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사이먼 경> 4년쯤 전에 세인트 사이먼 경의 결혼이 뜻밖의 결과로 끝난 사건은 무척이나 세상 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아직 그 사건의 진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건의 해결에 대해서는 내 친구 셜록 홈즈가 큰 역활을 했으니, 대충 이 진기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내가 결혼하기 2~3주 전, 아직 베이커 가의 하숙집에 홈즈와 함께 살고 있던 어느 날 홈즈는 오후에 으레 하곤 하던 산책에 나가 있었다. 그날 갑자기 날씨가 흐리고 바람까지 불기 시작해서, 나는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입은 상처가 묵직하게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락 의자에 앉아 건너편 의자에 두 다리를 얹어 놓은 채 신문은 손에 들고 있었는데 , 그 날의 기사도 죄다 읽어 버렸기에 신문을 밀쳐 놓고 책상 위에 있는 홈즈에게 온 편지 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봉투에 찍혀 있는 커다란 가문의 무늬를 보고서, 도대체 어느 귀족인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홈즈가 돌아오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 신분이 높은 분에게서 편지가 와 있어. 아침에 온 건 아마 생선 가게와 세관에서 보낸 거겠지만 ." 홈즈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지. 내겐 온갖 신분의 사람들에게서 편지가 오니까 재미있단 말이야. 그리고 초라한 편지일 수록 사실 재미가 있네. 이 으리으리한 편지는 아마 달갑지 않은 초대장일 거야. 남에게 거짓말이나 하품을 하게 하는 상류 사회의 사교라는 걸세." 홈즈는 봉투를 뜯고 훑어보았다. "아냐, 여보게, 이건 뜻밖에도 재미있는 사건이 될 것 같은데." "그럼 초대장이 아니로군?" "달라, 틀림없는 사건 의뢰 편지야." "그럼 의뢰한 사람이 귀족이군." "그래, 영국 일류의 명문이야." "그거 축하해야겠군." "아니, 와트슨, 뽐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의뢰인의 신분보다는 사건이 흥미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해. 하지만 이번 수사에는 어쩌면 재미도 있을 성 싶네. 요즘 자넨 신문을 세밀히 읽고 있나 보군." 나는 구석에 있는 신문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야. 할 일이 없어서." "그거 잘됐네. 내게 정보를 제공해 주게. 나는 범죄 기사와 사람을 찾는 안내란밖에는 읽지 않거든. 특히 안내란은 얻을 것이 많아. 한데, 여보게, 최근의 기사를 세밀히 읽었다면 세인트 사이먼 경의 결혼식 기사도 읽었겠군." "아아, 읽었고말고. 무척 재미가 있었네." "그거 잘됐군. 바로 이 편지가 그 사이먼 경에게서 온 거야. 지금 읽어 줄 테니까, 자넨 신문을 뒤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죄다 가르쳐 주게. 그럼 읽겠네. '셜록 홈즈 씨- 백워터 경 얘기로는, 당신의 판단력은 절대로 믿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내 결혼식에서 일어난 불행 한 사태에 관해서 당신을 방문하여 의논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건은 이미 경시처으이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수고를 해주시고 있지만, 당신에게 의뢰해도 그 경감은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 고 합니다. 4시에 찾아가겠습니다. 그 시간에 혹시 다른 약속이 있더라도 내 사건이 너무나도 중요하 니, 그 약속을 연기하시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깃털 펜으로 썼는데, 이 양반의 오른손 새끼 손가락의 바깥쪽엔 민망스러울 정도로 잉크가 묻어 있겠 군." 홈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편지를 접었다. 내가 말했다. "4시라고 했나? 지금이 3시야. 한 시간이면 오겠군." "그럼 그 동안에 자네가 수고해 주게. 사건의 경위를 얼른 조사해 두세. 신문을 뒤져 관계 기사를 날 짜 순서로 정리해 주게. 나는 의뢰인의 신원을 조사하겠네." 홈즈는 벽난로 옆에 있는 참고 서적 책장에서 붉은 표지를 씌운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무릎 위에 그 책을 펼쳤다. "아, 이거야.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발모랄 공작의 차남, 흠, 1846년 생. 그럼 금년에 미한한살이니 까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로군. 전 내각에서 식민차관을 지냈고, 아버지인 공작은 외무상을 지냈네. 플랜타넷 왕가의 직계이며, 외가는 튜더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흠, 이것만으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 와트슨, 구체적인 자료는 자네쪽에서 나올 것 같군." "필요한 자료는 곧 나올 거야. 모두 최근의 것이고, 또 난 흥미 있게 읽었으니까. 다만, 자네가 다른 사건에 정신을 쏟고 있어서, 쓸데없는 말을 걸어 방해를 하면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고서 자네에게 말 하지 않았을 뿐이야." "아아, 그 사건은 해결되었네. 어서 기사가 정리 되었으면 말해 주게." "이 보도가 제일 먼저 나온 거야. 모닝 포스트지에 실린 기사인데, 날짜는 보다시피 몇 주일 전이야- '발모랄 공작의 차남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 경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에 사는 앨로이 시어스 도런 씨의 외동딸 해티 도런 양과 약혼했으며, 소문에 의하면 곧 결혼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뿐이야." 홈즈는 가늘고 긴 다리를 벽난로 불 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같은 주의 사교계 신문에 좀더 자세히 나왔는데, 아, 이거야- '요즘 영국 명문 가정에서는 대서양 건너에서 오는 돈 많고 아름다운 미국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있다. 지난 주에도 아름다운 미국 아가씨가 이 영광을 차지했다. 세이트 사이먼 경의 부 친 발모랄 공작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귀중한 그림을 팔려고 내놓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 가, 세인트 사이먼 경도 버치무어에 얼마 되지 않은 영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므로, 도런 양은 이 결 혼으로 평범한 미국 아가씨로부터 영국 귀족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 도런 양 뿐 만은 아닌 것은 명백하다.' 