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어 통역관 ==== 코난 도일.. 1. 명탐정의 형.. 홈즈와 나는 상당히 오래 된 친구로서 친한사이였지만, 홈즈는 자신의 친척이나 혈육에 대한 이야기를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또한, 젊었을 때의 생활에 관해서 도 거의 말이 없었다. 홈즈가 이러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나는 홈즈 가 머리는 명석하지만 인간미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때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므로 나는 홈즈에게는 가까운 혈육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홈즈가 자기의 형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 해질 무렵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전에 관한것이 화제에 올랐다. 인간의 특수한 재능이 유전에 의한 것인가, 아 니면 젊어서부터의 훈련에 의한 것인가에 대해 서로 토론을 벌였다.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자네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자네의 관찰력이나 추리력은 분명히 자 네 자신의 훈련으로 이루어진 것이 되겠구먼." 홈즈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나의 그런 재능은 주로 혈통에서 온 것으 로 생각하네.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는 베르네 라는 프랑스인 화가의 동생이셨네. 예술가의 혈통은 가끔 색다른 인간을 탄생시 키거든." "그런데 어떻게 자네의 재능이 유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그야, 내 형인 마이크로프트는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니까."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특수한 재능을 가진 남자가 영국에 또 한명이 있다는데, 세상 사람들은 물론 경찰에서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렇ㄱ 물어 보았다. "자네, 겸손을 떠느라고 형이 자네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 홈즈는 내 질문을 일축했다. "천만에! 나는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세. 이론가는 모든 것을 알 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아야 한다네. 자신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은 자 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에서 벗어나는 짓이지. 따라서, 마이크로프트 형이 나보다 뛰어난 관찰력을 갖고 있다고 내가 말했다면, 그건 사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이지?" "주변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걸." "어디 말인가?" "음, 예를 들어 디오게네스 클럽 같은 곳." 그런 클럽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는 시계 를 꺼내 보며 말했다. "디어게네스 클럽은 런던에서도 가장 색다른 클럽인데다가, 마이크로프트 형도 아주 보기 드문 별난 인간이라네. 매일 오후 15분전 5시부터 20분전 8시까지는 반드시 클럽에 있네. 지금 6시니까 오늘처럼 한가한 저녁에 자네가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 기분이 든다면, 보기 드문 클럽과 희귀한 사람 하나를 소개해 줌세." 5분 뒤, 우리는 거리로 나와 리젠트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홈즈가 말했다. "자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째서 마이크로프트가 그의 재능을 탐정일에 쓰지 않느냐는 것이겠지? 하지만 형은 어림도 없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걸." "관찰력이나 추리에 있어서 형이 나보다 한 수 위라는건 틀림없네. 그래서 탐정 이라는 것이 안락 의자에 앉아 생각에만 골몰하는 일이라면 형은 굉장한 명탐정 이 되었을 걸세. 그러나 형에게는 그런 야심도 없고 의욕도 없다네. 자기가 머 리속에서 푼 문제를 실제로 가서 확인해 보려고 생각지도 않거니와, 그런 수고 를 해서 자기의 추리가 정확하다는것을 증명한 일이라면 틀린것으로 알게 내버 려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성질이거든. 나는 여러번 문제를 들고 가서 해결 방법을 듣곤 했는데, 그것이 정확했다는 것 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하지만 사건을 재판관이나 배심원에게 넘기기전에 실 제적인 증거를 모아들여야 하는데, 그런 수고를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우리 형이라네." "그럼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군?" "물론이지. 내게 있어 이것은 생활의 수단이지만, 형에게는 재미에 지나지 않네. 형은 숫자에 대한 비범한 재능이 있어서, 정부의 어느 분야에서 회계부의 감사 를 맡고 있네. 팰 멜 가에 살고 있는데, 매일 아침 길모퉁이를 돌아 화이트 홀 (런던의 관청들이 많이 있는 지역) 까지 갔다가 저녁이 되면 그 길모퉁이를 돌 아온다네. 일년 내내 이외의 운동은 하지 않으며, 사람이 모이는 곳에 얼굴을 내미는 일도 없지. 단, 디오게네스 클럽만은 예외인데. 이 클럽은 형의 집 맞은 편에 있다네. 