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성의 괴사건 ================= 딕슨 카 지음. ?? 등장 인물 ?? 알랭 캠벨 : 하이게이트 대학의 역사학 교수, 먼 친척의 초대로 고성에 갔 다가 뜻하지 않게 기괴한 연속 살인에 휘쓸리게 됩니다. 캐더린 캠벨 : 하펜던 여자 대학의 젊고 아름다운 조교수. 알랭 교수와는 역사 논쟁적으로 적수이지만, 고성으로 가는 야간 열차 속에 서 우연히 알랭을 알게 됩니다. 콜린 캠벨 : 고성의 탑에서 떨어져 의문의 죽음을 한 앤거스 노인의 동생. 의사인 그는 유령이 나온다는 그 전설의 탑에서 떨어집니다. 엘스펫 노부인 : 의문의 죽음을 한 앤거스 노인의 부인으로 고성의 여주인. 신앙심이 깊으며 괴팍한 여자 폭군으로 항상 의혹에 찬 행 동을 합니다. 채 프 만 : 보험회사의 젊은 조사원. 의문의 죽음을 한 앤거스 노인의 생명 보험금 지불 관계로 고성에 찾아와 자살설을 주장합니다. 기데온 펠 박사 : 밀실 살인을 풀어나가는 데는 세계 제일의 명탐정. 몸집이 유난히 비대한 그는 친구인 콜린의 부탁을 받고 수사에 착수 합니다. 제 1 장 탑에서 떨어진 사나이. 1. 미운 적수. 9월 1일 밤이었습니다. 별안간 공습 경보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런던역의 플랫폼은 전등이 꺼지 고 캄캄해졌습니다. 글래스고행 열차에 탈 사람들이 서로 밀고 밀리며 우 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공습 경보는 울렸지만, 고작 독일군 비행기 한 대 가 항로를 이탈해 들어온 모양이었습니다. 폭음도 들리지 않았고, 고사포 쏘아올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등화 관제의 혼란 속에, 젊은 역사학자인 캠벨 교수도 휩쓸려 있었습니 다. 그는 혼잡한 인파 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일등 침대차는 긴 열 차의 맨 앞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그 침대차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열차는 만원이었고 통로를 향한 객실의 문에는 각기 객실 번호 와 예약 손님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성냥불을 켜서, 자기가 예약 한 4호실을 찾아 내고 안도의 숨을 쉬며 문을 열었습니다. 침대 하나와 세면대가 있을 뿐인 작은 객실이었습니다. 창에는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공용의 검은 셔터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알랭이 침대 밑에 여행 가방을 밀어 넣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나더 니 승무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캠벨씨죠?" 그는 문 앞의 표찰을 힐끗 보고 물었습니다. "그렇소. 내가 캠벨 교수요." 알랭은 약간 위엄을 부리며 대답했습니다. 35살의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된 그는, 이 대학 교수라는 직함으로 상대방을 위압하는 것이 기분 좋았습 니다. "내일 아침 몇 시에 깨워 드릴까요?" "글래스고역에는 몇 시에 도착하지?" "6시 반에 도착할 예정인데요...." "그럼 6시에 깨워 주게. 이 열차엔 식당차가 있나?" "없습니다. 전시가 돼 놔서...." 알랭은 실망했습니다. 바삐 짐을 챙겨 오느라고, 아직 저녁 식사를 못했기 때문에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 동안 역 식당에서 저녁 식사나 하고 오시죠." "아니, 5분후에는 기차가 떠나는데?" "아닙니다. 공습 경보로 발차가 꽤 늦어질 테니,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럼 식사나 하고 올까." 알랭은 다급하게 열차에서 내려 복작거리는 플랫폼을 거쳐, 개찰구로 나왔 습니다. 그는 역 식당에서 홍차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아울러 매점에서 <샌디> 신 문을 샀습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신문을 읽는 순간, "제기랄! 또 그자가 썼잖아. 끈질긴 놈이군. 그 따위 바보는 죽어야 해!" 하고 알랭 캠벨 교수는, 도무지 학자답지 않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미운 적수가 있었습니다. 적수라고는 하지만 달리 적수가 아니라 학문상의 적수로, 우연히 상대도 같은 캠벨이라는 사람이었 습니다. 그 캠벨은 하펜던 여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모양인데, 알랭은 그를 만난 적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성이 같아도 그자가 자기 친척이 아니기를 바랬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음속 깊이 그는 또다른 캠벨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벌써 석 달째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알랭은 사람이 좋고 착실한 학자였으므로, 나쁜 뜻이 있어서 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샌디>신문에 종종 역사에 관한 책의 비평을 썼는데, 어느 날 그가 신 문사에서 <<국왕 찰스 2세의 말년>> 이라는 새 책을 보내 왔습니다. 저자는 케이(K).아이(I). 캠벨이라는 학자였습니다. 알랭은 그 책을 읽고, 당장 신문에 비평을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의 끝에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인 것이 싸움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K. I. 켐벨씨가 쓴 이 책에서는 특히 새로운 발견이 눈에 띄지 않으며, 사 소한 점이지만 한가지 틀린 점이 있습니다. 찰스 2세의 애인이었던 클리블 랜드 공작 부인을 '몸집이 작은 금발의 여인'이라 표현하였는데, 캠벨씨는 대체 어떤 근거에서 이런 글을 썼는지요? 그러자 1주일 뒤에, K.I.캠벨의 투서가 <샌디> 신문에 실렸습니다. 알랭 캠벨 교수는 역사학자이면서 아직껏 한 번도 대영 박물관에 가 본 적 이 없습니까? 그 박물관에는 '작은 몸집의 금발 머리'인 클리블랜드 공작부 인의 초상화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읽은 알랭은 또 다시 반론을 폈습니다. K.I.캠벨씨에게 충고합니다. 대영 박물관보다 국립 미술관으로 견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국립 미술관에는 '몸집이 크고 검은 머리'인 클리블랜 드 공작부인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공작 부인은 굉장히 몸집이 큰 미인 이며, 또 대단히 말괄량이였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상대방이 그만 손을 들 것이라고 알랭은 생각했으나 상대 방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알랭 캠벨 교수는 공작 부인을 '말괄량이'라고 했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약간 고집이 센 것만 가지고 말괄량이라고 말 하는 것은, 캠벨 교수가 여자의 심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캠벨 교수여! 당신은 결혼한 분이 아닌 것 같군요. 그래서 여성을 두려워 하고 있나 봅니다. 이 심술뒜은 공격에는 마음 좋은 알랭도 진정으로 화가 났습니다. 역사에 관한 학문만을 토의하다가 논쟁에 졌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여자를 두려워하는 겁장이란 놀림을 받고서는 남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 니다. 대학의 학생들에게도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한편, 신문 독자들은 이 두 사람의 논쟁을 재미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아뭏 든 진지한 역사학자들이 2백년전에 죽은 여성의 머리색과 몸집에 대해 이색 적인 토론을 벌이고, 급기야는 인신 공격까지 해대니, 이처럼 바보스럽고도 재미있는 기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샌디>신문은 날개 돋힌 듯 팔렸습 니다. '그런 작자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해.' 알랭은 화가 치민 얼굴로 역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샌디>신문을 읽 고 있었습니다. 그때 플랫폼 쪽에서 갑자기 발차를 알리는 벨이 울렸습니다. 알랭은 기차를 타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홍차를 남긴 채, 신문 을 움켜쥐고 어두운 풀랫폼으로 달려들어갔습니다. 가까스로 침대차에 뛰어 올라탄 순간,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알랭은 어두운 통로에 서서, 잠시 숨을 가라앉힌 다음 4호실 문을 열었습니 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습니다. 갈색 머리의 여자가 침대위에 걸터 앉아 여행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도 별안간 문이 열렸으므로, 깜짝 놀라 알랭을 노려 보고 있었습니 다. "앗, 실례했습니다!" 알랭은 자기가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나가려했습니다. 그러나 문에 붙 은 표찰에는 분명히 '4호실 캠벨씨'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저어, 실례지만.... 혹시, 방을 잘못 들어오신게 아닙니까?" 그는 망설이며 물었습니다.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는 차갑게 알랭을 쏘아 보았습니다. 27,8살쯤 되어 보이는 날씬한 그녀 는 엷은 화장에 예쁘고 둥근 얼굴이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또한 넓은 이마에는 지성미가 빛났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여긴 4호실입니다." "예, 알고 있어요." "아가씨, 여긴 내 객실이란 말이오. 여기 캠벨이라고 씌여 있잖소." 알랭이 표찰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성도 캠벨이란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 객실은 제 방이어요. 미 안하지만 나가 주셔요!" 여자도 지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서 침대위의 여행가방을 가리켰습니다. 그 가방에는 흰 페인트로 작게 'K.I.캠벨, 하펜던 여자 대학'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2. 객실 안에서. 그 여행 가방에 적힌 이름을 보고, 알래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한동안 멍해 있었습니다. 마치 야구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 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물었습니다. "케이. 아이. 란 무슨 머릿 글자입니까?" "물론 캐더린 아일린, 제 이름이죠. 아뭏든 이 객실은 제가 예약한 것이니 까, 빨리 나가 주셔요." 캐더린 캠벨은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소!" 알랭도 딱 잘라 말하며, 손에 든 <샌디>신문을 상대방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럼 하나 묻겠는데, 이 신문에 쓸데없는 투서를 한 사람이 당신이오?" 이번에는 캐더린 쪽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알랭 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열차가 '덜커덩!'하고 뒤흔들렸으므로, 그 녀는 비틀거리며 알랭의 가슴으로 넘어질뻔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알랭 캠벨 교수.....?" "그렇소. 내가 하이게이트 대학의 알랭 캠벨이오." 그는 가슴을 펴고 당당히 이름을 밝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캐더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습니다. 그녀는 몹시 분한 듯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흥, 교활하고 여자를 두려워하는 겁장이!" "아가씨,남의 객실까지 차지하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말이 나옵니까? 뻔뻔스럽게..." "농담말아요. 우린 육촌간인데 처음 만났다고 체면 차릴게 뭐 있어요!" "육촌 간이라고.......?" 알랭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그래요, 당신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사촌간이어요. 알랭 캠벨 교수, 당 신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내가 쓴 책을 그렇게 헐뜯었나요?" "아니오, 그건 오해요. 난 역사학자로서 그런 초보적인 잘못을 못 본 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잘못이라뇨? 대체 어디가 틀렸단 말이죠?" "클리블랜드 공작 부인은, 검은 머리의 몸집이 큰 말괄량이였소." "아녀요. 몸집이 작은 금발의 얌전한 여성이었어요." 두 사람은 여기서도 또다시 신문에서 벌였던 싸움을 되풀이하여, 서로 한치 도 양보하지 않고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이요? 여대생이오?" "하펜던 여자 대학의 사학부 조교수여요. 영국의 역사에 대해서라면, 당신 같은 사람에겐 뒤지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여긴 내 방이니까 빨리 나가 주셔요. 그게 신사가 지킬 예의 아니겠어요." "천만에! 여긴 내 방이오." "아녀요, 내 방이어요! 안 나간다면 벨을 눌러 승무원을 부르겠어요." "그럼 내가 누르겠소." 두 사람이 앞을 다투어 벨을 누르자. 곧 승무원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은 승객 명부를 조사하고 나서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이 명부에는 미스, 미 스터의 구별이 없이 그냥 캠벨이라고만 적혀 있군요...." "그럼 할 수 없군. 내가 신사답게 양보할 테니, 다른 객실을 잡아 주게." "죄송합니다만, 지금 비어 있는 침대는 하나도 없는 데요... 게다가 좌석 도 만원이라, 통로에 서 계신 손님도 있습니다." "그럼 내 여행 가방을 침대 밑에서 꺼내 주게. 난 밤새 통로에 서서 가겠 네." 알랭은 화가나서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어머, 그런 일이 어디 있담! 당신은 종점인 글래스고까지 가시죠? 그렇다 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어요. 이 방을 둘이서 쓰도록 해요. 밤새도록 안 자면 되잖아요." 캐더린은 숨도 쉬지 않고 말하며, 재빨리 침대 끝에 걸터앉았습니다. 승무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거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선생님, 아가씨 말씀대로 하시죠?" "아니, 나는 거절 하겠네." "어머나! 캠벨 교수는 내가 무서운가요? 당신은 역시 겁장이로군요." 캐더린은 놀리듯이 말하며 알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알랭은 남자 체면으로 물러설수 없어 마주 노려 보았습니다. 그 틈에 승무원은 꽁무니를 빼듯 살짝 문을 닫고 나가 버렸습니다. 좁은 객실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서로 겸연쩍어졌습니다. 열차는 적기의 습격을 경계하여, 불을 끈채 천천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캐더린이었습니다. 새침해 있던 그녀는 갑자 기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알랭도 따라 웃었습니다. "우린 뭔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육촌간인데도 마치 원수처럼 싸웠으니 말 이어요. 캠벨 교수님.... 아니, 알랭씨라 불러도 괜찮겠죠? 당신도 스코 틀랜드의 인베라레이 마을로 가시는 길인가요?" "그래요. 던컨이라는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지요. 인베라레이 마을 샤 일라성에 사는 앤거스 캠벨 노인이 일주일전에 죽었는데, 친족회의에 참 석해 달라고 초청받았소. 친족 회의라 해도, 재산 상속 문제는 아닌 모양 이오. 그래서 나는 일주일간 휴가를 얻었죠." "나도 던컨 변호사로부터 똑같은 편지를 받았어요. 당신은 샤일라성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아니, 한 번도 없었소. 나는 앤거스 캠벨이란 이름도 들은 적이 없소. 오 래 된 족보를 찾아보았더니, 앤거스 캠벨은 우리 아버지의 사촌이더군요." "저는 어릴때 한 번 가 보았을 뿐이어요." "나는 샤일라성이란 이름도 처음 들었소. 대체 어디로 가면 되오?" "그래스고역에서 지방 철도 열차로 바꿔타고, 또 기선으로 갈아탄뒤에 다 눈 항구로 건너가죠. 거기서부턴 택시로 가야 해요. 록파인 호수 옆이죠." "샤일라성은 대체 어떤 성이오?" "성이라곤 하지만 왕들이 사는 것처럼 훌륭한 성은 아니어요. 호숫가에 높 은 탑이 있는 작은 성이지요. 하지만 꽤 오랜 역사가 있나 봐요. 이번 여 행에서 흥미있는 것은. 샤일라성이 아니라 앤거스 캠벨 노인의 죽음 이지 요." "아니, 어떻게 죽었는데요?" "아직 사인은 쨛혀지지 않았나봐요." 알랭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죠?" "높은 탑 꼭대기 창에서 떨어졌는데, 노인이 자살하려고 뛰어내렸거나 아 니면 누군가가 떠밀어서 죽였다나 봐요." "그러나 경찰이 조사했을 텐데...." "예, 경찰도 타살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서 수사를 중지한 모양이어요." "저어....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소?" "예, 피우셔요." 알랭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캐더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 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머, 당신이 궐련을 피우리라곤 생각지 못햇어요. 틀림없이 파이프 담 배를 피우며 긴 턱수염을 기른 잘난 체하는 학자라고 생각했어요." "나야말로 그 책을 쓴 K.I.캠벨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일 줄은 꿈에 도 몰랐소." "그럼 여자인 줄 알았다면 그런 심술뒜은 비평은 쓰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 요?" "아니오, 필자가 남자든 여자든 내 의견엔 변함이 없소. 잘못은 잘못이라 고 비평할 뿐이오. 어떻소? 클리블랜드 공작 부인이 '몸집이 작고 금발머 리' 였다는 당신의 의견이 틀렸다는 걸 이제 여기서 솔직히 시인하겠소?" "어림없어요! 캠벨 교수, 당신의 의견이야말로 틀렸어요." 모처럼 사이가 좋아졌다 했더니, 다시 두 사람은 그 하찮은 토론을 되풀이 하여,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했습니다. 그때 옆 칸에서 벽을 쾅쾅 치면서 소리쳤습니다. "이봐! 좀 조용히 못 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야.!" 두 사람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입을 다물었습니다. 잠시 동안, 어색 하여 잠자코 있었습니다. 들여오는 소리라곤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한 열차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불을 끄고 바깥 경치나 볼까요?" 캐더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알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등을 끄 고 창문을 열어젖혔습니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습니다. 밖 은 캄캄했지만 지평선 너머의 밤하늘에는 탐조등의 불빛이 천천히 원을 그 리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적기의 폭음 같은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독일군의 폭격기가 이 기차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요?" 캐더린이 불안한 듯 중얼거렸습니다. 어깨를 맞댄 채 밤하늘은 쳐다보고 있자니, 알랭은 캐더린이 친밀하게 느껴 졌습니다. 그는 캐더린의 아름다운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습니다. 3. 택시의 손님 이튿날 아침 잠이 깬 알랭은,캐더린이 자기 어깨에 기댄 채 자고 있었으므 로 깜짝 놀랐습니다. 두 사람은 객실의 한 침대에 걸터앉은 채 어느새 잠들 어 버렸던 것입니다. 간밤에는 옆 객실에서 잔소리를 할 정도로 말다툼을 하였지만, 지금은 캐더 린이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알랭의 뺨을 스쳤습니다. 글래스고역에서 다른 열차로 바꿔 타고 다시 기선으로 옮겨 타 다눈 항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지방은 영국 본토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9월초였지만 이미 가을 이 깊었습니다. 두 사람은 항구의 잔교를 내려와 택시를 찾아보았지만, 한 대도 보이지 않 았으므로 여행 안내소로 들어갔습니다. "인베라레이 마을의 샤일라 성에 가려고 하는데, 택시를 불러 줄 수 없겠 소?" 알랭이 물어보자 안내소의 직원이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 다. "그 고성이 요즈음은 꽤 인기가 높군요. 5분전에도 샤일라 성으로 간다는 손님이 한 사람 있었지요. 그 손님과 합승해도 좋다면, 싼 요금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린 합승을 해도 좋지만..... 그 손님도 역시 캠벨이란 이름인가요?" "아닌데요, 찰스 스완이란 분입니다." 직원은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스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설마 그 사람이 샤일라성의 캠벨 상속 인은 아니겠죠?" 알랭이 알 수 없다는 듯이 캐더린에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어요. 돌아가신 앤거스 캠벨 노인에겐 부인도 있고, 남동생도 있어 요. 동생은 콜린 캠벨이라는 의사랍니다." 그 말을 들은 여행 안내소의 직원이 점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콜린 캠벨이라는 의사는, 어제 우리 자동차로 그 고성에 모셔다 드렸 죠. 입이 거칠고 고집이 센 노인이랍니다. 손님들은 스완씨와 합승하시겠 습니까? " "그 손님만 좋다면 우리는 합승해도 괜찮소." "그럼 30분가량만 기다려 주십시오. 택시가 모두 나갔으니까요.... 아마 스완씨는 저쪽에 있는 양품점에 있을 겁니다." 안내소의 직원은 거리에 즐비한 선물 가게 중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거리로 나가, 민예품을 파는 가게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거닐었습니다. 어느 가게의 선물이나 모두 스코틀랜드 명물인 체크 무늬의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체크 무늬인 넥타이, 머플러, 스카프, 책 표지도 체크 무늬인가 했더니,찻 잔, 재떨이에도 여러 색깔의 체크 무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형의 옷까지도 체크 무늬였습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핑핑 돌아 어지러웠습니다. "어머, 예쁜데요. 기념으로 하나 사 볼까요?" 캐더린은 진기한 민예품 하나하나에 눈을 반짝였습니다. 그 양품점에는 모자를 비스듬히 쓴 30살 가량의 사나이가 역시 체크 무늬의 넥타이를 몇 개 견주어 보고 있었습니다. "저어, 실례지만, 선생님이 스완씬가요? 샤일라성으로 가는 택시를 부탁하 셨지요?" 알랭이 다가가 말을 걸자, 그는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러시죠?" "실은 우리도 그곳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합승할까 해서요. 저는 알랭 캠벨 교수고, 이분은 캐더린 캠벨 양입니다." "아, 좋고 말고요. 나야말로 길동무가 생겨서 즐겁소. 두 분은 샤일라성의 캠벨 집안과 친척입니까?" 스완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예, 먼 친척입니다. 당신은?" "저는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엘스펫 캠벨은 어떤 분이 죠?" 갑자기 스완이 비밀스런 투로 물었습니다. 알랭이 우물쭈물 하자 캐더린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앤거스 노인의 두번째 부인이죠. 벌써 일흔에 가까운 할머니지만, 아직 정정해서 샤일라성의 안주인, 아니 주인 노릇을 하고 있대요. 모두들 그 를 두려워한다더군요. 난 아직 한 번도 엘스펫 부인을 만난 적이 없지만. ..." "호오, 고성의 여주인이라....!" 스완은 흥미있는 듯 감탄을 하더니, 넥타이 값을 점원에게 치렀습니다. "그럼 슬슬 여행 안내소로 돌아가 봅시다. 택시가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으 니...." 세 사람은 여행 안내소로 행했습니다. 스완은 처음 만났지만 매우 소탈한 성격의 사나이 같았습니다. "여기서 그 성까진 거리가 꽤 멀죠? 나는 샤일라성에서 묵지 않고, 어둡기 전에 돌아올 생각이오. 여기서도 등화 관제를 하고 있겠죠? 오늘밤엔 푹 자야겠어요. 간밤에는 기차에서 한잠도 못 자서 피곤하군요." "왜 못 주무셨는데요?" "침대차에 탔는데 옆간에서 신혼 부부인 듯한 남녀가, 클리블랜드라는 여 인의 머리색이 어떻다든가 하면서 큰 소리로 말다툼을 해서 시끄러워 잘 수가 있어야죠." 알랭과 캐더린은 겸연쩍은 듯 씁씁한 얼굴로 마주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완은 눈치 없이 계속 떠들어댔습니다. "정말 이상한 신혼 부부더군요. 아마 그 클리블랜드란 여자가 남편의 옛 애인인데, 신부가 질투하는가 봐요. 너무 시끄러워 참다못해 벽을 쾅쾅 쳤 지요." "아무래도 그건 우리 두 사람인것 같은데요." 정직한 알랭이 말하자, 캐더린은 급히 그의 팔을 꼬집었으나 이미 때는 늦 었습니다. "아니, 그게 당신들이었나요?" 스완은 놀라며 캐더린의 왼손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녀의 왼손엔 물론 결혼 반지 따위는 끼여 있지 않았습니다. 캐더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습니다. "스완씨,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하펜던 여자 대학의 조교수이고, 이분은 하이게이트 대학의 알랭 캠벨 교수인데 우린 부부가 아니어요. 게다가 간 밤에 우린...." 캐더린이 서둘러 변명하려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네들이 설령 결혼하지 않았다 해도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나는 이해심이 많고 입이 무거운 남자니 까. 절대 소문은 퍼뜨리지 않아요. 설마 당신들이라곤 상상도 못하고, 나 도 모르게 그만 그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저기, 택시가 와 있군요. 어서 즐거운 여행이나 합시다." 스완은 당황해하는 두 사람을 뒤에 두고,재빨리 여행 안내소 쪽으로 뛰어갔 습니다. 4. 샤일라서의 전설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스완이 운전사와 나란히 조수석에 앉 고 알랭과 캐더린은 뒷좌석에 탔습니다. 자동차는 모래 사장이 뻗쳐 있는 해안을 지나 울창한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 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은 말이 적고 대하기가 어려운 줄로 알았는데, 이 붉은 얼 굴의 운전사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보통때는 영구차를 운전한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댔습니다. "그럼 일주일 전에도 영구차를 운전했소?" 스완이 묻자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그랬었죠. 샤일라성의 캠벨씨 장례식이 있었으니까요. 손님들도 캠벨 씨 집안의 친척이십니까?" "나는 아니지만 뒷좌석의 두 사람은 친척이오." "어제도 그 집안의 친척을 한 분 태워다 드렸지요. 콜린 캠벨이란 의사였 는데, 입이 몹시 거친 노인이었어요. 