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탐정과 열병 ================= 코난 도일 작. 1. 죽음의 신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합니다.고릴라 처럼 억센 사람도, 사 자처럼 강한 사람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숙집 아주머니인 허드슨 부인은 명탐정 홈즈가 죽는다는 것을 꿈 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홈즈씨는 불사조야.' 하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홈즈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자,아주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아, 하나님! 제발 홈즈씨를 살려 주십시오." 허드슨 부인은 방바닥에 끓어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홈즈씨가 죽는다면 저는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하나님, 차라리 저를 불러 주십시오." 아주머니는 홈즈의 열렬한 팬으로, 홈즈를 마치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당황하고, 슬퍼하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의사를 부르려고 하였으나, 홈즈는 미치광이처럼, "의사가 오면 권총으로 쏘아 죽여 버릴테다!" 하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홈즈의 성격을 잘 아는 아주머니는 의사를 부르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 였습니다. 고집이 센 홈즈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 다.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주머니가 자기 침대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가 따뜻한 스프나 과일을 가져가도, "쓸데없는 짓 말아요!" 하고 도리어 화를 버럭 내어 아주머니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사흘째가 되자, 홈즈의 얼굴은 해골같이 변했습니다. 병이 난데다 빵 한조각, 스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홈즈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습니다. 턱뼈와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은 움푹 들어간데다 촛점을 잃은 눈동자가 희번뜩거렸습니다. 숨도 제대로 쉬 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죽는 것은 시간 문제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마음속에는 슬픔보다 격 렬한 노여움이 끓어 올랐습니다. "홈즈씨, 당신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이젠 당신이 고함치 든 울부짓든 난 의사를 부르겠어요. 당신이 죽는게 마음대로라면, 내가 의사를 부르는것도 마음대로죠. 알겠어요? 난 달려가서 의사를 불러오겠 어요." 아주머니는 철없는 아이를 꾸짖듯이 엄한 눈으로 홈즈를 노려 보았습니다. 순간, 홈즈는 힘없이 눈을 감으면서 가늘디가는 목소리로, "정 그렇다면 와트슨을 불러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홈즈가 또 고함을 칠줄만 알았던 아주머니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야단났군. 홈즈씨는 이제 죽는 모양이야.' 아주머니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쩔쩔 매다가, "곧 와트슨 선생님을 모셔올테니, 기다리셔요. 정신차려야 해요!" 하고 소리치고는, 계단을 구르듯이 뛰어내려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빨리 갑시다!" 아주머니는 마침 지나가던 마차를 불러 세우고 뛰어 오르며 소리쳤습니다. 그 즈음 나는, 결혼하여 파딘턴역 근처에서 작은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습니 다. 그러므로 홈즈가 심한 병으로 앓고 있는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였습 니다. 아주머니를 태운 마차가 굉장한 속력으로 달려오자, 나는 급한 환자가 실려 온 것으로 착각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현관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베이커 거리의 하숙집 아주머니가 뛰어들어오며, "와트슨 선생님,빨리 좀 가 주셔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놀란 얼굴로 허드슨 부인을 맞았습니다. "홈즈씨가 다 죽어가요.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요." "뭐, 뭐라구요, 아주머니?" 나는 정신없이 아주머니를 밀어 내고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잠깐, 와트슨 선생님! 마차를 타고 가요!" "좋아요, 아주머니.. 빨리!" 아주머니와 나는 모두 당황했지만, 마차가 베이커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 하자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2.무서운 열병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은 엄청난 속력으로 달려가는 마차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홈즈가 쓰러진 게 언제입니까, 아주머니?" 하고 물었습니다. "사흘 전이에요." 마차에 뒤흔들려 아주머니의 말소리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때 바로 알리지 않았어요? 홈즈가 저의 둘도 없는 친구란 걸 잘 아 시면서...." 나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았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홈즈씨는 마치 미치광이처럼 날뛰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했어요." "병세는 어때요?" "그걸 전혀 모르겠어요. 템즈강 부두 근처에서 어떤 사건을 수사하던 중 괴상하고 무서운 병에 걸린 모양이어요. 수요일 오후에 축 늘어져 돌아와 자리에 누운 채 고개도 들지 못하잖겠어요. 음식이라곤 전혀 이베 대지도 못하니, 멀지 않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요." "정말 큰일 났군! 왜 의사를 부르지 않았죠?"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친구인 선생님조차 부르지 못하게 한 걸요. 의사를 불렀으면 물어뜯었을 거여요. 정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요." 이때 마차가 '끼익!' 하고 멈춰 섰습니다. 어느새 베이커 거리의 하숙집 앞 에 닿은 것입니다.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홈즈의 방으로 뛰어올라갓습니다. 세 계단씩 한꺼번에 뛰어올라 홈즈의 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습니다. 홈즈가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 문입니다.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음산했습니다. 창으로 새어드는 늦가을의 약한 햇빛 이, 수척해진 홈즈의 얼굴을 더욱더 처량하고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홈즈는 이제 죽겠군!' 이런 생각이 퍼뜩 스쳐갔습니다. 