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연인의 모험 로저 바웬은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흰 30살의 청년이었다. 어떤 사람인가 하 면 키가 크고 좀 지나치게 웃는다 싶을만큼 잘 웃으며, 하버드 사투리가 심 한 영어를 썼다. 때로 칵테일을 마셨으며 담배는 도가 넘칠만큼 많이 피웠 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있는 친척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며 주로 로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는 늙은 숙모- 에 대해 매우 인정이 많으며, 독 서경향은 사바티니와 쇼의 중간인 중용을 취하고 있었다. 뉴욕주 코시카 (인구 745명)에서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있을 경우에는 변호사업무 를 하고 있었는데, 코시카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며, 어렸을 때 카터노인의 과수원에서 몰래 사과를 따먹고 메이지어 냇가에서 벌거벗고 헤엄도 치고, 토요일밤이면 코시카 바빌리언(두쌍의 밴드로 쉬지않고 춤을 출 수 있었다) 의 테라스에서 아이리스 스코트와 장난을 하던 마을이었다. 코시카 인구의 100%에 이르는, 로저를 아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로저는' 귀공자'이고, '정말로 선량한 젊은이'이며 '손톱만큼도 교양을 내세우지 않 으며' '착실한 사나이'였다. 친구들 -거의 대부분 메인가 변두리에 있는 재 스민가의 마이클 스코트의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 도 로저만큼 쾌 활하고 친절하고 상냥하며 밉지않은 청년은 없다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코시카에 도착한 지 반시간도 안되어 엘러리 퀸은 그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시민에 대하여 코시카 사람들이 어떤 애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러리는 메인가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클라우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정보를, 군(郡)재판소 부근의 길거리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던 이 름도 모르는 개구장이한테서 꽤 재미있는 단편을 , 그리고 코시카 우체국장 부인인 퍼킨스라는 여자로부터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로저 바웬 본인의 입으로부터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는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보기에도 분명 분개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군 구치소를 떠나 하숙집 쪽으로 -엘러리가 허둥지둥 맨해턴에서 달려온 원인이 된 로저 바웬의 친한 친구에게로 가는 도중 엘러리 퀸의 가슴을 세 게 때린 것은 이와 같이 모든 미덕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제1급살인 혐의를 받고 어두침침한 철창 속에 누워서 통탄스럽게도 공판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기묘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고 엘러리 퀸은 한참 뒤 장미꽃으로 덮인 포치에서 흔들의자를 앞으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이 사건은 틀림없이 겉보기보다는 그다지 비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바웬에 대해 들은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 앤소니 신부는 마디가 불거진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이 손으로 로저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떨며 그는 말했다. "퀸씨,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으니까 요. 그리고 본인도 단호하게 맥거번을 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구요. 나는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로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도.. 로저의 변호를 맡고 있는 군에서 제일 가는 변호사인 존 그레엄은 지금까 지 자기가 맡은 사건 가운데 이건 가장 불리한 정황증거 사건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하고 몸집이 큰 마이클 스코트가 우람한 가슴의 멜빵을 잡아당겨 철썩 하는 소리를 내며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로저까지도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제기랄, 난 로저가 자신이 그랬다고 자백한다 해도 그 말을 믿지 않겠어요. 신부님, 용서하세요, 말 씨가 너무 험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갠디부인이 휠체어에서 물어뜯을 듯이 말했 다. "뉴욕에서 온 그 교활한 검은머리 악당을 로저가 쏘아 죽였다고 말하는 녀 석이 멍청이라는 거에요. 생각 해보면 알 것 아니예요. 그 사건이 나던 날 밤 로저는 자기 방에 혼자 있었단 말예요. 누구든지 잠잘 권리는 있지 않 겠어요. 잠을 자는데, 왜 증인이 필요합니까, 네? 퀸씨. 가여운 로저는 불 량배가 아니예요. 제가 알고 있는 누구처럼." "알리바이가 없습니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점이 불리하단 말씀이야." 하고 몹시 뚱뚱하고 튼튼한 노인인 코시카 경찰서장 프링글이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 점이 아무래도 불리해. 그날 밤 로저가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면 좋았 을텐데 말이야. 아무튼-." 서장은 갠디부인의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자 당황해서 덧붙였다. "로저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로저가 맥거번과 싸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 "오오!"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둘이 서로 치고받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협박 비슷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때리기까지는 안했지만...." 앤소니 신부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싸움을 했습니다. 그 일이 있던 날 저녁이었지요. 맥거번이 살해 된 건 자정무렵이었는데, 로저가 그 친구와 말다툼을 한 것은 바로 그 한 시간쯤 전이었어요. 사실은 퀸씨, 그들이 싸운 것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습 니다. 전에도 몇 차례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답니다. 지방검사가 만족할 만한 동기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마이클 스코트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 총탄이라는 것이 있어요" "바로 그겁니다." 몸집이 작고 생쥐처럼 이지적인 용모를 한 도드 의사가 말했다. 한심한 듯한 말투였다. "나는 군(郡)의 검시관이자 이 고장의 장의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퀸씨. 검시때 맥거번의 시체에서 적출된 총탄을 조사하는게 내 임무였지요. 프링 글서 서장이 로저를 용의자로 구속하고 그의 총을 압수했을 때 우리는 당 연한 일로 총알의 탄흔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탄흔을 말입니까?"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며 설마하는 듯한 감탄한 태도로 프링글서장과 도드 검시관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럼요, 그런 문제가 되고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 으니까요." 하고 검시관은 얼른 덧붙였다. "내 현미경 검사로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만.....아주 성가신 일이라서 말이예요, 퀸씨. 하지만 직무도 직무고, 법을 옹호해야 하는 직 책에 있는 사람은 지켜야 할 서약이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탄도전문가의 감정을 받기 위해 총과 함께 뉴욕으로 보냈답니다. 감정 결과는 우리의 판 정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어요. 