캠벨 집안의 친척이면서도, 태연학 샤일라성 욕설을 퍼붓던데요. 하긴 그 사람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 고성은 제대로 된 곳이 아니죠." "제대로 된 곳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유령이라도 나온 단 말 이요?" "난 귀신이 나온단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분 나쁜 곳이니까, 기분 나쁘다고 솔직이 말했을 뿐입니다." 운전사는 뒷좌석의 알랭과 캐더린을 의식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스완은 주머니에서 여행 안내서를 꺼내어 책장을 넘겼습니다. 차창으로 들 어오는 저녁 햇살에 비추어, 그는 큰 소리로 안내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기 직전에, 여행자는 왼편에 자리잡은 샤일라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성은 16세기 말에 건조된 것으로, 돌로 지은 오래 된 저택 앞에는 , 원뿔 모양의 지붕을 이은 탑이 우뚝 서 있어, 멀리에서도 보입니다. 높이 20미터의 이 탑은 1692년의 그렌코 대학살 사건에 의해.... 스완은 읽기를 중단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렌코 대학살이라면 들은 적이 있어. 참, 학교에서 배웠지.... 하지만 누가 누굴 학살했더라...... 그걸 잊어버렸군."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캐더린이었습니다. "그건 캠벨 일족이 맥더널드 집안을 모조리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죠." 스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그렌코의 대학살 뒤 캠벨 집안의 병사 이안 캠벨이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싸움을 후회하여, 탑의 제일 높은 곳의 창에서 몸을 던져, 탑 아래 돌이 깔린 뜰에 떨어져 자살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흠, 일주일 전에 앤거스 캠벨 노인이 죽은 방법과 똑 같군." 스완은 또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계속 안내서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병사 이안 캠벨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에게 죽은 한 피해자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데, 칼은 맞고 죽은 피투성이가 된 유령이 병사 이안 캠벨을 방구석까지 쫓아다 녔으므로, 궁지에 몰린 그는 도망갈 곳을 찾다가 탑의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길밖에 달리 피할 곳이 없었다고 하는 말도 전해집니다..... 스완은 휘파람을 불며 안내서를 덮었습니다. "옛날 전설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앤거스 노인은 왜 탑 꼭대기에서 떨어 졌을까? 그렇게 높은 탑의 방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을텐데..... 운전사 양반, 이 마을에선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소?" 그러나 운전사는 스완의 말에는 대꾸하지않고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습 니다. "이제 곧 샤일라성이 보일 겁니다. 저기 보십시오. 저것이 록파인 호수지 요." 산기슭을 돌아 길이 두 갈래는 곳에 이르자, 별안간 눈 앞에 넓게 펼쳐진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어머, 아름다와라!" "음, 정말 신비스럽군!" 호수는 저녁놀을 받아 은빛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영원한 고요와 평화로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멀리 맞은편 호숫가에는 집들이 마치 점같이 박혀 있고, 교회의 탑이 나무들 사이로 보 일락말락했습니다. 호수가 하도 맑아, 멀리에서도 수면에 비치는 교회의 그 림자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세 사람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저기가 인베라레이 마을 입니다." 운전사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교회 쪽을 가리켰습니다. 호숫가를 따라, 길은 호수의 안쪽까지 일직선으로 뻗쳐 있었습니다. 맞은편 에 있는 인베라레이 마을로 가려면, 넓은 호수를 반 바퀴 가량이나 돌지 않 으면 안 됩니다. 10킬로미터는 충분히 될 것 같았습니다. 잠시 더 달리자, 시커먼 산이 호수 앞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그곳만은 호수 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운전사는 브레이크를 밟아 급정거 했습니다. "이제 그만 내려 주십시오. 여기서부턴 보트를 타야 합니다." "왜 보트를 타라고 하지? 샤일라성까지 도로가 통해 있는데." 스완이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보트를 타고 가는 것이 호수를 도는 지름길입니다. 게다가 휘발유도 절약 되고요." 운전사는 세 사람을 재촉하여 호숫가에 매어 둔 보트에 태우고, 힘차게 노 를 저어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발 아래 여행 가방 을 놓고 배의 뒤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수 는, 노을져 붉은 하늘보다 호수 수면이 맑았습니다. 캐더린이 추운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춥소?" "약간. 하지만 추워서 그런것만은 아니어요. 저길 보니 왠지 기분이 나빠 서...." 그녀는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샤일라성을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그 고성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돌과 벽돌로 지은 오 래 된 건물로, 특히 눈에 띄는것은 이끼 낀 돌로 만들어진 탑이었습니다. 원뿔 모양으로 된 탑의 기와 지붕이 저녁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호수 쪽으로 나 있는 창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창에서 돌을 깔아 놓 은 땅까지는 20미터쯤 될 것 같았습니다. 캐더린은 그 창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상상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습니다. "정말 유령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고성이로군." 뱃머리에 앉아 있던 스완이 성을 올려다보며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습 니다. 운전사는 성을 등진 채 노를 젓다가, 호숫가에 가까워지자 성 쪽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저기, 작은 잔교위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지요? 저 사람 이 아까 애기한 콜린 캠벨 의삽니다. 아마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다나 봐 요." 보트가 가까이 감에 따라 잔교에 선 사람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습니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사나이였습니다. 이미 예순을 넘긴 모양이지 만 사냥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습니다. 구레나룻과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보트가 잔교에 닿자, 모두들 보트에서 내렸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요?" 콜린 의사가 한 번 ?어보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세 사람을 노려 보았습 니다. 알랭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하고 이어서 캐더린과 스완을 소개했습니다. 콜린 의사는 사냥복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 넣은 채 악수도 청하지 않고 무 뚝뚝하게 말했습니다. "아, 잘들 왔네. 당신이 스완씨요? 난 스완이란 이름은 모르겠는걸. 처음 듣는 이름이야......" "저는 엘스펫 노부인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스완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콜린 의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큰 소리로 말했 습니다. "아니, 엘스펫 할머니가 불렀다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난 그런 말 은 믿을 수 없소." "왜 그러시죠?" "왜라니? 그 할머니는 지난 몇 년 동안 의사와 목사 외에는 아무도 부른 적이 없단 말이오. 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데일리>라던가, 뭐 그런 고십 신문이지. 나도 그 신문을 바보처럼 날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 지 않고 읽는게 소일거리지." "어머나, 그 지저분한 고십 신문을 말이어요?" 캐더린은 고십(어떤 주의나 체계가 없이 붓 가는 데로 글을 씀)이란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러자 스완이 약간 멋적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이봐요, 캐더린양. 좀 잘 봐달라구요..... <데일리>는 내가 다니는 신문 자니까요." "어머나! 그럼 당신은 그 고십 신문의 기자였군요? 이를 어쩌나..... 알랭씨, 우린........" 캐더린은 놀람과 동시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알랭도 약간 당황했습니다. 스완은 씩 웃으면서 진지한 말투로 캐더린에게 속삭였습니다. "아, 걱정마십시오. 당신과 캠벨 교수가 한 침대차에 탄 사실은 기사로 쓰 지 않을 테니까요...." 콜린이 얼른 그 소리를 엿듣고,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참지 못하겠다는듯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으하하.... 우리 친척 학자 두 사람이 한 침대차를 타고 왔다니 대체 무 슨 소리요?" "그건, 저......" 스완 기자가 설명하려 하자, 콜린이 급히 입을 막았습니다. "아냐,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강 상상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 다 맘에 드는 걸. 젊은이가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나도 젊었을 때 그런 경험이 있었다네." 콜린은 알랭과 캐더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비밀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방을 쓸 순 없네. 이 성의 엘스펫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은 구식 할머니니까. 뭘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장승처럼 서 있나? 나를 따라오게. 우리 캠벨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성으로 안내할테니." 5. 자살인가? 타살인가? 세 사람은 콜린 의사의 뒤를 따라, 잔교에서 뜰을 지나 고성으로 향했습니 다. "다른 손님들도 벌써 와 있습니까?" 알랭이 물었습니다. "변호사와 보험회사의 조사원이 와 있지." "조사원요.....?" "앤거스 형님이 누구에게 살해되었거나, 아니면 사고로 창에서 떨어져 죽 었다면, 엘스펫 형수와 나는 보험금을 탈 수 있네. 그러나 만일 자살이라 면 우리는 보험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되어 있다네. 정말 우스운 이야기 지." 콜린은 성큼성큼 걸으면서 씁씁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앤거스씨는 부자였잖습니까?" "그건 옛날 이야기라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실은 무일푼이야. 알렉 흡즈라는 사나이와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 하고 파산해 버렸어. 그후로 남아 있는 재산이라곤 이 고성뿐이라네." 콜린 의사는 일행을 현관의 홀로 안내했습니다. 넓은 홀에서는 마치 곰팡이 스는 것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콜린은 왼쪽방의 문을 열면서 알랭과 캐더 린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이 거실에서 기다리게. 그리고 스완 기자는 나를 따라오게. 자 네를 부른 엘스펫 할머니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알랭과 캐더린은 천장이 낮고 어두운 방에 남게 되었습니다. 구석에는 난로 가 있고, 밤의 냉기에 대비하여 나무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 희미한 불빛으 로 방안의 모습을 어슴푸레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벽에는 오래 된 종교화가 많이 장식되어 있고, 탁자 위에는 큰 성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로 위의 선반에는 검은 리본을 두른 큰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수염을 말끔히 깎은 그 사진의 인물은, 콜린 의사와 매우 흡사 했습니다. 죽은 앤거스 캠벨 노인인 것같았습니다. "알랭씨, 그 지저분한 고십 신문에 우리 기사가 실리면 어떡하죠?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나요?" 캐더린이 걱정스러운 듯이 속삭였습니다. "뭐라고 쓰든 난 상관없소. 오히려 그 고십이 사실이 아닌 게 유감스러울 정도니까." "어머나, 당신은 정말 뻔뻔스러운 사람이군요." "나는 이 고성을 처음 본 순간부터 옛날 기사같이 로맨틱한 기분에 젖었 소." "당신이 아무리 로맨틱해도, 나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 점을 명심하세요." 캐더린이 이렇게 차갑게 쏘아붙였을 때, 문의 안쪽에서 별안간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더 잘 들렸습니다. 나이 든 목소리와 젊은 목소리였습니다. "던컨씨, 나는 보험 회사의 조사원입니다. 내 일은 앤거스 캠벨씨의 죽음 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를 공정하게 조사해서, 회사에 보고하 는 것입니다. 만일 자살이라면 죄송하지만 보험금은 지불되지 않습니다." "자네는 앤거스를 만나 본 적이 있나?" 하고 물은 것은 나이 든 목소리였습니다. 캠벨 집안의 변호사인 던컨인 것 같았습니다. "예, 만난 적도 있으며 그 노인에게는 호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런 사사로운 감정과 공적인 일은 구별해야만 합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공 정한 입장에서 조사하겠습니다." "그럼 채프만, 자넨 앤거스씨가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란 건 알고 있겠 지?" "예,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는 죽기 사흘 전에 자네 회사와 계약하여, 새로이 3천 파운드의 생명보험에 들었네. 그전에 들었던 보험까지 합치면, 3만 5천 파운드나 되지. 보험 계약에 자살했을 경우에는 보험금을 탈 수 없다는 조건이 붙 어 있지?" "그렇죠." "그처럼 돈에 욕심이 많은 노인이 그런 큰 금액의 생명 보험에 들었는데, 사흘 뒤에 일부러 자살하리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면 그는 3만 5천 파 운드나 되는 큰 돈이 날아가 버린단 말이야. 더구나 그는 파산했으므로 남아 있는 재산이라곤 그 보험금 뿐이었어. 그것조차 유족에게 남기지 않 고 자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네." 던컨 변호사가 딱 잘라 말하자, 젊은 채프만 조사원은 입을 다문 모양이었 습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잠시 후, 나이 든 변호사 목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채프만, 아무래도 인정해 주어야겠어." "뭘 인정하란 말씀입니까?" "앤거스씨는 자살하지 않았단 말일세. 그건 살인 사건이야. 범인도 알고 있단 말이야. 노인을 살해한 건 알렉 흡즈야. 사건이 일어난 밤, 그 사나 이가 탑으로 찾아와 앤거스 노인과 싸웠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탑의 방에는 의문의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고, 일기장이 없어진 것도 역시 조사해서 알고 있을 텐데....." "던컨 변호사님, 이제 그만 하십시오. 언제까지나 이런 토론을 되풀이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경찰도 수사를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난 시골 경찰의 수사 따윈 믿을 수 없어. 캠벨 집안의 변호사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네 보험회사로부터 꼭 3만 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타내고 말겠네." 던컨 변호사는 고집스럽게 말했습니다. 채프만 조사원은 초조한 듯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그 발소리가 뚝 멈추더니 다 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사건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서 얘기해 보는 게 좋겠습니 다. 앤거스 캠벨씨는 매일 밤 그 탑의 맨 꼭대기 방에서 혼자 잤다고 했 지요?" "그렇지." "죽은 날 밤에도 그는 여는때처럼 9시경에 그 방으로 올라갔지요. 문에는 안으로 자물쇠와 빗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그는 탑아 래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등뼈의 골절이었는데, 떨어졌을 때 는 기절한 채 잠시 숨을 쉬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체를 해부한 결과, 독약을 먹었거나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실수로 창문에 서 떨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요." "그렇지, 사고로 죽은 건 아니야. 그건 나도 인정해." "그럼 다음엔, 타살인 경우를 생각해 보지요. 시체가 발견된 날 아침, 문 은 안으로 자물쇠와 빗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다른 출입구는 없으며, 단 하나 밖에 없는 창은 지상에서 20미터 높이에 있습니다. 더구나 창 밖에 서 땅까지는 미끄러운 석벽이 수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탑 위는 미끄 러지기 쉬운 원뿔 모양의 기와 지붕이므로, 로프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밑에서 창문까지 기어올라가거나 또 지붕에서 매달려 창문까지 내려온다 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굴뚝 청소부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앤거스 노인이 있던 탑의 방은 밀실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 방에 숨어 들어, 앤거스 노인을 창에서 밀어 떨어 뜨렸단 말입니까?" 채프만 조사원이 이렇게 말한 후 숨을 내쉬자, 이번엔 던컨 변호사가 반대 의견을 내세웠습니다. "그럼 자넨 개를 넣는 가방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 가방이 왜 방안에 있지 ?" "개 넣는 가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날 밤 9시 반쯤, 알렉 홉즈가 탑 꼭대기 방까지 찾아와서 앤거스 노인 과 크게 말다툼을 했지. 그 소동을 듣고 저택에서 엘스펫 노부인과 하년가 탑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홉즈는 돌아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그러 나 혹시나 해서,엘스펫 노부인은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어. 혹시 선반 뒤나 침대 밑에 홉즈가 아직도 몰래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 이지. 하지만 아무데도 홉즈는 없었어. 그래서 그들은 앤거스 노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네. 그때 앤거스 노인이 직접 문안에서 자물쇠와 빗장을 잠갔단 말이야. 그런데 다음날, 그의 시체가 탑 아래에서 발견된 뒤 방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 밑에 못 보던 큰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어. 여행 갈 때 개나 고양이 따위를 넣는 가방말이야. 동 물이 숨막혀 죽지 않게 한쪽에 쇠그물을 쳐 놓은 것이지. 이 가방이 침대 밑에 있었던 거야. 그건 범인이 가져다 놓은 게 틀림없어. 채프만, 그래도 자넨 앤거스 노인이 자살 했다고 고집할텐가?" 던컨 변호사의 말에, 보험 회사의 조사원은 잠시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습니 다. "그럼 다시 한 번 그 탑으로 올라가 조사를 해 보도록 하지요." 곧이어 두 사람의 말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벽에 있는 전등의 스위치를 올렸으므로, 어두웠던 거실이 순간 밝아졌습니다. 천 장의 큰 샹들리에에 불이 켜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엿듣던 알랭과 캐더린은 숨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우물쭈물 하며 서 있었습니다. 던컨 변호사는 대머리에 등이 굽은 남자였는데, 꽤나 위엄을 부리는 인물 같았습니다. 채프만 조사원은 잘생긴 얼굴에 유행하는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딱 벌어져 다부져 보였습니다. "저어, 우리는....." 알랭이 당황해서 자기 소개를 하려 했지만, 그 두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 고, 다른 문으로 홱 나가 버렸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겸연쩍고 어이가 없어 그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나, 뭐 저렇게 무례한 사람들이 있담!" "자기들 일에 너무 열중해서 다른 건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오. 그만큼 일 에 골몰한 증거지." "방금 이야기 들었지요? 앤거스 노인의 죽음은 왠지 무서운 사건같아요." "그런 것 같소. 자살할 까닭도 없고, 살해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니 말 이요." "오자마자 이상한 사건에 부딪쳐 난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것 같아요." 캐더린이 걱정스러운 듯이 어깨를 움추렸습니다. 그때 스완 기자가 발소리를 죽이며 살며시 들어왔습니다. 모자 벗는 것도 잊은 채 들떠 있었습니다. "정말 수수께끼에 싸인 사건 이군요. 여기 도착하기 전부터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 사건으로 어쩌면 특종 기사를 쓸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대체 어딜 갔다 왔소?" 알랭이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비밀스럽게 말했습니다. "하녀와 이야기했어요. 기사감을 취재할땐 먼저 그집의 하녀에게 달려가는 게 제일이죠. 이제 콜린씨가 엘스펫 노부인을 이곳으로 모시고 올 거요." "당신을 아직도 엘스펫 할머니를 못 만났나요?" "예.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그 노부인은 우리 신문의 애독자이고, 이 고 성의 주인이니까 경의를 표하여 좋은 인상을 주도록 해야 겠는데..... 참,어쩌면 노부인은 내게 이 성에 묵고 가라고 할지도 모르지. 그럼 좀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텐데....." 스완 기자는 혼자 들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6. 고서의 여주인. "누구야, 벌써부터 샹들리에를 켠 사람은? 전기를 아껴 써야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엘스펫 노부인이 나타났습니다. 검은 상 복을 입은 앙상한 노파였습니다. 나이는 일흔쯤 된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정정해 보였으며, 긴 스커트 밑에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데일리>신문을 들고, 걸을 때마다 힘찬 구두소리를 냈습니다.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오던 콜린 의사가 재빨리 전등을 끄려 하자, 노부인은 얼른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냥 켜 둬요. 이렇게 어두워서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알랭과 캐 더린은 어디 있지?" 콜린이 그 두 사람을 소개하자, 엘스펫 노부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알랭과 캐더린을 번갈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만족 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너희들은 캠벨 집안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다. 역시 캠벨 일족이야." 그녀는 난로위에 걸린 앤거스 캠벨 노인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습 니다. "돌아가신 우리 주인은, 캠벨 집안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만 명 가 운데서도 찾아낼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어. 참, 알랭, 네 종교는 뭐지?" 엘스펫 노부인의 갑작스런 질문에 알랭은 당황했습니다. "저어, 영국 국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뭐, 생각한다고? 넌 자기 종교도 확실히 몰라서 우물거리는 거냐?" "알고 있습니다. 영국 국교회가 틀림없습니다." "캐더린, 너도 마찬가지냐?" "예, 그렇습니다." 캐더린의 대답에 노부인은 코웃음쳤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 너희들도 오늘로써 엉터리 같은 영국 국교회는 집어치 우고, 스코틀랜드 교회로 바꾸도록 해. 그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캠 벨가의 전통 종교니까. 알았지?" 엘스펫 노부인은 탁자 위의 큰 성경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명령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독재자나 폭군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스완 기자 쪽을 홱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스완 기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띄우고 엘스펫 노부인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서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엘스펫 노부인, 저는 지금 부인께서 손에 들고 계신 <데일리>신문의 기잡 니다. 저희 편집장께서 부인의 편지를 읽고 감격했습니다. 이렇게 먼 스 코틀랜드 지방에도 고마운 애독자가 있다는 걸 알고, 몹시 기뻐하고 있습 니다 . 그런데 편지에는 이 고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부인께서 진상 을 알고 있다고 씌어 있던데, 꼭 그럴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데일리>신문에 크게 발표할 테니까요." "뭐, 뭐라구! 