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 ◎ (The Dream) Agatha Christie -1- 에르퓰 포와로는 감정이라도 하는 듯한 눈초리로 계속 그 저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저택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으로는 상점들과 커 다란 공장 건물이 한 채 들어서 있었고, 맞은 편에는 싸구려 아파트가 몇 채 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다시 구시대의 유물인 노스웨이 저택으로 시선을 돌렸다―공간과 여 유가 남아돌던 그 옛날에 한때는 이 저택도 푸른 잔디에 둘러싸여 그 거만 한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택도 시대에 뒤떨어진 건물 이 되어 현대적인 도시 런던의 용솟음치는 물결에 침수된 채 사람들의 뇌리 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마침내는 아무리 나이 를 먹은 사람이라도 이 저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될 날이 이르고야 말 것이다. 게다가 한때는 세계 부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 저택 주인의 이 름이 세상에 자자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거의 없었다. 본래 돈이란 것이 갑자기 명성을 높여 주기도 하지만, 또 그에 비례해서 그 명성을 깎아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격이 괴팍스러운 부호 베네딕트 팔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세상에 공 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자신 역시 좀처럼 외출이라는 것을 하 지 않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을 몹시 꺼려했다. 그러나 때때 로 그는 야윈 몸매에 매부리코를 한 얼굴로 중역회의에 모습을 나타내어 그 특유의 쉰 목소리로 중역들 위에 군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제외한다 해 도 어쨌든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 사람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즉, 28년간이나 입고 있다는 그의 그 유명한 누더기 가운과, 양배추 수프와 캐비어로 마련되는 변함없는 식탁, 그리고 고양이 혐오증 등 등―만큼이나 묘하게도 품위없는 태도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튀어나온 배가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미 일반대중들 사이에 그에 관 한 이런 이야기들은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에르큘 포와로 역시 그런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 터 그가 방문할 사람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는 편지를 읽어보아도 그 이상의 것은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지나간 시대의 서글픈 이정표를 잠시 아무 말 없이 살펴본 뒤에 그는 계단 을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선 다음 벨을 눌렀다. 그리고 최근에 자기가 애용하 던 시계―그것은 구식의 커다란 회중시계였다―대신에 차고 다니는 산뜻한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 시간은 정확히 9시 반이었다. 언제나처럼 에르큘 포와로는 1분도 어김이 없었던 것이다. 벨을 누른 뒤에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전형적인 집사 타입의 남자가 불이 환히 켜진 홀을 배경으로 윤곽만을 드러낸 채 문턱에 서 있었다. 「베네딕트 팔리 씨 댁이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물었다. 무표정하게 그 남자는 무례하지는 않지만 빈틈없는 눈초리로 그를 머리끝 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만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로군. 나름대로 그 남자에 대한 인상을 정리한 뒤 에르큘 포와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공손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물었다. 「그렇소.」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에르큘 포와로요.」 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 저택 안으로 들 어섰다. 집사가 그의 뒤에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나 숙달된 손놀림의 집사에게 방문객이 모자와 지팡이를 맡기기 전에 그 방문객이 밟아야 할 수속이 아직 한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실례입니다만, 편지를 확인하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신중하게 포와로는 주머니에서 접혀진 편지를 꺼내어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집사는 그 편지를 들고 대강 살펴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그 편지를 돌려주었 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편지 내용은 아 주 간단한 것이었다. 런던 서(西) 8구(區) 노스웨이 저택 에르큘 포와로 씨에게 안녕하십니까? 베네딕트 팔리 씨께서 당신과 상의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 십니다. 바쁘신 줄을 알고 있지만 내일(목요일)밤 9시 반에 위의 주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고 콘워시(비서) 추신; 오실 때에는 이 편지를 지참하여 주십시오. 숙달된 손놀림으로 집사는 포와로의 모자와 지팡이를 받아들고 외투를 벗 겼다. 그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콘워시 씨의 방으로 올라가시지요.」 그는 앞장서서 넓은 계단을 올라갔다. 포와로는 호화롭고 현란한 미술품을 감상이라도 하듯 두리번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미술품에 대한 그의 취 미는 항상 어느 정도는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이다. 2층에 올라가서 집사는 어떤 방문 앞에 서더니 노크를 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에르큘 포와로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이런 그의 행동은 우선 전혀 걸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빈틈없는 집사들이란 문에 절대 노크를 하는 법이 없었다―어느 모로 보나 이 사람은 일류 집사 였는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백만장자의 괴벽을 조금이나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 었다. 방안에서 무어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계시던 분이 오셨습니다.」라고 집사가 알렸다.(그리고 포와로 는 그것 역시 계획적으로 관례에서 벗어난 행동임을 알아챘다.) 포와로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사무원의 방처럼 아주 검소하게 꾸며 진 꽤 넓은 방이었다. 서류정리용 캐비닛들과 여러 권의 참고도서들, 안락의 자 두 개와 깨끗하게 정리되어 분류표가 붙어 있는 서류들과, 그 서류들이 잔득 얹혀 있는 크고 육중해 보이는 책상 한 개. 안락의자의 팔걸이 옆에는 작은 탁자가 한 개 놓여 있었고, 그 탁자 위에는 녹색 차양이 달린 스탠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방안에는 그 스탠드 불 하나만 켜놓았기 때문에 방의 구석진 곳은 어두컴컴했다. 그 스탠드는 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정면으로 비추게끔 놓여 있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적어도 그 스탠드의 전구가 150w는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안락의자에는 누더기 가운을 걸 친 야윈 몸매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베네딕트 팔리였다. 그의 머리는 약간 독특하게 앞으로 툭 불거져 나와 있었고, 매부리코는 새의 부리를 연상시켜 주었다. 이마 위에는 앵무새의 볏 같은 하얀 백발이 곤두서 있었으며, 의심 스러운 듯 방문객을 살펴보는 그의 눈동자가 돗수높은 안경알 뒤에서 반짝 거리고 있었다. 「오라―」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귀에 거슬릴 정도로 쉰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우 면서도 거칠었다. 「그럼, 당신이 그 에르큘 포와로라는 사람이란 말이오?」 「제게 용건이 있으시다고요?」 포와로는 정중하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쪽 손을 의자의 등 받이에 올려놓았다. 「앉으시오―자, 앉으시오」 퉁명스럽게 그 노인이 말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의자에 앉았다―그의 자리는 스탠드의 불빛을 정면으로 받게 되어 있어서 몹시 눈이 부셨다. 그 불빛 뒤에서 노인은 주의깊게 그를 살펴보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정말 에르큘 포와로라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믿지?―그렇지 않 소?」 그가 초조하게 물어보았다. 「어떻소―응?」 다시 한번 포와로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어 팔리한테 건네주었다. 「그렇군.」 마지못한 듯 백만장자도 마침내 인정했다. 「그 편지로군. 내가 콘워시한테 쓰라고 한 그 편지야.」 그는 편지를 접은 뒤에 포와로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럼, 당신이 그 사람이로구먼, 그렇소?」 한쪽 손을 약간 흔들면서 포와로가 말했다. 