용 조각 문버팀쇠의 비밀 신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늘상 얘기하는 메리벨 양은 그 정력적인 콘트랄토(Contralto,소프라노와 테너 중간의 여성 최저음; 옮긴이) 목소리로, 가능한 신을 돕는 것이 좋을거라고 조심스레 덧붙여 놓고도, 꺾일줄 모르는 신앙심으로 또 한 번 자신의 말을 확인했다. "그럼 당신은 신을 도울 수 있습니까?" 엘러리 퀸 선생이 조금은 반발조로 물었다. 메리벨양의 알아듣지도 못할 이 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조금 불쾌한 시간에 느닷없이 주나에게 침대에서 끌려나온 탓도 있었지만, 그는 소문난 이교도였던 것이다. 모르페 우스(Morpheus, 꿈의 신; 옮긴이)는 여전히 그를 향해 애타게 손짓하고 있 었고, 엘러리는 이 건장하고 풍만한 육체를 가진 젊은 아가씨가-실제로 여 자는 코너코피아(Cornucopia,어린 제우스 신에게 젖을 먹인 염소의 뿔로, 그 속에 과일, 곡식, 꽃 따위를 가득 담은 형태로 표현되는 풍요의 상징:옮긴이) 처럼 풍요롭고 건강해 보였다- 단지 자신에게 설교를 할 목적으로 온 것이 라면 단호히 돌려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들 작정이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느냐고요?" 메리벨양이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도울 수 있죠!" 여자는 한 번 더 자신의 말을 확인하며 모자를 벗었다. 무슨 수프 접시처 럼 보이는 그 모자가 예쁜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엘러리는 그 모자 에서 어떤 특이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보며 짜증 스레 눈을 껌벅 였다. "이것보세요!" 여자가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순간 엘러리는 여자가 엉뚱하게 기도를 올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자는 그 긴손가락을 잽싸게 위로 올리더니 자신의 왼쪽 과자놀이 부근을 덮고 있는 줄그스레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여자의 황갈색 머리카락 밑에 상한 고기 빛깔을 띤, 크기와 모양 이 비둘기 알만한 혹이 나 있었다. 그가 몸을 꼿꼿이 세우며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어쩌다 그런 끔찍한 혹이 생겼습니까?" 메리벨양은 애써 아픔을 참으며 머리를 원래대로 해 놓고, 그 위에 다시 그 수프 접시를 뒤집어 썼다. "모르겠어요." "모른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메리벨 양은 그 긴다리를 하나로 꼬며 담뱃불을 붙였다. "이제 두통은 거의 가셨어요. 계속 냉찜질을 했더니만 냉찜질 요령 아세 요? 혹을 가라앉히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지 뭐예요. 새벽 한 시에 보셨어 야 하는 건데! 마치 누가 제 입에다 자전거 펌프를 꽃아두고는 깜빡 잊고 그냥 가 버린 것 같지 뭐예요." 엘러리는 턱을 긁적거렸다. "실수로 그런 건 아니겠지요? 전 아시다시피 의사가 아니라......" 메리벨 양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제게 필요한 사람은 탐정이에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트위드 천 옷 속에 든 여자의 넓은 어깨가 으쓱했다. "이건 중요하지가 않아요, 퀸 선생님. 그러니까 제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 말예요. 보시다시피, 저는 힘이 엄청나게 세요. 그리고 6년째 정규 간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이 백합처럼 흰 피부에 긁힘이나 타박상이 없었던 날은 하 루도 없어요. 심지어 제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희열을 느끼는 환자를 만난 적도 있는걸요." 여자는 한숨을 내귀었다.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득였고, 입술은 살짝 다물려져 있었다. "이건 뭔가 달라요, 아시겠어요? 뭔가...... 이상하다고요." 짧은 침묵이 퀸의 거실을 휩쓸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엘러리는 뭔가 피 부에 기어오르는 듯한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메리벨양의 깊숙하니 가라 앉은 목소리에는 납골당에서 흘러나오는 공허한 신음 소리를 연상시키는 무 엇인가가 있었다. "이상해요?" 위안삼아 담배 케이스로 손을 뻗으며 엘러리가 물었다. "이상해요.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에요. 그 집에 가면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실거예요. 전 예민한 여자가 아녜요, 퀸 선생님. 만약 제가 그런 걸 겁내는 여자였다면, 벌써 몇 주 전에 그 일을 그만뒀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엘러리는 여자의 차분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제 아무리 간 큰 유령이라도 이 여자와는 사귀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설마 지금 아가씨가 일하고 있는 집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슬쩍 돌려서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자가 코방귀를 뀌었다. "유령이라뇨! 전 그런 터무니 없는 것들은 믿지 않아요, 퀸 선생님. 선생님 은 지금 절 놀리시느라......" "메리벨 양, 정말 머리가 좋군요!" "게다가 전 사람의 머리에 혹을 나게 하는 유령이 있다는 얘기는 더더욱 들어보지 못했어요."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이건 그런 것과는 달라요. 메리벨 양은 생각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요. 그냥 마치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 은데,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듯한 느낌...... 도대체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예요." 엘러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젠 불확실한 점은 분명히 없어졌군요.: 그는 여자의 수프 접시를 흘낏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가씨가 걱정하던 그 어떤 것이 아가씨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뜻 인가요?" 메리벨 양의 침착하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퀸 선생님, 아무도 절 공격하지 않았는걸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엘러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제 말은 제가 공격을 받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고의가 아니 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그냥 우연히 제가 방해를 한 거겠죠." "뭘 말입니까?" 엘러리가 짜증스레 눈을 감으며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기분나쁘다는 게 바로 그 점이에요." 엘러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자, 자, 메리벨 양, 이제 우리 정리를 해 봅시다. 솔직히 말해서, 난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요. 그렇다면 여긴 왜 온거요?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기 에......" 메리벨 양이 큰 소리로 활기차게 말했다. "있잖아요. 가기와 씨는 유난히 키가 작은 사람인데, 얼마나 무력한지 혼자 서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해요. 그 불쌍한 노인네가 정말 안됐지 뭐예요. 무 슨 동물이 얽혀있는 듯한 그 작도 흉측스러운 문 버팀쇠를 누가 훔쳐갔다면 글쎄요, 이 정도면 누군가를 의심하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여자는 자신의 뛰어난 언변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았느냐는 듯 의기양양 한 웃음을 보이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소독약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손수건으로 입을 눌러 닦았다. 엘러리는 자신이 말할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담배를 네 번이나 연거푸 빨아댔다. "지금 문버팀쇠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틀림없어요. 문을 열어 놓을 때 바닥에 놓고 괴는 그런 것 말예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도둑맞았다고 했습니까?" "글쎄, 그게 없어졌지 뭐예요. 어젯밤 제가 머리를 얻어맞기 전까지는 분명 히 거기 있었어요. 서재 문 바로 옆에 있는 걸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 는 걸요. 이건 거짓말이 아녜요, 선생님. 아무도 그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 만......" 엘러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문 버팀쇠. 좀도둑 치고는 제법 취미가 고상한 걸! 흐음... 동물이라! 뭔가 '얽혀 있는'것 같다고 말씀 하셨지요? 죄송하지만, 지금 아가 씨가 한 얘기로는 어떤 동물인지 감을 잡지를 못하겠군요." "뱀처럼 생긴 괴물이에요. 그런게 집안 곳곳에 있어요. 아마 그걸 사람들은 용이라고 부를거예요. 환각 상태에서 그걸 봤다는 사람은 있어도 실제로 그 걸 봤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엘러리는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가기와라는 그 늙은 신사분...... 그 사람이 지금 아 가씨가 돌보고 있다는 환자인가요?" 메리벨 양이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말했다. "맞아요. 만성 신장 질환이었어요. 종합 병원의 서터 박사님이 두어달 전에 가기와 씨의 신장 하나를 절개했고, 그 가엾은 양반은 이제 막 회복 단계로 들어서고 있어요. 워낙 나이 드신 분이라 지금 살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 만도 놀라운 일이죠. 얼마나 위험 한 수술이었는지 서터 박사님은 할 수 없 이......" "전문적인 사항은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메리벨 양. 