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습 없는 스파이 ================= 1. 외교관의 편지.. <<스파이대 홈즈>> 의 사건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 제 2의 스파이 사건이 일어 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의뢰해 온 사람은 학창 시절에 나와 가깝 게 지내던 상급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그 편지는 매우 단단히 봉해져 있었습니다. 와트슨군! 자네가 3학년일때 5학년이었던 올챙이 펠프스를 기억하겠나? 올챙이 펠프스 는 마음이 매우 약한 탓으로 동급생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3학년인 자 네 하고만 어울렸지. 그런 펠프스가 백부님 덕분에 지금은 외무성에 근무하 고 있다네. 이대로라면 몇 년 뒤에는 상당한 지위에 오를것 같네. 놀라운 이야기지? 그런데 갑자기 펠프스의 꿈을 산산히 부스러뜨릴만한 엄청난 사 건이 일어났다네. 사건의 내용을 이 편지에 쓸 수는 없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 기밀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일세. 만일 자네가 나의 부탁을 들어 준다면 만나서 자세히 설명하겠네. 나는 요즘 지독한 뇌염에서 9주일만에 가까스로 회복되어, 몹시 쇠약해져 있다네. 와트슨, 자네 친구인 셜록 홈즈씨를 내게로 모시고 와 줄수 없겠나 ? 내가 외무성 관리라고 해서 무리하게 부탁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네. 물론 경찰에서는 아주 은밀하게 이 사건을 조사<<수사가 아닐세>>했다네. 그러나 난 그 결과에 만족 할 수 없었네. 이제야 홈즈씨에게 부탁을 하게 된 것은, 결코 홈즈씨의 힘을 가볍게 여겼 기 때문이 아닐세. 그 사건이 일어난뒤, 바로 병석에 눕게 된 나는 되도록 그 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네. 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된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홈즈씨와 만 나고 싶네.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일어나지도 못한다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편지도 부득이 다른 사람에게 대필 시켰다네. 홈즈씨와 만날수 있도록 자네가 주선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워킹 마을에서 동창생 퍼어시 펠프스... 내가 그 편지를 가지고 베이커 거리에 있는 홈즈의 사무실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습니다. 마침 홈즈는 그의 연구실에서 화학실험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끝이 휘어 진 큰 시험관 속의 액체가 알콜 램프의 파란 불꽃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 었습니다. 홈즈는 내가 들어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실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 있었습 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홈즈가 큰 소리로 말을 거 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와트슨, 자넨 아주 중요한 때에 들어왔군! 만일 이 리트머스 시험지가 붉 게 변하면 어떤 사람의 목숨이 없어져." 홈즈는 보기 드물게 흥분하면서 시험관속에다 리트머스 시험지를 담갔습니 다. 그러자 파란 종이가 곧 탁한 주홍색으로 변했습니다. "음,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와트슨, 곧 끝날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담배는 그 페르시아 구두속에 있네." 홈즈는 책상 앞에 앉아 전보문을 펼쳤습니다. 그리고는 허드슨 부인을 불렀 습니다. "이 전보를 좀 쳐 주시오." 홈즈는 그제서야 일이 다 끝난듯 내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와트슨, 자네가 가져온 사건도 꽤 중대한가 보군."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내가 사건을 부탁하러 온 줄 알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자네가 여간해선 들어오지 않던 연구실에 들어왔어. 더 구나 내가 본체만체했는데도 이렇게 기다리지 않았나." 하며 홈즈는 웃었습니다. "그런가......" "아니, 그보다 그 호주머니에서 비쭉 내민 편지가 사건의 중대함을 잘 말해 주고 있어." "뭐라구?" "그 편지의 봉투는 외무성 전용이야. 따라서 사건 의뢰인은 외무성 관리 같 군 그래." 나는 새삼 홈즈의 예리한 관찰력에 감탄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았어. 자 우선 이걸 읽어 보게." 나는 서둘러 호주머니의 편지를 홈즈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편지를 읽고 난 홈즈는, "이것만 가지고는 사건의 내용을 잘 알 수 없지만, 이 편지를 대신 써준 사 람은 젊은 여성이군." 하고 말했습니다. "비서일지도 몰라." "아주 고급 향수를 쓰고 있군. 이런 여성이 이 의뢰인곁에 있다면 빨리 서 둘러야지. 까딱하면 때를 놓치게 될지도 몰라." "그럼 가 주겠단 말이지?" "사건 의뢰인은 외교관이야. 영국을 위해서라도 당장 가 볼 필요가 있어." 홈즈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10. 한밤중의 괴도.. 이튿날 아침, 나는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워털루역에 나갔습니다. 홈즈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잤나?" 하며 홈즈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더군. 대영 제국의 위기를 알고 어떻게 잠만 씩씩 자겠나. 그 보다 문제의 광고는 어떻게 뻍나? 마차의 목격자는 나타났나?" "아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어. 10파운드의 상금도 런던 시민에게는 매력이 없는 모양이지?" "만일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스스로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지." 그때 마침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에 워킹까지 다시 갈 필요가 있을까?"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홈즈는, "난 갑자기 장미가 좋아졌나봐. 펠프스씨의 집에는 진기한 장미꽃이 많더 군." 하면 빙긋이 웃었습니다. 우리는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펠프스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펠프스는 어제와는 달리 생기있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물론 약혼 녀인 애니가 곁에 붙어 있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홈즈는 긴장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도둑이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도둑이........" 홈즈는 깜짝 놀란듯이 소리쳤습니다. "어젯밤 처음으로 간호원 없이 혼자 잤습니다. 당신들을 만나 용기를 얻었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대비하여 야간등을 켜 두었습니다. 새벽 2 시경 무슨 소리가 들려 잠을 깼습니다." "그 소리가 어느쪽에서 들렸습니까?" 홈즈가 몸을 앞으로 내밀려 물었습니다. "창 쪽입니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 보 니 무엇인가를 창문틈으로 비틀어 넣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엔 창문의 고리를 벗기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후 3분쯤은 아무런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아마 내가 잠에서 깼는지 어떤지 살피고 있었던 모양입니 다." 펠프스는 애니에게 부탁하여 물을 마신 다음,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이윽고 창문이 스르르 밀려 올라가고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창틀에 매 달려 있던 사나이는 마치 고양이같이 잽싸게 달아나 버렸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까?"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못 보았습 니다. 그런데 달아날 때 무엇인가 번쩍 빛나더군요. 칼인것 같았어요." "칼?" "예, 무섭기도 하고, 또 이런 몸으로는 쫓아가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아 복 도의 문을 열고 큰 소리로 모두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맨 먼저 조셉이 뛰 어나와 집안 식구들을 깨워 주었습니다. 조셉과 마부가 곧 칸델라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조셉이 창문아래 화단에서 발자국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가뭄으로 땅이 말라 그 발자국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 었습니다. 나중에 조셉을 말을 들으니 도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나무 울 타리를 뛰어넘어 갔는지 바로 위의 나무가지가 하나 부러져 있더랍니다." "경찰에 알렸습니까?" "아닙니다. 먼저 홈즈씨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방에 혹시 도둑이 노릴 만한 귀중품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머니 방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지만, 여긴 아무것도 없습 니다.그렇다면 범인이 노린것은 내 목숨이었을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왜 그냥 달아나 버렸겠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아뭏든 나는 남의 원한을 살 만한 짓은 한적이 없습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보다 펠프스씨, 오늘은 상당히 안색이 좋군요. 어 떻습니까, 정원에 나가 일광욕이라도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홈즈가 이렇게 권하자, 펠프스보다 애니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은 생각이어요. 저도 함께 가겠어요." 그러나 홈즈는, "애니양은 여기 남아 계십시오. 어제도 부탁드린 바와 같이 되도록이면 이 방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며 애니를 말렸습니다. 애니는 잠깐 표정이 어두워지는 듯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와 홈즈와 펠프스, 거기에 조셉까지 낀 네 사람은 장미 향기가 감도는 정 원으로 나갔습니다. 홈즈는 펠프스의 병실 창아래 꽃밭에 웅크리고 앉아 발 자국을 조사했습니다. 과연 발자국이 있긴 했지만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희미했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알아보지 못하겠군." 내 말에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발자국은 포기하고, 도둑이 어째써 이 창문을 선택했는지 그것을 조사 해 보세. 응접실이나 식당의 창문이 커서 들어가기가 훨씬 쉬웠을텐데..." "여긴 길에서 잘보이니까 그랬겠지요." 뒤에 있던 조셉이 말했습니다. "아, 그렇군. 그런데 조셉씨, 당신이 찾아냈다는 부러진 나뭇가지는 어디있 죠?" "저쪽입니다." 조셉은 앞장서서 걸어갔습니다. 그곳은 저택의 뒤꼍으로, 나무 울타리 위로 옻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었습니다. "저것입니다." 조셉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옻나무 가지가 부러진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홈즈는 그것을 비틀어 떼어, 주의 깊에 관찰하고 나서, "이것은 어제밤에 부러진 것치고는 꺽인 자국이 좀 오래된 것 같군."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뭏든 어젯밤엔 어두워서 부러진 자국까진 조사하지 못했습 니다." "그리고 울타리 너머로 뛰어내린 흔적도 없군요. 딴곳을 조사해 봅시다." 홈즈는 울타리를 따라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도 둑이 달아났거나 들어온 흔적이 없었습니다. 