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궤짝의 비밀 ● (The Mystery of The Spanish Chest) Agatha Christie -1- 여느 때와 다름없이 1초도 어기지 않고 에르큘 포와로는 그의 유능한 비서 인 레몬 양이 그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얼핏 보기에 레몬 양은 정연한 각으로 이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그리고 사실 그런 점은 균형을 중히 여기는 포와로의 기호에 걸맞는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 문제에 관한 한 에르큘 포와로도 그렇게까지 기하학적인 정밀 함을 내세우진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아주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곡선에 대해--물론 그것은 관능적인 육체의 곡선을 일 컫는 것이다--일종의 대륙적인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여자다운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싱싱하고 부드러우며 아름답게 치장을 한, 그러면서 도 아주 이국적으로 생긴 여자들을 좋아했다. 한때는 그에게도 러시아의 어 느 백작 부인이 있었다--하지만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젊은 한때의 어리석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는 레몬 양을 단 한 번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정밀하기 이를 데 없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녀의 능력은 놀라웠다. 그녀는 48세였으며 상상력이라곤 전혀 없는, 그래서 행복 한 여자였다. "안녕, 레몬 양." "안녕하세요, 포와로 씨." 포와로가 자리에 앉자 레몬 양은 그의 앞에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은 아침 에 배달된 우편물을 갖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서 펜 과 메모지를 들고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평상시의 일과는 달리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포와로가 조간신문을 들고 와서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그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표제가 크고 굵직한 글씨로 실려 있었다. '스페인 궤짝 사건, 새로 밝혀진 사실.' "조간신문은 읽어보았겠지, 레몬 양?" "예, 포와로 씨. 제네바발 기사는 별로 좋지가 않더군요." 포와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손으로 그 제네바발 기사를 넘겼다. "스페인 궤짝이라--"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레몬 양, 그 스페인 궤짝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고 있 소?" "글쎄요, 포와로 씨, 제 생각으로는 그것이 본래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궤짝 을 뜻하는 말일 것 같은데요." "아마 어떤 사람이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그 궤짝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전혀 없다는 말이오?" "제가 알기로는, 그런 궤짝은 보통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것들이라고 해 요. 대단히 크며 겉에는 놋쇠 장식이 많이 붙어 있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놓으면 아주 멋있는 장식품이 될 수도 있고요. 제 언니가 경매장에서 그 궤짝을 하나 사온 적이 있었어요. 언니는 그 속에 집에서 쓰는 제품들 을 넣어두었는데, 정말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더군요." "당신 언니라면 틀림없이 집안의 가구들을 전부 다 잘 손질해 두었을 거 요." 정중하게 몸을 앞으로 굽히면서 포와로가 말했다. 요즘의 하인들은 정말 팔꿈치 기름(힘들고 끈기있게 해야하는 일을 뜻함) 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레몬 양은 탄식조로 중얼거 렸다. 포와로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그 이상한 '팔꿈치 기름'이란 말의 속 뜻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려 거기에 실려 있는 이름들을 읽어보기 시작 했다. 리치 소령, 클레이턴 부부, 맥라렌 중령, 스펜스 부부. 이런 이름들은 그에게 있어서 그저 단순한 이름일 뿐이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이름들은 모두 증오나 사랑,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한 편의 드라마인 이번 사건에 있어서 에르큘 포와로는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았 다. 그런데도 그는 그 드라마에서 역할 하나를 맡고 싶어하는 것이다! 저녁 파티에 참석한 여섯 명의 사람들, 벽 옆에 커다란 스페인 궤짝이 놓여 있는 방안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 중 다섯 사람은 혹은 얘기도 하고 혹은 뷔페 식 으로 차려진 저녁도 먹으며,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춤도 추 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그 여섯 번째의 인물은 스페인 궤짝 속에서 죽어 있었다...... 아, 포와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친구 헤이스팅스라면 이번 사건을 얼 마나 즐거워했을까! 로맨틱한 상상력의 날개를 퍼덕이며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를 해댔을 것인가! 오, 나의 친구 헤이스팅스여, 오늘 이 순간에 자네가 이곳에 있어 주었더라면......대신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레몬 양을 쳐다보았다. 레몬 양은 포와로가 지금 편지 를 구술시킬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으면서도 타자기의 덮개를 벗겨냈다. 그리고는 지체된 작업을 시작할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가 들어 있었던 그 끔찍한 스페인 궤짝에 대한 얘기도 그녀에게는 조금 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이다. 포와로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사진으로 나와 있는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 다. 신문에 실린 사진이 변변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긴 했지만, 이번 사진 은 그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사진이었다--아니, 그런데 이 얼굴은! 피해자 의 아내, 클레이턴 부인...... 그는 레몬 양 앞으로 그 신문을 불쑥 내밀었다. "이걸 한 번 봐요." 그가 말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봐요." 레몬 양을 무표정하게 그의 명령에 따라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를 보고 뭐 생각나는 일이 없소, 레몬 양? 그 사람이 클레이턴 부 인이오." 레몬 양은 신문을 받아들고 그 사진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우리가 크로이든 히스에서 살 때 거래하던 은행장의 부인과 약 간 닮았군요." "재미있단 말야." 포와로가 말했다. "당신이 거래하던 은행의 은행장 부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겠 소?" "글쎄요. 그렇지만 사실 별로 유쾌한 얘기는 아니어서 말이에요, 포와로 씨."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계속해 봐요."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었지요--애덤스 부인과 그 젊은 예술가에 대해서 말예요. 그런 와중에서 애덤스 씨가 그만 권총으로 자살을 해버렸답니다. 하지만 애덤스 부인이 그 젊은 예술가와 결혼하려 하지 않자 그 예술가는 실망해서 독약 같은 것을 먹어버렸지요--하지만 목숨만은 간신히 건졌답 니다. 결국 애덤스 부인은 어떤 젊은 사무변호사와 결혼을 해버렸어요. 그 뒤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을 테지만 그때쯤 해서 우리가 크로이든 히 스를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은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답니 다." 에르큘 포와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미인이었소?" "글쎄요--사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미인과는 조금 틀리지만--그녀에겐 어떤 매력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 그런데 그런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현대의 사이런(아름다운 목소리로 선원을 유혹하여 난파시킨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녀)이라도 된다는 얘긴가! 아니면 트로이의 헬렌이나 클레오파트 라라도 된다는 얘긴가--?" 레몬 양은 자기 타자기에 종이를 힘차게 끼워넣었다. "사실은 말이에요, 포와로 씨. 전 그 뒤로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너무 바보스러운 짓들이라 생각해 볼 가치도 없으니까 말 이에요. 만일 사람들이 자기들 일에만 열중하고 그런 일들은 생각지도 않 는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말예요." 이렇게 인간의 본질적인 허약함과 열정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뒤에 레몬 양은 타자기의 키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만을 조급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당신의 견해라는 말이로군." 포와로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바라는 것은 내가 당신이 맡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 었으면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레몬 양, 당신이 할 일은 단지 내 편지를 받아쓰고 서류를 분류, 정리해 두고, 그 밖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이 라든지 하는 것만이 아니오--물론 이 모든 일들을 당신은 아주 훌륭히 해 내고 있지. 하지만 난 말이오, 서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도 다루고 있소. 따라서 난 그것도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다는 게요." "알겠습니다. 포와로 씨." 레몬 양이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죠?" "이번 사건은 아주 흥미로워요. 그래서 말인데, 조간신문이란 신문은 다 뒤 져서 이번 사건에 관한 뉴스를 찾아 정리해 주고, 석간에 실린 새로운 뉴 스들도 더불어 검토해 주면 고맙겠소--그리고 나한테 정확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잘 알겠습니다, 포와로 씨." 포와로는 자기 거실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슬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정말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로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헤이스팅스를 보내고 난 뒤 그 대신 레몬 양을 맞이 하게 되었다니 말야. 정말 이처럼 대조적인 일이 어디있겠나? '나의 친구 헤이스팅스'--그였다면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해 계속 떠들어대며 그 사건에 대해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전부 복음서의 진리라도 되는 양 믿으면서 이 모든 사건에 가장 로맨틱한 해석 을 덧붙였을 거야. 그런데 그 가엾은 레몬 양은 내가 자기한테 시킨 일을 전혀 달가워하질 않는단 말야." -2- 레몬 양은 잠시 뒤 타이프를 친 종이를 한 장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났다. "포와로 씨, 원하시던 대로 정보를 모아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그대 로 믿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저 자신도 의문스러운데요. 신문들이란 때로 자기들이 좋을 대로 사실을 오도(誤導)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여기에 적혀진 사실들만 해도 정확한 사실이 60퍼센트 이상이 된다는 보장 은 저도 못하겠는걸요." "그럼 이건 아주 조심스런 보고서겠는걸."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고맙소, 레몬 양. 수고해 주어서 말이오." 그 사건의 진상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사실은 명명백백한 것이었다. 유복한 독신자인 찰스 리치 소령은 그의 아파트로 친구 몇 명을 초대하여 이브닝 파티를 열었다. 그 친구들이란 클레이턴 부부와 스펜스 부부, 그리고 맥라랜 중령이었다. 맥라렌 중령은 리치와 클레이턴 부부와는 아주 오랜 춘 구 사이였으나, 젊은 부부인 스펜스 부부는 아주 최근에 사귀게 된 사람들 이었다. 아놀드 클레인턴은 재무성에 근무하고 있었고 제레미 스펜스는 하 급공무원이었다. 리치 소령은 48세, 아놀드 클레이턴은 55세, 맥라렌 중령은 46세, 제레미 스펜스는 37세였다. 클레이턴 부인은 '남편보다 몇 살 아래'라 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파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파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클레이턴 씨가 급한 용무 때문에 스 코틀랜드로 가야 할 일이 생겨 8시 15분발 기차로 킹스 크로스 역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파티는 그런 종류의 다른 파티들과 별반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맘껏 즐기는 듯했다. 특별히 큰 소란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모두들 지나치게 술에 취한 그런 파티도 아니었다. 그 파티는 11시 45분에 끝났다. 네 명의 손님들은 다 함께 그 집을 나와 택시를 같이 탔다. 제일 먼저 맥라렌 중령이 자신의 클럽에서 내렸고, 그 다음 스펜스 부부가 마거리타 클레이턴을 슬론 가(街)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카디건 가든스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첼시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향했다. 그 끔찍한 일은 이튿날 아침 리치 소령의 하인인 윌리엄 버제스에 의해 발 견되었다. 그는 그 집에서 살지는 않았다. 그는 아침 일찍 그 집에 출근해서 리치 소령이 아침 차를 들기 전에 거실을 깨끗이 청소해 두려고 했다. 버제 스가 스페인 궤짝 밑에 깔려 있는 밝은 색깔의 융단에 커다란 얼룩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한참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얼룩이 그 궤짝 에서 스며나온 것처럼 보여서 하인은 즉시 궤짝의 뚜껑을 들어올리고 그 안 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에 칼이 찔려 죽어 있는 클레이턴 씨 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해 버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버제스는 거리로 뒤쳐나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경찰관을 불러 왔다. 이상이 이번 사건의 대강의 줄거리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과 같았다. 경찰은 곧바로 '완전히 지쳐 있는' 클레이턴 부인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날 저녁 6시가 조 금 지나서였다. 그는 아주 당황해 하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 자기가 갖 고 있는 재산과 관련된 급한 일이 생겨 스코틀랜드로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아내한테는 혼자서라도 그 파티에 참석하도록 당부했다는 것이 다. 그런 다음 클레이턴 씨는 자기 집과 맥라렌 중령의 클럽에 들러 맥라렌 중령과 술을 마시면서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킹스 크로스 역으로 가는 길에 리치 소령한테 들러 사정을 설명할 시간은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리 그에게로 전화를 걸어두려고 했 지만 아마도 전화가 고장난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윌리엄 버제스의 증언에 다르면, 클레이턴 씨는 7시 55분경에 아파트에 나 타났다. 리치 소령은 그때 집에 없었으나 곧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므로 버제스는 클레이턴 씨에게 안으로 들어와 기다리도록 권했다. 그러자 클레 이턴은 자기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 메모를 해두겠다고 말했 다. 자기는 킹스 크로스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참석을 못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하인은 그를 거실로 안내해 준 뒤 자신은 파 티에 내놓을 카나페(얇게 썬 토스트에 치즈 따위를 얹은 전채 요리)를 마련 하고 있던 부엌으로 되돌아갔다. 그 하인은 주인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한 10분쯤 뒤에 리치 소령이 부엌을 들여다보더니 버제스에게 급 히 가서 스펜스 부인이 즐겨 피우는 터키제 담배를 사오라고 시켰다. 버제 스는 명령대로 담배를 사와서 거실에 있는 그의 주인에게 그 담배를 갖다주 었다. 그곳에 클레이턴 씨가 없었으므로 그는 클레이턴 씨가 벌써 기차를 타러 갔나 보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버렸다. 