이제 알 것 같으니 까요. 물론, 신장을 떼내고 회복단계에 있다는 그 환자는 일본 사람이겠지 요?" "그래요, 전 일본 환자는 처음이었어요." 엘러리가 껄껄대며 웃었다. "아가씨는 꼭 첫아이를 낳기 전에 엄마가 된다는 기분에 들떠 있는 젊은 아가씨처럼 말하는군요. 그러니까, 메리벨 양, 당신의 그 일본 환자와 이상 하게 생겼다는 문버팀쇠 그리고 당신의 그 예쁜 머리에 생긴 혹이 제 관심 을 몹시 끄는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신다면, 옷을 갈아입고 당신과 함께 탐 색 여행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관한 모든 얘기는 가는 길에 차근차근 듣도록 하지요." 엘러리의 볼품없고 기름만 많이 먹는 듀센버그 안에서 메리벨 양은 몇 킬 로미터 앞쪽의 시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숨을 힘차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리벨 간호사는 서터 박사의 추천으로 웨스트 체스터 의 저택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일본 노신사 지토 가기와씨의 간호를 맡 았었다. 여자는 그 집- 메리벨 양은 그 아름답고 오래 된 집이 몇 에이커도 넘게 꾸불꾸불 뻗어 있어, 뒤쪽이 사운드 해(海)의 물속에 박힌 돌기둥 위에 얹혀 있다고 묘사했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일종의 불안감과도 같은 극도 의 짜증과 안달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원인이 뭔지는 여자 자신도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집안과 밖의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 -여자는 그 집이 외관상으로는 식민지 시대풍의 건축양식이지만, 안으로 들 어가면 특이한 외제 가구들과 도자기류, 그림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한 동양의 박물관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 다.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이국적이었어요. 아주 달착지근한 냄새가......" 여자가 얼굴을 예쁘게 찡그리며 설명했다. "늙은이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그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 버린, 위험천만한 속도로 차를 운전하랴 여자의 얘기를 들으랴 정신이 없었다. 우린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불가해한 것들에 대해 귀에 의 존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메리벨 양. 혹시 단순한 향내가 아닐까요?" 메리벨 양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이 느낌에 대해 민 감하기 때문에 조금은 영적인 작용을 받기 쉬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리 고는 다시 어쩌면 단순히 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계속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신께서는 알고 계시겠지만, 레티샤 갤런트만 빼고는 모두가 겉으 로 보기에는 좋은 사람들 같았다고 여자는 경건하게 말했던 것이다. 가기와 씨는 동양의 골동품을 수입하는 수입상으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40년 넘 게 미국에 살고 있었고, 거의 미국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실제 그는 미국 이혼녀와 결혼했었고, 그 이혼녀는 자신의 동양인 남편에게 수많은 아름다 운 추억과 미식 축구 선수처럼 덩치 큰 금발머리 아들 그리고 깐깐하고 고 집 센 독신 여동생을 남기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죽은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인 갤런트를 그대로 쓰고 있는 가기와 씨의 의붓아들 빌은 늙고 키 작 은 동양인 의붓아버지를 몹시 좋아했으며, 메리벨 양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실제적으로 그 일본 노인의 사업을 경영하기도 했다고 했다. 빌의 이모인 레티샤 갤런트에 대해 말하자면, 그 여자는 소위 이교도의 은 혜-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속으로 내던져진 자신의 잔인한 운명을 드러내 놀고 슬퍼하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그 착한 사람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경멸과 신랄한 냉대로 대해 식구들 모두가 끔찍하게 생각했다고 메리벨 양은 그 튼튼한 이빨을 딱딱대며 말했다. "이교도라......" 엘러리가 듀센버그를 펠럼 고속도로로 몰고 들어가며 생각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메리벨 양. 이국적 분위기라는 것은 일반적으 로 우리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니까요...... 그런데, 그 문버팀쇠가 값나가는 물건입니까?" 그렇게 평범한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그의 뇌세포를 갉아 먹고 있었 던 것이다. "오, 아녜요. 그냥 몇 달러 짜리예요. 예전에 가기와씨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메리벨 양은 그 튼튼한 팔로 문버팀쇠를 일격에 쓸어내 버리고는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으로 불안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가면서 더욱 더 극적인 이 야기를 펼쳐 나갔다. 어젯밤 그녀는 자기가 돌보는 늙은 화자를 저택뒤의 이층 침실에 눕혀 놓 고,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 그것으로 여자의 그날 임무 는 끝났다 - 노신사의 서재와 붙어있는 아래층 서고로 내 려가 한 시간동안 조용히 책을 읽었다. 여자는 집이 너무도 조용해서 벽난로 선반 위의 조그 만 일제 시계 바늘이 똑딱대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고 상기했다. 저녁 식사 뒤로 여자는 환자를 돌보기에 바빠 다른 식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 르고 있었다. 11시가 넘은 시각이라 다들 자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메리벨 양의 두 눈은 더 이상 차분하지가 않았다. 뭔가 기분 나쁜 듯 한, 그러면서도 흥분된 빛을 띄고 있었다. 여자가 나지막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정말 아늑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제 왼 쪽 어깨 너머에 등불을 켜 놓고 <백인 여자>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환 자를 돌보다 그 환자의 비서와 사랑에 빠진 젊고 아름다운 간호원의 이야기 인데, 여하튼 그러고 있었어요.> 여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지 뭐겠어요. 그냥...... 오싹했어요. 책 때 문에 그랬던 건 절대 아녜요. 그 책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퀸 선생님. 시계 는 계속 똑딱대며 가고 있었고, 집 뒤편 아래쪽 돌기둥에서는 철썩대는 물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제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왜 그럤는지 는 저도 몰라요. 그냥 온몸이 으스스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서재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기는 했는데, 거기는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전......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그 때 무슨 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그게 무슨 소리였습니까?" 엘러리가 참을성있게 물었다. "전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뭔가 주르르 미끄 러지는 듯한, 그러니까......"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뱉었다. "오, 웃으시면 안돼요, 퀸 선생님. 하지만 그건 뱀 소리 같았어요!" 엘러리는 웃지 않았다. 머케덤 도로(잡석을 여러 겹으로 깔아 만든 포장도 로:옮긴이) 위에서 용들이 춤을 추고 있는 듯 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용인지도 모르지요. 용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봐요. 그렇지 않습 니까, 메리벨 양? 그런데, 혹시 라디오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 니까? 물을 담은 유리잔에 아스피린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아름다운 소녀가 바다로 뛰어드는 소리로 바뀌지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상상력이 란...... 그런데, 그 이상한 소리가 어디서 났습니까?" "가기와 씨의 서재. 어둠 속에서요." 이제 메리벨 양의 분홍색 피부는 조금 전보다 더 하얘져 있었고, 두 눈에 는 온전한 이성으로는 가라 앉힐 수 없는 희미한 공포가 번득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별별 희한한 생각이 다 나는 게 견딜 수가 있어야죠. 저는 거 길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났어요. 그런데...... 갑자기 서재 문 이 세게 닫히지 뭐예요!" 엘러리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 로 물었다. "저런, 그런데도 아가씨는 문을 열고 거길 살펴 보았나요?" 메리벨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리석었죠. 정말 무모했어요. 그곳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 바보같이 문을 열었고, 멍청하게 안을 들여다 보았죠. 그 때 뭔가가 제 머리 를 쳤어요. 진짜 별이 보이더군요, 퀸 선생님." 여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공허한, 절망적인 웃음이었다. 여자의 눈이 안식을 구하듯 엘러리 쪽으로 돌아왔다. 에럴 리가 나직이 대 꾸했다. "정말 용기가 대단하군요, 메리벨 양. 