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의 등장 섣달 그믐날 밤,로이스턴 저택의 파티장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만이 늦게까지 남아서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모두 자러 가 버리고 아무도 없어서,새터드웨이트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겼다.그는 젊은이들이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것을 싫어했다.재미도 없고 점잖지도 못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나이가 들수록 새터드웨이는 마음이 세심해지고,또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좋아졌다.그런데 젊은이들에겐 그런 점이 부족했던 것이 다.세터드웨이는 62세의---약간 등이 굽은 늙은 남자이며,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묘한 표정에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예민하고 관심이 많았다.말하자면,지금까 지 죽 그는 관람석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인생극을 관조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언제나 구경꾼이었다.이제야 처음으로 느낀 점이지만,완전히 늙어 버린 지금에 와서 그는 연극에 대해서 점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현재 그는 약 간 유별난 구경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특별한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구경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그는 그것을 본 능적으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아 알아내는 것이 다.그런데 오늘 오후 로이스턴 저택에 도착하고부터 그의 그 특유한 감각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아니면 일어나려하고 있는것이다 파티에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부드럽고 붙임성이 좋은 주인 톰 이브샴과,결혼 전 에는 레이디 로라 칸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던 착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의 아내가 있었다.('레이디'는 귀족의 부인이나 딸에게 붙이는 경칭) 그리고,군인이고 여행가며 사냥을 좋아하는 리처드 콘웨이 경과,그밖에 젊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새터드웨 이트는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았다.그리고 포탈 부부가 있었다. 이 포탈 부부에게 새터드웨이트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알렉스 포탈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그의 아 버지나 할아버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알렉스 포탈은 그 집안의 전형적인 인물 이었다.나이는 마흔 살 정도이며,금발에 파란 눈은 다른 포탈 집안 사람들과 똑같았 고,스포츠를 좋아하며 상상력이 부족했다.알렉스 포탈에게 특이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선량하고 건전하고 평범한 영국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새터드웨이트도 알고 있듯이 그녀는 오스트레일리 아 태생이었다.포탈은 2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 간 적이 있었는데,거기서 그녀를 만 나 결혼하여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는 영국에 와본 적이 없었 다.그런데,그녀는 새터드웨이트가 지금까지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여자와는 전혀 달랐 다.그는 지금 그녀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정말 흥미 있는 여자다.매우 조용 하며 생기가 넘쳐 흐른다.생기! 확실히 그랬다.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은 아니다----그렇다,미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뭔가 매력이 있다.이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점이었다.그러나 새터드웨이 트는 이러한,남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점 외에 여성적인 면(새터드웨이트는 여성적인 기질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에도 역시 같은 흥미를 느꼈다.왜 포탈 부인은 머리를 염색한 걸까? 보통 남자들 같으면 그녀가 머리를 염색했는지 어땠는지 아마 느끼지 못했겠지만,새터드웨이트는 알 수 있었다.그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났 다.그래서 그는 당황했던 것이다.검은 머리칼을 금발로 염색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 이지만,금발을 검게 염색한 경우는 이번에 처음 보았던 것이다. 모든 면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그는 직관적으로 그녀가 매우 행복하든지 아니면 매우 불행할 것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그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른다.그래서 괜히 초조했다.게다가 그녀가 남편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데 호기심 이 끌렸다.새터드웨이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포탈은 분명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하지만 가끔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정말 흥미 있는 일이야.' 라고.포탈은 과음을 했다.