회원이 된 사람은 다른 회원에 대하여 눈꼼만큼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네. 손 님을 위한 면회실 이외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화가 금지되며, 3회 위반하고 그것이 위원회에 알려지면 제명 처분당하네. 형은 창립회원인데 내가 드나들어 본 느낌으로는 상당히 마음이 가라앉는 장소라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우리는 팰 멜 거리로 나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을 바 라보고 걸었다. 홈즈는 칼턴 클럽(영국 보수당 본부)못 미쳐 어느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춰 나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주의하고 나서, 앞장서서 현관 안으로 들 어갔다. 유리문을 통해 넓고 훌륭한 홀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 의 작은 칸막이 안에 들어앉아 신문따위를 읽고 있었다. 홈즈는 팰 맬거리 쪽으 로 난 작은 방으로 나를 안내하고는 곧 밖으로 나가 한눈에 형제라고 알아볼 만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셜록보다 뼈가 굵고 약각 뚱뚱했다. 얼굴 역시 큰 편이었으 나, 어딘지 모르게 표정에 날카로운 것이 번득였다. 그리고, 그의 잿빛 눈은 생 각에 잠겨 있는 듯했는데, 그것은 셜록 홈즈가 열심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보이는 눈매를 그대로 닮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물개의 지느러미 같은 평평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당신이 기록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셜록의 주가가 많이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셜록, 지난 주에는 마이너 하우스 사건으로 내게 상의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다. 너에게는 약간 무리일 것 같던데." 홈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잘 해결했습니다." "범인은 역시 애덤스였지?" "예, 애덤스였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처음부터.." 형제는 활 모양으로 튀어나온 창문턱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말 했다. "인간을 연구하려는 사람에게는 이곳은 둘도 없는 좋은 장소이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지나가거든. 예를 들어, 이쪽으로 오고 있는 저 두사람을 잘 보라고." "당구장의 점수 계산원과 그의 친구인 모양인데요." "맞아. 그런데, 그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나?" 두 사람은 바로 창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본 바로는, 한쪽 사나이의 조끼 주머니 위에 묻어 있는 초크자국이 당구장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표시였다.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작고 피부가 검은 남자로 모자를 뒤로 넘겨 쓰고 작은 보 퉁이를 몇개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셜록이 말했다. "군인이었던 모양이군요." 마이크로프트가 받았다. "아주 최근에 제대했군." "인도에서 근무했군요." "하사관급인데." "병과는 포병" "홀아비가 틀림없고." "하지만, 아이가 하나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가 아냐." "그거야 어쨌든, 저 태도며 내민 턱, 햇볕에 탄 얼굴...군인이기는 하나, 그렇다 고 졸병은 아니고, 인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마이크로프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근에 제대했다는 것은 군대에서 지급한 군화를 그대로 신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지." "다리를 벌리고 걷는 기병대의 걸음걸이는 아니고, 저 체격으로는 보병이나 공병 은 무리니 포병대가 알맞겠어요." "그리고, 검은 리본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사람 누군가가 최근에 죽은 모양이야. 그것이 아내라는 것은 직접 장을 봐 오는 보퉁이로 짐작이 가지. 딸 랑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아이는 갓난아이 같다. 아내는 산후가 좋지 않아 죽은 것이 틀림없고, 그림책을 산 것으로 보아 좀 큰 아이도 있겠는걸." 형이 자기보다 예리한 눈을 갖고 있다는 홈즈의 말에 그제야 그럴 만하다는 수긍 이 갔다. 홈즈가 흘끗 나를 쳐다보며, '어떠냐?'는 투로 싱긋 웃었다. 마이크로프트는 거북등껍질로 만든 담배 상자를 꺼내 담배 한 대를 물고는 홈즈 를 향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셜록. 네가 덥석 덤벼들 만한 사건이 있단다. 아주 묘한 사건인 데 내게 해결해 달라고 찾아왔더구나. 이야기를 들어 보겠니?" "들어보고 말고요. 형님." 마이크로프트는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뜯어내더니 뭐라고 적어, 벨을 눌러 급사 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밀러스라는 사람을 부르러 보냈다. 그 사람은 내 아파트의 한층 윗층에 살고 있 는데, 평상시의 안면이 있어 자기가 겪은 걱정스러운 일을 상의하러 왔지 뭐냐. 그리스인으로 알고 있는데 어학에 능한 사람이야. 