그리고요?" 그들은 우편물 수송도로로 접어들었고, 이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정도 의식을 잃었던가 봐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문지방 위 에 누워있지 뭐예요. 서고와 서재 복판에요. 서재는 여전히 캄캄했어요. 달 라진 것도 없고 전 서재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죠, 하지만 그대로였어 요. 문버팀쇠만 빼 놓고요. 그게 없어졌더라구요, 그때서야 문이 왜 그렇게 세게 닫혔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우습죠? ...... 그리고 저는 밤새 혹을 가라 앉히며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럼,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나요?" "안했죠." 여자는 찡그린 얼굴로 차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걸 말해야 될지 않아야 될지 알 수가 없었어요. 혹시 그 집에 누군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 있다 하더라도, 제 가 어쩌다 그런 일 을 당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그냥 내버려 두세요. 사실 전 아무것도 모 르는 걸요." 엘러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여자가 말했다. "오늘 아침엔 사람들이 전부 똑같이 보이더군요." 메리벨 양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쉬는 날이예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시내 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누가 그런 일에 신경을 쓰겠어요! 저만 어리석어 보일 뿐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퀸 선생님?" "바로 그 점이 제 관심을 끈단 말입니다. 여기서 돌아야죠?" 놀란 눈을 한 하녀가 현관 문을 열고 나와 그들을 고상한 분위기의 응접실 로 안내했을 때 엘러리 퀸 선생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 나는 이 집이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집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집에 뭔가 이상하게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느낌은 대담하게 비치된, 특색있는 동양식 가재도구들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동양식의 현란한 기교를 써서 화려하고 부드럽게 짠, 보풀이 무성한 마룻바 닥 깔개, 자개를 입힌 티크 탁자, 천장에 매달린 탑 모양의 조그만 등불, 이 국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수많은 국화 다발들, 갖가지 색깔로 여러마리의 용들을 수놓은 비단 장막. 두 번째 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어쩌면 그것은 하 녀의 창백하니 겁먹은 얼굴 때문이거나 코를 찌르는 듯한 향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기 속에 묵직하게 배어 있는 역겨울 정도로 달착지근한 냄새-이 미 메리벨 양이 묘사한 바 있지만-가 그의 오감을 괴롭히며, 그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 게 했다. "메리벨 양!" 남자의 큰 목소리에 엘러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홀쭉한 턱에 지적인 눈 을 가진 큰 키의 청년 하나가 메리벨 양이 말한 서고로 통하는 문간쪽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여자 쪽으로 몸을 돌리던 엘러리는 메 리밸 양의 두 뺨이 불타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리벨 양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쿠퍼씨. 제 친구 엘러리 퀸 선생님을 소개하죠. 오는 길에 우 연히 만났는데......" 두 사람은 엘러리의 우연찮은 방문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입을 맞춰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대접받을 운명이 못 되는 듯 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청년이 엘러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엎어질 듯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더니 메리벨 양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 자 여자의 두 뺨이 조금 전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메리벨 양, 대체 지토 어른은 어디 계시죠?" "가기와씨요? 저기, 이층 그분 침실에......" "안계세요. 없어졌다고요!" "없어져요?" 메리벨 양은 입을 쩍 벌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 제가 직접 침대에 눕혀 드린 걸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나가기 전 에 잠깐 그 방을 들여다봤는데, 그때까지도 주무시고." "아뇨, 그분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거겠죠. 베개며 옷가지로 사람처럼 꾸미고 침대 시트로 덮어놓았는데, 당신은 그걸 본 모양이죠." 쿠퍼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왔다갔다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씀이야." 엘러리가 공손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런 일에 조금 경험이 있습니다." 젊은 사내가 멈춰서며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엘러 리가 말했다. "가기와 씨는 몹시 연로하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 인 상태 가 아닐 수도 있다고 봐야지요. 그분이 여러분 모두에게 약간은 노망기 섞 인 장난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요?" "맙소사, 아녜요! 그분은 위피트(영국산의 날쌘 경주견:옮긴이)만큼이나 예 리하신 분이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어린애처럼 그런 유치한 짓을 좋아하 지 않아요. 이건 무슨 일인가 생긴 거요. 틀림없어요, 퀸 씨...... 퀸!" 갑자기 쿠퍼는 엘러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맙소사 들은 적이 있는 이름......" 메리벵 양이 풀죽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퀸 선생님은 탐정이세요." "맞아! 이제 기억이 나. 메리 벨 양, 그럼 당신은......" 청년이 갑자기 긴장을 한 채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의혹에 찬 눈길을 받은 여자의 얼굴이 또 한 번 빨개졌다. 그러자 다시 청년이 말했다. "메리벨 양, 당신은 뭔가 알고 있군요!"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아주 조금 알고 있을 뿐이지요. 메리벨 양이 대강 얘기해 주었는데. 무척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당신은 가기와 씨의 문버팀쇠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쿠퍼씨?" "문버팀쇠...... 아, 그분 서재에 있는 그 이상한 괴물 모양의 물건 말이군요. 그럴 리가 있나요. 어젯밤까지도 있었는데......" 메리벨 양이 울부짖듯 말했다. "오, 그랬어요! 그런데...... 누군가 제 머리를 쳤어요, 쿠, 쿠퍼씨. 그리고 그 걸 가, 가져갔어요." 청년의 얼굴이 하얘졌다. "무슨 소리요, 메리벨 양? 그건...... 그렇게 흉측한 걸! 다쳤다고요?" "오, 쿠퍼씨......" 엘러리가 단호한 말투로 나섰다. "자, 자 눈물은 거두세요. 그런데 쿠퍼씨. 이 이상한 방정식에서 당신은 어 떤 인수 역할을 맡고 있지요? 메리벨 양은 이 문제를 얘기하면서 당신 이름 은 언급하지 않더군요." 메리벨 양의 얼굴이 또 한 번 확실하게 붉어졌다. 엘러리는 날카롭기 그지 없는 눈길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메리벨 양이 환자의 비서와 사랑에 빠진 젊고 아름다운 간호원의 사랑 얘기를 읽고 있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의 머 리를 스쳤다. 쿠퍼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가기와 씨의 비서입니다. 이것보세요, 그 이상하게 생긴 문버팀쇠가 가기와씨가 사라진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엘러리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틈을 타 메리벨 양이 엘러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지켜 달라는 듯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다른 건 없어진 게 없습니까?" 엘러리가 물었다. 그때 서고 문간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지요, 젊은 양반? 하지만, 찬양하라, 이교도가 사라졌 네. 가방도 짐도 모두 사라졌네. 정말이지, 속이 다 후련해. 그 능구렁이 같 은 황색 악마가 좋지 않게 끝날거라고 내가 벌 써 몇번이나 얘기했었지." 엘러리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레티샤 갤런트 양, 맞지요?" 메리벨 양과 쿠퍼 씨가 잔뜩 긴장한 채 표정이 굳어지는 것으로 보아 엘러 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여자의 뒤에서 남자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세요, 레티 이모, 제발!" 여자가 에어데일 종의 개처럼 코방귀를 뀌며 그 기다란 치맛자락을 옆으로 홱 치켜올렸다. 빌 갤런트는 붉은 얼굴에 큰 몸집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옷은 풀기라고는 없이 온통 구김이 가 있었다. 그의 이모는 실제로 보니, 메리벨 양이 묘사한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마른 여자는 고래뼈와 질긴 고무 그리고 심술로 뭉쳐 놓은 듯 했다. 조금은 광기 가 비치는 눈에 전전(戰前)에 한창 유행하던 드레스를 입은 오십대의 키 큰 마녀라고 하는 게 차라리 옳을 듯했다. 