홈즈의 병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의사인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바라보는 홈즈의 눈은 높은 열에 들떠서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얼굴도 빨갛게 열에 떠 있었고, 입술은 마를대로 말라 바짝 타들어가고 있 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물겨운 것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홈즈의 손이었습니 다. 이불 위로 힘없이 내놓은 두 손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방에 적을 때려 눕혔다고 자랑하는 홈즈의 철권일까? 마치 다 죽어가는 까마귀의 발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오, 와트슨......"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는지, 목쉰 소리로 홈즈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불 위 의 손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계속 떨렸습니다. "와트슨 , 난 아무래도 끝장인것 같아. 자네에게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 어........." 홈즈는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자네답지 않게 약한 소리인가? 자넨 죽지 않아. 절대 죽지 않 을 거야....." 나는 이렇게 격려하며 홈즈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홈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안 돼! 가까이 오지마! 떨어져 있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범인과 맞설 때 외에 홈즈가 이렇게 날카롭게 소리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 니다. 홈즈는 다시 같은 말투로, "알겠나, 와트슨. 나에게 가까이 오려면 당장 여기서 나가!" 하고 소리쳤습니다. "홈즈 나는 의사고, 자넨 지금 중환자야. 왜 의사가 환자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된단 말인가?" 나는 어린애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글쎄, 안 된다니까. 옆에 오는 게 싫단 말이야!" 홈즈는 또 고함을 질렀습니다. 과연 허드슨 부인의 말대로 홈즈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게 제멋대로 이고, 남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안타깝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봐, 홈즈. 자넨 아주머니에게 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그래서 난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온거야. 자네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일이든 할 작정이야." "그래? 그렇다면 내 말대로 해주게. 제발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게." 홈즈는 끝까지 나의 우정과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홈즈는 일부러 나를 불러오게 했을까? 역시 정신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홈즈가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쉬며, "와트슨 화났나? 화내지 말게. 자네를 위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거 야." 하고 목쉰 소리로 말했습니다. "뭐, 나를 위해서라고?" 나는 홈즈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응, 나는 내가 걸린 병의 정체를 잘 알고 있어. 이병은 수마트라섬에 흔 한 쿠울리 병이라는 무서운 열병이야. 이 병에 걸리면 절대로 살아날 수 가 없어. 게다가 이건 무서운 전염병이야." 홈즈는 떨리는 손을 들어, 나에게 저리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와트슨, 내 몸에다 손을 대면 안 돼. 가까이 와도 안 돼. 그 정도로 떨어 져 있으면 괜찮아. 자네에게까지 쿠울리병이 옮으면 어떻게 하겠나? 병이 걸린 다음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의 말대로 쿠울리병은 치료법도 약도 없는 죽음의 열병입니다. 즉 아직 확실한 것이 연구되어 있지 않은 공포의 전염병인 것입니다. 3. 6시의 방문 얼마 후, 홈즈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습니다. 무서운 꿈에 시달리는지, 그는 몸을 뒤척이면서 낮고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가엾고 측은하여,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도 무슨 소린지 알 수도 없는 말을 마구 지껄이는 것보다야 자는게 낫지. 쉴 수가 있을 테니까.'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였습니다. 잠든 홈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홈즈와 함께 지낸 나날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 거의가 다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 생한 일뿐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그립군....'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방안을 거닐며 정든 난로와 선반, 벽 등을 둘러보았 습니다. 벽에는 지금까지 해결한 사건의 범인들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습 니다. 그것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이상하게도 흉악한 범인들의 얼 굴이 그리운 친구인 듯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벽난로 위쪽으로 눈길을 옮겼습니다. 거기에는 홈즈가 잠시도 떼어놓 은 일이 없었던 파이프와 담배 쌈지가 쓸쓸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아, 홈즈는 이제 두 번 다시 파이프를 물 수가 없을까? 홈즈, 제발 기운 을 되찾아 보랏빛 연기를 기세 좋게 내뿜어 주게.' 나는 그만 콧등이 시큰해져서 얼른 눈길을 옆으로 돌렸습니다. 주머니칼, 권총, 탄창 따위와 섞여 낯선 조그만 상아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 다. 한가운데 검은 두껑이 붙어 있는 그 상아 상자는 매우 진귀한 물건 같 았습니다. 나는 무심코 손을 ⅛쳐 그 상아 상자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홈즈가 마치 천둥같은 소리를 냈습니다. "만지면 안 돼! 와트슨, 손대지 말게!" 너무나 놀라,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습니다. 홈즈는 뺨을 실룩거리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 보더니. "남의 물건을 멋대로 만지지 마! 의사라는 작자가 나를 초조하게 하여 미 치광이로 만들 셈인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고 내뱉앗습니다. 꽤 인내심이 강한 나도 이번만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 미치광 이야, 네 멋대로 해라!'하고 소리치고 문을 박차며 나가 버리려고 생각햇습 니다. 