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서류를 노려라 ========== 아가사 크리스티.. --- 나오는 사람들 --- ** 제인 핀 ** 루시타니아 호가 침몰되기 직전 미국 정부의 첩보원으로 부터 비밀 서류를 넘겨 받은 아가씨. 용기와 지혜로 스파이단을 따돌리고 끝까지 비밀서류를 지킨다. ** 토미 베레스포드 ** 터펜스 카우리의 파트너로 활약하는 퇴역 육군 중위. 영국 정보국의 요청으 로 국제 스파이단을 상대로 비밀 서류를 찾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활약한 다. ** 줄리어스 하이세이머 ** 제인 핀의 사촌 오빠. 루시타니아 호의 생존자 명단에서 제인 핀의 이름을 발견하고 영국에 건너왔다가 터펜스와 토미의 일을 돕게 된다. 용기있는 청 년 재벌. ** 에드가튼 경 ** 국회의원이자 변호사. 차기 수상후보에 오를만큼 명망있는 인물이다. 비밀 서류를 찾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 터펜스 카우리 ** 호기심 많고 용기 있는 여자. 우연히 만난 옛 동료인 토미 베레즈포드와 비 밀 서류를 찾는 일에 뛰어들어 스파이단을 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 마거리트 밴디마이어 ** 일명 '리타'라고 불림. 루시타니아 호에서 미국 정보원의 뒤를 쫓다가 제인 핀에게 서류가 넘겨진 것을 알고 제인 핀에게 접근한다. ** 에드워드 위친튼 ** 에스토니아 유리기구 회사라는 위장 회사를 차려 놓고 스파이 활동을 한다. 비밀서류를 찾기 위하여 터펜스 일행과 접촉하다가 도리어 정보를 제공. ** 브라운 **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국제 스파이단의 두목.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 는 야망을 가진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 1. 루시타니아 호 최후의 날.. 세계 제 1차 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전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할 뿐 세계는 마치 암흑에 갇힌 것처럼 어둡기만 했 다. 어느 날 밤, 망망한 대서양 한복판을 대형 여객선 한척이 미끄러지듯 물살 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네개의 굴뚝에다 대형 돛대를 두 개나 가진 이 늘씬한 배의 선체에는 '루시타니아'라는 배 이름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선 명히 빛나고 있었다. 루시타니아 호는 1주일 전에 미국의 뉴욕 항을 떠나 지금 영국을 향해 항해 중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피어오르고 있는 뭉게구름은 전쟁 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듯 평화로와 보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U보트다! 독일의 잠수함이다!" 갑자기 루시타니아 호의 갑판위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유유히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달리던 루시타니아호 앞에 악마와 같은 독일 해군의 잠수함이 불쑥 그 모습을 들이댔던 것이다. "아앗, 어뢰다! 독일군의 어뢰가 다가온다! 어서 피하라!" 그러나 망을 보고 있던 선원의 고함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콰꽝!" 바다를 울리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서운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독일군이 쏜 두 발의 어뢰가 루시타니아 호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다음 순간, 곧 배는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전 선원은 갑판으로 집결하라! 구명 보트를 내려라!" 선장의 필사적인 고함소리가 비명소리를 뚫고 날카롭게 울려 펴졌다. 승객들은 서로 밀치고 밀리면서 뱃머리에 있는 구명 보트 앞으로 몰려들었 다. "어서 구명 보트를 내려 줘요! 배가 가라 앉아요!" "아앗, 발이 미끄러워요!" "이거 왜 이래요? 내가 먼저란 말이오!" 상갑판은 서로 먼저 보트에 타려고 하는 사람들로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보트 수가 부족합니다! 여자와 어린이가 우선입니다! 남자분들은 비켜 서 주십시오!" 마이크를 쥔 선원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밀고 들어오는 남자 승객들을 저 지 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둔 승객들은 막무가내였다. 말 그대 로 구명 보트 주위에는 지옥과 같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러는 사이에도 배는 점점 기울어 가고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는 이 혼란 스러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이는 17.8세 가량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침착 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 있는 모습은 주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저어, 실례합니다만...."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크고 눈이 유난히 날카로와 보이는 남자 였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뚫 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제게 하신 말씀인가요?" '아! 이젠 어쩔 도리가 없어....'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 여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남자는 결심한듯이,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 다. "아가씬 미국인이죠?"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조국을 사랑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여자는 침착하게, 역시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어조에는 주위의 혼 란 따윈 범접못할 어떤 용기가 짙게 깔려 있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가씨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탁입니다." 엄숙하고도 어딘지 모르게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어조였다. "나는 비밀 임무를 맡고 있는 미국 정부의 요원입니다. 지금 나는 중요한 서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절대 적으로 필요한 서류입니다." 여자의 눈은 긴장감으로 빛났다. "이 서류를 아가씨께 맡기겠습니다." "예엣?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아마 난 죽게 될 겁니다. 구명 보트에는 여자와 어린이들 밖에 탈 수 없 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건 불가능하겠지요. 이미 각오 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서류만은 바다에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 "그렇더라도 어떻게 제가 감히...." "당신은 용기가 많은 여성입니다. 아가씨라면 틀림없이 이 서류를 지킬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남자는 양복 저고리의 가슴 위쪽을 손으로 잡고 말을 이었습니다. "자, 이 서류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침착한 겉 모습과는 달리 마음 속에서는 거센 송 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듯.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여자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잠깐 손을 멈췄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서류는 적의 스파이가 혈안이 되 어 쫓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악 독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여자는 상기된 볼에 처음으로 생긋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잘 알겠어요. 어떤 위험이든지 각오하고 있어요. 목숨을 걸고 이 서류를 지키겠어요." 여자는 조용하게 그러면섣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서류는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전해 주면 되나요?" 여자의 침착하고도 주도면밀한 태도에 남자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런던의 미국 대사관에 가서 대사에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걱정마셔요." "자, 그럼....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한 다음 속주머니에서 손을 끄집어 내어 여자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남자의 손으로부터 기름종이에 싸인 작은 봉투가 여자의 손으로 뎄겨 졌다. 그리고 나서 남자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종종 걸음으로 사람들이 붐비는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여자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보트에 탈 차례가 가까와졌던 것이다. 그후, 곧 로시타니아 호는 침몰하였다. 보트에 타지 못했던 승객들은 대서 양 한복판에 그대로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보트에 탔던 승객들 중에 서도 많은 사람들이 행방불명되었다.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미국인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독일에 선 전포고를 하고 제 1 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지옥과 같았던 4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독일은 마침내 미국, 영국,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게 항복 했고, 제 1 차 대전은 막을 내렸다. 움추렸던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 고, 곳곳에서 재건의 망치소리가 울려 퍼졌다. 2. 해후.. 런던 도버 거리의 한 지하철 입구.. "아니, 이거 터펜스, 터펜스 아냐?" "어머, 토미! 정말 오래간만어요!" 두 사람의 젊은 남녀는 와락 두 손을 움켜 쥐었다. 둘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한 친구처럼 보였다. "자, 우리 어디 다방에라도 들어가자고! 여기서는 얘기할 수가 없잖아?" 토미라고 불린 청년이 쾌활하게 말했다. "좋아요. 나도 오랫만에 만난 친구와 그냥 헤어지기는 싫으니까요." 두 사람은 나란히 근처의 다바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여전하군, 터펜스. 생기있는 얼굴, 그리고 탄력있는 목소리... 아주 좋아 보이는 걸." 터펜스라는 여자는 정말로 아주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두 눈을 빛내며 말 했다. "토미, 당신도 좋아 보여요. 그런데 지금은 뭘 하고 계시나요, 토미 베레즈 포드 중위님? 전쟁도 끝났으니 군인은 아닐테고...." 토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말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몸이지." "어머, 그렇다면 실업자란 말이군요?" "실업자라니 무슨 그런 맥빠지는 말씀을...." 터펜스는 청년의 별로 말쑥하지 못한 옷차림을 스스럼없는 눈으로 빤히 바 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단지 어울리는 직업을 찾기 위해 탐색 중이지." "호호... 그 말이나 실업자나 결국 같은 뜻 아녀요?" "하하하... 그게 그렇게 뻍나?" 두 사람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채 한참동안 유쾌하게 웃었다. "참. 그런데 터펜스는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지? 설마 아직도 육군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그만둬 버렸어요." 터펜스는 간단히 말했다. "뭐야? 그럼 직업이 없다는 뜻인가?" "실은 쫓겨 났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걸요." "설마.... 유능하고 명랑한 터펜스를 누가 쫓아냈단 말이야?" 토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터펜스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이에요.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환자가 없어졌거든요. 그러니 많은 간호원이 필요없게 되었지 뭐여요? 새 직장을 찾고 있지만..." "맙소사. 그렇다면 우린 똑같은 처지로군. 그것 참...." 두 사람은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며 쿡쿡거리고 웃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두사람은 전쟁 중에 군인과 간호원으로서 알게 된 사이 같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 모두 직장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렇게 조급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유 있는 말투 로 보아 아무리 곤란한 처지에 놓여도 힘없이 그냥 주저앉아 버리거나 할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토미, 이젠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돈도 바닥이 드러났으니 뭔가를 해야 되겠어요." 먼저 입을 뗀 것은 터펜스였다. "하긴 나도 그래."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글쎄..." 토미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더니 문득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 듯 손뼉을 쳤 다. "야, 터펜스. 내게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어!" "그게 뭔데요?" 터펜스는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 당겨 토미 쪽으로 다가 앉았 다. "어때, 우리 둘이 한번 멋지게 해보지 않겠어?" "자꾸 뜸만 들이지 말고 어서 얘기 해 봐요. 뭔데 그래요?" "잘 들어봐. 터펜스는 그전부터 굉장히 호기심이 많았잖아? 여기저기 돌아 다니면서 병원안의 비밀은 모두 캐고 다녔었잖아? 그렇지, 터펜스?" "어머, 무슨 실레의 말을! 그런 건 어디까지나 환자를 돕기 위해서였다고요 !" 터펜스는 뾰룡통해지며 입술을 내밀었다. "아, 실례! 내 표현이 부적절했군. 아가씨를 화나게 하다니..." "그러는 토미는 어땠는데요? 군대에서도 뉴스거리가 없나 항상 두리번거렸 으면서..." 터펜스의 톡 쏘는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이 토미는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호기심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 울 정도니까.... 그래서 말인데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일한다면..." "뜻을 합해 일하면요?" 터펜스는 아직까지도 덜 풀린 어조로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립 탐정소 정도가 어떨까 해서..." "사립 탐정소?" 터펜스는 얼굴이 밝게 빛났다. "왜. 마음에 들지 않아?" "천만에요! 정말 멋진 생각인 걸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메모지를 꺼낸 다음 장난기 있는 눈길 로 토미를 올려다 보았다. "자, 그럼 계획을 세워야죠?" "계획이라니....?" "먼저 비용이 문제가 되겠군요." 터펜스는 당장 사업을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색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 다. "우선 사무실을 빌리자면 꽤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그야 그렇겠지." "하긴 난 토미를 믿으니까...." "암, 믿어야지. 나를 믿지 못하면 안 되고 말고!" "야호! 역시 토미는 멋진 사람이어요! 그러니까 비용문제는 책임지시겠단 말씀이시죠?" "뭐? 비용이라고? 그거라면 문제가 다르지." "다르다뇨? 토미, 설마 당신이 빈털털이라는 뜻은 아니겠죠?" "터펜스. 그렇게 몰아 세우면 어떻게 해? 실은 말이야..." 토미는 조금 멋적은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실은 난 터펜스에게 빌릴 셈이었는걸!" "뭐라고요?" "사무실만 어떻게든 열면 곧 일이 생길테고 그렇게 되면 돈이 들어올테니.. .. 그러면 터펜스에게 빌렸던 돈을 갚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어?" "하나님, 맙소사!" 터펜스는 질렸다는 듯이 눈을 치켜 뜨더니, 곧 대들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 을 깨물며 토미를 노려보았다. "이런 능구렁이!" "그거야 마찬가지지 뭐! 터펜스도 내게거 돈을 빌리려고 했다니 말야!" "휴우~ 내가 졌어요, 제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결론은 두 사람 다 무일푼이라는 거로군요?" "오, 하나님! 그럼 모처럼의 내 기발한 아이디어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건가!" 그러자 두 사람은 똑같이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 같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 버리자, 공연히 더욱 맥빠지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식어빠진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잠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 문에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갑자기 터펜스가 소리쳤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토미!" 토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눈으로 터펜스를 쳐다보았다. "터펜스의 '좋은 생각'이란 옛날부터 별로 기대할만한게 못 되었었잖아?" "아니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기가 막힌 생각이라고요!" 터펜스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끌어당겨 토미에게 내밀었다. "이걸 보셔요!" 신문에는 여러 가지 광고가 나와 있었다. 약 광고. 백화점 광고. 잡지 광 고.... 각종 광고 끝에는 사람을 찾는 작은 광고도 몇 개 눈에 띄었다. 토미는 눈에 보이는 광고 하나를 읽었다. "제인 핀. 24세 정도. 눈은 푸른 색. 금발. 이 여자를 찾아주시는 분에게 는... 오라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찾아 보자는 건가?" "쳇, 어디가서 그 여자를 찾아요?" "그럼? 다른 광고였나?" "눈을 크게 떠봐요. 꼭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어요?" "눈을 아무리 크게 떠 봐도 그다지 특별한 광고는 없는 걸!" "어휴, 속 터져!" 터펜스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우리도 광고를 내잔 말이어요!" "광고를?" "그래요. 이렇게 말이어요. '2인조 사립 탐정 업무 개시. 특히 어려운 모험 을 원함.'이라고요." "그래? 난 또 뭐라고...." "어머, 그렇게 시큰둥하게 말하지 말아요. 이 정도의 광고라면 별로 비싸지 않아서 우리들이 가진 돈으로 충분히 낼 수도 있어요." "그야 그렇겠지." 토미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터펜스는 벌써 자기 생각 속에 빠 져서 신나는 목소리로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런데 문장이 좀 특이해야 하겠는데요. '사립탐정' 이라면 너무 평범하니까, '청년 모험가'라고 하는 편이 좋겠어요. 그리고...." 터펜스는 종이 위에 만년필로 뭔가를 휘갈겨 써서는 토미에게 내밀었다. "어샔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청년 모험가 두 사람. 모험 희망. 특히 목숨이 걸린 모험을 원함. 보수만 충분하다면 북극이나 아프리카, 어느 곳에라도 가겠음.' 토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터펜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목숨까지 내놓겠단 말...." "물론이고 말고요!" "곤란한데..." "목숨이 아깝거든 성공하면 된다! 어때요?" "농담할 때가 아냐!" "걱정은 나중에 하는 게 어때요? 그러지 말고 자, 토미 우리들의 사업이 성 공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건배해요." 터펜스는 자기의 찻잔을 높이 치켜 들었다. "청년 모험가 클럽, 만세!" "만.... 세...?" 토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씁씁하게 웃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세라..... 좋지!" 두 사람의 찻잔이 부딪혔다. "쨍!" 경쾌한 소리가 다방안을 울렸다. 3. 첫번째 일.. 광고를 내는 일은 토미가 맡기로 하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다방을 나섰다. "그럼, 내일 오후 피카딜리 지하철 역에서 만나!" 토미와 다방 앞에서 헤어진 터펜스는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제임스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 갔다. 터펜스가 인적이 드문 공원 한가운데쯤 이르렀을 때였다. "저,아가씨. 잠깐 얘기할 게 있는데요." 터펜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인상이 나쁜 콧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서 있었다. "난 이런 사람이오." 그는 뚱뚱한 체격에 걸맞지 않게 잽싼 동작으로 터펜스에게 명함 한장을 건 네주었다. 명함에는 '에스토니아 유리 기구 회사. 에드워드 위친튼.' 이라고 쓰여 있 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터펜스는 상대방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십중팔구 이렇게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공원에서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라면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단 봐라! 유도로 집어 던져 버릴테니까....' 터펜스는 경계의 눈초리로 위친튼이라는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실은...." "무슨 일인데 그러지죠?" 