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룩 무늬의 끈 ====== 저 자 :코난 도일 타이핑 :김 수 환 1. 새벽의 방문객. 4월초의 어느 앙침이었습니다. 나는 홈즈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 습니다. 늦잠꾸러기인 홈즈가 오늘 아침에는 왠일인지 양복을 갖추어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습니다. 난로 위의 시계는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어습니 다. "홈즈가 오늘 아침에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을까? 무슨 큰 사건이라도 있었난 걸까?" 내 마음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홈즈가 말했습니다. "젊은 여자 손님이 찾아왔네. 좀더 자고 싶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는데 그럴수가 있어야지. 무슨 큰 사건을 의뢰하러 온 모양이야." "뭐, 큰 사건이라구?" 나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건이라는 소리에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잠시 후, 홈즈와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운지,그녀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습니 다. 홈즈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셔얼록 홈즈 입니다. 그 리고,이분은 제 친구인 와트슨 선생입니다. 뭐든지 서슴치 마시고 말씀하 십시오. 떨고 있는 걸 보니 추우신 모양이군요. 자, 좀더 난로 가까이로 오십시오. 뜨거운 코오피라도 한 잔 갖다 드릴까요?"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추워서 떠는 게 아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럼 어째서?"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엔 시시 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고 있 어요." 사자에게 물린 사슴처럼 그녀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홈즈는 그녀의 모습을 재빨리 관찰하면서, "걱정마십시오. 제가 곧 그 일을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그런데 아가씨는 오늘 새벽 일찍 기차로 오셨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나, 그걸 어떻게 아시죠?" "아가씨의 장갑 속에 왕복 차표가 들어 있군요. 아가씨는 집을 나와 이륜 마차를 타고 오랫 동안 진창길을 달려 역에 도착했지요?" 여자는 놀랍다는 듯 몸을 흠칫하며 홈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놀라실 건 없습니다. 아가씨의 왼쪽 소매에 흙이 튄 곳이 일곱 군 데나 있군요. 그런 식으로 흙이 튀는 것은 이륜 마차 밖에 없지요. 물론 아가씨는 마부 왼쪽 자리에 앉아 있었을 테고..." 홈즈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홈즈씨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저는 6시 전에 집을 나와 30분쯤 이륜 마 차로 달려 레저헤드역에 도착했죠. 그리고는 첫차로 워털루역에 내렸습니 다." 그녀는 이미 홈즈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홈즈씨, 저에게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 주십시 오.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지금 당장 사례금을 치를 수는 없지만, 결혼하면 재산을 물려 받을 수 있으니까 그때 꼭 지불하겠 습니다." "돈 같은 건 아무 때 주셔도 좋습니다. 저로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무 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니까요. 그럼 어떤 일이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며 홈즈는 책상 서랍을 열고 필기 도구를 꺼냈습니다. "아, 여기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녀는 기쁜 듯이 이렇게 말한 다음, 곧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 다. 2. 무서운 아버지 "제 이름은 헬렌, 아버지와 둘이 스토우크모란 마을의 낡은 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안 계십니까?" 홈즈가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정말 인자한 분이셨는데..." 헬렌의 얼굴에 슬픈 그림자가 스쳐 갔습니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말을 이 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아버지는 제 친아버지가 아닙니다. 우선 아버지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홈즈는 '어서 하시죠.'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붓아버지는 한때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지주였던 로일롯 집안의 후손 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감에 따라 집안이 몰락하자, 아버지는 어떻게 해 서든지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 박 사가 되자, 아버지는 인도의 캘커타로 돈을 벌로 갔습니다. 인도에는 의 사가 별로 없었으므로 아버지의 병원에는 항상 환자들이 들끓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들도 인도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들이라면 누구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니와 저,그러고 언니 줄리아입니다. 저와 언니는 쌍동이로,그때 겨우 2살이었습니다. 친아버지는 인도에 주둔하는 영국군 소장이었는데, 우리 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외로왔던지 지금의 아버지인 로일롯 박사와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언니인 줄리아는 지금 어디서 살지요?" 홈즈가 물었습니다. "아, 언니는 2년전에 죽었어요. 마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당했죠. 그 이 야기를 하기 전에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군요." 헬렌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습니다. 아무래도 이 번 사건에는 여러 가지 일이 복잡하게 얽힌 것 같았습니다. "로일롯 박사는 우리 어머니와 결혼한 뒤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 데, 어느날 도둑질을 한 인도인 하인을 몹시 때려 죽게 하였습니다. 다행 히 사형은 면했지만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행야 했습니다. 이로써 아버지 의 운명은 빗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는 어머니 와 우리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군요?" "예, 여러 가지 걱정과 마음의 고통이 겹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언니는 의붓아버지인 로일롯 박사와 함께 스토우쿠모란 마을의 낡은 저택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많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셔서 생활에 곤란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게 뻍지요? 이야기를 계속 하십시오." "하루하루의 생활은 울고 싶을 만큼 괴롭고 지루했습니다." "로일롯 박사가 학대를 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무서운 사람으로 변해 간 것입니다. 스토우크모란 마을에는 모두 명랑하고 인정많은 사람들뿐인데, 아버지는 그들과 교제하 기를 싫어하여 늘 찡그린 얼굴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외출이라도 했다 하면.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대판 싸움을 하곤 했죠. 