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연/구/ 제 1 장 와트슨 박사의 회고록.. 1. 셜록 홈즈라는 사나이.. 나는 1878년 런던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군의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을 따기 위해 네틀리 육군 병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규정된 교육을 끝내고 노섬벌랜드 연대 소속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 이 연대는 인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내가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2 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나는 봄베이에 상륙해서야 나의 연대가 적진 깊숙이로 공격해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길을 재촉하여 그 뒤를 쫓아가 륚 무사히 연대를 만나 새로운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나는 연거푸 재난과 마주쳐야 했다. 마이완드에서 격전에 참가했다 가 어깨에 탄환을 맞아 뼈가 으스러지고 동맥까지 다치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전령을 맡고 있던 부하 머레이가 충직하고 용감한 사람이어서, 나를 말 위에 짐짝처럼 싣고 무사히 아군의 진지까지 데리고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만일 그가 없었다면 나는 잔인한 적의 수중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나는 후방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 곳에서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어 병원 안을 걸어다니기도 하고, 베란다에 나가 일광욕도 할 만큼 회복되었는데, 운수 사납게 도 이번에는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달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하고는 조금씩 건강 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하루라도 속히 본국으로 돌아 가 요양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수송선에 태워져 1개월간의 항해 끝에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로 영국 남쪽의 포츠머스 항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기에, 외롭기는 했지만 공기처럼 자유로운 몸이었다. 얼마 동안은 런던의 스트랜드 가에 있는 호텔에서 묵으면서, 갖고 있 던 돈을 앞뒤 가리지 않고 쓰면서 무의미하고도 바보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말았 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주머니속이 가벼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런던을 떠나 어디 한적한 시골에 틀어박히거나 생활 태도를 싹 바꿔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나중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우선 호텔에서 나와 옹색하기는 하지만 돈이 덜 드는 하숙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막 그런 결심을 한 날이었다. 내가 어느 술집 앞에 서 있자니, 누군가 뒤에서 등 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그는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에 근무할 때 내 수술 조수를 했던 스탬포드 청년이었다. 넓은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은, 외로운 사람에게는 아 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스탬포드와 뭐 유별나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 으나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서. "점심이라도 같이 하세." 하고 말하며 지나가던 마차에 그를 밀어올렸다. 마차가 런던의 번화가를 달리기 시작하자 스탬포드는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 다. "와트슨 씨. 요즘 뭘 하고 계십니까? 몸은 철사 토막처럼 바짝 말랐는데도 얼굴 과 손은 구릿빛으로 타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그 동안에 겪었던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는데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 에, 목적지인 식당에 도착했다. 스탬포드는 내 이야기에 놀라움과 동정을 드러냈다. "그거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래, 지금은 뭘 하고 계십니까?" "하는 일은 없고, 값싸고도 그럴듯한 방을 빌릴 수 없을까 하고 돌아다니는 중이 라네." "그렇습니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두 번째로 듣습니다." "누가 또 그런 말을 했는데?" "병원의 화학 실험실에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방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혼자 살 기에는 부담이 커서 누군가 반부담할 사람이 없을까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군 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뭐, 그게 정말인가? 만일 그 사람이 공동으로 방을 빌려서 하숙비를 반부담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 나야말로 그 상대가 아니겠는가. 나도 혼자 살기보다는 말 동무라도 있는 편이 백번 낫고 말고." 스탬포드 청년은 악간 묘한 얼굴로 포도주 잔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은 아직 셜록 홈즈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함께 살다보면 아마 넌더리가 날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뭐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있는 사람인가?" "아뇨, 나쁜 소문이 있는건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이 머리가 좀 유별나답니다. 어떤 종류의 과학에 몰두하고 있는데, 내가 아는 한 인간성은 아조 좋은 사람이 지요."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인가?" "아뇨,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해부학에 통달해 있고 화학자로서도 일류급이지만 의학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관성 없이 색다른 연구만을 골라 하는데, 교수들도 놀랄 만큼 폭 넓은 지식을 갖고 있답니다." "뭘 하려는 건지. 본인에게 물어본 적은 없나?" "없습니다. 쉽게 본심을 털어놓을 사람도 아니고요. 하기야, 마음만 내키다면 이 야기도 곧잘 합니다만." "꼭 만나보고 싶군 그래. 이왕 함께 하숙하려면, 학구적이고 조용한 사람이 내게 는 맞을것 같네. 아직 몸이 성한 편이 아니니까.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견디기 어렵지. 그런 생활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컷 맛봤으니까. 그래 자네가 안다는 그 사람은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지금쯤 실험실에 가보면 있을 겁니다. 몇 주일씩이나 얼굴을 내밀지 않다가도 나타났다 하면 하루종일 처박혀 꼼짝도 안 합니다. 좋으시다면 식사를 끝내고 가보시지요." "부탁하겠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스탬포드는 그 인물에 대해서 좀더 자세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만일 그 사람과 틀어진다고 해도 날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실험실에서 가 끔 만나 알고 지낼 뿐이니까요. 이 이야기는 박사님이 꺼낸 거니까, 내 책임은 아닙니다." 나는 스탬포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숙을 옮기면 될 일이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좁은 오솔길을 걸어가, 큰 병원의 어떤 건물로 통하는 뒷문 으로 들어섰다. 냉기가 도는 돌계단을 올라가 우중충한 밤색문이 즐비하게 서 있 고 흰 석회로 발라진 복도를 걸어갔다. 막다른 곳에서 복도가 좌우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구부러지니 그곳에 화학 실험실이 있었다. 그 곳은 천장이 높은 방으로 수많은 약병이 들어차 있고,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실험대가 즐비했다. 실험대위에는 레토르트나 시험관, 푸른 불꽃이 타고 있는 분 젠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 보니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안쪽 실험대에 허리를 구부리고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 다. 인기척을 느꼈는지,이 쪽을 바라보고서 난데없이 소리를 질렀다. "발견했소! 발견했단 말이오!" 그는 시험관을 들고 이 쪽으로 달려와서는 흥분해서 스탬포드 청년에게 힘차게 설명을 했다. "혈색소가 섞이면 침전되지만, 그 이외의 것에는 절대로 침전이 되지 않는 시약 을 발견했단 말이오." 금광맥을 발견한 것보다도 더 기쁜 얼굴이었다. "이 쪽은 와트슨 박사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셜록 홈즈씨." 스탬포드 청년이 인사를 시키자, 상대방은 예상외으 세찬 힘으로 내 손을 잡아 흔들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말을 걸어 왔다. "반갑습니다. 당신은 아프카니스탄에서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홈즈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 별 것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이 혈색소 말입니다. 이 발견의 중대성은 당 신도 알아주셔야겠습니다." "화학적으로 재미있는 발견이겠지요. 하지만 실제적인 용도는....." "잠깐 이것은 법의학상 대단히 도움이 되는 발견입니다. 핏자국이 있느냐 없느냐 에 관해서 확실한 증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자, 이리 와 보십시오." 홈즈는 내 옷소매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아까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실험대로 데 리고 갔다. 그리고는 "새로운 피가 필요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핀 끝으로 자기 손가락을 찔러 피 한방울을 슬라이드 위에 떨어뜨렸다. "자, 이 한 방울의 피를 1l의 물속에 넣어 봅시다. 보십시오. 피를 섞었지만 보 기에는 보통 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피의 분량은 그 비율이 100만 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혈색소 특유의 반응을 얻어낼 수 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용기속에 무엇인가 흰 결정체를 조금 집어넣고 나서, 다음 에는 투명한 액체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용기속의 물은 붉은 갈색으로 변하고 유리 용기 밑바닥에 검붉은 침전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홈즈는 마치 어린인가 새 장난감을 손에 쥐었을 때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떻습니까?" "무척 정밀하고 신속한 반응이 나타나는군요." "그렇습니다! 틀림없지요! 과이억에 의한 구식 검출 방법으로는 번거롭기도 하고 불확실합니다. 현미경으로 혈구가 있나 없나를 찾아보는 것도 그렇고요. 더구나 현미경으로는 여러 시간 지난 피 흔적을 검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약을 사용하면 혈액이 새것이든 오랜 된 것이든 동일한 반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검출 방법이 좀더 일찍 발견되었더라면, 지금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범죄자들이 그 보상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범죄 사건에서는 늘 이 점이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사건이 발생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한 남자가 살인 혐의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 사나이의 옷이나 내의 를 조사해 보니 갈색의 얼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핏자국인지 아니면 진흙이나 녹물, 혹은 과일즙의 흔적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전문가 들이 늘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지요. 그것은 왜냐? 믿을 만한 시험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셜록 홈즈 방식이 창안된 이상, 앞으로는 그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홈즈는 그렇게 말하며 열기로 달아오른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마치 박수 갈채를 요란하게 보내 주는 관중에게 답례를 하듯 가슴에 한쪽 손을 대고 정중히 허리를 구부렸다. 나는 홈즈의 흥분된 태도에 놀라면서 말했다. "축하를 드려야겠습니다." 홈즈가 말을 이었다. "작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피솝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 방법 이 알려져 있었다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교수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밖에 우리 영국에서 활개치던 브래드포드의 메이슨이나, 악명 높았던 멀러, 프랑스 몽펠리에의 르페블, 그리고 미국 뉴올리언즈의 샘슨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했음직한 사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스탬포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홈즈씨는 범죄 사건의 살아있는 사전같군요. 이 방면의 신문이라도 발행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과거의 형사 범죄 신문'과 같은 제호로 말입니다." "읽을거리기로선 재미있겠구먼." 홈즈는 핀으로 찌른 손가락 위에 작은 반창고를 붙이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나에 게 미소를 보내면서 말했다. "늘 독극물을 만지기 때문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화를 입기 쉽답니다." 홈즈가 내민 손을 보니 콩알만한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살갗은 강한 산성 약품으로 퍼렇게 되어 있었다. 스탬포드 청년이 높은 삼각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용건을 꺼냈다. "실은 상의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 왔습니다. 와트슨 박사님이 하숙을 구하고 있 습니다. 분명히 홈즈씨도 공동으로 방을 쓸 상대가 없을까 찾고 있는 것 같기 에, 두 분을 만나게 하려고 온 겁니다." 홈즈도 나와 공동으로 방을 빌리는 데는 싫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내가 알아본 방은 베이커가에 있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는 하숙방이지요. 단,지 독한 담배 냄새를 참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나는 픽 웃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나도 냄새가 독한 마도로스 담배를 피우니까요." "그거 다행입니다. 그리고 나는 화학 약품을 집에 두고 수시로 실험을 합니다만. ...."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또, 나에게는 무슨 결점이 있더라? 그렇군요. 나는 가끔 생각에 잠겨 며 칠이고 벙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뭐 내가 화난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 이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내버려두면 곧 원상으로 돌아갑니다. 자, 선생께서는 밝혀 둘 일이 없습니까? 한 지붕 밑에서 살자면, 미리 서로의 결점을 알고있는 것이 도움이 되겠기에..." 나는 쫓기는 꼴이 되어 웃고 말았다. "난 불독 새끼를 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경을 다쳐서 소란스러운 것은 질색 이고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거니와, 좀 게으른 편이지요. 건강 이 회복되면 또 다른 나쁜 버릇이 도질 것입니다만, 지금 현재로선 그 정도입니 다." 홈즈가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바이올린 켜는 것도 소란스러운 축에 듭니까?" "그거야 연주하는 사람에 달렸겠지요. 능숙한 연주라면 하나님도 귀를 기울이시 겠지만, 엉터리라면 글쎄...." 홈즈가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자, 이야기는 다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물론 방을 보 시고 결정할 일이겠지만.." "언제 보러 갑니까?" "내일 정오에 이리로 오십시오. 함께 가서 정합시다." 나와 홈즈는 악수를 나누었다. 홈즈는 다시 약품을 상대로 연구를 시작했기에, 우리는 조용히 그 곳을 물러나왔다.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스탬포드에게 물었다. "이상하군. 그 양반, 어떻게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것을 알았을까?" 2. 추리라는 학문.. 다음 날 우리는 약속한 시각에 만나 어제 홈즈가 말했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의 하숙방을 보러 갔다. 그 곳은 아늑한 침실 두개와 넓은 거실로 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품위있는 가구가 놓여 있었고, 큰 창문이 두 개나 있어 밝은 편이었다. 방은 흠잡을 데 없거니와, 하숙비도 반부담하면 힘에 겨운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 는 그 자리에서 계약하고 그 방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 날 저녁 안으로 호텔에서 짐을 옮겼고, 이튿날 아침에 홈즈 역시 상자 와 여행용 가방 몇 개를 운반해 왔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은 짐을 풀고 살림살이 를 배열하는데 부산했으나, 그 일이 끝나자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홈즈는 함께 생활하고 보니 별로 신경쓰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몸가짐이 차분하 고, 모든일에 절도가 있었다. 밤에는 대게 10전에 잠자리에 들어가고 아침에는 언제나 내가 일어나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외출했다. 낮에는 병원에 있는 화학 실험실에 틀어박히거나 해부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 이었으나, 때로는 멀리 교외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가끔 열띤 연구심에 불타 정신없이 설치다가도 그 반작용을 며칠 동안이나 계속 거실의 소파위에서 뒹굴기도 하고, 하루종일 입을 다물고 손끝하나 까닥하지 않 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 홈즈는 멍하니 꿈이라도 꾸는 듯한 눈이 된다. 만일, 내가 홈즈의 평상 시 절도있는 생활을 몰랐다면 마약 중독자가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날이 감에 따라 홈즈에 대한 나의 흥미는 높아갔고, 홈즈가 그의 인생에서 무엇 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점에 차츰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홈즈는 그 외모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키는 180cm정도 였는데 깡마른 몸매라 실제보다도 더 키가 커 보인다. 눈은 쏘는 듯 날카롭다. 그리고 콧날이 선 매부리코 때문에 얼굴 전체가 날카롭고 강한 인상을 준다. 더구나 네모진 턱은 더욱 의지가 강한 성품임을 엿보이게 하였다. 손은 잉크나 화학 약품으로 늘 얼룩져 있지만, 그 손놀림이 날렵해서 깨지기 쉬 운 물건도 아주 익숙하게 다루었다. 나는 홈즈에게 몹시 마음이 끌려, 홈즈가 입 밖에 내지 않는 신상에 대해 여러가 지 일을 알아보려고 했다. 역시 홈즈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 고 해서 무엇인가 일관성 있는 공부를 하여 학위를 따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분야의 학문에 대해서는 맹렬한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기이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박식함이나 관찰력에 있어서는 내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함께 살기 시작해서 처음 1주일 정도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홈즈도 나 처럼 외로운 신세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홈즈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고, 그 것도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레스트레이드라는 사람은 몸집이 작고 혈색도 나쁘며 쥐와 같 은 얼굴에 까만 눈을 갖고 있었는데, 1일에 서너번이나 찾아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아침에는 최신 유행의 옷을 차려 입은 젊은 아가씨가 찾아 와 30분가량 이마를 맞대고는 돌아갔다. 같은 날 오후에는 행상을 하는 유대인 차림의 머리가 반백이 된 초라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몹시 흥분하고 있는 것 같 았다. 그리고 곧 뒤를 이어 뒤꿈치가 닳아 없어진 구두를 신은 노파가 얼굴을 내 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이 오면, 홈즈는 매번 거실을 독점하고 싶은 눈치여서 나는 늘 침실로 후퇴해야 했다. 홈즈는 이 일에 대해서는 그 때마다 미 안하다는 말을 했다. "내 처지로서는 거실을 사무실 대용으로 쓸 수 밖에 없네. 그리고 이곳을 찾아오 는 사람은 내 손님인 셈이지." 그럴때마다 난 홈즈가 어떤일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에게 내막을 털어 놓으 라고 강요하는것 같아 그만두곤 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홈즈가 자진해서 그 일을 설명해 주었기에 궁금중이 풀렸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날은 3월 4일 이었다. 내가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났 기에 홈즈는 아직 조반 전이었다. 그러자 하숙집 아주머니는 내가 늘 늦게 일어 난 탓에 내 몫의 아침 식사와 커피는 식탁위에 준비해 놓지 않았다. 나는 약간 신경질이 나서 벨을 눌러 아주머니를 불러서는 내 식사도 가져오라고 퉁명스럽게 일렀다. 그리고 토스트를 먹고 있던 홈즈를 곁눈질로 보고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식탁위 에 있던 잡지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연필로 표시가 되어 있는 어느 제목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그것은 '인생의 서'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관찰력이 풍부한 인간은 평소 마주치 게 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는 의견이었다.구체적이고도 열의에 찬 논문이었지만, 이론의 전개에는 억지 와 과장이 섞인것 같았다. 이 논문의 필자는 얼굴의 근육이 약간 일그러지거나, 시선이 번쩍 움직이는 것과 같은 순간적인 표정의 변화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만사를 체계있게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대서양이나 나이아가라 폭포에 관 해서 보거나 듣는 일이 없어도, 한 방울의 물을 보고서도 대성야이나 나이아가 라 폭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생 이란 하나의 큰 쇠사슬과 같은 것이어서 그 하나의 고리를 알면 인생 전체를 포 착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추리 분석의 학문은 다른 여러가지 학문과 마찬가지로 끈질긴 학습을 통해 마침 내 몸에 익힐 수가 있다. 이 학문을 익히고자 한는 사람은 인간의 마음을 짐작 해 낸다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기초적인 문제부터 배워 나가 야 할 것이다. 누구를 만나면 한눈으로 그 사람의 경력이나 현재의 직업을 판별하는 능력을 쌓 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러한 훈련은 어린아이 장난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럼을써 관찰력은 연마되고 어디에 착안하고 무엇을 볼 것인가를 터득하게 된다. 손가락의 손톱, 옷소매, 바지의 무릎, 둘째손가락이나 엄지 손가락에 박힌 굳은 살, 표정 등은 모두가 명백히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해 주고 있다. 뛰어난 연구자 가 그런 것들을 종합해 생각하면 그 사람의 직업을 추리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다. 나는 잡지를 식탁위에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릴! 이런 별 볼일 없는 글을 읽기는 처음인걸." 홈즈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나?" "이 기사말일세. 표시를 해놓은걸 보니 자네도 읽은 모양이네만, 이건 아마도 누 군가 할 일이 몹시도 없는 사람이 안락의자에 파묻혀 끄적인 것이 틀림없네. 그 런 이론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생각 같아서는 이 글을 쓴 자를 지하철 3 등차 속에 밀어넣고 차 안의 승객들 직업을 차례로 맞춰 보라고 윽박질러 주고 싶네. 내기를 걸고 말일세." 홈즈가 조용히 말했다. "그랬다가는 내기 돈만 날릴 걸세. 실은 그 글은 내가 쓴 거라고." "자네가?" "그렇다네. 나는 관찰이나 추리의 힘을 존중하지. 저기에 쓰인 이론은 자네에게 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여간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네. 따지 고 보면 나는 그 이론으로 먹고 사는 셈이거든." "어떻게 말인가?" "나는 그런 이론을 응용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네. 이런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 람은 아마도 나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즉, 탐정 고문 노릇을 하고 있으니 까 이 런던만 해도 형사나 사립 탐정이 꽤 많이 있지.그들이 수사에 막히면 나 를 찾아오고, 나는 거기서 정확한 타개책을 일러 준다네. 그들은 모든 증거를 내게 말해주고, 나는 범죄 역사에 관한 지식을 살려, 대개 의 경우는 해결책을 말해 줄 수가 있다네. 대부분 범죄 사건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1,000개의 범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으면 1,001번째의 범죄도 쉽게 풀릴 수 있을게 아닌가. 저번에 찾아온 레스트레이드도 몸집이 작고 생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유명한 경감이라네. 위조 지폐 사건으로 골치를 앓다가 나를 찾아왔다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대개 흥신소의 소개로 찾아온다네. 모두가 나름대로 가진 걱정거리가 있어. 그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지. 그래서 내가 상대방의 이야길 듣고 상대방이 내 의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면 사례를 하는 것이라네." "그렇다면 자네는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도 사건에 휘말려 있는 본 인도 풀 수 없는 의문을 풀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그런일에 관해선 나는 일종의 직감을 갖고 있다네. 그야 때에 따라서 는 복잡한 사건도 있기 마련이지. 그럴땐 내가 뛰어나니면 직접 살펴보기도 하 지.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특수한 지식을 적지 않게 갖고 있고, 또 그것을 응용 하니까 사건을 놀라울 정도로 간추려 생각할 수가 있네. 자네는 이 잡지에 나 와 있는 추리의 원칙을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했지만, 그 원칙이 내일에는 얼마 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네. 나는 무엇이든 저절로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네. 내가 처음 자네와 만났을때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왔느냐고 물었더니 놀라는 얼굴이 되더군." "누구에게서 들었겠지." "천만에! 내 추리의 힘으로 알았을 뿐일세. 오랜 습관으로 번갯불에 콩 튀기듯 생각이 돌아가니까 순식간에 결론이 나오고 말았지만, 그 추리의 순서를 풀어 보면 이렇게 된다네. '여기에 의사같은 신사가 있다. 그러나 군인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군의관이지. 얼굴과 손은 검게 탔지만, 와이셔츠 소매 밑의 손목은 흰 것으로 보아 열대지방에서 돌아왔을 것이다. 초췌한 얼굴로 보아 고생스러운 환경에서 중병을 앓은 모양이다. 왼팔에 부상을 입은 모양인지. 팔의 움직임이 딱딱하고 부자연스럽다. 열대 지방으로서 더구나 대영제국의 군의관이 부상을 입을 정도의 격전지는 어딘가? 아프가니스탄이 뻔하다.' 이상의 추리에 단 1초 도 걸리지 않았네. 그리고 결론을 이야기하자 자네는 토끼눈이 되었던 걸세."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극히 간단하군. 자네는 미국의 추리 소설가 포의 작품에 등장 하는 뒤팽 탐정 같군 그래. 그런 인물이 실재로 존재하리란곤 생각지도 못했는 걸." 홈즈는 벌떡 일어서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자네는 물론 나를 칭찬해 줄 생각으로 뒤팽을 끄집어냈겠지. 그러나 나보고 그 를 평하라면 불쌍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네. 15분 동안이나 생각하고 나서야 그 럴듯한 추리를 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다니, 답답하기보다는 동정이 가네. 어 느 정도는 분석에 재능이 있기는 했지만, 포가 기대한 만큼 명석한 인물이라고 는 생각지 않네." "그래? 자네는 프랑스의 추리 작가 가보리오의 작품도 읽었겠구먼. 거기에 나오 는 르코크 라면 자네의 눈으로 보아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 홈즈는 코방귀를 뀌었다. "르코크같은 건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 봐주기도 괴롭네. 한가지 인정해 줄 일이 있다면 정력적이라는 점 하나지. 하여간 그 책은 도저히 눈을 뜨고 읽어 줄 것 이 못되네. 입을 열지 않는 용의자의 신원 조사가 고작이 아닌가. 나라면 하루 로 족할 일을 르코크 선생은 반년이나 허둥거리더군. 그 책은 탐정으로서 빠지 기 쉬운 실수를 경계하는 교과서라면 도움이 될 걸세." 나는 내가 제딴에는 숭배한 책 속의 탐정들이 둘 다 홈즈에 의해서 묵사발이 되 는것을 보고 약간 화가 치밀었다. 나는 창가에 다가섯거 거리를 내려다보며 생 각했다. '이 사람은 머리가 좋을지 모르나 자만심이 지나친것 같아.' 홈즈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며 앉아 있었다. "최근에는 그럴싸한 악인도 범죄도 꼬리를 감추고 말았나 봐. 이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좋은 두뇌를 갖고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일세. 범죄 수 사에 있어서 나만큼 연구를 쌓고, 또 타고난 재능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단 말일세. 그러나 나와 같은 탐정을 필요로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 주지 를 않으니 어쩌나. 기껏해야 경시청의 돌대가리 수준에 맞는 동기가 뻔하고 서 투른 악당뿐이니.." 나는 홈즈의 기고만장한 이야기에 더욱 화가 났기에, 이야기를 돌려야겠다고 생 각했다. "저 남자는 뭘 찾고 있는 걸까?"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가리킨 것은 집의 번지수를 들여다보며 도로의 저 쪽을 서성 거리는 한 남자였다. 우람한 체격에 검소한 차림이다. 손에는 푸른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걸 배달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홈즈가 창 밖을 내다보 며 말했다. "저 해병대 출신 중사 말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큰소리군! 넘겨짚어 봤자 탄로날 걱정이 없으니 저런 소릴 하는 거겠지.' 그러는 동안에 우리가 지켜 보고 있던 남자는 우리 쪽의 집 번호를 확인하고는 잰 걸음으로 길을 건너왔다. 