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 존 딕슨 카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 --------------------------- 작가 소개 --------------------------- - 19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유니언 타운 탄생 - 소년시절부터 셜록 홈즈나 달타냥의 모험소설 등을 즐겨 읽었고, 11살 때에는 벌써 지방신문에 사건의 추측기사를 싣기도 했다. - 하바퍼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하기로 했다. - 1928년 파리로 유학, 방랑생활과 글쓰기에 매진 - 1929년 바퍼디안 지 3,4월호에 <글랜 기뇰> 연재 - 밤에 걷다(It Walks by Night, 1930) 5만 판매 - 클래리스 클리브스와 결혼,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 작품으로는 <궁현장(弓弦莊) 살인사건> <흑사장(黑死莊) 살인사건> <밤에 걷다> <마녀가 사는 집> <모자 수집광 사건> <구부러진 경첩>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 등 --------------------------- 제 1 장 --------------------------- 이브 닐은 네드 애트우드와 이혼했는데 이혼소송은 간단히 결말이 났다. 소송 이유는 남편인 네드가 어떤 유명한 여자 테니스 선수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었는데, 이브가 처음에 두려워했던 만큼의 스캔들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이 결혼한 곳은 파리의 조르주 5세 거리에 있는 미국 교회였는데, 파리에서 이혼하면 영국에서도 법률상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신문은 겨우 한두 줄의 기사로 끝내고 말았다. 이브와 네드는 프랑스의 라 방들레트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은 가늘고 긴 리본처럼 생긴 백사장이 유명한 곳으로서, 평화로운 시절에는 프랑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피서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런던과도 거의 인연을 끊고 지내온 셈이다. 한동안은 여기저기서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그런 정도에서 이 사건도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브에게 있어서는 이혼을 하는 쪽이 이혼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굴욕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어느 모로나 정상은 아니다. 이것은 그녀가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생긴 것이며, 그 결과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히스테리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뒤로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와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글쎄 말이에요 --" 하고 한 여자가 말했다. "네드 애트우드 같은 남자와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정도는 미리 각오를 했어야지, 안 그래요?" "하지만 --" 하고 상대편 여자는 말했다. "네드만 나쁜 걸까요? 이 이브의 사진을 봐요. 이 여자도 보통은 아니에요!" 그 무렵 이브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랭카셔에 여러 개의 방직공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딸 자랑으로 정신이 없었던 아버지에게서 열아홉 때에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녀는 스물다섯에 네드 애트우드와 결혼했는데, 그 첫째 이유는 그가 미남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가 혼자여서 쓸쓸했기 때문이고, 셋째는 결혼해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네드가 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바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람이 좋았으며 누굴 의심 한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겉보기에는 사내를 밝히는 음탕한 여자처럼 보였다. 화사하고 키는 좀 큰 편이며 파리의 벵돔 광장의 레베크가 한껏 멋을 낸 키르케로 분장한 듯했다.(키르케는 호머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마녀. 마법의 술을 먹여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밝은 갈색 머리는 양털처럼 부드럽고 길며 에드워드 왕조를 연상케 하는 머리 모양으로 땋아 놓았다. 흰 피부에 좋은 혈색, 회색 눈, 반쯤 웃고 있는 듯한 입 언저리가 더욱 그런 인상을 짙게 했다. 그녀의 그런 인상이 프랑스 인에게 주는 효과는 더욱 큰 것이어서, 이혼을 인정해 준 판사마저도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혼 성립에 앞서 당사자끼리 둘만이 마주앉아 서로의 불화를 해소할 수도 있는 최후의 노력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 법률로 정해져 있다. 베르사유 재판소의 판사실에서 일어난 그날 아침의 일을 이브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봄을 맞은 파리,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따뜻한 4월의 아침이었다. 친절하지만 성미가 급해 보이고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판사는 유난히 진지한 듯한, 그리고 조금은 무대 위에 선 배우 같은 태도로 말했다. "부인! 그리고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네드 애트우드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찬사를 받는 그 매력적인 얼굴은 지금의 이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그 방을 눈부시게 할 정도였다. 그 매력은 어제 마신 술이 다 깰 정도였으며, 슬픈 듯한 표정이나 참회했음을 애원하는 듯한 그 태도에는 자신감마저 있어 보였다. 밝은색 머리칼, 푸른 눈, 30대 중반이 지났는데도 싱싱한 젊음을 조금도 잃지 않은 그는 다소곳한 태도로 창가에 서 있었다. 이브는 밉살맞도록, 또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스캔들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결혼이란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말씀드릴까요?" 하고 판사가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하고 이브가 대답했다. "나로선 두 분이 생각을 바꿔주시면 그것으로......" "제겐 생각을 바꿀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네드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헤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몸집이 작은 판사는 빙글 돌아서 네드를 보고는 위압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가만히 좀 있어요! 나쁜 건 당신이오. 당신이야말로 부인에게 잘못을 빌어야 해요." "좋고말고요." 네드는 두말없이 승복했다. "괜찮다면 무릎을 꿇고라도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는 이브에게 다가갔다. 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드는 정말 매력적이야. 더구나 얼마나 현명한지. 나는 과연 이 남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고 이브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본건의 공동 피고는 --" 하고 판사는 살짝 서류를 훔쳐보면서 말했다. "이 여자분이시군요." 하고 판사는 다시 서류를 보며 말했다. "불미르 스미스......" "이브, 난 그 여자와는 깨끗해. 맹세할 수 있어,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 이브는 이제 그런 말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말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요?" "베시 벌머, 스미스 같은 여자는 개처럼 방종한 여자야.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당신이 그런 여자를 두고 질투를 하다니......" "질투 같은 건 안해요. 하지만 말예요, 단순한 화풀이로 그 여자의 팔을 담뱃불로 지져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시험해 보면 어때요?" 네드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마치 생각지도 않은 꾸중을 들은 아이와도 같은 얼굴이었다. "설마 그런 짓을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정도로 날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당신을 미워하고 말고도 없어요, 네드. 나는 단지 이런 일은 빨리 매듭짓고 싶을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나는 취해 있었어. 나 자신도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단 말이야." "이제 와서 입씨름 해봐야 늦었어요. 이젠 그런 일은 어찌되었건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이렇게 날 못살게 하는 거야?" 좀 화사한 잉크스탠드가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 옆에 이브는 앉아 있었다. 네드는 그녀의 손 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영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므로 판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판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책장 위에 걸려 있는 그림에 관심을 쏟는 척했다. 네드에게 손을 잡힌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네드에게로 다시 끌려가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갑자기 불안해졌다. 어떤 의미로는 네드의 말이 옳았다. 그는 매력과 현명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치 소년같이 자신의 성격 속에 잔인성이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 잔인성만으로도 -- 이브가 항상 네드의 속임수라고 얕잡아본 농담조의 '정신적' 학대 만으로도 -- 이혼사유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한 행실을 이유로 삼은 것이 손쉽고 반증의 여지도 없어도 그 편이 더 간단했다. 네드와의 부부생활을 엄숙한 법정에서 밝히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쪽이 낫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결혼생활이란 --" 하고 책장 위의 그림에게 말하듯이 판사는 입을 열었다.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단 하나의 행복이랄 수 있습니다." "이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이브는 어떤 파티 석상에서 모 심리학자로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암시에 약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네드의 손이 와닿아도 그녀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희미한 반감마저 느꼈다. 네드는 네드대로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는 과연 꼭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 '예스' 라고 해버리면 이런 소란, 수모,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질지 못한 마음 탓으로, 또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서 '예스'라고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네드나 네드의 생활태도, 네드의 친구들, 그리고 언제나 더러운 것을 몸에 묻히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그런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죽도 밥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브는 판사의 구레나룻을 보면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주저앉아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브가 대답하고 일어섰다. 판사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돌아보았다. "부인,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빌어먹을!" 하고 네드가 말했다. 지금까지 흔히 그랬던 것처럼 네드가 분통을 터뜨리고서 뭐든지 집어던질까 봐 이브는 순간 섬뜩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있었지만 그는 꾹 참고 있었다. 그는 선 채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속에 든 동전을 짤랑거리면서 가만히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튼튼한 이를 내보이며 빙긋 웃었다. 그 눈가에는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당신은 아직 날 사랑하고 있어, 틀림없이." 하고 그는 스스로도 마음속 깊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듯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브는 테이블에서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난 그 증거를 보여 주겠어." 하고 그는 덧붙였다. 이브의 얼굴 표정을 살피고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를 보냈다. "아니, 지금이 아니야! 당신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까, 그보다 마음이 따뜻해질 여유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난 당분간 아무 곳이나 가 있겠어. 하지만 돌아오게 되면......"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웃의 눈 같은 건 신경쓸 것 없다고 다짐은 하면서도 소문에 마음 졸여가며 이브는 라 방들레트에 눌러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데 상주 거리의 미라마르 별장에서 생긴 일 같은 것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라 방들레트 같은 곳은 짧은 사교 시즌에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가는 영국인이나 미국인 관광객들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런 피서지의 특색은 호기심의 진공지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브 닐은 데 상주 거리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봄도 지나고 여름을 맞게 되면 라 방들레트에는 피서객이 몰려온다. 색다른 모양과 페인트로 꾸며진 집들은 월트 디즈니의 영화에 나오는 꿈의 도시 같았다. 소나무 향기 그윽한 바람은 상쾌했고 거리에는 덮개 없는 마차가 말발굽 소리와 방울 소리를 울리며 오갔다. 카지노와 나란히 서 있는 두 대형 호텔 동종과 브리타니는 화사한 빛깔의 텐트를 치고 고딕 형식 비슷한 탑을 하늘 높이 세워놓았다. 이브는 카지노나 바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네드와의 골치 아프고 긴장된 생활을 한 뒤라 그녀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런 한편 주체할 수 없는 지루함에 빠져 있었다 -- 이것은 위험한 증상인 것이다. 그녀는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진 않았다. 가끔 골프를 치고 --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해서 -- 또 관목이 우거진 해변의 모래 언덕을 말을 타고 달리기도 했다. 토비 로스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로스 일가는 좀 당황했을 정도로 데 상주 거리의 그녀의 집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집에 살고 있었다. 이 거리는 길 폭이 좁고 짧았으며, 담이 처진 조그만 정원이 있는, 흰색 또는 핑크색 석조 저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불편을 느낄 만큼 길 폭이 좁아서 맞은편 집 내부가 창문으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불편과 혼란을 생기게 하는 것이었다. 이브는 네드와 여기서 살고 있었던 때부터 길 건너편 집의 사람들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하고 있었다. 그 집엔 노인이 있었는데 -- 토비의 아버지이며 모리스 로스 경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 당혹한 표정으로 이쪽을 한참이나 건너다보고 있었던 적이 한두 번 있었다. 그 상냥해 보이면서도 수도승 같은 얼굴이 이브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밖에는 붉은 머리의 딸과 명랑한 초로의 부인이 있었다. 그러나 토비의 모습은 그날 아침 골프장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6월이 반이나 지난 무덥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라 방들레트에서는 이 시각에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티 (골프를 치기 시작할 때 공을 올려놓는 자리)도, 아침 이슬에 반짝이는 푸른 페어웨이 (골프장의 잔디 구역)도,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솔밭도 모두 더위와 정적 속에 싸여 있었다. 이브는 세 번째 그린에 도전했으나 샌드 트랩(모래 구멍)에 처넣고 말았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그녀는 비참하고 반항적인 기분을 느끼며, 어깨에 매고 있던 골프 가방을 벗어서는 내던져 버렸다. 그녀는 골프에도 싫증이 나버려서 샌드 트랩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공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우드의 2번으로 친 롱 쇼트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페어웨이로 날아오더니 벙커(골프장의 모래땅의 장애 구역) 꼭대기의 잔디밭에 툭 떨어졌다. 공은 벙커의 가장자리 너머로 굴러떨어져서 이브의 공에서 3피트도 채 떨어지지 않은 모래땅 위에서 굴러가다 섰다. "이런......" 이브는 화가 났다. 얼마 뒤 젊은 남자가 공을 쫓아서 벙커 저쪽에서 올라오더니 푸른 하늘을 등지고 멈춰서서는 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하고 그는 말했다. "누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앞지르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소릴 쳐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는......" 그는 2다스 정도는 될 것으로 짐작되는 골프채를 넣은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벙커 안으로 뛰어 내려왔다. 건장한 체격에 소박한 느낌이 드는 약간은 촌스러운 청년이었지만 이브로서는 한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쾌활한 젊은이였다. 숱이 많은 갈색 머리를 짧게 깎아올렸고, 조그만 콧수염은 그의 당당하고 진지한 태도와 모순되는, 어쩐지 세상 물정에 밝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선 채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 청년은 어느 구석이나 정돈이 잘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다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그럴수록 얼굴은 더욱더 붉어지는 것이었다.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하고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요?" 하고 이브는 대꾸하면서 지금 자신의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을 것임에 생각이 미치자 괜히 신경이 쓰였다. 토비 로스는 그의 수완으로 한다면 몇 개월 걸렸을 테지만 타고난 솔직성 탓으로 단숨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고 그가 물었다. "바깥분과는 아직?" 두 사람은 함께 한 바퀴 돌았다. 그날 오후에 이미 토비 로스는 아주 멋진 여자를 만났다고 가족들에게 자랑했다. 비열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칭찬할 만한 생활태도로서 훌륭하게 견뎌내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대개 젊은 남자의 가족들은 그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는 세상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브는 그 이야기에 대한 로스 집안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무표정한 얼굴, 분별 있는 척해 보이는 헛기침, '그러니, 토비?' 하는 성의없는 말에 이어, '그런 모범이 될 만한 정숙한 여자를 만나서 좋겠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로스 부인이나 누이동생인 재니스 -- 여자들의 단정한 예의로서도 숨길 수 없는 적대감 같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브는 실제로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로스 일가는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로스댁의 녹음 짙은 뒤뜰에서 차 대접을 받으며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어 앞으로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네드 애트우드 같은 사내가 설쳐대는 세상에도 -- 불행히도 누구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만 --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브의 당황한 심정은 뜨거운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얼음 같았던 신경도 부드러워지고 어느새 행복감에 젖어 있는 자신이 두려울 정도였다. 토비의 어머니인 헬레나 로스는 선입관 없이 이브를 맞아주었다. 스물세 살인 붉은 머리의 재니스는 이브의 미모에 완전이 매료되어 무조건 찬사를 보냈다. 파이프만 피워대며, 말수가 적은 벤 아저씨도 모든 가족이 모여 의논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브 편을 들어주었다. 노신사인 모리스 경도 자기가 수집한 물건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브의 의견을 종종 묻기도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토비는...... 토비는 참으로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이건 뭐 그를 비꼬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좀 거드름을 피우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의 유머 감각으로 적당히 메워졌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야." 하고 그는 지적했다. "그렇게 되다니 어떻게 되는 건데요?" 하고 붉은 머리의 재니스가 물었다. " '시저의 아내' 지." 하고 토비가 말했다. ('시저의 아내는 의심받을 짓을 해서는 안 되오.' 하고 시저가 아내 폼페이아와 헤어질 때 한 말에서 인용한 것.) "라 방들레트의 훅손 은행 지점 간부쯤 된다면 -- " 이 말은 지금도 그를 기분좋게 하는 모양이다 -- "신중하게 행동해야 돼. 런던의 은행은 도락을 장려하지는 않거든." "그럼, 어디선 장려한다는 말예요?" 하고 재니스가 물었다. "프랑스의 은행에서도 행원이 카운터 밑에다가 금발 미녀를 숨겨둔다든지, 근무시간 중에 만취가 되어 있는 일 같은 건 좀처럼 볼 수 없다고요." "난 말이다 -- " 하고 어머니인 헬레나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말했다. "손 스미스 (1892~1934, 미국의 희극작가)의 소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주정꾼의 은행이란 건 최고의 착상이 아닌 것 같구나." 토비는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콧수염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훅손 은행은 -- " 하고 그는 말했다. "영국에서도 오래 된 은행 중 하나입니다. 금 세공상 (18세기까지는 은행이 흔히 금융업을 겸하고 있었다)을 하고 있을 때부터 템플 바의 옆인 지금의 장소에 있었지만." 하고 그는 이번엔 이브를 향해, "아버지의 수집품 중에는 옛날 훅손이 문장(紋章)으로 쓰던 조그만 금 세공품도 있답니다." 이 말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침묵이 맞아주었다. 모리스 경의 취미이기도 한 수집벽은 가족들 사이에서 때로는 농담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잡동사니에 섞여 간혹 진귀한 물건을 찾아낼 때도 있다고 찬사를 듣기도 했다. 수집품들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제법 넓은 2층 서재에 진열되어 있었다. 모리스 경은 언제나 그것들을 살펴보며 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지금은 결말이 나버린 불행한 결혼생활 동안 이브와 네드는 길 건너의 그녀 침실에서 한두 번 그 창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커튼을 젖혀놓은 서재에 확대경을 손에 든 노인이 있었고, 그 상냥해 보이는 얼굴과 벽에 줄지어 있는, 유리문으로 된 진열장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이미 그 당시의 일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로스 집안에 관한 한 네드 애트우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언젠가 한번 모리스 경이 네드와의 관계에 대해서 물으려고 몇 마디 꺼냈지만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묘한 표정을 짓자 그만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드디어 7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토비는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자신이 얼마나 토비를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편안한 마음과 진실한 웃음을 바라고 있었는지 그때까지는 이브도 미처 몰랐었다. 그녀는 토비라면 의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때론 스테인드 글래스에 새겨진 성녀처럼 이브를 떠받들어 난처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이브에게는 오히려 새롭게 다정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라 방들레트에는 그 무렵 '숲속의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의 작고 조용한 분위기의 음식점이 있었는데 나뭇가지에 달아놓은 중국풍의 등불 밑에서 야외식사를 즐길 수있었다. 그날 밤 진주색의 드레스 때문인지 창백한 얼굴빛보다는 이브는 따스한 느낌의 연분홍빛 피부가 강조되어 한결 아름답게 보였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토비는 손가락으로 나이프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는데, 거드름을 피울 정도의 여유는 없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하고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당신과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 네드 애트우드가 이 말을 들었다면 낄낄거리며 웃었겠지 -- "전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이브." 하고 그녀의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네드인가 싶어서 이브는 흠칫 놀랐다. 네드가 아니라 그의 친구였다. '숲속의 레스토랑' 같은 데서 네드의 친구와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런 시기에 그들은 10시 반쯤에 식사를 하고 카지노에 몰려가서 교활한 수법으로 노름을 하며 밤을 새우는 것이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은 생각이 안 났지만 그 얼굴은 본 적이 있었다. "춤 한번 추실까요?" 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는 따분한 목소리로 청해 왔다. "아니, 오늘밤엔 추고 싶지 않군요." "그래요? 그럼, 실례." 하고 남자는 투덜거리며 가버렸다. 그 눈을 보니 어떤 파티가 생각났는데, 이브는 정면에서 조소를 받은 느낌이었다. "친구요?" 하고 토비가 물었다. "아뇨." 하고 이브는 대답했다. 오케스트라는 이미 몇 해 전에 유행했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 남편의 친구예요." 토비는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의 애정은 좀 로맨틱하며,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그 말은 그에게 살을 에이는 듯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두 사람은 네드 애트우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즉, 이브는 네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성격의 차이가 원인이라고만 해두었었다. "사실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고 이브가 무심코 한 말 한마디가 토비 로스의 둔감한 마음에도 견디기 어려운 질투의 화살이 되어 깊이 파고들었다. 토비는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 난 다음에야 말을 했다. "아까 그 문제 말인데요, 즉 결혼 얘기 말입니다만, 만일 당신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이브의 귀로 흘러 들어와서 또 기분나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난 --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 " 하고 토비는 우물쭈물하면서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여전히 그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스라든지 노라든지 사무적으로 대답해 준다면......" 이브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스지요, 물론 예스예요." 10초 동안 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런 다음에 스테인드 글래스라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이브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얹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그 손을 도로 가져가 버렸다.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이브로선 놀랍기도 하고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다. 토비 로스가 여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마저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 이젠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고 이브가 물었다. 토비는 생각에 잠겼다. "한 잔 더 마시는 것이 좋겠군요." 하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다음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니까." 7월의 마지막 날 두 사람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2주일 뒤, 뉴욕의 플라자 호텔의 바에서 네드 애트우드는 막 도착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몇 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술잔의 다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를 나가서 이틀 뒤에 출항하는 노르만디 호의 배표를 샀다. 이렇게 해서 소름끼치는 비극이, 세 사람 모두 짐작도 못하는 사이에 데 상주 거리의 어느 별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제 2 장 --------------------------- 네드 애트우드가 카지노 대로(大路)에서 데 상주 거리로 들어선 것은 오전 15분 전 1시였다. 먼 하늘을 등대의 불빛이 휩쓸듯 비추며 지나갔다. 한낮의 심한 더위는 간신히 수그러들기 시작했으나 햇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솟고 있는 듯했다. 라 방들레트 거리에는 인적이 끊겨 있고,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피서객은 카지노에 틀어박혀 새벽까지 놀게 마련이다. 그래서 검고 낡은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젊은 이 남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데 상주 거리의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두 눈은 술에 취한 듯 흐려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만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네드는 질투나 분노 같은 감정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브는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을 갖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그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동종 호텔의 테라스에서 그녀를 다시 차지하고 말겠다고 큰소리를 친 것은 아무래도 현명한 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이제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것은 확실히 실수였다. 라 방들레트에 돌아올 때도 지금 이브의 별장 열쇠를 갖고 남 모르게 데 상주 거리를 걷고 있듯이 몰래 돌아왔어야만 했다. 이브가 살고 있는 미라마르 별장은 거리를 반쯤 올라가서 왼쪽에 있었다. 그 집이 가까워오자 네드는 본능적으로 맞은편 집을 쳐다보았다. 이브의 집과 마찬가지로 로스의 집도 높은 흰 석조건물에 선명하게 붉은 기와지붕으로 된 크고 네모진 모양이었다. 담장과 작은 쇠창살 문이 있고, 길에서 몇 피트 안으로 들어가서 건물이 있는 것도 이브의 집과 똑같았다. 네드가 올려다보니 생각한 그대로였다. 1층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고 2층은 모리스 경 서재의 두 개의 창만 밝혀 있을 뿐 나머지는 캄캄했다. 서재의 창은 강철 덧문도 열려 있었고, 무더운 밤이라 커튼도 쳐 있지 않았다. "좋아!" 네드는 소리까지 내어 말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밤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노인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이브의 집 문을 열고는 현관으로 가는 작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났다. 현관 열쇠는 행복했다고 할 순 없어도 떠들썩하게 지내던 무렵의 추억처럼 그가 지금도 갖고 있었다.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꽂았다. 네드는 여기서 또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계획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브는 깨어 있을까, 아니면 잠들었을까? 불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잠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브는 밤이 되면 언제나 창문의 커튼을 모두 쳐버리는 버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병적인 점잔이라고 골려주곤 했었다. 그러나 아래층의 홀은 캄캄했다. 프랑스 가정 특유의 가구 왁스 냄새와 커피 향기가 풍기고 있어서 지난날의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되살아나게 했다. 네드는 발 밑을 조심해 가며 계단까지 가서는 발끝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청동으로 세공한 난간이 있는 폭이 좁고 우아한 것으로, 소라껍질 같은 곡선을 그리며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계단은 경사도 급하고 높았으며, 두꺼운 융단을 고풍스러운 놋쇠 막대기로 고정시켜 놓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 계단을 올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악마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은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자신은 이브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녀는 자기에게 충실하지 않다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양탄자를 고정시키는 쇠막대기 중 하나가 -- 이브의 침실 문은 계단 꼭대기 가까이에 있었다 -- 헐거워져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거기에 가끔 발이 걸려서 어떤 때는, "이것이 날 죽이고 말겠군." 하고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네드는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서 그것을 의지하고 올라갔다. 이브는 아직도 깨어 있었다. 눈앞에 있는 침실문 틈으로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불빛에 정신이 팔려서 조심해야 할 느슨해진 양탄자 고정쇠를 깜박 잊고 그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하고 그는 소리를 냈다. 침실에서 이브는 그 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이브는 경대 앞에 앉아서 천천히 정성껏 브러시로 머리를 풀고 있었다. 거울 위에 달아놓은 전등만이 켜져 있어서 그 불빛이 그녀의 따스한 피부를 한결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 위로 풍성하게 흘러내린 밤색 머리칼, 빛나는 잿빛 눈동자, 브러시에 끌려서 머리가 뒤로 젖혀질 때마다 매력적인 어깨 위의 단아한 목선이 보였다. 그녀는 흰색 실크 잠옷을 입고, 하얀 공단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브는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머리를 빗고 있던 손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등뒤에서 문이 열렸을 때에 한 순간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네드 애트우드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네드는 냉정하고 맑은 정신이었지만 거의 울부짖듯 말했다. "이봐." 하고 아직 문도 다 열기 전부터 그는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안 돼!" 이브는 자신이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두려움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해 갔지만 머리를 풀어내리고 있던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당신인 줄 알았어요." 하고 이브는 조용히 말했다. "이젠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요?" "무슨 소리야! 나는 -- " "쉿, 제발, 조용히 해줘요!" "사랑하고 있어." 하고 네드는 두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분명히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맹세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거짓말이었군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드로서는 그런 일은 정말로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말 그 로스인가 하는 녀석과 결혼할 생각이야?" 하고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요."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길 쪽으로 난 두 개의 창문을 보았다. 커튼이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최소한의 에티켓 정도는 지켜줄 수 없나요?" 하고 이브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한 그건 무리야." 진정일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면 연극인가? 이브는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가 언제나 보여온 뒤틀린 냉소나 몸에 밴 뻔뻔스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곧바로 없어지고 네드의 본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침대 위에 모자를 벗어던지고는 안락의자에 가 앉았다. 이브는 크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다. "건너편 집에......" "알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니 뭘?" 하고 이브는 반문하더니 브러시를 놓고 경대의 의자에 앉은 채 빙글 돌아서 네드를 마주보았다. "그 노인 말이야, 모리스 경......" "어머? 모리스 경에 대한 걸 어떻게 알지요?" "매일 밤 늦게까지 건너편 방에 깨어 있지, 수집품 같은 걸 바라보면서. 저쪽 창에서 이쪽 방도 훤히 들여다 보일걸?" 침실 안은 굉장히 후덥지근하고 목욕용 소금과 담배 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네드는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긴 다리 하나를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비웃음을 띠고 있어서 날카롭게 보였다. 위엄이 있는 얼굴일 뿐만 아니라 이마나 눈이나 입 언저리의 주름까지도 상상력이 풍부한,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어두운 빨강색 공단으로 도배한, 눈에 익은 벽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많은 거울, 이불 위에 모자가 놓여 있는 침대, 그 옆의 전화, 그리고 경대 위에 켜져 있는 한 개짜리 전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이라면서?" "누구 말인가요?" "로스 일가 말이야. 만일 이런 한밤중에 손님을 허겁지겁 맞아들이고 있는 당신 꼴을 저 노인네가 본다면......" 이브는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걱정할 건 없어." 하고 네드는 거칠게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열한 사람은 아니야, 나는." "그럼 여기서 나가줘요!" 네드의 말투는 자포자기하듯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왜냐 하는 거야." 하고 그의 말은 점점 격해져 갔다. "그런 자식하고 왜 결혼할 마음이 생겼나?" "그가 좋아졌으니까요." "말도 안 돼." 하고 네드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이야기 언제 끝낼 건가요?" "돈이 목적은 아닐 테고." 하고 네드는 생각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쓰고도 남을 만큼 갖고 있으니까. 그렇군, 이 마녀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지. 그래, 오히려 그 반대로군." "반대라니, 무슨 소리죠?" 네드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 욕심 많은 노인네가 거만한 그의 아들과 당신을 결혼시키려고 얼마나 애써 왔는지 생각이나 해봤어? 당신 돈이야. 그래, 그렇고말고. 노리는 것은 돈 뿐이야." 이브는 하마터면 브러시를 집어던질 뻔했다.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 남자는 또 부숴버리려 하고 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앉은 그의 낡고 검은 양복 깃 사이로 넥타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어떤 문제를 기어이 풀고야 말겠다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브는 가슴이 답답하여 울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로스 집안 일을 잘 알고 있군요?" 하고 그녀는 화가 치밀어 빈정거렸다. 네드는 그것을 진지하게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야. 다만 정보수집을 했을 뿐이지. 결국 이 약혼의 열쇠는......" "열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이 집 열쇠는 돌려줘요." "열쇠라고?" "이 집 열쇠 말이에요. 당신 손가락에 끼고 빙빙 돌리고 있는 그 열쇠 고리에 달려 있는 열쇠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시달리는 것도 오늘로 끝내고 싶어요." "이브, 무슨 소릴!" "큰소리내지 말아요." "돌아와야 돼, 내게로." 하고 네드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이브의 표정을 본 그의 목소리엔 노여움이 더해 갔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 변했군." "그래요?"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거드름을 피우는 거지? 전에는 인간적인 면이 있었어. 지금 당신 모습은 구역질이 난단 말야. 로스 집안과 사귄 뒤로 당신 정숙한 척하는 꼴은 루크레티아(고대 로마의 전설의 여인. 미모와 정절로 유명하다)도 부끄러워할 정도군." "그래요?" 위험하고 숨막힐 듯한 침묵. 네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요'라니, 그런 소리가 태연히 잘도 나오는군. 당신이 토비 로스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 그런 말을 감히 내게 하다니!" "토비 로스의 일이 마음에 안 드나요?" "전혀. 단지 그놈이 멍청하고 거드름만 피운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 아니, 그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지. 다시 없는 멍청이일는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에게는 안 어울려. 뭐니 뭐니 해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 나라고." 이브는 소름이 끼쳤다. "당신 같은 여자는 대체 어떻게 하면 알아듣겠어?" 하고 거울 속에 있는 이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네드는 소리쳤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이브가 전부터 늘 보아온, 소름끼치게 싫은 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뿐이구먼." 이브는 펄쩍 뛰었다. "당신의 그 성적 매력은 -- " 하고 네드는 말했다. "특히 그 잠옷 차림의 모습은 신선이라도 탐을 내겠지. 더구나 나는 신선이 아니거든." "가까이 오지 말아요!" "어쩐지 난 멜로드라마의 악역 같은 느낌이 드는데." 하고 네드는 갑자기 풀이 죽었다. "눈앞에는 떨고 서 있는 여주인공, 그녀는 살려달라고 소리칠까 말까 망설이고 있어......" 라고 말하면서 그는 창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표정이 바뀌었다. "좋아." 하고 그는 능글맞게 말했다. "악역, 그거 좋지. 살금살금 다가오는 악한, 당신도 싫지는 않겠지?" "말해 두지만 나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어요!" "좋아. 그것이 더 재미가 있지." "네드, 난 진심이에요."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안 된다고 앙탈을 부리겠지.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뿐이지. 난 자신 있어." "당신은 원래부터 예의는 조금도 없었지만, 페어플레이 정신은 있다고 큰소리치곤 했잖아요. 만일 -- " "건너편 늙은 염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는 건가?" "네드, 뭐하는 거예요? 창에 다가가지 말아요." 뒤늦게나마 이브는 경대 위에 켜놓은 불이 생각이 나서 손으로 더듬어 머리 위의 스위치를 끄니 방안은 캄캄해졌다. 창은 열려 있었지만, 두꺼운 능직(綾織)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었다. 네드가 능직 커튼의 주름을 더듬어서 그 끝을 잡아젖히니 시원한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그로서는 가능한 한 이브를 정말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고 그는 마음이 놓였다. "모리스 경은 아직 안 주무시죠, 그렇죠?" "그래, 아직 안 자는군. 하지만 이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 없다는 얼굴인데. 확대경을 들고 코담배 케이스 같은 것을 보고 있어 -- 아니, 잠깐!" "왜 그래요?" "또 누가 있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토비겠죠." 하고 이브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는데, 그것은 소리 죽여 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네드, 창에서 물러서요!" 이때서야 둘은 방에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데 상주 거리에서 흘러 들어오는 희끄무레한 빛이 네드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방이 어두워진 것을 알고는 어린애처럼 놀라던 그의 순진한 모습도 입가에 떠오른 냉소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레이스 커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두꺼운 커튼을 쳤다. 방안은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방안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웠다. 이브는 머리 위의 전기 스위치를 손으로 더듬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찾는 것을 단념하고 경대의 의자에서 점점 뒤로 물러나서 네드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이브, 들어봐......"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점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을 켜주지 않겠어요?" "왜 날 보고? 당신이 더 가까운데......" "아니, 아니에요. 난......" "흠." 하고 네드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네드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느끼고 이브는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네드는 이브가 자기를 멀리하는 것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단순한 그의 자만심이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태는 단순히 곤란한 정도로 끝나버릴 수만은 없는, 악몽 같은 상황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다니 -- 이런 경우에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 본들 누구 하나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브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스 집안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못지않게 하녀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녀들은 남의 일에 대해 수군거리길 좋아하는 법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꾸며지고 불어난다. 새로 온 하녀 이베트 역시...... "분명한 이유를 알아야겠어." 하고 네드는 차갑게 말했다. "왜 로스 같은 녀석과 결혼하겠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이 어둠을 뚫고 날카롭게 들려왔다. "부탁이에요. 나가줘요. 그 사람이 좋아서 그렇다는 걸 못 믿나요? 정말이라고요.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어요. 아직도 뭐 할 말 남아 있나요?" "그럼." "그게 뭐예요?" "지금 그리로 가서 가르쳐 주지." 캄캄한 어둠 속이지만 지금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네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옷이 스치는 소리, 스프링의 삐걱이는 소리, 그녀는 분명히 침대 밑에 있는 두꺼운 레이스 가운을 집어들어 입으려 하는 것이다. 네드가 가까이 갔을 때 이브는 한쪽 소매만 남기고 간신히 다 입은 뒤였다. 이브에게는 또 하나의 불안이 있었다. 계속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불안이었다. 이브보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친구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는 제일 처음 관계한 남자를 잊을 수가 없다. 잊은 줄 알고 있어도 어딘가에 남아 있다." 라는 것이다. 이브 역시 인간이고, 몇 달 동안 남자 없이 혼자 지내왔다. 거기에 더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네드 애트우드는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겁날 만큼 멋지다. 만일 그가......? 네드에게 붙잡히자 이브는 서툴지만 사납게 손바닥으로 때렸다. "놔줘요! 아파요." "얌전히 굴겠지?" "싫어! 네드! 하녀들이......" "웃기지 마. 몹시 할멈 말고 누가 있어." "몹시는 그만뒀어요. 새로 온 하녀예요. 이번 하녀는 믿을 수도 없고 스파이 같아요. 어쨌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세요." "얌전히 있겠어?" "싫어요." 이브는 키가 커서 네드와 5 센티미터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났지만 날씬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에 힘은 별로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네드도 단순한 교태가 아니라 정말로 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위기로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고, 네드 또한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이브를 두 팔로 끌어안은 네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 제 3 장 ---------------------------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어떤 경우에도 기분좋은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전화벨 소리가 지금 침실의 어둠을 뚫고 비난하듯이 극성스럽고 시끄럽게 울렸다. 그것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전화가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다 얼이 빠져서 엉겁결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받을 것 없어, 이브." "이거 놔요. 혹시......?" "바보같이. 그냥 두라니까." "하지만 만일 그 사람들이......?" 두 사람은 전화 가까이에 서 있었다. 이브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서 수화기를 들려고 했지만 손목을 네드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수화기가 전화기에서 미끄러져서 테이블 위로 굴러떨어졌다. 시끄럽게 울리던 벨소리는 그쳤다. 조용해진 어둠속에서 조그만 소리가 분명하게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토비 로스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이브?" 하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드가 이브의 손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토비의 목소리를 알진 못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여보세요, 이브!" 이브는 수화기를 찾으려고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벽에 머리까지 부딪친 끝에 겨우 주워들었다. 가쁜 숨도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자리에서 그녀의 태도를 보았다면 감탄했을 것이다. 말을 시작했을 때에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평소의 차분한 음성이었다. "예. 어머! 당신이에요, 토비?" 토비의 목소리는 굵었고 느린 편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나온 조그만 소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두 사람의 귀에 들렸다. "이런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오.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그만 전화를 하고 말았소. 미안해요." 네드는 더듬거리며 걸어가서 경대 위의 전등을 켰다. 그런 일로 이브가 그를 노려보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브는 그렇지는 않았다. 흘끗 커튼이 처져 있는지 살펴보기는 했지만 그런 일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고, 네드가 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는 듯했다. 계속 사과하고 있는 토비의 명랑한 어조로 보아 이브가 걱정하고 있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비에 대한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내에게는 그렇게 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네드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상한 느낌까지 들었다. 네드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봐요, 토비!" 하고 이브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젠 틀림없다. 그것은 사랑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얼굴은 빛나고 있다. 안도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토비를 향해서 솟아나고 있는 듯했다. "전화를 걸어서 방해가 된 건 아니오?" 하고 토비가 묻는다. "토비, 무슨 소릴 해요!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 별일 없소. 잠이 오지 않아서."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음, 아래층 응접실에." 하고 사랑에 빠져 있는 로스 청년은 이 질문에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내 방에 있는데 아름다운 당신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결국 전화까지 하게 됐소." "어머, 사랑스런 토비!" "제기랄." 하고 네드가 말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감격하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으면 설사 자기도 같은 기분이라 해도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거짓말 아니야." 하고 토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 오늘밤에 본 영국 극단의 연극 마음에 들었어?" "이런 한밤중에 전화로 연극 비평을 하자는 건가?" 하고 네드는 중얼거렸다. "대강 해두지 않고." "재미있었어요, 토비. 버나드 쇼는 달콤한 데가 있더군요." ("쇼가 달콤하다고! 허어, 무슨 소릴!" 하고 네드는 투덜거렸다.) 그래, 그가 이브의 표정을 보고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토비는 말하기 곤란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 연극은 좀 노골적인 데가 있었는데, 당신은 충격을 받지 않은 모양이군?" ("이건 믿을 수 없군."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화기를 바라보면서 네드는 중얼거렸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머니나 재니스나 벤 아저씨도 모두 감동을 했다지만, 난 잘 모르겠소, 난 그렇지 못했거든." 토비는 버나드 쇼의 사고방식에 대해 굉장히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좀 보수적일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여자에게는, 물론 제대로 교육을 받은 명문 집안의 여자 말인데, 오히려 그런 일은 모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놀라지 않았어요, 토비." "흠." 하고 토비는 우물쭈물 대꾸했다. 전화통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토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거였소." ("온화한 기사도 정신을 가진 시인이군, 이건!") 그러나 토비는 꾹 참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내일은 피크닉을 가기로 했잖아, 잊지 말아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아, 그리고, 오늘밤에 아버지가 또 새 골동품을 얻게 되어서 기분이 좋으신 것 같소." ("맞았어." 하고 네드는 코웃음을쳤다. "조금 전에 노인네가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을 봤지.") "그래요, 토비, 우리도 봤어요 -- " 하고 이브는 맞장구를 치면서 무심코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뿐, 별 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버렸다. 흘끔 네드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로 진절머리나지만 매력적인 그 얼굴에 뒤틀린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브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말이 나왔다. "정말, 오늘밤 우리들은 너무나 멋진 연극을 봤어요." "그래, 그랬소." 하고 토비가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잠을 방해할 수는 없겠는데. 그럼, 잘 자요." "안녕, 토비. 전화해 주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녀가 수화기를 놓고 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이브는 그대로 침대 끝에 앉아서 한 손은 전화기에 대고, 한 손으로는 레이스 가운의 깃을 모아잡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 네드를 보았다. 그녀의 회색눈 아래의 뺨이 발그레했다. 보드랍고 긴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서 우아한 얼굴이 한층 돋보였고, 풍성한 머리칼은 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머리를 빗어넘기려고 올린 손에는 핑크빛 손톱이 빛났고, 하얀 팔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어딘지 먼 곳에 있는 느낌이고, 숨겨진 정열은 억누를수록 더욱 끓어오르게 하는 이런 여자를 대하면 어떤 남자라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네드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는 깊숙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라이터를 끄려고 할 때 불꽃이 손바닥 안에서 심하게 흔들였다. 