「속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베네딕트 팔리는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요술사가 모자 속에서 금붕어를 끄집어내기 전에 중얼거리는 대사지! 그런 대사도 속임수의 일부분일테니까.」 포와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팔리가 갑자기 말했다. 「내가 정말 의심많은 늙은이라고 당신은 생각할 테지, 그렇소? 그래, 사실 이오. 그 누구도 믿지 마라! 이것이 내 신조니까. 부자들은 어느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절대 못믿지.」 「저한테―」 포와로는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가에게 맡겨라, 비용은 따지지 말고. 포와로 씨, 내가 비용 같은 것에 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도 곧 알게 될 게요.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소! 나중에 청구서나 보내시오―함부로 가 격을 깎아내리진 않을 테니까. 농장에 있는 그 사기꾼 같은 놈들은 시장 에서 2실링 7펜스밖에 안하는 달걀값을 나한테는 2실링 9펜스씩이나 받 아먹으려고 한다니까―사기꾼 같은 놈들 같으니! 하지만 내가 그런 사기 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 흥! 어림없지. 하지만 어떤 분야에 있어서건 일 류인 사람들은 달라. 그런 사람들한테는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지. 나 역시 일류이니까―잘 알고 있다고.」 에르큘 포와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한쪽으로 약간 숙인 채 포와로는 노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만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심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꼭 집어내어 이야기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 만 이제까지 베네딕트 팔리는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살아왔을 뿐이었다.―다시 말해 자신도 모르는 새 속물근성이 몸에 배어 자신은 그것 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포와로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남자는―』 혐오감을 느끼며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사기꾼이야―사기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는 팔리 씨 외에도 다른 백만장자들을 몇 사람인가 알고 있었다. 그들 역 시 괴팍스럽기는 했지만, 그러나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어딘지 모르게 위 엄이 있었으며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누더기 가운을 입고 있었다면 포와로는 그들이 그런 가운을 입고 싶 어서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포와로가 보기에 베네딕트 팔리가 입은 누더기 가운은 하나의 연극 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 자체도 마치 무대에 오른 배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면, 따라서 포와로 는 그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하는 말이 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했다. 「팔리 씨, 저하고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그러자 갑자기 백만장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도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랬소…… 당신이 어떻게 말해 줄지 듣고 싶었고―당신의 생각 말 이오…… 무엇이든 일류한테 가라! 그것이 내 방법이지! 일류 의사―일류 탐정―상의할 이야기는 그 두 사람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런 이야기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하지.」 팔리는 재빨리 포와로의 말을 가로챘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직 단 한마디도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더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전혀 엉뚱한 것을 물어보았다. 「포와로 씨, 당신은 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2- 순간 작은 몸집을 한 남자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팔리 씨, 나폴레옹이 쓴 <꿈 이야기>나―최 근에 할리 가(街)(런던의 병원가)에서 개업을 한 심리학자를 추천해 드리 고 싶습니다만.」 베네틱트 팔리는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벌써 그 두 가지는 다 시도해 보았소……」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가 백만장자가 먼저 입을 열 었다. 처음에는 거의 속삭이듯 하던 목소리가 점차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항상 같은 꿈이었어―밤이면 밤마다 말이오. 그래서 나도 무서워졌어―무 서워졌다고…… 항상 같은 꿈만 꾸니까. 나는 이 방 옆에 있는 내 방에 앉아 있었소.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지. 책상에는 시계가 놓여 있는데 눈을 들어 시간을 보면―항상 3시 28분인 게요. 항상 같은 시간이 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리고 시간을 보고나면, 포와로 씨, 나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요. 나는 그 일이 하기 싫은데도 말야―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싫다고―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일 을 해야만 해……」 그의 목소리는 찌를 듯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포와로가 말했다. 「도대체 선생님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어떤 일이지요?」 「3시 28분이 되면―」 베네딕트 팔리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책상 오른쪽에 달려 있는 두 번째 서랍을 열고, 내가 거기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어 그 총에 총알을 채운 뒤에 창가로 걸어가는 거요. 그리 고―그리고―」 「그리고는요?」 베네딕트 팔리는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 총으로 나를 쏘는 거야……」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포와로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당신이 꾸신 꿈의 내용입니까?」 「그렇다오.」 「매일 밤 같은 꿈입니까?」 「그렇소.」 「총으로 자살을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잠에서 깨어나지.」 포와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흥미로운 점입니다만, 당신은 권총을 특별히 그 서랍 안에만 넣 어두십니까?」 「그렇소.」 「이유는 뭡니까?」 「그저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리고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놓는다는 의미도 있었고.」 「무엇에 대한 만반의 준비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팔리는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나 같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항상 경계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오. 부자들 한테는 적이 많으니까.」 포와로는 그 점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 이 앉아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어째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리다. 처음에는 먼저 의사들한테 상담을 했소―정확히 말하면 세 사람이었소.」 「그래서요?」 「첫 번째 의사는 나한테 그것이 다 음식 탓이라는 게요. 그 의사는 나이가 지긋했으니까. 두 번째 의사는 요새 학교를 나온 젊은 사람이었소. 그 의 사는 그 모든 일들이 내가 어렸을 때 어느 특정시간―즉, 3시 28분―에 일어난 어떤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장담하더구먼. 그런데 그 의사 말로는 내가 너무 완고해서 그 사건을 기억해 내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자 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게 그의 설명이었소.」 「그럼 세 번째 의사는 뭐라던가요?」 포와로가 물었다. 「그 의사도 젊은 사람이었소. 그 사람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대더군! 그 는 내가 생활에 지치고 살아가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어서 계획적으로 그 런 종말을 원하고 있다는 게요! 그런데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내가 인생에 있어서의 패배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 내가 잠에 서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진실을 외면한다나. 그러나 잠이 들면 그 모든 구속들이 다 없어지니까 나는 내가 『정말로 바라고 있는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이야기요. 즉, 인생에 있어서 종말을 고한다는 그런 이 야기더란 말이오.」 「다시 말해 그 의사 생각은 당신 자신은 잘 모르고 있지만 당신이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이 자살이라는 이야기입니까?」 