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사슴 1 에르큘 포와로는 시린 발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손가락 을 호호 불었다.눈이 녹아서 그의 콧수염 가장자리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나더니 하녀가 들어왔다.그녀는 둔해 보이는 땅딸막한 시골처녀 였는데 에르큘 포와로를 아주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전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물었다. "부르셨어요?" "그렇소,불 좀 피워 주겠소?" 그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곧 종이와 나무토막을 한아름 갖고 되돌아왔다.그녀는 빅토 리아 풍의 커다란 난로 앞에 꿇어앉아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팔을 돌리고 손가락을 호호 불었다. 그는 화가 났다.그으 차---값비싼 메사로 그래츠---가 기대했던 만큼 그 성능이 못 했던 데다가,그가 상당히 많은 월급을 주고 있는 젊은 운전사까지 고장난 자동차를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자동차가 갑자기 꼼짝못하고 서버린 곳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 고 나서 1.5마일(약 2.4km)더 달려간 2급 도로에서였다.평소와 마찬가지로 스마트한 가죽구두를 신고 있던 에르큘 포와로는 하틀리 딘이라는 강변 마을까지 1.5마일이나 꼼짝없이 걸어가야만 했다.그 마을은 여름철에느 번창했겠지만 겨울인 지금은 황량 하게 그지 없었다.블랙 스원 여관 사람들은 손님이 들어서자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 다.그가 계속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차를 고치게 마을 정비 공장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하자 여관 주인은 거의 웅변하듯 열변을 토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라틴 민족의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는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차를 빌리라고? 자가용-- 커다랗고 값비싼 내 차가 있는데 무슨 말씀! 그는 그 차 외에 다른 차로 돌아갈 마 음은 꿈에도 없었다.어쨌든 아무리 빨리 차를 수리한다 해도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계속 길을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어차피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따뜻한 방과 식사를 요구했다.여관 주인은 한숨을 쉬면서 그에게 방을 안내해 주고는 하녀더러 방에 불을 지피라고 시켰다.그리고 자기 아내와 식사문제를 의논 하면서 물러갔다. 1시간 뒤에 에르큘 포와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 쪽으로 다리를 쭉 뻗고서 한결 느긋한 기분으로 방금 전에 먹은 저녁식사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솔직히 말해서 스테이크 너무 질긴데다가 연골이 많았고,싹양배추는 잎이 너무 크고 시퍼래서 진짜 맛이 없 었는데다가,감자는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했다.후식으로나온 사과 스튜와 커스타드 역시 먹을 만한 게 못되었다.치즈는 딱딱했고 비스킷은 바삭바삭하기는 커녕 물렁 물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큘 포와로는 기세좋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커 피라고 이름붙을 수 있는 액체를 조금씩 마시면서 배고픈 것보다는 배부른 게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가죽구두를 신고서 눈이 쌓인 길을 걷다가 이렇게 따뜻한 불 앞에 앉아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정비공장 사람이 뵙고 싶다는데요." 에르큘 포와로가 상냥하게 말했다. "올라오라고 해요." 그 소녀는 킥킥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포와로는 자신이 올 겨울 내내 그 하녀의 친 구들에게 좋은 화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이번 노크소리는 아까와는 달랐다.포와로가 큰 소리로 말 했다. "들어와요."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청년을 호의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청년이 그 앞으로 와서 는 손으로 모자를 비틀더니 엉거주춤하게 섰다. 청년은 그리스 신을 꼭 빼닮은 아주 잘생긴 미남이었는데 몹시 순진해 보였다. 청년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차 말인데요,선생님.저희가 그걸 갖 다놓았습니다.그래서 고장의 원인을 알아냈지요.그걸 고치려면 한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포와로가 말했다. "어디가 고장났소?" 청년이 한참 동안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포와로는 간간히 고개 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지는 않았다.완벽하세 균형잡힌 체격은 그가 몹시 부러워하던 것이었다.그는 혼자 감탄하여 중얼거렸다. "그래,꼭 그리스 신같군 ---아르카디아의 젊은 목양신처럼 말이야." 청년이 돌연 하던 말을 멈추었다.그러자 에르큘 포와로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처음의 심미적인 반응에서 지적인 반응으로 옮겨간다는 표시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포와로가 말했다. "알고 있소.그럼,알고말고."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 얘기는 이미 우리 기사한테 들어서 알고 있소." 