법정에서 통역을 하고, 틈틈 히 노섬벌랜드 가의 일급 호텔에 묵는 동양인 부자들의 안내를 맡아 생활하지. 그가 체험한 이상한 이야기를 본인에게서 직접 들어 보자고." 2. 통역관의 모험.. 잠시 뒤, 작은 키에 뚱뚱한 사나이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올리브 색의 얼 굴과 까만 머리칼을 보고 남쪽나라 태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말씨는 교 양있는 영국인과 다를 바 없었다. 힘주어 홈즈와 악수를 나누고, 이 유명한 탐 정이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자, 그의 까만 눈에는 기쁨의 빛 이 감돌았다. 밀러스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은 내 이야기를 믿어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있을 법한 일이 아니 니까요. 하지만 얼굴에 온통 반창고를 바른 그 불쌍한 사람이 어찌되었는지 그 걸 알기전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겁니다." 홈즈가 말했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이야기해 주시지요." 밀러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이 수요일이지요? 그러니까 월요일 밤, 즉 엊그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이크로프트 씨에게서 들으셨겠지만, 나는 통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나라 말 을 통역합니다만, 태생이 그리스라서 주로 그리스말 관계의 통역을 합니다. 그리 하여 런던에서는 손꼽히는 그리스어 통역관으로, 호텔 계통에서 특히 알아주지 요.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늦게 도착해서 통역을 구하는 여행자의 부탁으로 해서 늦은 시간에 호출되곤 하지요. 그러므로 월요일 밤, 래티머 씨라는 잘 차려입은 젊은 신사가 내 아파트로 찾아와서, 마차를 밖에 세워 두었으니 함께 가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 친구가 장사일로 찾아왔는데 그 사람은 자기나라 말밖에 몰라서 아무래 도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은 켄싱턴으로 상당히 먼 곳었는데, 거리 로 나오자마자 나를 영업용 마차 안으로 밀어넣다시피 하는 것이 몹시 서두르는 것 같았습니다. 방금 영업용이라고 했는데, 나는 곧 내가 탄것이 개인 소유의 마차가 아닌가 하 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업용보다는 안락하고, 내부 역시 낡기는 했지만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래티머씨는 나와 마주앉았고, 마차는 체링 크로스 광장을 가로질러, 사프트스버 리 가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옥스퍼드가에 이르렀는데 그때 내가 이건 켄싱턴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상대방이 이상한 행동을 하 기에 나는 덜컥 겁을 먹고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납으로 만든 짧은 곤봉을 꺼내더니, 무게라도 재듯이 앞뒤로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말 없이 그 무서운 흉기를 옆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양쪽의 창문을 들어올렸는데, 거기에는 종이가 발라져 있었어요. 그 사 람은 천천히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에 커튼을 드리우면서 말했습니다.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해서 미안합니다. 밀러스씨, 실은 행선지를 당신에게 알리 고 싶지가 않아서요. 당신이 길을 알아 두고 또 찾아오게 된다면 성가시거든요.' 상대방의 말에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습니다. 그는 힘깨나 쓸 듯 어깨가 딱 벌 어진 청년이어서, 그에게 무기가 없다고 해도 내가 그와 격투를 벌여 이길 승산 은 하나도 바랄 수 없었으니까요. 나는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십니다. 래티머 씨.. 이것이 분명한 불법 행위라는 것쯤은 아실텐데요....' '좀 무례한 짓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 보상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른다든지 엉뚱한 생각을 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누구와 어디 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뿐만이 아니라, 나는 이 마차 속에서든 목적지에 가서든 당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말씨는 점잖았지만 겁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보잘것없는 나를 유괴해 가는 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입을 다물고 앉아 있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지요.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은 확실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다려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면 서 2시간 가까이나 마차속에서 흔들거렸습니다. 