터펜스는 싸늘한 어조로 대답을 재촉했다. "하하.... 너무 놀라진 마시오. 실은.... 아까 다방에서 우연히 당신들이 하는 얘길 들었소." 남자의 말에 터펜스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소. 괜찮다면 내일 오전 11시에 제 회사를 방문해 주시겠소?" 터펜스는 뜻밖의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느낌이었다. '첫 손님이다!' '이렇게 빨리 일이 생기다니.....' 이런 생각을 하자 터펜스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물론이지요! 위친튼씨.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성큼성큼 오던길로 사라져 갔다. 그날 밤. 터펜스는 침대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터펜스는 11시가 되기도 전에 그 회사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가만있자. 이거 너무 빨리 와 버렸는 걸. 숙녀 체면에 자존심 문제도 있 지.' 터펜스는 속으로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다시 건물 주위를 돌며 시간을 보내고나서 11시 정각에 '에스토니아 유리 기구 회사'라는 간판이 붙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인 듯한 여자가 터펜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지요?" "위친튼씨를 뵙기로 했습니다. 11시에 약속을 했어요." 터펜스는 될 수 있는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리로 오십시오." 그 직원은 곧 터펜스를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큰 방의 한가운데 있는 책상에 위친튼 씨가 앉아 있었 다. "아,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터펜스가 의자에 앉자 위친튼씨는 즉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게 부탁할 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우선 수고비부터 정해야겠군 요. 듣자 하니 그 문제가 심각한 것 같던데..." 위친튼씨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은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00파운드쯤이면 어떻겠소?" 터펜스는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100파운드라면 터펜스에게는 엄 청나게 큰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긴 일러. 이런 보수를 제안한 까닭이 있을 텐데... 특 히 이렇게 달콤한 일에는 범죄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거든.' 그렇게 생각하면서 터펜스는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괜찮겠습니다만... 그런데 무슨 일이죠?" "뭐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오." 그러면서 그는 콧수염을 만지며 터펜스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말했 다. "실은 파리에 있는 어느 유명한 학교의 기숙사에 가는 일이오." "그런 일이라면 왜 굳이 제게...." 위친튼은 그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소. 실은 어느 소녀 대신 3개월간 그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요." '그럼 그렇지! 역시 생각대로야. 무슨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해.' 터펜스는 자기의 짐작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 잠시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대답할 일은 못 돼. 더구나 범죄에 관련된 일이라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터펜스는 침착을 되찾고 위친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랬었군요! 그런데 무슨일로 그 소녀 대신 그곳에 가야 하는지요?" "그런 것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마시오. 그것도 이 일의 조건이오." 위친튼씨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건 없소.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 일은 범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만약의 예를 들어 아가씨가 그 소녀 대신에 왔다는 것 이 들통난다 해도 경찰에 잡힌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란 뜻이오." "그렇지만....." "이 일을 아가씨에게 맡기려고 하는 이유는 단지 가정문제로 그 소녀가 파 리에 가 있는 것처럼 해 두고 싶기 때문이오." "가정문제 라면?" "그 이상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소. 아가씨. 난 어제 다방에서 아가씨 가 모험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일을 특별히 부탁하려는 거 요. 자. 어떻게 하겠소?" 위친튼씨의 목소리는 더욱 엄숙해진 느낌이었다. "이 일을 맡아 주시겠소, 아니면 그만 두겠소?" 터펜스는 잠시 생각했다. '이 일에는 어쩐지 수상한 점이 있어, 하지만 100파운드짜리 보수는 결코 흔하지 않아. 더구나 어느 정도의 위험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지 않았던 가?' "좋아요. 받아들이겠습니다." 터펜스가 그렇게 대답하자 위친튼씨는 싱긋 웃었다. "흠. 과연 모험가다운 결정이오. 좋소.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그 런데 아가씨의 이름은?" 터펜스는 별 생각없이 '터펜스 카우리'라는 자기 이름을 대려고 했다. 터펜 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어떤 일인지도 잘 모르는 일에 본명을 쓰는 것은 어쩐지 내키지 않 아. 그렇다면....' 문득 터펜스는 어제 토미가 무심코 읽었던 광고난에 나왔던 이름을 생각해 냈다. "제인 핀이라고 합니다." 터펜스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순간, 위친튼씨의 얼굴이 갑자기 싹 변했다. 그때까지의 온화했던 얼굴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맹수와 같은 험악한 얼굴 로 바뀌었다. "이것 봐, 아가씨. 사람을 그만 놀리지 그래!" 그는 붉으락 푸르락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4. 사나이의 정체.. 그렇게 화를 내는 위친튼씨를 보고 더욱 크게 놀란 것은 터펜스였다. 왜 화를 내는 건지 터펜스로서는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친튼의 그런 태도에 겁먹을 그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험심과 호기심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부글부글 치밀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일에는 뭔가 깊은 내막이 있어. 좋아. 내가 그것을 밝혀내 보겠 어!' 터펜스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태도로 위친튼의 성난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위친튼은 위친튼대로 그녀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빤히 자기를 바라보자 점점 더 울화가 치미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위친튼은 점점 더 무서운 얼굴로 변하면서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다면 네 쪽에선 리타를 어느정도 알고 있지?"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정도여요." 이 말은 사실이었지만 상대방은 거짓말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알겠어! 넌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도대체 누구지? 비밀을 누설 한 사람이 누구냔 말야! 리타인가?" 위친튼은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터펜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리타는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렇지. 이젠 내가 리타라는 인물을 모른다는 것을 감출 수 있을 거야.' 터펜스는 자신의 임기응변에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거짓말 말아!" 위친튼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그 무서운 얼굴을 터펜스 가까이 들이대 었다. "이제 보니 넌 나를 협박하러 온 것이로군!" "아니어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터펜스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좋아, 그렇다면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일은 점점 묘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위친튼의 표정이 더욱 험상뒜 게 변하고 목소리가 높아갈 수록 터펜스는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글쎄요... 오늘은 그 일의 대가를 선금으로 받아 가는 정도로 할까요?" "나쁜 녀석,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다니..." 위친튼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해 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때, 한 직 원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종이쪽지를 건네 주었다. "방금 전화가 왔습니다." 위친튼은 그 쪽지를 힐끗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터펜스를 향해 돌아섰다. "좋아. 내일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나와. 오늘은 우선 절반만 주겠다." 그렇게 말하고 위친튼은 책상 서랍에서 5파운드와 10파운드짜리의 빳빳한 돈뭉치를 꺼내 그 중에서 50파운드를 세었다. 돈을 받아든 터펜스는 일부러 천천히 다시 세어보고 나서 핸드백에 넣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어요. 위친튼 씨." 위친튼은 밖으로 나가는 터펜스의 뒷모습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로부터 약 한시간 뒤,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토미와 터펜스가 만나고 있 었다.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 으로 잔뜩 배를 불린 두 사람은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말. 덕분에 잘 얻어먹긴 했지만..." "아뭏든 부자란 역시 편리한 건데요?"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려. 소화도 되지 전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나 아닌 지, 원!" 터펜스의 이야기를 다 들은 토미는 시종 씁쓸한듯 입맛을 다셨다. "원, 걱정도 많으십니다. 용감한 토미 베레즈포드 중위님?" "하지만 놀라운 일이야."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이젠 점점 재미있어지는 걸요." "도대체 제인 핀이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글쎄요. 그저 평범한 신문광고 같았는데...." "일단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어." 토미는 심각하게 턱에 팔을 괴고 말을 이었다. "즉, 제인 핀이라는 여자는 어쩌면 백만장자의 딸인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 리고 위친튼이라는 사람은 그녀를 유괴한 유괴범인지도..." "어째서죠?" "그렇지 않다면 100파운드라는 큰 돈을 들여 가면서까지 사람을 구할리가 없잖아?" "그럼 이상하잖아요? 제인 핀이라는 여자를 위친튼이 유괴했다면...." "서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토미는 추리를 하는 형사처럼 제법 조리있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유괴했던 제인 핀이 무슨 이유에선지 행방을 감추었어. 그렇게 되 자, 위친튼은 당황한 거야. 만약 행방을 감춘 사실이 부모에게 알려지면 돈 을 뜯어낼 수가 없어지니까..... 그래서 서둘러 신문광고를 내는 한편, 없 어진 사실을 숨기기 위해 터펜스를 대역으로 쓰려했던 거야." "그렇지만 신문 광고를 내면 부모가 당장 알아 버리 텐데요?" "흠,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 가정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말이죠?" "아마 그 부자는 외국인일 거야!" 토미는 자신의 추리가 틀림없을 것이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만 또 한가지 의문이 있어요. 내가 제인 핀이라는 이름을 댔을때 왜 그렇게 깜짝 놀랐을까요?" 화가 나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던 위친튼을 떠올리며 아무래도 이해가 되 지 않는다는 듯 터펜스는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위친튼이 만약 유괴범이라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돈 을 우려내려는 거죠?" "그런 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 악당들이야 무슨 방법이든 다 동원하는 법이니까...." "그야 그렇지만..." "다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토미는 갑자기 정색하는 표정으로 터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터펜스가 그 일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나중 에 무슨 일을 당할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더구나 때에 따라서는 놈들의 동조자로 몰려 경찰에 붙들려 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른 때 같으면 불길한 소릴 한다고 톡 쏘아 주었을 터펜스도 솔직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아무리 우리가 목숨을 건 모험도 사양치 않겠노라곤 했지만, 엉뚱한 음모 따위에 목숨을 걸기엔 너무 아까운 몸이잖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난 또 끝까지 해 보겠다고 덤벼들면 어쩌나 하고 걱정 햇지." "하는 수 없죠, 뭐! 그렇게 걱정까지 해 주신다니 동업자를 위해서라도 적 당한 곳에서 그만 두기로 하죠." 터펜스는 아까까지의 긴장된 표정을 지우고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토미에게 대답했다. "어렵쇼!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로군!" "자, 우리 그런 일엔 신경쓰지 말고 오늘은 실컷 즐기도록 하자고요!" "좋고말고! 내일의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르니까..." 토미의 말이 떨어지자 터펜스는 깜짝 놀란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그렇죠! 내일 나머지 50파운드를 받아야 되잖아요?" 토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터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 세사에! 터펜스, 그건 지나친 욕심이야. 오늘 받은 50파운드로 끝내는 게 어때?" "그렇게는 못해요. 위친튼은 틀림없이 그 돈을 주기로 했는 걸요?" "그 말을 믿는단 말이야?" "물론이고 말고요, 틀림없이 받아낼테니 두고 보세요," 터펜스는 자신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50파운드가 어디 적은 돈인가요? 그 돈만 받아내고서 살짝 사라져 버리면 그 사기사건인지 유괴사건인지에는 말려들지 않을 거여요." "지독하군. 여자는 그런 건가?" 토미는 질렸다는 듯 손을 저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일은 내가 동행해 주기로 하지.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그는 터펜스의 고집을 꺽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해가 지기 전에 오늘을 즐기도록 하죠!" "좋아!" 그들은 레스토랑을 나와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댄스홀에 들어가 춤을 추기도 하며, 다방에 가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의 재미있는 하루였다. 다음날 오전 11시. 두 사람은 함께 에스토니아 유리 기구 회사를 찾았다. "토미, 토미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둘이 불쑥 들어가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니까..." 건물안에 둘어서자 터펜스는 토미에게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럼 난 복도에 서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릴 치라고!" "알았어요. 그럼..." 터펜스는 허리를 펴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터펜스는 1분도 되지 않아서 여우에게 홀린 얼굴을 하고 급히 나왔 다. "어떻게 된거야, 터펜스?" "아.... 아무도 없어요!" "오라. 점심을 먹으로 나간 거로군. 그럼 좀 더 기다려 보지 그래?" "그게 아녀요!" "아니라니....?" 터펜스는 당황해 하는 빠른 말투로 토미의 말을 막았다. "에스토니아 유리 기구 회사는 어제 오후에 문을 닫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렸대요. 건물 관리인이 그렇게 말했는 걸요!" 5. 카터씨와 토미..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나서 다시 한 번 에스토니아 유리기구 회사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마치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어요." "꽤 급했던 모양이야. 간판도 떼지 않고 그냥 떠난 걸 보니..." "급한 일이라면 뭐죠? 한 회사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릴만한 일이라면. ..." "글쎄, 터펜스의 일과 관련이 있을까?" "설마 그런 일쯤으로 회사 하나가 이사를 간단 말이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이쪽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저쪽에겐 결정적일 수 도 있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뭐가 뭔지...." 잠시 후 토미는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 터펜스의 팔을 끌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겟군. 상대가 없는 승부는 낼 수가 없잖아? 자, 이만 돌아가지, 터펜스!" "안 돼요. 난 단념할 수 없어요." "뭐라고? 그럼 나머지 50파운드를 꼭 받아내고 말겠다는 건가? 무슨 수로 말이지?" "그게 아녀요." 터펜스는 상기된 얼굴로 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 수수께끼를 철저히 조사하겠어요." 터펜스의 단호한 어조에 토미도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어떻게 말인가?" "방법이 있어요." 터펜스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 무엇인가를 써서 토미에게 내밀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제인 핀에 관한 정보를 구합니다. - 청년 모험가 클럽 - "이걸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물론 신문에 내야죠." 그 광고는 다음날 신문에 나왔다. 연락처는 각자의 하숙집 두 곳으로 해 두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하숙집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광고를 낸 지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젠 기다리는 것도 지쳤어!" 행여나 어디로 연락이 올지도 몰라 자리를 지키고 있던 토미가 수화기에 대 고 말했다. "이게 뭐냔 말야? 괜한 고집 때문에 헛수고만 하느라고 잠도 설쳤잖아?" "그럼 포기하자는 말이어요?" "할 수 없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나흘셉 되는 날 아침, 우편배달부가 기다리고 있던 편지를 터펜스의 하숫집에 배달해 주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터펜스의 전화를 받자마자 토미는 급히 달려왔다. "어디있어? 편지 말야." 토미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터펜스를 다그쳤다. "자. 여기 있어요. 하지만 숨 좀 돌린 후에 보는 게 어때요?" "숨을 돌리라고? 그런 소리 하지마. 이 편지를 기다리느라고 얼마나 피가 말랐는데...." 토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편지를 봉투에서 꺼냈다. "오늘 아침에 난 광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 로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락처는 카이셜튼 가이덴즈 27번지. A. 카터로부터." 토미가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나자 터펜스는 또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여기엔 이렇게 쓰여 있어. '신문에 난 광고에 관한 일로 급히 만나고 싶습 니다. 리츠 호텔 14호실. 률리어스 하이세이머.' 아주 간단하군." "음, 아뭏든 만나봐야겠지?" "물론이죠. 자, 행동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거여요." 터펜스는 눈을 빛내면서 토미에게 말했다. "먼저 카터씨를 만나고, 다음에 하이세이머씨를 만나도록 해요." "좋아. 자, 출발하자고!" 두 사람은 즉시 카터씨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어떤 사람들일까?' 둘은 저마다 머리속에 편지의 주인공들을 상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훌륭한 주택들이 늘어선 거리로 들어섰다. 보기에도 웅장하고 호화 스러운 저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카터씨의 저택은 곧 찾을 수 있었다. 벨을 누르자, 저택의 하인인 듯한 남자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나으리께서 서재에서 기다리시랍니다." 미리 명령을 받고 있었던지 토미와 터펜스가 신분을 밝히자. 하인을 곧 그 들을 서재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리자. 깡마른 체구에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독수리와 같은 날카로운 눈을 가진 그 사나이는 토미와 터펜스를 보자 대뜸 말을 던졌다. "청년 모험가 클럽에 계신 분들이군요?