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기술자의 엄지 손가락 ?? 아서 코난 도일..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사건이 있었던 것은 1889년의 여름으로,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결혼한 뒤로 나는 홈즈를 혼자 남겨 두고 베이커가의 하숙 집을 떠났지만 수시로 홈즈를 찾아가서 시간을 보냈다. 내 병원은 날로 번창했다. 공교롭게도 병원이 런던 서쪽에 있는 패딩턴 역 근처 에 있었기에, 역 직원중에도 단골이 생겼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쉽게 치료해준 인연으로 사람을 만날때마다 우리 병원을 선전해 주기도 했 다. 어느 날 아침 7시경에, 가정부가 문을 노크하고는 패딩턴역에서 두 남자가 와서 진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옷을 급히 갈아 입고 병원으로 나가 보니, 그 단골 역 직원이 진찰실에서 나와 문을 닫고는 턱으로 안을 가리 키며 말했다.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선생님에게 보이는 것이 좋을 듯 해서요. 자,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는 내가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종종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진찰실에 들어가보니, 한 남자가 책상옆에 앉아 있었다. 한쪽 손에 손수건을 두 르고 있었는데 겉으로 피가 번져 있었다. 약 25살가량의 젊은이로 남자다운 체격에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좀 창백했다. 무엇인가에 혼이나서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젯밤에 커다 란 일을 당해 놔서.... 오늘 아침 패딩턴 역에 기차로 와서 의사를 찾았더니, 그 친절한 역 직원이 이리로 안내해 주더군요." 나는 책상 위에 내미는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 │ 빅터 해즐리 │ │ │ │ 기계 기술자, │ │ │ │ 런던 빅토리아 가 16의 A(4층) │ └───────────────┘ 나는 진찰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야간 열차를 타신 모양이군요. 지루했겠습니다." "아뇨, 지루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해즐리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의자에서 허리를 꺽고 는, 미친 사람처럼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 젖히는 것이었다. 나는 의사로서 이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자,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차가운 냉수를 갖다 주고서 마시게 했다. 해즐리는 물을 마시고 나자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았으나, 몹시 피곤한 듯 핏기가 없는 얼굴로 입을 열 었다. "추태를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걸 섞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에 브랜디를 약간 타서 다시 권했다. 그것을 마시더니, 청년의 얼굴엔 어느덧 핏기가 돌았다. "기분이 가라앉는군요. 그럼, 선생님. 엄지손가락을....아니 엄지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봐 주십시오." 해즐리는 직접 손수건을 풀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상처를 수도 없이 보았으 나, 청년의 손을 보고는 등줄기가 오싹함을 느꼈다. 엄지손가락이 있었던 자리에 시뻘건 해면처럼 피가 엉겨 있었다. "이거 지독하군요. 피가 많이 흘렀겠습니다." "많이 흘렸지요. 잘렸을 때는 정신이 아찔한 것이, 잠시동안 기절했었나 봅니다. 얼핏 정신을 차리고는 손목을 손수건으로 단단히 묶고 나뭇가지를 끼우고는 피 가 멎을 때까지 손을 어깨 위로 들고 있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외과 의사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나는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이 상처로 보아, 뭔가 무겁고 예리한 연장으로 내리친 모양이군요?" "고기를 써는 식칼 같은 거였습니다." "실수로 그랬나요?" "아뇨!" "아니, 그럼 사람을 죽일 셈으로 칼을 휘둘렀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럴 수가......" 상처를 소독하고 가제로 싸고는, 붕대를 매 주었다. 해즐리 청년은 의자에 기대 어 꾹 참고 있었으나, 가끔 아픈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자, 기분이 어떠십니까?" "한결 나아진 것 같습니다. 브랜디도 마시고 상처도 소독한 덕분에, 다시 태어난 느낌입니다. 하기야,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흥분하면 좋지 않으니까." "그렇겠군요.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경찰에 가서나 할 이야기니 까요. 하기야, 이 상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경찰에서 내 이야기를 믿어 줄지도 의문입니다. 그건 누구라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거니와, 증거가 될 만한 것도 달리 없으니까요." "허, 그런 문제의 해결을 원하신다면 경찰서로 가기전에 내 친구 셜록 홈즈라는 사람에게 가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 그분이라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물론, 경찰에도 신고를 해야겠지만, 그분 이 맡아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라 아니라 함께 가기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마차를 불러 타고 갑시다. 