로일롯 집안의 남자들은 원래 성격이 몹시 거칠었다는데, 우리 아 버지의 경우는 열대 지방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더 심한 것 같아요. 부끄 러운 일이지만 두 번이나 경찰에 잡혀 가기도 했습니다." "그쯤 되면, 아가씨들도 기를 펴지 못했겠군요." "아버지는 이젠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만 보면 슬슬 피해 달아나는 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아버지는 무서운만큼 힘이 센데다가 일단 화를 내면 참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대장장 이를 다리위에서 강물로 던져 버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있을리 없죠. 아버지의 친구라고는 떠돌아 다니는 집시들뿐입니다. 아버지는 집시들이 야영하고 있는 곳에 가서 함 께 식사도 하고 잠도 잔답니다. 집안으로 불러들여 정원의 숲속에 천막을 치게 하는 때도 있답니다. 아버지는 또 인도의 동물을 대단히 좋아해서, 인도 사람들은 통해 사들이고 있어요. 지금 있는 것은 표범과 비비인데, 그 맹수들을 뜰에 놓아 기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언젠가 틀림없이 사람 을 물어 죽일 거여요. 아, 홈즈씨!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헬렌은 몹시 여위고 겉늙어 보였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아버지 때문에 고민 을 해 왔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헬렌 양, 설마 언니가 인도의 야수에게 물려 죽은건 아니겠지요?" 홈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더욱 기묘하고 등골이 오싹한 죽음을 당 했지요. 언니가 죽은 날 밤의 일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생각 만 해도 소름이 끼쳐, 몸이 떨릴 지경입니다." 하며 헬렌은 몸을 움츠렸습니다. "언니가 죽은 것은 2년 전이라고 하셨지요?" "예, 2년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어요. 언니는 이모님에게서 소개받은 해군 소령과 곧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2주일 앞두고, 이상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 갑자기 목숨을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헬렌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눈을 감은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홈즈는 "언니가 죽은 날의 일을 되도록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3. 수수께끼의 휘파람 소리.. 마을 사라들은 헬렌과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을 <미치광이 저택>이라 불렀습니다. 그집은 낡을 대로 낡아 대부분의 방은 쓸모가 없고 그럭저럭 바깥채에서만 사람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바깥채 아래층에 학교의 교실같이 방 3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맨 첫째 방이 아버지인 로이롯, 가운데방이 줄리아, 가장 끝방이 헬렌의 침실 로 되어있었습니다. 방사이는 모두 벽으로 막혀 있어서 옆방으로 가려면 일단 복도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세 방 다 창문이 정원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2년전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밤, 로일롯은 자기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 다. 그렇다고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든 것이 아니라, 무슨 책을 읽고 있은것 같았습니다. 인도산 여송연의 짙은 냄새가 줄리아의 방에 까지 풍겨 왔습니 다. "아버지는 왜 저런 담배를 좋아하시는지 몰라. 냄새가 지독해서 견딜 수가 없어." 하고 투덜대며 줄리아는 헬렌의 방으로 건너왔습니다. "여기는 괜찮아.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이야기나 하다 가." 헬렌이 말했습니다. 줄리아는 다가오는 결혼식에 관해 헬렌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11시쯤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던 줄리아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문 앞에 서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것을 물었습니다. "얘, 헬렌. 너 한밤중에 휘파람 분 적이 있니?" "아니, 그런 일 없어." "정말 이상해. 내 귀에는 분명히 휘파람소리가 들렸어. 그것도 하룻밤만이 아니라, 요즘 거의 날마다 새벽 3시쯤이면...." "어머, 기분 나빠! 혹시 언니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아니야, 난 원래 잠귀가 밝잖니. 그래서 꼭 그 휘파람소리 때문에 잠이 깨곤 한단다. 정원 쪽인것 같기도 하고..... 마루 쪽인것 같기도 하고... 너도 혹시 들었나 해서 물어 본 거야." "난 들은 적이 없어. 집시들이 숲속에서 부는 건지도 모르지. 아니 틀림없 이 그럴꺼야." 헬렌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럴까? 어쨋든 대단한 일은 아니야. 그럼 잘 자, 헬렌." 줄리아는 웃으며 헬렌의 방을 나갔습니다. 이윽고 줄리아의 방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헬렌도 자물쇠 를 단단히 채우고 침대로 갔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잤습니다. 로일롯이 표범과 비비 를 놓아 기른 후부터 생긴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때려 부수기 전 에는 누구라도 두 사람의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헬렌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언니 줄리아가 말한 휘파 람 소리가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날 밤은 폭풍우가 휘몰아쳐 왔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는 유리창을 때리며 쏟아졌습니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헬렌의 귀에 폭풍우를꿰뚫는 여자의 비명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언니 줄리아의 비명이었습니다. 헬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간 순간, 헬렌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휘 파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휘파람 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무엇인가 무거운 쇠붙이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헬렌은 공포로 굳어진 몸을 이끌고 줄리아 의 방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열쇠 돌리는 소리에 이어 방문이 조용히 열렸 습니다. 헬렌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줄리아가 비틀거리며 복도로 나왔습니다. 희미한 복도의 불빛속에 떠오른 줄리아의 얼굴은 죽은 사람같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줄리아는 마치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며 헬렌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헬렌 은 재빨리 뛰어가 언니를 껴안았습니다. 그 순간, 줄리아는 무릅엣 힘이 빠 진듯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줄리아는 몹시 고통스러운지 몸을 비틀며 신음하였습니다. 손발에는 경련이 일었습니다. "언니! 정신 차려!" 헬렌은 줄리아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줄리아는 힘없는 목소리로, "아, 헬렌.... 끈이, 얼룩 무늬의 끈이....." 하고는, 무엇인가 더 할말이 있는듯 손가락으로 로일롯의 방 쪽을 가리켰습 니다. 