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전쟁 The Lord of the Rings J.R.R. 톨킨 / 김번 김보원 이미애 옮김 1 반지군주 지상의 요정왕들에겐 세 개의 반지 돌집의 난쟁이왕들에겐 일곱 개의 반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에겐 아홉 개의 반지 어둠의 권좌에 앉은 암흑의 군주에겐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은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차례 프롤로그 호비트족(族) 제 1 장 오랫동안 기다려온 생일잔치 제 2 과거의 그림자 제 3 세 동지 제 4 장 머쉬룸으로 가는 지름길 제 5 장 발각된 계획 제 6 장 올드 포레스트 제 7 장 톰 봄바딜의 집 제 8 장 배로우 다운즈의 안개 제 9 장 달리는 조랑말 제 10 장 스트라이더 제 11 장 어둠 속의 검 제 12 장 브뤼넨 여울로의 탈출 제 13 장 많은 만남 제 14 장 엘론드의 회의 제 15 장 반지는 남쪽으로 제 16 장 어둠 속의 여행 제 17 장 카잣 둠의 다리 제 18 장 로스로리엔 제 19 장 갈라드리엘의 거울 제 20 장 로리엔이여 안녕 제 21 장 안두인대하 제 22 장 깨진 우정 프롤로그 호비트족(族) 이 이야기를 끌어갈 주요인물들은 그 이름조차 낯선 호비트족이다. '호비트(Hobit)'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웨스트마치(Westmarch)의 레드 북(Red Book)을 보면 그들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찾을 수 있지만, 아직 그 이야기를 읽지 못한 독자들은 호비트라는 이름을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듣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프롤로그를 죽 읽어가다 보면 그들의 특징과 역사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비트'는 세계 역사에 최초로 이름을 드날린 호비트, 빌보가 직접 저술한 레드 북의 앞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그곳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와(There and Back Again)'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빌보가 예고없이 들이닥친 난쟁이 무리와 저 유명한 마법사 갠달프를 따라나선 후에 겪는 갖가지 모함들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지금부터 전개될 이 이야기를 읽게 되면서부터 여러분들은 빌보의 모험여행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나는 격동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 호비트족은 우리 인간들(그들은 인간을 '큰 사람들'이라 부른다)과 맞닥뜨리면서 우선 피하기부터 하기 때문에 요즘 들어선 그들을 만나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중간계(中間界)의 다른 종족들과 별 교류 없이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며 살아 왔다. 그 당시 중간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난 종족들이 할거하고 있었기에 자기네들끼리만 조용히 지내 온 이 왜소한 체구의 종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빌보와 그의 양자(養子)인 프로도 대에 이르러 이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호비트족은 실제로 난쟁이족보다 더 작은 체구를 가진 종족이지만 얼핏 보아서는 난쟁이족보다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좀 작달막하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그들의 신장은 우리 인간들이 쓰는 자로 환산하면 육십 센티미터에서 백이십 센티미터 정도로 편차가 심한 편이고, 평균신장은 구십 센티미터 안팎이다. 그들은 천성이 낙천적이고, 밝은 빛깔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노란색 같은 화사한 빛깔의 천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 반면에 머리칼과 비슷한 곱슬곱슬한 갈색털이 수북이 뒤덮인 발의 바닥은 질긴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그들에게 신발이란 전혀 쓸모있는 물건이 아니다. 덕분에 그들이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별 불편이 없을 기술이 있다면 그건 제화기술이었다. 그러나 길쭉하고 솜씨있게 생긴 손가락으로는 요긴하게 실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썼다. 그들은 대체로 선량한 인상이다.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는 영민함이 깃들여 있고, 혈색 좋은 그 얼굴엔 항상 은은한 미소가 감돈다. 그들은 낙천적인 성격대로 먹고 마시길 즐긴다. 그래서 맘껏 먹고 마시며 악의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일은 그들의 일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여건만 허락되면 하루에 여섯 끼나 식사를 즐기는 대단한 식도락들이다. 또한 이들 사이엔 조촐한 파티를 열어 여럿이 둘러앉아 담소를 즐기기도 하고 각자 성심껏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는 풍속이 널리 퍼져 있다. 요즘에는 우리 인간들도 그들 호비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지만, 오래 전엔 그들이 인간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추측들이 있다. 비록 자기네들 방식으로 고쳐 쓰긴 했지만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차용해 썼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고, 그들의 기호와 우리 인간들의 기호가 흡사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고증학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호비트족과 인간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호비트 역사는 이제는 까마득히 잊혀져 버린 제1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직 요정들만이 전설처럼 묻혀 버린 그 시대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대부분 그들 자신에 관한 기록들뿐이다. 그 기록에는 간혹 인간에 관한 기록이 끼여 있기는 하나 호비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전혀 없다. 파란의 시대에 기록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온 이 호비트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 사건은 앞서 말한대로 우리 어리숙한 빌보씨가 모험여행 도중 이상한 반지 하나를 손에 넣게 된 사건에서 출발한다. 빌보가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자기 토굴 안에서 한가하게 소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집 앞에 마법사 회색의 갠달프와 열세 난쟁이들이 불쑥 들이닥쳤다. 그 난쟁이들은 왕족인 도린 오큰쉴드와 망명 중인 열두 명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빌보에게, 난쟁이왕들이 멀리 동부의 데일 지방 에레보 산 속에 숨겨 놓았다는 보물을 찾으러 함께 떠나자고 부추긴다. 호비트답게 원체 소심했던 빌보가 대담하게도 도린 오큰쉴드와 그 일행을 따라나선 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때가 바로 샤이어력 1341년(제3시대 2941년)의 일이었다. 원정은 성공하여 마침내 보물을 지키고 있던 용을 처치했다. 그러나 마지막 대결전에서 승리를 얻기까지는 도린의 전사와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난전(難戰)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행은 윌더랜드를 향하여 안개산맥의 험준한 고갯길을 지나던 중에 오르크의 급습을 받았다. 그 와중에 빌보는 일행과 갈라져 산속 깊숙이 숨어 있는 오르크 동굴에 홀로 갇히게 된다. 거기서 빌보는 출구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반지 하나를 얻게 된다. 그는 그것을 무심코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 반지를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는 물건으로 생각했었다. 빌보는 깜깜한 굴속을 여기저기 더듬어 내려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굴의 막장에는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차가운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 가운데에 있는 바위섬에는 몹시 역겹게 생긴 괴물 골룸이 살고 있었다. 그는 크고 평평한 발을 노삼아 작은 보트를 저어가다가 희미한 빛을 뿜는 두 눈에 눈먼 고기가 보이면 긴 손가락으로 잡아 날것으로 먹어치우곤 했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싸우지 않고 쉽게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 흉칙한 오르크를 잡아먹기도 했다. 골룸은 오래 전에 밝은 세상에 있을 때 손에 넣은 물건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을 낀 자의 형체를 보이지 않게 해주는 신비한 반지였다. 그는 그 반지를 끼고 장난을 치다가 사랑하는 친척들의 미움을 사 고향에서 내쫓겼다. 그것은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는 자기 손에 그것을 끼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것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르크를 사냥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반지를 자기만 아는 섬 안의 구멍 속에 감춰 두었다. 그가 빌보를 처음 만났을 때 반지를 끼고 있었다면 그는 금방 빌보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보는 손에 요정의 검(스팅)을 쥐고 있었고 골룸은 반지를 동굴 속에 놔두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골룸은 시간을 벌 요량으로 빌보에게 수수께끼를 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자기가 내는 수수께끼를 빌보가 알아맞히지 못하면 빌보를 잡아먹되, 빌보가 이기면 빌보의 소원대로 동굴의 통로를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잔뜩 다급한 처지에 빠진 빌보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번갈아 주고받았다. 결국 빌보가 이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재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자기 차례가 되어서도 질문할 수수께끼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빌보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아까 동굴에서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고 잊어버렸던 반지가 손에 잡히자 아무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다 궁여지책으로 '내 주머니에 있는 게 뭐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골룸은 세 번의 기회를 더 요구했지만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사실 엄격한 게임의 룰에 따르자면 빌보가 낸 문제가 수수께끼인지 질문인지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골룸이 그 문제를 받아들여 대답을 하려고 시도한 이상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빌보는 그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그 비열한 괴물이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순간 그를 초조하게 했다. 약속이란 원래 신성한 것인 법, 옛날부터 사악한 인간을 제외해 놓고는 어느 누구도 감히 약속을 어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홀로 칩거해 온 골룸의 마음속엔 사악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는 몰래 빠져나와 섬으로 돌아갔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틀림없이 그곳엔 반지가 있을 것이었다. 속도 출출하고 조금은 약도 오른 그는 '보물'을 자기 손에만 끼면 만사가 원하는 대로 풀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섬에는 반지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빌보로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골룸이 지르는 비명소리는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골룸은 이미 너무 늦긴 했지만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놈 주머니에 있는 것이 뭐지?' 그는 소리쳤다. 어서 돌아가서 그 호비트를 붙잡아 '보물'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허둥대는 골룸의 두 눈에선 푸른 불꽃이 튀었다. 빌보가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간파하고 서둘러 달아나려고 한 순간 또 한번 행운이 그를 찾아와 주었다. 달아나기 직전에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려는 순간 절묘하게도 그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슬그머니 끼워졌던 것이다. 그러자 어찌된 일인지 골룸은 빌보를 지나쳐서 앞으로 내달릴 뿐이었다. 빌보는 조심스럽게 그를 뒤따라가다가 골룸이 욕을 해대면서 보물 어쩌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제서야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어둠 속에 갇혀 막막해진 빌보에게 희망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놀라운 반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빌보는 오르크와 골룸에게서 도망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출구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골룸은 거기서 웅크리고 앉아 쿵쿵거리며 빌보를 찾기 시작했다. 빌보는 단칼에 그 괴물을 베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연민의 감정이 그의 행동을 자제시켰다. 어쨌든 자기는 그 반지 덕택에 목숨만은 건졌으니 그것을 또다시 이용해서 궁지에 몰린 그 불쌍한 괴물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는 쪼그리고 있는 골룸을 뛰어넘어 통로 아래쪽으로 달아났다. 등뒤로 증오와 절망이 뒤섞인 골룸의 고함소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이 도둑놈! 배긴스! 죽을 때까지 네놈에게 저주를 퍼부을 테다!"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것은 빌보가 처음에 자기 일행에게 밝힌 이야기는 이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그간의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골룸이 먼저, 내기에서 자기가 지면 선물을 하나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기에서 진 골룸이 그것을 가지러 섬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주려던 선물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골룸은 자기가 주려던 물건이 아주 오래 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마법의 반지라고 했다. 빌보는 자기가 주운 반지가 골룸이 찾던 물건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가 게임에서 이겼으니 이제 그 반지의 소유자는 당연히 자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그는 골룸에게 반지에 대해 설명해줄 경황도 없이 선물을 못 주겠다면 대신 출구라도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빌보는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심지어 엘론드의 회의 이후에도 그것을 수정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점에 레드 북 원전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몇 권의 사본과 발췌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본에는 진실이 밝혀져 있다. 이는 분명히 프로도나 샘와이즈가 기록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둘 다 그 늙은 호비트의 기록을 일점일획도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진실을 알고는 있었던 것이다. 갠달프는 처음부터 빌보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그 반지에 대해서 계속 의심을 품었다. 결국 그는 몇 번이나 추궁한 끝에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들 사이의 우정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빌보에게 진실을 다 듣고난 마법사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우려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착하고 어리숙한 빌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데에 의심을 품었다. 이상하게도 빌보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자 빌보의 그런 태도에서 더욱더 풀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었다. '선물'이라는 변명은 단순히 호비트들이 선물을 주고받기를 좋아한다는 일상적 습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고백했듯이 빌보는 골룸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엿듣고 힌트를 얻었던 것이다. 사실 골룸은 수차례 반지를 일컬어 '생일선물'이라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는 그 후 한참 뒤에까지도 반지에 대한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었다. 빌보가 반지를 발견하고난 이후의 이야기를 여기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반지 덕택에 오르크 동굴에서 무사히 탈출해서 자기를 찾고 있던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그 후의 여행길에서도 반지의 힘을 빌어 곤경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갠달프와 프로도에게만 반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그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빌보는 그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반지의 존재를 알 수 없으리라 믿었다. 빌보는 난쟁이들과의 모험여행에 가지고 떠났던 검 스팅을 벽난로 위 벽에 장식해 놓았다. 용을 처치하고 빼앗은 진귀한 물건들 중에서 난쟁이들이 그의 몫으로 선물한 저 유명한 갑옷은 박물관, 미켈 델빙의 매돔하우스에 보냈다. 그리고 낡은 외투와 모자는 옷장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리고 반지는 근사한 줄에 꿰서 호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녔다. 그가 샤이어에 돌아온 때는 그의 나이 쉰둘이 되던 해 6월 22일이었다. 그로부터 그가 백열한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기까지 샤이어에서는 예전과 같이 평화로운 시간들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본론은 이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제1장 오랫동안 기다려온 생일잔치 빌보 배긴스가 백열한번째 생일날 특별히 성대한 파티를 연다는 소문이 떠돌자 별 소동 없이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이 갑자기 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이 술렁댔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으레 빌보의 생일잔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빌보의 생일잔치 소식은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파티 직전의 야릇하게 들뜬 기분을 느끼게 했다. 빌보는 마을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자였다. 때문에 호비튼에서 그는 여러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마을을 떠났다가 또 어느 날 떠날 때처럼 홀연히 호비튼에 나타났다. 빌보의 그런 수상쩍은 행동은 그가 호비튼에 돌아온 이후 육십 년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가 마을에 돌아오면서 귀한 물건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는 세간의 추측은 이제 이 지역에서는 하나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먼 옛날을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 엔드의 뒷산에는 보물을 감춰 둔 굴이 여기저기 뚫려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허황된 소문은 남의 말이라도 믿지 않는 이들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원기왕성한 빌보의 체력에는 혀를 내둘렀다. 달이 바뀌고 해가 가도 빌보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정정했다. 그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쉰 살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그가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정정하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무 변화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정도로 도무지 나이들어 가는 것 같질 않았다. 개중에는 그런 비정상적인 젊음은 아무래도 축하할 일이 아닌 성싶다고 염려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이는 혼자서 그렇게 많은 재산과 영원한 젊음을 동시에 누리는 것은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값을 치러야 할 거요. 이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에요. 무슨 일이 생기고 말 것 같아요." 그러나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보는 돈 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사람들에게 섭섭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래서 대개는 그의 유별난 행동이나 넘치는 행운을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가 일가친척(물론 새크빌 배긴스 집안은 제외해 놓고)들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찾아다녔기 때문에 가난한 호비트 집안에서는 그를 잘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인심을 잃지 않고 처신을 잘하는 빌보에게는 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할 친구가 없었다. 그래도 그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가 바로 먼 조카인 프로도였다. 그는 나이 아흔아홉이 되던 해에 프로도를 양자로 입적시키고 백 엔드에서 함께 살았다. 빌보의 이러한 조치로 그와 가장 가까운 촌수인 새크빌 배긴스 집안에서는 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빌보와 프로도는 우연히도 생일이 똑같이 9월 22일이었다. 어느 날, 빌보가 프로도에게 물었다. "얘 프로도, 여기서 나랑 같이 사는 게 어떠니? 그러면 생일 쇠기도 편하지 않겠니?" 그 당시 프로도는 아직, 호비트 관습으로는 서른세 살부터 시작되는 성년기와 유년기 사이의, 철없을 이십대였다. 십이 년이 더 흘렀다. 해마다 백 엔드에서는 빌보와 프로도의 합동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벌였다. 빌보의 백열한번째 생일이자 프로도가 이제 막 성년이 시작되는 서른세번째 생일인 올 가을 잔치는 이전과 다를 거라는 추측은 호비튼 주민이라면 누구든지 해볼 만한 것이었다. 생일이 점점 다가오자 사람들은 마치 자기집 잔치라도 다가오는 양 들썩했다. 빌보 배긴스의 내력과 인품이 다시 세간의 말도마에 오르기 시작했고, 추억이란 으레 아름답게 포장되듯이 노인들조차 지난날의 얘기 보따리를 풀게 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몹시 흥분했다. 가장 사람들의 넋을 빼놓을 만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은 이는 흔히 개퍼라고 부르는 햄 갬기 노인이었다. 그는 바이워터 노변에 있는 작은 객줏집 담쟁이가지에서 자기 흥에 겨운 채 옛일을 들려주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십 년 동안 백 엔드의 정원사로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 일을 하던 홀만 노인을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빌보에 대해서라면 믿을 만한 소식통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그도 늙고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정원사일은 그의 막내아들인 샘 갬기가 맡아 하고 있었다. 그들 부자는 빌보나 프로도와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백 엔드 바로 밑에 있는 백쇼트가 3번지의 언덕집에 살았다. "전에도 늘 말했지만 빌보씨는 대단히 훌륭하고 점잖은 신사지." 개퍼라면 전혀 의심없이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했다. 왜냐하면 빌보는 채소의 성장과정이나 다른 하찮은 문제를 놓고도 허물없이 그의 조언을 구해서 그가 우쭐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개퍼는 그 방면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권위자였다. 바이워터의 울드 노크스가 물었다. "근데 같이 살고 있는 프로도란 젊은이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배긴스 집안이진 한데 브랜디버크 쪽 피가 반쯤 섞였다면서? 배긴스네는 뭐하러 버크랜드에서 며느리를 데려왔는지 이유를 모리겠다어. 거긴 이상한 사람들뿐이라던데." 개퍼의 바로 이웃에 사는 대디 투풋이 끼어들었다. "사실 그렇긴 해요. 그치들은 브랜디와인 강 너머 올드 포레스트 숲 바로 앞에 살고 있잖아요! 듣자니까 그 동네는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곳이라던데요." 개퍼가 말했다. "그래, 대디. 자네 말도 맞기는 하네. 하나 브랜디버크 집안은 올드 포레스트 숲 속에 들어가 살고 있지는 않다네. 여하튼 겉으로 봐서는 이상한 친구들이지. 큰 강에서 바보처럼 배를 타고 놀기만 한다더구먼. 어이없는 사람들이지. 사고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라니깐. 근데 그건 그렇다 치고 자네도 만나 보고 싶어하는 프로도는 아주 멋진 젊은이라네. 빌보씨와 다를 바 없어. 우선 생김새부터가 그렇고말고. 아버지 쪽이 배긴스 집안인데 어련하겠는가? 드로고 배긴스도 아주 점잖은 호비트였지. 물에 빠져 죽기 전까지는 그이도 어디 흠잡을 데 있는 호비트였는가?" "물에 빠져 죽었어요?" 이구동성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물론 이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의 집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하는 호비트들인지라 그 이야기를 다시 해야 했다. "음... 소문은 그렇게 났지. 잘 알겠지만 드로고는 프리뮬라 브랜디버크양과 결혼했네. 프리뮬라는 우리 빌보씨와 외가 쪽으로 사촌간이었지. 프리뮬라 어머니가 울드 투크의 막내딸이니까. 드로고는 우리 빌보씨와 육촌간이니까 따지고 보면 프로도는 빌보씨의 외조카도 되고 친조카도 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드로고는 결혼 후에도 종종 브랜디 홀에서 장인인 고르바독씨와 함께 지내곤 했지.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특히 즐기는 한량이었지만 고드바독씨는 그런 사위를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더군. 그러던 어느 날, 드로고는 자기 아내랑 브랜디와인 강에 배를 타러 나갔다가 부부가 함께 빠져 죽고 어린 프로도만 불쌍하게 남게 된 거야." 울드 노크스가 끼어들었다. "저녁을 먹고 달빛이 떠오를 때쯤 물에 들어갔다 그 변을 당했다면서? 드로고가 너무 무거워서 말이야." 그때 방앗간지기 샌디맨이 끼어들었다. "내가 듣기엔 여자가 남자를 미는 통에 남자가 여자한테 매달렸다던데요?" 평소에 그를 마뜩찮아 하던 개퍼는 대뜸 면박을 주었다. "샌디맨, 자네는 소문을 그대로 다 믿나? 밀었으니 당겼느니 왈가왈부할 필요 없어. 배라는 것은 으레 흔들리게 마련이고 두 사람은 아름다운 달빛에 넋을 잃고 있어서 위험이 닥쳐오는 것도 몰랐던 걸세. 여하튼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프로도는 그 이상한 버크랜드 사람들 틈에 끼여 브랜디 홀에서 살게 되었지. 언제나 이백 명이 넘는 일가붙이들이 북적대는 영락없는 토끼굴 같은 집에서 말이야. 우리 빌보씨가 프로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그 토끼굴에서 빼내와 우리같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지. 한데 내 생각에는 그것이 새크빌 배긴스한테는 대단한 충격이 되었던 것 같네. 그들은 빌보씨가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백 엔드를 차지할 욕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거든. 그런데 빌보씨가 버젓이 살아 돌아와서 그들은 쫓아내고, 게다가 이제는 돌아가시기는커녕 점점 더 젊어지신단 말야. 그런 데다가 갑자기 양자를 들여서 호족까지 깨끗이 정리해 놓으셨으니 이제 새크빌 배긴스네 녀석들이 백 엔드를 구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지." 웨스트파링의 미켈 델빙에서 온 낯선 방문객이 물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그 집안엔 상당한 돈을 숨겨 놓았다던데요? 언덕 꼭대기까지 금, 은, 보석 상자들이 가득한 터널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개퍼 노인이 대답했다. "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빌보씨는 쩨쩨한 분이 아니죠. 그분은 항상 부족한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터널이라니 금시초문인데요. 내가 어렸을 때, 벌써 육십 년 전의 일이지만 빌보씨가 돌아오시던 날 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는 내가 우리 당숙 홀만 아저씨의 심부름을 해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경매 중에 아무도 함부로 정원을 밟고 다니지 못하게끔 지키고 있었어요. 그때 빌보씨가 큰 짐꾸러미 몇 개와 상자 두 개가 실린 조랑말을 끌고 언덕을 올라오셨지요. 그 짐꾸러미와 상자엔 여행 중에 얻은 보물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금으로 된 상에 갔다오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터널을 가득 채울 만큼 많지는 않았어요. 내 아들 샘이 그건 더 잘 알지도 모르지요. 그 녀석은 백 엔드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으니까. 옛날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라서 빌보씨와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을 것이오. 그분은 우리 아이에게 글자도 가르치셨답니다. 제발 아무 탈도 없으면 좋으련만. 요정, 용이라니! 가끔씩 그애를 타이르곤 하지요. 너나 나한테는 양배추와 감자가 더 어울린다. 높은 어른들 하는 일에 함부로 말려들지 마라. 잘못하면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하고 말이죠. 이런 충고는 내 아들놈뿐 아니라 딴 호비트들한테도 하긴 하지만." 그는 방앗간지기와 손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별 설득력이 없었다. 빌보의 재산에 대한 미신이 젊은 호비트들의 가슴 속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앗간지기는 마치 여론을 대변하듯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그 후로도 재산이 점점 더 늘어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분은 이따금 집을 비우시잖아요. 게다가 찾아오는 손님들 좀 봐요. 밤에는 난쟁이들이 찾아오지요. 그 늙은 마법사도 가끔 나타나지요. 노인장이 뭐라고 하시든 간에 백 엔드는 수상쩍은 집임에 틀림없어요. 거기 사는 이들은 더 속을 모르겠고요." "샌디맨, 자네는 아까 배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더니만 도대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넘겨짚는 것이 장기구먼." 개퍼 노인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드러내 놓고 비아냥거렸다. "만약 그 정도가 이상하다면 우리 동네는 좀더 이상해져도 아무 탈이 없을 걸세. 온 집안을 금으로 분탕질한 집에 살면서도 이웃이 찾아와도 맥주 한 잔 내놓지 않는 구두쇠들이 흔한 세상에, 백 엔드는 절대 그렇지 않잖은가! 우리 아들놈 얘기로는 이번 파티에는 누구나 초대받는다더구먼. 더 솔깃한 이야기는 선물까지 있다는 거야. 누구에게든지, 바로 이 달에 말일세." 그 달은 바로 9월이었다. 날씨도 유난히 좋았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 후에는 잔치 중에 불꽃놀이도 선보일 거라는9아마도 정통한 소식통인 샘에게서 나온 것 같은) 소문이 나돌았다. 더욱이 이번 불꽃놀이는 샤이어에서는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성대한 규모여서 올드 투크가 죽은 이후의 불꽃놀이 중에서 가장 최고일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날이 점점 임박해 왔다. 어느 날 저녁, 진기한 물건을 잔뜩 실은 이상하게 생긴 마차가 호비튼에 굴러들어와 백 엔드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호비튼들은 문틈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고는 입을 벌렸다. 뜨내기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마차를 몰고 있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난쟁이들이었다. 9월 둘째 주 어느 날 환한 대낮부터 짐마차 한 대가 브랜디와인 다리 쪽에서 나타나더니 바이워터를 지나왔다. 어떤 노인이 혼자서 마차를 몰고 있었다. 그는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파란색 모자를 쓰고 기다란 회색 외투에 은빛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턱 밑으로는 흰 수염을 늠름하게 휘날리고 있었으며, 눈썹은 모자 밖으로 비집고 나올 만큼 두툼했다. 꼬마 호비트들은 마차 꽁무니를 졸졸 따라 호비튼을 지나 언덕 위까지 쫓아갔다. 그들이 짐작한 대로 폭죽을 실은 마차였다. 노인은 빌보의 집 안에서 짐을 부리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거대한 폭죽상자에는 각각 붉은색의 대문자 G와 요정들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갠달프의 마크였고 그 노인이 바로 마법사 갠달프였다. 샤이어에서 그의 명성은 주로 불과 연기와 빛을 다루는 솜씨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실제 그가 중간계에서 맡은 임무는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샤이어의 호비트들은 그것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다만 파티 여흥 중의 한 순서를 빛나게 해주는 인물일 뿐이었다. 꼬마 호비트들은 탄성을 질러 댔다. "G는 위대하다(Grand)는 뜻이야." 꼬마들이 소리치자 노인은 싱긋 웃었다. 갠달프는 호비튼에 아주 가끔 나타났고, 나타날 때도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나 나이 많은 어른들도 그의 불꽃놀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전설적인 옛이야기였을 뿐이었다. 노인은 몇몇 난쟁이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다 부려 놓자, 빌보는 꼬마들에게 동전 몇 푼을 나눠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돈보다도 딱총 같은 장난감을 더 갖고 싶어했다. 갠달프가 말했다. "자, 이제 집에 가서들 놀아라. 다음엔 더 많이 주마." 그가 빌보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닫히고 아이들은 문 밖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쩐지 아이들은 소문도 떠들썩한 그 잔칫날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풀이 잔뜩 죽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백 엔드 안에서는 빌보와 갠달프가 서쪽으로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이 달린 작은 방에 마주앉아 있었다. 느긋한 저녁시간은 쾌청하고 평화로웠다. 빨갛고 노란 꽃들이 화려한 광채를 뿜어 내고 있었고 금붕어꽃, 해바라기, 금련화 들이 잔디 덮인 담을 기어올라 둥근 유리창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자네 집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구먼 그래."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나도 이 정원을 무척 사라하죠. 이 유서깊은 샤이어의 모든 것들까지도요. 하지만 이젠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계획을 실천에 옮길 생각인가?" "그래야겠지요. 이미 몇 달 전에 결심했답니다. 아직 결심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그래, 잘 생각했네. 이제 말은 더 이상 소용이 없으니 계획을 밀고 나가게. 자네의 계획을 모두 실행에 옮기게. 자네를 위해서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나 최선의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네." "저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목요일엔 예정대로 잔치를 벌일 생각입니다. 몇 마디 농담도 덧붙여서요." "글쎄, 웃어 줄 사람이 있을까?" 갠달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두고봐야겠지요." 다음날, 전날보다 더 많은 마차가 언덕 위로 굴러 올라갔다. '외지에서만 물건을 사온다'는 불평이 생길 법도 했다. 그러나 그 주가 시작되자 호비튼이나 바이워터, 그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이나 물건, 사치품 등 여라 가지 주문이 백 엔드에서 쏟아졌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고 호비트들도 달력에서 날짜를 하루하루 지워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우체부만 나타나면 초대장을 기대하며 마음을 졸였다. 이윽고 초대장이 배달이 시작되었다. 호비튼 우체국은 업무가 마비되고 바이워터 우체국도 초대장 사태로 자원봉사자를 따로 모집할 정도였다. 그리고 뒤이어 '감사합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와 같은 내용의 공손한 문구가 담긴 회신이 언덕으로 줄을 이었다. 백 엔드 정문에 표지판이 나붙었다. '파티 용무 외 출입금지.' 백 엔드는 실제로 파티 준비에 용무가 있는, 아니면 있는 척 슬쩍 들어가 보려던 이들 때문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빌보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초대장을 쓰고 답장을 확인하고, 선물을 꾸리고, 또 혼자서 준비해야 할 몇 가지 일들로 분주했다. 빌보는 갠달프가 도착한 이후로는 일꾼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침 호비트들은 빌보의 집 현관 앞쪽의 너른 들판에 천막을 치기 위한 장대와 밧줄이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로로 이어지는 둑에는 특별출입문이 만들어지고 넓은 계단과 커다란 흰 대문이 세워졌다. 그 들판에 인접해 있는 백쇼트가의 세 호비트 집안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갬기 노인은 정원에서 일하는 체하던 것마저 그만두어 버렸다. 천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틀별히 큰 천막 하나가 주빈석 앞 한쪽 끝에 웅장하게 세워졌다. 그 천막은 들판에 있던 나무 한 그루를 완전히 감싸 버릴 정도로 거대했다. 호비트들이 보기에 더 근사한 것은 들판 북쪽 끝에 세워진 거대한 야외취사장이었다. 인근 수마일 이내에 있는 여관과 음식점의 요리사들이 출장을 나와, 이미 백 엔드의 일손을 와 있던 난쟁이들과 타지방에서 불러온 일꾼들을 돕기 위해 속속 도착했다. 잔치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파티 전날인 수요일 밤엔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버렸다. 모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목요일인 9월 22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구름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휘날리는 깃발과 함께 잔치가 시작되었다. 이번 잔치엔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근방에 사는 이들은 거의 모두 초대되었다. 착오가 생겨 초대장을 받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빠짐없이 파티장에 나타났으므로 문제될 게 없었다. 샤이어의 다른 지역에 사는 호비트들도 대부분 초대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샤이어 외곽의 손님들도 간혹 있었다. 빌보는 새로 세운 흰 대문 앞에서 직접 손님을 맞아들였다. 그는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선물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떤 이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다시 앞문으로 들어와 선물을 더 받기도 했다. 호비트족은 생일날 손님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풍습이 있었다. 대개는 자기 분수에 맞춰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에 그리 값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것은 모두 꽤 값비싼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풍습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호비튼과 바이워터에서는 연중 어느 날이나 누군가의 생일이기 때문에 이곳에 살고 있는 호비트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 꼴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은 또 늘상 있는 그 풍습에 싫증을 내지도 않았다. 오늘의 선물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호비트 꼬마들은 너무 좋아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쁜 요술장난감들도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동쪽 산골짜기에 사는 난쟁이들에게 일 년 전부터 주문해 둔 것들이었다. 모든 손님들이 환영을 받으며 문 안으로 들어서자 노래와 춤과 음악과 놀이가 시작되고 음식과 술이 따라나왔다. 공식적으로는 점심, 간식, 저녁, 세 번의 식사가 제공될 거라고 했다. 점심과 간식은 다만 모든 손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식사를 같이 한다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열한시부터 폭죽이 시작되는 여섯시 반까지 줄곧 먹고 마셨다. 불꽃놀이는 갠달프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그가 손수 싣고 왔을 뿐만 아니라 손수 고안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집접 나서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갠달프의 솜씨는 과연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고운 목소리로 지저귀는 새의 형상을 본뜬 폭죽이 마치 새가 날 듯 가볍게 빛을 뿜어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밑동이 검은 연기로 휩싸인 녹색 나뭇잎들은 갑자기 새봄을 맞은 듯 싱그럽게 펼쳐졌고 빛나는 나뭇가지들은 놀란 호비트들 위로 환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쳐다보느라 하늘을 향해 목을 빼고 있는 호비트들의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감미로운 향내를 풍기며 사라졌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분수처럼 들어갔다 나오는 나비 형상의 폭죽도 퍽 이채롭게 펼쳐졌고 갖가지 빛깔의 불꽃 기둥이 느닷없이 독수리가 되기도 하고 돛단배나 나는 백조의 방진을 이루기도 했다. 빨간 뇌우가 샛노란 소나기를 퍼붓기도 했고 수많은 은빛 창들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전투중의 군대처럼 와아 함성을 지르고는 사라졌다. 빌보의 생일날을 마무리하는 불꽃놀이는 갠달프의 의도대로 호비트들을 완전히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불이 꺼지고 그 자리엔 거대한 연기기둥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본 웅장한 산 같았다. 그 검은 연기기둥 맨 꼭대기에는 초록빛과 진홍빛으로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는 주황색 용이 한 마리 날아올랐다. 크기도 실물만큼 클뿐더러 진짜 살아 있는 용처럼 꿈틀댔다. 입에서는 화염을 내뿜고 두 눈을 이글거리던 용은 쉭쉭거리며 호비트들의 머리 위를 지나다녔다. 그들은 모두 겁에 질려 고개를 수그렸고 아예 뒤꽁지를 들고 땅바닥에 코를 박은 이도 있었다. 용은 특급열차처럼 그들 위로 지나가다가 갑자기 한 번 공중을 선회하고는 귀가 멍멍할 정도의 파열음을 내며 바이워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자, 모두들 진정하세요. 저건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신호일 뿐입니다." 빌보가 사람들을 향해 외치자 엎드려서 와들와들 떨고 있던 호비트들은 벌떡 일어났다. 모두를 위해 풍성한 식사가 준비되어다. 물론 여기서 모두라 하는 것은 가족들만의 특별한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을 제외한 것이다. 그 특별한 파티는 나무를 뒤덮어 버린 커다란 천막 안에서 열렸다.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 백사십사 명이었다(호비트들 말로는 한 그로스라고 하는 숫자인데 인간들은 잘 쓰지 않는다). 손님들은 갠달프같이 특별한 친분으로 참석한 이들 외에는 모두 빌보와 프로도의 친척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어린 호비트들은 많이 있었는데 모두 부모의 허락을 얻어 두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자식들이 밤늦도록 돌아다녀도 비교적 관대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식사를 공짜로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린 호비트들을 키우는 데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초대객들은 대개 배긴스, 보핀, 투크, 브랜디버크 손님들로 이루어졌다. 빌보 배긴스의 할머니 쪽 친척으로는 그러브가에서 왔고 투크 할아버지 친척으로는 처브가의 호비트들이 왔다. 그 외에도 버로우즈, 볼저, 브레스거들, 브록하우스, 굳보디, 혼블로우어, 프라우드푸트가에서도 참석했다. 이들 중에는 빌보의 먼 친척도 있었고, 샤이어 오지에 살고 있어서 호비튼에 처음 오는 이도 있었다. 새크빌 배긴스가에서는 오도와 로벨리아가 왔다. 그들은 빌보를 싫어했고 프로도는 그보다 더 싫어했으나 금박을 입힌 초대장의 위력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촌인 빌보는 몇 년에 걸쳐 이 파티를 준비했고 또 그의 손님접대는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참석한 백사십사 명의 손님들은 모두 즐거운 잔치를 고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집 주인의 (빠질 수 없는 식순인) 식후연설을 염려하고 있었다. 빌보는 시라고 하는 짧은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한두 잔 들어가면 그 옛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과연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음식상은 매우 훌륭했다. 양이나 질이나 가짓수나, 여러모로 세심하게 신경을 쓴 진수성찬이었다. 파티가 진행된 다음 몇 주 동안, 이 지역에서는 양식을 사들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근의 가게나 창고의 재고 식량은 빌보의 잔치 준비팀이 이미 다 비워 버렸기 때문에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들 표현대로 하면 '구석구석까지 꽉 채웠기' 때문에 느긋하고 편안하게 들어 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좋아하는 음료수를 홀짝거리거나 맛있는 음식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면서 걱정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고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빌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조용, 조용, 조용!" 여기저기서 조용히 하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실상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싶지 않은 눈치들이었다. 빌보는 자기 자리를 떠나 불빛이 환한 나무 밑 의자에 올라섰다. 랜턴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비단 조끼 위에서는 금단추가 번쩍거렸다. 그들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들어올려 흔들어 대는 빌보를 올려다보았다. "친애하는 베긴스, 보핀 형제 여러분, 그리고 처브, 버로우즈, 혼블로우어, 볼저, 블이스거들, 굳보디, 브록하우스, 프라우드피트..." "프라우드푸트예요!" 천막 뒤쪽에 있던 한 호비트가 소리쳤다. 그는 물론 프라우드푸트가의 호비트였다. 그는 '자랑스런 발' 이라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발이 넓적하고 특히 털이 텁수룩했다. 그는 그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빌보는 계속했다. "프라우드푸트, 그리고 여기 백 엔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싶은 새크빌 배긴스 형제 여러분! 오늘은 저의 백열한번째 생일입니다. 오늘 백열한 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세, 만세, 해피 버스데이 투 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테이블을 꽝꽝 내리쳤다. 빌보는 멋지게 해내고 있었다. 짧고 분명한 것, 호비트들은 그런 것을 좋아했다. "여러분들 모두 저처럼 장수하시길 빕니다." 천지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 예(혹은 아니오) 하는 고함소리. 트럼펫, 호른, 나팔, 피리 등의 악기소리들. 당기면 폭음이 나는 수백 개의 악기들이 일시에 소리를 냈다. 그것들에는 대부분 데일이라는 마크가 찍혀 있었다. 호비트들에게 어울리는 악기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훌륭한 악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 속에는 작지만 완벽하게 만들어진, 매혹적인 음색을 내는 악기들이 들어 있었다. 한구석에는 투크와 브랜디버크 집안의 어린 꼬마들이 빌보 아저씨가 연설을 끝낸 줄 알고(필요한 내용은 거의 다 끝났으니까) 막 즉석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흥겨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에베라드 투크군과 메릴로트 브랜디버크양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아름답고 경쾌한 춤인 스프링글링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빌보의 연솔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옆에 있는 아이에게서 나팔을 빼앗아 뚜우 뚜우 뚜우 하고 세 번 크게 불었다. 곧 소란이 가라앉았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소리쳤다. 좌중에선 다시 환호성. "저는 중요한 일로 여러분 모두를 모신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무엇이 담겨 있는 듯했다. 천막 안에는 침묵에 가까운 고요가 흘렀고 몇몇 호비트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세 가지 목적으로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첫째는 제가 여러분 모두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으며, 백십일 년이란 세월은 여러 훌륭하시고 존경할 만한 호비트들과 함께 살아가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동감이라는 뜻의 열렬한 환호성. "저는 여러분에 대해서 제가 알고 싶어했던 것의 반도 알지 못했고 여러분이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의 반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조금은 어려웠다. 간간이 박수가 터져 나왔으나 그것도 대개는 계속 이야기를 끌고 가서 역시 칭찬으로 이어지는가를 알아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곳이었다. "둘째는 저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다시 박수. "아마도 우리의 생일이라고 해야겠지요. 아시다시피 오늘은 여기 있는 저의 조카이며 양자인 프로도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로 성년이 되어서 상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몇몇 노인들은 마지못해 박수를 쳤고 젊은이들은, "프로도, 프로도, 멋쟁이 친구 프로도!" 하고 소리쳤다. 새크빌 배긴스네 호비트들은 얼굴을 찡그린 채로 '상속을 받는다'는 말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둘의 나이를 합하면 144가 됩니다. 이 특별한 숫자를 맞추기 위해 여러분은 초대된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 그로스가 되는 셈이죠." 좌중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많은 손님들, 특히 새크빌 배긴스네 식구들은 마치 자기네가 상자 속에 물건 채워넣듯이 숫자 맞추려고 초대 받았다는 사실이 심한 모욕을 느꼈다. "한 그로스라고? 과연 웃기는 이야기로구먼." "오늘은 또 옛날이야기를 조금만 하자면, 롱 레이크의 에스가로스에 제가 도착한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는 그날이 생일이라는 것도 몰랐었지요. 그때 나이가 쉰하나였으니 생일 같은 것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는 때도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제가 감기에 걸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도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젠 정확하게 그 인사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저의 누추한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이제 곧 노래나 시가 장황하게 늘어지겠지 걱정을 하며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만 멈추고 건배 한잔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빌보는 노래도 부르지 않았고 시도 읊조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한 가지 선언을 하려 합니다." 그가 이 말을 너무 큰 소리로 불쑥 했기 때문에 앉아 있던 모든 호비트들은 바짝 긴장하여 몸을 바로 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러분과 함께 지내기에는 백십일 년이란 세월은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유감스럽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저는 떠납니다. 이제 떠납니다. 안녕!" 그는 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불꽃이 휘황찬란해서 손님들은 모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빌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백사십사 명의 호비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도 프라우드푸트 노인은 테이블에서 발을 내려놓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깊이 내쉬는 숨소리가 들리고 이내 술렁대기 시작했다. 모두들 장난치고는 너무 고약하다고 떠들어 댔다. 그들의 충격과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음식과 술이 더 있어야 했다. "그 양반 미쳤어. 내가 그러지 않던가?"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심지어 투크가에서도(몇몇만 빼놓고) 빌보의 행동을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만 해도 그가 사라진 것을 터무니없는 장난 정도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로리 브랜디버크 노인만은 생각이 달랐다. 나이도 지긋하고 오늘은 음식도 많이 먹었지만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여전했다. 그는 며느리인 에스메랄다에게 소곤거렸다. "얘야, 어딘가 수상쩍은 데가 있는 것 같구나! 아마 그 엉뚱한 배긴스가 다시 멀리 떠나 버린 모양이다.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걱정할 것도 없지. 저기 저렇게 먹을 것은 다 남겨 두고 갔으니까." 그는 프로도를 큰 소리로 불러 포도주를 더 가져오게 했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빌보의 텅 빈 자리 옆에 말없이 앉아서 손님들의 질문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는 아미 모든 내막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손님들이 놀라고 화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한편으론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현듯 자기가 그 늙은 호비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먹고 마시면서 오늘의 장난을 비롯해 빌보의 이상한 행동을 화제삼아 떠들고 있었고, 새크빌 배긴스네 일행은 이미 화를 내고 떠나가 버렸다. 프로도는 더 이상 파티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꾼들에게 술을 더 내놓으라고 지시하고 일어나 천막을 빠져 나왔다. 빌보 배긴스는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있는 황금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몰래 간직해 오고 있던 마법의 반지였다. 그가 층계를 내려오면서 반지를 손에 끼자마자 호비튼 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 그는 잠시 멈춰서서 천막 안에서 일어난 소동과 들판 저쪽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연회복으로 입었던 수놓은 비단조끼를 벗어서 박엽지에 잘 싸서 치워 두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옛날 모험여행을 떠날 때 입었던 낡은 옷을 걸치고는, 허리에 해진 가죽 혁대를 두르고 낡아빠진 검은 가죽 칼집에 든 단도를 그 위에 매달았다. 그 다음에는 곰팡내나는 서랍에서 옛날에 입던 외투와 모자를 꺼냈다. 그는 그것들을 마치 보물인 양 소중히 보관했으나 이제는 다 해지고 햇빛에 바래서 원래의 진록색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여하튼 그에게는 그 옷이 너무 커 보였다. 그 차림으로 그는 서재로 들어가서 크고 튼튼한 상자에서 낡은 천에 쌓인 꾸러미와 가죽장정의 필사원고와 커다란 봉투를 꺼냈다. 그는 이미 다른 물건들로 배가 불룩한 그 가방에 책과 꾸러미를 쑤셔넣었다. 봉투 속에는 반지와 그것을 꿰고 있던 멋진 줄을 같이 넣고 봉함을 한 뒤 프로도 앞으로 남겨 두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벽난로 위에 놓았다가 갑자기 자기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갠달프가 황급히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금방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법사는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다시 보게 돼서 반갑구먼. 마지막으로 몇 마디 할 이야기가 있네. 파티는 자네 계획대로 잘 끝난 것 같은데, 어떤가?" "그런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불꽃놀이가 압권이었습니다. 다른 것들로 물론이지만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더군요. 특별히 새로 고안하신 거죠?" "그런 셈이지. 자넨 그 반지의 비밀을 오랫동안 잘 숨겨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손님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래서 깜짝 놀랄 만한 불꽃놀이를 하나 넣은 거지." 빌보는 빙긋이 웃었다. "그 때문에 내 계획도 망쳐놓으시고요. 나이 드셨으면 이제 곱게 앉아 게실 일이지. 하지만 나보다 사려가 깊으실 테니까요." "대개는 그렇지. 하지만 이번 일에는 어째 자신이 없네.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는데 말이야. 자네는 그 장난으로 모든 친척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또 불쾌하게 만든 셈이지. 앞으로 아흐레, 아니 아흔아흐레 동안 샤이어는 그 이야기로 날이 새고 해가 질 걸세. 어디 멀리 갈 계획인가?" "그렇습니다.. 휴식을 취해야겠어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매우 긴 휴식 말입니다. 어쩌면 영원한 휴식일지도 모르지요. 다시 돌아오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그리고 주변 정리도 다 끝냈습니다. 갠달프, 나는 늙었어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확실하게 느낍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셈이지요. 아니, 기억력이 없어 쓰러질 지경이라는 표현이 더 낫겠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버터 한 조각을 너무 오래 울궈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쩔 수가 없어요. 무슨 변화가 있어야겠어요." 갠달프는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쩔 수가 없겠지. 하지만 자네 계획이 결국은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고 믿네." 그는 사려깊게 말했다. "여하튼 이미 결정은 내렸습니다. 다시 산을 보고 싶어요. 갠달프, 산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어딘가 쉴 만한 데를 찾아야지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기웃거리는 친척도 없고 계속 벨을 눌러 대는 손님도 없는 곳이 좋겠어요. 그리고 거기서 집필을 끝낼 생각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미 멋진 것을 생각해 두었지요. '그리고 그는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갠달프는 껄걸 웃었다. "나도 그러기를 바라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끝나든 간에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앞으로는 읽을 겁니다. 프로도는 이미 집필된 데까지는 다 읽었답니다. 프로도를 잘 돌봐 주시는 거죠?" "물론이지, 틈나는 대로,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살피겠네." "내가 가자고 하면 물론 따라나설 겁니다. 사실 오늘 파티 시작하기 전에는 그 애도 가겠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아직 진심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 거친 세계, 산을 보려고 떠나는 건데 프로도는 아직 샤이어를, 이 숲과 들판과 작은 강들을 사랑하고 있어요. 여기서 편하게 지낼 겁니다. 물론 몇 가지 빼놓고는 모두 프로도에게 남기고 떠날 작정입니다.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지면 그 애도 곧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스스로 주인이 될 때가 되었죠." 갠달프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모두라고 했는가? 반지는?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우린 약조를 하지 않았나?" "예, 아... 예, 그랬었지요." 빌보는 말을 더듬었다. "어디 뒀나?" 빌보는 짜증을 냈다. "봉투에 넣어 두었습니다. 저기 벽난로 위에요. 아니, 내 주머니 속에 있습니다." 그는 주저주저하였다. "거 참 이상하네.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지?" 빌보는 열없게 혼자 중얼거렸다. 갠달프는 다시 빌보를 향해 두 눈을 똑바로 치떴다. 그의 두 눈에 희미한 섬광이 번득였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빌보, 내 생각에는 그것을 여기 두고 가는 것이 좋겠네. 그러고 싶지 않은가?" "글쎄요... 이제 알겠어요. 반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당신은 왜 또 재촉하는 거죠?" 빌보의 어조에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의혹과 분노로 날카로워졌다. "항상 내 반지를 가지고 나를 못살게 괴롭히시는군요. 지난번 여행에서 가지고 온 다른 것은 전혀 문제삼지 않으시면서." "그런 셈이지.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내가 원했던 것은 진실이야. 그건 중요한 문제였어. 마법의 반지들은, 음, 마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희귀하고 또 호기심을 자극하네. 자네도 말했듯이 나는 그 반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자네가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선다니 나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네. 게다가 자네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그 반지를 가지고 있었어. 내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빌보 자네는 이제 더는 그것이 필요없을 걸세." 빌보는 낯색을 붉혔다. 두 눈에는 분노의 빛이 번득였다. 사람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내 물건 가지고 무얼 하든 간에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그 반지는 내것입니다. 내가 발견했어요. 내게 들어온 것이라니까요."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모두 당신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내겁니다. 내 소유물, 내 보물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내 보물입니다." 마법사도 정색을 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 스치는 한 줄기 빛이 그가 내심으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가 말했다. "옛날에도 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 자네는 아니지만."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비록 전에 골룸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이젠 그의 것이 아니고 내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못박아 두지만 이건 내가 보관하겠어요." 갠달프는 일어서서 엄하게 말했다. "빌보, 그렇게 한다면 자넨 바보가 될 걸세. 자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네. 반지의 힘이 이제는 자네를 압도할 지경이 된 거야. 반지를 내버리게. 그렇게 훌훌 털고 떠나면 자네는 자유를 얻을 수 있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 빌보는 고집을 부렸다. "자, 자, 내 친구 빌보!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자넨 내게 빚도 있지 않은가. 자! 약속한 대로 하게. 반지를 포기하게." 빌보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흥! 내 반지가 탐이 난다면 솔직히 그렇게 말씀하세요.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내 보물을 내놓지 않겠어요." 그의 손이 옆구리에 있는 단도의 손잡이께에 가 멈췄다. 그러자 갠달프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이제 내가 화를 낼 차례가 되었군. 계속 그렇게 고집을 피운다면 할 수 없지. 그러면 회색의 갠달프, 그 진면모를 한번 보게." 그는 호비트에게 바짝 다가섰다. 갑자기 갠달프는 무시무시한 거인처럼 보였고, 그의 그림자가 좁은 방 안을 꽉 채웠다. 빌보는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벽 쪽으로 물러섰다. 그들이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방 안의 공기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갠달프의 시선이 호비트의 얼굴에 날카롭게 꽂혔다. 빌보는 천천히 움켜쥔 주먹을 풀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갠달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잖아요. 왜 그러시죠? 반지는 내거라구요. 내가 발견했어요. 그것이 없었으면 골룸한테 죽었을 겁니다.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도둑이 아니에요." "자네가 도둑이라는 게 아니야. 나도 물론 아니고. 자네한테서 그걸 뺏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넬 도와 주려는 것일세. 예전처럼 나를 믿어 주었으면 좋겠네." 그가 몸을 돌리자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의 몸은 다시 줄어들어 세파에 시달려 구부정한 회색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빌보는 두 손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죄송합니다. 참 기분이 이상하군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겠군요. 최근에는 반지 때문에 마음고생이 참 심했답니다. 때로는 반지가 나를 지켜보는 눈동자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요. 늘 그것을 끼고 사라지고 싶은 유혹도 받았고요. 이해하시겠어요? 가끔은 안전하게 있나 궁금해서 꺼내어 확인해 보기도 했지요. 그 반지를 어디에 넣고 잠가 버리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그것도 없으면 도대체 마음이 놓이질 않았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나를 믿게. 이젠 완전히 결정된 걸세. 반지를 여기 두고 떠나게. 내버리게. 프로도에게 그 반지를 주게. 그러면 내가 돌봐 줌세." 빌보는 잠시 긴장한 채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윽고 한숨을 쉬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 파티를 그렇게 성대하게 연 것도 다 그 때문이지요. 선물을 많이 나눠 주면 반지 내놓는 것도 쉬워질 줄 알았어요. 결국 아무 효과도 없었지만요. 하지만 그 모든 준비가 물거품이 되지 않게끔 이제라도 떠나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파티장에서의 장난조 우습게 돼버리겠어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좋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반지는 프로도에게 주겠습니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젠 정말 떠나야겠군요. 그렇지 않으면 누구를 만날지 모르겠어요. 작별인사를 두 번 하는 것만큼 지겨운 일은 없지요." 그는 가방을 들고 문간으로 향했다. "자넨 아직 주머니에 반지를 가지고 있네." 마법사가 노기띤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그렇군요. 유언장과 다른 서류들도 같이 가지고 갈 뻔했군요. 당신이 가지고 있다가 내 대신 전해 주세요." "아니, 나한테 주지 말고 벽난로 위에 얹어 두게. 프로도가 오기 전까지는 그곳이 안전할 테니까. 내가 그를 기다리겠네." 빌보는 봉투를 꺼냈다. 시계 옆에 그것을 놓으려는 순간 그는 손을 뒤로 움찔했다. 그 바람에 꾸러미가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빌보가 그것을 줍기도 전에 마법사가 먼저 집어서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분노의 경련이 재빨리 호비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안도의 표정과 웃음으로 바뀌었다. "자, 그럼 끝났군요. 이제 떠납니다." 그들은 현관으로 나왔다. 빌보는 벽걸이에서 자신이 애용하는 지팡이를 꺼내 들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세 명의 난쟁이들이 바삐 일하고 있던 방에서 뛰어나왔다. 빌보가 물었다. "준비는 모두 다 끝났소? 짐을 싸고 꼬리표를 붙이는 일 말이오." "예." 그들은 대답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그는 현관문을 나섰다. 밤 공기는 상쾌했고 검은 하늘 여기저기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시 길을 떠나다니! 난쟁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다니! 이건 내가 오랫동안, 오랜 세월 동안 꿈꾸어 왔던 것이지. 안녕!" 그는 고향집 대문을 향해 허리를 굽혀 작별인사를 했다. "갠달프, 몸 건강하세요." "빌보, 잘 가게.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몸조심하게! 자넨 지혜로워진 만큼 늙기도 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조심하세요. 난 괜찮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아재 홀가분해졌답니다. 큰일을 끝낸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젠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군요. 발길을 돌릴 때가 되었어요." 그는 인사를 끝내고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오. 문을 나서면 내리막길 길은 저 멀리 아득히 이어졌는데 이제 나는 힘닿는 데까지 걸어가야 하리. 팍팍한 두 다리를 끌고, 큰길이 보일 때까지 많은 사람들과 길을 만날 때까지 그 다음엔 어디로? 난 모른다오. 그는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애써 참는 듯한 깊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들판과 천막을 뒤로 하고 세 난쟁이들과 함께 정원을 돌아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비탈길 끝에는 낮은 울타리가 있었다. 그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숲길로 접어들어서는 풀잎들 위로 일렁이는 바람처럼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갠달프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잘 가게,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곧 프로도가 들어왔다. 그는 갠달프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떠나셨나요?" "그렇다네, 결국 떠났지." "오늘 저년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것이 장난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떠나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진지한 이야기도 항상 농담처럼 하셨거든요. 좀더 일찍 왔으면 떠나시는 모습을 뵐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생각에 자네 아저씨는 정말로 조용히 떠나기를 원했던 것 같네. 너무 심려하지 말게. 지금쯤은 아주 마음이 편한 상태일 게야. 자네한테 뭘 남긴 것이 있네." 프로도는 벽난로 위에서 봉투를 내려 흘끗 보기만 할 뿐 뜯어 보지는 않았다. "자네 빌보가 남겨 놓은 유언장이나 다른 문서들을 발견하게 될 걸세. 이제부터 백 엔드의 주인은 자네야. 게다가 그 반지도 자네가 맡아 줘야 할 것 같네." "반지요? 그것도 남기고 가셨어요? 참 알 수 없군요. 아직 쓸모가 있을 텐데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내가 자네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겠네. 그러나 잘 보관하게. 안전하게 지켜야 해. 난 이제 그만 눈 좀 붙여야겠어." 프로도는 이제 자기가 백 엔드의 주인이 되어 빌보 대신 손님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벌써 들판 곳곳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지만 프로도는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라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한밤중쯤 손님들을 모시고 갈 마차들이 도착했다. 배는 가득 채웠으니 불만이 남은 호비트들을 싣고 마차들은 차례로 떠나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원사들이 늑장을 부리다 뒤처진 나머지 손님들을 인력거에 싣고 사라졌다. 그 밤은 서서히 걷히고 다시 날이 밝았다. 호비트들은 늦잠을 잤다. 아침나절이 되자 다시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시키는 대로)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손님들이 잃어버리고 간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나서 (일부러 부르지도 않은) 다른 호비트들이 나타났다. 배긴스와 보핀, 볼저, 투크 집안 손님들과 근처에 살거나 아직 떠나지 않은 손님들이었다. 해가 중천에 걸릴 때쯤 되자 어제 배가 터지도록 먹은 이들도 다시 나타나 백 엔드는 어제처럼 여전히 북적댔다. 초대한 일은 없으나 그렇다고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프로도는 계단 위에서 손님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썼으나 그 얼굴엔 피곤하고 근심스런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모든 방문객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였으나 어제 저년 일에 대해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빌보 배긴스씨는 떠났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영원히 떠났습니다." 프로도는 그들 중에서 빌보가 특별히 '메시지'를 남긴 이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집 안에는 크고 작은 꾸러미와 짐짝 그리고 작은 가구들이 쌓여 있었다. 각각에는 다음과 같은 꼬리표들이 붙어 있었다. '친애하는 아델라드 투크에게, 빌보가.' 우산이었다. 아델라드는 꼬리표가 붙지 않은 다른 짐꾸러미도 여러 개 더 가져갔다. '우라의 오랜 우정을 기억하며, 도라 배긴스에게, 사랑하는 빌보가.' 커다란 휴지통이었다. 도라는 드로고의 누이이며, 빌보와 프로도의 친척들 중에서 여자로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아흔아홉 살로 오십 년 이상이나 빌보에게 좋은 충고를 많이 해주었다. '밀로 버로우즈에게, 요긴하게 쓰기를 바라며, 빌보 배긴스가.' 금촉으로 된 펜과 잉크병이었다. 밀로는 편지 답장을 써본 적이 없었다. '안젤리카를 위하여, 빌보 삼촌이,' 둥근 볼록거울이었다. 배긴스가의 처녀인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미모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후고 브레이스거들의 장서를 위하여, 기증자로부터.' (텅 빈) 책장이었다. 후고는 책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로벨리아 새크빌 배긴스에게 주는 선물.' 은제 스푼 세트였다. 빌보는 자기가 첫번째 여행으로 집을 비웠을 때 그녀가 자기 스푼을 훔쳐간 것을 알고 있었다. 로벨리아도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날 늦게 백 엔드에 도착한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낯뜨거운 기색 없이 그 스푼을 넙죽 받아갔다. 이것은 모아 놓은 선물들 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다. 빌보의 집은 그가 오랫동안 살면서 쌓아 온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로 어수선했다. 호비트들의 토굴집은 대체로 너저분한 편이었다. 그것은 선물을 자주 주고받는 그들의 풍습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선물들이 항상 새것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돌고돌아 이제는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를 골동품이 한두 가지씩 있곤 했다. 그러나 빌보는 대개 새 물건을 선물로 주고 자기가 받은 것은 잘 보관해 두었다 선물을 다 나눠 주자 이제 그 토굴집도 조금은 깨끗해진 것 같았다. 갖가지 선물들에는 모두 빌보가 직접 써서 붙인 꼬리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일부는 부탁이나 농담이 적혀 있기도 했다. 선물들은 대부분 그것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빌보의 선물은 가난한 호비트들, 특히 백쇼트가의 주민들에게 가장 큰 보탬이 되었다. 갬기 영감은 감자 두 자루, 삽 새것 하나, 모직조끼, 관절염 연고 한 곽 등을 선사받았다. 로리 브랜디버크 노인에게는 두터운 후의에 대한 보답으로 올드위냐드 열두 병이 선물로 주어졌다. 빌보의 부친이 담근 사우스파딩산의 덕한 포도주는 이제 농익을 대로 숙성해져서 맛이 뛰어났다. 로리는 빌보를 완전히 용서하게 되었고 첫병을 따서 마셔 본 후로는 그를 최고의 친구로 추어올렸다. 프로도 앞으로 남은 것도 많았다. 물론 책이나 그림, 가구 등속을 비롯한 많은 물건들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돈이나 보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남겨 놓지 않았다. 동전 한 푼, 유리구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오후는 매우 지겨운 날이었다. 모든 가구와 물건을 공짜로 나눠 준다는 엉터리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서 집 안은 순식간에 아무 용건도 없는 사람들로 북새통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돌려 보낼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꼬리표가 떨어져 서로 섞이고 급기야는 싸움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마루에서 물건을 바꾸거나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또 일부는 자기들 이름이 붙지 않은 물건이나 필요없어 보인다거나 지키는 사람이 없는 작은 물건들을 슬쩍하기도 했다. 백 엔드 앞길은 마차와 손수레로 막혀 버렸다. 그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통에 새크빌 배긴스 집안이 도착했다. 프로도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친구인 메리 브랜디버크에게 물건을 잘 지키라고 부탁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도가 큰 소리로 프로도를 만나기를 요구했고, 메리는 공손하게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지금 쉬고 계세요." 로벨리아가 말했다. "숨겠다는 수작이지. 어쨌든 프로도를 만나러 왔으니 가서 빨리 나오라고 해." 메리는 그들을 오랫동안 마루에 세워 두었고 그들은 그 틈에 자기들 몫의 이별 선물인 스푼 세트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고 마침내 메리는 그들을 서재로 데리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도는 많은 서류들을 앞에 둔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여하튼 그는 새크빌 배긴스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 만지작거리며 일어서더니 매 우 공손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새크빌 배긴스 일행은 계속 불퉁거렸다. 그들은 꼬리표가 없는 여러 가지 값비싼 물건들에 대해 (친구 사이니까) 헐값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빌보가 지정한 것만 줄 수 있다고 프로도가 대답하자 그들은 이번 일은 수상쩍은 데다 많다고 우겼다. 오도가 말했다. "딱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지. 자네가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야. 유언장을 꼭 봐야겠어." 프로도가 입양되지 않았으면 오도가 상속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는 유언장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매우 분명했다(무엇보다도 호비트들의 관습에 따라 붉은 잉크로 일곱 명의 증인 서명이 있었다). 그는 자기 부인을 향해 외쳤다. "제기랄. 또 당했어. 육십 년이나 기다렸는데 이까짓 스푼이라고? 빌어먹을!" 그는 프로도의 코 앞에 삿대질을 해대고는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로벨리아는 그렇게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얼마후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프로도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에도 로벨리아는 여전히 모퉁이 구석구석을 뒤져 보거나 마룻바닥을 두드려 보면서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프로도는 한사코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로벨리아를 억지로 집 밖으로 내보냈다. 물론 어느새 그녀의 우산 속에는 몇 가지 작은 (그러나 꽤 값진) 물건들이 들어간 후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마지막 한마디를 속시원하게 퍼부어 줄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층계를 내려가면서 겨우 찾아낸 말이란 이 정도였다. "이 애송이 녀석! 후회하게 될 거다! 왜 너도 같이 가버리지 않았어! 넌 이 집안하고는 상관이 없잖아! 넌 배긴스가 아니야. 브랜디버크라고!" "메리, 저 말 들었어?" 그녀의 등뒤로 문을 닫으며 프로도가 말하자 메리 브랜디버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칭찬인 셈이죠. 물론 진심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집 안을 살피다가 창고들 중 하나에서 구멍을 내고 있던 젊은 호비트 셋(둘은 보핀 집안 호비트였고 하나는 볼저였다)을 쫓아냈다. 프로도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산초 프라우드푸트(오도 프라우드푸트 영감의 손자)가 커다란 식품저장실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바탕 드잡이를 벌여야 했다. 빌보의 황금에 대한 소문이 호비트들에게 호기심과 희망을 부추겨 놓은 것이었다. 모두들 전설적인 황금은(분명히 부당이익은 아니겠지만 획득한 경위가 수상쩍으므로) 방해만 없다면 찾는 이가 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초를 쫓아낸 후 프로도는 마루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메리, 현관문을 닫을 시간이군. 문을 잠그게. 오늘은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마. 공석무기로 공격을 하더라도 말이야." 그는 피로를 풀기 위해 차를 가지러 갔다.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현관문 쪽에서 들릴 듯 말듯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로벨리아가 틀림없어. 이제서야 진짜 후련한 저주가 생각나서 되돌아온 모양이야 가만히 있어 보자." 노크소리는 점차 크게 들려왔지만 그는 못 들은 체하고 계속 차만 마셨다. 그러자 갑자기 마법사의 머리가 창문에 쓱 나타났다. "프로도, 문을 안 열어 주겠다면 이창문을 저 산 속에 처박아 버리겠네!" "아! 갠달프! 잠깐만요." 프로도는 현관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전 로벨리아인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용서해 주지. 내가 오는 길에 보니까 그 여잔 바이워터 쪽으로 조랑말을 타고 가던데. 몰골이 꼭 귀신 같더구먼." "저도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빌보의 반지를 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말이에요. 없어지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그러자 갠달프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안 되네. 프로도. 그 반지를 조심하게! 사실 내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은 한편으로 그 대문이기도 하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자넨 그 반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지?" "빌보 아저씨께 들은 것뿐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떻게 발견했고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것 말이에요. 물론 그 여행 중에 말이죠." "무슨 얘긴가 궁금하군." "난쟁이들에게 이야기하거나 책에 쓴 것이 아니랍니다. 제가 여기 온 후에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당신께 털어놓기 전까지는 당신께도 시달렸다시면서 저도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프로도, 우리 사이엔 무슨 비밀이 있을 필요가 없지. 그렇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퍼져서는 안 된다. 그건 어쨌든 내 물건이니까' 하고 말입니다." "재미있군. 자넨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혹시 '선물' 이라고 꾸며 댄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나중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이야기를 바꿀 필요도 없고요. 어쨌든 아저씨답지 않은 일이었어요. 약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내 생각도 그렇다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귀중한 물건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겐,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반지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사라지게 하는 힘말고도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무슨 말씀이지 모르겠어요." "나도 사실은 모른다네. 난 그 반지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뿐이야. 특히 어젯밤부터 말이야.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자네가 내 충고를 따를 생각이라면, 그건 될 수 있는 대로, 아니 절대로 사용하지 말게. 적어도 그로 인해 어떤 이야기나 소문이 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전하게, 몰래 간직해 두게!" "참 이상하시군요. 뭘 두려워하시는 거지요?" "나도 자신이 없어.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할 수는 없지. 다음에 와서는 뭔가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 나는 곧 떠나야 해. 이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는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지금요? 전 한 일주일쯤 머무실 줄 알았는데요. 도와 주실 일도 있을 텐데."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몰라.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지. 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확실히 모르지만 소리없이 돌아올 거야. 요즘은 내 인기도 예전만 못한 것 같네. 내가 평화를 깨뜨리는 말썽꾼이란 소문도 들리거든. 게다가 빌보를 사라지게 한 것도 사실은 갠달프라는 소문도 있고, 자네와 내가 작당을 해서 그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도 있지." "오도와 로벨리아 말씀이시군요! 구역질나는 것들! 빌보 아저씨를 따라 산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놈들한테 백 엔드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겠어요. 저도 샤이어를 사랑하지만 어쩐지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아저시를 다시 만나 뵙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동감이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 예감이 떠오른다네. 이제 잘 있게! 몸조심하고! 자네가 예상치 못할 때에 돌아올 걸세. 잘 있게!" 프로도는 문간에서 그를 배웅했다. 갠달프는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그러나 프로도는 그 늙은 마법사가 등에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땅거미가 밀려오며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프로도는 그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제2장 과거의 그림자 아흐레가 지나고 또 아흔아흐레가 지났어도 소문은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빌보 배긴스의 두번째 실종사건은 일 년이 넘게 호비튼은 물론 샤이어 방방곡곡의 화젯거리였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풍문으로 떠돌았다. 어린 호비트들에게는 난롯가의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결국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불꽃을 흩날리며 사라졌다가 보물과 함께 되돌아왔다는 미치광이 배긴스 이야기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당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이 모두 잊혀진 뒤에도 사람들의 입에는 여전히 오르내렸다. 