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폴리테의 띠 1 '일이 하나 생기면 연달아 생긴다.'는 말은 에르큘 포와로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즐 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다. 그는 루벤스 도난사건만큼 증거가 확실한 사건도 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덧붙이고 싶 었다.사실,그는 루벤스 그림 도난사건에 대해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그 이유는 첫째는 루벤스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가 아니라는 것이고,둘째는 도난을 당한 그 상황 이 아주 평범하다는 점 때문이었다.그런데도 그가 그 사건을 맡은 까닭은 순전히 그 의 친한 친구로 자처하는 알렉산더 심프슨의 간절한 부탁과 고전문학과 관련된 그 자 신의 개인적인 이유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난 사건이 발생한 직후 알렉산더 삼프슨은 사람을 보내 포와로를 불러와 자신이 당 한 재난의 전후사정을 청산유수로 털어놓았다.그 루벤스 그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에 와서 발견된 작품인데,진짜 그의 그림임이 분명하다고 했다.심프슨 은 자신의 화랑에다 그 그림을 전시해 놓았는데,글쎄 환한 대낮에 그 그림을 도난당 했다는 것이었다.그러니까 많은 실업자들이 교차로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다가,리츠 로 몰려갈 무렵의 일이었다.그들 중 몇몇 사람이 심프슨 화랑으로 들어와, "미술은 사치다.굶주린 자에게 빵을 달라." 라는 슬로건이 쓰인 푯말을 들고서 바닥에 드러누 웠다.그가 경찰을 부르러 보낸 사이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군중들이 꾸역꾸역 모 여 들었다.곧 이어 경찰이 달려와 시위자들을 강제로 연행해 갔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루벤스의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누군가 그 그림의 액자 에서 교묘하게 그림만 잘라내어 가져가 버린 것이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 그림은 아주 작네." 하고 심프슨 씨가 설명을 했다. "따라서 사 람들이 그 바보 얼간이 같은 실업자들이하는 짓을 보고 있는 동안 범인은 그 그림을 팔밑에 끼고 유유히 화랑을 빠져나간 게 틀림없네." 경찰이 문제의 그 실업자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이 도난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들이 심프슨의 화랑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그런 도난사건이 발생했는지는 그들도 전혀 모르는 게 확실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것이 교묘한 속임수를 쓴 범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맡을 만 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그렇게 간단한 강탈사건이라면 경찰한테 수사를 맡기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그런데 알렉산더 심프슨이 말했다. "내 말 좀 들어 보게,포와로 난 그 그림을 훔쳐간 범인이 누구며 어디로 가져갔는지 알고 있다네." 심프슨 화랑의 주인 얘기로는,그것은 국제적인 도둑놈들이 그 그림을 말도 되지 않는 높은 가격으로는 결코 사가지 않는 어떤 백만장자한테 팔아먹기 위해 저지른 범행이 라는 거였다.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루벤스 그림은 지금 쯤 프랑스로 몰래 들어가 그 백만장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거라고 했다.영국 경찰과 프랑스 경찰이 함께 수사를 맡고 있긴 하지만 분명히 그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 거 라는 게 심프슨의 주장이었다. "일단 그림이 그 더러운 자식의 손에 들어간 이상 다 시 찾기는 어렵다는 얘기지.돈 많은 사람들은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거든.그래서 이 렇게 자네한테 부탁하는 걸세.상황이 아주 미묘해서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그래서 결국 에르큘 포와로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그는 심프슨 의 요청에 따라 즉시 프랑스로 떠나기로 했다.사실,그는 프랑스로 떠나고 싶은 마음 은 별로 없었다.그러나 그의 흥미를 끄는 여학생 실종사건도 있고 해서 기꺼운 마음 으로 그 요청을 수락했던 것이다. 포와로가 다음 얘기를 들은 것은 그가 하인과 여행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불쑥 나타 난 재프 주임경감한테서였다. "아하!" 하고 재프가 말했다. "프랑스로 떠날 모양이지." 포와로가 말했다. "자네의 정보망은 런던 경시청 안에서도 유명하더군." 재프가 싱글싱글 웃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없네! 심프슨이 그 루벤스 그림 도난사 건을 당신한테 맡겼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아마도 우리가 못 미더웠던 모양 이야! 어떻든 그건 그렇다 치고,내가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것은 다른 부탁할 일이 있어서네.이왕 파리에 가는 김에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헌 수사경감은 프랑스 경찰과 공동수사하려고 이미 거기로 떠났네.자네도 헌 경감은 알지?