진상이라니......?"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른 사람은 콜린 의사였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형수인 엘스펫 노부인을 날카롭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완 기자의 얼 굴을 잠자코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영국 사람이 아닌것 같은데" "예, 캐나다 태생입니다." "종교는?" "전 무신론자입니다." 깜빡 잊고 솔직히 대답한 순간, 스완 기자는 '아차!' 했습니다. 자기의 경 솔함을 뙾달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벌써 엘스펫 노부인의 눈에는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뭐, 무신론자라구? 우리 주인이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당 신은 상중의 집에 들어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다 니..... 참을수 없어! 설령 <데일리>신문의 기자라 할지라도 이 저택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순 없어. 빨리 꺼져 버려!" 마침내 엘스펫 노부인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노부인의 분노한 소리에는 스완 기자뿐만 아니라, 알랭과 캐더린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그건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입장인 난처해진 스완 기자가 변명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냈습니다. 엘스 펫 노부인은 발을 구르며 손에 든 <데일리>신물을 집어던졌습니다. "잔소리 말고 나가! 콜린, 이 남자를 창문으로 던져 버려요!" 그 굉장한 서슬에, 스완 기자는 겁을 집어먹고 허둥지둥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머, 무슨 집안이 이렇담! 마치 정신 병원 같아." 캐더린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캐더린. 내게 할 말이 있느냐?" "예, 엘스펫 할머님. 제가 느낀 걸 그대로 말씀드릴까요? 할머닌 좀 머리 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자신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불러 놓고, 이젠 쫓아 내다니 그건 너무해요. 자, 맘에 안 들면 나까지 쫓아 내시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캐더린은 알랭이 조마조마하게 느낄 정도로 마구 쏘 아 댔습니다. 모두들 금방이라도 엘스펫 할머니의 분통이 다이너마이트같이 폭발하는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노부인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캐더린, 너는 정말 곧은 기질을 가진 여학자구나. 내 맘에 들었다. 그래 야 우리 캠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일족이지. 그런데 알랭, 너도 나를 미친 할멈으로 생각하니?" "천만에요. 그러나 그 기자를 내쫓은 건 좀 지나치셨습니다. 그는 어쩌면 캠벨 집안에 대해 나쁜 기사를 쓸지도 몰라요." 그러자 콜린 의사가 옆에서 참견했습니다. "응, 그것도 맞는 말이야. 지금이라도 그 친구를 데리고 와서 오늘밤에 같 이 샤일라성의 명주를 마시면 어떨까......?" "나는 그렇게 못 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한발짝도 이집에 들여놓 을 수는 없어!" 엘스펫 노부인은 바위처럼 고집을 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문에 투서한 건 형수님이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편지를 냈 지요? 그의 말로는 이번 사건에 관한 진상을 알고 있다는 편지라던데...." "콜린, 이 집 주인은 나요.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알랭을 탑으 로 데리고 가서,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얘기해 줘요. 캐더린은 여 기에 남아 내게 여자 대학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여잔 여자끼리 얘기하자 구나." 엘스펫 노부인의 명령은 시동생인 콜린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알랭 과 함께 조금 전에 던컨 변호사와 채프만 조사원이 나간 옆문으로 나갔습니 다. 그 문은 탑의 일층으로 통해 있었습니다. 문을 여니 실내는 어둑어둑했습니 다. 바닥은 흙이고 돌로 된 나선형 계단이 위로 올라가 있었으며, 안뜰을 향해 나무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이 문에는 늘 주머니 모양의 작은 열쇠가 달려 있는데, 늘 잠그지 않고 열어 두지. 그래서 누구라도 밖에서 탑으로 몰래 숨어들어갈수가 있어. 정말 엉성하지. 알랭, 저 할머니는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아. 3만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타느냐, 못 타느냐 하는 중요한 때인데도, 왜 내게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을까?" "할머닌 경찰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알랭이 묻자, 콜린은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저 고집통 할머니는 경찰을 우습게 알아. 2,3년전에 소 한마리를 도둑 맞 은 일로 경찰과 한바탕 크게 싸웠어. 그뒤부터는 경찰을 도둑놈의 편이라 고 생각하고 있지. 그꼮서 이번에도 경찰 따윈 상대하지 않고 직접 신문 사에 투서한 모양이야." 콜린 의사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맛있게 한 모금 빤 다음, 이야기를 계 속 했습니다. "나도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엘스펫 형수도 빈털터리야. 만약 보험금을 못 타면, 우린 두 손 들어야 해. 형수는 몇 백년 동안 내려온 이 캠벨 집 안의 성을 팔아야 해. 그러나 과연 이렇게 낡고 보잘것없는 고성을 살 사 람이 있을지 모르지...." "그럼 유산은 아저씨와 엘스펫 할머님이 절반씩 나눕니까?" "그렇지. 형님은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동생을 많이 생 각해 주어서 내개도 절반 남겨주었지. 자, 꼭대기에 올라가 보세. 이 탑 은 6층이고 104개의 계단이 있다네." 알랭은 콜린 의사의 뒤를 따라,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탑 의 뒤쪽, 그러니까 호수의 반대쪽에는 한 층마다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창 이 있었지만, 해질 무렵의 어둑어둑한 빛만으로는 발밑이 캄캄해 울퉁울퉁 한 돌계단을 올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곰팡내 나는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올라갔습니다. "앤거스 노인은 매일 밤 이렇게 높은 탑의 방에서 잤나요?" "탑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호수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어. 나는 매일 밤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질색인데.... 숨이 차니 잠깐 쉬었다 가세." 콜린 의사는 도중의 계단참에 앉아 쉬었습니다. 알랭은 그곳의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저녁놀로 물든 하늘이, 붉은 색에서 자주색으로 바뀌었습니다. 호수는 보이지 않았고, 눈아래로 인베라레이 마을로 가는 도 로가 뻗쳐 있었습니다. 멀리 산 중턱에 큰 성이 보였습니다. 그 성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가일성 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네개나 되는 탑의 지붕 색깔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스코틀랜드 지방에는 전설이나 미신에 얽힌 고성 이 많이 있습니다. "알렉 홉즈는 무엇하는 사람이죠?" 알랭도 돌계단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콜린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사는 괴짜 노인이야. 술주정뱅이에 허풍선이지. 앤거스와 동업으로 아이스크림 제조 공장을 시작했어. 어차피 동업이란게 잘 될 까닭이 없지만, 예상대로 그들은 완전히 파산해 버렸지. 홉즈는 앤 거스에게 속았다고 하고, 앤거스는 홉즈에게 속았다고 하면 크게 싸운 뒤 갈라졌지." "아! 그래서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도, 그가 여기에 와서 싸움을 했군요. 그때 당신은 없었나요?" "물론이지. 난 런던에서 병원을 하고 있네. 그날 밤 홉즈는 술이 잔뜩 취 한채 이 탑의 방까지 올라와 형님과 큰 소리를 치며 말다툼을 한 모양이 야. 엘스펫 형수와 하녀가 그 소동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홉즈이 모 습은 보이지 않더라는 거야. 아마 형님이 쫓아 버린 모양이야. 형님은 나 이에 비해 주먹심이 세거든. 그래서 형수와 하녀는 안심을 하고 아래로 내 려갔고, 형님은 문에 자물쇠와 빗장을 걸고, 침대에서 잤는데, 한밤중에 사건이 일어난 거야. 경찰의는 사망 시각이 10시부터 새벽 1시 사이라고 했어. 아뭏든 10시까지는 살아 있었던 게 분명해. 형수와 하녀가 보았으니 까." "어셉서 침대에서 잤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잠옷을 입고 있었고 침대 시트가 구겨진 채 잠잔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불은 꺼져 있고 창문의 방공망이 벗거져 있었어. 만약 뙾어 있었다면, 창문에서 불빛이 새지 않도록 방공막을 내 려 놓았을 테니까 말이야." 알랭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금이 전시 중이라는 것을 하마 터면 잊을 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단의 작은 창에는 방공막이 안 쳐져 있는데요?" "이런 작은 창에 암막을 치면, 낮에도 계단이 캄캄해서 오르내릴 수가 없 어. 그래서 제일 꼭대기 방 창문에만 암막을 쳐 놓았지. 그 방은 몇 킬로 미터 밖에서도 불빛이 보이니까 말야. 알랭, 자넨 마치 탐정이나 된 것처 럼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군. 그렇게 의심스러운게 많으면 방에 올라가, 직접 눈으로 보도록 하게." 7. 의문의 여행 가방 두 사람이 탑 꼭대기의 방으로 올라가 보니, 던컨 변호사와 보험 회사의 채 프만 조사원이 아직도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채프만, 이것으로 앤거스 노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것이 뚜렷해졌네. 여행 가방인지, 개 먪는 가방인지 잘 모르지만, 아뭏든 그게 사건이 일어난 뒤에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단 말이야. 내 말을 알겠나?" "하지만 던컨씨, 그 가방은 텅 비어 있었어요. 그게 도대체 무슨 증거가 된다고 그럽니까?" 서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알랭과 콜린 의사가 들어왔으므로, 두 사람은 돌아보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방은 둥글고 넓었으며, 천장이 꽤 낮았습니다. 나선형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 문이 있었는데, 안쪽의 자물쇠가 잠긴 채 부서져 있었습니다. 빗장도 한쪽에 걸린 채 부서져 있었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날 아침, 문을 부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호수 쪽으로 창이 하나 있었는데, 두장의 유리창을 밖으로 밀어 여는 창문 이었습니다. 알랭은 그 창문에 난간이 없고 창지방이 낮아 위험할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벽면에 큰 침대가 놓여 있었고, 대리석으로 된 책상에는, 오래 된 가족 사 진, 서류, 편지 묶음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책이라곤 성경책이 한 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눈에 노인이 살던 방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지 럽고 지저분한 방이었습니다. 낡은 구두와 슬리퍼가 침대 밑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앤거스 노인은 맨발로 창문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런던에서 온 알랭 캠벨 교수를 소개하겠소." 콜린 의사가 격식을 차리며 소개하자, 등이 굽은 던컨 변호사는 뼈마디가 나온 손으로 알랭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여어, 당신이 캠벨 교수요? 대학 교수치곤 젊군요. 아뭏든 잘 오셨소. 기 다리고 있었는데." "던컨씨, 왜 제게 편지를 보냈죠? 물론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친척으로서 좀더 빨리 교제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나나 캐더린양은 이번 사건에는 그다지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편지에는 친족 회 의를 한다고 돼 있던데, 대체 무슨 소리죠?" "그건.... 나중에 천천히 설명하겠소. 지금 채프만 조사원과 나는 앤거스 노인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소. 그는 이 창문 으 로 떨어졌소." 그렇게 말하고 던컨 변호사는 알랭을 창가로 데려 갔습니다. 유리창은 열려 밖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어둠이 퍼지는 호수와 시커먼 산들 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알랭은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 습니다. 그러자 고소 공포증환자가 아닌데도, 눈이 아찔했습니다. 창가의 바닥에 등화 관제용 암막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무 틀에 검을 천 을 바른 것으로, 창문에 꼭 끼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암막은 시체가 발견된 날 아침에도 창문에서 벗겨져 있었습니까?" 알랭이 변호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렇소." "그럼 앤거스 노인은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전등을 끄고, 손으로 더듬어 창가로 가서 이 암막을 벗기려다가, 창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몸이 비틀 거리는 바람에 떨어졌다곤 생각할 수 없습니까? 창에는 난간도 없고 창지 방이 아주 낮지 않습니까?" 알랭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채프만 조사원이 웃으면서 가로막았습니다. "아니, 사고사는 아닙니다. 벽의 두께를 보십시오. 오랜 된 옛날 탑이므로 두께가 1미터나 됩니다. 그러므로 설령 난간이 없어도 몹시 술에 취하여 몸이 비틀거리지 않는 한, 떨어지진 않습니다. 더구나 시체를 해부한 결 과, 앤거스 노인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것이 판명 되었소." "그렇다면 사고사는 아니군요." "내가 왜 자살이라고 단정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요. 앤거스 노인 은 늘 창문을 닫고 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밤중에 암막을 벗긴 건, 아침에 날 새는 걸 알기 위해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죠. 그날 밤, 창 문이 닫혀서 잠겨 있었다는 건 엘스펫 노부인과 하녀가 분명히 확인했어 요. 나중에 경찰이 조사했을때도, 창 자물쇠에는 앤거스 노인의 지문만 찍 혀 있었습니다. 노인은 10시가 넘자, 잠옷으러 바꿔 입고, 암막을 벗긴 후, 늘 하던대로 침대가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밤중에 일 어나 스스로 창문을 열고 투신 자살한 겁니다. 그렇게밖엔 도저히 달리 생 각할 수 없어요." 채프만 조사원은 자신만만하게 말한 뒤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재빨리 돌아가 려 했습니다. "이봐, 기다리게! 하지만 여행 가방이....." 이번에는 콜린이 불러 세웠습니다. 채프만은 초조한 듯 얼굴을 찡그렸습니 다. "또 그 가방이야깁니까. 대강 해 두십시오. 이 사건과 개 넣는 가방 따윈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콜린 의사는 화를 벌컥 내며, 침대 밑에서 문제의 가방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옷가방 크기만한 갈색 가죽으로 만든 네모진 것이었습니다. 뚜꺼에는 물림쇠가 2개 붙어 있고, 안에 넣은 동물이 질식하지 않도록 한쪽 에는 철망이 처져 있었습니다. 알랭은 그 가방을 보고, 문득 어떤 무서운 트릭을 공상했습니다. 오래 된 고성이 주는 섬뜩한 느낌에서 떠오른 연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앤거스 할아버지는 공포에 몰려 그만 창문에서 뛰어내린게 아닐까 요?" 알랭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던컨 변호사가 틈을 주지 않 고 되물었습니다. "공포에 몰리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나는 알렉 홉즈란 인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만 꽤 엉큼한 사나이라고 생각합니다. 홉즈는 이 가방에 큰 독사나 독거미를 넣어 가지고 와서, 살 짝 침대 밑에 숨겼는지도 모르지요. 앤거스 노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다가 한밤중에 독사나 독거미가 가방에서 기어 나오자 깜짝 놀라 공포심에서 위험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독 사나 독거미가 아직도 이 방안에 있다는 말인가. 그다지 기분 좋은 이야기 는 아닌데...." 콜린 의사가 기분 나쁜 듯이 침대 밑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채프만 조사원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어리석은 소리. 뱀인지 거미인지 모르지만, 그런게 이 가방에서 기어나와 제대로 가방 두껑에 있는 물림쇠를 걸 수 있을 까요? 이튿날 아침, 이 가 방이 발견되었을때, 물림쇠는 둘다 제대로 걸려 있었잖습니까. 정말 바보 스러운 이야깁니다. 그것보다는 유령의 짓이라 생각하는게 훨씬 났죠." 8. 도둑 맞은 일기. "이봐. 채프만.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럼 자넨 우리 형님이 죽은 게 유령 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별안간 콜린 의사가 화를 내며,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큰 소리쳤습니다. 채프만은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그건 내 생각만이 아닙니다.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샤일라성에 유령이 나온다고 믿고 있는걸요. 그리고 화내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하는 데요.... 마을 사람들은 캠벨 집안에 그다지 경의를 표하고 있는것 같지 가 않아요. '저주받은 핏줄'이라고 수군거리더군요." "마을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문따윈 난 아무렇지도 않아. 이 마을 사람들은 죄다 무지한 자들뿐이니까. 설마 당신을 알렉 홉즈가 개 넣는 가방에 귀 신을 넣어 왔다고 믿지 않겠지?" "물론 믿지 않지만, 홉즈씨를 한 번 만나고 싶군요. 변호사님,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던컨 변호사는 난처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게 이상한데.....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홉즈는 행방불명이야." "아니 그럼 야밤 도주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니면 술에 잔뜩 취해서 여기저기 방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는 주정뱅이니까. 아뭏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야." 채프만은 실망했는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너무 시간이 늦어서 전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내일 경찰 서에 가 보겠습니다. 지금쯤은 경찰도 이 사건을 자살로 단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나도 그 결정에 따라 회사에 보고서를 제출할 작정입니다. 그 게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흥,난 경찰 같은 건 믿을 수 없어! 그래서 내가 기데온 펠 박사를 불렀 지. 어때 좋은 생각이지? 모두들 놀랐을 거야." 콜린 의사는 가슴을 펴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사립 탐정을 부른다면, 큰 비용이 들 텐데, 대체 어디서 그런 큰 돈을 마련할 겁니까?" "아니 던컨. 자넨 말끝마다 돈, 돈 타령인데, 돈 같은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펠 박사는 내 친구란 말이야. 그러니 탐정료 따윈 받지 않을 걸세." "그러나 만약 보험회사가 자살이라 단정해서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린 재판을 걸어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지요. 아 까 알랭 캠벨씨가 왜 친족 회의에 초청됐나 궁금하게 여겼는데, 그 이유 는....." 던컨 변호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했습니다. 콜린이 눈을 부릅뜨 고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라구? 이봐, 던컨. 자네가 알랭과 캐더린을 부른 건 돈이 목적이었나? 아니, 자넨 어쩌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지? 난 이 젊은이에게 돈 을 빌 정도로 몰락하진 않았어. 좋아. 형수님에게 이 사실을 말해서, 자 네를 해고시킬 테야! 캠벨 집안과는 절교란 말이야. 우리집과는 이제 끝난 거야." 자존심이 강한 콜린 의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화를 냈습니다. 던컨 변호사 의 굽은 등이 더욱 굽어졌습니다. 눈을 감고 참는 모양이었습니다. 알랭이 보다못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비용이 든다면,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난 아버지가 상당한 유산을 남겨 주었으니까요...." "호오, 알랭. 자넨 그렇게 부자인가? 꽤나 편한 신분이로군 그래. 하지만 난 자네에게 도움받을 정도로 노쇠하지 않았어." 콜린 의사는 화가 잔뜩 났습니다. 부서진 문을 발로 쾅 차더니, 화난 걸음 으로 나선형 계단을 급히 내려갔습니다. 다른 세 사람도 어색한 기분으로, 잠자코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이미 해는 지고 탑안은 캄캄했으므로 일행은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힘겹게 마지막 돌계단을 내려섰습니다. 던컨 변호사는 채프만의 자동차에 같이 탄 채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알랭은 기분이 언짢아 뵈는 콜린 의사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습니 다. 엘스펫 노부인과 캐더린이 식탁에 앉아, 정답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 습니다. 난로불은 활활 타올랐으며 벽에는 사슴목의 박제가 몇개나 장식되 어 있고, 장검 두자루가 엑스자 모양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알랭도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콜린이 커다란 소시지를 씹으면서 말했습니다. "내일 기데온 펠 박사가 올거야. 처음 호수에서 자네들의 보트를 봤을때, 난 펠 박사가 오는 줄 알았어. 펠 박사만 와주면 이 사건은 당장에 해결 될 거야." "기데온 펠 박사라니, 그 사람은 누구죠?" 캐더린이 물었습니다. "아니, 캐더린은 여학자이면서도 그 유명한 펠 박사를 모른단 말이야? 너 희들은 그 사람 발밑에도 못갈 만큼 훌륭한 학자야. 게다가 범죄 수사에 있어선 영국 제일, 아니 세계 제일의 명탐정이지." 콜린 의사는 마치 자기 일인 양 자랑했습니다. 엘스펫 노부인은 그런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를 숙이 고 부지런히 음식만 먹고 있었습니다. 노파인데도 식욕은 왕성했습니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식당안은 난로가 있어 따뜻하고 아늑 했습니다. 알랭은 조금 먹다 그만 두고, 아까부터 의심스러웠던 것을 물었습니다. "한 가지 모를 일이 있는데.... 일기장에 관한 것인데요. 던컨 변호사와 채프만이 옆방에서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없어진 일기장'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대체 그것은 누구의 일기장입니까?" "앤거스 형님의 일기장이지.형님은 매일 밤, 자기 전에 일기를 썼어.그러 니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에도 책상위에 일기장이 있어야 했는데, 그게 없어졌단 말이야.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 이미 몇 시간이 지난 뒤라, 누가 훔쳐는지 알 수가 킫어지. 형수님 그렇죠?" 콜린 의사는 토스트에 버터를 잔뜩 바르며, 엘스펫 노부인에게 말을 걸었지 만, 그녀는 그 말은 일부러 못 들은 체 하고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콜린, 지금 위스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지요? 아닌가요?" 콜린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습니다. "호오, 오늘밤은 '캠벨 집안의 운명을 마시게 해주는 건가요? 그거 고맙군 요. 알랭, 자네도 마셔 보겠나? 캠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밀주야. 머리 가 날아갈 정도로 독하지." "그것 참 꼭 마셔 보고 싶은데요." 그다지 술이 세지 않는 알랭이었지만,힐끗 캐더린쪽을 보면서 남자답게 대 답했습니다. 엘스펫 노부인이 하녀를 시켜, 지하의 술 창고에서 밀주 위스키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오래 된 큰 병에, 금빛의 액체가 들어있었습니다. 콜린 의사가 그것을 일동의 술잔에 부었습니다. "캐더린도 한 잔 줄까?" "예, 마셔보겠어요.아주 조그만...." "좋았어. 자, 캠벨 일족을 위해 건배!" "건배!" 알랭은 술잔을 눈앞까지 들고, 단숨에 마셔 버렸습니다. 그 순간, 목이 타 는 듯하고 눈앞이 핑핑 돌았습니다. 관자놀이의 힘줄이 튀어나오고 숨이 막 혀 죽는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멍청히 눈을 뜨고 보니, 콜린 의사가 ' 어때?' 하는 듯이 웃고 있었습니다. "어떤가, 술 맛 좋지?" "예, 굉장히 독한 술이군요." "너무 독하지 않아요?" "이 정도는 괜찮소." 알랭은 캐더린이 걱정스레 쳐다보는 것을 의식해서 남자답게 뽐냈습니다. "됐어. 그게 바로 우리 캠벨 집안 사나이야. 자, 또 한 잔, 건배! 자꾸 마 시자구!" < 제 1 장 끝..> ====================== 고성의 괴사건 ======================= 제 2 장 고성의 유령 9. 명탐정의 등장 다음날 알랭은 낮이 가까와서야 겨우 잠이 깨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습니 다. 그러나 어지러워 다시 쓰러져 버렸습니다.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픈 것이 심한 숙취인 듯했습니다. 