그리고 그는 자기 아내가 보지 않을 때 신경질적인 표정으 로 그녀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포탈의 그 신경질적인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녀 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그는 이 부부에게 대단한 호기심을 느꼈다.이들에게는 지금 예상치 못할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커다란 벽시계에서 울리는 종소리 때문에 문 득 상념에서 깨어났다.이브샴이 12시라고 알려주었다.그리고 새해 인사를 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여러분,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애들도 기다렸다가 새해를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부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애들이 잘 리가 없어요.분명히 헤어 브러시 같은 걸 우리 침대 속에 집어넣고 있을 거예요.그런 장난을 매우 재미있어 하거든요.왜 그런지 모르겠지만.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그런 장난은 해볼 수도 없었잖아요?" "시대가 변하면 관습도 변하죠." 하고 콘웨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키가 크고 군인다운 남자였다.그나 이브샴은 거의 같은 타입의---정직하고,솔직 하며,친절하고,별로 머리가 좋은 편이 못 되는 남자들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서로의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서 올드 랭 사인을 불렀어요." 하고 레이디 로라가 말을 이었다. "그런 노래라든가 창살에 서려 잇는 눈은 항상 사람들에 게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브샴은 어색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그만둬요,로라.이런 곳에서!" 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거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전등을 마저 켰다. 레이디 로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생각이 부족했어요.당신은 돌아가신 케 이플 씨를 생각하신 거죠? 그런데,포탈 부인,난롯불이 너무 뜨겁지 않나요?" 엘리노어 포탈은 무뚝뚝하고 솔직한 태도로 말했다. "고마워요.의자를 약간 뒤로 하겠어요." 매우 사랑스런 목소리다---낮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듣는 사람의 귀에 여운을 남긴다고 새터드웨이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그림자 속에 가려져 버렸다.정말 유감이다. 그때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플 씨요?" "예,원래 이 집 주인이었는데 권총 자살을 했어요.아니! 걱정말아요,톰.싫으시다면 그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물론 톰에게는 큰 충격이었죠.그 때 여기에 있었스 니까요.당신도 계셨었죠,리처드 경?" "예,그랬죠." 벽에 걸려 있는 낡고 큰 시계가 천식환자처럼 그르렁거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12시를 알렸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하고 이브샴은 지나는 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레이디 로라는 정성을 들여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포탈 부인 쪽을 보면서 말 했다. "이제 새해로군요.감상이 어때요?" 엘리노어 포탈은 일어서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우선 잠을 자야겠어요." '안색이 매우 좋지 않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새터드웨이트는 서둘러 촛대를 준비했다 항상 저렇게 창백한 얼굴은 아니었는데--- 그는 촛대에 불을 붙여 가볍게 인사를 하 면서 그녀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그녀는 간단하게 답례를 하고,그것을 받아들고 천 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갑자기 새터드웨이트는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그녀가 웬지 불안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이 충동이 사라지자 그는 쑥스러워졌다. 계단을 오를 때는 남편에게 시선을 주지 않던 그녀가 지금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그를 가만히 날카롭게 쳐다보았는데,그 시선에는 강렬한 것이 담겨져 있었다.그것이 새터드웨이트에게는 정말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정신을 차리고서 그는 당황한 태도로 안주인에게 밤인사를 했다. "정말 행복한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요.하지만 정세는 불안한 상태인 것 같아요." 하고 레이디 로라가 말을 받았다. "맞아요.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하고 새터드웨이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레이디 로라가 계속 말해 나갔다. "가능하면 꼭 머리가 검은 남자분이 제일 먼저 문 지방을 넘었으면 좋겠어요.그 미신을 알고 계시겠죠,새터드웨이트 씨? 모르세요? 어 머,놀랍군요.정초에 검은 머리칼을 한 남자가 맨 먼저 문지방을 넘어야만 그 집에 행 복이 온대요.침대 속에 기분나쁜 물건이 없었으면 좋겠는데.애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애들은 원체 개구쟁이들이라서." 슬픈 예감이라도 든 듯 고개를 흔들면서 레이디 로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 라갔다.여자들이 모두 가 버리자 남자들은 벽난로 옆으로 모여들었다. 이브샴이 술병을 치켜들면서 붙임성 있게 말했다. "자,한잔합시다." 술이 각자에게 다 돌아가자 지금까지는 거론되지 않았던 화제로 돌아갔다. "데릭 케이플을 아시죠,새터드웨이트 씨?" 