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상상력이 부족해서 좀 탈인 사람이지.그 사건에 대한 자네 의견을 듣고 싶네만." "자네가 말하는 그 사건이란 게 도대체 뭔데 그러나?" "어린 소녀가 행방불명됐네.아마 오늘 저녁 신문에는 그 기사가 실릴 걸세.아무래도 유괴된 것 같아.크랜체스터에 있는 성당 참사의원의 딸인데 이름은 위니 킹이라고 하지." 그는 사건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위니는 영국과 미국 여학생들을 선발하여 받아들이는 고급 교육기관---포프 학교--- 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가던 중이었다.위니는 크랜체스터에서 아침 일찍 기차로 출 발했다.그 소녀가 런던을 통과하는 것을 각 역에서 어린 소녀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앨더 시스터스 회사의 사원 하나가 보았으며,그 뒤에는 포프 학교의 부사령관격인 버 쇼 양이 빅토리아 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도착하자,다른 열여덟 명의 소녀들 과 함께 임항 열차(기선과 연결되는 열차)편으로 빅토리아를 떠났다.열아홉 명의 소 녀는 해협을 건너가 캘레(도버 해협에 임한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에서 통관수속을 마친 다음 파리행 열차로 갈아탔다.그리고 식당차에서 점심식사를 했다.그런데 기차 가 파리 근교에 이르렀을 무렵 버쇼 양이 인원을 점검한 결과 한 명이 없어졌다는 것 이다.즉,열아홉 명이어야 할 소녀들이 열여덟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하!"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도중에 멈춘 적은 없었나?" "아미앵에서 한 번 서긴 했지만 그때는 학생들이 모두 식당차에 있었는데 한결같이 위니도 자기들과 함께 있었다고 얘기하더군.그러니까 그녀가 칸막이 객실로 돌아오 는 도중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가 되지.다시 말해 그녀 혼자 다른 다섯 명의 학생 과는 떨어져 그 객실로 들어가지 않은 걸세.그러나 그 다섯 학생들은 그저 그녀가 다른 칸에 가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을뿐 무슨 문제가 생겼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거야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정확히 언제였나?" "기차가 아미앵을 떠난 지 약 10분 가량 되었을 때지." 재프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흠--그녀의 모습을 본 건 그 게 마지막이었네." 포와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자연스럽군."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밖에 다른 일은 뭐 없었나?" "아니,하나 있어." 재프의 표정이 엄해졌다. "그녀의모자가 철로변에서 발견되었네. 아미앵에서 대략 14마일(약22km)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그런데 시체는 없었나?" "그렇다네." 포와로가 물었다. "거기에 대해 자네 생각은 어떻나?" "생각이고 뭐고 골치만 아플 뿐이라네! 기차에서 떨어졌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내 참--그러니까 분명히 기차에서 떨어진 건 아니야." "기차가 아미앵을 떠난 뒤로는 정말로 한 번도 정지한 적이 없었나?" "그렇다니까.신호 때문에 한 번 좀 속도를 늦춘 적은 있었지만--완전히 멈춘 적은 없다고 하더군.그리고 아무리 속도를 늦췄다고 해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사람 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자네는 그 애가 갑자기 겁을 집어먹고서 도망이라도 친 게 아닌가 생각하나? 물론 그 애는 그 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신입생이고 따라서 갑자기 부모 품안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르지.하지만 그 애의 나이가 이미 열다섯 살하고도 6개월이 지났으니 그만하면 분별력이 있을 때도 되지 않았나? 게다가 그 소녀는 여행하는 동안 아주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즐겁게 지냈다고 하더군." 포와로가 말했다. "기차 안은 수색해 봤나?" "오,물론이지! 열차가 노르 역에 도착하기 전에 그 안을 샅샅이 뒤져 보았네.그 소녀 가 기차 안에서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 재프가 분통이 터져 못살겠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그 애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공기 속으로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포와로.정말 사람 미치게 만든다니까!" "그 학생은 어떤 소녀였나?" "내가 아는 바로는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여학생이었네."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그녀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걸세." "안 그래도 여기 그녀의 스냅사진을 가져왔네.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미인 은 아니야." 포와로는 그가 건네주는 스냅 사진을 받아들고 아무 말없이 찬찬히 살펴보았다.머리를 양쪽으로 길게 땋아내린 몸매가 호리호리한 소녀였다.포즈가 자연 스러운 것으로 보아 사진을 일부러 찍으려고 포즈를 취한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찍힌 사진이 분명했다.