간밤의 일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 지 않았습니다. 콜린 의사가 권하는 '캠벨 집안의 운명'을 실컷 마신 것 외 엔 기억나는게 없었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캐더린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쟁반에 담은 커피잔을 침대 옆의 탁자에 놓았습니다. "알랭, 기분이 좀 어때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조금은 기분이 좋아질거 여요. 당신은 취하니까 이상해지더군요." "내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소?" 알랭은 지근지근 쑤시는 머리를 누르며, 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말을 하 니 머리가 더 아팠습니다. "어머나, 기억 못 하시겠어요? 당신과 콜린씨는 벽에 걸린 장검을 들고, 온 식당을 뛰어다니며 펜싱놀이를 했어요. 그건 진짜 장검이었는데." "아니, 그게 정말이오?" "다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여요. 당신은 정말 우스운 사람이어요." "엘스펫 할머니는 뭐라고 합디까? 내 욕을 해대며, 화가 잔뜩 났겠군." "아니어요, 그 할머닌 당신이 맘에 쏙 드나 봐요. 캠벨 일족의 자랑이라고 하시던데요." "아니, 그건 또 왜?" "펜싱놀이를 하기 전에, 당신은 술취한 기세로, 스코틀랜드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30분이상이나, 장황하게 연설을 해댔어요. 그러니 엘스펫 할머니 마음에 들 수 밖에요."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도 나는군." 커피를 마신 덕분에 알랭은 조금씩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뒤의 행동이 또 대단했어요. <데일리> 신문의 스완기자를 당신 들이 어떻게 했는지, 그것도 기억나지 않으셔요?"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 기자가 어떻게 여길 다시 왔을까.....?" "당신과 콜린씨가 펜싱놀이를 하며 식당에서 뒤뜰로 나갔을 때, 스완 기자 가 저택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나 봐요. 그 모양을 본 콜린씨가 '이 고십 신문의 사냥개!'하고 장검을 휘두르며 쫓아갔어요. 놀란 스완 기자는 쏜 살같이 도망쳤지요. 그런데 그 뒤를 당신과 콜린씨가 쫓아가 스완 기자의 엉덩이를 칼로 찔러 버렸죠." 캐더린은 그샔의 광경을 다시 생각하고 재미있다는지 깔깔 웃었습니다. 알랭은 자신의 주정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문득 자기가 못 보던 파 자마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니, 내가 언제 파자마로 바꿔 입었지? 캐더린, 당신이 입혀 주었소?"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나,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알랭, 빨리 런던으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생각 안 드세요? 이렇게 음산 한 고성에 오래 머물다간 아마 두 사람 다 머리가 이상해질 거여요." "다시는 그 '캠벨 집안의 운명'은 안 마시겠소. 콜린씨도 역시 숙취로 아 직 일어나지 않았소?" "아녀요. 그분은 벌써 일어났어요. 원기가 넘쳐 좋은 위스키란, 뭐 뒤끝이 깨끗하다던데요. 게다가 그 유명한 펠 박사라는 분이 와 있어요." 30분뒤에 알랭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캐더린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 습니다. 기분은 상당히 좋아졌지만, 아직도 한 계단씩 내려갈때마다 머리가 아팠습니다. 거실에는 콜린 의사와 기데온 펠 박사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습니다. 펠 박사는 작은 산만큼 덩치가 큰 사나이였습니다. 산적 같은 수염 에 지팡이 꼭지에 양손을 끼고, 웃으면 살찐 두 겹의 턱이 공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백발이 섞인 머리카락이 검은 리본을 단 안경위로 흘러내려와 있었습니다. "아, 안녕하시오? 당신이 하이게이트 대학의 캠벨 교수요?" 말하는 펠 박사의 목소리가 뇌성처럼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여어, 알랭. 잘 잤나!" 콜린 의사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어..... 목소리를 조금 낮춰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알랭은 모기 소리같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우린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았어. 기분이 좋지 않 은가?" "예, 심한 숙취롤 머리가 아픕니다." "무슨 소리야! '캠벨 집안의 운명'은 고급 술이야. 좋은 술을 마시고 머리 가 아프다는 건 자네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야." 콜린이 무턱대고 알랭을 나무랐습니다. 펠 박사는 그 농담을 듣고, 큰 몸을 흔들며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콜린. 난 자네 초대를 받고 기꺼이 달려왔지만. 어젯밤 늦 게 다눈 항구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곳 호텔에서 잤지.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여행 안내소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한 남자를 만났어. 그 사람은 인베라레이 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왔는데, 뒷좌석에서 엉덩이 를 든 채 엉거주춤하고 있더군. 이상해서 어째서 그런가 물어 봤더니, 엉 덩이를 장검으로 찔려, 앉으면 아프다는 거야. 콜린, 그 신문 기자는 자 네들의 펜싱놀이에 몹시 화를 내더군. 핫하하....." 콜린 의사는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알랭은 겸연쩍어서 어깨를 움츠렸습니 다. 펠 박사는 안경 너머로 알랭과 캐더린을 번갈아 보며 말했습니다. "한가지 묻겠는데.... 당신들은 약혼했소?" "천만에요!" 캐더린이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럼 서둘러 결혼해야 할거요. 오늘 아침 데일리 신물을 읽어 봐요. 하이 게이트 대학의 젊은 교수와 하펜던 여자 대학의 아름다운 조교수가 한 침 대차의 객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고십난에 났더군." "어머나, 그 비열한 스완 기자가 썼군요. 기사로 안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서, 비겁한 배신자!" 캐더린은 예쁜 눈썹을 치겨 올리며 화를 냈습니다. 알랭은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화낼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늦게, 여러분 가운데 탑으로 올라간 사람은 없었나요?" 펠 박사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올라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음..... 이상하군. 나는 오늘 아침, 어제 그 기자가 탔던 택시로 이곳에 왔소. 그런데 택시 운전사로부터 묘한 이야기를 들었소. 어젯밤 스완 기자 는 인베라레이 마을에 숙소를 정한 뒤에 다시 한번 택시를 타고 이 성에 왔었다는 거요. 어떻든지 특종 기사를 얻으려고 마음먹었던 모양이오. 그 러나 다시 현관에서 내 슛길 것 같아 운전사에게 하녀를 불러 달라고 부탁 했다는군. 그래서 운전사는 호수 쪽으로 향한 정원으로 돌아 현관 앞에 서 있었대. 노크하려다 무심코 탑을 올려다 보니, 탑의 높은 창문에 수상 한 사람 그림자가 비치더라는 거요." "어떤 그림자였는데요?" "얼굴이 절반은 없는 유령이었대. 탑 꼭대기의 창문에서 운전사쪽을 가만 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밝은 달밤이라 유령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고 그 운전사는 말하더군." 일동은 그 순간 공포심으로 거의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그렌코 학살 때의 병사 이안 캠벨을 쫓아다니던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는 건가요?" 캐더린이 겁먹은 소리로 묻자, 콜린 의사가 초조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유령이라니! 바보같은 소리 그만해. 그런 괴담은 엉터리 여행 안내소가 흥미 본위로 쓴 거짓말이야. 그 탑엔 유령 따위가 나타난 일이 한 번도 없어. 형님이 날마다 그 방에서 잤지만, 귀신 같은 걸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펠 박사, 자네까지 그런 헛소리를 믿고 있나?" "난 다만 운전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운전사가 그 유령을 봤다는게 몇 시경이었죠?" 하고 알랭이 물었습니다. "스완 기자가 당신들에게 장검으로 내쫓기기 직전이었지. 운전사는 유령을 본 순간 겁이 나서, 급히 자기 차로 도망쳤다는군. 엔진을 걸고 기다리고 있자, 스완 기자가 엉덩이를 손으로 누르며 달려와 차에 타자, 마을로 급 히 돌아왔다는군." "어떤 유령이었나요?" "군인 모자를 쓴 남잔데, 피투성이 망토를 걸쳤고 얼굴의 절반은 구멍이 뚫 린 애꾸눈이었대. 그런 모습이 환한 달빛에 비쳐, 탑의 창에 서 있었 다고 하더군. 그런데 간밤에 이 저택에는 당신들 세 사람 말고 누가 있었 지?" "엘스펫 할머니와 하녀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 자고 있었습니다." 알랭이 대답하자 콜린은 코방귀를 뀌었습니다. "흥. 그건 트림없이 운전사의 헛소리야. 괘심한 거짓말장이 같으니!" 콜린은 조상의 고성에 얽힌 괴담을 모두 거짓이라고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하녀의 안내로 던컨 변호사와 보험 회사의 채프만 조사원이 들어왔습니다. "콜린씨. 알려 드릴 게 있어요. 알렉 홉즈가 발견된 모양입니다." 던컨 변호사의 맨 처음 보고였습니다. 간밤의 싸움은 깨끗이 잊은 모양입니 다. "아니, 어디서?" "그렌코 마을 부근의 농가 헛간이라는군요." 채프만 조사원이 얼른 끼어들었습니다. "그렌코 마을이라면, 여기서 그리 멀지 않군요. 어때요. 제 차로 빨리 달 려가 만나 보도록 하지요? 그러면 사건이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던컨 변호산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뭐, 그리 초조하게 굴건 없소. 그 사나이가 진짜 홉즈인지, 아닌지 경찰 이 조사할 테니까. 이전에도 가짜 정보에 속은 적이 있거든." "그 홉즈라는 사람은, 앤거스 캠벨 노인이 죽은 날 밤 싸우러 온 사나이로 군." 별안간 옆에서 펠 박사가 큰 소리로 말했으므로, 던컨과 채프만은 깜짝 놀 라 돌아보았습니다. 콜린 의사가 펠 박사를 소개하자, 채프만이 상냥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 당신이 그 유명한 기데온 펠 박사님이시군요. 존함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자살한게 뻔한데, 일부러 명탐정인 박사님께 서 오실것까진 없었는데요." 펠 박사는 안경 너머로 상대를 노려보았습니다. "난 살인 사건이라 기대를 걸고 찾아왔는데, 자살이라면 아주 흥미도 없 어. 참 그 홉즈란 사나이는 무었 때문에 앤거스 노인과 다투었지?" "아이스크림 때문이야." 콜린이 옆에서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뭐,아이스크림....?" "스코틀랜드 지방의 명물인 여러 가지 체크 무늬의 색깔을 묻힌 아이스크 림이야. 그걸 두 사람이 대량 생산하려고 했지. 드라이아이스를 써서 만 들었는데, 보기 좋게 실패해서 공장은 파산하고 말았어. 형님은 늘 그런 공상적인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실패해 드디어 재산을 다 털어먹었지. 그전에도 사기꾼에게 속아서, 해적 드레이크가 숨겼다는 보 물을 파내려다가 꽤 많은 돈만 날려 버렸어." "그럼 홉즈도 사기꾼인가? 어떤 사람이지?" "조금 배우기는 한 작자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형님과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고, 좀 덜 떨어진 사내야. 비쩍 마르고, 검은 피부가 음탕하게 보이는 술고래라네." "저 난로위에 있는 사진이 앤거스 노인이군?" 펠 박사는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다니, 어슬렁어슬렁 난로 쪽으로 걸어가 그 사진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음..... 자살한 만한 인상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자살한게 아닙니다." 하고 던컨 변호사가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자 채프만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사진의 인상만으로 그렇게 판단하다니, 명탐정답지 않으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캠벨 집안의 친척인가?" 펠 박사는 채프만 쪽을 돌아보며 안경 너머로 노려보았습니다. 콘크리트 벽 이라도 꿰뚫어볼 만큼 날카로운 눈초리였습니다. 채프만은 당황해서 더듬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전 이 캠벨 집안과는 관계없습니다. 보험 회사의 조사원이죠. 빨리 이 사건을 종결 짓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저어, 펠 박사님. 이 사건은 모든 증거로 보아 자살임이 뚜렸합니다. 새삼스레 박사님같은 명 탐정이 조사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젊은이. 증거란 항상 겉과 안이 있는 법이야. 생각하기에 따라서 겉이 되 기도 하고, 안이 되기도 하지. 내 말을 잘 기억해 두게...." 펠 박사는 설교를 한 다음, 다시 큰 몸집을 흔들며 소파에 앉더니 주머니에 서 수첩을 꺼냈습니다. "나는 콜린이 편지로 알려 온 것과, 오늘 아침 여기 와서 보고 들은 증거 를 정리해 보았소. 읽어 볼테니, 만약 틀린 곳이 있으면 고쳐 줘요." 1. 앤거스 캠벨 노인은 매일 밤 9시경 방으로 올라가 잠을 잤음. 2. 문은 늘 안에서 자물쇠와 빗장으로 잠그며 창문도 닫고 자는 습관임. 3.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기를 썼음. 펠 박사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눈을 깜빡였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진 틀림없죠? 그럼, 사건이 일어난 날 밤입니다." 4. 알렉 홉즈는 밤 9시 반경 앤거스 노인을 찾아와, 탑의 방으로 올라갔음. 5. 저택에 있던 엘스펫 노부인과 하녀는 그때까진 홉즈가 왔다는 사실을 몰 랐음. "참,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홉즌 대체 어떻게 탑 안으로 숨어들었을까?" 그러자 콜린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탑 1층의 문은 뒤뜰로 향해 있고, 바깥에 주머니 모양의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는데, 늘 열려 있어. 그러니 들어가려고만 하면 아무나 침입할 수 있지." "그랬군. 그럼 이제 어려운 문제에 들어가 볼까." 6. 홉즈는 앤거스 노인과 한바탕 싸운 뒤 쫓겨 났음. 7. 엘스펫 노부인과 하녀는 그 소동을 듣고 탑으로 달려왔음. 8. 그러나 이미 홉즈는 가고 없었음. 9. 그래도 노부인은 걱정이 되어, 남편방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침대밑에 는 물론 어느 곳에도 개 넣는 가방은 없었음. "여기까진 틀림없나요?" 그러자 별안간 뒤쪽 문에서 쇠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니, 그건 틀려!" 일동이 놀라 소리난 쪽을 돌아보니, 어느새 엘스펫 노부인이 문앞에 서있었 습니다. 노부인은 양손을 허리에 대고 일동을 노려 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엘스펫 부인. 어디가 틀립니까?" "내가 침대 밑을 보았을때, 개 넣는 가방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오. 가방 은 있었소." 하고 엘스펫 노부인은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경찰이 조사할때 그런 가방은 없었다고 분명이 증언했잖습 니까?" "난 여행 가방이 없었다고 했지. 개 넣는 가방이라곤 말하지 않았소." "그럼 앤거스 노인이 문에 자물쇠와 빗장을 걸기 전에, 침대 밑에 개 넣는 가방이 있었단 말인가요?" "그렇소." 그녀는 분명히 대답하고는, 문을 힘차게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엘스펫 노부인의 갑작스런 발언에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습 니다. 펠 박사가 그 웅성거림을 가라앉혔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방금 그 이야기는 우선 의문으로 남겨 두고, 말을 계속 하겠습니다." 10. 앤거스 노인은 문안으로 자물쇠와 빗장을 걸고 잠을 잤음. 11. 그의 시체는 이튿날 아침 6시에 탑 아래 떨어져 있는 것이 우유 배달부 에 의해 발견되었음. 12. 사인은 추락으로 인한 골절인데, 즉사가 아니고 잠시 기절한채 살아 있 었던 것으로 생각됨. 13. 사망 시간은 오후 10시부터 1시 사이임. 14. 약을 먹었거나 술에 취한 흔적은 없었음. 15.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음. 빗장은 녹슬어 빠지기 힘들었고, 뜠 끼어있 었으므로 문밖에서 가는 철사나 실로 안의 빗장을 움직이기 불가능함. 16. 창문으로는 방안에 들어갈 수 없음. 이것은 굴뚝 청소부의 증언으로 알 수 있음. 17. 방안에는 아무도 숨어 있지 않았음. 18. 침대에는 잠잔 흔적이 있었음. 앤거스 노인은 잠옷을 입고 죽었지만, 구두나 슬리퍼는 방안에 남아 있었음. 19. 앤거스 노인의 일기장이 없어졌음. 다른 것도 훔쳐 갔는지 알 수 없음. 20. 창문의 자물쇠에는 앤거스 노인의 지문만 찍혀 있었음. 21. 침대밑에 개 넣는 가방이 있었음. 이 집의 물건이 아니므로, 홉즈가 들 고 왔다고 생각되지만 전날 밤에는 거기 없었음. 22. 개 넣는 가방은 비어 있었음. "자, 여러분, 이상의 증거로 추리하면 두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는 앤 거스 노인이 자살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가방안에 그가 목숨을 걸고 도 망칠 만큼 무서운 것이 들어있었으므로,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것. 이 두가지 중의 하납니다. " 펠 박사는 수첩을 덮고 나서, 열심히 듣고 있는 일동의 얼굴을 둘러보았습 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채프만 조사원이 엷은 웃음을 띠며 비웃듯이 말했습니다. "그 가방 속에 독사나 독거미가 들어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도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리 재주 좋은 뱀이나 거미라도 가방에서 빠져나와 뚜껑의 물림쇠를 잠그진 못합니다. 그런 걸 믿느니,차라리 난 유령의 존 재를 믿겟습니다. 실지로 간밤에 택시 운전사가 탑위에서 유령을 봤다지 않습니까? 이미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어떻든 나같으면, 그렇게 소름끼치는 탑 꼭대기 방에선 하룻밤이라도 자기 싫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콜린 의사가 별안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채프만 에게 로 달려 갔습니다. 얼굴에는 분노로 파란 핏줄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이 성에 오는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유령 얘기를 하는데, 나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좋아, 유령이나 도깨비가 없 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 주지. 오늘밤부터 내가 탑 꼭대기 방에서 자겠어! 만약 유령이 나타나서, 나를 창 밖으로 밀어 내려면....." 콜린은 분노에 떨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문이 살며시 열리고 하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저어... 스완 기자가 또 찾아오셨는데요...." 10. 명탐정의 걱정. "그 고십 기자가 또 나타났군. 좋아. 이번엔 호수속에다 던져 버릴 테다!" 콜린 의사가 화를 내며 현관으로 달려가려 하자, 알랭이 나서서 급히 말렸 습니다. "안 됩니다! 지금 또 스완 기자를 만나면,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건 제 게 맡겨 주십시오. 잘 달래고 올 테니까요." 캐더린도 맞장구쳤습니다. "그래요. 더 이상 그 기자를 화내게 하면, 어떤 심한 고십 기사를 쓸지 몰 라요. 알랭, 어젯밤 장검으로 찌른 걸 솔직이 사과하도록 해요." 알랭이 급히 현관에 나가 보니, 돌계단 위에 스완 기자가 어깨를 펴고 서 있었습니다. "여어, 스완씨. 어젯밤의 일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죄송하게 생각하 오." 알랭은 솔직하게 머리 숙여 사과했습니다. 스완 기자는 상대방이 저자세로 나오자 점점 의기양양해졌습니다. "알랭씨,난 당신과 콜린 캠벨 씨를 상해죄로 경찰에 고발 하겠소. 장검으 로 남의 엉덩이를 찌르다니.... 당신은 대학에서도 그런 난폭한 짓을 합 니까?" "아니오, 간밤엔 술이 너무 과해서.... 정말 미안하오. 나는 아무래도 괜 찮지만, 캐더린양에 대해서는 이상한 고십을 쓰지 말아 주시오. 부탁이 오." "글쎄요... 나는 신문 기자로서 국민에게 보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그런 과장된...." "그럼, 우리 거래 한번 합시다." "거래...?" 알랭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스완 기자는 씩 웃으며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 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기데온 펠 박사라는 뚱뚱한 남자가 와 있죠? 오늘 아침 다눈 항구의 여행 안내소 앞에서 그를 만났소. 그때는 그가 유명한 인물인 줄 미처 몰랐소. 나중에 신문사에 전화했더니, 편집장이 깜짝 놀라며 그 박 사를 놓치지 말고 따라다니라는 거요. 그 명탐정이 가는 곳에 반드시 특 종 기사감이 따른다고 말이요." "그래서.....?" "그러니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특종 기사를 얻어 내야 하오. 그래서 거래 하자는 건데, 당신이 펠 박사의 수사경과를 가르쳐 주면 나는 당신을 경 찰에 고소하지도 않고, 캐더린양에 대한 고십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겠 소. 어떻소 이 거래는?" 그러고 있는데, 콜린 의사도 현관으로 나와, 상냥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어, 스완 기자! 간밤엔 나도 술이 취해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게 됐네. 자네와는 꽤 이야기가 통하는군그래. 그 거래라면 나도 찬성이야." "그럼 펠 박사의 수사에 관한 정보를 전부 말해 주겠습니까?" "좋아 약속하지." 스완은 자기에게 유리한 거래가 이루어졌으므로,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습 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느닷없이 스완 기자의 머리 로 물이 쏟아졌습니다. 알랭이 깜짝 놀라 이층 창문을 쳐다 보니, 엘스펫 노부인이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습니다. "무신론자! 썩 꺼져! 난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아. 이거나 받아랏!" 노부인은 다시 스완 기자의 머리 위에 두 번째 물벼락을 주고는 창문을 '쾅 !' 닫아 버렸습니다. 스완은 물에 빠진 생앙쥐처럼 되어, 멀거니 서 있었습니다. 너무나 얼떨떨 해서, 입을 벌린채 추위와 분노로 몸을 떨었습니다. 이번엔 콜린 의사가 위를 쳐다보며 고함쳤습니다. "저 할멈, 무슨 짓이야! 스완, 다친 덴 없나? 자. 집안으로 들어가 옷을 말려 입게." 스완 기자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얼굴의 물방울을 손으로 뿌리면서 말했 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다니! 누가 이 미치광이 정신 병원 같은 곳에 들어갈 것 같 아? 당신들은 모두 미치광이 범죄자야. 내가 신문에 크게 실어 줄 테니, 어디 두고 봐라!" "그래 가지곤 감기 걸리기 딱 좋지. 갈아입을 옷을 빌려 줄 테니, 들어오 게. 자네는 이 샤일라성의 사건을 취재하러 왔잖아, 펠 박사의 정보는 내 가 가르쳐 줄 테니.... 자, 기분을 바꾸게." "믿어도 됩니까?" "내가 약속하지. 저 할머니에겐 내가 잘 말할테니, 안심하게." 스완 기자도 온몸이 젖은 상태로는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콜 린 의사의 뒤를 따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알랭이 거실로 돌아와 보니, 던컨 변호사와 채프만은 어느새 돌아가고, 캐 더린과 펠 박사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창으로 그 소동을 내다본 모양이었 습니다. 캐더린이 걱정스러운듯 알랭에게 말했습니다. "스완 기자를 골탕먹였으니, 또 지저분한 고십을 쓰겠지요?" "아니오. 괜찮을 겁니다. 잘 달래서 거래하기로 했으니까." "어떤 거래를 했는데?" 펠 박사가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의 정보를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특히 박사님이 이 사 건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펠 박사님은 정 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펠 박사는 산적같이 더부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 을 열었습니다. "사건이 너무 간단해서, 무슨 함정이 있는 것 같아. 문에 자물쇠와 빗장을 걸고 침대에서 자고 있던 노인이, 한 밤중에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창 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밀실 사건 치고 너무 간단하단 말이야. 게다가 오늘밤엔 콜린이 그 방에서 잔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난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걸." "설마하니 다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모르지. 앤거스 노인이 살해되었다면,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까 위험한 노릇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 개 넣는 가방에 무엇이 들 어 있었느냐야.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건 대체 뭘까? 왜 가방의 한쪽 면만 철망이 쳐 있지? 생물을 넣어 두었다면, 그것이 질식하지 않도록 철망을 달아 놓았을 테지만....." "그 가방은 주의를 돌리기 위한 속임수라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뭔가 뜻이 있을텐데...." "역시 독거미나 독사일까요?" 캐더린이 소름끼친다는 듯이 말하자, 펠 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냐, 그런 생물이라면 가방에서 나와 두껑 물림쇠를 걸 수가 없어. 게다 가 그 철망은 그물눈이 작아서 아무리 가는 뱀이라도 기어나올 수가 없게 만들어졌거든." "펠 박사님, 택시 운전사가 봤다는 유령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그가 봤다는 건 틀림없을 거야. 그러나 진짜 유령은 아니지. 달밤에 20미 터 높이의 탑위니까 낡은 모자와 망토로 분장하고, 얼굴을 약간 화장하 면, 진짜 유령같이 보일 테니까." "누가 무엇때문에 그런 유령으로 변장했을까요?" "음.....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저 가방안에 들었던 것만 찾아 내면 이 사건의 의문은 풀릴 거야. 그런데 자네들은 누가 일기를 훔쳤는 지 알아맞힐 수 있겠나?" 