하고 콘웨이가 물었다. "음,약간은." "그리고 자네는,포탈?" "전혀 만난 적이 없는데." 그의 말투가 매우 과격하고 방어적이었기 때문에 새터드웨이트는 깜짝 놀랐다. "로라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난 질색입니다." 하고 이브샴이 천천히 말했다. "그 비극이 있은 뒤,이 집을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사들였지요.그런데 1년 만에 다시 그 집을 처분했어요---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나.하여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물론 유령이 나타난다는 쓸데없는 소문도 꽤 있었고.때문에 이 집은 평판이 점점 나 빠졌어요.그런데,로라 덕분에 내가 웨스트 키들비에서 입후보했을 때 이 근처로 이사 를 와야 했는데,그렇게 쉽게 적당한 집이 나서질 않더구먼요.그 때 마침 이 로이스턴 저택이 싼 값에 나와 있길래 결국 사들이게 된 거지요.유령 따위는 모두 쓸데없는 소 문이겠지만,그래도 역시 친구가 권총 자살을 한 집에 지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 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불쌍한 데릭 녀석---왜 그런 짓을 했을까? 영원한 수수 께끼예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권총 자살을 한 사람이 어디 그 친구뿐이겠나?" 하고 알렉스 포탈이 느릿하게 말했다.그는 일어서서 위스키뇁 소리내며 한잔 더 가득 따랐다. 새터드웨이트는 어쩐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분명히 어딘가 이상하다.새터드웨 이트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콘웨이가 말했다. "저 바람 소리를 들어 보게.어쩐지 좀 으스스하지 않은가?" "유령이 나타나기엔 딱 좋은 밤이군." 포탈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밤에는 지옥이 사자들이 모두 출현하실 거야." "레이디 로라가 말한 대로 그들 중에서 제일 머리칼이 검은 남자가 나타나 우리들에 게 행운을 가져다 주겠지." 하고 콘웨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소리를 들어 봐!" 흐느끼는 듯한,소름이 오싹 끼치는 바람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 세 번이 노크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 왔다. 모두 움찔했다. "이 밤중에 도대체 누구지?" 하고 이브샴이 외쳤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브샴이 이윽고 말했다. "내가 나가 보지.하인들은 모두 잘 테니까." 그는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리고 잠시 뒤 문을 활짝 열었 다.갑자기 얼음 같은 바람이 방안으로 세차게 흘러 들어왔다. 키가 크고 홀쭉한 남자의 모습이 마치 틀에 짜마춘 듯이 현관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새터웨이트에게는,이 남자가 문 위에 장식된 스테인드 글래스의 묘 한 작용에 이해 마치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무지개 옷을 입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그 남자가 앞으로 한걸음 나오자 야위고 머리칼이 검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그 낯선 남자는 부드럽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 고장이 나서요.대단치는 않습니다만.지금 운전사가 고치고 있는 중이 거든요.하지만 30분 정도 걸릴 것 같고,또 밖이 몹시 추워서---" 그는 말을 중단했다.이브샴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시군요.그럼 들어오셔서 한잔하십시다.우리가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으면 말 씀하시지요." "아니오,괜찮습니다.운전사가 알아서 할 겁니다.인사가 늦었읍니다만,저는 할리 퀸이 라고 합니다." 이브샴이 말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우리들을 소개하겠습니다.여기는 리처 드 콘웨이 경이고,그리고 새터드웨이트 씨.저는 이브샴이라고 합니다." 퀸은 소개에 응답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이브샴이 친절하게 꺼내어 준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는 불빛이 작용으로 한 줄기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가려서,그의 얼 굴은 거의 반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브샴이 장작을 벽난로에 더 집어넣었다.그리고는 말했다. "한잔 어떻습니까?" "고맙습니다." 이브샴이 그에게 술을 따르면서 물었다. "퀸 씨,당신은 이 고장을 잘 아십니까?" "몇 년 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그 당시 이 집은 데릭 케이플이라는 분의 집이었지요." "아,예! 그렇습니다.데릭 케이플을 알고 계십니까?" "예,알고 있습니다." 이브샴의 태도가 약간 변했다.영국인의 기질을 연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느끼 지 못할 정도의 변화였다.그는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럽게 행동했었는데,지금은 그런 태도가 없어졌다.퀸은 데릭을 알고 있다.그는 친구의 친구이다.때문에 그의 신분은 확실해진 것이다. 이브샴이 친한 사이처럼 말했다. "그 때는 정말 놀랐지요.마침 그 얘기를 하고 있던 참이랍니다.이 집을 사들일 땐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요.다른 적당한 집이 있었 으면 좋았을 텐데,그렇지 못했거든요.그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던 날 밤 저는 이 집에 있었답니다.콘웨이도 있었고요.저는 항상 그 친구가---유령이 되어 나타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고 퀸은 천천히 말을 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 지 않았다.