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The Adventure of The Christmas Pudding) Agatha Christie 著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에르큘 포와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중간에서 방해받아 끊어졌다. 물론 아주 무례한 태도는 아니 었다. 그것은 그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설 득하려는 듯 은근하면서도 교묘한 제지였다. "제발 그렇게 간단하게 거절하지는 마십시오, 포와로 씨. 국가의 중대사 가 달린 문제이니까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상부에서도 아주 감사 히 여길 겁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에르큘 포와로는 손을 내저었다. "사실 그 부 탁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하군요. 매년 이맘때쯤에는―" 제스몬드 씨는 다시 그의 말을 막았다.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로군 요." 그가 끈기있게 말을 이었다. "영국의 시골에서 지내게 될 고풍스러 운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에르큘 포와로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이맘때쯤의 영국의 시골을 생각해 보는 일은 그로서는 별로 유쾌한 일이 못 되었던 것이다. "아주 재미있고 고풍스러운 크리스마스 말입니다!" 제스몬드 씨는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글쎄요― 나는 영국 사람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 다. "우리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란 아이들이나 즐기는 날이죠. 우리가 진 짜 명절로 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설날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아, 예―" 제스몬드 씨가 말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아주 큰 명절에 속합니다. 자신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킹스 레이시에서라면 선생님도 그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으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곳은 아 주 유서가 깊은 훌륭한 저택이니까요. 그 저택의 일부분은 14세기에 지어 진 것이지요." 포와로는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쳤다. 14세기 영국의 장원 영주의 저택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그는 우선 걱정부터 앞섰다. 그가 영국 시골에 있는 유서깊은 저택들에서 고생을 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스팀 난방 장치와 바람 한점 들어오지 못하게 최신식 공법으로 지어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편안하고 현대적인 아파트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난 겨울에는-" 그는 잘라 말했다. "런던을 떠나지 않는답니다" "포와로 씨, 선생님은 이번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잘 모르고 계 신 것 같군요." 제스몬드 씨는 같이 온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포와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스몬드 씨와 함께 포와로를 방문한 또 한 사람은, "처음 뵙겠습니다." 라는 정중하고도 형식적인 인사말만 한마디했을 뿐,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지금도 그는 자리에 앉아 커피빛이 도는 얼 굴에 아주 낙심한 표정을 띤 채 잘 닦여진 자기의 구두만 내려다보고 있 었다. 그는 채 스물 세 살도 되어보이지 않는 아주 젊은 청년이었는데, 확실히 아주 난처한 처지에 처해 있는 듯했다. "아, 예―"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물론 그것이 중대한 일이기야 하 겠지요. 나도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충심으로 전하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지금 상황이 아주 미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제스몬드 씨가 말했다. 포와로는 그 젊은 청년에게서 눈을 돌려 좀더 나이가 든 방문객을 쳐다 보았다. 제스몬드 씨는 한마디로 세심함이란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제스몬드 씨한테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그 세심함 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훌륭한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눈 에는 그리 잘 띄지 않는 옷차림,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 듣기 좋을 정도의 말투, 좋은 가문 사람임을 나타내는 쾌활한 목소리, 관자놀이 부근에 약 간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한 엷은 다갈색의 머리카락, 창백하면서도 진지해 보이는 얼굴. 에르큘 포와로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제스몬드 씨 같은 사람 들을 수없이 만나왔었고, 또 그들은 모두 판에 박은 듯이 '극히 미묘한 상황'이라는 문구를 적절히 사용했었다― "경찰들도―"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세심하게 처리할 수가 있을 텐데요." 제스몬드 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경찰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그러니까―우리가 찾 으려고 하는 것을 되찾기 위해서 재판하는 것까지야 피할 도리가 없겠지 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의혹은 갖고'는 있지만 '아는 것'은 별로 없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딱한 일이로군요." 에르큘 포와로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동정이 그를 찾아온 두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의 오산이었다. 그들이 구하 러 온 것은 동정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었기 때문이다. 제스몬드 씨는 다시 한 번 영국의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 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그가 말했다. "정말 옛날 그대로의 크리스마스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호텔에서 보내고 있습니다만, 영국에서는 본래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가족이 다 집 안에 모이지요. 어린아이들과 그 애들이 걸어놓은 양말, 크리스마스 트리, 칠면조와 건포도를 넣은 푸딩, 크래커(양끝을 당기면 터지면서 과자, 종 이 모자 따위가 튀어나오는 장난감), 창밖에는 눈사람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서 에르큘 포와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눈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눈이란 것이 사람들의 주문만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무리 영국의 크리스마스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기상대에서 일하는 제 친구 한 사람과 통화를 했었지 요." 제스몬드 씨가 말했다. "그 친구 말로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가 이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그 말을 듣자 에 르큘 포와로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부르르 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눈을 만나다니!" 그가 말했다. "그것은 더더욱 끔찍한 일입니 다. 그저 넓기만 하고 냉랭한 석조로 된 장원시대의 영주의 저택이라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스몬드 씨가 말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사 정이 아주 많이 달라졌지요. 석유를 이용한 중앙난방장치가 되어 있으니 까요." "킹스 레이시에 석유를 이용한 중앙난방장치가 있다는 말인가요?" 포와 로가 이렇게 되물었다. 처음으로 그도 마음이 약간 동하는 듯했다. 제스몬드 씨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그가 말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훌륭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지요. 또 방마다 스팀 난방장치가 다 되어 있고요. 정말 자신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포 와로 씨, 겨울철의 킹스 레이시는 안락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따 뜻한 저택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지요." "그럴 리는 없을 겝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아주 숙련된 솜씨로 제스몬드 씨는 말머리를 약간 돌렸다. "선생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이 곤란한 상황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가 솔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문제란 것이 별로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부유하고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도 꽤 있는 미 개국의 통치자의 외아들이자 미래의 왕위 계승자인 한 젊은 청년이 몇 주일 전에 런던에 도착했다. 그의 조국은 바야흐로 혼란과 불안정의 시기 를 거치고 있는 중이었다. 완고하게 동양의 생활습관을 지켜나가고 있는 그의 부왕에 대해서는 여론도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왕자에 대해서는 문제가 달랐다. 그들은 그에 대해서 약간 불안해 하고 있었다. 왕자의 행 동에서는 종종 서양의 사고방식 같은 것이 나타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그의 행동은 국민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그와 결혼하게 될 신부감은 같 은 왕가의 사촌누이로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까지 한 아가씨였는데, 자기 조국에서는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에 서양의 생활방식이 드러날까 봐 매우 조심하고 있었다. 결혼식 날짜가 발표되자 그 젊은 왕자는 왕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보석 몇 개를 카르티에에서 현대적인 형태 로 다시 가공하기 위해 직접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 보석 가운데에는 아 주 유명한 루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명한 보석상에서 그 루비를 어울 리지 않는 구식 목걸이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그 다음에 생각지도 못한 장애가 생겨 나고 말았다. 아주 돈많고 놀기 좋아하는 젊은 청년이 약간 재미있다고 볼 수 있는 우행(愚行)을 저지르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 다. 그 정도로 끝났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젊은 왕자들이란 으레 그런 식으로 즐기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이 왕자가 이곳에서 만 난 여자 친구와 함께 본드 가(街)(런던의 고급상점가)를 산책하고, 그녀가 그에게 베풀어 준 즐거움에 보답하기 위해 에메랄드 팔찌나 다이아몬드 로 된 클립 같은 것을 사준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왕자다운 행동이라고 보아넘길 수도 있었다. 지금의 그의 부왕도 잠시 자기가 상대한 댄서들에 게 늘 캐딜락 자동차를 선물하고는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왕자는 그 정도를 넘어 아주 무분별한 짓을 저지르고 만 것 이다. 어떤 숙녀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는 그녀 에게 새롭게 가공된 그 유명한 루비를 선뜻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 중에는―단 하루 저녁만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한 번 몸에 달게 해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어리석게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후편은 간단하지만 비극적인 것이었다. 저녁 식사 뒤에 그 숙녀는 콧잔 등의 화장을 다시 고쳐야겠다고 하면서 화장실로 갔다. 그리 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출입문으로 그 건물을 빠져나간 뒤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곤란하게 된 일은 새로 가공된 그 루비마저도 그녀와 함께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발표된다면 아주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 명한 일이다. 그 루비는 보통 루비가 아니라 커다란 의미가 담긴 유서깊 은 가보였기 때문에, 그 루비가 사라지게 된 전후 사정이 사정인만큼 만 일 그 이야기가 부당하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아주 중대한 정치상의 문제가 일어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제스몬드 씨는 그러한 사정을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대단히 쓸데없는 말들로 그 이야기를 싸서 포장했던 것이다. 정확히 제스몬드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에르큘 포와로도 잘 모른 다. 살아오면서 제스몬드 씨 같은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보았다. 그가 내 무성이나 외무성, 혹은 좀더 비밀스러운 어떤 국가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 는 사람인가 하는 점은 분명치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는 영연방의 이익 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루비를 다시 꼭 찾아내야만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묘하게 말을 돌리면서, 그것을 찾아낼 사람은 포와로밖에 없다 고 제스몬드 씨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그렇겠지요." 에르큘 포와로도 그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 신이 나한테 해준 이야기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암시―의심―이런 것들은 모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아니, 그렇게만 말씀하지 마시고요, 포와로 씨, 틀림없이 선생님의 솜씨 라면 안될 것이 없을 겁니다. 오, 정말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라고 해서 항상 성공하란 법은 없지요." 하지만 이 말은 겉치레에 불과한 겸손일 뿐이었다. 자기가 그 일을 맡는 다는 것은 곧 그 일이 성공한다는 의미와 같다는 것은 포와로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왕자님은 아주 젊은 분입니다." 제스몬드 씨가 말했다. "따라서 젊 은 한때의 실수로 평생을 파멸시키게 된다면 그건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포와로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젊은 청년을 부드러운 눈길로 쳐 다보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할 시기이지요. 젊었을 때는 말입니다." 그는 용기를 북돋워주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사실 보통 평범한 젊은이가 그 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인자한 아버지가 전부 돈을 대줄 것이고, 집안의 변호사는 귀찮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그 젊은이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의 교 훈을 얻기만 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그 모든 일은 그런대로 다 잘 해결되 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왕자님과 같은 신분에 계신 분에게 있어서 이 문 제는 상당히 곤란한 겁니다. 결혼 날짜는 다가오지요―" "그렇습니다. 정말 그래요." 처음으로 그 젊은 청년의 입에서 말이 튀어 나왔다. "선생님도 그녀가 무척 진지하다는걸 아실 겁니다. 그녀는 삶을 아주 진지하게 살아갑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진지한 사상들을 아주 많이 배웠지요. 우리 나라에도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를 세워야 한 다,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모 든 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그녀는 늘 주장해 왔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시 대가 우리 아버지의 시대처럼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녀도 물론 내가 런던에서 기분을 내고 있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스캔들까지 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겁니다. 절대로 말예요! 문제는 스캔들입니 다. 아시겠지만 그 루비는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그 루비에는 긴 발자취 와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유혈사건들―수많은 죽음들!" "죽음이라― 에르큘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제스몬드 씨를 쳐다보았다. "제발―" 그가 말했다. "이 사건이 그렇게까 지 발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스몬드 씨는 마치 달걀을 낳으려던 암탉이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려고 주춤하고 있을 때처럼 기묘한 소리를 냈다. "아뇨, 아뇨,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확신하건대 '그런' 일이 벌어질 염려는 전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지금 그 루 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든간에 그 루비를 차지하려고 노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은 남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제스몬드 씨가 아까보다도 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런 추측까지 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이로울 게 없는 생 각이니까요." "나― 갑자기 완전히 외국인이 되어버린 듯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 나, 나는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길을 탐험합니다." 