나와 펠프스와 조셉이 잔디에 앉아 쉬고 있는 동안, 홈즈는 앤니가 있는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이쪽에서 보고 있으려니, 홈즈는 진지한 표정으로 애니에게 무엇인가 이야 기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해결된 뒤, 나는 홈즈에게 그때 애니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홈즈는, "펠프스씨를 하루 동안 런던으로 데리고 가는 일에 양해를 구했을 뿐이야." 하며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애니양, 펠프스씨를 런던으로 모셔 가야겠습니다." 홈즈의 말에 애니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런던엘요? 아직 몸도 시원치 않은데...." "꼭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 저도 따라가겠어요." "애니양은 여기 남아 있어야 합니다. 와트슨이 함께 가니까 걱정하실 건 없 습니다. 그것도 하루뿐입니다. 내일이면 돌아옵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군요?" "중요한 일은 오히려 당신 쪽에 있습니다." "예?" 애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떠난 후, 당신은 이방에서 한 발짝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어머나, 왜요?" "글쎄, 제 말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설령 당신 오빠라고 해도 이 방 에 들여 보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밤이 되면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십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펠프스씨에게도 해선 안됩니 다. "잘 알았습니다." 하며 애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애니! 이리 나오지 않겠어? 햇볕이 아주 따뜻해." 조셉이 홈즈와 이야기하고 있는 애니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기도 좋아요! 그보다 커피가 끓었으니 어서들 들어오세요!" 우리는 일어나서 옷에 묻은 잔디를 털었습니다. 그러자 애니와 이야기를 끝 낸 홈즈가 우리쪽으로 다가왔습니다. "펠프스씨, 중요한 문제를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런던까지 함께 좀 가 주 셔야겠는데요....." "런던으로 가자고요?" 펠프스는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서류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래야 합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다음 열차로 가면 내일은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야죠. 런던에서 묵는다면, 조셉도 함께 가는 게 좋겠군요." "집안이 너무 허전해도 좋지 않으니, 조셉씨는 집에 남아 있도록 하죠. 당 신에 대해서는 이 와트슨이 책임을 집니다." "좋아요, 좋아! 펠프스씨는 내가 맡죠. 이래뵈도 나는 의사니까요." 그로부터 한시간뒤,우리 세 사람은 워킹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홈즈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와트슨, 난 내릴테니 자넨 펠프스씨를 베이커 거리의 하숙집으로 모시고 가게." "홈즈,자넨 런던으로 가지 않나?" 나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음,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이곳에 잠시 동안만 남아 있어야겠네. 펠프스 씨,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저의 사무실에서 꼭 기다려 주십시오. 내일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전 8시에 워털루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있으니까요." 홈즈는 재빨리 기차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달리기 시작한 기차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역원 한 사람이 차 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홈즈의 변장한 모습이었습니다. 11. 부상당한 홈즈.. "홈즈씨는 왜 워킹에 남아 있는 걸까?" 펠프스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어젯밤의 도둑을 붙잡을 생각일 겁니다." "그럼 그 도둑은 역시 이번 사건과 상관이 있는 모양이군." "아뭏든 홈즈가 펠프스씨를 위험한 집에서 나오게 했을땐 무슨 생각이 있었 겠지요." "위험한 집? 그렇다면 애니는 괜찮을까?" "그런 걱정은 홈즈에게 맡겨 둡시다." 그래도 펠프스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홈즈씨는 애니에게 내 병실에서 나가지 말라고 분부했다네. 설마 애니를 내 대신 희생시킬 셈은 아니겠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홈즈는 그래봬도 여성에게는 매우 친절한 사 나이니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도 홈즈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베이커가의 하숙집에 도착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펠프스는 아무래도 애니의 일이 걱정되는지, 방안을 서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혹시 홈즈씨가 실수나 하면 어쩌지? 상대가 스파이고 보면 여느 도둑과는 다를 텐데...." "홈즈일이라면 조금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보다 학생 시절 이야기나 합시 다." 그러나 펠프스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닐세. 지금쯤 워킹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은근히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리 여기서 신경을 써 봐야 별수없지 않습니까? 진정을 하고 그만 앉으 세요." 그제야 펠프스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기색을 아주 떨쳐 버리 지는 못했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10시가 넘었습니다. "자, 이제 그만 잡시다! 내일 홈즈가 오면 바삐 뛰어다녀야 할텐데. 푹 자 두는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걱정에 잠겨 앉아 있는 것보다 그 편이 낫겠군." 우리는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펠프스의 걱정이 전염되었는 지, 나는 한참동안이나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계속 몸을 뒤척거리면서 이 괴이한 스파이사건을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홈즈는 왜 워킹에 남았을까? 왜 애니에게 펠프스의 병실에서 떠나지 말라 고 했을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다가 어느결엔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보니, 7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곧 펠프스의 방으로 갔습니다. 펠프스 역시 잠을 푹 자지 못한 모양으로 얼굴 이 핼쓱해 보였습니다. "홈즈씨는 돌아왔나?" 펠프스가 물었습니다. "8시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펠프스는 불안한 듯이 시계를 보았습니다. "지금이 8시인데....." 탁자위의 시계도 8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군, 내 시계는 7시인데......?" "자네 시계가 틀리는 모양인군." 하며 창 밖을 내려다보던 펠프스가 소리쳤습니다. "아, 홈즈씨가 왔어!"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보니, 지금 막 도착한 마차에서 홈즈가 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앗, 다쳤군!" 이번에는 내가 소리쳤습니다. 홈즈의 왼손이 흰 붕대로 감겨 있었던 것입니 다. "어떻게 된 거야? 그 손의 상처는?" "괜찮아.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야." 하면서 홈즈는 피로한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홈즈씨, 설마 도둑과 격투를 한건 아니겠죠?" 펠프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와트슨, 미안하지만 허드슨 부인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해 주시 않겠나?" 홈즈의 말을 듣고 내가 막 초인종을 울리려 했을때, 허드슨 부인이 들어왔 습니다. 그녀의 손엔 음식 그릇이 들려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허드슨 부인의 시간 관념은 놀랄만한단 말이야." 홈즈는 만족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스푼을 들었습니다. "닭고기를 넣은 카레이 요리군. 자, 어서들 같이 드십시다." 펠프스는 얼른 식사를 하려 하지 않고, "별로 생각이 없군요. 그보다 홈즈씨, 워킹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나요 ?" 하며 홈즈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어젯밤엔 잘 주무셨나요?"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더군요." "그러셨겠죠. 아주 얼굴빛이 안좋으시군요. 이럴땐 카레이 요리가 좋습니 다."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지 말고 조금만 드십시오." 펠프스는 마지못해 카레이가 담긴 그릇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릇 속에는 둘둘 말린 회색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펠프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더니, "앗, 이거다! 홈즈씨, 없어진 서류가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이제 염려 마십시오. 이로써 서류 도난 사건은 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식사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이 서류를 어디서 찾았는지 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선 커피나 한잔 마시고요." 커피를 맛있게 마신 후, 홈즈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기차에서 내린 다음부터 말해 주십시오." 펠프스는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먼저 당신 집 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죠. 커피를 마시면서 날이 저물기 를 기다렸습니다 저녁놀이 참 아름답더군요. 그것을 실컷 감상한 후, 샌드 위치를 싸 달래서 호주머니에 넣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왕 래가 드문 길을 따라서 당신 집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습니다. 집 앞 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으므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담을 뛰 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나요?" "아닙니다. 집안 사람들 몰래 들어가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뭘 훔치러 간것은 아닙니다." 하며 홈즈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슬그머니 정원으로 숨어든 나는 당신의 병실이 잘 보이는 나무 밑에 웅크 리고 앉았습니다. 밤이 깊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거죠. 애니양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더군요." 펠프스는 긴장된 얼굴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10시가 지나자, 애니양은 책을 덮고 자기 방으로 자러 갔습니다.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애니양에게 잠자러 갈때는 문을 잠그라고 일러 두었거든요. 만일 애니양이 내가 시킨대로 하지 않았더라면 서류는 아마 되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니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겠군요." 하며 펠프스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물론 애니양이 협조해 주신 덕분에 이번 사건은 빨리 해결되었습니다. 그 러나 애니양 때문에 이번 사건이 어렵게 된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애니가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까?" 