그런데 그때 또 경련ㅇ 일어나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참, 그렇지!' 헬렌은 그제야 생각이 미친 듯 로일롯을 부르려 뛰어갔습니다. 로일롯은 마 침 가운을 걸치고 방에서 나오는 참이었습니다. 복도에서 벌어진 소동에 잠 을 깬 모양이었습니다. "아버지, 언니가...." 헬렌은 매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로일롯을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에는 잘 따 르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의지하고 싶 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로일롯은 곧 줄리아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오, 줄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줄리아는 그때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정신차려, 줄리아! 정신차려!" 로일롯은 줄리아의 입에 브랜디를 흘려 넣어 준 다음, 마을의 의사를 불러 왔습니다. 이렇게 로일롯이 애쓴 보람도 없이 줄리아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슬프기 보다는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하고 헬렌은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정말 안됐군요. 그런데 언니가 죽던 날 밤, 휘파람 소리와 무엇인가 쇠붙 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죠?" 잠자코 헬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홈즈가 물었습니다. "예, 경찰에서도 그 점을 물어 보던데,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만 워낙 바람이 심하게 불고, 또 집이 낡아 삐걱거렸으니 혹시 잘못 들었 는지도 모르지요." "그때 언니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홈즈가 다시 물었습니다.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오른손에는 타다 남은 성냥을,왼손에는 성냥갑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음, 그렇다면 언니는 무엇인가에 놀라 성냥을 켜고 방안을 살펴보았군요. 이건 중요한 점이군. 그래, 경찰에선 어떤 판단을 내렸지요?" "아버지의 행실은 그 일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경찰은 이 사건을 매 우 자세히 조사했지만, 결국은 언니가 죽은 원인을 캐내지 못하고 말았습 니다. 문이 안으로 잠겼던 것은 제가 알고 있고, 정원 쪽으로 나 있는 창 문에는 튼튼한 쇠빗장이 달린 덧문이 있었습니다. 벽과 마루도 구석구석 조사했지만 어디에도 수상한 자가 숨어든 흔적은 없었습니다. 굴뚝은 굵 지만 큰 쇠못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 사람이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리고 언니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독약을 먹인 흔적은 없었습니까?" "언니는 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독약을 먹인 흔적도 또 스스로 마신 흔적 도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그 점은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음..... 그럼 헬렌양. 당신은 언니가 무슨 이유로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언니는 엄청난 공포로 충격을 받아 죽었을 것 같아요. 휘파람 소리 이외 에 어떤 무서운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집시들은 그샔 정원 숲속에 있었습니까?" "예, 언제나 몇 사람은 있거든요." "그건 그렇고, 언니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말한, 얼룩 무늬 끈에 대해 뭔가 생각나는 점이 없습니까?" "저도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언니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헛소리를 한 게 아닐까요? 참, 언니는 집시들이 쓰고 있는 물방울 무늬의 천을 가리켜 곧잘 얼룩 무늬 수건이라고 했는데 그게 얼룩 무늬 끈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홈즈는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 저었습니다. "아무래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이군..... 자, 헬렌양, 무엇이든 좋으니 까 이야기를 자꾸 계속해 보십시오." 헬렌은 무슨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긴장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습 니다. "홈즈씨, 저는 간밤에 그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를 들었어요." "뭐라구요?" 홈즈의 눈이 빛났습니다. "그래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뛰어온 겁니다. 홈즈씨에게 의논 하면 저 기분 나쁜 휘파람의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좀 더 자세히..." "언니가 죽은 후 지난 2년 동안 저는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 왔습니 다. 그런데 한 달 전에, 몇 년 전부터 교제하던 분에게 청혼을 받았습니 다.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으므로,좀 더 날씨가 따뜻해지면 결혼식을 올 리기로 했습니다. 그때문에 그저깨부터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집은 신랑에게 아무래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테니까요. 제 침실도 고치 느라고 벽을 헐었으므로, 간밤엔 할 수 없이 죽은 언니의 방에서 잤습니 다.언니가 쓰던 침대에 누우니 언니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방의 정적을 뚫고 소름 끼 치는 휘파람소리가 들려 왔어요. 무서워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지만, 저는 용기를 내어 일어나 등불을 켜고 방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습니다. 아무것 도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하지만 무서워서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어 요. 그래서 옷을 입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 다." "잘 하셨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까?" "이제 다 이야기한 것 같군요." "아니, 헬렌양. 또 한가지 털어놓지 않은 게 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로 일롯 박사에게 심한 짓을 당한 걸 숨기고 있군요." "어머나, 저는 ....." 헬렌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습니다. "당신 손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군요. 그건 분명히 누군가 억센 힘으로 잡거나 비튼 자국입니다. 아버지가 그런 것 아닙니까?" 무릎에 올려놓은 헬렌의 손목에는 다섯 손가락의 흔적으로 보이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헬렌은 재빨리 그것을 가리며, "아버지는 화가 나면 난푹해진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조용히 타오르는 난로의 불길을 바라보던 홈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자아, 그건 그렇고.... 이 사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몇가지 있어.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사건은 해결되지 않아. 이봐요. 헬렌양. 와트슨과 함께 스토우크모란 곳으로 가서 방들을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아버 지가 눈치채면 곤란해요. 될 수 있으면, 오늘이 좋겠는데..." "마침 아버지는 집에 안 계실 거여요. 