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여 살인, 검시, 의혹 등에 차례차례 도전해 가는 펑키에게 바친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지은이:애거서 크리스티 □ 나오는 사람들 로저 애크로이드 킹즈 애벗 마을 지주 랠프 페이튼 로저의 양아들 세실 부인 로저의 동생 부인 플로러 세실 부인의 딸 제프리 레이먼드 로저의 비서 존 파커 애크로이드 집안의 집사 미스 러슬 가정부 애슐러 본 심부름 하녀 브랜트 소령 로저의 친구, 수렵가 팰러즈 부인 킹즈 패독 저택의 미망인 제임즈 셰퍼드 의사 캐럴라인 제임즈 누님 래글런 경감 에르큘 포아로 은퇴한 사립 탐정. 세퍼드 의사, 아침 식사를 들며 팰러즈 부인이 숨을 거둔 것은 9월 16일에서 17일로 접어드는 목요일 밤이었다. 내가 불려간 것은 17일 금요일 아침 8시, 이미 손쓰기에는 늦어 있었 다. 부인은 벌써 몇 시간 전에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은 9시 조금 지나서였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가, 나는 모자와 초가을 아침이라 추울 것 같아서 들고 나갔던 외투를 걸며 잠시 현관에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몹시 마음이 뒤숭숭하고 당황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로 부터 몇 주일 동안에 걸쳐 일어나게 된 사건을 그때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 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왼쪽의 식당에서 찻잔 소리며 짧은 기침 소리가 나더니 캐럴라인 누님 이 묻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임즈냐?」 쓸데없는 말을 다 물어 보는군. 나 아니면 또 누가 있담. 정말은 현관 에서 우물거린 것도 이 캐럴라인 누님 때문이었다. 시인 키플링 씨에 의하면, 몽구스족의 표어는 <가라, 그리고 알아내 라>라고 한다. 만일 캐럴라인이 문장(紋章)을 고르게 된다면, 뒷발로 서 있는 몽구스를 권해야 할 것이다. 단 그녀의 경우 표어 앞부분은 없애 버려도 좋다. 집안에 가만히 있으 면서도 여러 가지를 알아내기 때문이다. 무슨 비결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 쨌든 알아내고야 만다. 아마도 하녀들이며 드나드는 장사치들이 그녀의 정보국을 이루고 있는 것이리다. 누님이 외출하는 것은 정보를 수집해 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퍼뜨리기 위해서이다. 그 점에 있어서도 그녀는 꽤 뛰어난 수완가다. 내가 현관에서 우물거린 것도 결국 누님의 이러한 성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팰러즈 부인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그녀에게 한다면, 한 시간 반도 채 못 되어 온 마을에 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의사로서 나는 당연히 신중해야 한다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따라서 정 보를 될 수 있는 대로 누님에게 철저히 감추는 습관이 붙어 버렸다. 결국 에 가서 누님은 대개 알아내고 말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도덕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팰러즈 부인의 남편도 1년 전에 죽었는데, 캐럴라인은 아무 근거도 없 이 부인이 남편을 독살했다고 처음부터 강하게 주장했다. 팰러즈 씨는 습관적으로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급성 위염에 걸려 죽었다고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아주 무시하는 태도였다. 위염과 비소 중독은 증상이 서로 비슷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캐럴라인이 주장하는 독살설의 근거는 참으로 엉뚱한 데 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잖니」 팰러즈 부인은 이미 젊다고 할 수 없으나 꽤 아름다웠으며, 입는 옷도 파리에서 맞춰와 수수하면서도 언제나 잘 어울렸다. 그러나 파리에서 옷 을 주문하여 입는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여자들 이 반드시 남편을 독살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을 두서없이 생각하며 현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또다시 캐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높은 목소리였다. 「그런 데서 뭘 하고 있니, 제임즈. 빨리 아침 식사해.」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곧 갑니다. 외투를 걸고 있습니다.」 「외투라면 그동안에 반 다스도 더 걸었겠다.」 참으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정말 반 다스도 더 걸었을 테니까. 나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늘 하던 대로 누님의 빰에 가볍게 입 맞추고 달걀과 베이컨이 담긴 접시 앞에 앉았다. 베이컨은 이미 식어 있었다. 캐럴라인이 말했다. 「꽤 이른 아침부터 왕진이로구나.」 「네, 킹즈 패독에 갔었습니다. 팰러즈 부인네 말입니다.」 「알고 있어.」 「어떻게 아셨지요?」 「애니한테서 들었지.」 애니는 하녀다. 착한 아가씨지만 입부터 먼저 태어난 듯 굉장한 수다쟁 이다. 이야기가 잠시 끊어졌다. 나는 달걀과 베이컨을 먹었다. 가늘고 긴 누 님의 코끝이 조금 쫑긋거렸다. 무엇인가에 흥미를 가졌거나 흥분했을 때 하는 버릇이다. 누님이 재촉했다. 「그래서?」 「도저히 손쓸 수 없었습니다. 잠자다가 숨이 끊어졌나 봅니다.」 「알고 있어.」 이번만큼은 나도 참을 수 없어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알고 계실 리 없습니다. 그 집에 닿을 때까지는 나도 몰랐으며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애니가 알고 있다면 그 애는 정말 천리안이군요.」 「애니가 아니야. 우유 배달부지. 팰러즈네 요리사에게서 들었다더구나. 」 이런 식으로 캐럴라인은 정보를 수집하러 직접 나다닐 필요가 없다. 집 에 가만히 있으면 정보 쪽에서 찾아와 주는 것이다. 누님은 말을 이었다. 「원인은 무엇이었니? 심장마비?」 나는 잔뜩 비꼬아 말했다. 「그건 우유 배달부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그러나 비꼬는 말 같은 것이 먹혀 들어갈 캐럴라인이 아니다. 곧이곧대 로 받아들여 대답한다. 「우유 배달부는 모르더구나.」 그러나 캐럴라인이니 만큼 곧 알아내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편에서 가르쳐 주는 게 낫겠지. 「부인은 베로날을 너무 많이 복용해서 숨졌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고 요즘 줄곧 먹더니 아마 분량을 잘못 재었나 봅니다.」 「바보 같은 소리.」 캐럴라인은 한마디로 반대했다. 「그녀는 일부러 먹은 거야. 아유, 끔찍해!」 묘하게도 사람이란 마음속으로 남몰래 믿고 있는 사실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면 한사코 부정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는 곧 성을 벌컥 내 며 반박했다. 「누님은 또 그러시는군요. 그건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팰러즈 부인이 자살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미망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젊은 데다 돈과 건강이 있으니 인생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잖습니까. 그런 어 리석은 짓을 할 리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 너도 팰러즈 부인이 요즘 달라진 것을 알았을 텐데. 정 말이지 지난 반년 동안에 아주 달라졌단 말이야. 마치 악몽에라도 시달리 는 사람 같았어. 그리고 요즘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고 너도 조금 전에 말했잖니.」 나는 쌀쌀하게 물었다. 「그래, 누님의 진단은 뭡니까? 사랑의 고민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캐럴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후회야.」 「후회?」 「그래. 팰러즈 부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했다고 내가 말해도 너는 좀처 럼 믿으려 하지 않았지. 이렇게 되고 보니 내 확신이 점점 더 굳어져.」 나는 반박했다. 「아무래도 그 생각은 그리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살인할 만한 여자라면 그런 마음약한 감상에 젖어 후회 같은 걸 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지른 죄의 결과를 즐길 만큼 독했을 텐데요.」 캐럴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자도 있겠지. 하지만 팰러즈 부인은 달라. 신경이 아주 날카 로운 사람이었거든. 일시적 충동에 이끌려 남편을 살해할 생각이 들었겠 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그 부인이 고통을 조금도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었기 때문이야. 애슐리 팰러즈 같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으면 아마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을 테니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 부인은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 때문에 내내 괴로웠 겠지. 참 안됐어.」 팰러즈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 캐럴라인이 이런 동정을 베풀어 본 일 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부인이 이제 파리에서 주문해 온 옷 을 입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비로소 연민이며 이해 같은 상 냥한 기분을 품을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나는 누님의 생각이 도무지 어이없다고 딱 잘라 말해 주었다. 누님의 말 가운데 적어도 어떤 부분은 은근히 동감이 갔기 때문에 한층 더 강하 게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누님이 어떤 육감으로 짐작한 것이 정말로 들 어맞는다면 더욱더 난처해진다. 그런 짐작이나 해달라고 털어놓았던 것은 아니다. 누님은 온 마을에 자 기 의견을 퍼뜨릴 테고, 모두들 나에게서 얻은 의학적 근거에 대한 판단 이라고 믿어 버리겠지. 인생이란 괴로운 것이다. 나의 비난에 대해 누님은 맞서 왔다. 「어이없는 말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팰러즈 부인은 틀 림없이 지금 내가 한 말을 고백한 유서를 남겼을 테니까.」 「유서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이런 말을 지껄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어머나! 그런 것까지 벌써 조사해 보았구나. 그러면 그렇지, 제임즈, 너도 마음속으로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참으로 여간 아니야. 」 나는 억압적으로 나갔다. 「어떤 경우든 일단 자살이 아닌가 생각하는 게 상식이니까요.」 「검시 심문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내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은 게 원인이라고 내가 딱 잘라 증언하면 아마 열리지 않을 겁니 다.」 「그래, 너는 그런 확신이 있니?」 빈틈없는 질문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식탁에서 일어섰다. 킹즈 애벗 마을 사람들 나와 캐럴라인의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먼저 이 지방 거리에 대해 설 명해야겠다. 우리 마을 킹즈 애벗은 다른 마을과 그리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읍은 9마일 떨어진 크랜체스터다. 마을에는 큰 역과 작은 우 체국, 그리고 서로 겨루는 두 개의 잡화점이 있다. 억센 남자들은 대개 젊을 때 마을에서 떠나 버리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 들과 퇴역 군인들만이 우글거리고 있다. 따라서 마을에서의 기분 전환 거 리나 레크리에이션이라면 한마디로 말해 소문에 대한 것이다. 킹즈 애벗 마을에는 커다란 저택이 두 채밖에 없다. 하나는 남편이 세 상을 떠난 뒤 팰러즈 부인이 물려받은 킹즈 패독이고, 또 하나는 로저 애 크로이드 씨가 소유하고 있는 팬리 파크다. 애크로이드 씨는 어떤 시골 지주도 그보다 더 시골 지주다운 사람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늘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 면 마을의 공유지를 배경으로 공연하는 옛날식 희가극 제1막이 열릴 때 등장하는, 얼굴이 붉은 수렵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흔히 <자, 런던 으로 가자>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은 레뷔 극이 유행하여 그러한 시 골 지주는 희가극 무대에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애크로이드 씨는 본래 시골 지주가 아니다. 짐차 바퀴를 제조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붉은 얼굴의 붙임성있는 중년 남자다. 마을의 목사와 아주 친한 사이여서 교구 기금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내놓았고----개인 생활에서는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라는 소문이었지만 ----크리켓 경기나 청년 클럽, 상이군인 구제협회 등의 후원에서도 한몫 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 사람이야 말로 평화스러운 킹즈 애벗 마을의 중 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로저 애크로이드 씨는 21살 때 자기보다 여섯 살 많은 아름 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페이튼이라는 여자로 전남편의 아들 이 있는 미망인이었다. 결혼 생활은 짧았으나 괴로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왜냐하면 부인이 알 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결혼한 지 4년 만에 그녀는 술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뒤 애크로이드 씨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부인이 데려온 아들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7살이었다. 그가 지금은 벌써 25살이 되어 있다. 애크로이드 씨는 처음부터 이 아이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하며 키웠는데, 그는 굉장한 바람둥이여서 아버지인 그에게는 늘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킹즈 애벗 마을에서는 누구나 이 랠프 페이튼에게 호감을 가지 고 있었다. 첫째 그는 꽤 잘생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마을 사람들은 특히 소문 거리라면 정신없이 좋아 한다. 애크로이드 씨와 팰러즈 부인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처음부터 마을 사 람들 눈에 띄었지만, 팰러즈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뚜렷해졌다.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머지않아 상복을 벗게 되면 팰러즈 부인은 로저 애크로이드 부인이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사실 누구 눈에나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로저 애크로이드 씨 의 아내는 틀림없이 술 때문에 죽었고, 애슐리 팰러즈도 죽는 날까지 오 랜 세월 동안 술주정꾼으로 지내 온 남자였다. 말하자면 술주정꾼의 희생 자였던 이 두 사람이 예전 배필과의 생활에서 받은 고통을 서로 메워 보 려는 건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팰러즈 집안이 이 마을에 온 것은 겨우 1년 전이었지만, 애크로이드 씨 로 말하면 이미 지난 몇 해 동안 소문 거리의 주인공이었다. 랠프 페이튼이 어른이 될 때까지 애크로이드 씨네 집안일은 몇몇 가정 부에게 맡겨졌는데, 사람이 바뀔 때마다 캐럴라인과 그 무리들의 호기심 을 새로이 불러일으키곤 했다. 틀림없이 애크로이드 씨가 그중 한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기대를 걸며 적어도 지난 15년 동안 온 마을이 지켜 보았 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채용된 것은 미스 러슬이라는 꽤 똑똑한 여자로 5년 동 안, 즉 전임자의 두 배나 되는 기간을 으스대며 애크로이드 집안을 휘저 었다. 팰러즈 부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애크로이드 씨도 이 여자에게 서 도저히 빠져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또 하나의 사건이 겹쳤다----미망인이 된 애크로이드 씨 동생의 부인이 딸 데리고 난데없이 캐나다에서 왔던 것이다. 애크로이드 씨의 변변치 못한 동생의 아내였던 여자로, 결국 이 세실 애크로이드 부 인이 팬리 파크에 살게 된 덕분에----캐럴라인의 말을 빌면----미스 러 슬은 그 본디 지위로 되돌아가게 된 셈이었다. 그 <본디 지위>라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아무래도 이 말은 차갑고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어쨌든 미스 러슬이 입술 양 끝을 아래로 처지게 다물고 시큰둥한 미소를 지으며 세실 애크로이드 부 인에게 최대한의 동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안됐어요, 세실 부인, 남편 형제분의 동정을 받게 됐으니. 동정의 빵 은 쓰다고 하잖아요. 나도 스스로 일하여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팰러즈 부인과의 소문에 올랐을 때 세실 애크로이드 부인이 어떻게 생 각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애크로이드 씨가 재혼하지 않는 편이 부인에 게는 분명 유리하다. 그러나 팰러즈 부인과 만날 때 그녀는 언제나----야단스러울 정도는 아 니었지만----무척 상냥했다. 하긴 캐럴라인의 말에 의하면 그런 일로 그 녀는 본디 마음을 알 수는 없다고 하지만. 지난 여러 해 동안 킹즈 애벗 마을의 관심사는 대강 이런 것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애크로이드 씨와 그의 결혼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서로 입씨름했는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팰러즈 부인 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는 그 요지경을 조금 달리 조정해 야만 했다. 태평스럽게 결혼 선물이나 서로 의논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비극의 한가운데로 내던져진 것이다. 이런 일과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이리저리 생각하며 나는 기 계적으로 왕진을 하러 나갔다. 특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할 환자는 없었지 만, 있었다 해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상념은 자꾸 만 팰러즈 부인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자살이었을까. 만일 자살이었다면 죽음을 택한 사연을 적어 놓았을 법 도 한데. 여자란 내 경험에 의하면 자살하기로 결심했을 때 대개 그렇게 까지 해야만 되었던 심경을 적어 놓고 싶어하는 법이다. 즉 여자에게는 언제나 남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부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1주일도 못 되었다. 그때의 부인의 태도를 여러 가지로----그렇다----아무리 이것저것 떠올 려 보아도 이상한 데는 전혀 없었다. 그 때 문득 나는 바로 어제, 비록 말은 주고받지 않았지만 부인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부인은 랠프 페이튼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랠프 가 킹즈 애벗 마을에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양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집에서 나가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벌써 반년쯤이나 그의 모 습을 마을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부인 쪽에서 뭔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이 때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직 뚜렷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어쩐지 일의 진전에 대해 막연하고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 같았다. 어쨌든 어제 랠프 페이튼과 팰러즈 부인이 뭔가 열심히 소곤거리고 있 었던 사실을 생각하니 나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일들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며 걸어가다가 나는 로저 애크로이드 씨와 마주쳤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셰퍼드 씨, 마침 만나 뵙고 싶었던 참이오!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 일 어났구려.」 「그럼, 벌써 들으셨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크고 붉은 뺨이 핼쑥 해진 것 같았으며 늘 명랑하고 원기왕성하던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정말은 더욱 난처한 일이 있소. 셰퍼드 씨, 꼭 말씀드릴 게 있는데 지금 곧 나와 함께 가주실 수 없겠소?」 「난처하군요. 아직도 세 집이나 더 왕진하고 12시에는 집으로 돌아가 외래 환자를 봐야 하거든요.」 「그럼, 오후에라도. 아니, 차라리 오늘 저녁 함께 식사합시다. 7시 30 분이면 어떻겠소?」 「글쎄요……어떻게 되겠지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랠프에 관한 일 이라도?」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아마 지금까지 무 슨 일이 일어나면 대개 랠프 때문이었던 탓이리라. 애크로이드 씨는 여우에게라도 홀린 듯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 습을 보고 아무래도 정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애크로이드 씨가 이토록 어쩔 줄 몰라 하는 모 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랠프라고요? 아니, 랠프 일이 아니오. 랠프는 런던에 있으니까요---- 제기랄, 난처하게 되는군. 저기 미스 개닛이 오는군요. 이런 일이 있을 때 붙들리면 당해 낼 재간이 없겠지요. 그럼, 셰퍼드 씨, 오늘 밤에 뵙겠소. 7시 30분이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리둥절해 서 있는 나를 남기고 빠른 걸 음으로 사라졌다. 랠프가 런던에 있다고? 하지만 어제 오후 분명 킹즈 애벗 마을에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제 저녁이나 오늘 아침 일찍 런던으로 돌아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애크로이드 씨가 말하는 태도에서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마치 랠프가 벌써 몇 달 전부터 집에 들르지 않은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정보에 굶주린 미스 개닛에게 붙잡힌 것이다. 미스 개닛도 나의 누님 캐럴라인이 지닌 성질을 그대로 갖추고 있지만, 아깝게도 한걸음 껑충 뛰어 결론으로 돌입하는 겨냥의 날 카로움이 결여되어 있다. 그점에 있어서는 역시 캐럴라인이 한 수 위다. 미스 개닛은 숨을 헐떡이며 자꾸만 탐색해 왔다. 「팰러즈 부인은 참 안됐어요. 사람들은 그 부인이 전부터 마약을 즐겨 먹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몹쓸 소리를 퍼뜨릴까요. 그런 데 딱하게도 그것이 아주 밑도끝도없는 소리가 아닌가 봐요. 아, 글쎄, 아 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소문으로는 애크 로이드 씨가 그 일을 알고 파혼했다지 뭐예요. 그럼요, 정말 약혼을 했었 대요. 틀림없는 증거가 있거든요. 물론 당신은 알고 계셨겠지요? 의사 선 생님은 무엇이든지 알고 계시니까요. 다만 입 밖에 내지 않으실 따름이지 …….」 혼자 지껄여대면서 그녀는 그 날카로운 구슬 같은 눈길을 지그시 나에 게 쏟으며 내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지켜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캐 럴라인 누님에게서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덕분에 나는 시치미를 떼고 아 무렇지 않은 듯 대답만 해줄 수 있었다. 지금 경우에는 미스 개닛에게 그런 질좋지 않은 소문 거리에 끼여들지 않으니 참으로 장하다고 칭찬하는 방법을 썼다. 나 스스로도 훌륭한 반격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스 개닛은 눈을 휘둥그 렇게 뜨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 자 리를 떠났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환자가 몇 사람 진찰실 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진찰하고 점심때까지 잠시 뜰에 나가 생각에 잠겨 보려는 데, 문득 또 한 사람의 여자 환자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일 어서더니 좀 놀란 태도로 우뚝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어째서 놀랐는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구태여 말한다면, 미스 러슬이라 는 여자에게는 육체적인 질병을 초월한, 어딘지 강철 같은 느낌이 드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애크로이드 집안의 가정부인 그녀는 키가 크고 꽤 아름다웠으나 가까 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나운 눈매, 꼭 다문 입술…… 만일 내가 그 집 하녀였다면 그녀의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틀림없이 피해 다녔을 것이 다. 미스 러슬이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셰퍼드 씨. 저, 무릎을 좀 봐주십사 하고 왔어요.」 진찰해 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호소하 는 뚜렷하지 않은 아픔이라는 것 또한 참으로 애매했다. 만일 그녀가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꾀병을 앓고 있다고 의심했 을 것이다. 어쩌면 팰러즈 부인이 죽은 원인에 대해 뭔가 알아내려고 일 부러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순간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내 판단이 틀렸음을 곧 알았다. 그녀 는 그 비극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이야기하 고 싶은 듯 우물쭈물했다. 마침내 그녀는 말했다. 「바르는 약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조금도 효력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나도 효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직업상 일단 반대했다. 그렇다 해도 그리 해로운 약이 아니며 내 장사 도구이니 만큼 변호해 두어야 한 다. 즐비하게 놓여 있는 약병을 멸시하듯 둘러보며 미스 러슬은 말했다. 「나는 이런 약 따윈 믿지 않아요. 약이란 크게 해를 끼치기도 하니까 요. 코카인 중독이 그 좋은 예지요.」 「아니, 그건 정도 문제입니다.」 「상류 사회에는 코카인 중독이 아주 많다지요?」 상류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나보다 훨씬 아는 게 많은 가 보다. 그 러나 나는 토론할 생각이 없었다. 미스 러슬은 말을 이었다. 「자, 셰퍼드 씨, 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만일 정말로 마약에 중독되었다면 치료 방법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내 가 조금 설명해 주니 그녀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었다. 역시 팰러즈 부 인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또다시 의심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즉 예를 들면 베로날입니다만…….」 그런데 기묘하게도 베로날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 눈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화제를 바꾸어 전문가도 검출하지 못할 진기한 독약이 있다 는 얘기가 정말이냐고 물었다. 「호,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으시는가 보군요?」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다. 「미스터리 소설의 참맛은 진기한 독약을 손에 넣는 일입니다. 될수 있 으면 남아메리카 같은 곳에서 아직 아무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을----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원주민이 화살촉에 바르는 그런 독약 말입니다. 닿기만 하면 곧 목숨이 끊어지며, 서양의 과학으로는 검출해 낼 수 없는, 그런 독약 말이지요?」 「네, 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로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없지요. 물론 큐라리(curari, 馬錢屬: 식물 즙 으로 만든 독)라는 게 있습니다만.」 나는 큐라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그녀는 여기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그 약이 내 약품장에 있느냐고 묻고, 내 가 없다고 대답하자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가봐야겠다고 하기에 내가 진찰실 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려는데, 마침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미스 러슬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는다니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녀가 자기 방에서 나가 잡담하고 있는 하녀들을 야단치고 다시 돌아와 읽다 만 ≪일곱번째 죽음의 수수께끼≫같은 미스터리 소설을 즐거운 듯 읽기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나는 아주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호박 가꾸는 사나이 점심 식사 때 나는 캐럴라인에게 오늘 저녁 팬리 파크로 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누님은 반대하기는커녕 대찬성이었다. 「근사하구나. 틀림없이 그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랠프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나는 놀라며 말했다. 「랠프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팬리 파크로 돌아가지 않고 스리 보어즈 여관에 묵고 있지?」 랠프 페이튼이 마을 여관에 묵고 있다는 캐럴라인의 말에 나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캐럴라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했 다. 「애크로이드 씨 이야기로는 런던에 있다고 하던데요.」 별안간 허를 찔린 나는 그만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다는 중대한 법칙을 어기고 말았다. 흥분으로 캐럴라인의 코가 실룩거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머나! 랠프는 어제 아침 스리 보어즈 여관에 나타나 아직 거기 있 어. 어젯밤에는 젊은 여자와 외출한 것 같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본디 랠프라는 사나이는 여 자와 외출하지 않는 밤이 더 드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대체 뭐가 좋아 서 런던의 번화가 대신 킹즈 애벗 같은 데를 골랐을까 하고 나는 이상하 게 생각했다. 「상대는 여급사였겠지요?」 「아니야,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 랠프 쪽에서 만나러 갔다는데, 그 게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그 점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런 일을 인정해야 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것임에 틀림없다. 지칠 줄 모르는 누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어. 사촌 누이야.」 나는 놀라서 그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플로러 애크로이드 말입니까?」 물론 플로러 애크로이드는 랠프 페이튼과 아무 혈연 관계도 없지만, 랠 프는 오랫동안 애크로이드 친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촌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플로러 애크로이드지.」 「하지만 플로러를 만나고 싶으면 왜 팬리 파크로 가지 않았을까요?」 「몰래 약혼했으니까 그렇지. 애크로이드 씨가 아무래도 허락하지 않으 니까 남몰래 만나야 했거든.」 캐럴라인은 득의양양했다. 이 주장에는 꽤 허술한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점을 지적하는 일은 미뤄 두었다. 그러다가 화제는 우리 이웃에 새로 이사온 사람에게로 옮아 갔다. 바로 이웃의 <낙엽송 집>에 요즘 낯선 사나이가 옮겨와 살기 시작했 다. 그 사나이가 외국 사람이라는 것밖에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 캐럴라인으로서는 큰 고민 거리였다. 그녀의 정보국도 손든 셈이 었다. 이 사나이도 역시 남들처럼 우유며 야채며 고기, 때로는 생선 같은 것 을 먹을 테지만, 그러한 식료품을 파는 장사꾼들도 누구 하나 정보를 얻 어낸 이가 없었다. 이름은 포아로 씨라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본래 이름이 아닌 것 같 은 느낌이 든다. 한 가지 알려진 것은 그가 호박 가꾸기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캐럴라인이 바라는 정보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녀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 사나이가 어디서 왔으며 직업은 무엇이고 결혼을 했는지, 했다면 부인은 어떤 여자였는지, 어머니의 옛 성은……하 는 것 등이었다. 여권의 기재 사항을 고안해 낸 것은 아마 캐럴라인 같은 사람이었으리라. 「누님, 그 남자의 직업이라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이발사였을 겁니다. 그 콧수염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캐럴라인은 나와 견해가 달랐다. 이발사라면 머리칼에 웨이브가 있으며 저렇게 곧은 머리칼을 하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발사는 모두 머리 칼에 웨이브가 있다고 한다. 나는 머리칼이 곧은 이발사를 몇 사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다고 대답 했지만, 캐럴라인은 도무지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짐작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주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요전에 원예 도구를 빌리러 갔을 때 굉장히 정중하더구나. 하지만 무 엇 하나 알아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프랑스 분이 신가요』하고 물었더니『아닙니다』하지 않겠니? 어찌 된 일인지 더 이 상 물어 볼 용기가 없어지고 말았어.」 나는 이 이상한 이웃 사람에 대해 한층 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캐 럴라인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시바의 여왕처럼 맨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사나이라면 꽤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마 그 집에는 새로 나온 진공 청소기가 있을 거야.」 또 뭔가 빌려 달라는 핑계로 찾아가면 여러 가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는 속셈이 캐럴라인의 눈 속에서 번쩍 빛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 았다. 그것을 기회로 나는 뜰로 빠져 나갔다. 나는 뜰손질하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민들레 뿌리를 열심히 뽑고 있는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 「아!」 그 순간 뭔가 무거운 것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더니 털썩 하고 눌려서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발 밑에 떨어졌다. 저런, 호박이 아닌가! 나는 화가 벌컥 나서 얼굴을 쳐들었다. 왼쪽 담 위로 얼굴이 나타났다. 달걀 모양 머리, 그 머리의 옆면을 뒤덮은 몹시 검은 머리칼, 멋진 콧수 염, 빈틈없는 두 개의 눈동자. 이 사람이 바로 수수께끼의 우리 이웃 포 아로 씨였다. 그는 곧 사과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 습니다. 실은 몇 달 전부터 호박을 가꾸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이 호박들이 보기싫어졌지 뭡니까. 놈들을 없애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글쎄, 그만 손을 뻗어 가장 큰 놈을 하나 움켜잡아 담 너머로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그려. 참으로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부 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정중한 사과의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 기분도 모두 사라지지 않 을 수 없다. 게다가 호박이 내게 부딪친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담 너머로 커다란 야채를 내던지는 것이 부디 이 새로운 이웃 사람의 취미가 아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이 살게 되면 아무래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자 이 색다르고 몸집작은 사나이는 내 기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 다. 「아, 아닙니다. 부디 걱정하지 마십시오. 늘 이런 짓을 하지는 않습니 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알아주실는지요? 어떤 목적을 위해 애써 일해 온 사나이가 온갖 고생 끝에 겨우 여가와 일다운 일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바쁘게 지내던 날이며 그토록 그만두고 싶었던 그 일들이 그리워 못 견디는 그런 심정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 알 수 있고말고요.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쉬운 예로 나 자신이 바로 그렇습니다. 1년쯤 전에 유산이 조금 굴러 들어왔지요. 오랫 동안 그리던 꿈을 실현시키기에 충분한 액수였습니다. 나는 전부터 여행 하고 싶다,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 는 줄 아십니까? 지금 말씀드린 대로 돈이 굴러 들어온 것은 1년 전인데, 그러나 나는 아직 이 모양으로 그저 여기서만 맴돌고 있답니다.」 몸집작은 이웃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의 사슬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합 니다. 그런데 막상 그 목적이 이루어지고 나면 지금까지 해오던 고달픈 그날 그날의 일이 그리워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내 가 하던 일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거든요.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재 미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면?」 나는 유도해 보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캐럴라인의 탐구 정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인간성의 연구였습니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대범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역시.」 틀림없는 이발사 출신이다. 이발사만큼 인간의 기묘한 심리를 환히 꿰 뚫어 아는 직업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내게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곁을 떠난 일이 없는 친구 말입니다. 때로 아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래 도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친구였지요. 이제와서는 그 친구의 어리석음까 지도 그리워집니다. 그 천진난만함, 진지하게 사물을 보는 견해, 나의 뛰 어난 재능으로 그를 즐겁게 해주고 깜짝 놀라게 해주기도 했던 즐거움, 그런 것들을 되새겨 보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해집니다.」 나는 동정하듯 물었다.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아닙니다. 팔팔하게 살아서 건강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 저쪽에서 말입니다 지금 아르헨티나에 있답니다.」 나는 부러운 듯 말했다. 「호, 아르헨티나에요?」 나는 오래 전부터 남아메리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문득 올려다보니 포아로 씨가 동정어린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사람 기분을 꽤 잘 알아주는 사나인 것 같다. 그는 물었다. 「당신도 언젠가는 가시겠지요?」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갈 수도 있었지요. 1년 전에는. 그런데 내가 어리석어서, 아니 어리석 기만 했더라면 그래도 좋았을 텐데, 욕심이 눈이 어두워 그림자를 위해 실물을 잃었다고나 할까요. 기껏 얻은 재산을 다 없애 버렸답니다.」 「저런, 투기에 손을 대셨습니까?」 나는 슬픈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으로는 유쾌 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야릇한 몸집작은 남자는 덮어놓고 진지하기 만 한 것이다. 그는 불쑥 물었다. 「포큐파인 제유(製油) 주였습니까?」 나는 움찔했다. 「아닙니다. 실은 그것을 노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만, 결국 서부 오스 트레일리아의 금광 주에 모두 쏟아 넣었습니다.」 포아로 씨는 추측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찬찬히 바라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마디 했다. 「운명이군요.」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무엇이 운명입니까?」 「포규파인 유전과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금광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 시는 분과 이웃에 살게 된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 역시 갈색 머리 여자에게는 약한 편이십니까?」 어리둥절하여 서 있는 나를 보고 상대는 크게 웃었다.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머리가 돈 사람은 아니니까요. 내가 그만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요. 아까 말씀드린 내 친구가 순진한 젊은이여서, 세상의 여성이 모두 착하고 아름다운 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만 그렇 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이가 꽤 드신데다 의사십니다. 우리 인 생의 어리석음도 허무함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서로 이웃에 살고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당신 누님에게 내가 가꾼 호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그는 몸을 굽히더니 가장 잘 익은 호박을 하나 집어 정중하게 내밀었 다. 나는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여 고맙게 받았다. 「참으로 유익한 아침을 보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 나라에 있는 내 친구와 여러 가지로 닮은 분과 가까워졌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한 가 지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아마도 이 작은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 나 아실 것 같은데, 눈과 머리가 검은 미남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언제나 가슴을 펴고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띠고 걸어가는 젊은이 말입니다.」 거기까지만 들으면 틀림없다. 「랠프 페이튼 대위인 것 같군요.」 「전에는 이 고장에서 볼 수 없었지요?」 「네, 얼마 동안 이 마을에 없었습니다. 그는 팬리 파크의 애크로이드 씨 아드님이라고 할까요, 아니 양아드님이랍니다.」 이웃집 남자는 좀 불안한 듯한 몸집을 해보였다. 「그러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애크로이드 씨에게서 가끔 이야기를 들 었으니까요.」 나는 조금 놀라 물었다. 「애크로이드 씨를 아십니까?」 「네, 런던에서요. 내가 거기서 일하고 있을 무렵에 말입니다. 이 고장 에서는 나의 옛 직업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려 두었지요.」 「그렇습니까.」 뻔뻔스럽게 속물 근성을 모조리 드러내는 말투에 나는 오히려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 몸집작은 상대는 굉장히 기분좋아 하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숨어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나는 명성같은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내 이름이 잘못 불려지고 있지만 바로잡 지 않고 내버려둔답니다.」 「그렇습니까.」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랠프 페이튼 대위라……」 포아로 씨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 젊은이가 바로 애크로이드 씨의 조카의 아름다운 플로러 양 의 약혼자였군요.」 나는 몹시 놀라 물었다. 「누구에게서 들으셨습니까?」 「애크로이드 씨에게서요. 1주일쯤 전이었을 겁니다. 아주 기뻐하고 계 시더군요. 일이 이렇게 되기를 오래 전부터 바라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 다. 오히려 그 젊은이에게 어느 정도 압력까지 넣어서 그렇게 하도록 이 끈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명한 일이 못 됩니다. 젊 은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결혼을 해야 하며, 아무리 유산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양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결혼을 해선 안 되지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애크로이드 씨쯤 되는 사람이 이 발사 따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조카와 양아들의 결혼 문제를 의논했 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애크로이드 씨는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는 데 인색하진 않지 만, 그와 더불어 체면을 존중하는 점에서는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포아로 씨는 역시 이발사가 아닌 것 같다. 당황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나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랠프 페이튼을 눈여겨보신 것은 그가 미남자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뿐이 아니지요. 그야 영국 사람치고는 보기드문 미남 자긴 하지만요. 아마도 이 나라의 여류 작가에게 말하라고 하면 그리스의 신 같다고 하겠지요. 정말은 그 젊은이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서입니다.」 포아로 씨는 이 마지막 말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투로 했으므로 나 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마치 나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은 뭔가 신비로운 지혜로 랠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었다. 나에게는 그 인상만이 남았다. 바로 그 때 집안에서 누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캐럴라인은 마을에서 방금 돌아온 듯 아직 모 자를 쓴 채였다. 그녀는 느닷없이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애크로이드 씨를 만났어.」 「그래서요?」 「물론 불러 세웠지. 그런데 왜 그런지 몹시 서두르는 눈치로 달아나려 는 태도였지.」 틀림없이 그랬으리라. 애크로이드 씨는 오늘 아침나절 미스 개닛에게 품었던 것과 같은 기분을 캐럴라인에게도 품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 이었을지도 모른다. 캐럴라인에게 붙잡혔다가는 미스 개닛의 경우보다 더 욱 난처해질 테니까. 「얼른 랠프 일을 물어 보았지. 그랬더니 깜짝 놀라던걸. 랠프가 이 마 을에 와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야. 흥, 나더러 잘못 본 게 아니냐 고 하더구나! 어림없는 소리지! 내가 잘못 보다니.」 「누님에 대한 인식 부족이군요.」 「그래도 랠프와 플로러가 약혼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더군.」 「그 일이라면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이 말만은 얼마쯤 으스대며 했다. 「누구한테서 들었지?」 「이웃집 주인에게서요.」 캐럴라인은 잠시 동요의 빛을 얼굴에 떠올리더니 다시 화제를 처음으 로 돌렸다. 「나는 애크로이드 씨에게 랠프가 스리 보어즈 여관에 묵고 있다고 알 려 주었어.」 「누님은 그렇듯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게 남에게 얼마나 폐를 끼치는 일인지 모르십니까?」 「바보 같은 소리마. 무슨 일이든지 알아야 하는 거야. 나는 모르는 사 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애크로이드 씨도 내가 가르쳐 주니 몹시 고마워하던걸.」 나는 그 다음 말을 들으려고 재촉했다. 「그래서요?」 「아마 애크로이드 씨는 곧 스리 보어즈 여관으로 갔을 거야. 하지만 거기 가도 랠프는 못 만났을걸.」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요? 그건 또 왜지요?」 「암, 못 만나지. 난 지금 저 숲 속을 지나왔는데…….」 「숲 속을 지나왔다고요?」 캐럴라인은 얼굴을 붉혔다. 「날씨가 아주 좋기에 산책이라도 좀 해볼 생각이었어. 숲 속은 지금 단풍이 한창이야. 참 아름답더구나.」 경치야 어떻든 캐럴라인이 숲 속에 흥미를 가질 리 없다. 숲 속에 들어 가면 발이 젖는다느니, 머리 위로 뭐가 떨어진다느니, 벌레가 있다느니 하며 늘 아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한 누님을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숲 속까지 이끈 것은 역시 그 몽 구스족의 본능일 것이다. 킹즈 애벗 마을 사람들 눈을 피해 젊은 남녀가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라곤 그 숲밖에 없다. 더욱이 그곳은 팬리 파크와 잇닿아 있다. 나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요?」 「응, 내가 숲을 지나오려니까 무슨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겠니.」 캐럴라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음.」 「한 사람의 목소리는 틀림없이 랠프였어. 그리고 다른 말소리는 젊은 여자 목소리였고. 물론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물론 그러시겠지요.」 나는 노골적으로 비꼬아 말했으나, 캐럴라인은 그런 줄도 모르는 모양 이었다. 「그렇지만 저절로 들려 오는 걸 안 들을 수가 있어야지. 여자가 뭐라 고 말했어.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랠프가 성내며 대답하더 군. 『알겠어.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나를 내쫓을 게 틀림없어. 요즘 와선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어. 이제 한 번만 더 거스르면 큰일날 거야. 그런데 우리는 지금 돈이 많이 필요하쟎아? 아버지만 죽으면 우리 는 부자가 될 텐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구두쇠야. 그 러나 죽고 나면 돈이 많이 굴러 들어오지. 하지만 유언장을 고쳐 쓰거나 하면 큰일 아니야? 아무튼 모든 일을 다 내게 맡기고 기다려. 너무 걱정 하지마』라고. 나는 한마디 한마디 다외고 있단다. 그런데 운나쁘게도 내 가 마른 나뭇가지를 밟아버렸지 뭐니. 그러자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추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뒤쫓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끝내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말았지.」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하지만 그것쯤 누님이 스리보어즈 여관 으로 곧 달려가서, 어지럽다고 핑계대며 부엌에 들어가 브랜디를 한 잔 시켜 놓고 여급사로 둘 다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면 될 것 아닙니까?」 캐럴라인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여급사는 아니었어. 정말은 나는 플로러 애크로이드가 아닐까 생각 해. 그러나…….」 「그저 상상만으로는 확실치 않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플로러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였을까?」 캐럴라인은 마을 아가씨들을 하나하나 들먹이며 그럴듯한 아가씨를 찾 아내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틈타 왕진하러 가겠다고 하며 일어서서 집을 나섰다. 우선 나는 스리 보어즈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쯤 랠프가 돌아와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랠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 마을에서는 내가 랠프와 가장 가 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어머니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 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유전의 희생자였다.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은 치명적인 술버릇은 없다 하더라도 어딘지 의지가 약해 보였다. 오늘 아침에 알게 된 이웃 사람도 말했듯 잘생긴 젊은이란 그를 두고 한 말이다. 180센티미터의 균형잡힌 몸집, 운동가다운 부드러운 동작, 머 리칼은 어머니를 닮아 검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는 늘 미소가 넘치고 있었다. 랠프 페이튼은 태어날 때부터 남의 눈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 었다. 그는 방종하고 낭비벽이 있으며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이였지만, 사람이 좋아서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하고 나는 혼자 생 각했다. 스리 보어즈 여관에 가보니 지금 막 랠프가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누 구의 안내도 받지 않고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미뤄 보아 나를 잘 대해 줄 지 조금 불안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며 나를 맞아 주었다. 「아, 셰퍼드 의사 선생님이군요! 어서 오십시오. 이 마을은 온통 불쾌 한 것투성이지만 당신만은 반갑습니다.」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이 마을이 어떻다고?」 랠프는 아주 쾌활하게 웃었다. 「이야기하려면 너무 길어지겠지요. 아무래도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잘되지 않는군요. 자, 우선 한 잔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맙네, 그렇게 하지.」 랠프는 벨을 누르고 다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나는 지금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 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그의 말투는 침울했다. 나는 동정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저 까다로운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떻게 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어떻게 했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 그 때 급사가 올라왔다. 랠프는 마실 것을 주문했다. 급사가 돌아간 뒤 랠프는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대한 일인가?」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은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말투가 꽤 조심스러웠으므로 나는 이번에는 예삿일이 아니구나 생 각했다. 랠프가 이토록 걱정하는 것을 보니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다. 「완전히 막혀 버렸습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나는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러나 랠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당신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 다.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생각입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아까보다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 풀이했다. 「그렇습니다.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생각입니다.」 팬리 파크의 만찬 내가 팬리 파크의 현관 벨을 누른 것은 7시 30분 조금 전이었다. 집사 파커가 문을 열어 주었다. 기분좋은 밤이었으므로 나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널따란 현관 홀로 들어서니 파커가 외투를 벗겨 주었다. 바로 이 때 애크로이드 씨의 비서인 레이먼드라는 쾌활한 젊은이가 두 손에 서류를 한아름 안고서 서재로 가고 있었다. 내가 테이블 위에 왕진 가방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그가 물었다. 「세퍼드 씨, 안녕하십니까? 오늘 밤은 손님으로 오셨나요, 그렇지 않 으면 왕진입니까?」 나는 언제 부르러 올지 모르는 산모가 한 사람 있어서 혹시나 하여 준 비해 가지고 나왔다고 설명했다. 레이먼드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접실에서 좀 기다립시오. 부인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저는 지금 이 서류를 애크로이드 씨께 보여 드리러 가는 참입니다. 당신이 오셨다고 말씀 전하지요.」 레이먼드가 들어올 때 파커는 물러갔으므로 홀에 나 혼자 남겨졌다. 나 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벽에 걸린 큰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전부터 알고 있는 응접실 문 이었다. 손잡이에 막 손을 댔을 때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창문 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 았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때 안에서 러슬이 막 나오려 던 참이었으므로 하마터면 둘이 부딪칠 뻔했다. 그래서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내가 이 가정부를 똑바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옛날에는 더 아름다웠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아니, 아름다운 점에 있어서 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없겠지. 흰 머리칼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머리 에 얼굴을 붉히니 여느 때의 차갑던 인상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외출하여 지금 집에 없는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 다. 그녀는 마치 달음박질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제가 너무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아니예요! 벌써 7시 30분이 지났는걸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 나서 덧붙였다. 「나는 오늘 저녁에 당신이 오시는 줄 몰랐어요. 애크로이드 씨가 아무 말씀도 안 하셨거든요.」 아무튼 미스 러슬은 내가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은 것이 그리 마 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무릎은 좀 어떻습니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여전해요.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세실 부인이 곧 나오실 거예요. 저는 다만 꽃이 제대로 꽂혀 있는지 보러 들어 왔을 뿐이었지요.」 그녀는 얼른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이 방에 있었던 일을 일부러 변명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창가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다. 그 때 나는 문득 여기에 큰 프랑스식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은 바깥 테 라스 쪽으로 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주의해 보았더라면 전부터 알 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들려 온 것은 이 창문을 닫는 소리였겠군. 나는 멍하니 ――쓸데없는 여러 가지 걱정거리를 생각하기 싫었다는 게 더 타당할 것 이다――아까 방에서 들려 온 것은 무슨 소리였을까 하고 추리해 보았다. 난로에서 석탄이 타는 소리였을까? 아니, 그것과는 아주 다른 소리다. 그렇다면 옷장 서랍을 여닫는 소리였을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 때 문득 나는 은테이블이라고 불리는 장식장을 보았다. 유리 뚜껑이 덮이고, 그 유리를 통해 속에 든 물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이었다. 나는 걸어가서 속을 들여다보았다. 옛날 은돈 두 닢, 찰즈 1세가 어릴 때 신었다는 구두, 중국 인형,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아프리카 토인들이 사용하던 도구며 민속품 등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유리 뚜껑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하 여 손에서 놓쳐 버렸다. 그 순간 아까 들려 온 게 바로 이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이 은테이블 뚜껑을 조심스럽게 닫는 소리였다. 나는 사실인지 어떤지 시험삼아 몇 번 더 열었다가 닫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의 것을 자세히 보려고 다시 한 번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연 채로 이 은테이블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플로러 애크로 이드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플로러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많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다 칭 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 위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투명할 만큼 맑고 하얀 살결이다. 아름다운 금 빛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그 맑은 살결에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볼, 어깨는 남자처럼 넓으나 허리는 가늘었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것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는 피곤한 의사에게 있어 한 잔의 청량제가 된다. 단순하고 소박한 영국 여성. 나는 너무 구식인지 모르나, 이런 순혈종 (純血種)인 사람은 꽤 귀중한 존재다. 플로러는 나와 함께 은테이블 옆에 서서 찰즈 1세가 어릴 때 신었다는 구두를 보며 정말 신었던 것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 「아무튼 누가 신었느니, 누가 쓰던 것이라느니 하며 떠들어 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 신을 신을 수도, 그 물건을 쓸 수도 전혀 없으니까요. 조지 엘리엇이 ≪강변의 물레방아≫를 쓸 때 썼다는 이 펜을 보세요. 결국은 여느 펜에 지나지 않잖아요? 그토록 조지 엘리엇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강변의 물레방아≫를 사서 읽는 편 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당신 같은 분은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책을 보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셰퍼드 씨. 저는 ≪강변의 물레방아≫를 굉장히 좋아 해요.」 나는 플로러의 이 이야기를 듣고 은근히 기뻤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책이란 대개 우리 같은 사람은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것 뿐이다. 「선생님은 아직 제게 축하 말씀을 안 하셨어요. 소문 들으셨지요?」 플로러는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가운뎃손가락에서 큰 진주가 빛나고 있었다. 「저, 랠프와 결혼하게 되었어요. 큰아버지도 퍽 기뻐하세요. 이제 언제 까지나 이 집에서 살게 되겠지요.」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두 분의 행복을 빕니다.」 플로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은 약혼한 지 벌써 한달이나 됐어요. 그런데 겨우 어제야 발표했 지요. 큰아버지는 크로스 스톤즈 저택을 사서 우리들에게 주신다나 봐요. 그래서 농장을 경영해 보기로 했어요. 하지만 겨울 동안은 그곳에서 사냥 을 하며 지내고, 사교 시즌에는 런던으로 돌아갈 거예요. 여름철은 요트 에서 지내고 싶어요. 저는 바다가 참 좋거든요. 그리고 물론 교회 일에도 관심이 많으니까 어머니회 같은 데 꼭 참석할 거예요.」 이 때 세실 애크로이드 부인이 늦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들어왔다. 미안한 말이지만 세실 부인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이와 뼈만 있는 사람 같아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가 입으로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역시 냉 담하고 타산적으로 보인다. 나는 플로러를 창가에 남겨 두고 부인 쪽으로 걸어갔다. 부인은 뼈마디 와 반지뿐인 손을 내밀며 말했다. 「플로러가 약혼한 것 아시지요?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배필이에요. 젊 은 두 사람은 모두 좋아서 야단이랍니다. 랠프는 검은 머리고 플로러는 금빛 머리니 얼마나 잘 어울려요. 셰퍼드 씨, 나는 정말 어머니로서 어깨 가 가벼워진 느낌이랍니다.」 세실 부인은 한숨을 지었다. 아름다운 모성애의 발로라고나 할까. 그러 나 그 눈은 여전히 날카롭게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당신은 로저와 오랜 친구잖아요. 그리고 아 주버님 역시 당신 의견이라면 존중하고 있지요. 나는 참 난처하게 되었어 요. 미망인이란 언제나 떳떳치 못하군요. 게다가 또 여러 가지 복잡한 일 도 많고. 재산 처분이라든가 하는 문제 말이에요. 아마 로저는 플로러에 게도 재산을 나눠 주겠지만, 워낙 돈에 까다로운 사람이거든요. 실업가로 서는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래서 당신에게 로저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플로러는 당신을 몹시 따르고, 우리는 알게 된 지 2년밖에 안 되지만 오래 사귄 사이처럼 친밀감이 드는군요.」 응접실 문이 열렸으므로 세실 부인의 웅변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방해자가 들어온 것이 나는 무척 기뻤다. 다른 사람들의 사사로운 일, 더욱이 플로러의 재산 문제로 애크로이드 씨와 이야기하라니 당치도 않 은 소리였다. 응접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세실 부인이 이야기를 계속 했더라면 나는 딱 잘라 거절했을 것이다. 「브랜트 소령을 아시겠지요. 셰퍼드 씨?」 「네, 잘 압니다.」 헥터 브랜트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이름만은 대개 알고 있다. 사람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낯선 산골이며 숲 속으로 가서 여 러 가지 사나운 짐승들을 잡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브랜트라고요? 저 맹수잡이로 유명한 브 랜트 말입니까」하고 되묻는다. 그 브랜트가 어떻게 애크로이드 씨와 사귀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전부 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릴 듯싶 지 않은데. 헥터 브랜트는 애크로이드 씨보다 다섯 살쯤 아래다. 그들은 어릴 적 동무였으나 자라나면서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우정만은 여전했다. 2년에 한 번쯤 브랜트는 이 팬리파크를 찾 아와 2,3주일 묵어 가곤 했다. 이 집 현관을 들어서는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는 훌륭한 뿔을 가진 동물들의 머리는 브랜트가 친구에게 갖다 준 것 이었다. 브랜트 소령은 그의 독특한 침착하고 조용한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왔 다. 보통 키의 듬직한 몸집으로 얼굴은 마호가니 비슷한 붉은 갈색에 유 난히도 무뚝뚝했다. 잿빛 눈동자는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말수가 적고, 어쩌다 한마디 할 때도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투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셰퍼드 씨.」 그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하고 난로 앞에 당당하게 서서 마치 아프리 카 숲 속에서 일어나는 진기한 사건이라도 구경하듯 우리들 머리 너머로 멀리 창 밖을 바라보았다. 플로러가 말했다. 「브랜트 씨, 여기 있는 아프리카 물건에 대해 좀 이야기해 주시겠어 요? 모두 다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전에 듣기로 헥터 브랜트라는 사람은 여자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지금 그는 웬일인지 쾌활한 태도로 얼른 은테이블 옆에 서 있는 플로러 곁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테이블 속을 들여다보았다. 세실 부인이 또다시 플로러의 재산 문제를 꺼낼까봐 나는 얼른 새로운 스위트피 종자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오늘 아침 데일리 메일 신문에서 새로운 스위트피 종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다. 세실 부인은 원예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으나, 언제든지 남의 화제에 아는 척하는 버릇이 있고 또한 데일리 메일 신문 애독자였다. 