그러자 청년은 뺨을 붉히면서 손가락으로 모자를 더욱 꽉 움켜 잡는 것이었다. 청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예---저---예,선생님,알고 있습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나한테 얘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저---예,선생님.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주---"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생각이 깊은 젊은이군.고맙소." 마지막 말에는 은연중에 그만 방에서 나가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청년은 그 자리에 꼼짝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트위드 천으로 만든 모자를 발작적으로 비틀던 청년이 당황한 목소리로 아주 낮게 말했다. "저---실례인 줄 압니다만---선생님이 명탐정이시라는 얘기가 맞죠? 헤라클 레스 프와리 씨지요?" 포와로가 말했다. "그건 그렇소." 청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신문에서 선생님에 대한 기사를 읽었서여." "그런데?" 이제 청년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완전히 진홍빛이 되었다.그의 눈빛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슬픔과 애원이 가득찬 눈빛이었다. 에르큘 포와로가 그를 도와주려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 기가 있단 말이지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청년이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절 건 방진 녀석이라고 생각하실까봐 무척 망설였습니다.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선생님께서 여기를 오시게 되었는데---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어서 그만...전 선생 님께서 어려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하셨다는 기사를 많이 읽었습니다.어쨌든 전 선생님께 부탁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그러면 안될까요?" 에르큘 포와로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여튼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상대방이 머리를 끄덕였다.그가 허스키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젊은 숙녀에 관한 일인데요.만약---만약에 선생님 그녀를 찾아주실 수만 있다면." "그녀를 찾는다고? 그럼,그녀가 없어졌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의자에 몸을 똑바로 앉았다.그리고 나서 날카롭게 말했다. "물론,내가 젊은이를 도울 수는 있겠지.하지만 그런일이라면 경찰한테 가보는 게 더 좋을 거요.그게 그들의 일이고 또 사람을 찾는 데는 나보다 나을 테니까." 청년이 발을 질질 끌었다.그는 어설프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었어요.경찰을 찾아갈 만한 일이 못 되거든요.말하자면 아주 이상한 일인 셈이죠." 에르큘 포와로는 청년을 응시했다.이윽고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아,그렇소.그럼, 일단 거기 앉지.이름이---?" "윌리엄슨,테드 윌리엄슨이라고 합니다." "앉게나,테드.그럼,얘기를 들어봄세." "감사합니다,선생님." 그는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 았다.그의 눈빛은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를 연상케 할 만큼 간절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부드럽게 말했다. "얘기해 보게." 테드 윌리엄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일이었습니다.전에 한 번 만난 뒤로는 도대체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전 그녀의 성도 모르고 또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그런데 진짜 이상한 것은 제 편지가 번번이 그냥 되 돌아온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얘기하도록 하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서두르지 말고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얘기해야 하네." "예,선생님.혹시 그래스론 저택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다리를 지나 강가에 있는 집 말입니다." "그 집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는데." "그 저택의 주인은 조지 샌더필드 경이지요.그는 그 집을 별장으로 사용하는 모양입 니다.으레 여름철이면 주말마다 내려와 거기서 파티를 열곤 하거든요.그는 여기 올 때마다 손님들을 많이 데려오더군요.여배우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그러니까 그게 지난 6월에 일어난 일이었서요.라디오가 고장났다며 좀 봐달라고 저한테 사람을 보 냈더군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그 집에 갔죠.그랬더니 그 별장 주인은 손님들과 함께 보트 놀이를 하 러 강으로 갔고,요리사는 외출했으며,하인도 보트에서 손님들이 마실 음료수를 갖 고 강으로 나갔더군요.그래서 집에는 그 아가씨 혼자만 있었어요.그녀는 그 별장에 손님으로 온 숙녀의 하녀였죠.그녀가 저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고장난 라디 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더군요.그리고는 내가 라디오를 고치는 동안 계속 제 옆에 있더라고요.