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금고실 1. 도망친 아내. "홈즈 웬일인가? 오늘 아침엔 몹시 풀이 죽어 있으니 말이야." 7월 어느날 아침. 내가 하숙집에 들렀을 때, 홈즈는 창가의 의자에 걸터앉아 파이프를 입에 물고 멍청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여어, 와트슨. 어서 오게. 사실 요즈음은 흥미있는 사건이 통 없어 맥이 빠져 있는 중이야." "사건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냐, 있긴 있어. 오늘 아침 일찍 에식스주의 시골에 살고 있는 한 노인이 도망친 아내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전화로 부탁해 왔어." "뭐, 아내가 도망갔다고? 그까짓 일이라면 그 고장 경찰에 부탁해서 찾으면 되잖아?" "응,나도 그렇게 권했지만. 노인은 아주 고집이 세단 말이야. 경찰에도 알렸지만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꼭 나더러 에식스주까지 와서 조사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맡았나?" "응, 하는 수 없이 맡기로 했지. 조오지아 앰빌레이라는 61살의 노인인데, 곧 이리로 올 거야. 만약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막 결혼한 남편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의뢰해 왔으면, 나는 기꺼이 맡았을 거야. 그런데 61살이나 된 노인의 부탁이라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 "하하. 맞았어. 자네가 맥이 빠진 까닭을 이제야 알겠군." 내가 웃으면서 말했을때, 문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흠, 찾아오셨군, 와트슨. 미안하지만 문 좀 열어 주지 않겠나?" "좋아."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 문을 열자, 낡은 중산모에 빛바랜 프록코트를 입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얼굴이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데다 등이 굽고, 굵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습니다. "앰빌레이씨죠?" 내가 묻자, 노인은 쑥 들어간 눈으로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며, "댁은 뉘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저는 와트슨이라는 의사로서, 홈즈의 친구죠." "아아, 당신의 와트슨 선생이었소? 이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홈즈씨의 모험담을 기록하고 계신 분이죠? 당신의 작품을 늘 애독하고 있소." "감사합니다. 홈즈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층으로 올라가시죠." 노인은 먼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지,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오른발을 끌듯이 절고 있었습니다. 홈즈는 언제나처럼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습니다. 방문자의 모습을 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앰빌레이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앉으시죠." 홈즈가 맞은편 의자를 권하자, 노인은 다리를 거북하게 움직이며 지친 듯이 의자에 앉았습니다. 나는 홈즈의 옆에 서서 가만히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70살이 훨씬 넘고 생활에 지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저분한 잿빛 머리카락이 귀를 덮었고, 얼굴은 온통 쪼글쪼글하게 주름이 잡혀 꼭 '말라 비틀어진 감자'와 같았습니다. "앰빌레이씨, 오늘 아침 전화로 부인이 집을 뛰쳐 나갔다고 하셨죠? 실례지만 부인은 몇 살입니까?" 홈즈가 물었습니다. "만 26살이 지난 지 얼마 안 되는군요." "옛? 26살이라고요? 그럼 당신보다 35살이나 젊은 셈이군요." "그렇소. 홈즈씨. 나 같은 늙은이가 딸같이 젊은 여자와 결혼한 것이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이상하긴요. 애정만 있으면 나이 같은 건 문제가 안 되죠. 그런데 부인의 사진은 가지고 계시죠?" "예, 당신이 그렇게 말하리라 짐작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큼직한 사진을 꺼내어 홈즈에게 주었습니다. 옆에서 들여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새카만 긴 머리카락, 흑수정 같은 큰 눈동자, 그리고 풍만한 가슴..... 한눈에 스폐인계의 미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이 볼품없는 노인이 부부라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걸맞지가 않았습니다. "상당히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홈즈가 사진을 도려 주면서, "두 분이 결혼하신 것은 언제죠?" 하고 물었습니다. "약 일 년 전입니다." "일 년 전? 그래요.... 부인과의 사이는 괜찮았습니까?" "나는 진심으로 에메리아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에메리아도 우리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인이 집을 나간 것은 언제입니까?" "나흘 전의 밤입니다." "뭔가 짐작이 가는 점은 없나요?" "글쎄요, 그게...."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홈즈씨. 아내는 혼자 나간 게 아닙니다. 함께 간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함께 간 사람이라뇨?" "우리 마을에 사는 레이 어네스트라는 젊은 의사와 함께 달아난 것입니다. 천한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둘은 서로 눈이 맞아 나를 속이고 도망친 것입니다." 하며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도둑맞은 1만 파운드. 홈즈는 한동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어네스트라는 의사는 어떤 사나이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이는 30살쯤 되었죠. 구레나룻이 길고, 멋진 콧수염을 길러 겉보기에는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홈즈씨. 시골 의사란 변변한 친구가 없더군요. 환자는 젖혀 두고 밤마다 우리 집에 체스를 하러 왔습니다. 아차, 와트슨 선생님! 이거 실례했소이다. 당신은 의사였죠?" "아니, 괜찮습니다. 나도 개업은 하고 있지만 거의 놀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다면 앰빌레이씨. 당신도 체스를 좋아했던 모양이군요?" 홈즈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술도 담배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체스만이 오직 하나의 오락이죠." "젊은 의사와 당신 중 누가 강했죠?" "그야 말할 나위도 없이 내가 단연코 우세했죠. 5판 중 4판은 내가 이겼습니다." "정말 잘 두시는군요. 그런데 그 젊은 의사는 밤마다 당신 집에 체스를 두러 오는 동안에 어느덧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로군요." "그렇소."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챈 것은 언제쯤이었죠?" "4,5개월쯤 됐습니다. 아내인 에메리아가 젊은 의사를 보는 눈초리에서 그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왜 부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습니까?" "홈즈씨, 저는 이래봬도 그림 물감 제조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질투한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더라면, 나는 아마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될 말입니까? 둘은 내 금고실에서 현금 1만 파운드와 20장의 증권을 훔쳐 가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돈은 오랫동안의 고생 끝에 모은 돈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찾고 싶습니다." 노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앰빌레이씨,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도망친 두 사람의 행방을 찾는 것보다 도둑 맞은 돈을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군요." "물론이죠. 증권은 번호를 적어 두었으니까 팔기가 힘들겠지만, 현금은 빨리 되찾지 않으면 모두 써 버릴 테니까요." "그런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습니까?" "예,이튿날 아침 일찍 신고했습니다." "담당 경찰관은 누구죠?" "맥키논 경감입니다. 몸집은 큰데 머리 속은 텅 비어 있는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두 사람의 자취조차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참다 못해 이렇게 당신에게 부탁하러 온 것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둑 맞은 1만 파운드는 금고실 안에 넣어 두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그렇게 큰 금고가 필요했나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나는 원래 에식스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농사일이 싫어서 20살때 집을 뛰쳐나와 철제품 행상을 시작했습니다. 철 제품이라 하니 듣기엔 좋습니다만, 실은 남비나 솥을 팔러 다니는 일이지요. 하루 40킬로미터나 걸은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목돈이 생겼으므로, 이를 밑천으로 버밍검시에서 그림 물감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순풍에 돛 단 듯이 되어. 내가 60살이 되었을 때는 버밍검에서 두 번째 가는 큰 그림 물감 제조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고생 많이 하셨군요." "예. 나는 학교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노력과 끈기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돈이 웬만큼 모이자, 나는 여태까지 갖고 싶었던 그림이나 미술품을 눈에 띄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큰 보관실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고실의 자물쇠는요?" "물론 튼튼한 자물쇠를 달고 열쇠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지요. 