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카터입니 다." 그리고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했다. "자, 좀 앉으실까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자, 남자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용건을 꺼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제인 핀에 대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왔나요?" "어머, 그건 저희들이 알고 싶어하는 건데요. 편지는 그런 뜻이 아니었나요 ?" 터펜스는 이렇게 말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 토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 나 토미를 돌아다본 터펜스는 깜짝 놀랐다. 토미는 카터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토미 는 갑자기 일어서서 차렷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오랫만입니다. 저는 토미 베레즈포드 중위입니다. 당신은 영국 정보부의.. ..." 토미가 여기까지 말하자, 카터씨는 손을 들어 말을 중지시켰다. "잠깐! 내 이름은 말하지 않는게 좋겠네. 이곳에서는 카터로 통하고 있지." 이렇게 말하고 그는 싱긋 웃었다. "난 또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었군. 그래? 베레스포드 중위. 난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네." 그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적에게 둘러싸여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을 때. 자네가 결사대를 이끌고 도와 주러 오지 않았다면 전쟁이 끝나는 것도 보지 못할 뻔했지." 터펜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 일에 영국 정보부의 높은 인물이 얽혀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토미와 아는 사이라니 더욱 일이 이상하게 얽혀드는 것 같았다. "아뭏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혹시 다른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토미도 역시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긴 했으나 카터씨와의 뜻밖의 만남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런데 베레즈포드 중위, 어떻게 해서 자네가 이 일에 관련되게 되었지?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은 걸." "저.... 어쩌다가...... 그저 호기심이 많다보니...." 토미는 좀 멋적은 얼굴로 머리를 글적이며 터펜스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 다. "사실 저는 아직까지 어떤 사건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선 저보다도 이 터펜스 양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터펜스?" "호오. 그래? 그렇다면 터펜스양.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말 해 주겠소?" 뜻밖의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고 있자, 토미가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터펜스. 이 분이라면 마음놓고 얘기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해 드려." 터펜스는 지금까지의 일을 알고 있는 대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터펜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카터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가씨는 정말 모험을 무척 좋아하고 있군요." 카터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곧 다시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아뭏든 덕분에 여러가지 일을 알게 되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부탁이 있소." 그 말에 토미와 터펜스는 똑같이 놀란 듯 소리쳤다. "부탁이라뇨?" "음, 자네들,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해 주지 않겟나? 물론 정확하게 월급도 지불해 주겠네." "어머,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라고요? 야호! 정말 멋져요!" 터펜스가 대뜸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 반면 토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 다. "하지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겠습니까? 전혀 첩보 훈련이라든지 하는 특수 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토미의 말을 저지하듯 카터씨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건 염려할 것 없네. 우린 자네들에게 그런 활동이 필요한 일을 맡기려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은 뭐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터펜스도 이제야 걱정이 되는지 대화에 끼어들 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계속해 주면 되는 거요." "지금까지 하던 일이라면..." "그렇소, 바로 제인 핀을 찾는 일 말이요." "하지만 저희들은 아직 제인 핀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는 걸요." 토미가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오, 그렇군! 그러면 우선 그 얘기부터 들려 주겠네." 6. 제인 핀의 정체.. "몇 년전, 세계대전이 한창 불붙고 있었을 때의 일이었네." 카터씨의 이야기는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연합군을 돕기 위해 비밀 무기를 발명했었지. 단 한 방울로도 백만명이나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세균 무기였어." "세균 무기라고요?" 터펜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렇소, 아가씨. 그 세균은 한번 뿌리면 저절로 죽어 없어질 때까지 무엇 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독성을 가지고 있다오." "그런데 그게 전쟁이 끝난 지금 어떻다는 거죠?" "바로 이 무서운 세균의 배양법을 적어 놓은 서류가 미국 정부의 어떤 비 밀 정보원의 손을 거쳐 영국으로 넘겨 지기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 남 자는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어. 그가 탔던 배가 바로 비극의 루시타니아 호 였거든. 루시타니아 호는 독일 잠수함이 쏜 어뢰를 맞아 침몰해 버렸고, 그 남자도 루시타니아 호와 함께 바다에 잠기고 말았어." "그럼 그 서류도 함께 말인가요?" 토미가 물었다. 그러자 카터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음, 처음엔 모두 그 서류가 바닷속에 잠겨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데 구명 보트를 타고 요행히 구조되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빌리면, 그 남자 가 배가 침몰되기 직전 어떤 젊은 미국인 여자와 얘길 나누었다는 것일세." "그때 그 정보원이 서류를 여자에게 맡겼을 거란 얘기군요?" "터펜스가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카터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옳아, 바로 그거지!" "그럼 그 여자에게 물으면 서류의 행방을 찾아낼 수가 있겠군요?" 토미가 쉽게 말했다. "물론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 아가씨가 영국에 상륙한 직후에 행방불명 되어 버린 것일세." "세사에, 그럴 수가!" 터펜스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질렀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바로 제인 핀이란 말일세." 여기까지 말하고 카터씨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랬었군요!" 그제서야 뭔가 알겠다는 듯, 두 사람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터씨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제인 핀이라는 아가씨는 영국에 도착한 뒤, 곧 프랑스의 파리로 가서 학교에 다닐 예정이었다더군. 그런데. 그녀가 영국에 상륙한 생존자 명단 속에 있었던 것은 확인이 되었는데. 그 뒤에는 어디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터펜스가 믿어 지지 않는다는 말투로 카터씨와 토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터씨는 대답 대신 말을 이었다. "한편, 루시타니아 호에는 그 서류를 노리는 국제 스파이단의 일당도 타고 있었던 것을 알았네." "그렇다면 제인 핀은 그들에게 납치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우리돌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우리들은 전 력을 다해서 그녀를 찾았지만 전쟁이 끝나도록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으니 까..." "그런데 그녀가 실종된지 4~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그녀를 다시 찾고 있는 겁니까?" 토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제인 핀은 죽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서류도 없어져 버렸을 지도 모르고요." 카터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다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 나라에서 다시 그 대규모의 국제 스파이단이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그리고 그들이 제인 핀의 행방을 찾고 있는 듯하다는 것 도 알았네. 그 스파이단의 두목은 브라운이라는 사람이지." 여기까지 듣고 난 터펜스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제가 만났던 그 위친튼이라는 사람이 브라운인지도 모르겠군요 ?" 카터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요, 브라운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그는 어느 누구도 뚜렷한 정체를 모르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요." "뛰어난 분장술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토미의 질문에 카터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엇다. "그건 모르지. 다만 그는 상당히 머리가 좋고 너무나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 고들 하더군, 그런 녀석에게 세균 배양법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야." 카터씨는 탁자위에 있던 물컵을 들어 물 한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 다. "베레즈포드. 그는 아마 그 비밀을 다른 어느 나라에 팔아 버릴지도 모르 네. 세균 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는 나라에게 그것을 판다면.... 이건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온 세계에서 몇 백만, 몇 천만.... 아니. 전 인류가 무두 멸망하 게 될지도 모르지." 카터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그래서 우리들이 놈들보다 먼저 제인 핀과 그 서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그것 때문에 자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세." "기꺼이 하겠습니다! 카터씨.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들이 그 일을 도와 드 리겠습니다!" 터펜스가 몸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물론 하고 말고요! 이 일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조국과 인류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토미도 긴장한 목소리로 용기 있게 대답했다. '온 세계를 전쟁과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구해내야 한다!' 두 사람은 일의 중대성을 깨닫고 긴장하였다. 7. 하이세이머씨와 제인 핀.. "그런데 제인 핀이 정말 살아 있을까요?" 토미가 걱정스러운듯이 물었다. "어머, 정말 그렇군요! 혹시 스파이단이 벌써 제인 핀을 찾아내어 살해해 버린것은 아닐까요?" 터펜스도 꿈에서 깨어난 듯 소리쳤다. "어셉서 그렇게들 생각하지?" 카터씨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놈들은 터펜스를 제인 핀 대신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다시 말해 서 그 스파이단이 속임수를 쓰기 위해 가짜 제인 핀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만약 진짜 제인 핀이 살아 있다면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 지 않겠습니까?" 토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하자. 카터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자네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인 핀이 적의 손에 붙잡혀 있는게 아닐까?" "어머, 그럴리가.... 그렇다면 그 서류를 이미 손에 넣었을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굳이 저를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을 거여요." 토미도 터펜스와 동감이라는 듯 카터씨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제인 핀은 미국의 비밀 정보원이 서류를 맡길 정도의 아가씨일세. 반드시 머리가 좋을 뿐아니라 애국심이 강할 거라고 믿고 있네. 그건 그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말을 빌려도 확신할 수 있어. 그래서 난 이런 추측을 해 본 거야."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왜 놈들은 가짜 제인 핀을 만들려고 했을까 요?" "거기에 대해선 알 수가 없네." 카터씨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 브라운이란 작자는 여우 같은 놈일세. 반드시 깊은 음모가 도사 리고 있는게 틀림없어. 서류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테니....." "그렇다면 지금 당장부터라도 서둘러야 되겠군요!" 터펜스가 소리치자 카터씨가 위엄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터펜스양. 지금 우리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거요. 그러 니 최선을 다해 주길 부탁하겠소." 터펜스는 대답대신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미, 자네에게도 거듭 부탁하겠네." 토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카터씨가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카터씨의 저택을 나와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너무 흥분한 까닭인지 두 사람 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터펜스!" 마침내 토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터펜스, 이렇게 무작정 걷기만 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토미.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걸음을 멈추고 토미를 바라보며 터펜스가 힘 없이 대꾸했다. "하긴 그래.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통 감이 잡히질 않는단 말이 야. 더구나 우린 제인 핀의 얼굴도 모르잖아?" "그러니 어떡하면 좋죠?" "그럼 다시 한번 처음부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 보는 게 어떨까?" "처음부터요?" 터펜스가 별로 신통치 않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듯이 얼굴을 들었다. "아, 그래요! 하이세이머씨를 하마터면 잊을뻔했어요. 우선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해요." "그래 맞았어. 그동안 우리가 너무 흥분해 있었군. 그 편지 생각을 깜빡 잊 고 있었다니...." "그런데 도대체 하이세이머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설마 그 사람도 놈 들 편은 아니겠지요?" 터펜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토미를 바라보았다. "만나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뭏든 조심하는게 좋겠어." 두 사람은 그 길로 리츠 호텔을 향했다. 호텔 프론트에 이름을 대자. 한 호텔 안내원이 하이세이머씨의 방으로 안내 했다. "아,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두드리자, 한 젊은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저어, 하이세이머씨를 찾아왔는데요." 터펜스는 운동선수 같은 인상을 한 젊은 남자에게 다시 한번 말을 강조했 다. 설마 그 사람이 하이세이머씨는 아니려니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이세이 머라는 이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독일인 같은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제가 바로 편지를 드린 하이세이머입니다. 자, 이리로 앉으시죠!" 그는 소파를 가리키고는 자기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인사가 끝나자 먼저 말을 꺼냈다. "자, 우선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얘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촌동생인 제인 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촌동생이라고요?" 터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인 핀은 제 아버지의 누이동생 -- 즉 고모님의 딸입니다." 하이세이머씨의 말투에는 순수한 미국인의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 토미와 터펜스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전혀 예상을 빗나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터펜스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제인 핀을 찾고 있지요?" "왜냐고요?" 그는 터펜스의 질문이 오히려 부당하다는 듯이 되묻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야 사촌동생이기 때문이죠. 나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뭣하긴 합 니다만.... 나 줄리어스 하이세이머라면 미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억만장자입니다. 그런데 고모님은 매우 가난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찌나 고 집이 세신 분인지 절대로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실은 아버지와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고모님이 4년전 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모님의 외동딸인 제인 핀을 찾았던 것입 니다. 사방으로 수소문 했었지만 찾을 길이 없더군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야 루시타니아호의 생존자 명단에 있었던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이세이머씨의 설명은 매우 흥미있게 진행되었다. "오. 그래요?" 터펜스는 가엾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것으로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그쪽의 얘길 들려 주실 차례군요." 하이세이머씨는 말을 끝내고 두 사람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실은 저희들이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뭐라고요? 모른다고요? 그럼 왜 제인 핀에 대해 신문에 광고를 냈지요?" "그.... 그건...." 토미가 머뭇거리자 하이세이머씨는 다그쳐 물었다. "제인 핀의 연고자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요?" "사실 목적은 당신과 같습니다.우리들도 현재 제인 핀을 찾고 있으니까요." "제인을 찾고 있다고요?" 하이세이머씨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이유에서죠? 당신들은 제인을 어떻게 해서 알고 있는 겁니까?" "제인과는...... 친구입니다." "친구? 어떤 친구들이죠?" 줄리어스 하이세이머씨의 의심스럽다는 듯한 말투에 터펜스가 벌컥 화를 내 었다. "어떤 친구라니요? 친구가 친구지 어떤 친구가 따로 있나요?" "터펜스, 그렇게 흥분할 건 없잖아?" 토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터펜스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우리들은 제인을 스파이단에서 구하려고 한단 말여요!" "터펜스!" 토미가 당황해 하며 큰 소리로 터펜스의 이름을 불렀다. 터펜스는 엉겁결에 말을 뱉어 놓고는 다음 순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줄리어스 하이세이머씨는 곧 얼굴색이 달라졌다. "스파이단이라고 했나요? 도대체 스파이단이 어떻단 말입니까? 제인과 스파 이단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터펜스는 곤란해하며 우물쭈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에서 만약 자세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면 이 줄리어스 하이세이머란 사람은 경찰이건 어디 건 아무데나 달려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마구 지껄여댈 듯한 기세였다. 