지금 가면, 아침식사도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안채로 급히 돌아가 아내에게 사정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5분뒤에는 해즐 리 청년과 함께 베이커가로 마차를 달렸다. 셜록 홈즈는 언제나처럼 신문의 찾는 난을 훑어보며, 가운을 입은 채로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하숙집 아 주머니에게 베이컨과 달걀 3인분을 준비시켜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홈즈는 해즐리 청년을 소파에 앉히고 머리에 베개를 괴게 한 다음, 머리맡에 물 을 탄 브랜디 잔을 준비해 놓고 말했다. "해즐리 씨, 당신이 겪은 사건이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 겠습니다. 그대로 편히 누워서 우선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피로를 느끼시면 그 술잔을 드시기 바 랍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박사님의 치료를 받고는 만사가 안정된 느낌입니다. 그럼 내가 겪은 이상한 경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홈즈는 큼직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나른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으나, 실은 예 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해즐리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해즐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습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하숙을 얻어 혼자 살고 있 습니다. 직업은 수력을 이용하는 기계 기술자로, 그리니지에 있는 이름난 기업체 에서 7년간 경험을 쌓았습니다. 2년전에 면허를 땄는데,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서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독립해 보고 싶어서 빅토리아가에 가게를 차렸 습니다. 누구나 독립된 사업을 시작하면 처음엔 고생하기 마련이지만, 내 경우는 더욱 심했습니다. 2년동안 별로 소득도 없는 일거리가 네뎃 건 들어왔을 뿐이었 지요. 그런데 어제 일이었습니다. 그만 가게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점원이 들어와 어 떤 남자 한분이 일관계로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들고 들어온 명함에는 '육군대령 라이샌더 스타크'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점원 뒤에서 그 예비역 대령이 큰 모습을 나타낸 것을 보니, 키는 보통 사람보다 큰 편이나 아주 깡마란 몸매였습니다. 그렇게 마른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 지만 그 마른 원인이 병 때문은 아닌것 같았습니다. 그 증거로 눈은 예리하게 빛 나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활달했고, 태도도 자신에 차 있었거든요. 복장은 검 소했지만 깔끔한 편이었고, 나이는 40세 안팎, 말투에는 독일어 엑센트가 섞여 있었습니다. '해즐리 씨입니까? 당신은 기술도 상당하지만 이해심이 많고 비밀도 굳게 지켜 주실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실례지만, 나를 그토록 좋게 평가해 준 분이 누구신지요?' '아니, 그건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것 같군요. 그리고 당신은 부모님이 돌아 가셨으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일에 관한 상의를 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일을 부탁하러 오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절대로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족이 많은 사람보다는 혼자 사는 분이 좋을 것으로 판단했지요.'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라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절대 일의 내용을 입 밖에 내 지 않겠다고요.' 대령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토록 의심에 찬 눈은 처음 보았습니다. 대령이 말했습니다. '그럼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이나, 일을 하는 동안과 끝난 뒤에도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약속합니다.' '좋습니다.' 대령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문을 홱 열어젖히더군요. 그러 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령은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다시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점원들은 흔히 주인이 하는 일을 알고 싶어하기에....이젠 안심입니 다.' 대령은 의자를 바짝 내 곁으로 끌고 와서는, 다시 그 의심에 찬 눈으로 날 찬찬 히 뜯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바싹 마른 사나이의 수상쩍은 행동에서 일종 의 불유쾌함과 두려움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손님을 놓쳐서는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뚝뚝하게 언성을 높였지요. '어서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룻밤이면 끝날일인데. 50기니면 어떻겠습니까?' '충분한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하룻밤이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한시간정도 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군요. 기능 이 떨어진 수압기를 손봐 달라는 일입니다. 어디가 나쁘다는 것만 지적해 주시 면, 나머지는 우리가 수리할 겁니다. 