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얼굴 아내의 비밀 봄이 기지개를 펴는 어느 날, 홈즈와 나는 함께 하이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공원의 느티나무가 막 새 눈을 내미는 무렵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가량이나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베이커 가로 돌아왔다. 사환 아이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조금 전에 찾아오신 손님이 있었습니다." 홈즈가 뜻밖이라는 투로 말했다. "우리의 산책이 길어서 돌아간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 않고?" "방으로 모시기는 했지요." "얼마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30분가량입니다. 무척 성미가 급한 분이어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서성거리더군요. 그러다가 복도로 나와 외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홈즈씨는 언제쯤 돌아오시는 겐가?' '글쎄요....곧 돌아오시겠지요.' 그렇게 말씀드리니, '그럼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이거야 원 답답해서........곧 다시 오겠다.' 라고 말씀하시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홈즈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일이 틀어지는 건 아닐까? 난 사건이 필요하다고, 와트슨. 그 손님이 안절부절 못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사건일 것 같네. 어라? 테이블 위의 담배 파이프는 자네 것이 아니로군. 아마 그 손님이 놓고 간 모양이네. 들장미 뿌리로 만든 것인데, 입에 무는 곳에 호박을 끼웠군. 이렇게 소중한 파이프를 잊다니,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러운 모양일세." "그게 소중한 파이프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하기야 이 파이프는 7실링 6펜스 정도의 흔한 물건이지. 하지만, 두 번이나 수선을 했는걸. 파이프 머리와 빨대의 이음새를 한번, 호박 같은 것을 또 한번, 특히 이음새는 은으로 둘렀는데, 그 비용이 파이프 값보다 더 들었을 걸세. 새 것을 사기보다는 수선해 쓰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 밖에 또 뭐가 있나?" 내가 그렇게 물어본 것은, 홈즈가 그 파이프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홈즈는 파이프를 들고서 마치 골격 강의를 하는 의과대학 교수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것을 두드려 보았다. "파이프라는 것은 때로는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을 보여 주지. 회중시계나 구두끈도 그렇지만, 파이프는 그 주인의 성격을 상당히 정확하게 보여 준다네. 하기야, 이 경우에는 크게 눈에 띄는 특징이나 중요한 점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여간 이 파이프의 주인은 체격이 듬직한 사람으로서 왼손잡이에다 이빨이 고르며, 우물쭈물하는 성격이 아닌데다가 돈 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 처지라는 것은 확실하네." 홈즈는 서슴없이 장담을 하고 나서, 자기 추리의 근거를 알 만하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선비용을 많이 들였다는 말인가?" 홈즈는 타다만 담뱃재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1온스에 8펜스 하는 그로스브너라는 담배일세. 이것의 반값만 주어도 피울만한 담배를 살수 있으니, 돈이 궁한 사람은 아니지." "그밖에는?" "이 사람은 램프나 가스 불에 파이프의 불을 붙이는 습관이 있어. 한쪽이 까맣게 그을려 있는 것이 보이지? 성냥불을 파이프의 옆구리에 갖다 대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램프나 가스 불에다 담배를 붙이려면 옆쪽이 타거나 그을리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그 그을린 편이 오른쪽이거든. 그래서 이 사람을 왼손잡이라고 생각하는 걸세. 램프에 파이프 담배의 불을 당겨 보게. 오른손을 쓰는 사람이라면 파이프의 왼쪽을 기울여 불 가까이 대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지. 어쩌다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만, 늘 그럴 수는 없을 걸세. 따라서, 이 파이프는 늘 왼손에 쥐어져 있었어. 그리고 이 사람은 호박으로 된 빨대에 무수한 이빨 자국을 냈네. 이 단단한 호박에 자국을 내려면 이가 고르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야. 어, 그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모양인데. 파이프 연구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구만." 곧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다갈색 중절모를 손에 들었다. 30세 가량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몇 살 위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남자는 당황하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노크를 했어야 했는데, 실은 걱정거리가 있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자는 앉는다기보다는 무너져 내리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홈즈가 위로하듯 말했다. "한 이틀 동안은 잠을 못 주무신 모양입니다. 잠을 못 잔다는 것은 일이나 게임보다도 더 신경에 부담을 주지요. 그래, 무슨 용건이십니까?"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럽니다. 내 생활이 엉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탐정이기 때문에 부탁하시는 겁니까?" "그뿐만은 아닙니다. 사리에 밝은 분으로서 내놓으시는 의견도 듣고 싶은 겁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지도받고 싶은 겁니다." 남자는 격한 감정을 잠시 억누르는 것 같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기는 입밖에 내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자기 가정의 속사정을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니까요. 특히, 자기 아내에 관한 일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털어 놔야 한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죠. 