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스페리스의 사과 1 에르큘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큰 마호가니재 책상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굵은 눈썹,얇고 볼품없는 입술,탐욕스러워 보이는 턱,날카롭고 몽상적 인 눈.그는 이 에머리 파워가 왜 재계의 실력자가 되었는지 그를 직접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길고 화사한 보기 좋은 상대방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며서 그가 위대한 미술품의 수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미술에 대한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정열은 역사에 대해 보여주는 그의 정열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 었다.그렇게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물건이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 했고 반드시 그 배후에 역사적인 전통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에머리 파워는 한창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그는 목소리가 아주 작고 또렷했지만 그 어떤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내가 알기로,당신은 요즘 사건을 잘 맡지 않는 걸로 알고 있소만,이번 일만은 맡아주리라고 믿소." "이번 일이 그렇게 중대한 일입니까?" 에머리 파워가 말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소." 포와로는 미심쩍다는 태도로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다.그 모습은 마치 명상에 잠긴 티 티새 같았다.상대방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건 어떤 예술품을 되찾는 일과 관계된 일이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황금술잔.그 술잔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데리고 보르지아---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인데,때때로 그는 자기와 친한 손님에게 그 술잔에 마실 것을 따라 주었다더군.그런데 말이오,포와로 씨.그 술잔을 받아 마신 손님들은 대부분 죽었다는 거요." "대단한 역사를 가진 물건이로군요." 하고 포와로가 중얼거렸다. "그 술잔의 내력은 항상 피비린내나는 사건과 연과지어져 있소.누군가 그것을 훔쳐가 면 그걸 되찾기 위해서 살인이 자행되곤 했으니까.세월이 흐름에 따라 수많은 사람 들의 핏자국도 계속 그 술잔의 뒤를 따라 이어지고 있는 셈이오." "그게 정말 그렇게 가치 있는 물건입니까,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 "그것의 진가는 확실히 굉장한 것이오.세공이 아주 훌륭하게 되어 있소.(사람들은 벤베누토 셀리니의 작품이라고들 하지.)보석으로 치장한 뱀이 한 그루의 나무를 휘 감고 있고 그 나무에는 아주 아름다운 에메랄드로 만든 능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 는 그런 디자인이오." 그러자 포와로가 갑자기 흥미가 생기는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능금들이라고요?" "그 에메랄드도 뱀의 몸에 박힌 루비들도 아주 훌륭하오.하지만 그 자느이 참된 가 치는 물론 그것의 역사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소.그잔은 1929년에 산 베라 트리노 후작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소.수집가들은 서로 경합을 벌였지.그렇지만 결 국 내가(그때 당시의 환시세로) 3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가격으로 그것을 획득했소." 포와로는 눈썹을 치겨올렸다.그리고 중얼거렸다. "대단한 액수로군요! 산 베라트리노 후작은 운이 좋은 편인데요." 에머리 파워가 말했다. "난 내가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얼마 든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오,포와로 씨." 에르큘 포와로가 조용히 말했다. "물론 당신도 이런 스페인 속담을 들어보셨을 겁니 다.'갖고 싶은 것은 가져라.단 그 대가는 반드시 치뤄라.'라는 속담 말입니다." 순간 대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노여움의 불꽃이 재빨리 그의 눈 속을 스치고 지나갔 다.그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철학자 같은 투로 얘기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로 군요,포와로 씨." "깊이 생각할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확실히 그렇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각만으로 내 술잔을 되찾기는 어려울 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필요한 것은 행동이니까." 에르큘 포와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당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요.하지만 양해해 주십시오,파워 씨.얘기가 약간 옆길로 새버린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어쨌든 당신은 그 술잔을 산 베리트리노 후작에게서 샀다고 했지요? "그렇소,그런데 지금 내가 당신한테 꼭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그 술잔이 내 수중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도난당했다는 사실이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경매가 있던 밤에 누군가 후작의 저택에 몰래 들어가 그 술잔을 포함하여 10점이나 고가 물품을 훔쳐가 버렸던 거요." "그래서 어떤 조치가 내려졌지요?" 