그 태도는 마치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대사를 마친 배우 같았다. 콘웨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불길한 수수께끼죠---영원히 말입 니다." 퀸은 불분명하게 말했다. "그러세요? 리처드 경,당신이 하신 말씀은?" "정말 놀랐다는 말씀입니다---사실 그랬습니다.명랑하고 쾌활하며,고민이나 걱정 같 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혈기 왕성한 사람이었는데.그 때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이 집에 묵고 있었지요.식사 때도 기분이 좋았으며,게다가 장래의 계획을 잔뜩 늘어 놓았어요.그런 사람이 식탁을 벗어나자마자 그대로 2층 방으로 올라가서 권총을 꺼 내들고 자살을 하다니.왜 그랬을까? 왜? 아무도 모릅니다.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만" "그런 생각은 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요,리처드 경?" 하고 퀸이 웃으며 말했다. 콘웨이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가요? 저는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해결할수 없는 문제로 단정할수는 없습니다" "그럼,어떻게 변한단 말입니까?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그 당시의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퀸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리고는 말했다. "저는 찬성할 수가 없군요.역사의흐름에 비춰 보더라도 당신의 의견은 틀립니다.사건 당시에 살았던 역사가는 결코 후세의 역사가만큼 진실한 역사를 쓸 수 없지요.사물 을 어떻게 관찰하며 판단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달라집니다.모든 세상 일들이 그렇듯 이,소위 상대성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거든요." 알렉스 포탈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로입니다,퀸 씨.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시간이 문제를 좌우하지는 못하지 요.단지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문제가 거론될 뿐입니다." 이브샴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이시겠군요,퀸 씨. 만일 우리들이 오늘밤에 데릭 케이플이 죽은 경위에 대해 토론 같은 것을 해보면 당 시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말이죠,맞습니까?" "그 당시 '이상'의 진실이겠죠,이브샴 씨.개인적인 오차가 대부분 없어진 상태니까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서는 안 되고,사실을 사실로서 그대로 생각해 내야 합니다." 이브샴은 이상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퀸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무슨 일이든 출발점이 있어야 하겠죠.대개는 가설이 출발점이 됩니다.반드시 여러분둘 중에 누군가가 가설을 갖고 있을 겁니다.당신은 어떻습니까,리처드 경?" 콘웨이는 생각에 잠긴듯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야 물론 이렇게 생각했지요---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이 사건에 는 틀림없이 여자 문제가 얽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대개 여자 아니면 돈 문제 아 닙니까? 돈 문제가 아닌 것을 확실했습니다.그런 문제는 전혀 없었으니까.그러니까 남은 문제는 생각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새터드웨이트는 깜짝 놀랐다.자신의 의견을 한마디 내놓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민 순 간 그는 계단 위에 있는 복도의 난간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본 것이다.그녀 는 쓰러지듯이 그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그 모습은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계단 밑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꿈쩍도 않고 그렇게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상황이 뭔 가 으스스하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못 느꼈다. 그러나,옷차림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고풍스런 금색 가운---엘리노어 포탈이다. 그러자 갑자기 그날 밤에 있었던 사건이 모두 하나로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퀸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어떤 역할을 맡고 등장한 배우와 같은 인물이다.오늘밤 로이스턴 저택의 거실에서는 연극의 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배우가 한 사 람 죽었다고 해서 연극이 판도가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아아! 그렇다.데릭 케이 플은 이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새터드웨이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또 한 가지,문득 새롭게 그의 뇌리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이 연극은 퀸이 연출이 이다.그가 이 연극을 연출하여 배우들에게 역할을 분담시키고 있는 것이다.그가 이 수수께끼의 중앙에 서서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었다.그는 다 알고 있다.그렇다.지금 2층 난간에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구경꾼이라는 자신이 위치를 유지하면서 새터드웨이트는 눈앞 에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퀸 씨는 조용하게,그리고 무리 하지 않게 실을 당기며 인형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퀸은 깊게 생각하듯이 말했다. "여자 문제란 말이죠?