포와로가 물었다. 그러자 베네딕트 팔리는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어―있을 수 없다고!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살 수가 있어! 그런 말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뿐이야―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고!」 포와로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흥분했는지 두 손을 마 구 흔들어대며 날카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강경하게 부인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는 오히려 팔리의 부인(否認) 그 자체가 더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포와로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저더러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이시지요, 팔리 씨?」 그러자 베네딕트 팔리는 갑자기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자기 옆에 놓인 탁 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이 더 있소. 만일 그 가능성이 옳은 것이라 고 한다면 당신의 임무는 바로 그것에 대한 일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오! 당신은 유명한 사람이지. 이제까지 수많은 사건들도 맡아왔고―그 중에는 기묘한 사건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사건들도 많았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 은 이번에도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밝혀낼 수 있을게요.」 「무엇을 밝혀내라는 말씀인지요?」 팔리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가령 어떤 놈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면 말이오…… 이런 방법으로 과 연 나를 죽일 수가 있을까? 밤마다 나한테 똑같은 꿈을 꾸도록 할 수 있 겠느냐는 말이오.」 「지금 최면술 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맞았어.」 에르큘 포와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 생각으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의사의 소관이 되겠지요.」 「그럼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사건을 맡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오?」 「정확히 이런 사건만이라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듣겠소? 밤이면 밤마다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소―그리고 그러다가―결국 어느 날 그러한 암시에 사로잡혀―나 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될지도 몰라. 지겹도록 꾸는 그 꿈대로 그렇 게―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라고!」 천천히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는게요?」 팔리가 물었다. 「가능이라고요?」 포와로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말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잖소?」 「그건 그렇지요.」 그러자 베네딕트 팔리가 중얼거렸다. 「하기는 의사도 그렇게 얘기하더군……」 그러고 나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날카롭게 올라가면서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면 왜 내가 이런 꿈을 꾸고 있다는 거야? 왜? 왜냐고?」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베네딕트 팔 리가 갑자기 물었다. 「당신, 틀림없이 이런 사건을 맡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소?」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오.」 조심스럽게 포와로가 헛기침을 했다. 「저, 죄송하지만―」그가 말했다.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질문이오? 무슨 질문이냐고? 무슨 질문이든 해보시오.」 「선생님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팔리는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시지요?」 포와로가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나도 알고 싶소―만일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오.」 「제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밖에 말씀드 리지 못하겠군요. 그건 그렇고, 혹시 옛날에 최면술에 걸려본 일이 있으 십니까?」 「물론 없소. 당신 눈에는 내가 그런 멍청한 짓에 나를 맡길 사람처럼 보이 오?」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이 상상하고 계신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날 리가 없 을 것 같군요.」 「그러나 분명히 꿈이란 말이오. 당신, 바보요? 꿈이라고 했잖소!」 「그 꿈은 주목해 볼 만한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포와로가 말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 물었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눈으로 그 꿈속에 나온 장소를 보고 싶군요―그 탁자며 시계며 권총 을 말입니다.」 「좋소, 내가 옆방으로 안내해 주지.」 자기 몸을 감싸고 있는 가운의 앞섶을 여미면서 노인은 반쯤 의자에서 몸 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그는 다시 자리 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그가 말했다. 「거기에 가봐야 별로 볼 것도 없지. 거기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해 줄 것은 이미 전부 당신한테 얘기해 주었소.」 「하지만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대도.」 팔리는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 생각은 이미 다 들었고 그걸로 됐소.」 포와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됐군요, 팔리 씨.」 베네딕트 팔리는 줄곧 자기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연히 쓸데없는 것을 알려고 들지 마시오.」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당신한테 이야기해 준 게요―하지만 당신한테 는 그런 이야기들이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그것으로 됐소. 이 상담료에 대한 계산서나 보내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뚝뚝하게 탐정이 대답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백만장자가 그를 다시 불러세웠다. 「그 편지는―돌려주시오.」 「선생님 비서가 쓴 편지 말입니까?」 「그렇소.」 포와로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접혀진 종 이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나서 그 종이를 노인한테 건네주었다. 노인은 그 것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자기 옆에 있는 탁자 위에 그 종 이를 내려놓았다. 다시 에르큘 포와로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는 거 듭거듭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 을 거듭하고 있자니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잘못은 포와로 자신이 한 잘못이지―베네딕트 팔리의 잘못이 아 니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마침내 그 잘못이 어떤 것인지가 떠올랐다. 에르큘 포 와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는 다시 한 번 더 방안으로 되돌아갔다. 「이거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말씀에 정 신이 팔려 있다 보니 그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 버렸군요! 지금 제가 건네드린 그 편지 말인데요―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는 것이 그 만 멍청하게도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말았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지?」 「방금 전에 제가 드린 편지는―제 옷 칼라 때문에 세탁소 여주인이 저에 게 보낸 사과 편지였습니다.」 포와로는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재빨리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 었다. 「이것이 당신 편지입니다.」 베네딕트 팔리는 낚아채듯 그 편지를 받았다―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포와로는 세탁소 여주인이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는 다시 한 번 더 정중하 게 사과를 하고 그 방을 나왔다. 그는 잠시 방 밖에 있는 층계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곳은 꽤 넓은 곳 이었다. 그의 바로 맞은편에는 오래 된 떡갈나무로 만든 긴 의자가 놓여 있 었고, 그 의자 앞에는 네모난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잡지가 몇 권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밖에도 안락의자 두 개와 꽃병이 놓인 탁자가 하나 눈에 보였다. 