홈즈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그 밖에 또 있나?" "있고말고. 많이 있네. 모닝 포스트 지의 기사에 의하면, 결혼식은 하노버 광장의 세인트 조지 교회 에서 집안 식구끼리만 모여식을 올리는데, 참석자는 친한 친구 몇 사람으로 한정되며, 신혼 부부는 식이 끝나자마자 신부의 아버지 도런 씨가 사들인, 가구가 딸린 랭카스터 게이트의 저택으로 가게 되 어 있구먼. 그리고 이틀 뒤, 즉 이번 수요일의 신문에는 결혼식이 거행된 것과, 신혼 여행은 피터스 필드 옆의 백워터 경 영지로 간다는 것이 간단하게 나와 있네. 이게 신부가 자취를 감추기까지의 기 사 내용 전부일세." 홈즈는 놀라며 되물었다. "무엇까지라고?" "신부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언제 자취를 감추었나?" "축하 파티 때." "흠, 이건 예상 밖으로 흥미 있겠군. 아주 극적인데." "그래, 나도 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네." "결혼식 전에 사라지는 일은 흔히 있고, 신혼 여행중에도 종종 있는 일이야. 하지만 이렇게 깨끗이 사라진 예는 생각나지 않는군.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게." "기사는 도무지 시원찮아." "둘이 추리하면 보충되겠지." "어제 조간신문에 제목이 나와 있으니까 읽겠네. '귀족의 결혼식에서 생긴 괴사건'이라는 제목이지.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 경의 가족은 사이먼 경의 결혼식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 때문에 당황하고 있 다. 어제 신문에서 일부가 보도되었듯이, 결혼식은 그저께 아침에 거행되었다. 그 동안 이 결혼식에 대해서 수상한 소문이 떠돌았는데, 그것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사이먼 경의 친구가 감추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이 사건은 이미 사회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하노버 광장의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거행 된 결혼식은 집안 식구끼리만의 모임이어서, 참석자는 신부의 아버지인 앨로이시어스 도런 씨, 발모 랄 공작 부인, 백워터 경, 신랑의 동생 유스터스 경, 역시 여동생인 클레어러 세인트 사이먼 양, 그 리고 앨리시어 휘팅턴 양뿐이었다. 결혼식 뒤, 일행은 랭카스터 게이트의 앨로이시어스 도런 씨 저택 에 마련된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이때, 이름 모를 한 여성이 자신은 세인트 사이먼 경과 결혼할 권 리가 있다고 외치면서 일행의 뒤를 따라 저택안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한마탕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잠시 옥신각신 소란이 있은 뒤에 그 여자는 하인장과 하인들에 의해서 쫓겨나갔다. 신부는 다행히 먼 저 집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란은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티 석상에 일행과 함께 자리를 잡고서 잠시 지난 뒤에 갑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다 시 나오지 않아서 한 사람이 걱정된다고 하자, 친아버지인 도런 씨가 찾으러 나가 하녀에게 물어보니 , 신부는 방에 잠깐 들렀을 뿐, 그대로 망토와 모자를 들고 곧 복도로 뛰어 갔다는 것이다. 하인 한 사람은 그런 복장을 한 여자가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신부는 으레 파티 석상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게 설마 신부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앨로이시어스 도런 씨는 이렇게 딸이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하고서는, 신랑과 함께 곧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지금 전력을 다하여 수사 에 나서고 있으니까, 이 이상한 사건도 곧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어제 저녁 늦게까지 신부의 행방에 대한 단서는 잡히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범죄 사건이라는 소문이 있어, 경찰에서는 앞서 소란을 피운 여자가 질투심에서나, 또는 다른 동기에서 이 사건에 끼어들어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여자를 체포하 기로 했다고 한다.'" "그게 전부인가?" "또 하나가 있네. 다른 신문엔 짧은 기사만 나와 있는데, 이 기사에는 의미 심장한 데가 있어." "어떤 내용인데?" "도런 씨 저택을 소란케 한 '플로라 밀러'라는 아가씨가 체포되었다는 기사야. 그녀는 알레그로 극장 의 댄서였는데, 신랑과는 몇 해 전부터 아는 사이라고 하네. 그 이상의 사실을 아무것도 나오 있지 않지만, 하여튼 이걸로 사건의 모습을 대충 안 셈이야. 적어도 신문에서 알아낼 수 있는 한도내에서 는 말이야." "허, 몹시 흥미를 끄는 사건인데, 이런 사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맡아 보고 싶네. 아니, 벨소리가 나고 있군, 와트슨. 벌써 4시에서 몇 분 지났으니까, 틀림없이 그 신분이 높은 손님이 찾아오셨겠지. 아, 와트슨, 자넨 자리를 뜨지 말게. 제3자가 입회해 주면 나중에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정말로 도움이 된다네."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 경이 오셨습니다." 사환 아이가 문을 열어젖히고 외쳤다. 들어온 사람은 기품이 있는 생김새의 신사로서 코가 높고 안색 이 창백하며, 입 언저리에는 어딘가 성급한 느낌도 들었지만, 뚜렷하게 뜬 눈에는 하인에게 명령하는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가지는 침착성이 나타나 있었다. 태도는 활발했지만, 살짝 등이 굽고 무릎을 구부리고 걷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머리칼도 가장자리에 새치가 섞여 있고, 정수리 부분은 약간 빠져 가고 있었다. 복장은 지나치게 멋을 부리고 있었다. 높은 칼라에 검정 프록 코트를 입고, 흰 조끼에 노란 장갑을 끼로,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은데다가 엷은 색깔의 각반을 매고 있었다. 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금테 안경에 달린 끈을 오른손으로 흔들면서 천천 히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세인트 사이먼 경. 저쪽 의자에 앉으시지요. 이쪽은 제 친구이며 협력자인 와트슨 박사입니다. 좀더 불 쪽으로 다가오시지요. 