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rder is Announced(예고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著 ◎ 1장. 살인 예고 ◎ (1) 조니 베트는 일요일만을 제외한 매일 아침 7시 반부터 한시간 동안 자전거로 치핑 클렉혼 마을을 한바퀴 돈다. 이빨 사이로 짜내듯이 요란스레 휘파람을 불어 대면서 큰 저택이나 허 름한 집앞에 이르면 자전거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우편함에 조간 신문을 찔러넣는다. 그는 하이 스트리트에서 문구점과 신문 소매업을 하고 있는 토트먼 씨의 고용인이다. 그가 배달하는 신문은 먼저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 댁에 <타임즈>와 <데일리 그래픽>을, 스웨트넘 부인 댁에 <타임즈>와 <데일리 워커>를, 미스 핀칠리피와 미스 마것로이드에게 <데일리 텔리그래프> 및 <뉴스 크로니클>을, 미스 블랙록에겐 <델리 그래프>와 <타임즈 >, 그리고 <데일리 에일>을 돌린다. 그 외도 금요일마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줄여서 그냥 <가제트>라고 부 르는 신문을 배달한다. 이 신문은 앞서 말한 집에 빠짐없이 배달될 뿐만 아니라 치핑 클렉 혼의 집집마다 배달된다. 금요일 아침이 되면 일간신문의 머리글자 「국제 정세의 위기!」「국제연합 총회 개막!」 「금발의 타이피스트 살해범 체포!」「탄광 스트라이크!」「시사이드 호텔에서 23명 식중독 사망!」등등을 쓱 훑은 후 대부분은 <가제트>를 집어 들고 읽는 것이다. 그들은 우선 독자 난을 살핀 뒤 대부분 광고난으로 눈을 돌린다. 광고난에는 매매, 종업원 모집에서부터 애완견의 매매와 질병에 관해, 그리고 정원 설비, 그 밖에 치핑 클렉혼이라는 조그만 사회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광고가 가득차 있는 것이 다. 10월 29일 금요일, 문제의 바로 그 금요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스웨트넘 부인은 타임즈를 펴든 채 이마로 흘러내린 한웅큼밖에 안 되는 희끗희끗한 머리 칼을 쓸어올리며 희미한 눈으로 왼쪽 페이지 중간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타 임즈란 소름끼치는 뉴스가 있어도 은폐해 버린다고 지레짐작하고 탄생, 결혼, 사망난, 특히 사망난을 잠깐 살펴보고는 초조하게 <가제트>를 집어들었다. 잠시 후 아들 에드먼드가 방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한참 광고난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부 인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잘 잤니? 스메드리의 집에서 자동차를 판다는 구나. 1935년 형이라…… 그렇다면 꽤 낡 았겠네, 그렇지?」 에드먼드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커피를 따르고 훈제 청어를 담고 <데일리 워커>를 토스트 받침에 걸쳐 세웠다. 스웨트넘 부인이 읽어내려갔다. 「경비견 매매라…… 이런 때 어떻게 개까지 먹여 키운담.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아니, 셀 리너 로렌스가 또 요리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구나. 요즘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정말 시간 낭비지. 게다가 주소도 없이 사서함 번호만 적어 놓았어. 이래서야 도저히 불가능할 걸. 고용인이란 의당 자기가 일할 곳을 알고 싶어하지. 좋은 곳에서 일하기를 원할 테니 까…… 틀니라. 어째 틀니가 이렇게 많이 보급되었는지 모르겠군. 여자애가 『흥미있는 일 원함. 여행도 할 수 있음』이라고. 정말 놀라겠군. 여행이 싫다는 사람도 있을까? 다 크스훈트종 개라…… 다크스훈트는 갖고 싶은 맘이 없었지. 굳이 독일개라서 그러는게 아니야.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이지. 오, 웬일이죠, 핀치 부인?」 문이 열리더니 낡은 벨벳 베레모를 쓴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제 청소를 해도 될까요?」 스웨트넘 부인이 말했다. 「아직 식사도 끝내지 않았어요. 금방 끝낼 거야.」 핀치 부인은 신문을 일고 있는 에드먼드를 흘낏 바라보더니 콧소리를 내고 방을 나갔다. 「난 지금 막 식사를 시작한 참인데요.」 「부탁인데, 그 무서운 신문(영국 공산당 기관지인 데일리 워커)일랑 읽지 마라. 핀치 부인 은 그걸 몹시 싫어한단다.」 「내 정치적 견해와 핀치 부인이 무슨 상관이죠?」 부인은 급히 말을 받았다. 「네가 노동자입네 하는 게 못마땅한 거야. 노동도 하지 않는 주제에 말이다.」 에드먼드는 화가 난 듯했다. 「천만에요. 난 글을 쓰고 있잖아요.」 「내가 말하는 건 진짜 노동 말이야. 핀치 부인이 없으면 큰 일이야. 그럼 누가 집안일을 돌봐주겠니.」 「가제트에 광고를 내면 되죠.」 에드먼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봐야 소용없어. 이런 땐 나이가 든 가정부가 부엌일이며 다른 일도 척척 해 줘야지, 안 그러면 애를 먹어.」 「그렇다면 그런 나이 많은 가정부를 두시지 그러셨어요. 진작 내게 그런 여자를 딸려 주 었으면 됐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죠?」 「전에는 너에게도 잔심부름할 아이가 있었잖니.」 「틀렸어요, 그런 하녀는.」 스웨트넘 부인은 다시 광고난을 읽기 시작했다. 「중고 모터 제초기 양도함이라…… 굉장히 비싸군. 다크스훈트종 개가 또 나왔고…… 절 망하고 있는 워글스에게 편지나 기타 방법으로 연락 바람. 괴상한 이름이군. 스파니엘종 사냥개, 너 기억하겠니? 그 귀엽던 수지 말이다, 에드먼드.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잘 들었어. 쉐라톤식 그릇장 양도함. 최고급 골동품. 데이어스 홀 루커스 부인…… 거짓말쟁 이야, 이 루커스란 여자는! 쉐라톤식이라니 정말…….」 스웨트넘 부인은 코방귀를 뀌고 다시 읽어내려갔다. 「모든 게 오해였음. 영원히 사랑함. 언제나처럼 금요일에, J…… 애인끼리의 사랑싸움이군. 아니면 도둑들의 암호이든가. 또 다크스훈트! 왜 다크스훈트를 기르고 싶어하는지 모르 겠군. 네 아저씨 사이몬은 멘체스터 텔리아를 길렀지. 우아하고 귀여운 개였단다. 나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개라면 다 좋아하지. 해외출국으로 투피스를 깁히 팖. 치수도 값도 적혀 있지 않군. 결혼안내…… 아니! 살인이라고? 놀라운 일이야! 에드먼드, 좀 들어봐라.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 참석 바랍니다. 정말 괴상한 일도 다 있네.」 「뭐라고요?」 에드먼드는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뗐다. 「10월 29일 금요일이면 오늘이잖아?」 「어디 좀 봐요.」 에드먼드는 어머니로부터 신문을 빼앗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에드먼드는 의심쩍은 듯 코를 문질렀다. 「일종의 파티가 아닐까요? 살인 게임 같은 거 말이죠.」 「뭐라고? 별 이상한 짓도 다하는구나. 일부러 광고까지 내다니, 레티샤 블랙록답지 않게 말이야. 그 사람 현명한 사람인데.」 「아마 함께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 짓일 거에요.」 「이건 너무 임박한 통고야. 오늘이라…… 우리도 가야 하나?」 「『친지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을 알립니다. 이 예고를 믿으십시오』라고 되어 있어요.」 「이런 초대는 왠지 기분나쁘구나.」 「그럼 어머니는 가실 필요 없어요.」 「그래.」 부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물었다. 「에드먼드, 그 토스트를 정말 먹을 거니?」 「저 늙은이가 식탁을 치우는 일보다 저의 영양섭취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쉿! 듣겠다. 에드먼드, 살인 게임이란 도대체 어떤 거지?」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옷에 종이조각을 꽂거나 아니면 모자 속에서 제비를 뽑겠지 요. 범인과 탐정이 결정되지만 본인들 밖에는 모르지요. 그리고 전등을 끄고 누군가 어깨 를 툭 치면 악 소리 지르며 쓰러져 죽은 체하는 거지요.」 「무척 재미있겠구나.」 「아니에요, 지루할 거에요. 나는 안 가겠어요.」 「무슨 소리냐, 에드먼드? 나는 갈 테니 너도 함께 가야 해, 알았지? 결정된 거다.」 스웨트넘 부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3) 「아치, 이것 좀 들어 보세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남편에게말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타임즈의 기사를 보고 화 가 난 것이다. 「인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군! 아주 기본적인 것도 말이야.」 「알아요, 여보.」 「알고 있다면 이런 엉터리 같은 글을 써내지 않았을 거야.」 「그래요, 아치. 그런데 잠깐 이것 좀 들어봐요.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오늘이 에요.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상을 알립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읽었지만 대령은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했다. 「일종의 살인 놀이야.」 「어머나!」 「그것뿐이오, 여보.」 대령은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잘만 하면 재미있지만, 그러려면 잘 아는 사람이 그럴듯하게 꾸며야 돼. 먼저 제비뽑기를 해서 살인자를 정하지. 그게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오. 불을 끄고 살인자가 피해자를 선택하고, 피해자는 살인자에게 잡혀도 스물까지 센 다음에야 소리를 지를 수 있지. 그리 고는 탐정으로 선택된 사람이 한사람씩 심문하는 거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 는 식으로 말이오. 그렇게 해서 범인을 찾아내는데, 꽤 재미있는 놀이지. 탐정으로 지명 된 사람이 경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말이오.」 「당신처럼 말이죠, 아치? 당신 관할에서는 꽤 재미있는 일도 많잖아요.」 대령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이야, 로라. 나라면 한두 가지 실마리를 제공할 수가 있지.」하며 대령은 어깨를 똑 바로 폈다. 「미스 블랙록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에요.」 「글세. 그녀의 집에 있는 버릇없는 젊은 녀석들이 생각해 낸 놀이일 거야. 조카라나 그런 애들 말이야. 그렇지만 신문광고까지 내다니 대단한 발상이야.」 「개인 광고난에 실렸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잘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마치 초대장 같지 않아요, 아치?」 「초대치고는 괴상한 방법이군.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그 초대에서 제외되었다 는 거야.」 「왜죠, 아치?」 「통지가 너무 임박했어. 알다시피 나는 바쁜 몸이잖아.」 「당신은 꼭 가야 해요. 미스 블랙록을 도와 줘야 해요. 틀림없이 그녀는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을 거예요. 당신은 경찰 업무를 잘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게 실패 로 돌아갈 거예요. 남과의 교제도 중요한 거예요.」 부인은 손질이 잘된 금발을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푸른 눈을 크게 떴다. 「로라,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가야지…….」 이스터브룩 대령은 다시 희끗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애교스런 아내의 얼굴을 기쁜 듯 바라 보았다. 부인은 대령보다 서른 살은 더 젊은 여자였다. 「저는 그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아치.」 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4) <치핑 클렉혼 가제트>는 볼더즈에 있는 미스 핀칠리피와 미스 마것로이드의 집에도 배달 된다. 세 개의 오두막을 한 지붕으로 지은 집이다. 「핀치!」 「왜, 마것로이드?」 「어디 있지?」 「닭장에.」 에미 마것로이드는 젖은 잔디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닭장으로 갔다. 핀칠리피는 골덴 바지 와 군복 윗도리 차림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껍질과 야채 찌꺼기 요리에 닭사료를 넣 고 있었다.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깎은 그녀의 얼굴에는 세파를 겪을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마것로이드는 통통하고 애교스런 여자로서 체크무늬 스커트와 남청색 자켓을 걸쳤으며 곱 슬거리는 잿빛 머리는 새둥지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가제트에 말이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살인을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 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 일고 나서 그녀는 친구의 반응을 기다렸다. 핀칠리피가 입을 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소리야.」 「그렇긴 해. 하지만 무슨 뜻일까?」 「술 마시는 일이겠지 뭐.」 「그럼 초대란 말이야?」 「가보면 알게 되겠지. 구급품 세리주 정도일 거야. 잔디에서 나가는게 좋겠다, 마것로이드. 네가 신은 침실용 신발이 다 젖었잖니.」 「오, 저런!」 마것로이드는 발을 내려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달걀을 몇 개나 낳았어?」 「일곱 개야. 그 암탉은 아직도 알을 품으려고 해. 이제 닭장에 넣어야겠어.」 「광고를 내다니, 재미있는 방법이잖니?」 마것로이드는 다시 가제트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광고에 대한 호기심 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강한 성격의 핀칠리피는 닭장속의 닭을 다룰 뿐 신문광고에는 전혀 관심조차 보이 지 않았다. 그녀가 진흙 땅을 질퍽거리며 들어가 얼룩덜룩한 암탉을 붙잡으려 하자 요란한 소동이 일 어났다. 「차라리 오리가 낫지. 이렇게 번거롭지는 않거든.」 (5) 「어머나, 놀랍구. 미스 블랙록 집에서 살인이 있을 예정이래요.」 허먼 부인은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남편 줄리언 허먼 목사에게 말했다. 「살인이라고?」 남편은 놀라운 듯이 물었다. 「언제 말이오?」 「오늘 오후에요. 6시 30분이에요. 애석하게도 당신은 견신례 준비가 있죠? 당신, 살인 게 임을 좋아하시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요, 번치?」 얼굴이 둥글어 번치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허먼 부인은 식탁 위로 신문을 밀어 건네 주었 다. 「거기, 중고 피아노와 의치 기사 가운데에요.」 「별 희한한 광고로군.」 「그렇죠? 미스 블랙록은 살인 게임 따위에 관심갖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마 시먼즈 남 매가 짜낸 것이 틀림없어요. 당신이 거기에 못 가신다면 제가 갔다 와서 말씀드릴께요.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겠죠. 그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툭 치며 『당신은 죽는 거야』 하고 속삭이면 아마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것만 같아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아니오, 번치. 당신은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게 될 테니까.」 「같은 날에 죽어 함께 묻힌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번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꽤 기쁜 모양이구료.」 미소를 짓는 남편을 보며 허먼 부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군들 내 입장이 되면 기뻐하지 않겠어요? 당신과 수잔과 에드워드가 다 함께 살며 나 를 사랑해 주잖아요. 또 태양은 빛나고 이렇게 아름다운 집도 있고 말이에요.」 줄리언 허먼 목사는 낡아빠진 부엌을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휑하니 크고 바람이 들어오는 집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할 거요.」 「하지만 저는 큰 방이 좋아요. 정원의 향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요. 그리고 물건들을 어질러 놓아도 그리 거추장스럽지 않고 말이에요.」 「집안일만 번거롭고 중앙난방이 없잖소. 당신에게 너무 힘든 일일 텐데, 번치?」 「줄리언, 그렇지 않아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보일러에 불을 붙이고 집안을 스팀엔 진처럼 빙글빙글 달리죠. 그러면 8시에는 다 끝나는 걸요. 그리고 왁스로 닦고 낙엽을 쓸 며 멋지게 청소해 놓잖아요. 큰 집이라고 해서 작은 집보다 청소하기 힘든 건 아니에요. 빗자루를 들고 일하려면 여기저기 엉덩이가 부딪혀 아무 일도 못할 거에요. 그리고 저는 넓고 시원한 방에서 자는 게 좋아요. 또 크고 넓은 집이라고 해서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이나 설겆이 같은 것이 더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수잔과 에드워드가 기차놀이와 소꿉 장난을 하더라도 넓어서 좋아요. 손님들이 와도 편히 묵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있다 는게 얼마나 좋아요? 지미 시메스나 조니 핀치를 보세요. 그들은 좁은 집에서 장인 장모 와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줄리언, 당신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걸 원치 않을 거 에요. 저도 좋아할 수 없어요. 소녀때와 같이 살고 싶어요.」 줄리언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당신은 아직도 소녀 같은데, 번치.」 줄리언 허먼은 60살 정도로 보였으나 25년은 더 살아야 그 모습에 걸맞게 된다. 「그야 전 어리석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번치. 당신은 굉장히 머리가 좋아.」 「아니에요. 저는 조금도 지적인 데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당신이 책이며 역사나 그 밖의 이야기를 해 주실 때는 정말 좋아요. 하지만 잠자기 전에 기본(영국의 역사가)의 책을 읽어 주시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아요. 추운 곳에 있다가 아늑하고 따뜻 한 집안에서는 그런 책은 수면제나 마찬가지에요.」 줄리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이 이야기해 주는 것은 좋아요. 아하스엘스에서 설교했다는 그 노목사님 이 야기를 또 들려 주세요.」 「그 이야기는 욀 정도로 많이 했잖소, 번치.」 「그래도 한번만 더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는 아내의 청에 따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늙은 스크림 이야기야. 어느 날 누군가 그의 교회를 들여다 보았는데, 목사는 설교단에 기댄 채 두 명의 날품팔이 아낙에게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지. 그는 그들을 손가락으 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지. '아, 나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소. 제 1과의 아하스엘스 대왕이 알탁셀크스 2세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틀렸소. 그는 알탁셀 크스 3세였소'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지.」 줄리언 허먼에겐 조금도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었으나 번치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했다. 그녀는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사람이죠? 당신도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 거에요.」 줄리언은 왠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깨달은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 같소.」 번치는 일어서서 아침식사 접시를 치우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제 배트 부인에게 들었는데, 철저한 무신론자인 그의 남편이 당신 설교 를 들으러 교회에 나간대요.」 번치는 배트 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을 이었다. 「『나의 남편이 리틀 위스딜에서 온 팀킨스 씨에게 말했지요. 이 치핑 클렉혼에는 진짜 문화가 있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목사님은 고등교육을 받은 신사에요. 옥스퍼드 출 신이지, 밀체스터 같은 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은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지식을 심어 주죠. 그리스나 로마, 또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시죠. 목사님 집에 있는 고양이 이름까지도 앗시리아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면서요! 』 이렇게 배 트 부인이 말했어요.」 번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오, 빨리 끝내야겠군. 이리 온, 티글래스 필레샤(고양이 이름). 청어뼈를 줄게.」 그녀는 문을 열어 발로 고정시키고는 접시를 잔뜩 들고 날랐다. 그리고 뚜렷한 곡조도 없 이 가사를 붙인 노래를 크게 불러댔다. 오늘은 살인의 날 5월처럼 상쾌하고 탐정들은 모두 출동했다네 개수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다음 구절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줄리언 허먼 목 사가 집을 나설 때 자신감에 찬 노랫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가세, 살인의 장소에 ◎ 2장. 리틀 파독스의 아침식사 ◎ (1) 리틀 파독스에서도 아침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60살이 넘은 집주인 미스 블랙록은 테이브르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촌스러운 트위 드 천 옷을 입고 있었고 높은 옷깃에 걸려 있는 가짜 진주 목걸이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니 었다. 그녀가 데일리 메일의 레인 노콧의 소설을 읽는 동안 줄리어 시먼즈는 그다지 흥미없 는 듯 텔레그래프를 뒤적이고 있었다. 패트릭 시먼즈는 타임즈의 크로스 워드에 열중해 있었고 미스 도라 배너는 가제트를 열심 히 보는 중이었다. 「점착성의(Adherent)야. 접착성의(Adhesive)가 아니고. 여기서 틀렸군.」 패트릭이 중얼거리고 미스 블랙록은 혼자 키득거리고 웃고 있다. 갑자기 놀란 암탉처럼 미스 배너가 소리질렀다. 「레티, 이걸 봤어? 이게 무슨 뜻이지?」 「어디 좀 봐, 도라.」 미스 배너는 블랙록이 내민 손에 신문을 건네 주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야, 레티.」 그것을 읽는 미스 블랙록의 눈썹니 치켜올라갔다. 그리고 테이블 둘레를 한번 살피더니 소 리내어 그 광고를 일기 시작했다. 「살인읠 예고합니다.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리틀 파독스에서. 친지분들이 오시 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을 알려드립니다.」 다 읽고 나서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패트릭, 이거 네가 꾸민 짓이냐?」 그녀의 눈은 식탁 맞은 편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젊은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패트릭은 재빨리 부인했다. 「아닙니다, 레티 아주머니.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저는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또 네가 장난친 줄 알고 맨 먼저 물어봤을 뿐이야.」 「장난이라고요? 저는 그런 장난 한 적 없습니다.」 「줄리어, 너는?」 줄리어는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아니에요.」 미스 배너가 중얼거렸다. 「그럼 헤임즈 부인이 아닐까.」 하며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나간 헤임즈 부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패트릭이 말했다. 「아니에요. 필리퍼는 그런 장난을 꾸밀 사람이 아니에요. 아주 얌전한 여자입니다. 안그래 요?」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무슨 뜻인가 말이에요.」 줄리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미스 블랙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 어처구니 없는 장난을 한 것 같군.」 「하지만 이유가 뭐지? 장난치고는 아주 어리석은 악취미야.」 미스 배너의 축 늘어진 볼이 떨리며 근시인 눈은 불꽃을 튀겼다. 미스 블랙록이 그녀를 보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쓰지 말, 배너. 누군가의 장난일 테니까. 하지만 실은 나도 누구의 짓인지 궁 금해.」 「오늘이라고 했지? 오후 6시 30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까?」 패트릭이 짐짓 소름끼치는 투로 내뱉었다. 「죽음이죠! 달콤한 죽음!」 「그만둬, 패트릭.」 배너가 짧게 비명을 지르자 미스 블랙록이 제지했다. 「미치가 만드는 케익을 말한 것 뿐이에요. 모두들 그 케익을 달콤한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슬며시 웃어넘겼다. 그러나 미스 배너는 끈질기게 물었다. 「레티, 정말 어떻게 생각해?」 미스 블랙록은 분위기를 바꾸며 밝게 말했다. 「6시 30분에 일어날 일이 꼭 한가지 분명한 게 있지. 마을 사람들의 절반은 호기심으로 모여들겠지. 그러니까 세리주를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군.」 (2) 「걱정이 되는 무양이구나, 레티?」 미스 블랙록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멍하니 책상 앞에 안자 종이 위에 작은 물고기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오랜 친구인 도라 배너의 근심스런 얼굴을 보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배 너는 그다지 걱정도 기분도 나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와 도라 배너는 학교때 친구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도라는 예쁘장한 소녀였지만 그리 영리한 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 때문에 많은 친구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은 도라의 예쁜 모습 때문에 친구로 삼고 싶었다. 그녀는 도라가 멋진 육군 장교나 지방 변호사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라는 무척 좋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사랑, 헌신, 성실을 지닌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성실히 일했지만 무슨 일이 든 잘되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 동안 떨어져 살았다. 6개월 전, 미스 블랙록에게 길고 애절한 편지 한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도라의 편지로서 그녀는 몹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양로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며 삯바느질이라도 해 볼까 해도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조차 굳어져 버렸다고 하소연해 왔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졸업한 이후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옛 친구가 혹 시 도움이라도 줄까 하여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미스 블랙록은 즉각 회답을 보냈다. 가엾은 도라, 연약하고 불쌍한 도라. 미스 블랙록은 도 라에게 달려가서, 집안 일이 힘겨워 누군가 도와 주었으면 하던 참이야, 하며 리틀 파독스에 서 함께 살자고 했다. 의사는 도라가 병에 침식당하고 있다고 했고 미스 블랙록은 그것을 직접 보게 되었다. 도라는 일을 저질러 놓고 도움을 청해 사람들을 당혹하세 했으며 세탁물을 망쳐 놓고, 영 수증이며 편지 등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실수 없는 미스 블랙록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엾은 도라는 늘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했으며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남을 도왔다고 매우 기뻐했지만 도라야말로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미스 블랙록이 갑자기 말했다. 「도라, 아까 내가 부탁한 거 말인데…….」 「아참, 깜빡 잊었어. 하지만 너 걱정하고 있지?」 「아니야. 걱정 같은 건 안해.」 그녀는 금방 덧붙여 말했다. 「가제트에 실린 그 엉터리 광고 때문에 내가 걱정한다는 거야?」 「응. 어쩐지 악의가 있는 장난 같아서.」 「악의?」 「그래. 말하자면 그다지 유쾌한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미스 블랙록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순한 눈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살짝 들린 들창코. 가엾은 도라. 섬세하고 여린 도라는 또 이런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도라, 그러 나 그녀에게는 사물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힘이 있다. 「도라, 그 말이 옳아. 그다지 기분좋은 장난은 아닐 거야.」 「나는 기분이 나빠. 왠지 두려워.」 도라 배너는 갑자기 열을 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레티, 너는 위협받고 있어.」 「바보 같은 소리.」 「틀림없이 위험한 일이야. 폭탄을 넣은 소포를 받는 것처럼 말이야.」 「도라, 그건 어떤 바보 같은 친구들이 단지 재미로 장난친거야.」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 못되잖아.」 사실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미스 블랙록의 얼굴에도 그러한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도라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것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글쎄, 도라는 참…….」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몸에 꼭 끼는 옷을 입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가 거칠게 들어왔다. 밝은 색 스커트를 입은, 검고 윤기나는 머리의 여자였 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미스 블랙록은 큰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미치, 무슨 얘기지?」 가끔 미스 블랙록은 차라리 요리며 집안일을 혼자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 피난민 하녀는 온종일 그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나 그만두겠어요. 지금 당장에요.」 「왜그러지? 누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 연극을 하듯이 미치는 얘기했다. 「네, 기분이 나빠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온 유럽을 도망다녔어요. 가족은 모두 살해당했고―어머니, 남동생, 사랑스런 조카까지도―나는 도망쳐 나왔지요. 숨어 있다가 영국으로 건너와 열심히 일했지요. 제 고향에서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껏 일했어요. 나 는…….」 「그건 다 아는 이야기야.」 미스 블랙록이 불쑥 말했다. 그것은 이미 수차례 들은 얘기였다. 「하지만 갑자기 왜 그만두겠다는 거지?」 「그들이 또 나를 죽이려 해요.」 「누가?」 「나찌에요. 어쩌면 볼셰비키 당원일지도 모르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죽이러 오는 거에요. 나는 그것을 읽었어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말이에요.」 「가제트의 광고 말이군.」 「이것 보세요. 여기 씌어 있어요.」 미치는 등뒤에 감추고 있던 가제트를 내밀었다. 「살인이라고 씌어 있잖아요? 리틀 파독스에서. 바로 여기가 아니에요? 오후 6시 30분. 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절대로!」 「어째서 이 광고가 너를 겨냥한 거라고 생각하지? 이건…… 틀림없는 장난일 거야.」 「장난이라고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장난인가요?」 「그렇지 않아. 만일 누군가 미치를 죽이려 한다면 왜 신문에 광고를 내겠어?」 「그렇지 않을 거라고요? 그럼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란 말씀인가요? 어쩌면 그들이 당신 을 노릴지도 몰라요.」 미치는 떨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은 가볍게 대꾸했다. 「누가 나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너를 죽일 까닭이 없어, 미치」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에요. 아주 나쁜 사람들이에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사랑스런 조 카까지…….」 미스 블랙록은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았어.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미치를 죽이려 한다는 건 믿지 않아. 짤막한 광고 때문에 떠난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내 생각엔 어리석은 짓이야.」 미치가 약간 망설이는 듯하자 미스 블랙록은 급히 덧붙였다. 「점심에는 정육점에서 가져운 쇠고기로 스튜를 해먹어야겠다. 고기가 질겨 보이더라.」 「네, 특별 요리를 해 드리겠어요. 굴래시 스튜로요.」 「좋을 대로 해. 그리고 치즈 스트로를 만드는 데 굳은 치즈를 쓰도록 해. 오늘 저녁엔 술 손님이 있을 것 같아.」 「오늘 저녁이라고요? 무슨 일로요?」 「6시 30분이야.」 「신문에 났던 바로 그 시간 아니에요? 누가 무슨 일로 오는거죠?」 미스 블랙록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장례식에 오는 거지. 이제 그만 됐어, 미치. 문을 닫고 나가줘.」 미치가 문을 닫고 나가고 나자 미스 블랙록이 입을 열었다. 「이제 미치도 당분간 잠잠할 테고.」 「정말 레티는 능숙해.」 미스 배너는 감탄을 했다 ◎ 3장. 금요일 오후 6시 30분 ◎ (1) 「자,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됐군.」 미스 블랙록은 두 칸으로 연결된 거실을 살피듯 둘러보았다. 장미 무늬의 면수건, 국화 모 양의 청동 화분 두 개, 제비꽃이 꽂힌 꽃병, 은제 담배 케이스, 가운데 테이블에는 술병이 얹힌 쟁반. 리틀 파독스는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보통 크기의 주택이었다. 좁고 길다란 베란다와 녹색 덧문이 달려 있었다. 베란다 지붕에 가려진 어두운 마름모꼴 응접실은 한쪽 끝에 이중문이 있어 들창이 달린 작 은 방과 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때 이중문을 떼어 버리고 벨벳 커튼을 달아 놓았다. 그 뒤 미스 블랙록은 그 커튼을 떼어내고 두 방을 완전히 연결시켜 놓았다. 두 방의 양쪽 에는 난로가 있었지만 둘다 불을 피우지 않았다. 패트릭이 말했다. 「중앙난방을 했군요.」 미스 블랙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안개가 끼고 날씨가 습해서 집안이 눅눅해서 말이다. 그래서 에번즈에게 스팀을 넣 으라고 했지.」 패트릭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 비싼 코크스로 말이에요?」 「그래. 코크스는 정말 비싸. 하지만 그보다 석탄은 더 비싼걸. 너도 알다시피 연료국에서 제대로 배급을 줘야 말이지. 잠자코 있으면 끼니도 못 끓여먹는 게 아니냐.」 줄리어가 낯선 얘기를 듣는 것처럼 물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석탄이며 코크스가 잔뜩 쌓여 있었지요?」 「그랬지. 그땐 값도 무척 쌌지.」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어요. 미리 사두지 않아도 언제든지 상점에 가면 살 수 있었고요.」 「종류도 많았고 질도 좋았지. 요즘처럼 돌덩이와 슬레이트 따위가 아니었지.」 「참 좋은 때였군요.」 줄리어는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블랙록은 미소지었다. 「그땐 일을 할 필요도 없었겠군요. 그저 꽃을 가꾸고 편지를 쓰고…… 왜 사람들은 편지 를 썼을까요? 누구에게 보내려고요?」 미스 블랙록은 장난스레 말했다. 「너는 전화를 하잖니. 예전에는 전화 대신 편지를 한 거란다. 너는 편지를 쓸 줄 아느냐, 줄리어?」 「편지교본처럼 멋지게는 쓸 줄 몰라요. 그 책에는 청혼 받았을 때 거절하는 방법까지 나 와 있어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네 생각대로 집에서 태평스럽게 즐길 수만은 없잖니. 모두들 일해야 하지. 요즘엔 잘 모 르겠다만 배너와 나는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지.」 그녀가 도라 배너에게 애정어린 미소를 보내자 도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암, 그랬었지. 좀처럼 잊지 못할 거야. 레티는 총명해서 큰 사업가의 비서로 일했지.」 그때 문이 열리고 필리퍼 헤임즈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차분한 여자였다. 그녀는 놀란 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파티가 있나보죠? 전 듣지 못했는데요.」 패트릭이 소리쳤다. 「물론 듣지 못했을 거예요. 치핑 클렉혼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마 당신뿐일 겁니다.」 필리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패트릭이 계속 말했다. 「지금 당신이 볼 장면은 살인 장면입니다.」 필리퍼는 어리둥절했고 패트릭은 두 개의 큰 국화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장례식 화환입니다. 저쪽의 치즈와 올리브 접시는 장례식의 구운 고기이죠.」 필리퍼는 의문스런 눈길을 미스 블랙록에게 돌렸다. 「농담하는거죠? 난 농담을 잘 알아 듣지 못한답니다.」 도라 배너가 정색하고 말했다. 「기분나쁜 농담이야. 난 그런 농담은 정말 질색이야.」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필리퍼에게 광고를 보여 줘. 나는 오리들을 우리 속에 넣어야겠어. 지금쯤 우리로 돌아왔 을 거야.」 「내가 할께요.」하고 필리퍼가 얼른 받았다. 「아니야. 할 일을 다 끝냈으니까.」 패트릭이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전번 날 너는 빗장도 걸지 않았더구나.」 미스 블랙록이 단호히 말하자 미스 배너가 얼른 나섰다. 「레티, 내가 하겠어.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야. 덧신을 신어야겠군. 그리고 스웨터를 어디에 두었더라?」 그러나 미스 블랙록은 웃으며 방을 나갔다. 「괜찮습니다, 배너 아주머니. 레티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이 일해 주는 게 성에 안 차나 봐 요. 뭐든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시죠.」 패트릭의 말에 줄리어가 맞장구쳤다. 「정말 그래요. 좋아서 하시는 일이에요.」 「너는 지금 네가 하겠다고 한마디라도 해봤니?」 「오빠가 방금 말했잖아. 레티 아주머니는 뭐든지 직접 하신다고. 그리고…….」 줄리어는 날씬한 다리를 뻗으며 말을 이었다. 「난 가장 아끼는 스타킹을 신었거든.」 패트릭이 소리쳤다. 「실크 스타킹의 시체!」 「실크가 아니라 나일론이야.」 「나일론 스타킹의 시체라…… 별로 흥미롭지 못하군.」 필리퍼가 호소하듯 소리쳤다. 「왜들 온통 죽음에 관한 말만 하고 있지?」 그 자리의 사람들은 그 까닭을 말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가제트를 찾을 수 없었다. 미치가 부엌으로 가져간 것이다. 잠시 후에 미스 블랙록이 돌아왔다. 「자, 이제 됐어.」 그러고는 흘깃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20분. 이제 곧 올 시간이야. 이웃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 야.」 필리퍼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죠?」 「아직 모르고 있나요? 하긴 모르는게 당연하지.」 줄리어가 심드렁하게 내뱉았다. 「필리퍼는 인생에 전혀 흥미가 없군요.」 필리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 위에는 조금 전 미치가 갖다 놓 은 세리주와 올리브, 치즈 그리고 파이를 담은 그릇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저쪽 들창 쪽으로 옮겨 놓는 게 좋겠구나. 패트릭, 그렇게 해 주겠니? 파티를 여는 게 아니지. 아무도 초대한 것도 아닌데 내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인상은 주기 싫으니까.」 「레티 아주머니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은 거죠?」 「그렇다, 패트릭.」 줄리어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조용한 저녁 한때의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해야겠군요. 그리고 누군가 찾아왔을 때 깜짝 놀라기만 하면 되고요.」 미스 블랙록은 세리주를 든 채 어딘지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패트릭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반 병 정도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할 거예요.」 「그래…… 패트릭, 찬장 안에 따지 않은 병이 잇는데 좀 가져다 주겠니? 아무래도 새 것 을 갖다 놓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건 마시다 남은 거라서…….」 패트릭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새 병을 가져와 마개를 땄다. 그것을 쟁반 위에 올려놓은 뒤 그는 미스 블랙록을 바라보았다. 「무척 꼼꼼하시군요, 레티 아주머니.」 도라 배너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레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쉿!」 미스 블랙록이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벨이 울렸어. 이제 내 말이 들어맞을 거야.」 (2) 미치가 거실 문을 열자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가 들어섰다. 그녀는 특유의 kafxn로 방문객 을 알렸다. 「이스터브룩 대령 내외분께서 오셨습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내심 당혹감을 숨기고 있었다. 「폐가 되지 않을는지요. 이 부근을 지나는 길에…….」 줄리어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음, 참 조용한 저녁입니다. 벌써 스팀을 넣었군요. 우리는 아직 안 넣었습니다만.」 그러자 대령 부인이 말했다. 「어머나, 국화 무늬 청동그릇이 정말 멋지군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실은 신통찮은 거예요.」 줄리어가 말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정중히 필리퍼 헤임즈에게 인사하며, 그가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루커스 부인의 정원은 어떻게 되어 가죠? 다시 본래대로 될 수 있을까요? 전쟁중에 완 전히 황폐해졌는데…… 그때 애쉬 노인이 이따금 풀을 뽑고 야채를 몇 포기 심긴 했었지 요.」 「손질만 잘하면 회복될 거예요. 금방은 안 되겠지만.」 미치가 또다시 문을 열고 알렸다. 「볼더즈에서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미스 핀칠리피가 인사하며 불쑥 들어오더니 미스 블랙록의 손을 석 잡았다. 「내가 마것로이드에게 리틀 파독스에 잠깐 들러보자고 했어요. 오리들이 어떻게 되어 가 는지 궁금했거든요.」 마것로이드가 갑자기 수선스럽게 말했다. 「저 국화 무늬 좀 봐!」 「엉터리예요.」 줄리어가 내뱉었다. 「넌 왜 자꾸 비뚤게만 말하지?」 패트릭이 줄리어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 미스 핀칠리피가 별로 좋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스팀을 넣었군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이맘때면 어찌나 습기가 심한지 말이에요.」 미스 블랙록이 받았다. 패트릭이 세리주를 내와도 되겠느냐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미스 블랙록은 좀더 기다려, 라고 눈짓했다. 미스 블랙록은 이스터브룩 대령에게 말을 건넸다. 「올해도 네덜란드에서 수슨을 가져오셨나요?」 그때 문이 열리고 스웨트넘 부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그녀의 아들 에드 먼드가 시큰둥한 채 따라 들어왔다. 「안녕들 하세요?」 스웨트넘 부인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북살스런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혹시 새끼 고양이를 기르고 싶으시다면 드릴까 하고요. 미스 블랙록, 우리집 고양이 가…….」 에드먼드가 뒷말을 이었다. 「새끼를 낳게 되었습니다. 어미는 갈색인데 보나마나 새끼는 신통치 않을 것입니다만… ….」 부인은 당혹해 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미는 아주 예쁘답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 예쁜 국화꽃 좀 봐!」 에드먼드가 물었다. 「벌써 스팀을 넣으셨군요?」 줄리어가 중얼거렸다. 「마치 똑같은 레코드를 듣는 것 같군.」 이스터브룩 대령은 패트릭을 붙잡고 무슨 얘긴가 떠벌이고 있었다. 「나는 뉴스를 싫어하지. 전쟁은 불가피해. 절대로 불가피한거지.」 「난 뉴스 같은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또다시 문이 열리고 허먼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낡은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유행에 맞 추려고 한껏 애를 쓴 듯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보통때 늘 입던 외투가 아닌 하늘하늘한 블 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블랙록? 베가 늦진 않았죠? 살인 게임은 언제 시작하죠?」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3) 그녀는 몹시 심하게 숨을 헐떡거렸다. 줄리어는 작게 키득거렸고 패트릭은 고개를 치켜들 었고 미스 블랙록은 마지막 손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먼 부인이 말했다. 「줄리어은 못 오게 되어 몹시 서운해 했어요. 그이는 살인 게임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지 난 주일에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문이죠. 남편의 설교를 칭찬한다는 건 좀 멋적은 노릇이지만 정말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문이죠. 남편의 설교 를 칭찬한다는 건 좀 멋적은 노릇이지만 정말 훌륭한 설교였잖아요? 평소 때보다 훨씬 좋았어요. 그건 ≪모자 살인사건≫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 책을 읽어 보셨나요? 푸트의 서점 여점원이 제게 특별히 갖다주었어요. 어찌나 재미있는지, 정신없이 읽다 보면 모든 게 뒤바뀌고 굉장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죠. 결국 4,5명이 살해당하죠. 그 책을 서재에 두 었는데 남편이 설교문을 생각하려고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걸 읽었지 뭐예요. 그리고는 시간에 쫓기며 설교문을 작성했죠. 자연히 학술적 논문이나 인용구를 안 쓰게 되자 썩 잘된 문장이 되었던 거예요. 어머, 내가 너무 많이 떠들었군요. 살인 게임은 언제 시작하 나요?」 미스 블랙록은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를 흘깃 보았다. 「6시 30분에 시작된다면 1분 남았습니다. 곧 시작될 테니 그 동안 세리주나 드세요.」 패트릭은 재빨리 입구로 향했고 미스 블랙록은 담배 상자가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저는 세리주를 좋아하죠. 그런데 『시작된다면』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허먼 부인의 물음에 미스 블랙록이 대답했다. 「글쎄요. 나도 여러분처럼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때 시계가 울리자 미스 블랙록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시계소리는 맑은 곡조처럼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일제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마지막 여운까지 사라져 버리자 갑자기 방안의 전등이 모두 꺼지고 어둠에 잠겨 버 렸다. (4) 어둠 속에서 가쁜 숨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되었군.」 허먼 부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오, 난 이런 건 질색이야!」 도라 배너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끔찍해!」 「섬뜩하군요.」 「아치, 어디 있어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머, 제가 발을 밟았죠? 미안해요.」 여러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그때 요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한 회중전등 불빛이 방안을 홱 스쳤다. 콧소리가 섞일 사내의 목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손들어! 어서!」 그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머리위로 손을 올렸다. 「재미있는데요.」 「스릴 있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두 발의 총성이 났다. 그 소리는 방안의 분위기를 단박에 깨어 버렸다. 이제 그것은 게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 문 앞에 있던 사람은 갑자기 방안을 돌며 망설이는 눈치더니 세 번째 방아쇠를 당기고 쿵 쓰러졌다. 회중전등은 바닥에 떨어지고 불이 꺼졌다. 또다시 방안은 캄캄해졌다. 거실문은 잘 열려지지 않는 빅토리아 왕조식 구조였는데 조용 히 찰칵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5) 거실 안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외치기 시작했다. 「전기 스위치를 켜요.」 「누구 라이터 가진 분 없어요?」 「오, 끔찍해라.」 「그 총소리는 진짜였어.」 「도둑일까?」 「아치, 난 돌아가야겠어요.」 「누구 라이터 가진 분 안 계세요?」 그제야 두 개의 라이터가 거의 동시에 찰칵 소리를 내며 불빛이 타올랐다. 사람들은 눈을 깜박이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얼굴에나 놀란 표정을 떠올리고 있 었다.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입구 쪽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불빛이 희미했지 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거무스름한 액체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재빠르게 소리쳤다. 「스위치를 켜 보게, 에드먼드」 문 곁에 있던 에드먼드가 스위치를 올렸다. 「전구나 퓨즈가 끊어진 모양이군.」 대령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또 끔찍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거지?」 닫혀진 문 안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더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이어 주먹으 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도라 배너가 소리쳤다. 「미치야! 누가 미치를 죽이고 있어요!」 패트릭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 「촛불을 켜야겠다, 패트릭.」 미스 블랙록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령이 문을 열었다. 그와 에드먼드는 라이터를 켜들고 홀로 들어섰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물체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총을 맞은 것 같은데. 그런데 비명을 지르던 여자는 어디에 있지?」 대령의 말에 이어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식당입니다.」 식당은 홀을 가로질러 있었다. 그쪽에서 누군가 벽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그녀가 안에 있는 모양이에요.」 에드먼드가 열쇠를 돌리자 미치가 뛰어나왔다. 식당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미치는 미친 듯이 계속 비명을 질러 댔다. 그녀는 은 그릇을 닦고 있었던지 한손에는 세무 가죽과 다른 손에는 큼직한 그릇을 들고 있는 폼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조용히 해, 미치!」 「그만해요.」 에드먼드도 말했지만 미치는 계속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자 에드먼드가 몸을 내밀며 그 녀의 뺨을 때렸다. 미치는 입을 꾹 다물고 재채기를 하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부엌 선반에서 초를 가져와라, 패트릭. 그리고 두꺼비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개수대 뒤에 있을 거예요. 제가 찾아 보지요.」 미스 블랙록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식당 쪽으로 다가갔다. 도라 배너는 울음을 터뜨렸고 미치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 댔다. 「피.. 피에요! 미스 블랙록, 피가 잔뜩 흘러요. 죽을지도 몰라요.」 「바보같이 굴지 마. 별로 다치지 않았어. 귀를 살짝 스쳤을 뿐이야.」 줄리어가 나섰다.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 피가 흐르잖아요.」 정말 미스 블랙록의 흰 블라우스아 진주 목걸이, 그리고 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미스 블랙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귀에서 피가 곧잘 나지. 내가 어렸을 때 미장원에서 미용사가 가위로 내 귀를 스치는 바람에 피가 잔뜩 나왔어. 그보다 빨리 양초를 찾아야 해.」 「제게 초가 있어요.」 미치가 말했다. 줄리어는 미치와 함께 나갔다가 접시에 초를 세워서 들고 왔다. 대령이 나섰다. 「자, 범인을 봐야겠군. 촛불을 아래로 비춰 주게, 에드먼드. 가능하면 촛불이 더 있었으면 좋겠군.」 「내가 다른 쪽을 비출께요.」 필리퍼가 말하고는 두 개의 촛불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몸을 쭈그려 앉으며 사렸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거친 옷감의 검정 외 투를 입고 얼굴에는 검정 마스크, 손에는 검정 면장갑을 끼고 있었다 마스크가 벗겨져 금 발의 고수머리와 흰 피부가 드러났다. 대령은 사내의 맥박을 짚고 심장의 박동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움찔하여 손 을 오므렸다. 손에는 끈적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제 손으로 쏘았군.」 대령이 중얼거렸다. 「중상인가요?」 미스 블랙록이 물었다. 「흠, 죽은 것 같습니다…… 자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넘어지는 바람에 총이 발사되었을 지도 모르죠. 좀더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 마술처럼 전등이 켜졌다. 치핑 클렉혼 사람들은 리틀 파독스의 홀에서 갑작스런 살인을 목격하고 야릇한 기분에 휩 싸여 있었다. 대령의 손은 피투성이였고 미스 블랙록의 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은 여전히 그녀의 블라 우스와 스커트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는 사지를 쭉 벌린 채 시 체가 누워 있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온 패트릭이 말했다. 「퓨즈가 한 개 끊어진 것 같아요.」 대령은 검정 마스크를 벗겨냈다. 「누군지 봅시다.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가 마스크를 벗겨내자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고 보려고 했다. 미치의 재채기 소리만 들 릴 뿐 혼 안은 조용했다. 허먼 부인이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사람이군요.」 갑자기 도라 배너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레티, 레티. 메디넘 수퍼 호텔 사람이야. 언젠가 여기에 와서 스위스로 돌아가고 싶으니 돈을 빌려달라고 성가시게 굴던 사람 있잖아. 그때 레티가 거절했잖아. 그게 모두 구실 이었던가봐. 이 집을 살피러 왔던 거야. 오, 레티― 하마터면 네가 살해될 뻔했어.」 미스 블랙록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필리퍼, 식당으로 가서 배너에게 브랜디 한잔을 주도록 해. 그리고 줄리어, 욕실에 가서 벽장에 있는 반창고를 좀 갖다 주렴. 돼지처럼 피가 지저분하구나. 패트릭, 너는 경찰에 신고전화를 좀 걸어 주겠니?? ◎ 4장. 로열 호텔 ◎ (1) 미들셔 경찰서장 조지 라이스델은 조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굵 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에 중간 키를 가졌고, 지껄이는 것보다 주로 듣는 편이었다. 그가 명료한 지시를 내리면 그 명령은 곧 이행되었다. 그는 더모트 클래독 강감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클래독은 그 사건을 맡은 수사관으로서 라이스델은 그를 신뢰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리버풀에 가 있 었는데 전날 밤 서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무엇보다도 높이 살 만한 장점은 어떤 사건이 라도 치밀하게 조사하고 끝까지 자제력을 지킨다는 것이다. 클래독이 경위를 설명했다. 「레그 경관이 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신속하고 침착하게 처리한 것 같습 니다. 그런데 사건은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열두 명이나 되는 사람들 이 한꺼번에 지껄여 댔고 그 중에는 경관만 보면 흥분하는 여자가 있었 답니다. 그녀는 방에 갇히는 바람에 비명을 질러 댔답니다.」 「사망자의 신원은 확인되었나?」 「네. 루이 셔트라는 청년으로 스위스 국적입니다. 메디넘 웰즈의 로얄 슈 퍼 호텔 종업원으로 있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그 호텔에 가서 조사한 뒤, 치핑 클렉혼으로 가보았으면 합니다. 플레쳐 형사부장이 조금 전 그 리로 떠났습니다.」 라이스델은 응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렸고 서장은 그쪽을 향해 말했다. 「어서 오게, 헨리. 좀 색다른 사건이 일어났네.」 헨리 클리더링 경은 전 런던 경시청의 경찰국장으로서 키가 크고 특출난 용모에 나이는 지긋한 사람이었다. 라이스델은 말을 이었다. 「자넨 여러 사건들을 신물이 나도록 다루어 봤겠지만 이번 사건만은 좀 재미가 있을 걸세.」 헨리 클리더링 경은 화난 듯이 대꾸했다. 「난 그런 적은 없네.」 「살인을 미리 예고했다는군. 헨리 경에게 그 신문 광고를 보여 주게, 클래 독.」 헨리 경이 중얼거렸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가제트라. 대단히 긴 이름이군.」 그는 클래독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광고문을 읽어내려 갔다. 「흠, 좀 다르긴 하군.」 라이스델이 물었다. 「그 광고를 누가 냈는지 알아냈나?」 「신문사 기록에 의하면 루디 셔트가 직접 접수시켰답니다. 지난 수요일에 요.」 「광고를 접수한 사람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상하지 않 느냐 말이야.」 「담당자는 비대한 금발 여자였는데 그런 생각까지 할 인물이 못됩니다. 단 지 기계적으로 수만 세고 돈을 받았을 뿐이죠.」 「왜 그런 광고를 낸 걸까?」 헨리 경이 물었다. 라이스델이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잔뜩 끌어 그들을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 모이게 한 뒤 그들을 위협하여 돈과 보석을 털려고 했겠지. 꽤나 독특한 방법 아닌가?」 「치핑 클렉혼이란 어떤 곳인가?」 헨리 경이 물었다. 「넓고 그림 같은 마을이지. 정육점, 빵집, 식료품점, 제법 근사한 골동품점, 게다가 찻집이 두 곳이 있지. 분명 아름다운 곳이야. 여행객들은 그곳에 서 식료품을 사고 주택도 고급이지. 전에 농부들의 집도 개조되어 나이든 독신여성이나 정년퇴직한 노부부들이 살고 있네. 빅토리아 왕조풍의 건물 도 꽤 있고 말이네.」 「그런가. 우아한 노처녀와 퇴역 장교들이 산단 말이군. 만일 그들이 그 광 고를 보았다면 6시 30분에 궁금히 여기며 모여들거야. 그곳에 내가 아는 여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이 사건에서 실력을 발휘해 줄 텐 데.」 「누군가, 그 여자란? 자네 아주머니 말인가?」 헨리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전혀 친척이 아냐. 그녀는 타고난 탐정일세. 게다가 좋은 환경에서 자란 분이거든.」 헨리 경은 이번에는 클래독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이 마을의 노처녀들을 경멸하지 말게. 만일 이번 사건이 복잡해진 다면, 정원 가꾸는 일과 뜨개질을 좋아하는 노처녀를 기억하게. 그녀는 정말 훌륭한 탐정일세. 사건은 이렇게 발생했을 것이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밝혀줄 걸세.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까 지 말이네.」 「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클래독은 헨리 경으로부터 세례명까지 받은 친숙한 사이지만 겉으로는 전 혀 내색하지 않았다. 라이스델이 헨리 경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6시 30분에 모였다 하면, 그렇지만 그 스위스 청년이 다들 모였을 거라고 확신했을까? 또 한가지, 모인 사람들이 값진 물건을 지녔을까 하는 걸 세.」 「구식 브로치 두 개, 모조 진주 목걸이 하나―돈이라야 지폐 한두 장―정 도이겠지.」 헨리 경은 깊이 생각하듯이 물었다. 「미스 블랙록은 돈을 많이 집에 두고 있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5파운드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닭 모이 값밖에 안 되는군.」 