그 방을 보자 그는 문득 치과의사의 대기실이 떠올랐다. 아래층에 있는 홀로 내려가 보니 집사가 그를 배웅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아니, 고맙소. 오늘밤은 날씨가 좋으니 걸어가도록 하지.」 보도로 나와 에르큘 포와로는 지나가던 차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에 번잡한 도로를 건너갔다. 그의 이마에는 한층 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냐.」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야. 짚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걸 인정해야 하다니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지만, 이번만은 이 에르큘 포 와로도 완전히 두손 들었어.」 이것이 이른바 드라마의 제1막이었다. 제2막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계속 되었다. 제2막은 의학박사인 존 스틸링플리트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었 다. -3- 그는 전혀 의학박사답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오, 포와로 씨. 맞습니까? 전 스틸링플리트입니다.」 「오, 자네로군. 어쩐 일인가?」 「저는 지금 노스웨이 저택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베네딕트 팔 리 씨 댁 말입니다.」 「오, 그래?」 포와로의 목소리에 재빨리 관심의 빛이 떠올랐다. 「팔리 씨는―좀 어떤가?」 「팔리 씨는 죽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권총으로 자살했어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가 포와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랬군……」 「당신은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군요. 이 일에 대해 무슨 알고 있는 일이 있는 거지요?」 「어떻게 알았나?」 「글쎄요, 하지만 뛰어난 추리력이나 텔레파시 같은 것이 통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은 한 일주일 전에 팔리 씨가 당신한테 보낸 약속을 정한 편 지가 발견되었거든요.」 「그랬었군.」 「지금 이곳에는 순한 경감님도 와 있기는 하지만―당신도 아시다시피 백 만장자들이 자살을 했을 경우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겠기에 말입니 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 당신 지혜를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전화를 걸 었습니다 괜찮다면 이곳으로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곧 가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도로를 횡단할 때는 부디 몸조심하시고요―예?」 포와로는 곧 그곳으로 가겠다는 말만 몇 번 되풀이했다. 「전화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죠? 좋아요. 이따가 보죠.」 그로부터 15분 뒤에 포와로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 방은 노스웨이 저택 의 뒤쪽, 1층에 있는 천장이 낮고 길이가 긴 방이었다. 방안에는 포와로 말 고도 다섯 사람이 더 있었다. 바네트 경감, 스틸링플리트 박사, 백만장자의 미망인인 팔리 부인, 그의 무남독녀인 조애나 팔리, 그리고 그의 개인 비서 였던 휴고 콘워시. 그들 중에서 바네트 경감은 신중한 군인 타입의 사람이었다. 의사로서의 태 도와 전화할 때의 스타일이 정반대인 스틸링플리트 박사는 키가 크고 갸름 한 얼굴의 서른 살 먹은 젊은이였다. 팔리 부인은 분명 그녀의 남편보다 훨 씬 더 젊은 듯했다. 그녀는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입술 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의 표시도 나타나 있 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 침착했다. 조애나 팔리는 주근깨가 있는 얼 굴에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코와 턱 모습은 영락없이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똑똑해 보이면서도 날카로웠 다. 휴고 콘워시는 잘생긴 얼굴에 정장차림의 옷을 입고 있는 젋은이였다. 그는 똑똑하면서도 유능해 보였다. 인사말과 소개말이 서로 오간 뒤에 포와로는 전에 자신이 이 저택을 방문 하게 되었던 경위와 베네딕트 팔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간단명료하게 설명 했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는 자기가 그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상한 이야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경감이 말했다. 「꿈이라? 팔리 부인, 이 일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제게도 그 꿈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이는 그 일 때문에 굉장 히 불안해 하고 있었어요. 저는―저는 그이한테 아마 소화불량 때문에 그 럴 거라고 말해 주었지요―아시다시피 그이의 식사는 아주 특이하니까 요―그리고 스틸링플리트 박사님에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유했죠.」 그러자 젊은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오지 않으셨습니다. 포와로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건대 아마 할 리 가(街)로 가셨던 모양입니다.」 「이보게, 그 점에 관해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포와로가 말했다. 「팔리 씨는 전문가 세 사람한테 진찰을 받아보았다고 하더군. 그 사람들이 내세운 이론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스틸링플리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하군요. 왜냐하면 팔리 씨가 당신한테 말해 준 내용이 정확히 그 의사들이 팔리 씨한테 해준 이야기와 똑같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비전문가가 나름대로 해석을 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럼, 팔리 씨가 말뜻을 잘못 이해했다는 말인가?」 「뭐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제 말은 다만 그 의사들은 분명 전문용어를 써가면서 팔리 씨한테 말을 했을 테고, 또 그 용어의 뜻을 약 간 잘못 받아들인 팔리 씨가 나름대로 말을 바꾸어 이야기했을 거란 말 이지요.」 「그럼, 팔리 씨가 한 말과 의사들이 한 말이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겠군.」 「결국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제 말뜻은 팔리 씨가 의사들의 말을 전체적으 로 약간 잘못 받아들였을 거라는 뜻입니다.」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리 씨를 진찰한 사람들을 알고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팔리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조애나 팔리가 불쑥 말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아빠가 진찰을 받았으리라곤 생각지 않아요.」 「그럼, 아버님은 아가씨한테도 그 꿈에 대해 얘기하시던가요?」 포와로가 물었다.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콘워시 씨, 당신한테는요?」 「아뇨, 전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제 가 선생님에게 보낼 편지를 받아쓰기는 했지만, 그분이 왜 선생님과 만나 고 싶어하는지를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지 저는 그냥 어떤 사 업상의 불법행위 때문에 그러는가 보다 하고 저 혼자 생각했을 뿐이지 요.」 포와로가 물었다. 「자, 이제는 팔리 씨가 돌아가셨을 때의 실제 상황에 대해 좀 들어볼까 요?」 바네트 경감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눈초리로 팔리 부인과 스틸링플리트 박사를 쳐다보더니 마침내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팔리 씨는 언제나 오후가 되면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일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유망한 사업상의 큰 합병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휴고 콘워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콘워시가 말했다. 「합동버스회사 건이었습니다.」 「그 일로―」 바네트 경감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팔리 씨는 신문기자 두 사람과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요. 그런 일은 좀체 있기 힘든 건데―제가 알고 있기로는 5년 만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기자들은 한 사람은 연합신문협회 소속 기자였고 또 한 사람은 합동통신소속 기자였습니다. 그 두 기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약속대로 3시 15분에 이 집에 도착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층에 있는 팔 리 씨의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팔리 씨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곳에서 기다리게끔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3시 20 분에 합동버스회사의 직원 한 사람이 아주 급한 서류를 가지고 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팔리 씨의 방으로 안내되어 직접 그 서류들을 건네주 었습니다. 