제스몬드 씨는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 습니까, 포와로 씨? 선생님은 킹스 레이시에 가주시는 거지요?" "그럼, 나는 무슨 자격으로 그곳에 가게 되는 겁니까?" 에르큘 포와로가 물었다. 제스몬드 씨는 염려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문제라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 드리지요." 그가 말했다. "자신있게 말씀드리지만 모든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레이시 가족을 만나보시면 그들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 란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정말 유쾌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얘기한 그 석유를 이용한 스팀 난방장치에 대한 이야기 가 거짓말은 아니겠죠?" "거짓말이라뇨? 그럴 리가 있나요." 제스몬드 씨는 아주 기분이 상한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신하지만, 선생님도 모든 것이 아주 편안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완전히 현대적인 쾌적함이라―" 무슨 추억거리라도 생각이 난 듯 포와 로는 불어로 혼자 중얼거렸다. "좋아요." 그가 불어로 말했다. "받아들이 기로 하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레이시 부인과 함께 세로로 창살이 쳐져 있는 커다란 창 문들 중 하나 옆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 킹스 레이시 저택의 그 긴 응접실의 실내 온도는 적당히 쾌적하다고 느낄 만한 화씨 68도(섭씨 20 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레이시 부인은 바느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 다고 그녀가 자수를 놓고 있었다거나 비단 위에다 꽃을 수놓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고 그녀는 접시를 닦는 행주의 가장자리를 꿰매는 그런 재미없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바느질을 하면서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을 때 포와로는 아주 매력적인 목소 리라고 생각했다. "포와로 씨, 저희 집 크리스마스 파티를 맘껏 즐겨 주시면 좋겠군요. 물론 아시겠지만 그 파티에는 우리 집안 식구들만 참석한답니다. 제 손녀와 손자, 그애의 친구가 한 명, 그리고 제 조카딸인 브리짓, 사촌인 다이애나, 그리고 아주 오랜 친구인 데이비드 웰윈이 참석하기로 했지요. 정말 가족들만 모이 는 파티랍니다. 하지만 에드위나 모어쿰의 얘길 듣자니 당신은 정말 크리스 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고 싶어하신다더군요. 정말 옛스러운 크리스마스 를 말예요. 옛스럽기로 한다면 우리집 사람들만큼 옛스러운 사람들도 없지 요! 아시겠지만, 제 남편도 완전히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는 분이니까요. 그 이는 자기가 열두 살 소년이었을 때와 똑같이 모든 것이 그래도 있는 것을 좋아해서 마치 방학 동안에 집에 돌아와 있는 듯이 행동한다니까요." 그녀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오래 전과 모든 것이 다 똑같지요.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양말을 매달고, 굴로 만든 수프와 칠면조 요리―두 마리가 필요해요, 한 마리는 삶고 또 한 마리는 구어야 하니까―반지와 독신인 사람의 단추를 넣어 만든 건포도 푸딩. 그 밖에도 그 푸딩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간답니 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6펜스짜리 은화는 넣지 않아요. 요즘엔 정말 순수 한 은으로만 만들어진 은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디저트는 옛날 그대로죠. 엘버스 플럼과 칼스배드 플럼, 아몬드와 건포도, 설탕에 절인 과일과 생강. 이런, 내 정신 좀 봐, 마치 '포트넘 앤드 메이슨'사(社)에서 나오는 목록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요." "부인 말씀을 듣고 있자니 군침이 마구 도는군요." "내일 저녁때가 되면 아마 모두 심한 소화불량에 걸리고 말 거예요." 레이 시 부인이 말했다. "하긴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먹어대는 것 같지는 않 죠?" 그때 창문 밖에서 커다란 함성과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문득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밖을 흘끗 쳐다보았다. "밖에서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 생각엔 아마 무슨 놀이인 가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아시겠지만 저는 늘 요즘의 젊은애들이 우 리집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지겨워하지나 않을까 무척 걱정스럽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색은 전혀 안 보이고 오히려 그 반대지요. 지 금은 제 아들과 딸, 그리고 그애의 친구들이 오히려 크리스마스에 대해 비 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답니다. 그애들은 집에서 지내는 크리스마스 같은 것 은 모두 어리석은 짓들이고, 너무 번거로우니까 어디 호텔 같은 곳으로 가 서 춤이나 추는 것이 더 낫다고 공공연히 말들을 하지 뭐겠어요. 하지만 그 애들의 자식들은 이런 집에서 지내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레이시 부인은 현실적인 얘기를 덧붙였다. "학교에 다 니는 애들은 늘 배가 고프잖아요? 제 생각에는 세 사람이 먹는 양만큼은 먹 어치운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예요." 포와로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까지도 이댁의 가족 파티에 참석토록 해주시다니 정말 부인과 바깥 양반에게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부인." "오, 무슨 말씀을. 기쁜 쪽은 오히려 우리인걸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호레이스가 조금은 무뚝뚝해 보이더라도―"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신 경쓰지 마세요. 알게 되겠지만 그건 그이의 천성이니까요." 사실 그녀의 남편인 레이시 대령은 이렇게 말했었다. "왜 당신은 그런 쓸데 없는 외국인을 초대해서 크리스마스를 망쳐놓으려는 거요? 다른 때 그를 초 대할 수는 없었소? 외국인은 싫단 말야! 아, 알겠소, 알겠어. 그래, 에드위나 모어쿰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단 말이지? 아니, 그래, '그녀'가 이 이로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왜 '자기'집 크리스마스 파티에 그를 초대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 이유는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레이시 부인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맘때쯤이면 에드위나는 항상 클래리지에 가니까요." 그녀의 남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엠, 당신, 혹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을 꾸미다뇨?" 푸르른 눈을 크게 치뜨며 엠이 되물었다. "물론 그 럴 리가 없죠. 내가 왜 그러겠어요?" 늙은 레이시 대령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지막하고도 굵게 울려퍼 지는 웃음이었다. "엠, 내 눈을 속이려 들지 마오."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 렇게 아주 순진한 척하고 있다는 것은 곧 당신이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 다는 얘기니까." 그런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레이시 부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에드위 나는 어쩌면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 얘기로는 언젠가 당신이 당신 친구들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군 요―지금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그런 친구들을 말예요. 제가―저, 당신 은 제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시겠죠?" 포와로는 격려하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레이시 부인은 나이가 70에 가까운 노부인으로, 쪽 곧은 아름다운 몸매와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복숭아빛으로 물든 뺨과 푸른 눈동자, 약간 우스꽝스럽게 생긴 코와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을 갖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포와로가 말했다. "제 가 듣기로는 젊은 아가씨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약간 불행한 연애사건이 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레이시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로군요. 제가―저,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신한테 얘기하고 싶어하다니 말예요. 당신 은 우리집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인데 말예요……" "게다가 외국인이기도 하지요." 포와로가 이해하겠다는 듯이 덧붙였다. "맞아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에드위나는 당신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글쎄,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그 데스몬드 리―워틀리라는 청년에 대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고 계시 지나 않을까 한 거죠." 포와로는 제스몬드란 남자의 교묘함과,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어쿰 부인을 어렵지 않게 이용한 그 솜씨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듣기에 그 청년은 평판이 그리 좋지가 않은 것 같더군요." 그가 조심 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정말 그렇답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이 나 있죠! 하지만 그런 것 은 새라에게 있어서 아무 소용도 없답니다. 젊은 여자애들에게 그 남자는 아주 평판이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를 해보세요. 그렇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 어요? 그 말은―그 말은 오히려 그애들을 자극하는 결과만 된답니다." "부인 말씀이 정말 옳습니다." 포와로가 말했다. "제가 젊었을 때는―" 레이시 부인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오, 맙소사, 정말 아주 오래 전의 일이로군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어른들이 우리한테 어 떤 젊은 남자를 조심하라고 얘기를 해주면 그 말은 오히려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높여주는 결과만 되어, 혹시라도 그 남자와 춤을 추게 되었다거나 아니면 어두운 방안에 둘이만 남아 있게 되면―"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 뜨렸다. "제가 호레이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에서죠." "얘기를 해보시지요." 포와로가 말했다. "부인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겁니까?" "제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답니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며느리도 새라가 태어나자마자 곧 세상을 떠났지요. 그래서 그 애를 우리가 맡아 길 러 왔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 애를 잘못 길렀는지도 모르죠―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가능하면 그 애를 항상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사람들도 세대차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한 거죠. 물론 요 즘의 여자애들도 당연스레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지만요." 포와로는 묻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는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새라는 요즘 그애들 말로 하면 커피바라는 곳을 자주 드나들었던가 봐요. 그애는 춤추러도 잘 안 가려 하고 사교계 같은 곳에 잘 나가려 하지 도 않죠. 대신 그애는 강변에 있는 첼시(런던 남서부의 자치구로, 과거에는 예술가·작가들이 많이 살았다)에 너저분한 방을 두 개 빌려놓고, 요즈음 젊 은애들이 입고 싶어하는 괴상한 옷들을 입고 다니는 거예요. 때로는 까만 양말을 신기도 하고, 아주 화려한 녹색 양말을 신기도 하면서 말예요. 아주 두꺼운 양말이죠. (정말 따가울 거라는 생각이 늘 들었답니다!) 게다가 그애 는 머리를 감거나 손질도 하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그런 거라면 아주 자연스런 일이지요." 포와로가 불어로 말했다. "요즘의 유행이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애들도 그런 것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그래요. 그것은 저도 알고 있답니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그런 일 뿐 이라면 저도 그리 걱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애는 그 데스몬드 리―워틀리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는데, 그 청년은 정말 평판이 아 주 나쁜 사람이란 말예요. 그 청년은 부유한 여자들한테 얹혀 살아가는 건 달이랍니다. 그래도 젊은 여자애들은 그 청년한테 아주 흠뻑 반해 버리는 것 같아요. 호프 집안의 아가씨도 하마터면 그 청년하고 결혼하게 될 뻔했 는데, 그녀의 친척들이 재판소 같은 곳에 가서 그 아가씨를 피후견인으로 삼아버리는 바람에 다행히도 그 일이 흐지부지 되어버렸죠. 물론 호레이스 도 바로 그런 조치를 취하려 하고 있답니다. 그이 말로는 그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포와로 씨, 저는 그 방법은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두 사람은 함께 도망을 쳐서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아니면 아르헨티나 같은 곳으로 가서 는 결혼을 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동거생활을 하게 될 거란 얘기에요. 그런 짓들이 법정모독죄인가 하는 법에 저촉될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그게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더 욱이 만일 아이라도 생겨 보세요. 결국에는 우리가 고집을 꺾고 그애들을 결혼시킬 수밖에 없죠. 그리고 나면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1∼2년이 지난 뒤에 이혼해 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면 그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지내다 가 또 한 1∼2년쯤 뒤에 사람이 좋기는 하지만 무디기 그지 없는 남자와 결 혼을 해서 그제서야 안정을 찾게 되겠죠. 하지만 만일 그 첫 번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 되겠죠. 아이 로서는 양아버지가 아무리 잘 해준다고 해도 친아버지와는 다른 법이니까. 역시 제 생각에는 제가 젊었을 때 한 것처럼 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군 요. 저는 첫사랑의 남자란 항상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 었답니다. 저도 한때 어떤 젊은 남자한테 흠뻑 빠져든 적이 있었죠―그런데 그 남자의 이름이 뭐였더라?―정말 이상한 일이지 뭐예요. 그 사람 이름이 전혀 생각나질 않다니! 티비트, 그게 그의 성(姓)이었죠. 티비트 청년. 물론 우리 아버지는 얼마 동안은 그가 우리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댄스 파티에 초대받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곤 했죠. 그리고 때로는 몰래 빠져나와 늦 게까지 같이 있었던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친구들이 우리 두 사람을 함께 소풍에 초대하기도 했어요. 물론,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욱 가슴 설레고 재미가 있었죠. 하지만 그때에는―그러니까, 요즘 애들처럼 '아무 짓'이나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티비트 집안이 이 고장에서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리고 나서 4년 뒤에 다시 그를 만나보았 을 때 어떻게 제가 그런 사람을 좋아했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 다. 정말 아주 별 볼일 없는 사람 같더라니까요. 싼 게 비지떡이었다고나 할 까.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죠?" "사람이란 항산 자기가 젊었을 때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죠." 약 간은 훈계조로 포와로가 말했다. "저도 알아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정말 짜증나는 일이라는 걸 말예요. 제발 저라도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텐데. 그건 그렇다 해도 어쨌든 전 새라 를, 그 귀여운 애를 데스몬드 리―워틀리와 결혼시키고 싶진 않답니다. 그애 와 지금 이곳에 와 있는 데이비드 웰윈은 옛날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죠. 서 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호레이스와 저는 나중에 그애들이 자라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하지만 지금 그애는 데이비드를 그저 멋없는 청년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애는 완전히 데스 몬드에게만 빠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부인, 저로서는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만." 