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베루스를 잡아라 1 지하철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 사람 저 사람하고 부딪치던 에르큘 포와로는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탈이란 말이야.'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확실히 저녁 이맘때쯤(오후 6시 30분)의 런던 지하철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덥고,소란스럽고,혼잡하고,서로 이리저리 마구 떠밀고---기분 나쁘게 짓눌러 오는 그 손,팔,몸,어깨들이라니! 전혀 모르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마구 짓눌리고--- 게다가(그는 치를 떨며 생각했다) 그 대부분은 얼마나 단조롭고 무표정한 모습들을 하고 있는지! 정말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들한테서는 매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혜로 빛나는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 겠으며,어떻게 '곱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과 만나게 되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 가? 게다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뜨개질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여자들의 그 극성스러 움이라니! 여자들은 자신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 어떻다는 걸 모른다. 온통 뜨개질에만 집중된 정신,흐릿한 눈동자,쉴 새 없이 바삐 움직이는 손가락!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뜨개질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들고양이의 민첩함과 나폴레옹 의 의지력이 필요한 법이다.그런데도 여자들은 용케도 그노릇을 잘해내고 있으니 참! 그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바쁘게 보잘것없는 뜨개바늘을 꺼내들고 곧장 뜨개질을 하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손을 놀려대긴 하지만 여자다운 우아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미 초로의 나이로 접어든 그의 정신세계는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긴장과 쫓기는 것 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그의 주변에 있는 요즘의 젊은 여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한 결같이---서로 엇비슷한데다 매력도 없고,또 그 풍부하고 매혹적인 여성미는 어디다 가 다 내버렸는지.....그는 보다 화려한 매력을 지닌 여자가 좋았다.아! 우아하고 품 위 있고 서로 교감이 통하는 사교계의 여인을 만나볼 수 있다면! 풍부한 몸의 곡선을 지닌 여자,약간 우스꽝스럽긴 해도 아주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런 여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한때는 그런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그런 시대도 있었다.그러나 요즘은----요즘은----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포와로를 뾰족한 뜨개바늘 끝으로 마구 밀어부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그리고 마치 기름에절인 정어리를 깡통에 넣듯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마구 쑤셔 넣으면서 다시 우르르 올라탔다.기차는 다시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포와로는 주렁주렁 짐을 들고 서 있던 어떤 뚱뚱한 여자 쪽으로 쓰러졌다.포와로가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허리에 서류 가 방을 끼고 있던 키가 크고 몹시 마른 어떤 남자에게 그만 몸이 쏠리고 말았다.그는 다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그는 자신의 콧수염이 흐늘흐늘 흐트러지게 되면 어 떡하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지옥 구덩이 같으니라고!' 천만다행히도 다음 역은 그가 내릴 차례였다. 그러나 피카달리 서커스가 공연중이어서인지 역 구내 역시 150여 명은 족히 되어보이 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플랫폼 위에는 사람들의 물결이 이 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이내 포와로는 다시 사람들 틈에 꼭 끼인 채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탔다. 지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이라고 포와로는 생각했다.올라가는 에스켈레이터 위에서 뒷 사람의 가방을 무릎으로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이 고통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 그때 누가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깜짝 놀라서 그는 눈을 치켜떴다.반대편 내 려오는 에스켈레이터 위에서 놀랍게도 그의 눈은 과거의 환영을 보았다.그곳에서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풍만한 여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염색 을 한 숱많은 적갈색 머리칼에는 화려한 맥고모자가 씌어져 있었다.그 모자는 작은 새 깃털로 장식되었는데,아름답고 정밀하게 채색되어 돋보였다.또한 값비싸게 보이는 모피가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진홍색으로 칠한 그녀의 입술이 크게 열리자 풍부하고도 이국적인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컸다. "여기예요!" 하고 그녀가 외쳤다. "여기라고요,에르큘 포와로 선생님! 우리가 다시 만났군요! 내 이럴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운명보다 더 매정한 것은 서로 엇갈려가는 두 대의 에스켈레이터였다.움쭉달 싹도 못한 채 에르큘 포와로는 그대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고,베라 로사코프 백작 부인은 밑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옆으로 틀며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포와로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부인---어디로 가야 부인을 만날 수 있지요?" 그녀의 대답은 저 밑바닥에서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대답 이었지만 그러나 묘하게도 지금의 상황에 아주 걸맞는 대답이었다. "지옥이지요........" 2 에르큘 포와로는 눈을 깜박거렸다.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또 깜박거려 보았다.갑자 기 그의 발 밑이 흔들렸다.자신도 모르게 그는 어느새 맨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던 것 이다.그런데 정확하게 그는 발을 옮겨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 다.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나갔다.한쪽으로 약간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며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고 있었다.그가 다시 그들 속 에 가세해야 한단 말인가? 백작 부인은 그런 뜻으로 그 말을 했던 걸까? 러시 아워에 지구의 안쪽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은 분명 지옥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만일 백작부인이 그런 뜻에서 그 마을 했다면 도저히 그는 그말대로 해줄 수가 없었 다.그러나 단호하게 포와로는 걸음을 옮겨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 선 다음 다시 아래쪽으로 되돌아갔다.에스컬레이터를 내려섰지만 백작부인은 자취도 없었다.포와로에게는 파랗고 빨갛게 알록달록 줄지어 켜 있는 불빛 가운데 하나를 선 택하는 일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백작 부인은 베이컬루나 피카달리 라인의 후견이었던 걸까? 포와로는 플랫폼 위를 차 례차례 돌아다녀 보았다.그는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을 대강 눈으로 훑어보기도 했 다.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러시아 백작 부인 베라 로사코프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백작 부인을 찾는 일에도 지치고 진력이 난 에르큘 포와로는 툴툴거리며 다시 위로 올라와서,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피카달리 서커스 공연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가벼운 흥분에 휩싸인 채 집으로 돌아왔다. 키가 작고 꼼꼼한 남자의 몸집이 크고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를 그리워한다는 건 어찌 보면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포와로는 자신을 사로잡아 버렸던,그 옛날 운 명적인 백작 부인이 매력을 아직 마음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를 마지막 으로 만난 뒤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마력은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 었던 것이다.비록 그녀가 하고 있는 화장이 무대의 배경을 그리는 화가의 일몰 그림 과 비슷하다 해도 화장술로 교묘하게 눈을 가린 그녀의 모습이 에르큘 포와로에게는 여전히 화려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비쳤다.소시민이란 항상 귀족들에 대해어떤 전율 같은 걸 느끼기 마련이니까.문득 이 늙은 찬미가의 머릿속에 그 옛날 그녀가 보석을 훔칠 때 발휘했던 그 기발한 솜씨가 떠올랐다.그는 그 사건에 대해 심문할 당시 모든 범죄 사실을 인정하던 그녀의 그 놀라울 정도로 태연자약하던 모습이 기억났다.천 명 아니,만 명에 하나 나올까 한 그런 여자였지!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그런데--- 금세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옥이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혹시 그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 히 그녀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럼,그녀는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던 걸까? 