파워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경찰이 사건을 수사했소.그리고 그 도난사건은 국제 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도둑 집단의 소행이었다는 것도 밝혀냈지요.그 일당 가운데 더블레이라는 프랑스 인과 리코베티라는 이탈리아 인,이 두 사람은 체포되어 재판에 까지 회부되었소.훔친 물건 가운데 일부는 그들 소지품 속에서 찾아냈고 말이오." "그러나 보르지아의 술잔은 없었군요?" "그렇소,경찰 조사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실제로 범행에 가담했던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다고 했소.내가 방금 얘기했던 두 사람 외에 패트릭 케이시라는 아일랜드 인이 더 있소.그 남자는 전문적인 도둑으로서 실제로 물건들을 훔쳐낸 것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고 하더군.더블레이는 일당의 참모격으로 모든 계획을 준비했고 리코 베티는 차를 몰고 창 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위에서 내려오는 물건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 같소." "그래서 훔친 물건들은요? 그들 세 사람이 나눠가졌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랬을 거요.하지만 되찾은 물건들은 모두 비교적 값이 적게 나가는 것들이 었소.더 비싸고 더 훌륭한 물건들은 서둘러 외국으로 모두 밀반출시켰겠지." "그럼,그 세 번째 범인인 케이시라는 남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의미로 봐서는 그렇소.그는 그리 젊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근육이 예전만큼 유연하지 못했던지 그로부터 2주일 뒤에 그는 어느 건물의 5층에서 추락 해서 그만 즉사하고 말았소." "어디서 말입니까?" "파리에서였소.그는 백만장자 은행가인 뒤볼리에의 저택을 털려고 하다가 그랬다더군 "그럼,그 뒤로 그 술잔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렇소." "팔아치운 흔적도 없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오.나는 경찰뿐만 아니라 여러 사설기관에도 의뢰해서 줄곧 그 점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 말이오." "그럼,당신이 지불한 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작은 워낙 예의바른 사람이라,자기 집에서 그 잔을 잃어버렸으니가 나한테 돈을 되돌려 주겠다고 말해 오긴 했소." "그렇지만 당신이 그걸 거부했다 이겁니까?" "그렇소." "왜 그랬습니까?" "글쎄,내 수중에서 이 문제를 그냥 유보시켜 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즉 만일 당신이 후작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지금은 법적으로 당신 소유일 그 술잔이 설사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의 소유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이 말씀입니까? "바로 그렇소." 포와로가 물었다. "당신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면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있는 거지요?" 에머리 파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직감력이오,포와로 씨.사실 그건 아 주 간단한 논리라오.사실 난 지금 그 술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대강 짐작 이 가니까." "아주 흥미롭군요.그래,그가 누구죠?" "루빈 로젠탈 경이오.그는 같은 수집가로서 내 동료가 될 뿐 아니라 또한 개인적인 적이기도 하지요.우리는 여러 사업상의 거래에서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었소.그런 데 대체로 승리자는 나였던거요.상대방에 대한 적의는 보르지아 술잔의 경매를 둘 러싸고 최고조에 달해 있었소.우리 두 사람은 각기 그것을 차지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말이오.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그건 자존심과도 관계된 문제였소.우리는 각기 대리인을 내세워 경매장에서 서로 경합을 벌였었소." "당신의 대리인이 마침네 낙찰에 성공했군요?" "아니,정확히 말하면 그런 건 아니오.나는 만일을 위해서 또 다른 대리인을 고용했 었으니까---파리에 있는 어느 미술상의 대리인으로 가장시켜서 말아오.아시다시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에게는 절대 양보할 수 없었지만 만일 제3자가 그 잔 을 가져 간다면 충분히 양보할 마음이 있었소.왜냐하면 나중에 그 제3자와 살짝 뒷 거래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소.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말이 오." "그러니까 살짝 속임수를 쓴 것이로군요." "바로 그렇소." "그리고 그 속임수는 그대로 성공했고---그 뒤에 루빈 경은 자기가 속았다는 걸 알 게 되었군요?" 파워는 미소를 지었다.그것은 회심의 미소였다. 포와로가 말했다. "이제야 대강 사정을 알겠습니다.당신은 루빈경이 절대로 질 수 없 다는 생각에서 그 도둑집단에게 부탁하여 그 술잔을 훔쳐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 는군요?" 에머리 파워는 한쪽 순을 들었다. "오,아니오,아냐! 그렇게 노골적인 얘기는 아니오. 다만 이렇게 됐을 거란 얘기요.