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집의 모험 "그리고 이건......" 마치 애원하듯 비비꼬인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되노네이 듀발 씨가 선언하 듯 말문을 열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독창적이라네, 친구. 굳이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자네가 직접 한 번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네. 거 왜, 뭐라더라, 굉장하다는 말 있잖나?" 엘러리 퀸은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조그만 위락 시설 구역 건너편 의 길다란 의자에 앉았다. "물론 그렇겠지."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굉장하겠지, 듀발. 나야 자네의 그 열정적인 창의성에 항상 공감하 는 사람 아닌가...... 주나! 제발 좀 가만히 앉아 있어!" 뜨겁게 작렬하는 오후의 태양 아래, 그의 흰 옷은 벌써부터 몸에 척 달라붙 어 있었다. 주나가 희망에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계속 둘러봐요." 퀸이 지친 두 다리를 죽 뻗으며 불평조로 말을 받았다. "이제 둘러보는 것은 그만 두고 이야기나 하자꾸나." 그는 이 즐거운 여름 내내 주나에게 이곳에 와서 놀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있었지만, 수확 체감의 법칙(토지의 생산력은, 이에 투자하는 자본이나 노력 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면 계속 증가시켜도 이에 비례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 : 옮긴이)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그가 알고 있는 놀라울 만큼 많은 각계 각층의 수백 명의 인사들 가운데 하나이며 무대배경 설계 전문가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듀발 씨의 열성적인 안내를 받 으며--그 지겹고 괴로운 두 시간 동안 조이랜드 유원지의 눈코 뜰 새 없는 유혹에 참여했었고, 지금은 극심한 체력 소모 상태에 있었다. 물론 주나는 예외로 쳐야 할 것이다. 아이에게는 흥분과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고, 지칠 줄 모르는 젊음이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는 아직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 처럼 활기찼던 것이다. 듀발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자네도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 제일 재미있는 곳이라네. 이 조이랜드 유원 지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지." 꼼꼼한 솜씨로 아름답게 꾸며진 조이랜드는 대서양 연안 일대 그 어디에서 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놀이 시설과 기계 장치들--주로 듀발 이 기획한--을 갖춘 전형적인 유원지로 이곳 군민(郡民)들에게는 조금은 생 소한 곳이었다. "암흑의 집...... 여보게, 그건 정말 기막힌 걸작일세!" 듀발이 말했다. "그거 끝내 주겠는데요." 엘러리를 흘낏 보며 주나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말을 곱게 써야지, 주나." 엘러리가 또 한 번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준엄하게 말했다. 길 건너에 있는 '암흑의 집' 은 아무리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 다지 재미있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집은 실제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온갖 유령들을 한데 모아 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악마적 상상력으로 흔들리 는 벽과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지붕이 설계되어 있었다. 엘러리는 그 집 을 보고--물론 듀발 씨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지만--언 젠가 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라는 독일 영화의 무대 장치를 떠올렸 다. 집은 뒤틀리고 기울어진데다 터무니없이 튀어나와 있고, 모조 유리창과 문, 낡은 발코니는 모두 부서져 있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 었다. 큰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진 집은 3면이 안뜰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안뜰에는 부서진 자갈과 낡아빠진 가로등이 있는 음산한 느낌의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난간이 설치된 나머지 한 면이 매표소로 이용되고 있었 다. 탁 트인 안뜰과 접해 있는 도로에는 공기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러면......" 듀발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난 잠시 실례해야겠네. 잠깐이면 되네. 금방 돌아오지. 그리고 나서 우리 저 집을 방문하자고...... 실례!" 그는 작고 날씬한 몸을 굽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다음 재빨리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조이랜드 유원지 직원복을 입은 젊은 사내 하나 가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퀸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유원지에는 결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목욕탕이나 해변을 찾게 되는 더운 여름날 오후라 유원지는 거의 비 어 있다시피 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통로와 보도에서는 유원지 전체 에 걸쳐 숨겨 둔 확성기를 통해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스워!" 팝콘의 분홍색이 감도는 뾰족한 부분을 아작 아작 소리내어 씹으며 주나가 말했다. "뭐라고?" 엘러리가 침침한 한쪽 눈을 뜨며 물었다. "저 사람은 어딜 저렇게 서둘러 가는 거죠?" "누구 말이냐?" 엘러리는 한쪽 눈을 마저 뜨고 주나가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 다. 큰 덩치에 숱이 많은 회색 머리의 남자 하나가 산책로 위쪽을 향해 열심 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사내는 검은색 옷에 챙이 처진 중절모자를 눈 바 로 위까지 내려쓰고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 태도에는 서릿발 같은 단호함이 깃들여 있었다. 엘러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난 대체 사람들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주나가 여전히 아작 아작 소리를 내며 말을 받았다. "우습잖아요." "정말 그렇구나." 엘러리는 도로 눈을 감으며 졸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주 제대로 봤어. 나야 방금 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만, 이 더 운 여름날 오후에 유원지에서 저렇게 바삐 걸어가는 걸 보니 뭔가 이상하 긴 이상하구나. 어쩌면 저 친구가 토끼띠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주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뛰다시피 걸어갈 리가 없잖니. 하지만 이런 유원지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런 종(種)에 속하는 모든 동물들처럼 고 질적인 방랑족이라고 할 수 있지. 거 참 신경쓰이는 문제구나."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따. 주나가 말했다. "미친 사람인가 보죠." "아냐, 그건 아닐 거다. 얘야, 그렇게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지. 우린 우리의 저 토끼 씨가 이 조이랜드 유원지의 즐거움 그 자체를 찾아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정확한 추리를 시작할 수가 있단다. 내 말 알아 듣겠니? 그러니까 저 토끼 씨에게 이 조이랜드는 단순한 수단 이라는 거지. 즉, 저 토끼 씨는...... 저 구깃구깃한 옷을 좀 보렴, 주나. 아주 특이하잖니? 이 조이랜드에는 관심이 없는 거야. 그에게 이 조이랜드는 존 재하지 않는 거야. 저이는 단테의 지옥과 위험한 잠자리 비행기 그리고 팝 콘과 냉동 커스터드까지 그냥 지나쳐 왔어. 마치 눈이 멀었거나 그런 것들 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겠니? 나라면 어떤 아가씨 와 데이트가 있었다고 말하겠구나. 그런데 늦게 온 거지. 이것 참, 내 말을 증명해 보일 방법도 없고...... 제발 주나, 이제 날 좀 내버려 두고 그 딱딱 한 팝콘이나 계속 씹으렴." "벌써 다 먹은 걸요." 주나는 빈 봉지를 내려다보며 못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듀발의 유쾌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갑시다!" 엘러리는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듀발을 보고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불만의 소리를 삼켜야 했다. "갈까요, 친구분들? 장담하건대, 여기보다 더 재미 있는...... 아이쿠!" 듀발이 왈칵 가쁜 숨을 내뱉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엘러리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챙이 처진 중절 모자를 쓰고 있던 덩치 큰 사내였다. 그가 작고 날렵한 몸매의 프랑스 사내 듀발과 몸을 부딪쳤고, 그 바람에 듀 발은 거의 넘어질 뻔 했던 것이다. 사내는 낮은 소리로 뭐라 미안하다는 뜻 의 말을 하고는 서둘러 가 버렸다. "미친놈!" 