그리고는 곧 아래층에서 노크소리가 나고 굵직한 목 소리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하더니 쿵쿵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방안에 들어선 남자가 봉투를 내밀었다. "셜록 홈즈씨에게 전해 드리랍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홈즈의 콧대를 꺽어 줄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홈즈는 일이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였을 테니 말입니다. 나는 자못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인지는 모르나,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심부름 센터에서 먹고 삽니다." 나는 심술뒜은 눈으로 홈즈의 표정을 흘끔 살펴보고 물었습니다. "그전에는 뭘 했습니까?" "해병대에 있다가 중사로 제대했지요. 답장을 써 주실 필요가 없다면 돌아가겠습 니다." .. 3. 로리스턴 가의 괴사건.. 솔직히 말해서, 나는 홈즈의 이론이 척척 들어맞는 증거를 눈앞에서 지켜 보고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홈즈의 분석력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없었 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홈즈가 나의 기를 죽이려고 미리 연극을 꾸며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속여서 무슨 이 득을 볼 것인가를 생각하니 역시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홈즈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니, 그는 막 편지를 읽고 나서 멍한 눈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추리가 가능했나?" 홈즈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슨 추리?" "아까 그 남자가 해병대 중사로 제대했다는 것 말일세." "난 지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네." 홈즈는 내뱉듯이 쏘아붙였다가 곧 웃는 얼굴이 되었다. "아차, 실례했네. 생각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기에 그만.... 그렇다면 자네는 그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 정도도 몰랐단 말인가?" "물론 짐작도 못 했네." "그런가? 나로서는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설명을 할지가 더 어려 운걸. 자네도 마찬가지겠지만, 2에2를 더하면 4가 된다는 이유를 설명하라면 그 답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설명을 하겠나? 그 남자는 길 저쪽에 있었지만 손목 에서 팔에 걸쳐 뚜렷한 닻의 문신이 있었네. 닻의 문신이라면 바다와 관계가 있 지. 거기에다 몸의 동작이 절도가 있는것이 신병을 호되게 다루는 고참병 냄새 가 풍기더군. 중요한 건 그 콧수염일세. 해군에선 그런 카이저형의 콧수염을 기 르지 않아. 그건 해병대 특유의 콧수염이지. 거기에 나이는 이미 중년에 접어 들었잖나. 그러면 뻔하지 않은가. 장교도 아니고 능구렁이 상사급도 아니면, 중 사 정도라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게 아닌가?" 나는 소리쳤다. "두손 들었네!" "아니 대수롭지 않은 일일세." 홈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말했지만, 내가 항복했다는데 대해서는 싫지 않다 는 얼굴이었다. "나는 방금 범죄다운 범죄자가 없다고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것 같구만. 이 걸 읽어 보게나." 홈즈는 편지를 나에게 내밀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편지를 ?어보고는 신음하듯 말했다. "허!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군." 홈즈는 침착하게 말했다. "평범한 사건이 아닌 것 같네. 어디 한번 소리내어 읽어 주겠나?" 나는 시키는 대로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셜록 홈즈 귀하.. 지난 밤 런던 브릭스턴 로에서 떨어져 있는 로리스턴 가든 3번지에서 까다로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오늘 새벽 2시경, 같은 번지의 빈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 을 순찰중인 경관이 발견하고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살펴본 결과. 현관문은 열려 있는 채였고, 가구 하나 없는 응접실에 한 남자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옷차림은 말쑥했는데 주머니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시 이녹 드리 버.'라는 명함이 몇 장 들어있었습니다. 소지품을 강탈당한 흔적은 없었고, 그 남자가 죽은 원인을 나타낼 만한 증거물도 남아있는것이 없습니다. 실내에는 몇 군데 핏자국이 있습니다만, 시체에는 상처하나 없습니다. 그 남 자 가 어떤 이유로 빈집에 들어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사건 전체가 안개에 싸 인 느낌입니다. 오늘 오전중에 이 집에 와주신다면 나는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 니다. 당신에게서 응답이 있을때까지 현장은 그래로 보관하겠습니다 별 지장이 없으시다면 와주시기 바라며, 못 오시게 될 경우엔 차후에 자세한 설명을 드리 겠습니다. 고견을 들려주시면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레그슨 드림.. 홈즈가 설명했다. "그레그슨이란 사람은 경시청에서 제일 가는 민완 수사관이라네. 이 사람과 레스 트레이드는 경감급에서는 알아주는 사람들이지. 두 사람 모두가 빈틈없고 정력 적이지만, 아깝게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네. 게다가 두 사람의 사이는 경쟁 의 불꽃이 튀기고 있어. 두 사람이 제각기 이 번 사건에 관여한다면 상당한 접 전이 벌어질 걸세." 나는 홈즈가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급해졌다. "자네 한가하게 이야기할 틈이 어디 있는가? 곧 마차를 불러 옴세." "난 아직 가보겠다고는 말한 적이 없는데?"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기회가 아닌가?" "자네는 그렇게 말하지만 냉정히 말해 내가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 가령 내가 해결한다 해도 그 공로는 틀림없이 그레그슨이나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것 이 될 것이 아닌가? 공무원이 아닌 사람의 비애라는 거지." "그러나 간절히 부탁해 왔는데...." "그야, 부탁해 오기 마련이지. 나에게는 못 당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으니까.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일세. 남에게 부탁할 거라면, 그 자리 를 그만두어야 하는데도 말일세.어쨌거나,잠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는 내 방식대로 조사해 보기로 하겠네. 큰 소득은 없겠지만, 그 사람들을 웃 음거리로 만들수는 있을 게 아닌가. 자. 가세." 홈즈는 급히 외투를 걸쳐 입으며 말했다. "자, 자네도 모자를 쓰게." "아니, 나도 함께 가자는 말인가?" "뭐 달리 할 일도 없다면.." 그러부터 1분후에 우리는 마차를 타고 브릭스턴 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아침이었다. 멀고 가까운 집들이 회색 장막에 쌓인 듯 멀수록 희미했다. 홈즈는 활기에 차서 내내 바이올린 연주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한편 나는 생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음산한 사건과 침침한 날씨 탓으로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푸념을 했다. "자넨 지금 다루게 될 사건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나?" "아직 아무런 자료도 없지 않은가? 구체적인 증거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추리를 했다가는 실수를 범하기 십상이지. 판단을 흐리게 하니까." 나는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료는 곧 입수되겠군. 지금 브릭스턴 로를 지나고 있네. 아, 저것이 바로 그 빈집이 아닌가?" "그런것 같군. 마부, 마차를 세워 주시오!" 그 집까진 아직 100m는 남아 있으나, 홈즈가 끌어내리는 바람에 우리는 그 집까 지 걸어가야 했다. 로리스턴 가든 3번지 일대는 보기에도 음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슬그머니 겁을 먹게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한길에서 좀 떨어진 곳에 네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중 두 집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집은 비어 있고,문제의 집은 그 중 하나였다. 인기척도 없는 음침한 창이 세줄로 나란히 달려 있고, 세 를 놓겠다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도로에서 집까지의 사이는 작은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고, 아직 어린 나무가 여기 저기 심어져 있었으며, 자갈이 듬성듬성한 흙길이 그 사이로 나 있었다. 길 언저리는 어젯밤의 비로 질펀했다. 집 둘레에는 목책이 달린 높이 1m가량의 벽돌담이 둘러져 있고, 문 쪽에 체격이 큰 순경이 한 명 서서 버티고 있었으나, 그의 주위에는 한가한 사람이 몇 명 서 성거리며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나는 홈즈가 곧 집 안으로 들어가 수사를 시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홈즈는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보는 눈으로는 일부러 딴전이라도 피우는 것처럼 도로를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땅이나 하늘, 그리고 길 건너쪽의 집과 울타리 같은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관찰을 끝내더니, 이번에는 집으로 통하는 길에서 되도록 자갈과 옆의 잔디 를 골라 걸어가며 땅 위를 살펴보았다. 도중에 두 번 걸음을 멈추었는데, 한번은 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자갈이 섞인 진흙길에는 많은 경찰 관계자들의 발자국이 나있어, 그런 상태에서 무슨 단서가 잡힐지 나로서는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홈즈의 관찰력이 얼마 나 예리한가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홈즈의 눈으로는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사 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을 것이라는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관에서 우리는 수첩을 손에 든 키가 크고 흰 얼굴에 갈색 머리를 한 남자의 영 접을 받았다. 그는 집안에서 달려나오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홈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잘 오셨습니다. 모든 상황을 손대지 않고 보존해 두었습니다." 그말에 홈즈가 정원의 흙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러고도 보존을 잘 해두었다는 것입니까? 설사 물소 떼를 풀어 놨다고 해도 저 지경은 되지 않았을 꺼요! 하지만 당신도 보통 수준은 넘으니까 저 지경이 되기 전에 살펴볼 것은 살펴보셨겠지, 그레그슨 경감?" 그레그슨 경감이 말을 더듬었다. "시, 실은 집 안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 동료인 레스트레이드 경감도 와 있길 래 밖의 일은 그에게 맡겨 두었지 뭡니까." 홈즈는 흠끔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는 심술뒜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나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같은 베테랑급 두 분이 진두 지휘를 한다면 다른 사람은 별로 얻는게 없겠는걸요." 그레그슨은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두 손을 비비며 자랑하듯 말했다.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진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상당히 이상 한 사건이라 홈즈씨의 취향에도 맞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홈즈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경감은 영업용 마차를 타고 이 곳에 왔소?" "아뇨."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방 안을 구경해 봅시다." 홈즈는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며, 경감은 홈즈가 왜 마 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먼지가 쌓인 판자로 된 복도가 곧장 부엌과 세탁실 쪽으로 뻗어 있었다. 복도의 좌우로 한 개끽 문이 있고 그 중하나는 여러 주 동안 닫혀진 채로 있었던 것 같 았다. 다른 하나는 식당으로 통해 있었는데, 그곳이 이번에 일어난 불가사의한 사건의 현장이었다. 홈즈가 먼저 들어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그 곳은 크고 네모진 방인데, 가구가 하나도 없어 더욱 넓어 보였다. 벽에는 싸 구려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곰팡이가 슬어 얼룩진 곳이 있는가 하면, 군데 군데 벽지가 벗겨져 누런 흙벽이 보이고 있었다. 문의 반대쪽 벽에는 흰 인조 대리석으로 된 벽난로가 있고, 그 모서리 위에는 타 다 만 붉은 양초가 서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유리창은 먼지가 뽀얗게 끼어. 창 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마저 희미한 것이 모두가 회색으로 침침해 보였고, 그 침 침한 느낌은 방안에 가득한 먼지로 더욱 심한 것 같았다. 그러한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가서야 내가 관찰한 것이고, 방안에 들어선 순간에 는 바닥에 누워 퀭한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시체에 정신이 팔렸던 것이 사실이다. 시체는 43-44세 가량에 어깨가 넓은 중키의 보통 체격으로 심한 고수머리에 턱에 는 짧은 턱수염이 나 있었다. 복장은 고급 양복지로 재단한 검은 윗도리에 조끼 까지 받쳐 입었고, 바지는 엷은 밤색, 와이셔츠는 그 소매와 깃이 때묻지 않은 새 것이었다. 그리고 곁에는 손질이 잘 도니 실크 헤트가 뒹굴고 있었다. 손을 움켜쥐고 팔을 길게 뻗었으며 발은 꼬여 있고, 죽음의 고통이 심했던 것 같 았다. 굳어진 얼굴에는 두려움과 증오의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 무섭게 일그러 진 얼굴은 이마가 좁고 콧등이 낮으며, 턱이 비어져 나온 모습에다, 몸을 구부린 부자연스러운 자세 탓으로, 원숭이와 아주 닮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때까 지 여러 시체를 보아 왔지만 그 시체만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시체는 청므 이었다. 그때 여전히 깡마르고 족제비 같은 인상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입구 쪽에 나타 나 홈즈와 나에게 아는체를 했다. "이번 사건은 꽤 떠들썩할 것 같습니다. 나도 경찰 밥을 먹을 만큼 먹었지만, 이 런 사건은 처음입니다." 그레그슨 경감이 말했다. "전혀 단서를 못 잡겠는걸."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맛장구를 쳤다. "응, 전혀." 홈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상처는 없습디까?" 홈즈가 사방에 튄 핏자국을 살피며 묻자 두 경감이 동시에 대답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피는 범인의 것이겠군. 하기야 타살이라고 가정해서 말입니다. 그 러고 보니 1834년에 유트레히트에서 있었던 반 얀센 살해 사건이 생각나는데, 그레그슨 경감은 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아뇨." "그럼 공부를 겸해서 사건 기록을 읽어 보시지요. 참고가 될 겁니다. 대개의 범 죄는 비슷비슷한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홈즈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쉬지않고 시체를 만져 보고, 눌러보고, 단추를 풀거 나 검진을 해보는 등 민첩하게 손가락을 놀렸다. 눈에서는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 린 표정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동작은 지나치게 빨라, 신중을 기한다는 느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홈즈는 마지막으로 시체의 입언저리를 냄새 맡아 보고는, 에 나멜 가죽 구두 밑창을 살피고 나서 물었다. "시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나요?" "우리가 조사하는데 필요한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시체는 운반해 가시오. 이제 더 살펴볼 것도 없으니." 그레그슨 경감은 들것을 준비해 놓았던 모양인지 부하에게 시켜 거기에 시체를 올려놓고 운반토록 했다. 그런데 시체를 들어올렸을때 반지 한 개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레스트레이드가 그것을 주워들고,이상하다는듯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여자 것이로군. 여자의 결혼 반지가 틀림없는걸." 그리고는 반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밀어 보였다. 우리는 레스트레이드를 둘러 싸고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장식이 없는 금 금반지는 결혼 반지가 분명했다. 그래그슨이 말했다. "사건은 더욱 얽히고 설키는군. 그러잖아도 복잡했는데...." 그 말을 홈즈가 받았다. "그 덕분에 오히려 사건이 간단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살펴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소. 그보다도 주머니에는 어 떤 것이 들어 있었지요?" 그레그슨 경감이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여 늘어놓은 창가로 걸어가 설명을 시 작했다. "이게 전부입니다. 런던의 바로드 회사 제품의 일련 번호 97163의 금시계 하나, 시계에 매달린 사슬, 이것은 무게가 나가는 순금입니다. 그리고 불독의 머리 장 식이 달리고, 그 눈에 루비를 박은 금으로 된 넥타이 핀, 러시아제 가죽 지갑, 지갑 속에는 '미국 클리불랜드시 이녹 드리버.' 라고 인쇄된 명함 몇 장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셔츠에 수놓인 E.D 라는 이름의 머릿글자와 일치합니다. 돈지갑 은 보이지 않고 푼돈으로 7파운드 13실링. 그 밖에 문고판 소설 한권, 첫장에 조셉 스탠거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가 두 통, 한 통은 받 을 사람이 드리버로 되어 있고, 다른 한 통은 스탠거슨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소는?" "런던 스트랜드 가의 아메리카 환전소 유치로 되어있습니다. 둘다 과이언 회사에 서 보낸 것으로, 내용은 리버풀에서 출항하는 기선의 항해 예정을 알려온 것입 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 피살자는 뉴욕으로 돌아갈 참이었나 봅니다." "그 스탠거슨이란 사람에 대해서 뭔가 조사해 봤습니까?" 그레그슨이 대답했다. "곧 손을 썼습니다. 신문에 광고를 내게 했고, 환전소에도 부하를 보냈습니다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미국 클리블랜드 시에는 조회를 했나요?" "오늘 아침에 전보를 쳤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이 번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무엇이든 참고될 만한 사항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 습니다." "단서가 될 것 같은 사항을 지적해서 조회는 하지 않았습니까?" "스탠거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그밖에 이 사건의 핵심을 찌를 만한 사항은 없을까요? 다시 한 번 전보를 쳐보면 어떨까요?" "필요한 것은 모두 조회했소." 그레그슨이 내지르듯이 말했다. 못마땅한 눈치였다. 홈즈는 혼자 실실 웃으며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때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그레그슨 경감, 지금 극히 중대한 것을 발견했네. 내가 벽을 세심하게 살펴 보 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할 뻔 했는걸." 그의 표정에는 그레그슨보다는 자기가 한 수위라는 자만심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 다. "자, 모두들 일 와보십시오." 그가 앞장서서 사건이 일어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뒤따라 들어가 보니, 시 체를 치워서 그런지 방안이 한결 밝아진 느낌이었다. 레스트레이드는 구두 바닥 에 성냥알을 문질러 불을 켜서는 그것을 구석진 벽으로 가져갔다. "여길 보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승리감으로 아주 의젓했다. 벽지가 여기저기 벗겨져 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으나, 그곳은 벗겨진 부분이 다소 커서, 거친 흙벽이 누렇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흙 벽에 다음 과 같은 글씨가 피처럼 붉은 것으로 쓰여 있었다. RACHE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마치 곡마단의 흥행사가 손님을 끌어들일 때의 제스처를 흉 내내듯 입을 열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것은 이 구석이 가장 어두운 관계로 아무도 유심히 들여다보 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범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 으나, 하여간 범인이 자신의 피로 이 글씨를 썼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글씨마다 피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자살이라는 가정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다음에 하필이면 왜 이런 구석에 글씨를 썼느냐입 니다. 여기에 대한 본인의 추리는 이렇습니다. 벽난로 위에 초가 있지요? 그것 은 범행 당시 켜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구석은 가장 어두운 장 소가 아니라 거꾸로 이방에서 가장 밝은 곳이었던 겁니다." 레스트레이드의 장황한 설명에 그레그슨이 코방귀를 뀌듯 빈정거렸다. "흐흥, 그래. 자네가 발견한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겐가?" "의미라고? 머리가 안 돌아가는군. 이것을 쓴 범인은 레이첼(Rachel)이라는 여 자의 이름을 쓰려고 했지만 다 쓰기 전에 어떤 방해를 받은 거라네, 두고 보라 고. 이 사건의 해결을 보게 되면 반드시 레이첼이라는 여자가 떠오를테니까. 어, 홈즈씨가 웃으시는군요. 물론, 당신의 머리가 비상하다는건 잘 압니다. 그 러나 나도 이 방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홈즈는 웃음을 터뜨려 레스트레이드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사과했다. "이거 뜻하지 않은 실례를 범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이것을 발견한 것은 큰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글씨는 지금 말씀하신대로, 모든 점 으로 미루어보아 어젯밤 사건에 등장한 범인이 쓴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나 는 아직 이 방을 조사할 틈이 없었는데, 이제부터 한번 조사를 시작해 보겠습니 다."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줄자와 대형 돋보기를 꺼냈다. 그는 그 두 도구를 갖고 방안을 소리없이 걸어다니다가, 때때로 걸음을 멈추거나 무릎을 끓기도 하 면서, 한번은 배를 깔기도 琴다. 얼마나 거기에 열중해 있는지 우리가 지켜 보고 있는 것도 잊은듯,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희망에 찬 탄 성을 지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잘 훈련된 순종의 폭스테리어 종 사냥개가 코를 땅에 대고 짐승의 냄새를 추적해 나가는 광경을 연상했다. 홈즈는 내 눈으로는 별다를 것도 없는 흔적과 흔적 사이를 공들여 재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벽에 줄자를 대보는 등 약 20분을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툡빛 먼지가 바닥 한곳에 얼마간 쌓인것을 조심스럽게 모아 봉투에 넣어 간수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벽의 글씨를 하나하나 돋보기로 주의 깊게 조사했다. 그것이 끝 나자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띠고서 줄자와 돋보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천재란 얼마든지 노력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엉뚱한 말이 되겠지 만, 탐정이란 노력보다도 타고난 재능이 없이는 눈뜬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홈즈가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그레그슨과 레스트레이드 두 경감은 신기한듯 때로는 비웃듯 홈즈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홈즈가 행동할 때는 언제나 분 명하고 일정한 목표가 있어,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그 방향으로 향해 나간 다. 나로서는 그것이 조금은 납득이 갈 만했으나 두 경찰 실무자에게는 아직 그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경감이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물었다. "의견을 들려 주시지요." "내가 지금 불쑥 조언 비슷한것을 했다가는 옆에서 두 분의 공로를 가로채는 결 과가 되지 않을까요? 당신들도 그럭저럭 나름대로의 단서를 잡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선수를 치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홈즈의 말에는 알게 모르게 비꼬는 냄세가 풍겼다. 홈즈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수사의 진전도를 알려 주면 나도 기꺼이 가능한 한 협력을 아끼지 않겠 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처음에 발견한 경관을 만나보고 싶군요. 이름과 주소를 알 수 있겠습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존 랜스라는 경관입니다. 런던 케닝턴 파크의 정문 앞 오들리 코트 48번지로 가 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홈즈는 주소를 적었다. "자, 와트슨 가보세. 그 경관을 만나면 도움이 될걸세. 참, 여러분. 참고가 될 만한 것을 하나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홈즈는 두 경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범인은 남자, 키는 180cm이상의 중년입니다. 키에 비해 서 발이 작고, 앞이 네모난 가죽 장화를 신고 있으며, 인도산의 트리치노폴리라 는 싸구려 잎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범인은 네 바퀴달린 영업용 마차를 타고 피살자와 함께 이 곳에 왔습니다. 마차를 끈 말은 오른쪽 앞다리 발굽에만 새 징을 달고, 나머지 세개는 낡은 것입니다. 그리고 범인의 얼굴은 십중팔구 불그 스레한 편이며, 오른손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르고 있습니다. 극히 사소한 특징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은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레스트레이드와 그레그슨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레스트레이드가 물었다. "타살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방법으로 살해 되었습니까?" "독살입니다." 홈즈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걸어나가다가, 현관 쪽에서 뒤돌아보며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 또 한가지 말해 두겠습니다만. 'RACHE'란 독일어로 '라헤' 라고 읽으며 '복수'라는 뜻입니다. L자가 빠진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레이첼이라 는 아가씨를 찾아 헤메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 4. 홈즈의 추리 .. 우리가 로리스턴 가든 3번지의 사건 현장을 떠난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 홈즈는 나와 함께 가까운 우체국에 들러 상당히 긴 전보를 쳤다. 그리고 나서 마차를 잡 아타고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가르쳐준 오들리 코트로 가라고 행선지를 말해주었 다. 마차속에서 홈즈가 입을 열었다. "직접 증언을 들어 보는 것이 제일일세. 사실, 나로서는 대체적인 윤곽은 잡았지 만 알아둘 일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홈즈,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인걸. 조금 전에 자넨 두 경감에게 여러 가지 사항 을 설명해 주었지만 설마 그렇게 훤히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 "생각나는 대로 떠든 것은 아닐세. 내가 알아낸것은 보도에 인접해서 두 줄기 마 차 바퀴가 나 있다는 것이었네. 지난 1주일동안 계속 날이 좋았다가 어제 저녁 에야 비가 뿌리기 시작했으니 그렇게 선명한 바퀴자국은 어젯밤의 것이 틀림없 지. 말발굽의 징 자국도 남아 있었는데, 네 개 중 하나만이 유달리 뚜렷한 것으 로 보아, 그 쪽 발의 징만이 새 것이라는 걸 알았네. 그 마차가 비가 오기 시작 한 뒤에 왔다는 것은 확실하네. 그리고 아침이 되고 나서는 한 대도 그 곳에 온 마차가 없었다는 그레그슨 경감의 말로 미루어 마차는 밤 사이에 왔고, 그 마차 에 두 사람이 타고 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지." "그렇게 설명을 하니 알아듣겠군. 그런데 보지도 않은 범인의 키는 어떻게 알았 나?" "사람의 키라는 것은 십중팔구 그 남자의 걸음폭으로 산출해 낼 수가 있다네. 계 산 방법은 극히 단순하지. 이 남자의 걸음 폭은 정원의 흙길과 집안에 쌓인 먼 지 위에 찍힌 발자국으로 알아냈네. 또한 그 계산이 정확한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 사람은 벽에 글씨를 쓸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 높이 가량에 글씨를 쓰지. 그런데 그 글씨는 바닥에서 180cm가량 되는 곳에 쓰여 있 었네. 별로 어려울것이 없는 추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이는?" "아,그건 1m 반이나 쉽게 건너뛸수 있는 남자라면 우선 노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 실하지. 1m 반이라는것은 흙길에 괸 물웅덩이의 폭으로서, 그 남자가 그걸 뛰어 넘은 것은 발자국으로 알 수가 있었네. 에나멜 가죽 구두 쪽은 물웅덩이를 돌아 갔으나, 앞이 네모진 구두는 그것을 뛰어넘었더군. 이건 뭐 이상하거나 신기할 것도 없는 사실 그대로 일세. 나는 그 논문에서 관찰과 추리를 충분히 하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것을 실제에서 응용한 것뿐일세. 자네는 아직도 미심쩍은 것 이 있나?" "손톱이 길다는 것과 트리치노폴리 담배는?" "벽의 글씨는 둘째손가락에 피를 묻혀 쓴 것이었네. 돋보기로 확대해 보니, 그거 을 쓸때 흙벽을 약간 긁은 자국이 있더군. 만일 손톱을 짧게 깎은 손가락이라 면, 그런 흔적은 남을 수가 없지. 그리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재를 조사해 보았네. 그 재는 검고 비늘같은 형상의 것이었네. 그런 재가 남는것은 트리치노 폴리 잎담배를 피웠을때만 한정되지. 나는 담배재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연 구해서 논문을 쓴 적도 있네. 나로서는 영국에서 나도는 어떤 담배라도 그 재만 보고도 무슨 담배를 피웠는지 알아맞출 수가 있어. 이렇게 사소한 점이, 다른 뛰어난 탐정들이나 그레그슨, 또는 레스트레이드 경감등과 다른 점이라네." "그렇다면 얼굴이 붉은 편이라는 것은?" "아, 그건 좀 대담한 추리지만, 틀림없을 걸세.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줄 수 없겠나?" 나는 이마에 손을 댔다. "나는 현기증이 다 나는군. 생각하면 할 수록 이상한 일 투성이인걸.두 남자는 무엇 때문에 그 빈집에 갔을까? 그리고 두 사람을 태우고 간 마부는 어찌 되었 을까? 또한 어떤 방법으로 한 사나이가 상대에게 독을 마시게 했으며, 피는 누 구의 것일까? 도난당한 흔적이 없다면, 살인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의 반지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고, 범인은 도망가기 전에 왜 일부러 RACHE라는 말 을 벽에 썼을까? 그것도 독일어로 말일세.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이러한 사 실을 어떻게 연관지어 해결할 것인지 막막하구먼." 홈즈가 내 말에 손뼉이라도 칠 듯이 말했다. "자네는 사건을 간추려 요령 있게 말해 주었네. 