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죽음 저자: 아가사 크리스티 작가소개 :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1∼1976) 애거서 크리스티는 197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데임(Dame) 작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추리소설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영광으로 남자의 나이트(Knight)와 같은 작위이다. 1920년 <스타일즈장의 괴사건>으로 미스테리 소설계에 처음 등장한 크리스티는 그후 85세 로 타계할 때까지 56년 동안 장편 66권, 단편 24권을 발표했는데 <추리소설의 여왕> 답게 지 금 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추리작가로 군림하고 있다. 그녀의 작풍이 기교적이면서도 이상 괴기를 애써 피한 것이라든지, 자유로운 필치이나 범작이 없는 것은 실로 기량이 놀랄 만큼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 <예고 살인> 등을 들 수 있으나, 수많은 작품 모두가 같은 비중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1952년에 초연된 희곡 <쥐덫>은 아직도 런던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 제 1 부 영국 1 "이봐, 저 여자 좀 봐. 리넷 리지웨이 아냐?" "그래, 맞아. 바로 그 여잔데." 술집 주인인 버나비가 옆에 선 친구의 허리를 찌르며 소리쳤다. 두 사람은 시골 사람 특유의 호기심을 가지고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주홍빛 롤즈로이스가 그 지방 우체국 앞에 멈추더니 젊은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모자도 쓰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금발 머리에 늘씬한 몸매가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런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강한 개성이 표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시골 거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술집 주인 버나비는 또다시 감탄하듯 말했다. "맞아, 그 여자가 틀림없어!" 버나비는 위축된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했다. "저 여자는 갑부야, 갑부. 이곳에 엄청난 돈을 뿌릴 거야. 그 집에 수만 파운드를 들인대. 수영장과 이탈리아식 정원을 만들고 파티장도 들어설 거야. 아무튼 그 저택을 거의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니까 말이야‥‥" "그럼 이곳에 많은 돈을 뿌리겠군." 그 사나이는 애처롭게 보일 정도로 야위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의 말 속에서 시기심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버나비가 응수했다. "그럼, 그렇게 되면 이 맬튼언더워드 같은 시골이 훌륭해지는 거야." 버나비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글세, 저 여자는 그 집을 개조하는 데 벌써 6만 달러는 썼다고 하던데?" "아유, 굉장하군 그래! 그런데 그토록 젊은 여자가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지?" "소문을 들으니 미국에서 돈이 오나 보던데. 그녀의 어머니가 백만장자의 외동딸이라지‥‥ 이건 꼭 영화 줄거리 같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때, 그 젊은 여자가 우체국에서 나오더니 차에 올랐다. 차가 달리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야윈 사나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눈에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게 보여. 그 여자는 눈부실 정도로 미인인데다가 돈도 주체할 수 없게 부자라는 것이‥‥ 참 불공평한 세상이야. 그런 갑부라면 미인이 아니라도 괜찮았을 거야. 저 여자는 모든 걸 완벽히 소유한 셈이잖아?" 2 <데일리 브라그>지의 사교난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어젯밤 셰마탕트 레스토랑의 식사 손님 중에는 미모의 리넷 리지웨이 양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에는 사교계의 저명한 귀부인인 조안나 사우드우드, 윈들쉠 경, 그리고 토비 브라이스 씨등이 함께 자리했다. 리제웨이 양은 메릿쉬 리지웨이의 외동딸로서 외할아버지 레오날드 하츠 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아름다운 리넷 양은 사교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그녀가 머지않아 약혼을 발표할 거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소문의 약혼자인 윈들쉠 경은 그녀와 사랑의 열병을 앓고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3 조안나 사우드우드가 말했다. "리넷, 이 저택은 정말 멋진 곳이 될 거야." 그녀는 우드홀이라고 불리는 리넷의 저택 침실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조안나는 정원에서 어슴푸레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숲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리넷이 창턱에 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훌륭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리넷의 얼굴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 옆의 조안나 사우드우드는 스물 예닐곱 살 가량 된 듯한 젊은 여인으로 명석해 보이는 얼굴에 숱 적은 눈썹이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굉장한 일을 했어.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에 말이야. 그런데 일하는 데 건축가는 몇 명이나 동원되었지? 그리고 또 어려운 일도 참 많았겠지?" "건축가는 세 명을 썼어요." "그 사람들은 일을 잘 하나? 난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꽤 잘한 편이지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리넷, 또 그런 식으로 말하는군. 아무튼 너만큼 실리적으로 생각하기도 참 힘들 거야." 조안나는 말하면서 화장대 위의 진주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 보았다. "리넷, 이 목걸이 진짜야?" "그럼요, 진짜죠." "리넷, 네겐 당연히 이 목걸이가 잘 어울리겠구나. 이 정도 목걸이라면 값도 상당히 비싸겠지?" "너무 천박스럽게 보이지 않아요?" "천박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아. 참 아름답군. 그래 얼마나 주고 샀어?" "오만 달러 정도‥‥" "엄청난 액수구나, 잃어버릴까 봐 항상 걱정되겠구나!" "아니에요, 늘 목걸이를 하고 다녀요. 잃어버려도 보험에 들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리넷, 그럼 저녁식사 전까지만 내가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 어떻겠니? 잠시 걸어보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구나." 리넷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리넷, 넌 참 좋겠다. 얼마나 행복하니? 너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지? 겨우 스무 살 밖에 안 됐는데도 돈은 얼마든지 있고, 미인인데다 건강하고 명석하지, 어느 것 하나 남에게 뒤지는 게 없구나. 참 부럽구나! 그런데 언제 스물 한 살이 되지?" "유월에요. 그때는 런던에서 멋진 성년 축하 파티를 열려고 해요." "그때 찰즈 윈들쉠과 결혼할 셈이니? 가십란 기자들이 네 결혼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더라. 찰즈도 너를 열렬히 사랑하는 거 같고‥‥" 리넷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후 말했다. "아직 뭐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지요. 지금은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너 그렇게 말만 하고 나중에 변하는 거 아냐?"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서 리넷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벨포 양 전화입니다. 통화하시겠습니까?" "드벨포요? 물론 통화하고 말고요. 빨리 연결시켜 줘요." 전화를 연결시키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명랑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새나왔다. 약간 숨이 찬 목소리였다. "리지웨이? 여보세요 오, 리넷이구나!" "재키! 이게 얼마만이니?" "그래 반가와, 리넷. 정말 오랜만이구나, 빨리 보고 싶어." "재키, 당장 이곳으로 와. 내가 새로 지은 집으로 오란 말이야. 너한테 이 멋진 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나도 빨리 너를 봤으면 좋겠어." "기차나 자동차를 얼른 잡아타고 와." "알았어. 그렇지만 나는 골동품같이 낡은 2인승 차를 타고 가야만 하는 걸. 15파운드 짜리란다. 어느 때는 아주 잘 달리기도 하지만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릴 수도 없단다. 만일 내가 차 마실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차가 또 말썽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럼 이따가 봐. 안녕, 리넷." 리넷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안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 친구인데요, 재클린 드벨포라는 아이인데 파리에서 같은 기숙사에 있었어요. 그애는 불행한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는 프랑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미국의 남부 출신이었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좋아해서 집을 나가 버리고, 어머니는 주식이 폭락하여 돈을 모두 날려 버리고 알거지가 되었대요. 그래서 재키는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어요. 2년동안 그애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르겠어요." 조안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손톱 줄칼로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이고 손톱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점잔을 가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넷! 그런 친구는 만나서 뭘 하려고 그러니? 분명히 피곤하기만 할 텐데. 나는 친구들 중에 파산한 친구가 있으면 언제나 교제를 끝내지, 너는 내가 인정사정도 없는 매몰찬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는 편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야. 그래야 문제가 생기지 않아. 파산하고 빈주먹이 되면 너나 할 것없이 손을 내밀고 돈을 빌려 달라거나 의상실 같은 걸 만든 다음 싸구려 옷을 좀 맞추어 달라고 조르지.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램프갓 위에 그림을 그려서 팔거나 엉터리 나염 스카프를 강매하는 게 일이지." "조안나, 그럼 당신은 내가 파산한다고 하면 나와 절교하겠네요?" "물론이지. 리넷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 나는 솔직한 게 흠이야. 내 생각 같아선 성공한 사람들 하고만 사귀고 싶은데‥‥ 그러나 이건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알아야 해. 나는 그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은 거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조안나, 당신은 너무 매몰차고 잔인해요!" "리넷, 나는 잔인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뿐이야, 모두가 그런 성격이야." "아니에요,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너는 물론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을 거야. 너에겐 일 년에 네 번씩, 요구하는 액수의 돈을 척척 내주는 중년 미국인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동안은 불쌍하고 가엾은 빈털터리 친구에게 야박하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 리넷이 야무지게 말했다. "조안나, 재키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당신은 내 친구를 오해하고 있어요. 재키는 궁색하다고 손을 내미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해요. 내가 몇 번 도와주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 당했어요. 재키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왜 그렇게 서둘러 너를 만나려는 걸까? 글쎄‥‥ 내 생각은 아무래도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아, 틀림없을 거야.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내 말이 맞을 테니까." 리넷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흥분한 거 같았어요. 재키는 성격이 너무 과격해요. 그 애는 언젠가 한 번은 어떤 사람에게 칼을 들이댄 적도 있었어요." "리넷, 그게 정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한 청년이 재키를 괴롭혔어요. 재키는 그 청년에게 말로 잘 타일렀지만 계속 자기를 괴롭히자 그 청년에게 대들었대요. 그래도 힘이 부치니까 재키는 그 청년의 가슴을 칼로 찔렀어요. 굉장한 소동이 일어났었어요!" "아유, 끔찍해라. 세상에 여자가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 그때 리넷의 하녀가 들아와 나지막히 실례한다고 말하며 옷장에서 그녀의 옷을 한 벌 꺼내 가지고 방을 나갔다. 조안나가 하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메리가 왜 저러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니?" "참 딱한 애예요. 메리가 나보고 이집트에서 일하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 남자에 대해서 좀 알아봤더니, 그 남자는 기혼자로서 자식이 세 명이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저 애는 그런 걸 전혀 몰랐던 거죠." "리넷, 너는 사방에 적을 만드는구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 작정이냐?" "아니, 적이라뇨?" 리넷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조안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는 말했다. "리넷. 그래, 적을 만들고 있잖아. 너는 지나치게 옳은 일만 하는 게 탈이야. 게다가 너무 유능하고‥‥" 그 소리에 리넷은 크게 웃었다. "안 그래요.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명의 적도 없는 걸요." 4 윈들쉠 경은 삼나무 밑에 앉아서 아름다운 우드홀을 바라보았다. 고색 창연한 우아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새로 손질을 해서 개조한 건물과 옛 건물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저택의 공사는 잘되어 있었다. 가을의 따사로운 햇빛 아래 펼쳐지는 그 풍경은 아름답고도 평화롭게 보였다. 찰즈 윈들쉠은 저택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의 시선은 엘리자베드식의 대저택과 그옆의 주차장, 그리고 황폐해진 뒷정원을 두루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윈들쉠 경의 집안 영지인 찰튼베리였다. 그 앞의 정원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리넷으로, 그녀의 모습은 활기차고 자신만만했다. 이제 찰튼베리의 여주인이 될 리넷! 윈들쉠 경은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거절은 단지 생각할 여유를 가지겠다는 것이리라. 그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리넷과 결혼하기 위한 조건은 충분히 갖춘 그였다. 아무래도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녀가 부자라는 것만으로 결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리넷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영국의 손꼽히는 부자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다만, 운 좋게도 그녀가 영국 최고의 부자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는 미래의 멋진 설계를 하느라고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록스데일의 주인이 되어 저 저택을 개조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로 사냥가는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찰즈 윈들쉠은 햇볕을 받으며 꿈을 꾸고 있었다. 5 고물 자동차가 자갈 위를 덜컹거리며 리넷의 저택 앞에 멈춰 선 것은 네 시경이었다. 한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작고 마른 몸매에 약간 검은 빛이 도는 갈색 머리였다. 그녀는 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그녀는 위풍당당하고 넓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목사같이 생긴 집사가 '드벨포 양이 오셨습니다.'라고 알렸다. "오, 리넷!" "재키!" 윈들쉠은 옆에 비켜 서서 이 작은 여자가 급히 리넷의 품 속에 뛰어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 인사해요. 이분은 윈들쉠 경이고, 이쪽은 드벨포 양.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윈들쉠은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름답지는 않지는 약간 검은빛 도는 머리와 큰 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건네고 나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재클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윈들쉠? 아, 맞아! 윈들쉠, 이제 생각나는구나. 저 사람이 신문에서 너와 결혼할 거라고 떠들던 남자구나! 리넷, 너 저 남자와 정말 결혼할 거니?" 리넷은 친구의 말투가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리넷, 나는 정말 기뻐. 그 사람 아주 미남이더라." "재키, 난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야 물론이겠지, 결혼은 쉽게 결정할 수 없으니까. 여왕님이 배우자를 선택하시는 일이니 어련하겠니?" "재키, 날 놀리는구나." "아냐, 정말 너는 여왕님이야! 여왕 폐하 리넷! 금발의 리넷! 나는 당신의 시녀이옵니다! 당신의 신임받는 시녀입니다." "재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니? 어느날,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가서는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고 뭘하고 지냈니? 너도 참 무심한 애야." "난 편지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동안 세 군데나 떠돌이처럼 돌아다녔어. 알다시피 그게 다 직업 탓이지. 우리같은 여자들은 늘 그런 끔찍한 일 밖에 할 일이 없으니까!" "재키,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너그러우신 여왕의 자비를 받으라고? 그래, 사실 오늘 내가 여기온 것도 그 때문이란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넷, 비약하지는 마. 돈을 빌려달라고 온 건 아니니까. 아직 그 정도는 되지 않았단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 왔어." "그게 뭐야, 어서 말해 봐." "리넷, 너도 윈들쉠 씨와 결혼할 생각이 있으니 내 마음 이해할 거야, 그렇지?" 리넷은 얼마동안 당혹해 하다가 겨우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키, 너 그러면‥‥" "응, 나 약혼했어!" "재키, 정말 그랬었구나. 나도 어쩐지 네가 발랄하고 활기차다고 생각했어. 평소에도 그런 편이었지만 오늘은 예전의 너와는 좀 다른 거 같구나." "그래, 요즘 내가 그런 편이야." "재키, 궁금해. 어서 약혼자 애기 좀 해 봐." "이름은 시몬 도일이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고 어린애 같단다. 키도 크고 어개가 넓은 아주 매력적인 남자야. 그런데 그 사람은 가난한 빈털터리란다. 그는영주의 아들이라는 신분 이외엔 가진 게 없어 그는 데분셔 출신이라 전원 생활을 좋아해. 지난 5년 동안 시내의 작은 회사에 다녔는데 얼마 전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어. 리넷, 난 그와 결혼하지 못하면다면 죽을 지도 몰라. 아니, 정말 죽어버릴 거야‥‥" "재키, 왜 그런 소릴 하니?" "아냐, 정말 그와 결혼할 수 없다면 난 살아갈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난 그가 너무 좋아, 그 사람도 나를 열렬히 좋아한단다. 우린 결혼할 수 없다면 둘 다 살 수 없을 거야." "재키, 너 형편없구나." "그건 나도 알아. 리넷, 너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알게 돼." 그녀는 말을 멈추고 몸서리를 한 번 쳤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이따금 나도 두려운 생각이 들어. 우리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해. 나는 그 이외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리넷, 좀 도와 주렴. 듣자하니 네가 이곳의 주인이라며? 그래서 나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내 생각을 잘 들어 봐. 너는 누구이든 이곳의 토지를 관리할 관리인을 채용할 거 아니니? 두 명 가량은 있어야 되겠지? 그 관리인 자리를 시몬에게 맡기면 어떻겠니, 리넷?" 리넷은 깜짝 놀랐다. "어머나!" 재클린은 그녀의 반응은 안중에 두지 않고 계속 말했다. "시몬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단다. 그리고 그는 땅에 관한 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어. 그는 영지에서 자랐고 거기에 필요한 교육도 전문적으로 빋았어. 리넷, 나를 봐서 시몬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고시켜도 관챊아. 아냐,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그는 아주 잘 해 낼테니까. 그렇게 해 주면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을 테고 너도 자주 볼 수 있지 않겠니? 그럼 영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재클린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넷, 어떻게 하겠니? 우리의 아름다운 리넷 양, 소중한 나의 친구여, 어서 답변해 줘!" "재키!" "승낙하는 거지?" 리넷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바보! 약혼자를 데리고 와 봐. 한 번은 봐야지, 보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재클린은 그녀에게 다가가 흥분해서 키스를 거듭했다. "리넷, 내 진정한 친구! 나는 너를 믿고 있었어. 전에도 너는 나를 항상 생각해 주었지 않니? 너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 리넷, 그럼 난 돌아갈게." "재키, 벌써 간다고? 좀 더 있다가 가도록 해." "아니야, 난 곧장 런던으로 가야 해. 그래야 내일 시몬을 이곳에 데리고 올 수 있어. 한시바삐 결정짓고 싶어서 그래. 분명히 너도 그에게 호감을 느낄 거야. 시몬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야."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구나, 차나 한 잔 하지?" "리넷, 미안해. 어서 가야 해. 내가 너무 흥분한 거 같지? 빨리 시몬에게 알리고 싶어. 내가 지금 너무 흥분한 걸 안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결혼하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테니까." 재클린은 급히 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멈춰 서더니 달려와 리넷을 껴안았다. "리넷, 사랑해. 세상에 너 같은 친구는 아마 없을 거야." 6 작지만 훌륭한 프랑스식 레스토랑 셰마탕트의 주인인 가스통 블롱댕은 손님을 무턱대고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자, 미인, 유명 인사, 귀족들까지도 주인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손님을 맞아 특별석까지 안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가 이렇게 특별 대접을 한 것은 불과 세 번 밖에 되지 않는다. 한 번은 공작 부인에게, 또 한 번은 유력한 상원 의원 후보에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특이한 경우였다. 그 손님은 콧수염을 기른 우습게 생긴 작은 키의 남자로, 외모로는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사람이었다. 이 레스토랑의 주인은 손님에게 차별 대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30분 전에는 좌석이 없다고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안내한 것이었다. "포와로 씨, 우리는 당신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자주 들려 주십시오. 당신이 저희 레스토랑에 오시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때 시체 한 구와 웨이터 한 명, 블롱댕, 미인 한 명이 관련된 지나간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블롱댕 씨, 정말 친절하시군요." "포와로 씨, 동행이 있으십니까?" "아뇨, 혼잡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 주방장에게 멋진 요리를 만들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림같이 멋진 요리를요. 여자는 아름답지만 약점이 하나 있지요. 그건 여자들이 음식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른다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은 정말 음식을 즐길 줄 아는 분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자, 그럼 포도주는?" 계속 주문이 이어졌다. 주문을 받고 물러가기 전, 블롱댕은 잠시 망설이다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포와로 씨, 또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난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좋을 때 저금을 한 덕택에 일을 하지 않는 지금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참, 부럽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생각처럼 내 생활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답니다." 포와로는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일을 해야만 잡념이 없어진다고요. 그 말이 이제야 실감 나는군요." 포와로의 말에 블롱댕이 나서며 말했다. "그러나 할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여행을 하시는 것도 좋을 텐데요." "아, 그야! 나도 여행을 떠날 생각을 했답니다. 이번 겨울에는 이집트에나 가 볼까 합니다. 그곳 기후가 좋다고 해서요. 이곳의 기분 나쁜 안개와 우울한 날씨, 지긋지긋한 비에서 해방되려고요." "아, 이집트에요!" 블롱댕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지금은 이집트까지 배를 타지 않고 기타 여행을 할 수 있지요. 도버 해협만 빼 놓는다면." "배를 타시는 걸 싫어하십니까?"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떨었다. "저도 배는 질색입니다." 블롱댕도 맞장구쳤다. "배만 타면 속이 메슥거린답니다." "그렇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닙니다. 배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전혀 멀미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배여행을 유쾌히 할 수 있고, 또 즐기겠죠." 블롱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하느님도 불공평하시죠?" 주인은 머리를 몇 번 흔든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얼마 후, 웨이터들이 와서 숙련된 솜씨로 식탁 위에 음식을 늘어놓으며 상을 차렸다. 식탁에는 바삭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버터, 얼음통, 그외에 고급 요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소스가 놓여졌다. 흑인으로 구성된 밴드가 불협화음의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추는 무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포와로의 머리에 막연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았다. '저들의 표정은 약속이나 한 듯 따분해 보이는군. 그러나 저 똥뚱이들은 흥겹게 노는군. 그러나 파트너의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 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살찐 여자는 정말 행복한 얼굴이군‥‥ 뚱뚱하지만 저 여자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날씬하고 예쁜 처녀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기품과 품위가 있어.' 젊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들 가운데 몇 명은 공허한 얼굴이었고 또 다른 젊은이들도 왠지 지친 얼굴이었으며, 몇몇 다른 사람들은 불행해 보였다. 누가 젊은 시절을 행복한 때라고 말했나, 그건 실로 우매한 말이다. 일생 중, 가장 상처를 받는 시기가 젊은 시절이다. 여러 생각이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는데, 포와로는 한 쌍의 젊은이를 바라보자 곧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그림같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큰 키에 어깨가 넓은 젊은이와 날씬한 아가씨였다. 그들은 행복한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만 보아도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밝은 모습이었다. 춤은 바로 끝났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후에도 그 젊은 한 쌍은 두 곡이나 계속 춤을 추고, 포와로와 가까운 자리의 탁자에 와서 앉았다. 젊은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그녀가 파트너에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 앉을 때, 포와로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포와로는 웃음 이외의 것을 발견하고는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는 목하 열애 중이군. 그러나 너무 뜨거운 사람은 오히려 위험을 부르지!' 그 순간, 그들이 '이집트'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두 젊은이의 말소리가 포와로에게 분명히 들려왔다. 여자는 쾌활하고 명랑하게 말하는데 R 발음에 외국식의 부드러움이 울려 나왔다. 반면에 남자의 목소리는 저음의 세련된 영어를 구사했는데 그런 대로 교양이 있는 말투였다. "시몬,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리넷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일은 당신에게 꼭 맞는 일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능력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어. 이 모두가 정말 잘 된 일이야." 여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능력이 인정되려면 석 달은 걸릴 거예요. 그래야 쫓겨나지 않는 게 확실해지겠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래, 그후에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어.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후에 우리는 이집트로 신혼여행을 가는 거예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긴 하겠지만, 나는 언젠가 꼭 이집트에 가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나일 강과 피라밋, 그리고 끝없는 사막‥‥" 남자가 행복에 젖어 있는 여자에게 정답게 속삭였다. "재키, 우리 함께 이집트에 가게 될 거야. 멋지게 보낼 수 있어." "글쎄, 내 기분처럼 당신도 그렇게 황홀할까요? 나는 당신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 궁금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뀌었고 눈은 두려움으로 한껏 크게 떠졌다. 남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재키, 어리석긴‥‥ 그런 소리 그만해." 그러나 여자는 아직도 불안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글쎄, 정말‥‥" 여자는 망설이다가 남자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했다. "우리 춤이나 춰요." 포와로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여자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있는 남자, 글쎄?" 7 조안나 사우드우드가 먼저 말했다. "리넷, 그 남자 좀 거칠은 사람일 것 같아." 리넷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재클린은 분별력이 있으니까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머는 법이야. 사람을 제대로 보지 않고 과대 평가하게 되지." 리넷은 화가 나는 듯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나, 피어스 씨를 만나서 의논 좀 해야겠어." "무슨 의논?" "너무 더러운 오두막이 있어서 그걸 헐어 버려리고요.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려고요." "아주 깨끗한 계획이군 그래." "그 오두막은 헐어야 해요. 그 오두막은 수영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그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할까?" "거의가 찬성하는데 두어 명이 말을 듣지 않고 있어요. 사실 그래서 좀 귀찮아요. 그들은 자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래도 결국에는 네 뜻대로 될 텐데 뭘 걱정이야?" "조안나, 이건 정말 그들에게도 손해되는 일이 아니에요." "그야 맞는 말이지. 그렇지만 강요된 일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선택할 기회가 없었어. 리넷, 내 말을 잘 들어 봐. 여태껏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적이 있으면 말해 보렴." "그럼요, 여러 번 있어요." "그래, 정말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들어 봐.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그런 기억은 없을 거야. 생각날 턱이 없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황금 자동차를 탄 리넷 리지웨이에게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아." 리넷이 그 말에 신경질적으로 응수했다. "그럼 나보고 이기적이라는 건가요?" "아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리넷에게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는 거지. 재산과 미를 겸비한 리넷에게 누가 감히 대항하겠어? 너는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름다운 미소로써 소유하지. 그러니까 너를 모든 걸 소유한 여자라고들 하는 거야." "조안나,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그만해요." "리넷, 그럼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니?" "아니, 내 생각은‥‥ 하여튼 난 그런 말은 참을 수 없어요." "그야 당연히 듣기 싫겠지. 너는 점점 지겹고 안일한 생활이 싫증날 거야. 그러면서도 여전히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즐길 거야. 나는 이따금 네가 통행금지라고 씌어있는 길을 가야 한다면, 그때 과연 무슨 일이 생길까 상상이 안 되더구나." "조안나, 이제 그런 말은 그만해요." 그때 윈들쉠 경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리넷은 그에게 말했다. "조안나가 방금 아주 심한 말을 했답니다." 조안나는 어색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모두가 심술 때문이야, 심술." 그녀는 실례한다는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방금 들어온 윈들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윈들쉠은 말을 하지 않다가 얼마 후에 입을 열었다. "리넷, 그래 마음의 결정은 했소?" 리넷은 일부러 다짐해 두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말을 해 나갔다. "내 태도가 애매했나요? 그래서 저를 나쁘게 생각하셨지요? 마음이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아니오'라고 해 둘까요?" 윈들쉠은 리넷의 말을 막았다. "리넷, 그런 말은 하지 마오. 당신이 원한다면 시간은 얼마든지 주리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우리 두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오." 그 말에 리넷이 변명조로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이곳의 모두가 좋아요.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우드홀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고 계획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꿈이 이루어진 거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도 이곳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오. 모든 게 다 완벽하오. 당신의 솜씨는 참으로 뛰어나오." 윈들쉠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찰튼베리도 좋아하지 않소? 그야 개조해야 할 곳이 더러 있지만, 당신은 그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잘 될 거라고 생각하오." "그럼요, 찰튼베리는 훌륭한 곳이지요" 리넷은 그렇게 말은 했지만 갑자기 을씨년스러워졌다. 그때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 그녀의 충족감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리넷은 윈들쉠이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자기의 심적인 변화를 생각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찰튼베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윈들쉠의 입에서 찰튼베리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찰튼베리는 꽤 유명한 곳으로 윈들쉠의 선조들이 엘리자베드 여왕 때부터 소유한 정원이다. 찰튼베리의 여주인이 된다는 것은 사교계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윈들쉠은 영국에서 인기있는 사람중의 한 명이다. 만일 리넷이 그와 결혼한다면, 윈드쉠은 우드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우드홀은 어느 모로 봐도 찰튼베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일 테니까. 이곳은 그녀-리넷 자신의 소유지였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꿈꾸어 왔으며, 이제는 이곳을 소유하게 되었다. 리넷은 우드홀을 개조하고 치장하기 위하여 거액을 투자했다. 어쨌든 이곳은 바로 리넷의 소유지이다. 그녀의 왕국인 것이다. 그러나 리넷이 만일 윈들쉠과 결혼한다면 이곳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곳과 찰튼베리 중에서 분명히 자기 소유인 찰튼베리를 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리넷 리지웨이란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 그녀는 거액의 지참금을 윈들쉠에게 안겨주고 백작부인이 되겠지. 그럼 리넷은 왕비는 되지만 여왕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리넷은 자기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중얼거렸다. "참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이야." 리넷에겐 우드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실로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재키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재키는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리넷은 그녀의 열렬한 사랑과 윈들쉠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한 번 비교해 보고 싶었다. 자기는 제클린에 미치지는 못한다. 아니, 앞으로 영원히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열린 창문 틈으로 자동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리넷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마도 재키와 그의 약혼자가 도착한 것이리라. 리넷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리넷은 현관문에 나와서 재클린과 그의 약혼자 시몬 도일이 자동차에서 내리는 것을 쳐다보았다. "리넷!"하고 외치며 재클린이 달려왔다. "리넷, 이 사람이 내가 말한 시몬이야. 시몬, 인사하세요. 내 친구 리넷이에요. 아주 미인이죠." 리넷은 친구의 약혼자인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푸른 눈에 보기좋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와 각진 턱의 소유자였다. 리넷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시몬의 손은 단단하고 따사로왔다. 리넷은 그의 눈매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마치 소년처럼 순수하고 진심이 가득 담긴 눈길을 리넷에게 보냈다. 순간적으로 따사롭고도 짜릿하게 하는 흥분이 온몸에 번졌다.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잘 오셨어요, 시몬 씨. 어서 들어오세요. 새로운 토지 관리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앞장 서서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재키의 약혼자가 정말 마음에 들어. 지금 이 순간 나는 굉장히 행복해.' 리넷은 기쁜 반면,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재키의 약혼자라는 사실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8 팀 앨러튼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힐끗 쳐다보았다. 앨러튼 부인은 제법 머리가 희끗희끗한 쉰 살 가량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엄격하고 가혹할 정도로 대하고 있으면서 그 뜨겁고 지극한 사랑은 감추었다. 그러나 처음 부인을 보는 사람일지라도 그녀의 그런 태도에 속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들 팀도 어머니의 마음을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는 터였다. 먼저 아들 팀 앨러튼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마조르카 섬 좋으세요?" 앨러튼 부인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적어도 그곳은 비용이 적게 들지 않겠니?" 팀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추울 거예요." 청년은 키가 크고 야윈 젊은이였다. 그는 검은 머리에 가슴은 약간 좁은 듯 했고,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그의 눈은 우수에 찬 듯 했고, 길고 가는 섬세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폐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글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그의 작품은 대단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팀,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앨러튼 부인은 예리한 여자였으므로,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팀 앨러튼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지금 이집트를 생각하고 있어요." "이집트?" 앨러튼 부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아들을 보았다. "어머니, 이집트는 지금쯤 정말 따뜻할 거예요. 평화롭게 빛나는 황금빛 사막과 나일강‥‥ 저는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도 가고 싶으시죠?" 앨러튼 부인은 그저 담담히 말했다. "그래, 나도 가고 싶단다. 그러나 이집트 여행을 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우리는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할 처지잖아.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팀은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는 기운찬 모습이 되어 다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여행 비용은 염려마세요. 제가 마련할 테니까요. 증권거래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증권 시세가 변동되었대요. 우리가 산 주식값이 껑충 올랐다더군요. 아침에 그 소식을 들었어요." 앨러튼 부인은 이내 표정이 바뀌어 날카롭게 물었다. "오늘 아침에 연락을 받았다고? 오늘 아침에는 편지 한 장 외에는 아무 연락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 편지는 바로‥‥" 앨러튼 부인은 이야기를 멈추고 갑자기 입술을 질근질근 물어 뜯었다. 팀은 밝은 얼굴이었다가 이내 표정이 바뀌더니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그러나 그는 기분이 좋은 날이었으므로 명랑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그 편지는 조안나가 보낸 것이란 말씀을 하시고 싶어서 그렇게 계신 거죠? 네, 어머니. 그 편지는 바로 조안나가 보낸 거예요. 어머니는 마치 탐정 같으세요. 아마 에르큘 포와로도 어머니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할 거예요." 앨러튼 부인은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듯 편안치 못한 얼굴로 변명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그 글씨를 본 거야." "어머니는 그 글씨가 주식 중개인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아셨죠? 물론 조안나의 필적은 너무 형편없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았을 거예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엉망으로 써갈긴 봉투였으니까요." "조안나가 왜 편지는 썼니?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는 거니?" 앨러튼 부인은 일부러 관심이 없는 듯이 덤덤히 물었다. 그녀는 아들 팀 앨러튼과 육촌지간인 조안나 사우드우드가 절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처럼 두 사람은 걱정할 정도로 이상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녀도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전혀 의심할 사이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팀은 그녀에게 이성을 느낀 적도 없었으며 조안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조안나와 팀이 절친한 이유는 두 사람은 세상사에 똑같이 관심이 많았고, 그들은 주위의 친구나 안면있는 사람들까지도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즐겼고 토론하는 것도 유난히 좋아했다. 조안나는 빈정거리는 습관만 버린다면 별 문제가 없는 유쾌한 여자였다. 앨러튼 부인은 아들이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찾아오거나 편지를 보내오는 것은 싫었다. 앨러튼 부인은 그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질투심일지도 모른다. 앨러튼 부인과 그의 아들은 잘 통하는 벗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거나 관심을 보일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들에게 참견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따금 아들과 조안나가 열을 내면서 이야기하다가 앨러튼 부인이 다가가 화제에 끼이게 되면 그 열띤 분위기가 이상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별로 달갑지 않은 태도로 그녀를 대화에 끼어 주는 것이었다. 앨러튼 부인은 조안나가 위선적이고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했으며 조안나가 억양을 나타내지 않고 책 읽듯 말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다. 팀은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서 죽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흠, 아주 긴 편지로군 그래." "별 내용은 없어요. 디베나니시 부부가 이혼할 거라고 씌어 있어요. 윈들쉠 경은 캐나다로 돌아갔고 올드 몬티는 음주 운전을 해서 고발당했대요. 윈들쉠은 리넷에게 딱지를 맞아서 아마 크게 실망했을 거래요. 글쎄 리넷이 새로운 토지 관리인과 결혼할 것 같다고 하는군요." "참 이상하구나. 그 젊은이는 어떻게 생겼다던? 험상궂은 사람인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 봐요. 그 남자는 데븐셔의 도일 가문 사람인데 가진 게 없나 봐요. 그리고 리넷의 친한 친구인 재키의 약혼자였었대요." 앨러튼 부인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좋지 않은 일이구나." 팀은 정다운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애인이나 남편을 빼앗는 일은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글세, 요새는 통 도덕 관념이 없는 거 같다‥‥ 예전에는 좋았어. 요즘 젊은이는 하고 싶은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하려는데 그건 큰일이란다." 팀은 싱긋 웃었다. "그건 생각의 부재 탓이에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무조건 행동에 옮기니까요. 참 리넷도 어리석은 아가씨로군."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구나." "어머니, 남의 일인 걸요.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제 생각도 어머니와 같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남의 아내나 약혼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아무렴, 나는 너를 믿는단다. 너는 그런 천박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나는 너를 훌륭히 키웠다고 자부하고 있단다." 앨러튼 부인의 모습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저는 어머니의 엄격하고 완고한 덕분에 훌륭히 컸어요." 팀은 웃으면서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앨러튼 부인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애는 여태껏 거의 모든 편지를 보여주었는데 왜 조안나의 편지는 읽어주지 않을까? 내가 들어선 안되는 이야기가 씌어 있는 모양이지?' 앨러튼 부인은 고개를 흔들며 자기의 생각을 떨쳐 버리고 점잖게 행동하려고 다짐했다. "그래, 조안나는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니?" "그냥 그런가 봐요. 그녀는 메이페어에서 식품점을 하나 냈으면 해요." "그 애가 돈이 어디 있니? 언제나 궁색해서 쩔쩔매면서." 앨러튼 부인은 못마땅한 투로 말하더니 다시 덧붙였다. "그애는 그러면서도 너무 값비싼 옷을 입더구나. 언제나 옷차림만 그럴 듯 하게 꾸미니 무슨 실속이 있겠니?" 팀은 건성으로 말했다. "네, 그건 그래요. 조안나가 돈을 내는 건 아니겠죠, 뭐. 어머니, 너무 비약은 하지 마세요. 돈은 아마 다른 사람이 내나 봐요." 앨러튼 부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사람들이 어쩜 모두 그런 식으로 살아나갈까? 알 수 없는 일이야." "어머니, 그것도 모두 타고난 능력인 걸요. 어머니도 그런 사람들처럼 돈을 마구 써 버릴 수 있고, 돈이 무서운 줄 모른다면 외상 거래도 가능할 거예요." "그야 그렇겠지. 그러나 결국에는 가엾은 조지 우드 경처럼 파산해버리고 급기야는 법정에 서는 꼴을 당할 거야." "어머니는 그 우드 영감님에게는 늘 관대하시군요. 그 사람이 무도회에서 어머니보고 장미꽃처럼 아름답다고 했기 때문인가요?" "별소릴 다 하는구나. 넌 언제나 그분 이야기만 나오면 그런 식으로 말하더구나. 조지 경은 예의바른 사람인데 그렇게 말을 하면 안된다." "그분에 대한 우스운 소문을 좀 들었어요." "나는 조안나와 네가 다른 사람에 대해 여러 말을 해 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계속되면 나중에 큰코 다치는 일이 있을 게다." 팀은 신경이 곤두서는지 눈썹을 치켜 세우고 말했다. "어머니, 그만 진정하세요. 전 어머니가 우드 영감님을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너는 그분이 우드홀을 파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나를 모를 게야. 그곳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셨단다." 팀은 어머니에게 자기의 생각을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결국 그는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네, 어머니 말씀이 맞는 거 같군요. 얼마 전, 리넷이 우드홀을 개조하고 나서 변한 모습을 구경하러 오라고 그 영감님을 초청했는데 그분은 그냥 거절했답니다." "그랬을 거다. 나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어. 리넷이 사려깊은 여자였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다." "영감님은 리넷을 좋아하지 않는 거 같더군요. 그녀를 대하면 낮은 소리로 욕을 하거든요. 그분은 리넷이 우드홀을 산 걸 용서하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그 낡고 쓸모없는 영지를 거액을 치루고 샀는데도요." "너는 그 영감님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겠니?" 앨러튼 부인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머니, 전 솔직한 심정으로 이해가 안 돼요. 왜 지난 과거만 붙잡고 살려는 거죠? 과거에만 집착하고 연연해 하는 이유가 뭐죠?' "팀, 그럼 넌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저는 매일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오래 북은 땅이나 고옥을 지키고 사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능력껏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럼 증권 투자 같은 것으로 한밑천 잡는 걸 말하는 거냐?" 팀은 못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그러면 증권 같은 걸 하면 안 되나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큰 손해를 입게 되면 어쩔 셈이냐?" "그건 그렇고, 이집트 여행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팀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야기했다. "벌써 결정된 거예요. 어머니도 이집트에 가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럼 언제쯤 갈 계획이니?" "다음달이 좋겠어요. 이집트는 1월이 날씨가 제일 좋대요. 몇 주일, 이 호텔에 더 묵으며 사람이나 사귀죠." 앨러튼 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아들을 불렀다. "팀, 리치 부인이 경찰서에 갈 때, 네게 함께 좀 가 달라고 했는데 어쩔 거냐? 그 부인은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한단다." 팀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 반지 때문이죠? 그 돈놀이 하는 부인의 빨간 루비 반지 때문이죠? 리치 부인은 지금도 그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우기는 것 같은데, 그건 시간 낭비예요. 괜히 가엾은 하녀만 의심하고 괴롭히는 일이에요.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나는 그 부인이 반지를 끼고 있는 걸 똑똑히 보았어요. 수영하다가 미처 반지가 빠진 걸 모르고‥‥" "그 부인은 분명히 화장대 위에 반지를 빼 놓았다고 하더라." "그렇지 않아요. 제가 이 눈으로 아주 똑똑히 보았어요. 그 부인은 이상해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가 봐요. 보나마나에요. 계속 흐리다가 하루 잠깐 해가 비친다고, 물이 따뜻하다며 수영하러 나가는 여자들이란 알아볼 노릇이에요. 그러나 저러나 법으로라도 뚱뚱한 여자들은 수영복을 입지 못하게 막았으면 좋겠어요. 그 뚱뚱한 몸에 수영복을 입고 뒤뚱거리는 꼴은 정말 가관이지요, 가관." 앨러튼 부인은 아들의 말에 심사가 뒤틀린 듯 쏘아붙였다. "팀, 네 말을 들으니 나도 이제 수영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야겠구나." 팀은 어머니의 말에 큰소리로 웃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예외죠. 어머니는 처녀 못지않은 몸매인데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앨러튼 부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너와 어울릴 수 있는 젊은이가 많았으면 좋겠구나." 팀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저는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훨씬 더 좋아요." "팀, 조안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니?" "아뇨,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팀의 목소리에는 완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어머니가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조안나와 어울려 이야기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와 오래 자리를 함께 하게 되면 반드시 조안나가 제 신경을 건드린답니다. 저로선 이곳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요. 저는 앞으로 조안나를 만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여성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그분이 누군지 아세요?" 앨러튼 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팀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멋있는 여자는 많지 않아요. 어머니는 그렇게 드문 사람 중의 한 분입니다." 9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롭슨 부인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코넬리아, 얼마나 멋진 일이니! 너는 운이 좋은 아이구나." 코넬리아 롭슨은 그 말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는 체구가 거대하고 못 생긴 갈색 눈의 소유자였다. "네, 멋진 일이에요." 그녀는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처녀 밴 슈일러는 이 가난한 친척들의 대화를 만족한 표정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저는 유럽 여행을 하는 게 꿈이었답니다." 코넬리아는 꿈꾸는 표정으로 말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정말 유럽에 가리라고는 꿈에서 조차 생각지 못했어요." 밴 슈일러가 조용히 말했다. "바워즈 양도 같이 갈 거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말벗이 되기엔 부족해-그래 부족하지. 그녀는 사교적인 일을 하기엔 무리니까 네가 나를 위해 간단한 일은 해주어야 될 거 같다." "물론 해드리고 말고요. 염려 마세요, 메리 아주머니." 코넬리아는 신이 나서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 그럼 결정된 거다. 코넬리아, 어서 바워즈 양을 좀 불러 주렴. 에드노그를 마셔야겠어." 코넬리아가 바워즈를 부르러 밖으로 나가자 그녀의 어머니 롭슨 부인이 말했다. "메리, 정말 고마워요. 아시다시피 우리 코넬리아는 사람들을 사귀지 못해서 괴로와했답니다. 그애는 굴욕감까지 느끼는 거 같았어요. 내가 그애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능력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당신도 잘 알겠지만 네드가 죽고나서 우리는 형편이 어려워져서 그럴 엄두도 못 낸답니다." "나도 코넬리아를 데리고 가게 되어서 기뻐요. 그애는 영리하고 싹싹한 거 같더군요. 명랑하고 심부름도 잘 하고요. 요즘 애들은 너무 타산적이고 자기만 알지요." 롭슨 부인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부유한 친척인 밴 슈일러의 누런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롭슨 부인은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컵에 노란 액을 담아가는 키가 크고 명석해 보이는 여자와 마주쳤다. "바워즈 양, 당신도 유럽에 가나요?" "네, 저도 간답니다." "정말 멋진 여행이 되겠군요." "네, 그럴 것 같아요. 아주 즐겁고 멋진 여행이 될 거예요." "당신은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지요?" "네, 지난 해 가을에 밴 슈일러 양과 파리 여행을 했지요. 그러나 이집트 여행은 처음이에요." 롭슨 부인은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순조로운 여행이 되어야 할 텐데‥‥" 바워즈는 목소리를 낮추어 태연히 말했다. "안심하세요, 롭슨 부인.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롭슨 부인의 안색에서 불안의 그림자가 가셔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을 다 내려가도록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앤드류 페닝턴은 우편물을 한 통씩 뜯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갑자기 책상을 쾅 소리나게 내리쳤다. 그의 얼굴은 흥분하여 빨갛게 상기되고 이마에는 정맥이 두 줄 솟아 올랐다. 그가 책상 위의 벨을 누르자 아름다운 타이피스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빨리 록포드 씨 좀 들어오시라고 해!" "네, 페닝턴 씨." 얼마 후, 그의 동업자인 스텐데일 록포드 씨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모습은 거의 비슷해서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구에 머리는 반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말끔하게 면도한 모습에 명석해 보이는 것까지 공통된 점이었다. "페닝턴, 무슨 일인가?" 그는 거듭 읽고 읽은 편지에서 눈을 떼고는 록포드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했다. "리넷이 결혼했어‥‥ 리넷이." "뭐라고?" "내 말이 안 들리나? 리넷이 결혼했단 말이야, 결혼!" "아니, 언제 결혼했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우리가 소식을 듣지 못했지?" 페닝턴은 책상 위의 달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편지를 보낼 때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벌써 결혼을 했을 거야. 4일 아침이 결혼 날짜라고 했거든. 오늘이 바로 4일이잖아." 록포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정말 놀랐는데! 뭐 다른 이야기는 없어? 누구야, 결혼 상대자가?" 페닝턴은 다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시몬 도일." "시몬 도일? 아니 어떤 인물이야? 금시초문인데." "나도 몰라. 리넷도 그 사람에 대한 말은 없어." 페닝턴은 깨끗하고 정결한 느낌을 주는 편지를 보면서 말했다. "이 결혼은 글쎄‥‥ 좀 이상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리넷이 결혼했다는 사실이란 말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록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숙고할 문제로군, 그래." "자,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내가 궁금한 점이야."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록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계획을 세웠나?" 페닝턴이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말했다. "오늘 노르망디 호가 출항한다고 하니,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일을 처리해야만 하네." "자네 정신나갔나! 그게 좋은 생각이란 말이야?" "그 영국 변호사 놈들‥‥" 페닝턴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변호사 놈들이라니? 자네 그들과 맞붙어 보려는 건가? 아예 그런 생각일랑은 하지 말게. 그건 미친 짓이네." "나는 지금 우리 중에 누가 영국에 가야 한다는 게 아냐." "그럼 자네의 그 기발한 생각이란 도대체 뭔가?" 페닝턴은 조바심이 나는지 책상 위의 편지를 집어서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리넷이 이집트로 신혼여행을 간다네. 그곳에서 한 달 가량,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머물지 몰라." "이집트로?" 록포드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그가 친구를 쳐다보자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음, 이집트‥‥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네." "그렇다네. 리넷의 신혼여행 도중에 우연히 만나도록 하는 거야. 리넷과 그녀의 남편이 신혼의 달콤한 꿈에 젖어 있을 때 기회를 봐서 해치워 버리는거야." 록포드는 불안해 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리넷은 철저하고 빈틈이 없는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방법이‥‥" 페닝턴은 침착하고 여유있게 말했다. "아냐,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록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페닝턴은 시계를 쳐다본 후 말했다. "서둘러야겠어, 두 사람 중에 누가 가든지." 록포드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자네가 가는 게 좋겠네. 