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난당한 시험 문제 =================== 코난 도일 작.. 1. 그리이스어 시험지.. 1895년 나와 홈즈는 어느 조용한 대학 도시에서 몇 주일을 보낸 일이 있었 습니다. 옛날 영국의 역사에 대한 홈즈의 연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대학 도서관 근처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홈즈는 책이며 노트들을 잔 뜩 늘어놓고 열심히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홈즈는 어지간히 범죄와 인연이 깊은지. 거기까지 사건이 따라왔습 니다. 사건을 의뢰해 온 사람은 힐턴 소움즈라는 그 고장 대학 교수 였습니다. 깡마르고 키가 커서 신경질적인 느낌을 주는 사나이였습니다.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홈즈씨. 바쁘신 줄은 알지만, 제 이야기를 좀 들 어 주십시오.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연구가 바빠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었던 홈즈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말씀대로 저는 지금 몹시 바쁩니다. 모처럼 오셨는데 안됐지만 경찰에 의 뢰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소움즈 교수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알려져서 안 됩니다. 가능하면 학교안에서 해결하고 싶습니다. 듣기에 홈즈씨는 입이 무거운 분이라 쓸데없는 이야기는 안 하 신다던데... 부탁합니다." 홈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소움즈 교수는 홈즈의 태도 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학교엔 포테스큐 장학 제도라는 게 있습니다.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졸업까지의 학비 일체를 대주는 거죠. 물론 장학금을 타려면 시험을 거쳐 합격해야 합니다...." 소움즈 교수는 내일로 닥쳐온 그 시험의 그리이스어 출제 위원이었습니다. 며칠 전, 소움즈 교수는 그리이스어 시험 문제를 만들어, 그것을 인쇄소에 보냈습니다. 외부에 시험 문제가 알려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진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3시, 인쇄소에서 시험 문제의 교정쇄(교정을 보기위해 활자로 짜 놓은 판위에 놓고 찍는 종이)가 나왔습니다. 오후 4시 30분경 교정을 보던 소움즈 교수는 문득 그 시간에 친구와 만나기 로 약속했던 일을 생각해 냈습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교수는 교정쇄를 책상위에 그대로 둔 채, 방문을 잠그고 친구를 만나러 밖 에 나갔습니다. 소움즈 교수가 자기 방으로 돌아온 것은 약 한 시간 후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하게 문의 열쇠구멍에 열쇠가 꽂혀 있었습니다. '내가 문을 잠그고, 열쇠를 그냥 꽂아 둔 채 나갔었나?' 소움즈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열쇠는 호주머니 속에 있었습니다. 그 방 열쇠는 2개인데 소움즈 교수와 사환 배니스터가 하나씩 가지고 있었 습니다. 그렇다면 열쇠 구멍에 꽂혀 있는 열쇠는 배니스터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소움즈 교수는 배니스터에게 가서, "내 방에 열쇠가 꽂혀 있는데, 자네가 잊고 그냥 둔 건가?" 하고 물었습니다. 배니스터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찾아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 아까 차를 드리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잊어버리고 그냥 나온 모양 이군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배니스터는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는 벌써 10년 가까이나 교수의 시중을 들어 온 사람으로, 정직하고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보통때야 상관없지만 오늘은 방안에 내일 있을 시험의 교정쇄가 놓여 있거 든." 소움즈 교수가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괜찮을까요?" 배니스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교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소움즈 교수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군가 시험 문제의 교정쇄를 만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2. 책상위의 흙.. 교정쇄는 세장으로, 교수는 방에서 나갈때 그것을 가지런히 간추려 놓았습 니다. 그런데 한장은 마룻바닥에, 한장은 창문 가까이의 작은 탁자 위에,, 또 한장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배니스터. 설마 자네가 이걸 만진 건 아닐 테지?" 교수의 물음에 배니스터는 펄쩍 뛰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생님 책상위의 물건 을 만진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시험 문제지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만일 문에 열쇠 가 그냥 꽂혀 있고 내가 방에 없다는 것을 알면, 나쁜 짓인줄 알면서도 문 제를 훔치러 들어올 가능성이 있지. 