일이 이쯤 되니 우리들이 할일이 무엇이겠습 니까? 이런 이유로 프링글 서장이 로저를 체포한 것입니다." "때로는" 앤소니 신부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보다 숭고한 의무가 있는게 아닐까요, 새뮤얼?" 검시관은 그야말로 비참해 보였다. 엘러리가 말했다. "바웬은 총기소지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뚱뚱한 경찰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대 개 가지고 있지요. 저어기 저 산이 아주 좋은 사냥터라서 말입니다. 사용 한 것은 38구경으로 -로저의 것은 콜트38 자동권총, 그것도 아주 근사한 것이었지요." "로저는 사격의 명수였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좋겠지요." 하고 스코트는 소리쳤다. "대단한 솜씨입니다" 그 우락부락한 얼굴이 누그러졌다. "나도 그런 것을 볼 줄 알아요. 이래뵈 도 내 팔에는 지금도 여섯개의 유산탄 파편이 박혀 있단 말입니다. 벨로의 격전(1918년 6월~7월)때 독일놈들의 총탄을 피해다니다가 얻어맞은 거지 요." "사격에는 기막힌 명수였어요." 검시관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우리는 곧잘 같이 토끼사냥을 갔었는데 로저가 50야드 앞을 달리고 있는 놈을 콜 트로 잡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로저는 소총을 쓰지 않았습니다. 소총 은 참다운 스포츠로서는 재미가 없다면서....." "이번 일에 대해서 바웬 자신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 까?" 엘러리는 담배 연기를 곁눈으로 보면서 물었다. "나한테는 도무지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로저는" 앤소니 신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부정하고 있습니다. 맥거 번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그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방검사한테는 그것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엘러리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로저의 자동권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 그 젊은이의 말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 누군가가 그 권총을 훔쳐 살인을 한 다음 몰래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는 것이 되겠군요?" 모두들 당황한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앤소니 신부는 보일듯 말듯 한 자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 스코트가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도무지 말도 안됩니다. 글레엄이 -우리들의 변호사인 글레엄이 로저에게 말했지요. '잘 듣게, 로저, 권총을 자네 방에서 훔쳐 낼 수 있었다는 사실 을 증명하는 것이 자네를 위해 절대 필요한 일일세. 자네의 목숨은 그 점 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지.' 하며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그 바보같은 젊은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싫다'는 거예요. '글레엄씨,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무도 내 권총을 훔친 사람은 없습 니다. 나는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거든요. 그리고 권총을 넣어 둔 것은 내 가 자는 침대 바로 옆에 있습니다. 또 그날밤에는 문에 빗장을 걸어 놓았 어요. 아무도 들어와서 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난 그런 증언은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거예요." 엘러리는 휘파람과 더불어 동그랗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오오, 우리의 영웅이여' 라고 해야 할 판이군요. 그렇게 되면-" 엘러리 는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싸움 말입니다, 제가 알 고 있는 점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원인은-" "아이리스 스코트예요." 망을 친 문쪽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예요, 일어나지 마세요, 퀸씨. 괜찮아요, 아버지, 저도 이제는 다 컸어요. 그리고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퀸씨에게 숨긴들 무슨 뜻이 있겠어 요." 여자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어떤 것을 알고 싶으세요, 퀸씨?" 보아하니 엘러리는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같았다. 벌떡 일어서서, 박물관 구경온 촌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코시카의 흙먼지 속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근사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하더라고 이처럼 놀라지 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미인은 드물다. 코시카에서는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아이리스 스코트인가 하고 엘러리 는 생각했다. 이름을 잘도 지었군, 오, 마이클! 아이리스는 신선하고 나 긋나긋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어, 그 이름이 가리키는 꽃(붓꽃) 바로 그 자체 인것처럼 싱싱하고 우아했다. 정말 싹트기에는 기묘한 땅을 골랐다. 이상할 정도로 갸름한 검은 눈동자는 엘러리를 완전히 매혹시켜버려 그 사랑스러움 앞에서 그는 망연히 넋을 잃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문 앞에 여자는 혼자 서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아이리스에게 유 혹적인 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벽함에서 생기는 무의식적인 고혹이 었다 - 눈썹의 곡선, 입술의 곡선, 조각같은 가슴의 융기. 그리하여 지금 엘러리 퀸은 비로소 로저 바웬같은 미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나이가 어째서 전기의자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될 파국에 빠졌는 지 그 까닭을 알았다. 설사 퀸에게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다 할지라도 포치에 않아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아름다움을 알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도드는 조심 스러운 차분한 존경심을 가지고 조용히 아이리스를 보고 있었다. 프링글은 높이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아이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렇다, 그 뚱뚱한 늙은이 프링글까지도. 그리고 앤소니 신부의 늙은 눈은 자랑스러워 보였으 며 보일듯말듯한 슬픔을 깃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스코트의 눈에는 아름다운 딸을 가진 아버지의 한없는 환희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리스야말 로 키르케(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딸)와 베스타(로마신화에 나오는 가정의 여신)가 합쳐진 것 같은 처녀로 시인이 시적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 과 마찬가지로 쉽게 남성을 움직여 살인을 범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거 정말 -" 엘러리는 깊숙이 숨을 들이쉬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즐거운 놀라움이었습니다. 자, 앉으세요, 스코트양. 나도 정신을 차리겠 습니다. 맥거번도 아가씨의 숭배자였겠지요?" 아이리스의 구두굽이 포치에 조그만 소리를 울렸다. "네" 하고 그녀는 조 심스운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무릎위에 포개진 상아같은 손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저도 -저도 그분을 좋아했어요 그분에게는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었어요. 뉴욕에서 온 화가였지요. 