펠 박사는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질문하는 투로 물으며, 알랭과 캐더린을 번갈아 쳐다보앗습니다. "물론 엘스펫 할머니죠." 캐더린이 대답하자, 펠 박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 덕였습니다. "멋진 추리야. 역사 연구로 기른 추리력은, 탐정의 일에도 도움을 주지. 나도 젊었을 때는 역사 공부를 많이 했어." "그러나 왜 엘스펫 할머니는 남편의 일기를 훔쳤을까요?" 알랭이 고개를 갸웃뚱거리자, 캐더린이 머리가 나쁜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투로 말했습니다. "그 일기를 읽어 보니, 자살을 비추는 듯한 내용이 씌어져 있었으므로, 노 부인은 당황했을 거여요. 만일 경찰이나 보험회사의 조사원이 그 일기를 보고, 자살이라고 단정하면, 3만 5천파운드의 보험금을 탈 수 없게 되니 까요. 알랭,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세요? 당신과 콜린씨가 일기 이야기를 꺼내니까 그 할머니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요. 갑자기 위스키를 권해서 당신들을 술에 취학 했잖아요. 일기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묻는 게 싫었 을 거여요." "과연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앤거스 노인은 죽기 사흘 전에도 새로운 생명 보험에 들었소. 그런데 자살하면 보험금을 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흘 뒤에 유서 비슷한 걸 일기에 적어 놓고, 자살했다곤 생 각할 수 없소." 알랭이 이렇게 말하자 지기 싫어하는 캐더린이 예쁜 코를 찡그리며 말했습 니다. "아뭏든 엘스펫 할머니는 일기를 읽었으므로 뭔가 비밀을 알고 있는 거여 요. 일부러 <데일리> 신문에 편지를 보내 기자를 부른 것도 비밀을 발표 하려고 그랬을 거여요. 저어, 펠 박사님. 왜 노부인에게 직접 그걸 물어 보지 않으시죠? 박사님 같은 명탐정도 저 할머니가 무서우세요?" "물통을 뒤집어 씌우면 곤란하거든...." 펠 박사는 살찐 두 턱을 움직이며 웃으려다가, 문득 문 쪽을 바라보고는 표 정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거기에는 어느새 왔는지, 엘스펫 노부인이 성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노부인.... 일기를 숨긴 건 당신인가요?" 펠 박사는 서슴치 않고 물었습니다. 11. 두 번째 추락 사건 그날 낮 알랭과 캐더린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고 호수는 신 비로움을 가득 담은 채, 그림같이 아름다왔습니다. 두 사람은 록파인 호수 를 한바퀴 돌고, 또 낙엽을 밟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어다녔습니다. 모처럼 집 밖에서 즐겁게 한나절을 보냈으므로, 두 사람은 약간 피곤했습니 다. 저녁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호수위에 산 그림자가 어려, 투명했던 호수의 푸르름이 조금씩 짙은 빛깔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저녁 식사에 늦었다고, 엘스펫 할머니에게 꾸중 듣겠어요." "할머니는 저녁 식사에 나오지 않을 거요. 펠 박사가 일기에 관해 물은 다 음부터 심한 히스테리를 일으켜 자기 침실에 틀어박혀버렸으니까." "그렇겠군요. 게다가 콜린씨가 무신론자인 스완 기자를 저택에 들어오게 했으니, 더욱더 기분이 상했겠지요." 두 사람은 황혼이 깃든 길을 따라 샤일라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북쪽 지방의 가을 해는 유난히도 빨리 져서, 저택에 도착했을 땐, 해가 완전히 진 뒤였 습니다. 식당에서는 콜린 의사와 펠 박사, 그리고 스완 기자도 함께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였습니다. 식탁 한가운데에는 밀주 '캠벨 집안의 운명'이 놓 여 있고 모두들 한 잔씩 마시고 있었습니다. 콜린이 쾌활한 목소리로 알랭과 캐더린을 맞이했습니다. "산책은 즐거웠나? 늦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길을 잃었나 걱정했지. 자, 식 기 전에 어서 들게. 지금 이 두 분에게 '캠벨 집안의 운명'을 시음시켜 드리는 참이야." 스완 기자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 밀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의 복장 은 정말 볼만琴습니다. 빌려 입은 콜린 의사의 싸쓰는 너무 커서 헐렁했고, 바지는 맞는 것이 없어서 화려한 킬트(옛날 스코틀랜드 군인이 입던 체크 무늬의 짧은 주름 스커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킬트를 입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마치 큰 거리를 바지를 입지 않고 진짜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밀주를 마시다 니, 마치 중세의 귀족이나 기사가 된 듯한 기분인데요. 콜린 캠벨씨, 오 늘밤 이 성에 머물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완 기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지간히 취한 듯했습니다. "당신옷은 냉리 아침이나 돼야 마를 거요. 어떻소. 또 한잔 하겠소" "예, 마셔야죠." "펠 박사 당신은?" "가득 부어 주게. 이렇게 맛좋은 술은 처음이야." 펠 박사의 얼굴도 술기운이 돌아 벌겋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알랭도 술잔을 받았지만, 마시기 전에 먼저 식사를 했습니다. 빈속에 마시 면 다시 어젯밤처럼 취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가씨, 식사 중이지만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소?" 펠 박사는 신사답게 캐더린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굵은 파이프를 꺼내 담 배를 채웠습니다. 불을 붙여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콜린 의사에게 말했습 니다. "다시 충고하네만, 오늘밤 저 탑의 방에서 잔다는 계획은 중지하는게 좋겠 네." "왜 내가 탑에서 자면 안 되나? 저 문의 자물쇠와 빗장도 오늘 낮에 제대 로 고쳤고, 내 짐도 전부 갖다 놓았어. 내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가? 바보 같은 소리!" "그러나 만약 내일 아침, 당신이 탑 아래에서 앤거스 노인처럼 죽어 있다 면 어떡하겠나?" 펠 박사의 말에 모두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섬뜩했습니다. 그러나 펠 박사 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콜린, 자넨 형님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음, 꼭 그랬으면 해. 형님이 살해되었다는 증거만 있으면, 나는 3만 5천 파운드의 생명 보험금 가운데 절반을 받게 돼." "하지만 형님이 살해된 것이라면 그 살인범은 자네도 죽일지 몰라. 그걸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만약 자네가 죽으면, 1만 7천 5백 파운드의 유산도 엘스펫 노부인이 전부 받게 되나?" "아니, 내가 받게 된 유산은 캠벨 집안의 일족으로서, 로버트 캠벨이 상속 하게 돼.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 자녀가 상속하지." "로버트란 누구지?" "내 동생이야. 젊었을때 말썽을 부리고 집을 뛰쳐 나간 뒤로 행방 불명이 야.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는 건 알지만, 벌써 몇년 째 소식이 없다네. 나 보다 한 살 아래니까 살아있다면 64살이야." 펠 박사는 굵은 파이프를 문 채,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살인 사건이라면, 동기를 찾아야 해.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 했다면, 범인은 당신이나, 엘스펫 노부인, 아니면 로버트나 그 자녀라고 볼 수 밖에 없어. 그렇다면 자살로 오해받기 쉬운 방법으로 살인을 했을 까닭이 없지. 자살로 단정되면 보험금을 탈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 알렉 홉즈란 사나이 말인데, 그자가 앤거스 노인을 살해했다면, 동기는 뭐지?" "그 두 사람은 동업으로 시작한 아이스크림 공장이 망했으므로, 돈 문제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어." 하고 콜린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음, 그럼 그 사나이는 자네에게도 뭔가 원한을 품고 있나?" "홉즈는 나도 형님과 똑같이 미워하고 있어. 그자가 아이스크림 공장을 동 업하자는 계획을 말했을때 나도 마침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반대하고 놈 을 사기꾼이라고 욕했거든. 그자는 그것을 고깝게 여기고 틀림없이 지금 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자네는 오늘밤, 저 탑에서 잘 건가?" "응, 이미 결심했어. 이 샤일라성에 유령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 하여, 저 건방진 채프만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야." 하고 콜린 의사는 의기 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일동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모두들 왜 그러지? 마치 초상집에 모인 것 같은 얼굴들이군 그래. 나는 죽지 않네. 유령 따위에게 죽어서야 되겠나. 이제 이따위 쓸데없는 얘긴 그만두고, 술이나 마시세. 알랭, 어젯밤엔 정말 재미있었어. 자네와 펜싱놀이도 하고....." 그뒤 네 남자들은 마시고 지껄이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캐더린만은 식사를 마치자 먼저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10시가 지나자 모두 제각기 침실로 돌아갔습니다.술 취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가장 많이 취한 사람은 스완 기자였고, 콜린 의사도 꽤 취해 있었으나 심하게 비틀거리지 않고 높은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알랭은 지난밤처럼 취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과음하여 머리가 아팠습니다. 이층의 침실로 들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15분마다 시간을 알리는 낡은 기둥 시계의 소리가 귀에 크게 울려,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 다. 10시 반, 10시 45분, 11시, 11시 15분....... 마침내 알랭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읽을 만한 책이 없나 찾아보았습니 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한 권의 책도 없었습니다. 펠 박사라면 한 권쯤 가 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한 알랭은, 가만히 문을 열고 차갑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펠 박사가 묵고 있는 방앞에 섰습니다. 문틈으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 어나왔습니다. 아직도 자지 않는것 같았습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시오'라는 대답이 들렸습니다. 알랭은 문을 열고 방안에 한 발을 들여 놓았다가, 연기를 들이마셔 기침이 나오는 바람에 멈칫했습니다. 방안은 마치 굴뚝 속같이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가득 찬 연기 속에서 펠 박사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반쯤 조는 모습으로 굵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있었습니다. 책상 위의 촛불 이 방안을 어슴푸레 비추어 주었습니다. "알랭, 마침 잘 와 주었네. 지금 막 부르러 가려던 참이야." 펠 박사는 갑자기 생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게 무슨 용무라도....?" "그 가방에 들었던 것을 겨우 알아냈네. 이제야 어떤 트릭을 썼는지 의문 이 풀렸어. 자, 일초라도 빨리 콜린을 탑의 방에서 구해 내야 돼. 아직 위험하진 않겠지만 만일의 경우 모르니까....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어." 펠 박사는 굵은 지팡이를 움켜 쥐더니 벌떡 일어섰습니다. 촛불이 너울거려 벽에 박사의 커다란 그림자가 춤추듯 움직였습니다. "나는 저 높은 탑의 계단을 올라가는 건 딱 질색이야. 자네가 올라가 콜린 을 불러 주겠나?" "예, 좋습니다. 하지만 왜.....?" "지금 설명할 틈이 없어. 자,이 회중 전등을 갖고 가게. 계단을 올라갈때 불빛이 창 밖으로 새지 않도록 조심해. 들키면 마을의 민방공단에게 책망 을 듣게 돼. 자, 빨리!" 알랭은 작은 회중전등을 받아들고 아래층으로 내려 갔습니다. 캄캄한 거실 문을 열고 탑의 맨 아래층인 흙 바닥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뜰로 향한 문 틈으로 하얀 밤안개가 흘러들어와 바닥은 얼음장같이 차가왔습니다. 알랭은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이제 취기는 완전히 깨어 버렸습니다. 회중 전등을 탑 위로 비추자, 나선형 계단이 끝없이 위로 뻗쳐 있어, 자신 이 깊은 우물 바닥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금방이라도 피투성이 망토 를 걸친 애꾸눈 유령이 스르르 내려올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랭은 급히 계단을 오르려 했지만 마음만 조급했지 발이 떨리는 바람에 몇 번이나 돌계단에 넘어졌습니다. 2층, 3층..... 숨이 턱에 찼습니다. 4층, 5 층.... 계단은 끝없이 위로 이어진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맨 위층에 다다라 보니, 튼튼한 나무 문이 꼭 닫혀 있었습니다. 손잡이를 돌려 보았지만 안쪽으로 자물쇠와 빗장이 걸려 있어 움직이지 않 았습니다. "콜린씨, 콜린 캠벨씨!"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 와 알랭의 목소리가, 좁은 탑안에 기분 나쁘게 울렸습니다. 알랭은 문을 어깨로 힘껏 밀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술이 꽤 취했으니 잠이 깊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 고는 소리도, 숨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너무 조용했습니다. 알랭은 펠 박사의 말이 생각나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는 바삐 계단을 뛰어내려갔습니다.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는지 모 릅니다. 겨우 흙바닥에 내려서서 안뜰로 나가는 나무 문을 밀었습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안뜰로 뛰어나온 알랭은 , 호수 쪽으로 돌아서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습니다. 펠 박사의 불길한 예언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정말 두 번째 추락 사건이 일 어난 것입니다. 파자마 바람의 콜린 캠벨 의사가 잔디밭위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탑을 올려다보니 열려있는 유리창이 휘영청한 달빛에 똑똑히 보였습니다. 흰 연기 같은 밤안개가 호숫가에서 흘러와, 쓰러져있는 콜린의 흩어진 머리 에, 조용히 밤이슬 방울이 젟혔습니다. 12. 일기장의 의혹 날이 새자 상쾌한 아침놀이 하늘에 비쳐 아름다왔습니다, 호수 위에 낀 안 개가 걷히자, 파란 수면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알랭은, 아름다운 경치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구를 들고 다시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뒤따라 스완 기자도 올라갔습 니다. 그는 심한 숙취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알랭씨, 진짜 그 방안으로 들어갈 겁니까? 영내키지 않는데요?" "무서워할것 없소. 날이 밝았으니, 유령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을거요." 제일 위의 계단참에 올라서자, 알랭은 스완 기자에게 회중전등을 들게하고, 곧 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문의 자물쇠 부근을 소곳으로 뚫고, 구멍이 뚫 리면 다음은 끌로 그 구멍을 크게 따내고, 가는 톱으로 손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자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콜린씨는 정말 좋은 분이었어. 입은 거칠었지만,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 스완 기자가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니,그게 무슨 소리요? 콜린은 죽지 않았는데...." "뭐요? 죽지 않았다고요......?" "부드러운 잔디 위에 떨어졌기 때문에 다리와 허리의 뼈를 다쳤을뿐 생명 에는 지장이 없소." "그런데 어째서 이런 높은 탑의 창에서 떨어졌을까/" 스완 기자는 숙취로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 다. 알랭은 톱질을 하여, 마지막 이음매를 잘라 냈습니다. 그 부분을 힘껏 밀자 문에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손을 집어 넣고 안쪽을 더듬어 보니 자물쇠는 잠긴 채였고, 빗장도 단단히 꽂혀 있었습니다. 열쇠를 돌리고 빗장을 벗기자 문은 쉽게 열렸습니다. 창으로 아침 햇살이 가득 방으로 비쳐들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콜 린 의사의 옷이 침대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침대에는 잠잔 흔적이 있고, 담요가 젖혀진 채로 있었습니다. 열린 유리창이 산들바람에 흔들려 덜커덕 거렸습니다. 방안에서는 왠지 차갑고 숨막히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여기서 뭘 하지?" 스완 기자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펠 박사가 시킨 대로 해야지." 알랭은 방바닥에 꿇어 앉아, 침대 밑에서 개 넣는 가방을 끌어 냈습니다. "지금 그걸 열어 보려는 거요?" 스완 기자는 더욱더 기분 나쁜 표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펠 박사가 열어 보라는군. 지문은 안 묻어 있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괜 찮다는군." "당신은 그 박사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 믿는군요. 만약 그러다가 독사 나 독거미가 나온다면..... 좋아요. 우선 열어 봅시다." 알랭은 가방의 물림쇠를 벗기고 주의 깊게 뚜껑을 열었습니다. 안은 생각한 대로 텅 비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습 니다. "자,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소?" 스완 기자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귀찮게 물었습니다. "그냥 열어서 안이 비었는지만 확인하라고 했소." "그런데 이 안엔 대체 뭐가 들어 있었을까?"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진단 말이야....." 그때 알랭은 책상위의 작은 일기장이 언뜻 눈에 띄었습니다. 어제는 분명히 없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서류 밑에 절반쯤 가려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알랭은 곧 그 일기장을 집어들었습니다. 표지에는 금색 잉크로 <<1940년 일 기장>> 이라 인쇄되어 있고, 면지에 '앤거스 캠벨'이라고 서투른 글씨가 씌 어 있었습니다. 책장을 대충 넘겨보니,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 니다. 마지막 기록은 8월 24일 토요일, 그러니까 앤거스 노인이 죽은 날 밤 에 쓴 것입니다. 8월 24일 토요일 또 아내가 불평을 늘어놓는다. 말 많은 할망구. 메모 : 무화과 시럽을 만들 것, 콜린에게 편지를 보낼 것. 밤에 홉즈가 찾아왔다. 마치 야밤 도주라도 할 듯이 이상한 가방을 들고 있 다. 그는 내게 속았다고 화를 냈다. 정말 웃기는 소리다. 다신 내 앞에 나 타나지 말라고 내쫓았더니,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영원히 작별을 하려고 하 나..... 이 방은 오늘밤 이상하게 곰팡내가 나고 웬지 추운 것 같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공백인 채여서 그의 인생이 여기서 끝난 것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책장을 거꾸로 넘기자 군데군데 찢긴 흔적이 있었습니다. "흠, 이건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스완 기자도 일기를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더 볼일이 없으면 빨리 내려갑시다. 이 방은 을씨년스러워 못 견디겠군." 알랭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거실에서는 펠 박사가 모자를 쓰고 외출할 채비를 갖춘 다음, 서서 피아노 위의 풍경화를 보는 체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펠 박사 는 돌아보면서 스완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스완 기자, 미안하지만 병실에 가서 부상자의 용태를 좀 보고 오게. 콜린 이 의식을 되찾아, 말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으니까." "예, 다녀 오죠." 스완 기자는 특종 기사를 취재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기꺼이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펠 박사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장난스럽게 알랭에게 눈짓했습니다. "자, 빨리 나가세. 신문 기자가 뒤따라 다니면 귀찮으니까. 우린 뒷문으로 빠져 나가세." "아침 일찍부터 대체 어딜 가죠?" 알랭이 놀라 물었습니다. "그렌코 마을이야. 아침 먹을 시간도 없어.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렇게 일찍 어떻게 그 마을에 갑니까?" "조금 전에 인베라레이 마을로 전화를 걸어, 자동차 한 대를 보내 달라고 했어. 어제 던컨 변호사가 그렌코 마을 부근의 헛간에서 알렉 홉즈가 발 견되었다고 말했잖나. 그러니 경찰보다 먼저 홉즈를 만나야 해. 어떤 수 단을 써서라도 말이야. 자, 빨리 가세!" 그러고 있는데, 캐더린이 외투를 걸치며 바삐 달려왔습니다. "부탁이어요, 펠 박사님! 저도 데리고 가 주셔요. 박사님이 전화로 자동차 를 부르는 걸 다 들었어요. 나만 두고 가다니 너무해요." "아가씬 콜린을 간호해야지." "지금은 엘스펫 할머니와 하녀가 간호하고 있으니, 괜찮아요." "좋아, 그럼 함께 가지. 자 출발하도록 해. 머뭇거릴 틈이 없어." 세 사람은 급히 저택의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좀 떨어진 도로 에 낡은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올라타자 작업복을 입은 운전사가 곧 차를 몰았습니다. 무개차라 펠 박사가 쓴 모자가 하마터면 바 람에 날려 가 버릴 뻔했습니다. 알랭은 주머니에서 일기를 꺼내, 펠 박사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박사는 한 페이지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음.... 역시 내 추리가 들어맞는군. 캐더린의 추리도 적중했어. 이 일기 를 감춘건 역시 엘스펫 노부인이었어." 펠 박사는 찢긴 곳을 기리키며 말했습니다. "왜 찢어 냈는지 알겠나? 마지막 날 쓴 일기에도 '또 아내가 불평을 늘어 놓는다.'라고 씌어 있지? 틀림없이 찢어진 페이지마다 저 할머니의 욕이 적혀 있었을 거야. 자존심이 강한 노부인은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거기만 찢고 다시 본디대로 일기장을 책상위에 갖다 놓은 거야." "하지만 펠 박사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개 넣는 가방입니다. 일기 에 쓴 것으로 보아, 그건 역시 홉즈가 들고 온 모양인데요." 하고 알랭이 말했습니다. "응, 마지막 대목은 상당히 의미 심장해...." 펠 박사는 깊이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엘스펫 노부인은 일기를 읽어 보고, 남편인 앤거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대 강 눈치챘지. 그러나 그녀는 경찰을 싫어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애독하던 신문에 편지를 보내서, 자기 생각을 털어 놓으려고 했어. 그런데 다시 한 번 일기를 자세히 읽어 보고, 그 진상을 파악했기 때문에 갑자기 무서워 진거야.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어. 그 때문에 사건이 얽혀 버렸던 거 야... 쳇, 기가 막혀서." 별안간 펠 박사는 화가 나는 듯 자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왜 펠 박사가 혼자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어서 멍청히 있었 습니다. "저어, 박사님.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만 하시면 저희들은 무슨 말인 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좀 더 쉽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어요?" 캐더린이 부탁하자, 펠 박사는 더욱 굳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명탐정인 나도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젊은 자네들이 간단히 알면 괜찮게? 그럼 내가 하나 물어 보겠네.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 문장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쓴 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알랭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소리 말게! 앤거스 캠벨 노인은 자살했어." 13. 목매단 시체 "아니. 자살이라뇨?" "박사님은 살인범을 감싸주려고 그런 소릴 하시는게 아닙니까?" 알랭과 캐더린은 놀라서, 펠 박사의 살찐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펠 박사는 불꺼진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자동차 좌석에 큰 몸집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 앤거스 노인에 대해 생각해 보세. 그는 어리석은 돈벌이 꿈만 꾸다가 실패해 파산해 버렸네. 일흔 살이 가까운 나이로는 재기하기 어렵 다는 것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지. 그러나 몸은 건강해서, 보험 회사 의 의사가 아직도 15년은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했어. 그러나 그런 말을 들어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어. 그렇게 오래 산다면, 앞으로 살길이 막막 했기 때문이지. 차라리 지금 죽어서, 보험금을 아내나 동생에게 남겨 주 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는 인생에 실패한 노인다운 생각을 한 거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노인이라고 생각한 거지." 펠 박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살을 하면 3만 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탈 수 없어. 그렇게 되면 헛된 죽음이 되니까 타살인것같이 꾸미고 죽어야 했어. 