그런데 아내인 에메리아가 어느 사이엔가 납으로 열쇠의 본을 뜨고 의사인 어네스트가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똑같은 열쇠를 만든 것입니다. 내가 밤늦게 집에 돌아와보니 금고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자물쇠에는 열쇠가 꽃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미술품 따윈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돈과 증권만을 갖고 달아났습니다." 이야기가 돈에 미치자,노인의 움푹 팬 눈은 분노로 번뜩였습니다. "앰빌레이씨, 당신이 부인과 알게 된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에메리아는 원래 우리 회사 사원이었습니다. 사장실에서 비서로 있었죠. 의지할 곳 없는 고아인데, 상냥하면서도 어딘지 야무진데가 있는 아가씨였습니다. 나는 60살이 된 작년에 회사를 친구에게 팔고,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살기로 했습니다. 그때 에메리아에게 결혼을 신청했던 것입니다." 노인은 스스로 생각해도 걸맞지 않은 구혼이었다는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에메리아는 승낙해 주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재산이 목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떻든 그때는 하늘에라도 날아 오를듯 기뻤지요. 나는 곧 회사를 판 돈으로 에식스주의 시골에다 큰 저택을 사고 에메리아와 새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셰필드역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쓸쓸한 마을인데, 넓은 정원에 큰 떡갈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있어, 마을사람들은 '떡갈나무 저택'이라고 부르지요." "신혼 당시는 무척 즐거웠겠군요?" 하며 홈즈는 노인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나는 에메리아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먼 곳으로부터 가스와 수도를 끌어 주었습니다. 300파운드나 들여서 말입니다." "저런! 그건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증거군요. 그런데 앰빌레이씨,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당신의 오른손 손톱 사이에 뭔가 파란 것이 말라붙어 있는데. 그게 뭡니까?" 노인은 거친 손을 폈습니다. 나도 홈즈의 말을 듣고야 비로서 알았지만, 노인의 오른손 손톱 사이엔 분명히 파란 것이 묻어 있었습니다. "아, 이거 말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일찍, 내가 경영하던 그림 물감 회사로부터 신제품을 하나 보내왔더군요. 나는 튜브에서 물감을 조금 눌러 짜서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보았습니다. 그림 물감의 품질을 조사하는 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품질이 아주 좋더군요. 그러다가 기차시간이 되었으므로 서둘러 손을 닦고 런던으로 달려왔지요. 너무 바삐 서두르는 바람에 제대로 닦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요? 아, 그랬었군요."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홈즈씨, 이것으로 모든 걸 말씀드렸는데, 어떻습니까, 지금 곧 저와 함께 떡갈나무 저택까지 가주시겠습니까?" 노인의 말에 홈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앰빌레이씨, 그건 안 되겠군요. 나는 지금 어떤 신분이 높은 분으로부터 중대한 사건을 청탁받고 있어 아무래도 런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내 대신 와트슨을 보내도록 하지요. 와트슨, 자네 앰빌레이씨와 함께 가 주지 않겠나?" 나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흥미있는 사건이 없어 맥이 빠진다고 말해 놓고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글쎄, 가도 좋겠지만, 오늘은 어려워. 실은 디프테리아에 걸린 소녀를 치료하고 있는데, 지금 가 보고 열이 내렸으면 내일 아침 첫차로 가도록 하지." 노인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히 떠올랐습니다. 홈즈가 가지 않는다고 실망한 것 같았습니다. "앰빌레이씨, 염려 마십시오. 와트슨은 나와 함께 자주 사건의 수사를 해 보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손이 나는 대로 곧 찾아가겠습니다." "그렇습니까? 홈즈씨도 꼭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수수료.... 사례금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나는 당신이 체스를 좋아하듯이 취미 삼아 탐정일을 하고 있으니까, 실비만 주시면 됩니다. 그것도 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냥이라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했습니다. 아니, 1만 파운드만 무사히 돌아오면, 될 수 있는대로 사례를 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낡은 중산모를 쓰고 발을 질질 끌면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현관 문이 닫히자. 홈즈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와트슨, 저 노인의 인상이 어떤가?" "글쎄, 가엾은 노인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군. 젊은 부인이 다른 남자와 도망을 친데다 1만 파운드나 가지고 갔으니, 엎친데 덮친 격이지. 나이란 먹을게 못 되는군." "아냐, 저 노인에게 동정할 필요는 없어. 와트슨, 돈 이야기가 나오자, 저 노인의 쑥 들어간 눈이 번뜩였지? 그 눈빛은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병적일이만큼 강한 집념을 나타내고 있어. 하기야 그런 끈질긴 성격 때문에 남비, 솥 따위의 행상에서 시작하여 대 회사의 사장까지 되었겠지만...." "그 노인은 오른발이 좋지 않았어. 행상을 할 때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일까?" 홈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게 아냐. 그 오른발은 무릎 아래가 나무로 된 의족이야." "뭐, 목발이라구? 그걸 어떻게 알았나?" "구두를 보고 금방 알았지. 왼쪽 구두는 끝이 구부러져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오른쪽 구두는 가죽이 팽팽했어. 그건 구두 속이 나무로 되어 있다는 증거야. 나무 의족으로 저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도 저 노인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어." "홈즈. 자네는 다른 중요한 사건 때문에 떡갈나무 저택에 갈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사실은 이 사건이 시시해서 가기가 싫었던 거지?" "천만에! 시시하다니. 나는 이번 사건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어.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이 사건엔 반드시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 와트슨, 내일 떡갈나무 저택에 들어가면, 자네의 눈과 머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집안의 모습을 철저히 관찰하고 돌아와 주게. 부탁이야." "잘 알았네." 나는 홈즈의 하숙집을 나서는 길로, 곧 디프테리아를 앓고 있는 소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소녀는 열이 완전히 내려, 침대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놓인 나는 다음날 아침 첫차로 셰필드역으로 향했습니다. 하늘은 파랗게 개고, 멀리 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서는 젖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기분에 젖어 있었으나, 이 평범한 사랑의 도피 사건이 며칠 뒤에는 온 국민들이 깜짝 놀랄 만한 중대 사건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3. 측 량 기 사 나는 앰빌레이 노인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집안을 세밀히 조사한 다음, 그날로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런던에서 셰필드역까지는 완행 열차로 30분가량 걸렸습니다. 나는 곧 홈즈의 하숙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제의 풀 죽은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홈즈는 시험관을 알콜 램프 위에 올려 놓고 열심히 화학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 와트슨. 수고 많았군. 어때, 조사는 잘 됐나?" "응,자네에게 참고가 될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조사해 왔어." "좋아,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보세." 홈즈는 실험을 중단하고 안락 의자에 앉아, 즐겨 피우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자, 자네가 보고 들은 것을 되도록 자세히 이야기해 주게." "내가 셰필드역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 30분이었어. 앰빌레이 노인이 마차로 마중을 나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주위에 마차는 한 대도 없었어. 대리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모양이야. 하는 수 없이 길을 물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지. 시골길이 어찌나 꾸불꾸불 한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지 뭔가. 그때 마침 맞은쪽에서 키가 크고 얼굴이 검붉게 탄 사나이가 오고 있었어. 측량 기사인지 다리에 각반을 차고, 손에는 얼룩덜룩한 가로 무늬가 든 긴 측량 막대를 들고 있었어. 내가 다가가, '이 근처에 앰빌레이라는 노인의 집이 있지요? 이 고장 사람들은 '떡갈나무의 저택'이라 부른다데요.... ' 하고 물어 보았지. 그러자 그 사나이는 잠자코 측량 막대 끝으로 오른편의 무성한 떡갈나무 숲을 가리키고는 바삐 역 쪽으로 가 버리더군. 정말 무뚝뚝한 사나이였어." "와트슨, 내가 그 기사의 생김새를 좀더 자세히 말해 볼까? 햇빛을 막기 위한 검은 안경을 쓰고, 파란 넥타이에 인조 진주 넥타이핀을 꽂고 있었지?" "뭐, 어떻게 그처럼 자세한 것까지 알고 있지? 그 기사와 아는 사이인가?" "알다마다! 그 측량기사는 바로 나 셜록 홈즈가 변장한 모습이니까." "뭐라구!" 