리넷은 자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나. 자네를 앤드류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따르니까 말이야. 그러니 일이 더 쉬울 수 있어." 페닝턴은 표정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글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일까가 아니라 분명히 잘 해야 하네. 우리는 지금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잊지 말고 말이야." 11 윌리엄 카미클은 의아한 표정으로 짐을 들고 들어오는 야윈 청년에게 말했다. "짐에게 이리 오라고 해." 잠시 후, 짐 팬숍이 들어와 용건이 궁금한 듯 숙부를 쳐다보았다. 카미클은 고개를 들어 짐을 쳐다보고 나서 신음소리를 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왔냐?" "찾으셨어요?" "그래, 이리 가까이 오너라." 청년은 자리에 앉아서 숙부가 건네준 편지를 살펴보았다. 카미클은 그 모습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니?" "글쎄요, 글씨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군요." 짐 팬숍과 숙부인 윌리엄 카미클은 그랜드 카미클 법률사무소의 공동 경영자이다. 카미클은 숙부가 준 이집트에서 방금 도착한 항공 우편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날에 사업상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따분한 일입니다. 우리는 매나 하우스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페이웅까지 왔답니다. 모레에는 증기선을 타고 나일 강을 거술러 올라가서 룩소르와 아스완까지 가려고 계획했지요. 어쩌면 카타툼에도 갈지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 차표 사정을 알기 위해 쿡 회사에 들렀더니 글쎄 그곳에 제 미국인 재산 관리인인 앤드류 페닝턴 씨가 와 있더군요. 2년 전 페닝턴이 영국에 왔을 때 당신도 만난 적이 있지요? 저는 그분이 이곳에 온 걸 몰랐고, 그분 역시 제가 이곳에 온지를 몰랐대요. 제가 결혼한 일조차 모르고 있더군요. 제 결혼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여행을 떠났나 봐요. 그분도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나일 강을 여행할 겁니다. 정말 굉장한 우연이지요? 그건 그렇고 바쁘신 와중에도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 청년이 다음 장 편지를 넘기려고 하는데 카미클이 재빨리 편지를 빼앗았다. "그 정도 읽었으면 됐어. 그 뒤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짐 팬숍은 잠깐 생각하는 척 하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이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닌 것 같은데요‥‥" 숙부는 그 의견에 공감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너, 이집트에 다녀오지 않을래?" "꼭 제가 가야 하나요?" "내 마음은 조급하단다. 서둘러야 할 거 같다." "숙부님, 왜 꼭 제가 가야 하는 거죠?" "짐, 머리를 회전시켜 봐라. 리넷은 너를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어, 그러니 네 얼굴을 모른단 말이야. 페닝턴도 너를 모르고‥‥ 비행기를 타면 제 시간에 그곳에 닿을 게다." "저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에 가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뭐죠?" "머리를 충분히 활용하고 눈과 귀를 십분 활용하도록 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행동을 취하는 거지." "그렇지만 저는 내키지 않아요." "싫어도 꼭 해야 한다." "꼭 해야만 하나요?" 카미클이 망설이며 말했다. "이 일에는 승패가 걸려있어." 12 오터번 부인은 머리에 두른 터번을 풀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제 예루살렘이 지겨워. 차라리 이집트로 떠났으면 좋겠어. 왜 우리가 그리로 가면 안 되는 거지?" 그녀는 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다시 쏘아 붙였다. "너도 말을 시키면 최소한 대답은 하도록 해라." 딸인 로잘리 오터번은 신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사진 아래엔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다. 시몬 도일 부인. 결혼 전, 리넷 리지웨이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친 미모의 여인. 도일 부부는 이집트에서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음. 그녀는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어머니, 이집트에 가시고 싶으세요?" "그래, 난 여기보다 이집트에 가고 싶다." 오터번 부인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거만하잖니. 사실 내가 여기 머무는 것만도 굉장히 광고가 될 텐데, 호텔비를 할인해 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가 슬쩍 말을 비쳤더니 글쎄 건방지게 뭐라는 줄 아니‥‥" 로잘리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디를 가나 모두 똑같아요. 한시바삐 여길 떠났으면 좋겠어요." 오터번 부인은 성급히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엔 지배인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와서 무례한 태도로 방을 비워 달라더라. 방들이 모두 예약되었다고 예정보다 일찍 비우라는 거야. 이런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담!" "그럼 어서 다른 숙소를 찾아봐야겠군요." "아니다, 그럴 거 없다. 나는 이미 여행 준비가 끝났으니 비행기로 출발하면 된다." 로잘리는 반면에 침착한 태도로 나지막히 말했다. "우리가 이집트로 가는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에요. 이집트에 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맞다, 어디 그게 죽고 사는 문제냐." 그러나 오터번 부인은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 여행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린 것이었다. 제 2 부 이집트 1 앨러튼 부인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사람이 탐정인 에르큘 포와로야." 앨러튼 부인과 그녀의 아들은 아스완에 위치한 카타랙트 호텔 정원의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양복을 입은 키 작은 남자가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팀 앨러튼은 참을 수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남자 말이에요?" "응, 저 남자 말이다." 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길 왔을까?" 앨러튼 부인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팀, 너무 흥분한 거 같구나. 남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저 범죄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이 없단다. 나는 탐정소설은 흥미없어. 난 그런 건 한 번도 읽지 않았지. 포와로 씨가 여기 온 건 아마 사건 때문이 아닐 거다. 그는 제법 많은 돈을 저축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자유롭게 여행을 즐기는 거란다." "네, 바로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눈이 아플 정도로 쳐다보면서 있지요." 앨러튼 부인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포와로와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포와로 옆에서 함께 걷는 여자는 그보다 약 3인치 가량 컸는데,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앨러튼 부인은 감탄하며 말했다. "굉장히 예쁜 여자로군!" 앨러튼 부인은 시선을 재빨리 아들에게로 돌렸다. 팀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꾸했다. "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로군요. 그런데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샐쭉한 표정이잖아요." "그건 표정만 그런건지 누가 아니?" "아니에요, 정말 기분 나쁜 표정이에요. 불쾌한 얼굴인 걸요. 그러나 미인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여자는 바로 포와로 곁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오터번은 접은 양산을 무료한 듯 빙빙 돌리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녀의 얼굴은 팀이 말한 것처럼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눈쌀은 잔뜩 찌푸린 채였고, 꼭 다문 입술은 축 처져 있었다. 그들은 호텔 정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구부러져서 그늘이 시원해 보이는 공원으로 향했다. 에르큘 포와로는 다정다감하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흰 실크 양복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손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파리채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이곳에 반했어요. 엘러팬틴의 검은 바위와 태양, 그리고 강 위의 작은 배들‥‥ 모두가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아가씨,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로잘리 오터번은 짧게 응수했다. "나쁘진 않아요. 그러나 아스완은 우울한 곳인 걸요. 호텔은 비어있고, 그나마 모두 늙은이 뿐이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짖궂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사실 이제 나도 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그 여자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같은 또래와 어울리길 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요. 글쎄, 가만 있자. 아, 맞아요. 젊은이가 한 명 있어요." "늘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그 사람 말씀이시군요. 저는 그 어머니는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나 그 젊은 남자는‥‥ 너무 얼굴이 여자처럼 곱고‥‥ 자신만만한 표정이에요." 포와로는 잔잔히 웃어 보였다. "그럼, 나도 그렇게 거만해 보입니까?" "아녜요, 선생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녀의 얼굴에는 무관심이 역력해 보였지만 포와로는 그녀의 반응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내 친구들은 나보고 너무 거만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로잘리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행동을 해도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러나 전 범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요." 포와로의 표정이 금새 엄숙하고 진지해졌다. "당신이 은밀히 숨겨야 할 비밀스런 범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다행이군요." 그 순간 로잘리의 표정이 재빨리 바뀌었다. 그러나 포와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신 어머니는 오늘 점심 식사 때 보이시지 않더군요. 혹시 몸이 불편하신 거 아닙니까?" 로잘리는 짧게 대답했다. "단지 이곳이 어머니와 맞지 않아서 그럴 뿐이랍니다. 어서 빨리 여길 떠났으면 좋겠어요." "우린 행선지가 같죠? 당신도 왜디핼파와 제2폭포까지 갈 거죠?" "네, 맞아요." 그들은 공원의 그늘에서 나와 강에 접한 먼지투성이 길로 들어섰다. 그때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목걸이 장사, 그림엽서를 파는 행상, 당나귀를 파는 소년들이 무리지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구걸하는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몰려왔다. "선생님, 이 예쁜 목걸이 하나 사세요. 값도 싸고 훌륭한 겁니다." "아가씨, 스캐럽 하나 사세요. 이걸 하면 여왕님 같을 겁니다. 이건 행운을 가져오는 겁니다." "선생님, 이건 진짜 유리에요. 값도 싸요. 자, 이것 좀 보세요." "선생님, 이 당나귀 한 번 타 보세요. 훌륭한 당나귀입니다. 다른 당나뒤는 모두 엉망입니다. 자, 이 훌륭한 위스키소다 당나귀를 한 번 타 보세요." "선생님 제 당나귀를 타시고 화강암 채석장 구경을 가시지요? 이 당나귀는 훌륭한 놈이에요. 다른 놈은 전부 형편없는 겁니다." "자, 그림엽서 사세요, 그림엽서! 값도 싸고 훌륭합니다." "아가씨, 호텔에 돌아가실 때 이 당나귀를 타고 가세요." 에르큘 포와로는 주변에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상인을 쫓으려고 애썼다. 그러는 동안에 로잘리는 상인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했다. "이런 때는 그저 묵묵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지나가면 돼요." 그 동안에도 나이 어린 거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구걸하며 쫓아왔다. "한 푼만 도와 주세요, 선생님. 아름다운 아가씨, 한 푼만 도와 주세요. 네?" 어린 거지들은 해진 옷을 걸치고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따라다녔다. 그 아이들의 얼굴 위에, 눈 위에 파리가 윙윙거리며 앉았다가 날아가고 또다시 앉곤 했다. 다른 상인들은 물건 팔기를 포기하고 다른 관광객들에게 매달렸으나 거지들은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거지들도 그들이 동냥을 주지 않으리라고 뒤늦게 깨달았는지 다른 관광객들에게로 갔다. 물빠진 듯이 모두 가 버리고 포와로와 로잘리만이 남게되자 두 사람은 양쪽으로 늘어선 상점을 향해 걸었다. 상점 앞에서도 상인들은 계속 손님을 붙잡고 물건을 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생님, 구경 좀 하고 가십시오." "선생님, 이 악어 가죽 좀 구경하세요." "선생님, 저희 집에는 훌륭한 물건이 많이 있읍죠. 구경 좀 하고 가시죠." 두 사람은 다섯 번째 상점으로 들어가 로잘리의 필름을 몇 통 맡겼다. 그들은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점에서 나와 강변을 따라 걸었다. 나일 강의 증기선 한 척이 부두에 도착했다. 그들은 흥미롭게 증기선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로잘리가 여전히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나 보군요, 그렇죠?" 그때 팀 앨러튼이 가까이 와서 끼어들었기 때문에 로잘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팀은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는데, 아마도 급히 온 것 같았다. 세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승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팀이었다. "저 배는 여전히 사람이 많군요." 그는 배에서 육지로 내리는 승객들을 무시하는 투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로잘리도 대꾸했다. "늘 저렇게 많아요, 끔찍히도 탔군요." 그들 세 명은 배에서 내린 승객들보다 한 발 먼저 이 장소에 도착했다는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팀의 안색이 바뀌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저기 저 여자 좀 봐요. 바로 리넷 리지웨이죠? 맞아요, 바로 저 여자예요. 내 말이 틀림없어요." 그 말에 포와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로잘리에게는 흥미를 돋구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물었다. "어디 누구 말이에요? 저기 하얀 옷 입은 여자 말인가요?" "맞아요, 키 큰 남자 옆에 서 있는 여자예요. 저 큰 사람은 남편 같군요. 저 남자 이름이‥‥" 로잘리가 대답했다. "도일, 바로 시몬 도일이에요. 신문에서 한참 떠들었죠. 참 저 여자는 돈이 주체하지 못하게 많다지요?" 팀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영국의 최고 부자일 겁니다." 세 사람은 배의 승객이 육지에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포와로도 흥미를 가지고 팀과 로잘리가 가리키는 사람을 바라본 후,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미인이로군." 로잘리는 다소 우울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엔 모든 걸 소유한 사람도 있지요." 그녀는 말하면서 리넷 리지웨이가 배와 부두를 연결한 다리 위에 선 모습을 바라보았다. 리넷 도일은 마치 리뷰를 공연하는 무대 가운데에 선 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명 배우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그리고 자기에게 감탄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늘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배우가 되어 육지에 내렸다. 아름답고 최고의 갑부인 신부가 신혼 여행에서 보여줄 만한 연기를 하면서‥‥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옆에 선 키 큰 남자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자 남자가 무엇인가를 말했다. 포와로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을 빛내며 눈쌀을 찌푸렸다. 그 멋진 한 쌍은 포와로의 앞을 지나쳤다. 그는 시몬 도일의 말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해 봅시다. 그러자면 시간을 아껴야지. 리넷, 이곳이 마음에 들면 한두 주일 가량을 여기 묵을 수 있을 거요." 시몬 도일은 뜨겁고 열렬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녀를 겸손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포와로는 찬찬히 그를 관찰했다. 넓은 어깨, 약간 그을린 얼굴, 푸른 눈동자, 그리고 어린애처럼 순진한 미소를‥‥ 그들이 지나간 후, 팀이 불평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행운의 사나이죠. 뚱보나 어디 이상이 있는 여자가 아닌,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미인을 엄청난 재산과 함께 맞아들이다니, 이거야말로 행운입니다." 로잘리가 질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 참 행복해 보이는 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불공평해요." 그녀가 너무 나지막히 말했기 때문에 팀은 그 말을 듣지 못했으나 포와로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로잘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머니께 드릴 물건을 좀 사야겠어요." 팀은 모자를 벗어 인사한 후, 건너편으로 길을 되돌아서 호텔을 향해 발을 옮겼다. 포와로가 로잘리가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하자 당나귀 장사들이 또다시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포와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정말 불공평한 일이지요?" 로잘리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거야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요? 난 조금 전에 당신이 중얼거린 말을 다시 한 번 해 보았을 뿐이오. 맞습니다, 아까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한 걸요." 로잘리 오터번은 우스꽝스럽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한 사람이 소유하기엔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돈, 아름다움 그리고‥‥" 로잘리는 말을 중단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포와로가 말했다. "더우기 그녀는 사랑까지 갖추었죠. 당신은 사랑을 말하려 했던 게 아닙니까? 그러나 그 남자가 돈에 어두워 결혼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죠." "선생님은 그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을 보시지 못했군요?" "아닙니다. 나는 물론 보았습니다. 물론이죠, 나는 모두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못 본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게 뭐죠?" 포와로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나는 한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수심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양산을 힘껏 잡고 있는 것도 보았고‥‥" 로잘리는 그 소리를 듣고 포와로를 말없이 쳐다보왔다. "무슨 뜻이죠?" "내 말은 빛이 난다고 모두 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부자이고 아름답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잘 안되는 일도 있을 거라는 뜻입니다. 또 나는 다른 사실도 알고 있고요." "그건 또 뭐죠?" 포와로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시몬 도일의 목소리를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였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군요." 로잘리는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꼼짝않고 섰다. 그리고는 양산 끝으로 모래 위에 줄을 죽죽 그어댔다. 로잘리는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미워서 못견디겠어요. 짐승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그 여자의 옷을 마구 찢어 버리고 그 예쁘고 당당한 얼굴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싶어요. 질투심에 몸둘 바를 모르는 여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이게 제 솔직한 심정인 걸요. 그 여자는 너무 유명하고 돈도 많아요. 게다가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요." 에르큘 포와로는 갑작스런 그녀의 큰소리에 놀란 표정이었으나 곧 그녀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 맞아요. 그렇게 말하면 마음도 다소 안정될 겁니다." "아녜요, 전 그여자가 증오스러워요. 난 초면인 사람을 이렇게 미워해 본 적이 없어요." "참 기막힌 얘기로군요." 로잘리는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금새 웃음을 터뜨렸고 바로 포와로도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호텔을 향해 걸었다. 로잘리가 어둡고 서늘한 홀로 들어섰을 때 말했다. "저는 어머니를 찾아보아야겠군요." 포와로는 나일 강이 바라다보이는 테라스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손님이 없었다. 그는 나일 강을 바라보다가 정원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몇 명이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테니스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본 후,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셰마탕트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본 여자가 나일 강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포와로는 한분에 그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날 밤처럼 깊은 고뇌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표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야위고 창백했으며 지친 모습으로 애처롭게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포와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충분히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듯 작은 발로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 눈에서는 괴로움과 동시에 일종의 자신만만한 기색이 나타났다. 그녀는 배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나일 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포와로는 자기의 귓가에서 맴돌고 있던 목소리, 그리고 낯익은 그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 여자의 얼굴과 조금 전에 들었던 남자, 리넷의 남편의 목소리가‥‥ 포와로가 벤치에 앉은 여자를 뒤에서 살펴보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벤치에 앉았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리넷 도일과 그녀의 남편이 그 길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행복하고 의기양양한 리넷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배에서 내릴 때의 약간 경직된 표정이나 긴장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온몸에서 행복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같이 보였다. 그때 그 여자가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걸어오던 리넷과 남편 도일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재클린 드벨포가 비양거리며 말했다. "안녕, 리넷. 우리는 너무 잘 만나는구나. 시몬, 안녕하신가요?" 리넷 도일은 갑작스런 침입자에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시몬 도일의 잘 생긴 얼굴도 화가 나 일그러졌다. 그는 마치 힘 없는 여자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재클린은 그 순간 낯선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민첩하게 머리를 돌려 쳐다보았다. 시몬도 포와로를 바라보며 당황해 했다. "안녕, 재클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시몬의 말은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그 여자는 그들을 쳐다보며 백치처럼 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물론, 놀라셨겠지요?" 그 여자는 혼자 무슨 뜻에서인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길을 따라 올라갔다. 포와로는 반대편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는 도중에 리넷 도일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몬, 어쩌면 좋아요. 하느님 맙소사! 이 일을 어떡하지?" 2 저녁식사가 끝났다. 카타랙트 호텔 테라스에 은은한 샹들리에가 빛났다. 이 호텔에 묵고 있는 대부분의 투숙객이 테라스의 작은 탁자에 나와 있었다. 시몬과 리넷 도일도 테라스에 나타났는데 두 사람 옆에는 키가 크고 반백의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유난히 시선을 끄는 사람으로 날카롭고 깨끗이 면도한 얼굴이 미국인처럼 보였다. 그들이 문 앞에서 망설이자, 가까이 앉아있던 팀 앨러튼이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저를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저는 조안나 사우드우드의 육촌입니다." "그래요, 제가 깜빡했어요. 이 분은 제 남편이랍니다." 리넷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리고 이 분은 제 미국인 재산 관리인이신 페닝턴 씨이고요." "그럼, 제 어머니를 소개해 드리겠어요." 얼마 후, 그들은 모두 한 탁자에 둘러 앉았다. 리넷은 구석에 앉고 팀과 페닝턴은 그녀의 양쪽 옆에 앉아 경쟁하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팀의 어머니는 시몬 도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호텔의 회전문이 반 바퀴 돌아가자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리넷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문에서 키 작은 남자가 나와서 테라스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앨러튼 부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당신만이 유명 인사는 아닙니다. 저기 키 작은 사람이 바로 에르큘 포와로라는 사람이지요." 앨러튼 부인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재치있게 가볍게 말했는데 리넷은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에르큘 포와로? 아, 저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나요." 포와로는 테라스를 가로질러 강으로 향한 테라스 쪽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발을 멈추어야만 했다. "포와로 씨, 여기 앉으세요. 아주 멋진 밤입니다." 포와로는 그 말이 들린 탁자 앞에 앉았다. "네, 부인. 정말 아름다운 밤이군요." 포와로는 오터번 부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터번 부인은 높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여긴 저명 인사가 꽤 있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한 구절 정도는 실릴만 하겠군요. 사교계의 미인들과 유명한 소설가들‥‥" 포와로는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는 로잘리가 더 한층 뾰로통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부인, 지금도 소설을 쓰고 계십니까?" 오터번 부인은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은 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답니다. 이 버릇이 없어져야 할 텐데. 독자들은 내 작품을 고대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출판업자들도 매일 독촉의 편지를 다투어 보내 온 답니다. 심지어는 전보를 보내오기까지 한다니까요." 포와로는 다시 한 번 어둠 속에서 로잘리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포와로 씨,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향토색을 찾기 위해서랍니다. <사막에 내리는 눈>이 바로 새 작품 제목이랍니다. 막강한 눈, 사막에 내리는 눈은 열정에서 나온 뜨거운 숨결에 금방 녹는답니다." 로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몇 마디 중얼거리며 어두운 정원으로 내려가 버렸다. 오터번 부인은 계속 말을 했다. 그녀는 터번을 두른 머리를 크게 흔들며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책은 강렬한 내용이어야 하죠. 내 작품 내용은 모두 그렇지만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설사 판매금지를 당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요. 난 어디까지나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섹스! 사람들은 왜 섹스 얘기만 나오면 야단법석이죠? 섹스란 원래 우주 만물을 지탱시켜 주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참, 포와로 씨, 제 작품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부인. 저는 원래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서요. 그리고 직업이 직업인지라‥‥" 오터번 부인의 목소리가 좀 딱딱해졌다. "그러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라는 책을 한 권 드려야겠군요. 그 책의 내용은 의미심장하답니다. 너무 노골적인 표현이 많긴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진실이지요." "당신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주신다면 감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터번 부인은 목에 걸린 두 줄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시선을 재빨리 옮겨 사방을 살펴보았다. "원하신다면 책을 지금 가져 오죠." "그렇게까지 하실 건 없습니다. 나중에 주셔도‥‥" "아니 됐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저, 당신에게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때 로잘리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아니란다. 방에 올라가 책을 한 권 포와로 씨에게 가져다 드릴까 하고." "그 <무화과 나무>말인가요? 그럼 제가 가져올께요." "너는 그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내가 가져오마." "아녜요, 어머니, 제가 가지고 오겠어요." 말을 마친 로잘리는 잰걸음으로 테라스를 가로질러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저런 사랑스런 따님을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포와로가 진심으로 오터번 부인에게 말했다. "아, 로잘리요? 네, 그애는 예쁘긴 하지만 성격이 까다로운 편이라 걱정이에요. 저 애는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글쎄 내 건강문제를 놓고도 나보다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할 정도랍니다." 포와로가 옆으로 지나치는 웨이터를 불렀다. "부인,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어떤 술을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오터번 부인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술은 마시지 않는답니다. 당신도 아셨겠지만 나는 물 말고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는답니다. 그 독한 술이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마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럼, 레모네이드라도 드시겠습니까?" 포와로는 웨이터에게 레모네이드 한 잔과 베네딕틴 한 잔을 주문했다. 그때 회전문이 돌아가고 로잘리가 한 손에 책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전혀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여기 있어요." "로잘리, 포와로 씨가 레모네이드를 시켜 주셨단다." "오터번 양은 무얼 드시겠습니까?" "아무 것도 마시고 싶지‥‥" 로잘리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중단했다. 자신의 말투가 너무 퉁명스럽다고 느꼈는지 다소 부드럽게 다시 말했다. "고맙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포와로는 오터번 부인이 준 책을 살펴보았다. 그 책의 표지는 화려한 빛깔로 여자를 그린 것이었는데 그림의 여자는 짧게 깎은 머리에 진홍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새빨간 열매가 달린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었다. 책의 제목도 오터번 부인이 말한대로 <무화과나무 아레에서>라고 찍혀 잇었다. 한 장을 넘기니 발행인의 추천사가 나왔다. 그 내용은 이 소설은 현대 여성의 용기있는 애정생활에 대해 정확하고 냉정한 분석을 했다는 칭찬이 씌어 있었다. 포와로는 약간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부인, 정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들고 시선이 여류 작가의 딸 로잘리와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그 순간 포와로는 그녀의 가슴에 품고 있던 고통과 고뇌가 전달되어 오는 듯 가슴이 서늘해 왔다. 그때 웨이터가 음료수를 가져왔기 때문에 포와로는 모녀에게 인사말을 했다. 포와로는 잔을 들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부인과 로잘리 양의 건강을 기원하며‥‥" 오터번 부인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아, 시원해!"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나일 강과 주위의 검은 바위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바위가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갑자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긴 침묵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테라스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착각일까, 아니면 그곳에도 똑같은 침묵이 감돌고 있는 것일까? 마치 무대 위에 나타날 여배우를 기다리는 듯한 순간적인 침묵이었다. 바로 그때 회전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회전문에서 멈추었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날씬하고 검은 머리의 여인이 회전문에서 나왔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테라스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빈 탁자에 앉았다. 그녀의 행동에는 어색하거나 거만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무대의 배우 같은 분위기가 그녀 주변에서 감돌았다. 오터번 부인은 신음 소리를 내며 터번을 두른 머리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저 여자는 자기가 무슨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가 보죠?" 포와로는 그 부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 보았다. 그녀는 리넷 도일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리넷 도일은 몸을 굽히고 무슨 말을 한 후, 자리를 바꿔 앉았다. 리넷은 그녀의 반대 방향에 앉아 있었다. 포와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5분 쯤 후에 그 여자도 테라스의 반대 방향에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여유만만하면서도 눈길은 도일의 아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15분 쯤 후에 리넷 도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로 들어가자 그녀의 남편도 그 뒤를 따랐다. 재클린 드벨포는 의미있게 웃으며 의자에 앉아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캄캄히 잠든 나일 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았다. 3 "포와로 씨!" 테라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호텔로 들어간 뒤까지 혼자 앉아서 생각에 빠졌던 포와로는 문득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 소리는 약간 거만하긴 했지만 교양있고 매력적이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리넷 도일의 얼굴을 보았다. 리넷은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리넷 도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에르큘 포와로 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당신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리넷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독선적인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포와로 씨, 저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는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부인." 리넷이 먼저 호텔로 들어가자 포와로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텅 빈 카드놀이 방으로 들어간 후, 포와로에게 문을 닫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포와로는 그녀와 마주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담담하고 숨김없이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망설임이나 거리낌이 없이 유창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당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 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답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서 용기를 냈습니다." "고마운 말씀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 휴가중이라 일을 맡지 않습니다, 부인." "그러나 그건 조절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은 무례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그녀의 확신이 담긴 표현이었다. 리넷 도일은 계속 말했다. "저는 지금 정신적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포와로 씨,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러나 제 남편은 경찰일지라도 이 일은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포와로는 정중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좀 말씀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랍니다." 리넷 도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명쾌하고 정확히 일을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말하는 도중 잠깐씩, 사실을 간결하고 정확히 전달하려고 말을 끊었다. "남편과 제가 만나기 전에, 그 분은 제 친구인 재클린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를 만난 후 그녀와 파혼했어요. 그 두 사람은 잘 맞지 않는 쌍이었지요. 그래서 제 친구 재클린은 몹시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건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재클린은 협박하는 투로 말했지만 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녀는 협박하긴 했지만 어떤 행동으로 나타내진 않았어요. 그 대신 재클린은 다른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답니다. 그녀는 우리가 가는 곳을 어디나 뒤쫓아 다니기 시작했어요." 포와로가 눈을 치켜 떠서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건 좀 특이한 복수 방법인데요." "네, 정말 그래요. 그 방법은 대단한 게 아닌 듯 하지만 사람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방법이랍니다." 리넷 도일은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운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포와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럴 겁니다. 당신은 지금 신혼 여행 중이시죠?" "네, 저희는 지금 신혼 여행을 하는 중이죠. 재클린이 모습을 나타낸 곳은 베니스에서가 처음입니다. 그곳의 다니엘리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어요.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브린디시에서 만났지요. 그때 우리는 재클린이 아마도 팔레스타인으로 가나 보다하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배에서 그녀와 헤어졌는데 우리가 메나 하우스에 도착해 보니 그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우리는 배를 타고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입니다. 저는 그 배에서 재클린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아 안심했어요. 이제 포기했나 보다고요.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도착해 보니 그녀가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포와로는 말없이 리넷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손가락이 파랗게 보일 정도로 탁자를 힘껏 붙잡고 있었다. "부인, 당신은 그녀가 뒤쫓는 게 두렵습니까?" "네, 두려워요. 물론 그건 큰일은 아니지만‥‥ 저는 재클린이 자존심을 가지고 행동해 주길 바래요. 품위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는데‥‥" 포와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부인, 사람에겐 때때로 품위나 자존심이 사라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리넷은 조급히 말했다. "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재클린이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무슨 소득이 있겠어요?" "그건 소득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는게 아닙니다." 포와로의 말 속에서 리넷은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얼굴이 상기된 채 빠른 어조로 말했다. "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런데 얘기가 좀 빗나갔군요. 제가 말하려는 건, 그녀가 행동하게 된 동기가 아니라 그녀의 행동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포와로가 반문했다. "부인은 그럼 재클린을 어떻게 막을 생각이시죠?" "글세‥‥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나 저는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수 없어요. 그녀의 행동에 법적인 제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리넷이 흥분해서 말하자 포와로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재클린이 당신을 대놓고 공공연히 협박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욕을 주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신은 법적인 제재도 취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녀가 여행을 하는데 당신과 아주 우연히 행선지가 같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럼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여행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재클린이 부인의 사생활을 침범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태껏 그녀와 만난 것은 언제나 공공연한 것이었습니다." "포와로 씨, 그럼 당신은 전혀 손을 쓸 수 없습니까?" 리넷이 의심스러운 투로 말하자 포와로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내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드벨포 양도 여행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건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예요. 어떻게 이 괴로움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다간 전 미쳐 버리고 말 거예요." 포와로는 냉정히 말했다. "부인을 동정합니다. 부인은 세상에서 괴로움을 단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걸 생각하면 더 동정심이 생기는군요." 리넷은 그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녜요,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포와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야 방법은 있죠. 당신들이 자꾸 옮겨 다니는 겁니다." "그럼 그녀가 따라올 텐데요." "물론 재클린도 따라가겠죠." "그건 바보같이 어리석은 짓이에요." "네, 어리석은 짓입니다." "포와로 씨, 제가 왜 도망을 쳐야 하죠? 마치 제가‥‥ 마치‥‥" 리넷은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마치‥‥ 처럼. 바로 당신의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리넷은 고개를 들고 포와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포와로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정중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왜 그렇게 재클린에 대해서 신경을 쓰시는 거죠?" "왜냐고요? 그녀는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난 끔찍해요. 당신에게도 이유는 말씀드렸잖아요." 포와로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전부 말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포와로는 의자 깊숙히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부인,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한두 달 전쯤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 옆 탁자에 젊은 연인들이 앉아 있었지요.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들로 무척 행복해 뵈더군요. 그들은 장래를 설계하는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일부러 엿들은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여자의 얼굴은 똑똑히 보였습니다. 그 얼굴은 사랑에 빠진 진지한 얼굴이었죠.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는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였지요. 내 짐작이지만 그들은 신혼 여행을 어디로 갈까 의논하는 거 같더군요. 그들은 이집트로 여행을 하려는 거 같았습니다. 그 남자는 정말 이집트로 신혼 여행을 왔죠. 비록 다른 여자와 오긴 했지만‥‥" 리넷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죠? 이미 모두 말한 거잖아요." "물론 그 이야기는 한 거죠." "그런데 또 뭐가 있죠?" 포와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말했다. "그 레스토랑에 있던 여자는 한 친구의 이름을 말하며, 그녀는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이 바로 당신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리넷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요, 그녀와 나는 친구지간이에요." "그녀는 부인을 굳게 믿었죠?" "네, 그렇습니다." 리넷은 망설이다가 초조한 듯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포와로가 잠자코 있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래요, 모든 일이 유감스럽게 일어나고 말았어요. 그런데 기왕지사 이렇게 된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에요, 포와로 씨." "부인, 당신 말대로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부인은 영국 국교신자시죠?" 리넷은 당황해 하며 대답했다. "그럼, 부인은 성경을 읽으셨겠군요. 다윗 왕과 수 많은 양떼와 소를 거느린 부자의 이야기를요. 재산이라곤 양 한 마리 뿐인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는 물론 아실 겁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의 양까지 빼앗아 버린 것도 아시죠? 그 일도 이미 일어난 상황입니다." 리넷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당신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은 속물 취급을 하시는 거죠.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처럼 나이먹은 사람들의 의식은 모두가 그래요.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대로 사물을 판단하죠. 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재클린이 몸과 마음을 다해 시몬 도일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난 그 점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시몬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회의를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 회의를 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고 깨달은 겁니다. 당신도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왜 세 사람의 운명은 마구 뒤섞인 일을 해야만 했을까. 그들이 그런 생활에서 결혼했다면 두 사람은 마구 불행했을 겁니다. 시몬이 저와 만났을 때 그들이 결혼한 몸이었다면 나도 그들에게 결혼 생활에 충실하라고 말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다면 다른 사람 역시 불행해지는 걸 저는 알고 있어요. 약혼은 결혼과는 달리 완전한 결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되었다면 더 늦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도 재클린이 지금 무척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요. 또 미안한 생각도 있고요. 그러나 이미 일은 저질러진 걸요. 이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어요." 포와로가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자 리넷은 그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부인의 말은 논리정연하고 분별력있는 말이긴 하지만 설명이 부족한 곳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그건 다름아닌 부인 자신의 태도입니다. 재클린이 집요하게 당신들을 추적하는 것을 부인은 두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재클린의 추적은 부인을 괴롭힐 수도 있고, 또 동정심을 갖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절친한 친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부인은 아주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부인은 재클린의 그런 태도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부인이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거죠." 리넷은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포와로 씨,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당신은 이야기를 이상하게 하는군요." "나는 그저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인이 아무리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부인은 친한 친구의 약혼자를 가로챘으니까요. 당신은 첫눈에 시몬에게 반했을 겁니다. 그 순간 부인은 잠시 망설이긴 했겠죠. 이 감정을 억제해야 하느냐, 아니면 그냥 그대로 표현을 해야 하느냐를, 처음에는 시몬 도일이 아니라 당신이 시작했겠죠. 당신은 명석하고 또 아름답습니다. 부인은 매력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친구는 오직 약혼자 한 명에게 인생을 걸고 있었지요. 부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일 뿐, 당신은 계속 감정을 표현했지요. 부인은 성경에 나오는 욕심장이 부자처럼 가난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단 한 마리의 소중한, 목숨과도 같은 양을 빼앗은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넷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녀는 냉정하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이야기가 영 빗나갔군요." "빗나간 게 아닙니다. 나는 단지 재클린의 등장에 부인이 과민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이 비록 예의에 어긋나고 우아한 여성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긴 하지만 부인은 마음 속으로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만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포와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부인은 왜 좀더 솔직하지 않으시죠?" "저는 거짓없이 말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포와로는 정중한 태도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행복한 생활을 해 왔으며 사람들에게도 관대하고 친절했습니다." 리넷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그녀의 얼굴에서는 이제 분노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괴로워하는 겁니다. 당신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어서죠. 당신은 또 그 사실도 인정하기가 싫은 겁니다. 무례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리넷은 여유있게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일지라도 나는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요. 설령 그렇다 해도 이제 어떻게 하겠어요. 과거는 돌이켜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누구나 현재 지금 처한 상태에서 처리해야 해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인, 정말 명석하십니다. 네, 인간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현재를 받아들여야만 하지요. 그러나 때로는 과거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리넷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포와로 씨, 그럼 제가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부인,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것 밖에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리넷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포와로 씨, 제발 당신이 재클린을 좀 설득해 주세요. 이성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해 주세요." "네, 해 보겠습니다. 부인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녀를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보기로는 재클린은 하나에만 집착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 생각을 바꾸기란 전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난 그녀가 따라오지 못하게 할 방법이 꼭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영국으로 돌아가서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면 되겠죠." "아닙니다. 우리가 집에 박혀 있는다면 아마도 재클린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겠죠. 그러면 정원에 나갈 때마다 싫으나 좋으나 그녀를 만나야 하죠." "그건 그렇겠군요." 리넷은 천천히 말했다. "더군다나 시몬은 재클린을 피해 도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시몬은 이 문제에 대해 뭐라고 말하죠?" "시몬은 몹시 분노하고 있어요. 그저 화를 내는 거죠." 포와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건성으로 말했다. "네, 알았습니다. 재클린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리넷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클린은 평범한 애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요." "그럼, 재클린이 무슨 협박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협박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십시오." "재클린은 우리를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녀는 이따금 라틴계 사람들처럼 불끈하기도 한답니다." 포와로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리넷은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포와로 씨,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아닙니다, 부인. 나는 휴가중이므로 일은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 볼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겠습니다. 부인이 어려움과 두려움 때문에 걱정하고 있으니 내가 그런 상황을 없애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군요." 리넷 도일은 다시 간절히 말했다. "그래도 저를 위해 일해주실 수 없습니까?" "그건 할 수 없습니다, 부인." 4 에르큘 포와로는 나일 강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있는 재클린 드벨포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호텔에서 잠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정원에서 밤을 새웠다는 것을 알았다. 바위 위에 앉아있는 재클린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포와로가 먼저 말을 건넸다. "실례지만 재클린 양이죠? 허락하신다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요." 재클린은 고개를 돌리고 포와로를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잠깐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나지막히 대답했다. "네, 좋아요. 당신은 에르큘 포와로 씨죠? 제가 알아맞춰 볼까요, 당신은 도일 부인의 일 때문에 저에게 오셨죠? 그렇지 않은가요? 물론 도일 부인은 엄청난 보수를 약속했을 거고요." 포와로는 그녀 옆 벤치에 앉았다. "아닙니다. 재클린 양의 짐작은 극히 일부만 맞았습니다. 방금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나 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알기 쉽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도일 부인을 위해 일하지 않는 거죠." "아니!" 재클린은 놀라며 뚫어질 듯이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급하게 질문했다. "그럼, 왜 여기 오셨죠?" 포와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하게 말했다. "재클린 양, 혹시 나를 본 기억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닙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거 같은데요." "나는 당신이 구면입니다. 언젠가 셰마탕트 레스토랑에서 당신과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시몬 도일과 함께 앉아 있었죠."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이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죠." "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재클린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건조하게 들렸다. "재클린 양, 나는 당신의 친구로 우정 어린 충고를 하겠습니다. 이제 시체는 매장하는 게 어떻겟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내 말은 과거는 모두 잊으라는 겁니다. 과거는 훌훌 털어 버리고 이제 미래를 내다 보십시오. 지난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으로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까요." 포와로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지금 리넷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딩신의 이런 처사는 앞으로 더 큰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재클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저는 결코 고통받는 게 아닙니다. 즐기고 있을 때도 있답니다." "그러면 그건 더 나쁜 행동입니다." 재클린은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당신은 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재클린 양, 당신은 젊습니다. 머리도 좋고 앞으로 얼마든지 좋은 날이 있을 겁니다." "당신은 모릅니다, 아니 세상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시몬은 내 인생의 전부였어요."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죠. 젊은 시절 한 때는 모두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건 오로지 젊은 시절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재클린은 여전히 고개를 세게 저었다. "포와로 씨, 당신은 몰라요. 아니, 리넷에게서 대강의 얘기는 들으셨겠죠. 당신은 그날 밤 우리를 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저와 시몬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시몬을 사랑했다는 건 잘 알고 있지요." 재클린은 예리한 여자였기 때문에 재빨리 포와로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했습니다. 저는 리넷도 친구로 좋아했습니다. 그녀를 굳게 믿어 왔어요. 그녀와 저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리넷은 마음만 먹으면 그게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 있는 입장이지요. 그녀는 시몬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강렬히 원했어요. 그래서 그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죠." "그럼 시몬은 자신이 스스로 그녀에게 팔려갔습니까?" 재클린은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만일 그렇게 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만일 시몬이 리넷의 엄청난 재산에 눈이 어두워 결혼했다면 그녀는 싫증을 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돈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에요. 거기엔 돈 이외의 문제가 있어요. 