야단났군." "열쇠를 그냥 꽂아 둔 제게 잘못이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배니스터는 비틀비틀하더니 머리를 감싸쥐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습 니다. "배니스터,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까지 괴로와하지 않아도 돼." 하며 소움즈 교수는 배니스터에게 브랜디를 따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수는 방안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둘러보았습니다. 창가의 책상위에 연필을 깍은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부러진 심도 있었습 니다. 범인이 급히 시험 문제를 베끼다가. 심이 부러져서 다시 연필을 깍았 다느 추리가 성립됩니다. 교수는 또 한가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방안엔 작은 책상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빨간 가죽을 씌운, 흠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사위에 7센티미터 정도의 흠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긁힌 자국이 아니라 칼로 벤 것 같은 흠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작은 흙덩어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흙 속에는 톱밥 같은것이 섞 여 있었습니다. 교수는 단서가 또 없을까 하고 열심히 찾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소움즈 교수는 홈즈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제발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범인을 잡든지 아니면 시험을 연기하고 새 문제를 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제 입장입니 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다시 내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시험을 연기하고 문제를 다시 내는 이유를 학생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데, 그렇게 되면 우리 학교의 명예가 깍이게 됩니다. 현재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시험 전에 범인을 몰래 찾아 내어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하는 겁 니다." 어느 결에 홈즈는 이 사건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 같았습니다. "알았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죠. 그런데 그 교정쇄가 전해진뒤로. 당신 방에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까?" "저와 같은 기숙사에 있는 다우라트 라스라는 인도 학생이 찾아 왔었습니 다." "그 학생도 내일 시험을 치릅니까?" "예." "그샔 교정쇄는 책상 위에 있었습니까?" "예, 그렇지만 말아 두었으니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도 시험 문제의 교정쇄라는 건 알았겠죠?" "아마 몰랐을 겁니다." "교정쇄가 당신에게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것을 가지고 온 인쇄소 직원뿐입니다. 사환인 배니스터도 몰랐습니다." "배니스터는 지금 어디 있죠?" "제 방에 있을 겁니다. 몹시 괴로와하는 것 같아서 그냥 두고 나왔습니다." "그럼 방은 열어 놓은 채 입니까?" "예, 하지만 교정쇄에 대해선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금고에 넣고 잠갔으니 까요." "그러니까 범인은 당신 방에 시험 문제의 교정쇄가 있는 것을 모르고 방안 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셈이 되는 군요." 잠시 후, 홈즈와 나는 소움즈 교수를 따라 대학 기숙사로 갔습니다. 3. 교수의 방.. 소움즈 교수의 방은 한눈에 내다보이는 아늑하고 조용한 곳에 있었습니다. 기숙사 건물의 아래층은 교수들의 방이고 2,3,4층에는 각각 한 명씩 있었습 니다. 우리가 기숙사에 닿았을때는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홈즈는 안 에 들어가지 않고 먼저 건물 바깥에서 교수의 방을 바라보았습니다. 교수의 방 창문은, 땅바닥에서 2미터쯤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홈즈는 발돋 움을 하고 방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홈즈씨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창문은 안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습니다." 교수의 말에 홈즈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교수의 방에 들어간 홈즈는, 우선 주의 깊게 양탄자 위를 조사하기 시작했 습니다. 이윽고 홈즈는 얼굴을 들었습니다. "발자국 같은건 전혀 없는 것 같군요. 요즘음 날씨가 좋아 땅바닥이 질척거 리지 않으니까.