나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나는 어제 자네가 왕진하러 가자 곧 앰빌레이 노인의 뒤를 쫓아 떡갈나무 저택까지 다녀왔지. 그래서 하룻밤 호텔에서 묵고 오늘 아침 자네와 엇갈려 런던으로 돌아왔어." "왜 그런 짓을 했지? 나를 따돌리다니, 이건 너무 하잖아." "너무 화내지 말게. 전에도 자네를 따돌린 적이 종종 있었잖아. 어제 자네에게 말한 것처럼 이번 사건의 뒤에 중대한 음모가 있다고 보고, 자네보다 한 발 앞서 염탐하러 갔다 왔지." "자네는 떡갈나무 저택에서 노인을 만났나?" "아냐. 만나지는 않았어. 노인에게는 비밀로 해둘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측량기사로 변장하고 그 마을의 잡화상이나 푸줏간을 돌아다니며, 앰빌레이 부부에 관한 일이나 젊은 의사에 관한 일들을 물어 보았을 뿐, 저택 안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않았네. 자, 와트슨. 자네 이야기를 계속해 보게." 4.페인트를 칠한 금고실. 나는 그제야 기분이 풀려 이야기를 했습니다. "떡갈나무 저택은 노인이 말한 대로 아주 넓었어. 주의는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이고, 정원에는 100년이 넘은 듯한 아름드리 떡갈나무가 무성하고, 빈터에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있었어. 잡초들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더듬어 현관으로 가서 초인종의 끈을 잡아당기자 곧 앰빌레이 노인이 나왔어. 그런데 정말 놀랐어. 등이 굽은데다가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은 노인이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뭐, 페인트 칠?" 홈즈의 눈이 빛났습니다. "어디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던가?" "복도의 벽이야." "페인트 색깔은?" "파란색이었어." 홈즈는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비며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럼 페인트 냄새가 지독했겠군?" "응,나는 그 냄새가 싫어서 혼났어. 마치 배멀미를 하는 것처럼 메스꺼웠어." "와트슨, 자네 이야기는 정말 흥미있어. 페인트를 칠한 곳은 복도뿐이던가?" "아니, 거실 벽에도 칠했어. 그곳은 이미 2,3일전에 칠했는지, 거의 말라 있더군." "음. 점점 재미있군!" 홈즈는 들떠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홈즈,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이봐, 와트슨. 어제 노인이 이 집에 왔을 때, 노인의 손톱 새에 파란 게 묻어 있었지? 노인은 '견본으로 보내온 파란 그림 물감의 품질을 조사해 보았다.'고 했었지만 어쩌면 그림 물감이 아니라 파란 페인트였을지도 몰라." "홈즈, 미안하지만 그 추리는 틀렸어. 노인의 거실에 놓인 탁자 위를 조사했더니, 노인의 말대로 담청색 물감의 튜브가 반쯤 눌린 채 뒹굴어 있었어." "그래? 빈틈없군." 홈즈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와트슨, 부엌도 조사해 보았나?" "물론 조사했었지. 노인이 말한 대로 가스와 수도 시설이 되어 있더군. 그 노인은 진심으로 부인을 사랑했나 봐. 300파운드나 들여서 가스와 수도를 끌어 주었으니...." "글쎄, 그럴까?" 하며 홈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렇게 젊은 부인을 생각했다면, 어셉서 가스나 수도를 끌어 주는 대신 하녀를 두지 않았을까? 그쪽이 부인에게 훨씬 더 편했을 텐데.....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앰빌레이씨의 젊은 부인은 정말 안됐어요. 하녀가 없어서 이렇게 먼 가게에까지 손수 물건을 사러 오셨어요.' 라고 말하더군. 와트슨, 자네는 그 집에서 3개월 전까지 뉴펀들랜드종의 큰 개를 기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아니, 개 이야긴 듣지 못했어." "내가 푸줏간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앰빌레이 부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개에게 줄 저린 고기 조각을 1파운드씩(약 453그램) 사 갔다더군. 와트슨, 자네도 생각해 보게. 뉴펀들랜드종과 같이 큰 개에게 일주일에 1파운드의 고기로는 어림도 없네. 그 개가 3개월전에 죽은 건 어쩌면 굶어 죽었는지도 몰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저 앰빌레이 노인은 인색한 걸 넘어서 지독한 수전노인 모양이야." "홈즈, 너무 노인을 욕하지 말게. 가엾잖아." "하지만 와트슨. 자네도 노인이 인색하다는 건 인정하겠지? 어제만 해도 사건을 부탁하러 왔다면서 우리에게 지불할 수수료를 걱정하지 않던가 말이야." "하긴 그렇군. 그렇다면 앰빌레이 부인은 노인이 생각 외로 너무 인색한데 놀라서 젊은 의사와 달아난 모양이로군." 홈즈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문제의 금고실은 살펴보았나?" "응, 금고실은 거실 정면에 있었어. 마치 은행의 금고같이 튼튼한 문이 달려 있었지." "금고실의 크기는?" "길이가 4미터, 폭이 3미터쯤 되는 상당히 큰 방이었어. 정면에 선반이 몇 개 있고, 노인이 수집한 미술품과 휴대용 금고가 놓여 있었지. 노인은 '와트슨 선생. 나는 휴대용 금고 속에 1만 파운드와 증권 20장을 넣어 두었는데, 그걸 몽땅 도둑 맞아 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안이 텅 비어 있잖소.'하며 휴대용 금고를 활짝 열어젖혔어. 노인은 이어 나에게 '그 1만파운드와 증권은 나의 전 재산이었소. 나는 이제 파산한 거나 마찬가지요.'하며 생각하기도 지겹다는 듯 문을 '쾅!' 닫아 버리던걸." "금고실의 벽에도 페인트를 칠해 놓았던가?" "응, 금고실은 늘 닫아 놓아서 그런지 페인트 냄새가 더 짙게 풍기고 있었지.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오래 있을 수가 없었네." "와트슨, 자네는 페인트에 관해 아무 말도 노인에게 물어보지 않았나?" "아냐, 물어봤어. 이런 경황에 무슨 마음으로 한가롭게 페인트 칠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노인은 도둑 맞은 1만 파운드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힌다는 거야. 그래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페인트 칠을 한다더군.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기는 그림 물감을 다룬 사람이므로 색에 대해서 민감하다나. 그래서 벽은 파랗게 칠해 놓았으니 마룻바닥은 회색을 칠해야겠대." "그래? 일단 사리에는 맞는군. 그런데 와트슨, 그 금고실에 조명 설비는 없었나?" "있었지. 천장에 가스등이 하나 매달려 있었어." "그 가스등에 불이 켜져 있었나?" "아니, 낮이었으니까 켜져 있지 않았어. 그러나 정원에서 들어오는 광선으로 금고실 안이 희미하게 보였어." "흠,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스등이라. 이거 정말 재미있군!" 홈즈는 다시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부인과 젊은 의사가 1만 파운드를 갖고 달아난 것은 지금부터 5일전의 밤이었지?" 하고 물었습니다. "응, 정확히 말하면 7월 1일 밤 11시경이야. 그 날 노인은 젊은 부인과 함께 연극 구경을 가려고 리시엄 극장의 입장권을 2장 사왔대. 그런데 저녁에 막상 극장에 가려고 하자, 부인이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못 가겠다고 말했다는군. 노인은 하는 수 없이 혼자 연극을 보러 갔대. 밤 11시가 지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금고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비로소 범행을 알게 되었대. 노인은 나에게 '와트슨 선생. 그 바람에 비싼 표가 한 장 썩어 버렸죠. 이건 아내의 표입니다.' 하며 입장권을 보여 주었어." "그래? 자넨 설마 그 표의 번호를 외우고 있진 않겠지?" "이봐, 홈즈. 너무 무시하지 말게. 얼핏 보았을 뿐이지만 표의 번호는 이층 B열의 23번이었어." "용케도 잘 외어 두었군. 부인 자리가 23번이었다면 앰빌레이 노인의 자리는 그 옆의 22번이나 24번이었겠지. 이건 중요한 단서가 되겠어." "사실은 말이야. 내가 대학 입학 시험을 칠 때의 수험 번호가 B의 23번이었다네. 하하하....." "뭐라구? 그렇다면 외고 있는게 당연하지. 칭찬할 필요가 없었군." 홈즈도 웃으면서 번호를 수첩에 적었습니다. "그 밖에 노인의 말 가운데 뭔가 중요한 것은 없었나?" "글쎄, 이건 별로 참고가 되지 않겠지만, 내가 노인에게 '엠빌레이씨. 이 저택은 이웃 농가까지 500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군요. 이래서야 무슨 급한 일이 생겨도 구원을 청할 수가 없겠군요. 튼튼한 하인이라도 고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권해 보았지. 그러자 노인은 '아니오. 나에게는 이것이 있으니까 안심입니다.' 하며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보여 주더군. 6연발의 리볼버였어." "그랬나? 와트슨. 늘 말하지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알아 두면 나중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법이야. 그리고 노인은 자네가 돌아올 때 무어라고 말하지 않던가?" "응, 했었지. 내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하자, '와트슨 선생. 런던으로 돌아가시면 홈즈씨에게 한시바삐 이곳으로 오시도록 전해 주십시오. 나는 돈과 증권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명탐정인 홈즈씨가 와 주시면 금방 돈의 행방을 찾아 내어. 돈과 증권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하더군." 홈즈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흠, 그렇게도 나를 기다린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함께 떡갈나무 저택으로 가 보세." "뭐? 지금 당장? 하지만 벌써 4시가 지났어. 깜깜해서야 떡갈나무 저택에 닿을 텐데....." "그 편이 오히려 좋아. 우린 정식 방문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밤사이에 주인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어가는 거야." "홈즈, 난 도둑 흉내는 질색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앰빌레이 노인이 꼭 홈즈가 찾아와 조사해 주었으면 하고 부탁했잖아.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만....." "나는 노인이 없을 때 집안을 조사해 보고 싶은 거야. 그러기 위해선 노인을 딴 곳으로 꾀어 낼 필요가 있어. 와트슨 걱정하지 말게.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어. 잘하면 오늘 밤 안으로 사건을 해결하게 될는지도 몰라." 하며 홈즈는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5. 명탐정 출동하다. 홈즈는 책장에서 두꺼운 인명록을 꺼내어 뒤적이더니. 