바퀴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로 돌길을 지난다는 것을 알았고, 소리 없이 바퀴가 굴 러가는 것으로 보아 아스팔트 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뿐,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지요. 팰 멜 가를 떠난 것이 7시 15분 조금 지나서였는데,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을 때 내 시계는 10분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래키머가 커튼을 젖혔을 때, 램프가 켜진 아치형의 문이 얼핏 보였습니다. 등을 떠밀려 마차에서 내리자, 문이 스르르 열리고 양쪽에 잔디밭과 정원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지요. 그러나 손목을 붙잡힌 채 급히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바람에 그곳이 주택지인지 교외의 한적한 곳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어요. 집안에는 가스등이 켜져 있기는 했으나 희미해서, 현관이 상당히 넓고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희미한 불빛속에서 문을 연 것은, 허리가 구부정하고 품위가 없는 중년의 남 자였습니다. 나를 흘끗 쳐다보았을때, 번쩍하고 빛이 반사한 것은 그가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안경 쓴 남자가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더군 요. '이 사람이 밀러스 씨인가, 해럴드?' '그렇습니다.' '잘 해냈네! 밀러스씨, 너무 언짢게 생각 마십시오. 당신같은 분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서요. 협조만 해주시면 섭섭하게 대접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후회하게 될겁니다.' 빠르고도 신경질적인 말투였는데, 이야기하며 입가에 웃음을 띠는 것이 아까보다 더 두려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리스의 신사가 와 계시는데, 몇 가지 질문을 할테니 통역을 해주면 됩니다. 단, 시키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다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잘 꾸며진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거기도 심지를 가늘게 한 램프 하나가 켜져 있을 뿐이더군요. 그러나 상당히 넓은 방으 로 융단에 발꿈치가 파묻히는 것으로 보아 꽤 훌륭한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습니다. 빌로드를 댄 의자, 흰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 한구석에는 일본의 옛 무사가 입었던 갑옷이 장식되어 있더군요. 램프 바로 밑에 의자가 있었는데, 중 년 남자는 거기에 앉으라고 나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조금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던 젊은이가 갑자기 다른 문으로 헐렁한 가운 같은 것을 입은 남자를 앞세우고 들어왔습니다. 나는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 남 자의 모습을 보고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얼굴빛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형편없이 마른 얼굴에서는 눈만이 튀어나올 듯 번쩍 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으스스했던 것은, 이미 위에 커다 란 반창고가 십자 모양으로 붙어 있고 입에도 한 장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습니 다. 이 이상한 신사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자, 중년남자가 말하더군요. '헤럴드, 석판을 갖고 왔나? 그럼, 손을 풀어 주고 석필을 들려줘라. 밀러스 씨. 당신이 질문을 하면 이 신사가 대답을 쓰게 됩니다. 우선 서류에 서명을 할 생 각이 들었느냐고 물어봐 주시오.' 내가 그렇게 그리스어로 물으니, 그의 눈이 이글거리며 불이 튀는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대답을 쓰더군요. '싫다!' 나는 중년의 남자가 시키는 대로 다시 질문을 했지요. '어떤 조건으로도 싫은가?' '내 눈앞에서 소피가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인 신부앞에서 결혼하는 것을 보지 않는 한 싫다.' 중년 남자는 그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띠며 다시 묻더군요. '그렇다면 네 목숨이 어떻게 된다는 걸 알 텐데.' '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이런 문답을 하고 있는 동안,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질문을 할 때마다 다른 질문을 짧게 덧붙인 것이지요,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내용을 추가해서 두 악당의 기색을 살펴보았으나, 그들은 그리스어를 전혀 모르는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좀더 구체적이고 위험한 질문들을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을 세우면 이로울게 없을텐데. (당신은 누구시죠?)' '마음대로 해라. (런던에는 처음 왔습니다.)'