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메데스의 말 1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포와로씨세요?" 에르큘 포와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젊은 스타더트 의사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 다.그는 마이클 스타더트를 좋아했다.수줍게 웃는 모습하며,범죄에 대한 그의 소박 한 관심이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그뿐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아주 열심이고 철두철미하다는 점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상대방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끝을 흐렸다. "하지만 자네를 귀찮게 하는 일이 생겼다는 건가?" 에르큘 포와로가 대뜸 그 말뜻을 알아채고서 이렇게 되물었다. "예,그래요." 미카엘 스타더트 박사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대번에 알아맞히시다니 정말 대단하신데요!" "뭐,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나.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가?" 스타더트는 즉시 대답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이윽고 그는 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늦은 시각에 당신을 오시라고 하면 너무 뻐----뻐---뻔뻔한 것 같아서...그-- 그----그렇지만 제가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거든요." "물론 가고말고.자네 집으로 가는 건가?" "아뇨---사실 전 지금 큰길 뒤쪽에 있는 뮤스 거리에 와 있어요.커닝바이 뮤스 17번 지.정말 오시겠습니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내 즉시 가겠네." 하고 에르큘 포와로는 대답했다. 2 에르큘 포와로는 번지수를 살펴보며 어두컴컴한 뮤스 거리를 걷고 있었다.새벽 1시 를 막 지난 시각이어선지 창문에 불빛이 세어 나오고 있는 한두 집을 빼고는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17번지에 도착해 보니 문을 열어놓은 채로 스타더트 의 사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포와로 씨!" 그가 말했다. "올라오시죠." 좁은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이 위층으로 이어져 있었다.오른쪽으로 상당히 커다란 방 이 있었는데 방안에는 소파와 함께 삼각형 모양의은빛 쿠션과 많은 컵이며 병들이 어 지럽게 놓여 있었다.그런데 방안은 온통 엉망이었다.담배꽁초와 깨진 유리조각들이 이곳 저곳에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허!"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친애하는 와트슨 선생,여기서 파티가 있었나 보군." "예,파티가 있었나 봐요." 하고 스타더트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무슨 파티였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예,전 직업상 여기 온 것뿐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스타더트가 말했다. "이 집은 페이션스 그레이스라는 부인 집입니다.페이션스 그레 이스 부인." "그 이름 하나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고풍스럽군."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그레이스 부인한테는 매력이라거나 고풍스러운 구석이 조금도 없습니다.거칠어 보이 는 여자예요.이미 남편을 두 사람이나 거쳤고,지금은 자기를 차버릴 것 같다는 남 자와 동거를 하고 있지요.이 파티를 시작할 때는 술을 마셨다가 나중에는 마약까지 먹었나봐요.코카인이 틀림없더군요.코카인은 사람의 기분을 아주 황홀하게 만들고 온 세상이 다 자기 것 같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마약이죠.또 그걸 사용하면 원기가 왕성해지고 평소보다 훨씬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만일 과 도한 양을 복용하게 되면 정신적인 흥분상태가 폭력적이 되면서 일시적인 정신착란 과 피해망상이 뒤따르게 되는 무서운 마약이죠.그레이스 부인은 호커라는 좋지 못한 남자친구와 대판 싸움이 붙었나 봅니다.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그 남자가 그녀를 버 리고 떠나자,그녀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서 어떤 미련한 사람이 그녀에게 준 신형 자동권총이 방아쇠를 그를 향해 잡아당겼습니다." 에르큘 포와로의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그가 맞았나?" "아뇨,그녀의 실력으로야 어림없죠! 총알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튄 모양이에요.그 총에 맞은 사람은 뮤스 거리 쓰레기통을 뒤지며 돌아다니는 불쌍한 부랑자였어요. 재수없게도 그의 팔뚝에 그 총알이 날아가 박힌 겁니다.그가 비명을 지른 것은 물 론이죠.그러자 사람들이 이곳으로 그를 둘러메고 와서 피가 너무 흐르니까 대충 지혈만 해놓고서 저를 데리러 왔더군요." "그래서?" "당연히 응급처치를 했지요.다행히도 중상은 아니었습니다.그리고 한 두 사람이 그와 뭐라고 한참 얘기를 하더니 결국은 5파운드짜리 지폐 2장을 받고 더 이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에요.가엾긴 하지만 그 사람한테 되레 잘된 일이었지요.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한 셈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자넨?" "저도 일한 댓가는 당연히 받았지요.그레이스 부인은 그때까지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제가 그녀한테 주사를 한대 놓고서 억지로 침대에 끌어다 눕혔 지요.그런데 좀 의식을 잃은 아가씨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아주 젊은 아가씨였는데 역시 응급처치를 했지요.그때쯤엔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 버리고 거의 남아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럼 그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겠군."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예." 하고 스타더트가 말했다. "단순히 술만 마시고 그 소동을 피웠더라면 일은 그 것으로 끝난 거죠.하지만 마약은 다릅니다." "마약을 복용한 게 확실한가?" "오,그럼요.그건 틀림없는 코카인입니다.래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걸 봤는데요.