나로서는 대충 전망이 섰다고 했 지만, 아직 분명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야. 레스트레이드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발견한 핏자국 글씨는 이 살인을 폭력 혁명 단원이나 비밀 단체의 소행으 로 생각하게 하여, 경찰의 눈을 속이려는 수단일세. 그건 독일인이 쓴 글씨가 아니야. 자네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그 A자는 독일식 활자체로 쓰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진짜 독일인이라면 반드시 라틴 활자체를 쓸 걸세. 따라서 그것은 독일인이 쓴 것처럼 위장한 거지. 즉, 수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책략일세. 어쨌거나 설명은 이정도로 끝내세. 와트슨, 알다시피 마술사는 자기 의 트릭을 전부 공개 했다가는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거든. 내 수사 방법도 지나치게 알려 주었다가는, '그저 그런 사람에 불과하군.'하고 신비로움이 없어 질 게 아닌가!" "아니, 나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세. 자네의 탐정 수사는 극히 과학적이라 는 것을 잘 아니까." 홈즈는 이 말을 듣고 기쁜듯이 얼굴을 붉혔다. "알아줘서 고맙네. 한가지만 더 알려 주지. 에나멜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와 끝 이 네모진 구두를 신은 남자는 같은 마차를 타고 와서, 사이좋게 마당을 걸어 들어갔네. 아마 팔짱이라도 낄 정도였을 걸세. 그러나 집 안에 들어가자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네. 정확히 말하면, 에나멜 구두를 신은 피살자는 끝이 네모진 구두를 신은 범인이 방안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한곳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지. 이런 일은 모두 바닥의 먼지에 찍힌 발 자국이 말해 주고 있지. 한편, 발자국으로 보아 네모진 구두의 사나이가 차차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네. 걸음 폭이 점점 넓어졌다는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어. 그는 서성거리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대다가, 마침내는 언성이 높아 지고 울컥 흥분이 극도에 달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네. 이상으로, 지금까지 안 사실은 모두 자네에게 이야기한 셈이고, 나머지는 추측 에 지나지 않네. 조사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단서는 그런대로 갖추어진 걸세. 그런데 나는 오늘 명 바이올리니스트 넬다 여사의 독주를 들으러 갈 생각이니 까. 서둘러 일을 끝내야겠어." 우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마차는 계속 지저분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는데, 유별나게 더러운 골목이 보이는 곳에서 마부가 마차르르 세우고는, 벽 돌집 사이로 뚫린 골목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이 오들리 코트입니다. 마차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돌을 깐 네모진 공간이 있고 그 주변에 허름한 집들 이 추녀를 낮대고 늘어서 있었다. 그 중의 한 집에 46번지라는 숫자와 랜스라는 구리 문패가 걸려 있었다. 문간에 나와 있던 랜스의 부인으로 짐작되는 여자에게 "랜스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남편은 자고 있으니 잠시 기다리셔야 되겠어요." 잠시 뒤, 단잠을 설치게 해서 그런지 부루퉁한 표정의 남자가 나타났다. 랜스일 것이다. "그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이미 서에 보고 했는데요." 홈즈는 주머니에서 10실링짜리 금화를 하나 꺼내더니 무심한 척 탁자위에 올려 놓고는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고서보다는 직접 현장을 목격한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그 만둘까요?" "아니, 알고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말씀드리지요." 랜스 경관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선 당신이 본 대로만 이야기하십시오." 랜스는 금화에 구미가 당긴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요. 내 근무시간은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였습니다. 밤 11시경 화이트 하트 술집에서 한바탕 싸움질이 있었뿐 순찰 구역에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밤 1시경에 비가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아마도 2시가 지 났을 겁니다만, 다시 한 바퀴 돌고 브릭스턴 로 쪽에는 이상이 없을까 해서 그 리로 갔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꽤나 으스스한 밤이었지요. 도중에서 마 차를 두 대 만났을뿐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거 우리들 끼리의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밤에는 뜨겁게 데운 진을 서너 잔 마시면, 몸이 풀리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니, 바로 그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눈에 띄더군 요. 글너데 로리스턴 로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장티푸스로 죽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 지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현관까지 갔는데...." 홈즈가 끼어들었다. "현관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왔지요..왜 그랬나요, 그때?" 랜스는 움찔 놀라면서 홈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되돌아 나왔지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실은, 현관까지 가보니 쥐죽은 듯 집 안이 조용해서 기분이 나빴던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 함께 들어가 볼 사람을 찾 으러 길가로 다시 나왔던 거지요.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어떤 자든 겁날게 없지 만,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면 상대가 곤란하거든요." "그래, 길에는 아무도 없습디까?" "사람은 커녕 강아지 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수없이 나는 다시 현관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인기척은 없더군요. 그래서 불빛이 보이는 방으 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습니다. 벽난로 모서리 위에 놓인 촛불이 흔들리고 바 닥에...." "그만, 당신이 본 것은 우리도 보았습니다. 당신은 방 안으로 급히 걸어 들어가 시체 옆에 가서 살펴보고는, 방에서 나와 부엌쪽의 문이 열리는지 밀어 보았습 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어디에 숨어 모두 지켜보고 이러는군! 그렇지 않으면....." 홈즈는 웃으면서 랜스에게 명함을 던져 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나는 사냥개이지 늑 대가 아닙니다. 그 점은 레스트레이드나 그레그슨 경감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래, 그 다음엔 어떻게 했지요?" 랜스는 다시 의사제 주저앉았지만,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호루라기를 불었습니다. 그러자 곧 두 명의 동료가 달려왔 지요." "그때에도 길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까?" "예, 아무도....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랜스 경관이 싱긋 웃었다. "나도 지금껏 몇 번이고 술에 취해 보았습니다만, 그렇게 곯아떨어진 주정뱅이는 처음 봤습니다. 내가 호루라기를 불러 나갔을 때, 그 자는 나무 울타리에 기대 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흐느적거리는 품이, 도저히 도움을 청할 만할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던가요?" 랜스는 별 쓸데없는 것도 다 물어본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여간 형편없는 주정뱅이였다니까요. 그 때 그런 일만 없었다면 유치장에 처박 았을 겁니다." 홈즈가 갑갑하다는듯이 다시 한번 질문을 했다. "얼굴이나 복장은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야 안 볼 수 없었지요. 달려온 동료와 함께 안아 일으켜 주었으니까요.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은 붉은 편인데. 얼굴 아래쪽은 천으로 가려져...." 홈즈가 외쳤다. "됐소! 그래 그 남자는 어찌했습니까?" 랜스는 내뱉듯 말했습니다. "그 판국에 그런 사람을 돌볼 겨를이 있습니까? 없어진 걸 보면 집으로 돌아갔겠 지요." "복장은?"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손에 마부용 채찍을 들고 있었을 텐데?" "채찍? 아뇨." 홈즈가 중얼거렸다. "그럼 놓고 왔군. 그 뒤에 마차를 보았다든가, 마차가 굴러가는 소린 못 들었나 요?" "보지도 듣지도 못 했습니다." 홈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모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이 금화는 술값이나 하시오. 그런데, 랜스 씨, 유감스럽지만 당신은 경찰에서 출세할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 머리는 장식물이 아닌 이상 써먹어야 할 게 아닙 니까? 당신은 간밤에 형사부장이 될 뻔 했습니다. 당신이 안아 일으킨 그 남자 야말로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이고 우리가 찾는 인물입니다. 그래, 그 남자한테 서 술 냄세가 납디까? 와트슨, 우리는 가 보세." 우리는 눈만 끔벅이고 있는 랜스 경관을 남겨 둔채,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마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향하면서 홈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바보 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좋은 기회를 만나고도 범인을 놓아 보내다니..." "나로서는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네. 그 인물에 대해서 랜스가 이야기한 바로는 자네가 말한 두 번째 남자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일단 도망 갔으면 그만이지 왜 일부러 돌아왔을까?" "반지라네. 그 남자는 반지 때문에 돌아온 것이 분명하네. 그 남자는 달리 붙잡 지 못한다고 해도 반지로 낚을 수는 있을것 같네. 아니, 이 번일은 자네에게 감 사를 해야겠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네. 그리고 지금까지의 그 어느 것보다도 흥미진진한 연구를 할 기회를 놓쳤을 거야. 그래, 이번 사건을 '주홍색 연구'라고 부르기로 할까 하네. 인생이라는 무색의 실패에 는 살인이라는 주홍색 실이 감겨져 있네. 우리의 일은 그것을 풀어 헤치고 가려 내어 한 올도 남김없이 드러내보이는 작업이라네. 와트슨. 자, 그럼 가볍게 식사를 하고 넬다 여사의 연주회나 들어가 갈까? 그녀의 연주 는 기가 막히지." 홈즈는 마차의 등받이에 기대어 종달새처럼 기분을 바꿨으나, 나는 이사건에 대 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 5. 광고를 보고 온 손님 .. 나는 몸이 허약한 데다 오전 내내 돌아다니 탓으로, 오후가 되어서는 피로를 느 꼈다. 그래서 홈즈가 연주회에 가고 나서 소파에 몸을 눕히고는 두어 시간 가량 잠을 자기로 했지만, 여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로 신경이 곤두섰거니와, 요상한 공상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살해된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남자가 독살되었다는 홈즈의 추리는 의당한 것으로 생각되었 다. 홈즈가 시체의 입 언저리의 냄세를 맡은 것도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였을 것이다. 더구나 시체엔 상처도 목이 졸린 흔적도 없으므로, 독살이 아니고 는 달리 죽은 원인을 생각해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독살이라면 바닥에 흘러 있던 그 많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현장에는 싸 움을 한 흔적도 없었고, 죽은자가 상대방을 해쳤다고 생각되는 흉기도 보이지 않 았다. 이러한 여러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나는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 나 홈즈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홈즈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실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지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홈즈는 늦게야 돌아왔다. 그렇게 늦은 것으로 보아, 그냥 연주회에만 다녀온 것 은 아닌 것 같았다. 홈즈는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말했다. "연주회는 굉장했다네. 그런데 자네 무엇 때문에 그러나? 안색이 나쁜걸. 그 살 인 사건으로 충격이 커서 그러는가?" "사실은 그렇다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험한 꼴을 많이 보아온 터라, 웬만한 일에는 마음이 동하는 일이 없는데 말야. 저 마이완드의 전투에서는 전우가 갈 기갈기 찢겨져 죽는 것을 보기도 대범했는데.." "이해가 가네. 이 사건에는륚 생각할수록 섬뜸한 점이 있지. 그런데 석간 신문은 보았나?" "아니. 왜??" "사건에 관해서 상당히 자세한 기사가 나와 있더군. 단, 시체를 들어올렸을 적에 여자의 결혼 반지가 굴러떨어진 이야기는 빠져 있더군. 천만다행이야." "그건 또 왜 그런가?" "광고를 보게나. 내가 연주회에 가면서 부탁한 광고라네." 홈즈가 신문을 건네주며 지적한 '분실물'란을 보니 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광 고가 나 있었다. 오늘 아침 브릭스턴 로 화이트 하트 주점과 홀랜드 그로브 사이의 길위에서 금으로 된 결혼 반지를 주웠음. 오늘 밤 8시에서 9시사이에 베이커가 221번지 B호 와트슨에게 연락바람.. "자네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한걸 용서하게. 하지만 내 이름을 썼다가는 경찰이 냄세를 맡고 쓸데없는 개입을 할 지도 몰라서....." "아니, 상관없네. 하지만 누가 금반지를 찾으러 오면 어쩐다?" 홈즈가 금반지를 하나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걱정할 것 없네. 이걸로 대용하면 되니까. 모양이 같은것을 고르느라고 애먹었 다네." "그래, 자네는 어떤 사람이 광고를 보고 올 것이라고 예상하나?" "물론, 갈색의 코트를 입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앞이 네모진 구두를 신은 그 남 자가 오겠지. 만일 본인이 오지 않으면 공범자를 보낼 걸세." "그 쪽에서는 이 일이 혹시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럴 걱정은 없네. 내 추리가 정확하다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틀림없네만 그 남자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반드시 반지를 찾으러 올 걸세. 아마도 드리 버의 시체위에 몸을 굽혔을 적에 반지를 떨구고도 그 때는 그것을 몰랐을 걸세. 현장을 떠나서 한 참 가다가 반지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현장으로 되돌아 왔지만, 촛불을 끄지 않은 실수로 이미 경관이 와 있었고, 호루라기 소리에 경 관들과 맞부딪치게 되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술주정뱅이로 가장했던 걸세. 여기에서 한 번 그 남자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게. 그로서는, 혹시 그 반지 를 급히 현장에서 나와 도망치다가 길가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게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문광고의 분실물란도 살펴볼지도 모 를 일일세.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 광고가 눈에 띄겠지. 크게 기뻐할 걸세. 덫 이라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어디 있겠나? 길에서 반지를 주운 거라면, 살인과 연관지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반지를 찾으러 올 걸세. 한 시간 안으로 찾아올 거라고." "오면 어쩔 셈인가?" "아아, 그 조치라면 나에게 맡기게. 그런데 자네는 무기를 갖고 있던가?" "군의관 시절에 지녔던 군대의 연발 권총과 탄환이 약간." "그럼 그걸 손질해서 탄환을 채워 두게. 상대는 흉폭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나 는 기습을 해서 붙잡을 셈이지만, 만반의 준비는 해 둬야지." 내가 침실로 가서 권총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까 테이블위는 말끔히 정돈되고, 홈 즈는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긴장된 투로 말했다. "사건은 중대한 고비로 접어들었네. 지금 막 미국에서 전보의 회신이 왔네. 내 판단은 틀림없었어." "그렇다면?" "차차 알게 될 걸세. 그 권총은 보이지 않게 간수하게. 그 자가 나타나더라도 태 연하게 이야기를 하게나, 뒷일은 나에게 맡기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해 서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주었다가는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내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8시가 넘었네." "이제 곧 나타날 걸세. 문을 조금 열고, 열쇠는 열쇠 구멍에 꽂아 놓아 주게. 고 맙네. 어라? 벌써 온 모양인걸..." 현관쪽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홈즈가 조용히 일어나, 자기 의자를 문쪽으로 옮겼 다. 가정부가 현관쪽으로 나가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웅얼웅얼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와트슨씨의 하숙집이 맞습니까?" 가정부가 그렇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곧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디고 끄는 듯한 발소리였다. 홈즈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고개를 꺄우뚱했다. 발소리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와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그런데 예상한 우락부락한 남자가 아니라 주름살투성이의 노파가 문을 빠끔히 열 고 들어왔다.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고는 눈을 끔벅거 리며 약간 떨리는 손으로 옷을 추스렸다. 흘끔 홈즈의 얼굴을 살피니 실망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노파는 석간 신문을 꺼내더니, 우리에게 광고란을 가리켜 보였다. "저, 신사분들. 나는 이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우. 브릭스턴 로에서 주웠다는 금 반지 말이우. 내 딸인 샐리의 것이라우. 그애는 작년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유니 온 기선에서 일하고 있지요. 돌아와서 그 반지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무슨 난리를 칠지도 모르니까요. 사위란 녀석은 성질이 거친대다가 술이라도 마시면 망나니라오. 실은 어젯밤 딸아이가 서커스 구경을 간다고 나갔다가 그만...." 나는 반지를 내보이며 물었다. "이 반지가 따님 것이 틀림없습니까?" 노파는 소리쳤다. "맞아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샐리는 살았습니다." 나는 연필을 손에 들고서 물었다. "주소라도 알려 주시지요." "하운즈디치의 던컨 로 13번지요. 이 곳에서는 꽤 멀다오." 홈즈가 날카롭게 입을 열었습니다. "하운즈디치에서 서커스단이 진을 치고 있는 템스 강변으로 가자면 브릭스턴 로 르 거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노파는 흠칫 홈즈를 노려보더니, 곧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 쪽 선생님은 내 주소를 물어보신게 아닌가요? 내 딸이야. 페컴의 메이필드 플레이스 3번지에 세들어 살고 있지요." "그럼 할머니 성함은?" "소여라고 해요. 딸은 샐리 데니스. 사위의 이름은 톰 데니스라오. 배를 타면 똑 똑하게 굴어 신용도 괜찮은 모양이지만, 육지에 올라오면 술만 퍼마신다오. 글 쎄." 나는 홈즈의 눈짓에 따라 이야기를 끝냈다. "그럼, 소여 할머니. 이 반지는 따님에게 전해 주십시오. 주인을 찾게 되어 천만 다행입니다." 할머니는 감사의 말을 입속에서 우물우물하더니 반지를 챙겨 넣고는, 한쪽 발을 절면서 방문을 나섰다. 홈즈는 방문이 닫히자 곧 자기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어느새 콧수염을 달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저 노파의 뒤를 밟겠네. 틀림없는 공범자일 테니까. 은신처를 알아내면 범인도 찾을수가 있겠지. 자지 말고 기다려 주게." 노파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홈즈가 뒤따라 나갔다. 내가 창틈으로 내다보니 노파가 길 건너 쪽으로 절룩절룩 걸어가는 것이 보이고 간격을 두고서 홈즈가 뒤를 밟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홈즈의 추리가 틀림없다면 홈즈는 지금 사건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것이 된다.' 홈즈는 나더러 자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행 결과 를 알기까지는 궁금해서 자려야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홈즈가 나간 것은 밤 9시가 다되어서였다. 얼마 뒤에야 돌아 올지 알 수 없었지 만, 나는 담배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으며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뒤적거 리며 기다렸다. 마침내 10시가 지나고, 가정부가 자기방으로 가는 문소리가 들 렸다. 곧 11시가 되고, 이번에는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침실로 가는 듯, 차분 한 발소리가 방 앞을 스치고 지나간 지도 오래 되었다. 마침내 홈즈가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그러 나 홈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미행이 실패였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홈즈는 마음속에서 쓴웃음과 분함이 한동안 뒤범벅이 되는 듯하더니. 쓴웃음 쪽 으로 마음을 돌린듯 낄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실수만은 경시청 나리들에게 숨기고 싶구먼, 그들은 노상 나에게 놀림을 받 고 있는 터라,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얼씨구나 좋아할테니 말이세. 하지만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 결국 언젠가는 범인들의 기를 꺽게 된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만은 알아주기 바라네." "어떻게 된 일인데 그러나?" "뭐, 실패담이라고 못할건 없지. 그 노파는 한 발을 절면서 자못 숨이 찬다는 듯 이 어기적 거리더군. 그러더니 때마침 지나가는 빈 마차를 세우는게 아닌가! 나 는 노파가 갈 곳을 뭐라고 대는지 들어 보기 위해, 눈치채이지 않게 조심을 하 면서 바짝 가까이 갔었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쓸 필요도 없었어. 노파는 길건 너에서도 들릴 만큰 큰소리로 '하운즈디치의 던컨 로 13번지로 가요.' 라고 외 치더군. 나는 '그렇다면 그 주소는 진짜였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노파가 마차 속으로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차의 뒤꽁무니에 달라붙었네. 마차 뒤꽁무 니에 달라붙는건 탐정이라면 누구나 익혀 두어야 할 기술이지. 마차는 곧 움직여 목적지인 던컨 로까지 쉬지 않고 달렸네. 나는 13번지에 도착 하기 전에 마차에서 뛰어내려, 행인으로 가장하고 뒤쫓아갔지. 곧 마차가 멈추 고 마부가 내리더니 출입구앞에 다가가 손님이 내리기를 기다리더군. 그러나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거였네. 내가 급히 가보니 마부가 어두운 마차안 을 들여다보며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게 아닌가. 마차안에는 노파의 그림자도 보 이지 않는 거였네. 나는 마부와 함께 13번지의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소여라는 노파의 이름은 들어본적도 없다는게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다면 그 절룩거리는 노파가 마차가 달리고 있는 동안, 마부나 자네에게 들 키지 않고 빠져나갔다는 건가?" "노파라고? 천만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우리가 노망한 늙은이 꼴이지 뭔 가. 그 노파는 젊은 남자가 변장한 것임에 틀림없어. 더구나 운동신경이 발달한 남자라서 연기도 배우를 뺨치는 자일세. 정말 그 변장하며 노파 행세는 일품이 라고 할 수밖에 없네. 그 자는 미행을 당하는 것을 알고는 마차를 이용하여 나 를 따돌린 걸세. 내가 마차뒤에 달라붙는 순간, 마차에서 내려 버렸겠지. 아마도 내가 노리는 상대는 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스스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당이 몇 명은 있는것 같아. 그런데, 와트슨 자네는 이미 피로가 겹치고 겹쳤 을것 같군. 자, 잊어버리고 잠이나 자세." 사실 나는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침실로 물러가며 뒤돌아보니 홈즈는 벽난로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낮게 바이올린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홈즈는 저렇게 밤을 새우며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 다. .. 6. 그레그슨 경감의 활약 ..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브릭스턴 로의 괴사건'이라는 제목아래 크 게 보도하고 있었다. 신문마다 사건에 대한 긴 기사가 나왔고, 개중에는 사설로 까지 다룬 신문도 있었다. 나는 신문을 이것저것 읽고서 몇 가지 새로운 일도 알 게 되었다. 나의 스크랩북에는 그때의 기사를 오려 붙인 것이 많이 남아 있기에, 그 중에서 서너개를 여기에 소개해 본다. 데일리 텔리그래프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사건만큼 수수께끼에 찬 것은 범죄 사상 드물 것만이 목적으로 보인다는 점. 벽에 피로 쓰인 글씨등으로 미루어 보아 정치상의 망명자나 혁명가에 의해 저질 러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피살자의 신원이 미국인인 것으로 보아 무수한 혁 명 단체의 지부가 있는 미국에서 피살자는 어떤 규율을 위반하고 우리 나라에 피해 왔다가 살해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영국에 건너오는 외국인에 대한 신원 파악과 감시를 강화해야 마땅할 것이다. 스탠더드지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당 정부의 무력함으로 인해서 이와같은 무법적인 학살 행위가 발생하는 것 으로 본다. 피살자는 미국의 신사로, 몇 주일전부터 런던에 와서는 캠버웰 구 토키 테라스 지역의 샤르팡티라는 부인댁에 하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셉 스탠거슨이라는 이름의 비서까지 데리고 있었다. 두 여행자는 이 달 4일 화요일에 하숙집 여주인에게 인사를 하고서 리버풀행 급 행열차를 탄다고하며 유스턴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 두 여행자의 모습을 역 플랫폼에서 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유스턴역에서 몇 Km나 떨어 진 브릭스턴 로의 그 빈집에서 드리버씨가 시체로 발견되었는지는 안개속에 싸 여 있다. 드리버씨가 왜 거기에 갔는지, 무슨 이유로 그런 불행을 당해야 했는 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 또한 비서인 스탠거슨의 행방에 대해 서도 오리무중 상태다. 그러나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 및 그레그슨 경감이 이미 이사건해결에 손을 댄 것은 다행한일로 이 유능한 두 수사관은 조만간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낼 것으로 기대된다. 데일리 뉴스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사건이 정치적 범죄사건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유럽 대 륙의 여러 나라가 혁명적인 사상을 억압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어 우리 나라에 와 있다. 이 사람들은 원래 선량한 시민이 었을 것이나, 무참하게 탄압을 받은 결과 음성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는 엄격한 규율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배반하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뤄야 한다. 따라서 피살자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비서 스탠거슨의 행방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두 사람이 묵었던 하숙집을 알아낸 것은 큰 수확으로서 수 사는 급진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것은 경시청의 그레그슨 경감의 노 련하고도 기민한 활동의 결과라고 평가하는 바이다. 홈즈와 나는 아침 식사를 들면서 이러한 기사를 읽었는데, 홈즈로서는 그러한 기 사가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 레스트레이드와 그레그슨은 사태가 어떻게 진전이 되든 득 을 보게 되어 있다고 말했지." "그러나 그것도 결과가 어떻게 매듭지어지느냐에 달렸다고 보는데?" "아니, 절대 그렇지 않네. 만일 범인이 붙잡히면 '두 수사관의 노력에 의해서'라 는 평가가 나올테고, 미욱에 빠져 버리면, '두 수사관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 하고' 라는 평가가 내려질걸세. 어찌 되었거나 두 사람은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 라네." 그때 현관을 지나 우당탕 계단을 올라오는 시끄러운 발소리가 났다. 가정부가 악 을 쓰는 소리도 들렸다. "저게 뭘까?" "하하, 나에게 직속된 베이커 가의 유격대원들이라네." 하고 홈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꽈당! 문이 열리며 거지 차림을 한 소년들 여섯명이 몰려 들어왔습니다. "차렷!" 홈즈가 군대식으로 외치자, 여섯명의 무뢰한들이 더러운 동상을 늘어놓은 듯 일 제히 줄을 섰다. 홈즈가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위긴스 한 사람만 보고를 하러 올라오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그래 위긴스 발견했나?" 소년 중 하나가 대답했다. "못했습니다. 선생님." "크게 기대한 일은 아니지만, 발견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거다. 자. 일당을 주 겠다." 홈즈는 소년들에게 1실링씩 나눠 주고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자, 해산이다. 다음에는 쓸 만한 보고를 가지고 오도록." 홈즈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소년들은 돼지 새끼를 해치듯 다투어 계단을 뛰어 내 려갔다. "저 거지 아이들은 열 두명의 경찰관 몫을 한다네. 거리의 사람들은 상대가 경찰 인것으로 눈치채면 입을 다물고 말지. 그러나 저 아이들이라면 아무데라도 갈 수 있고, 어떤 일에도 끼어들어 귀를 기울일 수 있다네. 거기에다 바늘끝처럼 예민하지. 저 아이들에게 없는 것은 유능한 지도자뿐일세." "저 아이들을 부리는 것은 이번 사건 때문인가?" "응,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이젠 시간 문제일세." 그때 홈즈가 창 밖을 내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하, 이제 새로운 뉴스를 지겹도록 들을 수 있겠는걸! 그레그슨이 희색이 가득 찬 얼굴로 나타났네. 물론, 우리를 만나려고 오는 거겠지. 보라고, 길을 건너오 고 있네.다음은 초인종을 누를 차례!"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자 그레그슨 경감이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무턱대고 홈즈의 손을 덥석 잡아 흔들었다. "어떻습니까? 마침내 내가 사건을 파헤쳐 냈습니다." 홈즈의 얼굴에 번뜩 불안한 그늘이 스쳤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단서라도 잡았다는 겁니까,경감?" "단서라니요! 그 정도가 아니라 범인을 잡았습니다." "그래요? 범인의 이름은?" 그레그슨은 통통한 손바닥을 비비며 가슴을 내밀고는, 뜸을 들이듯 헛기침을 하 고 나서, "아서 샤르팡티에. 