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에 빠지고 보면...." 홈즈가 입을 열었다. "그랜트 먼로 씨...." "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홈즈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으시거든, 모자의 안쪽 테두리에 이름을 적어 넣지 말거나, 이야기하는 상대방 쪽으로 모자의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하셔야지요.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와트슨과 나는 이 방에서 많은 사람의 비밀 이야기를 들었고, 다행히 그 많은 사람들 일을 해결해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경우도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은 값진 것이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고 무슨 일인지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손님은 이마를 문지르고 나서, 결심이 섰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홈즈 씨. 나는 결혼 한 지 3년이 됩니다. 3년 동안 아내와 나는 깊이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월요일부터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갑자기 벽이 생기고, 아내의 생활이나 하는 짓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즉, 메울 수 없는 틈이 생긴 겁니다. 나는 아내가 왜 그렇게 변했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홈즈 씨, 아내인 에피는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생긴 이상, 나는 마음의 벽을 허물 수가 없단 말입니다." 홈즈가 약간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일의 핵심을 말해 주시지요, 먼로 씨." "아내의 신상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우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처음 에피를 만났을 때, 그녀는 미망인이었습니다. 처녀 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홀몸이 된 겁니다. 다행히 남편은 에피가 아쉬운 것 없이 살아갈 만한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내가 그런 에피를 만난 것은 그녀가 미국이 싫어져서 영국으로 돌아온 지 6개월 뒤였지요. 우리 둘은 사랑하게 되어 3주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나는 맥주의 원료로 쓰이는 호프를 거래합니다. 한 해에 700-800파운드의 수입이 있으므로 생활은 윤택한 편이고요. 결혼하고 나서, 우리는 노베리에 전세금 80파운드짜리 아담한 저택을 빌렸습니다. 그 부근은 런던에 가까우면서도 아주 전원적이고 조용한 곳이지요. 맞은쪽의 밀밭 건너편에 또 다른 저택이 한채 서 있을 뿐이고, 역까지는 반 마일(약 0.8km)정도 가야 민가가 몇 채 있습니다. 나는 사업 관계로 런던을 오갑니다만, 여름에는 한가하므로 그 시골집에서 아내와 원만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저주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 사이에는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다. 한편, 우리가 결혼했을 때 아내는 자기의 전재산을 나에게 맡겼습니다. 나는 그러지 않기를 원했지요. 만의 하나, 내 사업이 실패하면 아내의 재산까지 날려 버릴 위험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내가 끝까지 고집을 세우기에 일단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 6개월이 지났는데, 뜻하지 않게 아내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잭, 당신이 내 돈을 맡으실 때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신 걸 기억하시죠?' '기억하고말고 그 돈은 당신 것이니까.' '그럼, 100파운드만 주세요.'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아내가 돈을 쓸 곳이라고는 새 옷을 산다든가 뭐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액수가 너무나 컸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지?' '어머, 당신은 저의 은행 역할만 하시겠다고 했잖아요. 은행이란 손님이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에 관해서는 물어 보는 게 아네요.' '그야 그렇지만,.. 정 모갯돈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내줘야지.(모갯돈:액수가 많은 돈.)' '고마워요.' '그래, 그 용도는 내게 말하지 않겠다는 거요?' '언젠가 말씀드릴께요. 아무튼 지금은 안돼요. 잭.'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비밀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아내에게 수표를 내주고는, 그 일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뒤에 일어난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말씀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또 한 채의 집이 있습니다. 두 집 사이에는 밀밭이 가로놓여 있지요, 그 집에 가기 위해서는 도로로 나가 약간 돌아서 오솔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저택 너머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서, 나는 가끔 그리로 산책을 가기도 합니다. 그 저택은 한 8개월 가량 비어 있었는데, 나는 늘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 저택은 담쟁이 덩굴이 엉켜 있고 고풍스러운 포치까지 달려 있는 아름다운 이층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 번 그 집 앞에 걸음을 멈추고, 주인만 잘 만나면 살기 좋은 집이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해가 질 무렵, 숲 저쪽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빈 마차가 오솔길에서 도로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저택 잔디밭에 융단과 의자등 살 도구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침내 그 저택에도 사람이 들게 된 겁니다. 