---그럼,식사 때에 여자에 관한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까?" 이브샴이 말했다. "그 때 그 친구는 약혼을 발표했지요.그런데 자살을 하다니 정말 미친 짓이에요.그는 매우 들떠 있었지요.현재로선 아직 발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 기도 곧 독신 생활을 청산할 거라는 암시를 은근히 주더군요." 콘웨이가 말했다. "물론 신부감이 누구인지 우리들은 예측할 수 있었지요.마저리 딜 크일 겁니다.좋은 여자죠." 이 때 퀸이 무슨 말을 할 듯했는데,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그렇게 잠자코 있으니 어딘지 이상하게 도발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마치 지금 한 말에 대해 의 심을 품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래서 콘웨이는 초조해 하는 눈치였다. "그 밖에 누가 있을까,이브샴?" 이브샴은 천천히 말했다. "글쎄,그런데 확실한 것은 상대편 여자가 허락하기 전까지 는 아직 그 여자이 이름이나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 등을 발표할 단계가 아니라고 했 다는 점이야.참,그리고 자기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지.내년 이맘때쯤이면 좋 은 아내를 얻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우리 둘에게는 알리고 싶다는 말 도 했었고.물론 우리들은 틀림없이 상대는 머저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두 사람 은 매우 친하게 지냈고,또 케이플이 그녀를 꽤 쫓아다녔거든요." "단지---" 콘웨이는 얘기를 하려다 말았다. "뭔가? 왜 말을 꺼내려다 마는 거지,덕?"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야.이건 내 생각인데---만일 상대가 마저리라면,왜 약혼 발 표를 비밀로 했을까? 혹시 상대가 유부녀가 아니었을까? 가령 남편과 막 사별을 했 다든지,아니면 이혼을 한 여자였든지." 이브샴이 말했다. "그럴 듯한데.만일 그렇다면 약혼 발표를 금방은 할 수 없었겠지. 그리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그 때엔 마저리와 자주 만난 것 같지도 않았서. 그 전 해부터였던 것 같아.나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 았거든." "이상하군요." 퀸이 말했다. "그래요.마치 두 사람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어 방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죠." "다른 여자가 말이지." 하고 콘웨이는 심각하게 말했다. 이브샴이 말했다. "확실히 데릭은 그날 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들떠 있었어.행복 에 취한 듯이 말이야.그리고 이런 식으로는 설명이 제대로 안 되겠지만,이상하게 싸 우려는 사람처럼 덤빌 듯한 태도이기 했고." "운명의 신에게 도전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이지." 하고 알렉스 포탈이 무겁게 말 을 했다. 포탈은 지금 데릭 케이플을 두고 하는 말일까,아니면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일까? 그를 응시하고 있던 새터드웨이트는 후자의 견해로 신경이 쏠렸다.그렇다.아무리 봐 도 알렉스 포탈은 그런 인간이다---운명의 신에게 도전하고 있는 인간이다.술로 어 지럽혀진 포탈의 상상력이 갑자기 대화의 흐름에 호응하여,자기 자신만이 은밀한 생 각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새터드웨이트는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직 거기에 있다 응시.귀 기울임---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얼어붙은 것 처럼---죽은 여자처럼. 콘웨이가 말했다. "정말 그랬습니다.케이플은 어딘지 흥분하고 있었지요----묘하게 흥분하고 있었지.뭐 굳이 표현을 한다면 큰 도박에서 뜻밖에 횡재를 만난 사람 같았 다고나 할까?" "한탕 해보려고 억지로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던 건 아닐까?" 하고 포탈이 넌지 시 말했다.그리고는 마치 연상에 의해 움직이듯이 그는 일어서서 자기 잔에 술을 따 랐다. "그런 점은 전혀 없었어." 하고 이브샴이 날카롭게 말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보장할 수 있지.콘웨이가 말한 대로야.좋은 기회를 잘 수습해 놓고서,자 신의 그런 좋은 운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태도였어." 콘웨이가 뭔가 개운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10분 뒤에는---" 그들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이브샴은 테이블을 툭 하고 한번 두드렸다.그리고 외쳤다. "그 10분 사이에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틀림없어! 하지만 왜지?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봅시다.우리들은 모두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케이플이 일어서서 방을 나갔지요---" "왜 그랬을까요?" 하고 퀸이 말했다. 이 뜻밖의 질문으로 이브샴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예? 뭐라고 하셨죠?" "왜 그랬느냐고 물었을 뿐인데요." 이브샴은 생각을 모으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 는데.그래! 맞아요.우편물이었어요.기억나요.초인종이 울렸을 때 우리들은 매우 들 떠 있었죠.그 때는 사흘간이나 눈이 계속 내려 모든 것이 두절된 상태였어요.몇 년 만에 찾아온 굉장한 폭설이었죠.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고 신문도 편지도 받아 볼 수가 없었거든요.케이플은 이제야 겨우 풀리는 모양이라면서 나가서는 신문과 편 지를 받아 왔죠.