이윽고 전보 용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적었습니다. 조지아 앨빌레이씨 앞. 나는 1만 파운드의 행방과 파란 페인트의 비밀을 알고 있소. 이 전보를 받는 즉시 콜체스터시 가로수 거리의 교회로 오시오. 만일 오지 않으면 당신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이오. 런던에서 존 하워어드 목사.. 옆에서 들여다보던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홈즈, 이상한 전보로군. 자네는 존 하워어드라는 목사를 알고 있나?" "몰라. 인명록 가운데서 적당히 뽑은 이름이야." "앰빌레이 노인이 전보를 받고 과연 콜체스터시까지 갈까?" "아마 안 갈 수 없을걸. 꼭 갈 거야. 이 '파란 페인트의 비밀을 알고 있다.'라는 글이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러나 하워어드 목사는 그런 전보를 친 일이 없다고 말할 게 아닌가?" "그것으로도 충분해. 요컨대 앰빌레이 노인을 몇 시간 동안 저 떡갈나무 저택에서 멀리 떠나 있게 해두면 되는 거야. 이봐, 와트슨. 콜체스터시는 에식스주의 동북쪽 끝에 있는 도시야. 앰빌레이 노인이 이 전보를 받고 곧 기차로 떠난다 해도 떡갈나무 저택으로 돌아오자면 밤 6시가 넘어야 될 거야. 그 동안 난 충분히 일을 할 수가 있지." 나는 전문을 되풀이해 읽어 보며. "홈즈, 이 끝줄의 '런던에서'란 말은 필요없잖아. 전보에는 반드시 발신국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래. 정작은 콜체스터시까지 가서 치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어. 그러니까 하워어드 목사가 런던까지 나온 길에 친 것같이 일부러 '런던에서'라고 밝힌 거야. 이렇게 해야만 앰빌레이 노인이 의심을 하지 않을 테니까." 홈즈는 심부름꾼 소년을 불러 전보를 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옆방으로 들어가며. "와트슨, 3분만 기다리게." 하고 말했습니다. 홈즈는 꼭 3분만에 나왔습니다. 스카치 직물의 웃옷에 검은 색안경, 파란 넥타이에 인조 진주로 된 넥타이핀, 다리에는 각반.... 오늘 아침 떡갈나무 저택으로 가다가 만났던 측량 기사의 모습이었습니다. "홈즈, 왜 변장을 했지?" "이렇게 하는 편이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기가 편하니까 말이야." "뭐, 마루 밑? 마루 밑엘 들어가야 하나?" "글쎄, 잠자코 따라오게나." 우리가 에식스주의 셰필드역에 내렸을 때는 날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와트슨, 떡갈나무 저택에 가기 전에 극장에 들러 우선 그 표에 관해 조사해 보세." 극장은 그곳의 큰 거리 중앙에 있었습니다. 곧 막이 오를 시간인지, 종업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홈즈는 매표소로 가서, "한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7월 1일 밤. 이층 B열에 서는 몇 번 표가 팔렸죠?" 하고 물었습니다. 매표소에 앉아 있던 노인은 안경 너머로 홈즈를 노려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런 건 왜 묻소?" "나는 경찰에 관계되는 사람인데 어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오." 홈즈가 일부러 으스대며 말하자, 노인은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져서, "아, 그랬었군요. 당장 알아보죠." 하며 매표 장부를 넘겼습니다. "가만있자. 7월 1일 밤이라고 하셨죠? 그날 밤 이층의 B열에서는 23번이 팔렸군요." "23번의 오른쪽이나 왼쪽 좌석은 안 팔렸나요?" "예,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안내양이 지나갔습니다. "아가씨, 혹시 7월 1일 밤에 이층의 B열에 등이 굽고 다리를 저는 노인을 안내한 기억이 있소? 60이나 70쯤 되어 보이는....." 홈즈의 물음에, 뺨이 발그스레한 아가씨는 둥근 눈을 굴리며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뇨. 그런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7월 1일은 첫날인데도 손님이 많지 않아 이층은 텅 비다시피 했죠. B열에는 손님이 한 분도 없었는 걸요." "고맙소." 홈즈는 아가씨에게 인사를 하고 나에게 눈짓을 하며 극장을 나갔습니다. "와트슨, 이제 앰빌레이 노인의 거짓말이 드러났지? 노인은 자네에게 7월 1일 밤에 아내와 함께 가려고 표를 2장 샀으나 아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자기 혼자 극장엘 갔다고 하며 못쓰게 된 23번 표를 자네에게 보였다면서?" "응, 그랬어." "그런데, 그 날 밤, 노인은 극장에는 가지 않았으며, 표를 2장 샀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애당초 1장밖에 사지 않았던 거야. 자네에게 살짝 보여준 B 열 23번 표가 그거야."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물론 사건 당시에 자기가 집안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지. 노인은 그것을 자네에게 믿게 하려고 표를 보였는데, 하필이면 그 번호가 자네의 수험 번호와 같아 자네가 외어 버렸지. 체스를 잘 두는, 머리가 좋은 노인으로서는 큰 실수였어." "홈즈, 자넨 앰빌레이 노인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의족의 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가?" 홈즈의 표정이 갑자기 엄격해졌습니다. "와트슨, 사건은 곧 막바지에 이르게 돼. 난 지금 내가 세운 추리가 맞아 들어가는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는 거야. 쓸데없는 질문은 말아 주게." 그리고는 지나가는 빈 마차를 불러 세워, 앞장서서 성큼 마차에 올랐습니다. "교외의 떡갈나무 저택까지 갑시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홈즈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6. 가택 수색. 마차가 떡갈나무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밤이었습니다. 홈즈는 마부에게 수고비를 듬뿍 주어 돌려 보내고 나서 말했습니다. "자, 와트슨. 이제부턴 자네가 안내 역이야. 우선 부엌문 쪽으로 안내하게. 노인이 젊은 아내를 위해 설치했다는 가스관은 부엌으로 통해 있을거야." 정문은 오늘 아침 내가 왔을 때와 똑같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떡갈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창문마다 꼭꼭 잠긴 채 불이 켜져 있지 않았습니다. "앰빌레이 노인은 아마 저 가짜 전보에 속아 콜체스터시까지 간 모양이야. 덕분에 9시까진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겠군." 홈즈가 말했습니다. 나는 홈즈를 뒤꼍에 있는 부엌 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창문 아래에 가수와 수도의 계량기가 붙어 있었습니다. 홈즈는 회중 전등으로 가스 계량기를 비춰 보았습니다. "아니, 겨우 500입방미터밖에 쓰지 않았군. 이것도 내가 예측한 대로야. 좋아. 이 창으로 들어가세." 홈즈는 주머니에서 두세 개의 소도구를 꺼냈습니다. 유리칼로 유리를 잘라낼 셈인가 하고 보고 있었으나, 홈즈는 그렇게 서투른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끝이 얇은 드라이버와 송곳으로 살짝 건드리자, 걸쇠가 빠져 창이 열렸습니다. "와트슨, 자네부터 들어가게. 겁내지 말고. 자, 여기 회중전등이 또 하나 있네." 나는 홈즈가 건네 준 회중 전등으로 발 밑을 비추면서 가스대에서 부엌 바닥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잇달아 홈즈가 고양이처럼 발소리하나 내지 않고 가볍게 뛰어내렸습니다. 복도로 나가니, 칠한지 얼마 안 되는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이거 지독하군. 속이 메스꺼워. 아무래도 이 페인트 냄새가 수상해." 하며 홈즈가 코를 막았습니다. 우리는 벽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복도를 따라 5미터쯤 걸어 거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홈즈가 회중 전등으로 캄캄한 방안을 비추었습니다. "이상하군, 엠빌레이 노인은 돈을 들여 가스를 끌어 놓고 거실에서는 석유 램프를 쓰고 있잖아. 이봐. 벽에 하나, 그리고 탁자 위에 하나야. 석유 램프가 가스등보다 싸게 먹혀서 그런가? 음, 이게 문제의 금고실이군. 과연 훌륭해." 홈즈는 금고실 앞에 웅크리고 앉아 호주머니에서 굽은 못을 꺼내어 열쇠 구멍에다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 몇 번 돌리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습니다. 홈즈는 만족한 듯이 일어서며, "와트슨, 난 때때로 사립 탐정이 되지 말고, 도둑이 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그랬다면 난 아마 루팡 이상가는 거물이 되었을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금고실 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짙은 페인트 냄새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확 끼쳤습니다. 홈즈는 손가락 끝으로 금고실 벽을 더듬어 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와트슨, 자네 말대로 이 금고실 벽은 4,5일 전에 칠한 것 같은데. 이처럼 밀폐된 방이라서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 있군. 그런데 이 금고실에는 가스등이 있었다고 했지?" 홈즈는 회중 전등을 천장으로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오늘 아침에 내가 본 가스등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와트슨, 자넨 저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나? 거실에서는 석유등을 쓰면서 왜 이 금고실에만 가스등을 달았을까? 그건 그렇고 의자 하나만 갖다 주게." 내가 거실에서 의자를 가져오자, 홈즈는 그 위에 올라서서 가스등이 스위치를 조사하고 유리 안의 심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됐어. 모두 내가 예측한 대로야." 의자에서 내려온 홈즈는 "와트슨, 이 금고실의 어딘가에 집안 전체의 가스를 조절하는 스위치가 있을 걸세. 벽을 조사해 주게." 하고 지시하였습니다. 나는 주위의 벽을 세밀히 조사해 보았지만 스위치는커녕 가스관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군, 이 금고실 안에 없다면 어딘가 밖에 있을 거야. 그런데 이 금고실 벽의 페인트는 아주 거칠게 칠해 놓았군. 아래쪽은 전혀 칠도 하지 않았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어. 아니, 이게 뭐야?" 하며 웅크리고 앉은 홈즈는, 벽과 마룻바닥이 만나는 구석에서 가느다란 보랏빛 색연필을 주워 들었습니다. "음, 이건 수첩에 끼우는 연필이야. 이게 어째서 여기 떨어져 있는 있을까?" 