포와로 가 말했다. "부인은 이번에 그 데스몬드 리―워틀리라는 청년도 초대해서 지 금 이 집에 그 청년도 함께 묵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잇는데요?" "그것은 제가 일부러 그런 거예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호레이스는 그 애에게 그 청년을 절대 만나지 말라고 했어요. 물론 호레이스가 젊었을 때 라면 아버지나 보호자가 말채찍을 들고 그 청년이 묵고 있는 하숙집으로 쳐 들어갔을지도 모르죠! 호레이스는 그 청년에게 이 집에 드나들지 말라고 얘 기한 다음, 그애에게도 그 청년을 만나지 말라고 얘기하겠다고 하더군요. 하 지만 전 그이에게 그런 조치는 잘못이라고 얘기해 주었어요. 전 이렇게 얘 기했죠.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청년을 이곳으로 내려오게 해서 우리집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가족 파티에 초대하기로 합시다.'라고 말예요. 물론 남편은 저더러 미친 짓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하여튼, 여보, 한 번 그렇 게 해보도록 해요. 우리집에서, 우리집만의 분위기 속에서 그애를 그 청년과 만나도록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그 청년에게 아주 잘 대해줘야 해 요, 아주 정중하게 말예요. 그렇게 되면 그애에게도 그 청년이 좀 멋없어 보 일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말했죠." "제가 보기에도 그런 방법이 일리는 있을 것 같군요, 부인." 포와로가 말했 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부인의 생각은 아주 현명한 것 같습니다. 남편분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말입니다." "글쎄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레이시 부인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아직까지는 그리 효과가 있는 것같지가 않아요. 하긴 그 청년이 이곳에 온 지가 겨우 이틀밖에 안되긴 했지만." 그녀의 주름진 뺨에 갑자기 보조개 가 생겨났다. "포와로 씨, 사실은 당신한테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저 역시도 그 청년을 좋아하게 되었거든요. 정말 '진심으로' 그 청년이 좋아진 것은 아 니지만 어쨌든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오, 그래요, 새라가 그 청년한테서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저도 알 것만 같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또 그 청년이 전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는 걸 알 정도의 경험은 충분히 쌓은 사람이지요. 설사 제가 그 청년과 즐 겁게 지내게 된다고 해도 말이죠. 그렇긴 해도―" 약간 생각에 잠긴 표정으 로 레이시 부인이 덧붙여 말했다. "그 청년에게도 몇 가지 장점은 있는 것 같거든요.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그 청년은 이곳에 자기 누이동생을 데리 고 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그의 누이동생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대요. 그 청년 말로는, 그 누이동생이 병원 침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 가엾은 일이니 만일 큰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 누 이동생을 데리고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만일 그렇게 되면 그 녀를 보살피는 일은 자기가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까 글 쎄 어쩌면 그 청년이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뭐겠어요." "마음 씀씀이가 되었다는 얘기인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청년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오, 저도 모르겠어요. 돈 많은 젊은 여자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 도 자기 가족만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노릇일 테니까요. 아 시겠지만, 새라는 아주 부자가 될 거예요. 우리가 그애한테 물려주는 유산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물론 우리가 남겨주는 대부분의 유산은 손자인 콜린 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애한테로 가는 몫은 그리 많지가 않 답니다. 하지만 그애의 엄마가 아주 부자였기 때문에 새라가 21살이 되면 그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어요. 물론 지금 그애의 나이는 겨우 20살 이지만요. 아니에요, 데스몬드가 자기 누이동생을 생각해 줄줄 아는 것을 보 면 역시 그에게도 착한 구석은 있는 것 같아요. 그 청년은 자기 누이동생이 아주 멋있다는 둥 그런 얘기는 하지 않더군요. 다만 제가 듣기로는 그 누이 동생이 속기 타이피스트인데―런던에서 비서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 자신이 말한 대로 자기 누이동생한테 식사를 날라다 주 고 있지요 물론 항상 그러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자주 그렇게 하는 편이랍 니다 그래서 저도 아, 그 사람에게도 몇 가지 좋은 점이 있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레이시 부인이 굳게 결심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 새라가 그 청년과 결혼하기를 바라지는 않는 답니다." "소문이나 제가 들은 얘기로 미루어보아도―" 포와로가 말했다. "틀림없이 그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실 방법이 없을까요?" 레이시 부인이 물었다. "물론, 방법은 있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기대를 걸지 는 마십시오. 데스몬드 리―워틀리 같은 사람들은 워낙 교활하기 때문이지 요, 부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무슨 방법 이 생기겠지요. 이번 크리스마스 축제에 이곳으로 저를 초대해 주신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주 위를 둘러보았다. "요즘에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벌이는 일도 그리 쉽지가 않 아요." "정말 그래요." 레이시 부인은 한숨을 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 포와로 씨, 제가 정말로 꿈꾸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제가 갖고 싶어하 는 것이 무엇인지 말예요." "말해 보시지요, 부인." "전 말예요, 현대식으로 지어진 작은 방갈로(베란다가 있는 목조 단층집)을 갖고 싶답니다. 아니, 꼭 방갈로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전 단지 여기 정 원 한귀퉁이에 길다란 복도 대신 최신식 설비를 갖춘 부엌이 달려 있는 아 주 아담하고 현대적인 집을 하나 지어 거기서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거죠. 일을 하더라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말예요."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실 텐데요, 부인?"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니까 문제죠. 남편은 이 집을 무척 사랑하고 있거 든요. 그이는 이곳에서 사는 것을 '좋아해요.' 생활하기에 약간 불편한 것은 별로 개의치도 않는답니다. 불편을 불편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숲 속에 있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작은 집에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싫어하지요.'" "그렇다면 부인은 남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부인 자신의 소망은 희생시 키고 있는 거로군요?" 레이시 부인은 다시 똑바로 몸을 고쳐 앉았다. "포와로 씨, 전 그걸 희생이 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전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서 그이와 결혼한 것이랍니다. 그이는 오랜 세월 동안 저한테 좋은 남편이 되어주었고, 또 저를 아주 행복하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저 역시 그이를 행 복하게 해주고 싶답니다." "그렇다면 부인은 계속 이 집에서 사시겠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사실은 그렇게 많이 불편한 것은 아니랍니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오, 천만에, 불편하다뇨." 포와로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와는 정반대로 아주 편한데요. 이 댁의 중앙난방장치와 더운 물이 나오는 설비는 완벽합니다." "이 집을 살기 편한 집으로 고치는 데 돈이 많이 들었죠."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우리는 땅을 약간 팔았답니다. 발전의 기회, 전 그렇게 말한답니다. 다행히 그 땅은 숲의 반대쪽에 있어서 이 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요. 사실 볼품도 없고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지만, 우리는 아주 괜찮은 액수를 받 았답니다. 그 덕분에 이 집을 가능한 한 많이 수리할 수가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하인들은요, 부인?" "아, 그 문제요. 사실 그 문제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아요. 물론 옛날처럼 보살펴주고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마을에서 사람들이 와주고 있답니다. 아침에 일을 거들어주러 여자 들이 두 사람 오고, 점심때는 식사를 마련하고 설거지를 해주는 다른 여자 들이 두 사람 오고, 저녁때는 또 다른 여자들이 오지요. 하루에 두세 시간만 와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아요. 물론 크리스마스 때에는 우리 가 아주 운이 좋은거예요. 로스 부인이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와주니까요. 그 부인은 요리 솜씨가 아주 훌륭하거든요. 정말 일류급이랍니다. 그 부인은 10년 전부터 일을 하지 않고 있지만, 급히 일손이 필요할 때면 우리를 도와 주러 오죠. 그리고 페브렐도 있어요." "댁의 집사 말이지요?" "그래요. 그 사람도 일을 그만두고 연금을 받으면서 문지기집 가까이에 있 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어요. 그는 정말 헌신적인 사람이에요. 크리스마스 때마다 시중을 들러 오겠다고 고집을 피우곤 하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포와 로 씨, 전 겁이 난답니다. 그는 너무 늙고 위태위태해서 그가 무슨 무거운 것이라도 나를라 치면 그걸 떨어뜨릴 것만 같아 불안하답니다. 정말 그가 일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니까요. 게다가 그 사람은 심장 도 좋은 편이 못 되어서 그가 너무 과로할까 봐 걱정이 된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사람한테 여기에 오지 말라고 하게 되면 그는 정말 기분이 상해버 릴 거예요. 그는 못마땅한 듯 쯧쯧 혀를 차면서 우리집에 있는 은제 식기들 의 상태를 살펴보지요. 그리고나서 여기에 온 지 채 사흘도 되기 전에 그 그릇들을 다시 깨끗하게 해놓는답니다. 그래요. 그 사람은 정말 충실한 친구 랍니다." 그녀는 포와로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크 리스마스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지요. 게다가 화이트 크리스마 스도 되어줄 것 같군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보이 죠? 눈이 오고 있어요. 저런,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군요. 포와로 씨, 그애들 을 만나봐 주세요." 그들에게 포와로가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우선 지금 학생인 손자 콜린과 그의 친구인 마이클에게 소개되었는데, 그애들은 열다섯 살의 예의가 바른 소년들로서 한 소년은 까만색 머리를, 또 한 소년은 금발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의 사촌인 브리짓에게 소개되었는데, 그 소녀는 자기 사촌과 같은 나이 또래로 검은 머리에 아주 발랄해 보였다. "그리고 이애는 제 손녀딸 새라랍니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포와로는 약간 흥미를 가지고 새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붉은 더벅머리를 하고 있는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태도는 신경질적이면 서도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자기 할머니를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듯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리―워틀리 씨랍니다." 리―워틀리는 선원들이 입는 저지와 몸에 꽉 붙는 검정색 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약간 길었고, 아침 면도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와는 대 조적으로 그 다음에 데이비드 웰윈이라는 청년이 소개되었는데, 그는 상냥 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실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으로, 분명 비누와 물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인 듯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또 다른 사람은 잘 생기고 약간 강렬한 인상의 아가씨로 다이애나 미들턴이라고 소개되었다. 간식이 나왔다. 납작한 핫케이크와 크럼펫(핫케이크의 일종), 샌드위치, 그 리고 세 종류의 케이크가 있는 간식이었다. 소년들이 맛있는 듯 간식을 먹 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레이시 대령이 들어와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렇 게 말했다. "아, 차로군. 나도 좀 주구려." 그는 아내에게서 찻잔을 받아들고 핫케이크를 두 조각 집은 다음 데스몬드 리―워틀리 쪽으로 기분나쁜 시선을 슬쩍 던졌다. 그리고 나서 가능한 한 그와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짙은 눈썹과 햇볕에 그을린 붉은 얼굴을 한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지주의 저택 주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농부 같은 인상을 주는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군." 그가 말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문제가 없 겠는걸." 간식을 먹고 나자 모두들 제각기 흩어졌다. "저애들은 이제 가서 테이프 레코더를 들으면서 놀 거예요." 레이시 부인이 포와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눈초리로 방을 나서는 손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투는, "어린아이들은 장난감 병정을 갖고 놀 거예요."라고 할 때의 말투 그대로였다. "저애들은 녹음기를 마치 전문가처럼 다룬답니다. 물론―" 그녀가 말했다. "아주 어른스럽게 말예요." 그러나 소년들과 브리짓은 호수로 가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얼 음이 꽁꽁 얼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오늘 아침에는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 이야." 콜린이 말했다. "호지킨스 할아버지가 안된다고 하시잖아. 그 할아버 진 항상 너무 조심성이 많단 말야." "산책하러 나가지 않을래요, 데이비드?" 다이애나 미들턴이 부드러운 목소 리로 물었다. 데이비드는 새라의 붉은 머리를 쳐다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데스 몬드 리―워틀리의 팔짱을 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의 곁에 서 있 었다. "좋아." 데이비드 웰윈이 말했다. "그래, 산책이나 가지, 뭐." 다이애나는 재빨리 그의 팔짱을 꼈다. 그들은 정원으로 나가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새라가 말했다. "데스몬드, 우리도 가지 않을래요? 집안에 있으면 가슴이 아주 답답해요." "누가 산책하고 싶대?" 데스몬드가 말했다. "내가 자동차를 내올께. '얼룩 멧돼지'에 가서 한잔 마시자고." 새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마켓 레드베리에 있는 화이 트 하트로 가요. 그쪽이 더 재미있을 것같아요." 그녀는 결코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데스몬드와 함께 이 지방에 있는 선술집에 가는 것만은 왠지 본능 적으로 꺼려하고 있었다. 딱 꼬집어 그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런 행동은 킹스 레이시 집안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킹 스 레이시 집안의 여자들이 '얼룩 멧돼지'와 같은 선술집을 드나든 적은 이 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막연하나마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늙은 레이시 대령과 그 부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데스몬드 리―워틀리에게 말하면 아 마 그는 그렇게 얘기해 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새라는 순간 짜증이 났다. 그녀는 그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할아버지나 엠 할머니같이 좋은 분들의 기 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분들은 정말 자상했고, 사실 그녀가 첼시에서 왜 그런 식으로 살고 싶어하는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 도 그녀 마음대로 살아가게 해주고 있었다. 물론 그건 엠 할머니 덕분이었 다. 만일 할아버지만 계셨더라면 무슨 소동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새라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데스몬드에게 킹스레이시에서 지낼 것을 권유한 것도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엠 할머니였다. 엠 할머니는 옛날부터 지 금까지 변함없이 그녀를 귀여워해 주고 있었다. 데스몬드가 자동차를 꺼내러 먼저 밖으로 나가 버리자 새라는 다시 응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켓 레드베리에 다녀올께요." 그녀가 말했다. "그곳에 있는 화이트 하트 에 가서 한잔하고 오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약간 도전적으로 들렸지만 레이시 부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그러려무나." 그녀가 말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데이비드와 다이애나는 산책을 나간 모양이더구나. 정말 잘된 일이야. 