충분히 의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홈즈 씨, 아시겠지만,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문제를 많이 해결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하긴, 나와 같은 신분의 사람과는 처음이시겠지만 ." "의뢰인의 신분을 말씀하신다면, 더 높으신 분도 오십니다." "뭐라고요?" "이러한 사건으로 최근에 오신 의뢴인은 국왕 폐하였습니다." "저런! 그런 일도 있었군요? 그래, 어느 나라의 국왕인가요?" "스칸디나비아 국왕입니다." "영시 왕비가 자취를 감추셨나요?" 홈즈는 차분하게 말했다. "경께서도 아셔야 합니다만, 의뢰받은 사건의 내용은 일체 다른 이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경 의 비밀을 지키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아, 당연한 말씀이오. 정마로 옳은 말씀입니다. 실례를 했군요. 한데, 내 사건에 관해서 당신에게 참고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물어 주시오." "감사합니다. 저는 벌써 신문에 발표된 건 모두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이상은 전혀 모릅니다. 신문에 보도된 것을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습니까? 예를 들어, 이 기사느-" 세인트 사이먼 경은 기사를 훑어보았다. "신문의 내용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르는 점이 많아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한 가지 질 문을 해도 좋습니까?" "물어보아도 좋습니까?" "해티 도런 양과 처음 만나신 건 언제입니까?" "1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요." "미국으로 여행하셨군요." "그렇소." "그때 약혼하셨나요?" "아니오." "그러나 친한 사이겼겠군요." "해티와 사귀는 건 즐거웠고, 또 그녀도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소." "장인 되시는 분은 대단한 부자인가요?" "태평양 연안에선 제일가는 부자라더군요." "어떻게 재산을 모으셨나요?" "광산이지요. 몇 해 전에는 빝털터리였는데, 노다지를 찾아내어 그걸로 투자해서 벼락 부자가 되었답 니다." "그럼, 도런 양-즉, 부인의 성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이먼 경은 코안경을 좀더 빨리 흔들며 벽난로 불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 점이 좀 문젠대요, 홈즈 씨. 해티의 아버지가 부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스무 살이 넘 어 있었지요. 따라서, 해티는 그 동안 광산의 노무자 합숙소를 제멋대로 드나들거나 숲이나 산을 뛰 어다니며, 학교의 교사에게서가 아니라 자연에게서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영국식으로 말한다면 말괄 량이 아가씨이며, 야성적이고 다소 자유 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떠한 종류의 전통에도 매달리지 않습니다. 활화산과도 같은 성격이라고 할까요. 결심이 빠르고 대담하게 실행합니다. 실은, 그녀에게 그러한 성격이 없으면 나로서도 명예로운 우리 집의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 줄 생각이 나지 않았을 거요." 사이먼 경은 여기서 뽐내듯이 기침을 했다. "근본은 고상한 성격의 여자지요. 자기를 희생시키는 영웅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자이며, 천한 짓 은 전혀 못하는 여자로 믿고 있소." "사진은 가지셨나요?" "이걸 가져왔습니다." 사이먼 경은 로킷(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목걸이)을 열어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의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 상아에 새긴 조그만 조각인데, 윤택이 나는 검은 머리에다 커다란 눈 이며, 얌전한 입 모습의 아름다움이 충분히 나타나 있었다. 홈즈는 오랫동안 찬찬히 그 조각상을 들 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로킷을 닫고 사이먼 경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그 뒤 도런 양이 런던에 오게 되어 다시 사귀셨군요?" "그렇소. 요전 사교 시즌 때 장인께서 데리고 왔지요. 몇 차례 만난는 사이에 약혼하게 됐고, 지금은 결혼한 셈이오." "굉장한 지참금을 가지고 오셨다지요?" "상당한 것이었소. 물론 우리 집안으로는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건 물론 경께서 관리하게 되는 거지요? 결혼이 정식으로 끝났으니까요." "글쎄요. 그건 아직 알아보지 못했소." "그러시겠지요. 결혼식 전날 도런 양을 만나셨나요?" "만났죠." "어떻던가요?" "명량하고 건강했지요. 앞으로 할 생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거 정말 흥미 있군요. 그러면 결혼식 아침에는요?" "굉장히 명량했지요-적어도 식이 끝날 때까지는." "그럼 식이 끝났을 때 신붕게 무슨 변화라도 보였습니까?" "그래요. 실은,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해티의 성격에 신경질적인 데가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건 아주 사소한 일이라서 사건에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글쎄요. 그러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뭐, 사실 유치한 일이라서....대기실로 들어가는 도중 해티가 꽃다발을 떨어뜨렸습니다. 맨 앞자리 의 옆을 걷고 있을 때 꽃다발이 그 좌석에 떨어졌습니다. 행렬이 잠깐 멈췄지만, 그 좌석에 앉아 있 던 신사가 바로 꽃다발을 해티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끝났지요. 그런데 그 뒤 내가 꽃 다발 얘기를 꺼내자 해티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마차 속에서도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어리석을 정도로 흥분한 것 같더군요." "호, 그랬었군요. 앞좌석에 신사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일반인도 결혼식에 참석했습니까?" "그래요. 교회가 열려 있어서 오는 사람을 쫓아 낼 수가 없었지요." "그 신사는 부인의 친구분은 아니었나요?" "아니, 당치도 않아요. 극히 평범한 남자였습니다. 어떤 차림새인지도 기억에 없을 정도였거든요. 아 무래도 얘기가 빗나간 것 같군요." "그러니까, 부인께서는 식장으로 가실 때에 비해서 언짢은 기분으로 돌아오신 거로군요. 