즉,도난사고가 일어난 직후 루빈 경은 출처가 불분명 한 르네상스 시대의 술잔을 하나 구입했을 거란 말이오." "경찰이 도난품의 수배서를 배포했을 게 아닙니까?" "물론,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곳에 그 술잔을 놓아두었을 리는 없겠지." "그럼,루빈 경은 그 술잔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 하고 있을 거라는 말입니까?" "그렇소,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내가 후작의 제의를 받아들이면---나중에 루빈 경은 후작과 비밀리에 거래를 해서 그 술잔을 합법적으로 자기 손에 넣을 가능성도 충분 히 있지 않겠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술잔의 법적인 소유권은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내 물건을 되찾을 가능성이 아직 다 사라 져 버린 것은 아니었소." "말하자면---" 포와로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술잔을 루빈 경에게서 다시 훔쳐오려고 했다는 말이로군요?" "그건 훔치는 게 아니오,포와로 씨.단지 잃어버렸던 내 물건을 다시 찾아오는 당연 한 일을 했을 뿐이란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긴가요?" "그도 그럴 수밖에.로젠탈은 그 술잔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오." "어떻게 그걸 압니까?" "최근 석유회사들을 합병시킨 뒤로 로젠탈 경과 나는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고 있 소.우리는 이미 적이 아닌 동지 사이가 된 셈이라고나 할까? 내가 그에게 솔직하게 그 문제에 대해 털어놓자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는 그 술잔을 단 한번도 자기 수중 에 넣어 본 적이 없다고 솔직히 대답했소." "그런데 당신은 그의 말을 믿습니까?" "그렇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포와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려 10년 동안이나 당신은,속된 말로 계속 헛다리만 짚어왔다는 말씀입니까?" 대부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소,난 계속 그 일만 하고 있었던 셈이오!" "지금은---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셨습니까?"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끌어들인 거로군요? 그렇다면 나는 희미한 단서나마 찾아내기 위해 당신이 끌고 나온 사냥개인 셈이군요----그것도 아주 희미한 단서를 찾아내려고 말입니다." 에머리 파워는 냉담하게 말했다. "만일 이번 사건이 쉽게 해결 될 사건이었다면 굳 이 당신을 불러올 필요가 없었을 거요.물론 당신이 아무래도 이번 일을 해결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말은 그 순간에 참으로 적절한 말이었다.에르큘 포와로는 몸의 자세를 다시 가 다듬었다.그리고 차갑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가능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만 내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해 볼 뿐이지요.이 사건은 과연 내가 손을 댈 만큼 흥 미 있는 사건일 것인가?" 에머리 파워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흥미가 있을 거요.당신은 당신이 요구하는 만 큼의 보수를 다 받게 될 테니까." 작은 남자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쳐다보았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그 미 술품이 그렇게까지 탐나는 건 아니로군요? 내 말이 맞지요?" 에머리 파워가 말했다. "당신처럼 나 역시 패배라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말이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그랬군요---그렇게 말씀하시니--충분히 이해됩니다." 2 바그스타페 경감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 산 베라트리노 술잔 말입니까? 예,그 사건에 대한 거라면 전부 기억하고 있지요.제가 끝까지 그 사건을 담당했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이탈리아 어를 조금 할 줄 알기 때문에 그곳으로 건너가 공동 수사 에도 참여했었지요.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술잔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당신 생각은 어떻소? 장물처리로 됐을 것 같소?" 바그스타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물론 그럴 가능성을 완전 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아니오,내 생각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요.그 술잔은 어디 에 숨겨졌고---그리고 그게 숨겨져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죽어버렸다 는 겁니다." "케이시란 사람 말이오?" "그렇습니다,그는 이탈리아에 그걸 숨겨놓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밀빈출시켰을 겁 니다.어쨌거나 그는 그것을 감추어 놓았고,그가 그걸 어디에 감추어 놓았건 그건 아직 그 장소에 있을 겁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로맨틱한 추리로군요.석고상 속의 진주 들---그 소설 제목이 뭐였더라? 맞아,'나폴레옹의 흉상'이었습니다.하지만 이번 경 우는 보석이 아니라---크고 단단한 황금잔이란 말이오.그건 숨기기도 그리 쉽지 않을 텐데요." 바그스타페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그건 모르겠는데요.하지만 하려고만 들 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가령 마루 밑이라든가---아니면,뭐 그 비슷한 곳에 말 입니다." "케이스는 자기 소유의 집이 있었소?" "그렇습니다---리버풀에요." 그러더니 그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곳 마루 밑에는 없었습니다.