그런나 그 순간, 미쳐 버린 홈즈를 혼자 방안에 내버려 두면 무슨 일 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홈즈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매우 위험한 상태였습 니다. 느닷없이 방안에 기름을 뿌려 불을 지르거나, 칼을 휘둘러 하숙집 아 주머니를 찔러 죽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와트슨, 자네 동전이나 은화를 가지고 있나?"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진 홈즈가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응, 은화 다섯 닢과 잔돈이 조금 있어, 왜 그러나?" "은화가 다섯 닢이라면 좀 적군. 자넨 재수가 없어. 하지만 할 수 없지. 5 개라도 좋으니, 그걸 조끼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잔돈은 바지주머니에 넣게. 그러면 몸의 균형이 잘 잡혀 똑바로 걸을 수가 있지." 아무래도 이건 미치광이 특유의 헛소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음 순간 홈즈 는 흐느껴 우는 듯한 이상한 목소리로, "와트슨, 가스등을 켜 주게. 너무 밝게 하지 말고, 아주 흐리게....."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잘한다, 잘해! 좋았어. 이번에는 편지 쓸 준비를 해 주게. 펜과 편지지와 봉투를 그 작은 탁자 위에 놓아 주게. 나에게 너무 가까이 오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이야." "편지를 쓰면 피로하지 않나? 괜찮다면 내가 대신 써 주지." 나는 어떻게든 홈즈의 기분을 돌려 보려고 이렇게 말하며, 펜과 편지지를 준비했습니다. "아냐, 이 편지는 내 글씨로 써야만 해." "누구에게 보내는 건데?" "내 열병을 고쳐 줄 사람에게 보내는 거야,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사람뿐이야." 나는 머리를 갸우뚱하였습니다. '이상하다? 미치광이의 헛소리 치고는 말 줄거리가 제대로 서 있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그토록 의사를 못 부르게 하던 홈즈가 이번에는 스스로 의사를 부르다니,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편지를 다 쓰면 자네가 전해 주게. 그런데 6시에 이 편지를 갖다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알겠나, 와트슨? 6시야." "응, 알았어. 뭐든지 자네 시키는 대로 하겠어." 나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점점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 을 하지 않으면 홈즈가 어떤 소동을 벌일는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홈즈는 이런 내 기분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와트슨, 거기 있는 설탕 집게로 조심스럽게 저 상아 상자를 집어 올려,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놓게. 조심해서 말야." 하고 또 한 가지 일을 시켰습니다. "뭐, 상아 상자를?" 나는 가슴이 섬뜩하였으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홈즈의 말에 따랐습 니다. 준비가 다 되자, 홈즈는 열심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편지라기보다 소갯장이었습니다. 4. 안개 속의 경감 미끄러지듯이 펜을 움직이며 편지를 쓰는 홈즈는,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이 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홈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치 광이도 흔히 훌륭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젠 됐어. 와트슨, 수고스럽지만, 이 편지를 로우어파크 거리 13번지의 카버어튼 스미드씨에게 전해 주게." 홈즈가 펜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칼버어튼 스미드? 그런 의사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홈즈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럴 테지. 스미드씨는 의사가 아니니까. 그는 수마트라에서 커다란 농장 을 경영하는 사람이야." "수마트라의 농장주라고?" 나는 더욱더 짙어지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응, 야자나무라든가 열대 과실 따위를 가꾸고 있는 사람이야. 지금 마침 런던에 와 있어. 의사는 아니지만,스미드씨는 쿠울리병에 관해 매우 자세 한 지식을 갖고 있다네." "하지만 홈즈...." "글쎄, 잠자코 내 말을 들어보게. 스미드씨는 자기 농장에서 이 병이 발생 했을때 스스로 연구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지. 더우기 스미드씨는 아직 도 이병의 연구에 열중하고 있어. 내가 쿠울리병에 걸렸다고 하면 스미드 씨는 한달음에 뛰어와서 나를 도와 줄 걸세." "자네가 살아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수마트라까지라도 가겠네." 나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이제야 알아 들었군. 그러나 스미드씨는 6시이외에는 집에 없어, 아주 꼼꼼한 성격이므로, 시간에 맞추어 가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말을 잘 하지 않으면 와 주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홈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뺨에는 붉은 두드러기 같은 열꽃이 늘어나고, 눈은 더욱 들어가고, 이마 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나는 안타까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돌팔이 의사든 농장 주든 빨리 데려다가 홈즈의 병세를 봐 달라고 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스미드씨를 꼭 데려오겠네." 나는 지푸라기리도 붙드는 기분으로 말했습니다. "스미드씨를 만나면, 내 병세를 자네가 보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해 주게. 알겠나, 와트슨? 내가 미쳐서 다 죽어가는 걸 숨김없이 이야기해야 된다 구. 그렇지 않으면, 스미드씨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걱정 말게, 그의 발 아래 끓어 엎드려 빌어서라도 데려오고 말겠네. 자네 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고비인데, 백번 천번인들 못 빌겠나." "부탁하네. 와트슨. 내가 스미드씨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걸세. 왜냐하면, 내가 스미드씨를 자기 조카를 죽인 범인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야. 스미 드씨의 조카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거든." "어떻게 해서든지 스미드씨를 설득하겠네. 도저히 안 될것 같으면, 완력을 써서라도 마차에 묶어서 데려오겠네." "아냐, 와트슨. 그렇게 난폭한 짓을 해서는 안 돼. 스미드씨만이 내 목숨 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정중하게 부탁해 봐." "응, 알았네." "그리고 스미드씨가 와 주겠다고 하면 자네는 한 발 먼저 돌아오게. 그럴 듯한 변명을 하고 스미드씨보다 먼저 이리로 돌아와야 해. 절대로 함께 오면 안 돼." "그건 또 왜?" "잠자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지금까지 자넨 내가 부탁한 건 꼭 그대로 해주었어, 이번에도 내 말대로 해줄 것으로 믿네." 