헨리 경이 중얼거렸다. 「그 청년이 연극을 꾸미려고 했던 게로군. 진짜 강도가 아니라 단지 돈을 강탈하는 연극을 해 보려고 했겠지. 영화에서처럼 말일세.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왜 자신을 쏘아 버린 걸까.」 라이스델이 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검시 보고서로군. 총알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되어져―옷이 탔으며…… 음…… 사고인지 자살인지 확인할 단서는 없군. 예정된 자살일 수도 있 고, 무엇에 걸려 넘어지면서 오발될 수도 있겠군. 아마 후자가 더 가능성 이 크지…….」 헨리 경은 클래독을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목격자들은 신중히 심문해 보고 그들이 본 것을 정확히 진술하도록 하게.」 클래독 경감은 우울하게 말했다. 「그들은 보나마나 다른 의견들을 말할 겁니다.」 「그것이 재미있는 걸세. 잔뜩 긴장해 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목격한 것 말이네. 실제로 본 것보다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더 흥미로운 것이지.」 라이스델 소장이 물었다. 「권총은 무슨 형이지?」 「외제입니다―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이지요―셔트는 총기 소지 면 허증도 없고,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신고도 없었습니다.」 「골치아픈 녀석이로군. 어느 모로 보나 문제가 있는 녀석이야. 클래독, 로 열 슈퍼 호텔에 가서 녀석의 신원을 조사해 주게.」 헨리 경이 흥미롭게 말했다. (2) 로열 슈퍼 호텔에 도착한 클래독 경감은 곧 지배인 사무실로 갔다. 지배인 롤랜드슨은 키가 크고 혈색이 좋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랐습니 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군요. 셔트는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인상 좋은 청년이었죠―그가 강도짓을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그가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롤랜드슨씨?」 「경감님 오시기 전에 알아봤더니, 석 달 조금 넘었더군요. 훌륭한 소개장 도 갖고 있었고 입국 허가증도 있었습니다.」 「일하는 건 마음에 들었습니까?」 클래독은 지배인의 얼굴에 약간 망설이는 듯한 기미를 보았다. 「아주 잘했습니다.」 클래독은 이전에 써오던 방법 중 효과적던 것을 써보았다. 「아뇨,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롤랜드슨 씨.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글쎄요, 저…….」 「말해 보시오. 뭔가 있었지요? 그것이 뭡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느낀 적은 있었겠지요?」 「글쎄…… 그래요, 있었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내 생각이 기록되 어 난처한 입장을 당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클래독은 미소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지 셔트가 어떤 인물인가 를 알아내야 합니다. 당신이 의심하고 있는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롤랜드슨은 마지못해 얘기했다. 「한두 번, 지불 계산서에 문제가 있었지요. 있지도 않는 항목이 적혀 있었 거든요.」 「말하자면 호텔의 계산에는 없는 항목을 청구서에 써넣고 손님이 지불한 차액을 슬쩍했다는 말입니까?」 「대충 그런 일이지요. 그러나 그가 부주의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번 은 굉장히 큰 품목을 적어 넣었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의 장부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속임수를 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요. 하지만 실수가 많고 꼼꼼하지는 못해도 실제 액수는 꼭 들어맞더군 요. 그래서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단정지었죠.」 「하지만 당신은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속임수를 써서 돈을 빼어 쓰고는 다시 보충하여 메우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네, 그가 돈을 갖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경감님 말씀처럼 돈을 빼 어 쓰는 사람은 대개 돈이 궁할 테니 남아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돈을 채워 넣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구하려 했겠지요. 강도짓을 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런 모양이군요. 하지만 처음으로 한 짓이겠지요.」 「맞습니다. 수법이 매우 서투르니까요. 그가 돈을 얻을 만한 사람이 없었 는지요? 사귀는 여자는 있었나요?」 「그릴의 웨이트레스인 마너 해리스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와 얘기해 보는 게 좋겠군요.」 (3) 마너 해리스는 윤기나는 빨강 머리에 오똑한 코를 가진 예쁜 아가씨였다. 그녀는 몹시 놀라며 경계의 기색을 풀지 않으며 경관에게 심문받는 걸 심 한 모욕으로 여기는 듯 했다. 「난 그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만 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호텔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지요. 그 호텔은 사람을 고용할 때 여간 신중한 게 아니거든요. 특히 외국인은요. 그가 나쁜 범죄 조직에 끌려들어 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클래독이 말했다. 「우리는 그가 혼자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그는 침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예 요. 물건이 몇 가지 없어진 적은 있어요. 지금 생각났는데, 다이아몬드 브 로치 한 개와 작은 금으로 된 장신구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루디의 짓이 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랬겠죠. 당신은 그와 아주 가까웠습니까?」 「글쎄요, 잘 알고 지냈다고 말해도 될지…….」 「친구였겠지요?」 「체, 그래요. 친구였어요. 그뿐이에요. 절대 깊은 사이는 아니에요. 전 언제 나 외국인들에게는 마음을 놓지 않거든요. 그들이 가끔 제멋대로 하는 걸 봤거든요. 전쟁 중의 폴란드인들 가운데도 있겠고요. 기혼자인 것을 숨기 고 여급사를 건드려 놓았죠. 루디도 과장해서 얘개했지만 저는 그것을 곧 이듣지 않았죠.」 클래독이 얼른 말을 끌러냈다. 「과장했다고요? 그것 참 재미있군요. 해리스 양, 그가 뭐라고 과장하던가 요?」 「뭐, 스위스의 집이 굉장히 부자라느니, 명문이라느니 하는 거죠. 하지만 그는 늘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돈을 마음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의 물건들은 싸구려였고 고급품은 하나도 없었어요. 또 그의 얘기는 허풍이 많았지요. 알프스에 오른 얘기며, 빙하의 깨진 틈으 로 사람을 구해 준 얘기 말이에요. 그는 단지 볼더 계곡 가장자리에나 가 보았을 거예요.」 「아가씬 그와 데이트를 여러 번 했습니까?」 「네, 그래요. 자주 데이트했었죠. 그는 아주 예의바른 사람이었고 여자에 대한 에티켓도 알고 있었어요. 극장에서는 언제나 좋은 좌석에 앉혀 주고 어떤 때는 꽃다발을 사다 주기도 했어요. 춤도 썩 잘 추었어요.」 「혹시 그가 당신께 미스 블랙록 얘기를 하지 않던가요?」 「가끔 이곳에서 점심을 드시는 분 말이지요? 한번은 여기서 묵은 적도 있 었지요. 하지만 루디한테서 얘기들은 적은 없어요. 그가 그녀와 아는 사 이인 줄은 몰랐어요.」 「치핑 클렉혼에 대한 얘기는 못 들었나요?」 클래독은 마너 해리스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들은 적이 없어요…… 한번 버스에 대해서, 몇 시에 출발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만요. 하지만 치핑 클렉혼인지 다른 곳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꽤 오래된 일이라서요.」 그녀로부터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었다 그녀 말에 의하면 루디 셔트는 평 범한 남자였다. 마너 해리스는 사건이 일어난 당일 밤에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루 디 셔트가 근본적으로는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닐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클래독은 아마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 5장. 미스 블랙록과 미스 배너 ◎ 리틀 파독스는 클래독 경감이 상상한 그대로였다. 오리며 닭들이 여기저기 서 돌아다니고, 바로 얼마 전까지 아름다운 초록으로 빛났을 정원에는 국화 꽃이 몇 그루 피어 있었다. 잔디와 오솔길은 손질되지 않은 채였다. 클래독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정원을 가꾸는데 그리 돈을 들 이지 않는 모양이군. 꽃은 좋아하지만 훌륭한 꽃밭을 가꿀 안목은 없는 듯하 고, 집에 칠을 새로 해야 하겠는걸. 하긴 요즘은 어느 집이나 칠을 새로 할 시기지만. 재산은 웬만큼 있는 모양이군』 클래독의 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집 옆쪽에서 플레쳐 형사부장이 돌아나왔 다. 그는 군인처럼 차렷자세로 선 채 「네.」하는 한마디에도 여러 가지 뜻 을 포함시키는 타입이였다. 「어이, 플레쳐!」 「네.」 「무슨 새로운 거라도 있던가?」 「지금 집을 한바퀴 살펴보았습니다. 셔트의 지문은 한군데도 남아 있질 않 습니다. 장갑을 끼고 있었겠지요. 문이나 창에도 억지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는 메디넘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에는 6시에 도착한 듯합니 다. 이 집의 옆문을 5시 30분에 잠갔다고 하니까 그는 현관문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현관문은 잠잘 때만 잠근다고 하는데 하녀 말로는 오후 내내 잠가둔답니다. 하지만 하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 다. 어찌나 성격이 거친지…….」 「다루기 힘든 모양이군?」 「네, 그렇습니다.」 플레쳐가 강하게 힘주어 대답하자 클래독은 미소를 지었다. 플레쳐가 보고 를 계속 했다. 「집안의 전기 배선은 이상이 없습니다. 어떻게 조작했는지 모르지만 회로 가 한 개 끊어져 있었지요. 거실과 홀을 잇는 선이죠. 하긴 요즘은 거실 의 벽 전등과 홀 중앙의 전등이 연결된 곳은 없는데 이 집은 구식으로 설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두꺼비집을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을 만지려면 부엌의 개수대 옆까지 가야 했고 그러면 하녀에게 들키게 되거든요.」 「하녀와 공모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죠. 그 둘 다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말이죠.」 클래독은 현관 옆 창문에서 놀란 커다란 검은 눈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는 것을 느꼈다. 창틀에 가려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저 창문 곁의 여자인가?」 「그렇습니다.」 그 얼굴은 이내 사라졌다. 클래독이 현관의 벨을 누른 뒤 한참 후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푸른 눈으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미스 불랙록이 기다리고 계세요.」 좁고 길죽한 홀에는 놀랄 만큼 많은 문들이 있었다. 젊은 여자는 왼쪽의 문 하나를 열고 말했다. 「클래독 경감님이 오셨어요, 레티 아주머니. 미치가 문도 열지 않으려 해 요. 여전히 부엌에 틀어박혀 신음 소리만 내고 있지 뭐예요. 오늘도 점심 을 차려 주긴 틀린 것 같아요.」 그녀는 클래독을 향해 덧붙였다. 「하녀는 경찰을 싫어한답니다.」 그리고는 이내 방에서 나갔다. 클래독은 리틀 파독스의 주인에게 가까이 갔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키가 크고 활동적인 60살 정도의 부인이었다. 자연스럽 게 웨이브진 흰머리가 지적으로 보여 강한 인상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회색 눈과 턱은 각이 졌고 왼쪽 귀를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트위드 웃저고리와 단정한 스커트, 그 위에 자켓을 걸친 차림이었다. 목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구식 목걸이가 걸려 있어 있어 빅토리아풍의 감상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부인이 앉아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헤어네트 밖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단정치 못한 느낌을 주었다. 클래독은 그녀가 레 그 경관의 보고서에 나와 있던 도라 배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의 비고난에는 <고양이>라고 쓸데없는 주석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클래독 경감님. 이쪽은 친구인 미스 도라 배너예요. 나를 도 와 주러 와 있지요. 자, 앉으세요. 담배 피우시겠어요?」 「근무 시간에는 안 피웁니다, 미스 블랙록.」 「그러세요?」 클래독은 노련한 눈으로 방안을 훑어보았다. 거실 두 개를 연결시킨 전형적 인 빅토리아식 응접실이었다. 한쪽에는 길다란 두 개의 창이 있고 다른 쪽에 는 들창이 하나 있었다. 의자, 소파, 국화 무늬의 청동 그릇이 놓인 테이블,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고 아늑했다. 단 한가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작은 은꽃병에 꽂힌 시든 제비꽃이었다. 그 꽃병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입구 옆의 탁자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미스 블랙록이 시든 꽃을 놔둘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뭔 가 일상의 평화로움을 깨뜨릴 만한 암시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클래독이 입을 열었다. 「미스 블랙록, 이 방이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방입니까?」 「네.」 갑자기 미스 배너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어제 저녁의 사건을 경감님이 보셨어야 해요. 끔찍했어요. 작은 테이블이 넘어지면서 다리가 두 개 부서지고―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아우성쳤지 요―어떤 사람이 불붙은 담배를 떨어뜨려 귀중한 가구가 다 타버렸지 뭐 예요. 사람들은―특히 젊은이들은―그런 일에 통 조심을 하지 않아요. 다 행히 중국 도자기는 하나도 안 깨졌지만…….」 미스 블랙록은 조용하고도 엄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도라, 그런 건 하찮은 거야. 그보다 우린 클래독 경감님께 솔직히 대답해 드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야.」 「감사합니다, 미스 블랙록. 저는 어젯밤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습 니다. 먼저 그 죽은 남자를 처음 본 게 언제였습니까? 루디 셔트 말입니 다.」 「루디 셔트라고요?」 미스 블랙록은 약간 놀라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의 이름인가요? 나는……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메디넘 슈퍼에 쇼핑하러 갔을 때였어요―그러니까 3주일쯤 전이 군요―우리들이―배너와 나 말이에요―로열 슈퍼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 고 돌아오려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바로 그 젊은이였지요. 그는 『미스 블랙록이시죠?』하고 묻더군요. 그리고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몽트루에 있는 알프스 호텔 주인의 아들입니다』하더군요.」 「몽트루의 알프스 호텔이라…….」 클래독은 급히 메모하고 다시 물었다. 「그를 기억하셨습니까, 미스 블랙록?」 「아뇨, 전혀 못했지요. 사실 그를 본 기억이 없었어요. 호텔 프런트의 젊은 이들은 모두 똑같아 보이잖아요. 우리가 몽트루에 있는 동안엔 아주 즐겁 게 지냈어요. 그 호텔 주인은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나는 그 젊은이에게 영국에 있는동안 즐겁게 지내길 바란다고 얘기했죠. 그러자 그는 아버지 명령으로 호텔 일을 배우러 6개월간 그곳에 파견되었다고 하더군요. 별얘기도 아니었어요.」 「그 다음에 다시 만난 때는요?」 「그러니까…… 열흘 전이었어요. 그가 불쑥 찾아왔더군요. 나는 깜짝 놀랐 지요. 그는 나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영국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다며, 어머니가 위독해서 스위스로 돌아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 는 거였어요.」 「하지만 레티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어요.」 미스 배너가 급히 말했다. 그러자 미스 블랙록도 얼른 말을 가로챘다. 「그의 얘기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요. 스위스로 돌아갈 여비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돈은 스위스의 아버지가 송금해 주면 되잖아요. 또 호텔 종업원들끼리는 서로 돈을 빌려쓰기도 하죠. 난 그가 돈을 빼 썼거나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 각했죠.」 그녀는 잠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냉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오랫 동안 대사업 가의 비서였기 때문에 돈 문제에 있어서 아주 신중해요. 그런 궁한 처지 에 놓일 수도 있다는 건 잘 알지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점이에요. 아무 소리 없 이 즉시 가버리더군요. 마치 애초부터 돈을 얻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 던 것처럼 말이에요.」 「지금 생각할 때 그가 이 집안 구조를 살피러 온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 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요. 그는 집을 나가면서 집안을 기웃거리더군요. 그리고는 『식당이 훌륭하군요』라고 말했어요. 실은 조금도 좋은 식당이 아지뇨. 어둡고 작은 곳이니까요. 결국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한 구실이었던 거죠. 그리고는 급히 현관으로 가서 직접 문을 열었어요. 지급 생각해 보니 자 물쇠를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곳 사람들은 어두워지기 전에는 현 관문을 잠그지 않죠. 아무나 들어올 수 있죠. 우리집도 마찬가지고요.」 「옆문은요?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 같던데…….」 「네, 손님들이 오시기 전에 오리를 우리에 넣기 위해 내가 옆문으로 나갔 었죠.」 「나가실 때 문을 잠갔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찌푸렸다.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렇지만 돌아와서는 분염히 문을 잠갔어요.」 「6시 15분쯤 되었지요?」 「네, 아마 그쯤이었을 거예요.」 「그럼 현관문은요?」 「여느 때처럼 열려 있었죠. 늦게 잠그려고요.」 「그렇다면 셔트는 그 문으로 들어왔겠군요. 아니면 당시이 오리를 가두기 위해 나간 틈을 타 몰래 숨어들어왔던가. 그는 이미 집 구조를 살피고 갔 으니까 숨을 만한 곳도 봐두었을 겁니다―벽장이라든가 그 밖의 장소 말 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아직 분명해진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애를 써가며 어리석은 강 도짓을 꾸며 댔을까요?」 「집안에 현금을 많이 두고 계십니까, 미스 블랙록?」 「저 책상 속에 5파운드쯤 있고, 지갑에 1,2 파운드쯤 있어요.」 「보석류는?」 「반지와 브로치가 두 개씩, 그리고 지금 걸고 있는 목걸이뿐이에요. 경감 님도 이상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시죠?」 미스 배너가 끼어들었다. 「절대로 도둑은 아냐. 내가 전에 말했잖아, 레티. 그건 복수야! 네가 그에 게 돈을 안 주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그는 너를 노렸어―두 번이나.」 클래독이 말했다. 「자,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가 보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죠? 미스 블랙록께서 기억하는 대로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 미스 블랙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얘기하기 시작했다. 「시계가 울렸어요. 벽난로 위의 시계죠.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 곧 일어날 거라고 내가 말했죠. 그때 시계가 두 번 쳤을 때 갑자기 불이 꺼졌어요.」 「어떤 전등이 꺼졌습니까?」 「이 방과 저족 방 벽의 램프예요. 다리가 달린 전등과 독서용 스탠드는 켜 놓지 않았었지요.」 「불이 꺼질 때 번쩍거리거나 무슨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나요?」 「나지 않았어요.」 도라 배너가 말했다. 「나는 분명히 번쩍 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도 들었고요. 소름끼쳤어요.」 「그리고요, 미스 블랙록?」 「문이 열렸어요…….」 「어느 문이죠? 방에는 문이 둘인 것 같은데.」 「이쪽 문이에요. 옆방 문은 열리지 않아요. 그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지요. 이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타났어요―복면을 하고 권총을 들고 있는 그 사람이요.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가 뭐 라고 말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손들어! 그러지 않으면 쏜다!」 미스 배너가 연극을 하듯 소리쳤다. 「대충 그런 말이었을 거예요.」 미스 블랙록은 이렇게 말했지만 다소 의심스런 얼굴이었다. 「그래서 모두 손을 들었습니까?」 미스 배너가 또 나섰다. 「네, 물론이죠. 우린 모두 손을 들었지요. 나는 그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했 으니까요.」 「나는 들지 않았어요. 너무 터무니 없고 게다가 귀찮았거든요.」 미스 블랙록의 대답이 끝나자 클래독을 급히 물었다. 「그리고는요?」 「회중전등 불빛이 나를 비추었습니다. 눈이 부셨고 그순간 총알이 스쳐지 나가더니 머리 뒤의 벽에 박혔지요.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나는 귀가 타 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이어서 두 번째 총성을 들었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미스 배너가 말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미스 브랙록?」 「글쎄요, 너무 아프고 또 놀라기도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는 그 사람은 발에 무언가 채여 넘어진 것 같았어요. 그때 세 번째 총소 리가 울렸고 회중전등이 꺼졌지요. 다들 소리지르고 불러 대고 소동이 벌 어졌지요.」 「당신은 어디에 서 있었죠, 미스 블랙록?」 「그녀는 탁자 뒤에서 제비꽃 꽃병을 들고 있었어요.」 도라 배너가 숨가쁘게 소리쳤다. 미스 블랙록은 입구 옆의 작은 테이블 쪽으로 갔다. 「나는 여기 있었어요. 꽃병이 아니라 담배상자를 들고 있었어요.」 클래독 경감은 그녀 뒤쪽의 벽을 조사했다. 두 개의 총알 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총알은 이미 빼내어져 조사하기 위해 보내졌다. 「정말 아슬아슬했군요, 미스 블랙록.」 「레티를 향해 쏜 거예요. 나는 봤어요. 회중전등으로 한사람씩 비추다가 발견하고 곧바로 총을 쏜 거예요. 그는 레티를 죽일 계획이었어요, 분명 히!」 「도라, 너는 뭐든지 차근차근 생각하지 못해.」 「그는 레티 너를 향해 쐈어. 그는 너를 쏘려다가 실패하자 자살한 거야, 틀림없어!」 도라는 고집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나는 그가 자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절대로 자살할 인물이 아니예 요.」 「권총을 쏠 때까지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죠, 미스 블랙록?」 「네. 당연히 게임이라고 생각했죠.」 미스 배너가 기억을 끌어내듯 얘기했다. 「처음에 패트릭이 한 짓일 거라고 했잖아.」 「패트릭?」 경감은 번쩍 눈을 빛냈다. 「패트릭 시먼즈. 내 친척이죠. 처음 신문에서 그 광고를 보고 그 애가 장 난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애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더군요.」 미스 배너가 또 끼어들었다. 「그런데 너는 걱정했잖니, 레티? 안 그런 척 했지만 걱정하고 있었어. 그 것은 살인을 예고한 것이었어. 바로 레티, 너를 죽이려고 했던거야. 만일 그가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레티는 죽었을 거야. 그럼 우린 어 떻게 되었을까?」 도라 배너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 다. 블랙록은 도라 배너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괜찮아, 도라. 너무 흥분하지 마. 몸에 안 좋아. 이제 다 끝났잖아. 그리고 제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나는 네 도움으로 집안을 꾸려가고 있잖니? 오늘 세탁소에서 오는 날이지?」 그러자 도라 배너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레티, 일깨워 줘서 고마워. 그 사람들이 잃어버린 베갯잇을 찾아다줄는지 모르겠군. 어딘가 적어 놓았을 텐데. 곧 살피고 올게.」 「그리고 그 제비꽃도 치워 줘. 시든 꽃처럼 보기싫은 것도 없어.」 「불쌍해라. 어제 싱싱한 것을 꺾어다 꽂았는데 너무 일찍 시들어 버렸네. 내가 깜빡 잊고 물을 붓지 않은 모양이야. 나는 늘 잊어버린다니까. 얼른 세탁물이나 살펴보러 가야지. 얼른 다녀올게.」 그녀는 다시금 밝은 얼굴이 되어 총총히 사라졌다. 「저 친구는 몸이 약해요. 그리고 절대로 흥분은 나빠요. 그밖에 또 알고 싶은게 있나요?」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몇이죠? 그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나와 도라 배너, 그리고 두 명의 친척이 있어요. 패트릭과 줄리어 시먼즈 남매죠. 나의 육촌 동생이죠.」 「육촌 동생이라고요? 조카가 아니었던가요?」 「레티 아주머니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육촌 동생들이지요. 그 애들 엄마와 내가 오촌이니까.」 「그들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습니까?」 「아니예요. 두 달밖에 안 됐죠. 전쟁 전에 그들은 남부 프랑스에서 살았어 요. 패트릭은 군대에 있었고 줄리어는 관청에서 근무했다고 들었어요. 전 쟁이 끝나자 그 애들 엄마가 편지를 보냈더군요. 두 아이를 내 집에 묵게 해달라고요. 줄리어는 밀체스터 종합병원에서 약제사로 있고 패트릭은 밀 체스터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있죠. 아시겠지만 밀체스터는 여기에서 버스로 50분밖에 안 걸리고 나도 그들이 우리 집에 있는 게 좋아요. 사실 이 집은 너무 큰 편이고 그들은 하숙비조로 약간의 돈을 내고 있는데, 아 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건 무척 즐겁답니다.」 「그리고 헤임즈 부인이라는 분도 함께 지내신다죠?」 「네, 그녀는 루커스 부인 소유의 데이어스 홀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하고 있어요. 그 집에는 늙은 정원사 부부가 살기 때문에 루커스 부인이 그녀 를 우리집에 묵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주 좋은 여자인데,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죽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8살 난 아들이 하나 있어요. 주말 이면 그 아이와 부인이 여기에 오곤 한답니다.」 「집안 일은 누가 합니까?」 「마을에서 허긴스 부인이 일주일에 닷새를 아침에만 거들러 오죠. 그리고 외국 피난민 한 사람이 있는데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여자인데 그냥 미치라고 부르죠. 그녀는 부엌일을 해주는데 일종의 피해망상증이 있는 여자라서 보시면 다루기 힘들 여자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클래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레그 경관이 일러 준 조서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도라 배너를 <고양 이>, 레티를 <갈대>라고, 그리고 미치를 <거짓말장이>라고 했던 것이다. 미스 블랙록이 그의 생각을 알아챈 듯 말했다. 「미치에 대해 거짓말쟁이라고 너무 편견을 갖지 마세요. 어느 거짓말쟁이 도 다 그렇듯이 그녀가 하는 말 뒤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끔 찍하게 학대받았던 과거를 의식하고 신문에 실린 끔찍한 사건들이 실제 로 자신과 가족들에게 있었던 일로 생각하고 꾸며 대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 자신 박해를 받았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 살해당한 것만은 사실이에 요. 이런 피난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녀는 심한 박해를 받았을수록 우 리의 동정과 관심이 크리라고 믿는지 더욱 과장하고 꾸며서 얘기하곤 해 요. 사실 미치는 정신 이상자예요. 우리는 그녀 때문에 종종 불쾌하고 화 가 날 때가 있죠. 의심이 많고 우울한데다 항상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생 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럴수록 나는 가엾은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요리를 곧잘 만들곤 한답니다.」 클래독은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되도록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줄리 어 시먼즈 양입니까?」 「네, 만나보고 싶으세요? 패트릭을 외출했고 필리퍼 헤임즈는 데이어스 홀 에서 일하고 있고요.」 「감사합니다, 미스 블랙록. 괜찮으시다면 지금 곧 시먼즈 양을 만나고 싶 습니다.」 ◎ 6장. 줄리어, 미치, 패트릭 ◎ (1) 줄리어는 방으로 들어와 조금 전까지 미스 블랙록이 앉았던 자리에 태연자 약한 태도로 앉았다. 클래독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 녀는 빤히 경감을 쳐다보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이 그 방을 나갔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어제저녁 얘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시먼즈 양?」 그녀는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제저녁이요? 우리는 푹 잠이 들었어요. 그런 것을 반작용이라고 하나 요?」 「아니, 나는 어제 저녁 6시 30분 이후를 말합니다.」 「아, 네, 따분한 손님들이 많이 왔었어요…….」 「따분한 손님들이라뇨?」 그녀는 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질문하는 건 내 쪽입니다, 시먼즈 양.」 클래독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난 항상 지나치게 묻곤 하죠. 경감님은…… 아니예요, 말씀드리 죠. 손님이라곤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 스웨트넘 부인과 그의 아들, 그 리 고 하먼 부인 뿐이었어요. 말씀드린 순서대로 도착했지요. 그들이 한 말 이 알고 싶다면 말씀드리죠. 그들은 똑같은 말을 했어요. 『벌써 스팀을 넣으셨군요, 국화 꽃이 사랑스럽군요』라고 말하더군요.」 클래독은 입술을 깨물었다. 「흉내를 잘 내시는군요.」 「하지만 허먼 부인은 다른 말을 했어요. 그녀는 모자를 금방이라도 떨어뜨 릴 것처럼 쓰고 구두끈도 묶지 않은 채 들어와서는 살인 게임을 언제 시 작할 거냐고 다짜고짜 물었어요. 모두들 당황했지요. 그들은 지나다가 우 연히 들른 체 했거든요. 레티 아주머니가 무뚝뚝하게 『곧 시작되겠지 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때 시계가 울렸고 갑자기 불이 꺼지고 문이 거칠 게 열리더니 복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 『손들어!』라고 한 것 같았어요. 마치 3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니까요. 정말 우스운 노릇이었지요. 그때 레티 아주머니를 향해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갑자기 상황이 긴박해 진 거예요.」 「그때 사람들은 어디 계셨습니까?」 「불이 꺼졌을 때 말인가요? 글세 이 부근에 흩어져 있었지요. 허먼 부인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핀치―핀칠리피 말이에요―는 난로 앞에 남자 같은 자세로 서 있었어요.」 「당신은 어디쯤에 있었나요?」 「창가에요. 레티 아주머니는 담배를 가지러 가셨어요.」 「입구 쪽의 탁자에 있었겠군요?」 「그래요. 그때 불이 나갔고 바로 그 3류 영화가 시작된 셈이죠.」 「그는 회중전등을 갖고 있었다는데 그걸로 어떻게 하던가요?」 「우릴 비추었어요. 불빛이 굉장히 세어서 눈이 부셨어요.」 「자, 이번엔 신중히 대답해 주십시오, 시먼즈 양. 그가 불빛을 어디에 고정 시키던가요, 아니면 방안을 비추던가요?」 줄리어는 곰곰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전의 따분해 하는 표정은 이제 사라졌 다. 「방안을 천천히 비췄어요. 댄스 홀에서 화려한 불빛처럼 말이에요. 내 눈 을 비추고 계속해서 방안을 두루 살폈어요. 그때 총성이 울렸어요. 두 차 례나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불빛을 홱 돌렸고―미치가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 같은 비명 을 지르기 시작했어요. 회중전등이 떨어져 깨지면서 또 한차례 총성이 울 렸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는데 삐꺽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통에 우리 는 굉장히 섬뜩했어요. 주위가 캄캄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배너 아주머니가 금방 숨넘어가는 듯이 비명을 질러댔어요. 그때 미치가 홀을 가로질러 나갔지요.」 「그가 자살을 한 건지, 아니면 발이 걸려 오발한 건지, 어떻게 생각합니 까?」 「뭐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게 다 연극 같으니까요. 사실 그땐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레티 아주머니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는 아니라 는 걸 알았지요. 아무리 연극을 실감나게 한다 해도 직접 머리쪽을 쏠 만 큼 자신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는 자신이 쏘려는 사람을 똑똑히 보았을까요? 그가 미스 블랙록의 모습을 회중전등으로 뚜렷하게 비추던가 말입니다.」 「모르겠어요. 난 아주머니 쪽을 보고 있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 남자를 보 고 있었어요.」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미스 블랙록을, 일부러 미스 블랙록을 향해 쏘았느냐 하는 겁니다. 특히 아주머니를 노리고 말입니다.」 그 말에 줄리어는 좀 놀라는 듯했다. 「레티 아주머니를 노렸다고요? 그건 아닐 거예요. 레티 아주머니를 쏠 계 획이었다면 더 적당한 기회가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친구들과 이웃을 불 러 모아놓고 했을 리가 없잖아요. 차라리 아일랜드식 울타리 뒤에서 아주 머니를 쏘았다면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크죠.」 클래독은 줄리어의 말이 배너가 주장하듯 레티샤 블랙록의 살해설에 대해 정반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시먼즈 양. 지금부터 미치를 만났으면 합니다.」 줄리어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녀의 손톱을 조심하세요. 다루기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요!」 (2) 플레쳐와 함께 클래독은 부엌에서 미치를 찾아냈다. 그녀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경계의 빛을 띠며 쳐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은 눈 위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고 얼굴은 우울한 표정 을 짓고 있엇다. 붉은 스웨터와 녹색 스커트는 창백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 다. 「왜 부엌까지 오신 거죠? 당신은 경관이죠? 어딜 가나 박해뿐이군요. 이젠 몸에 배어 버렸다구요. 영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더니 하나도 다를 게 없군요. 나를 고문하려는 거죠? 무슨 말인가 알아내려고요. 하지만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거예요. 그럼 손톱을 뽑고 성냥불로 지지려는 거겠죠. 하지만 아무 말도 안할 거예요. 그러면 포로 수용소로 보내겠죠. 그래도 저는 겁나지 않아요.」 클래독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보다 효과적인 접근 방법을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모자와 외투를 입어요.」 미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모자와 외투를 입고 함께 가잔 말이오. 여긴 손톱 뽑는 기구도 없소. 그 걸 본서에 두고 왔지. 플레쳐, 수갑을 가져 왔지?」 플레쳐는 얼른 알아채고 대답했다. 「네!」 미치는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난 싫어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요. 원한다면 변호사를 불러도 좋 소.」 「변호사라구요? 싫어요. 변호사따윈 필요없어요!」 그녀는 밀 방망이를 내려놓고 손에 묻은 가루를 옷에다 문지른 뒤 퉁명스 럽게 말했다. 「뭘 알고 싶은 거죠?」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말해 주면 됩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소」 「난 이 집을 나가려고 했어요.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요? 신문에서 살인에 대한 광고가 났을 때 그만 두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를 보내주지 않았 어요. 그녀는 조금도 동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냥 있으라는 거예 요.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았어요. 제가 살해당하리라 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살해되지 않았잖소?」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요.」 「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 봐요.」 「저는 두려웠어요. 정말 불안했다구요. 저녁 내내 안절부절 못했지요. 그래 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홀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 같아 살펴보았더니 헤임즈 부인이 들어오는 기척이었어요. 현관을 더 럽히지 않으려고 옆문으로 들어왔다나요. 그녀는 조심성도 많지 뭐예요. 헤임즈 부인은 나찌와 같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의 그녀는 늘 저를 업신 여기고, 하찮은 여자로 취급한답니다.」 「헤임즈 부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아요.」 「그녀는 뭐가 잘났다는 건가요? 나처럼 값비싼 대학교육을 받았나요, 아니 면 학사 학위라도 받았겠어요? 그녀는 단지 날품팔이 일꾼에 불과해요. 잔디를 깎아주고 토요일마다 주급을 받을 뿐이지요. 그런데 누가 그녀를 숙녀라고 불러주겠어요?」 「헤임즈 부인에 대해선 아무래도 좋다지 않소, 계속해 봐요.」 「나는 세리주와 잔, 그리고 맛있게 구워낸 파이를 거실로 가져갔어요. 그 때 현관의 벨이 울려 문을 열었지요. 계속해서 손님이 와서 여러번 문을 열었지요. 좀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식기실로 돌아가 은그릇을 닦기 시작했어요.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 같아서 날카 로운 식칼을 옆에 놔두었지요.」 「좋은 생각이었군요.」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식당을 지나―또 다른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뛰어갔어요. 가만히 귀를 기울였을 때 또 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밖에서 잠겨 있었어요. 그래서 덫에 걸린 쥐처럼 되었 던 거예요. 비명을 지르고 문을 세게 두드렸죠. 그러다가 나중에 문을 열 어 줘서 겨우 나왔지요. 나는 많은 초를 가져왔어요. 불을 밝히자 피가 보였어요. 피가 말이에요! 나는 숱하게 피를 봤었지요. 제 남동생이 눈앞 에서 살해되는 걸 보았거든요―거리에서도 피를 보았어요―총을 맞고 쓰 러진 시체를 말이에요―난…….」 클래독 경감이 말했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미치가 두려운 억양으로 물었다. 「이제 절 체포해서 감옥에 넣을 건가요?」 「오늘은 아닙니다.」 클래독 경감은 얼른 대답했다. (3) 클래독가 플레쳐가 홀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나가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크 고 잘생긴 젊은이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그들은 부딪칠 뻔했다. 젊은이가 소리쳤다. 「경관이시군요?」 「패트릭 시먼즈 씨?」 「네. 경감님이시죠? 이쪽은 형사부장님이시고.」 「그렇습니다, 시먼즈 씨. 잠깐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맹세코 난 결백합니다.」 「시먼즈 씨, 농담은 그만 하시죠. 아직 만나볼 사람이 많습니다. 이 방을 좀 봐도 될까요?」 「말하자면 서재라는 곳이죠. 하지만 아무도 공부하지 않죠.」 「학생이라고 들었는데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수학 공부가 안 되서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클래독은 사무적으로 그의 이름, 나이, 군대 경력 등을 물었다. 「시먼즈 씨, 어젯밤 사건에 대해 말해 주시겠소?」 「우린 살찐 송아지를 잡았지요. 미치는 파이를 만들고 레티 아주머니는 세 리주를 땄고…….」 클래독이 말을 막았다. 「네. 반 병쯤 들어 있었지요.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는 그걸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때 미스 블랙록께서 긴장하고 계시던가요?」 「아뇨,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척 침착한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배너 아주머니가 하루 종일 옆에서 끔찍한 얘기만 했을 거예요.」 「미스 배너는 초조해 했었군요.」 「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던 걸요.」 「그 광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겠군요.」 「네. 그 광고 때문에 몹시 무서워했어요.」 「미스 블랙록 말에 의하면 그 광고를 당신이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그 이유는 뭘까요?」 「저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의심을 받곤 한답니다.」 「정말 당신의 장난이 아니란 말입니까, 시먼즈 씨?」 「제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전에 루디 셔트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전혀.」 「비록 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광고는 흔히 하는 장난이겠지 요?」 「누가 그러죠? 아마 배너 아주머니에게 장난을 쳤고, 그리고 미치에게 나 찌의 비밀 경찰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어젯밤 일을 설명해 주시겠소?」 「전 세리주를 가지러 거실로 갔었는데 바로 그때 불이 나갔습니다. 돌아와 보니 어떤 남자가 『손들어!』하고 소리쳤어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제가 녀석을 한번 덮쳐 볼까 생각하는 순간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회중전등도 꺼졌습니다. 다시 컴컴해졌지요. 이스터브룩 대령의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불을 켜!』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 라이터가 켜지지 않지 뭐예요.」 「그가 미스 블랙록을 노렸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재미있게 하려고 쏜 건데 그만 너무 상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자살했단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죠. 소심하고 좀도둑 같았다구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분명하죠?」 「물론입니다, 전혀.」 「고맙습니다, 시먼즈 씨. 어젯밤 이곳에 모였던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 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필리퍼―헤임즈 부인 말입니다―는 데이어스 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집은 요 맞은편에 있어요. 그 다음엔 스웨트넘 부인 댁이 가장 가까울 겁 니다. 그 부근에 가셔서 물어보시면 쉽게 찾으실 겁니다.」 ◎ 7장. 사람들 ◎ (1) 데이어스 홀은 전쟁 동안 황폐해진 듯했다. 아스파라거스 밭이었던 곳에는 강아지풀이 무성했고, 간간이 부드러운 아스파라거스 잎이 겨울 흔적을 남 기고 있을 뿐이었다. 곳곳에 잡초만이 눈에 띄었다. 한 노인이 괭이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헤임즈 부인을 찾아오셨소? 글세 나도 그녀가 어디에 가있는지 모르오. 언제나 자기 멋대로 하니까. 도대체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니까, 요즘 젊은 여자들은! 바지를 입고 트랙터를 굴리면 뭐든지 다 아는 걸로 생각한다니까. 그녀가 여기서 하는 일은 정원 가꾸는 일이지. 그것 은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게 못되지요. 정원 가꾸기, 그 일이 그 여 자의 일이랍니다.」 클래독이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노인은 그의 말을 잘못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 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시오? 장정 세 명과 어린 애 한 명은 있어야 가꿀 수 있소. 그런데 이곳엔 사람이 부족해요. 어떤 때는 밤 8시 까지 일한 적도 있지, 글세 8시까지 말이오.」 「그렇게 늦게까지 하면 어떻게 일을 하지요? 등불이라도 켜놓고 하시나 요?」 「요즘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 한 여름에는 저녁 늦게까지 한다 이 말이 오.」 「아, 네. 제가 헤임즈 부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노인은 이 말에 흥미를 나타내는 듯했다. 「왜 그녀를 찾는다는 거요? 경찰이오? 혹시 리틀 파독스에서의 일 때문이 오? 복면을 쓴 괴한이 침입해서 그곳 사람들을 위협했다니, 이런 일은 전쟁 전엔 없었지요. 군대의 이탈자들일 게요. 그들이 마을을 떠도는 거 겠지. 왜 군대에서 그들을 잡아가지 않는지 모르겠다니까.」 클래독이 말을 받았다. 「글쎄요. 이번 일로 마을이 술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네드 버커의 말에 의하면 너무 영화 를 많이 본 때문이라더군요. 톰 라일리는 외국인을 너무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라고 하구요. 그는 미스 블랙록의 그 고약한 외국인 하녀가 너무 설친다고 하더군요. 그 여잔 공산주의자든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여자라 고 말이오. 그리고 술집에 있는 마린은 미스 블랙록의 집에 틀림없이 값 진 물건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사실 나는 미스 블랙록이 목에 걸고 있는 진주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소박한 여자라고 생각해왔소. 마 린은 그 진주가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벨러미 영감의 딸 플로리는 말도 안 된다며 액세서리라고 부르더군. 상류 계층에서는 로마의 진주라고도 했지. 내 마누라는 어느 귀족 부인의 하녀였는데 그걸 파리의 다이아몬 드라고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든 그냥 유리알이지요! 젊은 시 먼즈 양도 금빛 덩굴잎과 강아지 모양의 액세서리를 달고 다니더군요. 요즘은 진짜 금 같은 건 볼 수도 없다니까. 심지어 결혼반지도 도금한 것으로 하잖소. 그런 건 천박하단 말이야.」 노인은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짐 허긴스도 그러는데 미스 블랙록은 집에 많은 돈을 두지 않는다는군 요. 그의 부인이 리틀 파독스에서 일을 해 주고 있으니 잘 알지도 모르 지요.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라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아낸답니 다.」 「허긴스 부인이 뭐라던가요?」 「미치가 의심스럽다는 거요. 그녀는 성격이 고약하고, 언젠가는 허긴스 부 인을 대놓고 나품팔이 여편네라고 했다나요.」 클래독은 선 채로, 노인의 말 하나하나를 정리하여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의 말은 치핑 클렉혼 사람들의 개성을 나타내 주었으나 사건에 직접적인 실마리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그가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놓자 노인은 그 뒤에 대고 말을 던졌다. 「사과밭에 가면 헤임즈 부인이 거기 있소. 사과 따기엔 나보다 젊은 사람 이 더 나으니까.」 클래독은 사과밭에서 필리퍼 헤임즈를 만났다. 맨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 은 나무를 타고 가볍게 내려오는 그녀의 쭉 뻗은 두 다리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뭇가지에 걸려 흐트러진 금발을 날리며 필리퍼는 놀 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클래독은 그녀가 로잘린느 역에 적합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클래독 경 감은 셰익스피어를 무척 좋아하여 고아원 위문때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 하여 우울한 잭 역을 훌륭히 해낸 적이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생각을 전환시키게 되었다. 필리퍼 헤임즈는 로잘린느 역을 맡기에는 너무 뻣뻣했다. 그녀의 분위기는 영국적이었지만 16세기 영국인은 아니었다. 냉정하고 품위있는 20세기 영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헤임즈 부인? 놀라셨다면 용서하십오. 미들셔 경찰서의 클 래독 경감입니다.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어젯밤 사건에 대해선가요?」 「그렇습니다.」 「오래 걸리나요? 그렇다면…….」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래독은 나무 그 루터기 쪽을 가리켰다. 「편안히 들으십시오. 너무 시간을 뺏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지요. 어젯밤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간 시간이 몇 시쯤이었습니까?」 「5시 30분경이었어요. 온실에 물을 주느라 20분쯤 더 있었죠.」 「어느 문으로 들어갔습니까?」 「옆문이에요. 오리 우리와 닭장을 지나는 오솔길로 가면 더 가깝지요. 현 관을 더럽히지도 않고요. 가끔 신발에 흙이 묻어 있을 때가 많거든요.」 「언제나 그 문을 사용합니까?」 「네.」 「그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았나요?」 「아뇨. 여름이면 활짝 열어두고, 요즘에도 닫아두긴 해도 잠그지는 않는답 니다. 우린 대개 그 문으로 드나들지요. 어제도 제가 들어간 뒤 문을 잠 갔지요.」 「늘 그럽니까?」 「지난 주부터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요즘은 6시면 어둑어둑해지니까요. 미 스 블랙록이 직접 오리와 닭장을 단속하러 나오기도 해요. 그땐 대개 부 엌문으로 나가나 봐요.」 「어제도 옆문으로 들어간 다음 분명히 문을 잠갔습니까?」 「네, 틀림없어요.」 「헤임즈 부인.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뭘 하셨죠?」 「흙이 묻은 옷과 신발을 털고 2층으로 올라가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 었지요.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곧 파티가 시작되었어요. 그때까지 저는 그 광고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주실까요?」 「갑자기 불이 꺼졌어요.」 「그때 어디에 계셨죠?」 「벽난로 앞에요. 라이터를 그 위에 놓아둔 것 같아서요. 전기가 나가자 모 두들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어요. 갑자기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회중전 등을 비추면서 손을 들라고 위협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손을 들었습니까?」 「아뇨. 들지 않았어요. 장난인 줄 알았고 또 피곤했기 때문이죠.」 「부인은 그런 것이 시시했던 모양이군요.」 「네, 사실은. 그런데 총소리가 났어요. 귀가 멍멍하고 몹시 놀랐어요. 전등 이 한바퀴 방안을 비추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회중전등이 꺼졌 어요. 그러자 미치가 비명을 질러댔어요. 마치 돼지를 잡는 소리를요.」 「회중전등에 눈이 부셨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꽤 강한 빛이긴 했는데, 회중전등이 잠시 미스 배너를 비쳤을 때 그녀는 새하얀 도깨비 같았어요. 핏기 없는 얼굴에 툭 튀어나온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 상상이 가시겠죠?」 「그 남자가 회중전등을 휘두르던가요?」 「네. 온 방안을 둘러 비추었어요.」 「특별히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까?」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지요?」 필리퍼 헤임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온통 난리법석이 되었지요. 에드먼드 스웨트넘과 패트릭 시먼즈가 라이 터를 켜고 홀로 들어가자 우리가 뒤따랐지요. 누군가 식당문을 열었는 데―그곳은 불이 꺼지지 않았더군요―에드먼드 스웨트넘이 뺨을 때리자 그녀는 그제야 겨우 비명을 멈추더군요.」 「죽은 사람을 보셨습니까?」 「네.」 「전에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오.」 「그의 죽음은 사고와 자살, 그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가 전에 리틀 파독스에 찾아왔을 때 보지 못했나요?」 「오전에 왔었다는데 그땐 집에 없었지요.」 「고맙습니다, 헤임즈 부인. 한가지만 더 묻겠는데 부인은 값나가는 보석을 갖고 계십니까? 반지나 팔지 같은 종류 말입니다.」 「약혼 반지와…… 브로치가 있어요.」 「미스 블랙록의 집에 특별히 값진 물건은 없습니까?」 「별로. 근사한 은그릇이 있긴 하지만…… 특별히 값비싼 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헤임즈 부인.」 (3) 클래독은 채소밭을 지나오다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큰 몸집을 콜셋 으로 꽉 죄어 입은 붉그레한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조금은 공격적인 투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루커스 부인이시죠 난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서성거리며 잡담을 거는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직무를 수행하러 오신거라 면…….」 「네, 그렇습니다.」 「어젯밤, 미스 블랙록의 집에서 있었던 그 끔찍한 사건은 어떻게 됐나요? 범죄 조직에 의한 사건인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루커스 부인.」 「요즘은 하도 도둑이 많아서요. 경찰은 뭘하는지 모르겠어요.」 클래독이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필리퍼 헤임즈와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던데요?」 「네. 목격자로서 증언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그러시려면 1시까지 기다렸으면 좋았을걸 그랬어요. 그 시간에 질문을 하면 좀더 차분히 얘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요.」 「본서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요즘은 통 경우 지키는 사람이 없어요. 느지막이 출근해서 30분을 어정 거리다가 11시 휴식인데 10시만 되면 쉬려고 들고 비가 오면 하루 종일 노는 거죠. 잔디를 깎는 일도 제대로 안하고 퇴근은 항상 5분이나 10분 앞당긴다구요.」 「헤임즈 부인은 어제 5시 20분에 퇴근했다던데요?」 「네. 그녀는 무척 열심히 일하는 편이에요. 간혹 밭에서 사라져 버릴 때가 있긴 하지만요. 그녀는 타고난 숙녀에요. 그녀를 보면 전쟁 미망인들에게 무언가 해 주어야 할 의무를 느끼곤 한답니다. 학교가 방학일 때는 그녀 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고 있죠. 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해 주었어요. 요 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캠핑 그 룹이 많아서 훨씬 재미있어할 거라구요. 그런 곳이 있다면 굳이 여름 방 학이 되어도 집에 돌아올 필요가 없으니까요.」 「헤임즈 부인은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겠죠?」 「그녀는 고집센 노새 같아요. 그녀가 거의 매일 테니스 코트의 잔디를 깎 고 손질을 해 주면 좋을 텐데, 이제 애쉬 노인은 허리가 구부러져 제대 로 해내지를 못해요.」 「헤임즈 부인의 급료는 적은 편이겠군요.」 「당연하죠. 그 이상을 줘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루커스 부인.」 (3) 「정말 끔찍했어요. 너무 끔찍한 일이에요. 가제트 사에서도 그 광고를 접 수할 때 좀더 신중했어야 해요. 나는 그 광고를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내가 그랬었잖니, 에드먼드?」 스웨트넘 부인은 흥분하여 말했다. 「불이 나갔을 때 무엇을 하고 계셨죠, 스웨트넘 부인?」 「전에 있던 늙은 하녀가 곧잘 하던 말이 있죠. 『빛이 사라졌을 때 모세 는 어디 있었던가?』대답은 물론 『어둠 속에 있었다』지요. 엊저녁처럼 말이에요.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슴 죄며 있었어요. 그때 문이 열 리고 권총을 든 시커먼 괴한이 들어온 거예요. 눈이 부시도록 회중 전등 을 비추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하고 위협했어요. 정말 그것 은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1분도 안 되어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 예요. 큰 총소리가 울렸어요. 전쟁터 같았다니까요.」 「그때 어디에 서 계셨습니까?」 「글세, 어디에 있었는지…… 내가 누구와 얘기하고 있었지 않니, 에드먼 드?」 「전혀 기억할 수 없어요, 어머니.」 「쌀쌀한 날씨에는 닭들에게 간유를 주라고 미스 핀칠리피와 얘기하고 있 었나? 아니면 허먼 부인과…… 아니야. 그녀는 그때 막 도착했지. 이스터 브룩 대령에게 영국에서 원자력 연구소를 만드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방사선의 유출로 위험하다고 말했었지요.」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경감님? 아마 창가나 벽난로 곁에 있었을 거예요. 시계 가 울렸을 때 그 근처였다는걸 느꼈으니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 심정 말이에요!」 「회중전등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고 했는데 부인의 얼굴에 불빛이 직접 비 추었나요?」 「내 눈을 똑바로 비추는 바람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어요.」 「회중전등을 고정시켜 한곳을 비추던가요, 아니면 방안을 두루 비추던가 요?」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에드먼드, 너는 생각이 나니?」 에드먼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를 살피려는 듯이 천천히 한사람씩 비추었어요.」 「당신은 정확히 어디에 있었지요, 에드먼드씨?」 「그 방 한가운데서 줄리어와 시먼즈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방에 있었습니까? 다른 방에도 사람들이 있었나요?」 「필리퍼와 헤임즈는 벽난로 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세 번째 총알은 사고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계획된 자살이었다고 보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쿵 하고 쓰러졌어요. 그리고는 혼란스러워졌고 그때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미 치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댔고요.」 「식당문을 열고 당신이 미치를 나오게 해 주었다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문이 분명히 밖으로 잠겨 있었나요?」 에드먼드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그냥 분명히 확인해 두려고 그럽니다. 감사합니다, 스웨트넘 씨.」 (4) 이스터브룩 대령 집에서 클래독 경감은 한참 동안 지체해야 했다. 그 사건 의 심리학적 고찰이라는 장황한 대령의 설명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심리학적 접근―이것이야말로 사건을 파악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먼저 범죄자를 알아야지요. 