그녀는 런던의 지하철을 얘기하고자 했던 걸까,아니면 그녀의 말 속에는 어떤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걸까? 설령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 자신이 생활방식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간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 는 장소가 지옥이 된다 해도 분명히---분명히 러시아 인으로서 도의상으로라도 그녀 가 에르큘 포와로에게 반드시 그녀가 있는 그곳으로 그가 와야 한다고 말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야,그녀는 전혀 다른 뜻으로 그 말을 했던 게 분명해.그래,그럴 거야---그렇지만 에르큘 포와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무슨 음모투성이의 뚱딴지 같은 여자란 말인가? 다른 여자였다면 아마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리츠예요." 혹은 "클라리지로 오세요." 라고 말이다.그러나 베라 로사코프는 날카로은 목소리로 터무니없게도 "지 옥이지요!" 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그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 자 이튿날 아침 그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손쉬운 경로를 밟았다.그는 비서인 레몬 양 에게 그걸 물어보았던 것이다. 레몬 양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못생기긴 했지만 정말 능력 있는 여자였다.그녀에게 포와로는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단순히 그녀를 고용한 사람에 불과할 뿐 이었다.그녀는 그를 위해 훌륭하게 일처리를 해주었다.행여나 그녀의 마음에 쉴 틈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녀 개인의 생각과 꿈은 온통 새로운 서류정리방식에 쏠리곤 했다. "레몬 양,내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물론이에요,포와로 씨." 레몬 양은 타자기 키 위에 손을 내려놓더니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만일 당신 친구 중에 누군가가---그가 여자든 남자든---당신과 지옥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어떡하겠소?" 언제나처럼 레몬 양은 거침없이 대답했다.마치 이야기가 시작될 때에 이미 모든 대답 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사람처럼 "제 생각엔,미리 좌석을 하나 예약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에르큘 포와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이윽고 그가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좌석을 하나 예약해 두겠다고?" 레몬 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앞으로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오늘밤이에요?" 이렇게 묻더니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승낙이라도 받아낸 듯 그녀는 재빨리 다 이얼을 돌렸다. "템플 바 14578 대주세요....아,예,'지옥'입니까? 저 좌석 예약을 하 려고 하는데요? 이름은 에르큘 포와로,7시." 그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다시 그녀의 손가락은 타자기 키 위를 바삐 오르내 리고 있었다.약간---아주 미세하지만 초조한 표정이 얼핏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그 표정은 마치 자기 주인한테,'자 나는 내 할 일을 다 끝냈으니 이제 그만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나를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에르큘 포와로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레몬 양,그런데 그 '지옥'이란 곳이 대체 무얼하는 곳이오?" 하고 그가 물었다. 레몬 양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모르고 계셨던가요,포와로 씨? 그곳 은 나이트 클럽이에요---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요즘 유행하고 있지요.제가 알기로는 그곳을 경영하는 사람은 어떤 러시아 부인이라고 하더군요.물론 선생님이 오늘 해 떨 어지기 전에 그 클럽의 회원이 되고 싶으시다면 지금 곧바로 제가 아주 간단하게 처 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간 낭비는 이만 하면 충분하다는 듯(그녀의 표정 은 분명 그랬다) 레몬 양은 능숙하게 타자기 키를 계속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3 그날 저녁 7시에 에르큘 포와로는 윗부분에 조심스럽게 한 번에 한 글자씩만 켜지는 네온 사인이 붙어 있는 출입구를 들어섰다.빨간색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신사가 그를 맞이하며 코트를 벗어 들었다. 그는 몸짓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얕고 폭이 넓은 계단으로 포와로를 안내했다.각 계단 에는 문구가 하나씩 쓰여져 있었다.첫번째 문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 말 뜻은.' 두 번째 문구는,'나는 내가 맘이 내킬 때면 언제든지 그 일을 포기할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 아주 걸맞는 기발한 착상인걸." 하고 평가하듯 에르큘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래."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진홍식 백합이 피어 있는 물탱크가 놓여 있었다.거기에 배 모양을 한 다리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포와로는 그 다리를 건넜다. 그의 왼쪽에는 무슨 대리석 같은 걸로 만든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는 포와로 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크고 험악하게 생긴 시커먼 개 한 마리가 앉 아 있었다.그 개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몸을 곧게 편 자세로 꼼짝도 않고 앉 아 있기만 했다. '아마도 저 개는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닐 거여.'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그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개가 잔인하고 험악해 보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낮게 으르렁거렸다.그것은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그때 포와로의 눈에는 작고 둥그스름한 강아지용 비스켓이 들어 있는 장식 바구니 하 나가 들어왔다.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가 붙어 있었다. '케르베루스에게 뇌물을!' 개의 시선은 그 과자 위에 머물러 있었다.다시 한 번 낮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급한 포와로는 비스켓 하나를 집어들어 그걸 그 커다란 개 앞으로 던졌다. 움푹 패인 뻘건 입이 쫙 벌려졌다.재빨리 과자를 받아물더니 그 강인해 보이는 턱을 다시 닫았다.케르베루스는 그가 주는 뇌물을 받았던 것이다! 포와로는 열려 있는 출 입구 쪽으로 몸을 옮겼다.실내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곳곳에 작은 탁자들이 놓여 있었으며 중앙에는 춤을 추기 위한 플로어가 있었다.실내에는 자그마한 빨간 램프들 이 불을 밝혔고 벽에는 프레스코(갓 칠한 회벽토에 수채로 그리는 벽화법)가 그려져 있었다.그리고 맨 끝에는 꼬리와 뿔이 달린 악마의 의상을 입은 주방장이 커다란 그 릴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일 먼저 포와로를 맞이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고,마침내 진홍색 이브닝 드레스를 차 려입은 베라 로사코프 백작 부인이 러시아인 특유의 열정적인 몸짓으로 두 손을 앞으 로 내밀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오,선생님 오셨군요! 내가---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 생님! 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얼마나 기쁜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도---그렇게 많은 세월이 말이에요.정말 얼마나 됐죠? 아니에요.얼마나 됐는지는 알 필요도 없다고요! 내게는 바로 어제 일이나 다름없으니까요.선생님은 정말 변하지 않 으셨군요.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서요!" "부인 역시 그렇습니다." 그녀의 손 위로 고개를 숙이며 포와로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년을,어디까지나 20년이란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로사코프 백작 부인은 솔직히 아주 형편없어졌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러나 적 어도 그녀가 화려하게 몰락해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삶에 있어서 화려함과 그 칠 줄 모르는 즐거움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지만,애석하게도 그녀는 남자에게 어떻 게 애교를 부려햐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포와로와 함께 다른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친 구,그 유명한 에르큘 포와로 선생님이세요." 그녀가 소개했다. "이분은 악한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시죠! 한때는 내 자신도 선생님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나도 최고로 도 덕적인,아주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까요,그렇죠?" 그녀가 말을 걸었던 키가 크고 여윈 초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결코 지루한 것만 은 이니지요,부인." "이분은 리스커드 교수님이시죠." 하고 백작 부인이 소개했다. "이분은 과거 일이라면 모르시는 게 없는 분으로 이곳의 실내장식을 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내게 주신 분이시기도 해요." 그 인류학 교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이 무슨 일을 할 작정이었는지 내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말이지요!" 