사고사 정도로는 의심이 많은 보험 회사가 자살로 보고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뚜렷이 범인에게 살해된 것 같은 증거를 남기고 죽어야만 했던 거라네." "그렇다면 왜 자살이라고 오해받을 만한 방법으로 죽었지요?" "문제는 바로 그거야. 자네들은 그 개 넣는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앤거스 노인은 타살로 보이기 위해 그 가방 안에 '무엇'인가 넣어 두었어. 그런데 만에 하나 있을 만한 우연으로, 재 수없게 계획이 무너져 버린거야. 만일 앤거스 노인의 계획이 성공했더라 면 지금쯤 알렉 홉즈도 체포되고 보험 회사도 3만 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지불했을 걸세." 자동차는 호수에서 갈라져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아가일성 곁을 지나갔지만, 세 사람은 이야기에 열중하여 경치 같은 것은 눈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앤거스 노인은 동업자였던 홉즈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자 살했나요?" "맞았어. 그 두사람은 아이스크림 제조 공장이 실패한 뒤로 미워하고 있었 단 말이야. 그날 밤, 홉즈가 탑으로 온 것도, 사실은 앤거스 노인이 불러 서 왔던 거야. 그리고 일부러 온 저택안에 들리게 큰 싸움을 했어. 물론 앨스펫 노부인과 하녀에게 홉즈가 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알리기 위해 서였지." "그때 홉즈가 그 가방을 들고 온 모양이죠?" "아냐. 그는 가방 같은건 안 들고 왔어. 앤거스 노인은 홉즈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일기에 그런 터무니없는 글을 쓴 거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서 홉즈가 돌아간 뒤, 엘스펫 할머니가 탑으로 올라와 침대 밑을 조사 했을 때, 개 넣는 가방 따윈 없었다고 말했군요." "그렇지. 내가 우연히 앤거스 노인의 계획이 실패다고 한건 그 때문이야. 만약 그때 할머니가 침대 밑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일기에 쓰인 것처럼 홉즈가 그 개 넣는 가방을 들고 왔다는 의심을 받고, 살인범으로 몰릴뻔 했지." "도대체 그 안엔 뭐가 들어있었죠?" 캐더린이 궁금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펠 박사는 시치미떼고 씩 웃기만 했습니다. "이제 곧 홉즈를 만나면, 나도 직접 그에게 물어서 확인할 생각이야. 그때 까지 자네들도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게. 한 가지만 힌트를 주지. 가방안 에 들었던 것은 앤거스 노인과 홉즈의 동업에 관계 있는 것이야." "동업이라니.... 그럼 아이스크림 말인가요?" 하고 캐더린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펠 박사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잠 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사건이 일어난 날 밤으로 돌려 보세. 그 가방은 앤거스 노 인 자신이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어. 그는 탑 밖의 뜰에 가방을 숨겨 놓았 던 모양이야. 10시에 그는 엘스펫 할머니와 하녀를 보내고는 살짝 탑에서 내려와 가방을 들고 올라갔지. 그리고 침대 밑에 가방을 숨기고, 문에 자 물쇠와 빗장을 걸었어. 방을 밀시로 만든 것이지. 그 가방이 어떻게 방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이것으로 이해가 될거야. 홉즈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기 위해,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런 의미심장한 글을 쓰고 나서, 앤거스 노인은 잠옷으로 바꿔 입고 불을 끈 다음 침대로 들어갔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다음날 아침 탑 아래에서 앤거 스의 시체가 발견된 뒤, 엘스펫 할머니는 곧 탑의 방에 올라가 책상 위에 있던 일기를 몰래 숨겼어. 그 일기를 죄다 읽은 노부인은, 남편이 홉즈에 게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범인을 폭로할 작정으로 <데일리>신문에 편지를 냈던 거야. 그런데 그 뒤, 노부인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어. 만약 홉즈가 범인이라면, 그 가방이 침대 밑에 숨겨져 있었을 텐데, 자기가 조 사했을땐 가방이 없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홉즈가 범인이 아니란 말이지. 더구나 할머니가 모든 사실을 알았을땐 이미 경찰에 가방이 없었다고 증언 한 뒤였어." 펠 박사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일기를 자세히 읽 어 보았지. 그제야 엘스펫 부인은 남편이 홉즈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사 실은 자살했다는 진상을 파악했지. 이제 그녀는 난처해졌어. 자칫 잘못 말 했다간, 모처럼 남편이 목숨과 맞바꿔 준 보험금을 탈 수 없게 되지. 그래 서 그녀는 그 가방이 침대 밑에 있었다고 거짓 증언을 바꾸기도 하고, 자 기가 부른 스완 기자에게 화풀이하여 현관에서 내슛기도 했던 거야. 그렇 다고 진상을 숨기고 억울한 홉즈를 범인으로 몰아 넣는다는 것은 그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어. 아뭏든 그녀는 신앙심이 깊었으므로, 도저히 그 런 벌받을 짓은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끝에, 결 국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본디대로 일기를 책상 위에 갖다 놓고 우 리에게 결정해 주길 바란 것이지. 여태까지 그녀가 우리에게 못 살게 굴 며, 여자 폭군처럼 행동한 것도, 다 그런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어지러 웠기 때문이야. 자네들은 엘스펫 노부인을 너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게. 사실은 마음이 곧고, 정직한 분이니까." 알랭과 캐더린은 펠 박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무 지하고 완고한 괴퍅스런 할머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심각한 고민으로 괴로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자동차는 황량한 고지를 계속 달렸습니다. 산 중턱 군데군데 적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고사포가 보였습니다. 길다란 포신이 마치 고목같이 하늘 을 향해 치솟아 있었습니다. 구름이 퍼지며 습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 다. "앤거스 노인이 자살했다면 더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겠군요." 알랭이 말하자, 펠 박사는 눈을 부릎뜨며 화난 듯이 소리질렀습니다. "이봐,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하게! 우린 이제부터 살인범을 찾아 내야해." "하지만 자살이라면 범인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군. 탑의 창문에 유령처럼 꾸미고 나타난 것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콜린 캠벨을 창에서 밀어 떨어 뜨린 자는 누구인가? 만약 돌 위에 떨어졌다면 그는 벌써 천국에 가 있었 을 거야." 펠 박사는 불꺼진 파이프를 씹으며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기더니, "사진이란 때때로 엉뚱한 걸 가르쳐 주기도 하는 군." 하고 문득 수수께기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습니다. 알랭이 가만히 펠 박사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박사는 어느새 기분 좋게 졸 기 시작했습니다. "그렌코 마을까진 아직 멀었나요?" 캐더린이 낮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여기가 그렌코 마을의 골짜깁니다." 운전사가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차차으로 좌우를 살펴보니, 바위산이 양쪽에 깍아지른 듯이 솟아 있었습니 다. 차는 넓은 골짜기 길을 달렸습니다. 길을 따라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외에는 그저 고요함 뿐이었습니다. 여기저기 황폐한 농가가 드문드문 흩어 져 있었지만, 사람이 사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듯한 황무지였습니다. "폭포 근처에 있는 오두막집을 찾고 있는데, 모르겠나?" 졸고 있는 줄 알았던 펠 박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운전사에게 물었습 니다. "그렌코 폭포라면 바로 요 앞인데요, 이제 소리가 들릴 겁니다." 험한 바위산 기슭을 꺽어 돌자, 폭포수소리가 분명히 들려왔습니다. 운전사 는 차를 세우고 앞을 가리켰습니다. 깍아지른 벼랑 위에서 폭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냇물 건너쪽에 허름한 돌로 만든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으 며, 굴뚝에선 연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 한마리가 문 앞에 웅크리고 있 을 뿐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려 냇물의 돌을 징검다리 삼아 건넜습니다. 개가 다가 오는 세 사람을 보고, 겁에 질린 듯 짖어 대며 문을 긁었습니다. "워리, 워리." 펠 박사는 개를 달래더니, 굵은 지팡이 손잡이로 문을 두드리며 불렀습니 다. "홉즈씨! 홉즈씨!"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잡이를 몇번 돌려 보았지만, 안으로 빗장이 걸려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랭은 집 옆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굵은 철사 로 만든 철망 격자가 창틀 안쪽에 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리 창이 끼여 있었으며, 창은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알랭은 그 철망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음식물 썩는 냄새와 석유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식탁위에 흩어진 먹다 남은 음식과, 천장에 매달린 석유 등잔 고리가 보였습니다. 고리에 매달린 것을 보고는, 알랭은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쳤습니 다. 그러자 펠 박사와 캐더린이 다가왔습니다. "어머, 알랭. 왜 그래요? 얼굴이 새파랗군요." "캐더린 당신은 여기 오면 안 돼!" 알랭은 소리치며 급히 그녀를 오두막집 앞으로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 펠 박사도 창백한 얼굴로 되돌아왔습니다. "이 문은 약한 것 같군. 발로 차면 부서질 것 같은데.... 알랭 해 보겠나 ?" 알랭은 발로 힘껏 문을 걷어찼습니다. 안쪽의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 습니다. 두 사람은 캐더린을 밖에 남겨두고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천장 고리에 사 나이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더러운 가운을 입고, 그 가운의 끈을 고 리로 하여 목을 매단 것이었습니다. 시체의 발은 바닥에서 6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아래는 빈 술통 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개가 미친 듯이 짖으며 시체의 발에 뛰어올랐으므 로, 시체가 흔들렸습니다. 펠 박사는 부서진 자물쇠를 살펴보고, 창의 철망도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렷습니다. "음, 또 밀실 사건인가." < 제 2장 끝..> =============== 고성의 괴사건 ================ 딕슨 카. 제 3 장 밀실 사건의 수수께끼 14. 사라진 흉기. "알렉 홉즈인가 보죠?" 알랭은 매달려 있는 시체를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인상이 들어맞는군 그래. 얼굴 수염은 일주일 이상이나 깍지 않았고, 꽤 나 어려운 생활을 했나 보군. 저걸 보게." 펠 박사는 침대 위에 있는 옷가방을 가리켰습니다. 가방에는 더러운 내복이 들어있었고, 뚜껑에 A.H라는 알렉 홉즈의 머릿글자 가 페인트로 씌어져 있었습니다. 펠 박사는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캐더린에게 말했습니다. "어디서 전화를 빌어, 홉즈가 목매단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경찰에 알리고 오지. 할 수 있겠나?"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징검돌을 짚고 시내를 건너 마을쪽으로 달려 갔습니다. 펠 박사는 다시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안은 사방 4미터 가량의 정사각형이었습니다. 벽은 두껍고 바닥은 돌로 되어있었으며, 오래 된 난로가 하나 있었습니다. 가구라고는 초라한 침대와 탁자, 의자가 하나, 그리고 곰팡슨 책이 꽃힌 책 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전등도 가설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개는 시체 밑에 웅크린 채 슬픈 듯이 울부짖었습니다. 펠 박사가 시체의 가 슴과 손을 만지자, 개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도사렸지만 그 이상 짖 지는 않았습니다. "시체가 아직 완전히 꼿꼿하게 굳지 않은 걸 보니, 아마 오늘 새벽 2시나 3시경에 죽었을 거야." "홉즈는 왜 자살했을까요?" 알랭이 물었지만 펠 박사는 대꾸도 않고 탁자위에 있는 석유 등잔을 손에 들고 조사했습니다. "기름은 없어. 다 타 버린 모양이야." 다음에 박사는 창문의 철망 그물눈에 손가락을 집어 넣고 흔들어 보았습니 다. 그러나 창 안쪽에 못을 단단히 박아 놓았으므로 철망은 벗겨지지 않았 습니다. 창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음, 이건 목매달아 자살한 거야. 자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군. 술통은 목매단 발판으로 알맞은 높이이고, 창이나 잠긴 문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어. 바로 밀실이야. 게다가 문에는 열쇠 구멍도 없고, 기둥이나 마룻바닥엔 조금의 틈도 없는걸. 또 문밖에서 안으로 잠근 빗장을 움직일 수도 없지. 난로의 굴뚝도 작아서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어. 그러니 만 약 홉즈가..... 아니, 저건 또 뭐야?" 펠 박사는 난로 옆에 있는 책장을 가리켰습니다. 그 책장위간의 작은 타이 프라이터에 종이가 한장 끼워져 있었습니다. 이 종이를 발견한 경관 앞. 캠벨 집안의 앤거스, 콜린 형제를 죽인 것은 나다. 놈들이 내게 사기친 그것으로 두 사람을 죽였다. "아니, 유서까지 남아 있군. 정말 완벽한 자살인데." 펠 박사는 씁쓰레한 얼굴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럼 박사님의 추린 결과적으로 잘못 된 거군요."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박사님은 앤거스씨가 자살했다고 했죠? 하지만 유서대로라면 그는 홉즈에 게 살해된 겁니다. 범인 홉즈는 유서를 남기고, 목매달아 자살했으니, 이 로써 사건은 깨끗이 해결되었잖습니까. 더이상 뭘 조사하신단 말씀입니까 ?" "진상이야, 난 진상을 알고 싶어." 펠 박사는 또 열심히 책장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랫간에는 낚시 도구 인 작은 바구니와 낚시 바늘이 있었습니다. 가운에 간에는 물리, 화학, 건 축학, 천문학 등에 관한 책이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제조기의 선전 목록 도 있었습니다. 펠 박사는 특히 낚시 도구를 흥미 깊게 조사하고 있었습니 다. 알랭은 좁은 방안에서 목매단 시체와 함께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매스꺼 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습니다. "박사님, 아직도 홉즈가 살해됐다고 의심하시나요?" "난 타이프로 친 유서 따위는 믿지 않아. 그런 건 누구라도 칠 수 있으니 까. 자, 이 오두막엔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밖에 나가 맑은 공기나 쐬 지."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습니다. 알랭은 가슴 가득히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펠 박사는 파이프에 담배를 재어 불을 붙였습니다. "그 유서를 홉즈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면, 그자는 분명히 앤거스 노인이 자살에 쓴 트릭을 알고 있어." "자살에 쓴 트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그 개 넣는 가방에 넣어 둔 것 말이야. 그 유서를 읽고도 아직 모르겠나 ?"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겠는데, 앤거스 노인이 홉즈와 함께 동업했던 일은 무엇이었지?" "체크 무늬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일이었죠." "그럼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 어떤 냉동 재료르르 쓰는지 아나?" "드라이아이스죠." "드라이아이스가 어떤 건지 아나?" 펠 박사가 묻자 알랭은 중학 시절 화학 실험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얀 고체로 얼음 비슷하지만 투명체는 아니고, 눈덩어리 같은 것이지요." "정확히 말해서 탄산가스를 압축하여 고체로 만든 것이지. 그 드라이아이 스를 개 넣는 가방에 넣어 두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나? 가방에는 공기 가 잘통하도록 한쪽에 철망을 쳐놓았었지?" "드라이아이스는 공기에 닿으면, 천천히 녹아서 기화되죠." "기화되면서 무엇을 발산하나?" "탄산가스요." "어때, 이젠 앤거스가 쓴 트릭을 알겠나? 밤에 문이나 창을 꼭 닫고 침대 밑에 드라이아이스가 든 가방을 놓아 두면 어떻게 되겠나? 침대에서 자던 사람은 방안에 가득 찬 가스를 마시고 죽어 버리지. 설령 도중에 알아챈 다 해도 의식이 희미해지지.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침대에서 기어나와 창문 있는 데로 가도, 발이 비틀거려 똑바로 서지 못할 거야. 더구나 창 지방이 낮고 바깥으로 열리는 창이라면, 창을 열려고 하다가 몸이 앞으 로...." 펠 박사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떨어지는 시늉을 해 보였습니다. 알랭도 높은 탑의 창에서 앤거스 노인이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 았습니다. "드라이아이스는 아침까지 완전히 기화되어, 가방안은 텅 비게 되지. 그러 니 흔적도 없는 거야. 정말 감쪽 같은 살인 트릭이야." "하지만 박사님, 앤거스 노인은 자살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그는 스스로 드라이아이스가 든 가방을 침대 밑에 갖다 놓고 자 살하려고 했지. 나중에 시체를 해부하면, 혈액 속에 녹아 있는 게 알려 지므로, 가스 중독사로 판명된다. 그렇게 되면 드라이아이스를 쓰는 자는 동업자였던 홉즈밖에 없으므로, 그가 범인으로 의심받아 체포된다. 그 결 과 앤거스 노인은 타살이라고 밝혀져 3만5천파운드의 보험금을 탈 수 있 지. 이것이 그의 자살 계획이었어.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계획이 어긋났 어. 그는 가스를 마시던 도중 갑자기 죽는게 두려워졌어. 점점 호흡이 곤 란해져 죽는 것이 무서워진 거지.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죽을 힘을 다 해 창 앞으로 갔어. 그러나 발이 비틀거렸으므로 창문을 여는 순간, 몸이 기울어져 떨어져 버린 거야. 그러나 추락했어도 금방 죽진 않았던 것 같 아." "예, 경찰의의 말로는 기절한 채 잠시 살아 있었다더군요." "그래서 죽기전에 허파와 피 속에서 가스가 모두 나와 버렸기 때문에 시체 를 해부했는데도, 가스 중독은 밝혀지지 않았어. 만약 즉사했더라면, 가 스 중독사로 판명되어 사건의 의문도 간단히 풀려 버렸을 거야." 펠 박사의 목소리는 점점 열기에 찼습니다. "앤거스의 일기 마지막에 '이 방은 오늘밤 이상하게 곰팡내 나고 웬지 추 운것 같다.' 고 쓰여있지? 그건 홉즈를 범인으로 몰아 넣기 위해 슬쩍 드 라이아이스에 관한 걸 비친 거야. 만약 자살할 마음이 없었다면, 일기를 쓸때 드라이아이스의 탄산가스를 맡았을 거야. 가스의 위험을 못 깨달을 앤거스 노인이 아냐. 그러니까 그는 틀림없이 자살한 거야. 그렇다면 홉 즈는 범인이 아니지. 범인도 아닌데 자신이 살인했다는 따위의 유서를 쓸 까닭이 없어. 따라서 이 유서는 가짜야. 앤거스 노인의 죽음은 타살처럼 꾸민 자살이고, 이 홉즈의 죽음은 자살처럼 꾸민 타살이야. 그러므로 나 는 계속 사건을 수사해야만 해." 15. 밀실의 수수께끼. "그렇다면 어젯밤 탑에서 떨어진 콜린씨도 역시 드라이아이스 때문에 추락 한 건가요?" 알랭의 물음에 펠 박사는 파이프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러나 콜린씨는 자살한게 아니고 누군가가 콜린이 탑의 방에서 잔다는 것을 알고 먼저 들어와, 침대 밑에 있던 가방에다 큰 드라 이아이스를 집어 넣은 거야. 콜린은 술에 취해 있었으니, 침대 밑을 들여 다보지도 않고 곧장 잤겠지. 다행히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창문을 열고 잤다는 것과 재빨리 가스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야. 그래도 숨이 차서, 맑은 공기를 쐬러 창 앞에 갔을 때는 이미 발이 비틀거렸으므로 추 락한 거야. 그리고 홉즈를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며 죽인 것도, 그자 의 짓임에 틀림 없어." "하지만 나는 홉즈가 살해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살해된 것 이라면 대체 범인은 어떻게 이 밀실에서 빠져 나갔죠?" "음.... 그게 어려운 문제야....." 펠 박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멍청히 오두막 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참, 그렇지! 지금이 전시 중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군. 자, 따라오게. 범인이 실수한 증거를 보여 주지." 펠 박사는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알랭은 기분이 좋지 않아 입 구에 서 있었습니다. 펠 박사는 매달린 시체에 어깨가 부딪치는 것도 아랑곳없이 무엇을 이리저 리 찾더니, 이윽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침대 옆에서 등화관제용 암막을 찾아 낸 것입니다. 나무 틀에다 검은 종이를 바른 암막으로, 창에 끼워 보니 꼭 맞았습니다. "이 창문을 처음 보았을때, 방공 암막이 없다는 사실을 좀더 빨리 깨달았 어야 했어. 더우기 등잔은 밤새 켜져 있었던 것 같아. 석유 심지 탄 냄새 가 지금도 역겹지?" "예, 그렇군요." "이 부근은 매일 밤 민방공 단원들이 순찰을 하지. 창문에 암막이 없는데 밤새 불을 켜 놓으면 민방공 단원에게 금새 들킨단 말이야." "그들이 못 봤는지도 모르죠/" "아냐, 이런 산중에선 조금만 불빛이 새어도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이는 법이야. 민방공 단원들이 못 볼리가 없어." "어쩌면 홉즈 자신이 목매달기 전에 불을 끄고, 이 방공 암막을 창에서 벗 겼는지도 모르죠." 알랭의 말에 펠 박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습니다. "아냐. 자살하는 사람은 옆에 조명기구가 있으면 어두운 곳에서는 죽지 않 는 법이야. 그게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지. 더구나 목메달 준 비를 어둠 속에서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이건 범인이 홉즈를 죽이고 목매달아 자살한 것 같이 꾸민 뒤에 등불을 꺼 버린 거야. 등잔의 기름이 다 탄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남은 기름은 버린 거지. 그리고 창문의 암막을 벗겼어." "하지만 뭣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드는 일을 했죠? 암막을 그 대로 놓아 두고 달아나도 괜찮을 텐데요?" "여기서 도망치는 데 창문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 "창문이라뇨.....? 그러나 박사님, 저 창을 좀 보십시오. 굵은 철사로 만 든 철망이 안쪽으로 못박혀 있는데, 그 철망의 그물눈을 뚫고 범인이 밖 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음..... 지금으로선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범인은 분명히 창문을 이용 했어. 그밖엔 달아날 곳이 없으니까." 하고 펠 박사는 고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때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 보니, 스완 기자와 던컨 변호사가 징검돌을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합니다. 뉴스를 전부 알려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날 따돌리다니..." 스완 기자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며 투덜거렸습니다. 던컨 변호사는 웃으면서 펠 박사에게 말했습니다. "마을 의사에게서 콜린 캠벨씨의 용태에 관해 들었습니다. 탄산가스 때문 에 질식할 뻔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범인은 아이스크림 공장에 남아 있던 드라이아이스를 쓴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앤거스 노인도 역시 드라이 아이스로 살해된게 틀림없어요. 이건 분명히 살인 사건입니다. 박사님 의 견도 저와 마찬가지죠?" "그 전에 이 오두막 안을 보십시오. 당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을 테니까요...." 하고 펠 박사는 시치미떼고, 파이프로 문 쪽을 가리켰습니다. 던컨 변호사와 스완 기자는 멋도 모르고 오두막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앗!' 하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허둥지둥 뛰어나왔습니다. 그뒤로 개가 짖어 댔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도깨비집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파랗게 질린 채 몸을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전화는 어딨죠? 이건 대특종감인데...." 스완 기자가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던컨 변호사도 호흡을 가라앉힌 뒤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펠 박사님. 저 목매단 시체가 알렉 홉즈군요." "타이프라이터에 꽂힌 유서를 보았소?" "유서라뇨....?" 박사의 말을 듣고 던컨 변호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집안으 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서를 손에 들고 나왔습니다. "됐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이쪽이 승리한 것입니다. 보험 회사도 아무 소 리 않고, 보험금 전체를 지불해 줄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건은 깨끗이 해 결되었군요!" 던컨 변호사는 매우 기쁜 모양이었습니다. 3만 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받게 되면 자기도 많은 변호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던컨씨, 당신은 로버트 캠벨을 아시죠?" 펠 박사가 별안간 화제를 바꾸며 질문하자. 