해군 중위입니다." 하고 당당한 말투로 이름을 댔다. 홈즈는 기가 차다는듯이 쓴웃음을 짓고 나서 의자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오. 그리고 담배라도 한대 피우며 그 공로담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물을 탄 위스키도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잔해야지요. 어제와 오늘 사이에 그만한 일을 하자니 무척 피곤하군요. 물론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긴장에서 오는 피로이지요. 홈즈씨라면 그걸 알아 줄 겁니다. 서로가 정신 노동자이니까요." 홈즈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그런 눈부신 성과를 거두셨습니까, 경감?" 그레그슨은 팔걸이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담배 연기를 내 뿜더니 갑자기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듯이 허벅지를 탁 쳤다. "이거, 배꼽이 빠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레스트레이드 얼간이 친구, 제딴에는 한 가닥 한답시고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줄달음쳤지 뭡니까.. 비서인 스탠거슨 을 뒤쫓고 있는 겁니다. 그 비서라는 자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아기와 마찬가 지로 이 사건과는 관계가 있을수 없는 데도 말입니다. 아마 지금쯤은 스탠거슨 을 잡아들이고서 의기양양해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레그슨은 혼자 떠들고, 혼자 낄낄 웃었다. "그건 어찌 됐던 그렇게 중대한 단서를 어떻게 잡게 된 겁니까?" "아, 모두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와트슨씨, 당신도 이 이야기느느 비밀에 붙여 주서야 합니다. 내가 이사건에서 최초로 부딪친 문제는 살해된 그 미국인의 신 원 조사였습니다. 거기에는 신문광고를 내서 반응을 기다리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관계자가 나타나 정보를 제공할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 요. 그러나 나 그레이슨은 그런 답답한 방법은 질색입니다. 당신들은 시체 옆에 영국제 모자가 떨어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홈즈가 말을 받았다. "그건 캠버웰 로 129번가의 존 언더우드 부자 상회에서 만든 것이던군요." 그레그슨은 이 말에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당신이 거기깍지 알고 있다니 뜻밖입니다. 그 곳에은 가보았나요?" "아뇨." 그레그슨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언성을 높였다. "단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홀히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언더우 드 상회에 가서 이런 형태의 모자로 사이즈는 이러이러한 것을 3주이내에 판일 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겁니다. 주인은 장부를 조사해 보더니 곧 알아내더군요. 토키 테라스 지역의 샤르팡티에라는 하숙집에 사는 드리버씨에게 배달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걸로 피살자의 주소는 알아냈습니다." 홈즈가 칭찬을 했다. "대단하십니다." "나는 그 길로 샤르팡티에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창백한 얼굴에 근심 어린 기색이 엿보입디다. 딸도 함께 있었는데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그 아가씨도 눈가에 눈물 마른 자국이 엿보이고, 내가 말을 걸자 입술이 떨리는 거였습니다. 내가 그런걸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단서는 잡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은 홈즈씨도 이해가 갈 것입니 다만, 몸 속에 전류처럼 긴장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거였습니다. 나는 '미국 클리블랜드 시에서 온 이녹 드리버씨가 비명에 죽었다는 사건을 알고 계시 겠습니다만, 댁에 하숙했던 사람이 틀림없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샤르팡티에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입을 여는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는지, 딸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녀가 뭘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다 그쳐 물었습니다. '드리버 씨가 기차를 타려고 떠난 시간이 몇 시입니까?' 샤르팡티에 부인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듯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 대답하더군요. '저녁 8시였습니다. 비서인 스탠거슨 씨가 9시 15분발과 11시발, 두 대의 열차가 남아 있다고 하니까, 드리버 씨는 9시 15분차를 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드리버 씨를 본 마지막 이었습니까?'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부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흙빛이 되어 한참 망설이더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러나 그 태도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눈물을 거둔 딸이 각오가 섰다는 듯이 차분한 말로 그녀의 어머니를 달래 는듯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거짓말을 했다가는 다음에 난처한 입장에 빠져요.있는 그대로 이야기하 세요. 실은, 우리는 그 뒤에도 드리버씨를 만났습니다.' 그 말에 샤르팡티에 부인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외쳤습니다. '너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그러다간 네 오빠가 죽는다.' 딸의 태도는 냉정했습니다. '오빠에게도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로울 거예요. 어머니.' 내가 재촉했습니다. '맞습니다. 잘못 숨겼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그리고 우리도 조사한 바 가 있으니, 속아 넘어가지도 않을 겁니다.' '모든게 네 탓이다, 엘리스.' 어머니는 딸을 탓하며 나에게 얼굴을 돌렸습니다. '모두 말씀드리지요. 사전에 아실 것은 내가 이렇게 허둥거리는 것은 내 아들이 이 끔찍한 사건에 관계가 있을까, 그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닙니다. 아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단지, 당신들 경찰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 다. 우리 아이는 착합니다. 인격도 갖추었고, 장교라는 신분이나 평소의 소행을 봐서도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를 아이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가장 좋은 방법은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입니다..아드님에게 죄가 없다면 겁날 것이 뭐 있습니까?' '엘리스 너는 자리를 비키도록 해라.'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딸은 밖으로 나갔 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로서는 입도 뻥긋 하고 싶지 않지만, 딸아이가 털어놓았으니 할 수 없군요. 일단 말씀 드리기로 작정했으니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리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드리버씨는 대략 3주일동안 우리 집에 묵으셨습니다. 비서인 스탠거슨씨와 함께 유럽 대륙쪽을 돌고 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트렁크마다 코펜하겐의 라벨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덴마크에서 건너오셨을 겁니다. 그런데 비서인 스탠거슨 씨 는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드리버씨는 딴판이었습니다. 늘 거칠게 굴고, 하는 짓 이 야만스러웠어요. 도착한 그 날 저녁에도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늘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지 뭡니까. 그뿐이 아니라 가정부에게 집적거리기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니까 이번에는 내 딸에게 눈독을 들이더군요. 딸아이가 아직 철이 덜 들었기 망정이지, 몇 번이고 낯부끄러운 말을 걸곤 했어요. 한번은 딸아이를 껴 안아 비명을 지르게도 했고요, 보다못해 비서인 스탠거슨씨가 신사답지 못한 짓 은 삼가라고 충고할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참으셨습니까? 하숙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내보낼 수도 있는 일 이 아닙니까?' 그건 당연한 질문이었기에 샤르팡티에 부인은 얼굴이 붉어지며 답변했습니다. '매정하게 그랬어야 옳았지요. 그런데 돈에 끌린 겁니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1인 당 하루 1파운드, 즉 1주일분으로 14파운드의 선금을 받았던 겁니다. 나는 홀몸 인데다가 해군에 가있는 아들에게도 이것저것 돈이 듭니다. 그래서 그만한 돈벌 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지요. 그러나 3주가 지나자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떠나게 된 겁니다.' '음, 그래서요.' '짐을 싣고 마차가 떠나자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때마침 아들이 휴가를 얻어 집 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드리버씨에 대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 애는 욱하는 성질이 있는데다가 동생을 무척 아끼거든요. 하여간 그 분들을 떠 나 보내고서 체증이 내려간 기분으로 아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한 시간도 못 되어 초인종이 울리고 드리버씨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무슨일인지 흥분되어 있고, 술까지 취해 있었습니다. 나와 딸이 있는 부엌까지 밀고 들어와 기차를 놓쳤다는등 횡설수설하더니 딸아이 에게 자길 따라 나서라는 겁니다.옆에 내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아가씨는 이제 성인이니까, 아가씨를 말릴 수 있는 법률은 없어, 돈이야 나한테 썩어 돌아갈 만큼 있지. 자, 저기에 있는 할망구 같은 어머니에겐 신경쓰지 말고 어서 떠나자. 공주처럼 모실테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앨리스가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치자, 그 양반은 딸의 팔목을 움켜잡더니 현관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어요. 내가 비명을 질렀지요. 그 소리에 아서가 제 방에서 달려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신 이 없었어요. 현관쪽에서 우당탕 싸우는 소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시 뒤, 아서가 막대기를 들고 부엌 문간에 나타나더니 싱긋 웃으며 말하더군요. '어머니, 그 작자는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혼쭐을 내 줬으니까 요. 그 작자, 정말 우리 동네에서 떠났는지 보고 올께요.' 아서는 그 길로 모자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드 리버 씨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샤르팡티에 부인은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기며 대충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 니다. 때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되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습니다만, 부하 가 모두 속기를 해두었으니까 틀림은 없습니다." 홈즈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재미있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감?"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건대, 한 가지 점만 확인하면 만사가 풀릴 것으로 생 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핵심을 찔렀지요. '아드님은 몇 시에 들어왔습니까?' '모르겠어요.' '모르다니요?' '그 아이도 집 열쇠를 가지고 있거든요. 저 혼자 열고 들어온답니다.' '부인이 잠든 뒤였나요?' '그래요.' '몇 시쯤에 주무셨습니까?' '11시경입니다.' '그렇다면 아드님은 적어도 두시간 이상 밖에 나가 있었군요?' '그렇게 됩니다.' '네시간에서 다섯시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 '그 동안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모릅니다.' 물론 그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샤르팡티에 중위가 있는 곳을 찾아 내어 부하를 데리고 가서 체포했습니다.내가 어깨에 손을 얹자 중위는 대담하게 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를 체포하는것은 그 불한당 같은 드리버를 죽였다는 이유에서입니까?' 나는 드리버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격이지 요. 그것만으로도 혐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홈즈가 말했다. "그렇겠군요."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중위는 드리버를 뒤쫓아 나갈 때 막대기를 그대로 들고 있 었다고 합니다. 단단한 떡갈나무 막대기를 말입니다." "그래, 경감의 추리로는 그 해군 중위가 어떻게 했다고 봅니까?" "내 추리로는 샤르팡티에 중위는 브릭스턴 로까지 드리버를 뒤쫓아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두 사람은 한바탕 싸움이 붙었겠지요. 그러다가 어떻게 잘못되어 중위의 막대기가 드리버의 급소를 찔렀을 겁니다. 그래서 상처 하나 없이 죽었겠지요. 그날 밤에는 비가 왔고 더구나 그 근처는 인적이 드문 곳이 라 중위는 당황해서 시체를 그 빈 집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세 놓을 집'이라 는 푯말이 붙어 있으니까, 빈집이라는것을 금방 알수 있었겠지요. 촛불과 핏자 국, 그리고 벽에 쓴 글씨나 반지 등등, 여러가지 문제가 남습니다만 그것은 모 두 경찰의 눈을 다른데로 돌리려는 잔재주가 틀림없습니다." 홈즈는 그레그슨을 치키어 주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상당히 연구하셨군요. 그레그슨 경감. 우리는 앞으로 경감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경감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딴엔 이번 일을 멋지게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샤르팡티에 중위는 시키지도 않 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드리버를 급히 뒤쫓아가보니, 그 자는 마차를 불러 세워 서는 허둥지둥 도망가더라나요. 그래, 돌아서 오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있어,이야기를 나누며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 친구 의 주소를 물었더니 고개만 갸우뚱 할 뿐 대지를 못하더군요. 이번 사건은 처 음부터 끝까지 뻔합니다. 나는 헛물을 마시고 있을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생각하 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으니까요. 헛다리 를 짚어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어느 틈엔가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계단을 올 라와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의 자신에 찬 모습이 아니었다. 풀이 죽은 얼굴에 옷도 엉망이었다. 동료이자 라이벌인 그레그슨이 있는 곳을 보고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태도로 보아, 홈즈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것 같았다. 우 두커니 서서 모자만 만지작 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처럼 힘에 겨운 일은 처음입니다." 그말에 그레그슨이 승리의 개가라도 올리듯 비꼬아 말했다. "그런가, 레스트레이드? 그렇게도 힘에 겨운가 말일세.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비서인 스탠거슨은 찾아냈나?" 레스트레이드는 그레그슨의 얼굴을 노려보고 나서 홈즈에게 말했다. "스탠거슨은 오늘 아침 6시에 할리데이스 호텔에서 살해되었습니다." .. 7.어둠속의 빛 .. 레스트레이드가 입 밖에 낸 말은 너무나 슃밖의 일이었기에 우리 세 사람은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그슨은 그 바람에 물은 섞은 위스키 잔을 둘러엎을 정도 였다. 나는 살며시 홈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홈즈는 입술을 깨물면서 신음하듯 말했 다. "스탠거슨까지! 더더욱 복잡해 지는걸...." 그 말에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그러잖아도 복잡했는데 말입니다." 그레그슨은 따지듯 물었다. "자네, 그 얘기 확실한 건가?" "나는 스탠거슨의 방에서 곧장 이리로 오는 길이라네. 내가 시체를 최초로 발견 한 사람이야." 홈즈가 두 사람의 입씨름을 막으면서 말했다. "실은, 지금 그레그슨 경감에게서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었습니다만, 이 번에는 당신이 보고 들은 바를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레스트레이드는 의자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만, 나는 드리버 살해에는 스탠거슨이 관계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해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스탠거슨이 살해된 이상, 내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판명된 셈입니다. 어쨌거나, 그 동안 나는 스탠거슨이 범인일 것 으로 생각하고, 그 자의 행방 수사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3일 저녁 8시 반경 유스턴 역에 갔었다는 것은 하숙집 앞에서 그 들을 태운 마부를 찾아내어 규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리버는 다음 날 새벽 2시에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스탠거슨이 8시반부터 범행시간까지 무엇을 했는지, 또한 범행 뒤에 어디로 갔었는지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우선 리버풀에 전보를 쳐서 스탠거슨의 인상착의를 알려 주고, 미국행 기선에 승선하지 못하도록 조취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스턴 역 부근의 호텔이나 하숙집을 이잡듯이 뒤졌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역에서 헤어졌다면, 그 날 밤은 역 부근의 여관에 묵고 이튿날 아침 역 앞에서 만나는 것이 상례이니까요." 홈즈가 물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스탠거슨은 역 주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아침 부터 수소문하러 돌아다니다가 8시경에 리틀 조지가의 할리데이비스 호텔에 들 러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여기에 스탠거슨이라는 사람이 투숙하지 않았소?' 그러자 호텔 종업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하더군요. '아,오셧군요. 스탠거슨 씨가 기다리던 분인 모양인데, 손님은 이틀전부터 기다 렸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9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방으로 안내해 주시오.' 예고도 없이 나타나면 스탠거슨이 당황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라고 나는 생 각했습니다. 그의 방은 3층에 있었습니다. 보이는 방을 알려주고는 되돌아섰지 요. 그때 나는 섬뜩한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 생활 20년을 했지만, 등줄기가 오 싹했습니다. 문 밑으로 한 줄기 피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흘러나와, 작은 피의 연못처럼 괴어 있었던 겁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보이는 되돌아왔습니다만, 그것을 보자 넋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보이와 둘이서 몸으로 부딪쳐 박차고 들어갔습 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창문이 열려 있고, 창 밑에 잠옷 차림의 남자가 몸을 구부리고 쓰러져 있는것이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지고 손발이 굳어 있었습니 다. 죽은지 몇 시간이 지난 상태였지요. 얼굴을 돌려 보이에게 확인시키자, 투 숙한 스탠거슨이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장을 꿰뚫은 깊은 상처가 있고, 그것 이 치명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체에는 무서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등을 타고 차가운 전율이 흐르는것을 느꼈다. 홈즈 가 말琴다. "피로 RACHE라고 써놓았겠지." 레스트레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네 사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 범인이 하는 일은 만사가 섬뜩해서, 이 범죄 가 유난히 음산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전쟁터에서도 많은 피를 보았지만, 이 번 사건은 생각하면 할 수록 오싹오싹 소름이 끼쳤다. 레스트레이드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본 사람이 있답니다. 우유 배달을 하는 청년인데, 그는 호텔 뒷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늘 그곳에 가로놓여 있던 사다리가 3층에 걸려있고, 창문이 열려 있더랍니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다가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사다리를 내려왔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휘파람을 불 며 너무나도 태연해서 집 수리라도 맡은 청부업자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불그스레했으나, 이상한 점은 사다리를 오르내리기에는 불편한 갈 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범인은 살인을 한 뒤 한동안 현장 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인지, 손을 씻은 듯 세면기에 피가 섞인 물이 괴어 있었 으며, 칼의 피를 닦은 시트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범인의 인상착의가 홈즈가 예상한 범인의 것과 일치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홈 즈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은 없었다. 홈즈가 물었다. "방안에는 범인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던가요?" "별로, 스탠거슨의 주머니에는 드리버의 지갑이 들어있었습니다. 스탠거슨은 늘 드리버를 대신해서 돈을 지불했기에 이상할건 없습니다. 지갑 속에는 80파운드 의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만, 도둑 맞은 흔적은 없습니다. 이로써 두 번에 걸친 살인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돈이 목적이 아닌것만은 확실합 니다. 그리고 스탠거슨의 주머니속에서 나온 것으로는 한달전에 미국 동부의 클 리블랜드시에서 발신한 전보가 한 통 있었을 뿐입니다. 전문의 내용은 ' J. H. 는 유럽에 있음.' 입니다. 발신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 밖에 다른것은?" "이렇다 할 점은 없습니다. 스탠거슨이 잠들기 전에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설 책이 머리맡에 놓여 있고 의자위에는 파이프 하나, 그리고 타자기 위에는 물이 반쯤 남은 컵, 창틀위에는 환약이 둘 들어 있는 작은 상자가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홈즈가 탄성을 지르며 의장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제 최후의 단서가 잡혔다. 이제 사건은 해결뻍다.!" 두 경감은 갑작스러운 홈즈의 외침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홈즈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무척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으나, 마침내 그 실마리가 풀렸나 봅니다. 물론, 자세한 점은 이제부터의 조사로 보완해 나가야겠지만, 드리버가 역에서 비서 스 탠거슨과 헤어져 스탠거슨이 시체가 되어 발견되기까지의 대체적인 사실이 눈앞 에서 보듯 선명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그 증거를 한 번 보여 드릴까요? 그러면 레스트레이드 경감, 그 환약을 갖고 왔습니까?" 레스트레이드가 작은 상자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갖고 왔습니다. 지갑과 전보 등을 본서에 보관시킬 때에 묻어온 거나 다름없습 니다. 이런 건 별로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데...." "그걸 이리 주시오." 홈즈가 환약을 받아들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가 와트슨, 이거 보통 환약같은가?" 진주빛을 띤 작은 환약으로, 창문에 비쳐 보니 투명했다. "가볍고 투명한 것으로 보아 물에 녹겠는걸." "그럴걸세. 그런데 주인집 테리어종 개가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 하는걸 보지 못 하겠으니 어떻게든 평안히 숨을 거두게 할 수 없겠냐고 아주머니가 자네에게 상 의하는 걸 들었네만, 그 개를 데리고 와 주겠나?" 나는 곧 아래층에 내려가 개를 안고 올라왔다. 숨소리가 거칠고, 눈빛이 흐린 것 으로 보아 죽을때가 임박한 것 같았다. 홈즈는 주머니칼을 꺼내면 말했다. "그럼 이 환약 한 알을 반으로 쪼개겠습니다. 반쪽은 다음을 위해 보관하기로 하 고, 자 이 알약 반쪽을 컵 속의 물에 타 봅시다. 보십시오. 와트슨 박사의 예상 대로 곧 녹았습니다." 홈즈의 약장사 같은 먰두리에 레스트레이드는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 는지 볼멘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것이 스탠거슨이 칼에 찔려 죽은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아, 너무 조급하게 다그치지 마십시오. 관계가 깊다는것을 곧 알게 됩니다. 자, 테리어 개가 먹기 좋게 우유를 약간 타서, 이것을 접시에 담아 개에게 주면 잘 먹을 겁니다." 홈즈는 이렇게 말하며 접시를 개의 코끝에 놓았다. 테리어는 그것을 깨끗이 핥아 서 먹었다. 우리는 홈즈의 진지한 태도에 이끌려, 무엇인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 날 것을 기대하면 뚫어지게 개를 지켜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개는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고, 빛을 잃은 눈으 로 우리를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약을 먹은 결과가 개의 병에 나쁘지도 좋 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홈즈는 시계를 꺼내 들고 지켜 보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손가락 끝으로 테일블올 톡톡 소리내여 두드리는 모 습이 자못 초조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그러한 심정에 동정이 갔으나, 두 경감 은 홈즈가 난처한 입장에 빠진것이 고소했던 모양인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침내 홈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이럴수는 없는 일입니다. 드리버가 살해되었을때 나는 그 주변에 독약이 있을 것으로 단정했는데 바로 그것이 스탠거슨의 시체 옆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약에는 독이 없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추리가 엉뚱했던 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개는 멀쩡하다? 아, 알았다! 이제알았다!" 홈즈는 탄성을 지르며 다른 하나의 환약을 집어들더니 먼젓번 처럼 반으로 잘라, 그 한쪽을 몰에 녹이고 우유를 타서 테리어 코끝에 놓았다. 그것이 테리어의 최후였다. 불쌍한 개는 액체를 한 번 혀로 핥는 순간, 네 발을 격렬하게 버둥거리면서 마 치 감전이나 된 듯이 몸을 죽 뻗고 죽어 버렸다. 홈즈는 크게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내 추리에 좀더 자신을 가져야 했습니다. 어느 하나의 사실이 추리한 바에 어긋나 보일때는, 반드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상자속에 환약이 두개 있었는데 하나에는 독이 없지만, 다른 하나에는 맹독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두 개의 환약을 보았을때에 그 정도는 판단했어야 하는데, 이건 내 큰 실수입니다." 나는 홈즈의 그런 추리가 어떻게 해서 가능했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발 밑에 놓 인 테리어의 시체를 보고는 홈즈의 추리가 정확한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나는 머릿속에 꽉 찬 안개가 한 가닥씩 걷히며, 희미하게나마 사건의 진상을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홈즈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아직 짐작이 가지 않는 모양이나 처음 수사가 시작되면서 정확한 단서 가 꼭 하나 있었는데 당신들은 그 중요성을 지나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다 행히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그 뒤에 일어난 새로운 사태에서 나는 최초의 추리 가 옳았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극히 평범한 범죄가 오히려 해결하기 어려운 겁니 다. 까닭인즉, 그런 범죄에는 추리의 실마리가 될 만한 특이하고 유별난 점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 번의 살인에서도 이만큼 유별나고 눈에 두드러진 요소가 없었더라면 해결은 더욱 어려워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색다른 점 이 있었기에 해결이 어려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쉬워 졌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레그슨 경감은 홈즈의 강의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더니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압니다. 알아요. 홈즈 씨의 머리가 비상하고 독특한 수법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이론이나 설교가 아닙니 다. 범인을 붙잡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판단해 봤지만, 그건 아무 래도 틀린 일 같습니다. 이론만 갖고는 범인을 체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서 슬쩍, 저기에서 조금, 의미가 있음직한 말을 비치는 것 으로 보아 우리보다 조금은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몸 달게 했으니 이제 다 털어놓으실 만하잖습니까? 그래, 홈즈씨는 도대체 이사건 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까? 범인의 이름이라도 댈 수 있습니까?" 레스트레이드도 거들었다. "그레그슨 경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기 노력했지만, 결국은 실 패했습니다 아까부터 듣고 있자니, 당신은 필요한 증거를 모두 손에 넣은 투로 이야기했습니다만, 감질나게 하지 마시고 속 시원히 밝혀 주시지요."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범인 체포가 지연되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홈즈는 모두에게 공박을 받다시피 하면서도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 에 몰두해 있을때의 버릇대로, 고개를 떨구고 양미간을 찌푸린 채 방안을 오락가 락 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레그슨 경감 범인의 이름을 댈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는데 나는 그 이름을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수고에 비하면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쉬 운 일이지요. 