사과를 먹고 있던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이 벌어져 있어서 치과 교정 장치를 끼고 있는 이빨이 약간 드러나 보였다.거기에다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재프가 말했다. "수수해 보이는 아이지.하지만 누구나 그만한 나이 때에는 다 그렇게 보이기 마련 아닌가? 어제 치과에 들렀다가 '스케치' 잡지에 등장하는 '올해의 최고 미인'난에서 마르시아 곤트의 사진을 봤네.내가 절도사건으로 캐슬에 내려가 있었을 때 처음 그녀를 봤는데,그때는 그녀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네.그 당시에는 주근깨투성 이에다 이빨은 튀어나왔고 머리카락은 그냥 흩어져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었지.그런데 그런 애가 하룻밤 사이에 미인으로 변했다니--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참 신기하잖나,그게 바로 기적 아니겠나?" 포와로가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이란---원래 기적적인 동물이지! 그 학생의 가정환 경은 어떤가? 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라도 있나? 재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없어.그 어머니는 몸이 약 해 자리에 누워 있고,늙은 아버지는 당황헤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네.그 아버지 얘 기로는 자기 딸이 몹시 파리에 가고 싶어했으며---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기까지 했다 는 거야.미술과 음악---그런 것을 공부하고 싶어했다는군.포프 학교는 대부분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지원을 하네.자네도 알다시피 포프 학교는 그 방면 에서 아주 유명한 학교지.그래서 그 학교에는 상류층 자녀들이 많이 입학하는 편이고 그 학교의 규율 또한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학비도 매우 비싸고---특히 교 장한테 지도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고 하더군." 포와로는 한숨을 쉬었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영국에서 그 소녀들을 데 리고 간 사람이 버쇼 양이라고 했나?" "머리가 아주 좋은 여자는 아니네.포프 양 말로는 그게 모두 그녀으 탓이라고 하더군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여조로 물었다. "이번 사건에 젊은 남자가 관계되어 있을 가 능성은 없나?" 재프가 손짓으로 사진을 가리키는 시늉을 해보였다. "자네 눈에는 이 애가 그렇게 보이나?" "아니,꼭 그렇다는 건 아니네.하지만 외모가 예쁘지 않다고 해서 로맨틱한 감정을 가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열다섯 살이라면 그렇게 어린 나 이도 아니잖나?" "글쎄." 재프가 말했다.만약 로맨틱한 감정 때문에 그 소녀가 열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면,여류 소설가가 쓴 소설들을 한번 읽어 보겠네." 그는 기대감이 담긴 눈초리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안 나나?" 포와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철로변에서 그녀의 신발은 보지 못했나?" "신발? 아니,그런데 신발은 왜?" 포와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냥 생각이 나서...." 2 에르큘 포와로가 택시를 타러 막 내려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그는 수화기를 들었 다. "뭐?" 재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와 통화를 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이봐,모든 게 다 해결되었네.지금 경시청에 돌아와 보니까 보고가 올라와 있더군. 그 소녀를 찾았다고 말일세.아미앵퀮서 15마일(약 24km) 떨어진 간선도로변에서 그녀 를 찾아냈는데 멍한 표정일 뿐 묻는 말에는 한마디도 옳게 대답을 하지 못하더라지 뭔가? 의사 말로는 그녀가 마약을 먹어서 그렇다더군---하지만 곧 깨어날 거라고 했 어.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셈이라고." 포와로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럼,내가 조사할 피로요가 없어졌겠군?" "그러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사실--괜히 자네한테 폐만 끼친 것 같아 정말 미안하게 됐는걸." 재프는 익살스럽게 한바탕 웃어대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에르큘 포와로는 웃지 않았다.그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그의 얼굴에 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3 헌 수사경감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지 난 이해할 수 없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나와 의논하라는 얘기는 재프 주임경감한테 들 었겠지요?" 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감 얘기로는 당신이 여기 딴 볼일 보러 오시는 김에 우리를 도와 해결해 주시겠다고 했다더군요.하지만 그 사건은 이제 깨끗이 해결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절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겁니다.