그녀는 사람을 황홀하게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여자입니다. 돈은 옆에서 약간 도움을 주었겠죠. 당신도 느꼈겠지만 리넷은 분위기를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녀는 한 왕국의 여왕이고 미인 공주입니다. 그녀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건 마치 무대장치와도 같은 거예요. 그녀는 온 세상을 자신의 발 밑에 굴복시켰어요.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층에 드는 데다가, 많은 귀족들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그녀가 별 볼일 없는 시몬 도일에게 고개를 숙였어요‥‥ 이러한 사실이 시몬 도일을 흥분시켰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녀는 갑작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저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세요. 굉장히 밝지요? 지금은 매우 잘 보이지요. 하지만, 태양이 떠 오르면 저 달은 사라지게 되지요. 바로 이와 똑같은 원리지요. 제가 바로 그 달이었답니다‥‥ 태양이 솟아 오르자 시몬은 더 이상 저를 볼 수 없게 된 거죠‥‥ 그는 눈이 부신 그 태양 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 태양은 바로 리넷이었지요."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매력이랍니다. 점점 그는 리넷을 생각하게 되었지요. 게다가, 그녀의 태도가 그를 더욱 부추겼어요. 그녀 특유의 명령적인 태도가 말이에요.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과 똑같은 확신을 가지도록 만드는 재주를 있지요. 어떤 면에서 시몬은 우유부단한 성격이에요. 하지만, 그에게는 무척 단순한 면도 있지요. 만일, 리넷이 그를 가로채서는 황금 전차에 태우지만 않았다면 그는 제 곁을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만일, 그녀가 그럴 마음만 먹지 않았다면 그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따위의 일은 결코 생기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저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영원히 저를 사랑할 거예요." "과연 지금도 그럴까요?" 그 순간,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하다가는 갑자기 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포와로를 쳐다보았는데,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뒤 눈길을 돌리고는 갑자기 머리를 떨구고 억제된 듯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저도 알아요. 그는 이제 저를 증오할 거예요. 그럼요, 미워하고 말고요‥‥ 그는 조심하고 있을 거예요." 재빠른 손동작으로 그녀는 작은 비단 지갑을 집어들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무엇인가를 꺼내어서 손을 펴 보였다. 그 위에는 진주 장식의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권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보였다. "너무 작아서 진짜처럼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이건 진짜 총이에요! 여기서 발사되는 총알 하나가 어떤 남자나, 아니면 여자의 목숨을 빼앗아 갈지도 몰라요! 더군다나 저는 총을 아주 잘 쏘거든요." 그녀는 회상에 젖어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사우드 캐롤리나에 간적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결투를 신뢰하는 옛날 사고 방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지요. 특히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는 반드시 결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셨어요. 저의 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여러 번 결투를 하신 적이 있었지요. 아버지는 명사수였어요. 언젠가는 잘못해서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어요. 여자 때문에 벌어진 결투에서요. 자 보세요, 포와로 씨. 제 피 속에는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어요. 그 두 사람 중에 누군가를 죽일 생각에서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누구를 죽이느냐 하는 것이랍니다. 분명히 남은 한 사람은 괴로워 하겠지요. 리넷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녀는 물리적인 위협을 두려워 할 여자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러한 공격에 과감히 대항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지요. 기다리자고요! 그러는 편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컨대 죽이는 것은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기다려 보는 것도, 그리고 그걸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니까요. 그러자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그들을 따라 다니자! 그들이 서로 행복한 얼굴로 어느 곳에 도착할 때마다 그들은 저를 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건 분명히 효과가 있었어요! 리넷은 몹시 괴로워했지요. 아마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괴롭힐 수는 없을 거예요! 결국 그 방법은 그녀에게 적중한 셈이고 저는 쾌감을 느꼈어요. 더구나 그녀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을 테니까요. 저는 언제나 명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지요. 그들이 제 행동 어디에서도 꼬투리를 잡아낼 수 없도록 말이에요! 지금쯤은 그들의 심장 전체에 독이 퍼져 나가고 있을 거예요.- 전체에!" 그녀는 말을 마치자 맑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포와로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쉿, 조용히 해요. 조용히!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재클린은 빤히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네? 할 말이라뇨?" "제발 당신이 하고있는 일을 중단하시오." "아, 그 친애하는 리넷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악마를 부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재클린은 놀랐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재클린을 계속 쳐다보며 포와로가 말했다. "그 이유는, 만일 당신이 계속 이 일을 하면 악마가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서입니다. 네, 맞습니다. 분명히 악마가 올 거예요. 악마가 당신의 가슴 속에 일단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된 후에는 아무리 애써도 쫓아낼 수 없을 겁니다. 네, 쫓아낼 수 없어요." 재클린은 뚫어질 듯이 포와로를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어딘지 불안한 감정을 자제하고 있었다. "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당신도 저를 막지는 못합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건 맞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네, 당신은 비록 내가 리넷을 살해한다고 해도 말릴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이 댓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면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겠죠." 포와로의 말에 재클린이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저는 죽음 따위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희망으로 살아나가겠어요? 당신은 자기에게 큰 해를 끼쳤다고 해도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군요. 하지만 인간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겼어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포와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재클린은 또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하는 일을 막지 마세요. 저들을 뒤쫓는 동안에는 절대로 권총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두렵습니다. 네, 저도 두려워요. 저는 그녀를 죽이고 싶은 걸요. 리넷의 가슴에는 칼을 꽂고, 내 작은 권총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겨누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니!" 그녀가 갑자기 소리지르는 바람에 포와로도 깜짝 놀랐다. "왜 그러죠, 재클린 양?" 그녀는 날카롭게 어둠 속을 살펴보았다. "누군지 저 어둠 속에 있었어요. 지금은 가 버렸지만요." 에르큘 포와로가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포와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클린 양, 우리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어쨌든 제가 할 말은 모두 했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군요. 지금 함께 가실까요?" 재클린은 그를 뒤따라 일어나며 하소연했다. "포와로 씨, 저를 좀 이해해 주세요. 저는 절대로 그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답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에게 천천히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감정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그렇게 할 수 있고 말고요. 리넷도 자기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저지른 후에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지요." 재클린은 그의 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요?" 재클린은 얼마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녀는 반항하는 태도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포와로 씨,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군요." 포와로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호텔로 향했다. 5 이튿날 아침, 에르큘 포와로가 호텔을 나와 마을로 가려고 할 때, 시몬 도일이 그를 불러 세웠다. "포와로 씨,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마을에 가십니까? 그럼 좀 함께 걸어도 괜찮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함께 걸어 봅시다." 두 사람은 호텔 현관에서 빠져나와 시원한 정원의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시몬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입에 문 파이프를 빼고는 말했다. "포와로 씨, 어젯밤에 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셨죠?" "네, 그렇습니다." 시몬 도일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으로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손 쓸 방법이 없다고 아내에게 말했다죠?" "그렇습니다. 법적으로는 전혀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시몬 도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건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리넷은 그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경찰에 의뢰하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믿어온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혀 방법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시몬 도일이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말했다. "아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요. 아내는 잘못한 게 없어요. 괴롭히려면 나를 괴롭히지 왜 죄없는 아내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어요. 리넷을 괴롭히다니‥‥ 아내는 잘못이 없어요." 포와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와로 씨, 혹시 재키와 이야기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네, 이야기를 나누어 봤습니다." "재키가 당신 말을 따르겠다고 했나요?" "아뇨, 그러지 않을 겁니다." 시몬은 대뜸 신경질을 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품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자예요. 재키는 자존심도 없는 사람인가 봐요." 포와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재키는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시몬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미친 짓이에요. 아무리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품위없는 행동은 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비난받아도 마땅하지만요. 차라리 그녀가 나에게 대해 증오심을 품고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면 마음이 편하겠어요. 이런 식으로 나를 따라 다니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워요.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놀림감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런 행동이 무슨 이득을 주겠어요?" "이건 복수라고 봅니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멍청한 행동이죠. 차라리 영화에서처럼 나에게 총을 쏜다던가 하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 당신은 재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재키는 성격이 급합니다. 그녀는 흥분하면 물불을 못 가리죠. 그런데 이렇게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것은‥‥" 시몬 도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좀 교묘한 방법이죠. 더 똑똑한 방법이란 말입니다." 시몬 도일은 말없이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리넷은 재키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어요." "그럼, 당신은 어떻죠?" 갑작스런 질문에 시몬은 말없이 포와로를 응시했다. "나요? 나는 그 악마같은 여자의 목을 꽉 눌러 죽이고 싶습니다." "그럼 당신은 옛날의 감정은 이제 모두 사라진 거군요?" "포와로 씨,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비유하자면 해가 솟은 후의 달의 존재 같다고나 할까요? 더 좋은 비유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내 앞에 리넷이 나타난 후로 내 가슴에 재키의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포와로는 혼자 불어로 중얼거렸다. "그거 재미있는 일치인데." "네, 뭐라고요?" "당신들의 일치된 표현이 참 흥미롭기까지 하군요." 시몬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재키는 내가 리넷의 재산 때문에 리넷과 결혼했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돈 때문에 결혼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자기를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재키는 이해하지 못하지요." 포와로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에게 보내며 물었다. "재키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나요?" "글쎄,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나를 지나칠 정도로 나를 사랑했어요." 포와로는 다시 불어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여자와 자기를 죽도록 사랑하게 놓아두는 남자‥‥" "지금 뭐라고 말했죠? 남자는 자기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여자가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도 아실 테죠?" 시몬은 이야기하면서 점점 더 흥분되어 갔다. "남자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소유당한 것 같은 기분은 참지 못 합니다. 그건 소유욕 때문이죠. '이 남자는 내 것이다. 이 남자는 나에게 속해 있어.'- 세상의 어느 남자도 그런 기분은 참을 수 없을 거예요. 소유 당한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와지고 싶어하죠. 대개의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여자를 소유하기를 원하지요." 시몬은 말을 끝내고는 약간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포와로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이 재클린에게 그렇게 느꼈어요?" 시몬은 빤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사실 그렇게 느꼈지요, 그녀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이건 말로 표현할 성질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나는 참기가 어려웠어요. 그때 내 앞에 리넷이 나타났습니다. 첫눈에 나는 그녀에게 반했습니다. 난 평생 리넷같이 사랑스런 여자는 처음 만났답니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구혼을 했는데도 그녀는 나 같은 빈털터리를 택했어요."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포와로는 사려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재키는 나처럼 이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시몬이 분노한 투로 말하자 포와로는 약간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글쎄요, 재키는 당신처럼 남자가 아니라서겠죠."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내 문제지 당신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한다는 건 정말 비극입니다. 이 말만은 진실이에요. 더군다나 지금처럼 재키가 행동하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녀와 헤어진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포와로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재키가 어떻게 이 일을 몰고 나갈지 알고 있습니까? 그래, 당신은 그녀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시몬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어요. 네,전혀 알 수 없답니다. 포와로 씨, 딩신은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시몬, 당신은 혹시 재클린이 작은 권총을 항상 휴대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시몬은 놀라며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재키가 권총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총을 쏘려고 했다면 벌써 쏘았을 겁니다. 이제는 그런 시기가 지났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단지 우리에게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괴롭히려는 것 뿐입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요." 시몬은 다시 강조하듯 말했다. "염려스러운 건 리넷입니다." 포와로도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재키가 권총을 쏜다고 해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넷은 재키가 계속 쫓아다니는 것을 못견뎌하고 있답니다. 내 계획이 있는데 말씀드릴까요? 들어 보시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충고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가 이곳에서 열흘 정도 머무를 거라고 일부러 소문을 냈어요. 내일 증기선 카나크가 쉘랄에서 왜디핼파로 떠날 예정인데 나는 가명으로 예약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 필래로 가려고 합니다. 짐은 리넷의 하녀가 가져올 것이고 우리는 쉘랄에서 카나크 호를 탈 계획이죠. 재키가 우리 두 사람이 호텔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우리는 이미 멀리 가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는 아마 배 안에 있겠죠. 재키는 아마 우리가 카이로로 도망쳤다고 짐작할 테죠. 우리는 짐꾼을 고용하여 그렇게 말하도록 꾸미려고 합니다. 여행사에 연락해도 우리 이름은 없을테니 헛수고가 되겠죠.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시몬은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그것 참 좋은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재키가 의심없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곳엔 오지 않을 겁니다. 아마 카르툼까지는 갈 수 있겠죠. 그 후엔 케냐로 향할지 모릅니다. 재키가 그곳까지 쫓아올 리는 없겠죠?" "네, 그럴 겁니다. 경제적으로 언젠가는 손을 들어 버리고 말 겁니다. 그녀는 돈이 많지 않은 거 같던데‥‥" 시몬은 감탄하는 시선으로 포와로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당신은 명석한 분이시군요. 나도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실 그녀는 어려운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키는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을까요?" 시몬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수입이 많지 않답니다. 글쎄 1년에 한 2백 달러나 될까요? 내 생각엔 아마 그래요. 그녀는 아마 주식을 처분해서 비용으로 쓸 겁니다." "그럼, 그녀는 머지않아 빈털터리가 되겠군요?" "네‥‥" 시몬은 대답하기가 거북한지 망설였다. 그러한 생각이 그를 편치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포와로는 그러한 시몬의 태도를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포와로 씨, 우리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건 일종의 도피 행위로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시몬은 얼굴이 금방 상기되어 물었다. "우리가 도망간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리넷은‥‥" 포와로는 말없이 시몬 도일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세, 그게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키 양도 명석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시몬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그녀와 부딪쳐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재키의 태도는 너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키는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포와로는 어리둥절해 하는 시몬에게 다시 말했다. "그녀는 자니치게 이성적인 것 같습니다. 나도 카나크 호에 승선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내 여행 계획이거든요." 시몬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포와로 씨, 혹시 우리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닙니까? 내 말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포와로는 곧바로 그의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아닙니다. 그건 벌써 내가 런던을 떠나기 전부터 계획한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계획을 세워서 행동하지요." "그럼, 당신은 여행도 마음대로 여기 저기를 다니는 게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합니까? 여행은 발길 닿는대로 하는 게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인생을 효과있게 성공적으로 살려면 미리 세밀히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시몬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살인자들도 치밀히 계획을 세워서 행동하겠죠?" "네, 맞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범죄는 우발적인 거이었는데 그 사건은 아주 교묘하고 해결하기가 힘들었지요." 시몬은 마치 소년처럼 포와로를 졸랐다. "카나크 호를 타고 당신이 해결한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전문적인 것이라 뭣하고‥‥" "그렇겠죠, 하지만 배 위에서 그런 얘기를 듣는 건 스릴 만점이겠군요. 앨러튼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참, 그 부인은 포와로 씨께 반대심문을 하고 싶은 눈치더군요. 그 부인도 역시 카나크 호를 타실 겁니다." "앨러튼 부인요? 아, 그 머리가 반백인 매력적인 노부인 말이군요. 아들이 효자이죠. 그 부인도 당신 계획을 알고 있나요?" 시몬은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아뇨, 전혀 모릅니다. 제 계획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고 있죠.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제 신조거든요." "그것 참, 감탄할 만한 신조이군요. 나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은 먹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아, 당신들과 동행인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네, 페닝턴 씨요?" "그 사람도 함께 여행하고 있습니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죠? 페닝턴 씨는 리넷의 미국인 재산관리인이랍니다. 우연히 카이로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부인의 나이는 지금 몇 살쯤 되었죠?" 시몬은 기분이 다소 좋아진 듯 표정이 밝아졌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스물 한 살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누군가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닝턴 씨는 꽤나 놀랬나 봅니다. 우리의 결혼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카마니크 호로 뉴욕을 떠났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결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카마니크 호라고요?" 포와로는 놀란 듯이 반문했다. "카이로의 세퍼트에서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 페닝턴 씨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건 우연 중의 우연이군요." "페닝턴 씨도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군요. 그래서 동행한 겁니다. 박절하게 뿌리칠 수도 없어서요. 뭐 어떤 면으로 보면 더 편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는 다시 나지막히 말했다. "포와로 씨도 느끼셨겠지만 리넷이 너무 예민해져서요. 재키가 언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형편이고요. 우리 두 사람만 있으면 화제가 자꾸 재키 쪽으로 돌아간답니다. 그래서 페닝턴의 동행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셈이죠. 그가 옆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화제가 나오니까요." "리넷은 페닝턴 씨를 많이 의지하나 보군요?" 시몬은 싸움이라도 할 사람처럼 거칠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리넷에게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아요." 포와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 그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이 나려면 멀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포와로 씨, 당신은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포와로는 진지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친구는 카드 게임 외에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없군. 아직 미숙한 영국인!' 리넷 도일과 재클린 드벨포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시몬 도일은 남자답지 않게 조급하게 굴고 귀찮아만 했다. 포와로가 불쑥 그에게 물었다. "내가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신혼 여행을 이집트로 오자고 한 건 누굽니까?" "사실은 리넷이 하도 우겨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길 원했는데‥‥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죠." "아, 그랬군요!" 포와로는 다시 한 번 리넷 도일은 자기가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만다는 것을 확인했다. 포와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그 일에 대해서 각각 세 사람의 의견을 다 들었군. 리넷 도일과 재클린 드벨포,그리고 시몬 도일의 이야기 중에서 누구의 의견이 가장 진실되다고 볼 수 있을까?' 6 리넷 도일과 시몬은 이튿날 오전 8시쯤 필래로 출발했다. 재클린은 호텔의 발코니에서 아름다운 배를 타고 가는 시몬 부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새침한 리넷의 하녀가 짐을 가득 실은 차를 타고 호텔 정문을 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녀를 태운 차는 호텔을 빠져 쉘랄을 향해 달려갔다. 에르큘 포와로는 점심 식사 전까지의 시간을 엘러팬턴 섬에서 보낼 작정이었다. 그 섬은 호텔 건너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포와로는 선착장으로 내려가 호텔 보트에 올라타는 두 남자와 함께 보트에 동승했다. 두 사람은 초면인 듯 보였는데 그들 중 젊은이는 어제 기차로 온 사람이었다. 그는 큰 키에 머리가 검은 젊은이로 마른 얼굴과 턱이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지저분한 바지에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목이 높이 올라오는 점퍼를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한 중년의 남자로, 그는 포와로에게 대뜸 엉터리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등을 돌려 누비아 인이 손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발끝으로 보트를 민첩하게 조종하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보트는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보트는 거침없이 거대한 바위 사이를 빠져 나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후, 보트는 엘러팬틴에 도착했다. 포와로는 보트에서 내려 수다스런 중년 나자와 박물관으로 발을 옮겼다. 도중에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포와로에게 건네 주었다. 그 명함에는 <고고학자 시뇨르 기드 리체티>라고 씌어 있었다. 포와로도 그에게 명함을 주고 나서 두 사람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 수다스런 이탈리아 사람은 포와로에게 전문적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함께 보트를 타고 온 젊은이가 하품을 하고 박물관 안에서 왔다갔다 하더니 곧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포와로와 이탈리아 인은 한동안 박물관을 살펴보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이탈리아 인은 열심히 폐허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포와로는 강가의 바위 위에서 낯익은 양산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 양산의 부인은 짐작대로 앨러튼 부인이었다. 그녀 옆에는 스케치북, 무릎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포와로가 모자를 벗어들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앨러튼 부인도 웃으며 포와로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포와로 씨? 어떻게 해야 이 끈질긴 애들을 쫓아 버릴 수 있죠?" 검은 피부의 아이들이 앨러튼 부인 옆에서 손을 내밀고 돈을 달라고 합창했다. 부인은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 귀찮아 죽겠어요! 쟤들이 두 시간 가량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다가 내가 '예잇, 이놈들!'하고 소리치면 흩어졌다가 이내 또 가까이 다가온답니다. 나는 애들을 좋아하는데 이 애들의 눈빛은 왠지 역겹게 느껴지는 군요." 앨러튼 부인을 위해서 포와로가 용감히 아이들을 쫓으려고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느새 흩어졌다가 곧 돌아와서 두 사람을 빙 둘러섰다. 포와로는 바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이런 귀찮은 게 없다면 훨씬 더 즐거운 이집트 여행이 될 거예요. 어디를 가도 귀찮게 구니‥‥ 동냥을 하려고 쫓아다니거나 당나귀가지 사라고 조르는 판국이거든요. 글쎄 오리 사냥을 가자거나 원주민 부락에 가자고 매달리기도 하더군요." "네, 정말 귀찮은 일이죠."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드님이 보이지 않는군요." "여길 떠나기 전에 편지를 부친다고요. 우리는 제2폭포로 간답니다." "네, 그랬군요. 실은 저도 그곳에 갈 계획입니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당신과 동행하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마조르카에서 리치 부인과 함께 있었죠. 그 부인은 수영을 하다가 루비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그때 당신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반지를 찾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실은 저는 다이빙에는 자신이 없거든요." 두 사람은 큰소리로 웃었다. 앨러튼 부인이 유쾌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창문을 바라다보니 당신이 시몬 도일과 걷고 있더군요. 포와로 씨, 시몬 도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아, 그랬군요!" "그럼요,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죠. 그와 리넷 리지웨이의 결혼은 큰 충격을 주었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리넷이 윈들 쉠 경과 결혼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금시초문인 남자와 결혼을 해 버렸잖아요." "부인, 리넷을 잘 압니까?" "잘 몰라요. 친척인 조안나 사우드우드가 리넷과 절친하지요." "그 이름은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 이름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더군요." 앨러튼 부인은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말해 버렸다. "그녀는 자기를 선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답니다." "아, 부인께서는 조안나를 좋아하지 않나 보군요?" 앨러튼 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이곳엔 너무 젊은 사람이 없어요. 갈색 머리의 예쁜 아가씨와 터번을 쓰는 그녀의 어머니가 좀 젊은 축이지요. 참 당신은 그 모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더군요. 나도 그 아가씨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 이유가 뭐죠, 부인?" "웬지 그 아가씨가 애처롭게 보여서요. 젊었을 때는 괴로움도 많지만 그 아가씨는 무척 고민을 하는 것 같아서요." "네, 잘 보셨습니다. 그 아가씨는 그리 행복하지 못하죠. 가엾게도 그렇질 못하답니다." "내 아들과 나는 그녀를 새침데기라고 하죠. 한 두 번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했는데 그 아가씨가 냉담하게 나왔어요. 그녀도 나일 강 여행을 할 테니까 차차 친해지겠지만‥‥ 포와로 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여러 사람을 보노라면 각각 흥미가 생기죠. 아무리 사람이 많이 있어도 모두 제각기 개성이 있지요. 아들은 그 검은 머리의 처녀가 바로 시몬 도일과 약혼했던 재클린 드벨포라고 하더군요. 시몬 부부는 아주 어색하고 쑥스럽겠죠. 그녀와 부딪쳤으니‥‥" 포와로도 대꾸했다. "네, 어색한 게 당연하죠." 앨러튼 부인은 곁눈질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좀 어리석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웬지 무섭고 섬뜩해지더군요. 내가 너무 관민한 걸까요?" 포와로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뇨, 잘 보신 겁니다. 격앙된 감정은 사람을 두렵게도 하니까요." "포와로 씨, 당신도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끼시나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서 범죄의 가능성을 찾으며 즐기고 있나요?" "부인,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앨러튼 부인은 크게 놀란 듯 반문해 왔다. "포와로 씨, 정말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네, 특별한 동기만 주어진다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야 모두 가능성이 다르겠죠?" "네, 그렇습니다." 앨러튼 부인은 잠시동안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렇겠지요?" "뭐랄까, 모성애의 발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어머니들은 자식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상상할 수 없게 잔인해지지요." 앨러튼 부인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네, 그건 당신 말이 맞아요. 제 생각도 그렇답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만일 범죄를 저지른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동기가 각각 무엇일까요? 그건 참 흥미롭더군요. 예를 들어 시몬 도일은 어떤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를까요?" 포와로는 의미있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는 지극히 단순한 범죄를 저지를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총을 대고 쏘려고 할 겁니다. 교묘하지 않고 지극히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럼 그건 쉽게 들키겠군요." "네, 시몬은 교묘하게 범죄를 저지를 위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리넷은 어떨까요?" "그녀라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여왕같이 하겠죠. 그 여자의 목을 베어 버리라고 명령할 겁니다." "네, 그녀라면 그러고도 남겠죠. 리넷은 독재자처럼 굴 겁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또 항상 위기의 여자 같은 재키는 살인을 할 수 있을까요?" 포와로는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 생각 같아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신하는 건 아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 작은 아가씨는 좀 까다로와서요." "페닝턴 씨는 살인 따위는 하지 않겠죠?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보이거든요. 즉흥적인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는 전혀 흥분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 반면에 자신을 보호하거나 방어하는 본능이 유난히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입니다. 그리고 터번을 두른 그 오터번 부인은 어떻죠?" 앨러튼 부인의 목소리에는 짙은 의혹이 깔려 있었다. "살인의 동기에는 예상 밖의 극히 사소한 경우도 있지요." "포와로 씨. 가장 흔한 살인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거야 물론 돈이죠. 돈이야말로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니까요. 그 다음은 복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사랑과 공포심, 증오심, 선행심‥‥" "포와로 씨!" "부인,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그 살해 동기는 우습게도 C를 단지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해 봅시다. 정치저인 살인의 동기는 모두 이렇죠. 그 판에서는 사소한 이유에서 사람을 제거하죠. 그들은 사람의 생사가 오직 하느님의 뜻임을 잊고 있지요." 포와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의 말씀을 들으니 기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할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만 선택 된답니다." "부인, 그 생각은 위험 천만이군요." 앨러튼 부인은 한결 가볍게 말을 했다. "포와로 씨, 이런 식으로 가정해 보니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앨러튼 부인은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선착장에 당도했을 때, 허름한 차림의 젊은이가 막 보트에 앉으려고 하였다. 다른 중년의 이탈리아인은 벌써 앉아 있었다. 보트의 줄을 풀고 출발하자 포와로는 젊은이에게 점잖게 말을 하였다. "이집트에는 구경거리가 아주 많지요?" 젊은이는 독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담배를 빼고는 말했는데, 그 말투가 의외로 세련된 것이었다. "저는 그런 것만 보면 분통이 터집니다." 앨러튼 부인은 안경을 걸치고 호기심이 가득 차 살펴보았다. 포와로는 의외라는 듯 젊은이에게 반문했다.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피라밋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대한 석조물은 옛날의 사욕에 불타는 한 군주의 이기심을 충족시켜 주려고 세워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 피라밋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그 죄없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앨러튼 부인이 나서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피라밋이나 파르테논 신전, 또 거대하고 아름다운 무덤이나 사원이 없었던 게 낫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즉 사람은 평범하게 하루 세 끼의 밥을 먹다가 조용히 때가 되면 죽는 게 좋다는 생각이시군요." 젊은이는 앨러튼 부인의 말을 듣고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저 인간이 돌보다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포와로가 한 마디 했다. "그러나 인간은 돌처럼 오래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쌍한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죠.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입니다." 젊은이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리체티는 이해할 수 없는 큰소리로 마구 떠들었다. 젊은이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그의 말에는 독설이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젊은이의 연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들은 호텔 선착장에 닿았다. 앨러튼 부인은 먼저 활발히 보트에서 내렸다. 젊은이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포와로는 호텔 로비에서 승마복 차림의 재클린 드벨포 양과 마주쳤다. 그녀는 포와로를 조롱하듯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보냈다. "저는 당나귀나 좀 타려고 해요. 원주민 부락을 좀 구경하려고요. 볼거리가 많다던데요. 포와로 씨, 그 말이 맞나요?" "아, 오늘은 그곳에 가십니까? 네, 그곳은 참 아름답지요. 마치 그림과 같은 곳이랍니다. 그러나 골동품을 사지는 마십시오." "골동품이라면 유럽에도 널려 있는데 여기 진짜가 있겠어요? 저는 그런 것에 속아 넘어 가지는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빛나는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포와로는 짐을 빠른 시간에 모두 꾸렸다. 그는 언제나 물건을 잘 정돈해 놓는 성격이므로 그 일은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짐을 꾸린 후, 포와로는 약간 일찍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 식사 후, 제2폭포로 갈 손님은 호텔 버스로 역을 향해 출발했다. 역에는 10분 간격으로 카이로에서 쉘랄로 가는 급행 열차편이 있었다. 승객이라고는 포와로와 앨러튼 부인, 차림이 허술한 젊은이와 이탈리아인이 전부였다. 오터번 부인과 그녀의 딸은 먼저 필래로 출발하여 나중에 쉘랄에서 증기선을 탄다고 했다. 카이로와 룩소르에서 오는 기차는 20분 가량 연착이었다. 기차가 도착하자 짐을 부리는 이집트인들이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마구 떠들면서 기차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다. 포와로는 겨우 자기의 객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객실에는 자기 짐과 앨러튼 부인의 짐 외에도 낯선 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동안 팀과 앨러튼 부인은 자기 짐을 가지고 그들의 객실로 갔다. 포와로가 들어간 객실에는 벌써 여자 승객이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주름진 얼굴에 하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치장을 했지만 얼굴에는 타인을 경멸하는 오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귀족처럼 거만한 눈길로 포와로를 쳐다보더니 시선을 거두어 미국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건너편에는 30대 미만의 덩치 크고 못생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개눈같이 생긴 갈색의 눈과 더부룩한 머리를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태도에는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고 싶어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따금 나이 든 부인은 잡지에서 눈을 떼고 못 생긴 여자에게 억압적으로 명령했다. "코넬리아, 무릎덮개를 다 모으도록 해." "기차에서 내릴 때, 화장품 주머니를 잘 챙겨야 해. 다른 사람 손이 닿아선 안 되니까. 그리고 내 종이 재단기도 잊어버려선 안 되고‥‥" 기차는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들은 10분도 채 안 되어 카나크 호가 대기하고 있는 부둣가에 이르렀다. 오터번 모녀는 이미 승선해 있었다. 카나크 호는 제1폭포의 증기선인 파피루스 호나 로터스 호보다 작은 증기선이었다. 큰 배는 애스완 댐의 바위를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작은 배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 선실을 살펴보았다. 승객이 적었으므로 대개 갑판 위의 선실을 배당받았다. 갑판의 앞 쪽에는 네 벽이 모두 유리로 된 전망실이 설치되어 승객들이 앉아서 앞에 펼쳐지는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갑판 아래에는 흡연실과 작은 응접실이 있었고 그 밑의 선실에는 식당이 있었다. 포와로는 짐이 선실에 모두 옮겨진 것을 확인한 후에 배의 출발 모습을 보려고 갑판 위에 나갔다. 옆에 서 있는 로잘리 오터번을 보고 그녀에게 가까이 갔다. "부인, 드디어 누비아로 떠나게 되는군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쁘시죠?"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드는군요." 눈 앞에는 야만적인 분위기가 펼쳐졌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삭막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댐 공사 때 파손된 집도 보였다. 이 모든 풍경이 울적하고 우울한 매력을 동반해 왔다. "이제 모든 인간에게서 벗어나는 것 같군요." "그러나 이 배에 승선한 사람들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했죠." 오터번은 어깨를 추스려 보인 후, 다시 말했다. "이상하게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고 난 후부터 사악하게 느끼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어떤 힘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의 가슴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을 모두 밖으로 표출시키는 것 같아요. 모두가 다 불공평하고 부당하고‥‥" "그런 것은 물리적으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로잘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한 번 다른 어머니와 제 어머니를 비교해 보세요. 섹스 이외엔 신이 없어요. 참, 살롬 오터번은 그 신의 예언자랍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나는 세상 풍파를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만일 당신 가슴 속에서 잼처럼 끓어오르는 게 있다면 그 찌꺼기가 표면에 떠오르고 난 후에 그걸 떠내 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던져 버리지요." 포와로는 말을 하면서 나일 강에 무엇을 버리는 흉내를 냈다. "어때요, 이제 그 찌꺼기는 모두 떠내 버렸습니다." 로잘리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로잘리는 밝게 웃다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포와로 씨, 저기 좀 보세요. 도일 부인과 그 남편이 있군요! 아니 저들이 배를 타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리넷은 갑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녀 뒤에는 시몬의 의젓한 모습이 보였다. 포와로는 그 순간 리넷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시몬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시몬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시종 일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즐거움에 몸둘 바 모르는 소년의 태도와도 같았다. 시몬도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아, 멋지군 그래!" "리넷, 나는 이 여행을 기대했었어. 당신도 기대했지? 우리가 이집트의 심장부로 들어가고 있군." 리넷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어쨌든 기분이 어리둥절하군요." 리넷은 시몬 도일의 팔을 꼈다. 시몬은 아내의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가만히 눌렀다. 시몬은 나지막히 아내에게 속삭였다. "리넷, 드디어 배가 떠나는데." 증기선이 차츰 부둣가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왕복 일주일 동안의 제2폭포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그때, 뒤에서 높고 밝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리넷이 뒤돌아 보자 재클린 드벨포가 서서 유쾌한 듯이 웃고 있었다. "안녕, 리넷! 여기서 너를 만날 줄은 미처 몰랐는데. 너는 애스완에서 한 열흘 묵을 거라고 했잖니? 안 그래?" 리넷은 갑작스런 재클린의 등장에 놀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응, 나도 이렇게 너를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생각하지 못했다고?" 재클린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리넷은 남편의 팔을 힘껏 잡았다. "시몬, 시몬‥‥" 시몬 도일의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잔뜩 화가 난 듯 얼굴이 부어 있었다. 시몬은 분노에 못이겨 손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시몬과 리넷은 객실로 들어갔다. 포와로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어도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시몬 도일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리넷, 이렇게 도망칠 수만은 없어. 어떻게 영원히 도망치겠어? 앞으로는 맞부딪쳐 보는 거야‥‥" 몇 시간 후, 해가 막 지고 있을 때, 포와로는 유리로 된 전망실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막 협곡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양 옆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화가 난 듯이 보였고, 강은 깊고 힘차게 흘렀다. 배는 지금 누비아에 있는 것이다. 인기척에 돌아다보니, 리넷 도일이 옆에 서서 손가락을 폈다 오무렸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먼저 리넷이 그에게 말했다. "포와로 씨,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이에요. 전에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무서운 바위, 그리고 오싹오싹 소름이 끼쳐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죠? 무서워요. 제 주변의 사람들이 눈길을 모아 증오하고 있어요. 저는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절히 대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왜 저를 미워할까요? 시몬만 빼고는 적들이,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부이느 모두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맹목적인 증오란 없는 법이니까요." 리넷은 불안한 시선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제가 느끼기로는 자꾸 위험하다는 육감이 들어요. 어떻게 일이 끝날까요? 우린 꼼짝도 할 수 없는 덫에 걸렸어요.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저는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리넷은 맥이 빠지는 듯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포와로는 동정하는 눈빛으로 침통하게 리넷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포와로 씨, 재키는 어떻게 우리가 이 배에 탄 걸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재키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녀도 지혜로우니까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녀가 쳐 놓은 그물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포와로는 천천히, 그리고 리넷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방법은 있었죠. 나는 부인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의아했었습니다. 부인은 돈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왜 부인은 배를 전세내지 않으셨죠?" 리넷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당연히 배를 전세내었을 거예요. 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답니다. 그리고 또‥‥ 포와로 씨는 제 어려움을 이해하시기 어려울 거예요. 저는 시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답니다. 그 사람은 돈에 대해선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거든요. 제가 돈이 많다는 것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시몬은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살기를 원해요. 시몬은 신혼여행의 경비를 모두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주장하는 걸요. 그는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제가 배를 전세낸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쓸데없는 낭비라고 굉장히 화를 냈어요." 리넷은 자기의 고통을 모두 포와로에게 털어놓고 나서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리넷은 가만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 입어야겠어요. 포와로 씨, 제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지껄인 것 같군요." 7 앨러튼 부인은 수수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모습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문 앞에서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어디에 앉는 게 좋을까?" 식당에는 작은 식탁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앨러튼 부인은 그 자리에 서서 지배인이 자리를 안내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앨러튼 부인이 아들에게 말했다. "참, 얘야‥‥ 그 에르큘 포와로라는 키 작은 분 있지? 그 분이 우리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자고 하셨단다." 팀 앨러튼은 불쾌한 듯 하면서도 동시에 놀라서 말했다. "아이, 어머니도 참!" 앨러튼 부인은 아들의 반응이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아들은 그런 일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왜, 너는 싫은 거니?" "네. 저는 그 사람이 싫어요. 보기만 해도 불쾌하거든요." "팀, 그렇지 않단다. 아마 네가 잘못 본 것일 게다." "왜 다른 사람과 어울려야 하죠? 이런 작은 배에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정말 역겹군요. 그 사람이 밤낮으로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하면 어떡해요, 어머니." 앨러튼 부인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팀, 미안하다. 나는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그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잖니? 너는 추리소설을 아주 좋아하잖아." 팀은 불평을 해 댔다.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그걸 취소할 수는 없죠?"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구나." 그때 지배인이 그들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앨러튼 부인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팀은 성격이 좋은 편으로 표정이 밝았는데 지금의 태도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격은 흔히 영국인이 품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불신감과는 성질이 달랐다. 앨러튼 부인은 남자들의 성격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식탁에 자리잡고 앉자 에르큘 포와로가 조용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그들의 탁자로 다가와 빈 의자를 잡고 섰다. "부인, 제가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어서 앉으세요, 포와로 씨." "고맙습니다, 부인." 앨러튼 부인은 포와로가 의자에 앉자 아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불쾌해 하는 표정을 보고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수프를 먹으면서 앨러튼 부인은 접시 옆에 있는 승객 명단을 집어들었다. "우리 한 번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 맞춰 보도록 해요. 재미있을 거예요." 앨러튼 부인은 승객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 "앨러튼 부인과 팀 앨러튼, 이건 너무 쉽군요. 재클린 드벨포, 오터번과 같은 식탁에 앉은 아가씨죠. 그녀와 로잘리는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 다음은 베스너 박사? 포와로 씨, 혹시 베스너 박사를 아십니까?" 앨러튼 부인은 네 명의 남자가 함께 앉아 있는 식탁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 추측으로는 머리가 짧고 콧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가 베스너 박사일 것 같아요. 지금 수프를 열심히 먹는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이 수프를 먹는 소리가 그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크게 드려왔다. 앨러튼 부인은 쉬지 않고 말했다. "바워즈 양이라? 누가 바워즈 양 같아요? 서너 명의 아가씨가 있긴 하지만‥‥ 바워즈 양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도일 부부, 이 사람들은 이 여행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죠. 그 부인은 참 미인이에요. 특히 그녀가 입은 원피스는 더욱 아름답더군요." 팀은 의자에 앉아서 뒤돌아 보았다. 구석의 식탁에 시몬과 리넷 도일, 그리고 앤드류 페닝턴이 앉아 있었다. 리넷은 흰 옷에 눈부신 진주 목걸이를 하여 아름다움이 한층 돋보였다. 팀이 대뜸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름답기는요, 극히 단순한 옷인데요. 마치 긴 자루에다 벨트를 맨 것 같군요." 앨러튼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팀, 그건 남자다운 평가로구나. 남자들은 80기니나 되는 디자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밖에 평하지 못한단 말이야." "여자들은 왜 그렇게 의상에 신경을 쓸까요? 그렇게 많은 돈을 옷을 사 입기 위해서 쓰다니, 참‥‥ 너무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이에요." 앨러튼 부인의 승객 탐사는 계속 이어졌다. "팬숍 씨는 저 네 명 중, 한 명일 거예요. 입 다물고 앉아 있는 남자가 팬숍일 거예요. 미남이고 또 신중해 보이면서 명석하게 생긴 저 사람요." 포와로도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네, 저 사람은 명석한 사람같군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눈도 사물을 꿰뚫어 보는 눈이고요. 저 사람은 여행을 한가로이 할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왜 이 배를 탔을까요?" "다음은 퍼거슨 씨." 앨러튼 부인은 또다시 승객 이름을 짚어 나갔다. "퍼거슨은 그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던 젊은이일 거예요. 오터번 부인과 오터번 양, 그들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죠. 페닝턴 씨? 그는 앤드류 아저씨라고 불리더군요. 저 잘 생긴 사람이죠." 팀이 잔뜩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 앨러튼 부인은 아들에게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글쎄, 그는 미남이지만 인상이 좀 차갑지요. 뭐랄까, 신문 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실업가 같아요. 저 사람은 부자일 거예요. 그리고 다음은 에르큘 포와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죠. 포와로 씨는 사건이 일어나야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으니까요. 팀, 포와로 씨를 위해서 범죄라도 하나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니?" 농담으로 한 앨러튼 부인의 말이 오히려 아들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팀 앨러튼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앨러튼 부인은 아들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화제를 돌렸다. "리체티 씨? 음, 이탈리아 고고학자군요. 그 다음은 롭슨과 밴 슈일러 양이죠. 밴 슈일러 양은 쉽게 알아낼 수 있어요. 그녀는 참 못 생긴 미국인인데, 그녀는 자기가 이 배의 여왕이나 된 듯 착각하고 있군요.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달리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있죠. 정말 우스운 여자라니까요. 그녀와 함께 앉은 여자는 바워즈양과 롭슨 양일 거예요. 마르고 안경 낀 쪽이 하녀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한 친척이겠죠. 우울해 보이는 젊은 여자는 혹사 당하면서도 기꺼이 참고 있지요. 내 생각으로는 롭슨은 하녀이고 바워즈 양이 가난한 친척일 것 같군요." 팀이 다소 기분이 좋아진 듯 말에 끼어 들었다. "어머니, 그렇지 않아요." "네가 어떻게 아니?" "저녁 식사 전에 라운지에 있는데 늙은 여자가 옆의 여자에게 '바워즈는 어디에 있어? 어서 그녀를 데려와, 코넬리아.'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코넬리아라는 여자는 쏜살같이 달려가던데요."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앨러튼 부인이 말했다. "밴 슈일러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팀이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는 어머니를 무시할 겁니다." "그렇게 못 할 거야. 