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섬의 황소 1 에르큘 포와로는 자기를 찾아온 방문객을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고,단호해 보이는 턱과 푸르다기보다는 차라리 회색빛이라고 해야 좋을 눈, 그리고 진짜 짙은 남빛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그런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고대 그리스 인들의 보라색 머리카락 같다고나 할까? 그녀는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다 닳아빠진 시골풍의 복장,낡은 핸드백,그리고 언뜻 보기에는 몹시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가씨 같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내비치는 거만한 태도를 눈여겨 보았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맞아,저 아가씨는 카운티(군의 명문출신)야---하지만 돈은 없군! 나를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아주 다급한 일이 생 긴 모양이야.' 다이애나 메이벌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선생님이 저를 도 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그게 너무 이상스런 일이어서---" 포와로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다이애나 메이벌리가 말했다. "어렇게 선생님을 찾아온 건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 르기 때문이에요! 아니,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는걸요!" "그 판단은 내게 맡기는 게 어떻소?" 갑자기 아가씨의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저한테는 1년도 더된 약혼한 남자가 있는데,갑자기 그가 파혼을 선언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를 도전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제가 정신병자라 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죠." 에르큘 포와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마드무아젤.나는 아가씨가 아주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물론 연인들의 싸움을 무마해 주는 일이 분명 내 직업은 아닙니다.그리고 아가씨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난 알아요.따라서 그 파혼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얘기가 되지요.어때요,내 말이 맞죠?"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분명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는 자신이 조금씩 미쳐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약혼을 파기하는 거라고 했어요. 미친 사람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라는 거예요." 에르큘 포와로의 눈썹이 약간 치켜져 올라갔다. "그런데,아가씨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친다는 게 결국은 뭐죠? 사람은 누구나 조금 씩은 미친 구석이 있지 않은가요?" "하긴 그런 면이 있긴 있어요." 하고 포와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자신이 수란(달걀을 깨서 끓는 물에 반숙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감금시킬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나 사용하는 말이죠." "그럼,아가씨의 약혼자가 그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는 얘긴가요?" 다이애나 메이벌리가 말했다. "제가 보기로는 전혀 휴한테 무슨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그인,오,그인 정말 정상적인 사람이라고요.건실하고---믿음직하며---"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자신이 미쳐간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포와로는 잠시 말을 끊 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혹시 그의 가족 중에 미친 사람이라도?" 마지못해 하면서도 다이애나는 동의의 고개짓을 했다. "그이 할아버지가 정신이상이 셨던 것 같아요.그리고 대고모인가 하는 분도요.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어떤 사람이든지 그 가족 중에 약간 특이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잇다는 거예요.예를 들어 너 무 바보스럽다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머리가 좋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녀의 눈빛은 마치 호소하는 듯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슬픈 기색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안됐군요,마드무아젤." 그녀는 턱을 높이 치켜들고서 절규하듯이 외쳤다. "전 선생님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 러 온 게 아녜요!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고 온거죠!"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오?" "저도 몰라요.하지만 잘못된 게 있어요." "마드무아젤,그럼,그 약혼자에 대해 전부 얘기해 주시겠소?" 다이애나는 빠른 말투로 얘기했다. "그의 이름은 휴 챈들러예요.나이는 스물네 살이 고요.그의 아버지는 제독인데,리드 메이너에서 살고 있죠.거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부터 챈들러 가문이 살아오던 곳이에요.휴는 외아들인데 해군에 입대했죠.챈들러 가 의 남자들은 배를 타는 게 일종의 전통처럼 되어 있거든요.그게,그러니까 15세기경에 길버트 챈들러 경이 월터 레일리 경과 함께 배를 탄 것이 그 시작이라더군요.따라서 휴도 의당 해군에 입대했죠.물론 아버지 뜻에 따라서 한일이죠.그런데---그런데 그이 한테 해군에서 나오라고 강력하게 말한 사람이 바로 그 아버지였어요!" "그때가 언제죠?" "거의 1년 전 일이에요.정말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죠." "휴 챈들러는 자기 직업에 만족했습니까?" "그럼요." "스캔들 같은 건 없었나요?" "휴한테요? 전혀요.그는 아주 훌륭한 군인이었어요.그러니까 그 자신도---영문을 모 를 수밖에요." "챈들러 제독은 그 이유를 뭐라고 하던가요?" 다이애나가 천천히 말했다. "진짜 이유는 뭔지 몰라요.참! 이렇게 얘기했어요.휴가 재산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생겼다고---하지만---하지만 그건 핑계에 지나 지 않아요.심지어는 조지 프로비셔 씨까지도 그걸 알고 있는걸요." "조지 프로비셔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프로비셔 대령.챈들러 제독의 오랜 친구이자 휴의 대부이기도 한 분이죠.그는 대부 분의 시간을 메이너에 내려와 보낸답니다." "그럼,프로비셔 대령은 챈들러 제독이 왜 자기 아들을 해군에서 나오라고 한다고 생 각하던가요?" "그분도 깜짝 놀라시던걸요.전혀 영문을 모르시겠다는 표정이었어요.그러니까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 셈이에요." "휴 챈들러 자신조차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다이애나는 그 말에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포와로는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야 그도 몹시 놀랐겠지요.하지만 지금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전혀 아무 말도?" 다이애나는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기는----약 1주일 전 일인데요.자기 아버지가 옳았다더군요.그냥 그말뿐이었어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까?" "물론이죠,하지만 통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에르큘 포와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쪽에서 무슨 생각나는 일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약 1년 전에 말이오.혹시 짐 작되는 일이나 그 당시 떠돌아다니던 소문 같은 거라도 있다면---" 그녀가 발끈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포와로가 조용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얘기 해 봐요." "말할 게 있어야죠---선생님한테 얘기할 만한 그런 건 없어요." "그게 뭔데요?" "선생님은 성질도 참 고약하시네요! 농장에서는 가끔씩 끔찍한 일이 생겨요.복수를 하는 건지---아니면 머리가 돌아버린 사람이 한 미친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일인데요?" 그녀가 마지못해서 말했다. "양들 때문에 온통 난리가 났었어요....머리가 모두 잘린 채로 발견되었거든요.오!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모두 한 농부의 양들이었는데,성격 이 몹시 못된 사람이었어요.