아마 그걸 코로 들이마시나 봅니다.문제는 그걸 어디서 구했느냐는 겁니다.얼마 전 저 한테 최근에 마약복용이 유행처럼 번지고 마약중독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하셨 잖습니까?" 에르큘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오늘밤 이 파티에 대해서 관심이 많겠군 미카엘 스타더트가 침울하게 말했다. "제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불현듯 포와로는 새로운 관심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네---자넨 경찰이 관 심 있어 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미카엘 스타더트가 웅얼거렸다. "죄없는 사람들이 애꿎게 걸려 들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되면 너무 안됐으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걱정하는 사람이 페이션스 그레이스 부인인가?" "아이고,천만에요.그 여자는 조금도 동정할 여지가 없어요!" "그럼,다른 사람이라면---그 아가씨?" "물론,그녀 역시 어느 의미에서는 중독자일지도 모르죠.하지만 그녀는 너무 어려요. 좀 제멋대로이고 방종한 면도 없지 않아 있죠.그러나 그건 아직 그녀가 철부지라서 그런 겁니다.아마 틀림없이 그녀는 그런 게 멋있다거나 현대적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유혹에 자기도 모르게 말려든 것일 거예요." 포와로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나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 아가씨를 오늘밤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나 보군?" 마이클 스타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당황해 하는 그의 표정이 유난히 어려보였다. "머턴셔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헌트 볼에서지요.그녀의 부친은 은퇴한 장군인데-- 살벌하게 총을 쏴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서부극의 주인공처럼---진짜 신사였지요 그분에게는 딸이 넷 있었는데 모두들 성격이 거친 편이었습니다.그건 군인이었던 아버지하고만 살았던 탓입니다.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마을 환경이 좋은 편이 못 되었거든요.부근에 군수공장이 있어서 돈이 쏟아지니까---전형적인 시골이라는 느낌 은 전혀 없는 곳이었죠.어떡해서든지 돈을 벌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 고,개중에는 아주 나쁜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요.그런 환경 속에서 살게 된 아가씨들 은 자연히 그런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한참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이윽고 그가 말했다. "자네가 왜 나를 오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봤네.내가 직접 이 사건에 손대기 를 바라는 거지,그렇지 않나?"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솔직히 고백하 자면 전 제 힘이 닿는 한 실라 그랜트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 문제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하여튼 그 아가씨나 한번 만나보세" "절 따라 오세요." 그는 방문을 나섰다.반대쪽 문에서 난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의사 선생----제발,의사 선생,나 미치겠어." 스타더트가 방안으로 들어갔다.포와로도 따라 들어갔다.방안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화장분은 바닥에 엎질러져 있고---이곳 저곳에 주전자와 병들은 나뒹굴고,옷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침대 위에는 가발임에 분명한 금발 여자가 멍하고 심술궂은 얼굴로 누워 있었다.그녀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내 몸에 벌레들이 기어 다녀....벌레가. 정말이야.나 미치겠어.....제발,딱 한 대만 놔줘." 스타더트 박사는 침대 옆에 섰다.그리고는 전문적인 의사답게 환자를 다독거렸다. 에르큘 포와로는 조용히 그 방에서 물러나왔다.맞은편에 또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그 는 문을 열었다.그것은 조그만 방이었는데---거의 꾸미지 않아서 스산하기까지 했다. 침대 위에는 가냘프고,아직 채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아가씨가 죽은 듯이 누워 있 었다.에르큘 포와로는 발끝으로 걸어 침대 옆으로 가서 그 아가씨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검은 머리카락,갸름하고 창백한 얼굴---그리고--애띤----너무 어렸다. 아가씨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눈을 번쩍 떴다.그를 보고 처음에는 깜 짝 놀라더니 곧 무서운 표정이 되었다.그를 한참 노려보더니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 아 그 치렁치렁한 남빛 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뒤로 빗어넘겼다.그녀는 겁 먹은 말괄량이 같았는데,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마치 들짐승이 먹이를 주려는 낯 선 사람을 잔뜩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녀가 말했다--그 목소리는 앳되고 가냘 프면서도 당돌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무서워 말아요,마드무아젤." "스타더트 박사님은 어디 있어요?" 그 순간 그 젊은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그녀가 한결 느긋 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오! 거기 계셨군요! 이분은 누구예요?" "내 친구요,실라.지금 기분은 어떻소?" 아가씨가 말했다. "끔찍해요.이가 들끊는 기분이에요....내가 왜 그 좋지 못한 것을 들이마시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스타더트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다시는 그런 걸 들이마시지 않 을 거요." "이젠---안 그럴 거예요."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누가 그걸 아가씨한테 주었죠?"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지면서 윗입술이 약간 경련을 일으켰다. "여기---이 파티 때에 나온 거예요.우리 모두 그걸 코로 들이마셨죠.