리치 소령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클레이턴 씨 는 집에 없었으며, 자신은 그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한테 남겨둔 메모도 없었으며, 자신이 클레이턴 씨가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클레이턴 부인과 다 른 손님들이 도착하고 나서였다는 것이다. 석간신문에는 두 가지 기사가 추가로 실려 있었다. 그 첫 번째 기사는 '총 격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던' 클레이턴 부인이 카디건 가든스에 있는 자기 아파트를 나와 친구들 집에서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기사는 마감 뒤에 입수된 긴급기사였다. 그것은 찰스 리치 소령이 아놀드 클레이턴의 살인범으로 기소되어 구속되었다는 기사였다. "물론--" 레몬 양을 올려다보면서 포와로가 말했다. "리치 소령을 체포하는 것은 예상했었던 일이지. 하지만 정말 굉장한 사건 이야.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란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소, 레몬 양?" "그런 건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닌가요, 포와로 씨.'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 레몬 양이 대답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지!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으니까. 꼭은 아니더라 도 거의 매일처럼 일어나고 있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일들은 쉽게 납득이 갈 만한 것들이라오--비록 슬퍼할 일이긴 하지만." "정말 아주 기분 나쁜 사건이지 뭐예요." "칼에 찔려 살해된 채 스페인 궤짝 속에 쳐넣어진다는 것은 피해자로서도 분명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테지--정말 그랬을 게요. 하지만 내가 이것을 놀라운 사건이라고 한 것은 리치 소령의 놀라운 행동을 두고 한 말이오." 얼굴에 희미하게 혐오스런 표정을 지으며 레몬 양이 말했다. "리치 소령과 클레이턴 부인이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 돌고 있기는 해요...... 하지만 그건 추측에 지나지 않는 일일 뿐 확인된 사 실은 아닙니다. 그래서 보고서에는 올리지 않았지요." "그건 당신이 아주 정화가게 보았소. 하지만 눈에 확 들어올 만한 추리가 있을 법도 한데. 당신이 보고할 것은 이것이 전부 다요?" 레몬 양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며, 새삼스레 그의 친 구 헤이스팅스의 풍부하고 화려한 상상력을 아쉬워했다. 레몬 양과 이번 사 건에 대해 의논한다는 것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노릇이 었다. "잠시 이 리치 소령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는 클레이턴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어--이것까진 좋아요..... 그 사람은 그녀의 남편을 해치우고 싶어했지--이 사실 역시 그렇다고 인정해 보고. 하지만 만일 클레이턴 부 인도 그 사람을 사랑해서 두 사람이 은밀히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면 그렇 게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었을까? 어쩌면 클레이턴 씨가 아내에게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고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오. 리치 소령, 그는 퇴역군인이지.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군 인들은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못 된다고 말들 합디다. 하지만 어쨌든 이 리치 소령이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라고 보시 오?" 레몬 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을 단순히 수사학(修辭學) 적인 질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자--" 포와로가 다시 질문을 했다. "당신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레몬 양은 번쩍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렇소--당신 말이오!" 레몬 양은 뜻하지 않게 맡게 된 무거운 부담에 마음을 다지게 먹었다. 그 녀는 특별히 부탁받지 않는 한 절대로 지적(知的)인 추리 같은 건 하지 않 는다. 그녀에게 그럴 여가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녀의 마음은 온통 더할 나 위 없이 완벽한 서류분류방식에 대한 생각으로 뒤덮이고는 했다. 그녀에게 는 그것이 유일한 정신적인 놀이였던 것이다. "글쎄요, 저--" 그녀는 입을 열자마자 곧 말이 막혀 버렸다. "단지 일어난 사실만 말해 봐요--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날 저녁에 있었으리 라고 생각되는 일 말이오. 클레이턴 씨가 거실에서 메모를 적고 있을 때 리치 소령이 돌아왔소--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소?" "그는 클레이턴 씨가 그곳에 있는 걸 보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그 두 사람은 언쟁을 벌였을 것 같아요. 그 와중에 리치 소령이 그를 칼로 찌릅 니다. 그런 다음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자 그는--그는 궤짝 속에다 그 시체를 집어넣어 버린 거지요. 그리고 난 뒤에 제 생각으 로는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겠지요." "맞았소, 맞았어. 손님들이 도착했소! 시체는 궤짝 안에 있었고, 밤이 깊어 졌소, 손님들은 다 돌아갔지. 그리고--" "물론 그리고 난 뒤 리치 소령은 잠자리에 들었겠지요. 그리고--아!" "아하--" 포와로가 말했다. "이제 알겠소?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그 시체를 궤짝 속에 숨겨두었소. 그리고 나서--당신 하인이 다음날 아침 그 범죄를 알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평화롭게 잠자리 에 들었소." "전 그 하인이 궤짝 속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상자 아래에 깔려 있는 융단에 흥건히 피가 고여 있는데도 말이오?:" "리치 소령은 피가 그 융단에 배어나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나 보죠, 뭐." "그가 그것을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부주의했다는 얘기가 아니 오?" "아마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레몬 양이 말했다. 포와로는 절망적으로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레몬 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3- 엄밀히 말해서 스페인 궤짝 사건은 포와로가 맡고 있는 일과는 아무 관련 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어느 석유 재벌회사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었 다. 즉, 그 회사의 고급간부 한 사람이 어떤 의심스러운 거래에 손을 대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극비에 붙여진 중대한 사건으로 보 수 또한 아주 좋았다. 또한 포와로의 주의력을 굉장히 필요로 하는 사건으 로서 육체적인 활동이 거의 필요없다는 점도 포와로에게는 아주 이로운 점 이었다. 이 사건은 복잡 미묘하면서도 피라고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주 고도로 지능적인 범죄였던 것이다. 한편 스페인 궤짝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감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것은 포 와로가 헤이스팅스에게 자칫하면 과대평가할 우려가 있다고 항상 주의를 주 었던 두 가지 특성이었다--그리고 헤이스팅스에게는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 었다. 포와로도 그 점에 대해서만은 그의 친구 헤이스팅스에게 엄하게 대했 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신이 과거 그의 친구가 한 그대로 아름다운 여인 과 치정, 살인, 질투, 증오, 그 밖에 살인사건의 동기가 될 수 있는 다른 낭 만적인 원인들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었 다. 리치 소령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의 하인 버제스는 어떤 인물이며, 마 거리타 클레이턴은 어떤 여자인지 그는 알고 싶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생 각해 보기만 하면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故) 아놀드 클레이 턴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왜냐하면 피해자의 성격은 살인사건에 있어서 가 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진실한 친구인 맥라렌 중령은 누 구며, 최근에 사귀었다는 스펜스 부부는 어떤 사람들인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호기심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지 정확히 모르 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늦게까지 그는 이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이 사건이 그토록이나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즉, 관련된 여러 사실로 미루어 보아--이번 사건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이 사 건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같은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점으로부터 시작해 보면, 우선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 아마도 여자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화가 난 나 머지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 그렇다,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만 일 남편이 아내의 정부(情夫)를 살해했다고 한다면 더욱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아내의 정부가 남편을 살해했다. 칼(?)로 그를 찔러 죽인 것이다--어쨌거나 그 부근에는 없을 것 같은 흉기로 말이다. 혹시 리치 소 령의 어머니가 이탈리아인은 아니었을까? 어딘가에--분명--흉기로 단검을 선택한 이유가 있긴 할 것이다. 어쨌든 단검을 흉기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몇몇 신문은 그것을 이탈리아의 단도라고 일컫고 있지만 말 이다!) 손 가까이에 그 단도가 놓여 있어서 살인범이 그 단도를 사용했다. 시체는 상자 속에 숨겨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 그렇게 하는 것은 불 가피했을 것이다. 살인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인이 어느 순간에 들어 올지 모를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명의 손님들이 곧 들이닥치게 될 테니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손님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하인도 벌써 돌아갔다--그리고 --리치 소령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리치 소 령을 만나서 그가 그런 식으로 행동할 만한 사람인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두려움과, 저녁 내내 평소때와 다름없이 행동해 야 한다는 그 긴 긴장감을 이겨내려고 그는 수면제나 진정제 따위를 먹고 아주 깊은 잠에 빠져 평소보다도 훨씬 늦잠을 자버린 것은 아닐까? 물론 그 럴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면 심리학자들의 표현처럼 리치 소령은 잠재적인 죄의식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그 범죄가 발각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 닐지? 그런 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리치 소령을 만나봐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모든 일은-- 전화벨이 울렸다. 포와로는 잠시 동안 벨이 울리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레몬 양은 몇 시간 전에 자신한테 사인할 편지를 몇 통 가져다준 뒤 퇴근해 버렸고, 조지는 외출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포와로 씨 계세요?" "제가 포와로인데요." "오, 정말 잘됐군요." 포와로는 약간 흥분하고 있는 듯한 매혹적인 여성의 목소리에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저는 애비 채터턴이에요." "오, 채터턴 부인.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요?" "가능한 한 빨리 지금 우리 집에서 열고 있는 칵테일 파티에 와주셨으면 해서요. 그냥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말이 아니고요--사실은 전혀 다른 이 유가 있어서랍니다. 당신이 필요해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요. 제발, 제발, 제발 저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세요! 오실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진 말아 주세요." 포와로는 그런 말을 할 심산은 아니었다. 채터턴 경은 이 나라의 귀족이라 는 것과, 때때로 상원에서 아주 듣기 지겨운 연설을 한다는 것을 빼면 별로 특이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채터턴 부인은 포와로가 상류사회라 고 부르는 사교계에서 빛나는 보석 중의 보석이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은 무엇이건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똑똑하면서도 아름다움과 독창성 을 지니고 있었으며, 게다가 로켓을 달에 쏘아올릴 만한 활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지금 당장 와주세요! 당신의 그 멋진 콧수염만 한 번 매 만져 주면 되지 다른 준비는 필요없잖아요."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포와로는 우 선 아주 꼼꼼하게 몸단장을 했다. 그리고 콧수염을 한 번 살짝 비틀어준 다 음 그는 출발했다. 셰리턴 가(街)에 있는 채터턴 부인의 멋진 저택의 문은 약간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 같은 소리들이 들려왔 다. 두 사람의 대사와 한 사람의 국제적인 럭비 선수, 그리고 전도여행중인 미국인 전도사한테 둘러싸여 있던 채터턴 부인은 교묘한 솜씨로 재빨리 그 들을 쫓아버린 뒤 포와로의 곁으로 다가왔다. "포와로 씨, 이렇게 와주시다니 얼마나 기뿐지 모르겠군요! 오, 저런, 그런 맛없는 마티니는 치워버리세요. 당신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것을 마련해 놓았으니까요--모로코의 족장들이 마시는 시럽의 일종이죠. 2층에 있는 제 방에 있답니다." 그녀가 앞장서서 위층으로 올라가자 포와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전 일부러 이번 파티를 연기시키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 집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절대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하인들한테도 입만 꼭 다물고 있어 준 다면 많은 보너스를 주겠노라고 약속해 두었죠. 어떤 사람이건 신문기자 들이 자기 집을 드나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 불쌍한 애는 벌써 그런 시달림을 너무 많이 받아왔답니다." 채터턴 부인은 2층 층계참에서 한 번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 위층으로 계 속 올라갔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약간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채 에르큘 포와로는 그녀 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채터턴 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난간 너머로 아래쪽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문 을 확 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분을 모시고 왔어, 마거리타! 마침내 그분을 데리고 왔단다! 지금 여기 에 있어!" 그녀는 승리에 찬 모습으로 포와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다음 재빨리 두 사람을 서로 소개시켰다. "이쪽은 마거리타 클레이턴. 저하고는 정말 아주아주 친한 친구죠. 저 애를 도와주실 거죠, 그렇죠? 마거리타, 이분이 그 훌륭한 에르큘 포와로 씨야. 이분은 네가 원하는 걸 다 해주실 거야--그렇죠, 포와로 씨?" 그렇게 말한 뒤 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포와로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채터턴 부인은 미모를 앞세워 이유없이 무례 하게 행동해 오지는 않았다) 약간 경박하게, "저는 저 끔찍한 사람들한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답니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문밖으로 달려나가 층계를 내려갔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설사 채터턴 부인이 그녀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넓은, 아주 넓은 이마, 그 이마 양편으로 날 개처럼 돋아나 있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넓은 미간 양편에서 반짝이는 회색빛 눈동자. 