그래서 경찰은 그 사람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했었죠." "그 범인을 못 잡았소?" "예." 갑자기 그녀가 격렬한 어조로 덧붙였다. "만약 선생님 생각이---" 포와로는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생각이 어떤지는 아가씨가 짐 작도 할 수 없소.그러니까 아가씨의 약혼자가 의사의 진찰을 받았는지만 말해 봐요." "아뇨,분명히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맨 먼저 그것부터 해봐야 되는 일 아니오?" 다이애나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가 그럴려고 하지 않는걸요.그는---그는 의사들을 몹시 싫어해서요." "그럼 그의 아버지는?" "제가 보기에는 제독도 그러헥 의사들을 믿는 것 같지가 않아요.뭐,돈이나 밝히는 장사꾼들이라나요." "제독의 건강은 어떠십니까? 건강한가요?" 다이애나가 낮게 말했다. "그분은 갑자기 늙어버리셨어요.최근에---" "작년?" "예,너무 쇠약해서---마치 유령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예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약혼을 찬성했습니까?" "오,그럼요.우리 집과 그 댁은 가까운 이웃간이었거든요.우리 집은 거기서 대대로 살 아왔답니다.휴와 제가 약혼을 했을 때 그분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그럼,지금은요? 두 사람이 파혼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뭐라던가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어제 아침에 그분을 만났어요.그런데 모습이 아주 형편없으시더군요.그분은 제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가,너한테는 모진 일일 게다.하지만 그 애가 잘한 거야.그애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라고요." "그래서---"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나를 찾아온 거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물었다. "절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에르큘 포와로가 대답했다. "모르겠소,하지만 직접 내려가서 조사나 한번 해보기로 하지요." 2 그 무엇보다도 에르큘 포와로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다름아닌 휴 챈들러의 멋진 체격이었다.큰키에 근사하게 균형잡힌 몸매,우람한 가슴과 어깨,황갈색 머리카락. 어느 모로 보나 남자다운 힘과 젊음이 물씬 풍겨지는 젊은이였다. 그들이 다아애나의 집에 도착한 즉시 그녀는 챈들러 제독에게 전화를 걸었고,그들은 곧바로 리드 메이너로 향했다.그곳에서 세 남자가 길다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나이보다 훨씬 뫇어보이는 챈들러 제독은 백발에,생각에 잠긴 검은 눈,그리고 마치 무거운 짐을 둘러멘 듯한 사람처럼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있었 다.그에 비하면 그의 친구 프로비셔 대령은 이제 관자놀이에서부터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하는 불그스레한 머리카락,깡마르고 탄탄해 보이는 조그만 체구의 남자였다. 참착하지 못하고 성질이 급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테리어(민첩하고 영리한 개의 품 종)같은 조그만 남자였다.그러나 그의 눈초리만은 조금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낮추었다가는 갑자기 앞으로 쑥 내미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그 교활해 보이는 조그만 눈은 사람을 예리하게 주시했다.그리고 세 번째 남자가 바로 휴였다. "멋있는 청년이지요,안 그렇소?" 하고 프로비셔 대령이 말했다. 그는 포와로가 청년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을 눈치채고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와 프로비셔가 함께 나란히 앉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쪽에 앉아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약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포와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예,정말 당당하게 생겼어요.당당해.저 젊은이는 기운찬 황소 같아 보여요.예,바다의 신에게 제물로 바 쳤던 황소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건강한 남성미가 뚝뚝 넘쳐 흐 르는군요." "아주 건강해 보이지요?" 하고 프로비셔가 한숨을 쉬었다.그의 예리한 조그만 눈이 생각에 잠겨 있는 에르큘 포와로를 흘끗 훔쳐 보았다.이윽고 그가 말했 다.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아 그거야 비밀스런 얘기가 못 되죠!" 포와로는 품위 있게 손을 내저었다.그 제스처는 그가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당당 하게 본명을 쓰고 다닌다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프로비셔가 물었다. "저 애가 당신을 오라고 했지요? 이번 일 때문에 말이오 "일이라면...?" "휴 청년의 일이죠...예,당신이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줄 알아요.하지만 그 애가 왜 당신을 찾아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구면....이런 종류의 일은 당신의 전문분 야가 아닐 텐데---차라리 의사를 찾아갔다면 또 몰라도." "내 전문분야의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만....당신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 지요." "내 말뜻은 그 애가 당신한테서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요." "메이블리양은---"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투사입니다." 프로비셔 대령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그애는 정말 투사라오. 좋은 아가씨입니다.아마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싸 울 수 없는 게 있는 법인데..." 그는 얼굴이 갑자기 늙고 지쳐 보였다. 포와로는 아까보다도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가족 중에 정신이상자가 있다면서요?" 프로비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한 세대나 두 세대를 건너뛰면서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지요.가장 최 근에 발병했던 사람은 바로 휴의 할아버지였소." 포와로는 다른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다이애나는 웃기도 하고 휴를 놀리기도 하면서 대화를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 세 사람은 세상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 정신이상이 된 사람들은 어떤 증세를 나타냈습니까?" "그의 할아버지도 결국에는 사람들이 손을 못 댈 정도로 난폭해졌죠.그 사람도 서른 살까지는 별 탈없이 잘 살았다오.아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말이오.그가 조금씩 이상 해지면서 온 동네 사람들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그러니 온갖 소문이 떠돌 수밖에요.참,말도 많았지요.하여튼 그 소문이 안 나게 하려고 식구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하지만,글쎄---" 그는 어깨를 치켜 올렸다. "결국에는 그가 완전히 미쳐버렸지 뭐겠소! 사람을 죽인거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의 감정을 받아야 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곧 덧붙였다. "그는 아주 늙어서 죽었다더군요..... 물론 휴가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오.그가 의사를 찾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이 유도 바로 그거고.즉,그는 저신이 오랜 세월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살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거요.그러니 내가 그를 나무랄 수도 없지요.나 역시 똑같은 생각이니까." "그러면 챈들러 제독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아 받은 마음의 상처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지요." 하고 프로비셔가 간단 하게 말했다. "자기 아들을 사랑하나요?" "그 애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는데요.아시겠지만 저 애의 어머니는 저 애가 겨우 열 살 때 뱃놀이하러 갔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그만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부터 저 친구는 재혼도 하지 않고 혼자 저 애만 돌보며 살았지요." "부인을 몹시 사랑했나 보군요?" "사랑했다기보다 숭배했다는 편이 더 맞을 거요.하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숭배 했지요.그녀는---이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또 없을 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시겠소?" "정말 한번 봤으면 좋겠군요." 