여기서 당신이 해야 할 다른 일도 많을 테니 말입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내 일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 이번 사건이오.아까 당신은 그 사건을 수수께끼라고 지칭하면서 이젠 다 해결되었다고 했 어요.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수수께끼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글쎄요,우린 그 소녀를 찾았고 그 소녀가 어디 다친 것도 아닙니다.그럼,된 것 아 닙니까?" "그렇지만 그 소녀가 어떻게 되돌아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녀가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의사가 그녀를 진찰했지요,그렇죠? 그런데 뭐라고 하던 가요?" "그 소녀가 마약을 복용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그래서인지 아직도 의식이 완 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라더군요.크랜체스터를 출발한 다음의 일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기억상실증에 걸린 모양인데,의사 얘기로는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 이고 있다는 겁니다.머리 뒤의 타박상이 기억상실증의 원일일 가능서이 크다더군요." 포와로가 말했다. "그거 아주 편리한 생각이군요---누군가에게는!" 헌 경감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이죠?" "경감의 생각은?" "전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착하긴 하지만---나이에 비해 좀 어려보이거 요." "아니,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포와로가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녀가 어떻게 그 열차를 빠져나갔 느냐는 점이오.그렇게 하도록 시킨 사람이 누구며---또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말이 지요." "그 이유에 관해서라면 말입니다.그 소녀를 납치해 가려던 게 아닐까요? 몸 값을 받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잖소?" "경찰이 바짝 추적하니까 그만 겁이 나서---길가에다 내버리고 도망을 쳤을 수도 있지요." 포와로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크랜체스터 성당의 일개 참사회 의원한테 몸값을 뜯어내 봐야 과연 얼마나 받겠소? 백만장자도 아닌 교회의 의원에 불과한 사 람한테 말이오." 헌 수사경감이 즐겁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인들이 실수한 겁 니다." "아하,그게 경감의 의견이란 말이지요?" 헌이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그럼,포와로 씨 생각은 어떠신데요?" "난 그녀가 왜 기차를 빠져나갈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경찰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건 정말 수수께끼에요,예.조금 전까지만 해 도 식당 차에 앉아 다른 소녀들과 수다를 떨던 소녀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감쪽같 이 사라져 버린 것은---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요술쟁이가 요술을 부리지 않은 다 음에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요술쟁이가 요술을 부렸다! 바로 그거요.포프 학교에서 예약한 객실에 달려 있는 차 랑에는 다른 객실도 있었을 텐데 거기에 누가 타고 있지 않았습니까?" 헌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착안을 하셨군요.그건 중요한 문제죠.그들이 탔던 객실이 열차의 맨 마지막 칸이었는데 사람들이 식당차에서 돌아오자마자 차량 사이의 문들을 잠궈 놓았다는건---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지요.물론 문들을 잠근 건 점심 식사가 완전히 준비되기 전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거였어요. 위니 킹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식당차에서 그 차량으로 되돌아왔습니다.학교측에서 그 차량의 객실을 3개 예약해 놓은 때문이지요." "그럼,그 차량의 다른 객실에는 누가 들었습니까?" 헌이 노트를 꺼냈다. "조던 양과 버스터 양---둘 다 중년쯤 된 독신녀로 스위스로 가 는 중이었지요.그들에 대해서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이 고향인 햄프셔에서는 꽤 사회적 지위가 높고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두 프랑스 인 외판원 중 하나는 리용에서,다른 하나는 파리에서 온 사람입니다.두 사람 다 점잖은 중년신사들이에요.그리고 제임스 엘리옷이라는 청년과 그 아내가 있었습니다.눈에 번쩍 뛸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였지요.그 청년은 평판이 아주 나쁜 사람인데,경찰한테는 몇 가지 밀수사건에 관 련 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자입니다.하지만 유괴사건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어떻든 객실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그가 이번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 을 보여주는 물증은 하나도 없습니다.