무슨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런던에 가야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거 다행이군요. 와트슨. 함께 가는 데 이의는 없겠지?" 내게 이의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물론이지!" "그럼 둘이서 오후에 가겠습니다. 헬렌양은 지금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런던에까지 온 김에 볼일을 좀 보고 가야겠어요. 하지만 두분과 시간을 맞추어 오후에는 집에 돌아가 있겠어요." 헬렌은 올때와는 달리 생기있는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4. 로일롯 박사. 홈즈는 사건을 맡으면 무조건 행동을 개시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 았습니다. 경찰에서 놓친 것을 꼼꼼히 조사하고, 신중에 신주을 거듭하여 추리한 다 음, 단숨에 해결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헬렌이 돌아가자, 홈즈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물었습니다. "와트슨, 자넨 헬렌양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매우 고약하고 무시무시한 사건 같은데..." 내 말에 홈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고약하기로나 무시무시하기로나 한 군데도 흠잡을 데가 없지." "헬렌양의 말처럼 바닥이나 벽에 이상이 없고, 문이나 창문이나 굴뚝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다면, 언니는 방안에서 혼자 이상한 죽음을 당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군." 그러자 홈즈는, "그렇다면 그 수수께끼의 휘파람소리와 언니가 죽는 순간에 한 그 기묘한 말은 뭘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글쎄, 나로선 모르겠는걸...." "한밤중의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 집시, 헬렌 자매의 어머니가 남긴 재산 으로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살아가는 아버지, 얼룩 무늬의 끈, 그리고 헬렌이 들엇다는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연결 시켜 나가다 보면, 사건이 해결될수 있을 거야." 홈즈는 중얼거리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해결이 쉽지 않을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역시 간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스토우크모란 마을에 가면 뭔 가 단서를 잡을 수 있겠지." 여기까지 말한 홈즈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체격이 우람한 사나이가 거칠게 문을 열어 젖히고 방안 으로 들어선 뒤였습니다. 사나이는 키가 몹시 커서, 목을 길게 빼야 검은 모자의 꼭지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사나이의 옷차림은 농사꾼 같기도 하고 사냥꾼 같기도 한, 색다른 것이었습 니다. 그러고 보니 사나이의 손에는 사냥용 채찍이 들려 있었습니다. 아뭏 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나이였습니다. 커다란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고, 피부색은 거무튀튀하였습니다.게다가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날카롭게 뾰족해서 어딘지 사나운 늙은 독수리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샔문인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홈즈가 누구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접니다." 홈즈는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난 로일롯이야. 스토우크모란 마을에 사는....." "아, 그러십니까. 어서 앉으시지요." 하며 홈즈가 의자를 권했으나, 로일롯 박사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습니 다. "이대로도 괜찮아. 나는 헬렌의 뒤를 밟아 왔어. 대채 그애가 무슨 말을 하던가?" "4월인데도 아직 춥군요." 홈즈는 딴청을 부렸습니다. "헬렌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물었잖아?" 로일롯 박사는 사납게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추워도 크로커스꽃은 피었다지요?" 홈즈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 따위 말은 듣고 싶지 않단 말이야. 네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 다만, 소문대로 정말 건방진 녀석이로군." 로일롯 박사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위협하듯이 채찍을 휘둘렀습니 다. 홈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싱긋 웃었습니다. "이봐, 이 런던 경시청의 찌꺼기야! 건방진 수작 말라구!." 로일롯 박사는 점점 더 거칠어 졌습니다. 그와 반대로 홈즈는 더욱 침착하 여 금방이라도 껄껄대고 웃을듯 하였습니다. "조용히 나가 주실까요?"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나가지 말래도 나갈 거야. 만약 내 집안 일에 함 부로 참견하면 혼날 줄 알아. 이렇게 말야...." 하며 로일롯 박사는 난로의 부젓가락을 움켜쥐더니, 거친 손으로 쉽게 구부 렸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휙 집어던진 다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성 큼성큼 나가 버렸습니다. "쇠로 된 부젓가락을 엿가락같이 구부리다니, 정말 대단하군." 기가 차다는 투로 내가 말하자, 홈즈는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유쾌한 괴물이로군. 저 녀석이 조그만 더 우물쭈물 했더라면, 나도 완력 으로는 과히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텐데..." 이렇게 말하며 홈즈는 부젓가락을 줍더니. 힘들이지 않고 먼저대로 펴 놓았 습니다. 역시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저 녀석이 나를 경시청 형사로 잘못 안 건 곱게 봐준다 치지만, 헬렌양은 괜찮을까? 놈은 헬렌양의 뒤를 계속 쫓고 있는 모양인데, 이렇게 되면 스 토우크모란 마을에 가는 일을 한시바삐 서둘러야겠군. 와트슨, 나는 관청 에 가서 헬렌양 어머니의 유언 서류를 조사하고 올테니, 그 동안 아침 식 사 준비를 좀 해 주게." 홈즈는 내가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잽싸게 방에서 나갔습니다. 5. 적진으로 뛰어들다.. 홈즈는 점심때가 지나서야 돌아왔습니다.나는 간단한 식사를 권하면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알아 냈나?" 하고 물었습니다. "음, 꽤 참고가 될 만한 걸 알아 왔지." 홈즈는 빵을 씹으면서 숫자가 잔뜩 적힌 파란 종이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헬렌의 어머니가 죽었을 당시엔 연수입이 1100파운드 가까이 되었지만,지 금은 농산물 가격이 내렸으므로 750파운드밖에 안 돼. 딸들이 결혼하게 되 면 각자 일년에 250파운드씩 받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둘이 모두 결혼해 버리면 로일롯으로서는 적지않이 타격을 받겠지.이점이 중요한거야. 내가 아침을 굶고 뛰어다닌 것이 헛일은 아니었어. 로일롯에게 딸들의 결혼을 방 해할 만한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 냈으니까." "여보게, 그럼 줄리아를 죽이고, 헬렌까지 죽이려 하는게 바로 그 괴물 같 은 아버지란 말인가?" 나는 잔뜩 긴장하여 물었습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냥 수상쩍다고 보았을 뿐이야.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엔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아뭏든 꾸물거릴 때가 아닌 것 같아. 로일롯 박사는 우리들이 헬렌의 상 의에 응해 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암, 서둘러야지. 자네는 권총을 갖고 가게. 쇠로 된 부젓가락을 엿가락처 럼 휘는 괴물이 상대니까." 