그녀는 몸에 꽉 달라붙는 칙칙한 검은색의 하이네크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와 상아빛 피부를 더욱 돋보 이게 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하지 않 은 얼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즉, 때때로 고대 이탈리아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 느낄 수 있었던 기묘한 균형이 그녀의 얼굴에 잘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에게는 어떤 중세기적인 순수함이 있었다--그 어떤 관능 적인 여인들보다도 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는 이상한 순진함이라 고 포와로는 생각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린애들한테서나 느껴질 수 있는 솔직함이 들어 있었다. "애비 말로는 선생님이 저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더군요......" 진지한 눈초리로 그녀는 미심쩍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서는 조금도 무례한 구석을 엿볼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떤 솜씨좋은 의사가 자기의 새로운 환자를 상냥하지만 예리하게 살펴보는 눈초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부인--"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부인을 도와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순간 그녀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전 잘 모르겠군요." "부인, 제가 무슨 일을 해주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녀는 다소 당황한 듯했다. "전--선생님이 제가 누구인지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저는 부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부인의 남편 분이 살해당하셨 지요--칼에 찔려서 말입니다. 그리고 리치 소령이란 사람이 체포되어 살인 죄로 기소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리치 소령은 제 남편을 죽이지 않았어요." 포와로가 때를 놓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되물었다. "왜 그렇지요?"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저--저, 뭐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부인을 혼란스럽게 해드린 것 같군요--저는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가령 경찰이라든가--변호사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겠지요. '어째서 리치 소령은 아놀드 클레이턴을 죽여야만 했는가?' 하지만 저는 그 반대로 물 어보겠습니다. 부인, 어째서 부인은 리치 소령이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계신 겁니까?" "왜냐하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왜냐하면 전 리치 소령을 너무도 잘 알고 있 기 때문이에요." "부인은 리치 소령을 아주 잘 알고 계신다 이 말씀이지요." 포와로는 억양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다시 한 번 따라했다.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그녀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어떤지는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이 여자는 아주 단순한 여자이든가 아니면 아주 교활한 여자가 틀림없다고 그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마거리타 클레 이턴이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는 들었다. "어느 정도였냐고요?" 그녀는 의아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5년--아니, 6년 가까이나 되는걸요." "제 말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인, 부인은 제가 부인께 무례한 질문 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셔야만 합니다. 물론 부인은 지금 진실을 말씀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때로는 여자들에게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절대 있기도 합니다. 여자들도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 거짓말은 좋은 무기가 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부인, 여자들이 절대 진 실을 얘기해 주어야 할 사람이 세상에는 세 사람이 있지요. 고해신부와 미용사, 그리고 사립탐정이 바로 그 세 사람입니다--부인이 그 사람을 믿 고 계신다면 말이지요. 부인, 저를 믿으십니까?" 마거리타 클레이턴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전 선생님을 믿어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또 그래야만 하겠죠."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주기를 바라고 계십니까?--남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는 일인가요?" "그런 거 같아요--아니, 그래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사실은 저한테 리치 소령의 혐의를 벗겨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녀는 재빨리--그러면서도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그것뿐입니까?"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불필요한 질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거리타 클레이턴 은 한 번에 한 가지 사실밖에 모르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했다.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해야겠군요. 부인과 리치 소령, 두 분은 서로 사랑하 는 사이였습니까?" "선생님 말뜻은 저희가 정사(情事)라도 벌였다는 얘긴가요? 그렇다면 아니 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요." "그럼 부인도--그 사람을 사랑하셨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까?" "아뇨, 분명히 그래요--지금은 말예요." "음! 그렇다면 부인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지는 않았어요." "정말 부인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하시는군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란 이런 경우 지금 자기 기분이 어떤가 하는 것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 는 경향이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결혼한 지는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11년이에요." "남편에 대해 약간 얘기해 주시겠습니까?--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입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려운 질문이로군요. 사실은 저도 아놀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답니 다. 그이는 아주 조용하고--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그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알아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머리 도 좋았지요--사람들은 그이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들 했답니다--제 말은 그이가 일처리를 하는 데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이는--뭐라고 말 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는데요--그이는 변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 람이었어요......" "남편은 부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오, 그럼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이가 그렇게까지 는 마음에 두지 않았을--"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다른 남자들 때문에 말입니까? 부인이 얘기하려던 것이 그것이지요? 남편 께서는 질투가 심한 분이었습니까?"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좀더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말을 하지 않기도 했으니까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행한 사건--그 사건은 부인의 주변에서 일어난 겁니다. 그런 일을 겪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까?" "불행한 사건이라고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자 곧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선생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은--권총으로 자살한 그 가엾은 청년에 대한 얘기인가요?" "그렇습니다." 포와로가 말했다.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전 그저 그를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죠--그는 정말 수줍음도 많고--또 외로워 보였어요. 제가 보기에 그 청년은 틀림없이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청년말고도 이탈리아 인이 두 사람 더 있었지요--그 두 사람은 결투를 했 답니다--정말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아무튼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정 말 다행스러웠죠...... 그리고 정직하게 말해서 전 그 사람들한테 아무런 관 심도 없었답니다! 그런 눈치를 보인 적도 한 번도 없었고요." "그랬군요. 부인은 단지--그곳에 계셨을 뿐이군요! 그리고 부인이 계신 곳 에서는--반드시 비극이 벌어졌고요! 여지껏 살아오면서 전 옛날에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지요. 남자들이 그렇게 열을 올린 것도 바로 부인이 그들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리치 소령에게만은 부인도 관 심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우리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겠지요."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 명백한 사실들로 눈을 돌려봅 시다. 저는 신문에 보도된 사실들밖에 아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보도된 사실대로라면 단 두 사람만이 부인의 남편을 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그 두 사람만이 남편을 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리치 소령과 리치 소령의 하인이지요." 그러자 그녀가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전 찰스가 그 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하인이 한 짓이 분명하겠군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녀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부인은 그것이 미심쩍은 것이지요?" "단지 뭐라고 할까--조금 이해가 안된다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요. 남편은 분명히 그 아파트로 찾아 갔습니다. 그의 시체가 그곳에서 발견되었으니까요. 만일 그 하인의 이야 기가 사실이라면 리치 소령이 남편을 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인 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면? 그렇다면 그 하인이 남편을 살해한 뒤 자기 부인이 돌아오기 전에 그 시체를 궤짝 속에 숨긴 것이 됩니다. 그의 입장 으로 볼 때 시체를 숨기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었겠지요. 그는 단지 이튿날 아침 핏자국을 알아보고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었을 테 니까요. 혐의는 곧바로 리치 소령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어째서 그는 아놀드를 죽이고 싶어했을까요?" "오, 어째서냐고요? 글쎄요, 그 동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그렇지 않았다 면 경찰이 벌써 추궁해 보았을 테니까요. 남편이 그 하인의 부정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어서 리치 소령한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혹시 남편이 그 버제스란 남자에 대한 얘기를 부인한테 한 적은 없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남편이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만일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요. 아놀드는 다른 사람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법이 없었으니까요. 선생님 께도 얘기드린 것처럼 그이는 내성적인 사람이었죠. 그이는--그이는--결 코 수다스러운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마음속의 생각을 남한테 털어놓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좋 습니다. 그럼, 부인은 버제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주목할 만큼 두드러진 사람은 아니에요. 꽤 충실한 하인 이라고는 할 수 있죠. 열심히 일하기는 하지만 별로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서른일고여덟 살 정도 되었을 거예요. 전쟁 동안에는 육군에서 장교의 당번병으로 일했다던데, 그렇다고 정식 군인은 아니었던가 봐요." "그가 리치 소령 집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어요. 한 1년 반쯤 되었을 거예요." "혹시 남편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는 못 하셨습니까?" "우리는 그곳에 그렇게 자주 가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전혀 이상한 구석 이 없었어요." "그럼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시지요. 부인이 그곳에 도착한 시간 은 몇 시였습니까?" "파티가 8시 반에 열릴 예정이어서 8시 15분에 도착했죠." "그러면 그 파티는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요?" "글쎄요, 음료수와 뷔페식 저녁식사가 나오는 파티였죠--언제나 아주 맛이 좋았어요. 푸아그라(간(肝)으로 만든 요리)와 핫 토스트가 나왔죠. 훈제 연 어도 나왔고요. 때로는 따뜻한 밥도 나왔답니다--찰스는 극동 아시아에 있을 때 특별요리를 배워두었으니까요--하지만 그건 겨울철에 훨씬 더 자 주 나오지요. 그런 뒤에 우리는 음악을 틀고는 해요--찰스는 아주 좋은 스테레오 축음기를 갖고 있었거든요. 제 남편과 조크 맥라렌은 둘 다 클 래식 음악을 아주 좋아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댄스 음악도 틀지요--스펜 스씨 부부는 춤추는 데 아주 열심들이었죠. 대체로 그런 일들 뿐이었어요 --정말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즐기는 그런 파티였답니다. 찰스는 아주 훌륭하게 주인 노릇을 했고요." "그럼, 그날 밤의 파티도--여느 때의 파티와 같았다는 말씀이지요? 뭔가 이상한 것--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요?" "어색하다고요?" 그녀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말인데요--아뇨, 하지만 사라져 버렸어요. 뭔가 가 있긴 있었는데......" 그녀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틀렸어요. 선생님의 질문에는, 그날 밤 평소와 달랐던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군요. 우리는 모두들 즐거워했죠. 모두들 여 유있고 행복해 보였답니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런데 내내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포와로는 재빨리 손으로 그녀를 토닥거렸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편이 스코틀랜드로 가봐야 했다던 그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부인은 그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별로 많이 알고 있지 못해요. 남편은 가지고 있는 땅을 약간 팔려고 내놓 았는데, 그 와중에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겼죠. 매매가 다 이루어졌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생각지도 못한 장애가 나타난 거죠." "남편은 부인께 정확히 뭐라고 얘기하시던가요?" "그이는 손에 전보를 한 장 들고 들어왔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렇게 말 했던 것 같아요 '정말 귀찮게 되었지 뭐야. 내가 밤차로 에딘버러로 가서 내일 아침 우선 존스턴을 만나봐야겠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그리고 나서 그이가 말했죠. '조크에게 전화를 해서 당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얘기해 둘까?' 그래서 제가 말했죠. '그런 소리 마 세요. 그냥 택시를 타고 가면 되죠, 뭐.' 