하기야, 체포하는 일도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럴 수 있도록 손을 써두었고, 예정대로 잘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범인은 대단히 교활하고 위험한 자이며, 또한 민 첩하기 짝이 없는 일당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남자가 아무에게도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체포할 수 있는 기회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불안을 느끼면 이름을 바꾸고, 그 즉시 이 대도시의 400만 시민 속으로 섞여 들고 맙니다. 당신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 지만, 이번의 범인은 경찰의 손으로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당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의 하나 실패하면, 그 책임 은 내가 져야 하겠지만,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취한 작전 을 당시들에게 털어놓아도 무방할 단계가 되면, 그때 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레그슨과 레스트레이드 두 경감은 경찰이 무시당한데 대해서 화가 난 모양이었 다. 그레그슨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고 레스트레이드는 눈을 부라렸다. 그러 나 그들의 감정이 폭발하기에 앞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리의 부랑아 들의 대표인 위긴스 소년이 그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냈다. "선생님, 마차를 밖에 데리고 왔습니다." 홈즈의 눈이 빛났다. "수고했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왜 이런 신식 수갑을 쓰지 않지요? 이 용수철이 얼마나 예민하지 보십시오. 이렇게 순간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서랍에서 꺼낸 강철제 수갑을 움직여 보였다. 레스트레이드가 씹어 뱉듯 말했다. "수갑을 채울 놈만 있다면, 우리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홈즈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짐을 싸는 일을 마부에게 거들어 달라고 해야겠는데... 위긴 스 너 가서 마부를 이리로 데리고 오도록 해라." 나는 홈즈가 이사를 가거나 여행을 간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없으므로 그의 갑작 스러운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에는 큼직한 여행 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홈즈는 그것을 끌어내더니 혁대를 걸기 시작했다. 때마침 마부가 들어왔다. 홈즈는 무릎으로 가방을 누르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 다. "마부, 수고스럽겠지만 혁대의 장식을 채워 주시려오?" 마부는 무뚝뚝한 얼굴로 가까이 가서 일을 도우려고 양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나고, 홈즈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태연히 말했다. "여러분, 드리버와 스탠거슨을 살해한 범인. 제퍼슨 호퍼씨를 소개합니다." 모든일은 순각적이었다. 나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분간할 수도 없었다. 마부는 마치 마법에 의해 손목에 걸린 것과도 같은 수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 때의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 - 2 초 동안 우리는 조각된 군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수염이 무성하고 거친 마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는 홈즈의 손을 뿌리치더니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유리창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그러나 마부가 창틀에 발을 올려놓기도 전에 그레그슨, 레스트레이드 그리고 홈 즈가 마부를 덮쳤다. 마부는 방 안쪽으로 끌려오면 몸부림을 쳤다. 그의 황소같은 힘에 그들 네 사람 은 몇 번이고 나뒹굴었다. 마부의 얼굴과 손에서는 유리 파편에 찢겨 피가 흐르 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그러나 무술에 능한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등뒤에서 손을 걸어 목을 죄었다. 그는 이제 단념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팔다리를 묶어 꼼짝도 못하게 할 때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포박이 끝나고 우리가 제정신을 차렸을때 홈즈가 홀가분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자, 여러분 이걸로 이 사건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야기하라면 기꺼이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남자가 끌고 온 마차가 있으니까 그걸로 경시청까지 호송해 갈 수 있을 겁니다. .. 다음편부터는 잠시 화제를 바꾸어 이 불가사의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옛날의 일을 기술하기로 하겠다. 제 2 장 그 옛날에 있었던 일.. .. 8. 북아메리카 사막에서 .. 이야기는 이 피비린내 나느 사건으로부터 30년 가량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넓기만 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중앙부에는 황량하게 메마른 무서운 사막이 있다. 끝날 데를 알 수 없는 모래 바다는 겨울에는 흰 눈으로 빛나고, 여름에는 소금기 를 머금은 모래 먼지에 뒤덮여 툡빛이 된다. 이 황폐한 땅에는 사는 사람도 없다. 코요테가 바위 그늘에 몸을 숨기고 대머리 독수리 콘도르가 소리도 없이 하늘을 맴돌고, 회색곰은 어두운 골짜기를 어슬렁 거리며 먹이를 찾는다. 이 황량한 천지에 사는 것이라고는 그 정도가 고작이다. 특히 시에라 블랑코 산맥 북쪽의 사면에서 바라보는 풍경만큼 황막한 것은 없다. 눈이 닿는 곳은 모두 알칼리 성분의 모래로 덮인 평원이 이어져 있고, 그 군데군 데에 선인장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멀리 지평선 끝으로 눈을 머리에 인 험준한 산봉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 있다. 드넓은 그 쪽으론 짐승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칼날처럼 시퍼런 하늘에는 새 도 보이지 않고, 거무튀튀한 땅 위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귀기울여 들으려 해도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시에라 블랑코 산에서 굽어보면 한 줄기 길이 사막을 가로질러 끔틀꿈틀 지평선 저쪽으로 이어 닿아 있다. 그것은 마차 바퀴에 패이고, 모험가들의 발로 다져진 길이다. 길가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흰것이 점점이 흩어져 널려 있다. 가까이 가보면 그것이 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크고 우람한 무더기가 있는가 하 면 작고 갸날픈 무더기도 있다. 이 고난의 길은 모래 언덕을 넘고 자갈밭을 가로 질러 240km나 이어져 있는 것이다. 1847년 5월 4일. 한 나그네가 거기에 서서 이 황폐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그네의 얼굴은 이 평원을 지배하는 신이나 마왕의 얼굴로 착각될 정도였다. 나이는 40이나 되었는지, 아니면 60이 가까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양볼이 움푹 패일 정도로 살이 빠지고, 살갗은 양피지를 바른것 같다. 긴 갈색 머리칼이나 턱수염에는 새치가 섞이고, 움푹 패인 눈에는 이 세상의 것 으로느느 생각할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장총을 쥐고 있는 팔도 나무 토막 처럼 마르고 물기가 없다. 총자루를 지팡이 삼아 서 있었는데 그러대로 키가 크고 어깨뼈가 듬직한 것으로 보아 건장한 체격을 타고난 사람 같다. 그런데도 지칠대로 지친 얼굴에 살이 빠 져, 옷이 헐렁하고 그처럼 늙어 보이는 이유도 분명했다. 굶주리고 목이 타, 이 제 죽음이 가까운 것이다. 그 남자는 어디선가 물이 없을까 허망한 희망을 안고, 바위 골짜기를 기어올라 여기 산마루에 선 것이다. 그러나 눈 아래에는 끝도 없는 모래의 평원이 펼쳐지 고, 멀리엔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을 뿐, 물이 있는 곳을 알려 줄 푸 른 초목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 벌거벗은 바위 위에서 죽음을 기다 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서 죽는다 해도 안 될 이유는 없지. 20년 뒤 닭털 이부자리 속에서 죽는 거와 뭐가 달라." 그 남자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장총과 어깨에 메었던 자루를 땅에 놓았다. 그 색바랜 천으로 된 자루는 힘없이 내려놓는 바람에 땅에 털버덕 떨어져 한 바 퀴 굴렀다. 그러자 자루 속에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맑은 갈색 눈을 한 귀 여운 얼굴과, 작은 두 팔이 비어져 나오더니 깜찍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 이었다. "아야! 너무해요." 남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아팠니? 미안하구나. 그러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는 자루 끈을 풀고 안에서 다섯살 가량의 귀여운 소녀를 끌어냈다. 고급 구두를 신고 멋진 분홍색 옷을 입고 깜찍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은 수 척해 보이지만 활달한 몸놀림으로 보아 남자만큼은 고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남자는 소녀가 금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직도 아프냐?" 소녀는 부딪친 곳을 내밀어 보이며 종알거렸다.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세요. 엄마는 늘 그렇게 해주시는 걸요.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된 거죠?" "엄마는 놀러 갔단다. 그러나 곧 만나게 될거야." "놀러 갔다고요? 이상도 해라. 다녀오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이 웃집 아줌마 댁에 차 마시러 갈 때도 꼭 나한테 다녀오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사흘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다니, 저 아저씬 목이 안 말라요? 물도 먹을것도 없 나요?" 소녀는 반짝거리는 돌비늘을 두개 내보이면 말을 이었다. "어때요, 예쁘죠? 집에 돌아가면 이걸 밥에게 줘야지." "이제 곧 더 좋은게 나타날 게다. 조금만 더 참아야 해. 그런데 강을 건너온거 생각나니?" "응." "그 강을 건너, 이틀 밤만 가면 또 강이 나타나야 했단다. 그런데 나침반이 고장 났는지 지도가 엉터리였는지 우리는 엉뚱한 곳으로 빠지고 만 거란다. 그래서 물이 떨어졌다. 너 같은 꼬마들만 마실 수 있는 물을 조금만 남기고 말이다. 하 지만 그 물도 지금은 없단다." 소녀는 남자의 먼지투성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아저씨는 세수도 못 하셨나봐." "세수야 다음에 하면 돼. 그렇지만 물을 마시지 못 하면 사람은 죽는단다. 맨 먼 저 밴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 다음엔 인디언인 피트, 맥그리거 부인, 자니 혼스, 그리고 네 엄마도...." "그럼 엄마도 죽은 거네...." 소녀는 앞치마에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측은한 듯. 남자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렇단다. 남은것은 너와 이 아저씨뿐이란다. 그래도 이 산 너머에는 물이 있을 까 해서 너를 메고 여기까지 왔지. 그러나 틀린것 같구나. 아무데도 물이 보이 지 않아." 소녀는 울음을 멈추고서 눈물에 젖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도 곧 죽는다는 거야?" "그렇게 될 거 같구나." 그 말에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왜 좀 더 빨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나 언제까지 이렇게 목이 말라야 하나 속이 상했어요. 하지만 죽으면 엄마를 만나게 되죠?" "그럼 만나고 말고, 루시." "아저씨도 죽는 거예요? 함께 가서 나 엄마에게 말할테야. 아저씨가 날 위해 주 었다고. 엄마는 틀림없이 천국의 문까지 마중나와, 물주전자와 밥과, 내가 좋아 하는 쟁반만한 파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런데, 아저씨 얼마나 더 기다 려야 해요?" "글쎄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것 같구나." 그 남자의 시선은 먼 지평선을 더듬고 있었다. 하늘에 작은 점이 세 개 나타났 다. 무척 빠른 속도로 이 쪽으로 다가오는 모양인지 순식간에 커졌다. 그것은 세 마리의 대머리 독수리였다. 새들은 두 사람의 머리위로 원을 그리며 날더니, 높 은 바위에 내려앉아 끈질기게 그들을 지켜 보기 시작했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소녀는 그 불길한 새를 가리키며 기쁘다는 듯이 종알거렸다. "저기 봐요. 닭이 있어요. 저, 이 나라도 하나님이 만드셨나요?" "그야 물론이지." "하나님은 일리노이 주도 만드시고, 미주리 강도 만드셨다는거 나 알아요. 그렇 지만 이 곳은 다른 하나님이 만든 것 같아요. 솜씨가 형편없거든요. 나무도 강 도 빠뜨리다니...." 남자는 잠시 망설인뒤 차분하게 말했다. "기도를 드리지 않겠니?" "아직 잠잘 때도 아닌데요?" "상관없단다. 지금 하는 건 진짜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괜찮다고 하실게다. 푸른 초원을 지나올때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드렸겠지? 그래로 하면 된다." 소녀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왜 아저씨는 기도를 드리지 않나요?" "모두 잊어버렸단다. 아저씨 키가 이 총의 반만 했을 때부터 한 번도 기도를 드 린 적이 없거든.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은건 아닐게다. 그러니 네가 기도문을 외 면 아저씨가 따라하다가 아멘 소리만 크게 할게." "그럼 무릎을 끓으세요. 나도 무릎을 끓을께요. 자, 손을 이렇게 깍지를 끼고... . 어때요, 기분이 가라앉지요?" 철없는 아이와 두려움을 모르는 서부의 장정이 나란히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것 은 색다른 풍경이었다. 오동통한 소녀의 얼굴과 거칠고 메마른 남자의 얼굴이 구 름 한점 없는 하늘을 향해서, 맑고 또렸한 목소리와 굵고 쉰 목소리가 하나가 되 어 하나님에게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자, 두 사람은 바위 그늘에 자리잡았다. 소녀는 그 남자의 넓은 가슴에 안기더니, 잠시 뒤 영원 한 잠이 될지도 모르는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남자는 한동안 그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사흘 낮, 밤을 쉬지도 먹지도 못해 서 피로가 몰려오는 듯, 차츰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덮이더니 머리가 가슴위로 조 금씩 꺽여 어느덧 남자의 거친 턱수염과 소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이 한데 엉키면 서 둘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온 천지가 조용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안개와 식별이 잘 안되었지만 흙먼지는 자꾸만 커져서 윤곽이 뚜렸해졌다. 들소떼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오는 것 같았지만, 풀 한포기 없는 사막에 들소가 떼지어 나타날 리는 만무했다. 흙과 모래 먼지의 소용돌이는 차츰 둘이 잠들어 있는 벼랑 밑을 향해서 움직여 왔다. 그리고 마침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포장마차와 무장을 하 고 말을 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부를 향해 가는 이주민의 무리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마어마한 규 모였다. 그 선두는 이미 벼랑 끝까지 도달했는데도 끝은 아직 지평선 저 쪽에 묻 혀 보이지 않았다. 4륜 마차와 2륜 짐마차, 말을 탄 사람과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평원을 가로질러 끝없이 뻗어 있었다. 무거운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여자 들, 마차 주위를 뛰어다니거나, 흰 포장 밑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아이들, 그 건 보통 이주민이 아니라 어떤 사정에 의해서 대대적인 집단을 이루어 새로운 땅 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틀리없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고 말이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마른 하늘에 메 아리 쳤다. 그러나 벼랑 위에서 잠든 두 사람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 행렬의 선두에는 각기 총을 든 남자들이 20명 가량 말을 타고 앞장 서 있었으 나 벼랑 가까이에 오자 일제히 멈추어 서서는 무엇인가 수군거렸다. 그리고는 수 염을 깨끗이 면도하고 머리가 반백이 된 한 남자가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샘은 오른쪽에 있을 것 같다." 그러자 행렬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물 걱정은 없을 것이다. 바위 속에서 물을 자아낸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버 리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무리가 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아멘! 아멘!" 일행이 다시 말을 몰아 나아가려 할때,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깍아지른 벼랑 위를 가리켰다. 그 정상에서 무언가 분홍빛 천이 회색의 바위를 배경으로 펄럭이 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길잡이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말했다. "인디언이 이 부근에 있을 리는 없어. 포니 족이 사는 땅을 지나온지 오래니까. 대산맥을 넘기까지는 다른 부족이 있을 리 없는데...." 한 사람이 말했다. "스탠거슨씨, 내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이어 열 사람 가량의 목소리가 거기에 따랐다. "나도 가겠습니다." "나도.." "함께 가보게나." 나이 든 장로가 말하자, 젊은이들이 말에서 내리더니 분홍색 천이 보였던 곳을 행해 가파른 벼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위에서 바위로 날렵하게 옮 겨 뛰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맨 먼저 그것을 발견한 젊은이가 선두였다. 그가 무척 놀란 듯, 크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뒤따르던 청년들도 급히 기어 올라갔 다. 그들도 뜻하지 않은 일에 놀라고 말았다. 바위 그늘은 평평했다. 거기에 키가 큰 남자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고, 철사처럼 말라 비틀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 고 른 숨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 품에 안기 소녀였다. 통통하고 흰 팔을 남자의 때가 잔뜩 낀 가 는 목에 감고서 금발 머리를 그의 가슴에 파묻은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이 었다. 장미빛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어서, 그 사이로 흰 이가 가지런히 드러나 보였다. 천진스러운 얼굴에는 미소까지 감돌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바위 꼭대기에는 세 마리의 대머리 독수리 가 앉아 있다가, 달려온 사람들을 보자 쉰 목소리로 울어대며 퍼드득 날아올랐 다. 잠들어 있던 남자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평원을 굽어보았다. 아까만 해 도 그렇게 황량하고 조용했던 평원에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말이 득실거리고 있지 않은가! 남자는 그 놀라운 광경에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이게 환상이라는 건가?" 소녀는 그 바람에 잠을 깨어나서는, 남자의 소매에 매달려 어리광이 담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눈 앞의 광경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젊은이 하나가 소녀를 어깨에 올리고, 기진맥진한 남자를 다른 몇 명이 부축하여 벼랑을 내려갔다. 남자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내 이름은 존 페리어 라고 합니다. 21명중에서 나와 이 아이만 남았습니다. 다 른 일행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저 멀리 남쪽에서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다. "이 아이는 당신 딸입니까?" "지금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려냈고, 아이의 부모가 죽었으니까 내 가 길러야지요. 이 아이는 오늘부터 루시 페리어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굽 니까? 엄청난 인원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1만명이 넘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리노이 주에서 왔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피하여 편안히 살 수 있는 땅을 찾아나선 길입니다." 페리어는 이해가 간다는 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모르몬(1830년 미국에서 조셉 스미스라는 사람이 창시한 크리스트교의 한파,한 남자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도들이군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몬 교도입니다." "그래, 당신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예언자의 몸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대로 갑니다. 당신도 이제 그 예언자를 배알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자께서는 당신과 그 아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교시할 겁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이끌고 한결 크고 훌륭한 마차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마차는 말 두 필이 끌거나,많아야 네 필이 끄는 마차인 것에 비해. 그 마차는 여섯 마리 의 말이 달려 있었다. 마차 옆에 한 남자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이는 불과 30을 갓 넘어 보였으 나 근엄한 얼굴이 보기에도 지도자다웠다. 그는 일행이 보고하는 바를 묵묵히 듣 고 난 후에, 두 사람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우리와 믿음을 같이 해야 하 오. 양떼들 속에 늑대는 끼워 넣을 수 없기 때문이요. 당신들이 우리들 사이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면, 지금 이 광야에 백골을 묻게 하는 것만 못하기 때 문이외다. 내 말을 명심 할 수 있겠소?" "어떤 조건이라도 승복하겠으니 거두어 주십시오." 페리어가 너무도 간절하게 애원했기에, 백발이 성성한 장로조차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지도자의 근엄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스탠거슨 형제여, 이 사람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대접하시오. 그리고 우리 의 성스러운 가름침을 전하는 일도 당신에게 맡기리다. 자, 떠나도록 하시오." 마차의 무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출된 두 사람은 장로의 마차에 이끌려 가 음식을 제공받았다. "이제부터는 이 마차에서 기거하십시오. 2 - 3 일 지나면 건강도 회복될 겁니 다. 단, 못박아 둘 일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우리 신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브리감 영 선생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분부이십니다." .. 9. 유타주의 꽃 .. 모르몬 교도의 무리는 믿음의 땅을 찾아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참아 내며 미시시피 강을 돌아, 로키 산맥의 서쪽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유타주의 풍요로운 평야가 눈아래 펼쳐졌을때 지도자 영이 말했다.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땅이며 이 땅은 영원히 우리들의 것이 되리라."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무릎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영은 종교적인 지도자였을뿐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영은 미래 의 도시를 계획하고 주변의 비옥한 땅을 각자의 신분에 맞게 분배해 주었다. 장 사꾼은 가게를 열고, 대장장이는 대장간을, 양복장이는 양복점을 냈다. 이리하여 거리에는 하루가 다르게 건물이 들어차고 광장이 개설되는 등 마법의 나라처럼 도시가 형성되어 갔다. 한편, 시골에는 밭이 일구어지고 농사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해 여름에는 벌써 들마다 밀 이삭이 황금색 물결을 이루고 소 울음과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 한복판에 터전을 잡은 교회는 해마다 보다 높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존 페리어와 그의 양녀가 된 루시는, 그들 모르몬 교도들의 기나긴 여행길을 끝 까지 함께 했다. 어린 루시는 스탠거슨 장로의 마차에 태워져, 장로의 세 아내와 12살된 아들과 함께 묵으며 여행을 계속했다. 루시는 어린애다운 명랑함 덕분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슬픔을 잊고, 곧 포장을 얹은 움직이는 집의 생활에 만족 하게 되었다. 한편, 페리어는 기운을 되찾기가 무섭게 쓸모 있는 안내인으로서, 솜씨 있는 사 냥꾼으로서 실력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동료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었기에, 여행이 끝나 이 땅에 자리잡게 되었을 때는 지도자 영을 비롯하여 스 탠거슨, 캠벨, 존스턴, 드리버 등 네 명의 대장로를 빼놓고는 다른 사람들 못지 않은 기름지고 넓은 땅을 나누어 받게 되었던 것이다. 페리어는 그렇게 차지한 자기의 땅 위에, 스스로의 힘으로 튼튼한 통나무 집을 세웠다. 페리어는 타고난 성실성과 강철과 같은 육체를 갖고 있었기에, 그의 농 장은 해가 바뀔수록 번성했다. 그리고 12년 뒤에는 이 지방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도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페리어에게는 동료 모르몬 교도들이 못마땅하게 하는 점이 꼭 하나 있었 다. 그것은 페리어에게 그들의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하도록 설득했지만 끝내 외면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페리어는 자기가 아내를 마다하는 까닭을 결코 말하 지도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서 누구는 페리어의 신앙심이 돈독하지 못한 탓이라고 했고, 누구는 페리어의 욕심이 지나쳐, 아내를 여럿 거느림으로서 써야 할 돈이 아까워 그런다고 넘겨 짚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밖의 일에서는 페리어가 나무랄데 없는 독시한 모르몬 교도였기에, 차차 그러한 비난도 사그라져 갔다. 루시 페리어는 통나무 집에서 무럭무럭 커갔다. 그리고 그 작은 손으로 양아버지 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접시를 닦았다. 그 동안 뒤산의 상쾌한 공기와 소나무 의 향기로운 냄새가 이 소녀에게 유모와 어머니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 해가 가고, 또 한해가 저물고, 해가 바뀔수록 루시의 키는 커지고, 아름다움 은 더해 갔다. 그리하여 페리어가 이 지방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을때 루시는 이 지방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해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따사로운 5월의 아침이었다. 들에도 도시에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 들의 웅성거림이 가득 차 있었다. 먼지가 이는 신작로에는 무거운 짐을 실은 마 차의 행렬이 서부로 서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까닭은 때마침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황금에 운명을 건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그들 뒤에는 먼 방목지에서 끌려오는 양과 소 떼와 여행에 지친 이주민들의 무리 가 있었다. 이 혼잡 속을 루시가 발그레한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긴 금발을 펄럭이며 날렵 하게 말을 몰아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시내에 나가는 길이었다. 긴 여행 탓에 온통 흙먼지로 뒤범벅이 된 이주민들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말 위의 루시를 감탄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루시가 시내 입구에 접어들었을때 대여섯명의 카우보이가 모는 소 떼가 길을 막 고 있었다. 루시는 갈 길이 답답해지자, 소 사이로 말을 몰아 소 떼를 따돌리려 고 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소 떼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시는 평상시에 익숙하게 소를 다루어 왔기에, 당황하지 않고 말을 몰아 나갔다. 그런데 운수 사납게도 한 마리의 소가 말의 아랫배를 세차게 건드려, 말 이 날뛰기 시작했다. 말은 숨소리도 거칠게 힝힝거리며 뒷발로 일어서서 앞발을 휘젓는 등 금세라도 루시를 내동댕에칠 기세였다. 위험했다. 성난 말이 날뛸때마다 소의 뿔이 와 닿았고 그럴수록 말은 발광을 더 했다. 루시는 필사적으로 말 안장에 매달렸다. 말등에서 내동댕이 쳐지는 날에는 소 떼의 발굽 아래 짓밟혀 죽을 게 뻔했다. 루시는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눈앞이 아찔하고 움켜잡은 고삐에선 힘이 빠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때, 힘 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뭣들 하는 거야!"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젊은이 하나가 소 떼를 헤집고 말을 몰아 돌진해 오고 있 었다. 그리고 통나무처럼 굵은 그의 팔이 루시의 말 고삐를 낚아체서는 침착하게 소 떼의 물결을 타면서 밖으로 끌고 나갔다. 울상이 된 루시를 안장에서 안아 내린 젊은이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가씨, 다친데는 없습니까?" 루시는 젊은이의 햇볕에 탄 검고도 엄숙한 얼굴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 혼났어요. 우리 집 말이 소 같은것에 그렇게 겁먹을 줄 몰랐지 뭐예요." "그만하기를 천만다행입니다." 남자는 후리후리하게 키가 컸다. 야성적이고 근엄한 얼굴에 서부의 모자를 눌러 쓰고 어깨에는 최신식 라이플 총을 메고 있었다. "아가씨는 존 페리어 씨의 따님이시지요? 아까 페리어씨의 농장에서 말을 타고 나오는걸 봤습니다. 집에 돌아가시거든 아버님께 세인트 루이스의 제퍼슨 호프 가문을 아시느냐고 여쭈어 보십시오. 만일, 그 때의 페리어씨라면 우리 아버지 를 아실 겁니다." 루시는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면서 나무라듯 말했다. "어머? 직접 오셔서 여쭈어 볼 수는 없나요?" 호프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는 루시의 말에 입이 벌어지며, 까만 눈에 기쁨이 감돌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두달 동안이나 산 속에 틀어박혀있었던 터라, 숙녀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건 상관없어요. 이따가 세수나 하고 오세요. 아버지는 당연히 당신에게 감 사의 말을 해야하니까요. 아버지는 나를 무척 애지중지하시거든요. 내가 만일 이곳에서 소에게 밟혀 죽어보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실때까지 눈물을 흘리실 거 라고요." "나도 그럴것 같습니다." "어머, 왜 당신이? 당신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나요, 우리는 친구도 아닌데?" 