하고 싶은 다 해버린 홈즈는 방문 열쇠를 나에게 휙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 고 지친 듯 쑥 들어간 눈을 감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지나 있었습니다. 로우어파크 거리의 칼버어튼 스 미드씨에게 가려면 지금부터 슬슬 나서는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홈즈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좀 걸렸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방을 나갔습니 다. 방문 앞 복도에서 허드슨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흘쩍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녀는 홈즈가 죽는 줄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아주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홈즈는 그렇게 간단히 죽을 사나이가 아닙니다. 저느 지금 의사를 부르러 가는 중입니다. 그 동안 홈즈를 잘 부탁 합니다." 나는 허드슨 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해주고 밖으로 나갔습니 다. 저녁때가 되어서인지 기온이 내려가고, 거리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 다. 나는 휘파람을 불어 마차를 불렀습니다. 곧 덜커덕 거리며 다가오는 마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흐르는 안개 속에서 한 사나이가 모습을 불쑥 나타내더 니, "와트슨 선생, 홈즈씨의 병환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으나,이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 다. "경시청의 모턴 경감 아니오?" 경감은 사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홈즈씨가 병이 났다기에 병문안을 왔더니, 만나주지 않는 군요." "그래요? 홈즈는 지금 중태요. 어쩌면 죽을 지도 몰라요." 나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안됐군요. 무척 걱정이 되시겠습니다." 모턴 경감은 걱정스러운듯 말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감돌았습 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경감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는데, 그 때 나는 마음이 너무나 초조하여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급한 볼 일이 있어서 난 이만 실례하겠소." 나는 마침 다가온 마차에 재빨리 올라탔습니다. 모턴 경감을 안개 속에 남 겨 둔 채......... 5. 수마트라의 농장주 로우어파크 거리는 높은 지대로,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주택가 입니다. 주로 신분이 높은 귀족이나 재벌들의 저택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러 준 주소에 따라 마부가 마차를 세운 곳은 역시 호화로운 저택 앞 이었습니다. 집 주위에는 고전적인 냄새가 물신한 철책이 둘러쳐져 있었으며,양쪽으로 널찍하게 열리는 대문에는 묵지한 장식이 달려 있었습니다. 훌륭하고 품위있는 저택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진귀한 식물이 있는 정원이 있고, 그 안쪽 깊숙이 저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스미드란 사람은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인데....' 수마트라의 농장주 따위, 어차피 농부가 성공한 것이려니 하고 하찮게 생각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작은 문을 지나 현관으로 가서 긴장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곧 안내를 맡은 하인이 나왔습니다. 그 사나이는 마치 장관의 비서처럼 으 스댔으나, 말씨는 지나치게 공손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칼버어튼 스미드씨 말입니까? 지금 연구 중이십니다. 당신은 와트슨 박사라는 분이시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은 내가 준 명함과 홈즈의 소개장을 받아들고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문이 열려 있는지, 똑똑하게 들렸습니다. "난 지금 연구주이야. 연구 중에는 누가 찾아오든지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 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또 잊어버렸나? 와트슨인지 뭔지 빨리 쫓아 버려!" 스미드인 모양이었습니다. 하인이 작은 소리로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았습니다. "글콅, 안된다니까. 나는 지금 손님을 만날 틈이 없어. 돌려 보내. 그리고 너도 빨리 나가. 연구를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알겠나? 어서 가서 지금 집에 없다고 해. 꼭 만나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해." 스미드의 목소리였습니다. '흠, 성질이 고약한 친구로군.' 나는 조용히 귀를 귀울였습니다. 하인이 다시 뭐라고 지껄였습니다. "넌 도대체 누구 하인이냐? 내 말을 아직도 못 알아듣겠나, 이 바보야!" 마룻바닥을 '쾅!'하고 신경질적으로 구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잠시 후, 아까의 하인이 풀죽은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대단히 죄송합니다. 주인 어른께서는 지금 연구중이라 아무도 안 만나시 겠답니다. 모처럼 찾아오신 선생님께는 매우 송구스럽지만...."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하여 더 이상 그의 변명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 습니다. 잽싸게 사나이를 밀쳐내고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는 사나이를 돌아보며, "자네에겐 페를 끼치지 않겠어. 책임은 내가 지겠어. 미안!" 하고 소리쳤습니다. 무서운 열병에 걸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을 홈즈를 생각하면, 그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예의 같은 걸 찾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홈즈 가 사느냐 죽느냐는 스미드를 데리고 가느냐 못 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 다. 스미드의 방으로 무조건 밀고 들어간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부탁입니다, 스미드씨!" 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아니, 이거 실례 아니오? 이봐, 스테이블즈! 빨리 이 사나이를 끌어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스미드는 나를 노려보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스테 이블즈라고 불린 아까의 하인은 스미드가 아무리 불러도 달려오지 않았습니 다. "승낙도 없이 멋대로 남의 방에 침입하다니,강도나 다름 없군, 경찰을 부 르겠어!" 스미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강도라도 좋고, 도둑이라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습니 다." 