그가 중얼거렸다. "결과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 됐지만 말입니다." 포와로는 좀더 가까이에서 프레스코 벽화를 살펴보았다.그가 마주보고 있는 벽에는 오르페우스와 그의 재즈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에우리디스가 희망에 찬 표정 으로 그릴 쪽을 쳐다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그 반대편 벽에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가 뱃놀이를 즐기면서 이집트 인 하나를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그림이 그려 있었다. 세 번째 벽에는 쾌활한 표정의 젊은이들 몇 명이 벌거벗은 상태로 목욕을 하면서 한 데 뒤엉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나라죠." 이렇게 설명을 해주고는 백작 부인은 뒤이어 소개하 는 일을 마무리하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앨 리스예요." 포와로는 탁자에 앉아 있던 체크무늬 코트와 스커트 차림의 수수해 보이 는 아가씨에게 인사를 했다.그녀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아주 똑똑합니다." 로사코프 백작 부인이 말했다. "학위도 받았고 또 심리학자이기도 해요.이 아가씨는 미치광이가 왜 미치광이인지 그 이유까지도 다 알 고 있다고요! 그건 선생님이 생각하듯 그들이 미쳤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그런 게 아 니라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고요.나는 그게 아주 특이한 것이라 는 걸 알아요." 이름이 앨리스라는 그 아가씨는 상냥하게,그러나 약간은 경멸하는 듯 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교수에게 단호한 어조로 춤추지 않겠느냐고 물었 다.교수는 한편으로는 의기양양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웬지 불안스런 표정을 지었다. "실례지만 아가씨,나는 왈츠밖에 출 줄 모른다오." "이 곡은 왈츠라고요." 하고 끈질기게 앨리스가 말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러 나갔다.그들의 춤은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로사코프 백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혼자만의 긴 사념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 그녀 는 중얼거렸다. "사실 저 아가씨는 별로 못생긴 편은 아니에요." "저 아가씨는 사람들한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군요." 공정하려 애쓰며 포와로가 말했다. "솔직히----" 백작 부인이 말했다. "저는 요즘 젊은 아가씨들을 이해 못하겠어요.그들은 더 이상 남의 맘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제가 젊었을 때는 항상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말이에요.내게 어울리는 색깔에다 ---옷에는 약간 심을 넣고---허리는 코르셋으로 꽉 졸라매고---머리는 좀더 재미있는 색상으로 물들이고 싶어하고---" 그녀는 이마 앞으로 흘러 내려온 거대한 타이탄 머 리채를 뒤로 밀었다.최소한 그녀가 아직도 열심히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연이 부여해 준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것,그것은--그것 은 어리석은거예요! 또 건방지기도 하고요! 앨리스가 섹스에 대해 많은 말들을 늘어 놓으며 책을 쓴다지만,한 가지 물어보겠는데,실상 남자들이 저 아가씨에게 함께 브라 이턴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고 한 게 몇 번이나 될 것 같아요? 글,일,노동자 후생복지 미래 세계라는 것들은 아주 가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어디 그런 게 즐거움을 주나요? 그리고 보세요.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단조롭게 만들어 버렸는지 말이 에요! 온통 규칙과 금지사항뿐이잖아요!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고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데.그 애,아니 아드님은 어떻게 지내죠,부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음을 떠올리며 '그 애'란 말을 '아드님'이란 말로 재빨리 바꿨다.그러자 백작 부인의 얼굴에 광적인 모성애가 나타나며 표정이 밝아졌 다. "그 사랑스러운 천사 말이죠! 지금은 얼마나 자랐다고요! 그 어깨하며 그 잘생긴 모습이란! 그 애는 지금 미국에 있어요.그곳에서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답니다.다리 둑,호텔,백화점,철도 등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말이에요!" 포와로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아드님은 기사인 모양이로군요 건축가인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하고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 애는 사랑 스러워요1 그 애는 철로 된 대들보라든가 기계장치,압력이라나 하는 그런 것에 온통 몰두해 있어요.그런 것들에 대해서 난 전혀 문외한이지만요.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존 종해 준답니다.또 늘 그렇게 해왔고요!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그 애를 위해서 난 저 앨리스란 아가씨도 존중한답니다.둘은 비행기인가 배,아니 기차에서 여행하다 만났 는데,둘이서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가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 모양이에 요.그래서 저 아가씨는 런던에 온 김에 나를 찾아왔고 나도 진심으로 환영했죠." 백작 부인은 그녀의 그 풍만한 앞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난 말했어요. '아 가씨외 니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지? 그래서 나 역시 아가씨를 사랑해---하지만 그 애를 사랑한다면 왜 아가씨는 그 애가 있는 미국으로 안 가는 거지?'라고요.그랬 더니 저 아가씨는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며,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책에 대해서며,자 기의 경력에 대해서며 다 얘기해 주더군요.하지만 솔직히 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그렇지만 내 주장은 항상 이것이니까요.즉,'관용을 베풀라'예요."그리고 그 녀는 단숨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이곳을 이렇게 꾸며놓은 내 착상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시죠,선생님?" "정말 기발한 착상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며 포와로가 만족한 듯 말했다. "멋있소!" 실내는 사람들로 온통 꽉 들어차 있었으며,이 클럽의 성공이 결코 억지로 꾸며낸 것 이 아니라는 것을 그 실내의 분위기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손님둘 중에는 하릴없이 이브닝 정장을 빼입고 나와 그저 빈둥거리는 쌍쌍이 있는가 하면,반대로 지저분한 코르덴 바지 차림의 떠돌이들도 있었고,양복 차림의 뚱뚱한 신사들도 눈에 띄었다. 악마처럼 치장한 밴드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아무튼 '지옥'이 사람들한테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어요." 하고 백작 부인이 말했다. "이런 생각 안 드세요? 지옥의 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백작 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지도 못 하셨어여? 그러니까 당연히 지옥에 들어올 때는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하잖아요" 교수와 앨리스가 탁자로 돌아왔다.백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스티드에게 할말이 있어서요." 그녀는 여위고 냉소적인 지배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 탁자 저 탁자 사이 로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이마를 닦고 포도주를 한 모금 홀짝인 다음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개성적인 여성입니다.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쉽게 그걸 느낄 수 있어요." 그는 잠시 실례하겠다고 말하며 다른 탁자로 건너가더니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과 이야기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4 수수한 차람의 앨리스와 단 둘만 남게된 포와로는 차가워보이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 와 눈이 마주치자 좀 당황하고 말았다.그는 그녀가 아주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어떤 경계심이 느껴졌다. "나는 아직 아가씨의 성을 모르고 있소만."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커닝햄이에요.앨리스 커닝햄 박사.선생님은 옛날부터 베라 아주머니와 아는 사이 같던데요?" "족히 20년은 되었을 겁니다." "아주머니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대상이에요." 하고 앨리스 커닝햄이 말했다. "물론 제가 앞으로 결혼하게 될 남자의 어머니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 지만,그 밖에도 교수라는 입장에서 저는 그녀에게 많은 관심이 있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요,저는 요새 범죄심리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중이지요 저는 이곳에서의 밤 생활이 제 연구에 아주 고무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정기 적으로 이곳을 찾아 오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범죄자 타입을 찾아냈으니까요.그들 가운데 몇 사람하고는 이미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지요. 물론 선생님도 베라 아주머니으 범죄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죠? 그녀의 도벽에 대해서 말이에요." "모르는데,물론---그것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소만." 약간 놀라면서 포와로가 대답했다. "전 거기다 맥파이(수다쟁이) 콤플렉스란 이름을 붙였 어요.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그녀는 늘 '번쩍이는 것'을 탐내지요.