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쇼의 아방궁 ● (Greenshaw's Folly) Agatha Christie 著 -1- 두 남자는 무성한 관목 숲의 모퉁이를 돌았다. "자, 다 왔습니다."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저것이 바로 그 저택이지요." 호레이스 바인들러는 감탄한 듯 탄성을 질렀다. "오, 세상에."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로 멋지군." 그의 목소리는 정말 멋진 물건을 발겨한 심미가다운 기쁨으로 충만해 숲속 가 득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주변의 경건함에 겁이라도 먹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믿을 수가 없어. 우리 시대에 이런 대 건축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니! 이 건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훌륭한 건축물이야." "선생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지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좋아한다고? 세상에―" 호레이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카메라의 덮개를 벗기고 사진찍을 준비 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수집품 중에서 최고의 것이 될 거야." 그는 행복에 겨운 듯 중얼거렸다. "거대한 건축물 사진을 수집하는 일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지, 그렇지 않 나? 7년 전 어느 날 밤에 나는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 각을 했지. 내가 수집한 사진 중 가장 최근에 찍은 걸작품은 제노아에 있는 캄포 산토(공동 묘지)에서 찍은 사진이야. 그러나 이번 사진은 그것을 능가하 는 사진이 될 것이 분명해. 그런데 이 건축물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글쎄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아서 말입니다."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래도 이름 같은 것은 있을 것이 아닌가?" "아마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건물을 그저 그린쇼의 아방궁이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린쇼란 이 건축물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겠지?" "그렇습니다. 아마 1860년이나 70년쯤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그는 이 지 방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요. 신발 하나 제대로 사 신지 못할 정도로 가난 한 한 소년이 자라서 어마어마하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저 택을 짓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단순히 자기의 재력(財力)을 과시하기 위해 이 저택을 지었다고 말하는 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기의 채권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 저택 을 지었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 지만, 만일 채권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 저택을 지었다는 사람들 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 사람의 의도는 어긋났음이 분명합니다. 이 저택이 거 의 완성되어 갈 즈음 그는 파산을 했거나,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 니까요. 그런 연유에서 사람들은 이 저택을 그저 그린쇼의 아방궁이라고만 부 르고들 있습니다." 호레이스의 카메라가 찰칵 소리를 냈다. "됐어." 만족스런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생각난 일이지만 자네한테 내 수집품 중 310번을 보여주어야겠어. 그것 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있는 이탈리아식 대리석 벽난로 장식이라고." 그는 그 저택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그린쇼라는 사람은 어떻게 이런 저택을 지을 생각을 다 해냈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걸."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지요."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는 틀림없이 루아르 성(城)을 방문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안 드세요? 저 작은 탑들을 보세요. 그리고 이것은 약간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는 동양을 여행하기도 한 것 같아요. 타지마할의 영향을 받았다는 표시가 역 력히 나타나 있거든요. 그렇지만 역시 무어풍의 저 날개 건물은 맘에 듭니 다."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베네치아 궁전 같은 저 건물도요." "그나저나 이런 생각을 실현시켜 줄 건축가를 그는 어디서 찾아냈을까?" 레이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문제는 별로 어려웠을 것 같지가 않군요." 그가 말했다. "아마 그 건축가는 평생을 놀고먹고 지내도 좋을 정도의 보수를 받고 일 선에서 물러났겠지요. 반면 그 가엾은 그린쇼 노인은 파산을 하고 말았고요." "이 저택을 저쪽에서도 좀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호레이스가 물었다. "아니면 몰래 저쪽으로 다가가 보든지." "저쪽으로 가보도록 하지요, 뭐." 레이먼드가 말했다.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에 그는 그 저택의 모퉁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호레이스도 재 빨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에 지금은 누가 살고 있나? 고아원이라도 되었나? 아니면 휴일에만 놀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휴식처로 바뀌었나? 분명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운동장 같은 것도 없고 근대적인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일세." "아, 아닙니다. 이곳에는 아직 그린쇼 집안의 인물이 한 사람 살고 있지요." 레이먼드가 어깨 너머로 대답했다. "이 저택의 건물 자체는 별로 많이 파괴된 편이 아닙니다. 그린쇼 노인이 죽자 그 아들이 이 저택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구두쇠로서 이 저택의 한 구석진 방에서 일생을 보냈지요. 단 한푼도 돈을 쓰지 않은 채 말입니다. 아 마 쓸 돈이 한푼도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지금은 그 사람의 딸이 이곳에서 살 고 있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할머니인데―아주 괴짜이지요." 레이먼드는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린쇼의 아방궁을 생각해 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내심 우쭐해 하고 있었다. 문학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항상 시골에서 주말을 좀 지내봤으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고 있지만, 막상 시골에 와서 지내다 보면 그 시골생활이 아주 따분하 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일은 일요신문이 배달되어 올 테니 까 별 문제가 없다. 어떻게 오늘 하루만 그럭저럭 때우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레이몬드 웨스트는 호레이스 바인들러의 거대 건축물을 찍은 그 유명한 사진수 집품을 더 늘려준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그린쇼의 아방궁을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권유해 보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저택의 모퉁이를 돌자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은 잔디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정원의 한 귀퉁이에는 인공적으로 쌓아놓은 커다란 돌산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 돌산 위에서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본 호레이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레이먼 드의 팔을 꽉 잡았다. "여보게―" 그가 나지막히 부르짖었다. "저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이 보이나? 잔가지 무늬가 날염된 옷을 입고 있군 그 래. 마치 하녀들이 있던 시대에―그 하녀들이 입던 옷차림 같잖은가. 나의 가 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침이면 빳빳한 날염 드레스와 모자를 쓴 진짜 하녀가 나를 깨우던 그 시골집에서 살 때의 기억이라네. 정말 그랬지, 정말이라고―모자까지 꼭 쓰고 있었어. 모슬린 천으 로 만든 드레스에 장식 리본까지 달려 있었지. 아니야, 장식 리본이 달린 옷 을 입은 것은 객실 하녀였던가? 아무튼 그녀는 진짜 하녀였고, 커다란 놋쇠그 릇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방안으로 갖다주고는 했지. 정말 그때는 얼마나 즐거운 시절이었던지!" 날염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손에 모종삽을 든 채 그 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정말 아주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 다. 듬성듬성한 철회색빛 머리카락은 빗질도 하지 않은 채 어깨 위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에는 이탈리아에서 말한테나 덮어씌울 것 같은 밀짚모자 가 푹 눌러씌워져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채색된 날염 드레스는 거의 발목에 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햇볕에 그을린 그리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얼굴에 날카로운 두 눈동자가 그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린쇼 양." 레이먼드 웨스트가 그녀한테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저희 집에 묵고 계시는 호레이스 바인들러 씨라는 분이신데―" 호레이스는 고개를 숙이며 모자를 벗었다. "저―저―고대역사와―저―훌륭한 건축물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 이시지요." 