다이 애나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것은 정말 명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리다니 참 슬픈 일이지 뭐냐―겨우 스물두 살밖 에 안됐는데―나는 그애가 곧 다시 결혼하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새라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엠 할머니, 할머니는 지금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계신거죠?" "그리 큰일은 아니란다." 레이시 부인은 신이 난 듯 말했다. "내 생각에 그 애가 데이비드에게는 적격인 것 같구나. 물론 데이비드가 새라 너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다만, 너는 그를 싫어하는 것 같으 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니? 게다가 그 청년은 너한테 맞는 타입도 아닌 것 같고 말야. 하지만 난 그가 계속 불행하게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싶지가 않구나. 그래서 다이애나가 그에게 정말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 지." "엠 할머니, 마치 중매쟁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걸요." 새라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단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늙은 여자들이란 항상 그런 법이니까. 내 생각이지만 다이애나는 벌써 데이비드가 맘에 든 모양이더구 나. 너는 그애가 데이비드에게 적격이라고 생각지 않니?"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새라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 다이애나는 너 무 지나치게―그러니까 너무 정열적이고,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어요. 만일 데이비드가 그녀하고 결혼하게 되면 아마 따분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 될걸 요." "그거야 나중에 두고 보면 알 게 되겠지."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아무튼 너는 그 사람한텐 관심이 없잖니?" "사실, 그래요." 새라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덤벼 들기라도 할 듯 말을 덧붙였다. "할머니는 데스몬드를 좋아하죠? 그렇죠, 엠 할머니?" "그야, 나도 그 청년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레이시 부인 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를 좋아하시지 않아요." 새라가 말했다. "글쎄, 아직은 할아버지한테 그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니?" 레이 시 부인이 설득력있게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생각이 바뀌면 맘을 돌리 시게 되겠지. 그러니, 얘야, 할아버지한테 너무 재촉하지는 말거라. 늙으면 생각 하나를 바꾸는 데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이란다. 더구나 할 아버지는 특히 더 완고한 분이시잖니?"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또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전 개의치 않아 요." 새라가 말했다. "언제든 제가 마음만 내키면 데스몬드와 결혼해 버릴 테니까!" "알겠다, 얘야. 알겠어. 하지만 그 문제는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잖니. 할아버지의 태도 여하에 따라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너도 알 고 있겠지? 너는 아직 성년이 아니란다. 앞으로 1년만 더 지나면 너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 물론 그때까지는 호레이스도 생각을 바꾸게 될 테지만 말이다." "할머니, 할머니는 제 편이 되어주시는 거죠, 예?" 새라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 할머니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애정이 가득 담긴 키스를 했다. "나는 네가 행복하게 되기만을 바란단다."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아! 네가 좋아하는 그 청년이 저기에 차를 꺼내왔구나. 난 말이다, 요즘의 청년들이 입고 있는 아주 몸에 꽉끼는 바지가 좋더구나. 그걸 입으면 아주 스마트해 보이거든―하지만 한 가지, 안장다리가 너무 두드러져 보이는게 흠이긴 하 지만 말이다." 그래, 데스몬드는 안장다리야, 새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전에는 그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자, 얘야. 가서 즐겁게 놀다 오렴."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차를 타기 위해 방을 나서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자기가 초대한 그 외국 손님 생각이 나서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재 안을 들 여다보니 에르큘 포와로는 기분좋게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미 소를 짓고는 홀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가서 로스 부인과 식사문제를 의논하 기 시작했다. "자, 가실까요. 미인 아가씨." 데스몬드가 말했다. "당신이 선술집 같은 곳 엘 간다니까 식구들이 굉장히 화를 냈겠지? 정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시 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라니까. 그렇지?" "우리집 사람들은 그런 일로 화 같은 것은 내지 않아요." 차에 올라타면서 새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외국인 친구를 이곳으로 초대한 걸까? 그 사람은 사립 탐정이라면서? 대체 이곳에 사립탐정이 왜 필요하다는 거지?" "아, 그 사람은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새라가 말했다. "에드위 나 모어쿰 할머니가 그 사람을 이곳으로 초대해 달라고 부탁을 했대요. 내 가 알기로는 그 사람이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일을 그만두었다더군요." "이젠 쓸모없는 낡은 마차에 불과하단 말이지." 데스몬드가 중얼거렸다. "아마 그 사람은 옛날부터 전래되어 온 영국 고유의 크리스마스를 구경하 고 싶었을 거예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새라가 말했다. 데스몬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그런 것은 시시한 짓거리지 뭐 야."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참아낼 수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라고." 새라는 앞으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올리며 도전적으로 턱 을 앞으로 내밀었다. "난 그게 재미있다고요!" 그녀가 도전적으로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내일은 그런 일은 집어치우자고. 스카보로 같은 곳으로 가버리는 거야." "아무래도 난 그럴 수가 없어요." "왜?" "오, 그렇게 되면 모두들 기분이 상해 버릴 테니까." "오, 그런 헛소리는 그만둬! 당신이 그런 어린애들이나 하는 감상적인 바보 놀음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면 서 뭘 그래." "글쎄, 사실을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새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집에서 벌어질 크리스마스 파티를 굉장히 손꼽아 기다려 왔다는 사 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문득 자기가 무슨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기분 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사실 그런 일이 재미있었지만 데스몬드에게 그렇다 고 시인하기가 왠지 부끄러웠다. 크리스마스나 가정생활 같은 건 별로 재미 있는 일이 못 된다고 데스몬드가 늘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동안 이었지만 그녀는 크리스마스 때에 데스몬드가 이곳으로 내려오지 말았었으 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속으로 데스몬드가 제발 이 곳으로 내려오지 말기만을 빌었었다. 고향집에서 데스몬드와 만나기보다는 런던에서 그와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년들과 브리짓은 여전히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문제를 두고 열심히 토론하면서 호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송이가 계속 흩 날리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머지 않아 곧 큰눈으로 변할 것 같았다. "밤새도록 눈이 내릴 모양이지." 콜린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아침 때까지 는 틀림없이 2피트 정도는 눈이 쌓일 거야." 그런 기대로 모두들 가슴이 부풀었다. "그럼 우리는 눈사람을 만드는 거야." 마이클이 말했다. "정말 멋진 생각이야." 콜린이 찬성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랫동안 눈사 람을 만들지 못했었어―그래, 네 살 때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었어." "난 그걸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브리짓이 말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들은 우선 눈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된다는 얘기야." "포와로 씨의 모습을 본따서 만드는 건 어때?" 콜린이 말했다. "눈사람에다 커다랗고 검은 콧수염을 달아주는 거야. 가장용품(假裝用品)을 넣어두는 상 자 안에 콧수염이 하나 들어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마이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포와 로 씨가 어떻게 지금까지 사립탐정 일을 해왔는지 말야. 정말 옛날에는 어 떻게 변장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니까." "그건 그래." 브리짓이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그 아저씨가 돋보기를 가지 고 돌아다닌다든지 단서를 찾는다든지, 아니면 발자국 같은 것을 재는 모습 은 상상도 가지 않는다니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 콜린이 말했다. "그 아저씨 앞에서 연극을 하나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연극을 하다니?" 브리짓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 아저씨 앞에서 살인극을 하나 벌이는 거야." "정말 멋진 생각인걸." 브리짓이 말했다. "그럼 눈속에 시체가 하나 굴러다 닌다든지 하는―그런 식의 얘기로 말이지?" "맞았어. 그럼 그 아저씨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게 아니겠 니?" 브리짓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몰라." "눈만 내려준다면―" 콜린이 말했다. "무대장치는 완벽해지는 거야. 시체와 발자국―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거야. 할아버지가 갖고 계신 단검중에서 하나를 슬쩍해야 되겠고, 핏자국도 몇 개 만들어놓아 야겠지." 그들은 걸음을 멈춘 채,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흥분 한 목소리로 토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옛날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곳에 그림물감이 한 통 있어. 그걸 섞어서 피를 만들자―진홍색이면 될 거야." "진홍색은 너무 핑크색에 가까울 것 같은데." 브리짓이 말했다. "약간은 갈 색이 섞여야만 한다고." "그럼 누가 시체 노릇을 할 건데?" 마이클이 물었다. "내가 할께." 브리짓이 재빨리 대답했다. "어, 이것 봐." 콜린이 말했다. "이 일을 생각해 낸 사람은 바로 나라고." "오, 안돼, 안돼." 브리짓이 말했다. "내가 시체 역(役)을 맡아야 해. 그 역 은 여자가 맡아야 하는 거란 말야.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아름다운 소녀가 살해당한 채 눈속에 쓰러져 있는 거야." "아름다운 소녀라고! 오호, 그래?" 마이클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 다. "내 머리카락이 까만색이잖니." 브리짓이 말했다.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니?" "나 참, 그래야 눈 위에서도 잘 드러날 것이 아니냔 말야. 게다가 난 빨간 색 잠옷을 입을 거니까." "빨간색 잠옷을 입게 되면 핏자국이 잘 안 보이잖아." 이런 일을 경험해 보 기라도 한 듯 마이클이 말했다. "하지만 눈이 배경이니까 그렇게 해야 더 효과적으로 보일 것 아냐." 브리 짓이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흰색 털로 짠 숄이 하나 있으니까, 핏자국은 거기에다 묻히면 되는 거야. 오, 정말 멋있을 것 같지 않니? 참, 그런데 정 말 그 아저씨가 우리한테 속아 넘어가 줄까?" "우리가 잘 해내기만 한다면 속아 넘어갈 거야." 마이클이 말했다. "눈 위 에는 네 발자국과 시체 있는 쪽으로 갔다가가 다시 되돌아나온 또 한 사람 의 발자국만을 남겨놓는 거야―물론 어른의 발자국으로 말야. 그 아저씨는 남아 있는 발자국들이 지워지지 않도록 애를 쓸 테니 네가 정말로 죽어 있 는 것이 아니라는 건 모르게 될 거야. 그런데 말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마이클은 말을 멈췄다. 다른 친구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아저씨, 정말 그런 장난을 했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아,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문제 없다는 투로 브리짓이 말 했다. "우리가 그저 자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해 주 시겠지. 크리스마스날 벌이는 잔치 같은 것이라고 말야." "크리스마스에 그런 놀이를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생각해보는 눈초 리로 콜린이 말했다. "그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아주 화를 내실지도 모르잖 아." "그럼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하지, 뭐." 브리짓이 말했다. "그래, 크리스마스 다음날이 딱 좋겠다." 마이클이 찬성했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더 벌 수 있어." 브리짓이 마이클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준비해 두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말야. 지금부 터 가서 우리가 사용할 소도구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집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날 저녁은 매우 분주했다. 홀리(크리스마스 장식용 서양 감탕나무)와 미 슬토(겨우살이. 다른 나무 가지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를 대량으로 들여왔고, 식당 한쪽 구석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 트리를 장식하거나 그림 액자 뒤에 홀리 가지를 꽂거나, 홀 안의 적당한 곳에 미슬 토를 달아두는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런 구닥다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그래." 빈정대는 어조로 데스몬드가 새라에게 나지막하게 속 삭였다. "우리집에서는 항상 이렇게 해왔어요." 새라가 두둔하듯이 쏘아붙였다. "말도 안돼!" "오, 이젠 그만해요, 데스몬드. 난 이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으니 까." "오, 새라, 당신이 그럴 리가 없어!" "글쎄요, 사실―사실은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하지만―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자, 눈오는 밤, 자정 미사에는 누구누구 갈 거지?" 12분 전 12시에 레이시 부인이 물었다. "전 가지 않겠습니다." 데스몬드가 말했다. "자, 새라, 이리 와." 그녀의 팔을 잡고 그는 서재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레코드 판 을 뒤적거렸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고." 데스몬드가 투덜거렸다. "그런데 자정 미사라니!" "그래요." 새라가 말했다. "오, 그건 정말 그래요." 그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 중 몇몇이 외투를 걸친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 는 둥 온통 부산을 떨다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집을 나섰다. 두 소 년과 브리짓, 데이비드와 다이애나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교회로 출발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멀리 사라져 갔다. "자정 미사라니!" 레이시 대령이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젊었을 때 에는 자정 미사엔 결코 간 적이 없어. 미사라고? 세상에! 소위 카톨릭 교인 들이라는 사람들이 저런다니까! 아 참, 이것 죄송하게 되었구려, 포와로 씨." 포와로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한테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아침 미사를 보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소만." 대령 이 말했다. "주인 아침마다 보는 그 미사 말이오. '천군 천사의 노래 소리를 들으나'나 오래 된 크리스마스 찬송가들은 모두 아주 듣기가 좋지. 그리고 돌아와서 크리스마스 음식을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는 거요. 이렇게 하는 것 이 좋지 않소? 당신 생각은 어떻지, 엠?" "여보, 당신 말이 옳아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죠. 하지만 젊은애들은 자정 미상에 가는 걸 좋아하는걸요. 그리고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애들이 미사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만으로도 얼 마나 다행한 일이에요." "새라와 그 친구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잖소." "글쎄요, 여보,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아시겠지만 새라도 미사에 가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애는 그 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애가 왜 그놈의 생각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아." "그애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예요. 어머, 참." 레이시 부인이 평온하게 말했 다. "이제 그만 주무시려고요, 포와로 씨? 안녕히 주무세요. 편안한 밤 되시 기를 빌겠어요." "부인께서는요? 아직 주무시지 않을 겁니까?" "조금 더 있다가요." 레이시 부인이 대답했다. "아직 양말 속에 선물을 넣 어두는 일이 남아 있거든요. 