돈 같은것이 아녜 요.항상 보석이었어요.저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귀여움을 받은 응석받이였던데다가 지나친 과보호 속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어요.그녀에게 삶이란 견딜 수 없이 지루하기만 한 그런 것일 뿐이었죠.지루하면서도 안전했다고 할까요? 그녀의 본성은 극적인 것을 갈구했습니다.거기에는 '벌'이란 것도 포함되어 있었죠.그녀가 도둑질에 깊이 탐닉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어요.그녀가 원한 것은 벌 받는 것의 중요성 과 그에 따른 악명이었던 셈이죠!" 포와로가 반박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그녀가 구제도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삶 역시 그렇게 안전하고 지루하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커닝햄 양의 창백한 푸른 눈동자에 얼핏 재미있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녀가 말했다. "구제도의 일원으로서 말이지요? 아주머니가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 나 보죠?" "그녀가 귀족이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백작 부인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에게 얘기해 줬던 그 억척스럽고 다양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기 억해 내려 애쓰며 고집스럽게 포와로가 말했다.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니까요." 직업의식에 차 있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커닝햄 양이 대답했다. 포와로는 경계심을 느꼈다.순간적으로 그는 이번에는 자기가 무슨 콤플렉스에 해당하 는지 그 얘기가 나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스스로 적진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했다.솔직히 그는 로사코프 백작 부인이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그녀의 사 교계에 기꺼이 참석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런 자신의 즐거움을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가 지고 있는 이 푹 삶긴 구즈베리(서양 까치밥나무의 열매) 같은 눈동자에 안경까지 쓰 고 있는 젊은 아가씨 때문에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알아낸 놀라운 사실이 무 엇인지 아가씨는 아시오?" 하고 그가 물었다. 앨리스 커닝햄은 세상의 일들 중에서 그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그녀는 남들 눈에 자신이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처럼 보이 는 걸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포와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아가씨란 사람이오.젊기 때문에 적은 수고로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아가씨,바로 당신이란 말이어! 그런데도 이가씨는 마치 금방이라도 골프를 치러 갈 사람처럼 커다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치마에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있어요. 여기는 분명 골프장이 아닌 실내 온도가 화씨 71도나 되는 지하실입니다.더구나 아가 씨 콧등은 땀으로 번들거리는데 정작 본인은 분칠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그나마 칠 해져 있는 립스틱은 되는대로 입술의 선을 마구 무시해 버린 채 칠해져 있습니다! 아 가씨는 자신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전혀 관심을 기울일 생각을 안하고 있소 나는 아가씨한테 물어보고 싶어요.꼭 그렇게 해야만 하겠느냐고 말입니다.정말 안타 까운 일이군요." 잠시 동안 그는 앨리스 커닝햄 역시 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내심 만족해 했다.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을 튀기며 이는 분노의 불길을 그는 보았던 것 이다.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짓는 척했다. "친애하는 포와로 선생님---" 하고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의 생각과 요즘의 사고방식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는 것 같 군요.문제는 근본적인 사실에 있는 게 아닐까요? 한낱 장식물이 아닌!" 미침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아주 잘생긴 청년이 그들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은 가장 흥미로운 타입이지요." 강한 흥미를 보이 며 그녀가 속삭였다. "이름은 폴 바레스코에요.여자들한테 얹혀 살면서도 이상스레 타락된 갈망을 지니고 있는 남자! 저는 저 남자한테서 그가 세 살이었을 때 그를 돌 봐줬던 그 보며 겸 가정교사였던 여자에 대해 좀더 듣고 싶어요."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녀는 그 청년과 춤을 추고 있었다.그의 춤 솜씨는 훌륭했다. 그들이 춤을 추며 포와로가 앉아 있는 탁자옆을 지나갈 때 포와로의 귀에 그녀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보그노어에서 여름을 지낸 뒤에 그녀가 당신한테 장난감 두루미를 줬단 말이에요? 두루미 말이죠? 그렇군요,아주 암시적이군요." 잠시 동안 포와로는 범죄자 타입에 대한 커닝햄 양의 관심이 언젠가는 그녀의 불완 전한 육체만으로 홀로 숲속에 버려지게 되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짓궂게 생각했다.그는 앨리스 커닝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그래도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녀를 싫어하게 된 것은,그녀가 에르큘 포와로 자신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허탈감이 그의 몸을 휩쌌다! 그때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뒤로 그는 차츰 앨리스 커닝햄의 일 을 잊게 되었다.플로어의 반대쪽에 있던 한 탁자에 어떤 금발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었던 것이다.그는 이브닝 정장 차림이었는데,겉모습은 돈만 많이 가진 채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는 여늬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그의 맞은편에는 아주 사치스런 차림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그는 멍청히 바보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들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든지 이렇게 중얼거렸을 터였다. "하릴없이 빈 둥대는 부잣집 도련님이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와로는 그 청년이 사실은 부자도,빈둥대는 건달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찰스 스티븐스 수사경감이었던 것이다.포와로에게는 스티븐스 경감이 틀림없이 어떤 임무 때문에 이곳에 온 것만으로 생각되었다. 5 이튿날 아침 포와로는 런던 경시청으로 그의 오랜 친구인 재프 주임경감을 찾아갔다. 이것저것 떠보는 그의 질문에 대한 재프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이런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재프가 말했다. "이번에는 또 나를 얼마나 골탕먹이려고!"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맹세해도 좋아.전혀 모르고 있단 말일세! 있 다면 단지 쓸데없는 호기심뿐이랄까?" 재프는 포와로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자넨 그 '지옥'이란 곳에 대해 전부 알고 싶은 거지? 사실,겉으로 보기에는 그곳도 다른 곳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지. 요즘은 그런 게 대유행이니까! 돈도 꽤 잘 벌릴걸.물론 그곳을 여느라 비용도 꽤 들 었겠지만 말일세.표면적으로 그곳을 경영하는 사람은 자칭 백작 부인인가 하는 러시 아 여자로 되어 있네." "나는 로사코프 백작 부인과 아는 사이일세." 라고 차갑게 포와로가 말했다. "우린 오랜 친구사이지." "하지만 그녀는 허수아비에 불과해." 하고 재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자본금을 댄 사람은 그녀가 아니니까.아마 자본금을 댄 사람은 그곳의 지배인인 아리스티드 파포 폴루스일 걸세.그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으니까---하지만 우리는 그게 그가 꾸민 쇼 라고는 믿지 않아.솔직히 우리는 그 쇼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아직 모르고 있어." "그래서 스티븐스 경감이 뭣 좀 알아내기 위해 그곳에 갔던 거로군?" "오,자네도 스티븐스를 본 모양이지? 그 친구,납세자들이 낸 세금으로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정말 운좋은 친구지 뭔가? 물론 그 친구 이제까지 많은 것을 알아 내긴 했지만 말일세." "그곳에서 어떤 게 나오리라고 자넨 생각하고 있나?" "마약이지! 대규모 마약밀매.그리고 미약 대금은 무엇으로 치뤄지는 줄 아나? 돈이 아니라 값비싼 보석으로 치뤄진다네." "아하! 그래?" "진상은 이렇네.블랭크 부인은---혹시 무슨 백작 부인도 상관은 없겠지.현금을 손에 넣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네.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은행 밖으로 거금을 빼돌 리고 싶어하지도 않았지.그녀한테는 보석들이 있었네.때로는 그게 집안의 가보가 될 수도 있지.그 보석들은 모양을 바뀌거나 혹은 리세팅(보석을 바꾸어 박는 것) 되기 위해 어떤 장소로 보내지게 되네.그곳에서 보석들은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 반 죽 그릇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리세팅이 되지 않은 원석은 영국 내에서나 혹은 대 륙으로 건너가 팔리게 되네.아주 손쉬운 장사잖나? 보석을 훔친 도둑도,또한 보석을 찾아달라고 나서는 사람도 없으니 말일세.혹시 나중에 그 장식관이나 목걸이가 위조 품인 게 발각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말하고 싶겠지? 그렇게 되면 블랭크 부인은 아주 결백한 척 깜짝 놀라는 걸세.그녀는 진짜와 가짜가 언제,어떻게 뒤바뀌어졌는지 도 무지 모르겠다고 잡아떼네.그도 그럴 것이 목걸이는 그녀의 수중을 떠나본 적이 없 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말일세.