나는 도로에 서서 이삿짐을 바라보며, 과연 어떤 사람이 그 집에 살게 될까를 생각하며 무심코 2층쪽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작은 창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런게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그 얼굴 생김새를 눈여겨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 얼굴은 극히 부자연스럽고, 살아 움직이는 얼굴과는 무척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좀더 자세히 보려고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지요. 그러자 그 얼굴은 홱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마치 누가 등뒤에서 얼굴을 낚아챈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5분 가량 그 자리에 서서 그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얼굴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얼굴색 만은 선명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송장의 살갗처럼 노랗고, 말랑말랑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무 껍질처럼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견디기 어려운 궁금증 때문에 저택의 새로운 입주자를 좀더 똑똑히 봐 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현관을 두드렸더니, 곧 독살스러운 얼굴에 키가 큰 여자가 문을 열고는 북부 지방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묻더군요. '무슨 일이세요?' 나는 내 집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나는 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방금 이사를 오신 모양인데 뭐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 해서요.'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 요청하겠습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코 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불쾌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창가의 얼굴과 여자의 괘씸한 태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신경이 날카로운 편이라 창가의 그 얼굴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섬뜩한 느낌을 아내에게는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잠들기 전에, '그 저택에 사람이 들어왔더군.' 하고 말해 주었지만,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는 한번 잠이 들면 깊이 자는 편이라, 누가 엎어가도 모르겠다고 아내가 놀려댈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은 초저녁에 겪었던 일도 있고 해서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선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몽롱한 잠 속에서 누군가가 방안을 서성거리는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아내가 옷을 입고 조심스럽게 망토를 걸치고는 모자를 손에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아내가 한밤중에 외출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 이유를 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에 비친 아내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은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던 겁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숨소리는 거칠었으며, 망토의 단추를 채우는 동안 흘끔흘끔 내 쪽을 바라보며 혹시 내가 잠이라도 깨지 않을까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내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발소리를 죽여 방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현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위가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모서리를 주먹으로 두드려서 내가 정말로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인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니 3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도대체 무슨 일로 깊은 밤 3시에 집을 빠져 나갔을까? 나는 약 20분가량 곰곰히 그럴만한 이유를 이것저것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현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습니다. 아내가 방안에 들어오자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습니다. '이 밤중에 어딜 다녀 오는 거요?'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 같은 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그 비명소리와 놀란 표정에 마음이 혼란해졌습니다. 아내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상시의 아내는 솔직해서 비밀스런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자기 방에 들어오다시피 하고, 남편의 말에 기겁을 하며 비명까지 지른다는 것은 실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아내는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말하더군요. '잭, 잠에서 깨어 있었군요. 누웠다 하면 업어가도 모르는 양반이...' 나는 다시 한번 물었는데 이미 아내는 냉정을 되찾고 말했습니다.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아내는 태연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망토의 단추를 여는 손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기야...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실은 말이에요. 