이 일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일은 쉬울 것 같군요.' '그럼 오늘밤 막차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로 말입니까?' '바크셔 군의 아이퍼드입니다 패딩턴역에서 기차를 타면 11시 15분에 아이퍼드에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마차를 역에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럼 역에서 먼가여?' '상당한 거리입니다. 우리 집은 아주 한적한 시골에 있습니다. 역에서 10km는 되 지요.' '그렇다면 오늘밤 안으로 돌아오기는 틀렸군요.' '그래서 주무시고 갈 방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로군요. 오늘 저녁 8시 차면 좋을텐데..' '우리들 사정으로는 밤늦게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런 무리한 사정이 있기에 일류 기술자에게 맡길 만한 보수로 당신 같은 아직 무명의 청년에게 부 탁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50기니의 돈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처지로서는 무시 못할 액수였던 것입니 다. '아니 좋습니다. 막차로 가 뵙지요. 그런데 그 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좀더 구 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이 방에서의 이야기를 누가 엿들을 위험은 없겠습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말하지요. 모직물의 마무리 과정에서 쓰이는 표백토는 아주 값비싼 것으로 잉글랜드에서도 이 흙이 산출되는 곳은 서너 군데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리딩에서 10km떨어진 곳에 땅을 약간 샀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도 그곳에 표백토층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그 층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그 좌우에 큰 층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오른쪽 층과 왼쪽 층은 남의 소유의 땅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의 주인들은 그곳에 금광만큼이나 값진 표백토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이 그 땅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 동안에 그 땅을 사 들이면 크게 횡재를 할 일입니다만, 당장에는 그럴 만한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 비밀을 이야기했더니, 그렇다면 내 땅밑의 층을 우선 비 밀리에 파서 그것을 팔아 이웃 땅을 살 자금을 마련해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얼마전에 그 일을 하기 위해 수압기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압기가 자꾸 고장을 일을켜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이 비밀이 새어나가서는 큰일입니다. 집에 기계 기술자가 드나든다는 것을 눈치채였다가는 의심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사실이 밝혀지면 이웃 땅을 사들일 희망은 물거픔이 되고 맙니다. 그런 까닭에서 오늘밤의 일은 극비에 붙여 달라는 겁니다.이해가 가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단 한가지 잘 모르는 점이 있습니다. 표백토라는 것은 자갈처럼 파 내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왜 수압기가 사용되는지 모르겠군 요?' 대령은 별일 아니라는듯이 즉각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 말입니까? 그건 우리의 독특한 방법입니다. 흙을 벽돌처럼 단단히 굳 혀, 뭔지 모르게 해서 파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 다. 이상으로 비밀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해즐리씨, 이제 나는 당신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그럼, 11시 15분에 아이퍼드역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꼭 가겠습니다.' '비밀을 꼭 지켜주십시오.' 대령은 다시 한번 탐색하는 눈초리로 내 표정을 살펴보고는, 차갑고 축축한 손으 로 악수를 나누고 급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일이 무척 비정상적인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보 수가 그와 비슷한 일의 10배나 되었거니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주 일거리가 굴 러 들어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손님의 얼굴이나 태도에서 받은 불유쾌한 인상이 남아 있 고, 또 표백토의 설명만으로는 왜 한밤중에 가야만 하는지, 또한 그 일이 남에게 알려질까 봐 그렇게도 쉬쉬해야 하는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걱정 도 팔자라고 생각하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패딩턴 역으로 갔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 작고 어두운 역에 내렸습니다. 그 역에 내린것은 나 혼자였는 데, 플랫폼에는 포터 한 사람이 졸린듯한 얼굴로 칸델라 등을 들고 서 있을 뿐이 었습니다. 그러나 역을 나오니 그 예비역 대령이 저쪽 어둠속에 서 있는 것이 보 이더군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 팔을 잡고서 문을 열고 기다리던 마차 속으로 떼밀다시피 태웠습니다. 양쪽 창문을 닫고는 마부석의 판자를 툭툭 치자, 마차는 전속력으로 내달렸습니다." 홈즈가 여기서 질문을 시작했다. "말은 한 마리였습니까?" "예, 한 마리가 마차를 끌었습니다." "말의 털 색깔을 기억하시는지요?" "예. 