홈즈는 바닥에 무릎을 끓고 앉아 페인트가 칠해지지 않은 벽의 아래쪽을 회중전등으로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니,여기 글씨가 씌어 있잖아! 와트슨, 이것 좀 보게." 하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회중전등으로 비춘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과연 바닥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벽에, 'We(우리), We, m.....' 이라는 보랏빛 글씨가 똑똑히 보였습니다. 급하게 쓴 모양으로 글씨가 비뚤비뚤 했습니다. "홈즈, 누가 이런 곳에 글씨를 썼을까? 게다가 '우리는, 우리는 m....'뿐이니.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군." 홈즈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 글자의 뜻은 곧 알게 돼. 자, 어서 가스의 전체 스위치를 찾아 보세.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우리는 복도로 나와 금고실의 옆과 뒤쪽 벽을 회중 전등으로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벽 속에 숨겨 두었을 거야. 좋아. 내가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서 가스관의 행방을 더듬어 보겠어. 와트슨, 자넨 여기서 기다리다가 내가 마루 밑에서 신호를 보내면 그 장소에 서 있게." 홈즈는 부엌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10분쯤 지나자, 내가 서 있는 데서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탕, 탕!'하고 가스관을 두들기는 소리에 이어서 마루 판자를 밀어 올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구두 뒷축을 쾅쾅 울려서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홈즈가 온통 거미줄 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정말 혼이 났군." 하며 홈즈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습니다. "와트슨. 이젠 내가 각반을 차고 온 까닭을 알겠나? 그런데 마루 밑의 가스관은 이 근처에서 벽 속으로 들어가 있어." 그곳은 바로 금고실의 뒤쪽으로, 벽에는 널빤지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홈즈는 그 널빤지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더니. "음. 여기야." 하면서 드라이버로 비틀었습니다. 그러자 나무 판자가 조금 젖혀지면서, 그 앞 깊숙이에 가스관과 전체 스위치의 꼭지가 보였습니다. 꼭지의 스위치는 수평, 즉 가스를 끈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됐어, 이제 모든 걸 알아냈어. 자, 와트슨.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세. 지방 경찰에 가서 멕키논 경감을 만나야 해. 이번 사건의 담당자야." 우리는 곧 부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가 먼저 창에서 바깥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회중 전등의 강한 불빛이 내 얼굴을 비췄습니다. 잇달아 누군가가 굉장한 힘으로 왼쪽 어깨를 꽉 붙잡았습니다. "이봐, 넌 누구야?" 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전등 불빛에 눈이 부셔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키가 크고 몸집이 건장한 사나이 같았습니다. 7. 잠복 근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내가 우물쭈물 하고 있으려니까, 뒤이어 창에서 뛰어내린 홈즈가, "여어, 맥키논 경감이군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마침 잘 만났군요." 하고 허물없이 말했습니다. "아니, 두 놈이잖아? 대체 뭘 하는 놈들이야?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다!" 사나이는 내 어깨를 놓고 허리에 찬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습니다. "잠깐, 경감! 위험한 짓은 그만두시오. 우린 수상한 자들이 아닙니다. 당신이 잡고 있는 사람은 내 친구인 의사 와트슨이고 나는 사립 탐정인 셜록 홈즈입니다." "뭐, 홈즈씨라구?" 경감은 홈즈에게 회중 전등을 갖다 댔습니다. "음, 사진에서 본 기억이 있어. 하지만 홈즈씨. 아무리 사립 탐정이라도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남의 집안에 침입하다니, 점잖지 못하군요." "아니오. 우리는 이 집 주인인 앰빌레이 노인으로부터 이번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사건의 수사를 부탁받았다고요? 나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별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경감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경감님.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앰빌레이 노인은 결코 당신 수완을 믿지 못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인은 도둑맞은 돈과 증권을 한시라도 빨리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 우리에게 응원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감님, 앰빌레이 노인이 도난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것은 언제였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7월 2일 오전 10시경이었습니다." "그래요? 이튿날 아침 10시라면 너무 늦군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부하를 데리고 노인과 함께 이 저택으로 달려왔죠." "맨 먼저 어딜 조사하셨죠?" "금고실입니다. 금고실 안의 선반에 있는 휴대용 금고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금고실 벽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죠?" "예, 파란 페인트가 마구 칠해져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걸 칠했느냐고 물으니까. 노인은 전 재산인 1만 파운드와 증권을 도둑 맞고 미칠 것만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그랬다더군요." "그래요? 내가 들은 것과는 약간 틀리지만, 좋습니다. 다음에는 어디를 조사했습니까?" "거실 옆에 있는 노인의 침실을 조사했습니다." "뭐, 침실을?" 홈즈는 나를 돌아다 보며, "와트슨, 자넨 오늘 아침 이 집에 왔을 때 침실까진 조사하지 않았지?" 하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응, 침실따위는 조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건 잘못 생각했군. 경감님, 그래, 침실에서 뭔가 중요한 실마리라도 찾아 냈습니까?" "예, 찾아냈습니다." 맥키논 경감은 으쓱해져서 말했습니다. "침실에는 큰 침대이외에 부인의 옷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 앰빌레이 부인의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이 대여섯 벌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들이 어떤 실마리가 되죠?" "홈즈씨, 난 벌써 10년이상이나 경찰관 생활을 했으므로 범인의 심리를 잘 압니다. 젊은 부인과 그 애인인 의사는 돈과 증권을 갖고 달아날 때, 되도록 가벼운 몸차림을 하기 위해 옷가지는 남겨두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자란 대개 자기 옷에 이상한 애착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해서 안정되면, 이번엔 남겨 두고 간 옷가지를 되찾고 싶어질 것입니다. 멀지 않아 의사인 어네스트가 이 저택으로 옷을 가지러 올 것입니다. 그걸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으려는 것이 나의 작전입니다. 밤마다 부하와 이 저택을 망보고 있죠." "그랬었군요. 그 그물에 우리가 걸려든 셈이군요." 홈즈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경감님, 미안한 말이지만 그 두 사람은 100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경감은 불끈하여 소리쳤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 사건의 신고를 받자 곧 전국의 주요 항구에 앰빌레이 부인과 의사의 인상착의를 전보로 알려서 국외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 두었습니다. 아직 아무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두 사람은 국내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영국 내에 있는 이상, 두 사람은 반드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글쎄요.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내 작전을 이야기하죠." 홈즈는 회중 전등으로 시계를 보고 나서, "지금 8시 30분입니다. 늦어도 9시까지는 범인이 저택으로 옵니다. 우리 세 사람은 앰빌레이 노인의 거실에 숨어서 기다리기로 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뭐, 9시에 범인이 온다구요? 그걸 어떻게 알죠?" "모두 내 추리의 결과입니다. 경감님, 당신에게 도둑 흉내를 내라고 하긴 좀 안됐지만, 저 부엌에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가 주십시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자, 와트슨. 자네부터 먼저...." 나는 시키는대로 열린 창을 통해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홈즈가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감의 큰 몸집이 좁은 창문을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캄캄한 거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홈즈는 회중 전등으로 주위를 비추면서, "경감님, 당신은 그 문 뒤에 숨어 계십시오. 곧 범인이 올 것입니다.아마 6연발 권총을 가지고 있을 텐데. 내가 휘파람을 불어 신호하기 전에는 절대로 범인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맥키논 경감은 걱정스러운 듯이. "홈즈씨, 당신에게 뭔가 생각이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범인의 체포만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번 사건에서 아무 공적이 없으므로, 경찰서에서는 물론 마을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하, 그 점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나는 사립 탐정이므로 체포할 권한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신호를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 수갑은 가지고 계시죠?" "하나만 준비해 왔습니다."