나는 한껏 소리쳤습니다. 스미드의 누렇고 큰 얼굴에 개기름이 배어 나왔습니다. 성이 나면 끈적끈적 한 액체를 내는 두꺼비와 같았습니다. 턱의 살이 두 겹이 져 있어서 더욱 두꺼비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숱이 많은 적갈색 눈썹이나 어두운 잿빛 눈은 적을 위협하는 새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커다란 머리통은 위가 뾰족하게 솟아났으며, 대머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에 비해 몸은 기형적으로 빼빼 말라 가늘고 작았으며, 등은 굽고 어깨 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예전에 몹쓸 병을 앓은 듯,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아 괴물같았습니 다. "이 무례한 친구야! 어서 나가지 못해?" 하며 스미드는 발을 탕탕 굴렀습니다. "무례한 행동은 다음에 천천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스미드씨, 셜록 홈즈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 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스미드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호소했습니다. "셜록 홈즈가? 그럼 당신은 홈즈의 심부름으로 왔소?" 홈즈라는 이름을 듣더니, 웬일인지 스미드는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와트슨 의사입니다. 홈즈의 소갯장을 안 읽어 보셨습니까?" 스미드는 그제야 홈즈가 써 준 소갯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음, 이거로군.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군. 중한 병에 걸 렸다는 말은 없어. 보통 소갯장이야." "자세한 내용은 쓸 수 없었소. 그것도 간신히 썼으니까요." "음, 당신은 의사라고 했지요? 당신이 애를 먹을 정도로 심한 병이오?" "심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망적입니다." "흐흠,거참......." 하고 혀를 찼으나, 스미드는 어쩐지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홈즈를 고쳐 주어야 할 사람이 그가 다 죽어간다는 소리를 듣고 기쁨을 감 추지 못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몹시 초조해 있던 나는, 그때는 스미드의 이상한 태도를 꿰뚫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마음 밑바닥에 무서운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6. 통한 진심 "스미드씨, 홈즈는 미크 박사나 피셔 박사등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당신 앞에 끓어앉아 빌어서라도 꼭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간곡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홈즈씨가 당신에게 내 발 아래 끓어 앉아서 빌라고 말했단 말이죠?" 스미드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그토록 나를 의지하다니, 가엾군 그래." "정말 불쌍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요." "홈즈씨와는 어떤 일로 잠깐 만난 적이 있소. 나는 홈즈씨의 재능을 인정 하고 있소.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에는 아까운 사나이야. 그러나 나는 아마튜어 연구가에 지나지 않소. 내가 과연 홈즈씨의 병을 고칠 수 있을 지....." 하며 스미드는 책상 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책상위에는 무서운 열대병의 세균을 넣은 병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스미드씨. 당신은 열대병에 관한 한 권위자입니다. 홈즈는 선 생님의 실력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와트슨씨. 중요한 것을 하나 묻고 싶은데, 홈즈씨는 어떻게 자기 병이 쿠울리병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스미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습니다. "예, 그건 홈즈가 부두에서 중국인 노동자, 수마트라에서 온 노동자들과 섞여 일하다 병이 났기 때문입니다. 홈즈는 상당한 노력가이므로, 쿠울리 병을 비롯한 열대병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흠, 그런데 홈즈씨는 언제 병이 나셨지요?" "사흘 전부터 몸의 상태가 이상해졌던 것 같습니다." "정신 상태는 어떤가요?" "그게 가장 큰일입니다. 홈즈는 원래 정신력이 가장 강한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정신이 혼란해져 있습니다." 나는 되도록 자세히 홈즈의 병세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나의 의견도 덧붙였습니다. 스미드는 눈을 빛내며 나의 설명을 듣고 있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습니 다. "흠, 홈즈씨의 병은 상당히 위중한 상태군요. 그정도까지 악화되었다면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소. 와트슨씨, 당장 가 봐 드리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너무나 고맙고 기뻐서 스미드에게 꾸벅 절을 했습니다. 스미드는 친구를 위하는 나의 진심에 감동되었는지, "스테이블즈에게 마차를 준비시키겠소.. 당신도 내 마차를 타고 함께 가도 록 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습니다.'하고 말하려다 당황하여 그 말을 목구멍으 로 꿀꺽 삼켰습니다. 홈즈가 단단히 일러 주던 말이 퍼뜩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다른 데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혼자 가십시오. 스미드씨가 가면 홈즈는 백만 대군을 얻은 것같이 원기를 되찾을 겁니다." "음, 그래요? 좋소. 나 혼자서 가지요. 홈즈씨의 주소는 알고 있소. 30분 안으로 꼭 가지요." 스미드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서둘러 채비를 차리기 시 작한 스미드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급히 방을 나섰습 니다. 모든 게 대체로 순조롭게 된 것 같았습니다. 남은 일은 스미드보다 한 발 먼저 홈즈의 방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잽싸게 골목을 빠져나와 영업용 마차를 불러세우고는, "베이커 거리까지 되도록 빨리!" 하고 재촉했습니다. 스미드가 갈 때까지 홈즈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스미드 가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애써 그 생각을 누르며. '이러면 안 되지. 불길한 건 될 수 있는 한 생각지 않도록 하자.' 하고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얼마 후, 마차는 베이커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홈즈가 살아 있어 줄 것을 빌면서 계단을 뛰어 올라 갔습니다. 7. 침대 밑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가만히 침대 쪽을 살피던 나는 홈즈가 눈을 뜨고 있 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얼굴빛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것 같았습니다. 