프로비셔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서 일어났다.그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포와로 씨에게 그림 좀 구경시켜 드리겠네,찰스.미술에 상당히 안목이 있으신 분 이거든." 제독은 애매하게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포와로는 쿵쿵거리며 테라스를 따라 걷는 프로비셔의 뒤를 따라갔다.순간 쾌활한 척 떠들던 다이애나의 얼굴이 그 가면을 벗 어버리고 고뇌에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그러자 휴도 머리를 들고서 검은 콧수염을 커 다랗게 기른 조그만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포와로는 프로비셔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밝은 햇살 속에 있다가 갑자기 어둑한 실내로 들어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혀 물체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어둠에 어느 정도 눈이 익자 그는 집안이 상당히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프로비셔 대령은 그를 화랑으로 안내했다.벽난로로 장식한 벽에 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챈들러 가 조상들의 초상화가 죽 걸려 있었다.대부분 엄숙 하거나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예복이나 해군 제복,그리고 여자들은 진주 목걸이에 공단옷차림이었다. 드디어 프로비셔 대령이 화랑 맨 끝에 있는 초상화 앞에 멈춰섰다. "오픈 작품이죠." 하고 극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그레이하운드(몸이 길고 날쌘 사냥개의 일종)의 목에 손을 올 려놓은 채 앉아 있는 키가 큰 여자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적갈색 머리카락과 생기 발랄해 보이는 표정을 한 미인이었다. "그 애는 자기 어머니의 이미지를 많이 닮았어요." 프로비셔가 말했다. "그런 것 같 지 않소?" "어떤 면에선 그렇군요." "물론 그녀의 부드러움이나 여성다움은 닮지 않았지요.그 앤 남성미가 철철 넘쳐흐르 니까---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 애가 이 어받지 않았으면 좋을 그런 챈들러 가의 피를 이어받아 정말 안됐어....."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방안에는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고인이 된 챈들러 가 사람들이 대대로 그들의 핏속에 흐르는 광기와 그로 인해 비참한 온명에 처하게 됨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돌려 조지 프로비셔를 쳐다보았다.그는 벽에 걸린 아름다운 여인의 초사오하를 황활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이윽고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를 잘 아시나 봐요...." 프로비셔가 입을 실룩이며 말했다. "우린 소꿉친구였소.그녀가 열여섯 살 때 난 인도 에 중위로 파견되었죠....내가 돌아왔을 때는---그녀가 이미 찰스 챈들러와 결혼을 한 뒤였소." "본래 그 사람도 잘 알고 있었습니까?" "찰스도 내 소꼽친구라오.아주 친한 친구죠---옛날부터 말이오." "그 두사람이 결혼한 뒤에도 그들과 자주 만났습니까?" "틈이 나기만 하면 여기 와서 지냈죠.그래서 이곳은 내게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소 찰스와 캐롤라인은 여기에 항상 내 방을 마련해 두고---내가 언제 오든지 지내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해주었소." 그는 어깨를 펴더니 갑자기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머리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도 바로 그거요.언제 날 필요로 할지 몰라서 말이오.찰스가 날 필요로 하는 한---난 여기 있을 거요." 다시금 비애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모든 일에 대해서?" 하고 포와로가 물었다. 프로비셔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대로 서 있었다. " '말은 적을수로 좋다'는 속담이 있지요.솔직히 말해,포와로씨,난 당신이 뭘 할 수 있을런지 잘 모르겠소.다이애나가 왜 당신을 끌어들여 여기까지 내려오게 했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오." "다이애나 메이벌리와 휴 챈들러가 파혼한 사실은 물론 아시겠지요?" "예,그건 나도 알아요." "그럼,그 이유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프로비셔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선 나도 아는 바가 없소.그런 일은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는 거지 내가 간섭할 만한 게 못 되니까." 포와로가 말했다. "다이애나의 말로는 챈들러가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던데요.자기가 곧 미치게 될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는 프로비셔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송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꼭 그 지랄맞은 일에 대해 얘기해야 되겠소? 도대체 당신이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휴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물론 그건 그의 잘못 이 아니라 유전 형질---염색체---즉,뇌세포의 이상 때문입니다.하지만 일단 그가 그 런 사실을 안 이상에는 파혼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또 그러는 게 사람의 도리이 기도 하고요." "내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만 할 수 있다면야..." "방금 내가 다 얘기했잖소." "아주 하찮은 얘기들만 하셨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소." "챈들러 제독은 왜 자기 아들을 해군에서 나오게 했습니까?"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오." "왜요?" 프로비셔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포와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양이 살해된 일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상대방이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그 얘기에 대해서 들었소?" "다이애나 양이 얘기해 주더군요." "그런 일을 다 떠들어대고 다니다니 참 한심하군.가만히나 있지." "그녀는 그 얘기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데요." "그 앤 몰라요." "뭘 모른다는 거지요?" 싫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프로비셔가 입을 실룩이면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거 참,당신이 꼭 그걸 알고 싶다면...내 얘기하리다.챈들러가 그날 밤 소 리를 들었는데 누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 같더라는군요.그래서 밖에 나가 실펴봤더니 그애의 방에 불이 켜져 있더랍니다.챈들러가 그 애의 방에 들어가 보지 휴가 침대에 잠들어 있는데---죽은 듯이 잠들어 있더래요.글쎄,옷을 입고서 말이오.그런데 그 옷 에 피가 묻어 있더라지 뭐겠소.그리고 방안에 있는 세면대 위에도 피가 가득 고여 있고 말이오.그 애의 아버지는 차마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답니다.그 다음날 아침에 양들이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휴를 다그쳐 물었다고 합디다.하지 만 그 애는 전혀 기억이 없다는 거요.그의 신발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 채 옆문에 버려져 있었는데도 말이오.세면대의 피도 전혀 모른다는 얘기고,아무튼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거였소.가엾게도 자기가 한 일을 자기도 모른다는 것,그게 뭘 뜻하 는지는 잘 아실 거요.찰스가 나를 찾아와서 그 모든 얘기를 다 합디다.그래서 우린 의논을 했죠.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그런데 사흘 뒤에---똑같은 일이 다시 발 생한 거요.그 뒤는---말 안해도 잘 아실 거요.그 애는 해군에서 나왔지요.그 애가 찰 스의 눈앞에 있어야 지켜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오.해군에서 사고라도 치는 날이면 그 야말로 큰일 아니겠소? 그래서 그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어요." 포와로가 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 프로비셔가 사납게 말했다. "더 이상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소.휴 자신도 그게 최선 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에르큘 포와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항상 에르큘 포와로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3 그들이 홀로 들어가다 때마침 걸어오던 챈들러 제독과 마주쳤다.