한편 이웃들의 전반적인 여론은 항상 머리가 약간 돈 호비트였던 빌보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 버려 푸른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어느 연못이나 강에 떨어져서, 결코 늦었다고는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리라는 것이었다. 비난은 주로 갠달프에게 쏟아졌다. "만일 그 고약한 마법사가 프로도를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그도 마음을 잡고 제대로 호비트다운 호비트가 될 텐데." 이것은 그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마법사는 나타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프로도도 마음을 잡은 듯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 주는 행동은 마을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큼 호비트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빌보의 성격을 닮은 듯 그 역시 괴팍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상복을 입지 않았을뿐더러 이듬해에는 빌보의 백열두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를 예전만 못했고 초대받은 손님도 스무 명뿐이었다. 또한 호비트식 표현으로 음식이 눈처럼 쏟아지고 술이 비처럼 내리붓는 식사도 겨우 몇 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프로도는 모두 익숙해질 때까지 해마다 빌보의 생일잔치를 열었다. 그는 빌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호비트들이 '그렇다면 어디에 있느냐?' 고 물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그는 빌보처럼 혼자 살았다. 그러나 친구는 많은 편이었다. 특히 (대개 울드 투크의 후손들이면서) 어린 시절에 빌보를 좋아해 백 엔드를 들락날락했던 젊은 호비트들과 친하게 지냈다. 폴코 보핀과 프레데가 볼저가 그런 친구들이었으며,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대개 피핀이라 부르는) 페레그린 투크와, (메리아독이 본명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주지 않는) 메리 브랜디버크였다. 프로도는 그들과 함께 샤이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가하게 지냈다. 그러나 혼자 다니는 때가 더 많았으며 놀랍게도 집을 멀리 떠나 별빛 가득한 언덕과 숲속을 헤매는 모습도 가끔 눈에 띄었다. 메리와 피핀은 그가 빌보처럼 가끔 요정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비트들은 프로도 역시 훌륭한 호비트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음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보기에 그는 이십대를 막 벗어난 호비트 청년처럼 건장하고 탄력있는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웃들은 '복을 한꺼번에 타고나는 이들도 있어!' 하며 그를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호비트들이 프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대개는 보다 근실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오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프로도 자신을 첫 충격 이후, 스스로 주인이 되고 백 엔드의 배긴스씨가 되는 것도 별 무리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년 동안 그는 아주 행복하였으며 미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기도 모르게, 빌보와 함께 떠났어야만 했다는 후회가 조금씩 싹터 오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혼자서, 특히 가을이 되면 거친 산과 들을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상한 산의 환상이 그의 꿈속에서 나타났다. '아마 언젠가는 나도 저 강을 건너가게 되겠지' 하고 혼자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한산 '아직은 안 돼!' 하는 경계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의 사십대도 끝이 나고 오십회 생일이 가까워졌다. 50이란 숫자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혹은 불길한) 숫자처럼 느껴졌다. 빌보가 갑작스런 모험을 떠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나이 때였다. 프로도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가슴 속을 뒤흔들었다. 지도를 보며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되었다. 샤이어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는 국경 너머로는 오로지 흰 여백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종종 들판 너머까지, 그것도 혼자서 방황하는 것을 즐기곤 했다. 메리와 다른 친구들은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때때로 당시부터 샤이어에 나타나기 시작한 낯선 방랑자들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바깥세상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풍문이 무성했다. 갠달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기에 프로도는 수집이 가능한 뉴스는 모두 모으려 했다. 샤이어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요정들이 저녁 무렵마다 숲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쪽으로 간 요정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중간계의 혼란에 골머리를 앓으며 중간계를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들은 그보다 더 자주 노상에 나타났다. 난쟁이들은 청색산맥에 있는 자신들의 광산에 갈 때면 항상 샤이어를 통과해 서쪽 회색항구에서 끝이 나는 고대의 동서대로를 이용하곤 했다. 호비트들은 먼 나라 소식을 듣고 싶을 때면 주로 그들에게 의존해 왔었다. 난쟁이들은 대개 그리 말이 많지 않았으며 호비트들도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그러나 프로도는 먼 나라로부터 서쪽으로 피난처를 찾아가는 이상한 난쟁이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은 근심에 가득 차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낮은 소리로 적과 모르도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호비트들은 까마득한 옛날의 전설을 통해 모르도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으나 여하튼 불길하고 기분나쁜 느낌을 주었다. 신성회의에 의해 추방되었던 머크우드의 사악한 무리들이 모르도르의 옛 요새에 더 큰 세력을 형성해 다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암흑의 탑이 다시 세워졌다는 말이 들렸다. 그곳을 중심으로 그들은 먼 곳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며 동부와 남부 지방 끝에서는 공포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었고 전쟁이 벌어진 곳도 있었다. 산 속에서는 오르크들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고 그 멍청하던 트롤의 무리도 다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사악한 무리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 이름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평범한 호비트들의 귀에까지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소문에 어둡고 집에만 붙어 있는 이들도 이상한 소문들을 하나둘 듣기 시작했으며 사업차 변경까지 가본 이들은 괴이한 광경들을 보기도 했다. 프로도가 쉰 살 되던 해 봄, 어느 날 저녁 바이워터의 청룡정에서 있었던 대화는 이제 그 소문들이, 비록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아직 웃어 넘기고 있었지만, 이미 샤이어의 평화로운 삶 중심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샘 갬기가 난롯가 한구석에 앉아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방앗간집 아들인 테드 샌디맨이 있었고 다른 여러 명의 농부 호비트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즘엔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들려." 샘이 먼저 말문을 열자 테드가 받았다. "아, 듣는 사람만 듣지. 난 집에 가면 옛날얘기나 동화만 듣는데?" "그렇겠지. 그런데 그 중에는 꽤 그럴 듯한 이야기들도 있단 말이야. 도대체 누가 만들어 낸 걸까? 요즘 세상에 용이 다 나오다니 말이야!" "난 못 믿겠어. 어릴 땐 그런 이야기도 믿었지만 이제 누가 그런걸 믿어? 바이워터엔 용이라곤 하나밖에 없어. 뭔지 알아? 바로 이 청룡정의 청룡뿐이야." 이 소리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샘도 같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좋아. 그렇지만 그 숲속사람들, 거인들은 어떻게 된 거야? 들리는 얘기론 북부 황야에는 그리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보다 더 큰 거인들이 산다던데?" "누가 그래?" "우리 사촌 홀이 그런 얘길 했지. 그는 오버 힐에서 보핀씨네 일을 거들어 주는데 사냥을 하러 노스파딩까지 갔다가 그런 거인을 봤다는 거야." "기걸 어떻게 믿어? 홀은 항상 봤다고 하지만 허깨비를 본 건지 어떻게 알아?" "그렇지만 이번에 본 거인은 느릅나무보다 더 크고 한 걸음에 칠 미터나 가더래." "칠 센티가 맞겠지. 그가 본 건 십중팔구 거인이 아니라 느릅나무야." "아까도 말했잖아. 걸어다니더래. 게다가 북부 황야엔 원래 느릅나무도 없잖아." "그러면 홀이 잘못 본 거지 뭐." 테드의 말에 모두 좋아라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테드의 판정승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홀패스트말고도 샤이어를 지나가는 이상한 무리들을 분 이들이 많이 있어. 분명히 지나갔대. 변경에서 돌아온 이들도 많지만 변경 너머 사람들도 이전보다 훨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요정들이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마 들었겠지. 백색탑을 지나 회색항구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어." 샘은 자신없이 한쪽 팔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누구도 바다가 샤이어 서쪽 너머 그 탑을 지나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옛날부터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건너, 우릴 남겨 두고 서부로 떠난다네." 샘은 가락을 붙여 슬프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테드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 옛날이야기라면 새로울 것도 없지. 그 이야기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어. 건너가거나 말거나.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은 자네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샤이어에서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글쎄, 확인할 수야 없지." 샘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는 언젠가 숲 속에서 요정 하나를 보았다고 믿고 있었으며 또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들었던 많은 전설들 중 호비트들이 알고 있던 요정들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나 이젠 반쯤 잊혀진 이야기들이 그에게는 항상 깊은 감동을 주었었다. "샤이어에도 요정들과 알고 지내고 소식도 주고받는 이들이 가끔은 있잖아. 우리 주인 배긴스씨도 그 중 한 분이란 말이야. 그분은 내게 요정들이 배를 타고 떠난다고 말씀하셨지. 또 요정들에 관해 약간은 알고 계신다고도 말이야. 빌보씨는 아는 것이 많았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오, 그 집 양반들은 둘 다 정신이 나갔어.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빌보씨는 예전에 미쳤고 프로도는 지금 미쳐가는 중일 뿐이야. 그 양반들하고 같이 있으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자, 친구들, 이젠 집에 가 봐야지. 건배!" 테드는 자기 잔을 비우고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샘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생각할 것이 많았다. 우선 백 엔드의 정원에 할 일이 많아 내일은 날이 개면 꽤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잡초는 너무 빨리 자란다. 그러나 샘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정원이 아닌 다른 생각들이었다. 그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4월 초순의 하늘은 비가 쏟아진 후 다시 맑아지고 있었다. 해가 지자 시원해진 저녁공기는 조용히 밤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저녁 별들 아래서 생각에 잠겨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며 호비튼을 지나 언덕을 올라 집으로 갔다. 갠달프가 오랜만에 다시 나타난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는 그 유명한 파티 후 삼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 다음 나타나서도 프로도를 잠깐 방문해 정성껏 보살펴 준 뒤 다시 사라졌었다. 그 이후 한두 해는 꽤 자주 나타났었는데, 해가 지면 갑자기 들이닥쳤다가는 해뜨기 전에 소리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없었고 오로지 프로도의 건강이나 하는 일에 대해 사소한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방문이 끊어졌다. 프로도가 그를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지도 이미 구 년이 넘었다. 그는 마법사가 이제 호비트들에게 관심이 없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어둠이 깔리고 샘이 집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서재 창문에 한때 귀에 익었던 노크소리가 들렸다. 프로도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마음으로 옛 친구를 맞아들였다. "잘되어 가는가? 프로도, 자넨 여전하군." "당신도 그렇군요." 프로도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갠달프가 예전보다 더 늙고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갠달프에게 바깥세상의 동정에 관해 물었다. 그들은 곧 이야기에 빠져들어 밤 늦게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 늦게 식사를 마친 후 마법사는 서재 창문을 열고 그 옆에 프로도와 마주앉았다. 난로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바깥의 햇볕도 따스했으며 남쪽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만물은 신선해 보였으며 온 들판과 나뭇가지 끝에는 싱싱한 초록의 봄이 아른아른 빛나고 있었다. 갠달프는 빌보가 손수건 한 장 없이 백 엔드를 떠났던, 거의 팔십년 전의 어느 해 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그때보다 더 백발이 성성했고 수염과 눈썹은 더 텁수룩해졌으며 얼굴은 지혜와 근심으로 더 깊이 골이 파인 듯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그때와 다름없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으며 그때처럼 즐겁고 힘차게 담배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 수도 있었다. 프로도가 깊은 생각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도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햇살이 밝게 비치는 좋은 아침이었건만 프로도는 갠달프가 가져온 소식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마침내 프로도가 침묵을 깼다. "갠달프, 지난밤 제게 반지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멈추셨지요. 그런 얘기는 밝은 낮에 해야 한다면서요. 이제 그 뒷얘기를 마저 해주시지요. 반지가 제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얘기 말입니다. 왜 그렇지요?" 갠달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그건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반지야. 그 반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그 반지에 완전히 압도당하게 되어 있네. 반지가 사람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지. 아주 먼 옛날 에레기온에서는 우리가 마법의 반지라고 부르는 요정의 반지들이 많이 만들어 졌지. 물론 그것들 중엔 온 세상을 뒤흔들 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있었고 그보다는 좀 못한 것도 있었지.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반지들은 기술이 세련되어지기 전에 시험삼아 만든 것들이라고 요정들이 보기엔 하찮은 것들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들조차 인간들에겐 위험하다고 여겨져. 그러니 위대한 반지들, 권력의 반지들은 당연히 훨씬 더 위험하지. 프로도, 인간들은 위대한 반지들 중에서 하나만 가져도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어. 물론 더 성장하거나 힘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죽지 않고 생명이 유지된다는 말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으면 그 반지를 이용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어. 그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그러다가 영원히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결국에는 사악한 세력이 득실거리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야. 혹 의지력이 아주 강하다거나 원래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이 다소 지연될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악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는 거야. 결국엔 악의 세력에 잡혀 먹히게 된다는 것이지." "아니, 그럴 수가!" 프로도가 외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원에사 샘 갬기가 잔디를 깎는 소리만이 침묵의 틈을 비집고 들려올 뿐이었다. 프로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빌보 아저씨는 얼마나 알고 계시지요?" "자네한테 말해 준 것 이상은 모를 걸세. 내가 자넬 자 돌봐 주리라 믿고 있다 해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네에게 줄 리는 없잖은가 말이야. 그는 그 반지가 아주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필요할 때는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무슨 불길한 일이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그게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는 바로 그 점이 자기 마음을 갉아먹는다고 노심초사했지만 설마 반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하긴 반지를 잘 지켜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그 반지는 크기나 무게가 일정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갑자기 느슨해지거나 조여지기도 한다는 거야. 그래서 애초에 낄 때는 꼭 맞았다가도 갑자기 손가락에서 빠지는 일이 생기는 거야." "그래요. 마지막 편지에서 그것을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항상 줄에 꿰어 두고 있지요." "잘했네. 빌보는 자기가 그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정정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반지의 위력 때문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다만 타고난 건강 덕분이라고 자랑하곤 했지. 사실은 점점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지만 말이야. 스스로도 말라비틀어져 간다고 말했었지. 반지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였어."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프로도는 다시 물었다. "알고 있었느냐고? 프로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마법사들의 지혜를 넘지 못한다네. 그렇지만 자네 말이 '그 반지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는 뜻이라면 글쎄, 아직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게 옳겠지. 마지막으로 해봐야 할 실험이 하나 있어. 짐작이 거의 맞을 테지만 말이야. 내가 언제부터 그 반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더라?" 그는 기억을 돌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보자, 빌보가 반지를 발견한 것이 언젠가 하면 5개군대전투가 벌어지기 전, 신성회의가 암흑의 세력을 머크우드에서 추방하던 해였지. 그때 내 가슴엔 어두운 그리자가 엄습했었지만 나 자신도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몰랐었네. 종종 골룸이 어떻게 위대한 반지를 손에 넣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 하지만 처음부터 짚이는 데가 있긴 했어. 그때 빌보가 반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털어놓은 거야. 처음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네. 마침내 그에게 진실을 얻어 냈는데 그때 얼핏 빌보가 유난히 반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 골룸이 반지를 자기 '생일선물' 이라고 우기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어. 둘의 거짓말이 너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일단 난 마음을 놓게 된 셈이지. 그 반지가 이미 그에게 사악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분명해진 거야. 내가 실제로 처음 받은 인상도 일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어. 빌보에게 그런 반지는 쓰지 말고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충고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곤 했지.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그를 을러대서 빼앗을 수도 없었고 또 내겐 그럴 권리도 없었지. 지켜보며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더군. 백색의 사루만과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무슨 일이 생겨 버렸지." "그는 누구지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요?" "아마 그렇겠지. 예나 지금이나 호비트들은 그와 별 상관이 없었지. 하지만 그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인물이야. 우리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이자 신성회의의 의장이었지. 그의 지혜는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오히려 오만해져서 만의 참견을 불쾌하게 생각했지. 그는 아주 오랫동안 요정들의 반지에 대한 비밀을 캐내기 위해 광적으로 연구해 왔어. 신성회의에서 반지가 거론되었을 때 반지에 관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걱정을 많이 덜었지. 그래서 의심도 하지 않게 되었어. 물론 조금은 불안했지만 말이야. 여전히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 빌보에겐 아무 탈이 없었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네. 문제는 그 세월이란 것이 빌보의 나이와 무관하게 흐른다는 것이었어. 다시 근심의 그림자가 가슴을 담담하게 짓누르더군. 외가 쪽으로 장수하는 집안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좀더 기다려 보자 하고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기다렸어. 빌보가 이 집을 떠나던 날 저녁까지 말이야. 그런데 그날 그가 한 말이나 행동은 사루만이 했던 설명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했어. 나는 마침내 어떤 치명적인 암흑의 마력이 그를 조종하고 있음을 알았지.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그 비밀을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써온 거야." "그렇다면 빌보 아저씨는 그 반지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피할 수 없는 해를 입게 되는 건가요? 시간이 지나면 아저씨도 괜찮아지겠지요? 별 탈은 없는 거죠?" 프로도는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곧 좋아졌어.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반지와 그 반지의 위력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세력이 하나 있지.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 호비트들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세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마법사 중에서도 호비트의 역사에 관심있는 이는 나 혼자뿐이었지. 자네들 호비트의 역사는 불확실하면서도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 자네 호비트들은 버터처럼 부드럽다가도 어떤 때는 고목뿌리보다 더 거칠어질 수도 있지. 그런 점에서 호비트는 다른 어떤 현자들보다도 더 오래 그 반지의 위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 자넨 빌보를 염려할 필요는 없을 거야. 빌보는 상당히 여러 해 동안 반지를 지니고 있었고 또 여러 번 사용했으니 그 마력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물론 다시는 잠시라도 그 반지를 보아서는 안 되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아직 좀더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는 반지와 떨어진 순간부터 행복해진 거야.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의지로 그 반지를 떠난 것이니까. 그게 중요한 점이자. 그래, 난 그가 이미 반지에서 손을 떼었으니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 지금 염려가 되는 건 바로 자네야. 빌보가 떠난 후 난 자네를 비롯해서 매력적이면서도 어리석고 무력한 모든 호비트들을 자세히 지켜보았지. 암흑의 세력이 샤이어를 정복한다면 온 세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어 있어. 쾌활하고 멍청한 볼저, 혼불로우어, 보핀, 브레이스거들, 저 우스꽝스런 배긴스네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호비트들이 그의 손아귀에 잡히게 된다면 말이야." 프로도는 몸을 떨었다. "우리가 왜요? 그는 왜 우릴 노예로 만들려는 거지요?" "솔직히 말해 그는 지금까지, 잘 듣게, 적어도 지금까지는 호비트들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지. 감사해야 될 일이야. 하지만 자네들의 평화도 이젠 끝났어. 그는 유능한 부하들이 많으니 자네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겠지만 이젠 자네들은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호비트들보다 불쌍한 노예 호비트들이 그의 마음에 든다면 할 수 없는 거야. 여기엔 원한과 복수가 개입되어 있다네." "복수라고요? 무슨 복수 말입니까? 빌보 아저씨와 저와 우리들의 반지가 도대체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아주 깊은 관계가 있지. 자넨 아직 진짜 위험을 모르고 있어. 이야기해 주지. 지난번 내가 여기 왔을 때는 나도 잘 모르고 있었어. 그러나 이제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그 반지를 잠깐 보여주게." 프로도는 자신의 허리띠에 끈을 달아 꿰어서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줄을 끌러 그것을 마법사에게 천천히 넘겨 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프로도 또는 반지 중 어느 한쪽이 갠달프에게 넘기는 것을 꺼리기라도 하듯 갑자기 반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갠달프는 반지를 받아 높이 들어 보였다. 그것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무슨 무늬가 보이나?" "안 보여요. 아무것도 없어요. 긁히거나 닳은 자국도 없이 매끈한데요." "그렇다면 잘 보게." 프로도에게 불안과 경악을 동시에 주려는 듯 마법사는 갑자기 반지를 이글거리는 난롯불 속에 던져 버렸다. 프로도는 비명을 지르며 부젓가락을 찾았지만 갠달프가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 보게!" 그는 찡그린 얼굴로 프로도를 흘끗 바라보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지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갠달프는 잠시 후 일어나 겉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방 안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였고 창문 가까이에서 잔디를 깎고 있는 샘의 재깍대는 가위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법사는 잠시 불 속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숙여 부젓가락으로 반지를 꺼내 곧바로 집어들었다. 프로도는 숨을 죽였다. "꽤 차가울걸. 만져 보게." 프로도는 떨리는 손바닥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반지는 아까보다 더 굵어지고 무거워진 듯했다. "들어서 자세히 살펴보게." 프로도는 반지 둘레 안팎에 아주 정교한 펜으로도 그릴 수 없는 가는 선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꽃으로 드러난 가는 선들은 유려한 필치의 어떤 문자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깊은 심연으로부터 튀어나온 듯 아득하면서도 대단히 밝은 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저는 불꽃문자를 못 읽어요." 프로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지. 이 문자는 원래 고대 요정문자였는데 지금은 모르도르의 언어가 된 거니까. 내가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 우리말로 옮겨 보면 대충 이런 뜻이야.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은 절대반지 하지만 이건은 요정들의 이야기 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어떤 시의 두 구절일 뿐이야.” 지상의 요정왕들에겐 세 개의 반지, 돌집의 난쟁이왕들에겐 일곱 개의 반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에겐 아홉 개의 반지, 어둠의 권좌에 앉은 암흑의 군주에겐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은 절대 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그는 노래를 멈추고 장중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고의 반지, 즉 모든 반지를 지배하는 절대반지일세. 그가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절대반지란 말이야. 그 때문에 그의 힘은 약화되었고, 지금은 이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 이 반지는 절대로 그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일세." 프로도는 꼼짝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동쪽에서 검은 구름이 일어나 거대한 공포의 손이 되어 자기를 덮치는 것만 같았다. "이 반지가! 도대체 이 반지가 어떻게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 그건 아주 옛날 옛적의 일이지." 갠달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멀리 역사의 대가들만이 기억하고 있는 암흑기에 사건은 시작되었지.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이 봄이 지나 겨울이 와도 우린 여기 앉아 있어야 할 거야. 어젯밤 암흑의 군주 사우론에 대해 말했었지. 자네가 지금까지 들은 소문은 사실이야. 그는 다시 일어나 머크로우의 요새를 버리고 어둠의 탑이 있는 모르도르의 옛 성채로 돌아갔어. 모르도르란 이름이 옛날이야기 어느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깔려 있는 것을 자네들 호비트들도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 어둠의 그림자는 한 번 패한 뒤에도 언제나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지." "우리 시대에는 제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나도 그렇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심정이겠지. 하지만 시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자 않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야. 프로도, 이미 우리 시대는 어두워지고 있어. 적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고 그의 계획은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진척된 것이 사실이야. 이 반지로 인한 시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역시 우리는 매우 위험하고 험난한 시대를 살 수밖에 없어. 그런데 적은 아직 한 가지 무기를 갖추지 못한 거야. 그에게 모든 저항을 물리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고 최후의 저항세력까지 정복하여 온 세계를 순식간에 암흑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무기 말이야. 그것이 바로 절대반지지. 원래 요정들이 가지고 있던 세 개의 반지는 반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요정왕들이 그가 찾지 못하도록 감추었기에 그것은 손에 넣을 수 없었지. 난쟁이들이 가지고 있던 일곱 개의 반지 중에서 셋은 그가 빼앗았어. 나머지는 용들이 삼켜 버렸고. 그렇지만 그는 아홉 반지를 오만무도한 아홉 명의 인간들에게 주어 올가미를 씌워 버린 거야. 오래 전부터 그들은 절대반지의 지배하에 들어가 반지의 악령 즉 그의 가장 흉맹한 충복이 되어 암흑의 그림자를 추종하는 작은 그림자로 행세하게 된 거야.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 아홉 반지가 세상에 횡행하던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나? 암흑의 그림자가 다시 세력을 떨치고 있으니 그들도 다시 곧 나타날 거야. 잠깐! 샤이어의 아침이 아무리 밝고 환해도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이 낫겠어. 결론지어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어렵게 된 거야. 아홉 반지는 그의 휘하에 들어 있고 일곱 반지 역시 그렇지. 나머지는 파괴되었으니까. 세 개의 반지는 아직 숨어 있지만 그를 괴롭히지는 못할 거야. 그는 이제 절대반지만 찾으면 모든 것을 갖추는 셈이지. 그 반지는 그가 직접 만들었으니 그의 것이며 또 과거 그의 능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으니 다른 모든 반지를 지배할 수도 있는 거야. 만일 그가 그것을 다시 손에 넣는다면 나머지 반지들이 어디 있건, 심지어 세 개의 반지까지도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것들과 함께 만들어진 나머지 반지들도 행방이 드러나게 되어 그는 이전보다 더 강한 세력을 얻게 되는 거야. 프로도, 상황은 이렇게 급박하게 되어 있어. 그는 절대반지는 요정들이 파괴해서 사라졌다고 믿고 있었지.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어. 하지만 그는 이제 그것이 파괴되지 않았고 다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따라서 그는 지금 그것을 찾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거야. 그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희망이지만 우리에게는 거대한 공포일 뿐이야." "왜 그 반지는 파괴되지 않았지요? 또 그가 그렇게 강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라면 왜 잃어버렸지요?" 프로도는 어둠의 손가락들이 반지를 낚아채가려는 위험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건 그에게서 뺏어 낸 것이었어. 과거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요정들의 힘이 막강했던 적이 있었네. 인간들도 모두 요정에게서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니었고, 서역인들이 그들을 도우러 왔었으니까 말이야.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이런 대목은 참 기분좋게 들을 수 있는 것이야. 그때도 물론 어둠이 위세를 떨치던 암울한 시대이긴 했지만, 위대한 용기나 위대한 역사가 전혀 없던 시대는 아니었어.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모두 들려 줄 수 있을 걸세. 아니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서 이 반지가 자네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관심사이니, 물론 그 이야기도 상당히 길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이야기해 주지, 사우론을 물리쳤던 것은 요정의 왕 길 갈라드와 서역인 엔렌딜이었어. 그들도 물론 전사하고 말았지만 말이야. 엔렌딜의 아들 이실루드가 사우론의 손가락을 자르고 반지를 빼앗아 자기것으로 만들었지. 사우론은 그렇게 패배했고 그의 혼은 심연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머크우드에 그림자로 나타날 때까지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내야만 했던 거야. 그러나 반지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 그것은 안두인 대하로 가라앉아 버린거지. 왜냐하면 이실두르가 그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산 속의 오르크들에게 기습을 받았기 때문이야. 그 부하들은 대부분 살해당했고 그도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오르크들의 화살을 맞아 죽었지. 반지를 끼고 떠내려가던 이실루드의 손에 반지가 빠져 버렸던 거야." 갠달프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글래든 평원의 어느 어두운 물 속에서 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설로부터 멀어진 채 잊혀져 있었지. 이 정도의 이야기도 아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신성회의에서도 그 이상은 알 수 없었지. 하지만 그 후의 이야기를 내가 들려 줄 수 있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하지만 여전히 오래 전 옛날, 윌더랜드 변경 안두인 대하 기슭에 손재주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소인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스투어족의 조상과 혈통이 가까운, 호비트와 비슷한 종족이었다. 그들은 강을 사랑하여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갈대로 작은 배를 만들기도 했다. 그들 중 특히 존경을 벋는 가문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가문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부유했으며 그들의 오랜 역사에 정통한 엄격한 품성의 한 노부인이 집안을 이끌고 있었다. 또한 그 집안에는 호기심이 많고 무슨 일이든 알고 싶어하는 스메아골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사물의 근원과 뿌리에 관심이 많아서 깊은 강속으로 다이빙을 하거나 자라나는 풀과 나무 밑을 파 보기도 하고 푸른 산 속에 굴을 뚫기도 했다. 그는 산꼭대기나 나뭇잎이나 들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도 무심히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머리와 두 눈은 항상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데아골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눈매가 날카로웠으나 스메아골보다는 동작이 굼뜨고 힘도 약했다. 한번은 둘이 함께 배를 타고 꽃갈대와 붓꽃이 무성한 글래든 평원으로 내려갔다. 그메아골이 배에서 내려 강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는 동안 데아골은 배에 남아 낚시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들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기도 전에 그는 물 속에서 당시는 힘에 이끌려 강바닥까지 끌려 내려갔다. 그때 그는 강바닥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낚시줄을 놓고 숨을 죽이며 그 물건을 잡았다. 그는 머리에 물풀과 진흙을 잔뜩 묻힌 채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돌리고는 강둑으로 헤엄쳐 나왔다. 진흙을 씻어 내자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아름다운 금반지가 쥐여 있었다.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반지를 보며 그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나무 뒤에 숨어, 손바닥에 빛나는 물건을 놓고 좋아하는 데아골을 훔쳐보던 스메아골이 뒤에서 살그머니 다가왔다. 스메아골은 친구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사랑하는 친구 데아골, 그걸 내게 줘." "왜?"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난 그것을 갖고 싶어." "안 되겠는데! 선물은 이미 최고급으로 해주었잖아. 이건 내가 발견했으니까 내가 갖겠어." "너 그 말 진심이야?" 스메아골은 그렇게 묻고는 데아골을 붙잡아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금빛 반지의 유혹은 그에게 살인까지도 괘념치 않게 했다. 그리고 그는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꼈다. 데아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집에서 상당히 떨어진 것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시체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메아골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반지를 끼고 있으면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몹시 기뻐하며 반지를 잘 감추었다. 그는 반지를 이용해 남의 비밀을 염탐해 내고는 그 비밀로 못된 일을 벌였다. 그는 남을 해치는 모든 일에 눈이 밝아지고 귀가 트였다. 반지는 그의 적성에 맞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가 모든 친척들에게 버림을 받고 경원당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이 그를 발로 차면 그는 오히려 그들의 발꿈치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도둑질에 재미를 붙였고 혼자 중얼거리고 돌아다니며 목에서 골록골록 하는 끔찍한 소리를 내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골룸이라고 부르고 욕을 하며 먼 곳으로 떠나기를 요구했다. 평화를 원했던 그의 할머니는 그를 가문에서 추방하여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외로이 방황하며 세상의 무정함에 조금은 슬퍼하기도 했다. 안두인 대하를 따라 오르던 그는 산맥 쪽에서 흘러내리는 지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깊은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날것으로 먹고 살았다. 날씨가 몹시 무덥던 어느 날 물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그는 뒷머리가 불타는 듯 따가워지고 수면에 반사된 반짝이는 햇빛이 자신의 젖은 눈을 쓰리게 함을 느꼈다. 그는 너무도 오래 태양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그 돌발적인 광선의 아픔에 아연 놀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태양을 올려다보고 헛주먹질과 욕을 해댔다. 그러나 그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고 고개를 떨군 그는 저 멀리 강 지류가 시작되는 안개산맥의 정상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저 산 속은 그늘이 지고 시원할 거야. 거기서는 태양도 나를 어쩌지 못하겠지. 이 산맥의 뿌리야말로 진짜 산뿌리임에 틀림없어. 저기엔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을 거야.' 그래서 그는 그날 밤 당장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는 검은 지류가 시작되는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는 그 굴을 통해 구더기처럼 천천히 산 속으로 기어들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 숨어 버렸다. 반지도 그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무렵 다시 자신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던 반지의 주인은 반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로도가 소리쳤다. "골룸! 골룸? 그놈이 바로 빌보 아저씨가 만났던 그 골룸이라는 괴물인가요? 아주 구역질나는 놈이던데요!" "어떻게 보면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지. 이런 일은 다른 이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호비트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골룸이 호비트하고 혈통 관계가 있다는 건 믿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멀다고 해도 말이지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이야기예요." 프로도는 열을 내며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이네. 여하튼 그들의 족보에 관해서는 호비트들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걸세. 그 빌보의 이야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지. 빌보와 골룸의 생각과 기억의 배경에는 아주 유사한 점이 대단히 많았어.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단 말이야. 호비트가 난쟁이나 오르크 또는 요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 우선 그들이 서로 풀었던 수수께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긴 하군요. 하지만 호비트말고 다른 종족들도 수수께끼내기를 하지 않아요? 비슷한 내용도 있을 수 있고요. 호비트는 속임수를 몰라요. 그런데 골룸은 항상 속일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그는 불쌍한 빌보 아저씨로 하여금 방심하게 할 심산이었지요. 그리고 아마도 그의 사악한 성격이 그 내기를 즐겼던 것 같아요. 이기면 먹이를 쉽게 얻지만 지더라도 크게 손해볼 일은 없었거든요." "정말 옳은 얘길세. 하지만 내 생각엔 자네가 간과하지 있는 점이 있는 것 같네. 골룸조차도 완전히 사악해진 것은 아니었어. 그는 마법사 중 어느 누군가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강인했지. 마치 호비트처럼 말이야.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자신의 본성이 남아 있었다네. 그레서 마치 어둠 속으로 한 줄기 빛이 새어들듯 과거의 빛이 그의 마음속으로 비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사실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바람과 나무, 풀밭에 비치는 햇빛 등, 그 모든 잊혀졌던 것들에 대한 향수를 빌보의 목소리가 되살려 주었던 셈이지. 그러나 물론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심성이 치유되거나 극복되지는 않았으니까 빌보의 목소리는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뿐이었지만 말이야." 갠달프는 한숨을 쉬고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사악한 심성이 고쳐질 가능성은 없었다네.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 그는 자기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마지막으로 손가락에 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거든. 칠흑같이 어두운 것에 숨어 살다 보니 반지는 거의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반지를 끼고 '사라져' 본 일은 아마 한 번도 없었을 거야. 그는 몸이 야위었으면서도 여전히 튼튼했지. 그러나 물론 그 반지는 그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고 그 고통은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지. 산 속의 모든 '위대한 비밀' 도 알고 보니 텅 빈 어둠뿐이란 것이 드러났고 이젠 더 이상 발견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거나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소일거리였지. 그도 역시 불쌍한 처지에 있었던 거야. 그는 어둠을 증오했지만 빛은 그보다 더 싫어했고 만물을 증오했다네. 그 중에서도 반지를 가장 증오했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반지가 그의 보물이며 또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이라면서요? 만일 그걸 증오했다면 왜 버리고 멀리 떠나지 않았을까요?" "지금쯤이면 자네도 이해가 될 법한데, 프로도. 그는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한 것처럼 반지도 미워하면서 사랑한 거야. 반지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겐 이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지. 프로도, 마법의 반지는 스스로를 지킨다네. 반지가 주인을 버리고 떠나갈 수는 있지만 주인이 그것을 버릴 수는 없는 거야. 기껏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있지. 하지만 그것도 반지의 노예가 되기 전의 초기에나 가능한 일이야. 내가 알기로는 역사상 유일하게 빌보만이 그 일을 해낸 거야. 그도 역시 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결코 반지르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했을 걸세. 프로도, 결정을 내린 것은 골룸이 아니라 바로 반지였던 거야. 반지가 골룸을 떠난 것이지." "아니, 빌보 아저씨가 나타난 바로 그 시간에 맞추어서 말인가요? 반지로서는 오르크가 더 낫지 않았겠어요?" "이건 웃을 일이 아닐세. 특히 자네에겐 말이야. 그건 지금까지 반지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희한한 일이었어. 우연히 그때 빌보가 그곳에 나타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반지를 손에 잡게 된 그 사건은 말이야. 프로도, 이 일에는 또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네. 반지에게는 자기의 진짜 주인한테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있다고나 할까? 그것은 이실루드의 손가락을 빠져나와 그를 배반했고 다음 기회가 왔을 때는 데아골을 붙잡아 죽음을 가져다주었지. 그 다음에는 골룸을 노예로 삼은 건데 골룸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라서 그를 더 이상 이용할 수가 없게 되었던 거야. 골룸과 함께 있는 한 그 깊은 연못을 떠날 가망은 없었으니까. 바로 그 무렵에 그 주인이 다시 일어나 머크우드에서 어둠의 사자들을 내보내기 시작하자 골룸을 배반하게 된 거지. 결국은 터무니없이, 상상치도 않았던 빌보의 손에 들어갈 줄이야. 몰랐겠지만. 샤이어의 빌보에게 마법의 반지라니! 이렇게 보면 이 사건의 이면에는 반지 주인의 계획마저 뛰어넘는 어떤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이 돼. 쉽게 말하자면 빌보가 반지를 발견하도록 (그 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계획을 짰다는 것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가 반지를 가지게 된 것도 누군가의 뜻에 따른 셈이며 따라서 이 사실은 우리에겐 큰 위안이 되는 셈이지."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그런데 이 반지와 골룸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아시지요? 혹시 막연한 추측은 아니겠지요?" 프로도를 바라보는 갠달프의 눈이 빛을 발했다. "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공부했지.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자네한테 설명할 필요야 없지 않겠나? 엘렌딜과 이실두르, 절대반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법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네. 자네의 반지는 다른 어떤 증거보다도 그 불꽃문자로 미루어 볼 때 절대반지임이 분명하네." "언제 그것을 확신하게 되셨죠?" 프로도가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그러자 갠달프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물론 바로 지금 이 방에서였지. 하지만 예상은 했었네. 이 마지막 실험을 하기 위해 나는 그 멀고도 어두운 여행에서 돌아온 가야. 그것은 마지막 증거였고 이제 모든 것이 너무도 명백하지. 골룸의 이야기를 찾아낸 역사의 빈틈을 메우는 데는 약간의 추측도 필요했지. 하지만 처음엔 추측으로 시작했어도 이젠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어. 난 그를 만나 보았거든." "골룸을 만나 보셨다고요!" 프로도는 놀라 외쳤다. "그래.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시도한 끝에 드디어 성공한 거야." "빌보 아저씨가 떠난 뒤 그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것도 알고 계신가요?" "전부 다는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아까 내가 자네한테 들려 준 예기는 골룸이 직접 말한 것일세. 물론 내가 말한 대로 사실 그대로 털어놓지 않았지만 말이야. 골룸은 거짓말쟁이라서 그의 말은 골라 들어야 하지. 그 반지를 '생일선물' 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우겨댔지. 자기 말로는 그런 아름다운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 할머니한테 받았다는 거야. 웃기는 이야기지. 스메아골의 할머니가 비록 여족장이고 나름대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요정들의 반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 게다가 그런 식으로 반지를 내놓았을 리가 없거든. 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기도 하지. 데아골의 죽음이 항상 그의 마음에 걸렸던 거야. 그래서 핑계를 대야겠다고 마음먹고는 계속해서 반지를 일컬어 '생일선물' 이라고 중얼거린 거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다 보니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된 것이고, 그날은 생일이었으니 데아골이 반지를 자기에게 선물했다는 식으로 말이야. 반지가 그날 그렇게 나타난 것은 하나의 선물인 셈이기도 하니까 그건 자기 생일선물이라는 거야. 이런 식으로 혼자 계속 우겨 댄 것이지. 나는 그가 진실을 밝힐 때까지 참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협박을 해야만 했어. 골룸에게 불로 고통을 주겠다고 위협을 했지. 훌쩍거리기도 하고 투덜대기도 하면서 조금씩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하더군. 사실 그는 자신이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 몰리고 있다고 생각했었겠지. 그런데 수수께끼내기와 빌보의 탈출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막연하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몇 마디 이야기를 빼놓고는 말이야. 나보다 더 두려운 어떤 공포의 대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서 자기도 곧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중얼거리더군. 만약 자기가 습격을 받아 어딘가에 갇히게 되면 동료들이 곧 알게 될 것이라는 거야. 즉 골룸도 이제는 훌륭하고 힘센 친구들이 생겼으니 그들이 자기를 도와 줄 것이고 배긴스도 혼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빌보를 저주하면서 마구 욕을 해대더군. 게다가 빌보의 집이 어딘지도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 빌보란 이름은 어리석게도 빌보 자신이 골룸에게 말해 주었지. 따라서 골룸이 일단 바깥세상으로 나온다면 빌보가 사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는 사실 밖으로 나왔고, 반지에 대한 욕심은 오르크나 심지어 햇빛에 대한 공포조차 이겨 낼 수 있었던 셈이야. 한두 해 뒤 그는 산을 내려왔네. 반지에 대한 그 갈망은 여전했지만 이젠 반지가 더 이상 자신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서서히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지. 그는 세월이 흘러 자신이 늙었음을 실감했지만 공포심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매우 배가 고팠어. 햇빛이건 달빛이건 빛에 대한 공포증은 여전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그는 교활한 놈이야. 그는 햇빛과 달빛을 피할 수 있는 방책도 알아냈고 창백하고 차가운 눈으로 캄캄한 어둠 속을 소리없이 재빨리 기어가서 겁에 질리거나 방심한 작은 짐승들을 잡아먹고 견뎠던 거야. 그리하여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공기 덕분에 더 튼튼해지고 용감해졌지. 그리고 예상한 대로 머크우드로 길을 택했던 거야." "그럼 거기서 그를 만나신 건가요?" "거기서 만났지. 그렇지만 그는 그 이전부터 이미 빌보를 찾아서 멀리까지 헤매고 다닌 것 같아. 그에게서 뭔가 확실한 정보를 알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의 이야기는 항상 욕설과 협박으로 뒤범벅이었거든. 이런 식이지. '자기 주머니에 뭐가 있냐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나쁜 놈. 조그만 사기꾼 같으니! 엉터리 문제라고요. 그놈이 먼저 저를 속였어요. 먼저 말이에요. 규칙을 어겼어요. 붙잡아서 혼을 냈어야 하는 건데. 나쁜 놈. 분명히 혼을 낼 거예요. 나쁜 놈!' 이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는 않겠지. 난 지겹게 들었다네. 그렇지만 그 투덜대는 소리 사이로 간간이 새나오는 이야기를 열쇠로 그가 드디어는 에스가로스와 데일 계곡까지 몰래 염탐하고 냄새 맡고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그런데 빌보와 나 그리고 난쟁이 일행이 벌였던 모험과 전쟁 이야기는 벌서 윌더랜드 구석구석까지 퍼졌었고 빌보의 이름과 그 출신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게다가 우리는 서쪽으로 돌아올 때도 비밀리에 올 수는 없었거든. 골룸은 그 예민한 귀로 곧 자기가 원하던 것을 모두 알아냈지." "그러면 왜 빌보 아저씨를 끝까지 쫓아오지 않았을까요? 왜 샤이어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요?" "아, 지금 막 그 이야기를 할 참이었네. 골룸도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겠지. 그는 서쪽을 향해 길을 잡고 안두인 대하까지 왔던 것 같아. 그런데 거기서 방향을 바꿔 버렸어. 분명히 길이 멀어서 겁을 먹은 것은 아니야. 어떤 다른 힘이 그를 끌고 간 것이지. 나 대신 그를 찾아나섰던 내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네. 처음엔 숲의 요정들이 그를 추적했었지. 아직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머크우드 숲 속을 따라 추적했는데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고 대신 그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게 접할 수 있었지. 심지어 짐승이나 새들도 무서워할 만한 끔찍한 소문들을 말이야. 숲속사람들 이야기로는 피를 마시는 유령이 나타나 숲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거야. 그 유령은 나무 위로 올라가 새둥지를 찾아내고 산짐승들의 굴 속에 들어가 어린 새끼들도 잡아 먹고 창문 틈새로 기어들어와서는 아기들의 요람도 뒤진다는 거야. 그런데 머크우드 서쪽 숲에서부터 방향을 바꿔 남쪽을 향하더니 결국에는 숲속요정들의 추적에서 벗어나 버렸단 말이야. 그때 내가 큰 실수를 범했지. 물론 첫 실수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큰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거야. 그때는 그 밖에도 바쁜 일이 많아서 더 이상 골룸만 추적하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면서 여전히 사루만의 이야기만 믿고 있었으니." 갠달프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먼 옛날 일이지. 그 뒤로 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어. 빌보가 여길 떠난 후 다시 골룸을 찾아보았지만 벌써 희미한 자취밖엔 없었지. 한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추적은 아무 소용이 없을 뻔했다네. 그 친구는 아라곤이란 사람인데 우리 시대 최고의 사냥꾼이자 순찰대원이지. 우린 함께 골룸을 찾아 윌더랜드 끝까지 내려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고 희망도 없었네. 그래서 난 결국 추적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갔는데 그때 골룸이 발견된 거야. 내 친구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그 불쌍한 녀석을 붙잡아 내게 데려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더군. 그냥 목을 골록골록거리며 울면서 우리보고 잔인하다고만 했지. 우리가 몰아붙이자 징징 울면서 두 손을 마주 비비고 마치 먼 옛날의 어떤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리는 듯 손가락을 빨면서 아픈 척하더군. 그러나 결국 두렵긴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드러났네. 그는 한걸음 몰래 남쪽으로 내려가 마침내 모르도르까지 갔었던 거야." 무거운 공기가 방 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자기 가슴이 쿵쿵 울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샘의 가위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결국 모르도르까지." 갠달프는 말을 계속했다. "비통한 일이지만 모르도르는 모든 사악한 무리들을 끌어 모으고 있고 암흑의 세력도 전력을 다해 그 일을 돕고 있지. 이미 절대반지의 낙인이 찍힌 골룸도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 거야. 남쪽에서 다시 암흑의 세력이 나타났고 그들은 서부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어. 골룸의 복수를 도와 줄 수 있는 새로운 친구들이 모르도르에 나타난 것이지.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제딴에는 거기서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우고 또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그래서 모르도르의 변경으로 몰래 잠입하자마자 붙잡힌 골룸은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거야. 일은 그렇게 된 걸세. 내가 그 녀석을 다시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모르도르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던 거야. 무서운 음모를 가슴 속에 품고서 말일세.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골룸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큰 재앙은 이미 시작되어 버렸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적은 골룸을 통해 절대반지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 거야. 이실루드가 어디서 죽었고 골룸이 어이서 반지를 발견하였는지를 그는 확인한 것이야. 골룸이 그렇게 오래 산 것만으로도 그 반지가 절대반지라는 확증을 얻게 된 셈이지. 적은 그것이 요정의 세 반지 중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았겠지. 왜냐하면 세 개의 반지는 분실된 적도 없지만 재앙을 당한 적도 없기 때문이지. 또 일곱 반지나 아홉 반지의 소재는 이미 밝혀졌으니 그것이 절대반지임을 확신하고 있음은 물론 호비트와 샤이어라는 이름도 듣게 되었을 거야. 지금쯤 샤이어를 찾느라 분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벌써 샤이어의 위치를 확인하였을지도 모르지. 프로도, 지금 나는 배긴스라는 하찮은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이름인가를 그들이 벌써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운 거야." 프로도가 외쳤다. "정말 끔찍하군요. 제가 가끔씩 받은 암시나 경고로 미뤄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인데요. 오, 갠달프! 제 다정한 친구여!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지요?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어떻게 해야지요? 빌보 아저씨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왜 그 나쁜 놈을 죽이지 않고 쓸데없이 동정을 베풀어 살려 준 걸까요?" "동정이라고? 그래, 빌보의 손을 만류한 것은 동정심이었지. 필요없이 죽이지 않으려는 동정과 자비 말일세. 프로도, 빌보는 벌써 그 보답을 받았다네. 그렇게 자기가 반지의 주인이라고 주장했으면서도 결국 악의 세력한테 큰 피해를 당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동정을 베풀었기 때문일세." "죄송합니다만 저는 지금 너무 겁이 나서 골룸에겐 아무런 동정심도 느낄 수 없어요."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렇겠군요. 하지만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갠달프, 당신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골룸이 그렇게 끔찍한 일들을 벌여 놓았는데도 당신과 요정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다는 말씀이세요? 어쨌든 그는 이제 오르크 만큼이나 사악한 존재로 변해 버렸고 분명히 적이 되지 않았어요?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마땅하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살아 있는 많은 이들이 죽어 마땅하고 죽은 이들 중에도 마땅히 살아나야 할 이들이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 자네는 그들을 되살릴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의 심판을 그렇게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네. 심지어 우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만물의 종말을 모두 알 수는 없거든. 골룸이 죽기 전에 개심을 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 하지만 아주 없다고도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도 이젠 반지의 운명에 묶여 있게 되었거든. 내 생각에는 그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 일이 끝나기 전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네. 빌보의 동정심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지도 모른단 말일세. 어쩌면 자네의 목숨까지도 말이야. 여하튼 우리는 그를 죽이지 않았네. 그는 이제 너무 늙었고 불쌍한 처지야. 숲의 요정들이 그를 감금해 두긴 했지만 워낙 마음씨가 착한 친구들인지라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다네." "그렇긴 하지만, 빌보 아저씨가 골룸을 죽일 수 없었을 바에야 그 반지도 가져오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발견하지도 못하고 손에 넣지도 않았으면 좋았을걸 말이에요. 당신은 왜 제게 그걸 맡겼지요? 왜 내버리거나 파괴하지 않고 말이에요?" "내가 맡겼다고? 자넨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군. 자넨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르면서 입을 놀리고 있는 거야. 반지를 내버린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야. 반지는 스스로 발견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네. 악인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벌써 무사무시한 일이 저질러졌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에는 적의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이 반지는 절대반지이고 적은 이 반지를 찾아서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으니 말이야. 사랑하는 프로도, 물론 자네한테야 위험한 일이야. 나도 그 점이 대단히 고통스럽다네. 하지만 이 일에는 너무 많은 문제들이 걸려 있기 때문에 부득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네에게 맡긴 거야. 물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도 난 샤이어와 자네를 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어. 자네가 그것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한 반지는 결코 자네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적어도 자네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구 년 전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게. 그때만 하더라도 난 확실하게 알고 있지는 못 했거든."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진작에 파괴해 버리면 되지 않았어요? 저에게 경고를 해주시거나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없애 버렸을 텐데요." 프로도는 여전히 소리를 높였다. "없애 버린다고? 어떻게 말인가? 시도해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없어요. 하지만 망치로 부수거나 불에 녹이면 되겠지요." "해보게! 지금 당장 해보게!" 프로도는 다시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지는 이제 표면에 아무런 글자나 흔적도 없는 평범하고 매끄러운 보통 반지로 변해 있었다. 금빛은 매우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였고, 프로도는 빛깔의 윤기와 아름다움에, 동그라미의 완벽함에 내심 놀랐다. 그것은 실로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반지였다. 꺼낼 때만 해도 그는 곧바로 반지를 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망설이면서 갠달프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마치 대단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반지를 던질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그는 반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갠달프가 기분나쁜 웃음을 지었다. "알겠나. 프로도? 자네도 벌써 그 반지를 쉽게 버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파괴하겠다니 말이야. 될 소린가? 게다가 이젠 내가 강요할 수도 없네. 완력으로라면 모를까. 그렇게 되면 자네도 좋아하지 않겠지. 그러나 어쨌든 그 반지를 힘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대장간의 망치로 내리친다 해도 그 반지는 끄떡하지 않아. 자네 힘이나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물론 이 난롯불로는 보통의 금도 녹이지 못하지. 더구나 이 반지는 아까 보았듯이 불 속에서 달아오르지 않아. 샤이어의 대장간에서 이 반지를 녹인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뿐 아니라 난쟁이들의 용광로라 할지라도 어림없는 일이야. 용의 불꽃은 암흑의 반지들을 녹여 삼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뜨거운 불길을 내뿜는 그 옛날의 용은 이제 지상에 남아 있지 않네. 아니 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그리고 살아 있다면 절대반지를 파괴할 수 있을 검은 안칼라곤도 사라져 버렸어. 그 반지는 사우론 자신이 만든 것이니 말이야." 갠달프는 잠시 숨을 돌리고는 계속했다. "딱 한가지 방법이 있지. 자네가 진정으로 반지를 적의 마수를 피해 파괴하고 싶다면 불의 산 오로드루인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분화구를 찾아 그 속에 던져 버리면 되지." 프로도가 외쳤다. "제가 반지를 파괴하겠어요. 아니면 파괴되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위인이 못 되는데 어떻게 하죠? 파라리 반지를 보지 못했더라면 좋겠어요. 왜 그것이 제게 왔을까요? 왜 제가 선택되었지요?" "어리석은 말은 하지도 말게. 이 반지가 딴 사람에게 가지 않은 것은 자네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잖는가? 자네에게 무슨 힘이나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야. 어쨌든 자네는 선택되었고 따라서 자네에게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모두 짜내야 하네." "저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요. 당신이 오히려 지혜도 있고 용기도 있으니 차라리 당신이 반지를 맡아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자 갠달프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안 돼! 그 힘을 가지게 되면 나는 지나치게 강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어 버려. 그리고 반지도 더 강하고 치명적인 힘을 휘둘러 댈거야." 그의 눈에 불꽃이 일었고 그의 얼굴은 속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 벌개졌다. "나를 유혹하지 말게! 나는 암흑의 군주처럼 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 내가 진정 그 반지를 바란다면 그건 동정심 때문이야. 약자를 위한 동정심.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갈망 말일세. 나를 유혹하지 말게! 나는 감히 그것을 취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할 자신도 없네. 반지를 사용하고 싶은 욕망은 내 힘으로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이야. 내 앞길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네." 그는 창가로 가서 커튼과 겉창을 열었다. 햇살이 다시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샘이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프로도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자네가 결정할 일이야. 하지만 내가 항상 자네를 도와 주겠네." 그는 프로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 임무를 완수할 마지막날까지 내가 자네를 도와 주겠어. 하지만 우리는 즉시 행동을 개시해야 하네. 적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오랜 침묵이 흘렀다. 갠달프는 다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파이프를 빨아 댔다. 그는 두 눈을 감은 듯했지만 실은 눈썹 밑으로 프로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불꽃이 시야를 꽉 채울 때까지 벽난로의 빨간 등걸불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불꽃의 깊은 속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전설 속의 운명의 분화구와 불의 산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생각하고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했나?" 마침내 갠달프가 물었다. "아닙니다." 프로도는 깊은 어둠 속에서 다시 밝은 곳으로 이끌려온 듯한 느낌에 놀라며 대답했다. 그는 창 밖으로 햇살이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으로 보아 이 반지는 제가 보관하고 지킬 수밖에 없겠군요. 제게 어떤 일이 닥치든 간에 당분간은 말입니다." "자네가 그 목적을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일이 그리 빨리 닥치지는 않을 걸세." "그렇게만 되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면 저보다 나은 주인을 빠른 시일 내에 찾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 동안은 저 자신이나 주위의 모두에게 저는 위험한 존재겠군요. 반지를 가지고 여기 이대로 있는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할 테니까 이젠 백 엔드와 샤이어를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아요." 프로도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샤이어를 구하고 싶어요. 한때는 샤이어의 이웃들이 너무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여서 지진이 나거나 용이 쳐들어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이젠 생각이 달라집니다. 제가 떠나서 샤이어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는 없더라도 언제나 마음속에 든든하게 믿는 곳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될 테니까요." 프로도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물론 가끔 방랑에의 유혹을 느낀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휴가거나 아니면 빌보 아저씨의 모험처럼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이 길은 위험을 피해 위험 속으로, 위험을 달고 다니는 추방이나 다름없군요. 그리고 반지를 파괴하고 샤이어를 구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떠날 수밖에 없겠는데, 저는 너무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뭐랄까 절망적인 심정이 되는군요. 적은 너무도 강하고 무서운데 말이에요." 갠달프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프로도의 마음속에는 빌보를 따라가고 싶은 욕망이 불꽃처럼 강하게 타올랐다. 빌보를 찾아가자.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는 두려움도 잊고 있었다. 그는 먼 옛날어느 날 아침 빌보가 그랬던 것처럼 모자도 쓰지 않고 곧바로 길을 뛰어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갠달프가 감격에 겨워 외쳤다. "고맙네. 호비트! 전에도 말했지만 호비트들은 정말 놀라운 인물들이야. 한 달이면 호비프들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백 년이 지나도 그들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전히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거야. 나는 지금과 같은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 심지어 자네한테도 말이야. 하여간 빌보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몰랐겠지만 후계자를 뽑는 일에 실수를 하지는 않았군. 걱정스럽긴 하지만 자네 말이 옳아. 반지는 더 이상 샤이어에 숨어 있을 수가 없어. 자네를 위해서나 모두를 위해서나 자네는 떠나야 하네. 배긴스란 이름까지 남겨 두고 말일세. 샤이어를 벗어나 황야에 들어가면 그 이름을 위험의 상징이 될 테니까 말이야. 내가 자네에게 새 이름을 하나 지어 주지. 언더힐이 어떻겠나? 그리고 반드시 자네 혼자 갈 필요는 없어. 혹시 믿을 만한 친구가 있다면 말이야. 자네가 기꺼이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또 자네 역시 미지의 위험 속으로 데려가고 싶은 이가 있다면 데리고 가게. 하지만 친구를 찾을 때는 조심해야 하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말이야. 적은 이미 많은 첩자와 정탐꾼을 풀어 놓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들은 듯 그는 말을 멈췄다. 프로도가 듣기에는 집 안에서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갠달프는 창문가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러고는 번개같이 창틀 위로 올라서 긴 팔을 내리뻗었다. 그러자 비명소리가 나면서 샘 갬기의 고수 머리가 갠달프에게 한 쪽 귀를 잡힌 채 올라왔다. 갠달프가 말했다. "흠, 흠, 맙소사! 샘 갬기였구먼. 뭘 하고 있었나?" "살려 주세요. 갠달프씨!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냥 창문 밑에서 잔디를 깎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는 증거물을 제시하듯 가위를 들어 보이며 간청했다. 갠달프는 다시 엄하게 물었다. "글쎄, 가위소리가 끊긴 지 한참 되었는데 그래? 뭘 엿듣고 있었지?" "엿듣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정말이에요." "능청 떨지 마! 뭘 들었어? 왜 엿들었나?" 갠달프는 샘을 예리하게 쏘아보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샘은 벌벌 떨며 애원했다. "프로도씨 제발 살려 주세요. 늙은 제 아버지가 너무 슬퍼할 겁니다. 나쁜 뜻은 없었어요. 맹세합니다. 정말이에요." 약간은 놀라고 당황했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던 프로도가 말했다. "너를 해치진 않으실 거야. 나도 그렇지만 이분도 네가 나쁜 뜻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똑바로 일어서서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그러자 샘은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예, 예. 듣긴 많이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적이니 반지니 빌보씨, 용, 불의 산, 그리고 요정이란 말까지 들었어요. 제가 엿듣긴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제 말을 알아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테드가 뭐라고 하든 간에 그것들을 믿고 있어요. 요정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들을 정말로 보고 싶어요. 이번에 가실 때 저도 요정나라로 데려가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갠달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팔을 뻗어 놀란 삼과 가위, 깎인 잔디 부스러기 등을 한꺼번에 들어 방 한가운데 세웠다. "요정들이 보고 싶다고 했지?" 갠달프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지만 눈은 샘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프로도가 떠나간다는 말도 들었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숨이 막힐 뻔했지요. 그 소리를 아마 들으셨을 거예요. 참으려고 애를 썼는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갑자기 튀어나와 버렸지요." "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프로도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샤이어를 떠나는 것이 백 엔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쓰라린 이별의 고통을 의미한다는 것을 프로도는 문뜩 깨달았다. "난 떠나야 해. 그렇지만..." 그는 말을 멈추고 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염려해 준다면 그 비밀을 꼭 지켜 주어야만 해. 그렇지 않고 지금 들은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새나간다면 갠달프가 너를 반점두꺼비로 만들어 버리고 이 정원에다 뱀을 가득 채우실 거야." 샘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게, 샘."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 자네 입을 막을 수도 있고 또 이야기를 엿들은 데 대한 적당한 벌까지 줄 수 있는 방법이 말이야. 프로도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가요?" 샘은 산책 나가자는 주인의 신호를 받은 충견처럼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제가 요정들을 보러 간다고요? 야호!" 샘은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제3장 세 동지 갠달프가 말했다. "자네는 가능한 한 빨리, 아무도 모르게 여기를 떠야 하네." 벌써 두 주일 이상이 지났는데도 프로도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지 않아 갠달프는 내심 마음을 졸였던 것이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 소문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기가 어디 쉬운 알이겠습니까? 제가 빌보 아저씨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면 샤이어는 또다시 발칵 뒤집힐 거예요." 갠달프는 프로도의 해명을 듣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사라져서는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내 말은 될 수 있으면 빨리 떠나라는 것이지 지금 즉시 떠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네.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이곳을 떠날 무슨 묘안이 있다면 조금 늦어져도 괜찮겠지. 그러나 너무 오래 꾸물거려서는 안 되네." "가을쯤이 어떨까요? 제 생일을 쇠고난 다음에 말이에요. 그때까지는 뾰족한 수가 생기겠지요." 프로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운명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떠나가기 싫었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갈수록 백 엔드에 애착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샤이어의 여름을 맘껏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가을은 너무 쉽게 성큼 다가왔고, 가을이 되면 늘 그래왔듯이 그는 또다시 방랑벽이 도지는 걸 느꼈다. 이제는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나이가 쉰 살이 되는 날, 즉 빌보의 백스물 여덟번째 생일을 출발일자로 잡고 있었다. 어쩐지 빌보를 찾아 집을 떠나는 날로는 그날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는 빌보를 찾아가기 위해서라면 샤이어를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능한 한 반지 문제나 자신이 가야 할 최종 여행목적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그는 갠달프에게 자신의 심증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는 마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선뜻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다. 마법사는 프로도의 출발일자를 듣고 웃었다. "잘 생각했네. 그게 좋겠어. 하지만 더 지체할 생각은 말게. 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불안해지네. 그 동안은 자네가 어디로 떠난다는 소문이 돌지 않도록 조심하게. 샘 갬기의 입 단속도 잘하고, 떠벌이고 돌아다닌다면 정말로 두꺼비가 될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하게." "제가 어디로 떠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저도 아직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뚜렷하게 정해 놓지 않은 걸요." 갠달프는 프로도를 나무랐다.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도 말게! 내 말은 우체국에 주소를 남겨 두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야. 자네가 이곳을 멀리 떠나기 전까지 샤이어를 떠난다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단속을 하라는 것일세.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도 좋은데 그 방향조차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마을사람들에게 백 엔드를 떠난다고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아직 목적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누가 저를 인도해 줄까요? 목적은 무엇이지요? 빌보 아저씨는 보물을 찾으러 갔었고,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물을 버리러 떠납니다. 그것도 돌아올 기약도 없이 말입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네. 나 역시 모르니까. 자네의 임무는 일단 운명의 산을 찾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임무는 딴 사람의 몫일 수도 있네. 분명한 것은 자넨 아직 그 먼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일세." "그렇지요. 하지만 우선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는 겁니까?" "자네가 가야 할 곳은 대단히 위험한 곳일세. 하지만 너무 똑바로 너무 성급하게 가지는 말아야 하네. 자네가 내 충고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리벤델 쪽으로 가도록 하게. 그 길을 예전보다 더 험하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한 길일세. 물론 갈수록 더 험해지겠지만." "리벤델! 좋습니다. 동쪽으로 가지요. 리벤델로 가겠습니다. 샘에게 그 요정들의 나라로 함께 가자고 하면 좋아하겠군요."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요정 엘론드의 저택을 찾아가서 아름다운 요정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을 깊은 골짜기의 공기를 맘껏 들어마시고 싶은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 담쟁이넝쿨여관과 청룡정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샤이어 변경에 나타나던 거인들과 이상한 징조들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이 소식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프로도가 백 엔드를 내놓았다는 소식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 팔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새크빌 배긴스에게! "굉장히 값을 잘 쳐 받았다더군.” 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헐값에 판 거지. 로벨리아 부인이 사들인 것을 보면 뻔하잖아.” 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오도는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 나이 백두 살이었는데 오래 살긴 했지만 죽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가격보다도, 왜 프로도가 그 아름다운 토굴집을 팔아치웠는가도 이웃들을 궁금하게 했다. 일부에서는 프로도 자신이 말은 안해도 그렇다는 뜻을 비쳤듯이 돈이 다 떨어졌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호비튼을 떠나 집을 판 돈으로 고향 버크랜드에서 친척들과 조용히 살 계획으로 집을 팔았다는 이들도 있었다. '새크빌 배긴스네 식구들 꼴을 안 보려고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것이다' 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백 엔드의 그 전설적인 보물과 재산은 호비트들의 머리 속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그것이 갠달프의 은밀한 음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갠달프는 매우 조용하게 지내면서 낮에는 밖에 나돌아다니지도 않았지만 모두를 그가 백 엔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도의 이사 계획과 마법사의 음모가 어떤 연관이 있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프로도 배긴스가 버크랜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래요. 이번 가을에 이사할 계획입니다. 