왜 그런지 숨이 막히도록 답답해서, 신선한 밤공기를 마시고 싶었던 거예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몰라요. 잠시 바깥을 서성거렸더니, 이젠 살 것 같네요.' 아내는 그런 변명을 하면서도, 눈은 한번도 내 쪽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소리도 그전과는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소리도 그전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말하는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은 뻔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습니다만, 마음속에는 먹구름 같은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습니다. 아내는 나에게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 어디를 다녀왔을까... 의심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내가 그렇게 설명을 한 이상 더는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은 런던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너무나 머릿 속이 혼란스러워서 사업같은 건 생각할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산란한 듯, 가끔 탐색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곤 하더군요. 내가 자기의 말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안절부절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었지요. 아침 식탁에서도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습니다. 나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곧 시원한 아침 공기 속에 머리를 식히며,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에 가까운 공원까지 갔고, 그곳에서 한 시간 가량 앉아 있다가 정오가 넘어서야 발길을 돌렸습니다. 우연히 또 그 저택 앞을 지나게 되자, 어제 본 그 기이한 얼굴이 생각이 나서 혹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내가 그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들어가 몸을 감추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얼굴엔 핏기가 가시고 눈에는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머, 잭. 이번에 이사 온 분에게 인사하러 온 길이에요. 왜 그런 얼굴로 저를 보시죠? 뭐 못마땅한 일이라도 있나요?' '있지. 당신이 어젯밤 갔던 곳은 여기구료.' '그런 억지를....' '여기에 왔었지? 나는 알고 있소. 밤중에 사람을 찾아가다니.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이곳에 온 것은 지금이 처음이예요.' '거짓말이 뻔한데,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지? 당신은 벌써 목소리까지 달라져 있어. 내가 당신을 속인 일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소? 어디 이 저택에 들어가 문제를 확실히 합시다.' '안돼요, 잭! 제발, 그러지 말아요!' 아내는 내 옷소매를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언제가 다 말씀드릴 때가 있을 거예요. 지금 당신이 이 저택에 들어가면 불행이 뒤따를 뿐이에요.' 내가 들은 체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내는 미친듯 나를 부둥켜 안고 호소했습니다. '나를 믿어 주세요, 잭! 믿어 주셔야 후회를 하지 않아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숨기고 자시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이대로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세요. 굳이 이 저택에 들어가시겠다면 나와는 끝장이에요.' 아내의 애원이 너무나 심각하고 애절했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내가 양보했습니다. '조건부로 당신의 말에 따르리다. 이런 비밀은 더 이상 갖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말이오. 다시는 밤중에 집을 빠져 나가거나, 나를 속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굳게 약속만 한다면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캐묻지 않을 테니까.' 그제야 아내는 안도의 숨을 쉬며 말하더군요.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자, 가요.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는 다시 내 옷소매를 잡아 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뒤돌아보니, 그 노란 얼굴이 2층의 창너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낮도깨비 같은 것과 아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또한, 전날의 그 무례한 여자와 아내와는 어떤 사이일까요? 그런 수수께끼가 밝혀지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간 나는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아내는 약속을 충실히 지켜 주었습니다. 집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사흘째가 되자 아내가 약속을 어긴 확실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그 날 나는 런던에 갔었습니다만, 늘 3시 36분 차로 돌아오던 것을 한 시간 일찍 2시 40분 차를 탔던 겁니다. 집에 들어서자 가정부가 놀란 얼굴로 현관에 달려나왔습니다. '집사람은 어디에 있지?' 내가 묻자, 가정부는 허둥거리며 둘러댔습니다. '산책을 나가신다고 했는데......' 내 마음속에는 다시 짙은 의심의 먹구름이 피어 올랐습니다. 급히 아내의 방으로 달려 올라가 보았으나,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 가정부가 급히 밀밭을 가로질러 그 저택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틈에 저택에 가 있다가, 내가 오면 알려 달라고 가정부에게 일러두었던 것이 확실했습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문제를 깨끗이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고는 밀밭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내와 급히 돌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저택에는 내 생활을 위협하는 비밀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야 어찌 되든, 그 비밀을 들춰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저택에 이르러 나는 노크도 없이 현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집안은 쥐 죽은듯 조용했습니다. 