그는 바깥의 환한 빛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만 보이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두분 다 여기 계셨군.포와로 씨,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내 서재로 가시죠." 프로비셔는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고,포와로는 제독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마치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서 해군 장교에게 소환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독이 포와로에게 앉으라고 커다란 안락의자 하나를 가리켰다.그리고 자신도 그 맞 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프로비셔와 함께 있을 동안 포와로는 그에게서 불안정하 고 신경질적이며 안절부절 못하는---이른바 극도의정신적 긴장의 증세가 있다는 느낌 을 받았었다.반면 챈들러 제독에게서는 조용하고도 깊은 절망감과 좌절감이 온몸 구 석구석에 배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챈들러가 입을 열었다. "다이애나가 이번 일에 당신을 끌어들인 것 에 대해 정말 미안하단 말밖에는 할말이 없소이다.가엾은 것......그게 그 애한테 얼 마나 못할 짓인지는 잘 안다오.하지만---글쎄요---그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비극일 뿐,외부인이 나설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또 원하지도 않고요.포와로 씨,제 말을 이 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이애나,그 가엾은 애는 그게 믿기지가 않겠지요.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아마 지 금도 믿지 않을 겁니다.내가 그걸 알지만 않았어도---" 그는 말을 끊었다. "알다니요,뭘?" "핏속에 흐르는 그 더러운 병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약혼을 승낙하셨잖습니까?" 챈들러 제독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 반대를 하지 않았느냐 그 말씀이지요? 하지 만 그때는 몰랐지요.휴는 제 어미를 꼭 빼닮았어요.챈들러 가문의 사람들을 닮은 구 석은 하나도 없거든요.물론 난 모든 면에서 그 애가 제 어미니를 닮기를 바랬죠.애기 때부터 지금까지 그 애한테 이상증세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난 그걸 몰랐 었지요.제기랄,먼 조상때부터 대대로 우리 핏속에 광기가 흐르는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오!"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의사의 진찰도 받지 않았다고요?" 챈들러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암,절대 안 받을 거야! 여기서 내가 돌봐주는 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오.그 애를 짐승처럼 네벽 속에다 가둬놓을 순 없소." "그가 여기선 안전하다고 하셨는데,그럼,다른 사람들도 안전한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포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챈들러 제독의 슬퍼보이는 검은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제독이 씁쓰름하게 말했다. " '장사에는 각각 전문이 있다' 는 속담도 있소. 당신은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전문인 사람 아니오? 포와로 씨,내 아들은 범인이 아니 란 말이외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이번 일이 커지게 되면....그 양들을..." "양에 대해서 누가 얘기했지요?" "다이애나 메이벌리 양,그리고 당신의 친구인 프로비셔 대령." "조지가 안해도 될 얘기를 쓸데없이 해버렸군." "그는 당신의 소꿉친구라면서요?" "참 좋은 친구지." 하고 제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부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면서요?" 챈들러가 미소를 지었다. "예,조지가 캐롤라인을 사랑했었나 봐요.그녀가 아주 어렸 을 때 말입니다.그가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난 행운아였어요.아니 그렇게 생각했었죠.내가 그녀를 그에게서 빼앗은 셈이 되긴 했지만---결국에는 나도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숨을 쉬는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포와로가 말했다. "프로비셔 대령도 함께 있었습니까? 부인이 물에 빠졌을 때 말 입니다."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그 사고가 났을 때 그는 우리와 함께 콘월 에 내려와 있었어요.아내와 난 보트를 타러 함께 밖으로 나갔고---그날 그는 집에 머 물러 있었습니다.난 그 배가 어떻게 해서 뒤집히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 어요.갑자기 배에 물이 새어들어왔던 게 분명해요.우리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 는데---갑자기 커다란 파도가 몰려왔어요.난 어떡해서든지 아내의 손을 놓치지 않으 려고 기를 썼지만..."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내의 시체는 이틀 뒤에 떠 올랐지요.그때 우리가 어린 휴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 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적어도 그때의 생각은 그랬다는 거죠.하지만 이제와서는---차라리 그때 우리가 휴를 데리고 갔었으면 더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가엾은 녀석,그때 그냥 함께 죽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다시금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암담한 절망감이 가득찬 한숨이었다. "포와로 씨,챈들러 가문에선 우리가 마지막이오.우리가 죽고 나면 리드에 사는 챈들러 가문의 대는 완전히 끊기게 되는 셈이지요.그래서 휴가 다이애나와 약혼을 했을 때 내 소원은---아니,이제 와서 애기 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데.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 오.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제 다 했소이다!" 4 에르큘 포와로는 장미꽃이 피어 있는 정원에 앉아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는 휴 챈들 러도 앉아 있었다.다이애나 메이벌리는 방금 자리를 떴다. 젊은이가 자기의 동행 쪽으로 그 단아하면서도 괴로움이 가득한 얼굴을 돌렸다. "포와로 씨가 그녀를 좀 설득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 속했다. "아시다시피 다이애나는 투사예요.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당연히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그녀는---죽어도 내가---정상이라는 거예 요." "젊은이도 정말 자신이---비정상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젊은이가 주춤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완전히 내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닙니다.하 지만 점점 나빠지고 있지요.다행스럽게도 다이애나는 잘 몰라요.그녀는 정상적일 때 의 제 모습만 봐왔으니까요." "그럼,젊은이의 상태가 나빠지게 되면---어떤 일이 벌어지나?" 휴 챈들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윽고 그가 말했다. "첫째는---꿈을 꾸지요.그리 고 꿈속에서 전 미쳐 있습니다.예를 들어,어젯밤만 해도---꿈속에서 전 더 이상 인간 이 아니었습니다.처음에는 난 황소가 되어 있었어요.미친 황소---강렬하게 내비치는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이곳 저곳을 마구 쏘다니는---내 입에는 먼지와 피가 잔뜩 묻 어 있고---먼지와 피가...그 다음에 전 개가 되었어요---광견병에 걸려 입에 침이 줄 줄 흐르는 개 말입니다---내가 다가가면 애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고---사람들 은 나를 총으로 쏘려고 했어요.누군가 나한테 물 한 그릇을 갖다주었지만 마실 수가 없었어요.목은 말라 죽겠는데...마실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어요.그런데 진짜 목이 마르더라고요.난 세면대로 갔습니다.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어요.목이 말라 미칠 것 같았습 니다.그러나,포와로 씨,전 마실 수가 없었어요.....한 모금도 삼킬 수가 없더라고요. 오,하나님,난 마실 수가 없었어요." 에르큘 포와로는 가벼운 탄식소리를 내었다. 휴 챈들러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그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꼭 움켜쥔 채로 얼굴을 앞으로 쑥 내밀고서,마치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 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리고 꿈이 아닌 것도 있어요.갑자기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면,무서운 모습을 한 유령들이 보이는 거예요.