메리브랜디버크가 내대신 쓸 만한 토굴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없으면 그냥 집이라도 구해야지요." 사실 그는 메리의 도움으로 이미 크릭할로우에 작은 집을 하나구해 놓고 있었다. 샘을 빼놓고는 누구나 그가 집에 영원히 정착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동쪽으로 가야겠다는 그의 결심이 그런 구상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버크랜드는 샤이어의 동쪽 변경에 있었고, 그의 고향이 그곳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그럴싸하게 들릴 것이었다. 갠달프가 샤이어에 머무른 지 두 달 남짓된 6월 말의 어느 날 저녁, 그는 갑자기 날이 밝는 대로 떠나야겠다고 말을 꺼냈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 새로운 소식도 들을 겸 남쪽 지방으로 가볼 계획일세.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한가하게만 지낸 것 같아."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프로도는 그의 얼굴에서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별일 아닐세.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려와 가서 좀 살펴봐야겠어. 자네 출발 일정에 맞춰 돌아오지 못하면 내가 전갈을 보내지. 내가 없는 동안이라도 자네 계획은 그대로 밀고 나가게. 하지만 더 조심해야 하네. 특히 반지 말이야.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하지만 절대로 그 반지를 사용하지 말게." 그는 이튿날 새벽같이 떠나갔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늦어도 송별파티를 벌이는 날까지는 돌아오도록 애써 보겠네. 어쨌든 자네가 길을 떠나면 내가 동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프로도는 사뭇 불안하기는 하면서도 갠달프가 들었다는 소식이 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로 연일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자 불안감은 점차 엷어졌다. 샤이어의 여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또 가을도 예년처럼 평화롭고 풍성하게 다가왔다. 나뭇가지마다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벌들이 붕붕대는 벌집에서는 달콤한 꿀이 줄줄 흘러내렸으며 곡식도 키 자랑하듯 쑥쑥 잘 자랐다. 그러나 샤이어에 가을이 찾아든 지 한참이 지나도 갠달프가 나타나지 않자 프로도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9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었건만 그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사 예정일로 잡은 생일날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으나 그는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없었다. 백 엔드는 다시 북적대기 시작했다. 프로도의 친구 몇 명이 백 엔드에 와서 묵으면서 짐 꾸리는 일을 도와 주었다. 프레데크가 볼저와 폴코 보핀이 거들어 주었고, 물론 절친한 친구인 피핀 투르크와 메리 브랜디버크도 와주었다. 그들은 짐을 정리하느라 집을 온통 난장판으로 어질러 놓았다. 9월 20일, 팔지 않고 새 집으로 옮겨갈 가구와 물건들을 실은 두 대의 짐차가 브랜디와인 다리를 지나 버크랜드로 향했다. 그 이튿날 프로도는 안절부절 하면서 갠달프가 나타나기를 하루종일 목을 빼고 기다렸다. 목요일인 생일날 아침이 먼 옛날 빌보가 성대한 파티를 열던 날처럼 맑고 아름답게 밝아 왔다. 그러나 여전히 갠달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프로도는 송별만찬을 열었다. 그 자신과 네 명의 친구만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다. 그는 그 젊은 친구들과 곧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들과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젊은 친구들은 모두 기분 좋게 취해 있었고, 갠달프는 없었지만 파티는 곧 매우 흥겨운 자리가 되었다. 식당은 식탁과 의자만 남고 텅 비어 있었으나 음식은 훌륭했고 거기다 곁들인 술도 감칠맛이 있게 입에 쩍쩍 들러붙는 것이었다. 프로도의 포도주는 새크빌 배긴스네에게 팔아 넘긴 물품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이 물건들에 새크빌 배긴스네 발톱이 닿으면 어떤 꼴이 될지 걱정스럽구먼." 잔을 들어 술을 홀짝거리며 프로도가 말했다. 그것은 올드위냐드 상표가 붙은 것으로는 마지막으로 남은 포도주였다. 그들은 간간히 노래도 부르고, 함께 나누었던 즐거운 추억거리를 돌이켜보면서 빌보와 프로도의 건강을 기원하며 잔을 부딪쳤다. 마침내 파티는 파장이 되었고 그들은 밖에 나가 별빛을 바라보며 밤바람을 쐬고 들어와 각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프로도의 파티가 있는 그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갠달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트기가 바쁘게 그들은 남아 있는 짐을 정리해 또 한 대의 짐마차를 불러 실었다. 메리가 그 짐마차를 맡아서 패티(프레데가 볼저)와 함께 먼저 떠났다. 메리가 말했다. "아무라도 먼저 가서 불을 피워 둬야겠지요. 자, 그러면 내일모레 만납시다. 도중에 길바닥에서 잠들어 버리지만 않는다면요." 폴코는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갔고 피핀은 뒤에 남아 있었다. 프로도는 혹시 갠달프의 발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에 그가 오더라도 만약 급한 일이 있으면 곧장 크릭할로우로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프로도는 걸어서 갈 작정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먼저 그곳에 도착해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샤이어를 한번 둘러보기도 할 겸 해서 호비튼에서 버클베리 나루터까지 넉넉히 시간을 잡고 걸어갈 예정이었다. "걸어가면 건강에도 좋겠지." 휑뎅그레 비어 있는 마루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걸려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요즘 들어선 장거리 도보여행을 해본 적도 없는 데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이 모습이 너무 나약해 보인다고 느꼈다. 점심 때가 막 지나서 로벨리아와 머리카락이 꼭 모래빛깔처럼 누르께한 그녀의 아들 로도가 나타나서 프로도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이젠 드디어 우리집이 됐어." 로벨리아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부산을 떨어 댔다. 그녀의 그런 말은 방정맞게 들릴 뿐만 아니라 엄격히 따지면 틀린 말이었다. 백 엔드의 매매계약은 자정부터 유효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벨리아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칠십칠 년 동안이나 백 엔드를 욕심내 왔고, 이제 그녀의 나이도 백 살이 되었다. 여하튼 그녀가 나타난 것은 매매계약이 된 물건들을 실어가지 않았나 확인하고 열쇠를 받아 놓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물품대장을 가져와서 꼬치꼬치 따졌기 때문에 조사를 끝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녀는 보조열쇠를 받아가지고 로도와 함께 떠났고, 나머지 열쇠는 백쇼트가 갬기네 집에 맡겨 놓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래도 코방귀를 뀌면서 밤새 갬기네가 백 엔드를 온통 뒤질지도 모른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프로도는 그녀에게 맹물 한 사발도 대접하지 않았다. 그는 부엌에서 피핀과 샘 갬기와 직접 차를 끓여 마셨다. 샘이 '프로도의 새집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 버크랜드로 함께 떠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졌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샘의 아버지 햄 개퍼는 로벨리아와 이웃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단히 불쾌해 있었지만 샘이 프로도를 따라 집을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백 엔드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프로도는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그들은 로벨리아가 뒤처리를 하도록 설거지 그릇을 그대로 내팽개쳐 두었다. 피핀과 샘은 세 꾸러미의 짐을 잘 묶어서 현관에 쌓아 놓았다. 피핀은 정원을 산책해야겠다고 나갔고 조금 있다가 샘도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가 뚝 떨어졌다. 어둠이 슬픔과 함께 어수선한 백 엔드를 찾아 들었다. 프로도는 정든 방들을 둘러보면서 석양이 담장 아래로 깔리며 땅거미가 차츰 밀려오는 정원을 지켜보았다. 그는 천천히 대문 쪽으로 나가 집을 벗어나고 고샅길로 접어들었다. 그 앞쪽 어둠 속에서 갠달프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별빛은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밤 공기가 상쾌한데. 출발이 괜찮은 셈이군. 부쩍 걷고 싶은 마음이 당기는군. 이제 그만 꾸물대고 떠나야겠어. 갠달프 선생도 뒤따라오겠지." 그는 맏 걸음을 떼려다가 딱 멈춰섰다. 모퉁이 근처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분명히 개퍼의 목소리인데 다른 하나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말들을 나누는지 그 내용은 잘 들리지 않으나 개퍼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보니 역정을 내고 있는 듯했다. "글쎄 아니라니까요. 배긴스는 떠났다니까 그러시오. 오늘아침 날이 밝자마자 내 아들놈 샘하고 같이 갔다니까 그러시오. 짐도 다 꾸려갖고 갔다오. 그래요. 집을 팔고 분명히 떠났어요. 왜 떠났냐고요? 원 답답도 하시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 당신도 모르는 일을. 어디로 갔냐고? 그건 알지요. 버클베리라든가 어디라든가, 저 아래쪽 어딘가 봅니다. 예 그리로 가는 길은 좋다고들 합니다. 나도 그렇게 멀리는 못 가봤다오. 버크랜드 사람들은 좀 이상한 친구들이죠. 그밖엔 더 이상 가르쳐 줄 게 없소이다. 험, 그럼 잘 가시오." 언덕 아래로 급히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프로도는 이들이 언덕 위에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자기에게 커다란 안도감을 주는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 행방을 꼬치꼬치 캐묻다니 되게 일없이 호기심이 많은 친구군." 그는 개퍼한테 가서 누구였냐고 물어 볼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마음 편하게 생각해 버리고는 재빨리 백 엔드로 올라왔다. 피핀은 현관 앞에 둔 짐꾸러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인지 보이질 않았다. 프로도는 이제는 한없이 을씨년스러워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샘을 불렀다. "샘, 어딨나? 이젠 떠나야지." "예, 곧 가요." 저 안쪽에서 대답이 들리더니 곧 입을 소매로 쓱쓱 닦으면서 샘이 나타났다. 그는 광 속에 있는 맥주통에 작별인사를 하고 왔던 것이다. "자, 이제 출발할까?" "예, 좋습니다. 이제 한참 동안은 잘 견디겠는데요." 프로도는 둥근 문을 닫아 걸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 열쇠를 샘에게 주었다. "샘, 이것을 집에 갖다놓게. 그리고 지름길로 해서 가능한 한 빨리 목초지 건너 오솔길 입구에서 만나지. 오늘밤에는 마을을 지나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눈과 귀가 온통 우리들에게만 쏠려 있는 것 같거든." 샘은 재빨리 뛰어내려갔다. "자, 드디어 출발이다." 프로도가 말했다. 그들은 짐을 어깨에 메고 단장을 짚고 모퉁이를 돌아 백 엔드 서쪽으로 내려갔다. "안녕!" 모든 불이 다 꺼지고 깜깜한 어둠만 내비치는 창문에 프로도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흔들고는 돌아서서 정원 사이로 난 좁은 길로 페레그린을 따라 급히 내려갔다.(그는 잘 몰랐겠지만 빌보도 그와 똑같은 길로 백 엔드를 떠났었다) 그들은 언덕 기슭에 있는 낮은 생울타리를 뛰어넘어 풀잎에 스치는 바람처럼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들판 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서쪽 언덕 아래로 난 오솔길 어귀에 다다랐다. 거기서 일단 멈춰서 등짐의 끈을 조정하고 있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샘이 나타났다. 그는 무거운 지을 양 어깨 위에 높이 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펠트천으로 만든 높고 볼품 없는 가방을 이고서는 모자라고 익살을 떨었다. 어둠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은 꼭 난쟁이 같았다. 프로도가 말했다. "내 등짐 속엔 무거운 것만 골라 넣은 것 같군. 달팽이가 얼마나 불쌍한지 이제 알 것도 같아. 집을 등에 지고 살아야만 하니 얼마나 무겁겠어." "제가 좀더 질 수 있겠는데요. 제 짐은 가벼워요." 샘은 일부러 자기 짐은 가볍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이 뻔한 소리를 했다. 피핀이 샘을 말렸다. "아니, 샘 그럴 필요 없어요. 오히려 건강에 좋을 거예요. 프로도 짐 속에는 우리한테 집어넣으라고 부탁했던 것밖에는 없어요. 요즘 들어 형편없이 약골이 돼서 그렇지 좀 걸어가다 보면 가볍다고 할거예요." 프로도는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이 늙은 호비트에게 자비를! 버크랜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버드나무처럼 등이 휠 것이 확실하군. 하하하... 농담일세. 샘이 오히려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다음에 쉴 때 짐을 나누도록 하지." 그는 다시 단장을 집어들었다. "자, 우리 모두 야간행군을 좋아하니 잠자기 전에 한참 걸어 보세." 그들은 서쪽으로 소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는 그 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다시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생울타리와 관목숲 경계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갔고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이 가는 길목마다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마법의 반지를 끼고 있는 것처럼 어둠에 묻혀 형체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호비트였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가는 소리는 다른 호비트들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들판과 산 속의 짐승들도 그들의 야반도주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후 그들은 좁은 나무다리로 호비튼 서쪽의 강을 건넜다. 강은 꼬부라진 검은 리본처럼 보였고 물가엔 오리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일이 마일 정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브랜디와인 다리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 재빨리 건넜다. 그들은 이미 투크랜드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린 힐로 향했다. 첫번째 산비탈을 오르면서 그들은 뒤로 돌아서서 강변의 포근한 골짜기에 아득하게 반짝이고 있는 호비튼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산자락에 가려 불빛은 곧 사라졌고 회색 연못가에 있는 바이워터의 불빛이 나타났다. 마지막 농가의 불빛이 나무들 사이로 가물가물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프로도는 뒤로 돌아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저 골짜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 세 시간 가량 행군하고서 그들은 휴식을 취했다. 밤공기는 맑고 시원했고 하늘엔 별이 총총했지만 담배연기 같은 안개가 개울이나 깊숙한 초원에서부터 산비탈로 기어오르고 있었고, 잎이 얼마 남지 않은 자작나무들이 머리 위로 부는 미풍에 흔들리며 창백한 하늘에 검은 그물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호비트치고는) 매우 간소한 식사를 한 후에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의 어둠 속으로 멀리 희미한 회색의 띠처럼 뻗어 있는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우드홀과 스톡, 그리고 버클베리 나루터러 연결되는 길이었다. 호비튼의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와 산 속으로 이어진 그 길은 그린 힐의 외곽을 돌아 이스트파딩의 황량한 오지인 우디 엔드까지 닿아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어둠 속에서 마른 잎들을 날리고 있는 높은 나무들 사이로 깊숙하게 파묻혀 있는 험로로 접어들었다. 사방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이제는 호기심많은 이목들로부터 자유로웠으므로 그들은 이야기도 하고 나지막하게 노래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리없이 행군을 하던 피핀이 차츰 뒤로 처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가파른 비탈을 오를 때쯤 해서는 걸음을 멈추고 하품을 했다. "너무 졸려서 길바닥에 쓰러질 것 같아요. 서서 잠을 잘 작정인가요? 벌써 자정이 가까운 것 같은데요." 프로도가 대답했다. "난 자네가 야간행군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지. 메리가 모레 만나자고 했으니까. 아직 이틀은 더 여유가 있어. 쉴 만한 데가 나오면 숨 좀 돌리고 가지." 샘이 말했다. "산 너머 저쪽에 가면 바람이 불지 않는 아늑한 곳이 나올 것 같아요. 제 기억이 맞다면 바짝 마른 전나무숲이 있었던 것 같고요." 호비튼에서 이십 마일 이내는 샘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지리지식의 한계였다. 그들은 산꼭대기를 넘어서 전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길 옆으로 벗어나 송진냄새가 나는 캄캄한 숲 속으로 들어간 일행은 불을 지피기 위해 땔나무와 솔방울을 주워 모았다. 그들은 곧 커다란 전나무 밑동 근처에 불을 피웠다. 잘 마른 나뭇가지는 탁탁 튀는 소리를 내며 유쾌하게 타올랐고 호비트들은 불가를 빙 둘러 전나무 뿌리 틈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보초를 세우지 않았다. 프로도 역시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샤이어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불이 사그라들자 짐승이 몇 마리 다가와서 잠든 그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눅눅한 공기를 실은 아침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프로도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그는 나무뿌리에 대고 잤던 등 근처의 살이 우묵하게 눌린 것을 알았다. 목도 뻐근했다. "재미삼아 걷겠다고? 왜 말을 타지 않았지?" 여행을 시작하고난 이후 죽 그래왔듯이 그는 아침부터 혼자 불평을 늘어놓으며 중얼거렸다. "내 폭신한 깃털 침대는 새크빌 배긴스네에게 팔아 버렸으니 원! 이 따위 나무뿌리는 그치들한테나 어울릴 텐데." 그는 기지개를 켜면서 소리쳤다. "일어나게, 호비트들! 상쾌한 아침이야!" "뭐가 그리 상쾌해요?" 피핀은 한쪽 눈만 담요 한귀퉁이로 내밀고 짜증을 부렸다. "샘! 아홉시 반까지는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해! 세숫물 데워 놓았나?" 프로도는 샘에게도 심통을 부렸다. 샘은 벌떡 일어나면서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익살을 부렸다. "아뇨, 나으리. 아직 안 됐는뎁쇼, 나으리." 프로도는 피핀의 담요를 걷어 내며 그를 옆으로 한 바퀴 굴렸다. 그리고 숲 저쪽으로 걸어갔다. 동쪽 저 멀리서 사방을 온통 뒤덮고 있는 안개를 뚫고 태양이 빨갛게 떠올랐다. 황금빛과 붉은빛을 받은 가을 나무들은 마치 어둑어둑한 바다 위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배 같았다. 그들 왼편으로는 가파른 비탈길이 아래쪽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샘과 피핀은 불을 활활 피워 놓고 있었다. "물! 물은 어디 있어요?" 피핀이 소리쳤다. "난 물을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진 않아." 프로도가 대답했다. "물을 뜨러 가신 줄 알았지요." 피핀이 부산하게 음식과 그릇을 챙기면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가보세요." "자네도 같이 가지. 물통을 모두 가져오게." 언덕 밑에 개울이 있었다. 그들은 이삼 피트 정도 되는 높이에서 회색 암반 위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에서 작은 야외용 주전자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들은 물을 첨벙거리며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짐을 모두 다시 챙기고나니 열시가 넘었다. 날씨가 개면서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탈길을 내려가 길을 가로지르고 있는 개울을 건넜다. 다시 오르막이 나타났고 그 뒤로도 한 번 더 오르막 내리막이 있었다. 그때쯤 되어서는 그들의 외투와 담요, 물, 식량, 그리고 기타 장비들은 벌써 너무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행군은 무덥고 지루한 길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마일 걸어가자 비탈길은 끝이 났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따라 가파른 산비탈의 꼭대기에 파김치가 되어 올라서자 마지막 내리막이 나타났다. 그들 앞으로 관목숲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저지대가 펼쳐졌고 그 끝은 갈색 산안개로 덮여 있었다. 그들은 우디 엔드 너머에 있는 브랜디와인 강 쪽을 바라보았다. 길은 한 오라기 실처럼 구불구불 펼쳐져 있었다. 피핀이 말했다. "원, 길이 가도가도 끝이 없군. 난 이제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점심 먹기 딱 좋은 시간인데요." 그는 길가에 퍼더버리고 앉아 멀리 동쪽의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 강 너머에는 고향 샤이어가 있었다. 샘이 다가와서 그 옆에 섰다. 샘은 피핀에게 물었다. "저 숲 속엔 요정들이 있을까요?" 피핀이 대답했다. "글쎄, 난 아직 그런 말 못 들어 봤는데요." 프로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도 역시 처음 와 본 곳이었다. 그는 길을 쭉 따라 동쪽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천천히 마치 독백하듯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오. 문을 나서면 내리막길 길은 저 멀리 아득히 이어졌는데 이제 나는 힘닿는 데까지 걸어가야 하리. 팍팍한 두 다리를 끌고, 큰길이 보일 때까지 많은 사람들과 길을 만날 때까지 그 다음엔 어디로? 난 모른다오. 피핀이 말했다. "어쩐지 빌보 아저씨의 노랫가락 같군요. 아니면 비슷하게 한 곡조 지은 거예요? 여하간에 누구 노래건 맥빠지기는 한가지인데요." 프로도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마치 내가 만든 노래처럼 방금 내 머리 속에 떠올랐지. 아마 오래 전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던 노래인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길을 떠나기 몇 년 전의 빌보 아저씨 모습이 눈에 선하군.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가끔 말씀하시곤 하셨지. 길은 커다란 강 같은 것이라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만나는 모든 길은 강의 지류처럼 하나로 이어진다는 거야. '프로도, 문을 열고 나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일단 길을 떠난 뒤에는 발길을 조심하지 않으면 어디로 휩쓸려 갈지 모르는 일이지. 이 길은 바로 머크우드로 가는 길인데. 그대로 두면 외로운산까지 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더 무서운 곳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느냐?' 그분은 백 엔드의 현관 앞 길에서 특히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지."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해요. 이 길르 쭉 따라가도 한 시간 내로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피핀은 등짐을 벗어 내리며 말했다. 프로도와 샘도 짐을 강둑에 기대 놓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그들은 잠시 쉬고 나서 점심을 양껏 먹은 뒤에 또다시 오랜 시간 쉬었다. 그들이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쯤 해는 점점 나른한 오후의 들판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들이 가는 길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길은 마차들이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좁아서인지 우디 엔드로 가는 마차는 거의 없었다. 다시 한 시간 가량 부지런히 걸었을 때 샘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뭔가를 듣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이제 평지로 내려와 있었고 구불구불 했던 길도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풀밭 사이로 곧게 뻗어 있었다. 저 멀리엔 다시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샘이 말했다. "조랑말인지 큰 말인지 모르겠지만 뒤쪽에서 뭔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요."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길이 굽어서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다. "갠달프가 우릴 뒤쫓아오는 소린지도 모르겠군." 프로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자 갑자기 뒤쫓아오는 사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별탈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하는 일을 누가 본다거나 쑥덕거리는 데는 이제 진저리가 난다니까. 그런데 혹시 갠달프라면..."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어야지. 이렇게 늦은 데 대한 벌로 말이야. 그러면 일단 숨도록 하세." 샘과 피핀은 재빨리 길 왼쪽으로 뛰어들어 길에서 멀지 않은 우묵한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프로도는 숨어야겠다는 생각과 누군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며 잠시 망설였다.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는 길가에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는 큰 나무 뒤의 큼직한 덤불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땅 위로 튀어나온 굵은 뿌리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모퉁이를 돌아 흑마 한 마리가 휙 달려왔다. 호비트들의 조랑말이 아니라 큰 말이었다. 말 위에는 체격이 아주 큰 사나이가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두건이 달린 검은 외투를 푹 둘러쓰고 안장 위에 웅크리고 있어서 높은 등자 위에 놓인 구두만 보였다. 그의 얼굴은 두건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말은 나무 가까이 프로도가 있는 지점에 이르자 멈춰섰다. 말탄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건 안으로부터 사라진 어떤 냄새를 맡으려는 듯 킁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는 길 양쪽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프로도는 갑자기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갠달프의 충고도 잊고 주머니 속에 있는 반지를 끼고 싶은 욕망이 간절해져 조금씩 몸을 뒤채기 시작했다. 반지만 끼면 살 수 있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갠달프의 충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빌보도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손에 닿는 순간 말탄 사람은 몸을 일으켜 고삐를 흔들었다. 말은 앞발을 내디디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프로도는 길가로 기어나와서 말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오른쪽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어쨌든 기분나쁜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동료들에게로 걸어갔다. 피핀과 샘은 풀밭 위에 납작 엎드려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그 말탄 사람과 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나를 찾기 위해 냄새를 맡았던 것이 틀림없어. 본능적으로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샤이어에서는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피핀이 물었다. "큰 사람(인간)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리고 여길 뭐하러 왔을까요?" "이곳까지 돌아다니는 큰 사람들이 더러 있지. 내가 알기로는 사우스파딩에서는 큰 사람들과 다투기까지 했다던데. 하지만 지금 막 지나간 말탄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 어디서 왔을까?" 그때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샘이 끼어들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요. 한 사람뿐이라면 방금 그 사람은 호비튼에서 오는 길일 거예요.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것 같아요." 프로도는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샘?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지금 막 생각났을 뿐이에요.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어제저녁 열쇠를 가지고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어찌된 일이냐, 샘? 난 네가 오늘아침 일찍 프로도씨와 함께 떠난 줄 알았다. 백 엔드의 배긴스씨를 찾는 어떤 낯선 사람이 왔다가 방금 떠났단다. 버클베리로 가보라고 했지. 목소리가 영 기분나쁜 사람이었어. 배긴스씨가 옛 집을 영원히 떠났다고 알려 주니까 대단히 난처한 표정을 짓더라. 나를 보면서 쳇! 하고 못마땅하다는 소릴 냈는데 어찌나 소름이 끼치던지.'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비트는 아니었어.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었는데 나를 내려다볼 정도였어. 외지에서 온 인간들 중의 하나인 것 같더라. 목소리가 웃기던데' 하고요." 샘은 변명을 덧붙였다. "그때는 바빠서 더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여기 오면 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기력이 쇠약해지신 데다가 눈도 침침하신데 그 사람이 언덕에 올라와서 아버지가 동네 입구에서 바람을 쐬시는 것을 보았을 때는 날도 꽤 어둑했었대요.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좀 진작 말씀드릴걸." 프로도가 말했다. "너의 아버지 잘못이 아니야. 사실 그 낯선 사람과 너의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소리는 나도 듣긴 했지. 나를 찾는 것 같길래 하마터면 나가서 누구냐고 물어 볼 뻔했거든. 네가 좀더 일찍 이야기해 주었으면 도중에 더 조심을 했을 텐데." 피핀이 말했다. "하지만 아까 그 말탄 사람과 샘 아버지가 만난 낯선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호비튼을 빠져나왔는데 그 낯선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따라왔겠어요?" 샘이 물었다. "뭣 때문에 냄새를 맡고 다닐까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사람이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하셨어요." 프로도는 중얼거렸다. "갠달프를 기다릴걸 그랬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지도 몰라." "그러면 그 기사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단 말이에요?" 프로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피핀이 물었다. "모르겠어. 추측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네." "좋아요, 프로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당분간은 비밀로 묻어 두세요. 우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 봐요. 제 생각에는 간단하게 배를 채운 다음 일단은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어요. 낯선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는 코를 가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닌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데요." "그렇게 하세. 내 생각에도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낫겠어. 그러나 오던 길로는 말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꽤 많이 걸어야겠어. 버크랜드까지는 아직 멀었으니까." 그들이 다시 출발할 땐 나무들이 풀밭 위로 가늘고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길 왼쪽으로 약간 벗어나서 몸을 숨기며 걸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긴 풀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나뭇가지들마저 덤불 사이로 서로 뒤엉켜 있어서 그것도 쉽진 않았다. 그들의 등뒤 언덕 너머로 석양은 붉은빛을 뿌리며 사라졌고, 해가 넘어갈 때쯤 그들은 기다란 평지가 시작되는 것에서 다시 길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길은 몇 마일 가량 곧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스톡으로 향하는 예일 저지대로 이어졌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작은 샛길이 하나 갈라져 나와 참나무고목숲을 지나 우드홀로 향하고 있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야." 그들은 갈림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고목을 발견했다. 나무는 아직 살아 있어서 오래 전에 떨어져나간 큰 가지의 그루터기 근처에는 나뭇잎이 달린 잔가지도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틈새가 벌어져 있고 속도 텅 비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호비트들은 나무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낙엽과 썩어문드러진 나무조각들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가벼운 식사를 했으며 가끔 귀를 기울여가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이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어스름이 그들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서풍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면서 나뭇잎들과 속삭이고 있었다. 길은 곧 완만하게 내리막으로 경사가 졌고 차츰 어둠 속으로 접어들었다. 어두워져 가는 동쪽 하늘에 나무들 위로 별이 하나 나타났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하고 발맞춰서 용감하게 걸어갔다. 잠시 후 별이 더 많아지고 밝아지면서 그들의 불안감은 없어졌고 마침내 말발굽소리까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호비트들이 길을 갈 때 흔히 그렇듯이(특히 밤에 집 가까이 돌아올 때) 낮은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개의 호비트들은 그때 저녁식사나 잠자리에 관한 노래를 불렀으나 이 호비트들은(물론 저녁식사나 침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노래는 빌보 배긴스가 옛 민요가락에 노랫말을 붙여 만든 것인데 워터벨리의 산길을 걸으면서 프로도에게 모험담을 이야기하다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난로 위엔 불꽃이 새빨갛고 지붕 밑엔 포근한 침대 있으나, 우리의 발길 아직 피곤을 모르니 저기 길모퉁이 돌아가면 아직 아무의 손길도 닿지 않은 불쑥 나타나는 나무, 바위. 나무와 꽃, 잎과 풀 그것들을 지나! 그것들을 지나! 푸른 하늘 아래엔 언덕과 강 그것들을 지나! 그것들을 지나! 저기 모퉁이를 돌아가면 낯선 길, 비밀의 문이 있으나 오늘 그 길을 지나가도 내일 다시 이 길을 오면 숨겨진 길이 다시 나타나 해와 달로 나를 이끌리니. 사과나무, 가시나무, 호두와 오얏 그것들을 지나! 그것들을 지나! 모래와 바위, 연못과 골짜기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등뒤엔 고향집, 눈앞엔 먼 나라 어둠을 지나 밤의 모퉁이까지 가야 할 길은 끝이 없지만, 동트고 새벽별이 고개숙일 때까지 등뒤엔 먼 세상, 눈앞엔 고향집 고향집에 돌아가 편히 쉬라니. 안개와 황혼, 구름과 어둠 떠나거라! 떠나거라! 불꽃과 등불, 고기와 빵 꿈나라로! 꿈나라로! 노래가 끝나자 피핀은 소리를 질렀다. "자, 꿈나라로! 자, 꿈나라로!" 프로도는 나직한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쉿!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들은 귀를 쫑긋하며 나무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일어섰다. 저 멀리 뒤쪽 어디에선가 말발굽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서서히 다가왔다. 그들은 재빨리 길에서 벗어나서 참나무 아래 그늘로 기어들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너무 멀리들 가지는 마. 발각되고 싶지는 않지만 암흑의 기사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피핀이 거들었다. "그게 좋겠어요. 하지만 놈들은 냄새를 잘 맡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나무 밑 그늘말고는 더 좋은 은신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샘과 피핀은 커다란 나무 밑에 납작 엎드렸고 프로도는 다시 길 쪽으로 몇 미터를 기어갔다. 길은 숲 속으로 스며든 한 줄기 희미한 빛처럼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그 위 어두운 하늘엔 별빛이 가득했고 달은 보이지 않았다. 말발굽소리가 뚝 그쳤다. 프로도는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쓱 들어선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말의 검은 그림자가 그보다 작은 형체의 그림자에게 끌려가는 것 같았다. 작은 그림자는 길을 벗어나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프로도는 킁킁거리는 콧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림자는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프로도 있는 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프로도는 반지를 끼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프로도는 참기 어려운 그 유혹을 견디며 손으론 무심결에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노래와 엇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말의 그림자 위로 잽싸게 올라타더니 길 건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프로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샘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요정들, 요정들이에요. 프로도씨!" 그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샘은 나무 사이에서 뛰쳐나와 그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프로도가 말했다. "그래, 요정들이 틀림없는 것 같군. 그들은 가끔 우디 엔드까지 나타나지. 물론 샤이어엔 요정들이 살지 않지만 봄가을엔 탑언덕까지 가는 길에 샤이어를 지나간다고들 하더니 오늘은 정말 고마운 일을 하는군. 자네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암흑의 기사가 바로 저기 노랫소리를 듣더니 번개같이 사라져 버린 거야." 샘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암흑의 기사 따위는 잊어버린 듯했다. "잠깐 가서 요정들을 보면 안 될까요?" "아, 기다려. 들어 보게! 그들은 이리로 오고 있어.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돼."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맑은 어떤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들에 섞여 들리면서도 그 목소리만 알아들을 수 있게 도드라졌다. 요정의 언어로 부르는 노래였다. 프로도는 그 말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샘과 피핀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프로도가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흰 눈 같은! 흰 눈 같은! 오, 순결한 여인이여! 오, 서쪽 바다 건너의 여왕이여! 오, 여기 어지러운 숲 속의 세계를 방황하는 우리들의 빛이시여! 길도니엘! 오, 엘베레스! 그대의 맑은 눈동자, 빛나는 숨결! 흰 눈 같은! 흰 눈 같은! 우리는 그대를 노래한다오! 바다 건너 머나먼 땅에서. 태양이 없던 시절 빛나는 그대 손으로 심은 별들이여! 이제 맑고 환한 바람부는 들판에서 우리는 그대의 은빛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나니! 오, 엘베레스! 길도니엘! 이역만리, 숲 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네, 서쪽 바다 위 그대의 별빛을! 노래가 끝났다. 프로도는 사뭇 놀라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저들은 귀족요정들이야. 엘베레스를 노래하고 있어. 저 아름다운 요정들이 샤이어에 오는 거의 없는데. 중간계에 남아 있는 이들도 그리 많진 않고. 근데, 어쩐 일일까? 참 알 수 없는 일이군." 호비트들은 길가에 앉았다. 요정들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지나갔고 호비트들은 그들의 머리와 눈동자가 별빛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등불 같은 것은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걷는 동안, 마치 달이 떠오르기 전 산등성이 위로 희뿌연 달빛이 드러나듯 희미한 빛이 그들의 발길 언저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노래를 그치고 조용해졌다. 맨 뒤에 따라가던 요정 하나가 호비트들을 보고 웃었다. 그는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프로도씨! 이렇게 늦은 밤에 어딜 가시오? 혹시 길을 잃은 거 아니오?" 그는 일행을 불러세웠다. 요정들은 멈춰서서 호비트들을 둘러쌌다. 그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정말 내일은 해가 서쪽으로 뜨겠군! 한밤중에 난데없이 숲 속에 호비트 세명이 나타났으니. 빌보가 떠난 뒤로는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이오?" 프로도가 대답했다. "귀하신 분들, 우리는 단지 우연히 여러분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된 것뿐입니다. 난 별빛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같이 가시겠다면 기꺼이 환영합니다." 또 한 요정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린 동행이 필요없답니다. 혹시 동행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호비트들은 너무 따분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 일행과 방향이 같은지 모르지 않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텐데요." "그러면 내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린 아는 게 많다오. 당신은 우리를 보지 못했겠지만 우린 당신이 빌보와 함께 있는 것을 가끔 보았다오." "실례지만 당신들은 누구시죠? 어느 분이 대장이십니까?" 프로도에게 처음 인사를 했던 요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납니다. 나는 길도르요. 핀도르가의 길도르 잉글로리온이오. 우린 유랑객이오. 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오래 전에 떠났고, 우리도 대해를 건너가기 전에 여기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이지요. 아직 우리말고도 리벤델에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요정들도 남아 있지만. 자, 그러면 프로도씨,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겠소? 당신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덮여 있는 것이 보이오." 피핀이 용감하게 끼어들었다. "오, 현명하신 분들! 암흑의 기사들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암흑의 기사들? 왜 암흑의 기사들에 대해 묻는 것이오?" "암흑의 기사 두 명이 우릴 쫓아왔어요. 한 명이 두 번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바로 조금 전에 당신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황황히 사라졌지요." 그 말을 듣고 요정들은 자기네들의 언어로 의논을 하는 모양이었다. 길도르가 호비트들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군요. 우리와 같이 가십시다. 우리들 관습에는 어긋나지만 오늘밤은 우리들과 같이 가도록 하시지요. 원하신다면 잠자리도 함께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오, 고마우신 분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행운이군요." 피핀이 말했다. 샘은 어안이 벙벙해서 입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프로도가 공손하게 절을 하며 감사의 말을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길도르 잉글로리온. 엘렌 실라 루멘드 오멘티엘보, 우리들의 만남을 축복하는 별이 빛납니다." 그는 귀족들의 언어로 인사를 덧붙였다. 길도르가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들, 조심해야겠네. 여기 고대어를 알고 있는 학자 양반이 계시니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게. 빌보도 고대어엔 상당한 대가였지." 그는 프로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 요정의 친구, 이제 당신 친구들도 우리와 같이 가도록 합시다.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들 사이에 들어오는 것이 낫겠지요. 먼 길을 걸어야 하니 피곤할 겁니다." 프로도가 말했다. "아니, 어디로 갑니까?" "오늘밤 우린 우드홀 너머 산 속의 숲까지 가야 합니다. 상당히 먼 거리이긴 하지만 거기 가서 쉬도록 하지요. 그러면 내일 여행길도 짧아질 거니까요." 그들은 다시 말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요정들의 모습은 때로는 그림자 같기도 했고 희미한 빛 같기도 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호비트들보다 더) 교묘하게 발소리나 자취도 없이 걸을 수 있었다. 피핀은 곧 졸리기 시작했고, 몇 번인가 쓰러질 뻔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옆에서 걷던 키 큰 요정이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샘은 프로도 옆에서 마치 꿈속을 헤매듯 반은 기쁘고, 반은 두려운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길 양쪽의 숲은 더욱 울창해졌고 특히 어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길이 더 낮아지면서 언덕 사이의 우묵한 곳으로 접어들자 양쪽 산비탈에는 개암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요정들은 드디어 도로를 벗어나서 오른쪽 숲에 감춰진 녹색의 길을 찾아들었다. 그 길은 나무가 우거진 비탈을 돌아 올라가서 산꼭대기로 이어졌고 그곳에서는 강변 계곡에 연해 있는 저지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들은 나무들이 우거진 어둠 속을 뚫고 나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잿빛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넓은 풀밭을 바라보았다. 풀밭은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동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경사지가 있었고 그들 발치의 비탈 아래서 자라는 나무들의 "꼭대기가 비쭉 솟아 있었다. 저 멀리에는 별빛 아래로 저지대의 평평하고 희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가까이엔 우드홀 마을의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요정들은 풀밭에 앉아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더 이상 호비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프로도와 일행은 외투와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졸음이 그들을 엄습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골짜기의 불빛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피핀은 푸른 풀로 덮인 흙더미를 베개삼아 깊이 잠이 들었다. 동편 하늘 위론 그물 모양의 성좌인 레미라스가 올라왔고 붉은 보르길 별이 안개를 뚫고 천천히 불꽃을 내는 보석처럼 떠올랐다. 곧이어 공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베일처럼 드리워진 안개가 걷히고 하늘의 검객 메넬바고스가 번쩍이는 띠를 두르고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요정들은 합창을 시작했고 갑자기 나무 아래에서 빨간 불꽃이 일었다. 요정들은 호비트들을 불렀다. "이리들 오시오! 이제는 이야기를 나누고 즐길 시간입니다." 피핀은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그는 떨고 있었다. "저기 마당엔 불이 있고 시장하실 손님들께 드릴 음식이 있답니다." 그 앞에 서 있던 어떤 요정이 말했다. 남쪽 끝 빈터에는 숲 속까지 녹빛 풀밭이 잇닿아 있어 나뭇가지로 지붕을 이은 넓은 마당 같았다. 주위엔 커다란 나무들이 기둥처럼 버티고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는 금빛, 은빛의 횃불들이 차분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빈 잔에 술을 채우는 요정들도 있었고 접시에 음식을 담는 요정들도 있었다. 그들은 호비트들에게 말했다. "변변히 차린 것은 없습니다만 많이들 드십시오. 집 떠나 이런 숲 속에서 손님을 대접하자니 별수 없군요. 다음엔 집에 모시게 될 기회가 있으면 한턱 잘 내지요." "무슨 말씀을, 생일잔치 음식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는데요." 프로도가 정중하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후에 피핀은 그때 무슨 음식을 먹었고 무슨 술을 마셨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요정들의 얼굴에 빛나는 환한 빛만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갖가지 목소리도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몇 끼 굶어서 다 죽어 가던 사람이 맛있는 흰 빵을 먹을 때의 그 맛보다 더 맛있는 빵과, 산딸기보다 더 달콤하고 정원에서 기른 과일보다 더 싱싱해 보이는 과일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맑은 샘물처럼 시원하며 여름날 오후처럼 뜨겁고 향기로운 술잔을 비웠다. 샘은 그날 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고, 혼자 머리 속으로 상상해 그려 내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가 기껏 입을 열고 한 말은 이 정도였다. "프로도씨, 이런 사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만 정원사란 이름이 아깝지 않겠어요. 하지만 더 감동적인 것은 저 노랫가락이에요." 프로도는 즐겁게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주로 이야기 내용이었다. 그는 요정들의 말을 조금밖에 몰랐기 때문에 열심히 들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이따금 자기에게 음식을 날라 주는 요정들에게 요정언어로 말을 걸기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향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호비트들 중에도 보석 같은 인물이 있군요." 잠시 후 그들은 곯아떨어진 피핀을 나무 밑으로 옮겨갔다. 그는 날이 완전히 밝아 올 때까지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푹 잤다. 샘은 주인 곁을 따나려 하지 않았다. 피핀이 잠들자 그는 프로도 옆으로 다시 다가와서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나 그도 마침내 꾸벅꾸벅하더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프로도는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길도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옛날이야기에서부터 최근의 소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프로도는 샤이어 바깥의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대개 비극적이고 불길한 것들이었다. 밀려오는 어둠의 세력, 인간들의 전쟁, 요정들의 피난 등등. 프로도는 마침내 가슴 속 깊이 묻어 두고 있던 질문을 했다. "길도르, 빌보 아저씨가 우리를 떠난 후 혹시 그분을 뵌 적이 있습니까?" 길도르가 웃었다. "본 적이 있죠. 두 번 봤습니다. 바로 여기서 작별인사를 했는데 그 후로 한 번은 먼 발치에서 보았지요." 그가 그 이상은 빌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에 프로도는 잠자코 있었다. "프로도씨, 당신 문제에 대해 나에게 많은 것을 묻거나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얼마간은 짐작하고 있을뿐더러 당신 표정이나 당신 질문 뒤에 숨은 생각을 살펴보면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죠. 당신은 지금 샤이어를 떠나고 있지만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을 과연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길을 떠난 것은 갠달프와 여기 있는 충직한 샘만 아는 비밀인데 이상하군요." 프로도는 풀풀거리며 나직하게 코를 골고 있는 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입을 통해 그 비밀이 적에게 새들어가진 않을 것입니다." "적이라니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왜 샤이어를 떠나는지도 알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적이 왜 당신을 추적하고 있는지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쫓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내가 보기엔 참 별난 일이지만. 당신한테 분명히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당신 주위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사들 말입니까? 그들이 적의 하수인들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암흑의 기사들은 누구입니까?" "갠달프가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들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야기할 계제가 못 되는군요. 공포에 사로잡혀 당신이 원정을 포기하면 안 될 테니까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아주 알맞은 때에 출발한 것 같습니다. 이젠 쉬지도 말고 돌아서지도 말고 서둘러야 할 겁니다. 샤이어는 더 이상 당신의 은신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프로도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겁이 더 나는군요. 물론 나도 앞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샤이어 지역 내에 서 그런 위험이 닫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호비트가 호비튼에서 브랜디와인 강까지 마음놓고 돌아다닐 수도 없단 말입니까?" "샤이어는 당신들만의 땅이 아닙니다. 호비트들이 있기 전에는 딴 사람들이 있었고 호비트들이 떠나가면 또 다른 이들이 여기 정착할 겁니다. 넓은 세상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막아 낼 수는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너무나 평화롭고 안전한 땅이었거든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의 계획은 샤이어를 몰래 떠나서 리벤델로 가는 것이었는데 버크랜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미행을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 용기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더 분명한 조언을 바라다면 갠달프에게 여쭤 보십시오. 나는 당신이 왜 떠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추적자들이 어떤 수단으로 당신을 공격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갠달프가 잘 알고 있습니다. 샤이어를 벗어나기 전에 갠달프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사실은 그것도 걱정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실은 며칠 전부터 갠달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아무리 늦어도 그저께까지는 호비튼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무슨 변을 당한 것이 아닌지 여간 걱정스럽지 않습니다. 그를 기다려야 할까요?" 길도르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안 좋은 소식이군요. 갠달프가 약속시간에 늦다니, 어째 예감이 좋지 않은데요. 하지만 마법사들은 까다롭고 성급하니 그들의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당신이 선택하십시오. 가든 말든." 프로도는 그 말을 되받았다. "이런 말도 있지요. 요정들에겐 조언을 구하지 말라. 그들은 예스와 노를 동시에 말하니까." 길도르가 껄껄 웃었다. "그런가요? 요정들은 경솔한 충고는 하지 않지요. 충고란 위험한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서로 지혜를 주고받는 경우에도 그렇지요. 모든 길은 언제나 어긋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아직 당신 자신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조언을 구한다면 우정의 표시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지금 즉시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갠달프가 오지 않으면 이 점을 당부합니다. 혼자서는 떠나지 마십시오. 믿을 만하고 용감한 친구와 함께 떠나시지요. 당신은 내게 특별히 감사해야 할 겁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겐 우리들 나름대로의 고통과 슬픔이 있기 때문에 호비트나 지상의 다른 어떤 무리들의 일에도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우연이든 고의든 간에 우리의 길과 그들의 길은 만나는 법이 없답니다. 오늘의 이 만남은, 비록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내게는 분명히 짚이지 않지만 우연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군요." 프로도가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암흑의 기사들이 누군지 간단하게만 말씀해 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지금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면 앞으로 당분간은 갠달프를 만나지 못할 텐데, 나를 뒤쫓아오는 위험이 무엇인지 꼭 알아야겠습니다." "적의 하수인이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에게 아무 말도 걸지 마십시오! 무시무시한 무리입니다. 내게 더는 묻지 마십시오! 하지만 내 예감으로는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 당신은 이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나, 길도르 잉글로리온보다 이 끔찍한 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겁니다. 엘베레스의 가호가 있기를!" 프로도가 물었다. "하지만 어디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용기는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얻어집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이젠 그만하고 잠이나 푹 자두십시다. 아침이면 우린 떠나고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우리 방랑의 무리들은 당신의 여행소식을 항상 듣고 있을 것이며 용감한 이들이 언제나 당신 주위를 지켜 줄 겁니다. 지금부터 당신을 요정의 친구라고 부르겠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당신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 길을 비춰 줄 겁니다. 이방인을 만나서 이런 즐거움을 얻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죠. 더욱이 땅 위의 다른 방랑자의 입술에서 고대어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길도르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인데도 프로도는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젠 눈을 좀 붙여야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요정은 그를 피핀 옆의 나무 밑으로 데려갔고 그는 잠자리에 몸을 던지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제4장 머쉬룸으로 가는 지름길 프로도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는 땅바닥까지 가지가 늘어져 자신의 주위를 벽처럼 두르고 있는 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고사리와 풀잎으로 폭신폭신하게 꾸며진 그의 잠자리에선 묘한 향기가 났다.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녹빛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가지를 걷고 밖으로 나왔다. 샘은 벌써 일어나 숲과 잇닿아 있는 풀밭에 앉아 있었다. 피핀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씨를 살피고 있었지만 요정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피핀이 말했다. "요정들이 술과 먹을 것을 남겨 두고 떠났어요. 이리 와서 아침 들어요. 하룻밤 묵은 빵인데도 맛이 하나도 안 변했어요. 나는 남기지 말자고 했는데 샘이 자꾸만 당신 몫을 챙기더군요." 프로도는 샘 곁에 털썩 주저앉아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 "오늘 계획은 어때요?" 피핀이 물었다. "가능한 한 빨리 버클베리로 가야겠네." 그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계속 먹기만 했다. 피핀은 좀 기분이 나아진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기사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는 밝은 아침햇살을 다시 보자 기사들과 맞부딪친다 해도 겁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프로도는 다시 기사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나타나긴 하겠지. 하지만 놈들에게 들키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길도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요?" "뭐 별 이야기는 없었네. 잘 알아듣지도 못할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더구먼." 프로도는 그 이야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냄샐 맡으려고 킁킁거리고 다닌답니까?" "그런 건 못 물어 봤어." 그는 입에 음식을 잔뜩 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걸 물어 보셨어야 하는 건데. 난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은데." 프로도는 다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길도르는 더욱더 이야기해 주지 않으려 했을 거야. 피핀, 조금만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나? 식사를 하면서까지 자네 심문을 받고 싶진 않아. 나 혼자 생각 좀 하게 내버려 두게." "맙소사! 아침을 들면서 말이에요?" 피핀은 풀밭 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프로도 생각에 수상쩍으리만큼 맑은 날씨의 아침마저도 그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쫓기는 듯한 공포를 걷어내 주지 못했다. 그는 길도르의 충고를 곰곰이 생각했다. 피핀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푸른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혼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샤이어에서라면 아무리 피곤하고 배가 고파도 젊은 친구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어. 여긴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가 있거든. 하지만 주린 배를 채우고 피곤에 지친 다리를 쉬게 할 피난처가 아무 데도 없는 방랑의 길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은, 설사 그들이 선뜻 따라나선다 해도, 달리 생각할 문제야. 짐은 나 혼자 져도 충분해. 샘도 안 돼." 그는 샘 생각을 하다가 얼핏 고개를 돌려 곁의 샘을 쳐다보았다. 샘은 아까부터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이봐, 샘! 내 얘기 좀 들어 봐. 가능한 한 빨리 샤이어를 떠나야겠어. 크릭할로우에서 하루 정도 쉬어 갈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는 게 낫겠어." "그렇게 하죠, 프로도씨." "넌 계속 나를 따라갈 거야?" "물론이죠." "이봐, 샘! 아주 어려운 길일 텐데. 위험은 이미 시작됐어. 십중팔구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이야." 샘은 딱 잘라 말했다. "프로도씨가 못 돌아오시면 저도 안 돌아옵니다. 그들은 절대로 당신을 떠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분을 떠나다니요?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분이 달나라에 올라가면 저도 올라갑니다. 암흑의 기사들이 그분을 붙잡으려면 먼저 나부터 처리해야 할 겁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가만히 웃기만 하더군요." "그들이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군." "요정들 말이에요. 어젯밤에 그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지요. 그들은 프로도씨가 멀리 떠나시는 줄을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부인해도 소용이 없다 싶었지요. 요정들은 정말 멋진 친구들이에요." "그래? 그들을 가까이 보고나서도 그들이 좋은가?" 샘은 천천히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제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루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저 같은 게 좋아한다느니 싫어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담기에 좀 주제넘을 종족들인 것 같았어요. 물론 평소에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요. 뭐라고 할까, 그들에겐 젊음과 늙음이 함께 잇고,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고나 할까요?" 프로도는 샘을 그윽한 눈길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는 샘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변화를 그의 겉모습에서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그 소리는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쳐다보아도 이상하리만치 진지해진 표정만 제외하면 거기 앉아 있는 건 바로 옛날의 샘 갬기 그였다. 프로도는 불쑥 물었다. "이젠 요정을 보겠다는 소원도 풀었는데 굳이 샤이어를 떠날 필요가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젯밤 이후로 전 자신이 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야가 좀 트였다고나 할까요? 저는 우리가 매우 먼 길을, 어둠 속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요정이나 용을 만나러 깊은 산 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이 끝나기 전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것은 샤이어가 아니라 저 바깥세상에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 일을 끝까지 해내고 말 거예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갠달프가 친구 하나는 잘 골라 주었군. 그럼, 함께 가도록 하세." 프로도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아침식사를 끝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눈앞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피핀을 불렀다. 피핀은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벌써 출발하느냐고 외쳤다. "그래, 곧 출발해야겠어. 우린 너무 늦잠을 잤거든. 갈 길이 바쁘단 말이야." "우리가 아니라 내가라고 하세요. 나는 일어난 지 한참 되었다고요. 식사를 마치고 생각을 끝낼 때까지 우리는 계속 기다렸다니까요," "이젠 둘 다 끝났어. 어서 서둘러서 버클베리 나루터까지 가도록 하지. 어제저녁에 왔던 길로 가지 않고 여기서부터 지름길로 질러갈 생각인데, 자네 생각엔 어떤가?" "차라리 날라서 가자고 하시지 그래요. 여기서는 어디로 가더라도 걸어서는 똑바로 질러갈 수 없어요." "어쨌든 어제처럼 돌아서 가진 않을 거야. 나루터는 우드홀 동쪽에 있지만 길은 왼쪽으로 휘어지잖아. 저기 북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이 보이지? 저 길을 꺾어 돌아가면 마리쉬 북단을 돌아서 스톡으로 넘어가는 다리에서부터 방죽길을 따라 걷게 되어 있어. 하지만 그 길은 한참 돌아가야 하네. 만약 우리가 서 있는 데서부터 나루터까지 직선코스로 간다면 전체 거리의 사분의 일은 줄일 수 있을 거야." 피핀은 계속 못마땅해 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이곳은 굉장히 지새가 험해요. 마리쉬에 내려가면 늪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위험지대가 흩어져 있지요. 이 근방은 제가 좀 알기에 하는 소리예요. 또 암흑의 기사들과 맞부딪치더라도 숲 속이나 들판보다는 도로가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 "숲 속이나 들판에서는 사람들 눈을 피하기가 훨씬 쉽잖은가. 우리가 길 한복판에 있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항상 발각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야. 도망도 갈 수 없고 말이야." 마침내 피핀은 승복했다. "좋습니다. 늪이든지 개천이든지 어디든지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해가 지기 전에 스톡에 있는 황금횃대주점에서 한잔 걸치려던 꿈은 버려야겠군요. 맛을 본 지가 꽤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타딩에서는 그 집 맥주가 최고 아니예요?" "그게 자네 속셈이었지? 하지만 그래, 자네 말대로 바쁠수록 돌아가야겠지만 술독에 빠져 버리면 더 늦어지지 않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금횃대는 피해야겠는걸. 어두워지기 전에 버클베리에 도착하고 싶네. 샘은 어때?" "프로도씨와 함께 가겠어요." 샘이 대답했다(다소 불안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이스파딩 최고의 맥주맛을 놓치는 데 대한 깊은 유감도 섞여 있었다). 피핀이 말했다. "그렇다면 늪과 찔레나무 사이로 뚫고 나가야겠군요." 날은 벌써 전날 못지않게 푹푹 찔 기세였다. 서쪽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호비트들은 가파른 둑을 기어 내려가서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계획은 왼편의 우드홀을 지나 산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우거진 숲을 뚫고 나가서 그 아래 평지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실개천이나 울타리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나루터까지 계속 훤히 트인 평지였다. 프로도는 직선거리로 약 십 마일 가량 되겠다고 어림했다. 그런데 숲은 보기보다 훨씬 더 울창하고 빽빽해 만만치가 않았다. 숲 속 덤불 사이로는 길이 전혀 나 있지 않아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둑 아래로 내려갔을 때 그들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양쪽 계곡 사이 어디쯤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을 발견했다. 개울은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딱 가로막고 있었다. 건너뛰기에는 폭이 너무 넓었고 발을 적시자니 질척질척한 개울 바닥 때문에 영 기분이 개운치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그대로 서 있었다. 피핀은 난감해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외쳤다. "일차 장애물!" 샘 갬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방금 내려온 푸른 둑의 꼭대기가 나뭇가지들 틈새로 얼핏 드러났다. 그는 프로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저것 좀 보세요!" 그들은 모두 그쪽을 돌아다보았다. 언덕꼭대기에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 한 마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검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되돌아갈 생각은 아예 포기해야 했다. 샘과 피핀은 프로도를 따라 재빨리 개울가에 우거진 덤불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프로도는 피핀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자네 주장도 일리가 있군. 지름길이 벌써 어긋났으니 말이야. 제때 몸을 피했으니 다행이지만. 귀가 상당히 밝군, 샘!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그들은 거의 숨을 죽이다시피 꼼짝 않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쫓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말을 끌고 이 비탈을 내려올 생각은 못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눈치챈 것 같으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낫겠는데요." 샘이 말했다. 계속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등에는 짐을 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관목이나 덤불숲이 그들의 발길을 자꾸 가로막았다. 등뒤에 버티고 있는 높은 언덕 때문에 바람길이 막혀서 숲 속은 고요했고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숲을 벗어났을 때 그들의 몸은 온통 긁힌 상처와 땀투성이였고 피로는 극에 달했다. 이젠 방향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평지에 내려와서는 폭도 넓어지고 깊이도 얕아진 개울은 마리쉬와 브랜디와인 강을 향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피핀이 말했다. "아, 이제 알겠어요. 이 강은 스톡 강이군요! 우리가 원래 가던 길로 가려면 여기서 강을 건너 방향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발을 적셔가며 개울을 건너 나무는 없고 골풀만 우거진 둑 위의 넓은 공터로 올라섰다. 그 너머로는 다시 숲지대가 나타났다. 대부분 키 큰 참나무였고 여기저기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눈에 띄기도 했다. 땅바닥은 비교적 평평하고 덤불도 많지 않았으나 나무가 너무 빽빽이 들어서 있어서 앞길을 잘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한 차례 돌풍이 일어 낙엽들이 땅 위로 구르더니 우중충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듣기 시작했다.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그들은 서둘러 풀밭을 지나 나뭇잎들이 두텁게 깔린 숲 속으로 들어갔다. 사방에서 빗소리가 후두둑거렸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않고 계속 등뒤와 양 옆을 경계해 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 지 한 삼십 분 가량 지났을 때 피핀이 입을 열었다. "남쪽으로 너무 많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혹시 이 방향이 남쪽 아닐까요? 원래 넓은 숲이 있을 리 없을 텐데 이상하군요. 기껏해야 일 마일 가량 될까 싶은데, 지금쯤은 이미 숲을 벗어났어야 하는 건데." 프로도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돌아서 가도 소용이 없어. 계속 직진하세. 아직은 평지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그들은 약 이 마일 가량을 더 걸었다. 흩어진 구름조각들 사이로 햇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벌써 한낮이 지났고 그들은 몹시 배가 고팠다. 그들은 어떤 느릅나무 밑에서 멈춰섰다. 나뭇잎들은 단풍이 든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달려 있었고 나무 밑도 생각보다는 물기가 없어서 앉을 만 했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요정들이 그들의 물병에다 연노란 빛의 맑은 물을 가득 채워 놓은 것을 알았다. 물에선 고운 꽃냄새가 났고 꿀맛같이 시원했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암흑의 기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떠들고 웃었다. 남아 있는 몇 마일의 거리도 곧 끝날 것 같았다. 프로도는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샘과 피핀은 그 옆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낮은 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호! 호! 호! 술을 마신다 고통을 잊고 시름을 달래려고. 비가 내리고 바람불어 아직 갈 길은 멀어도 고목 아래서 휴식을 취하리 구름이 흘러갈 때까지. 호! 호! 호! 그들이 흥에 겨워 큰 소리로 다시 노래를 시작했을 때 프로도가 벌떡 일어났다. 피핀과 샘도 갑자기 노래를 뚝 그쳤다. 외로운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소리는 높이 올라가다가 낮아지더니 마지막으로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고 끝났다. 그들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는 동안 그 울부짖는 소리에 대답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먼젓것보다 더 먼 데서 들려오는 소리였으나 소름이 끼치기는 한가지였다. 그 다음에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뿐, 다시 사방은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피핀은 소리를 죽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무슨 소리 같아요? 새소리 같기도 한데 저런 소리는 샤이어에선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프로도가 대답했다. "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부르는 소릴세. 일종의 신호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저 소리엔 분명히 무슨 뜻이 담겨 있었어. 하지만 어느 호비트도 저런 목소리를 낼 수는 없어."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제각기 암흑의 기사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거기 그렇게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고 떠나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에 넓은 들판을 건너 나루터가지 가야만 했고 그러자면 가능한 빨리, 해 떨어지기 전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어깨에 짐을 메고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숲이 갑자기 끝나고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제서야 그들은 남쪽으로 너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원 저쪽 강 건너에는 버클베리의 야산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이제는 그들의 왼쪽에 있었다. 숲가에서 조심스럽게 기어나온 그들은 탁 트인 풀밭을 서둘러 건너기 시작했다. 평지만 펼쳐진 곳이라 처음에는 방패막이가 없어서 겁이 났다. 등뒤 멀리에 그들이 아침을 먹었고 고지가 보였다. 프로도는 능선 위에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던 말탄 사람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는 흔적도 없었다. 그들이 떠나온 산 너머로 멀어져 가는 태양이 조각구름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다시 대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공포심은 이제 그들을 떠났다. 땅이 차츰 평평해졌고 마침내 그들은 경작이 잘 된 밭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는 생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배수를 위한 수문과 도랑이 나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것이 전형적인 샤이어 마을이었다. 이제 그들은 발걸음을 내디딜수록 더 힘이 났다. 강줄기가 더 가까워지면서 암흑의 기사들은 저 멀리 두고 떠나온 숲 속의 유령들처럼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커다란 무밭 가장자리를 돌아 튼튼하게 만들어진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 뒤로는 잘 가꾸어진 낮은 생울타리 사이로 바퀴자국이 난 진입로가 한 무리의 나무숲을 향해 나 있었다. 피핀은 멈춰섰다. "이 밭과 문이 누구네 것인지 알 것 같은데요. 밤펄롱이에요. 그 늙은 농부 매고트의 땅이지요. 저 숲 뒤에는 그의 농장이 있고요." "갈수록 태산이군!" 프로도는 피핀이 가리키는 곳이 마치 도깨비소굴이라도 되는 양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피핀이 물었다. "그 늙은 매고트가 어떻다고 그래요? 그는 브랜디버크 집안과는 좋은 친구 사인데요. 물론 불법침입자들은 무서워하겠죠. 그가 사나운 개들을 기르고 있으니까요. 하여간 이 근방에 사는 이들은 모두 조심을 하기는 해야지요." 프로도는 열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그 노인과 그 개들이 무서워. 그의 농장을 피해 다닌 지가 오래되었거든. 내가 브랜디 홀에 있을 때 그의 버섯밭을 서리하다 몇 번 붙잡힌 적이 있지. 마지막으로 붙잡혔을 때는 나를 마구 패더니 개들 앞으로 끌고 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얘들아, 잘 봐라. 다음번에 이 꼬마도둑놈이 들어오면 잡아 먹어도 좋다. 알겠어? 자, 쫓아내 버려!' 그때 그 개들은 나루터까지 나를 쫓아왔었지. 사실 개들은 자기 임무가 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나를 잡아먹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졸아붙는다네." 피핀이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화해할 시간이 되었군요. 특히 앞으로 버크랜드에 정착해 살게 될 테니까 말이에요. 그의 버섯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는 사실 잘 지낼 수 있는 친굽니다. 진입로만 따라가면 가택침입이 아닐 테니까 안심하시고 이 길을 따라갑시다. 그를 만나면 내가 이야기하겠어요. 그는 메리의 친구이기도 해서 한때는 여기 같이 자주 왔었어요." 그들이 길을 따라 한참 걸어갔을 때 눈앞의 나무들 사이로 큰 초가집과 농장건물들이 내다보였다. 매고트나 스톡의 푸디푸트 집안을 비롯한 마리쉬의 주민들은 대부분 토굴집이 아니라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매고트의 농장은 튼튼한 벽돌로 벽을 쌓고 둘레에는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진입로와 담이 만나는 곳에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나무대문이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개들이 사납게 짖어 대기 시작했고 곧이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개들을 불렀다. "그립! 팽! 울프! 얘들아, 이제 그만!" 프로도와 샘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고 피핀은 몇 걸음 더 걸어갔다. 대문이 열리더니 큰 개 세 마리가 사납게 짖어 대면서 길가로 튀어나와 낯선 이들한테 덤벼들었다. 개들은 피핀을 알아보지 못했고 샘은 담에 바짝 기대 몸을 웅크렸다. 늑대처럼 생긴 두 마리 개가 수상스럽다는 듯 그 옆을 빙빙 돌며 코를 킁킁대다가 그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마구 짖어 댔다. 셋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 프로도 앞에 딱 버티고 서서 고리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그때 혈색좋아 보이는 둥근 얼굴에 어깨가 딱 벌어지고 땅딸막한 호비트가 문간에 나타났다. "어이! 어이! 누구쇼, 무엇들 하고 계시오?" 피핀이 나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매고트씨!" 농부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피핀군 아닌가? 페레그린 투크였지, 아마?" 찡그린 얼굴을 웃는 표정으로 바꾸며 그가 소리쳤다. "자넬 못 본 지도 참 오래되었구먼. 지금 막 낯선 사람들을 쫓으려고 개들을 풀어 놓으려던 참이었네. 오늘은 이상한 날이야. 물론 이 근방에는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지나가곤 했지만. 강이 너무 가까워서 그런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근데, 오늘 여기 들른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상한 녀석이었어. 다음에는 절대로 허락없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해야겠어." 피핀이 물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습니까?" 오히려 농부가 되물었다. "그러면 자네들은 그 사람을 못 봤단 말인가? 조금 전에 방죽길을 따라 올라갔네. 이상한 사람이었어. 이상한 질문도 많이 했고, 어쨌거나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세. 자네와 친구들이 원한다면 술통에 있는 좋은 맥주도 내놓겠네." 농부가 하고 싶은 대로만 내버려 두어도 그는 그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프로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개는 괜찮습니까?" 농부는 웃었다. "내가 시키지 않으면 자넬 물지는 않을 걸세. 이리와, 그립! 팽! 힐!" 그는 개들을 불러들였다. "힐, 울프!" 개들이 농부 쪽으로 물러나면서 샘과 프로도를 풀어 주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핀은 둘을 농부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프로도 배긴스예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한때 브랜디 홀에 살았었지요." 농부는 배긴스란 이름에 깜짝 놀라며 프로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로도는 옛날 버섯을 훔치다 들켜서 개한테 혼이 난 일을 농부가 기억해 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농부 매고트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군. 배긴스라고 했나? 이리들 들어오게! 이야기 좀 하세." 그들은 농부의 부엌으로 들어가서 난롯가에 앉았다. 매고트 부인이 커다란 항아리에 든 맥주를 가져와 네 개의 큰 술잔을 가득 채웠다. 술맛이 일품이어서 피핀은 황금횃대를 놓친 데 대한 대가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샘은 술잔에 조심스럽게 입을 댔다. 그는 샤이어의 다른 지방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대해 원래부터 불신감이 있었을 뿐 아니라 먼 옛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주인을 때렸던 호비트와 쉽게 사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날씨와 농사(평년수준은 된 듯했다)에 대해 몇 마디 나눈 후 농부 매고트는 술잔을 내려놓고 그들을 하나씩 둘러보고나서 말했다. "자, 페레그린. 어디서 오는 길이고 또 어디로 가는 길인가? 혹시 날 찾아온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날 만나지도 않고 그냥 지나갈 셈이었나?"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짐작하신 대로, 우린 반대쪽에서 들어왔어요. 밭을 가로질러 온 셈이지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나루터로 가는 지름길을 찾다가 우드홀 근처 어딘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요." "급한 길이었으면 여길 들르지 않아도 괜찮았을걸 그랬군. 하지만 내 걱정은 그게 아닐세. 필요하다면 우리 밭을 가로질러 가도 괜찮네, 페레그린. 그런데 배긴스, 아직도 버섯을 좋아하지는 모르겠고만, 자네 이름은 금방 기억나는군. 어린 시절의 프로도 배긴스는 버크랜드의 악동들 가운데에서도 유명했었지.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그런 일이 아니야. 자네가 여기 나타나기 바로 전에 배긴스란 이름을 들었거든. 아까 말한 그 이상한 사람이 내게 뭘 물었는지 알겠나?" 그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농부는 천천히 뜸을 들이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흑마를 타고 열린 대문으로 달려들어와 바로 내 앞에 섰어.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정체를 드러내기가 싫은지 외투에다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더군. 그래서 도대체 저런 친구가 샤이어엔 무슨 볼일이 있을까 하고 혼자 생각했지. 사실 변경지방 말고는 샤이어에 인간들이 나타난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여하튼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안녕하시오!' 하고 문 밖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지. '이 길은 막혔소. 어딜 가시는지 모르지만 돌아가시는게 좋습니다' 했더니 그 사람은 영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군. 그때 그립이 뛰어나왔는데 그를 보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라고. 그립도 기분나쁜지 컹 하고 한 번 짖더니 꼬리를 사르고 으르렁거리며 달아나 버렸어. 그 검은 사람은 꼼짝도 않고 말 위에 앉아 있고 말이야. 그는 '저쪽에서 오는 길이오' 하고 천천히, 딱딱하게 말하면서 서쪽 내 밭 쪽을 가리키더군. 그리고는 날 향해 몸을 기울이며 이상한 목소리로 '배긴스를 보았소?' 하고 묻더구먼. 모자를 너무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오싹하는 느낌이 들었어. 하지만 그가 왜 우리 땅에 들어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구는지 이유를 모르겠더군.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가시오. 여기는 배긴스라고는 아무도 없소이다. 잘못 찾아왔소.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호비튼이라는 마을이 있으니 그리 가보시오.' 그러자 그자는 낮은 소리로 '배긴스는 떠났소. 이리로 오고 있소.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요. 그를 만나야 할 일이 있소. 혹시 그가 지나가면 알려 주겠소? 황금을 가져다주겠소'라 그러겠지. 그래서 그럴 필요 없다. 지금 즉시 돌아서지 않으면 개를 풀어 혼내 주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자가 이상한 쉿 소리를 냈는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소리였어. 그리고는 바로 커다란 말을 나를 향해 몰아대 하마터면 깔릴 뻔했지. 화가 나서 개들을 불렀는데 그놈은 벌써 홱 돌아서서 대문을 지나 번개같이 방죽길 쪽으로 달려가 버렸어.