터펜스는 결심한듯 토미에게 말했다. "토미,이 분에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모두 이야기해 드리도록 해요." "하지만, 터펜스, 이런 일은...." 토미는 차마 본인 앞에서 다른 말을 할 수 없어서 일단 말을 끊고 터펜스에 게 눈짓을 했다. 거기에는. '터펜스 그렇게 쉽게 사람을 믿어서는 안 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토미. 내게 맡겨 둬요!" 터펜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토미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지금까지의 일을 알아듣기 쉽게 하이세이머씨에게 설명해 주었다. 터펜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줄리어스 하이세이머는 무척이나 놀랐는지 숨이 라도 막힐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사촌동생인 제인 핀이 그 스파이단에 붙잡혀 있는게 확실합니까?" "확실한 건 아니자만 아직까지의 상화으로 봐서는 그렇다고 가정하는 겁니 다. 물론 단서는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터펜스의 눈은 빛났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단서는 생긴셈이군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말이어요." 하지만 줄리어스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 사실은 나도 얼굴을 모릅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한번도 만난적 이 없으니까요." "예? 뭐라고요? 모른다고요?" 한 줄기 기대가 사라져 버리자 터펜스는 실망한 어조로 소리쳤다. "얼굴도 모르면서 어떻게 제인 핀을 찾으려고 했었나요?" 토미의 질문에 하이세이머씨는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믿을만 하진 않지만.... 혹시나 해서 제인의 친구를 수소문했었습니다. 그 것도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서요?" "그 친구에게서 제인의 사진 한장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낡은 사진이라서 뚜 렷하진 않지만. 그래도 제인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토미와 터펜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것을 좀 더 빨리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 사진을 보여 주시겠습니 까?" "지금은 없습니다." "없다니요?" "오늘 아침 일찍 런던 경시청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조사할 게 있다며 빌 려 갔어요." "경시청에서요?" 터펜스의 마음에 불쑥 의심이 솟아올랐다. '카터씨의 말에 의하면 제인을 찾고 있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의심은 불꽃처럼 더욱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줄리어스 하이세이머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브라운 경감잉라는 분이었습니다. 아주 높은 사람인 것 같았어요." 8. 최초의 단서.. "브라운 경감이라고요?" 터펜스와 토미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더니 곧 터펜스가 성큼성큼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남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터펜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터펜스는 다이얼을 돌려 침착한 어조로 몇 가지를 물어보고 난 후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뭐래?" "런던 경시처에는 브라운이라고 하는 경감이 없대요." "바로 그 브라운이다! 스파이단의 두목이야!" 토미가 황급히 외쳤다. "역시 머리가 빠른 녀석이야! 단 한장밖에 없는 제인의 사진을 벌써 빼앗아 가 버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이세이머씨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한테 경시청의 경감이라고 찾아와서 사진을 빼앗아 간 사람이 바로 스 파이단의 두목인 브라운이라는 사람이란 말여요!" 터펜스의 설명에 하이세이머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오, 하나님 맙소사!" 너무도 어이가 없는 사건에 세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이윽고 터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일로 쉽게 물러나서는 안 돼요. 그 따위 사진이야 처음부터 없 었던 걸로 하고 모두 힘을 내셔요.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단서를 찾아야 해요." "하지만 어떻게 찾는단 말야? 위친튼은 행방을 감춰 버렸고, 그밖에는 전연 단서가 없잖아?" 토미의 맥빠진 말에 터펜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있어요!" "있다고? 어디에?" "리타라는 여자에게요." "리타라니?" "지난번에 위친튼이 리타의 이름을 들먹였던 것을 얘기했었죠? 그렇다면 리 타가 그들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어요." "오호! 하지만 그 이름만 가지고 뭘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줄리어스가 심각한 얼굴로 한 마디 던졌다. 터펜스는 자신만만한 듯한 태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카터씨가 루시타니아호에 그 스파이단의 부하 가 타고 있었다고 한 말 기억하죠? 남자를 쫓아다니는덴 남자 보다도 여자 가 유리한 점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리타가 그때 그 배에 탔던 여자 스파 이가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그렇겠군. 그럴 가능성은 꽤 짙은 것 같아." 토미는 그제서야 터펜스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자 스파이가 루시타니아호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아 버렸다 고 한다면요?" 줄리어스도 두 사람 못지 않게 심각한 어조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그때 죽었다면 스파이단이 제인의 이름을 알 리도 없고, 또 위친튼의 입에서 리타라는 이름이 나올 리도 없지 않겠어요?" "흠, 맞았어! 그렇다면 리타는 루시타니아호의 생존자 명단에 있을 거야!" "그것 보셔요. 이제야 겨우 제 생각을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어때요. 내 생각이?" 터펜스가 우쭐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터펜스의 머리가 비상한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 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우쭐대기부터 하는 건 일러!" 토미가 터펜스의 말을 막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좌우지간 명단부터 확인해 보아야겠어요!" "좋아요! 지금 당장 신문사에 가서 생존자 명단을 확인하도록 해요!" 두 사람은 하이세이머씨와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곧 신문사로 달려갔다. 신문사의 자료실에서 낡은 신문들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느라고 두 사람은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야, 있다! 여기 있어!" 그 당시의 신문을 샅샅이 뒤지던 토미가 먼저 소리쳤다. "이걸 보라고! 여기에 루시타니아호의 생존자 명단이 나와 있어!" "그렇게 서둘지만 말고 어서 리타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해야죠." 침착한 어조로 터펜스가 타이르듯이 말하고 나서 신문을 들여다 보기 시작 했다. "자. 난 왼쪽줄을 볼테니까 토미는 오른쪽 줄을 봐요." 터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토미가 소리쳤다. "아, 여기다! 마거리트 밴디마이어 부인!" "맞군요! 리타는 마거리트의 애칭이니까요." 신문에는 명단외에도 생존자의 본적이며 행선지, 주소, 간략한 약력까지도 덧붙여 실려있었다. 이 밴디마이어 부인은 외국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 미망인으로 온 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니는게 취미라고 쓰여 있었다. 루시타니아호에 탑승 한 것은 미국 여행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정말 스파이 활동을 하기에는 적당한 조건이군요!" 터펜스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만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해 봐야 해. 이 여자가 확실한지는 아직 모 르잖아?" "그럼 우선 밴디마이어 부인을 만나 보는게 좋겠군요." 두 사람은 밴디마이어 부인의 주소를 들고 곧 달려갔다. "자. 여기야!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토미가 10층 맨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팔짱을 끼었다. 그때였다. 아파트 현관을 살피던 터펜스가 갑자기 토미의 팔을 잡아 끌고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아니.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영문도 모르고 터펜스가 이끄는 대로 황급히 몸을 숨기고 난 후, 토미가 물 었다. "쉿! 저기 저 사람들...." 터펜스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파트안에서 남자 두 사람이 걸어나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미, 저 두 사람들 뒤를 미행해 봐요!" 터펜스의 눈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왜 그러지, 터펜스?" "저쪽의 뚱뚱한 사람이 바로 그 위친튼이어요. 토미라면 얼굴을 모르니까 괜찮을 거여요. 자,빨리 뒤쫓아 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야 해요!" "좋아!" 토미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9.토미의 위기.. 두 사람은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토미도 놓칠세라 빠른 걸 음으로 뒤따라갔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가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어느 정 도의 거리를 두면서 조심스럽게 미행했다. 한참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은 어느 지하철 역 앞에 있는 '라이온'이라는 간 판이 붙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토미도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그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은 식당 한가운데의 식탁에 앉아서 점심을 시켰다. 토미는 될 수 있는한 가까운 식탁에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 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아서 확실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화속에 가끔씩 '브라운씨'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만은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위친튼과 이야기하는 남자가 보리스라는 이름인것도 알게 되었다. '흠.좋아. 어떻게 해서든지 이 녀석들의 소굴을 알아내고 말테다.' 토미는 다시금 입을 굳게 다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위친튼과 보리스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토미도 적당한 간격을 두 고 일어나서 뒤쫓아 나갔다. 밖으로 나온 위친튼과 보리스는 택시를 잡았다. 토미도 곧 다른 택시를 잡 아탔다. "운전사 아저씨. 저 차를 뒤쫓아 주십시오!" 운전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 바로 그 차를 뒤쫓기 시 작했다. 이윽고 위츤튼과 보리스가 탄 차는 중앙역에 도착했다. 차가 멎자, 위친튼과 보리스가 차에서 내렸다. 기차를 탈 예정인 것을 눈치 챈 토미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 뒤에 섰다. "브안마스 1장!" 위친튼은 자기 차례가 오자,창구로 돈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브안마스라면 해변가의 한 마을인데..... 그런데 혼자만 떠날 모양인가?' 토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같은 표를 사기로 결정했다. 그때 문득 보리스와 위친튼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좀 이른 것 같은데.... 기차가 떠나려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겠어." "흠, 그럼 어디가서 차라도 한잔 할까?" 그 순간, 토미의 머리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급히 근처의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서 리츠 호텔의 줄리어스 하이세 이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셔요? 줄리어스 하이세이머씨? 접니다. 토미 베레즈포드입니다." 뜻밖의 전화에 당황한 듯 잠시 얼떨떨한 채로 있던 줄리어스가 마침내 수화 기에 대고 소리쳤다. "아, 베레즈포드씨, 무슨 일입니까? 혹시 제인에 대한 정보라도..." "아닙니다. 자세한것은 나중에 말할테니 급히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예?" "지금 위친튼이 어떤 남자와 같이 있는 걸 발견하고 뒤쫓고 있는 중입니다. 두 사람은 이곳 중앙역에서 잠시 후면 헤어질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곳에 와서 같이 한 사람씩 미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토미는 단숨에 용건을 말하고 나서 줄리어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랬군요! 좋습니다. 지금 곧 나갈테니 놓치지나 마십시오!" 토미가 역 구내의 한 찻집에 들어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은 지 10분도 지 나지 않아서 줄리어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토미는 두 사람을 가리켯다. "어느 쪽이 위친튼입니까?" "왼쪽에 있는 뚱뚱한 남자입니다. 내가 보리스라는 남자를 뒤쫓을 테니 당 신이 저 위친튼을 맡아주십시오." "좋습니다." 줄리어스는 선선히 대답하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자, 그럼...." 토미와 줄리어스는 위친튼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눈짓을 교환琴다. 곧 위친튼의 뒤를 따라 줄리어스는 열차에 올라 탔다. 토미도 보리스의 뒤를 계속해서 뒤쫓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지하철을 탔다. 한참 뒤 그가 내린 곳은 사람이 붐비는 소호 거리였다. 이곳은 온 세계의 여러 인종잉 모여드는 곳으로 런던에서도 범죄가 많기로 이름난 지역이다. 보리스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는 허름하고 쓰러질 듯한 건물들이 죽 늘어선 뒷골목의 빈민가로 들어섰 다. 그렇게 계속해서 한참을 들어가다가 어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리고 어두컴컴하고 어쩐지 기분이 나쁜 낡아빠진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토미는 너댓 채 정도 떨어져 있는 건물의 모퉁이에서 보리스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보리스는 무슨 신호인 것처럼 현관문을 '탕탕. 탕. 탕탕.'하고 두 드렸다. 잠시 후에 문이 빠끔히 열리고, 한 사람이 얼굴만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주고받더니 보리스는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이젠 어떻게 한다지?' 토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이대로 그냥 돌아갈까? 하지만 그사이에 녀석들이 도망쳐 버리기라 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불쑥 토미의 가슴 속에 호기심과 모험심이 솟아 올랐다. '좋아! 내친 걸음인데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다!' 토미는 곧바로 그 집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보리스가 한대로 '탕탕. 탕. 탕탕.'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빠끔히 열리고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얼굴만 내밀고 토미를 똑바로 쳐 다보았다. "무슨 일이오?" "브라운씨는 만나기로 했습니다." 토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 남자는 문을 활짝 열어 주는 것이었다. '오라, 그 말이 신호였던 모양이구나!' "2층에 올라가서 왼쪽으로 두 번셉 문을 두드리면 됩니다." 토미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억누르며 일부러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그리고 몸을 흔들거리며 끽끽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올라갔다. 집안에서는 토미가 올라가는 발자욱 소리외에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서 마치 빈 집 같았다. 더구나 여기저기에 거미줄이 쳐 있고, 벽은 부서져 있었으며 집안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2층에 올라가니 좁은 복도가 있고 세 개의 방문이 나란히 나 있었다. 문득 두 번째의 방문에서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옳지. 보리스가 이 방에 들어간 게로군?' 그때, 현관에서 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또 다른 녀석이 온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곳으로 올라올 것이 틀 림없는데....' 토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 구석에 낡은 빌로오드 커튼을 친 좁은 창고가 눈에 띄었다. 청소 도 구등을 넣어 두는 곳인듯했다. 토미는 서둘러 그곳에 몸을 숨기고 커튼을 닫았다. 곧이어 계단을 올라온 사람 역시 험악한 표정을한 어쩐지 기분 나쁜 사나이 였다. 그는 왼쪽의 두번셉 문을 두드렸다. "탕탕. 탕. 탕탕.!" 문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호를 대라!" "14호!" "들어와라. 14호!" 남자는 방안에 들어갔다. 토미는 창고에서 나오려고 커튼을 젖혓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패거리들 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남자 몇 명이 집안에 들어섰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몰려오는 것일까? 분명히 스파이단의 회의가 열 리기로 되어 있을거야.' 토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들이 하는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고 싶었다. '위험은 각오하기로 했잖아?' 토미는 결심한 듯 창고에서 나와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럼 어떻게 된거지? 그 서류가 도대체..." "그저 적당히 손을 써서는 힘들것 같아. 두목님께서도...." 그 뒤는 너무 작은 소리여서 전혀 들리지 않았다. "꽝!" 그때.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가 나서 토미는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창고에 들어갈만한 시간도 없었다. 토미는 첫번째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토미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그 남자는 계단을 올라와서 두 번셉 방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라온 녀석들과는 어딘지 달라 보이는 걸. 혹시 브라운일지도 모르겠는데...' 이어서 문을 두르리는 소리가 들여오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토미는 벽에 귀를 바싹 대고 옆방의 동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토미가 숨어있던 방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다. "앗!" 토미가 놀라서 뒤로 물러서자,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 셋이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명이 들고 있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힘을 다해 토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눈깜짝 할 사이의 일이었다. "탁!" 소리와 함께 토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10. 싹싹한 하녀, 터펜스.. 한편 터펜스는 리타 밴디마이어 부인 댁의 하녀로 들어가는데 성공琴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터펜스의 밝고 명랑한 성격 덕분이었다. 그 집 근처를 서성이던 터펜스는 아파트 근처에서 구두를 닦는 구두닦이 소 년과 곧 친해질 수 있었고, 그 소년에게서 밴디마이어 부인이 하녀를 구하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터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선 미장원에 가서 머리 모양을 고치고, 옷 가게에 가서 하녀에게 어울릴 듯한 옷을 사 입는 거야. 그 다음은....' 터펜스는 차분히 계획을 짜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나서 카터씨에 게 연락하여 하녀 소개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다음날 밴디마이어 부인을 찾아갔다. 밴디마이어 부인은 40세 정도의 굉장한 미인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에 웬 지 모르게 무서운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저어, 일할 사람을 구하시다기에...." 터펜스는 일부러 말을 더듬으며 어리숙한 하녀로 보이도록 애썼다. "호오, 그래요?" 그녀는 터펜스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꼼꼼하게 뜯어보고는,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굉장히 의심이 많은 여자인것 같앗다. 그러나. 카터씨가 만들어준 소개장을 보여 주자, 그제서야 겨우 믿는 눈치 였다. "좋아요. 오늘부터 이 집에서 함께 지내도록 해요." 