엘러리는 여자의 혀가 뱀의 그것처 럼 갈라져 있는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교활하게도 그 순간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고집스레 침묵을 지켰고, 엘러리가 거북할 정도로 그를 독살스레 쳐다보았다. "짐이라니요?" 자기 소개를 끝낸 엘러리가 그들과 함께 서고로 가면서 물었다. 빌 갤런트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분의 옷가방이 없어졌어요. 옷가지도요...... 전부는 아니지만, 옷 여러 벌과 양말, 모자까지요.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일이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분이 집을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린 집안 구석구 석을 다 찾아보았고, 혹시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이곳 바닥까지 전 부 조사했습니다. 그분은 그냥 저 옅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 거예요...... 맙소 사, 이게 무슨 날리람! 그분은 미친게 틀림 없어." "밤새 몰래 빠져 나가신 건가?" 쿠퍼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미치지 않았어요, 갤런트 씨.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소. 만약 그분이 사라졌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거요." "혹시 무슨 쪽지 같은 건 없나요?" 엘러리가 흘낏 주위를 둘러보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들이 몰고 들어 온 묵직한 향내가 특이한 방식으로 진열된 동양식 가재도구들을 감쌌다. 일 단은 사라졌다고 추측되는 일본 노인의 서재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서고를 가로질러 가 그 문을 열었다. 서재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문은 현관의 널따란 방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젯밤 메리벨 양을 공격했던 사람은 저 문을 통해 서재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문버 팀쇠는 왜 훔쳐갔단 말인가? "없었어요." 갤런트가 말했다. 엘러리를 따라 서재로 들어온 그들은 무엇이 신기한지 그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갤런트가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한마디 말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엘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고 문 몇 발짝 뒤로 돌아가 무릎을 꿇 고 앉아 두꺼운 동양 카펫의 보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모양의 눌린 자국이 있었다.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뭐가 무거운 것이 거기 오랜 시간 놓여 있었던 것이다. 보풀은 마치 지속적으로 무거운 힘을 받았던 듯 똑같이 평평하게 눌려 있었다. 분명히 사라진 문 버 팀쇠였다.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연꽃과 용이 꼬여 있는 모습이 자개로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메리벨 양이 머뭇거리며 제안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엘러리가 기분 좋게 한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든 아무 설명 없이 자신의 집을 나갔다고 해서 범죄 행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 록 이교도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갤런트 양. 게다가 전 뭔가 잘못되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황인종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사고를 지닌 미묘한 인 종이니까요. 하지만 문버팀쇠를 도둑맞았다는 게 이상하군요.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 문버팀쇠에대해 제게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메리벨 양이 도움을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일종의 무력감 에 빠져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빌 갤런트가 그 건장한 어깨를 구부리며 불평조로 말했다. "이것보세요, 퀸씨. 자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아요." 그는 마음속으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초췌하니 걱정 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을 부르지 않겠다면, 이건 분명히 제 양부의 대리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엘러리가 점잖게 그의 말을 잘랐다. "물론 그렇게 하셔야겠지요. 하지만 제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어느 분이든 제게 그 문버팀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건 제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군요." 쿠퍼가 음악가처럼 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는 머리카락을 또 한 번 뒤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제가 그 물건을 여러번 다루었고, 그 물건이 이곳으로 배달됐을 때 속달 영수증에 서명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 티미터, 높이는 15센티미터입니다. 얕은 돋을 새김이 된 용장식을 빼고는 거 의 사각형 모양이지요. 아무튼 그건 전형적인 일본의 공예 상품이었습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교도의 우상숭배야. 악마라고!" 레티샤 갤런트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뱀 같은 두 눈이 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광신적인 증오로 번득였 다. 엘러리가 흘낏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리벨 양은 제게 그 문버팀쇠가 별로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고 말하더 군요." 쿠퍼와 갤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엘러리가 물었다. "그 문버팀쇠가 뭘로 만들어졌지요?" 빌 갤런트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천연 활석입니다. 아시다시피, 동양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부드럽고 매끄 러운 광석, 전문 용어로는 동성, 즉 운모라고 하지요. 제 양부께서는 그 돌 로 만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많이 수입하셨습니다." "아, 그럼 그 문버팀쇠는 그분의 골동품 회사에서 보내온 거군요?" "아니오. 그건 4,5개월 전에 일본을 여행하던 어떤 친구분이 선물로 보내온 것입니다.' "백인입니까?" 엘러리의 엉뚱한 질문에 다들 멍청한 얼굴을 했다. 쿠퍼가 억지로 웃어보 이며 대답했다. "가기와씨는 그 친구분의 이름이나 신상에 관해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 습니다, 퀸씨."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잠시 조용히 담배를 피우다가 다시 물었다. "배달이라고요? 속달로?" 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엘러리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꼼꼼한 편이지요, 쿠퍼씨?" 쿠퍼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분명해, 암, 그렇고 말고. 비서들은 유감스럽게도 뭐든 모아두는 버릇이 있지요. 제게 그 속달 영수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변호사들이 항상 하 는 얘기지만, 증거는 항상 증언보다 요긴한 것이지요. 그 영수증이 어떤 단 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릅니다......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쿠퍼가 그의 말을 잘랐다. "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유감이군요, 퀸씨. 그 영수증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엘러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자욱이 내뿜더니, 그 연기의 장막에 휩싸인 채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리 고는 마치 과감한 모험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그 문버팀쇠에는 용이 몇마리나 조각되어 있었지요, 쿠퍼씨?" "우상숭배야." 레티샤 갤런트가 또 한 번 독살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벨 양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선생님, 설마......" 쿠퍼가 엘러리의 말에 대답했다. "다섯마리요. 물론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고요. 다섯 마리였습니다, 퀸 씨." 엘러리가 웃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일곱 마리가 아닌 게 유감이군요. 7은 신비로운 숫자지요." 그는 일어서서 실내를 한 바퀴 돌더니 달콤하고 묵직한 공기 속에서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피며 비단 방막에 수놓여 꿈틀대는 금색 괴물을 쳐다 보았다. 갑자기 메리벨 양이 부르르 몸을 떨며 야윈 얼굴의 쿠퍼 옆 으로 바 짝 다가 앉았다. 엘러리가 이빨로 딱 소리를 내며 다시 말했다. "말해봐요." 그는 발뒤꿈치를 이용해 홱 몸을 돌리더니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실눈 을 하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지토 가기와 씨는 기독교인이었습니까?" 레티샤 갤런트 양만 놀라지 않았다. 여자는 바알세불(성서에 나오는 악마 : 옮긴이)이라도 가만히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이여 우릴 구하소서! 