덕분에 애 크로이드 씨와 그의 비서가 나타날 때까지 가벼운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 눌 수 있었다. 얼마 뒤 파커가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세실 부인과 플로러 사이에 앉게 되었다. 브랜트 소령은 세실 부 인과 마주앉았고, 비서 제프리 레이먼드는 브랜트 옆에 앉았다. 그리 즐거운 저녁 식사는 아니었다. 애크로이드 씨는 뭔가 생각에 잠겨 침울했고 음식에도 그리 손을 대지 않았다. 세실 부인과 레이먼드, 그리고 내가 식탁의 화제를 이끌어 나갔다. 플 로러도 큰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고, 브랜트 소령은 언제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애크로이드 씨는 나를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애크로이드 씨는 말했다. 「커피를 가져오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레이먼드에게 일러두었소.」 나는 무슨 곡절이 있구나 여겨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더니, 파커가 커 피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난로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기분좋은 방이었다. 한쪽 벽에는 책장이 죽 놓이고 큰 의자에는 모두 감색 가죽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창가의 큰 책상 위에 잘 정돈된 서류가 쌓여 있었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가지 잡지와 신문이 놓여 있었다. 애크로이드 씨는 커피를 마시며 예사롭게 말했다. 「요즘 또 소화 불량증이 생겨서……전에 먹던 그 알약을 좀 주시겠 소?」 애크로이드 씨는 마치 건강 상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맞장구쳤다.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참 잘됐군요. 그럼, 지금 먹을까요?」 「현관 홀에 가방을 두고 왔으니 얼른 가져오지요.」 애크로이드 씨는 손을 들어 나를 말렸다. 「아니오. 당신이 안 가셔도 됩니다. 파커더러 가져오라고 하지요. 파 커, 셰퍼드 씨의 가방을 좀 갖다 주게.」 「네, 알겠습니다.」 파커는 밖으로 나갔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려 하자 애크로이드 씨는 손짓으로 가로막았다. 「아직 좀 기다리시오. 나는 잠시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소.」 그의 표정으로 보아 잘 알 수 있었다. 나도 몹시 불안해졌다. 여러 가 지 불길한 생각만 머리에 떠올랐다. 애크로이드 씨는 다시 말했다. 「창문이 잘 닫혀 있는지 좀 봐주시겠소?」 나는 이상하게 여기며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 그것은 프랑스식 창문 이 아니라 아래 위로 여닫는 여느 창문이었다. 묵직해 보이는 비로드 커 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창문은 위쪽만 조금 열려 있었다. 내가 창가에 서 있을 때 파커가 가방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창문 쪽 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걱정없습니다.」 「고리도 걸려 있겠지요?」 「네.」 파커는 곧 나가고 문도 닫혀 있었으므로 나는 물어 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애크로이드 씨?」 애크로이드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난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오. 그런 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소. 파커가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오. 일하는 사람들이란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오, 자, 여기 앉으시오. 문도 꼭 닫혔겠지요?」 「네, 아무도 엿들을 염려없습니다. 마음놓으십시오.」 「셰퍼드 씨, 이미 24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르오. 아마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거요. 지금 내 눈앞에서 이 집이 무너진다 해도 이 토록 괴로울지. 랠프 때문에 한동안 머리를 썩였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 가 아니오. 문제는 다른, 아주 다른 것이오! 이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걷잡을 수조차 없소. 그러나 이제 곧 결심해야만 하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애크로이드 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무척 말하기 힘들어하 는 눈치였으나, 이윽고 입을 열자 그는 참으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란 이런 때 하는 말인 듯싶다. 「셰퍼드 씨, 당신은 애슐리 팰러즈가 죽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를 진찰 했었지요?」 「네, 그랬습니다.」 그는 더욱 어렵게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당신은 의심하지 않았소? 말하자면 혹시 독살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나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으나 겨우 말했다. 상대는 캐럴라인이 아니라 로저 애크로이드였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만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요. 처음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 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정말은 내 누님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계속 듣 고 있는 동안에 나 역시 이 문제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렇지만 무슨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침통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팰러즈는 독살된 거요.」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에게요?」 「자기 부인한테지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부인이 내게 이야기했소.」 「언제요?」 「어제! 아! 바로 어제였소! 한 10년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아시겠소, 셰퍼드 씨. 이 비밀은 당신에게만 말씀드리는 것이오. 당신 만 알고 계시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나혼자서는 도저히 이 무 거운 짐을 짊어질 수가 없소. 아까도 말씀드렸듯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군요.」 「어서 다 털어놓고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 습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됐단 말씀입니까?」 「말씀드리지요. 석 달 전 팰러즈 부인에게 결혼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 했소. 그 뒤 다시 한 번 청했더니 이번에는 겨우 승낙했지만, 약혼 발표 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군요. 어제 나는 또 부인을 찾아가 이제 남편이 죽은 지 1년하고도 3주일이 지났으니 우리의 약혼을 발표하는 게 어떻겠 느냐고 권해 보았소. 그러자――정말은 며칠 전부터 태도가 좀 수상하다 고 여겼었는데――갑자기 울면서 내게 그 무서운 사실을 모두 고백하더 군요. 술주정꾼인 남편의 냉혹함, 나를 차츰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 고 마침내 독살까지 하게 된 모든 경위를. 독약을 먹였다는 것이었소! 아, 얼마나 참혹한 짓이오!」 나는 애크로이드 씨의 얼굴에 혐오와 공포의 빛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팰러즈 부인도 이런 표정을 보았겠지. 애크로이드 씨는 사랑 때문에 모 든 것을 다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본디 선량한 사람이므 로, 그 부인의 고백을 듣는 순간 그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온건하고도 법 을 중히 여기는 마음들이 일어나 부인을 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애크로이드 씨는 낮은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그렇소. 그녀는 모든 것을 고백했소.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 부인한테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모양이오. 그래서 부 인은 그 괴로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고 하오.」 「그게 누구일까요?」 갑자기 내 눈앞에 랠프 페이튼이 팰러즈 부인과 나란히 걸어 가던 광 경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그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오늘 오후 랠프를 만났을 때의 그 쾌활하던 모습을 생각해 내 고 내 걱정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부인은 그 사람의 이름만은 안 가르쳐 주었소. 사실 나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있지요. 물론…….」 「물론 남자겠지요. 당신은 누구 짓인지 짐작이 갑니까?」 대답 대신 애크로이드 씨는 괴로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 굴을 감쌌다. 「그럴 리가 없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야! 아니, 없소. 짐작 가는 바 없소. 도저히 누구라고 의심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부인의 말투 로 미루어 보아 이것만은 확실하오. 문제의 인물이 우리 집안 가운데 하 나인 것 같다는 거요. 그러나 그럴 리 없지요. 내가 잘못 들은 것일 거요. 」 「당신은 부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겠소? 물론 내가 무서운 충격을 받았다는 건 그녀 도 알았소. 나는 내 의무로서 이 일의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 하고 있었소. 알겠소, 부인은 나를 사후종범자(事後從犯者)로 만들어 버렸 던 거요. 부인은 곧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스물네 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소. 나는 그동안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러나 협박자의 이름 은 끝내 안 가르쳐 주더군요. 아마 가르쳐 주면 내가 당장 달려가 그를 안 가르쳐 주더군요. 아마 가르쳐 주면 내가 당장 달려가 그를 때려눕히 게 되어 자기도 나도 파멸이며,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오. 부인은 스물네 시간 안에 반드시 그 협박자의 이름을 알려 주기로 약속했소. 그 랬던 게 이렇게 될 줄이야. 셰퍼드 씨, 부인은 그때 벌써 어떤 결심을 하 고 있었는데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요. 자살을 하다니! 더욱이 자살하게끔 독촉한 것은 결국 나였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결코 당신 책임 이 아닙니다.」 「남은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뿐이오. 가엾게도 부인은 이 제 죽었으니 새삼스럽게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 소?」 「동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을 자살하도록 만든 협박자를 어떻게 찾아내느 냐 하는 게 문제요. 부인이 저지른 일을 알고 마치 흡혈귀처럼 따라다니 며 못살게 굴었던 그 사람을. 부인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렀소. 그러나 그 악당은 남아서 점잔 빼고 다닐 생각을 하니…….」 「그 사람을 찾아내실 생각이군요.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이 밝 혀지게 되잖습니까?」 「그렇소. 그런 생각도 해봤지요. 그래서 지금 망설이고 있는거요.」 「악당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할 대 가도 생각해 봐야겠지요.」 애크로이드 씨는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거리더니 얼마 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떻소, 셰퍼드 씨. 이대로 그냥 덮어둘까요? 부인 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한.」 나는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부인 쪽에서 말하다니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어디엔가 내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 두었을 것 같소, 죽기 전에. 확실 한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드는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은 아무 편지도, 또 전할 말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셰퍼드 씨, 나는 틀림없이 무엇을 남겨 두었으리라고 믿소. 뿐만 아 니라 저렇게 죽음을 택한 것도 모든 걸 뚜렷이 밝히고, 그와 더불어 자기 를 파멸로 몰아넣은 그 남자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일지 모르오. 죽기 전에 나를 만났더라면 틀림없이 내게 그 남자의 이름을 대주고, 무슨 일이 있 든 꼭 원수를 갚아 달라고 했을 거요.」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랬으리라는 추측만으로는 믿을 수 없겠지요?」 「아니오. 믿어집니다, 어떤 면에서는. 만일 부인한테서 지금 말씀하신 것과 같은 부탁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파커가 편지 몇 통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애크로이드 씨에게 쟁반을 내밀며 파커는 말했다. 「저녁 우편물이 왔습니다.」 그리고 커피잔을 거두어 방에서 나갔다. 그동안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다시 애크로이드 씨에게로 눈길 을 돌렸다. 그는 긴 푸른 봉투를 하나 들고 마치 돌처럼 꼼짝 않고 있었 다. 다른 편지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팰러즈 부인의 글씨체요! 어제 저녁에 이 편지를 자기 손으로 우체통 에 넣었을 거요. 그리고 그 뒤에…….」 그는 봉투를 뜯어 두툼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얼굴 을 들었다. 「창문은 확실히 닫혀 있지요?」 나는 놀라며 대답했다. 「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오늘 저녁에는 웬지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소. 아니, 저건 무슨 소리일까!」 그는 얼른 문 쪽을 돌아보았다. 나도 돌아보았다. 문 손잡이가 조금 움 직인 것을 두 사람 다 느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 보았으나 아 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씨는 혼자 중얼거렸다. 「신경과민인 것 같소.」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펼쳐 낮은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로저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라는 말 잘 알았어요. 오늘 오후 당신 얼굴에서 그 말을 읽었지요. 나는 내 앞에 놓인 단 하나의 길을 가려고 해요. 이 1년 동안 지옥의 괴로움을 맛보인 그 사람을 벌주는 일은 당신께 부탁드려요. 아까 오후에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을 밝히겠어요. 자식도 가까운 친척도 없으니 모든 일이 밝혀져도 걱정될 건 없어요. 사랑하는 로저, 당신까지 괴롭힌 내 죄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막상 당 하고 보니 역시 나로선 도저히……. 다음 장을 넘기려던 손을 멈추고 애크로이드 씨는 읽기를 멈췄다. 「셰퍼드 씨, 용서하시오. 역시 이 편지는 나 혼자 읽어야 할 것 같소. 나에게만 보이려고 쓴 편지니까…….」 어쩐지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편지를 도로 봉투 속에 집어 넣어 책 상 위에 놓았다. 「나중에 나 혼자 읽겠소.」 나는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안 됩니다. 지금 읽으십시오!」 애크로이드 씨는 좀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소리내어 읽으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 읽어 보시라는 겁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나중에 읽겠소.」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또 한 번 권해 보았다. 「그럼, 그 남자의 이름만이라도 읽어 주십시오.」 그러나 애크로이드 씨는 본디 고집이 몹시 셀 뿐 아니라 억지를 쓰면 쓸수록 더욱 굳어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아무래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애크로이드 씨의 서 재를 나온 것은 꼭 8시 50분이었다. 편지는 여전히 끝까지 다 읽혀지지 않는 채로 있었다. 나는 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잠시 망설이며 무슨 잊은 물건이 없나 하 고 방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방에 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파커가 서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기분나쁜 사람이다. 그는 문 밖에서 엿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둥피둥하게 살찐 몸집에 기름진 얼굴을 한 남자다. 더욱이 그 눈길은 뭔가 살피는 것 같은 데가 있다. 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혼자 계시고 싶다고 특히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하 시더군요.」 「알겠습니다. 저, 벨소리가 난 것 같아서요…….」 속히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기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다. 파커는 현관까지 따라나와 나에게 외투를 입혀 주었다. 밖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달이 구름 속에 가려져 사방이 어둡고 고요했다. 문지기 집 앞을 지날 때 교회 시계가 9시를 쳤다. 내가 왼쪽길로 구부 러 든 순간 저편에서 오는 어떤 남자와 부딪칠 뻔했다. 남자는 거친 목소 리로 물었다. 「팬리 파크로 가려면 이 길이 맞습니까?」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그는 모자를 깊숙이 내려 쓰고 외투 깃을 세우 고 있었다. 얼굴은 거의 볼 수 없었으나 젊은 남자 같았다. 쉰 목소리로 교양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가르쳐 주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문지기 집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입을 열어 묻지 않은 말까지 했다. 「처음 오는 길이어서요.」 남자는 걸어갔다. 내가 돌아보니 문지기 집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 남자의 목소리가 웬지 귀에 익은 것 같으면서도 누구 목 소리인지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았다. 10분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캐럴라인은 내가 왜 이렇게 일찍 돌아 왔는지 호기심을 품고 알고 싶어했다. 나는 누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실 에 더 보태어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영리한 누님인지라 곧이 들을지 좀 불안했다. 10시를 치는 소리에 기지개를 켜며 이제 그만 자자고 말했다. 누님은 못마땅한 얼굴로 따라 일어섰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나는 금요일 밤이면 늘 하는 대로 집에 있는 벽 시계의 태엽을 감아 주었다. 캐럴라인은 하녀가 문을 잘 잠갔는지 확인하 러 나갔다.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간 것은 10시 15분 조금 지나서였다. 내가 2층 층 계를 다 올라갔을 때 아래층에서 전화벨리 울렸다. 캐럴라인이 자신있게 말했다. 「베이츠 부인일 거야, 틀림없어.」 「그래요?」 나는 층계를 내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뭐? 뭐라고요? 그래, 잘 알았소. 지금 곧 가지요.」 나는 2층으로 뛰어올라가 구두를 신고 왕진 가방에 응급 용품을 챙겨 넣으며 캐럴라인에게 소리쳤다. 「집사 파커로부터 온 전화입니다. 로저 애크로이드 씨가 살해되었다는 군요. 지금 막 발견되었답니다.」 살인 나는 급히 자동차에 올라 팬리 파크로 달렸다. 자동차에서 뛰어내리자 마자 나는 서둘러 현관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눌렀다.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리며 파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감각한 얼굴 로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떠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요?」 「네? 뭐 말입니까?」 「주인 말이오. 애크로이드 씨는 어디 있소?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오. 경찰에는 알렸소?」 「경찰? 경찰에 알렸느냐고요?」 파커는 어리둥절하여 마치 유령이라도 보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파커! 당신 말대로 주인이 살해되었으면…….」 파커는 놀라서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주인님이? 살해되었다고요? 터무니없는 소리 마십시오!」 이번에는 내가 눈이 휘둥그래질 차례였다. 「당신이 5분쯤 전에 내게 전화걸었잖소. 에크로이드 씨가 살해된 모습 으로 발견되었다고!」 「제가요? 천만에요. 저는 결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홀렸단 말이오? 그리고 애크로이드 씨에게는 아 무 일 없단 말이오?」 「실례지만, 누가 제 이름으로 전화를 걸었단 말입니까?」 「전화에 들은 대로 되풀이해 볼까요? <셰퍼드 씨지요? 저는 팬리 파 크의 파커입니다. 그런데 빨리 좀 와주실 수 없을까요? 주인님께서 살해 되셨습니다.>」 파커와 나는 귀신한테 홀린 사람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떻게 그런 장난을……너무하잖습니까?」 파커는 너무도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서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정말 기분나쁘군요.」 나는 불쑥 물어 보았다. 「애크로이드 씨는 어디 계시오?」 「아직 서재에 계실 겁니다. 부인들은 벌써 두 분 다 침실로 가시고, 브랜트 소령님과 레이먼드 씨는 당구실에 계십니다.」 「잠시 뵙고 가겠소. 방해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이토록 기분나 쁜 말을 듣고서야 어디 마음이 놓여야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가겠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저도 역시 마음에 걸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저 도 함께 방문 앞까지라도…….」 「그렇고말고, 함께 갑시다!」 나는 파커와 함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애크로이드 씨 침실로 통하는 좁은 층계가 있는 복도에서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 보았으나 잠겨 있었다. 「셰퍼드 씨, 잠깐만.」 파커는 큼직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그는 일어서며 말했다. 「열쇠가 꽂혀 있습니다. 안에서 잠겨 있습니다. 주인님은 문을 안으로 잠그고 아마 주무시고 계신 모양입니다.」 나도 허리를 굽혀 파커가 한 대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열쇠가 꽂 혀 있어 방안이 보이지 않았다. 「별일없는 모양이군. 그러나 파커, 아무튼 한 번 깨워서 직접 주인으 로부터 무사하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마음놓고 갈 수 없소.」 나는 손잡이를 이리저리 마구 소리내어 돌리며 크게 불러 보았다. 「애크로이드 씨! 애크로이드 씨!」 대답이 없었다. 나는 어깨너머로 파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집안 식구들은 놀라게 하고 싶지 않은데…….」 파커는 금방 우리가 지나온 현관 홀과의 사이에 있는 문을 닫고 왔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 겁니다. 당구실은 저편 끝이고 부엌과 부인들의 침실은 모두 반대편에 있으니까요.」 나는 마음놓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문을 두드리며 허리를 굽혀 열쇠 구 멍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불러 보았다. 「애크로이드 씨, 애크로이드 씨! 셰퍼드입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겨 있는 방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파 커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떻소, 파커, 나는 이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겠소. 아니, 우리 둘이 서 해봅시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내가 책임지겠소. 애크로이드 씨가 마음에 걸려 아무래도 그대로는 못 돌아가겠구려.」 나는 좁은 복도 안을 둘러보았다. 무거운 의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것을 파커와 둘이 들어 힘껏 문에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번째 비로소 문이 부서지며 우리는 방 안쪽으로 넘어졌다. 애크로이드 씨는 내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난로 앞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웃옷 깃 바로 밑에서 무 언가 구부러진 쇠붙이가 빛나고 있었다. 파커와 나는 가까이 걸어가서 목이 축 늘어져 있는 애크로이드 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커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숨을 삼키는 소리를 내더 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찔렀군요. 끔찍한 일입니다!」 파커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애크로이드 씨의 목에 꽂혀 있 는 단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건드리면 안 되오! 어서 전화로 경찰을 부르오. 그리고 레이먼드와 브랜트 소령에게 알리고.」 「알겠습니다.」 파커는 다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나는 몇 가지 아주 하찮은 일을 처리했다. 시체를 건드리지 않도록 하 고 단도에는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제 잡아 뺀다고 해서 다시 살 아날 수는 없으니까. 이미 숨이 끊어진 게 틀림없었다. 한참 뒤 비서 레이먼드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고? 설마, 그럴 리가! 의사는 어디 계시지?」 그는 방문 앞까지 달려왔으나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 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브랜트 소령이 레이먼드를 떠밀 듯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뒤에서 레이먼드가 소리쳤다. 「아! 역시 정말이군!」 브랜트 소령은 얼른 의자 곁으로 걸어와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가 파커처럼 단도에 손을 댈까봐 그를 잡아당겼다. 나는 설명했다. 「아무것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경찰에 보여야 합니다.」 브랜트 소령은 곧 깨닫고 물러났다.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그 속에 얼마쯤 격렬한 감정의 움직임이 엿보이는 듯했다. 제프리 레이먼드도 곁으로 와서 브랜트의 어깨너머로 시체를 들여다보 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이 좀 가라앉은 듯했으나 늘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닦는 손이 아 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도둑일까요? 그렇지만 어디로 들어왔을까? 창문으로? 뭐 없어진 건 없습니까?」 레이먼드는 책상 쪽으로 가보았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강도의 짓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럼, 달리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까? 자살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잖습니까?」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자기 손으로 이렇게 찌를 수가 있을까요? 틀림없는 타살이오. 그런데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브랜트 소령이 조용히 말했다. 「로저 씨는 누구에게 원수질 사람이 아닙니다. 강도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훔치려고 했을까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무 이상 없는 것 같은 데요.」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책상 위의 서류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책상 정리를 마치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군요. 책상 서랍을 열어 본 것 같지도 않고. 정말 이상합니다.」 브랜트 소령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바닥에 편지가 떨어져 있군요.」 나는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서너 통의 편지가 애크로이드 씨가 떨어뜨렸을 때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팰러즈 부인의 편지가 들어 있던 푸른 봉투는 눈에 띄지 않았 다. 내가 말하려는데 벨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홀에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파커가 데이비스 경감과 순경들을 안내해 왔다. 경감이 말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말 뜻밖의 일입니다! 애크로이드 씨같이 훌 륭한 신사분이 이런 변을 당하다니! 파커 말로는 타살이라는데, 사고라든 가 또는 자살이라는 의심이 전혀 없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결코 자살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일이 난처하게 되었군요.」 경감은 가까이 와서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겠지요?」 「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히 알 수 있었 지요. 그 밖에는 시체에 손댄 일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여러모로 보아 틀림없는 살입니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그 럼, 사정을 좀 여쭤 보겠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분은 누구시지요?」 나는 신중하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파커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고요?」 파커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전화건 일이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전화 가까이 가본 일도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증명해 주실 겁니다.」 「그거 참, 이상하군. 확실히 파커의 목소리였습니까, 셰퍼드 씨?」 「글쎄요. 확실히 그렇다고 잘라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저 처음부 터 파커라고 믿고 들었으니까요.」 「그러시겠지요. 그래서 달려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보니 애크로이드 씨가 이렇게 되어 있더라는 말씀이군요. 숨이 끊어진 지 얼마다 된 것 같 습니까?」 「적어도 30분, 아니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고 말씀하셨지요? 창문은 어땠습니까?」 「애크로이드 씨의 부탁으로 내가 저녁에 잠갔습니다.」 경감은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흠, 그런데 지금은 열려 있군요.」 확실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경감은 회중전등으로 밖을 비춰 보았 다. 「그렇겠군. 이리로 달아난 모양이지. 들어올 때도 이리로 들어왔군 그 래. 이것 보십시오.」 회중전등 빛에 구두 자국이 여러 개 확실히 보였다. 고무창을 댄 구두 같았다. 특히 두드러게 보이는 것은 창문 쪽을 향해 난 하나의 구두 자국 과, 그 위에 겹쳐 있는 밖으로 나간 구두 자국이었다. 경감은 말했다. 「아주 확실합니다. 무언가 귀중품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제프리 레이먼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없어진 물건은 없습니다. 게다가 애크로이드 씨는 이 방에 일체 귀중품을 두지 않습니다.」 「흠, 범인은 창문이 열려진 걸 보고 숨어 들어와 애크로이드 씨가 의 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졸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등뒤 에서 찔렀는데 갑자기 그만 겁이 나서 달아났을 겁니다. 구두 자국이 이 토록 확실하니 범인은 쉽게 찾을 수 있겠지요. 누구 이 언저리에서 수상 한 사람을 본 일은 없으신지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앗, 그렇지! 오늘 밤 이상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대문을 나서는데 그 가 팬리 파크로 가는 길을 나한테 물어 보더군요.」 「몇 시쯤이었습니까?」 「9시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대문을 나설 때 교회 종이 9시 치는 것을 들었으니까요.」 「어떻게 생긴 남자였습니까?」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 설명했다. 경감은 파커를 바로보았다. 「지금 셰퍼드 씨가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남자가 현관으로 찾아오지 않 았소?」 「네, 오늘 밤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뒷문으로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확실히 해두기 위해 하인들에게 물어 보고 오겠습니다.」 파커가 뒷문 쪽으로 가려는데 경감이 손짓으로 말렸다. 「아니, 괜찮소. 조사는 내가 하지요. 그것보다 먼저 시간을 좀더 자세 히 말해 주시오. 애크로이드 씨가 살아 있는 모습을 맨 마지막으로 본 것 은 누구였지요?」 내가 나섰다. 「아마 내가 맨 마지막으로 보았을 겁니다. 방에서 나온 게 8시 50분쯤 이었지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시기에 파커에게 그렇게 일어두 었습니다.」 파커가 공손하게 말했다. 「네, 그랬습니다.」 레이먼드가 덧붙여 말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9시 30분까지 분명히 살아 계셨다고 여겨집니다. 이 방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누구와 이야기했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셰퍼드 씨와 함께 계신 줄 알고 있었지 요. 서류를 정리하다가 애크로이드 씨에게 뭘 좀 여쭤 볼까 해서 갔는데, 이야기 소리가 들리기에 되돌아갔지요. 셰퍼드 씨와 좀 이야기할 일이 있 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때는 벌써 쎄퍼드 씨가 돌아가신 뒤였군요.」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9시 10분에 나는 벌써 집에 닿아 있었지요. 그 뒤 전화가 오기까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습니다.」 경감이 말했다. 「그렇다면 9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요. 당신이 아닙니까? 실례지만 성함이 뭐지요?」 내가 말해 주었다. 「브랜트 소령입니다.」 경감은 놀라움과 존경이 담긴 말투로 되물었다. 「헥터 브랜트 소령?」 브랜트 소령이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감이 말을 이었다. 「전에도 언젠가 여기서 뵌 듯합니다만……지난해 5월에 여기 오셨었 지요?」 브랜트 소령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6월이었습니다.」 「아, 6월이었나요? 그런데 방금 말씀드렸듯 당신은 오늘 밤 9시 30분 에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브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녁 식사 뒤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경감은 다시 레이먼드 쪽을 보았다. 「이야기 내용을 못 들으셨나요?」 「아니오, 조금 들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계신 분이 셰퍼드 씨라고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애크로이드 씨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지출이 많으므로 자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네.』 나는 물론 바로 되 돌아갔기 때문에 그 다음 말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좀 이상하 다고 생각했었지요. 설마 셰퍼드 씨가…….」 내가 그 말의 끝을 이었다. 「돈을 빌려 달라고 하거나, 더욱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궁한 소리 를 할 리도 없지요.」 「돈을 요구했다고요?」 경감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아주 좋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파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파커, 오늘 밤 현관 쪽으로는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고 했지 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애크로이드 씨 자신이 이 수상한 인물을 안으로 끌어들인 것 같군요. 그러나 그렇다면…….」 경감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군. 애크로이드 씨가 9시 30분에는 아직 살 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확실히 살아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마 지막 시각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파커가 뭔가 말하려는 듯 헛기침을 했으므로 경감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뭔가 할말이 있소?」 경감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필요없는 말 같습니다만, 플로러 아가씨가 그 뒤에 주인님을 만나 뵌 것 같습니다.」 「플로러 양이?」 「네, 그렇습니다. 9시 45분쯤 되었을까요? 그때 아가씨가 나오면서 오 늘 밤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당신한테 전하도록 플로러 양에게 말했단 말인가요?」 「네, 정말은 제가 위스키 소다를 쟁반에 담아 들고 가니 플로러 아가 씨가 막 서재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내게 큰아버지는 오늘 밤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경감은 주의깊은 눈길로 파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애크로이드 씨로부터 이미 그런 지시를 받고 있었잖 소?」 파커는 어쩔 줄 몰라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서재로 들어가려고 했소?」 「저는 그만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늘 그 시간이면 위스키 소다를 가지 고 들어가 무슨 시킬 일이 없느냐고 묻는 게 버릇이 되어서 그만. 아무 생각없이 늘 하던 대로…….」 파커는 몹시 당황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흠!」 경감은 계속하여 말했다. 「그럼, 빨리 플로러 양을 만나 물어 봅시다. 그리고 이곳은 잠시 이대 로 두시오. 플로러 양에게서 사정을 들어 보고 또 다시 조사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기 위해 창문을 닫고 잠가 두겠소.」 창문을 닫고 나자 경감은 앞장서서 복도로 나갔다. 우리도 모두 그 뒤 를 따랐다. 경감은 잠깐 멈춰 서서 침실로 올라가는 좁은 층계를 바라보더니 어깨 너머로 순경에게 소리쳤다. 「존즈, 자네는 여기 있게. 그리고 아무도 저 방에 못 들어가게 해야 해.」 파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홀로 나가는 저 문만 닫으면 아무도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저 층계는 주인님의 침실과 욕실로만 통하며 다른 방으로는 갈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전에는 문이 하나 더 있어 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 주인님께서 막아 버리셨습니다. 주인님 방만 동떨어지게 만드셨지요. 」 여기서 상황을 명확히 하고 애크로이드 씨의 집안 구조를 자세히 설명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나타냈다. 파커가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 로 좁은 층계는 넓은 침실――두 개의 방을 툭 터서 한 개의 방으로 만 든――과 거기 붙여 지은 욕실과 세면실로 통해 있다. 경감은 한눈에 이 집안의 구조를 알아차렸다. 모두들 복도로 나오자 얼 른 문을 잠그고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부하 순경에게 낮 은 목소리로 뭐라고 지시하자 순경은 밖으로 나갔다. 경감이 말했다. 「아까 저기 있던 구두 발자국부터 조사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플로러 양을 만나 사정을 들어 보기로 합시다. 아무튼 그녀가 애크 로이드 씨가 살아 있는 모습을 맨 마지막으로 본 인물이니까요. 플로러 양은 이 사건을 이미 알고 있겠지요?」 레이먼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잠시 동안은 알리지 맙시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편이 내 질문 에 좀더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아가씨를 좀 불러 주 실까요? 강도가 들어서 좀 여쭤 볼 말이 있다고 말이오.」 레이먼드가 플로러를 부르러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곧 돌아와서 보고했다. 「곧 내려오신답니다. 말씀대로 전했습니다.」 5분도 채 못 되어 플로러가 내려왔다. 연분홍빛 비단 옷을 입은 플로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층계를 내려왔 다. 경감은 앞으로 다가서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실은 강도가 들어서 좀 도와주십사고 오시게 했습니다. 이 방은……아, 당구실이로군요. 아무튼 여기로 들어갑시다.」 플로러는 침착하게 벽 쪽의 긴 의자에 앉아 경감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무엇을 도둑맞았나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요? 」 「사실은 파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가씨께서 9시 45분쯤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에서 나오셨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래요. 큰아버지한테 저녁 인사 드러러 갔었어요.」 「시간도 틀림없습니까?」 「네, 그런데 그때쯤이었다고 여기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큰아버님은 혼자 계셨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계셨습니까?」 「혼자 계셨어요. 셰퍼드 씨는 돌아가시고 난 뒤였으니까요.」 「그때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어떤지 기억하시겠습니까?」 플로러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커튼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럼, 큰아버님의 태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습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다시 한 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플로러는 기억을 더듬듯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는 서재로 가서 말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큰아버지. 피곤해서 오늘 저녁엔 먼저 자겠어요.』 그러자 큰아버지는 무슨 말씀인지 입 속으 로 중얼거리셨어요. 제가 가까이 가서 입맞춤을 하니 옷이 참 잘 어울리 는구나 하시며 오늘은 바쁘니 어서 가서 자라고 말씀하셨어요.」 「큰아버님께서 서재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하셨습니 까?」 「아, 그래요! 잊고 있었군요. 오늘 밤엔 별일없으니 파커에게 들어오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바로 문 앞에서 파커를 만나게 되어 곧 그대로 전했지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뭘 도둑맞았나요?」 경감은 망설이며 말했다. 「정말은, 아직 잘 모릅니다.」 플로러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불안한 빛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신은 제게 무언가 숨기고 계시는군요?」 브랜트 소령이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로 플로러와 경감 사이를 가로막 고 들어섰다. 플로러가 손을 조금 내밀자 브랜트 소령은 두 손으로 잡고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만져 주었다. 그 준엄한 바위 같은 모습에 위안 과 안도감을 되찾은 듯 플로러는 소령을 쳐다보았다. 「플로러 양, 섭섭한 소식입니다만 아주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 신 큰아버님께서』』.」 「큰아버님께서?」 「놀라시겠지만, 사실은 큰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플로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언제? 언제 돌아가셨어요?」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였다. 브랜트 소령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방을 나온 바로 뒤였나 봅니다.」 플로러는 입에 손을 갖다 대며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쓰러지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브랜트와 나는 그녀를 2층 침실로 데려갔다. 나는 소령에게 세실 부인 을 깨워 사건을 알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플로러는 얼마 뒤 정신을 차렸으므로 몇 마디 주의를 주고 부인에게 간호를 맡겼다. 그리고 나는 얼른 아래층으로 돌아왔다. 튜니지아 단검 나는 부엌 문을 나오는 경감과 마주쳤다. 「아가씨는 좀 어떻습니까, 셰퍼드 씨?」 「아, 조금 정신이 든 모양입니다. 어머니께서 곁에 계십니다.」 「잘되었습니다. 지금 하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 보았습니다만, 오 늘 밤 뒷문으로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군요.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 수상한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좀더 무슨 증거가 될 만한 이야기가 없을까요?」 「글쎄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나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캄캄한 밤인데다 상대방은 외투깃을 올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으니까요.」 「흠, 얼굴을 가리려고 그런 모양이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가요, 확실합니까?」 어디선가 보았던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했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 남자 의 목소리가 어디선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일이 생각 났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망설이며 경감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거칠고 교양없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셨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문득 거친 말투가 좀 너무 과장되게 느껴졌 던 것 같기도 했다. 만일 경감이 말한 것처럼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면 목 소리도 바꾸었으리라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셰퍼드 씨, 미안하지만 서재로 한 번 들어가시지요. 두어 가지 더 여 쭈어 볼 게 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데이비스 경감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으로 잠 갔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면 좀 곤란해서요.」 그의 얼굴은 엄숙했다. 「엿들어도 곤란하고요. 그런데 셰퍼드 씨, 협박하여 돈을 빼앗겼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협박?」 나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만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파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무슨 근거가 있다 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파커가 그 말을 들었다면, 이 문 밖에서 열쇠 구멍으로 엿들은 게 틀림없습니다.」 데이비스 경감은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틀림없이 그랬을 테지요. 정말은 오늘 밤 파커의 거동을 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는 내용 을 좀 알고 있을 겁니다. 이쪽에서 무슨 질문을 하면 몹시 놀라며 협박이 니 뭐니 하는 말을 들었다고만 되풀이할 뿐이거든요.」 나는 얼른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침 잘됐군요. 정말은 아까부터 그 일을 모두 털 어놓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기회가 없어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일을 사실대로 경감에게 하나도 빠 뜨리지 않고 말해 주었다. 경감은 가끔 질문할 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럼, 편지가 없어졌단 말씀입니까? 어렵게 됐군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 편지가 있다면 우리가 찾아내려는 것, 즉 살인 동기를 알 것 같습니다만.」 나는 그렇다고 동의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집안 사람이 관계하지 않았나 의심했다고 했지요? 하지만 집안 사람이라 해도 범위가 넓지요.」 「설마 파커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오실 때 그는 확실히 문 앞 에서 어물거리며 엿듣고 있었던 것 같고, 그 뒤에 플로러 양이 서재에서 나올 때도 그 자리에서 마주쳤으니까요. 가령 플로러 양이 자기 방으로 간 뒤 파커가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애크로이드 씨를 찔러 죽이고 안에서 문을 잠근 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미리 열어 두었던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이렇게 추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 까?」 나는 천천히 여유있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안 맞는 데가 있군요. 만일 내가 돌아간 뒤 애크로이 드 씨가 그 편지를 계속해서 읽었다면――혼자 있을 때 읽겠다고 했으니 까요――그 뒤 한 시간 동안이나 서재에 그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 을 리 없다고 여겨집니다. 금방 파커를 불러다가 그 자리에서 호통쳤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튼 애크로이드 씨는 참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곧잘 흥분하는 성질이지요.」 「그때는 편지를 계속 읽을 틈이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9시 30분에 누 군가와 함께 있었다고 하니까요. 만일 그 누군가가 당신이 나가자 곧 들 어왔고, 그 남자가 돌아가자 뒤이어 플로러 양이 저녁 인사를 하러 들어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10시 가까이까지 편지를 못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화는?」 「파커가 걸었겠지요. 안으로 문을 잠그고, 창문을 열어 두는 등의 자 세한 부분까지 생각하기 전에. 그런데 그 뒤에 마음이 달라져, 그렇지 않 으면 갑자기 무서워져 전화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척하려 했던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나는 그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그럴까요?」 「아무튼 전화 문제는 교환대에 물어 보면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이 집에서 걸었다면 파커 말고 다른 누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자 신있습니다. 범인은 파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런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증거를 확실히 잡을 때까지는 파커가 경계하지 않도 록 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겉으로는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 수상한 남자를 찾는 척합시다. 파커가 마음놓고 행동할 수 있게 말입니다.」 경감은 책상 앞 의자에서 일어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시체 옆으로 갔다. 「이 흉기는 좋은 증거물이 될 겁니다.」 그리고 경감은 얼굴을 들었다. 「이상한 물건이군. 골동품인가? 아주 귀한 것 같은데…….」 그는 허리를 구부려 단검 손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손잡이 밑부분을 쥐고 상처 에서 그 단검을 뽑아 냈다. 그는 여전히 손잡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 하며 난로 위에 장식용으로 놓아 둔 도자기 컵에 단검을 넣었다. 경감은 단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확실히 미술품인데요. 그리 흔하지 않은 물건입니다.」 정말 훌륭한 물건이었다. 칼날 끝이 뽀족하고 날카로우며, 손잡이는 정 교한 금속 세공으로 되어 있었다. 경감은 칼날 끝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만져 보며 아주 감탄한 듯한 얼굴을 했다. 「아주 날카로운 칼날이군. 아이들이라도 쉽게 사람을 찌를 수 있겠는 걸! 버터를 자르듯. 가까이 놓아두기에는 위험한 장난감이야.」 나는 물었다. 「이제 정식으로 시체를 살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세히 시체를 검사했다. 내 검사가 끝나자 경감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전문 용어는 그만두기로 하지요. 그것은 검시 심문 때 하겠습니다. 이것은 오른손잡이인 남자가 등뒤에서 찌른 겁니다. 칼에 찔리자마자 곧 숨진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의 표정으로 보아 조금도 예기치 못했던 것 같군요. 아마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었을 겁니다.」 「하인들이란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고 방안을 돌아다니지요. 아 무튼 이 사건은 그리 복잡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단검의 손잡이를 보십 시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손잡이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주 똑똑히 보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지문입니다.」 그리고 말의 효과를 알아보려는 듯 경감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과연 지문이로군요.」 내가 어째서 그렇게 무지하게 보였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미스터 리 소설도 읽고, 신문의 3면 기사쯤은 읽고 있으며, 여느 사람들 못지않 은 이해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만일 이것이 발가락 지문이라면 문제 가 다르다. 그렇다면 나도 얼마쯤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을 것이 다. 경감은 내가 놀라지 않는 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도자기 컵을 집어 들며 당구실까지 오라고 내게 말했다. 그는 설명했다. 「레이먼드가 이 단검에 대해 아는 사실이 있는지 좀 물어 보려고요.」 서재를 나오자 다시 문을 잠그고 우리는 당구실로 들어갔다. 경감은 제프리 레이먼드에게 증거물을 보이며 물었다. 「레이먼드 씨, 이것을 본 적 있습니까?」 「네, 그것은 분명 브랜트 소령께서 애크로이드 씨에게 선물하신 골동 품입니다. 모로코, 아니, 튜니지아제라던가요. 그것이 흉기로 쓰여졌습니 까? 이상한 일이군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러나 똑같은 단검이 두 개 있을 리 없잖습니까? 브랜트 소령을 불러올까요?」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얼른 일어나 방을 나갔다. 경감은 탄복했다. 「좋은 젊은이입니다. 명랑하고 정직해 보이는군요.」 나 역시 동감이었다. 그는 2년 전부터 애크로이드 씨의 비서로 일하는 젊은이인데, 나는 그가 화내거나 기분나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일 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얼마 뒤 레이먼드가 브랜트 소령을 데리고 들어왔다. 레이먼드는 조금 흥분한 듯 소리쳤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역시 튜니지아 단검인가 봅니다.」 경감은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나 브랜트 소령은 아직 이 단검을 보시지 않았을 텐데요.」 소령은 무뚝뚝한 말투로 조용히 대답했다. 「서재에 들어갔을 때 이미 그 단검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이미 알고 계셨군요?」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아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요?」 경감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말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쓸데없는 말이란 적당한 기회가 아 니면 오히려 화가 되는 법입니다.」 소령은 태연히 경감을 똑바로 보았다. 마침내 경감 쪽에서 무어라 중얼 거리며 눈을 돌렸다. 그는 단검을 브랜트 소령에게로 가져갔다. 「아주 자신있으신 것 같은데, 절대 틀림없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대체 이, 이 골동품을 늘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아십니까, 소령님?」 이번에는 비서가 대답했다. 「응접실의 은테이블 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뭐라고요?」 모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경감이 내 대답을 재촉했다. 「왜 그러십니까, 셰퍼드 씨?」 「아닙니다, 아무것도…….」 경감은 나를 다그치며 다시 물어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별일 아닙니다만.」 그리고 나는 그때의 일을 설명했다. 「다만 저, 오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왔을 때 응접실에서 은테이블 뚜껑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경감은 의혹의 빛을 떠올리며 얼마쯤 수상쩍어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 다. 「은테이블 뚜껑 소리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어쩔 도리없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루하고 긴 설명이어서 될 수 있으면 그만두려고 했던 것이다. 경감은 끝까지 조용히 들었다. 「당신이 은테이블 속을 들여다보실 때 이 단검이 있었습니까?」 「글쎄요, 틀림없이 있었다고 기억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물론 있 었겠지요.」 「그럼, 가정부를 불러 물어 볼까요?」 경감은 벨을 눌렀다. 얼마 뒤 파커에게 불려 온 가정부 미스 러슬이 들어왔다. 그녀는 경감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은테이블에 가까이 가지 않은 것 같은데요. 꽃이 시들지 않았나 보러 갔었을 뿐이에요. 아, 그래요, 기억나는군요! 은테이블 뚜껑이 열려 있었어요. 열린 채로 두면 안 되는데요. 그래서 지나가며 뚜껑을 닫았던 거예요.」 그녀는 대들듯 경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아, 그렇소. 그럼, 그때 이 단검이 있었소?」 미스 러슬은 태연히 흉기를 보았다.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고, 가족들이 모두 내려오시는 소리가 들리기에 얼른 응접실을 나가려고 했으니까요.」 「잘 알겠소.」 경감은 미스 러슬에게 뭔가 좀더 물어 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녀는 그것으로 질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감은 말했다. 「꽤 똑똑한 여자군요. 그런데 그 은테이블은 창가에 있다고 말씀하셨 지요. 셰퍼드 씨?」 레이먼드가 나 대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왼편 창가에 있지요.」 「창문은 열려 있었습니까?」 「네, 두 개 다 열려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 문제는 더 이상 파고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아 무튼 어느 인물――아직은 어느 인물이라고만 해두지요――이 언제든 자 기가 바라는 때 이 단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언제 꺼냈느냐는 정확 한 시각은 문제될 게 없습니다. 레이먼드 씨, 날이 새면 서장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올 테니 저 문의 열쇠는 내가 맡아 두겠습니다. 멜러즈 서장 님께 현장을 그대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서장님께서는 저녁 식사 초대 를 받아 가셨으니 아마 좀 늦으실 겁니다.」 단검이 든 그 도자기 컵을 경감이 들고 가는 것을 우리는 지켜 보고 있었다. 「이것은 조심스럽게 간수해야 합니다. 여러모로 중요한 증거가 될 물 건이니까요.」 조금 뒤 나는 레이먼드와 함께 당구실을 나왔는데, 그가 재미있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레이먼드가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키기에 나는 그 눈길을 따라가 보았 다. 데이비스 경감이 파커에게 작은 수첩을 건네 주며 뭔가 의견을 물어 보는 모양이었다. 레이먼드는 속삭였다. 「좀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파커가 의심스럽다는 게 되니까요. 어떻습니까, 우리도 데이비스 경감한테 지문을 제공하지 않겠 습니까?」 그는 명함 두 장을 꺼내 비단 손수건으로 닦은 뒤 한 장은 내게 주고 또 한 장은 자기가 가졌다. 그리고 싱글벙글 웃으며 명함 두 장을 경감에 게 주었다. 「선물입니다. 이건 셰퍼드 씨 지문이고, 이건 내 것입니다. 브랜트 소 령 것은 내일 아침에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젊은 사람이란 참으로 쾌활하다. 자기의 친지며 고용주인 사람의 참혹 한 살해 사건도 제프리 레이먼드를 오래 침울하게 만들 수는 없는 모양 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리라.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회복력 빠른 유연한 정신을 이미 옛날에 잃어버렸으니까. 나는 그날 밤 집에 퍽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남의 일을 알기 좋아하는 캐럴라인이라도 이미 잠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의 인식 부족이었다. 누님은 따끈하게 코코아를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코 코아를 마시는 동안 오늘 밤에 일어난 사건을 모조리 캐내고 말았다. 나 는 협박자에 대한 이야기만 빼고 살인 사건에 대한 사실을 모두 말해 주 었다. 나는 일어나 침실로 가며 말했다. 「경찰에서는 파커를 의심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모든 조건이 파커에 게 불리하거든요.」 누님은 되쏘아붙이듯 말했다. 「파커라고? 바보 같은 소리야! 그 경감도 꽤 멍청이군. 하필이면 파커 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지.」 이 알 듯 모를 듯한 누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침실로 갔다. 이웃 사나이의 직업 다음날 아침, 나는 중환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간단히 왕진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캐럴라인이 현관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누님은 흥분한 목소리 로 소곤거렸다.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이 찾아왔단다.」 나는 놀랐으나 되도록 그것을 감추며 말했다. 「뭐라고요?」 「꼭 너를 만나고 싶다면서 벌써 30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어.」 캐럴라인이 앞장서서 거실로 들어가기에 나도 따라갔다. 플로러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상복 차림으로 좀 불안스러 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 랐다. 핏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자 여느 때 와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로 돌아갔다. 「셰퍼드 씨,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어요.」 캐럴라인이 옆에서 말참견을 했다. 「네, 물론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고말고요.」 플로러가 캐럴라인이 옆에 있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틀림없이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단단히 결심한 듯 말을 시작했다. 「저, 저와 함께 옆집에 좀 가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너무 뜻밖으로 여겨져 되물었다. 「옆집에?」 캐럴라인이 소리쳐 물었다. 「그 몸집작고 이상하게 생긴 남자한테?」 「네,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계시지요?」 「우리는 은퇴한 이발사가 와서 사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플로러의 파란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머나, 아니예요. 그분은 에르큘 포아로 씨예요! 아시지요? 사립 탐 정 포아로 씨 말이에요. 아주 유명하신가 봐요. 마치 소설에 나오는 명탐 정처럼. 지난해에 은퇴하여 이곳에 와서 살고 계시답니다. 큰아버님은 잘 알고 계셨지만,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으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 라고 그분이 부탁드렸던 모양이에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런 분이었군요.」 「물론 당신도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나는 누님이 언제나 곧잘 말하듯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지요. 아무 튼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캐럴라인이 감탄하듯 말했다. 「어머나, 놀랍군!」 무엇이 그리 놀라운 건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아마 옆집 주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자기의 멍청함에 놀라기도 한 것일까. 나는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가려는 거군요? 무슨 까닭으로?」 캐럴라인이 대신 대답했다. 「물론 이 살인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거겠지. 제임즈, 뭘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거야?」 나는 그다지 머뭇거린 것도 아니었다. 캐럴라인이 제아무리 예민하다 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알 리 없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 플로러 양, 당신은 데이비스 경감을 믿을 수 없다는 겁니까?」 또다시 캐럴라인이 끼여들었다. 「물론이지, 나부터도 믿을 수 없는걸.」 이 말을 들으면 누구나 캐럴라인의 큰아버지가 살해된 줄 알 것이다. 「하지만 포아로 씨가 이 사건을 맡아 줄지 모르겠군요. 이미 은퇴하셨 다면서요?」 플로러가 거침없이 말했다. 「네, 그래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설득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꼭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캐럴라인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잖니. 좋다면 나도 함께 가주지.」 「고맙습니다. 하지만 셰퍼드 씨가 함께 가주셨으면 해요.」 때로는 딱 잘라 거절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플로러는 생각하는 모 양이었다. 캐럴라인을 상대로 해서는 부드럽게 사양하는 정도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플로러는 너무 딱 잘라 거절한 게 미안했던지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말하자면, 셰퍼드 씨는 의사시고 또 맨 먼저 시체를 발견하신 분이니 포아로 씨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아, 그렇군. 정말 그래.」 그러나 캐럴라인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로러 양, 그리 나쁘게 생각지는 않지만, 그 탐정을 이 사건에 끌어 들이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플로러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흥분되어 붉어져 있었다. 「당신이 왜 그렇게 말씀하지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럴수 록 더 부탁드리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두려워하고 계시지요. 그렇지만 저는 달라요. 랠프에 대한 일이라면 당신보다 제가 더 걱정하지 않겠어 요?」 캐럴라인이 말했다. 「랠프라고? 랠프가 무슨 관계가 있지요?」 플로러도 나도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플로러는 말을 이었다. 