나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쉬운 방법이지요. 그 런 광고를 낸 이유가 뭘까? 심리학적으로 그는 자신을 광고하고 싶었던 겁 니다. 자신에게 시선을 주목시키려고 말입니다. 그는 슈퍼 호텔의 종업원들 로부터 외국인이라고 따돌림 받았겠지요. 여자에게 채였는지도 모르죠. 그래 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을 겁니다. 요즘 영화 속의 우상이 어떤 인물 인지 아십니까? 무법자들이죠. 그는 『나도 한번 무법자가 되어 보자』했겠 지요. 복면을 쓰고 권총을 준비했지만 관중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무대를 준비했죠. 정작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단순한 좀도둑이 아닌 살인자가 된 겁 니다. 아무런 목적도 분별도 없이 쏘아댄 겁니다.」 클래독은 기회를 틈타 정중히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하셨죠, 대령님? 그렇다면 그가 어떤 특정한 인물, 미스 블랙록을 노렸다고 생각하시진 않군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쏘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정 신을 차린거지요. 총알이 누군가를 살짝 스치긴 했지만 그런 건 몰랐을 테 고 그는 자신을 쏜 겁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몹시 당황한 끝에 자신을 쏜거죠.」 이스터브룩 대령은 말을 끊고 헛기침을 하더니 만족스런 목소리로 다시 말 을 이었다. 「사건은 명백해요. 뻔한 이치죠.」 대령 부인이 끼어들었다. 「정말 멋있어요. 당신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계시다니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존경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클래독 경감은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지만 부인처럼 찬탄할 정도는 아니라 고 생각했다. 「총소리가 났을 때 방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내와 함께 중앙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죠. 무슨 꽃이 놓인 테이블이었 지요.」 「일이 일어났을 때 난 당신의 팔을 붙잡았어요. 그렇죠, 아치? 그때 꼭 놀 라 죽는 줄만 알았어요.」 대령은 장난스럽게 이죽거렸다. 「오, 가엾게도…….」 (5) 클래독 경감은 돼지 우리 곁으로 미스 핀칠리피를 찾아갔다. 그녀는 돼지 의 분홍빛 잔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아주 사랑스럽죠? 잘 자라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때쯤이면 좋은 베이컨 감이 되죠. 그런데 왜 나를 보자고 했나요? 이미 어젯밤에 그 일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고 경관에게 말했어요. 모프 부인이 그러던데 메디넘 웰 즈의 큰 호텔의 종업원이라지요? 어째서 그곳에서 강도짓을 하지 않았을 까요? 그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렇긴 하군』이렇게 생각하며 클래독은 질문을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사건이요? 방공대원으로 있을 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는 사건의 연속이 었죠. 총소리가 울렸을 때 말인가요?」 「네.」 「누군가 술 한잔 갖다주기를 기대하면서 벽난로에 기대 서 있었어요.」 「그가 총을 마구 쏜 것 같은가요, 아니면 특정 인물을 겨냥했다고 생각합 니까.」 「미스 블랙록을 말하시는 거죠?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때 심정이 어땠는 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잘 기억이 안나는데요. 불이 꺼지자 회중 전등이 방안을 이리저리 비추었고 그때 총이 발사되었어요. 나는 패트릭 시먼즈가 장난하는 줄로만 알고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럼 패트릭 시먼즈 짓이라고 생각했나요?」 「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인텔리 작가이고, 이스터브 룩 대령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패트릭은 장난이 좀 심한 편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에게 미안한 노릇이에요.」 「당신 친구도 패트릭의 장난인 줄 아셨습니까?」 「마것로이드 말씀이세요? 그애와 직접 얘기해 보세요. 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낼 게 없을 거예요. 과수원에 있는데 불러 드릴까요?」 미스 핀칠리피는 과수원 쪽을 향해 힘차게 불렀다. 「마것로이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지금 갈게.」 「빨리 와. 경찰에서 나오셨어!」 잠시 후에 미스 마것로이드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치맛자락은 흘러내 려왔고, 헤어네트 밖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둥근 얼굴은 미소를 띠었다. 「런던 경시청에서 나오셨나요? 이렇게 찾아오실 줄 알았으면 한발짝도 움 직이지 않았을텐데.」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아직 런던 경시청에는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밀체스더 경찰 서의 클래독 경감입니다.」 「그러세요! 무슨 단서라도 찾으셨나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관심밖이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미스 핀칠리피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건 당시 네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구나, 마것로이드.」 「그러세요? 그렇다면 알리바이를 준비해 두는 건데.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여전히 숨을 헐떡거렸다. 「너는 함께 있지 않았어.」 미스 핀칠리피가 말했다. 「그랬나? 맞아. 난 그때 국화를 보고 있었어요. 그때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런 일이 이전부터 벌어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설마 진짜 권총이리 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둠 속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그 하녀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외국 여자 말이에요. 홀 저쪽 어딘가에서 목이라도 찔린 줄 알았어요. 그 남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 데 목소리가 들렸어요. 『손들어요!』하고 말이에요.」 「『손들어!』했어. 공손한 말투는 아니었다구.」 미스 핀칠리피가 정정해 주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 그것을 재미있어 했어요. 캄캄한 곳에서 어찌나 무섭고 소름끼치던지…… 더 알고 싶은 게 있나요?」 「아닙니다.」 클래독 경감은 곰곰 마것로이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미스 핀칠리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분은 네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거야.」 「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거든.」 「경감님께선 그만 됐데.」 미스 핀칠리피는 흘긋 클래독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필요하시다면 다음엔 목사 댁에 가보세요. 그곳에서는 무슨 단서를 얻을 지도 몰라요. 허먼 부인이 좀 어리숙하다지만 난 그 부인을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뭔가 단서를 제공할 거예요.」 플레쳐와 클래독 경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것로이드가 숨가쁘게 말했 다. 「오, 핀치! 내 태도가 자연스러웠니? 너무 떨렸어!」 미스 핀칠리피는 미소지었다. 「아냐. 썩 잘해냈어.」 (6) 클래독 경감은 즐거운 기분으로 널찍한 방을 둘러보았다. 그 방은 캠벌랜 드의 고향집을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낡은 무명 시트가 덮인 큼직한 의자, 흩어져 있는 꽃이며 책, 그리고 바구 니에는 스파니엘종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 허먼 부인의 당혹한 표정을 대하자 그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녀는 곧 솔직 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할 거예요. 난 눈을 감고 있었거든요. 눈이 부셨어 요. 그리고 총소리가 울려 눈을 더 꼭 감았지요. 저는 좀더 조용한 살인 게임을 기대했거든요. 총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경감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못 보셨습니까? 그래도 들을 수는 있었지 않나요?」 「그래요. 모든 소리를 다 들었지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웅성대는 목소리, 헐떡이는 숨소리도 들었어요. 미치의 비명 소리―가엾게도 미스 배너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울었어요. 서로 밀고 엎치고 했어요. 총소리 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곧 불이 들어왔고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보통때와 마찬가지가 되었죠. 우리는 본디대로 돌아온 거였어요. 어 둠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완전히 변하는 모양이에요, 그렇잖아요?」 「무슨 말뜻인지 알겠습니다, 허먼 부인.」 허먼 부인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쓰러져 있었어요. 조금 교활해 보이는 외국인이었어 요―붉그스름한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쓰러져 있었죠―옆에 권총 이 있었고. 오, 정말 뭐가 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것은 클래독 경감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이 복잡 한 골칫거리인 것이다. ◎ 8장. 미스 마플의 등장 ◎ (1) 클래독 경감은 서장의 책상 위에 타이핑된 심문 보고서를 내놓았다. 서장 은 막 스위스 경찰에게서 보내온 전보문을 읽고 난 후였다. 「전과가 있군. 흠,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네, 그렇습니다.」 「보석 강도…… 흐음, 수표위조…… 굉장한 사기꾼이야.」 「네, 좀도둑정도이죠.」 「좀도둑이 나중에 거물되는 법일세.」 「그럴까요?」 서장은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가, 클래독?」 「그렇습니다.」 「왜지? 사건은 뻔하지 않나. 자네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분명하지.」 서장은 보고서를 끌어당겨 단숨에 읽어나갔다. 「별다르지 않군. 역시 모순과 일치가 있지. 긴장된 순간에 대한 저마다의 얘기는 언제나 들어맞지 않거든.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은 분명하지.」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역시 완전하지 못한 상황이지요. 미심쩍은 데가 있어요.」 「그럼 사건을 살펴보기로 하지. 루디 셔트는 메디넘에서 출발하여 6시에 치핑 클렉혼에 도착했는데 대해서는 안내원과 두 명의 승객이 증인이지. 버스 정류장에서 그는 리틀 파독스로 걸어가 어렵지 않게 그 집으로 들 어갔고―아마 현관문으로 들어간 것 같군. 그런 다음 모인 사람들을 위 협하며 두 발의 총을 쏘았는데 그 한방이 미스 블랙록에게 가벼운 상처 를 낸 모양이군. 그리고 세 벌째 총알로 자신을 쏘았는데, 자살시도냐 오 발이냐 하는 명확한 증거는 없네. 그리고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건 동감일세. 하지만 그 이유야 우리가 골치를 썩여가며 찾아내야 할 해답은 아니지. 검시관들은 자살이나 사고사라고 판결내리 겠지만 어떻게 내려지든 우리의 일은 마찬가지일세. 사건은 우리 손으로 종결지어야 하니까.」 클래독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서장님은 이스터브룩 대령의 심리학에 의지하라는 말씀에 긍정하시나 보 죠?」 라이스델 서장은 미소를 지었다. 「대령은 경험이 풍부하지. 무조건 그 심리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 「내 생각에는 전혀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럼 치핑 클렉혼 사람들이 그런 일을 꾸민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건 가?」 클래독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외국 여자는 제게 얘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어쩌면 제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그 여자와 셔트가 잘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를 집안에 들 여놓고, 일을 저지르도록 도왔을 거란 말이야?」 「그런 비슷한 말이죠. 아마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집에 값진 물건이 있는 듯합니다. 미스 블랙록이나 다른 사람들은 극구 부인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귀중품이 있었다는 셈이죠.」 「추리소설감이군.」 「황당한 얘기라는 걸 인정합니다만, 주목할 사항은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미스 배너가 확신하는 점입니다.」 「자네 말이나 그 미스 배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클래독은 급히 서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습니다, 서장님. 그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죠. 그러나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 했다는 말은 누구의 암시도 받지 않은 그녀의 생각이 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걸 부인했지만 미스 배 너는 누구의 의견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루디 셔트가 왜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 「바로 그게 문젭니다. 그점에 대해선 저도 모릅니다. 미스 불랙록이 거짓 말한 게 아니라면 그녀 자신도 모릅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데, 그래서 사실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클래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을 내게, 클래독. 헨리 경과의 점심에 함께 가세. 메디넘 웰즈의 로 열 슈퍼 호텔의 훌륭한 요리로 말일세…….」 클래독은 뜻밖이라는 듯이 서장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편지를 받았네…….」 그때 헨리 클리더링 경이 들어오자 서장은 말을 멈추었다. 「잘 있었나, 더모트!」 서장은 그를 맞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있네, 헨리.」 「뭔가?」 「어떤 노처녀에게 온 편지일세. 로열 슈퍼 호텔에 묵고 있는데 이번 사건 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이 있다는군.」 헨리 경은 약간은 우쭐대듯이 말을 받았다. 「그 노처녀들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지. 별의별 말을 다 입에 올리지.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건가?」 라이스델은 편지를 보면서 투덜거리듯 얘기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인가 보군. 잉크병에 빠진 거미가 지나간 것 같아. 완 고한 말투군. 귀중한 시간을 뺏지는 않겠지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식 으로 말일세. 이름이 뭐라더라…… 제인…… 그래, 제인 마플이야.」 헨리 경이 소리쳤다. 「정말인가? 그녀는 내가 전에 말했던 기막힌 그 여자일세. 무척 자신만만 한 노처녀지. 그녀는 세인트 메리 미드 집에서 조용히 있지 못하고 메디 넘 웰즈까지 왔군. 한번쯤 더 살인 게임의 예고가 있어도 좋겠는 걸. 미 스 마플을 위해서.」 라이스델이 일축하듯이 말을 잘랐다. 「헨리, 자네가 말하는 거물을 만나보세나. 자, 로열 슈퍼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그 여자를 만나도록 하세. 클래독은 매우 의심스런 표정이군.」 「아닙니다.」 클래독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대부(代父)인 헨리 경이 끼어들지 않아도 좋을 일 에 손을 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미스 제인 마플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클래독이 상상했던 모습과 거의 일치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자상했고 또 나이가 들었다. 사실 할머니라고 할 나이였다. 눈처럼 하얀 머리에 분홍빛 얼굴, 그리고 맑은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가 헨리 경을 보자 몹시 반가와했다. 그 리고 서장과 클래독을 소개받고는 들떠 떠들어댔다. 「헨리 경, 어서 오세요. 무척 오랜만이에요. 정말 그래요. 내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버렸지 뭐예요. 요즘 호텔 숙박료가 어찌나 비싼지 이런 곳에 묵을 형편이 못되는데…… 하지만 레이먼드가―내 조카 말이에요―손을 써주었어요. 기억하시죠?」 「그 사람이야 모르는 이가 없지요.」 「그래요. 그는 작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죠. 최근 작품이 독서 클럽 에서 선택되었다는군요. 그 레이먼드가 글세 내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하 지 뭐예요. 그애 와이프는 화가인데 이름이 꽤 알려져 있죠. 대부분 시들 어가는 꽃이나 창턱에 놓인 이빠진 빗 그림들이지만요. 물론 내가 평할 수는 없지요. 나는 지금도 블레어 레이튼과 앨머 터디머에게는 감복한답 니다. 어머, 내가 너무 수다를 떨었군요. 서장님께서 이렇게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시간을 빼앗아서 죄 송해요.」 클래독 경감은 은근히 불쾌해짐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굉장 히 늙은 고양이군』하고. 라이스델이 입을 열었다. 「지배인실로 들어갑시다. 그곳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스 마플은 뜨개바늘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그들을 따라 지배인실로 들 어갔다. 「자, 미스 마플. 우리에게 얘기를 들려 주실까요?」 뜻밖에도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표 말인데요, 그 사람이 고쳤어요.」 「그 사람이라니요?」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이 말이에요. 강도극을 연출하고 자신을 쏘았다고 알려진 그 사람 있잖아요?」 「그가 수표를 고쳤단 말씀입니까?」 미스 마플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기 갖고 있어요.」 그녀는 백에서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늘 아침 은행에서 인출한 다른 수표들 틈에 섞여 있었어요. 이것 보세 요, 7파운드짜리를 17파운드로 고쳤어요. 7자 앞에 1을 쓰고 세븐(Seven) 뒤에 틴(teen)이라고 교묘히 적어 넣었어요. 내가 봐도 틀림없는 금액이라 고 생각돼요. 잉크도 같아요. 내가 카운터에서 수표에 서명했으니까요. 그 사람이 전에도 자주 이런 짓을 했을 거라고 난 생각해요.」 「그 친구, 이번엔 잘못되었군.」 헨리 경의 말에 미스 마플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 사람이 끔찍한 범죄 조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해요. 그에게는 내가 나쁜 상대였죠. 갓 결혼한 여자라 든가 한창 열애중인 여자들이야 자기가 수없이 서명한 수표를 찬찬히 들 여다보지 않겠지요. 그러나 나처럼 할 일 없는 노인네나 세심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려는 사람을 찾아내고야 말지요. 나는 17파운드 금액은 전혀 끊지를 않아요. 매달 급료와 책값으로 20파운드를 쓰고 내 개인적인 지 출로 늘 7파운드를 쓰지요. 5파운드가 될 때도 있지만 요즘은 물가가 올 라서 7파운드를 쓰죠.」 헨리 경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를 보고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진 않았습니까?」 미스 마플은 미소지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당신 참 짓궂어요, 헨리 경. 실은 생선가게의 프레드를 생각했어요. 그는 항상 물건 값보다 웃돈을 받곤 했어요. 요즘은 생선이 많이 팔려나가니 까 꽤 많은 돈을 남길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코 넘어가기 때문에 그는 항상 10실링씩을 더 받아냈던 거죠. 그는 그것으로 넥타이도 사고, 제시 스프책―포목집 점원이죠―을 데리고 영화구경할 정도로는 충분해 요. 내가 여기에 온 첫주에 내 계산서에 차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에게 지적했더니 공손히 사과했지만 매우 당혹해 하더군요. 나는 그때 그가 『치밀한 눈을 가졌구나』하고 생각했죠. 치밀한 눈빛이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절대로 눈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는 그런 눈이지요.」 클래독은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몇 년 전 그를 법정에까지 서게 했던 악명 높은 사기꾼 짐 켈리를 생각해낸 것이다. 「루디 셔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는 스위스에 서도 전과가 있었습니다.」 라이스델의 말을 받아 미스 마플이 이었다. 「아마 스위스에서의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증명서를 위조하여 이곳으로 온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라이스델이 대답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하는 빨강머리의 웨이트레스와 가깝게 지냈다더군요.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빠져 있지 않았어요. 그는 그녀에게 꽃다발이나 쵸콜렛을 선사했죠. 다른 영국 젊은이들은 그런 걸 하지 않아요. 그녀가 모두 다 말하던가요?」 미스 마플은 갑자기 클래독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클래독은 곰곰히 생각하듯 말했다. 「글쎄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미스 마플이 말을 이었다. 「뭔가 숨기고 다 말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대단히 당황했나봐요. 오 늘 아침에도 청어를 주문했는데 연어를 가져왔고 우유는 아예 빼먹었지 뭐예요. 보통때는 아주 눈치빠른 아가씨였는데. 정말 걱정스러워 보였어 요. 증언, 그런 것들로 머릿속이 온통 꽉 차 있는 것 같았죠. 그러나 내 생각엔…….」 미스 마플의 푸른 눈동자는 클래독 경감의 핸섬한 얼굴을 빅토리아 여왕처 럼 우아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당신이라면 그녀를 설득하여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클래독 경감의 얼굴이 붉어졌고 헨리 경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미스 마플이 말을 이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그 젊은이는 그녀에게 그것이 누군지 얘기했을지 도 몰라요.」 라이스델은 미스 마플을 보며 물었다. 「그것이 누구라뇨, 무슨 말이죠?」 「아,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군요. 그에게 시킨 사람이 누군가 하는 말이에 요.」 「그럼, 누군가 뒤에서 그를 조종했다고 생각합니까, 미스 마플?」 미스 마플은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그래요. 그는 단정한 젊은이였어요. 여기저기서 돈을 빼내 고, 소액의 수표를 위조하고 보석을 슬쩍하지요. 이 모두 하찮은 좀도둑 이지요. 깔끔하게 차려입고 여자와 데이트하는 그런 남자 아니에요? 그 런 남자가 갑자기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해서 누군가를 쏜다. 전에는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럴 만한 인물이 못되죠. 그런 짓은 그 에게 불필요한 것이에요.」 클래독은 갑자기 숨을 멈추었다. 그건 레티샤 블랙록이 한 말이었고 허먼 부인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도 그쪽으로 기울고 미스 마플 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미스 마플,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 같군 요.」 클래독의 목소리는 갑자기 공격적이 되었다. 그녀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죠? 신문에 난 것만 알 뿐이에요. 그것도 일부분 이긴 하지만요. 물론 추측할 수는 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지 요.」 헨리 경이 서장을 향해 말했다. 「조지, 마을 사람들을 심문한 보고서를 미스 마플께 보여 주면 안 될 까?」 「글세, 규칙위반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규칙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지. 미스 마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많습 니다.」 미스 마플은 적이 당황한 듯했다. 「서장님, 헨리 경의 말을 믿지 마세요. 이분은 늘 이렇게 지나치게 세심하 시거든요. 내가 하찮게 추리한 것을 이분은 대단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사실 나에겐 그런 재능은 없어요. 전혀 말이에요.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지능을 빼놓는다면 말이죠. 사람들은―물론 내가 아는 사람들이지요―너 무 깊이 사물을 믿는 경향이 있어요. 반면에 나는 늘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답니다. 결코 좋은 버릇이라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곧잘 나의 판단이 옳다는 게 밝혀진답니다.」 라이스델은 타이핑된 보고서를 미스 마플 앞에 내밀었다. 「이걸 읽어 보십시오.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당신이 의견을 말해 주실 영역입니다. 미스 마플께서도 그들처럼 많은 사람을 알고 계실 테니까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사건도 곧 일단 락지어야 합니다. 부디 그 전에 아마추어의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클래독 도 이 사건에 대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못 내린 것 같습니다. 그도 역시 당신과 같은 말을 하는군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입니다.」 미스 마플이 보고서를 읽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는 눈길을 떼 었다. 「잘 보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 사람들이 한 말―생각들은 모두 틀리군요. 본 것이나―또는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하찮은 것들 뿐이에요. 하지만 한가지만이라 도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걸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요. 마른 풀더미 속에서 바늘찾기나 마찬가지지요.」 클래독은 심한 실망을 느꼈다. 잠시 동안 그는 헨리 경의 이 노부인에 대 한 평가가 옳은지 의심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예리한 데가 있는 법이니까. 예로써, 클래독의 대고모인 에머 부인에겐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코가 실룩거리더라고 뒷날 대고모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런데 헨리 경이 그렇게 칭찬하던 미스 마플은 평범하게 의견을 말할 뿐 이었다. 그는 불쾌한 생각이 들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사건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조금씩 다르다 해도 이들 이 본 것은 한가지입니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위협하는 걸 보 았다는 거지요. 『손들어!』라든가, 『돈을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 리겠다!』라고 소리쳤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쨌든 협박을 당했기 때 문에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를 보았다는 겁니다.」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경감님.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지요.」 클래독은 갑자기 숨을 삼켰다. 그녀의 말이 옳다! 그녀는 날카로운 통찰력 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는 미스 마플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말을 던진 것 인데 그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 시험은 사건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스 마플은 클래독과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즉, 복면을 쓴 사람에게 협박받았다 는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미스 마플은 홍조띤 얼굴로 어린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얘기했다. 「내 판단이 옳다면 바깥 홀에도, 층계참에도 전등은 켜져 있지 않았을 거 예요.」 클래독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문간에 버티고 있던 남자가 강한 회중전등 불빛을 비추었다면 방 안의 사람들은 그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지 않겠어요?」 「그렇죠. 볼 수 없지요. 그것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면을 쓴 남자를 보았다는 것은, 사실은 보지 못했고 나중에 전등이 켜지고 난 뒤에 본 것을 짐작한 거지요. 이 점은 모든 가정에 잘 들어맞죠. 루디 셔트가 <제물>이었다는 가정에도 말이에요.」 라이스델은 흥분하여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볼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미스 마플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제대로 표현했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미국식 어법은 잘 몰라요. 그 리고 미국어는 뜻이 잘 바뀌니까요. 나는 더 쉴해미트의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조카 레이먼드의 말로는 그가 추리소설에 있어서 최고의 작 가라는군요.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물>이라고 말씀 드린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죄를 짓고 누명을 입은 사람을 뜻하는 거예 요. 루디 셔트도 그런 종류의 인물인 것 같군요.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만 탐욕스런 사람은 쉽게 걸려들기 마련이죠.」 라이스델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누군가의 부추김에 의해서 총을 쏘았다는 말인가요? 점점 어려워지 는 걸.」 「그에게는 장난이라고 했겠지요. 물론 보수를 받기로 하고 신문에 광고도 내고 그 집에 찾아가서 살펴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사건이 나던 날 밤에 복면을 쓰고 회중전등을 들이대면서 위협하는 것까지 말이에요.」 「그리고 권총을 쏘는 것도 말입니까?」 「아니예요. 그는 권총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말했는데…….」 라이스델이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만일 그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 해도 사람들은 그걸 볼 수가 없죠. 나는 그가 총을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가 『손들어!』하고 소리친 뒤에 누군가 그의 뒤로 가서 어깨 너머로 총을 쏜 거예요. 그가 놀라자 누군가 그를 쏜 뒤 총을 그의 옆에 떨어뜨려 놓은 거죠.」 세 사람은 미스 마플을 바라보았다. 헨리 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추리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둠 속에서 다가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서장이 물었다. 그러자 미스 마플을 곧 대답했다.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느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그녀에게 물어보는 수밖 에 없지요.」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도라 배너가 적임자라고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얘기해 주고 싶어서 안달하니까. 「그럼 누군가 미스 블랙록의 생명을 노리고 한 짓이란 말씀입니까?」 라이스델이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래요. 한두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요. 그러 나 내가 정말 의심하는 것은 좀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하는 점이에요. 루디 셔트와 이 일을 꾸민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입을 막으려 했 겠지만 결국 비밀이 지켜지게 되었지요. 만일 루디 셔트가 누군가에게 발설했다면 그건 웨이트레스인 마너 해리스일 거예요. 그리고 누가 시킨 일인가 하는 몇 마디의 암시쯤은 남겨 두었을 거예요.」 클래독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곧 미스 해리스를 만나보고 오지요.」 미스 마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클래독 경감님. 그녀도 당신께 다 털어놓는 게 신상에 안전할 테니까요.」 「안전이라구요? 아, 알겠습니다.」 클래독은 방을 나갔다. 라이스델 서장은 약간은 의문스러워했지만 듣기좋게 말했다. 「미스 마플, 상당히 도움 말씀을 주신 것 같군요.」 (3) 「제발 그렇게 캐묻지 마세요. 그 할머니는 사소한 일에도 야단법석을 떠 는 분이라구요. 게다가 내가 공모자라는 거 아니예요?」 마너 해리스는 쉴새 없이 말을 뱉아놓았다. 「경감님께서 내 말을 곧이듣지 않은지 모르지만 루디의 사건은 장난이라 고 내가 말했잖아요.」 클래독은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효과적인 말을 거듭 반복해 말했 다. 「좋아요. 뭐든 말씀드리겠어요. 그 시초는 루디가 저와의 데이트 약속을 어긴 것부터였어요. 우리는 사건이 나던 날 저녁에 영화구경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못 가게 됐다는 거에요. 나는 화가 났지요. 그건 루 디의 제안이었거든요. 사실 외국인과 교제하는 건 싫었어요. 그는 제게 무척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파티에 가게 되었다고, 절 대로 손해보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어떤 파티냐고 물어보았더니 장 난으로 협박할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자기가 낸 신문 광고를 내게 보 여 주었어요. 난 그저 웃어 버렸지요. 그는 영국인들은 어린애 장난이나 한다면서 빈정거렸어요. 그래서 제가 왜 영국인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느 냐고 따졌고 우리는 잠시 말다툼을 했지요. 경감님도 아시겠지만 루디는 그날 저녁 누군가를 쏘고 자신도 쏘아 버렸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난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요. 만일 내가 그 전부터 파티에 관해 알 고 있었다고 지껄이면 나까지 사건에 관련된 걸로 생각할 테니까요. 하 지만 그때 말했을 땐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루디도 그렇게 알고 있 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가 총을 갖고 있었다는 말도 한마디도 비추지 않 았어요.」 클래독은 그녀를 진정시키며 중요한 질문을 했다. 「누가 그 일을 시켰다고 말하던가요?」 그녀의 대답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제 생각엔 부탁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모두 그가 혼자 한 행동 같아요.」 「아무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라든가 <그녀>라는 말이라도 요.」 「아뇨. 소동을 일으키러 간다고만 했어요. 『그들의 놀란 표정을 보면 우 스울 거야』라고만 말했을 뿐이에요.」 클래독은 생각했다. 『녀석은 웃을 시간도 없었구나』하고. (4) 메디넘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이스델이 말했다. 「그건 추리에 지나지 않아. 뒷받침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잖은가. 그 노부 인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진행시키는 게 어떻겠나?」 「글쎄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장님.」 「그건 믿어지지 않아. 어둠 속에서 스위스인 루디 셔트의 뒤에 나타났다 니, 도대체 누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그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 있 단 말인가?」 「옆문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지요. 셔트가 들어온 것처럼 말이지요. 아니면 부엌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부엌에서 들어올 수 있다, 그런 뜻이군.」 「그렇습니다. 가능한 일이죠. 그 여자가 의문스럽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발작적으로 신경질을 내는 게 아무래도 연극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여 자는 루디와 짜고 적당한 시간에 들여보낸 다음 미리 계획했던 대로 그 를 쏘고는 식당으로 달아난 겁니다. 그리고는 은그릇을 들고 비명을 질 러댔던 거지요.」 「하지만 우리가 얻은 사실로…… 음,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지, 에드먼드 스웨트넘의 말로는 문이 밖에서 잠겨 열쇠로 열어 그녀를 나오도록 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방으로 들어가는 다른 문이 있는 건가?」 「네, 뒷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부엌은 층계 아래쪽에 있는데 손 잡이가 3주일 전에 망가졌는데 아직 그걸 수리하지 않았다는군요. 그래 서 그 문은 열지 못합니다. 문밖 홀의 선반 위에 굴대와 손잡이 두 개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능숙한 사람은 문을 부수지 않고도 열 수 있었겠지만요.」 「자세히 그 여자의 신분을 파악해 보는 게 좋겠군. 신분 증명서를 지니고 있는지 조사해 보게. 하지만 너무 추측만으로 흐르는 것 같군.」 클래독은 그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서장님께서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사건을 밝히고야 말겠습니다.」 서장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뭏든 자네를 믿네.」 「아까 제 생각이 옳다면 그 권총은 셔트의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도 그 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고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독일제였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국에는 유럽제 총기가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많이 유럽제 총을 갖고 있고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래. 뭔가 새로이 짐작가는 데라도 있나?」 「먼저 동기를 밝혀내야 합니다. 제 추측대로라면 지난 금요일의 사건은 단순한 장난이나 강도극이 아닌 끔찍한 계획살인입니다. 누군가 블랙록 을 죽이려 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미스 블랙록 자신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터무니없다고 비웃을 걸세.」 「루디 셔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일축했지요. 하지만 다른 사 실이 있습니다, 서장님.」 「그게 뭐지?」 「누군가 또다시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고 시도할지 모른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 추측이 들어맞겠군.」 서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이내 덧붙였다. 「그리고 미스 마플을 신경써 주게.」 「미스 마플을요? 왜 그러시죠?」 「그녀는 요즘 치핑 클렉혼의 목사관에 머물면서 1주일에 두 번씩 메디넘 웰즈로 치료받으러 가는 모양이야. 목사관 부인의 딸이 미스 마플의 옛 친구 딸이라는군. 아무튼 그녀에겐 날카로운 직감이 있지 않나. 그녀는 일상생활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살인의 뒷조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클래독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녀가 치핑 클렉혼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네 혼자 해 보려고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멋진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서이 지요. 제 생각에는 우리들의 추측에 뭔가 있다는 겁니다.」 ◎ 9장. 문에 대하여 ◎ (1) 「또다시 이렇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미스 블랙록.」 「괜찮아요. 법정심리가 일주일 연기되어서 더 많은 증거를 얻으려고 다니 시는군요.」 클래독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 블랙록, 루디 셔트는 몽트루의 알프스 호텔 주인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는 베른의 병원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때 많은 환자들이 보석 들을 도둑맞았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꿔 스키장에서 급사 노릇을 한 적 도 있지요. 그는 레스토랑의 계산서를 이중으로 만들어 그 차액을 챙겼던 것입니다. 그 뒤로 쮜리히 백화점에 근무했는데 그가 근무하는 동안 분실 된 물건이 보통때보다 훨씬 웃돌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소행이라고 봐야 겠지요.」 미스 블랙록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도둑이었군요. 그 사람을 전에 본 적이 없다고 한 것도 맞는 얘기로 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로열 슈퍼에서 당신을 눈여겨 보았다가 전부터 아는 체 했던 거죠. 스위스 경찰의 추적을 받자 위조한 신분 증명서를 가지고 이 곳 로열 슈퍼 호텔에 취직한 거죠.」 미스 블랙록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돈벌이 장소로는 아주 좋은 곳이지요. 그곳에 묵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돈 을 잘 쓰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계산서따윈 들여다보지도 않을 테니까 요.」 「그렇습니다. 셔트에겐 그곳이 안성맞춤의 장소였겠군요.」 미스 블랙록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왜 치핑 클렉혼을 택한거죠? 어째서 돈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로열 슈퍼 호텔을 놔두고 말이에요.」 「이 집엔 아무리 뒤져도 값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은거죠?」 「그래요. 그건 분명하잖아요, 경감님. 이 집엔 램브란트 그림 같은 건 하나 도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 친구인 미스 배너의 말이 옳겠군요. 즉, 그가 당신을 죽이 러 왔다는 것 말입니다.」 「어머나, 레티! 내가 그런 끔찍한 얘길 했다구?」 「말도 안 돼, 배너!」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 고 생각합니다.」 미스 블랙록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얘기를 해 보세요. 그 젊은이가 신문에 광고를 내고 일정한 시간에 사람이 모이도록 한 뒤 소란을 벌이도록 했다는 말씀인가요?」 갑자기 미스 배너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그렇게 예상하진 못했을 거야. 그것은 레티, 너에 대 한 끔찍한 예고였어. 내가 <살인예고>라는 광고를 보았을 때 느꼈던 생 각 그대로야. 그땐 정말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그가 너를 쏘고 도망가 버 렸다면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어?」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광고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았어, 레티.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 었지. 그리고 미치를 보았더니 잔뜩 겁에 질려 있더군.」 클래독이 낮게 소리쳤다. 「아, 미치! 그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입국 허가증과 신분 증명서는 모두 합법적인 거예요.」 「그렇겠죠. 루디 셔트의 신분증도 이상이 없었으니까요.」 클래독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루디 셔트가 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거죠?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는군요, 경감님.」 클래독은 천천히 대답했다. 「셔트를 조종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 생각나는게 없습니 까?」 클래독은 가급적 우회하여 말했지만 미스 마플의 추측이 옳다면 자신의 말 도 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스 블랙록에게는 그런 말도 소용 없었으며 여전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문제는, 도대체 왜 나를 죽이려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미스 블랙록, 당신에게서 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난 몰라요. 대답할 말도 없고요. 나는 원한 가진 사람도 없어요. 이웃과도 좋게 지내왔죠. 남의 약점이나 비밀 같은 건 조금도 몰라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미치가 이 일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리석 은 추측이에요. 배너도 말했지만 그녀는 <가제트>에서 그 광고를 보고 무척 두려워했어요. 그때 정말로 짐을 꾸려 떠나려고 했을 정도니까요.」 「아마 그녀가 교묘히 수를 쓴 건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당신이 분명히 붙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죠.」 「경감님이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얼마든지 이유는 찾을 수 있죠. 하 지만 미치가 나에게 증오심을 품었다면 음식에 독을 넣을 수도 있을 거예 요. 그런데 왜 일부러 일을 번거롭게 했겠어요. 경찰은 외국인들에게 배타 적이라고 들었어요.미치는 거짓말쟁이일지는 몰라도 냉혹한 여자는 아니 에요. 만일 정 미심쩍다면 다시 한번 그녀를 추궁해 보세요. 그녀가 졸도 하거나 방문을 걸어잠근 채 비명만 질러댄다면 오늘 저녁 준비는 못된다 는 걸 알아두세요. 오후에 허먼 부인이 어떤 노부인을 모시고 와서 차를 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미치에게 케잌을 만들라고 했는데―분명 당신은 또 그녀를 흥분시키고 말 거예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셔서 다른 사람에게 로 의심을 돌려주세요.」 (2) 클래독은 부엌으로 갔다. 그는 일전과 똑같은 질문을 했고 미치는 역시 지 난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다. 그녀는 4시에 현관문을 잠갔다. 보통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 날 오후에는 그 끔찍한 광고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옆문은 잠가도 소용이 없다. 미스 블랙록이나 미스 배너가 오리를 가두기 위해 드나들고 헤임즈 부인도 그 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헤임즈 부인은 5시 30분에 들어와 자신이 문을 잠갔다고 하던데요?」 「당신은 그녀를 믿는군요. 정말이지 경감님은 그녀를 믿고 계시군요.」 「왜,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 생각이 무슨 참고가 되겠어요?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는데…….」 「그럼, 믿을 기회를 주겠소? 그러니까 헤임즈 부인이 저 문을 잠그지 않았 다고 생각하는군요?」 「그 여자는 잠그는 척했을 뿐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클래독이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혼자 일을 꾸민 게 아니예요. 그 남자는 들어올 문과 그 문이 열려져 있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던 거죠. 아주 쉽게 열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까지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제 말 같은 건 쓸데없는 얘기지요. 지금 경감님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리 고 거짓말쟁이 외국 여자라고 생각하실 테죠? 그녀는 영국 숙녀니까 무척 정직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니까 저 같은 여자는 믿지 않을 거예요. 하 지만 저는 경감님께 말해 줄 수 있어요!」 미치는 난로 위에 스튜 남비를 소리나게 얹었다. 클래독은 악의에 찬 이 여 자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다. 「우리의 얘기는 모두 기록될 거요.」 「난 아무 말도 안했어요. 왜 내가 이야기해야 돼죠? 당신들은 불쌍한 망명 자들을 학대하고 경멸하잖아요. 만일 내가 일주일 전에 그 젊은 남자가 미스 블랙록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헤임즈 부인과 바깥 섬머 하우스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경감님께 얘기한다면 내가 꾸며서 얘 기하는 거라고 하실 테죠?」 클래독은 분명히 꾸며서 한 얘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바깥 섬머 하우스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당신한테 들릴 리가 없잖소.」 그러자 미치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난 쐐기풀을 뜯으러 나갔었지요. 그건 아주 좋은 찬거리가 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모르죠. 난 쐐기풀로 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리답 니다. 그때, 그들의 얘기소리를 들었어요. 그가 『난 어디에 숨지요?』하 고 말하자 그녀가 『내가 가르쳐 줄께요』하더군요. 그리고 6시 15분이라 고 말했어요. 난 생각했어요. 숙녀인 체하는 여자가 일을 마치자마자 남자 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구요. 미스 블랙록은 그런 짓을 싫어하니까 당장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숨어 그 장면을 보았지요. 미스 블랙록에 게 그대로 일러주려고요. 그런데 이제 생각하니 제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 요. 그들이 꾸민 것은 사랑의 행각이 아니라 강도와 살인―바로 그 계획 이었어요. 하지만 경감님은 모두 제가 꾸며댄 얘기라고 생각하시겠죠? 『거짓말장이! 너를 감옥에 처넣겠다!』라고 말이에요.」 클래독은 어처구니없었다. 그녀 말대로 조작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 실일 수도 있다. 그는 신중하게 물었다. 「헤임즈 부인과 얘기하던 남자가 분명 셔트였다고 장담할 수 있소?」 미치는 자신있게 말했다. 「틀림없어요. 그는 차도를 가로질러 섬머 하우스로 들어갔어요. 이젠 그 만―신선한 쐐기풀이 있을까?」 클래독은 미치가 아무 까닭없이 엿들은 데 대해 둘러대느라고 쐐기풀 얘기 를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얘기 말고 더 들은 건 없습니까?」 미치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 배너가―늘 사람을 업신여기는 여자지요―나를 불렀어요. 그래서 그 녀에게 갔지요. 그녀는 정말 사람을 번거롭게 해요. 가보았더니 요리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예요. 미스 배너의 음식 솜씨란 맹물 맛이지요.」 클래독이 차갑게 물었다. 「지난 번엔 왜 이 얘기를 안했죠?」 「그땐 잘 기억나지 않았어요―미처 생각도 못했지요―그런데 뒤에 생각해 보니 바로 그때 그 여자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헤임즈 부인이란 걸 확신하나요?」 「그래요, 확신해요. 절대로요. 그 여잔 도둑이에요. 정원사 일을 해서는 그 처럼 숙녀 행세를 못하죠. 그렇지만 그렇게 친절히 대해 주는 미스 블랙 록의 물건을 훔칠 수 있을까요? 오, 나쁜 여자예요! 아주 나쁜 여자예 요!」 클래독 경감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이 루디 셔트와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면 뭐라고 하겠 소?」 그 말은 기대했던 것보다 효과가 없었다. 미치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흔들 었다. 「제가 루디 셔트와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면 그건 보통 거짓말이 아니예요. 남의 말을 퍼뜨리긴 쉬운 일이에요. 하지만 영국에서는 자기가 퍼뜨린 얘 기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미스 블랙록이 그렇게 일러 주더군요. 정말 그런가요? 난 살인자나 도둑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영국의 경 찰관들은 내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경감님이 이렇게 곁에 붙 어 있으니 제가 어떻게 요리를 할 수 있겠어요? 어서 부엌에서 나가 주세 요. 저는 소스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클래독은 순순히 나왔다. 미치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헤임즈 부인에 대해 한 얘기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아마 미치는 거 짓말쟁이일 것이라고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러나 헤임즈에 대한 이야기만은 뭔가 사실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헤임즈 부 인과 이야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클래독은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조용하고 교양있는 인상을 받았 다. 그로서는 헤임즈가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클래독이 홀을 가로질러 무심코 부서진 손잡이가 달린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마침 미스 배너가 층계를 내려오다가 황급하게 외쳤다. 「아니, 그 문은 열리지 않아요. 다른 문으로 가세요. 너무 혼동되죠? 이 집 에는 문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많군요.」 클래독은 좁은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미스 배너는 친절하게 문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것은 옷장 문이고, 그 다음은 붙박이 문, 다음은 식당 문인데 저 옆쪽에 있지요. 그리고 이쪽에는 방금 경감님께서 나가려던 <열리지 않는 문>, 다음은 거실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도자기 벽장문, 다음이 꽃꽂이 방, 그리고 맨 끝에 옆문이 있지요. 정말 복잡해요. 특히 이 두 개의 문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곧잘 혼동한답니다. 나도 가끔 열곤 하지요. 보 통때는 이 문에 테이블을 붙여 놓았는데 얼마 전 저 벽쪽으로 옮겨 놓았 어요.」 클래독은 문득 자신이 열려고 했던 문짝에 수평으로 나 있는 희미한 자국을 보았다. 테이블이 놓여 있던 흔적이었다. 「테이블을 언제 옮겨 놓았습니까?」 경감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짚이는 게 있었다. 다해스럽게도 도라 배너에게는 질문에 대한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 떤 질문이든지 수다스런 미스 배너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이다. 그녀는 하찮은 것이라도 알려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니까…… 열흘이나 2주일쯤 되었을 거예요.」 「왜 옮겼죠?」 「잘 생각나진 않지만 아마 무슨 꽃 때문인 것 같았어요. 필리퍼가 커다란 꽃병에 가을 꽃들을 잔뜩 꽂아 놓았었죠. 그런데 너무 커서 지나가는 사 람의 머리에 닿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필리퍼 헤임즈가 테이블을 옮기는 게 좋겠다고, 문보다 벽을 배경으로 하는 게 보기 좋을 것 같다고 하는 바람에 옮겼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고, 그리고 는 층계 밑에 놓았지요.」 클래독은 그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열리지 않는 문>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원래는 작은 거실 문이었는데 거실 두 개를 합쳐서 사용하니 문 이 두 개씩 필요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 문은 잠가버린 거예요.」 「잠그다니요? 못을 박았습니까? 아니면 자물쇠로 잠갔다는 겁니까?」 「네, 자물쇠로 잠그고 빗장을 걸어놓았어요.」 클래독은 문 위쪽의 빗장을 보고 그것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빗장은 쉽게 빠졌다. 아주 쉽게……. 「마지막으로 열었던 게 언제쯤입니까?」 「여러 해 전일 거예요. 내가 온 뒤로 한번도 연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홀 서랍 속에 열쇠가 많이 들어 있는데 그 중에 있을 거예요.」 클래독은 그녀를 따라가 서랍을 열고 오래 전에 넣어둔 채로 있는 녹슨 열 쇠 뭉치를 보았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그 중 조금 다른 모양의 열쇠 하나를 집어들고 그 문으로 되돌아갔다. 열쇠는 꼭 들어맞아 쉽게 돌아갔다. 그가 문 을 밀자 소리없이 조용히 열렸다. 미스 배너가 소리쳤다. 「오, 조심하세요. 안쪽의 벽에 물건들을 기대어 두었을지도 몰라요. 그 문 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경감의 얼굴에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이 문은 최근에 열렸었군요, 미스 배너. 열쇠 구멍과 경첩에 기름이 칠해 져 있는 걸요.」 미스 배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클래독은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생각했다―외부에서 X가 들어온 것인가?―아니다, X는 여기 있었다― 이 집안에. X는 그날 밤 거실 안에 있었던 것이다. ◎ 10장. 핍과 에머 ◎ (1) 미스 블랙록은 이번에는 좀더 세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클 래독이 알고 있는 바대로 그의 말 속의 복잡한 면도 잘 알아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사태가 달라지겠군요. 아무도 저 문에 손댈 까닭이 없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경감은 다그치듯 말했다. 「그날 밤 불이 꺼졌을 때 누군가가 이 방에 있다가 저 문으로 나가서 루 디 셔트의 뒤에서 총을 쏜 것입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인가요?」 「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날 밤, 불이 꺼지자 모인 사람들 이 비명을 질러대며 이리저리 부딪쳤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다만 회중전등의 불빛뿐입니다.」 미스 블랙록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우리 이웃들 중의 한 사람이―가운데 누군 가가 몰래 저 문으로 빠져나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건가요? 나를요? 하 지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것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잘 아실 텐데요, 미스 블랙록.」 「모릅니다, 경감님. 맹세코 정말 몰라요.」 「좋습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당신 돌아가신다면 누가 유산을 받게 됩니 까?」 미스 블랙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패트릭과 줄리어입니다. 이 집의 가구와 약간의 연금은 배너에게 돌아가 죠. 사실 남길 것도 별로 없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식 같은 게 조 금 있지만 세금은 많고 이익금은 낮죠. 게다가 갖고 있던 돈을 전부 1년 전에 연금에 넣어버렸어요.」 「달리 수입이 있는 걸로 압니다만, 미스 블랙록? 패트릭과 줄리어가 그것 까지 물려받게 되나요?」 「왜 그런 확신을 하시는 거죠?」 