나도 그녀 가까이 앉아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게 내가 아는 모든 유명한 친척과 친구 이름을 말할 작정이다. 특히 네 육촌 조안나와 글래스고 공작을 강조해야지. 그런 이름이라면 거만한 그녀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니?" "어머니, 아니 언제 그런 것까지 생각하셨어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나눈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어서 포와로는 아주 유쾌했다. 그 반자본주의 주장자인 젊은이는 퍼거슨 씨였는데 그는 승객이 대부분 전망실에 몰려 있는 것이 불만인 듯, 흡연실에 들어가 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밴 슈일러가 오너번 부인의 자리로 가까이 와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제 뜨개질감을 여기에 두었답니다." 밴 슈일러는 말하면서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밴 슈일러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카롭게 보내자 오터번 부인이 머뭇거리며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래서 오터번 부인이 앉았던 자리는 밴 슈일러 일행이 차지하게 되었다. 오터번 부인은 그곳에 남아 있으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를 했으나 그녀가 정중하고 냉담하게 대하자 그만 다른 자리로 가 버렸다. 밴 슈일러는 의기양양하게 앉아서 혼자 말없이 무게를 잡고 있었다. 도일 부부는 앨러튼 가족과 함께 자리했고 베스너 박사는 말이 없는 팬숍과 함께 앉아 있었다. 재클린은 혼자 독서를 하는 중이었고 로잘리 오터번은 불안정한 태도로 서성이고 있었다. 앨러튼 부인은 그녀에게 말을 시켜 함께 대화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말문을 말았다. 에르큘 포와로는 저녁 시간 동안 계속 작가의 사명에 대한 지루한 강의를 오터번 부인에게서 들어야 했다. 그날 밤 저녁에 선실로 돌아가던 포와로는 우연히 재클린 드벨포와 마주쳤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 섰다가 고개를 돌려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포와로는 그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비참하고 비통한 표정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악의에 찬 증오와 반항심, 그리고 승리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포와로 씨. 안녕하세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도 제가 이 배를 타서 크게 놀라셨겠죠?" 포와로도 우울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대신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저 때문에 유감스러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 위험을 스스로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이 배에 탄 여러 사람들이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당신도 역시 개인의 여로를 출발한 겁니다. 그래요, 물살이 빠르고 거대하고 가파른 바위를 헤쳐 나가야 하는 여행을 시작했지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여행을 시작한 거지요." "포와로 씨,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언제나 솔직한 게 흠이지요.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몸에 감는 안전한 끈을 풀어 버렸습니다. 지금 되돌아 갈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은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재클린은 천천히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어차피 인생이란 정해진 항로를 따르는 것이니까요. 내 운명의 별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걸요." "그러나 그 별이 당신의 별이 아닐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해요." 재클린은 말없이 쓸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서글픈 표정이 포와로를 새삼 우울하게 만들었다. 8 이튿날, 아침 일찍 배는 에즈 세브아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배에서 내린 사람은 창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코넬리아 롭슨이었다. 그녀는 활달하고 명랑하여 사람들과 금새 친해지는 성격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흰색 양복에 핑크빛 셔츠를 입고 큼직한 나비 넥타이를 맨 에르큘 포와로를 보고도 밴 슈일러처럼 거만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가 걸어서 스핑크스를 향해 갈 때, 포와로가 의례적으로 말을 걸자 그녀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아가씨 일행은 그 신전을 구경하려고 상륙하지 않았나요?" "메리 아주머니, 아니 밴 슈일러 양은 절대로 일찍 일어나지 않아요. 건강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에요. 아주머니는 바워즈 양이 남아서 시중을 들기를 원하시죠. 그러나 저는 여기 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포와로는 냉정히 말했다. "그 분은 자비로우신 분인가 보군요?" 순수한 코넬리아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네, 그럼요. 아주머니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랍니다. 이 여행에 저를 데리고 오시다니 꿈만 같아요. 아주머니가 이번 여행에 저를 데려간다고 우리 어머니께 말했을 때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아가씨, 이 여행이 즐겁습니까?" "그럼요, 너무 멋진 여행이에요! 저는 이탈리아 여행도 했어요. 베니스, 파우아, 참 피사의 탑도 보았어요. 카이로에도 갔고요, 그곳에서는 아주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구경을 많이 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이렇게 멋진 왜디핼파 왕복 여행을 하고 있고요." 포와로도 그녀를 따라서 즐겁게 웃었다. "아가씨는 아주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군요. 행복을 느낀다는 것도 축복받을 일이지요." 포와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앞에서 걷고 있는 로잘리의 잔뜩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와로의 시선을 따라 로잘리를 쳐다보던 코넬리아가 말했다. "저 아가씨, 아주 예쁘죠? 비웃는 표정만 빼면 미인이에요. 영국인답다고나 할까요, 그야 리넷보다 미인은 아니지만요. 내가 여지껏 본 사람 중에서는 리넷이 가장 미인이랍니다. 그녀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그리고 남편되는 사람은 그녀가 지나가면 그 땅까지 흠모하는 것 같더군요. 그렇죠, 제 말이 맞죠? 그리고 머리가 약간 희끗희끗한 부인도 아름답고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부인은 무슨 공작과 친척지간이라던가요, 어젯밤에 우리 식탁 가까이에서 공작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 부인이 작위를 가지진 않았죠?" 안내원이 잠깐 걸음을 멈추게 한 후, 신전에 대해 설명하기 전까지 그녀는 쉬지 않고 수다를 늘어 놓았다.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아몬>과 태양신 <라호라크트>를 모셨던 곳으로서‥‥" 안내원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베스너 박사는 여행 안내서를 펴서 혼자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그는 설명보다 안내서를 더 즐겨 읽곤 했다. 팀 앨러튼은 일행과 함께 오지 않았고 앨러튼 부인은 침묵에 빠진 팬숍의 말문을 열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리넷 도일과 팔짱을 낀 페닝턴은 안내인이 설명하는 수치에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높이가 2미터 가량이라고? 과연 그 정도가 될까? 훨씬 작은 것 같은데. 라메스는 이집트의 위대한 왕이었어." "어때요, 아저씨. 굉장한 상인이죠?" 페닝턴은 정감어린 시선을 리넷에게 보냈다. "리넷, 오늘은 유쾌하게 보이는구나. 네가 요즘 마른 것 같아서 걱정했단다." 일행은 큰소리로 떠들고 웃으면서 배로 돌아왔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카나크 호는 다시 강 위를 미끄러져 갔다. 멀리 야자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배는 서서히 강 위를 부드럽게 흘러갔다. 경치의 변화로 인해 승객들의 분위기가 다소 밝아지는 듯 했다. 팀 앨러튼도 불쾌함이 가셨고 로잘리의 침울한 표정도 밝아졌다. 그리고 리넷 도일도 훨씬 유쾌해 보였다. 앤드류 페닝턴이 그녀에게 말했다.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는 신부에게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렵구나. 그러나 꼭 해결해야 할 것이 있어서‥‥" "앤드류 아저씨, 전 괜찮아요." 리넷은 금방 사업가다운 자세가 되어 말했다. "제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변동이 있는 게 있죠." "그래, 서명을 해야 할 서류들이 좀 있지." "그럼, 지금 서명을 하죠?" 앤드류 페닝턴은 주위를 한 번 살펴보았다. 승객의 대부분이 갑판에 나가 있어서 전망실은 텅 비어 있었다. 전망실에는 에르큘 포와로와 퍼거슨, 그리고 밴 슈일러 뿐이었다. 퍼거슨은 가운데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에르큘 포와로는 전망실 앞머리에서 경치를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밴 슈일러는 구석 자리에 앉아 이집트 책자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럼, 지금 서명을 하도록 하지." 앤드류는 그렇게 말한 후, 밖으로 나갔다. 리넷과 시몬은 마주보며 잔잔히 미소지었다. 시몬이 물었다. "기분이 어떻소?" "네, 이제 괜찮아요. 참 이상할 정도로 편안해요." 시몬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여자야!" 페닝턴은 가득히 타이핑된 서류 한 묶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리넷이 큰소리로 물었다. "아유, 세상에! 아저씨, 여기에 모두 서명을 해야 하나요?" 페닝턴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피곤한 일이지만 일을 잘 마무리 지으려면 어쩔 수 없단다. 제일 처음 처리해야 할 게 5번가의 토지 임대 계약 건이고, 그 다음에는 서부의 부동산 등록‥‥" 앤드류 페닝턴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일일이 설명을 했다. 시몬은 곁에서 계속 하품을 해 댔다. 그때 문이 열리며 팬숍이 들어와 주위를 휘 둘러본 후, 천천히 걸어가 푸르디 푸른 강물과 모래를 조용히 내려다보는 포와로 곁에 섰다. 페닝턴은 재촉하듯 리넷에게 말했다. "여기에다 서명을 하면 돼." 그는 말하면서 손으로 빈 칸을 짚었다. 리넷은 서류를 처음부터 죽 훑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앞을 펼쳐서 만년필로 리넷 도일이라고 서명했다. 페닝턴은 그 서류를 치우고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놓았다. 팬숍은 그쪽으로 가까이 가서 공연히 주위를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무슨 구경거리라도 기대하는 듯이 옆 창문으로 열심히 내다보았다. 페닝턴이 서류를 펼치면서 한마디 했다. "그 서류는 읽어보지 않아도 돼. 명의 변경에 필요한 단순한 서류이니까." 페닝턴의 부언에도 불구하고 리넷 도일은 그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페닝턴이 세 번째 서류를 내놓자 리넷은 주의깊게 서류를 살펴보았다. 앤드류 페닝턴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모두 간단한 서류지. 이권이 관계된 게 아니라 법률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이지." 시몬이 지루해서 견디기 힘든지 또 하품을 하며 불평했다. "리넷, 그 서류를 모두 읽을 작정이야? 그걸 다 읽으려면 점심 시간을 다 써도 모자랄 것 같은데." 리넷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서류는 무슨 서류이건 모두 다 읽고 있어요. 아버지가 언제나 서류는 모두 읽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서류를 읽지 않고 서명했다간 나중에 큰 손해를 입게 된다고 하셨어요." 페닝턴은 리넷의 말에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리넷은 정말 뛰어난 사업가야." 시몬이 웃으며 말했다. "네, 리넷은 뛰어난 사업가죠. 저보다 훨씬 수완이 좋아요. 나는 여지껏 서류를 제대로 읽어 본 기억이 없는데요. 저는 서명할 자리를 가리켜 주면 그곳에 서명을 해 왔지만 잘못 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리넷이 어리석음을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시몬이 유쾌히 말을 받아 넘겼다. "나는 사업과는 거리가 멀지. 그런 머리가 부족하단 말야. 서명을 하라는 곳에 서명을 하는 편이 훨씬 간단한 일이잖아." 페닝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일 씨, 그건 좀 위험한 일 같군요." 시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나는 세상 모두가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는 비교적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랍니다. 네, 사람은 믿을 만한 가치가 있지요. 여태껏 내가 신뢰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은 없거든요." 그때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팬숍이 놀랍게도 입을 열고 말했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리넷, 당신의 사무적인 능력은 특출하군요. 나는 변호사입니다. 직업적인 일을 하다보면 여자들은 실무에 눈이 어두운 것을 많이 봅니다. 당신의 그 서류를 다 읽고 난 후에 서명을 하는 태도는 높이 살 만 합니다. 그래야만 해를 입지 않습니다." 팬숍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그는 얼굴이 상기된 채, 나일 강의 경치를 감상했다. 리넷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팬숍의 태도가 아마도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엄숙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앤드류 페닝턴은 크게 당황해하며 쩔쩔 매었고 시몬 도일은 불쾌하게 느껴야 좋을지 유쾌하게 느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팬숍의 귀가 붉게 물든 모습이 보였다. 리넷은 기분좋은 표정으로 페닝턴에게 말했다. "다음 서류를 가지고 오세요." 페닝턴은 몹시 불쾌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중에 하도록 하지. 도일 씨 말처럼 이 서류를 모두 읽으려면 점심 식사 시간까지도 지나갈테니. 그러면 경치도 구경하지 못할테고, 서명은 나중에 하도록 하는 게 좋겠어. 급한 서류 두 가지는 해결했으니 됐어." 리넷이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어기는 너무 더워서 못 견디겠어, 어서 밖으로 나가요."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포와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팬숍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의자에 몸을 반쯤 눕히고 휘파람을 부는 퍼거슨을 바라보았다. 포와로는 또 퍼거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밴 슈일러를 보았다. 그때 왼쪽 문이 열리더니 코넬리아 롭슨이 급히 들어왔다. 밴 슈일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참, 오래도 걸리는군.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는 거야?" "메리 아주머니, 죄송해요. 말씀하신 곳에 털실이 없어서요. 털실은 다른 가방에 있어서 이렇게‥‥" "너는 참 덜렁거려서 물건을 못 찾는 거야. 노력하는 줄은 알지만, 좀 찬찬히 걷고 재빠르게 행동해. 정신만 집중하면 모든 게 해결된단 말이야. 그렇게도 어렵니?" "죄송해요, 아주머니. 제가 너무 어리석게 굴어서." "더 노력하도록 해. 내가 너를 이 여행에 데려왔으니 너도 노력해서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코넬리아는 얼굴이 상기되어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아주머니." "아니 약 먹을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 바워즈는 어디 갔지, 어서 찾아 오렴. 의사는 시간 맞추어 약을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때 바워즈가 약병을 들고 들어왔다. "약을 가지고 왔어요." 밴 슈일러는 불평을 쏟아 놓았다. "11시에 먹어야 하는데 늦었어. 나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걸 알지?" 이번에는 바워즈 양이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간은 정확히 11시 5분이에요." 밴 슈일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내 시계는 10분이야." "내 시계가 정확해요. 단 1분도 틀리지 않는답니다." 바워즈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말했다. 밴 슈일러는 약을 삼키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몸이 더 약해졌어." "참 유감이군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바워즈의 목소리에는 유감인 듯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기계적이고 냉담히 울렸다. 밴 슈일러는 또 불평을 시작했다. "여긴 너무 덥군. 바워즈 양, 갑판 위에 자리를 좀 잡아 봐요. 코넬리아, 내 뜨개질감을 조심해서 가지고 나와라. 떨어뜨리지 말고. 그리고 털실 좀 감아 주렴." 밴 슈일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일에 착수했다. 젊은 반항자 퍼거슨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빌어먹을! 저 여자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군." 포와로가 관심이 있는 듯 그에게 물었다. "퍼거슨 씨, 당신이 미워하는 인간류가 저런 여자입니까?" "네, 잘 보셨습니다. 저런 여자는 살아있어도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죠. 저 여자는 자기 손가락은 까딱도 하지 않고 살아갈 겁니다. 저 여자가 세상에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부려 자기는 편안하고 사치스럽게 살아가죠. 저런 사람은 기생충이에요. 사람을 괴롭히고 해만 주는 기생충입니다. 이 배에는 세상에 해를 끼치는 저런 인간이 아주 많더군요." "아,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방금 이 방에서 서류에 서명을 하던 여자도 그런 부류죠. 수많은 노동자들이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고 혹사 당하는 것도 모두 저런 여자가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도록 해주기 위해서 착취당하는 겁니다. 저 여자는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더군요. 저 여자야 평생동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살았겠지요." "당신은 저 여자가 영국의 소문난 부자라는 걸 누구에게서 듣고 알았습니까?" 퍼거슨은 당장 싸움이라도 할 듯한 도전적인 태도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그런 사람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처럼 옷이나 말쑥하게 차려입는 사람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지요." 퍼거슨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포와로의 넥타이와 분홍색 셔츠를 쳐다보았다. 포와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내 손과 머리로 일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소." 퍼거슨은 포와로의 말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마구 떠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야 해." 포와로는 조용하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젊은이, 그렇게 폭력을 쓰고 싶소?"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의 정의가 폭력없이 성취된다고 보십니까?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수어야 합니다." "그건 적극적이고 시끄러운 방법이군." "당신은 살기 위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아니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겠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을 중산 계층이라고 스스로 부르면서 세상을 빈둥빈둥 놀면서 살아갈 겁니다." "아니오, 나는 중산층이 아니라 상류층이오." 포와로는 거만하게 약간 오기를 부리며 말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이죠?" 에르큘 포와로는 당당하고 거만한 투로 말했다. "나는 탐정이오." 젊은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탐정이요? 그럼 그 젊은 여자가 정말 탐정까지 고용했군요. 그 여자는 자신의 귀한 몸을 그야말로 지극히 보호하는군요. 물론 귀하신 몸이니 걱정이 될테죠." 포와로는 점잖은 태도로 말했다. "나는 도일 씨나 리넷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오. 나는 그저 휴가를 즐길 뿐이오." "아, 당신은 지금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당신도 휴가 중인가요?" 퍼거슨은 비웃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휴가요? 나는 지금 노동조건을 연구는 중일 뿐입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거 참 흥미있는 일이로군요." 포와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으로 나갔다. 밴 슈일러는 갑판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코넬리아가 무릎을 꿇은 채 털실을 잔뜩 팔에 감고 있었다. 바워즈는 바른 자세로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포와로는 오른쪽 갑판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막 배 모퉁이를 도는 순간 자칫 잘못하면 한 여자와 부딪쳐 쓰러질 뻔 했다. 그녀는 얼굴이 검은 라틴계로 제복의 건장한 남자와 이야기하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죄를 진 사람처럼 쩔쩔 맸다. 포와로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포와로는 다시 배 모퉁이를 돌아 왼쪽 갑판을 따라 걸었다. 그때 한 선실의 문이 열리고 오터번 부인이 쑥 나왔다. 그녀는 배의 요동 때문에 포와로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녀는 주홍색 실내복을 여미며 정중히 사과했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포와로 씨, 미안해요. 배 위에서는 파도가 치면 걷기가 어려워요. 누구라도 이런 배에서는 견디기 어렵겠죠. 나는 배에 약해서요‥‥" 오터번 부인은 포와로의 팔을 힘껏 잡았다. "왜 이렇게 요동을 친담. 몸을 가누기도 힘드니‥‥ 나는 배 멀미를 한답니다. 배만 타면 기분이 나빠요. 딸은 어미는 안중에도 없어요. 나 혼자 선실에 몇 시간 동안 틀어박혀 있어도 동정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답니다. 나는 저만 믿고 이제껏 살아왔는데 전혀 안중에 없어요. 불쌍한 어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오터번 부인은 서러운지 훌쩍거리며 울었다. "나는 그애만을 위해서 일해왔어요. 쉬지도 못했답니다. 모든 걸 희생해 가면서 저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걸 모른답니다. 이젠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얼마나 내게 못되게 구는지 다들 몰라요. 이집트까지 나를 끌고 와서는 이렇게 따분하게 만들고요. 어서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지금 당장‥‥" 오터번 부인은 팔을 빼고 달려가려고 했다. 포와로는 점잖게 그녀를 막았다. "내가 따님을 보내 드릴테니 선실에 들어가 계십시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녜요, 이 배에 있는 모두에게 말해야 해요." "부인, 파도가 거칠어져서 갑판에 나가는 건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물에 빠질 수도 있고요." 오터번 부인은 의심을 품은 눈길로 포와로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위험할까요?" "네, 지금은 위험합니다." 오터번 부인은 포와로의 말을 듣고는 머뭇거리다가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포와로는 바로 갑판으로 가서 앨러튼 부인과 팀의 중간에 앉아 있는 로잘리 오터번에게 다가갔다. "로잘리, 지금 어머니가 찾으시는데요."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로잘리의 얼굴이 금새 침울해졌다. 로잘리는 머뭇거리다가 잰걸음으로 갑판을 떠났다. 앨러튼 부인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저 처녀의 마음은 영 종잡을 수가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니‥‥ 어느 날은 상냥하고 다정했다가는 또 어느 날은 무례하거든요." 팀도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쳣다. "네, 버릇도 없고 괴퍅한 성격 같아요." 팀의 말에 앨러튼 부인은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그렇진 않을 거다. 성격이 괴퍅한 게 아니라 불행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 거다." 팀은 어머니의 말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글쎄, 모르겠군요. 사람에게는 모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때 식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러튼 부인이 쾌활하게 말했다. "점심식사 시간이군, 배가 고픈 참인데‥‥" 그날 저녁, 포와로는 앨러튼 부인이 밴 슈일러에게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포와로가 두 사람 앞을 지나가자 앨러튼 부인은 웃으며 윙크를 해 보였다. 포와로의 귀에 앨러튼 부인의 말이 들려왔다. "카프리 성에서는‥‥ 그 공작께서는 말이죠‥‥" 코넬리아는 갑판에 나와 쉬고 있었다. 그녀는 베스너 박사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는 여행 안내서에 기록된 이집트학에 대해 장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팀 앨러튼은 난간에 기대어 작은 소리로 불평을 했다. "모두가 썩어 빠졌어!" 로잘리 오터번이 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참 평등치도 못한 세상이에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했는데‥‥" 포와로는 자기가 젊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9 월요일 아침, 카나크 호의 갑판 위에서는 갖가지 감탄과 환호성이 터져나와 떠들썩했다. 배는 강기슭에 정박해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위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신전이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벼랑의 자연석으로 깎아 세운 네 개의 거대한 조각이 몇 천년 동안 나일 강을 내려다보며 아침 햇빛을 받아 그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코넬리라 롭슨은 감격하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포와로 씨, 기막히군요. 어쩜 저렇게 크고 거대할까‥‥" 그 옆에 섰던 팬숍도 한 마디 했다. "과연 듣던 대로군. 인상적이야!" 시몬 도일도 다가와 거들었다. "정말 위대하군." 시몬은 포와로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말했다. "나는 사원이나 관광 명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저건 정말 굉장한데요. 가슴이 뭉클해지는데요." 사람들이 하나 둘, 그곳을 떠나자 시몬이 그에게 말했다. "이번 여행은 참 잘 온 것 같습니다. 많은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리넷도 이제 정상적이 되었고‥‥ 리넷은 피하지 않고 부딪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리넷은 제일 처음 배에서 재키를 보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기로 했지요. 그녀가 우리를 쫓는다면 정면으로 부딪칠 겁니다. 그래서 그녀가 그 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해 줄 겁니다. 그건 정말 야비한 방법입니다. 재키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기뻐하겠지만 우리는 앞으로 절대 그 여자 때문에 피하거나 두려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포와로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참 잘 된 일이군요." "이제 만사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네? 네, 그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때,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리넷이 갑판을 걸어왔다. 그녀는 웃는 표정이었으나 포와로에게는 아는 체하지 않고 싸늘하게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는 시몬을 데리고 가 버렸다. 포와로는 리넷이 자기가 비판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 나온다고 생각하자 통쾌했다. 리넷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디에 가건, 무슨 일을 하건 맹목적인 찬사만 받아 온 사람이었다. 에르큘 포와로는 그런 인생을 살아온 리넷에게 난생 처음으로 도전한 사람이었다. 앨러튼 부인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다. "참 놀랍군요! 리넷이 애스완에서는 그렇게 근심스러운 얼굴이더니 오늘은 아주 대조적인데요. 행복해 보이죠? 너무 행복해 보여서 사람들은 혹시 그녀가 죽을 날이 가까이 온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한답니다." 포와로가 그녀의 말에 답변하기 전에 상륙할 승객은 집합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은 안내원을 따라 아부심벨 사원에 가기 위해 상륙했다. 포와로는 앤드류 페닝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페닝턴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네 왔다. "이집트 여행이 처음이십니까?" "아닙니다, 1923년에 왔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이로에 왔었죠. 그러나 나일 강을 거슬러 오르긴 이번이 처음입니다. 당신은 카마크 호를 타고 오셨죠? 도일 부인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페닝턴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네, 맞습니다." "내 친구도 그 배를 탔답니다. 혹시 스미드라는 부부를 만나보셨습니까?" "글쎄,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배가 만원이라서요, 그리고 날씨가 나빠서 선실에서 갑판에 나오지 않은 사람도 많았답니다." "아, 그랬군요! 당신은 도일 부부를 우연히 만나서 꽤 반가우셨죠? 두 사람이 결혼한 사실도 미처 몰랐다면서요?" "네, 알지 못했었죠. 도일 부인이 편지를 냈다는데 나는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을 카이로에서 만나고도 며칠 지나서 겨우 편지를 받았죠." "내가 알기론 선생께서는 오래 전부터 도일 부인과 아는 사이라지요?" "네 그렇습니다, 포와로 씨. 나는 리넷 리지웨이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입니다. 리넷의 아버지와 나는 친구 사이죠. 그는 특별한 사람이죠. 크게 성공했고요." "그의 딸이 굉장한 유산을 상속받는다죠? 내가 듣기로는‥‥ 이거 죄송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앤드류 페닝턴은 기분이 좋은지 선선히 말을 꺼냈다. "그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인 걸요. 사실이지 리넷은 돈이 아주 많은 부자랍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리넷의 결혼으로 인해 주식 가치 등에 변화가 없습니까?" 페닝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어느 정도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별로 사정이 좋지 않아요." 포와로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도일 부인은 사업 수완이 뛰어난 거 같던데요." "네, 잘 보셨습니다. 그녀는 아주 명석하답니다." 안내원이 라메스가 세운 신전에 대해 길게 설명을 늘어 놓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입구 양 옆에는 자연석을 깎아 세운 라메스 상이 두 개씩 서 있었다. 이탈리아 고고학자 리체티는 안내원의 설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구의 라메스 상에 새겨진 부조를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일행이 신전 내부로 들어서자 컴컴한 정적이 그들을 감쌌다. 안내원은 벽 내부에 여전히 생생한 색감을 빛내는 부조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고 몇 명씩 무리지어 흩어졌다. 베스너 박사는 안내 책자에 쓰인 독일어를 읽으면서 옆에 선 코넬리아에게 번역해 주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밴 슈일러가 바워즈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기 때문에 박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중단해야만 했다. 베스너 박사는 코넬리아의 뒷모습을 안경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포와로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습니까, 멋진 아가씨죠? 그녀는 다른 처녀들처럼 허약해 보이지도 않고 열심히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죠. 그래서 이해력이 빠른가 봅니다. 그녀에게 설명을 해 주면 이해를 잘 해서 기분이 무척 좋더군요." 그때 포와로는 코넬리아의 운명은 평생을 누군가에게 시달리거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니까. 바워즈는 밴 슈일러가 코넬리아를 불러 곁에 두었기 때문에 몸이 자유로와져서 신전의 중앙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무관심하게 주위를 휘 살펴보았다. 신전 안, 깊숙한 곳에 제단이 있었고 그곳에는 네 개의 상이 주변을 제압하듯 장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상 앞에 시몬 도일이 서 있었다. 리넷은 남편의 팔짱을 끼고 얼굴을 든 채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듯 보였으나 어떤 감동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불쑥 말했다. "리넷, 그만 나갑시다. 나는 저 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 불쾌해져. 특히 저 모자 쓴 친구는 보기만 해도 역겹단 말이야." "그건 아몬 같은데요, 저건 라메스고. 참 이상하네요. 왜 당신은 저걸 싫어하죠? 제 눈에는 인상적으로 보이는데요." "난 지나치게 인상적이기 때문에 불쾌해. 어쩐지 음산해지는 것도 같고. 이제 밝은 곳으로 나가지."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사원에서 나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그때 갑자기 리넷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모래 위에 누비아인 어린이들의 머리가 대여섯 개 줄지어 있었다. 그 음산한 머리들은 이내 눈을 빛내며 목을 좌우로 신나게 흔들며 일제히 소리 맞춰 외웠다. "힙, 힙, 힙, 힙! 아주 좋아, 아주 값지군. 아주 고맙군." "아니, 저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어떻게‥‥ 몸이 모두 모래 속에 묻힌 건가?" 시몬은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격인 아이 둘이 나서서 돈을 받았다. 리넷과 시몬은 이제 구경도 싫증이 났지만 그렇다고 배에 오르기도 싫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기대 앉아 햇살을 쬐고 있었다. 리넷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참, 아름다운 태양이군! 정말 행복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길 정말 잘했어.' 시몬은 흡족한 얼굴로 리넷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제 뜻한 대로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시몬은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 리넷을 재빨리 끌어안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큼직한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바로 앞에 떨어졌다. 리넷을 자기가 끌어안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몸이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리넷과 시몬은 너무 놀라서 꼭 껴안고 말도 못했다. 그때 에르큘 포와로와 팀 앨러튼이 달려와서 말했다. "부인, 정말 큰일 날 뻔 했군요." 네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절벽 위를 쳐다보았다. 그 꼭대기에는 벼랑을 따라 오솔길이 나 있었다. 포와로는 상륙했을 때, 그 길에 원주민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었다. 포와로는 시몬 부부를 쳐다보았다. 리넷은 아직도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몬도 흥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몬은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년!" 그러고 나서, 그는 옆에 선 팀 앨러튼을 얼핏 쳐다보고는 감정을 억제시키려고 노력했다. 팀이 숨을 길게 쉬고 나서 말했다. "누가 바위를 굴렸을까요? 아니면 바위가 어쩌다 떨어진 걸까요?" 리넷은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바보가 그런 거 같아요." "누군가가 부인을 달걀 껍질처럼 부수려고 그랬나 봅니다. 리넷 부인, 부인에겐 적이 없지요?" 리넷은 팀 앨러튼의 말 속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을 느끼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포와로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부인, 어서 배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진정제라도 좀 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들은 배를 향하여 급히 걸었다. 시몬 도일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터질 듯 했다. 팀 앨러튼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한 리넷을 위로하려고 쾌활하게 떠들었다. 포와로의 얼굴은 침통한 표정으로 얼그러졌다. 그들이 배가 정박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시몬은 못박힌 듯이 자리에 서 버렸다. 그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 배에서 재클린 드벨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 바둑판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년처럼 보였다. 시몬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아유, 하느님! 그럼 그건 우연한 사고였단 말인가!" 그 순간 시몬의 얼굴에서 분노가 걷히고 잔뜩 찡그린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시몬의 얼굴에서 재클린은 심상치 않음을 읽었다. 먼저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군요." 그녀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는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시몬은 힘껏 포와로의 팔을 잡았다. 팀과 리넷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오해했었습니다."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다." 포와로는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뒤돌아서서 신전을 돌아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밴 슈일러가 바워즈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앨러튼 부인이 누비아 소년의 머리가 줄지어 있는 모습을 미소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터번 부인도 서 있었다. 그러나 그외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포와로는 시몬의 뒤에 서서 배에 천천히 올라갔다. 10 "부인, 페이의 뜻이 무엇입니까?" 앨러튼 부인이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포와로와 그녀는 제2폭포가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다른 일행은 낙타를 타러 갔지만 포와로는 낙타를 타면 꼭 배를 탄 것 같기 때문에 거기에 끼지 않았다. 앨러튼 부인은 품위 때문에 낙타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어젯밤에 왜디핼파에 당도하여 오늘 아침 작은 증기선 두 척을 타고 제2폭포에 온 것이다. 일행 중에서 리체티만 빠지고 모두 이곳에 온 셈이었다. 이탈리아 고고학자 리체티는 전부터 세므나라는 외딴 곳을 탐험하러 가겠다고 끼지 않은 것이다. 리체티는 그곳이 아메넴트 3세 때에 누비아의 통로였으며 그곳에는 흑인들이 이집트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 조각된 돌기둥이 서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리체티를 설득했지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살짝 출발했다.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다른 승객들도 정해진 코스가 아닌 곳으로 관광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앨러튼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페이요? 그건 스코틀랜드어랍니다. 재난이 닥치기 전에 들뜬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죠. 간단히 설명하기가 어려운데요." 포와로는 앨러튼 부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감사합니다. 이제 이해가 갑니다. 어제 부인이 그 말을 하신 게 기묘한 우연이군요. 리넷은 그 후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까요." 앨러튼 부인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몸을 오싹했다.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구사일생으로 별일이 없었죠. 혹시 그 검둥이 어린애들이 장난을 친 게 아닐까요? 누구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포와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죠." 포와로는 얼른 화제를 바꾸어 마조르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앨러튼 부인은 이 키가 작고 통통한 포와로에게 점점 호감이 갔다. 물론 거기에는 반발하는 감정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아들 팀은 포와로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포와로와 가까워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또한 포와로를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앨러튼 부인은 아들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옷차림이 이국적이고 색다르기 때문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녀는 포와로가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와는 마음이 서로 통한다고 믿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조안나 사우드우드를 싫어하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녀는 포와로가 조안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말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질투와 혐오감을 말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팀과 로잘리 오터번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팀 앨러튼은 자신의 불운을 농담처럼 말했다. 자기는 감상적일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지만 건강이 형편없으므로 힘들다는 것과 돈이 없고 적성에 맞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팀은 퉁명스럽게 자기의 말을 정리했다. "지독히도 무능하고 허약한 인간이죠." 그 말을 로잘리가 재빨리 받았다. "그러나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것을 소유하고 있잖아요." "부러워하는 것이라뇨?" "바로 어머니죠." 팀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유쾌한 표정이었다. "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제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죠." "저도 그 분이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우시고 침착하시죠,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시고‥‥" 로잘리는 진지하게 말했으나 약간 더듬거렸다. 팀은 자기 가슴에서 로잘리에게 따스한 감정이 솟는 것을 감지했다. 팀은 그녀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로잘리의 어머니에게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오터번 부인을 세상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제일 귀찮은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잘리에게 그 말을 해 줄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밴 슈일러는 낙타를 타거나 걸어서 어디를 오른다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작은 증기선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활기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바워즈, 함께 있자고 해서 미안하군. 생각같아선 당신을 보내고 코넬리아를 남도록 하고 싶지만, 젊은이들이란 자기만 알기 때문에 그애는 내겐 단 한 마디도 없이 달아나 버렸어. 나는 그애가 불량해 뵈는 퍼거슨이란 사내에게 말을 거는 걸 보았다오. 그애한테 크게 실망했어. 로잘리는 도대체 사교적이지 못해." 바워즈는 습관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저 위까지 걸어 올라가면 무척 더울 거예요. 또 낙타를 타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고요. 혹시 벼룩이라도 있으면 어떡해요?" 바워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쓴 후,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롭슨 양은 젊은이와 이야기하지 않고 베스너 박사와 이야기하고 있군요." 밴 슈일러는 바워즈의 말을 듣고 불만을 늘어 놓았다. 그녀는 베스너 박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큰 병원을 가지고 있으며 내과 의사로 유럽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태도가 바뀌었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그의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승객 모두가 카나크 호로 돌아온 후, 리넷이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전보가 와 있네!" 리넷은 성급히 겉봉을 뜯고 전보를 펼쳤다. "이게 무슨 뜻이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감자, 근대의 뿌리. 시몬, 이걸 좀 봐요." 시몬이 그녀에게서 전보를 받으려고 하는데, 잔뜩 흥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실례지만 그 전보는 내게 온 전보입니다." 리체티는 말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리넷이 쥐고 있던 전보를 잡아챘다. 그는 화난 얼굴로 리넷을 노려보았다. 리넷은 크게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다가 겉봉을 확인했다. "아, 시몬! 어쩌면 좋아요. 저는 정말 바보같은 짓을 했군요. 리체티라고 씌어 있는데 리지웨이라고 읽었어요. 내 이름은 이제 리지웨이가 아닌데‥‥ 리체티에게 사과해야겠어요." 리넷은 허둥지둥 리체티의 뒤를 쫓았다. "리체티 씨, 죄송합니다. 실은 결혼 전의 제 이름이 리지웨이였어요. 결혼한 지가 얼마 안되어 착각했어요." 리넷은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리체티의 표정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엄하고 모질게 리넷을 비난했다. "아니, 이름을 읽지도 않고 겉봉을 뜯다니 말이 됩니까? 이건 변명할 수 없는 실수예요." 리넷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리체티의 태도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녀는 시몬에게 가서 심술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모두 저런 심통 사나운 사람 뿐이라니까요!" "리넷, 신경 쓸 거 없어요. 우리 그 크림색 상아색 악어가죽 구경이나 하러 갑시다." 시몬과 리넷은 바로 육지로 내려갔다. 포와로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재클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힘껏 난간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 표정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했다. 가슴 속 깊숙히에서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 보였다. 포와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랐다. "저들은 이제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가 버린 거예요. 그들에게 다가갈 길이 없어요. 그들은 내가 옆에 있건 말건 상관이 없는거 같아요.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힐 수가 없군요‥‥" 난간을 잡은 제클린의손이 가볍게 떨렸다. "이제 늦었어요. 포와로 씨, 당신이 경고를 하기에도 늦었단 말이에요. 네, 당신 말이 옳았어요. 저는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어요. 이 여행을 떠나선 안 되는 건데‥‥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 여행은 영혼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못 돌아가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네, 계속 나아가겠어요. 나는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도록 놓아두지 않을 거예요. 저는 반드시 그를 죽일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 포와로는 멍청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포와로 씨, 여자 친구가 화가 난 모양이군요." 포와로는 고개를 돌린 후 깜짝 놀랐다. "아니, 레이스 대령!" 얼굴이 검게 탄, 키가 큰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왜 놀랐나요?" 에르큘 포와로가 레이스 대령을 만난 것은 1년 전으로,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런던에서 대령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날 묘한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그 집 주인은 그날 밤 파티 도중에 살해당했었다. 포와로는 레이스 대령이 어느 곳이나 불쑥 잘 나타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대령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 문제가 발생하는 곳이면 으레 모습을 보이곤 했다. 포와로는 정중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했다. "왜디핼파에도 대령이 모습을 나타내셨군요." "아, 나는 이 배에 승선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거야 물론 쉘랄로 돌아간다는 뜻이죠." 에르큘 포와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참, 재미있겠군! 자, 그럼 한 잔 하실까요?" 두 사람은 텅 빈 전망실로 들어갔다. 포와로는 대령을 위한 위스키 한 잔과 오렌지 에이드를 주문했다. 포와로가 궁금한 듯 대령에게 물었다. "대령, 우리와 함께 돌아갈 겁니까? 정부의 증기선으로 가면 더 빨리 갈 텐데요. 그 증기선은 쉬지 않고 달리지 않나요?" 포와로의 말에 레이스 대령은 크게 감탄했다. "언제나 당신은 정곡을 찌르는군요‥‥" "승객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승객 중, 한 명 때문입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넌지시 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레이스 대령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은 듯이 말했다.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포와로는 점점 더 흥미가 당기는지 관심을 보였다. 레이스 대령은 포와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포와로 씨, 당신에게까지 비밀을 지키지는 않겠습니다. 문제가 좀 생겼지요. 지금 우리가 뒤쫓는 것은 앞장서서 폭도를 선도하는 녀석이 아니라 뒤에서 은밀히 그들을 조종하는 무리이죠. 그들은 세 명인데 한 명은 이미 죽었고, 한 명은 감옥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 남은 한 명을 지금 쫓고 있지요. 그 놈은 대여섯 번씩이나 살인을 해치운 끔찍하고 잔인한 작자입니다. 그 어떤 선동가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죠. 바로 그놈이 이 배에 승선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암호를 해독해 보니 '그가 2월 7일부터 13일까지 카나크 호를 타고 여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그가 어떤 가명을 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 인상착의는 압니까?" "아뇨, 전혀 모릅니다. 글쎄 미국계와 아일랜드계와 프랑스계의 혼혈이라고는 하는데‥‥ 그러나 도움이 될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답니다. 포와로 씨, 무슨 수가 없을까요?" "글쎄요, 지금은 떠오르는 게 없는데요. 한 번 생각해 보죠." 레이스 대령은 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에르큘 포와로는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배에는 좀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답니다." 레이스 대령은 의혹이 담긴 시선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대령, 당신도 생각해보십시오. A라는 사람은 B에게 모진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B는 그에게 복수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B는 A를 협박하고 있지요." "그럼, A와 B가 모두 이 배의 승객입니까?" "네, 그렇답니다." "물론 B는 여자겠군요." "네, 잘 보셨습니다." 레이스 대령은 담배를 붙여 여유있게 피웠다. "나는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겠다고 떠드는 사람은 대개 그 일을 저지르지 못하는 편이니까요." "그리고 여자는 더욱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죠, 당신은?" 그러나 포와로의 침울한 표정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고 있었습니까?" "네, A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요." "포와로 씨, 당신은 그게 B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B는 그 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걱정할 필요도 없겠군요. 그야 우연일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겠지만‥‥ 마음에 걸려서‥‥" "포와로 씨, 그 일에 B가 무관하다고 확신합니까?" "네, 물론 확신합니다." "그래요? 그럼 우연일 수도 있겠죠. A는 어떤 인물이죠? 나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A는 아름답고 부유한 젊은 여인입니다." 레이스 대령은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꼭 한 편의 소설 같은데요?" "그렇기도 하죠. 그러나 난 자꾸 꺼림칙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내 육감은 지금까지 어긋난 적이 없거든요." 레이스 대령은 포와로의 부연 설명에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지금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대령께서 또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왔으니 큰일인데요. 당신은 이 배에 당신이 찾는 선동자가 있다고 보십니까?" "안심하십시오. 그놈은 미인을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와로는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걱정되는군요. 오늘 그 부부에게 카르툼으로 떠나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더군요. 제발 쉘랄까지 무사히 가야 될 텐데‥‥" "당신은 너무 걱정을 하는 게 아닙니까?" "나는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들어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아요." 11 그 이튿날 저녁, 코넬리아 롭슨은 아부심벨 신전 안에 있었다. 후덥지근한 저녁으로, 카나크 호는 승객들에게 신전을 구경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다. 이 날은 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처음의 경치와는 또다른 분위기였다. 그녀는 감탄한 나머지 크게 흥분하여 퍼거슨에게 말했다. "오늘은 더 잘 보이네요. 왕에게 목이 잘렸다는 적병의 모습이 저기에 또렷이 보이는군요. 베스너 박사님이 계셨다면 좋았을텐데‥‥ 박사님은 설명을 잘 하시거든요." 퍼거슨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기분 나쁜 영감을 좋아하죠?" "어머나, 베스너 박사님은 제가 만난 분들 중에서도 가장 친절하고 훌륭한 분이에요." "따분한 노인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때 퍼거슨은 갑자기 코넬리아의 팔을 꽉 잡았다. 그들은 신전에서 나와 달빛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갔다. "당신은 어째서 그 기분 나쁜 영감과 상대를 하고 심술궂은 여자의 잔소리를 견디며 지내죠?" "퍼거슨 씨,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당신에게는 생각도 없단 말이오? 당신도 밴 슈일러와 똑같은 사람이오." 코넬리아는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과 똑같이 않아요."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 뜻으로 하는 말이죠?" "아니에요,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메리 아주머니는 교양있고 친절한 분이에요. 그리고‥‥" "교양이 있다고?" 퍼거슨은 지금까지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불쾌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정말 역겨워요." 코넬리아는 그의 과민한 반응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당신이 나하고 말하는 것조차 싫어할 텐데요." 코넬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뭘까요? 내 신분이 자기보다 낮아서지요. 당신은 이런 사실에 화가 나지 않습니까?" 코넬리아는 약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매사에 덜 흥분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이걸 모릅니까? 당신은 분명히 미국인이고,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평등하단 말이오." 코넬리아는 침착하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퍼거슨 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 나라, 미국의 헌법에도 명기된 사실이오." "아주머니는 정치가는 신사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아요. 평등하다고요? 그건 말도 안되는 억지예요. 저는 제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따금 도일 부인처럼 미인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못 생긴 얼굴을 한탄해야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압니다." 퍼거슨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도일 부인? 그 여자는 총살당해야 마땅한 기생충이오." 코넬리아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퍼거슨 씨, 당신 속이 편치 않으신가 보군요. 메리 아주머니가 쓴 적이 있는 특별한 펩신이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아니, 당신은 어쩔 수 없군 그래!" 퍼거슨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코넬리아는 배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막 통로로 들어가려는데 퍼거슨이 돌아서서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코넬리아, 당신은 이 배의 승객 중에서 가장 멋진 여인이오." 코넬리아는 얼굴이 상기되어 급히 전망실로 들어갔다. 밴 슈일러는 베스너 박사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베스너 박사의 상류층 환자에 대해서 환담하고 있었다. 코넬리아는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아주머니, 제가 너무 오래 나가 있었나요?" 밴 슈일러는 시계를 들여다 본 후, 날카롭게 말했다. "시간 좀 맞춰서 돌아올 수 없는 거니? 참, 내 벨벳 목도리는 아디 있니?" 코넬리아는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선실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선실에는 없어. 저녁 식사 후에도 여기에 있었어. 나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단 말이야. 저 의자 위에 놓아 두었었는데‥‥" 코넬리아는 목도리를 찾으려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데요." 밴 슈일러는 위압적이고 화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럴 리 없어. 다시 정신차리고 찾아 봐." 코넬리아는 길들인 개처럼 그녀의 명령에 복종했다. 가까이 앉아있던 팬숍도 일어나서 그녀를 도왔지만 목도리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날은 날씨가 유난히 더워서 승객들은 신전에서 돌아와서 바로 각자의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도일 부부는 페닝턴과 레이스 대령과 함께 구석의 탁자에서 브리지 게임을 했다. 포와로는 문 옆의 작은 탁자에서 입이 아플 정도로 연방 하품을 해 댔다. 그때, 양 옆에 바워즈와 코넬리아를 거느린 밴 슈일러가 마치 여왕처럼 침실로 가려다 말고 포와로가 앉은 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방금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어요. 제 절친한 친구 루퍼스 벤 올딘한테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간 있을 때 당신이 해결한 사건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포와로는 졸음을 쫓으려고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밴 슈일러는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섰다. 포와로는 또 한 번 하품을 크게 했다. 그는 잠이 쏟아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이 내리감겨서 뜰 수 없었다. 그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브리지 게임을 하는 사람과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팬숍을 쳐다보았다. 그들 외에는 모두 자기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와로는 전망실에서 나와 갑판으로 나갔다. 그는 반대편에서 황급히 걸어오는 재클린과 부딪칠 뻔 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포와로는 그녀에게 억지로 눈을 뜨고 말했다. "네, 졸려서 눈을 뜨지 못하시는 군요. 몸도 가누기 힘들고요. 아,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날씨군요." "네, 그렇군요." 재클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견디기 어려워요.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도 같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재클린은 멍하니 강가의 모래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양 손을 꼭 잡았다. 잠시 후, 희미하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포와로 씨,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 순간 포와로의 눈이 재클린과 마주쳤다. 다음날 포와로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그녀가 무엇을 호소하는 시선을 자기에게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포와로는 그 후로도 자꾸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포와로는 자기 방으로, 재클린은 전망실로 각기 향했다. 밴 슈일러의 심부름을 끝낸 코넬리아는 수놓을 감을 챙겨서 전망실로 갔다. 그녀는 조금도 졸립지 않고 더욱 정신이 맑아졌다. 그곳에는 네 명이 여전히 브리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팬숍도 계속 독서를 하고 있었다. 