팔리 씨는 그를 방문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그곳에서 두 신문기 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사업상의 급한 용무가 생겨서 말이오. 내 가능한 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요.』 두 신문기자, 애덤스와 스토다트는 팔리 씨한테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 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 자기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문 을 닫았지요―그것이 그가 살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계속하십시오.」 포와로가 말했다. 「4시가 조금 지나서―」 경감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 계신 콘워시 씨가 팔리 씨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 오다가 두 신문기자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 다. 그는 편지 몇 통에 팔리 씨의 서명을 받을 필요도 있었고, 또 이 두 신문기자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팔리 씨한테 상기도 시켜줄 겸해서 팔리 씨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에는 팔리 씨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방안은 텅 비어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언뜻 그의 눈에 책상 뒤로 삐져나온 구두가 보였습니다.(그 책상은 창문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얼른 그 뒤로 가보니 팔리 씨가 그곳에서 죽은 채 쓰러져 있었고, 그의 옆에는 권총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콘워시 씨는 급히 그 방을 나와 집사를 시켜 스틸링플리트 박사한테 전화 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박사의 충고대로 콘워시 씨는 경찰에 신 고를 한 것입니다.」 「총소리를 듣지는 못했습니까?」 포와로가 물었다. 「아니오. 이곳은 교통소음이 워낙 심한 데다가 층계참의 창문까지 열려 있 었으니까요. 트럭과 자동차의 경적소리 때문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들 들 려야 말이지요.」 포와로는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시간은 몇 시로 추정됩니까?」 그가 물었다. 이 질문에는 스틸링플리트가 대답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시체를 살펴보았는데―그 시간이 4시 32분이 었습니다. 팔리 씨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적어도 한 시간 전입니다.」 포와로의 얼굴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팔리 씨가 말한 그 시간에 그가 죽었을 수도 있겠군―즉, 3시 28분에 말일세.」 「정말 그렇겠군요.」 스틸링플리트가 말했다. 「권총에서는 지문이 나왔나?」 「그렇습니다. 그의 지문이더군요.」 「그럼 그 권총은?」 경감이 포와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당신이 들은 대로 그가 항상 책상의 오른쪽에 있는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둔 것이지요. 팔리 부인께서 틀림없다고 증언하셨으니까요. 게다가 당신 도 알다시피 그 방의 입구는 하나밖에 없고, 그 문은 층계참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신문기자가 바로 그 문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 데, 그들 말로는 팔리 씨가 자기들한테 말을 건 시간부터 콘워시 씨가 4 시 조금 넘어 그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정황으로 보아 팔리 씨는 자살한 것이라고밖에 추측할 수 가 없겠군요?」 바네트 경감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그게 뭡니까?」 「당신이 받은 그 편지입니다.」 그러자 포와로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 알겠소! 이 에르큘 포와로가 관련된 것이 드러나자마자―즉시 살인 용의자로 떠올랐다는 말이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경감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한테 상황설명을 듣고 보니―」 포와로가 갑자기 경감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그는 팔리 부인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편께서 혹시 최면술에 걸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자제력이 무너져 버린 듯했다. 「그런 끔찍한 꿈을 꾸다니! 어쩐지 무시무시해요! 그이가 그런 꿈을 꾸다 니―그것도 밤이면 밤마다―그리고는 기어코―마치―꼭 그래야 하는 것 처럼 죽어버리다니!」 포와로는 문득 베네딕트 팔리의 말을 떠올렸다―『나는 내가 정말 바라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거야. 즉, 인생에 있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고』 그가 물었다. 「부인, 남편께서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 까?」 「아뇨―적어도―때때로 그이가 아주 이상한 짓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옆에 있던 조애나 팔리가 단호하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빠는 결코 자살 같은 것을 하실 분이 아니에요. 아빠 자신을 얼마나 아 끼고 계셨는데.」 스틸링플리트 박사가 입을 열었다. 「팔리 양, 꼭 자살할 것같이 보이는 사람만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오. 때 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포와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그가 물었다. 「그 비극이 일어난 현장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스틸링플리트 박사님―」 의사는 포와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베네딕트 팔리의 방은 그 옆에 있는 비서의 방보다 훨씬 더 넓었다. 방안은 가죽으로 만든 덮개가 씌워져 있는 푹신해 보이는 안락의자와 두꺼운 양털 카펫, 우아한 특제 책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포와로는 책상 뒤로 돌아가서 창문 바로 앞, 카펫 위에 거무스름한 얼룩이 묻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는 다시 그 백만장자의 말을 떠올렸다. 『3시 28분이 되면 나는 내 책상 오른쪽에 있는 두 번째 서랍을 열고 내가 거기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어 창가로 걸어가는 겁니다. 그리고―그리고 그 총으로 나를 쏘는 겁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창문은 이렇게 열려 있었나?」 「그래요. 하지만 그쪽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지요.」 포와로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 창문 근처에는 문지방도, 난 간도 홈통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쪽으로는 고양이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 할 것 같았다. 맞은편에는 공장 건물의 단조로운 벽이 솟아 있었는데, 그 벽 은 창문 하나 없는 살풍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틸링플리트가 입을 열었다. 「바깥 풍경이 저런데 부자 양반이 자기 서재로 이 방을 택했다니 정말 희 한하군요! 마치 감옥의 벽이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잖습니까.」 「그렇군.」 포와로가 말했다. 포와로는 고개를 움츠리고 딱딱한 벽돌로 된 그 널찍한 벽을 한참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는 말일세―」그가 말했다. 「이 벽이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스틸링플리트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말뜻은―심리학적인 측면에서라는 건가요?」 포와로는 그때 이미 책상 있는 데로 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런 모습으로 그는 보통 집게라고 말하는 것을 집어들었다. 그 가 손잡이를 누르자 집게가 한껏 벌어졌다. 조심스럽게 포와로는 그 집게로 의자 옆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떨어져 있는 타다 만 성냥개비를 살짝 집 어올리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일을 다 하고 나서 말입니다……」 스틸링플리트가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에르큘 포와로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좋은 것을 발명해 냈군.」 그러면서 책상 위에 그 집게를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그가 물었 다. 「그때 팔리 부인과 팔리 양은 어디에 있었나?―그 사망시각에 말일세.」 「팔리 부인은 이 방 바로 위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쉬고 있었고, 팔리 양 은 이 저택 맨 위층에 있는 자기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잠시 톡톡 쳤다. 그런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팔리 양을 만나보고 싶군. 자네, 그 아가씨한테 가서 잠시 동안만 이곳으 로 좀 와달라고 해주겠나?」 「꼭 그러고 싶으시다면요.」 스틸리플리트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방을 나갔 다. 