그랬더니---처음에는 몸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더라고요." 에르큘 포와로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그걸 여기 가져온 사람은 누구죠?"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전 몰라요...아마 토니일지도 모르죠-- 토니 호커.하지만 정말로 전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포와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코카인을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오,마드무아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하오." 하고 스타더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저도 그럴 생각이에요.하지만 그때 기분은 정말 황홀했어요." "이봐요,실라 그랜트." 하고 스타더트가 말했다. "지금 난 의사로서 말하는 거니까 내말 잘들어야 해요.일단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하게 되면 그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돼요.파멸밖에 남는 게 없단 말이오.난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마약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파멸시킵 니다.술이 그래도 마약에 비하면 훨씬 신사죠.이 순간부터 당장 그것을 끊어요.내 말 명심해요.그건 결코 재미나는 일이 못 된다는 걸! 만약 오늘밤의일을 당신 아버지가 아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소?" "아버지?" 실라 그랜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아버지?"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죠! 아버지가 오늘밤 일을 알아서는 안 돼요.분명히 노발대발하실 테니까!"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하고 스타더트가 말했다. "의사 선생-----의사 선생----" 건넛방에서 그레이스 부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스타더트가 한숨을 쉬면서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방을 나갔다.실라 그랜트는 다시 포와로를 한참 쳐다보았다.그 표정이 몹시 곤혹스러워 보였다. "당신은 진짜 누구죠? 파티에는 없었는데." "그렇소,난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소.난 스타더트 의사의 친구요." "선생님도 의사세요? 의사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내 이름은---" 연극의 제1막이 올라가기 전에 으레 앞에 나와 간단한 인사말을 하는 사회자라도 된 것처럼 포와로는 한껏 점잔을 빼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에르큘 포와로요."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때때로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무지한 젊은이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그때마다 포와로는 무 척 슬펐던 게 사실이었다.그러나 실라 그랜트는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그의 이름을 듣고서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이었다.아니,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지...그저 그의 얼굴을 빤히 처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3 그 말의 진의야 어떻든간에 '누구나 토케이에는 고모 한 사람쯤은 있다'는 옛말이 있다.그와 똑같은 의미로 '머턴셔에는 아무리 없어도 누구나 친척 하나 정도는 있 다'라는 말이 있다.머턴셔는 런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수 렵,사격,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고 주위경관이 매우 수려했으며,약간은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마을이었다.또 철도 시설이 잘되어 있는데다가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서 주요도시들을 왕래하는 데 조금도 불편이 없었다.그래서인지 이웃의 다른 섬 에 비해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편이었다.그 결과 머턴셔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 입이 4자리수 이상 되거나 아니면 소득세와 기타 수입을 합한 금액이 최소한 5자리수 는 되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에르큘 포와로에게 그 마을에 사는 친척이 있을 리 없지만,교제 범 위가 상당히 넓은 그로서는 그쪽으로 자신을 초대해 줄 만한 사람을 찾기가 별로 어 려운 일은 아니었다.그 중에서 그는 자기를 초대해 줄 여주인으로 이웃사람들 이야기 를 하는 게 큰 낙인 한 귀여운 숙녀를 택했다.그녀의 유일한 그 결점 덕분에 포와로 는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까지,그녀의 입에서 술술 쏟 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랜트 가? 오,예,자식이 넷인데 모두 딸이죠.가엾은 장군이 그 딸들을 휘 어잡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녜요.남자가 딸만 넷을 데리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카마이클 부인은 웅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양손을 번쩍 올렸다. 포와로가 말했다. "정말 뭘 하겠습니까?" 그러자 숙녀가 말을 게속했다. "군대에 있슬 때는 자기가 이만저만 엄격한 사람이 아 니었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 딸들한테는 그도 두손 두발 다 들었대요.내가 젊었을때 는 그렇지가 않았는데.내가 기억하기로는 늙은 샌디스 대령도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 었는데 그 딸들은 그만----" (그녀는 샌디스 대령의 딸들과 카마이클 부인이 젊었을 때 친구 얘기를 한참 지루하 게 늘어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고 카마이클 부인이 처음의 주제로 되돌아오면서 말했다. "그 딸들이 정말 나쁘다는 얘기는 아녜요.한창 커가는 시기에는---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야 하는데,여긴 그렇지가 못한 편이거든요.아주 이상야릇한 사람들이 여기로 오 는 바람에 이젠 군이라고도 할 수도 없어요.지금은 모두들 돈,돈,돈이에요.그리고 그 끔찍한 얘기 들으셨죠? 누가 얘기해 줬어요? 앤터니 호커? 아,예,난 그 사람을 잘 알죠.