오, 물론 그애들이 이젠 다 컸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애들은 양말 속에 선물이 들어 있으면 아주 좋아한답니다. 양말 속에는 짓궂은 물건을 넣어두지요. 어떻게 보면 약간 바 보스럽기도 한 그런 물건으로 말예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크리스마스를 재 미있게 보내도록 해주기도 하지요." "크리스마스 때에 이 집을 행복한 집으로 만들려는 부인의 노력은 정말 대 단하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진심으로 부인을 존경합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궁정에서 하는 식으로 그 손등에다 입을 맞추 었다. "음." 포와로가 사라지고 나자 레이시 대령이 투덜거렸다. "아주 화려한 성 격의 남자로군, 그래. 그렇긴 하지만―그래도 당신을 이해하고는 있는 듯하 구먼." 레이시 부인은 살짝 보조개를 지으며 그를 보고 웃었다. "호레이스, 당신, 내가 미슬토 아래에 서 있다는 걸 알고나 계세요?" 그녀가 마치 열아홉 살 짜리 새침떼기 소녀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한 투로 말했다. (여자가 미슬토 아래에 서 있을 경우 키스해도 좋다는 뜻이다.) 에르큘 포와로는 자기 침실로 돌아왔다. 그 방은 스팀 난방장치가 여러 개 갖추어져 있는 넓은 방이었다. 커튼이 달린 커다란 네 기둥식 침대에 다가가 는 순간 그는 베개 위에 편지 봉투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봉투를 뜯고 편지지 한 장을 끄집어냈다. 그 편지지 위에는 또렷하지 못한 대문자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플럼 푸딩에는 절대 손대지 말 것. 당신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에르큘 포와로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 갔다. "흠, 비밀편지라."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걸." 크리스마스 식사는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말 하나의 향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넓은 벽난로 속에서는 커다란 장작이 탁탁 하는 명 랑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소리를 내면서 타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 에 왁자지껄하게 장작타는 소리를 압도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굴로 만 든 스프가 뱃속으로 들어갔고, 커다란 칠면조 두 마리가 날라져 왔다가 뼈 만 남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마침내 이날 최고의 순간에 크리스마스 푸딩 이 위풍당당하게 들여져 왔다. 늙은 페브렐은 여든 살이나 된 까닭으로 손 도 무릎도 떨고 있었지만 자기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나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레이시 부인은 너무도 걱정이 된 나머지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마주 꼭 잡고 있었다. 언젠가는 크리스마스에 페브렐이 쓰러져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라는 생각마저 그녀에게는 들었다. 그가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대로 그를 내버려두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말을 듣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줄 것인가. 이제까지 그녀는 전자(前者)를 택해 왔었다. 은쟁반 위에는 크리스 마스 푸딩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놓여져 있었다. 푸딩은 커다란 축구공 모 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푸딩 위에는 승리를 나타내는 깃발처럼 홀리 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고, 그 둘레에서는 푸르고 붉은 빛을 내며 불꽃이 타오르 고 있었다. 순간, "야호!"하는 환호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레이시 부인은 그전에 한 가지 조치를 미리 해두었다. 즉, 차례대로 탁자 주위를 돌며 푸딩을 건네주기보다는 그녀가 직접 잘라 나누어줄 수 있도록 푸딩 접시를 그녀 앞에 갖다놓으라고 미리 페브렐을 설득해 두었던 것이다. 접시가 안전하게 그녀 앞에 놓여지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불꽃이 타고 있는 푸딩이 한 조각씩 작은 접시 우에 얹혀져 재빨리 각 사람 에게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소원을 비세요, 포와로 씨." 브리짓이 소리쳤다. "불꽃이 꺼지기 전에 소원 을 빌어야 해요. 빨리요, 할머니, 빨리빨리 하세요." 레이시 부인은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푸딩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각 사람의 앞에는 아직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푸딩이 한 조 각씩 나란히 놓여 있었다. 푸딩의 불꽃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소원을 빌고 있었기 때문인지 식탁 주변은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그 누구도 자기 접시 위에 놓여 있는 푸딩을 바라보고 있는 포와로 씨의 얼굴에 약간 이상한 표정이 나타나 있다는걸 눈치채지 못했다. '플럼 푸딩에 는 절대 손대지 말 것.' 그 불길한 경고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아간 푸딩 조각과 자기 몫으로 돌아 온 푸딩 조각이 다른 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이 난처 한 궁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자인하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사 실 에르큘 포와로는 웬만해서 자기가 난처한 궁지에 빠져 있다고 자인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그는 스푼과 포크를 집어들었다. "하드 소스를 드릴까요, 포와로 씨?" 포와로는 기꺼이 자기 손으로 하드 소스를 쳤다. "아니, 엠. 또 내 브랜디를 슬쩍해 두었군, 그래?" 식탁의 다른 쪽 끝엣 아 주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대령이 말했다. 레이시 부인은 남편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보, 로스 부인이 최고급 브랜디를 써야만 한다고 하잖아요." 그녀가 말 했다. "로스 부인 얘기로는 그것 하나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는 거예요." "아, 알았어, 알았어." 레이시 대령이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일년에 한 번 밖에 오지 않을뿐더러 로스 부인은 위대한 여성이기도 하니 말이오. 정말 위대한 여성이자 훌륭한 요리사지." "그 아주머닌 정말 그래요." 콜린도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건 정말로 멋진 플럼 푸딩이라니까요. 음, 음." 그는 맛있게 푸딩을 한입 가득 입속에 넣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에르큘 포와로도 자기 푸딩에 살그머니 포크를 갖다댔다. 그는 한입 먹어보았다. 아주 맛이 좋지 않은가! 그는 다시 한입 먹었다. 그 때 뭔가가 그의 접시 우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는 포크로 그것을 살펴 보았다. 그의 왼쪽편에 앉아 있던 브리짓이 그걸 보고 말했다. "포와로 씨, 뭐가 들어 있는 모양이로군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일까 궁금 한데요." 포와로는 주위에 붙어 있는 건포도들을 떼어내고 작은 은빛나는 물체를 끄 집어냈다. "오―" 브리짓이 말했다. "이런, 독신자 단추잖아요! 포와로 씨한테 독신자 단추가 돌아갔어요!" 에르큘 포와로는 자기 접시 옆에 놓여 있는 손가락 씻는 물그릇 속에 그 작은 은단추를 담그고, 그 단추에 붙어 있던 푸딩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냈 다. "아주 예쁜 단추로군." 그가 단추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포와로 씨, 푸딩 속에 그 단추가 들어 있다는 건 아저씨가 내내 독신으로 지내게 될 거라는 걸 뜻하는 거예요." 콜린이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당연한 일이겠군." 진지한 표정으로 포와로가 말했다. "나는 오 랫동안 독신으로 지내왔고, 앞으로도 이런 상태로 계속 지내게 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야." "오, 기운을 내세요, 아저씨." 마이클이 말했다. "언젠가 95살이나 된 남자 가 23살짜리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본 적도 있는걸요, 뭐." "거 참, 희망이 있는 얘기로구나." 포와로가 말했다. 갑자기 레이시 대령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색이 자줏빛으로 변하면서 그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런 빌어먹을! 에멀린―" 그가 소리쳤다. "세상에, 요리사한테 푸딩 속에 유리를 넣어두라고 시키는 법이 어디 있소!" "유리라고요!" 깜짝 놀란 레이시 부인이 소리쳤다. 레이시 대령은 입속에서 그 괘씸한 물건을 끄집어냈다. "하마터면 이빨을 부러뜨릴 뻔했잖소." 투덜거렸다. "아니면 이 빌어먹을 물건을 삼켜서 맹장염을 일으키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는 손을 씻는 물이 담긴 그릇 속에 그 유리조각을 담그고 그것을 깨끗이 씻은 다음 손으로 집어올렸다. "아니, 이거 놀라운 일인걸." 그가 탄성을 올렸다. "이건 크래커 장식에 다 려 있었던 빨간 돌이잖아." 그는 그것을 높이 들어올렸다. "잠깐 실례할까요?" 아주 능숙하게 포와로는 옆사람 사이로 손을 뻗어 레이시 대령의 손에서 그것을 빼냈다. 그리고는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령이 말한 대로 그 것은 루비빛을 한 크고 빨간 돌이었다. 그가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볼 때마 다 햇빛이 그 돌의 여러 면에 부딪치면서 반짝반짝 빛났다. 누군가 식탁 주 변에 앉아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의자를 뒤로 싹 뺐다가 다시 앞으로 잡아 당겼다. "우와!" 마이클이 탄성을 질렀다. "그게 진짜라면 정말 멋있겠는걸."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잖아." 브리짓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브리짓. 이만한 크기의 루비라면 몇만 파운드짜리인 줄이나 알아? 제 말이 맞죠, 포와로 씨?" "그래." 포와로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푸딩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에요." "어!" 마지막까지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콜린이 중얼거렸다. "이런, 내 푸딩 속에는 돼지가 들어 있잖아. 이건 불공평해." 그 말을 들은 브리짓이 금세 놀려댔다. "콜린한테는 돼지가 돌아갔대요! 콜 린한테는 돼지가 돌아갔대요! 콜린은 정말 엄청나게 먹어대는 돼지라니까!" "어머, 내 푸딩 속에는 반지가 들어 있네." 다이애나가 맑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할 일이로구나, 다이애나. 우리들 중에서 네가 제일 먼저 결혼하게 될 거야." "나한테는 골무가 들어 있잖아." 브리짓이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브리짓은 노처녀가 될 거래요." 두 소년이 놀려댔다. "얼래꼴래리, 브리짓 은 노처녀가 될 거래요." "돈은 누구한테 들어갔지?" 데이비드가 물었다. "이번 푸딩 속에는 정말 10 실링짜리 금화가 들어 있다고 난 알고 있어. 로스 아주머니가 나한테 그렇 게 얘기해 주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그 행운아일 것 같은데." 데스몬드 리―워틀 리가 말했다. 레이시 대령의 양쪽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 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넌 운이 좋은 놈인 것 같다." "나한테도 반지가 들어 있군, 그래." 데이비드가 말했다. 그는 식탁 너머로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군요, 그렇죠?"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 누구도 포와로가 마치 어떤 일에 정신이라 도 팔린 사람처럼 그 빨간 돌을 자기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푸딩에 이어 민스 파이(잘게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파이)와 크리스마스 디저트가 나왔다. 그런 다음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나이가 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켜는 의식을 할 차(茶) 시간까지 낮잠을 즐기려고 각자의 방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에르큘 포와로는 낮잠을 자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널따란 구식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부엌 안을 둘러보며 포와 로가 물었다. "방금 전에 그처럼 훌륭한 음식을 맛보게 해주신 요리사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곧 로스 부인이 당당한 태도로 걸어나와 그를 맞았다. 그녀는 몸집이 큰 여자로, 연 극에 등장하는 공작 부인처럼 아주 위엄있고 품위있는 몸매를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빼빼마른 몸집을 한 부인네 두 사람이 안 쪽에 있는 개수대에서 그릇을 닦고 있었고, 황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젊은 여자 한 사람은 조리실과 개수대 사이를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분명히 단순히 일을 거들어주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로스 부인이야말로 부엌이라는 영토를 다스리는 여왕이었던 것 이다. "음식이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쁘군요." 그녀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마음에 들었다마다요!" 에르큘 포와로는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외 국인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그는 입가로 손을 들어올려 그 손바닥에 살짝 키스를 한 다음 그 키스를 천장을 향해 띄워보냈다. "아니, 부인의 솜씨는 정말 천재적입니다, 로스 부인! 정말 천재적이라고요! 그렇게 훌륭한 음식은 내 생애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보았습니다. 그 굴로 만든 수프하며―" 그는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속맛이라니. 밤으로 만든 속을 다져넣은 칠면조 요리는 정말 나로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음 식이었습니다." "정말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로스 부인 이 우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기에 넣은 속은 사실 아주 특별한 요리법 에 따라 만든 거랍니다. 몇 년 전에 함께 일했었던 어떤 오스트리아 인 주 방장이 저한테 그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었지요. 하지만 그 나머지는―" 그녀 가 덧붙였다. "전부 정통 영국식 요리법대로 만든 것이랍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르큘 포와로가 다시 그녀를 추켜세웠다. "글쎄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군요. 물론 선생님은 외국분 이시니까 대륙식 음식을 좋아하시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라고 대륙 음식을 만들지 말란 법은 없는 일이잖아요." "그야 물론이지요, 로스 부인, 부인이라면 어떤 음식이든 다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국 요리는―2류 호텔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먹는 그 런 요리가 아닌 정통 영국식 요리는―대륙에 살고 있는 식도락가들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는 18세기초에는 런던으로 특별조사단이 파견되기까지 했었는데, 그 조사단 은 프랑스에다 영국 푸딩의 놀라움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었습니다. 그 보고 서에는 '프랑스에는 푸딩과 비교할 만한 음식이 없음. 맛이 뛰어나고 종류가 다양한 영국의 푸딩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런던으로 여행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음. 푸딩 중에서도 특히―'" 포와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럴 듯하 게 얘기를 열광적으로 늘어놓았다. "가장 우수하고 맛이 좋은 푸딩이 오늘 낮에 우리가 맛본 것과 같은 크리스마스 플럼 푸딩이라고 되어 있었지요. 참, 그런데 오늘 우리가 먹은 푸딩은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이겠지요? 가게에 서 산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제가 몇 년 동안 연구해 온 제 나름대로의 비법에 따라 직 접 만든 거랍니다. 제가 이 댁에 처음 왔을 때 레이시 부인은 푸딩을 만드 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런던에 있는 가게에 푸딩을 한 개 주문해 놓았다 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말했죠. '그러시면 안됩니다, 부인. 생각해 주시 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가게에서 사온 푸딩이 집에서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푸딩과 같은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라고 말예요. 부인도 그 말이 맞긴 하다 고 하셨죠."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 부인은 요리 얘기가 나오자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가게에서는 크리스마스 푸딩 을 크리스마스 날이 닥쳐야 만들어놓는게 보통이지요. 하지만 진짜 맛있는 크리스마스 푸딩을 만들려면 크리스마스가 되기 몇 주 전에 미리 푸딩을 만 들어 놓고 충분히 재어놔야 한답니다. 얼마가 되든지 상관말고 오래 재어두 면 둘수록 푸딩의 맛은 더 좋아지게 되지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 주일마다 미사를 드리러 가면, '밝은 빛을 내리소서, 오, 주여, 당 신께 간구하나이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기도문을 들으려고 두 귀를 곤두 세우곤 했었어요. 왜냐하면 그 기도문은 그 주 내에 푸딩을 만들어야 한다 는 일종의 신호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언제나 그때쯤 해서 푸딩을 만들고 는 했었답니다. 주일에 가서 그 기도문을 듣게 되면 우리 어머니는 그 주 내에 반드시 크리스마스 푸딩을 만들어 놓으셨죠. 그런데 사실을 말씀드리 자면 이번에 만든 푸딩은 만든 지 겨우 사흘밖에 되지 않은 것이랍니다. 그 러니까 선생님이 이곳에 도착하시던 바로 그 전날 만들어놓은 거죠. 