그로부터 1∼2분이 지나자 문이 열리며 조애나 팔리가 방안으로 들어왔 다. 「마드무아젤, 내가 몇 가지 질문 좀 해도 괜찮겠소?」 그녀는 그의 시선을 차갑게 되받았다. 「뭐든지 물어보시죠.」 「아가씨는 아버지가 책상 속에 권총을 넣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소?」 「아뇨.」 「아가씨와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가씨의 의 붓 어머니겠지만―내 말이 맞지요?」 「그래요. 루이스는 아빠의 두 번째 부인이에요. 그녀는 나이가 저보다 겨 우 여덟 살밖에 더 많지 않죠. 그런데 선생님이 묻고 싶으시다는 것은 ―?」 「지난 주 목요일에 아가씨와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목요일 밤에 말입니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목요일이라고요? 글쎄요. 아, 맞아요 우리는 극장에 갔었지요. '작은 개가 웃었다'라는 연극을 보러요.」 「아버님은 같이 가려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아빠는 극장 같은 데를 가시는 분이 아니세요.」 「그럼 아버님은 밤에 보통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으셨어요.」 「아버지는 별로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지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빠는―」 그녀가 말했다. 「정말로 별나게도 불쾌한 성격의 소유자셨어요. 아빠와 가까이 지내본 사 람은 아마 아무도 아빠를 좋아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정말 아주 솔직하게 말해 주는군요, 마드무아젤.」 「제가 선생님의 시간을 벌어드리죠, 포와로 씨. 저는 선생님이 무엇을 물 어보시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 의붓 어머니는 돈 때문에 아 빠와 결혼했어요. 제가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살아갈 만한 돈이 저한테 없기 때문이에요. 저에게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 만―그이는 가난해요. 아빠가 손을 써서 그이를 실직시켜 버렸거든요. 아 빠는 저를 괜찮은 집안으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셨어요―제가 아빠의 상속 인이 될 테니 그이와 헤어지게 하려면 그 편이 손쉬운 방법이었겠지요.」 「아버님의 재산은 모두 아가씨에게 상속됩니까?」 「그래요. 아빠가 의붓어머니인 루이스에게 물려준 것은 세금이 붙지 않는 현금 25만 파운드와 그 밖에 다른 유산 약간이지요. 그 나머지 재산은 모 두 제가 물려받게 된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말예요, 포와로 씨, 제가 아빠가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는 것도 무 리가 아니잖아요?」 「마드무아젤, 내가 보기에 아가씨는 아버님의 머리 좋은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군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는 똑똑하셨죠……아빠와 함께 있으면―아빠에게는 어떤 힘―추진 력―같은 것이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어떤 까 다로움이나―심술궂음으로 바뀌어 버렸어요―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것으로 말이에요.」 에르큘 포와로가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내가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4- 조애나 팔리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몸을 돌렸다. 「그 밖에 또 물어보실 것이 있나요? 」 「두 가지 사소한 질문을 좀 해야겠군요. 여기에 있는 이 집게 말인데요.」 그가 집게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항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겁니까?」 「그래요. 아빠는 물건을 주울 때는 항상 그 집게를 사용하셨으니까요. 몸 을 구부리는 일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아가씨의 아버님은 눈이 좋으셨습니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오, 아뇨―아빠는 전혀 앞을 보지 못하셨어요―안경을 쓰지 않으면 말이 에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나빴으니까요.」 「그럼 안경을 쓰면 어떻습니까?」 「오, 물론 그렇게 되면 아주 잘 보셨지요.」 「신문이나 아주 작은 글씨들도 읽을 수 있으셨겠지요?」 「오, 물론이에요.」 「됐습니다, 마드무아젤.」 그녀는 방을 나갔다. 포와로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멍청했어. 모든 일이 내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데도 말야. 완전히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야.」 그는 다시 한 번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창 바로 밑에는 이 저택과 공장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이 있었는데, 무엇인가 작고 검은 물건이 그 곳에 떨어져 있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다시 아래층으 로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포와로는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콘워시 씨, 팔리 씨가 나를 부르게 된 정확한 경위를 자세하게 다시 말 해 주겠소? 가령 예를 들어 팔리 씨가 그 편지를 구술시킨 것은 언제였 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수요일 오후―5시 30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칠 때 특별한 지시 같은 것은 없었소?」 「저더러 직접 가서 부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나요?」 「그렇습니다.」 「나를 맞이할 때의 행동에 대해 집사에게 무슨 특별한 지시라도 내렸 소?」 「그렇습니다. 팔리 씨는 저한테 홈스(홈스는 집사 이름이지요)에게 이렇게 일러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시 30분에 어떤 남자분이 오실 거야. 그 남자분의 이름을 물어보게. 그리고 편지도 좀 보여달라고 해.』하고 말 입니다.」 「정말 이상스럽게도 조심스런 명령이었군요. 그렇지 않소?」 콘워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팔리 씨는―」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간 성격이 묘한 분이시라서요.」 「그 밖에 다른 지시는 없었소?」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그날 밤에 외출을 하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렇게 했소?」 「그렇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을 갔었지요.」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몇 시였나요?」 「한 11시 15분쯤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팔리 씨를 다시 만나보셨나요?」 「아니오.」 「그럼 그 이튿날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던가요?」 「예.」 포와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팔리 씨와 그의 방에서 만나지를 않았 소.」 「그렇습니다. 저한테 홈스한테 가서 선생님을 제 방으로 안내하라는 얘기 를 해두라고 하셨으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혹시 모르시오?」 콘워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저는 팔리 씨의 명령에 대해 반문해 본 적이 없습 니다.」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제가 그런 짓을 한다면 팔리 씨는 틀림없이 아주 화를 내셨을 겁니 다.」 「팔리 씨는 방문객을 보통 자신의 방에서 맞았습니까?」 「보통은 그렇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은 제 방에서 방문객 들을 만나기도 하셨지요.」 「그럴 만한 무슨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휴고 콘워시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아니오―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은데―사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한 번 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팔리 부인 쪽으로 몸을 돌리며 포와로가 물었다. 「집사를 좀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하세요, 포와로 씨.」 아주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홈스가 벨소리를 듣고 서재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팔리 부인은 몸짓으로 포와로 쪽을 가리켰다. 홈스는 정중하게 그의 쪽으 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시지요?」 「홈스, 목요일 밤 내가 이곳을 방문하면 어떻게 하라는 분부를 받았소?」 잠깐 헛기침을 하고 나서 홈스가 말했다. 「저녁식사 뒤에 콘워시 씨가 9시 반에 에르큘 포와로라는 분이 팔리 나리 를 만나러 올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할 일은 그 손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손님의 말씀이 편지의 내용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을 확인 한 뒤 콘워시 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노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지요?」 집사의 얼굴에 언뜻 불쾌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팔리 나리께서 분부하신 것 중 하나였습니다. 