이브에게는 보이지 않기 위해 네드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안은 무덥고, 무거운 침묵마저 깔려 있었으며, 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도 그것을 깨지는 못했다. 네드는 이젠 느긋해졌다. "알았어." 하고 겨우 입을 연 네드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했다. "자, 말해 봐." "무슨 말을?" "모자를 갖고 나가 버리라고 말이야." "모자를 갖고 나가 주세요." 하고 이브는 조용한 목소리로 시키는 대로 했다. "알겠어." 하고 네드는 담뱃불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후우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그것은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므로 이브는 얼굴을 붉혔다. 네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담뱃불을 찬찬히 보고 있는 척했다. 그러면서, 그는 악마 같은 탐정적인 본능으로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달콤한 마녀님, 구역질이 나지도 않아?" "무슨 말이죠?" "로스 일가와 함께 사는 것 말이야." "아뇨, 네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내가 점잔을 빼지 않아서 말인가? 저 건너 멍청이 도련님 같지 않아선가?" 이브는 일어나서 가운을 고쳐입었다. 핑크빛 공단으로 된 끈으로 허리를 매게 되어 있었는데, 언제나 쉽게 풀어져서 그녀는 다시 고쳐 맸다. "그렇게 심술부리는 아이처럼 굴지 않으면 당신 인상도 훨씬 좋아질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다만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놈과 수작을 부릴 때의 당신 말투였어."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당신은 머리가 좋은 여자야." "고맙군요." "그런데 토비 로스와 이야기하는 걸 보니 마치 그 녀석의 정신연령에 자신을 맞추려 하는 것 같더군. 기가 막혀, 그 말투라니. 쇼의 연극이 달콤했다느니. 머지않아 자신도 그놈 못지않은 바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고 싶어? 아직 결혼 전인데도 그 모양이니 결혼 후에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네드는 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브, 당신은 메스껍지도 않아?"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왜 그래?"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네드는 물었다. "나 같은 심술쟁이가 하는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당신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로스 가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사실대로 말해 봐." "그럼, 당신하고 결혼할 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죠? 결혼 전의 당신 말이에요. 알고 있었던 건 당신이 제멋대로고......" "그 점은 인정해." "징그러운 남자고......" "이것 봐, 지금 로스 집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어떤 점이 당신의 마음에 들었지? 명성인가?" "물론 명성도 있지요. 모든 여자는 그런걸요." "알겠어!"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봐야 뭘 해요. 머리 좋은 당신답지 않군요. 나는 그 가족이 좋아요. 어머님, 아버님, 토비, 재니스, 벤 아저씨, 모두 좋아요. 모두 친절한 분들이에요. 몸가짐은 단정하고, 답답하지도 않고, 뭐라고 할까, 모두 -- " 하고 이브는 적당한 말을 생각했다. "-- 아주 건전해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당신의 예금통장이 마음에 든 거야." "당신은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군요." "지금은 증거를 댈 수 없지만 언젠가는......" 네드는 입을 다물고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한동안 그는 이브를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듯한 무엇이 엿보였다. 여느때의 네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당혹스럽고 필사적인 어떤 것, 그리고 거기에 상냥함마저 엿보이는 것이었다. "이브." 하고 그가 갑자기 말했다.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 "그런 짓이라니?" "당신이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네드는 경대 옆으로 가더니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이브는 온몸을 긴장시키고 네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드를 잘 알고 있는 이브는 지금 그의 기분이 밝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네드가 다시 돌아보았다. 곱슬거리는 금발 아래의 반들거리는 이마에는 가는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이브, 오늘 동종 호텔에서 어떤 애길 들었어." "무슨 애길?" "로스의 아버지는 귀가 어둡다는 거야." 하고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창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지금 커튼을 젖히고 큰소리로, '오, 안녕하십니까?' 라고 한다면......" 침묵이 흘렀다. 배멀미를 할 것 같은 불안한 불쾌감이 이브의 위 근처로 솟아올라 그것이 온몸으로 퍼져서 시야까지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무더운 방에는 담배연기가 꽉 차서 가슴이 답답했다. 그 자욱한 연기 저쪽에서 네드의 파란 눈이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브는 자신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 비겁한 짓을, 당신 설마!" "못할 것 같아?" "아무리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도!" "그게 그렇게 비겁한 짓인가?" 하고 네드는 침착하게 묻고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부끄러운 짓은 한 적이 없었잖아?" "물론이에요." "다시 한 번 말하지. 당신은 미덕의 표본이고 나는 악역이야. 열쇠로 문을 열기는 했지만 침입자인 건 분명해." 하며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내가 소동을 피웠다고 해서 당신이 겁날 건 없잖아?" 이브는 입속이 바짝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모든 일이 진공상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빛이 확산되고 소리가 들려오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나는 토비가 때려눕혀도 할 말이 없는 불량배야 -- 토비란 자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도 날 쫓아내려고 했지? 그러니 당신을 알고 있는 충실한 이웃들은 당신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지. 걱정할 것 없어! 나도 당신이 하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약속하지. 만일 당신이 정말로 나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있다면, 그리고 또 로스 집안 사람들이 당신이 말한 그대로의 인간이라고 한다면, 내가 소란을 피우겠다고 위협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그렇게 떨기만 하고 큰소리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거지?" "네드, 그건 설명할 수가......" "왜지?" "당신은 이해 못할 거예요." "왜?" 이브는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다만 두 팔을 벌려 보일 뿐이었다. '세상사'라는 것을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가 있을까? "이 말만은 할 수 있어요." 하고 이브는 눈에 눈물이 글썽였으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밤 당신이 여기에 온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났다고요." 네드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게 됐나?" 하고 그는 빙글 돌아서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이브는 본능적으로 불을 끄려고 급히 앞으로 내딛다가 가운 자락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 바람에 공단 허리끈이 또 풀어졌다. 네드를 향해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지 어쨌는지 나중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경대 의자에 걸려 채이면서 늘어져 있는 전등 스위치를 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 불이 꺼지자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네드가 정말로 길 건너편의 모리스 로스 경에게 말을 걸 생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찌되었든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나무로 만들어진 링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만큼 기세좋게 면 커튼을 젖히더니 다시 그 뒤에 있는 레이스 커튼을 들어올리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한 행동은 그것 뿐이었다. 그의 눈은 15 미터도 채 안 되는 건너편 모리스 경 서재의 밝은 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창은 프랑스 풍을 본따고 있어서 마룻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기다란 창이었다. 그리고 정면 현관 위에 있는 조그만 발코니와 이어져 있었다. 창문은 반이나 열려 있었고, 덧문도 열린 채였고, 커튼은 완전히 젖혀져 있었다. 그러나 서재 안은 불과 몇 분 전 네드가 건너다보았을 때와는 그 양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네드!" 하고 이브는 점점 더해 가는 공포에 질려서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네드, 어떻게 된 거예요?"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보통 크기의 네모난 방엔 벽을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의 골동품 진열장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두개의 창문을 통해서 서재 내부가 거의 다 들여다보였다. 책장 한두 개가 장식장 사이에 놓여 있었다. 벽은 하얗고 양탄자는 차분한 회색이었는데, 의자나 테이블은 장식 부분이 대체로 길쭉한 느낌이었으며 금박이 되어 있었고, 천으로 된 부분은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까 네드가 건너다보았을 때에는 책상 위의 스탠드에만 불이 켜져 있었는데, 지금은 한가운데 매달린 샹들리에까지 휘황찬란하게 켜져 있어서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곳의 광경을 비춰 주고 있었다. 왼쪽 창 너머로 모리스 경의 커다란 책상이 왼쪽 벽에 붙어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 창 너머로는 오른쪽 벽에 설치해 놓은 흰 대리석 벽난로가 보였다. 서재의 안쪽 벽, 두 사람의 위치에서 정면에 해당하는 곳에 2층 복도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누군가가 그 문을 살그머니 닫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서재를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이브가 창가로 다가갔을 때는 너무 늦어서 그 얼굴이 얼핏 보였을 뿐이다. 미처 다 보지 못한 그 모습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문이 닫히면서 그 얼굴이 가리워질 때 누군가의 손이 쭉 삐져나왔다. 그런 거리에서는 손이 작아 보였고, 갈색 계통의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손이 문 옆의 스위치에 가닿자 가운데 샹들리에의 불빛이 꺼졌다. 노브 대신에 금속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길고 하얀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리고 지금은 단지 녹색의 유리 갓이 씌워진 조그만 탁상용 스탠드가 왼쪽 벽에 붙여놓은 커다란 책상과 그 앞에 있는 회전의자에 희미한 빛을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모리스 로즈 경은 언제나처럼 회전의자에 앉아서 옆얼굴을 이쪽으로 보이고 있었지만, 지금은 확대경을 손에 들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들 수 없겠지...... 확대경은 책상 위 흡묵지 (잉크나 먹으로 쓴 것이 번지지 않도록 그 위에 눌러서 빨아내는 두꺼운 종이) 위에 놓여 있었다. 흡묵지 위에 -- 아니, 책상 위 전체에 어떤 물건의 부서진 듯한 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있었다. 수많은 파편들, 기묘한 파편들, 장미빛으로 물든 눈처럼 핑크색으로 빛나는 투명한 파편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파편 속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도 섞여 있다. 어쩌면 또 다른 무엇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상 위에서부터 벽에까지 튀어서 묻어 있는 핏자국 때문에 그들 빛깔을 분명하게 판별할 수는 없었다. 이브 닐은 구역질이 목구멍에까지 솟구쳐 올라왔고, 자기 눈으로 본 광경이 믿겨지지 않아서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는지, 그 뒤에도 도저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네드, 난......" "쉿!" 모리스 경의 머리는 이쪽에서는 안 보이지만 흉기 같은 것으로 여러 차례 얻어맞은 듯했다. 책상 사이에 무릎이 끼어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턱을 가슴에 묻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피가 얼굴에 물감이라도 칠한 듯이 범벅이 되어 뺨에서 코 밑으로까지 흘러내렸고, 움직이지 않는 머리엔 마치 모자를 씌운 듯이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 제 4 장 --------------------------- 일찍이 웨스트민스터의 퀸 앤스 게이트에서 살았고 근년에는 라 방들레트의 데 상주 거리에 살았던 기사(騎士) 모리스 로스 경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신문의 기사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 적었고, 그에 비해 신문의 수는 많았던 시대였으므로 경의 죽음은 영국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사실 모리스 경같은 인물은 이런 기괴한 방법으로 살해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째서 그런 작위를 받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의해서 경을 둘러싼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경이 얻은 칭호는 왕년의 인도주의적 공로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경은 빈민가의 일소라든가, 형무소의 개혁이라든가, 선원의 처우개선 같은 것에 관심을 쏟았었던 것이다. <명사록>에 의하면 경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과 인간관찰'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는 뒷날 영국을 거의 파산으로까지 몰고간 바로 그런 비뚤어진 영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자선사업에는 거액을 서슴없이 기부하기도 하고, 복지사업에 돈을 아낀다고 당국을 공격하면서도 자신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외국에 나가 살았던 것이다. 콧수염과 짧은 턱수염을 기르고 이미 귀가 조금 어두워진 이 작달만한 노인은 자기 나름대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친절한 사람이며 선량한 가장이라는 평판은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호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주도면밀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이 모리스 경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곧 날이 새려는 시각, 조용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이브 닐과 네드 애트우드는 겁먹은 아이처럼 서 있었다. 이브는 불빛에 비쳐진, 피로 얼룩진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창가에서 멀리 떨어져서 더 이상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네드, 거기서 물러서요." 그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그분이......?" "응, 아마 그럴 거야. 여기선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지 상처만 입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 중에서 네드 쪽이 더 놀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브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갈색 장갑을 낀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이다. 불이 켜져 있는 그 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목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잖아요? 다치기만 했을지도 몰라요!" 네드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당신은......?" "하지만 우리가 가볼 수는 없어요." 하고 이브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에게 놓여진 상황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난 것이다. "가보고 싶지만 안 돼요." "흠, 안 되겠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네드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멋지다고 할까 (아니면 너무 심하다고 할까) 그 참상은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말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네드는 말없이 흉기를 들어올려 심하게 내리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두 사람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울려서 굴뚝 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밖으로 나갈 것만 같아서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시 한 번 네드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뭐 볼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쌍안경이나 오페라 안경이라도 좋아." "왜, 그래요?" "좌우간, 없어?" 쌍안경, 이브는 창가의 벽에 기대서서 떨고 있다가 쌍안경에 생각을 집중시켜 보려고 애썼다. 쌍안경 -- 그래, 경마야. 롱샹에서의 경마. 바로 2~3 주일 전에 로즈 일가와 함께 롱샹에 갔었다. 화려한 색채와 소음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햇볕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 색상이 선명한 기수의 셔츠, 희게 칠한 울타리 너머에서 흘러가듯이 달리는 말의 무리. 모리스 경은 회색 실크 모자를 쓰고 쌍안경을 눈에서 떼지 않았다. 벤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마권을 샀지만 날리고 말았다. 왜 네드가 쌍안경을 찾는지 짐작도 되지 않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이브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옷장 있는 곳에까지 가서 제일 윗서랍에서 가죽 케이스에 들어 있는 쌍안경을 꺼내와 네드의 손에 디밀었다. 샹들리에가 꺼진 건너편 방안은 전보다 훨씬 어두웠지만 오른쪽 창을 향해 쌍안경 초점을 맞추니 방 한구석이 아주 선명하게 네드의 눈앞에 다가왔다. 오른쪽 벽과 벽난로가 비스듬히 보였다. 흰 대리석 벽난로 선반 위 벽에 나폴레옹 황제의 청동제 원형 조각이 걸려 있었다. 8월이었으므로 난로에 불은 없었고, 열기를 막기 위한 조그만 가리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화구 옆 연장걸이에는 놋쇠 손잡이가 달린 철구(鐵具), 부삽, 부젓가락, 부집게 등이 걸려 있었다. "저 부집게로......?" 하고 네드가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이걸로 보라고." "그런 끔찍한. 못해요!" 무서운 한 순간, 이브는 네드로부터 눈앞에서 조롱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네드도 조롱할 만큼 여유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창백했으며, 쌍안경을 케이스에 넣는 손도 떨리고 있었다. "저런 점잖은 집안에서." 하고 그는 골동품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노인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아까 점잖은 집안이라고 했지?" 이브는 가슴이 콱 막혀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봤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도둑이 때렸군요. 그걸 봤죠?" "아니, 때리는 것은 못 봤어. 내가 봤을 때에는 그 갈색 장갑이 일을 끝낸 뒤였어." "그럼 뭘 봤어요?" "일을 끝내고 갈색 장갑이 부집게를 연장걸이에 걸고 있는 참이었어." "그 도둑을 다시 보면 알겠어요?" "그런 소린 안하는 것이 좋아." "무슨 소리에요?" "도둑이라는 말 말이야." 불이 켜져 있는 건너편의 서재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그머니 열린 것이 아니라 기세좋게 벌컥 열렸다. 거기에 나타난 것은 듬직한 모습의 헬레나 부인이었다. 헬레나 부인의 몸짓은 언제나 좀 과장된 것이어서, 어렴풋한 어둠속에서도 손에 닿을 듯이 보였다.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이 열리면서부터 그녀의 입술은 움직였다. 상황으로 보거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 양쪽 다이든간에 보고 있는 사람에겐 그녀의 말이 그대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리스, 이젠 그만 주무세요!" 헬레나를 로스 부인이라고 격식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키에 듬직한 몸매, 얼굴은 명랑하고 둥글며, 은빛 머리는 짧게 자른 모양이었다. 동양풍의 화사한 옷을 걸치고 두 손을 소매에 찌른 채 슬리퍼로 큰소리를 내며 걸었다. 그녀는 문앞에서 멈춰서서 다시 한 번 말했다. 가운데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두 팔을 끌어안듯이 하고 등을 보이고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어볼 양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헬레나는 근시였으므로 남편 바로 옆에까지 다가가 섰는데도 남편의 죽음을 그때껏 알지 못했다. 첫번째 창문을 지났을 때에 그 그림자가 길가에 비치어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두 번째 창에 나타났다. 결혼생활 30년 동안 헬레나 로스는 한 번도 당황한 일이 없었다. 그런만큼 그녀가 뒤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는 대단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계속되었으며, 밤의 정적을 찢고 거리 전체를 온통 뒤흔들어 집이란 집, 방이란 방은 모조리 두드려 깨우는 듯했다. 이브는 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네드, 돌아가요, 빨리!" 하지만 네드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브는 그의 팔을 잡았다. "헬레나가 날 부르러 올 거예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리곤 경찰이 올 거예요. 30분도 안 돼서 이 거리는 경찰이 우글거린다고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 끝장이에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네드의 팔을 계속 흔들어댔다. "아까 한 말 거짓말이죠? 큰소리로 우리의 일을 소문내려는 것은 아니겠죠?" 네드는 두 손을 들어 울퉁불퉁한 긴 손가락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어.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 그뿐이야. 미안해." "그럼 나갈 거예요?" "나갈 거야. 맹세하지, 나는 --" "모자는 침대 위에. 이쪽이에요." 하고 그녀는 침대 쪽으로 가서 새털 이불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어둡지만 짐작으로 내려가 봐요. 지금 불을 켤 수는 없으니까." "왜?" "이베트가 있어요. 새로 온 하녀예요." 나이는 꽤 들었지만 일을 잘하고, 동작은 느린 듯이 보이지만 제법 반반한 하녀 이베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든 동작은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토비 로스에 대해서도 이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묘한 태도를 보였다. 이브에게 있어서 그녀는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표 같은 존재였다. 여기서 갑자기 이브는 꼼짝없이 공개법정에서 증인석에 서게 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모리스 로스 경이 살해된 그 시각에 내 방에는 남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이 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요, 물론 그렇겠지요 --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곤 까르르 폭소로 변하겠지.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베트가 위층에서 자고 있는데 틀림없이 깼을 거예요. 저 비명 소리라면 온 마을이 다 깨겠어요." 말할 것도 없이 비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저 소리를 얼마나 참아낼 수 있을까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간신히 모자를 찾아서 그것을 네드에게 던져 주었다. "이봐, 이브. 당신은 정말 그 꽁생원 같은 자식에게 빠져 있는 거야?" "꽁생원이라뇨?" "토비 로스 말이야." "어머, 그런 소릴 하고 있을 때예요? 지금이?" "이봐, 살아 있는 한은 사랑한다 어쩐다 하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기분좋은 거야." 하고 네드는 말을 되받았다. 그는 아직도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이브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직접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경련을 일으킨 사람처럼 두 손을 벌렸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힘으로라도 그를 문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길 건너 헬레나의 비명은 그쳤는데도 아직 그 소리가 고막 깊숙히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뛰어오는 경찰관의 발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흘끔 창밖으로 눈길을 보냈다가 이브는 아까와는 다른 광경을 보았다. 헬레나의 곁에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아주 예쁜 딸인 재니스와 부인의 오빠인 벤이었다. 두 사람은 밝은 불빛으로 앞이 안 보이는지 비틀거리며 문으로 들어왔다. 재니스의 붉은 머리와 벤 아저씨의 침통한 얼굴을 이브는 보았다. 이야기 소리가 커질 때에만 들리는, 앞뒤를 알 수 없는 말의 조각들이 조용한 밤 거리를 건너서 들려왔다. 네드의 목소리 때문에 이브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정신차려!" 그는 힘내라는 듯이 말했다. "자칫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 같아. 자, 침착해. 그리고 걱정할 것 없어. 나는 들키지 않을 테니까. 뒷길로 몰래 빠져나갈 거야." "가기 전에 열쇠를 줘요." 그는 일부러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들어올렸으나 이브는 다그쳐 말했다. "어물쩡 넘어가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그 현관 열쇠를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자, 돌려줘요!" "싫어, 이건 갖고 있겠어." "잘못했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당신 덕분에 난 오늘밤 이렇게 궁지에 빠졌어요. 조금은 내 생각도 해줘요......" 하고 이브는 방금 네드가 후회하며 뭔가 망설이고 있는 기색을 눈으로 보았다기보다는 느낌으로 알았다. 사람을 궁지에 빠뜨리고 나서는 언제나 그가 하는 버릇이었다. "돌려만 준다면 -- 그래요, 또 만나도 좋아요." "정말이야?" "어쨌든 줘요!" 이브는 곧 자신이 한 말에 대해 후회했다. 생각해 보니 네드는 열쇠 고리에서 열쇠를 빼내는 데 너무 느릿느릿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만나도 좋다니, 아니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머리가 극도로 혼란해져서 이젠 무슨 약속을 해도 좋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받아쥔 열쇠를 잠옷의 가슴에 붙은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고 이브는 네드를 문 쪽으로 밀고 갔다. 2층 복도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했다. 3층에 있는 이베트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듯했다. 복도 끝의 커튼이 쳐 있지 않은 창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들어와서 층계를 발로 더듬어가며 내려가는 네드의 윤곽만 보였다. 그러나 이브는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되도록이면 불유쾌한 일은 피해 왔다. 그러니까 지금도 흰 벽에 금박으로 장식이 된 가구가 놓여 있는 별로 밝은 인상을 주지 않는 건너편 방에서 부집게로 살해된 모리스 경의 모습 뒤에 또 하나의 인간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런 불쾌감, 혹은 두려움 같은 것을 얼마나 외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만은 외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자칫 잘못되면 그녀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시청의 탑 속에 있는 대형 시계가 떠오른다. 그 건물엔 경찰서도 들어서 있다. 서장인 고롱 씨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우울한 아침, 철컥 하고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 "네드, 그건 도둑이었죠?" "이거 이상한데." 하고 갑자기 네드가 말했다. "뭐가요?" "오늘밤 이리로 올라올 때 이 복도는 정말로 캄캄했어. 저 창에 커튼이 쳐져 있었던 것이 분명해." 하고 그는 복도 끝을 손으로 가리켰다.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그것은 확신으로 변했다. "계단에서 걸려 넘어졌었어. 그 고정쇠에 걸려서.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걸려서 넘어질 리가 없잖아. 아니, 어째서 이렇게 밝아졌지?" "네드, 화제를 바꾸지 말아요. 그건 도둑이었죠?"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믿을 수 없어요. 설마 그런 일이, 믿을 수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당신!" 하고 네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빛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필 내가 약자를 감싸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당신은......당신은......" "내가 어떻다는 거예요?" "당신을 혼자 놔둘 수는 없어, 그것 뿐이야." 두 사람의 발 밑에 있는 가파른 원형 계단은 새카만 동굴 같았다. 네드는 손잡이가 흔들릴 만큼 힘껏 그것을 잡았다.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하고 그는 주먹을 꼭 쥐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사물의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남녀간의 일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할 생각도 없어. 다만 지금 문득 생각이 난 건데, 이런 상황은 별로 진기한 것도 아니야.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한바탕 웃었지." "대체 무슨 이야긴데?" "모르고 있어? 백년쯤 전에 윌리엄 경인가 하는 사람이 그의 시종에게 살해된 이야기야." "하지만 가엾은 모리스 경에게는 시종 같은 것은 없어요."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로 융통성이 없군. 무릎에 안고 엉덩이를 두들겨 줄까 보다. 이 이야기를 정말로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없어요." "그 살인 현장을 건너편 집에서 창을 통해 목격한 사나이가 있었대. 그런데 그 사나이가 있었던 방이 하필 어떤 유부녀의 침실이어서 자기 눈으로 본 범인을 고발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던 중에 죄없는 사나이가 붙잡혔는데, 그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물론 이런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겠지만 이 사건에서는 범인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고지식한 연인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이 너무도 희극적이었기 때문이지. 어쨌든 엉뚱한 일에 말려들고, 더구나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으니. 나 역시 그냥 희극적인 상황이라고만 생각했지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습기는 커녕 이건 심각한 일이야. 웃을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네드, 누구였죠? 누가 죽였어요?" 그는 그 옛날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는지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질문 같은 것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희곡으로 썼었지." "네드, 부탁이에요." "아니, 내 이야길 들어봐. 이건 중요한 일이야." 이렇게 말하는 그의 흰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연극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달아나더군. 그 얼빠진 사나이는 경찰에 익명의 편지를 보내어 살인범을 고발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끝날 줄 알았지. 물론 그런 정도로 끝날 수는 없지. 그 곤경에서 벗어나는 단 한 가지 길은 법정에서 진범과 대결하는 수밖에 없었어." '법정'이라는 불길한 말을 듣고 이브는 네드의 팔을 힘껏 잡았다. 그러나 그는 달래는 듯한 몸짓을 했다. 네드는 이미 한 계단 내려서고 있었는데 거기서 방향을 바꾸어 마주보았다. 아무리 느긋한 사람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궁지에 몰린 꼴이 되었고, 두 사람의 속삭이는 소리는 긴장이 고조될수록 더욱더 낮아져 갔다. "걱정할 것 없어. 당신은 아무 관련이 없어. 그렇게 되도록 해줄 테니까." "경찰에게 말할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 안해." "하지만 내겐 가르쳐 줘도 되잖아요? 누가 죽였죠?" 그는 이브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 계단 내려갔다. 뒷걸음질로 내려가서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른 흰 얼굴에 이빨만이 반짝이면서 그대로 안개 속으로 멀리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그때 이브의 머리에 섬광처럼 스친 생각은 신경이 극도로 약해지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아니야." 하고 네드는 말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고 먼저 앞질러가는 네드의 버릇대로 그것을 부정했다. "그런 일로 끙끙거릴 건 없어. 그 집안 사람이라면 당신도 걱정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정말?" "그것만은 확실하게 맹세할 수 있어." "날 괴롭힐 생각이에요?" 네드는 아주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천만에. 당신을 솝으로 싸서 다치지 않게 하려는 거야. 그것이 당신에겐 어울려. 당신과 알고 지내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다 그러겠지. 그렇긴 하지만 놀랍군! -- 그 나이에 조금쯤은 세상 물정을 알 만도 한데, 당신처럼 아직도 어린애같이 단순하고 낭만적인 환상을 안고 있는 여자는 없을 거야. 하여튼 좋아." 하고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는 당신도 알게 되겠지." "얼른 말해 봐요!" "처음 우리가 건너다보았을 때......기억하고 있지?"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광경은 되살아났다. 네드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 장면이 떠올랐다. 왼쪽 벽 가까이에 놓인 커다란 책상, 턱수염을 조금 기른 모리스 경이 확대경을 들고 있는 낯익은 모습, 그 머리는 피로 물들인 모자를 쓴 꼴이었다. 그리고 또,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그 위에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건너다봤을 때에 누군가 한 사람이 더 있다고 내가 말했을 거야. 그것이 누군지 몰랐는데......" "그래서요?" "그런데 두 번째는 불이 모두 켜져 있어서......" 이브는 그를 따라 한 계단 내려갔다. 거기서 손을 뻗어 그를 힘껏 밀어버릴 생각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 것이 나빴다. 앞쪽 길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사람살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있지도 않는 강도를 쫓고 있는 듯이 큰소리로 경찰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는 점점 크게 열려진 창을 통해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공포에 싸여 이브로서는 오로지 힘으로라도 네드를 빨리 층계 밑으로 쫓아버려 이 집에서 몰아내고 자신도 이 위험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미친 듯한 욕망밖에는 없었다. 그때 마침 그녀의 두 손은 네드의 어깨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밀어버린 것이다. 네드는 소리지를 틈도 없었다. 뒷걸음으로 뒤꿈치를 반이나 내밀고 왼손으로 가볍게 손잡이를 잡은 자세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손잡이를 놓치고 비틀거리던 그는 성난 듯한 외마디 소리를 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바로 그곳이 양탄자 핀이 툭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떨어지기 직전 이브는 그의 바보 같기도 하고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보았다. --------------------------- 제 5 장 --------------------------- 사람의 몸이 아주 비탈진 열여섯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게다가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는 벽에 제대로 머리를 부딪쳤으니 온 집안에 그 소리가 진동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브가 뒤에 가서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아주 조그만 소리밖에는 기억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도 너무 놀랐거나 너무 요란한 소리를 예상하고 신경이 반사적으로 위축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드가 떨어지고 나서 계단 밑에 누운 그를 숨을 헐떡이며 굽어보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해를 끼칠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이브는 차분한 행동에 교태가 넘쳐 흐르고, 아름답고 착한 여성이 무슨 짓을 했든간에 그것이 사악한 동기에서라고 의심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그녀는 스캔들 같은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런데 그런 것이 왜 자신을 늘 따라다니는지 그 이유를 분석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우연히 닥쳐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브는 여기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네드 애트우드를 죽게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구부러진 계단 아래의 홀은 캄캄했으며 이브는 그의 몸에 걸려 넘어졌다. 오늘밤의 악몽에 알맞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차라리 문을 열어 경찰을 불러서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던 네드가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너무 반가워서 울어버릴 뻔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떠밀었지?" 다행이라 하는 안도감이 마치 구역질처럼 지나갔다. "일어설 수 있겠어요? 다친 곳은?" "아니, 다치진 않았어. 약간 부딪쳤을 뿐이야. 이봐, 대체 왜 그랬어?" "쉿!" 네드는 엎어져 있었는지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불안하게 들렸으나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엎드려서 그를 안아 일으키려 했을 때 이브는 그의 얼굴과 머리를 만지다가 끈적한 피의 촉감에 그만 가슴이 섬뜩했다. "다쳤군요!" "바보같이! 좀 부딪쳤을 뿐이야. 아니, 좀 이상한데...... 어깨가 이상해. 젠장, 그런데 왜 떠밀었지?" "얼굴에 피가! 성냥이나 라이터 갖고 있어요? 한번 켜봐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코피야. 느낌으로 알 수 있어. 하지만 코를 부딪친 기억은 없어. 그래도 별일은 없을 거야. 라이터를 달라고? 자." 라이터에 조그만 불이 켜졌다. 이브는 그것을 받아쥐고 네드가 손수건을 찾고 있는 동안에 그를 비춰 보았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코트가 좀 더럽혀졌을 뿐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코피가 흘러 있었다. 이브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몸서리를 쳤지만 네드는 재빨리 얼굴을 닦고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다음에는 구겨진 모자를 주워들어 먼지를 털고 다시 썼다. 그러는 동안 네드는 망설이는 듯한, 조금은 떫은 얼굴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맛이라도 음미하듯이 몇 차례나 혀로 입술을 핥고는 침을 삼켰다. 고개를 옆으로 저어보기도 하고 어깨를 추스려 보기도 했다. 얼굴은 창백하고 푸른 눈은 허공을 향해 무엇인가를 노려보고 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 덕분에 끄떡없어." 하고 그는 이브의 손에서 라이터를 뺐더니 불을 껐다. 그전에 보았던 그의 거친 성격이 얼핏 느껴졌다. "알 수 없군, 정말 알 수 없어. 나를 죽이려 해놓고 이번에는 예수님 같은 마음으로 배웅을 해주겠다는 건가?" 역시 옛날의 네드 애트우드 그대로였다. 이것이 그녀를 위협하는 망령이야.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어두운 집안을 지나 부엌문 앞에까지 더듬거리며 갔다. 이브는 스프링 고리를 젖혔다. 거기서 돌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높은 돌 담장을 둘러친 시골풍의 조그만 뒤뜰로 나가게 된다. 그 뒷문을 나가면 카지노가 있는 큰길로 통하는 골목으로 나갈 수 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부엌문이 삐걱거렸다. 따듯한 밤 공기는 습기에 젖은 풀과 장미 향기로 가득차 졸음이라도 몰고올 듯했다. 지붕 저쪽 먼 하늘에서 등대의 불빛이 20초 간격으로 보였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두 사람은 뒤뜰로 나가는 돌 계단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현관 쪽에 경찰이 도착했는지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네드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서 소리를 낮추고는 날카롭게 물었다. "잠깐, 네드, 아까 말하려다가 만 그 사람이 누구죠......?" "잘자요." 하고 애트우드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마지못한 듯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브는 또 피가 조금 묻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브를 향해 모자에 가볍게 손을 얹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등을 보이고는 약간 비틀거리며 돌계단을 올라갔지만 뜰을 지나 뒷문 쪽으로 갈 때에는 이미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이브는 밀려오는 공포감 때문에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네드를 불러세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운의 허리끈이 또 풀어진 것도 모르고 돌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네드는 알 턱이 없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이라 등뒤에서 부엌문이 아주 작게 찰칵 하는 소리를 낸 것을 그녀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네드가 여기서 나가버리기만 하면 위험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때에는 한시름 놓을 수가 있다. 이 숨막힐 듯한 불안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아직 평온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라고 분명하게 말로 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막연한 공포가 솟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네드 애트우드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능글맞은 놈팽이인 네드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갑자기 서먹서먹해 하고 예의바른 타인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침까지는 그도 정상으로 돌아가겠지, 틀림없이. 그런데 그 아침이 되면...... 이브는 깊숙히 숨을 들이마셨다. 살금살금 돌층계를 내려갔다.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녀는 자지러지게 놀라고 말았다. 문이 잠겨져 있었다. 더구나 안쪽에서 스프링 고리까지 단단히 걸려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되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식사 준비로 계란 프라이를 하다가 노란 자위가 그만 터져버리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닌데도 여자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거실에서 무엇인가를 깨뜨리고 만다. 그 뒤로는 재수없는 일만 생긴다. 동면중인 뱀처럼 몇 주일이나 잠자고 있던 가정 안에서의 말썽들이 갑자기 눈을 뜨고 덤벼드는 것처럼 생각된다. 생명이 없는 물체까지도 적개심에 불타는 악마가 씌운 듯이 보여진다. 그렇게 되어도 어디 화풀이할 곳이 없으니까,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비참한 생각에 사로잡힐 뿐이다. 단단히 닫혀진 문의 손잡이를 미친 듯히 흔들어대면서 이브가 느낀 것은 그런 마음이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어째서 문이 잠겼을까 ? 바람 한점 없었다. 밤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맑게 갠 밤하늘 아래 정원 나무들 사이에서 무엇 하나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것은 어찌되어도 좋다. 이런 일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달려드는 것이 심술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면 왜 이렇게 되었는 하는 의문을 가져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단지 이런 일이 일어났을 뿐인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어야만 한다. 언제 어느 때 경찰이 몰려올지 모른다. 문을 두드릴까? 이베트를 깨울까? 조그맣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하나로 이어진 듬성듬성한 눈썹을 한 이베트, 무표정하고 뻔뻔스러운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브는 화가 날 만큼 반발심이 생겼다.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이베트는 무서웠다. 하지만 어떻게 집으로 들어가지? 창문은 안 된다. 1층의 창은 모두 매일밤 안에서 잠그고 덧문까지 내리니까. 이브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는데 끈적끈적한 피가 다시 느껴져서 질겁을 하고 손을 떼었다. 가운도 피로 엉망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살펴보려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알 수가 없었다. 비교적 덜 더러워진 왼손으로 가운의 앞자락을 잡아당기다가 네드에게서 돌려받은 현관 열쇠가 주머니에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거리에는 경찰이 좍 깔려 있는데 현관 쪽으로 어떻게 가지 ?' 다른 한쪽에서는, '아니, 집을 둘러싸고 돌 담장이 있으니까 길에서 안 보이게 갈 수 있어.' 하고 속삭이는 소리도 들린다.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현관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며 이브는 한동안 망설였다. 1초 1초 위험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자 드디어 해보자고 마음을 정했다. 집에다가 찰싹 몸을 붙이고 숨을 죽인 채 앞쪽 뜰에 나선 순간 -- 정면으로 토비 로스와 맞부딪칠 뻔했다. 그러나 토비 쪽에서는 이쪽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나마 유일한 행운이었다. 예상한 대로 로스 일가가 이브를 부르러 온 것이다. 토비는 잠옷 위에 긴 비옷을 걸치고 구두를 신고 길을 가로질러 와서 마침 미라마르 별장 바깥 문에 손을 대던 참이었다. 거리에 면한 돌 담장은 높이 3 미터 정도이고, 아치형 출입구엔 듬성듬성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세워서 만든 문이 달려 있었다. 데 상주 거리의 키가 크고 어두컴컴한 가로등이 상수리나무 가지를 푸르게 비추고, 그 그림자를 이브네 집 앞마당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가로등은 또 문 밖에 서 있는 토비의 모습을 뚜렷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데 상주 거리에는 아직 경찰들로 가득차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이브가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한 경찰 덕분이었다. 토비가 문앞에까지 왔을 때 등뒤에서 흥분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잠깐!" 하고 프랑스 어로 소리쳤다. "당신 거기서 뭘하고 있소? 당신 거기 영국인에게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뭐, 뭐라고요?" 그 소리는 회오리바람처럼 갈수록 높아지며,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길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토비는 두 손을 벌린 채 돌아보며 프랑스 어로 대답했다. 유창한 프랑스 어였지만 귀에 거슬리는 액센트가 있었다. 이브는 그전부터 그가 잘난 체하는 프랑스 인에게 양보할 수 없어서 고의로 세련된 발음을 내려고 한 데서 생긴 버릇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닐 부인댁에 잠깐 가려고 그럽니다!" 토비는 크게 소리지르고 문을 두드렸다. "안 됩니다. 집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자, 빨리, 빨리!" "하지만 당신 -- " "돌아가시지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십시오!" 토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화가 난 몸짓을 해보이고는 가로등 밑에서 홱 돌아섰다. 갈색의 보드라운 머리, 예쁘게 손질한 콧수염, 여느때는 명랑해 보이는 얼굴이 지금은 격한 감정에 시달려 일그러지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토비는 주먹쥔 손을 머리 위에서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으며, 특히 이브는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앵펙퇴르 -- " 하고 그가 불렀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앵펙퇴르(경감)'는 프랑스 어로는 그냥 보통 경찰을 뜻한다. "어머니 모습을 보셨겠죠? 2층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을 똑똑히 보셨죠?" "아아, 알고 있소." 하고 경관이 말했다. "어머니가 닐 부인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지금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닐 부인뿐입니다. 그리고 나만 해도 몰래 도망가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곳으로 닐 부인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하고 그는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디든 안 됩니다." "죽은 사람은 내 아버지란 말이오......" "여기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 내 탓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하고 경관은 야무지게 반격했다. "라 방들레트에서 살인이라! 굉장한 이야기군! 고롱 서장이 뭐라고 할는지. 카지노 자살사건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데, 거기에 또 이 사건까지!" 하고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아니, 또 한 명 나오는군!" 이 경관의 짜증은 길을 건너오는 또 하나의 발자국 소리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이번 것은 가볍고 빠른 발걸음이었다. 화려한 진홍색 잠옷을 입은 재니스 로스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길게 땋은 붉은색 머리가 그 잠옷이나 창백해진 귀여운 얼굴과 대조를 이루었다. 스물세 살의 재니스는 아담한 체격에 둥근 얼굴을 한 멋쟁이이면서 콧대가 높은 아가씨였다. 18세기풍의 용모에 18세기풍의 성실성을 지닌 일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재니스는 혼란에 빠져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그녀는 토비에게 소리쳤다. "이브는 어디 있어요? 오빠, 왜 여기 서 있어요?" "아니, 이 멍청이가......" "못 가게 한다고 그냥 있어요? 나 같으면 그렇게 가만히 있진 않겠어요." 경관은 영어를 아는 모양이었다. 재니스가 문 안을 들여다보니 이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브의 눈과 마주쳤을 때 다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모두의 귀를 왱왱 울리며 들려왔다. "저건 당신들 때문에 나는 소립니다." 하고 경관은 위압적으로 말했다. "자, 당신도 아가씨도 얌전히 돌아가겠죠? 아니면 강제수단을 쓸까요?" 그는 곧 이브의 시야에 들어왔는데 토비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망토 밑에서 뽑아서 쥐고 있던 흰 경찰봉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거칠던 경관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나도 괴롭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은 참으로 괴로울 줄 압니다만." 토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재니스는 홱 돌아서더니 집 쪽으로 뛰었다. "이것도 명령이니까, 자, 따라오십시오!" 하고 경관은 조금은 동정하는 기색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잠깐 동안뿐입니다, 수사주임이 올 때까지 겨우 15분간입니다! 15분만 기다려 주시면 그땐 조금도 의심받지 않고 그 부인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 "알겠소." 하고 토비는 기운 없는 대답을 했다. 경찰관은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토비는 돌아서기 전에 다시 한 번 미라마르 별장을 흘끔 보았다. 긴 비옷을 입은 엉성한 차림새에 완고하고 네모난 턱을 한 그가 갑작스레 중얼거렸다. 그는 조심성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감정이 너무 격해 있어서 마치 싸구려 멜로드라마의 대사를 외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세상에서 다시 없이 아름답고 상냥한 여인이여!" "뭐라고요?" "닐 부인 말입니다." 토비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흠!" 하고 경관은 목을 빼어 그 미덕의 화신이 살고 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그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기품 있고, 순수하고, 상냥하고......" 그는 숨을 삼켰다. 이브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격심한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이브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문 쪽을 보더니 프랑스 어로 말했다.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전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경관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전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없었습니다. 괜찮겠죠. 아니, 그렇게까지 뛰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이브는 경관이 거기에 남아서 문 안을 들여다보거나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토비 로스보다 먼저 전화 앞으로 달려가서 벨이 울릴 때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된다. 그런데 토비가 그렇게까지 자기를 이상적으로 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 거창한 거짓말을 입에 담다니 따귀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전에 없이 야릇하게 아파왔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초조하게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여성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희생의 심정에서 오늘밤 일어난 이 일을 토비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경관이 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그 때문에 이브는 한동안 숨을 죽여야만 했지만 그런 정도로 끝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길을 건너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 건너편의 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을 움츠리고는 자기 집 현관을 향해 뛰었다. 어렴풋이 가운의 앞자락이 날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허리띠가 또다시 풀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현관문까지는 겨우 몇 개의 계단이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끝없는 영원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양쪽에서 무서운 채찍질이 비가 퍼붓듯이 내리치는 사이를 달려야 하는 죄인처럼 언젠가는 붙잡혀 맞아죽게 될것 같은 기분이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 시간조차도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열쇠 구멍은 떨고 있는 그녀의 열쇠 쥔 손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듯했다. 간신히 집안으로 들어가자 더위와 어둠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닫혀진 문이 그녀를 악마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이것으로서 끝이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 그건 분명하다 -- 고 생각했다. 이브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고, 피가 묻은 손은 다시 끈끈함이 느껴졌다. 머릿속은 천천히 돌아가는 수레바퀴 같았다. 어둠 속에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토비와 통화할 수 있도록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2층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이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두 잘 풀려나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모든 것이 잘 되어야만 한다. 그녀는 가운을 바싹 잡아당겨 쥐고는 전화를 받기 위해 가만히 2층으로 올라갔다. --------------------------- 제 6 장 --------------------------- 정확히 1주일 뒤인 9월 1일 월요일 오후, 아리스티드 고롱 씨는 친구인 더못 킨로스 박사와 동종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고롱 씨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는 결정했어." 그는 커피를 저으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리스 로스 경의 살해용의자로 이브 닐 부인을 체포하기로 했다네." "증거에 의문점은 없나?" "유감이지만 전혀 없어." 더못 킨로스 박사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고롱 씨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눈금이라도 보듯이 한쪽 눈을 감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설마. 