그 악마가요?" 여자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엘러리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형부를 악마라 부르는 거지요, 갤런트 양?" 여자는 금속처럼 차갑게 보이는 입술을 꼭 다물고 엘러리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메리벨 양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분은 친절하고 착한 노인이에요. 기독교인은 아닐지라 도, 퀸 선생님, 이교도도 아녜요. 그분은 그런 용 같은 것은 절대로 믿지 않 으셨어요. 제게 종종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엘러리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교도가 아닌 게 분명하군요. 엄격히 말해서 이교도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독교나 유대교 또는 회교를 믿지 않는 국가나 민족 에 속하면서 자기 민족 고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거니까 요." 레티샤 겔런트가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여자는 금방 기고만장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요! 난 그 사람이 어떤 이방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종종 들 었다고요...... 그게 뭐라더라......" 쿠퍼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 "신도(神道, 일본의 종교 : 옮긴이). 가기와 씨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메리벨 양. 그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인간의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되는 근본적인 선을 믿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신도라는 종교 의 본질적 사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퀸 씨?" 엘러리가 멍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랬던가요?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흥미롭군요. 혹시 그분이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신도는 조금 원시적이지요." "우상숭배자야." 레티샤 갤런트가 마치 레코드 판이 튀듯 계속 같은 소리를 했다. 그들은 찜찜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재 책상 위에 반짝이는 흑 요석으로 만든, 배가 볼록 나온 작은 신상이 하나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땅 딸막하니 튼튼해 보이는 사무라이 갑옷 한 벌이 진열되어 있었다. 열린 창 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에 용이 수놓아진 비단 장막이 가볍게 일렁거렸 다. "그분이 고대 일본의 어떤 비밀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나요?" 엘러리는 집요했다. "혹시 동양에서 연락이 자주 오지는 않았습니까? 눈이 위로 삐죽 올라간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뭘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던가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용은 다시 심술궂게 펄럭였고, 사무라이는 그 불가해한 얼굴을 갑옷 속에 감춘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메스꺼울 정도 로 달착지근한 향내가 점점 더 진해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을 끔찍한 공포 의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막연한 원시적 공포에 사로잡혀 말없이, 무기력하니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문버팀쇠는 단순한 활석이었다 이거지요?" 창밖의 넘실대는 사운드 해를 바라보며 엘러리가 나직이 말했다. 모든게 넘실대며 요동을 치는 듯 했다. 집 자체가 망망대해에 뜬 채 바다가 호흡하 는 데 따라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큰 덩치의 빌 갤런트가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그럴 리가 없지요." 엘러리가 생각 깊은 얼굴로 자기 질문에 자기 스스로 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거죠, 퀸 선생님?" 메리벨 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식이지요. 그 문버팀쇠는 실용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가치가 없는 물건 입니다. 그런데 그 물건을 어젯밤 왜 도둑맞았을까요? 어떤 감상적 이유 때 문에? 그 물건에 그 정도의 애정을 가질 만한 사람은 가기와씨밖에 없습니 다. 만약 그분이 그 물건을 그렇게 아꼈다면, 메리벨 양, 당신의 머리를 때 리면서까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모와 조카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다시 엘러리가 말했다. "아, 물론 여러분께서는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요, 어젯밤 여기서 작 지만 고통이 뒤따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메리벨 양이 두통깨나 앓았지요. 정말이지, 그 혹 한번 대단하더군요. 그 문버팀쇠에 무슨 비밀이 라도 있는 겁니까? 무슨 상징이나 표시, 아니면 의미나 경고 같은 것이 말 입니다." 용을 수놓은 비단 장막이 또 한 번 불어 온 미풍에 일렁이자 사람들은 부 르르 온 몸을 떨었다. 레티샤 갤런트의 광기 어린 눈에 서려있던 증오는 어 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그 곳에는 작고 못된 영혼의 적나라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건......" 쿠퍼가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 다시 말했다. "지금은 20세기요, 퀸씨." 엘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정상적이고 증명이 가능한 일만을 생각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문버팀쇠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 물건이 그걸 가져간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 는 겁니다. 하지만 물건 그 자체가 가치가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렇게 추리하자면, 그 물건에는 뭔가 가치있는 것이 들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문버팀쇠가 단순한 활석만은 아닐 것이라 고 말한거지요." "그게 가장......" 빌 갤런트가 구부정하니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그는 말을 끊고 신기한 눈초리로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엘러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에는......" "제가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하십니까, 갤런트 씨?" 덩치 큰 갤런트는 얼굴을 붉히며 아래로 눈길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느슨 하게 뒷짐을 진 채 조금 전보다 더 걱정스런 얼굴로 방 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메리벨 양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곁에 있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 었다. 쿠퍼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다. 레티샤 갤런트의 빳빳한 옷에서 한밤중 나무 덤불 아래 몸을 숨긴 짐승이 바스락 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갤런트가 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털어놓아야겠군요. 그래요, 당신 추측이 맞았어요. 퀸 선생. 당신 이 맞았다고요." 엘러리가 놀란 얼굴을 했다. 갤런트가 계속 말했다. "그 문버팀쇠는 속이 비어 있었어요. 속에 구멍이 있었다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지요, 갤런트 씨?" "오만 달러요, 백 달러짜리 지폐로." 돈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이 속담에도 있다. 지토 가기와 씨의 서재에서 바로 그 말이 증명된 것이다. 용은 죽었다. 가죽과 금속으로 된 사무라이의 갑옷은 바스러진 빈조개 껍 질이 되었다. 집은 요동을 그치고 주춧돌 위에 반듯하게 섰다. 조금 전의 그 진하던 향내는 정화되어 제자리로 들어갔고,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나지 않 았다. 돈이 친숙한 억양으로 말을 하자 겁먹은 구경꾼들의 말 잔치는 눈 깜 짝 할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다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들의 눈은 다시 인간세상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예의 그 특이한 단조로움으로 돌 아갔다. 그 문버팀쇠 안에는 그냥 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메리벨 양은 가 볍게 킥킥대기까지 했다. "백달러 짜리 지폐로 5만 달러라......" 엘러리 퀸 선생은 선망과 실망이 엇갈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 거리며 말을 이었다. "백달러 짜리 지폐로 5만 달러라면 부피가 꽤 나가겠군요, 갤런트 씨. 자세 히 설명을 해 보시지요." 빌 갤런트가 재빨리 자세한 설명을 했다. 마치 마음 속의 큰 짐을 덜었다 는 듯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가기와 노인의 사업은, 이제 더 이 상 감출 것도 없이, 파산 직전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 경주에 대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차분하니 조용한 성격의 가기와 노인은 의붓 아들의 제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업 방침을 바꾸기를 거부 했다. 