그러자 그이는 돌아올 때에는 조 크나 스펜스 씨 부부가 집까지 데려다 줄 거라고 하더군요. 제가 뭐 준비 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가방 속에 세면도구 같은 것은 들어 있으니 까 괜찮아. 기차를 타기 전에 클럽에 들러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가겠어.' 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난 뒤 그이는 나갔어요. 그리고--그리고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그이를 본 것이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약간 떨리고 있었다. 포와로는 아주 냉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남편은 부인에게 그 전보를 보여주셨습니까?" "아뇨." "유감스런 일이로군요." "어째서 그렇죠?" 그는 그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활발하게 이렇게 말 했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해 봅시다. 리치 소령의 변호사들은 누구지요?" 그녀가 그에게 대답하자 그는 그 주소를 적었다 "부인이 그 사람들한테 편지를 한 장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리치 소 령과 만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그 사람은--일주일간 구속이 연기되었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것이 절차니까요. 참, 그리고 맥라렌 중령과 부인의 친구분인 스펜스 부부에게도 편지를 한 장씩 써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분 들 모두를 꼭 만나보고 싶으니까요. 그러려면 그분들이 저를 문전박대하 지 않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가 말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저도 그들에게서 느낀 인상을 적어두겠지만 또 부인의 얘기도 듣고 싶군요--맥라렌 중령과 스펜스 부부에 대해서 말입니 다." "조크는 우리들의 아주 오랜 친구 중 한 사람이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 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보기에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실하고--항상 변함이 없고--항상 신뢰할 만한 그런 사람이랍니 다. 쾌활하고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굳건히 서 있는 탑과도 같은 사 람이라고나 할까요--아무튼 아놀드와 저는 그에게 많은 것들을 의논해 왔 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역시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겠지요?" 포와로의 눈빛이 약간 반짝였다. "오, 그래요." 마거리타가 즐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절 사랑해 왔답니다--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슨 습관 처럼 되어버렸지요." "그럼, 스펜스 부부는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은 재미있는 분들이죠--그리고 굉장히 좋은 친구이기도 하고요. 린다 스펜스는 정말 머리가 아주 영리한 여자랍니다. 아놀드는 그녀하고 얘기하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게다가 그녀는 매력적이니까요." "그럼, 두 분은 친구 사이였습니까?" "그녀와 저 말씀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그랬죠. 그렇지만 제가 정말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너무 심술궂거든요." "그럼, 그녀의 남편은 어떻습니까?" "오, 제레미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죠. 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그림에 관해서도 상당히 조예가 깊더군요. 그 사람과 저는 가끔 그림 전 람회에도 같이 가지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이제는 제 눈으로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는 그녀와 악수를 했다. "부인, 부디 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 제가 그걸 후회하겠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포와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야, 나 역시--나 역시 잘 모르겠거든." 층계를 내려오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칵테일 파티는 아직 한창 진행 되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는 사람들을 피해 몰래 거리로 빠져나왔다. "아냐."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단 말야."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마거리타 클레이턴에 대한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 어린애 같은 순진함, 그리고 그 천진난만함--그러나 단 지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그 밑에 감추고 있는 것일까? 중 세에는 그런 여자들이 있었다--역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여자들 말이 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어리 스튜어트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 날 밤 필즈 교회에서 진행된 그 음모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전혀 결백했었던 것일까? 그 주모자들은 그녀한테 아무 얘기도 안해 준 것일까? 그녀 역시,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해 놓고는 그것을 믿으 라고 얘기하는 그런 어린애들처럼 단순한 여자 중 한 사람일 뿐인가? 그는 마거리타 클레이턴에게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완전히 믿고 싶은 마음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이란 비록 자기 자신은 결백하다 해도 범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여자들이란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의지와 뜻에 따 라서는 그들 자신이 범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손은 칼을 움켜쥘 그런 손은 아닐 것이다-- 마거리타 클레이턴의 경우에는--아냐--그것도 잘 알 수가 없었다! -4- 에르큘 포와로는 리치 소령의 변호사들에게서 별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얻어내지 못했다. 물론 그는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들은 비록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클레이턴 부인이 자기들의 의뢰인 을 위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의뢰인을 위해서는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포와로가 그들을 방문한 것은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죄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면 내무성이나 검찰국쪽에 얼마든지 연줄이 있는 터였다. 클레이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밀러 경감은 포와로의 마음에 쏙 드는 인 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사건을 단지 경멸할 뿐, 이번 사건에 대해 적대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늙다리 노인네한테 소비할 시간은 없어." 포와로를 만나기 전에 그는 형사주임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 하겠지."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해보실 작정이시라면 먼저 요술모자 같은 것이라도 사용해야 할 겁니다, 포와로 씨."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치 이외에는 아무도 그 사람을 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인을 뺀다면 그렇지요." "오, 그 하인 말인가요! 물론 가능성이라는 측면만 갖고 따진다면 그럴 수 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밖에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어찌되었 든 동기가 없으니까요." "틀림없이 그렇다고 확신할 수만은 없을 텐데요. 동기란 것은 사실 아주 괴 상한 것이니 말이오." "아무튼 그 사람은 우선 클레이턴과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요. 과거의 경력도 아주 깨끗하고요. 게다가 정신상태도 완전히 정상이지요.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나는 리치가 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싶소." "그 부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겠지요, 물론?" 밀러 경감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 부인이 당신을 놀려주려고 한 것 같군요. 아무튼 굉장한 여자지요? 이런 얘기가 있지요. 철저하게 '여자를 조사해라.' 만일 그 여자 한테 그럴 기회만 있었다면 자기 손으로 이번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 다." "그것은 그렇지 않아요!" "놀라는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옛날에 그런 여자를 한사람 알고 있었습니 다. 그 티없이 파란 눈을 깜짝도 하지 않고 남편을 두 사람이나 해치워 버렸지요. 그리고는 매번 비탄에 잠겨 있었답니다. 아마 승산이 반만 있었 더라도 배심원들도 그녀한테 무죄를 선고했을 겁니다--하지만 승산이 하 나도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경감, 논쟁은 집어치우는 게 좋겠소. 염치불구하고 내가 물어보려 는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몇 가지 믿을만한 이야기들에 관한 게요. 신 문에 보도되는 것이 뉴스임에는 틀림없지만--그렇다고 항상 진실이란 보 장은 없으니까요." "그야 신문사들도 재미를 봐야 할 테니까. 그런데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 까?" "우선 가능한 한 정확한 사망시간을 알고 싶소." "글쎄요, 그것은 그리 정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 시체 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방치되어 있었으니까요. 사망시간은 열세 시간에 서 열 시간 전 사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날 밤 7시에서 10시 사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칼은 피해자의 경정맥을 관통했습니다 --그러니 거의 즉사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흉기는?" "일종의 이탈리아식 단도였습니다--아주 작으면서도--면도칼처럼 날카롭 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요--결국에는 말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인내력의 문제일 뿐 이지요." "한참 다투던 와중에 무심코 그것을 집어들었을 가능성은 없겠구먼."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하인도 집안에서 싸움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하더군 요." "내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전보인데요." 포와로가 말했다. "아놀드 클레이턴을 스코틀랜드로 가게 만든 그 전보 말이오...... 그것은 진 짜 호출장이었습니까?" "아니오. 그쪽에는 아무런 지장이나 문제도 없었습니다. 토지매매에 대한 일 같은 것도 정상적으로 진행중이었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 전보를 쳤을까--그 전보라는 것이 실제로 오기 는 왔습디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 반드시 클레이턴 부인의 얘기를 믿어서가 아 니라, 클레이턴이 그 하인한테 스코틀랜드로 좀 와달라는 전보를 받았다 고 얘기했다더군요. 그리고 맥라렌 중령한테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요." "그가 맥라렌 중령을 만난 것은 몇 시쯤이었습니까?" "그들은 그--육해군--클럽에서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그때가 한 7시 15분경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클레이턴은 택시를 타고 리치의 아파트 로 가서 그곳에 8시 조금 전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난 뒤--" 밀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날 저녁 리치의 태도에 수상한 점이 없었는지 눈여겨본 사람은 혹시 없 습니까?" "오, 글쎄요, 당신도 사람들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일단 어떤 일 이 벌어졌다 싶으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많은 것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고 착각하기 마련이지요. 사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는데도 말입니다. 가령 스펜스 부인의 경우만 해도, 그녀는 리치가 그날 밤 내내 정신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고 하고 있지요. 무슨 말을 물어도 제 대로 대답을 못하더라나요. 마치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사람 같 았다고 하더군요. 하긴, 만일 그가 궤짝 속에 그 시체를 감춰둔 사람이라 면 그럴 법도 할 노릇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처치해 버릴 것인가 하고 고 민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는 왜 그것을 처치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말입니다. 아마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이튿날까지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었지요. 바로 그날 밤 시 체를 처치해 버릴 절호의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그날 밤 그 지역에는 야 간 순찰도 없었습니다. 그는 몰고 온 차를 돌려--차 트렁크에 그 시체를 실은 뒤--그것은 꽤 큰 트렁크이니까요--어디 교외 같은 데로 나가 시체 를 버리고 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요. 물론 그가 시체를 운반하다 사 람들한테 들킬 가능성도 있기는 했지만, 그 아파트는 거리 모퉁이에 있는 데다가 그 아파트 앞에는 충분히 차를 몰고도 들어갈 수 있는 뜰까지 있 었습니다. 그러니 새벽 3시쯤이었으면 시체를 처리할 기회쯤이야 얼마든 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행동은 어땠습니까? 시체를 처리할 생각은 않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어 이튿날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는, 그제 서야 잠에서 깨어보니 경찰이 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겁니 다." "그는 잠자리로 가서 마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처럼 잠을 푹 잤다 이거지 요?" "그것은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포와로 씨, 당신은 정말 그가 결 백하다고 믿고 계신 겁니까?" "내 자신이 직접 그 사람과 만나기 전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류시 켜 둘 수밖에 없겠소." "그 사람을 만나보시면 그가 결백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 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나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내가 그렇게 할 수 있 다고 호언장담할 생각도 없고 말이오. 하지만 내가 알아보고 싶은 점은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바보인가 하는 점입니다." -5- 포와로는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만나보기 전까지는 찰스 리치를 만나보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맥라렌 중령을 만나보기로 했다. 맥라렌은 키가 크고 얼굴빛이 거무스름하며 별로 말이 없는 남자였다. 생긴 것은 험악했지만 인상은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좀처럼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포와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거리타의 소개장을 만지작거리다가, 거의 마지못한 듯 맥라렌이 입을 열 었다. "글쎄,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당신에게 얘기해 주는 것이 마거리타의 소원이 라면 물론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렇지만 사실 이야기해 드릴 것이나 있 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모든 얘기를 다 들으셨을 테니 말이오. 하 지만 마거리타가 원하는 건 무슨 일이든--사실 난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항 상 죄다 해주었지요--그녀가 열여섯 살 때부터 말입니다. 그녀는 항상 그 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랬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 질문에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는 겁니다. 