결국 내막도 모르고 해고된 하녀나,의심스러운 집사,혹은 수상쩍은 창문닦이들의 뒤만 열심히 수사하는 불쌍한 경찰관들만 웃음거 리가 되는 거네.하지만 우리도 사교계의 참새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지.우리는 차례로 발생했던 몇 가지 사건을 조사했네.그리고 그 사건들의 공 통점을 발견해 냈지.그것은 그 사건에 등장한 여자들 대부분이 마약중독증세를 보 인다는 것이었네.신경질적이 되고 예민해지고---경련을 일으키며 눈동자의 동공이 확대되는 등등.문제는 이걸세.그들이 어디에서 마약을 공급받았으며 중간 밀매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런데 자네 생각에 그 대답은 '지옥'이란 곳으로 나왔단 말이지?" "우리는 그곳이 마약밀매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네.우리는 그 보석들이 어디에서 원석으로 뒤바뀌는지를 알아냈지.골컨다 주식회사라는 곳이더군---겉으로는 아주 훌륭하고 고급스런 모조 보석류를 만드는 회사인데,그곳에는 폴 바레스코라고 불리 는 약간 뒤가 구린 그런 작자가 있더군.아,참,자네도 그 사람을 알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 사람을 보긴 했네---'지옥'에서." "그곳에서 나는 그 녀거소가 만나고 싶었네.바로 그 장소에서! 그 녀석은 그런 짓을 한 여자들만큼이나 나쁜 녀석이라고---물론 여자들은---아무리 고상한 여자라 해도 ---그의 손아귀에냱 걸려들면 어쩔 수 없게 되고 말겠지만! 어쨌든 그 녀석은 골컨 다 주식회사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네.'지옥' 배후에 있는 인물도 틀림없이 그 녀 석일 거야.그의 목적을 이루기에는 그곳이 이상적인 장소니까---모든 사람들이 다 그곳으로 모여들잖나? 사교계의 여자들도,직업적인 사기꾼들도---그곳은 완벽한 만 남의 장소인 셈이지." "그렇다면 교환---마약과 보석---도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네는 생각하는 건가?" "물론이야.우리는 골컨다 쪽 사람은 알고 있네.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상대 편----즉,마약밀매인일세.우리는 마약공급책이 누구이며,또 어디서 가져오는지를 알고 싶은 걸세." "그럼,그 이상에 대해서는 자네도 모르고 있다는 얘긴가?" "내 생각으로는 말일세,러시아 여자가 개입되어 있을 것 같긴한데---그러나 증거가 없어.하긴 몇 주 전에는 우리가 성공할 뻔하기도 했네.바레스코가 골컨다로 가서, 원석 몇 가지를 받은 다음 곧장 지옥으로 갔으니까.스티븐스가 그를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 원석을 건네주는 걸 직접 목격하지 못했어.바레스코가 그곳을 나왔을 때 우리는 그를 연행해서 몸을 수색해 봤지만---원석은 그의 몸에 없었네.우리는 클럽 을 덮쳐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다 수색해 보았지만 결과는 원석도 마약도 찾아내지 못했지." "결론적으로 대실패였단 말이군?" 재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마터면 궁지에 빠질 뻔 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그 단속에서 페버럴(자네도 알고 있지? 그 배터시 사건의 살인자 말일세)을 체포했다네.정말 운이 좋았서.우리는 그 자식이 벌써 스코 틀랜드로 도망가 버린 줄 알고 있었거든.어쨌든 끝이 좋다면 다 좋은 거야---우리는 명예를 얻었고---그 클럽은 어느면에서 그 단속이 굉장히 상승작용이 된 셈이었지. 그날 이후 사람들이 그 클럽으로 더 많이 몰려 들어왔으니까." 포와로가 말했다. "그러나 마약 수사는 조금도 진척되지 못했잖나? 혹시 내부에 은 닉처가 있는 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그렇지만 그곳을 찾아내진 못했어.내부를 샅샅이 뒤져 봤지만 말일세.그리고 자네와 나 사이라 하는 말이지만 물론 비공식적인 방법도 동원해 보았지." 그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몰래 잠입해 들어가 보았네만 실패하고 말았 네.우리가 보낸 그 비공식적인 요원만 그 끔찍하게 큰 개한테 물려 하마터면 몸이 발기발기 찢길 뻔했지.그 개가 클럽 안에서 자고 있었거든." "아,케르베루스?" "그렇네,개한테 그런 바보 같은 이름을 붙이다니---차라리 소금뭉치라고 부를 일이지 "케르베루스!" 생각에 잠긴 채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이번 사건에 손댈 생각은 없나,포와로?" 하고 재프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이번 사건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건이네.나는 마약 밀매가 특히 싫어,그건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동시에 파괴시키는 거니까.그게 바로 지옥이지!" 생각하는 표정으로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일들을 정리해 연결시켜 보기만 하면 되 겠는데---그래,맞았서.자네 혹시 헤라클레스의 12번째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나?" "아니,전혀!" "'케르베루스를 잡아라'였네.참으로 그럴듯한 임무란 생각 안드나?" "자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통 이해가 안가지만,여보게,이 한 가지 사 실만은 잊지 말게.개가 사람을 잡아 먹으면 뉴스거리가 된다는 것을 말일세." 그리고 나서 재프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6 "아주 진지하게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클럽 안은 거의 텅 비다시피 했다.백작 부인과 포와로는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난 진지한 기분이 안 드는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 가엾은 앨리스,그 아가씨는 항상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지겨운 것일 뿐이잖아요? 가엾은 니키,장차 그 애는 무슨 재미로 살아가게 될까? 딱하기도 하지." "나는 부인에 대해 아주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포 와로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부인이 궁지에 몰리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요."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나는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에요.돈이 그냥 굴러 들어오고 있다고요!" "이곳 주인은 부인이십니까?" 백작 부인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이죠."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동업자가 있지요?" "누가 그러던가요?" 하고 날카롭게 백작 부인이 되물었다. "그 동업자가 폴 바레스코지요?" "네? 폴 바레스코? 세상에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는 나쁜 사람입니다---전과자라고요.그리고 이곳에서 아주 빈번하게 범죄가 저질 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백작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부르주아들이 그렇게 말했나 보군요! 물 론 나도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이곳의 매력이 바로 그런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 셨어요? 메이 페어(런던 하이드 파크 동쪽으로 고급 주택가로 런던 사교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함)에서 온 젊은이들---그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웨스트 엔드(런더 서부 지구에 속한 상류지역)주변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진력이 낫죠.그래서 그들은 이곳으 로 몰려와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거랍니다.도둑이나,공갈범이니,사기꾼들이니 하는 사 람들과 말이에요.그 중에는 살인자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죠.다음주면 일요신문에 대 문짝만하게 실릴 그런 사람들도요! 재미있잖아요? 그러면서---그들은 자기들이 정말 사는 것처럼 삶을 맛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일주일내내 니커스(무릎 아래에서 졸라매는 헐렁한 여자용 반바지)니,양말이니,코르셋 같은 것을 파는 부유한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평소의 남부럽지 않은 생활과 상당한 지위의 친구들을 벗어나 멋 진 변신을 해보는 거죠! 게다가 스릴도 있잖아요? 저기 저 탁자에 콧수염을 쓰다듬으 면서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이죠? 그 사람은 런던 경시청에서 온 형사라고요.꼬리에 형 사라고 적혀 있죠?" "부인도 알고 계셨군요?" 하고 포와로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그녀는 시선이 마주치 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여자가 아 니랍니다." "그럼,이곳에서는 마약도 팝니까?" "오,그렇지는 않아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백작 부인이 대답했다. "그런 짓은 생각 만 해도 역겹다고요!" 포와로는 잠시 동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나는 부인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부인은 이곳의 진짜 주 인이 누구인지를 나한테 얘기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예요." 하고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서류상으로는 분명 그렇지요.하지만 부인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그처럼 호기심이 많은 분이라는 건 처음 알았어요.그러나 저 개는 그리 호 기심이 많지 않답니다.그렇지,두두?" 마지막 말을 발음할 때의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비둘기가 구구하고 우는 것처럼 들렸 다.그녀는 자기 접시에서 오리 뼈다귀를 하나 집어들더니 그걸 그 크고 까만 하운드 앞으로 던졌다.그 개는 그 끔찍한 턱을 쫙 벌리더니 냉큼 그 뼈를 받아 물었다. "저 개 이름이 뭐라고요?" 시선을 돌리면서 포와로가 물었다. "나의 귀여운 두두!" "하지만 약간 우스꽝스럽군요.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그러나 사랑스러운걸요! 저 개는 원래 경찰견이였죠! 저 개는 뭐든지 다 해낸답니다 뭐든지 말이에요.기다려 보세요!" 그녀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그러더니 갑자기,근처 탁자에 막 올라온,소스가 듬뿍 쳐진 커다란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낚아챘다.그녀는 대리석 벽감 쪽으로 걸어가더니 러시아 어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접시를 개 앞에 내려놓았다. 케르베루스는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스테이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알겠지?