그럼 장인댁 으로 돌아가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하녀와 얘기하더군요." "하녀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름은 앨리스라고 합니다. 미국 여자고, 아내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왔습니다." "부인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 같은 사람인가요?" "다소 도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내가 너무 그 하녀를 놔두는 것 같더군요. 하긴, 그 런 점에서는 미국인과 우리들의 사고 방식이 다르니까요." "부인께서는 그 앨리스라는 하녀와 얼마나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한 2~3분 간이었죠. 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는 않으셨군요." "해티는 '광산의 채굴권을 빼앗겠다'라든가 뭐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속어를 잘썼는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미국의 속어에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는 하녀하고 이야기한 다음 어 떻게 하셨습니까?" "파티에 나갔습니다." "경꼐서 부축하시고요?" "아니오, 혼자 나갔습니다. 해티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자기 스스로 아주 잘 처리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들이 자리에 앉아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작은소리로 몇 마디 양해를 구하고 는 방을 나가 버렸지요.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녀인 앨리스의 진술에 의하면, 자기 방으로 가서 혼례복 위에다가 망토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서 밖으로 나가셨다던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아내가 폴로라 밀러와 함께 하이드 파크 공원으로 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 여자는 지금 구류중이고, 결혼식 날 도런 씨 댁에서 소란을 피운 장본인이죠." "그 젊은 여자와 경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데요." 세인트 사이먼 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눈썹을 치켜 올려싿. "5~6년 동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전에 알레그로 극장에 있었던 여배우입니다. 나로서는 해주란큼 해주었으니까, 이제 와서 불평을 들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홈즈 씨, 아시다시피 여자라는 건 감정적이니까요. 플로라는 예쁜 여자이긴 하지만, 몹시 열정적인 성격인데다 헌신적으로 나를 사랑했 던 모양입니다. 내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끔찍한 편지를 몇 통이나 보내 왔지요. 사실 결 혼식을 조용하게 올린 이유도, 교회에서 소란을 피우기라도 하면 난처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들이 결혼식에서 돌아오자 플로라가 바로 도런 씨 저택의 현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에 대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쳐들어오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일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사복 경관 두 사람에게 부탁을 해둔지라, 그들이 플로라를 바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플롤라는 떠들어대도 소용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해졌습니다." "부인께서는 그걸 들으셨습니까?" "다행히 듣지 못했지요." "그리고 나서 나중에 부인과 함께 공원을 거닐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도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플로라가 아내를 꾀 어내어, 어떤 끔찍한 올가미를 씌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추리할 수도 있겠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경께서는그럴 성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플로라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질투는 사람의 성격을 이상하게 바꿔 놓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사건에 대해서 경께서는 어 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나는 당신의 의견을 들으려고 왔지, 내 의견을 말하려고 오진 않았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 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물으니 얘기하지만, 아내는 별안간 높은 신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일로 신경이 좀 날카로워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말씀인가요?" "그래요. 사실, 해티는 많은 사람이 갈망하면서도 얻을 수 없는 높은 지위를 버린 겁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홈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아마 그러한 가정도 세울 수는 있겠지요. 세인트 사이먼 경, 이로써 필요한 자료는 대충 갖 춰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만 묻겠는데요, 파티 석상에서 창 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으셨습니까?" "우리 자리에서는 길 건너편과 공원이 잘 보이더군요." "그러셨을 겁니다. 그럼 이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세인트 사이먼 경은 일어서면서 말해싿.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말입니다-"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뭐라고요!" "벌써 해결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어디 있습니까?" "그 점도 당장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세인트 사이먼 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일에는 당신이나 나보다 더욱 우수한 두뇌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점잔을 빼며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홈즈는 웃으며 말했다. "세인트 사이먼 경은 황송하게도 내 두뇌를 자기의 두뇌 정도로 보아 주어싿네. 