「단지 그애들의 태도로 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 애들을 의심 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나도 살해될 만큼 재산이 많아질 때가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의 말을 얼른 잡아챘다. 「언젠가라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 미스 블랙록?」 「막연히 어느 날이라는 말이에요. 경우에 따라 빠른 기일에…… 나도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잖겠어요?」 「흥미있는 말씀이군요.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아실지 모르지만 나는 20년 동안 랜들 게들러라는 분의 비 서로 일하면서 가깝게 지내왔죠.」 클래독은 흥미를 느꼈다. 랜들 게들러라면 재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대담한 투자와 그를 둘러싼 평판은 그를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 던 것이다. 클래독의 기억으로는 그는 1937년이나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분은 당신보다 앞 세대의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 예요.」 「네, 그분은 백만장자였지요.」 「그래요. 그의 재산은 변동이 있긴 했지만 수백만 달러 이상은 되었지요. 그는 항상 기회를 포착하여 대담한 투기를 하곤 했지요.」 그녀는 추억으로 눈을 빛내며 얘기를 계속했다. 「아뭏든 그는 상당한 부자인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에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에게 재산을 모두 남겼지요. 그리고 아내가 죽 은 뒤에는 내게 남겨지도록 했어요.」 경감의 기억 속에 희미한 낱말들이 떠올랐다. 거액의 유산, 충성스런 비서에게 가다! 일종의 그런 비슷한 기사였다. 미스 블랙록은 눈을 깜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최근 12년 동안은―게들러 부인을 죽일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건 경감님께 아무 도움도 안 되겠죠?」 「이런 걸 여쭤봐서 실례입니다만, 게들러 부인은 남편의 유산 처리 방법 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았습니까?」 미스 블랙록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경감님은 내가 랜들 게들러의 애 인이 아니었느냐고 묻고 싶은거죠? 하지만 아니예요. 랜들은 단 한순간 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는 아내인 벨 을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도 그러했어요. 그분이 유산을 그런 식으로 처 리한 것은 나에 대한 보답이었을 거예요. 그가 젊었을 땐 재정적 안정이 안 되어 파산 직전에 놓인 적이 있었지요. 그때 현금으로 1천 파운드가 필요했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큰 거래였어요. 그런데 밀고나갈 돈이 그 에게는 없었어요. 그때 나는 재산을 털어서 그를 도와 주었지요. 그를 믿 었으니까요. 그런데 대단한 성공이었어요. 1주일도 못되어 그는 큰 부자 가 되었답니다. 그 후로 그분은 나를 동업자로 대해 주었어요. 아, 정말 신나는 시절이었어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병을 앓 고 있어서 난 모든 건 포기하고 그 애를 돌봐야 했어요. 그로부터 몇년 뒤 랜들도 세상을 떠났어요. 그 회사에 있을 때 난 많은 돈을 벌었기 때 문에 그분이 나에게 재산을 남겨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난 무 척 감동했어요. 그런데 벨이 먼저 죽는다면―그녀는 몸이 약해 모두들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죠―내가 그의 전재산을 상속받는다는 걸 알고 굉장히 기뻐했어요. 벨은 아주 좋은 여자였죠. 유산에 대해 함께 기뻐해 줄 정도로요. 그녀는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것 외에 몇 년간 못 만났죠. 난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동생을 데리고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갔었어요. 그 애는 그곳에서 폐병으로 죽고 말았지 요.」 미스 블랙록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1년 전에 영국으로 돌아왔지요.」 「당신은 곧 부자가 될 거라고 하셨는데 언제쯤을 말씀하시는거죠?」 「벨의 상태가 급속히 쇠약해졌다고 담당 간호원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아마 몇 주일 못 살 거라고…….」 그녀는 슬픈 듯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내겐 그 돈도 별의미가 없어요. 요즘처럼 단촐한 생활에는 지금 의 수입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얼마 전까지도 다시 증권에 투자해 볼까 생각했지만 이젠 늙었어요. 이해하시겠어요? 패트릭과 줄리어가 돈이 탐 나서 나를 죽이려 했다면 몇주일만 더 기다리면 되는걸요.」 「알겠습니다, 미스 블랙록. 만일 부인께서 게들러 부인보다 먼저 돌아가시 게 되면 누가 유산을 받게 되죠?」 「글쎄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아마 핍과 에머가 아닐까 요?」 클래독의 멍한 표정을 보고 미스 블랙록은 미소지었다. 「이상한 이름이죠? 만일 내가 벨보다 먼저 죽을 경우 법률상의 자손에게 재산이 돌아가게 되겠죠. 랜들의 유일한 여동생인 소니어에게 갈 거라고 생각해요. 랜들은 누이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녀는 랜들이 반대 하는 부랑자 같은 사람과 결혼했거든요.」 「그 남자는 정말 부랑자였습니까?」 「네, 그랬어요.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나봐요. 그는 그리스인과 루마니아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스탠포디스, 맞 아요. 드미트리 스탠포디스라고 했어요.」 「랜들 게들러는 누이동생이 그와 결혼해 버리자 아예 관계를 끊어 버렸습 니까?」 「아니예요. 소니어는 부모의 유산이 있어 아주 잘 살아요. 랜들은 그녀의 남편이 손댈 수 없게 누이동생의이름으로 재산을 넘겨 주었지요. 하지만 변호사가 벨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경우를 대비하여 또 다른 상속자를 대 라고 했다면 달리 사람이 없을테니 소니어의 자식들에게 물려주게끔 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선기관이나 사회에 내놓을 사람은 아니니까 요.」 「누이동생에게 아이가 있군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핍과 에머에요. 우스운 이름이죠? 소니어는 결혼 한 뒤 벨에게 편지 를 보냈는데, 자기는 무척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며 쌍둥이를 낳았는데 핍과 에머라고 이름지었으니 랜들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뒤 로는 편지 연락은 없었지만 벨은 나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미스 블랙록은 자신의 과거 얘기를 즐거운 듯 얘기했다. 그러나 클래독은 전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만일 당신이 그날 밤 살해되었다면 그 두 사람이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 겠군요. 자신을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틀린 겁니다. 당신 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분명히 두 사람은 있습니다. 그 쌍둥이는 몇살 입니까?」 미스 블랙록은 얼굴을 찌푸리며 기억해 내려고 했다. 「글쎄요……1922년생이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한 스물 대여섯 쯤 되었을 겁니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경감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누군가 당신을 살해할 목적으로 총을 쏘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일 인물이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행동하 십시오, 살인 계획이 실패되면 또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죠. 그것도 눈 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2) 필리퍼 헤임즈는 허리를 펴고 땀이 번들거리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 을 쓸어올렸다. 그녀는 정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웬일이시죠, 경감님?」 그녀는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클래독 역시 더욱 유심히 그녀의 모습 을 살폈다. 꽤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금발에 갸름한 얼굴, 전형적인 영국 여 인이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과 입,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인상을 주었 다. 푸른 눈동자에도 확고함 같은 것이 있어서 클래독은 그녀가 완전한 비밀을 지켜낼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헤임즈 부인, 번번히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점심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리틀 파독스에서 떠나 이곳에서 애기하는 게 편할 듯싶어서요.」 「무슨 일이죠, 경감님?」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흥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의 상상일지 모 르지만 뭔가 경계의 빛이 느껴졌다. 「오늘 아침에 어떤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부인과 관계된 얘기라서요.」 필리퍼 헤임즈는 눈썹을 약간 움직였다. 「당신은 루디 셔트를 전혀 모른다고 하셨죠?」 「네.」 「그가 죽었을 때 처음 보았다고 하셨죠?」 「그래요.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를테면 리틀 파독스의 섬머 하우스에서 그를 만난 적은 없습니까?」 「섬머 하우스요?」 헤임즈 부인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두려움의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헤임즈 부인.」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요?」 「내가 들은 얘긴 이렇습니다. 루디 셔트가 숨을 곳을 묻고 당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며 6시 15분이라고 시간 약속을 했다던데요. 사건이 나던 날 밤 그가 버스에서 내려 그곳에 간 것도 6시 15분쯤이었지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로놓였다. 그러다 헤임즈는 비웃듯 짧게 웃 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짐작은 가요. 정말 어리석고 바보같 은…… 물론 악의가 있는 말이긴 해요. 미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저를 미워하죠.」 「그럼 사실과 다르단 말씀입니까?」 「물론 거짓말이에요. 나는 셔트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날 아침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요.」 클래독 경감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날 아침이라면 어느 날을 말씀하시는 거죠?」 잠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고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매일 아침마다 여기에 나와 있어요. 1시까지는 떠나지 않아요. 미치의 이 야기를 들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 거든요.」 클래독은 플레쳐 형사부장과 함께 걸어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두 여자 말이 서로 다르니 도대체 어느 쪽을 믿어야 하지?」 「그 외국 여자가 또 거짓말을 한다고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 외국인들은 거짓말을 예사롭게 하는 편이죠. 미치가 헤임 즈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그럼 자네라면 헤임즈 부인을 믿겠다는 말인가?」 「별다른 혐의 사실이 없다면요.」 사실 클래독의 생각으로도 별다른 의심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단지 고집 스런 푸른 눈동자와 <그날 아침>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했던 것을 제외하고 는. 클래독의 기억으로는 섬머 하우스에서의 대화가 오전인지 오후인지 물어보 지 않았다. 미스 블랙록이나, 배너가 젊은 외국인이 여비를 빌리러 왔던 사 실을 그녀에게 말했을지도 모르며 그래서 헤임즈는 <그날 아침>이라고 했 는지 모른다. 하지만 <섬머 하우스요?>하며 두려움이 깃든 목소리로 되묻던 그녀의 말 을 클래독은 아직도 새겨두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좀더 두고보자고 마음먹었다. (3) 목사관 정원은 아늑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 쬐고 있었다. 클래독 경감은 성 마틴 축제일인지 성 누가 축제일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아늑하고 푸근 한 날씨를 알고 있었다. 마침 어머니 모임에 가려던 번치가 클래독을 위해 의자를 갖다 주었다. 그 옆에는 미스 마플이 숄을 두르고 무릎 덮개를 한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조용한 분위기, 미스 마플의 뜨개질 바늘이 부딪히는 소리, 이 모든 것이 경감에게는 나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쪽에서는 악몽같은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가라앉아 있다가 차츰 높아져 결국은 공포로 뒤바뀌는, 흔히 꾸는 악몽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미스 마플은 이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순간 미스 마플의 뜨개질 소리가 딱 멈췄다. 그녀의 조용한 푸른 눈동자가 클래독을 바라보았다. 「경감님은 꽤 성실한 분이군요. 번치의 아버지―우리 교구의 목사님이시 자 학자였어요―와 어머니―이분도 영적으로 대단한 분이셨어요―는 모 두 나의 오랜 친구예요. 그러니 내가 메디넘에 와서 번치네 집에 며칠간 묵는다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왠 지……그렇게 해야 안전할 것 같아서요.」 미스 마플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처럼 나이먹은 사람들은 늘 기웃거리고 다닌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세상 여기저기에 사는 친구들에 관해 묻고, 이러이러한 것을 아느냐, 하고 기웃거리죠. 누구누구의 딸의 결혼 상대자 를 알고 있느냐 하는 등 말이에요. 이런 것도 도움을 주거든요. 안 그래 요?」 「도움이 된다구요?」 경감은 시들하게 물었다. 「소문에 관한 것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죠. 그 점이 바로 당신이 염려 하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전쟁이후 세상이 많이 변했지요. 그 예로 치 핑 클렉혼을 보세요. 내가 살고 있는 세인트 메리 미드와 비슷한데 15년 전까지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어요. 큰 저택에 사는 밴트리 가족, 하트넬 가족, 플라이스 리들리 집안, 웨저비 집안…… 이 집안들의 부모,조부모, 숙부, 숙모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았지요. 만일 누군가 그곳에 살기 위해 이사오면 자신들의 소개장을 가져오고, 이 고장 사람 들과 같은 연대에 소속해 있었던가 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죠. 만일 누 군가 낯선 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이 옮겨왔다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알기 전까지는 사귀려들지도 않는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마을이든 어떤 도시든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사하고 옮겨다니지요. 대저택은 팔리고 시골집은 개조되어 바뀌었어요. 그리고 모두 새로 이사온 사람들뿐이고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들 이 말하는 정도이지요.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왔어요. 인도, 홍콩,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빈민가, 그리고 기묘한 섬에서 말이죠. 그들은 웬만큼 돈을 모았기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므로 누군지 신분을 파악할 수 없답 니다. 아시겠어요, 경감님? 이젠 누구나 비널리즈의 놋쇠 그릇을 가질 수 있고 인도의 요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죠. 타올마너의 그림이나 영국의 교회와 도서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요―미스 핀칠리피나 미스 마것로이드처럼 말이에요. 남프랑스에서도 옮겨올 수 있고, 동양에 서 남은 평생을 보낼 수 있죠.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건성 으로 흘리는 편이죠. 잘 아는 사람이니까 잘 대해주라는 편지를 받아야 만 대우해 주는 게 아니랍니다.」 그 사실은 분명하게 클래독을 압박해 왔다. 정말로 그는 깨닫지 못했던 사 실이다. 그들은 이주 증명서와, 사진도 지문도 없는, 다만 번호만 적혀 있는 그 카드로 멋지게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 증명서쯤은 조금만 힘쓰면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영국에서 전원생활을 연계해 주던 미묘한 연관이 샅샅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도시 사람들은 이웃에 관심갖지 않으려고 한다. 시골에서조차 이웃 사람을 알려 하지 않는다. 기름친 문을 발견하고 클래독은 미스 블랙록의 거실에 이웃 사람으로 가장 한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미스 마플의 신상을 염려했 던 것이다. 그녀는 게다가 몸이 약했고 나이가 많으며 사람들 눈에 잘 띄었 던 것이다. 「그들의 신원을 조회할 수는 있습니다.」 클래독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인도, 중국, 홍콩, 남프랑스…… 15년 전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도 잘 아는 사람 중에 도시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신분증을 훔 쳐내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신분 증명서를 사거나 위조하는 조 직이다. 물론 신원조회를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냥 시간을 들 일 수만은 없다. 랜들 게들러의 미망인은 머지 않아 죽음에 임박해 있으니 까……. 클래독은 지치고 피곤함을 느꼈지만 햇빛에 어느 정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스 마플에게 랜들 게들러와 핍과 에머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쌍둥이 이름입니다. 별난 이름이죠? 그들은 아마 유럽 어딘가에 어엿한 시인으로 살고 있겠지요. 어쩌면 그 둘다,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이 치핑 클렉혼에 와 있을 수도 있지요.」 25세 정도에―누가 그들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혼 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조카 남매―아니면 육촌이라든가―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마지막 으로 본 것이 언제일까.」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알아다 드리지요, 경감님.」 「아닙니다, 미스 마플. 이젠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간단한 일이에요. 나라면 그리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요. 난 공식적인 직 업을 갖지 않았죠. 만일 잘못된다 해도 경계하지는 않을 거예요.」 핍과 에머…… 그는 그 이름에 정신이 뺏겨 있었다. 매력적이고 대담한 젊 은 남자와 차가운 눈길의 아름다운 여자……. 클래독이 말했다. 「48시간 안으로 알아내야 합니다. 지금부터 스코틀랜드로 떠나겠습니다. 게들러 부인이 입을 연다면 두 사람에 대해 상당한 수확이 있으리라 생 각합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미스 마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미스 블랙록에게 조심하도록 일러두는 게 좋겠어요.」 「네, 이미 말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경계할 사람도 배치해 놓겠습니 다.」 클래독은 미스 마플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은 <위험이 숨어 있다면 경관에게 감시시켜 봐야 소용없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클래독이 말했다. 「이건 분명히 기억해 두십시오. 나는 부인에게도 경고를 드렸습니다.」 「기억해 두지요, 경감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마세요.」 ◎ 11장. 미스 마플의 방문 ◎ 허먼 부인이 자기 집의 손님과 함께 차를 마시러 왔을 때 주인 레티샤 블 랙록은 굳은 표정이었으나 미스 마플과의 첫대면에서는 조금도 딱딱함이 없 었다. 그 노부인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온화하고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도둑 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그 얘기에 열중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아요. 도둑도 아메리칸 스타일인가봐요. 나는 아 직도 구식 방법에만 신경을 쓰죠. 자물쇠를 열고 빗장을 여는 방법 말이 에요. 그런데 그들은 그것까지 뽑을 수 있어요. 시험해 보셨나요?」 미스 마플의 말에 블랙록은 조용히 대꾸했다. 「빗장 같은 것엔 그리 신경쓰지 않아요. 우리집에는 도둑맞을 만한 물건이 없답니다.」 「현관에 있는 사슬 말인데요, 하녀가 밖을 내다보려면 사슬이 걸린 채로 그 틈으로 확인할 수 있겠더군요.」 「미치는 종종 그랬어요.」 「강도극 때 몹시 놀라셨겠군요? 번치가 이야기해 주더군요.」 「난 정말 놀랬어요.」 번치가 말했다. 미스 블랙록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나도 처음이에요. 실수로 자신을 쏘다니, 천벌을 받 은 거예요.」 「요즘 도둑은 거칠기 짝이 없어요.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아마 잊고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미스 배너가 갑자기 소리쳤다. 「오, 레티! 깜빡 잊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 경감이 오늘 아침에 이상한 걸 묻던 걸. 그는 쓰지 않는 문을 열어 보겠다고 하잖아? 서랍에서 열쇠를 찾아 열어 보니까, 글세 열쇠구멍에 기름이 칠해져 있었다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미스 배너는 블랙록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한참 뒤에야 알아차리고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었다. 「오, 레티―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지?」 「괜찮아.」 미스 블랙록은 이렇게 말했지만 화가 난 표정이었다. 「클래독 경감은 그런 얘기가 누설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거야. 그가 이 집을 조사할 때 도라 네가 함께 있었는 줄은 몰랐어. 이해하겠지요, 허먼 부인?」 「물론이지요. 우리는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제인 아주 머니? 하지만 그가 왜…….」 허먼 부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미스 배너는 어쩔 줄 몰 라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오, 레티 난 왜 이렇게 천덕 꾸러기일까?」 미스 블랙록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아냐, 도라. 네가 있어서 난 마음이 든든해. 하긴 도라가 말하지 않아도 치핑 클렉혼에서는 금방 알려질 텐데.」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그렇고말고요. 사소한 것이라도 엉뚱한 경로로 퍼져나가죠. 하녀들을 통 해서 말이에요. 하긴 요즘엔 하녀가 있는 집이 많지는 않죠. 꼭 그들만이 아니라 파출부들은 여러 집을 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리기 마련이에요.」 「아, 알았어요! 그 문이 열린다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몰래 빠져나가 강도 짓을 꾸밀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 방에 있던 사람은 아니겠군요. 왜냐하면 범인은 로열 슈퍼에서 온 남자였으니까요. 혹시 그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허먼 부인이 열띠게 말하고 나더니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끊었다. 「그때의 사건이 이 방에서 일어났나요?」 미스 마플은 이렇게 묻고 나서 미안한 듯이 다시 덧붙였다. 「너무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흥미로운 일 아니예요? 신문 에 나옴직한 사건이죠. 그런데 사건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보고 싶군요. 이 해해 주시겠어요, 미스 블랙록?」 그러자 허먼 부인과 미스 배너는 열을 내며 이야기했고 미스 블랙록은 이 따금 그들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한참 이야기중일 때 패트릭이 들어와 루디 셔트의 역을 맡아주었다. 「레티 아주머니는 저기 계셨어요. 입구 쪽에요. 아주머니, 거기 서 보세 요.」 미스 블랙록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미스 마플은 그녀 뒷벽에 박힌 총알 자국을 보았다. 그녀는 놀라 소리쳤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손님들께 권하려고 담배상자를 집으려 했지요.」 미스 배너가 끼어들며 불평하는 투로 내뱉었다. 「사람들은 담배 피울 때 너무나 무신경해요. 도무지 조심하지 않는다니까 요. 평소에는 가구를 칭찬하면서 담배를 피울 땐 잊어버리나 봐요. 이것 보세요. 까맣게 탄 자국을요. 누군가 담배를 여기 놓았기 때문이에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 물건인데,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되잖아?」 「하지만 너무 훌륭한 탁자잖니, 레티.」 미스 배너는 친구의 물건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아꼈다. 허먼 부인 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그런 점이 미스 배너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탁자로군요. 그 위에 있는 램프도 좋구요.」 미스 마플의 말에 미스 배너는 자신의 물건을 칭찬받는 양 또다시 떠들댔 다. 「멋지지요? 드레스덴 도자기에요. 한 쌍인데 다른 한 개는 손님용 방에 있 지요.」 「이 집안의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구나, 도라. 너는 나보다 물 건을 더 아끼는 것 같아.」 미스 블랙록의 말에 도라 배너는 몹시 얼굴을 붉혔다. 「좋은 물건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부감이 담겨 있는 듯했고 어딘지 아쉬운 듯했다.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사실은 작은 물건이라도 각자에겐 소중한 거죠.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 죠. 말하자면 사진처럼 말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사진을 별로 추억으로 남겨두려 하지 않아요. 나는 아직까지도 내 조카들의 갓난 아이 때 사진 을 갖고 있답니다. 물론 그 뒤의 여러 사진들도 마찬가지예요.」 번치가 말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저의 3살 때 사진도 갖고 계시죠. 폭스테리어종 개를 안고 눈 은 사팔뜨기처럼 뜨고 말이에요.」 미스 마플은 패트릭을 향해 말을 돌렸다. 「아주머니께서는 당신 사진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패트릭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먼 친척이라서요.」 「네 엄마가 너의 아기 때 사진을 부쳐 준 적이 있었지. 그런데 어디론가 없어진 것 같구나. 너의 엄마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내올 때까지 아기를 몇을 낳았는지, 또 이름은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단다.」 미스 마플이 끼어들었다.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았나요? 요즘에는 어린 친족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 어요. 예전처럼 대가족이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에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내가 패트릭과 줄리어의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게 30년 전 그녀의 결혼 식장에서였죠.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패트릭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렇게 잘생겼죠?」 줄리어도 한마디했다. 「아주머니는 아주 멋진 옛날 앨범을 갖고 계시더군요. 요전날 그 앨범을 보았어요.」 미스 블랙록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땐 좋았지.」 패트릭이 말했다. 「레티 아주머니,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줄리어도 후일에 자신의 사진을 꺼내 보인다면 자신이 그렇게 생겼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예요.」 번치는 미스 마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물었다. 「무슨 의도로 사진 얘기를 꺼낸 거지요?」 「맞아. 미스 블랙록이 그 젊은이들은 이전에도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흥 미로운 걸. 클래독 경감이 알면 무척 눈을 빛낼 거야.」 ◎ 12장. 치핑 클렉혼의 아침 (1) ◎ (1)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정원의 땅을 고르는 롤러 위에 다소 위태로운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필리퍼.」 「안녕하세요?」 「바쁜가요?」 「그저 그래요.」 「뭘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시겠어요?」 「아뇨. 난 정원일은 전혀 모르거든요. 흙장난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겨울 상추를 찔러심고 있어요.」 「찔러심는다구요? 퍽 이상한 말이군요. 마치 찌른다는 말 같네요. 필리퍼, 찔러 꽂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사실 나도 얼마 전에 배웠는데 그때까진 전문적인 경기에서만 쓰이는 줄 알았어요.」 필리퍼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나요?」 「그래요. 당신을 보고싶은 거지요.」 필리퍼는 그를 흘깃 쏘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오지 마세요. 루커스 부인은 그런 걸 아주 싫어하니까요.」 「그녀는 당신의 수행자를 허락하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요!」 「수행자―썩 좋은 표현인 걸. 지금의 나를 적절하게 나타낸 말입니다. 공 손하게 먼 거리에서 더욱이 어디까지나 쫓아가는 거죠.」 「제발 저리 가주세요.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천만에요. 나는 볼일이 있어요. 오늘 아침 루커스 부인이 우리 어머니에 게 전화를 걸었더군요. 여기에 호리병박이 많다구요.」 에드먼드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요, 수없이 많아요.」 「그러니 벌꿀과 바꾸지 않겠느냐고 하던 걸요?」 「그건 불공평한 교환이군요. 요즘은 호리병박이 남아 돌아가서 잘 팔 수 없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루커스 부인이 전화를 걸어온 거죠. 지난번에는 탈 지 우유와 양상추를 교환했는데 양상추는 시기가 좀 일렀기 때문에 1실 링쯤 할 때니까요.」 필리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주머니에서 벌꿀 한 병을 꺼 냈다. 「구실이죠. 만일 루커스 부인이 나와서 화를 내더라도 나는 호리병박을 가 지러 온 셈이니까 당신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알았어요.」 에드먼드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테니슨의 시를 읽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일거 봐요. 요즘 부쩍 테니슨의 시를 많이 읽더군요. 저녁에 라디오를 틀 어도 트롤롭을 듣지 않아도 돼요. 그의 작품은 너무 애정에 치우쳐요. 물 론 트롤롭의 작품도 읽긴 하지만 좋아할 만큼은 못되요. 하지만 테니슨은 좋습니다. <모드>를 읽어 보셨나요?」 「오래 전에 한번.」 그는 조용히 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 티가 없는 실패작 차갑고 굳어진 견고함 아름다울 만큼 무표정함!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예요, 필리퍼.」 「별로 좋지 않군요.」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를 사로잡은 것처럼 모드도 그 가엾은 젊은이 를 사로잡았을 겁니다.」 「어리석게 굴지 말아요, 에드먼드.」 「필리퍼, 당신의 인습에 얽매인 교양 뒤에는 어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거 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 건가요? 행복합니까? 비참해요? 아 니면 두려운가요? 틀림없이 뭔가 있기는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필리퍼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내 일이에요.」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요. 당신의 냉정한 침묵 속에 무엇이 감추어 져 있는지 알고 싶단 말입니다. 내겐 알 권리가 있소. 있고 말구요. 나는 사랑 따위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그저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글을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비참한 생활의 문제를 피해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지요. 번 존즈의 생애에 대해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퍼는 흙손질을 멈추고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번 존즈에게 뭘 배웠단 말인가요?」 「전부예요. 라파엘 이전의 것을 읽어 보면 생활양식을 알게 될 거예요. 그 들은 마음껏 속어를 쓰고 활기가 있지요. 그리고 호기있게 웃고 농담하고 모든 게 아름답고 멋있지요. 하지만 그들이 우리보다 행복하고 건강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비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생활양식이란 것이죠. 전쟁이 끝난 뒤 우리는 섹스만을 찾았죠. 하지만 결과는 별게 아니란 겁니다. 왜 이런 말을 지껄이는지 압니까? 나는 당신 과 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당신이 도와 주려 하지않기 때문에 자 꾸만 주저앉아 버리는군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예요? 」 「말해줘요! 당신의 남편에 관해서! 당신은 그를 사랑했소? 그런데 그가 전 쟁터에서 죽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거요? 그렇습니까? 좋아요. 당 신은 그를 사랑했군요. 그리고 그는 죽은 거죠. 하지만 많은 여자들이 남 편을 잃었어요. 그 중에는 남편을 끔찍이 사랑했던 여자도 있어요. 그녀 들은 술집에서 그런 얘기를 털어놓고 울며 견딜 수 없어 함께 자자고 하 는거요. 그러면 어느 정도 위로를 받는 겁니다. 당신은 젊어요―대단히 아름답구요. 게다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 당신의 남편 이 야기를 해줘요.」 「말할 게 없어요. 우리는 그냥 만나 결혼한 것뿐이에요.」 「아주 젊었을 때인가 보군요.」 「너무 어렸어요.」 「그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나요? 말해 봐요, 필리퍼.」 「말할 게 없다니까요. 우리는 결혼했고 모두들 그렇듯이 행복하게 살았지 요. 해리가 태어났고 로널드는 전쟁에 나갔고―그는 이탈리아에서 죽었어 요」 「해리가 있잖습니까.」 「네, 그애가 있지요.」 「난 해리를 좋아해요. 정말 좋은 아이지요. 물론 그애도 나를 잘 따릅니다. 어때요, 필리퍼. 나와 결혼해 주겠소? 당신은 정원일을 계속하고 나는 글 을 쓰고 말입니다. 그리고 주말이면 일을 그만두고 즐겁게 지내는 겁니 다. 우리 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그냥 못 본체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난 아직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형편이고 글도 보잘 것 없고 그리고 또 말도 많다는 단점이 있지요. 어때요, 결혼해 주겠소?」 필리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커다란 안경을 쓴 젊은 사나이를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안돼요.」 필리퍼가 말했다. 「정말로?」 「절대로 않돼요.」 「왜죠?」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게 이유입니까?」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어요.」 에드먼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요. 잘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도대체 누가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가요, 내 사랑…….」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듯 리듬있게 말을 이었다. 넓고 넓은 정원의 종달새 황혼이 지네(지금은 오전 11시이지만) 필, 필, 필 우짖노라, 부르고 있네 「아무래도 당신 이름은 리듬에 맞지 않아요. 꼭 만년필에게 바치는 노래 같지 않아요? 다른 이름은 없어요?」 「조안이라고 해요. 빨리 저리 가요. 루커스 부인이 오고 있어요.」 「조안, 조안, 조안. 이 이름이 좀 낫군요. 하지만 썩 좋지는 않은데요. 조 안, 기름 투성이 남비를 엎었도다. 멋진 결혼생활이 될 수 없겠군요.」 「루커스 부인이에요―.」 「빌어먹을. 시든 호리병박을 줘요.」 (2) 플레쳐 형사부장은 리틀 파독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은 미치가 비번이어서 그녀는 언제나처럼 11시 버스로 메디넘 웰즈에 갔다. 플레쳐는 미스 블랙록에게 그 집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양해를 얻었다. 그녀와 도라 배너는 마을에 나가고 없었다. 플레쳐는 재빠르게 일을 시작했다. 문에 기름을 발라두고 전기가 나가자 거 실을 빠져나가려고 누군가 계획했던 것이다. 미치는 거실 밖에 있었으니 그 문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거실을 빠져나간 사람이 누구인가? 이웃사람도 혐의에서 빼는 게 좋 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에 기름을 치고 살인을 계획할 기회가 없었다. 패트릭과 줄리어 남매, 필리퍼 헤임즈, 그리고 도라 배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패트릭 남매는 밀체스더에 가 있고 필리퍼 헤임즈는 일하는 중이었다. 플레쳐는 아무런 방해없이 수색할 수 있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나 오지 않았다. 전기에 대해 전문가인 플레쳐도 배선이나 전기 장치만을 보고 어떻게 불이 나가게 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침실까지 샅샅이 조사했지만 짜증날 정도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필리퍼 헤임즈의 방에는 맑은 눈빛을 가진 어린 아이 사진과 그 아이의 갓 난 아기 때 사진,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서 보내온 편지 한뭉치, 극장표 두어 장이 있을 뿐이었다. 줄리어의 방에는 남프랑스에서 찍은 사진들이 서랍 가득 들어 있었다. 미모 사꽃들이 배경을 깔린 해수욕장 사진들이었다. 패트릭의 방에는 해군시절이 기념품들이 있었고, 도라 배너는 사소한 물건 들을 갖고 있을 뿐 그리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래도 플레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저 문에 기름을 칠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느 재빨리 계단 쪽으로 나가 아래픙을 내려 다 보았다. 스웨트넘 부인이 홀을 가로질러 오는 참이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든 채 거 실을 들어다 보고는 홀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번에는 빈손으로 식당을 나왔다. 플레쳐가 밟고 있는 마루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 쳤다. 「누구세요? 미스 블랙록?」 「아닙니다, 스웨트넘 부인.」 그녀는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깜짝 놀랐어요. 도둑이 들어왔는 줄 알았어요.」 플레쳐는 층계를 내려왔다. 「이 집은 도둑에 대비하지 않는군요. 누구든 도둑처럼 드나들 수 있나 요?」 스웨트넘 부인이 설명했다. 「나는 마르멜로를 가져왔어요. 미스 블랙록은 마르멜로 젤리를 만들고 싶 어하는데 이 집에는 마르멜로 나무가 없거든요. 식당에 두고 왔어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했다. 「아,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고 싶은 거죠? 저 옆문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서로 자유로이 드나들지요. 어두워질 때까지는 아무도 문을 잠그 지 않으니까요. 모처럼 물건을 갖고 왔다가 도로 가져간다면 우습잖아요? 벨이 울리면 곧 하인이 달려나가는 옛날과는 다른 때니까요.」 스웨트넘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도에서는 하인을 열 여덟 명이나 두고 살았지요. 유모를 빼고는 말이에 요.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언제나 세 명을 두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언 제나 요리사도 못 둘 정도로 가난하다고 여기셨지만 말이에요. 불평할 것 은 못되지만 어쨌든 그때보다 불편한 것은 사실이에요. 아무튼 탄광부들 은 석탄캐는 흉내만 내고 시금치를 재배할 줄도 모르면서 정원사가 되려 고 하니 점점 힘든 세상이지요.」 그녀는 얘기하면서 재빨리 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너무 떠들었군요. 바쁘실 텐데 시간을 뺏었나 봐요. 이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겠지요?」 「왜죠, 스웨트넘 부인?」 「여기서 당신을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또 사건이 일어났나 해서 요. 참, 미스 블랙록에게 마르멜로를 갖다 놓았다고 전해 주세요.」 스웨트넘 부인은 나갔고 플레쳐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지금까지 문에 기름을 칠한 사람은 이 집 사람일 것이라고 가정해 왔다. 하지만 그 생 각이 틀렸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외부사람이 미치가 버스를 타고 외출하고 레티샤 블랙록과 도라 배너가 이 집을 비울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기회라면 쉽게 있다. 플레쳐는 그날 밤 거실에 모여 있던 어느 누구도 혐의자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 「마것로이드.」 「왜, 핀치?」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 「나의 뇌세포가 움직이고 있어. 그날 밤의 사건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의심스럽다니?」 「그래. 자, 머리칼을 올리고 인두를 들어 봐. 그리고 권총을 든 강도를 흉 내내 봐.」 「어머나!」 미스 마것로이드는 불안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무섭게는 않할 테니. 자, 부엌문 쪽으로 걸어 봐. 너는 이제 도둑 이 되는 거야. 부엌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위협해 봐. 그리고 회중전등 을 켜고!」 「이렇게 환한 대낮에?」 「상상으로 해보라고, 마것로이드. 자, 불을 켜!」 마것로이드는 어색한 동작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한쪽 팔로 인두를 세워 잡았다. 미스 핀칠리피가 계속 말했다. 「자, 시작해 봐.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헬미어 역을 했던 것을 생각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해 보라고. 『손들어!』그 말 만 하면 돼. 『손을 들어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미스 마것로이드는 순순히 회중전등과 인두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오른 손에 회중전등을 들고 문손잡이를 돌린 다음 왼손으로 전등을 바꿔 들 고 소리쳤다. 「손들어!」 그녀는 가늘게 소리치고 난처한 듯 덧붙였다. 「너무 어려워, 핀치.」 「어째서?」 「문 말이야. 손을 놓으면 자꾸 닫히잖아.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있고.」 「맞아!」 미스 핀칠리피는 작게 소리쳤다. 「리틀 파독스의 문도 자동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열어 놓은채로 있는 걸 못봤어. 그래서 레티 블랙록이 중심가의 엘리어트의 가게에서 두꺼운 유 리로 된 문받침대를 사온 거야. 내가 그 가게에서 사려고 했을 때 그녀가 먼저 사가고 말았어. 내가 보기좋게 값을 깎아 엘리어트에게서 8기니에서 6파운드 10실링까지 깎아 놓았었거든. 그때 블랙록이 가로채 사버린 거 야. 그렇게 아름다운 받침대를 본 적이 없어. 너도 그렇게 큰 유리 물건 은 못 보았을 거야.」 미스 마것로이드가 말했다. 「아마 그 도둑은 문을 열어 놓기 위해 그 받침대를 썼을 거야.」 「상식적으로 그가 어떻게 했겠니? 우선 문을 열어젖히고 <실례>하고 말 하고 문 받침대를 놓은 뒤 『손들어!』하고 위협했을까? 그럼, 어깨로 문 을 받쳐 봐, 어때?」 「아주 불편해.」 「그렇군. 권총, 회중전등을 든 채로 문을 열어 놓기는 힘들겠구. 그럼 도대 체 어떻게 했을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머 리좋은 친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스 핀칠리피가 입을 열었다. 「그는 분명히 권총을 갖고 있었을 거야. 그는 총을 쏘았으니까. 그리고 회 중전등도 갖고 있었지. 거기에 있는 사람 모두 보았어. 이스터브룩 대령 이 지루하게 얘기하는 인도의 로프 요술에 걸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 그 도둑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는 말이 되는 거야.」 「하지만 누가?」 「글세, 너라도 할 수 있었어, 마것로이드. 내 기억으로는 전기가 나갔을 때 너는 바로 그 사람 뒤에 서 있었으니까.」 미스 핀칠리피는 큰소리로 웃었다. 「유력한 용의자야, 마것로이드. 그렇지만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어? 자, 그 인두를 이리 줘 봐. 진짜 총이 아니길 다행이군. 자, 이번엔 네가 자신을 쏠 차례야.」 (4) 이스터브룩 대령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야. 여보, 로라.」 「네?」 「잠깐만 이 방으로 와 봐요.」 「무슨 일이죠?」 이스터브룩 부인이 열린 문 앞으로 나타났다. 「전에 당신에게 권총을 보여 주었는데, 기억나오?」 「네, 기억해요, 아치. 무시무시한 검은색 권총 말이죠?」 「그래. 독일군의 기념품이요. 분명히 이 서랍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래요.」 「그런데 그게 없어졌소.」 「어머나, 정말 이상하군요.」 「당신 혹시 만지지 않았소?」 「아뇨. 그런 무서운 물건을 어떻게 만져요?」 「그 아주머니―이름이 뭐라더라?―그녀가 만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을 거예요. 배트 부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그래도 물어 볼 까요?」 「아니오. 가만히 덮어 두는 게 좋겠어. 내가 당신에게 보여준게 언제였 지?」 「글쎄요. 한 일주일쯤 됐어요. 당신이 칼라와 세탁물에 대해 불평하시면서 이 서랍을 끝까지 열었잖아요. 그때 서랍 깊숙이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뭐냐고 물었지요.」 「맞아. 일주일 전이었다고? 날짜를 기억하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눈을 감고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기억나요. 토요일이었어요. 우리는 영화보러 가려다가 그만 두었잖아요.」 「그날이 분명한가? 그 전날 아니었소? 수요일? 목요일? 아니면 전주일이 라던가.」 「아니예요. 난 분명히 기억해요. 30일 토요일이었어요. 그 사이에 많은 사 건이 일어나서 오래된 것 같아도, 미스 블랙록의 집에 강도 사건이 일어 난 다음날이었거든요. 그 권총을 보았을 때 전날 밤 일이 생각나서 분명 히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왜 그러죠, 아치?」 「만일 권총이 그 사건이 있던 날 이전에 없어졌다면 스위스 청년의 총이 내 것일지도 모르잖소.」 「하지만 그가 어떻게 당신이 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런 범죄단은 어디에 누가 사는가 하는 것쯤은 쉽게 알아내지.」 「당신은 아는 것도 많군요, 아치.」 「그런 경우를 한두번 경험했거든. 그 사건 이후에 당신이 분명히 권총을 보았다면 그것으로 됐소. 그 스위스 청년이 쏜 것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 야, 그렇지?」 「물론이죠.」 「이제야 마음 놓았소. 그 일로 인해 하마터면 경찰에 불려갈 뻔했는데 말 이오, 그들은 끈질기게 캐물을 것이고 나는 그곳에 묶여 있어야 할 거야. 나는 총기 소지 허가증이 없으니까.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규칙 따위는 잊어버리거든. 나는 그것을 무기가 아니라 기념물로 간직하고 있었거 든.」 「알아요.」 「그런데 그 권총이 어디로 없어진 걸까?」 「아마 배트 부인이 치웠을 거예요. 그녀는 정직한 사람이지만 그 사건 이 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집안에 총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추궁해 봐야 솔직히 대답하지 않을 테고, 달라고 하지도 않겠어요. 그래 봐야 화를 내게 할 뿐이죠. 그렇게 되면 안 되죠. 이렇게 큰집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거든요.」 「그렇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소.」 이스터브룩 대령이 말했다. ◎ 13장. 치핑 클렉혼의 아침 (2) ◎ 미스 마플은 목사관을 나와 시내로 이어진 작은 샛길을 내려갔다. 그녀는 줄리언 허먼 목사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총총히 걸었다. 그녀는 레트 카우와 푸줏간을 지나 엘리어트의 골동품 가게 쇼윈도를 들여 다보느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쇼윈도는 블루버드라는 찻집과 보기좋게 연결되어 있는데, 자가용을 가 진 부자가 <홈 메이드 과자>라는 맛좋게 보이는 과자와 커피를 먹을까 하 고 그곳에 멈추어 서면 멋지게 설계된 엘리어트의 쇼윈도가 시선을 끌게 되 어 있는 것이다. 활모양으로 구부러진 쇼윈도 안에 엘리어트는 온갖 물건들을 장식해 놓았 다. 완벽한 와인쿨러 위에 두 개의 워터포트 글라스, 그리고 섬세하게 짜여진 호도나무 책상이며 또 싸구려 노커, 이상한 인형들과 이가 빠진 드레스덴 도자기, 그을린 빛깔의 구슬 목걸이 두 개, 그리고 <테임브리지 웰즈가 보냄 >이라는 서명이 있는 컵,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은제품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미스 마플이 넋을 잃고 쇼윈도를 들여다보자, 늙은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평가하듯 엘리어트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목사관에 살고 있는 그 부인이 <데임브리지 웰즈가 보냄>의 매력에 걸려 들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때 도라 배너가 블루버드로 들어가는 모습 이 미스 마플의 눈에 띄었다. 미스 마플은 쌀쌀한 날씨에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덧 명의 여자들이 아침 쇼핑을 나왔다가 즐겁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바깥에서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미스 마플은 눈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도라 배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미스 마플. 여기 앉으세요. 난 혼자에요.」 「고마와요.」 미스 마플은 각이 진 푸른 의자에 앉았다. 「정말 바람이 차가와요. 난 다리에 류머티즘이 있어서 내내 시달린답니 다.」 미스 마플이 투덜거렸다. 「그러세요? 나도 1년 전부터 좌골 신경통을 앓는 바람에 고통을 받았지 요.」 분홍색 옷을 입은 불친절해 보이는 소녀가 하품을 삼키며 커피와 케잌을 주문받으러 왔다. 미스 배너가 속삭였다. 「이 집 케잌은 알아준답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요전날 미스 블랙록 집에서 나오다 보았던 멋진 여자 있잖아요. 그 여자 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녀는 정원 일을 한다고 했는데, 하인즈라고 하던 가…….」 「아, 필리퍼 헤임즈에요. 우리와 함께 있죠. 좋은 여자에요. 말이 없고, 전 형적인 숙녀랍니다.」 「그래요? 난 인도에 있던 기병대의 헤임즈 대령이란 사람을 안답니다. 혹 시 그녀의 아버지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녀는 헤임즈 부인이에요. 미망인이지요.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죽었다는군요. 그러니 남편의 아버지인지도 모르겠군요.」 미스 마플은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 키 큰 남자하고 말이에요.」 「패트릭 말인가요?」 「아니, 안경을 쓴 젊은 남자 말이에요. 전에 얼핏 본 듯한데.」 「에드먼드 말씀이군요. 쉬! 저기 구석자리에 어머니인 스웨트넘 부인이 계 세요. 글쎄요, 난 확실히 모르는 일이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 각하세요? 에드먼드는 괴상한 남자예요. 이따금 불안한 말을 하곤 하죠. 사람들은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말이에요.」 미스 배너는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배웠다고 전부는 아니지요. 자, 커피가 나왔군요.」 퉁명스런 점원이 덜그럭거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미스 블랙록과 같이 학교에 다녔다던데 정말 친했겠군요.」 「네, 그래요. 옛 친구 중에 그녀만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 시절 이 아득한 옛날 같군요. 즐거웠던 소녀시절―그땐 모든 것이 슬펐답니 다.」 미스 마플은 무엇이 그리도 슬펐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리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인생은 정말 힘든 거예요.」 미스 배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중얼거렸다. 「심한 고통을 견디자, 난 언제나 이 구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참다운 인내, 이런 것은 보상받아야 해요. 미스 블랙록이 아무리 큰 보상을 받는다 해 도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진실로 그런 보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거든요.」 미스 배너의 말에서 미스 블랙록에게 엄청난 유산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내포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돈이야말로 고생스런 인생을 평탄한 곳으로 이끌어 주죠.」 미스 마플의 말은 도라 배너에게 또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돈! 돈 때문에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돈이 어떤 것인지, 돈이 없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미스 마플은 백발의 머리를 끄덕였다. 미스 배너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지요―꽃이 없는 테이블에서 식사하느니 차 라리 음식이 없고 꽃만 있는 테이블이 낫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 이 정말 배고픈 게 뭔지 알까요? 빵과 고기, 한조각의 마가린. 그들은 날 마다 고기 요리 한 접시와 야채 두 접시를 기다리지요. 그리고 누더기와 해진 옷을 가리면서 말이에요.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맞고 어쩌다 일자리를 구해도 힘에 부쳐 견딜 수가 없어요. 그리고는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지요. 집세, 항상 그놈의 집세가 문 제랍니다. 집세를 지불하지 못하면 거리로 쫓겨나는 거예요. 요즘 형편이 나아졌다고 해도 양로연금 갖고는 살아갈 수도 없어요.」 「그렇지요.」 미스 마플은 조용히 말하고 미스 배너의 흥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레티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우연히 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았거든 요. 밀체스터 병원에서 식사를 제공받고 있을 때였어요. 신문에 레티샤 블랙록이란 이름이 있었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옛생각이 났겠지요.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었지요. 알다시피 그녀는 대단한 부자인 게들러의 비서였어요. 그녀는 똑똑했지요. 출세한 편이었죠. 나는 그녀가 나를 기억할 테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녀시절도 함께 보냈고 여학교도 같이 다녔지요. 소꿉친구는 결코 잊지 않는 법이랍니다. 그러나 편지로 도움을 청할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요.」 도라 배너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런데 레티가 내게 와서 나를 데리고 가주었어요. 일손이 필요하다면서 요. 난 놀랐어요. 고맙기도 했구요. 신문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야기는 모 두 잘못된 거였어요. 그녀는 정말 친절했어요. 게다가 정도 많아요. 나는 옛정을 생각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열심히 일하리라 마음먹었죠. 정말이에요. 지금도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늘 실수만 하고, 깜박 잊어버 리고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인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참아요. 고맙게도 내가 꼭 필요하다고 말해 주는 거에요. 정말 친절해요. 그렇지 않나요?」 미스 마플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정말 그렇군요. 친절한 사람이에요.」 「내가 리틀 파독스에 온 뒤로 만일 미스 블랙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고 곧잘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 느날 뜻밖에도 그녀는 나에게 얼마간 연금을 남겨놓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내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가구도 말이에요. 나는 그 가구들을 무 척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 는다더군요. 그 말이 맞는다 해도 난 뜨거운 글라스를 탁자 위에 놓아 자국을 낸다던가 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지독히 습관 이 나빠요. 나도 그리 바보는 아니랍니다.」 미스 배너는 계속해서 말했다. 「레티가 간혹 부담스러워 하는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이름은 밝히 지 않겠어요―그녀를 이용해요. 미스 블랙록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미스 마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네요. 정말 그래요. 당신과 나는 세상을 아는 편이죠. 하지만 미스 블 랙록은…….」 미스 배너가 고개를 저었다. 대자본가의 비서로 일했다면 미스 블랙록도 세상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미 스 마플은 생각했다. 도라 배너의 말뜻은 레티샤 블랙록이 부담스러운 것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이겠지. 그런 생활이란 인간의 심연에 대해 알지 못한다 는 의미일 것이다. 「패트릭은요!」 깜짝 놀랄 정도로 미스 배너는 갑작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아마 두 차례는 될 거에요. 쪼들리는 내색을 하고 그녀로부터 돈을 받아 쓰지요. 블랙록은 너무 마음이 좋아요. 그래서 내가 충고했더니 『그 아 이는 젊어. 뭐든지 하고 싶을 때야』라고 말하더군요.」 「그건 맞아요. 더구나 잘생긴 젊은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도라 배너가 말했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모습 또한 아름답다―하지만 패트릭은 사람을 우습게 알아요. 여자들과 놀러다니고 나는 놀림감밖에 안 돼요. 사람에겐 감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봐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것가지 신경쓰진 못하죠.」 