듀발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검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 빈약한 어깨를 으쓱 하더니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엘러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토끼 씨께서는 분명히 자네가 만든 명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걸세, 듀발. 틀림없이 자네 직원이 떠들어대는 말을 들으려고 걸음을 멈출 거라고." "토끼 씨?" 듀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받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상관없어. 저사람은 손님인 걸. 보라고! 손님이 될 사람과 싸울 뻔 했잖나! 자, 갑시다, 친구분들!" 덩치 큰 사내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유원지 직원의 설명을 듣기 위해 빽빽이 몰려 서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듀발을 따라 건너편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젊은 남자가 친근감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암흑의 집' 에 들어가 보지 않고 조이랜드에 갔다왔 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이런 전율은 없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다른 곳입니다. 이 세상 어느 유원지를 가더라도 이런 곳은 없을 것입니다. 무섭고, 오싹하고, 겁나고......" 엘러리 일행 앞에 있던 큰 키의 젊은 여자가 소리내어 웃으며 자기 팔에 기대고 있는 늙은 신사를 보며 말했다. "우리 들어가 봐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은근한 즐거움을 나타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밀짚모자 밑의 하얗게 센 머리 가 엘러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젊은 여자는 사람들을 헤치며 열심히 앞 으로 나아갔다. 늙은 신사는 한사코 여자의 팔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엘러 리는 그 노인의 이상하게 뻣뻣한 움직임과 발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젊은 여자는 매표소에서 표 두 장을 산 다음 늙은 신사 를 데리고 안쪽의 난간이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이제 젊은 연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극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암흑의 집' 은...... 바로...... 저곳입니다. 저 안에는 여러분의 눈을 밝혀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감각에 의지해 길 을 찾아야 하며, 혹시라도 그 감각이 잘못되었을 때는...... 하하! 암흑 속에 서, 그야말로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저기 갈색 트위드 양복을 입으신 분 께서는 벌써 겁을 먹으신 것 같군요. 하지만 겁낼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심장이 약한 분들을 위한 대책도......" "난 그런 겁쟁이가 아냐." 모여 선 사람들 앞쪽 어딘가에서 남자의 화난 듯한 굵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 가며 킥킥댔다. 젊은 직원이 심장이 약하다고 지목한 사람은 힘이 무척 세 보이는 흑인 청년이었다. 그는 세련된 갈색 양 복을 말끔히 차려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숯처럼 새카만 그의 피부와 대조적으로 밀짚 모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팔을 잡 고 있던 예쁜 흑인 소녀가 낄낄대며 말했다. "그만둬요,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면 될 것 아녜요! 이것 보세 요...... 여기 표 두 장 주세요, 아저씨!" 두 사람은 큰 키의 젊은 여자와 늙은 신사를 황급히 따라 들어가며 빙그레 웃었다. 젊은 직원이 다시 열광적으로 외쳤다. "여러분께서는 저곳 어둠 속에서 나오는 길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매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시 너무 무서운 나머지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조그만 녹색 화살표를 찾으십시오. 그 녹색 화살표는 길을 따라 여러 곳에 있을 것이며, 여러분을 보이지 않는 문 쪽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면 캄캄한 통로가 나올 것이고, 그 통로는 집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 뒤쪽의 집회실...... 그러니까......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지하실로 연결되 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상, 녹색 화살 표를 따라가지는 마십시오. 왜냐 하면, 그 길은 한쪽으로만 통하니까요. 하하하! 그때는 아시다시피, 다시는 '암흑의 집' 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지 요. 하지만 그 길을 이용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조그만 적색 화살표를 따라......" 검은 턱수염을 단정치 못하게 잔뜩 기른, 챙이 넓은 꾀죄죄한 모자에 축 처 진 넥타이를 한 사내 하나가 화구(畵具)처럼 보이는 납작한 가방을 들고 입 장권을 사더니 서둘러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사내는 자신이 사람들의 관심 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뺨을 붉게 물들였다. "이것 보게, 저건 또 무슨 생각이지?" 엘러리가 물었다. "화살표 말인가?" 듀발이 멋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약자와 겁쟁이들을 위한 배려지. 여긴 정말이지 보통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라네. 친구, 내 명작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지. 그 표시가 없으면 어떤 사람이라도--저 젊은 직원이 충실히 말한 것처럼--몇 시간을 헤매게 되어 있어. 그리고 녹색과 적색 화살표는 야광이 아니네. 그렇기 때문에 그 게 방해가 되는 일도 없을 걸세." 이제 젊은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도 여러분께서는 밖에 나오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적색 화살표 가운데 몇몇은 바른 길을 가리키고 있지만, 나머지는 그렇 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도중에 맞딱뜨리게 되는 짜릿한 모험 다음에..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모험의 가격은......" "들어가요, 우리.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에요." 젊은 직원의 장삿속에 넘어간 주나가 엘러리를 졸랐다. "물론 그렇겠지." 엘러리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술렁대며 왔다갔다 하기 시 작했다. 듀발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중히 머리를 굽히더니 두 사람에게 입장권 두 장을 내밀었다.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 친구. 내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집' 에 대한 자네 의견을 빨리 들어 봤으면 좋겠군. 자, 들어가게나." 그가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러리가 뭐라 투덜대자 주나는 재빨리 앞장서서 깡총대며 난간이 있는 곳 으로 내려가더니 이상한 각도로 기울어진 문 쪽으로 뛰어갔다. 안내원이 그 들의 입장권을 받아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한 낮의 햇볕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낡은 층계를 비추려 안간힘을 써대 고 있었다.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내려가라고? 아, 그래. 조금 전에 그 젊은 친구가 유령이 나올 것 같다는 지하실이 있다고 그랬지? 좋아, 듀발. 잘 보라고. 내 기꺼이 즐겨 줄 테니!" 그들은 가짜 거미줄이 얼기설기하고 전등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지하실 같이 좁고 기다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벽이 푸석푸석하니 몸시 습해 보이는 그 방은 해골 복장을 한 예절바른 인간이 주관하고 있었다. 그 해골 인간은 엘러리의 모자를 받아 한쪽 구석에 있는 기다란 나무 선반에 얹더니 그에게 놋쇠로 된 원반 하나를 건네 주었다. 나무 선반은 거의 비다시피 했다. 그러 나 엘러리는 선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화구와 또 다른 칸을 차지하고 있 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밀짚모자를 볼 수 있었다. 의식은 어쩐지 기분 나빴지만, 주나는 황홀한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쇠창살이 방을 두 구역으로 갈라 놓고 있었다. 엘러리는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모험을 끝내면 쇠창 살 반대편으로 나타나, 창살에 붙은 문을 통해 자신들의 소지품을 되찾은 다 음, 오른쪽의 또 다른 층계를 밟고 반갑기 그지없는 햇빛을 찾아 위로 올라 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나가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빨리 가요, 아휴. 왜 이렇게 느려요. 들어가는 길은 이쪽이에요." 입구라고 적혀 있는 왼쪽의 다 찌그러질 듯한 문 쪽으로 달려가던 주나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뒤에서 미적대며 천천히 따라오는 엘러리를 기다렸다. "그 사람을 봤어요." 주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응? 누구 말이냐?" "그 사람 말이에요, 토끼 씨." 