그 전에 우선 당신은 리치 소령이 정말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소. 만일 마거리타가 그가 결백하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면 굳 이 그녀한테야 그렇게 얘기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밖엔 생각되지 않아요.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그 친구가 범인인 것이 틀림없어 요." "그 사람과 클레이턴 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전혀 그렇지는 않았지요. 아놀드와 찰스는 제일 친한 친구였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사건이 더더욱 이상하다는 말이지만." "클레이턴 부인에 대한 리치 소령의 우정이라는 것은 아마도--" 맥라렌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흥! 그 허무맹랑한 얘기 말입니까? 신문들마다 은근히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써놓았더군요...... 사람을 갖고 놀아도 분수가 있지! 클레이턴 부인과 리치 가 친한 친구 사이인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것뿐이란 말입니다! 마거 리타는 원래 친구들이 많은 편이지요. 나 역시 그 친구들 중 한 명이고. 옛날부터 그래왔었죠. 그리고 그런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고요. 찰스와 마거리타도 바로 그런 사이였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두 사람 사이를 연인 사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말 이로군요?" "당연히 그렇소!" 맥라렌은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이렇게 내밷었다. "그 여우같은 스펜스의 마누라한테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여자 는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여댈 테니까." "그렇지만 클레이턴 씨는 자기 아내와 리치 소령의 사이를 의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소! 만일 그랬었다면 내가 알았을 테니까. 아놀드와 나는 정말 친한 사이였단 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그 사람을 제일 잘 알 고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지요. 아놀드는 아주 온순한 친구였어요. 하지만 머리 하나는 정말 좋았지요--아주 뛰어났단 말입니다. 이른바 1등급짜리 재정두뇌였지요. 아 시다시피 재무성에서도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지요." "그 친구는 책도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표도 수집했고요. 게다 가 음악을 무척 좋아했지요. 그렇지만 춤추는 일이라든지 외출하는 일 같 은 것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보기에는 결혼생활이 행복해 보이던가요?" 맥라렌 중령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그래요, 내가 보기에 그 들은 행복해 보였어요. 그 친구는 그 친구 특유의 조용한 방법으로 그녀를 사랑했었죠. 그리고 그녀 역시 그 친구를 좋아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헤어질 확률은 거의 없었지요. 만일 당신이 노리는 것이 그 것이라면 말입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닮은 점이 아주 많았다고는 얘기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한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정도 일 것이다. 포와로가 말했다. "그럼, 이제는 바로 그날 밤 일을 얘기해 주시지요. 클레이턴 씨는 당신과 클럽에서 식사를 했다던데요. 그와 어떤 얘기를 나누었습니까?" "그 친구는 나한테 자기는 스코틀랜드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무 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 같았었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그 때 식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샌드위치로 때우고 가볍 게 한잔했을 뿐이지. 그것도 그 친구만 그랬어요. 나는 그냥 술만 마셨고 요. 저녁은 그날 파티에서 먹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클레이턴 씨가 전보 얘기를 했습니까?" "그래요." "당신에게 그 전보를 실제로 보여주지는 않았죠?" "그렇소." "그럼, 그는 자기가 리치한테 들르겠다고 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 친구는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고 얘기했었 으니까.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마거리타나 자네가 잘 얘기해 주게.'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집까지 그녀를 데려다 주겠지?'라고 말입 니다. 그런 다음 그 친구는 클럽을 나갔지요.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 입니다." "그는 그 전보가 가짜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진짜가 아니라고요?" 맥라렌 중령은 깜짝 놀란 듯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거 참,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맥라렌 중령은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져든 듯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든 듯 갑자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요.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 친구를 스코틀랜드로 보내려 했을까요?" "확실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지요." 에르큘 포와로는 아직도 그 문제를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는 중령을 그 자 리에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났다. -6- 스펜스 부부은 첼시에 있는 문화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린다 스펜스는 아주 반갑게 포와로는 맞이했다. "저한테 얘기해 주시겠죠?" 그녀가 말했다. "마거리타에 대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거죠?" "그런 것은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부인." "정말 용케도 숨어버렸단 말야!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마거리타도 아주 빈틈 이 없다니까요. 그렇지만 재판이 시작되면 그녀도 틀림없이 증언을 해야 할 텐데요? 그녀도 그것만은 피하지 못할걸요." 포와로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대적인 스타일로 보자면(당 시에는 제대로 먹지 못한 고아원 아이들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 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그는 마음먹 었다. 그것은 평소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머리 주변에서 보풀보 풀 일어나 있는 예술적으로 흐트러진 머리 스타일, 관능적인 앵두빛으로 칠 한 입술을 빼고는 화장기가 보이지 않는 약간 지저분한 듯한 얼굴, 그를 쳐 다보고 있는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 그녀는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헐 렁한 크림색 스웨터와 몸에 꽉 붙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선생님이 맡은 역할은 뭔가요?" 스펜스 부인이 물었다. "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남자 친구를 구해내는 일이겠지요, 그렇죠?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일 뿐이죠." "그렇다면 부인은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로군요?" "물론이죠. 아니면 누가 또 있겠어요?" 그것이 바로 의문점이라고 포와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다른 질문을 하 면서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그 운명적인 날 밤에 리치 소령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평상시와 똑같았습 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았습니까?" 린다 스펜스는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에요, 그 사람은 평상시의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뭔가--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죠?" "글쎄요, 분명히, 마치 사람을 냉혹하게 칼로 죽이고 온 것 같은--" "하지만 그때는 그가 사람을 냉혹하게 칼로 살해했다는 사실을 부인은 모 르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요, 물론 모르고 있었죠." "그렇다면 그가 달라져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어떤 점 이 달라져 있었나요?" "글쎄요--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고나 할까요. 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다시 잘 생각해 보니까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았어요."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우리였어요. 짐과 저 말이에요. 그 뒤에 조크가 왔고요. 그리고 맨 나중에 마거리타가 도착했지요." "그럼 클레이턴 씨가 스코틀랜드로 갔다는 얘기를 제일 처음 들은 것은 언 제였습니까?" "마거리타가 도착하고 나서였죠. 그녀가 찰스한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아 놀드가 굉장히 미안해 했어요. 그이는 오늘밤 기차로 에딘버러로 급히 가 봐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찰스가, '아니, 거 참 섭섭하게 됐는 걸.'하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조크가, '이거 미안하게 됐구먼. 자네가 벌 써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하고 말했죠. 그런 다음 우리는 같이 술을 마셨 어요." "리치 소령은 그날 밤에 클레이턴 씨를 만났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 았습니까? 그가 역으로 가던 길에 들렀었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던가 요?" "그런 얘기, 저는 못 들었어요." "그 전보에 대해서는--" 포와로가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그것은 가짜 전보였으니까요. 에딘버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전보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로군요. 저도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럼 그 전보에 대해 뭐 생각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뻔한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 린다가 말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난 전보를 친 사람은 그 녀의 남편을 어디론가 쫓아버리려고 그런 것이라고요. 그렇게 되면 그날 밤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리치 소령과 클레이턴 부인이 그날 밤을 같이 지내기로 미리 계 획을 세워놓았었다는 얘깁니까?" "당신도 그런 소문을 들으셨나 보군요?" 린다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전보는 그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보냈다는 얘기군요?"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럼, 부인은 리치 소령과 클레이턴 부인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 겁니까?" "역시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클레이턴 씨는 그렇게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놀드는 약간 색다른 사람이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는 자기 감정을 속에 감추어만 두는 그런 사람이었죠. 저는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겉으로 드러낼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죠. 그래서 누구든지 그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람 이라고 보기가 쉬워요. 하지만 저는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답니다.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전 만일 아놀드가 찰스를 칼로 찔 러죽였다면 그렇게까지는 놀라지 않았을 거예요. 아놀드는 정말 이상하게 도 질투가 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것 참 재미있는 얘기로군요." "하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마거리타를 칼로 찔러죽이는 것이 더 그럴 듯할 텐데 말예요. 오셀로(셰익스피어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 오해로 생긴 질투심 때문에 아내를 목졸라 죽임)나--뭐 그 비슷하게 되는 거죠. 아시겠지만 마거리타한테는 이상하게도 남자들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잖아 요." "그녀가 얼굴이 예뻐서 그런 모양이지요." 포와로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그녀한테는 뭔가가 있다니까요. 남자란 남 자는 다 자기한테 반해 버리게 만들어 놓고--자기한테 미쳐버리게 해놓는 거예요--그리고는 슬쩍 돌아보면서 정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그 사람들을 쳐다보죠. 그렇게 되면 남자들은 더욱 미친 듯이 달려들게되는 거죠." "요부란 말이로군요." 포와로가 불어로 중얼거렸다. "아마 외국어로는 그렇게 얘기하는 모양이죠?" "부인은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오, 그녀는 저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죠--물론 그녀를 믿을 마음은 조 금도 없지만 말이에요!" "음." 포와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맥라렌 중령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조크 말이에요? 그 성실한 추종자 말이죠? 그 사람은 애완동물이나 다름 없다고요. 그쪽 집의 친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니까요. 그 사람과 아놀드는 정말 친한 친구사이였죠. 그 누구에게보다도 아놀드는 그에게 흉 허물없이 대해 주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그는 마거리타가 길들인 고양이 같은 사람이었죠. 그는 꽤 오래 전부터 그녀를 사랑해 왔었으니까요." "그럼 클레이턴 씨는 그에게도 질투를 했습니까?" "조크에게 질투를 했느냐고요? 어처구니가 없군요! 마거리타가 진짜로 조크 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한테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전 사실 그렇게는 생각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든......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 겠거든요...... 그건 너무 심한 생각인 것 같아요. 그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라고요." 포와로는 하인에 대한 얘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사이드 카(칵 테일의 일종)를 아주 잘 만든다는 것밖에는 린다 스펜스는 버제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을뿐더러, 평소 별로 신경써서 그를 살펴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도 찰스만큼이나 간단히 아놀드를 죽일 수 있다 고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로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거 의 없는 극단적인 생각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왠지 기가 죽는군요, 부인. 그렇지만 내게는 (부인은 아마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리치 소령이 아놀드 클레이턴을 살 해했다는 사실보다는--그가 그런 식으로 클레이턴을 살해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 않습니다." "그 단도 때문인가요? 물론, 리치 소령의 성격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방 법이죠. 단도보다는 오히려 둔기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렸을 테니까요. 그 렇지 않으면 목졸라 죽이는 방법도 있었을 거고요."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오셀로로 되돌아왔군요. 그렇군요. 오셀로라...... 부인 덕분에 어떤 생 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제 덕분이라고요? 무슨 일일까--" 그때 누군가가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렸다. "아, 제레미로군요. 그이하고도 얘기를 좀 해보시겠어요?" 