「랠프는 마음약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이때까지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 아니, 나쁜 일도 몇 번 저질러 왔지요. 하지만 사람을 죽일 만틈 나쁘 지는 않아요.」 「아니, 나도 결코 랠프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 「그렇다면 당신은 어제 저녁 왜 스리 보어즈 여관에 가셨지요? 돌아 가실 때, 큰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된 뒤에 말예요.」 나는 잠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곳에 다녀온 것은 아무도 모를 텐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되물었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오늘 아침 찾아가 보았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랠프가 그 여관에 있다 기에…….」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랠프가 킹즈 애벗에 와 있는 줄 모르셨습니까?」 「네, 깜짝 놀랐어요. 무슨 까닭으로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아무튼 만나 볼 생각으로 찾아갔어요. 그랬더니――당신도 어제 저녁 같은 대답을 들으셨겠지요?――랠프는 밤 9시쯤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더군요.」 플로러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표정에서 무엇을 찾아 낸 듯이 말했다. 「랠프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어디로 가든 마음대로니까요. 혹시 런던 갔을 지도 모르지요.」 나는 조용히 물었다. 「짐을 놓아둔 채 말입니까?」 플로러는 초조한 듯 대답했다. 「아무려면 어때요. 틀림없이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포아로 씨에게 갈 필요없이 이대로 그냥 두 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찰에서는 조금도 랠프를 의심하고 있지 않습 니다. 전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문제예요. 확실히 경찰에서는 랠프를 의심하고 있는 걸요. 오 늘 아침 래글런 경감이라는 두꺼비같이 생긴 작은 남자가 크랜체스터에 서 왔답니다. 게다가 나보다 먼저 스리 보어즈 여관으로 찾아가지 않았겠 어요? 그 사람이 다녀간 일이며 무슨 말을 물어 보았는지 그 여관 주인 이 모두 가르쳐 주더군요. 틀림없이 랠프를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거예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어제 저녁과는 방침이 달라졌나 보군요. 그 사람은 파커를 의 심하는 데이비스 경감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누님이 코웃음을 쳤다. 「파커라고? 참 어이없는 소리군.」 플로러는 내게 가까이 와서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자, 셰퍼드 씨, 어서 포아로 씨를 찾아가 주세요. 그분은 틀림없이 진 범을 찾아내고 말 거예요.」 나는 내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얹으며 말했다. 「플로러 양, 정말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습니까?」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역시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 요. 랠프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아는걸요!」 「물론 랠프가 그랬을 리는 없습니다.」 이때까지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던 캐럴라인이 끼여들었다. 「씀씀이가 헤프긴 하지만 좋은 젊은이예요. 게다가 그토록 예의바른 젊은이는 또 없을 거예요.」 나는 살인범 가운데에도 예의바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쏘아 주고 싶었으나 플로러가 옆에 있으므로 그만두었다. 아무튼 플로러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이지 하고 누님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얼른 일어서서 집을 나왔다. 커다란 브르타뉴풍 모자를 쓴 노파가 현관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들였 다. 포아로 씨는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잘 정돈된 응접실로 들어가 조금 기다리니 바로 어제 만난 포아로 씨 가 들어왔다. 포아로는 벙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 셰퍼드 씨. 잘 오셨습니다, 아가씨.」 그는 플로러에게도 인사를 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저녁 일어난 비극에 대해서는 이미 들으셨겠지요?」 포아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물론 들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아가씨,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 까? 내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내가 먼저 말했다. 「사실은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플로러 양은 당신께 부탁하여……그… ….」 플로러가 또렷하게 말했다. 「범인을 찾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경찰에서 해주지 않습니까?」 「경찰에서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해서 그래요. 벌서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걸요. 꼭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어요. 만일 돈이 문제라면…….」 포아로는 손을 들어 플로러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문제삼지 않는다 는 말은 아닙니다만.」 순간 포아로의 눈이 번쩍 빛나는 듯했다. 「돈은 나에게 있어 매우 필요한 것이었고 지금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 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내가 일을 맡게 되면 꼭 한 가지 양해 를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한번 맡은 일은 어떤 일이 있든 끝 까지 캐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냥개가 냄새를 맡으면 어디까지 나 뒤쫓아가듯! 그러니까 뒤에 가서 경찰에 그냥 맡겨 두는 게 좋았을 거 라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플로러는 포아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진실을 바라고 있어요.」 「모든 진실을?」 「네, 모든 진실을.」 몸집작은 사나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맡지요. 부디 지금 하신 말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그럼, 처음부터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까요?」 「셰퍼드 씨께서 말씀해 주세요. 저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시니까요.」 나는 이때까지 기록한 대로의 사실을 모두 자세히 이야기했다. 포아로 는 가끔 되물었으나 그 밖에는 거의 천장만 바라보며 묵묵히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나는 경감과 함께 팬리 파크를 나온 데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내가 말을 끝내자 플로러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랠프에 대한 일도 모두 말해 주세요.」 나는 좀 망설였으나 빈틈없는 포아로의 눈길이 나를 지켜 보고 있으므 로 하는 수 없이 말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포아로는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여관――스리 보어즈라고 했었던가요?――에 어제 저녁 돌아오시는 길에 들르셨단 말입니까? 무슨 일로 가셨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했다. 「누구든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그 젊은이에게 알려 줘야 하리라 고 생각했지요. 나는 팬리 파크를 나오며 문득 랠프가 이 마을에 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애크로이드 씨와 나뿐이라는 생각을 해냈지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겠습니다. 그것이 여관까지 찾아온 오직 하나의 동기였나 요?」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뿐입니다.」 「혹시 말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확인하기 위해 가셨던 것은 아닙니 까?」 「확인하기 위해서라고요?」 「당신은 아시면서도 모르는 척하는군요. 만일 페이튼 대위가 그날 저 녁 한 번도 밖에 나간 일이 없었다면 마음놓이지 않았겠느냐는 말입니다. 」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요.」 몸집작은 탐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 플로러 양만큼 나를 믿어 주지 않는군요. 그러나 아무래 도 좋습니다. 그보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페이튼 대위의 행방입니다. 꼭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 태는 좀 험악합니다. 그러나 혹시 생각보다 간단히 처리될 일인지도 모르 지요.」 플로러가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포아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지금 곧 경찰서에 가보자고 했다. 포아로 의 생각에 따라 플로러 양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내가 경찰서까지 함께 가서 이 사건을 맡은 경감에게 그를 소개하기로 했다. 우리들은 얼른 행동으로 옮겼다. 경찰서 앞에 데이비스 경감이 마치 썩 은 콩을 씹는 듯한 얼굴로 서 있고, 그 옆에 멜러즈 서장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크랜체스터에서 온 래글런 경감도 있었다. <두꺼비 같다>고 플로러에게서 들었기 때문에 그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멜러즈 서장과 친하게 아는 사이였으므로 나는 곧 포아로를 소개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다. 서장은 눈에 띄게 불쾌한 빛을 드러내고 래글런 경감 역시 험상궂은 얼굴을 지었다. 그러나 데이비스 경감만은 서장의 당혹한 얼굴을 보고 오 히려 힘을 내는 듯했다. 래글런 경감은 말했다. 「사건은 간단한 듯합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 사건 같은 것은 아이들이 봐도 알 텐데, 열두 시 간이나 허비한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투덜대며 데이비스 경감을 비웃었다. 그러나 데이비스 경감은 아 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멜러즈 서장이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애크로이드 씨의 유가족들이 여러 가지로 애쓰시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만, 그러나 경찰로서는 수사에 방해를 받는 게 가장 난처한 일이지 요. 물론 포아로 씨의 공적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래글런 경감이 말했다. 「경찰이란 자기 선전을 할 수 없으니 그만큼 손해보는 셈입니다.」 이 거북스러운 분위기를 포아로가 깨뜨렸다. 「정말은 나도 이미 은퇴한 몸이라서 다시는 아무 사건도 맡지 않으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는 게 싫습니다. 그러니 이번 사건에 혹시 내가 무슨 공을 세운다 해도 내 이름은 숨겨 주시기 바랍니 다.」 래글런 경감의 얼굴빛이 얼마쯤 밝아졌다. 서장도 마음이 풀어져 맞장 구를 치며 말했다. 「당신의 훌륭하신 공적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포아로는 조용히 말했다. 「경험만은 나도 누구 못지않게 많이 가졌지요. 하지만 내 공적은 한결 같이 경찰의 힘을 빌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특히 영국 경찰에는 진심으 로 경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래글런 경감께서 이번에 제가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매우 영광이겠습니다.」 경감의 표정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멜러즈 서장은 나를 옆으로 불러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포아로라는 분은 아주 눈부신 활약을 해온 것 같고, 우리로서는 될 수 있으면 런던 경찰국의 손을 빌지 않고 일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래글런은 매우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나와 반드시 의 견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요. 말하자면 저, 뭐라고 할까요, 이 사건 관계 자들에게 대해 우리들 쪽이 래글런보다 더 자세히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포아로 씨는 명성을 떨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당신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그는 정말 뒤에 숨어서 이 일에 협력해 줄까 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자. 「래글런 경감에게 한층 더 큰 명예를 안겨 줄 겁니다.」 멜러즈 서장이 큰소리로 쾌활하게 말했다. 「자, 그럼, 지금까지의 경과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포아로 씨.」 「고맙습니다. 여기 계신 셰퍼드 씨 말씀으로는 집사에게 혐의가 걸려 있다고 하던데요?」 래글런 경감이 얼른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입니다. 잘 훈련된 좋은 집안의 하인이란 대개 벌 벌 떨기 잘 하고 남에게 의심받을 만한 거동을 하게 마련이지요.」 나는 물어 보았다. 「지문은?」 「파커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경감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과 레이먼드의 지문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포아로가 조용하게 물었다. 「그럼, 랠프 페이튼 대위의 것은 어떨까요?」 사건에 용감하게 뛰어드는 포아로의 태도에 나는 마음속으로 꽤 놀랐 다. 돌아보니 경감의 눈에는 역시 존경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포아로 씨, 역시 당신은 생각이 비상하군요. 이쯤 되면 우리는 즐겁 게 서로 협력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젊은이의 지문은 그를 찾아내는 대로 곧 받을 작정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자네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네, 경감.」 멜러즈 서장은 결코 그럴 리 없다는 얼굴이었다. 「랠프 페이튼에 대해 그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지만, 사람을 죽일 만한 젊은이가 아닐세.」 경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내가 물어 보았다. 「무슨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우선 어젯밤 9시에 여관을 나갔고, 9시 30분쯤에 팬리 파크 언저리에 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습 니다. 더욱이 그는 지금 몹시 돈에 궁한 모양입니다. 여기 구두 한 켤레 를 압수해 왔는데, 고무창을 댄 구두입니다. 그는 아마 이와 똑같은 구두 를 두 켤레 가지고 있나 봅니다. 지금 곧 현장으로 가서 창틀에 나 있는 구두 자국과 맞춰 보려고 합니다. 현장에 순경을 보내 구두 자국을 그대 로 보존하도록 일러두었으니까요.」 멜러즈 서장이 말했다. 「그럼, 곧 나가 볼까? 당신과 포아로 씨도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우리는 동의하고 서장의 자동차에 함께 올라탔다. 경감은 한시바삐 구두 자국을 대조해 보고 싶은지 문지기 집앞에서 내 려 달라고 했다. 그 옆으로 난 길을 절반쯤 들어선 곳에서 오른쪽으로 갈 라지는 오솔길이 바로 테라스와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로 이어져 있었다. 서장이 물었다. 「포아로 씨, 경감과 함께 내리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서재부터 보 시겠습니까?」 포아로는 서재로 가겠다고 했다. 파커가 현관 문을 열었다. 여전히 굽실거렸으나 어제 저녁처럼 허둥거 리지는 않았다. 멜러즈 서장은 주머지에서 열쇠를 꺼내 홀에서 서재 쪽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포아로 씨, 시체를 옮겨 간 것 말고는 모두 어제 저녁 그대로입니다. 」 「시체가 있었던 곳은 어디지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애크로이드 씨가 있었던 위치를 설명 했다. 안락의자는 어젯밤 그대로 난로 앞에 놓여 있었다. 포아로는 걸어가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 푸른 봉투에 든 편지는 당신이 이 방을 나가실 때 어디에 놓여 있었습니까?」 「애크로이드 씨가 오른쪽 작은 테이블 위에 놓았습니다.」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습니까?」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멜러즈 서장님, 죄송하지만 이 의자에 좀 앉아 주실까요? 고맙습니 다. 그리고 셰퍼드 씨, 단검이 꽂혀 있던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켜 주십시 오.」 내가 시키는 대로 가리키자 포아로는 문 쪽으로 가서 바라보았다. 「단검 손잡이가 문 앞에서 똑똑히 보이는군요. 당신과 파커도 역시 보 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포아로는 다시 창가로 갔다. 그는 어깨너머로 물었다. 「당신이 시체를 발견하셨을 때는 물론 전등이 켜져 있었지요?」 나는 그렇다고 말하며 창틀에 나 있는 구두 자국을 살펴보고 있는 그 의 곁으로 갔다. 포아로는 조용히 말했다. 「이 고무 뒤축 모양이 페이튼 대위의 것과 같군요.」 그는 다시 방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능숙하고 민첩한 눈으로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둘러보았다. 「셰퍼드 씨, 당신은 관찰력이 날카로운 편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난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던 모양인데, 당신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애 크로이드 씨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불은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꺼져 있었습니까?」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레이먼드나 브랜트 소령께서 는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마주서 있던 몸집작은 탐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든 줄거리를 잘 찾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일을 당신 께 여쭈어 본 게 잘못이었습니다. 사람이란 모두 저마다 보는 면이 다른 법입니다. 시체의 모습이라면 당신은 자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저 책상 위의 서류에 대해서 알려면 레이먼드가 보아 두엇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난롯불은 이것을 돌보는 사람에게 묻지 않으 면 잘 모를 겁니다. 잠깐만요.」 그는 난로 옆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조금 뒤 파커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그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멜러즈 서장이 불러들였다. 「들어오오. 이분이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하오.」 파커는 좀 두려워하는 눈길로 포아로를 보았다. 「파커, 어제 저녁 셰퍼드 씨와 함께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주인이 돌 아가신 것을 보았을 때 이 난롯불이 어떻게 되어 있었소?」 파커는 서슴지 않고 얼른 대답했다. 「거의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포아로는 소리쳤다. 「호!」 마치 승리를 뽐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파커, 방안을 한 번 죽 둘러보오. 모두 그때와 조금도 다름 없소?」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등불도 켜져 있었고요.」 포아로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 밖에는?」 「네, 이 의자가 좀더 앞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문 앞에서 보아 왼쪽, 문과 창문 사이에 놓여 있는 커다란 안락의 자를 가리켰다(여기에 방안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나타내고 문제의 의자에 X표를 해둔다). 포아로가 말했다.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그대로 좀 해보오.」 파커는 그 안락의자를 벽에서부터 2피트쯤 끌어내 문 쪽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포아로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거 참, 이상하군! 그런 위치로 의자를 돌려놓고 앉을 리는 없는데. 그럼, 누가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을까? 당신이 했소, 파커?」 「아닙니다. 저는 주인님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걸요.」 포아로는 나를 보았다. 「당신이 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파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경관들과 함께 들어왔을 때는 벌써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틀림 없습니다.」 포아로가 다시 말했다. 「이상한데?」 내가 말했다. 「레이먼드나 브랜트 소령께서 제자리로 옮겨 놓았을지 모르겠군요. 그 리 별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포아로는 대답하며 은근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아주 흥미있는 일이지요.」 「잠깐 실례합니다.」 멜러즈 서장이 파커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물어 보았다. 「파커가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다른 점은 잘 알 수 없으나 이 의자에 대해서만은 사실일 겁니 다. 이런 사건을 많이 다루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어느 것이든지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일이 많습니다.」 나는 흥미를 느끼며 물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저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웃으며 물어 보았다. 「나도 말씀입니까?」 포아로는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 당신은 그 페이튼이라는 젊은이게 대해 아시는 대로 모두 말씀 하셨습니까?」 내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포아로는 미소지었다. 「아니,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억지로 묻지는 않을 테니까요. 때가 오면 모든 것은 저절로 다 알게 되는 법입니다.」 나는 당황한 빛을 숨기려고 얼른 말을 꺼냈다. 「당신의 추리 방법을 배우고 싶군요. 이를 테면 그 난롯불 같은 것 말 입니다.」 「네, 그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당신이 애크로이드 씨와 헤어진 것 은 8시 50분이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때 창문은 꼭 닫혀 잠겨 있었으나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10시 15분 좀 지나서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는 문에 쇠가 잠기고 창 문이 열려 있었지요. 누가 열었을까요? 확실히 애크이드 씨 말고는 아무 도 열 사람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방안이 너무 더웠든지――그 러나 난롯불은 거의 꺼져 가고 있었고 어제 저녁은 좀 추운 편이었으니 이 점은 문제되지 않습니다――아니면 애크로이드 씨 자신이 창문으로 누구를 들어오게 했든지 그 어느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누구를 들여 놓았다면 아주 잘 아는 사이겠지요. 그 창문에 대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부터 몹시 불안해 했으니까요.」 「그럼, 문제가 간단해지는군요.」 「사실을 질서있게 늘어놓으면 무슨 일이든 간단해지지요. 우리는 지금 어제 9시 30분에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인물이 누군가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보아 그것은 애크로이드 씨가 창문으로 들여놓은 인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 플로러 양이 아직 살아 있는 애크로이드 씨 를 만나기는 했으나, 그 방문객이 누군지 알아내기 전에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어렵습니다. 창문은 그가 돌아간 뒤에도 열려 있어 다른 사람이 침 입했다고 볼 수 있고, 또는 같은 인물이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르지요. 자, 서장께서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멜러즈 서장은 무슨 정보라도 얻었는지 밝은 얼굴로 들어왔다. 「전화가 걸려 온 곳을 알아냈습니다. 이 댁에서 건 게 아니라 어젯밤 10시 15분 킹즈 애벗 역의 공중 전화에서 셰퍼드 씨 댁으로 걸려 간 것 입니다. 그리고 10시 23분에 리버풀로 떠나는 야간 열차가 있습니다.」 래글런 경감의 확신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는 물었다. 「역에서도 물론 조사하고 있을 테지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그리 낙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도 알고 계시듯 같은 시각에 들어오고 나가는 열차가 여럿 있어서 말입니다.」 킹즈 애벗은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역이 중요한 접속역으로 되 어 있었다. 차량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물론, 연결이나 편성 바꿈까지 이 역에서 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중요한 급행 열차라 하더라도 대부분 이 역에서 한 번은 멈추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중 전화 부스도 두세 군데 있었다. 밤의 그 시각에는 세 방 향에서 세 열차가 한꺼번에 와 닿아, 10시 19분에 도착해서 23분에 발차 하여 북쪽으로 떠나는 급행 열차와 연결된다. 당연히 역 전체가 몹시 붐 벼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 전화걸고 있었다든지 23분발 급행 열차에 탔다 든지 하는 게 눈에 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멜러즈 서장이 물었다. 「그런데 그 전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아로는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너머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 니다.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그럼, 어떤 까닭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을 알아내는 때에는 모든 것이 밝혀져 드러날 것입니다. 아주 이 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흥미있는 사건이기도 하군요.」 포아로의 말투에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이 사건을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포아로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셰퍼드 씨, 문 밖에서 수상한 사나이를 만난 시각이 9시라고 하셨지 요?」 「그렇습니다. 교회의 시계가 바로 그 때 9시를 쳤으니까요.」 「그럼, 그 남자가 이 집까지 또는 이 창문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요?」 「뭐, 5분쯤 걸리지 않을까요? 찻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인 오솔길로 들 어서서 곧바로 오면 2,3분밖에 안 걸리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오려면 길을 잘 알고 있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에도 이 집에 왔던 사람으로서 지리에 밝다 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멜러즈 서장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쯤 애크로이드 씨를 방문한 낯선 손님이 있었는지 물론 알 아볼 수 있겠지요?」 내가 대답했다. 「레이먼드에게 물어 보면 알겠지요.」 멜러즈 서장도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커에게나!」 포아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두 사람에게 다 물어 봅시다.」 멜러즈 서장은 레이먼드를 부르러 나가고, 나는 파커를 부르려고 벨을 눌렀다. 얼마 뒤 서장이 젊은 비서 레이먼드를 데리고 들어와 포아로에게 소개 했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쾌활했다. 그리고 포아로와 알게 된 것을 놀라워하 면서도 아주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 마을에 계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번에 당신의 솜씨를 보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왜 이렇게 두셨습니까?」 포아로는 이때까지 문 왼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옆으로 비켜서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돌아서 있는 동안에 재빨리 큰 안락의자를 파커가 말하던 위치로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레이먼드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물었다. 「나를 여기 앉혀 놓고 혈액 검사라도 하실 겁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 까?」 「레이먼드 씨, 이 의자는 어젯밤 애크로이드 씨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런데 누가 도로 제자리에 갖 다 놓았더군요. 당신이 제자리에 옮겨 놓았습니까?」 비서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의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누군가가 제자리에 옮겨 놓았겠지요. 무 슨 중요한 단서라도 잃어버리셨나요? 그렇다면 참 안됐군요.」 탐정은 대답했다. 「아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물 어 보고 싶은 것은, 이 1주일 동안 애크로이드 씨를 찾아온 낯선 손님이 있었습니까?」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생각했다. 그동안 벨소리를 듣고 온 파 커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윽고 레이먼드가 대답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파커, 당신은 기억나 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번 주일 동안에 낯선 손님이 애크로이드 씨를 찾아온 일이 있소? 」 집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요일 젊은 남자분이 오셨습니다. 커티스 앤드 톨트 상회에서 오셨 다든가……」 레이먼드가 손을 내저어 그 대답을 막았다. 「그래, 나도 생각나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분이 물어 보는 뜻의 손님 과는 다르오.」 그는 포아로를 보며 설명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녹음기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있으면 일의 능 률이 오를 거라고요. 그래서 그 상회에서 외교원을 보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지 않았습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살 생각이 없어졌기 때 문이었지요.」 포아로는 파커에게 물었다. 「파커, 그 젊은 남자의 인상을 좀 말해 보오.」 「금발에 키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감색 사지 양복을 입었으며, 외교원 으로서는 아주 멋진 젊은이였습니다.」 포아로는 나에게 물었다. 「문 밖에서 만났다는 사람은 키가 큰 편이라고 하셨지요, 셰퍼드 씨? 」 「네, 6피트는 될 겁니다.」 벨기에인 탐정은 말했다. 「그럼, 문제가 되지 않는군요. 파커, 이제 가봐도 좋소.」 집사는 레이먼드를 보고 말을 건넸다. 「허먼드 씨가 오셨습니다. 뭐 도와드릴 일이 없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요? 곧 가보지요.」 레이먼드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포아로는 서장에게 무엇인가 묻고 싶 은 얼굴이었다. 서장은 묻기 전에 말해 주었다. 「애크로이드 씨의 고문 변호사입니다.」 포아로는 중얼거렸다. 「레이먼드도 꽤 바쁜 모양이로군. 능력있는 젊은이 같아 보입니다.」 「아주 유능한 비서라고 애크로이드 씨가 늘 칭찬하셨지요.」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됩니까?」 「2년쯤 될 겁니다.」 「아주 차근차근히 일을 잘하는 것 같은데, 취미는 무엇인가요? 운동을 좋아합니까?」 멜러즈 서장은 웃으며 말했다. 「비서라는 직업은 자기 취미를 즐길 만한 시간 여유가 그리 없는 모 양이더군요. 그는 아마 골프를 좀 할 겁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테니스를 하고요.」 「내기 말은? 저, 말이 서로 경주하는 것 말입니다.」 「경마 말입니까? 아니, 경마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더군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 이야기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는 천천히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볼 것은 다 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를 따라 방안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 벽에 입이 있어서 사실을 말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포아로는 머리를 저었다. 「입만으로는 안 됩니다. 눈이나 귀도 갖춰져 있어야지요. 그러나 이런 생명없는 물체일지라도…….」 그는 책상에 손을 댔다. 「반드시 벙어리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이런 물체들이 나에 게 말을 해주지요. 의자도, 테이블도, 이것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가 지고 있답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합니까? 오늘도 무슨 말을 해주었습니까?」 그는 돌아보며 대답했다. 「열려 있는 창문, 잠겨진 문, 그리고 자기 혼자 움직인 듯한 의자. 이 세 가지에 대해 나는 <왜?>하고 물어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해주는 군요.」 그는 머리를 저으며 가슴을 펴고 우리들 쪽을 보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자신을 꽤 훌륭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 워 보였다. 이 사람이 정말 훌륭한 탐정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빛좋 은 개살구처럼 이름만 난 게 아닐까? 멜러즈 서장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서장은 좀 무뚝뚝한 말투로 포아로에게 물었다. 「달리 더 보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그 흉기가 없어졌다는 은테이블을 좀 볼까요? 그 밖에는 더 보고 싶은 게 없습니다.」 나는 응접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순경이 서장을 기다리고 섰다가 귀엣말로 무어라 소곤거렸다. 서장은 포아로와 나를 남겨놓고 순경과 함 께 가버렸다. 나는 포아로에게 은테이블을 보여 주었다. 포아로는 뚜껑을 한두 번 여 닫더니 창문을 열고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 때 래글런 경감이 집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웃는 얼 굴은 아니지만 만족한 표정이었다. 「포아로 씨, 여기 계셨군요. 이 사건도 이젠 끝나려나 봅니다. 나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주 좋은 젊은이였는데, 아마 귀신에게라도 홀렸 나 보지요.」 포아로는 침착한 얼굴로 조용하게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겠군요.」 경감은 위로하듯 말했다. 「다음 기회에 또 부탁드리지요. 하기는 이런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날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만요.」 포아로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아무튼 퍽 빨리 찾아내셨군요. 실례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셨는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요컨대 첫째는 방법입니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우선 방법이지요!」 포아로가 맞장구쳤다. 「과연! 나 역시 그것을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방법, 순서, 그리고 작 은 회색 뇌세포.」 경감은 의아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뇌세포?」 벨기에인 탐정은 설명했다. 「작은 회색 뇌세포입니다.」 「아, 그거요. 우리들 누구나가 쓰고 있는 것 말씀이군요.」 「다만 쓰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요. 또는 질적으로 다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범죄 심리, 이것도 반드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하! 그 심리 분석이라는 것의 영향을 받으시는군요. 아무튼 나는 이렇게 솔직한 인간이라…….」 「솔직하다고요? 그러나 당신 아내는 아마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은 않 을 것입니다.」 포아로는 조금 머리를 숙여 보였다. 레글런 경감 역시 좀 기세가 꺾인 모양인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내가 한 말을 좀 오해하신 것 같군요.」 경감은 주저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의 오해란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일하는 방법을 말했을 뿐입니다. 우선 첫째로 방법입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살아 있는 것을 맨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그의 조카딸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 시간은 9시 45분, 이것이 첫번째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그렇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렇지요.」 「아니, 실제로 그렇습니다. 10시 30분에는, 여기 계신 셰퍼드 씨의 말 씀에 의하면, 애크로이드 씨는 적어도 30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나 합 니다. 셰퍼드 씨, 그 의견은 틀림없으시지요?」 「물론입니다. 30분, 또는 그 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일을 저지른 것은 그 15분 동안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연 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집안 식구들의 이름 밑에 9시 35분부터 10시 사이 에 저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포아로에게 건네 주었다. 나는 포아로의 어깨너머로 그것을 읽어 보았다. 단정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브랜트 소령: 레이먼드와 함께 당구실에 있었음(레이먼드의 증언). 레이먼드: 당구실(브랜트 소령의 증언). 세실 애크로이드 부인: 9시 45분까지 당구를 구경함. 9시 55분, 침실로 감(레이먼드와 브랜트가 부인이 층계를 올라가는 것을 보았음).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 큰아버지의 서재에서 곧바로 2층으로 감(파커와 하녀 엘시 딜의 증언). 파커: 곧바로 식당으로 감(가정부 미스 러슬의 증언. 그녀는 9시 47분 에 볼일이 있어서 파커를 만났는데, 적어도 10분 동안은 식당에 있었음). 미스 러슬: 앞 참조. 9시 45분에는 2층에서 하녀 엘시 딜과 이야기함. 애슐러 본(심부름 하녀): 9시 45분까지 자기 방에 있었음. 그 뒤 2층 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있었음. 쿠퍼 부인(요리사):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있었음. 클래디스 존즈(견습 하녀):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있었음. 엘시 딜: 2층 침실에 있었음. 미스 러슬과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이 확 인. 메리 슬립(식당에서 일하는 하녀):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있 었음. 「요리사는 여기서 일한 지 벌써 7년이나 되고, 심부름 하녀 애슐러 본 은 1년 반, 파커는 1년 조금 지났습니다. 그 밖에는 모두 새로 온 사람들 입니다. 파커가 좀 수상할 뿐 다른 사람들은 아무 수상한 점이 없습니다. 」 「아주 자세한 목록이군요.」 포아로는 종이를 돌려주며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파커는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 누님도 같은 의견이더군요. 게다가 누님의 말은 대개 들어맞는 답니다.」 그러나 내 말에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경감이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면 집안에 있던 사람은 거의 정리된 셈인데, 여기에 아주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문지기 집에 사는 메리블랙이라는 여자가 어젯밤 문에 커튼을 치다가 대문을 들어서 집 쪽으로 걸어가는 랠프 페 이튼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확실히 보았답니까?」 「확실하다고 봅니다. 랠프를 잘 아는 여자니까요. 몹시 급한 걸음으로 오른쪽 오솔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바로 이 테라스로 오는 지름길이지 요.」 그때까지 아무 표정없이 앉아 있던 포아로가 물었다. 「시간은?」 경감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9시 25분 조금 지나서였다고 합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경감이 다시 말했다. 「모든 일이 명백합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지요. 9시 25분에 페이큰 대 위가 문지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고, 9시 30분 또는 그 전에 제프리 레이먼드 씨가 이 방에서 누가 돈을 요구하고 애크로이드 씨가 그것을 거절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까요? 페이튼 대위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나가 화를 내며 테라스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열려 있는 응접실 창문까지 왔지요. 9시 45분쯤이었을 겁니다. 플로러 양은 큰아버지에게 저녁 인사를 드렸습니 다. 브랜트 소령, 레이먼드 씨, 세실 부인은 살금살금 들어가 은테이블에 서 단검을 꺼내, 서재 창문으로 되돌아가 구두를 벗고 창문을 기어올라 방안으로, 그리고 다음은 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리고는 얼른 뛰어 달아난 겁니다. 여관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는지 곧 역으로 달려가 거기서 전화를…….」 포아로가 조용히 물었다. 「왜 전화를 걸었을까요?」 나는 그 질문에 놀랐다. 이 몸집작은 탐정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 다. 그의 눈이 이상한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순간 래글런 경감도 이 질문에 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겨우 말했다. 「왜냐고 물으시면 설명하기 난처합니다. 그렇지만 살인범이란 묘한 짓 을 곧잘 한답니다. 경찰에 오래 있으면 그런 것도 자연히 알게 되지요. 아무리 머리좋은 녀석이라도 때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수가 있습니다. 자, 오십시오. 구두 자국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우리들은 테라스 모퉁이를 돌아 서재 창문 밑까지 갔다. 래글런 경감의 명령으로 순경이 여관에서 압수해 온 구두를 꺼냈다. 경 감은 그것을 발자국 위에 놓았다. 경감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꼭 들어맞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이 구두의 자국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 이 자국의 구두는 범인이 벌써 신고 달아났으니까요. 여기 있는 이 구두는 같은 모양이긴 하나 낡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창이 이렇 게 닳았잖습니까?」 포아로가 말했다. 「그러나 고무창 댄 구두를 신는 사람은 많을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나 역시 다른 여러 가지 점이 다 들어맞지 않는다 면 이렇게까지 구두 자국을 중요시하지는 않습니다.」 포아로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무튼 랠프 페이튼 대위는 꽤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남겨 놓다니.」 「바로 이것입니다. 어제 저녁은 날씨가 맑아 테라스나 자갈 깔린 오솔 길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나쁘게도 큰길에서 갈라진 오 솔길에 요즘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여기를 좀 보십시오.」 몇 피트 앞에서부터 자갈깔린 오솔길이 테라스로 이어져 있었다. 그 오 솔길이 끝나는 데서 몇 야드 떨어진 곳의 땅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이 젖은 땅을 가로지르며 또 발자국들이 있고, 그 가운데에 고무창을 댄 구 두 자국도 섞여 있었다. 포아로는 경감과 나란히 그 오솔길을 조금 걸어갔다. 포아로가 불쑥 물었다. 「여자 발자국도 있는데, 보셨습니까?」 경감은 웃었다. 「물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도 여러 사람이더군요. 그리고 남자들 도. 아무튼 집으로 들어오는 지름길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여기에 나타난 발자국을 모두 조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창가에 난 그 구두 자국입니다.」 포아로는 머리를 끄덕였다. 찻길이 보이는 곳에서 경감이 말했다. 「더 이상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또다시 자갈깔린 마당 땅이니까요.」 포아로는 또 머리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은 거기서 조금 떨어진 빈집으 로 쏠려 있었다. 자그마하나 아주 깨끗한 집이었다. 오솔길에서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역시 거기에도 입구까지 자갈이 깔려 있었다. 포아로는 경감이 저택으로 되돌아가자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나의 오랜 친구 헤이스팅즈 대신 내게 보내 주셨 나 봅니다. 셰퍼드 씨, 나와 함께 줄곧 다니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저 빈집을 좀 조사해 볼까요? 매우 흥미있어 보입니다.」 포아로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통나무 의자 두서너 개, 크리켓 도구, 그리고 접어 둘 수 있는 의자가 몇 개 있었다. 나는 포아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바닥 위에 엎드려 네 발로 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뒤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일어나며 혼자말 을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군. 있으리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러 나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을 텐데…….」 포아로는 갑자기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멈추며 통나무 의자로 손을 뻗 어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나는 외쳤다. 「뭡니까? 뭘 찾으셨습니까?」 포아로는 웃으며 내게 손을 펴보였다. 부드러운 흰 헝겊 조각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본 다음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셰퍼드 씨,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손수건 조각 아닙니까?」 그는 또 손을 내밀어 이번에는 작은 깃털을 주워 들었다. 거위 깃털 같 았다. 그는 매우 의기양양해 하며 물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을 뿐이었다. 그는 깃털을 주머니에 넣고, 아까 먼저 주운 헝겊 조각을 들여다보았 다. 포아로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손수건 조각이라……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것만은 알 아 두십시오. <세탁을 잘하는 사람은 손수건에 풀을 안 먹인다는 것을>. 」 포아로는 우쭐대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헝겊 조각을 마치 귀중한 물 건이나 되듯 종이에 잘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금붕어 못 우리들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경감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아 로는 테라스에 서서 천천히 집 둘레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는 감탄한 듯 말했다. 「훌륭한 저택이로군. 상속자는 누구지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때까지 상속 문제에 대 해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포아로는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았 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물었나 보군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 하셨 습니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생각해 봄직한 일인데요.」 포아로는 또다시 나를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말씀하신 뜻은 알겠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이 말하며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가로막았다. 「아니, 그만두십시오. 지금 변명해 봐야 헛일입니다. 어떻든 당신은 속 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웃으며 포아로가 언젠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누구나 숨겨 두는 일이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더욱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에르큘 포아로에게 감춘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요. 결국에 가서는 냄새를 맡아 내고야 마니 까요.」 그는 정원의 네덜란드식 돌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말을 이었다. 「좀 걸을까요? 오늘은 참 날씨가 좋군요.」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포아로는 오솔길을 왼편으로 꺾어 들어 도장나 무 산울타리가 둘러진 꽃밭 안으로 들어섰다. 잘 손질된 꽃밭 한가운데로 오솔길이 나 있고, 그 길 끝에 벤치와 금붕 어 못이 있었다. 그 언저리는 돌을 깔아 놓은 둥그런 휴게소로 되어 있었 다. 포아로는 이 길 끝까지 가지 않고 나무들이 있는 언덕으로 구부러지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나무를 몇 그루 베어 내고 벤치를 놓아둔 빈터가 있었다. 거기에 앉으면 마을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바로 밑 의 돌을 깔아 놓은 둥근 휴게소며 금붕어 못까지도 모두 내려다볼 수 있 었다. 사방을 둘러보며 포아로는 말했다. 「영국은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가씨들도 아름답지요. 쉬, 저 아래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십 시오.」 나는 그제야 비로소 플로러가 있는 것을 알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우리 가 막 지나온 오솔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걷는다기보다 오히려 춤춘다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 았다. 비록 상복을 입었으나 그 태도에서 기쁨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플로러는 별안간 발끝으로 한바퀴 맴돌았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바 람을 담뿍 안고 부풀어올랐다. 그러자 플로러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마음 껏 웃는 것이었다. 마침 이 때 나무 숲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헥터 브랜트였다. 플로러는 깜짝 놀라며 얼굴빛이 달라졌다. 「어머나! 당신이 여기 계신 줄 전혀 몰랐어요.」 브랜트는 아무 대답없이 잠시 플로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뻐요.」 그 말을 듣고 햇볕에 그을린 브랜트의 얼굴이 좀 붉어지는 듯했다. 한 참 만에야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좀 달랐다. 「아니, 나는 이야기를 잘할 줄 모릅니다. 젊었을 때부터 늘 그랬지요. 」 플로러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젊었을 때라면 퍽 오랜 옛날이겠지요?」 내가 느끼기에는 그 목소리 속에 웃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브랜 트 소령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아주 옛날입니다.」 「메두셀라(유대 족장으로 969살까지 살았다고 함)처럼 오래 산다면 어 떤 기분이 들까요?」 처음보다 더 웃음이 겉으로 드러났으나, 브랜트 소령은 역시 자기 생각 에만 잠겨 있는 듯했다.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았던 사나이를 아십니까? 왜 오페라에도 나 오지요? 젊음을 사기 위해서 영혼을 판…….」 「파우스트 말이지요?」 「네, 바로 그 사람입니다. 놀라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자기 영혼을 팔려는 사람도 있겠지요.」 플로러는 얼마쯤 당황해 하면서도 재미있는 듯 말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어딘지 좀 이상한 데가 있는 것 같군요.」 브랜트 소령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이윽고 플로러로부터 눈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나무를 향해 이제 그만 다시 아프 리카로 떠나 볼까 하고 중얼거렸다. 「또 탐험을 떠나시나요, 사냥하러?」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늘 하는 일이니까요, 수확물을 쏘는 것 은.」 「홀에 걸려 있는 짐승 머리도 당신이 잡은 거라지요?」 브랜트 소령은 그렇다고 대답하여 얼굴을 붉히더니 불쑥 말했다. 「고급 털가죽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바란다면 잡아다 드리지요.」 「어머나, 기뻐라! 갖고 싶어요. 정말이지요? 잊어버리면 안 돼요!」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브랜트 소령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생활에 도무지 익숙치 않습니다. 예의를 잘 모르니까요. 나는 야인(野人)입니다. 사교계 같은 데 드나들 인물이 못 됩니다. 인사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형편이지요. 어서 빨리 떠나야겠습니다.」 플로러가 소리쳤다. 「그렇지만 지금 곧 떠날 수는 없잖아요? 안 돼요,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부디 조금만 더 계시다 가세요. 만일 당신까지 떠나 버리면… ….」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브랜트 소령이 물었다. 「나더러 더 머물러 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심스럽고도 솔직한 질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브랜트 소령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사만을 물었을 뿐입니다.」 플로러는 천천히 상대편 쪽으로 돌아서서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더 머물러 계시기를 바래요. 만일, 만일 나와 함께 있는 게 좋 으시다면.」 「네,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금붕어 못 옆에 있는 돌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모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플로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참 상쾌한 아침이군요. 나는 참으로 행복해요. 이런 여러 가지 복 잡한 사정이 있는데도. 어이가 없으시지요?」 「아니오,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2년 전만 해도 당신은 큰아버지를 전 혀 몰랐는걸요. 슬퍼하는 게 오히려 무리한 일이지요. 겉으로만 슬퍼하는 척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퍽 마음이 놓여요. 모든 일을 당신은 아주 간단 하게 처리하시거든요.」 수렵가는 대답했다. 「사물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플로러의 목소리는 어느새 작아지고, 브랜트 소령은 저 멀리 아프리카 의 바닷가를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플로러의 목소리 가 작아진 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듯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말을 꺼냈다. 「그렇게 근심할 것 없습니다, 그 젊은이에 대한 일이라면. 아주 엉터 리 경감입니다. 그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 다. 그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을지. 외부 사람 입니다. 강도인 거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플로러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브랜트는 얼른 되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잠시 끊어졌다. 한참 만에 플로러가 말했다. 「나, 오늘 아침에 왜 이토록 기분이 좋은지 이야기하겠어요. 아주 몰 인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아요. 모두 말씀드리지요. 사실은 변호 사가 다녀갔어요. 허먼드 씨 말이에요. 그리고 유서 내용을 이야기해 주 었지요. 로저 큰아버지는 내게 2만 파운드를 남겨 주셨대요. 정말 꿈만 같아요. 2만 파운드예요!」 브랜트 소령은 놀라는 듯했다. 「그게 그렇듯 중대한 일입니까?」 「중대한 일이냐고요? 그럼요, 내게는 가장 중대한 일이지요! 자유롭게, 참된 삶을 보내고. 이제는 돈 때문에 깍쟁이 짓을 안 해도 되고, 거짓말 을 안 해도…….」 브랜트 소령은 깜짝 놀라 상대방의 말을 가로챘다. 「거짓말을?」 플로러는 아픈 곳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딱한 사정을 모르실 거예요.」 마치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돈 많은 친척에게서 변변치 못한 헌 옷가지라도 받으면 속으로 그리 좋지 않아도 겉으로 아주 고마운 척해야 하고, 유행이 다 지난 옷이며 모 자를 써야 하니까요.」 「부인들의 옷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늘 예쁘고 아름 다운 옷만 입고 계시던데요.」 플로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어요.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지요. 나는 참 행복해요. 이젠 자유롭고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브랜트 소령이 얼른 물었다. 「무엇을 마음대로 합니까?」 「잊어버렸어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예요.」 브랜트는 스틱으로 금붕어 못 속을 휘저으며 무엇인가 끌어 올리려 하 고 있었다. 「뭘 하세요?」 「뭔가 빛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금단추 같기도 하고. 흙탕 물이 일어나서 보이지 않는군.」 「왕관일지 몰라요, 메리 샌드가 물 속에서 본 것 같은.」 「메리 샌드!」 브랜트 소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페라에 나오는 여자지요?」 「네, 그래요. 오페라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브랜트 소령은 슬픈 빛을 보이며 말했다. 「가끔 사람들에게 끌려서 가보지요. 이상한 오락도 다 있더군요. 토인 들이 북을 치며 떠들어대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플로러는 웃었다. 브랜트 소령은 말을 이었다. 「메리 샌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만한 나이의 남자와 결혼했었 지요?」 그는 작은 돌멩이를 못 속에 던졌다. 그리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 플로 러 쪽을 보며 말했다. 「플로러 양, 내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랠프 일로 얼마나 걱정되 겠습니까.」 플로러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리 손을 빌 일이 없어요. 랠프 일도 그리 걱정 안 돼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에게 부탁해 놓았으니까요. 그분은 반드시 모든 것을 밝혀 내고 말 거예요.」 뜰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이 얼굴만 들면 우리 모습이 눈에 띌 정도였 다. 그래서 나는 조금 전부터 불안하여 상대방에게 우리가 있는 것을 알 리려 했으나, 포아로가 말렸다. 특별히 엿들으려고 여기 온 것은 물론 아 니다. 그러나 포아로는 잠자코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활 발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포아로는 기침을 하며 얼른 일어섰다. 「실례합니다. 아가씨로부터 그같이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화의 근원이 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번만은 그와 반대인 것 같습니다. 두 분을 방해하여 죄송합 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나는 포아로의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서 있는 금붕어 못 가로 갔다. 플로러가 소개했다. 「이분은 에르큘 포아로 씨세요. 성함은 벌써부터 많이 들으셨겠지요? 」 포아로는 머리숙여 인사하며 정중히 말했다. 「브랜트 소령의 존함은 벌써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사실은 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브랜트 소령은 의아해 하며 포아로를 돌아보았다. 「애크로이드 씨를 맨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지요?」 「저녁 식사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모습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으셨습니까?」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는 들었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지요?」 「아무 생각없이 테라스에 나갔다가 거기서…….」 「실례지만 그때가 몇 시쯤이었지요?」 「9시 30분쯤이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며 응접실 창문 앞을 거닐고 있었 습니다. 그랬더니 애크로이드 씨가 서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소리가 들 리더군요.」 포아로는 쭈그려 앉아 구두코에서 작은 풀잎을 떼어 내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서재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테라스까지 들리지는 않을 텐데요?」 그는 브랜트 소령을 보고 있지 않았으나, 나는 줄곧 보고 있었으므로 그가 얼굴을 붉히는 게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브랜트 소령은 설명을 덧붙였다. 「테라스 끝까지 갔었지요.」 포아로는 맞장구를 쳤다. 「아, 그랬군요.」 포아로는 좀더 자세히 물어 보려는 눈치였다. 「사실은 그때 여자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사라진 듯해서……뭔가 하 얀 것이 잠깐 보였을 뿐입니다만.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 일로 테라스 끝까지 가서 서 있는데, 애크로이드 씨가 비서에게 이야기하 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제프리 레이먼드에게 말입니까?」 「네, 그때는 그렇게 여겼습니다만,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봅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레이먼드의 이름을 불렀었습니까?」 「아니오.」 「그럼, 어떻게……?」 브랜트는 몹시 애쓰며 다시 설명했다. 「당연히 레이먼드려니 생각했습니다. 내가 밖으로 나오기 조금 전에 레이먼드가 애크로이드 씨에게 서류를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요. 다른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들으신 말씀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여느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깐 몇 마디 귓전을 스쳐 갔을 뿐,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건 그리 중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시체가 발견된 뒤 서재로 들어갔을 때, 의자를 벽 쪽으로 옮겨 놓으셨습니까?」 「의자요? 아니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포아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플로러 쪽으로 돌아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 한 가지만 더 물어 보겠습니다. 셰퍼드 씨와 함께 은테이블 속을 들여다보실 때 그 단검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 까, 아니면 없었습니까?」 플로러는 고개를 쳐들고 뾰로통하게 말했다. 「래글런 경감님도 같은 것을 물어 보시더군요! 경감님에게 이미 이야 기했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단검은 없었어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경감님은 그때에는 단검이 있었는데 나중에 랠프가 훔쳐 낸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 말을 조금도 믿어 주려 하지 않아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랠프를 감싸 주려고 말예요.」 나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플로러는 발을 구르며 말했다. 「어머나, 당신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너무해요!」 포아로가 얼른 화제를 바꿔 주었다. 「브랜트 소령, 아까 말씀하신 대로 못 속에서 뭔가가 반짝이고 있습니 다. 손이 닿는지 한 번 건져 볼까요?」 포아로는 못가에 무릎을 꿇고 웃옷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다음 밑바닥 흙이 일지 않도록 살며시 손을 못 속에 담갔다. 그토록 조심했으 나 헛일이었다. 흙이 솟아올라 반짝이는 물건을 건질 수가 없었다. 포아로는 팔에 묻은 흙을 원망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내가 손수건을 꺼 내 주니 미안해 하며 받았다. 브랜트 소령이 시계를 꺼내 보았다. 「곧 점심 시간이군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플로러가 말했다. 「포아로 씨, 함께 점심 식사를 드시겠어요? 우리 어머니를 꼭 좀 만나 주셨으면 해요. 어머니는 랠프를 무척 사랑하고 계세요.」 몸집작은 탐정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가지요.」 「그리고 셰퍼드 씨도요.」 나는 좀 망설였다. 「괜찮으니 당신도 함께 가세요.」 사실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굳이 사양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플로러와 브랜트 소령이 앞장서 우리들은 집 쪽으로 걸어갔다. 포아로가 플로러를 턱으로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머리칼이 참 아름답지요? 훌륭한 금발입니다. 검은 머리의 미남 페이 튼 대위와 아주 잘 어울리겠군요.」 나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포아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소맷부리에 조금 묻은 물을 열심히 닦아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녹색 눈동 자며 옷과 자기 몸의 하찮은 데까지 하나하나 신경쓰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고양이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공연히 헛수고만 했군요. 그런데 그 못 속에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요?」 「보여 드릴까요?」 나는 놀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리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큘 포아로는 목적한 물건을 얻을 확신없이 옷을 적시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지요. 나는 그런 어리석은 바보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의해 보았다. 「그러나 손에 아무것도 없었잖습니까.」 「때로는 분별이라는 것이 필요하지요. 당신은 환자에게 무엇이든지 다 말씀하십니까? 안 그러실걸요. 댁의 누님에게도 모두 털어놓지는 않지요? 아까 빈손을 보여 드리기 전에 집은 물건은 벌써 다른 한손으로 옮겨 쥐 었답니다. 그럼, 보시겠습니까?」 포아로는 왼손을 펴보였다. 작은 금반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부인용 결혼 반지였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포아로가 마치 명령하듯 말했다. 「안쪽을 보십시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안쪽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R로부터. 3월 13일. 