그래서 우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그녀는 자기 이름 이 니타라고 하면서 자기 주인은 그 집에 머물고 있는 러시아 여류 무용가라고 했 어요." "그녀의 국적은 어디였나,영국?" "아니에요.제 생각에는 프랑스 사람 같았어요.악센트가 조금 이상했거든요.그렇지만 그녀는 영어도 아주 잘했습니다.그녀가---그녀가 맘에 들었기 때문에 전 그날 밤에 영화구경을 하러 가지 않겠냔고 물었지요.그랬더니 그녀는 밤에도 주인 시중을 들 어야 한다고 대답하더군요.하지만 오후 일찍이라면 잠깐 나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저녁때쯤에나 강에서 돌아올 거라면서요.요점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날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오후 일을 빼먹었습니다.(주인한테 얘기해 봤자 퇴짜만 맞 을 게 뻔하거든요)그래서 우린 강변을 따라 산책을 했죠." 그는 말을 멈추었다.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고 눈빛은 꿈꾸는 사람마냥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예쁜 아가씨였나 보군?" "선생님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황금빛 날개 같았어요.그리고 얼마나 사뿐사뿐하게 걷는지 한 마리 사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전---전---대번에 그녀가 미치도록 좋아졌 습니다.하지만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건 절대 아녜요."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2주일 뒤에 자기 주인이 여기 올 테니까 그 때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약속한 장소에서 제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연락도 없었고요.참다못해 제가 용기를 내어 그 별장으로 그녀를 만나러 갔지 요.다행히도 그 러시아 숙녀분과 하녀가 그때까지 그 별장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녀를 좀 불러달라고 부탁했죠.그런데요,그녀가 나오는데 보니까 기가 막히 게도 니타가 아니더군요! 피부가 검고 교활해 보이는 소녀였는데---당돌하기 짝이 없더라고요.그 소녀의 이름은 마리라고 했어요.'날 만나러 왔다고요?'라고 선웃음을 치면서 말하더군요.내가 몹시 놀랐다는 것은 그 아가씨도 알았을 거예요.내가 만나 러 온 사람은 러시아 숙녀분의 하녀이지 댁이 아니라고 했지요.그러자 그 소녀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 하녀는 해고되었다는 거예요.'해고 되었다고요?'하고 내가 물 었죠.'대체 뭣 때문에요?'라고요.그랬더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어요.'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하고 그녀가 말하더군요.'그때 난 있지도 않았는데.'정말이지 그때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무슨 말을 해야 될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하지만 그대로 단념할 수가 없어서 그 뒤에 전 용기를 내어 다시 그 마리라는 소녀를 찾아가 니타으 주소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죠.전 그녀가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선물을 하나 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공짜로 그런 부탁을 들어 줄 아가씨가 아니었거든요.하여튼 그녀는 내 부탁대로 주소를 알아봐 줬습니다. 런던 북구로 주소가 되어 있었어요.그래서 전 그 주소로 편지를 띄웠습니다.그런데 '수취인 불명'이라는 딱지를 단 채 말입니다." 테드 윌리엄슨은 말을 멈추엇다. 그리고 그 깊고 푸른 눈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아시겠죠? 이런 일을 경찰한테 가봤자예요.하지만 전 그녀를 꼭 찾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서요.만약---만약에 선생님께서 그녀를 찾아주실 수만 있다면--" 그의 얼굴이 새빨게졌다. "저한테---저,조금 저축한 것이 있는데요.5파운드까지는 어떻게 해드릴 수 있어요. 그게 안된다면 10파운드라도요."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금전적인 면을 따질 필요가 없네.우선은 이것부터 먼저 알아보자고---그 니타라는 아가씨는 젊은이이 이름과 직장을 알고 있나?" "오,그럼요." "그럼,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젊은이와 연락을 할 수도 있겠군?" 테드가 아까와는 달리 한참 있다가 말했다. "예." "그럼,이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혹시---" 테드 윌리엄슨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말씀은 저 혼자만 그녀를 짝사랑 했다는 거죠? 어느 면에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하지만 그녀는 저를 좋아했어요. 정말 저를 좋아했단 말입니다.분명 일시적인 기분으로 그러지는 않았어요. 선생님,무슨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그녀 주변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제 말뜻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아기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젊은이의 아기를 말이지?" "제 아기가 아녜요." 테드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포와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그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약 젊은이으 추측이 사실이라면---그래도 그녀를 찾고 싶나?" 