레이먼드 웨스트는 자신이 유명한 작가로서 이 지방이 명사(名士)이며, 다른 사 람들은 가볼 생각도 못해 보는 곳을 자기만은 가볼 수 있다는 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털어놓 을 수 있었다. 그린쇼 양은 자신의 등뒤로 그 거대한 몸체를 드러낸 채 음산하게 서 있는 지 난날의 영화(榮華)의 잔해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정말 멋진 저택이기는 해요."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 저택을 지으셨지요―물론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 만 말예요. 할아버지는 이 고장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이 저택 을 지은 것이라고들 합디다." "틀림없이 마을 사람들도 놀랐을 겁니다, 부인." 호레이스 바인들러가 맞장구를 쳤다. "바인들러 씨는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십니다."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그러나 그린쇼 양은 문학평론가 같은 사람들을 그 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무덤덤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린쇼 양은 저택에 대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저택은 우리 할아버지의 천재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 같아요. 그런데도 바 보 같은 작자들이 이곳에 와서는 나한테 말하기를 왜 이 저택을 팔고 아파트 로 가서 살지 않느냐고 하지 뭐겠어요? 내가 왜 아파트 같은 데로 가서 살아 야 해? 이 저택에서 나는 태어났고 계속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그린쇼 양이 말했다.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이 말이야." 과거의 일을 더듬고 있기라고 하듯 생각에 잠긴 채 그녀가 말했다. "이 집에서 우리 세 자매가 자랐어요. 로라는 목사보와 결혼했지요. 아버지는 그녀한테 단 한푼도 돈을 주지 않았어요. 성직자가 세속적인 것을 탐내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녀는 아기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 아기마저도 결국 죽고 말았어요. 네티는 승마 선생하고 야밤도주를 해버렸다오. 그러자 당연히 아버지는 그녀의 이름을 유언장에서 빼버렸지요. 그 승마 선생은 해리 플레처라는, 얼굴은 꽤 잘생긴 놈이었지만 그야말로 백수건달이었지 뭐요. 아 마 모르긴 해도 네티도 그 녀석하고 살면서 속을 꽤 많이 썩혔을 거야. 어쨋 든 그녀도 별로 오래 살지를 못했어요. 그 두 사람 사이에 난 아들이 하나 있 는데, 가끔 가다 나한테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물론 그 애를 그 린쇼 가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린쇼 가문의 최후의 생존자 는 나밖에 없는 셈이지." 그녀는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굽은 양어깨를 한껏 펴면서 비뚤게 쓰고 있었던 밀짚모자를 똑바로 고쳐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그녀가 날카로운 목 소리로 말했다. "아, 크레스웰 부인, 무슨 일이지?" 저택 쪽에서 그들이 있는 쪽으로 어떤 여자가 다가왔다. 그린쇼 양과 그녀를 나란히 놓고 보니,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서로 너무 달라서 보기에도 우스울 지 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놀랄 만한 것은 크레스웰 부인의 머리 장식이었다. 파랗 게 물들인 머리카락은 꼼꼼하게 컬과 롤로 손질이 되어 탑 같은 모양을 이루며 위로 땋아 올려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프랑스의 어느 후작 부인으로 분장 하고서 금방이라도 가장 무도회에 나갈 듯한 모습이었다. 중년의 몸매를 감싸고 있는 옷은 당연히 옷 스치는 상쾌한 소리가 나는 검은 비단옷이어야만 하겠지 만, 실제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검은색 레이온으로 만 든 것이었다. 그녀는 덩치가 그리 큰 여자는 아니었지만 가슴만은 풍만하고 탄 력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일단 그녀가 입을 열자 목소리는 상상 외로 낮고 굵 었다. 말씨는, 'h'음을 과장되게 발음함으로써 아주 먼 옛날 그녀가 젊었을 때 'h'음을 자꾸 빠뜨리고 발음했었던 버릇을 고치려고 애쓴 것은 아닐까 하는 추 측을 불러일으키는 점만 제외한다면 꽤 고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생선 말인데요, 마님." 크레스웰 부인이 말했다. "대구 토막 말이에요. 그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앨프리드한테 가서 빨리 좀 갖다달라고 말 좀 하랬더니 싫다고 하잖겠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린쇼 양은 그 말을 듣자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싫다고 했다고? 그 사람이?" "마님, 요즘 들어서 앨프리드가 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요." 그린쇼 양은 자기의 흙묻은 손가락 두 개를 입가로 가져가더니 갑자기 귀청을 찢을 듯이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이렇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앨프리드. 앨프리드, 잠깐 이리로 와봐!" 그러자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저택의 모퉁이를 돌아 손에 삽을 든 한 젊은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을 한 젊은이였는데, 사람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면서 아주 악의에 가득찬 눈초리로 크레스웰 부인을 흘끗 노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앨프리드. 생선가게에 좀 다녀오라고 했더니 싫다고 했다면서?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응?" 앨프리드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갔다오겠습니다. 마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 는 것이라면은요." "그렇게 좀 해줘. 저녁 식탁에 꼭 필요한 것이니까 말야." "알겠습니다, 마님. 곧 다녀오도록 하지요." 그는 또다시 불손한 눈초리로 크레스웰 부인을 흘끗 보았다. 그러자 크레스웰 부인은 얼굴이 빨개지며 나지막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니까." "지금 막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린쇼 양이 입을 열었다. "마침 우리가 필요할 때 두 양반께서 와주었지 뭐겠어. 그런 생각이 들지 않 아, 크레스웰 부인?" 그러자 크레스웰 부인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무슨 말씀인지요, 마님―" "바로 그 문제 말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린쇼 양이 말했다. "유언장으로 혜택을 입게 되는 사람은 그 유언장의 입회인이 될 자격이 없다 는 것 말이야. 내 말이 맞지요?" 그녀가 레이먼드 웨스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분명히 그렇지요." 레이먼드가 대답했다. "나한테도 그 정도의 법률 상식은 있지요." 그린쇼 양이 말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두 분은 모두 훌륭한 지위에 계신 분들이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을 풀바구니 속으로 던져버렸다. "나하고 같이 서재로 좀 올라가 주시겠어요?" "기꺼이 그러지요." 호레이스가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는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들이 프랑스식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그 거실의 벽에는 빛바랜 비단천으로 만든 벽걸이가 걸려 있었고, 가구들에는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덮개들이 씌워져 있었다. 그 거실을 지나자 어둠침침한 큰 홀과 계단이 나타났다. 그린쇼 양은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곳은 우리 할아버지의 서재였지요." 그녀가 그들에게 설명을 했다. 호레이스는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기쁨을 느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관 점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온갖 희귀한 물건으로 가득차 있는 방이었다. 아주 색 다른 가구 위에는 스핑크스의 머리가 얹혀 있었으며, 그 밖에 폴과 버지니아를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청동상 하나와, 그가 오래 전부터 사진으로 찍 어두고 싶어한 고전적 문형을 지닌 커다란 청동시계가 방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좋은 책들이 많이 있지요." 그린쇼 양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먼드는 이미 눈으로 이 방안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강 훑어본 바로는 이 방안에 있는 책들 중에서 특별히 흥미를 끌 만한 것은 한 권도 없었으며, 더구나 그 어떤 책에도 과거에 읽었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책들은 모두 한 90년 전쯤에 신사의 서재를 꾸미기 위해서나 필요했음직한, 표지가 화려하게 꾸며진 고전물 세트였다. 그 가운데에는 과거의 유행소설이 몇 권 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 책들 역시 읽혀진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린쇼 양은 넓은 책상에 달려 있는 서랍들을 이것저것 뒤졌다. 그러더니 마침 내 양피지로 만든 서류를 한 장 끄집어냈다. "이것이 내 유언장이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재산을 누구한테 물려주기로 한다―뭐 그런 말을 적어놓은 서류 말이에요. 아 마 내가 유언장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죽어버린다면 그 말거간꾼의 자식놈 이 내 재산을 다 차지해 버리고 말 거예요. 해리 플레처, 그놈은 얼굴만 번지 르르했지 속은 더러운 악당이었다고요. 그런 놈의 자식한테 어떻게 이 저택을 물려줄 수가 있겠어요? 천만의 말씀이지." 그녀는 마치 누군가 그녀의 생각에 반대를 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듯 말을 계 속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작정해 두었답니다. 이 저택을 크레스웰한테 물려주자고 말입니다." "댁의 가정부한테 말입니까?" "그래요. 나는 이미 그녀한테도 그렇게 일러두었어요. 