따라서 그는 이번 유괴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분명합니다.나머지 한 사람은 밴 서이더 부인이라는 미국인인데,파리로 가던 중이었다고 합니다.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지만 별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이상으로 끝입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기차가 아미앵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서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확실합니까?" "예,틀림없습니다.한 번 느르게 간 적은 있지만 사람이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그 렇게 천천히 가지는 않았어요.죽을 결심을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에르큘 포와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사건이오.여학생이 아미앵 근교에서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가 다시 나타난다.그럼,그동안 그녀는 어디에 있 었던 걸까?" 헌 경감이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그걸 누가 알겠습니까.참! 그런데 신발에 대해 물어보셨다면서요? 그 여학생의 신발 말입니다.우리가 그녀를 찾아내었을 때는 신 발을 다 신고 있었어요.그런데 이상한 점은 열차신호수가 철로변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겁니다.그는 신발이 새것 같아 보여서 집으로 가져갔다 고 하더군요.검정색 에나멜 구두라나 봐요." "아하----"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그런 그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헌 경감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신발에 무슨 의미라도 들어 있습니까, 예? 무슨 중요한 의미라도------" "가설을 사실로 뒷받침해 주는 단서가 되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어떻게 수수께끼를 부렸나 하는 가설 말입니다." 4 포프 학교는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학교들처럼 뇌이유에 위치헤 있었다.위풍당당한 건물의 정면을 쳐다보고 서 있던 에르큘 포와로는 갑자기 정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 학생들 틈에 휩싸여 버렸다. 그가 그 숫자를 세어본 결과 모두 25명이었는데,한결같이 검푸른색 윗도리와 스커트 를 입었으며,머리에는 검푸른색의 벨루어 천으로 만든 영국풍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것도 포프 양이 선택한 독특한 자줏빛과 황금빛의 테가 둘러쳐진 모자였다.그들의 나이는 14세에서 18세 사이로 보였는데 그들의 나이만큼이나 그 생김새도 다양해서 뚱뚱한 학생,우아해 보이는 학생 등 고루 섞여 있었다.맨 마지막으로 나이어린 여학 생들과 함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희끗희끗한 백발에 까다로 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포와로는 아마 버쇼 양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포와로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벨을 눌러 포프 양을 민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레비니아 포프 양은 그녀의 부사령관 격인 버쇼 양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포프 양은 남다른 품격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포프 양이 학부모님들에게 아무런 스스럼 없이 대한다고 해도,학부모들은 감히 접근치 못할 그녀의 당당한 태도 앞에서 주눅이 들게 뻔했다.교장이라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되는 셈이 었다.그녀의 백발은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고,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수수하면서 독 특한 세련미를 풍기고 있었다.또 그녀는 유능하고 박식했다. 그녀가 포와로를 맞이한 방은 교양 있는 여자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우아한 가구와 꽃,액자에 든 사진들이 방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이 학교 출신으 로서 저명인사가 된 사람들의 사진인데,사진마다 각자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그들 대 부분은 학위 수여식 때 입는 정장차림이었다.벽에는 세계 각국의 명화 복제품들과 아 름다운 수채와 몇 점이 걸려 있었다.온 방안을 얼마나 깨끗이 청소했는지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였다.한마디로 먼지 한 점 떨어뜨리기도 미안할 만큼 깔끔한 방이었다. 포프 양은 자신만만하고 능숙한 태도로 포와로를 맞이했다. "에르큘 포와로 씨? 물론 당신 이름은 잘 알고 있지요.위니 킹이 겪은 불행한 사건 때문에 여기 오셨나 보군요.그렇게 마음을 괴롭힌 사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프 양은 마음의 괴로움을 겪은 것 같지는 않았다.