호프는 이말에 갑자기 풀이 죽었다. 루시가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 지금 그 말 농담이어요. 우린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까,꼭 우리 집에 오셔 야 해요. 그럼 이만 가 봐야겠어요. 아버지 심부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제 밖에는 내보내지도 않으실 거예요. 안녕!" "안녕!" 호프는 차양이 넓은 서부의 솜브레로 모자를 벗어서 흔들었다. 그리고는 루시와 반대 방향으로 말을 달려갔다. 호프 청년은 동료들에게로 돌아가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말수가 적어졌다. 그 는 동료들과 네바다 산맥으로 은광을 찾아들어갔었는데, 찾아낸 광맥을 캐기 위 한 준비를 갖추려고 솔트 레이크 시티로 왔던 것이다. 호프는 지금까지 동료들중에서도 유달리 일에 열성적이였으나, 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온통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쏠리게 되었다. 시에라 산의 산들바람처 럼 밝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자, 야성적인 젊음으로 가득 찬 그의 마음 이 밑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광산의 일도 그 밖의 어떤 문제도 루시를 사랑하는 정열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호프는 그동안 손을 대는 일마다 끝까지 관철시켜서 성공을 거 두어 왔다. 그래서 루시의 일도 반드시 성사시키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호프 청년은 그 날로 페리어씨의 농장을 방문했고, 그 횟수는 차츰 늘어 이제 스 스럼없이 드나들게 되었다. 페리어는 그럭저럭 10여년을 농장에 틀어박혀 농사일 에만 열중했기에,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호 프 청년은 그런 것을 널리 알고 있었거니와, 이야기도 잘해서 페리어뿐만 아니라 루시도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호프는 탐험, 사냥, 목장 경 영 등 두루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피끓는 많은 모험을 했던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이제 나이 든 페리어는 호프가 마음에 들어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그럴 때 루시는 늘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 붉어지는 볼이나 밝 고 행복해 보이는 눈을 보면, 그녀가 호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고지식한 페리어는 아직 거기까지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호프만은 자 기가 루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완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호프가 말을 달려 농장안으로 들어섰다. 루시가 달려나갔 다. 호프는 루시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루시, 이제 준비가 끝나 오늘 밤 안으로 떠나게 되었어. 이번에는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없지만, 다음에 내가 오면 함께 갈 준비를 해놓고 기다려 줘야 해." 루시는 얼굴을 붉히고 웃으며 물었다. "그게 언제쯤이죠?" "늦어도 두 달이면 충분할거요. 그 때 당신을 데리러 내가 오겠어.이제 우리 사 이를 가로막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아버지껜 말씀드렸다고 했지요?" "응. 광산의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시겠다고 하셨어. 요즘에야 눈치를 챘다고 하시더군." 루시는 호프으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기뻐요. 당신과 아버지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다됐네요. 기다리고 있 겠어요." 호프는 루시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만 가야지.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리고 일행들이 골 짜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안녕, 루시. 안녕. 두달 뒤에 우리는 결혼할 거 야." 호프는 몸을 돌려 말에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달려갔다. 루시는 그 뒷모습이 어 둠속에 잠겨 보이지 않을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 10. 예언자의 노여움 .. 호프와 그의 일행들이 떠난지 벌써 3주가 지났다. 페리어는 호프 청년이 돌아오 면 루시를 짝지어 떠나 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루시의 밝고 생 기에 찬 얼굴을 보면, 그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페리어는 그전부터 어떤일이 있어도 루시를 모르몬 교도와는 결혼시키지 않겠다 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페리어의 생각으로는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아내를 두 는 것은 수치스럽고 불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그 지방에서 모르몬 교도 의 가르침에 거역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위험했기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굳 게 입을 다물고 살아왔었다. 위험......그렇다. 그는 교리에 반대되는 의견을 입 밖에 낸 교도가 갑자기 자취 를 감추어, 어디로 갔으며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를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페리어는 밀밭에 나가 보려고 하다가, 목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모랫빛 머리에 우람한 체격을 한 중년 남자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예언자 브리감 영이었다. 그것을 본 페리어는 심장이 멎는것 같았다.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절대 권력자 영이 직접 자기의 집을 찾아온다는 것은 예삿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겁을 집어먹었지만 페리어는 급히 달려나가 공손히 그 를 맞아들였다. 영은 냉정한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은 페리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제 페리어여, 지금까지 우리 믿음의 동지들이 그대의 친구였소. 그대가 사막 에서 죽어갈때 우리는 그대를 거두어 먹고 마실 것을 나누어 주었으며, 하나님 이 선택한 이 땅에 인도하여 넉넉한 땅을 주어 재산을 모으게 해 주었소. 그렇 지 않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어 단 한 가지 조건을 그대에게 요청했던 것이오. 그것은 그대가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여 모든일에 있어 그 가르침을 따 르라는 것이었고 그대는 그것을 약속했소.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대는 그 약 속을 저버렸다는 거요." 페리어는 필사적이었다. "저버리다니요. 공동 모금에 솔선했고, 교회에도 빠진일이 없으며....." 영은 손을 흔들어 페리어의 말을 중단시키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대의 아내는 어디 있는가?" "제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때 여인의 수도 적었거니와 저보다 아내를 얻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딸이 있어 가사에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 이 곳에 온 것은 그 딸아이 때문이오. 루시는 탈없이 자라, 지금은 유타주의 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소. 이 땅의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그 아이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소." 페리어는 마음속으로 신음했다. 영이 말을 이었다. "향기롭지 못한 소문이 떠돌고 있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지 않지만, 루시가 이 교도와 약혼을 했다는 소문이외다. 그것이 근거도 없는 헛소리이기를 바라는 마 음 간절하오. 성 조셉 스미스의 규율 13조에 뭐라고 되어 있소? '참된 신앙을 가진 딸들을 하나님이 선택한 자와 혼인시킬지어다. 행여 이교도의 아내가 됨은 무거운 죄를 지음이니라.' 그대는 믿음이 강함을 내세운바 그대의 딸이 이 교리 를 배반 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할 것이오." 페리어는 말문이 막혔다. 예언자는 엄숙히 말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대의 신앙을 저울질할 수 있을 것이오. 이 것은 대장로의 신성한 회의에서 결정된 일이외다. 루시는 아직 젊으니까 머리가 허연 노인과 결혼하라거나 상대방을 선택하는데 제한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우리 장로들은 이미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 아들들에게 아내를 맞게 할 때가 된 사람도 많소. 그 누구보다도 장로 스탠거슨과 드리버에게는 각기 아 들이 있소. 그 어느쪽이든 그대의 딸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외다. 루시로 하여금 양가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시오. 두 가문의 젊은이가 모두 그 집안 형 세가 넉넉하고 신앙심이 깊으니 그대의 답변을 듣고자 하오." 페리어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시간을 줄 수 없겠습니까? 딸아이는 아직 철이 없어서 당황할 겁니다." 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못박았다. "혼인의 상대를 선택하는데 한 달의 말미를 주겠소. 그 때까지 루시는 짝을 정해 야 할 것이오." 영은 선고를 내리듯 말하고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뒤돌아서서는 증오가 끓어오르 는 눈으로 페리어를 노려보며 말했다. "존 페리어, 그대가 대장로 회의의 결정을 무시할 만큼 신앙이 약하다면, 우리는 그때 시에라 블랑코 바위위에 그대와 딸의 백골이 흩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 음을 후회할 것이오!" 문이 닫히고 마당의 자갈을 밟는 소리가 동상처럼 굳어있는 페리어의 귓가에 들 려왔다. 페리어는 이 일을 어떻게 딸에게 전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는 눈을 지 그시 감고 근심에 싸였다. 그때 문득 보드라운 손이 자기 손등위에 겹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루시가 어느틈엔가 곁에 와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과 겁먹 은 눈만 보고도 루시가 지금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었 다. 루시는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안 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 분의 목소리는 온 집안에 울려 퍼질 정도였으니까 요. 아아, 아버지.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페리어는 루시의 어깨를 껴안으며 크고 울퉁불퉁한 손으로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 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지. 설마 호프를 사랑하는 네 마음이 이 일로 흔들리는 것은 아니겠지?" 루시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대답대신 흐느껴 울었다. "됐다. 루시야. 그런말을 물어본 내가 바보로구나. 호프는 훌륭한 젊은이이자 크 리스트교인이지. 이곳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들의 신앙이 돈독하다고 해도 호프 에게는 미치지 못 할거다. 내일 네바다 주로 떠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지를 보 내어 우리의 절박한 상황을 그에게 알리도록 하자. 틀림없이 그는 전보 용지에 매질을 하듯 날듯이 달려올게다." 루시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그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을 말해줄 거예요. 하지만 아버 지의 일이 걱저이예요. 소문으로는 만약 예언자를 거역하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 던데...." "하지만 지금은 거역한 상태는 아니지. 배반했을때의 위험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 는 아직 있다. 한 달이나 남아 있으니까. 잘만하면 유타주를 빠져 나갈 수도 있 는 일이 아니겠느냐!" "유타주를 떠난다고요?" "생각해 봄직한 일이지." "이 농장은 어떡하고요?" "가능한 한 현금을 챙기고 포기해야지. 실은 말이다. 루시 내가 그런 생각을 품 은 것은 처음이 아니란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처하는 빌어먹을 예언자에 게 무작정 머리를 조아리지만, 난 아무에게도 머리를 수그리고 싶지는 않단다. 나는 자유로이 태어난 미국인이야. 모르몬 교의 교리는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 가 없다. 머릿속을 갈아내기에는 너무 늙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하여간 그 자가 우리집에 또 나타나면 사슴 사냥때 쓰는 총탄으로 고리타분한 그 자의 머리에 바람 구멍을 내줄 참이란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요." "호프가 달려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의논해 보면 좋은 수가 있겠지. 그때까 지는 속을 앓거나 울어서 눈이 짓무르는 일이 없도록 해라. 만사는 아버지와 호 프가 알아서 할 테니까." 페리어는 자못 자신이 있는 거처럼 루시를 안심시켰으나 그날 밤은 평상시와는 달리 문단속을 단단히 했고, 침실에 걸려 있던 사냥총도 내려 손을 보고 탄환도 장전해 두었다. .. 11. 필사의 탈출 .. 페리어는 모르몬 교도의 예언자 영의 방문을 받았던 이튿날 아침, 솔트레이크 시 티로 가서 네바다로 떠나는 친구 편에 호프에게 보내는 편지를 맡겼다. 그 편지 에는 지기들 부녀에게 무서운 위험이 임박했다는것과 곧 와주어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전하자, 얼마 간 마음이 놓여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 다. 페리아가 농장 가까이 가보니, 마당에 말 두 필이 매어 있어 깜짝 놀랐다.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두 청년이 거실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얼굴이 푸르죽죽한 젊은이로 흔들 의자에 앉아 양쪽 발을 난로위에 올려놓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목이 굵고 보기 흉하게 볼이 쳐졌으며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채 창가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페리어가 들어오자 형식적인 인사를 던지고 흔들 의자에 앉아 있던 자가 먼저 입을 열었 다. "당신은 아마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이 사람은 드리버 장로의 아들이 고 나는 스탠거슨 장로의 아들입니다. 지난번 사막에서 하나님이 손을 뻗어 당 신들을 참된 교회로 인도했을 때에 우리는 철부지 소년으로 당신들과 함께 여행 을 했습니다." 이 번에는 볼이 늘어진 친구가 설교에 가까운 말을 했다. "하나님은 뜻하시는 바에 따라 언젠가는 모든 백성을 택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느리지만, 결과는 극히 분명합니다." 페리어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 던 것이다. 스탠거슨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온 것은 둘 중 어느 쪽이든 당신이나 이 댁 아가씨에게 잘 보이는 사람 이 아가씨와 혼약을 맺도록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내가 아직 네명밖에 안 됩니다. 드리버는 벌써 일곱 명이나 거느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내가 유리할것 같습니다." 드리버가 가로막았다. "당치도 않은 소리, 스탠거슨 형제 문제는 지금 몇 명의 아내를 갖고 있느냐 아 니라, 몇 명까지 부양할 수 있느냐일세. 나는 일전에 아버지로부터 밀방앗간을 양도받았으니까 내가더 부자인것은 확실하잖나." 스탠거슨은 핏대를 올렸다. "앞으로의 전망은 내가 더 부자일세. 하나님이 아버지를 천국으로 부르실때가 오 면, 아버지의 가죽공장은 내것이 된단 말일세. 또한 나는 자네보다 교회에서의 서열이 위가 아닌가." 드리버 청년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으며 빈정거렸다. "어쨌거나 누구를 택하느냐는 아가씨에게 달린 일이 아닌가." 둘이 이러한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페리어는 화가 끓어 두녀석의 등을 말채 찍으로 후려갈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페리어는 참다 못해 두 사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봐, 어서 꺼지지 못해. 오라고 하기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두 모르몬 교도 청년은 기겁을 해서 페리어의 험악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 람으로서는, 자기들이 다투어 루시에게 구혼하는 것은 페리어나 그의 딸에게 큰 영광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리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방에는 나갈 곳이 둘 있다. 하나는 이 출입문이고 하나는 저 창문이다. 자네 들은 어디로 나가고 싶지?" 페리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나무 가지처럼 굵고 억센 팔을 휘둘러 보이자, 두 청년은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자, 걸어서 나갈테냐, 아니면 두들겨 창문으로 내 던지랴?" 그 서슬에 두 청년은 뒷걸음질쳐 문 쪽으로 나가면서 스탠거슨이 떨리는 목소리 로 위협을 했다. "혼날 줄 아시오! 당신은 예언자와 장로 회의의 결정을 무시했소. 죽을때까지 후 회하게 만들어 줄테요." 드리버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나님의 노여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거요." 페리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그때 루시가 페리어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으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그 사이에 두 청년은 허둥지둥 말위에 올라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건방진 악당들 같으니라고! 루시, 네가 저런 녀석들의 아내가 될거라면 오히려 죽어 없어지는 편이 낫겠다." 아버지의 말에 루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호프가 곧 와야 할텐데...." "곧 올게다. 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구나.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 으니.." 분명히 호프가 한시라도 빨리 와서 그들 부녀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했다. 이 개 척지에 모르몬 교도들이 정착한 이래, 장로들의 권위를 그만큼 노골적으로 모욕 한 예는 없었던 것이다. 사소한 실수도 엄히 처벌되는 관례로 보아, 이 번 경우 와 같은 반역에 얼마나 무서운 보복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페리어는 자 신의 지위와 재산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페리어 와 마찬가지로 재산과 명성을 가진 사람이 행방 불명되고 그 재산이 교회에 몰수 된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페리어는 용감한 남자였지만, 자신의 신상에 닥쳐올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정체를 알 수 있는 위험이라면 정면으로 맞설 수 있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은 까닭 모를 두려움으로 설렐 뿐이다. 그러나 페리어는 그 두려움을 딸에게 눈치채 이지 않게 하려고, 이 일을 대수롭지 않은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루시는 아버 지의 불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페리어는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조만간 어떤 지시나 경고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 는데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것은 뜻밖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페리어가 잠을 깼을때 놀랍게도 가슴 언저리의 이불위에 네모난 작 은 종이 조각이 핀으로 꽃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 었다. '그대가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할 기한이 29일 남았소. 그 다름은.....' 경고문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밑줄친 부분이 어떤 말보다도 무서운 의미를 지 니고 있었다. 하인들은 모두 별채에서 자고 있었고 문단속도 물샐틈없이 해 두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누가 침실까지 들어와 경고장을 꽃아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페 리어는 종이 쪽지를 태워 버리고 딸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나 간담이 서늘 해 지는 것을 느꼈다. 29일이란 분명히 영과 약속한 1개월의 날수였다. 이렇게 신비로울 정도로 은밀한 적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 핀을 꽃았던 손은 페리어의 심장도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는 더욱 무서운 일이 있었다. 부녀가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았을때, 루시 가 기겁을 하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천장 한 복판에 숯으로 28이라는 숫자가 쓰 여 있었던 것이다. 루시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페리어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밤은 총을 곁에 두고 밤을 새워 경계를 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수상한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아침이 되었지만 문밖에 나 가보니 대문에 페인트로 27이란 숫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이렇게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적은 밤마다 페리어의 집 안팎을 넘나들며 한 달의 여유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었다. 그 저주의 숫 자는 벽에도 쓰여지고 마룻바닥에도 문설주에도 쓰여졌다. 때로는 종이 조각에 숫자를 적어 유리창에 붙여 놓는 일도 있었다. 페리어는 밤마다 경계의 눈을 번뜩였으나 그 경고의 숫자가 어느 사이에 쓰여졌 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마침내 페리어는 미신적인 두려움을 품게 되었고, 차츰 얼 굴의 살이 빠지고 눈에는 쫓기는 짐승에서나 볼 수 있는 공포의 빛이 감돌았다. 불안과 초조감이 그의 심신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살아 남을 유일한 희 망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네바다 주에서 호프가 한시바삐 달려와 주는 것이었다. 저주의 숫자는 20에서 15가되고, 15가 10이 되었지만, 호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 이 없었다. 길에서 말발굽 소리만 나거나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나도 페리어는 호프가 왔나 해서 문간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5라는 숫자가 마침내 3이 되었을때는 자포자기하고서 탈출의 희망을 버리 고 말았다. 페리어 혼자로서는 개척지를 둘러싼 산악지대의 지리를 알 수 없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길은 어디에나 엄중한 감시 가 붙어, 장로 회의의 허가가 없이는 통과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페리어는 딸에 게 수치스러운 결혼을 시키는 일에 동의하기보다는 그대로 죽어 버릴 결심을 하 고 있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스러운 상상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이었다. 자신이 죽은 후 에 루시는 어찌될 것인가? 어떻게든 두 사람 주위에 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글 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페리어는 탁자에 머리를 쳐박고는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었다. 그때 쥐죽은 듯한 고요속에 슬그머니 무엇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현 관문 쪽에서였다. 페리어는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소리 는 멎었다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가 거기 있는것이 확실했다. 비밀 재판의 명 을 받고 암살자가 사형을 집행하러 온 것일까? 아니면, 여유 기간이 하루 남았다 는 것을 기록하러 온 것일까? 페리어는 이렇게 겁먹고 살 바에야, 차라리 결판을 내고 빨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확 문을 열어 젖혔다. 맑게 갠 밤하늘에 별이 보였다. 마당에 도 길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페리어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 러 보았다. 문득 땅위를 보니 거기에 한 남자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 다. 페리어는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땅 위를 기어다가왔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문 안으로 들어와 벌떡 일어서더니, 커 튼 옆으로 몸을 기댔다, 그 날카롭고 결의에 찬 얼굴은 틀림없이 호프였다. 페리 으는 다시 한 번 놀라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자네 호프가 아닌가! 어셉서 그런 모양으로 기어 들어왔지?" 호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이틀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달 려오는 길입니다." 호프는 페리어의 저녁식사 테이블에 남아 있던 고기와 빵을 보자, 만사 제쳐 놓 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간 배를 채우고서 물었다. "루시는 잘 있습니까?" 페리어는 대꾸했다. "그 아이에게는 위험이 얼마나 절박한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네." "잘 하셨습니다. 이 집은 사방에서 감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식으로 기어들어왔던 것입니다. 놈들의 경비는 물샐틈없지만, 이 호프도 만만치는 않습 니다." 페리어는 믿음직한 협력자가 생겨 딴 사람처럼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호프의 큼 직한 손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자네는 훌륭한 사람일세. 우리의 이 곤경을 함께 해 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고맙습니다. 하지만 루시를 위해서입니다. 저는 당신을 존경하지만, 당신 혼자 이런 곤경에 빠져 있다면 이 살엄음판 같은 위험속에 감히 뛰어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루시가 있기에 이런 용기가 생긴 겁니다. 만일 루시의 몸에 위 험이 닥친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것입니다."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은가?" "내일이 30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밤 안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끝장입니다. 저는 말 두필과 당나귀 한마리를 독수리 계곡에 매어 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돈 은 얼마나 갖고 계십니까?" "금화로 2000달러와 지폐로 5000달러." "그만하면 넉넉합니다. 저도 그만한 액수를 갖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산을 넘어 카슨 시티까지 강행군을 해야 합니다. 어서 루시를 깨워 주십시오. 하인들이 별 채를 쓰고 있어 다행입니다." 페리어가 딸에게 가서 길 떠날 차비를 하라고 시키고 있는 동안 호프는 지니고 갈 수 있는 한의 식료품을 자루에 챙기고 또한 산에는 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 었기에 물통도 준비했다. 호프가 대충 준비를 끝냈을때, 페리어가 루시를 데리고 왔다. 호프는 루시를 세 차게 껴안았으나 곧 손을 풀었다. 한시가 급한 것이다. 호프는 나직한 소리로 말 했다. "어서 출발합시다. 현관으로 나가면 당장에 감시자의 눈에 띌 테니까 침실 창문 을 통해 빠져나가 옥수수 밭으로 기어나가는 겁니다. 뒷산까지만 빠져나가면 말 을 매어둔 계곡까지는 30km밖에 안 됩니다. 동이 틀 무렵까지는 산을 절반은 넘 어야 합니다." 페리어가 물었다. "만일 감시원이라고 있으면?" 호프가 허리에 찬 권총을 두드려 보이며 씩 웃고 말했다. "상대가 힘에 겨운 인원수라면 싸우다 죽는 수 밖에요." 집 안의 불은 모두 껐다. 페리어는 어두워진 창을 통해 농장을 내다보았다.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피땀으로 이룩한 농장... 그러나 딸 의 행복을 위해서는 재산 같은건 아무레도 좋았다. 나뭇잎이 미풍에 흔들리고 곡식을 심은 넓은 밭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바라보면 더할 나위없이 평화스럽고 안 온해서 그 공기속에 살기가 서려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페리어는 금화와 지폐가 든 자루를 챙기고 호프는 식량과 물이 든 배낭을 매고 루시는 자기의 귀중품이 든 작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세 사람은 창을 조용히 열 고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기를 기다려 한 사람씩 옥수수 밭속으로 기어 들어갔 다. 그들은 옥수수 대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밭고랑을 기어 갔다. 옥수수 밭에서 벗어나 막 오솔기로 가려 했을때 억센 호프의 팔이 두 부녀의 어깨를 꽉 잡고서 내리눌렀다. 호프는 대초원에서 익힌 눈과 귀가 살괭이처럼 날카로왔던 것이다. 세 사람이 숨 을 죽이는 순간 2-3M 떨어진 곳에서 음산한 부엉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좀 떨어진 곳에서 같은 울음 소리가 거기에 답했다. 그러더니 오솔길 위에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 다시 한 번 부엉이 울음을 흉내냈다. 그러자 두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상급자인 듯한 첫번째 남자가 말 했다. "내일 한밤중 매가 세번 울때다." 다른 한 남자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드리버 형제에게 전달할까요?" "그에게 전하고 그로 하여금 그 옆의 사람에게도 전달하게 하라.9와 7." "7과 5." 두 번째 남자가 숫자를 말하고 나서 두 그림자는 각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교환한 숫자는 암호가 틀림없었다. 두 그림자의 발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호프는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부녀를 이끌고 오솔길을 가로질러 솔밭 속으로 들어갔다. 루시가 나무뿌리에 채 여서 넘어지자, 호프는 얼른 그녀를 안아 올리며 다그쳤다. "지금 보초선을 넘고 있는 중이니까, 속히 빠져나가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 되고 말아 서둘러!" 가까스로 신작로까지 나왔다. 한번은 누구와 마주칠 뻔했으나 밭고랑에 숨어 그 의 눈을 피琴다. 시내로 접어들기 전의 갈림길에서 호프는 일행을 이끌고 험한 산길로 들어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가파른 두개의 산봉우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 었다. 그 봉우리 사이가 말을 감추어 둔 독수리 계곡인 것이다. 호프는 잰 걸음으로 큰 바위사이를 누비고 물이 마른 계곡을 건너기도 해서 그늘 져 사람눈에 띄기 어려운 곳까지 갔는데 거기에는 충직한 세마리의 말이 기다리 고 있었다. 루시는 당나귀를 타고 페리어 노인은 돈자루를 들고 말에, 그리고 호프 역시 나 머지 말에 올라타고는 험하고 위험한 산길을 앞장 서 나갔다. 