코시 카의 유명한 언덕을 그리기 위해서 약 6개월전에 이곳에 왔어요. 무척 박 식했고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곳을 많이 여행해서 유명한 친구들도 있 었고........여기서는 우리 모두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거든요, 퀸씨. 전 지금까지 그런 분을 만난적이 없었어요." "그 교활한 악마녀석이......" 갠디 부인이 얼굴을 실룩거리며 혀를 찼다. "실례지만" 엘러리는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나요 ?" 꿀벌 한마리가 프링글의 털복숭이 귀근처를 붕붕거리며 날고 있었다. 서장 을 화를 내며 그것을 철썩 내리쳤다. 아이리스는 대답했다. "전 -그것을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요. 죽음이라 는 것은 왜 그런지 -사물을 바꿔 버리는군요. 아마 전 -그분의 참모습을 본 거겠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게 아닙니까 -살아 있었을 때는?" "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마이클 스코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딸에게 감섭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아이리스에게는 자기 나름대 로 생활방법이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나로서는 맥거번이 도무지 마음에 들 지 ㅎ았습니다. 그 자는 살이 보들보들한 허영만 찾는 녀석이라 아무짝에 도 쓸모가 없는 친구였지요. 하나에서 열까지 나는 그를 믿지 않았소. 아 이리스한테도 주의를 주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여자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홀딱 반했던 모양이에요. 그는 의외로 오 래 머물러서 -나한테 빚까지 졌답니다." 하고 불쾌한 듯이 말했다. "5주일 치 방값을 말입니다. 왜 어물어물하고 있었는지, 왜 주머니에 한푼 도 없는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로군요." 하고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 그리고 로저 바웬은 어땠습니까, 아가씨?" "저희는 -저어, 함께 자랐어요." 아이리스는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판에 박힌 것처럼 정해져있어요. 아마 저는 그것이 무척 싫었던가 봐요. 그리고 로저 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도 싫었어요. 그는 맥거번씨에 대해 진짜로 화를 내고 있었어요. 언젠가 몇 주일전에는 로저가 그 사람을 죽이겠다고 했어 요. 우리가 모두 듣고 있는 앞에서요. 그들은-저기 저 객실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이 포치에 앉아 있었구요...." 잠시동안 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엘러기가 샹냥하게 말했다. "그래서 아가씨는 로저가 그 사람을 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리스는 미칠 것 같은 눈을 엘러리쪽으로 들었다. "아니요. 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로저는 아니예요. 그는 화를 냈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예요. 그냥 말로만 그랬을 뿐이지, 본심은 아니었 을 거예요." 그리고는 목멘 소리로 모두들 당황하도록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마이클 스코트는 삶은 문어처럼 새빨개졌고, 앤소니 신부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 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미...미안해요." 하고 아이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누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엘러리는 부드럽게 물었다. "전 모르겠어요." "다른 분들은?" 모두들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프링글씨. 맥거번의 방은 사건이 있던 날 밤 당신이 조사했을 때 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시체는 어떻게 되었죠?" "네" 검시관이 말했다. "검시를 한 뒤 물론 검시 재판을 위해 보존해 두었 지요. 그리고 시체를 인수해 갈 사람을 찾아보았습니다만, 그 사람은 연고 가 없는 사람이었는지 친구 하나 나타나지 않더군요. 뉴욕의 화실에 남겨 놓은 약간의 물건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 손으로 처리해서 코시카의 새묘지에 매장했습니다." "여기 방 열쇠가 있소." 서장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숨이 답답한 것처럼 말 했다. "나는 지금부터 저쪽 기슭 마을로 가야합니다. 도드 의사가 뭐든지 질문에 대답해 드릴 수 있을걸고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서장은 체념한 것처럼 말을 끊더니 포치에서 비틀거리듯이 걸어나갔다. "신부님도 가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이 말했 다. "그러지요." 앤소니 신부는 대답했다. "퀸씨, 부디 뭐든지 물어보십시 오, 잘아시겠지만 -" 서장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신부의 야윈 어깨는 힘없이 처져 있었다. "실례지만" 엘러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시체를 발견했습니까 ?" 엘러리는 남은 사람들과 함께 집안의 서늘한 어두운 층계를 올라갔다. "나요." 검시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벌써 2년째 마이클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지요. 스코트부인이 돌아가신 뒤로는 줄곧 늙은 두 홀아비 가 같이 사는 셈이지요. 안그런가, 마이클?" 두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약 3주일전의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 밤이었어요 -심한 우뢰와 함께 비가 내렸는데 당신도 기억하고 있지요? 나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자 정쯤이었어요- 자리에 들기전에 2층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가느라고 맥거 번의 방 앞을 지나갔는데, 문이 활짝 열린 채 전등이 켜져 있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문쪽을 향해 앉아 있더군요." 검시관은 두 어깨를 움츠렸다. "난 즉시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심 장을 맞고 말입니다. 피가 잠옷에..... 그래서 나는 곧 마이클을 깨웠습니 다. 아이리스도 우리의 소리를 듣고 달려왔지요." 모두들 층계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엘러리는 아이리스가 숨을 몰아 쉬고 스코트가 헐떡이는 소리를 들었다. "죽은 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습니까?" 엘러리는 검시관이 손가락질한 닫혀진 문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바로 몇분전이었던가 봅니다. 아직 몸이 따뜻했으니까요. 즉사했던 거지 요."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태풍 ㎖문에 아무도 총소리를 못 들었겠지요 -상처 는 한군데뿐이었을거구요." 도드의사는 혼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 이방이군요." 엘러리는 프링글한테서 받은 열쇠를 구멍에 찔러 한바퀴 돌렸다. 그리고 몸으로 밀어 문을 열었다. 아무도 말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갓난아기처럼 폭력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 다. 방은 무척 컸는데 엘러리가 묵고 있는 방과 똑같았다. 가구도 엘러리의 방에 있는 것과 아주 똑같았다. 침대도 같았고, 두개의 창문 중간인 똑같은 장소에 놓여있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과 골풀로 엮은 등받이가 달린 등나무의자도 엘러리의 방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좋을 정 도였다. 양탄자, 책상, 다리가 높은 옷장.....그런데 옷장의 위치만은 달랐 다. "방마다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까?"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스코트는 굵직한 눈썹을 들엇다. "그렇습니다. 내가 영업을 시작하려고 쓰러져가는 집을 하숙집으로 개조했 을때 오바니의 어느 파산한 가게에서 잔뜩 사들였지요, 똑같은 물건만 말 이죠. 