펠프스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초조하게 물었습니다. "글쎄, 제 이야기를 더 들어 보십시오." 홈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시를 읊듯이 말을 이었습니다. "어젯밤엔 별이 유난히 아름답더군요. 그러나 불침번에게는 그것을 아름답 게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언제 그 사나운 표범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표범이라고요?" 펠프스가 더욱 놀란 얼굴로 묻자 홈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주 사나운 놈이었죠.. 난 그놈이 뜠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 다. 교회의 종이 15분마다 울려 졸음을 쫓아 주었습니다. 새벽 2시경, 마 침내 나타났습니다. 펠프스는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12. 스파이의 정체.. "상인들이 드나드는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조셉 해리슨이 나타났습니다." "뭐, 조셉이!" 나와 펠프스가 동시에 외쳤습니다. 홈즈는 우리의 놀라는 얼굴을 재미있다 는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조셉은 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적이 나타나면 그 외투 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셈인지, 사방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설마 조셉이...." 펠프스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당신 병실 창 쪽으로 슬며시 다가간 조셉은 칼을 창틈으로 쑤셔넣어 고리 를 벗기더니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이제 펠프스는 심한 놀라움에 입도 제대로 열지 못했습니다. "방안으로 들어간 조셉은 벽난로위에 촛불을 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도 방안의 광경이 똑똑히 보였습니다. 조셉은 웅크리고 앉아 양탄자를 젓 히더니, 그 밑의 나무 뚜껑을 들어 올렸습니다. 나무 뚜껑은 가스 파이프 의 이음새를 조사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서류 를 꺼낸 조셉은 재빨리 나무 뚜껑을 덮고 양탄자를 본디대로 해 놓았습니 다. 그리고 촛불을 불어 끄고 창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즉, 창밑에서 기 다리고 있던 내 품안으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미처 칼을 휘두를 여유도 없었습니다. 안되 얘기지만 조셉은 잔디 위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그때 칼끝이 스쳐 손에 상처가 난 것이지요." 홈즈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담담한 말투로 설명했습니다. "그래, 조셉은 경찰에 넘겼나?" 내가 궁굼하여 이렇게 묻자, 홈즈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니 어째서?" "조셉은 스파이완 관계가 없네.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펠프스씨를 찾아간 조셉은 장난삼아 그 서류를 가져갔던 거야. 물론 그 서류와 바꾸는 조건으 로 외무성에서 사례금을 받아 낼 작정이었지만, 그는 그 서류때문에 누이 동생의 약혼자가 면직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런데 집 에 돌아와 조사해보니,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 서류가 중대한 국가 기밀 서 류였지. 그렇다고 돌려 줄 수도 없는 일이어서 태워 버리려고 하고 있는 데, 펠프스가 병자가 되어 돌아온거야. 그래서 서류를 감춰 둔 자기 방에 서 내몰리고 말았던 것이지." "그래서 도둑 흉내를 냈단 말인가?" 내 말에 펠프스는 화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흉내가 아닐세! 그는 엄연한 도둑이야! 홈즈씨, 당장 경찰에 알려 주십시 오." 그러나 홈즈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만약 조셉이 그 서류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진짜 스파이에게 도둑맞았을 겁 니다." "그럼 스파이가 따로 있었나요?" "있었지요. 당신이 신용하는 윌슨이라는 서기장이 바로 스파이입니다. 그는 장관의 명령으로 그날 밤 당신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 다시 한 번 갔습니 다. 아마 당신을 수위실로 꾀어내어 수면제라도 먹일 생각이었겠죠. 그런 데 서류는 그가 가지 전에 조셉이 이미 가져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파이의 두목은 장관입니까?" 펠프스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예,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백부님이 바로 스파이의 우두머리 입니다." "홈즈씨, 제가 지금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펠프스는 잠에서 깨어 나기라도 하려는듯 고개를 마구 저었습니다. "지금쯤 장관은 내 편지를 읽고 물러날 결심을 했을 겁니다." "편지라니요?" "경시청의 포오부즈 형사편에, 당장 장관의 자리엣서 물러나라는 내용의 편 지를 보냈죠." "백부가 어째서 그런 무서운 생각을 했을까요?" 펠프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괴어 흘러내렸습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홈즈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포오부즈 형사는 백부를 체포하러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영 제국의 외무장관이 스피이일 까닭이 없습니다. 장관 자리 에서 물러나 장미를 좋아하는 백작으로서 워킹 마을로 돌아가도록 권고 하 였을뿐입니다. 그 서류는 처음부터 당신 방에 잊혀진채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뇌염 때문에 그것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겁니다. 자, 그럼 먼저 식사 를 하겠습니다." 홈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레이 요리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허드슨 부인이 바삐 들어왔습니다. "홈즈씨, 경시청의 포오부즈씨가......"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그런데 벌써 돌아가셨어요." "왜요?" "외무 장관이 자살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고는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뭐, 자살!"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잊고 입을 딱 벌렸습니다. "와트슨, 어제 저녁 마차의 목격자가 드디어 나타났어." 다음날 찾아간 나에게 홈즈가 말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역시 조셉이었나?" "응, 상금 10파운드는 억울하게 빼앗긴 셈이지?" 우리는 마주 보고 싱긋 웃었습니다. "그보다 윌슨을 어떻게 할 셈인가?" "그 사나이는 다른 죄로 포오부즈 형사에게 넘겨 주었지." "애니양의 일이 걱정이군. 오빠의 죄에 책임을 느껴 펠프스와의 약혼을 취 소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거야. 펠프스는 애니양 없이는 도저히 살지 못할 테니까....." 하며 홈즈는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에게 퍼어시 펠프스로부터 청첩장이 왔습니다. 신부는 물론 애니 였습니다. 2. 사라진 기밀 서류.. 나와 홈즈는 사건 의뢰인인 퍼어시 펠프스가 살고 있는 워킹으로 가기위해 서둘러 워털루역으로 나갔습니다. 그로부터 한시간도 채 못 되어, 우리는 워킹의 숲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자네에게 편지를 보낸 그 외교관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군." 홈즈가 말했습니다. "그건 것 같아, 그건 나라도 추리할 수 있어." 내 말에 홈즈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여자가 부인일지도 모르잖아." "그럴 리가 없어. 이 편지에 묻어 있는 향수는 외교관 부인이 쓰긴엔 너무 강해." "자네도 상당하군." 하고 홈즈는 다시 웃었습니다. "그보다 홈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펠프스라는 사나이는 아주 마음 이 약한 사나이야. 외교관이 도니 것이 이상할 정도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그리고 펠프스가 외무성 관리가 된것은 백부의 덕분이라고 했잖아." "그의 백부는 현재 외무 장관으로 있는 홀더어스트경이야."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틀림없이 국가 기밀에 관한 것이겠군. 기밀 서류를 도둑맞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동안 숲이 끝나는곳에 있는 퍼어시 펠프스의 집에 다다랐습니다. "생각보다는 역에서 가깝군." "사실은 먼데, 방금 지나온 숲이 너무 아름다와서 시간의 흐름을 잊었을거 야." 홈즈는 이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넓은 정원으로 들어섰습니다. 현관에는 안내를 맡은 하인이 있었습니다. 명함을 내밀자, 그는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시로 우리를 곧 안내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빨간 조끼를 입은 사나이가 나왔습니다. 그의 나이는 약 35세쯤 되어 보였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 사나이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퍼어시는 아침부터 마치 환자가 의사를 기다리듯이 목을 빼고 당신들을 기 다리고 있습니다. 가엾게도 퍼어시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지푸라기라도 잡 고 싶은 심정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내용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노력을 다할 생각으로 왔습 니다." "아, 그러십니까? 잘 부탁합니다." 사나이는 환자가 있는 집안에 사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쾌활해 보였습니 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언짢았습니다. 홈즈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사나이를 바라보고 빙긋 웃으 면서, "보아하니, 당신은 이집 식구가 아니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깜짝 놀란듯이 홈즈의 얼굴을 멍청히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핫하하, 목걸이에 새겨져 있는 제이(J).에이치(H)라는 글자를 보고 내 정 체를 알아 낸 모양이군요. 처음엔 당신이 무슨 요술이라도 쓰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그 사나이의 웃음 띤 얼굴을 바라보며, '이 사나이는륚 상대방의 기분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얼간이로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환자가 있는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여전히 큰 소리로 지껄였 습니다. "저는 조셉 해리슨입니다. 누이동생인 애니가 퍼어시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 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집과 친척이 되는 거죠. 누이동생은 지난 2개월 동안, 마치 간호원처럼 퍼어시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퍼어시 의 방에 있지요.자, 그럼 곧 방으로 가실까요?" 나와 홈즈는 담배 피울 시간도 없이 퍼어시의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퍼어시의 방은 응접실과 같은 아래층에 있었습니다. 거실과 침실을 겸한 그 방은 구석구석이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창문 가까이에 있는 안락의자에 얼굴빛이 창백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습니 다. 그는 우리들이 들어가자, "여어, 와트슨!" 하며 힘들여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바로 퍼어시 펠프스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는 학생시절의 밝은 느 낌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병 때문만은 아닌것 같았 습니다. 