한쪽으로는 높이 3 00M이사이 되는 바위산이 거무튀튀하게 위협하듯 솟아올라 있고, 반대쪽에는 울 퉁불퉁한 바위가 즐비하다. 그 사이로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산길이 나 있었는 데 그나마 좁아서 일행은 한 줄이 되어 말을 몰아 가야 했다. 길이 하도 험해서 승마에 익숙한 사람도 힘에 겨웠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러한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무서운 적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잠시 뒤 그들은 아직도 모르몬 교도가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세 사람이 한 고갯마루를 막 넘으려 했을때 하늘을 배경으로 바위위 에 우뚝 서 있는 보초의 그림자를 보았다. 보초 역시 이 쪽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철컥!' 총알을 장전하며 물었다. "누구냐?" 호프가 말 안장에 끼워 두었던 장총에 손을 대며 말했다. "네바다 주로 가는 여행자요." 그러나 보초는 그 대답에 만족을 할 수 없는 모양인지 총을 겨눈 채 아래를 보고 물었다. "누구의 허가를 얻었는가?" 페리어가 대답했다. "4인 장로 회의의 허가를 얻었소." 그는 모르몬 교도로서의 오랜 경험으로 장로회의를 들먹이는 것이 가장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보초가 외쳤다. "9와 7!" 호프가 옥수수밭에서 귀에 담은 암호를 생각해 내고 응답했다.. "7과 5!" 위에서 말했다. "통과해도 좋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고개를 넘어서자 길은 순탄해져서 어느정도 말을 달릴 수가 있었다. 뒤돌아보니 아까 그 보초가 총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은 모르몬 교도 의 마지막 보초선을 돌파했고, 앞길에는 자유가 충만해 있을 것으로 믿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12. 복수의 화신 .. 세 사람음 밤새도록 강행군을 했다. 몇 번인가는 길을 잘못 들어거시도 했지만, 호프는 산을 타는 데는 익숙했기 때문에 다시 옳은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밤이 지나자, 거칠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가 전개되었다. 사방으로 눈을 인 높은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고, 길 양쪽으로 바위의 절벽이 까 마득하게 솟아 있었다. 때때로 바위가 굴러 내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어 말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하자 산봉우리가 붉게 물들었다. 세 사람은 그 장엄한 경치에 기운을 얻고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바위 틈에서 샘이 솟아나는 곳에서 세 사람은 휴식을 취하고, 말에게도 물을 마 시게 했다. 그리고 급히 아침 식사를 했다. 루시와 페리어는 조금만 더 쉬고 싶 은 눈치였으나, 호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쯤은 추적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얼마나 빨리 보다 먼곳으로 도주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카슨 시티에 무사히 당도하기만 하면 죽을때까지 편히 쉴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좁은 계곡의 길을 전진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때 적으 로부터 약 50Km는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밤이 되자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가 바람을 막아 줄 곳을 찾아서는 서로 몸을 기대어 체온을 유지하면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나 동이 트기가 무섭게 잠에서 깨어 길을 떠났다. 추격대가 쫓아오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호프는 자기들이 그럭저럭 모르몬 교도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한지 이틀째가 되자 식량이 바닥났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호프는 크게 걱 정을 하지 않았다. 산에는 짐승이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까지 산속에서 장총 한 자루로 목숨을 지탱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높이 1,500m가 넘는 고산 지대에 올라와 있었기에 몹시 추위를 느꼈다. 그래서 양지바른 곳에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페리어 부녀가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불을 지펴 주었다. 그리고 말을 매어 두고는 루시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총을 들고 사냥을 나섰다. 뒤돌아보니, 페리어와 루시가 불옆에 웅크리고 앉았고, 그 뒤에 세마리 의 말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곧 바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 다. 호프는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두세 시간을 돌아다녔으나 단 한 마리의 산짐승 도 만날 수 없었다. 단념하고 돌아가려고 했을때, 문득 위를 바라보니 100M 가량 떨어진 돌출한 바위위에 뿔이 큰 짐승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로키 산양이라고 불리는 야생의 양이었다. 호프는 몸을 낮추어 바위에 총을 올려놓고는 천천히 겨 냥을 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짐승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절벽에서 아래쪽 골짜기 로 굴러떨어졌다. 산양은 너무 커서 지고 갈 수가 없었기에 호프는 뒷다리 쪽과 옆구리 쪽의 살의 일부만을 떼어 갖고 가기로 했다.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어, 산양의 고기를 어께 에 매고는 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일이 어렵게 꼬였음을 알았다. 짐승을 찾는데 정신이 팔려 어느새 길 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이 계곡 저 산등성이를 헤메는 동안 어둠이 밀려와 간신히 눈에 익은 골짜기까지 왔을때는 사방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와서도 아직 달이 뜨지 않아 양쪽의 높은 벼랑으로 인해 어둠이 더욱 짙어져 옳은 길을 찾아가는 것을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끝내는 처음 출발했던 계곡의 입구까지 왔다. 사냥을 떠난 지 벌써 다섯 시간 가까이 지났으므로 페리어와 루시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자기 가 돌아온 것을 한시바삐 알려주기 위해 입에 손을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여봐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들리는 것은 숨은 죽인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메아리쳐 퍼지는 자기의 외침뿐이었다. 다시 한 번 보다 큰 소리로 외쳐 보았으나, 두 사람의 응답은 없었다. 호프는 말할 수 없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고기도 팽게친채 미친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위 모퉁이를 돌아가자 불을 지폈던 장소가 한눈에 보였다. 아직도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쌓여 있는 땔감으로 보아 호프가 떠 나고 나서 그렇게 많은 나무를 지핀 것 같지가 않았다. 호프는 조바심이 나서 허 둥지둥 달려가 보았다. 불씨가 아직 남아 있는 주변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 무것도 없었다. 노인도 그의 딸도 말도 모두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호프 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서운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것이 분명했다. 호프는 이 엄청난 일에 정신이 멍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져 총에 기대어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호프는 한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그는 원래 행동력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서 불씨 를 일으켜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는 주변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땅위에는 많은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많은 추적대가 왔었다는 표시가 틀림 없다. 그렇다면 페리어와 루시를 함께 끌고 간 것일까? 호프는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문득 무엇인가 눈에 띄는 것을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모닥불을 피운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낮에는 볼 수 없었던 흙의 작은 봉우리 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새로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한 자루 나 뭇가지가 꽃혀 있고, 그 끝에 종이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존 페리어 솔트레이크 시티의 주민으로 1860년 8월 4일 죽다 아아, 그렇다면 불과 얼마전에 헤어졌던 그 외곬 노인은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것이 그 분이 묻힌 장소란 말인가! 호프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지 불안한 마 음으로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그렇게 보일 만한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루시는 역시 처음에 정해진 운명에 따라 장로 아들의 많은 아내들 중 하나가 되 기 위해 잔인한 추격대에 납치되어 간 것이 분명했다. 호프는 루시의 가련한 운 명을 깨달았을때 그곳에서 페리어 노인과 더불어 머리를 나란히 하고 영원한 잠 을 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호프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루시를 되찾을 수 없 게 되었다고 해도. 증오스러운 적에게 복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호프는 이 절망 과 슬픔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손으로 적에게 복수를 해줄 수밖에 없 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강한 의지와 꺽일줄 모르는 정력을 이 목적을 위해 받 쳐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호프는 핏기가 가셔진 얼굴로 아까 떨구었던 산양의 고기를 찾아들고 와서는 며 칠 동안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불에 구워 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싸서 간수하고 는 추격대의 흔적을 따라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프는 말을 타고 왔던 골짜기의 길을 이번에는 물집이 생긴 아픈 발을 이끌고 걸어갔다. 밤이 되면 바위 틈에 몸을 의지하고 서너 시간 눈을 붙였다가 동이 트 기 전에 일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6일셉가 되던날 그 운수 사나운 출발을 했던 독수리 계곡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모르몬 교도들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호프는 피로에 지친 몸을 장총에 의지하고 저 아래 널려 있는 거리를 향해 분노 의 눈을 굴렸다. 그때 자세히 살펴보니 광장쪽에 깃발이 나부끼고 어딘지 모르 게 잔치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말을 탄 남자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느 쿠퍼라는 모르몬 교도로서, 지금까지 몇 번인가 호프에게 신세를 진 사람이었다. 호프는 루시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그 를 불러 세웠다. "나는 호프요. 기억하고 있겠소?" 쿠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호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호프는 무덤에 서 기어나온 사람처럼 몰골이 처참한 채 눈만 반짝이고 있었기에 그 젊음이 싱싱 했던 모험가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쿠퍼는 이 남자가 호 프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겁먹은 듯 말했다. "이곳에 나타나다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니요? 당신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누가 보기만 해도, 내 목숨마저 날아갈 판입니다. 당신은 페리어 부녀의 도망을 도왔 다는 죄로 장로 회의에서 체포 영장이 나와 있어요." 호프가 격하게 말했다. "나는 놈들의 체포 영장 같은건 겁나지 않소. 그것보다는 쿠퍼, 당신은 이번일에 관해 아는 일이 많을 것이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걸고라도 조금만이라도 알 려주시오. 나는 당신을 괄시한 일이 없소. 부탁이오." 쿠퍼는 불안한듯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무엇을 알고 싶소? 서둘러야 합니다.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 겁니다." "루시는 어떻게 되었소?" "엊그제 드리버의 아들과 예식을 올렸소.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아, 괜찮아요." 호프는 간신히 말하고는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서 털썩 바위에 주저앉았다. 그리 고 다시 확인을 했다. "결혼을 했다는 거요?" "맞습니다. 그래서 공회당에 축하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겁니다. 하기야, 드리버 의 아들과 스탠거슨의 아들사이에 어느 쪽이 루시를 차지하느냐로 잠시 옥신각 신 말이 있었습니다만, 두사람 모두 추격대에 가담했지만, 스탠거슨이 루시의 아버지를 쏴 죽인 공로로 그 쪽이 유리할 것 같았지요. 하지만 회의를 연 결과 드리버 가문의 권세가 강했으므로 예언자께서는 그 집안에 루시를 주기로 했어 요.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새색시의 얼굴에는 이미 죽을 상이 나타나 있어, 어 느 집 며느리가 되던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넋을 잃은 유령 같았어요. 어라? 어디로 가는 거요?" 호프는 어느틈엔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을 깍아 만든 석상처럼 굳어 있었고, 눈만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내버려 두시오." 그렇게 내뱉은 호프는 총을 고쳐 메고는 독수리 계곡의 가파른 산속을 향해 걸어 가 이윽고 모습을 감추었다. 쿠퍼의 예상은 정확했다. 가련한 루시는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의 충격탓인지 아 니면 저주스러운 결혼을 강요한 탓인지 다시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빼빼 말 라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루시의 남편이 된 술주정뱅이 드리버는 루시를 차지할 욕심의 절반은 페리어의 재산이 목적이었으므로 루시가 죽었어도 태연히 술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오히려 드리버의 아내들이 루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식 전날 밤에는 모르몬 교의 관 습에 따라 밤샘을 해조고 있었다. 모두가 루시의 관을 둘러싸고 그럭저럭 새벽을 맞이하려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더기를 입고 비바람에 시달린 인디언과도 같은 남자가 방안에 들어섰다. 여인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멍하니 넋을 잃고 겁에 질려 있 었다. 남자는 겁먹은 여자들을 본 체도 않고 성큼성큼 루시의 시체 옆으로 갔다. 그리 고 허리를 굽혀 루시의 그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눈물이 루시의 백지장 같은 이마에 떨어졌다. 남자는 천천히 죽은 애인의 손을 잡아, 그 갸름한 손가락에 끼어 있던 결혼 반지를 빼어 들었다. "이 더러운 반지를 낀 채 땅에 묻힐 수는 없지!" 그렇게 외치고는 급히 방을 나서서 계단을 뛰어내려 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몇 달동안 호프는 산속에 숨어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호시탐탐 복수 의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한번은 스탠거슨의 집 창문이 박살나며 총탄이 날 아들어와 스탠거슨의 귀를 스치고 탄환이 벽에 박힌 퀮리이 있었다. 또 어떤때 는 드리가 벼랑 밑을 지나가는데 바위가 굴러떨어져 하마터면 깔려 죽을뻔한 일 도 있었다. 두 사람의 모르몬 교도 청년은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 하여 대규모의 수색대를 동원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를 잡거나 사살하려 고 산 속을 샅샅히 뒤졌으나 그 때마다 실패를 했다. 그러자 더욱 조심스러워져서 혼자 나돌아다니거나 밤 외출은 하지 않게 되고, 집 주위에는 파수보는 사람을 세워 경계를 하게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호프의 출몰이 없어지고 그를 보았다는 소문도 차츰 없어 져서, 그가 산속에서 굶어 죽었거나 복수를 단념하고 먼 곳으로 떠난 것으로 생 각하며 마음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호프의 복수심은 희미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평생의 비원으로서 더욱 굳고 끈끈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원래 호프는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어서 무한정 산속에 숨어 적을 노리고 있다가 는 자신의 몸이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노숙을 하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 하지 못하고 보니 건강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계절은 추운 겨울을 예 고하고 있었으며, 산 속의 겨울은 빨랐다. 만일 그대로 산 속에 머물러 들개처럼 병들어 죽는다면 복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그야말로 그것은 적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선 체력을 회복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춘 다음에 복수를 성취하기 위해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근거지인 네바다주의 광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예정으로는 1년가량 준비할 생각이었으나 뜻하지 않은 사정이 겹쳐 5년가량이나 네바다 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났다 해서 원한이나 복수심이 조 금도 사르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복수를 끝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은 아무래도 좋다는 결심을 굳히 고 이름을 바꾸어 솔트레이크 시티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호프에게 반갑 지 않은 사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언자가 죽고 교회의 장로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모르몬 교도의 절반이 솔트레이크 시티를 떠난 것이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 중에 드리버와 스탠거슨도 들어 있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행 방을 몰랐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드리버는 대부분의 재산을 현금으로 바꾸어 떠났으나 그의 친구인 스탠거슨은 극히 가난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손거나 아무 라 수소문해 봐도 그들의 거처는 알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아무리 집념이 강한 사람이라도 복수를 포기 하는것이 당연했으나, 호프는 조금도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허드렛일을 해가면 서 미국의 곳곳을 찾아다녔다. 해는 자꾸 바뀌어서 호프의 머리에도 흰 머리가 늘어갔지만, 평생을 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냥개처럼 적의 흔적을 찾아 내려고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마 침내 그 끈기를 보상받을 수 있는 날이 왔다. 창 너머로 얼핏 보았지만 찾고 있 던 인물이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의 어느 주택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았던 것 이다. 호프는 복수의 계획을 세밀히 짜기 위해. 그 날은 일단 초라한 여인숙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드리버 역시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 모 양의 호프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곧 자기의 비서가 된 스탠거슨을 데리고 치안 판사에게 가서, 옛사랑의 라이벌이 질투와 증오심으로 자기들의 목숨을 노 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 날 밤으로 호프는 경찰에 연행되어 갔으나, 보증인이 없었기에 몇 주일 동안이나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석방되고 보니 이미 드리버의 집은 텅 비고, 드리버와 스탠거슨은 함께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것 을 알았다. 이렇게해서 호프는 다시 한번 기만당했으나, 더욱 증오심을 불태워 그들의 뒤를 쫓을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유럽으로 갈 여비가 없었기에. 그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저축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목돈이 마련되자 유럽으로 건너가 다시 천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도시에서 도시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런던에서 그들을 만나 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일이 어떻게 일어났느냐에 대해서는 제 1장에 실은 와트슨 박사의 수 기에 이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인용하기로 한다. .. 13. 와트슨 박사의 회고록 .. 우리들에게 붙잡힌 남자, 즉 제퍼슨 호프는 심하게 저항했으나 만사가 틀렸다고 체념하며 평온한 미소를 띠고서 우리에게 물었다. "한바탕 격투로 다친곳은 없습니까?" 그리고 홈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를 경찰에 데려가려면 밖의 마차를 쓰시오. 발의 밧줄을 풀어 주시면, 내 발 로 걸어 내려 가겠소. 옛날과 달리 뚱뚱해져서 나를 떠메고 내려갈려면 힘들 게 요." 그레그슨과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건방진 소리라고 생각한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으나 홈즈는 곧 발목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호프는 일어서서, 다리가 과연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확인이나 하듯 이리저리 뻗 어 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골격이 잘 갖추어진 남자도 드물것이라 고 생각했다. 햇볕에 탄 그의 얼굴 역시, 그 체격과 어울릴 정도로 힘찬 결의에 차 있었다. 호프는 탄복했다는 듯이 홈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찰서장 자리가 비어있다면, 당신이야말로 제격입니다. 나를 찾아내어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한 솜씨는 일품이었소." 홈즈는 못 들은 체 하고 경감에게 말을 걸었다. "자, 범인을 연행하시지요." 레스트레이드가 말했다. "내가 천상 마부 노릇을 해야 되겠는걸...." "그래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와트슨 자네도 함께 가세나. 자네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지켜 봐야지." 나는 기꺼이 따라가기로 하고 모두는 계단을 내려갔다. 호프는 도망갈 기색도 없 이 조용히 자기 마차에 올라타고 우리가 그 뒤를 이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능숙하게 마차를 몰앙 곧 경시청에 도착했다. 우리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한 경감이 용의자와 살해된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했다. 그 경감은 얼굴이 유난히 흰 사람으로, 감정을 모르는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치안 판사의 취조는 금주 안으로 시작될 것이오. 그런데. 제퍼슨 호프, 그전에 무엇인가 해둘 말은 없소? 미리 말해 두지만 당신이 하는 말은 모두 기록되어 불리한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호프는 여유있게 말했다.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에게 남김없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경감이 물었다. "재판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는 재판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놀라실 건 없습니다. 도망가거나 자 살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호프는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을 나에게 돌렸다. "당신은 의사 아닌가요?" "맞소. 나는 의사라오." "그럼 여기를 만져 보시지요." 호프는 그렇게 말하고 웃음을 띠면서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가리 켰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 고 있는 것을 느끼고 놀랐다. "이거 큰일이군! 대동맥이 엉망이 되어 있소!" 호프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합디다. 지난주에 의사에게 보였더니 가까운 시일 내에 혈관이 터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몇년 동안 크게 나빠졌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어 요. 솔트레이크 시티의 뒷산에서 노숙을 하며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탈이 난 겁니다. 하지만 내 일은 끝났으니까 언제 죽어도 좋습니다만, 이 사건 의 내막이나 모두 털어놓고 싶은 생각입니다. 그저 그런 살인자로 간주되는 것 이 싫어서요." 경감이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에서 이 용의자의 진술서를 작성해 두어야 될 것으로 봅니다. 죽 고 나면 범인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낼 수 없는 일이니까. 자. 호프, 이야기를 하 시오." 호프는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앉겠습니다. 동맥이 얇아져서 그런지, 쉽게 피로를 느낍니다. 더구나 아까의 격 투로 현기증마저 느낍니다그려. 하여간, 나는 관 속에 발 한쪽을 들어 놓은 거 나 마찬가지라. 결코 거짓이 없다는 것만은 알아주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호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호프는 극히 대범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감이 일일히 필기해 둔 것을 참고했기에 다음 이야기가 정확하다는것을 보증할 수 있다. "내가 왜 그 두 인간을 증오했느냐 하면, 그 자들은 무력한 노인과 여인을 죽인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법정에 끌고 간들 그들의 죄값을 치르게 할 수 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이 판사와 배심원을 겸하고, 동시에 사형 집행까지 시행하는 세 가지 역할을 도맡기 로 결심한 거지요. 당신들도 정의를 아는 사람들로서, 내 입장에 있었다면 능히 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그 아가씨는 20년전에 나와 결혼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 습니다. 그런데 그 사악한 드리버에게 결혼을 강요당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죽은 거지요. 나는 그녀의 시체에서 그 불결한 결혼 반지를 빼내어, 드리버의 숨이 끊 길때 어떤 죄값의 보상으로 죽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주리라고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반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두 대륙을 헤맨 끝에 그 자와 그의 공범자 를 찾아냈습니다. 나느 내일쯤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을 끝 냈기에 안심하고 죽을수가 있습니다. 놈들은 돈이 많고 나는 가진게 없었으므로 그들을 뒤쫓기가 힘들었습니다. 런던 까지 왔을 때는, 주머니가 텅 비어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도 일거리를 찾 아야 했습니다. 마차를 몰거나 말을 다루는 일에는 능했으므로 영업용 마차 조합 에 부탁했더니 곧 써 주더군요. 그리고 매주 일정한 금액만 조합에 내면 나머지 는 내 수입이므로, 많은 수입은 아니지만 먹고 살 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차 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지리를 익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 를 갖고 다니면 목표가 되는 역이나 호텔등이 있는 곳을 알아둔 뒤로는 한결 수 월했습니다. 두 원수의 거처를 알아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 다.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 헤맨 결과 강 건너 캠버웰 구의 하숙집 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일단 발견한 이상, 뒷일은 나에게 달려 있었 습니다. 나는 수염을 무성하게 길렀으므로 그들이 나를 알아 볼 수는 없었지요. 매일처럼 그들의 뒤를 밟으며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런데 놈들도 신중을 기했습니다. 혹시 미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는지, 결코 혼자서는 외출을 하지 않았고, 밤에는 여간해서 나돌아다니려고 하 지 않았습니다. 나는 2주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뒤를 쫓았으나, 둘은 한번 도 떨어진 일이 없었지요. 드리버라는 놈은 늘 술에 취해 있었으나, 스탠거슨은 빈틈이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노리고 다녔지만, 기회는 여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회는 온다고 믿고 있었기에 조바심은 나지 않았습 니다. 언제 혈관이 터져 복수도 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이었습 니다. 마침내 어느날 밤, 내가 놈들이 하숙하고 있는 토키 테라스 지역의 거리 를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마차 한 대가 그 하숙집 앞에 멎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부가 짐을 내와 싣더니, 조금 뒤에 드리버와 스탠거슨이 나타나서 마차 를 타고 어디론가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곧 말을 달려 뒤를 밟았습니다. 아무래도 먼 곳으로 떠나는 것 같아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그들은 유스턴 역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급히 말을 매어 놓고 뒤 를 바짝 따랐습니다. 그들은 역 직원에게 다가가더군요. '리버풀행 열차가 지금 있소?' 역원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지금 막 떠났으니 다음 차를 타셔야 합니다.' 스탠거슨은 낙담이 큰 듯 말했습니다. '그거 큰일인걸. 조금만 서둘렀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드리버는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인파에 섞여 그들 등뒤에 바짝 다가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빠짐없이 엿들었습니다. 