그는 무슨 뉴스거리라도 찾는 듯이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편 지를 가지고 2층으로 가더군요.그리고는 3분 뒤에 총성이 들린 겁니다.모를 일이에 요.그 이유는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 때 포탈이 말했다. "그렇게 모른다고만 할 일도 아니지.그 편지에 뭔가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잖나.분명히 그랬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거기에 대해서는 우리들도 이미 다 생각해 봤어.그리고 검시관 도 맨 먼저 그 점에 대해서 물었었고.하지만 케이플은 편지에는 전혀 손도 안 댔어 편지 뭉치는 그대로 뜯지 않은 채 경대 위에 놓여 있었어." 포탈은 기가 죽어서 말했다. "전혀 뜯어 보지 않았다고? 확실해? 일고 태워 버렸을 지도 모르잖나?" "아니.물론 그것이 자연스런 해석이긴 하지만,결코 그렇지 않았어.편지에는 전혀 손 대지 않았으니까.그 점은 확신할 수 있어.태우지도 않았고,찢지도 않았어.방안엔 불기운도 전혀 없었고." 포탈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상하군." 이브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지.콘웨이와 나는 총소르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갔다가 방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발견한 거야.정말 대단한 충격 이었지." 퀸이 말했다. "전화로 경찰에 연락부터 했겠군요." "아니오.그 때 마침 부엌에 순경이 와 있었습니다.케이플에게는 개가 한 마리 있었 거든요.콘웨이,그 로버라는 늙은 개를 기억하지? 그 때 짐을 싣고 집 앞을 지나던 마차가 눈에 반쯤 묻혀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어요.그런데 그 개가 그것을 발견하 고는 경찰서로 달려간 겁니다.그 개가 케이플이 개이고,그가 특별히 귀여워하는 개 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경찰이 그 개를 따라와 준 겁니다.순경은 총소리가 나기 1분 전에 이곳에 도착했어요.그래서 우리들은 일부러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었죠." "정말 대단한 눈사태였습니다." 하고 콘웨이는 회상하듯이 말했다. "아마 이맘때였 지? 1월 초였으니까." "2월이었다고 생각하는데.그 뒤에 곧 우리는 외국으로 떠났으니까." "아니야,분명히 1월이었어.내 사냥개 네드를 기억하지? 네드가 1월 말에 다리를 절 게 되었거든.그게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어." "그럼 틀림없이 1월말쯤이겠군.참 이상하지.몇 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날짜를 기억 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죠." 하고 퀸이 격의 없이 말했다. "어떤 큼 직한 사건이 아닌 이상은 일일이 기억하기란 어렵죠.가령 왕의 암살이라든가,대규모 의 살인 사건 재판이라든가 하는 워낙 떠들썩한 사건이라야 기억에 남게 되는거지요 갑자기 콘웨이가 외쳤다. "맞아,그래.애플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어." "직후인 것 같은데?" "아니야,기억 안 나나? 케이플은 애플턴 집안 사람들과 아는 사이였어---케이플은 그해 봄에 그 늙은이 집에서 묵었었잖나---노인이 죽기 바로 1주일 전쯤의 어느 날 밤,케이플이 노인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정말 구두쇠 영감이었다고 했고 애플턴 부인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런 늙은이에게 매여 살다니 정말 불행했 을 거라는 등.그 때는 그녀가 그 노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는 없었던 때지." "그래.자네말이 맞아.사체발굴 신청이 허가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어. 역시 같은 날이었지.나는 그 때 신문기사를 보고도 그냥 건성으로 지나쳤거든.맞 아,이제야 알 것 같군.죽은 데릭은 그쪽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서." 퀸이 말했다. "그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매우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죠.매우 긴장한 순간에는 뭔가 전혀 쓸데없는 일에도 정신이 집중되게 마련입니다.그리고,그 기억은 나중에까지 역력히 남게 되고요.말하자면,순간의 정신적 긴장 때문에 마음속 에 그대로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게 된다는 뜻이지요.벽지의 모양라든가,전혀 관계없 는 자질구레한 것까지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콘웨이가 말을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퀸 씨. 마치 지금 제가 갑자기 데릭 케이플의 방으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데릭은 바닥 에 쓰러져 있었고,창 밖에는 커다란 나무와 나무의 그림자가 분명히 보였습니다.그 래요,달빛,눈,그리고 나무의 그림자,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죠.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러한 경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의 방은 주차장 위에 있는 커다란 바이었죠?" 하고 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그리고,주차장 모퉁이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습니다." 퀸은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새터드웨이트는 묘한 스릴을 느꼈 다.그는 퀸의 모든 말과 목소리의 억양까지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퀸은 목표가 있는 것이다---새터드웨이트는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그에 의해 이 모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신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이브샴은 조금 전의 화제로 되돌아갔다. "그 애플턴 사건은 지 금도 기억하고 있답니다.