그 날부터 터펜스는 부인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 터펜스는 일하는 것에는 간호원 시절부터 익숙해 있었다. 부인도 그 녀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터펜스는 일을 하면서도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살폈다. 바로 그날 밤 8시경의 일이엇다. 아파트에 스테파노프 백작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을때. 터펜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앗! 저 사람은..." 바로 어제 위친튼과 함께 이 아파트에서 나온 보리스라는 남자였다. 터펜스는 커피를 나른 다음 복도로 나와서 문을 살짝 열고 방안에 귀를 기 울였다. "오늘밤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브라운씨가 당신한테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 브라운시가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요즈음 당신의 행동에 어딘지 모르게 가벼운 곳이 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하더군요." 보리스 스테파노프 백작은 불꽤한 듯이 이렇게 내뱉았다. 그러자, 밴디마이어 부인이 재미있단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그렇게 생각하셔요?"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철저하게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만 해도 우리들의 비밀 장소에..." 거기서부터 보리스는 갑자기 말소리를 낮추었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터펜스는 더욱 귀를 문에 바싹 갖다 대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좀 있다가 큰 소리로 말하는 밴디마이어 부인의 음성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어머. 저런! 큰일날뻔했군요. 정말 아슬아슬 했어요!" 이어서 보리스의 화가 난 듯한 큰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렇게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리타!" "어머. 누가 가볍게 넘겼나요, 뭐?" "리타. 당신은 요즘 에드가튼 경이라는 남자와 자주 만나고 있다던데요?" "그게 어떻단 말이죠?" 밴디마이어 부인은 샐쭉해서 대꾸했다. "어떻다니요? 그 남자는 유명한 변호사인 데다가 범죄 수사에 여러가지로 경찰에 협력해서 공을 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남자와 만나는게 위 험하지 않습니까?" "흥. 쓸데없는 것에는 신경쓰지 말아 주셔요." 밴디마이어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브라운씨 뿐이어요. 나는 두목 이외의 사람이 명령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또 듣기지 않아요!" "쉿!" 보리스가 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길 봐요! 문이 꼭 닫히지도 않았는데..." 보리스는 터펜스가 엿듣고 있는 문을 가리켯다. "제가 닫고 오겠어요.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정 말...." 밴디마이어 부인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터펜스는 급히 발소리를 죽여서 그자리를 피했다. 11. 간호원 에디스.. 그날 밤, 터펜스는 일을 끝내고 아파트를 나와 리츠 호텔로 향했다. 줄리어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 터펜스양! 당신이 밴디마이어 부인 댁의 하녀가 되었다는 소식은 카터 씨에게서 들었습니다. 무척 수고가 많겠군요." "사실이어요. 그런데 토미한테서는 무슨 연락이 없엇나요? 어제, 밴디마이 어 부인의 아파트 앞에서 위친튼과 어떤 남자가 나오길래 그 뒤를 쫓으라 고 했는데...." "그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중앙역에서 토미와 헤어진 뒤로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거든요." "역에서요?" 줄리어스는 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토미와 역에서 헤어져 기차를 타고 위친튼을 미행했습니다. 위친튼은 브안마스에서 내려 어는 호텔로 곧장 가는 것이었어요. 나도 다 행히 그 사람 바로 옆방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계속 감시하 고 있으려니 9시쯤에 위친튼이 밖으로 나가더군요. 호텔을 나와서 차를 타 고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더군요. 나도 물론 차를 타고 뒤쫓아갔습 니다." "어디였나요?" "그가 차에서 내린 곳은 꽤 큰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 앞이었습니다. 그가 그 건물 안으로 사라진후 나도 발소리를 죽이며 그곳으로 다가갔지요." "그래서요?" 터펜스가 숨을 죽이고 물었다. "나는 정원으로 들어가 나무 뒤에 숨어서 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후 2층에 전등이 켜지고 위친튼인 듯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다른 사람도 보였어요?" 터펜스는 참을 수 없어서 줄리어스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고 잇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가까 이 가려고 앞쪽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침 그 방 창문 바로 옆에 서 있는 커 다란 나무가 눈에 띄더군요. 나는 곧 그 나무에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래 방 안이 보이던가요?" "예, 전부는 볼 수 없었지만 생각했던대로 위친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는 어떤 젊은 여자와 함께 있더군요." "젊은 여자라고요? 그 사람이 누구죠?" "글쎄요. 그 여자는 그늘에 가려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뭏든 위 친튼은 가끔씩 화를 내기도 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꽝하고 내려치기도 하더 군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던가요?" "예, 전혀..... 그래서 나는 창문 쪽으로 조금씩 다가붙었습니다. 그런데.. .." "그래서요?" 터펜스가 침을 삼켯다. 줄리어스는 그때의 상황을 그려보듯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그런데... 내가 올라타고 있던 나뭇가지가 뿌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뚝 부 러져버리는 것이어요. 물론 나는 밑으로 곤두박질쳐 버렸구요." "어머나, 세상에!" 터펜스는 마치 자기가 직접 그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 다. "그리고는 그만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떤 침 대 위에 드러누워 있는 거였어요." "그럼 놈들에게...." 터펜스의 눈이 긴장 때문에 더욱 커퉢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큰일이구나. 기어이 놈들에게 붙잡히고 말았 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에 스쳤습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나더 니 누군가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부딪쳐 보자.'는 식이었죠. 그런데..... 들어온 사람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원이지 뭡니까?" "후유. 그럼 놈들과 한 패는 아니었단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후.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나 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니요?" "그 별장이 바로 정신병원이었으니까요." "세상에, 맙소사!" 터펜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결국 위친튼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잇는 어떤 여자를 만나러 왔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맞아요! 그 여자가 바로 제인 핀일 거여요!" 터펜스가 외치듯이 말했다. 줄리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짓말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떤 거짓말을요?" "나는 의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실은 저는 이 병원에 있는 어떤 환자를 만나기 위해 숨어 들어온 것입니다. 혹시 이 병원에 제인 핀이라는 여자 환자가 입원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이지요." "정말 잘했어요. 하이세이머! 그런데. 그녀가 있다고 하던가요?" "아니오. 없다고 하더군요.' "그럼....." "난 다시 생각해 보았지요. 혹시 이름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터펜스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 손뼉을 쳤다. "그래서 다시 의사에게 물었지요. '오늘 밤에 저와 친분이 있는 위친튼씨가 여기에 오는 걸 봤는데요?' 라고요. 그러자 간호원이 대뜸 이렇게 대답하 더군요. '어머. 그 분은 이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는 조카딸 에디 스를 만나러 오신 거여요!'라고 하는 거였어요." "거짓말! 그 에디스가 바로 제인 핀일 거여요." 터펜스가 초조한 듯이 외쳤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에디스 간호원을 좀 만나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요." "그랬더니요?" 줄리어스는 어께를 움찔해 보였다. "방금 전에 삼촌인 위친튼씨와 함꼐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었어요. 나도 하 는 수 없이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줄리어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의 이야기로 보아 위친튼주위에는 수상한 점과 단서가 될만한 것은 많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도 밝혀지지 못했다. "그런데 베레즈포드시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보리스라던가... 그 외국 인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를 뒤쫓아갔는데...." 문득 줄리어스의 말을 들은 터펜스는 깜짝 놀랐다. 밴디미이어 부인과 이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어제의 그 남자 --- 보리스 스테파노프 백작. 스테파노프 백작은 부인과 이야기할때 '오늘만 해도 우 리들의 비밀장소에....'라고 했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아 내용은 모르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난 뒤에 밴디마이어 부인이 큰일날뻔했다고 말했 던 것이 기억났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터펜스의 머리를 스쳤다. '이야기의 내용은 앞뒤 상황을 연결해 보면 수상한 녀석을 붙잡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꼭 그랬던 것만 같았다. '맞았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렇다면 토미는 그 스테파노프의 비 밀 장소에까지 접근했다가 그곳에서 놈들에게 붙잡혀 버린거야!' 터펜스의 가슴은 불안으로 인해 터질것만 같았다. "줄리어스, 정말 큰일났어요!" 터펜스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큰일이란 말입니까? 좀 차근차근히....." "토미는..... 토미는 스파이단 녀석들에게 붙잡혀 있어요!" 터펜스는 스테파노프 백작과 밴디마이어 부인이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줄리어스도 놀란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우선 카터씨에게 연락해서 사건의 전말을 보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 나갑시다. 터펜스." 12.차가운 총.. 터펜스와 줄리어스의 이야기를 들은 카터씨도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러나 아무도 토미가 있는 곳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곧 부하에게 토미를 찾도록 명령을 내렷다. 그러는 사이에 이틀이 지 나갔다. 그동안 좋은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터펜스는 걱정에 싸여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참, 그래!' 터펜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번에 스테파노프 백작이 밴디마이어 부인에게 에드가튼 경을 만나는 것 이 못마땅하다고 투덜거리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에드가튼 경이라면 유명한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국회의원으로서 정치계에서 는 대단한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다음 번의 수상 후보로 오르고 있는 인 물 이었다. '좋아. 일단 에드가튼 경을 만나 보자!'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터펜스는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 다. 사흘째 되던 날 밤, 터펜스는 우물쭈물 망설이는 줄리어스를 설득하여 에드가튼 경을 찾아갔다. "정말 괜찮을까요, 터펜스? 에드가튼경이 우리를 만나 주기나 할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줄리어스가 말했다. "염려마세요. 제게 생각이 있으니까요." 터펜슨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벨을 눌렀다. "매우 중요한 일로 왔습니다. 저는 밴디마이어 부인의 하녀입니다." 터펜스는 에드가튼경의 집사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집사는 곧 두 사람을 에드가튼 경의 서재로 안내해 주었다. 에드가튼경은 듬직해 보이는 신사였다. 그를 대하고 있으려니 웬지 모르게 몸이 움츠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터펜스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서 오시오.밴디마이어 부인의 심부름으로 오셨다고 했나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에드가튼 경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하지만 저어...." 터펜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낸 듯 에드가튼경을 똑바로 바라보앗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의논을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호오. 그래요? 어디 들어 볼까요?" 에드가튼 경은 터펜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건 좀 놀라실 일이라서...." "자, 자. 마음놓고 얘기해도 좋아요. 어떤 얘길해도 놀라진 않을 테니까 어 서 계속해 보아요. 설사 밴디마이어 부인이 해적단의 여두목이라해도 말이 오. 허허..." 에드가튼경은 터펜스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이 농담을 섞어 말했다. 그것 이 터펜스에게 용기를 주었다. "좋아요. 에드가튼경! 밴디마이어 부인은 해적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엄청난 일에 관련되어 있어요." "허어, 그래요? 그건 좀 뜻밖의 말인걸. 어디 자세한 얘길 해 주시겠소?" "밴디마이어 부인은 스파이단의 일당이어요." 터펜스는 똑바로 에드가튼경을 바라보며 또렷히 대답琴다. "뭐, 스파이단이라고?" 아무리 에드가튼 경이라 해도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 눈을 감고 있더니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얘긴 아주 중대한 일이요. 아가씨. 따라서 그만큼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거요." 조금은 타이르는 듯한 에드가튼 경의 어조에 터펜스는 볼을 붉혔다. "물론입니다. 전 철없이 떠들어대거나 하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아, 저런! 내가 너무 실례되는 말을 했나 보군. 그렇다면 용서해 주시오. 다만 내 말뜻은 증거도 없이 그런 중대한 일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소." 에드가튼경이 너무나 진지하게 사과를 해 왔기 때문에 터펜스 쪽에서 오히 려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용서라뇨, 별 말씀을...." "자, 그럼 얘길 계속하겠소? 밴디마이어 부인을 그렇게 생각하게 된 무슨 증거라도 있소?" "예, 정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터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히 들 려 주었다. 줄리어스도 자기가 겪었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에드가튼 경은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날때 까지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더니 나중에 는 엄숙하게 되었다. "흠. 자네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군." "그런데 토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시 노련한 변호사의 입에서 좋은 방법이나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터펜 스는 에드가튼경에게 물었다. "글쎄..... 만약 그가 스파이단이 숨어 있는 집에 들어가서 발각되었다고 하면 벌써 죽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갇혀 있겠지." "토미를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밴디마이어 부인과 스테파노 프 백작을 잡아다가 그 집을 알아내어 쳐들어 가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 줄리어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엿다. "그렇게 성급하게 서둘 건 없어요. 이런 일일수록 신중해야 하니까..." 에드가튼 경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골몰하는 것 같았다. "그렇군, 그게 좋겠어!" 밝은 얼굴로 말하는 에드가튼 경의 얼굴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모아퉢 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터펜스와 줄리어스는 무의식중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밴디마이어 부인에게 물어보는 걸세." 에드가튼 경은 쉽게 내뱉았다. 큰 기대를 걸고 말을 기다렸던 두 사람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 다. 터펜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그건 안 돼요. 그 여자는 매우 교활해요. 절대로 순순히는 말하지 않을 거 여요." "아니오. 내가 물으면 반드시 대답할 거요." 터펜스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에드가튼경이 직접 물으신단 말씀인가요?" "그렇다니까!" 에드가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오. 영국 전체의 안전보장에 관한 문제니 까...." 이렇게 말하고 에드가튼경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만약 억지로 그녀의 입을 열게 하다가는 오히려 토미가 더 위험해 지지는 않을까요?" 줄리어스가 걱정스러운듯이 말했다. "그건 내게 맡겨도 될 거요. 난 그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 부하니까..."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그 여자를 돈으로 매수할 생각이오. 그녀는 꽤 욕심이 많거든." "아, 돈이라면 제가 내겠습니다. 백만 달러 정도라면 언제든지 준비할 수 있습니다." 에드가튼경의 말이 떨어지자 재빨리 줄리어스가 끼어들었다. 과연 억만장자 다운 이야기였다. "좋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밤 즉시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겠소. 터펜스 양, 아가씨는 먼저 돌아가시오. 나와 줄리어스가 오늘 밤 11시경에 그 집 을 방문하겠소." 생각했던대로 에드가튼경은 정말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그것 보셔요? 정말 에드가튼 경은 훌륭한 분이시죠?" 돌아오는 길에 터펜스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어스도 완전히 에드가튼경을 믿고 있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어스와 헤어진 터펜스는 기운을 되찾은 모습으로 밴디마이어 부인의 아 파트로 갔다. 아파트 현관문에 있는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일인 걸. 이 시각에 집을 나갈 일은 없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다가 터펜스는 깜짝 놀랐다. '혹시 밴디마이어 부인이 자신의 신상에 위험이 닥쳐오고 것을 느끼고 재빨 리 어딘가로 도망쳐 버린 것은 아닐까?' 터펜스는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그러나 터펜스의 예감과는 달리 잠시 후 방안에서부터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밴디마이어 부인의 손에는 긴 파이프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부인은 터펜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앗다.. "아이 참. 아주머니도.... 전 아무 소리도 안계셔서 깜짝 놀랐지 뭐여요?" 터펜스는 일부러 명랑한 척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오늘은 빨리 왔구나, 터펜스." 부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예, 일찍 와서 부엌을 좀 정리하려구요." 어쩐지 섬영한 분위기를 느끼며 터펜스는 얼른 둘러대었다. "응, 그래? 어서 들어와!" 터펜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밴디마이어 부인은 문을 닫고는 찰칵 문고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순간, 터펜스는 문득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뒤돌아보려 했다. 그때 터펜스는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권총이었다. "이 어리석은 아가씨야. 