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게 당연할지도 모르죠. 그건 그렇 고 배니스터가 주저앉아 있었다는 의자가 어느 것입니까?" "저겁니다." 하며 소움즈 교수는 창문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래요? 그럼 흩어진 교정쇄가 한장 놓여 있었다는 작은 책상을 좀 볼까요 ?" 홈즈는 작은 책상앞으로 다가가 옆의 창문과의 거리를 눈어림으로 재어 보 고 나서 말했습니다. "범인은 방 한가운데 있는 당신 책상에서 교정쇄를 한 장씩 집어. 이 창가 의 작은 책상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안뜰을 거쳐 돌아올 당신을 살펴보면 서 문제를 베끼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저는 안뜰을 걸치지 않고, 건물의 측면 입구로 해서 들어왔습니 다." "그러리라 생각했죠. 범인은 뜻밖의 일에 당황하여 교정쇄를 흐트러뜨리고 달아난 것입니다. 종이가 흐트러진 모양을 보니, 첫째 장의 문제는 전부 베낀 듯 합니다. 두 장셉를 작은 책상에 가지고 와서 베끼기 시작했을때, 당신이 갑자기 돌아오신 겁니다. 이 방에 들어섰을때 누가 달아나는 것 같 은 발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못 들었는데요...." 홈즈는 작은 책상을 전등 쪽으로 기울이고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낙심한 듯 얼굴을 들었습니다. "책상 표면에 연필 자국이 남아 있지 않나 했는데 그런 건 없군요." 홈즈는 이번엔 빨간 가죽을 씌운 다른 책상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아,이게 당신이 말한 흙덩이군요. 과연 톱밥 같은 것이 섞여 있군요." 그 다음에 홈즈의 눈은 책상위의 흠 쪽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건 좀 이상하군요. 처음엔 얕은데, 마지막엔 톱니 모양으로 되어 있으 니..." 홈즈는 방에 있는 다른 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 문을 어디로 통합니까?" "예, 침실로 통합니다." "사건이 있은 후 들어가신 일이 있습니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잠깐 저 방을 보여 주실까요?" 침실로 들어간 홈즈는 방안을 한바퀴 빙 둘러보더니 옷장 앞에 걸린 커튼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설마 이 뒤에 누가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홈즈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커튼을 옆으로 홱 끌었습니다. 물론 그 뒤엔 안 무도 없었습니다. 서너벌의 옷이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물러서려 하다가 홈즈는 갑자기 허리를 굽혔습니다. "아니, 손님께선 여기에도 같은 흙덩이를 떨어뜨리고 갔군." "그런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들어왓을까요?" 소움즈 교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이젠 사건 진상의 일부가 뚜렷해졌습니다. 범인은 당신이 방문에 손을 대 기까지 당신이 돌아온 걸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지품만 가 지고 헐레벌떡 침실로 뛰어들어, 이 커튼 뒤에 숨었던 것입니다." "그럼 나와 배니스터가 방안에서 떠들고 있을 때 범인은 이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요." 4. 세 기숙생.. 홈즈의 수사는 드디어 사건의 중심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 평면도를 보니 위층에 있는 학생들이 방으로 갈 땐 반드시 당신 방을 지나 층계를 올라 가야 할 것 같군요." "예, 그렇습니다." "위층에 있는 세 학생도 내일 시험을 치릅니까?" "예." "그중에서 특히 의심스럽게 생각되는 학생은 없습니까?" 홈즈의 물음에 소움즈 교수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증거도 없이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지요..." "그럼 세 학생의 성질이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죠.... 이층에 있는 학생은 길크리스트라고 하는데.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합니다. 특히 넓이 뛰기를 잘해서 다른 학교와의 시합 때 선수 로 나갑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로 늘 돈 걱정을 하고 있는 모양 입니다." "3층의 학생은 어떻습니까?" "아까도 잠깐 말한 인도 학생 다우라트 라스인데. 인도인답게 신비에 쌓인 사내여서 나로서도 확실한 성격은 알 수 없습니다. 성적은 대체적으로 좋 은데. 그리이스어만은 조금 떨어집니다." "4층의 학생은?" "마일즈 맥랄랜이라고. 머리가 썩 좋아서 교내에서 손꼽는 수재입니다. 그 런데 노력을 전혀 안 하고, 이따금 말썽을 일으킵니다. 1학년땐, 커닝을 하다가 퇴학당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여전하죠. 그러니 이번 시험도 걱정이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맥랄렌이 가장 수상하군요..." "그런 셈이지요." "자, 우선 배니스터를 좀 불러 주십시오." 홈즈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죠." 잠시 후 방에 들어온 사람은 키가 작고 흰 머리가 조금 섞인 50살 가량의 사나이였습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열쇠를 꽃아 둔걸 모르고..... 