그 고운 목을, 그렇게 가느다란 목을." "그럼?" "15년쯤 섬으로 유배를 보내거나 어쩌면 10년 혹은 5년이 될지도 모르지 -- 유능한 변호사에게 의뢰하고, 그녀가 가진 매력을 적절히 이용만 한다면 말일세. 물론 자네라면 5년의 유배도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닐 부인은 어때? -- 자기 죄를 시인하나?" 고롱 씨는 불안해 하면서 커피 잔에서 스푼을 들어내면서 말했다. "응, 그것이 문제야. 그 아름다운 부인은 자신은 멋지게 빠져나간 것으로 알고 있어. 용의자가 되어 있는 줄은 짐작도 못하고 있지. 그걸 알려줘야 하는 것이 내 일이란 말이야. 괴로운 직업이야......" 고롱 서장이 걱정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라 방들레트에서 범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괴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뚱뚱한 체격에 인정이 많고 고양이처럼 얌전하며 애교 있는 사나이로, 각반을 하고 가슴에는 흰 장미를 꽂고 다니는 그런 일면이 있었다. 서장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경관다운 일은 전혀 없고, 라 방들레트의 지역행사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빈틈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근처 일대는 그의 관할이며, 하얗게 뻗어 있는 라 포레 거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자동차나 무개마차가 오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동종 호텔의 정면에 설치된 오렌지빛과 검정 무늬의 차양이 테라스의 햇볕을 가려주고 있었다. 줄지어 놓인 조그만 테이블에 손님은 별로 없었다. 고롱 씨의 좀 튀어나온 듯한 눈이 가만히 상대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닐 부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더군. 뭔가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아. 로스 집안의 누군가와 만나기만 해도 사람이 변해 버리는 거야.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있겠나. 방금 말했듯이 증거는 완전히 갖추어져 있고......" "그런데도 자넨 확신이 안 서는 거지?" 하고 킨로스 박사는 꽤 유창한 프랑스 어로 말했다. "그래, 맞았어.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이해가 안 돼. 그래서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싶은데." 킨로스 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특히 박사와 사귀고 싶어지는 일종의 독특한 인품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꼭 집어내기 어렵다. 아마 그 표정에서도 볼 수 있는 타고난 너그러움과, 이 사람이야말로 나와 같다,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 라고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때문일 것이다. 볕에 그을린 얼굴은 부드럽고 사려 깊어 보이고, 학자답게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욕심을 모르는 듯한 검은 눈이 언제나 조용했다. 덮수룩한 검은 머리에 아직 흰 머리카락은 섞여 있지 않았다. 얼굴 한쪽에는 알라스의 전투에서 입은 포탄의 상처를 정형수술한 흔적이 있지만, 특별한 각도에서 보지 않는 한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표정에는 유머와 경박스럽지 않은 재치가 있었으나, 그의 강하고 다부진 일면은 필요한 때가 아니고는 겉에 나타나지 않았다. 박사는 팔꿈치 가까이에 위스키 소다수를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휴일 기분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정말 휴일이란 어떤 것인지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계속하지." 하고 박사가 말했다. 서장은 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이건 최고의 혼담이라고 생각해. 이브 닐 부인과 로스 -- 본명은 호레이쇼인데 모두들 토비라고 부르는 청년과의 혼담 말이야. 이상적이라고 할 만해. 재산도 있고, 더구나 목숨까지 걸 정도의 연애라던데." "목숨을 걸어? 그렇지는 않겠지." 하고 킨로스 박사는 그의 생각을 말했다. "가령 A가 B와 만나지 못하게 되어도 C와 행복해질 수 있는 걸세. 세상이란 그런 거지." 고롱 씨는 은근하지만 의심스럽다는 듯이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 정말 그렇게 믿나?"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이라네." "아니, 자네는 아직 닐 부인을 만나보지 못했잖나?" 하고 고롱 씨는 여전히 소극적인 의문을 안고 있었다. "그래, 아직은." 하고 박사는 미소지었다. "그 부인과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이 변할 수는 없다네." "그렇게 되겠군." 하고 고롱 씨는 한숨을 내쉬고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1주일 전 오늘밤의 일이네. 데 상주 거리의 보뇌르 별장에 사는 그들 가족은 모리스 로스 경, 부인, 딸 재니스, 아들 토비, 부인의 오빠인 벤자민 필립스 씨, 그 밖에 고용인이 둘이라네. 8시에 모리스 경 혼자 남겨두고 가족이 함께 닐 부인과 극장에 갔어. 모리스 경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군. 이 점이 중요한데, 경은 그날 오후 일과 중 하나인 산책에서 돌아온 뒤로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 보이더라는 거야. 기분이 나아진 것은 8시 반에 라 아르프 거리에서 미술상을 하는 그의 친구 베유 씨의 전화를 받고난 다음부터야. 전화의 내용은 모리스 경의 수집에 크게 보탬이 되는 멋진 보물을 손에 넣었는데, 괜찮다면 지금 곧 보뇌르 별장으로 가지고 가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했었다는군." 고롱은 잠깐 쉬었다. 킨로스 박사는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어서 그것이 따뜻하고 느슨한 대기 속을 굽이치면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보물이란 것이 뭐지?" "코담배 케이스라는군. 나폴레옹 황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나 봐." 서장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중에 베유 씨에게서 그 가격을 들었는데, 난 믿을 수가 없었다네. 정말 어이가 없더군. 아무리 취미라고는 하지만 그런 거금을! 물론 역사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기야 하겠지만......" 여기서 또 잠깐 쉬었다. "그런데 나폴레옹 황제는 정말 코담배를 사용하기는 했을까?" 킨로스 박사는 웃었다. "자네는 영국 연극에 나오는 나폴레옹을 본 적이 없나? 배우들은 하나같이 코담배 케이스를 들고, 대사를 세 마디도 하기 전에 무대에 온통 코담배를 뿌리지 않고는 단 5분도 나폴레옹 역할을 해낸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지. 믿을 만한 회고록에도 황제는 언제나 코담뱃가루투성이였다고 하더군." 고롱 씨는 떫은 얼굴이었다. "그럼 물건은 우선 확실한 것 같군." 하고 그는 인정했다. "어떻든 물건 자체는 아주 멋진 것이었어!" 하고 그는 커피를 마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어보게나, 그건 투명한 장미빛 마노(瑪瑙)로 만들어졌는데, 금으로 테를 두르고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를 앞뒷면에 온통 박아놓았더군.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아주 묘한 모양이야. 게다가 진짜가 틀림없다는 보증서까지 붙어 있었다네. 모리스 경은 크게 기뻐했지. 나폴레옹의 유품에는 맥을 못추었던 모양이야. 경은 그것을 사기로 하고 물건을 두고 가면 대금은 다음날 아침 수표로 보내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대금을 아직 치르지 않아서 베유 씨는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다는데 그건 무리도 아니지. 그날 밤 닐 부인은 아까도 말했듯이 로스 집안 사람들과 연극을 보러 갔었어. '워렌 부인의 직업'이라는 영국 연극이지. 밤 11시쯤 돌아와서 집앞에서 헤어졌다네. 젊은 토비 로스 씨는 그녀를 현관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어. 그건 그렇고, 나중에 예심판사가, '당신은 그때 잘 자라는 키스를 했나요?' 하고 물으니 토비는 박제한 부엉이처럼 단정한 자세로, '별걸 다 물으시는군요.' 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더군. 예심판사는 두 사람이 다투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지만, 사실은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야." 여기서 또 고롱 씨는 망설였다. "로스 집안의 가족들이 돌아오니 모리스 경이 2층에서 한달음에 내려와서 맞았어. 녹색과 황금색의 조그만 상자에 들어 있는 보물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재니스 양만이, '어머, 참 예쁘네요.' 라고 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덤덤한 얼굴이었어. 부인이, '너무 심한 낭비예요.' 라고 하니까 경은 화가 났는지, '마음 편히 있을 곳은 서재뿐이군.' 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각기 침실로 갔어.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둘 있었어." 고롱 씨는 상체를 내밀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커피는 오래 전에 식어 버렸다. "호레이쇼 씨, 즉 토비는 한밤중인 1시에 일어나서 닐 부인에게 전화건 사실을 시인하고 있어. 예심판사가, '허어, 불타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군?' 하고 말하니까 토비는 안색까지 달라지며 그렇지는 않았다고 부정했는데, 그런 것은 아무런 단서도 될 수 없지! 그러나 상황으로 봐서는 있을 듯도 한 일이지. 조금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나? 어떤가?" "아니 별로." 박사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그건 문제가 아니야. 다음을 계속하게." "그런데 토비는 아래층에 내려가 전화를 걸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서 잤다네. 집안은 캄캄했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어. 아버지의 서재 문 밑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경에게 방해가 될까 봐 그대로 지나쳤다는 거야. 같은 시간에 로스 부인도 마음이 뒤숭숭했어. 남편이 코담배 케이스를 산 일로 마음이 상했거나 놀란 탓은 아니었어. 조금은 마음이 쓰여 어쩐지 잠들지 못했던 거야. 1시 15분에 -- 이 시간을 기억해 두게 --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어. 표면상 이유는 이젠 그만 자자는 말을 하러 간 것이었지만,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로는 그런 비싼 장미빛 마노 노리개를 산 남편에게 잔소리를 좀 해줄 생각이었다고 하더군." 고롱 씨는 무대에 선 배우처럼 여기서 한층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이것으로 1막이 끝난 거야." 라고 말하고 그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남편이 책상 앞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지. 부집게로 머리를 난타당한 것이었어. 흉기는 방 한쪽 난로용구 걸이에 지금도 그대로 걸려 있네. 경은 문을 등지고 코담배 케이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 같아. 쓰다가 만 메모지가 앞에 놓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어!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모르지만 부집게로 마노 코담배 케이스를 내리쳐서 산산조각을 내버린 걸세." 킨로스 박사는 휙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노인의 목숨을 빼앗은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려서 그 보물까지 부숴버려야만했는가! 아니면 억지 같지만 우연이었을까?" 킨로스 박사도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사람의 머리만한 목표를 헛쳐서 노인의 눈앞 책상 위에 있던 코담배 케이스를 내리쳤다고 하면 어떨까? 다만, 물론......" "물론 뭔가, 박사?"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계속하게나." 고롱 씨는 엉거주춤한 채 성현의 가르침이라도 들으려는 듯이 손을 귀에 갖다댔다. 좀 튀어나온 듯한 눈은 박사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범행은 잔인해. 게다가 의미도 없어. 첫눈에 미친 놈 짓으로 보이는데......" "천만에!" 하고 박사가 말했다. 조금은 초조해 보였다. "그건 오히려 굉장히 특색 있는 범죄야." "특색이 있는 범죄?" "그래, 범죄의 유형으로 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아니, 이야기를 가로막아 미안하네. 다음을 부탁하네." "없어진 건 하나도 없어. 도둑이 든 흔적도 없어. 이 범죄는 집 내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의 짓이야. 난로 옆에 부집게가 걸려 있는 것도, 노인이 귀가 좀 어두워서 뒤에서 다가가도 모를 것이라는 점까지도 알고 있었던 거야. 로스 일가는 프랑스 생활에 익슥해져서 잘 지내고 있었어. 그건 틀림없지! 하지만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서 겁먹었어. 무리도 아니지." "그래서?" "닐 부인을 부르기로 한 거지. 모두들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거든. 범죄가 발견되자 곧 토비와 재니스 양이 일부러 그녀를 부르러 갔어. 지키고 있던 경관이 그들을 막고 총경이 도착할 때까지 집에서 나가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어. 재니스 양은 그 뒤에 또 빠져나간 모양이지만. 그런데 결국 닐 부인을 만나진 못한 것 같더군. 총경이 도착해서 현장 설명을 들었네. 집안 사람들은 닐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총경은 부하를 시켜서 부인을 불러다 주겠다고 했지. 명령을 받고 데리러 간 사람은 직무에 충실했던 바로 그 경관이었네. 그는 다행히도 등불을 가지고 있었어. 그 집은 바로 맞은편에 있지. 그건 신문에서도 읽었을 테고, 얘기도 들었겠지......?" "응." 킨로스 박사가 대답했다. "그 경관은 -- " 하고 고롱 씨는 굵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세우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닐 부인의 별장 현관 바로 옆길 위에......" "뭐가 있었나?" 고롱 씨가 말을 망설였기 때문에 박사가 재촉을 했다. "핑크빛 비단 허리띠랄까 밴드랄까, 여자들 잠옷이나 실내 가운 위에 매는 끈이 떨어져 있었다네. 거기에는 조금이지만 피가 묻어 있었고." "흠!" 여기서 고롱 씨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경관이 약삭빨라서 그 비단 허리띠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현관의 벨을 눌렀어. 그랬더니 곧 겁에 질린 여자 둘이 나왔어. 이름은 그러니까 -- " 하고 고롱 씨는 조그만 수첩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심부름하는 이베트 라투르와 요리사 세레스틴 브셰르야.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곳에서 두 사람은 소리를 죽여서 대답하고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소리내지 말라고 신호하고는 아래층 방으로 그를 끌고 들어가서 목격한 것을 들려주더라는 거야. 이베트 라투르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방에서 나가보니까 닐 부인이 몰래 집으로 숨어 들어오고 있는 참이었어. 간이 큰 여자였지만 너무 놀라서 이베트는 요리사인 세레스틴을 깨워서 둘이서 가만히 계단을 내려와서 부인의 침실을 들여다보았다는 거야. 침실 안쪽 대형 거울이 박혀 있는 욕실 안에서 닐 부인이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숨을 헐떡이며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흰 레이스 가운에 묻은 조그만 핏자국을 스폰지로 닦아내고 있더라는 거야. 그리고 가운 허리에 두르는 끈은 없고 말이지." 고롱은 흘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동종 호텔의 테라스 부근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라 포레 거리 저편 솔밭 너머로 사라져가는 저녁 노을이 두 사람에게는 눈부셨다.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 상황의 생생함 -- 이라고 더못 킨로스 박사는 생각했다. 사람 눈을 피한 행동, 몰래 엿보는 하녀들, 거울에 여러 겹으로 비친 혼란한 얼굴. 그것은 경찰의 영역인 악의 그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박사의 영역인 심리적 어둠에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어느 쪽인가의 판단은 우선 미루어두고 박사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래서?" "응, 경관은 두 사람에게 그 말은 절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다짐을 하고 서슴치 않고 2층으로 올라가서 닐 부인의 침실 문을 노크했어." "부인은 자고 있었나?"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하고 고롱 씨는 자못 감탄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어. 토비 로스의 전화로 -- 바로 2~3분 전에 건 두번째 전화를 말하는 거야 -- 깨어서 경의 죽음을 알았다는 걸세. 그때까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경관의 호루라기 소리나 거리에서 고함치는 소리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그녀는 말했다더군. 아니, 정말 완벽한 연기였어! 모리스 경의 죽음에 쇼크를 받고 눈물지으며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눈이 둥그래진 얼굴, 핑크빛 장미를 연상케 하는 순결함이랄까, 어떤가? 흰 가운은 옷장에 걸려 있었고, 옆에 있는 욕실에는 그녀가 열심히 노인의 피를 씻어낸 더운 물에서 생긴 김으로 거울은 그때까지도 흐려져 있었으니까." 킨로스 박사는 점점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경관은 어떻게 했나?" "속으로는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괜찮으시다면 건너편 집에 가서 위로를 좀 해달라고 했어. 그리고 자신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서 뒤에 남았지." "그렇다면......" "그래, 몰래 가운을 가져오기 위해서지." "그래서?" "이베트에게 단단히 입을 다물게 하고 여주인이 가운을 찾으면 세탁소에 보냈다고 하라고 시켰지. 그럴 듯하게 보이라고 다른 옷도 몇 가지 세탁소에 주도록 시켰어. 부인이 마음에 둘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조금 묻은 핏자국은 씻어버렸으니까. 물론 화학검사를 해보면 분명하게 들어난다는 것을 그녀는 상상도 못했겠지. 하지만, 박사, 그 가운에 대해서는 핏자국이 가장 중요했던 건 아니었어." "중요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네!" 하고 고롱 씨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베트가 가운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는데, 레이스에 달라붙어 있는 장미빛 마노의 조그만 파편을 찾아낸 거야." 이번에 서장이 잠깐 쉰 것은 고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단서 중 하나였다. "1주일이나 걸려서 부서진 코담배 케이스의 조각들을 맞추어본 결과 그 파편이 꼭 들어맞는 것을 알았다네. 닐 부인이 부집게로 노인을 쳐서 죽일 때에 흩어진 파편 중 하나였어. 무서운 일이지만 논쟁할 여지도 없어. 이것으로 닐 부인의 일생도 끝장이겠지." 침묵이 이어졌다. 킨로스 박사는 헛기침을 했다. "닐 부인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을 하던가?" 고롱 씨는 움찔하는 것 같았다. "아아, 실례했군." 하고 박사는 말했다. "깜박 잊었어. 부인에게는 아직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 "이 나라에서는 말이네, 박사 -- " 하고 고롱 씨는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승부가 나기 전에 이쪽에서 쥐고 있는 패를 보여주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지. 그녀에겐 물론 해명할 기회를 주지만 그건 체포되어 예심판사가 조사할 때에야 그럴 걸세." 그런 종류의 조사는 상당히 불쾌한 것이라고 박사는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고문은 실행되고 있지 않지만 법률은 거의 모든 형태의 정신적 압박을 인정하고 있다. 여간 거세고 배짱이 있는 여자가 아니고는 심문하는 상대방을 노려보거나, 나중에 후회할 말 한마디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닐 부인에게 불리한 증거는 하나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은 게 분명한가?" "분명해, 박사." "그건 다행이군. 이베트 라투르와 세레스틴 브셰르, 두 고용인은 어때? 그들이 입을 놀리거나......" "그건 걱정 없어. 잘 되어가고 있어. 요리사 세레스틴 브셰르는 충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한동안 휴가를 떠났으며, 이베트는 입이 아주 무거워." 고롱 씨는 잠깐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 하녀는 닐 부인에게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거든." "그런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 그 로스 집안은 훌륭하고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야. 모두가 거의 미친 듯한 상태에 빠져 있지만 이쪽의 질문에는 모두 대답해 주었네. 자네 나라에서 말하는 소위 '의연한 태도'를 그냥 지니고 있었다네." 라며 고롱 씨는 그 두 마디는 특히 영어로 발음했다. "닐 부인에 대해서도 전처럼 상냥한 태도로......" "그래서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부인을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천만에!" "그럼 로스 일가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나?" 고롱 씨는 두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도둑이나 미친 놈의 짓으로 보고 있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진 것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래." 하고 고롱 씨는 인정했다. "하지만 마노의 코담배 케이스 말고도 무엇인가 찾아본 흔적은 있어. 서재의 입구 왼쪽에 있는 유리상자 안에는 그의 수집품 이외의 보물이 들어 있었어. 다이아몬드와 터키 석의 비싼 목걸이인데, 거기에도 또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나중에 보니까 그 목걸이에 약간의 핏자국이 남은 채 장식장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어. 미친 놈이야!" 범죄심리학에 대해서는 영국에서 최고의 정신병 전문의로 불려지는 더못 킨로스박사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을 보았다. "중요한 말이군." 하고 박사가 말했다. "중요한 말이라고? 뭐가?" "'미친 놈'이라는 말 말이네. 그 도둑의 누명을 쓴 미친 놈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집에 들어갔을까?" "다행히 로스 집안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는 것 같네." "그렇다면 닐 부인은 어떻게 숨어 들어갔을까?" 고롱 씨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점이 마지막 증거가 될 것 같네. 데 상주 거리의 네 채의 집은 같은 건축회사에서 지은 것이어서 열쇠가 모두 같다네." 여기서 다시 고롱 씨는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박사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닐 부인의 가운 주머니에서 자기네 집 현관 열쇠가 들어 있는 것을 그 약삭빠른 이베트가 발견한 거야. 자, 알겠나? 어느 누가 자기 집 현관 열쇠를 가운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나? 무엇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겠어? 타당성 있는 설명을 할 수 있겠나? 지금부터 잠자리에 들어갈 참인데 그런 걸 주머니에 넣고 대체 어쩌겠나? 결백하다고 증명할 수 있겠나? 안 되지.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닐 부인은 건너편 집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서 그 열쇠가 필요했던 거야. 이것이 사건이 있었던 날 밤에 부인이 보뇌르 별장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네." 닐 부인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범인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는 해도......그녀의 동기는?" 하고 박사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고롱 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양은 이미 길 건너편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핑크빛 저녁 노을이 불타고 있었으며 바람은 아직도 후덥지근했다. 프랑스의 햇볕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눈부시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눈부신 것이 사라지면 두 사람은 눈을 깜박여 초점을 맞추어야만 했다. 고롱 씨의 이마에는 조그만 땀방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박사는 상체를 세우고 좌석 옆돌 난간 너머로 담배 꽁초를 버리려다가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 손은 허공에 들려진 채였다. 두 사람이 있는 테라스는 아래 땅에서 1 미터 정도 높은 곳이었으며, 자갈을 깔아놓은 아래 정원에도 테라스처럼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난간 바로 옆 테이블에 젊은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머리가 마치 두 사람의 발 밑에 있는 듯했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의 그 모습은 화려한 라 방들레트의 색채 속에서 검게 두드러져 보였다. 그 여자가 머리를 들어 박사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스물두세 살 된 귀여운 아가씨였다. 약간 붉은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눈부셔 그때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가씨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손도 대지 않은 칵테일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녀 바로 앞 라 포레 거리에서는 엔진 소리와 경적을 울리며 차가 달리고, 그것을 달래는 듯이 무개 마차가 느긋하게 발굽 소리와 방울 소리를 울리며 오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고, 또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갑자기 그 아가씨가 벌떡 일어섰다. 허리 부근을 조그만 오랜지색 테이블에 부딪쳐 칵테일 잔이 소리를 내며 접시 위에 넘어지면서 칵테일이 멀리까지 튀었다. 핸드백과 검은 레이스 장갑을 덮치듯이 거머쥔 아가씨는 은화 5프랑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고 획 돌아서 거리를 향해 달려갔다. 킨로스 박사는 그녀의 눈을 떠올리면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롱 씨는 소리를 죽여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런 실수가...... 사람들이 이렇게 들끓는 곳에서 우린 무슨 이야길 한 거지? 방금 그 아가씬 재니스 로스 양이었다네, 빌어먹을!" --------------------------- 제 7 장 --------------------------- "재니스,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고 헬레나 부인은 타이르 듯이 말했다. "넌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거야." 손수레 같은 티 테이블 옆에 웅크리고 있는 스패니엘 종 개인 '찰스 왕'의 귀 언저리를 긁어주고 있던 벤 외삼촌은 놀라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히스테리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고 재니스는 대답했는데, 그 낮고 빠른 목소리는 히스테리와 그렇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화를 내며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전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오는 대로 떠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흘끔 이브 쪽을 보았지만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경찰이 이브를 잡으러 온다고요!" 헬레나 부인은 눈을 껌벅였다. "하지만 어째서?" "엄마, 경찰은 이브가 범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넌 곧이곧대로 듣다니 -- " 하고 헬레나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놀람과 의혹으로 부인의 말은 중간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이브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있을 수 없어.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이브는 건성으로 찻잔을 놓았다. 보뇌르 별장의 응접실은 길고 넓은 방인데, 바닥은 단단한 목재이며 윤이 나도록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앞쪽 창은 데 상주 거리 쪽으로 나 있고 뒤쪽 창은 넓은 정원으로 활짝 열려 있어서 시원한 노을의 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데 쓰이는 도구를 실은 손수레 모양의 티 테이블이 있었고, 푹신푹신한 황갈색 스파니엘 종 개가 커다란 눈을 들어 벤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아저씨는 반백의 머리를 짧게 깎았고, 중키에 단단한 체격이며, 말수는 적지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 뚱뚱한 편이며, 금방 숨이 차서 잘 헐떡이는 사람 좋은 헬레나 부인은 짧게 자른 은백의 머리를 하고, 그것이 장미빛 둥근 얼굴에 잘 어울렸다. 지금 그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겁먹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재니스는 마구 떠들어대고 있었다...... 재니스는 용기를 내어 힘차게 밀고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똑바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 내 말 좀 들어봐요." 하고 그녀는 슬픈 듯이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좀 커 보이는 입이지만 귀여운 인상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신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변명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 눈은 이미 이브를 바로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왜 -- " 하고 헬레나 부인은 말을 꺼냈다. "의심을 하게 되었는가 -- " 하고 벤 아저씨가 뒤를 이었다. "어쨌든 -- " 하고 재니스는 벽난로 위 거울을 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날 밤 밖에 나가진 않았죠? 그리고 -- 그 코담배 케이스의 조각이 당신 가운에 묻어 있었다는 것은 -- 그런 것은 다 거짓말이죠, 그렇죠?" 부드러운 응접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커다란 스패니엘 개가 먹을 것을 더 달라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헬레나 부인은 천천히 안경집을 찾아서 테없는 코안경을 꺼내쓰고는 가만히 시선을 모았지만, 입은 아직도 반쯤 열린 그대로였다. "재니스, 너 정말?" 하고 부인은 호되게 나무랄 태세다. "지금 한 이 말은 서장이 직접 한 거예요." 하고 재니스는 반격했다. 그리고모두들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그녀는 강하게 주장했다. "이 귀로 분명히 들었다고요!" 벤 필립스 아저씨는 무릎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스패니엘 개의 귀를 다정스럽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파이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걱정스러운 이마, 자상해 보이는 푸른 눈에 문득 의혹의 빛이 떠올랐으나, 곧 죄책감 어린 듯한 표정과 함께 사라졌다. "난 동종 호텔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어요." 하고 재니스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재니스 -- " 하고 헬레나 부인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곳에 가다니 -- " "고롱 서장이 무슨 박사인가 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었어요. 범죄심리학의 대가라든가 그렇대요. 영국인이죠. 고롱 서장이 아니고 그 박사 말이에요. 나, 어디선가 그 사람 사진을 본 기억이 있어요. 서장 말로는 그날 밤 이브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고, 코담배 케이스의 조각이 그녀의 옷에 묻어 있었다는 거예요." 재니스는 모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충격은 이미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대신 두려움이 밀려왔다. "증인이 둘 있다고 했어요. 이베트와 세레스틴이 보았대요. 경찰은 그 가운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엔 피가 묻어 있고......" 이브는 굳어진 몸을 의자에 기대고서 재니스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큰소리로 웃고 싶어졌다. 웃고 또 웃어서 머릿속의 불길하기 짝이 없는 소음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살인용의자라니! 이런 식으로 명치 끝에 격렬한 일격을 당하는 꼴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분명히 하나의 웃음거리였다. 불쾌하고 어리석은 기억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아무래도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코담배 케이스 조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웃음거리로 여기고 있을 수도 없었다. 무슨 오해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악의(惡意)가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어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찰을 겁낼 건 없다고 이브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게 무서운 일, 로스 경을 살해했다는 고발엔 쉽게 반증할 수는 있다. 네드 애트우드를 내세우면 된다. 네드도 그것을 증언해 줄 것이다. 이브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겠지만 네드와의 일을 밝혀지게 된다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야긴 처음이에요." 이브가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좀 진정해 주세요!" "거짓말이지요, 그렇죠?" 하고 재니스는 여전히 흥분해 있었다. 이브는 격렬한 몸짓을 보였다. "물론 거짓말이에요!" 하고 이브는 말했다. "그건 -- " 갑자기 그녀는 크게 망설였다. 목소리는 떨렸다. 떨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였으며, 그것이 말 못지 않게 무엇인가를 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거짓말일 거야." 하고 벤 아저씨가 자신있게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물론이에요." 하고 헬레나 부인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 아까 '그건 -- ' 하고 말하려다 만 이야긴 뭐죠?" 하고 재니스는 물고 늘어졌다. "난 --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빛까지 이상했어요. '그건 -- ' 하고 말을 꺼낸 것은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요?" (아아, 하느님! 나는 어떻게 말해야 되나요?") "전부 거짓말이죠?" 하고 재니스는 흥분해서 말했다. "어떤 건 사실이고, 어떤 건 거짓말일 수는 없어요. 안 그런가요?" "이 아이 말에도 일리는 있군." 하고 벤 아저씨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하기 곤란한 듯이 한마디했다. 세 사람의 눈이 이브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건 틀림없이 그녀에게 호의를 가진 부드러운 눈이었다. 순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츰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과 오해였다. 그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을 애타게 하고, 무섭게 만드는 것은 '코담배 케이스 조각'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이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그녀를 괴롭히고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경찰도 증거를 댈 것이다. 부인해 봐야 별수가 없다. "부탁이에요, 말해 주세요." 하고 이브는 확고한 발판을 찾고 싶은 일념에서 말했다. "하필 이 내가 사람을 -- 그것도 그분을 해쳤다고 정말 생각하고 있나요?" "아니, 말도 안 되지." 하고 헬레나 부인은 격려하듯 말했다. 근시인 그녀의 눈에 차츰 애원하는 듯한 빛이 감돌았다. "그런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해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에요." "이브, 당신은 토비와 만나기 전에 어떤 생활을 했었나요?" 하고 재니스가 조용히 물었다. 이것은 그 집안이 이브에게 처음으로 던지는 본격적인 질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니, 재니스!" 하고 헬레나 부인은 나무랐고, 좀 전보다 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재니스는 태연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서는 이브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붉은 머리칼을 한 여자들이 흔히 갖는 투명할 만큼 흰 살결은 감정이 격해지면 기분이 나쁠 만큼 푸른색을 띨 때가 많다. 재니스의 커다란 눈은 이브만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은 찬미와 혐오가 한 데 뒤섞여 있었다. "당신을 책망한다고 생각진 말아요!" 하고 재니스는 스물세 살 아가씨답게 성급한 위엄을 보이고서 말했다. "나는 오히려 존경하고 있어요, 정말로. 전부터 그랬어요. 지금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서장이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즉, 문제는 당신에게 우리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당신이 그랬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안해요. 다만 어떤 이유가 있어서 부득이......" 벤 아저씨가 헛기침을 했다. "자, 우리 모두 마음을 넓게 가져야겠어요." 하고 헬레나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만 토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불쌍한 아버지는 -- 이제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런데, 재니스, 너는 어째서......" 재니스는 들은 척도 안했다. "당신은 애트우드인가 하는 사람과 결혼했었죠?" "그래요, 사실이에요." "그 사람이 라 방들레트에 돌아와 있는 것도 알고 있죠?" 이브는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돌아왔나요?" "예, 그래요. 지난주에 그 사람은 동종 호텔의 술집에서 떠들어댔었대요. 여러 가지 이야길 했는데, 그 중에서 당신이 아직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 또 우리 가족에게 당신에 대한 것을 속속들이 일러바쳐서라도 당신을 되찾을 거라고 했다더군요." 이브는 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한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지만 곧 격렬한 리듬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너무 엄청난 말을 듣고 보니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재니스는 목을 길게 빼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살해되던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죠?" 헬레나 부인은 눈을 감아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에 어떤 모습이었죠?" 하고 재니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말도 없으셨고 안절부절 못하고 계셨죠? 연극 구경은 안 가시겠다고 했고, 그 이유도 설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죠? 나중에 전화가 걸려와서 코담배 케이스 이야기를 듣고야 겨우 기분이 풀리셨죠? 또 있어요. 우리들이 극장에 가기 전에 토비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죠? 그런 다음부터 토비의 눈치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하고 벤 아저씨는 파이프를 꼼꼼히 살피면서 다음을 재촉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고 헬레나 부인이 말했다. 그날 밤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며 동그란 얼굴에서 여느때의 온화함이 사라지고 핏기가 가셨다. "토비가 뚱해진 것은 그날 밤에 본 '워렌 부인의 직업'이 -- 창녀를 다룬 연극이었기 때문이에요." 이브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버지는 동종 호텔 뒤에 있는 동물원을 산책하는 걸 즐기셨어요." 하고 재니스가 말했다. "만일 애트우드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서 무슨 말을 했다고 하면......" 재니스는 끝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위의 눈치는 볼 것도 없이 똑바로 이브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이상하게 새파래진 얼굴로 돌아온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를 오빠에게 했지만 오빠는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것으로 이젠 알겠죠? 오빠는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한밤중인 1시에, 이브, 당신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기억하시죠? 오빠는 아버지가 한 말을 당신에게 이야기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당신은 아버지를 만나서 좌우간 결말을 짓자고 이 집으로 건너와서......" "잠깐 기다려요." 이브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이브는 빨라진 숨결을 가라앉혔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나를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보고 있었나요?" "아니, 오해하진 말아요, 이브." 하고 헬레나 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코걸이 안경을 벗으면서 소리쳤다. "당신 같은 사람은 없어요! 아니, 내 손수건이 금방 어디 갔지? 우리는 다만 재니스가 핏자국이 어떻다는 둥, 그 밖에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분명하게 부인하지 않으니까......" "그 말이 옳아." 하고 벤 아저씨도 말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에요." 하고 이브의 말은 점점 격해졌다. "내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이렇게 넘겨짚거나 빈정거리는 말을 왜 들어야 하느냐 하는 거예요. '워렌 부인의 직업'은 바로 '닐 부인의 직업'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요, 그래요?" 헬레나 부인은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어머, 세상에!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그렇다면 뭐죠? 세상에서 나를 두고 뭐라고들 하고 있는지, 적어도 그전에는 뭐라고들 했는지 나도 알고 있어요. 모두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그런 말을 끊임없이 듣게 되면 이쪽에서도 반발심이 생겨서 차라리 정말 그렇게 되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살인은 어때요?" 하고 재니스가 조용하게 물었다. 재니스에게는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도 있었다. 닳고 까져서 같은 또래의 아가씨들이 하는 짓에 콧방귀를 뀌는 건방진 말괄량이는 이미 아니었다. 낮은 의자에 앉아서 두 팔로 무릎을 안고 있었다. 두 눈까풀은 갈색 눈 위에서 끊임없이 깜박이고 있었고 입술은 떨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린 당신을 너무 이상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탓으로......" 하고 재니스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또 재니스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그 다음 부분은 그녀의 태도로 대신했다. 이브는 이 집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괴로운 처지가 되었다. "당신은 아직도 애트우드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하고 재니스는 분명하게 물었다. "아뇨!" "그런데도 지난 1주일 동안 당신은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일이 있지요?" "아뇨. 그건 다만 -- " "그 사람은 좀 피곤해 보이는구나." 하고 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가 다 그렇구나." 그는 접는 주머니칼을 꺼내어 파이프의 굳어진 담뱃진을 파내다가 괴로운 듯한 얼굴을 들어서 헬레나 부인을 보았다. "기억하겠니, 돌리?" "뭘, 말씀이죠?" "내가 차를 몰고 있을 때야. 그 갈색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내 손이 이브에게 약간 닿았을 뿐인데 질겁을 했어. 하긴 별로 깨끗한 장갑은 아니었지만." 이브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당신에 대한 소문 같은 건 아무도 믿지 않아요." 하고 헬레나 부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이야기가 달라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당신은 아직 재니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날 밤 당신은 집 밖에 나온 적이 있었나요?" "예." 이브가 말했다. "그리고 피를 묻혔나요?" "예, 조금." 사라져 가는 저녁 노을이 창 언저리에 조금 남아 있는 넓은 응접실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두 앞발 사이에 귀를 늘어뜨리고 졸린 듯 배를 깔고 있는 스패니엘 개가 코를 킁킁거리며 바닥을 긁고 있을 뿐이었다. 벤 아저씨가 파이프 속을 긁어내고 있던 날카로운 소리도 멎어 있었다. 여자들은 검은 옷을 남자는 짙은 녹색 옷을, 입은 세 사람은 각기 정도의 차는 있지만 놀라움과 불신의 눈으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하고 이브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건 틀려요! 그분이 살해된 것에 나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난 그분을 좋아했어요. 완전히 오해예요. 정말 너무 무서운 오해일 뿐이에요. 나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재니스는 입술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날 밤 우리 집에 왔었나요?" "아니, 절대로!" "그럼 어째서 우리 집 열쇠가 당신의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었나요?" "댁의 열쇠가 아녜요. 우리 집 거예요. 댁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날 밤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말하고 싶었답니다. 그때부터 줄곧 그 생각을 해왔어요. 다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에요." "아니, 어째서?" 하고 헬레나 부인이 말했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브는 지금부터 해야 되는 이야기가 얼마나 불쾌하고 터무니없는 농담 같은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운명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못된 귀신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배를 쥐고 웃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마다 그 귀에 거슬리는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선뜻 말하지 못했던 것은 그때 네드 애트우드가 내 침실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 제 8 장 --------------------------- 아리스티스 고롱 씨와 더못 킨로스 박사는 살찐 서장에게는 힘겨운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데 상주 거리로 서둘러 걸어왔다. "정말 재수없어!" 하고 서장은 벌컥 화를 냈다. "이렇게 일진이 나쁘다니! 재니스 양은 벌써 닐 부인에게 달려가서 따지고 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고 박사도 시인했다. 서장은 그 살찐 몸을 더욱 눈에 띄게 하는 실크 햇을 쓰고 말라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스패츠 (구두 위에 감는 짧은 각반)를 감은 발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박사와 나란히 헉헉거리며 걷고 있었다. "자네가 닐 부인을 만나보고 그 인상을 내게 말해 주겠다면 -- " 하고 서장은 말했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 예심판사가 화낼 테니까. 그에게 전화를 했는데 자리에 없더군.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어떤 수를 쓸 것인지 나는 알아. 즉시 '샐러드 바구니'를 보내 닐 부인은 오늘밤 '바이얼린' 속에서 자게 되겠지." 킨로스 박사는 눈을 껌벅거렸다. "샐러드 바구니? 바이얼린? 그게 무슨 소린가?" "아아, 참, 자넨 모르겠군! '샐러드 바구니'란......" 하고 고롱 씨는 적당한 말을 찾다가 손짓으로 설명을 했으나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블랙 마리아(죄인 호송차) 말인가?" 하고 박사는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그래, 그거야!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바이얼린'이란 영국에서는 크링크(형무소)인가 쇼키(구치소)인가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세." "초키야. 쇼가 아니고 초라고 발음하는 거야." "메모해 두어야겠군." 하고 고롱 씨는 정말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하지만 내 영어도 아주 엉터리는 아니지? 로스 집안 사람들과는 언제든지 영어로 하고 있으니까." "응, 제법이야. 다만 부인과 얘기하러 가서 '인터코스' (관계) 하러 왔다고는 하지 말게." 고롱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뜻이 아닌가?" "전혀 다르지. 하지만......" 박사는 보도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섰다. 저녁 노을 속에 있는 정말 시골답고 깨끗하고 한적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정원의 회색 담장 너머로 밤나무 잎이 보였다. 지금의 킨로스 박사의 모습을 런던의 동료들이 와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낡아빠진 스포츠 웨어에 멋없는 모자를 아무렇게나 뒤집어쓰고 있었다. 휴가를 즐기기 위한 복장을 한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라 방들레트에 온 뒤로 박사는 피로도 많이 풀리고, 그때까지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많은 일에 무작정 덤벼들었던 긴장감에서도 겨우 풀려나고 있었다. 그래서 눈은 더욱 빛나고, 자세히 보지 않고는 모르는, 성형수술 자국이 있는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에도 한층 생기가 되살아났다. 즉, 박사는 고롱 씨에게서 이 살인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듣기 전까지는 아주 마음 편하고 느긋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닐 부인의 집은 어느 쪽이지?" "이쪽이야." 하고 서장은 말라카 지팡이를 들어 왼쪽의 높은 회색 담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보뇌르 별장은 바로 건너편이 되는 셈이지." 박사는 돌아다보았다. 보뇌르 별장은 때가 묻은 붉은 타일 지붕에 수수하게 흰색으로 칠을 한 네모난 건물이었다. 1층의 창은 담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2층에는 방 하나에 두 개씩, 모두 여섯 개의 창이 있었다. 킨로스 박사와 고롱 씨가 올려다본 것은 한가운데 있는 두 개의 창인데, 그것만 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프랑스식 창으로 되어 있고 무늬를 넣은 쇠난간이 있는 발코니와 이어져 있었다. 회색 칠을 한 철제 덧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저 서재 안을 볼 수 있다면 아주 흥미롭겠는데." 하고 박사가 말했다. "그건 간단해." 하고 고롱 씨는 등뒤의 이브네 집 쪽을 은근히 가리켰다. 초조한 빛이 더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닐 부인을 먼저 만나야 되지 않겠나?" 박사는 대꾸도 않고, "모리스 경은 밤에도 언제나 창문 커튼을 열어놓았었나?" "그랬을 거야. 날씨가 너무 후덥지근하니까." "그렇다면 범인은 확실히 모험을 한 셈이군?" "무슨 뜻인가?" "이쪽 집 이층은 어느 집에서나 다 보이니까." "아니, 그렇게 생각진 않네." "어째서?" 고롱 씨는 멋진 양복 어깨를 으쓱했다. "이 피서지의 시즌은 이미 끝나가고 있어. 이 근처의 별장은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고 지금은 거의 비었지. 이 거리를 둘러보면 한적한 것을 알 수 있지?" "그래서?" "닐 부인 집의 양쪽 이웃은 틀림없이 사람이 없었어. 그 점은 장담해. 그야말로 철저하게 조사했으니까. 누군가가 목격했다면 닐 부인 말고는 없어. 그러나 만일 닐 부인이 범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현장을 보았다고 하는 증언은 기대할 순 없을 걸세. 그녀는 창문에 커튼을 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병적인 데가 있을 정도니까." 박사는 모자를 깊숙히 고쳐썼다. "아무래도 자네가 말하는 그 증거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흠, 왜?" "가령, 닐 부인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동기가 석연치 않아. 설명을 할까." 하지만 이야기가 더 계속되지는 않았다. 크게 흥미를 느낀 고롱 씨는 또 누군가가 엿들을까 해서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중 카지노 거리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박사의 팔을 잡고는 이브의 집 문 안으로 끌어들이곤 문을 닫아 버렸다. "토비 로스야." 하고 그는 소리를 낮추었다. "좀 수상한 걸음걸이군. 틀림없이 닐 부인을 만나러 온 모양이야. 부인을 잘 다루려면 우리가 먼저 만나야 돼." "하지만 -- " "부탁이네. 그를 유심히 살펴보진 말게. 흔해빠진 얼굴이야. 자, 앞으로 가서 현관 벨을 눌러주게." 벨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두 개 있는 현관의 돌 계단 중 첫번째 계단에 발이 닿는 순간 눈앞에서 갑자기 문이 열렸던 것이다. 이쪽도 그랬지만 상대방에서도 놀랐는지 어두컴컴한 안쪽에서 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 두 명이 입구에 서서 한 사람은 문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한쪽은 틀림없이 이베트 라투르라고 박사는 생각했다. 어깨가 넓은 건장한 여인인데, 검은 머리에 다부진 얼굴이었다.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어두컴컴한 현관 안에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얼굴은 처음에는 놀라는 빛이 역력했고, 이어 짖궂은 만족이 아물거리고, 그 다음에는 조그맣고 검은 눈이 반짝 빛나고, 그리고는 무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고롱 씨가 깜짝 놀란 것은 또 한 사람, 20대 아가씨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하고 고롱 씨는 모자를 얼른 벗어들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실례했습니다." 하고 이베트가 억양을 붙여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이 애는 제 동생입니다." 하고 이베트가 거침없이 말했다. "지금 막 돌아가는 길이에요." "안녕, 언니." "잘 가." 하는 이베트의 음성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조심해. 엄마에게도 안부 전하고." 그 아가씨는 지체없이 나왔다. 보기에는 분명히 자매 같은데, 그런 느낌 말고는 너무 닮은 곳이 없었다. 날씬한 몸매에 고상하고 말쑥한 옷차림, 별나게 새침한 데가 있었다 -- 한마디로 세련된 아가씨였다. 크고 검은 눈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두 사람을 평가하듯이 바라보았다. 입을 약간 내민 듯한 미소를 짓고, 정말로 인생을 즐기고 있는 듯한 프랑스 여자 특유의 태도였다. 점잖게 이쪽을 살짝 피하는 것 같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두 개의 계단을 가볍게 내려오자 짙은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푸뤼 양." 하고 고롱 씨는 예의상 인사를 했다. "서장님." 그녀도 정중하게 머리를 조금 숙여 보이고는 큰길 쪽으로 가버렸다. "닐 부인을 만나고 싶은데." 하고 서장은 이베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서장님. 맞은편 집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부인은 로스댁에서 차를 함께 마시자는 전갈이 와서 그곳에 가 계십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별 말씀을!" 이베트는 처음부터 일부러 깎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문이 닫혀지기 직전 박사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비웃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롱 씨는 닫혀진 문을 노려본 채 지팡이의 손잡이로 앞니를 똑똑 두드리다가는 이윽고 모자를 고쳐썼다. "흠!"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 자넨 그렇지 않은가?" "나도 그래." "이 하찮은 일에 뭔가 복선이 있는 것 같아. 분명치는 않지만." "같은 느낌일세, 나도." "그 두 사람은 뭔가를 꾸미고 있었어. 냄새로 알 수 있어. 직업적인 감이라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 무리한 추측은 피하고 싶지만." "그 아가씨를 알고 있나?" "프뤼 양 말인가? 응, 알고 있네." "그래, 그 아가씨는?" "보통 여자냐, 그거겠지?" 하고 고롱 씨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쨌든 영국인들은 하나같이 제일 먼저 그걸 알고 싶어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잠깐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는 보통 여자야. 라 아르프 거리에서 꽃집을 하고 있어. 말이 난 김에 애긴데, 그 골동품 상인 베유 씨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모리스 경에게 코담배 케이스를 판 사람이지?" "그래, 그런데 대금은 아직 치르지 않았다네." 서장은 또 주춤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돼." 하고 많이 찌푸린 얼굴을 하고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프뤼 양이 언니를 찾아오던 말던 그런 이유 같은 걸 지금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네. 우리는 닐 부인을 만나러 온 거야. 건너집에 가서 그녀가 무슨 소릴 하는지 그것을 듣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두 사람은 곧 닐 부인을 만나러 갔다. 보뇌르 별장의 앞뜰은 벽돌담이 둘러쳐져 있었고, 손질이 잘 된 잔디밭이 있었다. 현관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 바로 오른쪽에 있는 길쭉한 창은 크게 열려 있었다. 저녁이라도 이미 6시를 지나고 보니 뜰에는 그림자도 짙어지고 응접실 안도 어두컴컴했지만, 방안은 충전이라도 한 것처럼 긴장된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고롱 씨가 문을 열자 두 사람의 귀에는 응접실에서 울려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음성,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킨로스 박사에겐 위세당당한 재니스 로스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하고 몰아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에 다른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난 --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하고 재니스가 부탁하고 있었다. "오빠가 돌아왔다고 이야기를 중간에 그만두지 말아요." "이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무거운 남자의 소리가 끼어들었다. 분명히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엿보였다. "토비, 당신에게는 말할 작정이었어요." "은행 일이 오늘은 힘들었어. 여자들은 모를 거야. 그 늙은 지점장은 일을 끝낼 생각을 도대체 안하는 거야. 게임 같은 거 할 기분이 나지 않는단 말이야." "게임이라고요?" 하고 재니스가 다시 물었다. "그래, 게임이지! 내 일에는 좀 참견하지 말란 말이야!" "아버지가 살해되던 날 밤 이브는 집에 없었어요. 그 뒤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거예요. 우리 집 현관 열쇠를 갖고 있었고, 더구나 가운에 그 코담배 케이스의 마노 조각이 붙어 있었어요." 고롱 씨는 손짓으로 박사에게 신호를 보내어 소리나지 않게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까운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긴 응접실은 여러 가지 가구로 어수선했다. 