파산이 확실시 되었을때야 그의 결심이 흔들렸지만, 그때는 이미 난파 선을 구조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였다. "양부께서는 그 사실을 비밀로 했습니다." 갤런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전 며칠 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때 그 분은 절 자기 방으 로 불러서 문을 닫아 걸고는 문버팀쇠를 집어들더니 - 항상 마룻바닥에 놓 여 있던 그 물건을 말입니다- 여러마ㅇ리의 용들 가운데 한 마리를 쑥 뽑아 냈는데...... 마치 무슨 마개처럼 뽑혔지요. 그 분께서는 그 문버팀쇠 안에 비 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선물로 받은 직후 우연히 알게 됐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면서, 그 물건의 내력 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물건은 원래부터 문버팀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문버팀쇠로 사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어ㅉㅆ든...... 그 안에는 꽁꽁 뭉쳐 둔 돈 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이 몰래 감추어 둔 돈이었지요. 전 그분 에게 그런 식으로 돈을 감춰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씀그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안에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저 밖에 없기 때문에 안심해도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로서 는 당연히......" 그는 얼굴을 붉혔다.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왜 그런 사실을 털어놓기를 꺼려 했는지 말입니다. 그 런 사실을 얘기한다는 자체가 자신에게 분명히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 겠지요." 덩치 큰 청년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양손을 펴 보였다. "전 그 망할 놈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가 절 믿어 주겠습 니까?" 그는 손으로 담배를 더듬어 찾으며 자리에 앉았다. 엘러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에겐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적어도 그럴 것 같 은데, 당신은 그분의 상속자지요?" 갤런트는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쿠퍼가 천천히, 거의 마지못한 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그분의 유언장을 직접 보았습니다." "쯧쯧. 공연히 법석을 떨었군. 그렇다면 당신은 어차피 당신 소유가 될 물 건을 훔칠 리가 없지요. 힘내세요. 갤런트시, 이제 당신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엘러리는 한숨을 귀더니 코트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사건에 대한 제 관심은 사라졌 습니다. 전 뭔가 기이한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모자를 집어들었다. "결국 이 일은 경찰이 나서야겠군요. 물론 저도 가능한 한 여러분을 돕겠 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지방 경찰들은 단독으로 일하기를 더 좋아합니 다. 그리고 사실,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메리벨 양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혹시 가엾은 가기 와 씨가......" "저는 심리학자가 아닙니다, 메리벨 양. 사실 심리학자라 하더라도 동양인 의 마음 속 깉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낼 수는 없는거지요. 경찰들 은 그런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 역 경찰들이 금방 이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레티샤 양이 코방귀를 뀌더니 거만한 자세로 치맛자락을 날리며 엘러리를 스쳐 지나갔다. 메리벨 양도 모자를 홱 집어 들더리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쿠퍼는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고, 겔런트는 찌푸린 얼굴로 창 밖의 사운드 해를 바라보았다. "경찰 본부죠? 서장님 좀 부탁합니다." 쿠퍼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실내는 다시 그 짙은 이 국적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요." 문간 쪽에서 엘러리가 말했다. 두 사내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엘러리가 미안하게 됐다는 듯 웃으면 서 말했다. "방금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정말 무섭군요. 한심하게도 제가 무시하고 넘어간 게 있지 뭐겠습니까. 여러분. 아직은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 "잠깐만요. 전화 끊지 말아요." 쿠퍼가 전화기에 대고 말하더니 , 다시 엘러리를 보며 물었다. "가능성이라고요?" 엘러리는 점잖게 한 손을 흔들었다. "혹시 제가 틀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두 분 가운데 누가 제게 연감(年 鑑)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갤런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연감이오? 그거야 얼마든지...... 하지만 저로서는 이해가...... 서고 탁자 위 에 하나가 있어요, 퀸씨. 여기 계세요. 제가 갖다 드리죠." 그는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표지의 책 한권을 들고 금방 다시 나타 났다. 엘러리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요란스레 책장을 넘겼다. 쿠 퍼와 갤런트가 눈길을 교환했다. 이윽고 쿠퍼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화를 끊 었다. 엘러리가 갑자기 콧노래를 멈추며 말했다. "아! 흠. 그래, 그래. 역시 지혜가 힘을 이기지. 문(文 )은 무(武)보다 강한 거라고. 아냐, 내가 틀릴지도 몰라." 그는 책을 덮고 코트를 벗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합(合)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단 말씀이야. 역시 연감은 유 용해...... 쿠퍼씨!"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 속달 영수증좀 보여 주십시오." 엘러리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쿠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불평조로 말했다. "이것 보세요, 지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쯧쯧. 빨리 영수증이나 주세요, 쿠퍼씨." 엘러리가 말했다. 빌 갤런트가 찜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갖다 드리세요, 쿠퍼씨. 퀸 씨가 시키는 대로 해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 영수증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가치란 내적인 것입니다, 갤런트 씨. 손이 눈보다 빠를 수도 있지만, 머리 는 그 두가지 다보다 빠르답니다." 쿠퍼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러나 그는 조각이 된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잡다한 영수증들을 모아 둔 듯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마침내 노란 색 의 조그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있소. 난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엘러리가 온화한 목 소리로 말을 맏았다. "당신 생각은 중요하지가 않답니다, 쿠퍼씨." 그는 쿠퍼가 건네준 노란색의 영수증 쪽지를 마치 고가학자가 탐색이라도 하듯 아주 신중하게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속달 우편물 영수증이었 고, 거기에는 우편물의 배달 날짜, 발신지, 요금 그런 비슷한 종류의 내용들 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포장물은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일본 유센 가이샤 증기선에 선적되어 샌프란시스코의 속달우편물회 사로 넘어갔고, 거기서 다시 웨스트 체스터 주소지에 살고 있는 수신자 지 토 가기와 앞으로 배달되었다. 선적과 속달요금은 문버팀쇠의 무게 20킬로 그램에 근거해 요코하마에서 선불로 지급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문버팀쇠에 대해서는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의 활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윗면에 얕은 돋을 새김으로 용들이 조각되어 있다고 간략하 게 묘사되어 있었다. "거기 어지럽게 적힌 수치들이 당신에겐 중요한 모양이군요." 쿠퍼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여기 적힌 이 수치들은......" 엘러리가 영수증 쪽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는 몹시 소중한 것입니다. 이 쪽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게 천만 다 행이지요. 내겐 마치 로제타석(1799년 나일강 어귀의로제타 부근에서 발견 된,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의 단서가 된 현무암의 돌 조각:옮긴이) 같다고나 할까요...... 또 다른 신비로운 사실에 대한 열쇠인 셈이지요." 그는 혼자 기뻐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회색 눈동자에 경계의 빛을 띄며 덧붙였다. "옛날 명언이 틀렸어. 숫자에서 찾는 건 안전이 아니라 계몽이라고." 