엘러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방금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주나가 장난기 어린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이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데이트를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장소 같구나." 다 찌그러진 문을 걱정스런 눈으로 보며 엘러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자, 주나.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니. 이제 부터 우리 남자답게 저 안으로 들어가서 악마를 쫓아내자꾸나. 내가 먼저 들어가지." "제가 먼저 갈래요." "그건 절대로 안돼. 난 네 할아버지께 널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약속 했다. 내 코트나 단단히 잡아! 자, 들어가자." 이제부터가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퀸 가문은, 리처드 퀸 경감이 가끔씩 지 적했듯, 영웅적인 기질이 다분한 가문이다. 그런 반면 엘러리는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분명한 성격의 인간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절망적으 로 몸을 떨며 그곳에서 적어도 천 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 으로 길을 더듬어 나갔다. 끔찍한 곳이었다. 끼릭대는 다 찌그러진 문 아래쪽으로 뻗어 있는 층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그들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층계 밑에는 뭔가 물컹물컹하니 소름끼치는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그들 의 발에 부닥치며 쏜살같이 뒤로 빠져나갔다. 도대체 어떻게 적응할 방법이 없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지금까지 엘러리가 가 본 가장 깊고, 어둡고, 캄캄 한 곳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더듬거리거나 발을 움찔거리는 것, 그렇지 않으면 만사 잘 되라고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그야말로 바로 코 앞의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분 나쁘게도 그들은 전기 충격이 오는 벽에 부딪쳤고, 온통 사람의 뼈다 귀 덜그럭대는 소리와 쥐 찍찍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들어섰다. 광택이 없 는 작은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자 막다른 벽이 나왔고, 그 벽에는 짐승처럼 기어서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구멍을 통과해 나간다 해도 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나 다를까, 구멍을 통과하자 그들의 체중을 받치고 있던 바닥이 아래로 기 울면서 그들을 반대편 아래쪽의 방--방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지만--으로 사뿐히 내려 놓았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1미터 아래쪽의 푸석푸석한 벽과 벽 사이를 통과했고...... 이번에는 그들이 딛고 있던 층계가 갑자기 위로 치 솟으며 그들이 발을 디딜 곳조차 없게 만들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 이 돌게 만든 층계였다. 머리에 부닥치는 천장, 덩치 큰 남자의 어깨 넓이 정도에 난쟁이가 서면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된 미로, 하반 신에 차가운 공기를 뿜어대는 창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방, 그 런 장난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신경을 더욱 더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덜거덕대는 소리, 삐걱대는 소리, 절거덕대는 소리, 휘 파람 소리, 쿵쾅대는 소리, 그리고 정신병 환자들에게나 명예스러울 온갖 소 리의 교향악이 있었다. 갑자기 미끄러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은 엘러리가 반은 정신 나간 목소 리로 투덜대며 물었다. "재미있니, 얘야?" 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되도네이 듀발에 대해 뭐라 좋지 못한 소리를 하더니 다시 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냐?" 주나가 엘러리의 팔을 꼭 붙들며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깜깜할 수가! 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뭐가 좀 보이세 요?" 엘러리는 또 투덜대며 앞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쪽은 가능성이 있겠는걸." 그의 손끝에는 매끈매끈한 표면이 가볍게 와 닿았다. 그는 표면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좁다랗지만,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창틀이었다. 모서리를 따라 나 있는 갈라진 틈이 그 창틀이 과거에 문이나 창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문고리나 빗장 같은 것은 없었 다. 그는 주머니칼의 날을 세워 유리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왜냐 하면 그 유 리가 두터운 불투명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 힘든 몇 분간의 노력 끝에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희미하 니 보잘것없는 빛 한 줄기 뿐이었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아닌데...... 여긴 문이나 창문이 있어야 해. 그리고 이 가느다란 불빛 은 발코니나 어디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들어와야 맞아. 우린 거길 찾아야......" "아야!" 그의 뒤쪽 어딘가에서 주나가 찢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났고, 쿵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엘러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맙소사, 주나, 무슨 일이냐?" 그의 앞쪽 손이 닿을 듯한 어둠 속에서 주나의 징징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길을 찾다가...... 미끄러졌단 말예요!" "저런!" 엘러리가 안ㄷ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또 혹시 요정 같은 것이 널 공격한 줄 알았구나. 그만 일어나렴. 이 복 잡한 미로에서 처음 미끄러진 것도 아니잖니." "하지만 축축한 걸요." 주나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축축하다고?" 엘러리는 아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더듬대며 나아가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어디 말이냐?" "바닥 말예요. 미끄러지면서 제 손에 조금 묻었어요. 그쪽 손이 아녜요. 이 쪽 손이라고요.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게...... 미지근해요." "축축하고, 끈적거리고, 미지근......" 엘러리는 아이의 손을 놓고 주머니를 뒤져 조그만 연필 크기의 손전등을 꺼냈다. 그는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재빨리 손전등의 버튼을 밀어 올렸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그 무엇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 다. 주나는 그의 곁에서 숨을 헐떡이고...... 그것은 단순한 입체적 윤곽을 띤, 낮게 댄 상부 가로대와 조그만 문 손잡 이가 있는 보통 크기의 문이었다. 그 문은 닫혀 있었다. 한쪽 틈새에서 새 나온 액체 비슷한 것이 바닥을 검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 손좀 보자꾸나." 엘러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주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그 작고 가 냘픈 주먹을 내밀었다. 엘러리는 아이의 주먹 쥔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들 여다보았다. 진홍색이었다. 그는 아이의 주먹을 자기 코 끝에 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거의 넋 나간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진홍색을 훔쳤다. "글쎄! 이건 페인트 냄새가 아닌 것 같구나, 그렇잖니, 주나? 그렇다고 듀발 씨가 어떤 극적인 ㅎ과를 내기 위해 뭔가를 바닥에 부어 놓은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그는 얼룩진 바닥과 서서히 공포감을 느끼는 주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얘야. 우리 이 문을 열어 보자꾸나." 그는 힘껏 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움직였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온몸의 체중을 실은 다음 힘껏 문 을 밀어붙였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뭔가 크고 무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좀처럼 밀려나지 않았고, 한 번에 1 센티미터씩...... 그는 문이 열리면서 드러나는 방 안의 광경을 주나가 보지 못하게 할 목적 으로 희미한 손전등 불빛을 교묘하게 이리저리 흩어지게 했다. 아무런 시설 도 되어 있지 않은, 완벽한 8각형의 방이었다. 그냥 8개의 벽면과 바닥 그리 고 천장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문 말고도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한쪽 문에는 적색 화살표가, 또 한쪽 문에는 녹색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문 은 둘다 닫혀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그가 들어온 문 양 옆과 아래를 훑 어보고는 문을 가로막고 있던 물체를 비춰 보았다. 