테드 윌리엄슨의 얼굴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예,선생님.그렇습니다.! 전 그 녀만 좋다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설령 그녀한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전 상관 하지 않아요! 선생님,제 부탁을 거절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에르큘 포와로는 미소를 지었다.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황금빛 날개 같은 머리카락이라? 그래,이걸 헤라클레스 제3의 모험으로 삼자.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게 아르카디아에서 일어났지." 아르키디아의 사슴 2 에르큘 포와로는 테드 윌리엄슨이 이름과 주소를 정성스레 적어준 종이쪽지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발레타양,북 15구 어퍼 렌프루 레인 17번지' 그는 이 주소로 뭘 알아낼 수 있을 것인지 뚜렷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그 주소로 찾아가 봤자 헛수고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그렇지만 테드가 그에세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 이것뿐인데 어떡하랴? 어퍼 렌프루 레인 17번지는 오래 되어 거무죽죽하긴 했지만 유서가 깊은 거리였다.포와로가 노크를 하자 눈빛이 흐릿한 살찐 여자가 문을 열었다. "발레타 양 있나요?"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이사갔어요." 포와로는 문이 닫혀질까 봐 얼른 문안으로 한 발 들여놓았다. "혹시 그 주소를 좀 알 수 없을까요?" "난 몰라요.주소를 남겨놓고 갔어야 말이죠." "언제 이사갔습니까?" "지난 여름에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을까요?" 포와로의 오른손에서는 2실링 6펜스짜리 은화 2개가 서로 부딪쳐 땡그랑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그러자 썩은 동태눈을 한 그 여자의 태도가 마치 마법이라도 걸 린 사람마냥 금방 나긋나긋해졌다.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글쎄,댁을 도와드리면 참 좋겠군요.가만 있자,그러니까 그게 8월이던가,아냐,그 이전이었으니까---7월---그래,그때가 7월이었던 게 분명해요.7월 첫째주였나 봐요. 아주 갑작스럽게 여기를 떠났는데,내 생각에는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그럼,그녀가 이탈리아 인이었습니까?" "예,그래요." "그녀가 러시아 무용가의 하녀로 일한 적은 있죠?" "그래요,이름이 세몰리나 마담이라고 했는데,이 밸리에 있는 세스피안 극장의 무용 가였죠.사람들한테 인기가 아주 좋아서 유명한 스타 중 하나였어요." 포와로가 말했다. "발레타 양이 왜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여자가 잠시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그건 모르겠어요." "해고당한 거지요?" "글쎄요---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하지만 발레타 양이 입을 열어 얘기하지 않으니 제가 알 수가 있나요.본래 그녀의 성격상 그런 얘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 어요.하지만 그 일때문에 몹시 화를 냈던 것 같아요.그녀는 성질이 나빠서 한번 화 가 났다 하면 금방 사람이라도 찔러죽일 것처럼 까만 눈으로 사람을 흘겨보는데 그 렇게 무서울 수가 없어요.진짜 이탈리아 인이라니까요.그래서 난 그녀가 그런 낌새 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녀한테 아예 가지를 않았다고요!" "진짜 발레타 양이 이사간 주소를 모릅니까?" 2실링 6펜스짜리 은화가 그녀의 용기를 북돋워주기라도 하려는듯이 다시금 땡그랑 거렸다.그녀의 대답속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나도 정말 내가 알고 있었스면 좋겠어요.알기만 한다면야 말씀드리고말고요.하지만 내가 아는 건---그녀가 갑작스레 떠났다는 것,그것뿐이에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래,그것뿐이라..." 곧 다가올 발레 공연의 무대장식에 대해 한참 신나게 설명을 해가던 엠브로즈 밴델은 포와로가 묻는 말에 쉽게 대답을 했다. "샌더필드? 조지 샌더필드 말입니까? 더러운 작자죠.돈은 많지만 그 사람은 사기꾼 이라고 합디다.나쁜 놈! 무용가와의 연애사건이요? 아,그야 카트리나하고 그렇고 그 런 관계였죠.카트리나 사모센카 말입니다.그녀를 보신 적은 있겠지요? 아이고--- 정말 아름답게 생겼지요.테크닉도 아주 뛰어나고요.'백조의 호수'---그 작품은 보셨 겠죠? 그 무대장식도 바로 내가 했지요! 그리고 드비시의 작품이나 만니의 '라비셰 오 부아'라는 작품은요? 그녀는 그 작품에서 미카엘 노브긴과 함께 공연했답니다. 그 사람 정말 멋지죠?" "그럼,그녀가 조지 샌더필드 경의 친구였습니까?" "예,그녀는 주말마다 그의 별장에 내려가곤 했거든요.거기서 그 남자가 굉장한 파티 를 열었나 봅니다." "내가 마드무아젤 사모센카를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지금 여기 없는데요.갑자기 파리인지 어디로 떠나버렸거든요.사람들 말로는 그녀가 소련 공산당의 스파이라고 하더군요---내 자신은 그걸 믿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이란 으례 그런식으로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카트리나는 자신이 화이트 러시아인(러시아 혁명에 반대한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왕자나 대공이라면서요.뭐,보통 그런 식으로 얘기하잖습니까? 실상 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자기네 조상이 어떻네 하고 떠벌이거든요." 