선생님 께서 4시 30분엔 언제나 차를 드셨거든요. 그런데 방에 안 계시기에 그냥 돌아갔지요. 다시와서 열쇠를 뽑는다는 것이 그만...." 배니스터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의 심정은 이해가 가는데, 그때 그러니까 소움즈 교수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의자가 어떤 겁니까?" 홈즈가 물었습니다. "저 입구 가까운데 있는 의자입니다." "좀 이상하군요. 더 가까이에 의자가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거기까지 갔을까요?" "그저.... 정신없이 비틀거리다 보니...." 홈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교수에게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잠깐 안뜰로 나가 봅시다." 그래서 우리는 다 함께 어두워진 안뜰로 나갔습니다. 세 학생의 방 창문에 는 이미 불이 환히 켜져 있었습니다. 돌연 검은 그림자가 창문에 나타난 것은 3층의 인도 학생 다우라트 라스의 방이었습니다.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고 분주하게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방을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이 기숙사는 학교안에서도 가장 오랜된 건물이라 구경하러 오 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당신들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죠." 우리는 먼저 이층 길크리스트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곧 길크리스트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신기한 건물의 방안을 좀 연구해 보고 싶어서요..." 홈즈가 길크리스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 그러십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며 상냥한 태도로 우리를 맞아들였습니다. 홈즈는 그럴듯한 얼굴로 노우트에 방안의 구조를 스케치했습니다. 잠시 후, 그 방을 나와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인도 학생 다우라트 라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를 쏘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홈즈가 스케치를 끝내자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4층 맥랄렌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돌아가! 오늘밤엔 아무도 만나기 싫어! 내일 시험이 있단 말이다." 교수는 미안한 듯이 우리 얼굴을 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맥랄렌은 아마 내가 노코한 줄 모를 겁니다." 그러나 홈즈는 그런 일에 별로 개으치 않는 눈치였습니다. 돌아서서 층계를 내려가며, 그는 소움즈 교수에게 이상한 말을 물었습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맥랄렌의 키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십니까 ?" "글쎄요. 정확한 건 모르지만 인도 학생보다 큰건 틀림없습니다. 한 1미터 70센티미터 정도 될 듯싶은데...." "그 점이 이 사건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돌아가시다니요" 시험은 바로 내일인데...." 소움즈 교수는 울상을 지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습니다. 그땐 만족할 만한 대답을 가지고 올 수 있을 겁니다. 그 전까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계십시 오." 그래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쳐 버리지 못한 소움즈 교수를 남겨 둔 채, 우 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인도 학생은 아직도 초조한 듯 방안을 왔다갔다하 고 있었습니다. 홈즈는 기숙사 건물을 돌아다보며, "와트슨, 범인은 저 세 학생중의 하나가 분명한데 자네는 누가 가장 의심스 러운가?"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4층의 맥랄렌이 좀.... 커닝하다 들킨 적도있고, 평소의 품행도 좋 지 않다니 말이야. 하지만 인도 학생쪽도 의심이 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안절부절을 못하고 서성거릴까?" "시험을 앞두고 무언가 욀적엔 저렇게 방안을 서성거리는 사람도 많아." "그런데 우리가 방에 들어가니까, 어쩐지 싫은 기색이더군." "시험 전날 밤이라 시간이 아쉬운 판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찾아갔으 니.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도 이상한 건 배니스터야." "배니스터? 그 사람은 꽤 정직하고 성실해 보이던데...." "아뭏든 숙소로 돌아가 차근차근 생각해 보세." 숙소로 돌아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은 홈즈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윽고 홈즈가 입을 연 것은 밤이 꽤 깊은 다음이었습니다. "와트슨, 범인을 알았네. 중요한 재료는 다 갖춰져 있어. 