손님을 안내할 때 는 항상 노크를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까요―물론 사업과 관계된 손님일 경우입니다만.」 그가 덧붙였다. 「음, 그것 때문에 나는 약간 당황했었지! 나를 맞이하는 일에 대해 그 밖 에 다른 분부는 없었소?」 「없었습니다. 콘워시 씨는 저한테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을 전해 주시고 는 외출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몇 시쯤이었소?」 「10분 전 9시였습니다.」 「그 뒤에 팔리 씨를 만났소?」 「예. 평소때처럼 9시에 뜨거운 물 한 잔을 갖다드렸습니다.」 「그럼 팔리 씨는 그때 자기 방에 계셨소, 아니면 콘워시 씨의 방에 계셨 소?」 「그때 나리께서는 나리의 방에 계셨습니다.」 「그 방에서 조금 이상하게 여겨진 점은 없었소?」 「이상한 점이라고요? 아뇨, 없었는데요.」 「팔리 부인과 팔리 양은 그때 어디에 계셨소?」 「두 분 다 연극 구경을 가셨었지요.」 「고맙소, 홈스. 이것으로 됐소.」 홈스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포와로는 백만장자의 미망인 쪽으로 몸 을 돌렸다. 「한 가지 더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팔리 부인. 남편께서는 시력이 좋으셨 습니까?」 「아뇨. 안경이 없으면 안될 정도였어요.」 「그럼 아주 근시였었군요?」 「오, 그랬어요.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아주 꼼짝달싹도 못할 지경이었죠.」 「안경은 여러 개를 가지고 계셨겠군요?」 「그래요.」 「음.」 포와로가 말했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댔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번 사건을 푸는 열쇠 같군요……」 -5-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모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콧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 작은 체구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경감의 얼굴에는 당혹스런 표정이 나타나 있었고, 스틸링플리트 박사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있었으며, 콘워시는 그냥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팔리 부인 은 멍청하게 놀란 표정으로, 조애나 팔리는 재미있다는 듯 계속 포와로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침묵을 깬 사람은 팔리 부인이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포와로 씨.」 그녀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그 꿈은―」 「그렇습니다.」 포와로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꿈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팔리 부인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말했다. 「예전에는 초자연적인 일 같은 것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는데―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무슨 예고처럼 밤마다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로군요.」 스틸링플리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란 말입니다! 포와로 씨, 당신이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 를 해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가령 당신이 그 이야기를 팔리 씨의 입에 서 직접 듣지만 않았어도―」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더니 그는 의사다운 태도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정말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팔리 부인, 팔리 씨 본인이 그런 이야기만 하지 않았어도―」 「바로 그것일세.」 포와로가 말했다. 그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아주 생기 있어 보였다. 「만일 베네딕트 팔리가 나한테 그런 이갸기를 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 러보았다. 「그날 밤에 일어난 일 중에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어째서 나한테 그 편지를 지니고 오라고 한 것일 까?」 「본인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콘워시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그런 생각은 아주 엉뚱한 것이었 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팔리 씨는 그 편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 편지를 자기 한테 돌려주고 가라고까지 했으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내가 그 편지를 두고 나온 뒤에 그 편지를 찢어버린 것도 아니고! 오늘 오후에 그 편지 는 그의 서류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왜 그 편지 를 갖고 있었을까요?」 조애나 팔리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빠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기가 꾼 그 이상한 꿈 이야기가 사람들한테 알려지기를 바랬던 거예요.」 포와로는 바로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드무아젤, 아가씨는 정말 머리가 좋군요. 그랬을 겁니다―편지를 갖고 있었던 이유는―그것밖에 있을 수가 없지요. 팔리 씨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이상한 꿈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꿈이 아주 중요했던 겁니다. 그 꿈이야말로, 마드무아젤, 결정적인 것입니다!」 「자, 이제는―」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나는 팔리 씨한테 그 책상과 권총을 나한테 좀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물 어보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자고 막 자리를 일어서려고 하다가 갑자기 주저앉으면서 거절을 하더군요. 왜 거절을 했을까요?」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말을 바꾸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 옆방에 무엇 이 있었길래 팔리 씨는 나한테 그 방을 보여주기 싫어한 것일까요?」 여전히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포와로가 말했다. 「어려운 일이로군요. 그러나 팔리 씨가 나를 자기 비서의 방에서 만나고 자기의 방을 보여달라는 내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한 데는 무슨 이유―아 주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즉, '그 방에는 나한테 보여줄 수 없었 던 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럼, 그날 밤에 일어난 일 중에서 세 번째 이해가 안되는 일로 넘 어가 볼까요? 내가 그 방을 나오려 하자 팔리 씨는 나한테 내가 받은 편 지를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나는 세탁소 여주인이 나한테 보낸 편지를 팔리 씨한테 건네주고 말았지요. 그는 그것을 흘끗 쳐다보더니 자기 옆에 그 편지를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그 방을 막 나서 려다가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나는 사과를 하고 그 세탁소 여주인의 편지를 돌려받고는 다른 편지를 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이 저택을 나섰습니다만―솔직히 고백하건대―그때는 정말 무 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었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특히 마지막 그 사건이 나에게는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차례로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스틸링플리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왜 세탁소 여주인이 등장하는지 정말 잘 모르겠는걸 요, 포와로 씨.」 「바로 그 세탁소 여주인이 아주 중요한 걸세.」 포와로가 말했다. 「내 칼라를 못쓰게 망쳐놓은 그 딱한 여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 로 누군가에게 유용한 일을 한 것이지. 틀림없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이것은 아주 명백한 사건이니까. 팔리 씨는 그 편지를 흘끗 눈으로 훑어 보았었네―누구든 그 편지를 한 번 흘끗 본 사람이라면 당장 그 편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야―그런데도 그는 그 사실을 전 혀 몰랐어. 어째서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네. 즉, 그는 그 편지를 전혀 읽 을 수 없었던 것이지.」 그러자 베네트 경감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니, 그럼 팔리 씨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에르큘 포와로는 미소를 지었다. 「아, 물론―」 그가 대답했다. 「팔리 씨는 안경을 쓰고 있었지요. 그러니 더 재미있는 일이라는 겁니 다.」 그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팔리 씨의 꿈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미 이야기했다 시피 그는 자기가 자살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리 씨는 정말 자살을 하고 말았지요. 