코넬리아는 탁자 앞에 수놓을 재료를 놓고 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재클린이 들어오더니 고개를 젖히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코넬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먼저 재클린이 코넬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육지에 내렸었나요?" "네, 달빛을 받아 참 신비하게 보이더군요." 재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밤이군요. 맞아요, 신혼 여행에 적당한 밤이군요." 그녀는 이미 브리지 게임에 열중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리넷과 시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가 앞에 나타났으므로 재클린은 진을 주문했다. 그 순간 시몬 도일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넷이 남편에게 게임을 독촉했다. "시몬, 당신 순서예요. 어서 해요." 재클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웨이터가 진을 갖다주자 잔을 들어올렸다. "범죄를 위해서!" 단숨에 잔을 비운 재클린은 다시 한 잔을 더 시켰다. 시몬이 또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재클린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페닝턴이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재클린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녀의 목소리를 점점 더 커졌다. "그는 그녀의 애인이었어. 어느 날, 그 남자는 배신을 했지요." 시몬이 놀라며 페닝턴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카드를 잘못 내고‥‥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어차피 이렇게 왔으니 마지막 3회전까지 계속해야겠습니다." 그때 리넷이 일어났다. "나는 그만 자러 가겠어요." 레이스 대령도 시계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 잘 시간이 다 됐군." 페닝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시몬, 당신은 선실로 가지 않을래요?" "나는 한 잔 하고 잠시 후에 가겠어." 리넷은 먼저 그곳을 떠났다. 그 뒤를 쫓아 레이스 대령이 자리를 떴고, 페닝턴도 한 잔 마시고 나서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코넬리아도 수놓는 재료를 거두며 돌아갈 채비를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재클린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지 말아요. 부탁이니 나와 함께 있어 줘요.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코넬리아는 그녀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같이 있는 게 좋아요." 재클린은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으나, 그 웃음소리는 기쁘거나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때 주문한 술을 가지고 웨이터가 왔다. 재클린이 코넬리아에게 술을 권했다. "자, 한 잔 마셔요." "아뇨, 전 생각이 없는 걸요." 재클린은 다시 의자에 몸을 깊숙히 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렷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다. "그는 그녀의 애인이었어. 어느 날 그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지요‥‥" 팬숍은 잡지를 한 장씩 넘겼다. 시몬도 책을 한 권 들고 건성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코넬리아는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젠 자러 가야겠어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재클린은 우악스런 목소리로 싸울 듯 덤볐다. "당신은 아직 가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야 해요. 자, 어서 당신에 대해 말해 봐요." 코넬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저 집에만 있었지요. 그리고 여행을 한 적도 거의 없고, 이게 첫 번째 여행이랍니다. 지금은 참 즐겁고 행복해요." 재클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게 사는군요. 나도 당신처럼 살면 좋겠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코넬리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재클린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바로 코넬리아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방에는 팬숍과 시몬 도일 밖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팬숍은 독서에 몰두해 있었고, 시몬 도일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클린이 다시 재촉했다. "어서 당신 이야기를 좀 해 줘요." 코넬리아는 남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미였으므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일상적인 일까지 말했다. 코넬리아는 지금까지 남의 말을 듣는 타입이었으므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자꾸 코넬리아에게 이야기하기를 보챘다. 코넬리아가 말을 멈추면 그녀는 또다시 재촉했다. "어서, 계속해요. 어서요." 그녀는 싫지만 어쩌지 못하고 계속 말을 했다. "네, 아주머니는 까다로운 점은 있지만‥‥ 때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콘프레이크같은 가벼운 음식 밖에 들지 못할 때도 있어요." 코넬리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재클린이 굉장히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건성으로 재미있는 듯 꾸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녀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닐까도 의심했다. 그러나 그 방에는 달리 관심을 둘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미술 강좌도 듣지요. 그리고 지난 겨울에는‥‥" 코넬리아는 이야기하다 말고 다른 생각에 잠겼다. "몇 시일까? 시간이 꽤 흘렀을 거야. 오랫동안 이야기했거든.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어." 코넬리아의 생각대로 금새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재클린은 고개를 돌려 시몬에게 말했다. "시몬, 벨을 울려 줘요. 나는 한 잔 더 마셔야겠어요." 시몬은 잡지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재클린을 쳐다보았다. "재키, 그만 마셔. 너무 많이 마셨단 말야." 재클린은 달려들 듯이 날카롭게 쏘아 부쳤다. "당신이 왜 참견이에요?" 시몬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말했다. "그렇지,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 재클린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몬, 두려운가요? 내가 겁나나요?" 시몬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잡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코넬리아가 잊었다는 듯이 급히 말했다. "나는 가겠어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주섬주섬 수놓던 재료를 챙겼다. 그러다가 코넬리아는 그만 골무 하나를 떨어뜨렸다. 재클린이 다시 애원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가지 마요, 코넬리아. 누구든 여자가 내 옆에 있어 줘야 해요. 나를 좀 위로해 줘요. 당신은 저기 앉아 있는 시몬이 왜 두려워 하는지 이유를 아나요? 시몬은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봐 지금 두려운 거랍니다." 그녀는 또다시 웃었다. 코넬리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코넬리아, 내 말 잘 들어요. 시몬과 나는 약혼했었죠." "아니, 뭐라고요? 두 분이 약혼했었다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순간 코넬리아의 가슴 속에 이상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녀는 시몬 도일이 지독히 뻔뻔하다고 느꼈다. 재클린은 천천히 말했다. "네, 그게 사실이에요. 슬픈 일이지요." 그녀는 낮은 소리로 쓸쓸히 말했다. "저 사람은 내게 상처를 주었어요. 시몬, 내 말이 틀렸나요?" 시몬 도일은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재키, 그만 가서 자. 당신은 너무 취했어." "당신이나 가서 자도록 해요." 시몬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책을 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상관없다는 듯 불쾌하게 한 마디 했다. "내 참견은 마시오.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 코넬리아는 난처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거듭 중얼거렸다. "이제 가야 해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재클린은 당황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코넬리아, 가지 말아요. 가면 안 돼요. 자, 앉아서 나와 얘기 좀 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재키, 이게 무슨 추태요. 어서 가서 잠이나 자도록 해요." 시몬이 말하자 재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르르 떨면서 한바탕 퍼부었다. "시몬, 당신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봐 두렵죠? 그게 쓸데없는 영국인 곤조예요, 곤조. 내가 추태를 부리거나 말거나 당신은 참견하지 말아요. 당신이나 여기서 나가요. 어서 리넷에게 가 봐요. 나는 여기서 더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팬숍은 책을 덮고 하품을 한 번 한 뒤, 시계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영국인다운 태도가 엿보였지만 어쩐지 어색한 몸가집이었다. 재클린은 아예 몸을 돌려 앉아 시몬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참 한심한 사람이군요. 아니, 나를 배신하고도 내가 마음이 편안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시몬 도일은 크게 당황하여 그녀의 말이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시몬은 입을 벌려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재클린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넬리아는 돌발적인 재클린의 감정 변화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흥분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왔으므로 재클린의 행동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말했던 것이 기억날 거예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지내는 걸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나아요. 당신은 그 말을 믿지 않았겠죠? 그러나 그건 착각이에요. 나는 기회를 보고 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약혼자예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사실은 어쩔 수 없어요." 시몬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재클린은 쉬지 않고 말을 퍼부었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건 진정이에요." 다음 순간 앞으로 몸을 숙였던 그녀의 손에서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렇게 쏘아버려야 해. 더러운 개 같이‥‥" 순간 시몬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지만 재클린이 이미 방아쇠를 당긴 후였다. 시몬은 몸을 굽히며 힘없이 의자에 쓰러졌다. 코넬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침 난간에 짐 팬숍이 기댄 채, 서 있었다. "팬숍 씨, 팬숍 씨!" 팬숍이 급히 달려오자 코넬리아는 그를 붙잡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녀가 쏘았어요. 재클린이 그를 쏘았단 말예요. 오, 하느님!" 시몬은 의자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클린은 마치 돌처럼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시몬의 바지를 붉게 물들이는 피를 쳐다보았다. 재클린이 쏜 총알은 시몬의 무릎 밑을 관통한 것 같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상처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 재클린은 겨우 입을 열었다. "오, 하느님! 나는 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재클린은 부르르 떨면서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가 발로 권총을 건드려 소파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몬은 모기 소리만 하게 중얼거렸다. "팬숍 씨, 어서‥‥ 누가 오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적당히 돌려 보내세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요. 모두가 놀라선 안 돼요." 팬숍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갔다. 문 앞에는 눈을 크게 뜬 누비아인이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소. 별일 아니니 걱정 마오." 그 사람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팬숍은 그가 돌아가자 시몬에게 다가왔다. "잘 됐습니다. 누구도 총소리는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콜라 마개를 딴 줄 알테니까. 자,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지‥‥" 그때 갑자기 재클린이 발작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오, 하느님. 이를 어쩌나. 나는 죽어야 해요. 죽어 버려야 해요. 나는 차라리 죽는 게 좋아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코넬리아가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조용히 해요, 그만 진정해요." 시몬의 찡그린 얼굴 위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어서 재키를 데리고 나가요. 제발 빨리요! 그녀의 방으로 데려 가요, 팬숍 씨. 롭슨 양은 간호원을 데려와요." 시몬은 서둘러 그들에게 말했다. "재키를 혼자 두면 안 돼요. 간호원에게 재키를 지키라고 해요. 그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그리고 베스너 박사 좀 모셔 와요.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 줘요." 팬숍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신중한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일을 처리했다. 재키는 팬숍과 코넬리아의 손에 끌려 마구 몸부림치면서 자기 방으로 갔다. 그들은 방에서도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 거칠고 커져 가고 있었다. "나는 물에 빠져 죽을 거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시몬, 시몬!" 팬숍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어서 가서 바워즈 양을 데려와요. 나는 여기서 여자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코넬리아는 급히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에도 재클린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의 다리에‥‥ 피가 나요. 피가 흐른단 말이에요.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을지도 몰라요. 시몬! 내가 시몬에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재클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점점 커지자 팬숍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진정해요. 자, 조용히‥‥" 그녀는 계속 몸부림쳤다. "이 손 놔요. 나는 물에 빠질 거예요. 나는 죽는 게 나아요. 나를 말리지 말아요." 팬숍은 강제로 그녀를 침대에 눕도록 했다. "자, 가만히 누워 있어요. 소란 피우지 말고 진정해요. 이제 괜찮아요. 안심해도 돼요.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다소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코넬리아와 함께 딘정한 옷차림의 바워즈가 들어왔다. 팬숍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워즈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녀는 침착하게 손을 움직였다. 팬숍은 이제 재클린을 바워즈에게 맡기고 베스너 박사 방으로 급히 갔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님!" 베스너 박사는 코를 골며 한참 잠을 자다가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팬숍이 그때 불을 켰으므로 베스너 박사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박사님, 도일 씨가 총에 맞았습니다. 재클린이 그랬어요. 지금 전망실에 있으니 급히 좀 가세요." 베스너 박사는 몇 마디 질문을 한 후, 실내복 차림으로 간단한 진찰 가방을 들고 팬숍과 함께 전망실로 갔다. 시몬은 겨우 창문을 열어놓고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찬 공기를 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베스너박사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닥에는 피가 잔뜩 묻은 손수건이 한 장 널려있었고, 카페트 위에는 붉은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베스너 박사는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상태가 아주 나쁜데. 뼈가 부러졌고 출혈도 많아서. 팬숍 씨, 내 방으로 데려 갑시다. 도일 씨가 걷지 못하니 우리가 부축해서." 두 사람이 시몬을 부축하려 할 때, 코넬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를 보고 박사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 왔군요. 잘 왔어요, 어서 우리를 따라와요. 당신이 좀 도와야 할 것 같으오. 이젊은이보다 더 잘 할 것 같으니. 팬숍 씨는 너무 놀라 흥분상태라서‥‥" 팬숍이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 가서 바워즈 양을 데려 올까요?" 베스너 박사는 코넬리아를 쳐다보다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코넬리아, 해 낼 수 있을까? 혹시 기절하는 일은 없겠지?" 그녀는 진지한 학생처럼 다소곳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 잘 할 수 있어요. 네, 자신있어요." 베스너 박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시몬을 부축하고 갑판으로 나갔다. 베스너 박사는 방에 도착한 후, 10분 동안 응급치료를 했다. 그 짧은 동안에도 팬숍은 역겨워서 진땀을 흘렸다. 그는 코넬리아의 침착하고 의연함에 자기가 더욱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베스너 박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군요. 코넬리아, 수고했어요." 베스너 박사는 그녀에게 칭찬을 한 후, 시몬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었다. 박사는 주사기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 잠을 자게 해 주죠. 참, 부인에게는 알릴까요?" 시몬은 나지막히 말했다. "아니, 일부러 알리지는 마십시오. 여러분, 그리고 재키를 탓하거나 욕하지 마세요. 모두가 제 탓입니다. 나는 재키에게 못할 짓을 했어요. 이게 모두 제 잘못 때문입니다. 그 불쌍한 여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나도 이해합니다." 시몬은 거듭 자기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넬리아를 바라보며 애원조로 말했다. "재키를 지켜야 해요. 그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베스너 박사가 주사를 놓는 것을 도와주며 코넬리아가 여유있는 태도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바워즈 양이 옆에 있을 거예요." 시몬은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이내 번쩍 뜨고 말했다. "팬숍 씨?" "네, 왜 그러시죠?" "권총‥‥ 그곳에 그냥 두어서는 안 돼요. 굴러다니다가 아침에 웨이터의 눈에라도 뜨인다면 곤란하니까‥‥" 팬숍은 재빨리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서 권총을 가져오죠." 팬숍이 갑판을 걸어가는데 바워즈 양이 선실 문 앞에 나왔다. 그녀는 팬숍에게 말했다. "드벨포 양은 잠이 들었으니 안심해요. 몰핀을 한 대 주사했지요." "그러나 오늘 밤은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할 겁니다." "네, 제가 있겠어요. 몰핀 주사 때문에 흥분할지도 모르니까요." 팬숍은 다시 전망실로 향했다. 잠시 후, 베스너 박사의 선실 문을 팬숍이 두드렸다 "박사님?" "무슨 일이오?". 팬숍은 밖으로 박사를 불러낸 후 말했다. "박사님, 글쎄 권총이 없어요. 그 권총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어요." "뭐라고요?" "재클린이 시몬을 쏜 권총요. 재클린이 총을 쏘고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녀가 발로 차는 바람에 소파 밑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찾아보았지만 없던데요."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그럼, 누가 가져갔나?"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두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제각기 방으로 갔다. 12 에르큘 포와로는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한 후, 거품을 닦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나더니 레이스 대령이 들어왔다. "포와로 씨, 당신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포와로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키며 반문했다. "사건이라뇨? 무슨 일이죠?' "리넷 도일이 살해되었습니다. 어젯밤 머리에 총을 맞았나 봅니다." 포와로는 말없이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재키가 애스완의 호텔 정원에서 작은 총으로 리넷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고 싶다고 한 말이 쟁쟁 울렸다. 또 그녀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시선을 보내던 것도 떠올랐다. 그는 왜 자기가 그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하는 자첵심이 생겼다. 어젯밤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스 대령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의 공적인 신분 때문에 이 사건을 나에게 맡긴 것 같습니다. 계획대로라면 30분 안에 출항하기로 되어 있지만 내 지시가 없는 한 출발하지 않을 겁니다. 범인은 이 배의 승객이 아니라 육지에서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죠." 포와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레이스 대령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동감입니다. 그럼, 그 가능성은 배제하기로 하고 당신이 이 사건을 맡아 주십시오. 당신의 뛰어난 솜씨를 다시 볼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포와로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으면서 레이스 대령의 제의를 허락했다. "좋습니다." 그들은 곧 갑판으로 나갔다. 걸으면서 레이스 대령이 먼저 말했다. "지금 베스너 박사가 와 있을 겁니다. 아까 웨이터에게 박사를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이 배에는 욕실이 있는 특실이 네 개 있었다. 특실 중에 왼쪽의 방은 앤드류 페닝턴과 베스너 박사가 묵고 있었고, 오른쪽의 두 개는 밴 슈일러와 리넷 도일이 묵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방은 그녀의 남편인 시몬이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쓰고 있었다. 리넷 도일의 방 앞에는 웨이터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방문을 열어 주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가니 베스너 박사가 몸을 숙여 침대에 있는 리넷 도일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그가 불평을 해 댔다. 레이스 대령이 박사에게 질문했다. "박사님,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스너 박사는 생각에 골몰한 듯 수염도 깎지 않은 턱을 비벼댔다. "네, 도일 부인은 가까운 거리에서 쏜 총알을 맞았습니다. 자, 여깁니다. 이 귀 윗부분을 맞았어요. 이곳이 총알이 관통한 자리입니다. 아주 작은 총알입니다. 22구경 같기도 하고‥‥ 권총을 이부분에 바짝 대고 쏘았기 때문에 피부가 까맣게 탔습니다." 포와로의 기억 속으로 또다시 재클린의 말이 떠올랐다. 박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리넷은 자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반항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요. 범인은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잠자는 여자를 쏘았어요." 그때 포와로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는 아무리 가정이라고 해도 재클린이 권총을 들고 어두운 선실에 몰래 침입하여 리넷에게 가까이 가는 장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박사는 안경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사건은 이렇게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네, 그건 맞습니다. 저도 당신 생각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베스너 박사는 흡족해 하는 태도였다. 포와로는 바짝 침대 곁에 섰다. 리넷 도일은 약간 옆으로 누운 상태로 죽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귀 위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포와로는 시체를 바라보고 나서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포와로의 눈길이 정면의 흰 벽에 고정되었다.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흰 벽에는 적갈색으로 영문자 'J'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포와로는 노려보듯 그 글자와 씨름했다. 그는 목을 숙이고 리넷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았다. 손가락 하나에 적갈색의 피가 묻어 있었다. 포와로는 무의식중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베스너 박사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니, 이건?" 또다시 레이스 대령이 물었다.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셨죠?" "뭐요?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고요? 그거야 간단하죠. 도일 부인은 쓰러지면서 범인을 알리려고 손에 피를 묻혀 이름의 첫 글자를 쓴 거죠. 그거야 아주 단순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지만 내 생각은‥‥" 베스너 박사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레이스 대령이 그의 말을 불쑥 막고 나섰다. 대령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보았습니까?" 포와로는 대령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건 지극히 단순한 방법입니다. 흔히 쓰고 있는 방법이죠. 추리 소설에 많이 쓰이는 방법이지요. 네, 그건 아주 낡은 수법이에요. 범인은 그렇게 우리를 유도하는군요." 레이스 대령이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는 말을 하다가 그만 중단해 버렸다. 포와로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드라마의 전통적인 수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 건가요? 그건 그렇고 박사님, 아까 무슨 말을 하시려 했죠?" 베스너 박사는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쉬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말해 나갔다. "나는 어리석은 얘기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단 말입니다. 맞아요, 그건 엉뚱한 생각입니다. 리넷 부인은 즉사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피를 묻혀서 벽에다 'J'라는 글씨를 썼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이에요. 앞뒤 이치가 맞지 않는 이야기예요."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럼, 그건 일종의 트릭이군요?" 포와로는 거의 울상이 되어 무겁게 대답했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J'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죠?" "네, 그건 재클린 드벨포일 겁니다. 그녀는 며칠 전 나에게 자기의 작은 권총을 리넷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답니다." 베스너 박사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레이스 대령이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과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군요."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작은 총알이더군요. 아마 22구경일 겁니다. 총알을 꺼내 보기 전에는 확실히 단정짓기 어렵지만요." 레이스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했다. "사망한 시간은 언제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까?" 베스너 박사는 덥수룩한 수염을 어루만졌다.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이 8시니까 사망한 지 6시간은 경과한 것 같습니다. 어젯밤의 기온을 고려해 보면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죠." "그럼, 사건은 자정부터 새벽 2시 사이에 일어난 셈이로군요." "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시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레이스 대령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남편은 저 방에서 자고 있었죠?" 그 말에 베스너 박사가 나섰다. "아닙니다. 시몬은 지금 내 선실에서 자고 있어요." 박사의 말에 대령과 포와로가 깜짝 놀랐다. 그때서야 베스너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내가 지금껏 말하지 않았군요. 도일 씨가 어제 전망실에서 총에 맞았답니다." "총에 맞아요? 아니 누가 쏘았죠?" "네, 바로 재클린 드벨포가 쏘았습니다." 이번에는 레이스 대령이 급히 물었다. "많이 다쳤나요?" "네, 뼈가 부러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다 했으나 어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포와로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아, 재클린 드벨포!" 그는 다시 시선을 벽 위에 씌어진 'J'라는 글자에 고정시켰다. 그때 레이스 대령이 말했다. "여기서 지금 해야 할 일이 없다면 흡연실로 갑시다. 우선 그곳을 사용하겠다고 했으니 그곳에 가서 어젯밤 사건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들이 선실에서 나오자 레이스 대령이 문을 잠근 후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죠. 우선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야 일이 쉽게 풀리겠죠." 그들이 흡연실로 가자 입구에서 이 배의 지배인이 자못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지배인은 수심에 찬 얼굴로 모든 일을 레이스 대령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대령님이 이 일을 모두 맡아 주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대령님의 뜻대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았습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포와로 씨와 나만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지금은 다른 부탁이 없으니 당신은 이제 가서 일을 보십시오. 필요하다면 내가 부르겠습니다." 지배인은 다소 밝아진 얼굴로 그 방을 나갔다. 레이스 대령이 박사에게 말했다. "자, 박사님. 앉으셔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은 베스너 박사의 길고 지루한 설명을 경청했다. 베스너 박사가 말을 끝내자 레이스 대령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겠습니다. 재클린은 술을 마시고 나서 흥분 상태로 가가이에서 22구경 권총을 쏘았군요. 그러고 나서 리넷 도일의 선실에 가서 그녀까지 쏘았던 거고요." 그 말에 베스너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틀린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죠. 리넷은 벽에다 어떤 이름의 첫글자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즉사했으니까요." 그러나 레이스 대령은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뇨,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글쎄‥‥ 소문처럼 그녀가 질투로 복수를 결심했다면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심정이라면 충분히 자기의 이름을 써놓았을 겁니다." 포와로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건 한 가지 설명 밖에 남지 않겠군요. 범인은 살인을 하고 그 죄를 재클린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트릭을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베스너 박사도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범인은 아주 운이 나빴습니다. 재클린은 살인할 사람도 못되고 또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어제의 상황으로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불가능한 이유가 뭡니까?" "네,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바워즈가 밤새 그녀 옆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레이스 대령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럼,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군요." 이번에는 포와로가 물었다. "시체를 맨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굽니까?" "도일 부인의 하녀인 루이스 버제트입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아침에 도일 부인을 깨우러 가서, 부인이 죽어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뛰쳐 나와 웨이터에게 말했답니다. 웨이터는 즉시 지배인에게 보고했고, 지배인은 나에게 알렸죠. 나는 즉시 베스너 박사를 모셔 오게 하고 곧장 포와로 씨, 당신에게 간 겁니다." 레이스 대령이 그제서야 생각이 나는지 말했다. "도일 씨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금껏 자고 있습니까?"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방에서 잘 겁니다. 어제 좀 강한 수면제 주사를 놓았기 때문이지요." 레이스 대령이 포와로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베스너 박사가 여기 같이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질문도 끝났고 더 물어 볼 말이 있습니까?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베스너 박사가 방을 나가자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는 약속한 듯 마주보았다. "포와로 씨,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어서 당신의 의견을 말해주시오. 나는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 맡아서 일해주시오. 먼저 무슨 일부터 해야 하는 거죠?" 포와로는 선선히 대령의 청을 승낙했다. "알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고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젯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인 롭슨 양과 팬숍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합시다. 그리고 권총이 없어졌다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레이스 대령이 벨을 누르자 웨이터가 왔다. 대령은 그에게 롭슨 양과 팬숍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포와로는 길게 한숨을 거듭 쉬었다. "이거 참, 복잡한데‥‥ 너무 머리가 아파‥‥" 레이스 대령이 구원을 청하듯 그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포와로 씨, 좋은 생각 없습니까?" "아뇨,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요.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재클린이 리넷을 죽이고 싶어했다는 거죠." "당신은 재클린이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 있다고 보는 겁니까?" "네, 그건 가능한 일입니다." 포와로의 말소리는 자신만만하지도 않았고 단호한 기색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방법을 생각하고 있죠. 이런 방법은 적합하지 않다 하고 - 캄캄한 밤에 몰래 들어가 여자의 머리를 겨누어 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건 너무 잔인한 방법이므로 여자들은 그런 방법을 쓰기가 곤란하죠." "당신은 지금 재클린 같은 여자는 잔인하게 살인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죠? 글쎄, 그녀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아무래도 그런 잔인한 짓은 하지‥‥" 레이스 대령은 포와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박사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살인을 할 상황은 아니었고‥‥" "네, 박사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혐의는 검토해 보아야겠지요. 아니 그게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게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너무 가엾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팬숍과 롭슨 양이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베스너 박사도 들어왔다. 코넬리아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리넷 부인이 불쌍해요. 오, 가엾은 분! 누가 그 아름다운 부인을 죽였을까요? 미친 사람이에요. 도일 씨도 불쌍하고요. 그는 부인이 죽은 걸 알면 실성할 거예요. 도일 씨는 자기가 총에 맞은 걸 부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답니다. 아내가 놀랄까봐 걱정해서 그런 거죠. 얼마나 부인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코넬리아 양, 어제 일어난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빠짐없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코넬리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포와로가 간단한 질문을 시작하자 생각을 정리하며 답변했다. "네, 알겠습니다. 브리지 게임을 그만 두고 도일 부인은 자기 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선실에 갔는지는 확인하지 않아서 단정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레이스 대령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선실로 갔어요. 내가 문 앞에서 그녀와 저녁 인사까지 나누었답니다." "그때 시간은?" 코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레잇 대령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럼 11시 20분에는 리넷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때 전망실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팬숍이 말했다. "도일 씨와 재클린 양, 나와 코넬리아 양이 있었습니다." 코넬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페닝턴 씨는 술만 한 잔 마시고 방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된 후였습니까?" "아마 3,4분 쯤 지나서 일 거예요." "그럼, 11시 30분이 미처 안 된 시간이군요." "네, 그럴 겁니다." "그럼, 전망실에는 롭슨 양과 재클린, 그리고 도일 씨와 팬숍 씨가 있었군요. 그때 무엇을 했지요?" "팬숍 씨는 독서를 했고 저는 수를 놓았지요. 또 드벨포 양은 저‥‥ 그녀는‥‥" 그 다음 말은 팬숍이 나서며 말했다. "재클린 양은 술을 마셨습니다." 코넬리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네, 그랬어요. 그녀는 제게 많은 질문을 했답니다. 재클린은 쉬지 않고 제게 말을 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은 제게 하는 게 아니라 도일 씨를 의식해서 하는 말 같더군요. 도일 씨는 몹시 화가 나 있었어요. 그는 잠자코 있는 게 재클린의 흥분을 가라앉힌다고 생각한 거 같더군요." "그러나 그녀가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나요?" "저는 너무 늦어서 제 방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녀가 막무가내로 저를 막았어요. 저는 그 자리가 거북했어요. 잠시 후, 팬숍 씨가 방에서 나갔고‥‥" 팬숍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나도 당황했었습니다. 내가 있으면 그들이 불편할 거 같아서 그곳을 나갔지요. 저도 재클린이 소동을 부릴 거라고 짐작을 했습니다." 코넬리아가 나서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재클린이 흥분해서 권총을 뽑았어요. 도일 씨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 그녀의 총을 뺏으려고 하자 그녀는 총을 쏘았어요. 도일 씨는 다리에 총을 맞고 그녀는 발작하듯 울음을 터뜨렸어요. 나는 놀라서 급히 팬숍 씨에게 달려갔습니다. 곧 그와 전망실에 돌아오니 도일 씨는 일을 조용히 수습하자고 하더군요. 그때 웨이터가 총소리를 듣고 달려왔기 때문에 팬숍 씨가 적당히 돌려보냈습니다. 그후, 재클린을 방에 데려다두고 팬숍 씨는 그녀의 방에 있고 저는 바워즈 양을 부르러 갔어요." 코넬리아는 쉬지 않고 말한 후,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시간이 몇 시쯤이죠?" 레이스 대령의 물음에 코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팬숍이 나서며 말했다. "아마 12시 20분 쯤일 겁니다. 내가 제일 끝으로 내 방에 갔는데 그때가 12시 30분이었습니다." 포와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건 중요한 질문이니 잘 답변해 주세요. 도일 부인이 전망실에서 나간 후 당신들 중에서 밖에 나갔던 사람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네, 재클린도 분명히 전망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도일 씨, 재클린 양, 롭슨 양, 그리고 나도 그 방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재클린 양도 12시 20분까지는 도일 부인을 쏘지 못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군요. 그럼 당신이 그녀의 방에서 떠나 바워즈 양을 부르러 갔을 때 재클린 양은 혼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는 팬숍 씨가 옆에 있었습니다." "아, 알았습니다. 모두 종합해보면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하군요. 이젠 바워즈 양과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그녀와 만나기 전에 당신의 의견을 참고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일 씨는 드벨포 양을 혼자 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했다는데, 그럼 도일 씨는 정말로 그녀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팬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일 씨는 드벨포 양이 자기 부인을 해칠까 봐 두려워했다는 말입니까?" 팬숍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도일 씨는 그녀가 스스로 자살을 할까 봐 걱정하는 거 같았습니다." "아, 재클린이 자살할 것을 걱정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재클린은 도일 씨를 쏜 후,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죄책감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했지요. 자기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울부짖더군요." 코넬리아도 침착하게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일 씨는 재클린을 걱정했지요. 도일 씨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했어요. 자기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하더군요." 포와로는 그 말을 다 듣고 난 후, 다시 계속 질문을 했다. "그럼 권총에 대해 묻겠는데요, 권총은 어디에 있죠?" 코넬리아가 먼저 말했다. "재클린이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래서 그 권총을 어떻게 했지요?" 그 다음의 말은 팬숍이 받아서 자기가 전망실에 권총을 찾으러 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 포와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론을 내릴 수 있겠군요. 그럼 그때의 상황을 더 자세히 말해주시죠." 코넬리아가 여유있는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재클린이 권총을 쏜 후, 힘없이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곤 발로 찼지요. 그녀는 권총이 끔찍했나 봐요. 저는 그런 상황의 재클린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 그래서 권총이 소파 밑으로 들어갔나 보군요.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답변해 주십시오. 재클린은 전망실을 나가기 전에 권총을 다시 줍지 않았습니까?" 팬숍과 코넬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건 중요한 문제라 신중해야 하니 두 분은 이해해 주십시오. 재클린이 전망실에서 자기 방으로 갈 때 권총이 소파 밑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녀는 선실로 돌아가서도 팬숍과 롭슨 양, 그리고 바원즈 양이 옆에 지키고 있어서 권총을 가지러 갈 수 없었습니다. 팬숍 씨가 권총을 찾으러 전망실에 간 건 언제죠?" "아마 12시 30분이 안 되었을 때 일 겁니다." "그럼 베스너 박사와 도일 씨를 방으로 옮기고 전망실에 권총을 가지러 갈 때까지는 얼마나 경과한 후였죠?" "글쎄 5분 후, 아니 그보다 좀 지난 후였는지도 모르죠." "그럼, 그 짧은 시간에 누군가 전망실에 들어가 소파 밑에 권총을 가져간 거로군요. 재클린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권총을 가져간 사람이 리넷을 살해한 범인일 겁니다. 그 살해범은 어젯밤 일어난 사건을 뒤에서 보았을 겁니다." 팬숍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그 권총은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누군지 권총이 그곳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권총을 가져 간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팬숍은 완강히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사건 직전에 갑판에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포와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오른쪽 문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왼쪽 문의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어도 당신은 그걸 몰랐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요." "흑인 웨이터 외에 또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는 거 같은데요.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밴 슈일러가 바람이 들어온다고 회전문까지 닫았지요. 총소리는 가까이에서도 듣지 못했을 겁니다. 글쎄, 들렸다고 해도 아마 병마개를 따는 소리쯤으로 생각했겠죠." 이번에는 레이스 대령이 나섰다. "내 생각도 같습니다. 아마 아무도 그 총소리는 못들었을 겁니다. 네‥‥ 리넷을 쏜 총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을 거예요."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재클린의 일을 처리해야겠습니다. 이제 바워즈 양을 만나야겠습니다. 참, 여러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몇 말씀 해 주십시오. 먼저 팬숍 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제임스 리치데일 팬숍입니다." "주소는?" "영국 노댐프튼셔주 마켓 터닝턴시 글래스모어 하우스입니다." "직업은 무엇이죠?" "변호사입니다." "여행 목적은 무엇이죠?" 그 질문에 침착한 팬숍은 약간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는 얼마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냥 관광 여행이죠." 포와로는 일부러 감탄하듯 말했다. "아, 휴가 기간이군요. 맞습니까?" "아, 예." "알았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젯밤 사건이 일어난 후 무엇을 했죠?" "바로 잤습니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죠?" "12시 30분이 지난 직후입니다." "당신은 22호실에 묵고 있습니까? 전망실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는데요, 당신의 방에 간 후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팬숍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바로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막 잠이들려는 순간에 물이 첨벙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물이 첨벙하는 소리? 그건 가까이서 들렸나요?' 팬숍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세,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때는 이미 잠이 들어 있어서요." "그럼, 그때는 몇 시 경이었죠?" "아마 1시 경일 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요." "팬숍 씨,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포와로의 시선은 이미 코넬리아에게 고정되었다. "롭슨 양, 이름은 무엇이죠?" "코넬리아 루스이고, 주소는 미국 코네티컷주 벨필드시 레드 하우스입니다." "이집트에는 왜 왔죠?" "메리 아주머니인 밴 슈일러를 따라 온 겁니다." "이전에 혹시 도일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만났습니다." "당신은 어젯밤에 무엇을 했습니까?" "베스너 박사님을 도와드린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당신 방은?" "왼쪽의 41호실입니다. 재클린의 방 바로 옆이지요."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나요?" 코넬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못 들었습니다." "물이 첨벙하는 소리도 못들었습니까?" "못들었는데요. 제 방은 육지 방향이기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롭슨 양,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바워즈 양에게 이리 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코넬리아와 팬숍이 함께 방에서 나갔다. 레이스 대령이 먼저 말했다. "이제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 것 같은데, 세 사람의 증언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재클린은 그 권총을 다시 잡지 못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소행이라고 볼 수 있죠. 즉 누군가 뒤에서 사건을 지켜보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벽에다 'J'라는 글씨를 써놓은 거죠." 그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곧 바워즈가 들어왔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였다. 바워즈는 포와로의 의례적인 질문에 천천히 이름, 주소, 자격 등등을 답변했다. 그리고 덧붙여 한 마디 더 했다. "저는 슈일러를 돌본 지 2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건강이 그 정도로 악화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건강이 나쁘지는 않아요. 그녀는 젊은 나이도 아니므로 항상 간호원을 가까이 두려고 한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신경을 집중시키려는 거지요. 그 댓가로는 돈을 지불하고요." 포와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당신을 부르러 간 사람은 롭슨 양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때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롭슨 양은 간단히 무슨 일이 일어났나 말해 주더군요. 그녀를 따라가 보니 드벨포 양이 흥분해 있었습니다." "드벨포 양이 도일 부인을 협박하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어요.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거 같았고요. 저는 드벨포 양은 혼자 두어선 안 될 것 같아서 몰핀을 주사하고 그옆에 있었습니다." "혹시 그녀가 방을 나가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요." "그럼, 당신은 나갔습니까?" "새벽까지 계속 드벨포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워즈가 방에서 나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재클린 드벨포는 완전히 혐의가 벗어진 것이다. 그럼 누가 리넷을 쏘았을까? 13 레이스 대령이 천천히 말했다. "맞아요, 누가 몰래 권총을 가져갔습니다. 재클린 드벨포가 아닌 다른 사람이요. 재클린에게 혐의가 가도록 트릭을 쓴 거죠. 아마 범인도 간호원이 밤새도록 옆에 있고 그녀가 몰핀주사를 맞아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건 생각지 못했겠죠. 그 범인은 신전의 절벽에서 바위를 굴려뜨려서 리넷을 죽이려고 했던 자일 겁니다. 그것도 재클린은 아니었지요? 그런 누가 범인일까요?" 포와로가 다시 말했다. "불가능한 사람부터 의심하는 게 더 쉽지요. 도일 씨, 앨러튼 부인, 팀 앨러튼, 밴 슈일러 양, 바워즈 양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혐의를 가질 사람이 여럿 있군요. 동기가 무엇이죠?" "그 점은 도일 씨에게 한 번 질문해 봅시다. 지금까지의 사고도 있으니까요." 그때 불쑥 재클린 드벨포가 들어왔다. 그녀는 시체같이 창백했다. 그녀는 금새 쓰러질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저는 죽이지 않았어요. 제가 한 짓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모두 나를 의심하겠죠? 끔찍해요.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원치 않았어요. 저를 믿어 주세요. 어제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나는 시몬을 죽일 뻔 했어요. 그렇지만 리넷은 내가 죽이지 않았어요." 재클린 드벨포는 의자에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포와로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이제 진정해요. 우리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그 사실은 입증되었으니까요. 당신이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재클린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럼, 누가 그녀를 살해했죠?" "지금 우리가 알아내야 할 숙제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좀 도와 주십시오." 그러나 재클린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무 생각도‥‥"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저 이외에는‥‥" 레이스 대령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잠깐 실례합니다. 급히 생각난 게 있어서요." 레이스 대령은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재클린은 초조함을 억제할 수 없는지 손을 비비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죽음은 끔찍해요. 네, 그건 끔찍한 일이에요. 생각만 해도 무섭고 두려워요." "네, 그렇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누군지 자기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대해 즐기고 있는 이 순간에는요." 갑자기 재클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만, 제발 그만 두세요. 이제 그 말만 들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단 말이에요." "네, 물론 그렇겠죠." 재클린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네, 저는 리넷이 죽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정말 그녀가 죽었어요. 그것도 내가 말한 방법대로‥‥" "네, 그녀는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내가 포와로 씨에게 말한 것과 똑같은 방법이죠. 그때 누가 내 말을 엿들었나 봐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꽤 궁금했습니다. 참 우연의 일치군요. 리넷은 당신이 말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재클린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그날 우리의 말을 엿들은 남자는 누구일까요?" 포와로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얼마 후 입을 열었다. "왜 그게 남자라고 생각하시죠?" "네, 저는‥‥" "서슴치 말고 말씀하십시오." 재클린은 생각을 더듬는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아주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저는 그냥 남자같이 생각되었어요." "그럼 확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워요. 저는 그때 막연히 남자 같았어요. 남자 형체 같은 게 비쳤었지요. 그림자 같았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럼, 지금은 여자라고 생각합니까? 이 배의 승객 중 그 누구도 리넷을 살해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포와로는 머리를 완강히 흔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베스너 박사가 들어왔다. "포와로 씨, 잠깐 도일 씨를 만나 주세요. 그가 당신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재클린은 이 말에 벌떡 일어나서 박사의 팔에 매달렸다. "박사님,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뼈가 부러져서 천만다행입니다." 베스너 박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박사님,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죠?"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마시오. 시설이 훌륭한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적절히 치료를 하면 될 거요." 재클린은 감격한 듯 두 손을 움켜잡고 의자에 앉았다. 포와로가 베스너 박사와 갑판 위로 나가자 레이스 대령이 가까이 왔다. 세 사람은 곧바로 박사의 방으로 향했다. 시몬 도일은 베개와 쿠션을 등에 괴고 다리에는 임시로 부목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그는 흰 종이처럼 창백해 보였으며 얼굴은 고통스러움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나는 박사님한테서 벌써 리넷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 리넷이 그렇게 되다니‥‥" "당신 심정은 이해합니다. 물론 충격이 클 겁니다." 시몬은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리넷을 죽인 건 재키가 아니에요. 네, 절대로 그녀의 짓이 아닐 겁니다. 그녀의 입장이 불리한가요? 그러나 그녀는 범인이 아닙니다. 어젯밤 흥분해서 약간의 소동은 있었지만, 그녀는 살인을 할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포와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도일 씨, 진정하십시오. 괴롭겠지만 좀 안정하셔야 합니다. 우리도 그녀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시몬은 의아한 얼굴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녀가 한 짓이 아니라면 혹시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도 생각나십니까?" 포와로의 말에 시몬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는 당황하여 얼굴이 마치 우는 것 같았다. "그건 정말 모를 일이군요. 그럼, 그녀 말고 누가리넷을 해쳤겠습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도일 씨, 심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정말 없었습니까?" 시몬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런 사람은 생각나지 않는데요. 네, 그녀가 나와 결혼해서 윈들이라는 사람을 배신하긴 했지만요. 그러나 그는 신사 중의 신사입니다. 그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또 조지 우드 경도, 리넷이 그의 저택을 사들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 있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건 불가능하죠." 포와로는 잠자코 있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도일 씨, 카나크 호를 맨처음 타던 날, 나는 부인에게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부인은 격앙된 음성으로 모든 사람들이 무섭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재클린과 함께 배를 탔기 때문에 흥분했을 겁니다. 실은 저도 두려웠으니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글쎄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적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지만 부인은 재클린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게 틀림없습니다." 시몬도 그 말은 수긍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리넷은 승객 명단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답니다." "누구의 이름이죠?" "그건 아내가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요. 저는 그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재클린 때문에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어서요. 리넷은 자기 때문에 사업이 망한 사람을 만나면 괴로워했어요. 나는 아직 리넷의 집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리넷의 어머니는 백만장자의 딸이었답니다. 아버지는 그저 부자였다가 결혼 후, 증권 투자에 관여했나 봅니다. 그래서 망한 사람이 여럿 있다는군요. 이건 제 생각이지만 이 배엔 리넷의 아버지와 사업 관계로 경쟁하다 망한 사람의 자손이 탔나 보더군요. 그녀가 지나치는 말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사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포와로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그랬군요. 그래서 부인이 내게 그런 말을 했군요. 부인은 자신의 많은 재산이 짐스러웠을 겁니다. 도일 씨, 부인이 그 사람의 이름을 정말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몬은 서글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녀에게 아버지의 일까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베스너 박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 배에 불만투성이 젊은이가 타고 있긴 한데‥‥" "퍼거슨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가 도일 부인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걸 들었지요." 시몬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을 했지요?" 그 말에 포와로가 말했다. "레이스 대령과 나는 모든 승객을 만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아무 추측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아, 그리고 하녀가 있었지요. 하녀를 먼저 만나야겠군요. 도일 씨도 여기 계십시오. 