하며 홈즈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곧 영업용 마차를 불러 타고 워털 루역으로 달렸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침 레저헤드행 기차가 있어 재빨리 올라탔습니다. 레저헤드까지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부터 2륜 마차로 10 킬로미터쯤 달려, 조용하고 경치좋은 스토우크모란 마을에 닿았습니다. 마침 날씨가 매우 좋았습니다.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하늘에는 서너 점의 흰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습니다. 길 옆의 나무와 풀에는 파릇한 새싹 이 돋아 나고, 지나가는 바람엔 향긋한 흙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다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 는 것 같았습니다. 홈즈는 팔짱을 끼고 모자를 눌러 눈 있는 데까지 눌러 쓴 채, 마부 옆자리 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졸고 있나 보다 했더니,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네 어깨를 두드리며 목장 저쪽을 손가락 질 했습니다. "저것 좀 보게!" 널따란 목장 너머에는 과수원이 있고, 그 앞엔 울창한 숲이 있었습니다. 홈 즈가 가리킨 것은 그 과수원과 숲 사이에 솟아 있는 매우 낡은 건물의 지붕 이었습니다. "오래 된 저택이군." 홈즈는 일부러 한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게 바로 로일롯 박사의 저택입죠." 마부가 설명했습니다. "아, 그런가? 마차를 그쪽으로 대주게. 우린 지금 수리관계로 그 집을 찾 아 왔거든." 홈즈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빙 돌아서 가는 것보다 여기서 마차를 내려 밭둑 길을 따라 걸어 가는 게 훨씬 더 빠를 겁니다. 저기 보십시오.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저 작은 길 말입니다." 마부가 친절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 말대로 하겠네..... 아니, 그런데 저 여자는 헬렌양 같 은데." 홈즈는 마차삯을 치르고 나서 가볍게 뛰어내렸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랐습 니다. "우리는 드디어 적진으로 뛰어들었네. 그러니까, 모든 일에 주의하지 않으 면 안 돼. 저 마부에게는 우리가 건축가인 것같이 여기게 하려고 그런 소리 를 했지. 그렇지 않으면,시끄러운 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르니까." 홈즈는 멀리 사라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때 헬렌이 우리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기쁨에 넘친 얼굴로 "정말 잘 오셨습니다. 혹시 두분께서 안 오시면 어떻게하나 걱정하고 있 었어요." 하며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한번 약속한 이상,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나타납니다." 홈즈가 말했습니다. "일이 제대로 되었어요. 아버지는 런던에 가셨는데 아마 저녁때까지는 돌 아오시지 않을 것 같아요." 헬렌은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헬렌양, 사실은 오늘 아침에 로일롯 박사를 만났습니다." 하며 홈즈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헬렌은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렷습니다. "아버지가 제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는 마음 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걱정이 되는 군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리 쪽이 한 단계 올라가 있는 셈이지요. 조심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로일롯 박사 쪽입니다. 아뭏든 오늘 밤에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아버지를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다른 집에 가서 주무 시던지...." "아닙니다. 저도 버티어 보겠어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뭐든지 시켜 주셔요." 헬렌은 뜻밖에도 꿋꿋해 보였습니다. "좋습니다. 어떻든 빨리 방들을 조사해 봅시다. 지금부터는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요." 홈즈와 나는 드디어 사건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것입니다. 저택은 얼룩덜룩 이끼가 낀 석조 건물로 전체가 잿빛이었습니다. 가운데 건 물이 특히 높고, 그 양쪽에 새의 날개같이 나지막한 건물이 붙어 있었습니 다. 한쪽 날개의 지붕은 군데군데 떨어져 몹시 황폐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황폐해 버렸을까.....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둔 것 같 군." 홈즈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가운데 건물도 손질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는 건물만이 어느 정도 현대식으로 고쳐져 있었습니다. 창에는 덧문이 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 으로 보아 현재 살림을 하고 잇는 곳 같았습니다. 수리하는 데 필요한 도구 는 놓여 있었으나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홈즈는 잔디 위를 걸어다니며 방 바깥쪽을 꼼꼼히 조사하였습니다. 잔디는 거의 손질을 하지 않아서 마치 잡초 같았습니다. "여기가 당신의 방, 가운데가 언니의 방, 안채에 가장 가까운 게 로일롯 박사의 방이군요." "예, 하지만 저는 어젯밤부터 가운뎃방을 쓰고 있어요." "참, 그랬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방을 그렇게 급하게 수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하며 홈즈는 머리를 갸우뚱했습니다. "어쩌면 헬렌양을 가운뎃방에서 자게 하기 위해 저 괴물 영감, 아니, 로일 롯 박사가 꾸민 일이 아닐까?" 내 말에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흠. 그럴 듯한 얘기군. 그런데 헬렌양, 저쪽에 긴 복도가 있다고 했지요? 복도에도 창문이 있나요?" "예. 그렇지만 사람이 들락거릴 정도로 크지는 못해요." "그렇다면 문제삼지 않아도 되겠군. 덧문을 단단히 닫으면 밖에서 들어올 수가 없고, 복도 쪽으로도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면, 줄리아는 완전히 갇혀 있었던 셈인데...." 홈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 거리며, 확대경을 꺼내어 창틀과 손잡이, 심 지어는 쭈그리고 앉아 잔디 위까지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이윽고 홈즈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턱을 쓰다듬었습니다. 난처할 때라든지, 일이 제대로 안 풀릴 때의 버릇입니다. "이번엔 방안을 조사해 보세. 실마리가 되는 것은 틀림없이 방안에 있을거 야." 내 권유에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하세." 우리는 3개의 방이 나란히 있는 복도 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수리하고 있는 헬렌양으 방은 특별히 조사할게 없을거야. 중요한 것 은 가운데방이야." 하며 홈즈는 가운뎃방으로 성큼 들어갔습니다. 줄리아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고, 간밤에는 헬렌이 무서운 휘파람소리를 들 은 바로 그방이었습니다. 방은 작고 검소하였으며, 옛날 시골집처럼 천정이 낮았습니다. 한쪽 구석에는 갈색 장롱, 다른 한쪽 구석엔 침대가 있고, 창 문 왼쪽엔 경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밖의 것이라고는 보잘것 없는 의자 와 방 한가운데에 깔린 융단 뿐이었습니다. 융단 주위에 보이는 마룻바닥과 벽의 간막이는 떡갈나무였는데, 군데군데 좀이 먹고, 지저분하게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는 몰 라도 아까 정원에서 들여다보았을 때와는 달리,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 았습니다. 