성가신 질문도 끝났 으니, 위스키를 마시든지 잎담배라도 피우세. 나는 의뢰인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 단 말일세." "설마!" "나는 이와 비슷한 사건의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네. 하긴, 아까 말한 대로 이번처럼 선명한 건 처음 이지만, 사정을 속속들이 듣고 보니 상상이 확신으로 바뀌었네. 상황 증거도 때로는 무척 중요한 거 야."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도 들었지만,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난 자네와는 달리 전례를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몇 해 전 스코틀랜드의 애버든에 똑같은 사건이 있었고, 독일의 뮌헨에서도 꽤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네. 아,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왔군. 안 녕하십니까? 식기장에 손님용 컵이 있고, 잎담배도 상자 속에 있습니다." 경감은 두꺼운 나사 양복에 목도리를 한 뱃사공같은 복장을 하고서, 손에는 검정 천 자루를 들고 있 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인살하고 앉더니, 잎담배에 불을 붙였다. 홈즈는 눈초리를 번득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꽤 시무룩한데?" "시무룩하게 되었지요. 이놈의 세인트 사이먼 경 신부 사건은 정말로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무런 단 서도 잡히지 않으니 말이오." "그거 안됐군요." "이렇게 까다로운 사건은 처음이오. 어떤 단서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마니, 오늘 하루도 헛수 고만 했소." 홈즈는 경감의 윗도리를 만지며 말했다. "게다가 옷도 흠뻑 젖었군요." "그렇소. 하이드 파크 공원의 연못 속을 뒤졌으니까." "저런! 아니, 왜?" "세인트 사이먼 경 부인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말이오." 홈즈는 의자 등에 몸을 젖히며 웃었다. "트라팔가 광장의 분수 바닥도 조사했나요?" "아니, 뭐라고요?" "시체가 있을 가능성은 어느 연못에도 있으니 말이오." 레스트레이드는 화가 치민 듯이 홈즈를 노려보았다. "흥, 당신은 죄다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조금 전에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요. 하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흥, 그렇다면 서펜타인 연못은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거요?" "없다고 생각하오." "그럼 연못에서 이런 물건이 나온 건 무슨 까닭인지 설명해 보시오." 경감은 이렇게 말하면서 가지고 온 자루를 펼치고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신부의 비단옷이며 하 얀 공단 구두, 화환 등을 마룻바닥 위에 쏟아 놓았다. 모두가 물에 젖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새 결혼 반지를 그 위엥 얹어 놓으며 말했다. "어때요, 홈즈 씨, 이렇게 되면 조금 난처할 텐데요?" 홈즈느 입담배의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허, 이걸 죄다 서펜타인 연못에서 끌어올렸단 말이오?" "아니오. 연못가에 떠 있는 것을 공원지기가 발견한 거요. 세인트 사이먼 경 부인의 옷으로 확인 되 었기에, 시체도 그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 멋진 논법으로 말하면, 인간의 몸은 모름지기 옷장 평에 있게 되겠군. 그래, 당신은 이 물건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렸소?" "신부의 행방불명에 플로라 밀러가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를 꺼낼 수 있다고 생각했소."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레스트레이드는 못마땅하게 외쳤다. "홈즈 씨, 당신의 추리는 실제적인 추리라고 할 수 없어요. 2분 사이에 벌써 큰 잘못을 저질렀잖소! 이 옷에서 신부의 행방불명과 플로라 밀러가 관계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데도." "그건 어떻게 해서 그런 겁니까?" "이 옷 호주머니 속에 명함 지갑이 들어 있고, 그 지갑 속에 편지가 들어 있소. 보시오, 기에 그 편 지요." 경감은 눈앞 테이블에 편지를 내동댕이치며 말을 이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소. '준비가 되는 대로 가뵙겠소. 곧 와주시오. F.H.M.(에프 에이치 엠)' 그것 보시오. 나는 처음부터 플로라 밀러가 세인트 사이먼 경 부인을 꾀어내어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숨겼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하고 있었소. 자, 보시오. 이 F.H.M.은 플로라 밀러의 머리글자요. 이 편지 를 그 부인에게 몰래 전하고서 꾀어낸 게 틀림없습니다." 홈즈는 웃으며 말했다. "대단합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 멋진 추리로군요. 편지를 좀 보여 주시겠소?" 이렇게 말하고서 내키지 않은 듯이 편지를 집어 들었으나, 곧 흥미를 느낀 모양인지 홈즈의 입에서 흐뭇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건 굉장한 건데." "어떻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실 테지요?" "생각하고말고요. 대단해!" 레스트레이드는 신이 나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다가 놀란 듯이 외쳤다. "저런! 뒷면을 보고 있군요." "아니, 이쪽이 앞면이오." "앞면이라고? 당치도 않은 소릴! 이쪽에 연필로 편지가 쓰여 있어요." "반대쪽은 호텔의 계산서 조각인 모야인데, 이게 흥미를 끄는군요." "거기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나도 아까 보았지만, '10월 4일, 방값 8실링, 아침식사 2실링 6 펜스, 칵테일 1실링, 점심식사 2실링 6펜스, 셰리주 한잔 8펜스'-라고 적혀 있을 뿐, 그밖엔 아무것 도 없어요." "그건 그래요. 그러나 이게 중요한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편지 쪽도 머리글자가 중요하니까 이것 역 시 대단합니다!" "어이구, 시간을 헛보냈군." 