갤런트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헀다. "정말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군요, 퀸 씨." 엘러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물론 두 신사분의 양해를 얻어야겠지만, 어떻게든 경찰 서장을 불러야겠 군요...... 하지만 부르는 사람은 접니다. 여러분이 나가 주신다면...... 저 혼자 서." 그 날 저녁 엘러리 퀸 선생이 발표했다. '저는 결국 제 기이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침착하니 절제하는 말투였다. 그는 서재 책상의 한쪽귀퉁이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배가 볼록한 흑요석 상을 만지작 거렸다. 쿠퍼, 메리벨 양, 두명의 갤런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들 초조의 극에 달 해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다시 집이 흔들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 는 바람에 용들이 비비 꼬인 몸들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사무라이 역시 마술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얻은 듯 그 불가해한 얼굴을 갑옷 속에 감춘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니 검은 색의 짙은 구름들로 얼룩덜룩했다. 달은 아직도 바다의 경계선 아래쪽에서 솟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경찰 서장과 전화 통화를 한 다음 가기와씨의 집을 나갔다가 저 녁 무렵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두명의 갤런트, 비서, 간호 원, 하인들, 그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대표자인 듯하 사 내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서재 창문 밖의 바다에서 이상하게 절거덕 대는 소리와 물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 도 감히 몸을 일으키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엘러리가 말했다. "이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얼마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으면 죽음의 신 이 갈라놓은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감동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아주 적절한 말이지죠. 여러분, 우리는 오늘밤 죽음의 신 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무게는 없어질 것입니다. 사우디(영국의 계관 시인 : 옮긴이)가 예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캄한 바깥에서 는 계속 쇠사슬 절거덕 대는 듯한 소리와 물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큰 목소리도 들려왔다. 엘러리는 담뱃불을 붙였다. "저는......"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또 한 번 제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오늘 오전 여러분 에게 그 문버팀쇠를 도둑맞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가 그 안에 든 내용물 때 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그 무너팀쇠는 안에 든 내용 물 때문에 도둑맞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용의 복부는 결코 두둑맞지 못 하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만 달러는......" 메리벨 양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빌 갤런트가 고함을 질렀다. "퀸 씨,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저 경찰들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말이오? 그리고 저 소리는 뭐죠? 당신은 우리한테......"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놀릴란 어떻게 보면 매끈매끈하지요. 거의 활석처럼 말입 니다, 갤런트씨. 그 논리가 오늘은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습니다. 전 그 문버팀쇠가 물 건 그 자체만으로는 도둑맞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제가 또 한 번 틀린거지요.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그 문버팀쇠는 물건 그 자체 만으 로 도둑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문버팀쇠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어떤 감상적 이유나 상징정 중요성을 뛰어넘는 한 가지 가치가 있었습니다. 바 로...... 문버팀쇠의 용도영ㅆ지요." 쿠퍼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용도? 그럼 당신은 누군가 그 물건을 그냥 문버팀쇠로 쓰기 위해 훔쳐갔 다는 말이오?" "그거야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그 문버팀쇠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쿠퍼씨. 용들이 조각된 그 특이한 돌의 특성이 무엇 이지요?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지요? 그 물건의 본질과 무게 말입 니다. 그것은 돌이며 20킬로그램의 무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갤런트가 한손으로 뭔가를 털어 내듯 이상한 동작을 취하더니 마치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몸을 일으키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금방 같이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짓누르는 억압된 공포 와 호기심을 최후까지 억누르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엘러리는 조용히 그 들을 지켜보았다. 이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 아래 펼쳐진 풍경은 검푸른 색깔의 날카로 운, 움직이는 작은 동판화 같았다. 커다란 배 한 척이 가기와 노인의 집 뒤 편 몇 야드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뱃전에 몸을 기댄 채 열심히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물 표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더 니 심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남자의 머리가 나타났고, 그는 입을 잔뜩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반나체 차림의 그는 배로 올라가 뱃전에 기댄 사람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배 위의 기 계가 끼릭대는 소리를 냈고, 검푸른 바닷물 속에서 밧줄이 나타났다. 작은 윈치(크랭크를 돌려 박줄을 동체에 감아 무거운 것을 끌어올리는 기구 : 옮 긴이)는 밧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있는 그들 뒤편에서 엘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물건이 돌이며 20킬로그램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도 둑맞아야했던 이유가 뭘까요?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이유는 명쾌해 질겁니다. 한 사람이 신비롭게, 그리고 불가사의 하게 실종되었습니다...... 병 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돈 많은 늙은 노인이 말입니다. 무거운 돌덩이도 없 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의 집 뒤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첫 번째 사실과 두 번째 사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을 종합해 보면 여러분께서 는......" 누군가 배에서 쉰 목소리로 괌을 질렀다. 보름달 아래쪽 물 속의 밧줄 끝 에서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났다. 그 덩어리는 세 개 의 뭉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옷가방이었다.또 하나는 위에 조각이 되 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돌덩이였다. 마지막은 누런 피부색에 눈이 위로 삐죽 올라간, 조그만 노인의 뻣뻣하게 굳은 알몸이었다. 엘러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여러분꼐서는......" 그는 책상 한쪽 귀퉁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빌 갤런 트의 등에 자동 권총의 총구를 갖다 대며 말을 이었다. "지토 가기와씨의 살인범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선원들의 의기양양한 고함소리가 일본 노인의 서재에 공허하게 울려퍼지자 갤런트가 돌아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 같으니...... 어떻게 알았지?" 레티샤 양의 독살맞은 입이 언변의 존엄성도 성취시키지 못한 채 열렸다 닫혔다. 엘러리가 자동 권통을 바짝 움켜쥐며 말했다. "그 문버팀쇠는 절대 속이 비지 않았다는 것, 속까지 딱딱한 돌덩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어. 당신은 그 문버팀쇠를 보지도 못했다. 추측이겠지. 게다가 당신은......" "당신은 내가 추측한다는 이유로 벌써 날 두 번째 비난하고 있어." 엘러리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친애하는 갤런트씨. 난 그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 오. 난 그 문버팀쇠 속이 비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의 말...... 가기와 노인이 그 문버팀쇠의 용이 조각된 '마개'를 뽑는 것과 그 문 버팀쇠에 나 있는 '구멍'과 '돈'을 당신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말이...... 