홈즈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아무리 조그만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저 초인종의 끈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나요?" 홈즈가 물었습니다. 침대위에 매달린 초인종의 끈은 그 끝이 베개위에 닿아 있었습니다. "2년전에 달았는데, 가정부의 방으로 통해 있을 거여요." "언니가 달게 했나요?" "아니어요. 언니나 저는 가정부에게 일을 시킨 일이 없어요. 가정부는 우 리 집에 오래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초인종 끈은 별로 필요가 없었을 텐데...." 홈즈는 확대경을 들고 엎드려 마룻바닥의 틈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벽의 간막이를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침대로 다가가 잠시 관찰한 후, 초인종의 끈을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아니, 이건 초인종 끈이 아니잖아!" 홈즈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울리지 않나요?" "울릴 리가 없죠. 자, 잘 보십시오. 끈 끝이 환기 구멍 바로 위 고리에 묶 여 있죠?" "어머, 이상하군요! 전 여태껏 몰랐어요. 아마 언니도 몰랐을 거여요." 홈즈는 계속 두세 번 끈을 잡아당기고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상한건 이것 뿐이 아니오. 환기 구멍은 바깥쪽을 향해 뚫려 있어야 원 칙인데, 이건 옆방으로 통했군요. 별 얼간이 같은 건축가도 다 있었군그래. " "그 구멍은 초인종을 달때 새로 만든 거죠. 그때 이밖에도 몇군데 간단한 공사를 했어요." "이거 재미있게 됐는걸. 끈뿐인 초인종에, 소용없는 환기 구멍이라.... 자, 이번엔 로일롯 박사의 방으로 가 봅시다." 홈즈의 동작이 활발하고 기민해졌습니다.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잡 은 것 같았습니다. 로일롯 박사의 방은 딸들의 방보다 컸지만 검소한점에서는 비슷했습니다. 마치 군인의 방 같았습니다. 조립식 침대, 안락 의자, 둥근 탁자 등 모두 사치스럽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다만 전문 서적이 꽉 들 어찬 책장과 철제 금고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홈즈는 천천히 걸어다니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홈즈가 가장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철제 금고였습니다. "헬렌양, 당신은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알고 있나요?" 홈즈는 금고를 툭툭 건드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헬렌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류가 들어있어요." "안을 본 적이 있나요?" "예, 몇 년 전에 단 한 번 보았는데, 서류가 가득 들어 있더군요." "고양이가 들어 있지 않던가요?" 홈즈의 엉뚱한 물음에 나와 헬렌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아무리 괴짜라도 금고에다 고양이를 기를까!" "표범과 비비는 있지만 고양이는 없어요. 만약 아버지가 고양이를 기르고 계셨다면 어쩌다가 울음 소리쯤은 들렸을 텐데...." 그러나 홈즈는 웃지도 않고, "보십시오. 여기 이런게 있습니다." 하며 금고 위에 있는 조그만 우유 접시를 들어 보였습니다. "표범은 맹수입니다. 조그마한 접시의 우유로는 어림도 없죠.어쨋든 이접 시의 수수께끼는 곧 풀릴 겁니다. 그 전에 확인해 둬야 할 게 있군요." 홈즈는 나무 의자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 위를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 니다. "이제 분명해지는 것 같군." 홈즈의 눈길을 끈 것은 개를 다루는 데 쓰는 작은 채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둥글게 감겨 있고, 끝부분은 무엇인가에 걸리도록 고리 모양으로 되 어 있었습니다. "이상한 채찍이군. 와트슨, 자넨 이것을 무엇에 쓰는 채찍이라 생각하나?" 홈즈가 수수께끼를 내듯이 물었습니다. "글쎄,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채찍인데, 끝을 왜 고리 모양으로 만들었을 까?" "이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거야. 머리가 좋은 사람이 나 쁜일에 머리를 쓰게 되면 이런 결과가 생기지. 헬렌양, 이제 볼 것은 대개 다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매우 참고가 되었습니다. 정원에 나가서 머리 를 좀 식힐까요?" 정원으로 나가자, 홈즈는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와 헬렌은 잠자코 홈즈의 모습을 지 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으고 홈즈는 헬렌 곁으로 다가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움직여줘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홈즈씨 말씀대로 하겠어요." 헬렌은 긴자하여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것을 머리속에서 정리한 결과, 나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 았습니다. 즉, 누군가 분명히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 늘밤이 고비입니다." "어머나!" 헬렌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지금은 우물쭈물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당신의 목숨을 지킴과 동시에, 악마와 같은 살인자를 체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드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첫번째 계획인데, 오늘밤 나와 와트슨이 당신 방에서 지 낼 겁니다." 우리는 놀라서 홈즈를 바라보앗습니다. 그러나 홈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 때까지는 저쪽에 보이는 여인숙에 있을 겁니다." 저택 맞은편에 크라운이라는 여인숙이 있었습니다. "저 크라운 여인숙에서 당신 방 창문이 보이죠?" "예, 보일 거여요." "로일롯 박사가 돌아오면,당신은 머리가 아프서 견딜수가 없다고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십시오. 그리고 박사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 면 당신 방의 덧문을 열고 등불을 흔들어 우리에게 신호를 한 다음, 살짝 방에서 빠져 나와 원래 당신의 방으로 옮기십시오. 알겠지요? 박사가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헬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습니다. "등불로 신호를 하면, 우리는 당신의 언니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 방으 로 몰래 숨어들어, 괴상한 휘파람소리가 어디서 들려 오는지 알아 낼 것입 니다. 잘하면 오늘밤에 범인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홈즈느 자신 만만했습니다. "홈즈씨는 범인이 누구이며,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두 알고 계시는군 요? 수사에 지장이 없다면 가르쳐 주세요." 헬렌이 애원하듯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좀더 분명해질 때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추리에 불 과하니까요. 아뭏든 오늘밤이 고비입니다. 당신은 내가 말한 대로 실수없이 행동해 주십시오. 그럼 우린 일단 크라운 여인숙으로 몸을 숨기겠습니다. 여기서 로일롯 박사에게 들키면, 모처럼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니까요. 용기 르 내요." 홈즈는 격려하듯이 헬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습니다. 6.신호의 등불. 우리는 운좋게 크라운 여인숙의 이층 방을 빌 수 있었습니다. 그 방에서는 저택의 정원과 건물이 똑똑히 바라다보였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덜커덕 거리는 마차소리와 함께 로일롯 박사가 돌아왔습 니다. "야아, 박사님이 돌아오셨군." 아래를 내려다 보던 홈즈가 빈정거리듯 말했습니다. 