마차에 올라탈 때 얼핏 보니 밤색이었습니다." "말이 지쳐 있는 것 같던가요?" "아뇨, 기운차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계속해 주시지 요. 흥미가 있군요." "마차는 계속 달렸습니다. 적어도 한 시간은 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샌더 스타크 대령의 이야기로는 10km정도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속도와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20km는 될 것 같았습니다. 그 부근의 시골길은 도로 사정이 나쁜 모양인지 마차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도 대체 어떤 곳을 달리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창문에는 불투명한 곰보유리가 끼워져 있어서 가끔 지나가는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험한 길은 끝나고, 바퀴 소리로 보아 자갈이 깔린 길에 들어서더니 마침 내 멎었습니다. 대령은 마차에서 뛰어내려서는 지체없이 나를 데리고 눈앞에 열 려 있는 현관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즉, 마차에서 곧바로 현관안으로 뛰어든 꼴이 어서 집의 외관은 살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문이 닫히고는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안은 캄캄해서 대령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더듬더듬 성냥을 찾았습니다. 그러 자 갑자기 안쪽의 문이 열리고 불빛이 아른거렸습니다. 그곳에서는 한 여인이 램 프를 치켜 들고 앞으로 내밀듯이 서서 나를 뜯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여 인이더군요. 그 여인은 내가 모르는 외국어로 몇 마디 질문을 했는데, 대령이 무뚝뚝하게 거 기에 답변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램프를 떨어뜨릴 정도로 크게 놀라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대령은 여인에게 가까이 가서,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 삭이면서 여인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여보내고 램프를 받아들고 나에게로 와서 말했습니다. '잠시 이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대령은 그렇게 말하며 방 문 하나를 열었습니다. 깔끔하게 치장한 작은 방으로 한가운데의 테이블위에는 독일어로 된 책이 몇권 있었습니다. 대령은 램프를 문 곁의 오르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대령은 나를 남겨 두고 나가더군요. 테이블 위의 책을 보니, 독일어 는 모릅니다만 두권은 과학 논문이고, 한권은 시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 다. 시골의 밤 풍경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창가에 가 보았습니다만, 떡갈나무 로 짠 덧문이 내려져 있고 단단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더군요. 기분이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한 집이었는데, 복도 어디에선가 벽시계가 찰칵찰칵 움직이는 소리가 날뿐, 주위는 쥐죽은 듯 했습니다. 왠지 불안해졌습니다. 이 독일인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이곳은 어딜까? 아 이퍼드에서 15km내외 떨어진 곳이라는 것은 짐작이 갔지만, 그것이 남쪽인지 북 쪽인지, 혹은 서쪽인지 동쪽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불안을 씻어 버리려고 콧노래도 부르고, 어쨌거나 50기니를 손쉽게 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습니다. 그때 내가 있는 방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렸습니다. 아까 그 여인이 어둠을 배경으로 입구에 서 있고, 방안의 램프에서 흐르는 노란 불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격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떨리는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는 떠들지 말라는 시늉을 해보이더군요.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 며 서툰 영어로 말했습니다. '도망치세요. 어서요. 이곳에 있는건 위험해요.' '하지만 부인. 아직 일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기계를 보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안돼요. 어서 도망가세요.' 그러나 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서, 여인은 예의 같은 건 잊어버 리고 방안으로 들어와 내 손을 잡아 끌다시피 하며 애원하는 투로 말하더군요. '부탁입니다. 빨리 달아나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나는 원래가 고집이 세서, 특히 누가 설득을 하려고 들면 오히려 반발을 하는 성 미입니다. 내 머릿속에는 50기니의 보수와 지루한 여행, 그 동안의 수고등이 떠 올랐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물거픔이 된다는 것은 참고 견딘 보람이 없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부탁받은 일도 하지 않고, 받아야 할 보수도 포기한 채 줄행랑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 여인은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여인의 태도로 보아 심상치 않은것을 느끼면서도, 고집을 세워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인이 다시 한번 애원을 하려 했을때, 2층에서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오더군요.