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범인은 보기보다는 거센 자이므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와트슨, 자넨 그 탁자 위에 램프가 있지? 자넨 성냥을 가지고 그 탁자 뒤에 숨어 있다가 내가 범인에게 회중 전등을 비추면 재빨리 성냥을 그어 램프에 불을 붙이게. 자네 역할을 그것뿐이야. 이 방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나도 자넨 참견하면 안 돼. 나의 귀중한 전기 작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알겠나?" "응, 알았어." 나는 램프의 등피를 벗겨 놓은 다음 손에 성냥을 들고 탁자 뒤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8. 범인 체포.. 우리의 잠복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9시 2분전, 바깥에서 마차바퀴소리가 들리더니 현관 앞에서 딱 멈추었습니다. 1분쯤 지나자, 다시 마차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거리의 합승 마차를 타고 온 모양이었습니다. 곧 현관 문이 열리고 거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발소리에 섞여 '똑똑똑!'하는 지팡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집 주인인 의족의 앰빌레이 노인이 돌아온 것입니다. 조용히 문이 열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홈즈의 회중 전등이 앰빌레이 노인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환히 비췄습니다. 나는 재빨리 성냥을 그어 램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아니!" 노인은 낮은 소리로 외치며 그 자리에 우뚝 섰으나, 방안에 있는 사람이 홈즈와 나라는 것을 알자,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난 또 누구라고! 홈즈씨와 와트슨 선생이었소? 이렇게 밤늦게 찾아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미리 통지를 하셨으면 역까지 마중을 나갔을 텐데..." "앰빌레이씨, 나는 당신에게서 한시바삐 이곳으로 와서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온 것입니다." "참 잘 오셨소.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어디로 해서 이 집안에 들어왔습니까? 현관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하며 노인은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니, 금고실 문이 열려 있군요. 누가 열었소?" "조사할 필요가 있어서 내가 열었소. 앰빌레이씨 당신은 지금 어디에 갔다 오는 길이죠?" "잠깐 볼일이 있어 거리에 나갔다 왔소." "그건 거짓말이요. 당신은 하워어드 목사의 전보를 받고 서둘러 콜체스터시까지 갔다오는 길이지요?" "하워어드 목사? 그런 이름은 들은 적도 없습니다만..."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소. 당신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벌써 눈치챘겠지만, 그 전보는 당신을 꾀어내려고 내가 친 거요. 알겠소? 그 전보에. '나는 파란 페인트의 비밀을 알고 있다. 곧 콜체스터시까지 오지 않으면 당신 신변에 위험이 닥쳐 올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죠?" 노인은 무슨 잠꼬대를 하느냐는 듯이 홈즈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켕기는 데가 있는 당신은. '대체 하워어드라는 목사는 어떤 자 일까? 만일 내 비밀을 안다면 살려 둘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고는. 그 책상 서랍에서 오늘 아침 와트슨에게 보인 6연발 권총을 꺼내 콜체스터시까지 달려갔소. 그런데 존 하워어드 목사는 이미 사흘 전에 병으로 죽은 것을 알았소. 비로소 당신은 누군가에게 속은 줄 알고 당황하여 이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어떻소?" "홈즈씨, 나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앰빌레이씨. 서로 쓸데없는 말은 그만둡시다. 나는 당신이 없는 동안 한 시간 가량 금고실과 마루 밑까지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사건을 완전히 해결한 것입니다." "뭐, 해결 했다구요? 그럼 돈과 증권을 갖고 달아난 두 사람의 행방을 알았나요?" "물론이지요." "그럼 어째서 경찰에 알려 그들을 체포하지 않죠?" "그 두 사람을 체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체포되는 것은 바로 앰빌레이씨 당신이오." "옛, 내가? 왜요?" "당신이 부인과 그 애인인 어네스트 의사를 죽였기 때문이요." 홈즈의 목소리는 얼음과 같이 차가왔습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떠올랐으나, 곧 안정을 되찾고 태연한 척 하였습니다. "핫하하. 홈즈씨. 당신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소. 그러나 당신은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인 에메리아와 어네스트를 무슨 까닭으로 죽였다는 거죠?" "이유는 질투입니다. 알겠소, 앰빌레이씨? 당신은 사건을 의뢰하러 나를 찾아왔을때, '나는 아내와 어네스트가 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림 물감 회사의 사장까지 지낸 내가 질투를 하다니, 내 자존심이 용서치 않소. 나는 만일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아내와 이혼해도 좋소, 다만 도둑 맞은 1만 파운드와 20장의 증권만은 찾고 싶소.'라고 말했었죠?" "예, 그랬었지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그게 당신의 거짓말의 시초인 것입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기는커녕 마음속에서는 그들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이 불처럼 들끓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면밀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두 사람을 죽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흥, 홈즈씨.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는 점점 더 재미있군요. 그러면 내가 그 두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증거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앰빌레이씨.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 들려 주기 위해 당신의 범행 경위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보죠. 좋습니까? 당신은 7월 1일 저녁때, 리시엄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간다고 말하며 혼자 이 저택을 나갔죠?" "그렇소. 처음에는 아내와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부득이 혼자 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극장에는 가지 않았소. 가는 체하고, 실은 이 저택의 떡갈나무 숲속에 숨어 있었죠."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 날 밤, 나는 분명히 극장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는데.... 그 증거로 못쓰게 된 아내의 입장권을 와트슨 선생에게 보이기까지 했지 않소." "핫하하.. 그 표를 와트슨에게 보인 것이 당신의 큰 실수였소. 와트슨은 정확히 그 번호를 외우고 있었단 말이오. 당신은 이층 B열의 23번 표를 한 장밖에 사지 않았소. 우리는 오늘 밤 이리로 오기 전에 리시엄 극장에 들러서 조사했소. 그 날 밤. 이층 B열에는 당신을 고사하고 손님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고 안내양이 증언했소. 다시 말해서, 당신이 만든 알리바이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오." 노인의 얼굴에 비로서 낭패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홈즈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앰빌레이씨, 당신은 극장에 간다고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정원의 떡갈나무 그늘에 숨어 있었소. 얼마 후, 젊은 의사 어네스트가 여느 때와 같이 당신과 체스를 두려고 찾아왔소. 어쩌면 부인이 당신 없는 틈을 타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지만, 어네스트는 이 거실에서 당신 부인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소. 거기에 갑자기 당신이 나타난 것입니다." 노인은 할 말을 잊은 듯 잠자코 있었습니다. "두 젊은 남녀는 몹시 놀랐겠지요. 당신이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신은 짐짓 태연한 척하고, '야아, 어네스트씨 아니오? 혼자 극장에 가다 생각하니 쓸쓸해서 돌아왔소. 마침 잘 왔소. 오늘 밤은 체스나 두며 세웁시다. 그런데 체스를 시작하기 전에 꼭 보여 주고 싶은게 있소. 내가 최근에 손에 넣은 진귀한 미술품인데. 에메리아 당신도 아직 보지 않았지?' 하며 의사와 부인을 교묘히 저 금고실로 몰아 넣은 거요." 홈즈는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의심도 없이 금고실 안으로 들어갔지요. 그 순간 당신은 날쌔게 금고실에서 뛰쳐나와 문을 닫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렸소. 금고실의 문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면 안에서는 절대로 열지 못하게 되어 있소. 의사와 부인이 아무리 울부짖어봐야 그 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지요. 당신은 금고실의 뒤로 돌아가서 벽에 댄 널빤지를 벗기고 그 안에 있는 가스 스위치를 틀었소.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조금 전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저 천장의 가스등을 조사해 보았는데, 가스를 잠그는 스위치도 없거니와 유리 안의 심지마저 부서져 있었소. 당신은 처음부터 '불이 켜지지 않는 가스등'을 설계해 두었던 거요." 나는 언제나처럼 홈즈의 빈틈없는 추리에 놀라며 귀를 귀울였습니다. "깨진 가스등에서는 가스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왔소, 어네스트는 틀림없이 어떻게 해서든지 가스를 잠그려고 초조하게 애썼을 것이요. 