유령들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그럴 때면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가 온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미친듯이 날뜁니다.마치 악마라도 된 것처럼 말이죠!" "저런,저런,쯧쯧!"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혀를 찼다.그것은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은 비난이 담긴 소리였다.휴 챈들러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사정이 그러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제 핏속에는 우리 조상의 그 끔찍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건 엄연한 현실이죠.제때에 그걸 발견한 것만 해도 참 다행스런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뭐!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망정이지,만약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그 애가 그 무서운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기라도 했다면!" 그는 포와로의 팔을 잡았다. "그러니까 제발 그녀를 설득시켜 주셔야 합니다.그녀한 테 모든 걸 잊고 새 출발하라고 얘기 좀 해주십시오.그녀가 날 단념하기만 하면 곧 좋은 사람이 생기겠죠.스티브 그레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그녀한테 아주 반해 있 어요.아주 좋은 남자죠.그녀가 그와 결혼한다면 행복하게 살 겁니다.또 안전하게요. 전 그녀가---행복해지만을 바랄 뿐입니다.물론 그레엄은 돈이 많지 않고 그녀의 집 안도 역시 가난하지만,제가 죽어버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에르큘은 돌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째서 젊은이가 죽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라는 건가?" 휴 챈들러가 미소를 지었다.그것은 은은하고도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우리 어머니 돈이 있거든요.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많은 돈을 상속받았는데,그 돈을 제게 물려주셨지요.그런데 전 그 돈을 모두 다이애나에게 물려줄 생각이거든요." 에르큘 포와로는 의자에다 몸을 기댔다. "아하!" 이윽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젊은 이가 아주 오래 살 수도 있잖나?" 휴 챈들러는 머리를 흔들었다.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오,포와로 씨.전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갑자기 그는 몸을 흠칫 떨며 뒤로 물러섰다. "오,하나님! 저것 좀 보세요!" 그는 포와로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기---당신 옆에 서 있어요....해골이에요.뼈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날 부르고 있어요.나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고요." 동공이 커다랗게 벌어진 그의 눈이 태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더니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비 틀거렸다.이윽고 포와로에게로 돌아서면서,그가 마치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보셨죠---아무것도?" 에르큘 포와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챈들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요---저렇게 보이는 건요.제가 두려워 하는 건 바로 피예요! 내 방에 있는 피---내 옷에 묻어 있는 피...우리 집에는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잠이 깨고 보니까 그게 목이 잘린 채로 내 방에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난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면도칼을 쥐고서 침대에 누워 있고 말이죠!" 그는 포와로에게로 더 가까이 몸을 구부렸다. "가장 최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어 요."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마을에 있는---고원지대에서 말이죠.어린 양들과--- 콜리(스코틀랜드 원산의 양 지키는 개)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된 겁니다. 아버지가 밤이면 내 방에다 자물쇠를 잠그지만,때때로---때때로---아침이면 그 문이 열려져 있곤 합니다.내가 나도 모르는 곳에다 열쇠를 하나 숨겨두고 있나 봐요.나도 모르겠어요.그런 짓을 하는 건 진짜 내가 아니라---누군가 내 맘속에 들어와서는--- 나를 조종하여---피를 원하는 미친 괴물로 변하게 하고 물도 마실 수 없게 하는 건 지...." 돌연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잠시 뒤 포와로가 물었다. "내가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그런데도 왜 의사를 찾아가지 않느냐하는거요 휴 챈들러는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이해 못하십니까? 신체적으로 난 튼튼합니다. 황소처럼 튼튼하다고요.의사를 찾아가면 전 네모난 방에 갇혀 수십 년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어요.총을 구해 자살하든지,아니면 사고로 가장해 죽든 지...다이애나도 이해할 겁니다.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게 낫다는걸!" 그는 도전적인 눈길로 포와로를 쳐다보았지만,포와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젊은이는 뭘 먹지?" 휴 챈들러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바탕 큰소리로 웃었다. "소화불량 때문에 내가 악 몽을 꾼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포와로는 부드럽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젊은이는 뭘 먹지?" "누구나 다 먹고 마시는 겁니다." "특별히 먹는 약 없나? 캡슐로 된 약이나,아니면 알약?" "세상에! 절대 아녜요.약을 먹는다고 해서 제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조롱하는 투로 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다고 해서 병든 가슴에 봄이 올꺼나!" 에르큘 포와로가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한번 고쳐보려는 거네.이 집에 혹시 눈이 나쁜 사람 있나?" 휴 챈들러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눈이 아주 많이 나쁘시지요.그래서 상당히 자주 안과의사한테 가시는 편이죠." "아하!" 포와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윽고 입을 열었다. "프로비셔 대령이 인도 에서 오래 살았다고 했나?" "예,인도에서 육균 대령으로 근무하셨습니다.그래서 인도에 대해서는 무척 정통하신 편이고---얘기도 많이 하시죠.그 나라의 고유습관이라든지---전통 같은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포와로가 다시 '아하!' 라고 탄성을 나지막하게 발했다.다시 그가 말했다. "턱을 베었나 본데." 휴가 손을 올려 자기 턱을 만졌다. "예,아주 상당히 많이 베었어요.언젠가 면도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를 깜짝 놀라 게 했지 뭡니까? 아시다시피 전 요즘 아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거든요.그리고 턱과 목에 뾰루지가 나서 면도하기도 아주 힘들어요." 포와로가 말했다. "진정시키는 크림을 사용해야 되겠는걸." "오,안그래도 사용하고 있어요.조지 아저씨가 나한테 하나 줬거든요."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마치 미장원에서나 하는 여자 같은 얘기를 하고 있군요. 로션,진정시키는 크림,약,눈병.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죠? 그래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셨느냐고요,포와로 씨?" 포와로가 조용하게 말했다. "난 다이애나 메이벌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거네" 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진지한 얼굴로 그가 포와로의 팔에 한 손을 올려놓 았다. "예,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그녀에게 이제 잊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시오.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해 주세요.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 주시고...그리고---오,제발 내 곁을 떠나라고 말씀해 주세요! 지금 나를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말이에요.내 곁 을 떠나----잊어버리라고 말해 주세요!" 5 "마드무어젤,용기가 있습니까?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아가씨한테는 그게 필요해요." 다이애나가 절규하듯이 외쳤다. "그럼,그게 사실이에요? 