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습 니다. 여인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젠 틀렸다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고 서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곧이어 대령은 턱과 구분이 안될 정도로 목에 살이 찌고 토끼 모양의 수염을 기 른 키가 작달막한 남자를 데리고 와서 소개를 했습니다. '우리 회사 지배인인 피거슨입니다. 그럼 곧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기계가 있 는 곳으로 안내하겠으니 따라오십시오.' '모자를 쓰고 가야겠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집안에 기계가 있으니까요.' '아니, 집안에서 표백토를 판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흙만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상관할 것 없어요. 당신은 기계만 살펴보고, 어디가 나쁜지 지적만 하면 됩니다.' 램프를 손에 든 대령이 앞장서고, 뚱뚱한 지배인과 내가 뒤따라 계단을 올라갔습 니다. 미로 모양의 복도가 얽힌 옛날 집으로 좁은 나선 모양의 계단이 있었는데, 그것을 올라가니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의 문턱은 오랜 세월 동안 밟혀 활처럼 패여 있었습니다. 하여간 2층에는 융단도 깔려 있지 않았고 가구 같은 것 도 보이지 않았으며, 벽에서는 회가 벗겨져 내려왔고, 습기가 차서 곰팡내가 났 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여인의 허둥거리던 모습이 마 음에 걸렸으므로 두 사나이의 행동에 경계의 눈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리고 피거슨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나와 같은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 아차릴수 있었습니다. 스타크 대령은 좀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작은 철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열쇠를 꽂고서 문을 열었습니다. 방은 꽤나 작아서 셋이 모두 들어갈 수 없었기 에, 피거슨은 밖에 남고 대령과 나만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수압기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지금 누가 이 기계를 움직 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납니다. 이 방의 천장이 피스톤의 아래부분에 해당하므로, 그것이 내려오기 시작하면 몇 톤이나 되는 압력이 생겨 이 철판으 로 된 바닥을 짓누르게 됩니다. 이 바깝쪽에는 가는 파이프가 여러개 있어서 받 은 수압을 피스톤에 전달하는데, 그런 장치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고 있으리 라 생각합니다. 기계는 이상 없이 작동하는데, 어딘가 잘못된 곳이 있는 모양인 지 압력이 적게 나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고 알려주면 됩니다.' 나는 대령에게서 램프를 받아들고 기계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습니다. 상당히 용량이 큰 수압기로, 굉장한 압력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 운 전용의 레버를 밀어 보니, 픽 하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물이 새는 곳이 있어, 물이 파이프속에서 역류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잘 검사해 보니 운전봉 끝의 고무 바킹이 느슨해져서 틈새가 생겨 있었습니다. 압력이 줄어든 원인은 그것이 틀림없었기에 나는 두 사람에게 그것을 지적해 주 었지요. 그들은 주의 깊게 내 설명을 듣고는 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자세한 방법을 알려준 다음, 다시 한번 압착실로 돌아와 호기심을 갖고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표백토 이야기는 전혀 가공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이렇게 강력한 기계를 쓴다는 것 자체가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요. 사방의 벽은 나무였으나 바닥은 철판으로 되어 있고, 조심해서 살펴보니 바닥 전 면에 금속으로 된 엷은 껍질 같은 것이 널려 있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려 좀더 자 세히 보려고 금속 껍질을 긁어모으고 있는데, 독일어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 리더군요.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대령의 송장과도 같은 무서운 얼굴이 나를 부 릅뜬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뭘 하는 거지?' '당신의 표백토라는 것이 금속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 기계의 용도를 정확히 알 았다면 좀더 효과적인 조언을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곧 내 입이 가벼웠다는 것을 후회해야 했습니다. 대령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지고 그의 회색눈이 잔인스럽게 번쩍 빛났습니다. '좋아, 이 기계에 관해서 좀더 공부를 하게 해주지.' 대령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서서 작은 문을 덜컹 소리가 나게 닫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나는 철문 쪽으로 달려가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았지만 꼼짝하지 않 더군요. 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대령 나를 내보내 주시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고요한 공기를 가르고 들려온 소리에 나는 소르라치게 놀랐 습니다. 