미스 배너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직이 말했다. 「이런 얘기 다른 사람에겐 하지 마세요. 그런데 난 패트릭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답니다. 그는 이전부터 그 젊 은이를 알고 있었을 거에요. 줄리어도 알고 있었겠죠. 용기를 내어 미스 블랙록에게 이런 얘기를 비추었는데 바보 같은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어 요. 당연한지도 모르죠. 그녀의 육촌이며 어쨌든 친척이잖아요. 그 스위 스 젊은이가 자살한 거라면 패트릭도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 까요? 패트릭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말이에요. 모든 일이 복잡해요. 모두들 거실의 문 얘기를 하더군요. 게다가 경감님께서 문에 기름을 쳤 다고 말했는데, 내 눈으로 보기로는…….」 도라 배너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미스 마플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난처하시겠군요, 미스 배너.」 동정하듯 말하고 미스 마플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경찰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도라 배너가 소리쳤다. 「그래요. 나는 밤에도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요…… 일전에 정원 에서 패트릭과 마주쳤어요. 나는 달걀을 찾고 있었어요―암탉이 아무데 나 알을 낳거든요. 그런데 그는 깃털과 컵을 들고 있었어요―기름이 담 긴 컵을요.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을까 요』하더군요. 그는 워낙 꾀가 많은 애라서 그때도 아마 둘러댄 걸 거예 요. 만일 거기에 있다는 걸 미리 알지 않았다면 어떻게 찾아냈겠어요?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그래야죠.」 「하지만 난 그애를 흘끔 노려보았지요.」 미스 배너는 칙칙한 붉은 빛이 도는 케잌을 집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날이었는데, 그가 줄리어와 이상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우 연히 들었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는 것 같았어요. 패트릭이 『네가 그 런 일에 관계하다니!』해서요. 그러나 줄리어가―그녀는 퍽 침착한 아가 씨에요―『그럼 어떻해야겠어?』하더군요. 그때 내가 밟고 있던 마루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그들이 나를 발견했지요. 나는 『너희들 싸우는구 나?』하고 웃어넘기려 했어요. 그러자 패트릭이 말하기를 『줄리어에게 암시장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하는 참이었어요』그러더군요. 서슴지 않고 술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게 아니란 걸 알지요. 그날 밤 틀림없이 패트릭이 거실 전 등을 조작해 놓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거 실에 있던 것은 여자 목동이였지 남자 목동이 아니란 걸 똑똑히 기억하 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갑자기 말을 뚝 멈추며 얼굴을 붉혔다. 미스 마플이 뒤돌아보니 미 스 블랙록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막 들어오던 참이었다. 「커피와 소문거리군, 미스 배너.」 미스 블랙록은 나무라는 투로 말하고 미스 마플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스 마플? 날씨가 꽤 쌀쌀하군요.」 미스 배너가 황급히 변명을 둘러댔다. 「배급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항상 불규칙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이 야.」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허먼 부인이 블루버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커피시간에 늦었나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괜찮아. 앉아서 마셔.」 미스 블랙록이 배너를 흘깃 보며 말했다. 「우린 이제 가봐야겠어요. 쇼핑을 마쳤니, 배너?」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레티. 돌아가는 길에 약방에서 아스피린과 물집에 바르는 연고를 사면 돼.」 그들이 나가고 블루버드의 문이 닫히자 번치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셨나요?」 미스 마플은 그녀가 주문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가족간의 결속이란 대단한 거지. 정말 대단해. 번치도 그 사건을 기억해? 난 확실히는 기억 못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독살하려던 사건이 있었지. 술잔에 넣어서 말리야. 그런데 법정에서 그 딸이 자기가 어머니의 술잔 을 반쯤 마셨다고 증언해서 아버지를 구해 주었지. 그 뒤 딸은 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살지도 않았대. 물론 아버 지와 조카는 다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혈연이 교수형에 처해 진다면 누군 들 가만히 있겠어?」 「물론이죠.」 번치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미스 마플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비슷하군.」 「저는 누구와 닮았지요?」 「번치는 번치를 닮았지. 특히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나진 않지만…… 그렇 군. 그녀를 빼놓는다면.」 「그녀라니요?」 「우리집에 있던 하녀를 생각했지.」 「제가 하녀를 닮았다구요?」 「아니, 그녀가 그랬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차려놓고 부엌 칼 과 테이블 나이프를 혼동하는거야. 이건 오래된 얘기지만 그녀는 한 번 도 모자를 똑바로 쓴 적이 없었지.」 번치는 재발리 손으로 모자를 매만졌다. 「그리고 또 다른 건 없나요?」 「그래도 나는 그녀가 즐겁게 집안 일을 하고 나를 곧잘 웃겨주어서 그냥 집에 두었지. 그리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게 좋았거든. 어느날 그녀는 내 게 와서 『잘은 모르겠지만 플로리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면 꼭 결혼 한 여자 같아요』하더군. 사실 그때 플로리는 임신중이었거든. 상대는 예 의바른 이발사 조수였지 다행히도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누어 그들은 마침 내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었지. 플로리는 아주 참한 아가씨였지.」 「그 여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나요? 그 하녀 말이에요.」 번치가 물었다. 「아니, 그녀는 침례교 목사와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았어.」 「어머나, 나와 똑같군요. 난 에드워드와 수잔밖에 낳지 않았지만요.」 번치는 잠시 말을 끊고 잠시후에 다시 물었다. 「제인 아주머니, 지금 누구를 생각하세요?」 「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세인트 메리 미드 생각도요?」 「응, 지금은 엘러튼 간호원을 생각했어. 친절한 여자였지. 그녀는 어떤 노 부인을 정성껏 보살폈어. 그런데 그 노부인이 죽자 다른 노부인을 간호 했는데 그 부인도 세상을 떠났지. 곧 모든 일이 밝혀졌는데 몰핀을 사용 한 거야. 그런데 그 간호원은 자기가 잘못한다고 깨닫지 못하고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거지. 그녀의 말로는 그들 환자는 얼마 못 살고 암으 로 몹시 고통을 받았다는 거야.」 「안락사시킨 거로군요.」 「아냐. 두 노부인은 엘러튼에게 돈을 남겼단다. 그녀는 돈이 탐났던 거야. 알겠니, 번치? 그리고 그녀에게는 정기선을 타는 남자가 있었지. 신문 판 매소를 하는 뷰지 부인의 조카였어. 그는 물건을 훔쳐 그녀에게 팔게 했 지. 외국에서 산 물건이라고 해서 그녀는 정말 믿었지. 그런데 경찰이 눈 치채고 집안을 뒤지고 캐묻자 그는 자신의 아주머니를 때려 그녀가 경찰 에 털어놓지 못하게 했던 거야.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잘생긴 남자였지. 그는 두 여자를 사귀면서 돈을 몽땅 다 써버렸지 뭐니.」 「비열한 사람이었군요.」 「그랬단다. 그리고 옷감가게 클레이 부인은 아들에게 무조건이었지. 너무 응석을 받아 줘서 아주 버릇이 나바졌단다. 그리고 조안 크로프트를 기 억하니, 번치?」 「아뇨, 기억이 안 나요.」 「언젠가 네가 우리집에 왔을 때 보았을 거야. 잎담배나 파이프를 피우던 여자 말이야. 언젠가 은행 강도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조안 크로프트가 강도를 쓰러뜨리고 총을 빼앗았지. 경찰에서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었 어.」 번치는 온 주의력을 기울여 미스 마플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구요?」 「그해 여름, 생 쟝 드 콜린느에서 만난 그 아가씨―별로 말이 없는 아가 씨였지. 누구나 그녀를 좋아했지만 별로 친한 사람은 없었지. 나중에 알 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위조범이었다는구나. 그 때문에 자연히 그녀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고 여겼고, 나중엔 정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어.」 「그리고 영국령 인도의 대령도 있잖아요?」 「그래. 라체스의 본 소령과 심러 로지의 라이트 대령이 있었지. 둘다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보다, 은행 지배인이었던 허지슨 씨가 있었지. 그는 여 행을 다니다가 딸 정도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단다. 그녀의 출생이 어딘 지도 몰랐지. 그녀가 직접 말한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어.」 「그녀가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겠죠?」 「그래, 모두 거짓이었어.」 번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우린 지금까지 도라, 잘생긴 패트릭, 스웨트넘 부인과 에드먼드, 필리퍼 헤임즈, 이스터브룩 대련과 그 부인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런데 이스터브 룩 대령 부인에 대한 아주머니 의견은 정말 놀라와요. 하지만 그녀가 미 스 블랙록의 목숨을 노릴 이유가 없잖아요?」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비밀으르 미스 블랙록이 알고 있을 수도 있 지.」 「아주머니, 오래 전부터의 소문 말인가요? 그건 이미 비밀도 아니예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는 없지. 번치, 너는 소문에 신경쓰지 않는 성격 이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어떤 비밀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떠돌이 고양 이 같은 신세가 됐을 때 우선 누군가 집으로 데려가 먹을 크림과 어루만 져 줄 손길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런 좋은 환경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는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해야겠지요. 아주머니는 그 사람들에 대해 모두 얘기해 주신 거로군요.」 미스 마플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야.」 「아니라구요? 그럼 줄리어군요? 줄리어는 특별난(피큘리어·peculiar) 것 같긴 해요.」 퉁명스런 여점원이 다가와 말했다. 「3실링 6펜스에요.」 한껏 숨을 들이마쉰 뒤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부인. 왜 저더러 피큘리어(유대인)라고 하시는거죠? 피큘리어 회원인 백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저는 충실한 성공회 신자랍니다.」 번치가 말했다. 「미안해요. 난 노래를 인용했을 뿐이에요. 난 아가씨 이름이 줄리어인 줄 몰랐어요.」 그러자 무뚝뚝한 종업원은 얼굴을 풀었다. 「우연한 일이로군요. 저도 갑자기 제 이름이 들려서 그랬던거예요. 잘 알 았습니다.」 그녀는 총총히 돌아갔다. 「제인 아주머니. 왜 그리 놀라세요?」 「분명히…… 하지만 불가능해. 그럴 수는 없어…….」 「제인 아주머니!」 미스 마플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번치.」 「누가 범인일가 생각하셨나요? 누구지요?」 「전혀 모르겠다. 언뜻 떠오르는가 싶더니―그게 아니었더. 나도 알고 싶 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니요?」 「스코틀랜드의 노부인이 곧 죽게 될 것 같다는구나.」 번치는 빤히 미스 마플을 쳐다보았다. 「그럼 핍과 에머를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들이 시도했고 또다 시 할 거라구요?」 미스 마플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 두 사람이 마음먹었다면 틀림없이 할 거야. 만인 네가 누군가를 살해하려고 계획했다면 첫 번째 실패했다고 포기하겠니? 게다가 확신을 갖는다면 의심을 받지 않게 되지.」 「하지만 핍과 에머라면―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둘밖에 없어요. 패트릭 과 줄리어에요. 그들은 남매인데다 핍과 에머의 나이와 비슷해요.」 「번치,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세부적으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만 일 그들이 결혼했다면 핍과 에머에게는 아내와 남편이 있겠지. 게다가 그들의 어머니는 직접 유산을 받지는 못한다 해도 관계는 있어. 레티 블 랙록이 30년 동안이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니까 잘 알아보지 못하겠지. 나이든 여자는 흔히 비슷해 보이니까. 번치, 너는 워더스푼 부인을 기억 하지? 그녀는 몇해 전에 죽은 바틀렛 부인의 양로연금을 받아내지 않았 니? 미스 블랙록은 근시야. 그녀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게다가 그 애들의 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외국인이잖아요?」 「출생지로는 그렇지. 하지만 서투른 영어로 말하고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고 그렇게 믿을 필요는 없지. 그가 이 사건에서 영국령 인도의 대령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아니. 단지 거기에 결부된 거액의 돈을 생각할 뿐이지. 사람들은 돈을 위 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걸 수차 보아왔으니까.」 「그렇긴 해요.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나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 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단다.」 번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사람들이란 자기만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죠. 나만 해도 그런 걸요.」 미스 마플은 생각에 잠겼다―너는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구나. 여러 가지 계획들―고아원을 세우고, 지친 어머니들, 힘겹게 살아온 늙은 어머니들을 위한 안식처를……. 미스 마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눈빛은 점차 슬픈 빛을 띠었다. 「아주머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제가 속물같은 인간이라 고 생각하시는 거죠? 제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이에요. 사람이란 누구 나 돈이 필요할 때면 자신을 속물이라고 여기고 말죠. 그러나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면 다른 사름을 해치는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죠.」 번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난 아니예요. 난 아무도 죽이지 못해요. 늙거나 병든 사람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도, 협박꾼이나 짐승 같은 사람일지라도 말 이에요.」 그녀는 커피잔에 빠진 파리를 조심스럽게 건져올려 테이블 위에 놓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파리도 마찬가지에 요. 비록 늙고 병들어 고생하더라도 어떻게든 살려고 할 걸요. 젊고 강한 사람보다 늙고 병든 사람이 더욱 간절히 살려고 한다고 줄리언도 그러더 군요. 나 역시 살고 싶어요. 행복이나 즐거움이 없더라도 내가 살아 있다 는 것 자체를 느끼는게 좋거든요.」 그녀는 파리에게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파리는 비실거리더니 어디 론가 날아가 버렸다. 「염려마세요, 제인 아주먼. 전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 14장. 과거를 찾아서 ◎ 기차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클래독 경감은 스코틀랜드 지방의 작은 역에서 내렸다. 게들러 부인 같은 부유한 재산가가 상류지역의 집과 햄프셔의 별장, 남프 랑스의 별장들을 마다하고 이 외진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지 경감에게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음으로 친구와 즐거운 오락과 멀어져 외로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니면 주위를 돌보거나 관심갖기에는 너무 병세가 악화된 걸까? 자동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식 대형 다이믈러에는 나이가 지 긋한 운전수가 있었다. 상쾌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20마일을 달리는 동안 경감은 부인이 무척 먼 곳에 깊숙이 산다는 것에 놀랐다. 그가 슬쩍 운전사에게 물어본 이야기에서 부인에 대해 꽤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부인이 어렸을 때부터 살던 곳이지요. 그분은 가족 중 유일한 생 존자입니다. 게들러 씨 부부는 어느 곳보다도 여기를 좋아했었죠. 게들러 씨가 런던을 떠나시기 어려웠지만 그분께서 오시는 날이면 마치 어린 아 이처럼 기뻐하셨답니다.」 오래된 고가의 잿빛 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클래독은 과거 속으로 거슬 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늙은 집사의 마중을 받고 클래독은 목욕과 면도를 마친 뒤 커다란 난로가 타고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아침식사를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간호원 옷을 입은 중년의 늘씬한 여자가 명랑하고 당당한 태도로 들어오더니 자신을 매클랜드라고 소개했다. 「클래독 경위님, 부인께서 지금 당신을 만나시겠답니다.」 클래독은 그녀와 약속했다. 「네, 환자를 흥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미리 주의를 드리는 게 낫겠군요. 게들러 부인께 서는 보통때는 극히 정상입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 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기력이 떨어집니다. 그대는 곧 저를 부르세요. 부 인은 몰핀으로 연명해 가고 있죠. 그래서 언제나 몽롱한 상태인데 당신 이 오신다기에 강한 자극제를 주사했지요.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의식 이 희미해 질 거예요.」 「잘 알겠습니다. 미스 매클랜다. 그런데 게들러 부인의 상태를 자세히 알 려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는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몇 주인 못 사실 거예요. 이런 말씀 드 리면 놀라실 테지만 부인께선 사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것과 다름없어 요. 게들러 부인의 삶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셔서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투병 생활로 50년 동안이나 집밖에 나가본 적 이 없다면 믿지 않으실테지만 사실입니다. 부인의 생명에 대한 애착은 누구 못지 않게 강렬한 것이지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부인은 아주 매력적인 분이랍니다.」 클래독은 커다란 침실로 안내되었다.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는 그 방의 휘 장이 드리워진 침대에는 노부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백발은 단정히 빗겨 있었고 엷은 회색빛 망토로 어깨를 덮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과 다정함이 함께 어려 있었고 푸른 두 눈에는 어딘지 모르 게 강인함이 엿보였다. 「흥미로운 일이군요. 내가 경찰의 방문을 받다니 말이에요. 레티샤 블랙록 이 위험했었다구요. 그녀는 좀 어떤가요?」 「네, 건강합니다. 부인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헤어진 뒤 퍽 오랫 동안 못 만났군요. 그 동안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았을 뿐이죠. 샬로트가 죽고 영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이곳으로 오라 고 했더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고통은 남을거라며 거절해 왔더군요. 그 말이 옳았어요…… 블래키는 언제나 생각이 깊었어요.」 클래독은 그녀 스스로 말을 하게 되어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가 게들러와 블랙록의 관계를 상세히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게들러 부인이 불쑥 말했 다. 「당신은 유산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죠? 랜들은 내가 죽은 뒤 전재산이 블래키에게 돌아가도록 했어요. 물론 내가 자기보다 오래 살리라고는 상 상도 못했을 거예요. 그는 건강하고 병을 앓은 적도 없지만 나는 항상 투정을 부려 의사들을 들락거리게 했지요.」 「투정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인.」 노부인은 빙긋 웃었다. 「불평했다거나 내 자신을 비참히 여겼다는 뜻이 아니예요. 나는 남편보다 당연히 먼저 죽을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바뀐 거죠.」 클래독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남편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유산을 처리하셨나요?」 「왜 블래키에게 물려주도록 했느냔 말씀인가요?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어요. 당신네 경찰의 생각, 랜들은 한 번도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어요. 그녀도 마찬가지였죠. 레티샤는 남자 같았어요. 여자다운 감정이나 나약함이라곤 전혀 없었어요. 남자를 사랑 할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옷에도 그리 신경을 쓰 지 않아요. 그저 습관적으로 약간 화장을 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녀는 생각에 잠겨서 말을 이었다. 「랜들은 블래키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듯해요. 그는 그녀의 판단력을 믿었 고 덕분에 곤경에서 빠져나온 게 여러 번 있죠.」 「한번은 자신의 돈으로 주인어른을 구해 드린 적이 있다고 미스 블랙록에 게서 들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한 번이 아니었어요. 이미 지난 얘기니까 말씀드리지만 랜들은 판단력이 없었어요. 정직한 것과 거짓도 구별하지 못했어요. 그의 이런 면을 블래키가 보완해 주었던 거죠.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항상 그녀를 존경했어요. 블랙록 자매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더군요. 아버지는 늙은 시골 의사였는데 고집스럽고 가정에서는 강압적 이었어요. 레티샤는 집을 나와 런던에서 회계 교육을 받았어요. 그녀의 동생은 정상이 아니어서 사람들을 꺼리고 일체 밖에는 나가지 않았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레티샤는 모든 걸 포기하고 동생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간 거예요. 랜들이 그녀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레티샤는 해야 할 일이라고 결정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런 성격이랍니 다.」 「그 일은 게들러 씨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입니까?」 「3,4년 전쯤일 거예요. 남편은 그녀가 회사를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만들 었지요.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에겐 자식이 없소. 우리 두 사람이 죽으면 블래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게 어떻겠소? 그녀라면 잘 번창시킬 거요』라고 말이에요. 사실, 랜들은 돈을 있는 대로 내기하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모험과 스릴을 즐겼던 거지요. 블래키도 남편처럼 모험 심이 많고 똑같은 육감을 가졌어요. 가엾게도 그녀에게는 여자로서의 즐 거움이 없었을 거예요. 가정을 꾸미고 아기를 갖는 그런 인생의 즐거움 말이에요.」 클래독은 그녀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게들러 씨는 재산을 물려 줄 만한 육친이 없었기 때문에 미스 블랙록에 게 남겼다고 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 않습니까? 누이동생이 한명 있었다던데요?」 「소니어 말이군요.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해 전에 다투고는 남남처럼 되 고 말았지요.」 「게들러 씨는 누이동생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요. 그녀와 결혼한 남자의 이름이…….」 「스탠포디스.」 「네, 맞아요.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였어요. 랜들은 그 남자를 사기꾼에다 건달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소니어는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했어요. 나 는 솔직히 랜들이 그렇게까지 반대하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녀는 25살이 나 되었고 철없는 소녀가 아니었거든요. 사실 그는 전과도 있는 건달이 었죠. 소니어도 알고 있었어요. 랜들이 단 한가지―드미트리가 여자들에 게 꽤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걸 랜들은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드 미트리도 소니어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런데 랜들은 그가 돈을 보고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사실과 달라요. 소니어는 분명한 성격 이기 때문에 그가 거칠다거나 자신에게 잘해 주지 않으면 즉시 드미트리 와 관계를 끊었을 거예요.」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않았나요?」 「그래요. 그들 사이는 화해되지 않았죠. 그녀는 랜들이 결혼을 반대한 것 에 몹시 화를 냈어요. 『잘 알았어요.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라 고 했지요.」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까?」 게들러 부인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1년 반쯤 뒤에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부다페스트에서 온 것 으로 기억되는데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어요. 그녀는 매우 행복하게 살 고 있으며 쌍둥이를 낳았다거 오빠에게 전해달라더군요.」 「아이들 이름도 적었습니까?」 벨 게들러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정오에 태어났기 때문에 핍과 에머라고 불러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농담일 수도 있었어요.」 「그녀로부터 언제 다시 소식이 왔습니까?」 「아니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과 곧 미국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었지요.」 「혹시 그 편지 보관하고 게시지 않습니까?」 「아니오. 난 그 편지를 랜들에게 읽어 주었어요. 그러자 그는 『그런 녀석 과 결혼한 것을 언젠가는 후회할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 말뿐이었어 요. 그 뒤로 그녀에 대한 기억은 우리 생활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지요.」 「미스 블랙록이 부인보다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재산은 소니어의 아이들 에게 돌아가도록 게들러 씨가 해놓으셨겠지요?」 「아니예요. 내가 그렇게 했어요. 그가 유언장에 대해 내게 말했을 때 『만 일 블래키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죠?』하고 물었죠. 그는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덧붙이기를 『아, 알아요. 블래키는 튼튼하고 나는 약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재난이라는 것도 있으니까.』했 어요. 그러자 남편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소니어의 아이들에게 주면 되잖아요.』했더니 투덜거리며 핍과 에머의 이름을 적 어넣었답니다.」 「그 뒤로 소니어나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셨나 요?」 「아무것도요.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치핑 클렉혼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클래독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벨 게들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블래키는 좋은 여자에요. 절대로 해를 당해서는…….」 갑자기 부인 목소리가 처지며 입과 눈가에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클 래독이 말했다.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을 들여보내 주세요. 그래요 피곤해요…… 블래키를 지켜주세요. 그녀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선 안 돼요. 그녀를 보살펴…….」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부인.」 그는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녀를 보호해 주세요.…….」 실같이 가는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가 막 방문을 나섰을 때 맥클랜드 간호원이 달려왔다. 「내가 환자에게 해롭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아니예요, 클래독 경감님.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부인은 갑자기 기력이 약해진답니다.」 잠시 후, 그는 간호원에게 물었다. 「부인께 한가지 물어보지 못한 게 있는데, 혹시 부인께서 옛날 사진을 갖 고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았어요. 전쟁이 시작되자 부인은 개인서류 나 물건들을 서류함에 넣어 런던의 창고에 보관했는데 폭격당하는 바람 에 없어져 버렸어요. 부인은 기념품들과 편지들이 없어져 버려 아주 애 석해 하셨지요. 아마 그런 것은 없을 거예요.」 그랬었군. 그러나 클래독은 이번 여행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핍과 에머, 이 쌍둥이는 껍데기가 아닌 실존해 있는 것이다. 클래독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소니어 게들러는 결혼 당시만 해도 부유했지만 유럽의 재산은 전쟁통에 다 날려보냈다. 그래서 전과가 있는 남 편의 아들과 딸이 영국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때 그들은 부유한 친지를 찾겠지. 막대한 재산가였던 아저씨는 죽어다. 그들은 우선 아저씨의 유서를 보고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남겨진 유산이 있 나 확인하겠지. 아마 그때 레티샤 블랙록의 존재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랜 들 게들러의 미망인은 얼마 살지 못하고, 만일 미스 블랙록이 부인보다 먼 저 죽는다면 자신들에게 막대한 유산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 그 렇다면! 클래독은 생각했다. 그들은 레티샤 블랙록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 곳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신분으로는 아닐 테고, 함께 아니면 따로? 내 생각으로는 핍 과 에머가…… 그렇다면 핍과 에머는 틀림없이 치핑 클렉혼에 있다. ◎ 15장. 달콤한 죽음 ◎ (1) 리틀 파독스의 부엌에서 미스 블랙록은 미치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했다. 「토마토와 정어리 샌드위치, 그리고 작은 스콘은 맛있게 만들도록 해. 그 리고 미치가 잘 만드는 스페샬 케잌은 멋지게 솜씨를 내어 만들어 봐.」 「파티가 있나요? 이런 여러 가지 음식을 …….」 「도라의 생일이야. 손님 몇 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지.」 「그 나이 정도 되면 생일은 차리지 않게 되는데요. 차라리 잊는 게 낫 지.」 「하지만 그녀는 잊고 싶어하지 않아. 몇몇이 그녀에게 선물을 갖다줄 테 니―조촐하게 파티를 여는 것도 괜찮잖아?」 「일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죠?」 미스 블랙록은 화가 난 듯 말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하지만 이 집안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 죠? 전 겁이 나서 하루 종일 어쩔 줄 몰라하고 방문을 걸어잠그고 또, 누 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해서 옷장 속을 살펴본답니다.」 미스 블랙록은 차갑게 대꾸했다. 「안전한 방법이군.」 「제게 특별히 만들라고 하신 케잌은…….」 미치의 발음은 꼭 고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특별히, 맛좋은 것이라야 해.」 「특별히 맛있게라구요? 하지만 그러려면 초콜렛과 버터가 필요하고 설탕 과 건포도도 있어야 해요.」 「미국에서 보내온 버터를 쓰도록 해. 그리고 크리스마스용 건포도도 있고 여기 초콜렛과 설탕 1파운드쯤 있으니까.」 미치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요. 미스 블랙록을 위해서 기가 막힌 케잌을 만들어 드릴께요.」 기쁨에 겨워 미치는 소리를 질렀다. 「맛있게 특별히 훌륭하게 만들 거라구요. 케잌 위에는 초콜렛으로 장식하 고 <행복이 있으라>라고 쓰겠어요. 영국 사람들은 먹어본 적이 없는 케 잌을 만들겠어요. 모두들 정말 맛있다고 말할 거에요.」 갑자기 미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패트릭은 내 케잌을 <달콤한 죽음>이라고 불러요. 내가 만든 케잌을요! 난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요.」 「미치, 그건 칭찬의 말이야. 그렇게 맛있는 케잌을 먹으면 죽어도 좋다는 뜻이야.」 미치는 의혹에 찬 눈으로 미스 블랙록을 쳐다보았다. 「저는 그 죽는다는 단어가 싫어요. 하지만 그들은 제가 만든 케잌을 먹고 아주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그래, 그럴 거야.」 미스 블랙록은 별생각 없이 대꾸하고 한숨을 쉬며 나왔다. 미치는 정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오다 도라 배너와 마주쳤다. 「레티, 내가 미치에게 샌드위치 써는 방법을 일러줘야겠어.」 「안 돼. 지금 미치는 기분이 좋은데, 망쳐놓으면 안 돼.」 미스 블랙록은 도라 배너를 거실로 밀고 나가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일러주기만 할 건데…….」 「아무것도 하지 마. 유럽 사람들은 간섭하는 걸 아주 싫어해.」 도라는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지금 막 전화를 걸어 나보고 오래 살라고 하더군. 그리고 오후에는 꿀을 선물로 가져오겠대. 정말 친절하지? 그가 내 생일 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스스로 알렸으니까 모두들 알고 있을 거야.」 「그래. 오늘이 내 쉰 아홉번 째 생일이라고 말했었지.」 「예순 넷이야.」 미스 블랙록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2) 초대된 사람들이 거실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자리에 앉았을 때 패트릭이 연주를 하듯이 소리쳤다. 「오,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가? <달콤한 죽음>이로군!」 「쉿! 미치가 듣겠다. 그녀는 그렇게 부르는 걸 싫어해.」 미스 블랙록의 말에 패트릭은 또다시 이죽거렸다. 「그래도 이건 <달콤한 죽음>인 걸요. 이게 미스 배너의 생일 축하 케잌입 니까?」 「맞다. 난 아주 멋진 생일을 맞게 될 거다.」 미스 배너의 얼굴을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작은 과자 상자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대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줄리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미스 블랙록 쪽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구석까지 음식이 차려졌고 사람들은 과자를 집어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어가 말했다. 「저 케잌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요. 분명히 지난 번과 똑같아요.」 패트릭이 대꾸했다. 「그렇지만 케잌은 훌륭해.」 「외국인들은 케잌을 잘 만들어요. 하지만 산뜻한 푸딩은 잘 만들지 못하더 군요.」 미스 피칠리피가 끼어들었다. 패트릭은 산뜻한 푸딩을 원하는 분 안 계십니까, 하는 말을 꺼내려고 입술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는 듯했다. 미스 핀칠리피가 블랙록과 함께 거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새 정원사를 두셨나요?」 「아니오, 그런데 왜 그러죠?」 「닭장 부근에 군인 타입의 남자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줄리어가 끼어들었다. 「아, 그 사람. 탐저이에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핸드백을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탐정이라구요? 탐정이 무슨 일로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는 집 안팎을 감시하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아요. 아 마 레티 아주머니를 지키려는 것일 거예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진킬 수 있어.」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게 아닌가요? 그런데도 그들은 왜 심리를 연기했을 까요?」 「경찰에서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겠지.」 이스터브룩 대령이 대답했다. 「뭐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죠?」 이스터브룩 대령은 많은 대답 가운데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를 흔들었다. 대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용의자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혐의로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물었다. 「신경쓰지 말아요, 여보.」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살인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거죠. 적절한 기회를요.」 도라 배너가 울부짖듯이 소리질렀다. 「제발 그만둬요, 스웨트넘 씨. 아무도 내 친구 레티를 죽이려는 사람은 없 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에드먼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농담으로 한 소리에요.」 필리퍼가 밝은 목소리로 6시 뉴스를 듣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모두들 그에 찬성했다. 패트릭이 줄리어에게 낮게 속삭였다. 「허먼 부인이 있었으면 분명히 높고 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거 야―『나는 지금도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미스 블랙록?』하고 말이야.」 「난 그 미스 마플이 오지 않아서 기뻐. 그 노부인은 철저하게 파고들거든. 그 마음속은 깊은 동굴 속 같고, 철저한 빅토리아 시대의 여자야.」 모두들 뉴스를 들으며 핵전쟁의 공포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문명국에 대한 진짜의 적은 러시아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진실한 러시아 친구가 몇 명 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파티는 미스 블랙록에 대한 인사로 끝이 났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미스 블랙록이 물었다. 「즐거웠지, 도라?」 「물론이야, 그런데 머리가 아파.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야.d」 패트릭이 말했다. 「케잌 때문이에요. 게다가 아주머니는 아침 내내 초콜렛을 드셨잖아요.」 「가서 쉬어야겠어. 아스피린을 두알 먹고 잠이나 푹 자야지.」 「그게 좋겠어.」 미스 배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패트릭이 물었다. 「오리 우리를 닫을까요, 레티 아주머니?」 미스 블랙록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해 주겠다면.」 「네, 단단히 닫겠어요.」 줄리어가 말했다. 「세리주 한잔 드시겠어요, 아주머니? 예전에 저를 돌보던 간호원이 곧잘 소화가 될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딱 들어맞아요.」 「그것 참 좋은 방법이구나. 확실히 기름진 음식은 부담스러우니까. 어머나! 왜 그래, 도라? 놀랐잖아?」 「아스피린을 못 찾겠어.」 「내 것을 먹도록 해. 침대 옆에 있으니까.」 필리퍼가 말했다. 「내 화장대 위에도 있어요.」 「그래, 고마워. 내 것을 찾지 못한다면 그걸 먹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새 병인데 어디 두었더라?」 줄리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욕실에도 꽤 많던데요. 이 집은 온통 아스피린 투성이에요.」 「난 정말 조심성이 없고 기억이 없단 말이야. 슬픈 일이지.」 미스 배너는 다시 2층으로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줄리어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가엾은 배너 아주머니에게도 세리주를 드려야겠어요.」 미스 블랙록이 만류했다. 「아니다. 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좋지 않을 거야. 거기다가 세리주까지 주 면 더욱 나빠질 거야. 그냥 혼자 있게 놔두는 게 좋겠어.」 「배너 아주머니는 세리주를 좋아하시는데…….」 패트릭이 중얼거렸다. 줄리어가 제안했다. 「미치에게 줘요.」 패트릭이 미치를 데려오자 줄리어는 그녀에게 세리주를 따라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를 위해서!」 패트릭의 말에 미치는 왠지 기뻐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요리사가 아닌 걸요. 고향에선 나도 꽤 고급스런 일을 했답니 다.」 「그렇다면 재능이 썩고 있는 셈이로군요. <달콤한 죽음>같은 걸작 말고 그 고급스런 일이란 게 뭐죠?」 「오, 난 그 이름을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패트릭이 말했다. 「좋든 싫든 상관없어요. 그건 내가 케잌에 붙인 이름이고 이 건배도 달콤 한 죽음과 그 결과를 위해서니까!」 (3) 「필리퍼, 나와 얘기 좀 할까요?d」 「뭐지요?」 필리퍼 헤임즈는 놀란 기색으로 미스 블랙록을 쳐다보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걱정이라구요?」 「요즘 걱정스런 표정인데,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예요, 없어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내 생각엔 당신과 패트릭이…….」 「패트릭이요?」 필리퍼는 분명 놀란 표정이었다. 「아닌가보군. 실례되는 말을 해서 미안해요. 당신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게다가 패트릭은 내 친척이니까. 솔직히 그애는 좋은 남편감이라고 생각 지 않아요. 곧 알게 되겠지만.」 필리퍼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재혼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될 걸. 아직 젊으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정말 걱정거리가 없는 건가요?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아니예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아이들 교육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알아요. 바로 그 얘기 를 하려고 하는 거지. 오늘 오후에 내 변호사인 베딩펠드를 만나서 밀체 스더에 갔었지. 어쩐지 요즘 마음이 편칠 않아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서 새 유언장을 만들려고 말이에요. 미스 배너의 몫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당신에게 주려고 해요, 필리퍼.」 「뭐라구요?」 필리퍼는 몹시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미스 블랙록을 바라볼 분이었다. 「그렇지만 난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주지 않는 게 나아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주려는 거죠?」 미스 블랙록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패트릭과 줄리어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 애들이 있긴 하지.」 미스 블랙록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딱딱함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미스 블랙록의 친척이잖아요?」 「하지만 아주 먼 친척이에요. 그 애들은 내게 바랄 권리가 없어.」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뭘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난 바라지 않아 요.」 그녀의 눈빛에는 고마움보다 오히려 적의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두려워하는 듯했다. 「난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아요. 필리퍼가 좋아졌어. 또 당신 에겐 아들도 있고. 만인 내가 죽으면 유산이라야 뻔하지만 몇주일만 더 있으면 상황이 달라지거든.」 그녀는 필리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미스 블랙록, 당신을 죽지 않아요!」 「조심해서 피할 수만 있다면…….」 「조심한다구요?」 「아네요…… 더 이상 걱정해 봐야 소용없어요.」 미스 블랙록이 방에서 나간 뒤 필리퍼는 그녀가 홀에서 줄리어와 무언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뒤 줄리어가 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꽤 훌륭하시군요, 필리퍼! 당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다 크호스군요?」 「들었군요…….」 「네,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받을 차례에요.」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 아주머니는 바보가 아니에요. 어쨌든 성공한 셈이군요, 필리퍼.」 「줄리어, 난 생각도 못했던 일이에요.」 「아니에요. 당신은 벌써부터 계산하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잖 아요? 하지만 이걸 기억해 둬요―레티 아주머니가 살해된다면 당신은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받을 거예요.」 「지금 내가 그녀를 살해한다는 건 바보짓이에요. 좀더 기다리기만 하 면…….」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의 그 노부인에 관해서도 알고 있군요? 그렇다면 필 리퍼 당신이 진자 다크호스였군.」 「난 줄리어나 패트릭을 배신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미안하게도 난 당신을 못 믿겠어요.」 ◎ 16장. 수상한 사람들 ◎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클래독 경감은 편치 않은 하룻밤을 보냈다. 악몽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옛성의 복도를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긴 안도의 한숨을 몰라쉬었다. 그때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레티샤 블랙록이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당신이 신경을 썼다면 난 살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순간 정말로 눈을 번쩍 떴다. 어쨌든 기차는 밀체스더에 당도했고 클래독 경감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 었다. 그는 곧장 라이스델 서장에게 보고하러 갔다. 서장이 말했다. 「대단한 것은 없군. 그렇지만 미스 블랙록 말을 뒷받침해 주는군. 핍과 에 머 말일세.」 「패트릭과 줄리어 남매가 그 나이에 맞습니다. 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어렸 을 때 본 것이 아니라면…….」 라이스델은 소리를 낮춰 웃었다. 「그건 미스 마플이 벌서 확인해 주었네. 실제로 미스 블랙록은 그들을 두 달 전에 처음 보았다더군.」 「그렇다면 확실히…….」 「그리 간단하지 않아, 클래독. 우리도 조회중인데 패트릭과 줄리어는 추측 과 달라. 패트릭의 해군 복무시절 기록에도 하자가 없다네. 칸느에도 조 회해 보았는데 시먼즈 부인은 화가 난 투로 자기의 아들 딸은 치핑 클렉 혼에 사는 친척 블랙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회답이 왔어. 이게 전부라 네.」 「그녀가 진짜 시먼즈 부인일까요?」 라이스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래 전부터 시먼즈 부인이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뿐이네.」 「그들은 나이가 비슷한데다 핍과 에머가 이곳에 와 있다면 그들이 가장 유력합니다.」 서장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래독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이스터브룩 부인에 대한 조사서일세.」 클래독은 흥미롭게 읽어내려갔다. 「그 늙은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왔군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번 사건과 별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 또 헤임즈 부인의 조사서도 있네.」 클래독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여자를 한 번 더 만나봐야겠군요.」 「이 기록이 뭔가를 말해 주는가?」 「무리하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플레쳐가 뭘 좀 알아냈습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네. 미스 블랙록의 양해 아래 그 집을 살피 고 있지. 그러나 이렇다 할 것은 없다네. 그리고 문에 기름을 칠 만한 사 람을 찾고 있지. 그 외국 여자가 외출한 뒤 집에 있던 사람도 조사하고 있는데 좀 복잡하더군. 그녀는 거의 매일 오후에 외출을 한다니까. 거리 에 곧잘 나가 블루버드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네. 게다가 미스 배너 와 블랙록도 오후에는 대개 집을 비우지.」 「문은 항상 잠겨 있지 않나요?」 「그렇다네. 그러나 지금은 또 모르지.」 「플레쳐의 결론은 뭔가요? 집이 비었을 때 들어갔던 사람이 밝혀지지 않 았나요?」 「사실 그들 모두였다네.」 라이스델은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알을 품고 있는 암탉과 함께 있었다네. 그녀의 이야기 는 앞뒤가 안 맞고 모순 투성이였지. 플레쳐도 그녀가 흥분한 것은 성격 탓이지 사건과 관련있다고는 보지 않네. 그리고 스웨트넘 부인은 말 먹이 를 가지러 왔었지. 그날 미스 블랙록이 부엌 식탁 위에 말먹이를 두고 나 갔다더군.」 클래독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미스 블랙록은 밀체스더로 가는 길에 스웨트넘 부인의 집을 지나며 말먹 이를 갖다 주면 될 텐데.」 「글세, 모르겠군. 스웨트넘 부인의 말에 의하면 미스 블랙록은 그걸 부엌 식탁 위에 두고 미치가 없을 땐 스웨트넘 부인이 그걸 가져갔다더군.」 「아주 논리적이군요. 계속해 보십시오.」 「미스 핀칠리피, 그녀는 요즘 전혀 그 집에 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과 달랐어. 그런데 그녀가 옆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미치가 보았고 배트부 인―마을사람이지―도 보았다더군. 그 뒤에 미스 핀칠리피는 가긴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지. 아마 그냥 들렸다고 말한 것 같았어.」 「이상하군요.」 「좀 수상한 점이 있지. 다음은 이스터브룩 대령 부인, 그녀는 개를 훈련시 키던 중 미스 블랙록에게 편물책을 빌리러 갔는데 집에 없어서 잠시 기 다렸다고 하더군.」 「그랬더라도 집안을 엿보고 다니는 짓은 할 수도 있고 문에 기름을 발랐 을지도 모르죠. 대령은 어떻습니까?」 「어느날 미스 블랙록이 인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기에 그 책을 갖고 갔 다더군. 그리고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그 집에 갔었는지는 모르겠네. 그는 이따금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긴 하는데 요즘은 통 간 적이 없다는군.」 「하나도 이렇다하게 해결될 게 없군요.」 라이스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미스 마플이 적극 활약하고 있지. 그녀는 블루버드에서 아침 커피를 마셨 고 볼더즈에서는 세리주 파티에, 그리고 리틀 파독스의 생일 파티에 갔다 고 하네. 스웨트넘 부인의 정원을 보았고 또 이스터브룩 대령의 인도 얘 기를 들으러 갔었다더군.」 「그렇다면 대령이 진자 대령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냈겠군요.」 「그녀 말로는 진짜인 것 같다더군. 확실히 알아보려고 극동 관계 당국에 조회를 의뢰했지.」 「그건 그렇고 미스 블랙록이 치핑 클렉혼을 떠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 각하십니까?」 「떠난다고?」 「네, 그렇습니다. 친구인 미스 배너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겠답니다. 스 코틀랜드로 가서 벨 게들러와 함께 지내면 좋을텐데요. 아주 안전한 곳이 지요.」 「그곳에 머물며 부인이 죽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서둘러야 합니다. 위험한 상황입니다. 만일 벨 게들러가 죽는다면…….」 그때 경관 한사람이 들어와 클래독은 말을 멈췄다. 「치핑 클렉혼의 레그 경관의 전화입니다.」 「연결해 주게.」 클래독 경감은 서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혹시 미스 블랙록이…….」 라이스델 서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도라 배너가 레티샤 블랙록의 침대 맡의 병에서 아스피린을 꺼내 먹었다네. 그 병에는 겨우 몇 알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아마 두 알을 꺼 내 먹고 한알을 남겨놓았다는군. 의사가 남은 한알을 분석했는데 아스피 린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군.」 「미스 배너는 죽었습니까?」 「그렇다네, 오늘 아침 침대에서 숨이 끊어진 시체로 발견됐다네. 건강 상 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의사의 말로는 자연사가 아니고 마취성 독약이라 고 하네. 오늘 저녁에 검시를 할 거라는군.」 「레티샤 블랙록 침대 옆의 아스피린…… 무섭도록 교활한 놈이로군요. 패 트릭의 말로는 반쯤 남은 세리주를 버리고 새로운 술병을 땄다더군. 그러 나 약이 남아 있는 아스피린 병을 버릴 생각은 할 수 없었겠죠. 어제나 그제 그 집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그 아스피린이 오래전부터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라이스델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모두들 그곳에 있었네. 도라 배너의 생일파티가 있었거든. 그들 중 누군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약을 바꿔 놓았을 수도 있지. 물론 그 집에 사 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지.」 ◎ 17장. 사진첩 ◎ 옷을 두껍게 입은 미스 마플은 목사관 문가에 서서 번치에게 쪽지를 건네 받았다. 「미스 블랙록에게 전해 주세요. 줄리언이 직접 못 와서 매우 유감스러워 한다는 말도요. 록 햄릿에서 신도 한사람이 죽었대요. 미스 블랙록께서 꼭 그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점심 식사 뒤에 들르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 편지는 장례식 절차에 관한 거예요. 만일 검시 심문이 화요일에 있게 되 면 수요일로 하자더군요. 가엾은 배너, 다른 사람을 노린 독약을 먹고 죽 다니―그럼,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주머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마세요. 저 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야 한답니다.」 미스 마플이 많이 걷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하자 번치는 급히 사라졌다. 미스 마플은 미스 블랙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블루 버드에서 도라 배너를 만났을 때 그녀가 『불을 꺼지도록 패트릭이 장난해 놓았을 거예요』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냈다. 어떤 전등일까? 그리고 그것 을 어떻게 했다는 걸까? 그것은 아마 현관 옆 테이블 위의 작은 전등일 것이라고 미스 마플은 생각 했다. 그리고 여자 목동이나 남자 목동이니 하고 말했는데―그 전등은 화사 한 드레스덴 도자기로 만들어진 파란 웃옷과 핑크색 바지를 입은 남자 양치 기였다. 이것은 본래 촛대였는데 전등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갓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너무 커서 인형이 가릴 정도였다. 도라 배너가 또 무슨 말을 했지? 『거실에 있는 것은 여자 목동이지 남자 목동이 아니었어요.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분명히 남자 목동이다. 미스 마플은 번치와 함께 미스 블랙록네 집으로 차를 마시러 왔을 때 도라 배너가 한쌍으로 되어 있는 전등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한 것을 기억했다.― 그건 여자 목동과 남자 목동 한쌍의 전등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도라 배너는 그것이 패트릭의 짓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 것 이다―증거가 없다 해도 그녀는 그냥 그렇게 믿었다. 왜 그랬을까? 본래의 전등을 조사할 수 있다면 어떻게 전기가 나가도록 조 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조작했을까? 미스 마플은 눈앞의 전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깃줄은 테이블 가장자리 를 따라 벽의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중간에 배 모양의 스위치가 있 었다. 전기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미스 마플은 그것만을 보고 별다른 단서를 찾 아낼 수 없었다. 그럼 여자 목동 전등은 어디에 있을까? 손님용 방에? 아니면 내다버렸을 까? 혹시 도라 배너가 깃털과 기름을 들고 있는 패트릭과 마주쳤다는 그곳 에? 그녀는 이런 의문을 모두 클래독 경감에게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스 블랙록은 육촌 패트릭이 그 살인 광고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었다. 그 런 직감은 종종 들어맞는다. 미스 마플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을 잘 아는 법이니까. 패트릭 시먼즈……. 잘생기고 여자들이면 모두 좋아할 만한 젊은이. 아마 랜들 게들러의 여동 생과 결혼한 남자도 이런 타입이겠지. 패트릭 시먼즈가 핍일 수 있을까? 하 지만 그는 전쟁중에 해군에 있었다. 경찰에서도 그쯤은 즉각 알아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교묘한 분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배짱 만 있다면 멋지게 해치울 수 있지. 문이 열리고 미스 블랙록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그녀가 더 늙어 보인다고 미스 마플은 생각했다. 생명력이 다 빠져나간 듯 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줄리언 목사는 신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못 왔고 번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편지를 전해 드리라는군요.」 미스 블랙록은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고 펼쳤다. 「앉으세요, 미스 마플. 이렇게 가져다 주시다니 고마워요.」 그녀는 편지를 읽어나갔다. 「목사님은 정말 자상한 분이에요. 자상하게 위로의 말을 썼어요. 장례식 준비는 잘 마무리되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는 찬송가 <길잡이인 은총 의 빛이여>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미스 마플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단지 남이지만 정말 슬픈 일이랍니다.」 