나는 포아로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작은 손거 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특히 콧수염을 정성 껏 다듬으며 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모 양이었다. 심부름 하녀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세실 애크로이드 부인이 현관 홀에 있었다. 몸집작고 나이많아 보이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고집세게 생긴 턱과 날 카롭게 빛나는 눈을 한 남자였다. 변호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세실 부인이 말했다. 「허먼드 씨도 우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게 되셨어요. 허먼드 씨, 브 랜트 소령을 아시지요? 이분은 셰퍼드 씨. 역시 돌아가신 로저의 친한 친 구분이셨지요. 그리고 이 분은…….」 그녀는 에르큘 포아로 쪽을 보며 좀 당황한 듯하더니 잠시 말을 멈췄 다. 플로러가 소개했다. 「포아로 씨세요.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세실 부인은 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랬었지. 네, 물론 알고 있어요. 랠프를 찾아 주신다는 분이시지 요?」 「큰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실 거예요.」 「어머나, 실례했어요. 그만 착각을 해서. 오늘 아침 일로 정신이 좀 이 상해졌나 봐요. 글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에요. 나는 자꾸만 무슨 사고 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로저는 이상하게도 골동품 만지기를 좋 아하더니, 혹시 손질이 헛나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모두들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포아로가 변호사에게 다가가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보 았다. 두 사람은 창가로 가서 나란히 섰다. 나도 뒤따라가, 그리고는 잠시 주춤거렸다.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포아로는 기분좋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조금도.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돕지 않으면 도저히 이 사 건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안 계셨더라면 어떻게 시작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허먼드 씨에게 몇 가지 사정을 여쭤 보려던 참입니다.」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을 들으니 랠프 페이튼 대위를 위해 힘을 많이 쓰신다고요.」 포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플로러 양이 큰아버지의 이상한 죽음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지요.」 허먼드 씨는 좀 놀라운 모양이었다. 「페이튼 대위가 이 범죄에 관련되어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습 니다. 모든 증거가 그에게 불리하다 해도. 다만 돈에 쪼들렸다는 것만으 로는…….」 포아로는 말끝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돈에 쪼들리고 있었습니까?」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페이튼 대위에게는 만성적인 병 같은 것이지요. 돈이 아무 리 많다 해도 물처럼 헤프게 쓰는 데야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양아버지 애크로이드 씨에게 늘 졸라댔지요.」 「요즘도 그랬습니까?」 「글쎄요, 거기까지는. 애크로이드 씨한테서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거 든요.」 「그렇겠지요, 허먼드 씨. 그럼, 애크로이드 씨의 유언서 내용은 알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오늘 여기 온 것도 그 일 때문입니다.」 「그럼, 나에게도 그 내용을 좀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플로러 양의 부탁으로 일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법률상의 특별 용어 같은 것도 없고. 그저 기념으 로 몇 사람에게 유증(遺贈)을 한 뒤…….」 포아로가 물었다. 「이를 테면 어떻게?」 허먼드 씨는 좀 놀라는 듯했다. 「가정부 미스 러슬에게 1천 파운드, 요리사 에머 쿠퍼에게 50파운드, 비서 제프리 레이먼드 씨에게 5백 파운드, 그리고 여기저기 병원에……. 」 포아로가 한손을 들었다. 「아, 자선 사업 기부금이군요. 그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실 애크로이드 부인께 1만 파운드의 주 식에서 들어오는 배당금이 일생 동안 지불됩니다.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 은 2만 파운드의 현금을 물려받게 됩니다. 나머지는――이 집과 애크로이 드 부자 상회의 주식을 합해――양아들 랠프 페이튼에게 물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막대한 재산입니다. 페이튼 대위는 굉장한 재산가가 되는 셈이군요. 」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포아로와 변호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세실 부인이 벽난로 옆에서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허먼 씨.」 변호사는 부인 쪽으로 가고, 포아로는 내 팔을 잡아 창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일부러인 듯 큰소리로 말했다. 「보십시오. 제비꽃이 피어 있군요. 참 곱지요. 힘차게 죽죽 솟아올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리고 그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 다. 「정말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이 사건 조사에 힘을 빌려 주겠습니까? 」 나는 열의를 담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로서는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니까요. 이런 시골 마 을에서의 생활이 아주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당신을 알게 된 겁니 다. 평범한 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협력자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제 곧 브랜트 소령이 이리로 올 겁니다. 세실 부인을 상대하기가 지루할 테 니까요. 그런데 몇 가지 알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 어한다는 걸 눈치채게 해서는 안되지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질문하는 역할을 당신이 맡아주시겠습니까?」 나는 좀 걱정스러워졌다. 「어떤 질문을 하려는 겁니까?」 「팰러즈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십시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부인의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팰러즈 씨가 죽었을 때 이 마을에 있었는지 물어 보십시오. 내 말 뜻을 아시겠지요? 그리고 소령이 대답할 때 그 얼굴빛이며 표정을 좀 살 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좋겠지요?」 더 이상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포아로의 말대로 브랜트 소령이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우리 쪽으로 다가왔 기 때문이다. 「테라스를 함께 거닐지 않겠습니까?」 내가 권하자 소령은 말없이 그대로 따랐다. 포아로는 혼자 뒤에 남아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때늦게 피어 있는 장미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루 동안에 꽤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군요. 바로 지난 수요일 밤에도 이렇게 테라스를 거닐었었지요.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그때는 아주 건강 했었는데. 그런데 겨우 사흘밖에 안 된 오늘에는 애크로이드 씨가 돌아가 시고, 팰러즈 부인도 세상떠난 지 벌써 며칠이 되었군요. 물론 팰러즈 부 인을 알고 계시지요?」 브랜트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여기 오신 뒤에도 부인을 만나 보셨습니까?」 「로저와 함께 한 번 찾아뵈었었지요. 아마 지난 주 화요일이었다고 생 각됩니다. 매력적인 부인이었지만, 좀 이상한 데가 있었지요. 좀 깊이가 있다고나 할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데가 있었습니다.」 나는 브랜트 소령의 침착한 잿빛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 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전에도 부인을 만나 보신 적이 있었겠지요?」 「네, 지난번에 여기로 초대받아 왔을 때였지요. 팰러즈 부부가 이 마 을에 갓 옮겨 왔을 때였습니다.」 소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보니 부인이 그때와 아주 달라졌더군요.」 「달라졌다니, 어떻게?」 「10년쯤은 늙어 보였습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팰러즈 씨가 세상을 떠날 때도 여기 계셨습니까?」 「아니오, 없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오히려 잘됐다고들 하더군요. 부 인에게 아주 귀찮은 존재였다지요.」 나는 동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슐리 팰러즈는 결코 모범적인 좋은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브랜트 소령이 말했다. 「나에게 말하라면 악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신분에 좀 지나치게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게 탈 이었지요.」 「아, 돈 말입니까? 이 세상 모든 불행의 근원은 돈인가 보군요. 돈이 있어도, 없어도 탈이니까요.」 「당신은 어느편입니까?」 「필요한 만큼은 갖고 있습니다.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1년 전에 유산을 받았는 데, 남의 말에 속아넘어가 모두 잃고 말았으니까요.」 나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되어 동정심이 일었다. 그래서 나도 같은 경험 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윽고 점심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서 모두 식당으로 들어갔다. 포아로는 잠시 나를 잡아 세웠다. 「어떻습니까, 잘되어 나갔겠지요?」 「수상한 데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무언가 동요하는 듯한 점은?」 「1년 전에 유산을 상속받은 일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뭐 그리 문 제될 게 없겠지요. 그분은 아주 공명정대하며 수상한 점은 전혀 없어 보 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리고 나서 포아로는 얼른 말을 바꾸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 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십시오.」 모두들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식탁에서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저녁 식 사를 한 지 스물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가 끝난 뒤 세실 부인이 나를 불러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나는, 나는 분해서 못 살겠어요.」 중얼거리듯 말하며 세실 부인은 손수건을 꺼냈으나 눈물을 닦으려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로저는 나를 조금도 믿어 주지 않았어요. 그 2만 파운드는 플로러보 다 나에게 주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어머니로서 딸의 뒤를 돌보아 주는 일쯤은 맡겨도 좋았으련만. 이토록 나를 무시하다니, 정말 너무했다는 생 각이 들어요.」 「잊어버리고 계신 것 같군요, 세실 부인. 플로러는 애크로이드 씨의 대를 이어받은 조카딸입니다. 만일 당신이 동생 부인이 아니라 친동생이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반드시 사정이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친동생의 미망인이에요. 내 기분을 조금쯤 헤아려 주었 어도 좋지 않을까요?」 부인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로저라는 사람은 전부터 돈에 대해 아주 이상했어요. 아니, 구두쇠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말예요. 나도, 플로러도 돈 때문에 얼마 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그 아이에게 용돈도 제대로 안 주었거든요. 사온 물건값은 치러 주었지만, 그럴 때에도 여러 가지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 요.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샀다느니 하고. 그 사람다운 말이라고 생각하 면 그만이지만. 어머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오, 그래, 우리는 자신의 돈은 1페니도 없었어요. 플로러는 그게 불만이었지요. 네, 아주 불 만이었답니다. 물론 진심으로 큰아버지를 사랑하고 있기는 했지만, 젊은 아가씨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그래요, 로저라는 사람은 돈에만은 이상 하게도 생각이 굳었어요. 타월이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도 새것을 사오라 는 말을 하지 않는걸요. 게다가…….」 거기서 그녀답게 이야기를 비약시켜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1천 파운드나, 아, 1천 파운드예요! 그런 여자에게 주다니!」 「그런 여자라니요?」 「가정부 미스 러슬 말이에요. 그 여자는 어딘지 수상한 데가 있어요. 나는 늘 주의해서 보아 왔지만 말예요. 로저는 그 여자에 대한 비난에는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똑똑한 여자라면서 자신은 탄복하며 존경한다고 말했지요. 정직하고 독립심 강하며 도덕적으 로 뛰어난 품성을 지니고 있다느니 하고 늘 칭찬만 했답니다. 아무튼 나 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로저와 결혼하려고 그 기회만 호시 탐탐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단념시켜 주었어요. 그러 자 그녀는 나를 꺼리고 미워했지요. 무리도 아니예요. 나는 그 여자가 생 각하고 있는 일쯤 다 알 수 있으니까요.」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때 마침 허먼드 씨가 돌아가겠다고 인사하러 왔으므로 나는 일어났다. 「검시 심문 말인데요, 어디서 할까요? 여기로 할까요, 아니면 스리 보 어즈 여관으로 할까요?」 세실 부인이 비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검시 심문이라고요?」 놀라움이 그대로 부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허먼드 씨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퍼드 씨께서 잘 부탁하여 그 점은 어떻게…….」 나는 무뚝뚝하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내 권한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로저의 죽음이 과실이었다면…….」 나는 용서없이 말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살해된 겁니다, 부인.」 부인은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과실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세실 부인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언짢은 일이라면 덮어놓 고 두려워하는 부인의 어리석음에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만일 검시 심문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나는 아무 대답 안해도 되지 요?」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이먼드가 당신에게 향 하는 질문의 화살을 가로막아 줄 겁니다. 레이먼드는 당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형식적인 검증의 증언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변호사는 머리를 조금 숙여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세실 부인. 불쾌한 일 같은 건 없이 끝날 겁니 다. 그런데 돈 문제입니다만, 지금 필요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즉…….」 부인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므로 변호사는 덧붙였다. 「가지고 계신 현금 말입니다. 만일 모자라신다면 얼마든지 필요하신 대로 말씀하십시오.」 옆에 서 있던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어제 애크로이드 씨가 1백 파 운드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두었으니까요.」 「1백 파운드?」 「네, 그렇습니다. 고용인들의 월급과 그 밖에 오늘 치를 예정의 비용 이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그 돈에 손대지 않고 있습니다.」 「돈은 어디 있습니까? 책상 속입니까?」 「아니오, 애크로이드 씨는 현금을 반드시 침실에 두신답니다. 더 자세 히 말씀드리면 헌 옷깃을 넣어 두는 상자 속에 말입니다. 참 묘한 생각이 지요.」 「그럼, 떠나기 전에 돈이 제대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는게 좋겠군 요.」 비서도 찬성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아, 깜박 잊었습 니다. 그 문은 지금 잠겨 있을 겁니다.」 파커에게 물으니 래글런 경감은 몇 가지 물어 볼 게 있어서 가정부 방 에 가 있다고 했다. 조금 뒤 경감이 열쇠를 가지고 우리들이 있는 현관 홀로 왔다. 경감이 문을 열자 우리는 복도로 들어가 좁은 층계를 올라갔다. 층계를 다 올라간 곳이 애크로이드 씨의 침실로, 문이 활짝 열려 있었 다.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으며, 침대는 어젯밤에 잠잘 준비를 해두었던 그대로였다. 경감이 커튼을 젖혀 방안에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제프리 레이먼드는 자단(紫檀) 옷장 맨 위 서랍으로 가까이 갔다. 경감이 말했다. 「현금을 이렇게 두십니까? 열쇠도 잠그지 않은 서랍 속에 넣어 두시 다니 놀랐습니다.」 비서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서슴지 않고 말했다. 「애크로이드 씨는 일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성품을 믿고 있었지요.」 경감은 좀 당황하여 말했다. 「과연, 지당한 일입니다.」 레이먼드는 서랍을 열고 안쪽 깊숙한 곳에서 가죽으로 만든 둥근 옷깃 넣는 상자를 들어내 뚜껑을 열고 두툼한 지갑을 꺼냈다. 그는 두툼한 돈 뭉치를 꺼내며 말했다. 「자, 이것입니다. 1백 파운드 그대로 들어 있을 겁니다. 어제 저녁 식 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시며, 제가 보는 앞에서 여기 넣어 두셨지 요. 그 뒤로는 물론 아무도 손댄 일 없습니다.」 허먼드 씨가 돈 뭉치를 받아 세어 보고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들었다. 「1백 파운드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60파운드밖에 없습니다.」 레이먼드는 변호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당황하며 변호사에게서 돈 뭉치를 받아 들고 소리내며 세어 보았 다. 허먼드 씨 말대로였다. 거기에는 60파운드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알 수 없는 일인데요.」 비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포아로가 물었다. 「당신은 어젯밤 애크로이드 씨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 으며 돈을 이 상자에 넣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고 했지요? 그 전에 어디 엔가에 지불하지 않았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1백 파운드씩이나 주머니에 넣고 식당에 가 기는 싫은데, 너무 부피가 커서』라고 말하셨는 걸요.」 포아로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젯밤 애크로이드 씨가 어디에 40파운 드를 지불했든가, 아니면 도둑맞았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경감도 그 말에 찬성했다. 「그렇습니다. 간단하지요.」 그리고 세실 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젯밤 이 방에 들어왔던 고용인은 누구였습니까?」 「하녀가 침대를 손질하러 왔었을 거예요.」 「그 하녀의 이름은? 그리고 경력을 아십니까?」 「엘시 딜이에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지만, 얌전한 시골 아가씨예요. 」 「이 문제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애크로이 드 씨가 자기 손으로 40파운드를 지불했다면, 이 살해 사건과 어떤 관계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다른 고용인들 가운데 달리 수상쩍다고 여 겨지는 사람이 없습니까?」 「네, 없어요.」 「이 때까지 무엇이 없어졌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만두고 나가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심부름하는 하녀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언제쯤?」 「확실히 어제 그런 것 같았어요.」 「당신께 말하던가요?」 「아니오, 나는 고용인들 일에는 전혀 상관하고 있지 않아요. 집안일은 미스 러슬이 맡아 하고 있지요.」 경감은 한참 말없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더니 혼자말을 중얼거리듯 말 했다. 「그럼, 미스 러슬을 만나 묻는 게 좋겠군. 그리고 엘시 딜이라는 아가 씨도 만나 봅시다.」 포아로와 나는 경감의 뒤를 따라 가정부 방으로 갔다. 미스 러슬은 여 전히 침착한 태도로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엘시 딜은 팬리 파크에 온 지 다섯 달 되지요. 일을 부지런히 잘하고 외모도 단정하며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예요. 다른 사람의 물건 에 손대거나 할 리 없어요.」 「심부름하는 하녀는 어떻소?」 「그 아이 역시 나무랄 데 없어요. 얌전하고 상냥하며 일을 잘 한답니 다.」 경감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나가겠다고 하는 겁니까?」 미스 러슬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은 아니예요. 아마 어제 오후 주인님께 꾸중을 들었나 봐요. 그 아이는 서재의 청소를 맡고 있는데, 책상 위의 서류를 뒤섞어 놓기라 도 한 거겠지요. 애크로이드 씨가 몹시 화를 내셔서 그 아이 쪽에서 나가 겠다고 말한 거예요. 나는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직접 만나서 물어 보시 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경감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미 점심 식사 때 그 아가씨 가 시중들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었다. 키가 크고 숱많은 갈색 머리를 뒤로 땋아 드리웠으며 아주 침착한 잿빛 눈을 한 아가씨였다. 지금 가정부에게 불려 온 아가씨는 그 잿빛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똑바로 서 있었다. 경감이 물었다. 「당신이 애슐러 본이오?」 「네, 그렇습니다.」 「여기를 그만두겠다고 했다지요?」 「네, 그렇습니다.」 「왜?」 「주인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함부로 흩뜨려 놓았다고 몹시 꾸중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주인님께서 한시 빨리 나가 버리라고 호통치셨지요.」 「어젯밤 애크로이드 씨 침실에 들어갔었소? 방을 정리한다든가 하는 일로.」 「아니오. 그것은 엘시가 맡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그 방 가까이 에도 가본 일이 없어요.」 「사실은 애크로이드 씨의 침실에서 돈이 없어졌소.」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 다. 「저는 돈에 대해서는 몰라요. 제가 돈을 훔쳤기 때문에 애크로이드 씨 께서 저를 쫓아내려 했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예요.」 경감이 달래듯 말했다. 「아니, 뭐 꼭 당신이 훔쳤다는 건 아니니 그렇게 화낼 것 없소.」 그녀는 쌀쌀한 눈길로 경감을 바라보았다. 「의심스럽거든 제 소지품을 조사해 보세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나올 거예요.」 원망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그 때 갑자기 포아로가 입을 열었다. 「애크로이드 씨가 당신에게 나가라고, 또는 당신 편에서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어제 오후였소?」 아가씨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이야기를 하는 데 얼마나 걸렸지요?」 「그 이야기라니요?」 「당신이 서재에서 애크로이드 씨와 이야기한 시간 말이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20분? 아니면 30분?」 「아마 그쯤 되었을 거예요.」 「그보다 더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까요?」 「30분 이상은 안 걸렸을 거예요.」 「고맙소. 수고했소.」 내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포아로를 보니, 그는 테이블 위의 물건을 홑 뜨렸다 바로 놓았다 하고 있었다. 그 눈이 빛나고 있었다. 경감이 말했다. 「이제 됐소.」 애슐러 본은 물러갔다. 경감이 미스 러슬 쪽을 돌아보았다. 「저 아가씨는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신분 증명서를 가지고 있나 요?」 미스 러슬은 첫번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옷장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어 서류 다발을 꺼내 왔다. 그리고는 그 가운데에서 한 장을 꺼내 경감 에게 주었다. 「흠.」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할 점은 없는 것 같군. 마비 마을, 마비 농원, 리처드 홀리엇 부 인이라. 이 부인은 어떤 사람이오?」 「그 주에서도 아주 훌륭한 집안의 분이에요.」 경감은 미스 러슬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다른 아가씨, 엘시 딜을 만나 보기로 할까요?」 엘시 딜은 몸집이 큰 금발 아가씨로 쾌활한 것 같으나 얼마쯤 머리 회 전이 둔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질문에 한마디도 어물거리 지 않고 대답하며, 돈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매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엘시 딜을 내보내며 경감이 말했다. 「그리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 것 같군요. 파커는 어떨까요?」 미스 러슬은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기며 경감은 말했다. 「어쩐지 그 사람에게는 수상한 점이 좀 있는 것 같아. 그러나 그에게 는 그럴 기회가 없었을 거야. 저녁 식사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을 테고, 초저녁에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으니까. 그 점을 특별히 유의해서 조사 했으니 틀림없겠지. 아무튼 미스 러슬, 수고 많았소. 지금은 이 문제에 대 해 그만 해두기로 하지요. 애크로이드 씨 자신이 지불했을 수도 있는 일 이니까.」 가정부의 쌀쌀한 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들은 그 방에서 나왔다. 나는 포아로와 함께 그 집을 나왔다. 내가 침묵을 깨뜨렸다. 「참 이상한 일이군요. 애슐러가 흩뜨려 놓았다는 서류는 대체 어떤 것 이었을까요? 거기에 어떤 수수께끼가 있는 게 아닐까요?」 포아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비서의 말에 의하면 책상 위에는 대개 특별히 중대한 서류는 놓아두 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말을 머뭇거렸다. 「그런 하찮은 일로 애크로이드 씨가 몹시 화를 냈다는 일이 이상하다 는 거지요?」 「네, 그런 기분이 드는군요.」 「그러나 과연 그런 하찮은 일이었을까요?」 「물론 그 서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레이먼드는 확실히… ….」 「레이먼드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그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아가씨 말입니까? 심부름하는 하녀요?」 「네, 그 애슐러 본 말입니다.」 나는 좀 머뭇거리며 느낌을 말했다. 「꽤 좋은 아가씨 같던데요.」 포아로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꽤 좋은 아가씨 같다고요. 흠, 과연…….」 그러나 나는 <좋은>이라는 말을 힘주어 발음했는데, 포아로는 <같다> 라는 말을 강조해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 아무 말없이 있더니 포아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나에게 건 네 주었다. 「자, 좋은 것을 보여 드릴까요? 이걸 보십시오.」 그것은 아침에 경감이 적어서 포아로에게 준 종이 조각이었다. 손으로 가리키는 데를 보니 애슐러 본이라는 이름 위에 연필로 조그맣게 X표가 그려져 있었다. 「당신은 그때 눈치채지 못하셨는지 모르지만, 이 표 안에는 증거가 확 실치 않은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애슐러 본입니다.」 「설마 당신은…….」 「셰퍼드 씨,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습 니다. 애슐러 본이 애크로이드 씨를 죽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동기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마음에 짚이는 게 있습니까?」 포아로는 엄격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엄격한 눈길이었으므로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포아로는 되풀이 말했다. 「마음에 짚이는 게 있습니까?」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전혀 없습니다.」 그의 눈길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애크로이드 씨를 협박한 게 남자인 이상 애슐러 본은 생각할 수 없 지요. 그렇다면…….」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포아로가 얼른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팰러즈 부인은 그 편지 속에서 어떤 인물이라고 했을 뿐 꼭 남자라고는 말하지 않았지요. 애크로이드 씨와 나는 추측으로 남자로 여겼을 뿐입니다.」 포아로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또 무언가 혼자말을 중얼거리고 있 었다. 「그러나 역시 생각해 볼 문제야. 그래, 확실히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잠깐만, 아!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방법 그리 고 순서, 지금은 그 두 가지가 필요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들어갈 곳에 꼭 들어가 맞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되지.」 포아로는 혼자말을 멈추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마비 마을은 어디입니까?」 「크랜체스터 맞은편에 있지요.」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14마일쯤 될 겁니다.」 「당신이 좀 다녀올 수 없겠습니까? 내일이라도, 되도록이면 빨리 말입 니다.」 「내일이오? 그렇지,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해보지요. 마비 마을에 가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홀리엇 부인이라는 분을 만나 주십시오. 애슐러 본에 대해서 되도록 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요.」 「좋으니 싫으니 할 때가 아닙니다. 한 남자의 목숨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엾은 랠프. 당신은 그의 결백을 믿고 있겠지요?」 포아로는 매우 엄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이야기하지요. 모든 것이 그를 유죄로 상상하게끔 되어가고 있 습니다.」 「뭐라고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 바보 같은 경감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자기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것이나 모두 나를 랠프 페이튼 쪽으로 이끌 어 가고 있습니다. 동기, 기회, 수단,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무 뿌리를 파헤쳐서라도 조사해 내고야 말 겁니다. 나는 플로러 양과 약 속했으니까요. 그 아가씨는 나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정말로 굳게 믿고 있지요.」 포아로의 방문 다음날 오후, 마비 농원의 벨을 눌렀을 때 나는 얼마쯤 신경질적이 되 어 있었다. 대체 포아로가 무엇을 찾아내려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 일을 일부러 내게 부탁했는데, 무엇 때문일까? 브랜트 소령에게 질 문할 때처럼 자기는 숨어 있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그때는 나도 그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예쁘게 생긴 하녀가 나타났으므로 내 생각은 중단되었다. 홀리엇 부인은 집에 계신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넓은 응접실로 안내되 어 홀리엇 부인을 기다리는 동안 신기한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크고 널찍한 방, 몇 점의 옛 도자기, 아름다운 동판화, 고풍스러운 의자 덮개며 커튼. 어디로 보나 부인용 방이었다. 홀리엇 부인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으므로, 벽에 걸린 발토로치(18세기 이탈리아 조각가)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얼른 돌아보았다. 곱슬 거리는 갈색 머리를 한 키큰 부인이 애교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셰퍼드 씨세요?」 「그렇습니다. 갑자기 실례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전에 댁에서 일했 던 애슐러 본이라는 하녀에 대해 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 니다.」 애슐러 이름을 듣는 순간 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지금까지 의 상냥한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불안한 듯 침착하지 못한 모습이었 다. 그녀는 망설이며 되물었다. 「애슐러 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혹시 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잊다니요? 나는 잘 기억하고 있어요.」 「1년쯤 전 댁에서 나갔지요?」 「네,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예요.」 「여기서 일하는 동안 뭔가 불만스러운 점이 없었는지요? 그건 그렇고, 댁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1,2년쯤 있었을 거예요,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요. 꽤 똑똑하고 일 잘하는 아가씨였지요. 틀림없이 당신도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팬 리 파크에서 나온다는 말은 전혀 못 들었는데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요.」 「그 아가씨에 대해 무엇이든 들려주실 말씀이 없습니까?」 「들려드릴 말씀이라니요?」 「네, 어디서 태어났으며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홀리엇 부인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굳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댁으로 오기 전에는 어디서 일하고 있었습니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부인의 머뭇거리는 듯한 태도 속에 한 가닥 노여움 같은 것이 어른거 렸다. 그녀는 고래를 번쩍 들었다. 막연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몸짓이 었다. 「그런 일까지 물을 필요가 있나요?」 「아니, 그리 화내실 것까지는…….」 나는 놀랐다. 그래서 얼른 사과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께서 그런 질문을 그토록 꺼려하실 줄 몰랐습니다. 대단히 실례 했습니다.」 부인은 화가 좀 풀린 듯했으나, 그 얼굴에는 다시 걱정하는 빛이 떠돌 았다. 「아니오,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꺼려할 까닭이 전혀 없는 걸요. 다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뭐라고 할까요. 그저 이상하 고 좀 묘한 생각이…….」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나는 상대방이 거짓말하고 있는지 어떤지 얼마 쯤은 알아낼 수가 있었다. 지금도 홀리엇 부인의 태도에서 그녀가 내 질 문에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아주 몹시 싫어하 는 눈치였다. 부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아마 무슨 까닭이 있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 그 부인은 사람을 속인다든가 거짓말을 둘러대는 여성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꼭 숨겨 둬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당황해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부인의 태도로 보아서는 어린아이라도 곧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부인은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애슐러 본에게 어떤 비밀 이 있다 해도 이 부인에게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단념했다. 나는 다시 한번 사과를 한 뒤 모자를 집어 들고 홀리엇 부인 집을 나왔다. 그 길로 환자 몇 사람을 찾아보고 집에 돌아오니 시간이 6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캐럴라인은 손님 접대를 하고 난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 었다. 그 얼굴에 내가 잘 아는 승리의 기쁨을 누르고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 라 있었다. 무슨 정보를 알아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뿌리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닌 뒤일 것이리라. 어느편이었을까? 내가 늘 앉는 안락의자에 앉아 불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 쪽으로 다리 를 쭉 뻗자, 캐럴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말을 꺼냈다. 「오늘 오후는 참 즐거웠어.」 「흠, 미스 개닛이라도 오셨던가 보군요.」 미스 개닛은 정보 수집가로 마을에 이름이 난 여자였다. 「아니, 아니야. 어디 한 번 맞춰 봐.」 캐럴라인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는 캐럴라인의 정보원들을 천천히 생각해 내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댔 으나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누님은 의기 양양하여 고개를 가 로젓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포아로 씨야! 어때?」 나는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상대가 캐럴라인이니 만큼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무슨 일로 왔지요?」 「물론 나를 만나러 왔지. 동생과 아주 친한 사이니까 그의 아름다운 누님과도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 했어. 나더러 <그의 아름다운 누님>이라 고 하더라. 알겠니?」 「그래, 무슨 이야기를 했지요?」 「자기에 대한 일이며, 이때까지 다뤄 온 사건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어. 그 모레타니아의 폴 전하를 너도 알고 있지? 댄서와 결혼 한…….」 「그래서요?」 「얼마 전 <사교계 잡지>에 났었는데 여간 재미있지 않았어.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은 러시아의 왕녀라는구나. 볼셰비키의 손에서 빠져 나온 짜아르의 딸이라는 거야. 아무튼 포아로는 그 두 사람이 휘말려 들어간 아주 이상한 살인 사건을 보기좋게 해결했대. 폴 전하가 몹시 고마워하더 라지 뭐니.」 나는 비꼬아 말해 주었다. 「그래서 전하로부터 새알만큼이나 큰 에메랄드가 박힌 넥타이핀을 받 았다지요?」 「그래? 그 이야기까지는 못 들었는데.」 「아무튼 미스터리 소설이란 거의 그렇게 되더군요. 이름있는 탐정의 방에는 반드시 사건을 해결해 준 감사의 뜻으로 보내져 온 루비며 진주 며 에메랄드 같은 것이 방이 비좁을 만큼 있는 법이지요.」 누님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 사건의 내면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간 흥 미로운 일이 아니야.」 그렇겠지. 캐럴라인에게, 수많은 사건 가운데에서 작은 마을에 묻혀 사 는 노처녀의 마음을 가장 끌듯한 사건을 골라 이야기한 포아로의 교묘한 수단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아로 씨는 확실히 그 댄서가 러시아 왕녀라고 했습니까?」 「그 일에 대해선 공공연히 말할 자유가 없다고 했어.」 캐럴라인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으스댔다. 대체 포아로는 얼마나 꾸며대 캐럴라인에게 이야기해 준 것일까? 아마도 그리 꾸며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우 얼굴 표정을 좀더 심각하게 한다든지 어 깨를 으쓱해 보인다든지, 하찮은 일이라도 특별히 의미깊은 듯 말했을 테 지. 「흥, 그래서 결국 누님은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낸 것으로 여기고 좋아 했겠군요.」 「제임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누나한테 그런 버릇없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나야 뭐, 외부와의 접촉이 환자들밖에 더 있나요? 미안하지만 나는 지체높은 왕자나 공주나 러시아의 망명 귀족에게는 그리 흥미없습니다.」 캐럴라인은 너무 화가 나서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았다. 「제임즈, 심술궂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아마 간장(肝臟) 탓인가 보다. 오늘 저녁에는 약먹고 자도록 해.」 내 가정 생활을 보면 아마 너무도 나를 의사로 여길 사람이 없을 것이 다. 가정에서는 약처방을 모두 캐럴라인이 민간 요법으로 혼자 해치우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간장 탓이라고요! 이번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 았습니까?」 「하는 게 당연하지, 제임즈. 이 마을에서 그것밖에 또 무슨 할 이야기 가 있겠니? 포아로 씨는 좀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바로잡아 주었지. 그랬더니 무척 고마워하던걸. 나더러 타고난 특별한 재주를 가지 고 있다지 뭐냐.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심리적 통찰력도 비상하다고 했 어.」 캐럴라인은 맛있는 크림을 맛본 고양이처럼 목에서 골골거리는 소리까 지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회색 뇌세포와 그 기능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했어. 자기 뇌세포는 1등품이라고 하더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라면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겸손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제임즈, 너는 왜 그렇게 투덜거리기만 하니! 어쨌든 포아로 씨는 하 루빨리 랠프가 나타나 스스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하셨어. 이대로 모습을 감추고만 있으면 심문할 때 더 불리해질 거라고 걱정하더구나.」 「그래서 누님은 뭐라고 했지요?」 「나도 동감이라고 했지.」 그리고는 마치 훌륭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으스댔다. 「그리고 이미 그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말도 해주었어.」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누님! 그럼, 그날 숲 속에서 엿들은 이야기도 했습니까?」 「물론 하고말고.」 캐럴라인은 만족스러웠다. 나는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다시 쏘아붙였다. 「누님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쯤 알고 있겠지요? 누 님이 랠프 페이튼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는건 누님이 지금 그 의자에 앉 아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일입니다.」 캐럴라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말 하지마. 나는 네가 그 이야기를 포아로 씨에게 왜 하 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참이야.」 「나는 랠프를 좋아하므로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 다.」 「나도 그래.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말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거야. 난 랠프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사실을 말하더라도 그에게 불 리할 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포아로 씨에게 뭐든지 다 이야기해 드리겠어. 생각해 봐. 랠프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 밤 틀림없 이 그 여자와 함께 있었을 것 같지 않니?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알리바이가 될 수 있어.」 「만일 완전한 알리바이가 있다면 왜 얼른 나타나서 밝히지 않는 걸까 요?」 「아마 여자에게 난처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포아로 씨 가 그 여자를 찾아내 잘 타이르면 그녀 쪽에서 오히려 랠프를 위해 떳떳 이 증명해 줄거야.」 나는 다시 안락의자에 앉았다. 「포아로 씨는 그 밖의 다른 것은 묻지 않았습니까?」 「그날 아침 너에게 온 환자에 대해 묻더구나.」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환자?」 「그래, 몇 명이나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더냐고 물었어.」 「그래서 누님은 정확하게 대답하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물론이지. 이 창문에서 진찰실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걸. 게다가 내 기억력은 뛰어나거든. 제임즈, 네 앞에서 이런 말해서 좀 안됐지만, 너보 다는 내가 훨씬 정확할 거야.」 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누님은 환자의 이름을 하나씩 들며 세어 나갔다. 「베닛 할머니가 오셨지? 또 손을 다친 농부와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빼러 온 돌리 글라이스, 그리고 기선에서 내린 미국 선원, 이렇게 네 사 람하고 그 다음에, 그래 그래, 종기가 생겼다고 찾아왔던 조지 이밴즈 노 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었다. 「마지막으로?」 캐럴라인은 벌써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바로 이 때다 하고 큰소리로 낭독하듯 정확한 발음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미스 러슬!」 캐럴라인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의미있게 나를 쳐다보았다. 캐럴라인이 의미있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 대답을 피할 수가 없었다. 「미스 러슬은 무릎이 아프다고 왔었는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무릎이 그 말을 듣고 코웃음치겠다. 그건 거짓말이야! 무릎이 아프기 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았을걸.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거야.」 「어떤 목적이지요?」 아무리 재주많은 캐럴라인이지만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털어 놓지 않을 수 없었어. 「그렇지만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야. 포아로 씨는 그걸 알고 싶어했 어. 그녀는 어딘지 수상한 데가 있어. 포아로 씨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 고 있더구나.」 「세실 부인도 어제 나에게 그렇게 말하더군요. 미스 러슬은 어딘지 좀 수상한 데가 있다고.」 캐럴라인은 애매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 세실 부인! 또 한 사람 있었구나!」 「또 한 사람이라고요?」 캐럴라인은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뭐라고 중얼거리며 바느질감을 거두 고 옷을 갈아입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앉아서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을 바라보며 캐럴라인이 한 말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포아로는 정말 미스 러슬에 대해 알아보러 왔을까?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는 캐럴라인이 제멋대로 상상한 것일까? 그날 아침 미스 러슬의 태도에서 이렇다 할 의심스러운 점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녀가 마약 상습 복용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이야기는 마약에서 독약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의심받을 만한 일은 없을 듯하다. 애크로이드 씨가 독살당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상한 이야기다……. 캐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쨍쨍한 목소리로 2층에서 부르고 있었 다. 「제임즈, 저녁 식사에 늦겠어.」 나는 아무 대답없이 난로에 석탄을 더 집어 넣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니까. 테이블에 둘러앉아 월요일에 검시 심문이 있었다. 심문 내용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결국 이때까지의 이야기 를 되풀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주 간략하게 발표하기로 경찰과 협정이 되었다. 나는 애크로이드 씨가 죽은 원인과 사망 측정 시각에 대해 증언했다. 랠프 페이튼이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해 검시관 가운데 한 사람이 언급했 으나, 특히 그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심문이 끝난 다음 다음 포아로와 나는 래글런 경감과 잠시 이야기를 했다. 경감은 아주 심각한 얼굴이었다. 「포아로 씨, 매우 불리하게 되었는데요. 나는 이 사건을 아주 공정하 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더욱이 나는 이 고장 사람이고, 크랜체스터에서 랠프 페이튼 대위를 몇 번 만나 본 일도 있습니다.나는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형세는 갈수록 불리해지 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결백하다면 왜 떳떳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물 론 불리한 증거도 있지만, 그럴수록 나타나 반증을 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는 숨은 채 있으며, 나타나서 모든 것을 밝히려 하지 않을까 요?」 경감의 이 말속에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여러 가지 뜻이 숨어 있 었다. 랠프의 몽타주가 영국 안 모든 항구와 역으로 전송되어 경찰이 여 기저기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런던에 있는 그의 하숙집은 물론, 여느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은 어디에 나 그물치듯 연락망이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엄중한 경계망을 그가 뚫을 수 있을 리 없다. 자기 소지품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져간 게 없었다. 더구 나 돈 한푼 지니지 않았을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경감은 말을 이었다. 「그날 밤 역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마을 사 람들은 모두 랠프를 잘 알고 있으니, 역에 갔었다면 누구든 틀림없이 보 았을 겁니다. 리버풀에서도 아무 소식이 없군요.」 포아로가 물었다. 「리버풀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역에서 전화를 걸어 왔던 때가 리버풀로 가는 급행 열차가 떠나기 3분 전이었으니, 무슨 관계가 있을 듯합니다.」 「수사망을 어지럽히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 전화를 하지 않은 한 그렇 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것도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이군요. 당신은 확실히 그 전화 문제 를 그렇게 해석하십니까?」 경감의 말투에는 열의가 담겨 있었다. 포아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감님,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해 두지요. 그 전 화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때는 이 사건의 수수께끼도 다 풀리리라는 겁니다.」 나는 포아로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전에 나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포아로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진지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은 그 자리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로서는 그것이 전혀 아무 관계없는 일로 여겨지는데요.」 경감도 내 편을 들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포아로 씨가 그 점에 너무 신경쓰시지 않나 여겨집니다. 더 좋은 증거가 있잖습니까? 이를 테면 단검 손잡이의 지문 같은 것 말입니다.」 포아로는 갑자기 심한 외국 사투리를 섞어 가며 말했다. 이것은 그가 아주 흥분했을 때의 버릇이었다. 「경감님, 조심하십시오. 막다른, 막다른, 뭐라고 하더라? 앞으로 더 나 아갈 수 없는 막혀 버린 골목길을.」 래글런 경감은 어리둥절하여 멍하니 서 있었지만, 나는 얼른 그 말을 받아 되물었다. 「막다른 골목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지요. 그 지 문도 혹시 그와 같을지 모릅니다. 아무데로도 빠져 나갈 수 없게 될지 모 르지요.」 경감이 말했다. 「나는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지문이 가짜란 말입니까? 그 런 예도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어 본 적은 있습니다만, 나는 아직 한 번 도 직접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진짜거나 가짜거나 아무튼 그 지문은 무 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포아로는 두 손을 벌리고 어깨만 한 번 으쓱해 보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경감은 그 지문을 여러 가지로 확대한 사진을 여러 장 우리에게 내보 이며 동그란 무늬라든가 말발굽 모양 같은 무늬에 대해 전문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포아로가 조금도 흥미없어 했으므로 경감은 마침내 화를 냈다. 「어떻든 이것은 그날 밤 그 집에 있던 사람의 지문임에 틀림없을 겁 니다.」 포아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그래서 나는 그 집에 있었던 사람들의 지문을 다 받아 보았습니다. 노부인으로부터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까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말입니다.」 세실 부인이 만일 노부인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어떻 게든 늙지 않으려고 고급 화장품만 쓰는 멋쟁이 부인이기 때문이다. 경감은 끈기있게 되풀이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받았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것도 함께 넣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구의 지문과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요. 랠프 페이튼이거나, 아니면 이 셰퍼드 씨가 말씀하시던 그 수상한 방문객이라고. 이 두 사람을 붙잡 기만 하면…….」 포아로가 입을 열었다. 「귀중한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알게 되겠지요.」 「무슨 뜻입니까, 포아로 씨?」 포아로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은 집안 사람들의 지문을 모두 받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겠지요?」 「확실합니다.」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았단 말이지요?」 「네, 한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두.」 경감은 이 말을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했는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더 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죽은 사람의 지문 말입니다, 경감님.」 그래도 경감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했다. 포아로는 조용히 설명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단검 손잡이에 나타난 지문은 죽은 애크로이드 씨 자신의 것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확인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요. 시체는 아직 보존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째서지요? 대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설마 자 살로 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포아로 씨?」 「아니오, 나는 범인은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든지, 아니면 천으로 손 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행 뒤 피해자의 손을 잡아 단검 손잡이에 갖다대어 찍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포아로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복잡한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서지요.」 「아무튼 나중에 조사해 봐야겠군요. 그런데 어떤 점으로 보아 그런 생 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당신이 단검 손잡이를 내게 보이며 지문을 보여 줄 때 생각났습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동그란 무늬니 말발굽 모양 무늬니 하는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문의 위치가 좀 이상한 것 같았습 니다. 만일 내가 사람을 찌르려고 칼을 잡는다면, 그런 식으로 쥐지 않았 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른손에 칼을 쥐고 어깨너머로 자기 등을 찌른 것 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요.」 래글런 경감은 이 몸집작은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포아로는 우 리들의 놀라는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소맷자락의 먼지만 털고 있 었다. 「흠,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그럼, 조사해 봅시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경감은 되도록 친절하게 말하려 애쓰고 있었다. 포아로는 경감이 떠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니, 눈앞에서 사라 지자마자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경감의 자존심에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데 이제 우리는 조사를 계속해도 좋지만, 셰퍼드 씨, 작은 가정적인 파티 를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포아로가 말한 <가정적인 파티>는 30분쯤 뒤에 열렸다. 우리는 팬리 파크의 식탁에 죽 둘러앉았다. 포아로는 무슨 위원회의 의 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윗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끼지 않았다. 세실 부인, 플로러, 브랜트 소령, 레이먼드, 포아로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포아로는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여러분들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나서 말을 이었다. 「맨 먼저 아가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플로러가 물었다. 「제게요?」 「아가씨, 당신은 랠프 페이튼 대위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가 이 가 운데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당 신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만, 그가 간 곳을 아신 다면 부디 나타나기를 권해 주십시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플로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얼굴을 들었던 것이다. 「충분히 잘 생각하시기 전에는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아가씨, 이대로 숨어 있으면 그의 입장은 날이 갈수록 난처해지게 됩니다. 그때 바로 모 습을 나타냈었다면, 아무리 불리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해 명할 기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 말없이 달아나 숨어 있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유죄를 인정하는 것입 니다. 아가씨, 만일 진심으로 그의 결백을 믿고 계신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타나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플로러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를 잃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되풀이해 말했다. 「늦기 전에!」 포아로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플로러를 바라보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아가씨?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포아로 아저씨입니다. 지 식과 경험이 풍부한 포아로 아저씨인 것입니다. 나는 결코 아가씨를 이용 하려는 게 아닙니다. 부디 나를 믿어 주지 않겠습니까? 랠프 페이튼이 숨 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 플로러는 일어나서 똑바로 포아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 로 말했다. 「포아로 씨, 저는 맹세하지만, 엄숙히 맹세하고 말씀드리지만, 랠프가 있는 곳을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날에도, 그 뒤에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편지 한 장 받은 일 없어요.」 플로러는 앉았다. 포아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테이 블을 쾅 소리나게 쳤다.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포아로의 얼굴은 아주 엄숙해졌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계신 다른 분들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실 부 인, 브랜트 소령, 셰퍼드 씨, 레이먼드 씨, 여러분은 모두 지금 모습을 감 추고 있는 젊은이의 친구이거나 친척들입니다. 만일 랠프 페이튼이 숨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오랜 침묵이 흘렀다. 포아로는 한 사람씩 차례로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침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세실 부인의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정말 어떻게 된 일일까요? 랠프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참 이상하군 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이런 경우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니,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요. 플로러, 나는 너의 약혼을 정식으로 발 표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플로러가 화난 듯 소리쳤다. 「어머니!」 세실 부인이 말했다. 「하느님의 뜻이야. 나는 하느님의 뜻을 믿는다. 우리들의 앞길을 정해 주시는 하느님을. 셰익스피어도 아름다운 시로 노래했듯이.」 제프리 레이먼드가 무책임하게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설마 못생긴 발까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는 하지 않으시겠지 요. 세실 부인?」 레이먼드는 이 긴장된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해볼 생각으로 말한 것 같았으나, 세실 부인은 나무라는 듯한 눈길을 그에게 던지며 손수건을 꺼 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플로러는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언짢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결코 랠프가 로저의 죽음과 관계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워낙 사람을 잘 믿는 성질이에요. 옛날부터, 어린 시 절부터 그랬지요. 사람들의 나쁜 점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예요. 하지만 물론 랠프가 아직 어렸을 때 공습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도 생각하셔야 해요. 그런 경험을 한 영향이 훨씬 뒤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더군요.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발작적으로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조금도 책임이 없 어요. 자제심을 잃어 자신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플로러가 외쳤다. 「어머니! 설마 랠프가 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 지요?」 브랜트 소령이 끼여들었다. 「부인, 마음을 좀 가라앉히시지요.」 세실 부인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아 요. 만일 랠프가 유죄라면 재산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레이먼드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브랜트 소령 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지그시 세실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실 부인은 여전히 끈질기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마도 폭탄 치매증(痴?症)에라도 걸린 것일까요. 게다가 로저는 늘 용돈을 잘 주지 않았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랠프를 위해서였을 테지만요. 여러분이 내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랠프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겨지는군요. 그래서 플로러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플로러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발표하겠어요!」 부인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플로러!」 플로러는 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레이먼드 씨, 모닝 포스트와 타임즈 두 신문에 우리들의 약혼을 발표 해 주세요.」 레이먼드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바라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플로러는 충동적으로 브랜트 소령 쪽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아시겠어요?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어요? 지금 사 정으로는 랠프 편을 들어 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지 않 으세요?」 플로러는 무언가를 구하는 듯 브랜트 소령을 바라보았다. 한참 묵묵히 있은 뒤 브랜트 소령이 느닷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 부인은 쇳소리를 지르며 반대했다. 플로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플로러, 당신 생각은 훌륭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좀 경솔했었다고 나 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하루나 이틀쯤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떨 까요?」 플로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꼭 해주세요. 어머니,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있어서는 아무것 도 안 돼요. 다른 일은 어떻든 나는 친구에게만은 불성실하게 대하지 않 을 작정이에요.」 세실 부인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포아로 씨, 뭐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브랜트 소령이 옆에서 말했다. 「아무 말도 할 필요없습니다. 아가씨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디까지나 아가씨 편에 서겠습니다.」 플로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브랜트 소령님.」 포아로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당신의 용기와 성실함에 대해 이 늙은이도 경의를 나타냅니 다. 그런데 오해없으시기를 바라며 한 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지금 말씀하신 약혼 발표를 적어도 2,3일만 미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플로러는 망설였다.