홈즈가 먼저, "스미드씨를 쉽게 만날 수 있었나, 와트슨?" 하고 물었습니다. "응, 이제 곧 올걸세." "그거 잘됐군. 과연 자네 수단이 좋군. 아무래도 자네가 아니죘ㄴ 모든게 제대로 되지 않는다니까." 홈즈는 이상하리만큼 분명한 어조로 나를 칭찬했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홈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홈즈는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습니다. "스미드씨가 함께 오자는 걸 따돌리고, 부리나케 나 먼저 돌아왔어." "뭔가 수상하게 느끼느 것 같진 않던가?" 홈즈는 신경이 쓰이는 듯이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병에 대해서 꽤 자세하게 묻더군." "그래서 자넨 뭐라고 대답했나?" "사실대로 자네가 중태에 빠져 있다고 햇지. 부두에서 쿠울리병이 전염되 었다는 것도 이야기했어." "좋아, 좋아. 그럼 됐어. 의사로서의 자네 설명을 들었으니, 스미드씨도 충분히 납득했을 테지." 홈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트슨, 자네 잠시 아래층 아주머니 방에 가서 쉬고 있게." 하고 말했습니다.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꼈습니다. 그렇게 느끼자, 지금까지의 일 에 어딘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홈즈, 중환자인 자네를 단 1분이라도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나는 스미드씨가 진찰하는 것을 꼭 보고 싶어." 나는 무엇을 캐내려는 눈초리로 홈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냐, 와트슨. 자네는 여기 없는 게 좋아." 홈즈는 이렇게 말하며 난처한 듯이 눈길을 돌렸습니다. 나는 일찌기 이렇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홈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나? 홈즈, 자넨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 지?" 하며 내가 일부러 홈즈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을때, 밖에서 마차 멎 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 스미드씨가 왔군!" "뭐? 이봐, 와트슨! 이 침대 밑으로 숨어. 빨리!" 홈즈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부탁이니 잠시 숨어 있게. 스미드와 단둘이 해결해야할 사건이 있어. 자, 빨리!" "사건이라니?" 나는 의아해 하며 되물었으나, 홈즈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명령대로 움직 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홈즈는 몸을 웅크리고 부리나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나에게. "그대로 움직이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꼼짝 말게. 말을 해서도 안 돼! 알겠나, 와트슨? 지금부터가 참으로 중요해." 하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숨을 죽인 채, 귀만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홈즈와 스미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다 죽어가는 환자의 몸으로 사건에 도전한 홈즈의 기백에 나는 그저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침대 위의 홈즈는 낮게 신음하기도 하고,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하기도 하며, 지독한 열병 환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방 앞에서 멎더니, 누군가 문 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스미드였습니다. 그는 아마 잠자코 홈즈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내 귀에 들리 는 것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홈즈의 괴로운 신음소리뿐이었습니다. 방안에는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로선 스미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만족스런 웃음을 띠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침대 밑에서 뛰어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홈즈, 잘 싸우게! 만약 위태로와지면, 소리를 지르게, 내가 맡을 테니... ...' 나는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홈즈를 응원 할 뿐이었습니다. 그외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기분 나쁜 침묵을 깨뜨리고, 스미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홈즈! 이봐, 홈즈! 나를 모르겠나?" 홈즈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드는지, 침대가 삐꺽삐꺽 소리를 냈습니다. "이봐, 홈즈! 나를 모르겠나?" 스미드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높고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홈즈가 죽어가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8. 상아 상자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조바심이 났습니다. 잘못하면 홈즈가 죽게 되지나 않을까 몹시 불안했습니다.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괴롭고, 안타깝고, 초조한 침대 밑이었습니다. 마구 어깨를 흔들린 끝에 정신을 차린 듯 홈즈는 '끄응!'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아, 스미드씨...... 스미드씨가 정말 저를 위해서 와 주셨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나, 홈즈? 보시는 바와 같이 내가, 스미드가 이렇게 찾아 왔어. 하지만 잘 들어둬, 홈즈." 스미드의 목소리는 승리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네가 죽는 꼴을 똑똑히 보기 위해서야. 용케도 너는 네 병이 무슨 병인지 알고 있다면서?" "예, 분명히 그 병이요....." "헛히히, 어때? 그 병에 걸린 기분은?" 스미드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으나, 홈즈가 이른 대로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스미드씨.... 지옥보다 견디기 힘듭니다. 당신 조카인 빅타씨가 이 병에 걸려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너무나 잘 알겠소...." 하며 홈즈는 다시 신음하였습니다. "흥, 빅타란 놈은 젊고 탄탄했는데, 나흘째에는 죽어 버렸어. 너도 빅타처 럼 곧 죽겠지." "빅타씨를 이 병에 걸리게 하여 죽인 사람이 당신이라는건 대충 알고 있었 지요........" "호오, 그래? 과연 명탐정이군. 용케도 내가 한 짓이라는걸 알아 냈군. 그 러나 이제 넌 어쩔 수가 없어. 얼마 뒤에는 저 세상으로 가게 되니까. 그 럼 아무도 나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게 되지." "아아, 으음..... 물 좀! 목이 타는 것 같아요!" 