우리가 이미 확인해 보았으니까요."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됐소?" "그의 아내는 고상한 여자였는데---폐결핵을 앓았지요.그녀는 자기 남편이 하는 일 때문에 무척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녀는 신앙심이 두터운 여자로--열렬한 카톨 릭 신자였기 때문에---차마 그와 이혼할 결심을 못했나 봅니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2년 전에 죽었습니다.딸이 그녀를 돌봐주고 있었는데---나중에 그 딸도 수녀가 되 었지요.아들은 달랐습니다.자기 아버지를 그대로 쏙 빼닮았지요.그에 대한 마지막 소식은 그가 미국에서 복역중이라는 것입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수첩에다 적었다. "미국? 케이시 아들이 그 숨겨진 장소를 알고 있 있을 가능성은 없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일 그랬다면 지금쯤은 벌써 장물아비의 손에 넘어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 술잔을 녹여 버렸을 수도 있잖소?" "물론이지요.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생각됩니다.하지만 모르는 일이지요. 그 술잔은 수집가들에게는 막대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 데다가---수집가들 사이에서 는 이런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니까요.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죠! 포와 로 씨,때로는----" 불쾌한 표정으로 바그스타페가 말했다. "수집가란 사람들은 최소 한의 도덕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오! 그렇다면 당신은 예를 들어 루빈 로젠탈 경이 당신이 말한 그 '은밀한 거래'에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겠군요?" 바그스타페가 웃었다. "그 사람 역시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가요.예술품에 관한 한 그 사람도 그리 양심적인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죠." "다른 공범자들은 어떻게 되었소?" "리코베티와 더블레이는 둘 다 중형을 선고받았지요.아마 지금쯤은 그들로 풀려나올 때가 되었을 겁니다." "더블레이는 프랑스 인이라지요?" "그렇습니다,그는 그 도둑집단의 참모격인 사람이었지요." "그 세 사람 이외에 또 다른 공범자들도 있었소?"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레드 케이트라고 불리는 여자였지요.이 여자는 귀부인 들의 하녀로 위장취업을 해서 모든 사전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예를 들 어 보석이 있는 장소라든지 등등을 말입니다.제가 알기로는 일당들이 일망타진되 뒤 에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없소?" "유구이안이라는 녀석이 그들과 한패일 거라는 혐의를 받았지요.그는 상인이었습니다 본거지는 스탐불이었지만 파리에도 가게를 하나 가지고 있었지요.그 자식에게는 증 거가 없었지만---하지만 수상쩍은 녀석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포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자기 수첩을 내려다보았다.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 여 있었다.미국,오스트레일리아,이탈리아,프랑스,터키...그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다녀야 할 것 같군." "뭐라고요?" 하고 바그스타페 형사가 물었다. "내가 보기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아무래도 세계일주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말이오." 3 에르큘 포와로에게는 옛날부터 유능한 하인인 조지와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 토론 을 벌이는 그런 습관이 있었다.다시 말해서 에르큘 포와로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조 지는 자신이 하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얻었던 처세슬로 그에 답하는 것이다. "조지,만일 자네가---전세계에 흩어진 다섯 나라로 가서 조사를 해야 할 상황에 직 면 했다면 어떻게 할 텐가?" "글쎄요,나리,아무래도 비행기로 가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요? 물론 어떤 사 람들은 그걸 타면 위가 뒤집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그 점에 대해서는 뭐러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생각해 보세.헤라클레스라면 어떻게 했을지 말이네." "그 자전거 가게 주인 말입니까,나리?" "아니면---" 에르큘 포와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좀더 간단하게 그가 어떻게 했느냐고 해볼까? 그 대답은 말일세,조지,그는 아주 정력적으로 여행을 했다는 것이 지.그러나 결국 그가 얻어 낸 정보는--얼마간은--프로메테우스한테 얻은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네레우스한테서 얻은 것이었지." "그래요?" 하고 조지가 말했다. "그런데 전 그런 신사분들의 성함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전,그분들은 여행사 분들인가 보죠?" 자기 목소리를 음미하면서 에르큘 포와로가 말을 계속했다. "내 고객 에머리 파워는 단 한 가지밖에 모르고 있네.그것은 '행동하라!'는 것이지.그러나 불필요한 행동에 정력을 낭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일 뿐이야.조지,삶에 있어서의 이런 철칙도 있지.