하지만 전 옛날부터 전해오는 관습에 따라 전 그것을 만들었어요. 이 댁에 계신 분 들이 모두 부엌으로 들어와서 한 번씩 푸딩 반죽을 휘저으면서 소원을 한 가지씩 빌었으니까요. 선생님,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 내려온 관습이기 때문에 전 항상 그것을 지켜왔답니다." "아주 흥미롭군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아주 흥미로워요. 그럼, 이 댁에 계신 분들이 다 부엌으로 들어왔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답니다. 이 댁에 계신 도련님과 브리짓 양, 이 댁에서 묵고 계신 런던 에서 오신 그 신사분과 그분의 누이동생, 데이비드 씨, 그리고 다이애나 양―미들턴 부인이라고 해야 옳겠지만―아무튼 모든 분들이 다 한 번씩은 휘저었죠." "그러면 푸딩은 몇 개나 만드셨습니까? 아까 낮에 먹었던 것 딱 한 개만 만드셨나요?" "아니에요. 네 개를 만들었죠. 큰 것 두 개와 작은 것 두 개였어요. 나머지 큰 것 하나는 새해 첫날에 내가려고 한 것이고, 작은 것 두 개는 이 댁의 식구들도 좀 줄어들고 대령님과 레이시 부인 두 분만 남게 되면 드릴 거고 요."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포와로가 말했다. "저, 그런데,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로스 부인이 말했다. "오늘 점 심때 드신 푸딩은 잘못된 푸딩이었답니다" "잘못된 푸딩이라니요?" 포와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렇지요?" "사실, 선생님, 이 댁에는 크리스마스 푸딩을 만들 때 사용하는 커다란 틀 이 있지요. 꼭대기에 홀리와 미슬토 모양이 붙어 있는 도자기 틀인데, 크리 스마스 푸딩은 항상 그 속에 넣고 쪄냈었답니다. 그런데 아주 불행한 사고 가 하나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애니가 식품저장실에 있는 선반 에서 그걸 내리다가 손이 미끌어지면서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 거예요. 그러 니, 선생님, 제가 어떻게 그렇게 된 걸 식탁에 내놓을 수 있겠어요? 그 속에 파편이 들어갔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다른 걸로 대신 쓸 수밖에 없었답 니다―새해 첫날에 내놓으려던 것으로 말예요. 그것은 넓적한 그릇에 넣어 두었었죠. 그 그릇은 둥근 모양으로 잘 만들어진 것이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푸딩용 틀에 있는 것과 같은 장식은 없었지요. 정말, 어디로 가야 깨어진 푸 딩틀과 같은 것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그만한 크기의 틀을 만들지 않잖아요. 그릇들이 다 자그맣게 나오니까요. 아침식사 때 사용하는 접시만 하더라도 달걀 열 댓개와 베이컨을 담아둘 만한 그릇은 살 수조차 없죠. 아무튼 물건들이 옛날만 못하다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포와로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렇지 않 았지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옛날 그대로의 크리스마스와 조금도 다름없었지 요, 그렇지 않습니까?" 로스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긴 하네 요. 하긴 요즘에는 옛날처럼 그렇게 잘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요새 사람들은 별로 솜씨가 없답니다. 물론 요즘 아가씨들도―" 그녀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아주 잘하려는 생각도 있고 자진해서 하려고도 하지만 별 로 훈련이 잘 되어 있지 못하답니다. 선생님.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시대적인 변화는 어쩔 수 없지요." 포와로가 말했다. "나도 때때로 그 점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하곤 하지요." "이 저택은―" 로스 부인이 말했다. "알다시피 부인과 대령님 두 분만 사시 기에는 너무 크답니다 부인께서도 그걸 잘 알고 계세요. 지금처럼 저택 한 쪽에서만 생활을 하시니 전혀 옛날 같지 않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다 모이면 그때서야 이 저택에는 생기가 돌죠." "내가 보기에 리―워틀리 씨와 그의 누이동생이 이곳에 묵은 것은 이번이 처음 같던데요?" "그렇답니다." 어딘지 모르게 로스 부인의 말투가 약간 조심스러워졌다 "그 분이 아주 훌륭한 신사분이긴 하지만, 글쎄요―우리 사고방식으로는 새라 아가씨가 그런 분을 친구로 삼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져요. 하지만―런던 의 풍습이 이곳과 다른 까닭이겠죠! 그분 누이동생이 저렇게 건강이 안 좋 으니 정말 딱한 일이에요. 그녀는 수술을 받았다더군요. 첫날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건강해 보였는데, 푸딩을 저은 바로 그날부터 다시 건강이 나빠져서 그 뒤로는 계속 침대에 누워만 있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녀가 수술을 받고 난 뒤 너무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 요 새 의사들이란 다 그렇다니까요. 환자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도 그 냥 퇴원을 시켜 버린다고요. 글쎄, 바로 제 조카며느리도……" 그러면서 로 스 부인은 환자에게 아낌없는 배려를 베풀어준 옛날의 병원과 요즘의 병원 을 비교하면서 자기 친척을 병원측에서 얼마나 소홀히 다루었는지를 길고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포와로는 적당히 그녀에게 동정의 뜻을 표했다. "다시 한 번―" 그가 말했 다. "오늘 그토록 멋지고 호화로운 음식을 맛보게 해주신 데 대해 부인께 감 사를 드립니다. 그 보답으로 나의 이 조그마한 감사의 표시를 받아주시겠지 요?" 그는 빳빳한 5파운드짜리 지폐를 로스 부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형식적으로 거절하는 척했다. "정말 이렇게 하시면 안되는데요, 선생님." "아니, 아니, 꼭 받아주십시오." "그럼…… 선생님은 정말 친절한 분이세요." 로스 부인은 당연하다는 듯 지 폐를 받아들었다. "정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복 받으시는 새해가 되기를 빌 겠어요." 이번 크리스마스도 여느 해의 크리스마스와 다름없이 저물어갔다. 트리에 불이 켜지고, 간식으로 멋진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나와서 모두들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모두들 그 케이크를 많이 먹지는 못했다. 저녁식사로는 찬 음식들을 먹었다. 포와로도, 그 저택의 주인 부부도 그날 밤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포와로 씨."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즐거운 하루가 되셨 기를 빕니다." "멋진 하루였습니다, 부인, 정말 멋졌어요." "그런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 다. "영국의 푸딩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지요." "혹시 위에 부담을 드린 것은 아닌지요?" 레이시 부인이 조심스런 말투로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소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 다만 푸딩의 의미 에 대해 좀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이지요." 레이시 부인이 말했다. "그 럼, 안녕히 주무세요, 포와로 씨. 그리고 크리스마스 푸딩이나 민스 파이 꿈 은 너무 많이 꾸지 마세요." "그래." 옷을 벗으면서 포와로는 혼자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크리스마스 플럼 푸딩에는 뭔가 문제가 있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말야." 그는 짜증이 나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좋아―곧 알게 되겠지." 어떤 준비를 몇 가지 해둔 다음 포와로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을 자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참고 기다린 보람은 두 시간 정도 지난 뒤에 나타났다. 그의 방문이 아주 살그머니 열렸다. 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뜻 그의 머릿속에 데스몬드 리―워틀리가 유난히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건네주던 커피 생각이 떠올랐다. 커피를 건네 받고 나서 곧 데스몬드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 그는 잠시 그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었다. 그런 다음 보란 듯이 다시 그것을 들고 한 방 울도 남김 없이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데스몬드의 얼굴에는 만족―만일 그것을 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한 듯한 표 정이 나타났었다. 하지만 오늘밤 잠을 푹 자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 람임을 생각하자 터져나오려는 웃음 때문에 포와로의 콧수염이 약간 실룩거 렸다. "그 쾌활하던 데이비드 청년." 포와로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청년은 고민이 있어서 마음이 괴로울 거야. 그러니 하룻밤 정도 잠을 푹 잤다고 해 서 해로울 건 없을 테지. 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구경해 볼까?" 때로는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숨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약하게 코를 골기도 하면서 그는 여전히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침대로 다가와 그의 몸 위로 몸을 구부렸다. 그런 다음, 만족했는 지 침대를 떠나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손전등을 비추면서 그 침입자 는 화장 대 위에 깔끔하게 정리해 둔 포와로의 소지품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갑 속을 뒤져보고 난 뒤 살그머니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런 다음 포와로의 옷에 달린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런 뒤 마침내 그 침 입자는 침대로 다가와서 아주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 다. 베개에서 손을 빼낸 뒤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기라도 하는 듯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방안에 있는 장식품들을 살펴보면서 방안을 걸어다니더니 그 방에 딸려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가 곧 되돌아나왔다. 그런 다음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아하." 포와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망했다는 말이로군. 아무 렴, 그렇고말고. 대단히 실망했을 거야. 흥! 그래 이 에르큘 포와로가 너 같 은 녀석이 찾아낼 수 있는 곳에 숨겨둘 거라고 생각했니!" 잠시 뒤 그는 돌 아누워 평온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튿날 아침, 그는 누군가가 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누구요?" 그가 불어로 말했다. "자, 들어와요, 들어와."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콜린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마이클도 서 있었다. "포와로 씨, 포와로 씨." "아니, 왜들 그러지?" 포와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아침 차인 가? 아니, 아니로군. 콜린, 너였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콜린은 한 순간 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는 무슨 격한 감정이라도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에르큘 포와로가 쓰고 있는 나이트 캡 을 본 순간 그의 말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곧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입 을 열었다. "저―포와로 씨, 저희들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죠? 좀 끔찍한 일이 일어 난 것 같아서 말예요." "일이 일어났다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지?" "그게―브리짓이 말예요. 그애가 눈속에 쓰러져 있어요. 저―움직이지도 않 고 말도 안해요―오, 아무래도 직접 가셔서 조사해 보시는 편이 낫겠어요. 전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그애가 죽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뭐라고?" 포와로는 벌떡 이불을 걷어찼다. "브리짓 양이―죽다니!" "저, 제 생각으로는―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해요. 그곳에 는―그곳에는 피도 묻어 있거든요―오, 빨리 가보세요!" "아, 좋아, 좋아. 내 곧 가지." 아주 익숙한 솜씨로 포와로는 외출용 신발을 끼워신고 잠옷 위에 털가죽이 둘러진 오버코트를 걸쳤다. "가자." 그가 말했다. "빨리들 가자. 참, 집안 사람들은 깨웠니?" "아뇨. 아뇨, 아직은 아저씨밖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게 더 나 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어 요. 아래층에서는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페브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애―브리짓은―그애는 집 저쪽으로 돌아가 보면 있어요. 테라스 와 서재의 창문 가까이에요." "좋아. 그럼 안내해라. 따라갈 테니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콜린은 앞장서서 아 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고, 지평선 위로 보이는 태양은 아직 그리 높게는 떠오르지 않고 있었 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밤새도록 내린 눈이 두텁게 쌓여 사방은 온통 눈의 주단으로 끝없이 덮여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은 아주 아름답고 순결한 은백 색으로 변해 있었다. "저기예요!" 숨을 헐떡거리며 콜린이 말했다. "저―바로―저기예요!" 그가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어떤 곳을 가리켰다. 그곳의 풍경은 그야말로 연극 그 자체였다. 몇 야드 떨어진 눈속에 브리짓 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진홍색 잠옷을 입고 어깨에는 하얀 털로 짠 숄을 두르고 있었다. 그 하얀 털 숄에는 빨간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 은 옆으로 돌려진 채 마구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에 묻혀 있었다. 한쪽 팔 은 몸 아래에 깔려 있었고, 다른 한쪽 팔은 주먹을 꼭 쥔 채 아무렇게나 내 던져져 있었다. 새빨간 핏자국이 묻어 있는 한가운데에는 레이시 대령이 바 로 그 전날 밤 그곳에 모인 손님들한테 보여 주었던 크고 약간 구부러진 터 키제 나이프의 자루가 꽂혀 있었다. "오, 맙소사!" 불어로 포와로가 부르짖었다. "마치 무슨 연극이라도 보고 있 는 기분인걸!" 마이클이 나지막하게 쿡쿡거렸다. 콜린이 재빨리 이 난국을 뚫고 나가려고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가 말했다. "이건―웬지 이건 현실 같지가 않죠? 저기 발자국 들이 보이시죠?―우리가 저 발자국들을 흐트러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데요?" "오, 정말, 발자국이 있구나. 맞았어, 우리는 저 발자국을 흐트러놓지 않도 록 조심해야 한단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콜린이 말했다. "그래서 아저씨를 모시고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저애한테 다가가지 못하게 했죠. 아저씨라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를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만." 에르큘 포와로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보다 우선 우리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니? 그렇 지 않니?" "그야―물론―그래야 하겠지만."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마이클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로는―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된 다고―" "오, 너희들은 꽤 신중하구나! 아마 탐정소설들을 꽤 많이 읽은 것 같구나. 현장에 손을 대지 말고 시체도 원래 그대로 보존해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저것이 분명히 시체인지 아닌지 를 모르고 있잖니, 그렇지? 신중한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우선 일반적인 인 간성이 먼저 발휘되어야 하는 거야. 그런 이유에서 경찰을 생각하기 전에 우 리는 먼저 의사를 생각해야만 하는 거란다. 그렇지 않겠니?" "아, 물론 아저씨 말씀이 옳으세요." 여전히 약간 당황한 모습으로 콜린이 대답했다. "우린 그냥 이렇게만 생각했죠, 뭐―무슨 말이냐 하면―우린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우선 아저씨를 모셔오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 것뿐이 라고요." 마이클이 재빨리 거들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둘 다 꼼짝말고 여기에 있거라." 포와로가 말했다. "나 는 발자국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쪽으로 돌아서 가볼 테니까. 정말 멋진 발자국이란 말야, 그렇지―정말 아주 선명하지? 발자국 모양으로 미루어보아 남자 어른 한 사람과 저 소녀가 지금 쓰러져 있는 곳까지 함께 걸어간 것 같구나. 그리고 난 뒤, 그 남자의 발자국은 되돌아왔지만 그 소녀 의 것은―되돌아오지 못했어." "그건 틀림없이 범인의 발자국일 거예요."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콜린이 말했다. "바로 그렇단다." 포와로가 말했다. "범인의 발자국이란 말야. 범인은 길고 좁은 발을 갖고 있는 약간 독특한 모양의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이지. 아주 흥미로운걸. 내가 보기에는 쉽게 구별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 저 발자 국들은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거야." 그때 데스몬드 리―워틀 리가 새라와 함께 집에서 나오더니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니, 여기서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가 약간 연극조로 물었다. "내가 침실 창문으로 보니 당신들이 여기 있더군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겁니까? 오, 이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요? 이거―이건 마치―" "바로 그렇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이건 살인처럼 보이지요, 그렇지 않소?" 