부엌에는 불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고 크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으나, 전에 보았던 그 여자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방문을 열어보았으나 아무데서도 인기척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2층으로 달려 올라갔으나, 거기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방의 가구나 그림등은 극히 평범한 것들이었습니다만, 내가 그 기이한 얼굴을 보았던 창이 있는 방만은 달라서, 장식도 잘 되어 있고 품위있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벽난로위에 놀랍게도 큼직한 아내의 사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의심의 불길이 가슴속에서 세차게 타올랐습니다. 그 사진은 불과 3개월전에 내가 권하여 찍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서성거리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현관에 써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아내가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해요. 잭. 하지만 사정을 아시게 되면 나를 용서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 털어 놓으시오.' '그건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어요.' '저 저택에 누가 사는지, 당신이 사진을 누구에게 주었는지를 밝히기 전에는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나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휑하니 집을 나왔습니다. 그게 어제의 일입니다. 그 뒤에는 아내를 만나지도 않았고, 그 뒤의 일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우리 부부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또 그것이 너무나 심각해서 나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갑자기 당신에게 의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이렇게 찾아 뵙고, 그 동안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한 겁니다. 아직 석연치 않은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찌해야 좋을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고민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홈즈와 나는 진지하게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홈즈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창 너머로 보았다는 얼굴이 남자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두 번 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여간 그것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건 확실합니까?" "그 얼굴색이 부자연스럽고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홱 사라져 버렸습니다." "부인이 100파운드를 가져간지 얼마나 되었지요?" "한 두달쯤 되었습니다." "부인의 전 남편의 사진을 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죽은 뒤 애틀란타 시에 큰 화재가 있어서, 사진이고 서류고 모두 불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사망 진단서를 보여 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화재 뒤에 구청에서 복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부인과 가까이 지낸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부인은 다시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던가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미국에서 편지가 온 일도?" "내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 문제를 풀어 봅시다. 그 저택에 든 사람들이 다시는 그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밝혀 내기가 어려울 일입니다만, 나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 사람들은 어제 당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에 당신이 오기 전에 급히 몸을 숨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쯤은 돌아와 있을 것이니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부탁해 둡니다만, 노베리에 돌아가시거든 저택 쪽을 다시 한번 잘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기색이 보이거든 모른 체하고 나에게 전보를 치십시오. 전보를 받고 30분 이내에 그리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건의 진상은 쉽게 규명이 될 겁니다.." "혹시 빈집이라면?" "그런 경우에는 달리 손을 써봐야겠지요. 하여간 진상을 알기 전에 너무 비관할 일은 아닙니다." 운명의 아이 홈즈는 그랜트 먼로 씨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돌아와 말했다. "이거 꽤 어려운 사건일 것 같구먼. 와트슨, 자내는 어떻게 생각하나?" "음산한 느낌일세." "그래. 내 눈이 틀림없다면 협박이 얽혀 있을 것 같네." "협박? 누가?" "그건 저택의 2층 방에서 먼로 부인의 사진을 벽난로 위에 장식해 놓고 있는 사람이겠지. 창가의 노란 얼굴이 그 사람이겠지만." "그게 누군지 짐작이 안 가나?" "짐작이 가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인의 전 남편이 아닐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지 않고는 부인이 현재의 남편을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잖겠나. 