이젠 그곳을 잘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돼.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게." 나는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5. 공범자.. 이튿날 아침, 홈즈가 내 방에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때 세수를 하고 있었습 니다. "와트슨. 범인을 알아 냈나?" "아니, 아무래도 내 머리는 자네 머리만 못한 모양이야." "하하, 그렇게 비관하지 말고 이걸 좀 보게. 내 생각이 옳다는 걸 뒷받침하 는 증거일세." 홈즈의 손바닥에 있는 걸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것은 어제 소 움즈 교수의 방에 떨어져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흙덩어리였습니다. "여보게. 이걸 도대체 어디서 가지고 왔나?" "그 설명은 소움즈 교수 앞에 가서 하지. 몹시 초조해 하고 있을 테니까." 홈즈의 말대로 소움즈 교수는 불쌍할이만큼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아, 난 오시지 않는 줄 알고 얼마나 낙심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몇 시간 후에는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은 시작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훔친 자가...." "그 학생은 시험을 치지 못하게 해야지요." "그럼 범인을 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비밀 재판을 엽시다. 우선 증인으로 배니스터 를 불러 주십시오. 당신은 거기 앉고, 와트슨은 여기, 그리고 나는 이 한 가운데 안락 의자에 앉겠습니다. 될수 있는 대로 무게있는 태도를 취해 주 십시오. 나쁜짓을 한 녀석이라면 우리 모습을 보기만해도 겁을 낼 테니까 요." 소움즈 교수가 벨을 누르자, 배니스터가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 모습 을 본 배니스터는 얼굴빛이 좀 질렸습니다. 홈즈는 여유를 주지않고 날카롭 게 말했습니다. "배니스터씨. 오늘은 솔직하게 얘기해 줘야 하겠습니다." "솔직하게라뇨? 전 어제 이미 다 말씀..." "아무리 그래도 날 속이진 못해요.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면서 당신은 가까운 의자에 앉지 않고 멀리 방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소. 의자에 놓여 있는 것이 소움즈 교수의 눈에 띄면, 방안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라는 것이 밝혀질까 봐 그것을 깔고 앉았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배니스터는 딱 잡아뗐으나, 홈즈는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교수가 갑자기 나타나자. 범인은 놀라서 침실로 뛰어 들었어. 교수가 방에 서 나와 나를 찾아간 사이에 당신은 범인을 달아나게 했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 방엔 아무도 없었어요!" "시치밀 떼도 소용없어요. 소움즈 교수. 죄송하지만 이번엔 길크리스트를 데리고 오시지요." 교수는 놀란 얼굴로 홈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럼 길크리스트가..."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범인은 길크리스트입니다." 6. 장갑과 스파이크.. 길크리스트는 소움즈 교수의 뒤를 따라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배니스터를 보더니, 몹시 놀란 기색을 보였습니다. "길크리스트군, 여긴엔 우리밖에 없어요. 이야기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어 요. 그러니 어째서 어제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솔직이 이야기해 봐요." 홈즈의 말에 길크리스트는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 기 배니스터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길크리스트님,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믿어 주세요!" 홈즈는 재빨리 그 말끝을 잡았습니다. "사실 배니스터는 아무 말도 안 했소. 자, 길크리스트군! 정직하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시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습니다. 이윽고 그는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말하기가 어려울 테니, 내가 대신 이야기하지. 내가 자네를 수상하게 생각한건, 교수님 방의 창문 높이 때문이었어...." 하며 홈즈가 교수에게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시험 문제의 교정쇄가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인쇄소 직원외엔 없다고 하셨 죠? 그렇다면 범인은 방에 몰래 들어왔다가 마침 그걸 본 셈이 됩니다. 그 건 이야기가 너무 우연스럽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혹시 범인이 창 밖을 지나가다가 방안 책상 위에 있는 교정 쇄를 본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 키는 약 1미터 80센티미터 입니다. 그런 내가 발돋움을 하지 않고는 방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더군요. 