레스트레이드는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나는 난로 앞에서 탁상공론이나 늘어놓는 것보다는 실제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녕히 계십 시오, 홈즈 씨. 누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가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리고 젖은 옷가지를 자루 속에 넣고 돌아가려고 했다. 홈즈는 경감이 나가기 전에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트레이드, 당신에게 한 가지만 암시를 주겠소. 문제의 답을 가르쳐 드리지. 세인트 사이먼 경 부인이란 만든 이야기요. 그런 인물은 있지도 않고, 또 있었던 적도 없었소."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가엾다는 듯이 홈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길을 내게로 돌리며, 이마를 세 번 가볍게 두드리고서 뽐내듯이 고개를 흔들더니 급히 나가 버렸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남자> 경감이 문을 닫자마자 홈즈는 일어서서 외투를 입었다. "저 사람이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건 틀림없는 말이기도 해. 그러 니까, 와트슨, 자네는 잠시 동안 신문이나 읽고 있게나. 나는 나갔다 올 테니까." 홈즈가 나를 두고 나간 것은 5시가 지나서였는데, 나는 그 뒤에 따분할 틈도 없었다. 한 시간도 되 지 않아서 식료품 가게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배달부가 찾아왔다. 그는 데리고 온 소년과 함께 상 자를 열고서는, 놀라서 보고 있는 내 눈앞에서 테이블 위에 아주 사치스럽지만 약간 식은 저녁 식사 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차지찬 도요새 한 쌍에 꿩이 한 마리, 거위 간으로 만든 파이, 게다가 거미 줄이 붙은 낡은 술이 몇 병 곁들여져 있었다. 사환은 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9시 조금 전에 홈즈가 생기에 찬 모습으로 돌아 왔다. 엄숙한 얼 굴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의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홈즈는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아하, 밤참을 차려 놓고 갔군." "누가 오는가? 다섯 사람분을 차려 놓고 가버렸다네." "응, 두세 사람 올지도 모르네. 세인트 사이먼 경은 벌써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네만. 아,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아무래도 사이먼 경 같군" 곧이어 들어온 사람은 틀림없이 사이먼 경이었다. 그는 코안경을 한결 더 힘차게 흔들어대며, 귀족적 인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홈즈가 물었다. "심부름꾼이 찾아갔던가요?" "그렇소. 편지를 보고 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이야기겠지요?" "완벽한 증거가 있습니다." "세인트 사이먼 경은 의자에 깊숙이 앉아 이마에 손을 대었다. "우리 아버님은 뭐라고 하실까? 자식이 이같은 수모를 받은 것을 아시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지요. 수모라고 생각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거야 당신은 입장이 다르니까." "뭐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지요. 부인의 갑작스런 행동은 경에게는 물론 충격적인 일이겠지만, 그 와 같은 경우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부인은 어머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이렇게 절박한 일을 당했을 때 의논할 상대가 없었던 겁니다." 세인트 사이먼 경은 말했다. "아니, 수모입니다. 이건 분명한 수모입니다." "부인께서는 젊은 몸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여졌으니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아니, 누가 이해를 한단 말이오. 난 정말로 화를 내고 있는 거요. 이렇게 심한 수모를 당했으니." 홈즈가 말했다. "초인종이 울린 것 같습니다. 아, 계단에 발소리가 들립니다. 사이먼 경, 제 입으로 관대하게 해주시 도록 부탁드려도 소용이 없는 것 같으니, 제가 초대한 손님을 만나시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그리고는 문을 열고서 부인과 한 신사가 방으로 안내했다. "세인트 사이먼 경, 프랭크 헤이 몰턴 부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부인 쪽은 이미 잘 아실 줄 압니다만. " 방에 들어온 여성을 보더니 세인트 사이먼 경은 의자에서 펄쩍 뛰면서 외쳤다. "해티!" 그리고 눈을 내리뜨고 한 손을 프록 코트 가슴팍에 집어넣고 잠시 서 있었는데, 아닌게아니라 참으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몰턴 부인이 얼른 한 발자국 내디디며 손을 내밀었으나, 그 는 여전히 눈을 들어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아름다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그 로킷 속에 들어 있던 초상의 여인 도런 양, 아니 세인트 사이먼 경 부인이 틀림없지 않은가. 몰턴 부인은 사이먼 경에게 말했다. "화가 나셨군요, 로버트.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해요." 세인트 사이먼 경은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변명 같은 건 그만두시오." "당신에게 몹쓸 짓을 했고, 집을 나가기 전에 당신에게 설명드려야 한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는 어쩐지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있어서 이분 프랭크를 만난 뒤로는 제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저 자신도 모르게 되어버렸어요. 강단 앞에서 기절하지 않은게 이상 할 정도였어요." 홈즈가 물었다. "몰턴 부인, 사정을 말씀하시는 동안 저와 제 친구는 자리를 비우는 게 좋겠군요." 몰턴 씨라고 소개받은 남자가 나섰다. "이번 일에는 저희들이 너무 비밀을 지킨 탓도 있습니다. 저로서도 전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진 상을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몸집은 작아도 야무지게 생긴 남자가 깨끗이 면도를 한 얼굴로 날카롭고 재빠른 어조로 말했다. 몰턴 부인이 말했다. "그럼 저부터 말씀드리죠. 