그녀는 그 불행을 기정사 실로 받아들여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그 불행이 미치는 파장을 될수록 줄여보겠다는 태세인 것 같았다. "그런 일은---전에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라고 포프 양이 말했다. 또한 그녀의 태도는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 니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입학하는 학생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위니와 예비 면담을 가지셨겠지요? 물론 그 부모도 함께 말입니다." "최근은 아니에요.2년 전 제가 크랜체스터 부근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지요.주교와 함께 말입니다.사실-----" 그렇게 말하는 포프 양의 태도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똑똑히 들어요,난 주교 같은 사람들하고 지내는 신분이란 말이에요.'라고 말이다.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제가 거기 머무르는 동안 성당 참사회 의원과 그 부인을 알게 되었지요.참 안됐게도 킹 부인은 몸이 아주 약하시더군요.그때 위니를 만나게 된 겁니다.가정교육을 잘 받 고 자란 학생으로 미술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많았어요.그래서 제가 킹 부인에게 말 했지요.1--2년 뒤에 위니가 보통교육과정을 마치면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게 어떻겠 냐고요.포와로 씨,우리 학교는 미술과 음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입니다.그래 서 학생들은 오페라 좌나 국립극장으로 관람을 가기도 하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강의 하는 것을 들으로 가기도 하지요.또 학생들에게 음악,성악,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 으로는 최고 수준의 선생님들만 모시고 있어요.보다 넓고 풍부한 문화생활,그게 바 로 우리학교의 교육목표입니다." 포프 양은 불현듯 포와로가 학부형이 아니라는 사 실을 상기해 내고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포와로 씨?" "위니에 대한 학교측의 견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킹 참사회 위원이 아미앵가지 와서 위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충격을 받은 아이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는 집이 최고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린 허약한 학생들은 받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 학생들을 돌불 전문시설이 없거든 요.그래서 제가 참사회 의원에게 그 학생을 집으로 도로 데려가는 게 낫겠다고 말 해 주었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포프 양의 견해로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 을 것 같습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포와로 씨.제게 보고된 내용으로 봐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했으니까요.솔직히 학생들을 인솔하는 일을 맡은 우리 직원이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물론 좀더 빨리 그 여학생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책임은 있겠지요." 포와로가 말했다. "혹시 경찰에서 찾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포프 양의 당당한 태도가 약간 흔들렸다.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경시청의 르파르지 씨라는 사람이 날 찾아왔더군요.혹시 제가 그 사건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요.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게 뭐 있어야 얘기를 해주죠.그랬더니 그 사람 은 위니의 트렁크를 조사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물론 같이 여기 온 다른 학생들의 트렁크도 함께 말이죠.그래서 이미 다른 경찰관이 와서 조사해 갔다고 말해 줬습니다 지휘계통이 하나로 서 있지 못한 모양이라고 혼자 추측하면서 말입니다.그 사람이 떠 난 지 몇 분도 채 안되어 전화가 한 통 걸려 왔습니다.그래서 전 그들에게 위니의 소 지품 모두를 건네줄 수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지요.무척 화가 나더군요.그렇게 거만 하고 관료적인 경찰한테 굴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죠." 포와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주 용기가 대단하십니다.정말 존경스럽군요,마드 무아젤.위니의 트렁크가 여기 도착하고 나서 그 짐을 풀어보셨겠지요?" 포프 양의 안색이 약간 싸늘하게 변했다. "규칙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우린 엄격 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합니다.여기선 으레 학생들의 트렁크가 도착하면 직원들이 그 짐을 풀어서 제가 지시하는 곳에다 정리를 해놓고 있습니다.따라서 딴 학생들의 짐을 풀 때 위니의 짐도 풀었지요.물론 위니의 짐은 원래대로 다시 싸 놓았습니다.짐을 찾 으러 오면 돌려주기 위해 말이에요." 포와로가 말했다. "원래대로?" 