특히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특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에르큘 포와로가 덧붙였다. "더욱이 비용이 아무 문제가 안될 때는!" 그는 책장에서 D자가 붙여져 있는 서류철을 하나 끄집어 내더니 '탐정 사무실---믿을 수 있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부분을 펼쳤다. "이보게,현대판 프로메테우스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뉴욕에 있는 핸커 턴 사무소,시드니에 있는 레이든 앤드 보쉐 사무소,로마에 있는 지오바니 메치 사무 소,스탐블에 있는 나훔 사무소,파리 로제에 있는 프랑코나르 사무소' 이상이네." 그는 조지가 쓰는 걸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이윽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지 금 당장 리버풀행 기차가 있는지 좀 알아봐 주게." "알겠습니다,나리.그런데 리버풀로 가시려고요?" "그래야 할 것 같네.물론 나중에는 그보다 더 먼곳으로 가봐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조지.그렇지만 아직은 아닐세." 4 에르큘 포와로가 바위 위에 서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서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의 일이었다.외로운 듯 갈매기들이 긴 울음소리를 남기면서 바다 위를 오르락내리 락 하고 있었다.공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축축했다. 이니시골란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누구나 그러하듯 에르큘 포와로 역시 자기가 지구 끝에 와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외지 고,쓸쓸하며,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황량한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이곳에는 아름다움과 우수가 있었다.금방이라도 유령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 움,외지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먼 과거의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이다.이곳 아일랜드의 서쪽은 로마군대조차 단 한 번도 진격해 오지 않은 땅이었다.단 한 번도 진지가 구축 된 적도 없었고,잘 정리된 편리한 도로가 닦여진 적이 없었다.이곳은 그야말로 상식 도,질서 있는 생활 양식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런 땅이었던 것이다. 에르큘 포와로는 자신의 신고 있는 에나멜 구두의 코끝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 었다.그는 웬지 아주 외롭고 비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그가 살아온 생활 수준 같은 것은 이곳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그의 시선은 황량한 해안선을 천천히 훑 어보고는 다시 바다 쪽으로 향했다.전설에 의하면 어딘가 저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위에는 축복받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섬과 젊은이들만의 나라가 있다고 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사과나무와 노랫소리,그리고 황금빛....." 문득 에르큘 포와로는 제정신이 들었다.마법이 풀리며 다시 그는 에나멜 구두와 산뜻 한 진회색 양복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그는 그 종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그것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아주 귀에 익은 소리였던 것이다.그는 벼랑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한 10분 가량 걷자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높은 돌담이 그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장식못이 박혀 있는 거대한 나무문이 벽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에르큘 포와로는 그 문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그리고 그 문에 철로 된 커다란 노커(현관 문을 두 드리는 쇠)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녹슨 쇠사슬을 잡아당겼다.그러 자 문 안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문에 붙어 있던 작은 판벽이 옆으로 밀쳐지며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그 얼굴은 온통 뻣뻣하게 서 있는 백발에 뒤덮인 채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상대방을 쳐다보고 있었 다.윗입술 위에는 상당히 짙은 콧수염이 나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여자의 목소리였는 데,그것은 에르큘 포와로가 '소름끼치는 여자'의 목소리라 말하는 그런 소리였다. 그 얼굴이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이곳이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들의 수녀원입니까?" 그 소름끼치는 여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곳이 아니면,그럼 어디란 말이우?" 에르큘 포와로는 그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않고 그저 이 괴물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장 수녀님을 뵙고 싶습니다만." 