던컨 변호사는 순간적으로 당황 하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예,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내가 들은 바로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 외국으로 도망쳤다던데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죠?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던컨 변호사는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의 젊은 시절밖에 모릅니다. 로버트는 캠벨 삼형제 중 가장 약삭 빠르고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쁜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다니던 은 행의 돈을 빼돌려 쓰고 외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남아 프리카로 건너갔다는데,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또 지금 살아있는지조차 모른답니다. 나는 로버트 캠벨이 이번 사건과 있다곤 생각되지 않는 데 요.... " "아니죠.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죠." 펠 박사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습니다. 캐더린이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며, 시내를 건너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 려왔는지 그녀는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했어요. 여기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그렌코 마을에 작은 호텔 이 있더군요. 거기서 전화를 걸었어요. 곧 경찰이 온다고 했으니 뒷일은 경찰에 맡기고, 우린 그 호텔에 가서 식사나 해요. 아침을 먹지 않고 왔 더니 몹시 시장해요. 참, 호텔 여주인이 홉즈를 잘 알고 있더군요." 펠 박사는 그 말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습니다. "호텔의 여주인이 뭐라든가요?" "홉즈가 이 집에 살게 된 건 낚시도 하고, 영구 운동의 연구를 하기 위해 서라더군요. 어젠 온종일 호텔의 식당과 술집에 틀어박혀 문 닫을 때까지 있었대요. 홉즈는 자전거 타는 게 장기여서, 아무리 술취해도 예사로 자 전거를 타고 달렸대요. 아뭏든 성질이 괴팍해서 남에게 호감을 못 주었나 봐요." 하고 캐더린은 말했습니다. "자전거라면 아까 이리로 올 때, 집 뒤에 있는 걸 봤어요." 던컨 변호사는 앞장서서 일동을 집 뒤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에는 짐 싣는 받침대를 달아 놓은 경주용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으로 마지막 의문도 풀렸군요. 홉즈가 늘 마음대로 샤일 라성에 왔다갔다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자전거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던컨 변호사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펠 박사는 자전거의 핸들을 잡고 멍청히 먼 곳을 쳐다보더니, "아차! 내 정신 좀 봐. 깜빡 잊어버렸었군." 하고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캐더린양 말대로, 곧 그 호텔로 갑시다. 나도 시장하지만 식사하기위해서 가 아니라, 빨리 가서 전화를 걸어야겠소." "어디에 전화하려고요?" 스완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도 아까부터 신문사에 특종 기사를 보내고 싶어 서 초조했던 것입니다. "이 마을의 민방공단이지. 자, 어서 가세." 펠 박사는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지팡이를 흔들며, 기민하게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16. 낡은 앨범.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샤일라성 거실의 활활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 다. "알랭...." 캐더린이 말을 걸어도, 알랭은 앨범의 사진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래 된 사진은 이상하게 보인단 말이야. 입은 옷이 구식이어서 그런가? 찍을 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음, 이건 젊은 시 절의 콜린 의사로군, 엘스펫 할머니도 젊었을 때엔 눈이 큰 검은 머리의 미인이었군." "이봐요, 알랭....." "앤거스 노인의 표정은 잘난 체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 는 군." "이봐요, 나의 알랭...." 그는 얼른 사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방금 뭐라고 불렀지??" 캐더린은 부끄러운듯 얼굴을 약간 붉혔으나, 곧 시치미떼고 대답했습니다. "그냥 한번 불러 봤을 뿐이어요. 당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요..... 알랭, 홉즈는 목매달아 자살한 게 아니죠? 그는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 는 콜린을 죽이려 한 범인이 아니니까요." "어째서 그가 콜린 의사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왜냐하면 홉즈는 간밤에 콜린씨가 탑의 방에서 잔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 죠. 콜린씨가 탑의 방에서 자겠다고 한 말은, 어제 낮이 지나서였어요. 보험 회사의 채프만 조사원이 유령 이야기를 꺼냈으므로, 콜린씨가 화가 치밀어 그런 결심을 한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홉즈는 어제 종일 호텔에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어요." "정말 그 말이 맞군." 알랭은 캐더린의 추리에 감탄했습니다. "펠 박사에게서 드라이아이스의 트릭을 듣고 난 안심했어요. 독사나 독거 미, 혹은 유령 따위의 짓이라고 생각했을땐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무서 웠어요. 그것이 드라이아이스 덩어리일 줄이야..." "공포란 정체를 알고나면 대게 싱거운 법이야." "그렇다면 유령 흉내를 낸 것은 누굴까요? 홉즈를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미고 살해한 건 누굴까요?" "누가 범인인 줄은 알 수 없지만, 놈의 동기는 뚜렷해. 앤거스 노인의 죽 음이 타살인 것같이 보인 후에, 똑같은 방법으로 콜린 의사도 죽여서 두 가지 죄를 홉즈에게 덮어씌우려고 한것이야." "3만 5천 파운드의 보험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럴 테지."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습니다. 바람이 약간씩 불기 시작했습니다. 방공 암막을 친 유리창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홉즈를 대체 어떻게 죽였을까요? 오두막집은 밀실이었잖 아요?" "펠 박사는 범인이 창을 통해 빠져 나간 것같이 생각 하더군." "그렇지만 범인이라도 철망친 창으로는 달아날 수 없을 텐데요." "하지만 캐더린, 개 넣는 가방의 경우도 우린 가방의 철망으론 아무것도 빠져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물을 빠져 나온 게 있었으니까 이번 에도 어쩌면...."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스완 기자가 들어왔습니다. 비에 흠뻑 젖어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난로 옆으로 오더니 흠뻑 젖은 옷을 불에 말렸 습니다. "어제는 엘스펫 할머니에게 물세례를 받더니 오늘은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야. 이 사건이 끝날때까진, 난 감기 걸리거나 폐렴에 걸리겠어."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디 갔다왔죠?" 캐더린이 물었습니다. "펠 박사 옆에 붙엇 안 떨어지려고 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소. 그 뚱보 박사가 무얼 조사하러 민방공단에 갔는지 통 모르겠소. 아마 명탐정 홈즈 라도 알 수가 없을 거요. 아니, 알랭씨는 뭘 보고 있죠?" "이 집이 낡은 가족 사진이요." 알랭은 앨범을 넘기다가,문득 사진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가만 있자. 이 얼굴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것은 굵은 팔자 수염을 가진 남자의 사진이었습니다. 상당히 잘 생긴 눈 이 교활해 보였습니다. 사진은 오래 되어 누렇게 바래 있었습니다. "물론 캠벨 집안의 한 사람이니까 본 적이 있는 것 같을 거요. 한 집안 사 람들은 모두 비슷한 데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하고 캐더린이 말했습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알랭은 그 사진을 앨범에서 떼어 뒤집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1905년 7월 로버트 캠벨'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아, 이사람이 행방 불명된 로버트로군!" 뒤에서 들여다보던 스완 기자는 다른 사진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 젊은 미인은 누구죠?" "엘스펫 노부인이요." "아니, 이 사람이, 그 괴팍한 할머니라니! 설마 그럴리가.... 정말 믿을 수 없는데.." 스완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렇소. 당신에게 물을 끼얹은 바로 그분이오. 젊었을 때는, 검은 머리에 상당한 미인이었지." 그러자 캐더린이 코방귀를 뀌며, 비꼬는 투로 알랭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클리블랜드 부인과 어느 쪽이 더 미인이죠?" 그 소리를 들은 스완 기자가 생각난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 아 보았습니다. "클리블랜드란 여잔 대체 누굽니까? 왜 당신들은 그 여자 말만 나오면 싸 우죠? 침대차에서 당신들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그게 궁금해서..." "클리블랜드 공작 부인이란 찰스 2세의 연인으로서, 200년 전에 죽은 여성 이요." 알랭이 진지하게 대답했지만, 스완 기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소리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말아요." "아니, 정말이오. 우린 역사상의 토론을 벌였던 것이오." "거짓말 말아요. 그 클리블랜드라는 여자는 당신의 옛애인이죠? 그래서 캐 더린양이 질투를 해서 싸움을 하는 것이고...." 계속 말하려던 스완 기자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캐더린이 매서 운 눈초리로 노려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봐요. 스완씨. 당신은 <<데일리>> 신문에 우리들에 관해 뭐라고 썼죠?" "난, 뭐 별로....." "알랭. 또 그 장검을 사용하는게 좋겠어요." 그녀는 벽에 걸린 두 자루의 장검을 가리키며 알랭에게 말했습니다. 스완 기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가리며, 엉거주 춤 앉아서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떻든 두 분은 결혼할 것 아닙니까? 펠 박사님도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 더군요. 그래서 나는 나쁜 뜻에서 기사를 쓴 게 아니고....." 갑자기 알랭이 껄껄 웃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퇐배 를 쥐고 웃었습니다. "알랭. 뭐가 우스워스 그래요? 놀리지 마요!" 캐더린이 화를 냈습니다. "핫하하.....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생각하니, 우스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당신들은 약혼을 발표해도 됬찮단 말입니까?" "안 돼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요! 장난기로 말하지 말고 진지 하게 대답해요." "하지만 캐더린, 고십 신문에 난 이상 당신과 결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아." 알랭이 농담조로 말하자, 스완 기자도 말꼬리를 잡아 말했습니다. "맞아요. 나도 두 분이 기뻐할 줄 알고 그런 기사를 쓴 것이요." 캐더린은 얼굴이 쌔빨개진채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알랭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있는데 하녀가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콜린 캠벨씨가 찾으십니다." "아니, 그는 중태라 면회 사절이 아닌가?" 스완 기자가 물었습니다. "아니어요. 아주 건강하십니다. 한 시간 전부터 '캠벨 집안의 운명'을 마 시고 계신 걸요." "아니, 오늘 아침에 탑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사람이..... 굉장한 환자로 군..." 세 사람이 하녀의 안내로 이층으로 올라가자, 긴 복도의 끝방에서 큰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가씨는, 귀여운 처녀 골짜기의 백합처럼 순진한 처녀 귀여운 그녀는 히드꽃이었다. 17. 약혼 파티. 세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자, 노랫소리가 뚝 그쳤습니다. 콜린 캠벨 의사는 창가 침대의 등뒤에 베개를 받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허리 아래는 붕대로 칭칭 감겼고, 한 발에는 깁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암막 으로 가려 놓은 방안에서 위스키 냄새가 물씬 났습니다. "여어, 여러분 들어오시오! 난 붕대에 칭칭 감긴 비참한 모습이오. 미치도 록 지루하오. 술을 마시는 일밖엔 할 일이 없소. 자, 여러분은 이 가엾은 늙은이와 같이 좀 있어 주시오." 콜린은 쾌활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습니다. 도무지 다친 사람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원기 왕성했습니다. 침대 옆의 탁자위에 반쯤 마신 빈 술잔과 20구경의 엽총이 놓여 있었습니 다. 아마 심심풀이로 그 엽총을 손질 하고 있나 봅니다. "내가 무엇에 혼난 줄은 들었겠지? 알고 보니 드라이아이스였어. 홉즈도 가엾은 친구야. 난 그를 미워하진 않았는데..... 아니, 펠 박사는 어디 갔지?" "마을의 민방공단에 가셨답니다." 알랭이 대답했습니다. "뭐, 민방공단에? 그 뚱보 박사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민방공단에 찾아갔 을까? 우스운 이야긴데." 콜린 의사는 또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캐더린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캐더린은 몹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고민이 생겼나?" "예, 있고 말고요. 스완 기자는 이쪽의 정보를 알려 주는 대신 고십을 안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뭐라구! 이봐, 스완 기자. 설마 우리가 자네 엉덩이를 장검으로 찔렀다는 기사를 신문에 쓴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런 걸 왜 씁니까?" 스완 기자가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그럼, 캐더린이 왜 화가 났지?" "스완 기자가 저하고 알랭이 한 침대차에 탔다는 고십을 썼어요. 그런데도 알랭은 태연한 얼굴로 웃고 농담을 하고 있답니다." 콜린은 눈이 휘둥그레져, 캐더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껄껄 웃기 시 작했습니다. "허, 그거 재미있는 얘기로군. 그래,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얘기해 봐." "부끄러울 건 없어요. 야간 열차 안에서 차장의 실수로 침대차의 한 객실 에서 밤을 세웠어요. 그런데 그렇게 천한 고십을 신문에 곰으니, 난 여자 대학을 사직해야만 해요." 캐더린은 분한 나머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랭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께에 손을 얹고 위로 했습니다. "캐더린,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요. 지금 당장 우리가 결혼한다면 당신 평 판에 손상이 가지 않을 거요. 아까부터 결혼해 달라는 말을 하려 했었는 데 ...." "그런 소린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그랬나? 그럼 지금 여러분 앞에서 정식으로 결혼 신청을 하지. 캐더 린 나의 아내가 되어 주지 않겠소?" 알랭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캐더린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살짝 들었습니다. 그 눈은 부끄러운 듯 약간 웃고 있었습니다. "예, 물론 받아들이겠어요. 난 좀더 로맨틱한 방법으로 결혼 신청을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건 마치 나를 협박하려는 것 같군요." 콜린은 어이없는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봐, 두 사람은 진짜 결혼할 건가? 이거, 경사로군! 이 샤일라성에선 몇 십년만의 경사야." 그렇게 소리치던 콜린이 별안간 엽총을 집어들었으므로 모두 깜짝 놀랐습니 다. "그 총으로 뭘 하려는 건가요? 위험해요!" "두 사람의 약혼을 온 마을에 알리기 위해 축포를 쏠 테다. 이봐, 창을 좀 열어 줘!" 스완 기자가 암막을 벗기고 창문을 열자, 콜린은 밤하늘을 향해 엽총을 한 방 쏘았습니다. 저택 안에 '탕!'하고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자. 이제 건배합시다! 참, 이 성의 여주인을 불러와야지. 누가 가서 엘스 펫 노부인을 불러 오게." 그러나 일부러 부르러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금전의 총소리를 듣고 엘스 펫 노부인이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차가운 눈초리 로 일동을 노려보았습니다. 그 완고하고 주름투성이의 얼굴에는, 전혀 낡은 앨범에서 본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저어, 형수님. 대단한 뉴스가 있습니다. 이 젊은 두 사람이 결혼 한답니 다!" 콜린 의사가 명랑하게 말했지만, 엘스펫 노부인은 웃지도 않고 알랭과 캐더 린을 쳐다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습니다. "아니, 형수님. 경사스런 약혼 발표를 하는데. 슬픈 눈물을 보이다니 무슨 일입니까?" 콜린이 나무랐습니다. "참, 그렇군. 그럼 축하해야지. 이런 할머니의 축하라도 좋아한다면...." 엘스펫 노부인은 알랭과 캐더린 곁으로 다가가, 두 사람의 볼에 가볍게 키 스해 주었습니다. 콜린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습니다. "됐어. 자,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건배합시다. 아니, 하녀는 어디 갔지? 술잔이 모자라잖아. '캠벨 집안은 운명'을 자꾸 가져와!" "잠깐만요. 콜린씨. 오늘밤에도 또 떠들썩하게 소동을 벌일 건가요?" 알랭이 콜린 앞에 있는 위험한 엽총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떠들썩한 소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들의 결혼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 건배하는 건데. 축하해 주는데 무슨 딴 소리야?" "아니어요. 전 이의가 없어요." 캐더린이 행복스런 눈빛으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마음껏 마십시다." 하고 스완도 끼어들었습니다. 다만 엘스펫 노부인만이 홀로 어두운 표정이었습니다. 콜린 의사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슬픔을 위로했습니다. "형수님, 난 형님이 안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어 요. 만약 형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형수님도 무일푼이고 나도 빛 때문에 꼼짝 못할 뻔 했어요. 모든 일이 순조로우니 당분간 나는 병원일 을 쉬고, 요트를 사서 한가롭게 여행이나 할 생각입니다." "콜린, 당신이 그런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있는게 다 누구 덕택인지 알아 요?" 엘스펫 노부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콜린은 우물쭈물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도 측은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 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들떳던 기분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난 남편의 일기를 읽어서 진상을 알고 있어. 남편 앤거스는 살해된 것이 아니고 자살했어. 그런데도 그걸 속이고 보험금을 타려 하다니.... 난 그런 벌받을 일은 할 수 없어. 내일 경찰서에 가서 모든 걸 정직하게 털어 놓겠어." 엘스펫 노부인의 목소리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완 기자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의 남편은 자살한게 아니고 홉즈에게 살해된 것입 니다. 홉즈가 살인죄를 고백한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달아 자살했답니 다." "뭐, 그게 정말인가? 나를 속이는 건 아니겠지?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예, 제 눈으로 홉즈의 유서를 똑똑히 봤습니다. 무신론자인 내가 하는 말 을 못 믿겠으면 직접 펠 박사님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럼, 역시 그는 자살한 게 아니었군그래. 정말 고맙게도....." 엘스펫 노부인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 습니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아늑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퍼졌습니다. 그녀 가 처음으로 보인 맑은 웃음이었습니다. 알랭은 그런 노부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앤거스 노인이 자살 했다는 것을 펠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노부인에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잔혹하다고 생 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 신앙심 깊은 노부인이 얼마나 비탄에 잠기겠습니까? 기독교는 자살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큰 죄로 금지하고 있어서, 교회 묘지에 묻히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살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 엘스펫 노부인은 자기 남편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 었다는 말을 듣고서 안심한 것입니다. 같은 죽음이라도 자살이 아니면 하나 님이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형님이 자살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것으로 만사는 경사스럽게 끝났으니 잘되었어요. 자, 형수님. 기분 전환을 하세요. 지금 이 상중이라는것은 나도 알지만, 우리 캠벨 일족인 젊은 두 사람의 결혼 을 축하하는 뜻에서 기분 좋게 건배합시다." 엘스펫 노부인은 원기를 되찾았습니다. 하녀에게 '캠벨 집안의 운명'을 가 져오게 하더니 모든 술잔에 따르게 했습니다. 즐거운 약혼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자, 내가 선창할테니 , 모두 합창합시다." 콜린은 부상당한 몸이지만 활기차게 엽총을 지휘봉처럼 흔들며 노래했습니 다. 사랑하는 아가씨는, 귀여운 처녀 골짜기의 백합처럼 순진한 처녀 알랭과 캐더린은 살짝 눈짓을 하며, 행복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합창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그 아가씨는 히드꽃 붉고 작은 히드꽃이어라. 18. 밝혀진 범인. 다음날 아침, 알랭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낮이 가까왔습니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또 숙취로 심한 두통이 오고 목이 탔습니 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사랑에 취한 행복한 숙취였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앉아,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으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단풍든 숲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캐더린이 커피를 갖다 주었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알랭. 나도 좀 지나쳤는지 머리가 아파요. 어젯밤의 일을 당신은 기억 못 하시죠?"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 "아니어요. 실수라뇨?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낭만주의자일줄은 꿈에도 생 각하지 못했어요. 마치 학예회의 왕자처럼 내 손을 잡고 '그대의 부드러 운 손을 내게 맡기어 내 사랑을 믿을지니'라고 진지하게 시를 낭독했거든 요. 정말 무안했어요." "아니, 내가 그랬었나.... 어째든 두 사람 다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으 니 괜찮아." 알랭은 뜨거운 커피를 마셔서인지 기분도 약간 좋아졌습니다. "괜찮다니요? 스완 기자가 지금쯤 병원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아니, 그럼 내가 또 장검으로 그의 엉덩이를...." "당신이 그런 게 아니어요. 스완 기자가 술취한 김에, 장난으로 하얀 식탁 보를 뒤집어쓰고 탑에 나타난 유령 흉내를 냈거든요. 그걸 보고 있던 콜 린씨가 별안간 화를 내며 '나가! 다시 이 성에 왔다간 봐라 가만두지 않 을 테니!' 하고 고함치며 엽총을 갖다 대었어요." "그래, 쏘았소?" "그때는 쏘지 않았어요. 스완 기자가 허둥지둥 도망치자, 콜린씨는 '불을 끄고 창문의 암막을 벗겨라! 기다렸다가 놈이 도로에 나서면 쏘겠어!' 라 고 소리쳤어요, 콜린씨의 침대는 창가에 있었잖아요." "설마, 정말 쏘려고 한건 아니었겠지?" "예, 콜린씨는 쏘지 않았어요. 총을 쏜건 나여요." 알랭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캐더린의 얼굴을 쳐 다보았습니다. 그녀는 금방 울어 버릴것 같았습니다. "그때 난 어디있었지? 왜 당신이 못 쏘게 말리지 않았지?" "새벽 4시 쯤이었으니까, 당신은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죠. 난 그 기자 에게 원한이 좀 있었잖아요. 그래서 도로에 그의 모습이 나타난 순간, 화 가 치밀어올라 콜린씨의 손에서 엽총을 빼앗아 무턱대고 두방을 쏘아 댔 어요." 알랭은 껄껄 웃었습니다. "알랭,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웃지 말아요! 걱정이 되서 죽겠어요. 난 경 찰에 잡힐지도 몰라요." "괜찮소. 그 창에서 도로까지는 상당한 거리인데다 20구경의 엽총이면 위 험하지 않소. 그래 스완 기자는 쓰러지지 않았소?" "예, 인베라레이 마을 쪽으로 쏜살같이 도망쳤어요. 알랭, 이런 미치광이 소굴 같은 곳에서 빨리 떠나요. 매일 밤 밀주를 마시다간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여요. 아침에 대학에서 편지가 왔어요. 런던에선 본격적 인 공습이 시작된 모양이어요. 휴가를 단축하고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어 요." "그럼, 우리의 휴가도 이것으로 끝장인가, 유감스러운데....." "알랭, 오늘밤이라도 출발해요." "그럼, 나도 빨리 서둘러 채비를 해야겠군. 