레티샤 블랙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하고 누르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미스 마플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 미스 블랙록은 자세를 바로잡았고 눈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얼 룩져 있었다. 「죄송해요. 도라는 과거를 기억하게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답니다. 하지 만 그녀는 갔고 이제 나 혼자 남았어요.」 「잘 알겠어요. 과거를 기억해 주는 마지막 한사람마저 가버리면 혼자만 남게 되죠. 내게는 조카와 친구들이 있지만 내 소녀시절을 알아 주는 사 람은 아무도 없어요. 벌써 나는 오랫 동안 혼자였답니다.」 두 사람은 오랫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잘 이해해 주시는군요. 목사님께 몇 자 써서 보내드려야겠군요.」 미스 블랙록은 일어나 테이블로 가서 펜을 집어들고 천천히 써나갔다. 「관절염으로 글씨를 쓸 수 없을 때도 있죠.」 그녀는 편지를 봉하고 겉봉을 적었다. 「이걸 전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홀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미스 블랙록은 황급히 덧붙였다. 「클래독 경감이에요.」 미스 블랙록은 난로 곁의 거울 앞으로 가서 얼굴에 분을 가볍게 발랐다. 클래독이 들어와 미스 마플을 보더니 원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기 계셨군요.」 미스 블랙록이 벽난로에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미스 마플이 친절하게도 목사님의 편지를 가져다 주셨답니다.」 미스 마플이 당황해 하며 말했다. 「나도 이제 돌아가겠어요.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클래독이 물었다. 「어제 오후 여기에서 열린 생일파티에 오셨던가요?」 미스 마플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오지 않았어요. 몇몇 친구들을 방문했는데 번치가 자동차로 태 워다 주었지요.」 「이젠 하실 말씀 없으시겠죠?」 클래독은 마치 재촉하듯 문을 열어 주었다. 미스 마플은 당황해 하며 종종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클래독이 말했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당신은 너무 심하군요. 그녀는 정말로 목사님의 편지를 가져왔어요.」 「구실로야 그랬겠지요.」 「그런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일종의 집착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에요.」 천만에요, 그녀는 독사처럼 위험한 인물입니다.―클래독 경감은 마음 속으 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쓸데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살인마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므로 되도록 말을 적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다음 희생자가 미스 마플이 아니기를…… 어딘가에 살인마가 있다. 어디에 있을까? 「시간이 없어 위로의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미스 블랙록. 사실 미스 배너 의 죽음에 대해서는 부끄럽습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그것을 막았어야 하 는건데.」 「그걸 어떻게 막겠어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수사를 서둘러야 합니다. 대체 누가 이 런 짓을 했을까요, 미스 블랙록? 두 번씩이나 당신 목숨을 노린 범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미스 블랙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요, 난 몰라요.」 「게들러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었습니다. 당신 의 죽음으로 이익을 받을 사람이 몇 명 있더군요. 우선 핍과 에머이지요. 그들은 패트릭과 줄리어와 같은 또래더군요. 그러나 그들의 신원은 확실 했어요. 그 외 또다른 사람이 있겠지요. 미스 블랙록, 당신은 소니어 게 들러를 만난다면 그녀를 알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소니어를요? 물론지요.」 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끝을 흐리며 이었 다. 「글쎄요, 어떨는지요.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30년…… 소니어도 퍽 늙었을 테니까요.」 「특별한 특징 같은 것은 없나요? 생긴 모습은요?」 「몸집이 작고 검은 머리칼에…… 그리고 무척 명랑한 성격이었어요.」 「지금은 그리 명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사진이 있습니까?」 「소니어의 사진? 오래된 스냅 사진 정도라면 앨범에 꽂혀 있을 거예요.」 「앨범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앨범이 어디 있더라?」 「미스 블랙록, 혹시 스웨트넘 부인이 소니어 게들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안드십니까?」 「스웨트넘 부인이?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군인이었어요. 인도에 있다가 그 뒤에는 홍콩―.」 「그거야 그녀가 직접 말한 것 아닙니까? 미스 블랙록께서 그것을 확인한 것은 아니겠죠?」 「그렇지요. 그렇게 말한다면…… 하지만 스웨트넘 부인이…… 그건 너무 엉뚱한 말씀이세요, 경감님!」 「소니어 게들러가 혹시 연극 같은 걸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아주 훌륭했어요.」 「그렇군요! 스웨트넘 부인은 가발을 쓰고 있어요. 허먼 부인이 그러더군 요.」 「실은 나도 가발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머리는 항상 잿빛 컬 모양이 거든요. 하지만 그럴까요, 설마. 그녀는 참 좋은 부인인 걸요.」 「그렇다면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드 중 누가 소니어 게들러일 가능성 은 없습니까?」 「미스 핀칠리피는 남자처럼 키가 너무 커요.」 「그럼 미스 마것로이드는?」 「하지만 미스 마것로이드가 소니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잘 못 보셨군요, 미스 블랙록?」 「얼핏 봤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소니어의 스냅 사진을 보도록 하지요. 비록 옛날 사진이어서 닮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아마추어들이 모르는 방법으로 유사점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럼 시간날 때 한 번 앨범을 찾아보지요.」 「지금 곧 찾아 주시겠습니까?」 「당장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어디 있어라? 벽장 속의 책을 정리할 때 앨범을 보았어요. 줄리 어가 도와주다가 내가 입은 옛날 옷이 우습다고 한 것이 생각나요. 책들 은 거실 선반 위에 놓아두었는데 앨범과 미술 잡지는 어디에 두었더라? 난 이렇게 기억력이 나쁘답니다. 아마 줄리어는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 아인 마침 오늘 집에 있어요.」 「그녀를 찾아오지요.」 패트릭 경감은 그녀를 찾았으나 아래층 어디에도 없었다. 「줄리어는 어디 있소?」 미치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부엌에서 식사준비에만 신경쓰고 있어요. 저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 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경감은 2층을 향해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올라갔다. 그는 층계의 모퉁이를 돌다가 줄리어와 마주쳤다. 그녀는 좁고 꾸불꾸불한 계단 뒤의 문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다. 「다락방에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클래독이 설명했다. 그러자 줄리어가 말했다. 「옛날 앨범이요? 네, 기억하고 있지요. 서재의 벽장 안에 있을 거예요. 찾 아다 드릴께요.」 그녀는 앞장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줄리어는 창문 옆의 큰 벽장을 열고 온갖 잡동사니 속을 뒤졌다. 「온갖 잡동사니 투성이에요. 그런데 노인들은 쉽게 버리려 하지 않아요.」 경감은 쭈그려 앉으며 벽장 아래선반에서 오래된 앨범을 집어들었다. 「이겁니까?」 「맞아요.」 미스 블랙록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여기 두었구나! 통 기억이 나지 않았어.」 클래독은 테이블 위에 앨범을 놓고 한 장씩 펼쳐보았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통이 좁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사진 속에 있었다. 사진 밑에는 간단한 메모가 있었는데 잉크빛이 바래 있었다. 「이 앨범에 있을 거예요. 두 번째나 세 번째 면에요. 다른 앨범은 소니어 가 결혼하여 떠난 뒤의 사진들이거든요.」 미스 블랙록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여기 있을 텐데…….」 그 면에는 몇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클래독은 몸을 굽혀 희미한 메모를 읽었다. <소니어……나……RG>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소니어와 벨 바닷가에 서>, 반대면에는 <스케인으로 피크닉>이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으로 넘기자 거기에는 <샬로트, 나, 소니어, RG>라고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클래독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은 일그러져 있었다. 「누군가 이 사진들을 떼어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일전에 우리가 보았을 땐 빈자리가 없었는데. 그렇지, 줄리어?」 「저는 그리 자세히 보지는 않고 사진 속의 옷들이 신기해서 얼핏 보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레티 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빈자리는 없었어요.」 클래독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누군가 이 앨범에서 소니어 게들러의 사진을 몽땅 떼어낸겁니다.」 ◎ 18장. 편 지 ◎ (1) 「헤임즈 부인, 실례합니다.」 필리퍼는 차갑게 말했다. 「좋으실 대로요.」 「이 방으로 들어가실까요.」 「서재요?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난로가 없어서 추우실 텐데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상관없습니다. 이 방이라면 새어나갈 염려도 없구 요.」 「무슨 얘긴데요?」 「난 괜찮지만 남이 들으면 부인이 난처해질 테니까요.」 「무슨 뜻이지요?」 「부인은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전사했다고 그러셨죠?」 「그런데요?」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편께선 탈주병이었다고 말입 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것까지 캐내신 모양이죠?」 클래독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진실을 바랄 뿐이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헤임즈 부인?」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고 묻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다니시겠다는 건가요?」 「그럼,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풀이 꺾인 듯했다. 「아무도 몰라요. 아들인 해리조차 몰라요. 그 아이에겐 영원히 숨겨두고 싶어요.」 「헤임즈 부인, 그러면 당신이 몹시 곤란해질 겁니다. 아들이 이해할 만하 게 자라면 사실을 알려 주십시오. 스스로 그 비밀을 찾아내게 되면 그 결 과는 좋지 않습니다. 남편께서 영웅적인 전사를 꾸며내려 했다면 말입니 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요. 그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었어요. 결 국, 그 이야긴―우리 모두를 위해서예요.」 「하지만 남편께서 살아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도 몰라요.」 「헤임즈 부인, 남편과 마지막 만난 게 언제였죠?」 필리퍼는 곧 대답했다. 「벌써 몇 년 동안 못 만났어요.」 「사실입니까? 2주인 전에 그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당신이 섬머 하우스에서 루디 셔트를 만났다곤 믿어지지 않지만 미치는 확신하더군요. 내 얘기는 그날 당신이 만난 사람이 남편이 아니었나 하는 말입니다.」 「섬머 하우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남편께서 돈이 궁해서 당신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섬머 하우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요.」 「탈주병들은 종종 강도짓도 합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갖고 들어온 외제 연 발총을 소지하기도 하죠.」 「저는 남편이 어디에 살아 있는지도 몰라요. 벌써 여러 해 그를 만나지 못 했으니까요.」 「헤임즈 부인, 더 할 말씀 없습니까?」 「그 밖에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2) 클래독 경감은 필리퍼 헤임즈와의 이야기를 단념하고는 대단히 화가 치솟 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성난 듯 혼잣말로 내뱉었다. 「고집장이 노새로군.」 필리퍼가 거짓말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는 것이 다. 경감은 헤임즈 대위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해 서 그가 죄를 범할 만한 사람인가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 문에 기름을 바른 사람이 헤임즈는 아니다. 그 집안의 누구이든 가 아니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짓이다. 그는 층계를 올려다보고 서 있다가 문득 줄리어가 다락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어처럼 까다로운 여자에겐 다락방이란 어울 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가볍게 2층으로 올라갔다. 거 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락방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거기에는 여행가방, 슈트케이스, 망가진 가구, 다리가 떨어져나간 의자, 깨 진 도자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여행가방 한 개를 열어 보았다. 유행이 지난 고급옷들이 들어 있었다. 아마 미스 블랙록이나 그녀의 죽은 여동생 것이라고 경감은 짐작했다. 그는 또다른 트렁크를 열었다. 거기에는 커튼이 들어 있었다. 다시 그는 작 은 서류가방 쪽으로 갔다. 그 속에는 서류와 편지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편 지들은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서류가방 바깥쪽에 CLB라는 머리글자가 보였다. 그는 레티샤의 여동생인 샬로트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편지 한 장을 펼쳤다. 사랑하는 샬로트, 어제 벨은 피크닉을 갈 정도로 좋아졌단다. RG도 오늘은 쉬었지. 아스보겔 회사의 주식 공모가 잘되어 RG는 매우 기뻐하고 있어. 그는 단숨에 편지를 훑어보고 서명한 곳을 보았다. <사랑하는 언니 레티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다른 편지를 집어들었다. 사랑하는 샬로트.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록 하려무나. 너는 지나치 게 심각해. 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한 상태는 아니란다. 게다 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하지는 않다 니까.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벨 게들러가 샬로트 블랙록이 불구였다고 말 한 것을 기억했다. 레티샤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일까지 버렸던 것이다. 편지는 어느 것이나 환자에 대한 위로와 사랑의 말로 가득했다. 그는 동생 에게 사소한 일까지도 소상히 적어 매일매일 적어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샬 로트는 이런 편지를 잘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가끔 스냅 사진도 함께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갑자기 클래독의 가슴속에 흥분이 일었다. 이것으로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 른다. 이 많은 편지 속에는 레티샤 자신도 잊어버렸던 사실이 적혀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과거를 보여 주는 사진도 있어서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앨범에서 사진 을 떼어냈던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소니어 게들러의 사진이 발견될지도 모른 다. 클래독 경감은 조심스럽게 편지들을 다시 넣고 층계를 내려왔다. 레티샤 블랙록이 아래에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락방에 올라간 사람이 당신이었나요? 발소리가 들렸지만 누군가 했어 요.」 「미스 블랙록, 오래 전에 당신이 여동생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발견했습니 다. 그것을 가져가서 읽어 보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꼭 그래야 하나요? 그것들을 읽어 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되지요?」 「소니어 게들러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또 조그만 단서를 얻을까 해서요.」 「그건 사적인 편지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역시 가져가려는 거군요. 자, 가져가라구요! 하지만 소니어에 대해 서는 알아낼 게 없을 거예요. 그녀는 내가 게들러 씨와 일한 지 1,2년 만에 결혼했으니까요.」 클래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뭐든 쓸모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모든 자료를 조사해야 합니다. 저는 미 스 블랙록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스 블랙록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도라가 나를 노린 아스피린을 먹고 죽었어요. 다음은 누구죠? 패트릭, 줄 리어, 또는 필리퍼나 미치―젊은이들의 목숨이 위험에 놓여 있어요. 나를 위 해 따라놓은 포도주나 내게 보낸 초콜렛을 먹고 죽을지도 몰라요. 편지를 가 져가세요. 보신 뒤에는 태워 버리세요. 그것은 나와 샬로트 외에는 아무 의 미도 없는 편지에요. 모두 지난 과거일 뿐이에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모조 진주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클래독은 그녀의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편지를 가져가세요.」 (3) 클래독이 목사관을 방문한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어둡고 바람이 몹시 불었 다. 미스 마플은 벽난로 가까이에 의자를 당겨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번치 는 마룻바닥 위에 엎드려 옷감의 본을 뜨는 중이었다. 미스 마플은 클래독을 보자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반갑 게 바라보았다.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건지는 모르지만―이 편지들을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다락방에서 그 편지들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정말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미스 블랙록이 진정으로 동생을 위해 온갖 정 성을 다했어요. 그리고 의사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더군요. 고집스런 영감으로 수천 명 환자들이 그 고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지 모르죠. 그에게 는 새로운 방법도 없었을 테니까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글쎄요, 그런 것까진 모르겠지만 젊은 의사란 무턱대고 실험해 보고 싶어 하지요. 새로운 방법이라며 남의 이를 마구 쑤셔댄 뒤 더 이상 치료할 게 없 다고 내던지고 말죠. 난 옛날처럼 큰 약병을 받는게 좋아요. 뒤엔 그것을 버 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클래독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그 편지를 읽어 보십시오. 저보다는 미스 마플께서 그 무렵의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시겠지요. 솔직히 나는 그들의 심정을 통 이해할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은 낡은 편지를 폈다. 그리운 샬로트 집안에 문제가 있어 하루 편지를 못했단다. 랜들의 동생 소니어―너도 그녀 를 기억하지? 언젠가 네가 드라이브하자고 권했었잖니? 그리고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고―가 결혼을 발표했어.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와. 나는 그와 딱 한 번 만났지만 틀림없는 사람은 아니더구나. RG는 그를 몹 시 싫어하며 사기꾼이라고 한단다. 벨은 소니어에게 축하하며 그녀에게 바싹 붙어 있어. 소니어는 태연한 체하 지만 RG와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단다. 어제는 정말 그녀가 오빠를 죽이는 줄로 생각했을 정도였어. 나도 힘이 들어. 소니어를 타이르고 RG에게도 얘기하여 겨우 납득시켜 놓 으면 또다시 전처럼 되어 버리지. 정말 피곤한 일이야. RG가 뒷조사를 해보 니 스탠포디스라는 사내, 정말 안좋은 인물인가봐. 그 동안 그가 사업에 신경쓰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맡아 하고 있지. RG가 소신껏 해도 좋다고 하기에 나는 아주 신나는 날을 보내고 있단다. 그가 어 제는 나에게 말했어. 『고맙군. 세상엔 아직도 정직한 사람도 있어. 당신은 사기꾼 따위와 연애 하진 않겠지, 블래키?』 『나는 누구와도 연애 따윈 하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그는 말했지. 『그럼 한 번 시험해 볼까?』 그도 이따금 심한 장난을 한단다. 일전에는 이런 말도 했어. 『당신은 나를 좁고 빠른 길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소.』 나도 그럴 생각이야. 세상 사람이 어째서 정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하 지만 RG는 그렇지 않아. 그는 무엇이 위법인지 알고 있을 뿐이지. 벨은 이 사건에 대해 웃기만 하지. 소니어에 대해 마음 쓰는건 바보짓이라 고. 『소니어는 자기 재산도 있잖아요. 왜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못하지 요?』 그녀의 신세를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다시 말했어.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예요. 랜들은 소니 어가 결혼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봐. 그는 배금주의자니까.』라고 하더구나.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다. 아버지는 좀 어떠시니? 새삼스레 뭐라 할 말은 없 지만 네가 판단해서 잘 말씀드려. 그 뒤 누구라도 만나 보았니? 너무 침울해 있지 말아라. 소니어가 방금 안 부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그녀는 성난 고양이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어. 틀림없이 RG와 싸운 모양이다. 물론 소니어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 가 있어. 그 차가운 눈길을 한 번 받는다면 말이야. 샬로트, 기운을 내. 이번 요드 치료는 좋은 효과가 있을 거야. 나도 여러 가 지로 조사해 봤더니 결과가 좋을 것 같구나. 사랑하는 언니 레티샤 미스 마플은 편지를 접어 클래독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상당히 흥미를 느 끼는 것 같았다. 클래독이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성격이라고 상상하십니까!」 「소니어 말인가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 사람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거예요. 직감을 믿으세요.」 클래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난 고양이처럼 손을 쥐었다폈다 한다……그래요, 어떤 사람이 생각났습 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미스 마플이 중얼거려싿. 「신원 조사를 해야지요…….」 클래독이 말했다. 「만약 그 신원 조사의 결과가 나오게 되면…….」 번치가 입에 핀을 문 채, 불분명한 말투로 물었다. 「그 편지를 읽으니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의 일이 연상되지 않나요?」 「글쎄……닥터 블랙록은 메디스트 교회의 목사 커티스 씨와 닮은 데가 있 어요. 그는 자기 딸의 이에 금을 씌우지 못하게 했어요. 이가 썩는 것도 신 의 뜻이라고 말이에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은 수염도 깎고 머리도 자르지요? 자라는 게 신의 뜻이라면 그것도 깎지 말아야 되잖아요?』라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것은 다르다고 하더군요. 인간적이라나요. 하지만 이번 문제와는 관계없어요.」 「권총에 대해서는 잘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그 총은 루디 셔트의 것이 아 니었습니다. 치핑 클렉혼에서 그 권총을 갖고 있던 사람을 알아봐야겠습니 다.」 번치가 끼어들었다. 「이스터브룩 대령이 갖고 있어요. 그는 옷을 넣는 서랍 속에 그걸 넣어 두 었어요.」 「어떻게 알지요, 허먼 부인?」 「배트 부인이 그러더군요.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은 우리 집에 오지요. 그녀 말에 의하면 군인이니까 권총을 갖고 있는 건 당연하다더군요. 그리고 도둑이 들어오면 잡을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오래 전에요. 한 6개월쯤 되었을 거예요.」 「이스터브룩 대령이라…….」 클래독이 중얼거렸다. 번치가 여전히 입에 핀을 물고 말했다. 「마치 포인터 개같지 뭐예요? 무언가 냄새를 맡고 뱅글뱅글 돌다가 이상 한 걸 발견하면 멈추잖아요.」 클래독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이스터브룩 대령은 리틀 파독스에 인도에 관한 책을 주러 간 적 이 있습니다. 그때 문에 기름을 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매우 자상한 사람이죠. 미스 핀칠리피와는 달리…….」 미스 마플이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경감님, 우리와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당신은 결찰이에요. 사람들은 경찰 에게 모든 건 털어좋지는 않아요. 안 그런가요!」 「왜 그럴까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말을 못합니까?」 번치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종이조각을 고정시키고 또 끼어들었다. 「아주머니는 버터를 말하는 거예요. 암탉에게 줄 버터와 옥수수―때로는 베이컨 조각을 말이에요.」 미스 마플이 그녀에게 말했다. 「미스 블랙록에게서 온 쪽지를 보여 드려라, 번치. 아주 훌륭한 추리소설 같아요.」 「아주머니, 이것 말씀인가요?」 미스 마플은 그것을 받아들고 훑어본 다음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맞아, 이거야.」 그녀는 종이를 클래독에게 건네 주었다. 거기엔 미스 블랙록의 필체로 다음 과 같이 씌어 있었다. 조사해 보니 목요일이에요. 3시 이후에 언제든지 내게 전하려는 것을 평소 그 자리에 놓아두세요. 번치는 입에서 핀을 뱉어내고 웃었다. 미스 마플이 경감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목요일이라면 이 동네 농가에서 버터를 만드는 날이에요. 그리고 이웃에 게 조금씩 나누어 주기도 해요. 보통 미스 핀칠리피는 그것을 모으지요. 그 녀는 돼지먹이로 농장에서 버터를 긁어모아 간답니다. 하지만 이건 비밀인 데, 일종의 물물교환이지요. 버터를 받고 오이를 준다던가 돼지를 잡을 때 고기를 주나봐요. 가끔 가축이 사고를 당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런 물 물교환이 비합법적이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귀찮으니까 눈감아 주는 것일 뿐이죠. 난 핀치가 버터를 가지고 리틀 파독스 에 가서 언제나 놓아두는 그 자리에 놓는 거라고 생각해요. 평소 그곳이란 조리대 밑의 밀가루 그릇을 말하죠. 밀가루가 들어 있지 않아요.」 클래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잘 알았습니다.」 번치가 말을 이었다. 「또, 의류 배급표도 있어요. 돈은 쓰이지 않아요. 배트 부인이나 허긴스 부 인은 흔하지 않은 멋진 옷을 입고 싶어하죠. 그들은 돈 대신 배급표를 이용 해서 물건을 산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됐습니다. 모두 위법이군요.」 번치가 다시 입에 핀을 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답답한 법률 따위는 소용없다구요. 물론 난 그런 것은 안 해요. 줄리언이 싫어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쯤은 잘 알지요.」 경감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재미있고 간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한 부인이 죽었고 또 한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핍과 에머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소니어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 편지에는 한두 장의 스냅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그녀의 것은 없더군요.」 「어떻게 그녀가 없다는 걸 아시죠?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나요?」 「몸집이 작고 검은 머리칼이라고 미스 블랙록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에요? 흥미롭군요. 난 한 멋진 여자의 스냅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데, 머리는 위로 올리고 키가 늘씬하게 큰 여자였어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 만 소니어는 아니예요. 스웨트넘 부인은 젊었을 때 검은색 머리칼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번치가 대답했다. 「검지는 않았을 거예요.」 경감은 편지를 집어들었다.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의 사진을 찾아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 이제 그만…… 별 도움이 못되어 유감입니다, 미스 마플.」 「아니예요. 그 편지는 썩 도움이 돼요.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경감님. 특히 랜들 게들러가 드미트리 스탠포디스의 신상조사를 했다는 대목을 말이 에요.」 클래독은 미스 마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번치가 마룻바닥에서 일어나 홀로 나갔다. 전화는 전형적인 빅토리아식 홀 과 잘 어울리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번치가 돌아와 클래독에게 말했다. 「경감님 전화받으세요.」 그는 좀 놀란 듯한 표정으로 전화기 쪽으로 갔다. 「클래독인가? 나 라이스델일세.」 「네, 서장님.」 「자네 보고서를 검토했는데, 필리퍼 헤임즈가 남편이 탈주한 이후 만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진실로 말했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네. 열흘 전, 트럭에 치인 남자가 밀체스더 병원에 실려간 사건을 기억하나? 뇌진탕과 골절이었지.」 「어린 아이를 살리려다 치었던 사람 말입니까?」 「그래. 전혀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친지도 없고 아무래도 도망다니 는 사람 같다고 했잖나. 그가 어젯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신원을 알아냈네. 그는 남부 롬셔 부대의 전 육군 대위 로널드 헤임즈야.」 「그럼 필리퍼 헤임즈의 남편인가요?」 「맞아. 그런데 치핑 클렉혼의 버스표와 상당액수의 돈을 지니고 있었네.」 「필리퍼에게서 받은 돈일 겁니다. 저는 미치가 섬머 하우스에서 필리퍼와 말하는 걸 들었다던 그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필리퍼는 완강히 부 인했지만 그 교통사고는 그 전에―.」 라이스델이 말을 이었다. 「그래. 사내가 밀체스더 병원에 실려간 것은 28일, 리틀 파독스에서의 강 도사건은 29일에 일어났지. 그러나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네. 물론 그의 아 내는 사고를 전혀 모르고 있지. 그가 강도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도 모르지. 그러나 어떻든 남편이니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 가.」 클래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트럭에서 어린 아이를 구해낸 것 말인가? 그렇지 용감해. 그가 겁쟁이여 서 군대에서 탈주한 것은 아닌 모양이야. 게다가 모두 지난 일이야. 오점을 남긴 인물에게는 훌륭한 죽음이지.」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군요. 그리고 아들에게도.」 「그렇지. 아버지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되고, 그 부인도 재혼할 수 있으니.」 클래독이 천천히 말했다. 「저는 그것을…… 가능성이 생긴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그곳 담당이지. 그 소식을 자네가 그녀에게 알려주는 게 좋겠 네.」 「그러죠. 지금 곧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리틀 파독스로 돌아올 때까 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몹시 충격적일 테니까요. 그리고 그 전에 이야 기를 나누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19장. 사건 재구성 ◎ (1) 「가기 전에 스탠드를 켜드릴께요. 하늘이 어두워요. 곧 폭풍이 불어올 것 같아요.」 번치는 독서용 스탠드를 테이블 한쪽에 놓았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서 뜨개질을 하는 미스 마플이 밝게 뜨개질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기줄이 테이블 위를 가로질러 당겨지자 고양이 티글라스필레샤가 전기줄 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장난치지 마, 필레샤. 아무 거나 막 물어뜯는구나. 코드가 벗겨지면 감전 된단 말이야.」 미스 마플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번치.」 미스 마플이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켜려고 했다. 「거기가 아니예요. 코드 중간에 있는 작은 스위치를 켜야 해요. 이 꽃을 치워야겠어요. 거치적거리기만 하니까.」 그녀는 크리스마스 장미꽃이 꽂힌 수반을 집어들었다. 고양이가 꼬리를 흔 들어 번치의 팔에 뛰어오르는 바람에 수반에서 물이 몇 방울 떨어지자 고양 이는 깜짝 놀라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미스 마플이 배 모양의 작은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묻은 전기줄의 선이 벗 겨진 부분에서 탁탁 불꽃이 튀었다. 「어머, 퓨즈가 끊어졌어요. 집안의 불이 모조리 나갈 거예요.」 그녀는 옆의 전등을 켜보려고 했다. 「다 나갔어요. 멍청이야. 테이블 위에서 불꽃이 튀게 하다니 이 말썽꾸러 기 티글라스필레샤! 모두 네 탓이야. 제인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너무 놀라셨나보군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지금에야 깨달았 어.」 「가서 퓨즈를 고치고 줄리언의 서재에서 스탠드를 가져오겠어요.」 「괜찮다. 버스를 놓치겠어. 불이 없어도 돼. 난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할 게 있단다. 얼른 서두르지 않으면 버스를 놓치겠다.」 번치가 나간 뒤 미스 마플은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폭풍우가 위협하듯 거칠게 소리를 냈다. 미스 마플은 종이를 당겨 <스탠드>라고 쓰고 밑줄을 긋고 잠시 후 또 다 른 단어를 적었다. 그녀의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져 단어를 만들면서 움직여 나갔다. (2) 낮은 천장과 창살문이 달린 볼더즈의 거실에서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 드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것로이드, 너는 뭐든 해 보지 않으려는 게 나쁜 점이야.」 「하지만 핀치, 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것 봐, 마것로이드. 우리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돼. 탐정의 눈으로 보 아야 해. 우린 문을 여는 문제에 대해 해결을 보지 못했어. 범인을 위해 문을 열어 준 것은 네가 아니야. 너는 결백해, 마것로이드!」 마것로이드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미스 핀칠리피가 말을 이었다. 「치핑 클렉혼의 청소부는 말이 없다니, 따분해! 나는 항상 그걸 고맙게 생 각했는데 이번만은 오히려 실망이야. 그곳 사람들은 거실의 문에 대해 다 알고 있는데 우린 겨우 어제야 그 얘기를 들었단 말이야.」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게 옳았어. 문을 열고 회 중전등을 비추면서 권총을 쏘는 동작은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린 권총과 회중전등을 결부시키고 문에 대한 것은 포기했지. 그런데 우 리가 틀린 거야. 손에서 버려야 할 것은 권총이었어.」 「하지만 그는 권총을 들고 있었어. 난 보았어. 쓰러져 있는 그의 곁에 있 던 총 말이야.」 「그가 죽었을 때는 그랬지. 그건 분명해. 하지만 그는 권총을 쏜 게 아니 야.」 「그럼 누가 쏘았지?」 「그것을 알아내야 해. 하지만 누군가 분명히 쏘았겠지. 그가 누구이든 레 티샤 블랙록의 침대 곁에 독이 든 아스피린을 놓아둔 사람과 동일 인물 이야. 그 때문에 도라 배너까지 희생되었지만. 그리고 루디 셔트는 아니 야. 그는 죽어버렸으니까. 범인은 강도극이 있던 날 밤과 생일 파티에도 참석한 인물일 거야. 그렇다면 허먼 부인은 아니지.」 「내 생각엔 생일 파티가 있던 날 누군가가 그 아스피린을 놓아둔 것 같은 데?」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했을까?」 「그는 가끔 그 자리를 떠났지? 난 케잌이 묻어 끈적해진 손을 씻으러 욕 실에 갔고, 이스터브룩 부인은 미스 블랙록의 침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 더군. 그녀는―.」 「핀치! 넌 그녀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네가 만일 독이 든 아스피린을 갖다놓을 생각이 었다면 네가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지는 않 았을 거야. 그런데 그녀가 침실에 있는걸 모두 보았거든.」 「남자들은 2층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뒤쪽에 또 층계가 있어. 게다가 자리를 뜬 사람의 뒤를 쫓아가 살펴본 것 도 아니잖아. 그러니 2층에 가지 않았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어? 아무 튼 그 얘긴 그만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미스 블랙록을 살해하려던 사건을 더듬어 봐야겠어. 그러니 잘 기억해내야 돼. 모든 게 네게 달려 있으니 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어머, 핀치!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그건 두뇌 문제가 아니야. 그건 바로 눈에 대한 문제야. 즉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게 문제야.」 「하지만 난 아무것도 본 게 없는데.」 「마것로이드, 너의 좋지 않은 점은 방금 전에 말했듯이 뭐든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거야. 주의를 집중시켜 봐. 이건 실제로 벌어진 일이야. 그날 밤, 누군가 레티 블랙록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분명 그 방에 있었어. 그는 ―편의상 <그>라고 부를게. 물론 여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남자란 비열한 존재이니까―거실로 통하는 또 하나의 문에 미리 기름을 칠해 놓 았어. 왜그랬나 하는 이유는 묻지 마. 혼란스러우니까. 사실상 30분 쯤은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고 필요한 방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 을 거야. 파출부와 집주인이 없는 시간만 알면 간단한 일이지. 아무튼 그 는 철저히 계획을 세워 또 하나의 문에 기름을 발라 소리 없이 문이 열 리도록 한 거지. 불이 꺼지고 첫 번째 문 A가 활짝 열리며 회중전등 빛 이 비춘다. 모두 정신없이 소란스런 틈을 타서 범인 X―이 말이 가장 어 울리는군―는 또 하나의 문 B를 통해 조용히 홀로 나갔다. 그리고 스위 스 청년 뒤로 가서 레티 블랙록을 향해 두 발을 쏘고 그리고 스위스 청 년을 쏜다. 그는 사람들이 스위스 젊은이가 쏘았다고 여길 만한 곳에 총 을 떨어뜨려 놓고 불이 켜지기 전에 재빠르게 거실로 되돌아온다. 어때, 알겠어?」 「그래. 하지만 그게 누굴까?」 「마것로이드, 너만이 알 수도 있지.」 「내가? 나는 몰라, 아무것도!」 미스 마것로이드는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잘 써봐. 불이 꺼졌을 때 모두 어디에 있었지?」 「몰라.」 「아니야. 너는 알고 있어. 지금 너는 흥분해 있어. 너는 네 자신이 어디 있 었는지 알지? 문 뒤에 있었어.」 「그, 그래. 문이 열리면서 내 발가락에 닿았어.」 「그 때문에 휘청할 정도라면 치료를 받지 그러니? 그러면 멍든 게 나아질 거야. 자, 다시―넌 문 뒤에 있었고 나는 벽난로 앞에서 음료수를 기다리 던 참이었어. 레티 블랙록은 현관 가까이 있는 테이블로 담배를 가지러 갔었고 패트릭 시먼즈는 레티 블랙록이 술을 준비해 둔 옆방으로 가고 있었지?」 「그래. 그러니까 생각이 나.」 「좋아. 그때 누군가가 패트릭을 따라 그 방으로 갔거나 막 뒤따르려고 했 어. 분명 그 방에 있던 남자들 중의 하나인데 그가 이스터브룩 대령인지 에드먼드 스웨트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넌 기억하고 있니?」 「아니.」 「넌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군. 그리고 그 방으로 간 사람이 또 있어. 필리퍼 헤임즈였어. 나는 그때 그녀의 상체가 멋지다고, 승마를 하면 멋 질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기억을 하지. 그녀는 벽난로 앞을 지나 작은 방으로 갔어. 그런데 불이 꺼졌기 때문에 난 그녀가 무엇을 하려 했 는지 보지 못한거야. 이제 중요한 부분이야. 옆방에는 패트릭 시먼즈와 필리퍼 헤임즈, 그리고 이스터브룩 대령이나 에드먼드 스웨트넘 중 누군 가가 있었어―누가 범인인지는 몰라. 마것로이드, 잘 생각해봐. 셋 중에 누구인가 말이야. 두 번째 문으로 빠져나가려면 재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는 사람이 했겠지. 아마도 그 셋 가운데 한사람일 것이라고 생 각해. 그런 경우 마것로이드 너는 관계가 없어.」 마것로이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만 범인은 셋 중에 없을 수도 있어. 그러면 또 너는 관련되는 셈이 지.」 「난 몰라. 전혀 몰라.」 「아냐. 너는 생각해낼 수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네가 모른다면 아무도 모 르는 일이야. 볼 수 있던 사람은 너뿐인 걸. 너는 문 뒤에 서 있었기 때 문에 문에 가려 전등빛이 비치지 않았어. 그러니까 다른 쪽, 즉 회중전등 이 비치는 쪽을 볼 수 있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눈이 부셔도 너는 그 렇지 않았잖아.」 「아냐, 아냐.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회중전등이 방안을 빙 움직이며 비쳤으니까.」 「회중전등이 무얼 비추었지? 사람들 얼굴? 테이블, 의자?」 「그래, 그랬어. 미스 배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고 있 었어.」 「그래! 너의 그 머리를 움직이기가 정말 힘들구나. 자, 계속해 봐.」 미스 핀칠리피는 힘겹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 것은 그것뿐이야.」 「그럼 방안에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않았단 말이 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허먼 부인이 팔걸이 의장 앉아 어린애처럼 덜덜 떨고 있었어.」 「됐어. 허먼 부인과 미스 배너는 그랬었고, 넌 내가 무엇을 찾아내려고 하 는지 아직 모르겠니? 하지만 네가 본 사람을 빼고 나면 중요한 점, 네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남게 될 거야. 예를 들면 줄리어 시먼즈, 스웨트넘 부인, 이스터브룩 부인, 그리고 이스터브룩 대령이나 에드먼드 스웨트넘 중의 하나, 그리고 도라 배너와 번치 허먼이지. 그 중에 허먼 부인과 미 스 배너는 보았으니까 됐어. 한 사람만 남겨놓도록 기억해 봐. 마것로이 드, 그들 중에 분명히 그 방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지?」 미스 마것로이드는 열린 창틈으로 나뭇 가지가 닿는 소리에 움찔 놀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꽃이 있었지…… 테이블 위에…… 커다란 의자…… 회중전등은 게가 있 는 곳까지 비치지 않았어, 핀치. 허먼 부인은…….」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미스 핀칠리피가 다가갔다. 「여보세요? 네…… 역이라구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눈을 감고 29일에 대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회중전등 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들…… 창문…… 소파…… 도라 배너…… 벽…… 스탠드가 놓인 테이블…… 현관…… 그리고 갑자기 권총이 나타났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야.」 미스 핀칠리피가 화가 난 듯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뭐라구요? 아침부터라구요? 지금이 몇신데 이제야 전화를 하는 거죠? 빌 어먹을! 실수였다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그녀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개 말이야. 붉은 세터. 오늘 아침 8시부터 역에 있었대. 그 멍청이가 이제야 전화했어. 지금 데리러 가야겠어.」 그녀가 방을 나서자 미스 마것로이드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 좀 들어봐, 핀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이미 미스 핀칠리피는 차고로 쓰는 창고로 갔다. 그녀는 소리쳤다. 「내가 돌아온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가 생각해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해가 지고 말겠다. 너와 함께 가고 싶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어. 넌 항상 침실 슬리퍼를 신고 있는데 갈아신을 시간도 없단 말이야.」 미스 핀칠리피는 재빨리 자동차를 타고 밖으로 몰았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얼른 차 옆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핀치, 들어 봐. 지금 말해야겠어.」 「다녀와서 듣겠어.」 자동차는 속도를 내며 떠났다. 미스 마것로이드의 흥분한 목소리가 희미하 게 흩어졌다. 「하지만 핀치, 그녀는 거기에 있지 않았어…….」 (3) 머리 위에는 짙은 구름이 몰려와 주위는 어두컴컴해졌다. 미스 마것로이드 가 떠나간 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달려가 뜰의 줄에 걸린 빨래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도무지 생각도 못한 일이야…… 저런, 거의 다 말랐는데 다 젖겠네.」 그녀는 빨래 집게를 겨우 다 벗겨내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뒤돌아보았 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옷이 다 젖겠어요.」 「도와드릴까요?」 「고마워요. 빨래를 걷어야 하는데 빨랫줄에 손이 닿지 않아서요.」 「여기 스카프가 있어요. 목에 감아드릴까요?」 「고마워요…… 이 빨래 집게에 손이 닿을 수 있으면…….」 털로 짠 스카프가 그녀의 목에 부드럽게 감겼다. 그리고 갑자기 팽팽히 당 겨지기 시작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숨소리만 가늘어 질 뿐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스카프는 더욱 세게 죄어지고 있었다……. (4) 미스 핀칠리피는 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는 미스 마플 을 보고 자동차를 세웠다. 「젖으시겠어요. 우리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드시지 않겠어요? 번치가 버스 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았으니 집에 가셔도 아무도 없을 거예요. 난 마것 로이드와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 있답니다. 어딘지 잘못되어 있던 게 아닐 까 하구요. 개를 조심하세요,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거든요.」 「개가 예쁘군요.」 「귀엽지요? 그런데 그 멍청이들이 알려주지도 않고 아침부터 내내 내버려 두었답니다. 게으름뱅이들! 어머, 이런 말씨를 써서 죄송해요. 아일랜드에 있는 하인들에게 배웠지 뭐예요.」 작은 차는 볼더즈의 좁은 뒤뜰로 달려갔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오리며 닭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미스 핀칠리피가 말했다. 「마것로이드가 아직 모이도 안 줬군.」 미스 마플이 물었다. 「옥수수 구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미스 핀칠리피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농부에게 부탁하면 쉽게 구할 수 있죠.」 발밑의 닭을 쫓으며 그녀는 미스 마플을 집쪽으로 안내했다. 「많이 젖으셨어요?」 「아니예요. 이 옷은 방수가 아주 잘되어 있어요.」 「마것로이드가 불을 지펴 놓지 않았으면 내가 해야겠어요. 마것로이드, 어 디 있지 마것로이드! 얘는 어딜 갔담!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뜰 쪽에서 개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성가시게 구는군.」 미스 핀칠리피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커티, 커티! 다른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어요. 이름이 나빠요.」 그녀가 뜰을 바라보았을 때 빨래가 나부끼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 아래 에서 세터종의 개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이 보였다. 「마것로이드가 빨래를 걷지도 않았잖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또다시 개가 옷뭉치인 듯한 더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저 개가 왜 그러지?」 미스 핀칠리피는 잔디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미스 마플도 걱정스러워 종종걸음으로 그녀를 뒤쫓았다. 그러다 두 사람은 우뚝 멈춰서따. 그리고 미스 마플은 미스 핀칠리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미스 핀 칠리피의 몸이 굳어진 것을 느꼈다. 미스 핀칠리피는 발밑에 누워 있는 시퍼 렇게 굳어진 물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누군지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그녀의 꽁무니만 잡았다면 그냥…….」 미스 마플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라니요?」 미스 핀칠리피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미스 마플에게로 돌렸다. 「그래요. 나는 누군지 짐작하고 있어요. 세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예요.」 그녀는 죽어 있는 친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감 정을 억제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알려야겠어요. 그들이 오는 동안 미스 마플, 당신께 말씀드리지요. 마것로이드가 살해된 것은 내 잘못이기도 해요. 나는 게임을 한 거예요. 그러나 살인 게임은 아니었는데…….」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럼요. 살인은 게임이 아니죠.」 미스 핀칠리피가 다이얼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것 아닌가요?」 그녀는 간단히 사건을 신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면 경찰이 올 거예요. 난 당신이 이 일에 관계했다고 들었는데― 에드먼드 스웨트넘이 내게 말해 주었지요. 마것로이드와 내가 무엇을 하 려고 했는지 아세요?」 미스 핀칠리피는 역으로 나가기 전에 마것로이드와 주고받았던 얘기를 설 명해 주었다. 「내가 막 떠나려고 할 때 그녀가 내 뒤에서 소리쳤어요. 그래서 여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만일 좀더 기다렸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빌어 먹을 그 개를 15분쯤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데 말이에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누구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그렇죠. 사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지요…… 그런데 아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분명히 범인은 밖에 있었어요. 그녀는 거기 있었던 거 예요. 그런데 마것로이드와 나는 큰소리로 얘기했구요. 그래서 그녀는 모 조리 들은거예요.」 「그런데 당신 친구가 한 말을 들었습니까?」 「꼭 한마디였어요. 『그녀는 거기 없었어』라구요.」 미스 핀칠리피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 명의 여자를 지목했죠. 스웨트넘 부인, 이스터브룩 부인, 그리고 줄리어 시먼즈―그들 중 한 명이 거기에 없었던 사람이에 요.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 홀에 나갔으니 거실에 있지 않았던 거예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셋중에 하나에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밝혀낼 거예요.」 「잠깐, 미스 마것로이드는 지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소리쳤나요?」 「내가 말한 것처럼이라뇨?」 「뭐랄까……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라고 세 마디에 똑같이 강세를 주는 방법 말이에요. 그 말을 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거 기에 없었어―이 경우는 특정한 사람을 강조하죠. 그녀는 거기에 <없었 어>에 힘이 들어갔다면 의혹에 가득찬 말이지요. 또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 라고 하는 방법이 있지요. 이 마지막 경우는 말 전체에 강세가 들어 있지만 특히 거기에 강세를 두는 거지요.」 미스 핀칠리피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는 기억을 못해요. 마것로이드는 분명히 <그녀는 거 기에 없었어>하고 자연스럽게 말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 겠어요.」 미스 마플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글쎄요. 말하는 방법이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역시 어떤 암시를 나타내 고 있는 거에요. 그럼요. 이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고 말구요.」 미스 마플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20장. 미스 마플의 실종 ◎ (1) 치핑 클렉혼의 우체부는 아침은 물론 오후에도 배달하라는 지시를 받고 몹 시 풀이 죽어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10분 전에 그는 리틀 파독스에 세 통의 편지를 배달하였다. 한 통은 아이들 글시로 또박또박 쓴 것인데, 필리퍼 헤임즈가 수신인이었 다. 나머지 두 통은 미스 레티샤 블랙록 앞으로 온 편지였다. 미스 블랙록은 필리퍼와 함께 티 테이블에 앉아 편지를 뜯었다. 이날은 비 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린 까닭에 온실 문을 닫아 버렸으므로 필리퍼는 아 무 할 일이 없었다. 미스 블랙록이 처음으로 뜯은 봉투 안에는 부엌 보일러를 수리한 청구서가 들어 있었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다이먼드는 폭리를 취하는군. 이건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비싸잖아.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여길 거야.」 그러면서 또 한통의 편지를 뜯었다. 그것은 눈에 익지 않은 글씨체였다. 보고 싶은 레티 아주머니 오는 화요일에 아주머니를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이틀 전에 패트릭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아직 회답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달에 어머니가 잉글랜드에서 오시는데, 아주머니 를 뵙고자 하시거든요. 오후 4시 15분에 도착하는 열차로 치핑 클렉혼ㅇ 가 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줄리어 시먼즈 미스 블랙록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그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곧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문득 필리퍼는 어떻게 하고있는지 바라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띠면 서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줄리어와 패트릭이 돌아왔을까요?」 그제서야 필리퍼가 얼굴을 들었다. 「네, 아까 내가 들어온 뒤 곧바로 돌아왔어요. 옷이 비에 젖었더군요. 그 래서, 갈아입으려고 2층에 올라갔답니다.」 「그럼 좀 불러 줘요.」 「그러지요.」 「잠깐만―이것 좀 읽어 봐요.」 필리퍼는 편지를 읽고 나자 낯빛이 흐려졌다. 「이럴 수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서 줄리어와 패트릭을 불러 줘요.」 필리퍼가 층계 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패트릭! 줄리어! 레티 아주머니가 찾으세요.」 이에 패트릭이 층계를 뛰어내려와 방으로 들어섰다. 「필리퍼! 제발 여기 있어요.」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패트릭은 활기차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티 아주머니?」 「글쎄, 너는 이 편지 내용을 알 것 같은데…….」 묵묵히 편지를 읽어 가는 패트릭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 아이에게 전보를 쳤어야 하는 건데……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했을까.」 「이 편지는 틀림없이 줄리어가 쓴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정색을 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줄리어 시먼즈라고, 네가 여기에 데려다 놓은 여자는 대체 누 구냐? 네 누이와 내 친척이라고 말한 그 여자의 정체가 뭐냔 말이다.」 「그러니까―레티 아주머니, 모든 걸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행위가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한편으로는 재미있 는 장난이었답니다. 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나는 그걸 들어야겠다. 먼저, 그 젊은 여자가 누구냐?」 「제가 제대한 직후에 어느 칵테일 파티에서 알게 된 여잡니다. 우리는 이 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제가 여기에 오게 된다는 걸 알리고 말 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함께 오면 무척 즐거울 것이라고 여겼 어요. 줄리어는―아주머니께서 아시듯이 진짜 줄리어는 그때 배우가 되 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줄리어는 뜻 을 굽히지 않고 계속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파스 같은 큰 극단에 들어갔 습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저와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얌전히 약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너는 그 여자가 누구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줄리어가 태연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패트릭은 구원받은 듯 줄리어를 돌아보았다. 「모두 알려졌어.」 그가 말했다. 순간 줄리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걸 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랬군요. 그건 모두 사실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셨나 봐요?」