괴물은 별로 마음내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결국에는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고리가 풀리고 문이 열리자 에르큘 포와로는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가구라곤 거의 없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곧이어 허리에 묵주를 매단 수녀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에르큘 포와로는 태어날 때부터 카톨릭 신자였다.그래서 그는 자기가 들어와 있는 수도원 내부의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뵈서 죄송합니다,수녀님." 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케이트 케이시라고 불리던 수녀 한 사람이 여기에 와 있다고 해서----" 원장 수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세례명이 메어 리(마리아) 우르술라지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실은 좀처럼 해결이 잘 안되는 어떤 범죄 사건이 있었습 니다.그 사건에 메어리 우르술라 수녀의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그녀는 아마도 이 사 건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게 주리라 믿습니다만." 그러자 원장 수녀는 고개를 저었다.얼굴은 평온했고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했다 "메어리 우르술라 수녀는 당신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나는----" 원장 수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메어리 우르술라 수녀는 두 달 전에 죽었습 니다." 5 지미 도노반 호텔 안에 있는 술집에서 에르큘 포와로는 심히 우울한 얼굴로 벽에 기 댄 채 앉아 있었다.이 호텔은 그웳 머릿속에 들어 있는 호텔이라는 기존 관념과는 동떨어진 그런 호텔이었다. 침대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고---그의 방에 있는 두 장의 유리창 역시 마찬가지여서 에르큘 포와로가 가장 싫어하는 차가운 밤공기가 인정사정없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 었다.그에게 가져온 뜨거운 물이라는 건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고 그가 먹었 던 음식 역시 뱃속에서 이상스레 고통스런 느낌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술집에는 5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화젯거리는 온통 정치에 관한 것들뿐이 었다.그 대부분은 에르큘 포와로에게 무슨 얘기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 얘기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잠시 뒤에 그는 그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 옆에 와서 앉았다는 걸 알아챘다.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계층의 사람인 듯했다.그에게는 도시에서 달고 온 듯한 그런 도시 사람의 찌꺼기가 약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주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을 걸어왔다. "선생,가르쳐 줄까? 좋아.가르켜 주지 '페간의 자존심'은 이길 승산이 전혀 없어.정말 전혀 없다고....도중에 틀림없이 녹 초가 되고 말 테니까 말이야---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니까.자네,내 예상을 사지 그래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내가 주는 정보를 사려고 한다니까.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선생?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응? 아틀라스야,내가 누구냐면 말이지---더블린 선의 아틀라스란 말이야...시즌 내내 승리마를 맞춘 사람이라고...배당이 얼마나 됐는 줄 알아? 무려 25배였다고---25배였단 말이야.선생,아틀라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틀림 없다니까." 에르큘 포와로는 이상스런 존경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는 목소리까지 떨 면서 이렇게 외쳤다. "오,하나님! 계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6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다.달은 때때로 구름 사이로 요염하게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포와로와 그의 새 친구는 벌써 몇 마일이나 걷고 있는지 자신들도 몰 랐다.포와로는 다리를 절룩거렸다.불현듯 다른 구두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시골길을 걷기에는 에나멜 구두보다 훨씬 더 편할 듯 싶은 그런 구두였다.실제 로 조지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그 구두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나리,고급 생피구 두입니다." 라고 조지가 말했었는데.... 에르큘 포와로는 그것을 신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그는 자신의 발이 산뜻하고 맵시 있게 보이는 것을 좋아했다.그러나 지금 이 자갈투성이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그 구두를 신고 왔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동행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 신부가 냄새라도 맡고 뒤쫓아오면 어떻게 하지 ? 웬지 양심에 가책이 되는걸?" 에르큘 포와로가 말햇다. "자네는 단지 시저의 것을 시저한테 돌려주려는 것 뿐이 라고." 