돌아가는 침대차 표를 끊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뭏든 사건은 일단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 린 돌아가도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요.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어요. 지금 아래층에 펠 박사님이 와 계셔요. 박사님의 거동으로 봐, 이제부터 또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난 웬지 무서워요."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을 들여다보니, 펠 박사가 혼자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안경은 코끝까지 흘러내렸고, 물고 있는 파이프는 금새 떨어질 것 같앗습니다. 조끼의 가슴 언저리에 담뱃재가 하얗게 떨여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단정치 못한 명탐정이었습니다. 엘스펫 노부인과 하녀는 교회가 가고 집에 없었습니다. 부상당한 콜린은 아직도 이층 병실에서 자는 것 같았습니다. 널따란 집안은 너무나 조용해서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알랭과 캐더린은 식당에서 토스트와 홍차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등이 굽은 던컨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시오! 난 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소. 펠 박사는 어디 있죠?" "거실에서 한가롭게 졸고 계십니다." "아니, 사람을 불러 놓고 자기는 한가롭게 졸고 있다니... 그건 그렇고, 이렇게 당신들이 사이좋게 식사하는 걸 보니, 육촌간이라기보다는 꼭 신 혼부부 같군요." 던컨 변호사의 말에 캐더린은 얼굴을 붉혔습니다. "우린 어젯밤 약혼했어요. 홍차 한 잔 드시겠어요?" "야,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차는 기꺼이 마시겠소." 세 사람이 홍차를 마신 다음, 함께 거실로 들어가자 그 발소리에 펠 박사가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박사님, 전화를 거셨기에 빨리 달려왔는데요. 사건은 이미 끝난 게 아니 었습니까?" 던컨 변호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펠 박사는 큰 몸을 흔들며 고쳐 앉았습니다. "나는 마을의 민방공단을 찾아가, 밤새 조사하여 마침내 홉즈를 살해할 때 사용한 도구를 찾았소." "홉즈가 살해되었다니...? 그런 소리가 어디 있담! 그는 목매달아 자살한 겁니다." "던컨 변호사 진정하시오. 당신도 앤거스 노인이 자살했다는 것과 홉즈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대강 알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펠 박사가 안경 너머로 노려보자, 던컨 변호사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 았습니다. "뭘 겁먹고 있는 거요? 여긴 우리 네 사람밖에 없으니까 비밀이 샐 염려는 없소." "내겐 비밀 같은건 없어요. 경찰에서도 홉즈는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증거로 살인이라고 하시는 거죠?" "그 오두막집 창에 검은 종이를 바른 방공용 암막이 없었기 때문이요. 만 약 홉즈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면, 암막은 창에 끼워져 있었을 거요. 그 렇지 않으면 불빛이 새어나가 민방공단의 의심을 받게 되지요. 등잔불은 켜져 있었으니까 말이요. 그런데도 암막은 벗겨져 있었소. 홉즈가 벗긴 것이 아니라면, 범인이 벗겼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소. 그럼 어셉서 범인 은 일부러 암막을 벗기고 달아났을까? 바로 그것이 문제요. 암막을 벗기 고 오두막집에서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암막을 창문에 끼울 수 없소. 왜 내하면 그 창문에는 튼튼한 철망이 안쪽에 못박혀 있었으니까." "그럼 범인은 어디로 빠져 나갔다는 말입니까? 문의 빗장은 안으로 잠겨져 있었는데요. 펠 박사, 당신은 이런 엉뚱한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소? 난 다른 용무가 있어서 바쁘단 말이요." 던컨 변호사가 초조한 듯 돌아가려하자, 펠 박사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 쾅!' 쳤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제안을 들으면, 당신도 내 생각 에 찬성할 테니." "제안이라뇨?" "거래라고 해도 좋고 교환 조건이라고 해도 좋소. 당신에게도 크게 득이 되는 일이니까." "설마 나를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하고 던컨 변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캠벨 집안의 고문 변호사가 아니오? 그러니 캠벨 집안을 위한 일 이라면 당신을 위한 일도 되지 않겠소?" "그야 그렇죠. 나는 캠벨 집안의 이익을 위해 고용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나는 홉즈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이요." "나는 홉즈에 관한 건 관심이 없어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앤거스 노인의 죽음뿐입니다. 박사님도 앤거스 노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건 증명할 수 없죠?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렇소. 유감이지만 뚜렷한 증거는 없소. 홉즈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밝혀 지면 당연히 그가 남긴 유서는 가짜요. 그건 범인이 조작한 유서요. 그렇 다면 경찰은 처음부터 수사를 다시 하여 마지막에는 앤거스 노인이 탑에 서 떨어져 자살한 사실도 캐낼 것이오. 그렇게 되면, 3만 5천 파운드의 생명 보험금도 탈 수 없게 되고, 당신도 변호료를 받지 못하오. 그래도 좋겠소?" 던컨 변호사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과 거래하죠. 그 전에 범인이 누군지 똑똑히 가르쳐 주십시오." "전혀 모르겠소?" "예, 애태우지 말고 빨리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곧 범인이 이리로 올 것이오.... 자, 온 모양이로 군." 던컨 변호사뿐만이 아니라, 알랭과 캐더린도 몹시 긴장이 되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문밖에서 멈추었습니다.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어." 펠 박사가 문을 향해 말했습니다. 일동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문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릴 때까지는 겨우 5,6초 정도였지만, 알랭은 이때처럼 시간이 길다 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저게 바로 살인범이야!" 펠 박사가 입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바로 보험 회사의 조사원인 채프만이었습니다. 19. 사건의 진상. "뭐라고 하셨죠, 박사님?" 채프만 조사원은 방안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펠 박사에게 물 었습니다. 유행하고 있는 멋진 양복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했네. 채프만.... 참, 캠벨이라 부르는 게 더 났겠군. 자네 본명은 캠벨이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채프만은 시치미떼고 고개를 까우뚱거렸지만, 그 눈초리는 경계하는 듯 교 활하게 빛났습니다. 펠 박사는 난로 위에 있는 사진을 지팡이로 가리켰습니다. "이틀 전, 이 방에서 자네와 처음 만났을때, 난 저 앤거스 캠벨 노인의 사 진을 보고 있었어. 기억나나? 문득 사진에서 눈을 떼고 자넬 보니. 캠벨 집안 사람과 매우 닮았더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물었었지. '자넨 캠벨 집안의 친척인가?' 라고 말이야." 알랭은 그때의 일이 똑똑히 기억났습니다. 동시에 어젯밤 낡은 앨범에서 본 로버트 캠벨의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채프만의 잘생긴 얼굴과 교활한 눈매, 튼튼한 체격 등이 그 사진의 인물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어샔요. 던컨 변호사. 이 청년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소?" 던컨 변호사는 채프만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로버트 캠벨.... 젊은 시절의 로버트 캠벨을 꼭 닮았군...." 하고 비로소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건지 통 모르겠는데요...." 채프만이 우물쭈물 무슨 말을 하려 하자, 펠 박사는 지팡이를 내밀며 가로 막았습니다. "난 어제 런던 경시청의 친구에게 전보를 쳐서, 자네 신원을 조사하게 했 어. 오늘 아침 그 답전이 왔지." 펠 박사는 주머니에서 전보를 꺼내 읽었습니다. "본명은 윌터 채프만 캠벨. 8년전까지 남아프리카의 포트엘리자베드시에서 부친 로버트 캠벨과 거주 했었는데. 부친이 사망하자 609348호의 여권을 발부받아 영국으로 건너 왔음. 보험 회사에 취직할 때. 은행돈을 횡령한 부친의 이름이 탄로 날까봐 캠벨 이란 이름을 버리고 가명을 사용했음. 2 개월전에 그곳 지점으로 전근되었음." 채프만은 전보 읽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그야 사정이 있어서 이름은 바꿨지만.... 그러나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겁니까?" "자네는 삼촌인 앤거스 캠벨과 만났어. 그리고 삼촌이 자살하는 걸 도와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삼촌인 콜린 캠벨을 죽이려다 실패했 고, 알렉 홉즈를 죽였어." "그런 터무니 없는 말씀 마십시오." 하며 채프만은 중얼거렸지만, 그의 안색에는 이미 핏기가 없었습니다. "자네가 시치미뗀다면 내가 말을 하지. 앤거스 노인은륚 자살하기 사흘 전 에 마지막 보험에 들으려고 보험 회사의 지점에 갔다가 우연히 자네와 만 났어. 그는 캠벨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니, 한 눈에 자네를 보고 동생 로버트의 아들인 것을 알았지. 그렇지, 채프만? 그샔 앤거스 노인은 자살할 계획을 자네에게 털어 놓았어. 타살인 것처럼 꾸미고 죽을테니까, 자네가 조사한 뒤에 회사에 타살이라고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지. 그러면 3만 5천 파운드 의 보험금을 아내 엘스펫과 동생 콜린에게 남겨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콜린 의사는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할 노인이고 독신이니까 얼마 안 가서 그 유산은 자네의것이 될 거라고 말했지. 앤거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드라이아이스로 자살할 계획을 자네에게 털어놓았을 거야. 파산한 캠벨 집안을 구하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는 혈족의 정에 호소 하여 자네에게 협력을 부탁한 게 틀림없어." 펠 박사는 잠시 말을 끓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보험금을 지불하는 건 회사지, 자네가 손해볼 것은 없어. 가짜 보고서를 만들어도 자네 자신이 손해보는 것은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콜린 삼촌 이 빨리 죽으면 1만 7천 5백 파운드가 자네 것이 되지. 그러나 만약 콜린 삼촌이 오래 살아서 그 돈을 다 써 버린다면, 자네에겐 한푼도 돌아가지 않을 걸 미리 알았어. 그래서 앤거스 삼촌이 자살하자, 자네는 내친김에 콜린 삼촌도 죽이고 1만 7천 5백 파운드를 빼앗으려고 꾸몃지." 채프만은 이젠 변명도 늘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그 창백해진 얼굴에는 될 대로 되라는 듯 포기한 태도가 엿보였습니다. "그날 자넨 콜린 삼촌이 탑의 방에서 자도록 충동질 했어. 일부러 유령 이 야기를 삼촌에게 했지. '나 같으면 그렇게 소름끼치는 탑 꼭대기 방에선 하룻밤이라도 자기 싫다.'고 말이야.... 그 소리를 듣고 성질이 급한 콜 린은, 마치 빨간 천을 본 성난 투우처럼 화를 탑의 방에서 잔다고 큰소리 쳤지. 보기 좋게 자네 계략에 빠진 셈이지." 펠 박사는 채프만을 노려보더니 다시 계속했습니다. "물론 그 전날 밤에 나타났던 유령도 자네가 꾸민 것이었어. 탑 아래의 문 은 늘 잠겨 있지 않으니까. 안뜰에서 마음대로 숨어들 수가 있지. 자네는 망토와 모자에 붉은 물감을 칠하여 피가 묻은 것처럼 하고 애꾸눈 유령으 로 변장하고, 탑의 창가에 서 잇었지. 그 모습을 택시 기사가 본 거야." 방에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펠 박사의 이야기는 계속되 었습니다. "콜린을 드라이아이스로 죽이려면, 아무래도 탑의 방에 그를 재워야 했어. 저택에는 들킬 위험이 있어서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날 밤 콜린은 내가 말렸는데도 듣지 않고, 술이 취한 채 탑의 방에 자러 올라갔어. 그 전에 자네는 드라이아이스를 넣은 개 넣는 가방을 그 방으 로 들고 가서 침대 밑에 숨겼어. 그리고 이튿날 아침, 콜린이 탄산가스 중독으로 죽은 게 밝혀지면, 흉기는 드라이아이스란 것이 밝혀지리라 생 각했어. 만약 경찰이 그걸 못 알아내면, 자네 자신이 그 말을 할 작정이 었지. 그러면 앤거스 노인의 죽음도 똑같이 드라이아이스에 의한 살인이 라 생각되어, 보험금을 탈 수 있으니까." 채프만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펠 박사는 말하 다 말고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이라면 범인이 없어선 안 되지. 그래서 자네는 홉즈를 범인으로 조작하기로 했어. 그날 밤 그를 죽이고 가짜 유서를 만들어 목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민 거야." "그럼 내가 홉즈를 죽였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당신 이야기는 다만 상상에 지나지 않아요. 증거라곤 아무것도 없잖아요." 하고 채프만이 뻔뻔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펠 박사는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채프만을 노려보았습니다. "자네 계획은 이중, 삼중을 완벽했어. 본디 앤거스 노인은 실지로 자살한 것이니까. 자네는 의심 받을 염려가 없었지. 또 콜린을 죽인 흉기는 흔 적도 없이 사라지는 드라이아이스였으므로, 증거는 남지 않아. 정말 완벽 한 살인 계획이야. 처음에는 아주 충실한 조사원인 것같이 행동하여, 앤 거스 노인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떠들어댔어. 나중에 홉즈의 시체와 유서 가 발견되면, 단번에 앤거스의 자살설이 뒤집히게 꾸며 놓고 말이야. 그 렇지 않으면 보험금이 손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자넨 커다란 실수를 하나 저질렀어. 콜린이 탑의 창에서 떨어졌을때 죽었는지를 확인 하지 ?은 것이 큰 실수였어. 하긴 자네는 빨리 그렌코 마을에 있는 오두 막집으로 가서 홉즈를 죽여야 했으므로 그럴 틈이 없었겠지만.... 아참! 채프만, 자네 자동차 번호는 몇 번이지?"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채프만은 한동안 멍청해 있었습니다. "자동차 번호는 몇 번인가 물었는데 뭘 우물거리는 거야...." 펠 박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말했습니 다. "자동차 번호는 MGM 1911 번이지? 홉즈가 죽은 날 밤, 2시부터 3시사이에 번호 MGM 1911 자동차가 그 오두막집 근처의 도로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민방공 단원이 보았어. 자넨 한밤중에도 민방공단원이 순찰한다는 걸 깜 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야." 20.범인과의 거래. "증거란 그것 뿐입니까?" 하고 질문한 사람은 던컨 변호사였습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오. 그럼 지금부터 홉즈 살인의 수수께끼를 설명하지. 문 안쪽으로 잠긴 밀실에서 범인이 어떻게 빠져 나갔느냐가 문젠데.... 던컨 변호사, 당신은 기하를 압니까?" "기하요......?" "학교에서 배운 수학 말이요.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 의 제곱의 합과 같다.' 라는 정리가 있었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런 것은 쓸데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소용되는 일이 있군그 래. 홉즈이 오두막집은 꼭 한 변이 4미터인 정사각형이었어." 펠 박사는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다 바로 오두막집의 겨냥 도를 그렸습니다. "정면에 문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철망이 쳐진 창문이 있었지. 어제 나는 그 집 한가운데에 서서 창을 쳐다보며 머리를 짜냈어. 왜 등화 관제용 암 막이 벗겨져 있었는가? 범인이 창문의 철망으로부터 빠져 나가기 위해서 라곤 생각할 수 없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다면 틀림없이 다른 이유로 암막이 벗겨졌을 거야. 그 철망의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 그물눈에 손가락을 집어 넣고 흔들어 보았더니 꽤 튼튼하더군. 그때엔 나도 도무지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어. 그런데 캐더린의 말에서 나의 육감이 번뜩 여, 곧 의문이 풀렸지." "어머,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캐더린은 기억이 나지 않아 펠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아가씨가 경찰에 전화하려고 그렌코 마을의 호텔로 갔을 때, 그곳 여주인 이 '홉즈는 낚시가 취미였다.'고 말했다고 했지? 그게 수수께끼의 실마리 를 푸는 열쇠가 되었어. 집안에는 낚시 도구와 낚시 바늘은 있었지만, 낚 시대는 하나도 없었어. 이 낚시대지." 펠 박사는 소파 뒤에서 큰 가방을 꺼내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서 따로 따로 떨어진 낚싯대가 나왔습니다. 굵은 마디의 손잡는 곳에 A. H. 라고 알 렉 홉즈의 머릿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릴에는 낚시줄이 감겨 있지 않 았습니다. 그 대신 가느다란 낚시대 끝에 낚시 바늘이 철사로 단단히 고정 되어 있었습니다. "어때, 멋진 도구지? 범인은 넥타이나 굵은 끈으로 뒤에서 홉즈의 목을 졸 라 죽였어.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등잔 거는 고리에 가운 끈으로 둥글게 고리를 만들어 거기에 시체의 목을 걸고,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몄 지. 이렇게 죽이면 목 졸라 죽인 것과 목매단 것의 구별이 안 돼. 그런 뒤, 범인은 등불을 끄고, 저절로 다 탄 것같이 나머지 기름을 버린 다음 창문의 암막을 벗겼어. 그리고 이 낚시대를 들고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 어. 그때는 문은 닫혔으나 아직 빗장은 걸려 있지 않은 상태였지. 채프만 은 옆창으로 가서, 철망의 그물눈 사이로 이 낚시대의 끝을 집어 넣어, 문 있는 데까지 비스듬히 뻗었어. 그 철망은 내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니 까, 가는 낚시대라면 충분히 집어 넣을수가 있지. 낚시대 끝에는 낚시 바 늘이 붙어 있으므로, 그것으로 빗장의 고리에 걸어, 앞으로 당기면 빗장 은 아주 쉽게 잠기므로, 문은 완전히 안쪽에서 잠기게 되지. 달이 떠있었 으니까 등불이 꺼져 있었도 달빛으로 잘 보였을 거야. 물론 암막은 벗겨 야 했지.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본디대로 창에 끼울 수는 없었어. 낚시대 도 가져가야 했어. 낚시대에는 굵은 릴이 붙어 있었으므로 철망을 통해 던져 넣을수도 없었지. 그렇다고 릴을 떼고 가느다란 낚시대만 집어 넣으 면, 당장 트릭이 들통났을 테고, 그는 낚시대를 들고 오두막집을 떠나 자 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숲에다 그것을 던져 버렸어. 어제 나는 마 을의 민방공단에 부탁하여, 민방공 단원을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이 낚시 대를 찾아 낸 걸세." 하며 펠 박사는 그 낚시대를 채프만의 가슴께로 내밀었습니다. "여기엔 피해자 홉즈의 머릿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자네의 지문도 아마 찍 혀 있을 거야. 훌륭한 증거품이지. 내가 이걸 경찰에 갖다 주면, 자넨 살 인죄로 체포되어 사형될 걸세." 채프만은 겁에 질려 두세 걸음 뒷걸음쳤습니다. 얼굴의 근육이 굳어진 채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넨 앤거스와 콜린 두 삼촌이 죽고, 홉즈가 범인으로 밝혀져 사건이 해 결되면 몰래 남아프리카의 포트엘리자베드시로 돌아갈 작정이었지? 그리 고 시침떼고, 이곳의 캠벨 집안에 편지를 내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리려고 했어. 그러면 콜린이 타게 되어 있던 1만 7천 5백 파운드의 보 험금을 송두리째 자네가 상속하게 될 테니까. 던컨 변호사는 제대로 수속 을 끝내 송금해 줄 것이라고 믿었겠지. 그러면 자네는 여기 있는 사람들 에게 들키지 않고, 큰돈을 수중에 쥐게 될 거라고 기뻐했겠지. 그러나 지 금은 이미 돈 같은건 바라지 않겠지. 돈보다는 목숨이 귀중하니까..." 별안간 채프만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형될 거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추호도 나쁜 마음은 없었어요! 앤거스 삼촌이 이상한 자살 계획을 제안하 면서, 보험금이 탐나면 도와 달라고 충동질하여, 그만 돈에 눈이 멀어서. .. 박사님, 저를 경찰에 넘기시는 건 아니겠죠?" 그는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자술서를 쓰면, 입을 다물어 줄수도 있어. 어떤가?" 하고 펠 박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채프만은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청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절망과 희 망이 반신 반의한 표정이었습니다. "펠 박사님. 그건 대체 무슨 말입니까?" 던컨 변호사가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펠 박사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새삼스레 채프만을 경찰에 넘겨 본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진 않소. 아니, 도리어 앤거스 노인의 죽음이 자살로 판명되면, 보험금을 탈 수 없 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 깊은 엘스펫 노부인은 비탄에 잠길 거요. 그렇다 면 교회 묘지에 매장되지도 못하고, 남편의 넋이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지 는 걸 얼마나 슬퍼하겠소. 나는 그런 짓은 하기 싫소. 노부인에게 행복하 고 안락한 여생을 보내도록 만들어 주고 싶은 거요. 앤거스 노인도 그걸 바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니까......" 펠 박사의 말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 이와 만년필을 꺼내 탁자위에 놓고, 채프만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자, 채프만. 내가 말하는 대로 자술서를 쓰게. '나는 삼촌 앤거스 캠벨을 죽이고 또 삼촌 콜린 캠벨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알렉 홉즈를 죽였 습니다.'라고 말이야." "하지만 저는 앤거스 삼촌을 죽이지 않았어요. 삼촌은 정말 자살한 겁니 다." "그건 알고 있어. 그러나 살해했다고 써. 그렇게 안 쓰면, 보험 회사는 보 험금을 지불해 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자네가 자술서를 쓰면 나는 48 시간 동안은 경찰에 연락하지 않겠어. 그 사이에 자네는 외국으로 도망치 게. 다눈 항구로 가면, 외국으로 떠나는 화물선이 있으니까, 친절한 선장 에게 부탁해서 태워 달라고 해봐." 채프만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펠 박사를 쳐다보며 망설였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만약 내가 자술서를 쓰면, 당신은 그걸 곧 경찰에 넘 길지도 모르잖아요. 정말로 도망칠 시간을 주실 겁니까?" "자네가 나를 믿으면 나도 자넬 믿겠어. 남자 대 남자의 약속이야." 그때 던컨 변호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끼어들었습니다. "나는 책임 있는 변호사로서, 이런 부정한 거래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뻔 히 보고도 살인범을 도망치게 하다니..... 펠 박사님, 그건 법률에 위반 되는 일입니다." 펠 박사는 미끄러져 내리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던컨 변호사를 날카로운 눈 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꼭 법률을 지키는 것만이 정의는 아니오. 이 세상에는 보다 중요한 것이 있소. 이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우리 뿐이오. 남에게 알리 지 않고 죽을때까지 우린 이 비밀을 지킨다고 맹세합시다. 여러분 어떻소 ?" "예, 저는 맹세합니다." 캐더린이 오른손을 들고 맨 먼저 찬성하자, 알랭도 오른손을 들었습니다. "나도 엘스펫 노부인을 위해 맹세합니다." "됐어. 다수결로 결정됐어. 자,채프만. 어떻게 할텐가? 두 가지 살인과 한 가지 살인 미수의 자술서를 쓰고 외국으로 도망갈텐가? 아니면 자술서를 쓰지 않고 한 가지 살인과 한 가지 살인 미수의 죄로 사형당하여 교수대 의 이슬로 사라질 텐가? 열을 셀 동안 결단을 내리게." 펠 박사는 굵은 지팡이 끝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채프만은 눈을 감았습니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넷, 다섯, 여섯....." 채프만은 눈을 뜨더니, 창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고성의 뜰에는 가을의 밝 은 햇빛이 내려쬐고, 고요한 호수의 수면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일곱, 여덟, 아홉....." 숨막히는 침묵이 계속되고 지팡이소리만이 울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열을 셀 차례였습니다. "쓰겠습니다." 채프만 캠벨은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었습니다. 글래스고발 열차는 도중에 공습 경보로 4시간이나 늦게 런던역에 도착했습 니다. 안개의 도시 런던에서는 보기 드문 상쾌한 아침이었습니다. 열차가 플랫폼에 닿자, 침대차 문이 열리며 젊은 남녀가 내렸습니다. 남자는 손을 흔들어 역의 짐꾼을 불렀습니다. "이 엽총은 부인 것입니까, 아니면 선생님 것입니까?" 짐꾼이 두 사람의 짐을 받아들며 물었습니다. "그건 우리 약혼 파티의 기념품이니까, 조심해서 운반해 주게." "아니, 이런 낡은 엽총이 말입니까....? 대체 이걸로 뭘 쏘았습니까? 산 토끼인가요, 들오리인가요?" "사람이야!"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짐꾼 쪽에는 신경쓰지 않고 함께 가는 여자에게 정답게 말했습니다. "캐더린, 당신은 내 아내가 되면, 클리블랜드 공작 부인이 검은 머리의 미 인이며, 몸집이 큰 말괄량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지?" "아녀요, 알랭. 당신과 결혼해도 학문은 학문이니까요. 클리블랜드 공작 부인은 금발에다 몸집이 작은 얌전한 여성이었어요." 짐꾼은 '이상한 연인들도 다 있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방 갸우뚱거리 며 두 사람 뒤를 따라 갔습니다. 많은 손님으로 복잡해서 웅성거리는 출찰구 쪽을 향해서..... [완 ---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