그래서 방마다 꾸밈새가 같답니다. 왜 그런것을 물으시죠?"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흥미를 느꼈을 뿐입니다." 엘러리는 입구 문 옆에 기대서서 담배를 꺼내면서, 그동안 침착하지 못한 잿빛 눈으로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격투한 흔적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문 바로 앞에 탁자와 등의자가 있고 의자는 문을 향해 놓여 있었다. 문과 의자를 연결하는 직선상의 방 저쪽 편 에는 다리 높은 구식 옷장이 벽에 붙여 놓여 있었다. 엘러리의 눈은 또 가 늘어졌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 옷장 말인데요, 내 방의 것은 두개의 창문 중간에 있지요." 뒤에서 아이리스의 부드러운 숨결이 들렸다. "하지만......아버지, 옷장은 저기 없었어요- 맥거번씨가 살아있었을 때는 요." "그거 이상한데." 스코트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사건이 있던날 밤에도 저 옷장은 지금의 장소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네, 그랬어요." 하고 아이리스는 의아한 듯이 대답했다. "틀림없이 저기에 있었습니다. 나도 지금 생각나는군요." 검시관도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하고는 문에서 몸을 떼었다. "무슨 단서가 되겠지요." 엘러리는 옷장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몸을 굽히고 옷장을 잡아당기고 하 더니 결국 벽에서 옷장을 끌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옷장 뒤에 무릎을 꿇고 벽을 한치 한치 열심히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벽 널판지에서 약 1야드쯤 위쪽의 벽면에 괴상하게 움푹 파인 곳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지름이 4분의 1인치도 못되는 거의 원형으로 1인치의 16분 의 1정도쯤 벽이 파여있었다. 벽가루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 였다. 엘러리가 일어섰을 때쯤 실망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으로 되돌아왔다. "별거아니군요. 살인이 있던 날부터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건 확실하지요? " "그것은 내가 보증합니다." 스코트가 말했다. "흠, 아직도 맥거번의 소지품들이 여기 있는 것 같군요. 살인이 있던 날 밤, 프링글서장님께서는 이 방을 철저히 수사하셨겠지요, 도드씨?" "물론이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스코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틀림없죠?" "아무렴요. 서장이 조사하고 있는 동안 우리 모두 여기 있었는걸요, 퀸씨. " 엘러리는 미소를 짓고 묘하게 열심히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스코트씨. 그럼, 나는 이만 내방으 로 물러가서 이 성가신 사건을 좀 생각해보기로 할까요. 이 열쇠는 내가 맡아두겠습니다, 도드씨." "좋습니다, 뭐든지 부탁할 일이 있으면 -" "우선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때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 "메인가에 있는 내 장의사로 연락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어딘가 멍하니 피곤한 듯이 웃고는 문을 잠그고 조용히 복도를 걸어갔다. 방은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엘러리는 깍지낀 손을 두통이 나는 머리 밑 에 받치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고 있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멧새가 지저귀고 꿀벌이 붕붕거리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통해서 향기로운 산들바람이 언덕에서 흘러왔다. 엘러리는 한번 복도 층계참에서 아이리스의 가벼운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들 었다. 그리고 또 아래층에서 마이클 스코트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엘러리는 담배를 피우면서 20분쯤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침대 에서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빠끔히 열고 귀를 기울 였다.......인적은 아무데도 없었다. 엘러리는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잠궈 놓은 살인이 있었던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잠궜다. "만일 이 부조리한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 엘러리는 중얼거리면서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맥거번이 죽었 을때 앉아 있었던 등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골풀로 엮은 의자등받이를 세세히 점검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미간을 모으고 일어서서 엘러리는 주위를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방의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서성거렸다. 늙은 꼽추처럼 등을 웅크리고 아랫입술 을 쑥 내밀고는 눈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가구 밑에 기어들어가기 위해 배 를 바닥에 깔고 엎드리기까지 했다. 적과 아군 진지 사이의 무인 지대에 잠 입한 공병처럼 침대밑을 한바퀴 돌았다. 방바닥 조사는 완전히 끝났으나 아 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엘러리는 얼굴을 찌푸리고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우울한 얼굴로 휴지통 속의 물건들을 도로 집어넣고 있을때, 갑자기 엘러 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됐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방을 나가 조심스럽게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귀를 기울이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연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조용 다른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엘러리는 네 번 ㎖로 조사한 방의 등의자에서 추론의 결과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찾아냈다. 그 방은 미리부터 엘러리가 어렴풋하게나마 그 사 람의 방이리라 짐작했던 인물의 방이었다. 엘러리 퀸은 조심스럽게 방을 본래대로 해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세 수를 하고 타이를 고쳐 맨 다음 다시 한번 양복에 솔질을 하고서 꿈꾸는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포치에서는 갠디부인과 마이클 스코트가 둘이서 심심풀이로 휘스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혼자 입속웃음을 지으며 집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리고 아이리스가 커다란 동굴같은 부엌에서 매워 보였지만 맛이 좋을 것 같 은 무엇인가를 큼직한 난로위에서 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흰 앞 치마를 두르고 뜨거운 열기로 볼을 빨갛게 하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전체적 으로 무척 즐거워보였다. "어머나, 퀸씨 아니세요. 무슨 볼일이라도......" 아이리스는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진지하고 애원하는 듯한 눈 으로 엘러리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는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엘러리는 아이리스의 아름다움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로저는 행복한 친구군요. 아이리스양 -나는 이래뵈도 아버지다운 마음씨 를 가진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군요 -하지만 아무튼 일은 꽤 진척이 되었소. 정말 입니다. 그 젊은 미남자도 오늘 아침에 비한다면 앞날이 훨씬 밝아졌소. 아무렴, 큰 진보를 이루었지요." "그럼, 그럼 - 그는 -오, 퀸씨!" 