그 청년은 내 가 싫어하는 전형적인 타입이에요.하지만 정말 돈은 많은가 보더라구요.여기 여우사냥하러 내려와서는----파티를 많이 여는데---말도 못하게 호화로운 파티라더군요.그런데 수상쩍은 파티를 열기도 한다는 말이 좀 있어요.물 론 내가 그 말을 들은 대로 다 믿는 건 아녜요.사람들이란 게 심보가 좀 고약해서 제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뭐,알코올 중독자라거나 마약 상 습복용자 같다는 드으이 험담 말이에요.얼마 전에 누가 나한테 어린 아가씨들이 타 고난 술꾼이라고 했는데,난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또 누가 행동이 조금 이상하거나 애매해도 사람들은 무조건 '마약중독자'라고 몰아 붙이는데,그것도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요.사람들 말로는 라킨 부인이 마약중독자라 고 하더군요.하지만 내가 보기엔 멍해서 그렇지,뭐 그런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난 그 여자를 좋아하지는 않아요.그 여자는 앤터니 호커와 보통 사이가 아닌 데,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여자가 그랜트 장군의 딸들을 그렇게욕을 하며 돌아다 닌다니까요.뭐,남자를 잡아먹는 식인종이라나요? 아마 그들이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은 모양인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뭐가 있겠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데.그 딸들은 하나같이 인물들이 좋거든요." 포와로가 불쑥 질문을 하나 던졌다. "라킨 부인? 이봐요,그녀가 누군지 나한테 물어 봐야 소용이 없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그 여자의 속까지 알 수가 있나요? 사람들 말로는 그 여자가 아주 부자고 승마를 즐긴다고 합디다.본래 그 남편은 도회지에서 상당한 자산가였는데 죽었다고 하더군요.이혼한 게 아니고요.그 여자는 이곳에서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어요.그랜트 장군이 이사온 다음에 바로 이사 왔으니까 말입니다.내 생각으로는 항상 그녀가---" 늙은 카마이클 부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그녀의 입은 벌어져 있었고 눈은 왕방울 만하게 커져 있었다.갑자기 그녀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들도 있던 재단기로 포와로의 손을 찰싹 때렸다.그는 아파서 몸을 움칠하며 상을 찡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그렇구나! 그래서 당신이 여기까지 온 거군요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 같으니라고.자,나한테 모든 걸 솔직히 얘기해 봐요." "내가 얘기할 게 뭐가 있어야죠." 카마이클 부인이 다시 그의 손가락을 때릴 태세여서 포와로는 재빨리 손을 치웠다. "얘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실걸요,에르큘 포와로 씨? 지금 당신의 콧수염이 떨리고 있 단 말이에요.몰론,당신이 여기 내려온 건 '범죄' 때문이겠죠.최근에 누가 죽었더라? 늙은 루이자 길모어밖에 없는데.하지만 그녀는 여든다섯 살인데다가 수종까지 걸렸 잖아.그러니까 그녀는 아니겠고,그럼 레오 스테이버턴? 가엾게도그 사람은 사냥터에 서 목이 부러져 온몸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다오.그러니까 분명 그 사람도 아냐. 그럼,살인사건이 아닌가? 이이고 답답해 미치겠구려! 최근에는 보석강도 사건이 발 생했다는 말도 못 들었고....혹시 범인을 추적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베릴 라킨? 그 여자가 남편을 독살이라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까 그 여작 그렇게 멍해 있는 게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던가 봐." "부인,부인!"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큰소리로 말했다. "너무 비약이 심하십니다." "무슨 소리!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니까요,에르큘 포와로 씨." "고전문학에 대해 잘 아십니까,부인?" "거기에 고전문학이 왜 갑자기 나오는 거죠?" "이번 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죠.전 위대한 선배 헤라클레스와 같은 모험을 하고 있 습니다.디오메데스의 야생마 길들이기도 헤라클레스 모험 중의 하나지요." "말을 길들이러 여기 왔다는 얘기는 말도 안돼요.그것도 당신 나이에---게다가 항상 에나멜 가죽구두만 신고 다니면서! 내가 보기에는 말이라고는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사람 같은데요." "그 말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입니다,부인.인간의 육체 를 먹고 사는 야생마들을 뜻하는 거지요." "정말 듣기에도 역겹군요.정말 그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내용이 불유쾌해요.그런 데 왜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그 신화의 구절들을 인용하기 좋아하는지,내 참 알 수가 없다니까---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겠는데다가 그 신화의 주제라는 게 목 사들한테는 도저히 맞지 않는 거라고요.그 수많은 근친상간,한결같이 벌거벗은 나체 상들----지금 내가 목사들이 어떻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아가씨들이 어쩌다가 스 타킹을 신지 않고 교회에 오는 날이면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그런다니까--그런데 가만 있자,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잘 모르겠는데요." "이 너구리 같으니라고,정말 얘기하지 않을 심산인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나한테 솔직히 얘기해 봐요.라킨 부인이 자기 남편을 살해한 거예요, 아니면 앤터니 호커가 브링턴 트렁크 살인사건의 범인인 건가요?" 그녀는 간절한 눈길로 포와로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위조지폐일지도 몰라." 하고 카마이클 부인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저께 아 침에 은행에 갔더니 라킨 부인이 마침 50파운드 짜리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있더라 고요.아닌게 아니라 현금도 많이 바꿔간다고 조금 수상스럽게 생각을 하긴 했죠.오, 아냐.그건 말도 안돼---만약 그녀가 위조지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수표를 입금시킬 리가 없잖아요? 에르큘 포와로 씨,정말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좀 참고 기다리지요." 