그녀의 말을 듣는 게 좋을 테니까요." 시몬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네, 좋습니다." "그녀가 도일 부인의 시중을 든 건 얼마나 됐습니까?" "2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요." 포와로가 불쑥 외쳤다. "아니, 2개월 밖에 안 되었다고요!" "혹시 당신은‥‥" "부인께서 귀금속 같은 걸 가지고 있었나요?" "네, 진주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4만 내지 5만 파운드쯤 된다고 했습니다." 시몬은 말하다가 다시 한 번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그 진주 목걸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둑질이 동기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거야 차차 밝혀지겠죠. 그럼 이제 하녀를 부르도록 합시다." 하녀 루이스 버제트는 포와로도 안면이 있는 라틴계의 거무스름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지만 교활한 면이 보였으므로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도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신이 루이스 버제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일 부인을 본 건 언제였습니까?" "어젯밤 선실에서 기다리다가 아씨가 돌아오신 후,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 드렸습니다." "그때 시간은?" "아마 10분 가량 될 겁니다. 아씨는 피곤한 모습이었어요. 저보고 나갈 때 불을 끄라고 하시더군요." "당신은 그 방에서 나와 무엇을 했습니까?" "갑판 아래쪽의 제 선실로 갔습니다." "당신은 혹시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일을 목격한 것은 없습니까? 무슨 소리 같은 걸 듣지 못했나요?" "제가 무슨 소릴 들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지금 질문하는 것이지, 당신이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포와로의 면박에 하녀는 슬쩍 쳐다보았다. "선생님, 저는 가까이 없어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제 방은 아래쪽 갑판에 떨어져 있답니다. 그리고 그 방은 반대 방향이므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글쎄요, 만약 제가 잠이 안 와서 위로 올라갔다면 살인범이 아씨 방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을 테지만요. 그러나‥‥" 하녀는 잠시 후, 시몬을 쳐다보며 애원했다. "선생님, 모두 아시잖아요. 저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죠?" 시몬이 신경질적으로 하녀를 질책했다.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 네가 무얼 보았다거나 들었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돌봐줄테니 안심 해. 너를 누가 나무라지는 않는단 말이야." 루이스는 금새 풀이 죽어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은 좋은 분이세요." 이번에는 레이스 대령이 날카롭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럼, 당신은 보고 들은 게 없단 말입니까?" "네, 들었어요. 저는 그게 누구라는 걸 알아요." 포와로가 침착하게 말했다. "드벨포 양을 말하는 건가요?" "드벨포 양도 그 중 하나지만 그녀 말고 또 있어요. 이 배에는 아씨 때문에 크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아씨를 증오하고 있어요." 시몬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루이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니 이럴 수가!" "그 사람은 바로 이 배의 기관사랍니다. 아씨를 모시던 하녀와 관계된 일이지요. 제가 오기 전에 아씨를 모시던 하녀는 기관사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아씨가 좀 알아보았더니 그 사람은 이미 기혼자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원주민으로 이집트에 돌아와 있지만 아내는 아내지요. 아씨가 그 사실을 메리에게 말해 주어서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답니다. 그후부터 기관사는 아씨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리 아씨의 결혼 전 이름이 리넷 리지웨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씨를 죽이겠다고 했대요. 아씨 때문에 자기의 인생이 엉진창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루이스는 점점 당당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스 대령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거 참 재미있는 일이군요." 포와로는 시몬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뭐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아뇨, 없는데요." 포와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도일 부인은 그 기관사가 이 배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까?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잊고 있었을 텐데요." 그는 다시 하녀 루이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혹시 리넷 아씨가 이 일에 대해 하신 말씀 같은 건 없었습니까?" "아뇨, 전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요." "그럼, 리넷 아씨의 진주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루이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주 목걸이요? 아씨는 어젯밤에도 진주 목걸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럼, 부인이 잠자리에 들 때는 목걸이를 어쨌죠?" "평상시처럼 침대맡의 탁자 위에 놓아 두었습니다." "그럼, 오늘 아침에도 그곳에 목걸이가 있었나요?" 하녀 루이스는 놀라서 눈이 커졌다. "저는 거긴 미처 못보았어요. 제가 침대로 다가가니 아가씨의 모습이‥‥ 저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갔어요. 그 후는 기절해 버렸어요." 포와로는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탁자 쪽은 못 보았다? 흠, 그러나 오늘 아침에 보니 탁자 위에는 진주 목걸이는 커녕 진주 한 알도 하나 없었지." 14 에르큘 포와로의 말처럼 리넷 도일의 침대맡 탁자 위에는 진주 목걸이가 없었다.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가 선실 밖으로 나오자 웨이터가 서 있다가 흡연실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갑판을 따라 걸었다. 그때 레이스 대령이 멈춰 서서 난간 너머를 쳐다보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팬숍이 첨벙 소리를 들었다고 할 때, 나도 어렴풋하지만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범인이 리넷을 살해하고 권총을 강물 속에 버린 건 아닐까요?" 포와로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까요?" "그저 잠시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권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그렇게도 생각해 보는 거지요." 포와로는 미심쩍은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권총을 강물에 버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그 권총은 어디에 있을까요?" 포와로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 권총은‥‥ 리넷의 방에 없다면 있을 곳에 있겠죠." "있을 곳이라니, 그게 어디죠?" "재클린의 선실일 겁니다." 레이스 대령도 심각하게 말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요." "그럼, 그녀의 방으로 가서 찾아봅시다. 그녀는 지금 방에 없을 테니까요." "조급하게 서두르지 맙시다. 아직은 그곳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럼, 이 배 선실을 모조리 조사해 볼까요." "그렇다면 공연히 의심만 받을 겁니다.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식사를 하며 생각해 봅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흡연실로 들어갔다. 레이스 대령이 커피를 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명백한 사실은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다는 것과 이 배의 기관사가 리넷을 증오한다는 사실이죠. 당신은 진주 목걸이의 행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로는 도둑질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이럴 때 진주 목걸이를 훔친다는 건 자기가 범인임을 알려주는 게 될 테니까요. 참, 도둑은 진주 목걸이를 어떻게 했을까요?" "글쎄, 뭍에 올라 은밀한 곳에 감추었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제 방에는 늘 경비원이 감시하고 있어요." "그럼, 그건 희박한 추리겠군요. 살인범이 일부러 진주 목걸이를 훔쳐 강도 살인처럼 꾸미는 건 아닐까요? 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야. 만일 도일 부인이 살아 있었을 때 도둑이 들어 진주 목걸이를 훔쳤다면‥‥" "그래서 도둑이 혼비백산하여 그녀를 쏘았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잠자고 있다가 총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이것도 가능성이 없군요. 내 나름대로 진주 목걸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 목걸이는 없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녀의 하녀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레이스 대령은 느릿느릿 말했다. "그녀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느낌이 들더군요." "나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좀 수상한 면이 있습니다." 포와로도 대령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녀는 믿지 못할 사람 같았습니다." "그럼, 하녀 루이스가 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럼, 진주 목걸이가 없어진 것과‥‥" "네, 그쪽에 더 혐의가 가는군요. 그녀는 도일 부인의 하녀가 된지 2개월 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누가 압니까, 귀금속 전문 털이범인지. 그런 패들은 신원이 확실한 하녀를 앞세워 일을 하면 손쉽겠지요. 우리가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을 조사할 수 없으니‥‥ 진주 목걸이는‥‥ 그러나 그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고‥‥" "기관사 플릿우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글쎄요‥‥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알겠죠. 지금으로선 뭐라고 말할 게 없고‥‥ 루이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뚜렷한 동기를 가진 셈이죠. 어쩌면 기관사 플릿우드가 전망실에서 재클린이 도일을 쏜 걸 엿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모두 돌아가서 전망실이 비었을 때, 몰래 권총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었겠죠. 그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글자를 써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유치한데요." 포와로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나도 내 약점은 알고 있답니다. 흔히들 에르큘 포와로는 어렵고 난해한 사건을 좋아한다고들 말한답니다. 대령이 설명한 건 아무래도 너무 단순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문이 생긴 겁니다. 과연 사건이 그런 식으로 일어날까 하고요. 물론 그 의문의 선입관 때문이긴 하지만요." "우선 그 기관사란 사람을 부르도록 하죠." 레이스 대령은 웨이터를 시켜 기관사 플릿우드를 호출했다. "포와로 씨, 또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까?"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그 미국인 재산관리인도 좀 혐의를 가질 필요가 있고요." "페닝턴 씨 말인가요?" "네. 얼마 전, 이 배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포와로는 레이스 대령에게 일전에 전망실에서 본 서류의 서명 건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다. "도일 부인은 서류에 서명하기 전에 모든 서류를 읽어보려고 하더군요. 그때 페닝턴은 당황하며 다른 날 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 시몬 도일이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습니까?" "시몬은 자기는 지금껏 서류를 읽어보고 서명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그저 서명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페닝턴도 그 뜻을 눈치챘지요. 나는 그 사람 눈을 보고 알았습니다. 페닝턴 씨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얼굴로 시몬을 쳐다보더군요. 이런 생각은 해볼 만 합니다. 누구라도 백만장자의 딸 대신 재산을 관리한다면 그 재산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 싶은 생각이 들 게 자명합니다. 그건 추리소설에 종종 나오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도 있고요." "네, 그 말이 맞아요." "재산 관리인은 리넷이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익을 많이 취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결혼을 했습니다. 재산 관리인의 수중에 있던 그녀의 재산은 이제 모두 그녀의 수중에 들어갈 위기에 처한 겁니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있죠. 그녀는 신혼여행 기간이라 사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많은 서류 사이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서류를 끼워 넣고 그녀에게 서명하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읽지 않고 서명하리라고 추측해서죠. 그러나 예상 외로 그녀는 빠짐없이 읽었지요. 페닝턴은 시몬이 서류를 검토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일 리넷이 죽고 시몬이 그 재산을 차지한다면 일은 훨씬 쉬울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시몬은 리넷과는 달리 살업가다운 데라곤 없어서 앤드류 페닝턴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페닝턴이 그런 착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감지했어요." "그건 가능한 일이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네, 그건 그래요. 유감스럽지만 증거가 없죠." "참, 퍼거슨이라는 젊은 친구는 입이 걸더군요. 혹시 그의 집안이 리지웨이 때문에 파산한 건 아닐까요? 나는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과거를 가슴 깊이 묻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레이스 대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그 다음은 내가 뒤쫓고 있는 자입니다." "아, 그 친구가 있었지요." "그는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리넷 도일에게는 원한이 있지 않겠죠. 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인 걸요." 포와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느리게 말했다. "만일 리넷이 우연한 기회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경우가 아니라면‥‥" "아, 그것도 생각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없을 듯 합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 두 번씩이나 결혼을 하려던 사나이가 나타났나 봅니다." 기관사 플릿우드는 우람하게 생긴 성질이 난폭해 보이는 사내로, 그는 방에 들어와서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포와로는 그를 보자 언젠가 하녀 루이스와 갑판에서 이야기하던 사람임을 알았다.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그랬소. 당신도 물론 어젯밤 일어난 사건은 들어서 알겠지요?" 플릿우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듣자하니 당신은 어제 죽은 도일 부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던 데요?" 플릿우드는 급습에 놀라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누가 그따위 말을 했죠?" "당신과 메리가 헤어진 게 도일 부인 때문이라고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알겠어요. 그 수다장이 프랑스 년이죠? 그 년은 수다장이고 허풍장이에요." "그러나 이말은 사실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내 말도 듣지 않고 어떻게 단정지어 말하는 거죠?" 기관사는 이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신은 리넷 부인의 하녀 메리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당신이 기혼자라는 걸 알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 사실이 죽은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죠?" "아니, 그게 도일 부인과 무관하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이곳 여인과 결혼한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 결혼은 실패였습니다. 아내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장장 6년이나 나는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당신은 기혼자입니다." 그 말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레이스 대령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리넷이었죠, 맞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가 알아내서 메리와 나를 헤어지게 만들었어요. 그 여자는 공연한 일을 해서 우리를 괴롭힌 거에요. 나는 진정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선 무슨 일이나 가리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알려 주지만 않았다면 메리는 내가 기혼자라는 걸 몰랐을 거예요. 맞습니다. 분명히 메리는 몰랐을 거예요. 나는 내 일생을 망쳐 놓고도 그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고 웃으며 나타난 그녀가 아주 역겨웠습니다. 맞아요, 나는 그녀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의심한다면 그건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그녀를 쏘지 않았어요. 아니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멈추었는데 긴장해서인지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당신은 어젯밤 12시부터 2시 사이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물론 선실에서 잤지요. 그건 내 동료가 증명해 줄 수 있습니다." 레이스 대령은 사무적으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물어 보십시오." "아뇨, 이제 다 됐습니다." 레이스 대령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가 나간 뒤, 포와로가 의심스런 시선으로 물었다. "아니, 왜 더 질문하지 않고?" 레이스 대령은 담담히 말해 나갔다. "플릿우드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가 불안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알리바이는 조사할 생각입니다. 그야 결정적인 단서는 없겠지만요. 그의 같은 방 동료는 물론 잠자고 있었을 겁니다. 중요한 건 누가 그 기관사를 보았느냐는 거죠." "그럼, 그걸 조사합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범행 시간에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나 조사해야겠습니다. 박사는 이 사건이 12시부터 2시 사이에 발생했다고 했어요. 그러면 승객 중에서 누군가는 그 총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 당신은 들었나요?" 그러나 포와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졸려서 잠이 깊이 들었었나 봐요. 곯아떨어져서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참, 유감이군요. 그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른쪽 선실에 있던 승객 뿐이군요. 팬숍 씨의 말은 들었으니 앨러튼 부인과 그의 아들을 만납시다. 웨이터에게 그들을 오라고 하세요." 잠시 후, 앨러튼 부인은 씩씩하고 당당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침울하고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침통하게 말했다. "너무 두려워요. 참 믿기지 않아요. 그렇게 예쁘고 재산도 많고 모든 조건을 구비한 미인을 죽이다니‥‥" "당신이 이 배를 탄 게 참 다행이에요. 당신은 범인을 분명히 잡을 거예요. 다행히 그 불쌍한 처녀가 아니라 됐어요." "드벨포 양을 말하는 건가요? 누가 드벨포 양이 범인이 아니라고 했죠?" 앨러튼 부인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코넬리아 롭슨 양이 그러더군요. 그녀는 이 사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녀는 이런 일을 처음 목격했을 거에요. 이런 일은 앞으로 절대로 일어나선 안 돼요. 그녀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해서 자기가 이 사건 때문에 흥분하는 걸 수치로 여겼습니다." 앨러튼 부인은 자기가 너무 수다를 떨고 있음을 느낀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다시 한 마디 했다. "내가 혼자 수다를 떨었군요. 당신들은 뭐가 궁금해서 나를 부른거죠?" "알았습니다. 그럼 사건이 나던 날, 몇 시 경에 잠자러 갔습니까?" "10시 30분이 좀 지난 후에요." "부인은 바로 잠자셨나요?" "네, 몹시 졸려서 금새 잠들었습니다." "부인, 혹시 무슨 소리 듣지 못하셨습니까?" 앨러튼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 물이 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요. 그리고 누군가가 달려가고 또 달려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아니 달려갔는지 달려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저는 누가 바다에 빠졌나 보다 생각했어요. 꿈을 꾼 듯 해서 일어나 소리를 들으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군요." "그때 시간은?" "글세, 모르겠는데요. 내가 잠자리에 든 지 오래 지나지는 않은 때였으니까, 1시도 안 되었을 것 같은데‥‥" "더 정확히 시간을 알 수 없을까요?"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군요. 시계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때가 몇 시였는지는 감을 잡기 힘들군요." "부인, 이 배를 타기 전에 도일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내 아들 팀은 만난 적이 있지만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어요. 이야기는 친척 조안나 사우드우드를 통해 많이 들었지만요." "부인, 허락해 주신다면 좀 다른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앨러튼 부인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무 질문도 좋습니다. 염려마시고 하세요." "혹시, 전에 리넷의 아버지로 인해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재산 피해를 본 적은 없습니까?" 앨러튼 부인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린 비록 재산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떤 사고나 다른 문제는 없었지요. 남편은 유산을 많이 남기진 못했지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정도는 남겼어요. 점점 즐어들긴 하지만 아직도 꽤 남아 있고요." "부인,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가셔서 아드님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앨러튼 부인이 아들에게 가자 팀은 말했다. "어머니, 이제 끝났습니까? 그럼 제 차례겠군요. 어머니에게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어젯밤 들은 소리가 있나를 물었지. 그런데 난 아무 소리도 못들었잖니. 왜 소리를 못들었을까? 리넷의 방은 이방에서 하나 건너에 있는데 총소리가 났으면 들었을 텐데, 난 아무 소리도 못들었단 말이야. 어서 가자, 팀.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포와로는 팀에게도 역시 앨러튼 부인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팀은 담담히 대답했다. "저는 10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시 독서를 하다가 11시에 불을 끄고 있지요." "그 뒤에 들은 소리는 없습니까?" "남자가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하더군요. 그건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거 같았어요." 레이스 대령이 얼른 말했다. "아, 그건 내가 도일 부인에게 한 저녁 인사였습니다." "네, 그렇습니까? 그후 곧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떠들썩하더니 팬숍 씨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건 롭슨 양이 전망실에서 총을 쏘자 달려나간 거군." "그리고 누군지 갑판을 뛰어갔고 그후엔 물이 첨벙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잠시 후 박사님의 '조심해서, 서두르지 말고'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도 첨벙하는 물소리를 들었습니까?" "네, 그런 소리 같았습니다." "그건 총소리는 아니었습니까?" "글세, 무슨 병마개를 따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게 총소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첨벙 소리를 병마개 따는 소리와 관련지어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잠이 든 상황이라 무슨 파티가 열리나 했어요." "그리고 또 다른 소리는 못들었습니까?" "팬숍 씨가 자기 방을 왔다갔다 하길래 무척 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는 무슨 소릴 들었죠?" "글쎄,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요." "잘 알았습니다. 팀 앨러튼 씨, 고맙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5 레이스 대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선실 배치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팬숍, 앨러튼, 앨러튼 부인, 그 다음은 시몬 도일의 방이고‥‥ 참, 도일 부인의 옆방에는 누가 들었지요? 아, 그 나이 든 미국 여자로군. 만일 소리가 났다면 그 부인이 들었을 겁니다." 그때 밴 슈일러가 들어왔다. 그녀는 더욱 늙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레이스 대령이 정중히 인사했다. "이거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런 일에 상관하기 싫습니다. 불쾌해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어떤 식으로라도 이런 역겨운 일에 말려들기 싫습니다." "네,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말을 빨리 듣는 게 좋을 거리고 생각해서 부인을 모신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밴 슈일러는 약간 표정이 누그러져 포와로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나는 이런 일에 익숙치 않은 몸이라서요." 포와로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그러실 테죠. 그래서 우리는 한시바삐 당신의 그 불쾌감을 벗겨 주려고 생각합니다. 어젯밤 몇 시쯤 주무셨지요?" "저는 보통 10시 쯤 자는데, 어제는 좀 늦게 잠자리에 들었어요. 글쎄 코넬리아가 오지 않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러셨군요. 잠자리에 들어서 무슨 소리 들으신 거 없습니까?" "나는 예민해서 깊은 잠에 들지 못해요." "그것 참, 천만다행이군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말입니다." "나는 그 예의없는 도일 부인의 하녀가 큰소리로 '아씨,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잠이 깼답니다." "그 뒤에는요?" "또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누가 방에 들어온 것 같아서 잠이 또 깼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에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니라 옆 방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그게 도일 부인 방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뒤에 누군가 갑판에 나온 거 같더니 물이 첨벙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때가 몇 시쯤이었습니까, 부인?" "네, 1시 10분이었어요. 그때 저는 분명히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어요." "그럼, 총소리는 들으셨습니까?" "아뇨, 총소리는 못들었는데요." "혹시 총소리 때문에 깨신 게 아닐까요?" 밴 슈일러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밴 슈일러 부인은 불쾌한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첨벙하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네, 분명히 압니다." 레이스 대령이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다고요?" "네, 압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밖이 시끄러워서 나는 문 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오터번 양이 몸을 굽히고 물 속에 무엇을 막 떨어뜨렸습니다." 레이스 대령은 깜짝 놀랐다. "아니, 오터번 양이요?" "네, 오터번이었습니다."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까?" "네, 분명히 오터번 양이었어요." "그럼, 오터번 양은 당신을 보았나요?" "아뇨, 못보았을 겁니다." 포와로는 관심이 생기는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표정은 어땠죠?" "글쎄, 흥분한 거 같더군요."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는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레이스 대령이 또 물었다. "오터번 양은 그 다음 무엇을 했습니까?" "그녀는 배 모퉁이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다시 누웠습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지배인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보퉁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대령님, 이걸 찾았습니다." 대령은 그 보퉁이를 받아 펼쳐 보았다. 속에서 분홍색 손수건이 나왔다. 그 안에서 진주 장식의 손잡이가 달린 작은 권총이 나왔다. 레이스 대령은 짖궂은 표정으로 포와로를 보았다. "내 생각이 옳죠? 권총을 물 속에 빠드린 겁니다." 레이스 대령은 그 권총을 손바닥에 놓고 내려다보았다. "포와로 씨, 이 권총이 당신이 언젠가 호텔에서 본 재클린의 권총입니까?" 포와로는 권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잠시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바로 이 권총이 맞습니다. 장식이 붙어있고 J.B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이건 숙녀용 권총이지만 살인을 할 수 있는 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레이스 대령도 권총을 보며 중얼댔다. "아, 22구경이로군. 두 발이 발사되었어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밴 슈일러가 그때 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두 사람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내 목도리가 어떻게 된 거죠?" "목도리요?" "네, 저 벨벳 목도리가 바로 내 것입니다." 대령은 아직도 물이 떨어지는 천을 집어들었다. "밴 슈일러 양, 이게 당신 목도리가 분명한가요?" "네, 제 거예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분명히 내 목도리입니다. 어젯밤 잃어버려서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찾지 못했어요." 포와로가 대령에게 의미있는 눈짓을 보내자 레이스 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도리를 제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디에서였습니까?" "전망실이었습니다. 저녁에 제가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 선실에 가서 찾아보니 없더군요." "부인, 이 목도리로 무엇을 했는지 아시겠어요?" 그는 손으로 구멍이 난 곳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범인은 총소리를 나지 않게 하려고 이 목도리로 권총을 싸서 쏘았습니다." 밴 슈일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담!" "당신은 전에 도일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요." "그러나 당신은 도일 부인을 알고 있었지요?" "나는 그녀의 신분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 집안과 아무 교제도 없었나요?" "우리는 그 집안과는 달라요. 우리 집안은 전통이 있고 긍지있는 가문이지요. 우리는 그런 재산만 많은 집안과 교제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것 뿐입니까?" "네, 그 이상 할 말이 없군요. 리넷은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에는 한 번도 못 보았어요." 그녀가 일어나자 포와로는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거만한 태도로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대령이 그에게 먼저 말했다. "밴 슈일러는 계속 고집스럽게 밀고 나갈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요. 오터번 양?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포와로는 자꾸 혼자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흔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으로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아닙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떤 점까지는 명확한데 그 이상은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누군가 리넷을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전망실에서 있었던 사건을 엿본 거죠. 그는 몰래 들어가서 권총을 훔쳤습니다. 그렇게 재클린의 총을 손에 넣은 후, 리넷을 쏘고 나서 벽에다 'J'라는 글씨를 썼습니다. 이게 명확합니다. 이건 모두 재클린에게 혐의가 가게 한 일입니다. 그런 뒤, 범인은 권총을 어쨌죠? 범인은 그 권총을 물속에 던졌습니다. 그건 절대적인 증거물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레이스 대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이상한데요." "이상한 게 아니라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요." "불가능하긴요,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일이 그렇게 진행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거 같아요." 16 레이스 대령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포와로의 두뇌를 믿고 있고, 그의 사건 해결에 뛰어난 실력도 알고 있지만 그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대령은 자기의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포와로 씨, 이제 오터번 양을 만날 차례인가요?" "네, 오터번을 부릅시다. 뭔가 진전이 있을 겁니다." 잠시 후, 로잘리 오터번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려워하거나 불안한 얼굴은 아니나 억지로 온 듯, 약간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불쾌한 듯 먼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지금 도일 부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는 중입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은 어젯밤에 무엇을 했습니까?" "저는 어머니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11시 전이지요. 처음엔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 박사님 선실 바깥 쪽에서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박사님이 독일어로 말하며 멀리 가더군요. 저는 오늘 아침까지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몰랐습니다." "혹시 총소리를 들었나요?" "아뇨, 못들었어요." "선실에서 나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틀림없이 나가지 않았나요?" 오터번은 날카롭게 말했다. "틀림없어요. 나는 어젯밤에 선실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혹시 배 오른쪽에 가서 물 속에 무엇을 던지지 않았습니까?" "물 속에 무엇을 던지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그야, 그런 법은 없지요. 그럼 당신은 물 속에 무엇을 던졌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난 내 방을 나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당신을 보았다고 하던데요?" "아니, 누가 나를 보았다고 했죠?" "밴 슈일러 양이요." 로잘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밴 슈일러 양이라고요?" "맞습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당신이 물 속에 무엇인가를 던지더라고 했습니다." 로잘리는 완강히 부인했다. "아녜요, 전 그런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그때가 몇 시쯤이죠?" 이번에는 포와로가 얼른 대답했다. "아마 1시 10분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외에 또 무엇을 보았다고 했죠?" 포와로는 흥미를 가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 것도 본 건 없고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였지요?" "도일 부인의 방에서 인기척이 나는 거 같았다고 했습니다." 로잘리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럼, 오터번 양은 물 속에 아무 것도 던지지 않았던 말씀입니까?" "제가 무엇 때문에 밤에 나가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무슨 이유, 해롭지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뭐요, 해롭지 않은 이유요?" "네, 당신은 물 속에 무엇을 던졌어요. 그건 해롭지 않은 거고요." 레이스 대령은 벨벳 꾸러미를 꺼내 그 안의 권총을 보여 주었다. 오터번 양은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게 그녀를 살해할 때 쓴 건가요?" "네, 바로 그 권총입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제가 리넷을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녜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요. 내가 왜 이유도 없이 그녀를 살해하겠습니까? 난 그녀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녀는 잔뜩 경멸이 담긴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참 터무니 없군요. 이건 엉터리 수작이에요." "오터번 양, 분명히 달빛에 비친 당신을 밴 슈일러는 보았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로잘리는 어처구니없는 듯 픽 웃었다. "그 심술쟁이 여자가 나를 봐요? 아마 그 늙은이는 눈 뜬 장님인가 보군요. 그 늙은이가 본 건 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제 가도 되겠죠?" 대령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횅하니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말이 판이하군요. 누구 말이 맞는 걸까요?" 포와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시키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런 게 제일 골치 아픈 일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찮은 이유 때문에 거짓을 일삼지요. 그럼 계속 승객을 만나 볼까요?" "네, 그렇게 합시다. 순서와 방법을 바꾸지 말고 진행합시다." 잠시 후, 오터번 부인은 딸을 따라서 들어왔다. 그녀는 로잘리의 진술처럼 11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으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아마, 치정 때문에 살인했을 거예요. 살인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 본능은 성 본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재클린은 라틴 혈통이 있어서 더 본능에 사로 잡히게 되어 있지요. 그녀는 손에 권총을 쥐고 살금살금 다가가‥‥" "재클린은 도일 부인을 쏘지 않았어요. 그건 확실하지요." "그럼, 그야 시몬 도일일 겁니다. 이건 성 범죄로 볼 수 있어요. 그런 예는 왕왕 있습니다." "부인, 그렇지 않아요. 시몬은 다리에 총을 맞아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뼈가 부러졌어요. 그리고 베스너 박사가 밤새도록 옆에 있었답니다." 오터번 부인은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또 생각하고는 말했다. "맞아요. 네, 맞아요. 바로 바워즈 양입니다. 바워즈요." "바워즈요?" "네, 틀림없이 그녀의 짓이예요. 심리학적으로 따져 봐요. 그녀가 틀림없을 거예요. 시몬과 그 아내가 열렬히 사랑하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간 겁니다. 바워즈는 미인도 아니고 매력이라곤 찾기 힘든 추녀지요. 내 작품 중 <열매 맺히지 않는 포도 덩굴>을 보면‥‥" 레이스 대령이 재빨리 그녀의 다음 말을 막았다. "부인,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대령은 정중하게 오터번 부인을 배웅해 준 후, 자리로 돌아와 숨을 깊게 쉬었다. "어휴, 끔찍해라. 왜 저런 여자는 살아 있담!" "글쎄, 앞으로 누가 압니까? 정말 누가 죽일지도요." "그건 그렇지요. 이제 누구 차례죠? 퍼거슨과 리체티가 남았군요. 참 페닝턴은 제일 끝에 보기로 합시다." 다음에 온 리체티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이건 너무 끔찍한 일이군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살해하다니!" 그는 물음에는 선선히 대답했다. 리체티는 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최근에 발행된 논문 <소아시아의 선사시대 연구> 라는 것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나톨리아의 산기슭에서 발견한 채색 도자기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한 것이었다. 그는 11시가 되기 전에 불을 껐는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고 한밤중에 자기 창 가까이에서 첨벙 소리가 크게 들렸다고 말했다. "당신의 선실은 아래쪽 갑판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첨벙 소리가 크게 들렸나 봅니다." "그 소리를 들은 건 몇 시쯤이죠?" "글쎄요, 그건 내가 잠자리에 든 지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세 시간 쯤‥‥ 글쎄 한 두 시간 쯤 지나서였을 겁니다." "그럼, 1시 10분 쯤인가요?" "네, 그쯤 되겠군요. 아,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그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을 총으로 쏘다니‥‥" 여전히 리체티는 손까지 마구 휘두르면서 말했다.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은 의미있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나가고 그 다음에는 퍼거슨의 차례였다. 퍼거슨은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아주 의자에 길게 앉아 이야기했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비양댔다. "당신들은 굉장한 일을 하고 있군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참, 이 세상에는 형편없는 여자들도 많아요." 레이스 대령이 그의 말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냉정히 물었다. "퍼거슨 씨, 당신은 어젯밤에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나는 그 일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요. 롭슨 양과 육지로 나갔다가 그녀가 배로 돌아간 후, 나 혼자서 돌아다니다 밤늦게 배로 돌아와 잤습니다." "당신 방은 아래쪽 갑판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지요?" "맞습니다. 내 방은 그런 곳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지체높은 분들과 나란히 방을 쓸 수 있겠습니까?" 대령은 또다시 냉정히 질문했다. "어젯밤에 혹시 총소리를 듣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병마게 따는 소리처럼 들렸는지도 모릅니다." 퍼거슨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게 몇 시쯤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제가 잠들기 직전이었죠. 그때까지 갑판은 떠들썩하더군요. 갑판 위를 뛰어 다니는 소리도 들렸고요." "그 소리는 재클린이 쏜 총소리였을 겁니다. 또 다른 소린 못들었습니까?" 퍼거슨은 고개만 저었다. "그럼, 첨벙하는 물소리는 듣지 못했습니까?" "물소리요? 들은 거 같기도 한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확실치는 않아요." "당신은 밤중에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퍼거슨은 픽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불행히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었죠." "퍼거슨 씨,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진지하게 답해 주세요." "아니, 왜 내 대답을 강요하십니까? 난 폭력 행위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포와로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생각을 실행하지는 않겠죠? 퍼거슨 씨, 당신에게 도일 부인이 영국 최고의 갑부라고 말해 준 사람은 플릿우드죠?' "아니, 이 사건과 플릿우드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플릿우드는 도일 부인을 살해할 만한 동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녀를 증오하고 있으니까요." 퍼거슨은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참, 당신들의 수법은 저질이군요. 자기 자신을 방어할 능력조차 없는 가엾은 플릿우드 같은 사람을 의심하는 건 불공평합니다. 그는 맨주먹이라서 변호사를 고용할 수도 없을 겁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만일 당신들이 플릿우드를 이 사건의 혐의자로 본다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포와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퍼거슨은 얼굴이 상기된 채 말했다. "누가 뭐래도 난 내 친구를 돕겠습니다." 레이스 대령이 얼른 나서서 말했다. "퍼거슨 씨, 이제 됐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퍼거슨이 나가자 대령이 한 마디 했다. "왠지 저 청년은 마음에 들어요." 포와로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당신은 저 청년은 의심하지 않는 겁니까?" "네, 저 쳥년은 범인이 아닐 거 같습니다. 저 청년은 솔직하죠. 거짓이 없었으니까요. 다음에는 페닝턴입니다." 17 앤드류 페닝턴은 의례적으로 도일 부인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표시했다. 그는 평상시처럼 말쑥한 옷차림이었는데 넥타이는 검정색을 매고 있었다. 면도는 말끔히 했으나 당혹한 표정은 지울 수 없었다. "도일 부인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 눈에는 리넷의 어린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귀여웠었죠.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죠. 그는 딸 리넷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내가 공연한 넋두리를 늘어놓았군요. 내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페닝턴 씨, 혹시 어젯밤에 무슨 소리 못들었습니까?" "아뇨, 전혀 못들었는데요." "당신은 몇 시에 잤습니까?" "11시 좀 지나서였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 배에는 소문이 많이 떠돌고 있어요. 재클린 드벨포라는 아가씨가 수상한 거 같은데요. 리넷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남들만큼은 알아요. 시몬과 그녀는 한때 좋아한 사이로 약혼까지 했었다는 걸 나도 압니다. 재클린은 리넷을 뒤쫓고 있지만 그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신은 드벨포 양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좀 알고 있지요. 그녀는 리넷을 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재클린이 총을 쏘지 않았다는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었으나 페닝턴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두 분의 말씀에 동감은 하지만, 그 바워즈 양이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그녀를 지키지는 않았을 겁니다. 간호원이 졸 때 살짝 나가서 리넷을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페닝턴 씨,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녀가 재클린에게 독한 마취주사를 놓아서 그녀는 잠에 빠졌으니까요. 그네들은 늘 환자 옆에서 환자가 움직이면 눈을 뜨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나는 의심이 가시지 않는데요." 레이스 대령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페닝턴 씨,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제클린은 리넷을 쏘지 않았음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돌리기로 한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를 도와 주세요." 페닝턴은 과잉 반응을 보이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돕죠?" "당신은 죽은 도일 부인과 친하게 지낸 유일한 주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남편 도일 씨보다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가 리넷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요. 도일 씨는 부인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으니까요. 당신은 부인을 살해할 만한 동기가 있는 사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페닝턴은 초조한 듯 입술에 침을 묻힌 뒤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성장했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나는 그녀의 주변은 전혀 모릅니다." 포와로는 심중을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날카롭게 페닝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이 배에는 부인의 목숨을 해치려는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일전에 신전에서도 리넷은 바위가 굴러 떨어져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요. 당신은 그때 그곳에 있었던가요?" "네, 나는 신전 안에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죠. 그러나 나는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페닝턴은 값비싼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스 대령이 계속 질문을 했다. "도일 부인은 언젠가 이 배에 탄 사람 중에서 자기 집안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페닝턴은 급습을 당한 것처럼 놀랐다. "아닙니다,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도일 부인이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아버지와 절친했었죠? 혹시 그가 나쁜 방법으로 경쟁자를 파산시킨 적은 없었습니까?" "뚜렷이 기억나는 건 없고‥‥ 그런 적은 더러 있지만 협박을 받거나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페닝턴 씨, 당신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는 게 없군요."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아는 게 없군요."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페닝턴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일 씨가 일어나지 못하니, 내가 대신 일을 해야 합니다. 실례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어떻죠?" "이곳을 출발하여 바로 쉘랄로 갈 계획입니다. 내일 아침엔 쉘랄에 당도할 겁니다." "시체는 어떻게 하지요?" "냉장실에 보관할 겁니다." 앤드류 페닝턴이 나간 후, 두 사람은 또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레이스 대령이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그는 초조한 모습이군요."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페닝턴은 바위가 굴러떨어졌을 때 신전 안에 없었어요. 그건 내가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전 안에 있었으니까요." "어리석게도 그는 뒤만 돌아서면 밝혀질 거짓말을 했어요." "당분간 그를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레이스 대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나는 너무 마음이 잘 통하는군요." 그때, 배가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가 쉘랄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제 진주 목걸이의 행방에 대해 조사해야겠습니다." "좋은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이제 30분 후면 점심 식사 시간이니 승객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지요. 나는 식사가 끝날 때쯤 도일 부인의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다고 발표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식당에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짐을 조사할 계획입니다."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좋습니다. 목걸이를 훔친 사람도 아직 그걸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아무 말도 없이 조사한다면 물 속에 빠뜨릴 시간도 없을 겁니다." 레이스 대령은 종이 몇 장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는 수사 진행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요. 메모를 해 두면 기억도 잘 나고 복잡하지도 않아서 편리하지요." "그것 참 좋은 방법입니다. 매사에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지요." 레이스 대령은 종이에 무엇인가를 잔뜩 써내려 갔다. 그는 다 쓴 후 종이를 포와로에게 건넸다. "혹시 당신 의견과 다른 게 있나요?" 레이스 대령이 건네 준 종이 위에는 큼직하게 <리넷 도일 살인사건>이라고 씌어 있었다. 살아있는 도일 부인을 제일 끝에 본 사람은 하녀 루이스 버제트로, 그녀는 11시 30분쯤 부인을 보았다. 코넬리아 롭슨, 제임스 팬숍, 시몬 도일, 재클린은 11시 30분에서 12시 20분 간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 범죄는 그 이후에 저질러졌다. 그 이유는 범행에 사용된 무기는 재클린의 총으로, 그 권총은 그때까지 재클린의 핸드백 속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권총이 범행에 쓰였는지는 검시 결과가 나와야 단정지을 수 있다고 본다. <사건 경과에 대한 추정> 살인범은 전망실에서 재클린이 시몬 도일을 쏜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권총이 소파 밑에 들어간 것을 알고, 전망실에 사람이 한 명도 없자 권총을 몰래 훔쳤다. 범인은 재클린이 혐의를 받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코넬리아 롭슨은 팬숍이 전망실로 총을 가지러 가기 전까지 권총을 훔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워즈 양도 롭슨과 똑같다. 베스너 박사 역시 그런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팬숍은 혐의를 둘 수 있다. 그는 권총을 찾고서도 없다고 했을 수도 있었다. 그 외의 승객들도 모두 10분 안에 권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범인의 살인 동기> 앤드류 페닝턴 - 리넷의 재산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실을 입증할 심증은 있으나 물적 증거가 불충분하다. 신전에서 바위를 떨어뜨린 사람이 바로 앤드류라면 그는 분명히 절호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번 사건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어젯밤에 재클린이 시몬을 쏜 충격적인 사건으로 범인은 적절한 기회를 잡은 것이다. 페닝턴이 범인이 아니라는 견해 - 그가 범인이었다면 재클린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는 권총을 물 속에 던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릿우드 - 그는 복수심 때문에 살인을 할 수도 있다. 리넷이 자기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며 원망하고 있다. 어젯밤 장면을 목격하고 권총을 입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재클린에게 혐의를 돌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권총이 손쉬운 무기이므로 그걸 훔쳤는지 모른다. 그러면 왜 기관사 플릿우드는 벽에다 'J'라고 썼을까? 주의사항 - 권총을 쌌던 손수건은 상류층에서 쓰는 게 아니라 플릿우드 같은 류의 사람 이 쓰는 값싼 것이었다. 로잘리 오터번 - 밴 슈일러의 증언을 믿어야 하는지 로잘리 양의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이 안 선다. 주의사항 - 로잘리 오터번은 리넷을 살해할 동기가 있을까? 그녀는 리넷의 미모와 부 때문에 미워는 했지만 살해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만일 로잘리가 범인이라면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잘리와 리넷은 전에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밴 슈일러 - 권총을 쌌던 벨벳 목도리는 밴 슈일러의 것이다. 그녀는 어젯밤 전망실에서 그 목도리를 본 후 잃어버렸다고 한다. 어제 저녁 계속 목도리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고 한다. 범인은 어떻게 벨벳 목도리를 수중에 넣었을까? 어쩌면 일찍 목도리를 숨겼는지도 모른다. 그럼 왜 일찍 그것을 감추었을까? 재클린이 시몬 도일을 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는데, 아니 범인은 소파 밑의 권총을 훔칠 때 그 목도리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왜 밴 슈일러가 찾았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면 밴 슈일러가 목도리를 잃어버리지 않은 건 아닐까? 그럼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또 로잘리 오터번이 물 속에 무엇인가를 빠뜨렸다고 말한 것은 거짓일까? 만약 그녀가 리넷을 살해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살해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 외의 가능성> 강도에 의한 살인 -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진주 목걸이가 없어졌으며 리넷은 어젯밤에도 그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그 목걸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리지웨이 집안에 원한이 있는 사람 - 가능하지만 증거가 없다. 이 배에는 요주의 인물이 타고 있다. 이 둘을 관련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리넷 도일이 요주의 인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결론 - 이 배의 승객을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살인할 동기가 있는 사람과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또다른 부류는 전혀 혐의가 없는 사람들이다. <살인 동기가 있는 사람> 앤드류 페닝턴 플릿우드 로잘리 오터번 밴 슈일러 루이스 버제트(절도?) 퍼거슨(정치적?) <살인 동기가 없는 사람> 앨러튼 부인과 팀 앨러튼 코넬리아 롭슨 바워즈 제임스 팬숍 베스너 박사 리체티 포와로는 다 읽은 후 종이를 대령에게 건넸다. "아주 정확합니다." "이 내용과 달리 생각하시는 건 없나요?" "네, 없습니다." "특별히 더 첨가하실 것은요?" "나는 스스로 '그 권총을 왜 물 속에 던졌나?'하고 자문자답해 보았습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네, 지금은 별다른 게 없군요. 그 문제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기 전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게 즉 단서지요. 당신이 기록한 것에는 그 문제의 해답은 없더군요." "혼란스럽기만 하지요." 포와로는 말을 마치고 권총을 쌌던 벨벳 목도리를 탁자에 펴놓고 불에 탄 구멍과 그을린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총기에 대해서 잘 알지요? 목도리로 감고 쏜다고 소리가 정말 들리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것으로 감싸도 소리는 들리지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총기류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여자들은 전혀 모르지요." "네, 그럴 겁니다." 레이스 대령은 진주로 장식된 손잡이가 달린 권총을 가볍게 손으로 튕기면서 한 마디 했다. "이 권총은 아주 작아서 그다지 소리가 크지 않을 겁니다. 네, 그저 펑 소리만 약하게 날 거예요. 주위에 다른 소리가 나면 그 총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죠." "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포와로는 권총을 쌌던 분홍색 수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남자 손수건입니다. 신사가 가질 만한 물건은 못되고, 한 3펜스 정도 될 거 같은데요." "그 손수건은 플릿우드에게나 어울릴 것 같군요." "네, 그럴 거에요. 앤드류 페닝턴은 고급 손수건을 쓰더군요." 이번에는 레이스 대령이 은근히 물었다. "퍼거슨은 어떤 손수건을 쓰죠?" "아, 속임수를 쓸 수도 있어요. 만일 그렇다면 퍼거슨은 큰 비단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손수건은 장갑 대신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권총을 싼 것입니다." "아, 그럼 분홍색 손수건이 이 사건의 단서가 되겠군요." "그런데, 그 색은 처녀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데요." 포와로는 다시 벨벳 목도리에 난 총탄 구명을 살펴보았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야‥‥" 레이스 대령이 궁금한지 물었다. "뭐가 이상합니까?" 포와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죽은 도일 부인만 가여워요. 평화롭게 누워 있는데‥‥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 당신은 그녀의 모습이 생각납니까?" 포와로의 갑작스런 변화에 레이스 대령이 싱글싱글 웃었다. "당신은 내게 무엇인지 말하려는 게 아닙니까?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영 짐작이 안 가는군요." 18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스 대령이 큰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웨이터 한 명이 들어와 포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실은 시몬 도일 씨가 뵙고 싶다고 하던데요." "알았소, 곧 가지." 포와로는 곧 그 방을 나와 도일이 머물고 있는 갑판 위의 베스너 박사 방으로 갔다. 시몬은 상기된 얼굴로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약간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포와로 씨,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무슨 부탁이죠?" 시몬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다름이 아니라 재키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요. 