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를 파겠다는 건가? (갇힌지 얼마나 됩니까?)' '상관없다. (3주)' '재산보다 목숨이 중하지 않은가? (무슨 짓을 하던가요?)' '죽어도 너희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먹을 것을 안 줍니다.)' '서명만 하면 살려준다. (이 집의 위치는?)' '결코 서명할 수 없다. (모릅니다.)' '소피를 위해서도 해로울 텐데? (당신 이름은?)' '소피를 만나게 해달라. (크리티데스 입니다.)' '서명만 하면 만나게 해준다. (어디에서 왔지요?)' '안 만나면 그만이다. (아테네에서. )' 5분만 더 끌었어도 그들의 코앞에서 알고 싶은 것을 모조리 알아냈을 겁니다. 아 니, 한 가지만 더 물어봤어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똑똑히 볼 수는 없었지만 검은 머리 에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서툰 영어로 말하더군요. '헬럴드, 혼자서는 더 이상 이층에 못 있겠어요. 적적해서 견딜수가... 아니. 폴.. 폴 아니세요!' 끝의 말은 그리스어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인 신사는 필사적으로 입에서 반창고를 떼어내고는 '소피, 소피!'하고 외치며, 여자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은 것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젊은이가 여자의 손목 을 잡고는 밖으로 나가며, 중년 남자는 그리스 신사를 또 다른 문으로 무자비하 게 끌어냈습니다. 잠시 동안이나마 나는 혼자가 되었기에, 지금 있는 곳이 어떤 집인지 단서라도 잡으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서툰 짓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중년 남자가 열린 문 저쪽의 어둠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 던 것입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방안에 들어서며 말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밀러스 씨. 보시다시피 이 일은 예삿일이 아니오.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어를 아는 우리 친구가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갈 일이 생겨서, 그 대신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오. 자, 수고비요.' 그는 내 손에 5파운드짜리 지폐를 쥐어 주며, 다시 으스스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말하더군요. '이만하면 수고비로는 부족하지 않을 거요. 단, 다시 말해두지만 여기에서 생긴 일을 입밖에 내는 날에는 어떤 보복을 받아도 원망하지 마시오.'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으스스한 느낌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때 그가 램프 가까이 섰기에 얼굴을 좀더 확실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관이 빠르고 혈색 이 나쁘며 뾰족한 턱수염이 실처럼 가늘게 헝클어져 있더군요. 말을 할때는 턱을 쑥 내밀고, 입술과 눈썹을 쉴새없이 실룩거렸습니다. 그 묘한 웃음이나 실룩거리는 모양이 무슨 신경계통에 오는 병의 증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여간, 그를 감싸고 있는 위험스러움은 그의 눈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강철과도 같은 차가운 눈에 용서를 모르는 잔이성이 흐르고 있는 겁 니다. 그는 다시 강조했습니다. '당신이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우리는 그 즉시 그 사실을 알 수 있소. 당신 주 위는 늘 감시될 테니까. 자, 마차가 밖에서 기다리니 어서 타고 가시오.' 나는 다시 떠밀리다시피 홀을 나와 마차에 탔습니다. 그랬더니, 곧 래티머가 올 때처럼 내 앞에 앉더군요. 우리는 말없이 창을 닫은 채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는데, 밤 12시가 넘어서야 마차가 멎더군요. 래티머가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내려 주시오. 집에서 먼 데라 안됐지만, 어쩔 수 없소이다. 행여나 마 차를 뒤쫓아 보겠다는 생각은 안하는 게 좋을 겁니다.' 라고 하면서, 마차 문을 열어 나를 내리게 합디다. 그리고 마부에게 명령을 내리 자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마차는 멀어져 갔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전혀 낯선 곳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밀밭이 이어 진 벌판의 시골길이었습니다. 멀리 불이 켜진 집들이 보였고, 반대쪽으로는 철도 의 붉은 신호등이 보이더군요. 내가 막 불빛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군요. 가 까이 온 사람은 철도역의 화물 운반원이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요?' 내 물음에 철도 운반원은 내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했습니다. '원스워스입니다.' '런던으로 가는 차를 탈 수 있겠습니까?' '이 길을 따라 1마일 정도 걸어가면 역이 보일 게요. 한 30분뒤에 막차가 올 겁 니다.' 그래서 나는 무사히 런던으로 돌아왔고, 내 모험은 끝났습니다. 홈즈 씨, 갔던 장소도 이야기를 나눈 상대도 모르며 지금 이야기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흉악한 범죄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그 불행한 그리스인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마이크로프트 씨에게 이야기를 한 다음, 경 찰에도 신고를 해두었습니다." 