이윽고 그들은 수녀원의 높은 돌담 밑에 도착했다.아틀라스는 자기가 맡은 역활을 다 하기 위해 준비태세를 갖췄다. 그 남자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만 찌그러져 버리겠다고 나지막하지만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에르큘 포와로는 엄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조용히 해! 자네가 지금 떠받치고 있는 건 지구 전체의 무게가 아니라고! 기껏해야 이 에르큘 포와로의 몸무게일 뿐일세!" 7 아틀라스는 빳빳한 5파운드짜리 지폐 두 장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그리고 마치 기도 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침이 되면 어떻게 해서 내가 이 돈을 벌게 되었는지 다 잊 게 되었으면 좋겠어.아무래도 오레일리 신부님께 의심을 받을 것만 같아서 걱정이 된 단 말이야." "다 잊어버리게나,친구.내일이면 세상은 자네 것이라고." 아틀라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다 건다! 그래,위킹 래드가 좋겠어.그 말은 거마인 데다 아주 사랑스러우니까! 그리고 셰일라 보인도 있지.그럼,7배는 문 제없다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방금 자네가 이교도 신을 들먹거렸던 것 같은데,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야,헤라클레스라고 자넨 말했어.오,하나님 감사 합니다.내일 3시 반에 헤라클레스란 말이 경기에 출전한단 말이야." "이보게,친구."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말에 돈을 걸어 보게나. 내 장담하네만 헤라클레스는 절대 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이튿날 과연 그의 예상은 적중해서 로슬린 씨 소유의 헤라클레스는 보이넌 경마경기에서 60배라는 좋은 배당으로 전혀 예기치 않게 우승을 차지했다. 8 재빨리 에르큘 포와로는 산뜻하게 포장된 소포를 뜯었다.처음에는 갈색 종이가 나타 났고,그 다음에는 솜이,마지막으로 휴지가 나타났다. 이윽고 에머리 파워 앞에 놓인 책상 위에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술잔을 올려놓 았다.술잔의 표면에는 녹색 에메랄드로 된 능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새겨져 있었다. 대부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마침내 그가 말했다. "축하하오,포와로 씨." 에르큘 포와로가 고개를 숙였다. 에머리 파워는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그 술잔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그는 감격스 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내 물건!" 에르큘 포와로도 그 말에 동의했다. "네,당신 것이지요!" 파워는 한숨을 쉬었다.그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그리고 사무적인 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어디에서 찾아냈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제단 위에서 찾아냈지요." 에머리 파워는 깜짝 놀란 듯했다. 포와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케이시의 딸은 수녀였습니다.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죽 었을 때 마침 허원식(마지막 서약식)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그녀는 무식했지만 그러 나 신앙심만은 깊었지요.그 술잔은 리버풀에 있는 케이시의 집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걸 아버지의 유물로 생각한 그녀는 아버지가 지었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 술잔을 수녀원으로 가지고 갔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 그걸 바쳤던 겁니다.내가 보기에는 수 녀들 자신은 그 술잔의 가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아마도 가보 쯤으로 여겼을 테지요.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성찬배일 뿐이었고 실제로 그들은 이 술잔을 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에머리 파워가 말했다. "정말 뜻밖의 이야기로군!" 그가 덧붙였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곳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한 거요?" 포와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소거법을 적용했던 덕분이 아닐까요? 거기다 그 누구도 그 술잔을 처분할 생각을 안했다는 의외의 사실도 있었고 말입니다.그런 사실들은 그게 일번적인 물질적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그런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는 것을 깨우쳐 주었지요.그리고 나서 나는 패트릭 케이시의 딸이 수녀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습니다." 파워는 감탄섞인 어조로 말했다. "정말,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축하하오,포와로 씨. 자,이제 보수가 얼마면 되겠는지 말해 보시오.수표를 써줄 테니까."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보수는 필요없습니다." 파워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오,그게?" "혹시 어릴 때 옛날 이야기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 이야기들 소게 나오는 왕은 대개 이렇게 말했지요.'