그리고 나서 그는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대 성당이 보이는 이 그림의 다리는 그 유명한 크랜체스터 다리군요." "잘 보셨습니다,포와로 씨.위니가 저를 놀라게 해주려고 저 그림을 그렸나 봅니다. 위니의 트렁크 속에 저 그림이 포장되어 들어 있었어요.그 포장지 위에는,'포프 선 생님께 위니가 드림'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죠.정말 귀엽고 깜찍하더군요." "아하!" 포와로가 말했다. "그럼,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림으로서는?" 솔직히 그는 지금까지 크랜체스터 다리를 그린 그림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왕실미술 전에 출품되는 작품들 중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상이 바로 그 다리였던 것이 다.어떤 때는 유화,어떤 때는 수채화라는 것만 달랐을 뿐이다.그러다 보니 그는 아주 뛰어나게 잘 그린 그림,평범하게 그냥 그린 그림,아주 형편없는 그림등 여러 수준의 그림을 보아 왔다.그러나 이 그림처럼 실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그림은 본 적이 없 었다.포프 양은 관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생들의 의욕을 꺽어서는 안되지요, 포와로 씨.물론 위니가 지도를 받게 되면 솜씨가 휠씬 나아질 거예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그 나이에는 수채화로 그리는 게 더 자연스러 운 일이 아닙니까?" "예,그 학생이 유화를 그리고 있는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아하!"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내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마드무아젤?" 그는 그림을 벽에서 떼내 창문으로 가져갔다.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포와로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는데요,마드무아젤.이 그림을 내가 가져가면 안되겠습니까?" "글쎄요,그게,포와로 씨-----" "이 그림에는 별로 애착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그림이 형편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오,예술적인 가치가 없다는 건 저도 인정해요.하지만 그건 학생의 작품이고---" "분명히 말슴드리지만,마드무아젤.이 그림은 여기 벽에다 걸어 둘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지 영문을 모르겠군요,포와로 씨." "지금 당장 그걸 증명해 드리지요." 그는 주머니에서 병 하나와 스펀지,그리고 헝겊 조각들을 꺼냈다. "우선 간단하게 얘기부터 하기로 하지요,마드무아젤.'백조로 변한 미운 오리새끼' 동화와 비슷한 얘기입니다." 그는 입으로 얘기를 하면서도 바쁘게 손 을 움직였다.터펜틴 유(油) 냄새가 방안을 진동했다.교장 선생님은 레뷰(시사 풍자 극으로 음악,춤,무대장치가 화려한 극)을 잘 구경하러 가시지 않는 모양이지요?" "아,예 솔직히 말하면 좀 시시한 것 같아서....." "시시하지요.예,하지만 때로느느 얻는 것도 있습니다.난 아주 머리가 좋은 유명한 풍자극 배우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변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어느 순간에 보면 그녀는 아름답고 요염한 카바레의 여왕이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10분도채 못 되어 그녀는 아데노이드 증세가 있는 조그만 여학생으로 분장하여 교복을 입고 나옵 니다.그런가 하면 어느새 또 그녀는 미래의 운수를 점치는 누더기를 걸친 집시로 분장해 나오지요." "그럴 수야 충분히 있겠죠.하지만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이해가-----" "난 기차 안에서 요술쟁이가 어떻게 요술을 부렸는지를 설명하려는 겁니다.머리는 양 쪽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안경을 쓰고,거기다가 치과교정장치까지 해서 정말 꼴불견 처럼 보이는 위니라는 한 여학생이---화장실로 들어갑니다.그리고 15분도 채 못 되 어 다시 나타납니다.헌 경감의 말을 빌리자면---눈에 번쩍 뛸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 을 하고서 말이지요.눈은 실크 스타킹,높은 하이힐---교복을 가리기 위해 걸친 밍크 코트,구불거리는 머리위에 올려놓은 귀엽고 앙증맞은 모자---그리고 짙게 화장한 얼 굴---예,분을 짙게 바르고,빨갛게 바른 입술,그리고 새까맣게 마스카라를 칠한 눈! 그렇게 빠른 시간에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정체는 과연 뭘까요? 아마 하느님만 아셨겠지요! 하지만 마드무아젤,당신은 어떻게 미숙한 여학생이 촌티를 벗 고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매력적이고 세련된 미인으로 변모할 수 있는 지를 종종 봐 왔습니다." 포프 양은 상당히 놀란 모양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럼,당신의 얘기는 위니 킹이 변장했다는---" "위니 킹이 아닙니다.천만에요.위니는 열차가 런던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납치되었 습니다.그리고 변신의 명수인 우리의 주인공이 그 소녀 노릇을 한 거지요.따라서 비쇼 양은 진짜 위니 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셈입니다.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리고 치과교정장치를 낀 여학생이 사실은 위니 킹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어떻게 알겠소?