엘러리는 길이 들어 반들반들한 부엌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있는 사기접시 속에서 설탕을 뿌린 쿠키를 한개 먹은 다음 눈을 크게 뜨고 싱긋 웃고 또 한개 집었다. "아가씨가 만든건가요? 아주 맛있는데. 진짜 클크레치아인데! 아니면 페넬 로페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오....그래요, 난 아가씨에게 그만큼 감탄하고 있소. 만일 이것이 아가씨 솜씨의 견본이라고 한다면 -" "이건 쿠키인걸요." 아이리스는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오더니 얼떨떨해있는 엘러리의 손을 덥썩 잡아 가슴에 대었다. "퀸씨, 만일 퀸씨가 할 수 있다면 - 전 모르고 있었어요. 제가 이렇게 로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지금까지 -지금까지...감옥에 들어갈때까지..." 아이리스는 몸부림쳤다. "전 뭐든지 하겠어요 - 무슨 일이든지-" 엘러리는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그리고 칼라를 늦추며 애써 무관심을 가장 하고 조용히 아이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렇군요. 아가씨의 기분은 잘 알아요. 하지만 나한테는 두번다시 이러지 말아요. 어쩐지 하느님이라도 된 것같아 식은땀이 나는데요." 엘러리는 이마를 닦았다. "이야기할 게 있는데 아이리스양, 잘 들어요. 아 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이 꼭 한가지 있소." 아이리스는 얼굴을 빛내며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엘러리는 일어서서 먼지 하나 없는 부엌 마루를 걷기 시작했다. "새뮤얼 도드씨는 직무에 대단히 충실하다고 들었는데, 틀림없겠지요?" 아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뮤얼 도드씨 말인가요? 어머나,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분은 자기 "리 에 무척 성실해요. 당신이 알고 싶은게 그거라면 -"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일이 번거로와지겠는데." 엘러리는 씁 쓰레 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현실은 어쩔 수가 없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입 니다, 이 추악한 지상에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한번도 내려온 적 이 없었을 만큼 아름다운 여신인 아가씨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 밤 그 새뮤얼 도드선생이 잠시동안 그 임무를 잊어버리도록 유혹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아이리스의 까만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언뜻 스쳤다. "어머나, 퀸씨." "글쎄, 오해하지 말고....아가씨에게 꼭 알맞은 일이예요. 그렇다고 -뭐- 대담한 짓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오. 과자를 하나 더 먹겠습니다." 엘러리는 두개를 더 집었다. "오늘 밤에 그 사람과 영화구경을 갈 수 없을 까요? 도드씨가 집에 있으면 일이 복잡해지기때문에 그럽니다. 아무튼 오 늘 저녁에 집에서 내몰지 않으면 내 일을 방해할지도 몰라요." "새뮤얼 도드씨라면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줘요." 여자는 지극히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발갛게 물들었던 볼의 붉은 기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 무엇때문에 그런 짓을 하라고 하는지 이 해가 안가요." "그것은 말이오." 엘러리는 과자를 한입 가득 물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난 오늘 저녁에 도드씨의 권위를 짓밟으 려는 겁니다. 세상없어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좀 까다로운 정식 서류 가 없으면 그 일은 분 명히 불법행위지요, 범죄행위까지는 안되더라도 말입 니다. 도드씨가 협력만 해준다면 괜찮겠지만, 그에 대한 내 판단이 맞는다 면 그는 협력해 줄 것 같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이 나 나나 이른바 양심에 거리낄 게 없을테니까요." 아이리스는 엘러리를 냉정하게 저울질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똑바로 쳐다 보는 아이리스의 눈길에 좀 당황했다. "그렇게 하면 로저를 위해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요." 엘러리는 열정을 담아 말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를만 큼." "그렇다면 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아이리스는 갑자기 눈을 내리깔고 앞치마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부엌에서 나가 주시겠어요, 퀸씨? 지금부터 저녁준비를 해야겠어요 . 그리고 퀸씨는 -" 아이리스는 난로쪽으로 가서 국자를 집어들었다.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 각해요." 엘러리 퀸은 황홀해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부지런히 물러갔다. 엘러리가 망으로 된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갠디부인은 이제 없었다. 그리 고 스코트가 앤소니 신부와 포치에 앉아있었다. "마침 잘됐군. 두분이 같이 계시는군요." 엘러리는 유쾌한 듯이 말했다. "몸이 편찮으신 갠디부인은 어디 가셨나요? 그 휠체어로 어떻게 계단을 올 라가지요?" "계단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부인의 방은 아래층에 있으니까요." 하고 스 코트가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퀸씨?" 스코트의 눈은 초췌해져 있었다. 앤소니 신부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엘러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엘러 리의 얼굴이 갑자기 긴장되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그는 의자를 두사람쪽으 로 바싹 끌어당겼다. "신부님" 엘러리가 조용히 말했다. "무엇인가 제게 은밀히 암시를 해주고 있습니다만 신부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 더 숭고한 법칙을 섬기고 계십니다 -성심성의껏 봉사하고 계시지요." 늙은 신부는 잠시동안 엘러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나는 법률은 잘 모 릅니다, 퀸씨. 나는 두분의 주님이신 -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그로 인해 목숨을 내던지신 분들을 섬기고 있지요." 엘러리는 말없이 이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스코트씨, 당신은 아까 벨로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죽 음같은 건 조금도 두렵지 않겠군요?" 튼튼하게 생긴 사나이의 매서운 눈이 엘러리의 눈을 파고들었다. "들어보십시오, 퀸씨. 나는 제일 친한 친구가 내 눈앞에서 두동강이 나는 것을 보았소. 이 손으로 전우의 창자까지 쓸어담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나 는 내 앞에 지옥을 다발로 묶어 가져온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직 접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니까요." "대단히 좋습니다."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대단히 좋습니다. 아라미스와 포르투스, 그리고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제가 달타냥이라고 해두지요. 좀 억지같은 느낌이 있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신부님, 스코 트씨!" 신부와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엘러리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무덤파는 일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성 발푸르기스 밤의 축제 (독일의 전설로, 5월 1일 전날 밤 마녀들이 하르 츠산에 모여서 마왕과 술잔치를 벌인다)로부터 여러 달이나 지났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밤 마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마녀들은 무시무시한 산허리의 어두운 달빛 아래서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말없이 늘 어선 묘비위를 스치는 바람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엘러리 퀸은 그날 밤 자신이 그 세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상 당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묘지는 코시카 변두리에 있었으며 철책이 둘 러쳐져 있고 울창한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얼음같이 찬 바람이 세 사 람의 머리위에 죽음을 휘몰아붙이고 있었다. 