바닥은 잘 손질이 되어 하늘보다도 밝게 빛나는 푸른 호수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어서 쾌적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으며, 재떨이나 그 밖에 늘 쓰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황갈색 스패니엘 개가 손수레처럼 생긴 티 테이블 옆에서 졸고 있었다. 올이 굵은 누른 빛 천을 씌운 소파며 흰 대리석 벽난로 선반, 사이드 테이블 위의 붉고 푸른 시온(국화과의 꽃)을 심은 화분이 어두컴컴한 실내에 어렴풋이 색채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비슷하게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살아 있는 실물인 얼굴을 제외하면 거의 그림자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박사는 고롱 씨로부터 그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헬레나 로스나 빈 파이프를 물고 티 테이블 옆에 앉아 있는 벤자민 필립스를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재니스는 야트막한 의자에 앉아서 창을 등지고 있었다. 이브 닐은 토비가 가리고 있어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토비는 수수한 회색 양복에 팔에는 단정히 검은 상장을 두르고 벽난로 옆에 서 있었다. 좀 얼빠진 표정으로 .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재니스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다시 재니스를 보았다. 조그만 콧수염까지도 뭔가 묻고 싶어하는 듯했다. 드디어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토비, 그야 물론 -- " 하고 헬레나 부인이 망설이며 말했다. "설명을 듣고 있단다." "설명이라고요?" "그래. 모든 것이 이브의 전남편인 애트우드 씨 탓인 거야." "예?" 토비가 말했다. 어머니의 이런 정도의 말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도 없을 텐데, 토비는 분명하게 충격을 받고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예?" 하는 짤막한 한마디가 저녁 어스름 속에 사라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자제하고 억누른 소리였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질투에 끓고 있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였을 것이다. "글쎄요, 어머니!" 하고 토비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 사람은 이미 이브와는 헤어졌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이브가 말하고 있어요." 하고 재니스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 라 방들레트에 돌아왔어요." "응, 돌아왔다는 이야긴 나도 들었어." 토비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면서 그로서는 몹시 거친 손짓을 했다. "그래, 대체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애트우드 씨가 아버지가 살해되던 날 밤에 이브의 집에 쳐들어갔다는 거예요." 하고 재니스가 대답했다. "쳐들어 갔다고?" "그래요. 함께 살던 때부터 갖고 있었던 열쇠가 있었대요. 이브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2층으로 올라갔다는 거예요." 토비는 잔뜩 긴장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보기에는 허탈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벽난로 선반에 부딪치곤, 겨우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을 말해 봐." 하는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할 건 아니잖아요." 하고 재니스가 말했다. "이브에게 직접 들어봐요. 말해 줄 거예요. 이브, 말해야 돼요! 오빠를 걱정시키지 말아요. 오빠는 여기 없다고 생각해 버려요." 라 방들레트의 경찰서장 아리스티드 고롱 씨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질이 잘 된 마룻바닥에 높은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성큼성큼 응접실로 쳐들어갔다. "나도 여기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닐 부인." 하고 그는 말했다. --------------------------- 제 9 장 --------------------------- 10분 뒤 의자에 버티고 앉은 고롱 씨는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며 이브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의 질문은 처음엔 영어로 거창하게 시작하더니, 점차 흥분하면서 길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결국은 아예 프랑스 어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군요, 마담." 그는 이브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부드럽게 그녀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요?"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하고 이브는 소리쳤다. "애트우드 씨는 -- " 하고 서장은 말했다. "가지고 있던 열쇠로 2층에 숨어 들어갔다. 그는 -- " 하고 고롱 씨는 헛기침을 했다. "-- 즉, 강제로 욕보이려고 한 거로군요?" "그래요." "물론 당신은 그럴 마음이 없었겠죠?" "물론이에요!" "알겠습니다." 고롱 씨는 상대방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의를 갖추고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바로 길 건너편 방에서는 모리스 로스 경이 아직 깨어 계셨기 때문이에요." "그리고는?" "그 사람도 모리스 경이 정말로 서재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다면서 커튼을 열려고 했어요. 그래서 전 불을 껐습니다......" "당신이 불을 껐다고요?" "예, 확실해요!" 고롱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머리가 좀 둔한 편이라서, 마담,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애트우드의 행패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방법으로는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리스 경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롱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즉, 말입니다, 사람들 눈에 띄어선 안 되겠다는 이유만으로 그, 뭐라고 할까, 강력히 거부했다는 말이로군요?" "세상에, 저런! 아니에요!" 기다란 응접실엔 저녁 어스름이 짙게 내렸다. 로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앉아 있는 사람이나 서 있는 사람이나 모두 마치 납인형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거의 표정이 없었다. 적어도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은 없었다. 토비는 난로 앞에 앉아서 있지도 않은 불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쬐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고롱 서장은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겁을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 남자로서, 프랑스 남자로서 이 알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당신은 애트우드라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었지요?" "예, 물론이에요." "그런데도 모리스 경을 부르려고는 하지 않았군요, 충분히 보이고 들을 수 있는 그런 거리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못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흠! 그래, 그때 모리스 경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책상 앞에 앉아 계셨어요." 하고 이브는 이제는 견딜 수 없이 분명하게 아로새겨져 버린 그 광경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확대경을 손에 들고 뭔가를 보고 있었어요. 거기엔 --" "뭡니까, 마담?" "또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하고 이브는 말할 작정이었지만 로스 집안 사람들 앞에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하니 말이 목구멍에서 걸리고 말았다. 여기서 또 노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던 일, 확대경에 대한 것, 등뒤에서 움직였던 사람의 그림자 등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거기에 코담배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경은 그걸 보고 계셨던 거예요." "그게 몇 시쯤입니까, 마담?" "전 --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그 다음엔?" "네드가 다가와서 밀려났어요. 하녀들이 깰지 모르니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이브는 한마디도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는데, 이 마지막 한마디로 듣고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렇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하녀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때 전화가 걸려왔어요." "그렇게 됐군요." 하고 고롱 씨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 추정은 간단하군." 하고 그는 돌아보면서 말했다. "토비 씨, 당신이 전화한 것은 정각 1시였지요?" 토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지금 그런 것은 문제도 안 된다는 듯이 이브를 향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전화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줄곧 당신 방에 있었군?" "미안해요, 토비! 그 동안 당신에게 숨기고 있어서." "맞아요." 하고 재니스는 낮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걸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은 당신 옆에 서 있으면서 -- " 하고 토비는 중얼거렸다. "아니면, 당신과 나란히 앉아서. 아니, 어쩌면......" 하고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도 당신의 말소리는 그렇게 태연했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한밤중에 전화로 잠에서 깨어나 내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한 태도로......" "어쨌든 그 다음을 계속해 주시지요, 마담?" 하고 고롱 씨가 가로막았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에게 나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갈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이지요, 마담?" "그 사람 생각으로는 제가 토비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창에서 내다보고 모리스 경에게 말을 걸어 자기가 내 침실에 있는 것을 보여주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네드는 한번 생각이 떠오르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가 창 쪽으로 가기에 나도 뒤를 쫓아갔죠. 그런데 건너다보니까......" 이브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그 뒤에 이어진 침묵은 더못 킨로스 박사나 아리스티드 고롱 서장이나 그 자리의 분위기에 민감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없이 불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침묵 속에서 희미한, 그러나 많은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헬레나 부인은 가슴에 손을 대고 가볍게 기침을 했다. 파이프에 정성스럽게 담배를 재고 있던 벤 아저씨는 성냥을 그었다. 칙 하는 그 소리는 뭔가 뜻이 있는 말처럼 들리면서 불꽃이 일어났다. 재니스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는데, 갈색 눈을 턱없이 크게 뜨고서 점점 사건의 중대성을 느끼기 시작한 듯했다. 입을 연 것은 토비였다. "창에서 내다보았군요?" 이브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그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조그맣게 소곤대는 듯한 소리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자칫 큰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잠복해 있는 적이 튀어나오거나, 또는 유령이라도 깨어날까 봐 겁내고 있는 듯한 낮은 음성이었다. "당신은 보았나요--?" 하고 헬레나 부인이 말을 꺼냈다. "누구였죠?" 하고 재니스가 재촉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소?" 하고 벤 아저씨도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아무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턱밑에 주먹을 괴고 이브를 지켜보고 있던 박사는 그녀가 자주 망설이며 꺼내놓는 설득력 없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참뜻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정신분석 전문의로서의 그는 이브에게 이미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강갑상선형(强甲狀腺型). 상상력이 풍부하고 암시에 걸리기 쉬움. 선량하고 관대하나, 그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볼 때도 있음. 친절한 상대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정성을 다함. 분명히 이 여자는 충분한 이유만 있다면 살인도 할 수 있음. 그러면서도 그는 이 진단에 한 가닥 불안을 느꼈다. 즉, 그가 20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주변에 쌓아올린 튼튼한 벽이 지금 그 불안으로 말미암아 구멍이 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박사는 누르스름한 천으로 싼 커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자의 팔걸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섬세한 얼굴, 꼭 다문 입술, 그리고 그녀의 목에서 움직이고 있는 힘줄을 찬찬히 보았다. 이마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그 무서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회색 눈이 토비에게서 재니스, 그리고 헬레나 부인과 벤 아저씨에게로 옮겨갔다가, 끝에 가서는 다시 토비에게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여자가 거짓말을 할 작정이구나.' 하고 박사는 생각했다. "아니에요, 못 봤어요!" 하고 이브는 소리쳤다. 단단히 결심을 한 때문인지 온몸이 굳어졌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라!" 토비는 반복하더니 벽난로 선반 위를 두드렸다.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고롱 씨가 말없이 토비를 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마담 -- " 고롱 씨는 상냥하게 물었지만 그 상냥함이 오히려 두려웠다. "뭔가를 보셨을 텐데요? 모리스 경은 살해되어 있었지요?" "예." "확실하게 보였습니까?" "예." "어떻게 살해된 직후인 걸 알았습니까?" 하고 서장은 정중하게 물었다. "물론 확실하게 알았다는 건 아니에요." 하고 이브는 잠깐 생각한 다음에 말했다. 회색 눈은 똑바로 고롱 씨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을 뿐이에요." "계속하시지요." 하고 고롱 씨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부인이 서재에 들어와서 비명을 지르셨어요. 그때에는 저도 정말로 네드에게 나가라고 했습니다." "흠! 그럼, 그때까지는 정말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다만 그때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져서 네드 자신도 겨우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나가기 전에 그에게서 열쇠를 도로 받아서 잠옷 주머니에 넣었죠. 그리고 그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여기서 그녀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이야기가 얼마나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발을 헛디뎌서 코를 다쳤습니다." "코를?" 하고 고롱 씨는 다시 물었다. "예, 코피가 났어요. 그래서 그를 일으켜세우다 보니까 피가 제 손하고 가운에 묻은 거예요. 당신네들이 소란을 피운 피는 사실은 네드 애트우드의 피였던 거예요." "사실이겠지요, 마담?" "제게 물어보지 마세요. 네드에게 물어보시죠. 아무리 그 사람이라도 제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안다면 제가 한 말에 대해 확인 정도는 해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마담?" 이브는 다시 한 번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매달려 호소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이브에 대한 더못 킨로스 박사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뭔가 언짢은 느낌이다. 이런 기분이 되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의 냉정한 이성으로, 이브가 한 가지 망설이던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애트우드 씨에 대한 얘기 말인데요 -- " 하고 서장은 계속했다. "'발을 헛디뎌서 코를 다쳤다'고 했습니다만,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습니까?" "다른 곳이라뇨? 무슨 뜻이죠?" "예를 들어서 머리를 다쳤다든가?" 이브는 얼굴을 찡그렸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다쳤을는지도 모르죠. 높고 가파른 계단에서 심하게 굴렀으니까요. 어두워서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피는 코에서 나온 거였어요." 고롱 씨는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계속하시지요, 마담." "저는 그에게 뒷문으로 나가도록 했어요." "왜 뒷문으로?" "앞쪽 길에는 경관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네드는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뒷문에는 스프링 고리가 달려 있는데, 제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바람에 잠겨 버린 거예요. 저는 집에서 쫓겨난 꼴이 되었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동안 로스 집안 사람들은 묘한 얼굴로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헬레나 부인이 부드럽게 타이르는 투로 말을 꺼냈다. "혹시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바람으로 문이 잠기다니! 기억 안 나나요?" "그날은 밤새 바람이라곤 없었는데." 하고 재니스도 끼어들었다. "극장에서도 그런 이야길 했잖아요?" "예, 했죠." "그렇다면, 당신!" 하고 헬레나 부인은 몰아세울 기세였다. "예,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다만 나중에 가서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본 다음에야 겨우 어쩌면 누군가가 -- 그래요, 누군가가 일부러 잠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죠." "흠! 그게 누굴까요?" 하고 고롱 씨가 물었다. "하녀인 이베트예요." 이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의자에 앉은 채 치를 떨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절 싫어할까요?" 고롱 씨의 눈썹이 다시 높게 치켜 올라갔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마담. 이베트 라투르가 고의로 안에서 문을 잠그고는 당신을 골렸다는 겁니까?" "아니, 저도 확신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에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마담. 자,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당신은 뒤뜰에 있었는데......" "아시겠죠? 전 쫓겨나서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거예요." "들어갈 수 없었다고요?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누르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녀들이 잠을 깨잖아요. 전 그게 싫었어요. 이베트를 깨우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서......" "하지만 그 이베트가 깨어 있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당신이 못 들어가게 문을 잠가버렸다는 거죠?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하고 고롱 씨는 동정하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뭐라고 할까, 당신이 사실대로 말하는지 그것을 확인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예요." "전부?" "제 가운 주머니에 현관 열쇠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나서 몰래 현관으로 돌아가서 집안으로 들어갔죠. 그때 가운 허리띠를 떨어뜨렸던 것 같아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잃어버렸다는 것을 안 것은 제가, 그래요, 손을 씻고 있을 때였어요." "그랬군요!" "그것을 경찰이 찾아냈다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허리띠 말입니다만, 또 한 가지 당신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입고 있던 가운의 레이스에 붙어 있던 마노 조각에 대한 겁니다." 이브는 조용히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 전혀 모르겠어요. 제 말을 믿어주시는 수밖엔 도리가 없어요." 하고 눈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녀는 듣고 있는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그건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예요.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런 건 붙어 있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방금도 말씀드렸듯이 손을 씻기 위해서 가운을 벗었기 때문이에요. 그 뒤에 누군가가 붙여놓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어요." "누군가가 붙여 놓았다 -- ?" 하고 고롱 씨가 묻는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중얼거렸다. 이브는 웃으려다가 말고 문득 의아하다는 듯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설마 제가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해괴한 생각도 할 수가 있답니다." "그러나, 전 -- 모르시겠어요?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말이죠, 마담?" 서장은 그렇게 묻고는 자기 옆 테이블을 단정하게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브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네드가 제 방에 있었던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건 잘 알겠어요." 하고 재니스는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 " 하고 이브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잠든 사람을 깨워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네가 죽였지 하고 몰아세우는 식이에요. 저는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겁이 나서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너무 끈덕진 것 같습니다만,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마담." 하고 고롱 씨가 말했다.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생각입니까?" "물론 네드 애트우드의 증언이지요." "그렇겠군요." 하고 서장이 말했다. 서장은 너무나 태연했다. 윗도리의 깃을 세우고 윗주머니에 꽂은 흰 장미 향기를 맡았다. 그의 눈은 방바닥의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얼굴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담, 지금 당신이 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는 데 1주일은 꼬박 걸렸겠군요?" "아녜요, 분명히 말하지만 꾸민 이야기가 아니에요!" 고롱 씨는 눈을 들었다. "당신은 지난 1주일 사이에 애트우드 씨와 만났습니까?" "아뇨,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브, 당신은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하고 재니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 하고 헬레나 부인이 사이에 끼어들어 그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이브는 토비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도 그렇게 말해야 될까요? 나는 그 사람이 싫어서 미워하기까지 했어요. 그 남자만큼 경멸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두 번 다시 그 얼굴은 보기도 싫어요."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하고 고롱 씨가 나직하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서장에게로 쏠렸다. 그는 이제껏 마룻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시 얼굴을 들고는 말했다. "마담, 당신은 애트우드 씨가 그럴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당신의 말을 뒷받침해 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틀림없이 알고 계실 텐데요?" 하며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애트우드 씨는 동종 호텔에서 뇌진탕으로 쓰러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실 줄 압니다만?" 아마 10초는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뒤에 이브는 소파에서 튕겨지듯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서장을 가만히 마주 바라보았다. 박사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가 회색 실크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았다. 크게 뜬 회색 눈, 장미빛을 띤 흰 살결, 그것은 정말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경의 움직임, 머리에 떠올리는 모든 생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박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지금까지 퍼부어지고 있었던 비난은 그녀에게 한갓 농담이나 빈정거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박사는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분명히 보이는 것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고롱 씨의 부드러운 태도나 신중한 말씨에서도 무서운 위험이, 어처구니없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뇌진탕......?"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고롱 씨는 고개만 끄덕였다. "1주일 전 오늘, 한밤중인 1시 반에 애트우드 씨는 동종 호텔 로비로 들어가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던 도중,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러진 겁니다." 이브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그건 우리 집에서 나가다가 다친 거예요. 어두워서 잘 몰랐지만 틀림없이 그때 머리를 다쳤을 거예요......" 얼마 뒤에 그녀는 한마디 더 했다. "불쌍한 네드!" 토비가 벽난로 선반 위를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고롱 씨의 근엄한 얼굴에 비웃음이 희미하게 번졌다. "공교롭게도 말입니다 -- " 하고 그가 말했다. "애트우드 씨는 처음 얼마 동안은 의식이 있었는데, 그때 길을 건너다가 차에 받쳐서 보도의 연석에 머리를 찧었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고롱 씨는 중요한 대목에 밑줄을 치듯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로그었다. "이젠 아시겠습니까? 애트우드 씨는 이제는 아무것도 증언할 수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회복도 어렵다고 하더군요." --------------------------- 제 10 장 --------------------------- 고롱 씨의 얼굴은 의혹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정말 경솔했습니다. 용의자에게 체포 전에 쥐고 있는 카드를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체포라고요?" 하고 이브는 우물거렸다. "그런 정도는 각오해야 됩니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모두들 프랑스 어로만 이야기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헬레나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랫 입술이 반항하듯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영국 국민에 대해서 그런 짓은 못할 줄 아는데요? 돌아가신 주인은 영사와도 친한 사이였어요. 게다가 이브는 -- " "좀 설명해 줄 필요가 있어요." 재니스가 허둥대며 소리쳤다. "그 코담배 케이스의 조각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애트우드라는 사람이 무서웠다면 왜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는지 하는 점도요. 나 같으면 누군가를 불렀을 거예요." 토비는 화가 나서 난로 문을 걷어찼다. "질렸어." 하고 그는 투덜거렸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놈이 방에 있었다니." 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차를 고치기도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벽지를 바르는 등 손으로 하는 일은 어떤 전문가에 못지않게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 테이블 옆에 앉아서 파이프 연기나 내뿜으며 가끔 힘내라는 듯이 엷은 미소를 이브에게 보내고 있었으나, 온화한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서 끊임없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닐 부인을 체포, 구금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고 고롱 씨가 영어로 말을 계속했다. "잠깐!" 하고 박사가 나섰다. 그 소리에 모두 깜짝 놀랐다. 더못 킨로스 박사는 피아노 옆 컴컴한 구석에 앉아 있어서 그들은 전혀 그를 보지 못했고, 그를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브는 박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박사의 마음에는 그 옛날의 공포와 굴욕, 얼굴의 반쪽을 잃어버린 채 평생을 지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병임을 깨닫고, 그래서 그것과 싸우는 일을 자기의 천직으로 삼자고 결심한 그 당시의 추억이었다. 고롱 씨는 펄쩍 뛰었다. "이런 정신 좀 보게!" 하고 서장은 연극 대사라도 외우듯이 말했다. "깜박 잊고 있었구먼. 박사, 미안하네. 실례를 용서해 주게. 보다시피 이렇게 흥분한 상태이고 보니..." 여기서 서장은 여러 사람 앞에 손을 휘둘렀다. "소개합니다. 영국에서 온 내 친구 킨로스 박사입니다. 이쪽은 좀 전에 말한 분들이네. 로스 경 부인, 그리고 부인의 오빠, 따님, 아드님. 이쪽은 닐 부인일세.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이러면 되나?" 토비 로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국인입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박사는 빙긋 웃었다. "영국인입니다. 하지만 마음쓰실 건 없습니다." "고롱 씨의 부하인 줄 알았습니다." 하고 토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하군요, 우리는 마음놓고 떠들고 있었는데." 하고 그는 모두를 흘끔 둘러보았다. "그것도 가족끼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어머, 뭐 어때요?" 하고 재니스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사가 사과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실은-- " "내가 부탁을 했습니다." 고롱 씨가 설명을 했다. "박사는 뱅폴 거리에서 개업중인 유명한 의사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중대한 범인을 세 명이나 잡아냈지요. 한번은 윗도리의 단추 채우는 버릇이 이상하다는 것으로, 또 한번은 범인의 말투에 주목해서 얻어낸 성과였지요. 그런 것들은 인간의 심리에 관계되는 유형의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박사는 똑바로 이브를 보면서 말했다. "친구인 고롱 씨가 닐 부인에 대한 혐의사항에 약간의 의문이 있다고 해서 말이죠." "아니, 이보라고!" 하고 서장은 화가 나서 책망하듯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니었나?"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야." 하고 고롱 씨는 아주 심술궂게 말했다. "특히 지금은." "하지만 제가 여기 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하고 생각한 진짜 이유는, 실은 이댁 주인 어른을 전에 뵌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모리스를 아신다고요?" 하며 박사를 마주보며 헬레나 부인이 소리쳤다. "예, 제가 전에 형무소 관계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였지요. 주인 어른께선 형무소의 개선에 대단한 정열을 기울이셨더군요." 헬레나 부인은 반가운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뜻밖의 손님이라 주춤했으나, 얼른 일어나서 환영의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난 1주일의 괴로움이 너무도 커서 모리스 경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써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모리스는 보통 열성이 아니었답니다. 형무소에 들어가는 죄수들에 대한 것을 언제나 조사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죠. 그 사람들은 제 남편에 대한 것은 전혀 모르겠지요. 남편은 단지 그들을 도왔을 뿐이지, 그것으로 명예 같은 걸 얻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녀의 말투는 점차 급해졌다. "어머, 제가 무슨 애길 하고 있는 거죠? 이제 와서 이런 소리 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데, 그렇죠?" "킨로스 박사님 -- " 하고 재니스가 작지만 분명한 소리로 불렀다. "무슨 말씀인가요?" "경찰에서는 정말로 이브를 체포할 생각인가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박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뇨? 왜죠?" "그렇게 되면 전 오랜 친구인 고롱 씨와 영원히 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지요." "이브의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마음에 들든 않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습니다." 화가 난 것을 숨기려고 애쓰고 있는 고롱 씨의 얼굴은 볼 만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사의 너그러운 인품이 모두에게 전해져서 팽팽했던 신경을 달래주어 어느새 편안함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다니, 정말 견딜 수 없군." 토비가 말했다. "우리들로서는 정말 듣기 싫은 이야깁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그러나 닐 부인에게 큰 폐를 끼쳤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박사가 말했다. "초면인데 그런 말을 다하다니,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하고 토비가 말했다. "아니,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토비는 괴로워하고 있는 듯했다. "뭐 꼭 돌아가 달라는 건 아닙니다." 하고 그는 씩씩거렸다. 평소의 명랑하던 얼굴이 의혹과 불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들이었고, 또 퇴근하기가 무섭게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도 이애해 주셔야지요, 그렇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을 만나본 사람을 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그......?" 박사는 되도록 이브 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공포와 불안에 쫓기어 두 주먹을 쥐고 의자 옆에 서서 토비가 눈길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리학자가 아니라도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토비의 한마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사이에 더못 킨로스 박사의 마음속에는 막연한 분노가 퍼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릴까요?" 하고 박사는 말했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듣고 싶지 않았겠지만 토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 " 하고 박사는 미소지었다. "당신이 먼저 분명히 태도를 정해야 됩니다." "분명히 정하다니?" "그렇습니다. 닐 부인은 당신을 배신했거나, 아니면 살인을 저질렀거나 그 어느 한쪽이겠지요? 부인이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토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어 버렸다. 킨로스 박사는 모두의 얼굴을 차례차례 둘러보고는 다시 토비에게로 돌아가서 여전히 무겁고 참을성 있는 어조로 계속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그 점을 잊고 있는 것 같소. 전화를 걸었을 때에 애트우드와 거기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같은 입으로 가운에 어째서 코담배 케이스의 조각이 붙어 있었는지 설명을 하라고 몰아세우고 있소. 닐 부인의 친구이면서도 그런 식으로 양쪽에서 몰아붙인다는 것은 좀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은 태도를 분명히 해야만 됩니다, 로스 씨. 가령 닐 부인이 그럴 듯한 동기 같은 것은 있을 듯싶지도 않지만, 어떻든 이 집에서 당신 아버님을 살해했다고 한다면 애트우드와 함께 침실에 있었을 리가 없지요. 그러면 당신을 배신했다는 그런 문제로 당신이 화를 낼 이유는 없어지는 셈이오. 반대로 애트우드와 침실에 있었다고 한다면 부인이 이 집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을 것이오." 하고 박사는 한숨 돌렸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정중한 가운데에서도 비꼬고 있는 박사의 정연한 논리가 토비의 마음에 화살이 되어 박혔다.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눈을 뜨게 해주는 말이었다. "잠깐만, 박사." 하고 고롱 씨가 침착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떤가?" "좋고말고." "부인, 실례합니다만 -- " 하고 고롱 씨는 헬레나 부인 쪽을 보고는 여전히 큰소리로 말했다. "킨로스 박사와 복도에 나가서 잠깐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서장은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박사의 팔을 꽉 잡고는 교장 선생님처럼 방 저쪽까지 마구 끌고갔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박사를 먼저 나가게 하고 남은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으로 인사하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거의 캄캄했다. 고롱 씨가 전기 스위치를 올리자 붉은 양탄자를 깐 돌계단이 있는 회색 타일의 아치형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씩씩거리는 서장은 모자와 지팡이를 모자걸이에 걸었다. 좀 전까지는 영어로 주고받았으므로 따라가기가 힘겨웠지만, 지금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화가 나서 프랑스 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아니, 미안, 미안." "더구나 배신을 하다니! 여기 데리고 온 것은 날 좀 도와달라는 뜻인데. 그런데 대관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네!" "그 여자는 억울한 처지야." 고롱 씨는 복도를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가끔 멈춰서서는 뜻도 짐작할 수 없는 프랑스 인 특유의 눈으로 박사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말은 머리에서 나온 건가, 아니면 가슴인가, 대체 어느 쪽이시지?" 하고 서장은 일부러 정중하게 물었다. 킨로스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봐!" 고롱 씨가 말했다. "적어도 자네는 과학적인 사실 밖에는 상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어 -- 자네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 그러니까 닐 부인의 매력에 유혹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던 거야. 그런 종류의 여자는 사회의 위협적 존재지." "똑똑히 들어! 나는 -- " 서장은 가엾다는 눈으로 박사를 보았다. "이봐, 박사, 난 탐정이 아니야. 그러나 지지폼폼 (마성(魔性)을 가진 여자) 이라면 이야기는 달라. 3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거나 한밤중이라도 나는 알아낼 자신이 있지." 박사는 똑바로 서장의 눈을 보았다. "내 명예를 걸고 --" 그는 진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가 유죄라고는 생각지 않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말인가?" "그 이야기의 어디가 이상한가?" "이 사람아! 그걸 내게 묻고 있나?" "그렇다네. 애트우드라는 사람은 계단에서 굴러 머리를 다친 거야. 닐 부인이 한 말은 그것과 딱 들어맞아. 의사로서 분명하게 말하겠네. 외상이 없으면서 코피가 나온다는 것이 뇌진탕의 가장 확실한 증상이야. 별로 다친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애트우드는 일어나서 호텔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쓰러진 거야. 이것도 뇌진탕에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 이 '흔히 있는 일'이라는 말에 고롱 씨는 그만 깊은 생각에 잠겨버린 것 같았으나, 그는 그 이상은 그 문제를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다. "애트우드 본인의 진술이 있었는데도 그런 말을 하나?" "왜 안 되나? 그는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나 닐 부인, 혹은 데 상주 거리의 사건과 자신이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의 의식은 있었던 거야. 닐 부인이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차에 부딪쳤다고 되는 대로 말해 버린 걸세." 고롱 씨는 쓰디쓴 얼굴을 했다. "닐 부인의 가운이나 허리띠에 묻은 핏자국은 -- " 하고 박사가 물었다. "물론 모리스 로스 경의 혈액형과 대조해 보았겠지?" "했어. 같은 혈액형이었어." "무슨 형이지?" "O형." 박사는 눈을 들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O형은 가장 많은 혈액형이야. 유럽 인의 41퍼센트가 O형이야. 그래, 애트우드의 혈액형 조사도 했겠지?" "조사하지 않았어. 조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그리고 부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란 말일세." "그럼 조사해 보게. 만일 다른 혈액형이라면 부인의 말은 자동적으로 거짓말이 되겠지." "아하!" "하지만 만일 O형이라면 소극적이긴 하지만 닐 부인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이 되네. 어찌되었든 그 부인을 감옥에 집어넣고서 요리조리 구슬러가며 요령 있게 몰아세우기 전에 그런 정도는 미리 조사해 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고롱 씨는 다시 복도를 바쁘게 오갔다. "난 닐 부인이 애트우드가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맞추어 이야기를 꾸몄다고 보고 싶네." 하고 고롱 씨는 소리쳤다. "어떤 양반처럼 -- 잘 듣게! -- 그녀에게 푹 빠진 애트우드니까 회복만 된다면 어떻게든지 그녀의 이야기를 뒷바침해 줄 거라고 그녀는 계산한 거야." 박사는 마음속으로 그것도 아주 당연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는 있으나, 만일 틀렸다면? 마음을 헝클어놓는 듯한 이브 닐의 매력이 아직도 남아서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이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증거라는 구체적 이론에 대항해서 인간적 논리의 모든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자신이 공격이나 책략을 하나하나 때려부숴 주지 않으면 그녀는 경찰에 의해서 살인죄란 죄목 아래 피고인석으로 보내지고 말 것이다. "동기는?" 하고 박사가 지적했다. "동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뭐 있었나?" "도대체 그 동기라는 것이 참!" "아니, 이 사람아! 도무지 자네답지 않군. 왜 그녀는 모리스 로스경을 살해했다는 건가?" "오후에 자네에게 말한 그대로야." 하고 고롱 씨는 반박을 했다. "가정이라면 가정이지만 앞뒤는 맞는다네. 모리스 경이 살해된 날 오후, 닐 부인에 대해서 뭔가 꺼림칙한 이야길 들은 거야 -- " "어떤 이야기?" "거기까지야 아무리 나라도 알 수가 없지!" "그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글쎄, 듣기나 해! 모두들 말했듯이 집에 돌아와 보니 노인의 태도가 이상했어. 그리고 토비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 두 사람 다 굉장히 흥분했고. 한밤중인 1시에 토비는 닐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이야기를 했어. 닐 부인도 역시 흥분해서 모리스 경을 만나러 와서는 거기서 옥신각신하다가......" "허허, 자네도 또 -- " 하고 박사는 끼어들었다. "그 말도 안되는 소릴 하겠다는 건가?" 고롱 씨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싸움 같은 건 하지도 않았네. 큰소리로 말다툼은 물론이고 서로 만나지도 않았네. 자네 말에 의하면 범인은 몰래 숨어 들어와서 귀가 어두운 노인의 등뒤로 돌아가 귀중한 코담배 케이스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에 갑자기 내리쳤다는 거 아닌가?" 고롱 씨는 우물거렸다. "그러니까......" 하고 그는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흠, 아직도 닐 부인의 짓이라는 말이군. 그럼, 왜 그런 짓을 했겠나? 모리스 경이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건 토비도 알고 있었어. 전화로 그녀에게 알린 바로 뒤니까, 그렇지?" "글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게나. 가령 내가 한밤중에 자네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롱, 지금 예심판사에게서 들었는데, 자네는 독일 스파이니까 총살시킬 모양이야.' 하고 말했다고 하세. 자네는 곧 달려가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예심판사를 죽이겠나? 그 비밀은 이미 나도 알고 있는데? 그것과 같다네! 닐 부인의 인격에 관계되는 불리한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몰래 길을 건너가서 한마디 해명도 들어보지 않고 약혼자의 아버지를 내리쳤겠는가?" "여자란 알 수 없는 거야." 하고 고롱 씨는 아는 척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불문곡직할 순 없지않겠나?" 이번에는 고롱 씨는 치수라도 재듯이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화를 잔뜩 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가 말더니 끝내 분통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리고는 소리쳤다. "자네는 내게 증거를 무시하라는 건가?" "하지만 의문점은 있겠지?" "그야,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 하고 서장은 인정했다. "그런데도 그녀를 체포할 건가?" 고롱 씨는 어이가 없었다. "당연하지! 예심판사의 명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해. 단지, 물론 -- " 그 눈에는 조롱하는 듯한 빛이 있었다 -- "우리의 존경하는 친구가 요 몇 시간 안에 그녀의 무죄를 입증한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없나?" "음,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건 있네." "무슨 생각?" 박사는 똑바로 서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거의 확실하다고 보이네. 살인은 이 '단란한 로스 집안'의 누군가가 저질렀어." --------------------------- 제 11 장 --------------------------- 라방들레트의 경찰서장은 절대로 허둥대는 일이 없었는데, 이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킨로스 박사를 마주보았을 때의 서장의 눈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윽고 이런 믿을 수 없는 말에 대해서는 대답조차 할 필요 없다는 듯 닫혀진 문을 가리키며 손짓으로 물었다. "그래, 그게 좋겠군." 하고 박사는 대답했다. 고롱 씨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헛기침부터 했다. "분명히 범행현장을 보고 싶다고 했었지? 따라오게. 보여주지. 그때까지는 -- " 그는 침묵을 지켜달라는 몸짓을 해보이고는 -- " 어떤 말도 해선 안 되네!" 고롱 씨가 휙 돌아 앞장을 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박사는 서장이 입속으로 무엇인가 꿍얼거리고 있는 것을 들었다. 2층 복도도 역시 어두웠다. 고롱 씨는 스위치를 올리고 정면에 있는 서재의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얗게 칠한 높은 이 문이 수수께끼로 통하는 문인 것이다. 어쩌면 착오로 통하는 문이 될는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어 박사는 금속으로 된 손잡이를 잡고 문을 밀었다. 방안에는 황혼의 어스름이 가득차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드물게 양탄자를 모두 다 깐 서재였다. 양탄자가 너무 두꺼운 탓으로 문을 여닫을 때마다 모서리에 걸려서 털 보풀이 일어났다. 이런 일들을 머릿속에 넣어가면서 박사는 왼손으로 스위치를 더듬었다. 스위치 두 개가 세로로 나란히 있었다. 위의 것을 누르자 책상 위 녹색 유리 갓을 씌운 스탠드에 불이 들어왔다. 밑의 것을 누르자 번쩍이는 프리즘으로 장식된, 마치 유리의 성(城)처럼 보이는 중앙의 샹들리에에 불이 들어왔다. 네모난 방에 주위의 벽은 번쩍거리는 흰색 판자로 되어 있었다. 바로 정면에 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프랑스식 창이 두 개 나란히 있었는데, 지금은 철제 덧문이 닫혀 있었다. 왼쪽 벽에는 육중한 흰 대리석 난로가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바짝 붙여놓은 책상이 있었고, 회전의자는 약간 뒤로 당겨져 있었다. 방추형 황금빛 자수로 장식된 몇 개의 의자와 중앙에 역시 황금빛 조그만 원형 테이블이 있었으며, 회색 양탄자와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벽면에는 책장 한두 개가 끼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골동품을 넣어둔 유리 진열장이 죽 늘어서서 샹들리에의 불빛을 반사해 주고 있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박사도 이 진열품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방안은 후텁지근하고 합성세제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마치 죽음 그 자체의 냄새 같았다. 박사는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세제로 철저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녹이 슨 것처럼 갈색으로 변해 버린 핏자국과 흡묵지, 그리고 모리스 경이 죽기 직전까지 써오던 커다란 메모용지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박살이 났다는 코담배 케이스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흡묵지 위에는 확대경, 보석 감정용 렌즈, 펜, 잉크, 그 밖의 문방구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녹색 스탠드의 불빛에 비쳐지고 있었다. 박사의 메모지로 눈이 갔다. 그 옆에는 주인이 떨어뜨린 채 그대로 있는 황금색 만년필이 보였다. 메모지에는 커다란 장식문자로 '시계형 코담배 케이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유품'이라고 곱게 표제가 씌어 있었고, 이어서 동판의 글씨체같이 작고 정성스러운 글씨로 설명문이 써 있었다. '이 코담배 케이스는 1811년 3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인 로마 왕의 탄생을 맞아 양아버지인 오스트리아 황제가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선물. 직경 5.7 센티미터. 금박제품이며 장식의 용머리도 금으로 되어 있음. 시계의 문자와 바늘에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았고, 중앙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문장인 "N"이......' 여기서 문장이 끊어져 있었고, 핏자국이 두 곳에 묻어 있었다. 박사는 휙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이거,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군." "가치?" 하고 서장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그런 말은 이미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박살이 나 버렸으니." "자네가 본 그대로야. 그리고 좀 특별한 모양이라는 것도 말했을 거야. 설명문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시계 모양을 하고 있었거든." "어떤 시계?" "흔히 있는 회중시계야!" 하고 고롱 씨는 자기의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들어보였다. "사실은 로스 집안 사람들도 처음엔 모리스 경이 보여줄 때는 시계인 줄 알았다는군. 이런 식으로 뚜껑이 열리고......봐. 책상에 난 상처를 좀 봐주게. 범인이 잘못 내리친 흔적일세." 박사는 메모지를 처음에 있었던 장소에 놓았다. 서장이 의심에 가득차서 바라보고 있을 때 박사는 고개를 돌려 방 저쪽 대리석 벽난로 선반 옆에 있는 난방용구 걸이에 시선을 보냈다. 벽난로 선반 위 벽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나폴레옹 조각이 걸려 있었다. 흉기로 쓰여진 부집게는 이미 용구걸이에는 없었다. 박사는 그곳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짐작해 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생각이 이리저리 엇갈리고 있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고롱 씨가 내세운 증거와 모순되는 점이 있었다. "가르쳐 주게. 로스 집안에 눈이 나쁜 사람이 있나?" "허허, 참!" 하고 고롱 씨는 소리치며 두 손을 들었다. "아직도 로스 집안, 로스 집안에 대한 것 뿐이군! 나 좀 보게." 그러나 지금까지보다는 태도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긴 우리 둘 뿐이야.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네. 노인을 죽인 것이 로스 집안 누군가의 짓이라고 자네는 꽤나 분명하게 말했는데,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겠나?" "날 끈질기다고 생각하겠지만 가족 중에 누군가 눈이 나쁜 사람이 있나?"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조사해 보는 것은 간단하겠지?" "이제 알겠군!" 고롱 씨는 머뭇거리며 실눈을 떴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 " 하고 부집게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사람의 머리 크기의 목표를 헛쳤다면 범인은 분명히 눈이 나쁠 것이다, 그런 이야기지?" "아마도." 박사는 유리 케이스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진열품 안에는 다른 물건보다 유난히 정성들여 장식해 놓은 것도 있었다. 대개의 물품에는 동판 글씨체보다 곱게 써넣은 카드가 붙어 있었다. 그는 보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있었으나 골동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수집품 중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짜 일품(逸品)도 상당히 많이 들어 있다는 것쯤은 박사도 알 수 있었다. 도자기, 부채, 사리함, 진귀한 시계. 톨레도 제(製)의 가느다란 칼을 걸어놓은 칼걸이, 그리고 뉴게이트 감옥을 철거할 때에 나온 고물을 모아둔 상자도 있었다 -- 많은 골동품 중에서 이 상자만은 묘하게 우중충하고 섬뜩했다. 책장의 책들은 거의가 보석 감정에 관한 전문서적이었다. "말을 계속하게나." 고롱 씨가 재촉했다. "자네에게 들은 증거인가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지. 분명히 아무것도 도둑맞지는 않았지만 다이아몬드와 터키석 목걸이가 케이스 밖에 나와 있었고, 피가 묻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던가?" 박사가 물었다. 고롱 씨는 고개를 끄덕여 시인하고는 문 바로 왼쪽의 둥글게 보이는 유리 케이스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그 케이스도 다른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고, 고롱 씨가 슬쩍 손가락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정면이 소리없이 열렸다. 내부의 선반도 유리로 되어 있었다. 목걸이는 케이스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놓여 있었고, 잘 보이도록 비스듬히 세워놓은 진한 청색 빌로도 받침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깨끗이 닦아내고 본래대로 해놓았네." 하고 고롱 씨가 말했다. "전해지는 말로는 이 목걸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총애하던 드 랑발 부인 것인데, 그 부인이 라 포르스 감옥 밖에서 군중들에게 참수당하던 때에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라네. 모리스 경은 아무래도 소름끼치는 물건에 특별히 흥미를 느낀 것 같아, 그런 생각 안 드나?" "소름끼치는 물건을 좋아하는 묘한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는 걸세." 고롱 씨는 씩 웃었다. "그 옆에 있는 것도 봤나?" 목걸이 왼쪽을 흘끗 보고 박사는 대답했다. "어째 바퀴가 달린 오르골처럼 보이는데." "응, 오르골이라네. 이런 것을 유리 선반에 놓아두다니 정상이 아니야. 지금도 기억나네만, 사건 다음날 의자 위의 노인의 시체도 그대로였고, 이 방 검증을 하고 있을 때 경감이 이 케이스를 여는 바람에 손에 부딪쳐 오르골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지......" 고롱 씨는 또 뮤직 박스를 가리켰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나무 상자인데 몸체에 붙인 주석판은 낡아서 거무스름하고, 거기에 색이 바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박사는 그것이 미국의 남북전쟁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르골이 옆으로 쓰러지자 갑자기 '존 브라운의 유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네. (존 브라운은 미국의 급진적 노예 폐지론자. 하퍼즈 페리의 병기창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함.) 이런 곡이야, 알지?" 하고 서장은 두세 소절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뒤에 일어난 소동이 볼 만했지. 토비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쫓아오더니 아버지 유품에 손대지 말라고 소리치더구먼. 벤자민 노인은 누군가가 최근에 오르골에 손을 댔을 거라는 거야. 까닭인즉 그 노인은 손재주가 비상해서 2~3일 전에 고장난 오르골을 직접 고치고 그때 태엽을 끝까지 감아두었다는 거야. 그런데 한두 소절 울리다가 서고 말았으니 누군가가 손을 댄 것이 분명하다는 거지. 아무리 그렇기로, 그렇게 사소한 일로 큰 소동을 벌이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흠, 있을 수 있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은 아주 특수한 범죄니까 말일세." "참! 그랬었지!" 하고 고롱 씨는 문득 생각나서 잔뜩 긴장했다. "그 말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왜 특수한 범죄인지, 그 이유를 이 자리에서 꼭 들려주어야겠네." "그거야 한 가정 안에서의 범죄이기 때문이네. 단란하고 편안한 난롯가의 살인이라고 할까, 이런 종류의 것은 언제나 가정 안에서의 사소한 다툼에서 일어나는 걸세." 고롱 씨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이마를 문지르더니 영감이라도 기대하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박사, 제정신인가?" 킨로스 박사는 중앙의 테이블 끝에 걸터앉아 검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어떤 생각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이 집중되어 감에 따라서 그 검은 눈은 얼이 빠져버린 듯 도무지 그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박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한 번만 쳐도 충분한데 부집게로 몇 번이나 얻어맞고 죽은 사람이 있어. 