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랠프 페이튼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니 당신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의심 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러나 나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사건을 내게 맡겼습니다. 그러니 설마 방해하지 는 않겠지요?」 플로러는 잠시 입다물고 있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나는 늦출 생각이 없지만, 말씀대로 따르겠어요.」 플로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포아로는 빠른 말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여러분, 아까 말씀드리려던 것을 계속하겠습니다. 나는 어디까 지나 진실을 밝히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란 그 자체가 아무리 추할지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매혹 적이며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 옛날 젊었을 때처럼 힘이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어떤 반대하는 소리라도 기다리듯 말을 멈췄다. 「아마 이것은 내가 손대는 마지막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르큘 포 아로는 실패로서 마지막 막을 내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똑똑히 밝혀 두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사실을 드러내 보여 드리고야 말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는 이 마지막 말을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들의 얼굴에 도전적으로 퍼부었다. 모두들 이 말에 좀 당황하는 듯했으나, 제프리 레이먼드는 여 전히 명랑한 얼굴로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숨기려 한다는 말씀은?」 「즉, 아니, 글자 그대로의 뜻입니다. 이 방안에 있는 여러분은 모두 내 게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항의하듯 모두들 웅성거렸다. 포아로는 손을 들어 보였다. 「네, 네, 나로서도 내가 하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 중 요하지 않은, 아주 하찮은, 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여겨지는 일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 도 빼놓지 않고 모두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내 말이 틀림없지요?」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길로 포아로는 모두를 둘러보 았다. 모두들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다, 나도 눈을 내리깔았던 것이다. 「대답을 들은 셈이로군요.」 포아로는 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진실을 있는 그 대로.」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아무도 말씀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는 다시 한 번 아까처럼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매우 안타깝군요.」 이 한마디를 남기고 포아로는 밖으로 나갔다. 거위 깃털 그날 밤, 나는 포아로의 부탁으로 저녁 식사 뒤 그의 집을 찾아갔다. 나를 보내는 캐럴라인의 얼굴에는 불만의 빛이 뚜렷했다. 나와 함께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포아로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소다수 사이펀 이며 글라스와 함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리쉬 위스키 병이 놓이고, 그 자신이 마실 뜨거운 초콜릿이 든 포트가 있었다. 포아로가 이 초콜릿 을 가장 즐겨 마시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포아로는 누님에 대해 몇 마디 묻고는 아주 재미있는 부인이라고 칭찬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신은 누님을 꽤 부추겨 놓았더군요. 일요일 오후에는 어땠습니까? 」 포아로는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늘 숙련가와 만나는 일을 좋아했지요.」 그는 까닭모를 말을 할 뿐 그 뜻을 설명해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마 당신은 마을에 퍼져 있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온갖 소문을 들었겠지요.」 포아로가 조용히 덧붙였다. 「게다가 아주 귀중한 정보도 있었지요.」 「이를 테면?」 포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리어 내게 물었다. 「왜 당신은 사실대로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까? 이런 좁은 마을에서는 랠프 페이튼의 행동이 아무래도 다 알려지고 맙니다. 그날 누님이 숲 속 을 지나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지나갔을 겁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내 환자에게도 흥미를 나타낸 건 어째서 입니까?」 포아로는 다시 눈을 깜박거렸다. 「한 사람뿐이지요. 여러 환자 가운데 한 사람뿐입니다, 셰퍼드 씨.」 나는 물어 보았다. 「맨 나중에 온 환자 말입니까?」 포아로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미스 러슬은 실로 흥미있는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내 누님이며 세실 부인과 마찬가지로 미스 러슬에게 어딘지 수상한 데가 있다고 보십니까?」 「예?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수상한 데가 있다고요?」 나는 그 말뜻을 되도록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그럼, 그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어제 오후 누님이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포아로는 일반적인 문제로 슬쩍 돌렸다. 「여성이란 실로 이상하지요! 제멋대로 무언가 생각해 냅니다. 더욱이 이상하게도 그런 것이 기적적으로 들어맞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은 기적이 아니지요.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사소한 점까 지 살피고 있는 겁니다. 그 잠재 의식이 그런 하찮은 사실들을 연결시켜, 그 결과 이른바 직관이라는 것이 되지요. 나는 심리학을 조금 알기 때문 에 이런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포아로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 워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포아로는 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고는 조심스럽게 수염을 닦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대체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 까?」 그는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알고 싶습니까?」 「네.」 「내가 본 것은 당신도 다 보고 계셨지요. 우리들의 생각은 같지 않을 까요?」 나는 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쩐지 나를 놀리는 것 같군요. 물론 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경험 이 없으니까요.」 포아로는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마치 엔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군요. 당신은 그 집안 사람들에 대해 주치의로서가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탐정 의 눈으로 보려 하시는군요. 탐정에게는 관계가 모두가 낯선 사람이며 누 구나 다 혐의의 대상으로 보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럼, 강의를 좀 해드릴까요. 우선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었느냐 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상대방이 거 짓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간 의심이 많지 않군요.」 「그렇지만 필요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려 두지만, 이것은 절대로 필요 한 일이지요. 맨 먼저 셰퍼드 씨, 당신은 8시 50분에 그 집을 나왔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을 알고 있는 걸까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렸으니까요.」 「그렇지만 당신은 거짓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당신의 시계가 틀 릴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파커도 당신이 8시 50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실로 인정해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오후 9시에 당신은 문 밖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기 서 우리는 <수수께끼 인물의 로맨스>라고 할 만한 것에 맞닥뜨린 셈인 데, 내가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걸까요?」 「내가 말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려는데 포아로가 손을 흔들어 가로막았다. 「아! 당신은 오늘 밤 좀 멍청하시군요. 물론 당신은 확실히 알고 있겠 지요. 그러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무튼 그 수상한 사나 이가 당신의 환상이 아니었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미스 개닛이라는 할머 니가 당신보다 몇 분 앞서 그 남자를 만났고, 또 팬리 파크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니까요. 따라서 그 남자는 실제 인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 며, 그 남자에 대해 두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남자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팬리 파크에 무슨 목적으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두 번이나 길을 물어 본 것으로 보아 그 목적에 그리 큰 비밀 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겠군요.」 「그래서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 스리 보어즈 여관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급사에게서 들으니 그 남자의 말투에는 미국 사투리가 좀 섞여 있었고, 그의 말로는 미국에서 방금 오는 길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서 미 국 사투리를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잠시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고 말했다. 「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던 듯싶습니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습니다. 당신도 기억하시겠지요. 저 외딴집, 빈집에서 주운 것입니다.」 그는 조그만 깃털을 꺼내 보였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바라보 았다. 문득 오래 전 어떤 책에서 그것에 대한 것을 읽은 기억이 되살아났 다. 포아로는 내 얼굴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코카인 가루지요. 마약 중독자는 이 깃털에 그걸 넣어 가지고 다니며 코로 냄새를 맡는답니다.」 나는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치아염산 모르핀이군요.」 「미국에서 흔히 이런 방법으로 마약을 쓰고 있지요. 이로써――만일 필요하다면――그 남자는 캐나다나 미국에서 왔다는 새로운 증거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 여겨져 물어 보았다. 「그 외딴집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어째서입니까?」 「래글런 경감은 그 오솔길을 팬리 파크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라고만 여기고 있었으나, 나는 그 외딴집을 보자, 얼른 누군가와 몰래 만나는 장 소로 그 집을 쓰는 사람 역시 그 오솔길로 가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런데 그 남자는 현관으로도 뒷문으로도 들어간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누군가가 집에서 나와 그 남자와 만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외딴집처럼 남의 눈을 피해 만나기 좋은 곳은 또 없으리라 생각하고, 무슨 흔적이라도 없을까 해서 외딴집을 찾아갔던 겁니다. 그래 서 두 가지를 찾아냈지요. 흰 베 조각과 이 거위 깃털입니다.」 나는 크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럼, 그 흰 베 조각은 무엇입니까?」 포아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작은 회색 뇌세포를 쓰지 않는 모양이군요. 풀먹인 흰 베 조 각이라면 금방 알 수 있잖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그 남자가 누구를 만나려고 외딴집으로 갔었다면, 그 누구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문제는 그것입니다. 세실 부인과 플로러 양이 캐나다에서 왔다는 것 을 기억하십니까?」 「그럼, 오늘 당신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야단치셨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심부름 하녀의 이야기를 어 떻게 생각합니까?」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그만두겠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고용인을 내보내는 데 30분씩이나 걸 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서류를 흩뜨려 놓았다는 말도 그대로 믿 을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가씨는 9시 30분부터 10시까지 자기 침 실로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이 복잡하게 되어가는군요.」 「나로서는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당신의 생각 과 의견을 좀 들려주십시오.」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변명하듯 말했다. 「몇 가지 생각나는 일을 적어 보았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좀 들어 볼까요. 」 나는 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첫째로 사물을 논리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친구 헤이스팅즈도 늘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말뿐, 그 자신은 전혀 논리적으로 보지 못했답니다.」 「요점 1ː9시 30분, 애크로이드 씨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 렸다. 요점2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랠프 페이튼이 창문으로 들 어온 것 같다. 구두 발자국에 의해 추리된다. 요점3ː사건이 일어난 날 밤 애크로이드 씨는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러므로 잘 아는 사 람이 아니고는 방에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요점4ː9시 30분에 애크로 이드 씨와 함께 있던 인물은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랠프 페이튼이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이상 네 가지 요점은 9 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있던 인물은 랠프 페이튼이었다는 증거 가 된다. 그러나 애크로이드 씨가 9시 45분까지는 무사했다는 것은 사실 이므로 범인은 랠프가 아니다. 랠프는 창문을 열어 놓은 채 나갔다. 범인 은 그 뒤 다시 창문으로 들어왔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럼, 범인은 누구입니까?」 「아까 말씀하신 미국 사람입니다. 그 사나이는 파커와 공모하고 있었 는지도 모르고, 또한 팰러즈 부인을 협박하고 있었던 것은 파커인지도 모 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때 파커는 모든 것을 엿들어 이제 다 끝났다 고 각오하고는 상대에게 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 사나이가 파커로부 터 넘겨받은 단검으로 애크로이드 씨를 찔러 죽였는지도 모르지요.」 「그것도 한 가지 가설은 되지요. 당신도 아주 훌륭한 뇌세포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직 설명되지 않는 점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테면?」 「그날 밤 걸려 온 전화, 그리고 앞으로 밀어 놓여 있었던 의자…….」 「그 의자에 관한 일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우연히 의자가 밀어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고, 레이먼드나 브랜트 소령이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제자리로 옮겨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밖에 40파운드가 없어 진 사건도 있습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랠프에게 주지 않았을까요? 처음에는 거절해 놓고 나중에 다시 생각을 돌렸는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또 한 가지 설명되지 않는 점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브랜트 소령은 어째서 9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이야기한 사람을 레이먼드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소령 자신이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그것으로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그 점은 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랠프 페이튼이 행방을 감춘 이유를 좀 설 명해 주실까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건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의사로서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지요. 아 마 랠프의 신경이 두려움으로 혼란되어 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떠난 지 몇 분 뒤 양아버지가――더욱이 심한 말다툼을 하고 나온 참인데―― 살해된 것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란 모두 그런 겁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수상한 짓을 해버리는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동기를 말하 는 거지요? 랠프 페이튼은 양아버지가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 게 됩니다.」 「그것도 한 가지 동기가 되겠지요.」 「한 가지?」 「그렇습니다. 아무튼 저마다 다른 세 개의 동기가 밝혀진 것을 아시겠 어요. 누구인지는 모르나 확실히 그 푸른 봉투와 그 속에 든 편지를 훔쳤 습니다. 이것이 한 가지 동기지요. 다음은 협박입니다. 팰러즈 부인을 협 박하고 있었던 것은 랠프 페이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허먼드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랠프는 요즘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더군요. 그것은 어딘가 돈이 나올 곳이 있었던 것을 뜻합니다. 더욱이 랠프는 얼마쯤, 영어로는 뭐라고 하지요? 궁지라고 합니까? 그 궁지에 빠져 있었으며, 더구나 이 일이 애크로이드 씨의 귀에 들어갈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 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지금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속 문제에 대한 동기가 있습니다.」 나는 좀 놀라며 말했다. 「흠, 그렇다면 갈수록 랠프의 혐의가 짙어지는 게 아닙니까?」 「그럴까요? 당신과 내 의견이 틀리는 데가 바로 거기입니다. 동기가 셋,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랠프 페 이튼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세실부인 포아로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날 밤부터 사건은 다른 단계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면 사건 전체를 명확히 크게 두 부분으로 나 눌 수 있겠다. 제1부는 금요일 밤 애크로이드 씨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월요일 밤까지 다. 이것은 에르큘 포아로에게 보고한 것처럼 사건 내용을 사실 그대로 진술한 부분이다. 나는 그동안 포아로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다녔었다. 그가 본 것은 나도 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하 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포아로는 자신이 찾아낸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이를 테면 결혼 반지 같은 것――내게 보여 주었지만, 자신의 머리 속에 세워 둔 중 요한 논리적 생각은 조금도 내비추지 않았다. 이러한 비밀주의가 그의 특성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암시와 시 사는 하지만, 그 이상은 손 안의 것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월요일 밤까지의 내 기록은 포아로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는 셜록 홈즈에 대한 와트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월요일 이후부터 우리들의 길은 갈라져 버렸다. 포아로의 자기 혼자서 무언가 아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내 귀에도 들어왔다. 킹즈 애벗 마을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포아로는 나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역 시 바빴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월요일 뒤로 우리는 저마다 제 생각대 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이 사건의 수수께 끼를 풀어 보려고 애쓰기는 했다. 마치 그림 맞추기를 하듯 저마다 자기 의 지식과 발견의 단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런 단편 조각들을 저마다 제자리에 맞춰 넣는 명예는 포아로 한 사람 만의 것이었다. 사건 중에는 애크로이드 씨의 살해와는 아무 관계없고 무의미하게 보 이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이를 테면 검은 반장화 같은 게 그 가운데 하 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뒤에서 하기로 하자. 정확하게 순서에 따라 이야기 하려면 먼저 세실 부인에게 불려간 일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부인은 화요일 아침 일찍이 사람을 보내 나를 불렀다. 심부름온 사람이 몹시 급한 일처럼 말했으므로, 나는 그녀가 심하게 아픈 줄 알고 급히 달 려갔다. 부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면서도 예의는 잃지 않으려고 뼈만 남 은 앙상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더니, 침대 옆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의사로서의 인사를 가볍게 했다. 「부인, 어디 편찮으십니까?」 세실 부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쳐 버렸어요. 정말 완전히 기운이 빠졌어요. 로저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 때문인가 봐요. 이런 일은, 그 무렵에는 아무탈 없다가도 나중에 긴 장이 가라앉으면 이렇게 되나 보지요?」 의사란 슬픈 직업으로, 때로는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 는 때가 있다. 이러한 때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마디 따끔하게 쏘아 줄 수만 있다 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강장제를 권해 보았다. 부인은 먹 어 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체스 게임은 조금 진전된 것 같았다. 나는 애크로이드 씨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불려 왔다고는 처음 부터 생각지 않았었다. 세실 부인이란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지 직접 그 이야기를 꺼내 놓지 못하는 성질이다. 반드시 본론과는 먼 곳에서부터 와 이윽고 본론에 이르는 것이다. 대체 나를 부른 목적이 무엇일까 하고 나 는 몹시 궁금했다. 「게다가 또 그 소동이 있었으니, 어제 말예요.」 그리고는 맞장구치기를 기다리듯 잠시 말을 끊었다. 「소동이라니요?」 「어머나, 벌써 잊으셨어요? 저 기분나쁜 프랑스 사람, 아니, 벨기에 사 람이었던가요? 아무튼 그 남자 말예요. 우리를 마치 죄인처럼 다루지 않 았어요? 나는 완전히 기분이 나빠져 버렸어요. 그렇지 않아도 로저의 죽 음으로 슬퍼하고 있던 참인데.」 「참 안됐습니다, 부인.」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소리지르며 식탁 을 마구 두드려대다니. 자신의 의무는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숨겨 둘 생각은 조금도 없단 말이에요. 경찰에도 되도록 협력해 왔는데.」 부인이 잠시 말을 멈췄으므로 나는 말했다. 「물론 그렇고말고요.」 부인의 고민이 무엇인지 나도 이제야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세실 부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거예요. 래글런 경감도 틀림없이 만족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 오만스러운 외국인 남자는 그런 소동인 거예요. 게다가 그 우스꽝스러운 태도라니, 마치 연 극에 나오는 프랑스 요술쟁이 같아요. 플로러는 무엇 때문에 그런 남자를 끌어들였는지 모르겠어요. 나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자기 혼자 결정해 서 데려 왔잖겠어요. 그 아이도 큰일이에요, 너무 제 마음대로 고집만 부 려서. 아무래도 내가 세상을 더 많이 보고 겪었고, 게다가 어머니잖아요? 우선 나와 의논하여 결정하는 게 옳은 일이지요.」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걸 좀 알았으면 좋겠어 요. 정말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제 확실히 나를 추궁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다 면 그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잖습니까.」 세실 부인은 늘 하는 식으로 얼른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비약시켰다. 「일하는 사람들이란 너무 입이 가벼워요. 틈만 있으면 아무런 쓸데없 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니까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마을에 얼마나 많이 퍼졌겠어요. 근거없는 말도 마구 떠벌렸을 거예요.」 「일하는 사람들이 이번 일에 대해 무슨 소문을 퍼뜨렸습니까?」 그러자 세실 부인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는 몹시 당황했 다. 「나는 당신이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더욱이 당신은 포아로 씨와 늘 함께 다니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잘 아실 거예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것은 바로 애슐러 본이 라는 아이예요. 당연하지요. 그만두게 되었으니 될 수 있으면 심술피우고 가려는 배짱이에요. 그런 아이들은 다그래요. 모두 똑같지요. 당신은 그 자리에 계셨으니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다 아실 테지요? 그런 아이 때문에 말이 이상하게 번지지나 않을까 나는 퍽 걱정스러워요. 아무튼 하 찮은 것까지 일일이 경찰에 보고하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집안일까지 밝혀져서는 난처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를 원 망하고 있다든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를 모두 지 껄였을지도 몰라요.」 부인은 좀처럼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 뒤에는 몹 시 불안하고도 초조해 하는 모습이 어려 있음을 나는 눈치챘다. 역시 포아로의 추측이 맞은 듯하다. 어제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여섯 사 람 가운데 적어도 세실 부인만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만일 내가 당신이라면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해 버리겠습니다.」 부인은 어이없다는 듯 조그많게 부르짖었다. 「어머나, 셰퍼드 씨!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마치 내가, 마치……하지 만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부인은 레이스 달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나는 당신이 이 말을 포아로 씨에게 전해……아니, 설명해 주셨으면 하고 생각해요. 외국 사람에게는 우리 생각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을 테니 까요. 더욱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아마 당신은, 아니, 아무도 모를 거예요. 순교자 생활,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활이었어요. 죽은 사람의 흉을 보아 안됐지만, 그러나 사실인걸요. 우리 가 한두푼 쓴 계산서까지도 모두 일일이 설명하게 했으니까요. 마치 1년 수입이 겨우 몇백 파운드밖에 안 되는 사람처럼. 어제 허먼드 씨도 말씀 하셨듯, 로저는 이 지방에서 으뜸가는 큰 부자였는데도 말예요.」 부인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다음을 재촉하듯 말했다. 「흠, 그랬군요. 그러니까 계산서 이야기로군요?」 「그 지긋지긋한 계산서. 그 가운데에도 로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 도 있었어요. 남자들이 봐서는 이해하지 못할 물건들이지요. 로저가 보면 틀림없이 쓸데없는 물건을 사왔다고 할게 뻔하니까요. 그것이 점점 쌓여 서 청구서가 사정없이 줄곧 날아들었어요.」 부인은 마치 이런 놀랄 만한 일에 대해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기 바라 는 눈길로 날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말해 주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그러자 부인의 말투가 홱 달라졌다. 불평이 굉장히 심해진 것이다. 「셰퍼드 씨, 나는 정말 신경쇠약이 되었어요. 밤에 잠은 안오고 심장 이 무섭게 뛰는데, 어떤 스코틀랜드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답니다. 실제 로는 두 통이었지요. 둘 다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은 블루스 맥퍼슨, 또 한 사람은 콜린 맥도널드. 둘 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라니, 참 우연한 일이에요.」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건값을 재촉하는 것은 거의 스코틀랜드 사람이 지요. 아마 그 두 사람의 조상에게는 틀림없이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을 겁니다.」 세실 부인은 기억을 더듬듯 중얼거렸다. 「약속 어음만도 10파운드만 더하면 1만 파운드나 된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는 좀더 기다려 달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성가스러 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점점 미묘한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나는 느꼈다. 요점에 이르 기까지 이토록 돌려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세실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셰퍼드 씨, 모든 것은 유산 문제예요. 그렇지요? 유언장에 의한 유산 말이에요. 물론 로저는 내게도 유산을 물려주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얼마 나 줄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나는 유언장 사본을 좀 보고 싶어서, 아니, 훔쳐 보려는 그런 비겁한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다만 그 액수라도 미리 알 수 있다면 나대로의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부인은 곁눈으로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제 실로 미묘한 국면에 접어든 셈이었다. 다행히 말이란 쓰기에 따라 노골적인 사실의 추함을 감출 수 있다. 세실 부인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일만은 말씀드리겠어요. 셰퍼드 씨, 당신이라면 내가 말씀드 리는 일을 오해하지 않고 포아로 씨에게 사정을 바르게 전해 주시리라 믿어요. 그것은 지난 금요일 오후의 일로…….」 부인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불안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다음을 재촉하듯 부인의 말을 되풀이했다. 「역시 금요일 오후였군요? 그래서요?」 「모두들 외출하고 없었지요. 정말 모두 다 외출했는지 확실한 것은 몰 랐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로저의 서재로 가보았어요. 정말 서재에 볼일이 있어서 간 것이지 나쁜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 런데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았을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어 요. 로저가 혹시 책상 서랍 속에 유언장을 넣어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내키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성질이었지 요. 그런데 부주의하게도 로저가 열쇠를 맨 위 서랍에 꽂아 놓은 채로 나 갔잖아요.」 나는 그 말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유언장을 뒤져보셨습니까?」 세실 부인은 어쩔 줄 모르게 낮게 소리쳤다. 나는 내가 얼마나 말솜씨 가 부족한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머나, 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뒤지다니요,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 었어요.」 나는 당황하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말솜씨가 없어서 그만…….」 「물론 남자분은 아주 이상하니까요. 내가 로저의 입장이었다면 유언장 내용을 발표했을 거예요. 하지만 남자란 비밀을 무척 좋아하지요. 그래서 자기 방위상 꾀를 좀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 그 꾀를 좀 쓴 결과는?」 「지금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내가 맨 위 서랍을 열려고 하는 바로 그 때, 애슐러 본이 서재로 들어왔어요. 내 입장이 얼마나 난 처했겠어요. 나는 얼른 서랍을 닫고 일어나서는 책상 위에 먼지가 많다고 꾸짖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걸렸어요. 겉으로는 얌전한 체 공손한 척하고 있지만, 그 눈길이 불쾌했어요. 사람을 아주 경 멸하는 듯한 쌀쌀한 눈길이었어요. 나는 처음부터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나 심부름만은 잘했지요. 마님, 마님 하며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요즘 젊은 하녀들처럼 모자나 앞치마를 두르는 것도 귀찮 게 여기지 않았어요. 파커 대신 현관에 내놓아도 손님 응대를 잘하고, 식 사 시중을 들 때도 아무 불만이 없었으며, 다른 아이들처럼 주착없는 짓 도 하지 않았답니다. 아참,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요?」 「좋은 성질도 있지만 애슐러 본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 기였지요.」 「네, 그랬어요. 그 아이는 어딘지 다른 하녀들과는 좀 다른 데가 있었 어요. 교육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교양이 좀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요. 하긴 요즘은 주인 댁 아가씨인지 하녀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만 로저가 들어왔을 뿐이에요. 산책하러 나간 줄 알았는데. 그분이 무슨 일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나는 아무 일 도 아니라면서 그저 <펀치> 잡지를 가지러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리고 <펀치> 잡지를 들고 서재에서 나왔어요. 애슐러는 뒤에 남아 있 었어요. 로저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나는 그 대로 내 방으로 돌아와 누웠어요. 아주 기분이 나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포아로 씨에게 설명해 주시겠지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정말 대 수롭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렇지만 포아로 씨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야 단칠 때, 나는 그 일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가 뭐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였을지도 모르니 당신이 말씀 좀 잘 해주세요.」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부인은 힘주어 대답했다. 「네, 네, 그뿐이에요!」 그러나 세실 부인이 한순간 망설이는 빛을 보였으므로 아직 뭔가 숨기 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한순간의 느낌이라고 할지, 나는 곧 물어 보았다. 「세실 부인, 은테이블 뚜껑을 열어 놓은 것은 당신이었지요?」 새빨개진 얼굴로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부인의 태도로 미루어, 나는 이 미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부인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당신이었군요.」 「네, 나였어요. 그 옛날 은돈 가운데 한두 닢 흥미있는 것이 있었거든 요. 정말은 옛날 돈에 관한 책을 읽다가 크리스티 상점에서 아주 비싼 값 으로 사들였다는 은돈 사진이 실린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 테이블 속 에 있는 은돈과 똑같은 것 같았어요. 가만히 런던으로 가져가 그 값을 알 아보려고 했지요. 만일 정말 가치있는 것이라면 로저도 좋아할 줄 알았어 요.」 나는 부인의 말을 꼬집어 이것저것 물어 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로 했다. 어째서 그런 것을 숨길 필요가 있었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참고 그대로 두었다. 그 대신 다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뚜껑을 연 채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잊어버리셨던가요?」 「테라스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거든요. 그래서 얼른 응접실을 나와, 파커가 현관 문을 열고 당신을 모셔 들이는 동안에 2층으로 올라가고 말 았지요.」 나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아마 미스 러슬이었겠지요.」 세실 부인은 아주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을 나에게 제공해 준 셈이었 다. 애크로이드 씨의 은돈에 손댄 부인의 계획이 과연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로서는 관심도 없었다. 흥미깊은 일이란 미스 러슬이 테라스로부터 응접실에 들어온 게 틀림 없으며, 숨을 좀 헐떡거렸던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뛰어오지 않았나 하는 내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그때 미스 러슬은 어디에 갔다 온 것일까? 나는 외딴집과 흰 베 조각을 생각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물어 보았다. 「미스 러슬은 손수건에 풀을 먹입니까?」 세실 부인은 깜짝 놀라며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은 몹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포아로 씨에게 잘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네, 물론 잘 말씀드리지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뒤에도 부인은 여러 가지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나는 겨 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현관에 바로 그 애슐러 본이 있다가 내게 외투를 입혀 주었다. 나는 여느 때보다 더 주의깊게 그 아이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 었던 것 같았다. 「애슐러, 너는 애크로이드 씨가 금요일에 너를 서재로 불러 들였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말을 들으니 네가 먼저 애크로이드 씨에게 할말이 있 다고 했다면서?」 그녀는 갑자기 화살에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꼼짝않고 서 있 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어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무튼 나는 이 집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었어요.」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나갈 수 있도록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밖으 로 나가려 할 때 당돌하게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페이튼 대위님 소식은 좀 들으셨나요?」 나는 의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타나지 않으면 큰일이에요. 그분은, 정말……정말 어서 나타나셔야 해요.」 그녀는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계신지 아무도 모르시나요?」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는 알고 있니?」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그분의 친구라면 모두 말하지요. 꼭 나타나 야 한다고 말예요.」 또다시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므로 나는 우물쭈물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다음 질문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주인님이 살해되신 것은 몇 시로 알려져 있나요? 10시 조금 전인가 요?」 「그래, 그때쯤이지. 9시 45분에서 10시 사이야.」 「좀더 일찍이 아니었을까요? 9시 45분보다 더 일찍 말이에요.」 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건 말이 안 돼. 플로러 양이 9시 45분에 큰아버지가 살아 계신 걸 보았다니까.」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나는 자동차를 달리며 혼자말을 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로군. 참으로 아름다운 아가씨야.」 캐럴라인은 집에 와 있었다. 포아로가 또 찾아왔었다고 말하며 아주 기 분이 좋아서 의기양양하게 보고를 했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포아로 씨를 도와드리게 되었어.」 나는 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캐럴라인은 지금도 꽤 성가스럽다. 그런데 더 이상 탐정적 재능를 부추겨 놓는다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랠프 페이튼과 이야기하던 수수께끼의 여자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매 려고요?」 케럴라인은 대답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쯤의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일이 아니야. 포아로 씨로부터 특별히 부탁받은 일 은 다른 거야.」 「뭡니까, 그것은?」 「포아로 씨는 랠프 페이튼의 구두가 검은 색인지 갈색인지 알고 싶어 하시더구나.」 그리고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누님을 바라보았다. 그 구두에 대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내 자신 이 어리석었던 것을 겨우 깨달았다. 사건의 요점을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색 단화였지요.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단화 말고 반장화 말이야, 제임즈. 포아로 씨는 랠프가 여관으로 가 지고 와 있던 구두가 갈색인지 검은 색인지 알고 싶어 하시는 거야. 이것 은 랠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더구나.」 바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나로서는 전혀 무슨 가닭 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누님은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생각이지요?」 그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누님은 대답했다. 우리 집 하녀 애니 는 미스 개닛네 하녀인 클래러와 아주 친하며, 또 클래러는 스리 보어즈 여관의 구두닦는 아이와 친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미스 개닛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클래러는 외출할 수 있었다. 외출하는 대로 곧 스리 보어즈 여관으로 달려갔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는 일 이다. 점심 식사 때 캐럴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꺼냈다. 「랠프 페이튼의 구두 말인데…….」 「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아로 씨는 아마도 갈색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틀렸어. 검 은 색 구두였다지 뭐니.」 말하면서 캐럴라인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분명 포아로 보다 한 발 앞섰다는 생각으로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랠프 페이튼의 구두 빛깔이 사건과 무 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프리 레인먼드 그날, 나는 포아로가 우리를 모아 놓고 이야기한 수법이 확실히 성공적 이었다는 새로운 증거를 또 하나 보게 되었다. 포아로가 우리를 향해 한 도전은 인간성에 대한 그의 풍부한 지식에서 나온 교묘한 방법이었다. 우선 공포심과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세실 부인이 끝내 진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세실 부인은 포아로의 작전에 맨 먼저 반응을 보인 셈이다. 그날 오후, 왕진에서 돌아오니 제프리 레이먼드가 금방 다녀갔다고 캐 럴라인이 일러주었다. 현관에서 외투를 벗어 걸며 나는 물었다. 「나를 만나러 왔었습니까?」 캐럴라인은 내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포아로 씨를 만나러 왔었어. 포아로 씨가 댁에 안 계셔서 혹시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나 싶어 들렀대. 여기에 안 왔어도 네가 물어 보면 어디 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더구나.」 「나는 전혀 모릅니다.」 「잠깐 기다려 보라고 했더니 한 30분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가버 렸어. 그런데 금방 길에서 어긋났는지 포아로 씨가 돌아오시지 않았겠니. 」 「포아로 씨도 여기 왔었습니까?」 「아니,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지요?」 캐럴라인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저 옆 창문을 보렴.」 나는 이것으로 우리의 대화가 끝난 줄 알았으나, 캐럴라인은 그렇지 않 았다. 「제임즈, 너 가보지 않으련?」 「가보다니, 어디 말입니까?」 「물론 옆집이지.」 「내가 뭐하러 쓸데없이 찾아갑니까?」 「레이먼드는 무슨 특별한 볼일이 있는 것 같았어. 가보면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잖아?」 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호기심 같은 건 없습니다.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 을 하든, 그런 것을 몰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마, 제임즈. 너도 나 못지않게 알고 싶어하면서 뭘그래! 너는 나보다 정직하지 않을 뿐이야. 늘 체면만 차리며 솔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지.」 「글쎄요. 그럴까요.」 나는 진찰실로 들어가 버렸다. 10분쯤 뒤 캐럴라인이 진찰실 문을 두드렸다. 손에 잼 항아리를 들고 있었다. 「이봐, 제임즈, 이 모과잼을 포아로 씨께 갖다 드리고 와. 내가 보낸다 고 약속했어. 집에서 만든 모과잼을 아직 먹어 본 일이 없다고 하시더구 나.」 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애니를 보내면 안 됩니까?」 「애니는 지금 바느질하고 있어서 틈을 낼 수가 없어.」 캐럴라인과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좋습니다, 가지요. 하지만 나는 이 묘한 물건을 현관에서 건네 주고 곧 와버릴 겁니다. 그래도 괜찮지요?」 누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론이지. 누가 너더러 또 다른 일을 하라고 했니?」 캐럴라인의 완전한 승리다. 내가 현관 문을 열자 누님이 등뒤에서 말했다. 「하지만 만일 포아로 씨를 만나게 되면 그 구두 이야기를 해줘도 좋 아.」 참으로 교묘한 일격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구두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브르타뉴풍 모자를 쓴 노파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완전히 기계적으로 포아로 씨는 집에 계시느냐고 묻고 있었다. 포아로는 얼굴 가득히 기쁜 웃음을 띠고 뛰어오를 듯 반갑게 나를 맞 아 주었다. 「자, 어서 오십시오. 큰 의자가 좋으십니까, 아니면 작은 의자? 방안이 너무 더운 것 같지요?」 난롯불이 훨훨 타오르고 창문은 모두 닫혀 있어, 나는 숨이 막힐 지경 이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영국 사람은 신선한 공기를 몹시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신선한 공 기란 그것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인 바깥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지요. 그 러나 그것을 집안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지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두 가지 있습니다만, 우선 하나는 이것입니다. 누님 심부름이지 요.」 나는 모과잼 항아리를 내밀었다. 「정말 친절하시게도 누님께서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군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정보――라고나 할까요?」 나는 세실 부인이 한 이야기를 모두 말해 주었다. 포아로는 흥미있게 듣고 있었으나 특별히 흥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습니다. 기억하시겠지요? 은테이블 뚜껑 이 열려 있어 지나가던 길에 닫았다던 가정부의 말이 증명된 셈입니다.」 「미스 러슬은 꽂아 놓은 꽃이 시들지 않았나 보러 들어갔었다고 했는 데,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때 응접실에 있었던 이유를 급 히 설명하려고 얼른 지어낸 말이겠지요. 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데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말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녀가 은테 이블을 만졌기 때문에 놀란 줄 알았습니다만, 이렇게 되고 보면 까닭이 있었던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갔을까요? 그리고 무슨 볼일 이 있었을까요?」 「당신은 그녀가 누구를 만나러 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누님이 말씀 좀 전해 달라고 했는데, 랠프 페이튼의 구 두는 갈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랍니다.」 말하면서 나는 줄곧 포아로의 얼굴을 살폈다. 순간 몹시 당황하는 빛이 보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갈색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던가요?」 「네, 확실히.」 「그래요!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포아로는 매우 낙심한 듯했으나 얼른 다른 화제를 꺼내 이야기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 진찰받으러 왔던 가정부 미스 러슬 말인데요. 무 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물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의학적인 이야기 말고…….」 「괜찮고말고요. 의학상의 이야기가 끝난 뒤 독약에 대한 이야기와 독 물 검출의 어려움, 그리고 마약 복용이며 마약 상습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특히 코카인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 놀라며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시지요?」 대답하는 대신 이 몸집작은 탐정은 일어나서 신문철을 들고 왔다. 그리 고 9월 16일 금요일 날짜의 (데일리 배짓) 신문을 펼쳐 코카인 밀수에 대 한 기사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흥미를 노리고 씌어진 몹시 자극적 인 기사였다. 포아로가 말했다. 「셰퍼드 씨, 이 기사가 그녀의 머리 속에 코카인을 불어넣어준 겁니 다.」 나는 어쩐지 그의 말뜻이 잘 납득되지 않아 다시 더 캐물어 보려 했으 나, 바로 그 때 문이 열리며 제프리 레이먼드가 왔다는 말이 전해졌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쾌활하고 힘차 보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우리 둘 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셰퍼드 씨, 포아로 씨? 오늘 아침 이로써 두번째 온 겁니다. 꼭 당신을 만나야겠기에…….」 그는 좀 어색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그만 실례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나 때문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야기가 곧 끝날 테니까요.」 레이먼드는 포아로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고백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포아로는 정중하게 흥미를 나타내며 물었다.」 「호, 그렇습니까?」 「네,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어제 오후부터 양심의 가 책으로 좀 괴로워서요. 포아로 씨, 당신은 우리들이 저마다 무언가 숨기 고 있다고 하셨지요. 사실은 나도 어떤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레이먼드 씨?」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 중대한 일은 아니지만, 실은 내게 빚 이 조금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다행 히도 이번에 유산을 받게 되어서……. 이 5백 파운드만 가지면 빚을 다 갚고도 조금 남습니다.」 레이먼드는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그 솔직한 태도로 우리에게 웃어 보였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덤벼드는 경관들 앞에서 는 솔직하게 빚에 쪼들렸다는 이야기를 하기 싫었고, 또 의심받을까봐 두 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브랜트 씨와 함께 9시 45분부터 내내 당구실에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괜 히 두려워했지요. 그래도 당신이 저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야단치시 자,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선 채로 우리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포아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젊은데도 아주 현명하십니다.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변변치 않은 것이라도 몹시 나쁜 일같이 여겨지기 쉽지요. 아무튼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레이먼드는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의심이 풀려서 매우 기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젊은 비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나는 말했다. 「또 한 가지 정리되었군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주 하찮은 일이지만, 만일 그때 그가 당구실에 없었다 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요. 5백 파운드도 못 되는 돈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는 일은 흔히 있으니까요 결국 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 얼마큼의 돈이 있으면 충분한가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당신은 그 댁에서 애크로이드 씨의 죽음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선 세실 부인을 비롯하여 플로러 양, 레이먼 드, 가정부 미스 러슬. 이득을 보지 않는 사람은 사실 브랜트 소령 한 분 뿐이지요.」 소령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포아로의 말투가 좀 기묘하게 들렸으므로, 나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내가 힐문한 사람 가운데 지금 둘만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브랜트 소령 역시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포아로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리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격언이 있잖습니까? 『영국 사람은 숨기는 일이 꼭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라고요. 그러나 브랜트 소령은 내가 보기에 그리 솜씨있게 숨기지 못하더군요.」 「때때로 생각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어떤 점에서 결론으로 너무 지나 치게 비약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여태까지 팰러즈 부인을 협박한 인물이 애크로이드 씨를 살해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여기에 잘못된 점은 없다고 여기십 니까?」 포아로는 힘있게 대답했다.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나도 지금 당신이 거기까지 깨달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편지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도 당신 말씀처럼 반드시 살인범이 훔쳐 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 이 시체를 처음 발견했을 때, 파커가 살그머니 훔쳐냈을지도 모르는 일이 니까요.」 「파커가?」 「네, 파커 말입니다. 나는 언제나 파커에게로 생각이 돌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파커가 살인법이라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는 살인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팰러즈 부인을 협박해 온 수수께끼의 인물로는 그가 가장 그럴듯하지요. 팰러즈 씨가 죽은 원인에 대한 정보는 킹즈 애벗의 하인을 통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브랜트 소령 같은 이따 금 들르는 손님보다도 그럴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듣고 보니 편지를 훔친 사람은 어쩌면 파커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나 는 한참 뒤에야 겨우 그 편지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으니까요.」 「얼마나 지난 뒤였습니까? 브랜트 소령과 레이먼드가 방으로 들어온 뒤였습니까? 아니면 그 전이었나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생각이 잘 안 나는군요. 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알겠군요. 틀림없이 그분들이 들어온 뒤였습니다.」 포아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지는군요. 그러나 역시 파커가 가장 의 심스럽습니다. 자, 파커를 한 번 간단히 시험해 볼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당신도 함께 팬리 파크로 가지 않겠습니까?」 나는 승낙하고 함께 나섰다. 포아로가 애크로이드 양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얼마 뒤 플로러가 나 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나는 아주 조그만 비밀을 하나 밝혀 내야겠습 니다. 나는 아직 파커의 결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힘을 빌어 파커를 시험해 볼까 합니다. 나는 그날 밤 파커의 거동을 다시 한 번 되풀이시켜 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무슨 좋은 구실이 생각나지 않는군 요. 그렇지, 좋을 수가 있습니다. 저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바깥 테 라스에서 들리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하지요. 자, 그럼, 미안합니다만 파커 를 좀 불러 주실까요?」 내가 벨을 누르자 한참 뒤 파커가 언제나의 그 굽실거리는 태도로 들 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음, 그렇소. 잠간 실험할 일이 있어서요. 브랜트 소령이 바깥 테라스 에 있을 때, 그날 밤 복도에서 플로러 양과 당신이 이야기한 소리가 테라 스에서도 들렸는지 알고 싶소. 그날 밤처럼 다시 한 번 해줄 수 있겠소? 쟁반이든 뭐든 그날 밤 당신이 들고 있었던 것도 가져오는 게 좋겠소.」 파커가 나가자 우리는 서재 앞 복도로 갔다. 얼마 뒤 홀에서 유리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리더니, 파커가 소다수와 위스키병과 글라스 두 개를 쟁반에 담아 들고 문 앞에 나타났다. 포아로는 손을 들어 매우 흥분한 몸짓으로 말했다. 「잠깐만, 모든 것을 다 그날 밤과 똑같이 해줘야 하오. 그것이 내 방 식이니까.」 파커가 말했다. 「외국에서는 이런 것을 잘 한다지요? 범죄 현장의 재현이라고 하지 요?」 포아로의 명령을 예의바르게 기다리고 있는 파커는 매우 침착했다. 포아로가 외쳤다. 「호, 파커, 당신은 그런 일을 썩 잘 알고 있군요. 어디선가 읽어 본 모 양이지요? 자, 그럼, 모든 것을 되도록 정확하게 해주오. 당신은 지금 홀 에서 들어왔소. 자, 그럼 아가씨는 어디 계셨었지요?」 「여기였어요.」 플로러는 바로 서재 문 앞으로 가서 섰다. 파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막 문을 닫은 참이었어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바로 지금부터 문 손잡이를 잡고 계셨습니다.」 포아로가 말했다. 「그럼, 시작해 주십시오. 연극을 한 장면 해보여 주시는 겁니다.」 플로러는 문 손잡이에 한손을 대고 서 있고, 파커는 쟁반을 들고 홀에 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복도로 들어서며 멈칫했다. 플로러가 먼저 말했다. 「아, 파커, 큰아버지는 오늘 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이렇게 말했던가요?」 「내 기억으로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아가씨. 오늘 밤이 아니라 오늘 저녁이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파커는 얼마쯤 연극적인 투로 소리높여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여느 때처럼 문단속을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파커는 들어왔던 문으로 되돌아 나가고, 플로러도 뒤따라 나가 홀 가운 데 있는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플로러가 돌아보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포아로는 두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파커, 그날 밤 쟁반 위에 확실히 글라스를 두 개 얹고 있었소? 하나는 누구에게 주려는 거였지요?」 「늘 두 개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달리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이제 됐소. 수고했소.」 파커는 마지막까지 점잔을 빼며 물러갔다. 포아로는 얼굴을 찌푸리고 홀 가운데에 서 있었다. 플로러는 층계에서 내려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실험은 성공하셨나요? 저로서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 포아로는 미소지어 보였다. 「모르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파커가 들고 온 쟁반에 글라스가 두 개 얹혀 있던가요?」 플로러는 이마를 찌푸렸다. 「잘 모르겠지만, 두 개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것이……그 실험의 목적이었나요?」 포아로는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두드렸다. 「구태여 설명하라면 하지요. 나는 언제나 하찮은 일이라도 사람들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 「그럼, 파커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나요?」 포아로는 생각에 잠기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뒤 우리들은 마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끌려 물었다. 「글라스에 대해 물으셨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포아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경우 무엇인가 말을 해야만 하니까요. 글라스가 아니라 다른 무 엇이라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포아로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튼 셰퍼드 씨, 이만하면 알고 싶었던 것을 대강 안 셈입니다. 그 럼, 오늘은 이쯤 해두기로 하지요.」 마작모임 그날 밤 우리 집에서 조그만 마작 모임이 있었다. 이런 가벼운 모임은 킹즈 애벗 마을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손님들은 저녁 식사 뒤 장화에 레인코트 차림으로 모여들었다. 우선 커 피를 마시고 난 다음 과자와 샌드위치와 홍차가 나왔다. 그날 밤의 손님은 미스 개닛과 교회 가까이 사는 카터 대령이었다. 이런 모임이 있는 날 밤에는 으레 남의 소문으로 꽃를 피워 때로는 이 야기하느라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 적도 있었다. 우리는 브리지 게임을 곧 잘 했는데, 어느새 그것은 최하급의 지껄이는 브리지 게임으로 바뀌곤 했 다. 오히려 마작 편이 훨씬 더 조용하다. 브리지를 할 때처럼 그 패를 왜 먼저 내지 않았느냐고 다툴 필요도 없고, 서로 여전히 말씨름을 하지만 브리지를 할 때처럼 그리 신랄하지 않다. 난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던 카터 대령이 말했다. 「오늘 밤은 꽤 춥군요, 셰퍼드 씨. 아프가니스탄의 산길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캐럴라인은 미스 개닛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 두둑이 입고 온 겉옷들을 벗겨 주고 있었다.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카터 대령은 커피를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애크로이드 씨 사건은 참으로 이상하군요. 뒷면에 여러 가 지 복잡한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요. 이건 당신에게만 하는 말입니다만, 무언가 협박이라는 말 비슷한 것도 들리더군요.」 대령은 마치 우리는 이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이라는 듯한 눈 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는 여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이 사건의 그늘에 는 분명 여자가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때 캐럴라인과 미스 개닛이 들어왔다. 미스 개닛이 커피를 마 시고 있는 동안, 캐럴라인은 마작 상자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패를 늘어 놓았다. 대령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패를 씻으시는군요. 그렇게 말한답니다. 상하이(上海) 클럽에서는 세 패(洗牌)라고 하지요.」 캐럴라인과 나만의 의견이지만, 카터 대령은 아마 아직 한번도 상하이 클럽 같은 데 가본 일이 없을 겁니다. 상하이는커녕 인도에서 더 동쪽으 로는 가본 일이 없다. 인도에서는 세계대전중 쇠고기 통조림이며 건포도 며 사과잼 같은 식품을 다루는 일을 맡아 했던 듯하다. 그러나 대령이 군인임에는 틀림없었고, 킹즈 애벗 마을에서는 누구든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캐럴라인이 말했다. 「이제 시작할까요?」 우리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처음 5분 동안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누가 가장 먼저 늘어놓게 되나 하고 네 사람이 서로 마음속으로 은근히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럴라인이 말했다. 「자, 제임즈, 내가 선(先)이야.」 나는 패를 버렸다. 한 번, 두 번 차례가 돌아가는 동안 3퉁(三筒)이라든 가 2만(二萬) 또는 펑( )이라는 단조로운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가끔 미 스 개닛이 덤벙거리며 자기 차례도 아닌 패에 <펑>을 불렀다가는 다시 취소하느라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미스 개닛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 플로러를 만났지요. 