떼지어 있는 묘비들은 산허리 의 지표에서 마치 바람에 바래 허옇게 된 송장의 뼈처럼 어렴풋이 반짝이 고 있었다. 성난 듯한 먹구름이 달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며, 나무들은 쉴 새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렇다. 마녀들이 춤추는 광경을 상상하기에는 아 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묵묵히 본능적으로 바싹 붙어서 걸어가고 있었다. 망령을 조금 도 개의치 않는 앤소니 신부는 앞장서 달리는 큰 배처럼 심상치 않은 공기 를 가르면서 꿋꿋하게 가슴을 펴고 신부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고 있었 다. 그 표정은 어둡고 엄격했지만 침착함 바로 그것이었다. 엘러리와 마이 클 스코트는 삽, 곡괭이, 밧줄, 그리고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들고 무거워 허덕이면서 그 뒤를 따랐다. 꿈틀거리고 속삭이며, 그림자에 에워싸인 컴 컴한 산중턱에는 이 세사람을 빼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맥거번의 무덤은 묘지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쓸쓸한 언 덕의 막바지라 독수리가 서식할 것 같은 곳이었다. 무덤의 봉분은 아직도 새 흙이었다. 그곳에 누워있는 시체의 표시로 가느다란 막대기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입을 다문채 얼굴을 긴장시키고 두 사나이는 곡괭 이질을 시작했으며 앤소니 신부는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달은 구름사이 로 성난듯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단단한 흙이 물러지자 두 사람은 곡괭이를 버리고 삽으로 흙을 팠다. 두 사람 다 옷 위에 헌 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도 이제야 겨우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무덤 옆에 수북이 쌓인 흙더미 옆에서 잠시 일을 쉬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도둑들의 심정을 말입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옆에 계시니까 얼마 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되지못한 상상을 잘 하는 편이라서요." "엘러리씨,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소." 노신부는 좀 언짢은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시체니까요." 엘러리는 몸을 떨었다. 스코트가 투덜거렸다. "빨리빨리 합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의 삽은 덜커덕 하는 소리를 내며 목재에 부딪혔 다. 어떻게 해서 해냈는지 엘러리는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도저히 이야기로 다 쓸 수 없는 작업이었다. 작업이 아직 끝나기 훨씬 전부터 엘러리는 땀 으로 범벅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고드름처럼 살갗을 찔렀다. 악몽 속의 망 령처럼 온 몸이 산산히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코트가 혼자서 묵묵히 대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동안 엘러리는 그 옆에서 숨을 헐떡거렸고 앤소니 신부는 무뚝뚝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엘러리는 파헤친 무덤 옆에서 스코트와 마주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길쭉하고 무거운 시커먼 덩어리같은 것이 구덩이 밑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위태 위태하게 흔들리며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쓴 안간힘으로 그것은 구덩이 옆 에 쿵하고 소리를 내며 내려졌는데, 엘러리는 너무나 무서워서 정신이 아 찔했다.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아 엘러리는 담배를 더듬었다. "난 -아무튼 -한숨 돌려야겠군."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 정신없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기 시작했 다. 스코트는 태연하게 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단지 한 사람 앤소니 신부 만이 소나무목재로 된 관 옆으로 다가가서, 안전하게 관을 끌어당겨 위치 를 바로잡고 부드러운 손으로 천천히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엘러리는 넋 나간 사람처럼 이 노인을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담배를 집어던지고 입속으로 한마디 욕을 하고는 신부의 손에서 곡괭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하여 힘껏 한번 치자 관뚜껑이 부서졌다. 스코트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앞으로 걸 어나갔다. 그는 튼튼한 목장 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위에 몸을 굽혔다. 앤소니 신부는 뒤로 물 러나서 피곤한 눈을 감았다. 엘러리는 멀리 재스민가에서 일부러 가져온 커다란 보퉁이를 부지런히 풀어, <코시카 콜>신문의 편집장으로부터 몰래 빌어 온 다리가 달린 큼지막한 사진기를 꺼냈다. 그리고 뭔가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있습니까?" 엘러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코트씨, 있어요?" "있는데요, 퀸씨." 튼튼한 몸집의 사나이는 또렷하게 말했다. "하나뿐입니다." "뒤집어 봐 주세요." 잠시 뒤 엘러리는 또 말했다.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고 스코트가 대꾸했다. "하나뿐입니까?" "네" "내가 있을 것 같다고 한 곳에 말입니까?" "그렇소." 엘러리는 무엇인가 머리 위로 높다랗게 들어올려 한 손으로 쥐고, 흙투성 이 관속에 누워있는 물체에 사진기의 렌즈를 대더니 떨리는 손을 불끈 쥐 었다.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불을 연상시키는 새파란 섬광이 연옥의 불길처럼 잠시 산등성이를 환하게 비추었다. 엘러리는 일손을 멈추 고 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마이클 스코트는 넓은 잔등을 굽히고 한결같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앤 소니 신부는 다시 카메라를 싼 보퉁이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늙은 얼굴 을 가리고 있었다. "이야기하지요." 엘러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랄정도로 교묘한 사건이라 그 계략이 발각되었다는 것은 .....신부님, 역시 이 세상에 신은 있는 모양입니다. 맥거번 방의 옷장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추정되는 시간에 늘 있던 장소에서 움직여졌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저는 범인 자신이 이것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옷장을 한쪽으로 밀어 보았더니 과연 벽판자로부터 약 1야드위의 벽에 조그맣게 파인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파인 곳과 그 앞에 놓인 옷 장은 두 가지 것을 연결하는 직선상에 있었습니다. 즉 맥거번이 총을 맞았 을 때 앉아 있었다고 생각되는 등의자와 범인이 방아쇠를 당겼을 때 서 있 었을 것이 틀림없는 문을 연결하는 직선입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당장 그 파인 곳이 총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파인 곳이 얕은 점으로 보아 힘을 잃은 총알입니다. 그리고 또 범인이 서 있었고 피해자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 튼 총알은 심장 을 관통했으니까요 -의자에서 몇 야드 떨어진 뒤쪽 벽의 파인 곳이 범인 이 쏜 총알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내가 발견한 곳 언저리에 흔적이 생길 것이고 탄도는 약간 아래로 향할 것이 분명합니다." 