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프로도는 잠시 불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머리 속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나루터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프로도는 한참 감나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매고트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 주지. 프로도, 자넨 호비튼의 친구들과 너무 오래 같이 있었던 거야. 거긴 전부 이상한 친구들뿐이잖는가?" 샘은 의자에서 몸을 떨며 날카로운 눈으로 노인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자네는 어려서부터 항상 겁이 없었지. 자네가 브랜디버크에서 나와 늙은 빌보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자네가 또 큰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지. 잘 들어 보게. 이 모든 일이 그 이상한 빌보 때문에 생긴 거 아닌가? 소문에는 그의 돈이 교묘한 방법으로 먼 나라에 옮겨졌다던데. 또 호비튼 언덕 밑에 파묻혀 있다는 황금과 보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치들도 많다네."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부의 심술궂은 추측에 조금은 기분이 상했다. "자, 프로도, 자네가 버크랜드로 돌아오게 되어 반갑네. 내 충고는 이것일세. 여기 정착하게! 그리고 그 이상한 사람들 일에는 휩쓸리지 말게. 자넨 여기 친구도 많이 있잖은가. 그 검은 녀석이 다시 찾아오면 내가 해결해 줌세. 자네가 죽었다고 하거나 아니면 샤이어를 떠났다고 꾸며 대지. 하여튼 자네 좋을 대로 해서 돌려 보내지. 그러면 충분할 거야. 그들이 찾는 것은 십중팔구 그 늙은 빌보에 관한 소식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프로도는 농부의 눈길을 피해 불을 바라보았다. 매고트는 그를 유심히 살피며 다시 말했다. "자네는 지금 딴 생각을 하고 있군. 그러고 보면 자네가 그 기사가 오늘오후 거의 동시에 나타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네. 게다가 내 이야기도 결국 자네에겐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게 되겠지. 자네 혼자 지켜야 할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하진 않겠네. 다만 내가 보기에 자네는 큰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데, 나루터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실은 그렇습니다.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거기까지 가야 해요.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거든요. 지금 곧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지난 삼십 년간 어르신네와 어르신에 개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그 동안 좋은 친구를 모르고 지낸 셈이니까요.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더니 이젠 가보아야 하겠어요.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꼭 들르도록 하지요." "언제라도 좋네. 하지만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날도 거의 저물었으니 우리 식구는 곧 식사를 할 걸세. 해만 지면 전부 잠자리에 들거든. 자네나 페레그린이 괜찮다면 소찬이나마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게 어떻겠나?" "정말 감사합니다만 우린 지금 즉시 떠나는 게 좋겠어요. 지금 떠난다 해도 어두워지기 전에 나루터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아, 잠깐만! 그 이야기를 막 할 참이었네. 식사를 간단히 한 다음 내가 작은 마차로 자네 일행을 나루터까지 실어다 줌세. 그러면 시간도 절약될 거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법도 될 테니까 말이지." 프로도는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고 피핀과 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갔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고트의 두 아들과 세 딸이 들어오고 성대한 만찬이 커다란 식탁 위에 차려졌다. 부엌은 숯불로 환하게 밝혀졌고 난롯불로 새로 활활 타올랐다. 매고트 부인이 부산하게 움직였고 농장에서 일하는 한두 명의 호비트들도 들어왔다. 잠시 후 모두 열네 명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맥주와 버섯과 베이컨이 상 위에 가득 차려졌고 농장에서 수확한 야채들을 이용한 요리도 많았다. 개들은 난롯가에 앉아서 과일껍질과 뼈다귀들을 핥았다. 식사를 마치자 농부와 아들들은 등불을 가지고 나가 마차를 준비했다. 일행이 밖으로 나왔을 때 마당은 이미 캄캄했다. 그들은 짐을 싣고 올라탔다. 농부는 마부석에 앉아 건장한 두 마리 조랑말에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부인이 문을 열어 놓은 채 문간에 서서 외쳤다. "여보, 조심하세요! 낯선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곧바로 돌아오시고요." "알았소." 그는 대문 밖으로 마차를 몰았다. 사방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고 차가운 밤공기가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은 등불을 켜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한두 마일 지나자 길이 끝나고 깊은 도랑이 앞을 가로막으며 짧은 오르막 비탈이 높은 방죽길로 이어졌다. 매고트는 마차에서 내려 남쪽과 북쪽을 살펴보았으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지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가느다란 강안개 줄기가 도랑 위로 올라와 들판 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매고트가 말했다. "안개가 짙어지는군. 하지만 돌아갈 때까진 등불을 켜지 않겠네. 오늘밤에는 십리 밖의 소리도 들릴 것 같군." 매고트의 진입로에서 나루터까지는 오 마일 남짓했다. 호비트들은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삐걱이는 바퀴소리와 따각거리는 말발굽소리 사이로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프로도에게는 마차가 달팽이보다도 더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옆에는 피핀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샘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나루터 입구에 이르렀다. 그들 오른쪽으로 불쑥 나타난 두 개의 커다란 흰 기둥이 그 표지였다. 매고트가 고삐를 당기자 삐걱 소리를 내며 마차가 멈췄다. 그 순간 그들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갑자기 그들이 두려워하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멀리 앞쪽에서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였다. 발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안개낀 고용한 밤공기를 타고 크게 울려펴졌다. 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프로도씨, 숨는 것이 낫겠어요. 마차 속으로 들어가 담요로 몸을 감추세요. 우리가 저놈을 쫓아 버릴게요." 샘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농부 옆에 섰다. 암흑의 기사들이 마차에 접근하려면 먼저 자기부터 물리치지 않고는 안 될 거라는 기세였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기사는 그들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 잠깐만!" 매고트가 불렀다. 다가오던 말발굽소리가 급히 멈췄다. 그들은 일이 미터 앞 안개 속에서 검은 외투를 입은 형체를 어렴풋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농부는 샘에게 고삐를 건네주고 앞으로 걸어갔다. "자! 가까이 오지 마시오! 원하는 게 뭐요? 어디 가는 길이오?" "배긴스를 찾고 있어요. 혹시 못 보았어요?" 둔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건 메리 브랜디버크의 목소리였다. 희미한 등불 가리개가 벗겨지며 놀란 농부의 얼굴 위로 불빛이 쏟아졌다. "메리!" "예, 그래요! 누군 줄 아셨어요?" 메리는 다가서며 물었다. 그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의 공포심은 가라앉았고 메리의 모습도 보통 크기의 호비트로 줄러든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있었으며 안개를 피하기 위해 목에서 턱까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프로도가 마차에서 내려 반겨 맞았다. 메리가 말했다. "마침내 도착했군요. 오늘쯤은 도착하실 것 같아 기다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어요. 안개가 좀 심하기에 강을 건너 스톡까지 가봤죠. 혹시 어디 도랑에라도 굴러 떨어지지나 않았나 걱정이 되어서요. 도대체 어느 길로 오셨는지 모르겠어요. 매고트씨, 이분들을 어디서 만나셨어요? 아저씨네 오리 연못에서였나요?" "아닐세. 우리집에 몰래 숨어들어왔길래 붙잡았지. 하마터면 개들을 풀어 놓을 뻔했네. 하지만 자네 친구들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겠지. 그러면 나는 이만 실례하겠네, 메리, 프로도, 그리고 나머지 분들도. 집에 가봐야겠어. 밤이 깊어지면 집사람이 걱정하거든." 그는 마차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자, 여러분 모두 안녕!" 그는 인사를 하며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야. 문간에 발을 들여놓기까지는 안심해선 안 되겠지만 하여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집엔 무사히 도착하겠지." 매고트 노인은 등불을 켜들고 마차에 올랐다. 갑자기 그는 자리 밑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를 꺼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매고트 부인이 배긴스씨에게 선사하는 걸세." 그는 바구니를 내려 주고는 감사와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떠나갔다. 그들은 마차의 등불이 안개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등불이 그리는 희미한 동그라미 불빛을 지켜보았다. 프로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열었다. 버섯향기가 피어 올랐다. 제5장 발각된 계획 메리가 말했다. "자, 이젠 집으로 갑시다.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궁금하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진 참아야겠네." 그들은 나룻가를 돌아 내려갔다. 잘 닦인 길이 똑바로 뚫려 있었으며 양쪽 길가에는 회칠된 연석들이 길을 따라 죽 받혀 있었다. 백 야드쯤 가서 강둑이 나타났다. 강물 위에는 나무로 된 넓은 부잔교가 떠 있었고 그 옆에 바닥이 평평한 큰 나룻배 한 척 대어져 있었다. 강가에는 흰 계선주들이 높은 장대에 달린 두 개의 등불 아래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안개가 벌써 생울타리 위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눈앞의 강물은 어둠침침해 오로지 강변 갈대 사이로 일어나는 수증기만이 도깨비불처럼 몇 군데 보일 뿐이었다. 건너편에는 안개가 그리 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메리가 조랑말을 끌고 부잔교를 지나 나룻배에 오르자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이 전부 배에 오르자 메리는 긴 장대로 천천히 배를 밀었다. 브랜디와인 강은 그들을 태우고 유유히 흘렀다. 건너편 강둑은 경사가 심해 선착장으로 이어진 길은 비스듬하게 뻗쳐 있었다. 강변에서는 등불이 빛났고 그 뒤로 버크 힐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냈다. 뿔뿔이 흩어진 안개자락 사이로 산기슭의 노랗고 빨간 둥근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브랜디버크가의 고옥 브랜디 홀의 창문들이었다. 먼 옛날 마리쉬 지방, 아니 샤이어에서 가장 유서깊은 가문 중의 하나인 올드버크가의 수장 고르헨다드 올드버크가 원래 그 땅 동편 경계였던 브랜디와인 강을 건너왔었다. 그는 브랜디 홀을 지은 후 자신의 이름마저 브랜디버크로 바꾸었으며 그곳에 정착해 주인이 되었다. 그 후 그 땅은 작은 독립왕국처럼 되어 버렸다. 그의 가족은 점점 불어나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번성해 마침내 브랜디 홀은 아래쪽 산기슭까지 전부 차지하게 되었고 세 개의 커다란 현관, 여러 개의 작은 문, 그리고 백 개 이상의 창문을 가진 작은 성채와 같은 굴을 이룬 것이었다. 브랜디버크의 직계와 방계 그리고 많은 식객들은 그 주변의 땅을 다시 뚫어 나가며 집(토굴)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버크랜드의 시작이 되었으며 브랜디와인 강과 올드 포레스트 사이의 인구밀집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일종의 샤이어 식민지와도 같은 셈이었다. 그 중심도시는 브랜디 홀 뒤편의 언덕과 강둑에 집단부락을 이룬 버클베리였다. 마리쉬의 주민들은 버크랜드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브랜디 홀공(브랜디버크가의 우두머리)의 권위는 스톡과 러쉬 사이에 살고 있는 모든 농부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샤이어에 살고 있던 호비트들은 버크랜드의 호비트들을 괴상한 친구들, 말하자면 절반 이방인들로 여겼다. 사실 그들은 샤이어의 다른 지역 호비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배를 좋아한다는 점, 어떤 이들은 수영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들의 땅은 원래 동쪽으로는 무방비였으며 그쪽에 하이 헤이라는 숲지대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숲은 오래 전에 형성된 것이었고 그 동안 꾸준히 손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크고 무성한 나무들로 울창했다. 그 숲은 브랜디와인 다리에서부터 동쪽으로 곡선으로 그리며 강에서 멀어지다가 헤이센드(올드 포레스트에서 시작된 위디윈들 강이 브랜디와인 강으로 흘러드는 곳)까지 이어졌다. 숲은 그 직선거리가 이십 마일이 넘었다. 하지만 그 숲이 충분한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올드 포레스트와 그 숲이 닿는 접경이 몇 군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샤이어에서는 그런 일이 없지만 버크랜드인들은 해가 지면 꼭 대문을 걸어 잠갔다. 나룻배는 천천히 강을 가로질렀다. 버크랜드 강변이 가까워졌다. 일행 중에서 샘만이 유일하게 그 강을 건너 본 적이 없었기에 콸콸거리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사뭇 남다른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뒤편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앞에는 오로지 어두운 미지의 세계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프로도가 백 엔드에서 조용히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네 명의 호비트는 나루터에 발을 디뎠다. 메리가 배를 고정시키는 동안 피핀이 조랑말을 길 위로 끌어올렸다. 샤이어에 작별을 고하기라도 하듯 건너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샘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프로도씨, 저것 좀 보세요. 뭐가 보이지 않아요?" 멀리 강 건너 등불 아래 부잔교 위로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들이 깜박 잊고 온 짐꾸러미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그 형체는 땅바닥을 더듬어 살피는 듯 이쪽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몸을 낮추어 기다시피해 등불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저게 뭐예요?" 메리가 소리쳤다. "우릴 쫓아오던 놈이야. 그러나 지금은 묻지 말게! 어서 떠나세!" 프로도가 대답하자 그들은 서둘러 급히 강둑 위로 올라갔다. 강둑 위에서 다시 건너편을 바라보았지만 모든 것이 안개 속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편에 배가 남아 있지 않아 천만다행이군! 말이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그러자 메리가 대답했다. "브랜디와인 다리까지는 북쪽으로 이십 마일이나 돼요. 아니면 헤엄을 쳐야 하지요. 하지만 말이 브랜디와인 강을 헤엄쳐 건넜다는 소린 못 들어 봤어요. 그런데 말이 무슨 상관이에요?" "다음에 얘기해 주지. 집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하세." "좋아요. 길을 알고 있죠? 내가 먼저 가서 패티 볼저한테 오신다고 얘기해야겠어요. 저녁식사도 준비해야겠고요." "우린 벌써 매고튼네 집에서 먹었네만 한 끼 더 먹을 수도 있겠지." "물론이죠! 그 바구니 이리 주세요." 메리는 말을 마치고 어둠 속을 달려나갔다. 브랜디와인 강에서 크릭할로우에 있는 프로도의 새 집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그들은 버크 힐과 브랜디 홀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버클베리 교외에서 버크랜드 간선도로로 들어갔다. 그 길은 브랜디와인 다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도로였다. 북쪽으로 반 마일 가량 그 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갈라져나간 작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오르막 내리막을 넘으며 이 마일 가량 행군을 계속했다. 마침내 그들은 생울타리가 촘촘하게 쳐진 작은 대문 앞에 이르렀다. 주위는 이미 깜깜해졌기에 집의 형체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울타리 안쪽에 심어진 작은 관목들로 빙 둘러싸인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집 한 체가 서 있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프로도가 직접 선택한 집이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버클베리에서도 외딴 구석에 위치해 있었고 근방에 아무도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집이었다. 그 집은 오래 전에 브랜디버크가에서 지은 것이었다. 손님들이나 브랜디 홀의 복잡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가족들을 위한 집이었다. 구식 농가였지만 가능한 한 호비트들의 토굴집을 본뜨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길고 나지막한 형태와 이층이 없다는 점, 뗏장으로 덮인 지붕, 동그란 창문, 커다란 둥근 현관문 등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입구로부터 녹색 길을 걸어 올라갈 때까지 전혀 불빛이 비치지 않았고 창문에는 가리개가 내려져 있었다. 프로도가 문을 두드리자 패티 볼저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불빛이 열린 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넓은 홀 양쪽으로 문이 나 있었고 정면에는 집의 중심부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다. 메리가 통로로 올라오며 말했다. "자, 어때요? 짧은 시간 동안 살 만한 집으로 손보아 놓느라 둘이서 애를 먹었어요. 패티와 내가 마지막 짐차를 끌고 온 게 어제였거든요." 프로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늑한 집이었다. 그가 즐겨 쓰던 옛 물건들이 - 혹은 빌보의 물건들이(그것들은 그 새로운 환경에도 빌보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일깨워 주었다) - 가능한 한 백 엔드에서와 똑같이 배열되어 있었다. 즐겁고 편안하고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문득 자기가 정말로 이 집에서 조용히 눌러 살려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이토록 번잡한 일을 시킨 것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곧, 정말 지금 즉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쨌든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감탄했다. "정말 멋진데! 다시는 이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군!" 일행은 외투를 벗어 걸고 짐을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메리는 그들을 통로 아래로 안내해 맨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불빛이 새나오며 뜨거운 김이 그들을 덮었다. 피핀이 소리쳤다. "목욕탕! 오, 메리아독, 고마우셔라!" 프로도가 말했다. "누구부터 할까? 나이 순서대로 할까, 아니면 제일 먼저 옷을 벗는 사람이 먼저 하도록 할까? 어쨌든 자넨 꼴찌겠군, 페레그린."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 내게 맡겨요. 크릭할로우에서의 새 출발을 목욕탕 때문에 싸우면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목욕탕 안에는 욕조가 세 개 있고 가마솥에는 펄펄 끓는 물이 가득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수건하고 깔개, 비누도 전부 준비되어 있으니 어서 들어가세요. 빨리요!" 메리와 패티는 통로 반대쪽 끝에 있는 부엌으로 가서 때늦은 저녁식사를 차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음식을 손보았다. 목욕탕에서는 첨벙거리며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흘러나왔다. 피핀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른 목소리를 압도하면서 빌보의 유명한 목욕탕 노래들 중 하나를 뽑아 냈다. 헤이, 노래부르세! 피곤한 땀을 씻어야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목욕! 노래하지 않는 자는 멍청이. 오, 뜨거운 물은 고상한 위안! 오, 떨어지는 빗소리도 달콤하고 산과 들을 건너뛰는 냇물소리 달콤하지만 빗소리보다 물소리보다 달콤한 것, 그건 김이 오르는 뜨거운 물! 오, 타는 목마름을 축이는 냉수만큼 반가운 것은 없지만 더 반가운 건 모자랄 때 마시는 맥주, 등줄기로 쏟아붓는 뜨거운 물! 오, 하늘 밑 하얀 샘물에 튀어오르는 물방울도 아름답지만 어떤 샘물소리보다 더 달콤한 것은 두 발로 뜨거운 물을 첨벙거리는 소리! 요란하게 물 튀는 소리가 나더니 프로도가 우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피핀이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메리는 문 앞으로 가서 외쳤다. "저녁식사와 맥주는 잊어버린 거야?" 프로도가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 "온통 물바다라서 모두 치워 놓고 식당으로 가겠네." "맙소사!" 메리는 탕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바닥은 온통 물바다였다. "목욕탕 청소 끝내기 전에는 밥 먹을 생각 마, 페레그린. 늦게 오면 국물도 없을 거고." 그들은 부엌 난롯가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세 분 손님께서는 설마 버섯을 드시고 싶진 않으시겠지?" 프레데가가 크게 희망을 품지 못하고 묻자 아니나다를까 피핀이 소리쳤다. "더 먹어야지!" 그러자 프로도도 외쳤다. "그건 내꺼야! 그 여왕처럼 고귀하신 매고트 부인께서 내게 주신 거니까 자네들은 욕심부릴 생각 마. 내가 공평하게 나눠 줄 테니까." 호비트들은 욕심쟁이 인간들보다도 훨씬 더 버섯을 좋아한다. 프로도가 어릴 때 멀리 마리쉬의 유명한 버섯밭까지 원정을 갔던 것이나 버섯을 도둑맞을 뻔했던 매고트가 그리도 화를 냈던 것을 보면 조금은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먹성좋은 호비트들에게조차 충분할 정도의 양이었다. 그 밖에도 먹을 것이 많아 식사를 마쳤을 때는 뚱보 패티 볼저마저도 너무 먹었다면서 숨을 씨근거렸다. 그들은 식탁을 물리고 난롯가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메리가 말했다. "설거지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먼저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어. 아마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던 모양인데. 나를 빼놓았다니 섭섭하군.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해 줘. 우선 매고트 영감은 어떻게 만났고 왜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는지 말이야. 그 영감 목소리가 어쩐지 겁을 먹은 것 같던데." 잠시 후 피핀이 입을 열었다. 프로도는 불을 응시할 뿐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어. 너도 이틀 동안 암흑의 기사들에게 쫓겨보면 아마 그렇게 되었을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검은 말을 탄 사람 말이야. 프로도씨는 말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니 내가 자세히 말해 주지." 그리고나서 그는 호비튼을 출발한 순간부터 그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샘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며 이야기를 도왔다. 프로도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아까 강 건너에 있던 검은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면 모두 꾸며 낸 이야기하고 생각했을 거야. 매고트 아저씨 목소리도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지. 어떻게 생각해요, 프로도?" 메리가 묻자 피핀도 거들었다. "너무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털어놓을실 때도 됐잖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들은 것이라고는 빌보의 보물과 관련되었을 거라는 매고트 영감의 추측뿐이잖아요." "추측일 뿐이지. 매고트는 아무것도 몰라." "매고트 영감은 눈치 하나는 빠른 양반이지요. 그 둥글둥글한 얼굴 뒤에는 이야기는 안해도 많은 것이 숨어 있거든요. 내가 듣기론 언젠가 그는 올드 포레스트까지 가봤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또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요. 여하간 그의 추측이 맞는지 틀리는지만 말해 보세요." 프로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정확한 추측이야. 빌보 아저씨의 옛날 여행과 관계가 있거든. 게다가 그 기사들이 찾고 있는 이도 빌보 아저씨 아니면 나야. 자네들은 듣고 싶어 안달이지만 난 자네들이 이 말을 농담으로 여길까 봐 걱정이 돼. 여기 이 집이나 다른 어느 곳도 내겐 안전하지가 않아." 그는 창문과 벽이 혹시 갑자기 무너지지나 않을까 겁에 질린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호비트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곧 나오겠지?" 피핀이 메리에게 속삭였고 메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도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몸을 일으켜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군. 자네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그런데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제가 좀 도와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메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프로도는 그를 불안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지요, 프로도. 지금 작별인사를 어떻게 할까 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거죠? 물론 그 말은 샤이어를 떠나 신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위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닥쳐서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우리들도 모두 이해하고 있어요." 프로도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의 놀란 표정이 너무 재밌어서 다른 호비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피핀이 나섰다. "존경하는 프로도, 정말 우리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었다면 그건 별로 지혜롭지도 용의주도하지도 못했어요. 지난 4월부터 분명히 호비튼과 샤이어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요.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걸 우린 여러 번 들었거든요. '내 다시 이 골짜기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등의 탄식 말이에요. 그리고는 돈이 다 떨어져 버린 척하면서 정들었던 백 엔드까지 그 새크빌 배긴스한테 정말 팔아 버리신 거예요. 그리고 갠달프와 나누었던 밀담도 그렇고요." 프로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맙소사! 난 상당히 용의주도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 지경이군. 갠달프가 알면 뭐라고 할까. 그러면 내가 떠나는 것을 샤이어의 모두가 다 알고 있을까?"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 점은 걱정 안해도 돼요. 물론 이 비밀이 오래 가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현재로는 우리만 알고 있을 거예요. 결국 우리가 당신을 잘 알고 있고 함께 지낸 시간이 종종 있었던 걸 알잖아요. 우린 당신이 뭘 생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난 빌보 아저씨도 역시 알고 있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분이 떠난 뒤부터 당신을 주의깊게 관찰한 셈이지요. 그리고 조만간에 그분을 따라 떠나실 거라고 짐작했었어요. 실은 이보다 더 일찍 떠나시지 않나 예상했었으니까 사실 우린 최근 들어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지요. 빌보 아저씨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슬쩍 떠나 버리시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지난봄부터 우리는 항상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우리 나름대로 상당히 계획도 세웠지요. 이젠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난 가야 해. 어쩔수 없는 일이야. 고마운 친구들,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나를 붙잡으려 해봤자 소용없어. 그 정도까지 깊이 생각들 했다면 이젠 나를 도와 주게. 막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이번엔 피핀이 말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가셔야지요! 다만 우리도 함께 가는 겁니다. 메리와 저는 같이 가기로 했어요. 샘도 좋은 친구니까 당신을 구하는 일이라면 호랑이굴에라도 뛰어들겠지요. 발을 헛디뎌 넘어 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에요. 여하튼 이 위험한 여행길에는 친구가 여럿 필요할 거예요." 프로도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사랑하는 친구들! 하지만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나 역시 오래 전에 결정한 일이야. 자네가 지금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과연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네들은 짐작도 못할 거야. 이건 보물찾기도 아니고 빌보 아저씨의 여행처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행도 아니야. 나는 지금 필사의 탈출을 하는 거야." 그러자 메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가기로 결정한 거예요. 우리는 그 반지가 웃어넘길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기 위해 가는 거예요." "반지라고?" 프로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예, 그 반지 말이에요. 존경하는 프로도, 친구들의 눈치를 과소 평가했군요. 난 오래 전부터, 실은 빌보 아저씨가 떠나기 전부터 그 반지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이 그것을 분명히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음모를 꾸미기 전까지는 제 머리 속에만 간직해 두고 있었지요. 전 물론 당신을 아는 만큼은 빌보 아저씨를 잘 모르지요. 전 나이도 어렸고 그분 역시 대단히 조심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분도 그렇게 철저하지는 못하셨어요. 혹시 제가 그것을 처음 알아차리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지금 말하지요." "계속해 보게." 프로도가 나직하게 말했다. "혹시 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실수하게 된 건 바로 새크빌 배긴스네 때문이었어요. 그 파티가 있기 일 년 전 어느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빌보 아저씨가 앞에 계시는 걸 봤어요. 그때 갑자기 저 앞쪽 멀리에서 그 녀석들이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더군요. 빌보 아저씨는 발걸음을 늦추더니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전 너무 놀라서 어디 마땅하게 숨을 곳을 찾아볼 여유조차 없었어요. 그리고 그녀석들이 지나갈 때까지 길 쪽을 뚫어지게 살펴보았지요. 그때 갑자기 빌보 아저씨가 다시 나타났어요. 바지주머니 속으로 뭔가를 집어넣는데 금빛이 번쩍거리더군요. 그 후로 유심히 지켜보았지요. 사실 감시를 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지요. 하지만 그건 너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거였고 그때 전 십대였잖아요. 그분의 비밀의 책을 본 호비트는 당신말고는 샤이어 전체에서 아마 저 하나뿐일 거예요." 그러자 프로도가 소리쳤다. "그의 책을 봤다고? 맙소사, 이젠 비밀이라곤 없군."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딱 한 번, 그것도 흘끗 보았을 뿐이에요. 빌보 아저씬 항상 책 곁을 떠나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 책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다시 한번 보고 싶거든요. 혹시 지금 가지고 계세요?" "아니야. 그건 백 엔드에 없었어. 그분이 가져가셨을 거야." 메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까 말했듯이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하던 올봄까지는 저 혼자만 알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리들 몇이서 음모를 꾸몄지요. 우리들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겁나지는 않았어요. 비밀을 정탐해 내는 데에는 당신도 쉽지 않은 분이었지만 갠달프는 더 어려웠지요. 만일 우리 일당의 정탐대장이 누군가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 드릴까요?" "그게 누구지?" 프로도는 가면을 쓴 무서운 인물이 찬장 속에서 튀어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샘, 자백해요." 메리가 말하자 샘이 귀끝까지 빨개지면서 일어섰다. "우리의 정보원이지요. 정말이지 결국 꼬리가 잡히긴 했지만 그때까지 많은 정보를 수집했었지요. 그 후로는 글쎄 무슨 맹세를 했는지 입을 다물었지만요." "샘!" 프로도는 더 이상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는 도대체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안심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바보같이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샘이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프로도씨나 갠달프씨께 그 문제에 관한 한 해를 끼쳐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그분은 생각이 깊으셔서 프로도씨께서 혼자 가신다고 했을 때 믿을 만한 친구를 데려가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 말은 아무나 믿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프로도가 말하자 샘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메리가 끼어들었다. "결국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렸어요. 우리를 믿으신다면 어디라도 끝까지 따라가겠어요. 그리고 또 우리를 신뢰하신다면 그 비밀을 철저하게, 당신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우리를 믿지 못한다면 이 짐을 혼자 지고 가셔야 할 것이고 우리는 말없이 떠나겠어요. 프로도, 우리는 당신의 친구들이에요. 그리고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잖아요. 우린 갠달프가 당신께 이야기한 내용도 대개는 알고 있어요. 그 반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알고 있고요. 사실 우리는 대단히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당신과 함께 가려고 해요. 함께가 어폐가 있다면 하인으로라도 좋아요." 그러자 샘이 덧붙였다. "게다가 요정들의 충고도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길도르는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을 데려가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말을 부인하지 못하시겠죠?" 프로도는 샘을 보고 이제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부인할 수 없지. 하지만 앞으로는 자네가 코를 골든 골지 않든 잠들었다고는 절대 믿지 않겠어. 확인해 보기 위해 꼭 한 번씩 엉덩이를 차 볼 거야. 이 사기꾼 악당들 같으니라고!" 그는 나머지 호비트들도 돌아보면서 일어서서 두 팔을 벌리고 말했다. "항복일세! 길도르의 충고를 따르도록 하지. 앞길의 위험이 그렇게 두렵지만 않다면 지금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어. 하여간 기쁨을 감추고 싶지는 않아. 내 평생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었네. 사실 오늘저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자네들은 모를 거야." "좋아요! 이젠 됐어요. 프로도 대장과 그 부하들을 위해 만세, 만세, 만세!"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프로도를 둘러싸고 춤을 추었다. 메리와 피핀은 특별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오래 전 빌보가 길을 떠날 때 불렀던 난쟁이들의 노래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으로 가락은 같았다. 따뜻한 난롯불, 아득한 안방이여, 안녕!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아침해가 뜨기 전에 우리는 떠나리, 멀리 숲을 지나 높은 산을 넘어. 그곳은 요정들의 리벤델 무서운 안개가 뒤덮인 숲 속 늪과 황야를 지나 달려가리, 그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 앞에는 적, 뒤에는 공포 우리 쉴 곳은 하늘 밑 어디? 마침내 고생은 끝나고 긴 여행이 끝나 심부름 마칠 때까지. 떠나야 하리! 떠나야 하리! 아침해가 뜨기 전에 달려가리! 프로도가 외쳤다. "좋았어! 하지만 그러자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준비할 것이 많아. 하여간 오늘밤만은 지붕 아래서 잘 수 있어 다행이야." 그러자 피핀이 소리쳤다. "아니! 그건 노래일 뿐이에요. 정말 아침해가 뜨기 전에 출발할 작정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암흑의 기사들을 생가하면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건 안전할 것 같지 않아. 특히 여기는 우리의 새 집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잖아. 게다가 길도르도 기다리지 말라고 충고했거든. 하긴 나도 갠달프를 꼭 보고 싶긴 해. 갠달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길도르도 대단히 놀라는 표정이었어. 문제는 결국 두 가지야. 암흑의 기사들이 얼마나 빨리 버클베리에 도착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빨리 출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야. 그러자면 준비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아."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두번째 문제는 간단해요. 우린 한 시간 안에 출발할 수 있어요. 사실을 제가 준비를 모두 해놨거든요. 마구간에는 들판을 달리 수 있는 조랑말이 여섯 필 있고 기타 장비와 준비물도 꾸려 놨어요. 여분으로 넣을 옷가지나 상하기 쉬운 음식만 새로 챙기면 다 돼요." 프로도는 감탄했다. "상당히 주도면밀한 음모였군 그래. 그런데 암흑의 기사들은 어떻게 한다? 하루 더 갠달프를 기다려도 괜찮을까?" 메리가 다시 말했다. "그 기사들이 당신을 여기서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점에 달려 있지요. 물론 그들이 브랜디와인 강 동쪽의 북문에서 제지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여기 도착했을지도 모르지요. 북문의 문지기들은 야간에는 절대로 그들을 들여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강제로 뚫고 들어오면 모르지만요. 낮이라도, 제가 알기로는, 브랜디 홀의 허락이 없으면 들여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 기사들의 흉칙한 모습을 그들이 좋아할 리가 있어요? 어쩌면 놀라 자빠졌을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들의 무서운 공격을 버크랜드가 오랫동안 막아내지는 못할 거예요. 따라서 아침이면 아마도 프로도란 이름을 수소문하고 다녔던 기사들 중 최소한 한 명은 통과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크릭할로우로 돌아왔다는 것은 꽤 널리 알려져 있거든요." 프로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기로 하지. 내일아침 해가 뜨자마자 출발하세. 하지만 큰길로는 가지 않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야. 다른 길로 가면 한 사나흘 정도는 들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북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금방 발각되고 말겠지. 그 기사들이 버크랜드에 발을 들여놓았건 아니건 간에 브랜디와인 다리와 동부대로는 들키기 쉬운 곳일세." 프레데가는 겁에 질려 물었다. "그러면 올드 포레스트를 뚫고 지나갈 거란 말입니까? 건 말도 안 돼요. 암흑의 기사들과 맞부닥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에요." 메리가 나섰다. "꼭 그렇지는 않아.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프로도씨의 계획이 괜찮을 것 같아. 그 길을 추적을 따돌리고 즉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운만 따라 준다면 출발이 상당히 순조로울 수도 있어." 프레데가는 다시 반대했다. "올드 포레스트에는 행운이라곤 없어. 거기서 행운을 만났던 사람은 아직 못 봤거든. 십중팔구는 길을 잃게 될 거야. 요즘에는 그 숲에 가는 사람이 없어." 다시 메리가 말을 막았다. "전혀 없는 건 아냐. 브랜디버크 사람들도 가끔 기분이 내키면 그 숲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어. 비밀입구가 있어. 프로도씨도 오래 전에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으실 거야. 나도 여러 번 가봤고. 물론 그때는 대낮이라서 나무들이 모두 잠을 자고 조용했었지." 프레데가가 말했다. "그럼 좋을 대로들 해. 하지만 난 이 세상에서 올드 포레스트가 제일 무서워.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쪽 끼칠 정도야. 하지만 난 여행엔 따라가지 않을 거니까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어차피 우리 중 누군가는 남아서 갠달프가 나타나면 소식을 알려 줘야 할 테니까 더 이상 간섭은 않겠어. 그분이 곧 나타나실지도 모르잖아." 페티 볼저는 프로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샤이어를 떠나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의 선조들 고향은 이스트파딩, 즉 브리지필드의 벗지포드였으나 그는 브랜디와인 다리도 건너 본 적이 없었다. 그들끼리 세웠던 원래의 계획에 의하면 그의 임무는 뒤에 남아서 호비트들의 호기심을 무마시키고 배긴스가 크릭할로우에 살고 있는 것처럼 꾸며서 일행에게 최대한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역할을 맡기 위해 프로도의 옛날 옷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프로도는 갠달프를 떠올린 프레데가의 계획을 이해하고 말했다. "멋진 생각이군. 하마터면 갠달프에게 소식을 전할 수 없을 뻔했네. 암흑의 기사들이 우리 글을 읽을 줄 알지 어쩔지 모르지만 혹시 집에 들이닥쳐 온 집안을 수색할까 싶어 메모 쪽지 한 장 남길 수 없어서 걱정했는데 참 잘됐군. 패티가 우리 뒤에 남아서 이 집을 지켜 준다면 갠달프는 분명히 우리가 간 방향으로 따라올 테니까 안심해도 되겠어. 내일 동이 트면 일찍 올드 포레스트로 떠나기로 하세." 피핀이 말했다. "자, 이제 그만들 합시다. 여하간에 패티처럼 여기 남아서 암흑의 기사들을 기다리느니보다는 올드 포레스트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겠죠." 프레데가가 그 말에 반박했다. "숲 속에 한참 들어가서 암흑의 기사들을 기다려 보지 그래. 아마 내일 이맘때쯤이면 차라리 나하고 여기 남을걸 하는 생각이 간절해질걸." 메리가 나섰다. "싸워 봤자 더 이상 득될 게 없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짐이나 살펴보고 정리를 하도록 해. 모두들 동트기 전에 깨워 줄테니."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으나 프로도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리가 쑤셔왔다. 아침에는 말을 탈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는 뒤척이다가 설풋 잠이 들었다. 그는 높다란 창문 밖으로 검푸른 바다처럼 펼쳐진 나무수플 내다보는 꿈을 꾸었다. 창문 아래 나무 근처에서 킁킁거리며 기어다니는 짐승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이 곧 자기 냄새를 찾아낼 것만 같았다. 그때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그는 소리가 숲의 나뭇잎들 사이에서 울부짖는 바람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니라 멀리서 들려오는 바라소리였다. 깨어 있을 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종종 그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했던 소리였다. 갑자기 그는 텅 빈 대지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그는 캄캄한 황야에 서 있었고 바람에서는 이상한 소금 냄새가 났다. 그는 눈을 들어서 저 앞쪽의 높은 산등성이 위에 홀로 서 있는 커다란 흰 탑을 바라보았다. 탑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었다. 그는 탑을 향해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 환한 빛이 내비치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제6장 올드 포레스트 프로도는 갑자기 눈을 떴다. 아직 방 안은 어두웠다. 메리가 한 손엔 초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두들겨 대며 서 있었다. 프로도는 아직도 얼떨떨해 있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됐어, 이젠 그만 해둬! 대체 왠 소란이야?" "소란이냐고요? 일어날 시간이에요. 네시 반이란 말이에요. 안개가 잔뜩 꼈어요. 자, 어서 일어나요. 샘이 벌써 아침밥을 차려 놨고 피핀도 일어났어요. 난 나가서 말에다 안장을 씌우고 짐 싣고 갈 말도 안으로 끌어올 참이라고요. 저 느림보 패티나 좀 깨우세요! 패티도 그만 자고 일어나 환송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여섯시 조금 넘어서 다섯 명의 호비트들은 출발할 준비를 다 마쳤다. 패티 볼저는 여전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왔다. 메리가 짐을 실은 조랑말을 끄고 앞장을 섰다. 그는 집 뒤 숲 속으로 난 길을 통해 들판을 가로지를 심산이었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반짝거렸고 가지에선 물방울이 떨어졌다. 풀잎은 찬 이슬을 머금고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으며 멀리서 들리는 작은 소리도 옆에서 나는 것처럼 또렷하게 울려왔다. 어느 집 마당에선 닭이 꾹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문 닫는 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그들은 헛간에서 말을 끌어냈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하루종일 걷기엔 충분한, 호비트들이 좋아하는 튼튼한 종자의 조랑말들이었다. 그들은 말에 올라타 곧 안개 속으로 숨어들었다. 안개는 마지못해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는 곧 그들이 지나온 등뒤 쪽은 철저하게 가려 주었다. 한 시간쯤 말도 없이 천천히 행군한 후 그들은 버클베리와 올드 포레스트의 경계로 심어 놓은 생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나무는 모두 키가 컸으며 은빛 거미줄이 그물처럼 엉켜 있었다. "저길 어떻게 지나간단 말이야?" 프레데가가 물었다. "날 따라와.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메리가 대답했다. 일행은 그를 따라 울타리를 끼고 왼쪽으로 올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보였다. 그 길을 계곡 초입으로 이어졌다. 울타리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부터 완만하게 땅을 파 만들어진 터널이 있었다. 양쪽 벽을 벽돌로 쌓은 둥그런 아치 모양의 터널은 울타리 밑 땅 속으로 뚫려 반대쪽 골짜기로 출구가 나 있었다. 패티 볼저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몸조심해 가세요, 프로도! 이 숲에는 들어가지 않길 바랐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무 위험이 없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행운을 빌어요. 이 순간부터 영원히." 앞으로 이 올드 포레스트보다 더한 위험이 없다면 난 운이 좋은 걸 꺼야. 갠달프에게 동부대로로 급히 오시라고 전해 주게. 우리도 가능한 한 빨리 그쪽으로 갈 테니까." 그들 모두는 큰 소리로 작별인사를 하고 터널 속으로 비탈을 따라 내려가 마침내 프레데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터널 속은 어둡고 눅눅했다. 터널이 끝나는 곳에 촘촘하게 쇠창살로 만들어 놓은 문이 있었다. 메리는 문을 열고 일행이 모두 통과하자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은 철커덕 울리며 닫혔다. 기분나쁜 소리였다. 메리가 말했다. "자, 이젠 샤이어를 벗어났어. 여기서부턴 올드 포레스트야." "소문이 정말일까?" 피핀이 물었다. "무슨 소문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패티의 유모가 말해 줬다는 도깨비나 늑대가 나온다는 귀신이야기라면 그건 사실이 아니야. 여하튼 난 믿지 않아. 하지만 이상하긴 이상한 곳이지. 그 속에 들어가면 샤이어와는 달리 모든 것이 살아 있거든. 말하자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숲이 알고 있단 말이야. 나무들도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낮에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시비는 걸지 않아. 가끔 심술궂은 나무들이 가지를 떨어뜨리거나 뿌리를 불쑥 내밀기도 하고 덩굴로 몸을 감아서 놀라게 하지. 그런데 밤이 되면 그렇게 무섭다는 거야.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말이야. 어두워진 다음에 여기 들어왔던 건 한두 번밖에 안 되거든. 그것도 사실 숲 가장자리까지만이었어. 나무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소식과 음모를 주고받고,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것 같았지. 어떤 이들은 나무들이 실제로 움직여서 이방인들을 꼼짝도 못하게 포위하는 걸 봤다고 하더군. 사실 옛날에는 나무들이 울타리를 공격한 적도 있었어. 숲가로 옮겨와서는 바로 옆에 몸을 누이기도 했거든. 그런데 호비트들이 와서 수백 그루의 나무를 베어 내고 포레스트에 큰불을 피워 울타리 동쪽의 넓은 땅을 태워 버렸던 거야. 그 후로 그 나무들은 공격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성질은 더 고약해졌다지. 여기서 조금만 가면 그때 불을 질렀던 넓은 공터가 아직도 그대로 있어." "위험한 건 그 나무들뿐이야?" 피핀이 물었다. "깊은 숲 속이나 저쪽 끝에 가면 이상한 것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재로 보지는 못했어. 하지만 뭔가가 지나다닌 흔적은 있지. 숲 속에 들어가면 언제나 길이 있는데, 수상쩍은 것은 그 길이 가끔씩 이상한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점이야. 이 터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는 큰 길이 있지. 그 길을 따라가면 그때 불을 질렀던 공터가 나올 거야. 우리가 가는 방향은 거기서 북동쪽인데, 내가 지금 찾으려는 길이 바로 그 길이야." 마침내 일행은 터널 출구를 지나 넓은 계곡을 가로질러 갔다. 저 멀리 울타리 쪽에서 백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포레스트 중심부로 올라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숲에 도착하자 길은 사라져 버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이미 그들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울타리는 검은 선처럼 보였고 그들 앞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곧은 나무, 휜 나무, 배배 꼬인 나무, 옆으로 누운 것, 땅딸막한 것, 날씬한 것, 보드라운 것, 마디투성이인 것, 가지가 많은 것 등 수없는 나무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들 줄기는 모두 매끌매끌한 털이 송송 난 이끼로 덮여 초록빛과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메리는 혼자 꽤 들떠 있었다. 프로도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길을 잘 찾아 인도하게. 우리끼리 서로 잃어버리면 큰일이니까. 항상 울타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 잊지 말도록 하고." 그들은 나무들 사이로 길을 트며 나아갔다. 조랑말들은 발굽에 휘감겨 오는 나무 뿌리를 조심조심 피하면서 터벅터벅 걸었다. 관목이나 덤불은 없었다. 지대가 차츰 높아지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무들은 더 커지고 거뭇해졌으며 더 빽빽해지는 듯했다. 고요한 숲 속에 간간이 떨어지는 이슬방울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나뭇가지들끼리 속삭이거나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은 불안한 정도를 지나 차차 혐오감이나 적대감으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어떤 기습 공격을 예감이라도 한 듯 고개를 위로 홱 쳐들거나 무심코 등뒤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아직 길이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으며 나무들은 여전히 그들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피핀이 갑자기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우! 우!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지나가게만 해줘!" 모두들 깜짝 놀라 멈춰섰다. 그러나 그 고함소리는 마치 두꺼운 커튼에 파묻혀 버리기라도 한 듯 이내 사라져 버렸다. 숲은 더 울창하고 더 무섭게 느껴졌지만 여전히 아무런 메아리나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라면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겠어. 오히려 더 위험한 거야." 메리가 말했다. 프로도는 혹시 길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들면서 이 무시무시한 숲 속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메리는 이쪽저쪽을 살피고 있었으나 이미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자신이 없는 듯했다. 피핀은 그런 눈치를 채고 핀잔을 주었다. "그새 벌써 우리가 옆에 따가간다는 것도 잊어버렸군 그래." 그러나 그 순간 메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렇지. 이 나무들이 움직이고 있어. 저 앞에 그 공터가 있었는데, 그 동안 길이 바뀐 것 같아." 앞으로 나아갈수록 하늘은 차츰 밝아왔다. 그들은 갑자기 숲 속을 빠져나와 넓은 원형의 공터에 자신들이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숲 속에서는 아침이 밝아오면서 안개가 걷히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무꼭대기에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공터 안까지 비칠 만큼 해가 높이 솟은 것은 아니었다.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잎이 더 푸르고 무성했다. 마치 단단한 벽처럼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듯한 나무숲이었다. 공터엔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었고 길쭉하고 빛바랜 당근이나 파슬리, 보드라운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들풀, 무성한 쐐기풀이나 엉겅퀴처럼 거칠고 키 큰 잡초들뿐이었다.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나 숨막힐 듯한 숲 속을 빠져나온 그들에게는 아름답고 유쾌한 정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호비트들은 용기를 얻어 환한 아침햇살이 밝아오는 하늘을 반가이 올려다보았다. 공터 저쪽 끝에는 벽처럼 둘러싼 나무들 사이로 갈라진 틈이 있었고 그 속으로 좁은 길이 드러나 보였다. 그쪽 숲은 가끔 나무들 틈새가 좁아지고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그들 앞을 가렸지만 대체로 공간에 여유가 있었고 머리 위로는 터진 하늘도 보였다. 그들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여전히 완만한 오르막길이었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빨라졌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드디어 숲이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그들을 무사히 통과시켜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날씨가 더워지면서 숨이 가빠졌다. 간격이 다시 좁아진 나무들이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숲의 심술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그들을 압박해 오는 듯했다. 사방이 너무도 고요했기에 낙엽을 스치며 이따금 숨어 있던 나무뿌리에 걸리곤 하는 조랑말들의 발굽소리가 그들의 귀에는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일행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프로도는 노래를 시작했지만 목소리는 곧 중얼거리는 콧소리로 낮아졌다. 오, 어두운 대지의 방랑자여, 절망하지 마오! 그대 비록 어둠 속에 서 있으나 저 숲도 언젠가는 끝이 나 비쳐드는 환한 햇빛을 보리니 지는 해 아니면 떠오르는 해를, 하루의 끝 혹은 하루의 시작을, 동쪽이든 서쪽이든 모든 숲은 반드시 끝나리니... '끝나리니' 이 마지막 마디에서 그의 노래는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대기가 차츰 더 무거워지자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들 지경이었다. 그들 바로 뒤에서 늘어진 고목의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길바닥에 떨어졌다. 그들 앞길의 나무들이 점점 더 좁혀 오는 듯했다. 메리가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길은 끝이라는 걸 모르잖아? 이젠 노래부르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 숲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 멋지게 숲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 보는 게 어떨까?"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어쨌든 간에 겉으로는 불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두 의기소침해 있었다. 천근만근의 무게가 서서히 프로도의 가슴을 짓 눌러 오기 시작했다. 그는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 무시무시한 숲에 무모하게 도전한 것을 후회했다. 사실 그는 (가능하다면) 즉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 바로 눈앞에 변화가 생겼다. 오르막길이 끝나면서 거의 평평한 길이 펼쳐진 것이었다. 어두운 나무들이 물러나면서 눈앞에 거의 곧게 뻗은 길이 나타났다. 저 멀리 앞쪽에 나무라고는 없는 푸른 언덕이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일행은 잠시나마 그 감옥 같은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을 얻어 다시 서두르기 시작했다. 길은 내리막이 되었다가 다시 오르막이 되었고 그들은 마침내 가파른 언덕 기슭에 도착했다. 숲은 거기서 끝나고 땅 위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숲은 마치 정수리만 반지르르 벗겨지고 주위는 머리숱이 텁수룩한 대머리처럼 언덕 주위를 빙 두르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조랑말을 끌고 언덕 위로 빙빙 돌아 올라갔다. 정상에 오른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공기는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아직 안개가 짙어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주변에는 안개가 거의 걷혔으나 숲 속은 여전히 안개가 남아 있었고 남쪽으로는 포레스트 전체를 가로질러 곧게 뻗은 습곡에 하얀 연기처럼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메리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위디원들 강이야. 다운즈에서 시작돼 남서쪽으로 포레스트를 뚫고 흘러 헤이센드 밑에서 브랜디와인 강으로 흘러들지, 저쪽으로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아. 위디원들 계곡은 세상에서 제일 괴상한 땅으로 소문이 나 있거든, 모든 이상한 일들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야." 모두들 메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깊숙하고 습기찬 골짜기 위로 떠도는 안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그 너머로는 포레스트의 남쪽 지역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언덕 위의 공기가 햇빛으로 차츰 뜨거워지고 있었다. 벌써 열한시는 지났음에 틀림없었지만 가을 안개는 어느 쪽으로도 그들 시야를 시원하게 틔워 주지 않았다. 서쪽 울타리나 그 너머 브랜디와인 강의 골짜기도 볼 수 없었고 혹시나 하고 바라본 북쪽도 그들이 찾아야 할 동부대로의 흔적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수해의 고도에 갇혀 있었으며 수평선은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남동쪽으로는 경사가 급해서 흡사 깊은 바다 속으로부터 불쑥 솟은 섬처럼 산비탈이 숲 속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풀밭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발 아래 숲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이 높이 떠올라 정오가 지나면서 동쪽으로 올드 포레스트 너머에 있는 다운즈 지역의 푸르스름한 선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숲이 아닌 다른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도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쪽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배로우 다운즈는 호비트들의 전설 속에서 포레스트만큼이나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길을 계속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을 언덕 위로 데려다 준 길은 다시 북쪽으로 계속 뻗고 있었지만 그 길을 따라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길을 오른쪽으로 조금씩 굽어들다가 마침내는 급경사로 이어진 위디원들 계곡에 이를 것이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방향이었다. 잠시 의논을 한 뒤 그들은 그 위험한 길을 버리고 정북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언덕에서 보이지는 않았으나 동부대로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북쪽 길은 땅이 더 건조하고 공간이 넓어 보였으며 나무들이 듬성듬성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나온 숲 속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혹은 이름모를 이상한 나무들 대신 소나무나 전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선택은 처음에는 옳은 듯했다. 그래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은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멀리서 보았을 때 듬성듬성하다 싶었던 곳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나무들이 다시 빽빽해지기 시작했다. 땅에는 예기치도 않았던 커다란 바퀴자국 같은 깊은 고랑이 파인 곳도 있었고 이따금 물구덩이나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아서 가시나무로 뒤덮인 함정도 있었다. 그런 장애물들은 대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기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조랑말들에게는 여간 어렵고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기어 내려간 웅덩이는 빽빽한 관목과 엉클어진 덤불로 가득했으며 웬일인지 그들에게 왼쪽 방향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오른쪽 길만 내주는 듯했다. 그리고 내려갔다 올라올 때마다 바닥에서 상당히 헤매야 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무는 더 빽빽해지고 숲은 더 어두워졌으며 왼쪽이나 위로 향하는 길은 찾기가 힘들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아래쪽으로 계속 가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북쪽으로 가는 길은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한두 시간 후에는 방향 감각마저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들은 방향을 잃은 채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끌려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동쪽으로, 남쪽으로,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포레스트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때까지 만난 어떤 웅덩이보다 더 넓고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해는 이미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 웅덩이는 너무 경사가 급해서 조랑말과 짐을 버리지 않고는 앞으로도 뒤로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땅은 부드러웠고 가끔씩 습지도 나타났다. 둑 위로 샘이 보이더니 곧 풀밭 사이로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그런데 땅이 갑자기 급경사로 변했고 냇물이 큰 소리를 내며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은 머리 위로 높이 나무들이 우거진 깊고 어두운 소협곡에 들어와 있었다. 냇물을 따라 한참 동안 헤매고 고생을 한 끝에 그들은 겨우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마치 문틈으로 새어든 것처럼 햇빛이 비쳐들었다. 바깥으로 나와서야 그들은 거의 절벽처럼 깍아지른 듯한 높은 언덕의 갈라진 틈새로 기어 내려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발 밑에는 넓은 풀밭과 갈대밭이 펼쳐졌고 다른 쪽에는 이쪽만큼이나 가파른 또 하나의 절벽이 보였다. 황금빛 낙조가 따뜻하고 나른하게 그들을 비췄다. 앞에는 흑갈색의 강물이 유유히 흘렀고 강가에는 수백 년 묵은 버드나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골짜기에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일어 나뭇가지가 금빛으로 반짝일 때마다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갈대도 바람에 바스락거렸고 버드나무 가지가 딱딱거리며 소리를 냈다. 메리가 입을 열었다. "아, 여기가 어딘지 조금은 알 것 같군! 우린 목적지하곤 정반대 방향으로 왔어. 여기가 바로 위디원들 강이에요. 가서 좀 살펴보고 올게요." 그는 햇빛을 받으며 넓은 풀밭 사이로 들어갔다. 이윽고 곧 되돌아온 그는 절벽 아래와 강 사이에는 꽤 단단한 땅바닥이 있으며 물가에까지 잔디가 깔린 곳도 있더라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강변을 죽 따라 작은 도로가 나 있는 것 같아요. 여기서 왼쪽으로 돌아 그 길로 가면 결국 포레스트 동쪽으로 나갈 것 같은데." 그러자 피핀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 길이 계속 거기까지 이어져 있고 중간에 늪 같은 것도 없어서 무사히 데려다 준다면야 괜찮겠지. 하지만 그 길을 누가 만들었나 생각해 봐. 왜 만들었겠어? 우리 좋으라고 만든 건 절대로 아닐 거야. 이 포레스트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수상해. 소문이 맞는 모양이야. 도대체 우리가 동쪽으로 얼마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사실 우리가 위드원들 강 하류로 얼마큼 내려왔는지 알 수도 없고 게다가 누가 여기까지 와서 길을 뚫어 놓은 건지는 더더구나 알 수가 없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 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들은 한 줄로 서서 메리가 찾아낸 길을 따라 올라갔다. 갈대와 들풀이 도처에 무성했으며 이따금 키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길에 들어서고 나니 길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늪과 웅덩이들 사이의 단단한 땅을 잘 골라 길을 곧게 이어졌다. 그들은 높은 언덕에서 시작해 산골짜기를 거쳐 위드원들 강으로 흘러드는 실개천들을 건너뛰곤 했다. 그런 것에는 통나무와 잔가지로 묶인 다리가 놓여 있었다. 호비트드른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갖가지 종류의 날곤충들이 귓가에서 앵앵거리고 오후의 태양이 등뒤에서 이글거렸다. 갑자기 흐릿한 그늘이 나타났다. 길 위로 커다란 회색 나뭇가지들이 뻗쳐 있었던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아까보다 힘들어졌다. 졸음이 땅속에서 기어나와 그들의 다리로 기어오르는 듯했고 공중에서도 슬며시 그들 머리와 눈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프로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고개가 꾸벅거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 앞에서 걸어가던 피핀이 무릎을 꺾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프로도는 걸음을 멈췄다. 메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용없어. 쉬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걸. 자야겠어. 버드나무 그늘이 시원하군. 파리도 없어졌네." 프로도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자면 안 돼! 우선 숲을 벗어나야 해."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옆에 있던 샘까지 하품을 하며 멈춰서서는 바보처럼 눈을 껌벅거렸다. 프로도도 갑자기 졸음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공중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윙윙거리던 파리소리도 사라졌다. 다만 반쯤 속삭이는 노랫가락 같은 희미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머리 위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무거운 두 눈을 억지로 뜨고 머리 위로 축 늘어진 거대한 고목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큰 나무였다. 나뭇가지들은 마치 긴 손가락이 달린 많은 손을 가진 팔처럼 뻗어 있었고 옹이가 진 뒤틀린 몸통에는 커다란 틈새가 벌어져 나뭇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어렴풋이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맑은 하늘 위에서 팔랑거리는 나뭇잎들의 현란한 빛이 눈을 가리자 그는 그대로 풀밭 위에 쓰러져 몸을 눕혔다. 메리와 피핀은 몸을 질질 끌며 버드나무 아래로 가 몸통에 등을 대고 누웠다.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틈새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회색과 노란색 나뭇잎들이 눈부신 햇빛 사이로 살랑거리며 노래부르는 것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물과 잠을 노래하는 시원한 이야기가 그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들은 그 주문에 서서히 빠져들어 회색 버드나무 고목에 기댄 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프로도는 엄습해 오는 수마와 싸우기 위해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힘을 내 다시 다리를 질질 끌며 일어섰다. 시원한 물에 발을 적시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샘, 잠깐만 기다려. 발을 좀 물로 축여야겠어." 그는 비몽사몽간에 강으로 걸어갔다. 구불구불한 큰 뿌리들이 물 속으로 뻗쳐 있어 마치 우락부락한 작은 용들이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뿌리들 중 하나에 걸터앉아 시원한 갈색 강물 속으로 뜨거운 다리를 담갔다. 그리고 그 역시 그곳에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깜박 잠이 들었다. 샘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긁고나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아직 저녁도 안 됐는데 이렇게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햇볕이 뜨겁고 날이 더운 탓만은 아니야. 이 커다란 고목이 기분 나빠. 믿을 수가 없어. 마치 자장가라도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도대체 말도 안 돼!" 그는 발을 끌며 비틀비틀 일어나 조랑말들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마리가 길 저쪽에서 서성대는 것을 보고 막 몰아오려는 순간 양쪽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은 아주 큰 소리였고 다른 한쪽은 좀더 작지만 매우 또렷했다. 하나는 뭔가 무거운 것이 물 속으로 첨벙 떨어지는 소리 같았고 또 하나는 문이 조용히 닫힐 때 나는 찰칵 하는 소리 같았다. 그는 강가로 뛰어갔다. 프로도가 물 속에 빠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그를 휘감고 위에서 더 깊숙이 밀어넣는 것 같은데 프로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샘은 그의 재킷을 붙잡아 겨우 강둑 위로 끌어올렸다. 거의 동시에 프로도가 눈을 뜨더니 재채기를 하며 침을 뱉고나서 말했다. "샘, 알겠어? 저 괴물 같은 나무가 나를 밀어넣었어! 거짓말이 아니야! 커다란 뿌리가 나를 칭칭 휘감더니 슬쩍 밀었어." "꿈을 꾸신 것 같아요. 아무리 졸려도 그런 곳에 앉아서는 안 되지요." "모두들 어디 갔지? 무슨 꿈들을 꾸고 있는지 궁금하군." 그들은 나무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샘은 조금 전 들었던 찰칵 하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핀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기대고 있던 나무 둥치 속으로 완전히 끼여들었다.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나무 틈새에 허리가 물려 있었다. 두 다리는 아직 바깥쪽에 있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으며 틈새 가장자리가 마치 집게처럼 그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프로도와 샘은 우선 피핀이 누워 있던 나무 밑동을 힘껏 찼다. 그리고 불쌍한 메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당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프로도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아니 이럴 수가! 어쩌다 이 끔찍한 포레스트에 들어온 거야! 크릭할로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힘껏 나무를 찼다. 아주 작은 진동이 나무줄기를 통해 가지로 전달되자 나뭇잎들이 우수수 흔들리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웃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샘이 외쳤다. "짐 속에 도끼가 있지 않을까요?" "땔나무를 하기 위해 조그만 자귀를 넣긴 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자 땔나무란 말에 샘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불을 피워 보면 어떨까요?" "피핀이 위험할 텐데?" 프로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선 이 나무에게 겁을 줄 순 있을 거예요. 메리와 피핀을 내놓지 않는다면 베어 버려야지요." 샘은 조랑말로 달려가 부싯깃 두 통과 자귀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즉시 가랑잎과 마른 풀, 나무껍질, 나뭇가지 들을 한 무더기 주워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동료들이 잡혀 있는 반대편으로 가지고 가서 나무 밑동에 놓았다. 샘이 부싯깃에 불을 일으키자마자 마른 풀에 옮겨 붙어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나뭇가지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탔다. 불꽃이 혀를 널름거리며 말라비틀어진 고목껍질을 핥고 그을렸다. 버드나무는 온 몸을 크게 한 번 뒤틀었다. 그들 머리 위에서 나뭇잎들이 쉭쉭 비명을 울리며 분노와 고통을 표시했다.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한 메리의 비명이 들리더니 곧이어 더 안쪽에서 들릴락말락하는 피핀의 소리도 들려왔다. 메리가 소리쳤다. "불 꺼! 불 꺼! 끄지 않으면 두 동강 내겠대. 어서 꺼!" 그러자 프로도가 그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누가? 뭐라고?" "불 꺼! 불 꺼!" 메리는 애원했다. 버드나무 가지들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일진의 광풍이 일어나며 사방의 나뭇가지들로 퍼져나가자 잠자듯 고요하던 강 위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물결이 솟아퍼지듯 숲 속 전체가 분노의 물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샘은 발로 짓밟아 불을 껐다. 프로도는 길을 따라 달리며 '살려줘! 살려줘!'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고함소리는 입에서 떠나자마자 나뭇잎들이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 속으로 잦아들어갔다. 절망적이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달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응답이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뒤쪽, 즉 길 아래쪽 포레스트 속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프로도는 뒤로 돌아서서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차츰 분명해졌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윽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행복하고도 태평스러운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으나 가사에는 별다른 뜻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헤이 돌! 메리 돌! 링 어 동 딜로! 링 어 동! 깡총 뛰어! 팔 랄 버드나무! 톰 봄, 유쾌한 톰, 톰 봄바딜로! 이 새로운 상황에 반쯤은 희망을 품고 또 반쯤은 겁을 먹은 채 프로도와 샘은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갑자기 긴 횡설수설이 끝나더니 목소리가 굵어지며 청아한 노랫가락이 울려퍼졌다. 헤이! 오라, 메리 돌! 데리 돌! 내 귀여운 여인! 날개달린 찌르레기와 바람은 가벼이 날고, 언덕 저 아래, 햇빛이 반짝이는 것, 차가운 별빛을 기다리며 물가에 서 있는 어여쁜 내 사랑, 강의 여신의 딸, 버드나무보다 날씬하고, 강물보다 맑은 여인. 늙은 톰 봄바딜은 수련을 가지고 깡총깡총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노래 들리는가? 헤이! 오라, 메리 돌! 데리 돌! 메리-오, 골드베리, 골드베리, 유쾌한 노란색 베리-오, 불쌍한 버드나무영감, 내 뿌리를 감추어라! 톰이 달려간다. 해가 지면 저녁이 오는 법, 톰은 수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헤이! 오라, 데리 돌! 내 노래 들리는가? 프로도와 샘은 귀신에 홀린 듯 서 있었다. 바람이 멎었다. 나뭇잎들은 다시 잠잠해진 나뭇가지에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노래가 또 한 곡 이어지고나서 갑자기 갈댓잎 위로, 높은 꼭대기에 파란 깃털이 달린 낡아빠진 모자 하나가 깡총깡총 춤추듯 길을 따라 나타났다. 인간이라고 할 만큼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비트라고 하기엔 덩치가 너무 컸다. 그는 두툼한 발을 감싼 커다란 노란색 구두로 쿵쾅거리며, 물을 마시러 내려가는 암소처럼 풀밭을 마구 뭉개며 걸어왔다. 그는 푸른 외투를 입었고 긴 갈색 수염과 밝고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얼굴은 익은 사과처럼 빨갰다. 웃을 때는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커다란 수련잎을 쟁반처럼 받쳐 그 위에 작은 수련꽃다발을 올려 들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프로도와 샘은 두 팔을 흔들고 외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호아, 호아, 거기 서!" 노인은 한 손을 들며 소리쳤다. 그들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자, 꼬마친구들, 그렇게 풀무처럼 헐떡대며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난 톰 봄바딜이야. 문제가 뭔가 얘기해 봐. 톰은 지금 바쁘다네. 내 수련을 망가뜨리면 안 되거든." "저희 친구들이 버드나무에 붙잡혔습니다." 프로도는 숨을 씨근거리며 말했다. "메리가 틈새로 빨려들어갔어요!" 샘도 외쳤다. 그러자 톰 봄바딜은 몸을 깡총 뛰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버드나무영감이? 그것뿐이야? 그런 문제라면 쉽게 해결되지. 난 그의 노랫가락을 알고 있거든. 회색 버드나무영감!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뼛속까지 얼게 할 거야! 노래를 불러 뿌리도 잘라버리고, 바람을 일으켜 가지와 잎을 몽땅 날려 보낼 거야. 버드나무영감!" 그는 풀밭 위에 수련을 곱게 내려놓고 버드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메리의 발만이 나무 밖으로 삐쭉 나와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나머지는 이미 훨씬 안쪽으로 삼켜져 들어갔던 것이다. 톰은 나무 틈새에 입을 대고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뜻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메리가 힘을 얻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톰은 벌떡 일어나더니 축 늘어진 가지 하나를 꺾어 버드나무를 후려쳤다. "어서 놔, 버드나무영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넌 깨어나면 안 돼. 흙을 먹어! 땅 속으로 들어가! 물을 마셔! 잠을 자란 말이야! 봄바딜의 말씀이시다." 그리고나서 그는 메리의 두 발을 잡아 벌어진 틈새 밖으로 끌어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다른 쪽 틈새도 벌어지며 발길에 채이기라도 한 듯 피핀이 퉁겨나왔다. 나무는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한 번 크게 몸을 요동치더니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맙습니다!" 호비트들은 차례로 인사했다. 톰 봄바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몸을 숙여 호비트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말했다. "자, 꼬마친구들! 나와 같이 우리집으로 가세! 식탁에는 노란 크림과 꿀벌, 흰 빵과 버터가 가득할 테니. 골드베리도 기다리고 있어. 저녁식탁에 앉으면 질문할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우선 부지런히 날 따라오도록 하지." 그리고나서 그는 수련을 집어들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깡총깡총 춤을 추듯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나무 놀라기도 하고 또 긴장이 풀리기도 해 호비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의 속도를 따를 수가 없었다. 톰은 곧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고 노랫소리 역시 점점 희미하게 멀어졌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고함을 치듯 높아지더니 뒤를 따르는 그들에게 날아왔다. 깡총 뛰어. 꼬마친구들, 위디원들 강을 올라오게! 톰은 촛불을 켜야 하니 먼저 간다네. 서쪽으로 해가 지면 곧 엉금엉금 기어야 하니까. 밤의 그림자가 내려앉으면 문이 열리고 창 밖으로 노란 불빛이 반짝이지. 검은 오리나무도, 백발의 버드나무도 두려워 말게! 뿌리도 가지도 두려워 마! 톰이 앞장을 섰으니. 헤이 어서! 메리 돌! 자네들을 기다리겠어. 그리고나서 호비트들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거의 동시에 등뒤 숲 속으로 해가 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때쯤이면 기울어 가는 석양빛이 브랜디와인 강물 위에 반짝이고 버클베리의 창문에 수백 개의 등불이 반짝일 것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나무 밑둥과 가지가 길 위에 어둠을 내려뜨리고 그들을 위협했다. 하얀 안개가 일어 강물 위를 맴돌더니 강가 나무 뿌리 둘레로 스며들었다. 바로 그들 발 밑에서는 어둑어둑한 수증기가 일어나 빠르게 내리깔리는 땅거미에 섞여들었다. 길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그들은 너무 피곤했다. 두 다리가 납덩이 같았다. 길 양쪽 덤불과 갈대숲 사이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은밀히 오고가는 듯했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면 마디와 옹이가 달린 이상한 얼굴들이 황혼을 배경으로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때로는 높은 둑 위에서 때로는 숲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깨어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꿈 속의 이상한 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만큼 피곤해졌을 때 앞길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강물소리가 요란해졌다. 어둠 속에서 흰 물거품이 어렴풋이 비쳐, 자세히 보니 강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숲은 갑자기 끓어졌고 안개도 사라졌다. 드디어 포레스트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널따란 풀밭이 펼쳐졌다. 폭이 좁아지고 물살이 급해진 강물은 그들을 환영하듯 즐겁게 쿵쾅거렸으며 이미 하늘가에 나타난 별빛을 받아 여기저기서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발 밑 풀밭은 마치 손질이라도 한 듯 짧고 보드라웠다. 포레스트의 경계는 생울타리처럼 잘 정돈돼 있었다. 길은 평평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고 길가에는 연석이 박혀 있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 회색으로 보이는 길은 풀밭으로 뒤덮인 나지막한 산 위로 돌아 올라갔다. 그들은 그제서야 아직 멀기는 하지만 비탈길 저 위쪽에서 반짝이는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다시 내리막과 오르막이 이어지고나서 불빛을 향해 잔디로 뒤덮인 부드러운 언덕길이 길게 열렸다. 열린 문에서 갑자기 노란 불빛이 환하게 쏟아져 나왔다. 언덕 아래에 있는 톰 봄바딜의 집이었다. 그 뒤로는 회색 민둥산이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배로우 다운즈의 어슴푸레한 윤곽이 동녘 밤하늘 아래 깔려 있었다. 호비트와 조랑말들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이미 그들의 피로와 근심은 반쯤 달아난 듯했다. 헤이! 오라, 메리 돌! 그들을 환영하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헤이! 오라, 데리 돌! 깡총 뛰어, 다정한 친구들! 호비트! 조랑말! 모두 함께! 우리는 친구들 좋아하지. 자, 즐거운 잔치를 벌이자! 함께 노래부르세! 상쾌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산골짜기 개울물의 노랫가락처럼, 봄날같이 유서깊고 젊은, 낭랑한 목소리가 은빛 선율로 그들을 맞이하며 울려퍼졌다. 자, 노래부르세! 함께 노래부르세! 해와 별, 달과 안개, 비와 구름, 새싹 위의 햇빛, 깃털 위의 이슬, 광활한 언덕 위의 바람, 야생의 히드꽃, 그늘진 연못가의 갈대, 물 위의 수련을. 늙은 톰 봄바딜과 강물의 딸! 노래가 끝날 즈음 호비트들은 벌써 문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으며 황금빛 불빛이 그들을 온통 둘러쌌다. 제7장 톰 봄바딜의 집 네 명의 호비트는 널찍한 돌 문지방을 넘어 서서 눈을 껌벅이며 안을 휘둘러보았다. 들보에 매달린 등잔불이 좁고 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광택이 나는 나무로 된 식탁 위에는 길고 노란 양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방문 맞은편 안쪽에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긴 금발머리는 어깨 위로 물결치듯 흘러내렸고 싱싱한 갈대빛깔처럼 푸른 가운에는 이슬 같은 은박이 박혀 있었다. 불꽃을 한 줄로 꿰어 놓은 듯한 순금 벨트에는 하늘색 물망초의 새싹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발 언저리에는 하얀 수련꽃이 떠 있는 녹색과 갈색의 커다란 토기들이 놓여 있어 마치 연못 한가운데 모셔진 여신처럼 보였다. "어서 오세요, 귀한 손님들!" 그들은 그 여인의 음성을 듣고서야 오던 길에 들었던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았다. 그들은 방 안쪽으로 주춤주춤 들어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했다. 마치 산 속 외딴집에 물 한잔을 청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가 싱싱한 들꽃으로 옷을 해입는 아름답고 젊은 요정여왕을 만났을 때처럼 놀랍고 황망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수련 수반을 넘어 그들을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강가의 꽃밭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처럼 그녀의 가운이 살포시 흩날렸다. 그녀는 프로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귀한 분들! 즐겁게 웃으세요. 저는 강물의 딸 골드베리예요." 그녀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녀의 백옥 같은 두 팔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지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안개와 나무그림자와 깊은 물과 야생의 짐승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군요. 두려워 마세요! 오늘밤 여러분들은 톰 봄바딜의 지붕 아래 있으니까요." 호비트들은 경이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그들을 차례차례 내려다보며 웃었다. 프로도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환대에 감격하여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골드베리 부인!" 그는 가끔씩 요정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혹되었던 때와 마찬가지의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의 감동은 좀 색다른 것이었다. 기쁨이 그때만큼 강렬하거나 고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슴에 닿아 오는 느낌은 더욱 그윽하고 친근했다. 놀랍기는 했으나 어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아름다운 골드베리 부인! 우리가 들었던 그 노래 속에 담겨 있던 기쁨을 이제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오, 버드나무보다 더 날씬하고! 