그렇다면 근무하고 있는 외무성의 분위기가 펠프스에게 견딜 수 없 는 고통을 주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번 사건 때문일까요? 아뭏든 펠프스 가 풍기는 분위기는 몹시 어둡고 날카로왔습니다. "자넨 어디로 보나 훌륭한 의사로군. 이분이 바로 유명한 셜록 홈즈씨인가? 자, 앉으십시오." 하며 펠프스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려 했으나, 곁에 서있던 젊은 여자에 의 해 억지로 의자에 도로 앉혀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까지 퍼어시씨는 무리하면 안 되거든요." 나와 홈즈에게 양해를 구하듯 젊은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펠프스는 황 급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애니, 난 이제 괜찮아. 당신은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군." "내가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게 아니어요. 무리하면 그만큼 회복이 늦어지니 까요." 애니라고 불린 여자는 퍼어시를 부드럽게 흘겨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셉 해리슨에게. "오빠, 저희는 나가 있죠."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펠프스는, "당신은 여기 남아 있어 줘요." 하며 애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오빠인 조셉은 이런 일에는 익숙한 듯, 조금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 다. "그럼 천천히......" 하며 그는 곧 방에서 나갔습니다. "괜찮겠어요?" 애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펠프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녀는 까다로운 펠프스의 마음에 들 만큼 건강하고 아름다왔습니다. 마치 올리브 열매같이 싱싱한 느낌을 주는 아가씨였습니다. 그녀의 그런 싱싱한 아름다움 때문에 곁에 있는 펠프스는 더욱 중한 병자처 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펠프스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걸리면 두분께 미안하니, 본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와트슨군 도 알다시피 나는 복 많은 사나이였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자마 자, 백부인 홀더어스트경의 추천으로 곧 외무성에 근무 할 수 있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결혼을 눈앞에 두고 뜻밖에 불운을 맞은 것입니다." "그건 외무성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까?" "그렇습니다. 해군의 기밀 서류가 없어졌습니다." "뭐, 해군의 기밀 서류라고!" 나는 홈즈의 추리가 너무나 정확한 데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 다. 3. 유령 저택.. "기밀 서류는 없어진 겁니다. 도둑맞은 것이 아닙니다." 펠프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없어졌다지만, 그 서류는 도둑맞은 거죠?" 나는 펠프스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펠프스 는 내 표정을 살피며, "도둑맞았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네. 그래서 없어졌다고 한 걸세." "중요한 서류가 까닭도 없이 없어지다니, 외무성은 마치 유령의 저택같군 요." 하며 내가 웃자, 홈즈가 펠프스를 두둔하고 나섰습니다. "와트슨, 이분은 외무성의 관리시니까 우리와는 달리 알고 있어도 말 못할 사정이 계실 꺼야." "그건 잘 알아. 하지만 그때문에 우리의 수사가 옆길로 새게 되면 더욱 난 처해지지 않겠나?" 펠프스는 나와 홈즈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곧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모양이 었습니다. "와트슨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관료 근성이 몸에 밴 모양이야. 자네와 홈즈씨를 이곳으로 오게 한것은 그만큼 믿었기 때문일 세.무엇하나 숨길 생각은 없네." 펠프스의 솔직한 태도는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보이지 않는 장막을 걷 어 버렸습니다. 그뒤로 펠프스는 조금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백부는 외무 장관이 되자, 나같은 신임 관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중요한 일들을 잇달아 맡겼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습 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따갑던 동료들의 눈초리도 차차 부드러워졌습 니다." "당신의 실력이 인정된 거군요." 펠프스는 홈즈의 말에 얼굴을 붉혔습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뭏든 나중엔 내가 장관실에 불려가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날도 나는 백부의 부름을 받고 장관실로 들어갔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말인가요?" "예, 5월 23일의 일입니다." 펠프스는 좀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장관실은 평소와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늘 있던 비서관이 눈 에 띄지 않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습니다. 백부는 늘 그러듯이 펠프스의 일솜씨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해줘야겠다." 하며 책상 서랍에서 무슨 서류를 꺼냈습니다. "퍼어시, 이건 이탈리아와의 비밀 조약 문서야. 프랑스와 러시아 대사관이 이 기밀 서류를 노리고 몇 명의 스파이를 채용했다는 정보가 있다." "어디에 전할 건가요?" "전하는 일이라면 군인에게 부탁하지." 하며 백부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건 해군에 관한 조약 문서야. 만일 이것이 적의 손에 넘어 갔다간, 우리 나라는 말할 수 없이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백부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펠프스는 차츰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정이 생겨, 이 서류를 복사하게 되었다. 그 일을 네게 맡기 려는 거야." "제게요?" 펠프스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처음엔 비서관을 시켜 여기서 할 작정이었으나. 그게 위험하게 뻍어." "어째서요?" "비서관 주위에 스파이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거든." "그래서 저에게........." "그래, 넌 지금 외무성의 별관에 있지?" "그렇습니다." "설마 그 낡은 건물에서 이렇게 중요한 서류가 취급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하지 못 할거야." 하며 백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과연 그렇겠군요." "자, 어서 이걸 가져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어라.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퇴 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옮겨 쓰도록 해. 너 혼자만 남도록 너의 상관에게 일 러 두겠다." "다 옮겨 쓰고 난 후엔 어떻게 하지요?" "원본과 함께 다시 책상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둬. 그리고 평상시와 다 름없이 워킹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다음날 출근하는 대로 원본과 사본을 내 손에 건네 주면 네 일은 끝나는거야." "잘 알겠습니다." 펠프스는 그 서류를 받아들고 장관실을 나왔습니다. 펠프스는 여기서 잠깐 말을 중단하였습니다. "물론 그때 장관실에서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었겠죠?" 홈즈가 물었습니다. "예, 백부님과 나 이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방은 크기가 얼마만한가요?" "사방 3미터쯤 됩니다." "당신들의 그 방의 어느 위치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까?" "한가운데입니다."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셨겠죠?" "예, 백부님은 늘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말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장관의 명령대로 그 서류를 가지고 별관으 로 갔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별관에 돌아와보니 벌써 백부의 명령이 내려졌는지, 동료들이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혼자 남는다는 것 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아니 누군가 눈치챈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게 아닙니까?" 홈즈의 말에 펠프스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없었을겁니다. 동료들은 내가 백부에게 불려가기 전에 전보를 받은 걸 알 고 있었거든요." "전보요?" "예, 조금전에 여기 있던 조셉이 마침 런던에 나왔다가 전보를 친 겁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11시 기차로 워킹역에 함께 가자면서, 자기가 외무 성에 들를때까지 기다려 달라구요. 그러니까 모두들 내가 조셉을 기다리기 위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서류를 서랍에 넣고 잠근 다음, 그때까지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서기장에게 잠깐 식사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30분쯤 지나서 돌아와보니. 벌써 서기장은 가고 없었 습니다. 나는 안심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서기장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외무성에 20년이나 근무한 노인입니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펠프스의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4. 초 인 종.. '만일 그 서기장이 스파이였다면?' 하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펠프스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조셉이 올때까지 일을 다 끝내고 11시 기차로 워킹에 돌아갈 생각이 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삼국동맹(프랑스, 도이칠란드, 이탈리아가 젢은 동맹)에 대한 영국측의 태 도를 밝힌 문서로, 만일 지증해에서의 프랑스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보다 우세해질 경우 우리 해군이 이탈리아의 편을 들어 준다는 것이 주된 내용 이었습니다. 거기엔 이탈리아와 영국 고관들의 서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난 그 서류를 펼치기 전까지는 백부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 게 중대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내용을 알고나니 어째서 백부는 이런 중대한 서류의 사본을 만드는 일을 나에게 맡겼을까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 문서는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었나요?" 긴장하여 듣고 있던 홈즈가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프랑스어였습니다. 아뭏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신없이 베꼈습니다. 그러나 9시가 다 되었는데도 26개 조문중 9개 조문 밖에 베끼 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다가는 도저히 11시 기차를 탈수 없을것 같았습 니다." 