제레미 스펜스는 아주 잘 차려입은 몸차림에 거의 허세에 가까운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는 서른 일곱 살의 인상 좋은 남자였다. 스펜스 부인은 부엌에 가서 요리냄비 좀 보고 오겠노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방을 나 갔다. 제레미 스펜스에게서는 그의 아내가 보여준 매력적인 솔직함 같은 것은 전 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확실히 그는 이번 사건에 휘말려드는 것을 아주 싫어 하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대개가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클레이턴 부부와는 얼마 전부터 교제해 왔으나, 리치에 대해서는 별로 잘 모 른다. 그가 인상이 좋은 친구 같기는 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문제가 되는 날 밤에 리치의 태도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클레이턴과 리치는 항상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정말 이번 사건은 까닭을 모르겠다.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제레미 스펜스는 포와로가 어서 가주었으면 하는 표 정을 노골적으로 짓고 있었다. 그는 예의가 바르기는 했지만 단지 예의상 그 럴 뿐이었다. "아무래도--" 포와로가 말했다. "당신은 이런 얘기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물론이지요.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경찰한테 굉장히 시달림을 받았으니까 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들은 것이나 본 것은 벌써 다 얘 기했습니다. 이제는--그 사건을 잊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동정을 금치 못하겠군요. 이런 사건에 휩싸이는 것은 정말 아주 불쾌 한 일이지요. 사람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자 본 것 이외에도 아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도 물어보았을 테지요?" "생각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요? 예를 들어 당신도 클레이턴 부 인이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리치와 자기 남편의 살인계획을 공모했을 것 같습니까?" "오, 이런, 그럴 리가 없지요." 당황한 듯 스펜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혹시 부인이 그런 가능성을 내비치지는 않으셨나요?" "아, 린다 말입니까? 당신도 여자들이 어떻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항상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고 살지요. 마거리타는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별로 평판이 좋은 편이 못됩니다--너무 매력적인 것도 병이랄까요. 하지만 리 치와 마거리타가 살인계획을 공모했다는 추리는 분명--너무 공상적인 얘 기입니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흉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 흉기는 남자들보다 오히려 여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이거 든요." "그렇다면 경찰이 흉기의 주인이 그녀라는 것을 밝혀내기라도 했다는 말씀 인가요?--그랬을 리가 없을 텐데!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니, 아무것도 모릅니다." 포와로는 정직하게 털어놓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스펜스의 얼굴에 나타난 경악스런 표정에서 포와로는 그 신사한테 자기가 뭔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를 남겨주고 왔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7-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포와로 씨, 아무튼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도 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포와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인 아놀드 클레이턴을 살해한 죄로 기소된 남자의 얼굴을 생각에 잠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의 굳건한 턱과 뾰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햇볕에 그을은 마른 얼 굴,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의 몸매, 그에게는 왠지 그레이하운드(몸과 다리가 긴 사냥개)를 연상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으며, 방문객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섭도록 무뚝뚝했다. "클레이턴 부인이 좋은 뜻으로 당신을 나한테로 보냈다는 것은 아주 잘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경솔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이것이 현명한 처사가 못 된다는 말입니 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리치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어깨 너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함께 따라 온 간수는 규정대로 얼마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 있었다. 리치는 낮은 목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이 당치도 않은 죄를 나한테 뒤집어 씌우기 위해 동 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클레이턴 부 인과 나 사이에 무슨 공모라도 있었던 것처럼 주장할 겁니다. 클레이턴 부 인이 벌써 당신한테 얘기해 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 다. 우리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그녀가 나 를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에르큘 포와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리치가 한 말 중에 서 한마디를 들추어냈다. "당신은 당치도 않은 죄라고 했는데요. 그러나 그렇지는 않지요." "나는 아놀드 클레이턴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트집이라고 바꿔야 하겠군요. 그 트집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반대로 그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그 점을 잘 명심해야 할 겁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이 나한테는 괴상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밖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당신한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보다는 더 당 신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않됩니다." "내 대변자는 변호사들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내 변호를 저명한 변 호사들한테 의뢰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에는 찬성할 수 없는데요." 뜻밖에도 포와로는 미소를 지었다. "아하." 가장 외국인다운 태도로 그가 말했다. "그건 나를 비꼬는 말이로군요. 좋아요. 나는 가지요.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이미 나는 당신의 경력도 다 조사해 두었지요. 당신은 샌드허스트(영국 버크셔 군(郡)의 육군사관학교 소재지)를 수석으로 나왔고, 육군대학도 나왔더군요. 그 밖에도 기타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요. 그리고 오늘은 나 자신이 직접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아본 셈이지요. 당신은 그렇게 바보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 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일이 다 관계가 있지요! 우선 당신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런 식 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결백해요. 어쨌든 지금은 당신의 하인인 버제스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버제스에 대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클레이턴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버제스가 한 짓이 틀림없을 겁니다. 결론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유가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그 이유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당신은 그 이 유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버제스를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리치 소령? 그 이유가 뭐지요?" "나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전혀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아, 나 도 당신처럼 추리를 해보았지요. 그렇습니다. 버제스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지요--나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 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문제는,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버제스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를 살해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변호사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리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내 변호사들은 내가 한 일을 나 자신도 사실은 모르고 있는 블랙아웃(일 시적인 시각·의식·기억상실증)증상으로, 내가 그동안 그것 때문에 고생 해 온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만 갖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실정 입니다!" "거 참 딱한 일이로군." 포와로가 말했다. "어쩌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사람이 바로 버제스라는 것을 알게 될지 도 모를 일이지요. 항상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 니까. 그건 그렇고, 그 흉기 말인데요. 그 사람들이 그것을 당신한테 보여 주면서 혹시 당신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겠지요?"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요." "당신 것이 아니라는 건 틀림없을 테지요. 그렇지만 정말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얘기가 틀림없습니까?" "예." 그의 목소리가 약하나마 어떤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건 일종의 실내장식품이더군요--사실--어떤 사람의 집에 가도 그런 것 이 놓여 있는 것을 흔히 볼수 있잖습니까." "아마 숙녀용 응접실에서였겠지요. 혹시 그곳이 클레이턴 부인의 응접실은 아니었습니까?" "분명히 그곳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말이 큰소리로 튀어나왔기 때문에 간수가 얼굴을 들었다. "아, 좋습니다. 분명히 그곳에서는 아니란 말이지요--그렇다고 그렇게 큰소 리를 지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딘가에서 그것과 아주 비슷한 것을 본 적은 있었지요? 어때요, 내 말이 틀립니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어떤 골동품 가게에서...... 어쩌 면......" "아하, 역시 그렇군요." 포와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8- "자 이번에는--" 에르큘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버제스 차례야. 그래, 마침내 버제스의 차례가 돌아온 거야." 그는 이번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그를 스스로의 입을 통해, 혹은 서 로의 입을 통해 여러가지를 알아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버제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단서나 힌트마저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버제스를 만났을 때 그는 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그 하인은 맥라렌 중령이 전화로 포와로의 방문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리치 소령의 아파트에서 포와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에르큘 포와로라고 하오." "예,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제스는 정중한 몸짓으로 문을 연 뒤 안으로 포와로를 안내했다. 작고 네 모난 앞 현관에 들어서자 왼쪽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이 열리자 곧바로 거 실이 나타났다. 버제스는 포와로한테서 모자와 코트를 받아든 뒤 그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음." 포와로는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이로구먼?" "그렇습니다." 끝까지 침착한 친구 버제스는 창백한 얼굴에 약간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보기 흉한 어깨와 팔꿈치, 포와로가 잘 모르는 지방의 액센트가 섞여 있는 평범한 목소리. 아마도 동쪽 해안지방 출신일 것이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 이는 사람이긴 하지만--어떻게 보면 아무런 뚜렷한 특징이 없는 사람 같기 도 했다. 아무튼 이 남자와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과연 소극적인 살인자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엷은 파란색 눈동자는 약간 미덥지 못해 보였는데, 그것은 흔히 부주 의한 사람들이 또한 정직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그러 나 진짜 거짓말쟁이는 대담하고도 확신에 찬 눈초리로 사람들을 쳐다보는 법이다. "지금 이 아파트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소?" 포와로가 물었다. "아직까지는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리치 소령님이 미리 제 급료를 선불 해 주시면서 잘 관리해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하지만 언젠가는--언젠가 는--" 그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언젠가는이라--" 포와로가 그대로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는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리치 소령은 십중팔구 재판을 받아야만 할 게요. 이번 사건에 대한 재판이 아마 3개월 이내에 열리게 될 테니까." 버제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의 몸짓이 아니라 아주 당혹 스런 듯한 몸짓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리치 소령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말이오?" "모든 일이 다 말입니다. 그 궤짝에--" 그는 방의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아, 저것이 그 유명한 궤짝이로군." 그것은 아주 까만 광택이 아는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가구로, 놋쇠 장식 이 군데군데 붙여져 있었으며 커다란 놋쇠 고리와 구식 자물쇠가 달려 있었 다. "멋진 물건이로군." 포와로는 그 궤짝 옆으로 다가갔다. 그 궤짝은 창문 가까운 벽에 레코드를 꽂아두는 현대식 장식장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반대쪽에는 문 하나가 약간 열려진 채 있었다. 그 문은 채 색된 커다란 가죽 칸막이로 일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리치 소령님의 침실이 나옵니다." 버제스가 설명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의 반대쪽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곳에 는 낮은 탁자 위에 스테레오 축음기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코드를 단 채 두 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락의자 몇 개--큰 탁자가 하나, 벽에는 일본의 판 화세트가 걸려 있었다. 아무튼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멋진 방이었다. 그는 윌리엄 버제스를 돌아보았다. "그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주 굉장히 놀랐었겠소?" "오, 물론이지요, 선생님.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막힌 둑이 터졌을 때처럼 그 하인은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말들이 그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그는 그 이야기를 있는 대로 다 털 어놓게 되면 마침내는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선생님, 전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청소를 하려고요. 