거 직말이라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나는 명백히 곤경에 빠져 있는 저렇게 멋 진 신사분께서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소. 그랬더니 당신에게는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 있으며, 또한 그 문버팀쇠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소." 바다는 조용히 달빛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버팀쇠가 절대로 다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 려면, 당신은 그 문버팀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요. 그리고 그 물 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 물건을 없앤 사람이 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방에서 그 불건을 훔쳐갔을 것이고, 그 전에 메 리벨 양의 머리를 때렸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되어야 하는 거 지요. 그 때 메리벨 양이 들었다는, 용이 미끄러지는 것 같은 그 소리는 당 신이 두꺼운 커펫 위에서 발을 끌 때 난 소리겠지요. 어쨌든 그 문버팀쇠를 없앤 사람이 바로 그 작고 착한 지토 가기와씨를 실종시킨 사람입니다. 다 시말해서 살인자이지요. 아니, 아니오, 갤런트씨. 우리 분명히 합시다. 이건 절대로 추측이 아니었고." 메리벨 양이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갤런트씨. 전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했죠? 끔찍한......"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엘러리가 한숨을 귀며 말을 이었다. "전 그 문버팀쇠 안에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이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라 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사람이 애초부터 교묘한 이야기를 꾸며 놓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조각이 된 그 문버팀쇠를 훔쳐간 진짜 동기를 감출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단순히 죽은 시체를 가라앉히기 위한 용도에서 돈을 감춰두는 용도로 전환시킴으로써 수사의 초 점을 바꾸려 했던 거지요. 그래서 그 문버팀쇠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 만, 오만 달러라는 거짓말은 왜 했을까요? 왜 그렇게 상세히, 구체적으로, 주의 깊게 했을까요?" 엘러리는 갤런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당신 양부의 회사에서 오만 달러를 횡령했소, 갤런트씨. 그런데 당 신은 당신이 그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머잖아 들통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 었소. 그랬기 때문에 당신은 몇 달 전 당신이 횡령해 흥청망청 써 버린 그 액수 만큼의 돈을 맞추기 위해 어젯밤 가상의 도둑을 만들었던 거요. 틀렸 나요, 갤런트씨?" 빌 갤런트는 말이 없었다. 다시 엘러리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일련의 계획을 세웠고, 마치 그분이 직접 그렇게 한 것처 럼 밤중에 그 노신사의 침구를 사람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소. 그리고는 마치 그분이 도망칠 계획을 세웠던 것 처럼 그분의 옷가지 몇 개를 옷가방에 집 어넣었소. 사실 당신이 그런 모든 일들을 꾸민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 기와 씨가 자신의 남은 재산을 가지고 서구 사회를 벗어나 자신이 살던 동 양으로 단호히 도망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였소. 주로 당신이 횡령 한 탓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사업이 위태로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마링오. 그런 식으로만 되었다면, 노인을 찾을 일도, 살인자 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더 나아가 당신이 의심받을 일조차도 없었을거요. 그 리고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당신은 당신이 처음 저지른 범죄행위, 즉 사업 자금을 횡령한 중절도죄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겠지요. 당신은 당신에게 무 든 것을 준 양부가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여느 신사분이나 마찬가지로 어떤 죄라도 영서하겠지만, 명예를 더럽힌 죄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 실을 알고 있었어요. 가기와 노인이 당신이 회사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었던 거지요." 엘러리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추측에도 빌 갤런트는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잔잔한 물결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 다. 배, 돌, 옷가방, 시체, 사람들,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엘러리는 씁쓸한 만족감 같은 표정을 띤 채 갤런트의 뻣뻣하게 굳은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 였다. 쿠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유산을 상속받는거지. 상속자는 당연히 자신이니까. 영리해, 정말 영리해!"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어리석은 짓이야. 범죄 행위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 갤런트가 그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지 않았다는 사실, 난 아직도 당신이 그 사실을 추 측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마치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 같았다. 엘러리는 속지 않 았다. 자동 권총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창문을 열려있었고, 바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죽음 외에는 탈출구가 없는 사람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러리가 거의 항변조로 말했다. "천만에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당 신도 알다시피, 그 문제는 분명하지 않았소. 내가 이 집을 나가다 말고 그 문버팀쇠가 활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릴때까지는 말이오. 나는 활 석이 제법 무겁다는 것을 알고있었소. 그리고 그 문버팀쇠가 거의 입방체(정 육면체:옮긴이)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그랬기 때 문에 기본적인 계산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었소.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어 있다는 당신의 증언이 정확한지 시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 오. 그래서 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백과사전을 찾았고, 거기서 보통 광물질 의 무게표를 찾은 다음 활석을 찾아보았소. 그랬더니 거기 있더군요." "뭐가 말이오?" 갤런트가 거의 호기심에 가까운 어조로 물었다. "백과사전에는 1 입방피트(=0.02831입방미터)의 활석은 73킬로그램에서 79 킬로그램까지 나간다고 되어 있었소. 그 문버팀쇠는 활석이었지요. 그 치수 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티미터, 높이가 15 센티미터였습니다. 그렇다면 6/750입방미터입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무 게표의 수치를 계산하고, 거기다 얕은 돋을 새김이 된 용의 무게를 약간 더 하면 그 문버팀쇠의 무게는 약 20킬로그램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영수증에 나와 있는 수치가 아닙니까?" 쿠퍼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 20킬로그램이라는 수치가 무엇을 나타내는 거 지요? 그것은 20킬로그램의 속이 비지 않은 활석을 말하는 겁니다! 갤런트 씨는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어 있었으며, 백달러짜리 지폐로 5만달러의 돈 이 들어갈 만큼 큰 공간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폐가 500장입 니다. 지폐 500장을 집어 넣을 정도의 큰 공간이라면, 제아무리 접고 꽁꽁 뭉친다 해도, 그 문버팀쇠의 총 무게는 20킬로그램보다는 덜 나가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그 문버팀쇠가 속이 비지 않았으며, 갤런트씨가 거짓말 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지요." 밖에서 쿵쾅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났다. 갑자기 실내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지토 가기와의 시체가 소파 위에 놓여졌다. 노인의 알몸은 오래 된 대 리석처럼 노란 색이었고, 사죄라도 하듯 조용히 물을 흘리고 있었다. 빌 갤 런트가 여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시체같은 눈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저즈른 극안 무도한 짓에 처음으로 놀라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엘러리는 바닷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무거운 문버팀쇠를 경찰의 손에서 받 아 들고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용을 올려다보며 친근 한 미소를 보냈다. 이제 그것은 분명 비단과 금색 실로 만든 에쁜 장막이었 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