밀러스의 기묘한 이야기가 끝났으나 잠시 동안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홈즈가 형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래, 무슨 손을 쓰셨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탁자위에 있던 '데일리뉴스' 신문을 집어들었다. "아테네에서 온 그리스인 신사 폴 크리티데스 씨의 행방을 알려 주시는 분에게 사례하겠음. 소피라는 그리스 여인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면 마찬가지로 사례하겠 음.'이라는 광고를 신문마다 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 "그리스 대사관은요?" "조회해 봤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야." "그럼, 아테네의 경시총감에게도 알리셨습니까?" 내 말에 마이크로프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홈즈 가문의 활동력은 셜록 홈즈가 타고났답니다. 자, 셜록. 한번 활동을 시작 해 봐. 그리고 그 결과나 내게 알려주고." 홈즈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알려 드리고말고요. 밀러스 씨에게도요. 그런데 밀러스씨, 내가 당신이라면 정 신을 바짝 차릴 겁니다. 이 광고는 붙잡혀 있는 그리스인의 가족이 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들은 당신이 배반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요." 3. 재산을 노리다.. 함께 돌아오는 길에 홈즈는 우체국에 들러 몇 통인가 전보를 쳤다. "여보게, 와트슨. 오늘 저녁의 산책은 결코 헛되지 않았지? 내가 손을 댄 기괴한 사건 중에는 이렇게 마이크로프트 형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 적지 않다네. 지금 들고 온 문제도 한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나?" "해결의 실마리라도 잡았나?" "글쎄,... 그 정도로 사실을 알았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풀리게 마련이 아닐까? 자네도 조금 전에 들은 여러 가지 사실에서 무엇인가 논리적인 추리를 해낼 수 있을 텐데." "음, 막연하긴 하지만." "그래, 어떤 생각인가?" "내 생각에 그 소피라는 아가씨는 헤럴드 래티머라는 젊은 영국인에게 납치된 것 같네." "어디에서 납치되어 왔을까?" "아마도 아테네겠지." 홈즈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젊은이는 그리스어를 한마디도 모르네. 반면에 그리스 아가씨는 영어를 좀 할 줄 알거든. 따라서, 아가씨는 영국에 온지 얼마쯤 되지만, 젊은이는 그리스 에 간 적이 없다는 얘기가 되네." "그렇겠군. 그럼, 그 아가씨는 영국에 관광하러 왔던 것으로 하세. 그것을 헤럴 드가 접근, 납치한 걸세." "그쪽이 사실에 가까운것 같아." "그리고 붙잡혀 있는 그리스인 남자는 아가씨의 오빠가 틀림없는데, 그는 누이동 생을 데려가기 위해서 왔을 것 같네. 그런데 오히려 악당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된거지. 오빠는 동생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데, 두 악당은 헤럴드와의 결혼은 빙자해서 그 재산을 가로채려는 것 같아. 그래서 서류에 강제로 서명시 킬 생각인 것 같네. 하지만 오빠는 그것을 거절했어. 결판을 내기 위해 그리스 어를 아는 밀러스 씨를 데려갔는데, 일당중에도 그리스인이 하나 있는 모양이더 군. 한편, 동생은 오빠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우연히 아래층에 내 려왔다가 오빠를 보게 된것일세." "훌륭해, 와트슨. 진상은 틀림없이 그렇네. 사건의 내용은 파악되었지만, 나머지 문제는 놈들이 그 남매를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일세. 저쪽에서 시간만 끌어 주면 좋겠는데." "하지만 놈들의 은신처를 어떻게 찾아낸다?" "음... 우리의 추리가 정확하다면, 그리고 그 아가씨의 이름이 소피 크리티데스 라면, 그 행적을 추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오빠는 막 런던에 도착했 으니까, 그보다는 동생 쪽의 행적을 찾는 것이 수월할 거야. 그 헤럴드라는 청년이 그리스 아가씨와 알게 된지는 상당히 오래 된 것 같네. 오빠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올때까지는 시일이 걸렸을 테니까. 따라서, 아가씨 에 대해서는 마이크로프트 형이 낸 광고에 반드시 반응이 있을걸세."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베이커 가의 하숙집 앞이었다. 앞장서 계단을 올 라간 홈즈가 방문을 열어 보고는 멈칫했다. 나 역시 홈즈의 어깨너머 방안을 들 여다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트는 멍해 있는 우리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들 들어오지 않고...내가 이렇게 활동력을 보이다니 뜻밖이라는 얼굴이로 군. 셜록. 하지만 묘하게도 이 사건에는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죠?" "마차로 왔으니, 걸어오는 자네들보다 빨라겠지." "무슨 새로운 일이라도 생겼나요?" "광고에 대한 응답이 한건 들어왔어." "그래요?" "자네들이 돌아가고 금방이었지." "어떤 내용입니까?" 마이크로프트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마도 몸이 허약한 중년 남자가 쓴 것 같아. 내용은 이렇네. 오늘 날짜의 신문 광고를 보고 알려 드립니다. 