밴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금전의 자기 얘기로 되돌아갔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만약 밧세바(솔로몬을 낳았다는 성경에 나오는 여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당신은 유대인의 관습에 대해 아셔야 할 겁니다. 제가 그걸 자세히-----" 그는 신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에르큘 포와로가 어렵게 마련한 조지 샌더필드 경과의 자리는 처음부터 그 출발이 순조롭지 못했다. 엠브로즈의 말을 빌자면 나쁜녀석인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조지 경은 키가 땅딸막한 남자로 머리카락은 뻣뻣하고 검었으며 목둘레에는 살이 디룩디룩 쪄 있었다 "용건이 뭐요,포와로씨? 한데------전에 우리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소만" "예,만난 적은 없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요? 정말 이상하군." "오,아주 간단한 일입니다.뭘 좀 알고 싶어서요." 상대방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실업계의 비밀정보라도 알려 달라는 말이오? 당신이 재정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 소."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어떤 숙녀에 관한 일이지요." "오,여자라고?" 조지 샌더필드 경은 안락의자에 상체를 뒤로 기댔다.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그래서인지 목소리도 한결 여유 있게 들렸다. 포와로가 말했다. "마드모아젤 카트리나 사모센카하고 친하게 지내셨다고요?" 샌더필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예,매혹적인 여자요.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만 런던을 떠나버렸소." "왜 런던을 떠났죠?"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소? 경영주측과 싸움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오.아시겠지만 그녀는 성격이 좀 변덕스러워서 말이오.러시아 기질이 다분한 여자지.당신을 도와 줄 수가 없어서 안됐지만 난 정말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그녀가 떠난 뒤로 는 서로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그의 말 속에는 이제 그만 꺼지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포와로가 말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은 마드모아젤 사모센카가 아닙니다." "그녀가 아니라고?" "예,내가 찾는 사람은 그녀의 하녀입니다." "하녀라고?" 샌더필드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포와로가 말했다. "혹시-----그녀의 하녀를 기억하십니까?" 샌더필드의 심기가 다시 불편한 모양이었다.그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이고,그걸 내가 어떻게---물론 그녀한테 하녀가 하나 있긴 했소만...아주 질이 나쁜 아이였다는 것은 내 단언코 말할 수 있어요.천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데다 남의 말을 몰래 엿듣는 나쁜 버릇이 있는 아이였단 말이오.게다가 거짓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포와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녀에 대해서 그리 잘 기억하고 계십니까?" 샌더필드가 허둥지둥 말했다. "그런 인상을 받았다는 것뿐이지요.이름조차 생각이 안 나는걸요.가만 있자,마리라던가? 아니 이름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군요.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세스피안 시에트로에 들러서 그 이름이 마리헬린 이라는 것을 알아왔습니다.그리고 주소도요.하지만,조지 경,제가 지금 얘기하는 사람은 마리 헬린 전에 있던 하녀입니다.니타 발레타 말입니다." 샌더필드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소.내가 기억하는 사람은 마리뿐이오.심술이 뚝뚝 흐르는 눈빛에다 피부가 까맣 고 조그만 계집아이 말이오." 포와로가 말했다. "내가 말한 그 아가씨는 지난 6월에 당신의 그래스론 저택에 있 었어요." 샌더필드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하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요.그때는 분명히 그녀는 하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소.그러니까 당신이 뭘 잘못 알고 있는거란 말이오." 에르큘 포와로는 머리를 흔들었다.그는 자신이 실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 헬린은 조그맣고 영리해 보이는 눈으로 포와로를 흘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제 기억은 분명해요.전 6월 마지막주부터 마담 사모센카 댁에서 일하기 시작 했다고요.그 전에 있던 하녀가 갑자기 그만두었다나 봐요." "그 하녀가 갑자기 그만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소?" "갔다는 것---그것도 갑자기---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예요! 병이 났던지--- 뭐,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죠.하지만 마담이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알 수 없 죠." 포와로가 말했다. "아가씨는 주인과 사이가 좋았소?"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이 변화무쌍한 분이세요.울다가도 웃고,또 웃다가는 우신다니까요.어떤 때는 기가 푹 죽어서 말도 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로 명랑해져요.무용가들은 대부분 그렇잖아요? 