그가 미친 사람이라는 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마드무아젤,난 정신과 의사가 아닙니다.따라서 난 이 사람 이 미쳤다든가 정상이라는 말을 할 만한 입장이 못 됩니다." 그녀가 그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챈들러 재독은 휴가 미쳤다고 생각하세요.프로비셔 대령도 마찬가지고요.게다가 휴 자신도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포와로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아가씨는요?" "저요? 전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그래서---"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는 거지요?" "예,그렇지 않다면 왜 제가 선생님을 찾아갔겠어요?" "지금까지 내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던 말이 바로 그겁니다,마드무아젤." 에르큘 포와 로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스티브 그레엄은 누굽니까?"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스티브 그레엄? 오,그 사람은---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 요." 그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마음속에 뭐가 있는 거죠? 도대채 무슨 생 각을 하시느냐고요? 선생님은 거기 그렇게 서서---선생님의 그 거대한 콧수염만 내보 이며---햇빛 속에서 눈만 깜박거리기만 할 뿐이지 제게는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 잖아요.그러니까 두려워진단 말이에요.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고요.선생님은 왜 저를 두렵게 만드시는거죠?" "아마---"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내 자신도 두렵기 때문일거요." 깊숙한 잿빛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 다. "선생님은 뭘 두려워 하시죠?" 에르큘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것도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말이다! "살인을 막기보다는 살인범을 잡는 게 훨씬 쉬운 법이죠."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살인? 그런 단어는 쓰지마세요.무서워요." "나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쓸수밖에 없소." 그가 돌연 어조를 바꿔 빠르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드무아젤,오늘밤은 아가씨와 내가 리드 메이너에서 보내야 할겁니다.그러니까 아가씨가 그걸 주선해 주어야 하는 데,가능하겠소?" "전---예---그렇게 하도록 하죠.하지만 왜---?" "이제 시간이 없기 때문이오.아까 아가씨는 용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그걸 증명해 봐요.그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아달란 뜻이었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집안으로 사라졌다. 포와로는 잠시 시간을 둔 뒤에 그녀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그는 서재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는 넓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위층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휴 챈들러의 방을 쉽게 찾았다.그 방 한 구석 에는 언제나 뜨거운 물과 찬물이 나오는 세면기가 설치되어 있었다.그리고 그위에 달 린 유리선반 위에는 여러 가지 튜브와 항아리,그리고 병들이 놓여 있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재빨리 다가가서 능숙한 솜씨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가 홀로 다시 내려가자 마침 다이애나가 반 항적이고 상기된 얼굴로 서재에서 나오고 있었다. "잘 됐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챈들러 제독이 포와로를 서재로 데리고 가서는 문을 닫았다. "이봐요,포와로 씨.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다이애나가 오늘밤 여기서 당신과 함께 지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소.난 손님을 푸대접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런 푸대접의 문제가 아닙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난 손님을 냉대했다는 소릴 듣고 싶지 않아요.아니,솔직히 말해서 난 그게 싫소,포와로 씨.난--- 당신이 뭐라고 하던간에 그 애와 당신이 여기서 지내 는게 싫단 말이오.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려는 이유도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그런다 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답디까?" "시험삼아 한번 해보는 거죠." "무슨 시험요?" "그건 내 일이니까 모른 척 해주시면서 좋겠는데...." "아니,이봐요,포와로 씨.난 당신한테 여기 와달라고 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포와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믿어 주시오,챈들러 제독.난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내가 여기 온 건 단지 사랑에 빠진 한 아가씨의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당신은 자신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게 얘기해 줬어요.또 프로비셔 대령도 그렇고,휴라는 그 젊은이도 마찬가지였어요.그래서 이제는---내 눈 으로 직접 보려는 겁니다." "좋아요,하지만 뭘 본다는 거요? 내 분명히 말해 두지만 볼 건 아무것도 없소! 내가 매일 밤 휴의 방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밖에는 말이오.단지 그것뿐이오." "그렇지만---때로는---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 문이 잠겨져 있지 않다고 하던데요?"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문을 잠그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챈들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문의 자물쇠는 항상 조지가 여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뜻이오?" "그 열쇠는 어디에 두십니까? 자물쇠에 그냥 꽂아두십니까?" "아니오,집 밖에 있는 궤짝에 올려놓지오.그리고 아침에 나나 조지,아니면 위더스라는 집사가 그 속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어요.그렇게 하는 이유는 밤에 휴가 자다가 일어나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위더스한테 들었기 때문이오.단언코 말하지만 그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나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다른 열쇠가 또 있습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없소." "누군가 그 열쇠를 하나 더 만들어 갖고 있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누가 그런--" "아드님은 자기가 자신도 모르는 곳에다 그 열쇠를 하나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데요." 그때 방 한구석에는 프로비셔 대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찰스,난 싫네..그 아가씨는" 챈들러 제독이 재빨리 말했다. "내 생각과 똑같군.그 아가씨는 오늘밤 여기서 지내면 안돼요.그러니까 당신 혼자라도 괜찮다면 여기서 하룻밤 자든지." 포와로가 말했다. "메이벌리 양이 오늘밤 여기서 자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십니까?" 프로비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오.만약에---" 그는 말을 끊었다.포와로가 말했다. "휴와 그 아가씨는 서로 사랑하는데....." 챈들러가 외쳤다. "그게 바로 그 이유란 말이오! 제기랄,이봐요.미친 사람은 이것저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오.휴도 그걸 잘 알고 있소.그러니까 다이애나가 여기서 지내면 안된다는 거요." "그 점에 관해서라면---"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다이애나 양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겠지요." 그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다이애나가 차 안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밤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저녁 먹을 시간에 돌 아올께요." 차가 한참 달려가는 동안,포와로는 그녀에게 자신이 제독과 프로비셔 대 령하고 함께 막 나누었던 대화를 되풀이해 들려주었다.그녀는 경멸하듯이 웃었다. "휴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죠?" 