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과인에게 말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그러나 돈은 아닙니다.아주 간단한 부탁이지요." "대체 그게 뭐요? 주식시세에 대한 예상이라도 듣고 싶다는 거요?"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돈에 불과한 것일 뿐이지요.내 부탁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간단한 것입니다." "도대체 뭔데 그러오?" 에르큘 포와로는 술잔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술잔을 다시 수녀원으로 돌려보내 주 십시오." 잠시 말이 끊겼다.이윽고 에머리 파워가 입을 열었다. "당신,정신이 아주 이상해진 모양이로군?"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내 정신은 이상해지지 않았습니다.자,보십 시오.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술잔을 집어들었다.그리고 손톱 끝으로 나무를 휘 감고 있는 뱀의 벌어진 주둥이를 힘껏 눌렀다.그러자 술잔 안쪽에 새겨져 있던 부각 의 일부분이 살짝 옆으로 벗겨지면서 속이 비어 있는 손잡이와 연결된 부분에 구멍이 하나 나타났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보르지아 교황의 술잔이었습니다.이 작은 구 멍을 통해 독이 술 속으로 들어갔던 거지요.당신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 습니다.이 술잔의 역사는 사악하기 그지없다고 말입니다.폭력과,피와,사악한 격정이 그 술잔을 소유한 사람을 늘 따라 다녔지요.어쩌면 이번에는 그 해가 당신한테 닥치 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건 미신일 뿐이오!" "그럴지도 모르지요.하지만 당신은 왜 그토록이나 이것을 손에 넣고 싶어했지요? 그 것은 이 술잔의 아름다움 때문도,이것의 가치 때문도 아니었습니다.당신은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가지나 되는---아름다운 물건들과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당신은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했던 것뿐입니다! 당 신은 지는 것이 싫었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당신은 지지 않았습니다.당신은 이겼소! 술잔은 당신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그러니 지금은 훌륭한---아주 훌륭한 아량을 베풀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거의 10여 년 동안이나 평화롭게 안치되어 있던 그 곳으로 그 술잔을 되돌려보내 주십시오.그곳에서 그 술잔의 사악함이 깨끗하게 씻 겨질 수 있도록 놓아 둡시다.한때 이 술잔은 교황에게 속해 있던 물건이었습니다. 그걸 다시 교회로 돌려 줍시다.우리가 사람들의 영혼이 정결하게 되고 속죄함 받 을 수 있도록 그 술잔을 다시 제단 위에 올려 놓자는 겁니다." 그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가 이 술잔을 어디에서 찾아냈는지 말씀드리지요. 그곳은 잊혀진 젊음과 영원한 미의 파라다이스 쪽으로 가는,서해가 내려다보이는 평 화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니시골란의 아름다움을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묘사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에머리 파워는 의자에 깊이 파묻힌 채 한쪽 손을 눈 위에 얹었다.그러더니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일랜드의 서쪽 해안가였소.내가 아직 소년이 었을 때 미국으로 가기 위해 나는 그곳을 떠났지." 포와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 얘긴 나도 들었습니다." 대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의 눈동자는 다시 빛나고 있었다.그는 입을 열었 다.그때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구려,포와로 씨.아무튼 당신 생각대로 하시오.이 술잔을 내가 주는 선물로 수녀원에 갖다 주시오. 상당히 값비싼 선물이 될 거요.무려 3만 파운드짜리니까--그런데 이것과 바꾸어 내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오?" 포와로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녀님들이 당신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려드릴 겁니다." 대부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탐욕스러우면서도 굶주린 듯한 미소였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하나의 투자인 셈이 되겠군!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투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9 수녀원의 작은 응접실 안에서 에르큘 포와로는 모든 사정을 들려주고 원장수녀에게 성찬배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저희들이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그리고 그분을 위해 늘 기도드리겠다는 말도 함께요." 에르큘 포와로는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그 사람에게는 수녀님들의 기도가 필요하 지요." "그분이 그토록 불행한 분이었던가요?" "너무나 불행해서 그는 무엇이 행복인지도 잊고 말았습니다.너무도 불행해서 그 자신은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할 정도입니다." 원장 수녀는 조용히 말했다. "아,그 부유한 사람이......" 에르큘 포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달리 할말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