가느다란 불빛이 크고 시커먼, 바닥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엉성한 뭔가 를 비추었다. 그것은 문 쪽에 엉덩이를 댄 채 잭나이프처럼 잡혀 있었다. 불 빛이 그 물체의 뒤쪽 한가운데에 있는 시커먼 네 개의 구멍을 비췄다. 그 구 멍에서는 천연의 작은 폭포처럼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피는 코트를 적 신 채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러리는 주나에게 딱딱대며 무슨 말인가 하고는 무릎을 꿇고 그 물체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덩치 큰 토끼 씨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잠시 뒤 몸을 일으켰을 때 엘러리의 얼굴은 창백하니 넋 나간 사람 같았다. 그는 손전등으로 바닥을 천천히 비춰 보았다. 붉은색 띠는 방 건너편에서 죽 은 사내에게까지 이어져 있었다. 맞은편 대각선 방향에 총신이 짧은 연발 권 총 한 정이 놓여 있었다. 방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가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이죠?" 주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러리는 소년의 팔을 낚아채 방금 그들이 나왔던 방으로 도로 힘껏 밀어 넣었다. 그의 손전등이 조금 전에 그가 주머니칼로 긁어 놓은 유리 표면을 비추었다. 그는 문을 힘껏 걷어찼다. 유리가 몸부림을 치면서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려 했다. 계속 유리를 걷어차자 그의 몸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겼다. 그는 뱀처럼 몸을 꿈틀대며 깨진 유리 사이를 통 과해 '암흑의 집'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작고 환상적인 발코니로 나갔다. 유 리가 깨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아래쪽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는 매표소 옆에서 카키색 제복 차림의 조이랜드 유원지 상주 경찰 한 사람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단정한 모습의 듀발을 찾을 수 있었다. "듀발! 누가 이 집에서 나왔지?" 엘러리가 소리쳤다. "뭐라고?" 키 작은 프랑스 사내 듀발이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간 다음에 말이야! 빨리, 이 사람아,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누가 나왔지?" 듀발은 잔뜩 겁먹은 눈으로 엘러리를 쳐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네, 퀸......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혹시 자네 머 리가...... 태양을 보려고......" 엘러리가 큰 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알았네! 그렇다면 범인은 아직 이 복잠한 미로 속에 있는 거야. 경관님, 빨리 이 지역 담당 경찰을 불러요. 그리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해요. 누구든 나가려고 하면 무조건 체포해요. 이 안에서 남자 하나가 살해 됐어요!" 쪽지에는 가느다란 여자 글씨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앤스...... 당신을 꼭 만나야겠어요. 중요한 일이에요. 예전에 만났 던 그곳 조이랜드 '암흑의 집'에서 일요일 오후 3시에 만나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래요. 그 사람이 의심하고 있어요. 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 랑해요!!! - 매지 - 군 경찰서의 형사 반장 지글러가 손마디를 요란스레 꺾으며 말했다. "이건 보복 행위요, 퀸 선생. 그 쪽지는 죽은 사내의 주머니에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매지는 누구며, 의심하고 있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요? 남편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방이 한 다스의 불빛 세례를 받았다. 가리개를 제거한 랜턴을 죽은 사내 위 로 높이 들어올리고 있는 경찰 하나를 중심으로 경찰들이 방의 모양 만큼이 나 기이한 방식으로 손전등 불빛을 교차시켰다. 여덟 개의 벽면 가운데 한 벽면에 여섯 사람이 나란히 기대 섰다. 그들 가운데 다섯 사람은 놀라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방 한복판의 빛이 환하게 모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섯 번째 사람--키 큰 젊은 여자의 팔을 아직도 잡고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자기 앞만 똑바로 보고 있었다. "흠......" 엘러리의 소리였다. 그는 실내에 갇힌 사람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분명히 더 이상 숨어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지글러 반장님?" "이 사람들이 전부요. 듀발 씨가 기계를 작동시켜 문을 다 내렸으니까요. 우린 듀발 씨와 함께 이 '암흑의 집' 구석 구석을 다 뒤졌습니다. 게다가, 이 끔찍한 곳을 빠져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범 은 분명 이 여섯 사람 가운데 있는 거지요." 형사는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다들 찔끔하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노인만은 예외였다. "듀발." 엘러리가 나직이 불렀다. 듀발은 몸을 움찔했다. 그의 얼굴색이 백짓장같았 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는 없겠지?" 엘러리가 물었다. "오, 없네, 없어. 퀸! 이것 보게, 내가 당장 이곳 설계도 사본을 가져오라 해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그러니까...... 그 지하실이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데다......" 듀발은 말을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이렇게 되려면......" 엘러리가 칙칙한 색깔의 가운을 걸친 채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우아한 여성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신이 매지군요, 그렇지요?" 그제야 그는 여자가 자신이 '암흑의 집' 밖에서 주나와 듀발과 함께 젊은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보았던 여섯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사 실을 기억해 냈다. 여자는 그들보다 먼저 이 집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나 머지 다섯 사람은, 키 큰 젊은 여자와 여자의 늙은 아버지, 에술가 넥타이에 턱수염을 기른 사내, 그리고 체격 좋은 젊은 흑인과 그의 동반자인 예쁜 혼 혈 아가씨였다. "실례지만 이름이......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전...... 매지가 아녜요." 여자가 뒷걸음질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여자의 슬퍼보이는 눈 밑에 푸 르스름하니 반달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여자는 서른 다섯 살 정 도로 보였고, 한때는 상당힌 미인이었을 성싶었다. 엘러리는 여자의 나이보 다 여자를 유린하고 있는 공포감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키 큰 젊은 여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따. "저 사람은 하디 박사에요!" 여자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는 듯 자기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누구요?" 지글러 반장이 재빨리 물었다. "저...... 죽은 사람 말예요. 앤섬 하디 박사라고, 안과 전문의에요. 뉴욕에 살 죠." "맞습니다." 시체 옆에 말없이 무릎을 꿇고 있던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형사 반 장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 사람 신분증입니다." "고맙소, 닥터.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노라 라이스에요."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이분은 제 아버지 매튜 라이스에요. 우린 이 일, 이 끔찍한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우린 오늘 이 조이랜드 유원지에 그냥 놀러 온 거에요. 혹 시라도 우리가......" "예야, 노라." 여자의 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도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고개 한 번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럼 이 죽은 사람을 안다는 얘기요?" 지글러 반장이 매우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매튜 라이스가 대답했다. 그는 높낮이가 뚜렷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 었다. "우리, 그러니까 내 딸과 나는, 하디 박사를 알고 있소. 단지 그의 직업 때 문이기는 하지만 말이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글러 반장 님. 그 사람은 날 몇 년도 더 치료해 왔고, 결국에는 내 눈을 수술했지요." 그의 창백한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백내장이라면서......" 지글러 반장이 그의 말을 받았따. "흠, 그렇다면......" "난 완전히 시력을 잃었습니다." 