펑, 아니, 취소예요. 잘못 불렀어요. 」 캐럴라인이 외쳤다. 「4통. 어디서 만났지요?」 「그쪽에서는 나를 보지 못했을 거예요.」 설마 이 작은 마을에서 자기만 보았을 리 없을 텐데도 미스 개닛은 거 드름을 피우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캐럴라인이 흥미를 나타냈다. 「아, 그랬어요! 초우.」 미스 개닛이 화제를 조금 바꾸었다. 「요즘은 초우가 아니라 치이(吃)라고 하지 않나요?」 「아무려면 어때요. 나는 옛날부터 초우라고 했는데요, 뭐.」 카터 대령이 입을 열었다. 「상하이 클럽에서는 초우라고 하지요.」 미스 개닛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잠시 게임에 열중해 있던 캐럴라인이 다시 물었다. 「플로러가 어떻게 했다고요? 누구와 함께 있던가요?」 미스 개닛이 대답했다. 「그럼요.」 두 여자의 눈과 눈이 서로 마주쳤다. 정보를 주고받은 듯했다. 캐럴라인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그랬군요. 정말이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아 요.」 대령이 일러주었다. 「캐럴라인, 당신 차례입니다.」 남의 소문 거리에는 그리 흥미없는 듯 게임에 열중하는 척 애쓰는 모 양이었으나, 거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스 개닛이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하고 싶지 않지만. 아, 당신 이 지금 버린 게 퉁쓰(筒子)였나요? 아니, 틀렸군! 빈즈( 子)였어. 플로러 는 참 운이 좋아요. 그 이상 운이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 대령이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미스 개닛? 그 류파(綠發)는 펑입니다. 플로 러 양이 운이 좋다는 건 어째서지요? 아주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만.」 미스 개닛은 알만한 일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나는 범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어요. 무슨 사 건이든지 맨 먼저 묻는 것은 <피해자가 무사히 있는 것을 맨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누구였는가?>하는 문제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대개 의심받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애크로이드 씨가 살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 은 플로러였어요. 이것은 플로러에게 불리한 일이지요. 아주 불리한. 그래 서 내 생각으로는, 생각한 그대로 말한다면, 랠프 페이튼은 플로러를 위 해 그녀에게 혐의가 가지 않도록 몸을 숨기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항의했다. 「잠깐만요. 설마 플로러 같은 젊은 아가씨가 자기 큰아버지를 찌를 만 큼 잔인하고도 참혹한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미스 개닛은 자기 의견을 늘어놓았다. 「글쎄, 어떨까요?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에서 <파리의 암흑 가>에 대해 읽은 일이 있어요. 그 책에는 흉악한 여자 범인 가운데 마침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젊은 아가씨가 많이 있다고 씌어 있더군요.」 캐럴라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프랑스 이야기예요.」 대령도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시장 같은 데 곧잘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만…….」 대령의 이야기는 쓸데없이 길기만 할 뿐 아무 재미도 없었다. 그 옛날 인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바로 엊그제 킹즈 애벗 마을에서 일어난 일과 비교될 수는 없다.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캐럴라인 때문에 대령의 흥미없는 이야기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캐럴라인의 틀린 계산을 내가 바로잡아 주 는 좀 불쾌한 장면이 있고 나서, 우리는 새로 게임을 시작했다. 「선이 바뀝니다. 랠프 페이튼에 대해 나는 내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3만.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겠어요.」 미스 개닛이 말했다. 「그래요? 초우, 아니, 펑.」 캐럴라인은 딱 잘라 말했다. 「그래요.」 「구두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나요? 검은 색으로?」 「네, 그것으로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 그걸 알 필요가 있었을까요?」 캐럴라인은 그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입술을 꼭 다물고 고 개를 저었다. 미스 개닛이 말했다. 「펑, 아니, 틀렸어, 취소예요. 당신은 포아로 씨와 늘 함께 다니시니 내용을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대답해 주었다. 「천만에요.」 캐럴라인이 말했다. 「제임즈는 너무 조심성이 많아요. 어머나! 암강(暗?)이에요!」 대령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동안은 소문 거리고 뭐고 없었다. 대령이 말했다. 「게다가 당신 차례로군요! 그리고 팡타이(蒜牌)를 둘이나 펑 하셨군. 이거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나겠소. 캐럴라인, 솜씨가 굉장하군요.」 모두들 한참 동안 아무 말없이 게임에만 열중했다. 카터 대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포아로라는 사람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훌륭한 탐정인가요? 」 캐럴라인이 사뭇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명탐정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게 싫어 남몰래 이 마을에 와서 살고 있어요.」 미스 개닛이 말했다. 「초우. 이런 작은 마을로선 정말 명예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클래러 ――저, 우리 집 하녀 말예요――는 팬리 파크의 일하는 아이 엘시와 여 간 사이가 좋지 않아요. 그런데 엘시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요? 그 댁에서 많은 돈을 도둑맞았대요. 그 애 생각으로는 애슐러라는 심부름 하는 하녀와 관계있는 것 같다더군요. 그 애는 한달 뒤 그만두게 되어 있 는데, 밤마다 운대요. 내 생각으로는 악당들과 한편인 것 같아요. 전부터 좀 이상한 아이였지요. 이 마을 아이들과는 잘 놀지 않을 뿐더러 쉬는 날 이면 늘 혼자 외출하곤 했거든요. 아무튼 이상해요. 수상한 점이 한두 가 지가 아니예요. 지난번에도 여자 친목회에 나가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딱 잘라 거절하지 뭐예요.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로 물어 보았어요. 고향이 며 가족에 대한 것을 말예요. 그런데 겉으로는 공손한 체하며 내 말을 가 로막지 않겠어요.」 미스 개닛은 숨을 좀 돌리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다. 하녀들에게는 아무 흥미가 없는 대령이 상하이 클럽에서는 게임을 빨리빨리 하는 것이 철칙 으로 되어 있다고 투덜거렸다. 우리는 한차례 활발한 게임을 했다. 캐럴라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미스 러슬 말인데요. 금요일 아침에 진찰받으러 온 척하고 여기 왔겠 지요. 어쩐지 독약을 넣어 둔 장소를 보러 온 것 같았어요. 5만!」 미스 개닛이 말했다. 「초우. 설마 그럴 리 있으려고요!」 대령이 물었다. 「독약이라면……네, 뭐라고요? 내가 아직 버리지 않았나요? 그럼, 버 리지요. 8통」 미스 개닛이 소리쳤다. 「고마워요!」 캐럴라인은 맥이 풀려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흉퉁(紅中)이 하나만 있다면 3황(蒜)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말해 주었다. 「흉튱은 내가 처음부터 두 개 갖고 있었습니다.」 캐럴라인은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제임즈, 참으로 너답구나! 네게는 원래 게임 정신이 없어.」 나로서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일 캐럴라인이 이기게 된다면 다른 사람은 모두 큰돈을 내야 하는 것이다. 미스 개닛은 기껏 이겨 봐야 ――캐럴라인도 늘 하는 말이지만――얼마 안 되는 액수였다. 선이 바뀌고 우리는 묵묵히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캐럴라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내가 이야기하던 것 말이에요.」 앞을 재촉하듯 미스 개닛이 맞장구쳤다. 「네?」 「랠프 페이튼에 대한 내 생각인데요.」 미스 개닛은 더욱 캐럴라인의 흥을 돋궈 주었다. 「그래, 들려줘요. 초우!」 캐럴라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렇게 빨리 초우를 부르는 것은 결국 마음이 약한 탓이에요. 좀더 큰 것이 잡힐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알고 있어요. 그보다도 아까 랠프 페이튼의 이야기를 하려다 말았잖 아요.」 「그래요. 나는 랠프가 어디 숨어 있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손을 멈추고 캐럴라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카터 대령이 입을 열었다. 「캐럴라인, 아주 흥미있는 문제로군요. 하지만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 겠지요?」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아무튼 이야기하지요. 저 현관 홀에 걸린 이 지방의 큰 지도를 보셨어요?」 우리들은 모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포아로 씨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지도앞에 서서 말했어요. 꼭 그대로 되풀이할 수는 없지만, 크랜체스터는 이 지방에서 가장 가까운 도 시라든가 뭐라든가, 아무튼 그 비슷이 말했어요. 틀림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나간 뒤, 문득 생각이 떠오르겠지요.」 「무슨 생각이?」 「포아로 씨가 말한 뜻 말이에요. 랠프는 틀림없이 크랜체스터에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때 늘어놓던 패를 그만 뒤집어엎고 말았다. 누님은 나에게 조 심성이 없다고 나무랐다. 그러나 누님 역시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 기 생각에만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카터 대령이 되물었다. 「크랜체스터라고요? 설마 그런 곳에!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캐럴라인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더욱 좋지요. 기차를 타고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 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에요. 틀림없이 크랜체스터까지 걸어서 갔을 거예 요. 나는 랠프가 아직도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렇게 가까 운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거든요.」 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한번 머리 속에 생각이 꼭 박히면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캐럴라인이었 다. 미스 개닛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포아로 씨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우연일 지도 모르지만, 오늘 오후 크랜체스터로 가는 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포 아로 씨가 탄 자동차가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와 엇갈 려 지나갔지요.」 모두들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미스 개닛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이것 좀 봐. 아까 벌써 패가 다 맞아떨어졌는데도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네.」 모처럼 이룩한 추리에서 캐럴라인의 주의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캐럴라 인은 미스 개닛에게 흩어져 있는 패를 제멋대로 주워 모아 초우를 했다 해서 그리 뽐낼 것은 없다고 말했다. 미스 개닛은 못 들은 척 한귀로 흘려 버리고는 점수를 적어 넣으며 대 답했다. 「네, 당신이 말하는 뜻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패를 나누는 데 달려 있지 않을까요?」 캐럴라인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덤비면 결코 큰 몫이 오지 않는 법이에요.」 「그렇지만 저마다 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을까요?」 미스 개닛은 점수표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때까지는 계속 내가 이기고 있어요.」 꽤 뒤지고 있는 캐럴라인은 아무 할말이 없는지 입을 다문 채 자기 앞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선이 바뀌어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애니가 차를 날라 왔다. 캐럴라인과 미스 개닛은 이런 모임날 밤에는 대개 마음이 좀 들떠 있었다. 미스 개닛이 어느 패를 낼까 하고 말설이는 것을 지루해 견딜 수 없는 듯 보고 있던 캐럴라인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좀더 빨리 할 수 없어요? 중국 사람은 패를 던지는 게 어찌나 빠른 지 새들이 날개를 푸드득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더군요.」 우리도 한참 동안 중국 사람 못지 않게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카터 대령이 쾌활하게 말했다. 「셰퍼드 씨, 당신은 조금도 정보를 들려주지 않는군요. 용케 피하십니 다그려. 그 탐정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사이면서, 사건이 어떻게 되 어가는지 이렇듯 모두들 궁금해 하는데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너무 하시 는데요.」 캐럴라인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았다. 「제임즈는 정말 별난 사람이에요. 정보가 아까운가 봐요. 조금도 말하 려 들지 않는다니까요.」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포아로 씨는 자기 의견을 조금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요.」 대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다니 영리하군요. 아무튼 그 외국인 탐정은 아 주 굉장한 인물입니다. 사람을 따돌려 놓는 재간까지 가졌으니.」 미스 개닛이 조용히 승리의 소리를 질렀다. 「펑. 이로써 내가 이겼지요?」 상황이 매우 긴박해져 왔다. 미스 개닛이 세 번이나 이겼으므로 캐럴라 인은 몹시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패를 나누며 내게 그 화풀이를 했다. 「제임즈, 너는 참 답답하구나. 어쩌면 막대기를 꽂아 놓은 것처럼 아 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니!」 「하지만 할말이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누님이 바라시는 것 같은 이 야기는 하나도 모른단 말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마.」 캐럴라인은 패를 들여다보며 나를 나무랐다. 「무언가 흥미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한순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놀라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만관(滿貫)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에 책에서나 읽었던 일이었다. 배패(配牌)한 그대로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이런 운이 오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기쁨을 억누르며 패를 펼쳐 보였다. 「상하이 클럽에서 말하는 태호(天和) 만관이라는 겁니다.」 대령의 눈이 둥그래졌다. 「정말 놀랍군요.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런 것은 처음 봤습니다!」 지금 캐럴라인에게 구박받고 화가 잔뜩 나서 될 대로 되라며 아무렇게 나 하고 있었는데, 이런 승리를 얻게 되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이 때까지 그토록 조심하던 것을 그만 말해 버리고 말았다. 「흥미있는 일이라면 결혼 기념 금반지는 어떨까요? 안쪽에 날짜와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요.」 그 다음 장면은 생략하겠다. 나는 그 귀중한 물건을 어디서 찾았으며 날짜는 언제나 새겨져 있다는 것까지 다 말해 버렸던 것이다. 캐럴라인이 말했다. 「3월 13일이라면 꼭 다섯 달 전이구나. 그래, 맞았어!」 저마다의 의견과 억측이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쏟아져 나온 다음 세 가지 의견이 탄생되었다. 첫째, 카터 대령의 의견ː랠프는 플로러와 이미 비밀리에 결혼하고 있 었다. 이것은 맨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결론이다. 둘째, 미스 개닛의 의견ː로저 애크로이드 씨는 남몰래 팰러즈 부인과 결혼하고 있었다. 셋째, 누님의 의견ː로저 애크로이드 씨는 가정부 미스 러슬과 결혼하 고 있었다. 네번째 의견이라고 할까. 말하자면 초논리적인 설(說)이 나중에 침실로 올라갈 때 캐럴라인의 입에서 나왔다. 누님이 별안간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낸 것이다. 「잘 들어. 제프리 레이먼드와 플로러가 결혼했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 라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가 아니라 로 되어 있어야 할게 아닙 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야. 여자 아이들은 흔히 남자를 성(性)으로만 부르 기도 하니까. 게다가 아까 미스 개닛이 한 말 들었지? 플로러는 행동이 좀 가볍다고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미스 개닛이 그렇게 말한 것을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캐럴라인의 독특한 해석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는 말해 보았다. 「헥터 브랜트는 어떨까요? 만일 플로러의 상대로서 누군가를 생각한 다면…….」 「바보 같은 소리마. 그는 플로러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만 생각뿐일걸. 바로 곁에 잘생긴 젊은 비서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아버 지뻘 되는 소령을 상대하겠어. 플로러는 책략적으로 브랜트 소령을 부추 기고 있는 건지도 몰라. 젊은 아가씨들이란 마음놓을 수가 없어. 그렇지 만 제임즈,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 두겠다. 플로러 애크로이드는 랠프 패 이튼을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리고 이 때까지도 페이튼을 좋아하 지 않았어. 이것만은 마음에 잘 새겨 둬.」 나는 그 말대로 마음에 새겨 두었다. 파커 다음날 아침, 나는 비로소 지난 밤에 마작으로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 지 분별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포아로는 반지에 대해 비밀로 해두자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팬리 파크에 있는 동안 그는 그는 아무에게도 반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 다. 따라서 반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이 좀 거북했다. 반지 이야기는 지금쯤 불길처럼 킹즈 애벗 마을에 번져 가고 있을 게 틀림없다. 포아로에게 비난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팰러즈 부인과 로저 애크로이드 씨의 합동 장례식이 10시에 시작되었 다. 참으로 우울하고도 엄숙한 장례식이었다. 팬리 파크 사람들은 모두 참석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포아로가 내 팔을 잡으며 자 기 집인 <낙엽송 집>까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몹시 심각한 얼 굴이었다. 나는 어젯밤에 저지른 실수가 벌써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나 몹시 걱정되었으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이었다. 포아로는 전혀 다른 일로 신경쓰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셰퍼드 씨, 한 가지 또 좀 해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당 신의 힘을 빌어 어떤 증인을 조사해 볼까 합니다. 심문하며 좀 겁을 주어 서라도 사실을 말하게 하는 겁니다.」 나는 몹시 놀라며 물었다. 「증인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파커입니다! 오늘 12시에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곁눈으로 그를 보며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지요?」 「이것만은 말하지요. 나는 아직 납득되지 않는 겁니다.」 「팰러즈 부인을 협박하고 있었던 게 파커라고 생각합니까?」 「그럴지도 모르고, 또…….」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나서 물었다. 「또?」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나는 그것이 파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그 무게있는 태도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괴로운 분위기에 위압받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포아로 씨 집에 다다르니 파커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파커는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포아로가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파커, 빨리 왔구려. 잠깐만 기다려 주오.」 포아로는 외투와 장갑을 벗었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파커는 일어나 다가와서 포아로가 벗어 놓은 옷을 문 옆 의자 위에 잘 접어 놓았다. 포아로는 그 동작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파커, 고맙소. 자, 앉구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파커는 황송한 듯 허리를 조금 굽히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 왜 당신을 일부러 불렀는지 알겠소?」 파커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돌아가신 주인님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 보시려는 것으로 생각됩니 다만. 무슨 개인적인 일이라도?」 포아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파커, 당신은 사람을 협박해 본 적이 있소?」 「나리!」 파커는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렇게 흥분할 건 없소. 정직한 사람이 모함받는 것 같은 연극 은 이제 그만두오. 당신은 협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나는, 나는 지금까지……지금까지 이런…….」 「이런 모욕을 당한 일은 없다는 말이오? 그럼, 그날 저녁 협박이란 말 을 듣고 애크로이드 씨 서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려 한 것은 무 슨 까닭이지요?」 「나는 겨……결코…….」 포아로는 느닷없이 물었다. 「당신의 전주인은 누구였소?」 「전주인이라니요?」 「당신이 애크로이드 씨 댁으로 오기 전에 모셨던 주인 말이오.」 「엘러비 소령님이었습니다만…….」 포아로는 곧 그 말을 잡아챘다. 「그래, 엘러비 소령이었지. 엘러비 소령은 마약 상습자가 아니오? 당 신은 소령과 함께 여행하며 다녔소. 그리고 버뮤다에 갔을 때 어떤 사건 이 일어났소. 한 사나이가 살해된 사건 말이오. 엘러비 소령도 그 사건에 얼마쯤 관계가 있었지. 그러나 사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묻혀 버렸는 데, 당신이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당신 입을 막기 위해 엘러비 소령은 돈을 얼마나 주었소?」 파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포아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포아로는 유쾌한 듯이 말했다. 「어떻소. 모두 알아봤지. 지금 말한 그대로일 거요. 당신은 앨러비 소 령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냈소. 엘러비 소령은 죽을 때까지 당신한테 협박 받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오. 그것보다 좀더 최근의 일이오.」 파커는 여전히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숨겨도 소용없소. 에르큘 포아로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 엘러비 소령 에 관한 사건도 내가 말한 대로인 게 틀림없지요?」 파커는 무리하게 억압당한 사람처럼 불만을 품은 채 고개를 푹 떨어뜨 렸다.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사라졌다. 파커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님의 머리칼 하나 다친 일 없습니다. 하느님께 맹 세코 정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실은 이런 일이 있을까봐 자나깨나 늘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죽인 게 아닙니다!」 파커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나도 당신 말을 믿고 싶소. 당신에게는 그런 배짱이랄까 용기가 없으 니까. 그러나 나는 진실을 알아야 하오.」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든지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그날 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귓전을 스쳐 가는 말에 호기심을 느껴 서. 더욱이 주인님께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며 셰퍼드 씨와 단 두 분만이 들어가셨기 때문에 더 이끌렸었지요. 경찰에 말씀드린 것은 조 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협박이란 소리가 들리기에, 저…….」 파커는 말을 더듬었다. 포아로가 급소를 찔러 말했다. 「또 좋은 협박감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네, 그렇습니다. 만일 주인님께서 협박받고 계신다면 내게도 얼마쯤 몫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포아로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스쳤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날 밤 이전에도 애크로이드 씨가 협박받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한 일 있었소?」 「아니오, 없었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었지요. 어느 모로 보나 그토록 훌륭하고 점잖으신 분이…….」 「얼마나 엿들었소?」 「그리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줄곧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또 식당에 서 할일도 있어서요. 한두 번 서재 문 앞까지 가만히 가기는 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셰퍼드 씨께서 나오셨기 때문에 자칫하면 들킬 뻔 했지요. 그리고 또 한 번은 레이머드 씨와 현관 홀에서 마주쳤기 때문에 그만두었습니다. 레이먼드씨가 먼저 서재 쪽으로 갔기 때문에 안 되겠다 고 생각한 거지요. 그리고 다음에 쟁반을 들고 갔을 때는 플로러 아가씨 에게 쫓겨 나왔습니다.」 포아로는 파커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아보려는 듯 이야 기가 끝날 때까지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커 역시 진지한 표정으 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부디 믿어 주십시오. 경찰에서 엘러비 소령으로 옛일을 들춰내 이번 일도 나를 의심하지 않을까 하여 잠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알았소, 당신 말을 믿기로 하지.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당신의 은행 예금 통장을 좀 보여 주오. 가지고 있겠지요?」 「네, 마침 지금 여기 갖고 있습니다.」 파커는 머뭇거리지 않고 주머니에서 예금 통장을 꺼냈다. 포아로는 푸 른 통장을 손에 들고 죽 훑어보았다. 「음, 올들어 5백 파운드의 국민 저축 채권을 샀군.」 「그렇습니다. 예금이 1천 파운드를 넘었기 때문에. 전주인 엘러비 소 령님과의 그 관계에서 들어온 돈과, 또 올해 경마에 굉장히 재미를 봐서 꽤 벌어들였지요. 아실지 모르지만, 아주 이름없는 말이 뜻밖에도 기념 레이스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20파운드를 번 적이 있습니다.」 포아로는 통장을 되돌려 주었다. 「수고했소.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고 믿겠소.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당신 은 그만큼 더 불리하게 될 거요.」 파커가 돌아간 뒤 포아로는 다시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나는 물었다. 「또 나가실 겁니까?」 「허먼드 변호사를 좀 찾아가 볼까 해서요.」 「파커의 말을 믿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범위에서는 믿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가 아주 연극을 잘하는 사나이라면 모르지만, 협박받고 있던 사람이 애크로 이드 씨였다고 믿는 모양이더군요. 그렇다면 그는 팰러즈 부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게 뚜렷해지지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바로 그겁니다! 협박자는 누구였나? 그러나 허먼드 씨를 찾아가면 한 가지 목적은 이룰 수 있겠지요. 파커가 완전히 결백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포아로는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야기를 도중에서 끊어 버리는 나쁜 버릇이 생긴 모 양입니다. 언짢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좀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실은 그만 실수로 금반지 이야기를 주 책없이 지껄이고 말았습니다.」 「어느 반지 말입니까?」 「당신이 금붕어 못에서 꺼내신 반지 말입니다.」 「아, 그것 말씀입니까?」 포아로는 빙그레 웃었다. 「혹시 일에 방해라도 되지 않을지요? 완전히 내 실수로 그만…….」 「아니, 괜찮습니다. 당신께 말하지 말라고 한 일은 없었으니 이야기하 셔도 좋습니다. 누님께서 재미있어 하시던가요?」 「물론입니다. 야단법석이었지요. 덕분에 여러 가지 추측이 튀어나왔답 니다.」 「호! 하지만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진실한 설명이란 곧 눈에 나 타나게 되는 거지요.」 나는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 「그럴까요?」 포아로는 웃었다. 「영리한 사람은 꼬리잡힐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하잖습니까? 자, 허먼드 씨 댁까지 왔군요.」 마침 변호사는 사무실에 있었다. 우리는 곧 만날 수 있었다. 허먼드 씨는 일어나서 언제나 그렇듯 상냥하지는 않지만 예절바른 태 도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포아로는 곧 요점으로 들어갔다. 「좀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하긴 물론 당신에게도 그리 지장은 없는 일입니다만. 당신은 분명 돌아가신 킹즈 패독의 팰러즈 부인 고문 변호사였지요?」 나는 변호사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떠오른 것을 깨달았으나, 눈깜짝할 사이에 직업적인 자제의 가면이 그 얼굴을 본래대로 뒤덮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부인의 사무적인 일은 모두 내 손을 거쳐서 처리되었지 요.」 「좋습니다. 그럼, 내가 여쭤 보기 전에 먼저 셰퍼드 씨 이야기부터 들 어 주시기 바랍니다. 셰퍼드 씨, 미안하지만 지난 금요일 밤 애크로이드 씨와 하셨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곧 그 기묘한 밤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먼드 씨는 아주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말했다. 「이게 모두입니다.」 변호사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 중얼거렸다. 「협박입니까?」 포아로가 물었다. 「놀라셨습니까?」 변호사는 코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아니, 놀랐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전부터 그런 일이 아닐까 의심 을 품고 있었지요.」 「이로써 내가 여쭤 보고 싶은 정보에 한 발 다가선 셈입니다. 실제로 부인께서 얼마나 되는 액수를 지불했는지 당신은 아시겠지요?」 조금 사이를 두고 허먼드 씨는 말했다. 「그 일이라면 숨길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인은 지난 1년동안 꽤 많은 증권을 현금으로 바꾸어 은행에 예금했는데, 어디 다른 데 투자하거 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인은 수입이 많은 편이었고, 더욱이 남편이 돌 아가신 뒤로는 비교적 검소하게 사셨으므로 그 돈이 무슨 특별한 목적에 쓰여졌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한 번 부인께 그 일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세상떠난 남편의 친척 가운데 가엾은 사람이 있어서 도와주어 야 한다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지요. 지금까지 나는 그 돈을 돌아가신 남편이 살았을 때 관계했던 여자에게라도 주는 게 아닌가 생각 했었습니다. 팰러즈 부인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액수는?」 「이것저것 합해 적어도 2만 파운드는 될 겁니다.」 나는 소리쳤다. 「2만 파운드! 1년 동안에!」 포아로가 차갑게 말했다. 「팰러즈 부인은 꽤 부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살인을 한 벌은 그리 유쾌 한 게 못 되지요.」 허먼드 씨가 말했다. 「달리 또 뭐 물어 보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고맙습니다.」 포아로는 일어났다. 「바쁘신데 착란을 일으키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포아로에게 말했다. 「착란이란 정신장애의 경우에만 쓰는 말입니다.」 포아로는 소리쳤다. 「호! 내 영어 실력은 언제까지나 완벽해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혼란하게 했다고 말할 걸 그랬군요. 그렇지요?」 「방해해서 또는 시끄럽게 해드려서라고 하면 괜찮겠지요.」 「고맙습니다. 정확한 말, 당신은 그것을 열심히 마음에 새겨 두고 계 시는군요. 그런데 파커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2만 파운드나 되는 돈을 가 진 사나이가 왜 집사 노릇을 계속하고 있을까요? 나로서는 알 수 없군요. 물론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금할 수도 있지만, 나는 파커가 사실대로 털 어놓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악당이긴 해도 좀 시시한 악당이지요. 큰일은 생각지 못하는 사나이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레이먼드, 아니면 브랜트 소령.」 나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레이먼드는 아닐 겁니다. 5백 파운드의 돈 문제로 난처해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긴 그 자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헥터 브랜트는…….」 포아로가 끼여들었다. 「브랜트 소령에 대해서는 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조사해 보는 것이 내 직업이니까요. 나는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소령이 말하던 그 유산을 알아보니 거의 2만 파운드에 가깝더군요.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 까?」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믿을 수 없는데요. 헥터 브랜트처럼 이름난 분이…….」 나는 겨우 이 말만 했다. 포아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뭐라고 말할 수 없군요. 적어도 큰 꿈을 꾸는 사나이니까요. 실은 나도 소령이 협박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또 한 가지 당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건 또 무엇입니까?」 「난롯불입니다, 셰퍼드 씨,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신 뒤 애크로이드 씨 자신이 그 편지를 푸른 봉투와 함께 태워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요.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내가 돌아간 뒤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마침 우리 집 앞에 이르렀으므로, 나는 포아로에게 우리 집에서 있는 그대로의 요리로 함께 식사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캐럴라인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점심 식사는 두툼하게 썬 고기였던 것 같다. 캐럴라인은 부 엌에서 양파와 다른 야채 요리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참이었다. 아무튼 세 사람 앞에 두 사람 분의 고기가 놓인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캐럴라인은 언제까지나 우물쭈물거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 는 포아로 씨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둘러댔다. 제임즈는 늘 웃지만, 자기 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땅콩 커 틀릿이 아주 맛있다고――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 알고 있다――설명하며 녹인 치즈를 바른 토스트를 다 먹어 버렸다. 그러 면서 한편 지나친 육식이 우리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 모른다는 통렬한 비판까지 하는 것이었다. 식사 뒤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캐럴라인이 포아로에게 질문의 화살을 던지기 시작했다. 「랠프 페이튼을 아직 못 찾아내셨나요?」 「어디 가서 찾으면 될까요?」 캐럴라인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크랜체스터에서 찾아낸 줄 알았는데요.」 포아로는 다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크랜체스터에서요? 왜 크랜체스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좀 빈정대는 말투로 설명했다. 「우리들 사립 탐정국의 풍부한 인재 가운데 한 사람이 어제 당신이 크랜체스터 쪽에서 자동차를 몰고 오는 것을 보았답니다.」 포아로의 얼굴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이 사라지고 그는 한바탕 크게 웃 었다. 「아, 그것 말입니까!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었지요. 그뿐입니다. 이가 쑤셔서 한 번 가보았지요.그런데 치과 병원 문을 들어서니 감쪽같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되돌아오려니까 의사가 아무래도 이를 빼는 게 좋겠 다고 해서 정말 난처했습니다. 한 번 빼버리면 다시는 아프지 않을 거라 면서 말입니다.」 캐럴라인은 구멍뚫린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말았다. 우리는 랠프 페이튼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했다. 나는 주장했다. 「성격이 약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포아로가 말을 받았다. 「호! 그러나 약한 성격은 막상 일이 닥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지 요.」 캐럴라인도 맞장구쳤다. 「정말 그래요. 우리 제임즈도 그렇답니다. 말할 수 없이 나약하여 만 일 내가 함께 있으면서 돌봐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나는 좀 당황했다. 「누님, 내 인격을 공격하지 않으면 할말이 없나요?」 캐럴라인은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너는 정말 약한 인간이야, 제임즈. 나는 너보다 8살이나 위니까, 어머 나! 포아로 씨에게 내 나이를 알려 드리다니…….」 포아로는 상냥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8살이나 더 먹었으니 네 뒤를 보살펴 주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만일 내가 돌봐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지 모를 거 야.」 「아름다운 여자 사기꾼과 결혼해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천장 쪽으로 담배 연기를 둥글게 뿜어냈다. 「여자 사기꾼이라고!」 캐럴라인은 코를 흥 울렸다. 「여자 사기꾼이라면…….」 나는 얼마쯤 호기심을 느꼈다.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그런 사람이 생각났을 뿐이야.」 그리고는 별안간 포아로 쪽을 돌아보았다. 「살인범은 그 집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당신이 믿고 계시다고 제임즈 는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잘못 짚었어요.」 「잘못 짚는 일 따위를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 영어로는 뭐라고 합니까? 즉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요.」 캐럴라인은 포아로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제임즈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꽤 확실한 사실을 들었지요. 내가 보기에 그 집 사람들 가운데 일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던 것은 둘밖에 없 다고 생각해요. 랠프 페이튼과 플로러 애크로이드지요.」 「누님!」 「아니야, 제임즈, 가만 있거라. 나는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파커는 문 밖에서 플로러를 만났어요. 하지만 애크로 이드 씨가 플로러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 플로러는 죽일 생각만 있었다면 그때 죽였을 거예요.」 「누님!」 「제임즈, 나는 플로러가 죽였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저 그럴 생각만 있으면 죽일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 요즘 젊은 아가씨들이 흔히 그렇듯 웃어른을 몰라보고 세상 일은 뭐든지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척하지만, 그 런 살인까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지금 말했듯 레이먼드와 브랜트 소령은 알리바이가 있고, 세실 부인에게도 역시 있지. 저 미스 러슬이라는 여자 도 알리바이가 있어. 더욱이 그녀의 경우에는 알리바이가 있어서 구사일 생으로 빠져 나온 듯해. 그럼, 다음엔 누가 남지? 랠프와 플로러가 남잖 니! 그런데 포아로 씨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랠프가 범인 이라고는 결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젊은이예요. 」 포아로는 말없이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는 모양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윽고 입을 연 포아로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조용히 울려 오는 듯 듣 는 사람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었다. 여느 때의 포아로와는 전혀 다른 모 습이었다. 「어떤 한 남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주 평범한 남자입니다. 그가 살인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는 어딘지 약한 성품이 있습니다. 마음속 깊이에. 이제까지 한 번도 겉으 로 나타내 본 적 없는 약한 마음이지요. 아마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나타 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 약한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구나 다 존경하고 그 역시 죽을 때까지 편할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는 돈에 몹시 궁금했지요. 아니, 궁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꽉 막혀 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어떤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사에 관계되는 비밀을 말입니 다. 그 남자는 처음에는 이것을 공표하여 선량한 시민의 의무를 다하려 했 지요. 그러나 여기서 그의 약한 성격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납니다. 이건 돈이 생길 좋은 기회다. 더욱이 막대한 큰돈이다라고요. 그 남자는 돈 때 문에 몹시 난처해 있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돈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더구나 그 돈을 얻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침묵만 지키면 되는 겁니다. 이것 이 시작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져 갑니다. 더 많이, 더 많이! 남자는 발 밑에 깔린 금광에 그만 취해 버립니다. 그리고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집니다. 상대가 남자라면 언제까지나 협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 나 상대가 여자일 경우에는 오랫동안 협박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여자는 대개 마음속의 진실을 말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속이고도 비밀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편안히 죽음의 길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와 반대로 얼마나 많 은 부정한 아내들이 자기 남편 앞에 비밀을 털어놓고 파멸의 길을 택했 습니까? 너무 지나치게 쫓겼기 때문이지요. 너무 쫓긴 나머지 생각하는 힘을 잃어――물론 나중에 후회할 게 틀림없는 일이건만――스스로 죽음 의 길을 택하고,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해 진실을 고백해 버리지요.」 여기서 포아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아마 이번 일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돈이 자꾸 나오는 바람에 너 무 지나치게 쫓았던 거지요. 영국의 격언과 같이 금덩이를 낳는 거위를 죽여 버린 격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 는 사실이 폭로될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그는 벌 써 과거의 그, 1년 전의 그가 아닙니다. 이제 도덕 관념도 흐려져 있습니 다. 자포자기가 되었습니다. 점점 지고 있는 싸움에서 그는 수단을 가리 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의 폭로란 바로 그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 이었지요. 그리하여 단검이 꽂혀졌던 것입니다! 포아로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둘레를 지배했다. 마치 온 방 안이 그의 저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그의 말에서 받은 인상 을 나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용서없는 분석, 냉엄한 통찰력 에는 우리 두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포아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단검이 뽑혀진 뒤 그는 다시 여느 때의 평범하고 동정심 많은 남 자로 돌아갔겠지요. 그러나 만일 필요할 때는 다시 단검을 휘두를 겁니 다.」 캐럴라인이 마침내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당신은 랠프 페이튼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지금 당신이 말씀하신 것 과 같을지도 모르고 다를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아무튼 한마디 변명도 들 어 보지 않고 죄를 단정해서는 안 돼요.」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나는 현관 홀로 나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 다. 「네? 그렇습니다. 셰퍼드 의사입니다.」 나는 잠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수 화기를 내려놓고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포아로 씨, 리버풀에서 한 남자가 붙잡혔답니다. 찰즈 켄트라는 이름 의 남자인데, 사건이 일어난 날 밤 팬리 파크로 왔던 수상한 인물 같답니 다. 나에게 지금 곧 리버풀로 가서 확인해 달라는군요.」 찰즈 켄트 30분 뒤 포아로와 나는 래글런 경감과 함께 리버풀로 가는 기차에 몸 을 실었다. 경감은 몹시 흥분해 있었다. 「다른 점은 몰라도, 이로써 그 협박 사건에 대해서는 윤곽이 좀 잡힐 지 모르겠군요.」 경감은 기뻐하는 것 같았다. 「전화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사나이는 좀 거친 것 같으며 마약 상습 자라더군요. 하지만 조금도 숨김없이 실토하게 하겠습니다. 만일 조금이 라도 동기 같은 게 엿보이기만 하면 녀석을 애크로이드 씨 살해범으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랠프 페이튼은 왜 모습을 감추고 있을 까요? 이렇게 되면 또다시 줄거리가 흐트러지고 마는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이야기군요. 그런데 포아로 씨, 그 지문 말입니다만, 당신 생각대로 역시 애크로이드 씨 자신의 지문이었습니다.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이 좀 들긴 했습니다만, 너무도 보기드문 일이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었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자기 체면을 세우려는 래글런 경감의 속셈이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 남자 말입니다만, 아직 정식으로 체포된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용의자로 잡아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경감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는군요. 아주 교활한 녀석인 모양입니다. 발 악만 하고 필요한 말은 조금도 털어놓지 않는답니다.」 리버풀에 닿아서 나는 포아로에 대한 환영이 아주 굉장한 데 놀랐다. 우리를 마중나온 헤이즈 총경은 전에도 포아로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며 그의 실력과 솜씨를 몹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이즈 총경이 유쾌하게 말했다. 「자, 포아로 씨가 나섰으니 이제 사건이 풀릴 날도 멀지 않았군요. 나 는 당신이 완전히 은퇴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헤이즈 씨, 은퇴해 있었지요. 그런데 은퇴란 정말 어찌나 지루한지!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변함없는 하루가 계속되는 지루한 생활 을 당신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이번 수수께끼를 풀러 다시 나서신 거로군요? 이 분은 셰퍼드 씨지요? 어떻습니까, 그를 보면 알 수 있을까요?」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리 자신은 없습니다만…….」 포아로가 물었다. 「그런데 그를 어떻게 붙잡았습니까?」 「아시는 바와 같이 몽타주를 돌려 두었었지요. 신문에도, 내밀스러운 뒤쪽 루트에도. 아직 아무 조사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확실히 미국 사 투리를 쓰고 있으며, 그날 밤 킹즈 애벗 언저리에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 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경찰과 무슨 관계가 있어. 당장 잡아먹을 듯 하지마』라는 식으로,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하려 들지 않는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나도 그 사나이를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총경은 알겠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좋고말고요. 부디 바라시는 대로 하십시오. 경찰국의 재프 경감이 포 아로 씨 안부를 묻더군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요. 그런데 포아로 씨,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페이튼 숨은 곳을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지금은 아직 말씀드릴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포아로의 태도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 우 참았다. 이 몸집작고 변변찮아 보이는 남자의 연기는 아주 그만이었 다. 그 뒤에 두서너 가지 의논이 끝난 다음 우리는 구류되어 있는 사나이 를 만나러 갔다. 용의자는 아직 젊은이로, 겨우 22, 3세밖에 안 되어 보였다. 키가 크고 여위었으며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지금은 볼품없어 보였으나, 그 전에 는 꽤 몸집이 좋았을 것 같았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는 침착을 잃고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보았던 사람을 어디선가 만나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느 꼈었는데, 만일 이 사람이었다면 완전히 내 착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총경이 말했다. 「자, 켄트, 일어서. 자네를 만나 보러 오신 분들이야. 두 분 가운데 어 느 분을 본 기억이 없나?」 켄트는 못마땅한 듯 아무 말없이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눈길이 내게로 되돌아와 멈추었다. 총경이 나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당신 생각에는?」 「키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인상은 그 사나이 같습니다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는데요.」 켄트가 소리질렀다. 「도대체 뭐요!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소? 자, 말해 보시오! 그래, 내 가 뭘 어떻게 했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사람이 맞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군요.」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다고? 어디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요?」 「지난 주 금요일 밤 팬리 파크 대문 밖에서였지. 내게 길을 묻지 않았 소?」 「그랬던가?」 경감이 물었다. 「인정하나?」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묻는지 그 이유를 밝힐 때까지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겠소.」 포아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요 며칠 동안 자네는 신문을 읽지 않았나?」 젊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가, 그 일 때문이었군. 팬리 파크에서 노인이 살해됐다는 이야기 는 읽었소. 음, 그래서 나를 범인으로 만들자는 거로군?」 포아로는 조용히 물었다. 「자네는 그날 밤 팬리 파크에 갔었잖나?」 「그걸 어떻게 알았소?」 「이것으로 알았소.」 포아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그에게로 내밀었다. 우리가 외딴집에 서 발견한 그 거위 깃털이었다. 그것을 흘끗 보자 그 사나이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 다. 포아로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코카인 가루지. 아니, 이것은 빈 거야. 그날 밤 자네가 그 외딴집에 들어가 떨어뜨리고 간 걸세.」 찰즈 켄트는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포아로를 쏘아보았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나 꽤 잘 아시는 모양이군, 변변치 않게 생 긴 분이. 그렇다면 아마 이것도 알고 있겠지. 신문에는 그 노인이 9시 45 분에서 10시 사이에 살해되었다고 씌어 있었소.」 「그렇지.」 「그건 확실하겠지요? 나는 그것을 똑똑히 알고 싶소.」 「그 점은 이분이 확실하게 가르쳐 주실 걸세.」 포아로는 래글런 경감을 가리켰다. 경감은 잠시 망설이더니 헤이즈 총경을 쳐다보고 다시 포아로 쪽을 본 다음, 이윽고 허락이라도 받은 듯 입을 열었다. 「그래, 9시 45분에서 10시 사이였어.」 「그렇다면 당신들은 나를 여기 가둬 둘 필요가 없소. 나는 그날 밤 9 시 25분에 팬리 파크를 나왔으니까. <개와 휘파람>이라는 술집에 가서 알아보시오. 팬리 파크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 크랜체스터 길 쪽에 있는 술집이오. 그곳에서 꽤 떠들어댔지. 그때가 바로 9시 45분이었소. 자, 어 떻소?」 래글런 경감은 수첩에 무언가 적어 넣고 있었다. 켄트가 다그쳐 물었다. 「어떻소?」 경감은 대답했다. 「조사해 보지. 자네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별일없을 거야. 그런데 자 네는 팬리 파크에 뭐하러 갔었나?」 「사람을 만나러 갔었소.」 「누구를?」 「당신이 알 바 아니오.」 총경이 주의를 주었다. 「말조심해.」 「시끄럽소. 나는 내 개인의 볼일이 있어 갔던 거요. 그뿐이오. 살인이 나기 전에 이미 현장을 나왔다면, 경찰에서 나를 붙잡아 둘 필요가 없을 텐데.」 포아로가 물었다. 「이름이 찰즈 켄트라고 했지? 태어난 곳은 어딘가?」 젊은이는 포아로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다시 표정이 누그러졌다. 「나는 이래봬도 순수한 영국 사람이오.」 「흠,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지. 태어난 곳은 켄트 주겠지?」 사나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내 이름이 켄트여서? 그게 고향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켄 트라는 이름이면 모두 켄트 태생이란 말이오?」 포아로는 아주 신중하게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지. 어떤 경우에는 말이야. 자네도 알 고 있겠지?」 그 목소리는 두 경관도 놀랄 만큼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것처럼 울렸다. 찰즈 켄트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당장에라도 포아로에게 덤벼들 듯한 자 세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꿨는지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홱 얼굴을 돌려 버렸다. 포아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왔다. 두 경관도 곧 그 뒤를 따랐다. 래글런 경감이 말했다. 「그 진술을 확인해 볼까요?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팬리 파크에서 그가 뭘 했는지 밝혀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협박 했던 범인을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녀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면, 살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게 됩니다. 녀석은 체포되었을 때 10파운 드나 가지고 있었지요. 꽤 큰돈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 잃어버린 40파운 드가 그 녀석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폐 번호는 맞지 않지 만, 어디 가서 얼른 바꾸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의고향이 켄트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포아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요. 나의 이 순간적인 추리는 아주 유명하니까요.」 「호, 그렇습니까?」 래글런 경감은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것 같은 얼굴로 포아로를 뚫어지 게 쳐다보았다. 헤이즈 총경이 큰소리로 웃었다. 「포아로 씨의 머리 속에 번갯불처럼 홱 지나가는 생각에 대해서는 재 프 경감한테서 가끔 들었지요. 언뜻 보기에는 아주 제멋대로인 것 같지 만, 몹시 의미심장하다고 말입니다.」 포아로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하지만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웃는 것은 젊 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늙은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포아로는 진지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거리로 나 왔다. 포아로와 나는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포아로는 그때 이미 사건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진상으로 이 끌어 주는 마지막 끈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아직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포아로의 자신있 는 듯한 태도를 누구에게나 있는 자만심으로 여겨, 내가 모르는 것은 그 도 으레 모르려니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찰즈 켄크라는 남자가 대체 팬리 파크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포아로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곧 대답했다. 「나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고말고요. 하지만 그가 켄트 주 출신이어서 그날 밤 팬리 파크에 갔다고 말씀드려도, 당신은 아마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 나는 포아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꾸밈없이 말했다. 「정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포아로는 동정하듯 말했다. 「그렇겠지요! 아니, 좋습니다. 그것 역시 순간적으로 문득 떠오른 생각 이니까요.」 플로러 다음날 아침, 왕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래글런 경감을 만났다. 내가 자 동차를 세우자 그는 발판에 한쪽 발을 걸치며 말했다. 「셰퍼드 씨,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어제 그 남자의 알리바이는 아주 완벽하더군요.」 「찰즈 켄트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개와 휘파람>이라는 술집의 샐리 존즈라는 여급사가 그 사람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더군요. 사진을 다섯 장 가져갔는데, 그 가운데에서 바로 그 사나이를 골라내지 않겠습니까. 그가 술집에 들어선 것은 꼭 9시 45분이었답니다. 그리고 그 술집은 팬리 파크에서 넉넉히 1 마일을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켄트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답니 다. 주머니에서 돈을 뭉텅이로 꺼내는 것을 여급사가 보았다더군요. 몹시 놀랐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다 떨어진 구두를 끌고 다니는 초라한 꼴이었으니까요. 이로써 그 40파운드의 행방도 확실해진 것 같군 요.」 「그는 아직도 팬리 파크로 간 목적을 설명하지 않던가요?」 「오늘 아침 리버풀에 있는 헤이즈 총경과 전화로 이야기했는데, 본디 고삐없는 말같이 사나운 녀석인 모양입니다.」 . 「에르큘 포아로 씨는 그 사나이가 그날 밤 팬리 파크로 간 까닭을 아 는 모양이던데요.」 경감은 힘차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말입니까?」 나는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그 사람이 켄트 주 태생이기 때문에 팬리 파크에 갔다더군요.」 나는 나 자신의 의혹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기쁨을 뚜렷이 맛보았 다. 래글런 경감은 잠시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 다. 한참 만에야 두더지 같은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의미있게 이마를 두드려 보였다. 「여기가 좀 어떻게 된 게 아닐까요? 나는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보았 습니다만, 가엾게도 그래서 은퇴한 모양이로군요. 그의 조카 가운데 미친 사람이 하나 있다더니, 혈통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포아로 씨에게?」 「그렇습니다. 포아로 씨가 말하지 않던가요? 미친 짓은 하지 않고 얌 전해서 그리 사람을 해치진 않는 듯하지만, 역시 제 정신이 아니니 함부 로 다룰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가엾게도.」 「누구에게서 들으셨습니까?」 또다시 래글런 경감의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당신 누님께 들었지요. 아주 자세히 들었습니다.」 캐럴라인한테서 듣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서 든 가정의 비밀까지 모두 알아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질이다. 불행히도 나는 누님 에게 남의 비밀을 자기 마음속에만 담아 두는 예의를 가르치지 못했다. 나는 자동차 문을 열며 말했다. 「자, 타시지요, 경감님. 함께 <낙엽송 집>으로 가서 포아로 씨에게 그 새로운 소식을 알려 줍시다.」 「좋겠지요. 머리는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지문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유익한 말을 해주었으니까요. 켄트에 대해서는 핀트가 좀 어긋난 것 같지 만 혹시 모르지요. 나중에 무슨 좋은 생각을 해내어 도움이 될지도.」 포아로는 언제나처럼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는 때때로 고개를 끄덕여 가며 우리들이 가져온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경감이 우울하게 말 했다. 「어떻습니까, 그 사나이는 아무래도 결백한 것 같습니다만. 1마일이나 떨어진 술집에서 술마시고 있던 사나이가 같은 시각에 다른 곳에 가서 살인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 사나이를 풀어 줄 생각입니까?」 「하는 수 없지요. 남을 협박하여 돈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가둬 둘 수 도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경감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 성냥 끄트러기를 덧문 창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포아로가 그것을 주워 재떨이에 넣었다. 완전히 기계적인 동작이었다. 포아로의 온 신경이 다른 일에 쏠려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포아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당신 입장에 있다면, 그 찰즈 켄트라는 남자를 아직 풀어 주지 않겠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요?」 래글런 경감은 포아로를 가만히 지켜 보았다. 「지금 말했듯, 아직 풀어 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설마 그 사나이가 살인 사건에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 「아마 관계없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야기한 대로…….」 포아로는 한손을 들어 경감의 말을 가로막았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확실히 들었습니다. 나는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고맙게도 바보도 아닙니다! 당신은 틀린 전제―― 이 말로 좋겠지요――틀린 전제 위에 서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감은 둔한 눈길로 포아로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애크로이드 씨는 9시 45분까지 는 무사하셨습니다. 그 점은 인정하시겠지요?」 포아로는 경감을 한 번 슬쩍 쳐다보더니 얼굴에 조금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증명되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증거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의 증언이라든가 …….」 「플로러 양의 큰아버지께 저녁 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 말입니까? 그 러나 나는 젊은 아가씨들의 말을 믿지 않기로 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라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플로러 양이 서재에서 나오는 것을 파커가 보았습니다.」 포아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파커는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실험 을 좀 해서 그 점을 확인해 보았지요. 기억하시지요, 셰퍼드 씨? 파커는 다만 플로러 양이 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서재에서 나오는 것을 본 건 결코 아니지요.」 「그렇지만 서재밖에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 층계였겠지요.」 「층계?」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의 그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입니다. 층계지요. 」 「하지만 그 층계는 애크로이드 씨의 침실로밖에 갈 수 없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경감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채 포아로를 보고 있었다. 「그럼, 플로러 양이 애크로이드 씨의 침실에 갔었다고 생각하시는군 요? 만일 그랬다면 굳이 거짓말을 꾸며 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아,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아가씨가 거기서 뭘 했을까 하는 겁니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그 돈이로군요? 설마 40파운드를 플로러 양이 훔쳐 냈다고 생 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어떻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녀는 생활이 넉넉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쓸 곳은 많고. 그럴 때마다 돈에 여간 곤란받은 게 아닐 겁니다. 로저 애크 로이드 씨는 돈에 대해 보통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 가씨도 아마 돈 때문에 고민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이런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가씨는 큰아버지 침실에서 몰래 돈을 가지고 그 층계를 내려옵니다. 