펠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식사를 하자마자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날은 온종일 바빴던 관계로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9시가 지나자, 졸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라도 마시면 머리가 맑아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나는 책상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 초인종은 아래층에 있는 수 위실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당직 수위가 야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알코올 램프로 커피를 끓여주게 되어 있었거든요, 잠시 후 수위의 아내가 앞치마 에 손을 닦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커피를 한잔 끓여 달라고 부탁 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펠프스씨, 그 부인은 외무성 건물안에 살고 있습니까?" 홈즈가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 부인은 낮에 잡역부로 일하고, 당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9시가 지났는데도 왜 퇴근하지 않고 남아 있었을까요?" "아마 자기 남편이 당직이였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그 여자는 곧 커피를 가져왔습니까?" "이상하게 한참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더군요." "가져오지 않았다고요?" 홈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 여자가 다녀간 후 2개 조문을 더 베꼈는데도 그때까지 커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꾸만 졸음이 와서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습니다. 1미터쯤 복도를 걸어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내려가면 좁은 콘크리트 홀 이 나타납니다. 그곳을 가로질러 곧장 가면 수위실이 있습니다. 콘크리트 홀에서 곧장 가지 않고 오른쪽을 돌아가면 건물 정면에 출입구가 하나 있 는데, 수위실 오른쪽에도 잡역부를 위한 출입구가 또 하나 있습니다. 수위 실 오른쪽에 있는 이 출입구는 차알스 거리 쪽에서 오는 직원들의 지름길 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두 군데 말고는 출입구가 없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곧장 수위실로 가 보았습니다. 알콜 램프위에 올려 놓은 주전자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수위는 그 옆에서 쿨쿨 자고 있더군 요. 나는 호통을 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주전자를 내려놓았습니 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나와 홈즈는 긴장하여 펠프스를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기둥에 달린 초인종이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그 바람에 수위가 벌떡 깨어 일어났습니다. 수위는 내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가 커피를 가지러 왔다고 말하자 그는 미안해서 어 쩔 줄 몰라 하면서 서둘러 커피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난듯, '펠프스씨 말고 야근을 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하고 물었습 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럼 방금 초인종은 누가 울린 걸까요?'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퍼뜩 정신 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없어야 할 방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입니다. 책상위 에는 그 기밀 서류가 펼쳐진 채로 놓여 있는데 말입니다." 펠프스의 손끝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신없이 수위실을 뛰어나왔습니다. 어떻게 계단을 올라갔는지, 지금 도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누구와 복도에서 마주친 기억도 없고, 방안 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상위의 서류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 렸습니다....." 펠프스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5. 검은 쇼올의 여자.. 펠프스의 이야기가 계속 되는 동안 홈즈는 자꾸만 양손을 비볐습니다. 그것 은 홈즈가 사건에 열중했을때의 버릇이었습니다. "펠프스씨, 도둑맞은 서류는 당신이 베낀 겁니까? 아니면 원본입니까?" "물론 원본입니다." "그거 곤란하게 뻍군요. 그개서 어떻게 하셨죠?" "맨 먼저 생각한 것은, 도둑이 어디로 들어왔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잡역부들이 사용하는 출입구로 들어왔다면 틀림없이 나와 마주쳤을 것입니 다. 그렇다면 범인은 틀림없이 건물의 정면 출입구로 들어와 내가 수위실 로 가는 걸 확인하고 사무실로 들어간 것이 됩니다." "당신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간 사이에 범인은 이미 사무실 안으로 몰래 숨 어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홈즈의 물음에 펠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당신이 수위실에서 나오기 전에 콘크리트 홀 오른쪽에 있 는 출입구로 달아난 모양이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죠. 곧 뒤따라온 수위는 내가 새파랗게 질린것을 보고, '뭐가 없어졌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중요한 서류가 없어졌다고 하 자,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지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잠시 후, 우리 둘 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정면 출입 구 쪽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쪽 말고는 범인이 달아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지요." "그 출입구는 잠겨 있지 않았나요?" "예, 나와 수위가 문을 밀어젖히고 뛰어나갔을때, 가까운 교회의 종이 울렸 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때가 10시 15분전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틀림없죠?" 하며 홈즈가 수첩에 그 시간을 적어 넣었습니다. 펠프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거리에는 사람 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펠프스와 수위는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불빛이 환한 화이트홀 쪽으 로 달렸습니다. 도중에 그들은 경관과 마주쳤습니다. 펠프스는 숨을 헐떡이며 경관에게 물 었습니다. "방금 중요한 서류를 도둑 맞았습니다. 혹시 누가 이쪽으로 달려가지 않았 습니까?" 경관은 그들을 번갈아 ?어보면서, "난 여기서 15분동안이나 서 있었는데 지나간 사람은 검은 쇼올을 쓴 여자 뿐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검은 쇼올을 쓴 여자요?" "그렇소. 검은 쇼올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 똑똑히 못 보았지만, 키가 크 고 나이가 든 여자였죠." 그러자 수위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아. 그 여잔 제 아냅니다.그밖에 또 지나간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밖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소." "그렇다면 도둑은 반대 방향으로 달아난 게 틀림없군요.펠프스씨, 저쪽으로 가 봅시다." 하며 수위는 펠프스의 팔을 잡아 끌었습니다. 그러나 펠프스는 그 여자가 몹시 마음에 걸렸으므로, "그 여자는 어느쪽으로 갔죠?" 하고 경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글쎄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 할 수가 없군요." "혹시 당황하는 기색은 없던가요?" "걸음걸이로 보아선 조금도 수상한 점이 없었어요." "그 여자가 지나간 게 한 5분 정도 되었소?" "그 정도 된 것 같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수위는 마침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 여자는 내 아내가 틀림없다니까요! 내 말은 안 믿고 이렇게 시간을 끌 다가는 정작 범인을 놓치면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그는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펠프스가 황급히 그 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잠깐! 당신 집은 이 근처요?" "프린스턴구 아이비 거리 16번지 입니다. 설마 내 아내를 의심하는건 아니 겠죠?" 수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습니다. "그럴리가 있소.내가 염려하는건 그 여자가 당신 아내가 아니었을 경우요." "그렇다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 여자는 제 아내임에 틀림없으니까요." 수위는 몹시 화가 나 있었고 또 만일 수위의 아내가 범인이라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 다. 펠프스와 수위는 곧 반대방향인 차알스 거리 쪽으로 달렸습니다. 물론 경관도 함께 였습니다. 그런데 차알스 거리로 나가는 길은 사람의 왕래가 잦았고, 게다가 비까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도저히 범인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외무성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몇 시쯤이었지요?" 홈즈가 물었습니다. "내가 식사하고 돌아올때까지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7시쯤 됐을겁니다." "혹시 방안에 젖은 구두 발자국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문은 두군데밖에 없습니까?" "창문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창문이나 안쪽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습니 다." "창에서 방바닥까지의 높이는?" "6미터쯤 됩니다." "사무실 바로 밑은 무얼 하는 곳이죠?" "창고 입니다. 이미 필요없어진 서류를 집어 넣어 두는 곳이죠." "창고의 입구는?" "딴곳에 있습니다. 우리 사무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혹시 사무실 마룻바닥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던건 아닐까요?" 내가 물었습니다. 펠프스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만일 무슨 장치를 해 놓았다면 내가 곧 알아차렸을 걸세." "어떻게요?" "바닥에는 얇은 융단이 깔려 있었거든. 조금만 움직여도 어딘가에 주름이 잡혀 있었을걸세." "그렇겠군요." "천장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홈즈가 물었습니다. "비가 샌 흔적은 있습니다만, 어이에도 구멍 같은 것은 없습니다." "벽난로는 조사해 보셨나요?" "벽난로는 없습니다. 겨울에는 보통 난로를 놓게 되어 있습니다." "범인은 역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고 봐야 겠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전에 들어간 것 같군요. 만일 수위의 아내가 범인이라 면, 넉넉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뭔가 흘려 놓고 간 것은 없습니 까? 예를 들면 머리핀 따위를......" "그런건 없었습니다." "담배 꽁초도 없었습니까?"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담배를 피웠다면, 냄새로 당장 알 수 있죠." "그렇다면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는 셈이군요." "검은 쇼올을 쓴 여자외에 수상한 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위를 조사해 보았나요?" 펠프스는 조금 피로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습 니다. 아무래도 수위의 아내가 마음에 걸렸던 펠프스는 수위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서 돌아갔소?" "내 아내는 내가 당직을 할 땐 늘 그시간에 돌아갑니다." "일은 훨씬 일찍 끝날텐데요?" "대개 식사를 하고 가거든요." 