견딜 수 없다는 듯 홈즈가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온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나서 미쳐 죽는게 이 병의 특징이야. 실 컷 괴로와 하라구, 홈즈! 나를 위협한 네가 괴로와할수록 나는 유쾌해진 단 말이야. 자, 불쌍해서 물은 주겠어. 고맙게 받아 마셔. 그리고 또 괴 로와하며 몸부림 치라구." 스미드는 컵에 물을 따라 홈즈의 입에 갖다 대었습니다. 되도록 살려 두면 서 서서히 곯려 죽이려는 모양이었습니다. 홈즈는 와락 달려들어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물은 대부분 엎질러졌습니 다. "스, 스미드씨, 제발 부탁입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만일 이 병을 고쳐 주면, 나는 당신의 범죄를 절대로 폭로하지 않겠소." 홈즈는 가느다란 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핫하하, 그런 얕은 수에는 안 넘어가. 나로선 너 같은 탐정이 살아서는 곤란해. 빅타 살인을 냄새맡은 이상 너를 살려 둘 수는 없어." "아아, 스미드씨....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졌습니다. 어떤 교활한 놈에게 도 지지 않았던 내가 당신에게는 그야말고 멋지게 졌습니다. 당신은 그야 말로 천재적인 악당입니다." "새삼스레 치켜세워도 소용없어." "아, 난 아예 당신에 대한 일을 조사하지 말았어야 했소. 당신의 끔찍한 살인 계획을 조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들끓는 부두로 나갔다가 그만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만 가지 않았더라도 병에 걸리지 않았 을텐데....." "핫하하! 무슨 잠꼬대인가, 홈즈. 너는 꽤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 는데 뜻밖에도 얼간이군 그래. 그런 머리로 그 많은 사건들을 해결해 냈 다는게 믿어지지 않는군." 스미드는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껄껄대고 웃었습니다. "이봐, 홈즈! 너는 정말 부두에서 쿠울리병에 전염되었다고 생각하나?" 홈즈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무, 물을 주십시오,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쑤셔요..... 살려 주십시오, 스미드씨.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힘이 없소." "좋아, 좋아. 물을 주지. 죽기 전에 어째서 네가 이런 병에 걸렸는지를 분 명히 알려 주고 싶으니까 말이야." "스미드씨, 약을 주십시오.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죽어가는게 이 병의 특징이야. 아프다고 울부 짖으면서 죽어가는거야. 서서히 몸이 죄어들기 시작할걸." 스미드의 말은 매우 잔인하게 들렸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몸이 마구 뒤틀리는 것 같아요." "흥, 마침내 끝장이군 그래. 좋아, 홈즈. 마지막으로 내 말을 잘 들어 둬. 넌 이 병에 걸리기 전에 조그마한 소포를 받은 걸 기억하나?" "소포?" "그래. 작은 상자 말이야." "아, 눈이 희미해진다. 소리가 안 들린다. 아아, 아아. 아아....." 홈즈는 계속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봐, 홈즈. 잘 들어 둬!" 스미드는 마구 홈즈를 뒤흔들며 말했습니다. "천국에 가는 선물로 나의 멋진 계략을 들려 주지. 상아로 만든 작은 상자 가 수요일에 도착했을 거야. 너는 그걸 열어 보았겠지?" "으응, 상아의 작은 상자.... 분명히 난 열어 보았어. 안에는 강한 용수철 이 장치되어 있었어. 깜짝 놀라게 하는 장난감처럼....." "이봐, 정신차리라구!" 스미드는 죽어가는 홈즈의 뺨을 철썩철썩 샔렸습니다. "그건 장난감이 아냐. 그 상아의 상자가 너에게 병을 옮긴 거야. 알겠나, 이 얼간이 같은 녀석아! 네가 내 일에 방해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지 독 한 변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그랬던가? 아, 생각이 나는 군. 용수철에 찔려 내 손가락에서 피가 났었어.... 탁자위에 그 상자가 놓여 있어." "오, 이거야, 이거! 바로 이 상자야. 온 김에 이 상자를 가져가야겠군. 그 대로 놓아두면 너를 죽인 증거가 되니까 말이야. 힛히히..... 이로써 내 범죄는 완전 무결해 졌어. 참으로 멋진 성공이야." 스미드는 껄껄 웃으면서 작은 상아 상자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습니다. "어때, 홈즈? 나에게 멋지게 한 대 얻어맞고 죽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겠 지? 죽기전에 내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안 것만 해도 다행이지. 자, 그 럼 여기 앉아서 네놈이 죽는 꼴을 천천히 지켜볼까?" 그샔 홈즈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는데, 내 귀에는 모기 울음소리 같아 잘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이제야 말로 죽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뭐라고? 좀더 밝게 해달라고? 그러고 보니, 방이 너무 어둡군. 좋아, 발 게해서 네 얼굴을 똑똑히 보아 주지. 응? 뭐?" 그러자 홈즈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성냥과 담배를 갖다 주게." 하고 말했습니다. "뭐라구!" 스미드가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 일어났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잠시 어리둥절하였으나, 이내 짐작가는 바가 있 었습니다. 벅찬 기쁨에 환성을 지르며 침대 밑에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 다. 9. 명탐정의 명연기 눈 깜짝할 사이에 형세가 뒤바뀐 것이었습니다. 승리감에 젖어 제멋대로 지껄여 대던 스미드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홈즈는 숨을 크게 내쉬며, "이번 연극은 정말 힘들었어. 고된 역할이었어." 하고 말했습니다. "연극이라고? 그, 그럼 병이 아니었나?" 스미드는 화가 치밀어올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잠깐 꾀병을 해 보았지. 그러나 진짜 병보다 더 괴로왔어. 아뭏든 난 사 흘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까. 정말 고행이더군. 당신이 조금 전 에 따라 준 물은 참말로 맛이 있었어. 무엇보다도 괴로왔던 건 담배를 피 우지 못했던 거였지. 자, 우선 담배 한대 피워야 겠군." 방안에 향긋한 담배 냄새가 퍼졌습니다. "아, 이제야 좀 살 맛이 나는 것 같군. 마침 때를 맞추어 또 한사람의 배 우가 등장하는군." 홈즈는 이렇게 제멋대로 한가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면서 모턴 경감이 성큼 들어왔습니다. "연극이 제대로 척척 진행되었소. 경감님. 이 사나이가 문제의 스미드입니 다." 홈즈가 말했습니다. "빅터 살해범으로 널 체포한다. 저항하면 해롭다는 걸 잊지 마." 모턴 경감은 엄한 소리로 말하며, 스미드 앞에 버티고 섰습니다. "잠깐 모턴 경감님! 그자는 조카인 빅터만 죽인게 아니라, 나까지 살해하 려고 했소. 그 점도 잊지 마시오." 홈즈가 밝은 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으음..." 스미드는 마치 이리를 만난 들개처럼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홈즈의 연기나 제때에 나타난 경감이 나타난 것등, 너무나 멋진 솜씨에 얼 이 빠져 그저 앓는 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스미드씨, 그렇게 놀랄 건 없어. 당신이 방의 불빛을 밝게 했지? 그게 신호였어. 방이 밝아진 것을 보고, 경감님이 와 주신 거야. 