중간쯤 왔을 때 복도에서 글라 스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압니다. 파커 가 서재 쪽으로 오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층계를 내려오는 모 습을 들키면 큰일입니다. 틀림없이 파커는 의심을 품고 잊어버리지 않을 테니까요. 만일 돈이 없어진 게 밝혀지면 파커는 반드시 아가씨가 층계를 내려오던 것을 기억해 낼 테지요. 그녀가 얼른 서재 문 앞까지 뛰어가 지 금 금방 서재에서 나온 척하며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을 때, 파커가 나타 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초저녁에 로저 애크로이드 씨가 한 말을 되풀이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얼른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던 겁니 다.」 「과연! 그렇지만 나중에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게 이 사건에 있어 얼 마나 중요한지쯤은 아가씨도 알지 않았을까요? 사건 전체가 그 점에 관 련되어 있는데.」 경감은 여전히 주장했다. 포아로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플로러 양으로서는 좀 난처하게 되어 버렸지요. 처음에는 그저 도난 사건이 있어서 경찰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틀림없이 그 돈 때문 인 줄 알고 파커에게 한 거짓말을 경관 앞에서 되풀이했지요. 그런데 그 뒤 큰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알고 그녀는 아주 당황했습니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기절하거나 떨지 않습니다. 플로러 양은 끝 까지 이 꾸며 낸 거짓말을 고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고백하 느냐의 두 가지 길에서 망설이게 되었지요.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로서는 자기가 도둑이라고 고백한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 이 자기를 존경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래글런 경감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포아로 씨, 당신은 그 일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가능성만은 처음부터 머리 속에 있었지요. 플로러 양이 무언가 숨기 고 있다는 확신은 전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 해 셰퍼드 씨의 입회 아래 아까 말씀드린 현장검증을 해보았던 겁니다.」 나는 나무라듯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파커를 시험해 본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포아로는 변명했다. 「셰퍼드 씨,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무언가 핑계를 대지 않으면 안 되었 으니까요.」 경감이 일어섰다. 「이젠 취할 길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금 곧 그 아가씨를 붙잡아 물어 보지요. 당신도 팬리 파크까지 함께 가시겠습니까, 포아로 씨?」 「가지요. 셰퍼드 씨, 자동차로 태워다 주시겠지요?」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플로러 양을 좀 뵙고 싶다고 하자 당구실로 안내해 주었다. 플로러와 헥터 브랜트 소령이 창가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경감이 말을 건넸다.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실은 아가씨와 좀 조용히 이야기할 일이 있어 서 왔습니다만.」 브랜트 소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플로러는 매우 걱정스러운 모습이었다. 「가지 마세요, 브랜트 소령님.」 그녀는 경감을 돌아보며 물었다. 「소령님이 여기 계셔도 괜찮겠지요?」 경감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직무상 한두 가지 물어 볼 일이 있으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요. 더구나 아가씨도 그편을 더 좋아 하실 줄 압니다.」 플로러는 깜짝 놀라며 경감을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녀는 브랜트 소령에게 말했다. 「여기 계셔 주세요. 부탁이에요, 정말. 이분이 무슨 말을 하든지 괜찮 아요. 당신이 함께 들어 주세요.」 래글런 경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면 구태여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아가 씨, 여기 계신 포아로 씨가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지난 주 금요일 밤, 당 신은 서재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애크로이드 씨에게 저녁 인사도 하지 않 았다고요. 다시 말하면, 당신은 서재에서 나온 게 아니라 큰아버지의 침 실로 가는 층계에 있을 때 파커가 복도를 가로질러 오는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플로러의 눈길이 포아로에게로 옮겨 갔다. 포아로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가씨, 지난번 우리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했을 때 내가 정 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었지요.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이 포아로 아저씨는 기어이 캐내고야 맙니다. 어떻습니까, 그대로지요? 자, 그럼, 대답하기 쉽 게 말해 드리지요. 아가씨는 돈을 훔쳤습니다. 그렇지요?」 브랜트 소령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돈을?」 침묵이 적어도 1분 동안은 이어졌다. 이윽고 플로러는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포아로 씨 말씀이 맞아요. 제가 그 돈을 훔쳤어요. 도둑질한 거예요. 저는 도둑이에요. 그래요, 변변치 않은 좀도둑이에요. 아시겠어요! 모두 속시원히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며칠 동안 마치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어요.」 플로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 손가락 사이에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 「이 집으로 온 뒤의 내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 요. 갖고 싶은 게 많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거짓말하고 속 이고, 결국은 빚만 잔뜩 늘어 곧 갚는다고 거짓 약속만. 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요! 랠프와 내가 약혼하게 된 것도 이런 일이 원인이었지요. 랠프의 기분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엾게 여겼지요. 그도 나와 같 은 처지니까요. 우리는 둘 다 혼자선 걸을 수도 없는 연약하고 불행하고 가련한 인간이었어요.」 그녀는 브랜트 소령을 올려다보더니 별안간 발을 굴렀다. 「왜 그런 눈길로 나를 보시지요? 마치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나 는 도둑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아무튼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숨김 없고 꾸밈없는 진실한 나예요. 이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젠 당신 앞에서 젊고 천진스러운 아가씨인 척하지 않아도 된단 말예요. 이제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기싫다고 하셔도 좋아요. 나는 나 자신이 미워서 못 견디겠어요. 자신을 멸시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믿어 주세요. 만일 제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게 랠프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면 좀더 일찍 이야기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오히려 랠프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의심받게 할 것 같았어요. 내 거짓말에 구 애되어 랠프를 불리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브랜트가 말했다. 「랠프라고요. 언제나 랠프, 랠프로군요.」 플로러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 그리고는 경감 쪽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을 인정해요. 나는 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날 밤 저녁 식탁에서 헤어진 뒤, 큰아버지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어요. 돈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좋으실 대로 처분하세요. 각오가 되어 있어요. 아무 리 나빠져도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갑자기 플로러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경감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랬었군.」 그는 이제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브랜트가 앞으로 나서며 침착하게 말했다. 「래글런 경감님, 그 돈은 어떤 특별히 쓸 데가 있어서 애크로이드 씨 가 나에게 주셨습니다. 플로러 양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훔친 것 처럼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페이튼 대위를 감싸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 가 말하는 게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증인으로 나설 용의가 있습니다. 약 속합니다.」 소령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발꿈치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포 아로는 얼른 뒤따라 나가 복도에서 소령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소령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지요?」 브랜트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를 찌푸리며 포아로를 내려다보았다. 포아로는 빠른 말투로 이야기했다. 「브랜트 소령님, 나는 그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이야기에 넘어가지 않 습니다. 돈을 훔친 것은 확실히 플로러 양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도 꽤 잘 꾸며대시는군요. 아주 좋았습니다. 소령님을 다시 보았습니다. 어쩌면 생 각이며 행동이 그토록 빠르신지.」 브랜트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당신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포아로는 조금도 기분이 상 하지 않은 듯 소령의 앞길을 막듯이 팔을 붙잡았다. 「아니,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내 말을 꼭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지 난번엔 나는 여러분들이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리고 당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말 씀드리지요. 당신은 플로러 양을 몹시 사랑하고 계십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지요. 아니,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 이야기합시다. 왜 영국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을 마치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도 되듯 비밀 로 하십니까? 당신은 플로러 양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애쓰고 계십니다. 그것도 좋겠지요. 반드시 그 래야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 에르큘 포아로의 충고만은 받아들 여 주십시오. 당신의 그 기분을 아가씨에게까지 숨기지는 마십시오.」 브랜트 소령은 포아로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 하는 듯한 태도였으며, 이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소령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아가씨가 랠프 페이튼 대위를 사랑하고 있는 줄 생각하십니 다. 그러나 이 에르큘 포아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 니다. 플로러 양이 페이튼 대위와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은 큰아버지의 뜻 을 거역하지 못해서였고, 또 한 가지는 대위와 결혼함으로써 이 집안의 생활, 솔직하게 말해 견디기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플로러 양은 페이튼 대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겠지 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동정과 이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플로러 양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페이튼 대위가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햇볕에 그을린 브랜트 소령의 얼굴빛이 붉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당신은 장님이었군요, 소령님. 정말 장님이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신 의를 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자기명예를 걸고 랠프 페이튼의 혐의를 벗겨 주는 게 랠프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때야말로 한마디 덧붙임으로써 이 일에 협력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 라고 생각한 나는 힘을 북돋워 주듯 말했다. 「요전날 밤, 나의 누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플로러 양은 랠프 페이튼을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요. 또 앞으로도 결코 사랑하지 않 을 거라더군요. 이런 이야기나 예측에 대한 누님의 의견은 대개 잘 맞는 답니다.」 브랜트 소령은 내가 모처럼 한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포아로 쪽을 보았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 말하려다가 그는 그만두었다. 그는 정말 말솜씨없는 사람이었다. 생각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포아로는 그가 그토록 말이 서투른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만일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그 아가씨한테 물어 보십시오. 아니면 이젠 그 돈 문제 때문에 그럴 마음이 사라졌습니까?」 브랜트 소령은 화난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런 일 따위에 사로잡힐 것 같습니까? 로저는 옛날부터 돈에 대한 몹시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플로러는 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로저에게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했겠지요. 정말 가엾습니다. 아가씨가 가 엾어 견딜 수 없습니다.」 포아로는 동정하는 눈길로 옆문 쪽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플로러 양은 정원으로 나갔나 봅니다.」 브랜트 소령은 별안간 마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큰 바보였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 습니다. 마치 햄릿 연극처럼. 그런데 포아로 씨, 당신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잘 아시는 분이군요. 고맙습니다.」 그는 아파서 얼굴을 찡그릴 만큼 포아로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옆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아픈 손을 어루만지며 포아로는 중얼거렸다. 「눈뜬 장님이었군. 그럴지도 모르지. 사랑은 맹목적이라고 하니까.」 미슬 러슬 래글런 경감에게는 큰 타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브랜트 소령이 의협심에서 한 거짓말에는 속지 않았으나, 마을로 돌아오 며 투덜거렸다. 「포아로 씨, 이렇게 되면 사정이 아주 달라지는데요. 당신은 이미 알 아차리고 계셨지요, 그것을?」 「네,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벌써 오래 점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요.」 겨우 30분 전에야 그것을 알게 된 경감은 어이없는 얼굴로 포아로를 쳐다보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이렇게 그 알리바이는 아무 쓸모없게 되어 버리는군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되겠군요. 9시 30분 뒤의 모두들의 행동을 저마다 다시 조사해야겠습니다. 9시 30분, 이것이 중요한 시각이 되는군요. 켄트라는 사나이에 대해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아 직 당분간 그 사나이를 석방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9시 45분에 그는 <개와 휘파람>이라는 술집에 있었습니다. 달려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애크로이드 씨와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레이먼 드가 들었다는데, 그것은 켄트의 목소리였는지도 모릅니다. 돈을 빌리려 했으나 애크로이드 씨가 거절했다는 것은.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것 이 있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 사나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역은 반대 편으로 반 마일, 그리고는 <개와 휘파람>에서는 1마일 반 넘게 떨어져 있고, 그는 10시 10분쯤까지 그 술집에 있었으니까요. 빌어먹을 전화로군! 늘 그 전화에 와서 걸리고 말거든.」 포아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만일 페이튼 대위가 창문으로 숨어 들어왔기에 애크로이드 씨가 살 해된 것을 보았다면, 그가 전화를 걸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 히 자기가 혐의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가 달아났다 고도 생각할 수 있잖습니까?」 「왜 전화를 걸 필요가 있었을까요?」 「애크로이드 씨가 정말 죽었는지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요. 되도록 빨리 의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혹시 자기가 혐의를 받을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추리는? 비교적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경감은 사건의 문제점을 자신있게 다 캐내기라도 한 것처럼 으스댔다. 이쯤 되면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사람이다. 마침 이 때 우리 집 앞에 다다랐기 때문에 나는 기다리는 외래 환자들 을 진찰하러 얼른 진찰실로 들어가고, 포아로와 래글런 경감은 경찰서로 갔다. 마지막 환자의 진찰을 끝내자 나는 스스로 작업장이라고 부르는 뒤쪽 골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가 만든 라디오를 자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 다. 캐럴라인은 이 방을 가장 싫어한다. 이 방에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놓 여 있기 때문에 하녀 애니에게 결코 청소를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먼지 떨이나 빗자루를 휘둘렀다가는 큰일난다. 쾌종시계가 잘 맞지 않아 내가 수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캐럴라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매우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응, 여기 있었군, 제임즈. 포아로 씨가 만나고 싶다는구나.」 나도 좀 언짢게 대답했다. 「네, 알았습니다.」 누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작은 기계 부속품들을 떨어 뜨렸기 때문이다. 「만나고 싶다면 이 방으로 모셔 오면 되잖습니까?」 「이런 데로?」 「그렇습니다, 여기로.」 캐럴라인은 못마땅한지 흥 콧소리를 내며 되돌아갔다. 이윽고 얼마 뒤 포아로를 안내해 들어오더니 곧 문을 꽝 닫고 다시 나가 버렸다. 포아로는 두 손을 마주 비벼대며 들어왔다. 「여, 셰퍼드 씨!」 「경감과의 일은 끝났습니까?」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환자를 다 보셨습니 까?」 「네, 다 끝냈습니다.」 포아로는 의자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달걀 모양의 머리를 갸웃거리며 무언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환자가 또 한 사람 남아 있으니까요.」 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설마, 당신이?」 「아닙니다. 나는 물론 건강합니다. 사실은 이것도 나의 한가지 음모지 요. 누구를 좀 만나 보고 싶은데 당신의 도움을 빌어 진찰실에서 몰래 만 나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 집으로 부르게 되면 모두가 보고 당연히 말이 많겠지요. 어떻든 상대가 여성이라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라면 괜찮 을 겁니다. 이미 환자로서 찾아온 일도 있으니까요.」 나는 소리쳤다. 「미스 러슬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녀와 꼭 이야기해 보고 싶기에 편지로 당신 진찰실까 지 와달라고 부탁해 두었습니다.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도 한몫 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당신의 진찰실이니까요!」 나는 손에 들었던 핀셋을 내던졌다. 「정말이지 흥미진진한 사건이군요. 어느 모로 보나 말입니다. 새로운 사실들이 마치 만화경을 보는 것처럼 자꾸 전개되고. 포아로 씨가 한 발 자국 옮길 때마다 사건의 양상이 홱 달라지는군요. 그런데 미스 러슬은 또 왜 만나고 싶어하십니까?」 포아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뻔한 일 아닙니까?」 나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또 시작이로군요. 당신에게는 모든 일이 다 뻔한 사실로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갈수록 알 수가 없습니다.」 포아로는 벙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플로러 양의 이야기를 들을 때 래글런 경감은 몹 시 놀라는 모양이었지만, 당신은 태연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역시 그 아가씨가 훔쳤으리라고는 꿈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얼굴만 보고 있었습니다 만, 당신께서는 조금도 래글런 경감처럼 놀라거나 믿을 수 없는 듯한 표 정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전부터 플로러 양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 았거든요. 그래서 사실이 드러났을 때 나도 모르게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래글런 경감은 굉장히 놀란 모양이더군 요.」 「그랬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었나 봅니다. 참 딱하게 됐지 뭡니까. 경감은 자기 생각을 다시 모조리 고쳐야 할 테니까요. 나는 경감의 생각 이 혼돈되어 있는 틈을 타서 한 가지 부탁을 하여 승낙을 받아 두었습니 다.」 「무슨 부탁인데요?」 포아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씌어진 종이 쪽지를 꺼내 펴더니 소리내 어 읽었다. 「경찰 당국은 지난 금요일 팬리 파크의 애크로이드 씨가 살해된 이래 여러 날 동안 애크로이드 씨의 아들인 랠프 페이튼 대위의 행방을 찾고 있었는데, 대위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바로 전 리버풀 항구에서 체포되었 다.」 포아로는 다 읽고 나자 다시 본래대로 접었다. 「이것을 내일 아침 각 신문에 낼 예정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포아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까! 랠프는 리버풀에 없습니다!」 포아로는 나를 보며 웃었다. 「당신은 참 머리가 좋군요! 리버풀에서 찾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래글런 경감은 내가 이 기사를 신문에 내는 것에 한사코 반대했지요. 더 구나 내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으니 더하지 뭡니까. 그러나 이것이 신문 에 나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뿐, 경감에게는 조금도 책임을 지우 지 않겠다고 열심히 설명해서 겨우 납득시켰답니다.」 나는 포아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마주보았다. 나는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것으로 어떤 결과를 얻으실 작정인지…….」 포아로는 점잖게 말했다. 「당신의 작은 회색 뇌세포를 써보십시오.」 그는 일어서서 내 작업대로 다가와 비좁을 만큼 홑뜨려 놓은 많은 기 계 부속품들을 보았다. 「기계 만지는 것을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누구나 제 나름대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나는 얼른 내가 만든 라이오를 포아로에게 보여 주었다. 그가 매우 흥미를 느끼는 듯했으므로, 나는 내가 고안한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가정에서 쓸모있는 발명품 한두 가지를 자랑했다. 「당신은 의사보다 발명가가 되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아, 벨 이 울리는군. 환자가 왔나 봅니다. 진찰실로 가봅시다.」 전에도 한 번 나는 이 가정부의 아름다운 얼굴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이날 아침에도 나는 새삼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옷차림은 수수하나 키가 크고 어깨가 곧으며 똑똑해 보이는 얼굴. 검고 큰 눈이 빛나고, 늘 핼쑥하던 볼에는 연지를 발라서 젊었을 때 얼마나 아 름다웠을까 하고 생각되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스 러슬. 어서 앉으십시오. 당신과 꼭 이야기하고 싶 은 게 있는데, 친절하게도 셰퍼드 씨가 이 진찰실을 빌려 주셨으니, 천천 히 이야기 나눕시다.」 미스 러슬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마음속으로는 혹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조금도 그런 빛을 나타내지 않 았다. 「이런 곳에서 뵙게 뵈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요.」 「미스 러슬, 실은 좀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찰즈 켄트가 리버풀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쏘아붙 이듯 물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지요?」 그 순간 나는 문득 마음에 짐작되는 게 있었다. 찰즈 켄트의 도전적인 태도에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제야 그것을 알 수가 있었 다. 목소리도――한편으로 몹시 거칠고 또 한편으로는 꽤 점잖았는데―― 묘하게 닮은 점이 있었다. 그날 밤 팬리 파크의 문 밖에서 어디선지 듣던 목소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미슬 러슬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겨우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포아로 쪽을 보았다. 그는 고 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미스 러슬이 묻는 말에 포아로는 프랑스 사람들이 흔히 하듯 두 팔을 크게 벌려 보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그저 흥미를 느끼실 듯해서요.」 미스 러슬은 말했다. 「나는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그 찰즈 켄트란 어떤 사람 이지요?」 「살인이 있었던 날 밤 팬리 파크로 왔던 사나이지요.」 「그래요?」 「그러나 다행히도 이 사나이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9시 45분에 그는 여기서 1마일 떨어진 술집에 있었으니까요.」 「그거 잘된 일이로군요.」 「그러나 그가 팬리 파크에서 무엇을 했는지, 말하자면 누구를 만나러 갔는가 하는 것은 아직 우리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겠군요. 나는 아무 소문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럼, 그것뿐이라면…….」 미스 러슬은 공손하게 말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포아로는 그녀를 막으 며 태연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데 오늘 아침이 되어 다시 새로 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살해된 것은 9시 45분이 아니 라 그 이전이었다는 겁니다. 셰퍼드 씨가 집으로 돌아가신 8시 50분부터 9시 45분 사이지요.」 가정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며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허둥지 둥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러나 플로러 아가씨가, 플로러 아가씨가 말씀하셨잖아요.」 「플로러 양은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녀는 그날밤 서재에 한 번도 들어간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범인은 찰즈 켄트 같다는 의심이 짙어질 뿐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무슨 일로 팬리 파크에 왔으며, 뭘 하고 있었 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일이라면 내가 말할 수 있어요. 그는 주인님의 머리칼 하나도 손 댄 일이 없어요. 더욱이 서재 가까이 간 일도 없어요. 맹세합니다. 그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흥분하여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 강철 같던 자제력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포아로 씨! 포아로 씨! 오, 부디 나를 믿어 주세요.」 포아로는 일어나서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위로하듯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믿고말고요, 그 말을 믿지요. 다만 나로서는 찰즈에 대한 모든 사실 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순간 그녀는 의혹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까 말씀하신 것은 정말인가요?」 「찰즈 켄트가 살인 용의자라는 것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팬리 파크에 왔던 이유만 말하면 됩니 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나를 만나러 왔던 거예요. 나를 만나러…….」 「외딴집에서 만나셨지요? 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지요?」 「미스 러슬. 여러 가지 일을 알아내는 게 에르큘 포아로의 일이니까 요. 그날 이른 저녁에 당신이 밖으로 나가 언제쯤 거기로 가겠다는 쪽지 를 외딴집에 놓고 온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예요. 찰즈에서 편지가 왔는데, 이리로 오겠다고 씌어 있 었어요. 그러나 이 댁에는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찰즈가 보낸 주 소로 다시 편지를 했지요. 외딴집에서 만나자고 약도를 그려서 보내 주었 어요. 그래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워 외딴집 으로 달려가 9시 10분쯤에 간다고 종이 쪽지에 적어 놓고 왔지요. 그곳에 갈 때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으 로 살짝 빠져 나갔었어요. 그리고 돌아와 문 앞에서 셰퍼드 씨를 만났을 때 뛰어왔기 때문에 숨을 헐떡이고 있어서 수상하게 여기지나 않을까 하 고 걱정했어요. 셰퍼드 씨가 그날 저녁 식사에 오신다는 것을 전혀 몰랐 었거든요.」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 포아로가 재촉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9시 10분이 지난 뒤 집을 나와 그를 만났던 것 이겠지요. 무슨 말을 주고받았습니까?」 「실은 그 말을 하기가 거북스러워…….」 포아로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미스 러슬, 사실을 모두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셰퍼드 씨와 나는 비밀을 지켜 드릴 겁니다. 나는 당신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려 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 겠습니까. 그 찰즈 켄트라는 사람은 당신 아들이지요? 아닙니까?」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지요. 옛날, 아주 옛날 켄트 주에 있었을 때의 일이에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주의 이름을 따 아들의 성으로 삼았군요.」 「나는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아이의 생활비만은 그 럭저럭 벌 수 있었지요. 내가 제 어머니라는 것을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자라면서 자꾸 비뚤어진 생활을 하기 시작했 어요. 술을 마시고 마침내는 마약에까지 손대고 말았지요. 나는 여비를 마련해 주어 그 아이를 캐나다로 보냈어요. 2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는 데,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내 편지로 돈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끝내 본국에 돌아와 팬 리 파크로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편지를 보냈더군요. 그러나 나는 그 아 이를 팬리 파크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아주 성실하고 얌전 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나쁜 소문이 날까 두려웠지요.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가정부로서 지위도 잃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편지를 썼던 거예요.」 「그날 아침 당신은 셰퍼드 씨를 찾아왔었지요?」 「네, 마약 중독자로부터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 을까 해서였어요. 마약에 손대기 전까지는 결코 나쁜 아이가 아니었거든 요.」 「그랬었군요.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아들은 그날 밤 외딴집으 로 왔던가요?」 「네, 내가 가보니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아주 형편없고 말투 도 몹시 거칠었어요. 나는 내게 있던 돈을 모두 그 아이에게 주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몇 마디 이야기를 했을 뿐 그 아이는 곧 돌아갔어요.」 「그때가 몇 시쯤이었지요?」 「9시 20분에서 25분 사이였다고 생각해요.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9시 30분이 채 못 되었으니까요.」 「아드님은 어느 길로 돌아갔습니까?」 「올 때와 마찬가지로 문지기 집 앞을 지나 찻길로 이어지는 작은 오 솔길로 나갔어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때 브랜트 소령께서 담배를 피우시며 테라스를 거닐고 계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멀찍이 돌아서 옆문으로 들어갔지요. 그때가 바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9시 30분쯤이었어요. 」 포아로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조그만 수첩을 꺼내 몇자 적어 넣었다. 그리고 위로하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하려다가 그녀는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래글런 경감님에게도 모두 해야 되나요?」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사 건을 처리할 순서와 방법에 따라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지요. 찰즈 켄트가 아직 정식으로 살인범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일이 되어가는 데 따라서는 당신 이야기를 공개하지 않아도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미스 러슬은 일어섰다. 「포아로 씨, 정말 고맙습니다. 친절하게, 정말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해주셔서. 그럼 포아로 씨, 당신은 나를 믿어 주시겠지요? 찰즈가 이 무 서운 사건에 관계없다는 것을!」 「9시 30분에 서재에서 애크로이드 씨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남자가 당 신 아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미스 러슬. 머지않아 모든 일이 잘되겠지요.」 미스 러슬은 돌아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나는 말했다. 「역시 그랬었군요! 이렇게 되면 또다시 랠프 페이튼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는군요. 그런데 찰즈 켄트가 만나러 온 상대가 미스 러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두 사람이 닮은 점이라도 있어서인가요?」 「나는 켄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 두 사람을 연결지어 생각했습니 다. 그 거위 깃털을 보았을 때부터였지요. 거위 깃털은 마약을 떠올리게 했고, 따라서 나는 미스 러슬이 당신을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냈 습니다. 더욱이 그날 아침 신문에 코카인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았거 든요.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확실해집니다. 미스 러슬은 그날 아침 누군 가 마약 중독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신문 기사를 읽고, 당신을 찾아와서 코카인에 대해 몇 가지 물어 보았지요. 그것은 그날 아침 신문기사가 코 카인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코카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당신이 너 무 흥미깊게 이야기하자, 얼른 화제를 미스터리 소설이라든가 검출해 내 지 못하는 독약 이야기로 옮겼던 거지요. 나는 그녀에게 아들이나 형제,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한 친척이라도 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자, 이제 점심 시간이 되었으니 가보겠습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식사하시면 어떻습니까?」 포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눈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아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캐럴라인 누님을 이틀씩이나 계 속 채식주의자로 만들어서는 너무 미안하니까요.」 아무튼 애르큘 포아로에게는 무슨 일이든 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모양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문 기사 캐럴라인은 물론 미스 러슬이 진찰실로 찾아온 것은 모를 리 없다. 나 도 이미 그것을 예측하고 미스 러슬의 무릎 병에 대해 설명할 것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캐럴라인은 물어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누님 의 견으로는 미스 러슬이 찾아온 본래 뜻을 자기는 알고 있으나 나는 모른 다는 것이었다. 캐럴라인은 말했다. 「제임즈, 미스 러슬은 진찰을 핑계로 너한테서 무슨 말을 좀 들어 볼 까 해서 온 거야. 틀림없어. 능청스럽게도 너를 넘겨 짚어 보려고 온 거 란 말이야. 넌 그녀의 그런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 남자란 모두 단순하거든. 네가 포아로 씨아 친한 것을 알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얻어 들으려고 왔지, 뭐. 제임즈, 내 생각이 틀림없어!」 「글쎄, 나는 짐작도 못 하겠는걸요. 누님 생각은 언제나 좀 특이하니 까요.」 「비웃어 봐야 소용없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 지만, 애크로이드 씨의 죽음에 대해 틀림없이 여러가지 상세한 것을 알고 있을 거야.」 캐럴라인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듯 뻐기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요?」 「제임즈, 오늘은 왜 그렇게 활기가 없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구 나. 아마 간장이 나빠졌나 보다.」 그 뒤 우리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화제를 옮겼다. 포아로의 제안에 의한 기사는 다음날 아침 신문에 났다. 나는 그 목적 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캐럴라인에게 끼친 영향은 굉장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면서도, 자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떠보였을 뿐 말싸움 은 그만두었다. 캐럴라인은 양심에 찔리는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리버풀이라고까지 확실히 말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랠프가 미국 으로 달아나리라고는 짐작했어. 살인마 클리핀도 역시 그랬잖니.」 「하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가엾게도 결국 붙잡히고 말았군. 제임즈, 랠프를 교수대에서 구해 내 는 것은 네 의무라고 생각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너는 의사가 아니냐? 더구나 랠프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지. 랠프 는 정신박약자니까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게 아니겠니. 요 며칠 전 책에서 읽었는데, 브로드무어의 정신병원은 설비가 잘되어 있 어 환자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다더구나. 마치 고급 클럽 같대.」 그러나 캐럴라인의 이 말은 내게 다른 생각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포아로 씨에게 정신박약의 조카가 있다는 것은 몰랐었는데요.」 「몰랐어? 내게는 모두 이야기해 주던데. 가엾게도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그 아이 때문에 우울해진다는 거야. 지금까지는 집에 두었지만 점점 심해져서 아무래도 어디 병원에라도 보내야 될 것 같다고 하더구나.」 나는 화난 투를 섞어 말했다. 「이젠 포아로 씨 집안 사람들 이야기를 모두 알아낸 모양이군요.」 캐럴라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거의 다 알고 있어. 사람이란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누구한테든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해 버리면 여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거든.」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그렇겠지만, 남의 집안일이나 비 밀을 억지로 캐물어서 털어놓게 해도 기분이 좋을까요? 그렇게 되면 문 제가 달라지지요.」 캐럴라인은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수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듯한 얼 굴로 나를 돌아볼 뿐이었다. 「제임즈, 너는 참 무뚝뚝하구나.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퍼뜨리는 것도 싫어하고, 게다 가 다른 사람도 모두 자기처럼 되기를 바라니 말이다. 그건 무리야. 그리 고 나는 다른 사람의 비밀을 일부러 캐낸 일은 없어. 이를테면 포아로 씨 가 약속대로 오후에 찾아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아침 일찍 포아로 씨 댁에 찾아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거나 캐내려고 하지 않을 거야.」 「오늘 아침 일찍이라고요?」 「아주 일찍, 우유 배달부가 오기도 전이었어. 나는 우연히 창가에 서 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 남자였단다. 상자 모양의 자동차를 타고 왔는 데, 외투깃을 올려 세우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 그렇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어. 틀림없이 내 짐작이 맞을 거 야.」 「그래, 누님은 그 남자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캐럴라인은 의미깊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내무부 감식과 직원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내무부 감식과라고요! 설마! 누님…….」 「자, 조용히 들어 봐. 들어 보면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까. 저 미스 러 슬이 지난번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약장에 있는 독약이 목적이었던 거 야. 그날 만찬 때 로저 애크로이드 씨의 식사에 독약이 들어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어리석은 소리 마십시오. 그는 단검으로 목덜미를 찔렸습니다. 누님 도 그런 것쯤은 알 텐데요.」 「제임즈, 죽은 다음에 찔렀는지 누가 알아! 죽은 원인을 감추기 위해 서 말이야.」 「누님, 시체는 내가 살펴보았으니까 틀림없습니다. 그 상처는 죽은 뒤 에 찔린 게 아니고,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캐럴라인은 여전히 자기는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화가 치밀어 한마디 쏘아 주었다. 「한 가지 묻겠는데요, 누님. 나는 대체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면허야 가지고 있지. 나는 적어도 네가 훌륭한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너는 상상력이 좀 모자라거든.」 나는 냉담하게 말해 주었다. 「누님이 세 사람 몫이나 가져서 내 몫은 없어졌나 보지요.」 그날 오후 약속대로 포아로가 찾아왔다. 나는 캐럴라인의 교묘한 진술 을 흥미깊게 구경했다. 캐럴라인은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교묘하게 돌려 서 아침에 찾아온 손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포아로의 눈이 빛나는 것으로 보아 벌써 누님의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 이었다. 포아로가 아무 관심없는 태도로 묘하게 질문을 피하는 바람에 제 아무리 캐럴라인이라도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아무튼 포아로는 이 하찮은 게임을 아주 재미있어 하는 모양이더니, 이 윽고 일어나 나에게 함께 산책하러 가자고 권했다. 포아로는 설명했다. 「살을 좀 빼야겠습니다. 당신도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돌아와서 캐럴 라인 누님에게 차라도 한 잔 끓여 달라고 부탁하지요.」 캐럴라인은 말했다. 「기다리겠어요. 그리고……댁의 그 손님도 함께 오시면 어떨까요?」 「친절은 고맙지만 친구는 지금 쉬고 있어서요. 나중에 다시 좋은 기회 가 있겠지요.」 캐럴라인은 마지막 지혜를 짜내어 말했다. 「누군가에게서 들었는데, 아주 오래된 친구라더군요.」 포아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말을 다 하던가요? 자, 그럼 나가 볼까요?」 우리들은 어느새 팬리 파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 게 되리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포아로의 방식을 이제야 겨우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딴전부리는 듯하지만 결국은 어느 것이 나 모두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잠시 뒤 포아로가 입을 열었다. 「셰퍼드 씨,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 집에서 모임 을 좀 가졌으면 하는데, 당신도 참석해 주실 수 있겠지요?」 「가지요.」 「좋습니다. 그리고 팬리 파크의 여러분들도 모두, 세실 부인, 플로러 양, 브랜트 소령, 레이먼드도 왔으면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대신하 여 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좀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임은 9시에 시 작할 예정이라고 말입니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런데 왜 직접 전하지 않습니까?」 「왜 그러느냐, 무엇 때문이냐고 여러 가지로 질문받기 싫어서입니다. 내 생각을 알아내려고 여러 가지로 물어 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도 아 시다시피 나는 말할 때가 오기 전에는 내 생각을 발표하기 싫어합니다.」 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내 친구 헤이스팅즈는 늘 나보고 음흉 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비평이지요. 나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숨기지는 않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저마다 다르니까요.」 「그런데 애크로이드 씨 댁에는 언제쯤 가는 게 좋을까요?」 「될 수 있으면 지금 곧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팬리 파크는 바로 저기 니까요.」 「당신은 안 들어가시겠습니까?」 「나는 이 언저리를 거닐겠습니다. 15분쯤 지난 뒤 문지기 집앞에서 만 나기로 합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팬리 파크로 갔다. 팬리 파크에서는 세실 부인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부인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셰퍼드 씨, 참 고마웠어요. 포아로 씨에게 그 일을 잘 이해시켜 주셔 서. 그런데 세상엔 왜 이리 귀찮은 문제가 자꾸 일어나는 것일까요? 물론 플로러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플로러 이야기라니요?」 「플로러와 헥터 브랜트의 약혼 말이에요. 물론 랠프처럼 어울리는 짝 은 아니지만, 저희끼리 행복하면 되는 것이니까 상관없어요. 플로러에 비 해 나이가 좀 많은 편이지만 똑똑하고 의지가 굳지요. 오늘 아침 신문에 서 랠프가 붙잡혔다는 기사를 읽으셨겠지요?」 「네, 읽었습니다.」 세실 부인은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무서운 일이에요. 제프리 레이먼드가 놀라서 리버풀에 전화를 거는 등 소동이 일어났었어요. 그런데 저쪽 경찰에서는 그 보도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잖아요. 체포한 기억도 없다지 뭐예요. 레이먼드는 틀 림없이 무슨 오해일 거라고, 뭔지는 모르지만 신문이 잘못 보도한 것일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하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어요. 체면 문제니까요. 만일 플로러가 랠프와 결혼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세실 부인은 굉장히 마음아파 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이래서야 대체 언제쯤 포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초조해졌다.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하자 세실 부인이 또 먼저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어제 당신도 래글런 경감과 함께 계셨지요? 지독한 남자예요, 래글런 경감이라는 사람은. 플로러를 협박하여 로저 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말하 게 하다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플로러는 돈을 조금 빌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므로 로저에게 가지 못하고, 돈이 있는 곳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서 필요한 액수만큼 빌 려 온 것뿐이에요.」 「플로러 양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요즘 젊은 아이들의 기질은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곧바로 아주 쉽 게 암시에 걸려 버리지요. 당신은 물론 최면술이라는 것을 아실 거예요. 경감이 막 소리치며 훔쳤지, 훔쳤지 하고 야단치니까, 가엾게도 그 아이 는 놀라서――강박관념이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걸 늘 혼돈한답니다―― 마침내 정말로 자기가 훔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나는 곧 알아 차렸지요. 그렇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이번 오해 때문에 저 두 사람, 플로러와 헥터가 맺어지게 된 셈이니까요. 사실 나는 이때까지 플로러에게 대해 퍽 걱정했답니다. 어떤 때는 그 아 이와 레이먼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세실 부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재산도 없는 비서 따위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신에게는 큰 타격이겠지요. 그런데 부인, 애르큘 포아로 씨가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내게요?」 세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나는 급히 부인을 안심시키고 포아로의 용건 을 말했다. 세실 부인은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알겠어요. 포아로 씨가 그렇게 하라면 해야지요. 그런데 무슨 일일까 요? 미리 좀 알고 갔으면 좋겠군요.」 나 역시 부인보다 더 알고 싶으나 조금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네, 잘 알겠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9시에 찾아가지요. 」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포아로와 약속한 장소로 갔다. 「약속한 15분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군요. 아무튼 그 부인은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칠 줄을 모르니까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포아로는 말했다. 「뭐, 괜찮습니다. 나는 그동안 저택을 구경하며 퍽 즐거웠습니다. 이 정원은 볼수록 참으로 훌륭하군요.」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캐럴라인은 몹시 기다린 듯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보였다. 그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과 가벼운 흥분이 가득 흘러넘쳤다. 「팬리 파크의 하녀 애슐러 본이 지금 와 있어. 식당으로 들여 보냈지. 가엾게도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포아로 씨를 얼른 만나고 싶대. 나는 따뜻한 차를 내놓고 친절히 대해 주며 위로 했어. 그 모습을 보고 동정하 지 않을 수 있어야지.」 포아로가 물었다. 「식당에 있습니까?」 나는 식당 문을 열었다. 「이리로 들어오시지요.」 애슐러 본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두 팔을 식탁 앞으로 내민 모습이 아마 여태까지 엎드려서 울고 있었던 듯 눈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슐러 본이었군!」 포아로는 그녀 쪽으로 두 손을 내밀며 내 옆을 지나갔다. 「아니, 그것은 올바른 이름이 아닐 겁니다. 어떻습니까, 애슐러 본이 아니라 애슐러 페이튼이겠지요? 페이튼 부인입니다.」 애슐러 본 애슐러는 한참 동안 말없이 포아로를 쳐다보더니 더 참을 수 없는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캐럴라인은 나를 밀어내고 한손으로 애슐러를 안아 어깨를 두드려 주 며 위로하듯 말했다. 「자, 이제 그만 울어요!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이제 곧, 틀림없이 모두 잘될 거야.」 호기심과 소문에 열심인 캐럴라인이기는 하나 그녀에게도 인정은 충분 히 있었던 것이다. 포아로가 감추고 있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흥미조차도 괴로움과 슬픔에 싸인 젊은 여자 앞에서는 빛을 잃은 것 같았다. 이윽고 애슐러는 고쳐 앉으며 눈물을 닦았다. 「나는 참으로 약하고 바보였어요.」 포아로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오, 이 1주일 동안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말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우리들의 일을 다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그 일을 어떻 게 아셨지요? 랠프한테서 들으셨어요?」 포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늘 찾아온 것은 이 일 때문이에요.」 애슐러는 구겨진 신문을 한 장 꺼내 놓았다. 포아로가 싣게 한 기사가 있었다. 「여기에 랠프가 체포되었다는 씌어 있어요. 이제 모든 일이 다 물거품 이 되고 말았어요.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길 필요가 없어요.」 포아로는 좀 멋쩍은 듯 말했다. 「하지만 신문 기사가 반드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아무 튼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에 게는 사실이 꼭 필요합니다.」 애슐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포아로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포아로는 조용히 말했다. 「나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나를 만나러 일부러 이 렇게 온 게 아닙니까? 무슨 일로 왔지요?」 애슐러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랠프가 살인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신 은 훌륭하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진상을 밝혀내 주실 줄 알고 만나 뵈러 온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틀림없이 인정많으신 분이리라고 생각했어요.」 포아로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나도 당신 남편이 결백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주위 상황 이 점점 랠프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남편을 도우려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그것 때문에 남편의 입장이 잠시 불리하게 된다 할지라도.」 「정말 잘 이해하시는군요.」 「그럼, 처음부터 모두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안락의자에 털썩 앉으며 캐럴라인이 말했다. 「나를 쫓아내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 아가씨가 왜 하녀로 왔는지 알 고 싶어요.」 나는 되물었다. 「하녀로?」 「그래. 왜 그런 일을? 돈 때문에?」 애슐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활 때문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재촉하는 대로 자기 사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 서는 그 이야기를 내 자신의 말로 고쳐 쓰기로 하겠다. 애슐러 본은 아일랜드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딸들은 저마다 사회에 나가 스스로 생 계를 꾸려 나가야만 하게 되었다. 애슐러의 큰언니는 홀리엇 대령과 결혼했다. 내가 지난 일요일에 만났 던 사람은 바로 이 언니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당황해 하던 모습이 당 연한 일로 여겨졌다. 애슐러는 자립할 결심을 했으나, 이렇다 할 아무 기술이 없었으므로 아 이보는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슐러는 아이보는 일이 싫어 서 하녀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견습 하녀가 되기는 싫었다. 할 바에는 아주 직업적으로 정식 하녀가 될 생각으로 언니에게 부탁하여 신분 증명서를 써받아 팬리 파크 로 온 것이었다. 이리하여 팬리 파크에서 우리가 다 아는 봐와 같이, 동료들 사이에서는 호감을 못 받았으나 하녀로서 평판이 좋았던 것이다. 일을 잘하고 충실했 으며 눈치가 빠르고 조심성도 있었다. 그녀는 설명했다. 「일은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자유로운 시간도 많았고요.」 그 뒤 랠프 페이튼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국 남몰래 결혼까지 했다. 애슐러는 그 비밀 결혼에 반대했으나 랠프가 억지로 설득시켰던 것 이다. 양아버지가 재산없고 공부도 제대로 못 한 아가씨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몰래 결혼해 놓고 나중에 좋은 기회를 보아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려 애슐러 본은 애슐러 페이튼이 되었 다. 랠프는 우선 빚을 갚고 직업을 얻어 아내를 부양할 수 있고, 양아버 지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만한 때, 애크로이드 씨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랠프 페이튼 같은 새로운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 이야기를 숨기고 잘 부탁하면 혹시 양아 버지가 빚을 갚아 주고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그런데 막상 부탁해 보니 로저 애크로이드 씨는 빚을 많이 졌다고 화 내며 한푼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몇 달 뒤 랠프는 다시 팬리 파크로 불려 왔다. 그런데 갑자기 랠프에게 플로러와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로저 애크로이드 씨는 듣기좋게 돌려 말 하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랠프 페이튼의 연약한 마음이 그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편리하 고 손쉬운 해결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 플로러와 랠프는 서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약혼은 일종의 거래에 지나지 않았다. 로저 애크로이드 씨의 희망에 두 사람은 다만 동의했을 뿐이었다. 플로러는 이것을 자유와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회로 여겼고, 랠 프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경제적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 은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먼 장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성격이 못 되 었고, 적당한 때가 오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 었다. 플로러와 랠프는 당분간 약혼을 비밀로 해두기로 약속했다. 랠프는 이 것이 애슐러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애슐러는 똑똑할 뿐 아니 라 이중 성격을 아주 싫어했고 우물거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면 몹시 분개하리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생겼다. 고집센 로저 애크로이드 씨가 갑자기 약혼을 정식으로 발표하기로 했던 것이다. 랠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플로러에게만 알렸다. 원래 플로러는 아무래도 좋았으므 로 그리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슐러 씨에게는 이 사실이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랠프는 애슐러로부터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런던에서 돌아 왔다. 두 사람은 숲 속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다. 이것을 캐럴라인이 보았 던 것이다. 랠프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애슐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지금 당장 애크로이드 씨에게 고백하겠다고 한 것 이었다. 결국 애슐러와 랠프는 싸우고 헤어졌다. 한번 결심하면 그대로 실행하는 애슐러는 그날 오후 로저 애크로이드 씨를 만나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태는 험악해졌다. 만일 로저 애크로이드 씨에게 자기 자신의 걱정이 없었다면 더 무서운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애크로이드 씨는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여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주로 랠프를 나무랐으나, 애슐러에게도 남의 양아들을 계획적으로 꾀어냈다고 야단치는 바람에 그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심한 말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날 밤 애슐러는 뒷문을 살짝 빠져 나가 미리 약속한 대로 랠프와 외 딴집에서 만났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말다툼을 했을 따름이었다. 기회도 가리지 않고 애크로이드 씨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제 계획이 다 틀어 졌다고 랠프는 애슐러를 나무랐고, 애슐러는 랠프가 배신했다고 비난했 다. 두 사람은 또다시 싸우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30분쯤 뒤 로저 애크로이 드 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날 밤 뒤로 애슐러는 랠프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편지 한 장을 받지 못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랠프에게 불리한 사실만 드러나는 데에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애크로이드 씨가 살아 있었다면 당장 유언장을 고쳤을 것이다. 나 는 애크로이드 씨를 잘 알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맨 먼저 그 일을 생각 했을 것이다. 랠프와 애슐러에게 있어 애크로이드 씨의 죽음은 퍽 유리한 것이었다. 애슐러가 입을 굳게 다물고 비밀을 지켜 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포아로의 목소리에 나는 문득 명상에서 깨어났다. 그 신중한 말투로 보 아 포아로도 상황의 중대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 보겠습니다. 반드시 정직하게 대답해 줘야 합니다. 그 대답에 따라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외딴 집에서 랠 프와 헤어진 시각이 언제였지요? 자,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애슐러는 조금 웃어 보였으나 몹시 괴로운 것 같았다. 「제가 그 생각을 안 해본 줄 아세요? 그를 만나러 나간 것은 꼭 9시 30분이었어요. 브랜트 소령님이 테라스를 거닐고 계셨기 때문에 들키지 않으려고 나무 사이로 몰래 빠져 나갔었지요. 외딴집에는 9시 33분쯤 닿 았을 거예요. 랠프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함께 있은 건 10분쯤, 그보 다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오니 꼭 9시 45분이었지요.」 그제야 비로소 나는 전에 애슐러가 시간을 자꾸 물어 보던 이유를 깨 달았다. 만일 애크로이드 씨가 9시 45분에 살해되었으며 그 뒤가 아닌 것 만 증명되면 되는 것이다. 「누가 먼저 외딴집을 나왔습니까?」 포아로가 이렇게 묻는 것을 보니 그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 었던 모양이다. 「제가 먼저 나왔어요.」 「랠프 페이튼을 그곳에 남겨 둔 채?」 「네, 그렇지만 당신은 설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상관할 바 없습니다. 당신은 집으로 돌아와 무엇을 했지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방에는 몇 시까지?」 「10시쯤까지 있었지요.」 「누군가 그것을 증명해 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증명이라고요? 제가 제 방에 있었던 것을 말예요? 아니오, 왜 그런 말을……아, 알겠어요! 혹시, 혹시 내가…….」 겨우 사정을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두 눈에 공포의 빛이 어렸다. 포아로가 그녀를 대신하여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창문으로 가만히 들어가 의자에 앉아 있는 애크로이드 씨를 찔렀다는 것 말입니까? 그렇지요, 그런 의심도 충분히 할 수 있군요.」 옆에 있던 캐럴라인이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어지간히 멍청하군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다 하다니…….」 그녀는 애슐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애슐러는 두 손에 얼굴 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무서운 일이에요.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캐럴라인은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포아로 씨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 니예요.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 남편은 너무 나빠요. 자기만 달아 나 당신 혼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다니!」 그러나 애슐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랠프는 자기 일 때문에 달아나거나 하지 않아요. 이제 두고 보면 알 거예요. 애크로이드 씨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저질렀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캐럴라인이 말했다. 「랠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날 밤 저는 아주 냉정하게 대해 주었어요. 몹시 심한 소리만 했지 요. 그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가 나를 걱정하고 생각 한다는 소리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버티고 서서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퍼부었지요. 마음내키는 대로 차갑게 심한 말을 마구 했던 거 예요. 어떻게 하면 그를 좀더 마음아프게 해줄까 하고…….」 