유리컵들과 그 밖에 여러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있었지요. 마침 바닥에 올리브가 한 개 떨어져 있길래 그걸 주우려고 몸을 구부렸지요--그러다가 그것을 본 겁니 다--융단 위에 검붉은 얼룩이 있는 것을 말이지요. 아닙니다. 지금은 그 융단이 없습니다. 세탁소로 보냈으니까요. 경찰이 다 조사한 뒤에 말입니 다. 이게 대체 뭘까? 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농담으로 혼자 이렇 게 중얼거려 보았지요. '정말 이것은 피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런데 대체 이게 어디서 흘러내린 거지? 뭐가 깨지기라도 했나?' 그런 뒤에 저는 그것 이 궤짝 속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여기 이쪽에 바닥 쪽 으로 틈이 벌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서도 계속 전 별 생각없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대체 뭐가 들었길래--?' 그러면서 이렇게 뚜껑을 들어올렸지요." (그는 자신의 말에 따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거기에--한쪽으로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는 어떤 남자의 시체가 있지 뭡니까?--마치 잠이 든 사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외국 칼 인지 단검인지 하는 것이 그 사람 목에 꽂혀 있더라고요. 정말 절대로 못 잊을 겁니다--절대로! 제가 살아 있는 한은 결코 못 잊죠! 그 충격은--전 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짐작하실 겁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는 뚜껑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거리로 내 려갔습니다. 경찰을 찾아보려고 말입니다--그런데 운이 좋게도 한 경찰을 만났지요--바로 저 모퉁이에서 말입니다." 포와로는 주의깊게 그를 한참 살펴보았다. 만일 이것이 연기라면 기가 막히 게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은 연기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이것은 단지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나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먼저 리치 소령을 깨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그가 물었다. "그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충격이 너무 컸으니까요. 전--전 단지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습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그리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사람이 클레이턴 씨라는 것은 알아보았소?" 그가 물었다. "그랬어야 했을 걸 유감스럽게도 그러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경찰관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 사람은 클레이턴 씨잖아!' 그러니까 경찰관이 묻더군요. '클레이턴 씨가 누굽니까?' 라고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이분은 어젯밤에 이곳에 오셨었던 분입니 다.'라고요." "음." 포와로가 말했다. "어젯밤이라...... 그럼 클레이턴 씨가 정확히 몇 시에 이곳에 도착했었는지 혹시 기억이 납니까?"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15분 전 8시쯤이었을 겁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소?" "그분과 클레이턴 부인은 제가 이 댁에서 일한 1년 반 동안 자주 이 댁을 드나드신 분들이지요." "그때 그의 모습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약간 숨을 헐떡이긴 했습니다만--아마 급히 오시느 라고 그랬을 겁니다. 기차를 타야 한다고 하셨으니까요." "내 생각에는 그가 스코틀랜드로 갈 예정이었으니까 가방을 들고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소?" "아뇨, 그분은 가방을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아마 밑에다 택시를 기다리게 해두었을 테지요." "그는 혹시 리치 소령이 외출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 소?" "별로 염두에 두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냥 메모를 해놓고 가겠다고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여기로 들어와서 책상 쪽으로 가시길래 전 그냥 부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앤초비 알 준비가 덜 되어 있었거든요. 부엌은 복도 끝에 있어서 그곳에 있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요. 전 그분이 나 가는 소리도, 주인 어른께서 돌아오시는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사실 그 때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됐소?" "리치 소령님이 절 부르시더군요. 주인 어른께서는 여기 이 문 앞에 서 계 셨습니다. 그분 말씀이 스펜스 부인이 즐겨 피시는 터키산(産) 담배를 사 오는 것을 깜박 잊었다고 하시면서 빨리 가서 그 담배를 사오라고 하시더 군요. 그래서 분부대로 했지요. 전 담배를 사갖고 와서는 여기 이 탁자 위 에 갖다놓았지요. 물론 그때쯤에는 클레이턴 씨가 이미 기차를 타러 가버 린 줄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럼 리치 소령이 외출중이었을 동안에 아파트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부엌에 있었고?" "그렇습니다, 선생님--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할 수 있겠소?" "왔을 턱이 없지요. 안 그러면 벨을 울렸어야 할 테니까요."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왔을 턱이 없다고? 스펜스 부부와 맥라렌, 그리고 클레이턴 부인의 그날 밤의 행동을 하나에서 열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다. 맥라렌은 클럽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었고, 스펜스 부 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두 친구와 이미 한잔을 하고 있었다. 마거리타 클레 이턴은 바로 그 시간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 중 누군 가가 이 아파트로 들어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놀드 클레이턴을 죽 이기 위해서는 하인도 있고 주인도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아파트까지 뒤쫓 아와서 살해하는 방법보다도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 '정체 모를 이방인'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클레이턴의 과거는 아무 흠잡을 데 없이 깨끗했지만 누군가 옛날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우연히 거리에서 그를 알아보고 이곳 까지 따라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단도로 그를 찌른 뒤 그 시체를 상자 속에 밀어넣고 도망을 쳐버렸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 사건은 동기 나 개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멜로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하기야 낭만적인 역사소설에는--스페인 궤짝이 적당한 소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다시 방을 가로질러 궤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뚜껑을 들어 보았다. 뚜껑은 쉽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들어올려졌다. 겁먹은 목소리로 버제스가 말했다. "그 속은 깨끗이 닦아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렇게 해놓았지요." 포와로는 그 궤짝 속으로 몸을 굽혔다. 순간 그는 "앗!"하고 짤막하게 외치면서 더 깊숙히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는 손가락으로 그 안을 더듬어 보았다. "이 구멍들은--뒤쪽과 옆쪽으로 각각 뚫려져 있는데--마치--누군가가 아 주 최근에 일부러 뚫어놓은 것처럼 보이는군." "구멍이라고요, 선생님?" 하인도 몸을 구부려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글쎄, 자신있게 뭐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이제까지는 특별히 이 구 멍들을 눈여겨보아 두지 않았으니까요." "이 구멍들은 그다지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있기는 있어. 어디 다 쓰려고 이런 구멍을 뚫어놓았는지 무슨 짐작이라도 가오?" "글쎄요, 전 정말 모르겠는데요, 선생님. 어쩌면 벌레 같은 것이 그렇게 해 놓지 않았을까요?--딱정벌레 같은 그런 벌레들이 말이지요. 나무를 갉아 먹고 사는 그런 벌레들 짓이 아닐까요?" "벌레들 짓이라?"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글쎄." 그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담배를 사가지고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뭔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 었소? 전혀? 의자들이 옮겨져 있다거나 탁자의 위치가 바꾸어져 있다든가 하지는 않았나 말이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인데요...... 지금 선생님이 물어보시니까 생 각이 나는군요. 저 칸막이는 침실 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걸어둔 것인데, 저게 약간 왼쪽으로 밀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오?" 포와로는 그 자리에서 그 말대로 해보였다. "조금 더 왼쪽으로...... 예, 됐습니다." 그 칸막이는 원래 그 궤짝을 한 반 정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인의 말 대로 움직여 본 결과 그 칸막이는 거의 완전히 궤짝을 가리게 되었다. "이것이 왜 이렇게 밀려져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글쎄, 모르겠는데요." (제 2의 레몬 양이로군!) 버제스는 자신없는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침실로 가는 통로를 좀더 넓히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부인들이 외투를 맡겨두시기 위해서 말이지요."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게요." 무슨 얘기냐는 표정으로 버제스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칸막이는 궤짝을 거의 다 가려놓고 있소. 따라서 이 궤짝 밑에 깔 려 있는 융단도 자연히 가려지게 되지. 만일 리치 소령이 클레이턴 씨를 칼로 살해했다면 피가 금방 궤짝의 바닥에 나 있는 구멍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을거요.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그것을 보게 될 수도 있었을 거고-- 그 이튿날 아침 당신이 본 것처럼 말이오. 그래서--칸막이가 이렇게 밀려 져 있었던 것이라오." "그렇게는 전혀 생각 못했군요, 선생님." "이 방의 조명은 어땠소, 환했소, 아니면 흐릿했소?" "직접 보여드리지요." 재빨리 그 하인은 커튼을 치고 두 개의 전등에 스위치를 넣었다. 불빛은 부 드럽고도 온화했지만, 그 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포와로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쳐다보았다. "저것은 켜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웬만하지 않으면 평소엔 거의 사용하 지 않거든요." 포와로는 조용히 타는 듯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 핏자국이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선생님. 상당히 불빛이 어두우니 까요." "그랬을 것 같군. 그렇다면 어째서 이 칸막이가 옮겨져 있었을까?" 버제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리치 소령님 같은 훌륭한 신사분이 그런 짓을 저지르시다니--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당신은 그가 틀림없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로 군? 그래, 그럼 어째서 그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 것 같소, 버제스?" "글쎄요, 주인 어른은 물론 전쟁 때 참전하셨지요. 그러니 그때 머리에 부 상을 입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몇 년이나 지난 뒤 그 부상이 다시 재발할 수도 있다더군요. 그렇게 되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주 이상해져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게 될 수도 있다더 군요. 그리고 그렇게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거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군요. 혹시 이번 일이 그렇게 해서 일어난 일은 아닐까요?" 포와로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면서 눈길을 돌렸 다. "아니오." 그가 말했다. "이번 사건은 그런 것이 아니오." 마치 요술사 같은 표정으로 포와로는 빳빳한 지폐 한 장을 버제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아니오, 많은 도움이 되었소." 포와로가 말했다. "이 방을 나한테 보여주었으니 말이오. 그리고 이 방안에 있는 것도 보여주 었고, 그날 저녁 일어난 일도 나한테 얘기해 주었고. 불가능이란 말은 절 대 있을 수 없지! 이것을 잘 기억해 두시오. 난 이번 사건에는 단지 두 가 지 가능성밖에 없다고 얘기했지만--그건 틀린 생각이었소. 제 3의 가능성 도 있으니까 말이오." 그는 다시 한 번 더 방안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몸을 떨었다. "커튼을 다시 젖히시오. 햇빛과 바람이 통하게 해야 하니까. 이 방에 필요 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지. 깨끗이 해둘 필요도 있고 말이오. 하지만 내 생각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이 방안에 가득 차 있는--꺼지지 않는 증오의 기억을 깨끗이 씻어버리기까지는 말이오." 버제스는 멍청히 입을 벌린 채 포와로에게 모자와 코트를 건네주었다. 도무 지 포와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알 듯 모 를 듯한 말을 내뱉어놓고 포와로는 활기찬 걸음걸이로 거리로 내려왔다. -9- 포와로는 집으로 돌아오자 밀러 경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클레이턴의 가방은 어떻게 됐소? 그의 아내 말로는 그가 짐가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던데요?" "그 가방은 클럽에 있었습니다. 그곳 짐지키는 사람한테 맡겨두었더군요. 그런데 아마 그 사실을 깜박 잊고 클럽을 나갈 때 그 가방을 찾아가지 않 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뭐가 들어 있었소?" "생각한 대로였어요. 파자마와 갈아입을 셔츠, 세면도구같은 것들이었으니 까요." "그게 전부였소?" "그럼, 그 안에 뭐가 더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포와로는 그 질문에는 못 들은 척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단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경감님은 스펜스 부인댁에 청소부로 다니는 여자를 잡아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리고 그 댁에서 그 단도와 비슷한 것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적은 없는지 한 번 알아보시지요." "스펜스 부인이라고요?" 밀러가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이 이제껏 당신이 궁리하고 있었던 건가요? 스펜스 부부에게는 벌써 그 단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단도는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 다." "그들한테 다시 물어보시오." "아니, 도대체--" "그런 다음 나한테 그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얘기해 주시오--" "도대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군요." "오셀로를 읽어보시오, 밀러. 그리고 오셀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빠뜨릴 뻔한 것이오." 그리고 나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그는 채터턴 부인한테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는 통화중이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그는 하 인인 조지를 불러 통화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리라고 했다. 채터 턴 부인이 말릴 수 없는 전화광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자 조심스럽게 에나멜 가죽 구두의 끈을 푼 뒤 발끝을 펴면 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도 나이를 먹었어." 에르큘 포와로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쉬 피곤해지니 말이야......" 순간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뇌세포는--아직 활동을 하고 있지. 느릿느릿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활동을 하고 있단 말이야...... 