하고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4 그랜트 장군이 살고 잇는 애쉴리 로지 저택은 그렇게 큰 집은 아니었다.그 집은 언 덕 비탈에 위치해 있었는데 훌륭한 마구간과 손질을 하지 않아서인지 볼품없는 정원 이 하나 딸려 있었다.내부는 부동산 소개업자가 '가구 장식 완비'라고 말하면 딱 알 맞을 그런 광경이었다.움푹 들어간 벽감(조상,꽃병 등을 두기 이해 만든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부처들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아래오 내리깐 채 곁눈질을 하 고 있었고,바닥에는 베나레스(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 남동부에 있는 도시)산 청동제 쟁반과 테이블들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또 벽난로 선반은 코끼리 행 렬들이 장식되어 있었고,상당히 꾸불꾸불한 청동세공품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치 인도에서 사는 영국인 집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인 그집 중앙에.그랜트 장군이 붕대를 칭칭 감은 다리를 맞은편 의자에 올려 놓은 채 커다랗고 허름한 안락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앉아 있었다. "통풍이오." 하고 그가 설명했다. "통풍에 걸려본 적 있습니까,미스터---흠---포와로 씨? 한번 걸렸다 하면 정말 미칠 지경이죠! 그게 다 우리 아버지 탓이오.그 양반은 평생 술을 마셨으니까----그뿐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도 그러셨다오.그게 나를 망쳐 버린 거요.좀 마시겠소? 미안하지만 내 다리가 이 꼴이니 그 벨을 눌러주시오." 머리에 터번을 두른 하인이 나타났다.그랜트 장군은 그를 압둘이라고 소개시킨 뒤,그 에게 위스키와 소다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술이 나오자 장군이 너무 많은 양을 따르 는 것을 보고 놀란 포와로는 얼른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다. "함께 마시지 못해 정말 유감이오,포와로 씨." 장군은 슬픈 눈으로 술병을 쳐다보았 다. "내 주치의는 내가 그걸 마시는 건 독약을 먹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하지 뭡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뭘 알아.의사들이란 무식하기 짝이 없다오.남이 노는 것을 방해나 할 줄 알지.글쎄,남이 먹고 싶은 음식과 술은 하나도 못 먹게 하고는 갓난애기들한테 나 먹일 찐 생선 같은 것만 먹으라는 거요.그게 얼마나 악취미요.찐 생선이라니--- 흥,더러워서!" 화가 난 장군이 무심결에 자신의 아픈 다리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그는 자기의 말이 거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성난 곰처럼 화를 냈소이다.그래서 딸들도 내가 통풍에 걸려 있 을 때면 나를 피한다오.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애들만 나무랄수도 없다는 걸 잘 알아요.당신이 내 딸아이를 만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예,그런 즐거움을 누렸었지요.따님이 여럿 되신다지요?" "넷." 하고 장군이 우울하게 말했다. "아들은 하나도 없고 지독한 여자들만 넷인 셈 이오.요즘 들어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 간절하다오." "따님들이 전부 아주 매력적이라고 하던데요?" "인물이야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죠.아주 못생기진 않았으니 말이오.그런데 문제는 그 애들의 속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거요.당신도 요즘 여자아이들은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거요.세상이 너무 규율이 없어요.너무 자유가 많아 전부 제멋대로인 세상이라 니까.이런데 남자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소? 그렇다고 그 애들을 집안에다 꽁꽁 묶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따님들이 이웃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것 같던데요." "늙은 고양이 같은 여자들은 그 애들을 좋아하지 않소." 하고 그랜트 장군이 말했다. "이 마을에는 순진한 어린 양의 탈을 쓴 늙은 양들이 상당히 많다오.그래서 혼자 사는 남자는 조심해야 하오.나도 하마터면 푸른 눈의 과부 하나한테 꼼짝없이 붙잡 힐 뻔했지 뭡니까? 새끼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면서 우리 집 주위를 배회하곤 했소 '가엾은 그랜트 장군---당신도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우.' 이러면서 꼬시더란 말입니다." 장군이 윙크를 하면서 코에다 손가락 하나를 갖다대었다. "그렇게 꼬리 치는 속셈이야 뻔한 것 아니겠소,포와로 씨? 오,물론,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아주 나 쁜 곳이라는 말은 아니오.약간 시끄럽고 서로 빨리 달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 내 기 호에 좀 안 맞는다 뿐이지.난 시골다운 시골을 좋아해요.자동차와 재즈와 하루 종일 나팔을 부는 라디오가 없는 고즈넉한 시골 말이오.그래서 우리 집에는 그런 게 하나 도 없다오.딸들도 그 점은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지요.혼자 사는 남자가 자기 집에서 그만한 평화를 누릴 권리쯤은 있는 것 아니겠소?" 포와로가 슬그머니 화제를 앤터니 호커에게로 돌렸다. "호커---호커라? 잘 모르겠는 데.아,그럼,그 친군가? 미간이 너무 좁아서 음흉해 보이던걸.사람 얼굴을 똑바로 쳐 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마시오." "그가 댁 따님인 실라 양 친구죠?" "실라? 그건 모르겠소.딸애들이 나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니까." 장군이 숱이 무성한 눈썹을 지푸렸다.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그의 예리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에르 큘 포와로의 얼굴울 한참 쏘아보았다. "이봐요,포와로 씨.도대채 무슨 일 때문에 그 러시오?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가 도대체 뭐냔 말이오?" 포와로가 천천히 말했다. "글쎄요---내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이것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댁 따님인 실라 양이---아마 따님 모두일지도 모르죠.좋지 못 한 친구들을 사귀고 있습니다." "나쁜 애들 틈에 들어갔다고요? 안그래도 그게 늘 걱정이었는데.하긴 그런 말을 전혀 안 들었던 건 아니었소." 그가 애절한 눈빛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소,포와로 씨? 