내가 그녀에게 만나달라고 하면 그녀가 기분 나쁠까요? 누워있자니 그 가엾은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내가 너무 몹쓸 짓을 했어요. 그리고‥‥" 시몬은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포와로는 그의 얼굴을 흥미있게 살폈다. "그럼, 내가 재클린 양을 데려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포와로 씨." 포와로는 재클린을 찾아다니다가 전망실 구석에 쪼그린 채 앉아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녀의 무릎에는 책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읽지는 않았다. "도일 씨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재클린 드벨포는 뜻밖의 제의에 놀랐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한 탓인지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아니, 시몬이요? 정말 시몬이 저를 보자고 했어요?" 재클린은 믿어지지 않는지 반문을 하며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재클린 양, 함께 가시겠습니까?" 재클린은 얌전한 어린아이처럼 포와로의 뒤를 따랐다. 포와로는 시몬이 있는 베스너 박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 재클린 양이 왔습니다." 재클린은 잠시 머뭇거리며 포와로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잠자코 시몬을 응시했다. 시몬도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재키, 안녕.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마워.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러니까‥‥" 그때 재클린이 그의 말을 막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 나는 리넷을 살해하지 않았어요. 믿어 주세요. 당신도 내가 그녀를 해치지 않은 걸 알죠? 어젯밤에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당신을 믿어. 나는 당신이 아무래도 그 일을 걱정할까 봐‥‥" "시몬, 저는‥‥" "재키는 어제 흥분 상태였어. 물론 그간 너무 괴로워서 그랬을 거야. 당연한 일이야." "시몬, 저는 당신을 죽일 뻔 했어요." "아냐, 장난감 같은 것으론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당신은 어쩜 앞으로 그 다리 때문에 걷지 못할지도 몰라요." "재키, 그만 울어. 애스완에 도착하면 곧 엑스레이를 찍고 탄환을 꺼낸다고 했어. 그러면 좋아질 거야." 재클린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달려가 시몬이 누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자 시몬이 약간 어색하게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가만히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포와로는 한숨을 쉬며 그 방을 나왔다. 그가 걸으려 할 때,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몬, 정말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쏘았을까요?" 밖에서는 코넬리아 롭슨이 난간에 기댄 채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포와로 씨,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좀 이상해요." 포와로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양이 빛날 때는 달을 볼 수 없지요. 그 태양이 져버린 후에는‥‥ 태양이 져버리면‥‥" 코넬리아가 그에게 반문했다. "선생님, 뭐라고요?" "나는 태양이 사라지면 달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코넬리아는 의혹에 찬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포와로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농담으로 한 말이니 신경쓰지 말아요, 롭슨 양." 포와로는 배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선실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배은망덕해. 너를 위해 지금까지 희생하면서 살아왔는데, 이 어미에게 모질게 대하는구나. 너는 이 어미의 고통을 몰라." 포와로는 그 방문을 몇 번 노크했다. 방안에서는 말소리가 뚝 그치고 오터번 부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네, 로잘리 양 있습니까?" 잠시 후, 문 앞에 로잘리가 나왔다. 포오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시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입가는 떨렸다. 그녀는 거칠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당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그녀는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 "제가 지금 꼭 나가야 합니까?" "네, 부탁입니다." "지금 저는 좀 곤란해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방을 나왔다. 그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포와로는 그녀의 팔을 잡고 선미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사람이 없는 뒤쪽 갑판에 섰다. 포와로는 난간에 몸을 기댔으나 그녀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로잘리는 여전히 불쾌하게 물었다. "포와로 씨, 무슨 일이시죠?"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당신이 답변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이는 겁니다." "그럼, 저를 예까지 데리고 온 게 쓸데없는 일이겠군요." 포와로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려운 일에 익숙해 있지요‥‥ 그러나 더 이상 지탱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 짐은 로잘리 양에겐 너무 과중합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저는 현실, 고달픈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어머니는 매일 과음을 하죠?" 로잘리는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잠시 입을 열 듯한 기색도 보였지만 이내 다물어 버렸다. "대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도 그런 것쯤은 짐작합니다. 당신이 어머니께 심하고 야박한 듯 하지만 사실은 당신은 지금 무엇인가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당신 어머니가 만취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술을 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당신 어머니는 교묘히 술을 구했고 은밀한 곳에 숨겨 두고 몰래 마셨습니다. 어젯밤에도 숨긴 술병을 찾아 몰래 물 속에 던져 버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선생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일부러 그 일을 발설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정말 싫었기 때문이에요. 그 소문이 퍼지면 어머니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글쎄 나보고 이런 끔찍한 일을 했다니‥‥" "당신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게 터무니없다는 말이죠?" 그의 말에 로잘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어머니가 알콜중독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 무척 노력했어요. 그건 사실 어머니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책이 팔리지 않아서 실망을 하셨지요. 독자들은 이제 어머니가 쓰시는 저속한 섹스 내용에 식상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신 거예요. 얼마간은 저도 어머니가 술을 마시는 걸 몰랐어요. 그 사실을 알고부터 무진 애를 썼어요. 어머니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다툰답니다. 끔찍해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그래서 저는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면 안돼죠. 그러면 꼭 일이 벌어지니까요. 저는 어머니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막았어요. 그후부터 저렇게 저를 미워하시고 증오하는 느낌을 받곤 해요." 포와로는 그녀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저를 동정하진 마세요. 그냥 평소처럼 해주시는 게 좋겠어요. 저는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어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와로가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저도 당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건방지고 비뚤어졌다고 싫어하죠. 그래고 어쩔 수 없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저는 기분이 바뀌니까요." "내 말이 바로 그거에요. 당신 혼자 그 짐을 지는 건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요. 포와로 씨는 늘 제게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제가 무례히 굴었던 건 모두 용서해 주세요." "친구 사이에서는 예의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잘리의 얼굴에는 의심이 서렸다. "당신이 물 속에 버린 게 술병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 말해 주십시오. 1시 10분이었나요?" "네, 그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요." "로잘리 양, 당신은 그때 밴 슈일러를 보았습니까?" "아뇨, 저는 못보았습니다." "밴 슈일러는 문틈으로 살짝 엿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보지 못했어요. 그냥 갑판 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던져 버렸어요." "그럼, 그때 갑판에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생각을 거듭 한 후, 입을 열었다. "거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이 꽤나 심각했다. 19 승객들은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식사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계속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했다. 팀 앨러튼은 어머니 앨러튼 부인이 자리에 앉고 나서 식당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팀은 낮은 소리로 불평을 했다. "이런 여행이 될 줄 알았으면 애시당초 떠나 오지도 않을 걸‥‥" 앨러튼 부인이 아들에게 꾸짖듯 말했다. "팀, 나도 그런 생각은 마찬가지야. 어쩌면 그 아름다운 여인이 죽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누가 그런 아름다운 여인에게 총을 쏘았을까? 참 잔인한 인물이야. 난 그런 잔인한 살인범과 이렇게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게 끔찍하단다. 그리고 또 가엾은 사람이 있잖니?" "재클린 말인가요?" "그래, 나는 재클린만 보면 가슴이 아프단다. 불쌍한 아가씨야." 팀은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불쑥 한 마디 했다. "장난감 권총을 마구 쏘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었어야 했어요." "성장할 때 환경이 나빴을 게다." "아휴, 하느님! 어머니, 매사에 그런 생각 좀 버리세요." "팀, 너도 불쾌한가 보구나." "네, 이 배에 탄 사람들 중에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뭐가 그리 기분 나쁘다는 거니? 난 그저 슬프다." 팀은 어머니의 태도를 반박했다. "어머닌 감성적으로만 생각하시는군요. 살인 사건에 말려드는 건 아주 골치 아픈 거예요." 앨러튼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건과 관계가‥‥"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결백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누가 그걸 믿겠어요? 모두 혐의를 받는 거예요. 어머니와 저도 예외일 수가 없어요." "그건 이치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머니, 이건 살인 사건이에요. 앉아서 나는 죄가 없다고 해 봐야 믿어 줄 사람이없단 말이에요. 쉘랄이나 애스완의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경찰이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믿어 줄 거 같아요?" "그 전에 범인이 잡힐지도 모르지." "어떻게 범인이 잡혀요?" "음, 포와로 씨가 범인을 알아낼 거다." "그 늙은 영감 말이에요? 그는 밝혀내지 못할 거예요. 수다장이고 콧수염이나 기르고 점잖은 신사 흉내나 내는 사람이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하겠어요. 그 사람은 엉터리 사기꾼이에요." 앨러튼 부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팀,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단다. 그러니 기분을 좀 전환해서 유쾌하게 보내자꾸나." 팀 앨러튼은 여전히 잔뜩 찡그린 얼굴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진주 목걸이도 없어졌잖아요." "리넷의 진주 목걸이를 말하는 거냐?" "네, 진주 목걸이를 누가 훔쳐갔나 봐요." "그럼, 그 진주 목걸이 때문에 살인을 했나 보구나." "그건 단정지을 수 없어요. 어머니 그건 별개의 사건이에요." "누가 별개의 사건이라고 했지?" "퍼거슨 씨가 그러더군요. 그 사람이 거칠어 뵈는 기관사에게 들었는데, 그는 또 죽은 도일 부인의 하녀에게서 들었다고 하더군요." "참 멋진 목걸이였는데‥‥" 그때 포와로가 앨러튼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식탁 앞에 앉았다. 포와로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제가 좀 늦었죠." "당신은 늘 바쁘시니까요." "네, 좀 바쁜 편입니다." 포와로는 웨이터에게 포도주를 주문했다. 앨러튼 부인이 포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취향이 다르군요. 포와로 씨는 늘 포도주만을, 팀은 언제나 위스키소다를, 나는 여러 종류의 탄산수를 마시잖아요." "자, 앨러튼 부인을 위해 건배!" 포와로는 말없이 앨러튼 부인을 쳐다보다가 생각에 잠긴 듯 나지막히 중얼 거렸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는데‥‥" 그러나 포와로는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게 앨러튼 부인이 질문했다. "도일 씨는 많이 다쳤습니까?" "네, 그런가 봅니다. 베스너 박사는 속히 애스완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다리에 박혀 있는 총알을 뽑아야 한다는군요. 그렇지만 그가 절름발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불쌍한 사람! 시몬은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지요. 그러나 하룻밤 새에 아름다운 아내는 비명횡사하고 자기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그러나 나는‥‥" "계속 말해보시죠, 앨러튼 부인." "나는 시몬이 그 불쌍한 재클린에게 좀 너그럽게 대해 주었으면 해요." "부인,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시몬 도일은 재클린을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기묘한 심리적 현상으로 볼 수 있겠죠. 시몬은 그녀가 자기 부부를 뒤쫓아 다닐 때에는 미워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녀에게 총을 맞아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심리적 현상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포와로는 팀을 보며 물었다. "저도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몬도 처음 그녀가 뒤쫓아다닐 때에는 무시당한 것 같아서 미워하고 증오했을 겁니다." 포와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남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재클린이 바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두 사람의 대화에 앨러튼 부인이 끼어들면서 말했다. "그러나 시몬은 재클린을 용서해 줄 거야. 참 이상해요, 남자란 모두 어린애 같답니다." 그 말에 팀이 반박하고 나섰다. "여자들은 모두 그런 말을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포와로도 미소 띤 얼굴로 팀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일 부인의 친척인 조안나 사우드우드는 도일 부인과 비슷하게 생겼습니까?" "포와로 씨, 착각하고 계셨군요. 조안나는 우리의 친척이고 도일 부인과는 친한 찬구 사이입니다." "아, 그랬군요. 내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런데 조안나는 신문에 자주 오르는 인물이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아니, 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시죠?" 포와로는 앞을 지나치는 재클린 드벨포에게 인사하려고 몸을 세웠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은 빛났으나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포와로는 자리에 앉아서도 팀 앨러튼이 질문한 것을 잊어버린 듯 했다. 포와로는 영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젊은 숙녀들은 값비싼 보석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모두 도일 부인처럼 부주의합니까?" 앨러튼 부인이 재빨리 물었다. "그럼, 진주 목걸이를 도둑맞았다는 게 사실이었습니까?" "부인, 누구한테 그 말을 들으셨죠?" 팀이 어머니 대신 대답했다. "네, 퍼거슨 씨한테 들었습니다." "네, 진주 목걸이는 도난 당했습니다." 앨러튼 부인이 약간 초조한 투로 말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서 모든 승객이 불쾌한 거예요. 팀도 그렇다고 말했지만요." 팀 앨러튼은 불쾌한 얼굴이었으나 포와로는 그를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팀, 당신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전에 집에 강도가 침입한 적이 있었나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팀, 너는 벌써 잊었니? 그 비싼 다이어몬드를 도독맞았을 때, 그 자리에 있었잖니?" "어머니, 그건 착각하신 거예요. 제가 있었을 때는 이미 그 여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모조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었지요. 그 목걸이는 몇 달 전에 가짜와 바꿔치기 당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사람들까지도 그녀가 다이어몬드를 바꿔 놓았을 거라고 했어요." "그건 조안나가 한 말이겠지." "아녜요, 그녀는 거기에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조안나는 그 사람들을 알고 있었어.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조안나 밖에 없단다." "어머니는 왜 조안나를 비난하시죠?"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포와로는 화제를 얼른 바꾸었다. 그는 애스완 상점에서 물건을 샀다고 했다. 인도인의 가게에서 자색과 금색의 직물을 샀는데 본국으로 가지고 가면 세금을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옷감을 직접 본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하는데, 비용도 의외로 적게 들더군요. 그렇지만 그게 잘 도착될까요?" 앨러튼 부인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는데 모두 물건을 틀림없이 받았다고 했다. "아, 그럼 나도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행중이거나 부재중일 때, 물건이 영국에 도착하면 어떻게 하죠. 부인은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경험은 없었습니다. 가만 있자‥‥ 내겐 책이 많이 오거든요. 물론 책은 좀 다르지만‥‥" "네, 책은 별도죠." 디저트가 나왔을 때, 불쑥 레이스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이스 대령은 살인 사건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진주목걸이를 도난 당했다고 말했다. 대령은 지금부터 배 안을 수색할 계획이니 모든 승객은 식당에 남아있어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승객의 동의를 얻어 몸수색도 아울러 하겠다고 밝혔다. 포와로는 얼른 일어나서 레이스 대령에게 다가갔다. 잠시 승객들의 불평 소리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포와로는 레이스 대령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들은 웨이터에게 몇 마디 이른 뒤 식당을 나왔다. 두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식당에 있던 웨이터가 다가왔다. "대령님을 만나시겠다는 부인이 있는데요." "그 부인이 누구지요?" "간호원인 바워즈 양입니다." "그럼 바워즈 양을 흡연실로 모시고 오게. 절대로 다른 사람은 식당을 나와선 안 되네." 잠시 후, 바워즈 양이 흡연실로 들어왔다. "바워즈 양,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실례인 줄은 알지만 너무 급해서‥‥" 바워즈 양은 자기의 핸드백을 열고 진주 목걸이를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이걸 돌려 드리려고요." 20 레이스 대령은 깜짝 놀랐다. 그는 탁자에서 목걸이를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바워즈 양, 이게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 집안은 무척 까다로와서요. 그들은 저를 신뢰하기 때문에 제 짐이 더 무거웠습니다. 당신이 선실에서 목걸이를 찾아내지 못하면 몸수색을 하겠죠. 그러면 여러 사람 앞에서 제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게 밝혀질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빨리 사실을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사실이 뭡니까? 당신이 진주 목걸이를 훔쳤단 말입니까?" "대령님, 제가 훔친 것이 아니라 밴 슈일러 양의 짓이에요." "밴 슈일러?" "네, 그분은 자신도 모르게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습니다. 주로 보석 종류를 잘 훔친답니다. 그래서 나는 늘 그녀를 감시하고 있어요. 그녀는 훔친 물건을 스타킹 속에다 늘 감추죠. 저는 매일 아침 그 속을 검사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그녀가 움직이면 쫓아가서 침대에 들게 합니다. 배에선 그런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밤에는 훔치지 않는 편이고요. 그녀는 무슨 물건이건 옆에 있으면 슬쩍 집어넣지요. 더욱이 진주의 유혹을 그녀는 뿌리치지 못해요." "그럼, 당신이 그녀가 진주 목걸이를 훔친 걸 알았나요?" "오늘 아침, 스타킹 속에 그 목걸이가 들어있었어요. 그래서 전 그녀의 짓이라는 걸 눈치챘어요. 저도 리넷이 목걸이를 한 걸 보았으니까요. 저는 진주목걸이를 제자리에 갖다 두려고 했어요. 도일 부인이 깨기 전에 갖다두면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녀의 방에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못들어가게 하더군요. 오늘까지 저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어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고요. 만일 이 사실이 신문에 실린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신문에 꼭 내야 하나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밴 슈일러 양은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녀는 자기는 모른다고 부인할 겁니다. 늘 그랬거든요. 누군가가 스타킹 속에다 감춘 거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계속 추궁하면 침대로 들어가 버린답니다." "롭슨 양은 그녀의 도벽을 알고 있습니까?" "아뇨, 그녀는 모르고 롭슨의 어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롭슨은 단순한 아가씨라서 어머니가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난 혼자서도 그녀는 감시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에게 알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바워즈 양, 솔직히 대답해 주십시오. 밴 슈일러가 도벽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녀에게 살인광적인 경향은 없습니까?" "아녜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그분은 결코 파리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분이랍니다." 그녀가 확신있게 대답하자 대령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포와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밴 슈일러 양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거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얼굴을 보고 말할 때는 잘 모르지만, 누가 자기 방에 들어와도 모르는 때가 있답니다." "도일 부인의 방에 누가 들어가서 왔다갔다 한다면 그녀는 그걸 깨달을 수 있습니까?" "아뇨, 모를 거예요. 그리고 침대도 반대쪽에 놓여있고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겁니다." "그럼, 바워즈 양은 식당에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스 대령은 문을 열어주고 그녀가 식당에 들어간 후, 문을 닫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효과가 나타났군요. 바워즈 양은 명석한 여자군요. 그녀는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계속 시치미를 뗐을 겁니다. 밴 슈일러는 아직 혐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죠? 그녀는 목걸이를 수중에 넣으려고 살인했는지도 몰라요. 글쎄, 바워즈도 정직하다고만 할 수는 없어요." 포와로가 목걸이를 한참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밴 슈일러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는 진실일 겁니다. 그녀가 선실 밖을 살피다가 로잘리를 본 건 사실이오. 그러나 그녀가 도일 부인의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고 말한 건 모두 거짓이죠. 그녀는 목걸이를 훔치려고 밖의 동정을 살폈을 겁니다." "그때 오터번 양이 거기에 있었고요?' "그래요. 그녀는 어머니의 술병을 버리고 있었지요." "젊은 아가씨가 어머니 때문에 너무 고생하는군요." "그런데, 롭슨 양은 정말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까요?" "그녀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본 게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더군요." 레이스 대령은 자기 생각을 침착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만일 리넷 도일이 1시 10분 경에 살해되었다면 아무도 그 총소리를 못 들은 게 이상합니다. 물론 그 장난감 같은 권총은 큰소리는 나지 않겠지만요. 그래도 병마개 따는 듯한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요. 그러나 리넷의 옆방은 비어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박사의 방에 있었고 다른 옆방에는 귀가 어두운 밴 슈일러가 있었으니 못들을 수도 있었겠죠‥‥" "그녀의 선실 가까이에 있는 방은, 그럼 페닝턴의 방 뿐입니다." "다시 그를 불러 물어봐야겠군요." "그럼, 그때까지 선실을 살펴봅시다. 진주 목걸이를 찾은 건 아무도 모르니까요. 바워즈 양도 그 사실을 말하진 않을 겁니다." 포와로는 진주 목걸이를 핥아보기도 하고, 이로 깨물어도 보면서 자세히 살핀 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대령, 문제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난 보석 감정가는 아니지만 가짜와 진짜는 구별할 줄 압니다. 이건 정교하게 만든 모조품입니다." 21 레이스 대령은 바짝 약이 오른 표정이었다. "그럼, 이건 어찌된 일일까요? 그럼, 도일 부인이 모조품을 하고 다녔나요?" "그랬다면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포와로가 불쾌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배에 탄 첫날, 시몬은 그녀의 목걸이를 보고 훌륭한 진주라고 감탄하더군요. 그녀는 진짜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갰군요. 누군가 진짜를 훔쳐가고 모조품을 두었는데, 밴 슈일러 양이 그 모조품을 훔쳤다고 보는 견해가 있죠. 두 번째는 바워즈가 진짜 목걸이를 훔친 뒤, 밴 슈일러가 도벽이 있다고 꾸미고는 가짜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그 여자 두 명은 한 패의 보석 절도범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도일 부인의 눈을 속일 정도로 모조품을 만든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건 서둘러서 되는 일이 아니지요." 레이스 대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앉아서 탁상공론을 해 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빨리 진짜 목걸이를 찾아야만 합니다." 두 사람은 아래 쪽 선실부터 수색했다. 리체티의 선실에는 여러 나라의 고고학 서적과 옷, 편지 두 통, 여러 색깔의 비단 손수건이 있었다. 그리고 퍼거슨의 방에는 사상 서적 몇 권과 스냅 사진, 옷이있었다. 그런데 겉옷은 낡고 해진 게 대부분이었는데 속옷은 모두 고급품이었고 손수건도 비싼 비단 손수건이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서류나 편지가 전혀 없는 게 좀 이상하군요." "퍼거슨은 참 묘한 인물 같습니다." 그는 서랍에서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꺼내 자세히 살펴본 후, 제 자리에 넣어 두었다. 다음은 하녀 루이스 버제트의 방으로, 그녀는 언제나 승객의 식사가 끝난 후에 식사를 했는데, 오늘은 대령의 지시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에는 웨이터 두 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령님, 버제트가 보이지 않는데요." 레이스 대령이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았으나 거기는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는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와 오른 쪽의 방부터 흝어갔다. 첫 번째 방은 제임스 팬숍의 방인데, 그 방은 빈틈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물건은 모두 값비싼 것들이었다. 포와로가 방을 살펴 본 후에 말했다. "팬숍은 치밀한 사람인가 봅니다. 편지는 모두 없앤 거 같군요." 다음에는 팀 앨러튼의 방이었다. 팀은 영국 성공회 신자답게 정교한 종교화와 묵주가 있었다. 그외에는 옷과 미완성의 원고, 많은 책이 있었다. 책상 서랍 속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조안나 사우드우드에게서 온 편지는 단 한 통도 보이지 않앗다. 레이스 대령이 불쑥 말했다. "싸구려 손수건 같은 건 보이지 않는군요." 다음은 앨러튼 부인의 방으로, 그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라벤더꽃 향기가 은은히 풍겼다. 두 사람은 그 방을 바로 나왔다. 레이스 대령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주 깔끔한 부인이군요." 그 다음 방은 시몬 도일이 탈의실로 쓰는 방이었다. 매일 쓰는 파자마, 세면 도구 등은 베스너 박사의 방으로 옮겨졌고 그외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다. "이 방은 찬찬히 살펴봅시다. 도둑이 여기에다 진주 목걸이를 감추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두 사람은 샅샅이 조사했지만 진주 목걸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다 조사한 후, 리넷 도일의 방으로 갔다. 그 방은 도일 부인의 시체가 옮겨진 후 계속 잠가놓았기 때문에 대령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시체를 치운 것 외에는 아침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포와로 씨, 진주 목걸이를 찾는데 보다는 살인범 쪽에 더 신경을 써 주십시오. 내가 아침에 소홀히 넘겨 버린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 밖엔 범인을 밝힐 사람이 없습니다." 포와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세밀히 리넷 도일의 방을 조사했다. 침대와 여행 가방, 옷가지들도 일일이 살펴본 후에 세면대로 나갔다. 세면대에는 여러 종류의 크림과 분, 그리고 로션이 있었다. 포와로의 시선은 나일렉스 라는 상표가 붙은 두 개의 매니큐어 병에 집중되었다. 분홍색 상표가 붙은 병에는 붉은 액체가 한두 방울 남았을 뿐이고, 똑같은 크기의 다른 병은 진홍색 상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득 매니큐어가 들어 있었다. 포와로는 빈 병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고나서 다시 가득 찬 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온 방 안이 과일즙 냄새로 가득찬 듯 했다. "레이스 대령, 우리는 지독히 운이 나쁘군요. 살인범은 용의주도해서 커프스 단추나 담뱃꽁초, 또 담뱃재조차 남기지 않았어요. 범인이 여자라면 손수건이나 립스틱, 아니면 머리카락이라도 남겨 놓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매니큐어 병이라니?" "하녀에게 물어봐야겠어요. 이상해요." "그런데 하녀는 어디 갔죠?" 두 사람은 밴 슈일러의 방으로 갔다. 그녀의 방도 역시 다른 사람처럼 한 눈에 부유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 많았다. 고급 화장품과 많은 짐, 편지와 서류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 방은 포와로의 방이었고, 그 옆이 레이스 대령의 방이었다. 대령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우리 방에 숨기지는 않았겠죠?" "대령,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일어난 사건을 맡았을 때, 붉은 잠옷이 내 가방 속에서 나왔었지요. 그게 범인이 입었던 옷이었는데요." "그럼, 범인이 과연 우리에게 도전을 했는지 우리 방도 살펴보죠." 그러나 그들의 방에서도 진주 목걸이는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배 위로 올라와 바워즈의 방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러나 수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손수건은 이름의 첫 글자가 새겨진 모시 손수건이었다. 그 다음은 베스너 박사의 방이었다. 시몬 도일은 식사는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열이 높고 상태가 나쁜 것 같았다. 시몬은 바워즈가 가지고 온 진주 목걸이가 모조품이라고 말하자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리넷은 그 진주 목걸이를 아주 애지중지했어요. 그래서 늘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분실할 것에 대비해서 보험도 들었다고 했어요." "그럼, 계속 조사를 해야겠군." 대령이 박사의 가방을 조사하자 시몬이 한 마디했다. "박사님을 의심하십니까?" "우리는 박사님을 전혀 모릅니다. 자기가 한 말 이외에는요." 그러나 그 방에서도 목걸이는 찾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다음 방인 페닝턴의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법률과 사업에 관계있는 서류가 든 가방이 있었다. 그 서류의 대부분은 리넷 도일이 서명해야 할 것들이었다. "패닝턴은 의심받을 서류는 모두 없애 버린 거 같군요." "그랬을 겁니다." 포와로는 옷장 맨 윗 서랍에서 콜트 권총을 한 자루 꺼냈다. "지금도 권총을 가지고 여행하는 사람이 있었나." "저번에 당신이 왜 리넷 도일을 쏜 총이 물 속에 던져졌냐고 물었죠? 이제 생각났어요. 리넷을 살해한 범인이 총을 버려 두었는데 다른 인물이 보고 물 속에 빠뜨린 게 아닐까요?" "그것도 가능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많아요. 그럼 다른 인물은 누굴까요? 그는 왜 그 총을 버렸을까요? 그 선실에 들어간 게 확실한 사람은 현재로선 밴 슈일러 뿐입니다. 혹시 그녀가 권총을 물 속에 던진 게 아닐까요? 그럼, 그녀는 왜 재클린을 감싸 주려고 했을까요?" "밴 슈일러는 목도리가 자기 것이라, 놀라서 자신의 계획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목도리는 그렇다 치고 권총은 왜 물 속에 던졌을까요? 그리고 목도리에 관한 건데, 당신이 깨닫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 방을 나오자 포와로는 레이스 대령에게 재클린 드벨포와 코넬리아 롭슨의 방을 조사하라고 한 뒤, 자기는 시몬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포와로가 베스너 박사의 방으로 들어오자 시몬이 말했다. "포와로 씨, 그 목걸이 말입니다. 어제는 가짜가 아니었어요. 리넷이 저녁 식사하기 전에 목걸이를 들고 진주에 대해 말했어요. 그녀는 진주에 대해 상식이 있는 것 같았어요. 만일 그때 모조품으로 바뀌었다면 그녀가 알았을 겁니다." "그건 속을 정도로 정교한 모조품이었습니다. 혹시 리넷이 누구에게 그 목걸이를 빌려 준 적은 없었나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리넷은 원래 매사에 관대했어요. 글쎄, 친한 친구라면 빌려 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혹시 재클린 양에게 빌려 준 일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도둑질을 했을 리가 없어요." 포와로는 그때 애스완의 나일 강을 바라다보며 재클린이 자기는 시몬을 사랑하고, 시몬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재클린의 말이 가장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레이스 대령이 들어왔다. "생각대로 소득이 전혀 없군요. 지금 승객들의 몸수색을 한 웨이터가 오고 있습니다." 남자 웨이터와 여자 급사가 들어와 먼저 남자 쪽이 경과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인이 잔소리를 심하게 하더군요. 그는 권총도 한 자루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젤 25구경 자동 권총이더군요." 그때 시몬이 한 마디했다. "리체티라는 사람은 난폭하더군요. 왜디할파에서 리넷이 그 사람의 전보를 잘못 보았을 때 굉장히 흥분해서 화를 낸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곱상한 여자 급사가 말했다. "부인들에게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모두 불평을 하는데 앨러튼 부인만 조용하셨어요. 그리고 오터번 양의 핸드백 속에 진주로 장식된 권총이 있었습니다." 레이스 대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혐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 배에 탄 여자는 모두 그 진주 장식의 손잡이가 있는 권총을 가지고 있나?" "그 손님은 제가 핸드백을 조사할 때, 등을 돌리고 있었어요. 아마 제가 권총을 본 줄 모르고 있었겠죠." "참, 하녀는 어디 있죠?" "배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하녀가 목걸이를 훔쳤나? 겁이 나서 물에 뛰어든 게 아닌가?" 시몬의 말에 대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낮에 물에 뛰어들었다면 눈에 띄었을 겁니다. 그녀의 방을 살펴보아야겠군."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은 하녀 루이스의 방으로 갔다. 그 방은 옷이 지저분하게 널려있고 속옷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루이스의 구두가 침대 옆에 있었는데, 한 짝은 뒤집어질 듯이 놓여 있었다. 다음 순간, 침대 밑을 들여다보던 레이스 대령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사라진 게 아니라 침대 밑에 죽어 있군요‥‥" 22 포와로와 레이스 대령은 침대 밑에 누워있는 루이스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가슴을 맞고 즉사했군요. 사망한 지, 1시간 가량 되었나 봅니다. 베스너 박사를 불러야겠군요." 포와로는 시체를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오른손에서 무엇인가를 빼냈다. 그것은 엷은 자주색의 천 프랑짜리 지폐 조각이었다. "맞아요,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녀는 범인에게 협박해서 돈을 요구하려고 한 겁니다."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 어제 하녀는 무엇을 보았을 겁니다. 아침에 그녀가 만일 자기가 잠이 오지 않아서 아씨의 방에 갔거나 갑판에 올라갔다면 살인범이 방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걸 보았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범인이 리넷 도일의 방으로 들어가는. 아니면 나오는 것을 본 겁니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어리석게도 목숨을 잃다니‥‥" "이제 사실은 명확해졌어요. 그러나 그걸 믿을 수가 없군요. 내 생각이 맞을 거예요. 오늘 아침까지는 난 그걸 생각지 못했어요. 우리 두 사람이 다 어리석었어요. 나는 하녀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범인을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교활하게 범인에게 돈을 요구했겠죠. 그래서 범인은 프랑스 돈을 주고 그 과정에서 하녀는 목숨을 잃어버린 거죠." 포와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행할 때는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5파운드나 달러, 프랑스 지폐 등을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범인은 그녀에게 각 나라의 지폐를 섞어서 주었을 겁니다. 그러면 하녀는 돈을 세면서 계산을 할 겁니다. 정신을 온통 돈에만 집중시키고 말입니다. 그 틈에 범인은 하녀의 가슴을 찌른 거예요. 그리고 돈을 모두 빼앗아 가지고 갔을 겁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돈 조각이 남은 것은 까맣게 모르고 도망쳤겠죠." "그럼, 찢어진 지폐가 단서가 된다면 범인을 밝힐 수도 있겠군요." "범인은 지폐를 조사할 겁니다. 그리고 끝이 찢어진 것을 알고, 내 생각으론 그는 째째한 인간이 아니어서 그 돈을 없앨 거라고 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사건이나 도일 부인의 사건을 보면 용기와 민첩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대담한 실행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사건을 저지를 인물은 꼼꼼하거나 절약하지는 않지요." 베스너 박사가 와서 간단히 시체를 살펴보고는 사망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흉기가 좀 색다르군요. 날카롭고, 가느다란 칼 종류인데 내가 어떤 모양의 흉기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베스너 박사는 선실로 돌아와서 예리한 외과용 메스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런 메스로 살해했습니다." 레이스 대령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박사님 칼 중에 없어진 건 없습니까?" 베스너 박사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크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뭐요? 내가 그런 하녀 나부랑이를 죽였다고요? 나는 오스트리아에선 유명 인사요. 병원도 있고 상류층의 환자도 많이 갖고 있소. 내 메스는 모두 있습니다. 없어진 메스는 없단 말이오." 베스너 박사는 소리치며 메스 상자를 닫은 후, 던져 버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박사님이 화가 났군요." 포와로도 씁슬하게 말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때 박사가 들어와서 명령조로 말했다. "이 방에서 모두 나가 주시오. 환자의 붕대를 갈아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별수없이 그 방을 나왔다. 대령은 혼자 불평을 하다가 어디로 가 버렸다. 포와로는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젊은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잘리의 방에서 재클린과 로잘린이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포와로를 쳐다보았다. 로잘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포와로는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눈치빠른 재클린이 포와로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저, 또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순간 로잘리의 눈에는 두려움 이상의 것, 즉 경악이 떠올랐다. "도일 부인의 하녀가 살해되었습니다." 포와로는 재클린과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로잘리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못 볼 것을 본 모양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그녀의 입을 영원히 열지 못하도록 조치한 겁니다." 재클린이 또다시 물었다. "루이스가 무엇을 봤죠?" 포와로는 그 말에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로잘리를 향하고 있었다. "네, 하녀는 분명히 범인이 리넷의 방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와로는 그때 로잘리가 숨을 크게 들이 쉬는 소리와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로잘리는 빛나는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하녀가 누굴 보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포와로와 로잘리 오터번은 그곳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로잘리,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죠?" "네? 저는 모두 이야기했는데‥‥" "아닙니다. 당신은 어젯밤에 당신이 본 것도 모두 말하지 않았고, 왜 핸드백에다 진주로 장식된 손잡이가 달린 작은 권총을 갖고 있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는 권총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급히 선실로 뛰어가 핸드백을 가지고 와서 포와로에게 내밀었다. "당신은 엉터리에요. 전 권총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아닙니다, 엉터리가 아니에요." "직접 보셨잖아요. 어디 권총이 있다는 거죠?" "나는 사실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이 어제 무엇을 보았나 말해 볼까요? 당신은 어제 리넷의 선실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걸 보았죠. 그는 방에서 나와 당신과는 정반대 쪽으로 가서 제일 끝의 선실 중 하나로 들어갔죠. 어때요? 내 말이 틀립니까? 당신은 입을 다무는 펀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군요. 입을 열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포와로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다. 난 아무 것도 못보았습니다." 23 바워즈가 베스너 박사의 방에서 나오자 재클린이 다가와 물었다. "시몬은 어떻죠?" "글세, 나쁘지는 않지만‥‥ 빨리 엑스레이를 찍고 총알만 빼내면 문제가 없을 거예요. 언제 쉘랄에 도착하죠, 포와로 씨?" "내일 아침에 도착할 겁니다." "그럼 너무 늦어서 위험해요. 언제 패혈증 증세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재클린이 놀라 그녀의 팔을 잡고 물었다. "그럼, 시몬이 죽는단 말인가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빨리 엑스레이를 찍어야만 해요. 도일 씨는 안정을 해야 하는데 자주 흥분해서 열이 올라요. 이일 저일로 휴식을 취할 수 없어서‥‥" 바워즈는 말을 마치고 그 자리를 떠났고 재클린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선실로 돌아갔다. 포와로는 그녀를 침대에 앉혀주었다. "시몬은 내가 죽인 거예요. 내가 죽게 한 거죠." "그건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시몬을 사랑해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자, 안심해요. 원래 간호원들은 그렇게 말한답니다. 사실 당신은 이 여행을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네, 그래요. 내가 이렇게 오는 게 아니었어요." "시몬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무사할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되겠죠." "그렇고 말고요." "재클린, 당신은 어린애 같군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시몬은 저를 동정하는 거예요. 제가 그를 쏘고 괴로워하자 저를 동정하는 것 뿐입니다." "순수한 동정심이라고요? 그것 참 고상하군요." 그는 재클린을 경멸하듯 쳐다보고는 그 방을 나왔다. 갑판에서 레이스 대령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포와로 씨, 시몬이 전보에 대해 말했지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조사해 보는 게 어떨까요?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아닙니다, 실마리가 나타났습니다. 확신이 갑니다,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요. 당신도 알다시피 리넷 도일의 주변에는 증오, 질투, 시기, 그리고 야비한 인간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확실한 것을 알아냈군요." 포와로는 은근한 어조로 레이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할 단계가 되면 입을 여는 것까지도요. 애스완에서 나와 재클린이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엿들었다고 했죠? 팀은 사건이 났던 날, 무슨 소리를 들었으며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침에는 루이스가 의미있는 말을 했고, 앨러튼 부인은 탄산수를, 팀은 위스키 소다를, 나는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매니큐어 두 병, 내가 말한 프랑스 속담, 끝으로 제일 난해한 문제로, 싸구려 손수건과 벨벳 목도리에 권총을 싸서 물 속에 던진 것등‥‥" "나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글쎄, 잘 될까요?" "물론 잘 되죠. 당신은 사실을 제대로 못 보았습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착각을 한 겁니다. 나는 여태껏 권총이 없어진 것에만 주목했어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그러나 30분 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답니다. 그럼 먼저 그 전보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들이 노크를 하자 박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환자를 만나겠다니, 그건 안됩니다. 시몬 도일은 열이 높아요. 오늘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꼭 한 가지만 물어 보겠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박사는 투덜거리다가 할 수 없이 3분 동안의 면담을 허락하고는 그 방을 나가 버렸다. "전에 당신이 전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죠? 그걸 좀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왜디할파에서의 일인데, 우리가 제2폭포에서 돌아와 보니 전보가 와 있었습니다. 리넷은 자기가 결혼한 사실을 잊었는지 리체티라고 흘려 쓴 전보를 리지웨이라고 읽고 뜯어서 읽었죠. 그때 리체티가 나타나서 전보를 빼앗고 한바탕 소동을 부렸습니다. 그는 리넷의 사과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리넷이 크게 읽어서 저도 분명히 들었어요. 그건‥‥"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포와로 씨와 레이스 대령을 만나야 해요. 그들이 도일 씨와 함께 있다고요?" 박사는 문을 열어놓고 나갔기 때문에 커튼만 내려 있었다. 커튼을 젖히고 황급히 오터번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흥분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일 씨, 나는 부인을 죽인 범인을 알고 있어요." 시몬과 포와로, 레이스 대령은 놀라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터번 부인은 세 사람을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레이스 대령이 급히 물었다. "도일 부인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증거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여러분도 루이스 버제트를 살해한 사람이 도일 부인을 죽인 동일범이라고 생각하시죠?" 시몬이 초조한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계속해 보세요." "그럼, 내 주장이 더욱 옳다고 봅니다. 나는 루이스를 죽인 범인을 알아요." "부인은 단지 누군가 살해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아닙니까?" "나는 내 눈으로 그 사람을 직접 보았어요." 오터번 부인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시몬이 큰소리로 말했다. "부인, 제발 처음부터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다가 나는 식욕이 없어져서 식당에 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방에다 뭔가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로잘리에게 혼자 가라고 했지요." 오터번 부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문에 드리워진 커튼이 약간 흔들렸다. "나는 이 배의 선원과 약속이 있어서 딸에게 알리지 않고 그를 만나야 했지요. 딸은 언제나 나를 귀찮게 하기 때문에‥‥" 레이스 대령은 포와로를 얼른 쳐다보고 작은 목소리로 '술.'이라고 말해주었다. 또다시 커튼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에서 희미한 금속성의 푸른 빛이 번쩍거렸다. "나는 그 선원과 만나려고 갑판을 걸어가는데 선실 문이 열리더니 루이스라는 하녀가 밖을 살펴보더군요. 누구를 기다리는 듯, 나는 보고는 실망한 표정으로 문을 닫더군요. 나는 그냥 약속 장소로 가서 선원에게 물건을 받고 돈을 준 후 돌아왔어요.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누구인지 그녀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더군요." 레이스 대령이 그 말에 끼어들었다. "그럼, 그 사람이 바로‥‥" 그때 요란한 총소리가 나고 오터번 부인이 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녀의 귀 뒤에 난 작은 구멍에서 피가 마구 쏟아졌다. 순간, 침묵이 방안에 흘렀다.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대령은 시체를 살펴보고 포와로는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갑판에는 사람이 없었고, 문 앞에는 콜트 권총이 놓여 있었다. 포와로는 배 모퉁이 쪽으로 뛰어가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모퉁이를 도는데 반대 방향에서 팀 앨러튼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죠?" "도중에 누구 본 사람 없습니까?" "아뇨, 아무도 못 보았는데요?" 포와로는 팀과 선실로 돌아왔다. 벌써 그 방에는 로잘리, 재클린, 코넬리아가 와 있었다. 잠시 후에는 전망실에 있던 퍼거슨과 팬숍, 앨러튼 부인도 달려나왔다. 포와로는 팀의 장갑을 끼고 그 권총을 살펴보았다. 레이스 대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범인은 저리로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팬숍 씨와 퍼거슨 씨가 갑판 로비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그쪽으로 갔다면 그들에게 들켰을 겁니다." 포와로도 한 마디 했다. "배 모퉁이 쪽으로 갔으면 팀과 부딪쳤을 겁니다." 레이스 대령은 오터번 부인을 쏜 후, 범인이 버리고 한 총을 들여다 보았다. 그건 얼마 전에 본 총이었다. 레이스 대령이 페닝턴의 방을 두드렸으나 아무 응답도 없었다. 대령은 문을 열고 들어가 권총이 있던 옷장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권총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갑판으로 나왔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포와로는 앨러튼 부인에게 다가가 로잘리 오터번을 부탁했다. 그때 베스너 박사가 소리치며 달려오자 문 앞에 섰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어 그는 선실로 들어갔다.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는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아래쪽 갑판에서 페닝턴을 찾아냈다. 그는 휴게실에서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총소리 못들었습니까?" "못들었습니다. 아니, 그럼 그게 총소리였나요? 또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아서‥‥" "오터번 부인이 총에 맞았습니다." "왜 그녀가? 이해할 수 없군요. 혹시 이 배에 살인광이 타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럼 우리도 방법을 강구해야죠?" "페닝턴 씨,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죠?" "네, 20분 전쯤 일 겁니다." "줄곧 여기에 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당신 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24 페닝턴은 큰 충격을 받아 어안이 벙벙했다. "당신에게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왜죠? 나는 총소리가 날 때도 여기서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요?" "누가 그걸 증명하죠?" "그러나 그 여자를 쏘고 이곳으로 왔다면 갑판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보았을 겁니다. 어떻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내려오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왜 그녀를 쏜단 말입니까?" "그럼 당신의 권총에 대해서는 어떻게 된 거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건 제 책임이겠죠. 이 배에 탄지 얼마 안 되어 저녁에 전망실에서 이야기하다가 나는 여행할 때는 늘 총을 휴대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가 있었죠?" "생각이 나지 않는데, 꽤 많이 있었던 거 같아요. 내가 잘못한 것 같군요. 처음에는 리넷, 그 다음은 그녀의 하녀, 이번에는 오터번 부인‥‥ 그들에겐 아무 연관성도 없지 않습니까?" "연관성이 있습니다. 오터번 부인은 루이스의 방에 들어간 사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에 총을 맞았습니다." 포와로가 잠자코 있다가 그에게 말했다. "페닝턴 씨, 30분 후에 내 선실로 와 주십시오.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갑판으로 돌아오자 앨러튼 부인이 손짓을 했다. "포오로 씨, 로잘리와 함께 있을 2인용 선실이 없을까요? 그녀를 그 방으로 보내지 못하겠어요. 내 방은 1인용이고."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몹시 흥분했지요?" "네, 그녀는 어머니에게 헌신적이었나 봐요. 참 불쌍한 처녀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주정뱅이라면서요?"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어머니에게는 지극했습니다." "나도 그녀의 그런 사고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보기 드문 처녀죠. 참 착한 처녀지요. 내가 그녀를 잘 보살필테니 염려 마세요." 앨러튼 부인은 선실로 돌아가고 포와로는 사건의 방으로 갔다. 코넬리아는 갑판 위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포와로 씨, 범인은 어떻게 들키지 않고 도망쳤을까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범인이 도망칠 길은 세 군데나 있답니다." 재클린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세 군데나요?" "범인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도망쳤겠죠. 그 외에는 또 어떤 방향이죠?" 그 말에 재클린이 대답했다. "물론 왼쪽, 오른쪽이 아니면 아래쪽이겠죠. 위로 날아갈 수는 없는 거고." 포와로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명석하시군요." 그러나 코넬리아가 아직 어리둥절해하자 재클린이 나서서 말했다. "포와로 씨는 범인이 난간을 넘어서 아래쪽 갑판으로 내려갔을 거라는 말이에요." 코넬리아는 감탄하듯 말했다. "난 그걸 몰랐어요. 아, 범인은 상당히 민첩하군요." 이번에는 팀 앨러튼도 한 마디했다. "그건 쉽게 할 수 있죠.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당황해서 넋이 나가니까요. 총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1, 2분 동안은 꼼짝도 못하게 된답니다." "그건 경험에 의한 말입니까?" "네, 나도 5초간은 정신을 잃고 서 있었답니다. 그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갑판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이때 대령이 베스너 박사 방에서 나오며 큰소리로 말했다. "비키세요, 시체를 운반해야 하니까요." 코넬리아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영원히 이번 여행을 잊지 못할 거예요. 세 번이나 살인 사건이 생기고,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퍼거슨이 그 말을 듣고 대뜸 싸울 듯 말했다. "그건 당신이 너무 여린 탓이오. 당신은 죽음을 동양인들과 똑같이 생각하는 거 같군요. 그건 지극히 단순한 사고입니다." "그게 잘못된 거라고요? 동양인은 무식하지 않아요." "물론이겠죠. 교육은 백인을 타락시키고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봐요, 그 타락하고 오염된‥‥" "당신은 너무 역설적이에요. 나는 겨울에 그리스 예술과 르네상스에 대한 교양 강좌를 들어서 당신이 엉터리라는 것쯤은 알아요. 그리고 나는 역사상 저명한 여성에 대한 강의도 듣고 있어요." "뭐요? 그리스 예술? 르네상스? 한심하군요, 한심해요. 아가씨,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이 배에서 세 명의 여자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쓸모없는 인간들이에요. 리넷은 돈만 많지 아무 쓸모가 없고요, 프랑스인 하녀는 마치 기생충 같은 인간이고, 오터번 부인은 폐물이 다 된 인간이죠. 그들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거 같습니까?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코넬리아가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살면 안돼요. 저도 오터번 부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을 거예요.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어요. 또 하녀 루이스도 누군가 그녀를 아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리넷 도일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에요. 저는 못 생겼기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칭찬하는지도 몰라요. 그런 미인이 죽었다는 건 우리 모두의 손실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퍼거슨은 화가 난 듯, 자기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여자군, 그래. 당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리넷의 아버지 때문에 파산한 사실을 모릅니까? 그런데도 리넷이 진주 목걸이를 목에 감고 멋진 옷을 입은 걸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다니, 참 자존심도 없는‥‥" 코넬리아가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도 얼마간은 속상하고 괴로워 했지만‥‥ 아버지는 파산 후, 홧병으로 돌아가셨지요." "얼마간 속상했다고요?" "당신이 방금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가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저 지난 과거의 일일 뿐이에요." "그건 그렇지요. 코넬리아, 당신은 내가 본 여인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해요. 코넬리아, 나와 결혼해 주시오." "농담은 그만 하세요." "아니오, 이건 진심이오. 탐정님이 증인입니다. 코넬리아가 절차를 무시하면 거절할 테니까요. 코넬리아, 대답해 주시오." "당신은 참 엉뚱한 분이군요." "왜, 결혼해 달라는 걸 거절하는 건가요?" "당신은 이 세상 모두를 비웃는 사람이에요. 교육, 문화, 그리고 죽음까지 비웃는데 어떻게 당신을 믿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급히 선실로 들어갔다. 포와로는 퍼거슨에게 말했다. "퍼거슨 씨, 당신은 무례해요." "이해해 주세요. 전 기성 세대를 공격하길 즐기는 편이랍니다." "그럼, 나도 기성 세대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죠. 당신은 코넬리아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훌륭한 아가씨죠." "네, 잘 보셨어요. 연약해 뵈지만 용기있는 여자랍니다. 나는 그 친척인 늙은 노처녀를 좀 곯려주려고 해요. 그녀가 나를 미워하면 코넬리아는 내게 가까워질 테니까요."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전망실로 들어가 뜨개질을 하고 있는 밴 슈일러에게 가까이 갔다. 포와로는 떨어져서 잡지를 읽는 척 했다. "밴 슈일러 양, 안녕하십니까?" 그녀는 거만하게 퍼거슨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짧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죠. 난 당신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털실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당신, 제정신이 아니군요." "나는 코넬리아에게 결혼 신청을 했습니다." "그럼, 그녀가 거절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난 그녀가 제 청혼을 승낙할 때까지 계속 구애할 겁니다." "나는 조카딸이 그렇게 당신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왜 나를 싫어하십니까?" 밴 슈일러는 묵묵히 뜨개질만 했다. "도대체 나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당신의 사회적 지위요." "그런 건 부질없는 겁니다." 