변덕스러운 면 말이에요." "그럼,조지 경은?" 그녀는 재빨리 그를 쳐다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기분나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조지 샌더필드 경 말이에요?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세요? 혹시 선생님께서 진짜 알고 싶어하는 게 바로 그것 아닌가요? 딴 사람은 괜히 핑계였죠,그렇죠? 물론,조지 경에 대해서라면 말씀드릴 게 있죠.제가 그걸 말----" 그때 포와로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필요치 않아요." 그녀는 입을 벌리고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심한 실망감이 그녀의 눈에 가득찼다. 아르키디아의 사슴 3 "알렉시스 파블로비치,자넨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늘 말하지." 에르큘 포와로가 최대한 아첨 섞인 어조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이 세 번째 헤라클레스의 모험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과 인터뷰 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처음에는 별것 아니게 생각했던 이번 일이 의외로 몹시 까다로웠던 전의 사건들 못지않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행방불명된 하녀를 찾기 위해 단서란 단서는 다 조사해 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포와로는 이날 저녁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 하는 카운트 알렉시스 파블로비치를 만나러 파리에 있는 그의 사모바 레스토랑까지 직접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그럼.이보게,알다마다---항상 알지.자네가 지금 어디로 갔냐고 물어본 여자가---사모센카,뛰어난 무용가 맞지? 아하! 그 여자 최고였지,귀엽기도 하고." 그는 손가락 끝에다 입을 쪽 맞췄다. "얼마나 정열적이고---자유분방했는지 몰라! 그 세계에선 성공해서---전성기에는 주연 벌레리나였었다네.그런데 갑자기 인기가 없어지더니---그만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네.세상 끝으로 말일세.그리고는 곧,아 참! 사람들은 너무나 빨리 그녀를 잊어버렸지." "지금 그녀는 어디 있는가?" 포와로가 다그쳐 물었다. "스위스 알프스 산속에 있네.거긴 마른 기침을 하고 몸이 자꾸 마르는 사람이 가서 살면 죽기 딱 쉽상인 곳이지.그 여자는 죽을거야.그래,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 여자는 숙명론적인 기질이 있거든.그러니까 죽을 거야." 포와로는 주문 같은 비극적인 말을 그만하게 하려고 헛기침을 했다.그가 알고 싶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자네 혹시 그녀가 데리고 있던 하녀 생각나지 않나? 니타 발레타라는 하녀라고--" "발레타? 발레타라고 했나? 옛날에 하녀 하나를 본 적이 있긴한데---카트리나가 런던에 간다고 해서 내가 역에 전송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봤었지,아마. 피사(이탈리아 중부의 도시,사탑으로 유명함)에서 온 이탈리아 인 아니었나? 그래, 피사에서 온 이탈리아 인이 맞아." 에르큘 포와로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렇다면---난 이제 피사까지 가봐야 한다네." 에르큘 포와로는 피사의 공동묘지에서 무덤 하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가 그렇게 찾아왔던 일이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 있는 이 초라한 무덤일 줄이야! 소박한 영국 청년 가슴을 그렇게 흔들어 놓은 예쁘고 명랑한 아가씨가 이 차가운 땅밑에 누워 있다니 이럴 수가 있을까? 이번 일은 결국 이런 비극적인 로맨스로 결말나는 건가? 이제 이 아가씨는 젊은이의 기억 속에 6월 오후의 그 황홀했던 몇 시간동안의 그 모습 그대로만 남아 있을 것 이다.국적문제로 인해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것이고 생활규범이 다른 데서 오는 문 제,환멸의 고통,이런 일들은 이제 영원히 그들 두 사람한테서 사라질 것이다. 에르큘 포와로는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그는 발레타 가족과 나누었던 대화 를 다시 상기해 보았다.넓적한 시골 아줌마 얼굴을 한 그녀의 어머니,꼿꼿하면서도 비탄에 잠긴 아버지,피부가 까맣고 말이 없는 여동생.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어요.옛날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아이이긴 했지만..... 의사는 우리한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맹장염은 즉시 수술해야 한다는 거에요.그래서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그만......그래요.그 애가 죽은 건 마취가 채 풀리지도 않아서였서요.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눈물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안카는 정말 똑똑한 아이였서요.그런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다니..." 에르큘 포와로는 그 말을 되풀이 해 보았다. "어린 나이에 죽다니..." 그것은 자신이 도와주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청년한테로 그만 되돌아가야 한다는 메세지였다. 그의 추적은 이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피사의 사탑과,이제 다가올 생명과,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함초롬히 그 꽃망울을 피우기 시작하는 초봄의 꽃들이 피어 있는 이곳에서 말이다. 