그러나 천정이 너무 높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소. 그러는 사이에 좁은 금고실 안에는 가스가 꽉 차서 두 사람은 숨이 막혀 죽어 버린 것입니다." 좀체 감정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는 홈즈도 격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습니다. "앰빌레이씨, 당신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었죠? 그 사랑하는 젊은 부인이 살려 달라고 외치면서 금고실 문을 두드렸는데도 당신은 모른체 했소. 그리하여 두 사람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을 시간을 계산하고 가스 스위치를 잠근 후에, 시체를 이 저택 안 어느 구석에다 묻었소. 그 장소도 나는 대강 짐작할 수 있소. 이렇게 당신은 부인과 의사 어네스트의 살해에 성공했지만. 한 가지 곤란한게 있었소. 그것은 금고실에 강한 가스 냄새가 배어 있다는 점이었소. 그래서 당신은 가스 냄새를 얼버무리려고 금고실 안은 물론 복도의 벽까지 파란 페인트를 마구 칠하느라 이튿날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경찰에 신고 했던 거요. '아내와 어네스트 의사가 1만 파운드를 가지고 달아났다.'고 말이오. 곧 맥키논 경감이 달려왔지만, 페인트 냄새에 속아 끔찍한 살인 사건을 눈치채지 못했던 거요. 그리하여 지금도 부인과 어네스트 의사의 행방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홈즈의 목소리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앰빌레이씨. 이상이 당신의 부탁을 받고 내가 조사한 사건의 진상입니다. 어네스트 의사와 부인은 당신의 금고에서 1실링도 훔치지 않았소. 아니, 도리어 당신의 금고실 안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어떻소? 내 추리에 틀린 데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홈즈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눈은 칼날처럼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감자처럼 흙빛이 되어 있던 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6연발 권총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꼼짝 마라, 홈즈! 어서 벽을 보고 돌아서서 손을 들엇! 와트슨, 너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용서없이 쏘겠다!" "흥, 재미있군." 홈즈의 태도는 침착하고 당당했습니다. "앰빌레이, 넌 이미 두 사람을 죽였다. 또 한 사람 죽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너 따위 비겁한 놈에게 이 홈즈가 당할 것 같은가! 자, 쏘아 봐라!" 조끼의 앞가슴을 풀어 헤치며 홈즈가 노인 앞으로 쑥 나섰습니다. 노인은 엉겁결에 주춤 뒷걸음질 쳤으나, 다음 순간 그 움푹한 눈에 살기가 번뜩였습니다. "앗! 위험해! 홈즈!" 내가 소리친 순간, 노인의 권총이 '탕!'하고 불을 뿜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홈즈가 몸을 날리며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동시에 문 뒤에서 가슴을 죄고 있던 맥키논 경감이 맹렬한 기세로 뛰어나와 뒤에서 노인을 억센 팔로 죄었습니다. 맥키논 경감은 몸집이 앰빌레이 노인의 2배나 되어 보였습니다. 허약한 노인따위는 단번에 눌러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인이 몸을 홱 틀자, 경감의 큰 몸집이 공중에서 한바퀴 돌아 '쾅!'하고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이 영감이 날 집어던졌어!" 경감은 벌떡 일어서서 다시 노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레슬링을 했는지 교묘하게 몸을 피하며 오히려 경감의 팔을 비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사이에는 엎치락뒤치락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홈즈는 빙긋이 웃으며 맥키논 경감의 고전하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나는 홈즈가 이른 것도 잊어버리고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왼쪽 정강이를 힘껏 걷어 채였습니다. 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윽!'하고 신음하면서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마치 다리가 부러진 것같이 심한 아픔이 계속되었습니다. 노인의 나무 의족에 챈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 의족도 무서운 흉기였습니다. "와트슨,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하며 홈즈는 날쌔게 몸을 날려 돌진하더니. 노인의 왼팔을 잡고 거꾸로 비틀었습니다. 노인은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경감은 엎드린 노인의 몸에 걸터앉아 재빨리 수갑을 채웠습니다. 9. 시체의 행방.. 앰빌레이 노인은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 뜨린 채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 쉬고 있었는데, 그 눈은 분노와 미움으로 활활 타올랐습니다. 맥키논 경감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홈즈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노인이 권총으로 당신을 쏘려 했기 때문에 체포한 것입니다. 나는 문 뒤에서 당신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당신의 상상일 뿐이지 노인의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이것으로는 재판에서..." "안심하십시오. 증거는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지금 곧 보여드리지요. 하지만 먼저 이 위험한 노인을 한시 바삐 유치장의 철창 속에 잡아 넣어 버리십시오. 이 근처 어느 집에서 전화를 걸어 당신 부하와 마차를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 점에 대해선 열려 마십시오. 이제 곧 내 부하들이 나와 교대하러 이 저택에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 왔군요.." 마차가 멎는 소리에 이어 현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경감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노인의 권총을 주워 홈즈에게 건네 주고,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곧 3명의 정복 경관이 맥키논 경감을 따라 들어왔습니다. 경감은 경관들에게 "자네들은 이 노인을 경찰서로 데려가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해. 알겠나?" 하고 일렀습니다. 세 경관이 축 늘어져 있는 앰빌레이 노인을 잡아 끌고 가려 하자, 홈즈가 손을 들어 말렸습니다. "잠깐 기다리게. 노인의 호송은 마부와 경관 한 사람이면 충분할 걸세. 나머지 두 사람은 여기 남아 있게. 할 일이 있어." 앰빌레이 노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로 경관 한 사람에게 끌리어 방을 나갔습니다. "자, 경감님. 앰빌레이 노인이 두 사람을 살해한 증거를 보여 드리지요." 홈즈는 맥키논 경감을 금고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경감님, 만일 당신이 이 밀폐된 방에 갇혀 가스에 중독되어 죽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글쎄요. 아마 유서 같은 걸 남기려고 하겠죠." "그렇소. 죽은 어네스트 의사도 역시 유서를 남겨 놓았소. 종이 쪽지에 써 두면 앰빌레이 노인에게 발견될까 봐 눈에 띄지 않는 벽 아래쪽 구석에다 수첩에 끼워둔 보랏빛 연필로 썼습니다. 자, 여기를 보십시오. 홈즈는 엎드려서 벽의 아래쪽에 쓰인 글씨를 회중 전등으로 비췄습니다. 맥키논 경감도 엎드려 그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는데...."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이건 어네스트 의사가 의식을 잃을 순간에 써 둔 것입니다. 이 'We, We.. ... M .....'은 'We were murdered.'(우리는 살해됐다.)라고 적으려다가 미처 다 쓰지 못하고 가스 중독으로 신경이 마비되어 연필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게 구석에 떨어져 있던 연필입니다." 홈즈는 호주머니에서 보랏빛 색연필을 꺼내 보였습니다. "앰빌레이 노인은 페인트 칠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므로 이 가느다란 연필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어네스트 의사의 시체를 발견하면, 수첩에 적힌 글씨와 이 벽에 적힌 글씨체를 비교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똑같을 겁니다." "과연 노인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겠군요. 그런데 홈즈씨. 왜 아까 노인 앞에서 이 증거를 들이대지 않았습니까?" "앰빌레이 노인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걸 말해 버리면, 재판이 열릴 때까지 멋진 구실을 만들어 낼 우려가 있어서 일부러 잠자코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 보랏빛 색연필은 귀중한 증거품이니까 잘 보관해 두십시오." "고맙습니다. 홈즈씨. 당신은 듣던 것 이상으로 명탐정이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홈즈는 빙그레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경감님, 나에게 기대지만 말고 그 큰 머리를 움직여 보는 게 어떻소. 이 집에는 마차가 없어서 시체를 멀리 운반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 넓은 저택의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의 경관과 함께 찾아보십시오." "그러나 이 떡갈나무 저택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게다가 캄캄한 밤중입니다. 세 사람으로선 도저히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하나만 힌트를 드리죠. 이 집에 수도가 놓여 있는 것을 압니까?" "예, 앰빌레이 노인에게서 들었습니다. 부인을 위해서 이 저택에 이사하자마자 가스와 수도를 끌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그 수도가 힌트입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수도를 끌어온 이상, 지금까지 쓰고 있던 우물은 필요없죠. 