오, 맑은 강물보다 더 맑은! 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오, 폭포의 바람, 나뭇잎들의 웃음!” 갑자기 프로도는 자신이 그와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노래를 멈추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골드베리는 웃으며 말했다. "멋지군요! 전 샤이어의 호비트들이 이렇게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당신은 요정의 친구가 틀림없군요. 그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즐거운 만남이에요! 이제는 앉아 이 집 주인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여러분들의 지친 조랑말들을 돌보고 계실 테니까요." 호비트들은 골풀로 만들어진 낮은 의자에 앉았고 골드베리는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녀의 날렵하고 우아한 몸놀림이 대단히 매혹적이었기에 그들의 눈길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집 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데리 돌, 메리 돌, 링 어 딩 딜로, 이런 후렴구 사이로 간혹 반복되는 구절이 있었다. 늙은 톰 봄바딜은 유쾌한 친구, 재킷은 하늘색, 구두는 노란색. 잠시 후 프로도가 다시 말했다. "아름다운 부인!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톰 봄바딜은 누구시지요?" "그분은..." 골드베리는 날렵한 몸놀림을 멈추고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프로도는 더욱 궁금해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기심어린 표정을 향해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분은 여러분들이 보았던 바로 그분이에요. 숲과 물과 산의 주인이시죠." "그러면 이 이상한 나라 전부가 그분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짐이 되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일순 미소가 걷혔다. 그녀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무와 풀과 이 땅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모든 것은 다 스스로의 것입니다. 톰 봄바딜은 주인이지요. 낮이건 밤이건 톰이 숲 속을 거닐고, 물을 건너고, 산꼭대기를 뛰어다니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답니다. 그분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분은 주인이시니까요." 그때 문이 열리고 톰 봄바딜이 들어왔다. 그는 이제 모자를 벗고 텁수룩한 갈색 머리 위에 낙엽을 왕관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골드베리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호비트들을 향해 말했다. "나의 귀여운 부인일세. 꽃장식된 허리띠를 둘고 은초록 옷을 입은 나의 골드베리, 식탁은 준비되었는가? 노란 크림과 꿀과 흰 빵, 버터, 우유, 치즈, 산나물, 익은 열매까지 모두 차려졌군. 이 정도면 충분한가? 저녁식사는 준비된 것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아요." 골드베리가 대답하자 톰은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톰, 톰! 손님들이 피곤하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자, 이리 오시게, 유쾌한 친구들! 톰이 깨끗하게 해드리지. 때묻은 손을 씻고, 지친 얼굴도 깨끗이 하고, 더러운 외툴랑 벗어 버리고, 달라붙은 넝쿨은 떼어 내게들." 그가 문을 열자 호비트들은 그 뒤를 따라 짧은 통로로 돌아갔다. 그 집 북쪽 끝에는 비스듬한 지붕으로 뒤덮인 나지막한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벽은 깨끗한 돌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녹색 걸개나 노란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평평한 돌이 박혀 있었고 산뜻한 녹색 골풀이 깔려 있었다. 네 개의 푹신한 매트리스와 하얀 담요가 개켜진 채 벽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김이 나는 뜨거운 물과 찬물이 담긴 물통들이 있었으며 침대 옆에는 푹신한 녹색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씻고 원기를 회복한 호비트들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양쪽에 둘씩 앉고 주인과 골드베리가 양 끝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유쾌하고 긴 식사였다. 굶주린 호비트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마음껏 먹었지만 음식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물통의 물은 시원한 냉수 같았지만 마치 포도주처럼 목을 넘어가 그들의 목을 해방시켰다. 손님들은 갑자기 이야기보다는 노래가 더 쉽고 자연스럽다는 듯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마침내 톰과 골드베리가 일어나 재빨리 식탁을 치웠다. 손님들은 모두 피곤한 다리를 발판 위에 올려놓은 채 꼼짝 말고 휴식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되자 등불 하나와 벽난로 위 양쪽에 켜 놓은 촛불 두 개를 제외하고 방 안의 모든 등불이 꺼졌다. 골드베리는 촛불을 들고 그들에게 편히 쉬라는 인사를 했다. "아침까지 편안히 주무세요. 밤의 소리는 조금도 신경쓰지 마세요. 달빛과 별빛, 언덕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말고는 아무것도 우리집 창문을 지나갈 수 없으니까요. 안녕!" 옷자락이 스치는 감미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방을 나갔다. 그녀의 발소리는 밤의 고요 속에서 비탈길을 내려가 차가운 돌 위로 살며시 떨어지는 냇물소리처럼 들렸다. 톰은 잠시 말없이 그들 옆에 앉아 있었다. 그 동안 그들은 모두 식사시간에 물어 보고 싶었던 질문을 그제서야 해보려고 용기를 내고 있었다. 졸음이 그들의 눈가에 찾아왔다. 프로도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어르신네, 제가 외치는 소리는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우연히 그때 지나가시던 길이었습니까?" 톰은 즐거운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응, 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냐고? 아니야, 못 들었어. 노래 부르느라 바빴거든. 자네 말대로 우연이하면 우연이랄 수도 있겠지. 자네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내 계획은 아니었어. 우린 자네 소식을 이미 들었었고 자네가 헤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모든 길은 위디원들 강으로 내려가는 그 길로 통하게 되니까 우린 자네가 곧 그 길로 내려와 강가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했었지. 회색 버드나무영감은 대단한 노래꾼이라서 호비트들이 그 간교한 미로에서 빠져나오기란 아주 힘들다네. 하지만 톰이 거기에 마침 볼일이 있었는데, 버드나무영감이 감히 그걸 막을 수야 없지." 톰은 다시 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꾸벅꾸벅하더니 곧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거기 심부름을 갔었지, 내 귀여운 여인을 위해 수련과 푸른 풀잎과 흰 백합을 꺾어 오는 일, 겨울이 오기 전 올해의 마지막 걸음이었지. 눈이 다시 녹을 때까지 그녀의 어여쁜 발을 치장할 꽃, 해마다 여름이 끝날 때면 그녀를 위해 꽃을 찾으러 가지 위디원들 강 저 아래에 있는 넓고 깊고 맑은 연못으로, 이른 봄 가장 일찍 꽃이 피고 가장 늦게 꽃이 지는 곳, 그 연못가에서 먼 옛날 강물의 딸을 보았지 골풀 속에 앉아 있던 아름답고 젊은 골드베리! 그녀의 노랫소리는 달콤했고 그녀의 가슴은 뛰고 있었지.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이해가 잘 되었겠지, 이제 다시는 숲 속의 강물을 따라 깊숙이 가지는 않겠네, 이 해가 가기까지는. 또한 봄이 오기까지는. 다시 버드나무영감이 집을 지나지 않으리, 즐거운 봄이 오기까지는. 봄이 와 강물의 딸이 춤추며 강변을 따라 내려가 목욕할 때까지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도는 질문을 한가지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버드나무노인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그는 누굽니까? 전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자 메리와 피핀이 갑자기 몸을 바로 일으키며 동시에 외쳤다. "안 돼, 하지 마세요! 지금은 안 돼요! 내일아침까지는 안 돼요!" "옳은 말이야. 지금은 휴식을 취할 시간이야. 세상이 어둠 속에 들어갈 때는 듣는 것도 조심해야 할 때가 있지. 아침햇빛이 비칠 때까지는 잠을 자게. 편히 자! 밤의 소리도 두려워하지 말고, 회색 버드나무도 두려워 말게." 그는 등불을 내려 불어 끄고는 양손에 촛불을 하나씩 들고 그들을 침실로 데려갔다. 그들의 매트리스와 베개는 깃털처럼 푹신했고 담요는 흰 양털로 짠 것이었다. 깊은 침대 속에 파묻고 가벼운 이불을 덮자마자 그들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밤중에 프로도는 깜깜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둥근 통로가 뚫린 검은 암벽이 펼쳐졌다. 프로도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같이 느껴졌다. 암벽에 산처럼 둘러싸인 평지 한복판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는 거대한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꼭대기에는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떠오르는 달은 잠시 그의 머리 위에 멈추었고 바람이 불자 그의 백발은 달빛에 반짝였다. 어두운 평원으로부터 소름끼치는 통곡소리와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날개 모양의 그림자가 갑자기 달을 가로질러 갔다. 첨탑 위의 사람의 형체가 두 팔을 들자 그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득였다. 거대한 독수리가 내려앉더니 그를 낚아채 멀리 날아갔다. 통곡소리가 커지며 늑대들이 울부짖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바람소리를 타고 동쪽으로부터 따가닥 따가닥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도는 '암흑의 기사들!' 하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으나 말굽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안전한 돌집을 과연 다시 떠날 용기를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꼼짝도 않고 귀를 기울이며 누워 있었다. 그러나 사위는 조용했고 마침내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잠이 들어 기억할 수 없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그 옆에서는 피핀이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몸을 뒤틀며 신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면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둠 속에서 그의 꿈자리를 괴롭혔던 소리를 여전히 들을 수 있었다. 뚝뚝 끼익. 바람 속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손가락 같은 잔가지들이 벽과 유리창을 긁어 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삐걱 삐걱 삐걱. 그는 집 근처에 혹시 버드나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럭 겁이 났다. 또 지금 누워 있는 곳이 보통 집이 아니라 버드나무 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삐걱삐걱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다시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 푹신한 베개를 만져 보고 안심하며 다시 누웠다.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두려워 말게! 아침까지 편히 쉬어! 밤의 소리는 걱정 말게!" 그리고나서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메리의 고요한 잠자리를 괴롭힌 것은 물소리였다. 물소리는 처음에는 잔잔하게 졸졸 들려오다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는 집 주변을 온통 끝도 보이지 않는 호수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벽 아래로부터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나며 서서히 물이 방 안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에 빠져 죽겠어. 곧 침대 위까지 올라오겠지.' 체념을 하는 사이에 벌써 그는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늪에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벌떡 일어난다는 것이 차갑고 딱딱한 돌 모서리를 발로 차버렸다.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달빛과 별빛, 언덕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말고는 아무것도 우리집을 지나갈 수 없으니까요.' 지나가던 따뜻한 미풍이 커튼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샘은 적어도 자기 기억으로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세상 모르게 잠을 잤다. 네 명의 호비트는 아침햇살에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톰이 찌르레기처럼 휘파람을 불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헤이! 오라, 메리 돌! 데리 돌! 다정한 친구들!" 그가 노란 커튼을 걷자 호비트들은 방 양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상쾌한 기분으로 벌떡 일어났다. 프로도는 동쪽 창으로 달려가 이슬을 맞아 회색빛을 띠고 있는 채마밭을 내다보았다. 그는 잔디가 벽에까지 바짝 붙어 자라고 있고 또 온통 말발굽으로 푹푹 파여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받침대를 휘감고 자라난 강낭콩의 키 큰 줄기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너머 먼 곳에는 일출을 배경으로 회색 산봉우리가 희끄무레 떠올랐다. 어슴푸레한 아침이었다. 가장자리가 붉은 기다란 양털구름 너머로 노란 하늘이 희미하게 아물거렸다. 비가 올 징조였다. 그러나 아침은 점점 밝아졌고 콩밭의 붉은 꽃은 이슬 젖은 녹색 풀잎 위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피핀은 서쪽 창 밖으로 안개 연못을 내다보았다. 포레스트는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비스듬한 구름지붕을 보는 느낌이었다. 안개가 깃털이나 물결 모양으로 갈라지는 곳은 골짜기나 물길, 위디원들 강의 계곡이었다. 강은 왼쪽 산 위에서 시작돼 하얀 안개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가까이에는 꽃밭과 은빛 그물처럼 잘 정돈된 생울타리가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이슬방울로 연회색을 띤 풀밭이 산뜻한 모습을 드러냈다. 버드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안녕들 한가, 즐거운 친구들!" 톰이 창문을 크게 열어 젖히며 소리쳤다. 시원한 공기가 들려오며 빗방울 내음이 났다. "오늘은 해가 잘 나지 않을 것 같네. 새벽이 어슴푸레 시작될 때부터 난 저 멀리 산봉우리까지, 바람과 날씨와 밭 밑 젖은 풀과 머리 위 젖은 하늘냄새를 맡으며 한 바퀴 돌아왔지.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불러 골드베리를 깨웠어. 하지만 이른 아침에는 아무도 호비트들을 깨우지 않네. 꼬마 손님들은 한밤중에 깜깜할 때 잠을 깨고 날이 새면 자기 시작하는 모양이니까! 링 어 딩 딜로! 자, 일어나게. 유쾌한 친구들! 밤의 소리는 잊어버리고 링 어 딩 딜로 델! 데리 델! 귀한 손님들! 빨리 오면 식탁에서 아침식사를 대접하겠지만 늦으면 풀잎과 빗방울밖에 없을 거야." 말할 것도 없이 - 톰이 협박이 무서워서는 물론 아니었지만 - 호비트들은 곧 달려갔고 식탁의 접시가 하나둘 비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톰과 골드베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톰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기도 하고 층계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집 바깥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서쪽으로 난 창문이 열려 있어 안개가 구름처럼 뒤덮인 골짜기가 내려다보였다. 초가지붕 처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들이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구름이 더 짙게 깔리더니 회색 빗방울이 부드럽게 조금씩 조금씩 떨어졌다. 그 두꺼운 커튼 뒤로 올드 포레스트는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골드베리의 맑은 노랫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마치 그 노래에 맞춰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노랫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노래가 메마른 들판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달콤한 비의 노래라는 것은 분명했으며 고원의 샘물에서부터 저 아래쪽 바다까지 흘러가는 강의 일생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호비트들은 즐겁게 노래를 들었고 프로도는 특히 기분이 좋아 빗줄기를 바라보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출발을 연기할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나 적어도 오늘은 떠나지 않아도 되겠다고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바람이 서쪽으로부터 잠잠해지더니 더 시커멓고 더 습한 구름이 빗방울을 가득 싣고 다운즈의 벌거벗은 대지 위로 날아갔다. 집 주변에서는 빗줄기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는 열린 출입문 옆에 서서 백묵처럼 하얀 길이 작은 우윳빛 강으로 변해 골짜기 아래쪽으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톰 봄바딜은 마치 빗줄기를 막기라도 하듯 두 팔로 비를 가리며 집모통이를 돌아왔다. 사실 문간에 성큼 뛰어든 그의 몸은 신발을 제외하고는 전혀 젖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서 벽난로 구석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의자에 자리를 잡고 호비트들을 자기 옆으로 불러 모았다. "오늘은 골드베리가 세탁하는 날이자 가을 대청소를 하는 날이지. 호비트들에겐 빗물이 너무 셀 테니까 여기서 푹 쉬도록 하게. 오늘 같은 날은 옛날이야기를 하거나 궁금한 사연을 주고받기에 안성맞춤이지. 그러면 톰이 먼저 이야기를 하지." 그는 희한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때로는 반쯤 혼자 이야기하는 듯하기도 했고 때로는 짙은 눈썹 아래로 형형한 푸른 눈을 번득이며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종종 그의 이야기는 노래로 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그는 포레스트의 벌과 꽃,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이상한 짐승들에 관한 전설을 들려주었고, 악한 무리와 선한 무리, 다정한 것과 사나운 것, 잔인한 것과 친절한 것, 그리고 덤불숲 속에 숨어 있는 비밀까지도 이야기해 주었다. 호비트들은 이야기를 들이며 자신들과는 다른 포레스트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끼리 평화롭게 지내는 곳에서는 바로 자신들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다. 톰은 이야기 도중 버드나무영감을 이따금 언급했다. 그래서 프로도는 그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실은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고 하는 편이 나을 법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유쾌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이상하고 사악한 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던 나무들의 속마음과 사정을 톰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으며 대지를 자유로이 활보하며 물도 뜯고 베고 자리고 불 태우는 파괴자와 약탈자들에 대해 그들이 품고 있는 증오심도 수긍이 갔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이 숲의 이름이 올드 포레스트라 불리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숲은 지금은 잊혀진 고대의 거대한 삼림지였다. 그 안에는 아직도 자기가 주인이었던 때를 기억하며 산처럼 서서히 늙어가는, 나무들의 조상의 조상이 살고 있었다. 숱한 세월이 그들에게 자만심과 심원한 지혜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 동안 원한도 쌓여 갔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버드나무 고목이었다. 그의 마음은 썩어가고 있었으나 힘은 아주 강하고 지혜는 간교했다. 그는 바람을 부릴 줄 알았으며 노래와 생각은 위디원들 강 양안의 숲 속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그의 갈급한 회색 영혼은 대지로부터 힘을 끌어냈고 땅 속으로는 실뿌리처럼, 공중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처럼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는 생울타리 경계에서 다운즈까지의 모든 포레스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갑자기 톰의 이야기가 숲을 떠나 강 상류로 뛰어올라갔다. 물거품이 이는 폭포와 조약돌, 세월에 마멸된 바위를 넘어 난쟁이 풀밭의 작은 꽃들과 젖은 바의 틈에서 노닐던 이야기는 드디어 다운즈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레이트 배로우와 초록무덤들 그리고 산등성이의 돌로 쌓은 원형지대와 언덕 사이의 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양떼들이 무리지어 음메 울고 있으며 녹색성벽과 흰색성벽이 일어났다. 고원에는 성채가 세워졌다. 소왕국의 제왕들은 서로 싸움을 벌였고 그들의 탐욕스런 신병기의 붉은 칼날에 아침햇살이 불꽃처럼 반사되었다. 승리와 패배가 있었으며 탑이 무너지고 성채가 불타 올라 화염이 하늘을 찔렀다. 죽은 왕과 왕비들의 상여 위에 황금이 덮여졌고, 무덤이 그들을 덮고나서 돌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위에 풀이 자랐다. 오래 전엔 양떼들이 풀을 뜯으며 뛰놀았으나 언덕은 곧 황량한 빈터가 되어 버렸다. 멀리 암흑의 땅으로부터 어떤 그림자가 나타나면서 무덤 속의 뼈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배로우인들은 얼음같이 차가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황금 목걸이를 바람에 휘날리며 골짜기를 어슬렁거렸다. 원형지대의 돌기둥들은 마치 부서진 이빨 모양 달빛 속에서 흰빛을 번뜩이며 웃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몸을 떨었다. 샤이어에서도 포레스트 너머 배로우 다운즈에 살고 있는 배로우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아무리 아늑한 난롯가에서라도 마찬가지였다. 네 명의 호비트는 그 집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빠져 잊고 있었던 사실을 갑자기 기억해 냈다. 톰 봄바딜의 집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산골짜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톰의 이야기 가닥을 놓쳐 버리고 서로를 곁눈질하며 불안하게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다시 따라잡았을 때 톰은 그들의 기억 저편에 있는 이상한 나라, 세상이 지금보다 더 넓어서 서쪽 해안까지 바다가 바로 뚫려 있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톰은 거기서 더 거슬러올라가 요정의 나라만이 깨어 있던 태고의 별빛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었다. 마치 잠이 들기라도 한 듯 고개를 꾸벅이는 것이었다. 호비트들은 마법에라도 홀린 듯 꼼짝도 못하고 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주문이라도 되었던 양 바람도 사라지고 구름도 개고 햇빛도 걷힌 채 동쪽과 서쪽에서 어둠이 몰려와 이윽고 온 하늘을 하얀 별빛으로 가득 채웠다. 며칠 낮, 며칠 밤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프로도는 배가 고프지도 피곤하지도 않고 오직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별빛이 창가로 흘러들었고 우주의 적막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그 적막이 두려워지면서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을 했다. "어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응, 뭐라고?" 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광채를 발했다. "내 이름을 아직도 모르는가?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일세. 그러면 자네는 누군가? 아직 난 이름도 모른다네. 하지만 자네는 젊고 나는 늙었네. 이 세상에서 가장 늙은 사람, 그게 날세. 친구들, 내 말을 새겨듣게. 톰은 강과 나무들이 있기 전에 여기 이 자리에 있었다네. 톰은 최초의 빗방울과 최초의 도토리를 기억하네. 그는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길을 닦았고 난쟁이들이 도착하는 것도 보았네. 그는 제왕들과 무덤과 배로우인들보다 먼저 여기에 있었고, 바다가 희어지기 전 요정들이 서쪽으로 이동할 때도 여기 있었네. 그는 저 별빛 뒤편의 어둠이 두렵지 않던 시절, 즉 암흑의 군주가 먼 곳에서 나타나기 전의 세계도 알고 있네." 어떤 그림자가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해 호비트들은 창문 쪽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골드베리가 등뒤로 불빛을 받으며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촛불을 들고 한 손으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불빛은 마치 흰 조개껍데기에 햇빛이 반사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젠 비가 그쳤어요. 별빛 아래로 새로운 물이 흘러가고 있어요. 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톰이 맞장구를 쳤다. "먹고 마실 것도 있어야겠지! 긴 이야기는 목을 마르게 하고 오랫동안 듣는 것도 배를 고프게 하는 일이야. 아침, 점심, 저녁까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굴뚝 밑 선반에서 양초를 내려 골드베리가 들고 있는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테이블 주변에서 춤을 추더니 갑자기 깡총깡총 문턱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그는 곧 음식을 담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톰과 골드베리는 상을 차렸고 호비트들은 경이와 미소가 반쯤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골드베리의 우아한 자태는 너무 아름다웠고 톰이 깡총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유쾌했다. 묘하게도 그들은 방을 들락날락하고 식탁 주변을 빙빙 돌면서 서로를 방해하지도 않으며 마치 함께 춤이라도 추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 음식과 그릇과 촛불이 빠르게 준비되었다. 음식은 희고 노란 촛불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톰이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고 골드베리는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그제서야 호비트들은 그녀가 하얀 허리띠를 두르고 온 몸을 은빛으로 치장한 것과 그녀의 구두가 고기비늘로 만든 것임을 알았다. 톰의 옷은 모두 빗물에 씻긴 물망초처럼 맑고 푸른 빛깔이었고 양말은 초록색이었다. 지난번보다 더 멋진 저녁식사였다. 톰의 이야기에 흘려 몇 끼를 걸렀던 것일까? 음식이 차려지자마자 그들은 마치 일 주일이나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숟가락만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허기를 끈 그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함께 웃으며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밥을 다 먹고난 후 골드베리는 그들에게 노래를 몇 곡 들려주었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산 속으로 즐겁게 울려퍼지다가 서서히 적막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적막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어떤 것들보다 더 큰 호수와 강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물 속에는 하늘도 있었고 더 깊은 곳에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난롯가를 떠났다. 그러나 톰은 말짱하게 깨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느라 바빴다. 톰은 이미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고 샤이어의 역사와 내력에 대해서는 호비트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의 역사까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 그들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최근에 얻은 소식이 대부분 농부 매고트에게 들은 것이라고 털어놓아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고트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늙은 발 밑에는 대지가 있고, 그의 손가락 위에는 흙이 있고, 그의 뼈 속에는 지혜가 있고 그의 두 눈은 열려 있네." 톰은 매고트를 이렇게 칭찬했다. 톰은 요정들과 알고 지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길도르에게서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사실 톰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았고 질문 또한 매우 교묘했기 때문에 프로도는 자기도 모르게 갠달프에게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자신의 희망과 공포, 그리고 빌보에 대해 그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암흑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두 눈엔 섬광이 일었다. "그 반지 좀 보여 주게!" 이야기 도중에 그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프로도는 스스로 놀랍게도 얼른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줄에서 끌러서 톰에게 넘겨 주었다. 그것은 그의 커다란 갈색 손바닥 위에 놓이자 더 커지는 듯 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반지를 자기 눈에 갖다대고 웃었다. 호비트들은 잠시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광경을 보았다. 반지의 금빛 동그라미 사이로 그의 푸른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톰은 새끼손가락 끝에 반지를 끼고 촛불에 비춰 보았다. 호비트들은 처음에는 무엇이 신기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한참 후에야 입을 벌렸다. 톰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톰은 껄껄 웃고는 공중에서 반지를 빙글 돌렸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프로도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톰은 앞으로 몸을 숙이고 웃으면서 반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프로도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기꾼에게 보석을 빌려준 사람처럼 약간은 의심스럽게 반지를 만져 보았다. 똑같은 반지였다. 모양도 같고 무게도 같았다. 프로도의 손에서는 반지는 항상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뭔가 확인해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갠달프조차 그렇게 끔찍하게 위험시했던 반지를 톰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조금은 불안해졌다.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자 프로도는 기회를 엿보았다. 톰이 오소리들의 이상한 살림살이에 대해 터무니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반지를 슬쩍 꼈다. 메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그를 향해 몸을 돌리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도 못 지르고 입을 벌렸다. 프로도는 약간은 기뻤다. 틈림없는 그 반지였다. 메리는 분명히 그의 의자를 바라보면서도 그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몰래 일어나서 슬그머니 바깥문 쪽으로 향했다. 톰이 그 빛나는 눈으로 모든 것을 다 알아본다는 듯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잠깐만! 프로도, 이리 오게. 어서! 어딜 가는가? 톰 봄바딜이 늙긴 했지만 아직 그만큼 눈이 멀지는 않았네. 반지를 그만 빼게! 자네 손은 반지가 없으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이리 돌아와! 장난 그만 치고 여기와서 앉게! 이야기할 것이 좀더 있어. 그리고 아침의 일도 생각해 두어야 되지 않겠나? 톰이 자네가 헤매지 않도록 길을 잘 가르쳐 주겠네." 프로도는 (재미있는 척하려고 애를 쓰며) 웃었다. 그리고 반지를 빼고는 돌아와서 앉았다. 톰은 내일아침은 해가 나고 날씨가 좋아서 출발하기에는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출발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왜냐하면 그곳 날씨에 대해서는 톰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윗도리를 갈아입는 사이에 날씨가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날씨의 주인이 아닐세. 두 발 짐승은 아무도 주인이 될 수 없지." 그들은 그의 충고대로 그의 집에서 거의 정북 방향으로 다운즈 서쪽의 저지대 비탈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렇게 하루쯤 걸어가면 배로우를 피해 동부대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임무에만 충실하라고 부탁을 했다. "풀밭을 따라가게. 그리고 웬만한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옛 왕국의 돌조각이나 차가운 배로우인들, 혹은 그들의 집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게!" 그는 이 충고를 몇 번이나 당부하고 만약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반드시 서쪽으로 배로우를 지나가라고 일러 주었다. 호! 톰 봄바딜, 톰 봄바딜로! 물이나 숲, 언덕, 갈대, 버드나무 옆이나 불이나 해와 달 어디에 있더라도 이제 우리의 소리를 들어 주오! 오라, 톰 봄바딜, 우리는 그대가 필요해요! 그들은 모두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는 웃으며 그들 모두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는 촛불을 들고 그들을 침실로 인도했다. 제8장 배로우 다운즈의 안개 그날 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도는 꿈인지 생신지 모를 만큼 매혹적인 노랫가락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잿빛 비의 장막 뒤로 흐릿한 불빛처럼 다가오는 노래였다. 노랫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베일을 온통 유리조각과 은조각으로 산산이 갈라 놓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아침해가 떠오르며 광대한 녹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오면서 눈을 떠보니 톰이 마치 새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나무처럼 흥얼거리며 서 있었다. 햇살은 벌써 고개를 넘어 열린 창문으로 비스듬히 비쳐들고 있었으며 창 밖은 온통 녹색과 연노란색으로 덮여 있었다. 호비트들은 자기들끼리만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그런 아침이면 으레 그렇듯 무거운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할 준비를 차렸다. 비온 뒤의 쪽빛 가을 하늘은 서늘하고 맑고 환했다. 북서쪽으로부터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말 못하는 조랑말들은 벌써 코를 불어 대며 어서 떠나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톰은 문간에서 춤을 추듯 모자를 흔들어 대며 호비트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다. 빨리 떠나자는 신호였다. 그들은 집 뒤켠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 집을 뒤에서 보호하고 있는 바위턱의 북쪽 끝을 향해 비스듬하게 올라갈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급경사길로 말을 끌고 오르기 위해 그들 모두 말에서 내렸을 때 갑자기 프로도가 발을 멈추고 소리쳤다. "골드베리! 은록색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 우린 어제저녁 이후로는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작별인사도 못했어!" 그는 몹시 서운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때 그들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물결치듯 귓가에 들려왔다. 바위턱 바로 위에서 그녀가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채는 햇빛에 현란한 광채를 띠며 휘날리고 있었고 그녀가 춤을 추는 동안 발 밑 풀잎들은 이승방울 같은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 그들은 서둘러 마지막 비탈길을 올라가 숨을 헉헉거리며 그녀 옆에 섰다. 그들이 절을 하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라는 손짓을 했다. 산 아래로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대지가 펼쳐졌다. 포레스트의 산 위에서 보았던 안개 자욱했던 희미한 풍경과는 달리 언덕과 골짜기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포레스트도 이제는 서쪽의 거뭇거뭇한 숲지대 가운데서 연록색으로 두드러지게 구별되어 드러났다. 그쪽으로는 녹색과 황색, 적갈색의 산등성이들이 햇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너머로 브랜디와인 강의 골짜기가 숨어 있었다. 남쪽으로 위디원들 강 줄기를 따라가면 브랜디와인 강이 저지대에서 만곡을 이루며 호비트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멀리서 희미한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북쪽으로는 지대가 차츰 낮아져 회색과 녹색, 연고동색의 평지와 구릉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아무런 형체도 없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동쪽에는 배로우 다운즈의 수많은 능선이 아침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차츰 멀리 사라져 갔다. 그것은 희뿌연 하늘이 지평선과 경계가 맞닿아 있는 까마득히 먼 곳이었지만 그들은 옛이야기와 기억을 통해 그것이 높고 험준한 산맥이란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산 밑으로 펄쩍 뛰어내려갔다. 몇 발짝만 달려가면 아무 곳이라도 갈 수 있을 것같이 느껴졌다. 그들은 톰처럼 가볍게 높은 산들을 징검다리삼아 안개산맥을 향해 곧바로 뛰어가야 할 만큼 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부대로를 향해 다운즈의 구불구불한 외곽을 기약없이 걸어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골드베리가 말을 걸어 수심에 잠긴 그들의 눈과 생각을 일깨웠다. "자, 어서 가세요, 아름다운 손님들! 목표를 잊지 말아요. 바람을 왼쪽 눈으로 받으며 북쪽으로 가세요. 발걸음에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해가 있을 동안 열심히 가세요!" 그리고나서 특별히 프로도를 향해 다시 인사했다. "안녕히, 요정의 친구여! 즐거운 만남이었어요!" 그러나 프로도는 대답할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말에 올랐다. 언덕을 뒤로 하고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따라 친구들을 이끌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톰 봄바딜의 집과 골짜기와 포레스트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산등성이의 푸른 풀밭 사이로 지나갈 무렵 이미 날씨는 더워졌고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잔디냄새가 진하게 코를 자극했다. 녹색 골짜기의 바닥까지 내려와 뒤돌아보았을 때 그들은 골드베리가 여전히 하늘을 배경으로 한 송이 꽃처럼 조그맣게 날씬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이 뒤돌아보자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소리친 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산 너머로 사라졌다. 길은 골짜기 바닥을 꼬불꼬불 따라 이어져 가파른 언덕 기슭을 돌아 더 깊고 넓은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그 다음에는 좀더 높은 산마루로 다시 올라가더니 거기서부터 때로는 산등성이를 따라, 때로는 부드러운 기슭을 지나 새로운 언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기도 했다 주위에는 나무도 없고 물도 찾을 수 없었으며 짧고 푹신한 잔디만이 깔려 있었다. 멀리 산등성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낯선 새들의 외로운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양은 더 높이 떠올랐고 날은 더워졌다. 산등성이를 새로 오를 때마다 바람은 점점 잦아드는 듯했다. 멀리 서쪽을 바라보자 포레스트에서는 어제 내린 비가 나뭇잎과 뿌리와 흙에서 수증기로 변해 버린 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어두운 그림자는 저 멀리 물러나고 높은 하늘이 파란 모자처럼 뜨겁고 무겁게 내리눌렀다. 한낮 무렵 그들은 바닥이 넓고 평평한 분지로 들어섰다. 그곳은 가장자리를 녹색으로 두른 얕은 접시 모양의 분지였다. 바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하늘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본 그들은 용기가 다시 솟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온 것이 분명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운즈가 곧 끝날 것임이 분명했다. 눈 아래로 길쭉한 계곡이 북쪽으로 굽어졌고 그 계곡은 경사진 두 언덕 사이의 통로로 연결되었다. 그 너머로는 기다란 검은 선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메리가 말했다. "저건 가로수예요. 동부대로가 틀림없어요. 브랜디와인 다리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멀리까지 가로수가 서 있거든요. 소문에는 아주 먼 옛날에 심어졌다고 해요." 그러자 프로도가 말을 받았다. "멋진데! 오후에도 아침처럼만 걷는다면 해가 지기 전에 다운즈를 빠져나가 야영지를 찾을 수 있겠어." 그렇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동쪽을 한번 살펴보았다. 다운즈의 산들은 더 우뚝한 모습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산비탈 곳곳에는 녹색의 무덤이 마치 왕관처럼 흩어져 있었다. 갖가지 비석들이 녹색 잇몸에서 나온 들쑥날쑥한 이빨처럼 땅위에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그 광경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돌려 쉬고 있던 우묵한 분지를 둘러보았다. 둥근 분지 한가운데에 한낮의 태양을 바라보며 큰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한낮이라 그림자가 없었다. 비석은 볼품은 없었지만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이정표나 길 표지판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경고판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배가 고팠으며 태양은 아직 너무 뜨거웠다. 그들은 비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뜨거운 태양도 이 비석만은 어쩔 수 없는 듯 비석은 이상하리만치 서늘했다. 그들은 여하튼 시원해서 좋았다. 거기서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꺼내 놓고 맑은 하늘 아래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날 하루 먹기에는 충분할 만큼 톰이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기에 음식은 맛이나 양이나 모자람이 없었다. 등짐을 풀어 놓은 조랑말들도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었다. 언덕을 겨우겨우 올라가 배가 터지게 식사를 하고, 태양은 여전히 뜨겁고 잔디향기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등을 깔고 다리를 뻗고 코 위로 하늘만 보고 누워 있으니 그들이 다음 순간 어떤 상태로 돌입하리란 것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뻔한 이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던 잠에서 갑작스런 불편을 느끼며 깨어났다. 비석은 차가웠고 그들이 누운 동쪽으로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태양은 그들이 누워 있던 분지 서쪽 가장자리 위에서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누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쪽, 남쪽, 북쪽 모두 분지 밖으로 짙은 안개가 차가운 벽을 두른 듯 깔려 있었다. 주변에는 무거운 적막감이 감돌았고 냉기마저 느껴졌다. 조랑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저편에 모여 서 있었다. 호비트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서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개로 둘러싸인 섬 속에 고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당황해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석양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흰 안개바다 속으로 빠져들어갔고 등뒤편 동쪽에서 차가운 잿빛 어둠이 밀려왔다. 안개가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위로 밀려 올라오더니 그들 머리 위에 지붕처럼 자리잡았다. 그들은 중앙의 비석이 기둥처럼 버티고 선 안개의 방 안에 갇혀 버린 꼴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덫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했지만 크게 낙심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보였던 동부대로의 검은 선이 그려 놓았던 희망적인 광경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어느 쪽인지도 알고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이 비석 둘레의 분지가 너무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더 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서둘러 짐을 꾸렸다. 그들은 곧 조랑말들을 이끌고 일렬종대로 안개바다에 빠진 비탈길을 북쪽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갈수록 안개는 더 차갑고 축축해져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계곡 바닥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너무 추워져 외투와 모자를 꺼냈으나 그것들도 곧 흰 이슬에 젖어 축축해졌다. 그들은 조랑말에 올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천천히 더듬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침에 보았던 긴 계곡 북쪽 끝에 있던 대문처럼 생긴 통로를 목표삼아 가능하면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았다. 일단 그곳만 빠져나가면 바로 직선코스로 동부대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으며 게다가 다운즈만 벗어나면 안개도 없어지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행군속도는 매우 느렸다. 길을 잃고 다른 쪽에서 헤매지 않도록 모두 프로도의 뒤를 따라 일렬로 나아갔다. 샘이 바로 뒤에 섰으며 그 다음에 피핀, 메리의 순서였다. 계곡은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희망적인 조짐이 보였다. 전방의 길 양쪽으로 안개 속에서 어둠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프로도는 드디어 언덕 사이의 통로 즉 배로우 다운즈의 북쪽 입구에 도착했다고 추측했다. 저곳만 지나면 안심이다. "자, 따라와!" 그는 어깨 너머로 소리치고 앞으로 서둘러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곧 당혹과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둠의 장막은 더욱 깊어졌고 그들은 그럴수록 위축되었다. 갑자기 그는 불길한 탑처럼 생긴 두 개의 비석이 마치 문짝이 떨어져 나간 기둥이 서로 떠받치고 있듯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을 발견했다. 아침에 산 위에서는 이런 것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이를 통과했지만 어둠은 마치 옥죄어오듯 더 짙어졌다. 조랑말이 히힝 콧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프로도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이 혼자만 남은 것이었다. 그는 외쳐 댔다. "샘! 피핀! 메리! 이쪽이야! 왜 따라오지 않는 거야!" 대답이 없었다. 그는 뒷걸음질치며 미친 듯 외쳤다. "샘! 샘! 메리! 피핀!" 조랑말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무슨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호이! 프로도! 호이!' 동쪽이었다. 그는 커다란 바위 밑에 서서 왼쪽의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한 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가파른 비탈길 같았다. 그쪽으로 달려가면서도 프로도는 계속 미친 듯 외쳤지만 한참 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아까보다 더 희미한 소리가 더 위쪽,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프로도! 호이!'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나서 '살려 줘! 살려 줘! 하는 듯한 아우성이 몇 번 반복되다가 마지막으로 '살려 줘!' 하는 애원이 기다란 통곡처럼 여운을 남기며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기에 방향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점점 더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지면의 감촉으로 보아 마침내 언덕이나 산등성이의 꼭대기에 올라온 것 같았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기진맥진했으나 여전히 으스스한 냉기를 느꼈다. 어둠은 여전히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들 있어!" 그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서 있었다. 갑자기 냉기가 심해지며 얼음처럼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변에 변화가 일어났다. 안개가 뒤로 빠져나가며 갈래갈래 흩어졌다. 자기 입김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둠은 뒤로 물러나 옅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서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과 안개들 사이로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바람이 쌩쌩 소리를 내며 풀잎 위로 스쳐갔다. 어디선가 들릴락말락하는 비명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그쪽으로 움직였다. 걸어가는 동안 안개가 양 옆으로, 위로 걷히면서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드러났다. 방향을 가늠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자신이 언덕 위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북쪽으로부터 언덕을 기어올라왔던 것이 분명했다. 동쪽에서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오른쪽으로 서쪽 하늘의 별들을 배경으로 검은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어디들 있는 거야?"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해 그는 고함을 질렀다. "여기야!" 음산한 저음의 목소리가 땅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들려왔다. "난 널 기다리고 있어!" "안 돼!" 프로도는 소리를 질렀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힘없이 무릎을 꺾고 무너져내리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림자 같은 검은 형체가 별빛을 등지고 커다랗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것은 몸을 숙여 그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 검은 형체의 눈인 듯싶은 곳에서 마치 기억 저편에서 비쳐오는 것 같은 희미한 광채가 소름끼칠 정도로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무쇠보다 더 육중하고 차가운 손길이 그를 잡아챘다. 뼈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얼음장같이 차가운 감촉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후 그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프로도는 잠시 막막한 공포감으로 치를 떨며 아무 생각도, 어떠한 움직임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무덤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꼼짝없이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무시무시한 배로우인들의 주문에 걸려 무덤 속으로 끌려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감히 움직일 엄두도 못 내고 차가운 돌바닥에 그대로 등을 기댄 채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공포가 너무 심하다 보니 오히려 그 공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일부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프로도는 어느새 그대로 누워 빌보 배긴스와 그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샤이어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모험과 여행을 이야기하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뚱뚱하고 소심한 호비트라 할지라도 막상 최후의 절망적인 상황에 맞부딪칠 때면 솟아나게 마련인 신비한(대개는 깊이 숨어 있는 것이 흠이지만) 용기의 씨앗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하물며 프로도는 지나치게 뚱뚱하지도 소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실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빌보(와 갠달프)는 그를 샤이어 최고의 호비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험이 드디어 끔찍한 종말로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감이 오히려 그에게 더욱 강인한 생명력과 끈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용수철처럼 탄력있게 튀어오를 각오로 단단히 무장한 듯 그의 몸은 점점 더 긴장되고 있었으며 이제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는 나약한 먹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그는 불현듯 어둠이 서서히 걷혀 가는 것을 깨달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점점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자기가 누워 있는 마룻바닥 주변만을 감돌 뿐 천정이나 벽에는 닿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자신이 어디 있는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몸을 비트는 순간 차가운 불빛 속에서 바로 옆에 샘과 피핀, 메리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도 모두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으며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황금으로 세공한 듯한 보석들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불빛 속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머리에는 장식핀이 꽂혀 있었고 허리에는 황금혁대, 손가락에는 수많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옆구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고 발끝에는 방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세 호비트의 목에는 일자로 긴 칼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높낮이가 있는 차가운 웅얼거림이었다.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한없이 처량하게 들려왔고 때로는 하늘 높이 가냘프게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땅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신음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처량하면서도 섬뜩한 소리들이 형체도 없이 흘러가는 와중에 간혹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섞여 들기도 했다. 소름끼칠 만큼 딱딱하고 섬뜩한 소리들이었으며 냉혹하면서도 처연한 한탄이었다. 밤은 자신이 잃어버린 아침을 비난하고 있었고 추위는 자신이 갈망하는 더위를 증오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뼛속까지 으스스해졌다. 잠시 후 노래는 더 분명해졌고 프로도는 가슴이 차가워지며 그것이 어떤 주문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도 가슴도 뼈도 차가워지고, 돌 아래 잠도 차가울지어다. 돌침대 위에서도 깨어나지 말라, 해도 사라지고 달도 멈출 때까지. 어두운 바람 속에서는 별들도 죽어, 여기 황금 위에 조용히 누울지어다, 암흑의 군주가 자신의 손을 죽은 바다와 황폐한 대지 위에 들어올릴 때까지. 그의 머리 위로 삐걱거리며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팔로 몸을 일으키던 그는 희미한 빛 속에서 비로소 뒤쪽으로 모퉁이가 져 있는 통로 안에 자신들이 누워 있음을 알았다. 웬 길쭉한 팔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모퉁이를 돌아나와 가장 가까이에 누워 있는 샘과 그의 목 위에 놓여 있는 칼의 손잡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프로도는 처음에는 그 주문에 의해 자신이 돌로 변해 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곧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감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만일 반지를 낀다면 그 배로우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혼자 살아나 메리와 샘, 피핀을 안타까워하며 풀밭을 뛰어내려가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면 갠달프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에게 솟아난 용기는 친구들을 그렇게 버리고 도망갈 만한 비겁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내젓고는 주머니를 더듬으며 다시 자기 자신과 싸웠다. 그러는 동안 팔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자기 옆에 놓여 있던 단도를 집어들고 동료들의 몸 위로 무릎을 꿇은 채 웅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다가오는 팔의 손목을 베었다. 손이 잘려나갔고 동시에 칼도 손잡이까지 떨어져 버렸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빛도 사라졌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차츰 잦아들었다. 프로도는 몸을 굽혀 메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순간 불현듯 그의 의식 위로 불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안개 속을 헤매면서 줄곧 잊고 있었던 언덕 아래 집의 기억, 즉 톰의 노래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목을 컥컥 막히게 하는 필사적인 목소리로 '호! 톰 봄바딜!' 하고 소리를 가다듬으며 점점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게 변했으며 어두운 실내는 마치 북과 트럼펫이 함께 어우러진 듯한 소리가 꽉차기 시작했다. 호! 톰 봄바딜, 톰 봄바딜로! 물이나 숲, 언덕, 갈대, 버드나무 옆이나 불이나 해, 달, 어디에 있더라도 이제 우리의 소리를 들어 주오! 오라, 톰 봄바딜, 우리는 그대가 필요하오! 노래를 마치자 일순 깊은 정적이 흘렀고 프로도는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를 애가 타는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의 그 짧은 정적이 마치 천 년 세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먼 곳으로부터 톰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땅 끝에서부터 울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두꺼운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기도 했다. 늙은 톰 봄바딜은 유쾌한 친구, 재킷은 하늘색, 구두는 노란색, 아무도 그를 붙잡지 못하지, 그는 주인이니까. 그의 노래가 가장 힘찬 노래, 그의 발은 가장 빠른 발. 거대한 바위가 굴러떨어지듯 귀를 멍멍하게 하는 큰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어둠 속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대낮처럼 환한 진짜 햇빛이었다. 프로도의 발 뒤, 방 끝 쪽으로 문처럼 생긴 낮은 통로가 드러나면서 톰의 머리(모자, 깃털, 그리고 몸통)가 떠오르는 붉은 아침햇살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햇빛이 마룻바닥과 프로도 옆에 누워있는 세 호비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 있기는 했지만 창백했던 얼굴은 핏기를 되찾았으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톰은 모자를 벗고 몸을 숙여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노래를 불렀다. 꺼져라, 이 늙은 놈! 햇빛 속으로 사라져! 차가운 안개처럼 오그라들어 바람처럼 통곡하며 산을 넘어 저 멀리 황량한 대지로 떠나가라!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 네 무덤을 비우고 떠나라! 잊혀지고 사라져라, 영원히 문이 열리지 않는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 세상이 바뀔 때까지. 노래가 끝나자 방 안쪽이 요란스럽게 무너졌다. 그리고나서 기다란 여운을 남기며 비명이 이어지다가 끝없이 먼 곳으로 아득하게 사라져 갔으며 그 다음에는 다시 고요해졌다. "이리 오게, 내 친구 프로도! 깨끗한 풀밭으로 나가야겠어. 나 좀 거들어 주게." 톰은 세 호비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메리와 피핀과 샘을 밖으로 옮겼다. 프로도는 마지막으로 무덤을 빠져나오면서 잘린 손이 아직도 흙더미 속에 묻혀 거미처럼 꿈틀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톰이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가더니 쿵쾅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린 후 갖가지 보석을 한아름 안고 나왔다. 금, 은, 동, 청동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구슬과 고리, 줄, 보석달린 장식품 등이었다. 그는 녹색 무덤 위로 올라가 햇빛 속에 환히 비치도록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 위에 올라서서 그는 한 손에 모자를 들고 바람결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무덤 서쪽의 풀밭에 나란히 눕혀진 세 호비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또렷하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유쾌한 내 형제들 이제 일어나라! 일어나 내 소리를 들으라! 심장과 사지도 이제 온기를 찾으라! 차가운 비석은 떨어졌노라. 어둠의 문이 활짝 열렸고 죽음의 손도 파괴되었노라. 밤은 밤 속으로 달아났고 대문이 환하게 열렸노라. 신기하게도 호비트들은 몸을 떨더니 팔을 뻗으며 눈을 비비고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먼저 프로도를 보고 다음에는 머리맡에 있는 무덤 위의 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입고 있는 흰 옷과 갖가지 금빛 보석과 달그락거리는 장신구들을 눈이 휘둥그레져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눈가에 내려온 황금고리를 더듬으며 메리가 먼저 물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며 눈이 감겼다. "아, 이제 기억이 나요. 칸 둠 사람들이 밤에 우리에게 와서 이 옷을 입혔어요. 아, 그리고 내 가슴에 창을!"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안 돼, 안 돼!'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눈을 뜨면서 다시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꿈을 꾸었군, 어디 갔었어요, 프로도?" "길을 잃은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우선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생각해 보세. 여길 떠나야지!" 그러자 샘이 말했다. "이 옷을 입은 채 말이에요? 제 옷은 어디 갔지요?" 그는 벨트와 고리와 반지 등을 풀밭 위에 내려놓고는 혹시 근처에서 자기 외투와 재킷, 바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사방을 힘없이 둘어보았다. "옷은 다시 찾지 못할 걸세." 톰이 무덤에서 내려오며 말하고는 햇빛 속에서 그들 주위를 빙빙 돌면서 춤을 추며 웃었다. 무슨 위험하거나 무시무시한 일이 조금 전에 벌어졌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의 춤과 장난기어린 눈빛을 바라보는 호비트들의 가슴 속에도 이미 공포심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이제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피핀이 그를 향해 물었다. "무슨 뜻이죠? 왜 못 찾습니까?" 그러자 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지금 깊은 물 속에서 살아나온 거야. 물에 빠진 호비트를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격이군! 자, 유쾌한 친구들! 마음을 편하게 먹고 따뜻한 햇볕에 팔다리와 가슴을 녹이도록 하게. 이 차가운 옷은 벗어 버리고. 톰이 사냥을 갔다 올 동안 발가벗고 풀밭을 달려 보게!" 그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산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프로도는 산과 산 사이의 녹색 계곡을 따라 여전히 흥얼거리며 남쪽으로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헤이! 자! 이제 오라! 어딜 그리 돌아다니나? 위로, 아래로, 가까이, 멀리, 여기, 저기, 저 너머로? 날카로운 귀, 지혜로운 코, 철썩 하는 꼬리 그리고 범프킨, 하얀 양말을, 내 꼬마친구, 그리고 늙은 뚱보 럼프킨! 그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또 한편으로는 모자를 위로 높이 던졌다가 떨어지는 것을 재미있게 낚아채는 묘기도 부리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마침내 골짜기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참 동안 '헤이 어서! 헤이 어서!' 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계속 들려왔다. 날이 다시 몹시 더워지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그가 말한 대로 한참 동안 풀밭을 뛰어다녔다. 그들은 혹독한 겨울 추위에서 갑자기 낯익은 고향땅으로 날아온 사람들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갑자기 완쾌되어 희망에 넘쳐 흐르는 사람처럼 기분좋게 햇볕을 쬐며 누워 있었다. 톰이 돌아올 때쯤엔 그들은 이미 원기를 다시 회복하고 (또 배가고파) 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모자가 먼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뒤로 여섯 마리 조랑말이 수굿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말 다섯에 또 한 마리가 더 있었다. 그 말은 분명 늙은 뚱보 럼프킨인 것 같았다. 그들의 말보다 더 크고 더 건장하고 더 뚱뚱한 (더 늙은) 말이었다. 나머지 다섯 마리의 주인이었던 메리는 아직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톰이 지어 준 이름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다. 톰은 말들을 한 마리씩 불러 한 줄로 세우고는 호비트들에게 인사를 했다. "자, 여기 조랑말들을 대령했나이다. 이놈들은 (어떤 점에서는) 자네들 엉터리 호비트들보다 낫더군. 코가 더 예민하더란 말이야. 자네들이 가려고 했던 곳에서 수상한 냄새를 맡았던 거지. 아마 마음대로 가라고 했으면 제대로 길을 찾았을 거야. 용서하게. 아무리 충성스런 짐승이라 하더라도 배로우인들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자, 보게들. 여기 짐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메리와 피핀과 샘은 여벌로 가져왔던 옷을 꺼내 입었다. 그러나 그 옷들은 겨울이 되면 입을 요량으로 준비해 온 두터운 것들이었기에 곧 더워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저기 저 뚱보 럼프킨이란 말은 어디서 온 겁니까?" 프로도가 물었다. "내 말이야. 내 발 달린 내 친구지. 내가 타는 일은 거의 없고 혼자서 가끔 산 속 멀리까지 돌아다니곤 한다네. 자네들 조랑말이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우리 럼프킨을 알게 되었지. 밤에도 럼프킨 냄새를 맡고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던 거야. 그래서 럼프킨을 데려오면 지혜로운 이야기로 그들의 공포를 덜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하지만 유쾌한 럼프킨은 이제 이 늙은 톰이 타고 가야지. 헤이! 자네들을 큰길까지 바래다주려고 같이 가는 거야. 그래서 럼프킨을 데려온 거라네. 자네들은 말을 타고 난 걸어간다면 마음놓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호비트들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호비트들은 길을 잃어버리는 데엔 일가견들이 있으니 자기 땅 경계까지 안전히 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지켜보아야 안심이 되겠다고 말했다. "난 할 일이 많아. 만들고, 노래부르고, 이야기하고, 걷고, 또 내 땅도 돌봐야 하거든. 버드나무 틈새와 무덤 문을 열도록 톰이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어. 그는 지켜야 할 집이 있고 또 골드베리가 기다리고 있거든."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꽤 이른 시간이었다. 아마 아홉시나 열시쯤 된 것 같았다. 호비트들은 그제서야 출출한 배를 채울 궁리를 했다. 전날 비석 옆에서의 식사가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저녁식사로 남겼던 음식에 톰이 새로 가져온 음식을 보태 아침을 먹었다. 식탁은 (호비트라는 점과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리 풍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든든해질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음식을 들고 있는 동안 톰은 무덤 위로 올라가 보석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풀밭 위에 반짝반짝 쌓아 놓은 그는 보석들을 '발견하는 모든 생명들, 곧 새와 짐승, 요정과 인간 그리고 모든 선한 피조물들이' 공짜로 가져갈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해야만 무덤의 주문이 풀리고 어느 배로우인도 다시 찾아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석더미에서 자기 몫으로 아마꽃이나 파랑나비의 날개처럼 여러 가지 빛깔이 나는 푸른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골랐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마치 어떤 기억을 상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톰과 그 부인을 위한 예쁜 장난감이 있군! 먼 옛날 그 어깨에 이것을 달았던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겠지. 골드베리가 이제 이것으로 치장을 할 테니, 우린 그녀를 잊을 수 없겠군." 그는 호비트들에게 각각 섬세한 장인의 솜씨가 확연한, 나뭇잎 모양의 길고 예리한 단검을 골라 주었는데 거기에는 적황색의 뱀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검을 칼집에서 뽑자 햇빛이 칼날에 부딪혀 섬광이 일었다. 칼집은 가벼우면서도 탄탄한 진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했고 내화석이 박혀 있었다. 칼집이 훌륭해서인지 아니면 무덤 속을 떠돌던 주문 때문인지는 몰라도 칼날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녹이 슬지 않았고 햇빛 속에서 예리하게 번득였다. "옛날 칼이 호비트들이 쓰기엔 길이가 알맞지. 샤이어의 친구들이 동쪽이든 남쪽이든 혹은 어둡고 위험한 먼 나라로 떠나간다면 좋은 칼이 꼭 있어야만 할 걸세." 그리고나서 그는 그 칼들이 먼 옛날 서역인들이 만든 것이며 그들은 암흑의 군주의 적이었기에 앙마르의 칸 둠의 마왕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들려 줬다. "이젠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아직도 사라진 왕들의 몇몇 후손들이 외로이 방황하며 악의 무리로부터 착한 사람들을 구해 주고 있다네." 호비트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는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간 한 시대의 환영이 보였다. 어둠이 깔린 거대한 평원이 나타났고 그 평원 위로 빛나는 칼을 든 채 엄숙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키 큰 사람들이 있었으며 맨 뒤에는 이마에 별을 단 사람이 오고 있었다. 곧 환영은 사라지고 호비트들은 다시 환한 햇빛 속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호비트들은 짐을 꾸려 말에 싣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새로 얻은 무기를 윗도리 속 가죽벨트에 매달았으나 매우 어색한 느낌이 들었고 언제 써먹을 때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들이 위험천만의 탈출을 감행한 후 아직 싸움이라 할 만한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언덕 아래까지는 조랑말을 끌고 내려갔고 거기서부터 조랑말에 올라타고 빠른 속력으로 계곡을 빠져나갔다. 언덕 위 옛 무덤 꼭대기를 뒤돌아보자 햇빛이 황금에 반사되어 마치 노란 불꽃처럼 공중에서 번쩍거렸다. 그리고 한 굽이 돌아서니 이내 그 무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프로도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문처럼 생겼던 두 개의 커다란 비석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북쪽 입구에 도착했고 재빨리 그곳을 통과했다. 거기서부터 길은 내리막이었다. 톰 봄바딜과의 여행은 즐거웠다. 뚱보 럼프킨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달렸고 톰은 그들과 나란히 가거나 때로는 앞장서기도 하면서 시종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는 대개 말도 안 되는 소리거나 아니면 호비트들이 알아듣지 못할 가사로 놀라움이나 기쁨을 나타내는 고대어였다. 그들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으나 동부대로는 예상과는 달리 쉬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는 안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한낮의 낮잠 때문에 해지기 전에 대로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들이 보았던 검은 띠는 가로수들이 아니라 건너편으로 가파르게 뻗어 있는 깊은 암벽 가장자리의 관목덤불이었다. 톰의 이야기로는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 한 때 어떤 왕국의 경계였다고 하나 거기에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지 그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개천을 건너 담벽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톰은 그때까지 약간 서쪽으로 향하고 있던 방향을 꺾어 정북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거기서부터 시야가 확 트이고 땅은 비교적 평탄했기에 속도가 빨라졌다. 드디어 저 앞쪽으로 길게 열을 짓고 선 키 큰 나무들이 보였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기치 않았던 수많은 모험을 겪은 후 비로소 대로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경사진 제방 꼭대기였고 땅거미가 지면서 희미해진 동부대로는 그들 발 밑으로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거기서부터 도로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도로 오른쪽으로는 넓은 계곡이 급경사를 이루며 뻗어 있었다. 도로에는 최근에 폭우가 내린 듯 곳곳에 물웅덩이와 홈이 파여 있었고 바퀴자국도 보였다. 그들은 둑길을 내려가 길 아래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가 말했다. "드디어 도착했군! 아마 포레스트로 질러온답시고 늦어지긴 했지만 이틀 이상 손해본 건 아닐 거야. 어쩌면 늦어진 게 결국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놈들을 완전히 따돌렸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일행은 그를 돌아보았다. 암흑의 기사들에 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갑자기 그들을 덮쳐왔다. 포레스트에 들어간 후 그들은 내내 동부대로로 되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 발로 다시 땅을 밝게 되자 그들을 쫓아왔던 공포가 되살아났고 오히려 대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뒤돌아보았다. 갈색 대로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오늘밤에 또다시 추격을 당하지나 않을까요?" 피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니, 오늘밤은 그렇지 않을 거야. 어쩌면 내일도 괜찮을지 몰라. 하지만 내 추측을 믿지는 마. 자신이 없으니까. 이 톰의 지식은 동쪽 방향으로는 한계가 있단 말이야. 어쨌든 암흑의 나라에서 온 그 기사들의 주인이 이 톰은 아니거든." 톰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비트들은 그가 자기들과 함께 동행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암흑의 시가들을 능히 대적할 만한 사람은 바로 톰뿐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낯선 세계, 먼 옛날부터 희미한 전설로만 전해 오던 세계로 막 들어갈 참이었던 것이다. 밀려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그들은 불현듯 고향집이 그리워졌다. 진한 외로움과 깊은 절망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들은 마지막 이별을 두려워하며 말없이 서 있었다. 톰이 이제 막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나려 한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어두워지기 전까지 쉬지 말고 달려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톰이 좋은 충고를 해주지. 날이 새기 전에 (그 다음엔 나도 모르지만) 아마 운명의 여신이 대신 인도해 주겠지. 이 길을 따라 사 마일 가량 달려가면 브리힐 산 밑의 브리라는 마을이 나올 것일세. 문이 모두 서쪽으로 나 있는 마을이지. 그곳엔 '달리는 조랑말' 이라는 오래된 여관이 하나 있는데 주인은 발리맨 버터버라는 사람이야. 오늘밤은 거기서 묵고 내일아침 힘을 내서 떠나게. 대담하게, 그러나 조심해서 가야 하네!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운명에 도전하게! 그들은 그에게 그 여관까지만이라도 같이 가서 술 한잔 대접하겠노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톰의 나라는 여기서 끝나지. 경계는 넘을 수가 없다네. 톰은 돌봐야 할 집이 있고, 그곳에선 골드베리가 기다리고 있다네. 그는 모자를 머리 위로 높이 던져올려 쓰고는 럼프킨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을 달려 제방을 넘어 어둠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호비트들도 말에 올라타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샘이 입을 열었다. "봄바딜과 헤어지게 되어 섭섭해요. 그분은 사려가 깊어서 실수가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어딜 가더라도 그처럼 멋진 분은 찾아볼 수가 없겠죠. 어쨌든 달리는 조랑말 여관을 알려주신 것만 해도 대단히 고마운 일이에요. 고향에 있는 청룡정만큼 괜찮은 집이라면 좋겠는데. 브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메리가 대답했다. "브리에도 호비트들이 있는데 대개 사람들만큼 키가 커요. 인심이 그리 고약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조랑말 여관도 내가 들은 바로는 꽤 괜찮은 집이고요. 우리 친척들도 가끔 거기 들른다던데요." 프로도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쨌든 간에 거긴 샤이어가 아닐세. 너무 방심해서는 안 돼. 특히 모두들 기억해야 할 것은 배긴스라는 이름을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일세. 내 이름은 이제부터 언더힐이야, 알겠나?" 그들은 조랑말에 올라타고 소리없이 어스름 속으로 숨어들갔다. 어둠은 재빨리 그들을 에워쌌고 오르막 내리막을 몇 번 지난 뒤에 마침내 그들은 멀리서 불빛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다. 브리힐 산이 희미한 별자리들을 배경으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었고, 그 서쪽 기슭에 커다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오직 밤의 어둠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줄 대문과 난롯불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쪽을 향해 말고삐를 재촉했다. 제9장 달리는 조랑말 브리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브리랜드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주변을 빙 둘러 황량한 땅이 펼쳐져 있어서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았다. 브리 근처에는 산 동쪽으로 스태들, 좀더 동쪽의 깊은 골짜기 속에 코움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체크우드 근처에는 아르체트가 있었다. 브리힐 산과 마을 부근에는 작은 규모의 농경지와 폭이 이삼 마일에 불과한 벌목지가 있었다. 브리 사람들은 갈색 머리칼에, 키는 작지만 어깨가 벌어진, 쾌활하고 독립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부심이 대단해 다른 지방 사람들과 여간해서는 잘 사귀지 않았지만 그 근처의 호비트나 난쟁이, 요정들과는 꽤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땅에 최초로 정착한 인간들이며 중간계의 서부 지역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인간들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제1시대의 격동기를 거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제왕들이 대해를 건너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때까지도 브리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때 브리에 살던 그 사람들이 그 옛 왕들의 기억이 이슬 속으로 사라져버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브리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서쪽 외곽지역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었다. 샤이어까지 삼백 마일에 걸치는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브리 외곽의 황야에는 신비한 방랑자들이 떠돌아다녔다. 브리 주민들은 그들을 순찰자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브리 사람들보다 키가 더 크고 더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각과 청각이 놀랄 만큼 뛰어나 짐승이나 새들의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은 남부지역, 심지어는 안개산맥까지 마음대로 활보하고 돌아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나타날 때는 대개 먼 지방 소식을 가지고 왔으며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상한 옛날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브리 사람들은 그 이상 그들과 가까이 지내려 하진 않았다. 브리랜드에는 호비트 집안도 여럿 정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호비트 부락, 즉 호비트들이 브랜디와인 강을 건너 샤이어를 개척하기 전에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 자기들 마을이라고 주장했다. 브리에 정착한 호비트들도 있긴 했으나 대개는 스태들에 모여 살았다. 호비트들은 사람들의 주택 위쪽 높은 산비탈에 집을 지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들(그들은 서로를 이렇게 불렀다)은 사이가 좋았고 상대편의 고유한 관습을 인정해 줌으로써 서로를 브리에서 없어선 안 되 구성원으로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특이한 (그러나 훌륭한) 친교가 맺어진 것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크고 작은 브리인들은 여행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네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만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간혹 브리의 호비트들이 버크랜드나 더 멀리 이스트파딩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그들이 사는 그 작은 땅은 브랜디와인 다리에서 조랑말로 하루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었으나 샤이어의 호비트들은 거의 그곳을 찾지 않았다. 가끔 버크랜드나 투크 집안 호비트들이 여관에 들러 하루 이틀 묵고 가는 일도 있었으나 그것도 점점 드물어졌다. 샤이어의 호비트들은 브리 주민들뿐 아니라 그들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이방인이라 불렀고 따분하고 천박한 사람들이라 여겨 그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당시 서부지역에서는 아마 샤이어의 호비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떠돌아 다녔을 것이다. 그 중에는 분명히 유랑객이나 다름없는 뜨내기들도 있어, 그들은 아무 산기슭이나 굴을 파고 불편해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여하튼 브리랜드의 호비트들은 세련된 매너를 가지고 있었고 살림살이도 괜찮았으며 대부분 샤이어 호비트들만큼의 문화적 수준도 유지하고 있었다. 샤이어와 브리 사이에 왕래가 빈번했던 적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아직은 많았다. 그리고 여러모로 따져 보면 브랜디버크인들 중에는 브리 쪽 혈통이 섞여 있는 호비트들도 꽤 있었다. 브리 마을에는 약 백 채 가량 되는 석조건물들이 있었는데 대개 대로 위쪽의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서쪽을 향해 창문을 내고 있었다. 산을 빙 둘러 반원 모양의 깊은 도랑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으며 안쪽으로는 빽빽한 생울타리가 마을을 애워쌌다. 동부대로는 방죽을 따라가다가 이 도랑을 가로질렀고 생울타리를 지나는 곳에 커다란 대문이 새워져 있었다. 대로가 남쪽으로 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도 대문이 있었다. 해가 지면 문은 대개 폐쇄되었고 문 안쪽엔 문지기들의 작은 초소가 있었다. 여관은 길 아래쪽 산기슭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연변에 있었다. 그것은 동부대로의 교통량이 지금보다 훨씬 많던 옛날에 세워진 것이었다. 과거엔 브리가 교통의 요지였다. 마을 서쪽의 도랑 바깥쪽으로 동부대로와 교차하는 옛날 도로가 하나 더 있었는데 과거에는 인간이나 요정, 호비트 들이 분주하게 다니던 길이었다. 이스트파딩에서는 아직도 '브리에서 온 소식처럼 이상한'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동쪽, 남쪽, 북쪽의 모든 새 소식들이 여관에 몰리고 샤이어의 호비트들도 종종 소식을 들으러 가곤 했던 과거로부터 내려온 속담이었다. 그러나 북쪽지역은 이미 오래 전에 황폐해졌고 따라서 북부대로는 이용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잡초만 무성했다. 브리 주민들은 그 길을 초록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브리 여관은 여전히 열려 있었으며 그 주인은 마을의 유지였다. 그 여관은 네 마을에서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은 한량들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순찰자들과 다른 방랑자들, 동부대로를 따라 안개산맥까지 오가는 여행객들(대개는 난쟁이들)이 묵어가는 곳이었다. 프로도 일행이 마침내 초록길 교차로를 지나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고 흰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문은 이미 닫혔고 그 너머 문지기 초소 앞에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등불을 가져와 문 위로 들어올리다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뭐요? 어디서 왔소?"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프로도가 대답했다. "여관을 찾고 있습니다. 동쪽으로 여행 중인데 날이 너무 어두워 오늘밤은 더 갈수가 없군요." "호비트! 네 명의 호비트라! 게다가 말씨를 보니 샤이어에서 온 모양이군." 문지기는 혼잣말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들을 잠시 훑어보더니 천천히 문을 열어 그들을 들어오게 했다. 그리곤 그들이 문 옆에서 멈칫거리자 계속 말했다. "한밤중에 샤이어분들이 동부대로에 나타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인데, 무슨 일로 브리를 지나 동쪽으로 가시는지 알고 싶군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이름과 용건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고 또 여기는 그런 얘길 나눌 만한 곳도 못 되는 것 같군요." 프로도는 그 사람의 인상과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두워진 후에는 용건을 묻는 것이 내 임무요!" 이번에는 메리가 나섰다. "우리는 버크랜드에서 온 호비트들이오. 여행을 하는 중인데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겠소. 나는 브랜디버크라는 호비트요. 이제 됐소? 브리 사람들은 손님 대접이 좋다고 들었소만." "좋습니다. 좋아요! 화내실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여관에 들어가면 이 문지기 해리 영감말고도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겁니다.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이거든요. 조랑말 여관에 가시면 다른 손님들이 더 있을 거요." 그가 인사를 했음에도 그들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도는 그가 여전히 등불을 비추며 수상쩍게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걸어가는 동안 등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들리자 프로도는 안심이 되었다. 