대답삼아 포와로는 그녀에게 마을에 있는 약국에 좀 들려도 좋겠냐고 물었다.칫솔을 깜박 잊고 가져오지 않아 좀 사야겠다고 말했던 것이다.약국은 평화스러운 마을 한가 운데 길가에 있었다.다이애나는 차 안에서 기다렸다.그런데 어느 순간 에르큘 포와로 가 칫솔을 고르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6 묵직한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오크재 가구가 딸린 커다란 침실에서 에르큘 포와로 는 앉아서 기다렸다.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이제 모든 준비 는 완료되었다.호출이 온 것은 새벽이 채 되기 전이었다.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포와로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복도에 는 남자 두 사람이 서 있었다.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중년의 두 남자가 말이다. 제독은 심각하고도 무서운 얼굴로,프로비셔 대령은 얼굴을 실룩이며 약간 떨고 있었 다.챈들러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포와로 씨,함께 가시겠소?" 다이애나 메이벌리의 방문 앞에 웬 사람이 아무렇게 누워 있었다.불빛이 마구 헝클어 진 황갈색 머리를 비쳤다.휴 챈들러가 거기서 코를 골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는 화장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차림이었다.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날카롭게 휘 어진 나이프가 불빛을 받아 날이 번쩍거렸다.번쩍거리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붉은 반점들이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다. 에르큘 포와로가 가만히 부르짖었다. "오,이런!" 프로비셔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무사해요.그녀한테는 손을 못 댔어요." 그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다이애나! 우리야! 문 좀 열어줘!" 포와로는 제독이 신음소리를 내며 탄식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고,이 불쌍한 자식!" 안에서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자마자 다이애나가 거 기에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무슨 일이 생겼어요? 누군가가---안에 들어오려고 했는데---그 소리를 들었어요. 문을 더듬고---손잡이를 돌리다가---문짝을 마구 할퀴는---오! 정말 무서웠어요... 짐승 같은 소리였어요." 프로비셔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찬만다행이었군!" "포와로 씨가 문을 잠그라고 했어요." 포와로가 말했다. "그를 안으로 데려다 누입시다." 두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의식불명인 젊은이를 들어올렸다.그들이 다이애나 곁을 지나가자 그녀는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휴? 저 사람이 휴예요? 저건 뭐죠---손에 묻어 있는?" 휴 챈들러의 손에는 갈색을 띤 붉은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다이애나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건 피예요?" 포와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제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야! 고양이야! 아래층 홀에서 고양이가 목이 잘린 채로 있는 것을 봤지.그리고 나서 그 애가 여기로 올라온 게 분명---" "여기?" 다이애나의 목소리리가 공포로 인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했다. "나한테?" 의자 위에 눕혀 놓았던 남자가 몰을 흠칫 떨더니---뭐라고 중얼중얼거렸다.사람들이 넋나간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휴 챈들러가 일어나 앉더니 눈을 껌벅거렸다. "어!---" 그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왜 여기 돌연 그가 말을 멈추었다.그는 그때까지도 자기 손에 쥐여 있는 나이프를 썂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더니 느리면서도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 죠?" 그의 눈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러다가 드디어 그의 시선이 벽 쪽으로 뒷걸음질치고 잇는 다이애나한테 가서 머물렀다.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다이애나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였다.휴가 외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 좀 해줘요! 어차피 알아야 될 일이 아닙니까?" 그들이 마지못해 더듬거리면서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그는 참을서 있게 조용히 그 얘기를 들었다.창 밖에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에르큘 포와로가 커튼을 옆으로 밀어젖혔다.그러자 새벽의 밝은 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어왔다. 휴 챈들러으 표정은 복잡해 보였고 목소리는 딱딱했다. "알겠어요." 그러더니 자리에 서 일어났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아름다운 아침이죠? 숲속에 나가 토끼나 잡을까 봐요." 그는 놀란 눈으로 자 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방을 나가버렸다.그러자 제독이 벌떡 일어나 따라 가려 했다.프로비셔가 그를 잡았다. "안돼,찰스,안돼.그게 최선의 방법이야,그 애를 위해서는.가엾은 것! 어느 누구도 어쩔 수가 없단 말일세." 다이애나가 침대에 쓰러져서는 마구 흐느끼기 시작했다.챈들러 제독이 떨려서 잘 들 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조지---자네가 옳았어.그 앤 용기가 있지..." 프로비셔 역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앤 남자고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갑자기 챈들러가 말했다. "제기랄,그 지랄맞은 외국인은 어디갔지?" 7 총기실에서 휴 챈들러가 선반 위에 놓인 권총을 내려 막 탄알을 재려는 찰나 에르큘 포와로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르큘 포와로가 한 말은 단 한마디였지만 이상스럽게도 그 말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다. "안돼!" 휴 챈들러가 그를 노려보았다.그가 무겁거도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나한테서 손을 떼세요.간섭하지 말라고요.'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요.이것만 이 내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요." 다시 에르큘 포와로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안돼." "만일 다이애나의 방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다면 내가 다이애나의 목을 잘랐을지도 모 른다는 걸 아세요? 다이애나의 목을 말입니다.그 나이프로!---"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네.젊은이는 메이벌리 양을 죽이려 ? 않았거든." "내가 고양이를 죽였잖아요?" "천만에,젊은이는 그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네.앵무새도,양도 모두 젊은이가 죽인 게 아니라네." 휴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그러더니 다그치듯이 물었다. "당신이 미친 건가요,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요?" 에르큘 포와로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아주 말짱하네." 바로 그때 챈들러 제독과 프로비셔 대령이 안으로 들어왔다.그 뒤를 따라 다이애나도 들어왔다.휴 챈들러가 당황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이분 말이 내가 미친 게 아니라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젊은이가 아주 정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 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휴가 큰소리로 웃었다.그것은 진짜 미치 광이라도 된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양과 개의 머리를 잘랐는데 도 내가 정상이에요? 앵무새를 죽였는데도 정상이라고요? 더구나 오늘밤 고양이를 죽 였는데도?" "젊은이가 양,앵무새,고양이를 죽인 게 절대 아니라고 내 말했잖나." "그럼 누구 짓이란 말인가요?" "자네를 정신이상자로 몰아버리려는 사람! 사실은 누군가 자네한테 강한 최면제를 몰래 먹여 잠에 골아떨어지게 해놓고는 피가 얼룩진 나이프나 면도칼을 자네 옆에 갖다둔 거지.그것은 또한 피묻은 손을 자네의 세면대에 서 씻은 자의 소행이기도 해." "하지만,왜?" "아까 내가 막았네만,젊은이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교묘히 유도하기 위해 서라네." 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포와로는 프로비셔 대령에게로 몸을 돌렸다. "프로비셔 대령은 인도에서 오래 사셨다고 하더군요.