그러니 까 땅에서 창문까지의 높이는 약 2미터가 되는 셈이군요." "아, 그래서 세 학생의 키를 물으셨군요?" "그렇습니다. 맥랄렌의 키는 1미터 70센티미터, 인도 학생은 그보다 적으 니, 지나가다가 문득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키가 큰 길크리 스트군밖에 없습니다." 길크리스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 홈즈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어제 오후, 길크리스트군은 틀림없이 운동장에서 넓이뛰기 연습을 했을 겁 니다. 오후 늦게 연습을 끝낸 길크리스트군은 손에 스파이크를 들고 기숙사 로 돌아왔습니다. 키가 큰 길크리스트군은 문득 창문을 통해 시험 문제의 교정쇄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길크리스트군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건물안에 들어와 교수의 방문에 열쇠가 꽃힌 것을 보고 나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길크리스트군은 열쇠를 돌려 방안으 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빨간 가죽을 씌운 책상에 스파이크를 놓고, 창가 의 의자에도 무엇인가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길크리스트가 고개를 들고 말했습니다. "운동용 장갑이었습니다." "그랫군.... 길크리스트군은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시험 문제를 베끼기 지 시작했습니다. 소움즈 고수가 돌아오는 것을 살피기 위해 연방 안뜰을 내다 보면서... 그런데 교수는 안뜰을 거치지 않고 건물 옆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길크리스트군은 당황해서 스파이크를 책상에서 집어 들고 얼른 침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저 책상의 흠은 구두 바닥에 못이 박혀 있는 스파이크의 자 국이었군요!" 소움즈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방안에 떨여져 있던 피라밋 모양의 작은 흙덩어리에 대해서도 이젠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모꼴로 뾰족한 스파이크이 못이 만든 거죠. 나는 오늘 아침 일찍, 대학의 운동장에서 그와 똑같은 흙덩어리를 주웠습니다. 또 넓이뛰기를 할때 뛰어내리는 근처의 땅바닥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톱밥 이 뿌려져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당황하 길크리스트군은 침실로 달 아날때 의자에다 장갑을 놓은 걸 잊었습니다. 그뒤에 교수와 배니스터가 들 어왔습니다. 의자 위에 있는 장갑을 본 배니스터는 범인이 누구라는 걸 대 번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잃은 체 하면서 그 장갑 위에 주저앉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배니스터, 당신 은 어째서 길크리스트를 그토록 감쌌지요?" 배니스터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전에 길크리스트님의 아버님밑에서 사환 노릇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길크리스트님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죠.... 의자 위에서 길크리스 트님의 장갑을 본 저는, 정신없이 그 위에 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이 홈즈씨한테 의논하러 가신 뒤, 침실에서 내보내 드렸던 것입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열쇠를 잊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 니까요. 길크리스트님은 본래 진실한 분인데 조그마한 유혹에 졌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신 것입니다. 방에서 나가실때, 이런 짓을 다시 하면 안 된다고 간곡히 말씀드렸으니, 지금은 깊이 반성하고 계실 겁니다..." 배니스터의 말이 끝나자 길크리스트는 조용히 일어섰습니다. "소움즈 선생님, 배니스터의 충고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제 죄를 빌기 위해 오늘 시험은 치르지 않고, 이걸 학교에 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며 길크리스트는 호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습니다. "아니, 이게 뭔가?" "자퇴 원서 입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훨씬 전부터 남아프리카의 로디지아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해 보 지 않겠냐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새로운 출발을 할까 합니다." "자네 말에 나도 안심했네." 하며 홈즈는 길크리스트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두드려 주었습니다. "잘 다녀오게. 열심히 일해서 이번 잘못을 보충하도록 하게. 틀림없이 성공 할 거야." 그리고 나서 홈즈는 나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여보게, 빨리 돌아가세. 아침을 안 먹었더니 속이 쓰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