놀라움 속에서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때서야 엘러리는 자신의 무지를 깨 닫고 성급히 머리를 저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노인의 무기력한 행동, 이상하게 고정된 시선, 희미한 미소, 떨리는 걸음걸이...... "당신이 눈을 멀게 된 것이 하디 박사 책임입니까, 라이스 씨?" 느닷없이 엘러리가 물었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그건 틀림없이 신의 뜻이었을 거요. 그 사람은 최선을 다 했어요. 난 시력을 잃은 지 이미 2년이 됐어요." 노인이 읊조리듯 말했다. "오늘 하디 박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아니오. 난 그 사람을 본 지가 2년도 넘었소." "경찰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두 분은 어디에 계셨죠?" 매튜 라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앞쪽 어디쯤일 거요. 출구 근처거나." "당신들은요?" 엘러리가 흑인 남녀를 보며 물었다. "제 이름은......" 흑인 사내는 말을 더듬었다. "주주 존스입니다, 선생님. 프로 권투 선수지요. 체급은 라이트 헤비급 이고 요. 전 이 의사 양반을 전혀 모릅니다. 저와 제시는 계속 저기 아래쪽의 요 동치는 방에 있었어요. 저희들은......" "오, 하느님." 예쁜 혼혈 아가씨가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당신은요?" 엘러리가 턱수염을 기른 사내를 보며 물었다. 그는 마치 프랑스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요? 이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오. 난 날만 새면 곶으로 나가 온종일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오. 난 화 가요...... 이름은 제임스 올리버 아담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그의 태도에는 거의 빈정거림에 가까운 적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저기 아래층 소지품 보관소로 내려가면 내 화구 가방 안에 물감과 스케치 북이 들어 있을 거요. 난 저기 죽어 있는 저런 인간은 몰라요. 그리고 정말 이지 이런 유치하고 지저분한 장소에는 오고 싶지도 않았다구." "지저분......" 듀발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그는 턱수염을 기른 사내 앞으로 달려갔다. "내 이름은 듀발......" "진정하게, 듀발." 엘러리가 그를 말리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두 분 예술가의 논쟁에 끼여들고 싶지는 않지만, 여하튼 지금은 참게나. 좋아요, 아담스 씨. 이 안의 기계 작동 장치가 멈췄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 었지요?" "앞쪽 어딘가에 있었소." 사내는 성대에 이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소. 질리기도 했고......" 지글러 반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맞아요, 이 사람은 내가 직접 봤어요. 어둠 속에서 자기 혼자 욕을 해대며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날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체 여길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밖에서 떠들어대던 친구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 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가도 실없는 장난만 쳐 대는 방밖에 없잖소'. 자, 아담스 씨. 당신은 왜 그렇게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 했지요? 뭘 알 고 있었던 거요? 어서 실토해요!" 화가는 대답 대신 같잖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벽에다 어깨를 기댔다.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반장님." 벽에 기대서 있는 여섯 사람의 얼굴은 천천히 들여다보며 엘러리가 나지막 이 말을 이었다. "반장님꼐서는 매지라는 여성이 쓴 쪽지의 '의심한다' 는 사람을 찾는 데 더 신경을 쓰시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매지, 이제 털어놓는 게 어떻겠소? 더 이상 버틴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오. 이건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 오. 조만간......" 우아한 모습의 여자가 입술을 축였다. 여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당신 말이 맞겠군요. 결국은 밝혀지겠어요." 여자가 나지막이 공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하죠. 그래요, 제 이름이 매지에요...... 매지 클라크. 그리고 잘 보셨어요. 그 쪽지는 제가 썼어요...... 하디 박사님께요."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격정적으로 떨렸다. "하지만 그 쪽지는 제가 쓰고 싶어서 쓴게 아녜요! 그 사람이 시켰어요. 이 건 함정이에요. 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로서는......" "누가 그 쪽지를 쓰라고 했죠?" 지글러 반장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제 남편이에요. 하디 박사와 전 친구 사이로...... 그래요, 친구였어요, 순수 하게. 제 남편은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그이가...... 그이가 알게 됐죠. 그이는 틀림없이 우리를 미행했을 거에요...... 여러번. 우린....... 예전에 여기 서 만난 적이 있어요. 제 남편은 무척이나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제게 이 쪽지를 쓰라고 했어요. 날 협박했어요...... 쪽지를 쓰지 않으 면 절 죽이겠다고요. 난 몰라요. 그 사람이 시켰어요!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 고요!"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글러 반장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크 부인." 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반장의 손에 들린 짧은 총신의 연발 권총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반장이 말했다. "이게 당신 남편의 총입니까?" 여자는 몸을 떨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녜요, 그 사람도 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총신이 길어요! 그 사람은.... 명사수에요." "전당포에서 빌린 거로군." 지글러 반장이 총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엘러리를 보며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클라크 부인, 그러니까 부인께서는 남편이 협박을 했는데도 이곳에 오셨다 는 얘기군요?" "그래요, 맞아요. 전...... 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하디 박사에게 경고 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말 용기가 대단하시군요. 부인의 남편 얘긴데, 혹시 부인이 이곳에 들어 오시기 전에 이곳 조이랜드 유원지에서 보지 못하셨나요?" "그래요. 못 보았어요. 하지만 분명 톰이 그랬을 거에요. 그 사람은 내게 앤 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단 말예요!" "그럼 부인께서는 이곳에 들어와서 하디 박사를 만났나요? 그가 살해되기 전에 말입니다." 여자는 몸을 떨고 있었다. "아녜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여기서 당신 남편은 보지 못했나요?" "못 보았......" "그렇다면 당신 남편은 어디 있는 거지요?" 엘러리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처럼 사라질 수는 없는 거지요. 기적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글러 반장님, 그 총의 출처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지글러 반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해 보죠. 제조 번호는 이미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총이 라...... 게다가 지문도 없고, 검사 양반이 고생 깨나 하겠죠." 엘러리는 성마르게 혀를 차며 시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 주나는 그의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듀발, 이 방을 어떻게 좀 밝게 하는 방법이 없겠나?" 듀발이 화들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비수처럼 훑고 지나가는 불빛에 아까보 다 더 창백해 보였다. "이 건물엔는 전선줄도 없고, 전기 장치 같은것도 전혀 되어 있지 않네, 퀸. 지하실만 빼고는 말이야." "그럼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는 뭐지? 그건 보인다고 했잖나?" "화학 약품이네. 어쨌든 난 이번 일로 완전히......" "물론 그렇겠지. 살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즐거운 일이 못돼니까. 하지만 자 네가 만든 이 지옥 같은 곳이 사건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네. 어떻게 생각 하세요, 반장님?" "나로서는 간단한 문제 같군요. 여길 어떻게 빠져 나갔는지는 몰라도 그 클라크라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우린 그 사람을 찾아서 심문할 겁니다. 그 는 선생이 권총을 발견한 그 자리에서 박사를 쏘았어요." 엘러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반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시체를 끌고 가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어 있는 문 앞에다 기대 놓았지요.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입니다. 핏자국을 보면 알 수 있 지요. 