펠프스는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안 풀렸으므로, 경관가 상의하여 그 부인을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마침 경시청의 포오부즈라는 형사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경관가 수위를 외무성에 남겨 놓고 펠프스와 포오부즈 형사는 수위의 집으 로 달려갔습니다. 수위는 그들이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을 알고 몹시 못마땅 해서 투덜거렸습니다. "끝내 내 아내를 의심하시는군요." 그들은, 일이 워낙 중대하여 다만 조사를 하는 것뿐이라고 그를 달래고 밖 으로 나왔습니다. 30분쯤후에 그들은 수위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열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직 안 오셨어요." 하며 소녀는 문을 탁 닫아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비를 맞으며 문밖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소녀 는 조금 안된 생각이 들었는지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수위의 아내를 초조하게 기다린지 10분쯤 지난 후, "줄리, 문 열어라!"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틀림없이 수위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그만 큰 실수를 저질렀 습니다. 두 사람중 누군가가 문을 열고 그 여자를 붙잡았어야 하는 건데, 소녀가 먼저 문을 열게 내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문을 열고 소녀가 말했습니다. "엄마,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남자니?" "예, 두사람이어요." 그러자 부인은 아무말도 없이 도망쳐 버렸습니다. 우리는 소녀를 밀치고 밖으로 쫓아나왔습니다. 빗속을 20분이나 달려 겨우 부인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펠프스씨 아니세요?" 부인은 멋적은 듯 얼굴을 붉혔습니다. "왜 달아났죠?" 펠프스가 숨을 몰아쉬며 묻자,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을 전당포에서 나온 사람으로 생각했거든요. 실은 지난 몇 달동안 날마다 전당포 주인에게 쫓기고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우리는 아이들이 많 아서 얄팍한 월급만 가지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단 말이어요." 마치 월급이 적은 것이 펠프스의 탓이나 되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펠프스와 포오부즈 형사는 쏟아지는 빗줄기속에 서서 여자의 이야기를 듣느 라고 흠뻑 젖었습니다. 펠프스는 생각난듯 기침을 했습니다. 6. 뇌염에 걸린 펠프스.. "그 비로 말미암아 병에 걸렸죠. 9주일이나 되는 귀중한 시간을 뇌염 때문 에 자리에 누워서 허비한 것입니다." 펠프스는 몹시 유감이라는듯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죠." 홈즈가 양손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만일 당신이 필요이상으로 스파이를 쫓았다면, 적은 반격을 가해 왔을지도 모르니까요." "반격?"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은 위험한 지경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숨 에 관계될 만큼 위험한 지경에 말입니다." "설마........" 펠프스는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그 서류가 중요한 것이니만큼 적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을 겁니다." "물론 그 서류는 중요합니다. 그때는 그만 경황 없이 뛰어다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건이 너무도 엄청났습니다." "서류의 행방이 걱정이로군요. 그날 밤 수위의 부인이 외무성을 나와서 자 기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까?" 홈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습니다. "물론 조사했습니다. 부인은 돈을 꾸기 위해 자기 동생네 집에 들렀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포오부즈 형사가 부하 순경을 부인의 동생 집으로 보 냈습니다. 부인의 말은 틀림없더군요." "수위의 집은 조사하지 않았나요?" "조사했습니다. 나와 포오부즈 형사는 부인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기전에 혹 시 서류를 숨겨 놓지 않았나 하고 샅샅히 조사했습니다. 딸들에게도 우리 가 찾아가지 전에 부인이 다녀갔는지 물어 보았더니 물론 아니라고 하더군 요. 우리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부엌의 쓰레기통이나 아궁이 속이며, 숨길 만한 곳은 모조리 조사해 보았습니다. 여순경을 시켜 부인의 몸 수색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서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펠프스는 낙심한 듯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때는 쉽게 찾을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서류를 되찾 지 못할 경우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죠. 그런데 포오부즈 형사가 이 이상 더 조사할 방법이 없다고 한숨짓는 걸 보자,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와트슨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학생 시절부터 겁장이에다 신경질이 많았습니다. 내가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들었다고 생각하니 앞뒤 판단마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로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백부님에게까지도 책임이 미친다고 생각 하니,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앞서서......" "경찰에서는 외무성의 서류 도난 사건 같은 중대 사건을, 어째서 일개 형사 에게만 맡겼을까요?" 홈즈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꺄우뚱했습니다. "그때는 나도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이미 경찰로부터 백부님께 보고가 들어갔었다는군요." "그래서 장관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것은 중요한 서류가 아니니, 당장 손을 떼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합니 다. 물론 외무성의 불명예가 경시청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 지요. 그러나 포오부즈 형사는 나를 위해 조사를 계속해 주었습니다. 그는 내게 '당신은 몹시 지쳐 있는것 같군요. 오늘밤은 돌아가서 쉬십시오. 서 기장과 의논하여 또 다른 각도로 조사해 볼 테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서기장? 그 사람은 당신이 식사하러 나갈때까지 방에 남아 있던 인물이 아 니오?" "그렇습니다. 의논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경관에게 그를 불러다 달라고 했 었지요." "서기장에게는 사건의 내용을 이야기했나요?" "예, 서류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어떤 중요 서류가 없어졌다는 것은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서기장 윌슨씨는 당직을 보게 되고, 수위는 경찰에 불려갔습니다. 그러나 수위는 수상한 점이 없었으므로 곧 풀려났습니다." "그 다음에 당신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친절한 포오부즈 형사의 권유를 들어 집에 오기 위해 워털루 역으로 나갔 죠.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자, 갑자기 열이 오르고 어지러워 길가에 주저앉 았습니다. 페리아 선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페리아 선생이라뇨?"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의사죠. 마침 막차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답니다." "그거 다행이었군요." "그 자리에서 해열 주사를 맞았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했 을때는 이미 중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페리아 선생은 왜 그때 곧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요?" 내 물음에 펠프스는, "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난 빨리 집에 오고 싶어서 그냥 기차를 타자고 졸 랐던 거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무리만 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글쎄, 아뭏든 집에 도착해서도, 초인종을 울릴 힘이 없었으니까. 페리아 선생이 초인종을 울려주어 사람이 나왔는데,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깜 짝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곧 집안으로 옮겨졌습니다. 병이 오래 갈 것 같으니 조용한 방을 준비하라는 페리아 선생의 말에 따라 애니는 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방을 차지하고 있던 조셉을 내몰고, 그 방을 내 병실 로 만들었습니다." "펠프스씨, 그러니까 이 방은 애니양의 오빠인 조셉씨의 방이군요?" 홈즈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습니다. "예, 조셉이 이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 줄곧 사용해 왔습니다." "그럼 당신의 방은?" "바로 이 이층입니다." "그 방은 지금 비어 있습니까?" "예, 비어 있습니다.." "방을 서로 바꾼게 아니었군요?" "집안에 빈방은 많으니까요. 그러나 이방이 가장 조용하고 좋습니다. 정원 도 여기서는 잘 내다보입니다. 덕분에 나는 원기를 되찾았습니다. 아마 페 리아 선생과 애니가 없었더라면, 나의 회복은 더 늦어졌을겁니다." 펠프스는 눈물이 글썽하여 애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니어요, 모두 페리아 선생님 덕분이죠." 애니는 얼굴을 붉히며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애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아가씨라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7. 서기장 윌슨.. "물론 페리아 선생의 힘이 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니가 곁에서 돌봐 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미치광이 같은 발작은 횟수가 더 잦았 을 겁니다." 하며 펠프스는 정다운 눈길로 애니를 바라보았습니다. "펠프스씨, 그 미치광이 같은 발작이란 어떤걸 말하죠?" 홈즈는 보기드물게 진지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펠프스는 그러한 홈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나중에 어머니와 애니에게 들으니, 그 동안 몇 번이나 침대에서 내려와 방안을 마구 뛰어다녔다고 하더군요." 하고 멋적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애니가 거들어 주었습니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뛰어다니곤 했어요. 너무 괴로와하는것 같아서 차 마 볼 수가 없었어요." "애니양은 밤에도 시중을 드셨나요?" "아니어요. 밤엔 간호원이 돌봐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에 펠프스씨 혼자 남겨진 일은 없었던 셈이군요?" "예, 없었어요. 낮엔 제가, 밤엔 간호원인 베이시양이 늘 옆에 있었어요." "누군가가 이 방에 와도, 예를 들어 펠프스씨의 어머니가 들어오셔도 당신 은 이방에서 나간 일이 없었다는 말이군요." "예,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식사도 이 방에서 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신경을 썼죠." "그렇다면 안심했습니다." 