자네는 그것을 보고, '이건 너무 심하군, 상식 밖이야. 미친놈의 짓이야.' 라고 했네. 그래서 자네는 평온한 가족 중에서 그런 무참한 짓을 할 인물이 있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족에 대한 것은 아예 외면해 버린 거야. 그런데 범죄사를 보게 되면 그렇지도 않네. 적어도 앵글로색슨의 범죄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이 집안 사람들이 영국인이니까 특히 그렇다네. 일반적으로 냉정하고 명확한 동기를 가진 살인범은 절대로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지는 않네.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그 분명한 목적은 되도록 간단하고 깨끗이 죽이는 데 있으니까.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한 가정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을 누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참을 수 없게 되어가고, 드디어는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잔인한 행위로써 갑자기 폭발하네. 가정 안에서의 감정의 갈등이 동기인 경우 그 폭발은 실로 잔학무도한 행위가 되어 나타나게 되지. 지극히 믿음이 깊은 가정에서 나무랄 데 없이 자란 딸이 아주 사소한 가족간의 다툼 말고는 이렇다 할 분명한 이유도 없는데 먼저 도끼로 계모를 죽이고, 그리고 친아버지를 죽였다면 자넨 믿겠는가? 지금까지 말다툼 한번 한 적이 없는 중년의 보험외무원이 아내의 머리를 부집게로 마구 때려서 죽게 할까? 얌전한 16세 소녀가 계모를 미워한 나머지 갓 태어난 남동생의 목을 조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네는 믿지 않겠지? 그것도 다 이렇다 할 동기 같은 건 있지도 않네. 그런데도 그런 범죄 유형은 실제로 볼 수 있다네." "선천적으로 잔인한 인간이겠지." 하고 고롱 씨는 말했다. "미안하게도 자네나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일세. 그런데 닐 부인 말인데......" "참! 그래서 그 여자의 경우는 어떻다는 건가?" 박사는 서장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 여자는 뭔가를 보았어. 그게 뭐냐고 내게 물어도 별 수가 없네. 다만 그 여자는 범인이 가족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걸세." "제기랄, 그렇다면 왜 그걸 밝히지 않나?" "그것이 누군지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 그럴 거야." 고롱 씨는 비웃음을 띠고 고개를 저었다. "그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는데. 더구나 자네의 심리학이라는 것도 별로 믿을 수가 없으니 말일세." 박사는 노란 메릴랜드 담뱃갑을 꺼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찰칵 소리내어 뚜껑을 닫고는 고롱 씨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 박사가 보기에 서장의 얼굴엔 단순히 불안한 정도로 넘어가 버릴 수 없는 무엇이 떠올라 있었다. 박사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 확인된 데 대한 만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담배를 빨아들여서는 밝은 전등 불빛을 향해 훅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자네에게서 들은 증거에 의하면 -- " 하고 박사는 최면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낮고 단조로운 소리로 말했다. "로스 집안의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되네." 하고 그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어떤 거짓말인지 말을 하면 자네는 생각을 바꾸겠나?" 고롱 씨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런데 그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박사가 그 요긴한 대목을 설명하려고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이 부신 듯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리고 안을 들여다본 사람은 재니스 로스 양이었다. 이 방이 그녀는 아직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앉을 사람도 없어진 회전의자를 흘끔 쳐다보는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애 같았으며, 실내에 차 있는 합성세제의 역한 냄새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방으로 들어오더니 손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하얀 벽을 배경으로 서 있으니 검은 드레스가 한결 두드러져 보였다. 그녀는 영어로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셨나 해서요." 그녀는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복도에 나가시곤 그 길로 사라지신 바람에." 하고 그녀는 사라지는 몸짓을 해보였다. "아가씨, 무슨 할 말이라도?" 하고 고롱 씨가 재촉했다. 재니스는 서장은 무시해 버리고 박사에게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잘 움직이는 눈으로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동안의 일이고, 막상 입을 열었을 때에는 이미 젊은 아가씨다운 순진함이 넘치고 있었다. "이브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킨로스 박사는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아가씨, 당신은 아주 훌륭한 태도로 그분을 변호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그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되고, 어떤 인물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격렬한 분노가 또다시 치미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아가씨의 오빠는 너무하더군요......" "박사님은 오빠에 대해서 모르세요." 하고 재니스는 소리치고 발을 굴렀다.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오빠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요. 단지 품행에 대해서 결백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에요." "산크타 심플리키타스(Saneta simplicitas!)" "그건 '거룩한 순진성'이라는 의미죠?" 하고 재니스가 거침없이 말하고 박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말괄량이 티를 내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야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가족의 처지도 좀 생각해 주셨으면 해서요.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는 --" 하고 그녀는 회전의자를 가리켰다. "아버지는 살해되었어요. 우리는 지금 그 생각밖에 할 수가 없어요. 만일 갑자기 그런 혐의가 자신에게 씌워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단순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걸 일부러 해명할 필요까지 있겠어?' 하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요? 인간이라면 그렇게는 못하겠죠." 냉정하게 말하자면 박사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그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거기에서 힘을 얻었는지 그녀는 다음을 계속했다. "그래서 전 박사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어요.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물론!" 고롱 씨는 박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닐 부인은 지금 어디에?" 재니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 이브는 토비와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머니와 아저씨는 거북해 할까 봐 자리를 피해 주었고요.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 " 하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깊이 숨을 들여마시고는 박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 어머니와 말씀하셨었죠 -- 아버지가 형무소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던가 하면서요?" 웬지 형무소 일이라는 말이 박사에게는 추악하게 들렸다. "그래서요?" 박사가 말했다. "전 생각이 났어요. 그 살해당하신 날 오후, 아버지 태도가 아주 이상했다고 모두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시겠죠? 산책에서 돌아온 뒤의 태도나, 연극은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셨고, 안색은 유령같이 창백했고, 손까지 떨고 계셨었어요. 그런데 전 박사님이 말씀하실 때 그전에도 한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뵌 적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8년쯤 전이에요. 피니스테르라는 말재간이 좋은 노인이 찾아와서 아버지를 꾀어 무슨 장사에 끌어넣어서 사기를 쳤죠. 저는 아직 어린애였고 장사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도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었어요. 하긴 지금도 장사에 대한 거라면 그 당시와 별로 다를 게 없지만요. 그런데 그때의 그 무서운 소동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요." 한 손을 귀에다 대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롱 씨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내겐 좀......" 하고 그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재니스가 박사에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사람의 얼굴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어쩌다가 문득 생각해 낼 때가 있었나 봐요. 그 사건은 법적 보상으로까지는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는지, 아버지는 그 '피니스테르'라는 사람과 피해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이 생각난 거예요. 본명은 매콘클린이라는 사람인데, 형무소 복역수였지만 가석방되어 나와서는 서약을 지키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사람이었어요. 매콘클린은 아버지와 만난 적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 사건에 관심이 있어서 적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도는 아시고 있었던 거지요. 그 매콘클린이 느닷없이 나타난 거예요. 본색이 드러나 버린 것을 안 그는 제발 경찰에는 넘기지 말라고 울면서 사정을 했어요. 돈은 돌려주겠다고 하고 처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죠. 형무소에만 다시 보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사정을 한 거죠. 아버지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토하더라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는 죄인을 가두는 일을 싫어하셨어요. 아주 싫어하셨죠. 그러나 그렇다고 다 풀어줄 수도 없는 거죠. 정말로 변명의 여지도 없는 나쁜 짓을 했다면 아버지는 가족일지라도 형무소에 보냈을 거예요." 재니스는 한숨 돌렸다. 단조롭고 빠른 말투로 계속 늘어놓고 보니 입술이 말라 있었다. 골동품 진열장으로 둘러싸인 이 방안에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피니스테르에게 얘기했습니다. '24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까 어디든지 도망을 치게. 다만 시간이 되면 자네가 도망을 쳤든 못 쳤든간에 자네의 지금의 생활, 사는 곳, 쓰고 있는 가명 등, 그 모든 것을 경시청에 통보하겠네.' 라고요. 아버지는 약속대로 했고 피니스테르는 결국 형무소에서 죽었습니다. 그 뒤 며칠간은 아버지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재니스는 그 마지막 말에 확신과 깊은 뜻을 담고 말했다. "저를 심술궂은 계집애로 보지는 마세요. 절대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게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절대로 그런 인간은 아니에요. 그럴 생각도 없고요. 하지만 이런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숨겨서는 안 되니까요." 여기서 다시 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브 닐 부인이 그전에 형무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겠어요?" --------------------------- 제 12 장 --------------------------- 아래층 응접실에는 이브와 토비 둘뿐이었다. 다만 황금색 갓이 씌워진 스탠드가 켜져 있었는데, 그것은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 다 상대의 얼굴을 될 수 있는 대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브는 핸드백을 찾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얼른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냥 방을 왔다갔다 하며 같은 곳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가 그녀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토비가 재빠르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핸드백을 찾고 있어요." 하고 이브는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찾으면 바로 가야죠. 거기 좀 비켜 주시겠어요?" "하지만 우리 이야기의 결말을 내야잖소!" "할 이야기가 또 뭐 있었나요?" "경찰에선 당신을 -- " "들으신 대로 경찰은 날 체포하러 온대요.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서 주변 정리를 해두는 것이 좋겠죠? 그런 정도는 괜찮겠죠?" 낭패하는 빛이 토비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정의는 지켜야만 한다. 턱을 내밀면서 감정을 죽이고라도 옳은 일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순교자와도 같은 자신의 영웅 행세가 얼마나 독선적이고 방자한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편이라는 것은 알겠지? 이것만은 절대 믿어 줘요." "어머, 고마워요." 이 비꼬는 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는 토비는 깊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궁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잡아가게 놔둘 수는 없소.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대체 경찰은 정말 잡아갈 생각인가? 아니면 겁만 주는 건가? 어쨌든 나는 오늘밤 영국 영사와 만나야겠소. 만일 당신이 잡혀가기라도 한다면, 알지? 은행으로선 곤란해진단 말이오."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지요." "이브, 당신은 이런 일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르고 있소. 훅선 은행은 영국 금융계에서도 손꼽히는 전통 있는 은행이오. 그래서 나도 가끔 말했듯이 품행에 대해서는 굉장히 까다롭단 말이오. 은행의 체면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 가지 손을 쓰고 있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줘요." 이브는 무진 애를 쓰며 참았다. "토비, 당신은 내가 아버님을 살해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때 토비의 약간 둔감해 보이는 얼굴에 빈틈없는 표정이 언뜻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브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의 토비 로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그의 아주 깊은 곳에서 번득이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결코 아무도 죽이지 않았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이마 언저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당신네 집 그 하녀가 뒤에서 한몫 거들고 있는 게요. 그게 분명해. 그 여잔 -- " "토비, 당신, 그 하녀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요?" "아니, 별로." 하고 토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나로선 이건 좀 괴로운 이야기요." 하고 넋두리하듯 · 10· "우리 둘 사이도 잘 되어가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당신은 다시 애트우드라는 녀석과 만나고 있으니." "그걸 믿나요?" 토비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 한번 툭 터놓고 솔직히 이야기 해봐요. 재니스가 가끔 놀려대기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난 그렇게 구식은 아니오. 사실, 나 자신은 제법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을 정도요. 나를 만나기 전에 당신이 무얼 했는지 나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소. 그런 것들은 하나도 문제삼지 않겠소." 이브는 말없이 토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아, 정말 싫어지는군!" 토비는 점점 더 열을 올렸다. "남자에게는 이상이 있소. 그래, 이상 말이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에게도 그 이상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태도를 바라는 거요." 이브는 핸드백을 발견했다. 금방 눈에 띄는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몇 번이나 그 부근을 찾아보았는데 어째서 보지 못했는지 참 이상했다. 그것을 집어들고는 찰칵 소리내어 열고는 건성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비켜 주세요. 가야겠어요." "글쎄 지금 나가면 안 돼요. 경찰이나 신문기자 같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쩔 셈이오? 지금 이런 상태라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할는지 몰라." "훅선 은행으로서는 곤란해지겠군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곧이듣겠소? 이브, 이런 일은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여자들은 그런 점을 이해 못한단 말이야." "저녁 식사 시간도 다 됐어요." "하지만 나도 -- 그래, 이렇게 말할 수 있겠소. 즉, 단지 한 가지만 확실하다면 훅선 은행 같은 건 어찌되든 상관없소. 나는 당신에게 눈꼽 만큼도 속이는 건 없으니까, 당신도 숨기지 말고 말해 주지 않겠소? 당신은 애트우드와 다시 합쳤소?" "아뇨." "믿을 수 없어." "그러면서 왜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묻죠? 이젠 비켜 주세요." "아아, 좋소." 하고 토비는 무안을 당해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당신이 정 그렇다면." 토비는 짐짓 정중한 자세로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는 턱을 내밀고 있었다. 이브는 망설였다. 토비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언젠가는 그가 믿을 수 있도록 해명할 기회가 오겠지. 토비는 분명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진지한 만큼 격렬함도 더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지금의 이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토비의 옆을 얼른 지나 현관의 거실을 나가서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현관 홀의 밝은 불빛으로 이브는 한 순간 눈이 부셨지만, 점점 익숙해지자 벤 필립스 아저씨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듯한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아니, 돌아가는 겐가?" (이분도 날 의심하고 있을까? 아아, 하느님, 이 사람만은 그렇지 않기를.) 벤 아저씨는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사람 눈을 피해 다가온 사람처럼 어색한 태도로 한쪽 손으로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에는 구겨진 봉투 같은 것을 들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잊을 뻔했네. 이브 앞으로 편지가 왔어." "제게요?" 벤 아저씨는 현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10분쯤 전에 우편함에 있더군. 우체국을 거쳐서 온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넣고 간 모양이야. 어쨌든 이브 앞으로 왔어." 온화하고 파란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중한 편지일지도 모르겠군." 이브는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강 수취인 이름을 보고는 핸드백에 쑤셔넣었다. 벤 아저씨는 빈 파이프를 물고 소리를 내가며 빨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용기를 짜내어 말을 걸려고 마음속으로 애쓰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집에서 별로 뚜렷한 존재는 아니야." 하고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지만 -- 나는 이브 편이야."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 " 벤 아저씨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이브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동작이 느린 노인은 얼굴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졌다. "왜 그러지?" "아니, 죄송합니다." "그 장갑 생각이 나는군." "무슨 장갑인데요?" "그때 -- " 하고 벤 아저씨는 다시 온화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에 끼고 있었던 그 갈색 장갑이지. 왜 그렇게 이브가 놀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브는 돌아서서는 뛰기 시작했다. 큰길에 나오니 이미 어두웠다. 9월의 온화한 저녁은 봄보다도 한층 더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밤나무 사이에 창백한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보뇌르 별장의 숨막힐 듯한 곳에서 도망쳐 나온 이브는 자유세계에 뛰어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브에게는 자유로운 세계 같은 것은 이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듯싶었다. 갈색 장갑. 갈색 장갑, 갈색장갑. 문을 나선 그녀는 담장의 그늘에서 우뚝 멈춰섰다. 혼자 되고 싶었다.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혼자가 되고 싶어졌다. 본색을 숨기고 있는 간사한 목소리, 끊임없이 살피고 있는 듯한 눈을 피해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있고 싶었다. 바보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어째서 본 대로 다 말하지 못했을까? 그 집의 누군가가, 갈색 장갑을 낀 누군가가 가면을 쓴 위선자라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그 집안에 대한 의리 때문일까? 그런 고발을 하게 되면 그 사람들의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단지 토비에 대한 의리 때문일까?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심한 말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정직하고 솔직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의리가 있다는 거지? 그런 건 조금도 없어. 더구나 지금으로선! 이브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거짓 눈물이었다. 그 집안 사람들 모두가 죄가 있을 리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가 그녀처럼 충격을 받고 허둥대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은 이브를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보면서 마치 샐러드라도 섞듯이 태연하게 살인을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 문제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결국 그것이 이브의 마음에 가장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 그녀를 아주 간단히 흔해빠진 창녀로 보면서, 그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몸짓을 해보였던 것이다. 하긴 실제로는 그렇게 심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모두들 허둥대고 있었으니까 무리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은혜를 베푸는 척하는 꼴을 이브는 더없이 미워했다. 그러나 이러고 있는 사이에? 틀림없이 유치장으로 갈 거야. 그럴 수는 없어! 터무니없는 일이야 !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그녀 걱정을 해주는 듯싶은 사람이 둘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하나는 구제할 수도 없이 방탕한 네드 애트우드였다. 절대로 '은근함' 같은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감싸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쓰러졌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은 그 박사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 표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 위선에 대한 미움을 깊은 곳에 숨긴 채 빛나고 있었던 그 검은 눈, 비웃음이 어려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로스댁 응접실에 울려 물거품 같은 거짓을 날려 보내고 거들먹거리는 위선을 찔러 쓰러뜨린 그 칼날같이 날카로운 지적인 감각을. 문제는 네드가 사실을 말해도 경찰이 그것을 믿을 것인가 하는 거였다. 네드는 부상을 당해 쓰러져서 의식불명이다.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위험에 정신이 팔려 그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여기서 만일 로스 집안과의 지금까지 관계를 무시하고 과감하게 네드에게로 달려간다면 과연 자신은 구제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전화는 고사하고라도 편지도 쓸 수가 없다...... 편지. 이브는 데 상주 거리의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발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핸드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핸드백을 열고 약간 구겨진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이브는 분명한 걸음거리로 길을 건너서 자기 집 문 부근 가로등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회색 봉투를 살펴보았다. 완전히 봉해져 있었고, 겉에는 그녀의 이름이 프랑스풍 글씨체로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우체부 아닌 누군가가 그녀의 집 건너편 우편함에 넣고 간 것이다. 아주 흔한 봉투이고 특별히 다른 점도, 불안하게 하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봉투를 뜯으려고 하니까 심장이 천천히, 그러나 높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안에는 프랑스 어로 쓰여진 짤막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인은 없었다. '마담, 당신이 지금의 궁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로 와주십시오. 밤 10시 이후라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문은 열어놓겠으니 서슴치 마시고 들어오십시오.'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사각거리고 회색 편지지 위에 그림자가 흔들렸다. 이브는 눈을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자신의 집이 있었다. 요리하는 하녀가 휴가중이어서 이베트가 저녁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브는 편지를 접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언제나처럼 거침없고,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이베트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저녁 준비는 다 됐어요. 30분이나 기다렸는걸요." "저녁은 필요없어." "하지만 조금은 드셔야 해요. 건강은 유지하셔야지요." "왜?" 그렇게 말하며 이브는 이베트를 밀어내듯이 하고 시계와 거울로 장식해 놓은 보석함 같은 조그만 현관을 지나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홱 돌아보며 하녀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이 집에 이베트와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아프게 의식되기는 처음이었다. "왜냐고 묻잖아!" 하고 이브는 다그쳤다. "어머, 마님." 하고 뜻밖에도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이베트는 이브의 공격적인 물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눈을 크게 뜨고 레슬러같이 튼튼해 보이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었다. "누구든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건강에 신경을 써야지요." "모리스 로스 경이 돌아가신 날 밤에 왜 나를 밖에 두고 문을 잠갔었지?"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저어, 마님!" "말해 봐!" "예, 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경찰에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지?" 이브는 심장이 죄어오고 양볼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 "내 흰 레이스 가운은 왜 세탁소에서 찾아오지 않지?" "어머, 마님! 저는 몰라요. 아주 오래 걸릴 때도 있으니까요 -- 저녁식사는 몇 시에 하시겠어요?" 이브의 물음은 허공에서 떨어져서 모리스 경의 도자기 접시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필요없다고 했잖아." 하고 이브는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 방에 있겠어." "샌드위치라도 올려갈까요?" "글쎄. 그럼 커피도 한 잔." "예, 마님. 오늘밤 또 외출하세요?" "어쩌면.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말하고 이브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버렸다. 침실의 다마스크 커튼은 이미 드리워져 있었고, 경대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이브는 문을 닫았다. 숨이 찼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고, 거기서 심장의 힘없는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은 덜덜 떨리고 아까 얼굴로 솟아올랐던 피가 그대로 머리로 올라가 버린 느낌이었다. 허물어지듯이 소파에 파묻혀서 이브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 침실에는 시계가 없어서 가만히 복도로 나가 손님용 침실로 가서 시계를 하나 갖고 왔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시한폭탄처럼 위협적이었다. 시계를 옷장 위에 올려놓고 욕실에 가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나와 보니 샌드위치와 커피포트가 사이드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커피를 조금 마시고 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그러는 사이에 시계 바늘은 8시 반에서 9시, 9시에서 10시로 기어가듯이 움직였다. 이브는 언젠가 한번 파리에서 살인사건의 재판을 방청한 일이 있었다. 네드를 따라갔었는데 그는 그것을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브는 법정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어본 것은 처음이라 그만 놀라고 말았다. 가슴에 장식이 달린 법복을 입고, 머리 위쪽이 납작한 모자를 쓴 판사가 몇 명 있었는데, 그들까지도 큰소리로 피고의 자백을 강요하는 검사에 못지 않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로서는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그저 불유쾌한 구경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손톱이 새카만 손으로 피고석 손잡이를 잡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치던 그 우중충한 얼굴의 사나이를 구경거리라고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피고가 법정에 끌려나왔을 때에 크레오소트 (석탄산) 냄새가 나는 통로로 면한 문에 자물쇠 두 개가 철컥 소리를 내며 잠겼다. 그 크레오소트 냄새가 지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어쩐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브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어서 아래 길가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관의 벨소리는 들었다. 아래층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밟고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베트가 여느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침실문을 노크했다. 이베트는 아직도 그 태도만은 정중했다. "마님, 아래층에 경찰에 계신 분들이 오셨는데요." 하고 그녀는 보고했다. 그 어조에는 정말로 즐거운 듯하고 일을 잘 마무리지었다는 듯한 만족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이브는 입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곧 내려가서 만나시겠다고 말씀드릴까요?" 그 말이 끝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그 소리가 이브의 귓속에서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바깥 응접실에 모시도록 해. 곧 내려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이브는 벌떡 일어났다. 옷장에 가서 짧은 모피 케이프를 꺼내어 어깨에 두르고 목의 단추를 잠갔다. 핸드백을 들여다보고 돈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그녀는 불을 끄고 살그머니 복도로 나왔다. 망가진 양탄자 고정쇠를 조심해 가며 소리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이베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리면서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 응접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보니까 이베트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서 경찰관을 환대하고 있는 듯한 태도로 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어떤 경관의 한쪽 눈과 콧수염이 얼핏 보였으나 저쪽에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2초 뒤에는 이브는 어두운 식당을 빠져나가 더 어두운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전처럼 뒷문 스프링 고리를 열었다. 이번에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직접 잠갔다. 돌계단을 올라가 이슬에 젖은 뒤뜰로 나갔다. 그 사이 등대의 불빛이 반원을 그리면서 머리 위를 지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뒷문을 통해 골목으로 나갔다. 3분 뒤에는 어떤 집 뜰에 사슬로 묶여 있는 개의 미친 듯이 짖어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녀는 이미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도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카지노가 늘어선 대로(大 路)에서 택시를 불러세우고 있었다.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로 가세요." 이브가 말했다. --------------------------- 제 13 장 --------------------------- "여긴가요?" "예, 마담." 하고 운전사는 말했다.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입니다." "보통 가정집인가요?" "아니, 상점이지요, 꽃집입니다." 라 방들레트에서도 점잖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산책 전용도로 옆, 바다에 면해 있는 곳 부근이었다. 라 방들레트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는 영국 부자들은 이 일대를 무척 꺼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일대가 웨스턴이나 페인턴, 또는 폭스톤과 아주 비슷하게 보였고,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낮에 보면 회색으로 우중충한 이 일대는 벌집 같은 좁은 길가에 화사한 빛깔의 여러 가지 선물들, 장난감, 부삽, 물동이, 풍차 등을 진열해 놓은 조그만 상점, 코닥 필름의 노란 간판, 가족 상대의 술집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가을엔, 더구나 밤이고 보면 이런 거리의 등불도 꺼지고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택시는 양쪽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라 아르프 거리로 빨려 들어갔다. 불이 꺼진 상점 앞에서 차가 멈춰섰으나 이브는 차에서 내리는 것이 갑자기 겁이 났다. 반쯤 열린 뒷문을 잡은 채 택시 안에 앉아서 이브는 희미한 미터 램프 불빛에 비친 운전사를 보았다. "꽃집 -- 이라고요?" 하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틀림없습니다, 마담." 하고 운전기사는 어두컴컴한 진열대에 겨우 알아볼 수 있게 씌어져 있는 흰 에나멜 글씨를 가리키며 읽어나갔다. "'에덴 화원 특선 생화 주문 받습니다.' 이미 장사는 끝낸 모양입니다." 하고 그는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그건 것 같군요." "어디 다른 데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여기 좋아요." 하고 이브는 차에서 내렸으나 다시 망설이고 있었다. "이 상점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흠, 주인 말이죠?" 하고 운전사는 좀 생각하더니 말했다. "주인까지는 모르지만 상점을 맡아서 하고 있는 사람은 잘 압니다. 라투르 양이라고 하는데, 모두들 그냥 프뤼 양이라고 부르고 있죠. 아주 고상하고 젊은 아가씨입니다." "라투르?" "그렇습니다. 아니, 어디 불편하십니까, 마담?" "아니에요. 그 여자의 언니인가 숙모인가에 이베트 라투르라는 사람이 있나요 ?"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무리죠.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상점이 그 아가씨처럼 예쁘고 깨끗하다는 정도죠." (여기서 이브는 운전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기를 살피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여기서 기다릴까요, 마담?" "아니 -- 아, 그래 주세요. 그러는 게 좋겠군요." 이브는 한 가지 더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갑자기 운전사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서둘러서 보도를 가로질러 꽃집으로 다가갔다. 뒤에 남은 운전사는 느긋하게 생각에 잠겼다. 한심한 손님이군. 그러나 대단한 미인인데, 분명히 영국인이야. 혹시 프뤼 양과 저 여자 애인이 눈이 맞아서 한바탕 해주려고 왔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봐, 마르셀 영감, 당신도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는지도 모르겠는걸. 염산이라도 뿌리는 소동이 벌어질는지도 모른잖아. 하지만 영국인은 염산 소동 같은 것은 그리 벌이지 않는 편이지. 그러나 고주망태가 된 서방을 붙들고 악을 버럭버럭 쓰는 여편네를 본 일도 있으니까 영국인도 굉장히 앙칼진 데가 있단 말이야. 하지만 목숨까지 어떻게 되는 건 아닐 테고, 어쩌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는지도 모르지. 게다가 아직 8프랑 40상팀의 요금도 안 받았고. 그러나 이브 자신의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것은 아니었다. 상점 입구에서 그녀는 멈춰섰다. 바로 옆에는 깨끗이 닦아놓은 유리 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지붕 위로는 달이 그 모습을 조금 내밀고 있었는데, 그 빛이 반사되어 유리창 전체가 불투명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10시 이후라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문은 열어놓겠으니 서슴치 마시고 들어오십시오.' 이브가 문 손잡이를 돌려 보니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머리 위에서 벨이 울릴 것을 예상하면서 문을 활짝 열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고 캄캄했다. 문을 이대로 열어놓아야 할지 마음에 걸렸으나, 밖에는 운전사도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대로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서늘하고 눅눅한 꽃향기가 확 밀려왔다. 별로 큰 가게 같지는 않았다. 오른쪽 창문 옆에 덮개를 씌운 새장이 나직한 천정에 사슬로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까지 스며든 달빛은 꽃으로 가득찬 방안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고, 벽에는 장례용 화환의 그림자가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습기 머금은 여러 가지 꽃향기 속에서 판매대와 계산기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에서 한 줄기 노란 불빛이 보였다. 가게와 안쪽 방 사이를 막아놓은 두꺼운 커튼 자락에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그때 커튼 저쪽에서 젊은 여자의 활기찬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죠?" 하고 프랑스 어로 말했다. 이브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커튼을 젖혔다. 그곳 광경은 한마디로 가정적이었다. 온 방안에 가정적인 분위기가 가득차 있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거실이었는데, 별로 고상한 취미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정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벽난로 선반 위에는 거울을 중심으로 해서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선반이 붙어 있었다. 난로 속에서는 프랑스 인이 '포탄'이라고 부르고 있는 계란 모양의 석탄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술로 장식된 전기 스탠드, 인형이 놓여진 소파가 있었고, 피아노 위에는 액자에 넣은 가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전기 스탠드 바로 옆 안락의자에 프뤼 양이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브는 초면이지만 고롱 서장과 더못 킨로스 박사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주 고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몸가짐엔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크고 새침한 검은 눈으로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그 옆 테이블에는 반짇고리가 놓여 있었고, 마침 솔기를 꿰매고 있었던 양말의 핑크빛 고무 밴드의 실을 이빨로 끊으려던 참이었다. 그것이 더욱 온화한 가정적 분위기와, 슬리퍼를 신은 듯한 편안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마주보고 토비 로스가 앉아 있었다. 프뤼 양은 바늘, 실, 양말, 고무 밴드를 밑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머, 마담!" 그녀는 활기 있게 말했다. "그럼, 편지는 보셨군요. 다행이에요. 자, 안으로 들어오시죠."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제일 먼저 느낀 충동은 말하기조차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토비의 면전에서 그를 비웃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웃을 일은 아니었다. 토비는 잔뜩 굳어서 앉아 있었다. 가만히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의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탁한 피처럼 붉은색이 천천히 얼굴에 번져가서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의 양심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싶다면 그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에서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본다면 누구나 거엾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 이제 그가 언제 소리치고 대들어도 상관없다고 이브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그 편지는 당신이 썼군요?" 이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프뤼는 불안한 미소를 짓고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일은 다 현실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담." 프뤼는 토비의 옆으로 가서 그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토비와 나는 꽤 오랫동안 친구였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조금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예요. 이런 정도에서 툭 터놓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요, 어떠세요?" "예, 그게 좋겠군요." 프뤼의 귀여운 얼굴이 다시 자신과 침착을 되찾았다. "마담, 사실 나는 수상쩍은 장사꾼이 아니고 점잖은 집안에서 제대로 자란 처녀예요." 하고 그녀는 피아노 위에 세워놓은 사진을 가리켰다. "저쪽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 밑이 작은아버지인 아르센, 그리고 언니인 이베트입니다. 하긴 나 역시 약해진 마음 탓으로 현실에 지고 마는 때도 더러 있지요......하지만 인간미가 있는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이브는 토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일어서려고 하다가 다시 앉아 버렸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마담." 하고 프뤼는 계속했다. "로스 씨는 나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전 믿고 있었어요. 내가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당신과의 약혼이 발표되었더군요. 그건 안 돼요. 싫어요. 나는 여하튼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싸움이라도 걸어올 듯이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한번 물어보겠어요, 그게 잘하는 짓일까요? 옳은 일일까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런 남자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베트 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의 결혼을 취소시키고 나와 로스 씨의 결혼이 성사되도록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된 거로군요?" 하고 이브는 겨우 여러 가지 일들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요. 그것이 누구든 싫다는 사람의 뒤를 쫓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바보 짓은 안해요! 토비가 돌아선다고 해도 남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 시간을 빼앗고 제 순결한 마음을 희롱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을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여자로서 당신도 내 편을 들어주시겠지요, 마담?" 토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편지를......?" 힘없는 목소리였다. 프뤼는 토미를 향해 마음에도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지만, 실은 처음부터 그를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진짜 흥정 상대는 이브였던 것이다. "나는 이분에게 보상을 요구했죠. 그렇게 되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그리고 이분의 행복을 빌어주고, 결혼을 축하해 줄 수도 있다고. 그런데 이분은 돈이 없다고 푸념만 하고 있는 거예요." 프뤼의 눈에는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토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잖아요. 참 안됐어요."--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그래서 한 1주일쯤은 이분에게 위로의 말만 하고 귀찮은 이야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답니다. 게다가 이분은 유산상속이 끝나면 내게도 두둑하게 한밑천 떼어줄 수가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한번 들어보세요. 어제 토비가 내게 와서는 아버님의 재산상태는 엉망이고 돈도 별로 없는 데다가, 이 부근의 미술상인인 베유 씨에게서 부서진 코담배 케이스의 대금을 지불하라고 독촉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 값이 무려 75만 프랑이나 된다나요." "이 편지는......" 하고 토비가 입을 열려고 했다. 프뤼는 그래도 여전히 이브를 보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썼어요." 하고 프뤼는 시인했다. "이베트 언니는 편지 보낸 것을 모르고 있어요. 나 혼자서 한 일이에요." "왜 내게 편지를 썼죠?" 하고 이브가 물었다. "말로 꼭 해야 아시겠어요, 마담?" "예, 듣고 싶군요."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짐작은 했을 줄 알았는데요." 프뤼는 비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토비 옆으로 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말이죠, 토비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문제의 신사는 펄쩍 뛰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난 돈이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 " 하고 프뤼는 난로 위에 걸린 거울을 향해서 자신의 앞뒤 모습을 비춰 보고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부끄럽지 않은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은 인정해 주시겠죠, 어때요?" "예뻐요!" "고마워요. 그런데 당신은 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일은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 물정을 잘 알고, 또 점잖은 분이라면 금방 알아들으셨겠죠?" "하지만 난 아직......" "나의 토비와 결혼하고 싶은 거죠, 마담? 나 역시 토비를 잃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당신들 영국인이 좋아하는 '공명정대'한 방법으로 끝을 내고 싶군요. 나는 혼자 살아가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다만 이런 일은 분명하게 해두어야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이라도 내게 보상만 해준다면 문제는 깨끗이 끝나버릴 텐데요."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뭐가 이상한가요, 마담?" 프뤼는 전혀 다른 말투로 날카롭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웃고 있는 게 아니에요. 좀 앉아도 될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자, 이리로 앉으세요. 토비가 좋아하는 의자죠." 이런 상황에서 덜미를 잡혀 당혹과 굴욕으로 시뻘개진 토비였지만, 이제는 모두 가라앉은 듯했다. 15라운드를 다 뛰고난 복서 같은 허탈한 눈은 아니었다. 등을 두드려 주며, "이젠 끝났어." 하고 위로해 줄 필요는 이미 없었다. 아직 어색한 기분이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분노와 독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좋든 싫든 관계 없이 인간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괴로운 처지에 몰리게 된 바에야 이번에는 상대가 누구든 분풀이로 그를 같은 처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었다. "나가 줘." 하고 그는 프뤼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나가라고 했어!" "당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브는 반격했다. 그것은 토비가 눈을 껌벅이며 멍하게 될 정도로 차고 날카로운 어조였다. "여기는 라투르 양 집인데요." "누구 집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오! 난 단지......" 토비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흔들며 자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는 벌떡 일어났다. "제발 나가 줘!" 하고 그는 사정했다. "부탁이야, 빨리 나가줘. 나가 달라니까. 나는 이 사람과 할 이야기가 있어." 프뤼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이 사라졌다. 후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겠죠." 하고 프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신도 위자료 문제로 의논하고 싶을 테니까, 마담?" "글쎄, 그랬으면 싶군요." 하고 이브도 맞장구를 쳤다. "난 말이죠, 보기보다는 말이 통하는 여자예요." 하고 프뤼는 말했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기분좋게 들어주셔서 정말 기뻐요, 마담. 솔직히 말해서 난 걱정했거든요. 자, 그럼 난 실례합니다. 2층에 있을 테니까 볼일이 있으면 그 막대기로 천정을 쿡쿡 찌르세요. 내려올 테니까. 그럼, 마담. 토비도 나중에 봐요." 양말 밴드, 바늘, 실 등을 한데 그러모으더니 프뤼는 거실 안쪽에 있는 문을 향해 갔다. 신이 나서 귀엽게 눈인사를 하는 모습이 눈과 입술, 그리고 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어떤 향기로운 꽃 향기를 남기면서 방을 나가더니 가만히 문을 닫았다. 이브는 앞으로 나가 테이블 옆 안락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있었다. 토비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이브에게서 떨어져서 벽난로 선반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있었다. 꽃집 안채의 이 평온한 곳에 지금 격렬한 폭풍이 몰아치려 하고 있다는 것은 토비 로스보다 훨씬 둔감한 사나이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브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이런 기회가 주어진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한 괴로움을 주고, 그만큼 쓴 물을 마시게 한 상대이고 보면, 지난날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공평한 제3자라도 이 아늑한 방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면, '자, 당장 달려들어서 상대의 엉덩이와 넓적다리를 걷어차라고.' 하고 환성을 올리며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제3자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토비는 벽난로 선반에 팔꿈치를 세우고 양복 깃이 귀를 덮을 만큼 등을 굽혀 콧수염을 비틀면서 가끔씩 흘끔 곁눈질로 이브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브가 겨우 한마디했다. "그래요?" --------------------------- 제 14 장 --------------------------- "이브,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하고 토비는 언제나처럼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태도로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요?" "당신이 이런 일을 알게 해서 말이오." "어머,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은행이 알게 될까 봐 겁이 난 게 아니었나요?" 토비는 그 점을 생각해 보았다. "아니, 그건 걱정 없소." 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브를 마주보는 그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그런 일까지 다 걱정하고 있었군?" "아마 그런가 보죠." "그 문제라면 절대로 걱정할 거 없어, 정말이오." 하고 토비는 고지식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당신이 이 일을 떠벌려 스캔들로 삼지 않는 한 걱정할 건 없소. 어쨌든 소문나게 해서는 안 돼요. 소문만 내지 않으면 사생활은 자유니까.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 " 하고 그는 눈치를 살폈다 -- "늙은 은행 지점장 뒤푸르 씨만 해도 뷜로뉴의 정부(情婦) 집에 들락거리고 있으니까. 정말이오! 은행에서는 다 알고 있지. 하지만 이건 물론 비밀이오." "그렇겠죠." 토비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이브, 난 당신의 그 이해심 많은 점이 좋단 말이야." 하고 엉뚱한 말을 했다. "예?" "정말이오." 하고 토비는 이브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입에 담을 얘기는 아니오. 점잖은 여성과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싫소. 당신하고는 더 싫어. 하지만 이렇게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보니......그저, 그런 거요." "그래요, 분명히 흉금을 털어놓은 거죠?" "이런 경우 여자들은 대개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되니까. 솔직히 말하겠소.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지. 내가 그전처럼 명랑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눈치를 챘을는지 모르겠소. 이 집 2층의 그 닳고 닳은 계집애." -- 이브는 온몸이 굳어졌다 -- "정말 저런 두통거리는 없을 거야.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그래,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요?" 하고 이브는 천천히 물었다. 토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전부냐고?" 이브 닐은 지금까지 얌전한 여자로 세상에 알려져 왔다. 하지만 동시에 랩카셔의 룸홀트에서 닐 공장의 조 닐이라는 사람의 딸인 것이다. 이브는 사정에 따라선 끝까지 참아낼 수도 있지만, 한편 사정에 따라서는 조 닐처럼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성미 같은 것도 있었다. 프뤼 양의 의자에 푹 파묻혀 있는 사이에 온 방안에 뿌연 안개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벽난로 선반 위 거울에 토비의 뒤통수가 비쳤는데, 텁수룩한 머리칼 한가운데에 6펜스 은화만하게 머리가 빠진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웬지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이브는 앉음새를 바로하고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낮짝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나요?" 이처럼 과격한 말을 듣고 토비는 한동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하고 알고 지내는 동안에도 계속 저 아가씨와 재미를 보면서 언제나 나에게는 도덕을 설교하고 기품 있고 씩씩한 기사 개러해드(원탁의 기사 중 가장 고결한 기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이상이 어떻고 주의가 어떻고 하며 설교했군요. 자신도 우습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토비는 그만 겁에 질려버린 듯했다 -- "저, 이브, 그것은 -- " 하고 말을 꺼내놓고, 토비는 마치 은행의 뒤포르 지점장과 갑자기 얼굴을 맞부딪치기나 한 듯이 겁먹은 눈으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이 사기꾼!" "그런 저속한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어." "말이라고! 그럼 행실은 어때요?" "행실이 어땠다는 거지?" 하고 토비 쪽에서도 말씨가 거칠어졌다. "그러니까 내 행실을 다 잊고 용서해 주겠다는 건가요, 그런가요? 당신은 유라이아 힙 (디킨스의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작품인물)이 무색할 지경이군요. 필시 으스대며 용서해 주겠다는 거죠. 그럼, 대체 당신의 이상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고서도 바르고 깨끗한 도덕관을 지닌 청순한 젊은이라고 할 수 있어요?" 토비는 허둥대는 단계를 지나 완전히 나자빠진 꼴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근시인 그는 근시 특유의 눈을 깜박거리면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하고 이건 이야기가 달라." 하고 그는 너무나 뻔한 일을 어린애에게 설명하듯이 질려버린 말투로 반격해 왔다. "어머, 그래요?" "그렇고말고!" "그래, 어떻게 다르죠?" 토비는 난감했다. 태양계라든가 우주의 구조 같은 것을 간단히 한마디로 설명하라는 식이다. "잘 들어요, 이브. 