로일롯 박사는 무엇 때문인지 마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 니다. "저 사나이는 일년 내내 성을 내는 모양이군." 홈즈가 다시 빈정거렸습니다. 잠시 후 저택의 거실에 불이 켜졌습니다. 로일롯 박사가 그 방에서 저녁 식 사를 하는 모양이엇습니다. 바깥은 어느 결에 캄캄해져 있었습니다. "헬렌양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내가 걱정을 하자 홈즈는 염려할 것 없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그 여잔 보기보다는 단단한 여자야." "글쎄......" "그보다 와트슨 오늘밤의 모험에 자네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망설여지는군. 몹시 위험할 테니까." "이봐, 새삼스럽게 무슨 소릴 하는거야? 방해가 된다면, 난 따라가지 않겠 어." "방해라니, 당치 않은 소리! 자네가 함께 가주면 크게 도움이 되지." "그렇다면 가겠네." "고맙네. 그렇지만 적을 깔보면 안돼, 와트슨. 저 방에는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죽음의 위험? 자네는 그 방에서 내가 못 본것까지 보고 온 모양이군." "그건 아니야. 추리는 조금 앞질렀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본 것 중 색다른 건 초인종 끈인데, 그것도 죽음의 위험을 불러 일 으키는 것 중의 하나인가?" "음, 환기 구멍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고...." "그 환기 구멍은 쥐가 겨우 드나들 정도잖아." "크고 작은 건 그다지 문제가 안되네. 박사의 침실과 줄리아의 침실 사이 에 있다는 게 문제지. 와트슨, 사실 난 여기 오기 전부터 그런 구멍이 있 을 거라고 짐작했었네. 그런데, 역시 있었어." "아니, 그건 어떻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헬렌양이 오늘 아침에 로일롯 박사가 피우는 여송연 냄새를 줄리아가 맡 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두 방이 어딘가 통해 있지 않으면 도저히 냄새 따위는 흘러 들어가지 않아. 그리고 경찰조차 무심코 지나쳐 버릴 정 도니까, 틀림없이 작은 구멍일거라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그 작은 구멍에 무슨 장치를 할 수 있을까? 독가스를 흘려 보낼 수도 없을 테고..." 그러자 홈즈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환기 구멍과 초인종 끈, 그리고 줄리아의 죽음 ..... 아무래도 기묘한 일 치라고 생각되지 않나? 그리고 침대에 수상한 장치가 되어 있었는데, 자 넨 그걸 못보았나?"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침대의 발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어. 침대를 옮길 수 없도록 잔재주를 부려 놓았더란 말일세." "그래? 그거 해괴하군." "그러니까 침대는 환기구멍과 초인종끈에 대해 항상 같은 위치에 있어야만 됐었네. 그 끈은 밧줄이라고 해도 괜찮지. 초인종 끈은 아닌 게 분명하니 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홈즈! 나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얼마나 끔찍한 범 죄인가!" "성격이 비뚤어진 의사가 생각해낸 범죄는 매우 교묘해. 그러나 우리는 그 의 나쁜 꾀를 꿰뚫어 보았어. 이젠 확실한 증거를 잡아 그를 붙잡는 일 만 남았어. 물론 거기엔 상당한 위험이 따르겠지만...." 홈즈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파이프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6실경에 거실의 불이 꺼졌습니다. 로일롯 박사가 마 침내 자기 방으로 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저택 쪽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습니다. 그후 2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2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더없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퉢습니다. 시계 바늘이 11시를 가리킨 지 얼마 안 되어 어둠 속에 불이 켜졌습니다. "신호의 등불이다!" "가운뎃 방이다!" 우리는 단단히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여인숙 주인은 이렇게 깊은 밤에 어딜 가느냐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홈즈는, "급한 볼일로 친구에게 가는 겁니다. 오늘밤은 아마 친구네 집에서 자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며 팁을 주었습니다. 주인은 싱글벙글하며 말했습니다. "수고가 많겠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며 어두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 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7. 죽음의 절규 우리는 신호의 등불을 안내 삼아 한발 한발 저택으로 다가갔습니다. 저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담이 낡아 여기저기 허물 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자칫 잘못하면 '와르르!' 하고 무너질 우려 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거의 기다시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무 사이를 빠져 나가 정원의 잔디까지 도착하는 데 30분이나 걸렀습니다. 가운뎃방의 창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막 그 창문을 넘으려던 우리는 깜짝 놀라 숨을 죽엿습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바로 옆의 월계 수 그늘에서 갑자기 곱추 같은 것이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잔디 위로 털썩 몸을 던졌다가는 날쌔게 일어나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깜짝 놀랐어. 식은땀이 다 났어." "나도 놀랐어. 저건 비비야." 홈즈가 내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표범과 비비가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물 쭈물 하다가는 언제 표범이 덤벼들지 몰랐으므로, 재빨리 구두를 벗고 창문을 뛰어넘어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홈즈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여 덧문을 닫고, 등불을 탁자 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방안을 둘러 보앗습니다. 낮에 조사한 때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이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홈즈는 내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오더니,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 습니다. "소리를 내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물거품이 돼. 옆방에 박사가 있다는 걸 잊지마." 나는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곧 불을 꺼야 돼. 환기 구멍으로 불빛이 새면 좋지 않으니까. 어둠 속에 서 숨을 죽이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기다리다가 지루해도 잠들면 안돼. 잠들면 마지막이야. 만일의 경우를 위 해 권총을 손에 들고 있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테니 자넨 그 의자 에 앉아 있게." 나는 권총을 손에 들었습니다. 홈즈는 미리 준비해온, 가늘고 길다란 지팡 이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냥과 초를 나란히 놓 아 두었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홈즈는 등불을 껐습니다. 방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세계가 되었습니다. 때때로 밤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뿐, 숨막힐 듯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습 니다. 