나는 내 재산 전부를 그 녀한테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만들어놓았으니 더 이상 그녀한테 급료를 줄 필요도 없어졌지요. 내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더 저축해 놓는다면 그녀한테는 그만큼 더 이득인 셈이니까. 그리고 그녀도 이 생활이 지겨울 때면 나한테 미리 알려놓지 않아도 언제든지 휴가를 갈 수도 있고요. 보셨다시피 자기는 아주 숙녀인 척 멋을 내려고 애를 쓰지만 그녀의 아버지 는 연관공 노릇을 하며 겨우 먹고살았지요. 그러니 저렇게 고상한 척하는 것 이 우스울 수밖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양피지를 펼쳤다. 그런 다음 펜을 잡고 그 끝에 살짝 잉크를 뭍힌 뒤에 그녀는 그 양피지에 캐서린 도로시 그린쇼라고 서명을 했다. "자,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두 분 다 보셨지요? 이제는 두 분이 여기에다 서명을 해주세요. 그래야 이 유언장이 법률적으로 유효하게 될 테니까." 그녀는 레이먼드 웨스트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녀가 자기한테 부탁하 는 일에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재빨리 그 유명한 자신의 서명을 그녀가 내민 서류에 휘갈겨 써넣었다. 하루에 적어도 여섯 번 이상 아침마다 받는 우편물에 그는 그와 똑같은 서명을 해주고 는 했었다. 호레이스도 그가 건네주는 펜을 받아들고 자기 서명을 했다. "끝났군요." 그린쇼 양이 말했다. 그녀는 책장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그 앞에 서서 망설이는 태도로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책장의 유리문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내어 그 책갈피 사이 에 접은 양피지를 끼워넣었다. "물건을 숨겨두기 위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장소를 마련해 놓았지요." 그녀가 말했다. "「레이디 오들리의 비밀」이로군요." 그녀가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을 때 재빨리 그 책의 제목을 보아둔 레이먼드 웨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린쇼 양은 다시 한 번 껄껄거리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는 베스트셀러였던 책이지요." 그녀가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쓰는 책과는 비교도 안되는 내용이지만. 그렇지 않수?" 갑자기 그녀가 친밀한 태도로 레이먼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레이 먼드는 자기가 작가라는 사실을 이런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오히려 의 아스럽기만 했다. 레이먼드 웨스트라는 이름이 문단에서 자자한 것은 사실이지 만,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록 중년으로 접어 들면서 그의 필치가 조금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삶의 추악한 면을 냉 철하게 파헤치는 작품들을 써온 것이다. "괜찮다면―" 호레이스가 숨쉴 틈도 없이 물었다. "이 시계를 사진으로 좀 찍어두고 싶군요." "괜찮고말고요." 그린쇼 양이 선뜻 허락했다. "내가 알기로 이 시계는 파리 박람회에서 샀다고 들었어요." "틀림없이 그렇겠지요." 호레이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사진을 찍었다. "이 방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린쇼 양이 말했다. "이 책상에 있는 것은 온통 할아버지의 일기뿐이에요. 읽으면 재미있을 것도 같기는 한데, 내가 시력이 별로 안 좋아서 읽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이 일기 들을 책으로 펴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러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단 말이에요." "그 일을 할 사람을 따로 고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사람을 고용한다고? 글쎄,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레이먼드 웨스트는 자기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그가 말했다. "만나보게 되어서 기뻤어요." 그린쇼 양이 품위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두 분이 이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경찰 인 줄만 알았다니까." "어째서 경찰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한 번도 질문 없이 넘어가는 법이 없는 호레이스가 물었다. 그린쇼 양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시간을 알고 싶으면 경찰한테 물어보세요." 마치 노래를 하듯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이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농담을 한 뒤에 팔꿈치로 호레이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재미있는 오후였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곤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호레이스가 말했다. "정말 그곳에는 없는 게 없더군. 그 서재에서 딱 한 가지 없는 것은 시체뿐이 었어. 옛날 추리소설을 보면 서재에서는 항상 살인이 일어나기 마련이었지―그 추리작가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서재가 바로 저런 서재였음이 분명해."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레이먼드가 말했다. "우리 제인 이모님과 이야기해 보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제인 이모님? 지금 마플 양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약간 당혹감을 느끼며 그가 말했다. 그 전날밤 그는 매력적인 그 구식 할머니를 소개받기는 했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살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저 평범한 할머니일 뿐이었다. "오, 그럼요." 레이먼드가 말했다. "살인이 그 이모님의 전문이니까요." "오, 이거 호기심이 돋는걸. 그런데 살인이 그 이모님의 전문이라는 것이 도대 체 무슨 뜻인가?" "바로 이렇습니다."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는 알기 쉽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살인사건 속에 휘말려드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그런가하면 그 살인사건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사람도 있습니 다. 저희 제인 이모님은 바로 그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 속하지요." "아니,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건가?" "절대로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 믿지 못하시겠다면 옛날 런던 경시청의 총감 이름이나 지방 경찰 서장의 이름, 아니면 수사과의 민완경감 한두 사람의 이 름을 대드릴 수도 있습니다." 호레이스는 깜짝깜짝 놀랄 만한 것들이 너무 많다고 유쾌하게 떠들어대고 있었 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 그들은 레이먼드의 아내인 조안 웨스트와 그녀의 조카 인 루 옥슬리, 그리고 늙은 마플 양을 모아놓고 그날 오후에 일어났었던 일들을 대강 이야기해 준 다음, 그린쇼 양이 자기들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자세하게 늘 어놓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호레이스가 말했다.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웬지 약간 불길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 있 었던 것도 같거든요. 가령 그 후작 부인 같은 머리 모양을 한 가정부만 해 도―지금쯤은 아마 여주인이 자기한테 유리한 유언장을 만들어 두었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찻주전자에 비소를 집어넣은들 누가 알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제인 이모님?" 레이먼드가 말했다. "과연 살인이 일어날까요, 안 일어날까요? 이모님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약간 엄한 표정으로 털실을 감으면서 마플 양이 입을 열었다. "지금처럼 그런 일들을 놓고 농담을 해서는 안될 것 같구나, 레이먼드. 물론 비소를 사용할 가능성은 아주 높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에 있을지도 모르지. 제초제말이다." "어머, 정말 그렇겠네요, 여보."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조안 웨스트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너무 번한 일이 아니겠어요?" "유언장을 만드는 것이야 만드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레이먼드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할머니가 남겨줄 것이라고는 그 끔찍한 하얀 코끼리 같은 집뿐일 텐데 누가 그런 것을 탐내겠어요?" "영화사에서 살 수도 있잖나." 호레이스가 말했다. "아니면 호텔이나 무슨 공공시설이 들어설 수도 있을 테고." "그렇더라도 아주 헐값으로 사려고 들 텐데요."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마플 양은 고개를 저었다. "오, 레이먼드, 얘야,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너와 생각이 다르단다. 그 재산문 제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번 대신, 또 그 만큼 낭비가 심한 사람이었으니 돈을 모을 수가 없었겠지. 그래서 네 말대로 그 사람이 점점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파산한 것 은 아니었을 게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아들이 그 저택을 물려받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야. 그래서 이런 경우 늘 정해져 있듯이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게 되지. 아주 지독한 구두쇠가 되는 거야. 그 사람은 단 한푼도 쓰는 일이 없이 돈을 모두 모아두었어.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지 만, 아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는 꽤 많은 돈을 모아두었을걸. 그린쇼 양 은 바로 그런 아버지를 쏙 빼닮아 돈 쓰는 일을 아주 싫어하고 있지. 그래, 그 녀가 어딘가에 꽤 많은 돈을 숨겨두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그렇다면―" 조안 웨스트가 말했다. "이러는 것이 어떨까요?