두 사람의 시체는 그 필요없게 된 우물 속에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부엌 근처를 찾아보십시오. 반드시 묵은 우물이 있을 거요." 맥키논 경감은 경관들을 데리고 부엌을 나갔는데, 20분쯤 지나서 화가 잔뜩 나서 돌아왔습니다. "홈즈씨, 당신의 추리는 틀렸습니다. 부엌 바로 옆에 묵은 우물이 있었고, 콘크리트 뚜껑이 덮여있었습니다. 갈고랑이를 넣어 몇 번이나 찾아보았지만, 시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마루 밑이나 떡갈나무 숲속에 파묻은 것 같아요." "아니오, 마루 밑은 아까 내가 가스관을 찾느라고 조사해 봤지만 시체를 파묻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이 저택에는 묵은 우물이 또 하나 있는 것 같군요. 경감님. 내가 한번 찾아봐도 될까요?" "예, 부탁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엌에서 나왔습니다. 홈즈는 회중 전등으로 부엌 문에서 3미터쯤 떨어진 땅 위를 비추면서 말했습니다. "경감님, 여기 길이 약 1.5미터, 폭이 1미터가 되는 큰 상자 같은 것이 놓였던 흔적이 있죠? 나는 아까 이 부엌에 숨어들어 갈 때 이미 알아차렸소만, 이 직사각형의 흔적은 무엇을 놓아 두었던 것이라 생각합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고..." "이건 개 집을 놓았던 자리요." "뭐, 개 집?" "경감님, 당신은 이 집에 뉴펀들랜드종의 큰 개가 있었다는 걸 모릅니까?" "알고 있습니다. 순찰할 때. 저택 안에서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약 3개월 전에 병들어 죽었다고 들었는데...." "개는 죽어도 개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홈즈는 회중 전등으로 땅 위를 비추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개 집을 끌고간 흔적이 있습니다. 개집이 커서 굴림대를 썼군요. 자,이 굴림대 자국을 따라가 봅시다." "홈즈씨, 개집을 찾아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글쎄, 잠자코 따라오십시오." 굴림대의 자국을 더듬어 10미터쯤 가자, 풀밭이 나왔습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이 폭 1미터 남짓 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경감님, 이 풀이 쓰러진 모양을 잘 보십시오. 이건요 3.4일전에 개집을 끌고 간 흔적입니다. 부인과 어네스트 의사가 행방 불명이 되어 큰 소동이 벌어진 판에 왜 개집을 끌고 갔을까요?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 저기 개집이 있군요." 떡갈나무 숲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헛간만큼이나 큰 개집이 있었습니다. "경감님, 이 개집을 밀어 보십시오. 그 아래에 틀림없이 묵은 우물이 있고, 그 속에 두 사람의 시체가 버려져 있을 겁니다." 홈즈가 말했습니다. 경감은 두 경관가 함께 큰 개집을 옆으로 밀어 냈습니다. 과연 그 밑에 썩어 가는 나무 뚜껑을 덮은 묵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뚜껑을 젖히고 들여다보았으나,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감이 쇠갈고랑이를 내리려고 하였으나, 홈즈는, "잠깐만! 버린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으므로 시체는 떠 있을 겁니다. 그 회중 전등 좀 주십시오." 하며 경감의 대형 회중 전등에 끈을 달아 우물에 내렸습니다. 과연 4미터쯤 내려간 수면에 두 개의 시체가 떠 있었습니다. 흰 원피스를 입은 앰빌레이 부인의 시체는 엎드려 있었으나, 어네스트 의사 쪽은 위를 향해 누워 있었으므로, 긴 구레나룻과 콧수염까지 똑똑히 보였습니다. "음, 정말 지독한 짓을 했군! 가스로 죽여서 시체를 헌 우물에 집어 던지다니, 마치 악마 같은 놈이야!" 멕키논 경감이 신음하듯이 내뱉았습니다. "경감님, 시체는 내일 아침에 끌어올려도 될 것이오. 의사의 호주머니에 있는 수첩과 보라빛 색연필, 그리고 나를 쏘려던 노인의 권총을 잘 간수하십시오, 그 노인이 아무리 잘 둘러댄다 해도, 이만한 증거품이 갖추어지면 유죄가 틀림없을 것이오. 이로서 내 임무는 끝났소." 홈즈는 시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서둘러 가면 런던행 기차를 탈 수 있겠군. 경감님, 미안하지만 마차를 좀 불러 주시겠소?" "제가 타고 온 마차를 이용하시죠." 경감이 호각을 불자 경찰 마차가 앞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홈즈의 뒤를 이어 내가 발을 절면서 마차에 올랐습니다. 그때 경감이 다가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홈즈씨,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뻔뻔스러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예, 알겠소. 두 사람의 시체를 내가 발견했다는 걸 비밀로 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그, 그렇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번 사건은 모두 당신 혼자서 해결한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신문 기자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겠소. 그럼 수고하시오." 10. 홈즈에의 도전..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참다 못해 빈정거리듯이 말했습니다. "홈즈, 이번 사건에서도 자넨 고생만 하고 애쓴 보람이 없게 되었군. 내일 아침 신문엔 '맥키논 경감, 멋지게 어려운 사건을 해결.'이라고 대문짝만하게 나오고,자네 이름은 그림자도 없겠군." "그러면 어떤가, 자네와 나는 충분히 스릴을 맛보지 않았나. 자네는 정강이를 채이고, 나는 노인의 총에 맞아 죽을 뻔했지." "겉으로는 약하고 가엾어 보이는 노인이 흉악한 살인자라니. 정말 놀랐어. 자네는 언제부터 앰빌레이 노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나?" "어제 아침, 노인이 처음으로 우리 하숙집을 찾아왔을때 부터야. 내가 노인의 손톱에 파란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파란 그림 물감의 품질을 알아 보기 위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고 대답했었지. 그러나 내가 알기론 아무리 기술자라도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보아선 질이 좋고 나쁨을 알 수가 없어. 그건 많은 화가들이 몇 번이나 써 본 후에야 비로서 알 수 있지. 게다가 곧 런던으로 가려는 판에 일부러 그림 물감을 조사하다니 이상하잖아.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대뜸 이 영감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느꼈어." "그러나 오늘 아침에 내가 떡갈나무 저택에 가 보았더니, 탁자 위에는 분명히 파란 그림 물감의 튜브가 놓여 있었어." "그건 나에게 대답한 대로 앞뒤를 맞추기 위해 나중에 탁자 위에 올려 놓은거야. 아뭏든 나는 이 노인이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 몰래 측량 기사로 변장하고 이 마을로 찾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 그 결과, 저 앰빌레이 노인이 두번째 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단 말이야." "큰 거짓말이라니?" "가스관가 수도관을 끌어 온 시기지. 노인은 우리에게 '젊은 아내가 불쌍해서 떡갈나무 저택으로 이사하자마자 300파운드나 들여 멀리서 가스와 수도를 끌어 주었다고 말했었지?" "응, 그랬어." "그런데 잡화 상회 여주인의 말로는, 떡갈나무 저택에 가스와 수도가 놓인 것은 바로 한 달쯤 전이라는게 아니겠나. 필요없게 된 펌프를 잡화 상회에서 인수한 탓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어. 노인은 이사하자마자, 즉 일 년 전에 가스와 수도를 끌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 달 전이었어."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물론 저 인색한 노인이 300파운드나 들여서 가스와 수도를 끌어온 것은 젊은 부인과 그 애인을 죽일 목적이었어. 노인은 3,4개월 전부터 자기 부인과 어네스트 의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결코 질투는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두 사람이 미워서 어떻게든 그들을 죽이려고 결심한 거야. 어제 내가 노인의 눈을 보고 한번 마음 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사람 같다고 말했었지? 체스를 잘 두는 노인은 그 비상한 머리를 굴려, 마침내 가스에 의한 살인을 생각해 냈어. 그리하여 한 달 전에 저 금고실 안까지 가스관을 끌어 넣고 금고실밖에 비밀 개폐 장치를 만들었어. 치밀하고 계획적인 살인이지." 홈즈는 파이프를 꺼내 물었습니다. "와트슨, 자네는 오늘 아침 떡갈나무 저택을 조사하러 갔을 때 , 노인이 금고실을 비롯하여 거실이나 복도의 벽에 마구 파란 페인트를 칠해서 그 냄새가 지독하다고 했었지?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음. 가스 냄새를 얼버무리기 위한 수작이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오늘 밤 자네와 함께 떡갈나무 저택에 숨어들어 내 추리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맥키논 경감이 문 뒤에서 듣고 있는 동안 앰빌레이 노인의 범행을 폭로했던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완고한 경감은 노인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좀체로 믿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랬었군, 그런데 앰빌레이 노인은 왜 자네에게 일부러 사건의 조사를 의뢰하러 왔을까?" "저 노인은 나에게 도전한 거야." "뭐, 도전?" "그래, 저 노인은 자기가 한 짓이 빈틈없는 완전 범죄로서, 지방의 경찰은 물론, 명탐정 홈즈라도 풀지 못하리라 믿고 나를 찾아온 거야. 즉 체스의 시합 상대로 날 택했던 거지." "가만히 있었으면 무사했을 텐데. 자네에게 도전하여 체포되다니,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군." "그건 그렇고.... 와트슨, 노인에게 챈 다리는 좀 어때? 아직도 아픈가?" "응, 쑤시긴 하지만 뼈는 상하지 않았어. 집에 돌아가 찜질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낫겠지." "하하, 의사가 제 손으로 자기 상처를 돌봐야 하다니. 이거 정말 우습군. 하하하....." 웃음거리가 된 나는 기분이 좀 상했으므로 비꼬아 말했습니다. "이봐, 자네도 빨리 결혼하는게 좋을거야." "뭐, 결혼? 왜?" "앰빌레이 노인처럼 다 늙은 다음에 젊은 여자와 결혼해 봐. 언제 애인이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야." "뭐라구? 에기, 이 사람! 이거 한 대 얻어맞았군. 좋아. 자네 충고를 받아들여 되도록 빨리 결혼하도록 노력하지." 마차에 흔들리며 홈즈는 유쾌하게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