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스 블랙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하긴 저 역시 화를 냈을 겁니다.」 「너는 누구야?」 줄리어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대로 밝힐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모두 말하겠어요. 저는 핍의 동생 에머,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에머 조슬린 스탠포디스가 제 세례명 이에요. 그 뒤 우리 아버지는 스탠포디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드 크루시 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부모님은 저와 핍이 태어난 지 3년쯤 뒤에 이혼하셨지요. 그 바람에 우리는 따로따로 헤어지고 말았어요. 그분들은 우리 가족을 갈라 놓은 거예요. 저는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그분은 매력 적인 사람이긴 했으나 아버지로선 아주 형편없었어요. 그 때문에 저는 수도원 신세를 지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였으며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요. 그분은 수도원에 딸을 맡길 적에 잘사는 것처럼 양육비를 선뜻 내놓았지만 그 다음부터 한두 해 동안은 으레 소식이 없었어요. 물론 그 사이사이에 아버지와 함 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는 등 재미있게 산 일도 있었어요. 그러나 전 쟁이 터지는 통에 우리는 완전히 헤어져 버렸답니다. 그 후에 저는 위험 한 경우를 여러 번 겪었어요. 한때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도 했었지요. 무척 스릴이 있었어요. 이야기가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 간단 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런던으로 옮긴 저는 미래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그때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던 외삼촌이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는 저에게 남겨 놓은 유산이 없을까 궁금하여 그의 유서를 살펴보았지요.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없었 어요. 그래서 미망인인 외숙모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뜻밖에 그녀는 약물에 중독되어 의식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어요. 결국 저에게 있어서 당신은 등불이었어요. 당신께서는 많은 재산을 가졌 으나,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쓸 사람이 친척 중에 없어 보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더 솔직히 말하겠어요. 저는, 만약에 당신이 저에게 호감을 갖 는다면―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랜들 삼촌이 돌아가셨기 때문 에 상황이 달라지리라는 예측에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산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없어져 버렸는데, 이로써 세상에 외톨 이가 된 가엾은 저에게 당신이 연민을 가지고 조금쯤은 도움을 주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을 여태껏 만나지 않았었습니다. 저 혼자서만 가 슴 속에 감격적인 상봉을 그렸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하였다는 말이야?」 미스 블랙록은 화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요.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없어서…… 제가 처량하다는 느낌을 금 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행운을 얻었어요. 저는 당신의 조카인지 육촌인지 그런 관계에 있는 패트릭을 만났지요. 굉장히 좋은 기회였어요. 제가 패트릭한테 접근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 주었습니다. 진 짜 줄리어는 이런 연극에 능숙했으므로 그녀를 충동질하여 세러 베르나 르처럼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하였지요. 제발 패트릭을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는 외로운 저를 안쓰러워하고 제가 누나로서 여기 에 와 있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용기를 주었던 거예요.」 「오냐. 그래서 그는 네가 경찰에 거짓말을 늘어놓을 적에도 모른 체해 준 것이냐?」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 이상스런 강도사건이 일어났을 때―아니, 그 일이 일어난 뒤로 저는 제 자신이 사건에 휘말리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실상 저는 당신을 죽인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제가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님을 당신이 잘 알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건과 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한데 패트릭조차 저를 수상하다고 생각한 모 양이에요. 그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경찰이 어떻겠어요? 그 사람들은 필 경 저를 용의자로 지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줄리어로 행세하다가 이 사건이 유야무야되면 줄 행랑칠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멍청이 같은 진짜 줄리어가 프로듀서 와 크게 싸우고 화를 이기지 못해 이렇듯 뒤죽박죽으로 일을 만들 줄 누 가 알았겠어요? 줄리어가 패트릭한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여기에 와도 되는가를 물었을 때, 그에게 아직 오지 말라고 전보를 쳤어야 했어요. 그 런데 그 일을 잊고 말았다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밀체스더에서 얼마나 곤궁하게 보내었는가를 모르실겁니다. 물론 자선단체의 신세는 지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저는 어딘가에 가고 싶었어 요. 주로 영화관에서 무서운 영화를 보고 또 보고 하며 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핍과 에머―.」 미스 블랙록은 중얼거렸다. 「경감은 진짜 오누이라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구.」 그녀는 줄리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네가 에머라면, 핍은 어디 있지?」 그녀의 물음에, 맑고 순진해 보이는 줄리어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저는 몰라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거짓없이 말해, 줄리어. 마지막으로 핍을 본 게 언제였지?」 이에 줄리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세 살 때 엄마와 같이 떠난 뒤로는 보지 못했어요. 또한 엄마도 만 날 수 없었으며,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정말이야?」 줄리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고말구요. 비록 제가 살인극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나, 저로선 한 번 시도해 보려고 들었을 겁니다.」 「줄리어―.」 미스 블랙록이 불렀다. 「나도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만, 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지?」 「네, 18개월에 걸쳐서…….」 「그럼 사격 솜씨가 제법이겠는 걸?」 미스 블랙록의 차갑고 푸른 눈이 줄리어를 응시했다. 「저는 사격에 자신 있어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당신을 쏜 것 은 아니예요. 믿지 않겠지만, 만약 제가 쏘았다면 빗나가지 않았을 거예 요.」 (2) 긴장된 방안의 공기를 뚫고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 미스 블랙록이 중얼거렸다. 미치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문밖을 내다보았다. 겁에 질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경찰이 또 왔어요. 이건 정말 고문이에요. 어째서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 고 괴롭힐까요? 저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수상께 편지를 쓰겠어요, 국 왕께도.」 클래독은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들어왔다. 그의 입가에는 모두들 두려워하 는 차가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의 클래독 경감과는 좀 달라 보였다. 「미스 마것로이드가 목이 졸린 채 살해당했슴니다. 이 사건은 아직 한 시 간도 안 되었습니다.」 그의 눈길은 줄리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어 양, 당신은 오늘 아침부터 어디에 있었지요?」 줄리어는 피곤한 듯이 말문을 열었다. 「밀체스더에 있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경감은 패트릭을 돌아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패트릭이 대답했다. 「아니예요.」 줄리어가 이내 부인했다. 「그렇게 해 보았자 금세 들통나고 말아, 패트릭. 버스 승객들이 우리를 잘 알고 있어서 모두 밝혀질 거야. 경감님, 제가 조금 먼저 돌아왔어요. 그 때가 4시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했지요?」 「산책을 하였습니다.」 「볼더즈 쪽으로 말인가요?」 「아닙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왔어요.」 경감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창백한 줄리어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짧은 동안의 침묵이 방안을 무겁게 내리누를 때 전화 벨이 울렸다. 미스 블랙록이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누구지요? 오, 번치, 뭐라구요? 아니오, 그녀는 안왔는데요. ……네, 지금 여기 와 계세요.」 그리고는 수화기를 떼며 클래독에게 말했다. 「경감님, 허먼 부인이 당신과 통화하고 싶대요. 미스 마플이 목사관에 돌 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답니다.」 클래독은 두어 걸음 걸어나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클래독입니다.」 수화기를 통해 번치의 음성이 어린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정말 걱정되요, 경감님. 제인 아주머니가 밖에 나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시거든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살해당했다는건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미스 마플이 미스 핀칠리피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시체 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계시겠군요?」 번치는 안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거기 없어요. 벌써 30분쯤 전에 돌아갔는데요. 아직 집 에 당도하지 않았다니 나도 걱정이 됩니다.」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데, 대체 어디 갔을까요?」 「혹시 이웃집에 가지 않았을까요?」 「아주머니가 갈 만한 곳이면 다 전화해 보았어요. 하지만 한결같이 없다 는 거예요. 경감님, 정말 염려스러워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클래독은 이렇게 말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즉시 댁에 가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아주머니가 밖에 나가시기 전에 써 놓은 쪽지도 있으니까 요. 전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클래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스 블랙록은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미스 마플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클래독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저도 동감입니다. 그녀는 나이가 많은데다 몸이 약합니다.」 「웬일이지요?」 미스 블랙록은 자신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이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이건 틀림없이 미 친 사람의 짓이에요.」 「아닌게 아니라 걱정입니다.」 그때 미스 블랙록의 손에 신경질적인 힘이 주어졌다. 그러자 진주 목걸이 가 끊어지면서 진주알들이 방바닥에 흩어졌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오, 내 진주! 진주!」 그녀의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한 고통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에 손을 가져가 흐느껴 울면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필리퍼는 허리를 구부리고 진주를 줍기 시작했다. 「미스 블랙록이 이처럼 이성을 잃는 건 처음이에요. 그녀는 언제나 그 목 걸이를 걸고 있었어요. 아마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선사한 것인가 봐요. 이를테면 랜들 게들러 같은 사람 말이에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경감은 맞장구를 쳤다. 필리퍼는 무릎을 꿇고 하얗게 빛을 발하는 진주를 주우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목걸이는 진짜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클래독은 대답 대신 한 알을 집어들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단 정적으로 말했다. 「그래요, 이건 진짜가 아닙니다.」 그는 더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이 진주알들이 진짜이겠는가. 알들은 너무 굵고 고르며 빛깔이 지나 치게 희었다. 분명히 가짜였다. 그러나 문득 클래독은 진짜 진주 목걸이가 전당포에서 몇 실링 안 되는 헐값에 팔렸던 형사사건을 생각해 냈다. 레티샤 블랙록은 비싼 보석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경감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만일 이 진주가 진자라면 어느 정도의 값이 나갈까? 더구나 랜들 게 들러가 보낸 것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있겠다. 이것은 모주품이 틀림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진짜 가 분명하면? 미스 블랙록은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성싶다. 아니면, 여러 사람 앞에 서 싸구려로 말해 놓고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 진주가 진짜로 판정되면 얼마 만큼의 값이 나갈까? 얼른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엄 청난 금액이리라. 살인을 범해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겠지. 누군가 진자 진주 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자에게는. 경감은 상념의 늪을 헤매다가 흠칫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다. 미스 마플이 실종되었다니 목사관에 가야만 하였다. (3) 클래독 경감이 당도하자, 수심에 가득찬 번치와 그녀의 남편이 그를 맞았 다. 「아주머니는 아직 소식이 없어요.」 먼저 번치가 말했다. 「볼더즈를 떠나면서 이곳으로 곧잘 가시겠다고 말했던가요?」 줄리언이 물었다.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었습니다.」 클래독은 마지막으로 미스 마플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대답 했다. 그는 이어서 딱딱하게 굳은 듯한 차가운 입술과 파란 눈이 유난히 빛 나던 것을 생각했다. 무슨 결심을 한 듯한 모습이었지. 무엇 때문일까? 어디에 가려는 것이었을 까? 「제가 미스 마플을 마지막 보았던 것은, 마침 대문이 있는 곳에서 플레쳐 형사부장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목사관에 와 있는 미스 핀칠리피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녀가 곧바로 목사관에 돌아가는 줄만 알았어요. 제 차로 모셔다 드렸으면 좋았겠지만,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은 터에다, 또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셨거든요. 어쩌면 플레쳐 씨 가 알고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클래독은 플레쳐가 볼더즈에 가 있으려니 짐작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고 어디로 간다는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 경감은 그가 어 떤 까닭이 있어서 밀체스더에 간 모양이라고 여기었다. 클래독 경감은 본서에 연락해 보았으나 거기에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번치가 전화로 말한 것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미스 마플이 남기고 간 종이쪽지는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뭔가 써 있다 고 하셨지요?」 번치가 그 쪽지를 갖다 주었다. 경감은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쳤다. 번치는 경감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면서 그가 읽는 것을 들었다. 글씨가 날려 있어 서 읽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램프>. 그리고 <제비꽃>이라 씌어 있었다. 그 다음에 한 칸을 띄고, <아스피린 병은 어디 있지?> 이 구절 다음 줄은 읽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 잠자코 있던 번치가 읽 었다. 「<달콤한 죽음>, 이건 미치가 만든 케잌의 이름이에요.」 그 뒤를 클래독이 읽었다. 「<신상 조사서를 만든다>. 신상 조사서? 한데, 이건 또 무슨 뜻이지? <극 한의 고통을 용기 있게 견디어 내는……>, 도대체 모를 말이로군.」 클래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읽어 갔다. 「<요드 치료>. <진주>? 오, 진주 말이군. 그리고는 <로티>, 아니 <레티 >로군. 레와 로를 구별하기가 어렵군. 그 말 다음에는 <베른>아리고 써 있고, <양로 연금>이라? …… 이건 웬 뚱단지 같은 말이야?」 그들은 도깨비에게 홀린 듯 어리둥절한 눈길을 교환했다. 클래독은 재빨리 그것을 연결지어 보았다. 「램프. 제비꽃. 아스피린 병은 어디 있지? 달콤한 죽음. 신상 조사서를 만 든다. 극한의 고통을 용기있게 견디어 내다. 요드 치료. 진주. 레티. 베른. 양로 연금.」 번치가 입을 열었다. 「이 말들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는데 요.」 「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한데 그녀가 진주라고 쓴 게 이상하군요?」 「진주가 어떻습니까? 그것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미스 블랙록은 세 줄짜리 진주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걸 보고 웃고는 하였지요. 어쩐지 꼭 가 짜로 보이거든요. 그러나 레티는 그걸 멋이라 여기는 것 같았어요.」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클래독은 의미있게 말했다. 「설마 그 진주가 진짜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부인께서는 그처럼 커다란 진짜 진주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것들은 너무 유리구슬 같잖아요?」 클래독은 그제서야 어깨를 으쓱했다. 「참, 지금 당면 문제는 미스 마플이지요. 지주에 관해선 나중으로 돌리고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종 이쪽지에 쓴 말들로 미루어 보면, 그녀에게 어떤 위험이―무서운 위험이 찾 아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플레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클래독 경감은 목사관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미스 마플을 빨리 찾아야 한다. 이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마침 그때 비에 젖은 월계수 그늘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경감님!」 그것은 플레쳐 형사부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 21장. 세 여인 ◎ 리틀 파독스에서는 저녁 식사를 막 끝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답답 한 분위기였다.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린 패트릭은 침착성을 잃은 채 더듬더듬 이야기했으 나 분위기의 변화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필리퍼 헤임즈는 얼빠진 듯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으며, 미스 블랙록은 전날의 명랑함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카메오 목걸이를 걸고 있었지만, 검고 둥그스름한 눈동자에는 두려움의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손가락을 연방 비비꼬았다. 오직 줄리어만이 시종 냉정하고 의젓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레티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그녀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저로선 이곳을 떠날 수도 없으려니와, 경찰이 그걸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 다. 하지만 제가 오랫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머지않아 클래독 경감이 찾아와 제 손에 수갑을 채울 테니까요. 왜 여태까지 그가 오지 않았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이에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지금 경감은 그 늙은 미스 마플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어.」 「미스 마플도 살해됐다고 여기세요?」 패트릭은 호기심에 찬 어조로 물었다. 「그건 어떤 근거에서죠? 그녀가 이번 사건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 가요?」 미스 블랙록이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미스 마것로이드가 그녀한테 귀띔했을 게다.」 「만일 그녀가 살해되었다면―.」 패트릭이 말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범인은 다만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는 단정하다시피 자신있게 말했다. 「그야 미스 핀칠리피입니다. 미스 마플이 살아 있는 것을 마지막 본 곳이 볼더즈였으니, 필경 그녀가 거기를 뜨지 않았다고 봅니다.」 「골치가 아프구나.」 미스 블랙록은 힘없이 말하고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어째서 핀치가 미스 마플을 죽였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구 나.」 패트릭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건 핀치가 마것로이드를 죽였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지요.」 그의 말을 듣고 필리퍼가 참견했다. 「핀치는 결코 마것로이드를 살해하지 않았을 거예요.」 패트릭은 굽히지 않았다. 「가령 마것로이드가 우연히 핀치의 행위를 알고 이것을 폭로하려 들었다 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핀치는 마것로이드가 살해될 때 정류장에 있었는데요.」 「하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죽일 수도 있어요.」 이때 별안간 레티샤 블랙록이 큰소리를 질러 모두 깜짝 놀랐다. 「살인, 살인, 살인―이제 살인 이야기를 그만할 수 없어? 뭣이 좋아서 그 소름끼치는 걸 계속 입에 올리는 거야! 난 지금처럼 공포감에 휩싸이긴 생전 처음이란 말야. 물론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어. 내 자신을 내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너희들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살 인자한테 어떻게 한단 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린 너무나 무력해. 오, 주님!」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두 팔로 감싸쥐었다. 잠시 뒤에 얼 굴을 들고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흥분했었구나.」 「괜찮습니다, 레티 아주머니. 제가 곁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패트릭은 힘있게 말했다. 「네가 말이지?」 블랙록은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 말은 비난이 숨겨진 환멸감을 담고 있었 다. 이것은 저녁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 미치가 들어왔다. 그 리고 저녁 요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시각 이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 방의 문을 걸어 잠그 고 내일 새벽까지 꼼짝않겠어요. 아, 무서워―사람들이 살해되다니요?― 그렇듯 사람 좋은 미스 마것로이드가 죽다니, 대관절 누가 그런 악행을 저질렀을까요? 아마 미치광이 짓일 거예요. 미친 놈은 자기가 어떤 짓을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니까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부엌에 어두운 그 림자가 깃들고―무슨 소리도 들리고―마당에 누가 서 있는 것 같기도 하 였어요. 그뿐인가요. 식품 저장소 옆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보았지요. 또 발소리가 들린 적도 있어요. 이제 저는 제 방으로 가서 당장 방문을 잠그 고 장롱을 옮겨다가 문앞에 놓을 거예요. 그리고 날이 새면 그 잔인하고 심술궂은 경찰관한테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하겠어요. 만약 못 나가게 하 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어요. 『나가게 할 때까지 줄곧 소리치겠어요』라 고 말이에요.」 모두들, 미치의 비명을 듣기라도 하듯이 몸서리를 쳤다. 「전 제 방으로 가겠어요.」 그녀는 이 말을 강조하듯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런 다음 입고 있던 앞치 마를 벗어 던졌다. 「오늘 밤 안녕히 주무세요, 미스 블랙록. 당신은 틀림없이 내일 아침에 살 아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작별인사를 하는 거예요.」 미치는 머뭇거리지 않고 문 쪽으로 갔다. 이윽고 문은 전과 다름없이 조용 히 닫혀졌다. 그러자 줄리어가 일어났다. 「아주 그럴싸한 대비군요. 그럼 제가 저녁을 하지요. 패트릭이 레티 아주 머니의 경호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저는 식탁에 있을 필요가 없겠어요. 게 다가 당신을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있어선 큰일이니까요.」 이날 줄리어는 맛있는 저녁을 준비했다. 필리퍼가 거들겠다고 부엌에 얼굴 을 내밀었으나, 줄리어는 끝내 도움을 거절했다. 「줄리어,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데요.」 「우리만의 이야기는 들을 겨를이 없어요. 그러니 식당으로 돌아가세요, 필 리퍼.」 드디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거실의 난로 앞 조그만 탁자에 둘러앉 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러면서 저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8시 30분에 전화 벨이 울렸다. 클래독 경감이었다. 「15분 이내에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이스터브룩 대령 부부와 스웨트넘 부 인과 그 아들도 함께 가게 됩니다.」 「한데 경감님, 실은 오늘 밤 사람을 만날 기분이 아닙니다.」 미스 블랙록은 지친 음성으로 겨우 말했다. 「당신의 기분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급히 서둘 일이라서…….」 「미스 마플을 찾았나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마친 경감은 전화를 끊었다. 줄리어는 커피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치가 서 있 었다. 그녀는 개수대 옆에 쌓아 놓은 접시들 속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미치는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깨끗이 해놓은 부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 프라이 팬은 내가 오믈렛 만들 때만 사용한단 말이에요. 줄리어, 거기다 무얼 하 였지요?」 「양파를 볶았는 걸.」 「못 봐 주겠군. 모두 엉망을 만들었어. 오믈렛 팬만 해도 그렇지. 이건 사 용 후에 기름종이로 닦아내야 하는데 물로 씻으려 하다니! 그리고 당신 이 쓴 이 남비는 우유를 끓일 때만 사용했다구요.」 줄리어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당신이 프라이팬을 어떻게 쓰는지 내가 알 수 있나요? 당신은 잠자러 간 다 해놓고 왜 다시 일어났지요? 내가 깨끗이 치워 놓을 테니 어서 나가 세요.」 「안 돼, 싫어요. 내 부엌을 함부로 쓰게 놔둘 순 없어요.」 「어머나, 미치, 당신이 어째서 그러는지 까닭을 모르겠네요.」 줄리어는 화를 내며 부엌 밖으로 나왔다. 마침 벨이 울렸다. 「난 현관에 나가지 않아요.」 미치가 부엌에서 소리쳤다. 할수 없이 줄리어가 현관으로 나갔다. 내심 불 쾌함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방문객은 미스 핀칠리피였다. 「느닷없이 찾아와 미안해요. 실은 경감님이 전화로 여기에 오라고 하여 왔 답니다.」 「경감님은 당신이 여기 오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줄리어는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의아해 하였다. 「하긴, 그분은 나한테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난 웬일인지 오고 싶었지요.」 아무도 미스 핀칠리피에게 마것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원망을 말하지 않았 다. 그녀 역시 초췌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 뒤 미스 블랙록이 말했다. 「방안의 불을 모두 켜. 그리고 난로에 석탄을 더 많이 넣고. 난 웬일인지 자꾸만 한기가 드는 걸. 미스 핀칠리피, 난롯가로 와서 앉으세요. 경감님 께서는 15분 안에 오신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미치가 다시 내려왔어요.」 줄리어가 말했다. 「그래? 나는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가, 혹시 완전히 돌아버린 건 아닌가 하고 가끔 생각해. 아니면, 우리들이 모두 돌았던가.」 「내 생각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모두가 미쳤다고 봅니다.」 미스 핀칠리피가 얼른 나섰다. 「그렇지 않겠어요? 무서우리 만큼 지능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 이것이 내가 그려보는 범인이거든요.」 밖에서 차가 멎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뒤에 클래독과 이스터브룩 대령 내외와 에드먼드, 또한 스웨트넘 부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유난히 침통한 표 정을 지었는데, 이스퍼브룩 대령은 이를 씻어 버리려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외쳤다. 「야! 불이 정말 좋군 그래.」 밍크 코트를 입은 이스터브룩 부인은 앞으로 손을 모으고 남편 곁에 앉았 다. 전에는 평범하고 예쁜 여인이었던 그녀는 이젠 생기가 없는, 마치 노쇠 한 족제비 얼굴을 하였다. 에드먼드는 괜스레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스웨트넘 부인은 애써 분위기를 살리려고 지껄여댔다. 「세상이 어찌 될려고 그러는지 큰일이에요. 안 그런가요? 모든 게 다 잔혹 하다구요. 차라리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져요. 이 다음은 또 누가 당할는지 모를 재난이거든요. 미스 블랙록, 브랜디를 약간 마셔 보면 어떻겠습니까? 정신을 들게 하는 데는 반 잔의 브랜디로 도 효과를 본답니다. 특히 충격을 받았을 대 아주 좋대요.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이게 된 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고 무섭기조차 했어요. 그런 데 클래독 경감님이 우리 보고 꼭 와야 한다잖아요. 아직 그녀를 찾아내 지 못했으니, 이보다 중대한 문제가 어딨겠어요. 아시겠지만, 목사관의 그 불쌍한 미스 마플 말이에요. 번치는 안절부절 못하여 실성하다시피 한 모 양입니다. 그녀가 글세, 집에 가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미스 마플은 나 있는 곳에 오기는커녕 오늘은 보지도 못했답니다. 그녀가 우리 집에 왔었더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텐데―난 뒤쪽에 있는 응접실에 있 었고, 에드먼드는 앞쪽 서재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녀가 어디로 들어 왔든 우리 눈에 금방 띄었겠지요. 아무튼 그 착한 분이 아무 일 없이 돌 아오기만 빈답니다.」 「어머니.」 에드먼드는 못 참겠다는 듯 스웨트넘 부인을 응시했다. 「제발 잠자코 계십시오, 네?」 「그래, 이젠 더 지껄일 말도 없다.」 그녀는 이렇게 대꾸하고서 줄리어 옆자리에 앉았다. 클래독 경감은 문 옆에 서 있었다. 세 명의 여자는 그를 향해 거의 한 줄로 앉았다. 줄리어와 스웨트넘 부인은 소파에, 그리고 이스터브룩 부인은 남편 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경감이 의식적으로 정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앉은 것이 그로선 편리하게 되었다. 이 밖에 미스 블랙록과 미스 핀칠리피는 난롯불 옆에 바짝 다가앉았고, 에 드먼드는 그들 가까이에 서 있었다. 필리퍼는 그 뒤쪽 조금 떨어진 그림자 속에 자리잡고 앉았다. 클래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스 마것로이드가 살해되었음은 여러분께서 알고 계신 사실입니다. 경찰 은 그녀를 살해한 사람이 여자라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나는 지 금부터 여기에 모인 여자 분들이 오늘 오후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무 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줄리어라고 자칭하는 저기 젊 은 아가씨만은 이미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한테 다시 한 번 물 어볼 작정입니다. 줄리어 양, 만약 당신의 답변이 당신을 불리하게 한다 고 판단되면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말씀하지는 것은 에드워즈 순경이 모두 기록하여 법정에서 증거로 쓰이게 됨을 밝힙 니다.」 「그런 건 당신이 진술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줄리어가 따지고 들었다. 그녀의 얼굴빛은 핼쓱했지만 음성은 차분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어쨌든 원하신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4시에서 4시 20분 사이에 저는 컴프튼 농장 옆의 냇물을 향해 들판을 따라 걸었어요. 그런 다음에 포플 러 나무가 있는 길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볼더즈 근처에는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스웨트넘 부인께서는요?」 이때 에드먼드가 불쑥 물었다. 「아까 그 말은 우리한테도 적용됩니까?」 경감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얼마 동안은 줄리어 양에게만 적용됩니다. 당신의 답변이 당신 을 불리하게 한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분이나 변호사를 설정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가 없는 분은 답변을 회피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웨트넘 부인이 외쳤다. 「하지만 그런 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지금 당장 그때의 상황 을 소상하게 밝힐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러면 지금 부탁드립니다, 스웨트넘 부인.」 「그러니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리 말합니다마는, 나는 미스 마것로이드의 죽음과 추호도 관계가 없습 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점을 알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그러나 나는 경찰 이 하찮은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중하게 대답해야 함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기록>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런가요?」 스웨트넘 부인은 한참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에드워즈 경관에게 눈길 을 보내었다. 그리고 상냥한 어조로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 천천히 이야기하겠어요. 내 말이 그렇게 빠른건 아니지요?」 에드워즈 순경은 속기가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도 주변이 없어서 귓불을 붉 히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부인. 굳이 바라자면 조금만 더 천천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웨트넘 부인은 다시 진술로 들어갔으며, 쉼표와 마침표가 찍힐 만한 곳에 서는 잠시 말을 쉬었다. 「물론 판에 박히듯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저, 시간 관념 이 희박하거든요. 더군다나 우리집 시계는 전쟁이 터진 뒤부터 거의 절반 이나 고장이 났답니다. 움직이는 것들도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은 늦거 나 빠른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잊어버리고 태엽을 감아 주지 않는 경우 도 있어요.」 여기서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또 입을 열었다. 「그때, 그러니까 오후 4시에 나는 양말의 뒤꿈치를 만들고 있었어요. 웬일 인지 잘못 뜨고 있어 시간이 걸렸지요―평직이 아닌 안뜨기를 하고 있지 않겠어요? 만일 그 일이 빨리 끝났더라면 정원에서 국화를 잘라 내고 있 었을 텐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건 좀더 일찍이었어요. 비가 오기 전이었거든요.」 경감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비는 정확히 4시 10분부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나요? 나는 비가 너무 많이 오자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항상 비가 올 때는 거기 물이 새는 곳에 빨래통을 갖다 놓곤 하였던 거예요. 먼저 눈에 띈 것은 물이 가득 찬 물받이였어요. 홈통이 막혔구나 생각했답니 다. 그래서 곧 2층에서 내려와 비옷과 장화를 꺼냈습니다. 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에드먼드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필경 소설을 쓰다가 중요한 대목에 이른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더 이상 그 애를 방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들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는 늘 그렇듯이 오 늘도 혼자서 일했어요. 먼저 빗자루를 긴 장대에 묶어서―.」 클래독은 에드워즈 경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는 걸 보고 다급하게 물었 다. 「그럼 부인은 그 시간에 홈통르 소제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네, 나뭇잎들이 홈통을 막고 있었어요. 그 작업은 제법 오래 걸렸지요. 하 지만 결국 깨끗이 끝낼 수 있었답니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옷에서는 썩은 나뭇잎 냄새가 지독했어요―빨래를 하였지요. 그러 고 나서 부엌에 가 주전자를 올려 놓았어요. 부엌 시계로 그때가 6시 15 분이었습니다.」 에드워즈 경관은 눈을 껌벅거렸다. 스웨트넘 부인은 이를 알아채고 재빨리 사족을 달았다. 「그 시각을 정확하게 말하면 5시 20분 전입니다.」 「부인이 홈통을 치우는 걸 누가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만약 본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도와 달라고 하였겠지 요. 혼자서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비가 오고 있을 때 부인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밖에서 홈통 청 소를 하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부인이 홈통을 청소한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구요?」 이에 스웨트넘 부인이 말했다. 「의심스러우면 우리집 홈통을 조사해 보세요. 아주 깨끗이 뚫려 있을 겁니 다.」 「스웨트넘 씨, 어머니가 당신을 부를 때 그 소리를 들었던가요?」 「못 들었습니다. 나는 잠들어 있었거든요.」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에드먼드―나는 네가 소설을 쓰는 줄로 알았다.」 클래독 경감은 이스터브룩 부인 쪽을 보았다. 「그럼 이스터브룩 부인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나는 그 시간에 아치와 더불어 서재에 있었습니다.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아치, 그렇지 않아요?」 부인은 선량해 보이는 눈빛으로 남편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스터브룩 대령은 잠시 주저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아내의 손을 쥐었다. 「당신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해.」 그런 다음 클래독 경감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경감님.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아내는 흥분상태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경과민이어서 진술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는다는 걸 알지 못합니다.」 「아치―.」 이스터브룩 부인이 볼멘소리로 불렀다. 「글쎄, 당신은 저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거예요?」 「실제로 난 없었지. 않 그렇소, 여보? 나는 매사에 솔직해야겠다고 다짐하 지요. 하물며 오늘과 같은 진술에선 특히 그러하오. 나는 클로프트 엔드 에 가서 램프슨 농부와 한참 양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때가 3 시 45분이었어요. 그리고 비가 그친 뒤 집에 돌아왔는데, 차를 마시기 직 전의 시각이 4시 45분이었습니다. 로라가 케잌을 굽고 있었지요.」 「이스터브룩 부인, 당신께서도 외출했었습니까?」 예쁘장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 겁에 질린 족제비처럼 보였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허둥거렸다. 「아니예요. 나는 집에서 줄곧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보다 앞서, 그러니까 3시 30분경에 잠깐 나갔다 오긴 했어요. 산책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지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경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클래독은 조용히 말했다. 「이것으로 됐습니다, 이스터브룩 부인. 방금 말씀하신 게 타이핑되어 나올 테니, 읽어보고 잘못이 없으면 서명해 주십시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갑자기 불쾌한 안색을 하고 경감을 보았다. 「잠깐! 어째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디에 있었는지 질문하지 않았지요? 헤임즈 부인과 에드먼드 스웨트넘 말인데―이를테면, 에드먼드가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요?」 클래독 경감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죽기 전에 어떤 말을 하였습니다. 강도 사건이 이곳에 서 있던 날 밤에 누군가가 이 방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속 있어 야 할 사람이 없었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스 마것로이드는 그날 자 기가 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꼽 아 나가다 보니 자기가 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 다.」 「아무도 무엇을 보지 못했을 텐데요?」 줄리어가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미스 핀칠리피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것로이드는 보았을 거예요. 그녀는 문 뒤에, 지금 클래독 경감님이 서 계신 저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방에서의 일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때 미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은 겨우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녀는 문을 왁살스럽게 열고 경감을 옆으로 밀치며 나타났다.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경감님, 당신을 이 미치를 부르지 않았지요? 하찮은 미치, 부엌데기 미치 는 부엌에나 틀어박혀 있으란 말이죠, 융통성 없는 경감님? 하지만 한 귀 로 흘려 버리지 마세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아무렴요, 강도사건이 있던 날 밤에 제가 본 것이 있거든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으나 지금가지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시기가 올 때까지 말하지 않고 기다릴 거예요.」 클래독이 물었다. 「그럼 사건이 잠잠해지면 그 사람에게서 돈이라도 받겠다는 생각이오?」 미치는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그에게 응수했다. 「오, 저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래요, 그러면 좋겠네요. 제 가 아주 중요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모른 체하고 있겠어 요? 아마 오래지 않아 저한테 많은 돈이 생기겠지요. 어쨌든, 저는 들었 어요. 죄다 안단 말이에요. 핍과 에머, 이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니까 요.」 미치는 문득 줄리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사람은 가짜가 틀림없어요. 저는 돈을 뜯어낼 수도 있지만, 별안간 두 려워졌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야겠단 말이에요. 이대로 있으면 누가 저를 죽일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밝히겠어 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경감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말하겠어요. 그날 밤에 저는 이미 말했던 대로 식기실에 있지 않고, 총소 리를 들었을 때는 식당에 있었지요. 저는 열쇠구멍으로 홀을 들여다보았 어요. 어두운 홀에서 총소리가 또다시 들리고 회중전등이 바닥에 떨어졌 어요. 그 순간 비추었지요, 저 사람을. 손에 권총을 들고 그 사람 가까이 서 있었어요. 바로 미스 블랙록이었습니다.」 「나를? 너 어떻게 되지 않았니?」 미스 블랙록은 아연 실색하며 일어섰다. 에드먼드가 외쳤다. 「그럴 리 없어요! 미치는 미스 블랙록을 볼 수 없었어요.」 「볼 수 없었다구요, 스웨트넘 씨?」 클래독이 에드먼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어째서 볼 수 없지요? 권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미스 블랙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그럼 당신이었군, 그렇지요?」 「나라구요? 당치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요!」 「들어 보시오. 당신은 이스터브룩 대령의 권총을 훔쳐 루디 셔트와 사건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패트릭의 뒤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불이 나가자, 기름을 칠한 문을 통해 홀로 빠져나가 미스 블랙록을 쏜 다음 루 디 셔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와 라이터 불을 켰어요.」 에드먼드는 말이 막힌 듯 멍청히 있다가 말했다. 「터무니없군요.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합니까? 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요?」 「만일 미스 블랙록이 게들러 부인보다 먼저 죽으면 두 사람이 유산을 받 게 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요? 다시 말해 핍과 에머 두 사람이 말입니다. 줄리어 시먼즈가 에머라는 건 밝혀졌거니와…….」 「핍이 나라는 말입니까?」 에드먼드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건 허황되고 너무 비약적인 추측입니다. 내가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는 나이뿐이지요. 나는 자신이 에드먼드 스웨트넘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호적등본이든 졸업증서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보여 주겠습 니다.」 「그 사람은 핍이 아니예요.」 방 한구석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필리퍼 헤임즈가 핼쓱한 얼굴로 걸 어 나왔다. 「경감님, 제가 핍입니다.」 「당신이? 헤임즈 부인 당신께서요?」 「그렇습니다. 모두들 핍이 남자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줄리어는 우리가 여자 쌍둥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녀가 오늘 오후에 그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군요.」 줄리어가 말했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난 갑자기 당신이 누구라는 걸 알게 됐 어요. 그러나 조금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필리퍼가 그 말을 받았다. 「나도 줄리어와 똑같은 생각을 하였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암담하기만 하였습 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가 게들러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게들러 부인은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고, 그녀가 죽으면 유산이 블랙록이라는 여자한테 넘어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는 미스 블랙록이 살고 있는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루커스 부인에게 고용되 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 블랙록은 외로운 노인이었으므로 저를 기꺼 이 도와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능 히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 아들 해리의 학비를 대주기만을 바랬던 거 예요. 따지고 보면 미스 블랙록의 재산은 게들러의 것이고, 게다가 그녀 는 특별히 돈을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필리퍼는 여태 가슴 속에 간직해 온 비밀을 한꺼번에 털어놓듯 빠르게 말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강도사건이 발생했어요. 저느 별안간 무서워졌어요. 미스 블랙 록을 죽일 동기를 제가 충분히 지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줄리어가 누 구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쌍둥이라지만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가 아 니어서 용모가 아주 닮지는 않았거든요. 결국 의심받는 건 저밖에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아름다운 금발을 이마에서 뒤로 쓸어넘겼다. 클래독은 편지 봉투 속에 있었던 빛바랜 사진의 주인공이 필리퍼의 어머니 라고 생각했다. 혈육간의 닮은 점은 숨길 수가 없다. 소니어가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버 릇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는데, 이제 보니 필리퍼가 그러고 있었다. 「미스 블랙록은 저한테 잘해 주셨습니다. 아주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저 는 그녀를 죽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추호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 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틀림없는 핍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이제 아셨지요? 더 이상 에드먼드를 의심해선 안 됩니다.」 「의심치 말라구요?」 클래독의 음성에는 날카로움이 번득였다. 「에드먼드 스웨트넘은 금전에 애착하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돈 많은 여 자와 결혼하려는 젊은이지요. 그런데 미스 블랙록이 게들러 부인에 앞서 죽지 않으면 그는 부자가 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게들러 부인이 미스 블 랙록보다 먼저 죽게 될 상황이었으니 어떤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 을 겁니다. 스웨트넘 씨, 그렇지 않습니까?」 「황당 무계한 말이에요!」 에드먼드가 소리쳤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명이 들려 왔다. 부엌 쪽에서 끔찍한 공포의 소리가 길 게 꼬리를 끌며 들린 것이다. 「저건 미치의 소리가 아닌 걸요.」 줄리어가 말했다. 클래독 경감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필경 세 사람을 살해한 범인의 목소리일 겁니다.」 ◎ 22장. 진 실 ◎ 경감이 에드먼드 스웨트넘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미치는 살며시 방을 나 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미스 블랙록이 뒤따라 가 보니, 미치는 개수대에 물 을 버리고 있었다. 미치는 마음의 가책 때문인지 그녀를 힐끗 쳐다본 뒤 옆쪽으로 눈길을 돌 려 버렸다. 「어쩜 거짓말을 그렇게 잘하니, 미치?」 미스 블랙록은 별 감정 없이 말했다. 「미치, 씻는 법이 틀렸어. 은그릇을 넣고 설거지대에 물을 채우는 거야. 물 이 적으면 씻을 수 없어.」 미치는 말없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했던 말에 화를 안 내세요?」 「네 거짓말에 일일이 화를 내자면 난 기력을 잃고 말겠지.」 미스 블랙록의 말이었다. 「제가 경감한테, 아까 했던 말은 모두 꾸며낸 말이라고 할까요?」 「그 분은 벌써 그것을 알아차렸어.」 미스 블랙록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미치가 수도꼭지를 잠그는 찰나, 별안간 두 손이 그녀의 머리 뒤로 왔다. 그와 동시에 물이 가득한 개수대 속으로 얼굴을 밀어넣었다. 「네가 진실을 말했다는 건 내가 알고 있다.」 미스 블랙록은 악의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치는 몸부림쳤으나 그녀의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뒤쪽 어딘가에서 도라 배너의 슬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 레티, 레티, 그러면 못 써…… 레티!」 미스 블랙록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은 공중으로 뻗치고 질식해 있던 미치는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들었다. 미스 블랙록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부엌에는 그들뿐 아무도 없는 데……. 「도라, 도라, 용서해 줘. 나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할 수 밖에…….」 그녀는 식기실 문 쪽으로 내달았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커다란 몸 이 그녀 앞을 막았다. 플레쳐 형사부장이었다. 바로 그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미스 마플이 상기된 모습으로 청소용구가 들어 있는 벽장 속에서 나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 흉내를 잘 냅니다.」 미스 마플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 여자를 물에 빠뜨려서 죽이려 했던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밖에도 혐의가 있으니, 레티샤 블랙록―.」 미스 마플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샬로트 블랙록이에요. 그게 이 여자 이름이에요. 늘 걸고 다니는 진주 목 걸이 밑에 수술한 자국이 있어요.」 「수술이라구요?」 「네, 갑상선 종양 수술이지요.」 미스 블랙록은 정신을 가다듬고 미스 마플을 보았다.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군요.」 「그럼요. 오래 전에 알았지요.」 샬로트 블랙록은 테이블 옆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은 심한 짓을 하였어요. 도라의 음성을 흉내내다니요. 나는 도라를 사랑했어요. 도라만은 진정으로 사랑했었지요.」 클래독 경감과 다른 사람들이 몰려왔다. 에드워즈 경관은 미치에게 응급치 료를 해 주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미치는 으쓱거리며 마구 떠들었다. 「그럴 듯하게 하였죠? 안 그래요? 저는 영리하고 용감하거든요.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용감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큰 일을 해내 었어요.」 이때 미스 핀칠리피가 사람들을 헤치고 테이블 앞에서 흐느껴 우는 미스 블랙록에게로 달려들었다. 플레쳐 형사부장은 그녀를 힘껏 끌어당기었다. 「여보세요! 이러면 안 됩니다. 감정을 억제해야 합니다. 미스 핀칠리피!」 미스 핀칠리피는 이를 갈며 외쳤다. 「그냥 좀 두세요. 저 여자를 만나야겠어요. 저 사람이 에미 마것로이드를 죽였단 말이에요!」 샬로트 블랙록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중얼거렸 다. 「난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어느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모 든 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어요. 하지만 내가 가장 슬퍼하는 것은 도라예요. 도라가 죽고 난 뒤 난 혼자가 됐어요. 난 외로웠어요. 도라, 도 라―.」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느낌이 애절하 게 이어졌다. ◎ 23장. 목사관의 저녁 ◎ 미스 마플은 큰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번치는 무릎을 끌어 안고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줄리언 허먼 목사는 몸을 의자 앞으로 내밀듯이 앉아, 얼핏 보기에 원숙한 장년이라기보다 학생과 같은 자세를 하였다. 클래독 경감은 위스키 소다수를 마시는 사이사이에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비번이라도 되는지 아주 한가한 모습이었다. 이들을 에워싸듯 줄리어와 패트릭, 그리고 에드먼드와 필리퍼가 앉아 있었 다. 「이번 일은 모두 미스 마플 당신의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아니예요, 경감님. 저는 이것저것 조금씩 도왔을 뿐이에요. 당신이 모든 것을 맡아 해결하신 겁니다. 당신은 제가 모르는 것도 잘 알고 있잖아 요.」 번치가 답답하다는 듯 나섰다. 「그러면 두 분이 차례로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제인 아주머니가 먼저 말 씀해 주세요. 저는 아주머니가 어떻게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몹시 궁 금합니다. 미스 블랙록을 의심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글쎄, 번치, 그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구나. 물론 그 강도사건을 꾀하 기에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확실히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미스 블랙록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어. 