―루를 그 저택으로 보내 보는 것이 말예요." 그들은 일제히 난로가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루를 쳐다보았다. 루는 조안 웨스트의 조카였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최근, 그녀의 표현처럼 풍지 박산이 되어 남편은 그녀와 어린 두 아이들만 남겨놓은 채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 아이들을 키울 양육비조차 아주 곤란을 받고 있는 지경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조안이 설명했다. "만일 그 그린쇼 양이 자기 할아버지의 일기를 정리해서 출판할 수 있도록 책 을 꾸밀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면 말예요……" "그것 괜찮은 생각인걸."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러자 루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즐겁게 일할 수도 있을 것도 같 고요." "그럼, 내가 그녀한테 편지를 써주지."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마플 양이 말했다. "그 노부인은 무슨 뜻으로 경찰이라는 말을 입밖에 낸 것일까?" "오, 그건 단순한 농담이었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났는데 말이다."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플 양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 이야기가 나한테 바로 네이스미스 씨에 대한 일을 기억나게 해준 거 야." "네이스미스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레이먼드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양봉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마플 양이 말했다. "일요신문에 실리는 낱말맞추기 퀴즈를 아주 썩 잘했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저 재미로 사람들한테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기를 좋아했거든. 그래서 가끔씩 그것 때문에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 모든 사람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네이스미스 씨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사람과 그린쇼 양 사이에 닮은 점이라 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침내 사랑하는 제인 이모가 나이를 많이 먹은 탓으로 요즘에는 약간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다고 모두들 결론을 내렸다. -2- 호레이스 바인들러는 그 이상의 거대 건축물의 사진은 수집하지 못한 채 런던 으로 돌아갔다. 레이먼드 웨스트는 그린쇼 양에게 자기가 편지를 정리하는 일에 아주 적격인 루이자 옥슬리 부인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녀를 고용할 의 사가 없느냐고 편지를 썼다. 며칠이 지나자 거미줄을 친 것 같은 구식 글씨체로 직접 쓴 그린쇼 양의 답장 이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자기는 꼭 그 옥슬리 부인을 고용하고 싶으니 옥슬리 부인과 의논해서 저택을 방문할 날짜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루는 지체없이 약속 날짜를 정하고, 그 지정된 날에 그린쇼 저택을 방문한 다 음 유리한 조건으로 고용이 되어 당장 그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레이먼드한테 말했다. "모든 일이 다 잘 됐지 뭐예요. 아침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 다음 그 린쇼의 아방궁으로 출근하고,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학교에 가서 그 애들 을 데려오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저택의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요! 그 할머니 만 해도 보지 못한 사람은 믿지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일을 시작한 첫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자 그날 경험한 것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가정부의 모습은 거의 보지도 못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11시 반이면 커피와 비스켓을 들고 제 방으로 들어오는데, 말을 할 때 면 입을 오므린 채 아주 점잔을 빼는 투로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사실 저한 테는 거의 말을 시키지 않아요. 그녀는 제가 그 집에 고용된 것이 아주 못마 땅한가봐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와 정원사인 앨프리드는 아주 사이가 나쁜 것 같았어요. 앨프리드는 이 지방에서 자란 청년인데, 아주 게으르고, 제가 보기에 그 사람과 가정부는 서 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꺼려하는 것 같았어요. 그 문제에 대해 그린쇼 양 은 그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가정부한테 이렇게 말하곤 하더군요. '내 기억으로는 정원사와 가정부는 옛날부터 늘 사이가 좋지 못했어. 우리 할아버 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랬으니까. 그때는 정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어른 셋 에다가 남자 아이가 한 명 있었고, 집안에는 하녀가 여덟 명 있었는데 항상 마찰이 끊이지가 않았다고.'" 그 이튿날이 되자 루는 새로운 뉴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아침 그린쇼 양이 제게 자기 조카한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린쇼 양의 조카한테?" "그래요. 그 사람은 '보어햄 온 시'에서 하계공연을 하고 있는 극단에 소속된 배우인가 봐요. 저는 극장으로 전화를 걸어서 내일 점심식사를 하러 오라는 메모를 그 사람한테 남겨두었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일을 이거예요. 글쎄 그 할머니가 그 일을 가정부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아마 크레스웰 부인이 그린쇼 양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무슨 짓을 저질렀나 봐요." "내일이면 이 스릴 만점인 연재물의 그 다음 줄거리가 이어지겠군." 레이먼드가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잡지의 연재물 같네요. 조카와의 화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야 기겠죠?―이제 새로운 유언장을 하나 더 만들고 옛날에 만들어둔 것은 없애 버리겠군요." "제인 이모님, 이모님 얼굴 표정이 아주 심각해 보이는걸요." "내 표정이 그랬나? 그런데, 루, 그밖에 경관에 대해 하는 말은 듣지 못했니?" 루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경관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요." "그린쇼 양이 그런 말을 한 것에는―" 마플 양이 말했다.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 분명해." 그 이튿날 루는 밝은 기분으로 자기의 일터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느 때와 같 이 열려진 채 있는 현관문을 들어섰다―이상한 일이었지만 이 저택의 모든 창 문과 문들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린쇼 양은 도둑을 별로 겁내는 것 같지 않았 다. 이 저택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무게가 몇 톤씩이나 되는 것들 이고, 또 대부분 아무 값어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듯싶었다. 루는 찻길 있는 데서 앨프리드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무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낙 엽을 쓸기 시작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게으름뱅이야. 하지만 생긴 것은 정말 잘생겼단 말야, 그녀는 이렇게 혼자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홀을 지나 2층 서재로 올라가다가 무심코 벽난로 선반 위에 걸려 있는 나타니엘 그린쇼의 커다란 초상화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초상화는 빅토리아 여왕의 전성시대 때의 그의 모습으로, 그 그림 속에서 그는 뚱뚱한 배 위로 보이는 금 시계줄 위에 양 손을 올려놓은 채 커다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배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두툼한 턱, 짙은 눈썹, 숱많은 검은 콧수염이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는 나타니엘 그린쇼가 젊었을 때는 아주 잘생겼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얼핏 앨프리드와 닮은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녀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타자기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는 책상 한쪽에 붙어 있는 서랍에서 낡은 일기장을 끄집어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잔 가지 무늬가 날염된 암갈색 옷을 입은 그린쇼 양이 정원에 쌓아둔 나지막한 인 공 돌산 위에 몸을 구부린 채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 어왔다. 이틀씩이나 계속 비가 왔기 때문에 잡초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자란 루는 만일 자기가 정원을 갖게 된다 해도 일일이 손으로 잡초 를 뽑아야만 하는 인공 돌산 같은 것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그녀도 자기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1시 반이 되자 언제나와 같이 크레스웰 부인이 커피잔을 받쳐들고 서재로 들 어왔다. 한눈에 그녀가 지금 기분이 매우 언짢아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탁자 위에 커피잔을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내려놓은 뒤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점심때에는 손님도 온다던데―도대체 이 집구석에는 있는 것이 있어야지! 이 런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 그리고 어딜 갔는지 앨프리드는 모습 도 보이지 않으니." "제가 여기로 올 때 보니 그 사람은 자동차길 있는 데서 청소를 하고 있던걸 요." 