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그런 일은 아냐! 아니,그는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고 저렇게 앉아 있을 테니까."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몇 마디를 중얼거렸고,번개처럼 케르베루스는 그 긴 목을 수 그렸다.그 순간 접시 위의 스테이크는 마치 요술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베라 로사코프는 개의 목에 팔을 둘렀다.그리고 발을 일으켜 세우는 개를 꼭 껴안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얘가 얼마나 얌전한지 보세요!" 하고 그녀가 외쳤다. "나와 앨리스,또 자기 친구들한테는 말이에요---그들은 그들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도 괜찮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죠.제가 명령을 내려두었으니까요.그 사람---예를 들어 형사 같은 사람 말이에요---을 조각조각낼 거예요! 맹세해도 좋 아요! 조각조각낸다니까요!" 그러더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외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군요." 포와로가 급히 말을 가로막았다.그는 백작 부인이 하는 유머의 의 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건 스티븐스 경감이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는 사 실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리스커드 교수께서 부인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신 모양인데요,부인?" 교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의 팔꿈치 근처에 서 있었다. "부인은 내 스테이크를 가져 갔소." 하고 그가 투덜거렸다. "하필 왜 내 스테이크를 가져간 거요? 아주 훌 륭한 스테이크였는데!" 7 "목요일 밤일세." 하고 재프가 말했다. "풍선은 그때 띄워지기로 되어 있다네.그리 고 출동하는 팀은 앤드류 사단---마약 단속반원---들이네.그렇지만 자네가 이번 사건 에 나섰다는 걸 알면 그 친구도 무척 기뻐할걸.아니 됐네.나는 자네의 그 진귀한 시 럽을 맛볼 생각이 별로 없어.나도 내 위를 보호해야 할 테니까 말일세.그런데 저기 있는 게 위스키 아닌가? 난 저게 더 좋을 것 같네그려."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건은 이미 다 해결된 거나 다름없어.그 클럽에는 외부와 통하는 다른 통로가 있었네.우린 마침 그걸 찾아냈지!" "어디에서?" "그릴 뒤쪽이네.그릴이 한쪽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더군." "하지만 틀림없이 자네 눈으로---" "물론 아니네.수색이 시작되자마자 불이 나갔으니까---누군가 메인 스위치를 내려버 린 거야.우리가 불을 다시 켜기까지는 한 1-2분 정도 걸렸네.그동안 정면 출입구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그곳은 우리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누군가 비밀통로를 통해 그 클럽 밖으로 빠져 나갔을 수도 있 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네.우리는 클럽뒤에 있는 집도 수색해 봤지.그리 고 그동안 우리가 왜 헛다리만 짚어야 했는지를 알게 됐다고." "그래서 앞으로 자네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라는 게---대체 뭔가?" 재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건 계획한대로만 하면 되는 일이지---경찰이 나타나 고,불이 나가고---'그리고 그 비밀통로에서 튀어나올 사람을 비밀통로 끝에서 기다 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아마 이번에는 우리가 성공하게 될 거야." "그런데 왜 꼭 목요일이라야 한다는 건가?" 또다시 재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사실은 골컨다에 도청장치를 해두었지.목요일 에 그곳에서 물건이 나갈 예정이라더군.캐링턴 부인의 에메랄드 등이 말일세." "그렇다면---" 포와로가 말했다. "나 역시 몇 가지 준비를 좀 해도 되겠나?" 8 목요일 밤 언제나 앉았던 입구 가까이에 있는 작은 탁자에 몸을 내려놓으면서 포와 로는 자신의 주위를 살펴보았다.늘 그랬던 것 처럼 '지옥'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단장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늘밤,그 어느 때보다 더 러시아 인다운 태도로 손뼉까지 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폴 바레스코가 도착했다.그는 어떤 때는 완벽한 이브닝 차림으로 또 어떤 때는 오늘 밤처럼 깡패처럼 차리고 나타나곤 했는데,단추가 잔뜩 달려 있는 코트 차림에 목둘레 에는 스카프까지 두른 그의 모습은 퇴폐적이긴 해도 어딘지 모르게 매력적이었다. 다이아몬드로 온통 몸을 감싼 뚱뚱한 중년 부인한테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는 탁자에 앉아 작은 노트에 분주하게 글씨를 쓰고 있는 앨리스 커닝햄 쪽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다.험악한 눈초리로 앨리스를 쏘아보던 그 뚱뚱한 여인은 다시 사랑스런 듯 바레스코로 시선을 돌렸다. 커닝햄 양의 눈동자에는 전혀 사랑의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그 눈동자드은 단순 히 학문상의 흥미만을 나타내며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그들이 춤을 추며 옆을 지나 갈때 포와로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분을 들었다.그녀는 이제 그의 보모 겸 가정교사였던 여자에서 화제를 돌려 폴의 예비학교 시절의 그의 여사감이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자 기쁘고 흥분된 표정으로 그녀는 포와로 옆에 와서 앉았다. "아주 흥미 로운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바레스코는 내 책에서 든 실례 중 가장 중요한 실 례가 돌 거라고요.상징성도 명백해요.예를 들어 조끼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렇죠. 왜냐하면 그 연관 관계를 따져보면 조끼는 결국 '헤어 셔츠'(말의 털을 깎아 만든 고행자들의 입는 옷)로 귀착되니까요.그리고 전체적인 일들은 아주 단순해지지요. 그는 틀림없이 범죄자 타입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치료 법이 약효를 발휘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이 난봉꾼을 새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오---" 하고 포와로 가 말했다. "여자들이 흔히 빠지는 가장 사랑스러운 착각 중의 하나지요." 앨리스 커닝햄이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이 일에 사적인 감정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아요,포와로 선생님." "절대로---" 포와로가 말했다. "아무 사심도 없는 순수한 애타주의에서 비롯된 거라 는 말인데,음---말이야 항상 그렇게들 하지요.그러나---그 이면에는 역시 이성에 대 한 매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요.예를 들어 아가씨는 내가 어디에서 학교를 다녔으며,나에 대한 여사감의 태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겠소?" "선생님은 범죄자 타입이 아니니까요." 하고 커닝햄 양이 말했다. "그럼 아가씨는 상대방을 보면 첫눈에 그가 범죄자 타입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리스커드 교수가 그들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그는 포와로 곁에 자리를 잡았다. "여러분은 범죄자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계신 모양이로군요.그렇다면 함무라비 법 전에 실려 있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연구하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합니다,포와로 씨.그건 BC 1800년경의 법전이지요.아주 재미있습니다.가령 '불이 난 집의 물건을 훔치다 잡힌 사람은 그대로 불 속으로 던져져야 한다'는 둥---" 그는 유쾌한 듯 전기 장치가 되어 있는 그릴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더 오래 된 것으로는 수메르 법 전이 있습니다.'만일 아내가 남편을 싫어해서 그에게,"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녀를 강물에 던져 버린다.'고 써 있지요.어떻습니까? 요즘 이혼 재판보다 훨씬 싸면서도 손쉬운 방법이지요? 그러나 만일 그렇게 말한 사람이 남편 쪽이라면 그는 그녀에게 단지 일정한 양의 은을 주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지요. 아무도 그를 강물에다 던지지 않습니다." "옛날 얘기라는 건 똑같잖아요." 하고 앨리스 커닝햄이 말했다. "하나는 남자를 위 한 법률이고 또 하나는 여자를 위한 법률이라는 차이만 뺀다면 말이에요." "물론 금전적인 가치면에서라면 여자들이 훨씬 더 비싸지요." 생각에 잠긴 채 교수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그는 덧붙였다. "나는 이곳이 맘에 듭니다.그래서 웬만하 면 저녁때마다 이곳으로 오지요.물론 나는 돈이 없습니다.백작 부인은---아주 친절 하게도---이곳의 실내를 꾸미는 데 내가 그녀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 에 나한테는 돈을 받지 않겠노라고 말하더군요.사실,나는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사 람인데 말입니다.그녀가 나한테 무얼 물어왔던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거든요.그런데 다 그녀와 실내장식가는 모든 일을 아주 그릇되게 꾸며놓고 말았습니다.나는 이 무서 운 것들과 내가 아주 미미하나마 관계가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알게 되기를 원치 않습 니다.물론 나는 그 오명을 절대로 씻지 못하겠지요.그렇지만 그녀는 멋진 여자입니다 나는 그녀가 오히려 바빌로니아 인을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으니까요.바빌로니아 여 인들은 사업면에서 훌륭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아시다시피---" 교수의 얘기는 갑자기 외치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경찰들이다'하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한바탕 시끌법적한 소동이 벌어졌 다.전기불이 나가고 전기장치가 되어 있던 그릴 역시 불이 꺼졌다.그 와중 속에서도 나지막한 교수의 목소리가 조용히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인용문들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불이 다시 켜졌을 때 에르큘 포와로는 폭이 넓고 얕은 계단 위를 반쯤 올라가 는 중이었다.