남자라고 하는 것은 그......뭐라고 할까, 순간적인 기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 " "그럼, 여자에게는 순간적 기분이 없다는 말인가요?" "뭐?" 하고 토비는 날카롭게 되받았다. "그럼, 당신은 그걸 인정한다는 말이로군?" "인정하다니요, 뭘?" "당신이 그 돼지 같은 애트우드란 놈과 다시 불장난을 시작한 것 말이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나는 단지 여자도 -- " "아니, 틀려." 하고 토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부정했다. "점잖은 여자는 그렇지 않아. 그 점이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이지. 바람기가 있는 여자를 숙녀라고 할 수는 없소. 이상적인 여자라고 존경받을 가치도 없고. 이브, 나는 당신 말에 너무 놀라 버렸소. 좀더 분명하게 말할까, 이브? 당신에게 상처입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가슴속을 털어놓지 않고는 결딜 수 없어. 오늘밤 나는 당신을 다시 보게 되었어. 당신은 마치 -- " 이브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난로 바로 옆으로 너무 다가서 있는 토비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양복의 종아리 반대쪽 부근이 불에 눌어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자칫 몸을 잘못 움직이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울 텐데. 그런 생각은 했으나 그녀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한 것은 프뤼였다. 가볍게 노크 소리가 났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녀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멈칫멈칫 변명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왔다. "실을 -- "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무명 실이 모자라서 실패를 가지러 왔어요." 하고 프뤼 양은 반짇고리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때 장딴지가 눌고 있어서 토비는 뜨거워 펄쩍 뛰었다. 그 모양을 보자 이브는 스페인 춤인 새러밴드를 떠올렸다. "이봐요, 토비." 하고 프뤼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마담, 당신도. 그렇게 크게 소리치는 건 삼가 줄 수 없어요? 우리 집은 이 부근에서는 평판이 좋은 편이니까요.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이웃집에 대한 폐도 이만저만이 아니잖아요." "소리가 너무 컸나요?" "대단했어요. 난 영어를 못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좋은 애긴 아닌 것 같더군요." 하고 그녀는 빨간 무명실이 감긴 실패를 찾아내더니 그것을 불빛에 비쳐 보면서 말했다. "혹시 그 문제에서 -- 위자료 부분에 대해서 원만하게 의논이 안 되는 것은 아니겠죠?" "사실은 그래요." 이브가 말했다. "마담?" "당신의 애인을 돈으로 다시 사들이고 싶진 않군요." 하고 이브는 그 한마디로서 깨끗이 토비에 대한 것을 처리해 버리고 말았다. 토비 쪽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버린 것에 화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에요, 당신하고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고 이브는 과연 조 닐의 딸답게 프뤼를 보고 말했다. "모리스 로스 경이 살해된 날 밤, 당신의 언니인 이베트가 나를 밖에 두고 문을 잠갔어요. 그 사실을 경찰에게 증언하도록 언니에게 말해 준다면 위자료의 곱쯤은 줄 수 있어요." 프뤼의 얼굴에서 싹 핏기가 가셨다. 그래서 핑크빛으로 칠한 입술이나 속눈썹이 보이는 검은 눈이 한결 싱싱하게 눈에 띄었다. "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저는 몰라요." "그럼, 당신 언니가 나를 잡아넣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있는 걸 모르나요? 그런 다음에 이 로스 씨가 당신과 결혼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죠." "마담!" 하고 프뤼는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 계집애는 모르는 모양이군 --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그런 걱정은 할 것 없어." 하고 토비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경찰에서 잡아넣겠다는 건 진심이 아니야, 겁주는 거지." "어머, 그런가요? 나를 잡아가려고 집에 경찰이 여섯 명이나 왔는데도요. 나는 아슬아슬하게 도망쳐 이리로 온 거예요." 토비는 멋적게 되어 양복 칼라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브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겁먹은 프뤼로서도 그 내용이 대강 짐작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실패를 살펴보고 있다가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이리로 경찰이 오나요?" "와도 난 겁날 것 없어요." 하고 이브는 되받아주었다. 프뤼는 떨리는 손으로 반짇고리를 휘젓더니, 여러 가지 물건을 집어내어 멍청하게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줄을 세웠다. 무명 실패가 몇 개, 바늘 쌈지, 가위, 왜 그 안에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구두 주걱이 하나, 줄자, 골무에 엉겨붙어 있는 헤어네트. "당신 언니는 -- " 하고 이브가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거예요. 그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건 정말이지 언니가......" "하지만 그런 짓은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좀 무리한 얘기니까. 아마 로스 씨에게서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줄 알겠지만, 이 사람은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예요. 그와 반대로 나는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데, 그 혐의를 벗겨주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 당신의 언니라는 이야기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이베트는 나를 바보 취급하고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하고 이브는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언니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는 애트우드가 내 방에 계속 있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어요. 경찰은 애트우드의 말은 믿지 않아도 이베트의 말이라면 믿을 거예요. 내가 잡혀가기를 바라는 단 한 가지 이유가 당신을 위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이브는 여기서 갑자기 입을 다물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프뤼는 반짇고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거의 다 꺼내 버리고 마지막에 남아 있던 것을, 화가 나서는 이 따위 것들이 다 뭐냐는 듯이 실패와 바늘이 널려 있는 위로 내동댕이쳤다. 싸구려 액세서리 같았다. 아니, 진짜일지도 모른다. 조그맣고 네모난 수정 같은 돌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구슬을 고풍스러운 디자인인 가는 선 모양으로 세공을 해서 이은 목걸이였다. 떨어진 곳에서 뱀처럼 몸을 사리고 스탠드의 불빛을 받아 그 돌은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거 어디서 났죠?" 하고 이브가 물었다. 프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거? 아주 싸구려예요, 마담." "싸구려?" "예." "다이아몬드와 터키석이에요." 하고 이브는 한쪽 끝을 잡고 들어올렸다. 목걸이는 전등 불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드 랑발 부인의 목걸이죠! 내 머리가 돌지 않았다면 이것은 모리스 로스 경의 수집품 중에서 본 거예요. 서재로 들어가서 바로 왼쪽 진열장에 있었어요." "다이아몬드와 터키석이라고요? 잘못 보신 거죠, 마담." 하고 프뤼는 비웃듯이 말했다.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담 바로 근처에 있는 미술상인 베유 씨에게 가지고 가서 값을 얼마나 보는지 직접 가서 들어보면 되지요." "그렇구나." 토비가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프뤼, 어디서 났지?" 프뤼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말대로 나는 바보예요." 하고 그녀의 자신에 차 있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내가 짜낸 궁리 같은 건 하나도 도움이 안 됐어. 아아, 이 일을 어쩌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언니가 날 죽일 거야! 당신들 둘이서 내게 올가미를 씌울 작정이로군요. 이젠 믿지 않겠어요. 뭘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어, 절대로 -- 언니에게 전화해야겠어." 프뤼는 서슬이 시퍼렇게 떠들어대더니 잡을 틈도 없이 방에서 튀어나갔다. 상점 뒤로 나 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하이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브는 목걸이를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토비, 이걸 준 것은 당신이군요?" "천만에!" "정말인가요?" "물론 정말이지." 토비는 휙 등을 돌려 거울 속의 이브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 목걸이는 잘 보관되어 있소." "무슨 말이죠?" "입구의 왼쪽 진열장에 넣어두었지. 적어도 한 시간 전 내가 집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있었단 말이오. 재니스가 목걸이 이야기를 해서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지." "토비, 갈색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누구지요?" 군데군데 칠이 바랜 거울 속에서 토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오늘 오후 서장님이 물을 적에 나는 사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어요." 이브는 온몸을 긴장시키고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네드 애트우드는 당신 아버님을 살해한 범인을 보았어요. 나도 거의 볼 뻔했죠. 누군가 갈색 장갑을 낀 사람이 서재에 들어가서 담배 케이스를 때려부수고 모리스 경을 살해한 거예요. 네드는 죽지 않을는지도 몰라요. 죽지 않는다면 본 것을 다 말할 거예요." -- 거울 속에서 토비는 약간 시선을 피했다 -- "나는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한 짓이든 범인은 당신이 늘 자랑하던 그 단란한 가족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야!" 토비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럴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세요." "대체 그......당신 애인은 뭘 봤다는 거요? 당신은 고롱 서장에게 그런 소리는 전혀 안했잖소." 토비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목 안이 바짝 말라서 말하는 것조차 괴로워 보였다. "왜 아무 말 안했는지 알아요?" "몰라. 그 누군가와 끌어안고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 말고는 -- " "토비 로스, 한 대 맞고 싶어?" "점점 천박해지는군!" "천박하다니,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나요?" "아니, 미안해." 토비는 눈을 감고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주먹쥐었다. "하지만 당신은 모르고 있어, 이브. 그런 소릴 하다니 너무 심하군. 어머니나 재니스가 관련이 되었다는 말만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고!" "누가 당신 어머니나 동생을 들먹였나요? 나는 다만 네드도 증언을 할 수 있고, 또 이베트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바보 같은 나는 당신이 괴로워할까 봐 그 사실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죠. 당신은 기품 있는 청년이고 옳지 않은 일은 그토록 싫어하던 분이었으니까......" 토비는 천정을 가리키며, "저 여자를 이용해서 나를 골탕먹이자는 거로군." 하고 그는 갑자기 위압적인 태도로 변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질투를 하는군?" 하고 토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브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질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의 당신 얼굴이라니, 정말 보여주고 싶었다고요. 이런 꼴로 경찰에 쫓기고 있고, 더구나 당신은 그걸 막을 아무런 방법도 없어요 --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꽤 볼 만한 구경거리였을 텐데. 게다가 이 프뤼 양의 목걸이는 아무래도......" 상점 앞쪽과 이 거실을 구분하고 있는 커튼은 갈색 장식용 실로 짠 두꺼운 것이었다. 손이 하나 쑥 나오더니 그 커튼을 한쪽으로 젖혔다. 이브는 낡은 스포츠 복 차림의 키가 큰 남자가 모자를 벗어들고 거실에 들어오며 얼굴에 떠올린, 좀 일그러진 듯한 미소를 보았다. 입의 위치가 처음부터 비뚤어진 듯한 묘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뛰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 목걸이를 잠깐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더못 킨로스 박사가 말했다. 토비는 휙 돌아보았다. 박사는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거기에 모자를 놓았다. 하얀 돌과 푸른 돌을 이어놓은 목걸이를 손에 들고 불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돌을 손톱 끝으로 슬쩍 문질러 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주머니에서 보석감정용 돋보기를 꺼내더니 어색한 솜씨로 오른쪽 눈에 끼우고는 다시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군." 하고 그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다행이군, 진짜가 아니야." 그는 목걸이를 내려놓고 돋보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브는 겨우 입을 열 수가 있었다. "경찰과 함께 오셨군요! 경찰은......?" "당신을 쫓아온 줄 아셨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킨로스 박사는 빙긋 웃었다. "실은 난 라 아르프 거리의 미술상 베유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박사는 안주머니에서 얇은 종이에 싼 것을 꺼냈다. 종이를 풀고 들어올린 것은 번쩍거리는 푸른 돌과 흰 돌로 된 또 하나의 목걸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테이블 위에 있는 것과 똑같아서 이브는 양쪽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얇은 종이에 쌌던 목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박사가 말했다. "이것은 드 랑발 부인의 목걸이였고, 모리스 로스 경의 수집품 중 하나입니다. 범행 후에 이것이 진열장 밑에 떨어져 있었던 사실을 아시죠?" "예, 그래서요?" "나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하튼 진짜 다이아몬드와 터키석이었으니까요." 하고 박사는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베유 씨가 방금 진짜라고 보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두 번째의 목걸이가 나왔습니다. 유리로 된 모조품이지요. 이것으로 어떤 추측이 가능한지 아시겠죠?" 킨로스 박사는 잠깐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진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종이에 싸서는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좀 들어보고 싶군요?" 토비가 소리쳤다. "내가 무례하게 들어와 있는 여기가 당신댁이던가요?" "얼버무리지 마시죠. 그리고 그렇게 의도적인 정중한 말씨도 귀에 거슬리는군요. 마치......" "마치?" "비웃는 것 같군요!" 박사는 이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여기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아직 안에 있다고 하고, 바깥 문도 활짝 열린 채였습니다. 실은 이제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경찰은 당신을 체포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장은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는 왜 몰려왔을까요?" "경찰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요. 앞으로 한동안은 당신 뒤를 귀찮을 만큼 따라다니겠죠. 그러나 우리끼리 이야깁니다만 경찰이 노리고 있는 것은 실은 이베트 라투르입니다. 경찰을 그렇게 환영하고 있었던 그 여자 말이지요. 그 여장부도 지금쯤은 호되게 당하고 있을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프랑스 인들을 다시 봐야 하고......자, 힘 내세요!" "예, 걱정마세요." "저녁은 드셨나요?" "아뇨." "그럴 줄 알았습니다. 대책을 세워야겠군요. 이미 11시가 지났지만, 아직 열려 있는 레스토랑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참! 그리고 고롱 서장은 말입니다, 로스 집안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약간 심경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로스 집안'이라는 불길한 말에 방안의 공기는 다시 일변했다. 토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신도 이 음모의 같은 패거리로군!" "음모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문 밖에서 엿듣고 -- " 하고 토비는 그 '엿듣고'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서 말했다. "뭔가를 알아낸 거로군요. 갈색 장갑이나 뭐 그런 걸......" "들었소." "그것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나요?" "아니, 놀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토비는 씩씩거리며 쓰디쓴 얼굴을 두 사람 쪽으로 돌리고 왼쪽 팔에 감고 있는 상장(喪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토비는 말했다. "내가 집안 일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 밖에 내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 줄 압니다. 그러나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로 내가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아실 텐데요?" 이브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당신은 가만 있어!" 하고 토비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야 겉으로 보아선 같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집의 누군가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은 누군가의 음모라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바보 같은 이야기요. 아시겠소? 그런 소릴 처음 꺼낸 것은 바로 이 여자란 말이오." 하고 그는 이브를 가리켰다. "내가 신뢰하고 예찬하기까지 한 여잔데. 사람이 달라진 것 같다고 좀 전에도 말했었소. 정말이오! 그 애트우드란 자와 다시 합치기로 한 것을 인정한 거나 같습니다. 그러나 불장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랄 정도의 여자지요. 만일 내가 그런 말을 조금이라도 입 밖에 내면 여지없이 덤벼들어서, 내가 아내로 삼으려고 한 여자라면 도저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겁니다. 이 여자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이 집의 프뤼라는 계집애 때문이지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게도 잘못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남자라면 멋진 아가씨 한 명쯤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서지요. 그건 아시겠죠? 그런 일을 나 자신도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정색을 하고 따지고 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토비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내게 결혼을 맹세한 여자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지요. 그 애트우드라는 돼지 같은 자식과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하더라도 여하튼 침실에 사내를 들인 것은 사실이니까 의심을 받아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남들에게 존경받는 어엿한 은행원입니다. 아내라는 여자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 적어도 약혼을 발표한 뒤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요. 아무리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무리지. 조금은 마음을 바로잡은 것 같아서 나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의 약혼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군요." 토비도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브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브가 운 것은 다만 화가 나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이었지만, 토비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오." 그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10초쯤, 2층에 있는 프뤼 양의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릴 만큼 아주 조용했다. 더못 킨로스 박사는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섣불리 숨을 쉬었다가는 울화통이 그만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에게 분별을 가져다 준 과거의 고민과 굴욕이 또다시 마음을 졸이게 하고, 그 마음속으로 연이어 피투성이의 살인 광경이 떠올랐다. "여기서 나가기로 합시다." 박사가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런 일에 휩쓸려서는 안 될 사람이오." --------------------------- 제 15 장 --------------------------- 서늘한 9월의 피카르디 해안의 새벽, 마치 크레용으로 선을 그어놓은 듯한 수평선 위에 해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주변의 해면을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점점 떠오름에 따라서 도버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물결은 빛을 안고 춤추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영국 해협, 왼쪽에는 관목이 우거진 모래언덕이 있다. 해안선을 따라서 휘어진 아스팔트 길은 강물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 대의 무개마차가 딸그락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꽤 참을성 있어 보이는 마부가 앉아 있었고, 뒷자리에는 손님이 두 명 타고 있었다. 바퀴 돌아가는 소리, 말장식 부딪치는 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도 현기증을 느낄 듯한 아침의 정적과 공허 속에 토막토막 덧없는 소리를 내고 있는 듯했다. 도버 해협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이브의 머리칼을 흐트러놓고, 검은색 모피 케이프 자락을 흔들었다. 눈이 좀 들어간 듯했지만 이브는 소리까지 내어 웃고 있었다. "박사님은 밤새 제게 수다를 떨게 하셨어요." "그게 좋지 않습니까." 더못 킨로스 박사는 말했다. 실크 햇을 쓴 마부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말참견도 하지 않았지만 어깨를 웅크리고 있어서 귀언저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쯤인가요? 라 방들레트에서 10 킬로미터는 나온 것 같은데!" 마부의 어깨가 그렇다는 듯이 다시 으쓱하고 올라갔다. "그런 거야 무슨 상관입니까." 하고 박사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한 말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 " "예?" "한 번 더 해주시지요. 대강 하지 말고 아주 자세히." "또요?" 이번에는 마부의 어깨가 귀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마부가 아니면 흉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묘하게 올라갔다. 휙 하고 채찍이 날아갔다. 얼굴을 마주보려던 두 손님을 공중에 들어올리고 마차는 기세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네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말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젠 목까지 아파요. 조금쯤 경치 구경도 해야죠." 하고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시원한 바람 탓인지 눈물까지 어린 회색 눈으로 호소하듯이 박사를 보았다. "하다 못해 아침이나 먹고 하도록 해주시지 않겠어요?" 킨로스 박사는 유쾌했다. 그는 빛 바랜 시트에 기대앉아서 두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머리가 어쩐지 멍해진 것은 수면부족 탓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쪽으로 관심을 갖게끔 새로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있는 것이나 옷차림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는 것도 모두 잊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기분만이 가득차 있었다. 전세계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들어서 아무데나 집어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어쩐지 부인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박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겨우 중요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닐 부인! 당신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뭔데요." "범인이 누군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낡아빠진 마차는 날듯이 달렸다. 이브는 앞으로 몸을 좀 구부려 마차의 비품인 무릎덮개가 걸려 있는 손잡이를 꽉 잡았다. "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인의 증언이 가치가 있는 겁니다. 만일 부인이 진상을 알고 있었더라면 -- " 박사는 망설이며 이브를 흘끗 보았다. "어제부터 나는 뭔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파파 루세 식당에서 오믈렛을 먹으면서 부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그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킨로스 박사님, 그들 중 누가 범인인가요?" "그것이 당신에게 중요한 일일까요? 그것이 여기 있는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박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 누가 그랬을까요?" 박사는 이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깊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만,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브는 이젠 그만 얘기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화가 나서 몇 마디 하려고 입을 열다가 성실하고 따뜻하게 격려하는 듯한 박사의 표정을 보았다. 당장 불이라도 붙을 듯한 강렬한 동정의 빛을 띤 얼굴이었다. "들어보십시오." 박사는 계속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말하자면 명탐정 같이 마지막 장에 가서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다만 심리학자로서 생각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요. 이 사건의 비밀은 -- " 하고 그는 손을 뻗어서 이브의 이마를 건드렸다.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 머릿속에." "하지만 전 아직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가 설명해 버리면 당신은 사건을 다시 한 번 바꾸어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하기도 해서 사실을 마구 주물러 버릴 겁니다. 그 점이 곤란한 거죠, 지금으로서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 고롱 서장이나 예심판사 앞에서 당신이 내게 말한 그대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브는 불안한 듯이 몸을 움직였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지요." 더못 박사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조끼 주머니를 뒤져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들어보였다. "예를 들어서 이건 뭡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계지요, 요술쟁이 아저씨." "어째서 시계라고 아십니까? 바람이 세게 불고 있으니 소리는 들리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박사님, 그건 한눈에 시계인 줄 알잖아요!" "바로 맞았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이 시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 " 하고 그는 아주 낮고 가볍게 덧붙였다. "지금 5시 20분. 당신은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합니다 -- 이봐요, 마부!" "예, 선생님." "이젠 돌아가는 게 좋겠소." "예, 그렇게 하죠!" 참을성 많던 마부가 마법에라도 걸린 듯했다. 마차의 고삐를 휙 당겨 방향을 바꾸는 솜씨는 뉴스 영화에서 고속촬영을 보고 있는 것 같았으며, 길 전체에 전류라도 통하고 있는 듯했다. 마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오던 길을 다시 달렸다. 청회색의 도버 해협 위를 흰 갈매기가 시끄럽게 울면서 날고 있었다. 이브는 말을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죠?" "자는 겁니다. 그 다음엔 당신의 충실한 친구인 나를 믿어주시고요. 아마 오늘은 당신이 고롱 서장과 예심판사를 만나야만 할 겁니다." "그렇겠죠." "예심판사인 보투르 씨는 엄격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만 겁낼 건 없습니다. 예심판사의 권한을 행사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만, 내기 심문에 입회할 수는 없게 될 겁니다." "박사님은 제 곁에 안 계실 건가요?" 하고 이브는 외쳤다. "난 변호사가 아닙니다. 참! 그렇군, 역시 변호사에게 의뢰하는 편이 좋겠군요. 솔로몽이라는 사람을 부인에게 보내드리지요." 하고 박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마부의 등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함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그렇게 다릅니까?" "아주 다르지요. 그러고 보니 전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리고 있네요......"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여하튼 아까도 말했듯이 자세하게 사소한 부분까지 내게 말한 그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진술이 정식 조서가 되었을 때가 바로 내가 뛰어들 때이니까요." "그때까지 박사님은 무얼 하시나요?" 박사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범인이 누구인가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네드 애트우드입니다만, 지금으로서는 그는 도움이 안 됩니다. 나도 같은 동종 호텔에 묵고 있으니 담당의사에게 물어볼 생각입니다만, 아마 무리일 겁니다. 아니 -- " 하고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런던에 가기로 하겠습니다." 이브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런던엘요?" "예, 당일로 돌아올 겁니다. 10시 반 비행기로 이곳을 출발해서 크로이든에서 오후 늦게 떠나는 비행기를 잡아타기만 하면 저녁식사 때까지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작전계획이 잘만 진행된다면 그땐 결정적인 정보를 쥐고 올 수가 있을 겁니다." "킨로스 박사님, 당신은 왜 저 같은 여자를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시나요?" "누구든지 같은 동포가 형무소에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지요. 혹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농담은 하지 마세요!" "농담으로 들렸습니까? 그거 실례했군요." 사과를 하는 박사의 얼굴에는 말과는 달리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브는 그 얼굴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과거의 공포가 되살아나서 그의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브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지쳐서 짧은 모피 케이프 밑에서 떨면서 간밤의 여러 가지 일들이 앞뒤도 없이 엇갈리며 떠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의 시시한 첫사랑 이야기로 박사님도 꽤 지루하셨을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래 사귄 친구도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한 것을 아침이 되어 생각해 보니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바로 얼굴을 대할 수도 없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그것 때문에 온 건데요. 그런데 다시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토비 로스는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요?" "그렇게 빈틈없는 방법으로 쫓아내는데 어떻게 하다니요? 저는 분명하게 거절을 당한 거지요?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은 생각하십니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니고, 사랑하고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맑고 크게 들렸다. 드디어 이브는 웃기 시작했다. "저라는 여자는 남자 운이 좋지 않은가 봐요." 이브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사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마차가 라 방들레트의 깨끗하고 흰 거리에 말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돌아왔을 때에는 6시가 가까웠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두셋 말을 달리고 있을 뿐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차가 데 상주 거리로 기세좋게 들어서자 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사는 이브의 집 앞에서 내리는 그녀를 거들어 주었다. 이브는 건너편 보뇌르 별장을 흘끔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2층 침실의 창문이 하나 열려 있었고, 창가에서 동양풍의 옷을 입은 헬레나 로스 부인이 콧등에 안경을 걸친 채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거리에 소리가 크게 울리자 이브는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뒤를 보셨나요? 이층 창문 말이에요." "예." "아는 체라도 해야 할까요?" "내버려두십시오" 이브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어이 말씀해 주시지 않겠어요? 범인이 누군지......"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만 말해 두겠습니다. 당신은 내가 알기로는 아주 잔인하고 또한 빈틈없이 짜여진 음모에 발이 빠져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음모를 꾸민 녀석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며, 실제로 용서받지도 못할 겁니다. 오늘밤 다시 뵙겠습니다. 일이 잘 풀리게 되면 그땐 놈을 몰아세울 수가 있을 겁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해요!" 이브는 박사의 손을 한번 힘껏 잡고는 문을 열고 현관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갔다. 마부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으나, 박사는 언제까지나 보도에 선 채로 이브의 집을 바라보고 있어서 다시 불안해졌다. 이윽고 박사는 마차에 타고 말했다. "동종 호텔까지 갑시다. 오늘 수고했네." 호텔에서 박사는 요금 외에도 팁을 두둑히 주었으므로 마부가 여러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인사말에 쫓기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이 호텔 로비는 중세 성(城)의 홀을 본땄는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박사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고롱 씨에게서 빌려온 다이아몬드와 터키석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등기소포로 되돌려 보내기로 했다. 그 안에 오늘 하루 볼일이 생겨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편지도 함께 써넣었다. 그런 다음 수염을 깎고 냉수 샤워를 해서 머리를 맑게 하고는, 옷을 입는 동안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온 전화로 애트우드의 방이 401호임을 알아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보니 마침 아침 회진을 마치고 네드의 방에서 나오는 호텔 의사와 마주쳤다. 부테 의사는 킨로스 박사의 명함을 보고는 그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는지라 조금은 황송한 모양이었다. 그는 어둑한 복도에 선 채 힘주어 말했다. "애트우드 씨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스무 번이나 경찰이 찾아와서는 같은 말을 묻고 갑니다만." "언제쯤 회복될 것이라는 짐작은 처음부터 할 수 없을 것으로 압니다만, 가끔 의식이 돌아오는 일은 더러 있겠지요?" "부상의 성질상으로 가능은 합니다. X레이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그거 고맙군요. 회복 가능성은 어떨까요?" "저로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헛소리 같은 거라도." "가끔 소리를 내어 웃습니다만 그것 뿐입니다. 하긴 우리가 늘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간호원에게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환자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어둡게 한 실내에 사건의 열쇠를 쥔 그 사나이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간호원은 어떤 종교단체의 수녀였는데, 그 모자가 뿌연 차양을 배경으로 실루엣처럼 떠올라 있었다. 박사는 환자를 가만히 관찰했다. 환자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점에 박사는 내심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 사나이가 이브 닐의 첫 남자이고 아마도......박사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설령 의식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브가 아직도 이 사나이를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네드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의 회중시계는 조용한 실내에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부테 박사가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환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라며 흥미 있다는 듯이 말했다. "환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으시는 거죠?" 하고 간호원이 박사의 질문을 되물었다. "예, 가끔 뭐라고 중얼거리더군요." "흠." "하지만 영어라서 전 모릅니다. 그리고 자주 웃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해요." 문을 향해 걸어나가던 박사가 다시 되돌아보았다. "어떤 이름이죠?" "쉿!" 하고 부테 박사가 주의를 주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음절이나 똑같이 들리니까요. 죄송하지만 흉내도 낼 수가 없군요." 하고 어둠 속에서 간호원은 불안해 했다. "꼭 필요하시다면 이번에는 적어놓도록 하겠습니다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박사가 여기에 온 용건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남은 것은 호텔 안에 있는 몇 개의 술집을 돌아다니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웨이터 중 한 명이 재니스 로스 양에 대해 신이 나서 말했다. 모리스 경에 대해서는 살해된 날 오후 시끌벅적한 술집에 나타나서 바텐더와 웨이터를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무서운 눈초리더군요!" 바텐더는 떠들썩하게 말했다. "그 뒤에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옆을 걷고 있는 것을 쥘 세즈넥이 본 모양입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본데, 상대방은 나뭇잎에 가려져서 쥘이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 더못 킨로스 박사는 '솔로몬과 코엔' 법률사무소의 친구 솔로몽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고, 이어서 10시 30분에 라 방들레트 공항을 출발하는 임피리얼 항공 여객기의 좌석을 예약했다. 그 이후의 하루는 나중에 가서 생각해 보니 마치 악몽 같았다. 이 여행의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기내에서는 잠을 자며 기운을 아꼈다. 크로이든 공항에서 타고 간 버스는 한없이 지루했다. 런던의 거리는 휴가에서 돌아온 사람에게는 매연과 휘발유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박사는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갔다. 30분 뒤 그는 승리의 고함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확인을 하기 위해 와본 어떤 것이 확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금빛 저녁 하늘 아래에서 라 방들레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에 그는 이미 피로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엔진이 윙윙거리고 타이어가 소리를 내며 활주하기 시작하자 부근의 풀은 세찬 바람에 휩쓸려 일제히 땅에 누웠다. 이브를 구해낸 것이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기내에는 환기장치가 붕붕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사는 서류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좌석에 기대어 영국의 크고 작은 지붕이 차츰 한 장의 지도로 변해 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브는 구해낼 수 있다. 박사는 계획을 세웠다. 어두워지기 직전,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마을 쪽에선 점점이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빈틈없이 가로수가 이어진 큰 길을, 소나무 향기 그윽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차를 타고 마을로 가는 박사의 마음속에는, 지금의 골치아픈 상황을 넘어서서 미래의 희망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종 호텔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로비의 밝은 조명과 소란스러움이 신경을 건드렸다. 프런트 앞을 지나가는데 담당직원이 손짓을 했다. "킨로스 박사님! 오늘 하루 여러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 분이 두 분 계실 겁니다." "누굴까?" "솔로몽 씨하고 -- " 담당직원은 메모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마드무아젤 로스입니다." "어디요?" "로비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하고 직원은 벨을 눌렀다. "곧바로 안내해 드리지요." 보이의 안내를 받으며 고딕풍의 로비에 들어가니 벽의 움푹 들어간 한 구석에 재니스 로스와 피에르 솔로몽 변호사가 보였다. 그곳 모조석으로 된 벽에는 같은 모조품인 중세기의 무기가 걸려 있었다. 한가운데 조그만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를 벽을 따라 소파가 둘러싸고 있었다. 재니스와 솔로몽은 각각 다른 걱정거리를 갖고 있는 듯이 조금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박사가 다가가자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났다.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박사는 깜짝 놀랐다. 솔로몽 변호사는 당당한 체구에 올리브빛 얼굴을 하고, 굵고 낮은 음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주 묘한 얼굴로 박사를 보았다. "역시 돌아오긴 왔군." 솔로몽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말했잖나. 그런데 닐 부인은 어디에 있나?" 솔로몽 변호사는 자신의 손톱을 한참 보고 있다가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시청에." "시청? 이런 시간에? 어째서 그렇게 오래 잡고 있나?" 솔로몽 변호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독방에 갇혀 있네. 아마 당분간 계속 있게 될 걸세. 닐 부인은 살인혐의로 체포됐다네." --------------------------- 제 16 장 --------------------------- "자,우린 같은 편인데 탁 터놓고 말해 주지 않겠나?" 당당한 체구의 솔로몽 변호사는 위압하듯이 진지한 얼굴로 재촉해 왔다. "설마 날 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혹시 이브를 놀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하고 재니스가 끼어들었다. 킨로스 박사는 두 사람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솔로몽 변호사는 박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그 손가락을 법정에서 심문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자네는 닐 부인에게, 자네에게 말한 그대로 경찰에서 정확하게 진술하라고 지시했다면서?" "물론 그렇게 말하라고 일렀지." "흠!" 솔로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손가락 두 개를 조끼 주머니에 찌르고 떡 버티고 섰다. "자네, 미쳤나? 아니, 정말 미쳐버린 거 아니야?" "하, 이 사람아!......" "오늘 오후 부인의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경찰은 그녀의 무죄를 거의 확신하고 있었어. 거의! 그것이 자네의 지시로 인해서 경찰의 자신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러니까 그녀의 증언이 끝났을 때에는 경찰은 더 망설일 것도 없게 된 거지. 고롱 서장과 예심판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구먼. 닐 부인은 증거를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죄를 확신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큰 실책을 저지른 게야. 만사 끝났어! 나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걸세." 조그만 테이블 위, 재니스 양 앞에는 반쯤 마신 마티니 잔이 있었다. 그 옆에 받침접시가 세 개나 포개져 있는 것은 이미 그 접시 수만큼 마셨다는 것을 뜻한다. 재니스는 자리에 앉더니 남아 있던 마티니를 단숨에 죽 마시고 말았다. 얼굴이 약간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헬레나 부인이 보았더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킨로스 박사는 재니스의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솔로몽을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게! 그 '큰 실책'이라는 것이 그 문제의 나폴레옹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에 관한 것이 아닌가?" "맞았네." "그렇다면 그 코담배 케이스에 대해서 그 여자가 설명한 것에 문제가 있었군?" 박사는 서류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고 박사가 화를 잔뜩 내자 상대편 두 사람은 머뭇거렸다. "그렇다면 그자들에게 닐 부인이 무죄라고 믿게 할 증거가 오히려 반대로 유죄로 보는 증거가 되었다는 겐가?" 솔로몽 변호사는 거대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뜻인지 나로선 모르겠는데!" "고롱 서장은 꽤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고 박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엇을 착각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닐 부인 쪽에서 잘못한 것인가?" "확실히 그 부인은 당황한 것 같았어." 하고 변호사는 시인했다. "진술할 때도 당연히 사실이라고 보이는 부분에서조차도 설득력이 없었다네." "그래? 그렇다면 그 여자는 고롱에게 오늘 아침 내게 말한 그대로 말하지 않았군?" 솔로몽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에게 자네가 뭐라고 말했든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네. 그러니까 알 턱이 없지." "저, 잠깐 한 말씀만 -- "하고 재니스가 조그만 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겨우 영어로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건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하루 종일 이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BC 3세기경의 로마의 정치가. 유명한 아피아 가도(街道)를 만들었다) 같은 사람의 뒤만 따라다녔어요." -- 하고 그녀는 솔로몽 변호사 쪽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이분은 계속 기침만 하면서 점잔을 빼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들은 모두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오빠, 아저씨도 모두 지금 시청에 와 있어요." "흠! 모두들 말인가요?" "예, 이브에게 면회를 신청해 놓았지만 잘 될 것 같지 않군요." 재니스는 여기서 망설였다. "오빠의 눈치로 봐서 어제 저녁에 무슨 소동이 한바탕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가끔 그렇게 되니까요.) 어제 무슨 말인지 이브에게 해버렸는데, 오늘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흘끗 쳐다본 박사의 얼굴이 너무 험악했으므로 재니스는 전보다 더 풀이 죽어서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은 좋지 않은 일뿐이었죠." 하고 그녀는 계속했다. "그리고 박사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우리들은 이브 편이에요. 체포 소식은 박사님 못지않게 우리에게도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마세요. 어쩐지 박사님이 사형집행인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고맙소.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고 싶군요." 재니스는 재빨리 얼굴을 쳐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지난번 고롱 씨와 얘기할 때에 -- " 하고 박사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해 버리고 말했다. "그는 두 장의 카드를 쥐고 있으니 거기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어. 하나는 이베트 라투르를 추궁해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듣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사건이 있었던 날 밤에 일어난 일 가운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 왜 이 두 가지 카드를 버리고 그 부인을 체포했을까? 그 이유가 뭔지 내 이 둔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구먼." "고롱 씨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하고 변호사는 로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마침 이리로 오고 있는데." 아리스티드 고롱 씨의 이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으나, 언제나처럼 시원스럽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풍당당하게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안녕하시오." 하고 그는 킨로스 박사에게 약간 미안해 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런던에서 방금 돌아온 모양이군." "그렇다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이쪽은 일이 멋지게 되어가고 있군 그래." "유감이지만 그렇다네." 하고 고롱 씨는 한숨을 쉬었다. "정의를 짓밟을 수는 없으니까. 자네도 그건 인정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부랴부랴 런던에 가야 했는지 그 이유나 좀 말해 보게." "모리스 로스 경 살해 진범의 동기를 확인하고 왔다네." "무슨 소리야!" 하고 고롱 씨는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킨로스 박사는 솔로몽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 서장과 할 얘기가 있네. 그리고, 로스 양, 이 두 신사분과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미안합니다만 -- " 재니스는 한껏 침착한 척해 보였다. "사라지라는 말씀이군요?" "천만에요. 솔로몽 씨와의 얘기는 곧 끝날 테니까 가족들이 계신 시청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지요."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재니스가 자리를 뜨는 것을 기다렸다가 박사는 솔로몽에게 말을 걸었다. "이브 닐에게 전할 말이 있는데, 자네에게 좀 부탁해도 되겠나?" "좌우간 하는 데까지는 해보지." 하고 솔로몽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탁하겠네. 내가 고롱 씨와 얘기를 끝내고 아마 한 시간 아니면 길어야 두 시간 안으로 석방될 거라고 전해 주게나. 그리고 또 한 가지, 부인 대신에 모리스 경 살해 진범을 경찰에게 인도할 생각이라고 전하게."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이건 속임수야!" 고롱 씨가 갑자기 말래카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말장난이야. 잘 듣게, 난 그런 일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네!" 그러나 변호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돛을 올린 갤리언 배처럼 로비를 향해 나갔다. 그리고 발을 멈추어 재니스 양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팔을 내밀어 부축을 하려고 했으나 재니스 양이 거절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로비를 나가 사람들 속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킨로스 박사는 소파에 앉더니 서류가방을 열었다. "서 있을 작정인가, 서장?" 서장은 흥분해서 말했다. "아니, 앉지는 않겠네!" "허허. 잘 듣게,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 " "흥!" "너무 딱딱해서 안 되겠군! 뭐 좀 마시는 게 어떻겠나?" "글쎄." 고롱 씨는 화가 나서 으르렁거렸다. 아직은 상당히 자신 있는 태도였지만 조금 누그러지며 소파에 앉았다. "조금만 하겠네. 그럼, 작은 잔으로 가볍게 한 잔 정도로. 하지만 기어이 권한다면 위스키 소다수라도 마셔 볼까." 박사는 마실 것을 주문했다. "놀랍군." 박사가 비아냥거렸다. "닐 부인 같은 거물을 잡고 떠들썩하더니, 왜 그대로 시청에 남아서 심문해 보지 않았나?" "이 호텔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고롱 씨는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볼일이 생겼다고?" "그렇다니까." 고롱 씨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조금 아까 부테 의사에게서 전화가 걸렸왔어. 애트우드가 의식을 회복했으니까 간단히 끝나는 조사라면 해도 된다는 거야." 박사 얼굴에서 만족해 하는 표정을 보니 서장은 다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럼, 자네에게 말만은 해두기로 하지." 하고 박사는 말했다. "애트우드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하게 될 걸세. 틀림없어. 그의 증언으로 이 수수께끼는 윤곽이 들어날 거야. 그런데 그가 내가 한 말과 똑같은 증언을 하게 되면 -- 이미 말해 두지만 내가 뒤에서 조종해서 증언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야 -- 내가 제시하는 증거를 인정해 주겠나?" "증거? 무슨 증건데?" "잠깐 -- " 박사는 대답도 없이 다른 것을 물었다. "왜 자네는 180 도로 생각을 바꾸어 부인을 체포했나?" 고롱 씨는 설명했다. 서장은 위스키 소다수를 찔끔찔끔 마셔가며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서장 자신은 아직 이런 결과에 대해 완전히 만족해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박사가 보기에는 서장의 의혹과 예심판사의 놀라운 확신에는 모두 어떤 한 가지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부인은 결국 말하지 않았군." 하고 박사는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수면부족으로 기진했을 때 그만 내게 해버린 말을 자네에겐 하지 않은 거야. 자신의 무죄와 다른 진범을 분명하게 밝혀줄 유일하고 중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무슨 말인데?" "자, 들어 보게!" 하고 박사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가방을 열었다. 박사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로비에 있는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는 시계는 5분 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9시 5분이 되자 고롱 씨는 안절부절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15분이 지나자 고롱 씨는 화가 잔뜩 나서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기색이 완연하더니, 마치 애원이라도 하듯이 손바닥을 위로 펴보였다. "정말 지겨운 사건이군." 하고 고롱 씨는 신음하듯 말했다. "아주 끔찍해. 좀 잘 풀려나간다 싶으면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다시 뒤집어 엎어버리니."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이것으로 모두 설명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나?" "이번에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겠네. 나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분명히......설명은 되네." "그럼 사건은 해결된 거야. 자네는 사건을 목격한 그 사람에게 하나만 물어보면 되네. 네드 애트우드에게, '그것은 이러한 게 아니었소?' 하고 물어보게나. 만일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땐 유치장을 준비시켜도 좋다는 말일세. 그리고 내가 그 사나이에게 그렇게 시켰다는 말은 하지 말게." 고롱 씨는 일어서서 남은 위스키 소다수를 마셔 버렸다. "자, 함께 가서 언도를 받을까!" 그가 재촉했다. 401호실에 킨로스 박사는 그날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처음 왔을 때에는 이런 행운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어쩐지 선한 힘과 악한 힘이 이브 닐의 운명을 사이에 두고 서로 상대방의 헛점을 노려 쓰러뜨리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실에는 희미한 전등이 켜져 있었다. 네드 애트우드는 몹시 창백한 얼굴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의식만은 분명했다. 야근 간호원에게 뭐라고 말하며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데, 영국 병원에서 파견된 듯한 서부지방 출신의 뚱뚱하고 명랑한 간호원이 그를 눌러서 눕히려 하고 있었다. "방해가 되어 미안하지만 -- " 하고 킨로스 박사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 " 하고 네드가 굉장히 쉰 목소리로 불러놓고는, 몇 번이나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간호원의 팔 사이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사인가요? 그럼, 부탁입니다, 이 귀신 같은 여자를 내쫓아줘요. 몰래 들어와서 주사 같은 것을 놓으려고 한다니까요." "잠이나 자요." 간호원은 화가 나 있었다. "안정해야 돼요."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무조건 안정하라는 건 억지요. 그렇게는 못해! 안정 같은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라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라도 해준다면 나도 조용하게 처방해 주는 대로 그 알쏭달쏭한 약을 먹겠지만." 간호원이 수상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어서 박사가 말했다. "간호원, 우리는 수상한 사람들이 아니오." "누구신지요?