루가 입을 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게 제일 손쉬운 일이니까요." 크레스웰 부인은 휙 하고 방을 나가더니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조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머릿속으 로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그녀는 다시 일에 착수했다. 일은 아주 재미있어서 시 간이 간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나타니엘 그린쇼는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할 당시 뭐든지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써두는 기쁨을 맘껏 누렸던 것 같 다. 지금 타자를 치고 있는 페이지에는 이웃 마을에 있는 술집 여자에게서 느낀 매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루는 이것을 정리하려면 상당한 편집기술이 필 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정원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나 그녀는 열려져 있는 창가로 뛰어갔다. 창밖에서는 그린쇼 양이 인공 돌산이 있는 곳에서 저택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목 부분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손 사이로 깃털이 달린 대 같은 것이 삐죽 튀 어나와 있었다. 루는 그것이 화살대라는 것을 알고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찌그러진 밀짚 모자를 쓰고 있는 그린쇼 양의 머리가 가슴 쪽으로 푹 고꾸라 졌다. 그녀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목소리로 루를 부르고 있었다. "……쐈어……그놈이 나를 쐈어……화살로……살려줘……" 루는 황당하여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녀가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녀는 문을 열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자신이 방안 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달려갔다. "문이 잠겼어요." 그러자 그린쇼 양은 루한테 등을 돌리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정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저쪽에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경찰을 불러……전화해……" 그런 다음 술취한 사람처럼 지그재그로 비틀거리던 그린쇼 양의 모습이 아래 에 있는 창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갔는지 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 마 뒤 루의 귀에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넘어지는 소 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조용해졌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아래층에서 벌어졌을 장 면들을 나름대로 떠올려 보았다. 그린쇼 양은 비틀거리며 거실로 들어가다가 미 처 세브르 찻잔 세트가 놓여 있는 작은 탁자를 피하지 못하고 그 탁자와 부딪 친 것이 틀림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루는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담쟁이덩굴도 배수관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문 두드리는 일에도 지쳐서 그녀는 창가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있는 방 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저쪽 창문에서 가정부가 머리를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서 저 좀 꺼내 주세요, 옥슬리 부인. 전 갇혀버렸어요." "저도 그런데요." "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경찰에는 전화를 걸어두었어요. 이 방에 전화가 있거든요. 하지만, 옥슬리 부인, 왜 우리가 갇히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 겠는데요. 문 잠그는 소리를 전혀 못 들었는데 말예요, 그렇잖아요?' "맞아요. 저도 그런 소리를 전혀 못 들었는데. 오, 하나님,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참, 어쩌면 앨프리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루는 목청껏 소리높여 고함을 쳤다. "앨프리드, 앨프리드!" "밥을 먹으러 갔나? 지금 몇 시죠?" 루는 자기 시계를 쳐다보았다. "12시 25분이에요." "12시 반이 되기 전까지는 식사하러 가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도 매번 틈만 보이면 그전에 슬금슬금 빠져나가 버린다니까." "저, 당신 생각으로는―당신 생각으로는―" 루는, "당신 생각으로는 그녀가 죽었을 것 같나요?" 라는 말을 물어보려고 했지 만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가 않았다. 이제는 별 도리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창틀 위에 걸터앉았다. 그로부터 둔해 보이는 헬멧을 쓴 경관 한 사람이 저택의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내기까지는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난 듯이 느껴졌다. 그녀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자 경관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면서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책망이 라도 하는 듯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그 위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나무라는 투로 그가 물었다. 루와 크레스웰 부인은 각각 자기들이 갇혀 있는 방의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에 있는 경관을 내려다보며 흥분된 어조로 방금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떠 들어대기 시작했다. 경관은 수첩과 연필을 꺼내들었다. "당신들 두 분은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실수로 방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말이 지요? 이름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우리를 방안에 가둔 것이라고요. 와서 좀 꺼내 주세 요." 그러자 여전히 나무라는 투로 경관이 말했다. "기다려요. 다 때가 되면 꺼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에 그는 아래에 있는 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한 번 기나긴 시간이 흘러간 것 같았다. 자동차 한 대가 이 저택에 도착 하는 소리가 루의 귀에 들려왔고―루가 느끼기에는 거의 한 시간 정도가 지나 간 것처럼 느껴졌지만―실제로는 그로부터 3분 뒤에 먼저 크레스웰 부인이, 그 리고 나서 루가 아까의 경관보다는 좀더 기민해 보이는 경사의 손에 의해 그 방으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린쇼 양은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루가 물었다. "어떻게―어떻게 되었죠?" 경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부인." 그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크레스웰 부인에게 미리 얘기했듯이 그린쇼 양은 돌아가셨습니 다." "살해당하신 거예요." 크레스웰 부인이 말했다. "이번 일은 그러니까―살인사건이라고요." 그러자 경사가 애매모호한 태도로 말했다.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마을 아이들이 활을 쏘았을지도 모르니까요." 또다시 자동차 한 대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사가 말했다. "검시관일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도착한 사람은 검시관이 아니었다. 루와 크레스웰 부인이 아래층에 내 려가 보니 한 젊은이가 머뭇거리는 태도로 현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루 와 크레스웰 부인, 그리고 경사를 보더니 문턱에서 걸음을 멈춘 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루가 듣기에는 약간 귀에 익은 목소리로―아마 그것은 그가 그린쇼 양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밝게 그가 입을 열었다. "저―실례합니다만―이곳에 그린쇼 양이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보다 먼저 괜찮으시다면 당신 이름을 좀 알고 싶은데요." 경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플레처라고 합니다." 그 젊은이가 대답했다. "내트 플레처. 실은 제가 그린쇼 양의 조카입니다." "그렇다면, 선생, 그―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사실은―" "아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습니까?" 내트 플레처가 물었다. "사실은―사고가 있었습니다―당신 이모님이 화살을 맞았지요―목의 동맥을 꿰뚫는―" 그러자 크레스웰 부인이 여느때의 고상한 품위 따위는 어디다 던져버렸는지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댁의 이모가 살해당했어요, 글쎄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까요. 댁의 이모가 살 해당했다고요." -3- 웰치 경감은 탁자 쪽으로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를 약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방안에 있는 네 사람을 차례차례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날 저녁의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사건의 진술을 듣기 위해서 웨스트 집 안으로 루 옥슬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린쇼 양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쐈어……그놈이 나 를 쐈어……―화살로……살려줘……'라고 말입니다."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몇 시쯤이었습니까?"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손목시계를 보았는데요―그때의 시간이 12시 25분이었습니다." "부인의 손목시계는 정확한 것이겠지요?" "그때 제가 벽걸이 시계도 보았으니까요." 