이분 프랭크와 저는 1884년 로키 산맥에 가까운 아버지의 광산에서 만났어 요. 그리고 결혼을 약속했어요.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는 노다지를 캐게 되어 졸부자가 되었짐나, 프 랭크의 광산 사정은 계속 악화되어가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폐광하게 되어버렸지요. 아버지는 계속 부 자가 되고 프랭크는 더욱 가난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아버지는 약혼을 취소시키려고 저를 샌 프란시스코로 데려갔어요. 하지만 프랭크는 단념하지 않았어요. 저의 뒤를 쫓아와서는 아버지 모르게 저를 만났어요. 아버지가 아시면 몹시 노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든 것을 우리끼리만 결정했어요. 프랭크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서 아버지와 견줄만한 부자가 된 후에 다시 저에게 돌아오 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프랭크가 살아 있는 한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요. 그러자 프랭크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결혼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당신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소. 그 대 신 돌아올 때까지는 결코 당신 남편이라고 나서지 않겠소.' 그래서 프랭크와 전 재빨리 서둘로 목사님께 찾아가 바로 그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프랭크는 사업을 일으키러 가고, 저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겁니다. 그 뒤 풍문으로 프랭크가 몬테나 주에 있었고, 다음에는 애리조나 주의 광산에, 또 그 다음에는 뉴멕시코 주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요. 그 뒤 아파치 인디언이 광산 마을을 습격하여 백인들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왔는데, 피 살자 명단에 프랭크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고 몇 달 동안 자리에 누워 버렸지요. 아버 지는 폐병으로 생각하셨는지 샌프란시스코의 의사들을 차례로 불러들였지요. 한 해가 지나도 프랭크 의 소식은 한마디도 없었으므로, 저는 프랭크가 정말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세인트 사이먼 경께서 샌프란시스코에 오시게 되었고, 저희 가족도 런던에 가게 되고 해서 세인트 사 이먼 경과 약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지만, 마음을 프랭크에게 쏟은 저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다시는 마음을 쏟지 못할 것으로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물론 세인트 사이먼 경과 결혼한 이상,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는 다할 생각이었어요. 경과 함께 강단에 나 갔을 때, 되도록 좋은 아내가 될 작정이었지요. 그렇지만 강단의 난간까지 갔을 때 문득 돌아보니, 맨 앞줄 자리에 프랭크가 서서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겠어요? 저는 처음엔 유령을 보지 않 았나 했어요. 하지만 다시 한번 돌아보니 역시 같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묻는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지요. 저는 용하게 쓰러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눈앞이 빙빙 돌며, 목사님 목소리는 마치 벌소리처럼 귓전에 울릴 뿐이었어요. 전 어찌할 바를 몰랐죠. 결혼식을 중지해 달라고 교회에서 소란 이라도 피워야 하는 걸까요? 또다시 프랭크를 바라보니, 제 생각을 눈치챈 모양인지 입에 손을 대고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종이쪽지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저에게 편 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식이 끝나 프랭크 앞에 지날 때 일부러 꽃다발을 떨어뜨리니까, 프랭 크는 꽃다발을 집어 돌려주면서 제 손 안에 쪽지를 살그머니 밀어넣었어요. 연락이 있으면 오라고 단 한 줄이 적혀 있더군요. 물론 저는 이렇게 된 바에야 누구보다도 프랭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씅니 까, 모든 것을 프랭크 말대로 하리라고 결심했지요. 집에 돌아와 하녀에게 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 하녀는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부터 프랭크를 알고 있었고, 늘 우리 편을 들어 주었지요. 저는 하녀에 게 비밀을 지키도록 하고 제 소지품을 뭉뚱그려싸고 망토를 달라고 했습니다. 세인트 사이먼 경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사이먼 경의 어머니나 신분이 높으신 분 앞 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무서웠어요. 그래서 지금은 이대로 도망치고 나중에 설 명하기로 마음을 정했지요. 파티 석상에 앉은 10분 뒤에 길 건너편에 프랭크가 있는 것이 창 너머로 보이더군요. 프랭크는 저에게 눈짓을 하고서 공원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가만히 빠져나와 준비를 하 고서 프랭크의 뒤를 쫓아갔지요. 그때,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세인트 사이먼에 관한 넋두리를 하더군 요. 별로 흥미를 가지고 듣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 이야기로는 사이먼 경에게도 결혼 전의 비밀이 있 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간신히 그 여자를 뿌리치고 곧 프랭크를 따라갔지요. 둘이서 영업용 마차를 타고 고든 광장에 있는 프랭크의 하숙집에 갔는데, 그거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 이었답니다. 프랭크는 아파치족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제가 프랭크가 죽 은 것으로 단념하고 영국에 건너간 것을 알고서는 바로 제 뒤를 좇아 영국에 와서 그 결혼식 날 아침 , 겨우 저를 만났던 거예요." 프랭크 몰턴이 그 뒤를 이어서 말했다. "신문에서 해티의 결혼식 기사를 보았죠. 교회 이름은 나와 있었지만, 집 주소는 나와 있지 않아서 곧바로 교회로 찾아갔지요." 몰턴 부인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둘이서 앞일을 의논했어요. 