문 옆에 서 있던 경찰관들이 그를 보고 인사를 했다.그는 거리로 나와 길모퉁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가 모퉁이를 막 돌자,벽 쪽에 코가 빨갛고 키가 작 은 데다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자그마한 남자가 하나 바짝 붙어 서 있었다.그는 허스 키한 목소리로 불안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저,여기 있습니다,나리.제 장기를 발휘할 시간은 있겠지요?" "물론이네.자,가지." "그런데 거기엔 무시무시한 경찰 나으리들이 많지 않을까요?" "그 문제에 대해선 걱정말게.그 친구들한테는 자네 얘기를 미리 해두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요.그건 어떻습니까요?" "그 친구들은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그런데 자네가 장담한 대로 자네가 그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문제의 그 개는 아주 큰데다가 사납기까지 하다네." "그래도 저한테는 사납게 대들지 못할 것입니다요."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작은 남자가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습니다요! 하지만 그 어떤 개라도 설령 지옥까 지라도 저를 따라올 것입니다요." "그렇지만 이번엔---"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그 개는 자네를 따라 지옥 밖으로 나와야 한단 말일세!" 9 이른 아침에 전화가 울렸다.포와로는 수화기를 들었다.재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하라고 했다면서?" "그래,정말 그랬지.그래 어떻게 됐나?" "마약은 없었네---에메랄드는 찾았지." "어디서?" "리스커드 교수의 주머니 속에서." "리스커드 교수?" "자네 역시 놀라는군? 솔직히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는 그 에메랄드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떻게 그 보석들이 자기 호주머니속에 들어와 있는 건지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 내가 보기에 그 친구,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네! 아마 불이 나갔을 때 바레 스코가 그 보석들을 교수의 호주머니 속에 슬쩍 집어넣었을 거야.나는 이런 류의 사건에 늙은 리스커드 교수 같은 사람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그는 이 과장투성이 사교계에 속한 인물일 뿐 아니라 영국 박물관과도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이네.그가 돈을 쓰는 데라고는 책밖에 없었고,그나마도 그 책들이라는 게 온통 곰팡내나는 중고책들이었지.아니야,그는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돼.아무래도 이번 사건에서는 우리가 헛짚은 게 아닌가 싶네---그 클럽에는 애초에 마약 같은 게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 "오,아닐세.여보게,그건 그곳에 있었네.오늘밤,그곳에 말일세.그런데 자네가 찾아냈 다던 그 비밀통로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던가?" "나오긴 했지.스캔덴버그에서 사는 헨리 왕자와 그의 시종무관이었네.그는 바로 어제 영국에 도착했었지.그리고 국무위원인 비타미언 에반스가 마중 나왔네.(노둥부 장 관이란 직업은 괴롭기 그지 없는 것이지.자네도 미리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사람 들은 토리정당(토리 정당은 혁명에 반대하여 제임스 2세를 옹호한 왕당파로 19C에 지금의 보수당이 되었다)의 당원이 방탕한 생활에 돈을 낭비해도 전혀 개의치 않네 왜냐하면 납세자들은 그건 그 사람의 돈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그러나 만 일 그가 노동 당원일 때는 문제가 달라.국민은 그가 쓰는 돈을 자신들의 돈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원래 그런 거야.맨 나중에 나온 사람은 베어트리스 바이너 부인이 었네.그녀는 내일 모레면 레오민스터에서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젊은 공작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네.그 클럽 안에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뒤섞여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 노릇이지 뭔가?" "자네 생각이 옳았어.마약은 그 크럽 안에 있었고 누군가 그걸 클럽 밖으로 가지고 나왔으니까 말이네." "누가 그랬단 말인가?" "내가 그랬지." 하고 포와로가 조용히 말했다.그는 수화기 를 내려놓았다.재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때 현관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그는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로사코프 백작 부인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섰다. "오호,우리가 그렇게 늙지만 않았어 도 절대 타협 같은 것은 안했을 거야!"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자,선생님이 메모해 놓으신 대로 이렇게 내가 왔어요.아마 지금쯤 내 뒤에는 경찰들이 와 있겠지요? 물론 지금은 거리에 있겠지만.자,선생님,무슨 일이신가요?" 공손하게 포와로는 그녀의 여우모피를 들어주었다. "부인은 그 에메랄드들을 왜 리 스커드 교수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그건 점잖은 행동 이 아닙니다.부인이 한 행동이라면 말이오." 백작 부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물론 처음에 내가 그 에메랄드들을 집어넣으려던 곳은 바로 당신 호주머니였었죠!" "아니,내 호주머니였다고요?" "그래요,나는 당신이 평소 늘 앉던 그 탁자로 서둘러 갔어요.하지만 불이 나가는 바 람에 그만 그 에메랄드들을 라스커드 교수의 호주머니 속에 넣고 만 거라고요." "그럼,부인은 왜 하필 내 호주머니 속에 그 훔친 에메랄드들을 집어넣으려고 했던 겁니까?" "나한테는----잘 아시다시피 그때 난 재빨리 상황 판단을 내려야만 했 었죠.그게 최선의 방법 같았으니까요." "베라,정말 부인은 멋진 사람이오!" "하지만 선생님,생각해 보세요.경찰들은 들이 닥치지,불은 나갔지,(그건 체포당해서는 안될 클럽의 고객들을 보호해 주기 위한 비공개적인 방법 중 하나였죠)누군가 탁자 위에 있던 내 핸드백을 빼앗아갔어요.물론 내가 재빨리 핸드백을 다시 낚아채긴 했지만---그 안에 뭔가 딱딱한 게 들어 있다는 건 벨벳의 촉감으로 쉽게 알 수 있었죠.내가 손을 핸드백 속에 집어넣고 만져보았더 니,글쎄 무슨 보석 같은 게 들어 있지 뭐겠어요.나는 누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금방 깨달았어요." "오,그래요?" "물론이에요! 그 더러운 녀석이 한 짓이니까요! 그건 그 도마뱀괴물,위선자,배신자,돼지새끼 같은 자식에다 꿈틀대는 살모사나 다름없는 폴 바레스코의 짓이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부인의 동업자로서 '지옥'에 자본금을 댄 사람이지요?" "그래요,맞아요.맞다고요.그곳의 주인은 그 자식이었어요.자본금을 댄 사람도 그였고 요.지금까지 나는 그를 배반한 적이 없었어요.나는 약속을 지켰다고요.난 그랬다고 요! 하지만 그는 나를 배반했어요.나를 경찰에 고발하려 했다고요.아! 이제부터는 그 자식 이름만 들어도 저주를 퍼부을 거예요.그래요,그 이름을 저주할 거라고요!" "진정하십시오."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잠시 함께 옆방으로 가시지요." 그는 문을 열었다.그곳엔 작은 방이 하나 나타났는데,그들이 들어선 순간 그들은 그 방이 잠시 개로 꽉 들어찬 기분에 사로잡혔다.케르베루스는 '지옥'의 그 넓은 실내에 있을 때 보다도 한층 더 거대해 보였다.포오로가 살고 있는 현대식 아파트에 딸린 좁은 식당 안에는 케르베루스 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곳에는 또한 몸집이 자그마 하고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나리,계획대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요." 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작은 남자가 말했 다. "두두!" 하고 백작 부인이 외쳤다. "오,나의 천사 두두!" 케르베루스는 꼬리로 바닥을 쳤다.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부인께 윌리엄 히그스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케르베루스의 꼬리가 내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포와로가 소리쳤다. "그는 전문적인 사육사지요.오늘밤 그 소 란 중에---" 포와로가 계속 말을 이었다. "히그스 씨가 케르베루스를 설득하여 '지옥 밖으로 따라나오도록 한 겁니다." "당신이 이 개를 설득했다고요?" 백작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듯 쥐처럼 생긴 남자의 조그만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히그스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숙녀분 앞이라 말씀 드리기가 쑥스럽습니 다요.하지만 저한테는 그 어떤 개도 대들지 못하는 어떤 물건이 있지요.세상 어디에 있는 개라 해도 제가 원하기만 하면 저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요.물론 암캐를 이 용해서 유인해 내는 그런 방법은 아니라는 걸 우선 아셔야 합니다---제가 쓴 방법은 다른 방법이니까요.예,다른 방법이지요." 로사코프 백작 부인은 포와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왜죠? 이유가 뭐예요?" 포와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목적을 위해 훈련시킨 개는 그 물건을 버려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입에 그 물건을 계속 물고 있는 법입니다.필요하다 면 몇 시간이고 그렇게 하고 있을 겁니다.자,이제 부인이 이 개한테 물고 있는 물건 을 떨어뜨리라고 말해 주시겠습니까?" 베라 로사코프는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 더니 똑똑한 발음으로 두 마디 말을 내뱉었다. 케르베루스의 그 커다란 턱이 벌어졌다.그러자 놀랍게도 케르베루스의 혓바닥이 그 개의 입 밖으로 떨어져 나오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가? 포와로는 앞으로 한 발 나섰다.그는 분홍색 스펀지 백으로 포장된 작은 꾸러미를 집 어 들었다.그 속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봉투가 하나 있었다. "그게 뭐에요?" 하고 백작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포와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코카인입니다.