그러자 경감은 레이먼드 웨스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 한 일주일 전에 당신과 호레이스 바인들러라는 분이 그린쇼 양의 유언 장에 입회인으로 서명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간략하게 레이먼드는 그와 호레이스 바인들러가 그린쇼의 아방궁을 방문했었 던 그날 오후의 일을 경감한테 들려주었다. 간략하게 레이먼드는 그와 호레이스 바인들러가 그린쇼의 아방궁을 방문했었 던 그날 오후의 일을 경감한테 들려주었다. "당신의 이번 증언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말을 듣고 난 웰치가 말했다. "그린쇼 양이 분명 자기 입으로, 자기 유언장이 가정부인 크레스웰 부인한테 유리하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크레스웰 부인이 자기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므로 크레스웰 부인한테 지금은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 다고 말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그녀가 나한테 이야기해준 바로는 그랬습니다." "그럼, 크레스웰 부인은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까?" "그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린쇼 양은 유언장 에 의해 이익을 받게 되는 사람은 입회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분명히 크레스웰 부인은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린쇼 양은 자기 입으로 저한테 이번 일을 크레스웰 부인과도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 일이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크레스웰 부인한테는 그날 작성된 유언장이 자신한테 이롭게 만들 어졌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군요. 그 정도면 그녀가 살 인을 할 만한 동기는 충분히 있는 셈입니다. 만일 그녀가 옥슬리 부인처럼 방 안에 틀림없이 갇혀 있지만 않았다면, 또 그린쇼 양이 확실하게 그놈이 쐈다 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이번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되었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 부인은 방에 갇혀 있었겠지요?" "오, 물론입니다. 케일리 경사가 그녀를 방 밖으로 꺼내 주었으니까요. 문을 잠 근 자물쇠는 아주 큰 구식으로서, 역시 구식의 커다란 열쇠가 달려 있는 것이 었습니다. 그 열쇠는 자물쇠 안에 꽂혀 있었는데, 안에서 열쇠를 돌린다든지 아니면 그 비슷한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 다, 크레스웰 부인이 방안에 갇혀서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틀 림없는 겁니다. 그 방에는 활과 화살도 없었고, 설사 활과 화살이 있었다 해 도 그 방의 창문에서 그린쇼 양을 쏘아맞추는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각도 가 맞지 않으니까요―그래요, 크레스웰 부인을 용의자 가운데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그린쇼 양은 농담을 잘하는 사람 같았습니까?" 그때 마플 양이 구석에서 번쩍 고개를 들고 경감을 쳐다보았다. "그럼, 그 유언장이 크레스웰 부인한테는 전혀 유리한 것이 못 되는 모양이로 군요?" 그녀가 말했다. 웰치 경감은 약간 놀랐다는 태도로 그녀 쪽을 건너다보았다. "대단히 훌륭한 추리력입니다, 부인." 그가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크레스웰 부인의 이름은 그린쇼 양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사람의 이름 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정말 네이스미스 씨의 경우와 흡사하군요." 마플 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린쇼 양은 크레스웰 부인한테 나중에 자신의 전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그 동안의 급료는 주지 않겠다고 말해 두었지요. 그렇게 말만 해놓고 실제로 자기 재산은 제삼자에게 물려주어 버린 겁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해놓고 그린쇼 양 은 아마 무척 재미있어 했을 테지요. 그러니 그 유언장을 「레이디 오들리의 비밀」이란 책갈피 속에 끼워두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거릴 법도 하지 않 겠어요." "옥슬리 부인이 그 유언장이 있는 곳을 우리한테 곧 말씀해 주셔서 다행이었습 니다." 경감이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유언장을 찾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유머로군." 레이먼드 웨스트가 중얼거렸다 "그럼, 그녀는 결국 자기 재산을 조카한테 물려준 거로군요?" 루가 말했다. 경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재산을 내트 플레처에게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야기는 약간 복잡하게 돌아갑니다―물론 제가 이곳에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떠도 는 소문으로 들은 것에 불과한 것이기는 합니다만―대략 이렇게 된 이야기 같더군요. 아주 오래전에 그린쇼 양과 그녀의 동생이 동시에 아주 잘생긴 젊 은 승마 선생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결국 동생이 그 남자를 차지하고 말았습 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카한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이 지요―" 그는 말을 멈추더니 자기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앨프리드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앨프리드라면―그 정원사 말인가요?" 조안이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웨스트 부인. 그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게 도니 사람은 앨프리 드 폴록인 거지요." "하지만 이유가 뭘까요?" 루가 외치듯이 말했다. 마플 양은 헛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거기에도 아마― 가정 내의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 같군요."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감도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앨프리드의 할아버지였던 토머스 폴록이 그린쇼 영감의 사생아였다는 사실은 이 마을에 익히 알려진 사실 같더군요." "그랬었군요." 루가 짧게 부르짖었다. "어쩐지 닮았더라니! 저는 오늘 아침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 뭐예요." 그녀는 아침에 자기가 앨프리드의 옆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그린쇼 영 감의 초상화를 쳐다보았을 때 받은 느낌을 떠올렸다. "아마도―" 마플 양이 말했다. "그린쇼 양은 앨프리드 폴록이 그 저택을 자랑스러워하고 계속 그 저택에서 살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반면 그의 조카 쪽은 그 저택을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저택을 처분해 버 릴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조카는 배우라고 했지요? 지금 그가 공연하고 있는 연극은 정확히 어떤 것이지요?" 정말 이 할머니는 옆길로 잘 새어나간다니까, 웰치 경감은 속으로는 이렇게 생 각했지만 겉으로는 정중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제가 알기로는, 부인, 제임스 베리의 연극을 공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베리라―"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마플 양이 말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 웰치 경감은 이렇게 말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런 연극 제목이지요."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저 자신은 별로 연극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가 말했다. "아내가 연극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지난주에 그 연극을 가서 본 모양입 니다. 아주 잘된 연극이라고 아내가 말하더군요." "베리는 아주 재미있는 연극을 몇 편인가 썼다더군요." 마플 양이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오랜 친구인 이스털리 장군과 베리의 '리틀 메어리'라 는 연극을 보러갔었는데―" 그녀는 딱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 두 사람 다 그렇게 형편없는 연극은 처음 보았답니다." '리틀 메어리'라는 연극을 본 적이 없는 경감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플 양이 그것을 보고 설명을 해주 었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는 말이에요, 경감님, 아무도 뱃속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답니다." 경감의 표정을 점점 더 당혹스런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플 양은 나지막 한 목소리로 연극 제목을 중얼거렸다. "'훌륭한 크리치턴'이라는 연극이 있지요. 아주 잘된 연극이랍니다. '메어리 로 즈'라는 연극도 있어요―이것 역시 재미있는 작품이지요. 그렇지만 '상류사회 사 람들'이라는 작품은 별로 내 맘에 들지 않아요. 그리고 또 '신데렐라에게 키스 를'이라는 작품도 있어요. 이것 역시 잊을 수 없는 연극이었지요." 웰치 경감으로서는 연극에 대한 논쟁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가 없었 다. 그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문제는―" 그가 말했다. "앨프리드 폴록이 그 할머니가 자신한테 유리한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다는 사 실을 과연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린쇼 양이 과연 그 사실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을까요?" 그가 덧붙였다. "알다시피―보어햄 로벨에 가면 궁술 클럽이 있는데 '앨프리드 폴록은 그 클럽 의 회원이란 말입니다.' 그의 활 쏘는 솜씨는 아주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아주 명백한 것이 아닐까요?"