내가 본 바로는 진상은 대충 이럴 것 같네, 부인은 미국에서 결혼했지만, 남편이 어떤 몹쓸 병이나 사고로 보기에 끔찍한 모습이 되었어. 부인은 마침내 남편을 단념하고 영국에 돌아와 이름을 바꾸고 재혼을 했지. 가짜 사망 진단서 같은 걸 만들어 새 남편에게 보여 주어서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전 남편이 부인의 거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거야. 전 남편은 부인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어 모든 사실을 현재의 남편에게 밝히겠다고 했겠지. 부인은 남편에게 100파운드를 달라고 하여 전 남편을 쫓아 보내려 했으나 전 남편은 오히려 가까운 곳에 집을 얻은 거겠고. 남편이 아내에게 그 저택에 사람이 이사왔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나, 부인은 그것이 전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남편이 잠들기를 기다려 그 저택으로 가서는 자기의 생활을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을 테고, 하지만 전 남편이 말을 들어 주지 않자 다음날 다시 찾아갔는데, 그 저택에서 나오다가 현재의 남편에게 들킨거야. 그래서 다시는 그 저택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 당장은 남편을 무마시킬수 있었으나, 전 남편은 멀리 쫓아버려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남편이 런던에 나간 틈을 타 또 찾아갔을 테고 아마도 그때 전 남편이 요구한 자기 사진을 갖다 주었을텐데, 이야기 도중 가정부가 달려와 남편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을 테지. 그러자 부인은 남편이 그 저택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는, 전 남편과 가정부를 뒷문으로 해서 숲속으로 빠져 나가게 했겠고. 그러기에 남편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집안에 아무도 없었겠지.... 이상이 내 추측인데 먼로 씨가 이리로 온 뒤 그 저택의 식구들은 다시 돌아와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어떻게 생각하나, 내 추리를?" "너무 비약한 건 아닐까?"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가장 있음직한 추리로 생각되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수정하기로 하고, 현재로는 먼로씨에게서 전보가 오기 전에는 별수가 없을 것 같네."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차를 마신 다음에 전보가 배달되었던 것이다. '저택에 사람이 있음. 창가에 그 얼굴이 다시 보였음. 7시 차로 오기 바라며 그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리겠음.' 우리가 기차에서 내리니 먼로 씨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거장의 불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흥분에 못 이겨 입술이 약하게 실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먼로는 홈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역으로 올 때 보니 저택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오늘로 모든 문제를 깨끗이 끝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시골길을 걸었다. 홈즈가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나는 집안으로 쳐들어가 집주인이 누군가를 이 눈으로 확인할 셈입니다. 만일의 경우에 두 분은 증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인께서는 시간적인 여유를 원하시는 모양인데 꼭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 결심이 섰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명백한 것을 몰라 의심으로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결과야 어떻든 진실을 알고 싶겠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법률적으로 불법 행위에 속합니다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어느덧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로 씨는 급한 걸음으로 앞서가고 우리는 그 뒤를 힘겹게 뒤쫓았다. 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거리는 불빛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것이 우리집의 불빛이고 이쪽이 그 저택의 불빛입니다." 오솔길을 꺾어 들어가자 바로 거기에 건물이 서 있었다. 캄캄한 현관에 문 옆으로 한 줄기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관 문이 꽉 닫혀 있지는 않은 것 같았으며, 2층에는 창문 하나에만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그곳을 올려다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커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먼로가 외쳤다. "그 괴물이 있습니다. 지금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셨지요? 자, 뒤따라오십시오.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겁니다." 우리는 곧장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나타나 가로막고 섰다. 어두워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양팔을 내밀고 호소하듯 말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잭! 오늘밤 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한번 나를 믿어달라고요. 그래야만 후회하지 않게 돼요." 먼로는 격하게 말했다. "더 이상은 당신을 믿을 수 없어. 에피! 저리 비키라고. 나는 이분들을 증인으로 해서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할 작정이오." 먼로가 아내를 밀치다시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집안에서 중년 여자가 달려나오며 길을 막았으나, 먼로는 여자를 떼밀었다. 우리는 그 길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먼로는 불이 켜진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우리도 그의 등뒤에 섰다. 