레버가 덜컹 움직이는 소리에 이어, 쉬익~~~ 하고 물의 압력이 피스톤에 전달되는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대령이 기계를 작동한 것입니다. 램프는 조금전에 바닥을 살펴보려고 놓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불빛으 로 검은 천장이 조금씩 내려앉는 것이 똑똑이 보였습니다. 이대로라면 나의 몸은 몇 분을 넘기지 못하고 형태도 없이 납작해질 것이 뻔했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철문에 몸을 부딪치고, 손톱으로 철판을 긁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 쳤지만 기계가 움직이는 굉음이 나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말았습 니다. 천장은 머리 위 5-6 cm까지 내려와 손을 내밀면 그 거칠거칠한 표면이 만 져졌습니다. 그때 머리속을 스친것이 죽을때의 몸의 위치에 따라 고통이 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엎드려 있으면 등뼈에 압력이 가해질 것인데, 그때 뼈가 튕겨져 나올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반대의 자세가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위를 보고 누워서 시 시 각각으로 그 검은 덩어리가 내려오는 것을 지켜볼 용기가 있을까요? 그때는 이미 곧장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천장은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얼핏 눈에 띈 것을 보고 마음속에 희망이 솟았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천장과 바닥은 쇠로 되어 있었으나, 사방의 벽은 나무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판자 사이에서 노란 불빛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천장에 밀려 판자의 틈새는 조금씩 넓어져 갔습니다. 처음에는 살아날 가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나, 필사적으로 몸을 부딪히 자 판자가 부서지며 나는 거의 실신 상태로 판자 저쪽으로 나뒹굴었습니다. 그리 고는 곧 램프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나고, 아래위의 철판이 맞닿는 둔탁한 금속성 의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실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지요. 그때 누가 내 손목을 마구 잡아 끄는 것을 느끼고 정신이 들었습니다. 나는 좁은 복도의 돌바닥 위에 쓰러져 있고, 한 여인이 내 손목을 잡아 끌며, 오른손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까 나에게 충고를 해준, 그 친절한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쪽으로! 빨리와요. 그 사람들이 곧 이리로 옵니다.. 당신이 눌려 죽지 않았다 는 알면 큰일이예요. 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에요. 어서 따라와요.' 이번에는 여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는, 여인의 뒤를 쫓아 복도를 달려 나선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계단 밑은 넓은 복도였는데 그곳까지 갔을 때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두 사나이가 서로 외쳐대는 고함이 들렸습니다. 한 사람은 위쪽에서, 한 사람은 아래쪽에서 서로 외치며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곁의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그곳은 침실이었고 창으로는 밝은 달빛이 비쳐 들고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어요. 높기는 하지만 뛰어내릴 수는 있을 겁니다.' 여인이 그렇게 말했을때, 복도 저쪽에 불빛이 나타나며 스타크 대령의 깡마른 그 림자가 한손에 램프를 들고, 다른 손에는 푸줏간의 커다란 식칼같은 것을 움켜 잡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는 지체없이 침실로 달려 들어가, 창문을 열어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달빛속에 떠오른 정원은 고요하고 아름다왔습니다. 창에서 아래까지는 넉넉히 10m는 되어 보였습니다. 나는 창틀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명의 은인을 악한이 어떻게 할 것인가가 궁금해서 잠시 창틀에 매달리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 었습니다. 만일 여인을 해치는 일이라도 있으면 달려 들어가, 어떤 위험을 무릅 쓰고서라도 구출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순간, 대령은 여인 앞을 지나 곧장 창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령에게 매달리며 소리질렀습니 다. '이봐요! 저번에 약속했잖아요. 다시는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저 사람, 아무 말도 퍼뜨리지 않을 거예요.' '엘리제, 당신 미쳤어? 우리를 파멸시킬 생각이군. 저 자는 이미 눈치챘어. 이걸 놓지 못하겠어?' 대령은 여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여 인을 밀어젖히자마자 창가로 달려와 그 무거운 식칼을 내리쳤습니다. 나는 창틀 에 매달린 손에 둔한 통증을 느끼며 창틀에서 손을 놓자, 내 몸은 땅위로 털썩 떨어졌습니다. 충격은 컸지만, 당행히 다친곳은 없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필사적으로 정원의 나무 그늘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달려가며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아까부터 심한 통증이 심한 왼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 지만, 엄지손가락이 끊겨져 나가고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겁니다. 