보기에는 이렇게 적은 양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걸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천 파운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지요.이 정도의 양이라면 수백 명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합 니다." 그녀는 숨을 죽이더니 이내 이렇게 외쳤다. "그럼,선생님은 이 내가---하지 만 아녜요! 맹세해요,내가 한 게 아녜요! 물론 내가 과거에 보석이나 골동품,진귀한 물건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던 건 사실이에요.하지만 선생님도 알다시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잖아요? 그리고 그게 바로 내 생각이 라고요.왜 누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소요하고 있어야만 하는 거죠?" "저도 개들에 대해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요." 하고 히그스가 맞장구를 쳤다. "부인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전혀 없는 분이시지요." 하고 포와로는 비통한 목소리로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마 약은---그건 아녜요! 그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당하게 하고 타락시키는 거라 고요! 난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꿈도 꾸지 못했다고요.그토록 매력적이고 순결하고 기쁨이 넘치던 나의 '지옥'이 그런 목적에 이용당하고 있었을 줄은!" "약물에 대해서는 저도 부인 말씀에 동의하는 바입니다요." 하고 히그스가 말했다. "그레이하운드(몸뚱이와 다리가 긴 사냥개)들한테 약물 주사를 놓는 것은---그런 짓 은 아주 더러운 짓이에요! 저는 앞으로도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고 예전에도 그런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제발 나를 믿는다고 말해 주세요,선생님." 하고 백작 부인이 애원했다. "물론 나는 부인을 믿습니다! 설마 내가 진짜 마약밀매범들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도 록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도 않고,또 그렇다고 헤라클레스의 12번째 임무를 수행할 생각도 아니면서,단지 내 입장만을 설명하기 위해 지옥에서 케르베루스를 끌어내 왔겠습니까? 나는 부인한테 이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겁니다.즉,나는 내 친구들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입니다.그렇습니다,바로 무고한 죄입니다.이번 사건에서 만일 일이 잘못될 경우 그 죄를 모두 뒤집어쓰게 되어 있는 사람은 바로 부인이었습니다.에메랄드들은 부인의 핸드백 속에 발견되게 되어 있었고,또 누구든(나만큼이라도)영리한 사람이라면 그 사나운 개의 입안 어딘 가에 은닉처가 있을 거라고 추측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그런데다 그 개는 부인의 개잖습니까? 설사 그 개가 앨리스의 명령에 복종할 정도로 그 귀여운 앨리스를 따랐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부인은 좀더 눈을 크게 뜰 필요가 있 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학술용어를 남발하는 그 젊은 아가씨와 그녀가 입고 있던 코 트,그리고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그녀의 치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그렇습니다 그 주머니 말입니다.어떤 여성이든 겉모습을 그런 식으로 건방지게 차리고 있다는 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요! 그리고 그녀가 나한테 해줬던 말---그건 계산에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하,그래요! 중요한 것은 그 주머니들이었습 니다.그녀가 마약을 넣어올수 있고 또 보석을 몰래 빼내 가기에 안성맞춤인 그 주머 니들 말입니다.그녀가 심리학적으로 하나의 유형에 속한다던 자신의 공범자와 춤을 출 때 그 작은 교환은 아주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오,참으로 그럴듯한 구실이었지요! 그 누구도 의학박사의 학위를 가진데다 그 진지하고 학술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안경 낀 심리학자를 의심하진 않았습니다.그녀는 마약을 밀수하여 자신의 부유한 환자들이 그 약에 중독되도록 만들었고 또 나이트 클럽의 자본금을 대주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클럽을 운영해 나가도록 손을 썼던 겁니다.아마도 그녀의 과거 어딘가에 틀림없이 무슨 약점이 있슬 겁니다! 그녀는 이 에르큘 포와로를 깔 보고 자신이 폴 바레스코의 유아보모 겸 가정교사에 대한 얘기와 조끼에 대한 얘기 를 늘어놓음으로써 이 에르큘 포와로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도전에 대응할 대비책을 마련해 놓았지요.불이 나갔습니다.그 순간 재빨리 나는 탁자에서 일어나 케르베루스 옆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어둠 속에서 그녀가 다 가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그녀는 개의 입을 열고 그 꾸러미를 그 속에 집어넣었습 니다.그래서 나는---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작은 손가위로 그녀의 소맷자락을 조금 잘라냈지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포와로는 은색 천을 꺼내들었 다. "부인도 아실 겁니다.그녀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체크 무늬의 트위드 천이지 요.나는 재프에게 이걸 넘겨주고 원래 이 천이 붙어 있던 자리에 한번 대보라고 할 겁니다.그리고 그녀를 체포하라고 하겠습니다.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런던 경시 청이 얼만 우수한지를 세삼 깨닫게 될 겁니다." 로사코프 백작 부인은 다만 멍청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그러더니 갑자기 그녀가 크고 쉰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우리 니키는요---우리 니 키는---이번 일은 그애에게 아주 충격적인 일이 될 텐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 었다. "아니면,선생님은 그렇게 생각이 되시지 않나요?" "미국에는 다른 아가씨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번에는 그 애 어머니가 감옥으로 갔겠죠.감옥으로 말이에요! 오,선생님은 역시 훌륭한 분이에요.훌륭한 분이라고요." 앞으로 뛰쳐나오며 그녀는 양팔로 포와로를 꼭 껴안고 슬라브인다운 열정으로 그에게 마구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히그스 씨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케르베루스가 꼬리로 바닥을 다시 쳤다. 이 감격적인 장면이 한창 펼쳐지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재프야!" 하고 백작 부인의 포옹에서 벗어나며 포와로가 외쳤다. "아무래도 난 다른 방에 가 있는 편이 좋겠죠?" 하고 백작 부인이 말했다.그녀는 옆 방과 연결되어 있는 문으로 사라졌다.포와로는 홀로 나가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리---" 근심스런 목소리로 히그스가 식식거렸다. "먼저 거울을 보시는 게 어떻겠 습니까요?" 포와로는 그 말대로 했다.그리고 나서 그는 뒷걸을질을 쳤다.립스틱과 마스카라로 그 의 얼굴은 온통 환상적으로 얼룩덜룩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저 문 밖에 계신 분이 런던 경시청에서 오신 재프 경감이시라면,아주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잖습니까요? 틀림없이 말이에요." 하고 히그스가 말했다. 그가 다시 말을 덧붙일 즈음 다시 초인종이 울렸고,포와로는 자기 콧수염 끝에 묻어 있는 진홍색 립스틱 자국을 지우려 애를 썼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요? 그분을 저도 만나뵈야 하나요? 그리고 지옥에서 끌어낸 이 그레이하운드 종의 개는 또 어떻 게 해야겠습니까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케르베루스는 다시 지옥 으로 돌아갔네."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고 히그스가 말했다. "사실상 제가 좋아하는 개는...어쨌든 그 개는 제가 잡아두고 싶은 그런 개는 아닙니다요! 그 개는 너무 눈에 잘 띄인단 말입니다요.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실테지요? 그리고 제가 그 개를 먹여 키우는 문제 도 생각해야 할 테고요! 아마 못 먹어도 젊은 사자만큼은 먹어치울 것입니다요." "'네메아의 사자'에서부터 '케르베루스를 잡아라'까지---" 하고 포와로는 중얼거렸다 "완벽해." 10 그로부터 일주일 뒤 레몬 양은 자신의 고용주 앞으로 계산서 한 장을 가져왔다. "실례합니다만,포와로 씨.이걸 지불하라는 말씀이세요? 레오노라라는 꽃장수에게 말이죠? 붉은 장미꽃다발이라니! 11파운드 8실링 6펜스나요? W.C.I.엔드 거리 13번지 '지옥'에 살고 있는 베라 로사코프 백작 부인 앞으로 말입니까?" 포와로의 뺨이 빨간 장미빛깔로 물들었다.그는 자기의 눈두덩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 었다. "그대로 하시오,레몬 양.특별한 일에 대한---조그만---감사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지.백작 부인의 아들이 미국에서 약혼식을 올리게 되었으니까---철강계의 거물 급 회사 사장의 딸과 말이오.붉은 장미꽃은---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오." "그래요?" 하고 레몬 양이 말했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 쯤이면 꽃값이 얼마나 비싼 지 아세요?" 에르큘 포와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때때로---" 그가 말했다. "절약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오."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는 방을 나갔다.그의 발 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아주 유쾌해 보였다. 레몬 양은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았다.이미 서류정리방식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머릿속에는 다만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이 온통 꽉 들어차 있었다. "맙소사!"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세상에.....정말----저 나이에....아냐,그럴 리가 없어."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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