방안은 아득하게 꾸며져 있었고 가구도 훌륭했다. 테이블 위에 두 자루, 벽난로 위에 두 자루의 초가 켜져 있다. 방 한구석, 책상 앞에 앉아 한 소녀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이는 붉은 옷에 손목이 긴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았을때, 나는 그만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애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표정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홈즈가 웃으며 다가가 소녀의 귀밑에 손은 대자, 얼굴에서 가면이 벗겨지며 얼굴이 까만 소녀가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고서 우리가 놀라고 있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먼로는 자기 목에 손을 댄 채 얼어붙은 듯 소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부인이 침착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졌군요. 전 남편은 애틀란타에서 죽었지만, 아이는 살아 남아 있었어요." "저애가 당신의?" 부인은 가슴에서 상당히 큰 은제 로킷을 끌어냈다. "이걸 열어서 당신에게 보여 드린 일은 없었지만...." 부인은 로킷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남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속의 남자는 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틀림없는 흑인이었다. "이분은 애틀란타에서 젊은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존 헤브론입니다. 훌륭한 인격자였지요. 나는 이분과 결혼하기 위해 백인 사회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그걸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딸 루시가 검은 피부를 타고 난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갗이 검든 희든 이애는 나의 소중한 딸입니다." 그때 소녀가 조르르 달려가 부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내가 이 아이를 미국에 남겨 두고 온 것은 오랜병에 시달려 몸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애에게 지루한 여행을 시키고, 더군다나 토지와 기후가 다른 이곳에 데리고 온다는 것은 무리였지요. 그래서 아이를 충실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모에게 맡기고서 나만 왔던 겁니다. 나는 이 아이를 버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인연으로 잭, 당신을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되고나서는 당신에게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워 졌습니다. 당신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사실을 밝힐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과 딸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귀여운 딸애와 멀리 떨어져 살았지요. 그리고 3년동안 이 일을 당신에게 비밀로 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탄로날 위험이 있다는걸 잘 알면서도 비록 2~3주 동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살게 하다가 다시 보낼 생각을 굳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받은 100파운드를 유모에게 송금해서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이 저택에 옮겨오도록 일렀습니다. 또한, 이 아이가 철없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사람 눈에 띄어 흑인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날까봐, 얼굴에는 가면을 쓰게 하고 손에는 긴 장갑을 끼게 하여 검은 피부를 감추게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갈 3주동안만 참으라고 이르고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공교롭게도 그 날로 이 저택에 사람이 입주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나는 무척이나 조마조마했죠.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흥분에 못 이겨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일단 잠들면 여간해서 깨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나를 지켜보았고, 나를 의심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튿날에는 내가 이 집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지만 당신은 내 애원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났을 때,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이 이 집에 쳐들어 왔을때는 이 애와 유모를 뒷문으로 빠져 나가게 한 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에 끝장이 났군요. 3주일만 참아 주셨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텐데.... 말씀해 주세요.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부인은 두 손을 모으고 남편의 말을 기다렸다. 먼로는 잠시 말이 없다가, 덥썩 소녀를 안아 올려 그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소녀를 한 손에 안은 채, 다른 팔을 아내에게 내밀며 말했다. "집에 돌아가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나는 당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옹졸하지는 않소." 홈즈와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도로로 나왔다. 홈즈가 내 옷소매를 잡아 끌며 속삭였다. "우리는 더 이상 노베리에서는 볼일이 없는 것 같네." 홈즈는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이 없었으나, 그 날 밤 늦게 촛대를 들고 자기 침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와트슨, 내가 추리를 비약시켜서 지레짐작으로 덤벼들거든 내 귀에 대고 '노베리 사건의 실수를 거듭하지 말라.'고 속삭여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