새라가 갑자기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빨 리 두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 그 말은, 누군가가 저 애―이름이―브리짓이라는 저 애를 죽였 다는 얘깁니까?" 데스몬드가 물었다. "세상에, 누가 저 애를 죽였단 말일까 요? 정말 믿기지 않는 얘기인걸!" "세상엔 믿기 어려운 일들도 얼마든지 았는 법이오." 포와로가 말했다. "아 침식사를 하기 전에는 더더욱 그렇지, 그렇지 않소? 당신 나라의 고전에도 나와 있지요. 아침식사전에 일어나는 6가지 불가능한 일들이라고 말이오." 그리고나서 그가 덧붙였다. "자, 당신들은 모두 이곳에서 기다려주시오." 조심스럽게 길을 돌아 그는 브리짓한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그 녀의 몸 위로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콜린과 마이클은 둘 다 웃음을 참으려 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새라가 그들한테 와서 작은 목소리로, "너희 둘, 무 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거지?" 라고 속삭였다. "브리짓이 아주 잘하고 있는걸." 콜린이 속삭였다. "아주 멋지잖아? 꼼짝도 않는걸!" "난 브리짓만큼 죽은 연기를 잘 해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마이클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르큘 포와로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건 끔찍한 일이야." 그가 말했다. 그전에는 없었던 어떤 감정이 지금 그 의 목소리에는 들어 있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콜린과 마이클은 둘 다 몸을 돌렸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마이클이 말했다. "어떻게―어떻게 하면 좋죠?"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포와로가 말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어. 여러분 중에서 누가 전화 좀 걸어주겠소? 아니면 내가 직접 할까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콜린이 말했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냐―어때, 마이클?" "그래, 됐어." 마이클이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도 생각해." 그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는 약간 주저하는 기색이 나타났 다. "정말 죄송해요." 그가 말했다. "너무 화내시지 마세요. 그건―저―이를 테면 크리스마스를 좀더 즐겁게 보내려고 해본 장난 같은 것이죠. 우리는 저―그냥 아저씨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살인사건을 하나 꾸며본 거예요." "나를 즉겁게 해주려고 살인사건을 꾸미다니? 그렇다면 이것은―그렇다 면―" "그냥 우리가 꾸며낸 연극일 뿐이에요." 콜린이 설명했다. "그냥―아저씨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해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 "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그랬었구나. 너희들이 나를 놀려주고 싶었 다는 말이지? 만우절 때처럼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4월 1일이 아니고 12월 26일이란 말이다." "사실 이런 장난을 치면 안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콜린이 변명했다. "하지만―하지만―정말 화가 많이 나신 건 아니죠, 포와로 씨? 이제 됐어, 브리짓." 그가 큰소리로 불렀다. "일어나, 조금만 더 있으면 넌 얼어죽을거 야." 그러나 눈 위에 쓰러져 있는 브리짓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인걸."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네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텐데."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는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장 난이라고 했지? 정말 틀림없는 장난이냐?" "물론이에요." 불안해진 목소리로 콜린이 말했다. "우린―우린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왜 브리짓 양이 일어나지 않는거지?" "웬일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콜린이 말했다. "이제 됐어, 브리짓." 새라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소리쳤다. "언제가지 바보처럼 그렇게 누워 있을 셈이니?" "정말 죄송해요, 포와로 씨."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콜린이 말했다. "진심 으로 사과드려요." "너희들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심상치 않은 어조로 포와로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콜린은 아연해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브리짓! 브리짓! 도대체 무슨 일이죠? 왜 저애가 일어나 지를 않는 거예요? 왜 아직도 저기에서 누워 있기만 하는 거죠?" 포와로는 데스몬드를 손짓으로 불렀다. "당신, 리―워틀리 씨. 이쪽으로 와보시오―" 데스몬드는 그의 곁으로 갔다. "이 아이의 맥박을 짚어보시오." 포와로가 말했다. 데스몬드 리―워틀리는 몸을 굽히고 그녀의 팔목에 손을 댔다. "전혀 맥박이 뛰지 않는데요……" 그는 아연해져서 포와로를 뚫어져라 쳐 다보았다. "팔이 굳어 있어요. 오, 하나님 맙소사, 이 여자애는 정말 죽었어 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소녀는 죽은 것이오." 그가 말했다. "누군가가 희극을 비극으로 바꿔놓은 것이지." "그 누군가가―누구죠?" "누군가가 이곳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갔다는 걸 보여주는 발자국이 남아 있소. 그 발자국은, 리―워틀리 씨, 당신이 저쪽 작은 길로 돌아 이 지점까지 올 때 눈 위에 새겨진 당신 발자국과 아주 흡사하단 말이오." 데스몬드 리―워틀리는 휙 몸을 돌렸다. "이런, 세상에―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이 나를 말입니까? 미쳤 군요! 도대체 내가 왜 이 여자애를 죽이겠습니까?" "아―이유 말이오? 글쎄……그럼 한 번 볼까……" 그는 몸을 굽혀서 꽉 쥔 채 굳어져 있는 소녀의 손가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폈다. 데스몬드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어 있는 소녀의 손바닥에는 커다란 루비 같 은 것이 놓여져 있었다. "이건 그 푸딩에서 나온 것이잖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 그렇소?" 포와로가 말했다. "확실하오?" "물론이지요." 재빠른 동작으로 데스몬드는 몸을 굽히고 브리짓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그 빨간 돌을 낚아챘다. "그런 짓을 하면 안되오." 포와로가 나무라듯 말했다. "아무것도 흐트러놓 아서는 안된다니까." "시체를 흐트러놓은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어쩌면 잃어 버릴지도 모르잖습니까. 중요한 증거일 텐데.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 능한 한 빨리 경찰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일이에요. 내가 지금 빨리 가서 전 화로 신고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저택 쪽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새라가 곧바로 포와로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이해 못하겠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빛 은 죽은 사람처럼 하앴다. "정말 이해가 안된다고요." 그녀는 포와로의 팔을 잡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그 발자국이란 게 말예요." "직접 한 번 보시지요, 아가씨." 시체 옆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간 발자국은 바로 조금 전에 포와로와 함 께 그 소녀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발자국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은―그게 데스몬드 짓이라는 얘기예요? 말도 안돼!"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맑은 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그들은 모두 뒤를 돌아 다보았다. 차 한 대가 아주 맹렬한 속도로 현관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새라는 그 자동차가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데스몬드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데스몬드 자동차예요. 저 사람은―저 사람은 전화로 신고를 하는 대신에 직접 경찰을 데려오려고 가는 걸 거예 요." 다이애나 미들턴이 집안에서 뛰어나와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에 데스몬드 가 집안으로 뛰어들어 왔어요. 그 사람은 브리짓이 살해되었다는 둥 어떻다 는 둥 하면서 전화를 걸었어요. 하지만 전화가 되지 않더군요. 신호도 가지 않았고요. 그 사람 말로는 전화선이 끊긴 모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제 자동차를 타고 경찰서에 직접 가서 알리는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경찰이 필요하다는 거죠?……" 포와로는 브리짓 쪽을 가리켰다. "아니, 브리짓이?" 다이애나는 그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분 명히―이건 일종의 장난이 아니던가요? 제가 들은 얘기가 있거든요―어젯밤 에 들은 애기가 말예요. 전 저애들이 선생님한테 장난을 치려 한다고 생각했 었지요. 아닌가요, 포와로 씨?" "그렇소." 포와로가 말했다. "원래는 그러려던 생각이었지―나한테 장난을 치려고 했단 말이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모두들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여 기에 이렇게 있다가는 모두들 얼어죽고 말 거요. 게다가 리―워틀 리가 경찰 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아저씨―" 콜린이 말했다. "여기에―여기에 브리짓 혼자만 남겨두 고 갈 순 없잖아요." "여기에 계속 이렇게 서 있는다고 해도 별 도리가 없을텐데." 포와로가 상 냥하게 말했다. "자, 여러분, 이번 사건은 슬픈, 아주 슬픈 비극입니다 하지 만 이제는 브리짓 양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커피나 홍차라도 한잔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순히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페브렐이 아침식 사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려 하고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 대부분 밖에 나가 있고, 더구나 포와로가 아직도 잠옷 차림으로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기 는 했지만 그는 그것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페브렐은 여전히 훌륭한 집사였던 것이다. 무슨 일에든 특별히 자신한테 일 러주지 않는 한 그는 모른 척했다.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모 두의 앞에 커피잔이 하나씩 놓여지고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포와로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에게 해드릴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간단한 이 야기지요. 물론 여러분에게 자세하게 다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략 적인 줄거리만은 얘기해 주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나라를 방문한 어느 젊 은 왕자와 관련된 겁니다. 그 왕자는 이 나라로 올 때 자기가 장차 결혼하게 될 아가씨에게 줄 아주 유서깊은 보석을 한 개 다시 모양을 꾸미려고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러기 전에 그는 아주 예쁜 젊은 아가씨를 사귀 게 되었지요. 그 예쁘고 젊은 아가씨는 그 왕자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보석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어느 날 그녀는 몇 대에 걸쳐 가보로 전해 내려온 그 유서깊 은 보석을 가지고 행방을 감춰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가엾은 젊은 청년은 그 만 곤경에 처하고 말았죠. 무엇보다 그가 겁낸 것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니 경찰에 가서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래서 나한 테, 바로 이 에르큘 포와로한테 부탁을 하러 왔었습니다. 그가 말하더군요. '저를 위해서 그 유서깊은 루비를 찾아주십시오.' 그런데 그 젊은 아가씨, 그 녀한테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친구는 아주 의심스러운 거래를 여러 번 해온 인물이었지요. 그는 공갈에도 관계하고 있었고, 외국에서의 보석밀 매에도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는 아주 영리하게 처신을 해왔지요. 그래서 항상 혐의는 받았지만 증거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데 바로 그 똑똑한 신사가 이 저택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이미 보석을 손에 넣은 그 예쁘고 젊은 아가씨는 잠시 동안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었지요. 그래야 압력을 받거나 심문을 당할 우려가 없 을 테니까요. 따라서 이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녀는 이곳 킹스 레 이시로 내려옵니다. 그 똑똑한 신사의 누이동생으로 가장한 채 말입니다―" 새라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오, 아니에요. 오, 아니에요. 이 집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제가 있는 이 집에서 그럴 리가!" "그러나 그건 사실입니다." 포와로가 말했다. "그래서 약간 농간을 부려서 나 역시 이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손님으로 온 것이지요. 그 젊은 아가씨, 그녀는 병원에서 막 퇴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 을 때는 아주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탐정인―아주 유명한 탐정인 내 가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자 그녀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 래서 그녀는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장소에 그 루비를 감춘 다음 아주 재 빨리 병이 도진 척하면서 다시 침대에 누워버린 거지요. 그녀는 나한테 자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내가 사진을 갖고 있어서 그녀를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분명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아주 따분한 노릇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그녀의 오 빠라고 가장한 사람이 날라다 주는 식사를 먹을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루비는 어떻게 되었죠?" 마이클이 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포와로가 말했다. "내가 도착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젊은 아가씨는 여러분들과 함께 부엌에서 웃고 떠들면서 크리스마스 푸 딩을 젓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 크리스마스 푸딩은 그릇 속에 들어 있었고, 그 젊은 아가씨는 그 루비를 푸딩 그릇 중의 하나에다가 밀어넣어 버렸지. 그것은 크리스마스날 먹을 푸딩이 아니었으니까. 오, 물론 그녀는 크리스마 스에 먹을 푸딩은 아주 특이한 틀 속에 들어 있었으니 금방 알아볼 수 있었 지. 그녀는 그것을 다른 푸딩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것은 새해 첫날에 먹기 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지. 새해 첫날이 되 전에 그녀는 떠날 준비를 다 마칠 것이고, 그녀가 이 저택을 떠나고 나면 틀림없이 그 새해 푸딩도 그녀와 함 께 모습을 감추고 말았을 거야. 하지만 운명이 어떻게 손을 내밀었는지 잘 보거라. 바로 그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하나 일어났지. 색다른 틀에 들어 있던 크리스마스 푸딩이 돌바닥 위로 떨어져 그만 그 틀 이 산산조각 나버린 거야. 그러니 어떡하겠지? 눈치 빠른 로스 부인은 남아 있는 다른 푸딩 하나를 꺼내와서 그것을 식탁에 내놓은 거지." "하나님 맙소사." 콜린이 말했다. "그럼 크리스마스날 할아버지가 푸딩을 드시다가 입속에서 나온 것이 진짜 루비였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포와로가 대답했다. "그러니 데스몬드 리―워틀 리가 그 루비를 보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겠지? 그런데 그 다음에는 무슨 일 이 일어났니? 그 루비는 이 사람 저 사람 손으로 돌려졌지. 나도 그것을 들 고 살펴보다가 아무도 몰래 그 루비를 슬쩍 내 호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단 다. 아무 관심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런 척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만은 내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지. 내가 잠자리에 들자 그 사 람은 내 방을 뒤지더구나. 내 몸도 뒤졌고. 하지만 루비를 찾지는 못했지. 왜 그랬겠니?" "왜냐하면―" 숨돌릴 틈도 없이 마이클이 말했다. "아저씨가 그 루비를 브 리짓에게 주었기 때문이죠. 그게 정답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된 거죠―하지 만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어요―그렇다면―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거예요?" 포와로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도서실로 가서―" 그가 말했다. "창밖을 내다보기로 하자. 그럼, 이 미스터리에 대한 의문이 풀릴 테니까." 그가 앞장을 서자 모두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시 한 번―" 포와로가 말했다. "범행현장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앗하는 소리가 터져나 왔다. 창밖에는 눈 위에 있었던 시체가 온데 간데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비 극의 흔적조차 감쪽같이 사라졌고, 다만 짓밟혀진 눈들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게 전부 꿈은 아니죠, 그렇죠?" 