이제 연극은 그만 두시지!" 밴디마이어 부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13. 위기일발.. 터펜스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자. 그대로 앞으로 가! 큰 소리를 친다든지 하는 날엔 당장 쏴 버릴 테다 !" 밴디마이어 부인은 권총을 겨누며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내 침실로 들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뭏든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부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서 부인은 한 손으로 권총을 터펜스에게 겨눈 채로, 다른 한 손으로 화장대 위에 있는 작은 병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병뚜껑을 열고 컵에 따랐다. "자. 이걸 마셔!" 터펜스는 등골이 오싹 해쪘다. "도... 독약을 먹으라구요??" 터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절대로 마실 수 없어요. 독약을 먹고 죽기보단 차라리 총에 맞아 죽는 편이 낫겟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쏜다면 총소리가 날 테니 당신도 무사하진 못 할 거여요!" "정말 엉뚱한 아가씨로군." 밴디마이어 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터펜스를 노려 보았다. "이건 수면제일 뿐이야. 이걸 마시고 내일 아침까지 푹 자면 되는 거야. 물 론 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나는 떠나 버린 뒤겠지. 자, 그러니까 얌전 히 마셔 둬! 싫다면 하는 수 없지. 정말로 쏘는 수 밖에.... 이렇게 담요 를 둘둘 말아서 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단 말이야. 이 바보같은 아가씨야!" 밴디마이어 부인은 담요를 권총에 감았다. "자, 어서 마셔!" 이제는 정말 어쩌는 수가 없었다. 터펜스는 권총이나 수면제 중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엇다. '만약 부인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부인은 도망치고 난 생명만은 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독약이라면...' 순간 머리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터펜스는 갑자기 밴디마이어 부인의 발 밑에 무릎을 끓었다. "살려주세요. 부인!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어요.. 제발, 제 발...." 밴디마이어 부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겁장이 주제에 그 동안 잘도 나를 속였구나!" 그러더니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딴전 부리지 말고 빨리 마셔!" "제... 제발... 부인, 살려 주세요!" 터펜스는 눈물까지 흘려 가며 애원했다. "이런 앙큼한 계집애. 어서 마시지 못하겠니?" "예, 예예.... 알았어요." 터펜스는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저어...." "또 뭐냐?" "이 약이 수면제라는 게 정말인가요?" "맙소사! 정말 끈질긴 계집애구나!" "아...알겠어요. 마... 마실께요..." 터펜스는 힘없이 대답하고는 컵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부들 부들 떨려서 좀처럼 컵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깜찍한 계집애야!" 밴디마이어 부인도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쪽손을 뻗어 컵을 집어들 고 터펜스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그 순간. 권총을 쥔 손이 옆으로 비켜졌다. 바로 터펜스가 노리고 있었던 기회였다. 터펜스는 손을 내밀어 컵을 받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 컵을 부인의 얼굴에 던졌다. "앗!" 뜻밖의 기습으로 컵을 얼굴에 맞은 부인은 잠시 비틀거렸다. 터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인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리고는 부인의 권총을 빼앗았 다. 밴디마이어 부인이 다시 일어났을때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있었다. 밴디마이어 부인은 마녀와 같은 험악한 얼굴을 하고는 달려들려 했다. "가까이 오면 쏘겠어요!" 터펜스가 외햡다. 부인은 움찔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터펜스가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 듯한 모 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밴디마이어 부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냈다. "터펜스, 넌 반드시 후회할 거야! 이 바보같은 아가씨!" "부인, 그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인 걸요. 난 지금 당장 당신을 경찰에 넘 겨 버릴 테니까요." 터펜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부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우리들에게 협력해 준다면 이대로 도망가게 해줄 수도 있어요." "흥. 협력해 달라고? 천만에!" "백만 달러를 준다면?" 순간, 밴디마이어 부인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고? 백만 달러?" "그래요. 백만 달러를 주겠어요." "거짓말 말아! 네게 그렇게 큰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부인은 의혹에 찬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정말이어요. 내겐 억만장자인 미국인 동료가 있어요. 그 사람이 돈 을 지불해 주기로 했어요. 만약 당신이 우리 일에 협조만 해 준다면 말이 어요." "도대체 내게 원하는게 뭐지? 뭘 협조해 달라는 건지 말해 봐?" 밴디마이어 부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엇다. "토미는 어디 있죠?" 터펜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부인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토미라니?" 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제서야 짐작이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라, 이제야 알겠어. 보리스에게 잡힌 그 경솔한 남자를 말하는 모양이 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잘 몰라." "그렇지만, 보리스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글쎄. 그 사람이야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걸 알아내는 데 백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하려는 건 아니겠지?" 터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드가튼경의 말대로 이 부인은 돈만 준다면 무엇이든지 말해 줄 것도 같 아.' 터펜스는 부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브라운이란 사람이 누군지 가르쳐 주어야 겠어 요." 터펜스의 입에서 브라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부인의 얼굴에 핏기가 싸 악 가시고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안 돼! 그건....그것만은 말할 수 없어!" "무슨 이유죠? 왜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그.... 그건..." "차라리 브라운에 관한 일을 불어 버리는 것이 부인으로서는 안전하지 않을 까요? 브라운은 어차피 붙잡히게 될 거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배신했다 고 해서 보복을 받지는 않을 거여요." 터펜스는 밴디마이어 부인을 설득하기 위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사람은 절대로 잡히지 않아. 넌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 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지도..."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침실의 문이 끼익 하고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밴디마이어 부인은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밴디마이어 부인의 입에서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악! 저, 저 사람이...." 그리고는 갑자기 가슴을 감싸쥐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다가 바닥으로 쓰러 졌다. 그 모습을 본 터펜스도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터펜스는 재빨리 돌아서 서 문쪽으로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에드가튼 경과 줄리어스 두사람이 서 있는 것이었다. 터펜스는 그제야 휴유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 오셔요. 하마터면 저도 기절할 뻔했지 뭐여요?" 터펜스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요?"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밴디마이어 부인을 보며 줄리어스가 물었 다. "아마 두 분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것 같아요. 지레 겁먹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 들어오신 두 분을 보고 놀랐던 거죠." "이거 원!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두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줄리어스는 어이없다는 듯 부인을 내려다 보앗다. 그러는 사이 에드가튼 경은 성큼성큼 방에 들어와 몸을 굽히고 부인을 살펴 보았다. "이거 좀 위험한 걸. 심장이 발작을 일으킨 모양이야. 빨리 저쪽에 있는 브 랜디를 가져오게!" 줄리어스가 급히 선반에 있던 술병을 가져오자 에드가튼 경은 그것을 부인 의 입에 부어 넣었다. 순간.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무슨 말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더니 그대 로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잠시 이대로 놔 두면 될 걸세. 우선 침대에 뉘어 놓도록 하지. 아침이 되 면 괜찮을 거야." 에드가튼 경이 말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거실에 모였다. "오늘 밤에는 세 사람이 교대로 감시를 하기로 하지. 혹시 브라운이 밴디 마이어 부인의 배신을 눈치채고 보복하러 올지도 모르니까 잘 경계해야 돼." 에드가튼 경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두 사람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것 같았다. 처음에 터펜스는 밤을 꼬박 새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피로가 겹쳐서 그런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터펜스가 깜짝 놀라 잠을 깨어 보니 옆에 있는 두 사람도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터펜스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 가만히 옆방의 침실로 들어갔다. "앗!" 터펜스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밴디마이어 부인은 잠자는 모습으로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것이다. 터펜스는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브라운의 짓이어요! 브라운이 밴디마이어 부인의 배신을 눈치챈 거여요!" 터펜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에드가튼 경과 줄리어스도 멍하니 할 말을 잊 은 채 부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아... 이제 어떻게 하죠? 부인이 죽었으니 토미의 행방을 알아낼 수도 없게 되었고..." "그것보다도 놈이 어떻게 해서 이 방에 들어왔단 말인가? 투명인간이 아니 고서는 우리 세 사람의 눈을 피해 침실까지 들어올 수 없었을텐데..." 에드가튼 경은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내뱉았다. 14. 구원의 손길.. 한편, 토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에게 몽둥이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던 토미는 욱씬욱 씬 쑤시는 머리의 통증으로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다.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시야에 험상궂은 얼굴들이 들어왔다. "흠,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군." 맨 나중에 계단을 올라왔던 눈이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말했다. "콘라드에게 얻어맞고 죽지 않은 녀석은 너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보리스 스테파노프 백작이었다. 그러자 아까 머리를 내리친 녀석이 히쭉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이 자가 콘라드인 모양이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냐?" 토미가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쳤다. "물론 스파이에 알맞는 대접을 해야지. 멋진 처형 방법을 생각해 두겠다. 하하하...." 옆에 있던 남자들도 일제히 따라 웃었다. "그러기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다. 넌 왜 이 집에 몰래 숨어 들었지 ?" "흥. 궁금하겠지. 하지만 난 당신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단 말이야. 아마 섣불리 내게 손 대지는 못 할걸!" 이것은 토미가 한번 해 본 소리였다. 어차피 올데까지 왔으니 될대로 되라 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의외로 이 패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 같앗 다. "뭐라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이 비밀 소굴을 내가 어떻게 알았으며, 또 어떻게 신호까지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놈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토미는 '이 때다.'싶어 말을 계속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야. 나는 아주 중요한 것도 알고 있어. 당신들이 그렇게 까지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서류 말이야." 제법 거드름까지 피우며 토미는 여유 있게 놈들을 주시했다. "뭐라고? 그럼 그 루시타니아 호에서 잃어버린 서류가 있는 곳을 네가 알고 있단 말이냐?" "물론이지!" "장소를 알고 있다고? 그게 어디지?" 보리스가 다가서며 다그치듯 물엇다. 토미는 대답대신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지 않으면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테다!" 보리스는 으르렁 거리며 토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는 못 할걸! 나를 죽이면 그 서류는 영영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녀석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뭔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보리스가 앞에 나서서 말했다. "좋다! 자네가 이겼어. 그 서류가 있는 곳을 우리에게 알려 주면 자네를 자 유롭게 해 주지." "그건 좀 곤란한데... 난 사람을 잘 믿지 못 하거든. 특히 당신들 같은 사 람들은 좀 곤란해. 서류가 당신들 손에 넘겨지는 순간 난 살해되어 버리고 말겠지?" 토미는 여유있게 한 사람씩 둘러보았다. "더구나 그 서류를 찾는 데는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럴 수는 없어!" 보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정말 죽고 싶으냐? 우리들의 이야기를 순순히 듣는게 좋을 거다. 이 애송 이야!" "협박은 통하지 않아. 원한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죽여도 좋아!" 스파이들은 곤란하게 된 듯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눈이 날카로운 남자가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두목과 의논해 보도록 하겠네." "브라운 말인가?" 토미가 그렇게 말하자 눈이 날카로운 남자는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더니 콘 라드라는 남자에게 명령했다. "이 녀석을 2층에 가두어 두게!" 토미는 콘라드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2층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 은 우중충하고 더러운 방이었는데 벽에는 교회 그림과 꽃 그림, 그리고 마 녀의 그림 따위가 걸려 있었다. 토미는 침대 한쪽에 멍하니 걸터앉았다. 그러다가 피곤과 배고픔 때문에 어 느 사이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 문에서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토미는 깜짝 놀라 눈을 떳다. 그 리고 얼른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마녀의 그림 액자를 떼어 들었다. 만약 콘라드가 들어왔다면 정말로 머리가 깨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양손에 음식이 놓여진 쟁반을 들고 있었다. 아침식사였다. "후유~~~" 토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액자를 다시 벽에 걸었다. 아가씨는 말없이 식사가 놓인 쟁반을 놓고 그냥 나가려고 했다. "저, 잠깐..." 토미는 급히 그녀를 불렀다.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아네트여요."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집의 하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제인 핀이라는 아가씨를 모르십니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토미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에 빠른 걸음걸이로 나가 버렸다. 뭔 가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아가씨라면.... 어쩌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보아 도 스파이 일당 같진 않아.' 이렇게 생각하자 토미에게 조그마한 희망이 솟아올랐다. 아가씨는 오후에도 식사를 날라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토미는 바짝 다가가 말을 건넸다. "잠깐 아네트, 나를 이곳에서 도망치게 해 줄 수 없겠습니까?" 아네트는 깜짝 놀라며 우뚝 멈춰 섰다. "그건 안 돼요. 전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가씨만 도와 준다면 감시원의 눈쯤이야...." "어떻게 세 사람의 눈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이어요?.... 더구나 나는 그 사 람들과 같은 편인걸요." 아네트는 더욱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도 스파이란 말이어요." "하지만 그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아네트 제발 날 도와 줘요. 난 그들이 납치해 간 제인 핀이라는 아가씨를 구해 내려고 몰래 숨어 들어왔던 것입 니다." 토미의 말을 들은 아네트는 물끄러미 토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아네트는 토미의 어깨 너머로 벽 쪽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앗!'하는 조그만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토미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까 토미가 떼어냈던 마녀의 그림 밖에 없었다. "왜 그러죠, 아네트?" 토미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네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 미 아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토미가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급히 방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아뿔사!' 토미는 아네트가 놈들에게 토미의 말을 고해 바치기 위해 갔을 거라고 추측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걸. 내가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고해 바쳤다면 지금쯤 놈들이 올라 왔을 텐데...' 토미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후로느 느 아네트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저녁 식사를 날라 온 사람은 콘라드였다. 다음날 아침 식사도 콘라드 가 날라다 주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토미는 걱정이 되어 방안을 서성였다. 문득 세 남자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 다던 아네트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아네트가 내게 쓸데없는 것을 말했다고 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갇혀 있는 신세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사흘째 되던 밤의 일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콘라드와 또 다른 남자가 방에 들어와서 토미를 침대에 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밧줄로 꽁꽁 묶어 버렸다. "이 녀석, 그 동안 용케도 우리들을 속였지? 네 녀석이 아무리 그래도 브라 운 씨의 눈은 속일 수 없다는 걸 명심해 둬라!" 콘라드가 울화통이 터지는 듯한 목소리로 거칠게 내뱉았다. 이제 토미의 기 대는 산산조각이 나 버린 듯했다. "그래 좋다! 이젠 그만 나를 괴롭히고 차라리 죽여 다오!" 토미가 신음 하듯이 말했다. "물론, 죽여 주고말고! 내일 아침이 되면 너를 해안에 데리고 가서 절벽위 에서 떨어뜨려 줄테다! 