총소리는 이 망할 놈의 집에서 나는 그 희한한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테고, 범인은 그것까지 계산했던 것이죠." "흠, 아주 훌륭하군요. 클라크가 사라진 방법만 제외하고는...... 범인이 클라 크일 경우에 말입니다." 엘러리는 손톱을 잘근 잘근 씹으며 지글러 반장의 분석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잘못된 게 있었다...... "아, 검시가 끝났군요. 어때요, 박사?" 랜턴 밑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던 키 작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선 여섯 사람은 거짓말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검시관이 말했다. "아주 간단하군요. 거의 같은 위치에서 네 발의 총알을 맞았습니다. 뒤에서 맞았는데, 두 발은 심장을 관통했어요. 명사수에요, 퀸 씨." 엘러리는 눈을 깜빡였다. "명사수라...... 그래요, 정말 훌륭한 솜씨 같군요. 박사, 사망 추정 시간은?" "약 한시간 전쯤. 즉사했어요." 엘러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 내가 발견하기 몇 분 전에 총을 맞았겠군요. 그때까지도 몸이 따뜻했으니까요." 그는 죽은 사내의 검푸른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틀렸군요, 지글러 반장. 범인이 총을 쏜 위치 말입니다. 범인은 하디 박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 생각으로는 범인이 하디 박사와 아주 가까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몸에 화약 자국이 남아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박사?" 검시관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화약 자국이요? 아뇨, 없어요, 절대로 없어요. 화약이 탄 흔적은 전혀 없 어요. 지글러 반장 말이 맞아요." 엘러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약 자국이 없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분명합니까? 화약 자국은 틀림없이 있을 거요!" 검시관과 지글러 반장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런 일에 전문가로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퀸 선생님." 키 작은 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살자는 적어도 4미터, 어떠면 4미터도 더 되는 거리에서 총을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엘러리는 엄청나게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입을 열고 무슨 말인가 하 려다 입을 다물더니 다시 한 번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불 을 붙여 물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4미터, 화약 자국이 없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 참, 글쎄, 정말 신기하군요. 듀웨이 교수의 흥미를 끌 만한 비논리적 인 교훈이군요.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어." 검시관이 엘러리를 기분 나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퀸 선생님. 그런데도 선생님은 제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지글러 반장이 나섰다. "대체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엘러리가 막연히 되물었다. "두분 다 모르시겠어요? 좋아요. 어디 이 사람 옷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한 번 봅시다." 반장은 바닥에 널린 피살자의 소지품 잡동사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러 리는 주위 사람들의 눈길은 아랑곳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심술궂게 뭐라 투덜대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찾으려던 것, 논리적으로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을 찾지 못했떤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종류의 끽연 용 품도, 시계도 없었다. 그는 피살자의 손목에 시계를 찼던 흔적이라도 있나 싶어 손목까지 다 조사해 보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 보고 있는 의아한 눈총들도 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손 전등으로 바닥을 샅샅이 비춰 가며 고개를 숙이고 실내를 열심히 왔다갔다 했다. 마침내 지글러 반장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방은 벌써 수색을 끝냈어요! 대체 뭘 찾는 거요, 퀸 선생?" 엘러리가 엄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분명 이곳에는 뭔가가 있어야 해요. 어디 봅시다, 반장님. 당신 대원들이 뭘 찾아 냈는지." "우리 대원들 역시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소!" "난 지금 형사들의 눈에 중요하게 보일 만한 물건을 말하는 게 아니오. 아 주 사소한 물건이오. 종이 쪽지나 나무 조각 같은 것...... 아니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어깨가 넓은 사내 하나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다 찾아 보았습니다. 퀸 선생님, 먼지 하나 없었어요." 듀발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발...... 우리가 아주 세심하게 설비를 해 놓았네. 여긴 환기 시설과 진공 청소 시설까지 다 되어 있네. 이 안에 있는 먼지는 죄다 빨아들여서 이 '암 흑의 집'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해 놓는 시설 말이네." 엘러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진공 청소 시설! 빨아들인다...... 그렇다면 가능하지! 진공 청소 시설은 온 종일 가동하나, 듀발?" "그렇진 않네, 친구. 밤에만 가동한다네. 이 '암흑의 집' 이 비었을 때, 그리 고...... 자네들이 하는 말로 뭐라더라? 손님이 없을 때만 말이네. 그렇기 때 문에 여기 계신 경찰들께서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먼지 하나 찾아내지 못 했을 거네." "낭패로군." 엘러리가 밑도 끝도 없이 중얼댔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진공 청소 시설을 낮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꺼져 있었다. 반장님 제 고집을 용서해 주십시오. 분명히 모든 곳을 다 수색했다고 했지요? 아 래층의 회의실까지요? 여기 있는 누군가가......" 지글러 반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 선생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하는 겁니까? 지하실 에 근무하는 이곳 직원이 살인이 일어난 시간에는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나간 사람도 없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그렇다면......" 엘러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반장님께 저 분들의 몸을 수색해 달라고 부탁드려야겠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여섯 사람 가운데 마지막 사람의 소지품을 내려놓았을 때 엘러리가 얼굴을 찡그린 모양은 절묘했다. 그는 그들의 소지품을 임의대로 갈라 놓았고, 주로 화가 아담스와 라이스 양의 물건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를 풀고 일어서서 말 없이 소지품들을 가리켰다. 주인들에게 돌려 주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듀발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생각을 못했어! 대체 자네가 찾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 우리 자 신도 모르게 우리 몸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나? 혹시라도 그 게 위험한 성질의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엘러리가 야릇한 관심을 나타내며 고개를 들었다. "멋진 생각이네, 듀발.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 걸?" "그것 보라고." 듀발이 신이 나서 자기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며 말을 열었다. "이 되도네이 듀발의 머리도 나쁘지는 않다고. 자, 자네가 직접 확인하겠나 퀸?" 엘러리는 그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없군, 고맙네, 듀발." 그는 자기 주머니도 뒤지기 시작했다. 주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도 다 꺼냈어요." 지글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됐습니까, 퀸 선생님?" 엘러리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곧 끝납니다, 반장님...... 가만!" 갑자기 그는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기다려요. 아직은 가능성이......" 아무 설명도 없이 그는 녹색 화살표가 표시된 문으로 뛰쳐 나갔다. 밖은 그 방과 연결된 방만큼이나 컴컴하고 좁은 통로였다. 그는 손전등으로 주위 를 비춰 본 다음 복도 맨 끝머리로 다시 돌아가더니 마치 자신의 꼼꼼함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기라도 한 듯 바닥을 샅샅이 뒤지며 느릿느릿 걸어갔 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았을 때 그는 '회의실 출구' 라고 적혀 있는 막다른 문 에 다다랐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환하게 밝혀 둔 불빛 때문에 눈 을 깜빡거렸다. 경찰관 하나가 그에게 거수 경례를 했다. 