콜린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누군가가 그 시체를 치워버린 것은 아닐까요?" "아―" 포와로가 말했다. "알겠지? 사라져버린 시체의 미스터리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맙소사." 마이클이 소리쳤다. "포와로 씨, 아저씨―아저씨가 설마―오, 세상 에, 아저씨는 지금까지 우리를 속이고 계셨군요!" 포와로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나 역시 약간 장난을 쳐보았을 뿐이란다. 난 너희들의 그 장난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나도 그 대항책을 강구해 놓았던 거야. 아, 브리짓 양이로구나. 눈속에 누워 있느라 병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 모르겠구 먼? 브리짓 양이 폐렴에라도 걸리게 되면 그것처럼 미안한 일이 어디 있겠 니?" 브리짓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꺼운 스커트에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은 채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에다 약탕을 갖다주라고 했는데." 포와로가 엄하게 말했다. "그걸 마셨 겠지?" "한 모금만 마셔도 충분해요!" 브리짓이 대답했다. "전 괜찮으니까요. 그런 데 제가 잘 해냈죠, 포와로 씨? 그렇지만 아저씨가 지혈기로 팔을 너무 꽉 매어서 아직까지도 팔이 아픈걸요." "넌 아주 훌륭했어." 포와로가 말했다. "정말 훌륭했다고. 하지만 보다시피 아직도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모양이로구나. 사실 난 어젯밤에 브리짓 양을 찾아갔었지. 그리고 브리짓 양한테 내가 너희들이 짜놓은 그 계획을 다 알고 있다고 예기해 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나를 위해 역(役)을 하나 맡아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했지. 브리짓은 그 역을 아주 그럴 듯하게 잘 해주었 어. 리―워틀리의 구두로 발자국까지 만들어놓고 말야." 그때 새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서 얻는 것이 뭐예요, 포와로 씨? 데스몬드에게 경찰 을 불러오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냔 말예요. 그 일이 단순한 장난에 불과 하다는 걸 경찰들이 알게 되면 아주 화를 낼걸요." 포와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마드무아젤, 나는 리―워틀리가 경찰을 데리러 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리―워틀리는 살인사건 같은 일에 휩싸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그 사람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루비를 손에 넣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요. 루비를 손에 넣고 나자 그 는 전화가 고장난 것처럼 꾸며놓고는 경찰을 불러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차 를 타고 이 집을 나가버린 거랍니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아가씨도 앞으로 한동안은 그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영국을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 놓았다더군요. 혹시 그 사람, 자가용 비행기를 갖고 있지는 않나요, 마드무아젤?" 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 계획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 사람은 그런 방법으로 함께 도망을 치자고 아가씨한테 졸라대고 있었 습니다, 내 말이 맞지요? 사실 보석을 외국으로 밀반출하기에는 바로 그런 방법이 아주 안성맞춤이지요. 젊은 아가씨와 사람의 도피를 하게 되면 설사 그런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그 유서깊은 보석까지 함께 해외로 가지고 나갔으리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테니까. 오, 틀림없이 그것은 아주 좋은 위장책이 되었을 겁니다." "믿을 수 없어요." 새라가 말했다. "단 한마디도 믿지 못하겠다고요!" "그렇다면 그 청년의 누이동생한테 한 번 물어보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라는 재빨리 고개를 뒤 로 돌렸다. 문앞에는 백금색 머리를 지닌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모피 코트를 입 은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분명히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누이동생이라고요? 흥, 웃기지 말아요!" 콧방귀를 뀌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 돼지 같은 작자가 내 오빠라니! 오빠라는 작자가 자기만 도망치고 뒤처 리는 다 누이동생한테 떠넘기나요? 이번 일은 모두 그 작자가 꾸민 짓이라 고요! 그 작자가 나를 부추긴 것이라니까! 뭐 돈을 잔뜩 벌 일거리가 있다 나. 스캔들이 일어날까 봐 그 사람들은 고발도 안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 고 만일의 경우엔 그 왕자가 나한테 그 유서깊은 보석을 주었다고 말하면 된다나요. 그 뒤에 그와 내가 파리에서 만나 돈을 나눠갖기로 했었는데―그 런데 그 돼지 같은 작자가 책임을 다 나한테 미뤄두고 뺑소니를 쳐버리다 니! 정말 죽일 놈이야!" 그러더니 그녀는 급히 말투를 고쳤다. "가능한 한 빨 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누구 전화로 택시 좀 불러주지 않겠어요?" "차 한 대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타고 역까지 가면 될 게요." 포와로 가 말했다. "당신은 무슨 일에건 머리가 빨리 잘 돌아가는군요." "대체로 그런 편이지요." 포와로가 의기양양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포와로는 그렇게 간단하게 그들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그가 가짜 리―워틀리 양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태워준 뒤 식당으로 돌아오자 콜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다운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런데, 포와로 씨, 그럼 루비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설마 그 사람이 루 비를 가지고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작정은 아니시겠죠?" 포와로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콧수염을 비비꼬기 시작했다. 웬지 불안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직은 다시 찾아올 수가 있지." 그가 힘없이 대답했다. "다른 수가 있으 니까. 나는 아직―"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마이클이 말했다. "그 돼지같은 놈이 루비를 가 지고 도망치게 내버려두다니!" 브리짓이 좀더 날카롭게 따지고 들었다. "그 사람이 또다시 우리를 속인 거라고요."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포와 로 씨, 선생님도 속으신 거죠, 그렇죠, 선생님?"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요술을 부려보도록 할까요, 마드무아젤? 자, 내 왼쪽 주머니를 뒤져보도록 해요." 브리짓은 그의 말대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승리의 함성을 올리 며 그녀는 다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손 안에서 진홍색으로 번쩍이는 커다란 루비를 위로 높이 쳐들었다. "이젠 알겠지?" 포와로가 설명을 해주었다. "네 손에 쥐어준 그 루비는 유 리로 만든 모조품이었지. 그것은 만일의 경우 바꿔치기를 해야 될지도 모를 사태가 생길 것 같아 런던에서 내가 가져온 것이었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겠지? 스캔들이 일어난다면 곤란할 테니 말이야. 아마도 데스몬드는 그 루 비를 파리나 벨기에같이 그의 거래선이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갈 테지. 그리고 그곳에서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될 테고. 이 이상 더 좋은 방 법이 어디 있겠지? 모든 일은 다 잘 해결되었잖니. 스캔들을 피할 수도 있게 되었고, 내 의뢰자인 그 왕자도 다시 루비를 되찾아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왕자는 이젠 착실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될 게 야.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된 거지." "나만 빼고 말이죠." 새라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포와로밖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포 와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새라 양, 지금 아가씨가 한 말은 잘못된 겁니다. 아가씨도 한 가지 경험을 얻었을 테니까요. 경험이란 것은 모두 가치있는 것이지요. 내가 감히 장담하 는 바입니다만 아가씨의 앞길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건 선생님 말일 뿐이에요." 새라가 말했다. "하지만, 포와로 씨―" 콜린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저씨한테 장난을 치려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죠?" "그런 일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내 일이란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그 는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비틀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는 걸요. 누가 알려준 건 아니에요?―누군가가 아저씨한테 가서 일러바친 거 아 닌가요?" "아니, 아니, 그렇진 않아."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예기 좀 해주세요." 그들은 다같이 졸라댔다. "그래요, 어떻게 아셨는지 예기해 주세요." "그건 안돼." 포와로는 거절했다. "그건 안되는 일이야. 만일 내가 너희들한 테 어떻게 그걸 알아낼 수 있었는지 얘기해 주면 너희들은 그것이 별것이 아니었다고 여기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건 마치 요술사가 자기 요술의 비밀 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란다." "얘기해 주세요, 포와로 씨! 어서요. 얘기해 주세요, 얘기해 주세요!" "오, 아무래도 얘기하고 싶지가 않은걸. 너희들이 무척 실망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요, 포와로 씨, 예기해 주세요. 어떻게 그걸 알아내 셨죠?"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사실 요전날 밤 나는 차를 마신 다음 서재의 창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단다. 내가 잠이 들었다가 얼핏 눈을 떠보니 너희들이 내 바로 옆에 있는 창밖에서 바로 그 계획에 대해 얘 기하고 있더구나. 그 창문 위쪽이 약간 열려 있었으니까." "그게 다예요?" 콜린이 실망한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오,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그렇지?" 에르큘 포와로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알겠지? 너희들, 무척 실망한 모양이구나!" "뭐, 아무튼 좋아요." 마이클이 말했다. "어쨌건 이젠 모든 걸 다 알게 되었 으니까요." "응, 그래?" 에르큘 포와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 단다. 바로 내 직업은 모든 것을 다 알아내는 것이니까." 그는 머리를 약간 흔들면서 홀로 나갔다. 아마 벌써 스무번도 더 그는 약간 더러워진 그 종이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보았을 것이다. "'플럼 푸딩에는 절 대 손대지 말 것. 당신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에르큘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이든 다 설명 해 낼 수 있는 그도 이것만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말 굴욕적인 일이었다. 누가 이 쪽지를 쓴 걸까? 어째서 이런 쪽지를 쓴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단 한 순간도 편안할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몽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이상한 신음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황갈색 머리의 여자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채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그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 선생님."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가 중얼거렸다 "오, 선생님, 제발 그것 만은." "아가씨는 누구요?" 포와로가 상냥하게 물었다. "애니 베이츠입니다, 선생님. 전 로스 부인을 도와주러온 사람이지요. 전 아 무 뜻도 없었어요, 선생님. 전―뭐 나쁜 짓을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 님, 전 제깐에는 좋은 일을 한답시고 한 짓이었답니다. 선생님을 위한 일이 라고 생각되어서요." 포와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더러워진 그 종이쪽지를 앞으로 내밀었 다. "그럼, 이건 애니가 쓴 것인가?" "나쁜 뜻은 없었어요, 선생님. 정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애니."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한테 얘기해 주겠소?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말야." "저, 그건 그 두 사람 때문이었어요, 선생님. 리―워틀리 씨와 그분의 누이 동생 말이에요. 분명히 그 여자는 그분의 누이동생이 아니었거든요. 우리들 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여자는 조금도 아픈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까요. 우리는―모두들 그렇게 생각 했어요―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이지요. 선생님께는 다 털어놓겠어요. 전 깨끗한 타월을 갖다놓으려고 그 여자의 욕실에 들어가 있 었어요. 그런데 문틈으로 얘기가 들려오지 뭐예요. 그때 그 남자는 그 여자 방에서 무슨 얘긴가를 하고 있었지요. 전 그 두 사람이 하는 소리를 다 엿들 었답니다.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탐정이란 작자 말야. 여기에 온 다는 작자가 포와로라는 그 친구래. 우리도 미리 무슨 손을 써놓던가 해야겠 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 친구를 해치워야 할 것 같아.' 라고요. 그리고 나서 심술궂고 기분 나쁜 말투로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건 어디에 넣어두었지?' 그러니까 그 여자가, '푸딩 속에요.' 라고 대답하더라고 요. 오, 선생님, 전 제 심장이 하도 뛰어서 그게 멈춰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 을 정도였답니다. 전 그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푸딩 속에 독을 넣어 선생님을 독살할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전 어떡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로스 부인은 저 같은 것의 얘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선생님께 경 고장을 보내자고 생각하게 된 거랍니다. 전 그 편지를 쓴 다음 선생님이 잠 자리에 드실 때 그걸 보실 수 있도록 베개 위에 놓아두었지요." 애니는 숨이 찬 듯 말을 멈추었다. 포와로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애니, 내가 보기에 아가씨는 통속적인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군 그 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니면 텔레비전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 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가씨가 착한 마음씨와 어느 정도는 재치를 가지 고 있다는 거요. 내가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가씨한테 선물을 하나 보내 주겠소." "오, 고마워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애니, 선물로는 뭐가 좋지?" "제가 좋아하는 것 말씀인가요, 선생님?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 보내 주시겠어요?" "적당한 것이라면야." 에르큘 포와로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 지." "오, 선생님, 그럼 화장품을 넣는 가방을 하나 보내주시겠어요? 그 리―워 틀리 씨의 누이동생, 그 가짜 누이동생이 가진 것과 같은 멋진 화장품을 넣 는 가방 말예요." "그러지." 포와로가 말했다. "그러도록 하지. 그 정도라면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있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얼마 전 박물관에 갔을 때 바빌론인가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수천년이나 된 옛날 도기들을 본 적이 있었지―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화장품 넣는 상자도 있었단 말야. 여자의 마음이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로군."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애니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생각을 좀 해봤을 뿐이니까. 화장품 넣는 가 방을 아가씨한테 보내주도록 하겠소." "오, 고마워요, 선생님.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요, 선생님." 애니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갔다. 포와로도 만족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자―"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제―나도 가야겠군. 여기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 갑자기 누군가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바로 그 미슬토 밑에 서주시겠어요?" 브리짓이 말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정말 즐거웠다. 그는 자기가 아주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 냈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text down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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