홈즈는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사건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펠프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보다 펠프스씨, 당신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 무슨 일부터 하셨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2, 3일전의 일 입니다." "그래서요?" "포오부즈 형사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형사가 바로 왔던가요?" "예, 그는 수위 부부에 대한 의혹이 풀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요?" "달리 수상한 인물이 있다는 겁니다." "누구 말입니까...?" 홈즈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서기장 윌슨이 수상하다고 하던군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확실히 윌슨씨는 늦게까지 외무성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그랬습니다. 그날 밤만 일부러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윌슨씨를 퍽 신용하고 있군요?" "그런 편이지요. 그런데 포오부즈 형사는 그에 대하여 중대한 사실을 발견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홈즈는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파리의 대사관에 근무할 당시, 윌슨씨는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었답니다." "그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대사관 서기로서는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죠. 우리도 외국에 나 가면, 설령 적국에 가더라도 친구를 사귀니까요. 그런데 포오부즈 형사는 그게 위험하다는 겁니다. 나는 윌슨씨가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가를 되풀이 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포오부즈 형사는 '서기장을 의심하지 않 는다면, 결국은 당신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웃더군 요." "그래서 당신은 와트슨에게 편지를 낼 마음이 생겼군요." "그렇습니다. 윌슨씨와 나의 명예를 지켜 줄 사람은 홈즈씨밖에 없다고 믿 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당신으로부터 더 들을 말이 없는 것 같군요." "협력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이나 장관을 위해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영국인입니다. 영국에 위험이 닥쳐왔는데 모른체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협력해 주시겠단 말씀이군요. 아뭏든 감사합니다." 펠프스는 안심한듯 안락의자에 푹 파묻혔습니다. 애니는 곧 향기가 짙은 술을 펠프스에게 따라 주었습니다. 홈즈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홈즈라는 사나이는 아주 차가운 인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때 홈즈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홈즈는 눈을 퍼뜩 떴습니다. "펠프스씨, 또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그 수위는 줄곧 런던에 살고 있었나요 ? 혹시 외국에 갔었던 일은 없을까요?" "외국이라고요?" 펠프스는 고개를 꺄우뚱거리더니, "없는 것 같군요. 군대에 있을때, 혹시 다른 나라에 갔었는지 모르지만..." 하고 말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포오부즈 형사에게서 듣죠. 경찰서라는 곳은 그런 걸 조사하 기에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니까요." 하며 홈즈는 펠프스의 옆을 지나,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장미꽃이 참으로 아름답군요." 홈즈는 덩굴장미의 꽃잎을 만지며 말했습니다. 그것을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홈즈가 꽃 따위에 관심을 쏟은 적 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8. 상금 10파운드의 광고.. "홈즈씨, 사건에 대해서는 뭔가 실마리라도 잡히셨나요?" 애니가 홈즈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습니다. 애니의 눈엔 장미 따위에 열중 하고 있는 홈즈를 나무라는 기색이 어려 있었습니다. "아, 사건 말이오?" 홈즈는 계속 꽃잎을 만지며 얼굴을 애니 쪽으로 돌렸습니다. "단서는 잡혔나요?" "어느 정도는....." "그래요?" "하지만 당장 범인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머, 왜요?"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서류를 무사히 되찾는쪽이 더 중요하기 때 문이지요." 애니는 상냥스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와트슨, 우린 이제 그만 실례할까....." 창가에서 몸을 돌리며 홈즈가 말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시려고요?" 펠프스가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말했습니다. "런던에 돌아가서 포오부즈 형사를 만나야겠어요." "다음에 오실 땐 건강한 몸으로 뵈야 할 텐데...." "난 내일도 같은 기차편으로 다시 올 예정인걸요." "예? 내일도 와 주시렵니까?" 펠프스의 눈이 빛났습니다. "예, 그러나 너무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닙니다. 홈즈씨가 수사를 계속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절대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애니, 마차가 준비될때까지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해줘요." "예, 이리로 가져오죠." 애니가 방에서 나간지 얼마 안 되어 심부름하는 소녀가 편지 한 통을 가지 고 들어왔습니다. "됐어, 나가 봐!" 급히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은 펠프스는, 그때까지 나가지 않고 서 있는 소 녀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홈즈가 편지를 넘겨다보며 물었습니다. "백부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사건 때문에.......?" "정말 냉정한 분입니다. 내 말도 들어 보지 않고 나를 면직시켜 버렸다는 군요." "펠프스씨, 장관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서류를 찾으면 용서해 주실겁니 다." 홈즈는 펠프스의 기분을 돌리려고, 애니를 처음 만났을때의 일을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애니네는 노오던버랜드 마을에서 철공소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그 마을로 사냥을 나갔다가 애니를 만났습니다. 바로 약혼하고 집으로 데 리고 왔죠. 다행히도 애니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호감을 샀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애니가 마음에 쏙 든다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조셉씨도 그때 이 집으로 왔습니까?" "조셉은 애니의 보호자로서 따라왔습니다. 원래부터 철공소 경영 같은 것에 흥미가 없던 그는, 우리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와 홈즈는 조셉이 부리는 마차를 타고 퍼어시 펠프스 의 집을 나섰습니다. 덕분에 곧 런던행 기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기차안에서 홈즈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그 런 버릇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는 기차가 크라범 역을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고가 철도로 런던 시내에 들어가는 건 정말 유쾌한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홈즈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기와의 바다 위에 커다란 벽돌섬이 떠 있는 것같이 보이는군." 차창 아래쪽을 가리키며 홈즈가 말했습니다. "저건 기숙 학교야." "아냐, 등대야. 미래를 비춰주는 빛이지." "등대?" "그렇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작은 씨앗을 품은 꼬투리야. 얼마 안 있어 그 속에서 영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튀어나올꺼야!" "그건 그렇고, 홈즈. 자네는 펠프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홈즈는 빙그레 웃으며, "와트슨, 자네는 펠프스를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되는 모양이군?"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약한 겁장이 사나이야. 게다가 예의도 전혀 없어." "그럴수록 우리는 그를 지켜 줘야 해." "그는 자기의 부주의로 국가의 기밀 서류를 잃어버리고는, 그 책임을 절실 하게 느끼고 있는것 같지도 않단 말이야."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겠지." "마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뇌염에 걸린것 같아." "자넨 의사면서 그런 소리를 하나?" "아뭏든 그런 친구를 가진게 부끄러울 지경이야." "와트슨, 자네는 홀더어스트경을 의심스럽게 생각지 않나?" "뭐, 장관을?" 나는 느닷없이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일 장관이 돈에 매우 궁색함을 느끼고 있다면 어떨까?" "그 서류를 프랑스 정부에 팔겠지." "교활한 자라면, 자기 조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슬쩍 서류를 훔쳐낼 수 도 있지." "그렇다면 그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서기장인 윌슨인가?" 나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런던에 도착하면 곧 장관을 만나 볼 생각이야. 물론 그 전에 포오부즈 형 사를 만나야겠지만." "난 뭘 하면 좋지?" "자넨 베이커 거리에 가서, 신문에 낸 광고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 "광고라니?"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홈 즈는 빙그레 웃으며. "워킹역에서 런던의 한 석간 신문에 전보를 쳐 두었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첩을 한 장 찢어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상금 10파운드. 5월 23일 밤 10시 15분 전, 차알스 거리 외무성 별관 입구 부근에서 손님을 내린 마차의 번호를 알고 계신 분은 베이커 거리 221번지로 알려 주십시오. "홈즈, 자넨 스파이가 마차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나?" "그날 밤, 별관안에는 어디에도 비에 젖은 발자국이 없었네. 그렇다면 그 사나이, 혹은 여자가 마차로 왔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은가?" "그렇군!" 나는 홈즈의 추리에 새삼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차는 3시20분에 종착역인 워털루 역에 도착했습니다. 9. 초인종이 울린 이유.. "베이커 거리로 가는 것보다 경시청쪽이 더 재미있겠군." 내 말에 홈즈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럼 따라오게." 나와 홈즈는 역전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난뒤, 런던 경시청으로 갔습니 다. 홈즈가 전보를 쳐 두었는지 포오부즈 형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륚 니다. 경시청에는 우리가 잘 아는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 인사건 담당이었으므로 이 사건에는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포오부즈 형사는 펠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는 교활한 눈초리에 키가 작은 사나이였습니다. 우리가 용건을 말하자 그는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당신들에 관한 걸 잘 알고 있소. 당신들은 경찰에 찾아와 모든것을 알아낸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더군요. 따라서 우리 경찰에 대한 평판은 나빠질 따름이죠." "당신은 생각보다는 정직한 사람이군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지 금까지 내가 경시청의 여러분과 힘을 합쳐 해결한 사건이 53건이나 있습니 다. 