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요?" "나는 킨로스 박사고, 이쪽은 경찰서장인 고롱 씨요. 모리스 로스경 살해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중이오." 또렷치 않은 렌즈의 초점이 차츰 맞아가듯이 네드 애트우드의 표정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이해력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갸냘픈 숨을 쉬며 두 손을 뒤로 짚어서 버티고는 겨우 상반신을 일으켰다. 지금 처음 알았는지 자신의 잠옷차림을 내려다보다가 드디어 눈을 깜박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 " 하고 네드는 신중하게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갑자기 나는......" 하고 말하다 말고 목에 손을 갔다댔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있었죠?" "9일간." "9일간?" "그래요. 당신은 호텔 밖에서 차에 부딪쳤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차에? 무슨 소리야, 그 바보 같은 이야기는?" "당신이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여하튼 나는 말한 기억이 없소." 그때 그의 머리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브!" 그는 말했다. 그 한마디에 그의 모든 생각이 담겨 있었다. "애트우드 씨, 진정하고 들어봐요. 지금 닐 부인은 아주 곤란한 처지에 있어서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이분을 죽일 생각이세요?" 하고 간호원이 화가 나서 말했다. "시끄럽소!" 네드는 체면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고 고함치더니 박사에게 물었다. "곤란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대답은 서장이 했다. 고롱 서장은 팔짱을 끼고서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숨기려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닐 부인은 구속되어 있습니다." 고롱 서장은 영어로 말했다. "모리스 로스 경 살해혐의로 말이오." 긴 침묵이 흐르고 시원한 밤바람이 창가의 커튼과 흰 차양을 흔들고 있었다. 네드는 지금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꼿꼿이 세우고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잠옷의 어깨 부근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9일간의 투병으로 팔은 가늘어진 듯했고, 여윈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환자에 대한 일반적 조치로서 머리의 꼭대기 부분은 동그랗게 머리칼을 깎아버리고 거기에 하얀 거즈를 대어둔다. 그것은 지쳐버린 파란 눈과 약간 벌어진 입, 희고 초췌한 얼굴과 코믹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농담이겠죠?" "농담이 아니오." 박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 부인에게는 아주 불리한 증거가 있어요. 게다가 로스댁 사람들은 전혀 도와 주지 않는군요." "놈들은 그런 족속이지요." 네드는 시트를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당장 큰 소동이 일어났다. "자, 봐요!"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네드가 말했다. 웃는 얼굴에는 건강할 때의 표정이 되살아나 있었다.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무척이나 우스운 일이 내밀하게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도 심각한 일이어서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듯했다. 네드는 망막에서 무엇인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환자로 보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환자답게 고분고분 대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옷을 입고 싶소. 왜냐고요? 물론 시청에 가기 위해서지. 옷을 가져다 주지 않겠다면 저 창밖으로 뛰어내리겠소. 이브 같으면 내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금방 알 텐데." "애트우드 씨 -- " 하고 간호원이 말했다. "정 이러시면 사람을 불러 억지로라도 끌어다 눕히겠어요."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나는 창밖으로 뛰어나가 버리겠소. 어째 모자밖에 보이지 않는군. 필요하다면 모자만 쓰고라도 뛰어나가겠소." 그는 킨로스 박사와 고롱 서장에게 호소했다. "내가 의식을 잃은 뒤에 이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브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들려주시지요. 이 사건에는 아주 복잡한 이면이 있습니다, 모르시겠지만." "아니, 알고 있습니다." 박사는 대답했다. "닐 부인이 갈색 장갑을 낀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더군요."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알고 있군요?" 고롱 씨가 물었다. "물론이죠." 네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서장은 거친 동작으로 실크 햇을 벗었다. 네드는 몸을 비틀거리며 테이블 옆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이 패여 있었다. "이브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우리들이 길 건너 창으로 내다보았을 땐 누군가가 노인과 함께 있었는데, 두 번째 보았을 때에는 노인은 이미 맞아서 쓰러져 있었다고요. 사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실은......" --------------------------- 제 17 장 --------------------------- "여러분." 예심판사인 보투르 씨가 말했다. "누추한 방이지만 들어오십시오." "실례합니다." 재니스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이브를 만나게 되나요?" 헬레나 부인은 괴로운 듯 말했다. "가엾게도.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좋을 리야 없겠지." 하고 벤 아저씨가 뜻밖에도 스스로 끼어들었다. 토비는 말이 없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깊이 찔러넣고 우울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생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라 방들레트 시청은 세로로 길쭉한 황색 석조건물이며, 시계탑도 있고, 중앙시장 가까이로, 기분 좋은 공원에 면해 있었다. 보투르 씨의 사무실은 가장 위층의 커다란 방으로 북쪽에 두 개, 서쪽에 한 개의 넓은 창문이 있었다. 서류함이 몇 개 있었고 -- 법조계 유명인사의 취미인지 -- 먼지를 뒤집어쓴 법률서적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다 잊혀진 레종 도뇌르 훈장이 달린 제복을 입고 있는 고관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있었다. 보투르 씨의 책상은 서쪽 창문을 등지고 앉도록 놓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마주보는 자리에 낡은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 의자의 바로 위에는 전등이 하나 달려 있었다. 이 방에는 방문객들의 눈길을 끄는 어떤 다른 것이 있었다. 애들 장난이라고 해버리면 그뿐이겠지만 또한 두렵기도 한 것이었다. 커튼이 없는 서쪽 창에서 대낮으로 착각할 정도의 하얀 빛이 확 몰려들어 모두가 눈도 뜨지 못하고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흰 빗자루 다발 같은 빛이 표면을 스치듯이 방 한쪽 면을 쓸고 지나가 굉장한 거품을 일으켰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등대의 불빛이었다. 보투르 씨와 마주보는 의자에 앉으면 판사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운명처럼 냉혹하고 눈부신 빛이 정확히 20초마다 얼굴을 비치게 된다. "아, 등대의 불빛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존잽니다." 하고 보투르 씨는 중얼거리며 손으로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자, 편히들 앉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보투르 씨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의자 방향만 조금 틀어 모두와 마주보았다. 그는 바짝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중년 남자로, 듬성듬성한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비벼대자 가랑잎 바스라지는 것같이 메마른 소리가 났다. "닐 부인을 면회할 수 있겠습니까?" 토비가 물었다. "글세...... 아니, 아직 안 되겠소." "왜 안 됩니까?" "그에 앞서 내 쪽에서 꼭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오." 다시 눈부신 하얀 빛이 창을 비추면서 보투르 씨의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천정에는 전등이 켜져 있는데도 판사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반백이 된 머리카락 끝이 반짝이고 있었고, 아직도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등대 불빛만 없었다면 이 판사의 방은 아주 흔해빠진 것이다. 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사무실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가 동그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그때 판사가 앉아 있는 주변에서 서서히 밀려오고 있는 분노의 기색을 방문객들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동료인 고롱 서장과 오랫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그는 지금 동종 호텔에 있습니다만,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조금 있으면 킨로스 박사와 함께 여기로 오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말하더니 보투르 씨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반드시 우리가 경솔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나는 닐 부인의 체포를 너무 서둘렀다고는 생각지 않소......" "예?" 하고 토비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실은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나도 아연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먼저 더못 킨로스 박사가 지적한 점에 다시 중점을 두기로 한 겁니다. 닐 부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점을 그만 소홀히 하고 있었던 거지요." "토비." 헬레나 부인이 조용히 물었다. "어제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니?" 그리고 그녀는 방의 반대쪽에 앉아 있는 보투르 씨를 향해 돌아보면서 한 손을들어 앞으로 뻗었다. 로스 일가는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으나, 그 중에서는 헬레나 부인이 가장 침착한 것 같았다. "판사님!" 부인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제 토비는 밤 늦게 돌아왔습니다. 정말 무섭게 화를 내면서......" "그것이 -- " 토비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전 잠이 오지 않아서 깨어 있었습니다. 코코아라도 마시겠느냐고 물어도 이 아이는 대답도 않고 침실로 뛰어 올라가더군요." 부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브와 뭔가 크게 다투기라도 한 것 같았어요. 이브는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다고 했으니까요." 보투르 씨는 손을 비볐다.또 그 하얗고 눈부신 빛이 그의 어깨 언저리를 쓸고 지나갔다. "흠!" 판사가 말했다. "그래, 아드님은 부인께 어딜 다녀왔다고 합니까?" "라 아르프 거리 17번지이지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니스와 벤 아저씨 두 사람은 토비를 보고 있었다. 자세히 관찰했더라면 그때 재니스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얼핏 지나가고 곧 젊은 아가씨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긴 공복에도 칵테일을 네 잔씩이나 해치우는 대단한 아가씨니까. 벤 아저씨는 주머니칼로 빈 파이프 안쪽을 긁어내고 있었다. 깔작거리는 그 작은 소리가 토비의 신경을 꽤나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헬레나 부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호소하듯이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브와의 싸움은 저에게는 나쁜 일의 마지막 마무리처럼 생각되었어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그렇게 날이 밝자 이브가 그 높으신 박사인가 하는 인상 나쁜 사람과 함께 돌아오는 것도 저는 보았지요. 그런 뒤에 결국 이브가 잡혀갔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연관이 있는 겁니까?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가르쳐 주시면 안 되나요?" "동감이오." 하고 벤 아저씨가 말했다. 보투르 씨는 턱을 앞으로 당긴 다음 말했다. "그럼, 아드님에게서는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말이군요, 부인?"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닐 부인이 댁의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십니까?" "우리집 누군가를 --?" "그렇습니다. 댁의 누군가가 갈색 장갑을 끼고 모리스 경의 서재에 들어가서 노인을 때려 죽였다는 겁니다." 오랜 침묵에 잠겼다. 토비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갈색 장갑 이야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튀어나올 줄 알았지." 벤 아저씨는 놀랄 만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 생각을 여러 각도에서 음미해 보고 있는 듯했다. "즉, 그 사람이...... 뭔가를 봤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하면 필립 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벤 아저씨는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녀가 보았다면 당신도 그렇게 멀리 돌려서 말하지는 않았을 거요. 곧바로 체포했겠지. 그러니까 그녀는 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군. 집안의 누군가가 살인범이다? 이건 좀 놀라운 일인데!" "그렇게 말은 하지만 -- " 하고 재니스가 뜻밖에 끼어들었다. "우리들도 그런 생각을 조금도 안했다고는 할 수 없지요." 헬레나 부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재니스를 바라보았다. "재니스! 무슨 소릴!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어. 너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우리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구나." "잘 들어봐." 벤 아저씨는 입을 열며 빈 파이프를 빨았다. 그는 지금 모두가 여느때처럼 자기의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기를 바랐다. 집안 일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젖혀두고 그 밖의 일로 그가 의견을 말할 때에는 모두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했다. 그는 떫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태도에서는 부드럽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완고한 일면이 보이기도 했다. "이 이상 시치미를 떼고 있어도 별 수가 없어. 물론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지. 빌어먹을!" 돌변한 아저씨의 말투에 다른 식구들은 깜짝 놀라서 앉음새를 고쳤다. "점잖은 집안인 척해 보이는 이 짓은 이젠 집어치우자. 우리들에게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게 바람과 햇빛을 쐬게 하는 게야." "벤!" 헬레나 부인이 소리쳤다. "집은 잠겨 있었어. 문에도 창에도. 도둑이 아니야. 탐정이 아니라도 그런 정도는 알아. 이브 닐이나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한 짓이야." "그럼 내가 혈육의 행복보다도 남의 행복을 더 앞세우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부인은 오빠에게 대들었다. "그렇다면 왜 시치미를 떼고 있지? 왜 이브가 한 짓으로 생각한다고 나서서 말하지 않느냐 말이야?" 하고 벤 아저씨는 끊질기게 말했다. 헬레나 부인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브가 너무 좋은걸요. 그녀는 대단한 부자이고, 그것은 토비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요. 이브가 모리스에게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역시 그 생각을 안할 수는 없군요. 하지 말라는 건 무리지요." "그럼 이브가 했다고 생각하는군?" "모르겠어요, 난!" 헬레나 부인은 울먹였다. "아마 곧 무슨 설명이 있겠지요." 보투르 씨는 차디차고 엄숙하고 자신에 넘치는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조용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서쪽 창 맞은편에 복도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등대 불빛이 선회할 때마다 그 문에도 강한 빛이 비쳐서 더러워진 창의 흔적이 하얀 널빤지 위에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보투르 씨의 대답 소리와 함께 더못 킨로스 박사가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빛이 그를 지나갔다. 박사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으나 그 빛으로 인해서 모두가 노여움을 누르고 있는 무서운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깨달은 박사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온화하고 태평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모두에게 목례를 보내고 나서 그는 방을 가로질러 예심판사에게로 다가가서 프랑스식 악수를 했다. 보투르 판사에게는 고롱 서장 같은 서글서글한 면은 조금도 없었다. "어제 저녁에 만났었지요, 박사."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그 대단히 흥미 있는 목걸이를 갖고 당신이 라 아르프 거리로 떠나기 전에 말이오." "그 뒤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에는 -- 그래,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소만. 어쨌든 여기에 당신의 상대편이 모여 있습니다." 그는 일동에게 손짓을 했다. "자, 시작하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에게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것으로 아는 데까지는 알게 될 테니까요." "서장이 지금 닐 부인을 이리로 데리고 오는데, 괜찮겠습니까?" 하고 박사는 로스 집안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물었다. "물론 좋소." 예심판사가 말했다. "그리고 그 목걸이에 대해서 말인데, 서장 이야기로는 판사님이 두 개 다 가지고 있다던데요?" 예심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랍을 열어서 두 개의 목걸이를 꺼내어 흡묵지 위에 놓았다. 하얀 불빛이 다시 돌아오니 목걸이는 흡묵지 위에서 반짝이는 두 가닥의 빛이 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다이아몬드와 터키석의 목걸이는 얼핏 보아서는 모조품을 가려낼 수가 없었다. 모조품 쪽에는 조그만 표식이 붙어 있었다. "고롱 씨에게 한 당신의 지시에 따라서 부하를 라 아르프 거리에 보내어 모조품을 압수하고 그 출처를 캤소." 판사가 불쾌한 듯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판사는 표식을 건드려 보이고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에 대한 중요한 의미는 이제 와서야 겨우 나도 알게 되었소. 하지만 -- " 판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하튼 오늘은 닐 부인과 코담배 케이스 건에 쫓겨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나, 이 쌍으로 된 목걸이까지는 미처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소." 박사는 돌아서서 방 반대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들은 박사에게 화가 나 있었다. 입 밖에 내지 않는 만큼 더욱 심하게 끓고 있는 그 노여움을 그는 느끼고 있었으나, 어떤 의미로는 오히려 그것이 속이 편했다. 보투르 씨는 거미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등대 불빛은 커다란 흰 파도처럼 벽면을 쓸고 지나갔다. 박사는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 리놀륨 바닥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향해서 돌려놓았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틀림없이 나는 주제넘게 나서고 있습니다." 하고 박사는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왜 주제넘게 나서는 거요?" 하고 벤 아저씨가 물었다. "누군가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어서는 이 사건은 결말이 나지 않지요. 그 갈색 장갑에 대한 것은 이미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좋습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하지요." "누가 끼고 있었는가 하는 것도 말이죠?" 하고 재니스가 말했다. "그렇소." 하고 박사는 말했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모리스 로스 경이 돌아가신 날 오후에서 저녁, 그리고 밤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박사는 말을 계속했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은 대부분은 들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특히 중요한 점입니다. 그날 오후 모리스 경은 여느때처럼 산책을 나갔습니다. 동종 호텔 뒤쪽의 동물원이 즐겨다니시던 코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날 모리스 경은 산책을 나갔다가 호텔의 술집에 들어가서 바텐더나 웨이터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헬레나 부인은 분명히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오빠 쪽을 돌아보았다. 벤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날카로운 눈으로 박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이세요?" 재니스가 둥그런 턱을 쳐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그렇겠지요. 어쨌든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왔으니까. 그 뒤에 하필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근처에서 경은 목격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은 나무에 가려져서 목격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소한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즉 살인의 전주곡인 셈이지요." 헬레나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이 붉어져서 박사를 보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모리스를 살해한 범인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어디서 그런 걸 알게 되었나요?" 재니스가 물었다. "실은, 아가씨, 당신 말에서지요."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당신이 알려고 하던 문제점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는 점에서 어머니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는 덧붙이고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인간의 심리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사소한 일로 인해서 전혀 다른쪽의 일도 알게 되더군요. 어떻든 우선 내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모리스 경은 저녁식사 전에 귀가하셨습니다. 경은 동물원에서 중요한 '만남'이 있기 전부터 바텐더의 표현대로라면 '험악한 눈길'이었던 모양입니다만, 댁에 돌아갔을 때에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가끔 이야기가 있었듯이 창백한 얼굴로 몸까지 떨 정도라고 했습니다. 극장에 가는 것도 싫다고 하고 서재에 틀어박히고 말았습니다. 8시에 다른 가족인 여러분은 극장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것이 틀림없지요?" 벤 아저씨가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대로요. 하지만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는 이유가 뭐요?" "그것이 곧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브 닐과 함께 11시경에 귀가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미술상 베유 씨가 8시 반에 새로 입수한 골동품 건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그 때문에 코담배 케이스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두고 돌아갔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귀가할 때까지는 코담배 케이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틀림없지요?" "그렇소." 벤 아저씨는 인정했다. "닐 부인도 코담배 케이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제 고롱 서장에게서 조서의 증언 내용을 들어보았습니다만, 그것에 의하면 닐 부인은 댁에까지 함께 간 것이 아니고, 토비 씨가 부인댁에까지 바래다 드리고 거기서 헤어진 모양이더군요." 박사는 토비 쪽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 하고 토비가 갑자기 거칠게 소리쳤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겁니까?" "여기까지의 사실에는 틀림이 없겠지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토비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태도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번들거리는 흰빛이 방으로 비쳐 들어와서 정면에서 빛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모두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사가 일어서고 보투르 씨도 따라 일어났다. 세 사람이 들어왔다. 첫번째는 고롱 서장이었다. 두 번째는 회색 머리의 수수한 얼굴을 가진 여자인데, 제복으로 보이는 서지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세 번째는 이브 닐이었다. 회색 머리의 여자 손이 이브의 손목 근처에 가 있었다. 피의자가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서일 것이다. 이브는 도망칠 기색은 없어 보였으나, 그 냉혹한 빛이 낡은 나무 의자를 비치는 순간 온몸을 움츠리고 뒷걸음을 쳤다. 여간수는 이브의 손목을 꽉 잡았다. "저 의자엔 다시 앉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나지막히 말했는데, 박사는 그 억양 속에서 어떤 위험을 느꼈다. "무슨 짓을 해도 좋지만 두 번 다시 그 의자에 앉는 것은 싫어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마담." 하고 보투르 씨가 말했다. "그리고, 킨로스 박사, 당신도 좀 진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물론 그런 걱정은 하실 것 없습니다." 고롱 서장도 이브의 등을 가볍게 다독거려 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당신을 괴롭혀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 좋은 늙은이가 책임지지요. 그리고, 박사, 자네도 나를 골탕먹이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일이 좀더 순조로웠을 텐데 말이야." 박사는 눈을 한참 감고 있다가 다시 떴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군." 박사는 씁쓸하게 말했다. "하루, 아니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지만." 이브는 박사를 보고 웃었다. "별일은 없었어요. 그렇죠?" 그녀는 말했다. "고롱 서장님은 박사님이 약속대로 어김없이 해주실 거라고 하시니 -- 저는 거의 안심해도 좋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 " "그런 말을 간단히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심판사는 의문이 가득한 어조로 쓰디쓰게 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믿든지 자유입니다." 박사는 불쾌한 듯 말했다. 빛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자 이브는 이젠 이런 사건에 자기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 되었다. 고롱 씨가 권한 팔걸이 의자에 앉으면서 그녀는 의례적인 웃음을 띠우며 헬레나 부인, 재니스, 벤 아저씨에게 눈인사를 하고, 토비에게도 웃어 보이고 나서 킨로스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틀림없이 구해 주실 줄 알았어요." 이브는 사실대로 말했다. "상황이 점점 나빠져도 테이블을 꽝꽝 치며, '이 살인마, 자백해.' 하고 소리치더라도 -- " 이브는 문득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박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어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실은 너무 무서워서......" "알았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그런 점이 사실은 사고의 원인이 된 겁니다." "사고?"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게 된 것도 거기에 원인이 있다는 뜻이지요. 부인은 아무나 믿어버립니다. 상대방은 그것을 알고 그 점을 이용한 거지요. 나를 믿은 것은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그것과 이것과는 문제가 다르지요." 박사는 여러 사람들 쪽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나는 좀 준엄한 심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별로 기분좋은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만, 이대로 계속해도 되겠지요?" --------------------------- 제 18 장 --------------------------- 누군가의 의자가 리놀륨 바닥 위에서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좋소, 계속하시오!" 보투르 씨가 결정을 내리듯이 말했다. "범행이 있었던 날 밤에 일어난 일들을 죽 훑어보겠습니다만 아주 중요한 일이어서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11시에 극장에서 돌아온 시점까지였습니다." 박사는 말하고서 토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은 당신의 약혼자를 그녀의 집 문앞까지 바래다 주고, 그 다음에는 가족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다고 했지요?" 재니스 로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밑으로 내려오셔서 코담배 케이스를 보여주셨습니다." "예, 그렇군요. 어제 고롱 서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경찰은 범행 다음날 그 파편을 모아서 1주일이나 걸려 원상회복을 위한 작업을 한 끝에 겨우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놓은 모양입니다." 토비는 기침을 하면서 고쳐앉았다. 희망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나하나 붙였나요?" 그는 물었다. "이미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로스 씨." 고롱 서장이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박사의 손짓에 따라서 예심판사는 다시 책상 서랍을 열고 손바닥에서 금방이라도 산산조각이 날까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조그만 물건을 꺼내어 박사에게 건네주었다. 모리스 로스 경이 이 꼴을 보았다면 아마 크게 한숨지었을 것이다. 하얀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는 장미빛 마노의 은은한 빛이 떠올라 글자와 바늘에 박힌 좁쌀만한 다이아몬드가 반짝였고, 가장자리와 용의 머리는 순금으로 빛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산뜻하지 못하고(이런 말을 사용해도 괜찮다면) 천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모양이 일그러진 듯한 느낌이었다. 박사는 그것을 여러 사람 앞에 내밀고서 뒤집어 보였다. "아교로 붙인 겁니다." 하고 그는 설명했다.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은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시력이 형편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젠 뚜껑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것을 망가지기 전에 보았겠죠?" "보았습니다." 토비는 무릎을 치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깨어지기 전에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박사는 코담배 케이스를 보투르 씨에게 돌려주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11시 조금 지나서 모리스 경은 서재로 갔습니다. 모처럼 손에 넣은 보물인데, 가족들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기분이 상했지요. 다른 사람들은(내 생각입니다만) 모두 각자의 침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토비 씨, 당신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인 1시에 당신은 일어나서 아래층 응접실로 가서 이브 닐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토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눈으로 흘끔 이브를 보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에게 무언가 알려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브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그는 콧수염만 하릴없이 비틀고 있었다. 박사는 토비의 시선을 좇고 있었다. "당신은 전화로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지요?" "예?"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토비의 시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일일이 기억해 두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음, 잠깐만요,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손으로 입을 문질렀다. "그날 밤 본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죠." 이브는 문득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창녀를 소재로 한 연극이었어요. 토비는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하더군요. 그때에는 그런 연극조차도 저 사람에게는 괴로웠던 모양이에요." "뭐라고?" 토비는 되도록 치미는 울화를 참으려고 애쓰면서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처음 약혼했을 때에 나는 완전무결한 남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었지? 아닌가? 그런데도 어제 저녁 내가 흥분해서 잘 생각지도 않고 떠들었던 말 몇 마디를 언제까지나 마음에 새겨둘 셈이오?" 이브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박사는 재촉했다. "당신은 그날 밤에 본 연극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밖에는 없었습니까?" "허, 참, 그런 것을 물어서 뭘 하자는 겁니까?" "중요한 일입니다." "참 -- 피크닉인가 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 피크닉을 갈 예정이었거든요. 물론 가지 못하게 되긴 했지만. 그리고 아버지가 또 골동품 하나를 조금 전에 손에 넣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골동품이 어떤 것인가는 말하지 않았지요?" "그렇습니다. 말 안했습니다." 박사는 토비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은 내가 고롱 서장에게서 들은 대로 말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당신은 2층 침실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1시 조금 지난 시각이었죠. 2층에 가보니 아버님이 아직 깨어 있었습니다. 서재의 문 밑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아버님에게 방해가 될까 봐 서재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리스 경이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 있는 버릇을 갖고 있진 않았지요?" 헬레나 부인이 기침을 하고 토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는 밤 늦게 잠자리에 든다고 해도 다른 집과는 달라서 그렇게 늦지는 않아요. 모리스는 대개 1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었지요."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부인께 묻겠습니다. 부인은 1시 15분에 일어나서 남편의 서재에 갔었지요. 그만 주무시라고 말하고 코담배 케이스를 사들인 데 대해서 잔소리를 좀 해줄 생각이었다고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보니 샹들리에는 꺼져 있고, 탁상용 스탠드에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남편께서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는데, 부인은 근시라서 곁에 가서 피를 볼 때까지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셨습니다." 헬레나 부인의 눈에 눈물이 넘쳤다. "그런 것까지 되풀이해야 하나요?"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박사는 부인에게 말했다. "비극에는 눈을 감을 수가 있지만, 사실을 외면하고 지나갈 수는 없지요. 경찰이 달려왔습니다. 토비 씨와 재니스 양, 두 분은 길을 건너 닐 부인을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총경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지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기서 그 이베트 라투르라는 여장부에게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베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경찰이 찾아오는 소동이 벌어져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 침실에서 나왔습니다. 여기가 증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말하자면 단두대의 칼날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베트는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온 닐 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인이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피묻은 가운 차림으로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서 곧 욕실에서 피를 씻어내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시각은 -- 거의 1시 반이었습니다." 예심판사는 불쑥 손을 들었다. "잠깐." 하고 날카롭게 말하고는 책상 모서리를 돌아서 다가왔다. "새로운 증거라는 것을 아무리 이리저리 맞추어 보아도 나로서는 당신이 노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없군요." "모르시겠다고요?" "모르겠소. 여하튼 닐 부인의 중언과 그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니까요." "그렇습니다. 1시 반에 말입니다." 박사는 지적했다. "흠! 1시 반이건 몇 시 건간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지 않겠소, 박사?" "좋습니다." 하고 박사는 책상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또다시 이어맞춘 코담배 케이스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에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토비 앞에 서더니 정말 진기한 물건을 다 보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토비 씨, 당신의 증언 중에서 정정하고 싶은 부분은 없습니까?" 토비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더니, "나 말입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지요? 사랑하고 있다고 그처럼 자신 있게 말하던 여성을 구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고칠 생각이 없다는 겁니까?" 뒤쪽에서 고롱 서장이 나지막하게 킬킬 웃었다. 보투르 예심판사는 책망하듯이 서장을 노려보고는 슬금슬금 책상 모서리를 돌아서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걸어갔지만, 위압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토비 곁으로 다가가서 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대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생각하오?" 토비가 무서운 기세로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나자 의자가 리놀륨 바닥에 나뒨굴었다. "거짓말이라고요?" "닐 부인에게 전화를 걸고 2층에 올라가서 아버님의 서재 앞을 지나다가 문 밑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았다고 당신은 증언했소." 박사가 말했다. 고롱 서장이 끼어들었다. "어제 킨로스 박사와 둘이서 서재를 조사하러 갔을 때 박사는 문을 보고 놀라는 듯했습니다." 서장은 모두에게 설명했다. "그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몰랐지요. 그런 세밀한 부분은 그만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이라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 문은 -- 잘 기억을 더듬어 보시지요 -- 푹신푹신한 양탄자와 문 밑바닥 사이에 틈이 너무 없어서 문을 여닫을 때마다 양탄자의 보푸라기가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서장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팔을 수평으로 해서 앞뒤로 움직여 가며 모두에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상태를 생각나게 해주었다. "그 문의 밑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요." 서장은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여 말했다. "더구나 토비 씨의 거짓말은 이것만이 아니오." "그렇소." 예심판사가 맞장구를 쳤다. "두 개의 목걸이에 대해서도 말하기로 할까요?" 더못 킨로스 박사는 이 두 사람처럼 덫에 걸린 먹이를 희롱하는 취미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누구든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즐길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브의 얼굴에 넘치고 있는 표정을 보았을 때에는 박사도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갈색 장갑을 끼고 있었던 사람은......" 이브의 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렇소." 박사가 말했다. "당신의 약혼자 토비 로스였습니다." --------------------------- 제 19 장 --------------------------- "조금도 신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토비 씨에게는 프뤼 라투르라는 귀여운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그 솜씨 좋은 하녀 이베트의 동생이지요. 프뤼 양은 값비싼 선물을 해달라고 졸라대며, 만일 주지 않을 때에는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고 소란을 피우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토비 씨의 봉급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수집품 중에서 다이아몬드와 터키석 목걸이를 훔쳐낼 결심을 한 겁니다." "믿을 수 없어요." 헬레나 부인의 신음소리는 흐느낌처럼 들렸다. 박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훔쳐냈다'고 하는 표현은 적당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요. 토비 씨가 스스로 말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모르게 목걸이를 모조품과 바꾸어놓고, 프뤼 양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임시방편의 선물로서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박사는 예심판사의 책상으로 걸어가서 두 개의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이 가짜 목걸이를 만들게 한 장소는......" "라 글루아르 거리 폴리에 상점이오." 고롱 서장이 계속해서 말했다. "폴리에 씨는 그 목걸이를 주문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기꺼이 증언해 줄 겁니다." 토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서슴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보투르 씨는 그가 문 쪽으로 가는 줄 알고 큰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토비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서류 캐비닛이 세워진 곳까지 가서 그는 모두에게 등을 보이고 그 자리에 섰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인데 -- " 박사는 목걸이 중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이 가짜 목걸이는 프뤼 양의 반짇고리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을 압수해서 출처를 캐보는 것도 헛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나는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고롱 서장에게 몇 자 적어놓았지요. 결과는 물론 토비 로스가 그녀에게 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말을 들어도 저는 조금도 놀랍지 않아요." 의외로 이브가 입을 열었다. "놀랍지 않다고요?" 고롱 서장이 강한 어조로 되물었다. "뜻밖이 아니에요. 어젯밤 그곳에서, '당신이 그 여자에게 주었지요?' 하고 묻자 토비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 여자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더군요. '탄로나지 않도록 조심해.' 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 뜻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요." 이브는 갑자기 눈 언저리를 손으로 눌렀다. 얼굴이 상기되어 빨갛게 되어 있었다. "프뤼는 빈틈없는 여자예요. 토비가, '이 목걸이 어디서 났지?' 묻자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입을 다물고 말더군요. 하지만 어째서 가짜 목걸이 같은 것을 선물했을까요?" "진짜를 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박사가 대답했다. "필요가 없다니요?" "모리스 경이 돌아가셨으니까 이 훌륭한 청년은 유산에서 언제든지 프뤼에게 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헬레나 부인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고롱 씨와 보투르 씨는 그 소리로 한결 극적인 흥미를 느꼈는지 부인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벤자민 필립은 일어나서 동생의 의자 뒤로 돌아가서 두 손을 동생의 어깨에 올려놓고 위로했다. 박사는 드디어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철썩 하고 내리치는 소리조차 들리는 듯했다. "그는 아버지도 자기 못지않게 돈이 옹색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하고 박사는 계속했다. "그것은 그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을 테지?" 고롱 씨가 말했다. "틀림없어. 프뤼 양은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직접 증언한 겁니다. 하긴 이브 닐과의 결혼 발표 이후로 계속 그를 들볶고 있었지요. 분명히 그 여자는 -- 다소 자신을 잃고 마음이 약해질 때에는 -- 왜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대들면서 협박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프뤼 양이 하지 않았다면 아마 언니인 이베트가 뒤를 이어서 세상 체면을 중하게 여기는 훅선 은행의 높은 양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청년신사를 협박했을 것이 분명하지요. 프뤼 양은 점잖은 아가씨라고 고롱 서장도 보증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목걸이라도 안겨주면 프뤼 양은 만족하겠지 하고 토비 씨는 생각한 겁니다. 진짜 목걸이로 말이지요. 여하튼 10만 프랑은 나가는 물건이니까요. 그런데 가짜를 만들기는 했는데 막상 바꿔치기할 단계에 오니 그는 역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왜지요?" 이브가 조용히 물었다. 박사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야 그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소리를 듣고도 토비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본 그 연극 탓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이것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어쨌든 무엇인가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인 1시에 그는 약혼자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내 상상이 적중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기 장래의 행복은 목걸이를 훔쳐내어 프뤼 라투르 양과 손을 끊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진지했지요. 그는 그것이 신성한 사명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지요. 여러분, 이건 빈정거림이 아닙니다." 박사는 예심판사의 책상 옆에 선 채 말을 잠시 멈추고서 숨을 돌렸다. "바꿔치기는 간단했을 겁니다. 그가 알고 있기론 아버지가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 있지 않으니까요. 서재는 캄캄하고 아무도 없습니다. 가만히 숨어 들어가서 문 바로 왼쪽의 골동품 진열장을 열고 목걸이를 가짜와 바꿔놓고 그 다음에는 기분좋게 돌아오면 되는 것이지요. 1시 조금 지나서 그는 실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추리소설처럼 그는 가족이 다같이 쓰고 있는 갈색의 작업용 장갑을 꼈습니다. 가짜 목걸이는 이미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지요. 발소리를 죽이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닫혀진 문 밑으로 불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방안은 당연히 캄캄하고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캄캄하지도 않았고, 또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던 겁니다. 이야기 중에 몇 번 나온 적이 있습니다만 모리스 로스 경은 옳지 않은 일은 무척 싫어한 분이었습니다." "침착해, 헬레나!" 벤 아저씨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헬레나 부인은 오빠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내 아들이 아비를 죽였다는 겝니까?" 여기서 비로소 토비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기어든 방 한구석에서 등대의 불빛이 쓰다듬듯이 지나가자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토비의 뒤통수에 동전만하게 머리가 벗겨진 자국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그제서야 겨우 새로운 사태를 짐작하게 되었는지 깜작 놀라고 있는 듯했다. 그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드디어 모두가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미친 듯이 그들 앞으로 튀어나왔다. "살인이라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소." 고롱 서장이 말했다. "농담은 집어치우시지!" 토비는 반박하면서 모두를 쫓아버릴 듯한 기세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설마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지 않은가요?" 박사가 물었다. "그렇지 않다니? 말도 안 돼! 자기 아버지를 죽이다니!" 아연해진 토비는 이 문제를 추궁할 틈도 없이 또 하나의 성가신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 지긋지긋한 '갈색 장갑'에 대한 얘기는 어제 저녁에 처음 들었습니다. 이브는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프뤼의 집에서 갑자기 끄집어냈어요. 일이 그렇게 된 거란 말입니다 !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나를 골탕먹이려는 모양인데, 어제 저녁 이브에게도 말했고, 오늘도 모두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갈색 장갑'은 아버지가 죽었든 누가 죽었든간에 살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그래도 모르겠어요?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에 아버지는 이미 죽어 있었단 말입니다!" "결국 잡았군!" 박사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그 소리는 신경을 휘저었고, 귀까지 멍멍하게 했다. 토비는 뒷걸음쳤다. "잡았다니, 무슨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당신은 역시 갈색 장갑을 끼고 있었군?" "글쎄......그런 셈이죠." "그래, 당신은 도둑질을 하려고 방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의자에 앉은 채 죽어 있더라는 이야기인가요?" 토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도둑질이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당신이 제멋대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도둑질은 질색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이브를 차지할 무슨 방법이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그런가요, 토비?" 이브는 정말로 황송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훌륭하군요. 당신은 정말로 훌륭해요!" "아니, 도덕적인 논쟁은 접어두고 -- " 박사는 책상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만을 말하시지요." 토비는 정말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말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나 동생 앞에서 기왕 이런 창피를 당했으니까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요. 좋아요. 나는 숨어 들어갔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브와 전화를 끝낸 뒤에 나는 바로 2층으로 갔어요. 다들 자는지 집안은 조용했고, 가짜 목걸이는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책상 스탠드가 켜져 있는데, 아버지는 등을 이쪽으로 돌리고 앉아 있더군요. 내가 본 것은 그것뿐입니다. 어머니처럼 나도 근시거든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 " 토비는 눈 위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그 특유의 손짓을 하며 눈을 껌벅거렸다. "하긴,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 여하튼 안경 없이는 일하기가 어려워서 은행에서는 언제나 끼고 있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어쨌든 방에 들어선 순간 불은 켜져 있었고, 아버지까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지요. 문을 닫고 그대로 도망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생각했지요. 왜 계획대로 하지 않는 거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잖아? 계획은 이미 짜여져 있어. 그런데도 질질 끌고만 있어. 지금 큰맘 먹고 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자칫하면 머리가 돌아버릴는지도 몰라 ! 그렇게 생각했죠, 왜 못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귀가 어둡고, 지금은 코담배 케이스에 정신이 팔려 있어. 목표인 진열장은 입구 바로 옆이니까 조금만 손을 뻗어 목걸이를 바꾸기만 하면 끝나는 거야. 누가 알 것인가? 해내고 나면 푹 잠들게 될 것이고, 라 아르프 거리의 그 작은 악마는 잊어버릴 수가 있어 -- 나는 손을 뻗었죠. 진열장에는 자물쇠도 채워져 있지 않더군요. 열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걸이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토비는 입을 다물었다. 등대의 흰 불빛이 방안을 한 바퀴 돌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토비의 절박한 모습에 모두 더할 수 없이 긴장되어 주의를 온통 토비에게만 집중시키고 있었다. "유리 진열장에서 오르골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토비가 말했다. 그리고는 또 적당한 말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크고 무거운 오르골인데, 나무와 주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조그만 바퀴가 달려 있지요. 진열장 위에 목걸이와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겁니다. 손에 스친 순간 그건 죽은 사람도 눈을 뜰 만큼 큰소리를 내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지요. 아무리 아버지의 귀가 어둡기는 하지만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죠. 그뿐이 아닙니다. 오르골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살아 있는 것처럼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존 브라운의 시체' 노래가 흘러나왔던 겁니다. 한밤중이라서 스무 개의 오르골에서 나는 소리만큼이나 요란했죠. 나는 목걸이를 손에 쥔 채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돌아보았지만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꼼짝하지 않더군요." 토비는 또 꿀꺽 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옆으로 다가가서 보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천정의 불을 켜보았지만 틀림없더군요. 나는 목걸이를 그대로 들고 있는 채였죠. 장갑에는 피가 묻지 않았는데, 그때 목걸이에 피가 묻은 것이 분명해요. 아버지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잠자는 듯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동안 오르골은 '존 브라운의 시체'를 계속 울리고 있었죠. 우선 오르골을 꺼야 했기 때문에 나는 달려가서 그것을 집어들고는 진열장 안에 처넣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섣불리 목걸이를 바꿔치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경찰이 관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강도의 짓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일 내가 10만 프랑이나 하는 목걸이를 프뤼에게 주고 그것을 경찰이 알게 되고 진열장의 가짜가 발각이 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죠. 누구든지 그럴 겁니다. 방안을 둘러보니 난방용 기구걸이에 부집게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려 있더군요. 다가가서 들고 살펴보니 피와 머리칼이 엉켜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자리에 걸어놓고 나니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졌지요.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목걸이를 진열장에 도로 올려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미끄러져서 선반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선반이 비스듬히 경사져 있는 것을 기억하시겠죠?)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다만 방을 나올 때에 천정의 샹들리에를 꺼두는 정도의 분별은 남아 있었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토비의 목소리를 점점 가늘어졌다가 사라졌다. 예심판사의 사무실에는 악의 그림자가 가득차 있었다. 