그녀가 루디 셔트와 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게다가 사건의 무대를 자기 집에서 꾸밀 수 있으 니 아주 수월하지 않겠어? 이를테면 스팀을 이용한 일도 그렇지. 그녀는 방안의 불빛을 없애려고 벽난로를 피우지 않았거든. 이렇게 난로를 피우 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집의 주인이 아니겠어?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 사건이 그렇듯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 레티샤 블랙록을 죽일 작정이었다고 한동 안 생각했던 거야.」 「저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 스위스 청년은 레티샤 블랙록이 블랙록인 줄 단번에 알았나요?」 「그랬던 것 같더군. 루디 셔트는―.」 미스 마플은 말을 하다 말고 클래독을 바라보았다. 클래독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베른의 아돌프 코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코호 박사는 갑상선 수술로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샬로트 블랙록은 그 병원에서 갑상선 제거 수술 을 받았으며, 그때 루디 셔트는 그 병원 간호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호 텔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금방 옛 환자였음을 알아채고 말을 걸었지요. 그가 생각이 좀더 깊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그와 달라, 옛 간호원을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럼 루디는 몽트루에 대해서, 또 자기 아버지가 호텔 주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미스 블랙록이 루디가 말을 걸어 왔다는걸 과장하느라 꾸며낸 말이었어요.」 미스 마플은 감동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루디의 출현은 큰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자기 정체를 알고 있는 남 자를 만났으니, 그 놀람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서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갖기에 이른 겁니다. 클래독 경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름답고 명랑하고 매력적인 샬로트 블랙록은 갑상선이 커지면서 생활에 파탄이 생겼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에게는 대단한 불행이었지요. 한창 자기 용모에 신경을 쓰던 때였으 므로 그렇지 않겠어요. 만일 샬로트에게 어머니가 있었거나, 적어도 아버 지가 관심을 더 써 주었던들 후일 그런 비극을 겪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를 보살피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경써 주는 사람이 그녀한테는 없었어요. 그런데다 집안 분 위기 때문에 몇 년 일찍 수술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요. 내가 알기로 는, 닥터 블랙록은 소견이 좁고 기질이 완고하고 독재적인 사람이었어요. 샬로트는 아버지에게서 고작 옥소 따위의 약으로 치료를 받았을 뿐 수술 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샬로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복종 했어요. 레티샤는 의사로서의 아버지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던 모양입니 다. 겁이 많고 의지가 약한 샬로트는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완전히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또 실제로 아버지가 그녀의 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갑상선이 커져 보기 흉하게 되면서 그녀는 남의 눈을 꺼려 집에 틀어박혔어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는데 말입 니다.」 「여자 살인자를 묘사하면서 퍽 동정적이십니다.」 에드먼드는 비아냥거렸다. 미스 마플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하지만 심약하고 상냥한 사람이 종종 엉뚱한 면을 보 이지요. 가령 그들이 삶에 대한 한스러움을 갖게 되면 그 마음이 도덕적 인 힘을 부숴 버려요. 그런데 레티샤 블랙록은 샬로트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클래독 경감님은 나에게 벨 게들러가 레티샤를 아주 훌륭한 여자라고 말했다고 하였지요. 나도 그 점에 대해 동감이에요. 그녀는 성격이 원만하고 정직 하지 못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였지요.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 도 부정을 저지를 여자가 아니었어요. 레티샤는 동생 샬로트를 극진히 사랑했어요. 그녀는 동생을 생활 속에 끌어들이려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까지 편지에 써서 보냈어요. 그러나 샬로트는 갈수록 깊숙히 병적상태로 빠져들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닥터 블랙록이 죽었어요. 레티샤는 랜들 게들러의 일을 그만두고 샬로트를 보살피려고 돌아왔지요. 그리고 동생의 수술 여부를 알기 위해 스위스의 전문가에게 함께 갔지요. 너무 오랫 동안 방치해 뒀 었지만 수술은 성공했어요. 흉하게 튀어나온 종양이 사라지고, 수술 자국 은 구슬이나 진주 목걸이로 가릴 수 있었어요. 이때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스위스에 머물렀어요. 그러면서 적십자에 관한 일 등을 하며 지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경감님?」 「맞습니다, 미스 마플.」 「물론 영국에서 가끔 소식이 왔겠지요. 게들러 부인의 죽음이 가까워졌다 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막대한 유산이 굴러 들러온다 는 기대감은 두 자매의 가슴을 벅차게 하였겠지요. 그래서 이것저것 계 획을 세우고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같은 계획은 레티샤보다 샬로트에게 더 큰 뜻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제 그 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정상적인 여자, 이를테면 아무도 혐오와 동정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는 보통 여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까요. 그녀 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졌습니 다. 여행을 다니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옷과 보석을 사들이며 웃음꽃을 피우고, 연극과 음악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 꿈 같은 일들 이 이제 샬로트의 현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잔병 한 번 앓지 않 던 레티샤가 독감에 걸렸어요. 폐렴까지 발병한 그녀는 앓아 누운 지 1 주일 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샬로트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요. 언니를 갑자기 잃었고 그와 동시에 바야흐로 분홍빛 풍선의 띄우던 마음 속 꿈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겁니다. 필경 그녀는 레티샤에게 분 노 같은 걸 느꼈을 거예요. 벨 게들러의 임종이 가깝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그즈음 레티샤가 세상을 떠나다니. 앞으로 한 달 만이라도 더 살았 다면 유산은 언니의 것이 되고 언니가 죽으면 자기 것이 될 텐데……. 바로 이것이 두 자매의 성격상 차이였습니다. 샬로트는 자기의 생각이 잘못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그 유산은 몇달 내에 레티샤에게로 오게 되어 있다―그녀는 자기와 레티샤를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이 생각은, 의사나 누가 언니의 세례명을 물었을 때 불현듯 떠오른 발상 이었는지 몰라요―샬로트는 그때, 언니와 자기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 타낼 적에 블랙록 자매로 통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어요―좋은 가문에 서 자란 중년의 영국인 자매인 그들은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아주 구별하 기 어렵게 보였습니다. 번치, 내가 언젠가 말한 바와 같이 나이가 많은 여인들은 대개들 비슷해 보이거든요. 그러므로 그녀는 샬로트가 벌써 죽 고 레티샤가 살아 있는 것으로 꾸밀 수가 있었던 거예요. 이 계획은 틀림없이 악한 마음에서 그랬다기 보다 다분히 충동적인 것이 었어요. 그리하여 레티샤는 샬로트의 이름으로 매장되었고, 샬로트는 비 로소 레티샤의 이름을 가지고 영국에 왔습니다. 오랫 동안 잠재해 있던 타고난 독창력과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지난날 그녀는 샬로트라 는 이름으로 단역을 맡았던 것이나, 이젠 레티샤가 차지했던 지휘자 자 리를 고스란히 받아 우월감에 취했어요. 두 사람은 정신적인 면에서 그 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도덕적 가치관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고 봅 니다. 물론 샬로트는 한두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점이 있음을 잊지 않았어요. 그녀는 영국에 돌아가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에 집을 샀어 요. 그녀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고향 캠벌랜드에서 은둔시절에 알았던 몇 사람과 레티샤를 잘 아는 벨 게들러뿐이었어요. 필체는 손가 락이 관절염에 걸렸다는 핑계로 속일 수 있었지요. 아무튼 그녀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샬로트는 레티샤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텐데요? 제법 많 았을 것 같은데요?」 번치가 물었다. 「그들한테는 똑같이 하면 되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 다지. 『요전에 레티샤 블랙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녀가 너무 변해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라고. 그들은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 지만 그녀를 레티샤가 아니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 사이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사람도 변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또, 미스 블랙록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들 근시안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 었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샬로트는 런던에서 레티샤가 어떻게 생활해 왔는 가를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이를테면 누구를 만났었다고 하는 것 까지―알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특히 그녀는 레티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았으므로, 레티샤를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거나 친구의 소식을 묻는 등의 수법으로 위기를 모면했을 거예요. 그 러한 중에도 그녀는 자기의 정체가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했을 게 분명해 요. 리틀 파독스로 와서 살게 된 것도 그렇고, 전혀 본 적이 없는 두 젊 은 <6촌>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킨 것도 그와 같은 반증인 셈이지요. 그 리고 그들이 그녀를 레티 아주머니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확고 해졌던 것입니다. 한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어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완벽할 수는 없었어요. 마침내 그녀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것은 그녀의 친절함과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 때문에 일어난 실수였어요. 어느날 옛날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그 친구는 곤경에 처해 있음을 하소연하였는 데, 샬로트는 서둘러 도움을 주려고 들었지요. 아마 이건 그녀가 외롭게 지내고 있었지 때문이었겠지요. 그녀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과 동떨 어져 살려고 하였으니까요. 더욱이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도라 배너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도라 배너―다름아닌 그때 편지를 보내온 친구 이름입니다. 여학교 시절에 무 척이나 활달하고 낙천적이던 친구의 모습이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어 요. 그래, 자기의 입장을 잊고 설레는 기분으로 답장을 썼던 거예요. 하지만 도라는 얼마나 놀랐겠어요? 도라가 편지를 보낸 상대를 레티샤인 데 정작 답장을 보낸 사람은 샬로트였으니 말입니다. 이때만 해도 도라 는 샬로트가 레티샤로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오직 옛날 쓸쓸하고 불행했던 나날을 보내던 샬로트를 알고 있는 몇 사 람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도라가 차츰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샬로트는 결국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도라는 친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듣고 진심으로 동정해 주었어요. 하지만 일시에 머리가 혼란해진 그녀는, 친구 로티가 레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 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로티야말로 용감하게 역경을 이겨내었으니 당 연히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겠지요. 그 많 은 유산이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 던 거예요. 도라는 샬로트의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어요. 그 유산은 샬로트에게 있어서 여분으로 놔둔 몇 파운드의 버 터와 같은 것이었거든요. 다시 말해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 것 으로 만들어도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도라는 드디어 리틀 파독스로 왔어요. 샬로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오래 되지 않아서였답니다. 그것은 도라 배너가 매사에 갈피를 못 잡고 실수로 손해를 입힌다는 것만이 아니었어요. 단지 그 정 도라면 샬로트도 견디었을 거예요. 그녀는 도라를 여전히 좋아했고 소중 하게 여겼으며, 의사에게서 도라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 문이지요. 그런데 도라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 버렸던 거예요. 샬로트와 레티샤는 언제나 상대방 이름을 줄여 부르지 않았는데, 도라는 늘 약자로 부르는 것이었어요. 이를테면 그녀는 블랙록 자매를 레티(레티샤)와 로티(샬로트 )라 불렀거든요. 샬로트는 도라에게 자기를 레티라고 부르도록 주의를 주 곤 하였으나, 그녀는 곧잘 로티라고 불러 버리는 거예요. 게다가 대화중에 과거의 이야기를 내놓는 거였어요. 샬로트는 도라의 빈발하는 실수에 신 경을 써야만 하였고 급기야 신경과민이 되었어요. 물론 도라의 말에 의아 해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샬로트의 신상에 정말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은 다른 사건이었어요. 앞 에서 말했지만, 로열 슈퍼 호텔에서 루디 셔트가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 왔던 거예요. 그 뒤 루디가 호텔에서 훔친 돈을 벌충하려고 샬로트 블랙록에게 찾아 갔 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클래독 경감님 께서 생각하신 것처럼―유산에 관한 비밀을 알고 협박하지는 않았다고 추 측합니다.」 클래독 경감이 미스 마플의 말을 받았다. 「루디는 샬로트를 협박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용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생긴 남자들이 그렇듯이 적극적 이고 요령 있게 접근한다면 중년부인에게서 돈을 얻어 낼 수 있다고 꿍 꿍이속을 가졌던 겁니다. 하지만 샬로트는 그의 유혹을 달리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서 이상한 눈치를 채고 교활한 협박이라고 단정한 모양입니다. 만약 벨 게 들러가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라도 하면 레티샤에 대한 유산 상속 을 놓고 그가 금광을 발견한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라고 지레 짐작 한 듯 싶습니다. 아까 미스 마플께서도 언급했지만, 그녀는 신분을 속이고 있는 중이었습 니다. 세상에 레티샤 블랙록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은행은 물론 벨 게 들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장애가 협박자일 가능성이 많은 이 스위스 호텔 고용인인 루디 셔트였던 것입니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빈틈없이 해낼 수 있었을 테고, 모든 것이 환상처럼 이루어졌겠지요. 그녀는 어떻게 해 서든지 그를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 동안 감정과 정서가 메마른 생활을 해온 그녀는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만족감에 몸을 떨 었습니다. 마침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루디에게 파티 때 강도극을 연출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면서, 만약 루디가 협조해 주면 많은 사례를 하겠다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가 아무 의심 없이 승낙한 것을 보면, 역시 루디 셔트는 그녀를 협박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 셈입니다. 그에게 샬로트의 존재는 다만 돈을 잘 주는 어리석은 노부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신문에 게재할 광고 문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의 구 조를 알아야 하니 리틀 파독스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날 그녀는 두 사람 이 만날 장소와 출입구를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도라 배너는 이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건이 발생한 비극적인 날이 찾아 왔습니다.」 클래독은 말을 그쳤다. 미스 마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의 이 야기를 이었다. 「샬로트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계획을 취소할 시 간이 있었으니까요. 도라 배너는 레티가 그날 몹시 불안해 하더라고 우 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착수하려는 음모가 두려웠고, 혹시 일 이 잘못되면 어쩔까 여간 심란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나 겁에 질려 취 소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스터브룩 대령의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을 때는 자신이 장난을 하고 있 다고 행위를 합리화시켰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달걀이나 잼을 몰래 꺼내 어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집 2층으로 올라가고, 소리가 나 지 않도록 응접실 두 번째 문에 기름을 발라 놓았을 때, 그리고 필리퍼 가 해 놓은 꽃꽂이를 잘 보이게 해야 한다면서 문 옆의 테이블에 옮겼을 때도 그런 기분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을 거예요. 모든 것이 게임을 준 비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게임이 아니었어요. 그래요. 그녀는 두려 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도라 배너의 느낌은 정확했었지요.」 「샬로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클래독이 말했다. 「계획은 어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녀는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자리에 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리들을 우리 안에 넣어야겠다면서 밖으로 나 갔습니다. 물론 루디 셔트를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집안에 들어온 그에게는 마스크·망토·장갑·회중전등이 전달되었습니다. 괘종시계가 6시 30분을 알리는 종을 치자, 샬로트는 자연스럽게 아치 쪽 의 테이블로 다가가 담배 상자를 집어들었습니다. 주인측으로서 손님을 맞고 있던 패트릭이 술을 가지러 갔으므로, 샬로트가 여주인으로서 담배 를 가지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시계가 종을 치면 사람들의 시선이 시계 쪽으로 향할 것이라 여 겼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시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 람, 도라 배너는 샬로트를 응시하고 있었어요. 도라는 첫 진술에서 미스 블랙록이 그때 무엇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샬로트는 제비꽃 이 담긴 화병을 들고 있었답니다. 그녀는 전기줄의 철사가 드러나도록 램프의 코드를 미리 벗겨 놓았습니 다. 정전은 예정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담배 상자·화병·램프, 이 세 가 지는 모두 한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비꽃을 꺾는 듯이 하다가 전선에 물을 떨어뜨린 다음 램프의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물은 전기의 양도체이므로 곧바로 퓨즈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번치가 말했다. 「얼마 전 저녁에 우리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인 아주머니께 서는 그 때문에 크게 놀라셨군요?」 「그래, 번치. 나는 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지. 그리고 한 쌍의 램프 중 하 나가 그날 밤에 있었는데, 밤 사이에 감쪽같이 다른 걸로 바꿔 놓은 걸 알아차렸어.」 「그렇습니다.」 클래독 경감이 말했다. 「플레쳐 형사부장이 다음날 아침 그 램프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램프와 다 름없이 아무런 결함이 없었습니다. 전선이 드러나거나 합선된 부분을 발 견할 수 없었습니다.」 미스 마플이 말했다. 「나는 도라 배너가 그 램프를 두고 여자 목동이라고 말한 뜻을 그것으로 알았어요. 하지만 패트릭의 일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도라 배너는 자기가 들었던 것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했어요. 그녀는 자기의 상 상력으로 실제의 일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평판이 나 있지만, 자기 눈으로 본 것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한 여자였어요. 그러 니까 레티샤가 제비꽃을 꺾고 있는 걸 분명히 보았던 거예요.」 클래독이 말참견했다. 「하지만 자기가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번치가 장미꽃 화병의 물을 램프의 전선에 엎질렀을 때, 난 미스 블랙록이 틀림없이 불을 껐다고 믿었어요. 테이블 앞에 있었던 사 람은 그녀뿐이었거든요.」 클래독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도라 배너는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다가 테이블에 놓아두어 테이블이 탔다고 투덜거렸지만, 이날 담배를 피운 사람은 아무 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병에 물이 없어서 제비꽃이 시들고 말았는데, 이것이 레티샤의 큰 실수였습니다. 사건이 난 후에 물을 다시 채워야 하는데, 그녀는 그만 깜박 잊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런데까지 신경써서 볼 사람이 없을 것이 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미스 배너조차 자기가 처음에 물을 넣 어 주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말을 계속했다. 「도라는 쉽사리 남의 암시에 걸리곤 했습니다. 미스 블래록은 이 약점을 여러 차례 이용했었습니다. 도라가 패트릭을 의심한 것도 분명히 미스 블랙록의 암시 때문이었습니다.」 패트릭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경감님은 왜 나를 끌어들입니까?」 「물론 그다지 대단한 암시는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그 암시로써 미스 배 너의 의혹이 샬로트에게서 다른 사람한테로 옮겨 가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의 상황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갑 자기 전기가 나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이때 샬로트는 기름을 칠 해 놓은 문을 통해 살짝 빠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중전등으로 방안을 비추면서 자기의 역할을 해내는 루디 셔트의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처음에 원예용 장갑을 낀 손으로 권총을 쥔 샬로트가 자기 등뒤에 서있 는 줄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서 있기로 한 장소―아 까 서 있던 창가―에 회중전등이 비추기를 기다리다가, 그때가 되자 재 빨리 방아쇠를 당기었습니다. 두 번의 총성이 울렸고, 깜짝 놀란 루디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의 몸을 향해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총을 쓰러진 루디 곁에 떨어뜨리고 장갑을 벗어 홀 테이블 위에 던졌습니다. 그녀가 조금 전에 나왔던 문으로 들어가 불이 꺼질 때 서 있던 장소로 돌아가자 불이 켜졌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귀에는 상처가 있었습니다.―샬로트가 상처를 어떻게 냈는지 모르겠지만―.」 미스 마플이 말했다. 「필경 손톱깎는 가위로 그랬을 거예요. 귓불은 약간 상처를 내기만 해도 피가 많이 흐르거든요. 이건 남을 속이는 훌륭한 방법이었지요. 그녀의 흰 옷에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총알이 다행스럽 게 귀를 스쳐갔다고 여겼을 거예요.」 클래독이 말했다. 「결과는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도라 배너는 셔트가 미스 블랙록을 쏘았다 고 주장했고, 그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 라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로 샬로트가 피습당하는 장면 을 목격한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 증언을 토대로 수사했더라 면, 루디의 죽음은 자살 아니면 사고사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손바닥 엎듯이 뒤집혔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결말을 가져온 것은 미스 마플의 덕분입니다.」 미스 마플은 이를 부인하듯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경감님. 나는 그저 흉내만 내었을 뿐인 걸요. 그 사건을 만족 해 하지 않으시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은 당신입니다. 초기에 마무리짓 지 않았던 건 정말 잘하신 일이었습니다.」 클래독 경감은 감회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저는 사건 내용을 살피고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확실히 떠 오르지는 않았지만, 어디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 니다. 그러한 저에게 길을 열어 주신 분이 미스 마플입니다. 이로써 미스 블랙록의 흉계는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저는 그 문이 비밀리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이 때까지 추리의 늪에서 맴돌던 경찰에게 기름을 칠한 이 문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저의 실수 때문이었지요. 그 문으로 나가려다가 문의 손잡이를 잡아버린 것입니 다.」 미스 마플이 덧붙였다. 「경감님, 난 당신이 그 문으로 인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표현이긴 합니다마는―.」 「그래서 수사가 다시 시자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였지 요. 우리는 레티샤 블랙록을 죽일 만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클래독의 말을 미스 마플이 이어받았다. 「주위에는 혐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지요. 미스 블래록도 그 사실을 알았어요. 이즈음 그녀는 필리퍼가 누구라는걸 알아 본 모양이에요. 왜냐 하면 소니어 게들러는 샬로트의 비밀을 아는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거든 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클래독 경감님은 모르겠지만―젊은 시절에 만났던 사람을 몇 년 전에 만난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한답니다. 필 리퍼는 샬로트가 기억하고 있는 필리퍼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인데다 얼굴 모습이 어머니를 아주 닮아 있었어요. 드디어 필리퍼가 소니어 게들러의 딸임을 알게 된 샬로트는 무척 기뻐했 어요. 그리고 필리퍼를 친딸이기나 한 것처럼 아주 귀애하였어요. 기묘한 노릇이었지만, 모르면 몰라도 무의식 속의 양심의 가책을 애정으로 갚고 자 했음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유산을 받으면 필리퍼를 성심껏 돌봐 줄 작정이었지요. 그래서 필리퍼와 해리가 자기와 함께 살게 되자, 그녀는 매우 흐뭇하였고 행복 하기까지 하였던 거예요. 그런데 경감님께서 핍과 에머에 관해 캐묻자 샬로트는 적지않이 불안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필리퍼한테 뒤집어씌우고 싶지가 않았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루디가 강도질을 하려 다가 자기 실수로 죽은 것처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기름칠한 문이 발견되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어요. 오직 필리퍼 만이 그녀를 죽일 만한 동기를 가졌으니까요. 물론 그녀는 주리어에 관 해 아는 바가 없었어요. 그 때문에, 필리퍼가 핍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 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께서 물었을 때, 소니어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머리카락이 가무잡잡하다고 속였던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말이 거짓말 로 알려질까 싶어 앨범에 있는 소니어와 레티샤의 사진을 모조리 떼어냈 어요.」 클래독은 언짢은 기색이 되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스웨트넘 부인을 소니어 게들러로 생각토록 유도했 었지요.」 에드먼드가 중얼거렸다. 「어머니만 가엾게 되셨군요. 평생 동안 고결하게 사신 분이신데―.」 미스 마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참으로 위험한 사람은 도라 배너였어요. 그녀는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고 말이 많아졌어요. 앞서 나는 차를 마시러 그곳에 갔는데, 미스 블랙록이 도라를 보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무엇 때문에 험상궂게 보았는지 아세요? 도라는 그때 그녀를 로티라고 불렀던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은 실수였는데, 샬로트한테는 까무러칠 만한 말이었어요. 그런데도 도라는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가엾게도 떠들어대지 않으면 살 의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지요. 블루버드에서 차를 마실 적에도 나는 그녀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한 야릇한 인상을 받 았어요. 사실 그녀는 두 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하였던 거예요. 한 번은 레티에 대한 말을 했어요. 자기 친구가 아름답지는 않으나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니, 이내 예쁘장하기는 하나 진지하지는 못한 여자라 고 정정했어요. 그러다가, 레티는 아주 영리하고 처세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또, 친구의 인생은 매우 불행하였다면서, <극심한 고통을 꿋 꿋이 견디는도다>라는 시구를 들려주기도 하였어요. 레티샤의 생애에 그 런 역경이 없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날 샬로트는 블루버드에 몰래 들어와 도라가 지껄이는 소리를 죄다 들 었나 봐요. 그렇다면 램프를 바꿔 놓았다는 도라의 말을 들었을 것이고, 여자 목동의 램프가 남자 목동의 그림이 그려진 램프로 바뀌었더라는 말 에서, 도라 배너가 자기에게 위험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꼈을 겁니다. 생각해 보건대, 도라는 그날 찻집에서의 이야기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어요. 좀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지만, 샬로트는 도라 배너가 거추장스러워졌다는 게 분명해졌어요. 이제까지 도라를 사랑했던 샬로트 로선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그녀는, 요전 에 번치에게 말한 간호원 엘러튼처럼,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에서 죽이는 것이라고 합리화했을 거예요. 아무튼 샬로트는 배너의 남은 인생을 행복 으로 채워 주려고 온 정성을 기울였어요. 생일 파티에다 특제 케잌까지 만들어 주고…….」 필리퍼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야말로 달콤한 죽음이군요.」 「정말 그래요. 도라의 죽음이 그랬었지요. 미스 블랙록은 친구에게 달콤한 죽음을 주려고 하였지요…… 파티를 열고, 도라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주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한테는 그녀가 마음 편히 있도록 부탁했어요. 그리고 자기 침대 옆에, 무슨 종류인지 알 수 없는 알약이 든 아스피린 병을 놓아 두었어요. 도라가 자기의 약병이 눈에 띄지 않으면 틀림없이 미스 블랙록의 머리맡에 있는 병에서 약을 꺼내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만약 알약이 발견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미스 블랙록을 죽이려 고 놔두었다고 여기겠지요. 그리하여 미스 배너는 잠을 자는 것처럼 행복하게 죽었어요. 샬로트는 비로소 시름을 떨치고 침착을 되찾게 되었구요. 하지만 아울러 그녀는 도라 배너와, 그녀의 우정과 충실함을 잃어버린 거지요. 앞으로는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쓸쓸함이 오죽하겠어요. 내가 목 사님의 쪽지를 그녀에게 전하러 갔던 날 그녀는 몹시 울고 있었어요. 그 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슬픔이었지요. 자기 친구를 죽였으니 그렇지 않겠 어요?」 번치가 말했다. 「소름끼치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하군요.」 줄리언 허먼이 말했다. 「그러나 아주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살인자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잊 고는 하지요.」 미스 마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들도 인간이지요. 살인범에게도 동정할 만한 점이 있어요. 특 히 샬로트 블랙록처럼 마음 약하고 인정 많은 살인자에겐 말입니다. 하 지만 역시 위험한 존재에요. 나약한 인간은 자신의 입장이 위협 받으면 너무 무서워 과격해지고 급기야 자기를 억제할 수 없게 되지요.」 줄리언이 물었다. 「미스 마것로이드는 어떻게 되었지요?」 「오, 불쌍한 미스 마것로이드. 샬로트는 두 사람이 사는 집에 들렀다가 그 들이 살인 과정을 추정해 보는 걸 엿들었나 봐요. 창문이 열려 있어서 들을 수가 있었겠지요. 그때까지 샬로트는 더 이상 위험인물이 있지 않 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컸을 거예요. 이때 미스 핀칠리피는 미스 마것로이드에게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다그 치고 있었어요. 샬로트는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일을 목격한 사람이 있 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루디 셔트를 쳐 다 보았을 것이라 믿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에서 계속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지요. 그러면서,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할는지 모른다고 희망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마침 미스 핀칠리피가 정류장을 향해 급히 뛰어나갔어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바야흐로 새로운 사실이 떠올랐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미 스 핀칠리피의 뒤에서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말했어요. 나는 그 뒤 미스 핀칠리피에게 물어 보았어요. 미스 마것로이드가 어떤 식으로 말했었느냐구요. ……왜냐하면 미스 마것로이드가 <그녀는>에 힘 주어 말했다면 그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클래독이 말했다. 「언어의 뉘앙스는 중요합니다.」 미스 마플은 상기된 얼굴을 경감 쪽으로 돌렸다. 「그때 미스 마것로이드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사람들은 무 슨 물건을 보았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치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오래 전에 나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보았었지 요. 그런데 객차 벽에 칠한 페인트가 열을 받아 보기 흉하게 얼룩졌던 것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거든요. 지금이라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 어요. 그리고 런던에서 비행기가 폭발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 유리 파 편이 사방에 흩어졌어요. 대단한 충격을 주었었지요. 지금 내 기억에 강 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내 앞에 서 있었던 여자의 스타킹 올이 나갔다는 것이었어요. 이 같은 경험으로 보아, 미스 마것로이드가 자신이 보았던 일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면 적잖은 것들을 떠올렸을 거예요. 아마 그녀는 벽난로 가까이에서부터 기억해 냈겠지요. 회중전등이 처음 에 그곳을 비췄으니까요. 그리고 두 개의 창문이 떠오르면서, 창문과 그 녀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보였어요. 예를 들면, 허먼 부인이 손으로 얼굴 을 가리고 있었던 모습 말이에요. 그녀는 회중전등이 비추는 방향대로 기억을 이어 갑니다. 미스 배너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커다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어요. 그 다 음은 벽과 램프와 담배 상자가 놓인 테이블. 그 순간, 총소리가 들렸어 요. 미스 마것로이드는 여기에서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녀는 두 개의 총알 자국이 있는 벽, 다시 말해 미스 블랙록이 총에 맞았을 때 있었다던 벽을 보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레티 는 거기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지요? 그녀는 핀칠리피가 말한 세 여자를 생각했어 요.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 그곳에 없었다면 그가 곧 범인일 테니까요. 그럼 그녀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말이 에요. 그렇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은 장소였어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어 야 할 장소에, 아무도 없었다는 건 그녀로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핀치. 그녀는 거기에 없었어』하고 그녀가 말했 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레티샤 블랙록을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번치가 물었다. 「한데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그 전에 이미 알고 계셨지요? 전등이 합선됐 을 때도 종이에다 의문점을 쓰셨잖아요.」 「그래. 그때 짐작했던 거야.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패턴으로 맞아떨 어지더구나.」 번치는 미스 마플이 메모한 것을 인용하며 물었다. 「램프―이건 알겠어요. 제비꽃―이것두요. 아스피린 병―아주머니는 그날 미스 배너가 아스피린을 새로 샀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미스 블랙록의 것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고 말이에요.」 「누군가 그걸 감췄다면 할 수 없었겠지. 어쨌든 레티샤 블랙록은 살인자 가 노리는 인물이라는 것을 꾸며야 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달콤한 죽음이라는 케잌은―그건 단순한 케잌이 아니 었어요. 파티가 벌어지고 미스 배너는 죽기 전에 행복했어요. 귀여워해 주는 개를 죽이려는 음모 같지요. 그게 무서운 거죠. 뭐랄까 겉으로마느 이 친절이라는 것 말이에요.」 「그러나 샬로트는 정말 친절한 여자였어.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나는 아 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어. 그녀가 원하는 건 엄청난 돈이었으니까. 그리고 욕망 앞에서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지. 그녀는 고통스런 인생의 대가로 돈을 얻으려 했던 거야. 세상에 악의를 가진 사람은 위험해. 그들은 으레 보상받으려고 하거든. 나는 그녀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참한 환자들도 보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 도 행복하고 만족스런 생활을 보내려고 하고 있지. 사람의 행복과 불행 은 그 사람에 달려 있지. 이야기가 엉뚱하게 빗나갔군.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아주머니가 종이에 적어 놓으신 것에 대해 얘기했어요.」 클래독이 물었다. 「신상조사라고 쓴 것은 뭐였지요?」 미스 마플은 장난스럽게 그를 향해 웃었다. 「클래독 경감님도 보셨겠지요? 레티샤 블랙록이 샬로트에게 보낸 편지를 경감님이 내게 보여 주셨잖아요. 그 편지에 조사(enquiries)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요. 둘 다 e라고 되어 있는데 언젠가 내가 번치를 시켜 경감 님께 보여 드린 쪽지에는 i로 썼더군요. 대부분 사람들은 철자법에 관한 습관은 오랜 뒤에도 좀처럼 고치지 못하거든요. 그것은 내게 대단한 힌 트가 되어 주었죠.」 「그렇군요. 난 미처 알아채지 못했군요.」 번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스 배너는 카페에서 아주머니에게 역경을 이겨냈다고 얘기했는데 레티 샤는 그런 역경을 겪은 적이 없었지요. 그리고 요드 치료라는 말은 갑상 선 종양을 연상시켰지요?」 「그래. 샬로트는 언니가 죽은 것을 폐렴으로 말했고 또 스위스에서였다고 했지. 난 갑상선의 권위 있는 병원이 스위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고. 그 생각은 레티샤 블랙록이 늘 걸고 다니던 싸구려 진주 목걸이와 연관 짓게 된 거지. 정말 그 목걸이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 바로 목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클래독이 말했다. 「그날 밤 목걸이가 끊어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당황해 하던 이유를 알았 습니다. 그땐 정말 이상했습니다.」 번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닌 <로티>라고 쓰셨어요. 우리는 레티라고 알고 있는데 아 주머니께서 잘못 쓰신 줄 알았어요.」 「그래. 나는 그녀의 동생 이름이 샬로트라는 걸 기억했고 도라 배너가 미 스 블랙록을 한두 번 로티라고 불렀지. 도라는 무심코 그렇게 부르고 나 서 몹시 당황했었지.」 「<베른>과 <양로연금>이란 뭐예요?」 「루디 셔트는 베른의 병원에서 일했었지.」 「양로 연금은요?」 「그건 <블루버드>에서 네게 말했잖니. 하긴 그땐 특별난 생각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워더스푼 부인이 죽은 패틀렛 부인의 양로 연금 을 타냈던 얘기 말이야.―나이든 여자는 대개 비슷비슷하거든. 이렇게 해 서 여러 개의 추리가 하나로 맞춰진 거지. 그리고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밖에 나가 있었는데 그때 미스 핀칠리피를 만나 그녀가 차를 태워주었고 곧 마것로이드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거지.」 미스 마플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이젠 그 목소리는 흥미롭거나 즐기는 듯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착잡해 하는 듯했다. 「나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 같은 걸 느꼈지. 그러나 아무런 물증이 없었어. 그래서 한가지 가능성 있는 계획을 세워 플레쳐 형사부장에게 말을 한 거지.」 클래독이 끼어들었다. 「그를 혼내 주어야겠군요. 내게 보고하지도 않고 찬성했다니 말입니다.」 「사실 나도 가까스로 그를 설득했지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리틀 파독 스로 가서 미치를 설득했어요.」 줄리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를 설득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지만 남을 위한 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에요. 나는 그녀를 추켜 세워주고, 그녀가 고향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레 지스탕스 대원이 됐을 거라고 했지요. 그러자 그녀는 『물론이죠』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용감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리고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활약한 여자 이야기 를 해 주었더니 그녀는 몹시 감격했어요. 그 이야기 중에 꾸며낸 것도 꽤 많았는데―.」 패트릭이 감탄했다. 「아주 멋진데요!」 「그리고 그녀가 맡을 임무를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시켰지요. 그러고 나서 2층 자기 방으로 올려 보내고 클래독 경감이 오실 때까지 내려오면 안 된다고 말했지요. 흥분 하기 쉬운 사람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거든요.」 줄리어가 말했다. 「하지만 멋지게 해냈잖아요.」 번치가 변명하듯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그곳에 없었긴 하지만…….」 「그건 좀 복잡하지―미치는 갑자기 협박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그때 몹시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실을 얘기할 수 있 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그녀가 식당 열쇠구멍으로 권총을 들고 루디 셔 트 뒤에 있던 미스 블랙록을 보았다고 하도록 시켰지요. 곧 그녀는 실제 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열쇠구멍에 열쇠가 꽂혀 있 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샬로트 블랙록이 알아챌지도 모르는 일 이었지. 하지만 심한 충격을 받았을 대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한다 고 여겼지 때문에 미치는 분명하게 보았다고 떠들어댈 수 있었지.」 클래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척해야 했죠. 그리고는 조금 도 의심한 일 없는 인물을 몰아세운 것입니다. 나는 에드먼드 씨를 급습 한 것이죠.」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멋지게 내 역할을 해냈습니다. 격렬한 부인―모든 게 계획 대로 진행되었지요. 계획에 어긋난 것은 필리퍼가 자신이 핍이라고 주장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핍은 내가 맡은 역이었죠. 그래서 경감님과 내가 손발이 맞지 않아 아슬아슬했지만 과연 경감님은 그 위기를 잘 넘겼습니 다. 경감님은 내가 부유한 부인을 노렸다고 둘러댔지요.」 「그런데 그런 연극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모르시겠어요? 샬로트 블랙록은 미치만이 진상을 안다고 생각했던 겁니 다. 경찰은 아예 미치를 거짓말쟁이라고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의심했지 요. 그러나 미치가 끝까지 주장한다면 경찰도 그녀의 이야기를 재고해 보리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면 미치가 살인범의 다음 목표일 가능성이 크게 마련이죠.」 미스 마플이 말했다. 「미치는 방에서 나와 곧장 부엌으로 갔어요. 미스 블랙록은 곧 뒤를 따라 들어왔구요. 부엌에는 미치가 혼자 있는 듯했지만 플레쳐 형사부장은 문 뒤에 숨고 나는 부엌 벽장 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번치가 미스 마플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아주머니?」 「두 가지 경우이지. 즉 샬로트는 돈을 주며 입을 막으려고 한다거나 또 한가지는 그녀를 죽인지도 모른다는 두 가지 경우였어.」 「하지만 그런 짓을 하고 덮어둘 수 있을까요? 곧 의심받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 샬로트는 이미 구석으로 몰린 쥐와 다름없었어. 그날 일어 난 일만 해도 그래. 미스 핀칠리피와 마것로이드의 사건 재구성 말이야. 핀치가 역으로 갔다 오면 미스 마것로이드가 레티샤 블랙록이 사건 그날 밤 그 방에 없었던 것을 설명할 거야. 그녀의 입을 막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자 계획을 세울 여유도 없이 무자비하게 목을 죄어서 죽인 거야. 인사까지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하지 않은 척하며 난롯가에 앉아 있었던 거지. 그때 경감으로부터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데려가겠다는 전화를 받자 새로운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었던 거지. 곧 줄리어나 호감가지 않는 젊은이를 해치워 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 미치의 문제가 생긴거야. 미치를 죽여 그녀의 입 을 막아야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때는 인간 이랄 수도 없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어.」 번치가 물었다. 「그런데 왜 플레쳐 형사부장께 맡기지 않고 벽장 속에 들어가 있었나요, 제인 아주머니?」 「두 사람이 안전했거든. 게다가 나는 도라 배너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 거든. 샬로트 블랙록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면 도라 배너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 뿐이거든.」 「사실 멋진 효과를 냈지요.」 「그래……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어.」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그때를 회상한는 듯했다. 줄리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게 말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미치는 달라졌어요. 어제 사우댐턴 부근에 일자리를 구했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요.」 줄리어는 미치의 목소리를 그럴 듯하게 흉내냈다. 「나는 그곳에서 만일 그들이 내가 외국인이니까 등록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어요. 『그러죠. 경찰은 나를 잘 알아요. 내가 경찰을 도와주었으 니까요. 내가 없었다면 위험한 범인을 못잡았을 거예요. 난 사자처럼 용 감하게 위험은 신경쓰지 않으니까요』라고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은『미 치, 당신은 영웅이오. 훌륭해요』라고 말하겠죠. 그때 나는 『뭘요, 대단 한 일이 아닌걸요』라고 말해 줄 거예요.」 줄리어는 말을 멈추더니 본래의 제 목소리로 돌아왔다.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경찰을 돕게 될 겁니다.」 필리퍼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내게도 친절해졌어요. 미치는 결혼선물로 <달콤한 죽음>을 만드 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지요. 그리고 줄리어가 자기의 오믈렛 프라이 팬 을 망쳐 놓았으니 그녀에게는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하더군요.」 「루커스 부인은 필리퍼의 일을 기뻐하고 있어요. 벨 게들러가 죽어 필리 퍼와 줄리어가 유산을 상속받았잖아요. 그녀는 우리 결혼 축하 선물로 아스파라거스 모양의 은제 가위를 주셨어요. 결혼식에 와달라는 말은 않 했지만 잘한 것 같습니다.」 에드먼드의 말에 이어 패트릭이 덧붙였다. 「이젠 축하할 일만 남았군. 에드먼드와 필리퍼―줄리어와 패트릭은 어 때?」 줄리어가 정색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축하받을 자격이 없어요. 클래독 경감님이 에드먼드에게 한 얘기 가 당신에게 꼭 맞는 얘기더군요. 당신은 부유한 아내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패트릭이 말했다. 「고맙군. 그러나 난 당신을 위해 한 일이었어.」 「난 감옥에 갈 뻔했어요. 당신의 건망증 때문에 말이에요. 난 당신의 동생 에게서 편지가 왔던 그날 저녁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게 온 편지라고밖 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배우가 될까 생각도 해 보았어요.」 「뭐라고, 당신도?」 「그래요. 파스에 가면 극단에 자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공부를 한 뒤 극장 을 경영하고 싶어요. 그럼 에드먼드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어요.」 줄리언 허먼이 물었다. 「당신은 소설을 쓰지 않았나요?」 「네, 그랬었지요.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그냥저냥 읽을 만한 겁니다. 덥수룩한 남자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무언가 냄새를 맡는 것으로 시작되 어 잿빛거리, 수종을 앓는 노파, 턱이 긴 매춘부―그들은 세계의 정세에 대해 얘기하고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나도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 을 메모해 두었다가 가벼운 희곡을 썼습니다. 흥미를 느끼고 쓰자마자 3 막짜리 희곡을 완성시켰죠.」 패트릭이 물었다. 「제목이 뭐죠? <집사는 무엇을 보았나?>인가요?」 「나는 제목을 <코끼리도 잊는다>라고 붙였습니다. 곧 상연하게 되었지 요.」 번치가 중얼거렸다. 「코끼리도 잊는다…… 정말 그런가요?」 줄리언 허먼 목사가 갑자기 말했다.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서 그만 설교 준비를…….」 번치가 말했다. 「이번엔 탐정 소설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에 정신을 뺏겨 버렸군요.」 패트릭이 말했다. 「살인을 하지 말지어다―설교 제목으로 어떻습니까?」 「아닐세. 그건 그만두지.」 번치가 끼어들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보다 더 좋은 설교가 많아요.」 그리고는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경을 인용해 가며 덧붙였다. 「봄이 오면 거북의 소리 땅에 울리도다―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하지만 왜 거북이라고 했는지…… 거북은 목소리가 좋을 리가 없는데 말이에 요.」 줄리언 허먼 목사가 설명했다. 「거북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오. 그건 산비둘기를 의미한 거지. 헤 브라이어로는―.」 번치가 갑자기 줄리언을 끌어안는 바람에 이야기는 끊어졌다. 「난 한가지는 알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아하스엘스는 알탁셀크스 2세 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하지만 우리에겐 알탁셀크스 3세에요.」 줄리언 허먼은 아내가 왜 그 이야기를 특별히 재미있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번치가 말했다. 「티글라스필레샤가 당신을 돕고 싶어해요. 어떻게 해서 퓨즈가 합선되었 는지를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 24장. 에필로그 ◎ 에드먼드가 필리퍼에게 말했다. 「신문 몇 가지를 봐야겠어. 토트먼 씨 가게에 가봅시다.」 그들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치핑 클렉혼으로 돌아와 있었다. 동작이 느리고 뚱뚱한 토트먼은 상냥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신문을 보려 하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안녕하신가요? 이제 본 머드에 정이 드셨나 모 르겠습니다.」 「어머니는 좋아하세요.」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에드먼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러하듯 부모의 일이니까 잘되려니 하는 것이다. 「네, 참 좋은 곳이죠. 작년 휴가에 그곳엘 갔었는데 아내가 무척 좋아하더 군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어떤 신문으로…….」 「런던에 당신 작품이 상연되는 모양이던데 모두들 재미있다고들 합니다.」 「네, 잘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목이 <코끼리도 잊는다>라는군요. 내 생각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잊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네, 그렇죠. 나도 제목을 잘못 붙인 거라고 생각합니다.―모두들 당신과 같은 말을 하니까요.」 「동물학상으로 분명히 그렇습니다.」 「네, 네―알을 낳을 때의 집게벌레처럼 말이죠.」 「집게벌레도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신문 말인데요―.」 「타임즈겠죠?」 토트먼 씨는 펜을 집어들며 물었다. 그러자 에드먼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데일리 워커.」 필리퍼가 말했다. 「그리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뉴 스테이트먼트.」 「라디오 타임즈도 넣어주세요.」 「스펙테이터도요.」 「가드너스 클로니클.」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대고 나서 그제야 숨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제트는요?」 「싫어요.」 필리퍼와 에드먼드는 동시에 대답했다. 「가제트는 필요하지 않단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노스 베넘 뉴스 앤드 치핑 클렉혼 가제트>가 필요하지 않단 말씀이 죠?」 토트먼은 다짐하듯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매주마다 나오는 신문이 필요하지 않다구요?」 「네.」 그리고 에드먼드가 덧붙였다. 「이제 됐습니까?」 「아, 네.」 에드먼드와 필리퍼는 돌아가고 토트먼은 거실로 들어갔다. 「연필 좀 줘요. 내 펜이 없어졌구료.」 토트먼 부인이 주문 장부를 집어들며 말했다. 「내가 쓸 테니 부르세요.」 「데일리 워커, 데일리 텔레그래프, 라디오 타임즈, 뉴 스테이트먼트, 스펙 테이터―그리고 가만 있자, 가드너스 클로니클이에요.」 「가드너스 클로니클.」 토트먼 부인은 되뇌면서 빠르게 적어나갔다. 「그리고 가제트?」 「가제트는 필요없다는군.」 「뭐라구요?」 「가제트는 필요없으니 넣지 말라더군.」 토트먼 부인이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잘못 들었을 거예요. 모두들 가제트를 보는데 필요하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신문이 아니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어떻게 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