흥, 꼴 좋게 됐군! 오늘 밤엔 꿈이나 실컷 꾸어 두 라고!" 두 사람은 토미를 방 한가운데 버려 두고 나갔다. '오호, 이것으로 내 생애도 끝나는가 보군!' 토미는 꼼짝할 수 없이 꽁꽁 묶인 채 마루에 누워있었다. 막상 내일 아침이 면 죽는다고 생각하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두려움이 솟아 올랐다. 묶여진 손발이 저려 왔다. 마침내 머리 끝까지 저려 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토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눈만 그쪽으로 향했다. "아니, 아네트!" 순간 토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네트는 재빨리 토미 옆으로 다가와서 무엇인지 작고 날카로운 것을 손에 쥐어 주고는 얼른 나가 버렸다. 토미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작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아네트는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이유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토미는 손목을 움직여서 그 칼로 밧줄을 끊 기 시작했다. 밧줄은 단단한 것이어서 잘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토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계속해서 칼을 움직이자 겨우 한 가닥이 탁 하고 끊겼다. 그 다음은 쉬웠다. 토미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묶였던 손발이 마비되어 있어서 잠시 동안은 움 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토미는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 게 되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무겁고 둔탁한 구두 소리였다. '놈들이다!' 토미는 다시 벽에서 그림 액자를 떼어내어 양손으로 단단히 주고 문 옆에 바싹 다가붙었다. 문이 열리고 콘라드와 다른 한 명의 남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들은 토미가 꽁꽁 묶여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 다. 토미는 얼른 뛰어나가면서 뒤따라 들어오는 한 녀석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 쳤다. "으악!" 그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마루로 나가떨어졌다. 콘라드가 괴물같은 얼굴을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콘라드가 성난 호랑이 처럼 으르렁대며 토미쪽으로 몸을 덮치려 한 것과 토미가 재빨리 몸을 피하 며 문을 쾅 닫은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토미는 재빨리 열쇠구멍에 꽂혀 있던 열쇠를 돌렸다. 순식간에 방안에 갇혀 버린 콘라드가 괴성을 지르며 문에 발길질을 퍼부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무턱대고 복도를 뛰어 내려갔다. 첫 번째 코너를 막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 그의 손 을 꽉 잡았다. "아, 아네트!" "쉿! 자, 빨리 이 계단으로 올라가셔요!" 토미는 그녀가 가리키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곳은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아네트, 이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요!" "괜찮아요, 우선 그곳에 숨어 있다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속여서 뒷문으로 가게 할 테니까 그때 현관으로 빠져 나가세요." "그럼 아네트는 어떻게...." "제 일은 걱정하지 마셔요. 자, 어서!" 아네트는 이렇게 말하고 곧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큰일났어요! 큰일났어요! 그 남자가 뒷문으로 도망쳤어요!" 곧이어 발소리가 쿵쿵 울리더니 뒷문쪽으로 멀어져 갔다. 토미는 얼른 복도로 뛰어 나갔다. 현관을 막 빠져 나가려고 할 때였다. 거 기에서 그만 콘라드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앗다. 그 방에서 빠져나온 모양 이었다. 토미는 콘라드의 턱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콘라드는 뜻하지 않은 선수 기습을 받고 멋들어지게 벽에 머리를 부딪치면 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현관을 나오자 토미는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때서야 뒷문 쪽으로 뛰어 나갔던 패들도 토미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는지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두세방의 총소리가 났으나 무턱대고 쏘는 총에 맞을 리는 없었다. 토미는 문을 나와 헐레벌떡 쉬지 않고 뛰었다. 마침내 사람들로 붐비는 거 리로 들어섰다. "됐다! 이젠 안심해도 돼!" 너무도 기쁜 나머지 저절로 큰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15. 터펜스가 함정에 빠졌다.. '그런데 아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흥분이 가라앉자 토미의 머리속은 다시금 아네트의 걱정으로 가득찼다. 그 위험한 곳을 아네트 덕택에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다. '악당들에게 사실이 밝혀져 큰 곤욕을 치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걱정해도 혼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누구에게든지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토미는 우선 택시를 잡아 타고 카터씨의 집으로 향했다. 카터씨는 토미를 보자 깜짝 놀라며 반겨 주었다. 토미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그러자 카터씨는 흥분 되 표정으로 금고 속에서 어떤 남자의 사진을 꺼내 왔다. "그 눈이 날카롭다는 남자가 이 자는 아니던가?" 토미는 사진을 보았다. "맞습니다. 바로 그 녀석입니다!" 카터씨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음, 역시 그 녀석도 한 패거리였었구나. 이 자는 크램닌이라는 A국 외교관 일세. 그전부터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증거가 없었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체포해 버리면 되겠군요?" "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네. 외교관이란 직책은 함부로 다룰 수가 없네. 잘못하다간 국제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네. 범죄 현장을 덮치지 않는 한 불가능해." 카터씨는 한숨을 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저는 우선 리츠 호텔에 가서 줄리어스와 터펜스를 만나야겠습니다. 지금쯤 제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오, 물론 그래야지. 다녀오게." 카터씨도 토미의 의견에 찬성했다. 토미는 서둘러 리츠 호텔로 향했다. 호텔의 현관에 들어서자, 마침 줄리어스가 나오다가 토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야아. 무사했군요! 우린 당신이 놈들에게 붙잡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었지요.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그런데 터펜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물건이라도 사러 나간 모양입니다. 한 시간전에 나가서는 연락이 없 습니다." "그럼 기다리기로 하죠." "그 동안 당신이 어떻게 됐었는지 들려 주십시오. 어떻게 놈들의 소굴에서 빠져나왔지요?" 토미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줄리어스에게 들려 주었다. "정말 대단했군요. 마치 갱 영화를 보는 것 같은데요." "자, 제 얘긴 끝났으니 제가 없는 사이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들려 주 십시오." 이번에는 줄리어스가 터펜스의 활약과, 밴디마이어 부인의 의문의 죽음, 그 리고 정신병원에 숨어 들어갔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 놓았다. 이야기를 마쳤을때 토미가 물었다. "줄리어스, 혹시 터펜스는 시장에 간 것이 아니라 나를 찾으러 간 게 아닐 까요?" "글콅요. 하지만 당신을 찾을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무턱대고 어디로 나갔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줄리어스는 호텔 보이를 불러 터펜스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느냐고 물어 보았다. 보이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더니 곧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래여. 어디에선가 아가씨 앞으로 전보가 왔었어요. 그래서 급히 나 갔습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보이를 밀어젖히듯이 하면서 복도 로 뛰어나갔다. 그들이 뛰어간 곳은 터펜스의 방이었다. 방안을 샅샅이 뒤져 보니 휴지통 속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전보가 발견되었 다. 두 사람은 재빨리 전보를 펼쳤다. 그곳에는 이런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곳으로 빨리 올것. 사건 해결이 가까워졌다. 요크 군 에버리. 모트하우스에서. 토미' "가짜 전보다! 나는 이런 전보를 보낸 적이 없어!" 토미가 입술에 경련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면 터펜스가 녀석들의 함정에 걸려들었군요!" "그러니 어떻하면 좋지?" "빨리 이 요크 군의 에버리라고 하는 곳에 가 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급히 역으로 달려갔다. 마침 에버리 행 열차가 있었다. 두 사람 은 표를 사서 급히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가 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초조와 불안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열차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열차가 에버리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 었다. 그곳은 시골의 조그마한 역으로서, 역원도 세사람밖에 없었다. 손님은 줄리 어스와 토미뿐이었다. 역원에게 물으니 모트하우스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 었다. 두 사람은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고 둘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버렸다. 모트하우스가 보이는 곳에 겨우 닿은 것은 저녁 7시가 지나서였다. "저기다!" 줄리어스가 외치며 손으로 가리켰다. 빨갛게 녹이 슨 높다란 철문이 달려 있는, 어쩐지 기분 나쁜 집이었다. 정원에는 울창하게 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바람을 받아 으시시하는 소리 를 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철문을 열고 길 양쪽의 나무가 맞닿아서 굴속 같이 된 차도로 들 어섰다. 잠시 걸어가자 집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토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현관의 벨을 눌렀다. 벨은 휑한 집 속에서 괴물의 외침과 같은 소리를 내며 울려퍼졌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줄리어스가 문을 덜컹거려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토미는 집 주위를 둘러 보다가 유리창을 발견했다. "음, 좋아! 저 창문을 통해 들어가 봅시다." 두 사람은 돌로 유리창을 부수고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서 구석구석 까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최근 1 ~ 2년 정도는 사람이 들어 왔던 흔적조차 없었다. "흠. 깜쪽같이 속였구나!" 토미는 분한듯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전보는 미끼였던것 같습니다. 놈들은 이 집밖에서 터펜스가 오기를 기 다렸다가 터펜스를 납치하여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 게 틀림없습니다." 줄리어스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데려갔을까요?" 두 사람은 어두침침하고 낡은 집안에 서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깊은 절망감 이 두 사람을 덮쳤다. 16. 3층의 그림자..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서 리츠 호텔로 돌아왔다. 터펜스의 방은 여전히 텅 빈 채로였다. 토미는 담배를 피우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아까의 전보가 손에 잡혔다. 그는 화가 치밀어올라 박박 찢어 버리 려고 했다. '빌어먹을! 터펜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지금쯤 어떤 곤욕을 치르고 있을까? 우리가 찾을때까지 살아만 있어 준다면 좋겠는데....' 토미는 전보를 찢으려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알았다! 이것은 속임수였다!" 토미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생각에 빠져 있던 줄리어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이 전보는 다시 쓴 겁니다. 터펜스에게 배달되고 나서 누군가가 일부러 고쳐 쓴 게 분명해요! 이걸 보십시오!" 토미가 내민 전보를 받아든 줄리어스의 얼굴도 분함으로 일그러졌다. "물론 우리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지요?" "전보국에 물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토미는 급히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였다. 전보국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똑같았으나 장소는 ' 켄트군의 게이트하우스'였다. "즉시 출발합시다!" 토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러자 줄리어스가 손으로 토미를 막았 다. "잠깐만 토미! 이번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전보의 농간으로 보아 놈들은 우리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 녀석들은 게이트하우스를 철저히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고...." 줄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토미, 당신은 우선 그곳에 가서 동정을 살펴 보 십시오. 절대로 성급하게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좋은 생각이란 뭐죠?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난 이렇게 할 생각입니다." 줄리어스는 토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토미는 눈 을 둥그렇게 떴다. "그것은 좀 위험한 방법인데..."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엔 없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자, 그럼 행운을..." 두 사람은 손을 들어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 목적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 다. 토미는 급히 켄트 군으로 갔다. 그가 게이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었다. 그곳은 모트하 우스와는 달리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훌륭한 저택이었다. 토미는 우선 저택 부근을 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았다. 그 결과 이 저택에 2 ~ 3일 전부터 어떤 젊은 아가씨 두 사람이 와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터펜스임에 틀림없는것 같았 다.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토미는 몰래 저택의 넓은 정원으로 숨어 들어갔 다. 혹시 개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개 짖 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심조심 저택 가까이로 접근했을때, 토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 춰 섰다. 3층의 한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쳐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히 터펜스 같 았기 때문이다. 토미는 어떻게 해서든지 터펜스의 주위를 끌 방법이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러자 곧 한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지막히 휘파람으로 '영국 의 군대'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전쟁때 모두들 즐 겨 불렀던 것이다. '터펜스 제발 이 노래를 듣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다오.' 토미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휘파람을 불었다. '틀렸어.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 보면 터펜스가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 한 가닥 남을 희망도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터펜스의 방에서 불이 꺼졌다. 잠자리에 드는 것 같았다. '터펜스 이런 맹꽁이! 내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토미가 실망에 빠져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창문이 살짝 열렸 다. "아니!" 토미가 눈을 크게 뜨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휙'하는 소리와 함께 무 엇인가가 땅에 떨어졌다. 토미는 얼른 그것을 집어올렸다. 그것은 편지를 돌돌 만 것이었다. 토미가 급히 펼쳐보니, 터펜스의 글씨로 마구 갈겨 쓰여져 있었다. '지금 접근하면 안 돼요. 이 집에는 스파이들이 득실거려요. 우리들은 오늘 밤 어딘가로 옮겨질 거여요.' 토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불 꺼진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17. 멋진 구출작전.. 한편, 줄리어스는 그날 오후에 A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대사관의 한 사무실에는 크램닌 서기관이 두꺼운 서류를 ?어보고 있었다. 비서가 서기관에게 다가가서 손님이 왔다고 일러주었다. "손님이라니 누군가?" "줄리어스 하이세이머라는 미국인입니다." "하이세이머? 난 그런 사람 모르겠는데..... 만날 수 없다고 해!" 비서는 고개를 갸웃뚱했다 "하지만 크램닌 서기관님. 하이세이머란 사람은 미국에서도 이름난 억만장 자입니다. 무엇을 의논하러 왔는지 그 이야기만이라도 들어 보시는 게 좋 지 않겠습니까?" 비서의 말에 크램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군, 좋아. 들어오라고 하게." 비서의 안내로 곧 줄리어스는 크램닌의 방으로 들어왔다. 줄리어스는 크램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크램닌씨, 실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가 있어 찾아왓습니만..... 두 사람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크램닌은 날카로운 눈으로 줄이어스를 ?어보았다. 그 역시 미국인 억만장 자의 비밀 얘기라면 호기심이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크램닌은 비서에게 손짓해 밖으로 나가게 했다. "자, 이젠 됐습니까? 그럼, 얘기를 들어 보도록 할까요?" "좋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줄리어스는 나지간 목소리로 말하며 주머니에서 커다란 권총을 꺼내어 크램 닌의 가슴에 겨누었다. "손을 들고 책상에서 떨어져! 서투른 짓을 했다간 심장에 바람구멍을 내 줄 테다!" "아.... 아니. 하이세이머씨!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겁니까? 여긴 A국 대사관이요." "흥, 잔소리는 필요없어!" "그..... 그렇지만 이런 짓을 하면 국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나 있소?" 줄리어스는 권총을 크램닌의 코 앞에 바싹 갖다 댔다. 크램닌은 사색이 되 어 벌벌 떨며 양손을 높이 들고 책상에서 떨어퉢다. "도대체 내게 뭘 요구하는 거요?" "터펜스 카우리라는 아가씨를 알고 있겠지?" "터펜스 카우리라고요? 난 그런 여자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요?" 크램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흔들었다. "오, 그래? 모른다면 가르쳐 주지. 네놈들이 켄트군의 게이트하우스에 감금 시켜 놓은 아가씨의 이름이지. 어때, 기억나나?" 줄리어스는 빈정대며 냉소를 흘렸다. "그.....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크램닌은 당화해 하는 것 같았다. "자,엉뚱한 수작은 그만 두고 빨리 그곳으로 안내해!" "아.....알았습니다. 하이세이머씨." "미리 말해두지만 권총은 주머니에서 언제든지 나올 준비가 되어 있어. 내 권총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사정없이갈겨 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지." 크램닌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줄리어스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어색하지 않게 해! 자, 누가 보아도 아주 다정한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두 사람은 정말 누가 보아도 아주 다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나란히 뒷문을 나가 줄리어스의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바로 총알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5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후, 밤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겨우 게이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 차가 멈추어 줄리어스는 권총의 총구로 크램닌의 옆구리를 꾹 눌 렀다. "자. 