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두 여자가 방에 갇히게 된 것도 그것으로 설명이 되고 말입니다―즉, 그 사람 이라면 그 두 여자가 있는 장소쯤은 쉽게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경감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주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는 알리바이가 있단 말입니다." 경감이 말했다. "알리바이라는 것은 반드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저는 늘 생각해 왔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웰치 경감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작가들의 말이지요." "저는 탐정물 같은 것은 쓰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투로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알리바이를 의심해 보라고 말하기는 쉽지요." 웰치 경감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사건의 용의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세 사람은 사건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아주 가까이 있 었던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상한 일을 그 세 사람 가운데에선 이번 사건을 저질렀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가정부에 대해서는 아까 이미 살펴보았었고요―조카인 내트 플레처는 그린쇼 양이 화살을 맞던 바로 그 시 간에 그 저택으로부터 한 2마일쯤 떨어져 있는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서 이 저택으로 오는 길을 물어보고 있었습니다―앨프리드 폴록의 경 우에는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가 12시 20분에 '도그 앤드 덕'에 들어가 서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여느 때와 같이 빵과 치즈, 그리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교묘히 계획된 알리바이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기대로 눈을 빛내며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웰치 경감이 말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그에게는 알리바이가 성립해 있는 겁니다." 방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레이먼드가 단정한 자세로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는 마플 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문제는 이모님에게 맡기기로 하지요, 제인 이모님." 그가 말했다. "경감님도 경사님도, 저도, 조안도, 루도 모두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인 이모님, 이모님한테는 이번 사건이 마치 수정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 해 보이겠지요, 그렇지요?" "레이먼드, 반드시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 마플 양이 말했다. "수정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란다. 살인이란 장난이 아니거든. 내가 보기에도 가엾은 그린쇼 양이 죽고 싶어했다고는 볼 수가 없 어. 이번 사건은 특별히 잔인한 살인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아주 주도면밀 하게 계획되고 아주 냉정하게 실행된 살인사건이라는 말이야. 농담거리로 주 고받을 일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무안한 표정으로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사실은 저도 이번 사건을 말처럼 그렇게 무심하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 닙니다. 다만 그 사건이 주는 공포―그래요,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 부러 가볍게 다루어본 것뿐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이 요즘의 풍조인 것 같더구나." 마플 양이 말했다. "이 모든 게 다 전쟁 탓이야. 장례식조차도 하나의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그래, 내가 너를 무심하다고 말해 버린 것은 내 생각이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 도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아요." 조안이 말했다. "그보다는 아마 우리가 그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바로 그거야." 마플 양이 말했다. "조안, 너는 그린쇼 양을 전혀 모르고 있어. 나도 그녀를 전혀 알지 못해. 레이 먼드도 그가 그 저택을 찾아가던 날 우연히 그녀와 몇 마디 나눈 대화를 통 해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만을 갖고 있을 뿐이야. 루도 겨우 이틀 동안밖에 그 녀를 보지 못했지." "그렇다면, 제인 이모님―" 레이몬드가 말했다. "이모님의 생각을 한 번 말씀해 주시지요. 괜찮겠지요, 경감님?" "괜찮고말고요." 경감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자, 그 노파를 살해할 만한 동기가 있고, 또 그런 동기를 가 지고 있을 만한 사람에 대해 우선 생각해 보기로 하자꾸나. 지금 현재까지 그 런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세 사람은 모두 이번 범 행을 저지를 수 없는 아주 명백한 이유들을 갖고 있지. 가정부의 경우, 그녀 는 범행이 일어난 바로 그 시간에 자기 방에 갇혀 있었어. 더구나 그린쇼 양 은 분명히 자기를 쏜 사람이 남자였다고 말했지. 따라서 그 가정부가 이번 범 행을 저지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어. 정원사는 살인이 자 행되던 바로 그 시간에 도그 앤드 덕에 앉아 있었으니 역시 범행을 저지를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 조카도 범행시간에 그 저택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 는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고 있었으니 이번 범행을 저지를 수가 없었겠 지." "아주 명쾌한 설명이로군요, 부인." 경감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 사람이 이번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번 사건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 까?" "그것이 바로 경감님이 알고 싶어하시는 겁니다." 레이먼드 웨스트가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어떤 사물을 그릇된 방향에서 보기가 쉬운 법이란다." 변명하는 투로 마플 양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번 사건의 용의자인 그 세 사람의 행동이나 그때의 위치가 정말 틀림 없는 것이라면, 가령 범행시간을 옮겨보면 어떻게 될까?" "그럼 제 손목시계와 벽시계가 둘 다 고장나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루가 물었다. "그런 것이 아니란다." 마플 양이 말했다. "절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냐. 다만 내 말은 네가 생각하고 있는 범행시간 과 실제로 범행이 일어난 시간은 서로 틀리다는 말이지." "하지만 제가 직접 목격했는걸요." 루가 짧게 부르짖었다. "글쎄, 사실 나는 이번 사건의 목격자로 네가 이용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아까 부터 생각해 보았단다. 혹시 그것이 네가 그 저택에 고용된 진짜 이유가 아니 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나 자신한테 물어보고 있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인 이모님?" "자, 얘야,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어. 그린쇼 양은 돈쓰기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도 그녀는 너를 고용하고 네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다 받아주겠노라고 아주 기꺼이 수락했단 말이다. 아마 너를 창밖이 내다보이 는 2층 서재에서 일하도록 해놓음으로써 너를 결정적인 증인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겠지―외부에서 온 더할나위 없이 믿을 만한 사람의 입을 통해―살인 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진술시키기 위해서 말야." "하지만 설마―" 루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린쇼 양이 스스로 살해당할 작정으로 저를 고용했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플 양이 말했다. "네가 사실은 그린쇼 양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네가 그 저택으로 가서 만난 그린쇼 양이 그보다 더 며칠 전에 레이먼드가 만난 바로 그 그린쇼 양 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오,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하려는 루의 말을 가로막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린쇼 양은 독특한 구식 날염 드레스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에 이상한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지. 그녀는 지난 주말에 레이먼드가 우리한테 이야기해 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단 말야. 하지만 그 두 여자는 나이나 키, 체격 같은 것이 서로 무척 비슷하지. 그 가정부와 그린쇼 양은 말야." "하지만 가정부가 더 뚱뚱하다고요!" 루가 부르짖듯이 말했다. "더구나 그녀는 가슴이 아주 큰 여자란 말예요." 마플 양은 헛기침을 했다. "얘야, 요즘에는 말이다, 그―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것들을 진열장에다 아무렇게나 전시해 놓은 가게들이 많이 있더구나. 그러니 사람이든 맘만 먹으 면 어떤 크기, 어떤 모양의―가슴이든―만들기가 아주 쉬운 일이 아니겠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레이먼드가 물었다. "얘야, 나는 다만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뿐이란다. 루가 그곳에서 일하던 그 2∼3일 동안 한 여자가 일인이역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야. 루, 너느 이렇 게 말했지. 너한테 커피를 가져다 줄 때이 아침 한때를 빼고는 그 가정부를 좀체로 볼 수가 없었다고 말야. 정말 훌륭한 연기자는 단 1∼2분만에 다른 사 람으로 재빨리 모습을 바꾸고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법이란다. 