혹시 약을 먹고서 미쳤다는 사람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프로비셔 대령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졌다. "직접 눈으로 본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소이다.가시독말풀의 독을 많이 먹으면 사람이 미친다고 합디다." "예,맞습니다.아무튼 가시독말풀의 독도 기본적으로 알칼로이드 아트로핀과 그 성분 이 아주 유사합니다.아트로핀은 벨라도나에서 채취하는 독극물이지요.벨라도나 조제 약은 일반적으로 시판되고 있고,아트로핀 황산염은 안과의사들이 눈치료제로 많이 처방해 주고 있어요.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처방전 하나를 복사하거나 얻어서 여러 약국을 다니며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상당한 양의 독을 사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에서 알칼로이드를 추출해 내어 늘 사용하는---그러니까 진정제를 면도 크림속에 살짝 섞어놓는 겁니다.그것을 계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뾰루지가 생 기는데,뾰루지가 있으니까 면도할 때만다 아플 수밖에요.따라서 자꾸만 그 크림을 바르게 되고 그렇게 해서 독약이 교묘하게 그 몸속으로 침투하게 되는 거지요.그 독 약이 몸속에 많이 들어가게 되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 있습니다.입과 목이 마 르고 뭘 삼키는 게 힘들어지며,환각,이중환상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되죠.사실상 그 모든 증상이 이 젊은이에게 나타난 겁니다." 그는 젊은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의혹을 말끔히 지우기 위해서,그건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내 증명해 주겠네.자네의 면도크림 속 에서 아트로핀 황산염이 다량 검출되었지.내가 그걸 조금 떠가서 분석해 봤다네." 새하향게 질린 열굴로 몸을 떨며 휴가 말했다. "누가 그런 짓을,왜?"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내가 여기 도착하고 나서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게 바로 그거였다네.다시 말해 난 살인의 동기를 찾고 있었던 거지.다이애너 메이벌리는 젊 은이가 죽의면 그 재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지만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 하다고 생각했네." 휴 챈들러가 발끈 화를 내며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그래서 난 다른 각도에서 한번 그 동기를 찾아보기로 했네.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 의 영원한 삼각관계.프로비셔 대령은 자네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혼한 사 람은 챈들러 제독이었네." 챈들러 제독이 절규하듯이 부르짖었다. "조지? 조지! 난 믿을 수가 없어." 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 증오심의 화살이--아들한테로 돌려졌 단 말인가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어떤면에선 그런 셈이라네!" 프로비셔가 울부짖었다. "엉터리 거짓말이야! 찰스,그의 말을 믿지말게." 챈들러가 뒷걸음치면서 투덜대며 중얼거렸다. "가시독말풀....인도---그래,맞아.. 아무도 독약을 쓴 걸 눈치채지 못했는데---어느 누구도 몸속에 미친 피가 흐르고 있 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데,이런......." "바로 그거요!" 에르큘 포와로가 불어로 높고 날카롭게 말했다. "몸속에 미친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 말이오.복수심에 불탄----한 미친 사람이---많은 미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오랫동안 교묘하게 그러한 자신의 광기를 숨겨 왔소." 그가 프로비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휴가 댁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프로비셔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몰랐소.정말 그런 줄은....언젠 가 캐롤라인이 나를 한번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그녀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 소.그것도 아주 몹시.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그녀가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난 모릅니다.하여튼 그녀와---나---우린 서로에게 열중했 소.그리고 난 즉시 떠났어오.우린 이성을 찾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요.글쎄요---그럴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하지만 꼭 그렇다는 확신을 가질만한 것도 없었 소.캐롤라인이 한 번도 나한테 휴가 내 아들이라는 낌새를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다가 이런---그 애한테 이런 정신이상증세까지 있는 이상 의심해 볼 여지가 전 혀 없다고 생각한 거요." 포와로가 말했다. "예,의심해 볼 여지가 없고말고요! 젊은이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저 얼굴과 아래로 처진 눈썹은 당신을 꼭 빼다 박은 둣이 닮았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버릇까지도 말이오.찰스 챈들러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오래 전부터---아마 자기 부인한테서 그 사실을 알아냈겠지요.이건 내 생각입니다만,그녀는 자기 남편을 몹시 무서워했습니다.그건 제독이 그녀한테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요.그래서 그녀는 당신한테로 달려갔습니다.그녀가 변함없이 사랑했던 당신 한테로 말입니다.그 사실을 알게 된 찰스 챈들러는 복수를 할 계획을 세웁니다.그의 아내는 보트 사고로 죽었어요.그 보트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그와 그녀 두 사람뿐이 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런 사고가 발생했는지는 오직 그 사람만 알지요.그런 다 음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증오의 화살을 자기 이름만 땃을 뿐인 자기 아들이 아닌 저 젊은이에게로 돌립니다.그래서 당신이 인도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무심결에 흘린 가시독말풀 이야기를 그는 예사로 듣지 않고,그 독을 이용해 저 젊은이를 죽일 계획 을 세웁니다.천천히 미치도록 만들자.절망감에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서서히 유 도하자.이게 그의 계획이었습니다.따라서 피를 갈망했던 사람은 챈들러 제독이였지 휴 챈들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즉,고원에 있는 양들의 목을 잘라버린 사람은 바로 찰스 챈들러였어요.하지만 범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은 휴였지요! 내가 언제 그를 의심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챈들러 제독한테 아들을 의사한테 보이라 고 했더니 그 싫어하는 정도가 지나칠 만큼 심했습니다.휴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충 분히 이해가 됩니다.하지만그 아버지가 반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요!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치료법이 있을 수도 있고---하여튼 아버지된 입장으로서는 의사를 찾아가는 게 백번 마땅하지요.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그로서는 의사에게 휴 챈들러 를 진찰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왜냐하면 휴가 정상이라는 사실을 의사가 알게 될 테니까요!" 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상....내가 정상이라고요?" 그는 다이애나한테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프로비셔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주 정상이야.우리 집안에 미친 사람은 없었으니까." 다이애나가 말했다. "휴......" 챈들러 제독이 휴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돼먹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 나가서 토끼나 한 마리 잡을 수 있는지 봐야겠는데---" 프로비셔가 앞으로 훌쩍 뛰어나가려 했다.그러나 에르큘 포와로가 그를 가로막았다. "자신의 입으로 말했지요? 조금 아까----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휴와 다이애나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영국인과 벨기에 인 두 사람은 함께 챈들러 가의 마지막 자손이 정원을 지나 숲속으 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한 발의 총성이 들렸다.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text down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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