흙덩이가 소리를 내며 관위로 굴러떨어졌다. "또 명백한 것은 " 엘러리는 삽을 쥐면서 이상한 어조로 말했다. "만일 벽에 구멍을 만든 그 맥없는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고 한다 면 그 사람이 앉았던 등의자 등받이에도 구멍이 뚫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자를 조사했습니다만 총알 자국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벽에 자국 을 낸 총알은 맥거번의 몸을 관통한 것이 아니라 빗나간 총알이엇다고 생 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폭풍이 치던 날 밤에 두 방의 총이 발사되어 한 방은 몸속에 남고 또 한방은 벽에 자국을 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안을 샅샅이 세밀하게 조사하였다는 여러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 고 제2탄이 발견되었다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제 자신도 방바닥을 조사했 습니다만, 헛일이었습니다. 제2탄이 그곳에 없다고 한다면 옷장을 움직여 벽의 구멍을 가렸을 때 범인이 가져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엘러리는 숨을 쉬고 어두운 얼굴로 덮여저 가는 무덤구덩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범인은 한개의 총알은 가져갔으나 중요한 쪽 -피해자의 몸 속에 남아 있던 총알은 그대로 놓아두었을까요? 이건 좀 이상한 일입니다. 동시에 또 뜻이 있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두개의 총알따위는 없었고, 쏜 것은 단지 한방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허리에서는 마녀가 춤을 추며 어둠속에서 떨고 있었다. "저는 그래서" 엘러리는 피곤한 듯이 뒷말을 이었다. "그 가정위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단 한방밖에 발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면 그것은 맥거번을 죽인 총알로 그 친구의 심장을 뚫고 잔등을 빠져나가 의자 등받이까지 뚫고 방을 가로질러 그 흔즉이 발견된 벽에 부딪쳐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맥거번의 의자에는 총알 자국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 그 의자는 맥거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총알이 피해자의 몸 속을 관통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이미 어떤 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옷장을 움직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일을 해서 안된다는 이유는 없지 않겠 습니까? 그래서 의자까지 바꿔치기했던 것입니다. 스코트씨, 댁의 방들에 는 모두 똑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더군요. 범인은 맥거번의 의자를 끌어다 가 자기방에 갖다놓고 자기 것과 맥거번의 의자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저의 추리는 만일 등받이에 구멍이 뚫린 등의자를 -의자에 앉 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관통했을 경우에 생기리라고 가정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등의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옳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입니다. 그 런데 저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 스코트씨, 댁의 어느 한 방에서 말입니 다." 파헤쳐졌던 흙은 다시 언덕 면과 같이 평평해지고 나머지는 봉분 흙이 약 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앤소니 신부는 흐릿한 고뇌에 찬 눈으로 엘러리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 먹구름이 달을 가려 세 사람은 칠흙같은 어둠에 싸였 다. "왜 -" 엘러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은 사용한 총알을 숨기려 했을까요? 거기에는 단 한가지 이유밖에 없 습니다. 총알이 발견되어 조사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총 알은 발견되어 조사를 당했습니다." 구름은 화난 듯이 흩어지고 또 다시 달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발견된 총알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겨우 작업이 끝났다. 봉분은 달빛에 둥글고 검실검실하게 떠올라 있었다. 앤소니 신부는 넋나간 사람처럼 조그만 나무 막대기 묘표에 손을 ㉫어 봉 분에 찔러 세웠다. 마이클 스코트는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진짜가 아니라고 하면?" 스코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발견된 그 총알이 해낸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 두말할 것도 없이 로저 바웬을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린 거지요. 그 총알 은 바웬의 39구경 자동권총의 것이라고 실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 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바웬은 누군가에 의하여 억울한 누명을 뒤 집어 쓴 것입니다. 그는 바웬의 방의 경계가 엄중해서 그의 자동권총을 훔 쳐내지는 못했지만, 전에 바웬이 사냥터에서 자동권총을 쏘았을 때 몰래 총알을 주워 두었다가 -말하자면 애매한 총알을 맥거번 살해에 실제로 사 용된 총알인 것처럼 꾸몄던 것입니다." 엘러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범인의 총에서 발포된 총알에는 물론 바웬의 총알과는 다른 탄흔이 있으 므로 거기서 꼬리가 잡히게 됩니다. 범인이 자기가 쏜 총알을 그대로 내버 려 두었다가 발견되는 날에는 감식 결과 바웬의 38구경에서 발사된 것이 아님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그 트릭이 당장에 드러나게 되고 맙니다. 그 래서 범인은 맥거번을 죽인 그 총알을 가져가고 벽의 구멍을 숨긴 다음 등 의자를 바꿔치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코트가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 멍청한 녀석은 어째서 의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벽의 구멍이 눈에 띄도록 해놓지 않았을 까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간단했을텐데. 그리고 총알이 몸을 관통 했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당연한 의문입니다." 엘러리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범인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틀림 없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겁니다. 범인이 사건을 저질렀을때 주워 두었던 바웬의 헌 총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거지요. 범인이 살인을 했을 때는 그것을 다른 곳에 두고 있어서 갑자기 써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보기 좋게 관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셈이군요." 하고 스코트는 소리치며 굵은 팔을 휘둘러서, 그 그림 자가 맥거번의 보기 흉한 무덤위를 가로질러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니까 녀석은 나중에 그 총알과 바웬의 총알을 바꿔치기할 수 있으리 라고 생각한 모양이군요. 죽인 뒤에, 경찰의 조사가 끝난 뒤에...." "그렇습니다."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 그리고 말을 중단했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옷에 몸을 감싼 유령이 컴컴한 땅위에 닿을락말락 떠오르더니 세 사람쪽을 향해 산허리를 줄달음쳐 달려 왔다. 앤소니 신부가 벌떡 일어섰다. 이 세상 사람같이 않을 만큼 키가 커 보였다. 엘러리는 삽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마이클 스코트가 거칠 게 소리쳤다. "아이리스, 웬일이냐 -" 아이리스는 미친듯이 엘러리에게로 달려와 숨이 턱에 찬 소리로 말했다. "퀸씨! 다들 -다들 이리로 오고 있어요. 봤어요 -누군가가 퀸씨와 아버지 와 앤소니 신부님이 삽을 들고 이 길을 오는 걸 봤어요....