그는 왜 문지기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혹시 누군가가 호비트 일행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갠달프였을까? 그들이 포레스트와 다운즈에서 지체하는 동안 그가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지기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어딘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 문지기는 호비트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 후 다시 초소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어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재빨리 대문을 넘어 호비트들이 지나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호비트들은 호젓한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가 외딴집 몇 채를 지난 후 드디어 여관 앞에서 말고삐를 늦췄다. 그들의 눈에는 집이 이상하게 커 보였다. 샘은 삼층으로 지어진 창문이 많은 여관을 쳐다보면서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여행 중에 언젠가는 나무보다 키가 큰 거인들이나 아니면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인간들과 그들의 큰 집을 본 샘은 그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피로에 지친 하룻길 뒤라 더 그러했다. 마당 한구석 어두운 곳에 검은 말들이 안장을 얹은 채 서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캄캄한 이층 창문으로 암흑의 기사들이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샘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밤 여기서 묵을 건 아니죠? 이 마을에도 호비트들이 있을테니까 우릴 반길 만한 집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더 낫겠어요." 그러자 프로도가 대답했다. "이 여관이 어디 잘못된 거라도 있어 보여? 톰 봄바딜이 추천한 집이야. 안으로 들어가 보면 괜찮을 거야." 실제로 밖에서 보기에 그 여관은 낯익은 사람의 눈에는 호감이 갈 만한 집이었다. 건물 정면은 도로 쪽을 향하고 있었고 뒤로 갈수록 조금씩 야트막한 산기슭에 잘려 있어서 뒤쪽에서는 이층 창문이 지면과 맞닿아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아치가 세워져 있었고 아치 밑으로 큼지막한 층계 몇 개가 널찍한 현관까지 이어져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불빛이 새나왔다. 아치 위로 등불 밑으로 큼지막한 간판이 흔들렸다. 살집 좋은 흰 조랑말이 뒷다리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 출입문 위에는 흰 글씨로 '발리멘 버터버의 달리는 조랑말' 이라고 쓰여 있었고 아래층 창문 여러 곳에서 커튼 뒤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들이 어두컴컴한 바깥에서 망설이는 동안 안에서는 누군가 유쾌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 쾌활한 목소리들이 여럿 합세해 노래는 합창이 되었다. 그들은 노랫소리를 잠시 듣고 용기를 내어 말에서 내렸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그들은 아치 밑으로 조랑말들을 끌고 들어가 마당에 세워 놓고는 층계를 올라갔다. 앞장서 들어가던 프로도는 하마터면 대머리에 혈색이 좋고 키가 작은 뚱보와 부딪칠 뻔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술이 넘실거리는 잔들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한쪽 문에서 급히 나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프로도가 말을 꺼냈다. "저..." "죄송합니다, 손님들. 잠깐만요!" 뚱보는 어깨 너머로 소리치고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자욱한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앞치마에 두 손을 닦으며 다시 나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뭘 원하십니까?" "침대 넷과 조랑말 다섯 마리가 들어갈 마구간을 부탁합니다. 당신이 버터버씨인가요?" "그렇소 내가 버터법니다. 발리맨 버터버지요. 분부만 하십시오. 모두들 샤이어에서 오셨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갑자기 뭔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며 손으로 이마를 쳤다. "호비트들이시라!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혹시, 손님들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소?" "투크와 브랜디버크입니다. 이쪽은 샘 갬기고 내 이름은 언더힐이지요." 버터버는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또 잊어버렸군! 하지만 좀 한가해지면 기억이 날 겁니다. 여하간 오늘저녁은 녹초가 될 지경이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유감입니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이렇게 손님이 몰려드는군요. 브리식으로 말하자면 비가 한번 내렸다 하면 억수같이 퍼붓는 거지요. 어이, 놉! 어디 있냐? 이 느림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놉!" "갑니다! 예, 가요!" 쾌활하게 생긴 호비트 하나가 건들거리며 문 밖으로 걸어나오다 여행객들을 보고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대단히 흥미롭다는 듯 찬찬히 뜯어보았다. "봅은 어디 있어? 몰라? 여하간 찾아봐! 빨리 서둘러! 난 발도 둘뿐이고 눈도 둘뿐이야! 봅한테 말 다섯 마리가 더 있다고 해. 여하튼 자리를 만들어 보라고 하란 말이야, 알겠어?" 놉은 싱긋 웃으며 윙크를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버터버는 이마를 치며 말했다. "한 가지가 생각나면 다른 하나를 잊어버리는군. 오늘밤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라오. 어젯밤에는 초록길을 따라 남쪽에서 올라온 손님들이 있었고, 여하간 그것부터 이상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오늘저녁에는 서쪽으로 가는 난쟁이들 일행이 또 들이닥쳤지요. 그리고 손님들이 나타나신 겁니다. 손님들이 호비트들이 아니었더라면 방도 드리지 못할 뻔했어요. 다행이 이 집을 처음 지을 때 호비트 손님용으로 특별히 북쪽 끝에 방을 한두 개 만들어 두었거든요. 흔히들 좋아하시는 대로 아래층에다가 유리창도 동그랗게 했고 다른 것도 모두 호비트식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식사도 하셔야겠지요? 가능한 대로 빨리 준비하지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짧은 내리막 통로로 일행을 데리고 내려가 방문을 열었다. "아주 멋지고 아늑한 객실이지요!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계속 뛰어다녀야 할 지경이라니까요. 다리가 둘뿐인 게 유감천만이지만 도대체 이놈의 살은 빠질 생각을 않는군요. 좀 있다 다시 들르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거기 요령을 흔드세요. 그러면 놉이 올 겁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면 다시 한번 흔들고 소리를 지르세요." 그가 사라지자 그들은 말 한마디 안했는데도 숨이 찰 지경이었다. 주인은 아무리 바빠도 이야기할 끝없이 늘어놓을 재간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들이 들어간 방은 작고 아늑했다. 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앞에는 낮은 안락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둥근 식탁 위에는 이미 흰 식탁보가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 커다란 요령이 있었다. 그러나 호비트 하인인 놉은 그들이 요령을 울릴 생각도 하기 전에 벌써 부산을 떨며 나타났다. 양초와 접시가 가득한 큰 쟁반을 들고 있었다. "식사준비가 될 동안 한잔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손님들? 그리고 침실도 보여 드리지요." 그들이 세수를 하고 맛있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있을 때 버터버와 놉이 다시 들어왔다. 눈깜짝할 사이에 식탁이 차려졌다.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고기, 검은 딸기파이, 갓 구워낸 빵, 버터조각, 그리고 반쯤 숙성한 치즈 등으로 꽤 풍성한 식탁이었다. 샤이어에서도 이 정도 차림이면 성찬 축에 들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샘의 걱정(이미 맥주맛 덕분에 상당히 완화되어 있던)도 없앨 수 있을 만큼 좋은 식사였다. 주인은 잠시 식탁 주변을 돌아다니다 가보아야겠다고 했다. "식사하시고나서 바깥손님들과 합석하실 의향이 없으신가 모르겠군요. 아마 바로 침대에 들고 싶으시겠지요? 하지만 생각만 있으시면 바깥손님들은 대환영일 겁니다. 요즘은 이방인들이,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샤이어 손님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거의 없었거든요. 우리는 그쪽 소식도 좀 듣고 싶고 혹시 무슨 노래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요령을 울려 주시고." 쓸데없는 말 한마디 없이 사십오 분 동안 열심히 식사를 한 후 원기도 다시 솟고 기분도 좋아진 프로도와 피핀, 샘은 바깥에 나가보기로 했다. 메리는 자리가 좀 거북할 것 같다며 반대했다. "난 여기서 난롯불이나 좀 쬐다가 이따 늦게 바라이나 쐬러 나갔다 오겠어. 말조심들 하라고. 우리는 지금 몰래 도망치는 중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돼. 여기는 아직도 대로변이고 샤이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야." "알았어! 너나 조심하라고. 괜히 나갔다가 길이나 잃지 말고. 방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야." 피핀이 대답했다. 손님들은 모두 큰 연회실에 모여 있었다. 불빛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프로도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세 개의 등불은 너무 침침했고 반쯤 연기 속에 가려 있어 주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발리맨 버터버가 장작불가에서 난쟁이 두엇과 이상하게 생긴 외지의 한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브리 사람들도 있었고 (함께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 인근의 호비트들도 있었으며 난쟁이들도 몇 명 더 있었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샤이어의 호비트들이 들어서자 브리 사람들은 환영의 표시로 환성을 질렀고 초록길을 올라왔다는 낯선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그들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새로온 손님들을 브리 사람에게 소개했지만 말이 하도 빨라 이름은 들었지만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브리 사람들은 모두 (샤이어 호비트들이 보기엔 이상하게도) 식물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았다. 가령 러쉬라이트, 고우트리이프, 이이스토우, 애플도어, 시슬울, 퍼니 등이 그러했고 버터버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브리의 호비트들도 일부는 그와 비슷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그워트란 이름이 꽤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샤이어에서처럼 뱅크스, 브록하우스, 롱호울즈, 샌드히버, 터널리 등의 자연스런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언더힐이란 이름의 스태들 출신 호비트들이 서넛 있었는데 아무 인척관계도 없다는 것을 의아해 하면서도 프로도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촌 대하듯 다정하게 대했다. 브리 호비트들은 사실 우호적이고 호기심도 많아 프로도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약간은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다고 털어놓았다(이 두 단어는 브리 근방에서는 많이 쓰이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책을 한 권 쓸 계획이라고 말하고 (그러자 그들은 속으로 좀 놀라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샤이어 외곽 특히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호비트들에 관한 자료를 모으러 나선 길이라고 했다. 이 말에 다시 환성이 일어났다. 정말 프로도가 책을 쓸 계획이었고 또 귀가 몇 개 더 있었더라면 아마 순식간에 몇 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것도 모자랐다면 발리맨 영감을 위시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수없이 추천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프로도가 당장 그 자리에서 책을 쓸 의향을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샤이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주변이 없는 프로도는 곧 한 구석에 혼자 앉아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과 난쟁이들은 먼 지방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의 관심이 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 모양이었다. 멀리 남쪽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초록길을 따라온 사람들은 어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나선 모양이었다. 브리 사람들은 동정심이 많기는 했지만 많은 외지 사람들을 좁은 땅에 모두 받아들일 의사는 없었다. 여행자들 중에서 어떤 못생긴 사팔뜨기 하나가 장차 더 많은 사람들이 북쪽으로 올라올 것이라고 했다. "여기 그들이 살 곳이 없다면 그들은 또 찾아나설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살 권리가 있으니까요." 브리의 주민들은 그 이야기에 영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 호비트들은 현재로서는 자신들과 별 상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이야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간들이 호비트들의 토굴에서 같이 살자고 할 리는 결코 없었다. 그들은 샘과 피핀에게 더 관심이 있었는데 둘은 이제 꽤 느긋한 기분이 되어 샤이어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피핀이 미켈 델빙에 있던 시청 굴집의 지붕이 무너지던 때의 이야기를 해 사람들을 크게 한바탕 웃겼다. 웨스트파딩에서 가장 뚱뚱한 호비트인 윌 위트푸트 시장이 석회더미에 파묻혔다가 밀가루반죽처럼 어기적거리며 기어나오는 모습을 흉내내자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그러나 프로도를 약간은 불안하게 만드는 질문도 몇 가지 있었다. 샤이어에 몇 번 가본 경험이 있는 듯한 브리 사람이 언더힐 집안은 어디 살며 누구와 친척인가를 물어 그를 난처하게 했다. 갑자기 프로도는 햇볕에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벽 옆 어둠 속에 앉아 호비트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높은 술잔을 앞에 놓고 묘하게 생긴 기다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다리는 앞으로 뻗고 있었는데 굽이 높은 구두는 그에게 잘 맞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 했으나 많이 닳았고 또 온통 흙투성이였다. 두꺼운 진록색천으로 만든 빛바랜 외투로 온 몸을 감싼 채 실내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굴을 거의 가릴 정도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러나 호비트들을 지켜보는 그의 눈길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날카로웠다. 버터버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자 프로도가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아까 소개받지 못했던 사람인 것 같은데요?” "저 사람?"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곁눈으로 힐끔 보면서 주인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뜨내기들 중 하난데, 우리는 저들을 순찰자라고 부르지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지만 어떤 때는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요. 한 달이나 일 년씩 보이지 않다가 다시 불쑥 나타납니다. 지난봄에는 가끔씩 들락날락했는데 최근에는 도통 못 보았어요. 그의 이름이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모릅니다만 여기선 흔히들 스트라이더라고 부르지요. 다리가 길어서 걸음이 굉장히 빨라요. 하지만 어딜 그렇게 급히 달려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는 법이 없지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인 셈이지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순찰자들이나 샤이어분들이나 모두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게지요. 저 양반에 대해 관심을 갖다니 참 재미있군요." 그러나 그 순간 맥주를 달라는 주문이 있어 버터버는 뒷말을 끝내지 못하고 일어서야만 했다. 프로도는 스트라이더가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모두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이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손짓과 고갯짓으로 프로도를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프로도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모자를 벗고 희끗희끗하고 텁수룩한 머리를 드러냈다.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잿빛 두 눈동자는 매우 날카로웠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스트라이더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군. 언더힐이라고 했지? 버터버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프로도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는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몹시 두려웠다. "그런데 언더힐, 내가 자네라면 자네 젊은 친구들이 저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와두진 않을 거야. 술이 있고 난로가 잇는 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담소를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하지만 여기는 샤이어가 아니야. 주위엔 이상한 사람들도 있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건 아니지만 여하간 잘 생각해 보게." 그는 심상치 않은 미소를 지으며 프로도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프로도의 얼굴을 직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엔 더 이상한 여행자들도 브리를 거쳐갔다네." 프로도는 그의 눈길을 마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스트라이더 역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의 눈길은 갑자기 피핀에게로 향했다. 아연하게도 그 우스꽝스러운 젊은 투크는 미켈 델빙의 뚱보시장 이야기의 성공에 도취해 이제는 빌보의 송별파티를 화제로 삼아 주변의 호비트들을 웃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빌보의 연설을 흉내내고 있었으며 곧 빌보가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으로 들어갈 찰나였다. 프로도는 불안했다. 사실 이 지방의 호비트들에게는 그 이야기는 강 저쪽에 사는 재미있는 친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에게는(가령 버터버 영감 같은 사람들은) 한 두 가지쯤 들었을 수도 있었고 또 빌보가 사라진 사건에 대해서도 오래 전에 소문이 돌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배긴스란 이름도 튀어나올 게 뻔했고 특히 브리에서 그 이름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프로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피핀은 완전히 분위기에 취해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기분대로라면 피핀이 반지 이야기까지도 털어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프로도는 더럭 겁이 났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스트라이더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손을 쓰는 게 좋겠어." 프로도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핀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의 눈길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몇몇 호비트들은 프로도를 보고 언더힐씨가 꽤 마셨나 보다고 생각하며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프로도는 갑자기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할 때의 그의 버릇대로) 주머니 속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반지의 감촉이 전해지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지를 끼고 이 난처한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은 충동이 문득 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충동은 외부에서, 즉 방 안의 다른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그에게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반지가 손을 빠져나가자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반지를 손안에 꼭 움켜쥐었다. 여하튼 어색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샤이어에서 하는 대로 우선 '몇 마디 인사치례'를 했다. "여러분들의 따뜻한 환대에 저희 모두는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잠시 여기 머무르는 것을 계기로 샤이어와 브리 사이의 오랜 유대관계가 더 공고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호비트들 중 하나가 '노래를 해요!' 하고 소리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노래! 노래!' 하는 아우성이 일어났다. "자, 한 곡만 해보세요. 우리가 못 들어 본 노래 한번 들어 봅시다!" 프로도는 잠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빌보가 꽤 좋아했던 (그리고 자신이 작사를 했기에 사실 상당히 자랑스럽게도 여기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여관에 관한 노래였기 때문에 아마 금방 머리 속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요즘은 대개 가사의 일부만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 그 전 곡을 싣도록 하겠다. 옛날에 어떤 유쾌한 여관이 있었지 회색빛 낮은 둔덕 아래, 그곳에서는 갈색 맥주를 빚고 있었지. 어느 날 밤 달나라 사람이 내려와 마시고 흠뻑 취해 버렸지. 다섯 줄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비틀거리는 고양이를 기르는 말구종,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연주를 했지, 때로는 삑삑거리고 때로는 가르릉거리고, 때로는 중간소릴도 내면서. 농담을 한없이 좋아하는 강아지를 기르는 여관주인, 손님들이 한바탕 크게 웃을 때면, 그도 우스개에 귀를 기울이다가 배를 잡으며 웃어 대곤 했지. 어느 여왕 못지않게 오만한 뿔달린 암소도 길렀지, 그렇지만 음악만 들으면 술취한 듯 어지러워, 보숭보숭한 꼬리를 내저으며 풀밭에서 춤을 추었지. 그리고 오! 줄지어 놓인 은빛 접시들, 창고 가득한 은빛 스푼들! 일요일에 쓰이는 특별한 짝이 있어, 토요일 오후만 되면 조심스레 닦곤 했지. 달나라 사람이 곤드레만드레되자 고양이는 소리치고 접시 하나 스푼 하나가 식탁 위에서 춤을 췄지. 정원의 암소는 미친 듯 날뛰고 강아지도 자기 꼬리를 쫓아다녔지. 달나라 사람은 한 잔 더 들이키고 의자 밑으로 굴러떨어졌지. 그리고 꾸벅꾸벅 졸더니 꿈속에서 맥주를 만났네. 하늘에선 별빛이 희미해지고 새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말구종은 비틀거리는 고양이에게 말했지. 달나라에서 온 백마들이 히힝거리며 안달이 났는데 주인은 세상 모르고 자빠져 있고, 해는 금방 떠오르겠어. 고양이는 바이올린으로 헤이 디들 디들 연주를 했지. 죽은 사람도 일어날 빠른 곡조로 삑삑거리며 활을 켜는 동안 주인은 달나라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 세시가 넘었어요. 그들은 천천히 언덕 위로 그 사람을 밀어 올려 달나라로 던져 올렸지. 뒤에서는 그의 말들이 뛰어오르고 암소는 사슴처럼 껑충거리고 접시가 스푼과 함께 달려나왔지. 바이올린은 더 빨리 디딜 둠 디들 강아지가 으르렁거렸지. 암소와 말들은 물구나무를 서고 손님들은 모두 침대에서 튀어나와 마룻바닥에서 춤을 추었지. 핑, 퐁 소리와 함께 바이올린 줄이 끊어졌지. 암소는 달을 향해 뛰어오르고 강아지는 재미있다고 깔깔거렸지. 토요일의 접시는 일요일의 스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 둥근 달이 언덕 너머로 굴러 내려갔고 태양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 불꽃처럼 환한 두 눈을 태양은 믿을 수 없었지. 한낮인데도 아, 놀라워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 있었지. 한동안 요란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프로도는 목청이 좋았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노래에 만족했다. "발리맨 영감은 어디 있어? 이 노래를 들어야만 하는 건데. 고양이한테 바이올린을 가르쳐서 우리도 춤을 추게 해주어야지." 그들은 맥주를 더 시키더니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손님, 그거 한 번 더 들어 봅시다. 자, 한 번만 더요!" 그들은 프로도에게 술을 한 잔 권하고 노래를 다시 부르게 했고 일부는 따라부르기도 했다. 곡조가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노랫말 외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프로도가 즐길 차례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노래를 불렀다. '암소는 달을 향해 뛰어오르고' 하는 대목에 와서는 정말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너무 높이 뛰어올랐던지 술잔이 가득 놓인 쟁반 위에 떨어지면서 미끄러져 우당탕 테이블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청중들은 입이 찢어져라 웃어 댔지만 곧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숨을 죽였다. 가수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마루 틈새로 구멍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듯 그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호비트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발리맨을 불렀다. 모든 손님들이 샘과 피핀을 구석에 남겨둔 채 뒤로 물러나 어둠 속에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수상한 목적으로 여행하는 이상한 마법사의 친구들로 간주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샘과 피핀을 가장 불안하게 한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조롱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서있는 가무잡잡한 브리 사람이었다. 그는 곧 문을 열고 슬며시 빠져나갔고 남쪽으로 왔다던 사팔뜨기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은 저녁 내내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지기 해리 역시 그들 뒤를 따라나갔다. 프로도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나와, 아무 표정 없이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스트라이더 옆으로 돌아왔다. 프로도는 벽에 등을 기대며 반지를 뽑았다. 어떻게 손가락에 끼워졌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노래부르고 있는 동안 주머니 속에서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의 균형을 잡다가 손을 뻗친다는 것이 아마 손가락에 반지가 끼이게 된 모양이었다. 잠시 그는 반지가 무슨 장난을 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소망이나 명령에 대해 반지 스스로 자신이 존재를 드러내 보이려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이것 참. 왜 그런 짓을 했어? 자네 친구들이 저지를 뻔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야! 자넨 벌써 잘못 디딘 거야! 아니면 손가락을 잘못 눌렀다고 할까?" 프로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침떼지 말게. 하지만 일단은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지. 배긴스군, 괜찮다면 조용히 할 말이 있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자신의 본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물었다. 스트라이더는 프로도의 눈을 보며 말했다. "상당히 중요한 일이지. 우리 둘 다에게. 자네한테는 이로운 이야길 거야." "좋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프로도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편 난롯가에서는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버터버가 들어와 사건의 자초지종을 동시에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버터버씨, 그 친구가 금방 내 눈앞에 있다가 다음 순간에 안 보이더라고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노랠 부르다 공중으로 사라졌다니까요." 한 호비트가 열심히 주장했다. "머그워드씨, 설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주인이 말했다. "설마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호비트가 아니예요. 게다가..." 머그워드는 계속 우겼다. 그러나 버터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착각을 하셨겠지. 여하간 언더힐씨가 공중으로 사라졌다는 얘기가 너무 많기는 많군. 담배연기가 너무 뿌얘서 그런가?" "도대체 그 친구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몇 사람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일아침에 돈만 낸다면 그 손님이 어디갔든 난 상관 안해요. 투크씨는 지금 저기 앉아 있잖아요. 사라지지 않았다고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깐." 머그워드가 계속 우겼다. "아마 착각을 한 모양이야." 깨진 그릇과 쟁반을 주워 모으며 버터버가 다시 말했다. 그때 프로도가 나섰다. "물론 착각을 하신 겁니다. 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구석에서 스트라이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그는 난롯가로 성큼 걸어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들은 프로도가 떨어진 다음 테이블 밑으로 재빨리 스트라이더에게 기어갔다는 변명을 전혀 수긍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호비트들과 브리 사람들은 그나 밤을 즐기려던 생각을 바꿔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그 중 한두 사람은 프로도에게 험상궂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고 저희들끼리 뭐라고 투덜거리며 나갔다 남아 있던 난쟁이들과 두세 명의 이상한 사람들도 주인에게만 인사를 하고 프로도와 그 친구들은 못 본 체하고 떠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는 벽 옆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스트라이더밖에 남지 않았다. 버터버는 많이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그는 오늘밤의 이 사건을 모두 해결하자면 자신의 여관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손님들의 토론장으로 쓰일 것이라 계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더힐씨,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 손님들을 모두 놀라 쫓겨나게 만들고, 또 재주를 부리다가 그릇을 온통 깨버렸으니 말입니다." 프로도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실수였어요." "좋아요, 언더힐씨. 하지만 앞으로 또다시 무슨 재주를 부린다거나 마술을 보여 주시려면 미리 말씀을 해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알려 주시고요.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지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봅니다. 아시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갑자기 좋아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버터버씨. 약속하지요. 그러면 이제 우리들도 잠자리로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내일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인데 여덟시까지 말을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하지만 떠나시기 전에 따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언더힐씨. 당신한테 이야기해야 할 것이 이제 생각이 났어요. 나쁘게는 생각 마세요. 한두 가지 일을 더 마무리한 다음에 객실로 찾아가지요." "좋습니다." 프로도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얼마나 많은 비밀이야기를 듣게 될지, 또 그 속에서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궁금했다. 이들이 모두 자신을 둘러싸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심지어 버터버의 퉁퉁한 얼굴마저 무슨 무서운 흉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제10장 스트라이더 프로도와 피핀, 샘은 객실로 돌아왔다. 촛불은 꺼져 있었다. 메리는 거기 없었으며 난롯불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남은 불씨를 살려 장작 두 개를 던져 넣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스트라이더를 발견했다. 그는 문가의 의자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여보세요! 당신은 누군데 여기 들어와 있어요?" 피핀이 물었다. "난 스트라이더라고 하네. 그리고 잊어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자네 친구가 나하고 조용히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했네." 그러자 프로도가 나섰다.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지요?" "여러 가지지. 하지만 공짜로는 안 되는데." "무슨 뜻입니까?" 프로도는 날카롭게 물었다. "놀랄 필요는 없어! 다만 이런 얘기야. 내가 알고 있는 것, 즉 너에게 도움이 될 충고를 해줄 테니 그 대가만 치러 주면 된다는 말이지." "그 대가란 게 뭐지요?" 그제서야 프로도는 자신이 못된 악당에게 걸려들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돈을 조금밖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악당이 만족할 리가 없겠지만 그로서는 그 돈을 한 푼이라도 낭비할 수가 없었다. 프로도의 심중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스트라이더는 비죽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야. 바로 이걸세. 내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자네들 일행에 끼워 달라는 거야." "아, 그래요?" 프로도는 약간 의외란 듯 물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일행이 더 필요하다고 해도 그런 제안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당신이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스트라이더는 다리를 꼬고 등을 편하게 기대 앉으면서 말했다. "멋진 친구군! 자넨 이제야 이성을 찾는 것 같군. 잘됐네. 지금까지는 너무 경솔했어. 하여간 좋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 테니 그 대가는 자네 마음대로 하게. 아마 내 이야기를 듣고나면 기꺼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걸세." "그렇다면 말씀해 보세요. 그게 뭡니까?" 프로도가 물었다. 스트라이더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너무 많이, 어둠 속의 일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 일은..." 그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가더니 재빨리 문을 열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귀가 예민하지. 그리고 비록 몸을 숨기는 재주는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산짐승조차 눈에 띄지 않게 다가가서 붙잡을 수 있어. 그런데 아까 해거름에 브리 서쪽의 동부대로 생울타리 뒤에 있자니까 호비트 네 명이 다운랜드 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이더군. 봄바딜 영감에게 한 말이나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여기서 모두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딱 한 가지 내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들 중 하나가 이러 얘기를 했어. '특히 모두들 기억해야 할 것은 배긴스라는 이름을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일세. 내 이름은 이제부터 언더힐이야, 알겠나?' 이 말에 난 너무 호기심이 동해서 여기까지 그들을 따라온 거야. 그들의 뒤를 따라 곧장 서문을 훌쩍 넘어왔지. 배긴스씨는 본명을 숨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면 더욱더 조심을 하는 것이 좋겠단 말이야." 그러자 프로도는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이 브리 사람들에게 왜 관심거리가 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당신이 왜 그 점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지도 말이에요. 스트라이더씨도 아마 남을 엿보고 남의 이야기를 엿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테니 어디 그 얘기부터 들어 보지요." 스트라이더는 껄걸 웃으며 말했다. "재치가 있군. 하지만 대답은 간단하네. 나는 프로도 배긴스라는 이름의 호비트를 찾고 있었거든. 나는 그를 급히 찾는 중이었지. 사실 그는 내 친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어떤 비밀을 가지고 샤이어를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란 걸 난 알거든." 그러자 프로도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샘도 얼굴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자, 오해는 말게. 나는 자네들보다 그 비밀을 더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정말 조심해야 하네." 그는 몸을 앞으로 바싹 당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사방의 어둠을 조심하게! 암흑의 기사들이 이미 브리를 지나갔지. 지난 월요일에 한 놈이 초록길을 따라 지나갔다는 소문이 있고, 또 한 놈이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정보도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프로도는 피핀과 샘을 향해 말했다. "아까 문지기의 인사말부터 이상했어.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주인도 무슨 얘기를 들은 모양이야. 그러면 왜 우리를 밖으로 나오라고 했을까? 여하튼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지? 여기 가만히 있는 건데 그랬어."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끼어들었다. "그게 나았을 걸세. 내가 할 수만 있었다면 자네들이 연회장에 나오는 것을 막았을 거야. 그런데 여관주인이 허락하지 않더군. 쪽지전달도 안 되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그가?" "아닐세. 버터버 영감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다만 나 같은 이상한 뜨내기들을 싫어할 뿐이지." 프로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트라이더는 입을 씰룩거리며 눈에 이상한 빛을 띠고 말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좀 악당같이 보이지 않은가? 하지만 곧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자네 노래가 끝날 때 일어났던 그 일도 설명을 들었으면 하네. 그 좀스런 장난..." "그건 순전히 실수였어요!" 프로도가 말을 가로막았다. "글쎄, 그렇다면 실수였겠지. 하지만 그 실수 때문에 자네가 위험해졌어." "이전보다 더 위험할 것도 없지요. 그 기사들이 나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쨌든 지금은 나를 놓치고 떠나가지 않았어요?"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게 낙관하지 말게. 그들은 돌아올 거야. 그리고 더 많은 놈들이 자네를 쫓아올 거야. 나는 그들이 몇 명이라는 을 알아. 그 기사들이 누구인지 안단 말이야."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에 냉기가 흘렀다. "브리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몇 명 있지. 가령 빌 퍼니 같은 녀석이지. 브리랜드에서도 악명이 높은 녀석인데 이상한 방문객들이 그의 집을 종종 찾아온다네. 아마 자네도 보았을지 몰라. 조롱하듯이 웃고 있던 그 얼굴이 가무잡잡한 녀석 말이야. 남쪽에서 올라 온 피난민들 중 하 녀석 곁에 앉아 있다가 자네가 그 '실수'를 저지른 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갔지. 남쪽에서 온 피난민 중 일부는 수상한 녀석들이야. 그리고 퍼니 같은 녀석은 누구에게 무엇이든 팔아먹을 수 있는 놈이고. 아니면 일부러 못된 장난을 칠 수도 있겠지." "퍼니가 무엇이든 팔아먹다니, 그게 내 실수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프로도는 여전히 스트라이더가 넘겨짚은 말을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물론 자네에 관한 소식이지. 조금 전에 자네가 보여 준 묘기를 설명해 주면 지대한 관심을 보일 사람들이 많이 있네. 그리고나면 자네 진짜 이름은 확인할 필요도 없게 되는 거야. 내 생각으로는 오늘밤이 새기 전에 아마 그들은 그 소식을 들을 걸세. 이 정도면 충분한가? 나를 길잡이로 데려가든지 말든지 이제 자네 마음대로 하게. 나는 샤이어와 안개산맥 사이의 지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고 있어.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돌아다녔거든. 나는 겉보기보다는 나이가 많아. 그리고 자네들한테도 유익할 걸세. 이제부터는 밤낮으로 그 기사들이 경계를 할 테니까 자네들은 오늘밤 이후로는 동부대로로 가는 걸 포기해야 할 거야. 아마 브리를 빠져나가서 낮 동안은 달아날 수 있겠지. 하지만 멀리는 못 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황야나 어느 캄캄한 구석에서 그들이 덮칠지 모를 일이야. 그들을 만나고 싶은가? 무서운 놈들이지!" 호비트들은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이그러지고 두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방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불빛은 더 침침해졌다. 한동안 그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 아니면 어둠 속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라도 듣는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리며 그는 다시 소리쳤다. "자, 그 추적자들에 대해선 아마도 내가 자네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자네들도 그들을 두려워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는 잘 모르고 있어. 자네들은 가능한 바로 떠나야 하네. 스트라이더가 아무도 모르는 길로 데려다 주겠어. 같이 가겠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프로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마음속은 의심과 공포로 혼란스러웠다. 샘이 얼굴을 찡그리며 주인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먼저 말씀드리자면 전 반대예요! 여기 이 스트라이더라는 사람은 우리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 그 점은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그는 우선 황야의 유랑자에요. 전 그들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도 분명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자기 말대로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캄캄한 구석으로 우리를 끌고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피핀은 안절부절못하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스트라이더는 샘이 말에는 상관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길로 프로도에게로 향했다. 프로도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했다. "안 됩니다. 동의할 수 없어요. 내 생각에는 당신의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것 같군요. 당신은 처음에는 브리 사람들처럼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목소리가 달라졌어요. 그리고 샘이 말한 대로 당신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또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가장을 하는 겁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우리들의 일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지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스트라이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전교육을 아주 잘 받았군. 하지만 조심하는 것과 망설이는 것은 별개야. 자네들은 자네들만의 힘으로 절대 리벤델까지 갈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세. 결정을 하게. 혹시 도움이 된다면 자네들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해주겠네. 하지만 나를 목 믿는다면 어떻게 내 이야기는 믿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 순간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버터버가 양초를 가지고 들어섰고 그 뒤엔 뜨거운 물통들을 든 놉이 서 있었다. 스트라이더는 재빨리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여관주인은 양초를 테이블 위에 세워 놓으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드리러 왔지요. 놉! 그 물통들을 각 방에 날라 둬." 그는 문을 닫은 다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저 때문에 폐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일이 웬만큼 바빠야지요. 전 바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들어와서 이 일 저 일 터지면서 기억이 되살아나더군요. 제발 너무 늦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전 샤이어에서 오는 호비트들을 찾아보라는 부탁을 진작에 받았지요. 특히 배긴스라는 이름을 가진 호비트를 말입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프로도가 이렇게 말하자 주인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아, 잘 아실 텐데요. 밖으로 비밀이 새나가게 할 생각은 없어요. 실은 배긴스란 호비트가 언더힐이란 가명으로 지나갈 것이란 이야기까지 들었지요. 그리고 대강 들은 인상착의가 손님한테 꼭 맞는군요." "그래요?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프로도가 말을 가로막았다. "빨간 볼을 가진 키가 작고 뚱뚱한 친구." 버터버는 엄숙하게 말했다. 피핀은 킬킬거리며 웃었지만 샘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버터버는 피핀을 흘끗 보면서 말을 이었다. "'호비트들은 모두 그렇게 생겼으니 그 말만 가지고는 잘 모르겠지, 발리?' 그분은 내게 이렇게 일러 줬지요. '하지만 그 호비트는 키가 보통보다는 크고 꽤 잘생겼어. 턱 아래 찢어진 흉터가 있고 눈이 반짝이는 활달한 친구야.'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 말이 아니고 그분이 말씀한 겁니다." "그분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프로도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아,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갠달프라는 분이지요. 흔히들 마법사라고 하지만 저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올시다. 하지만 그 양반이 나중에 만나면 저보고 뭐라고 할지 겁이 납니다. 우리집 맥주를 모두 쓴맛으로 바꿔 버릴지, 아니면 저를 나무토막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성질이 좀 급하니까요. 그런데 일은 벌써 글러 버렸으니." "도대체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버터버는 느죽느죽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마음이 급한 프로도가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를 했지요?" 주인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다시 이야기를 했다. "아, 그렇지. 갠달프, 그분이 석 달 전에 제 방에 노크도 없이 불쑥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발리, 난 오늘아침에 떠나네. 부탁 좀 들어 주겠나?' 그래서 말씀해 보라고 했지요. '난 지금 급하네. 시간이 없어. 샤이어에 연락을 해야 하는데 누구 믿을 만한 사람 좀 보낼 수 있겠나?' 그래서 내일이나 모레 찾아보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내일로 하게' 하면서 편지를 한 통 주더군요. 주소가 이렇군요." 버터버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주소를 천천히 자랑스럽게 읽었다(그는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샤이어, 호비튼, 백 엔드, 프로도 배긴스씨." "갠달프가 보낸 편지라고요!" 프로도는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러면 당신이 배긴스씨가 맞군요." "그래요. 빨리 그 편지를 주세요. 왜 진작 보내지 않았어요? 이야기는 뜸 들이느라 오래 했지만 어쨌든 그 변명을 하러 여기 오신 거지요?" 불쌍한 버터버의 얼굴이 벌개졌다. "맞습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만일 그 때문에 무슨 사고라도 생겼으면 갠달프가 뭐라고 하실지 정말 겁이 납니다. 그렇지만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편지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샤이어에 선뜻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집 애들도 바빴고요. 그러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어버린 겁니다. 장사가 워낙 바빠서요. 혹시 어디 잘못된 일이라도 있으면 제가 힘닿는 대로 도와 드릴 테니 말씀만 하세요. 편지는 그렇고 갠달프와 약속한 일이 또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발리, 샤이어의 그 친구는 머지않아 이쪽으로 올지도 몰라. 동행이 하나 있을 걸세. 그런데 이름을 언더힐이라고 할테니 잘 기억해 두게. 하지만 묻지는 말고. 만일 내가 그때 그와 동행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분명히 위험한 처지에 있을 테니 자네 힘 닿는 대로 그를 도와 주면 정말 고맙겠네.' 그런데 이제 손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위험이 곧 닥쳐올 것 같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프로도가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배긴스를 찾고 있었어요. 좋은 일로 찾는 게 아닌 건 분명해요. 월요일이었는데 동네 개들이 마구 짖어 대고 거위들도 꽥꽥거리더군요. 참 이상한 일이다 하고 있는데 놉이 들어와서 검은 엇을 입은 두 사람이 문간에서 배긴스란 호비트를 찾는다고 말하더군요. 놉의 머리카락이 온통 곤두서 있었어요. 나가서 그들을 돌려보내고 문을 쾅 닫았지요. 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그들은 아르체트까지 가면서 집집마다 똑같은 질문을 했다더군요. 그리고 그 스트라이더라는 순찰자도 역시 똑같이 물었어요. 손님들이 식사도 하기 전에 만나 보겠다고 떼를 썼답니다."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며 말했다. "떼를 좀 썼지. 그리고 발리맨, 당신이 나를 진작 들여보내 주었더라면 위험은 상당히 줄어들었을 거요." 여관주인은 놀라 펄쩍 뛰었다. "당신은! 당신은 항상 소리없이 나타나는군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허락했습니다. 날 도와 주러 왔다니까요." 프로도가 대답했다. 그러자 버터버는 스트라이더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손님 일이니까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손님같이 위험한 처지에 있다면 순찰자와 같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그러면 누구하고 같이 있겠소? 하루종일 손님들이 불러 대야 겨우 자기 이름이나 기억하는 뚱보 여관주인하고 같이? 이 친구들은 조랑말 여관에 오래 있을 수도 없고 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소. 앞으로 갈 길이 멀거든. 당신이 함께 가서 그들을 지켜 주겠소?" "내가? 브리를 떠난다고!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렇게는 안 돼요!" 버터버는 정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언더힐씨, 왜 여기서 며칠 조용히 숨어 있으면 안 됩니까?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이상한 일들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를 쫓고 있는 건가요? 어디서 온 사람들입니까?" "미안하지만 모두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난 지금 피곤하고 몹시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져요. 그러나 당신이 나를 돕고 싶어도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집에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이 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암흑의 기사들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때 스트라이더가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모르도르에서 왔지. 발리맨, 당신이 그 이름을 아는가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모르도르에서 온 거요." 그러자 버터버는 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그 이름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맙소사! 제 평생 브리에서 들어 본 가장 무서운 소식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아직 날 돕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프로도가 묻자 버터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요. 전보다 더 도와 드려야지요. 비록 나 같은 사람이 대항해 싸워야 할 적이 바로..." 스트라이더가 나직이 말했다. "동쪽의 어둠이지요. 조금만 도와 주면 됩니다. 발리맨, 오늘밤 언더힐씨가 이 집에서 언더힐이란 이름으로 지내게만 해주면 고맙겠소. 그가 내이 떠날 때까지 배긴스란 이름은 잊어 주시오." "물론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제가 손님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챌까 걱정입니다. 배긴스씨가 오늘저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빌보씨가 사라졌다는 소문은 이미 여기까지 퍼졌습니다. 우리집 멍청이 놉도 그 둔한 머리로 약간은 짐작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브리에는 보기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프로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우린 다만 그 기사들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버터버가 말했다. "저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어쨌든 유령인지 귀신인지 모를 그 기사들이 우리 여관을 호락호락 쳐들어올 수는 없을 겁니다. 내일아침까지는 아무 걱정 마세요. 놉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한 그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 우리집 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습니다. 저희집에서 일하는 애들과 함께 제가 직접 오늘밤 보초를 설 테니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프로도가 말했다. "여하튼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능하 한 빨리 떠나는 것이 낫겠어요. 여섯시 반에 아침 좀 부탁합니다." "물론이지요! 그렇게 일러 두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배긴스, 아차, 언더힐씨. 자, 그럼 안녕히들 주무십시오. 참! 근데 브랜디버크씨는 어디 계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프로도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메리를 잊고 있었다. 벌써 밤도 꽤 깊은 시간이었다. "밖에 나가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아까 바람쐬러 간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버터버가 말했다. "어린애들처럼 따라다녀야 말썽이 없을까, 원! 놀이터에 놀러 나온 걸로나 생각하는 모양이죠? 저는 가서 빨리 문단속을 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친구가 오면 들여보내야죠. 놉을 내보내서 찾아보는 것이 낫겠군요. 모두들 안녕히 주무십시오!" 버터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스트라이더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어이! 그 편지는 언제나 뜯을 건가?" 스트라이더가 물었다. 프로도는 편지를 뜯기 전에 밀봉이 그대로 되어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봉투 안에는 마법사의 굵고 우아한 필치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샤이어력 1418년, 한 해의 중간날, 브리의 달리는 조랑말에서. 사랑하는 프로도!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와서 곧 가봐야겠네. 자네도 빨리 백 엔드를 떠나는 것이 좋겠는데. 늦어도 7월 말 이전에는 샤이어를 출발하게.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겠지만 이미 자네가 떠났으면 뒤를 따라감세. 혹시 브리를 지나가게 되면 거기 내게 쪽지를 남겨 두게. 주인(버터버)은 믿을 만한 사람일세. 그리고 또 동부대로에서 내 친구들 중의 하나를 만날지도 모르겠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시커먼 친군데 흔히들 스트라이더라고 부르지.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을 알고 있으니 자네를 도와 줄 걸세. 리벤델로 가게.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빌겠네. 만약 내가 못 가면 엘론드가 충고를 해줄 것일세. 그럼, 이만 총총. 갠달프. 추신;그것을 다시는 사용하지 말게. 어떤 이유로도 말이야. 밤에는 여행하지 말게! 추추신;스트라이더가 진짜인지를 확인할 것. 노상에는 이상한 작자들이 너무 많음. 그 진짜 이름은 아라곤임.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며, 모든 방랑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벼려질 것이며, 잃어버린 왕관을 다시 찾을 것이다. 추추추신;버터버가 이 편지를 신속하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음. 훌륭한 사람이긴 한데 까마귀고기를 먹었는지 기억력이 엉망임. 필요한 것은 꼭 잊어버림. 만약 잊어버리면 이번에는 로스구이를 만들어 버릴 것임. 그럼, 안녕! 프로도는 혼자서 편지를 다 읽고나서 피핀과 샘에게 그것을 넘겨 주며 투덜거렸다. "버터버 영감이 일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군! 정말 로스구이로 만들어야겠어. 이 편지를 그때 즉시 받았다면 우리는 지금쯤은 리벤델에 무사히 도착했을 텐데. 그런데 갠달프에겐 무슨 일이 생긴걸까? 마치 대단히 위험한 곳으로 떠나가듯이 적고 있으니 걱정이 되는군." "오랫동안 계속해 온 일일세."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프로도는 갠달프의 두 번째 추신을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진작 갠달프의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면 시간이 절약되었을 텐데요." "그럴까? 하지만 자네들은 여지껏 나를 믿으려 하지 않았어. 나는 그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러니 내가 자네들을 도와 주려면 아무 증거 없이도 자네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네. 여하튼간에 처음부터 자네들한테 나의 정체를 드러내 보일 생각은 없었지. 나도 자네들을 먼저 살펴본 뒤에야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적은 훨씬 전에 벌써 내 앞에 함정을 파놓았거든. 그러나 마음속으로 확신을 한 뒤로는 곧바로 자네들의 질문에 무엇이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네.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나 자신을 위해서 자네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네. 쫓기는 사람은 가끔 남의 불신에 짜증이 나고 따뜻한 우정이 그리울 때가 있는 법이거든. 하지만 내 인상이 워낙 고약해서 그런 기대는 좀 지나치겠지?" "그럼요. 여하간 첫눈에는..." 갠달프의 편지를 읽고 마음을 놓은 피핀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샤이어 속담에는 거죽보다 속마음이란 말이 있답니다. 그리고 아마 저라도 숲 속이나 도랑에서 며칠 동안만 뒹굴면 인상이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자네가 스트라이더처럼 보이려면 황야에서 몇 날, 몇 주, 아니 몇 년을 보내도 부족할 걸세. 그보다도 우선 지금의 자네보다 더 튼튼해지지 않고서는 그렇게 되기도 전에 먼저 저 세상에 가 있겠지." 스트라이더의 대꾸에 피핀은 다시 기가 꺽였다. 그러나 샘은 전혀 겁내지 않고 여전히 스트라이더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갠달프가 말한 진짜 스트라이더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이 편지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갠달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했어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지금 우리와 함께 가려고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쩌면 진짜 스트라이더를 해치고 옷을 뺏어 입었는지도 모르죠. 대답해 보세요." "맹랑한 친구군. 샘 갬기, 미안하네만 내가 자네한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일세. 만약 내가 스트라이더를 해치웠다면 자네들도 이미 목숨이 붙어 있지 못했을걸. 무슨 말이냐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자네들을 벌써 해치우고 말았을 거란 말일세. 만약 내가 반지를 빼앗으려고만 했다면 이미 손에 넣고도 남았을 거야. 자 보게!" 그가 의자에서 몸을 불쑥 일으키자 갑자기 키가 쑥쑥 커지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엔 날카롭고 위압하는 듯한 빛이 번득였다. 그는 외투를 벗어 던지고 옆구리에 감추고 있던 장검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댔다. 호비트들은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었다. 샘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진짜 스트라이더야." 그는 돌연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오.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대들을 지켜 주겠소." 그 후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을 망설이던 프로도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나는 이 편지를 보기 전에 당신이 친구인 걸 알았습니다. 적어도 그렇기를 자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오늘저녁에 나를 여러 본 놀라게 하셨지만 그것은 적의 졸개들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들의 첩자라면 아마 더 잘생기긴 했겠지만 어떤 거부감이 느껴졌을 테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스트라이더는 껄껄 웃었다. "알고말고. 내가 생긴 것은 이리 고약해도 호감은 간단 말이지, 맞는가?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며, 모든 방랑자가 다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세." 프로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그 시는 당신을 두고 한 말입니까? 저는 그 뜻이 무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갠달프의 편지를 보지 않고도 거기 있는 내용을 어떻게 아십니까?" "나도 몰랐네. 하지만 내 이름은 아라곤이고 그 시구는 그 이룸에 어울리지." 그는 돌연 칼집에서 칼을 빼들었다. 호비트들은 그 칼이 손잡이 아래로 이 피트쯤 되는 곳에서 부러져 있는 것을 알았다. "이보게, 샘! 이 칼은 아직까지 살생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지? 그러나 이 칼을 다시 벼려야 할 때가 가까웠네." 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 이제 샘이 허락한 셈이니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하고 스트라이더가 자네들의 길잡이가 되겠네. 내일은 꽤 어려운 길이 될 걸세. 우리가 브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빠져나갈 수는 없어.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샛길로 숨을 계획일세. 동부대로말고 브리랜드를 빠져나가는 길을 한두 군데 알고 있지. 그리고 일단 추적을 벗어나면 웨더톱으로 곧장 향할 것이고." "웨더톱? 거긴 어딥니까?" 샘이 물었다. "동부대로 바로 북쪽에 있는 야산인데 여기서 리벤델로 가는 길목 중간쯤에 있네. 거기서는 사방이 멀리까지 보이니 거기까지 가서 한번 둘러보도록 하세. 만약 갠달프가 우리를 따라온다면 분명히 그곳으로 올 거야. 웨더톱 지나서는 길이 험한 곳이 여러 군데 있지." 프로도가 물었다. "갠달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나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스트라이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도 모르네. 지난봄에 나는 그와 함께 서쪽으로 왔어. 그가 다른 곳에서 바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은 내가 죽 샤이어의 경계지역을 지키고 있었지. 갠달프가 그렇게 부탁을 했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5월 초하루 브랜디와인 강 하류의 산 포드 지방에서였는데 자네와의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서 자네가 9월 마지막 주에 리벤델로 출발할 것이라고 하더군. 나는 그가 자네와 함께 있는 줄 알고 내 볼일 때문에 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어. 분명히 무슨 소식을 들은 모양인데, 나도 가까이 없어서 도와 줄 수가 없었지. 그를 알게 된 후로 이번처럼 걱정이 되기는 처음일세. 만약 올 수가 없으면 연락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야. 며칠 전에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나쁜 소식을 들었지. 갠달프가 사라지고 기사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사방에 짜하게 퍼져 있더군. 나는 이 소식을 길도르의 요정들에게서 들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자네가 출발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지. 하지만 버크랜드를 떠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로 동부대로로 가는 길목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네." "암흑의 기사들이 나타난 것과 갠달프가 사라진 것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프로도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갠달프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네. 하지만 희망을 잃진 말게. 갠달프는 샤이어의 호비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한 분일세. 자네들이 분 것은 그의 불꽃놀이와 장난감밖에 없겠지만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이 일은 그의 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일세." 피핀은 하품을 했다. "죄송하지만 너무 졸려서 못 견디겠어요. 걱정이고 위험이고 간에 우선 잠부터 자야겠어요. 아니면 여기서 그냥 곯아떨어져 저릴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멍청이 메리는 어디 갔지? 이 깜깜한 밤중에 찾으러 나가 봤자 헛수고일 테고." 그 순간 그들은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복도를 따라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메리가 황급히 뛰어들었고 놉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문을 닫고 그 앞에 막아섰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메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놈들을 봤어요, 프로도! 그 암흑의 기사들을 봤단 말입니다." "암흑의 기사들을? 어디서?" "여기, 이 마을에서요. 아까 난 방 안에서 한 시간쯤 당신들이 연회장에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길래 바람이나 쐬려고 산책을 나갔어요.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여관 바깥의 등불 밑에서 별빛을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쳐오면서 뭔가 무서운 것이 가까이 기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길 건너 등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 더 시커먼 무슨 물체가 있는 것 같더니 곧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어요. 말은 보이지 않았어요." 스트라이더가 갑자기 날카롭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사라졌나?" 메리는 그때서야 낯선 사람을 알아차리고는 움찔했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계속해 봐! 갠달프의 친구분인데, 나중에 차차 이야기해 줄게."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어요. 따라가 보려고 했는데 금방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도 길모퉁이를 돌아서 대로 맨 끝에 있는 집까지 가봤어요." 스트라이더가 놀랍다는 듯이 메리를 바라보았다. "담력이 대단하군. 하지만 어리석은 일이었네." 메리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모르겠지만, 용감해서도 아니고 어리석어서도 아니었어요. 나 자신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나는 중얼중얼하는 듯한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쉭쉭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거기서부터는 온 몸이 떨리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없어서 가만 있다가 더럭 겁이 나서 뒤로 돌아서서 죽어라고 달렸지요. 그런데 뒤에서 무언가가 뒤쫓아오는 바람에 그만 넘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놉이 설명을 했다. "제가 손님을 발견했습니다. 버터버씨가 저에게 등불을 들고 나가보라고 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서문으로 갔다가 다시 남문 쪽으로 가봤지요. 빌 퍼니의 집 바로 옆 대로에 뭔가가 보이더군요.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두 사람이 몸을 숙이고 무엇을 들어올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소리를 지르고 달려갔더니 그들은 흔적도 없고 브랜디버크씨만 길가에 쓰러져 있더군요.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흔들어 깨웠더니 '깊은 물 속에 빠졌던 것 같군' 하고 말을 하긴 하는데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자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여기까지 달려온 겁니다."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게 사실인 것 같아요. 무시무시한 꿈이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아요. 온 몸이 조각조각 찢겨지는 것 같았어요. 나를 덮친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암흑의 악령들이지. 그 기사들은 마을 외곽에 말을 세워 두고 서문으로 몰래 들어온 것이 틀림없어. 지금쯤은 빌 퍼니도 만나 보았을 테니 소식을 다 알고 있겠군. 그 남부인도 역시 첩자였던 것 같고. 오늘밤 브리를 떠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메리가 물었다.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여관을 공격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아직 여기에 모두 모이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지. 그들은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에선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불빛이 있고 사람들이 많은 집은 급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공격하지 않아. 그리고 아직은 에리아도르의 여러 마을이 근처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위력은 그들이 내뿜는 공포에 있지. 이미 브리 사람들 몇 명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어.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벌이겠지. 퍼니와 낯선 사람들 몇 명, 그리고 문지기 해리도 그 속에 낀 것 같네. 월요일날 그들이 해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지나간 뒤에 보니 그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되어서 떨고 있었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프로도가 물었다. "일단은 자네들 방에 돌아가지 말고 이 방에 있게! 그들은 자네들 방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호비트들 침실은 북쪽으로 창이 나 있고 지면에 가깝거든. 이 방에 모두 함께 모여서 유리창과 출입문을 봉쇄하는 것이 좋겠어. 우선 내가 놉과 함께 가서 자네들 짐을 가져오겠네." 스트라이더가 나가자 프로도는 메리에게 저녁식사 후에 있었던 일을 빠르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스트라이더와 놉이 돌아왔을 때 메리는 아직도 갠달프의 편지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놉이 말했다. "자, 손님들, 재가 침대마다 시트를 부풀려 놓고 복판에다가 덧베개를 접어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배긴... 언더힐씨, 손님 머리는 갈색 양털깔개로 멋지게 꾸며 놓았지요." 그가 싱긋 웃자 피핀도 따라 웃었다. "진짠 줄 알겠죠? 하지만 가짜인 것이 탄로나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여하튼 아침까지만 이 요새를 지키도록 힘써 보세." "모두들 안녕히 주무십시오." 놉은 인사를 하고 경계를 서기 위해 현관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짐과 옷을 거실 바닥에 쌓아 놓았다. 그리고 낮은 의자를 출입문 앞에 당겨다 막았고 창문을 가렸다. 프로도는 창문 틈으로 별빛이 아직 환한 것을 보았다. 브리힐 산 위로 북두칠성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창문을 닫고 무거운 안쪽 셔터를 내린 다음에 커튼을 쳤다. 스트라이더는 난롯불을 더 살린 후에 촛불을 모두 껐다. 호비트들은 모두 난로 쪽으로 발을 향한 채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자 스트라이더는 문 앞에 막아 놓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메리가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워서도 이야기를 더 했다. 메리는 담요 속에서 몸을 굴리며 낄낄거렸다. "암소가 달에 뛰어올랐어? 정말 한심해요, 프로도! 나도 그 장면을 봤어야 하는 건데. 브리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앞으로 백 년 동안은 두고두고 할 겁니다." "동감일세."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차례로 잠이 들었다. 제11장 어둠 속의 검 그들 일행이 브리의 여관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편 버크랜드에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골짜기와 강둑을 따라 밤안개가 떠돌았고 크릭할로우의 집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패티 볼저는 가만가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까닭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잠도 잘 자지 못했고 맘놓고 쉬지도 못했었다. 숨통을 누르는 듯한 밤공기가 사방에서 엄습해 왔다. 그가 어둠 속을 한참 응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의 나무 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대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소리도 없이 닫히는 것 같았다. 순간 그는 엄청난 공포가 자신을 휘어잡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루로 흠짓 물러나서 아무 정신 없이 떨고 서 있다가 얼른 방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밤이 깊어졌다. 그는 길을 따라 살금살금 말을 끌고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문 앞까지 와서 그쳤다. 밤의 그림자가 대지를 뒤덮듯이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집 안으로 쓱 들어왔다. 하나는 방문 앞에 섰고 나머지 둘은 양쪽 집모퉁이 쪽에 지켜섰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바위그림자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밤은 서서히 깊어갔다. 어둠에 휩싸인 집과 나무들은 숨을 죽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뭇잎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새기 직전의 차가운 새벽공기가 집 주위를 둘러쌌다. 그때 문 앞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집에서 빠져나온 칼날이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에 섬뜩한 빛을 뿜어 냈다. 희미하지만 둔중한 마찰음이 들려오더니 방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라! 모르도르의 이름으로!" 나직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또 한번 쿵 소리가 나면서 빗장이 부숴지고 방문이 안으로 벌렁 나자빠져 버렸다. 검은 그림자들은 재빨리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순간 집 근처 숲 속에서 뿔피리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언덕 꼭대기의 봉화처럼 순식간에 밤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비상! 비상! 불이다! 적군이다! 비상!" 패티 볼저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는 검은 그림자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리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는 뒷문으로 빠져나와 뒷마당을 가로질러 들판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인가는 일 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근처 인가에 도착하자마자 문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한테는 그것이 없어!" 그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호비트들이 그가 질러 대는 소리를 알아듣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들은 버크랜드에 외적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올드 포레스트에서 기습 공격을 하나 보다 생각하고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비상! 불이야! 적이다!" 브랜디버크의 호비트들은 근 백 년 동안 사용한 적이 없던 버크랜드의 뿔피리를 불어 댔다. 그것은 브랜디와인 강까지 꽁꽁 얼렸던 그 악명 높은 겨울에 흰 늑대들이 쳐들어왔을 때말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비상! 비상!" 머리서부터 응답하는 뿔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구석구석까지 경보가 퍼졌다. 검은 그림자들은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그들 중의 하나가 달려가면서 층계에 호비트용 외투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급히 말을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크릭할로우 일대는 순식간에 발칵 뒤집혀 뿔피리소리와 허둥대는 발소리들로 온통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암흑의 기사들은 등뒤의 소동에도 아랑곳 않고 질풍처럼 북문 쪽으로 치달았다. '바보 같은 것들, 계속 불어 대라지! 나중에 사우론에게 혼 좀 나봐라!' 그들은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이제 그 집은 텅 비어 있고 반지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북문의 경계선을 넘어 샤이어 땅에서 사라져 갔다. 이른 밤 프로도는 갑작스럽게 깨어났다. 어떤 소리나 형체 같은 것이 그의 꿈자리를 괴롭힌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보초를 서고 있는 스트라이더를 보았다. 난롯불은 새로 지펴 넣은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눈은 그 불빛을 받아 번득거리고 있었다. 그는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프로도는 곧 다시 잠이 들었으나 꿈자리는 다시 바람소리와 달리는 말발굽소리로 어지러웠다. 바람이 주위를 빙빙 돌며 집을 흔들어 댔고 멀리서는 뿔피리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여관 마당에는 수탉이 기운차게 울어 댔다. 스트라이더는 커튼을 걷고 쨍 소리를 내며 셔터를 열어 젖혔다. 열린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쏟아졌고 찬공기가 선뜻하게 밀려들었다. 스트라이더는 호비트들을 깨워 침실로 데려갔다. 침실의 광경을 보고서야 그들은 스트라이더의 충고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창문은 바깥에서 억지로 열어 젖힌 듯 덜렁거렸고 커튼이 펄럭거렸다. 침대는 엉망으로 흩어졌고 덧베개들은 난도질을 당해서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며 갈색 깔개는 아예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스트라이더는 즉시 주인을 불러왔다. 불쌍한 버터버는 졸린 듯 연신 선하품을 해대다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밤새 한 잠도 자지 않았지만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내 평생에 이런 사건은 한 번도 없었어요. 손님들을 받을 수도 없게 침대고 베개고 온통 엉망이 되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암흑의 시대요. 하지만 우리가 집을 나가기만 하면 당신은 안전할 겁니다. 우린 곧 떠나겠소. 아침은 걱정 마시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이면 충분할 테니까. 우린 이삼 분 내로 짐을 꾸리겠소." 버터버는 조랑말들에게 여물을 좀 먹여서 출발할 채비를 할 참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금세 당황해서 되돌아왔다. 조랑말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간밤에 누가 마구간 문을 열어서 말을 모두 내보낸 것이 분명했다. 메리의 말뿐만 아니라 거기 있던 다른 말이나 가축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프로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낙심했다. 적은 말을 타고 쫓아오는데 어떻게 걸어서 리벤델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달에 뛰어오르는 게 낫지! 스트라이더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서 호비트들을 바라보다가 달래듯 말했다. "그 기사들을 따돌리고 도망가는 데는 조랑말이 별로 도움이 안 되네." 그는 프로도의 표정을 보고 이미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신중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길은 말을 타는 것이 걷는 것보다 빠를 것도 없는 길이야. 애초에 걸어갈 작정이었으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식량이지. 여기서부터 리벤델까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지고 갈 식량에만 의존해야 해. 그리고 혹시 예정보다 늦어지거나 먼길로 우회해야 할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여유있게 가져가야 하네. 등짐을 얼마나 지고 갈 수 있겠나?" "필요한 만큼은 가져가야지요." 피핀은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용감하게 대답했다. "저는 두 사람 몫은 할 수 있습니다." 샘도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나 프로도는 여전히 걱정스러워 버터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수가 없을까요, 버터버씨? 이 마을에서 조랑말 두 마리 정도 구할 수 없나요? 아니면 짐이라도 싣고 가게 한 마리라도요. 세를 낸다면 거짓말이 될 테고 돈을 주고 사면 어떻습니까?" 그는 돈이 그만큼 될까 걱정을 하면서도 내친 김이라 말을 꺼내 보았다. 주인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글쎄요. 이 마을에서 타고 다니던 몇 안 되는 조랑말은 모두 저희 마당에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다 달아나 버렸군요. 이곳 브리에는 짐수레나 다른 용도로 쓰이는 말이 거의 없을뿐더러 있어도 팔지를 않아요. 하지만 한번 알아는 보지요. 봅을 내보내서 빨리 한바퀴 돌아보게 해야겠습니다." 스트라이더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적어도 한 마리는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군. 아침 일찍 몰래 빠져나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군! 차라리 출발한다고 나팔이라도 불어 대는 게 낫겠어. 이게 다 그놈들 작전이겠지만." "하지만 좋은 점도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아 아침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빨리 놉을 찾아야지!" 메리가 말했다. 결국 그들은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넘게 지체했다. 봅은 조랑말이고 큰 말이고 간에 인근에서는 딱 한 마리밖에 구하지 못했다고 보고해 왔다. 빌 퍼니의 말인데 팔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봅이 말했다. "늙어서 반쯤 죽어 가는 볼품없는 말인데 손님들이 급한 걸 알고는 값을 세 배까지 쳐주지 않으면 팔지 않겠답니다." 프로도가 물었다. "빌퍼니? 무슨 속임수가 아닐까요? 그놈이 우리 짐을 모두 가지고 돌아와 버린다거나 아니면 우리 뒤를 추적하려는 속셈은 아닐까요?" 스트리아더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일단 집을 떠나면 집으로 돌아오기는 힘들 걸세. 내 생각에는 빌 퍼니가 이번 기회에 이익이라도 좀더 보자고 약은 수작을 부리는 것 같군. 문제는 그 말이 금방 죽어 나자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건데 지금으로선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지 않나! 얼마나 달라고 하던가?" 빌 퍼니가 요구한 값은 은화 십이 페니로 그곳에서 거래되는 조랑말 가격보다 세 배나 비싼 값이었다. 말을 데려와 보니 과연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금방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버터버가 그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메리에게는 잃어버린 조랑말들에 대한 대가로 십팔 페니를 다로 주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브리에서는 꽤 부유한 축에 들었으나 은화 삼십 페니는 그로서는 상당한 타격이었고, 더구나 빌 퍼니에게 속았다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익을 본 셈이었다. 실제로 잃어버린 말은 딱 한 마리뿐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말들은 모두 겁에 질려 달아나기는 했지만 브리랜드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니다가 발견되었고 메리의 조랑말들도 함께 도망을 치기는 했지만 결국은 (꽤 영리한 놈들이라서) 모두 뚱보 럼프킨을 찾아서 다운즈에까지 내려갔었다. 거기서 톰 봄바딜의 보호를 받으며 한동안 편하게 지냈다. 그러나 톰은 브리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조랑말을 모두 버터버에게 돌려 주어서 버터버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다섯 마리의 좋은 조랑말을 산 셈이 되었다. 메리의 조랑말들은 브리에서 많은 일을 해야 했으나 봅이 잘 보살펴 주었고, 무엇보다도 프로도 일행과 무섭고 위험한 여행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조랑말들은 결코 리벤델 구경은 하지 못했다. 어쨌든 버터버가 이익을 보았건 손해를 보았건 그건 나중의 일이고 그는 또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여관에 투숙한 손님들이 간밤에 여관이 습격당했단 소문을 듣고 소동이 벌어졌다. 남쪽에서 온 여행객들은 자기들 말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주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나 자기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금은 머쓱해졌다. 없어진 사람은 바로 빌 퍼니와 함께 있던 사팔뜨기였다. 혐의는 그에게 씌워졌다. 버터버는 화가 나서 악을 썼다. "그 도둑놈을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시오. 나한테 소리지를 것도 없이 당신네들끼리 손해배상을 하면 될 거 아니요! 