오셀로라, 맞았어. 누가 나 한테 그 얘기를 해줬더라? 아, 그렇군, 스펜스 부인이었어. 그 가방하며...... 그 칸막이하며...... 잠자는 듯이 누워 있었던 그 시체...... 정말 교묘한 살인 이란 말야. 미리 잘 생각해서 계획했던 거야...... 그리고는 기뻐했겠지!......" 그때 조지가 채터턴 부인과 전화가 연결되었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에르큘 포와로입니다, 부인. 댁의 손님과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오, 물론이에요! 아 참, 그리고 포와로 씨, 무슨 놀랄 만한 사실이라도 알 아내셨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포와로가 말했다. "그러나 착착 진행 중이지요." 곧 마거리타의--조용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제가 부인한테 그날 밤 파티에서 뭔가 어색하게 여겨지던 것이 없었 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부인은 뭔가 기억이 나는 듯 눈살을 찌푸렸었지요 --그리고 나서 생각이 안 난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그것은 그날 밤 칸막 이의 위치가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칸막이라고요? 아, 그래요, 맞았어요. 그 칸막이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 있 지 않았어요." "부인은 그날 밤 춤을 추셨습니까?" "가끔요." "대체로 어떤 분과 춤을 추셨습니까?" "제레미 스펜스였어요. 그 사람은 춤을 아주 잘 추거든요. 찰스도 잘 추기 는 하지만 멋있게는 못 추지요. 그 사람과 린다가 춤을 추고 나면 파트너 를 바꾸고는 했어요. 조크 맥라렌은 춤을 추지 않아요. 그는 레코드를 꺼 내 적당한 음악을 고른 다음 틀어주고는 했죠." "나중에는 고전 음악도 들었습니까?" "그래요." 잠시 동안 말이 끊겼다. 마거리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포와로 씨, 왜 그런 걸--물으시죠? 무슨--희망이라도--있는 건가요?" "부인, 도대체 부인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인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고나 계셨습니까?"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저--그랬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부인은 그런 일에 대해 생각도 전혀 안해 보았을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것이 바로 부인 삶에 있어서는 비극 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 비극조차 다른 사람의 것이었지--부인의 비극 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저한테 오셀로에 대한 얘기를 해주더군요. 제가 부인께 남편이 평소 질투가 많은 편이냐고 물어보자 부인은 그랬던 것 같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얘기했지요. 마 치 데스데모나(오셀로의 아내. 오해로 인해 남편인 오셀로에게 살해당함) 가 위험을 깨닫지도 못하고 얘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데스데모나 역시 남 편의 질투심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습 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은 질투를 경험하지도, 경험할 수도 없었기 때문 이었지요. 제가 보기에 그녀는 격렬한 육체적 욕망의 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영웅숭배라는 낭만적인 열정으 로 사랑했고, 또 친한 친구로서 아주 순수하게 카시오를 사랑한 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정열에 대한 그런 그녀의 면역성 때문에 그녀는 남자 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거지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지요, 부인?" 수화기에서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그런 뒤 마거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리고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 리였다. "전--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요......"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에--" 그가 말했다. "그곳으로 찾아가 뵙지요." -10- 밀러 경감을 설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르큘 포 와로 역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밀러 경 감은 투덜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포와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채터턴 부인이 왜 이 사건에 개입했을까요?" "사실 그녀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녀는 친구를 위해 은신처를 제공해 주 었을 뿐, 그것뿐이오." "그 스펜스 부부 말인데요--아니, 어떻게 그것을 알아내셨죠?" "그 단도가 그 사람들 것이라는 사실 말이오? 그것은 단순한 추측이었지. 제레미 스펜스의 얘기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겁니다. 난 그 단검이 넌 지시 마거리타 클레이턴의 것인지 떠보았소. 그랬더니 그는 그렇지 않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약간 호기심이 생기는 듯 그가 물었다. "옛날에 자기들 집에 있었던 장난감 단도와 아주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더군요. 하지만 몇 주 전에 어딘가에 놓고 와서는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마 리치가 그곳에서 그 단도를 훔쳐갔겠지요." "정말 신중한 사람이로군. 제레미 스펜스 말이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몇 주 전이었다고...... 오라, 그랬군. 이 음모는 벌써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라느 말이렸다." "예? 뭐라고요?" "자, 도착했소." 포와로가 말했다. 택시가 셰리턴 가(街)에 있는 채터턴 부인의 저택 앞에서 멈췄다. 포와로는 택시 요금을 지불했다. 마거리타 클레이턴은 2층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밀러를 보 자 얼굴이 굳어졌다. "전 몰랐어요--" "부인은 제가 함께 데리고 오겠다고 한 친구가 누구였는지 모르고 계셨습 니까?" "밀러 경감님은 제 친구가 아닙니다. " "그것은 부인이 재판이 치러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린 문제이지요, 클레이턴 부인. 남편이 살해당하셨으니--" "그러니 이제부터는 누가 그를 살해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합시다." 포와로가 재빨리 말했다.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부인?" 마거리타는 천천히 그 두 사람 맞은편에 있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먼저--"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포와로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기를 두 분께 부탁드립니다. 지금 나는 그 운명의 날 밤에 리치 소령의 아파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 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번 사건을 진실이 아 닌 가정을 근거로 해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즉, 그 궤짝 속에 시체를 넣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는 가정 으로부터 말입니다--다시 말해 리치 소령이 아니면 윌리엄 버제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우리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그날 밤 그 아파트에는 그 두 사람 외에도 그런 짓 을 하기 위한 아주 좋은 기회를 갖고 있었던 제 3의 인물이 있었으니까 요." "그럼, 그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밀러가 재빨리 물었다. "엘리베이터 보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제 3의 인물은 바로 아놀드 클레이턴이었지요." "뭐라고요? 자기가 자기 시체를 치웠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물론 시체는 아니었지요--그때는 살아 있는 몸이었으니까. 간단하게 말해 서 그는 상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 일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요. '미슬토 보'에 나오는 죽은 신부(新婦), 이모젠(셰 익스피어의 작품 실베린에 나오는 여주인공. 정절의 표본)의 정절을 꺾겠 다는 야심을 품은 아이키모 등등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 궤짝 속에서 아 주 최근에 뚫린 듯한 구멍이 있는 것을 본 순간 바로 그런 생각을 했지 요. 어째서일까요? 몰론 그 구멍들은 궤짝 속으로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 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 칸막이는 왜 평상시의 자리 에서 옮겨져 있었을까요? 방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궤짝을 보지 못하도 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궤짝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은 가끔 뚜껑을 들어올려 움츠렸던 몸을 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하는 얘기도 더 잘 들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왜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마거리타가 물었다. "왜 아놀드가 궤짝 속에 숨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부인, 부인이 그것을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남편은 질투가 많은 사람 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것을 입밖에 내는 사람도 아니었지요. 부인의 친 구인 스펜스 부인이 얘기한 대로 그는 그 감정을 속으로 억눌러두고만 있 었던 겁니다. 그의 질투심은 날로 쌓여만 갔습니다. 그 질투심은 밤낮으로 그를 괴롭혔습니다! 과연 자기 아내가 리치의 애인인가 아닌가? 그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알고 싶었습 니다. 그래서--생각해낸 것이 그 '스코틀랜드에서 온 전보'였던 겁니다. 그 러니 당연히 그 전보를 친 사람도, 그 전보를 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을 수 밖에요. 그리고 그는 여행용 가방에 짐을 꾸려들고 나온 뒤에 편리하 게도 클럽에 떨어뜨려 놓고 나왔습니다. 아마 그는 리치가 외출한다는 것 을 확인하고 난 뒤 그 아파트로 들어갔겠지요--그는 하인에게 메모를 적 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상자에다 구멍 을 뚫고 칸막이를 옮겨놓은 뒤 상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밤이 되면 그는 진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틀림없이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겠지. 아니면 일단 나가는 척하다가 다시 되돌아오 겠지. 바로 그날 밤 절망과 질투심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그 남자는 알 게 될 것이었죠......" "설마 그가 스스로 자기 목을 찔렀다는 얘기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밀러가 물었다.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오,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를 찔렀으니까요. 그가 그 상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말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살인범이지요. 신중하게 계획하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살인이 었습니다. 다시 오셀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 리가 생각해 봐야 할 사람은 바로 이아고입니다. 아놀드 클레이턴의 마음 속에 교활한 방법--암시와 의혹으로 독을 집어넣은 인물. 정직한 이아고, 그 성실한 친구, 항상 신뢰해 온 사람! 아놀드 클레이턴은 그 사람을 믿었 습니다. 아놀드 클레이턴의 마음속에서는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궤짝 속에 숨겠다는 생각은 아놀드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일까 요! 그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요--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 습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리하여 무대는 마 련되었습니다. 단도도 벌써 몇 주일 전에 살짝 훔쳐두어 마련해 놓았습니 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저녁이 돌아왔습니다. 불빛은 어둠침침했고 축음 기는 틀어져 있었습니다. 두 쌍의 남녀는 춤을 추고 있었으며, 혼자 남은 그 남자는 스페인 궤짝과 그것을 가리고 있는 칸막이에 가까이 놓여 있는 레코드를 넣어둔 장식장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를 보다가 아무도 몰래 칸막이 뒤로 숨어들어 가서 뚜껑을 들어올리 고 칼로 찌릅니다--대담하면서도 아주 손쉬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클레이턴이 비명을 질렀을 텐데요!" "만일 약을 먹은 상태였다면 소리를 질렀을 리가 없지요." 포와로가 말했다. "하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시체는 마치 잠이 든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더 군요. 그에게 약을 먹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클럽에서 함께 술을 마신 그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마취제가 섞인 술을 마시고 클레이턴은 잠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설마 조크가?" 아이들이 놀랐을 때 그러는 것처럼 마거리타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 이 올라갔다. "조크가 그랬다고요! 오, 그 상냥한 조크는 아닐 거예요!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조크와 아는 사이였어요! 도대체 조크가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 가 없잖아요......?" 포와로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 두 이탈리아 인이 결투를 했습니까? 어째서 그 젊은이는 총으로 자 살을 한 것일까요? 조크 맥라렌은 평소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부인과 부인의 남편에게 좋은 친구가 되 어주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리치 소령이 등장한 것입니 다. 그것은 그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증오와 욕망의 암흑 속 에서 그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완전살인을 계획했습니다--이중살인을 말 입니다. 만일 부인 남편이 살해된다면 자연히 리치는 살인자로 지목되어 유죄판결을 받을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었지요. 그리하여 리치와 부인의 남편이 둘 다 제거된다면--결국에는 부인이 자신한테로 돌아오게 될 것이 라고 그는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부인, 어쩌면 부인은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요...... 아닌가요?"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저, 전--저도 모르겠어요......" 그때 밀러 경감이 갑자기 위엄을 되찾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추리로군요, 포와로 씨. 하지만 그것은 추리에 불과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그것을 증명할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까요. 어쩌면 그 모든 얘기가 다 거짓일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내가 한 얘기는 모두가 사실이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볼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지 않습 니까! "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보기에 맥라렌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면 그는 그것을 인정하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마거리타 클레이턴이 모 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일러준다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포와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왜냐하면 일단 그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다 끝장일 테니까 요...... 완전살인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text down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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