「조금도 마음아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남자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했어요. 남자란 아무리 지나친 말을 해도 곧이듣지 않거든요.」 애슐러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말을 이었 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 랠프가 나타나지 않아 저는 퍽 걱정했어요. 혹시 그가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그의 성격으로는 그 런 짓을 못 한다고 생각되었어요. 결코 그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시원스 럽게 말하는 게 좋았을 거예요. 그가 셰퍼드 의사 선생님을 몹시 따르기 때문에, 저는 혹시 당신이 그가 있는 곳을 알고 계시지 않나 했어요.」 애슐러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날 선생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던 거예요. 만일 그가 있는 곳 을 아시면 말이라도 전할까 해서요.」 「내가?」 캐럴라인이 톡 쏘아붙였다. 「제임즈가 알 리 없지.」 「그럴 리 없겠지만, 랠프는 셰퍼드 의사 선생님을 좋아했고 캥즈 애벗 마을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거든요.」 나는 말했다. 「애슐러 양, 랠프 페이튼이 지금 어디 있는지 나 역시 짐작도 못 하고 있습니다.」 포아로도 덧붙였다. 「물론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애슐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신문을 내보였다. 포아로가 멋쩍게 말했다. 「아! 그것 말입니까?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요. 나는 랠프 페이튼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애슐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것은…….」 「한 가지만 더 알고 싶습니다. 그날 밤 페이튼 대위는 단화를 신고 있 었습니까, 아니면 반장화를 신고 있었습니까?」 애슐러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기억하지 못하겠는데요.」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무리도 아니지요. 그럼, 부인.」 포아로는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웅변투로 휘두 르며 애슐러에게 미소지었다. 「물어 볼 말은 이것뿐입니다. 부디 너무 걱정 마시고 용기를 내십시 오. 그리고 에르큘 포아로를 믿어 주십시오.」 포아로의 작은 모임 캐럴라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자, 너무 걱정 말고 2층에 올라가 좀 쉬어요. 포아로 씨가 잘 처리해 주실 테니 마음놓고.」 애슐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는 팬리 파크로 돌아가야 해요.」 그러나 캐럴라인은 펄쩍 뛰며 말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당분간 내가 보살펴 줄 테니, 아무튼 지금은 여기 에 있어요. 포아로 씨, 그렇지요?」 몸집작은 벨기에인 탐정도 동의했다. 「네, 그게 좋겠군요. 아가씨, 아, 실례했습니다, 부인,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밤 우리 모임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9시 부터 시작되니 당신도 꼭 와주십시오.」 캐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슐러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두 사람 이 나가 문을 닫자 포아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우선 이만하면 일이 잘되는 셈이군. 모든 일이 저절로 풀려 나가고 있으니.」 나는 자신없는 말투로 물었다. 「랠프 페이튼은 점점 더 불리해지는 게 아닐까요?」 포아로는 동의했다. 「네, 그렇게 되는군요. 그러나 이것은 미리 예측했던 일이 아닙니까? 」 나는 이 말에 당황해서 포아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자에 기대 눈을 반쯤 감은 채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숨을 쉬며 머리 를 저었다. 나는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가끔 옛 친구 헤이스팅즈가 몹시 그리워집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 요? 지금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친구 말입니다. 내가 큰 사건에 부닥칠 때 면 언제나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도와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잘 도와주었지요. 이상하게도 그는 자연스럽게 진상에 부딪치는 재주가 있었 으니까요. 물론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때는 엉뚱한 말을 한 적 도 있었지만, 그 엉뚱한 소리가 내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 주기도 했답니 다. 그리고 또 흥미있는 사건은 그 경과를 하나하나 반드시 기록해 주었 지요.」 나는 좀 멋쩍게 기침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머리를 꺼내다가 나는 그만두었다. 포아로는 똑바로 앉아 눈을 빛내 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사실은 나도 헤이스팅즈 씨가 쓴 것을 몇 편 읽은 적이 있어서 한 번 흉내를 내볼까 생각했지요. 이런 사건에 관계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없 을 테니, 이 기회에 한 번 기록해 보고 싶어서…….」 말하다 보니 점점 앞뒤가 맞지 않게 되었다. 포아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나는 프랑스식으로 목을 껴안 는 게 아닌가 하고 놀랐으나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그거 놀라운 소식이군요. 사건 진행에 따른 당신의 인상을 적으셨다 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아로는 소리쳤다. 「멋지군요! 보여 주십시오, 지금 곧.」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응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어떤 세밀한 부분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내려고 나는 머리를 짜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씌어 있더라도 부디 기분나빠 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내 생각이 지나치게 씌어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가끔 내 행동을 희극적이랄까, 우스꽝스럽게 썼겠지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헤이스팅즈도 나에게 반드시 예의를 지켜서 썼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얼마쯤 망설이며 책상 서랍을 뒤져 잘 정돈되지 않은 원 고를 포아로에게 건네 주었다. 앞으로 어쩌면 출판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므로 나는 전체를 몇 개의 장(章)으로 나누어 썼으며, 어제 저녁 미스 러슬이 찾아온 데까지 씌어 있었다. 포아로가 받아 든 것은 그 20장까지의 분량이었다. 나는 원고를 포아로에게 주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먼 곳에 사는 환자에게 왕진갈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8시 좀 지나서 집에 들어오니 따뜻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포아로와 캐럴라인은 7시 30분에 벌써 저녁을 함께 들고, 그 뒤 포아로 는 내 원고를 마저 읽으려고 나의 작업장으로 갔다고 했다. 누님은 말했다. 「저, 제임즈, 저 원고 속에 내 이야기를 조심해서 썼겠지?」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심하기는커녕……. 「뭐, 괜찮아!」 캐럴라인은 내 표정으로 얼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포아로 씨는 알아주시겠지. 너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이해하고 있으니 까.」 나는 작업장으로 가보았다. 포아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옆 의자 위 에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겸손한 태도에 경의를 나타냅니다.」 나는 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포아로는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과묵함에도!」 나는 <무슨 그런 말씀을>하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포아로는 말을 이었다. 「헤이스팅즈는 이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어느 페이지를 보나 그가 쓴 글에는 <나는>이 여러 번 나오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고 있군요. 겨우 한두 번 나타났을 뿐입니다만, 그것도 가정 생활 을 묘사할 때뿐입니다.」 포아로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조심 스럽게 물어 보았다. 「읽고 난 감상을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포아로는 진지한 태도가 되었다. 「정말 세밀하고 정확한 기록입니다. 모든 사실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관계된 부분에서는 적당히 침묵을 지키고 있군요.」 「그럼, 좀 도움이 되겠습니까?」 「네, 퍽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자, 그럼, 이제 우리 집으로 가서 오늘 밤 꾸밀 연극 무대를 준비할까요?」 캐럴라인은 현관에 있었다. 자기도 저녁 모임에 초대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포아로는 교묘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는 매우 안타까운 듯 말했다. 「당신도 꼭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오늘 밤만은 아무래도 안 가시 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 모이는 사람은 모두 용의자 들뿐이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애크로이드씨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려는 것이니까요.」 나는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포아로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아직 에르큘 포아로의 참 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군요.」 바로 이 때 애슐러가 2층에서 내려왔다. 포아로가 물었다. 「준비 다 되었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우리 집까지 함께 가지요. 캐럴 라인,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호의에는 힘닿는 대로 보답하겠 습니다. 그럼, 안녕히.」 현관에 나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캐럴라인을 그대로 남겨 두고 우리 는 나왔다. <낙엽송 집> 응접실에는 손님맞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테이 블 위에는 여러 가지 음료수와 글라스들이 놓이고 비스킷 접시도 얹혀 있었다. 다른 방에서 의자도 몇 개 더 갖다 놓았다. 포아로는 이쪽저쪽 둘러보며 의자 위치를 고치고 전등 위치를 바꾸고 바닥에 엎드려 카펫을 바로 펴놓기도 했다. 조명에 아주 신경을 써서 손 님들이 앉을 의자 쪽을 밝게 하고, 자기가 앉을 한구석 자리는 어두컴컴 하게 전등을 배치했다. 애슐러와 나는 포아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포아로가 말했다. 「모두들 오신 모양이군요. 자, 이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며 팬피 파크 사람들이 들어왔다. 포아로는 한걸음 다가서서 세실 부인과 플로러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브랜트 소령님, 레이먼드 씨도.」 레이먼드는 여전히 명랑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무슨 일입니까? 무슨 과학적인 기계라도 장치해 놓았습 니까? 손에 수갑을 채우고 심장의 고동을 계산하여 범인을 붙잡아 내는 방법이라도 있나요? 그런 기계가 발명되었다고 하던데요.」 포아로가 말했다. 「나도 그런 기사를 읽었지요. 하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어서 낡은 방법 을 그대로 씁니다. 작은 회색 뇌세포를 움직이는 것 말입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그런데 먼저 여러분께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포아로는 애슐러의 손을 잡아 여러 사람들 앞으로 내세웠다. 「이분은 랠프 페이튼 부인입니다. 지난 3월 페이튼 대위와 결혼했지 요.」 세실 부인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새어 나왔다. 「랠프와! 결혼했다고요! 지난 3월에! 어머나,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요!」 부인이 마치 애슐러와 처음 보는 듯 쳐다보았다. 「이 아이와 결혼했다고요? 농담 마세요, 포아로 씨. 아무래도 믿지 못 하겠어요.」 애슐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때 플로러가 얼른 애슐러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놀랐다고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렇 지만 당신이나 랠프는 참으로 비밀을 잘 지켰군요. 나는……진심으로 축 하해요.」 애슐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아가씨.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아가씨는 화내시는 게 당연 하다고 생각해요. 랠프는 정말 아가씨한테 무례한 짓을 했어요.」 플로러는 위로하듯 애슐러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염려하지 말아요. 그 일이라면. 랠프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그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내가 만일 랠프였더라도 역시 같은 행동 을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내게만은 비밀을 털어놓았으면 좋았을걸. 그랬 으면 결코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포아로가 테이블 가볍게 두드리며 의미깊게 기침을 했다. 플로러가 말했다. 「회의가 시작하려나 보군요. 이젠 말하지 말라는 신호 같은데, 한 가 지만 알려 줘요. 랠프는 어디 있지요?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나도 몰라요. 나는 정말 몰라요.」 애슐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리버풀에서 붙잡힌 게 아닙니까? 신문에는 그렇게 났던데요.」 포아로가 불쑥 한마디 했다. 「리버풀에는 없습니다.」 나도 한마디 했다. 「랠프가 있는 곳은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레이먼드가 말했다. 「에르큘 포아로 씨는 빼놓고 말이지요?」 이 가벼운 농담에 포아로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여기 있는 이 나는 무엇이든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잘 기 억해 주십시오.」 제프리 레이먼드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엇이든 모두 말입니까?」 그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거 참, 굉장하군요! 그러면 말씀해 주실까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랠프 페이튼이 어디 숨었는지 정말 짐작하신단 말입니까?」 「당신은 짐작이라고 하시지만,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크랜체스터입니까?」 「아니오, 크랜체스터는 아닙니다.」 포아로의 대답은 무게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몸짓으로 모두 자리에 앉 았다. 그 때 다시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파커와 가정부 미 스 러슬이었다. 그들은 문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포아로는 말했다. 「이제 모두 모였습니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오신 셈입니다. 」 그 말투에는 만족스러운 울림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한편 방안에 앉 은 모두의 얼굴에는 그 말을 듣고 불안스러운 빛이 스쳐 갔다. 어쩐지 함 정을 떠올리게 하는, 나가는 문을 막아 놓은 함정을 생각케 하는 분위기 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포아로는 좀 거만스러운 몸짓으로 손에 든 종이 쪽지를 읽었다. 「세실 부인,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 브랜트 소령, 제프리 레이먼드 씨, 랠프 페이튼 부인, 존 파커, 미스 일리저버스 러슬.」 다 읽고 나자 그는 종이 쪽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레이먼드가 물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읽은 것은 바로 용의자들의 명단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 에게는 저마다 애크로이드 씨를 살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실 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런 것은 싫어요. 나는 싫어요.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부인, 진정하십시오. 내 이야기를 다 듣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포아로의 말투는 엄숙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나서 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럼, 처음부터 말씀드리지요. 우선 나는 플로러 양에게서 사건의 해 결을 부탁받고 셰퍼드 씨와 함께 팬리 파크로 갔습니다. 나는 셰퍼드 씨 와 함께 테라스로 나가 창틀에 나 있는 구두자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래글런 경감의 안내를 받아 큰길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때 나무 사이로 외딴집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 안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 거기서 두 가지 물건, 풀먹인 베 조각과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거위 깃털을 발견했습니다. 베 조각은 부인들의 앞치마자락으 로 생각되었습니다. 래글런 경감이 집안 사람들의 알리바이 표를 보여 주 었을 때, 나는 하녀 가운데 한 사람 즉 심부름하는 애슐러 본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자기 방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혹시 그 사이에 그녀 가 외딴집에 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 시 누군가를 만나러 간 것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셰퍼드 씨의 말로, 사건이 일어난 날 밤 확실히 외부에서 누군가 이 댁으로 찾아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문 앞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만일 이 사 나이가 애슐러 본을 만나러 외딴 집으로 갔다고 생각하면 이 수수께끼는 풀리는 것 같습니다. 남자가 외딴집으로 갔다는 것은 거위 깃틸이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거위 깃털을 보자 나는 얼른 마약 중 독자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깃털 속에 코카인 가루를 넣어 코로 냄새맡 으며 다니는, 저 바다 건너 미국에서 그런 습관을 배워 온 남자를 말입니 다. 셰퍼드 씨가 만난 남자는 미국 사투리를 썼다고 했으니, 그 점으로 보아 이 추리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포아로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것은 시간 차이입니다. 애슐러 본이 외딴집으로 간 것은 9시 30분 전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9시 조금 지났을 때 벌써 외딴집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남 자가 30분쯤 기다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요. 아니면 그날 밤 외딴집에서 또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해 놓고 보면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우선 나는 가정부 미스 러슬이 그날 아침 셰퍼드 씨를 찾아와 마약 중독자 치료법에 대해 비상한 관심 을 나타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거위 깃털에 관련시켜 생각해 보았지요. 문제의 사나이가 팬리 파크에 온 것은 애슐러 본이 아 니라 미스 러슬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고 추리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애 슐러 본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외딴집으로 갔을까요? 이 의문은 얼마 안 가서 풀렸습니다. 나는 반지를, 라는 글자와 날짜가 새겨져 있 는 결혼 반지를 연못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랠프 페이튼이 9시 25분 쯤 외딴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고, 또 그 날 오후 마을 언저리의 숲 속에서 주고받은 대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 습니다. 랠프 페이튼이 누군지 젊은 여자와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상의 여러 가지 사실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비밀 결 혼, 비극이 있은 그날 발표된 약혼, 숲 속에서의 말다툼, 그리고 그날 밤 외딴집에서의 밀회. 그 결과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랠프 페이튼 과 애슐러 본 또는 페이튼 부인은 애크로이드 씨의 살해에 충분한 동기 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또 한 가지 뜻밖의 일도 확실 해집니다. 9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에 있었던 인물은 랠프 페이 튼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 운 점에 이르게 됩니다. 9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랠프 페이튼은 아닙니다. 그는 외딴집에서 애슐러를 만 나고 있었으니까요. 찰즈 켄트도 아닙니다. 그는 이미 떠나간 뒤였지요. 그럼, 대체 누구였을까? 그래서 나는 좀더 현명하고 더욱더 대담한 질문 을 자신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과연 애크로이드 씨는 누구와 함께 있었을 까?」 포아로는 이 마지막 말을 자랑스러운 듯 몸을 앞으로 내밀려 우리에게 던졌다. 그리고 큰 숙제를 떠맡긴 듯 자신은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항의했다. 「포아로 씨,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드실 작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혼자만 들은 게 아닙니다. 애크로이드 씨의 목소리를 확실히 들은 것은 나 혼자인지 모르지만, 브랜트 소령도 애크로이드 씨가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지요. 소령님은 테라스에 있어서 확실한 말은 못 들었지만 이야기하는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고 했습니다.」 포아로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브랜트 소령님은 애크로이 드 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순간 레이먼드는 어이가 없는 듯했으나 얼른 다시 침착한 태도로 돌아 왔다. 「그렇지만 브랜트 소령님은 잘못 생각했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하고 있습니다.」 브랜트 소령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포아로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그러나 소령님께서 그렇게 생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 포아로는 한손을 들어 상대방을 막았다. 「아, 아니! 당신이 무슨 이유를 들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이유를 찾아 보십시오. 이렇다면 어 떨까요.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도 이 점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레이먼드 씨가 들었다는 이야기의 말투 말입 니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입니다.」 포아로는 잠시 말을 끊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애크로이드 씨의 말을 되 풀이했다. 「<……지금은 지출이 많으므로 당신의 요구에 응할 수 없습니다… …> 어떻습니까,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레이먼드가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요. 애크로이드 씨는 가끔 나에게 편지 를 받아쓰게 했는데, 대개 지금과 같은 말투를 쓰셨습니다.」 포아로는 소리쳤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어하는 점입니다. 알겠 습니까?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따라서 그것이 그때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런데 만일 애크로이드 씨가 편지를 구술하고 있었다면…….」 레이먼드가 물었다. 「애크로이드 씨가 편지를 소리내어 읽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 렇다 해도 누군가에게 들려주었을 게 아닙니까?」 「어째서 그렇습니까? 서재에 애크로이드 씨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데요. 아시겠습니까? 애크로이드 씨 외에 다른 사 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그런 편지를 혼자서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 운데요. 만일 정신이 좀 이상하지 않는 한…….」 포아로는 부드럽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고 계십니다. 사건 전날인 수요 일에 애크로이드 씨를 찾아왔던 인물 입니다.」 모두들 포아로를 쳐다보았다. 「수요일입니다. 찾아왔던 젊은이 자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러나 그 사람이 근무하는 회사는 내 흥미를 여간 돋구지 않았습니다.」 레이먼드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녹음기 회사 말이지요. 그렇지, 녹음기야. 당신도 그것을 생각하셨군 요.」 포아로는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애크로이드 씨는 큰 마음먹고 녹음기를 사려 했지요. 나는 호기심에서 그 회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회사측 말을 들 으니 확실히 애크로이드 씨는 그 회사 외판원을 통해 녹음기를 한 대 산 모양입니다. 그 사실을 비서인 당신에게 왜 숨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 레이먼드는 중얼거렸다. 「아마 나를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을 겁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아이들 처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했지요. 하루 이틀 숨겨 두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아마 새 장난감이라도 산 것처럼 혼자서 가지고 노셨 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를 알겠습니다. 당신 말씀대로 아무도 여느 대화에서는 그런 말투를 쓰지 않을 터이니…….」 포아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브랜트 소령이 왜 서재에 있었던 것을 당신인 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설명되는 셈이지요. 띄엄띄엄 들려 온 것이 구술하는 말의 단 편이었기 때문에, 소령님은 저도 모르게 당신이 애크로이드 씨와 함께 있 는 줄로 생각했겠지요. 소령님의 의식은 전혀 다른 곳에 쏠려 있었으니까 요. 나무 사이로 언뜻 무엇인가가 보였거든요. 소령님은 그것이 플로러 양인 줄 알았지만, 정말은 애슐러 본이 흰 앞치마를 입고 몰래 외딴집으 로 가는 참이었지요.」 레이먼드는 이미 처음의 놀라움에서 깨어나 있었다. 「확실히 포아로 씨의 추리는 비상합니다. 도저히 우리 같은 사람은 상 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본질적인 문제는 움직이지 않고 있 잖습니까. 녹음기에 녹음을 하고 있었다면 9시 30분까지 살아 있었던 셈 이 되지요. 그리고 이때 이미 찰즈 켄트란 사나이는 확실히 현장 부근에 없었고요. 그렇다면 랠프 페이튼이라고 생각하기에…….」 레이먼드는 머뭇거리며 애슐러 쪽을 곁눈질해 보았다. 애슐러는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 「랠프와 나는 꼭 9시 45분에 헤어졌어요. 랠프는 결코 집 가까이 오지 않았어요. 확실해요.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를 다시는 만나 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만나 보라고 했어도 싫다고 했을 거예요.」 레이먼드는 변명했다. 「당신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처음부터 페이튼 대위는 결백 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때에 나타났고 조사해 볼수록 대 위는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제라도 나타나서… ….」 포아로가 말을 가로막았다. 「페이튼 대위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게 당신의 충고로군요.」 「그렇지요, 만일 그가 있는 곳을 아시면…….」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방금 나는 모든 사 실을 다 알고 있다고 했는데도. 전화에 대한 진상도, 창틀의 구두 자국도, 랠프 페이튼이 숨어 있는 곳도 말입니다.」 브랜트 소령이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어디 있습니까?」 포아로는 미소지었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내가 물었다. 「크랜체스터입니까?」 포아로는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같은 말만 하시는군요. 크랜체스터라는 생각이 아주 머리 속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지요. 크랜체스터가 아닙니다. 그는 바로 저기 있습니다.」 포아로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두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랠프 페이튼이 문가에 서 있었다. 랠프 페이튼 그것은 나에게 있어 아주 불쾌한 순간이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놀라서 소리쳤던 생각만 날 뿐이다. 랠프 페이튼이 아내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나를 보고 웃을 때에야, 비로 소 정신을 가다듬어 둘레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포아로도 웃으며 나를 보고 웅변투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에르큘 포아로에게도 숨겨도 소용없다고 아마 서른여섯 번쯤은 말했을 겁니다. 반드시 찾아내 보인다고 말입니다.」 포아로는 처음의 자세로 돌아갔다. 「며칠 전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작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우리 여 섯 사람이. 나는 나를 뺀 다섯 분에게 저마다 숨기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 니다. 그 가운데 네 분은 비밀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셰퍼드 씨만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수상하다고 의심했지요. 그날 밤 셰퍼드 씨는 스리 보어즈 여관으로 랠프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셰퍼드 씨는 랠프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랠프는 범 행 현장에서 곧바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셰퍼드 씨는 사태가 랠프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았을 테지요.」 나는 유감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모두 이야기하지요. 나는 그날 오후 랠프를 만나러 갔습니다. 처음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더니, 나중에는 남몰래 결혼한 일이며 곤경에 빠져 있는 이야기를 다 해주더군요. 나는 만일 살인이 발견되고 곧 이 사실이 드러나면 틀림없이 랠프가, 그의 사 랑하는 아내가 혐의를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그에 게 솔직하게 이런 이야기를 모두 했습니다. 만일 아내에게 혐의가 씌워진 다면 랠프도 어떻게 해서든지……그…….」 내가 말하기 거북해 하자 랠프가 다음 말을 이어 뚜렷이 말했다. 「밤중에 몰라 달아나기로 계획했지요. 애슐러는 나를 남겨 두고 집으 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나 생각했지요. 아버지는 이미 낮에도 애슐러에게 심한 말을 했었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한테 지독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고, 마침 내 살피지 않고…….」 그는 말을 끊었다. 애슐러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뒷걸음쳤다. 「어머나, 랠프,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내가 정말 그런 엄청난 짓을 했으리라고 생각했단 말인가요?」 포아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면 셰퍼드 씨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다시 화제를 돌립시다. 셰퍼 드 씨는 될 수 있는 대로 랠프를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페이튼 대 위를 경찰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추었던 겁니다.」 레이먼드가 물었다. 「어디였습니까? 셰퍼드 씨 댁입니까?」 포아로는 말했다. 「아닙니다. 나처럼 한 번 추리해 보시지요. 셰퍼드 씨가 랠프를 숨긴 다면 어떤 곳을 택할까요. 우선 손쉽고 가까운 곳이라야 됩니다. 나는 크 랜체스터로 생각했지요. 호텔일까? 하숙집일까? 아니, 그것은 더 불리해. 그럼, 어디일까? 그렇지! 있고말고요. 요양소입니다. 정신병 환자 요양소 지요. 나는 이 추리를 실증해 보았습니다. 우선 정신병 환자 조카를 만들 었지요. 그리고 어디 좋은 요양소가 없을까 하고 셰퍼드 씨 누님께 물었 습니다. 캐럴라인은 셰퍼드 씨가 환자를 보낸 적이 있는 크랜체스터에서 가까운 요양소를 두 곳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얼른 두 군데를 알아보 았지요. 과연 그 가운데 한 곳에 토요일 새벽 셰퍼드 씨 자신이 환자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본래 이름을 숨겼지만 페이튼 대위임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수속을 밟아 나는 그 환자를 도로 데려올 허가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랠프는 새벽에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 입니다.」 나는 포아로를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캐럴라인이 내무부 감식과 직원이라고 했던 게 랠프였군요. 그런 줄 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당신이 쓴 글을 읽고 너무 객관적으로 적었다고 한 이유를 아시겠지 요? 씌어진 사실에 관한 한 실로 정확합니다. 씌어 있지 않은 것도 꽤 많 은 것 같더군요. 그렇지요, 셰퍼드 씨?」 나는 완전히 당황하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랠프가 말했다. 「셰퍼드 씨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신의를 지켜 주셨습니다. 수고스럽게 도 나를 위해 애쓰셨지요. 셰퍼드 씨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최선의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포아로 씨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습 니다. 나는 스스로 남자답게 나타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신 문을 읽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 어떻게 되어 나가는지 도 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포아로는 빈정댔다. 「셰퍼드 씨는 정말 신중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소한 비밀이 라도 알아내고야 맙니다. 그것이 내 일이지요.」 레이먼드가 초조한 듯 말했다. 「자, 그러면 그날 밤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랠프가 말했다.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9시 45분쯤 외딴집에서 나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까, 어떤 방침을 세울까 생각하며 오솔길을 걸어갔습니다. 나에게 알리바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맹세합 니다. 서재로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살아 계신 모습도, 돌아가 신 뒤의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여기 모인 여러분들만은 믿어 주십시오!」 레이먼드가 중얼거렸다. 「알리바이가 없다고요? 나는 물론 믿지만, 그러나 역시 곤란한데요.」 포아로가 명랑하게 말했다. 「아니오. 이로써 일은 아주 간단해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말하는 뜻을 아시겠습니까? 모르겠다고요? 그럼, 말씀드리 지요. 페이튼 대위를 구하기 위해 진범이 자백하면 되는 겁니다.」 포아로는 웃으며 모두들 둘러보았다. 「그렇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오늘 밤 일부러 래글런 경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 다. 아직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경감에게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 이지요. 적어도 오늘 밤만은 아직.」 포아로는 다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목소리와 태도 가 달라졌다. 순간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위협적인 태도로 바뀌고 만 것이다. 「여러분, 나는 애크로이드 씨 살해범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알 고 있습니다. 그 범인에게 나는 말합니다. 내일이면 나는 진상을 래글런 경감에게 보고합니다. 알겠습니까?」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 속으로 하녀가 쟁반에 전보 한 통 을 담아 들고 들어왔다. 포아로는 봉투를 뜯어 보았다. 브랜트 소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이 침묵을 깨뜨렸다. 「범인이 이 가운데 있다고 하셨지요? 그것은 누구입니까?」 포아로는 전보를 다 읽고 손에 구겨 쥐었다. 그는 구긴 종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레이먼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보입니다. 미국으로 항해중인 기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다시금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포아로는 일어서서 공손히 인사했 다. 「여러분, 오늘 밤 모임은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럼, 부디 잊지 마 십시오. 내일이면 나는 진상을 래글런 경감에게 보고합니다.」 범인은…… 포아로는 나에게 좀 남아 있으라고 슬쩍 눈짓을 해보였다. 나는 난롯가 에 가서 지펴져 있는 장작을 발끝으로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포아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순간적이나마 지금 목격한 장 면을 포아로가 과장해서 자신을 흥미있고 중요한 인물로 만들려는 연극 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런데도 내 마음속 깊은 한구석에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아로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고지식한 데가 있었 다. 그러나 또 한편 그는 당치도 않은 것을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문을 닫고 포아로는 난롯가로 돌아왔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어떻습니까, 셰퍼드 씨,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나는 어리둥절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노리는 겁니까? 범인에 게 그런 경고를 하기보다는 얼른 래글런 경감에게 보고하는 게 좋지 않 을까요?」 포아로는 앉아서 러시아 담배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는 말없이 담배만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이윽고 말했다. 「작은 회색 뇌세포를 움직여 보십시오. 내 행동의 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아직 진범이 누군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오늘 밤 여기 모였던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확 신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하신 말씀은 그 미지의 범인이 자백해 주기를 바라고 한 거지요.」 포아로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생각이군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알고 있는 척하면 범인 쪽에서 자백하리라 여기고 계신 줄 알았는데 요. 자백까지는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내일 아침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애 크로이드 씨를 침묵으로 몰아넣듯 당신 입을 막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신 겁니까?」 「그럼, 나 자신을 미끼로 삼아 범인에게 덫을 놓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을 만큼 영웅적인 인간은 못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하신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 게 경고해 버리면 범인에게 달아나라는 것이나 다름없잖습니까?」 포아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달아날 수 없습니다. 달아나는 길은 단 하나, 그러나 그 길은 자유로 이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나는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정말 오늘 밤 여기 모였던 사람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 고 여기십니까?」 「그렇지요.」 「누구입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포아로는 피우던 담배 꽁초를 난로 속에 던지고 생각에 잠겨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길을 더듬어 가며 말씀드리지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 보겠습니다만, 모든 사실이 의심할 나위없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맨 먼저 내 주의를 끈 것은 전화입니다. 만일 랠프 페이튼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전화를 건 것은 어리 석은 짓이 됩니다. 그러니까 랠프 페이튼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팬리 파크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그 전화를 걸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범인은 그 참극이 있은 날 밤, 애크로이 드 씨 집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전화 는 공범자의 손으로 걸렸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추리를 자신은 없으나 한 번 해보았던 겁니다. 다음에는 전화를 건 동기를 알아보았지요. 이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 니다. 결과로부터 판단해서 거꾸로 추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야 발견되었을 시체를 그날 밤 안으 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점에는 이의가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애크로이드 씨는 자기 방에 들 어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 밤에는 아무도 서재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좋습니다. 사건은 매우 진전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가 지 확실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범행이 다음날 아침이 아니라 그날 밤 안 으로 발견되어서 유익한 점이 무엇일까요?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범인은 범행이 발견되어 문이 부서졌을 때 또는 그 바로 뒤에 자기도 현장에서 함께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 또 한 가지, 벽에서 의자가 앞으로 끌어당겨져 나와 있던 것 을 생각해 봅시다. 래글런 경감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반대로 처음부터 아주 중요시했습니다. 당신이 쓰신 글 속에 서재 배치도를 그려 두었더군요. 지금 꺼내 보시 면 잘 아시겠지만, 파커가 증언한 위치까지 그 의자를 끌어내 놓고 보면, 바로 방문과 창문의 일직선 위에 오게 됩니다.」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창문이라고요?」 「당신도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군요. 나는 의자가 앞으로 끌어당겨져 나와 있던 것은, 무언가 창문과 관계있는 것을 방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상상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곧 집어치우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등받 이 높은 옛날 의자이기는 하나 창문이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문 앞에 책이며 잡지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겠지요. 그런데 의 자를 앞으로 끌어내면 그 테이블이 완전히 가려집니다. 나는 여기서 얼른 흐릿하나마 진상의 일부를 냄새맡았습니다. 혹시 저 테이블 위에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될 무슨 물건이 놓였던 게 아닌가 생각했던 거지요. 범인이 올려놓은 것이라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짐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아주 흥미있는 몇 가 지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범행이 발견된 뒤에는 얼른 치워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가 걸려지고,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범인은 그 현장에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경찰이 와 닿기 전 현장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파커, 브랜 트 소령 그리고 레이먼드였지요. 파커는 곧 빼놓았습니다. 언제 범행이 발견되든 반드시 현장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의자가 앞으 로 나와 있었다는 것도 파커가 내게 일러주었지요. 그러므로 파커는 혐의 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에 관한 혐의는 풀렸으나 팰러즈 부인을 협 박한 것은 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레이먼드와 브랜드 소령은 여 전히 혐의를 벗지 못했습니다. 만일 범행이 다음날 아침에 발견될 때는 테이블 위의 물건이 다른 사람 눈에 띄기 전에 현장에 나타나기 힘들었 을 테니까요. 그럼, 그 물건이란 무엇일까? 나는 오늘 밤 서재에서 말소리가 띄엄띄 엄 들려 왔었다고 말했지요? 녹음기 회사의 외판원이 애크로이드 씨를 찾아왔다고 했을 때, 곧 녹음이가 내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바로 30분 전에 내가 이 방에서 이야기한 것을 들으셨겠지요? 모두들 내 말에 찬성했습니다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날 밤 애크로이드 씨가 녹음기에 녹음을 하고 있었다면, 그 녹음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건 정말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녹음기를 산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크로이 드 씨의 소유물 가운데 녹음기가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니 그 테이블 위 에 있던 무엇을 치웠다면, 그것은 녹음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추리에는 몇 가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의 주의는 물론 모두 피해자에게 쏠려 있겠지요. 따라서 범인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테이블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녹음기는 꽤 큰 물건입니다.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갈 수는 없 는 거지요. 그것을 집어 넣을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을 겁니다. 내가 점점 접근해 가고 있는 점을 아시겠습니까? 범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 타나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현장에 곧 뛰어든 사람, 범행이 다음날 아침 에 발견되면 현장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숨길만한 커다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인물…….」 나는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왜 녹음기를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레이먼드와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9시 30분에 들렸던 것이 애크로이 드 씨가 녹음한 목소리인 줄 아십니까? 이 편리한 기계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말을 녹음해 두었다가 뒤에 비서나 타이피스트가 그것을 틀면 그 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나는 숨가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렇습니다. 9시 30분에 애크로이드 씨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 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녹음기였지, 결코 애크로이드씨 자신이 아니었습니 다.」 「범인이 녹음기를 틀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그 시각에 범인이 방에 있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기계 장치가 되어 있었으리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요. 시한 장치라든지 간단한 괘종 시계를 응용한 장 치 같은 것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범인을 상상하는 데 두 가지 조건이 주어집니다. 애크로이드 씨가 녹음기를 사들인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기계에 대한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럼, 이쯤 추리해 놓고 다음엔 창가의 구두 자국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세 가지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두 발자국은 확실히 랠프 페이튼의 것일지도 모른다. 랠프는 그날 밤 팬리 파크에 왔었으므로, 혹시 창문으로 기어올라가 애크로이드 씨가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그 발자국은 혹시 랠프의 구두와 같은 고무창을 댄 구두를 신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집안 사람들의 구두에는 이와 같은 모 양의 것이 없다. 그러면 누군지 외부 사람이 랠프 페이튼과 똑같은 구두 를 신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개와 휘파람> 술집에 있는 여급사의 말에 따르면 찰즈 켄트는 낡은 반장화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셋째, 그 구두 자국은 누군가가 랠프 페이튼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일부 러 찍어 놓은 것이다. 이 세번째 추리를 증명하려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랠프의 구두 한 켤레는 경찰에서 압수했습니다. 랠프는 다른 사람이든, 그 구두는 그날 밤 아무도 못 신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두는 닦으 려고 아래층에 갖다 두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에서는 랠프가 같은 구두를 두 켤레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나 도 조사해 본 결과 사실임을 알았지요. 그런데 내 추리가 맞으려면 범인 은 그날 밤 랠프의 구두를 신었어야 합니다. 그런렇다면 랠프는 다른 구 두를 신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단화를 세 켤레나 가지고 있었으리라 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는 혹시 반장화로 여기는 게 좋겠다고 상상하고, 나는 이 점을 당신 누님을 통해 조사해 보았지요. 이때 나는 구두 빛깔을 좀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본래의 목적을 감추는 연막 작전이었지 요. 누님이 조사해 온 결과 당신도 아시다시피, 과연 랠프는 반장화를 한 켤레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제 아침 랠프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 는 우선 사건이 일어난 날 밤 무슨 구두를 신었느냐고 물었지요. 랠프는 곧 반장화를 신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할 때에도 반장화를 신고 있 었지요. 그 밖에는 신을 게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범인에 대한 한 가지 조건이 더 생깁니다. 즉 그날 스리 보어즈 여관에서 랠프의 구두를 가져올 기회가 있는 사람이지요.」 포아로는 숨을 크게 쉬고 나서 다시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범인은 은테이블에서 단검을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집안 사람들은 누구나 다 단검을 꺼 낼 수 있었습니다만, 플로러 애크로이드 양이 은테이블을 보았을때는 확 실히 단검이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포아로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럼, 다시 한 번 요약해 볼까요? 이제는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까요. 그날 오후 스리 보어즈 여관에 갔던 사람, 애크로이드 씨가 녹음기를 산 것을 아는 사람, 기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 플로러 양이 오기 전 은테이 블에서 단검을 꺼낼 기회가 있었던 사람, 녹음기를 감출 만한 무언가를, 이를 테면 검은 가방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범행이 발견되고 파커 가 경찰에 전화걸 동안 단 몇 분이라도 서재에 혼자 있었던 사람, 그것은 다름아닌 당신, 셰퍼드 의사입니다!」 오직 진실이 있을 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게 아닙니까?」 포아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신은 똑똑합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지목하게 된 것은 사소한 시간 차이였습니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물었다. 「시간 차이?」 「그렇습니다. 기억하겠지만, 당신도 다른 사람들도 문지기 집에서 안 채까지는 걸어서 5분밖에 안 걸리며, 테라스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오면 5 분도 채 못 걸린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안채를 나온 것은 8시 50분, 이 것은 당신 자신과 파커가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문지기 집 앞을 지날 때 9시를 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산책할 만 한 밤이 못 되었습니다. 그럼, 5분이면 갈 곳인데 왜 10분이나 걸렸을까 요? 그리고 또 서재 창문이 잠겨 있었다는 것은 당신만 아는 일이었습니 다. 애크로이드 씨는 당신에게 창문이 잠겼느냐고 물었을 뿐 실제로 확인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서재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요? 그 10분 동안 집 밖을 돌아 구두를 바꿔 신고 창문으로 서재에 들어 가 애크로이드 씨를 찌르고, 9시에는 문지기 집 앞까지 올 수 있었겠지 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애크로이드 씨는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에 창문으로 기어올라 오는 당 신을 못 봤을 리 없고, 만일 보았다면 큰 소동이 일어났을 게 아닙니까. 만일 서재를 나오기 전, 그의 의자 곁에 서 있을 때 찔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범행 뒤 당신은 현관으로 나와 곧 외딴집으로 가서 그날 스리 보어즈 여관에서 훔쳐온 랠프의 구두를 꺼내 신고 진땅이 있는 데를 밟 아 창가에 발자국을 낸 뒤, 창문으로 서재에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그고 다시 외딴집으로 와사 자기 구두를 바꿔 신은 다음 대문 쪽으로 얼른 갔 지요. 지난번 당신이 세실 부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실제로 해보니 꼭 10 분 걸리더군요. 그런 다음 당신은 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알리바이는 충분합니다. 녹음기가 9시 30분에 틀어지도록 당신이 장치해 두었으니까 요.」 「포아로 씨!」 나는 입을 열었으나 그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너무 이 사건에 열중하다가 신경이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내가 애 크로이드 씨를 죽여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몸의 안전을 위해서지요. 팰러즈 부인을 협박한 것은 당신입니다. 팰 러즈 씨가 죽은 원인을 주치의인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뜰에서 처음 뵈었을 때, 당신은 1년 전 유산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하셨지 요.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 봐도 유산을 받을 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당신 은 팰러즈 부인을 협박해서 2만 파운드 받은 것을 그렇게 설명하신 겁니 다. 그러나 그 돈을 모두 투기에 쓸어 넣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협박하고 못살게 굴어 결국 팰러즈 부인은 자살하고 말았지요. 만일 애크 로이드 씨가 이 사실을 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든 당 신은 다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겠지요.」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럼, 전화는? 그 점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겠지 요?」 「솔직히 말해 그 전화가 정말 킹즈 애벗 역에서 걸려 왔다는 것을 알 았을 때는 나도 앞이 캄캄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당신의 창작인 줄로 만 알았거든요. 참 교묘한 계교였습니다. 팬리 파크에 가서 시체를 발견 하고, 알리바이 공작의 중요한 증거가 될 녹음기를 꺼낼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요. 처음으로 누님을 방문하여 금요일 오전에 어떤 환자가 왔었느냐고 물었을 때 어렴풋이나마 이 계교를 짐작했습니 다. 아직 미스 러슬에 대한 일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지요. 그 녀가 찾아온 것은 우연이었지만 내게는 퍽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 에 당신은 내 질문의 참뜻을 짐작하지 못했고,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무사히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날 아침 찾아온 환자 가운데 미국 항 선의 요리사가 있었으니까요. 그 남자는 그날 밤 차로 리버풀에 가게 되 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인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는 그 뒤 육지를 떠나 멀리 대양으로 나갈 사람이었으니까요. 나는 라이언 호라는 배가 토요일에 떠나는 것을 그 남자의 이름도 알아내어, 기선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아까 내가 받은 전보는 바로 그 사람한테서 온 것이었습니다. 」 포아로는 내게 전보를 건네 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 다. 사실임에 틀림없음. 셰퍼드 의사 선생님의 부탁으로 어느 환자에게 편 지를 전하고 역에서 의사에게 회답을 보고함. <답없음>이라는 간단한 보 고였음. 포아로는 말했다. 「참으로 교묘한 생각이었습니다. 전화는 확실히 걸려 왔었지요. 누님 이 당신이 전화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들을 수 있었던 것 은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뿐이지요.」 나는 하품을 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될까 요?」 「그럴까요? 내 말을 잊지 마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래글런 경감에게 진상을 그대로 보고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당신의 착한 누님을 생각해 서 이제 한 가지 좋은 방법을 기꺼이 가르쳐 드리지요. 예를 들면 수면제 과용이라는 방법도 있겠지요. 아시겠습니까? 그렇지만 랠프 페이튼 대위 의 혐의만은 벗겨 주어야 합니다. 이건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입니 다.」 「충고를 많이 하시는군요. 이제 모두 이야기하셨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 아직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애크로이드 씨의 입을 막은 것처럼 이 포아로에게도 그렇게 하려는 건 현명하지 못 한 일입니다. 그런 식의 시도는 에르큘 포아로에게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아시겠지요.」 나는 조금 미소를 띠며 말했다. 「포아로 씨,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그런 바보는 아닙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하품을 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요. 덕분에 오늘 밤은 아주 재미있고 유 익하게 보냈습니다.」 포아로는 일어나서 집으로 가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변명 새벽 5시,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일은 다 끝났다. 열중하여 내리 글을 썼더니 팔이 뻐근하다. 이 수기가 이렇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언제나 이 수기 가 포아로의 실패담으로 출판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참으로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랠프 페이튼과 팰러즈 부인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미 이런 파국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부인이 랠프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은 지나친 염려였지만, 그러나 만일의 일을 염려하는 의구심은 그 날 밤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에 가서 사실을 듣기까지 좀처럼 가시지 않 았다. 가엾은 것은 애크로이드 씨다. 그러나 나는 한 번 기회를 주었던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편지를 읽으라고 몇 번이나 권했던 가?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 애크로이드 씨처럼 의심많은 사람에게는 그렇 게 하는 것이 오히려 편지를 읽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무의 식중에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날 밤 애크로이드 씨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그는 위험이 닥쳐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 면서도 그는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검을 사용한 것은 미리부터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은테이블에 단검 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작아서 다루기 편리하고 흔적이 남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애크로이드 씨를 살해할 의사는 미리부터 있었던 것 같다. 팰러즈 부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곧 부인이 애크로이드 씨에 게 모두 자백하고 죽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길에서 애크로이드 씨를 만났을 때 몹시 흥분해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확실히 믿어지지 않아 내게 고백할 기회를 주려는 것인 줄 여겼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예방책을 강구했다. 만일 애크로이드 씨의 고민이 랠프 때문이었다면 당연히 아무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녹음기는 이틀 전 애크로이드 씨가 고쳐 달라고 내게 맡겼었다. 좀 고 장이 났는데, 그에게 말해 회사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내가 고치겠다고 가져왔었다. 나는 그것을 고쳐 기계 장치를 한 다음 그날 밤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 나는 뛰어난 글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조금이나마 자부하고 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데는 얼마나 교묘하게 잘 씌어져 있는지…….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애크로이드 씨의 서 재를 나온 것은 꼭 8시 50분이었다. 편지는 여전히 끝까지 다 읽혀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나는 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잠깐 망설이며, 무슨 잊은 물건은 없나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모두 사실 그대로다. 그러나 첫 글귀 아래에 붉은 줄을 그어둘 만하리 라! 그 공백의 10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스럽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문가에 서서 방안을 한 번 둘러보았을 때, 나는 아주 만족했다. 잊어버 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녹음기는 창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9시 30분에 저절로 틀어지도록 장치해 두었다. 괘종 시계의 원리를 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녹음기가 문에서 보이지 않도록 안락의자가 끌어내 놓여져 있었다. 문 앞에서 파커와 마주쳤을 때 정말 굉장히 놀랐다. 이 사실도 충분히 기록해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 뒤 시체가 발견되고, 파커에게 경찰에 신고하라고 시키는 장면 같은 데는 얼마나 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가. 나는 몇 가지 아주 하찮은 일을 처리했다. 정말 감쪽같은 일이었다. 녹음기를 가방 속에 집어 넣고 의자를 제자리 에 갖다 놓았을 뿐이었다. 파커가 그 의자를 눈치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했다. 시체를 보고 정신이 나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잘 훈련받은 하인의 직업적인 콤플렉스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9시 45분까지 애크로이드 씨가 살아 있었다는 플로러의 증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 사건 전체가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 누구나 그 혼란 가운데 관련된 것 같 았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한 것은 캐럴라인 누님이었다. 누 님이 모든 걸 알아차릴지도 모른다고 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누님이 내 성격이 약하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캐럴라인은 끝내 진상을 모를 것이다. 포아로가 말한 것처럼 내 게는 한 가지 피할 길이 있으니까. 나는 포아로를 믿는다. 그는 래글런 경감과 단둘이서 일을 잘 처리해 주겠지. 캐럴라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다. 그녀는 남동생인 나를 몹시 사랑할 뿐 아니라 자존심도 있다. 내가 죽으면 누님은 퍽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언젠가 사라 지겠지. 이 수기가 끝나는 대로 나는 모두 봉투에 넣어서 포아로 앞으로 겉봉 을 써서 보내려 한다. 그리고 나서……그런데 뭘로 할까? 베로날? 모든 것은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팰러즈 부인의 죽음에 대해 내가 책임 을 진다는 것은 아니다. 부인의 죽음은 그녀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인 것이다. 부인에 대해서는 아무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 또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베로날로 하자. 하지만 에르큘 포아로가 은퇴하여 무엇 때문에 이런 시골에까지 와서 호박을 가꾸고 있었는지 참으로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