이 마지막 판결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정은 봄의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그 어떤 것----말----이름? 모든 일이 깔끔하 게 끝나지 않아서일까? 일이 척척 들어맞지 않아서? 에르큘 포와로는 한숨을 쉬었다.일을 완전히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여행을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그것도 알프스 깊은 산속으로 말이다. 아르키디아의 사슴 4 여긴 세상의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눈이 첩첩 쌓인 곳---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오두막 속에는 교활한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는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드디어 그는 카트리나 사모센카를 찾아냈다.전에는 통통하고 발그레했을 그녀의 뺨 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이불 위로 내놓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몹시 수척해 보였다.그녀를 보자 그는 대번에 생각이 났다.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공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공연이었던지 꽤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그는 사냥군으로 나온 미카엘 노브긴이 앰브로즈 밴델이 장치해 놓은 그 환상적인 숲속에서 뛰어오르고 회전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그러자 그 사랑스런 암사슴이 끝없이 쫓기는 장면---머리에 뿔을 단 어여쁜 금발 아가씨가 청동빛 다리 를 경쾌하게 움직이며 춤추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그리고 마지막에 그녀가 총을 맞고 쓰러지자 두 팔로 그 사슴을 안고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던 미카엘 노브 긴의 모습도 눈앞에 선했다. 카트리나 사모센카는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 같은데요?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죠?" 에르큘 포와로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마담,먼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씀 부터 드리고 싶군요.그동안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연기를 보여주셔서 말입니다." 그녀의 입가에 엶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여기 온 건 사업상 일 때문이죠.난 당신이 데리고 있던 하녀를 오래 전부터 찾고 있답니다.이름은 니타인데." "니타?"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그녀의 눈이 커진 것으로 보아 놀란 게 분 명했다. "뭘 아시는 거죠? 니타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럼 말씀 드리죠." 그는 차가 고장나던 날 저녁에 테드 윌리엄슨이 찾아와 애꿎은 모자만 비틀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달라고 애원했다는 얘기를 다 들려주 었다.그녀는 아주 관심 있게 그 이야기를 듣는 눈치였다. 그가 말을 다 끝내자 그녀가 말했다. "그것 참 안됐군요.그래요.애처로운 이야기로군요......" 에르큘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마치 아르키디아의 전설 같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럼,그 아가씨에 대해서 말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트리나 사모센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아니타라는 하녀가 한 명 있었어요. 예쁘고---그래요,명랑한 애였죠.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은 빨리 데려간 다는 말이 있듯이 그 애는 어려서 죽었어요." 그 마지막 말은 포와로가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이었다.그런데 지금 또 똑같은 말을 듣게 되다니---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죽었다고요?" "예,죽었어요." 에르큘 포와로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내가 조지 샌더필드 경에게 댁의 하녀에 대해서 물었더니 약간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더군요.그건 왜지요?" 무용가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그 하녀 말씀이군요.그는 당신이 마리 얘기를 하는 줄 알았을 거에요.주아니타가 떠난 뒤에 새로 온 하녀죠.아마 그 얘가 그의 비밀을 미끼로 삼아 협박하려고 했었 나봐요.몹시 밉살스러운 계집애였죠.남의 편지를 몰래 뜯어보고 서랍을 마구 뒤지 는 일쯤은 아주 다반사였어요.게다가 어찌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정말 성가셨죠." 포와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서 그랬군요."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끈덕 지게 물고 늘어졌다. "주아니타의 또 다른 이름은 발레타였고 그녀는 피사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다가 죽 었습니다.그건 맞죠?" 그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에 앞서,그녀의 얼굴에 낭패해 하는 기색이 보일락말락 떠오른 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예,그건 맞아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문제가 하나 있어요.