꽤 떠들썩한 사건이었죠.그녀는 아마 무죄판결을 받았죠?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새터드웨이트의 눈은 계단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찾고 있 었다.그의 환상이었을까? 아니면,실제의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일 격을 맞은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동시에 한 개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테이블보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서 멈추는 것을 그는 실제로 본 걸까? 쨍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자작으로 위스키를 따르던 알렉스 포탈의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술병을 떨어뜨린 것이다. "아니,내가 왜 이러지?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이브샴이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네,괜찮아.그런데 참 이상하군.그 깨지는 소리를 들으니 생각이 나는데,애플턴 부인도 포도주병을 깨뜨리지 않았나?" "맞아.그 노인은 매일 밤 포도주를 꼭 한 잔씩 했어.그 노인이 죽은 다음날 그녀가 포도주병을 가지고 나와서 일부러 깨뜨렸는데,하인들 사이에서 그것이 소문거리가 됐었지.그녀가 남편과 행복하지 못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그들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소문이 점점 커져서 결국엔 친척 중 누군가가 사체발굴 허가를 신청한 거야.결과는 독살된 걸로 나왔는데,비소로 독살되지 않았었나?" "아니야,스트리키닌이었던 같아.아뭏든 독살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거든.범인으 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애플턴 부인은 재판을 받았지.그녀가 석 방된 이유는 확실히 무죄라는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도,오히려 유죄로서의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어.운이 좋았던 게지.하지만 그녀가 범인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 지가 없었지.그 뒤,그녀는 어떻게 됐지?" "캐나다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을 거야.그쪽에 고모부인지 누군지가 있어서 거 처를 마련해 준 모양이야.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새터드웨이트의 눈은 술병을 들고 있는 포탈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너 무 거칠게 움켜쥐고 있는 건 아닐까.저러다가는 또 깨뜨릴 텐데.새터드웨이트는 모 든 것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이브샴은 일어서더니 술을 한 잔 따랐다.그리고는 말했다. "그런데,왜 데릭 케으플 이 권총 자살을 했는지에 대한 그 문제는 별로 접근하지 못했군.우리들의 토론은 별 성과 없이 끝난 셈이 됐군요,퀸 씨?" 퀸은 소리내어 웃었다.비웃음 같기도 하고 슬픈 소리 같기도 한 묘한 웃음소리였다. 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당신은 아직 과거 속에 살고 계시군요,이브샴 씨.당신 은 아직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하지만 제3자인 제게는 오로지 사실 만이 눈에 비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사실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사실의 순서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당신은 개념만을 서술했을 뿐 그 핵심 은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10년 전으로 되돌가서,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생각해 보 십시오.선입견이나 감상에 구애되지 말고 말입니다." 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키가 유난히 커 보였다.벽난로 불꽃이 그의 뒤에서 이 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사로잡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만찬회에 참석했고,데릭 케이플은 약혼을 발표합니다.당신은 그 때 약혼 상 대는 마저리 딜크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죠.지금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만.케이플 은 운명의 신에게 도전해서 승리한 남자처럼 들떠 있었다고 했습니다---당신의 말 에 의하면 철저히 불리한 상황에서 뜻밖의 횡재를 만난 사람 같았다고요.그리고 벨 이 울립니다.그는 나가서 그 동안 배달되지 못한 우편물을 가지고 옵니다.그는 편 지를 뜯지 않았다고 했는데,당신 말에 의하면 신문을 펴서 뉴스거리를 찾았다고 했 습니다---10년 전이니까 그날의 뉴스가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하지만 우리들은 그날 신문 내용에 대해서 유일하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내무성에서 사흘 전에 애플턴 노인의 사체발굴 허가를 내렸다'는 조그마한 기사를 여러분들은 거익하실 겁니다." "무슨 뜻이죠?" 퀸이 계속했다. "데릭 케이플은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창 밖으로 무엇인가를 봤습니 다.콘웨이 경은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고,게다가 그 창문은 주차장과 접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는 무엇을 봤을까요? 그는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자살을 결심했을까요?" "무슨 뜻이죠? 무엇을 본 거죠" "제 생각으로는 경찰을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개를 따라 온 경찰 말입니다.