아마도 이번 경우에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는 일쯤은 누워서 떡먹기였을 게야. 그 후 작 부인 같은 머리 모양은 간단하게 썼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가발이었을 테 니까." "제인 이모님! 그럼, 그린쇼 양은 제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죽지는 않았어. 아마 약이라도 먹고 잠들어 있었을 거야. 그 가정부처럼 그렇 게 철면피인 여자라면 그런 일쯤은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놓았을 테지. 그런 다음 그 여자는 너와 계약을 맺고 너를 고용했어. 그리고 시간을 정해 주며 조카한테 그 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이 저택으로 오라는 전화 좀 해달라고 너 한테 부탁을 했지. 그 그린쇼 양이 진짜 그린쇼 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마 앨프리드 한 사람뿐이었을 거야. 그리고 기억하겠지 만, 네가 일을 시작한 날로부터 이틀 동안은 비가 왔었어. 따라서 그린쇼 양 이 저택 안에만 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앨프리드는 가정부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어. 그리 고 그 살인이 벌어지던 날 아침에는 앨프리드는 자동차길 있는 데 있었고, 그 동안 그린쇼 양은 정원에 있는 인공 돌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그런데 그 인공 돌산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그럼, 그린쇼 양을 살해한 사람이 크레스웰 부인이라는 말씀이세요?" "내 생각에는, 너에게 커피를 갖다준 다음 그 여자는 네 방을 나오면서 문을 잠갔을 거야. 그리고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던 그린쇼 양을 거실로 옮겨놓은 다음, 자기는 그린쇼 양으로 다시 변장을 했겠지. 그리고 네가 창밖으로 볼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 인공 돌산에서 일하는 척했던 거야. 정해진 순서대로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비틀 저택 쪽으로 걸어오지. 마치 목에 화살이라 도 맞은 듯이 손으로 화살대를 꽉 움켜쥔 채 말야. 그녀는 살려달라고 하면서 용의주도하게, '그놈이 나를 쐈어.'라는 말을 하지. 가정부에게 혐의가 돌아가 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술수로 말야. 그리고 그녀는 마치 가정부가 그녀의 방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정부 방의 창문으로 다가가 살려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어. 그런 다음 일단 거실로 들어가서 일부러 사기 찻잔 세트가 놓여 있는 탁자를 넘어뜨리고―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가 후작 부인의 머리가발을 뒤 집어썼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머리를 창문 밖으로 내밀고 너한테 자기 역시 방에 갇혀 버렸다고 이야기한 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갇혀 있었다고요." 루가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리고 나서 곧 경관이 그곳에 도착했지." "무슨 경관 말입니까?" "정확히 말해서―무슨 경관이냐고요? 경감님, 괜찮으시다면 경감님께서 그 사 건 현장에 도착한 시간과 그곳에 도착한 뒤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 요?" 경감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12시 29분에 우리는 그린쇼 양의 가정부인 크레스웰 부인으로부터 자기 주인 이 화살에 맞았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켈리 경사와 제가 즉시 차를 타고 그 저택에 도착해 보니 그때가 12시 35분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그린쇼 양은 죽어 있었고, 두 여자분은 각자 자기 방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자, 알겠지." 마플 양이 루한테 말했다. "네가 본 경관은 진짜 경관이 아니었던 거야. 너는 두 번 다시 그 사람에 대해 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누구든―그렇지만―경관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 면 그냥 당연히 그 사람이 경관이려니 하고 믿어버리고 마는 거야." "하지만 누가―왜 그런 짓을?" "누구냐고?―좋아, '신데렐라에게 키스를'이란 연극을 보면 경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내트 플레처는 자기가 무대엣 입었던 무대 의상을 살짝 빌렸을 뿐 이야.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 시간―12시 25분에 일부러 주유소 에서 길을 물어보았지. 그런 다음 재빨리 차를 몰아 저택 모퉁이에다 그 차를 세워놓고 경관 제복으로 갈아 입은 거야. 그런 뒤에 자신의 역할을 한 거지." "하지만 이유가 뭐죠?―이유가요?" "누군가가 밖에서 가정부의 방문을 잠가두어야 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린쇼 양의 목에 화살을 꽂을 사람도 필요했고. 마치 활에 맞은 것처럼 그 화살을 목에 찔러넣어야 했을 테니까―그러려면 아주 힘센 사람이 필요하게 되지."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 두 사람이 공모한 것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맞았어. 내 생각은 그래. 아마 그 두 사람은 모자(母子)간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린쇼 양의 동생은 벌써 오래 전에 죽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틀림없이 플레처 씨는 재혼을 했을 거야.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 지만, 그린쇼 양의 동생이 낳은 아이 역시 죽었을 것 같아. 지금 조카라고 행 세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두 번째 부인의 자식일 거야. 따라서 그린쇼 양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셈이지. 그 여자는 가정부로 그 저택에 들어가 내부 사정이 어떤가 정탐을 해보았을 거야. 그런 다음 그가 자기가 그린쇼 양의 조카인 척 편지를 보내고 한 번 찾아가 뵙겠다고 이야기해 놓았을 테지―농담으로 경관 의 제복을 입고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말야―아니, 어쩌면 그녀한테 자기가 출 연하는 연극을 보러 오라고 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해서 그를 만나지 안겠다고 한 모양이야. 만일 그린쇼 양이 아무 유언장도 만들어놓지 않고 죽었다면 그녀의 전재산은 자연히 그가 물려받았을 테지―하지만 그녀는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 놓았었지. (그들이 생 각하기로는) 가정부한테 전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이야기가 적힌 그런 유언장을 말야. 그러니 그들한테는 문제될 것이 없었던 거야." "그렇지만 하필이면 왜 화살을 사용했을까요?" 조안이 반문했다. "굳이 화살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예요." "그건 전혀 그렇지 않아, 조안. 앨프리드가 궁술 클럽에 가입해 있으니까 말 야―그 사람들은 앨프리드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었거든. 그러니까 앨프 리드가 12시 20분도 되기 전에 술집으로 가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의 생각을 불행히도 어긋나게 해버린 거지. 그는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저택을 빠 져나가고는 했는데 운좋게도 그것이 살인혐의를 벗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런 행동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번 경우에는 앨프리드의 게으른 성격이 그의 목숨을 구해낸 결과가 되어버렸 지." 경감이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부인, 부인의 추리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제가 다시 조사를 해 보기는 해야겠습니다만―" ********************************************************************** 마플 양과 레이먼드 웨스트는 정원에 있는 인공 돌산 여에 서서 시들어진 풀 포기로 가득차 있는 정원용 바구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플 양은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냉이, 호이초, 금작화, 초롱꽃……됐어,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필요로 한 증거 물들이야. 어제 아침 이곳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던 사람은 정원의 일 같은 것 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잇는 사람이었어―잡초와 함께 정말 중요한 식물들 까지 다 뽑아내 버렸으니까 말야. 이것으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 고맙구나, 레이먼드, 이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어서 말이다. 내눈으로 직접 이 장소를 확인하고 싶었거든." 그녀와 레이먼드는 둘 다 턱없이 거대하기만 한 그린쇼의 아방궁을 쳐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으므로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잘생긴 한 젊은 청년이 그들처럼 그 저택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가시게 크기만 한 집이에요." 그가 말했다. "요즘 집들 치고는 너무 크죠―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들 하겠지요. 하지만 저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일 제가 축구경기의 복권에 당첨되 어 큰 돈을 손에 넣게 된다면 내가 짓고 싶어할 집도 바로 이런 집이 될 거 예요."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쑥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 것 같군요―사실 이 저택은 저희 증조부님이 지으신 것이지요." 앨프리드 폴록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건물을 그린쇼의 아방궁인가 뭔가 하는 말로 부른다지만, 어쨌든 이 저택은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겁니다."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asp/board.asp?sid=55&bid=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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