그녀의 가족 들은 그녀를 주아니타가 아니라 '비안카'라고 부르더군요." 카트리나가 여윈 어깨를 으쓱했다. "비안카---주아니타,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녀의 본래 이름은 비안카였겠지만 주아니타라는 이름이 훨씬 로맨틱하게 들린다고 생각 해서 자신을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아하,그렇게 생각하신다고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어조를 싹 바꿔서 말했다 "그와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죠." "어떻게요?" 포와로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테드 윌리엄슨이 만난 아가씨는 황금빛 날개 같은 머리칼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좀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그의 손가락이 이마 한가운데서 갈라져 양쪽으로 굽이치는 카트리나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황금빛 날개,황금빛 뿔? 사람들은 악마로 보든지,아니면 천사로 보든지 할 겁니다! 하지만 그 둘 전부일 수도 있겠죠.혹시 이 머리카락이 상처입은 사슴의 황금빛 뿔 은 아닌가요?" 카트리나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상처입은 사슴..."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없는 절망만이 가득차 있었다. 포와로가 말했다. "테드 윌리엄슨의 이야기에서 계속 나를 괴롭힌 것이 있었습니다.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죠.그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숲속에서 그 빛나는 청동 다리로 춤추는 바로 당신.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볼까요,마드무아젤? 비안카 발레타가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에 새로운 하녀가 즉시 오지 않았기 때문에,당신은 1주일 동안 하녀 없이 생활 했습니다.그런데 그때 마침 그래스톤 저택으로 내려가게 되었고,따라서 하녀 없이 당신은 혼자 가야 했습니다.그때 이미 당신은 자신의 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을 깨 닫고서 다른 사람들이 강으로 놀러나갔을 때도 하루 종일 집안에만 머물러 있었습 니다.그런데 그날 초인종이 울려 밖에 나갔다가 그만 보게 된 거죠.당신이 본 걸 내가 이야기해 볼까요? 당신은 어린애처럼 순진하면서도 그리스 조각처럼 잘생긴 청년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가씨인 척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주아니타'가 아니라---'인코그니타'로 말입니다.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 그와 산 책을 했습니다.마치 아르키디아의 연인처럼......" 오랜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카트리나가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한가지 만은 사실을 말씀드렸는데요.그 이야기의 결말 말이에요.니타는 젊 은 나이에 죽게 될 거예요." "말도 안되는 소리!" 에르큘 포와로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그는 손으로 테이블을 내 리쳤다.갑자기 딱딱하고 사무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건 정말 말 같잖은 소리요! 당신은 죽을 필요가 없단 말이오.다른 사람처럼 당신도 죽음과 싸우면 되잖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절망과 슬픔이 가득찬 표정으로 말이다. "나한테 무슨 생이 남았다는 거죠?" "무대 위의 인생만이 최고는 아닙니다.힘을 내요! 또 다른 인생도 있다는 걸 생각 해 봐요.마드무아젤,솔직히 얘기해 봐요.당신 아버지가 진짜로 왕자나 대공,아니면 장군이었소?"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는 레닌그라드에서 화물자동차 운전사였는걸요!" "됐어요! 그럼,시골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 아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소? 그리고는 천사같이 예쁜 아기들을 낳아 기르고,그러다 보면 당신처럼 발레를 하는 아이도 생기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카트리나가 숨을 죽이며 말했다. "그건 모두 꿈같은 얘기일 뿐이에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분명히 실현 될 수 있는 이야깁니다!"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text down page
Downloading ETEXT


  etext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etext는 아직은 많이 모자라지만,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고 만들어가는 공간이니 자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Palm사용자 여러분이 경우엔, .prc 파일의 다운로드 창이 뜨면 적절히 저장위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셀비안(Cellvic) 여러분, 그리고 WindowsCE계열, 또는 Newton이나 Psion 사용자 여러분들은 .ZIP 파일 형태로 제공되는 etext를 압축을 풀어서 저장하시면 됩니다.
 다 받으신 다음에는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시면 계속해서 etext를 여행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dlif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