손수건으로 상처 를 동여매려고 했지만 어지러움이 더해지며 장미 덩굴 속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을 떠보니 달은 이미 졌고, 환하게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땅 위에 피가 홍건했습니다. 그 심한 아픔속에서도 나는 간 밤의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일을 하나하나 생각해 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습니 다. 아직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위를 둘러보니 어젯밤의 그 집과 정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마구 달려왔었나 봅니다. 즉,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시골길 에 면한 나무 울타리속이었는데, 저쪽에 긴 건물이 보이기에 가까이 가보니 그것 은 바로 아이퍼드 역이었습니다. 손에 극심한 통증만 없었다면, 그 공포에 찬 어 젯밤의 일도 한낱 악몽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을 겁니다. 멍한 정신으로 역에 들어가 기차 시간을 물어 보니, 한 시간 남짓 기다리면 된다 고 하더군요. 어젯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본 포터가 있기에 스타크 대령이라고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 마차가 저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을 보았소?' '아뇨, 유심히 보질 않았습니다.' '이 부근에 경찰서는?' '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신이 몽롱해서는 5km나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일단 런던에 돌아와서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6시에 런던에 돌아와 친절한 역 직원의 안내로 박사님의 치료를 받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데, 이 사건에 관해 서는 홈즈씨에게 전적으로 맡길 생각입니다." 이상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셜 록 홈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터운 스크랩 북에서 신문 오린 것을 찾아내어 들고 왔다. "여기에 당신의 사건과 관계가 있음직한 광고가 하나 있습니다. 1년쯤전에 모든 신문에 났던 것인데, 내가 읽어 보겠습니다... '행방 불명. 이달 9일. 제레마이어 헤일링. 26세의 수력 기계 기술자, 밤 10시에 집을나가 돌아오지 않았음.. 복장은...' 바로 이 기술자가 수압기를 손봐주고 희생당한 사람일 겁니다." "아, 이제야 그 여인이 대령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해즐리가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그 대령이라는 자는 잔인한 작자로, 자신의 은밀한 일에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은 모두 해치우는 모양입니다. 자, 일이 이렇게 밝혀진 이상 지체 할 수는 없습니다. 기운이 남아 있다면 아이퍼드로 갈 준비를 하고 함께 경시청 에 들릅시다." 그로부터 세시간뒤, 우리들은 기차 속에 있었다. 일행은 셜록 홈즈와 그 기술자, 경시청의 브래드스트리트 경감과 사복 형사 한명, 그리고 나였다. 경감은 좌석 탁자위에 아이퍼드 역 부근의 지도를 펴놓고 역을 중심으로 컴퍼스로 열심히 원 을 그리고 있었다. "자, 보십시오. 이 원은 역을 중심으로 반지름 20km를 나타낸 겁니다. 범죄 현장 은 원 둘레 어디엔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20km가량 되는 곳이라고 했지요, 해 즐리씨?" "마차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허둥지둥 역까지 달려왔거나 놈들 이 마차에 당신을 실어 길가에 버리고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의문점을 말했다. "그들이 당신을 마차로 실어다 버렸다면, 왜 당신을 발견했을 때 살해하지 않았 을까요? 그 여인의 만류에 못 이겨 자비심이라도 생겼을까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령의 얼굴에는 자비심 같은건 찾아볼 수도 없었 으니까요." 해즐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건 차차 알게 되겠지요. 문제는 놈들이 이 원의 어느 지점에 근거지를 두 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경감의 말에 홈즈가 입을 열었다. "그 지점이라면 내가 점찍어 드릴 수 있습니다." 경감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요? 이미 확증을 잡았나요? 그럼, 누가 홈즈씨의 의견과 일치하는지 서로 의 생각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남쪽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쪽이 가장 한적 한 지역이니까요." 해즐리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나는 동쪽으로 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라고 동쪽을 주장했다. 사복 형사는 서쪽이라고 말했다. "나는 서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쪽으로는 외딴집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까 요." "나는 북쪽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까닭인즉, 북쪽으로는 언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즐리씨의 이야기에는 마차가 비탈길을 올라 갔다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말하자 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게도 네 사람의 의견이 각기 다르군요. 그럼, 홈즈씨의 의견을 들어봅시 다." "모두가 틀린것 같습니다." "모두라니? 한 사람은 맞을 게 아닙니까?" 