퍼니한테 가서 그 잘생긴 친구는 어디 있나 한번 물어 보시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가 언제부터 남쪽에서 온 여행객들과 동행하게 되었는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식사를 하고난 후 호비트들은 짐을 다시 풀어서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지도 모를 여행에 대비해 식량과 물자를 더 많이 챙겨 넣었다. 오전 열시가 다 돼서야 그들은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그들이 출발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 밖은 온갖 추측들로 떠들썩했다. 프로도의 귀신 같은 마술, 검은 기사들의 출현, 말 도난사건, 그리고 순찰자 스트라이더가 수상한 호비트들과 한패거리가 되었다는 소문은 앞으로 몇 년 동안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끝없는 얘깃거리를 그곳 사람들에게 제공한 셈이었다. 브리와 스태들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코움과 아르체트 사람들도 호비트들이 출발하는 광경을 보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여관의 투숙객들도 현관문 앞에 나와 서 있거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스트라이더는 계획을 바꾸어서 대로를 따라 브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관에서 나와 바로 숲이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염려가 있었다. 주민들의 반 정도는 호비트 일행을 따라와서 어디로 가는지 지켜볼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들은 놉과 봅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버터버에게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세상이 다시 조용해지면 그때 다시 만나뵐 수 있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이 여관에서 오랫동안 맘놓고 푹 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로도가 말했다. 그들은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안하고 풀죽은 모습으로 출발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얼굴이나 그들을 향해 질러 대는 소리가 모두 다정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트라이더를 본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특히 그의 눈길을 한 번 받은 사람들은 아예 입을 다물고 뒷걸음질치기도 했다. 스트라이더와 프로도가 맨 앞에 섰고 메리와 피핀이 그 뒤를 따랐으며 샘이 맨 뒤에서 조랑말을 끌고 갔다. 조랑말에는 그들의 양식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의 짐이 실렸으나 조랑말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그리 낙담한 기색은 아니었다. 샘은 사과를 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놉과 봅이 이별의 선물로 준 것인데 그의 한쪽 주머니 가득 되는 분량이었다. "걸을 때는 사과, 앉아서는 담배. 하지만 둘 다 곧 끝장나고 말겠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호비트들은 문 밖이나 담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리는 호기심 많은 얼굴들을 모른 척하고 태연히 걸어갔다. 프로도는 남문 쪽으로 한참 다가가서야 우거진 생울타리 너머로 손질이 잘 안 된 어두컴컴한 집을 한 채 보았다. 마을 맨 끝에 있는 집이었다. 그 집 창문으로 교활한 눈빛을 가진 창백한 얼굴이 쓱 나타나더니 곧 사라졌다. 프로도는 혼자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기가 그 남쪽에서 온 놈이 숨어 있는 곳이란 말이지! 꼭 도깨비같이 생긴 녀석이군.' 울타리 너머로 또 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두툼한 검은 눈썹에다 조롱기가 섞인 검은 눈을 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입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짧은 검은색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다가 그들이 다가가자 그것을 입에서 떼고 침을 뱉었다. 그가 외쳤다. "안녕, 꺽다리! 벌써 떠나나? 드디어 길동무를 만났군?" 스트라이더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호비트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 애송이들! 자네들 지금 누구하고 같이 가는지나 알고 있나? '거칠 것 없다'는 스트라이더야. 이름치고는 근사하지? 오늘밤을 조심하게! 그리고 자네, 새미, 우리 불쌍한 늙은 조랑말을 박대하면 안 돼! 퇘!" 샘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런데, 너 퍼니, 그 못생긴 대가리 좀 치울 수 없어? 혼 좀 나볼래?" 그와 동시에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번개처럼 사과 하나가 샘의 손을 떠나서 빌의 코를 정통으로 맞혔다.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울타리 너머로 빌의 욕설이 마구 쏟아졌다. '아까운 사과 하나만 버렸네.' 샘은 걸어가며 계속 후회했다. 그들은 마을을 벗어났다. 줄레줄레 뒤따라붙던 아이들과 구경꾼들은 지쳤는지 남문에서 터덜터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남문을 지나 동부대로 방향을 몇 마일 더 걸어갔다. 길은 브리힐 산 밑을 돌아 왼쪽으로 꺽어지면서 동쪽으로 향해 가다가 급한 내리막길이 되었다. 그리고 숲지대가 나타났다. 그들 왼쪽으로 산 위 남동쪽 완만한 비탈에 스태들 마을의 집들과 호비트들의 토굴이 몇 채 눈에 띄었고 멀리 북쪽의 깊은 분지에는 코움 마을에서 연기자락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아르체트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 내려와서 브리힐 산마저도 높은 갈색의 산으로 덩그렇게 윤곽을 드러낼 때쯤 해서 그들은 북쪽으로 빠져들어가는 오솔길을 발견했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쉬운 길을 버리고 숨어야겠네." 피핀이 말했다. "지름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지난번 숲 속에서는 지름길이라고 그쪽으로 갔다가 죽을 뻔했거든요."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아, 그때는 내가 없었잖는가? 내가 가는 지름길은 짧든 길든 간에 틀린 길은 아니야." 그는 대로를 아래위쪽으로 한 번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나무가 우거진 계곡을 향해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지방의 지리를 모르는 그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그의 계획은 먼저 아르체트로 가다가 곧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르체트를 지나 동쪽으로 똑바로 황야를 거쳐서 웨더톱 언덕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계획대로만 잘 되면 그들은 밋지워터 늪지대 때문에 남쪽으로 크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동부대로를 가로질러 가는 샘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직접 늪지대를 건너야만 했다. 스트라이더가 설명해 주는 늪지대는 가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군이 기분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지난밤의 소동만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을 맞이한 것이기도 했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계곡 숲 속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무성했고 평화롭고 상쾌한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스트라이더가 수많은 갈랫길에서 그들을 자신있게 인도했기에 망정이지 그들끼리 있었더라면 곧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이나 빙빙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했다. "빌 퍼니는 분명히 우리가 어디서 대로를 벗어났는지 확인했을 거야. 하지만 자기 혼자서 따라올 생각은 못하겠지. 제딴에는 이 지방을 꽤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숲 속에서는 내 상대가 못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거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놈들에게 뭐라고 전해 줄까 하는 점인데, 그놈들이 멀리 있을 것 같지가 않거든. 우리가 아르체트로 갔다고 생각해 주면 더 좋겠는데 말이야." 스트라이더으 솜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그들은 하루종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두 발 달린 동물은 새밖에 없었고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는 여우 한 마리와 다람쥐 몇 마리밖에 없었다. 다음날도 그들은 꾸준히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숲 속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다. 브리를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체트우드 숲을 빠져나왔다. 대로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낮아지기 시작하던 도로는 이제 광활한 평원으로 바뀌었으나 행군하기에는 더 힘이 들었다. 그들은 브리랜드의 경계를 벗어나 한참 동안 길도 없는 황야를 걸어 밋지워터 늪지대 가까이로 나아갔다. 지면이 축축해지면서 곳곳에 소택지와 웅덩이가 나타나고 보이지 않는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갈대와 골풀밭이 넓게 펼쳐졌다. 그들은 발을 적시지도 않고 또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도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길은 위험해졌다. 늪은 겉보기와 달리 복잡한 곳이어서 순찰자조차도 그 변화무쌍한 수렁들 사이로 안전하게 다니는 일정한 길을 만들어 놓을 수가 없었다. 파리가 성가시게 굴었으며 공중에는 작은 벌레들이 구름처럼 떼를 지어 소매와 바짓가랑이, 머리칼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피핀이 소리를 질렀다. "산 채로 뜯어 먹히겠어! 밋지워터라! 물보다 밋지(각다귀)가 더 많은걸 그래." 샘도 몸을 긁으며 짜증을 냈다. "이놈들은 호비트가 없으면 무얼 먹고 살까?" 그들은 그 쓸쓸하고 기분나쁜 곳에서 처량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차갑고 축축하고 불편한 습지 외에는 야영할 만한 곳이 없었고 날파리와 각다귀벌레들도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갈대와 덤불 속에는 소리로 짐작컨대 귀뚜라미와 사촌쯤 될 성싶은 끈질기기 짝이 없는 곤충들이 우글거렸다. 사방에서 수천 마리가 밤새 쉬지도 않고 '니크 브리크, 니크 브리크!' 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호비트들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도 나을 것이 없었으며 밤은 여전히 지긋지긋했다. (샘이 이름을 지어준) 니커브리커들은 이제 없어졌지만 각다귀벌레들은 여전히 따라왔다. 프로도는 피곤하긴 했지만 눈을 붙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멀리 동쪽 하늘에 불빛이 한 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불은 몇 번 반짝이고 사그라졌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도 몇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그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어둠 속을 응시하던 스트라이더에게 물었다. "저 불빛이 뭘까요?" "나도 모르겠네. 산꼭대기에는 비치는 번개 같기도 한데. 너무 멀어서 알 수가 없군." 프로도는 다시 누웠지만 오랫동안 하얀 불꽃과, 말없이 불빛을 쳐다보고 서 있는 스트라이더의 어두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불편한 잠 속에 뺘져들었다. 닷새째 되는 날 얼마 가지 않아 드디어 늪지대의 웅덩이와 갈대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눈앞의 평지가 조금씩 오르막으로 변했다. 그들은 동쪽 멀리 연이어 늘어선 산봉우리들을 보았다. 그 중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다른 봉우리들과 멀리 떨어져 맨 끝에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원추형이었는데 정상은 약간 평평해 보였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저것이 웨더톱이야. 우리가 버리고 온 동부대로가 저 산 남쪽 기슭으로 돌아가지. 그러니 대로 북쪽을 타고 웨더톱으로 똑바로 간다면 내일 정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내 생각엔 그게 좋을 것 같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지요?" 프로도가 물었다. "내 말은, 우리가 웨더톱에 도착하면 무엇과 마주치게 될지 분명치 않다는 거야. 동부대로가 가깝거든." "하지만 갠달프를 만날 수도 있잖겠어요?" "그렇기도 하지만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만일 그가 이 길로 언다면 브리에 들르지 않을지도 몰라. 따라서 지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는지 모를 거란 말이야. 그리고 여하간 운이 좋아 함께 그곳에 도착한다고 해도 만나기는 쉽지가 않아. 갠달프가 우리나 거기서 오래 기다릴 수는 없거든. 기사들이 만일 평지에서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웨더톱으로 갈 거야. 거기서는 사방이 다 보이거든. 사실 우리가 여기 서 있으면 저 꼭대기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새나 짐승이 많지. 이 지방에서는 새들조차 모두 믿어선 안 돼. 그들 중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정탐꾼들도 있거든." 호비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샘은 푸르스름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혹시 날카롭고 사나운 눈을 가진 독수리나 매들이 머리 위를 맴돌지나 않나 걱정그러워하는 눈치였다. 샘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겁이 나고 무서워지잖아요, 스트라이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프로도가 물었다. 그러자 크게 자신은 없는 듯 스트라이더가 천천히 말했다. "네 생각에는 아까 말했듯이 웨더톱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거든. 그러면 대로 반대쪽인 북쪽에서 은밀하게 웨더톱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초저녁의 냉기가 그들을 둘러쌀 때까지 그들은 하루종일 걸었다. 땅은 점점 더 팍팍하고 황량해졌으며 그들 뒤쪽 늪지대에서는 여전히 안개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둥글고 붉은 태양이 서편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몇 마리 새들이 우울하고 슬픈 노래를 불렀으나 곧 대지는 침묵에 휩싸였다. 호비트들은 아득한 고향 백 엔드의 따스한 창문 너머로 흘러들던 감미로운 저녁놀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룻길이 끝날 때쯤 그들은 산 속에서 흘러나와 하류 늪지대로 썩어 들어가는 하천을 끼고 계속 강둑을 걸었다. 마침내 강가 오리나무 밑에 야영을 하기 위해 멈춰섰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멀리 전방에서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산등성이의 윤곽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그날 밤 그들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으나 스트라이더는 한잠도 자지 않은 것 같았다. 달이 중천에 떠오르면서 초저녁의 대지 위로 차가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해가 뜨자마자 즉시 출발했다. 하얀 서리가 대지를 덮었고 하늘은 물감을 뿌린 듯 선명했다. 호비트들은 간밤에 숙면을 취해 기분이 상쾌했다. 그들은 이미 짧은 거리의 평지를 걷는 데 꽤 익숙해졌다. 샤이어에 있을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걸음이 빨라진 것이었다. 피핀이 프로도에게 전보다 키가 두 배나 더 커 보인다고 하자 프로도는 혁대를 조이며 말했다. "사실 살이 점점 빠지는 것 같으니 이상한 일이야. 이러다 살이 무한정 빠지면 악령만 남게 되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놀랄 만큼 엄숙한 표정으로 급히 말을 가로 막았다.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지 말게!" 산이 더 가까워졌다. 굴곡이 심해 때로는 거의 삼백 미터나 올라가기도 하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협곡을 이루면서, 그 너머 동쪽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를 이루기도 했다. 산등성이 위로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성벽과 수로의 흔적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고 협곡에는 옛날의 돌기둥을 비롯한 유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밤이 이슥해져서야 서쪽 산비탈에 도착해 야영을 했다. 그날은 10월 5일로 브리를 떠난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그들은 체트우드를 떠난 후 처음으로 길이라 할 만한 곳을 나섰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그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길은 위쪽 산꼭대기나 서쪽의 평지 어디에서도 쉽게 보이지 않도록 대단히 교묘하게 닦여져 있었다. 그들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기도 하고 골짜기로 내려가기도 했는데 비교적 평평하고 앞이 트인 곳에서는 양쪽에 커다란 둥근 바위나 깎아 놓은 돌기둥들이 늘어서 있어 마치 생울타리처럼 그들을 숨겨 주었다. 유난히 바위들이 크고 촘촘하게 박혀 있는 지역을 지나가면서 메리가 말했다. "이 길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거지요? 기분이 좋지 않아요. 어쩐지 무덤 속의 배로우인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웨더톱에는 배로우인들이 없겠지요?" 그러자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없지. 웨더톱은 물론이고 이곳 어느 산에도 배로우인들은 없어. 서역인들은 앙마르의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 산을 지킨 적은 있지만 여기서 살지는 않았지. 이 길은 그때 세워진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거야. 가마득한 옛날, 북왕국 초기에 그들은 웨더톱에 아몬 술이라는 거대한 경비대를 세웠는데 지금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경비대의 폐허와 그 주변의 원형 띠 모양의 허물어진 돌기둥만 남았지. 하지만 그것도 옛날에는 높고 아름다웠다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인간과 요정의 최후동맹이 이루어졌을 때 엔델린이 여기 서서 서쪽에서 길 갈라드가 오는지 지켜보았다고 하더군." 호비트들은 스트라이더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야의 생활뿐 아니라 역사와 전설에도 조예가 깊은 것 같았다. 메리가 물었다. "길 갈라드는 누구예요?" 스트라이더는 아무 대답도 없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갑자기 웅얼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 갈라드 요정의 왕 하프를 타는 이들은 슬프게 노래했지, 안개산맥과 바다 사이의 넓고 아름다운 대지를 마지막으로 다스린 왕이 바로 그였다고. 그의 칼은 길고 창은 예리했으며 번쩍이는 투구는 멀리서도 보였네. 밤하늘의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도 그의 은빛 방패 속으로 모두 안겨 들어왔지. 그러나 오래 전에 그는 떠나갔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 어둠에 뒤덮인 모르도르의 암흑 속으로 그의 별이 떨어졌기에. 모두들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샘의 목소리였다. 메리가 소리쳤다. "계속해 봐, 샘!" 그러자 샘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어릴 때 빌보씨께 배운 거지요. 제가 요정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글을 가르쳐 주신 것도 그분이고요. 그분은 모르는 개 없어요. 시도 쓰셨지요. 방금 부른 노래도 그분이 지으신 노래예요."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그가 직접 지은 것은 아니지. 그건 '길 갈라드의 몰락'이라는 고대어로 된 노래의 일부분인데 아마 그가 번역을 한 모양이지. 그런 줄은 몰랐어." "노래가 더 있었는데 모두 모르도르에 관한 것이라서 배우지를 못했어요. 노래만 불러도 온통 소름이 끼쳤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쪽으로 가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어요?"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모르도르로 간다고! 제발 거기는 안 갔으면 좋겠어요!" "그 이름은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말게!" 스트라이더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들이 도로의 남쪽 끝에 가까이 왔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그들은 10월의 맑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산의 북쪽 비탈로 들어가는 마치 다리처럼 생긴 청회색 들길을 보았다. 그들은 곧 해가 있는 동안에 정상에 오르기로 결정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숨는 것도 불가능했고 오로지 적이나 첩자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산 위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갠달프가 근처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아직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웨더톱 서쪽 비탈 밑에는 눈에 자 띄지 않는 분지가 하나 있었는데 맨 밑바닥은 주발 모양이었고 양 옆에는 풀밭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말을 세우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샘과 피핀이 지키게 하고 셋은 계속 올라갔다. 삼십 분쯤 산을 오른 후 스트라이더가 먼저 정상에 올랐고 프로도와 메리도 숨을 헉헉거리며 기진맥진한 채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 바로 밑의 비탈은 경사가 심한 암벽이었다. 정상에는 스트라이더가 말한 대로 틈새로 잡초가 무성한 허물어진 돌기둥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돌무덤이 있었다. 돌은 모두 불길에 그을린 듯 시커맸고 주변의 잔디밭도 뿌리까지 불에 탄 듯한 흔적이 역력했다. 불길이 산곡대기까지 휩쓴 듯 원둘레 안에 있는 풀밭은 모두 시커멓게 그을렸으며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폐허가 된 원둘레의 가장자리에 올라서서 그들은 사방을 멀리까지 둘러보았다. 땅은 대부분 나무도 없이 평범하고 민둥민둥했으나 남쪽으로 멀리 숲이 보였고 그 너머로 강이 있는지 물빛이 반짝였다. 그들의 발 밑으로 산 남쪽 기슭을 끼고 동부대로가 마치 리본처럼 꼬불꼬불 서쪽으로 오르막 내리막을 달려와 동쪽 어두운 산맥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그들은 안개산맥을 보았다. 가까운 산기슭은 엷은 갈색이었으나 그 뒤로 솟은 높은 산봉우리들은 잿빛이었고 다시 그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한 흰 산봉우리들이 구름 사이로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메리가 신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이런 곳일 줄이야! 정말 음산하고 기분나쁜 곳이군요! 물도 집도 또 갠달프의 흔적도 없으니. 하지만 그분이 여기 왔다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가버렸다 해도 탓할 수는 없겠는데요." 스트라이더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브리에서 우리보다 하루 이틀 늦게 출발했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셨을 텐데 이상하군. 급할 때는 몹시 빨리 달리는 분이신데!" 갑자기 그는 허리를 굽히고 돌무덤 꼭대기에 있는 돌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다른 것들보다 더 반반했고 불길에 그을리지 않은 듯 더 흰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그 돌을 들어서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최근에 누군가 만진 돌이군. 자넨 이 기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프로도는 납작한 돌 아래쪽에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밑줄이 세 개, 점이 하나, 그리고 다시 밑줄이 세 개군요." "왼쪽에 가는 가지 같은 것이 달린 것은 아마 룬 문자로 G일 걸세. 확실하지는 않지만 갠달프가 남긴 암호일지도 모르네. 긁힌 자국이 아직 선명한 걸 보면 최근에 새긴 것이 분명하거든. 하지만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기호일지도 몰라. 순찰자들도 룬 문자를 쓸 줄 알고 가끔 여기 오기도 하거든." 메리가 물었다. "만약 갠달프가 쓴 것이라면 무슨 뜻이 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G3가 되는 셈인데 갠달프가 10월 3일 여기 있었다는 말이 되네. 그러니까 사흘 전이지. 짐작컨대 그는 몹시 급하고 위험한 상태에 있어서 더 길고 자세하게 쓸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그럴 엄두도 못 냈던 것 같네.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조심해야하겠지."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든 간에 갠달프가 남긴 표시라면 정말 다행입니다. 우리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간에 그분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 해도 안심이 됩니다." "나는 그가 여기 왔었고 또 위험한 처지에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 여기 이 그을힌 자국을 보게. 우리가 사흘 전 밤중에 동쪽 하늘에서 보았던 불빛이 이제 생각나는군. 그가 산꼭대기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 다음은 알 수가 없어. 그가 이제 다시 여기 오진 않을 테니 우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벤델까지 갈 도리밖에 없네." "리벤델은 얼마나 멉니까?" 메리가 피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웨더톱에서 바라본 세상은 넓고 황량했다. "브리에서 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있는 그 황량한 여관에서 거기까지 몇 마일이나 될지는 나도 몰라. 어떤 사람들은 아주 멀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하지. 여하튼 이상한 길이야. 그래서 그 길이 멀든 가깝든 간에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빨리 길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지.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날씨가 좋고 달리 사고만 없다면 여기서부터 브뤼넨 여울까지 약 열이틀 거리로 알고 있어. 브뤼넨 여울은 바로 리벤델에서 흘러나오는 라우드워터 강과 동부대로가 만나는 지점일세. 우리는 동부대로를 거의 이용하지 못할 테니까 앞으로 적어도 이 주일은 더 가야 할 거야." 프로도가 소리를 질렀다. "이 주일이라고요? 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스트라이더가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들은 산꼭대기 남쪽 끝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프로도는 그 쓸쓸한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고독과 위험을 절감했다. 그는 운명이 다시 자신을 평화롭고 사랑스런 샤이어에 되돌려 놓아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는 서쪽으로 쭉 뻗은 동부대로를 따라 아득하게 보이지 않는 고향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두 개의 검은 점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또 다른 세 점이 자기들 쪽으로 기어오듯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스트라이더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보세요!" 스트라이더는 즉시 프로도를 끌어당기며 허물어진 돌기둥 뒤의 땅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메리도 함께 몸을 던졌다. 그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뭡니까?" 스트라이더가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위험할 것 같네." 그들은 다시 천천히 원둘레의 가장자리로 기어가서 들쭉날쭉하게 갈라진 두 개의 바위 틈새로 내려다보았다. 오전에는 날씨가 맑았으나 오후가 되면서 동쪽에서 몰려온 구름떼가 해를 가려 날씨가 흐려졌다. 메리도 검은 점을 보았으나 어떻게 생긴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산 밑에서 조금 떨어진 동부대로에 암흑의 기사들이 모여 있음이 분명했다. "틀림없어! 적일세!" 그들보다 시력이 더 좋은 스트라이더가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나서 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한편 샘과 페레그린도 한가하게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그 동안 그 작은 골짜기와 주변의 비탈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산비탈에서 깨끗한 샘물을 발견했고 그 근처에서 하루이틀 전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을 보았다. 골짜기 안에는 최근에 불을 피운 흔적도 있었고 야영을 하고 떠난 자취도 있었다. 산 쪽 가까운 골짜기 가장자리에는 떨어져 내린 바위도 몇 개 있었는데 샘은 그 뒤에서 솜씨좋게 쌓아 놓은 땔나무 다발을 찾아냈다. 샘은 피핀을 돌아보며 말했다. "갠달프가 여기 오셨는지도 모르겠어. 여기 이렇게 땔나무를 쌓아 놓은 걸 보면 그게 누구든지 간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지?" 스트라이더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심상치 않게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여기 남아서 직접 땅바닥을 살펴볼걸 그랬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발자국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샘물가로 뛰어갔다 와서 말했다. "걱정했던 대로야. 샘과 피핀이 부드러운 땅을 마구 밟아 버려서 발자국들이 서로 뒤엉켜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순찰자들이 여기 왔었던 것 같아. 바로 그들이 나무를 저 뒤에 숨겨 놓았네. 그런데 순찰자들보다 더 나중에 여기 온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 적어도 한 사람의 발자국은 더 있어. 하루나 이틀 전에 온 것 같은데, 무거운 구두발자국이야. 적어도 한 사람, 아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발자국이 몇 개 더 되는 것 같기도 해." 그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호비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외투를 입고 구두를 신은 기사들을 생가하고 있었다. 이미 기사들이 이 골짜기를 발견했다면 빨리 스트라이더와 함께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샘은 적이 벌써 동부대로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계곡을 둘어보았다. 그는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스트라이더에게 물었다. "빨리 여기를 뜨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스트라이더? 해도 기울어 가고 어쩐지 이 골짜기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군요." 스트라이더는 날씨와 시간을 가늠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이지. 방향을 곧 결정해야겠지. 샘, 나도 여기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길 떠난다 해도 해지기 전에는 이보다 나은 곳에 갈 수가 없어. 이 자리를 피하면 잠시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곧 적의 첩자들의 눈에 띄기 심상일세. 기껏해 봤자 여기서 북쪽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는데 거기나 여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야. 동부대로가 위험하긴 하지만 대로 남쪽의 숲 속으로 숨으려면 그 길을 건너는 수밖에 없네. 동부대로 북쪽은 모두 나무라고는 전혀 없는 평지뿐이야." 메리가 물었다. "기사들에게 곧 발각되지 않을까요?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들은 적어도 대낮에는 눈보다는 코로 냄새를 맡아서 우리를 찾아내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산 위에는 우리보고 엎드리라고 하고 이제는 길을 건너가다가 들킬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니 이상하군요." 스트라이더가 대답했다. "산 위에서는 내가 너무 경솔했어. 갠달프가 남겨 놓은 암호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세 명씩이나 올라갈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있을 필요도 없었는데 잘못했어. 암흑의 기사들은 직접 나타날 수도 있고 또 브리에서처럼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을 첩자로 이용할 수도 있네. 그들은 우리들과는 달리 밝은 곳에서는 사물을 보지 못하고 다만 그 형체를 머리 속에 그림자로만 간직할 수 있는데 그 그림자는 오로지 태양으로만 지울 수 있다고 하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의 피냄새를 맡고 그것을 증오한다네. 시각과 후각말고도 다른 감각이 더 있지. 그들이 우리 근처에 접근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상할 만큼 가슴이 섬뜩한 어떤 예감이 드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예민하게 우리들이 다가가는 것을 감지한다네. 게다가..." 그는 잠시 숨을 죽이고 겨우 들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반지가 그들은 끌어당기고 있지." 프로도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흥분하여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면 놈들에게서 벗어날 방도가 없단 말입니까? 움직이면 발각돼서 쫓기고, 그대로 있으면 놈들은 저절로 여기를 찾아온단 말이지요!" 스프라이더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말게. 아직 희망은 있어. 자넨 혼자가 아니야. 여기 이 땔나무들은 이용하세. 우리 지금 하늘을 가려 줄 지붕도 없고 적에게서 들키지 않을 엄폐물도 없는데 어쩌면 이 장작불이 그 두 가지 구실을 모두 해낼지도 모르지. 사우론은 불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자기한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그 기사들은 불을 아주 싫어하고 또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네. 황야에서는 불이 우리의 친구야." "그리고 소리 한마디 없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가 되겠군요." 샘이 빈정거렸다. 그들은 골짜기 중에서 가장 낮고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우고 식사를 했다. 저녁그림자가 사 속을 찾아들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시장했으나 함부로 양껏 먹을 수도 없었다. 앞으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새나 짐승들밖에 없는 말하자면 버림받은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찰자들이 그 산을 넘어다니기도 했으나 그 수도 적었고 오래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다른 방랑자들도 가끔 있었으나 대개는 경계의 대상들이었다. 안개산맥 북쪽 골짜기에서는 가끔 트롤들이 내려와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동부대로를 걷는 여행객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는 급한 볼일로 달려가는 난쟁이들이어서 무슨 도움을 바라고 말을 붙여 볼 형편도 되지 못했다. 프로도가 말했다. "식량이 모자랄까 걱정이군요. 지난 며칠 동안도 조심했고 오늘도 결코 잘 먹었다고는 할 수 없는데 벌써 계획했던 것보다 더 먹었으니 큰일이에요. 아직도 이 주일 이상은 더 버텨야 하는데."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들판이로 나가면 식량은 있네. 열매나 나무뿌리, 약초 들을 구할수 있겠지. 그리고 난 급하면 사냥꾼이 되는 재주도 있으니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말게. 하지만 그렇게 식량을 구하는 일은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가급적 허리띠를 더 조이고 엘론드의 저택에서 맛볼 진수성찬만 생각하고 참도록 하게." 어둠이 짙어지면서 날씨도 차츰 쌀쌀해졌다. 골짜기 바깥으로는 어둠 속으로 재빨리 빨려들어가는 회색 대지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하늘이 다시 맑아지면서 별들이 하나둘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프로도와 일행은 자신들이 가진 담요와 옷가지를 모두 꺼내 둘러쓰고 모닥불가에 둘러앉았다. 그러나 스트라이더는 외투 하나만 뒤집어쓰고 따로 떨어져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파이프를 빨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스트라이더는 호비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옛날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제1시대의 요정과 인간들의 신나는 무용담을 끝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그의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모두 들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요정의 이야기를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메리가 물었다. "길 갈라드 이야길 좀 해주세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옛날 노래를 좀 더 알고 있나요?" "물론이지. 프로도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는 문제니까." 메리와 피핀은 불빛을 응시하고 있는 프로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로도는 나직이 말했다. "난 갠달프에게 들은 것밖에는 몰라. 길 갈라드는 중간계 최후의 요정왕이었지. 길 갈라드란 그들 요정의 언어로는 별빛이란 뜻이야. 요정의 친구인 엘렌딜과 함께 그는..." 그때 스트라이더가 갑자기 프로도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그만! 지금은 적의 하수인들이 가까이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때가 좋지 않아. 엘론드의 저택에 무사히 도착하면 그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이야기해 줌세." 샘이 말했다. "그럼, 무슨 다른 이야기라도 해주세요. 요정들이 몰락하기 전의 이야기라든가, 여하간 저는 요정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사방에서 어둠이 점점 더 조여드는 것 같아요." "티누비엘의 이야기를 해주지. 그것도 짧게. 왜냐면 이 이야기는 끝이 어딘지도 모를 만큼 긴 이야기인 데다 옛날 그대로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엘론드말고는 아무도 없어. 중간계의 이야기가 모두 그렇듯이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야. 그리고 자네들도 힘이 더 솟아날 걸세."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읊조리는 노래였다. 나뭇잎은 넓고, 풀잎은 푸르며 헴록꽃잎은 크고 아름답고, 숲 속 빈터에는 빛이 비쳤어, 어둠 속에서 아물거리는 별빛이. 티누비엘은 거기서 춤을 추고 있었지, 보이지 않는 피리소리에 맞춰, 그녀의 머리에도, 그녀의 옷자락에도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어. 추운 산맥에서 그곳으로 베렌이 왔지, 길을 잃고 숲을 방황하고 있었던. 요정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서 그는 슬퍼하며 홀로 걷고 있었어. 헴록꽃잎 사이로 그는 보았지, 금으로 만든 눈부신 꽃들이 그녀의 망토와 소매에 달려 있는 것을. 그녀의 머리채가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것을. 산 속을 헤매 다닐 수밖에 없던 그의 지친 두 다리를 마법이 고쳐 주었지. 그는 날 듯이 힘차게 달려가서 반짝이는 달빛을 붙잡았어. 요정나라의 복잡한 숲 속으로 그녀는 춤추듯이 가볍게 달려갔지, 적막한 숲 속에서 귀기울이며 외로이 헤매고 있는 그를 남겨 두고. 그는 거기서 종종 들었지, 보리수 나뭇잎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발소리를. 비밀의 동굴 속에 올려퍼지는 땅 속에서부터 올려 나오는 음악소리를. 이제 헴록꽃잎은 시들었고, 한숨 쉬듯 하나씩 하나씩 너도 밤나무 잎도 속삭이듯 떨어졌어, 소리없이 떨고 있는 겨울의 숲 속으로. 그는 언제나 그녀를 찾아 헤맸지. 달빛과 별빛을 벗삼아 차가운 하늘가를 하염없이 떠돌며 아무도 밟지 않은 낙엽을 밝으며 방황했어. 달빛 속에 빛나는 그녀의 망토는 산꼭대기처럼 높고 멀었지. 흩어지는 은빛 안개 속에서 그녀는 춤을 추고 있었어. 겨울이 지나고 그녀는 다시 왔지, 솟구치는 종달새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살며시 녹아드는 얼음조각처럼 그녀의 노래는 대지에 갑작스런 봄을 몰고 왔어. 그는 요정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지, 그녀의 발 밑에서. 다시 힘을 얻은 그는 평화로운 풀밭 위에서 그녀와 함께 춤추고 노래부르고 싶었어. 다시 그녀가 달아났으나 그의 걸음도 빨랐지. 티누비엘! 티누비엘! 그가 요정들의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귀기울이며 돌아섰어. 그녀가 잠깐 멈춰서는 동안 그의 음성이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지. 베렌이 다가왔고 그의 두 팔에 반짝이며 안긴 티누비엘에게 가혹한 운명이 시작됐어. 그녀의 머리채 그림자 속으로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다가 베렌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 그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것을 보았지. 아름다운 요정 티누비엘 영원히 죽지 않는 요정소녀는 반짝이는 은빛 두 팔로 검은 머리채로 그를 감쌌어. 그들을 떼어 놓은 운명의 길은 멀었지. 차가운 회색 바위산맥을 넘어 무쇠로 된 방과 어둠의 문을 지나 아침이 없는 밤의 숲 속으로 이별의 바다가 그들을 가로막았으나 마침내 그들은 다시 만났지. 그리고 몬 옛날 그들은 즐거이 노래부리며 숲 속에서 함께 숨을 거뒀어. 스트라이더는 함숨을 쉬고 잠시 쉬었다 말했다. "이건 요정들 언어로는 안데나스라는 가락으로 된 노래인데 우리가 쓰는 말로 옮기기는 쉽지 않아. 옮긴다고 옮겨 봤지만 어설프게 흉내낸 것밖에는 안 되는군. 이 노래는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과 루디엔 티누비엘의 만남을 소재로 한 것인데 베렌은 인간이고 루디엔은 먼 옛날 중간계 요정왕들 주의 하나인 딩골의 딸이었지. 그녀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어. 북구의 안개 위로 반짝이는 별들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위엔 언제나 환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네. 원래 모르도르 사우론은 일개 졸개에 불과한 악당으로 옛날 북부의 앙반드에 살고 있었는데 중간계로 되돌아온 서역의 요정들이 그가 훔쳐간 실마릴(제1시대에 놀도르족 피노르에 의해 만들어진 세 개의 위대한 보석, 이로 인해 중간계에 죄악이 나타나고 전쟁이 시작된다)을 되찾기 위해 그와 전쟁을 시작했지. 인간의 조상들도 그 전쟁에 끼어들었지만 결국 적에게 패배를 당해 바라히르는 죽게 되었네. 그의 아들 베렌은 천신만고 끝에 공포의 산맥을 넘어 넬도레스 숲 속에 있는 딩골의 비밀왕국에 들어가게 된 걸세. 거기서 그는 루디엔이 마법의 강이라는 에스갈두인 강변의 숲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게 된 거야. 그가 그녀에게 붙여 준 티누비엘이란 이름은 우리말로 나이팅게일이란 뜻이야. 그 후로 그들에게 슬픈 일이 많이 닥쳐서 그들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는데 결국은 티누비엘이 사우론의 토굴 감옥에서 베렌을 구출해 냈지.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그 악당을 왕좌에서 쫓아냈고 베렌은 그의 강철왕관에 달린 세 개의 실마릴 중에서 하나를 뺏어서 그녀의 아버지 딩골에게 신부의 몸값으로 주었다네. 하지만 베렌은 앙반드의 성문을 열고 나온 늑대에게 물려 결국 티누비엘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네. 그가 죽자 요정인 그녀도 남편을 뒤따르기 위해 인간들과 같은 죽음을 선택해 버렸어. 전해 오는 노래에 의하면 그들은 이별의 바다 건너에서 다시 만나 잠깐 동안 푸른 숲 속을 살아서 거닐다가 오래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고 하네. 그리하여 요정들 가운데 유일하게 루디엔 티누비엘만이 정말로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갔지.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을 잃어버리게 된 걸세. 하지만 그녀로 인해서 요정왕 혈통이 인간들에게도 내려오게 된 거야. 루디엔을 조상으로 모시는 종족들이 아직 있지 않은가! 그들은 결코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들 하네. 리벤델의 엘론드가 그 혈통이지. 베렌과 루디엔에게서 디오르, 즉 딩골의 후손이 태어났고 디오르에게서 백색의 엘윙이 태어났는데 그녀는 바로 이마에 실마릴을 붙이고 자신의 배를 몰아 이 세상의 안개를 벗어나 하늘나라의 바다로 들어간 이렌딜의 부인이지. 그리고 그 이렌딜에게서 뉴메노르의 왕들, 즉 서역인들이 태어나게 된 거야." 스트라이더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들은 모닥불 빛에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열띤 표정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이 광채를 띠며 목소리에도 무게와 깊이가 실리는 듯했다. 그의 머리 위를 별이 빛나는 검은 하늘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등뒤로 웨더톱 산꼭대기에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떠오르는 달이 그들을 가려 주던 산 위로 서서히 솟아올랐고 산꼭대기의 별빛이 희미해졌다. 이야기가 끝났다. 호비트들은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켰다. 메리가 말했다. "저것 봐! 달이 떠오르는데. 밤이 꽤 깊어진 모양이야." 모두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달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그 희미한 달빛 속에서 조그마한 검은 물체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희미한 달빛 때문에 더욱 뚜렷해 보이는 큰 기둥이거나 튀어나온 바위인지도 몰랐다. 샘과 메리는 일어나서 어둠 속을 걸어 보았다. 프로도와 피핀은 아무 소리 없이 가만히 않아 있었다. 스트라이더마저 입을 다물어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으나 프로도는 섬뜩한 냉기가 갑자기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닥불가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 순가 셈이 골짜기 끝에서 허둥지둥 달려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마구 겁이 나는데요. 죽으면 죽었지 골짜기 바깥으로는 못 나가겠어요. 누군가 비탈을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프로도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뭐가 보여?" "아뇨. 못 봤습니다만 겁이 나서 살펴볼 수가 없었어요." 메리가 말했다. "뭔가 있는 것 같았어요. 산그림자 너머 달빛이 비치는 평지 서쪽으로 멀리 두세 개의 검은 형체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쪽으로 오는 것 같던데요." 스트라이더가 명령을 내렸다. "모닥불에 등을 대고 바깥쪽으로 향해 앉게! 양손 가까이에 긴 장작을 준비해 두도록." 그들은 모닥불을 등지고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숨막힐 듯한 순간을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선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프로도는 불안한 침묵을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떨었다. 그는 크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스트라이더가 속삭였다. "쉿!" 동시에 피핀이 물었다. "저게 뭡니까?" 골짜기 어귀의 산에서 떨어진 쪽에 하나인지 몇인지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림자는 더 늘어나는 듯했고 잠시 후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서너 개의 키 큰 검은 그림자들이 비탈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기분나쁜 숨소리같이 쉬쉬 하는 흐릿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온 몸을 엄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들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피핀과 메리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샘은 프로도 옆에 바짝 붙었다. 무섭기로 치자면 프로도도 동료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한겨울 추위라도 만난 듯이 덜덜 떨고 있었으나 반지를 껴야겠다는 순간적인 유혹에 정신이 팔려 공포를 잊고 있었다. 반지를 끼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해서 그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배로우의 사건이나 갠달프의 충고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충고와 경고를 무시하도록 유혹하는 이상한 힘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탈출을 해야겠다거나 아니면 좋거나 나쁜 무슨 행동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냥 반지를 한번 껴보아야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샘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금 프로도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프로도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그는 반지를 꿴 줄을 꺼내서 왼손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둡고 침침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갑자기 그림자의 형체들이 무시무시하게 뚜렷해졌다. 그는 그들의 검은 옷 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의 키가 큰 괴한들이었는데 둘은 골짜기 입구에 서 있고 셋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하얀 얼굴에는 날카롭고 냉혹한 눈동자가 불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고 망토 속으로는 기다란 회색 옷이 보였다. 그리고 은빛 투구가 그들의 회색 머리카락을 덮고 있었고 말라빠진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삼키기라도 할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횃불처럼 붉은빛이 칼날에 번득였다. 두 그림자가 걸음을 멈췄다. 다른 하나는 옆의 둘보다 키가 더 크고 머리도 길고 번쩍거렸으며 투구에는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장검을, 다른 손에는 단도를 들고 있었는데 단도를 든 손에 희미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뛰어오며 프로도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 순간 프로도는 땅바닥에 몸을 날리며 자기도 모르게 '오 엘베레스! 길도니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그는 적의 발을 칼로 찔렀다. 어둠 속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고 그는 왼쪽 어깨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독화살이 뚫고 들어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정신을 잃은 순간 그는 희뿌연 안개 속으로 스트라이더가 양손에 불붙은 장작을 들고 어둠 속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그는 칼을 던지고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오른손 안에 꽉 움켜쥐었다. 제12장 브뤼넨 여울로의 탈출 프로도는 정신이 다시 들 때까지 필사적으로 반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새로 장작을 쌓아 올려 너울너울 타오르는 모닥불가에 누워 있었다. 세 동료는 걱정스럽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로도는 눈을 뜨자마자 느닷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그 악령의 왕은 어떻게 됐어?" 그들은 그의 질문을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그의 의식이 회복된 것이 너무 기뻐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프로도는 샘에게서 흐릿한 검은 형체가 자기들 쪽으로 다가왔었다는 말을 들었다. 샘은 프로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했다고 했다. 그런데 검은 그림자가 옆을 지나가자 자기도 쓰러져 버렸다고 했다. 그는 프로도의 비명을 들었으나 그 소리는 먼 곳에서 아니면 땅 속에서 기어나온 듯한 괴성으로 아득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곧 칼을 배 밑에 깐 채 죽은 듯이 풀밭 위에 엎어져 있는 프로도를 발견했다. 스트라이더는 모닥불가에 그를 눕히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샘은 다시 스트라이더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깨어난 프로도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스트라이더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호비트들은 깜짝 놀랐고 샘은 칼을 빼서 프로도의 앞을 막아섰으나 스트라이더는 태연히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부드럽게 말했다. "난 암흑의 기사가 아닐세, 샘. 그리고 그들과 한패도 아니야. 놈들이 움직인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없더군. 왜 그들이 다시 공격하지 않고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어. 여하간 이 근방 어디에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그는 프로도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머리 속이 복잡하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피핀과 메리에게 작은 주전자에 가능한 한 물을 많이 끓여 그 물로 프로도의 상처를 씻어 주라고 지시를 했다. "불을 잘 피워서 프로도를 따뜻하게 해주어야 하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저쪽으로 걸어가면서 샘을 불렀다.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적은 모두 다섯뿐이었어. 왜 모두 다 나타나지 않았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 일단은 물러선 모양인데 필경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걸세. 우리가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면 내일밤 다시 오겠지. 어쩌면 놈들은 목표가 일단 달성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프로도가 치명상을 입었으니까 반지가 멀리 달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곧 알게 될 거야." 샘이 갑자기 눈물을 쏟자 스트라이더는 그를 달랬다. "낙심 말게! 자네는 나를 믿어야 해. 갠달프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프로도는 내가 생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어. 그는 죽지 않아. 적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상처의 독성을 견뎌낼 거야. 나도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도록 애쓸 테니까 자네는 내가 없는 동안 그를 잘 지켜야 하네!" 그는 이렇게 말하곤 급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상처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어깨의 얼음장 같은 냉기는 팔과 옆구리에까지 내려왔지만 프로도는 하염없이 졸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지켜보면서 상처를 씻어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더디기만 하던 밤이 서서히 지나가고 동쪽 하늘에서 희뿌옇게 박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스트라이더는 골짜기에 희미한 아침 빛이 스며들 때쯤 돌아왔다.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때까지 어둠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던 검은 외투를 땅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아랫단에서 삼십 센티쯤 위쪽에 칼자국이 나 있었다. "이것 보게! 이것이 프로도의 칼자국이야. 적의 상처는 겨우 이것뿐이야. 그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네. 오히려 그 무시무시한 마왕을 찌르는 칼이 부러질 뿐이야.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엘베레스란 이름이었지." 그는 다시 몸을 숙여 가늘고 긴 장검을 들어올렸다. "프로도에게는 이 칼이 더 치명적이었어." 칼날에는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스트라이더가 칼을 들어올렸을 때 그들은 칼날 끝부분에 흠이 나 있고 맨 끝이 부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칼을 희미한 아침의 여명에 비추자 칼날이 얼음 녹듯이 녹아서 마치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보리는 것이었다. 스트라이더의 손에는 칼자루밖에 없었다. "아아! 이 저주받은 칼이 바로 프로도에게 상처를 입힌 거야. 그 상처의 치료는 아무나 할 수가 없지만 난 최선을 다해 보겠어!" 그는 땅바닥에 앉아서 칼자루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이상한 말로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 내려놓고 프로도를 향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나직이 했다. 그리고 혁대를 찬 주머니에서 길쭉한 풀잎을 수북이 꺼냈다. "이 잎을 구하러 사방을 헤맸지. 야산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풀이야. 다행히 동부대로 남쪽 숲 속에서 풀잎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 그가 손가락으로 잎을 부수자 향긋하고 톡 쏘는 냄새가 났다. "이 약초는 서역인들이 중간계로 들여온 것인데 여간 귀한 것이 아니야. 이름은 아델라스라고 하는데 워낙 희귀한 것이라 옛날에 서역인들이 살던 곳이나 야영하던 곳에서만 자라지. 북부에서는 황야의 방랑자들 중에서 겨우 일부만 알고 있을 뿐 아는 이들이 거의 없지. 약효가 대단한 풀인데 프로도의 상처엔 얼마나 효험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나뭇잎을 끓는 물에 집어넣고 그 물로 프로도의 어깨를 씻어 주었다. 수증기에서 상큼한 향기가 났고 다치지 않은 호비트들도 마음이 안정되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약초는 상처에도 꽤 효험이 있어서 프로도는 통증은 여전했으나 옆구리의 차가운 기운은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팔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아서 팔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하면서 의지력의 박약을 스스로 질책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반지를 낀 것이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적의 강압적인 요구에 굴복한 것임을 깨달았다. 프로도는 이러다 일생 불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이 상태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는 너무 힘이 없어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의 동료들 역시 그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웨더톱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내 생각에 적은 며칠 동안 이곳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갠달프가 여기 왔었다 해도 그도 떠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고. 여하튼 어젯밤의 공격이 있었으니까 일단 해가 진 뒤에는 여기는 위험해. 어디로 가든 간에 여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날이 훤히 밝자마자 그들은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프로도가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랑말의 짐을 네 명이 나누어 지고 프로도가 말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 가련한 짐승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살도 더 찌고 몸도 꽤 튼튼해졌다. 그리고 새 주인들, 특히 샘을 잘 따르기 시작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황야에서 그 어려운 길을 가는 데도 전보다 몸이 좋아진 것을 보면 빌 퍼니네 집에서 얼마나 학대를 받았는지 알 법도 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은 바로 동부대로를 횡단한다는 의미였지만 숲지대로 가장 빨리 가는 데는 그 길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연료도 필요했다. 스트라이더의 말대로 프로도를 항상, 특히 밤중에 따뜻하게 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불이 그들 모두에게 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웨더톱을 지나서부터는 동부대로도 북쪽으로 휘어져 돌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숲 속으로 빠지는 것이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 스트라이더의 계획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산의 서남향 비탈을 끼고 돌아서 잠시 후 동부대로 길가로 나왔다. 아직 기사들이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멀리서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벌벌 떨면서 앞쪽의 작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눈앞, 남쪽으론 길도 없는 황량한 비탈이 펼쳐졌다. 발육부진으로 이그러진 나무들과 관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간간이 그 사이로 맨땅이 희끗희끗 드러나기도 했다. 풀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나 거친 회색 잡초는 간혹 눈에 띄었고 빛바랜 단풍잎들이 떨어졌다. 주변 풍경은 하나같이 우울했고 그들의 발걸음도 느리고 지루했다. 그들은 걷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프로도는 동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타박타박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스트라이더조차 몹시 지쳐 보였다. 첫날 행군이 끝나기 전부터 상처는 다시 쑤시기 시작했으나 프로도는 아무 내색 않고 견뎠다. 나흘이 지났다. 그 동안 지형과 풍경은 아무 변화가 없었고 다만 웨더톱이 등뒤로 서서히 멀리 사라지고 눈앞의 산맥이 어렴풋하게나마 좀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멀리서 들었던 그 고함소리말고는 적이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알아차리고 뒤쫓아오는 낌새는 아직 없었다. 어둠이 두려운 밤이었다. 그들은 밤에는 둘씩 짝을 지어 보초를 섰으나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달빛 아래로 언제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골짜기에서는 공격이 있기 바로 직전에 느꼈던 섬뜩한 두려움이나 냉기를 그 후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기사들이 그들의 흔적을 놓쳐 버렸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어쩌면 좁은 골짜기에서 잠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닷새째 해도 저물어 갈 즈음해서 그들은 여태껏 내려왔던 넓고 얕은 골짜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트라이더는 다시 방향을 북동쪽으로 바꿨다. 그들은 엿새째 되는 날 길고 완만한 경사지의 정상에 올라서서 멀리 숲이 우거진 산들을 보았다. 그들의 발 밑으로는 엷은 햇빛 속에 회색 강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더 멀리 또 하나의 강이 안개로 반쯤 가려진 바위골짜기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당분간은 다시 동부대로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군. 우리는 지금 호르웰 강에 도착했네. 요정들은 미데이델 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이 강은 리벤델 북쪽의 트롤들이 살고 있는 고원지대, 즉 에튼무어에서 시작해서 남쪽에 가서는 라우드워터 강과 합쳐지네. 거기서부터는 그레이플러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다로 들어갈 때쯤에는 상당히 큰 강이 되지. 에튼무어의 수원지말고 이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은 바로 동부대로가 지나가는 마지막다리밖에 없어." 메리가 물었다. "멀리 보이는 저 강은 무슨 강이에요?" "리벤델의 브뤼넨이라고도 하는 라우드워터 강이야. 마지막다리를 건너 동부대로를 따라 수마일을 가면 브뤼넨 여울이 나오지. 하지만 그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아직 생각도 못했어. 당장 눈앞에 있는 강부터 생각하세! 마지막다리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이야." 그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동부대로 길가로 내려왔다. 샘과 스트라이더가 먼저 길에 들어섰다. 길가엔 그들말고는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산그림자가 진 이쪽에서는 비가 조금 내린 듯했다. 스트라이더는 이틀 전에 비가 온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발자국은 모두 씻겨 버렸고 그 이후의 발자국은 없었다. 그들은 거의 뛰다시피 속력을 내어 걸었다. 일이 마일쯤 지나서 가파른 비탈길 멘 밑에 있는 마지막다리를 보았다. 암흑의 기사들이 거기서 기다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스트라이더는 그들을 대로변의 작은 숲에 숨어 있도록 하고 혼자서 정탐을 나섰다. 그는 금세 급히 되돌아왔다. "적은 보이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주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지." 그는 손을 내밀었다. 연록색 보석이었다. "다리 한가운데 진흙 속에 박혀 있는 것을 주웠지. 요정의 돌이라고도 하는 녹주석이야. 일부러 거기 놓아 둔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떨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길조로 여겨야지. 다리를 건너도 좋다는 허가증으로 생각하세.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확실한 허가증이 없으면 동부대로를 다시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그들은 곧 출발했다. 세 개의 커다란 아치형 교각을 싸고 돌아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일 마일을 더 가서 그들은 대로 왼쪽에서 가파른 비탈길로 들어가는 좁은 골짜기를 발견했다. 스트라이더는 거기서 방향을 바꾸었고 그들은 곧 야산 기슭을 돌아 거무튀튀한 나무들이 우거진 어두운 땅으로 접어들었다. 호비트들은 그 따분한 야산과 위험한 대로를 벗어나게 되어 기뻤지만 새로 들어가는 곳도 위험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갈수록 주변의 지대는 점점 높아졌다. 산등성이와 고지대에는 폐허가 된 옛 성벽과 탑의 잔해들이 곳곳에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말을 타고 있던 프로도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빌보가 들려 준 여행기를 회상하면서 그가 최초로 큰 모험을 했다던 트롤의 숲 근처, 동부대로 북쪽 산 위에 위험한 탑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프로도는 바로 여기가 그곳이 아닐까 짐작하면서 우연하게도 빌보와 자신이 같은 지점을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트라이더에게 물었다. "이곳엔 누가 삽니까? 이 탑은 모두 누가 세웠지요? 여기가 트롤의 땅입니까?" "아닐세. 트롤은 집을 짓지 않지. 이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오래 전에 인간들이 여기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네.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앙마르의 마수에 걸려들어서 악의 무리가 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결국 북왕국이 멸망하던 전쟁에서 전멸하고 말았지. 이젠 그 이야기도 먼 옛날 일이 되어서 아직 이 땅에 어둠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거야." 페레그린이 물었다. "이 땅은 비어 있고 기억하는 이들도 없는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새나 짐승들한테서 들었을 리는 없을 텐데요." "엘렌딜의 후예들은 과거의 일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아. 리벤델에 가면 내가 말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걸세." 프로도가 물었다. "리벨델은 자주 가보셨습니까?" "한때 거기 살았었지. 요즘도 일 있으면 들르고. 내 마음의 고향은 거기야. 하지만 엘론드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것이 나의 운명은 아니네." 나무들이 다시 빽빽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버리고 온 동부대로는 브뤼넨 강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젠 모두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기다란 골짜기로 들어갔다. 폭이 좁고 깊이가 깊은 어둡고 고요한 골짜기였다. 꼬불꼬불 늙은 뿌리가 달린 나무들이 가파른 벼랑 밖으로 몸을 내밀고 위쪽 가지는 소나무 숲을 향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몹시 피곤했다. 길이 없는 숲 속에서 떨어진 나뭇가지와 굴러온 바윗돌을 피해가며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속도도 느렸다. 그들은 프로도를 위해 가능한 한 오르막길은 피했다. 그리고 사실 좁은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데는 오르막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걸었을 때 날씨가 대단히 흐려졌다. 서쪽에서부터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더니 먼 바다에서 몰고 온 빗방울을 어두운 산꼭대기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서 그들은 옷이 흠뻑 젖어 버렸고 불을 피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야영은 더욱 침울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정면의 산은 더 높고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방향은 바꾸어 북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이더의 표정은 점점 더 불안해 보였다. 웨더톱을 떠난 지 벌써 열흘이 다 되었고 양식은 점점 줄어들었다. 애꿎은 비는 계속 내렸다. 그날 밤 그들은 등뒤로 암벽이 둘러쳐진 바위턱에서 야영을 했다. 얕은 동굴이라기보다는 그저 절벽 중간이 움푹 파인 곳이었다. 프로도는 불안했다. 추위와 습기로 인해서 상처는 전보다 더 쓰렸고 냉기와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몸서리를 치면서 잠을 설친 채 마치 도둑의 발소리처럼 다가오는 밤의 소리들을 공포에 떨며 들어야 했다. 바위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물방울 듣는 소리, 툭 하고 떨어지는 난데없는 돌멩이소리가 그를 섬칫하게 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다가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으면 스트라이더가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어둠 속을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시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여전히 꿈자리는 사나웠다. 그는 꿈속에서 샤이어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으나 그곳은 안개 속에서처럼 희미하게만 보였고 암벽 너머로 그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그림자만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다. 구름은 여전히 짙게 내리깔려 있었으나 그 틈새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바람의 방향이 다시 바뀌었다. 그들은 출발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차고 맛없는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스트라이더는 그들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절벽의 은신처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하고는 혼자 밖으로 나갔다. 그는 가능하다면 위로 올라가서 지형을 한번 둘러볼 심산이었다. 그가 돌아왔으나 좋은 소식은 없었다. "북쪽으로 너무 왔네. 남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겠어. 이대로 계속 가면 리벤델에서 휠씬 북쪽에 있는 에튼데일에 이르게 되지. 거기는 트롤의 땅이고 나도 잘 몰라. 물론 거기서 남쪽으로 리벤델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길을 모르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식량도 모자랄 걸세.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브뤼넨 여울로 가는 길을 찾아야겠어." 그날은 하루종인 암벽을 기어올랐다. 그들은 두 언덕 사이의 통로에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동남쪽 방향으로 들어가는 골짜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날이 다 저물어갈 때쯤 길은 다시 높은 산등성이에 가로막혀 버렸다. 어두컴컴한 산등성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이빠진 톱니처럼 들쑥날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들은 올라가든지 되돌아가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도는 곧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들은 등에 짐을 진 채로 과연 말을 끌고 올라갈 수 있을지, 그리고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가까스로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고 날은 벌써 어둑어둑 해져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산꼭대기 사이에 좁게 파인 곳으로 올라가서 다시 급경사 길을 약간 내려갔다. 프로도는 탈진한 상태로 몸을 덜덜 떨며 땅바닥에 누웠다. 왼쪽 팔은 감각이 없었고 어깨와 옆구리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발톱으로 후벼파는 듯 아팠다. 주위의 나무와 바위들은 더욱 어두컴컴해 보였다. 메리가 스트라이더에게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갈 수 없겠어요. 프로도에겐 너무 무리였어요. 탈이 더 크게 나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어떻하죠? 만약 우리가 리벤델에 갈 수 있다면 거기서는 치료할 수 있을까요?" "그럴 걸세. 산 속에선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도 바로 그 상처 때문이야. 여하간 오늘밤은 더 갈 수 없다는 데 동의하네." 샘이 애타는 눈빛으로 스트라이더를 바라보며 소근소근 물었다. "프로도씨의 상처는 도대체 어느 정도예요? 상처도 작고 거의 다 아물지 않았어요? 어깨에 난 차가운 흰 상처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프로도는 적의 무기에 당했어. 거기엔 내 힘으로도 제거해 낼 수 없는 독이 들어 있는 거야. 하지만 포기하진 말게, 샘!" 높은 산마루에서 밤을 지내기엔 추웠다. 그들은 옹이가 불거져 울퉁불퉁한 노송뿌리 근처에 관솔불을 피웠다. 소나무 밑에 움푹 파인 구덩이는 한때 돌을 캐내던 곳 같기도 했다. 그들은 불가에 오종종하니 모여 앉았다. 밤바람이 거칠게 몰아왔다. 노송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우쭐우쭐 춤을 추면서 잉잉거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프로도는 혼몽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둠의 날개들이 머리 위를 빙빙 돌아다니는 환상을 보았다. 추적자들은 산골짜기 곳곳에서 날개를 타고 그를 쫓아왔다. 새벽이 맑고 상쾌하게 밝아왔다. 비 갠 뒤의 공기는 더 깨끗했고 하늘빛도 더 산뜻한 쪽빛이었다. 그들은 날이 밝자 좀 힘이 나기는 했지만 어서 해가 떠올라 차갑게 굳은 몸을 따뜻이 녹여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날이 더 맑아오자 스트라이더는 메리를 데리고 동쪽 방면의 지형을 살피러 높은 꼭대기로 올라갔다. 해가 떠올라 사방을 환히 비추었을 때 그들은 다소 고무적인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들은 지금 비교적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계속 이렇게 나아가면 산등성이 저 아래 왼쪽으로 안개산맥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트라이더는 멀리 전방에서 라우드워터 강을 다시 보았다고 하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브뤼넨 여울로 향하는 동부대로가 강에서 멀지 않으며 그들 가까이 어디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동부대로로 다시 나가세. 산 속에선 길을 찾을 수 없어. 무슨 위험이 있든 간에 여울로 가는 데는 동부대로가 제일 낫겠어." 그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남쪽 산등성이를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쪽 비탈길은 경사가 훨씬 완만해서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내려갈 수 있었고 프로도는 곧 다시 말에 올랐다. 빌 퍼니의 늙은 조랑말은 예기치도 않게 길을 찾는 데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등에 태운 프로도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일행은 다시 힘이 솟았다. 프로도도 아침햇살을 받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이따금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 듯해서 그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곤 했다. 앞장서서 걷던 피핀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 길이 있어요!" 모두들 그에게 급히 달려가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저 아래 숲 속에서부터 꼬불꼬불 올라와서 뒤쪽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간혹 나무가 무상하거나 바위가 굴러떨어져 막힌 곳이 있기는 했으나 한때는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던 길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팔다리가 건장하고 힘센 사람들이 길을 닦은 듯 여기저기 고목이 쓰러져 있었고 큰 바위가 갈라지거나 쪼개진 곳도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에 한참 동안 그 길을 따라갔다. 그러나 길이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가면서 좀더 넓어지고 평평해지자 그들은 불안해져서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전나무숲을 나오자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났고 길은 산중턱의 암벽을 급히 왼쪽으로 돌아 내려갔다. 모퉁이에 다다라서 주위를 둘러보자 길은 휘늘어진 나무들로 뒤덮인 낮은 절벽 바로 밑의 좁고 평평한 지대로 이어졌다. 암벽에는 돌쩌귀에 달린 문 하나가 삐죽하니 열려 있었다. 그들은 문 앞에 멈춰섰다. 안쪽에는 동굴이나 무슨 석실이 있는 듯했으나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트라이더와 샘 그리고 메리가 온 힘을 다해 문을 활짝 열어 젖혔고 스트라이더와 메리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바닥에는 오래된 뼈들이 널려 있었고 입구 가까이에는 커다란 빈 단지와 깨진 그릇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핀이 말했다. "정말 그런 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어쩐지 트롤의 굴인 것만 같은데요. 어서 나오세요. 여길 떠나는 것이 낫겠어요. 그러고보니 이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겠어요. 빨리 도망가죠!" 스트라이더가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그럴 필요가 없겠어. 이건 트롤의 굴이 확실하지만 쓰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조심해서 내려가도록 해야겠지." 길은 그 문을 오른쪽 평평한 공터를 지나 우거진 산비탈로 이어졌다. 피핀은 자신이 겁먹고 있음을 스트라이더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메리와 함께 저만큼 앞장서서 나아갔다. 샘과 스트라이더는 프로도의 조랑말 양쪽에 나란히 걸어갔다. 길은 이제 너댓 명의 호비트가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피핀이 달려왔고 메리도 뒤따라왔다. 둘 다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피핀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트롤이 있어요! 저 아래 멀지 않은 숲 속 빈터에요. 나무 사이로 보았는데 굉장히 커요." "가서 보세!" 스트라이더는 막대기 하나를 쥐고 말했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샘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위로 쭉쭉 뻗은 나뭇가지들이 가려 주기는 했지만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서 숲 속의 빈터를 환하게 비췄다. 그들은 빈터에서 멀찍이 떨어진 나무들 밑동 사이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내다보았다. 커다란 트롤이 셋이나 있었다. 하나는 웅크리고 있었고 둘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스트라이더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행을 안심시키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어나라, 늙은 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막대기로 웅크린 트롤을 툭 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비트들은 탄성을 올렸고 프로도도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집안의 가족사를 잊어버리고 있었군! 이것들은 분명히 갠달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열세 난쟁이와 한 명의 호비트를 요리해 먹는 방법을 놓고 싸우던 그 트롤들이 틀림없어." 피핀이 말했다. "우리가 그곳을 지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었는데." 빌보와 프로도에게 종종 그 일에 관해 들었기 때문에 그도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이야기를 반쯤밖에 믿지 않았었다. 심지어 지금도 혹시 어떤 마술의 힘으로 그들이 다시 살아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며 바위가 된 트롤들을 의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프로도 자네가 자네 집안에 관계된 일만 잊어버린 게 아니라 모두들 트롤에 관한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있군 그래.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환한 대낮인데도 자네들은 숲 속에 트롤이 숨어 있다고 나를 놀렸어! 저 괴물거인 중 하나는 등뒤에 새둥지를 매달고 있잖은가? 저게 정말 살아 있는 트롤이라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장식물이겠는가 말이야." 그들은 한바탕 웃어 젖혔다. 프로도도 힘이 다시 솟았다. 빌보의 첫 여행을 돌이켜보면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빛도 기분좋게 느껴졌고 눈앞을 가라던 안개도 조금 걷히는 듯했다. 그들은 빈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트롤들의 거대한 다리 그림자 바로 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나서 메리가 말했다. "날씨도 좋은데 누가 노래 좀 불러 보죠! 며칠 동안 노래도 못 듣고 이야기다운 이야기도 전혀 들은 기억이 없는데." "웨더톱에서가 마지막이었지." 프로도가 말했다. 모두 그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이젠 내 걱정은 말게! 상태가 훨씬 좋아진 듯한데 노래는 아는 것이 없으니 어떡한다? 샘이 기억을 되살려 한 곡 해보지!" 메리도 부추겼다. "자, 샘! 당신은 입 밖에 내놓는 것보다 머리 속에 저장해 놓은 것이 더 많지요?" 그러자 샘이 말했다. "무슨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 글쎄 이건 시라고 할 수도 없고 허튼소리로 치부해 주면 좋겠어요. 금방 머리 속에 떠오른 거니까." 그는 일어나서 마치 어린이가 노래하는 것처럼 가슴께에 두 손을 모으고 옛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트롤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닭아빠진 옛날 뼈다귀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어. 그는 몇 년 동안 계속 그것만 뜯었지. 고기를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끝이 났어! 틀림없어! 산 속 동굴 속에 그는 홀로 살았어. 고기를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톰이 커다란 구두를 신고 올라와서 트롤에게 말했지, 그게 뭔가?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될 우리 삼촌 팀의 정강이뼈 같은데 동굴 속에! 큰길가에! 팀은 벌써 몇 년 전에 죽어서 무덤 속에 누워 있어여 될 텐데. 젊은이, 트롤이 말했지, 이 뼈는 훔친 걸세. 하지만 무덤 속에서만 있으면 뼈다귀가 무슨 소용이 있나? 자네 삼촌 죽은 지 한참 지나서 정강이뼈만 꺼내 왔을 뿐이야. 정강이뼈! 썩은 뼈! 불쌍한 늙은 트롤한테 적선 좀 하면 어때? 그 양반은 필요도 없을 텐데. 톰이 말했지. 당신 같은 신가가 왜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우리 삼촌 정강이뼈를 훔쳐 왔는지 알 수 없군. 그러니 그 뼈 이리 내놓으소! 도둑놈! 불한당!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 뼈는 그분 거요. 그러니 그 뼈 이리 내놓으소! 트롤이 웃으면서 말했지. 다리 두 개 때문에 자네도 잡아먹어야겠네. 정강이뼈 맛 좀 보세. 싱싱한 고기라 달콤하게 넘어가겠지! 자, 이젠 시식을 해볼까 잘 봐라! 맛 봐라! 말라빠진 뼈다귀 뜯는 데도 이젠 지쳤어. 오늘저녁은 네놈으로 잔치하자! 그러나 저녁거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그가 마음 먹기도 전에 톰은 뒤로 빠져나가 그를 혼내 주려고 발로 찼다네. 조심해라! 나쁜 놈! 톰은 생각했네. 엉덩이에 한 방 먹이면 혼쭐이 나겠지, 하고. 그러나 산 속에 홀로 앉아 있는 트롤의 뼈와 살은 바위보다 더 단단해서 차라리 그 발로 지구를 차는 것이 더 나을 텐데. 트롤의 엉덩이는 끄떡도 않았지. 달려라! 치료하라! 늙은 트롤은 허허 웃고 있었고 톰은 발가락이 아파 어쩔 줄을 몰랐지. 집에 돌아와서 톰의 다리는 고장났네. 쓸데없는 헛발질로 그의 발은 영영 절름발이가 되었지. 그러나 트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도둑질한 뼈를 입에 물고 여전히 거기 있었어. 고맙소! 주인장! 트롤의 늙은 궁둥이는 여전했다네. 도둑질한 뼈를 입에 물고. 메리가 말했다. "우리 모두한테 주는 경고로군! 손을 대지 않고 막대기를 쓴 것이 천만다행이었군요, 스트라이더!" 피핀이 물었다. "샘, 그건 어디서 배웠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샘이 뭐라고 우물우물거렸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프로도가 말했다. "물론 자작곡이겠지. 이번 여행으로 샘 갬기의 진면목을 보는구먼. 처음에는 음모를 꾸미더니 이젠 광대 노릇까지 하는군. 나중에 가면 마법사나 전사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그러자 샘이 말했다. "제발 둘 중 어느것도 되지 않았으면 졸겠어요." 오후에도 그들은 계속 숲 속을 내려갔다. 어쩌면 먼 옛날 갠달프와 빌보, 그리고 열세 명의 난쟁이가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을 그들이 따라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삼 마일을 더 내려가니 그들은 동부대로 위쪽의 높은 언덕꼭대기에 나와 있었다. 그 지점에서 바라보니 호르웰 강은 멀리 좁은 산골짜기에 있었고 동쪽으로 브뤼넨 여울과 안개산맥에 이르기까지 숲과 히드가 무성한 비탈을 지나 꼬불꼬불 흘러가고 있었다. 언덕에서 얼마 내려가지 않은 곳에서 스트라이더가 풀밭 속에 있는 어떤 돌을 가리켰다. 돌 위에는 난쟁이들의 룬 문자와 비밀 기호가 거칠게 새겨져 있었으나 비바람에 깎여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메리가 말했다. "맞았어! 이건 트롤의 황금이 숨겨져 있던 곳을 표시했던 돌이 틀림없어. 프로도, 빌보 아저씨의 몫은 지금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하군요." 프로도는 그 돌을 바라보면서 빌보가 함부로 내버릴 수고 없는 그 무서운 보물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하고 상상해 보았다. "하나도 없어. 아저씨는 모조리 남들에게 줘 버렸지. 사실 그것들은 도둑놈들에게서 뺏어온 곳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 초저녁의 긴 그림자를 드리운 동부대로는 고요했고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젠 달리 갈 수 있는 길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덕을 내려가서 서둘러 왼쪽으로 돌아갔다. 급히 떨어지던 석양도 산허리에 걸려 곧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앞쪽 산맥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이 대로에서 떨어진 곳에서 밤새 야영할 곳을 찾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가슴에 섬뜩한 공포가 몰아넣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였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길이 워낙 기복이 심하고 또 굴곡이 많았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재빨리 대로를 벗어나서 히드와 월귤나무 가지들이 우거진 비탈로 올라가서 개암나무가 빽빽히 작은 숲을 이룬 곳에 숨었다. 그리고 약 십 미터쯤 아래 숲 사이로 석양빛을 받아 희미한 회색빛 윤곽을 드러낸 동부대로를 바라보았다. 말발굽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따가닥따가닥 하는 경쾌한 소리로 보아 꽤 빠른 속도 같았다. 그런데 그 소리와 함께 그들은 바람결에 실려온 듯한 딸랑딸랑 하는 방울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암흑의 기사의 말발굽소리가 아닌데." 유심히 듣고 있던 프로도가 말했다. 