그러나 데릭 케이플은 경찰이 온 이유를 몰랐습니다---그가 본것은 단지 경찰이었던겁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이브샴이 겨우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설마,데릭이 애플턴을? 하지만 애플턴이 죽었을 때 케이플은 거기에 없었는데--" "그러나 1주일 전에는 있었을 겁니다.스트리키닌은 염산 형태가 아닌 한 잘 녹지 않 습니다.포도주에 넣으면 가라앉아서 대부부늬 분량이 마지막 한 잔 속에 남게 되겠 죠.아마 그가 떠난 지 1주일 정도 뒤에 그 마지막 한잔을 애플턴이 마셨을 겁니다" 포탈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의 목소리는 잠기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왜 그녀는 포도주병을 깼습니까? 왜 깬 겁니까? 그 이유를 말해 주시지요." 퀸은 처음으로 새터드웨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새터드웨이트 씨,당신은 인생 경험이 많은 분입니다.아마 당신이라면 그 이유를 말 씀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새터드웨이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드디어 그의 차례가 온 것이다.그는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지금 그는 이미 배우로서 한 발을 내디딘 셈이다---관객이 아닌 배우로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애플턴 부인이 데릭 케이플을 좋아 했던 것 같습니다.그녀는 착한 여자였습니다.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사건 의 진상을 깨달았던 겁니다.그래서 사랑하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불 리한 증거를 없애려고 했지요.제 생각으로는 나중에 그가 그녀를 설득시킨 것 같습 니다.근거 없는 의심이라고 말이지요.그래서 그녀는 그와의 결혼에 승낙했겠죠.그 러나 그 때도 그녀는 망설였습니다---여자의 육감 같은 거였겠죠." 새터드웨이트는 자기 몫의 대사를 훌륭하게 끝마쳤다. 갑자기 떨리는 듯한 긴 한숨이 방안 공기를 채웠다. 이브샴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게 뭐지?" 새터드웨이트는 그게 계단 위에 엘리노어 포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예술적 기 질이 다분한 그는 일부러 효과를 깨뜨리고 싶지가 않았다. 퀸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 차가 다 고쳐졌겠군요.격이 없이 대해 주셔서 고마왔습니다,이브샴 씨. 조금은 친구를 이해하게 됐겠죠?" 그들은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플도 그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그는 틀림없이 올 것이 온 거라고 생각했겠죠.그래서 그는 자 살을 택했습니다.그는 결국 그녀에게 끝까지 어려움을 남겨 준 셈이 된거지요." "그녀는 무죄석방이 되었잖습니까?" 하고 이브샴이 말했다. "유죄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죠.아마--단순한 공상에 지나지 않겠지만---그녀는 아직 괴로운 생각들에 싸여 있을 겁니다." 포탈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서 깊숙이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퀸은 새터드웨이트를 돌아보았다. "안녕히 계십시오,새터드웨이트 씨.당신은 연극을 좋아하시는군요." 새터드웨이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놀라고 있었다. "꼭 어릿광대 연극을 보시도록 권하고 싶군요.지금은 이미 쇠퇴해 가고 있지만 한번 볼 만한 가치는 있죠.그 상징성을 이해하기는 다소 어렵겠지만,시대가 변한다고 해 서 상징성까지도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여러분,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지는 퀸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그의 모습은 처 음에 그가 들어올 때도 그랬듯이 스테인드 글래스의 반사에 의해 광대옷을 입은 것 처럼 얼룩덜룩하게 보였다. 새터드웨이트는 2층으로 올라갔다.공기가 쌀쌀했기 때문에 그는 창문을 닫으러 갔 다.퀸이 주차장에 있었다.그리고 옆문에서 여자가 달려나왔다.잠시 그들은 얘기를 주고받더니 여자는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그녀가 창문 바로 아래를 지나갈 때 새터드웨이트는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고는 또다시 마음이 설레기 시 작했다.그녀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여자 같았다. "엘리노어!" 알렉스 포탈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엘리노어,용서해 줘.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었소.그런데도 나는,아,정말 내가 나빴 소.나는 믿을 수가 없었던 거요." 새터드웨이트는 남이 일에 관심이 많았다.하지만,그는 또 신사이기도 했다.창문을 닫아야 했으므로 그는 그렇게 했다.그러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닫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다. "알고 있어요.알아요.당신은 지금까지 지옥에 계셨던 거예요.옛날에는 나도 그랬어 요.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자꾸 의심하게 되는 마음을 나도 알아요.알렉스,알고 있 어요.하지만 더 지독한 지옥도 있어요.지금까지 나와 당신이 함께 살아온 것이 바 로 지옥이었죠.당신이 의심하고 계신다는 것을,당신이 나를 두려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은 엉망이 되어 버린 거예요.그 남자분, 우연히 지나던 그 분이 나를 구해 주었군요.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요.오늘밤---오늘밤,난 실은 자살을 결심했었어요---알렉스---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