본인은 찾고 계시는 젊은 여자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본인을 찾아오시면, 그 여인의 가엾은 신상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인은 현재, 베케넘 구 마이어틀스 저택에 있습니 다. J. 대븐포트. 편지를 낸 곳은 브릭스턴이다. 셜록. 어서 그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지만 형님. 지금은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것보다 오빠의 목숨이 더 급합 니다. 경시청에 들러 그레그슨 경감을 데리고 곧장 베케넘으로 달려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요. 한시가 급합니다." 내가 끼어들었다. "가는 길에 밀러스씨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통역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까." 홈즈가 말했다. "맞아.마차를 불러오게 해서 어서 떠납시다." 그렇게 말하며 홈즈는 서랍을 열어 권총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흘끗 나를 보며 말했다. "이야기 듣기에, 상대방은 상당히 거친 인물들 같네." 팰 멜 가에 있는 밀러스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의 장막이 내리고 있었 다. 놀라은 사실은 조금 전에 어떤 신사가 찾아와 밀러스와 함께 나갔다는 것이 다. 마이크로프트가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요?" 문을 열어 준 여자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 신사와 함께 마차를 타는 것을 창너머로 보았을 뿐이에요." "그 신사의 명함이라도?" "없어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은 잘생긴 젊은이가 아니던가요?" "아뇨, 달라요. 키가 작고 안경을 쓰고 얼굴은 깡말랐는데, 시종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습니다." 홈즈가 다급하게 외쳤다. "서둘러야 해요. 일이 크게 벌어지겠는걸. 놈들은 밀러스를 납치했어요. 밀러스 는 소심한 사람이고, 놈들은 일전에 겪어 봐서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 악당이 눈앞에 나타나자 밀러스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하고 끌려간 거예요. 또 통역할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살려 보내지 않 을 겁니다." 우리는 기차로 가면 마차보다도 먼저 베케넘에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시청에 들러 그레그슨 경감을 만나고 놈들의 은신처를 수색하기 위한 법률상의 소속을 밟는 데 한 시간이나 끌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 일행이 런던 브 리지 역에 도착한 것은 15분 전 10시였고, 베케넘역의 플랫폼에 내렸을 때는 이 미 10시 30분이 넘었다. 마차로 한 시간 가량 달려 마이어틀스 저택에 닿았다. 크고 어두운 집이, 도로에 서 상당히 들어가 정원수에 파묻히다시피 웅크리고 서 있었다. 마차를 돌려보내 고 우리는 걸어서 집 가까이 다가갔다. 경감이 속삭였다. "창이 모두 캄캄해요.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요?" 홈즈가 중얼거렸다. "새는 날아가고 둥지는 텅 비어 버렸어."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가 이 길을 달려나갔소." 경감이 웃었다. "나 역시 마차 바퀴가 나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습니다만, 짐을 실었다는 걸 어 떻게 아시죠?" "보다시피 마차가 건물 쪽으로 갔다가 되돌아나오고 있잖소. 그런데 길쪽으로 향 한 마차 바퀴가 더 패인 것으로 보아, 나간 마차에는 여러 사람이 탔거나 짐을 가득 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경감이 어깨를 으쓱하며 싱겁게 웃었다. "홈즈 씨에겐 당할 수가 없군요.... 문이 잠겼군요. 그렇지만 누가 있을지도 모 르니, 사람을 불러 보기로 합시다." 그래서 초인종을 누르고 고함을 쳐 보았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추었던 홈즈가 돌아와 말했다. "창이 하나 열려 있소." 홈즈가 솜씨를 발휘하여 안으로 걸린 빗장을 딴것을 눈치챈 경감이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허가는 없지만 창을 넘어 들어가기로 합시다." 우리는 차례로 창을 넘었다. 더듬더듬 넓은 방을 찾아 들어가자, 경감이 불을 켰 다. 그곳은 밀러스의 말대로 두개의 문이 반대 방향으로 나 있었고, 일본 무사의 갑옷도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잔이 둘, 브랜디 병과 먹다 남은 음식 부 스러기가 있었다. 홈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리지?"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신음하는 듯한 낮은 소리가 천 정 위쪽에서 간간이 들려 왔다. 홈즈는 이미 문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 일제히 홀로 달려갔다. 신음 소리는 2층에서 들리는 것이었 다. 우리 모두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뚱뚱한 편인 마이크로프트는 숨을 헐떡 이며 뒤를 따랐다. 2층에는 3개의 문이 나란히 있었는데, 낮은 신음소리는 가운데 문에서 새어나오 고 있었다. 홈즈는 문을 열어젖히고 캄캄한 방안으로 뛰어들었으나, 곧 목을 감 싸쥐고 달려나왔다. "숯불이다!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야해." 