그 가운데 내 이름이 밝혀진 건 오직 4건뿐이오. 나머지 49건은 모두 경시청 여러분의 공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것이 좋을 거요." 홈즈의 강경한 태도에 포오부즈 형사는 금방 수그러들었습니다. "실은 단서를 못 잡아 몹시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그래서 신경이 날 카롭다 보니 무례한 말을 했습니다. 널리 이해하시고, 도움이 될 만한 일 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윌슨 서기장을 점찍고 있죠?" "예, 그러데 그 사나이에게는 완전한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알리바이?" "예, 그날 밤 그 시간에 윌슨은 장관 사택에 있었다는군요." "뭐라고요?" 홈즈는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장관의 서기관도 증언했지요." "그랬었군요....용건은 말하지 않았겠죠?" "아닙니다. 이야기해 주더군요." "뭐라던가요?"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더군요. 장관과 윌슨은 대단한 장미 애호가랍니다. 그날도 윌슨은 희귀한 종류의 장미 묘목을 갖다 주러 갔다는군요." "아마 그건 프랑스 사람이 좋아할 장미일 겁니다." 홈즈의 엉뚱한 말에 포오부즈 형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예엣?" "그건 그렇고 수위쪽은 어떻소?" "미행을 붙여 두었지만, 아직 의심할 만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웃간의 평판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인 쪽은 여간 아니더군요." "부인에게도 미행을 붙여 두었소?" "여자 경관이 미행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술을 잘 마신답니다. 부인이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졌을때 두 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실마리가 될 만한 말을 없었답니다." "그 집에는 전당포 사람이 드나든다던데요?" "그 빛은 깨끗이 갚았답니다."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 수위가 연금을 탔거든요." 홈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은 초인종 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펠프스와 수위가 수위실에서 들었다는 초인종소리 말이죠? 그건 범인이 서류를 훔쳐 달아날 때, 실수로 초인종 끈을 잡아당겼을 테지요. 범인이 일부러 초인종을 울릴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포오부즈 형사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먼저번 초인종소리는 어때요?" "먼젓번 초인종 소리?" "펠프스씨가 수위를 부를려고 울린 소리 말이오."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 초인종 소리를 듣고 수위대신 부인이 얼굴을 내밀었다고 했죠?" "그랬다더군요." "그런데 부인은 어째서 커피를 가져오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을까요? 당신은 그점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부인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풀리더군 요. 그 점에 대해 부인은, '수위실에 돌아와보니 주인이 기분좋게 잠을 자 고 있더군요. 그걸 보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라 홱 나와 버렸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했습니 다." "그럼 범인이 누군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포오부즈 형사의 눈이 빛났습니다. "좀더 확실해진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포오부즈 형사는 낙심한듯 어깨를 늘어뜨렸습니다. "아뭏든 국가 기밀에 관한 일이니까 경솔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와트슨, 그만 가보세." "어디로?" "장관실이지. 어디겠나?" 그로부터 얼마뒤. 나와 홈즈는 외무성의 장관실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외무 장관 홀더어스트경은 어딘지 모르게 퍼어시 펠프스와 닮았습니다. 그러나 펠프스가 올챙이라면, 그는 왕개구리였습니다. 왕개구리는 아주 정중하게 우리를 난로 옆에 놓인 호화로운 안락의자로 안 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안락 의자보다 더 큰 의자에 깊숙이 앉았습 니다. 머리는 백발이었으며 빛나는 눈초리에는 귀족다운 기품이 엿보였습니 다. "홈즈씨,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퍼어시에게 들어 잘 알고 있소. 와트슨씨와 퍼어시는 같은 학교 출신이라지요?" 하며 장관은 웃음띤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찾아온 것은 바로 그 펠프스씨의 일때문입니다." "퍼어시는 역시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펠프스씨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우리가 이 사건에 관계하게 된것은 절대로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 다. 그 서류가 스파이의 손에 넘어갈 경우를 생각하니, 영국 국민으로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서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오." "그런데 왜 펠프스씨를 그만두게 하셨죠?" "퍼어시는 내 조카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엄격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요." "만일 그 서류를 찾아낸다면, 펠프스씨는 외무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까 ?" "그야 물론이오." "그럼 안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서류를 찾을 가망이 있다는 말이오?" 장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습니다. "예." 홈즈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려야 할 텐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뭐든지 물으시오. 아는 데까지는 대답할 테니." "별관에서 그 서류를 베낀다는 사실을 펠프스씨외에 누구에게 말씀하신 적 이 없습니까?" "없소."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맹세할 수 있소." "펠프스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분 다 말하지 않았다면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어째서 서류가 없어졌을까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곳에 스파이가 숨어 있었던게 틀림없어." "모습 없는 스파이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분의 말 씀을 종합해 보면, 그날 밤의 도둑은 우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뭔가 훔치 기 위해 들어갔는데, 중요하게 보이는 서류가 책상위에 펼쳐져 있었습니 다. 그것을 본 도둑은, 이건 돈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훔쳐간 것입니다. 만 일 스파이였다면 초인종 따위를 울릴 까닭이 없습니다." "초인종?" "펠프스씨가 수위실에 있을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초인종을 울린 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초인종 끈 이라는걸 모르고 잡아당긴 겁니다. 그렇지 않 으면 도둑질하러 들어간 자가 초인종을 울려 사람을 부를 까닭이 없습니 다." 나는 홈즈의 설명이 그럴 듯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우연이라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만일 스파이가 훔쳐 갔다면, 서 류는 벌써 적의 손에 넘어 갔을 것입니다."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로부터 9주일이나 지났으니까요." "서류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적의 외무성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반격을 가해 올 것이오." "그것을 이쪽에서 느낄 수 있나요?"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 "그래서 반격해 왔나요?" "잘 모르겠소." "그 말씀은, 아직 적에게 서류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죠 ?"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장관은 여송연 피우는 것도 잊고, 대화에 열중했습니다. "어쩌다 서류를 훔치기는 했지만, 두둑은 틀림없이 그 처분에 곤란을 느끼 고 있을 것입니다. 불쑥 프랑스 대사관에 서류를 팔러 간다면, 거꾸로 이 중 간첩으로 오해받거나 아니면 미치광이로 취급되어 내쫓길 테니까요." "홈즈씨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소?" 장관은 홈즈를 살피듯 바라보았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서류는 가까운 시일안에 되찾을 수 있겠군." "그렇게 될 겁니다." 장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송연을 고쳐 물었습니다. "장관님께서는 장미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이 방엔 장미꽃이 없군요?" 하며 홈즈는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홈즈씨도 장미를 좋아하오? 장미라면 우리집으로 오시구료. 진기한 것이 많이 있으니까." "꼭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저는 프랑스산 회색 장미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것도 있습니까?" "뭐라고?" 나는 그때 장관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우리는 장관실에서 나왔습니다. 화이트홀 거리로 나서자, 홈즈가 말했습니다. "와트슨, 그것을 보았나?" "그것이라니?" "구두 밑창말이야. 대영 제국의 외무 장관이라는 사람이 밑창을 갈아 댄 구 두를 신고 있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검소한 성격 탓 아닐까?"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는데 자네는 장관이 피우는 여송연의 값을 알고 있 나?" "글쎄...." "그 여송연 한개의 값은 자네의 한달 수입보다 더 액수가 많다네."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비싼가?" "이집트에서 들여온 여송연이야. 그런 여송연을 피우고 있는 사람이 어째서 밑창을 갈아 댄 구두를 신고 있을까? 그건 장관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 니란 증거야. 그리고 장관의 가정 형편을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아마 꽤 궁상한 편일걸." "장관의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나?" "있을 거야. 올바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돈에 곤란을 받아도 범죄를 저지르 지 않지만, 장관은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니까 그럴 가능성이 충 분히 있다고 봐." "그렇다면 그 서류는 벌써 적의 손으로 넘어갔단 말이야?"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장관은 그 서류를 빼내지 못했으 니까." "뭐라고?" 나는 홈즈의 말을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밀 서류는 틀림없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거야." 홈즈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인종 소리로 알지." "초인종 소리?" "만일 장관의 앞잡이가 그것을 훔치러 들어갔다면, 초인종을 울리는 어리석 은 짓을 했을리가 없어. 윌슨 서기장만 해도 그렇지. 그 끈을 잡아당기면 수위실로 통한 초인종이 울린다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 홈즈의 말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보다 광고 쪽이 걱정이군. 나는 지금 곧 사무실로 돌아갈테니 자네는 내 일 아침, 오늘과 똑같은 시간에 워털루 역으로 나와 주게. 그럼 안녕." 하며 홈즈는 다가오는 마차에 뛰어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