어떻게 할 도리 가 있어야지." 포와로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그랜트 장군이 계속해서 말했다. "딸애들이 그 애들과 어울려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거요?" 포와로가 질문을 대답으로 대신했다. "그랜트 장군,혹시 따님들 중에 기분이 아주 좋아서 날뛰다가는---갑자기 의기소침해지고---성격이 아주 신경질적인데다---정서 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없습니까?" "거,약 광고하는 투군,그래.아니,우리 딸들 중에 그런 애는 하나도 없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포와로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요?" "마약!" "뭐라고?" 갑자기 장군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포와로가 말했다. "한번 시험삼아 해본 게 실라 양을 마약중독자로 만들 수도 있습니 다.코카인 중독자가 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아요.1-2주면 충분합 니다.그리고 일단 중독이 되었다 하면 그것을 맡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걸 구하려 들지요.그렇게 되면 돈이 많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마약밀매업자가 엄청나게 돈을 많이 모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죠" 포와로는 불같이 화가 난 노인이 입술에 침을 튀겨가며 온갖 욕을 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이윽고 그 불길이 가라앉자,장군은 이럴 때 바보천치 같은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에르큘 포와로가 말했다 "장군이 그렇게 존경하는 비턴 부인의 말처럼,우린 먼저 산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마약밀매업자를 잡기만 하면 내 기쁘게 그 녀석을 장군에게 선물로 드리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장식이 많이 조각되어 있는 조그만 테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장군을 꽉 붙잡고서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장군,마지막으로 한번 더 부탁하겠는데 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대답해 주십시오.정말 댁의 따님들과 이 모든 일에 대 해 얘기를 한마디도 나누신 적이 없으십니까?" "뭐라고요? 그 애들은 나한테 그런 사실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니까요.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오." "장군이 말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요.하긴 말해 봐야 모두 거짓말뿐일 테고 말입 니다." "이런 제기랄,이봐요------" "그랜트 장군,당신이 입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난 잘 알지요.그건 생사가 달 린 문제니까----무슨 말인지는 아시겠죠? 바로 생사가 달린 문제란 말입니다." "오,이런!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늙은 군인이 성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약간 기가 꺽인 기색이긴 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에르큘 포와로는 베나레스 청동 물건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5 라킨 부인의 방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라킨 부인은 보조 테이블에서 손수 칵테일 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키가 컸는데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목 바로 뒤에서 안으로 도르르 말려 있었다.그녀의 눈은 초록빛을 띤 회색으로 눈동자가 유난히 크고 까맸다.자기 딴에는 우아한 척 해보이며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나이는 겨우 30대초반으로 보였다.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알 수 있는 눈가의 주름만 뺀다면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이곳에 에르큘 포와로를 초대해 준 사람은 카마이클 부인의 친구로 성격이 활발한 중 년부인이었다.그는 칵테일 잔을 손에 들고서 창문 옆에 앉아 있는 한 아가씨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그 아가씨는 조그맣고 예쁜 미인이었다.백옥같이 흰 피부와 발그레 한 뺨의 홍조는 마치 천사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에르큘 포와로가 그녀한테 다가가자 대번에 그녀의 눈빛에 경계하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 그가 말했다. "아가씨의 건강을 위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그러더니 그녀가 불쑥 입을 열 었다. "우리 언니를 아시죠?" "언니? 아,그럼,아가씨가 그랜트 장군의 따님 중 한 분인가?" "전 팸 그랜트에요." "오늘 언니는 어디 있소?" "사냥하러 나갔는데 곧 돌아올 거예요." "난 아가씨 언니를 런던에서 만났지요." "알고 있어요." "언니가 다 얘기한 모양이군?" 팸 그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갑지가 물었다. "실라 언니가 곤경에 처했어요? "그럼 언니가 모든 걸 다 얘기하지 않았나 보군?" 아가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토니 호커도 거기 있었어요?" 포와로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열리면서 호커와 실라 그랜트가 안으로 들어왔 다.그들은 사냥복을 입고 있었으며 실라의 뺨에는 진흙 찌꺼기가 묻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여러분? 우리도 한잔 하러 왔습니다.토니의 물병이 말라버렸거든요." 포와로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기가 마치 천사라도 되는 것 처럼 말하고 있군." 팸 그랜트가 냉큼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실은 악마라는 말씀이시죠?" 포와로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듣고보니 정말 그런 것 같은데." 베릴 라킨이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었군,토니.오늘 사냥이 어땠는지 얘기해 주겠 어? 길러츠 덤불 숲으로 간 거야?"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그를 벽난로 옆에 있는 소 파로 끌고 갔다.