프랭크는 모든 것을 밝히자고 했지만, 저는 이번 일이 몹시 창피 해서 이대로 자취를 감추어 다시는 세인트 사이먼 경을 만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만은 간단한 편지를 써 보내서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지만, 파티에서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 는 신분이 높은 신사 및 부인들 생각을 하니까, 그저 무서운 생각만 들더군요.그래서 프랭크가 신부 옷 같은 것들을 뭉뚜윽려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 버리러 갔지요. 홈즈씨가 어떻게 제가 있는 장소를 아셨는지는 몰라도, 오늘 저녁때 찾아오셔서 제 생각이 잘못되고 프랭크 생각이 옳다고 분명하게 가 르쳐 주시더군요. 그렇지 않았으면 내일 파리로 떠났을 거예요. 더군다나, 홈즈 씨는 세인트 사이먼 경과 저희들만 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시기에 얼른 이쪽으로 찾아 온 거 예요. 로버트, 이제 모든 걸 말씀드렸어요. 걱정을 끼쳐 죄송하기 일르 데 없습니다만, 부디 저를 나 무라지는 말아 주세요." 세인트 사이먼 경은 준엄한 태도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마를 좁힌 채 입을 꼭 다물고 이 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냉정하게 말했다. "실례지만, 나는 은밀한 개인적 얘기를 이와 같이 남들이 있는 자리에서 해본 적이 없소." "그러면 용서해 주시지 않는군요. 작별의 악수도 해주시지 않나요?" "아니, 하고말고. 원한다면." 경은 손을 내밀어 몰턴 부인이 내민 손을 쌀쌀하게 쥐었다. 홈즈가 끼어들었다. "저로서도 화해의 뜻으로 함께 식사를 하셨으면 하는데요." 사이먼 경이 대답했다. "그건 좀 무리입니다. 이번 일은 내가 말없이 물러가겠소. 남의 잔치판에 낄 생각은 없소. 용서해 주 신다면 자리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 모두에게 고개를 약간 숙이고서 천천히 방을 나갔다. 홈즈가 말했다. "그렇다면 두 분만이라도 남아 주시겠지요? 몰턴 씨, 미국분과 만나는 건 대단히 즐겁습니다. 왜냐하 면, 나는 미국과 영국이 형제국으로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화기 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했다. 손님이 돌아간 뒤에 홈즈가 말했다. "이 사건의 재미는, 얼른 보기에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것이 아주 쉽게 풀려 나갔던 점에 있 었네. 몰턴 부인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만큼 자연스러운 결말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경시청의 레스트 레이드 경감 등은 결말만 보면 이보다 더 싱거운 일은 없게 되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 사건을 해결했단 말인가?" "처음부터 두 가지 사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네. 신부가 기꺼이 결혼식을 맞이한 사실과, 식장에서 돌아가는 잠깐 사이에 결혼을 후회하기 시작한 사실 말이야. 분명히 신부의 마음을 변하게 한 무슨 일이 아침에 생긴 거지. 그 일이 무슨 일일까? 집을 나가 줄곧 신랑과 함께 있었으니까, 누구와 이야 기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그렇다면 누굴 만난 걸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미국에서 온 사람임이 틀 림이 없을 것이네. 신부는 최근에 영국에서 막 왔으니까, 영국 남자중에 신부에게 인생의 방향을 변 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네. 이렇게 추리해 나가면 신부는 그 날 어떤 미국인과 만났다는 결론이 쉽게 나오지. 그럼 그 미국인은 누구이며, 또 어떻게 해서 그런 강한 영향력을 신부에게 끼칠 수 있었을까? 애인일지도 모르며, 또 남편일지도 모르지. 내가 듣건대, 신부는 처녀 시절을 거친 환경 속에서 보냈다고 했네. 나는 여기까지 추정을 한 뒤에 세인트 사이먼 경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가 한 이야기에서 교회의 맨 앞 줄에 앉아 있었던 남자, 신부 태도의 느닷 없는 변화, 편지를 전하기 위해 흔히들 떨어뜨리는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부가 '광산을 가로 채다.'라는 광산 용어를 사용한 것 등등을 듣고 있는 사이에 사건의 줄거리가 뚜렷하게 떠오르더군. 그렇다면 신부는 남자와 함께 도망을 쳤다는 얘긴데, 그 남자는 신부의 애인이나 본 남편일 거야. 아 니, 아마 본 남편으로 생각하는게 들어맞을 거라고 추리했었네."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두 사람을 찾아냈지?" "레스트레이드가 연못에서 주운 신부 옷에서 발견한 편지는 플로라 밀러가 쓴 것이 아니라, 그 남자 가 보낸 거야. 마침 남자 이름이 프랭크 헤이 몰턴이어서, 머리글자가 F.H.M. 이기 때문에 레스트레 이드가 착각을 한 거지. 머리글자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남자가 1주일 이내에 런 던의 일류 호텔에서 계산을 치른 사실을 알게 된거야." "어디서 일류라고 판단했나?" "값이 일류였기 때문이지. 방값 8실링, 세리주 한잔에 8펜스라는 건 최고급 호텔이 아니면 있을 수 없거든. 이런 일류 호텔은 런던에 흔하지 않아. 노섬벌랜드 가에서 두 번째 들어간 호텔에서 숙박부 를 조사하여 프랭크 H. 몰턴이라는 미국 신사가 전날 숙박한 걸 알아냈지. 그 계산서를 보니, 기재 사항이 편지의 것과 똑같았네. 게다가, 몰턴에게 온 편지는 고든 광장 226번지로 보내 주기로 되어 있더군. 그곳에 가보니 다행히도 사이좋은 두 사람이 집에 있기에, 아버지와 같은 충고를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특히 세인트 사이먼 경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어느 점으로 보아도 유리하다 고 타일렀지. 그리고는 여기 와서 사이먼 경과 만나라고 하고서 사이먼 경에게도 이리로 오도록 했네 . 그러나 결과는 재미가 적었어. 사이먼 경의 태도는 별로 관대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홈즈는 웃으며 말했다. "하긴 당연하지. 약혼에서 결혼식까지 성가신 절차를 밟기까지 했는데, 삽시간에 아내와 재산을 빼았 겼으니 자넨들 관대하게 굴 수는 없겠지. 우리는 세인트 사이먼 경을 탓하기에 앞서, 그분에게 관대 해야 했네. 그리고 절대로 그러한 처지에 빠질것 같지 않은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지 자네, 의자를 바짝 당겨 내 바이올린을 집어 주게. 아직도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문제는 오직 이 쓸쓸한 가을밤을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것뿐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