그때 코넬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퍼거슨과 밴 슈일러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퍼거슨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코넬리아, 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당신에게 구혼하고 있는 중이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밴 슈일러가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코넬리아, 이 젊은이에게 어떤 행동을 했느냐?" "아니에요, 저는 그런 일은‥‥" 퍼거슨이 나서서 말했다. "내가 혼자 한 일입니다. 그녀는 착해서 노골적으로 나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코넬리아, 당신의 아주머니는 내 사회적 지위가 보잘 것 없다고 거절하는군요. 그럼, 당신 생각은?" 코넬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좋아만 한다면 당신의 신분 같은 건 상관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무례하고‥‥ 역설적이고‥‥ 이상한 말투에‥‥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그녀는 울상이 되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퍼거슨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천장으로 보고 휘파람을 불다가 한 마디 했다. "반드시 당신을 아주머니라고 부를 겁니다." 밴 슈일러는 흥분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당장 나가요. 나가지 않으면 웨이터를 부르겠어요." "나도 돈을 내고 탔는 걸요. 나를 쫓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지요." 그는 거만한 태도로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포와로는 떨고 있는 밴 슈일러에게 털실을 주워 주었다. "건방지죠? 그 집안은 모두 그렇답니다. 버릇없이 키워서 그럴 겁니다. 참, 부인도 그가 누군지 아시겠지요?" "네?" "그는 퍼거슨이란 이름만 쓰지만 바로 젊은 돌리시 경이죠. 진보주의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그냥 퍼거슨이라고 하지요.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공산주의자가 되었다지요, 아마. 나는 신문에 난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이 새겨진 반지도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돌리시 경이에요." 밴 슈일러는 포와로에게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포와로는 그녀가 방에서 나가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맞아, 모두 들어 맞고 있는 거야." 25 레이스 대령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포와로 씨, 10분 후에 페닝턴이 오면 당신이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다." 포와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팬숍을 자기 방으로 불러 달라고 하고 나갔다. 잠시 후, 팬숍과 레이스 대령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포와로는 그들이 의자에 앉자 담배를 권했다. "팬숍 씨, 당신은 내 친구인 헤이스팅즈와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 같군요." "네, 이건 내가 졸업한 학교의 넥타이입니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영국인의 가치관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죠?" 팬숍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요즘엔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나 관습은 오래 남습니다. 모교의 넥타이를 매고는 거짓말을 하거나 모교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젠가 타인의 사적인 대화를 엿들었죠. 그리고 리넷 도일 부인에게 사무적인 태도가 훌륭하다고 칭찬했습니다. 팬숍 씨, 당신은 젊고 돈이 없는 사람인데 이 호화로운 배를 탄 게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은 왜 이 배를 탔지요?" "포와로 씨, 난 당신처럼 이상한 사람에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당신 사무실은 우드홀에서 가까운 노댐프턴에 있지요? 왜 당신은 리넷의 이야기를 엿들었습니까? 당신은 도일 부인이 서류를 읽도록 하려고 그녀에게 칭찬을 보냈죠? 이 배에선 살인 사건이 연달라 발생했습니다. 오터번 부인이 앤드류 페닝턴의 총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면 사실을 말하겠습니까?" 팬숍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아저씨는 도일 부인의 영국측 변호사인 카마이클 씨입니다. 아저씨는 도일 부인의 재산을 관리하지요. 아저씨는 앤드류 페닝턴과 자주 편지를 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페닝턴이 공채를 처분하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아서 아저씨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리넷이 결혼을 하고 이집트로 신혼 여행을 떠나 아저씨는 안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카이로에서 보낸 리넷의 편지에 우연히 페닝턴 씨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는 더 의심을 품었지요. 아저씨는 페닝턴이 막바지에 이르면 도일 부인에게서 서명을 받으려 애쓸 거라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증거가 없어서 아저씨는 나를 보내신 겁니다. 그래서 나는 형편없이 남의 이야기를 엿들었던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했다고 봅니다." "도일 부인에게 경고라도 해 주었습니까?" "아뇨, 그런 일은 못했지만 페닝턴은 당분간 서명을 받으러 나서지는 못할 겁니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경고해 주려고 했습니다. 도일 부인은 페닝턴을 전폭적으로 믿는 처지이므로 도일 씨에게 접근하려고 했었지요." "솔직히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도일 부인과 도일 씨 중에서 누구를 더 손쉽게 속일 수 있을 거 같습니까?" "리넷 도일은 철저해서 힘드니, 도일 씨를 택할 겁니다. 그는 가리키는 곳에다 그냥 서명만 할테니까요." "그게 모두 동기가 되겠군요." "현재로선 증거가 없지만 페닝턴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팬숍이 나간 후, 바로 앤드류 페닝턴이 들어왔다. 그는 여유있게 미소 띤 얼굴이었으나 턱과 눈매에서 경계심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부른 것은 이번 사건이 당신과 특별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침에 리넷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말했죠?"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아버지와 절친했는데 그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당신을 재산 관리자로 부탁했나요?" "네, 그런 셈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은 죽고 지금은 스텐데일 록포드만 살아 있죠." "당신의 동업 변호사인가요? 이제 리넷이 결혼을 했으니 재산 관리는 모두 그녀가 하겠지요?" "도대체 당신은 무슨 질문을 하려는 겁니까?" "대답하기 싫다면‥‥" "싫은 게 아니라 나는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럽니다." "살인 동기지요! 동기를 알려면 경제적인 면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페닝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리지웨이의 유언에 따라 리넷이 결혼을 하면 직접 재산을 관리하게 됩니다." "무조건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과 동료 변호사의 걱정이 크겠군요." "우리는 그런 업무에 익숙해 있어서 그런 일은 특별히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페닝턴은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혹시 리넷의 갑작스런 결혼 때문에 당신네 사무실이 위급한 상태로 돌입하지 않았습니까?" "위급한 상태라뇨?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죠?" "간단한 문제입니다. 리넷 도일 씨의 서류는 모두 제대로 갖추어져 있겠죠?" "그렇소,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염려마시오." "당신은 리넷의 결혼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이집트로 달려와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나는 그녀와 도일 씨와의 결혼 사실을 몰랐어요." "당신은 카매닉 호를 타고 왔다고 했는데, 당신 짐에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노르망디 호의 꼬리표는 붙어 있더군요. 그 배는 카매닉 호가 떠난 지 이틀 후에 떠난 배입니다." 냉정하고 자존심 강한 페닝턴의 시선이 가볍게 떨렸다. "자, 솔직히 말해 보시오. 부인해도 헛일이오. 노르망디 호의 승객 명단을 보면 금방 확인될 테니까." 앤트류 페닝턴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교활한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당신들은 뛰어난 분들이군요.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말은 비밀에 붙여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지요. 약속을 지키겠소." "영국 쪽에서 우리를 속이는 듯 해서 제가 직접 온 것입니다. 도일 부인이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증거를 입수했기 때문이지요." "누구에게 사기를 당한다는 말이죠?" "그야, 리넷의 영국측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편지를 못 받았다고 했습니까?" "그냥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그들은 신혼 여행 중이니까요. 더욱이 나는 남편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그 남편도 의심을 했었지요." "그럼,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그 때문이었습니까?" "네." "당신 말을 믿을 수 없군요. 당신은 리넷이 결혼하자 경제적인 위기에 처했겠죠. 그 곤경의 돌파구를 찾기위해 여기까지 따라와 부인에게 서명을 받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또 신전의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렸는데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리넷 도일과 하녀를 죽인 범인을 밝히려던 오터번 부인은 당신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건 분명히 당신의 총이었습니다."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도대체 내가 리넷을 죽일 이유가 뭐겠습니까? 리넷이 죽어도 나는 이득이 없습니다. 그녀의 재산은 단 한 푼도 내게 오지 않고 그녀의 남편만 부자가 될 뿐이지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시몬 도일을 조사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도일 씨는 그때 총에 맞았습니다. 부상을 당한 후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고요. 그의 증인들은 믿을 만한 인물들이지요. 시몬이 그의 아내를 죽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루이스나 오터번 부인도 마찬가지죠. 오터번 부인이 살해 당할 때는우리도 도일 씨와 함께 있었죠." "그러나 나는 아무 이득도 없는데 왜 살인을 하겠습니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도일 부인은 날카롭고 철저한 사람이라 자신이 영국에 돌아가 재산을 관리하게 되면 이상한 걸 금방 눈치챌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의심을 받게 되겠죠. 그러나 이제는 리넷이 죽고 남편이 재산을 관리할테니 문제가 달라졌지요. 남편은 단순해서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성격이니까요. 그를 상대하기는 손쉬운 일입니다. 그런 남편과 상대하느냐 리넷과 상대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사정은 엄청나게 변할 테니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겁니다. 세 번의 살인 사건이 났으니 검찰에서 도일 부인의 재산 관계를 모두 조사할 겁니다." 페닝턴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당신이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제 모두 밝혀질 테니까요." 페닝턴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불경기 때문입니다. 월 스트리트는 지금 쑥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6월이 되면 잘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그 담뱃불은 곧 꺼져 버렸다. "페닝턴 씨, 바위를 떨어뜨린 건 우연이 아니었겠죠?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여‥‥" "아닙니다, 그건 정말로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위에 발이 걸려 넘어지자 바로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진 겁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페닝턴의 시선은 불안으로 떨렸다. 그러나 그렇게 궁지에 몰렸으면서도 그의 투지는 전혀 굽힘이 없었다. "당신들이 내게 그걸 뒤집어 씌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우연한 사고였으니까. 리넷을 쏜 것도 내가 아니고‥‥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소."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26 "수확이 크군요. 그는 스스로 살인 미수와 사기 행각을 털어 놓았군요. 더 이상은 어렵겠는데요." 포와로는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애스완의 정원, 앨러튼의 진술, 매니큐어 두 병, 내가 마신 포도주, 벨벳 목도리, 싸구려 분홍색 손수건, 범행 현장에 떨어진 권총, 루이스 살해 사건, 오터번 부인 살해 사건‥‥ 이 모두를 정리해 보니 페닝턴은 범인이 아니군요." "네, 뭐라고요?" "페닝턴은 범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살인의 동기는 있지만, 그의 성격으로는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살인 사건은 대담하고 민첩하며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나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페닝턴은 안전하다고 확신이 가는 일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모험적인 사건을 저지를 인물이 못 되지요." "포와로 씨, 당신은 철저하게도 파악했군요." "아직 확실치 않은 게 있긴 해요. 또 리넷이 잘못 읽었다던 전보도 문제가 있는 거 같고‥‥" "참, 도일에게 물어본다고 하고선 그만 깜빡했군요." "그건 뒤로 미루고 우선 팀 앨러튼을 만납시다." 레이스 대령은 벨을 눌러 웨이터에게 팀 앨러튼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했다. 팀은 의아한 표정으로 의장 앉아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지요?" 포와로는 짧게 한 마디 했다. "아닙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됩니다." "아, 저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입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앨러튼 부인은 참 훌륭한 분이니까요. 그리고 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어떤 여자 때문입니다." "어떤 여자라뇨?" "조안나 사우드우드죠. 나는 그녀의 이름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런던 경시청을 3년간 괴롭힌 상류사회의 보석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보석 사건의 수법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그 수법은 늘 진짜 보석과 똑같이 만든 모조품으로 바꿔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종합해서 검토한 결과, 그것은 두 명 이상이 공모한 범죄였습니다. 내 친구인 잽 경감의 여러 자료를 검토해서 상류 사회의 사교계를 출입하는 지체높은 인물이 범인이라는 게 확실해졌습니다. 그 지체높은 인물이 누군지 압니까? 그건 바로 다름아닌 조안나 사우드우드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보석 도난 사건이 날 때마다 그녀와 잘 알고, 그녀가 도난당한 보석을 빌린 적이 있다고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석을 바꿔치기한 사람은 다른 인물이었지요. 조안나가 영국에 없을 때도 보석 도난 사건은 일어났으니까요. 그래서 잽 경감은 하나의 추측을 했지요. 조안나가 보석 조합에 관여한 적이 있으므로 훔칠 물건을 복사한 후, 그 복사한 것을 보석상에게 주어 모조품을 만들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공범은 모조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런데 그녀의 공범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죠. 그런데 당신이 마조르카에 있을 때 일어났다는 반지 분실 사건과 어떤 파티에서 일어났다는 바꿔치기 사건을 이야기하는 게 내 흥미를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조안나와 친하다는 게 더 흥미를 돋구었죠. 그리고 당신은 나를 무척 꺼려 했고요. 리넷 도일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의 진주 목걸이가 도난 당했다는 걸 알고는, 팀 당신이 생각나더군요. 당신이 조안나와 공범이라면 목걸이를 바꿔치기를 할 뿐 훔치진 않았다는 거죠. 그때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모조품 목걸이를 가져왔더군요. 그래서 나는 목걸이를 훔친 사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목걸이를 바꿔치기한 거죠." 그는 포와로가 뚫어질 듯이 바라보자 창백한 얼굴로 약간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그 목걸이를 어디에 두었단 말입니까?" "그거야 한 군데 밖에 없지요. 아마 당신 선실의 묵주 속일 겁니다. 그 묵주는 평범한 거 같지만 나사를 돌려 빼도록 특별히 고안했겠죠. 묵주알 속에 진주를 접착제로 붙였겠죠. 종교적인 성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함부로 손대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조안나가 그 모조품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안나는 리넷이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올 걸 알고 당신을 이곳으로 보낸 겁니다. 그녀는 네모난 구멍을 만든 책 속에 숨겨 보냈을 겁니다. 우체국에서도 책이라면 펴보지 않을 테니까요." "이제 끝났군요. 내가 졌습니다. 흥미로운 게임도 일방적인 패배로 끝나는군요. 이제 대가를 치루는 일만 남았군요." "당신은 그때 목격자가 있었다는 걸 압니까?" "누가 목격했죠?" "리넷 도일이 살해되던 날 밤, 새벽 1시가 넘어서 당신이 그녀의 방에서 나온 걸 누군가가 보았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를‥‥ 저는 그 여자를 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맹세합니다. 나는 무척 불안했어요. 왜 하필이면 그날 밤에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건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당신이 그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살아 있었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나는 진주가 어디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침대맡 탁자에서 목걸이를 찾아서는 바로 그 방을 나왔어요. 물론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숨 쉬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아뇨,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럼, 혹시 금새 총을 쏜 듯한 화약 냄새가 나지 않던가요?" "글쎄, 냄새는 맡지 못했는데‥‥" "당신이 선실에서 나오는 걸, 모퉁이를 돌아오던 로잘리 오터번이 목격했지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녀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추측했습니다. 그녀는 내게 아무 것도 못봤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그녀는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본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더 솔직히 얘기했을 텐데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정말 그녀는 특이하군요. 어머니 때문에 고통스러울텐데‥‥" "그렇지요. 힘겨운 생활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대령님, 리넷의 방에서 목걸이는 바꿔치기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안나에 관한 것은 인정할 수 없어요. 당신이 그녀를 체포할 증거는 없을 겁니다. 모조품을 구한 건 내 문제니까요." "당신은 훌륭하군요." 그러자 팀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저는 신사랍니다. 나는 어머니가 당신에게 호의를 품으셔서 불안했습니다. 저는 형사 앞에서 여유있게 앉아있을 정도로 뻔뻔한 놈은 아니랍니다." "그래도 당신은 목걸이를 바꿔치기했지 않습니까?" "네, 저는 배 안에서 바꿔치기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방 건너에 그녀의 방이 있고, 리넷도 정신이 산만한 상황이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그럼 좀 이상한데요?" 포와로는 벨을 눌러 오터번 양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로잘리가 나타났는데 그녀는 너무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로잘리는 팀과 마주치자 깜짝 놀랐으나 이내 평상시처럼 침착한 태도로 포와로와 레이스를 쳐다보았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몇 가지 확인할 일이 있어서요. 당신은 오늘 새벽 1시 10분 경, 갑판 오른쪽에서 누군가를 보았죠? 그러나 당신은 그가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팀 앨러튼 씨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그도 리넷 도일의 선실에 들어간 걸 시인했고요." 로잘리가 팀을 쳐다보자 그는 경직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앨러튼 씨, 시간도 맞죠?" "네, 맞습니다." 로잘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어떻게 당신이‥‥" "아닙니다.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진주 목걸이만 훔칠 생각이었습니다." 포와로가 나서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앨러튼 씨는 어제 리넷의 방에 들어가 진짜 진주 목걸이와 그 모조품을 바꿔치기 했다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네,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스 대령은 초조한지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포와로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앨러튼 씨가 꾸며낸 얘기 같습니다. 그가 리넷의 방에 들어간 증거는 있지만 왜 들어갔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팀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당신은 이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나는 당신이 진주를 훔친 건 알지만 그게 언제였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전에 그걸 훔쳤는지 누가 압니까? 만일 리넷이 목걸이가 바뀐 걸 알았다면‥‥ 그녀가 어젯밤에 그 사실을 밝히겠다고 했다면? 당신은 그 말에 겁을 집어 먹은데다가 재클린이 시몬을 쏜 사건을 목격하고‥‥ 그럴 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당신은 전망실에서 있다가 조용해진 후, 리넷의 방에 들어가 그녀가 아무 말도 못하게‥‥" "그게 무슨 알지죠, 포와로 씨?" "그런데 뜻밖에도 루이스가 당신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은 망설였지만 일단 그녀의 말대로 했습니다. 당신은 그녀에게 돈을 주고 정신없이 돈을 셀 때 그녀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당신이 루이스의 방에 들어간 걸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잘리 양의 어머니였습니다. 당신은 또 모험을 해야만 했습니다. 페닝턴이 권총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나서 그의 방에 가서 권총을 가지고 와 오터번 부인이 범인의 이름을 말하려 할 때 총을 쏜 겁니다." 로잘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절대로 팀은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총을 쏘고 배 모퉁이 쪽으로 한바퀴 뛰어서 내가 나갔을 때는 반대 방향에서 뛰어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당신은 장갑을 끼고 권총을 만졌고 장갑은 주머니 속에 있었으니까‥‥"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그때 로잘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포와로 씨,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거죠?" "과연 당신은 영리하군요. 그러나 그럴 듯 하지요?" 팀이 흥분해서 소리를 치자 포와로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앨러튼 씨,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추측하는 게 당연합니다. 나는 묵주를 조사하지 않았는데, 거기엔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즉 로잘리 양이 어젯밤에 당신을 보았다고 증언하지 않는 한, 당신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거죠. 그 진주를 훔친 범인은 도벽이 있는 사람이며 게다가 진주는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자, 두 분은 탁자 위의 상자를 열어 보십시오." 팀은 한동안 서서 말없이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포와로 씨, 감사합니다." 팀과 로잘리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상자에서 가짜 진주 목걸이를 꺼내 멀리 나일 강 속으로 던져 버렸다. "이제 됐습니다. 포와로 씨는 이 상자에다 진짜를 넣겠죠. 왜 내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앨러튼 씨,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죠?"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권태롭고 나태한 생활 때문이었죠. 좀 재미있는 일이 필요했거든요. 노력해서 얻는 것보다 많은 돈도 벌 수 있고요. 그 모험이 매력적이었다고 할까요." "알겠어요.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 당신은 귀여운 여인이오. 그런데 당신은 어젯밤에는 왜 나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죠?" "그들이 당신을 의심할 것 같아서요." "그럼, 당신은 나를 의심했나요?" "아니요, 당신은 사람을 살해할 사람이 절대로 아니에요." "그건 맞는 말이오. 나는 살인을 할 위인은 못 되오. 그저 좀도둑일 뿐이지." 로잘리는 살짝 그의 팔을 만지면서 말했다. "로잘리, 나를 이해해 주겠소, 아니면 경멸하겠소?" 로잘리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저를 책망하실 거 같은데‥‥"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면서 '조안나‥‥'라고 말끝을 흐렸다. 팀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조안나라니? 로잘리도 어머니처럼 착각하고 있군요. 나는 그녀에겐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탐욕스럽고 못생긴 여자라오." "팀, 어머니께 이번 일을 말하면 안돼요." "어머니께 말씀드려도 괜찮을 거요. 그분은 강인한 분이라 참으실 거요. 말씀을 드려야 조안나와 내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거요." 두 사람은 앨러튼 부인의 선실 문을 세게 두드렸다. 곧이어 그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어머니, 로잘리와 저는‥‥" 앨러튼 부인은 얼른 로잘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나는 오래 기다려 왔어요. 팀은 당신을 싫어하는 척 했지만‥‥ 나는 그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지!" 로잘리가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는 항상 다정하게 대해 주셨어요, 저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어요‥‥" 로잘리는 앨러튼 부인의 가슴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27 팀과 로잘리가 나간 뒤, 포와로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레이스 대령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물론 찬성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의 행복이니까요." "그럼, 내 행복은 관계없단 말입니까?" "대령, 그녀는 참 가련한 여인이지요. 그런데 팀을 사랑하고 있답니다.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로잘리는 팀에게 부족한 꿋꿋함이 있고 앨러튼 부인이 또 그녀를 좋아하고 있으니 아주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 두 사람은 에르큘 포와로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거군요. 또 나는 중요한 범죄를 눈감아야 하는 거고." "그러나 그 이야기는 모두 내 착상일 뿐이지요." "아, 됐습니다. 나는 경찰이 아니니까요. 그는 이제 정직하게 살테고‥‥ 그녀가 잘 이끌어 가겠죠. 나는 그들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태도가‥‥ 내가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포와로 씨, 당신은 이 세 사건의 살인범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겁니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죠?" "당신은 내가 너무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러나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나는 진실을 보려고 주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겁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 진실을 밝혀 봅시다. 페닝턴과 앨러튼은 제외시켜야 될 거 같군요. 플릿우드도 아니고‥‥ 누가 범인이죠?" "그럼, 그 이야기를 해 드리죠." 그때 베스너 박사와 코넬리아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흥분한 것 같았다. "대령님, 바워즈 양에게서 메리 아주머니에 대해 들었어요. 바워즈 양은 자기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서 내게 말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믿을 수 없었는데 박사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그런 도벽은 어쩔 수 없다는군요. 박사님도 그런 환자를 보셨대요. 노이로제가 심하면 그런 병이 생긴다는군요. 그런 습성은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대요. 어릴 때의 사소한 일이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요. 그랴서 환자를 치료하실 때는 과거를 기억하게 만들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낸다는 군요. 그러나 제일 걱정되는 건 이 사실이 신문에 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뉴욕에서 큰 소동이 벌어질 거예요. 신문은 경쟁하듯이 이 일을 보도하려고 할 거고요. 메리 아주머니와 어머니, 또 우리 집안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요?" 레이스 대령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염려마십시오, 그 일은 비밀로 할 테니까요." "네, 뭐라고요?" "살인 이외의 일은 모두 비밀을 보장할 것입니다." "어머, 정말 다행이군요. 이제 안심이에요. 저는 너무 걱정스러웠어요." 베스너 박사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 박사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롭슨 양은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박사님, 그렇지 않아요. 박사님이 더 친절하신 분이에요." 포와로가 그녀에게 물었다. "롭슨 양, 그 이후 퍼거슨 씨를 만났습니까?" "만나지 않았어요. 메리 아주머니는 퍼거슨 씨에 대해 계속 말씀하신답니다." 베스너 박사도 끼어들었다. "그 젊은 친구는 상류사회 출신인가 보더군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전혀 그렇게 볼 수 없는 인물이더군요. 의복이나 말투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같아요." "롭슨 양의 생각은?" "네, 그 사람은 참 이상해요." 포와로는 시선을 베스너 박사에게 옮겼다. "환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재클린 양이 안심할 겁니다. 도일 씨는 아주 건강한 사람입니다. 맥박도 정상이고 체온은 정상보다 약간 높지만요. 그러나 참 우스운 일이죠, 금방 총을 쏜 사람을 걱정하다니." "그건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당신 같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저는 총을 쏜다거나 과격한 행동은 싫어하고 있어요." "물론 그렇겠죠, 롭슨 양은 지극히 여성적이니까요." 그때 대령이 끼어들며 말했다. "도일 씨가 좋다면 전보 이야기를 끝마쳐야겠군요." 베스너 박사가 일어나더니 왔다갔다 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도일 씨는 그 전보에 채소 이름이 잔뜩 씌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감자, 아티초크, 부추 등등이 있었다던데요." 레이스 대령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가! 맞아요, 바로 리체티입니다. 그건 새로운 암호입니다. 그것은 남아프리카 폭동에서 사용되었는데 감자는 기관총을, 아티초크는 강력한 폭탄을 가리키는 겁니다. 리체티는 위험인물입니다. 그리고 살인을 한 번 이상 한 잔인한 놈이죠. 도일 부인이 착각을 하고 전보를 읽었다고 했는데 그때 내가 있었다면 그놈의 정체가 발각되었을 겁니다." 그는 포와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생각이 맞죠? 그가 범인이죠?" "아닙니다. 그는 대령이 찾던 인물일 뿐입니다. 그가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고학자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연기는 완벽했죠. 그러나 리체티는 도일 부인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살인 사건의 앞부분은 알았지만 뒷부분이 감이 잡히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습니다. 이제는 모든 추리를 완성했지요. 범인은 찾아냈는데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의 양심적인 고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베스너 박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기적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적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코넬리아도 궁금한지 한 마디 거들었다. "그게 누구죠? 어서 말씀해 보세요." 포와로는 주위의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 뽐내듯 말했다. "나는 승객 여러분이 모두 있을 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건 일종의 허영심이겠죠.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뽐내고 싶어서요." 대령이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우리는 모두 에르큘 포와로가 얼마나 뛰어난지 봅시다." 포와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나는 정말 멍청했답니다. 그 없어져 버린 권총이 내 사고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았죠. 범인은 재클린에게 혐의가 가도록 했는데 왜 그 권총을 없앴을까? 나는 그 대답을 짜내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죠. 범인은 그 권총을 없애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28 "레이스 대령과 나는 선입견을 가지고 수사를 착수했습니다. 그 사건은 계획된 게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 거죠. 누군가가 도일 부인을 죽이려고 하다가 재클린이 소동을 벌이자 기회를 삼아 사건을 저질렀다고 보았습니다. 범인은 전망실이 비자 권총을 훔쳐갔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이 사건은 우발적인 충동에 의한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철두철미하게 계획되었죠. 미리 시간까지 계획하고 내 포도주 속에 수면제까지 넣었습니다. 내가 끼어 있으면 그날 밤의 일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걱정한 거죠. 그래서 나를 잠들게 하려고 내 포도주 병에 수면제를 넣은 겁니다. 그거야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포도주 병은 탁자 위에 하루종일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날은 너무 덥고 피곤해서 잠에 곯아 떨어졌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술병에 수면제를 탔다면 그건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범인은 저녁 식사 시간인 7시 30분 전에 범행을 계획했다는 말인데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면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내 선입견을 재고할 일이 일어났죠. 그건 나일 강에서 권총을 건진 겁니다. 내 생각대로라면 절대로 권총이 강에서 발견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계속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말을 끊고 나서 베스너 박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박사님, 도일 부인의 시체를 검사했을 때 총알이 관통한 부위가 그을린 것 같다고 하셨죠, 그건 총을 머리에 바짝 대고 쏘았다는 걸 뜻하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권총은 목도리에 싸여 발견되었고 그 목도리에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목도리를 감싸서 총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거겠죠. 그러면 왜 도일 부인의 총상 부위가 그을렸을까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그럼 그 총알은 재클린이 시몬 도일을 쏜 총알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두 사람이 옆에서 총 쏘는 걸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검토해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 번째 총알이 발사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권총에서 세 발이 발사되었다면 두 발을 제외한 다른 한 발은 어디에 쏜 걸까요?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도일 부인의 방에 있는 매니큐어 병이 내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흔히 여자들은 매니큐어를 여럿 가지고 번갈아 칠하는데 그녀는 분홍색만 칠했더군요. 그 분홍색 병에는 이상하게도 검붉은 액체가 들어 있었고요. 냄새을 맡아보니 식초 냄새가 났습니다. 아마 그 병엔 머큐롬이 들어있었나 봅니다. 왜 매니큐어 병에다 머큐롬을 넣어두었을까요? 나는 그때 문득 권총을 쌌던 분홍색으로 얼룩진 손수건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큐롬은 씻으면 지워지긴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는 게 아니라 얼룩이 남게 되지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진상을 밝힐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또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녀 루이스가 살인범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려다가 살해된 거죠. 나는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1천 프랑짜리 지폐를 보고, 그녀가 범인을 협박했을 거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건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그녀에게 어젯밤에 누구를 보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습니다. 자기가 만일 잠이 오지 않아 위로 올라갔다면 그 살인범이 선실로 들어오거나 나오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자,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번에는 베스너 박사가 대답했다. "루이스가 위로 올라갔다는 말이겠죠." "박사님, 그게 아닙니다. 루이스가 왜 그런 식으로 말했겠습니까?" "글쎄, 암시를 주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왜 그녀는 우리에게 암시를 주려고 했죠? 그녀가 범인을 알았다면 우리에게 범인을 말하거나 아니면 범인에게 접촉을 해서 협박을 했겠죠. 그러나 그녀는 이 두 가지 일 중, 어느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범인에게 암시를 주려고 했던 겁니다. 즉 범인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가 목격했음을 알리려 했던 거죠. 그 자리에는 나와 대령, 그리고 시몬 도일과 베스너 박사가 있었습니다." 포와로의 말을 듣고 있던 박사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뭐라고요?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지금?" "고정하십시오. 나는 지금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코넬리아가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 "박사님을 의심하는 게 나이에요." 포와로는 얼른 말을 계속했다. "그럼, 범인은 베스너 박사님이나 시몬 도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스너 박사는 도일 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몬 도일은 리넷을 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도일은 총을 맞기 전에는 전망실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증인도 있으니까요. 그는 총을 맞고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베스너 박사님이 범인이라는 결론이 나오겠죠. 이 주장을 확인해 주듯 하녀 루이스는 수술용 메스로 살해되었죠. 박사님은 이 사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만일 베스너 박사였다면 하녀는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은밀히 그를 만나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 오직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시몬 도일이죠. 시몬 도일은 총상 때문에 늘 베스너 박사가 곁에 있었습니다. 도일은 박사의 방에 있었으므로 루이스가 그를 살짝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활한 루이스는 그런 암시를 던진 겁니다. 그는 도일에게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제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죠?'라고 말하자, 시몬 도일은 하녀에게 '바보같으니! 네가 무엇을 보았다거나 들었다는 게 아니야. 걱정하지마, 내가 보살펴 줄 테니까.'하고 말했죠. 결국 그녀는 시몬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받아 냈지요." 그러나 베스너 박사는 흥분해서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다리가 부러져 부목을 댄 환자가 어떻게 걸어다니며 사람을 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네,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인 걸요. 그래서 나는 새로운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았습니다. 시몬 도일은 총을 맞고 5분 가량을 혼자 전망실에 있었죠. 우리는 그가 총을 맞아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총을 맞는 걸 우리 눈으로 본 것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건 총을 맞은 것 같이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총을 맞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롭슨 양이 목격한 것도 재클린이 총을 쏜 것과 시몬 도일이 의자에 쓰러져 손수건을 다리에 대자 손수건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 뿐이었죠. 그럼, 팬숍이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롭슨 양이 불러 전망실에 들어와 보니 시몬이 붉게 물든 손수건으로 다리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그에게 재클린을 어서 방으로 데리고 가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재클린을 혼자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런 후, 팬숍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롭슨 양과 팬숍은 재클린을 데리고 전망실에서 나갔지요. 5분 가량 그들은 갑판 왼쪽에서 분주히 움직였지요. 바워즈와 박사, 그리고 재클린의 선실은 묘하게도 모두 왼쪽에 있었으니까요. 2분 가량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지요. 도일은 소파 밑에서 권총을 꺼내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구두를 벗은 후, 오른쪽의 리넷의 선실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가까이 가서 리넷의 머리에 바짝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 다음에 머큐롬이 든 병을 세면대에 놓고 전망실로 급히 가서 숨겨 둔 밴 슈일러의 목도리에 권총을 싸서 자기 다리에 대고 총을 쏜 겁니다. 그래서 시몬은 정말로 총상을 입게 된 거죠. 그런 다음 손수건과 권총을 목도리에 싸서 나일 강에 던져 버린 겁니다." 레이스 대령이 얼른 말했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팀의 진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펑 소리가 난 후, 첨벙하는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외에도 자기 선실 앞을 뛰어가는 소리도 들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때는 오른쪽 갑판엔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 그 소리는 시몬 도일이 뛰어간 소리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요." "그래도 이상하군요. 어떻게 즉흥적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몬 도일은 명석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행동은 민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몬은 그 정도의 머리는 없는 거 같은데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은 시몬 도일 혼자서 꾸민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죠. 우리는 이 사건이 우발적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싸구려 손수건의 등장도 각본에 의한 것이었고요. 재클린이 권총을 소파 밑으로 걷어찬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재클린도?" "네, 그렇습니다. 재클린도 공범입니다. 시몬의 알리바이도 그녀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증명된 거고요. 재클린의 알리바이는 시몬의 말대로 간호원 바워즈가 옆에서 지켜 주었기 때문에 증명된 겁니다. 시몬과 재클린은 넉넉히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입니다. 재클린은 명석하고 시몬은 민첩하니까요. 심사숙고해 보면 의문이 모두 풀립니다. 두 사람은 한때 약혼까지 했던 사랑하던 사이였습니다. 시몬은 리넷을 살해한 후, 재산을 얻어 재클린과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클린은 계획대로 두 사람을 쫓아다닌 겁니다. 물론 시몬이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까지도 각본에 의한 거였죠. 언젠가 시몬은 내게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싫다는 말을 했지요. 그러나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재클린이 아니라 리넷이었습니다. 시몬이 여러 사람 앞에서 리넷에게 대하는 태도는 좀 의외더군요. 그는 너무 과장되게 행동하는 거 같았습니다. 영국인답지 않은 태도죠. 재클린은 나와 이야기하는데 누가 엿듣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누구도 엿듣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건 그녀가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위장이었지만요. 나는 언젠가 시몬과 재클린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젠 어쩔 수 없어, 해치울 수 밖에.'라고 말했지요.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내게 수면제를 먹였고, 재클린도 고의적으로 롭슨 양을 붙들어 놓고 수다를 떤 겁니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소란을 피운 것도 놀라운 착상이었죠. 재클린은 시몬을 쏘았다고 말했고 롭슨과 팬숍도 그렇게 말했지요. 또 시몬도 다리에 총을 맞았으니 누가 의심을 품겠습니까? 시몬과 재클린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지요. 물론 시몬은 총상을 입었지만 그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에게 들키고 말았던 겁니다. 그녀는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지요. 결국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인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코넬리아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 씨가 루이스를 죽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녀를 살해한 건 도일이 아니라 재클린입니다. 시몬은 재클린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한 후, 둘만 있을 기회를 마련하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재클린은 그곳에서 메스를 훔쳐 루이스를 살해하고 나서 다시 제자리에 메스를 갖다 두었지요. 그리고 재빨리 점심식사를 하러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오터번 부인이 그녀가 하녀의 방에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오터번 부인은 그 사실을 시몬에게 알리려고 급히 왔던 거지요. 시몬은 옆 방의 재클린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큰소리를 쳤지요. 재클린은 그 소리를 듣고 쏜살같이 달려가 총을 꺼내 문 앞에서 그녀가 범인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재클린의 사격 솜씨는 정확했습니다. 그녀는 총을 쏘고 재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갔지요. 얼른 침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대령이 물었다. "도일이 쏜 총알은 어디로 간 거죠?" "그야 탁자에 박혔겠죠. 탁자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건 시몬 도일이 총알을 파낸 구멍일 겁니다. 그리고 총알을 숨겨 두어서 두 발만 발사한 것처럼 꾸몄죠." 코넬리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서워요, 어쩌면 그런 일을‥‥" 포와로는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이 에르큘 포와로를 미처 생각 못했어." 잠시 후, 포와로를 말을 꺼냈다. "베스너 박사님, 이제 당신 환자와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29 그날 밤 늦게 포와로는 재클린의 선실을 노크했다. 포와로는 방으로 들어가 재클린의 옆 의자에 앉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재클린은 포와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포와로 씨, 모두 끝났군요. 당신은 과연 명탐정입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우리가 사실을 부인하면 어떻게 되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설명으로는 배심원을 납득시키기 어려울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모두 말하지 않았으면 시몬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당황한 나머지 모두 인정한 겁니다." "당신은 끝까지 냉정하군요." "네, 그래요. 이제 저에게 신경쓰지 마세요. 지금도 저를 걱정하십니까?" "네,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감상에 빠져도 헛된 일이죠. 살인도 별게 아니더군요. 그동안 친절히 대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언젠가 저에게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죠?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그야 모르죠.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요." "그때 그만 둘 생각이었으면 그만 둘 수도 있었는데‥‥ 시몬에게도 그런 제의를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그야 당신이 원한다면요." "저는 시몬을 사랑했고 시몬도 저를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만으로도 만족했고 시몬은 그렇지 않았죠." "네, 그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고 원했어요. 그는 승마와 요트를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서 즐길 수가 없었어요. 시몬은 아주 단순한 사람이랍니다. 모든 걸 가지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약혼은 했지만 결혼은 요원했지요. 그런데 또 그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공금을 횡령했다가 그 사실을 들키고 말았어요." 그때 포와로는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듯 했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궁핍해졌어요. 나는 그때 리넷과 그녀의 새 별장이 떠올랐어요. 나는 곧장 리넷에게 달려가 시몬에게 일자리를 주면 우리는 형편이 좋아질 거라고 말했어요. 리넷은 선선히 승낙하면 시몬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쯤, 당신이 셰마탕트 레스토랑에서 우리를 보았을 겁니다. 우리는 여유가 없었지만 특별히 자축 파티를 하려고 그 식당에 갔지요. 저는 지금 진실을 말하는 거예요. 나는 리넷이 시몬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그녀가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추호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요. 그녀는 친구의 약혼자를 조금도 주저치 않고 차지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시몬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답니다. 그는 리넷이 오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결코 그녀를 사랑하거나 원하지 않았지요. 시몬은 잘난 척 하는 여자를 제일 싫어한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의 돈에 매력을 갖게 되었지요. 저도 그걸 깨닫고 그에게 리넷과 결혼하라고 말했어요. 시몬은 그 말을 듣고는 그녀가 부자라 할지라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어요. 시몬은 돈은 자신이 가져야지, 아내가 부자인 것은 싫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만 사랑한다고 했답니다. 시몬이 한 번은, 운이 좋으면 리넷과 결혼하고 1년 가량 지나 그녀가 죽으면 자기가 모든 재산을 상속할지 모른다는 말을 했어요. 그 이후로 시몬은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리넷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저는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후부터 시몬은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요. 어느 날, 나는 그가 비소를 연구한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그것에 대해 추궁하자 그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번이 큰 돈을 만질 마지막 기회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시몬이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걸 알고 걱정스러웠어요. 그는 마음 먹은 일은 하고 마는 성격이니까요. 그는 너무 단순해서 치밀하게 그런 일을 해 낼 수도 없답니다. 그는 리넷에게 비소를 먹여 죽게 하면 의사는 위염으로 사망했다는 검시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늘 낙관적이었죠. 그래서 저는 이 일에 공범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됐답니다." 그녀는 간단히 사실대로 말했다. 포와로는 재클린이 돈 때문에 공범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시몬을 사랑했기 때문에 공범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시몬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험을 한 것이다. "저는 머리를 짜내서 두 사람의 알리바이를 맞추었어요. 그러다가 우리 서로가 상대방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면 혐의를 벗어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시몬을 증오하는 건 쉬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떠오른 게 리넷이 살해되면 내가 제일 먼저 의심받는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아예 처음부터 의심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일이 잘못되면 저만 체포될 생각이었어요. 그러자 시몬이 제 걱정을 해 주더군요. 그러나 저는 잠든 리넷을 죽일 수는 없었어요. 그녀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원하지만요‥‥ 우리는 계획을 세밀히 세우고 행동했지요. 그런데 시몬이 피로 'J'라고 벽에다 글씨를 쓴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짓이지만 그건 그에게 어울리는 행동이었어요." "그렇죠, 루이스가 밤에 잠을 자지 않은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그 다음에는 어땠죠?" "제 자신도 너무 끔찍해서 믿어지지 않아요. 루이스가 시몬에게 암시를 주었기 때문에 그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한 거였어요. 우리 두 사람만 있게 되자 그는 루이스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제가 할 일을 알려주었는데도 저는 전혀 두렵지 않더군요. 그러나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그 하녀만 아니었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저는 주머니를 털어 그녀에게 갔어요. 그리고 돈을 셀 때 재빨리 그녀를 해치웠어요. 그 일은 너무도 손쉽더군요. 그러나 계속 악운이 따라다녔어요. 오터번 부인이 저를 보고 당신과 레이스 대령을 만나 그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지요. 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쏜살같이 움직여 그녀를 살해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내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겠죠. 그 뒤에 당신이 제 방으로 오셨죠. 그때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시몬이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당신도 시몬이 죽길 바라지 않나요?" "네, 그게 시몬을 위한 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재클린." "포와로 씨,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운명적으로 거친 세상을 살 사람이니까요. 우리 계획이 성공했다면 저는 행복해졌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감수해야만 한답니다. 포와로 씨, 저는 목을 매지도 극약을 먹지도 않을 겁니다. 급사와 함께 있지 않아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시몬은 제가 있어야 편해요." 30 배는 새벽이 되어 쉘랄에 도착했다. 레이스 대령과 포와로는 기분 나쁠 정도로 괴이한 바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대령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소임을 완수했군요. 리체티를 첫 번째로 상륙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놈을 체포해서 다행입니다. 참, 도일을 운반할 들것을 준비해야겠군요. 그런 놈은 교수형에 처해야 해요. 냉혹한 인간이죠, 재클린이 가엾지만‥‥" "사람은 결코 모든 걸 정당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재클린과 같이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때 코넬리아가 다가와 말했다. "이제야 도착했군요."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는 밴 슈일러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때 퍼거슨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코넬리아, 이건 사실이 아니지? 어서 그렇다고 말해 봐요." "분명한 사실이에요. 나는 베스너 박사님과 결혼할 거예요." "당신은 왜 그 늙은이와 결혼하겠다는 거지?" "저는 그분을 사랑해요. 그리고 환자와 병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요. 나는 그분과 멋지게 살 거예요." "나보다 그 늙은이가 좋단 말이오." "물론이죠,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분은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늙지도 않았어요." 코넬리아가 돌아서서 가 버리자 퍼거슨은 포와로에게 구원을 요청하듯 말했다. "저 말이 진심일까요?" "물론이죠." "저런 여자는 처음이에요.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고 리체티가 두 명의 기관사에게 둘러싸여 땅에 내렸다. 잠시 후, 시몬 도일이 들것에 실려 옮겨졌다. 그는 공포에 질린 듯 했다. 그 뒤에는 재클린이 여급사와 함께 내려갔다. 그녀는 시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시몬!" 시몬이 어린애 같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재키, 내가 일을 망쳤지? 당황해서 실토한 거야. 미안해, 재키. 내 탓이야, 모두가." "괜찮아요, 시몬. 어리석은 승부를 하다가 패한 거예요." 재클린은 비켜 섰고, 들것을 운반하는 사람이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는 구두 끈을 맨 후, 스타킹을 만지더니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는 몸을 일으켰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뱃전을 울렸다. 시몬 도일은 약간 몸을 떨었으나 곧 그 움직임이 멎어 버렸다. 재클린은 여유있는 태도로 포와로를 쳐다보고 미소를 지었다. 레이스 대령이 그녀에게 달려가려고 할 때, 그녀는 장난감같이 생긴 그 작은 총을 자기 가슴에 대고 쏘았다. 그녀가 천천히 배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포와로의 팔을 살며시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짐작했었죠?" 포와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재클린은 한 쌍의 권총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로잘리의 핸드백에서 권총이 발견되었을 때 알았습니다. 그녀는 수색하리라고 짐작하고 그녀의 핸드백에 넣은 거죠. 나중에 그녀의 방에 가서 루즈를 비교해 보면서 다시 그 총을 가져간 겁니다." "포와로 씨, 재클린이 이런 결과를 택하기를 바랐나요?" "그녀는 혼자 죽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덕분에 시몬은 편안히 죽은 거죠." 곧이어 하녀 루이스와 오터번 부인의 시체가 운반되고 끝으로 리넷 도일의 시체가 운반되었다. 널리 이름을 떨치던 아름다운 리넷 리지웨이의 죽음이 온 세계에 알려졌다. 조지 우드 경은 런던 클럽에서, 스텐데일 록포드는 뉴욕에서, 조안나 사우드우드는 스위스에서 신문을 보고 리넷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앨튼언더워드의 술집에서도 화제에 올랐다. 그리고 버나비의 깡마른 친구도 한 마디 했다. "어쩐지 그녀는 모든 것을 혼자 소유한 것 같았어." 그 말에 버나비가 말했다. "맞아, 그녀에게는 돈이나 용모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어." 잠시 후, 두 사람은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잊고 장애물 경마 대회에서 누가 우승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룩소르에서 퍼거슨이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니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