언젠가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와 함께 덧문 긁는 소리가 났는데, 틀 림없이 표범인 모양이었습니다. 은은한 교회 종소리가 15분마다 시간을 알려 주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계속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괴롭고 고된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여느 때보다 10배나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용케도 버티어 나갔습니다. 12시, 1시, 2시가 지나고, 이윽 고 3시가 되었습니다. 교회 종소리가 3시를 알린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환기 구멍 근처에 서 불빛이 번쩍이는 것 같더니,이어 기름 냄새가 났습니다. 석유램프에 불 을 붙인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후, 희미하게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습니다. 냄새는 점점 강하게 풍겨 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재빠른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긴장한 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30분 가량 지났을때, 옆방에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쉬익 쉬 익!'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마치 불 위에 올려놓은 물주전자에서 수 증기를 내뿜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 순간, 홈즈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성냥불을 켜고는 지팡이 를 들어 초인종 끈을 힘껏 때렸습니다. "와트슨! 보았나?" 하고 외치면서 홈즈는 다시 한 번 지팡이를 쳐들어 힘차게 끈을 내리쳤습니 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 다. 다만 휘파람소리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홈즈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힘껏 때렸을까요? 마치 악마라도 내리치는 듯 한 기세였습니다. 홈즈는 말없이 환기 구멍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긴장한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일찌기 들어 본 일이 없는 끔찍한 비밀이 들려 왔습니 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그 소리에는 고통과 공포와 노여움 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8. 얼룩 무늬 끈의 정체.. 밤의 고요를 깨뜨린 그 죽음의 절규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로 변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한 그 무서운 비명은 멀리 떨어진 데 까지 들려 마을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고 합니다. 아뭏든 홈즈와 나는 얼굴을 마주 본채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얼이 빠진 것입니다. 마침내 신음 소리도 멎었습니다. "지금 그건 무슨 소리였을까?" 나는 조금 숨찬 어조로 물었습니다. "간악한 살인자의 최후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국 이로써 사건은 해결된 셈이 지. 자, 로일롯 박사의 방으로 가세. 권총을 잊지 말게." 홈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촛불을 켜 들고 앞장서서 복도로 나갔습니다. 홈즈가 로일롯 박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분명히 죽었어..." 홈즈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비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권총을 꽉 쥐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제일 먼저 테이블 위의 석유 램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램프 불빛은 반쯤 열린 철제 금고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일롯 박사는 테이블 옆에 있는 나무 의자에 가운을 걸친채 꼼짝하지 않고 앉 아 있었습니다. 발끝이 마구 뒤틀려, 붉은 슬리퍼가 벗겨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낮에 본 가죽 채찍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엔 로일롯 박사가 잠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앗습니다. 턱을 치켜든 채 부릅뜬 눈은 천정의 한 곳에 못박혀 있었습니 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로일롯 박사의 머리에 감겨 있는 갈색 무늬의 노란 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홈즈는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노려보며, "와트슨,이거야! 이게 바로 줄리아가 말한 얼룩 무늬의 끈이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나는 권총을 겨누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순간 시체의 머리 위에 있던 얼룩 무 늬의 끈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박사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독사의 삼각형 대가리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와트슨, 조심해! 늪독사야. 인도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사지. 로일롯 박사는 물린 지 10초도 못 되어 죽었어.... 가만 있게 이놈을 금고 속으로 몰아 넣고 헬렌양을 안전한 장소로 옮긴 다음, 이지방 경찰에 연락하세." 홈즈는 이렇게 말하면서 로일롯 박사의 무릎에 놓여있던 채찍을 들어, 끝쪽의 고리를 독사의 목에 걸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참으로 멋지고 재빠른 솜씨였습니 다. 독사는 곧 채찍에 감겨 철제 금고 속으로 집어던져퉢습니다. 홈즈는 금고를 단단히 잠 가 버렸습니다. 금고가 잠기는 소리와 함께 스토우크모란 마을에서 일어난 낡은 저택 의 끔찍한 사건은 끝났습니다. 의붓딸인 줄리아를 죽이고, 그 동생인 헬렌까지 죽이려 한 로일롯 박사의 미치광이 같은 계획은 홈즈에 의해 멋지게 뒤집혔던 것입니다. 다음 날, 헬렌을 이모네로 보내고 사건의 뒤처리를 지방 경찰에 맡긴 다음, 우리는 서 둘러 런던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홈즈는 기차 안에서 어젯밤의 일을 차근차근 들려 주 었습니다. "환기 구멍을 지나서, 초인종 끝을 타고 그 독사가 내려왔을때 예상은 하고 있었지 만, 난 좀 당황했었어." "아니, 당황한 것은 뱀 쪽이야. 자네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눈 깜짝할 새에 되돌아갔 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주인인 로일롯 박사를 물엇으니..." "그러고보니 로일롯 박사는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 좀 가엾은 생각도드는군 그래." 이렇게 말하는 홈즈의 얼굴에 잠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가엾긴 뭐가 가엾단 말인가, 독사를 이용해 사람을 죽인, 천하에 고약한 악당이야. 어차피 사형을 당하게 될걸." "글쎄, 그도 그렇군. 그런데 독사를 우유로 길들이고, 휘파람으로 불러 들일수 있다 는 사실은 전혀 몰랐어. 이번 사건은 또 나에게 새로운 공부를 시켜준 셈이군. 아, 졸 려! 오늘은 집에 가서 한숨 푹 자야 겠어." 홈즈는 몹시 피곤해 보였습니다. "나는 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번 사건에 관한 걸 자세히 기록하는 일 말이 야."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빵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습니다. 홈즈도 덩달아 하품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