그 옆에 있는 해골 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왁스나 깨진 유리 조각, 또는 타다 남은 성냥개비도 하나 없군."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그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이봐요, 경관님. 이 창살에 나 있는 문을 좀 열어 주시겠소?" 경찰관이 창살에 나 있는 조그만 문을 열쇠로 열자 엘러리는 자신이 서 있 는 곳보다 훨씬 넓은 방으로 들어가, 즉각 벽의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 각각의 칸에는 엘러리 자신을 포함해 지금 갇혀 있는 사람들이 '암흑의 집' 으로 들어오기 전에 맡긴 물건들이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세밀하게 조사 했다. 화가의 화구가 든 가방에 이르러서 그는 흘낏 안을 들여다보고 다시 가방을 닫았다. 그 안에는 물갑과 붓 그리고 아주 평범하면서도 영감이라고 는 없이 그린 서툰 솜씨의 그림 세 점--하나는 풍경화, 나머지 둘은 바다 경치--이 들어 있었다. 그는 먼지가 잔뜩 낀 전등알 밑에서 얼굴을 찡그린 채 왔다갔다했다. 몇 분 이 지났다. '암흑의 집' 은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는 듯 고요하기 만 했다. 경찰관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엘러리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찡그린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 랐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그는 계속 혼자서 중얼거렸따.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경관님! 여기 있는 이 잡동사니 들을 모 두 사건 현장으로 가지고 갑시다. 난 이 조그만 탁자를 가지고 가겠소. 필 요한 물건을 다 갖췄으니, 어둠만 있으면 무시무시한 강신회(降神會)를 열 수가 있을 거요!" 그가 복도에서 8각형 방의 문을 두드리자 지글러 반장이 직접 문을 열었다. "아니, 또 온거요?" 반장이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오. 사체도 다 넣었고......" "몇 분 정도는 더 기다려 줄 수 있겠지요?" 엘러리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짐을 든 경찰관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잠깐 연설을 좀 해야겠군요." "연설!" "영묘함과 교묘함으로 가득 찬 연설 말입니다. 친애하는 반장님, 듀발, 나의 이 연설이 자네 프랑스 사람들의 영혼을 기쁘게 해 줄 거네. 신사 숙녀 여 러분, 잠시만 그대로 계십시오. 좋습니다, 경관님. 탁자 위에 올려놓아요. 자, 여러분, 죄송스럽지만 여러분이 들고 계신 손전등을 저와 이 탁자를 향 해 비춰 주시면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방안에서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앤섬 하디 박사의 시신은 고리 버들로 만든 갈색 자루에 들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엘러리는 가느다란 불빛들이 덩 어리를 이루고 있는 방 한가운데 서서 마치 학자처럼 회의를 주관했다. 벽 쪽의 반짝이는 눈빛들이 그를 주시했다. "그럼 신사 숙녀 여러분, 시작하겠습니다. 우린 먼저 이 사건 현장이 어떤 한 가지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암흑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약간은 평범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에 어떤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암흑의 집' 입니다. 그리고 이 성스럽 지 못한 방에서 한 남자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희생자 와 저, 그리고 제가 데리고 온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듀발 씨의 악마적인 상상력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여섯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집을 직접 설계한 듀발 씨의 말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이 집 의 하나밖에 없는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따고 했습 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 하디 박사의 살인범 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잠시 술렁임과 한숨 소리가 있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엘러리가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어떤 못된 운명이 장난을 놀았는지 살펴 보기로 하지요. 이 비극 적인 암흑 속에는 그것과 연관된 인물이 적어도 세 명은 등장합니다. 라이 스 씨, 이분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주 존스 씨와 그의 여자 친구 그들은 흑인입니다. 이게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입니까?" 주주 존스가 으르렁댔다. "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퀸 선생님."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엘러리가 말했다. "게다가 라이스 씨는 타당한 동기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희생자가 그의 눈 을 치료했고,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시력을 잃었으니까요. 그리고 클 라크 부인에게는 질투심 많은 남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살해 동 기가 두 가지는 나오는 셈이지요.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들은 이 범행을 저지를 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지글러 반장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뭐가 결정적이란 말이오?" 엘러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이지요, 반장님. 이 어둠 말입니다. 아마 이 어둠 때문에 혼란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저 하나 뿐일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 방은 완벽하게 캄캄합니다. 전깃불도, 전등도, 랜턴도, 가스등도, 촛불도 없으며 창문 하나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세 개의 문이 이 방 만큼이 나 캄캄한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각각의 문에 표시되어 있는 녹색과 적색 화살표는 야광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는 빛을 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캄캄한 방의 가장 캄캄한 곳에서, 그것도 최소 한 4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누군가가 보이지도 않는 희생자의 등에 불과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네 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습니다......" 누군가가 숨을 헐떡였다. 지글러 반장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다시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사격 솜씨는 정확했습니다. 그게 사고였을 리는 없습니다. 처음에 저는 희생자의 코트에 분명히 화약 자국이 있을 것 이며, 살인자가 하디 박사 바로 뒤에 서서, 그를 만져 보거나 움직이지 못 하게 잡고서, 그의 등에다 총부리를 대고 권총을 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그러나 검시관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전 도대체 불가능한 일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하게 깜깜한 방에서? 그것도 4미터나 떨어진 거 리에서? 살인자가 귀 하나에 의존해 움직임이나 발소리를 듣고 하디 박사 를 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사격 솜씨가 너무나도 정확했습니다. 게다가, 비록 느리기는 했겠지만, 살인자가 노리는 표적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답은 살인범이 볼 수 있는 불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불이 없습니다." 매튜 라이스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아주 현명하시군요, 선생." "아니죠, 그건 기본적인 사실이지요, 라이스 씨. 우선 이 방에는 불이 없으 니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듀발 씨의 진공 청소 시설 덕분에 조그만 부스러기 하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뭔가를 발견 한다면 그것은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손전등을 들고, 타다 남은 성냥개비나 양초 같은 것--하디 박사를 총으로 쏘아 맞힐 수 있는 정도의 빛을 내는 그 어떤 것--을 찾아 이 방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저는 사실을 분석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분석한 여느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제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 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빛의 성질을 띤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여섯 명의 용의자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내용물까지 전부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빛의 성분을 띤 물건은 없었습니다. 