안을 들여다보니, 방 한가운데 놓인 놋화로에서 파란 불꽃이 춤을 추듯 피어 오 르고 있었다. 그 불꽃은 마치 도깨기불처럼 사방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그 빛으로 벽을 등지고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방안에서는 독한 가스가 흘러나와 숨이 막히고 기침이 나왔다. 홈즈는 복도 끝의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방안으로 달려들어가 창문을 부수고 화 로를 아래로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복도로 달려나오더니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어. 초가 없을까? 하지만 저 방안에는 산소가 없으니 소 용없겠군. 형님, 입구 쪽에서 계속 성냥불을 켜 주세요. 우리가 저 사람들을 끌 어낼 테니까요, 자!" 우리는 탄산 가스에 중독된 두 사람을 서둘러 밖으로 끌어냈다. 두 사람 모두 입 술이 새파랗게 질려 의식을 잃고 있었으며, 얼굴은 부어 올라 붉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의 하나가 2~3시간 전에 디오게네스 클럽에서 헤어진 그리스어 통 역관이라는 것은 검은 턱수염과 뚱뚱한 체격으로 알 수 있었다. 손발은 단단히 묶여 있고 왼쪽 눈위에 상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손발을 묶인 다른 한 사람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키가 큰 사나이로 얼굴에는 여러개의 반창 고가 붙여져 있었다. 이 사람은 신음소리도 없이 축 늘어져 있어서 애석하게도 이미 때가 늦은것 같았다. 다행히 밀러스는 숨을 쉬고 있었고, 신선한 공기와 브랜디 덕분으로 의식을 회복 했다. 밀러스의 이야기로 우리들의 추리가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년의 악당은 밀러스의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흉기를 들이대고 간단히 밀러 스를 끌어냈던 것이다. 그 악당은 마음 약한 밀러스에게 어지간히 겁을 준 모양이었다. 밀러스는 그 남 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손을 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밀러스는 그 길로 이곳에 끌려와 두 번째 단판의 통역을 맡았던 것이다. 이번 담판은 전의 그것보다도 험악했다. 두 명의 영국인은 그리스인에게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곧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이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그들은 그 를 감금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밀러스에게 일격을 가하여 기절시켰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어 통역관이 관련된 사건인데 아직 설명이 부족한 점이 몇 가지 있 다. 광고에 회답을 보내온 사람을 만나 알아본 결과. 그 불쌍한 아가씨는 유복한 가문의 상속녀로 영국의 친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런던에 있는 동안 헤럴드 레티머라는 젊은이와 친해져서 그에게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 서 이 일에 당황한 친구가 아테네의 오빠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오빠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레티머와 그의 패거리인 중년남자, 윌슨 켐 프라는 악당의 포로가 되었다. 두 악당은 아가씨의 오빠를 감금해 놓고, 먹을것 도 주지 않았으며, 어떻게든 동생의 재산 관리권을 래티머에게 양도하는 서류에 서명시키려고 했다. 그런 설득을 하는 동안 아가씨에게는 이 일을 비밀에 붙였 다. 그리고 소리르 지르지 못하도록 반창고를 붙여 입을 봉했고, 혹시 동생이 먼 발치에서 보더라도 모르게끔 이마와 콧잔등에 십자 모양으로 반창고를 붙여 놓았 던 것이다. 그러나 밀러스가 처음 통역을 하러 끌려갔을 때, 뜻밖에 방안에 들 어온 그리스 아가씨는 그것이 오빠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아기씨 역시 포로의 몸이었다. 집에는 마부 역할을 한 남자와 그의 아내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들 역시 한패였으므로 아가씨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악당들은 아가씨에게까지 비밀이 탄로난데다가 그리스인에게서 서명을 받아내기 란 틀린것으로 알고 아가씨를 데리고 이 집에서--그건 세낸 집이었다.---불과 두 어시간 전에 달아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두 남자는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한달이 지났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생각지도 않은 신문기사의 스크랩 이 배달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여자 한 사람과 동행하여 여행하던 영국인 두 사 람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둘다 여러군데 칼에 찔려 죽었는데, 헝 가리 경찰에서는 여자때문에 두 남자가 다투다가 서로 찔렀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홈즈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 그리스 아가씨를 찾 아내기만 한다면, 그녀가 자기를 기만하고 오빠를 죽인 악당들에게 어떻게 복수 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