경감님 을 불러 준 것은 바로 당신이었단 말야." 홈즈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스미드는 다시 '끄응!'하고 앓는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아참, 모턴 경감님! 이 친군 저고리 호주머니에 상아로 만든 작은 상자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빼앗아 버리시오. 위험한 물건이니 조심해서 다루시 오. 중요한 증거품이기도 합니다." 홈즈가 이렇게 말했을때, 스미드가 별안간 문 쪽을 향해 몸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모턴 경감의 동작은 참으로 민첩하였습니다. 마치 럭비에서 태클하 듯이 스미드에게 달려든 경감은 , 재빨리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아, 아야..." 스미드가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 채거나 얻어맞은 모양이었습 니다. "얌전히 굴지 않으면, 뼈 한두개 쯤은 부러질걸. 그 경감님은 화가 나면 범인의 손발이나 갈비뼈를 꺽는 버릇이 있으니까." 홈즈가 농담을 하였습니다. "제기랄! 홈즈, 이 사기꾼 같은 녀석아!" 스미드는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녀석아! 천하에 다시없는 사기꾼아!" 명탐정 홈즈가 악랄한 살인범에게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다니, 우스운 일 이었습니다. "시치미를 떼고 나를 부르러 온 사나이도 역시 네 편이겠지? 사기꾼의 짝 이겠지?" 스미드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 깜빡 잊었었군!" 하며 홈즈가 침대를 쿵쿵 주먹으로 두드렸습니다. "미안, 미안해! 와트슨, 이제 됐어. 나오게. 오랫동안 고생을 시켜서 정말 미안해." "아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야아, 정말 지독한 놈들이군. 나 하나 잡 으려고 더러운 속임수까지 쓰고 말이야." 스미드가 또다시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었습니다. 나는 침대 밑에서 기어나와 목덜미를 주무르고 손발을 펴며, "명탐정의 명연기에는 참으로 감탄했지만, 무대 밑은 견디지 못할 만큼 괴 로운 곳이더군."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자, 가자!" 모턴 경감이 스미드의 등을 밀었습니다. 홈즈는 끌려가는 스미드의 등뒤에다 대고, "나도 곧 뒤따라가겠네. 경찰의 조사에 나의 증언이 도움이 될 테니 말일 세." 하고 소리쳤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그럼 먼저 가서 경시청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모턴 경감은 예의 바르게 경례를 붙이고 방을 나갔습니다. 런던 경시청에 가기위해 채비를 차리면서 홈즈는 과실주를 마시고 비스킷을 먹었습니다. "아, 맛있군. 비스킷이 이렇게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어때, 와트슨, 자네도 좀 들게." 사흘이나 굶은 사람답지 않게 홈즈는 원기왕성 하였습니다. "자네의 솜씨에는 정말 감탄했어. 난 도저히 흉내도 낼 수가 없어." "난 원래 불규칙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괜찮아. 밥을 먹다가 안 먹 다가, 2,3일동안 밤을 꼬박 새우기도하고.... 그러니까 이번처럼 며칠 굶 고도 그렇게 괴로운줄 모르겠어." 홈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그러다가 진짜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 하려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허드슨 부인에게 내가 다 죽어가는 중환자라는 사 실을 믿게 하는 일이었어. 그러면 아주머니는 트림없이 자네에게로 달려 갈 게 뻔하니까. 와트슨,하지만 언짢게 생각하진 말아주게. 자네나 아주 머니를 놀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홈즈는 잠시 숨을 돌린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는 아주머니 못지않게 순진하고 정지하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며 스미 드를 부르러 갈 것이라 생각했지. 아니나다를까 자넨 내가 진짜 쿠울리 병 에 걸린 줄 알고 스미드에게 가 주었어. 만일 자네가 내 연극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도저히 스미드를 멋지게 속여 데려올 수가 없었을 거야. 자넨 속이는 일엔 서투르니까 말이야." "응, 그건 자네 말이 옳아. 나는 연극을 할 줄 몰라. 그러나 자네의 수척 해진 얼굴이며, 괴로와하는 모습에는 의사인 나까지 쉽게 속았어. 나는 역시 돌팔이 의사일까?" "자넨 돌팔이 의사가 아니라 보기드문 명의야. 와트슨 선생. 그러니까 나 는 미치광이 같은 소릴 해서 자네를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琴던 거 야. 와트슨 선생의 진찰을 받으면, 당장 꾀병이 들통날 테니까 말이야." "맥을 짚고 열을 재거나 하면 증세를 어느 정도 알수 있지." "자네가 만지지 못하도록 고함치고 떠들어 대느라고 몹시 고생했어, 아뭏 든 사흘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으니 얼굴은 형편없이 말라빠졌지. 게다가 이마에 바셀린을 발라 식은땀처럼 보이게 하고, 눈두렁과 뺨에는 중환자 처럼 보이도록 그림 물감을 칠했으니, 속을 만도 하지. 입술에는 엷은 가죽을 붙여 거칠게 해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여 댔 지. 나를 진찰하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이야." "큰 곤욕을 치렀군. 자네라면 이제 꾀병에 대한 논문이라도 쓸 수 있겠 어."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곧 정색을 하며, "저 상아로 만든 작은 상자는 정말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이지. 굉장히 무서운 거야." 홈즈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햇습니다. "이봐, 와트슨! 아까 자네가 저 작은 상자를 집어들었을땐 아찔하여 식은 땀이 나더군, 그때만은 정말 필사적으로 소리쳤어. 잘못하여 그 상자를 열 면, 독사의 이빨같은 날카로운 용수철이 튀어나와,쿠울리병의 세균을 핏속 으로 왈칵 흘려넣게 되어 있거든. 죽음의 장치지. 나는 악당들로부터 수상 한 장치를 해 둔 소포를 종종 받으므로, 일단 경계하고 조사해 보았기 때 문에 괜찮았어. 하지만 스미드에게 살해된 그의 조카 빅터는 자기도 모르 게 죽음의 장치가 된 상자의 독 때문에 죽엇지." "스미드는 왜 조카를 죽였을까?" "재산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지." "돈에 얽힌 살인인가? 곁들여 자네까지 죽이려다 거꾸로 한 대 얻어맞은 꼴이군." "스미드란 놈을 멋지게 꾀어 낸 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자네의 공로야. 와트슨 선생. 말한자면 자네의 순수한 우정이 악랄한 범죄를 멸망시킨 거 야." "서투른 배우의 연기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니 나로서도 기쁘군." "와트슨, 경시청에서 일이 끝나면, 시내에 나가 맛있는 것으로 한턱내겠 네." 홈즈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매고 웃옷을 입었습니다. 나는 하인처럼 공손히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문을 열면서. "잘 다녀오십시오. 명탐정님!"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허드슨 부인은 복도에 서서 두 사나이의 우스운 몸짓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