드리버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볼 일이 남았으니 이 곳에서 기다려 주게. 곧 돌아올테니까.' 그러자 스탠거슨이 따지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함께 다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드리버가 단호한 태도로 대꾸했습니다. '이거 내 사사로운 일이니까 함께 갈 수 없네.' 그말에 스탠거슨이 뭐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드리버가 버럭 화를 내 더군요. '자네는 내가 고용한 신분이야. 건방지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말라고.' 스탠거슨은 그 말에 기가 꺽이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막차가 떠날 때까지 올 수 없다면 할리데이스 호텔에서 기다리겠네.' 드리버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1시가 넘으면 할리데이스 호텔로 가겠네.' 그리고는 휑하니 역에서 나갔습니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무르익어 가는 판이었습니다. 놈은 이제 내 수중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둘이 함께라면 공동 전선을 펴고 대항해 오겠지만, 혼자라면 꼼짝도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서두룰 일도 아닌것이 나에게는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겁니 다. 그 악당들로 하여금 왜 자기가 죽게 되는가, 어떤 죄로 그 보복을 받는가를 충분히 음미할 분위기가 아니고는 복수의 진가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찔러 죽여서는 아까운 일이었던 겁니다.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만 브릭스턴 로의 빈집을 보러 갔던 손님이 우연히도 열 쇠를 마차에 잃어버리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튿날 열쇠를 찾으로 조합으로 왔기에 곧 돌려 주기는 했지만 나는 그 본을 떠서 또 하나의 열쇠를 만들어 두었 지요. 그렇게 해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아도 될 장소를 이 대도시 속에 마련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다만, 어떻게 드리버를 그 집으로 끌어들이느냐가 문제로 남아 있었지요. 드리버는 길을 어슬렁거리고 걸어가면서 이 집 저 집 술집에 들르더니, 마지막 집에서는 30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그때 그의 걸음걸이로 보아 상당히 취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 앞에 서 있는 마차에 탔습니다. 나는 곧 그 마 차를 따라갔지요. 워털루 다리를 건너 몇 Km를 가더니 놈은 놀랍게도 토키 테라 스 지역의 그 하숙집 앞에서 내렸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다시 그 하숙집으로 돌 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근처에 마차를 세우고 놈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지요. 아, 죄송하지만 물 한 컵 마실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목이 마른군 요." 내가 물을 따라 건네주니 호프는 맛있게 컵을 비웠다. "아, 시원하군! 나는 그곳에서 15분가량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 안에서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남자가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드리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청년이었습니 다. 청년을 드리버의 뒷덜미를 끌고 나오더니, 계단 위에서 냅다 팽게치더군요. 놈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몽둥이를 치겨 들고 소리질렀습 니다. '개만도 못한 인간! 다시 한 번 이근처에 얼씬했다가는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테 다!' 드리버는 발 하나를 절룩거리며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그리고는 내 마차를 보 고는 집어타더니. '할리데이비스 호텔로 갑시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놈이 마차에 올라타자, 기쁨에 넘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러다가 혈관 이 파열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도리 정도였으니까요. 하여간 나는 마차를 몰며 독 안에 든 쥐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궁리해 보았습 니다. 물론,으슥한 골목이나 시골길로 끌고 들어가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놈은 스스로의 갈 길을 정해 주었습니다. 술을 더 마시고 싶었던 모양인지, 어느 술집 앞에서 마차를 세우고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나온 그 자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를 참혹하게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무렇게 죽여도 죄의 보답 이 되겠지만, 상대방이 무릎을 끓고 눈물로 죄를 뉘우친다면 살려주지 않을 수도 없겠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한편, 나는 미국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었는데 한번은 요크 대학 실험실의 청소 부 노릇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가 독물학 강의를 하면서 알칼로이 드라는 것을 학생에게 보인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토인들이 화살에 발 라 쓰는 것으로, 극히 작은 양으로도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맹독이라고 했습 니다.나는 그 약이 들어있는 약병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아무도 없을 때 그것을 조금 들어냈습니다. 또한 나는륚 웬만한 조제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 알칼로이 드를 섞어 물에 잘 녹는 투명한 환약을 몇 개 만들고 독을 넣지 않은 똑같은 환 약도 만들어 각기 짝을 지어 작은 상자에 넣어 간수했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상대방에게 상자 속의 한 알을 선택하게 하고 남은 것을 내 가 입에 넣을 생각이었습니다. 그 방법이라면 권총을 수건에 싸서 발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면서도 조용히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뒤로는 늘 환약 상자를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마침내 그것을 사용할 샔 가 온 겁니다. 시각은 한밤중으로 그럭저럭 1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리는 쓸쓸한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거리는 음산했으나, 내 마음 속은 밝 았습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도록 기뻤습니다. 20년이나 기다리고 기다 리던 기회가 드디어 오고야 말았던 거지요.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잎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어 봤지만, 손끝이 떨 리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밤하 늘에서 페리어 노인과 목숨처럼 사랑했던 루시의 얼굴이 나타나, 웃는 얼굴로 나 르 바라보고 있는 착각을 느꼈습니다. 브릭스턴 로의 빈집에 다다랐을때, 주위에는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비가 뿌리는 소리밖에는 온 천지가 조용했습니다.드리버는 곯아 떨어진 채 마차 한구석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팔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처음 손을 대 보는 원수의 육체였습니다. '자, 내리십시오.' '아, 다 왔나?' 놈은 호텔에 도착한 것으로 알았을 겁니다. 나는 그를 도와 마차에서 내리게 하 고 계속 부축해서 현관쪽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현관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간신히 몸을 가누며 말했습니다. '되게 어둡군 그래.' '곧 밝아집니다.'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갖고 온 양초에 불을 붙여 손에 들고는 그 자를 향해서 돌 아서서 내 얼굴을 비쳐 보이며 물었습니다. '이봐, 드리버. 내가 누구같은가?' 그 자를 잠시 흐리멍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면 얼 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습니다. 나를 알아본겁니다. 드리버는 흙빛이 된 얼굴을 하고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습니다. 이마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위아래 이를 덜 덜 소리가 나도록 떨고 있었습니다.나는 문을 등지고 서서 드리버의 공포에 일그 러진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습니다. 복수라는 것이 이렇게도 통쾌한 것인지 짜릿 한 쾌감이 온몸을 뒤흔들었던 겁니다.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아.나는 네놈을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유럽까지 뒤쫓아다 녔지만, 번번히 골탕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도망쳐 다니지 않아도 된다. 네놈이나 나나 어느쪽인가는 내일의 태양을 우러러 볼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내 말에 그자는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표정에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 는 미치광이를 대하는 듯한 두려움이 어려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미친듯 흥 분해서 정수리의 동맥이 망치질을 하듯 뛰고 있었습니다. 그때 코피가 터지지 않 았으면 그 혈압으로 혈관이 터졌을 겁니다. 코피는 마루바닥에 자꾸 떨어졌습니 다. 나는 문에 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놈의 코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이기죽거 렸습니다. '어때, 불쌍하게 죽어간 루시 생각이 나나? 네놈에게 천벌이 내려지는 것이 꽤 늦어졌지만, 바로 오늘밤이 그 날이라는 것을 알고나 죽으라고.' 드리버는 입술을 떨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는 그만두더군요. 용서를 빌 어 보고 싶었지만, 허사라는 것을 안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더듬더듬거리면 간신히 말했습니다. '나를 죽일 셈인가?' 나는 대답했습니다. '네놈은 페리어를 죽이고 나의 루시를 끌어가 추악한 첩으로 삼아 말라 죽게 했 다. 그러고도 너는 살겠다는 건가?' 드리버가 외쳤습니다. '페리어를 죽인건 내가 아니다.' 나는 환약이 든 상자를 그자의 눈앞에 바짝 들이댔습니다. '하여간 루시의 마음을 짓밟아 죽인건 너다. 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느쪽이 옳 은가를 가려내시게 하지. 원하는 쪽을 집어라! 하나에는 독이 들어 있고, 하나 는 아무렇지도 않다. 네놈이 선택한 나머지를 내가 먹는다. 이 세상이 정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지 아니면 우연으로 지배되고 있는지를 이것으로 시험해 보는거다.' 그자는 겁이 나서 아우성을 치며 살려 달라고 애원도 했지만 나는 단도를 그자의 목에 들이대고 끝내 환약 중 하나를 먹게 하고, 동시에 나도 나머지를 먹었습니 다. 그리고는 어느 쪽이 죽고 어느쪽이 살아남는가를 지켜 보기 위해 1분가량 말 없이 마주서 있었습니다. 곧 드리버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독이 든 환약을 먹은 것 을 알았습니다. 그때의 그자의 절망에 찬 얼굴은 볼 만했습니다. 나는 회심의 미 소를 지으며 놈의 눈앞에 루시의 결혼반지를 들이댔습니다. 알칼로이드의 작용은 신속하더군요. 드리버는 격심한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지 고 비틀거리며 허공을 잡더니 목에서 짜내는 듯한 낮은 비명을 지르고는 쓰러져 심장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발로 엎어진 그자의 몸을 젖혀 놓고, 심장에 손을 대어 보았습니다. 심장의 박동이 멎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에도 계속 코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문득 그 피로 벽에 글씨를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려운 싸움에서 이긴 용사가 개가를 올리고 싶은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요. 마음 한구석에는 경찰을 놀려 주고 싶은 장난기 같은 것도 있었고요. 옛날 뉴욕에서 독일인이 살해된 일이 있었는데 그 시체 위에 "RACHE (복수)' 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혹시 비밀 단체의 소행이 아닌가 신문에서 떠들어 대던 일이 생각났던 겁니다. 그때 뉴욕 시민들이 호기심으로 들떴던 것으로 보 아, 런던 사람들도 흥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되어, 손가락에 코피를 묻혀 벽에 그 것을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차로 되돌아갔습니다. 거리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참 마차를 달리다가 문득 생각이 나 서 루시의 반지를 찾아보니, 주머니에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유품이라고는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드리버의 시체 위에 허리를 구부렸을때 그것을 떨어뜨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다시 돌아 가 멀찌감치 마차를 세워두고 그 빈집으로 다가갔습니다. 반지를 되찾기 위해서 는 모험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에서 달려나온 경관과 거의 마주칠 뻔 했지요. 나는 순간적을 술주정뱅이로 가장해서 그곳을 피해 달아났습 니다. 이상이 드리버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나머지는 스탠거슨에게도 같은 벌을 내려, 페리어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이었습니 다. 그 자는 할리데이비스 호텔에 묵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하루 종일 망 을 보았으나 나오지를 않더군요. 아마도 드리버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눈치를 챈 모양이었습니다/ 실제로 스탠거슨이라는 놈은 생쥐처럼 눈치가 빨라서 한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 었습니다. 하지만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琴 다면 오산이었지요. 나는 놈의 방을 알아내여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호텔 뒷골목으로 가서 거기에 뉘어 놓았던 사다리를 타고 그자의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것을 흔드 러 깨웠습니다. '네놈은 페리어를 죽인 죄의 보답을 받을 때가 온 것이다.'하고 일러 주고. 드리 버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너도 이 환약 중의 하나를 택하라.' 하고 약상자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운이 좋았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고 침대에서 뛰어 내리더니 나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자의 심장을 찔렀지요. 그자가 환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죄진 자로 하여금 독약을 집 게 했을 테니까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요. 이야기는 대충 이상과 같습니다. 이제 몸이 몹시 나른하군요. 어솔거나 나는 미국에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계속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차 조합에 나갔더니 거지 차림을 한 아이가 나에게로 와서. '베이커 가 221번지 B호에서 마차가 필요하답니다.'하고 나를 택하길래, 함께 그 리고 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내가 출근하기 전에 내 이름을 수 소문해 놓았던 모양입니다. 어솔거나, 나는 별 의심도 하지 않고 그곳에 가서는 짐싸는것을 거들려고 했는데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던 저 양반의 날쌘 솜씨는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이상으로 내 이야기는 끝입니다.나를 잔인한 살인자로 생 각할지는 모르나 내딴에는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해 죄인을 벌한 것으로 생각할 뿐, 후회는 없습니다." 호프의 이야기는 실로 기기 묘묘했기에, 호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아무도 기침 한 번 하지 않았다. 범죄에 관한 이야기라면 매일처럼 듣고 보고 하는 경감 들도 호프의 이야기에는 상당한 감동을 받은것 같았다. 호프이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방안은 물 속처럼 조용했다. 속기를 마무리짓 는 연필 움직이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릴뿐이었다. 홈즈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알고 싶은게 있는데, 신문광고를 보고 내 하숙집으로 반지를 받으러 온 노파로 변장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 질문에 호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 관한 비밀이라면 이야기하겠습니다만, 나를 도와준 선의의 사람에게까지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연간, 나는 그 신문 광고를 보고 그것이 덫인 지 아니면 정말 누가 우연히 그 반지를 주운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자기가 가보겠다고 하더군요. 어떻습니까, 그 친구 멋지게 변 장했지요? 그는 내가 런던에서 사귀었고 나의 한을 이야기해 주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만 말해 두겠습니다." 홈즈는 더 이상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당직 경감이 말했다. "그럼. 여러분. 목요일에는 판사가 이 용의자를 취조하게 되니까, 그때 다시 한 번 나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책임을 지고 이 사람의 신병을 인수해 두겠습니다." 경감의 지시로 호프는 두사람의 간수에 이끌려 나갔다. 홈즈와 나는 까닭도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경시청을 나와, 베이커가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 14. 결말 .. 우리들은 목요일에 출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프는 체포 된 그날 밤 동맥이 파열되어 아침이 되자, 독방의 마룻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 던 것이다. 복수를 끝내고 한을 풀어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감돌 고 있었다. 홈즈가 말했다. "그래그슨과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실망이 크겠는걸. 호프가 죽은 이상, 자기들의 공로를 선전할 기회를 잃은 것이 되니까 말일세." "그 두 수사관이 이 번 사건 해결에 공로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내말에 홈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얼마만큼 일했느냐가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닐세. 문제는 얼마만큼의 일을 했노라고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일이지. 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려면 어떤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다시 쾌활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은 단순하기는 했지만 무척 감동적이었네." "단순했다고?" 나는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홈즈는 웃으며 말했다. "단순했다는 말은, 약간의 추리로 크게 수고한 일 없이 3일만에 범인을 체포했다 는 뜻일세." "그건 그렇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특이하다는 것은 단서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방해가 되지 는 않네. 이러한 문제를 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거꾸로 추리해 들어갈 수가 있 느냐는 점이지. 이것은 대단히 효험이 있는 방법이자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세 상 사람들은 별로 이 방법을 이용하지 않아. 일상 생활에서는 앞을 향해 추리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거꾸로 추리해 보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쉬운 걸세.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종합적 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50이라면 분 석적으로 추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꼴이나 될까." "자네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군." "그럴까? 어떻게 이야기하면 알아듣기 쉬울까? 대두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에 관 해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에서 다음에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마음속에 종합해 보고, 이런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추리를 하네. 그러나 어느 하나의 결과를 보고,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단 계가 있었는가를 논리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말하는 역추리다, 분석적 추리다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일세." "알겠네." "그런데 이번 일은 결과만 주어졌을뿐 나머지는 모두 이 쪽에서 두드려 맞추어야 하는 사건이었네. 그래서 내가 추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단계를 밟아 올라갔느 냐를 설명해 줌세.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멀찌감치에서 마차를 내려, 그 빈 집으로 걸어서 들어갔지. 즉, 수사는 도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네. 거기에는 마차 바퀴가 뚜렷이 남아 있었지.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그것은 틀림없이 밤 사 이에 다녀간 것으로 결론을 내렸네. 그리고 바퀴사이가 좁은 것으로 보아 자가 용 마차가 아니고 영업용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지. 런던 시내의 영업용 마차 느 유난히 폭이 좁거든. 그것이 최초의 단서였네. 다음엔 마당의 흙길을 세심히 살펴 봤는데, 그곳의 흙은 발자국이 남기 좋은 찰흙이더군. 물론, 자네 눈으로는 마구 짓밟힌 진흙길로 보였겠지만 훈련된 내 눈으로 보면 발자국 하나하나가 의 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네. 탐정학에서는 발자국을 조사하는 기술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기술 은 극히 경시당하기가 일쑤지. 다행히 나는 그 중요성을 알고, 평상시부터 훈련 을 쌓아 두었네. 경관들의 구두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나, 경관보다 먼 저 거기를 걸어간 두 사람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더군. 먼저 걸어간 사람 의 발자국을 나중 사람의 발자국으로부터 가려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네. 두 사람 의 발자국은 여기저기에 경관들의 발자국으로 밟혀 있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두번째의 사실을 알았네. 즉, 밤 사이에 빈 집에 들른 것은 두 사람 으로 그 중의 한 사람은 키가 크다는것, 그것은 걸음 폭으로 계산해 낼 수가 있 었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보다 작고, 값비싼 장화의 구두 발자국으로 보아 돈푼깨나 있는 사람이란것을 알았네. 이 추리는 방에 들어가 보고서 곧 증명되었네. 값진 에나멜 구두를 신은 남자가 그곳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이 살인사건이라고 가정하면, 키가 큰 남자가 범인으로 남게 되지 않겠는가. 시체를 보니 상처는 없었지만 얼굴에 두려움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알고 죽은 것이 분명했 네. 심장 마비등, 갑작스런 병으로 죽는 사람의 얼굴에는 겁먹은 표정이 나타나 지 않는 걸세. 그래서 시체의 입 냄새를 맡아보니 희미하지만 신 냄세가 나더군. 그래서 이 사람은 독을 강제로 먹어야 할 판국에 몰려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네. 무리하게 먹어야 했다는것은, 얼굴에 떠오른 증오와 공포의 그림자로도 추리할 수가 있었네. 자, 다음은 살인의 동기가 무엇이었느냐가 큰 문제가 되네. 아무것도 빼앗긴 거 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둑의 소행은 아니었지. 그렇다면 정치적인 암살이냐, 여 성관계의 원한이냐? 나는 처음부터 여성 관계로 보았네. 정치 관계의 암살자라면 가능한 한 신속히 일을 해치우고 현장을 떠나는 것이 보 통일세. 그런데도 범인은 상당히 공을 들이고 시간을 끌었더군. 범인의 발자국이 방안 여기저기서 많이 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처럼 말이 많은 사건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원한관계라는 것이 상례 일세. 더구나 벽에 쓴 글씨가 발견되고부터는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 네. 벽의 글씨가 수사를 혼란시키려는 장난이라는 것은 훤히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네. 거기에 여자의 반지가 나타나, 내 머릿속에는 일단 사건이 해결된거 나 다름이 없었네. 범인은 그 반지를 보여 줌으로써, 죽은자에게 그 여인을 생각 나게 했을 것으로 판단을 했지. 이 단계에서 나는 그레그슨에게. '클리블랜드로 친 전보에서 드리버의 과거 경력상 뭐 특별한것을 조회하지 않았 습니까?' 하고 물어봤지. 그러나 자네도 들었다시피 그레그슨은, '그런 말은 물어보지 않았소.'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서 나는 방안을 면밀히 조사했고 그 결과 범인의 키가 크다는 것이 더 욱 확실해 졌으며, 그 밖에 트리치노폴리라는 싸구려 담배를 피운다는 것과 자주 손톱을 못 깍아 손톱이 길다는 것도 알았네. 그리고 바닥에 흐른 피는 방안에서 격투를 벌인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범인이 흥분한 나머지 코피가 터진 것으로 생각을 했네. 방바닥을 조사해 보니, 피가 흐른 자국은 범인의 발자국에 밟혀 있 었네. 그러나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코피를 흘렸다는 것은 어지간 히 괄괄한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좀 비약을 했네만, 범 인은 얼굴에 피가 많이 오른 불그스레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가정이 용케도 들어맞았지 뭔가. 나는 범행 현장을 나와서 클리블랜드 시 경찰서장 앞으로 전보를 쳤는데. 질문사 항은 드리버의 결혼 관계만을 조회한 것일세. 답장은 결정적이었는데, 그 내용은 드리버가 클리블랜드시에 거주할 때 제퍼슨 호프라는 옛사랑의 라이벌을 두려워 하여 보호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는 것과 호프가 석방되기에 앞서 드리버는 유럽 으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호프라는 사람도 그 뒤를 쫓아 유럽으로 간 것으로 생 각된다는 내용이었네. 나는 그것으로 사건을 풀 열쇠는 손에 쥐었다고 믿었네. 나머지는 범인을 찾아내는 일뿐이었지.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네. 드리버와 그 빈집에 들어간 것을 마차의 마부일 것으로 나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 네. 길의 말발굽 자국과 마차 바퀴 자국으로 보아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는데 마부가 피살자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네. 가령, 범인이 달리 또 있어다면, 문간에 세워둔 마차에 마부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뜸을 들인 살인을 할 수 가 있었을까? 언제 비명을 지를지 모르는 희생자 를 앞에 두고 말이세.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런던 시내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 자면 영업용 마부가 되는 길이 가장 빠르지. 나는 그러한 요소를 종합한 끝에, 제퍼슨 호프는 마부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 라고 생각을 굳혔던 것이라네. 어쨌거나 호프가 범행당시 마부였다면 쉽게 그 일 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네. 먹고 살 방도도 그렇거니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도 의심을 사기 쉬우니까 당분간은 마부일을 계속 할 것으로 보았 던 것일세. 물론 가명을 쓸 우려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조합에 서 그태여 본명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더군. 그래서 나는 그 꼬마들을 동원해서 런던 시내 여러 마차 조합을 뒤져 제퍼슨 호 프라는 이름의 마부를 찾게 했는데 꼬마들은 그 임무를 훌륭히 해내 주었던 거 네. 한편 호프가 스탠거슨을 단도로 찔러 죽인 일은 뜻밖이었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약을 먹일 계제가 아니었더군. 자, 이걸로 어느정도 자네의 궁금증이 풀렸다면 다행일세." 나는 넋을 잃고 외쳤다. "훌륭하네! 자네의 그 공로는 세상에 알려져야 마땅하다고, 부디 이번 사건의 기 록을 발표하게. 자네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면 내가 대신하겠네." "좋도록 하게나 그런데 우선 이거나 읽어 보게." 그렇게 말하며 홈즈는 신문 한 장을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 날의 에코 지로서, 홈즈가 가리킨 난에는 다음과 같이 논평이 실려 있 었다. 이녹 드리버씨와 조셉 스탠거슨씨의 살해 사건 용의자 호프가 갑자기 죽음으로 써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서 사건의 보다 구체적인 내막 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나. 정통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범죄의 그늘 에는 사랑과 모르몬 교에 얽힌 해묵은 원한이 숨어 있다고 한다. 피살자는 둘 다 청년 시절 모르몬 교도였으며. 급사한 용의자 호프 역시 모르몬 교의 본고장 인 솔트레이크 시티 출신이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에 의해 우리나라 경찰의 수 사력이 뛰어난 것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범인이 단시일내에 검거된 것은, 오 로지 경시청의 명수사관 레스트레이드와 그레그슨 두 경감에게 힘입은 바 크다 고 할 수 밖에 없다. 범인은 셜록 홈즈라고 하는 사람의 하숙집에서 검거된 모 양이나, 홈즈라는 인물도 이번 사건의 수사에 얼마간의 협조를 한 모양이어서, 두 경감의 지도를 받으면 얼마 안 있어 적지 않은 수사 기술을 익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두 경감에 대해서는 그 공적을 표창하는 의미에서 각별한 조치가 있어 마땅할 것이다. 홈즈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피의 문자의 수수께끼를 푼 공로는 남의 것이 된다고 말하지 않던가 말일세." 내가 대꾸했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일기에 적어 두었 으니까 언제고 세상에 발표할 걸세. 그때까지 자넨, 이 사건을 해결한 것은 홈 즈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게나." 으아아아아아아아악~~~~ ^^; 드디어 끝났습니다.. 에공~ 손이 마비뻍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