성냥개 비 하나만 나왔더라도, 비록 그것이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미리 준비해 놓은 덫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인범은 그의 희생자를 이 '암흑의 집' 으로 유 인했던 게 분명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를 생각을 하고 있었습 니다. 분명히 그는 예전에 여기 들어온 적이 있을 것이며, 이 안에 불이라 고는 없다는 것까지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리 빛의 성분을 띤 어떤 것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성냥을 준비할 확률은 거의 없고, 손전등이 분명히 나았겠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 었습니다. 타다 남은 성냥개비조차 없었습니다. 몸에 지니지 않았다면 버린 게 분명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에? 성냥개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방이나 복도 어느 곳에서도." 엘러리는 담배를 피우느라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불빛은 희생자 본인의 몸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그럴 리가!" 듀발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어느 바보가 그런 짓을......"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빛을 내보내고 있었을 걸세. 나는 하디 박사의 시신을 살펴보았네. 그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었고, 야광으로 된 시침이나 분침이 있는 손목시계도 차고 있지 않았네. 하다못해 끽연 도구도 없었네. 그는 분명 금연가였던 거지. 그 러니까, 성냥이나 라이터도 없었고, 손전등도 없었네. 빛을 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살인범이 어떻게 그를 겨냥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면......"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남은 가능성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거지요." "그게 뭐지......" "신사 여러분, 들고 계신 등불과 손전등을 꺼 주시겠습니까?" 잠깐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이 엘러리가 처음 이 방에 비틀대며 들어왔을 때와 마찬 가지로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엘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아무도 움직이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엘러리가 피우던 담뱃불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마침내 꺼져 버 렸다. 그러자 가볍게 부스럭대는 소리와 날카롭게 딸깍대는 소리가 났다. 사 람들의 놀란 눈앞에서 각설탕만한 거의 직사각형 모양의 희미한 진주색을 띤 불빛이 방을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빛은 집을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처럼 일직선으로 돌진했고, 또 하나의 작은 불빛을 만들더니 어딘가 부닥쳤다. 그러자 보시라! 또 하나의 불빛이, 세 번째의 불빛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엘러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이 자신의 가장 고집스러운 자식에게 어던 식으로 기적을 보여 주었 는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燐)입니다. 물감 형태를 한 인. 가령, 살인범이 희생자가 이 '암흑의 집' 에 들어오기 전에...... 아마 사람들 에게 떠밀렸을 때겠지요--그의 코트 뒤에다 이 물감을 칠해 놓았다면, 살 인범은 자신의 범행을 위한 충분한 조명을 확보해 놓은 셈이지요. 살인범 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인광만 찾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캄캄하고 4미터나 떨어진 거리라지만, 명사수로서 네 발의 총알은 별로 어 려운 일이 아닌 거지요. 그리고 희생자에 몸에 묻어 있던 인은 총알이 박힌 순간 거의 없어져 버렸겠지요. 설사 조금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덮어 버렸을 것이고...... 그래서 살인범은 어디를 가더라 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영리했어요...... 안돼요, 움직이면 안 돼요!" 세 번째 불빛이 갑자기 난폭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불빛 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더니 녹색 화살표가 있는 문 쪽으로 나아갔다. 우당 탕 쿵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싸우는 소리가 났다. 전등불이 미친 듯이 켜지며 서로가 서로를 비췄다. 경찰들은 절망적인 침묵 속에서 안간힘을 쓰 고 있는 한 사내와 싸우고 있는 엘러리를 비추었다. 그들은 바닥에서 뒹굴 고 있었고, 그들 옆에는 화구 가방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지글러 반장이 그들에게로 뛰어가더니 곤봉으로 사내의 머리를 내려쳤다. 사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고개를 젖히더니 의식을 잃었다. 그는 화가 아담스였다. "범인이 아담스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잠시 뒤 어느 정도 정돈이 되었을 때 지글러 반장이 물었다. 아담스는 수갑 을 찬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안심이 되거나 놀란 얼굴들 로 그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지요." 엘러리는 숨을 헐떡이며 옷의 먼지를 털었다. "주나, 이제 그만 잡아당기렴! 난 괜찮아...... 당신이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 잖소, 반장. 당신이 아담스를 발견했을 때 그가 컴컴한 곳에서 더듬대며 나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투덜대고 있었다고 말이오. 당연히 그랬겠지! 그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미로 깊숙히 들어 가기만 했지요. 녹색 화살표만 따라갔었 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 녹색 화살표 가운데 어 느 하나만 찾았더라도 그는 출구로 통하는, 속임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곧바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녹색 화살표를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색맹인 것이지요. 그는 사물의 녹색과 적색을 구분 하지 못하는 평범한 증상의 색맹이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자신에 게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는 이 '암흑의 집' 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곳 안내원에게 들은 분명히 출구로 연결되어 있다는 녹색 화살표에 의존해 시체가 발견되기 전 에 빨리 여기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요. 중요한 문제는 그가 자신이 화 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색맹인 사람이 화가라는 것이 맞아떨어지 지가 않았던 거지요. 자기 꾀에 넘어가 적색 화살표를 잘못 따라갔다는 것 은 자신이 적녹색맹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화구 가방에 들어 있던 풍경화와 바다 그림을 보았고, 그 그림들 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그림들이 그가 그린 그림 이 아니며, 그가 가장을 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변장을 하고 있다면 결정적인 용의 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 빛이 어디서 나왔느냐에 대한 최종적 연역을 종합해 보았 고, 그때 갑자기 모든 해답이 떠올랐습니다. 화구 가방 속의 인광성 물감이 었지요. 그리고 그는 곧바로 하디 박사를 뒤따라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 그 뒤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된 거지요. 그는 자신이 인을 가 지고 있다 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위험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화구 가방 을 조사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밝은 곳에서 그것을 열어 볼 것이고, 밝 은 곳에서는 화학 약품인 인 성분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게 바로 저것이지요." "그럼 제 남편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살인범을 내려다보며 클라크 부인이 질식할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동기가 뭔가, 친구? 동기가 없잖나! 저 친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디 박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듀발이 이의를 제기했다. "동기?" 엘러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자넨 이미 그 동기를 알고 있네, 듀발. 사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턱수염을 기른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이 재빨리 뭔가를 낚아챘다. 사내의 얼굴에서 턱수염이 떨어져 나왔 다. 순간 클라크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 친구는 목소리까지 변조했지. 안됐지만, 이게 당신의 최후요. 클라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