포와로는 그가 그녀를 따라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실라를 흘낏 쳐다 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실라가 포와로를 본 모양이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 더니 곧 창문 옆의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그러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어제 우리 집에 찾아왔던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시죠?" "아가씨 아버지가 얘기하시던가?"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압둘이 당신 인상을 말해 줬죠.그래서 나 혼자---짐작한 거예요." 팸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다고요?" 포와로가 말했다. "아----예,친구를 통해서 서로 아는 사이거든요." 팸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난 믿을 수 없어요." "뭘 못 믿는다는 말이오,아가씨? 아버지와 내가 친구를 통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 말이오?" 아가씨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바보인 척하지 마세요.제 말은---선생님이 여기 온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녀가 자기 언니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실라가 깜짝 놀랐는지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그게 토니 호커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겠지요?" "꼭 그래야만 되는 이유라도 있소?" 포와로가 물었다. 실라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방을 가로질러 다른 사람들한테로 가 버렸다. 갑자기 팸이 격렬한 어조이긴 했지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전 토니 호커가 싫 어요.웬지---그 사람은 불길해 보이거든요.그리고 그 여자도---라킨 부인 말이에요. 저들을 좀 봐요." 포와로가 그녀의 시선을 쫓아 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호커의 머리와 여주인의 머리가 맞닿아 있었다.그는 그녀를 달래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그때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난 기다릴 수가 없어.난 지금 당장 원한단 말야." 포와로가 엶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자들이란---그게 무엇이든간에---항상 당장 원하는 모양이오,그렇지 않소?" 그러나 팸 그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자신으 트위드 스커트 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포와로가 어루만지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가씨는 언니와 아주 다른 타입이군요,마드무아젤." 그녀가 진부한 평도 다한다는 듯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포와로 씨,토니가 실라 언 니에게 주는 약이 뭘까요? 언니를 변하게 만든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요?" 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랜트 양,코카인을 복용한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오,천만에요.그렇다면 그 약이 바로 그건가요? 코카인? 아주 위험한 것 아녜요?" 실라 그랜트가 손에 술잔을 들고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뭐가 위험해?" 포와로가 말했다. "지금 마약중독이 끼치는 영향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오.마약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천천히 좀먹어 들어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오. 인간의 진실과 선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무서운 병이란 말입니다." 실라 그랜트가 몸을 움찔했다.그러자 그녀의 손에 든 잔이 흔들리면서 바닥에 그 액 체가 흘러 떨어졌다.포와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약이 인간의 생명을 좀먹는 다는 얘기는 스타더트 의사가 분명히 얘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한번 엎지르긴 쉽지만---그걸 다시 주워담으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돈을 벌기 위해서 남을 타락시키고 파멸로 이끄는 사람은 인간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흡혈귀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는 몸을 돌려버렸다.어깨너머로 그는 팸 그랜트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실라!" 이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그것은 실라 그랜티의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는 가까스로 한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물병......" 에르큘 포와로는 라킨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홀로 나갔다.홀 테이블 위에는 사냥용 채찍과 모자가 사냥용 물병과 함게 놓여 있었다.포와로가 물병을 집어 들었다 병에는 A.H라는 약자가 새겨져 있었다. 포와로가 혼자 중얼거렸다. "토니의 물병이 비어 있다고?" 그는 병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는 마개의 나사를 돌려 뚜껑을 열었다.토니 호커의 물병은 결코 빈 병이 아니었다.그 속에는 가득차 있었다. 그것도 온통 하얀 가루가.............. 6 에르큘 포와로는 카마이클 부인의 저택 테라스에 서서 한 아가씨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너무 어려요.아가씨와 동생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난 믿고 있소.아가씨는 디오메데스의 암말처럼 자신 의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던 거요." 실라가 몸을 떨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끔직하군요. 하지만 그개 사실이겠죠! 