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는데 문제는 위니가 진짜 이곳에 와서는 안된다 는 데 있었습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짜 위니와 안면이 있는 처지였으니까 말입니 다.그래서 위니는 화장실에 들어가 사라지고 싹 요술을 부려 제임스 엘리옷이라는 남자의 여권에 기재된 아내로 나타납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안경,레이스 실로 짠 스타킹,치과교정장치---이 모든 것은 둘둘 뭉쳐 가방 한구석에 처박아 버리면 되었지요.그러나 투박한 구두와 모자---그것도 잘 구겨지지 않는 영국풍의 모자--- 는 버려야 했습니다.그래서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지요.그 뒤 진짜 위니는 해협 건너편까지 끌려 갑니다---강제로 마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어린 소녀를 경찰의 눈 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데려간거지요.그리고 차로 간선도로변에다 그 아이를 내려 놓고는 사라져 버린 겁니다.만일 그 소녀가 스코플라민 때문에 계속 의식을 잃고 있었다면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억을 해내지 못하겠지요." 포프 양은 포와로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녀가 덤벼들듯이 물었다. "하지만 왜요? 뭣 때문에 제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겁니까?" 포와로가 우울하게 말했다. "위니의 짐 때문이지요! 범인들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몰 래 가져갈 물건을 갖고 있었습니다.세관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물건이지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난품이지요.그런데 세관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여학생의 트렁크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포프 양,당신은 유명한 인물이고,학교 도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미래의 예술가가 될 어린 여학생들의 짐은 세관에서도 검 사하지 않고 대부분 그냥 통과시켜 주고 있습니다.더욱이 유명한 포프 학교의 학생 들이라는 데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러나 납치시건이 알려진 뒤에,경시청의 형 사가 와서 그 학생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되겠지요." 에르큘 포와로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학교의 규칙상 트렁 크가 도착하면 짐을 풀어보기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위니가 당신에게 줄려고 했다 는 선물---물론 위니가 크랜체스터에서 포장을 한 선물은 아니지요."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은 이 그림을 나한테 준 거요.분명히 말하지만,이 그림이 당신의 이 우수한 학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캔버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그러자 마치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크랜체스터 다 리가 사라지고 대신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조의 고전적인 광경이 나타났다.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히폴리테의 띠지요.히폴리테가 헤라클레스에게 자신의 띠를 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루벤스의 작품이지요.아주 위대한 작품이긴 합 니다만---당신의 응접실에 걸어놓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오." 포프 양의 얼굴이 약간 벌개졌다. 히폴리테의 손에는 띠가 들려 있었고---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헤라 클레스 한쪽 어깨에는 사자가죽이 비스듬하게 걸쳐져 있었다.루벤스의 그림 속에 나 오는 인물들은 모두 풍만하고 관능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포프 양은 마음의 평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훌륭한 예술작품이에요.하지 만---당신이 말한대로---결국에는 학부모들의 감정을 존중해야만 되겠지요.마음이 좁은 사람들이 꽤 많으니까요.제 말뜻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5 포와로가 막 학교를 떠날려고 할 때였다.갑자기 뚱뚱한 학생,마른 학생,검정머리 학 생,금발머리 학생 등 각양각색의 여학생 무리가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런!" 하고 그는 불어로 중얼거렸다. "진짜 아마존(그리스 전설의 여장부로 사나운 여자를 가리킴)이 공격하는 것 같군!" 키가 큰 금발머리 여학생이 큰소리로 외쳤다. "소문이 다 돌았대요-----" 학생들이 파도처럼 그의 주위로 밀려들자 에르큘 포와로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이 그만 갇혀버리고 말았다.젊고 시끌법적한 여학생들 틈에 끼인 그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25명의 학생들이 제각기 다른 음색으로 똑같은 말을 소리치고 있었다. "포와로 씨,사인북에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