프링글 서장님 이 새뮤얼 도드씨를 데리러 왔더군요......그래서 전 뛰어서 -" "고맙소, 아이리스양."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씨는 여러가지 미 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용기도 포함되어 있군요." 그러나 엘러리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칩시다." 마이클 스코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무래도 -" "이것을 범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엘러 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축복받은 죽은자와 친구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아니, 나는 기다리겠 습니다." 두개의 그림자가 나타나 인형이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점점 커져서 미친 사람처럼 언덕을 기어올라왔다. 첫번째 그림자는 뚱뚱하였으며 손에서 무엇인가가 둔중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서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흰 사나이가 기를 쓰며 오고 있었다. "마이클!" 프링글 서장이 권총을 휘두르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신부님, 그리고 퀸씨,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들 정신이 돌았소? 무 덤을 파헤치다니." "다행이군." 검시관은 헐떡이면서 말했다. "늦지 않아서. 아직 파지는 않 았군 -" 검시관은 봉분과 도구들을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퀸씨, 당신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법률위반이라는 것쯤은 아실텐데요-" "프링글 서장." 엘러리는 앞으로 걸어나가 잿빛 눈으로 검시관을 빤히 쳐 다 보면서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서장님은 이 사람을 계획적인 맥거번 살해 및 로저 바웬에게 누명을 씌운 죄목으로 체포하셔야 합니다." 포치는 보라색 그림자로 감싸여 있었다. 달은 이미 오래 전에 지고 코시카 마을은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단지 아이리스의 흰 가운이 아련하게 빛 나고 마이클 스코트가 뻐끔거리는 파이프가 빨갛게 타올랐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새뮤얼 도드가 -" 마이클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내 딴에는 새뮤얼 도드 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오,신부님!" 아이리스는 신음하면서 곁에 있는 흔들의자 위의 앤소니 신 부손을 더듬었다. "도드 외에는 있을수가 없었지요." 엘러리는 피곤한 듯이 말했다. 발은 난 간위에 얹혀 있었다. "스코트씨, 당신이 범인은 나중에 총알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설 마하니 총알이 보기좋게 맥거번의 몸을 관통할 줄을 몰랐을 거라고 말씀하 신 건 정말 정곡을 찌른 의견이었습니다. 범인이 발포전에 예상했던 대로 총알이 몸 속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몸속의 총알을 바꿔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도드 외에는 없습니다. 살인 사건에 따르기 마 련인 검시를 하는 것은 검시관이기 때문입니다. 또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는 것을 숨길 수 있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누구겠습니까? 매 장을 위해 시체를 처리하는 장의사 도드말고는 없습니다. 총알이 맥거번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검시를 한 검시관 도 드뿐이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에게 거리끼는 점이 없었다면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바웬의 총알을 증거품으로 갖고 나온 것이 누구였습니 까? 그것을 피해자이 심장에서 꺼냈다고 주장한 도드뿐이었습니다." 아이리스는 조그맣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증거가 있냐구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도드는 이 집에서 사니까 그날 밤 맥거번의 방에 접근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시체를 발견한 것도 도드였으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엇 지요. 도드는 검시관으로서 사망시간을 추정하였습니다. 실제로 살인이 행 해졌던 시간보다 조금 늦추어서, 옷장을 움직이고 의자를 바꿔치기하는데 소요된 시간을 속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드는 로저 바웬과 함께 가끔 토끼 사냥갔던 일을 직접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웬의 헌 총알, 바 웬이 쏘아 맞히지 못한 총알을 줍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도드는 검시 관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지요. 탄도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탄흔을 조사하기 위한 현미경도 갖추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나는 증거 를 발견했습니다. 등받이에 총알 자국이 난 등의자를 발견한 곳은 도드의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맥거번의 시체를 발굴해서 흉부 에 난 하나의 탄환 자국과 잔등에 그것이 빠져나간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면 도드는 정식보고서에 허위신고를 한 것이므로 저의 추리가 옳았다는 것 이 입증된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체를 발굴했는데, 과연 잔등에는 총알구 멍이 있었습니다. 저의 증거사진은 도드를 전기의자 로 보내게 되겠지요." "엘러리씨, 당신이 신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앤소니 신부가 어둠속에서 조용히 물었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었다. "전 도드가 쏜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신이 있기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만일 총알이 도드가 예상했던 대로 맥거번의 심장에 머물러 있었다면 벽에는 구멍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의자에도 물론 구멍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체를 발굴해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요. 도드는 검시 후 바웬의 총알을 꺼내 놓고 맥거번의 몸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했잖습니까. 그리고 바웬은 더할 나위없이 불행한 청년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도드씨가 그런 짓을 하다니...." 아이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 리고 소리쳤다. "전 어렸을 때부터 무척 오랫동안 그 분을 알고 있어요. 늘 조용하고 다정 하고 그야말로 -정말이지...." 엘러리는 일어섰다. 캄캄한 포치에 구두가 소리를 냈다. 엘러리는 희끄무 레하게 떠오른 아이리스의 모습 위로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그 턱을 받쳐 들듯이 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묘한 사모의 정을 담아 전혀 보이지 않 는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가씨 같이 아름다운 분은 참으로 위험한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 온후한 도드는 한 사람의 경쟁상대를 내쫓기 위해 맥거번을 죽이고 또 하나의 경 쟁자를 없애기 위해 바웬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겁니다." "경쟁상대라구요?" 아이리스는 숨을 삼켰다. "경쟁상대라고? 괘씸한 녀석같으니." 스코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러리씨, 당신 눈은 -" 앤소니 신부가 속삭였다. "아주 훌륭합니다." "희망은 영원히 통하는 수도 있고 또 죽음을 초래하는 수도 있습니다." 엘 러리는 조용히 말햇다. "새뮤얼 도드는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