더못 킨로스 박사는 예심판사의 책상 끝에 걸터앉은 채 토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냉소라고도 감탄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그 이야기는 아직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겠죠?" "안했습니다." "왜 하지 않았지요?" "오해받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한 일의 동기 같은 건 알아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겠군. 닐 부인이 얘기했을 때 아무도 그녀의 동기를 이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와서 당신 말을 믿으라는 건,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좀 무리가 아니겠소?" "그만해 두시지요!" 토비는 공소해진 태도로 말했다. "그 빌어먹을 건너편 창문에서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흘끔 이브 쪽을 보았다. "이브 역시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여하튼 '갈색 장갑' 이야기도 어제 저녁 갑자기 튀어나온 거니까요." "하지만 당신도 상식에 벗어난 짓을 하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얘기했다면 약혼자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토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모르겠습니까? 잘 들어봐요. 당신은 1시에 닐 부인에게 전화를 하고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서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발견했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 부인이 범인이라면 살해한 것은 1시 이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1시에 그 범행을 끝마치고 침실로 돌아가서 당신의 전화를 받았으니까." "그렇겠지요." "1시에 범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그녀가 어떻게 다시 집에서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1시 반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어떻게 된 애길까요?" 토비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어 버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박사는 얼핏 듣기에는 되도록 부드럽게 말을 했다. "두 번이라는 것은 좀 지나칩니다. 겁먹은 살인자가 범행을 끝내고 1시 반에 몰래 돌아왔습니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부랴부랴 피를 씻어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베트가 자세하게 진술했습니다. 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30분 전에 모리스 경을 죽여놓고 다시 나가서 한 번 더 살인을 했다는 말인가요? 생각해 보시지요, 처음 범행을 하고 다시 나갈 때에는 옷쯤은 갈아입을 수도 있지 않겠소?" 박사는 책상 끝에 느긋하게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보투르 씨?" 하고 그는 물었다. 헬레나 부인은 잡고 있는 오빠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그런 데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들에 대한 것입니다." "어머, 저는 달라요." 재니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빠가 라 아르프 거리의 그 아가씨와 불결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아까 스스로 인정한 그런 짓을 했다면 우리들은 정말로 이브에 대해서 더러운 태도를 취한 거예요!" "입 다물어, 재니스! 만일 토비가 네가 말한 것처럼......" "자기 스스로가 인정했어요, 엄마!" "그렇다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나 역시 이브에게 모질게 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이브가 결백한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킨로스 박사님, 토비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모리스를 죽인 건 아니겠지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한 짓이지?" 벤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했습니다." 하고 박사는 인정했다. "우리는 가까이 온 셈입니다." 이 사이에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이브뿐이었다. 하얀 불빛이 다시 돌아와서 모두의 일그러진 그림자를 벽에 그려 놓고 지나갔다. 그녀는 앉은 채로 구두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한 번 이야기가 어떤 대목에 이르렀을 때 뭔가 생각이 적중했다는 듯이 의자의 팔걸이를 힘있게 잡았다. 눈 아래 희미한 그늘이 지고 아랫입술을 꽉 물어서 이빨 자국이 하얗게 보였다. 그녀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굴을 들어 박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잊지 말라고 하신 것을 전 잊지 않고 전부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브는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나로선 당신에게 설명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과도." "아니에요!" 하고 이브는 말했다. "아니에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가 오늘 조사에서 한 이야기가 왜 나쁜 결과를 가져왔는지 지금에 와서야 겨우 알았어요." "저,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 " 재니스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슨 일인가요?" "대답은 범인의 이름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하!" 하고 고롱 서장이 중얼거렸다. 이브는 책상 위에 놓인 채 박사의 손 옆에서 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9일 동안은 마치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어요." 하고 이브는 계속했다. '갈색 장갑'의 악몽입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것이 어이없게도 토비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 " "고맙군." 당사자인 청년이 중얼거렸다.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그런 식으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해 버리니까 다른 일은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도 그만 사실이라고 생각해 버리게 되지요. 자기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가끔 너무 지쳐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사실 그대로가 생각나게 되는 거죠." 헬레나 부인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이지 그런 것을 두고 심리학이니 프로이트적이니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지만, 제발 부탁이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가르쳐 줘요." "코담배 케이스에 대한 거예요." 이브가 대답했다. "그게 어떻게 됐는데?" "범인이 박살을 내고 말았지요. 그 뒤에 곧 경찰이 파편을 모아서 다시 조립하기 위해서 갖고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것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 !" 하고 재니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려고 했다. 박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코담배 케이스를 보십시오. 큰 것은 아닙니다. 모리스 경이 기록한 설명서에 의하면 직경이 2인치 4분의 1입니다. 손에 들고 가까이에서 보면 이것은 뭐 같습니까? 시계와 똑같습니다. 사실 모리스 경이 가족 여러분에게 처음 보여주었을 때, 여러분은 시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죠?" "그렇소." 벤 아저씨는 시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코담배 케이스로는 보이지 않지요?" "그렇군." "닐 부인은 범행 전에 이것을 본 적도, 설명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럼 15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보았다는 닐 부인은 대체 어째서 이것이 코담배 케이스인 줄 알았을까요?" 하고 박사가 말했다. 이브는 눈을 감았다. 고롱 서장과 예심판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것이 내 대답의 전부입니다." 박사는 이어서 "남은 것은 암시의 힘입니다." "암시의 힘?" 헬레나 부인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이 살인사건은 대단히 지능적인 범죄입니다. 이브 닐 부인을 제2의 희생자로 만들고 범인은 모리스 로스 경 살해에 대한 철벽 같은 알리바이를 준비한, 지극히 교묘하게 계획된 범죄였던 것입니다. 범인은 정말로 성공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럼 범인은 누굴까요, 여러분은 알고 싶으시겠죠?" 킨로스 박사는 책상 끝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서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등대의 하얀 빛이 막 돌아오는 순간에 확 문을 열었다. "참으로 이 사나이는 병적이라고 할 만큼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고, 우리가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서 스스로 증언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자, 들어오시지요."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문 바로 앞에는 눈을 부릅뜬 네드 애트우드의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 제 20 장 --------------------------- 그뒤 꼭 1주일이 지난 어느 맑게 갠 늦은 오후, 재니스 로스 양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에게 나쁜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스스로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는 목격자가 실은 범인이었다는 이야기로군요. 들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범죄 아닌가요?" "네드 애트우드로서는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더못 킨로스 박사가 설명했다. "그는 1840년에 런던에서 일어난 윌리엄 러셀 경의 사건을 힌트로 그것을 역이용한 겁니다. 그가 노린 것은 먼젓번에도 말했듯이 모리스 경 살해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었고, 이브가 그의 알리바이가 되고 증인이 될 예정이었던 거지요. 더구나 어쩔 수 없이 끌려나간 증인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럴 듯해지는 겁니다." 이브는 몸서리를 쳤다. 박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기까지가 그의 최초의 계획이었지요. 설마 토비 로스가 갈색 장갑을 끼고 그 와중에 뛰어들 줄은 네드 애트우드로서도 예상치 못했겠지요 -- 덕분에 그에게는 알리바이용의 증인뿐 아니라 죄를 대신 감당해 줄 희생자까지 손에 넣은 셈이 되었지요. 그는 토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운 환성을 올렸을 것이고, 아울러 너무 이야기가 잘 풀려나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편, 자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뇌진탕을 일으키게 되리라고도 예상치 못했겠지요. 더구나 그로 말미암아 결국 그의 범죄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겁니다. 한마디로 운명은 어느 쪽에도 공평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 말씀해 주세요." 이브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요. 부탁이에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브, 킨로스 박사, 재니스, 벤 아저씨, 이렇게 네 사람은 이브의 집 뒤뜰의 높은 당장과 밤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부근에서 차를 마신 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테이블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잎이 어렴풋이 누른 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구나 -- 하고 더못 킨로스는 생각했다. 이제 내일은 런던으로 돌아가는 날이군.) "그래요, 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보투르 예심판사, 고롱 서장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지난 1주일 동안 계속 사건 전체를 검토해 보았지요." 불안해 하는 이브의 얼굴을 보고 박사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싫었다. 벤 아저씨가 중얼중얼 끼어들었다. "박사, 당신은 계속 입이 너무 무거웠소이다." 라고 말하고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분명하게 질문했다. "지금도 난 모르겠는데, 대체 그 사람이 모리스를 죽인 동기가 뭐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이브도 말했다. "왜 그랬죠? 그 사람은 모리스 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죠?"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박사가 대답했다. "깨닫지 못했다고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박사는 등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포갰다. 그리고는 메릴랜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 점에 집중하더니 화가 난 듯한 날카로운 얼굴이 되고 여느때보다도 주름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그 표정을 숨기면서 이브 쪽으로 미소를 보냈다. "우리들이 찾아낸 것을 몇 가지 생각해 보시지요. 애트우드와 결혼해서 이 집에 살고 있을 무렵 -- " 하고 말하자 이브의 기가 꺾이는 것을 박사는 느꼈다. "당신은 그때까진 로스 집안과의 접촉이 없었지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 경에 대해서는 아는 체한 것이 몇 번인가 있었지요?" "예, 있었어요." "당신이 애트우드와 함께 있을 때 그 노인은 난처한 듯한 얼굴로 당신네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말입니다, 네드 애트우드와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겁니다." 이브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쳐앉았다. 뜻하지 않은 예감과 번쩍 떠오른 추측이 그녀의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박사는 추측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토비 로스와 결혼약속을 한 뒤에도 모리스 경이 애트우드에 대한 것을 멀리 돌려서 물어본 적이 꼭 한 번 있었다고요? 그러나 경은 곧 혼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는 묘한 얼굴을 하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지요? 그래, 부인은 애트우드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었나요? 오늘 이 시간까지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의 과거나 출신 같은 것에 대해서 뭐라도 들은 것이 있습니까?" 이브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이상하군요. 그 살인사건이 있었던 날 밤 저도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거든요." 박사는 재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겨우 알아차린 듯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아연해 있었다. "아가씨, 당신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못 되지만, 가끔 어떤 계기로 기억이 되살아나면 어디서 그 사람을 보았는지 분명하게 기억해 낸다고 했지요? 형무소 관계의 일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트우드와 그전에 만난 것을 아버지가 기억해 낸 정확한 날짜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만 무엇을 기억해 냈었는가는 압니다. 애트우드는 원즈워즈 형무소에 복역중 모범수로 있었는데, 어느 날 탈옥해 버린 겁니다. 중혼(重婚)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지요." "중혼이라고요?" 이브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항변은 하지 않았다. 저녁 노을이 비낀 잔디밭을 밟으며 다가오는 네드의 모습이, 그리고 그 웃고 있는 얼굴까지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듯 상상 속에 떠올랐다. "그는 색마 패트릭 마혼 (영국인으로, 1924년 연상의 애인을 도끼로 살해하고 처형되었음) 같은 사나이였던 것이지요." 킨로스 박사는 계속했다. "여자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이 있는 남자죠. 영국은 되도록 멀리하고 유럽을 방랑하면서 여기저기서 좋지 않은 장사에 손을 대어 돈을 벌기도 하고 빚을 지기도 하며 그 상대는 -- " 박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여하튼 대강 짐작은 되겠지요? 당신은 애트우드와 이혼했지만 사실은 이혼이라고 할 수 있을지 -- 당신은 법률적으로는 미혼이니까요. 또한 덧붙여 말해 두겠습니다만, 애트우드라는 것도 본명이 아닙니다. 언젠가 당신도 그의 기록을 보게 될 겁니다. 어떻든 그는 소위 그 이혼이라는 걸 하고 난 뒤에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당신을 되찾겠다고 떠벌리고 다녔고, 또 사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토비 로스와 약혼을 해버렸지요. 모리스 경은 그 약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만족했지요. 실제로 경은 기뻐했습니다. 그 결혼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냥두지 않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는 재니스 양과 필립스 씨는 아시겠지만......" 한동안 그들은 말이 없었다. "아, 맞았소." 벤 아저씨는 파이프를 십으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언제나 이브 편이었어." 재니스는 이브를 보았다. "나는 당신에게 좀 심하게 했지요." 갑자기 재니스는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빠가 당신에게 그렇게 제멋대로고 비겁한 남자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얼마든지 욕해 줄 거예요. 우리 오빠라도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정말로 의심한 적은 없었다고요......" "만일 이브에게 전과라도 있다면 하고 말했던 때도 그랬습니까?" 하고 박사가 싱긋 웃었다. 재니스는 박사를 보고 혀를 쏙 내밀었다. "하지만, 아가씨, 당신은 단서를 안겨주었습니다." 하고 박사는 계속했다. "아가씨가 말하던 피니스테르나 매콘클린 같은 사나이의 이야기는 이번 사건과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줄거리였거든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는 되풀이된 겁니다. 하긴 당신이 그것을 틀린 방향으로 생각해 버렸다고 해도 그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자, 네드 애트우드가 라 방들레트에 돌아와서 동종 호텔에 묵은 일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겠죠? 모리스 경은 여느때처럼 오후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동종 호텔 안에 있는 술집이었습니다. 술집 안에는 누가 있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네드 애트우드가 거기에 있었는데, 세상의 소문이 어떻든 꺼릴 것도 없이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누라를 도로 찾을 테니 두고보라고 떠벌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재니스 양, 당신은 애트우드가 모리스 경을 만나서 무슨 말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요?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할 말이 있는데 밖으로 좀 나가지 않겠소?' 하는 모리스 경의 말에 애트우드는 영문을 모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애트우드는 노인이 자기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때 그가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는 짐작이 갈 줄 압니다. 두 사람은 동물원을 걸었습니다. 모리스 경은 온몸을 몹시 떨면서 그전에 피니스테르에게 말한 그대로 선언했던 겁니다. 기억납니까?" 재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때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24시간의 유예를 줄 테니 어디로든 달아나게. 다만 시간이 다 되면 자네가 도망을 갔든 안 갔든 자네의 지금의 생활과 그 주변, 가명 등을 런던 경시청에 통보하겠네.'" 박사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다시 등의자에 깊숙히 기대어 앉았다. "애트우드에게 그것은 날벼락이었지요. 되찾을 것으로 확신했던 아내도 이젠 되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느긋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자칫 잘못하면 형무소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니까. 맹수의 우리 앞을 지나 공원 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애트우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때 그의 가슴속에 오간 생각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무섭고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를 형무소로 밀어넣으려 한 겁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리스 로스 경과는 평소에 인사도 없이 지내온 사이지만 보뇌르 별장의 가족들의 습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마주보는 집에서 살아왔으니까요. 모리스 경은 가족들이 잠자리에 든 뒤에도 혼자 서재에 남아 있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습니다. 이브와 함께 길 건너 서재를 바라본 적이 수없이 많았으니까요. 서재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더운 여름철에는 커튼을 치지 않는다는 것, 모리스 경이 앉는 장소, 문의 위치, 난방용 기구를 놓아두는 장소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성맞춤이었던 것은 그가 이브의 집 현관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줄 압니다만, 그 열쇠는 보뇌르 별장의 현관에도 꼭 맞는 열쇠였으니까요." 벤 아저씨는 파이프의 손잡이로 이마를 긁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구먼. 증거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박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만 꼭 듣고 싶으십니까?" "예, 꼭요!" 이브가 소리쳤다. "애트우드는 일단 하려고 마음을 정했으니 당장 행동으로 옮겨 모리스 경의 입을 영원히 막아놓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스캔들을 겁내는 모리스 경은 그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트우드는 추측했고, 사실도 그대로였던 겁니다. 하지만 만일을 생각해서 철저한 알리바이를 준비해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동물원을 걸으면서 교활하고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는 10분 동안에 알리바이 계획을 짜낸 거지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도 알 줄 압니다. 애트우드는 가족인 여러분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극장에서 돌아왔을 무렵, 그는 데 상주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요. 이브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여러분들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두 잠자리에 들고 커튼을 치지 않은 서재의 창문을 제외한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서재 커튼이 열려 있는 것은 마음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실은 그것도 그의 계산에는 분명히 들어 있었으니까요." 재니스는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묻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길 반대쪽에서 목격할 위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길 반대쪽 집이라면 어느 집 말인가요?" 박사가 되물었다. "예, 저는 알아요." 이브가 말했다. "우리집에서는 언제나 커튼을 쳐놓고, 이웃의 두 집은 철이 지나서 요즘은 이미 비어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박사가 맞장구를 쳤다. "고롱 서장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다시 애트우드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젠 행동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열쇠로 모리스 경의 집 현관을 열었습니다......" "몇 시쯤일까요?" "20분 전 1시쯤이겠지요." 박사의 담배는 저 혼자 타들어가서 누런 꽁초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것을 땅바닥에 버리고 뒤축으로 밟아버렸다. "내 추측으로 애트우드는 난방용구 걸이에 부집게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서 뭔가 소리나지 않는 흉기를 가지고 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요. 부집게는 제자리에 있었으니까요. 그가 나중에 이브에게 한 말로 미루어보아 모리스 경의 귀가 어두운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부집게를 쥐고는 뒤에서 다가갔습니다. 경은 책상 앞에 앉아서 새로 손에 넣은 보물을 살펴보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눈앞의 메모지에는 커다란 장식용 글자로 '시계 모양의 코담배 케이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살인자는 흉기를 들어 내리쳤습니다. 일격을 가하고 난 다음에는 그만 미친 듯이 계속 내리쳤던 겁니다." 네드 애트우드를 잘 알고 있는 이브에게는 그 광경이 눈에 선했다. "한 번은 손이 빗나간 탓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 그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되지만 -- 값비싸 보이는 그 골동품을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애트우드는 자기가 때려부순 물건이 궁금해졌겠죠. 밑에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은 '코담배 케이스'라고 쓰인 커다란 글씨였습니다. 메모지에는 핏방울이 튀어 얼룩이 생기기는 했지만, 글자는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 글자가 그의 눈을 아프게 찌른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그 글짜는 그만큼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지요. 그것은 여러분도 보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것 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만 -- " 박사는 이브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애트우드는 그날 밤 어떤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틀림없이 보풀이 일고 거친 천으로 된 검은색 양복이었어요. 천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박사는 말했다. "그 옷입니다. 코담배 케이스를 박살을 냈을 때 작은 조각들이 튀면서 윗도리에 붙은 겁니다. 당시에는 그도 몰랐겠지요. 나중에 그것이 우연히 당신의 흰 레이스 가운에 묻게 된 겁니다. 침실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서 그가 당신에게 덤벼들었을 때 그랬겠죠. 당신도 그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고. 그래서 그런 것이 붙어 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 누군가가 일부러 갖다붙였을 것이라고 정말로 믿게 된 겁니다. 진상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지만 말이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고 박사는 재니스와 벤 아저씨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 꺼림칙한 마노 파편도 이렇게 알고 보면 꺼림칙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나는 이야기를 너무 서두른 감이 있군요. 여하튼 사건이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중에 우리들이 재구성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롱 서장에게서 처음 이 사건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범인이 로스 집안의 누구일 가능성이 훨씬 많았습니다. 내게 화내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요. 그 첫날 오후, 보뇌르 별장에서 이브가 고롱 서장에게 아주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을 때에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파파 루세 상점에서 오믈렛을 먹으면서 이브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야 내 머리는 혼수상태에서 벗어나 어렴풋이 하나의 생각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방향만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 점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죠?" 이브는 몸서리를 쳤다. "예, 알고도 남아요." "여러분이 다 아시도록 아주 똑같이 재현해 봅시다. 애트우드는 이브의 집에 15분 전 1시쯤 가서 그 중요한 열쇠를 이용해 제 마음대로 들어갔습니다......" "눈동자가 확 풀어져 있었어요." 이브가 소리쳤다. "처음엔 술에 취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엇엔가 신경이 곤두서서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그런 얼굴을 한 네드를 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더군요." "술은커녕 그는 살인을 저지른 직후였습니다." 박사는 말했다. "그렇게 자신에 차 있던 사람도 계획적인 살인을 범한 뒤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겠지요. 보뇌르 별장을 빠져나온 뒤 카지노 대로를 1~2분 헤매다가 이제 막 이 거리에 들어선 듯한 얼굴을 하고 보뇌르 별장의 건너편 집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것으로 알리바이를 만들 준비는 다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쪽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정도로 해두고, 지금까지의 사실만을 간추려 봅시다. 애트우드는 갑자기 이브에게 시비를 걸고 로스 집안의 일이나 길 건너편에서 아직 잠들지 않은 노인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브의 신경을 잔뜩 건드려놓고는 결국 커튼을 젖히고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이브는 불을 껐지요. 이브,그 다음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을 그때 그대로 다시 한 번 말해 보십시오." 이브는 눈을 감았다. "저는, '모리스 경은 아직 깨어 있어요, 그렇죠?' 하고 물었습니다. 네드는, '응, 아직 안 자는군.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이쪽에 대해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군. 확대경을 들고 코담배 케이스 같은 것을 보고 있어 -- 아니, 잠깐!'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왜 그래요?' 하고 물어보았죠. 네드는, '누군가가 또 있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고 말했어요. 저는, '토비겠죠. 네드, 창가에서 물러나요!' 하고 말했지요." 바람 한점 없이 후텁지근한 밤의 어두운 침실의 광경이 분명하게 떠올라와서 이브는 깊은 숨을 내쉬고 감았던 눈을 떴다. "그것이 전부예요." 하고 이브는 덧붙였다. "그 동안 당신은 한 번이라도 창문으로 내다보았습니까?" 박사가 집요하게 물었다. "아뇨." "내다보지 않았으니 당신은 그의 말을 그대로 사실인 것으로 생각해 버린 겁니다." 박사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지금 이브의 말 속에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한 대 엊어맞은 느낌입니다. 그것은 애트우드가 보았다고 하는 물건이지요. 그가 보았다고는 해도 15 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시계와 똑같은 조그만 물건을 본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도 그는 서슴치 않고 '코담배 케이스 같은'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똑똑한 사나이의 단 한 가지 실수였던 겁니다. 알고 있을 리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 알고 있다면 거기엔 더없이 끔찍한 이유가 있을 뿐이었던 거지요.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에 주목해 주십시오! 즉시 그는 이브도 함께 창에서 보았다고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모리스 경이 확대경을 쥐고 분명히 살아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덤벼들었다고 말입니다. 애트우드는 이것을 암시의 힘으로 해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때의 이브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여러 번 계속 암시를 걸었습니다. '우리가 본 것을 기억하겠지?'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상대방이 암시에는 아주 약한 성격이니까요. 나와 같은 계통의 일을 하고 있는 심리학자가 그런 말을 했는데, 나도 동감입니다. 여하튼 신경이 극도로 지쳐 있었던 닐 부인으로서는 어떤 일이라도 믿고 말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는 잔뜩 그런 인상을 심어놓고는, 커튼을 확 열어서 모리스 경의 시체를 보게 한 겁니다. 내가 퍼뜩 정신이 든 것은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이런 잔꾀를 쓴 것은 실제로는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이브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 즉, 애트우드와 함께 있었을 때에 모리스 경은 그때까진 살아 있었다고 믿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애트우드는 살인자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운 계획이었습니다만, 꼭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브는 그의 작전에 완전히 걸려들어서, 모리스 경이 이제까지 여러 번 보아온 것처럼 눈에 익은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고만 생각하게 된 겁니다. 고롱 서장에게 처음 이야기했을 때에도 부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나도 들었습니다. 만일 그 코담배 케이스가 흔한 물건이어서 한눈에 코담배 케이스라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 교활한 애트우드 선생은 지금쯤 성공의 미소를 짓고 있었겠지요." 박사는 의자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우고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킨로스 박사님." 재니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머리가 좋으시군요." "머리가 좋다고? 분명히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 사나이는 틀림없이 범죄사에 밝았을 겁니다. 그 윌리엄 러셀 경의 사건을 알아내어 그것을 멋지게 역이용하는 기막힌 솜씨는 어느 누구라도......" "그게 아니에요. 그것을 꿰뚫어보신 박사님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킨로스 박사는 웃었다. 이런 자랑스러운 순간에도 그는 활짝 웃지 못했고, 그 웃음은 오히려 쓴 약을 삼킨 듯했다. "아, 그런 정도는 누구든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브처럼 비열한 사나이의 먹이가 되도록 타고난 여성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 흐름을 거꾸로 가게 하는 듯한 일이 몇 가지 일어나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던 겁니다. 먼저 갈색 장갑을 낀 토비 로스가 뜻밖에 등장했습니다. 애트우드로서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죠.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이것으로 자신의 처지가 절대로 안전해지기 위한 마지막 마무리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까 말이지요. 여기까지 오면 여러분들도 이 계획을 어떻게 끝맺을 작정이었는지 아실 줄 압니다. 애트우드는 되도록 이 사건의 표면에 자신을 드러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처지에 있을 필요가 있었지요. 그와 모리스 경을 결부시킬 수 있는 표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무심한 얼굴로 지나가버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죠. 다만 만일을 위해서 완전한 알리바이를 준비해 두었던 겁니다. 그것도 증언을 시키려면 상당히 애를 먹을 부인 -- 자진해서 증언하기 어려운 부인을 상대로 그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로서는 그 여자에 대한 영향력에는 자신을 갖고 있었고, 아무래도 자신의 나쁜 소문을 겁내는 여자가 입증하는 알리바이인만큼 신빙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내다본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호텔에서 쓰러졌을 때에 '차에 부딪혔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꼭 그럴 필요가 없는 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기로 한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자신의 상처가 중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그쯤에서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우연히도 계단에서 떨어져서 뇌진탕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집념으로 가득찬 이베트 라투르가 제멋대로 줄거리를 꾸미려고 끼어들었습니다. 애트우드로서는 이브에게 혐의를 씌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건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지요. 그래서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사이에 사태가 어떻게 되어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는 아마 공포에 떨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문을 잠가버리고 이브를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한 것은 정말로 이베트였군요?" 재니스가 끼어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다만 이베트에 대해서는 추측을 할 뿐입니다. 노르만 지방의 농촌 태생이라 그런지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요. 보투르 예심판사가 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한마디도 말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마 살인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이브를 못 들어오게 했겠지요. 하지만 애트우드가 와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스캔들을 만들어낼 생각이었을 겝니다. 그렇게 되면 아가씨의 그 완고한 오빠는 이브와의 결혼을 취소할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되풀이가 됩니다만, 그 이베트는 노르만 지방의 농촌 출신입니다. 닐 부인에게 살인혐의가 씌워진 것을 알자 놀라긴 했지만, 뒷걸음질치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본심을 드러내고 이브에게 죄를 씌우려고 열을 올렸지요. 크게 애쓴 셈이지요. 하긴 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지요. 닐 부인의 결혼을 취소시키는 데는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으니까. 선악 같은 것은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오로지 동생인 프뤼를 토비와 결혼시켜야겠다는 일념이었겠지요. 이렇게 얽히고 설킨 상황에서 나는 그날 밤 라 아르프 거리의 꽃집에 가서 목걸이가 두 개인 것을 알았고, 또 이브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듣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로 인해서 범인이 누구인지 대강 짐작을 했습니다. 일단 그런 가정 아래 모든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여러 가지 증거를 거기에 맞추어 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요. 문제는 애트우드의 살인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답은 헬레나 부인과 재니스 양에게서 들은 이야기, 즉 모리스 경의 형무소 관계의 일에서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피니스테르의 사건이 도움이 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나의 가정이 과연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 간단했습니다! 애트우드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든가, 혹은 다른 이름으로라도 어떤 전과가 있다고 한다면 그의 지문은 런던 경시청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벤 아저씨는 휙 휘파람 소리를 냈다. "흠, 그랬었군!"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고쳐앉았다. "이젠 알겠소! 비행기로 런던에 날아간 이유를......" "그것을 확인해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나는 호텔의 애트우드의 방에 가서 몰래 지문을 채취했습니다. 맥을 짚어보면서 그의 손가락을 내 은시계 뒤쪽에 대고 지문을 찍은 겁니다. 회중시계란 그런 때에 적절하게 쓰이는 물건이지요. 더구나 그것과 똑같은 지문이 기록보관소에서 쉽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쪽에서는......" "또다시 계획이 뒤틀려 버리고 -- " 이브가 선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요, 당신이 구속되었지요." 박사는 말하며 얼굴이 흐려졌다. "나는 지금도 그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이브가 자세한 이야기를 했을 때에 이브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깨닫지 못한 진실을 꺼냈지요.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흔히 그런 장난을 치곤 한답니다. 이브의 말에서 실제로는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고, 따라서 모리스 경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추리하기는 쉬운 일이었습니다. 즉, 코담배 케이스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다만 애트우드의 암시에 걸려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로서는 닐 부인의 기억을 흔들어놓거나 거꾸로 암시를 걸거나 할 필요도 없었던 겁니다. 닐 부인이 말한 그대로면 충분했지요. 그것은 애트우드가 진범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내게 말한 그대로 고롱 서장에게도 말하도록 일렀던 겁니다. 그 진술이 기록되었을 때에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애트우드의 살해동기를 내가 찾아낸다면 그것은 나의 이론적 근거가 증명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애트우드가 이브에게 심어준 암시의 강도나, 고롱 서장이나 보투르 예심판사가 특별히 갖고 있는 프랑스 인다운 집착성을 나는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브는 애트우드에게서 암시받은 그대로 말해 버리고 내게 말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 바람에......" 이브는 항의했다. "하지만 -- 그 사람들은 나에게 광선을 비쳐놓고 마치 스프링 인형처럼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의지하고 있던 박사님도 옆에 안 계셨고......" 재니스는 이브와 킨로스 박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이브와 박사는 마치 화가 난 사람들처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도 겨우 깨닫게 된 것이죠." 박사는 마무리를 짓듯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다만 애트우드가 실수로 잘못 뱉어버린 실언을 그녀의 실언으로 착각을 한 겁니다. '흠! 모리스 경이 새로 입수한 물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당신에게 말한 사람이 없소.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당신은 듣지도 않았소. 그건 분명해. 그런데 그 시계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이 사실은 코담배 케이스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그 다음은 설명을 하면 할수록 수상하다는 생각을 더하게 해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잡았다고 허풍을 떨고서 부인을 유치장에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그때 바로 악역을 맡은 내가 그들 앞에 나타난 거지요." "그럴 듯하군." 벤 아저씨가 말했다. "처음에는 액운, 그 다음에는 행운이라, 종잡을 수 없는 시계추 같구먼. 다시 애트우드가 의식을 회복했으니까." "그렇습니다." 박사는 씁쓰름하게 말했다. "애트우드는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불쾌한 생각에 박사가 얼굴을 찡그리자 두 눈썹 사이에 세로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애트우드는 갈색 장갑을 낀 사나이가 토비라고 해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죠. 어쨌든 한꺼번에 아내도 되찾고 라이벌을 형무소로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토록 중상을 입은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터덜터덜 보투르 예심판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겠죠? 그것을 그 사나이는 해냈습니다.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집했지요?" "말리지 않았군요?" "말리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박사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애트우드는 보투르 예심판사 방문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 등대의 강렬한 불빛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 복도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져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모든 것이 들통난 것을 알자 목숨도 다한 것이지요." 해는 기울어 저녁이 다가오고, 새들이 지저귀던 정원에도 서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오빠는 그렇게 잘난 척만 하고......" 재니스가 말을 꺼내려는데 박사가 웃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고는, 토라졌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아가씨, 당신은 오빠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 말도 안 돼요!" "비겁이라는 말은 적당치가 않군요.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는 발육이 늦어진 인간의 가장 흔한 유형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정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는 아직 15세 정도의 어린애입니다. 그뿐이지요. 아버지 물건을 훔치는 것은 범죄가 안 된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 겁니다. 성도덕에 대한 사고방식만 해도 기껏 중학생 시절에 알게 된 그대로일 뿐이지요. 토비 같은 사람은 세상에 많습니다. 대개는 그런대로 잘 해 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처럼 단단하고 착실해 보이지만 일단 진짜 위기에 부딪치면 상상력도 용기도 없는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골프를 친다든지 함께 술을 마시는 상대로는 괜찮지만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해낼는지는......그런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둡시다." "난 의아스러운 일이 있는데 -- " 벤 아저씨가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번부터 마음에 걸렸었는데, 모리스가 그날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 완전히 흥분해서 몸까지 떨고 있었다오 -- 토비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서 말이오. 그때 애트우드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 걸까?" "아니에요." 재니스가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즉, 아버지가 오빠에 대해 무슨 말을 듣고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알고 난 다음에 오빠에게 그때의 일을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라고만 했다는 거예요. 물론 애트우드에 대한 것이었지만 오빠는 지레 겁을 먹고 말았지요. 프뤼 라투르가 정말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오빠는 하루빨리 결말을 낼 생각으로 그날 밤 목걸이를 훔쳐내기로 결심한 거죠." 그런 다음 재니스는 불안한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지금쯤 틀림없이 저기서 어머니가 오빠를 위로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길 건너 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빠도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들이란 다 같잖아요." "아!" 벤 아저씨가 심각한 듯한 소리를 냈다. 재니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브." 하고 재니스는 깜짝 놀랄 만큼 큰소리로 불렀다. "나도 오빠와 다를 게 없었어요. 사과하겠어요. 그것만은 믿어줘요. 정말 여러 가지로 너무 미안해요." 또 무슨 말인지 하려는데 미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재니스는 그대로 정원을 뛰어 별장의 뒤꼍을 지나 사라지고 말았다. 벤 아저씨는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 " 하고 이브는 말했다. 벤 아저씨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잘 됐다고 생각해." 하고 그는 중얼중얼 말했다. "이브를 위해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야 -- 내 말뜻 알아듣겠지? 이브와 토비, 이건 안 돼." 하고 그는 걸어가다가 말고 다시 뒤돌아보고 말했다. "이번 주에는 이브에게 줄 모형 배를 만들었어.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칠이 다 끝나면 보내지. 자, 그럼......" 그리고 그는 불안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난 다음 이브 닐과 더못 킨로스 박사는 둘 다 말없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서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말씀하신 거 정말이세요?" "뭐 말입니까?" "내일 런던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 "예,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지낼 생각입니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박사님에게는 뭐라고......" "잠깐 -- " 박사는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인사말 같은 것은 딱 질색입니다." 하고 말했다. "어머, 뭐 그렇게까지 딱딱거릴 건 없잖아요!" "딱딱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사의 마음 같은 것을 당신 마음속에서 쫓아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머, 왜죠! 그렇다면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애써 주신 이유를 알 수 없군요!" 박사는 메릴랜드 담뱃갑을 들어서 이브에게도 권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대 붙여 물었다. "시시한 이야깁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당신의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서 서로 할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정말 앞으로 어쩔 셈인가요?" 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대강 짐을 챙겨서 니스나 칸에라도 가볼까 하고......" "안 됩니다." "왜요?"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지요. 고롱 씨가 당신에 대해서 하는 말이 제대로 맞는 말인 것 같군요." "어머, 뭐라고 하셨는데요?" "당신은 사회의 위협적인 존재라면서 다음에는 어떤 일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리비에라에도 가봐요. 먹이를 기다리고 있던 그 부근의 남자들에게 붙잡혀서 그 사나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또 같은 일이 되풀이될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당신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국이라고 위험이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켜볼 수 있으니까." 이브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저도 영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말씀해 주세요. 네드 애트우드와의 일로 제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킨로스 박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가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탁 치며 말했다. "실천심리학의 문제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군더더기는 빼고 간단명료하게 얘기하지요." "말씀해 보세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그 사나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대, 죽이지 말라. 그러나 굳이 살리려 애쓸 것도 없나니.' (영국의 시인 아서 휴 그래프의 <근세의 십계>) 적어도 나는 그를 부추겨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고, 그래서 그가 건강을 회복했다손 치더라도 같은 일을 훨씬 간단하게 단두대가 대신했겠지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박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토비 로스, 그는 당신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남자였습니다. 당신은 인생이 외롭고 지루했던 겁니다. 의지할 사람을 찾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런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질러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토비와 당신과의 관계는 그런 살인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다른 일로 깨어졌을 줄 압니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토비와는 달랐지요." "달랐다니요?" "그 사나이는 제멋대로이기는 했지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었지요. 그는 자기의 생각을 여러 가지 말했는데, 그것이 반드시 모두 연극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자기의 알리바이를 꾸미는 데 이용하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만......" "그 점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이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겁니다. 애트우드 같은 남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주 위험한 존재이지요." 이브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뜰로 몰려들고 있는 엷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은 젖어서 빛나고 있었다. "저와 네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사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편이 좋겠지요. 다만 로스 집안의 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생각만은 하지 마세요. 저, 조금 더 이리로 다가앉으시면 안 되나요?" 라 방들레트 경찰서장 아리스티드 고롱 씨가 데 상주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다리는 좀 짧은 듯했지만 당당하게 보였다. 가슴을 활짝 펴고 말래카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혼자 봄을 맞고 있는 듯했다. 더못 킨로스 박사가 닐 부인댁 뒤뜰에서 차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오는 길이다. 고롱 서장은 로스 사건이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직책상 두 사람에게 전해야만 했다. 서장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데 상주 거리를 둘러보았다. 로스 사건으로 라 방들레트 경찰의 위신을 크게 높인 셈이다. 멀리 파리에서도 신문기자와, 특히 카메라맨들이 많이 몰려왔다. 킨로스 박사가 이 사건에 대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원치 않고, 특히 사진찍히는 것을 마다한 것이 무슨 까닭에서인지 서장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빛나는 명예를 짊어질 인사가 누군가 있어야만 한다면......요컨대 세상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으니까. 사실 고롱 서장은 지금 와서는 킨로스 박사에게 처음에 품었던 불신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사나이는 '생각하는 기계' 바로 그것이다. 존경을 보낼 가치가 충분하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도 말했듯이 대수롭지 않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사는 보람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마치 시계처럼 분해하지만, 사실 그 자신도 하나의 시계인 것이다. 고롱 씨는 미라마르 별장의 문을 열었다. 왼편으로 집 옆을 빠져나가 뒤뜰로 통하는 좁은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갔다. 영국인 중에도 토비 로스 같은 위선자가 아닌 진지한 사람들이 있다고 알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이제는 영국인을 전보다는 더 잘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지팡이로 풀을 헤쳐가며 고롱 서장은 의기양양하게 뒤뜰로 들어갔다. 저녁 어둠은 차츰 짙어지고 밤나무 숲속은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부터 한바탕 열변을 토할 생각을 하며 서장이 문득 얼굴을 드니 저만치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고롱 서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당장에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동안 멍청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서장은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남이 행복해 하면 자신도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빙글 돌아서 방금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편 그는 정정당당한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나이였다. 그가 다시 데 상주 거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는 정말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올 때보다는 한결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었지만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지지폼폼'이라는 한마디가 저녁 하늘에 머물다 사라져 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