홈즈는 원의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아이퍼드역 근처라고 생각합니다. 놈들은 그 근처에 있습니다." 홈즈의 말에 해즐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20km나 달렸는데도요?" "10km갔다가 10km되돌아오면 20km가 되지요. 이건 간단한 덧셈입니다. 마차를 탈 때, 말은 원기 왕성하고 윤기가 흐르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20km 나 되는 험한 산길을 달려온 말은 아닙니다." 브래드스트리트 경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 만합니다. 놈들이라면 능히 그만한 잔꾀는 부릴 만하겠군요. 그 일당이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윤곽을 잡았으니까요." 홈즈가 말을 받았다. "경감의 추측대로 놈들은 대규모의 위조 은화 주조단입니다. 그리고 압축기는 은 대신에 합금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었을 겁니다." "꼬리가 잡히지 않은 위조 은화 주조범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은 벌써 알고 있 었습니다. 반 크라운짜리 가짜 은화가 나돌기 시작한 것이 6개월이 넘었으니까 요. 어느 선까지는 추적이 되었습니다만, 그 이상은 캄캄했습니다. 아주 교활한 작자들이라 여간해서 꼬리를 들어내지 않았는데, 이번 사건은 그 돌파구를 마련 해 준 셈입니다. 이로써 놈들을 일망 타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감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 일당은 법망에 걸리는 운명은 아니었 던 것이다. 기차가 아이퍼드역에 도착했을때, 가까이의 숲너머 쪽에서 거대한 연기 기둥이 피어올라, 한가로운 농촌 풍경위에 멀리까지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때, 플랫폼에 나와 있던 역장에게 경감이 물어보 았다. "화잰가요?" "예, 맞습니다." "언제 시작되었나요?" "간밤에 시작된 모양인데, 지금쯤은 꺼졌을 겁니다." "누구의 집입니까?" "베처 의사댁입니다." "베처 의사란 독일인으로 깡마르고 매부리코에 키가 큰 사람이 아닌가요?" 역장은 픽 웃고 말았다. "천만예요, 베처 의사는 영국인인데다, 이 부근에서 그 의사만큼 품격이 있는 분 도 드뭅니다. 턱이 안 보일 정도로 살이 찐 편인걸요. 하기야, 의사댁에 머물고 있는 신사 한 분은 대조적이지요.. 그 의사의 환자라고 합니다만, 그분은 외국 인인데다 바크셔 군의 질 좋은 쇠고기를 먹고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깡말랐지 요." 역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화재 현장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은 낮은 언덕을 넘어 이어져 있었다. 언덕위에 올라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벽에 흰 회를 바른 집이 보였다. 정원에는 소방차가 세대 늘어서 있고, 소방수들이 마지막 불 길을 잡고 있었다. 해즐리가 흥분해서 외쳤다. "저 집이다! 자갈을 깐 마차길이 있고, 내가 뛰어든 장미 덩굴도 보입니다... 나 는 저 두번째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홈즈가 말했다. "하여간 당신의 복수는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이 놓아둔 석유 램프가 수압기에 박살이 나며, 그 불이 둘레의 나무 판자에 옮겨 붙은 것이 틀림없습니 다. 그러나 놈들은 당신을 뒤쫓는 데 정신이 팔려 불이 붙은 것도 몰랐던 거지 요. 혹시 구경꾼들중에 일당이 섞여 있을지 모르니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어쩌 면 지금쯤 100km이상 멀리 도망갔을지도 모르지만..." 홈즈의 예상은 사실로 나타났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그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 서도, 또 인상이 고약한 독일인에 대해서도, 그리고 말수가 적고 뚱뚱한 영국인 에 대해서도 전혀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그날 밤 새벽에 몇 사람이 탄 마차가 유달리 큰 상자를 싣고서 급히 달려가는 것 을 보았다는 한 농부의 말을 끝으로 범인들의 행방은 홈즈의 지혜로써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소방수들은 건물 내부에 낯선 시설에 크게 놀랐지만, 3층 침실밖에 떨어져 있는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보고는 더욱 혼비백산,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완전히 진화가 되었지만, 지붕은 무너져 내리고 벽만이 앙상하게 남았다. 그리고 수압기 역시 몇개인가 구부러진 원통과 철관만 을 남기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창고에서는 다량의 니켈과 주석이 발 견되었지만, 화폐는 한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범인이 싣고 갔다는 상자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기술자가 쓰러진 장미 덩굴 속에서 길가의 나무 울타리까지 어떻게 이동했는 가는, 정원의 흙이 부드러운 덕분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히 두 사람에 의해 부축을 받고 운반되었던 것인데, 그 한 사람은 작은 발자 국을 남겼고, 다른 하나는 유달리 발자국이 컸다. 아마도 말수가 적고 뚱뚱한 영 국인은 대령만큼은 냉혹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여인을 도와 의식을 잃은 기술자 를 안전한 곳까지 운반해 갔던 것이리라.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 속에 자리잡고 앉자, 해즐리는 자못 분하다는 투로 말했 다. "제길, 재수가 없으려니 엄지손가락을 잃은데다가 50기니의 보수마저 날렸으니, 이게 무슨 꼴이람!" 홈즈가 웃으면 말했다. "그곳도 경험입니다. 경험은 언제고 유용하게 살릴 수가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을 구해 준 그 여인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