자네 동료들에게 터펜스를 데리고 나오라고 말해. 브라운의 명령이라 고 말이야. 알겠지?"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할테니 이 권총만은 제발....' "자. 어서!" 크램닌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이봐! 나다. 크램닌이야! 그 애들을 데리고 나오라. 브라운 씨의 명령으로 내가 데려가기로 했다!" 그러자 위친튼이 저택안에서 모습을 나타내고는 크램닌의 얼굴을 보고 곧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러헤 기다리고 있으려니 드디어 위친튼이 두 여자를 끌듯이 하며 다 시 나타났다. 위친튼은 두 여자를 거칠게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터펜스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차안에 타고 있는 한 사람을 보자 깜짝 놀라 엉겁결에 말을 꺼내고 말았다. "어머, 줄리어스씨!" 위친튼은 터펜스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는 얼른 차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리고는 크램닌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사태를 짐작 한 모양이었다. 위친튼은 주머니에서 까만 권총을 꺼내어 줄리어스에게 겨누었다. 줄리어스 도 같이 쏘려고 했지만 크램닌의 몸이 방해가 되어 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위친튼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밖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토미가 서있는게 아닌가! 정원에 숨어 서 상황을 보고 있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 뛰어나와서 위친튼에 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빨리 토미!" 줄리어스가 소리치며 권총을 쏘았다. "탕! 탕탕!" 곧이어 집안에서도 총소리가 울려퍼졌고, 날아든 총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차에 맞았다. 토미가 차안으로 기다시피 하며 들어서자 줄리어스가 운전대에서 크램닌을 밖으로 밀어냈다. 크램닌은 비명을 지르며 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차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총소리가 울렸다. 차는 숲속으로 난 찻길로 들어가서 잠시 후에는 게이트하우스 집 밖으로 빠 져나갔다. 18.드디어 나타난 제인 핀.. "이젠 됐어!" 토미가 신나는 듯이 외쳤다. "대성공이다!" 줄리어스도 오랜만에 명쾌한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어? 당신은 분명히 그 병원에 있었던 아가씨 같은데..." 동시에 토미도 놀라서 물었다. "아네트! 아네트가 아닙니까?" 그러자 터펜스가 싱긋 웃었다. "아니어요. 이 아가씨는 아네트가 아녀요. 그것은 가명이었어요. 진짜 이름 은....." 토미와 줄리어스는 동시에 터펜스를 바라보았다. "진짜 이름은 제인 핀, 우리들이 지금까지 찾고 있던 제인 핀이어요!" "뭐라고?" 토미와 줄리어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외쳤다. "설마 그럴리가!"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모두 사실이어요." 아네트가 조용히 대답하곤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인은 지금까지 기억 상실증 환자로 가장했었대요. 스파이들의 눈을 속이 기 위해서 말여요. 제인은 나와 함께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모두 얘기해 주었어요." 터펜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했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 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아네트? 아니. 제인 양?" 토미가 그렇게 말하자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루시타니아 호가 침몰했을때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탔었기 때문에 겨우 구조되었는데, 그때 함께 구조된 사람 중에는 밴디마이어 부인이라고 하는 외국인 여자가 있었어요. 그 부인은 제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 상륙한 뒤에 그 부인이 이상한 남자와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제가 맡아두었던 그 비밀서류에 관한 일이었어 요. 그래서 저는 밴디마이어 부인이 그 서류를 노리고 있는 스파이단의 일 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줄리어스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을 알아차린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부인으로부터 도망쳐야 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인과 그 일당이 언제나 저를 감시하고 있었어 요." 제인의 이야기는 침착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틈을 보아 저는 그 서류를 잡지 사이에 끼우고 미국 대사 관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얻어 맞고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집의 침대에서 누 워 있었어요. 깜짝 놀라 살펴보니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뒤진 흔적이 있더군요." "서류는 어떻게 되었나요?" 토미가 물었다. "무사했어요. 그들은 잡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서류의 행방을 끈질기게 물어 올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머리를 얻어맞은 것을 구실로 삼아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체하자.' 라고 말입니다." "오, 정말 좋은 생각을 했군요!" 토미가 감탄하며 말했다. 제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저를 믿지 않았어요. 그리고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자백을 받아내려고 저를 괴롭혔어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해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결국에는 단념하더군요." "그래서요?" "그들은 저를 위친튼의 조카딸이라고 하며 에디스라는 이름으로 기억 상실 증을 고치기 위해 그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그 병원에 입원해 있었군여.." "예, 그래요. 그 후로 저는 4년간이나 그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요 즈음에는 간호원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만 그 병원 안에도 스파이가 있어서 언제나 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당신들이 저를 찾기 시작하자 그들은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를 토미가 갇 혀 있던 그 집에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그때 토미에게서 저를 구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어요." 제인은 말을 멈추고 그때의 감격을 회상하듯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왜 그샔 미리 제게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토미가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물론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감시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에 걸려 있었던 그림 뒤에는 비밀 창문이 있어서 그리고 빠져나갈 수 도 있었어요. 그러나...." 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 서류를 그곳에 그냥 놓아두고는 도망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서류는 아직 그 방에 있단 말입니까?" 세 사람은 동시에 물었다.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말입니까?" 토미가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 방에 걸려 있는 액자 속입니다. 꽃 그림 액자 말입니다." 토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제인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그렇다면 나는 그 서류를 바라보고 잠을 잔 셈이잖아?" "좋아, 그렇다면 지금부터 곧 그 서류를 찾으러 갑시다!" 줄리어스가 힘차게 말琴다. 물론 모두 찬성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카터씨와 에드가튼 경에게도 이 일을 보고해 두는 게 어떨 까요?" 토미는 그렇게 말하고 곧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터씨는 마침 자리에 없어서 가는 곳을 말해두고는 그리로 와 달라고 메모 를 부탁했다. 전화를 직접 받은 에드가튼경은 진심으로 모두의 성공을 기뻐해 주었다. 그 리고는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네 사람은 차를 타고 어둠 속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모두 입을 다물고 쌩쌩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차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좀 더 빨리!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그 비밀 서류가 잠시 후면 손에 들어온 다. 이제서야 겨우 스파이단의 마수를 뿌리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브란운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고도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일까?' '혹시 마지막에 뜻밖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서류를 빼앗으려 하는 것 은 아닐까?' 한 가지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불안의 그림자는 브라운이라는 정체 모 를 사나이엿다. 더구나 브라운의 정체는 아직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19. 브라운의 정체.. 차는 드디어 소호 거리의 그 집 앞에 멈췄다. 그런데 그 집 앞에는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멎어 있는게 아닌가! "어? 이것은 에드가튼 경의 승용차인걸?" 토미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오라. 이번 일에는 에드가튼 경도 가만히 기다리실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 네 사람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잘 알고 있는 제인이 앞에 서 서 들어가고 이어 다른 사람들이 제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토미가 갇혀 있었던 그 방에 가 보니, 역시 에드가튼 경이 와 있었 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칼로 자르고 있는 중이었다. "오, 이제들 오는 군." 에드가튼 경은 반가운 듯이 말했다. "처음엔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했었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는 조금 멋적은 듯 억지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계속 그림을 찢어 나갔 다. "그래서 급히 달려와서 기다리고 있던 중일세. 조금이라도 빨리 찾지 않으 면 브라운에게 빼앗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드디어 그림 뒤에서 두 장의 얇은 종이가 팔랑팔랑 밑으로 떨어퉢다. 제인이 그것을 주워서 ?어보았다.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가 깨알같이 잔뜩 쓰여져 있는 서류였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일동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이젠 됐어!" "정말 다행이어요!" 터펜스와 토미, 줄리어스는 서로 손을 굳게 잡으며 기뻐했다. 에드가튼 경은 조용히 제인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 들고는 정성스럽게 접어 서 속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이것은 내가 맡아 두겠네." "어머, 하지만 그것은 카터씨에게 건네 주기로 약속했는데요." 터펜스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 순간, 에드가튼 경은 표범과 같이 재빠른 동작으로 문쪽으로 걸어나갔 다. 그러더니 총신이 긴 권총을 꺼내들고 이쪽을 향해 휙 돌아서는 것이었 다. "아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에드가튼 경? 뭐라도 잘못 되었습니까? 도대 체....." "아니,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네. 물론 잘못 된 것도 없고...."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죠?" 토미가 다가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조용, 조용히 하게! 그 자리에 서!" 에드가튼경의 험악해진 표정을 보고 네 사람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자네들이 좀 얼간이 같았을 뿐이지." "뭐라고요?" "하하하.....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누구 한 사람 내가 브라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뭐, 뭐라고요? 당신이 브라운이라고요?" 터펜스가 기가 막힌 듯이 외쳤다. "그렇고말고, 특히 아가씨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겠군. 풋나기 탐정인 아가 씨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진 셈이니까..... 우리가 애써 조사? 필요도 없이 직접 찾아와서 정보를 제공해 주더군. 하하하..." 그는 통쾌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았다면 내가 수상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의 의기양양한 말투는 한층 네 사람의 가슴을 찔렀다. "밴디마이어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집에 있었던 것은 자네들과 나 뿐이었 고, 또 자네들과 나밖에는 모르는 일들이 누설되어 버리기도 했어. 그래도 자네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더군. 이 얼간이 탐정들...." 에드가튼 경-- 아니, 스파이단의 두목인 브라운은 더욱 비양거리며 네 사람 을 둘러보았다. 줄리어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아니, 의심은 했었어. 그러나 영국에서도 덕망있는 변호사였고, 더구나 국 회의원이라는 직책을 갖고 잇었기 때문에 설마 했을 뿐이지. 아뭏든 그게 우리들의 실책이었어." "바로 말하는군.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슬픔이라는 것도 명심하게나 !" 정체를 밝힌 브라운은 노골적으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 난 듯 떠들 어댔다. "이 세균 무기의 비밀이 내 손아귀에 둘어왔으니 나는 곧 영국의 수상이 될 수 있다. 아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전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마치고는 눈을 부릅뜨고 네 사람을 노려 보았다. "한 가지 유감스로운 것은...." 그의 입에서 싸늘한 냉소가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도와준 자네들에게 보답을 해 줄 수가 없다는 점일세. 이 비밀 은 아무에게도 밝혀져서는 안 되건든.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봉사해 주게 나! 자, 이 브라운을 위해.....?" 브라운의 권총이 천천히 올라가서 터펜스이 가슴을 겨누었다. 터펜스의 심장은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서 총을 쏘면 당신도 무사하지는 못 할 걸!" 토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외쳤다. 브라운은 권총을 토미에게 돌리 며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이 권총에는 소음 장치가 붙어 있어. 더구나 우리의 정의로운 경 찰 양반들이 국회의원에다가 또 유명한 변호사인 나를 살인범이라고 생각 할까? 자, 마지막 기도나 하는게 어때?" "악랄한 녀석!"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젠 끝장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브라운의 등뒤에 있는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리더니 갑자기 어떤 남자가 튀 어나와서 권총을 쥐고 있는 팔을 향해 덤벼 들었다. "아앗!" 등뒤에서 기습공격을 편 사람은 바로 카터씨였다. "아니, 카터씨......" 네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 소리가 터져나왔다. 뜻밖의 기습을 받은 브라운은 카터씨와 함께 마루에 뒹굴었다. 이와 동시에 토미가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줄리어스도 달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네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마룻바닥을 뒹굴며 싸웠다. "앗!" 조금 떨어져서 네 사람의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터펜스와 제인은 갑 자기 들려온 '퓽!'하는 소리에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불안은 곧 안도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결사적으로 버티던 브 라운이 풀석 하고 고개를 떨구며 축 늘어졌던 것이다. 그가 쥐고 있던 소음 권총이 싸우는 통에 발사되어 자신에게 맞았던 것이 다. 브라운의 가슴은 곧 새빨갛게 피로 물들었다. 브라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 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음모극은 막을 내린 셈이군." 카터씨는 브라운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섰다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 얼거렸다. "그런데, 카터씨. 어떻게 그곳에 숨어 계셨던 거죠?" 꿈에서 깨어난 듯 토미가 물었다. "음, 모두가 자네들의 공로일세. 난 부하에게 연락을 받고 지름길로 해서 이 집에 먼저 도착했지. 그런데 내가 도착하자마자 한 대의 승용차가 이 집 앞에 멎는 것이 아니겠나?" "바로 브라운의 승용차였군요." "맞았네. 그 차를 보는 순간. 어떤 예감이 머리를 스치더군.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커튼 뒤에 몸을 숨겼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그래,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네. 숨을 죽이고 나는 커튼뒤에 숨어서 그 자의 일거일동을 빈틈없이 주시하고 있었네. 하지만 나도 역시 그자가 브 라운이라인 줄은 모르고 있었어." 다섯 사람은 이제까지의 일들을 주고 받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 와 차에 올랐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 동안의 일들을 말끔히 식혀 주는 것 같았다. 20. 모험가 클럽 만만세!.. 한편, 두목을 잃은 스파이단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더러는 뿔뿔히 흩어져 숨어 버리기도 했고, 경찰에 잡히거나 외국으로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터펜스와 토미, 그리고 줄리어스의 눈부신 활약은 조금도 세상에 알 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신문에도 발표할 수 없을만큼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만족해 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세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더할 수 없이 기뻤기 때문이다. 터펜스와 토미는 실업자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카터씨의 추천으로 두 사람 모두 영국 정보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5년이란 긴 세월을 혼자의 힘으로 스파인단과 맞서 버티면서 엄청난 비밀을 지켜 온 용감한 아가씨인 제인 핀도 행복을 찾았다. 미국의 억만장 자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억만장자는 그녀의 외사촌 오빠인 줄리어스 하이세이머였다.(우리나라에서는 사촌끼리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 지 되어 있지만 서양에서는 가능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군요!" 사무실 의자에 앉아 그 동안의 일을 회상하고 있던 터펜스가 아쉬운 듯 토 미에게 말했다. "하지만 끝난 건 아냐!" "예?" "그 사건은 끝났지만 우리 모험가 클럽은 건재 하잖아?" "아!" 터펜스는 활기를 찾은 듯 두 눈을 반짝였다. "맞았어요! 우리 모험가 클럽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어요!" "아무렴, 터펜스의 성격에 이렇게 따분하게 사무실만 지킨다는 게 어디 있 을 법이나 한 일이야?" "토미!" 터펜스는 솖한 음성으로 토미의 이름을 부르고 입가에는 흘겼지만 눈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할 소리인데 그래요?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슈크림 다음으로 좋아한 다던 사람이 누구였느냐고요!" 터펜스의 핀잔을 받고 토미는 껄껄대며 웃었다. "좋아요, 좋아! 따지기 좋아하는 아가씨야. 내가 양보하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오늘 밤에 한 잔 하는게 어때? 모험가 클럽의 단합을 위해서..." "좋았어요. 그때처럼 찻잔으로가 아니라 좀 더 근사한 곳에 가서 근사하게 하자고요. 둘 다 실업자 신세도 면했으니....." 그날 밤, 시내 중심가의 한 고급 식당에서는 두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가 명 쾌하게 울려퍼졌다. "자,건배! 모험가 클럽을 위해서!" "자, 건배! 모험가 클럽의 미래를 위해서!" "덧붙여 모험가 클럽의 만세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