그는 방 안에 혼자 있었으며, 그의 옆에서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 고 그가 권총으로 자살을 한 그 시간에 방으로 들어가거나 방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다면 그건 곧 무슨 뜻 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스틸링플리트가 말했다. 그의 말에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가 말을 이었다. 「팔리 씨의 죽음은 타살이었네. 비정상적이고도 아주 교묘하게 계획된 살 인이었던 것이지.」 또다시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 의 눈동자는 생기있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팔리 씨는 그날 밤 왜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일까? 그곳에 내가 보아서는 안될 무엇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그 방에는―바로 베네딕트 팔리 자신 이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 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팔리 씨는 어째서 닮은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두 통의 편 지를 구별해 내지 못한 것일까요? 여러분, 그 이유는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그가 아주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적 인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런 도수 높은 안경을 쓰게 되면 전혀 앞 을 못 보게 되는 법이지요. 그렇지 않나, 의사선생?」 스틸링플리트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야 물론―그렇지요.」 「팔리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서 어째서 나는 내가 마치 사기꾼이나 연극을 하고 있는 연극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요? 그날 밤의 무대장치를 잘 생각해 봅시다. 어두침침한 방 안,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잘 보지 못하도록 똑바로 나에게만 향해 있었던 녹색 갓을 씌운 스탠드 불빛. 내가 본 것이라고는―그 유명한 누더기 가운과 매부리코(이것은 물론 잘 만들어진 인조코를 붙인 것이지요), 앵무새의 볏처럼 쭈삣쭈삣 서 있는 백발, 눈동자를 감추고 있었던 도수 높은 안경. 팔리 씨가 꿈 같은 것을 꾸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들은 이야기와 팔리 부인의 증언뿐입니다. 베네딕트 팔리가 책상 서랍에 권총 을 넣어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역시 내가 들은 이야기와 팔 리 부인의 증언뿐이었지요. 따라서 두 사람이 이번 사기극을 연출했다는 이 분명해졌습니다―바로 팔리 부인과 휴고 콘워시입니다. 콘워시는 나 한테 편지를 보내고 집사한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뒤 보란 듯이 영화 구경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열쇠로 집안에 들어온 다음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분장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트 팔리의 역할 을 그럴 듯하게 해낸 겁니다. 그럼, 다시 오늘 오후로 돌아와 봅시다. 콘워시 씨가 기다리고 있었던 기회가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자, 층계참에는 베네딕트 팔리의 방으로 들 어갔거나 그 방에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증언해 줄 두 사람 의 증인이 있습니다. 콘워시는 특히 요란한 소음을 내며 차의 행렬이 지 나가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런 다음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옆방에 있는 책상에서 미리 훔쳐다 놓은 집게로 어떤 물건을 집은 채 옆방의 창 문 쪽으로 내밉니다. 베네딕트 팔리는 그것을 보고 창가로 다가옵니다. 콘워시는 재빨리 집게를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팔리가 창밖으로 몸을 내 밀고 트럭들이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밖에서 지나가는 그 순간 콘워시는 미리 준비해 놓은 권총으로 그를 쏩니다. 맞은편에는 살풍경한 모습의 벽이 있을 뿐 범행의 목격자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콘워시는 그로부터 한 반 시간 정도를 기다린 다음 서류를 몇 장 챙깁니다. 그 서 류들 사이에 집게와 권총을 감춘 다음 층계참으로 나가 옆방으로 들어갑 니다. 그는 집게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권총에다 죽은 사람의 지문을 찍은 뒤 그 총을 바닥에 버려둡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와 팔리 씨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립니다. 그는 내가 받은 편지가 발견되어 내가 이곳에 다시 오도록 준비를 해놓 습니다. 나는 이곳에 다시 와서 내가 들은 이야기―'팔리 씨의 입'에서 직 접 들은―그가 꾸었다는 그 이상한 '꿈에 대한 이야기와―꼭 자살하고 말 것만 같았다는 그 이상스런 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 기를 그대로 믿은 몇몇 사람들은 최면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 겠지요―하지만 결론은 결국 권총을 잡을 사람은 틀림없이 베네딕트 팔 리 자신이었다는 것으로 나게 되었을 겁니다.」 에르큘 포와로의 시선이 미망인의 얼굴에 가서 멈추었다―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낭패감과―하얗게 질린 표정―그리고 극도의 공포감을 만족스러운 듯 그는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을 행복하게 끝낼 수 있었겠지요. 굴러 들어온 25만파 운드를 가지고 두 연인은 축복 속에 함께……」 존 스틸링플리트 박사와 에르큘 포와로는 노스웨이 저택의 옆길을 따라 함 께 걷고 있었다.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공장의 거대한 벽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들의 왼쪽 머리 위에는 바로 베네딕트 팔리의 방 창문과 휴고 콘워시의 방 창문이 있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물건을 바닥에서 집어들었다―그것은 헝겊으로 만든 검은 고양이 인형이었다. 「이것 보라고!」 그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콘워시가 집게로 집어 팔리의 창문 앞에다 들이민 거야. 자 네도 기억하지? 팔리 씨한테는 고양이 혐오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이것을 보고 그가 창문 앞으로 다가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네.」 「콘워시는 이것을 바깥으로 떨어뜨린 뒤에 왜 주우러 오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런 짓을 하면 틀림없이 혐의를 받 게 될 텐데. 그리고 나중에 이 인형이 발견되었다 해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을 거야―어떤 어린애가 이곳에 와서 놀다가 인형을 떨어뜨려 놓고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일세.」 「그렇겠군요.」 한숨을 내쉬며 스틸링플리트가 말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죠. 하지만 에르큘 만큼은 그렇지 않았어요! 포와로 씨, 당신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끝까지 당신이 이번 사건을 교묘하게 계획된 암시 살인으로 끌고가 고 있다고 생각했죠. 제가 보기에 그 두 사람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팔리 집안의 그 사람들은 정말 음흉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군요. 맙소사, 그 여자의 변한 모습이라니! 만일 그녀가 히 스테리를 부리면서 손가락으로 당신 얼굴을 할퀴려고 들지만 않았어도 콘워시는 용케 이번 사건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때에 그 여자를 당신한테서 떼어놓았기에망정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오히려 그 아가씨가 괜찮아 보이더군요. 용기도 있고 머리도 좋고 말입니다. 만일 제가 지금부터 그녀한테 접근을 한다면 저를 재산을 노 린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까요……?」 「쯧쯧, 여보게, 벌써 한발 늦었어.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 를 잡고 있네. 그녀의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행복의 길이 열리 는 일만 남았어.」 「잘 생각해 보면 그녀한테도 별로 반갑지 않은 아버지를 살해할 만한 동 기는 충분히 있었던 셈이군요.」 「동기와 기회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아.」 포와로가 말했다. 「거기에다 범죄적인 성격도 가세해야 한다는 말일세!」 「포와로 씨, 당신 같은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스틸링플리트가 말했다.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그 궁지를 잘 모면해 나갈 테지요. 솔직히 그런 일 은 당신한테는 누워서 떡먹기가 아닙니까―무슨 말이냐 하면, 애초에 그 런 일은 끝이 빤한 이야기니까 당신 같은 분은 아예 그런 일을 저지를 생각도 안한다는 거죠.」 「그것은―」 포와로가 말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국인다운 생각인걸.」 -The End-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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