그날 저녁 런던에서 스타더트 박사님이 저한테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런 줄은 몰랐어요.그분은 아주 엄숙하고---진지하게 제게 충 고해 주셨어요.전 그때서야 제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알게 된 거죠......그전까지는 그게----오! 전 그게 식후에 마시는 음료수인 줄 알았아요. 돈주고 사먹는 것인 줄은 알았지만 그게 그렇게 무서운 해를 끼치는 약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포와로가 말했다. "그럼 지금은?" 실라 그랜트가 말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어요.전---전 다른 사람들에게 도 얘기를 해주겠어요." 그녀는 덧붙였다. "스타더트 박사님은 이제 다시는 저와 얘 기하려 하지 않겠지요." "천만에요." 하고 포와로가 말했다. "스타더트 의사와 난 아가씨가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그러니까 아가씨는 우리만 믿어 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그건 죽어 없어져야 마땅한 사람이 하나 있 습니다.철저하게 파괴시켜야 하는데,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가씨와 동생들뿐이 오.즉,그가 유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가씨와 동생들 증언뿐이라는 뜻 이오." "선생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사람은---우리 아버지?" "아가씨의 아버지가 아니죠,마드무아젤.에르큘 포와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지요? 치안본부에서 아가씨의 사진으로 간단하게 신원을 확인했소.아가씨 이름은 실라 켈리---2-3년 전 상습절도범으로 소년원에 수감되었지요.그 뒤 아가씨 가 소년원을 나오자 그랜트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한 남자가 아가씨에게 접근하여 같이 지내자고 했소.딸이라는 신분으로 말입니다.그 사람은 아가씨가 딸 노릇을 하면 많은 돈과 즐거움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겠죠.그 대신 아가씨는 그 코담배를 아는 사람한테 소개해 주기만 하면 되었지요.물론 어떤 사람이 아가씨에게 그걸 준 것처럼 하면서 말이오.아가씨의 동생들 역시 아가씨와 사정은 마찬가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먼저--그 남자를 형무소로 보내야 해요.그 다음에는---" "예,그 다음에는?" 포와로가 기침을 했다.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신의 은총에 감사해 야 되겠지요." 7 마이클 스타더트가 놀란 눈으로 포와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랜트 장군? 세상에 그랜트 장군이?" "바로 그렇다네,의사 선생.그 모든 게 하나의 연출이었던 걸세.그 불상,베나레스산 청동제 수공품,그리고 인도인 하인.그 모든게 연출을 위한 소도구들이었던 게야! 그뿐인 줄 아는가? 그 남자가 통풍에 걸렸다는 것 또한 기막힌 연기였단 말일세. 하지만 그건 옛날에나 써먹던 수법이고 요즘에는 한물간 방법이지.통풍으로 고생 하는 아주 나이많은 노신사---그 사람이 열아홉 살짜리 딸을 둔 아버지라고 하기 에는 너무 나이가 많잖은가? 내가 확신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 말고도 또 있다네.내가 나가려고 하다가 발에 뭐 가 걸려 몸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 남자의 아픈 다리를 꽉 잡았지 뭔 가? 그런데도 내 말에 머리가 혼란해진 그 신사는 내가 자기 다리를 잡은 줄도 모 르고 있더라니까,글쎄.그래서 난 확신을 갖게 된 걸세.그 장군이라는 남자가 가짜 엉터리라는 것을 말일세.하지만 그 아이디어 하나는 정말 기막히더군.인도에서 군 인생활을 하다가 퇴역한 장군,불같이 성을 잘 내는 다혈질의 희극적인 인물로 분장 하여 그는 그 마을에 정착했네.다른 퇴역 장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을 피해서 말 일세.아니,보통 퇴역군인들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고급스럽지 않은 거주지를 택해 살기로 마음먹은 걸세.하지만 그곳은 런던의 돈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상 품시장으로서는 아주 그만인 곳이었지.게다가 어느 누가 그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이 며 어린 아가씨들을 의심하겠는가? 또 만약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그 아가씨들이 피해자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까 말일세.그러니 그것만큼 확실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악마를 만나러 가셔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는데요? 그를 깜짝 놀라게라도 해줄 심산이셨습니까?" "그렇다네,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보고 싶었단 말일세.사실,그렇게 오래 기다리 고 뭐고 할 필요도 없더군.그 아가씨들한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난 즉 시 알아차렸으니까.실질적으로 피해자의 한 사람인 앤터니 호커가 희생양이 된 셈 이지.실라는 나한테 홀에 있는 그 물병에 대해 얘기해 주려고 했다네.아마 그녀로서 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지---하지만 다른 아가씨가 그녀의 입을 막으 려고 화난 목소리로,"실라!" 하고 외치는 바람에 그만 용기가 꺽였는지 멈칫해 버렸다네." 마이클 스타더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아시겠지만 전 그 아가 씨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전 사춘기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구 를 상당히 한 편이죠.그들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항상-----" 포와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사 선생,자네의 학문에 대해서 난 항상 깊이 존 경 하고 있다네.아까 말한 자네의 연구는 실라 켈리 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 충분히 알지." "다른 사람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귀여운 실라 양밖에 없으니까.아무튼 자네라면 그 아가씨를 잘 길들이리라 믿어 의 심치 않네! 사실,그 아가씨는 이미 자네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 같더군." 마이클 스타더트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원,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포와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