다른 호비트들도 모두 아닌 것 같다고 동의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추격의 공포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는 무엇이든지 일단 불길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스트라이더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한 손을 귀에 댄 채 소리를 들어 보더니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해가 지고 관목잎들도 부드럽게 흔들렸다. 방울소리는 더욱 또렷하고 가깝게 들려왔고 따가닥따가닥 하는 말발굽소리도 더욱 커졌다. 갑자기 황혼의 어스름 속으로 백마 한 필이 환한 빛을 내며 급히 달려왔다. 말의 굴레장식 띠가 마치 별빛 같은 보석이라도 박힌 듯 어둠 속에서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기사의 망토는 등뒤로 펄럭이고 있었고 모자도 벗겨져 있었으며 금빛 머리카락은 달리는 바람결 속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얇은 베일 사이로 새나온 듯한 흰 빛이 기사의 형체와 옷을 환히 비췄다. 스트라이더는 숨어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히드 수풀 사이로 소리를 지르며 대로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기사는 벌써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는 그들이 숨어 있는 숲을 쳐다보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이 아베두이 듀나다! 메이 고바넨.' 호비트들은 방울같이 맑은 그 목소리에 완전히 안심을 했다. 기사는 요정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넓은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긴박하고 무서운 사태가 예감되었다. 그는 스트라이더와 뭔가 급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스트라이더가 호비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은 숲을 박차고 나가 대로로 급히 내려갔다. 스트라이더가 그 요정처럼 보이는 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엘론드의 저택에 계시는 글로핀델일세." 그 요정의 소영주는 프로도에게 인사를 했다. "반갑소, 드디어 만났군요! 나는 당신을 찾으러 리벤델에서 파견되었지요. 노상에서 혹시 위험한 사태를 당하지나 않았는지 걱정하고 있었소." 프로도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갠달프가 리벤델에 도착했단 말입니까?" 글로핀델이 대답했다. "아니오. 내가 떠날 때만 해도 그분은 거기 안 계셨지요. 하지만 그건 아흐레 전 일이니까. 엘론드님은 그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지요. 그리고 바란두인(블내디와인) 강을 넘어 당신네 땅으로 여행을 하던 우리 종종 중의 누군가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급히 연락을 해온 겁니다. 그 전갈에 의하면 아홉 기사들이 출현했고 당신은 갠달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하고 짐을 진 채 길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사실 리벤델에도 아홉 기사들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사는 많지 않은데 엘론드님은 그들은 모두 북쪽과 서쪽, 남쪽으로 보내셨지요. 당신이 추격을 피하기 위해 너무 몰리 우회하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으로 짐작했던 겁니다. 동부대로가 내가 맡은 지역이었는데 약 이레 전에 미데이델 다리(마지막다리)에 가서 거기에 무슨 신호를 남겨 두었지요. 사우론의 세 기사들이 다리 위에 있다가 달아나길래 서쪽까지 추격해 보았습니다. 다른 두 기사도 만났는데 그들은 남쪽으로 달아나 버리더군요. 그때부터 당신의 자취를 찾기 시작해서 이틀 전에야 찾았지요. 그래서 마지막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다가 오늘 당신들이 산을 넘어 내려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잠깐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우리 뒤에는 여전히 암흑의 기사가 다섯 놈이나 도사리고 있어요. 길에서 당신의 흔적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달려올 겁니다. 게다가 나머지 네 명이 어디있는지 알 수도 없지요. 혹시 벌써 브뤼넨 여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글로핀델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땅거미는 더욱 짙어졌다. 프로도는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앞을 가로막는 안개는 더 심해져서 마치 동료들과 자기 사이에 어두운 막이 한 겹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통증이 되살아나며 추위까지 몰려왔다. 그는 샘의 팔을 붙잡으며 한쪽으로 휘청했다. 샘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프로도씨는 부상당했어요. 해가 지고나면 계속 갈 수가 없어요. 쉬어야 해요." 글로핀델은 땅바닥에 쓰러지려는 프로도를 붙잡았다. 프로도의 두 팔을 부드럽게 부축하면서 안색을 살려보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스트라이더는 웨더톱 밑에서 야영하다가 기습당했던 일과 떨어져 있던 적의 장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는 숨겨 두었던 칼자루를 꺼내 요정에게 넘겨 주었다. 글로핀델은 그것을 받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 칼자루에는 무서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아라곤, 엘론드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이것을 잘 보관하세요. 하지만 조심할 것은 가능한 한 이것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이 칼로 인한 상처는 나의 기술로도 어쩔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도 쉬지 말고 계속 달아나는 일이 급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프로도의 어깨 상처를 만져 보았다. 상처가 예상보다 심했던지 그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 프로도는 옆구리와 팔의 냉기가 한결 덜한 느낌을 받았다. 한 줄기 따뜻한 기운이 어깨에서 손으로 전해 오면서 통증이 다소 가라앉았다. 마치 하늘을 가린 구름이라도 걷힌 듯 그를 둘러싸고 있던 저녁의 어둠도 한꺼풀 엷어지는 것 같았다. 동료들의 얼굴이 다시 똑똑히 보였고 새로운 희망과 힘이 솟아났다. 글로핀델이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을 타는 것이 더 낫겠소. 등자를 안장에 맞도록 줄이지요. 가능한 한 말잔등에 붙어야겠지만 너무 걱정은 마시오. 이 말은 내가 부탁하는 손님은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걸음걸이가 가볍고 유연할 뿐만 아니라 만약 위험이라도 닥치면 적의 흑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지요."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내 친구들을 위험한 곳에 두고 나 혼자 리벤델에 간다면 절대로 그 말을 타지 않겠습니다." 글로핀델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만 없다면 친구들이 얼마나 d나전하지 아직 잘 모르시는군요. 적은 당신만 쫓아가고 우리는 아마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겁니다.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바로 프로도 당신이고 또 당신이 가진 물건이라오." 프로도는 더 이상 고집피우지 못하고 글로핀델의 백마를 타는 데 동의했다. 그 대신 다른 일행의 짐을 조랑말에 실을 수 있어서 그들은 한결 가볍게 출발할 수 있었고 한동안 꽤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러나 호비트들은 얼마 안 가 요정의 지칠 줄 모르는 빠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갔고 밤하늘은 여전히 두꺼운 구름장으로 덮여 있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었다. 새벽빛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왔을 때 비로서 글로핀델은 휴식을 허락했다. 피핀과 메리, 샘은 걸어가면서 거의 반쯤은 자고 있었다. 스트라이더조차도 피곤한지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말을 탄 채 어두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이삼 미터 떨어진 히드 숲 속으로 쓰러질 듯 몸을 던졌고 곧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잠을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선 글로핀델이 깨웠을 때 그들은 도대체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해는 벌써 높이 떠올라 있었고 간밤의 안개와 구름도 씻은 듯이 걷혔다. "이걸 마셔요." 글로핀델이 은단추가 박힌 가죽주머니에서 음료수를 따라서 모두에게 한 잔씩 나눠 주었다. 그 음료수는 이른 봄의 샘물처럼 산뜻하고 아무 냄새도 없었으며 입 안에 들어가서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는 동안 그들은 몸 속으로 힘과 생기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료수를 마시고나서 그들은(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빵과 마른 과일을 먹었다. 샤이어에서는 그처럼 맛있는 아침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들이 다시 길에 나섰을 땐 다섯 시간 남짓하게 휴식을 취한 뒤였다. 글로핀델은 여전히 그들을 재촉했고 그날 하루 동안 단 두 번만 간단한 휴식을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해지기 전에 이십 마일을 갈 수 있었고 그 지점에서부터 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골짜기 하단부까지 내리막길이었고 브뤼넨까지 곧장 뻗어 있었다. 호비트들이 보기나 듣기에는 아직까지 무슨 추격의 기미나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글로핀델은 그들이 뒤에 처질 때마다 한참 동안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고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 가끔 스트라이더와 요정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길잡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대도 호비트들은 그날 밤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극도의 피로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고 자신의 발과 다리밖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프로도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주위의 사물은 모두 회색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밤이 되는 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밤이 되면 세상이 덜 희미해 보일 것이기에.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했을 때 호비트들은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브뤼넨 여울까지는 아직 몇 마일이 더 남아 있었고 호비트들은 사력을 다해 걸었다. 글로핀델이 말했다. "강을 건너기 직전이 아마 가장 위험할 겁니다. 우리를 추격하는 발길이 차츰 빨라지고 있고 브뤼넨 여울에서는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듭니다." 길은 여전히 완만한 내리막길이었고 길가에는 가끔 풀밭이 있어서 호비트들은 발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고 가능한 한 그쪽으로 걸었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면서 길은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무가 우거진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축축한 붉은 바위들이 양쪽 벽을 가득 채운 굴속 같은 곳을 향했다. 급히 달려가는 그들의 발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쳐 울려왔다. 한 발만 내디뎌도 수많은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듯햇다. 빛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도 통과한 듯 갑자기 길은 터널 끝을 지나 밝은 세계로 나왔다. 그들은 가파른 경사지가 끝나면서 일 마일가량 기다란 평지가 펼쳐지고 그 끝에 리벤델(브뤼넨) 여울이 있는 것을 보았다. 강 건너에는 가파른 갈색 언덕이 있었고 실낱같이 가는 길이 꼬불꼬불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안개산맥의 연봉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어깨를 견주며 어두운 하늘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굴속 같은 길에서는 여전히 발소리가 메아리쳐 울려왔다. 소나무가지 사이로 바람이 일어나듯 갑자기 일전광풍이 일었다. 글로핀델은 즉시 뒤로 돌아 귀를 기울이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서 피해! 적이다!" 백마가 앞으로 내달았다. 호비트들은 비탈길을 뛰어냐려갔고 글로핀델과 스트라이더는 후방을 경계하며 따라갔다. 평지를 겨우 반쯤 달려갔을 때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방금 지나온 소나무숲 입구에 암흑의 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안장 위에서 육중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 뒤로도 하나, 또 하나 그리고 둘이 더 나타났다. 글로핀델이 프로도에게 소리쳤다. "빨리 앞으로 달려! 달려!" 그는 그 말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상한 힘이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천천히 걸어가게 고삐를 당겨 놓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들은 마치 언덕 위의 무시무시한 동상처럼 견고한 모습으로 거대한 흑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주변의 모든 숲과 대지는 안개 속으로 숨어 버린 듯했다. 갑자기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기다리라는 무언의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삐를 잡았던 손을 놓고 칼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붉은 섬광을 일으키며 칼을 빼들었다. "달려! 계속 달려!" 글로핀델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는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향해 요정언어로 소리쳤다. "노로 림, 노로 림, 아스팔로스!" 백마는 즉시 몸을 날려 남아 있는 마지막 거리를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흑마들이 언덕 아래로 추격해 내려왔고 암흑의 기사들은 프로도가 멀리 이스파딩의 숲 속에서 끔찍스럽게 들었던 것과 같은 괴성을 질러 댔다. 그 소리에 응답이 들려왔다. 왼쪽 나무 숲과 바위 사이에서 네 명의 다른 기사들이 날 듯이 달려와서 프로도와 동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둘은 프로도를 향해 달려왔고 나머지 둘은 앞길을 차단하려고 브뤼넨 여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프로도는 그들이 마치 바람처럼 달려오며 점점 더 검고 거대한 모습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프로도는 잠시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따라오던 기사들은 더 처지고 있었다. 그들의 거대한 흑마들은 속도에 있어서는 글로핀델의 백마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절망적이었다. 숨어 있던 적이 앞길을 차단하기 전에 브뤼넨 여울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망토와 모자를 벗어 버린 것 같았고 흰색과 회색옷을 입고 있었다. 창백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고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의 차가운 눈엔 살기가 번득거렸고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프로도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칼을 쥘 엄두도 나지 않았고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말갈기에 매달렸다. 귓가로 바람이 씽씽 지나갔고 마구에 달린 방울이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한 줄기 흰 불꽃처럼 요정의 말이 마지막 질주를 하여 맨 앞에 있던 기사의 얼굴을 지나쳐 갈 때 무시무시한 냉기가 창끝처럼 그를 찔렀다. 그는 물이 첨벙이는 소리를 들었다. 발 밑에서 물거품이 일었다. 말이 강을 건너 자갈밭길을 올라갈 때쯤에서야 프로도는 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경사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여울을 건넌 것이다. 그러나 추격자들은 바로 뒤에 있었다. 언덕꼭대기에서 말은 걸음을 멈추고 요란하게 히힝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저 건너편 물가에 아홉 기사들이 있었다. 프로도는 자기를 쳐다보는 그들의 위협적인 얼굴을 보고 다시 절망에 빠졌다. 그가 그렇게 쉽게 건넌 여울을 그들도 쉽게 건너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인달 그들이 여울을 건너기만 한다면 거기서부터 리벤델까지 알지도 못하는 먼 길을 혼자 도망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하튼 그는 적의 마력이 강하게 자신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다시 솟았으나 그는 더 이상 거부할 힘이 없었다. 갑자기 맨 앞에 있던 기사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말은 강물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프로도는 몸을 곧추세운 뒤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그는 소리쳤다. "돌아가라! 더 이상 따라오지 말고 모르도르로 돌아가라!" 그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힘이 없었다. 적들은 냉기가 감도는 거친 목소리로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돌아와라! 돌아와! 너를 모르도르로 데려가겠다!" 프로도는 또 한번 힘없이 말했다. "돌아가라!" "반지! 반지!" 그들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외쳐 댔다. 갑자기 그들의 우두머리가 물 속으로 말을 몰고왔고 두 기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프로도는 칼을 높이 쳐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엘레베스와 아름다운 루디엔의 이름으로, 너희들은 결코 반지와 내 몸을 손대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여울을 거의 반쯤 건너온 우두머리가 등자 위에서 위협적인 자세로 일어나서 손을 들었다. 프로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입의 혀가 꼬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칼이 부러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요정의 백마가 뒷걸음질을 치며 히힝거렸다. 맨 앞에 섰던 흑마는 벌써 거의 물가에 다다랐다. 그 순간 천지를 울릴 듯한 파도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바퀴라도 굴릴 듯한 기세로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왔다. 프로도는 발 밑의 강물이 일어나고 그 물길을 따라 깃털장식을 한 기병대 같은 파도가 노호하듯 밀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프로도의 눈에는 파도 머리에서 흰 불꽃이 번쩍이는 것 같았고 물 속에는 흰 거품 같은 갈기가 달린 백마 위에 흰 옷의 기사들이 타고 있는 듯했다. 그때 여울 속에 있던 세 기사는 파도에 휩쓸려 분노한 물거품 속에 묻혀 버렸다. 건너편에 있던 기사들은 당황하며 두로 물러섰다. 프로도는 가물가물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강변에서 망설이던 기사들 등 너머로 흰빛을 내는 물체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작고 검은 형체들이 불꽃을 흔들며 달려왔고 그 불꽃은 대지를 감싸고 있던 회색 안개 속에서 새빨간 빛을 토해 냈다. 흑마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다가 미친 듯이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사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그들을 싣고 가는 파도의 노호하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프로도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파도소리와 어지러운 함성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제13장 많은 만남 프로도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의 한구석에 떠돌고 있는 길고 어지러운 악몽에 사로잡혀 늦잠을 잔 것이 아는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앓아 누워 있었던가? 그러나 천장이 낯설었다.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 검은 들보가 평평한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누운 채 한참 동안 벽에 비친 햇빛을 바라보며 폭포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그는 누운 그대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긴 어딥니까? 그리고 지금 몇시예요?"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엘론드의 집이지. 시간은 아침 열시고. 더 알고 싶다면 얘기해 주지. 지금은 10월 24일 아침일세." "갠달프!" 프로도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열린 창문가의 의자에 늙은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맞았네, 날세. 집을 떠난 뒤로 그렇게 수없이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도 여기 도착한 것을 보면 자네도 운이 꽤 좋군 그래." 프로도는 다시 누웠다. 갠달프와 이야기를 하기엔 마음이 너무 평화롭고 흡족했으며 그와 논쟁을 해보았자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고 지난 여정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쳤다. 올드 포레스트의 끔찍한 '지름길' , 달리는 조랑말 여관에서의 '사고' , 웨더톱에서 귀신에 홀린 듯 반지를 꼈던 일 등이 생각났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 리벤델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회상하고 있는 동안 갠달프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이따금 파이프를 뻐꿈거리며 창 밖으로 하얀 담배 연기 동그라미를 날려 보냈다. 마침내 프로도가 말을 꺼냈다. "샘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무사한가요?" "물론이지. 모두 건강하고 무사하네. 샘은 계속 자네 옆에 있었는데 삼십 분 전쯤에 좀 쉬라고 내가 내보냈지." "여울에서는 어떻게 된 거지요? 너무 가물가물해서 기억할 수가 없어요.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랬을 거야. 자네는 죽어가고 있었어. 상처가 자네를 압도하고 있었고 몇 시간만 늦었더라면 우리 힘으로도 자네 상처를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야. 하여간 사랑스런 호비트, 자넨 정말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네. 배로우에서도 물론 용감했지만. 그 정도로 넘어갔지만 아마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겠지. 웨더톱에서는 좀더 버텨 볼 수도 있지 않았나?" "벌써 다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배로우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나요? 처음에는 말하기가 너무 무서웠고 다음에는 다른 일 때문에 잊어버렸거든요." 그러자 갠달프가 자상하게 말했다. "프로도, 자네는 잠을 자면서 많은 얘기를 했어. 그리고 자네 생각과 기억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걱정말게! 조금 전에 내가 '어리석은' 이란 말을 하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야. 난 자네와 자네 동료들을 대단히 높게 평가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적잖은 자랑거리로 삼을 만하고. 게다가 그처럼 위험한 고비를 겪어 내고 여전히 반지를 지켜 왔다는 건 대단한 일일세." "스트라이더가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필요했어요. 당신이 돌아오시지 않으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내가 늦었지. 그리고 그 바람에 모든 것을 그르칠 뻔했어.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요." "때가 되면 얘기해 주지. 하지만 오늘은 이야기를 하거나 무슨 다른 일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엘론드의 처방이야." "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상상이나 추측을 해서 더 피곤해질 텐데요. 이젠 정신이 말짱해요. 그러니 궁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왜 늦으셨어요? 적어도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자넨 곧 알고 싶은 걸 모두 듣게 될 거야. 자네 몸이 건강해지면 우린 회의를 열 테니까 말이야. 우선은 내가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사실만 말해 주지." 그러자 프로도가 외쳤다. "당신께서요?" 갠달프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네. 이 회색의 갠달프가 말이야! 이 세상에는 선이든 악이든 보지 못한 세력들이 있지. 나보다 더 강한 이들도 있고 또 아직 상대해 보지 못한 이들도 있어. 하지만 이제 나의 시간이 오고 있네. 모르굴의 군주와 그의 암흑의 기사들이 나타났어.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제가 그놈들과 마주치기 전에도 그들을 알고 계셨군요." "물론 알고 있었지. 언젠가 자네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암흑의 기사들이란 반지의 악령들이고. 그러니 반지군주의 아홉 졸개들인 거야. 나는 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모르고 있었어. 만일 알았더라면 자네와 함께 즉시 떠났을 걸세. 지난 6월에 자네집에서 떠나고서야 그 소식을 들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는 두로 미루기로 하지 우선은 우리 모두 아라곤 덕분에 목숨을 건진거야." "맞습니다. 우리를 구한 것은 아라곤이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겁이 났어요. 아마 샘은 글로핀델을 만날 때까지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을 거예요." 갠달프가 웃었다. "샘에게서 모두 들었지. 이젠 완전히 의심을 푼 모양이더군." "저도 스트라이더를 좋아하게 되어서 기뻐요. 아니, 좋아한다는 말 이상으로 그에게 정을 느껴요. 가끔씩 이상하게 무서울 때도 있지만요. 사실 그에게는 갠달프 당신을 연상케 하는 무엇이 있어요. 인간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대개는 그냥 덩치만 크고 멍청한 줄 알았거든요. 버터버처럼 친절하면서 멍청하거나 빌 퍼니처럼 멍청하면서 성질이 고약하거나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브리 사람들을 빼놓곤 인간들에 대해 잘 모르는가 봐요." "만일 발리맨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면 자넨 아직 브리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지. 그는 자기 나름대로는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야. 생각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적고 또 느리지만(브리식으로 말하자면) 때가 되면 돌담 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이제 중간계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 같은 사람은 거의 없지. 바다를 건너온 왕족의 혈통도 거의 끊어져 버렸으니까. 이번의 반지전쟁은 아마 그들로서는 마지막 모험이 되겠지." 그러자 프로도는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면 스트라이더가 고대 왕족의 후예란 말입니까? 저는 그들이 벌써 옛날에 사라진 줄 알고 있었는데요. 전 그가 그냥 순찰자 중 한 사람인 줄만 알았어요." "그냥 순찰자라니! 프로도, 그들이 바로 순찰자들이야. 북부에 남아 있는 위대한 서역인들의 마지막 후예들이란 말일세. 그들은 전에도 나를 도와 주었고 앞으로도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 우린 리벤델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반지는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전 여기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더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행과 모험은 지난 한 달 동안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요." 프로도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10월 24일이 나오지 않아요. 제 생각에는 오늘이 20일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요. 여울에 도착했던 것이 20일이었거든요." "자넨 말도 너무 많이 하고 계산도 너무 하는군. 이제 어깨나 옆구리는 좀 어떤가?" "잘 모르겠어요. 감각이 없어요. 그게 나았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그런데..."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팔은 조금 말을 들어요. 맞아요.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냉기가 없어졌아요."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만지면서 말했다. "좋아! 회복이 빠르군. 자넨 곧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겠어. 엘론드가 자넬 치료했지. 자네가 여기 온 후 며칠 동안 계속 말이야." "며칠이라고요?" "그러니까, 정확히 나흘 밤 나흘 낮이지. 자네가 날짜 계산을 잊었던 그 20일 밤에 요정들이 자넬 여울에서 데려왔어. 우린 대단히 걱정했지. 샘은 심부름할 때를 빼고는 자네 곁을 밤이나 낮이나 떠난 적이 없었어. 엘론드는 의술의 대가이긴 하지만 적의 무기는 너무 치명적이었지.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가 죽는 걸로 생각했었네. 상처 속에 칼날조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어제저녁까지도 그걸 찾을 수가 없었거든. 엘론드가 결국 파편을 찾아냈지. 파편은 깊이 박혀서 계속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었다네." 프로도는 스트라이더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던 그 무시무시한 칼의 끝이 부러져 있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몸을 떨었다. "걱정 말게! 이젠 없어졌어. 녹아 버렸지. 호비트들은 명이 상당히 질긴 것 같아. 내가 알기론 인간들 중에서도 많은 용사들이 그 칼날의 파편으로 곧 쓰러지곤 했는데 자네는 그것을 열이레 동안이나 몸 속에 넣어가지고 다녔단 말이야." "그들은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걸까요? 기사들의 계획이 무엇이었어요?" "그들은 자네 상처 속에 들어간 모르굴의 칼로 자네 심장을 찌를 작정이었던 거야. 그것이 성공했더라면 자네가 그들처럼 변해서 그 부하가 되었을 거야. 암흑의 군주에게 지배받는 악령이 되는 거지. 자네한테서 그 반지를 뺏어 자기 손에 끼고도 분이 안 풀린다면 아마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자넬 고문했을 거야." 그러자 프로도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 끔찍스런 위험을 몰랐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에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무섭기는 했지만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한 발짝도 못 움직였을 거예요. 살아난 것이 기적이로군요!" "그렇지. 자네 용기도 물론 가상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자네를 도운 가야. 자네는 심장을 다치지 않고 어깨만 다쳤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말하자면 간발의 차이였어. 자네가 반지를 끼고 있을 때는 위험했지. 왜냐하면 그때 자네는 이미 반쯤은 악령의 세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네를 사로잡을 수 있거든. 자네는 그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도 자네를 볼 수 있었지." "맞았어요. 끔찍한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말은 왜 눈에 보이지요?" "그건 진짜 살아 있는 말이거든. 마치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들과 싸울 때 그들의 허상에다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입은 검은 옷이 진짜 천이듯 말이야." "그렇다면 그 흑마들은 어째서 그 기사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나요? 다른 동물들은 그들이 다가오기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을 못하는데 말이예요. 글로핀델의 백마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을 보면 개도 짖고 거위도 꽥꽥거리던데요." "그 말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르도르의 암흑의 군주에게 복종하도록 훈련을 받은 거야. 반지의 악령들만이 그의 부하인 것은 아니야! 호르크와 트롤도 있고 늑대, 워울프 등도 있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용사와 왕들이 햇빛 아래 살면서도 그의 하수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야. 그리고 그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지." "리벤델과 요정들은 어떨까요? 안전한가요?" "물론이지. 바깥세상이 완전히 적의 수중에 들어갈 때까지는 안전하지. 요정들도 물론 암흑의 군주를 두려워하고 그를 보면 달아나지만, 결코 그의 말을 듣거나 복종하지는 않아. 그리고 여기 리벤델에는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 곧 먼 바다를 건너온 엘다의 요정영주들이 아직 남아 있는 거야. 그들은 반지의 악령들을 무서워하지 않아. 왜냐하면 먼 옛날 축복의 땅에 살았던 그들은 양쪽 세계에 동시에 살 수도 있고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모두에 대해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거든." "빛이 나면서 다른 형체들과는 달리 어둠침침해지지 않던 하얀 물체를 본 기억이 나요. 그러면 그것이 글로핀델이었단 말인가요." "그렇지. 그가 강 건너에 있을 때 잠시 보았겠지. 그는 제1시대의 요정용사들 중의 하나이자 많은 요정들을 거느리는 영주야. 사실 리벤델에는 모르도르의 공격을 막아 낼 만한 힘이 있어. 그리고 다른 곳에도 또 다른 성채들이 남아 있지.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들은 곧 사면초가가 되고 말 거야. 암흑의 군주는 총공세를 펴고 있거든." 갑자기 그는 몸을 일으키며 턱을 내밀었다. 그의 수염이 곧은 철사처럼 뻣뻣하게 뻗쳤다. "아직은 용기를 잃어선 안 돼. 자네가 죽을 지경이 될 정도로 나와 이야기만 나누지 않는다면 곧 완쾌될 거야. 여기는 리벤델이야. 당분간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단 말일세." "더 이상 낼 용기도 없지만 지금은 아무 걱정도 안해요. 다만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울에서 어떻게 일이 끝났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더는 묻지 않겠어요. 그리고나서 잠을 좀더 자야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갠달프는 의자를 침대 옆으로 당기고 한참 동안 프로도를 내려다보았다. 프로도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와 붉었고 눈동자도 맑아져 의식이 완전히 정상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눈은 그의 몸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몸이, 특히 이불에서 밖으로 나와 있는 왼손이 속이 비어 투명해진 듯한 기미가 보였다. 갠달프는 중얼거렸다. "아직 안심할 수 없군. 두고봐야겠어. 결국 어떻게 될지는 엘론드도 모르겠지. 설마 나쁜 쪽으로 가지야 않겠지. 어쩌면 유리잔처럼 손이 텅 비어 버릴 있겠어." 그리고는 프로도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자넨 다 나은 것 같군. 엘론드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대강만 이야기해 주지. 아주 간략하게 할 테니까 그 다음엔 잠을 자야 하네. 알겠지? 내가 들은 바로는 이렇게 된 거야. 자네가 달아나자마자 그들은 추격을 시작했지. 자네가 이미 그들의 세계에 반쯤 발을 들여놓아서 그들의 눈으로도 자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놈들은 굳이 말의 인도를 받을 필요도 없어졌던 거야. 게다가 반지 역시 그들을 끌어당기거든. 자네 친구들은 길 옆으로 피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발굽에 깔려 버렸겠지. 자네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백마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 기사들은 너무 빨라서 따라잡을 수도 없었고 또 수가 너무 많아 함부로 덤벼들 수도 없었어. 글로핀델과 아라곤도 맨손으로는 그들 아홉을 동시에 상대할 수가 없었지. 반지의 악령들이 지나가자 자네 동료들은 그 뒤를 따랐네. 그리고 여울 가까이에 작은 분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무 뒤에 숨어 재빨리 불을 피운 거야. 글로핀델은 기사들이 여울을 건너려 하면 반드시 물결이 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 남아 있던 놈들을 처치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물결이 일자마자 그는 아라곤을 포함한 자네 동료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뛰어간 거야. 기사들은 앞에는 강물, 뒤에는 횃불이 나타났고 또 요정의 영주가 분노한 것을 보자 당황하게 되었지. 말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반쯤 미쳐 버린 것이고. 셋은 물결에 휩쓸려 갔고 나머지도 놀란 말들이 강물로 뛰어드는 바람에 역시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그렇다면 이제 암흑의 기사들은 끝장이 난 건가요?" "아니야. 말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까 절름발이나 마찬가지 처지가 되었지만 반지의 악령들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 친구들은 물결이 잔잔해진 뒤에 강을 건너 자네가 부러진 칼을 배 밑에 깐 채 언덕 위에 엎드려 있는 걸 발견했지. 백마가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네. 자네는 얼굴도 창백하고 몸도 얼음장처럼 식어서 모두 죽지 않았나 걱정을 했지. 그때 엘론드의 부하들이 나타나 자네를 천천히 리벤델까지 데려오게 된 거야." "물결은 누가 일으킨 건가요?" "엘론드의 명령이었지. 이 골짜기의 강은 그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여울을 급히 봉쇄할 필요가 있을 땐 강물이 분노한 듯 물결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 그러니 악령들의 우두머리가 강물 속에 들어서자마자 큰 물결이 일어난 거지. 내 솜씨도 일조를 했고. 자네는 보지 못했겠지만 물결 가운데 백색의 기사들이 거대한 백마를 탄 모습이 있었지. 집채만한 바윗돌이 굴러가기도 했고 물결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져서 자네들까지 휩쓸어가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어. 안개산맥의 눈이 녹아 내려오는 강물은 물살이 대단하거든." "예,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물결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어요. 저도 빠져 죽는 줄만 알았지요. 친구도 적이고 다같이 말이에요. 하지만 살았군요!" 갠달프는 재빨리 프로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맞았어. 당분간은 모두 안전하네. 조만간 브뤼넨 여울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잔치가 열릴 거야. 그러면 자네는 고귀한 분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 "멋지군요! 스트라이더는 말할 것도 없고 엘론드와 글로핀델 같은 위대한 영주들이 저를 위해 그렇게 애를 써주시고 게다가 환대를 베풀어 주시다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갠달프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우선은 나 때문이고 둘째는 반지 때문이야. 자네는 반지의 사자야. 게다가 자네는 반지를 발견한 빌보의 후계자가 아닌가!" 프로도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리운 빌보 아저씨! 그분은 어디 계실까요? 여기 오셔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암소가 달에 뛰어오른 사건이나 불쌍한 늙은 트롤의 이야기도 있는데 말이에요." 그 말을 마치자 프로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프로도는 '바다 동쪽의 최후의 아늑한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잤다. 그 저택은 오래 전 빌보가 말했던 대로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또 그냥 앉아 좋은 생각을 하기에,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즐기기에 가장 적당한 집'이었다. 그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피로와 공포와 슬픔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프로도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휴식과 잠은 충분한 것 같았고 다만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나서 노래도 부리고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는 침대에서 나와 팔을 움직여 보며 거의 예전처럼 회복된 것을 알았다. 초록색의 깨끗한 옷이 준비되어 있었고 몸에 꼭 들어맞았다. 거울을 보고 그는 자신이 많이 말랐음에 놀랐다. 마치 샤이어의 정원에서 아저씨와 즐겁게 뛰어놀던 빌보의 어린 조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겨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렇군. 지난번 거울을 본 후로 허깨비를 한두 번 보았었지. 하지만 이젠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야!" 그는 두 팔을 크게 뻗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노크소리가 나며 샘이 들어왔다. 그는 프로도에게 달려와 조심스럽고 어색하게 그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만져본 후 얼굴을 붉히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따뜻해졌어요. 손 말이에요. 며칠 밤 동안 얼마나 차가웠는지 몰라요. 이젠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겠어요!" 그는 탄성을 지르고 돌아서서 두 눈을 반짝이며 마룻바닥에서 춤을 추었다. "다시 일어나셔서 정말 기뻐요. 갠달프가 올라가서 프로도씨께서 내려오실 준비가 되었는지 살펴보라고 하시길래 농담인 줄 알았어요." "준비가 됐어. 가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 보지." "제가 안내할게요. 이 집은 굉장히 커요. 희한한 데도 많고요. 항상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요정들 말이에요! 여기도 요정, 저기도 요정, 온통 요정들 뿐이에요! 왕처럼 위엄있고 화려한 이들도 있고, 어린애처럼 까불대는 요정들도 있어요. 지금까지는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나 시간이 없었지만 노래와 음악도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요. 하지만 벌써 이곳 사정에 조금은 익숙해졌어요." 프로도는 샘의 팔을 잡으며 감사의 정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샘, 네가 그 동안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밤은 마음을 푹 놓고 즐겁게 지내도록 하지. 자, 가보세." 샘은 몇 개의 복도와 많은 층계를 내려가서 급경사의 제방 위에 위치한 높은 정원으로 그를 인도했다. 프로도는 친구들이 저택 동쪽 현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골짜기 아래로는 벌써 어둠이 내리깔렸으나 산꼭대기에는 아직도 석양빛이 감돌고 있었다. 대기도 따스했다. 물이 흘러가고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아직 여름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듯 저녁공기 속에는 희미한 꽃향기와 풀내음이 스며 있었다. 그를 본 피핀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만세! 우리의 위대한 친구께서 오신다! 반지대왕 프로도 만세!" 그러자 현관 뒤쪽 그늘 속에 있던 갠달프가 주위를 주었다. "쉬! 악의 무리들이 이 골짜기 속에야 못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그런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돼! 그리고 반지대왕은 프로도가 아니야. 모르도르에서 암흑의 탑을 지키면서 온 세계에 세력을 퍼뜨리고 있는 암흑의 군주가 바로 반지대왕이야. 우리는 지금 요새 안에 앉아 있지만 바깥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 피핀이 투덜거렸다. "갠달프는 계속 그런 지독한 말씀만 하세요. 나보고 항상 불안한 대기 상태로 있으라고 합니다만 어떻게 이런 집에서 매일 우울하게 있을 수 있어요? 노래라도 많이 안다면 신나게 불러 젖힐 텐데." 그러자 프로도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한 곡조 뽑고 싶은 기분이야. 하지만 일단은 배부터 채우고 봐야겠어." "문제없어요. 보다시피 용케도 식사시간에 딱 맞게 일어나셨거든요." 피핀이 말하자 메리도 거들었다. "그냥 식사가 아니에요. 파티예요! 회복이 되셨다고 갠달프가 말씀하시자마자 잔치 준비가 시작됐어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쪽에서 그들을 부르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엘론드의 저택 안 홀은 벌써 꽉차 있었다. 대부분은 요정들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엘론드는 관습대로 상단 긴 테이블 끝에 놓인 큰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양쪽에 글로핀델과 갠달프가 자리를 잡았다. 프로도는 전설적인 요정 엘론드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엘론드의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를 잡으니 글로핀델이나 그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갠달프까지도 대단한 위엄과 권위를 지닌 영주로 보였다. 갠달프는 둘보다 키가 작았지만 긴 백발이나 늠름하게 늘어뜨린 은빛 수염, 그리고 떡벌어진 어깨로 보아 마치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지혜로운 왕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나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처럼 희고 두툼한 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불 속에 넣어진 석탄처럼 형형한 빛을 발했다. 글로핀델은 키가 크고 꼿꼿했다. 머리는 빛나는 금발이었고 얼굴은 젊고 아름다웠다. 두려움을 모르는 기개를 나타내 보이면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표정이었다. 눈은 맑고 예리했으며 목소리는 음악 같았다. 이마에는 지혜가 새겨져 있었고 손에는 힘이 넘쳐 나고 있었다. 엘론드의 얼굴은 늙지고 젊지도 않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기쁨과 슬픔을 함께 간직한 수많은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머리는 미명의 어둠처럼 검은색이었고 그 위에는 은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관이 씌워져 있었다. 두 눈은 맑은 저녁날 같은 회색이었고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그는 오랜 세월 왕좌에 앉아 있는 영주처럼 위엄이 있었고 아직도 힘이 넘치는 강건한 용사처럼 정정했다. 그는 리벤델의 군주였으며 인간과 요정 어느 세계에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테이블 중간의 차양을 친 의자에는 벽걸이 천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엘론드와 너무도 닮은 데가 많아 프로도는 그녀가 엘론드의 가까운 친척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땋아 내린 검은 머리는 흰 가닥이 하나도 없었으며 흰 팔과 깨끗한 얼굴은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고왔다. 그녀의 눈에는 구름 없는 밤 하늘의 회색빛 같은 별빛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여왕의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듯 눈길에는 깊은 사색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이마 위엔 하얗고 작은 보석들이 박힌 은빛 레이스 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보드라운 회색옷은 은으로 만든 나뭇잎 모양의 허리띠 외에는 다른 장식물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요정들 외에는 아무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엘론드의 딸 아웬을 본 것이었다. 루디엔이 환생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에겐 샛별이란 뜻의 운도미엘이란 이름도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산맥 너머 로리엔의 외가 쪽 친척집에 있다가 최근에 리벤델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오빠 엘라단과 엘로히르는 무사수업을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북방의 순찰자들과 함께 종종 먼 곳까지 여행을 하곤 했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오르크들의 굴에서 수모를 받았던 쓰라린 기억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로도는 이제껏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도, 아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이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의 의자는 쿠션을 많이 넣어 높이를 알맞게 조정해 놓았으나 그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주제넘은 자리에 나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연회는 매우 유쾌했으며 음식은 그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옆자리의 손님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친구들을 찾았다. 샘은 자신의 주인 곁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었지만 프로도가 중요한 손님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프로도는 샘이 피핀, 메리와 함께 상단 가까이에 있는 옆 테이블 위쪽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스트라이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의 오른쪽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난쟁이가 있었는데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듯했다. 턱수염을 두 갈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과 마찬가지로 눈처럼 흰빛깔이었다. 그는 은으로 만든 벨트를 띠고 은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잠시 멈추고 난쟁이를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난쟁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인사하고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자기를 소개했다. "글로인, 삼가 인사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더 정중하게 절을 했다. 프로도는 황급히 일어나 받쳐 놓은 쿠션을 떨어뜨리며 깍듯이 답례를 했다. "프로도 배긴스가 귀하의 댁에 삼가 안녕을 기원합니다. 혹시 저 유명한 도린 오큰쉬드의 열두 동료 중 한 분이신 글로인이 아니신지요?" 난쟁이는 쿠션을 주워 모아 프로도가 의자에 다시 앉는 것을 정중히 도와 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손님께서는 저 유명한 우리 친구 빌보의 친척이시자 양자시라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으니 여쭙지는 않겠습니다. 회복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글로인이 다시 말했다. "매우 어려운 여행을 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호비트 네 분이 무슨 일로 그렇게 긴 여행을 하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빌보가 우리와 함께 떠난 이후론 그런 일이 없었지요. 하지만 너무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엘론드와 갠달프가 싫어하실 테니까요." "저도 지금은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도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엘론드의 집일지라도 반지 문제는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제는 당분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저 역시 귀하신 난쟁이께서 무슨 일로 외로운산을 떠나서 이 먼 길을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글로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다면 그것 역시 아직은 이야기를 할 계제가 못 되겠지요. 아마도 엘론드께서 우리들 모두를 곧 부르실 테니까 그때 가면 아시게 될 겁니다. 다른 이야기도 많으니까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프로도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샤이어의 소식은 반지말고는 별로 특이한 것이 없이 자질구레한 것뿐이었으나 글로인은 월더랜드 북쪽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베오른의 아들 그림베오른 영감이 이제는 많은 장사들을 거느린 영주가 되어 안개산맥과 머크우드 사이에 있는 자기 영토 내로 오르크나 늑대들이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글로인이 말했다. "사실 베오른족(베오르닝)이 없었다면 데일에서 리벤델까지의 통행은 일찌감치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들은 용감하기 때문에 항상 높은 고갯길과 캐록 여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도와 주지요. 하지만 통행료가 너무 비싸지요." 그는 고개를 휘휘 내두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옛날의 베오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난쟁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조금씩 우애가 싹트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쪽은 바로 데일 사람입니다. 바드의 후손이라고 해서 바딩이러고 하는데 아주 좋은 사람들이에요. 지금은 그 유명했던 명궁사 바드의 손자이자 바인의 아들인 브란드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용감한 왕이어서 남쪽 멀리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에스가로스 동쪽도 그의 영토지요." "귀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야기는 많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좋은 편입니다. 이 시대의 어둠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그래도 지금까지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 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해드리지요. 하지만 지루하게 느껴지면 곧 이야기를 멈추게 하세요. 난쟁이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할 때면 끝이 없다는 속담도 있으니까요." 그리고나서 글로인은 난쟁이왕곡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착실한 청자를 상대로 하게 된 것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프로도는 피곤하다거나 화제를 바꾸려는 기색을 전혀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낯선 지명과 인명이 쏟아져 나오자 곧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그는 다인이 여전히 산아래 왕국에서 왕좌에 앉아 있으며 이제는 늙었지만(이백오십 살이 넘었으니)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뻤다. 5개군대전투에서 살아남은 열 명 중 일곱이 아직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드왈린, 글로인, 도리, 노리, 비푸르, 보푸르, 그리고 봄부르가 그들이었다. 봄부르는 이제 너무 뚱뚱해져 식탁에 혼자 앉을 수 없으므로 젊은 난쟁이 여섯이 도와 주어야 한다고 했다. "발린과 오리, 오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로인의 얼굴에 그늘이 덮였다. "우리도 모릅니다. 리벤델에 계신 분들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도 바로 바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밤은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글로인은 데일과 산아래 왕국에서 펼쳐졌던 자신들의 장구한 역사를 비롯해 생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린 솜씨가 있지만 금속공예에서는 조상들을 따를 수 없습니다. 비법이 모두 끊겨 버렸지요. 요즘도 훌륭한 갑옷이나 예리한 검이 나오긴 합니다만 용이 나타나기 전에 만들어졌던 갑옷이나 칼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광산이나 건축 부문에서는 옛날보다 발전했지요. 프로도, 언제 한번 오셔서 데일도 구경하고 산 속으로 뚫어놓은 수로와 인공호수들을 구경해 보세요. 석재로 알록달록하게 깔아 놓은 포장도로를 보면 놀라실 겁니다. 지하에는 큰 연회장도 있고 가로수 모양의 아치가 세워진 동굴도로도 있지요. 산기슭에는 테라스와 탑도 많이 있답니다. 그걸 보시면 아마 우리가 결코 게으른 종족이 아니란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가서 구경하고 싶습니다. 용 스마우그가 쓰러진 곳에 그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면 빌보 아저씨가 얼마나 놀라시겠어요!" 글로인은 프로도를 보고 웃었다. "빌보를 대단히 사랑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느 궁전, 어느 탑보다도 그분을 먼저 뵙고 싶습니다." 마침내 연회가 끝났다. 엔론드와 아웬이 일어나 홀을 내려가자 남은 이들도 모두 정해진 순서에 따라 뒤를 따랐다. 입구의 문이 열렸고 일행은 넓은 복도를 지나 몇 개의 문을 거쳐 멀리 떨어진 홀로 들어섰다. 그곳엔 테이블이 없었지만 조각이 새겨진 기둥들이 양쪽으로 죽 늘어선 사이의 대형 벽난로에선 불꽃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어느새 갠달프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마법사가 말했다. "이곳은 불의 방이라고 하네. 자네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노래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 방은 축제 때 외에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조용히 사색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지. 여기는 일 년 내내 불이 피워져 있고 다른 빛은 거의 없네." "엘론드가 들어와서 그를 위해 마련해 둔 의자 쪽으로 걸어가자 요정 음유시인들이 달콤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방안은 채워졌고, 프로도는 함께 모여 있는 많은 아름다운 얼굴들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황금빛 불빛이 그들의 얼굴에 어른거렸고 그들의 머리카락을 빛냈다. 갑자기 그는 난롯가에서 멀지 많은 곳에 작고 검은 형체가 기둥에 등을 대고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 바닥에는 술잔과 빵이 몇 조각 있었다. 프로도는 그가 아픈 건지 궁금했고(만약 리벤델에서도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면), 그래서 파티장에 나타나지 않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에 취한 듯 머리를 가슴에 푹 파묻고 있었고, 검은 외투자락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엘론드는 앞으로 나가서 그 말없는 인물 옆에 섰다. 그리곤 잔잔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만 일어나게, 작은 내 친구!" 그는 프로도를 향해 오라고 손짓했다. "프로도, 이제 자네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네. 자네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친구가 있지."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고개를 들고 얼굴을 드러냈다. "빌보 아저씨!" 그 순간 프로도는 그를 보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에게로 뛰어갔다. 빌보가 말했다. "잘 있었나, 내 아들 프로도! 드디어 도착했구나! 난 네가 꼭 해 낼 줄 알았지. 잘했어, 잘했어! 이 모든 잔치가 너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던데, 재밌게 보냈니?" 프로도는 거의 울 것같이 악을 쓰며 물었다. "왜 거긴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왜 이제야 나타나신 겁니까?" "그건 네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야. 난 그 동안 몇 번이나 봤단다. 매일 샘하고 네 옆에 앉아 있었지. 하지만 이젠 잔치 같은 것도 시들해져서 거기 가지 않았을 뿐이란다. 더구나 난 해야 할 일도 있었거든." "무슨 일요?" "응, 그냥 하염없이 앉아서 사색하는 일이지. 요즘엔 그런 시간이 늘어났단다. 명상은 하기엔 이 방이 최고지. 괜히 남이 잠자는 것을 방해하는군 그래!" 그는 엘론드에세 한쪽 눈을 찡긋 해보였다. 하지만 빌보의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프로도가 보기엔 졸음기라곤 전혀 없었다. "일어나라고요? 실은 정말 잠을 잔 건 아니었어요, 엘론드. 모두들 너무 빨리 연회를 마치고 이 방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노래 한 곡을 다 만들어 가다가 그만 망쳐 보린 겁니다. 한두 소절이 마음에 걸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젠 다 글러 버렸군요. 시끄럽게 노래들을 불러 젖힐 텐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내 친구 듀나단에게나 도와 달라고 해야겠군. 그는 어딨습니까?" 엔론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찾아보도록 함세. 그러면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작품을 마저 끝내게. 우리가 들어 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잔치가 다 끝나기 전에 완성시켜야 하네!" 엘론드는 요정들을 내보내 빌보가 말하는 친구를 찾게 했지만 그가 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디 있는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프로도와 빌보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샘이 재빨리 다가와 그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방 안의 흥겨운 분위기와 노랫소리를 잊어버린 채 둘이서만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보는 자신에 대해 들려 줄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그는 호비튼을 떠난 후 동부대로를 따라 돌아다니거나 그 길 양쪽 마을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줄곧 리벤델을 향하고 있었다. "이곳엔 별 어려움 없이 도착했지. 처음 얼마 동안 쉰 다음에 난쟁이하고 데일을 구경갔단다. 그게 내 생애의 마지막 여행이었지. 이제 다시는 여행을 하지 않을 거야. 늙은 발린은 집을 비우고 없더라. 그래서 다시 여기로 돌아와 내내 여기 눌러 있었지. 이 일 저 일 손대 봤단다. 글도 더 썼고 노래도 몇 곡 지었지. 여기 요정들이 가끔 내 노래를 부르는데, 난 그게 꼭 날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리벤델에 어울릴 만큼 좋은 노래도 아닌데. 난 가끔 요정들이 부르는 노래도 듣고 사색에 잠기기도 하지. 여기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 같거든. 암튼 여러 모로 희한한 것이지. 난 여기 가만히 앉아서도 온갖 소식을 듣고 있어. 안개산맥 너머, 그리고 멀리 남부지방 소식까지. 하지만 샤이어 소식은 통 듣질 못햇지. 반지 소식은 들었단다. 갠달프가 가끔 여기 왔었으니까. 그는 내게 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여하간 그하고 난 최근 몇 년 사이에 각별히 친해졌지. 오히려 소식을 더 많이 들려 준 사람은 듀나단이지. 세상에, 그 반지가 그렇게 골치덩이일 줄이야! 갠달프가 점더 빨리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 게 유감이야. 차라리 그때 내가 직접 가져왔으면 오히려 큰 탈이 없었을걸 그랬어. 그 때문에 몇 번이나 호비튼으로 되돌아갈까 망설였는데 이젠 너무 늙었어. 모두들 못 가게 말리기도 했고, 갠달프와 엘론드가 특히 그랬지. 적이 지금 나를 찾으려고 사방에 쫙 깔려 있는데 혼자 가다가 산 속에서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뼈다귀도 못 추릴 거라는 거야. 게다가 갠달프의 반진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또다시 그 반지 문제에 간섭하려 하면 나나 남들에게 도움될 것이 없다 하더라. 갠달프 다운 기묘한 말이지. 하여간 자긴 지금 프로도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길래 그냥 잠자코 있었는데, 이렇게 무사히 건강하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구나!" 그는 잠깐 말을 끊고 수상쩍은 눈길로 프로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은밀히 물었다. "지금 그것을 가지고 있니?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듣고나니 더 궁금해지는구나 다시 한번 잠깐만 봤으면 싶다." "예, 갖고 있죠. 하지만 예전 그대로겠죠, 뭐." 프로도는 이상하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 알아. 잠깐만 보자." 빌보가 말했다. 프로도는 조금 전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기가 잠든 동안 누군가 반지를 새 줄에 꿰어 목에 걸어 준 것을 알고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줄을 끌렀다. 빌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프로도는 반지를 든 손을 재빨리 뒤로 감췄다. 그는 몹시 놀라고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빌보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어두운 벽이 생기는 것 같았다. 프로도는 그 벽 너머로 탐욕스러운 얼굴에 뼈만 앙상한 손을 내미는 주름살투성이의 왜소한 노인을 보았다. 그 노인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었다. 음악과 노랫소리가 한층 잦아들더니 방 안은 조용해졌다. 빌보는 프로도의 얼굴을 힐끗 보고나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그걸 치워라! 괴롭혀서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한 마음뿐이야. 모험에 끝이 있을까? 아마 없겠지. 누군가는 항상 그 짐을 지고 나가야 하는 것,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책을 다 써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지만 이젠 그 이야긴 그만두고 진짜 소식을 들려주렴. 샤이어 이야길 말이다!" 프로도가 반지를 치우자 눈앞의 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벤델의 불빛과 음악이 다시 그를 둘러쌌다. 빌보도 즐겁게 웃었다. 빌보는 프로도가 때때로 샘의 정정을 받아가며 들려주는 샤이어 소식은 무엇이든지, 마을에서 가장 작은 나무가 쓰러진 사건에서부터 호비튼에서 가장 어린 꼬마의 짓궂은 장난에 이르기까지, 흥미있게 들었다. 그들은 네 파딩 지역의 이야기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진록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몰랐다. 그 남자는 미소를 띠고 한동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빌보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이제 나타나셨소. 듀나단!" 프로도가 소리쳤다. "스트라이더! 당신 이름은 굉장히 많군요!" 빌보가 말했다. "스트라이더라니, 그건 난 첨 들어 본 이름인데. 그런 이름도 있었나요?" 스트라이더는 한바탕 웃고나서 말했다. "브리에선 그렇게들 부르지요. 그리고 이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쳐 줬습니다." 프로도가 물었다. "왜 듀나단이라 부르지요?" 빌보가 대답했다. "듀나단, 여기서도 종종 그렇게 부르지. 너도 둔 아단이란 요정들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다. 서역인, 즉 뉴메노르인이란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공부시간이 아니야!" 그는 스트라이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있었소, 친구? 왜 연회엔 참석하지 않았나요? 아웬도 거기 갔었다는데." 스트라이더는 어두운 표정으로 빌보를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가끔은 즐겁게 지낼 수 없는 때가 있지요. 엘라단과 엘로히르가 돌아왔는데 내가 기다리던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빌보가 말했다. "그렇다면 친구, 이제 그 소식을 들었으니 나한테 시간 좀 내주면 어떻소? 급히 당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소. 오늘저녁 잔치가 끝나기 전에 노래 한 곡을 완성시키라는 것이 엘론드의 명령인데 막히는 데가 있거든요. 자, 저쪽으로 가서 마저 해봅시다." 스트라이더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일단 한번 들어 보고요." 샘이 잠들었기 때문에 프로도는 한참 동안 혼자 있어야 했다. 리벤델의 요정들도 곁에 있었지만 그는 왠지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 있는 요정들은 음성과 악기소리가 어우러진 음악만을 조용히 들을 뿐, 다른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프로도도 음악을 들기로 했다. 그는 요정의 언어를 완전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노랫가락과 노랫말의 아름다움에 신비한 매력을 느꼈다. 어쩐 일인지 음성은 그대로 형상이 되어 지금까지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먼 나라의 빛나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불꽃이 환히 비치는 실내가 세상 끝에서 한숨지으며 떠도는 거품바다의 황금빛 안개처럼 보였다. 음악은 점점 더 꿈 같은 세계로 그를 이끌어 갔고 금과 은이 넘쳐 흐르는 끝없는 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늬를 그려 내며 머리 위를 흘렀다. 음악은 방 안의 요동치는 대기로 바뀌어 갔고 그는 그 속에 흠뻑 빨려들었다. 그는 휘황찬란한 세계에 제압당하여 깊은 잠의 나라로 빠져들어갔다. 꿈 같은 음악의 나라를 한참 동안이나 헤매던 그는 음악이 갑자기 유창한 강물로 변했다가 갑자기 낭랑한 음성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렴풋이 그 음성의 주인공이 빌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아련하더니 차차 또렷하게 노랫말이 들려왔다. 수부 이렌딜은 아르버니엔에서 쳐져 버렸다오. 그는 배 한 척을 지었지. 님브레딜에서 베어낸 나무로 은실을 짜서 돛을 만들고 등불도 은으로 이물은 백조 모양 깃발은 태양처럼 찬란한 빛깔로. 고대왕들의 갑옷과 사슬로 무장하고 빛나는 방패엔 룬 문자를 새겨 모든 부상과 재앙을 막았지. 활은 용뿔로 화살은 흑단으로 갑옷조끼는 은으로 칼은 옥수로 만들었지. 강철칼에 대작할 이 없었고 높은 투구는 철석 같았고 투구머리엔 에메랄드가 빛났네. 이승의 시간을 넘어 마법의 길에 미혹되어 북쪽 해안에서 먼 곳, 달빛과 별빛 속을 그는 헤맸다네. 얼어붙은 산 위에 어둠이 뒤덮인 빙하지대의 흑한을 뚫고 하계의 열기와 불타는 황야를 황급히 빠져나와 멀리, 별빛조차 없는 바다 위를 헤매다 마침내 무의 밤을 통과했으나 그는 빛나는 해변도 보지 못했고 그가 찾던 빛도 보지 못했네. 분노의 광풍이 그를 몰아쳤고 파도 속을 미친 듯이 도망친 그는 절망적인 심경으로 동쪽을 향하여 고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네. 그때 엘윙이 그에게로 날아와서 어둠 속을 환히 비추었다네. 금강석보다 밝은 불꽃으로. 그녀의 목걸이는 타는 듯 반짝거렸고 그녀는 그의 이마에 실마릴을 달아 주었네. 그는 살아 있는 빛의 왕관을 썼네, 불꽃처럼 환한 이마로 용감하게. 그는 다시 뱃머리를 돌렸네. 한밤중에 바다 건너 멀리서 순풍이 불어왔네 타르메넬의 강풍이었지. 죽음의 입김처럼 차가운 냉기로 바람은 그의 배를 몰아 어느 인간도 가보지 못한 길을 따라 오랫동안 버려진 회색바다를 건너 동에서 서로 그를 데려갔네. 끝없는 밤 내내 그는 노호하는 검은 파도에 등을 돌리고 역사가 시작되기 전 몰락한 어두운 해변을 따라 파도는 한없이 달렸네. 드디어 세상이 끝나고, 끝없는 파도가 누런 황금과 하얀 보석을 씻고 있는 진주해안에서 그는 아스라이 음악소리를 들었네. 발리노르와 엘다마르의 입구, 희미한 빛이 비치는 곳에 산이 말없이 다가오는 것을 그는 먼 바다 저편에서 보았네. 밤의 어둠을 빠져나온 방랑자는 마침내 백색항구에 도착했네, 녹색의, 아름다운 요정의 고향에. 바람은 짜릿하고 상쾌하고 일마린의 언덕 아래 가파른 계곡에 은은히 비치는 티리온의 불밝힌 등대가 유리처럼 투명하게 섀도우미어 호수 위에 빛나네. 그는 거기서 기사수업을 받았네. 그들은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고 늙은 현자들은 불가사의를 들려주었으며 황금의 하프를 가져다주었지. 그가 칼라시리아 골짜기를 지나 비밀의 땅으로 외로이 들어갈 때 그들은 그에게 요정의 흰 옷을 입히고 일곱 등불을 가져왔네. 그는 영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무수한 세월이 빛나고 있었고 가파른 언덕 위 일마린 왕국에서는 발라르왕이 영겁을 통치하고 있었네. 인간과 요정들은 들어 보지 못한 언어가 그곳에서 쓰였고 인간과 요정들은 알 수도 없는 그들의 미래가 그곳에서 보였네. 그들은 미스릴과 요정의 유리로 그에게 배 한 척을 새로 만들어 주었네. 배는 이물만 있을 뿐 노도 없고 은으로 만든 마스트에는 돛도 없었네. 한편으로는 등불삼아 한편으로는 불꽃처럼 환한 깃발삼아 엘베레스는 손수 실마릴을 배에 걸었네. 그리고 불멸의 날개를 그에게 만들어 주고 불사의 운명을 선사하였네. 가없는 하늘을 항해하며 해와 달 뒤에까지 다다르도록. 은빛 샘이 고요히 흘러내리는 영원한 저녁의 나라, 높은 언덕 위에서 그의 날개는 장대한 산맥 너머 방랑의 불꽃처럼 그를 데려갔네. 세상의 끝에서 다시 돌아선 그는 멀리 어둠 속을 날아서 그의 고향을 다시 찾아보고 싶었네. 안개 위 높은 곳을 외로운 별처럼 불타오르며 그는 날아왔네. 태양 앞에서는 먼 불꽃으로 북국의 회색 강물이 흐르는 여명의 새벽 앞에서는 경이로움으로. 그리고 중간계 위로 날아가 드디어 멀고먼 옛날 제1시대의 아낙과 요정여인들의 쓰라린 통곡을 들었네. 그러나 달이 질 때까지 사라져야 하는 둥근 별이 그의 무서운 운명, 인간들이 사는 이승의 해변에서는 절대로 머물 수가 없네. 그는 지금도 영원한 선구자,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언제나 멀리까지 비추어야 하리, 그의 빛나는 등불, 서역의 불꽃을! 노래가 끝났다. 프로도는 눈을 뜨고 빌보가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돌러싸여 의자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요정이 말했다. "한 번 더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빌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린디르.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다시 할 수가 없어요." 요정들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다지 피곤하지 않을 겁니다. 자기가 지은 노래는 아무리 불러도 지치지 않잖아요? 그리고 딱 한 번 들어서는 알아맞힐 수도 없어요!" 빌보는 악을 썼다. "뭐라고요? 어느 부분이 내 작품이고 어느 부분이 듀나단의 작품인지 구별할 수가 없단 말이오?" 그 요정이 말했다. "우리로서는 유한생명의 차이점을 알아내기가 힘들답니다." 빌보는 코방귀를 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린디르. 인간하고 호비트를 구별 못하다니. 당신 판단력은 기대 이하군. 당신은 완두콩하고 사과도 구별 못하겠구려." 린디르는 웃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양 눈에는 다른 양이 모두 달라 보이겠죠. 양치기 눈에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유한생명의 존재는 우리의 연구 대상이 아니에요. 우린 따로 할 일이 있답니다." 빌보가 말했다. "당신하고 다투고 싶지 않소. 너무 오랫동안 음악과 노랠 들었더니 졸리는군. 답은 당신 짐작에 맡기겠어요." 그는 일어나서 프로도에게 다가왔다. 그는 소곤소곤 말했다. "음, 이제 끝났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았나 보구나. 한 번 더 듣자는 소리 나올 때가 드문데. 넌 구별하겠니?" 프로도는 웃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실은 내가 다 지었단다. 아라곤이 녹옥을 자꾸 집어넣으라고 고집부리더구나. 딴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유를 모르겠어. 아니면 혹시 내 머리로 그 노래를 완성하기는 무리라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엘론드의 저택에서 감히 이렌딜의 노래를 하겠다면 자긴 알 바 아니라는 투로 말하던데. 그 사람 말이 맞는지도 몰라." 프로도가 말했다. "전 잘 모르지만 어쩐지 잘 어울린단 느낌이 들었어요. 노래가 시작될 때 저는 반쯤 잠이 든 상태였는데 제가 꿈꾸고 있는 어떤 것에서부터 노래가 계속되는 것 같더라니까요. 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누가 노래를 부르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어요." "이곳에 익숙해질 때까진 정신차리고 깨어 있기가 어렵지. 물론 호비트들이 요정들만큼이나 음악과 시와 이야기를 즐기는 건 아니겠지만. 여하간 요정들은 먹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여흥을 즐기는 것 같아. 아직도 한참 더 계속할 거야. 이야길 더 많이 들이려면 잠을 자두는 것이 어떻겠니?" "지금 여기서 나가도 돼요?" "물론이지. 지금은 일하는 시간이 아니고 노는 시간이야. 소리만 내지 않으면 마음대로 왔다갔다할 수 있어."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용히 어두 속으로 물러나 문간으로 향했다. 샘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고 깊이 잠들어 있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빌보와 함께 있게 된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프로도는 불의 방을 나오면서 뒤에서 누가 잡아끄는 듯 미련이 남았다. 그가 문을 나오는 순간에도 낭랑한 음성이 뒤따라왔다. 아 엘레베스 길도니엘, 실리브렌 펜나 미리엘 오 메넬 팔란 디리엘 오 갈라드레민 에노라스, 파누일로스, 리 리나돈 네프 애르, 시 네프 애론! 프로도는 걷다가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엘론드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불꽃이 마치 오뉴월 땡볕이 숲 속을 내리쬐듯 그의 얼굴 위에 부서졌다. 그 옆에는 아웬이 앉아 있었다. 프로도는 아라곤이 그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검은 망토는 뒤로 젖혀져 있었다. 그는 안에 요정의 갑옷을 받쳐 입은 것 같았으며 가슴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아웬이 프로도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멀리서부터 그에게 날아와 가슴을 찔렀다. 그는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 말없이 멈춰섰고 요정들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이야기와 가락이 절묘하게 섞여 많은 보석처럼 흘러나왔다. 빌보가 말했다. "엘레베스에게 바치는 노래란다. 그들은 그 노래를 부르고나서는 축복의 땅을 찬미하는 노래를 오늘밤 안에도 여러 번 부를 거야. 자, 가자!" 그는 프로도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은 정원 쪽으로 문이 나 있었고 남쪽으로는 브뤼넨 계곡이 보였다. 그들은 방 안에 앉아서 한참 동안 창 밖으로 멀리 가파른 산 위에 별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나먼 고향 샤이어의 하찮은 소식이나 주변을 둘러싼 어둠의 그림자나 위험은 이제 그들의 화제가 되지 못했다. 넓은 세상에서 그들이 함께 본 온갖 아름다운 것들, 요정, 별, 나무 그리고 빛나는 세월이 고요히 숲 속으로 흘러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직한 목소리로 나누었다.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뭐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샘이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미안하네만, 샘 갬기, 자네 주인이 잠자러 갈 시간이란 뜻인가?" 빌보가 물었다. "실은 저, 내일아침 일직 회의가 있답니다. 프로도씨는 겨우 오늘 아침에야 일어나시지 않았어요?" "좋아, 샘. 빨리 달려가서 갠달프에게 자네 주인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이르게. 프로도, 잘 자라! 정말이지 너를 다기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즐거운 이야길 나눌 상대는 호비트밖에 없어. 나도 이젠 늙어서 채워넣어야 될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잘 자라! 난 정원에서 산보나 하며 엘레베스의 별들을 찾아 봐야겠다. 잘 자거라!" 제14장 엘론드의 회의 이튿날, 프로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몸은 가뿐하고 상쾌했다. 그는 아래로는 물이 콸콸거리며 흐르는 브뤼넨 계곡 위 테라스를 따라 거닐면서 희미하고 서늘한 아침해가 먼 산 위로 떠올라 은빛 안개 사이로 햇살을 비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노오란 나뭇잎들에 매달린 이슬방울과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이 곧 스러질 듯 빛났다. 샘은 프로도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걷다가 가끔 아침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신기한 듯 멀리 동쪽의 험준한 산세를 바라보았다. 산꼭대기는 하얗게 눈을 이고 있었다. 그들이 오솔길을 꺾어 돌아간 곳에 놓인, 바위를 깎아 만든 의자에 도착했을 때 갠달프와 빌보는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것 같았다. 빌보가 프로도를 불러세웠다. "어이, 잘 잤니, 프로도? 오늘아침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겠어?" 프로도가 대답했다. "네 거뜬합니다. 하지만 전 오늘 이 골짜기나 먼저 올라가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멀리 리벤델 북쪽을 가리켰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걸세, 아직 계획에는 없지만, 여하간 오늘은 의논할 것이 많아." 갠달프가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맑은 종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갠달프가 말했다. "엘론드의 회의를 알리는 종소릴세. 자네와 빌보 모두 참석해야 하네." 프로도와 빌보는 마법사를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총총히 저택으로 내려갔다.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샘도 종종걸음치며 그들 뒤를 따랐다. 갠달프는 전날 저녁 프로도가 자기 친구들을 다시 만났던 현관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맑은 가을햇빛이 계곡을 꽉 채웠다. 하얀 물거품이 이는 계곡에선 물소리가 요란하게 위로 퍼져 올라왔다. 새들이 지저귀고 대지도 평화로 가득찬 것 같았다. 프로도는 이 아슬아슬했던 탈출과 바깥세상에서 점점 무성하게 퍼지고 있는 어둠에 관한 소문들이 다만 간밤의 어지러운 꿈자리였던 듯싶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친 얼굴들은 모두 굳은 표정이었다. 엘론드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몇몇 다른 인물들도 조용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글로핀델과 글로인이 보였다. 스트라이더는 여행할 때 입던 낡은 옷을 다시 입고 구석자리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엘론드는 프로도를 불러 자기 옆자리에 앉게 하고 모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이 호비트는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라 합니다. 이분보다 더 위험하고 절박한 문제로 이곳에 오신 분은 아마 없을 줄로 압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프로도와 초면인 인물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글로인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난쟁이는 그의 아들 김리였다. 그 밖에도 글로핀델 옆에 있는 다른 무사들도 몇몇 소개했다. 에레스토르가 그 중 우두머리였고 그와 함께 있는 이는 갈도르였다. 그는 신성한 뱃사공 키르단의 심부름을 전하기 위해 회색항구에서 달려온 요정이었다. 녹색과 갈색 옷을 입은 레골라스라는 낯선 요정은 머크우드 북쪽의 요정왕인 스란두일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보낸 사자였다. 그리고 또 한쪽 구석에 아름답고 기품있어 보이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에 오만하고 완고한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막 말에서 내렸는지 망토를 두르고 긴 구두를 신고 있었다. 사실 그의 복장은 매우 화려했고 망토 가장자리에는 모피가 둘러져 있었지만 오랜 여행으로 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그는 하얀 보석이 달린 은목걸이를 차고 있었고 머리채를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장식 허리띠 위에 달고 있던 은이 박힌 커다란 뿔나팔을 풀어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프로도와 빌보를 신기한 눈길로 계속 지켜보았다. 엘론드는 갠달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분은 남쪽에서 오신 보로미르입니다. 오늘새벽에 도착했지요. 우리들에게 자문을 구하러 오셨답니다. 그 말씀도 들어 볼 겸 이 자리에 참석하시라고 했습니다."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을 모두 다 이 자리에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깥세상, 특히 남쪽과 안개산맥 동쪽의 광활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주로 언급되었다. 프로도도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글로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어서 글로인이 말을 꺼낼 때마다 주의깊게 들었다. 이미 수공예품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바 있는 외로운산의 난쟁이들에게 대단한 시련이 몰아닥친 듯했다. 글로인이 말했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요. 우리 형제들에게 불안의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했어요.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소문은 은밀히 퍼져 갔어요. 우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있다. 넓은 세상에 나가면 부자도 되고 명예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었지요. 심지어 모리아를 들먹이는 이들도 있었답니다. 모리아는 지금 우리들 말로는 카잣 둠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상들이 건설한 옛 도시지요. 이제 우린 그곳으로 돌아갈 만큼 힘도 세졌고 수도 많아졌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이 생겨났어요." 글로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리아! 모리아! 북부의 불가사의! 우린 너무 깊어 그곳에 연연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끔찍한 공포를 초래하고 말았지요. 듀린의 후예들이 떠난 후로 그 거대한 저택들은 오랫동안 텅 빈 채 방치되어 왔지요. 그런데 다시 그 땅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겁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요.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드로르말고는 아무도 카잣 둠의 입구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도 결국은 죽고 말았지만요. 그런데 발린이 그 소문에 솔깃해서 그 땅으로 가겠다고 나선 겁니다. 국왕 다인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았지만 그는 오리와 오인을 비롯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그것이 약 삼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 얼마 동안은 소식도 있었고 그런 대로 견딜만했던 것 같았어요. 모리아의 입구를 무사히 통과해서 큰 공사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었거든요. 그런데 그 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어요. 그러나 일 년 전쯤 우리 국왕께 사자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그는 한밤중에 말을 타고 와서는 우리 왕을 대문 앞으로 불러 냈습니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위대한 군주 사우론이 너희 난쟁이들과 친교를 맺길 원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 징표로 옛날에 사우론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반지를 선사하겠다고 하면서 호비트들이 대체 누구며, 어디 살고 있는지 다그치더라고요. 그는 또 언젠가 어떤 호비트가 우리와 사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사우론도 이미 알고 있다고 협박을 했지요." 그는 잠시 빌보를 쳐다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얼마나 떨렸는지 대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그러자 그 사자는 그러지 않아도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더 낮추면서 말하더군요. 딴에는 부드럽게 대한다고 그랬겠죠. 그의 말은 대강 이랬습니다. 작은 우정의 표시로 사우론이 이런 부탁을 한다. 그 호비트 도둑놈들을 잡아서 그놈이 가진 작은 반지를 뺏어 와라. 그게 바로 놈이 도둑질한 물건이다. 사우론이 원하는 건 아주 하찮은 물건에 불과하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옛날에 너희 난쟁이 조상들 거였던 반지 세 개도 돌려주고 모리아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단 그 도둑놈이 아직 살아 있는지, 그렇다면 어디 살고 있는지 그 소식만 알아 와도 후히 보답을 해주고 사우론과 영원한 친교를 맺을 수 있을 거다. 만약 거절한다면 뒷일을 책임질 수 없다. 거절 하겠냐? 사우론의 말을 전하는 그 사자의 숨소리에는 마치 징그러운 뱀이 지나갈 때 내는 쉿쉿 소리가 섞인 듯했어요. 곁에 서 있던 우리는 모두 진저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다인께선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예스라고도 노라고도 답할 수 없다.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 그러자 사자는 좋을 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단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안 된다고 단서를 달고요. 우리 다인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시간은 내 마음대로다, 하시더군요. 사자는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고는 휭하니 말을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답니다. 하지만 그날 밤부터 우리들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우린 그 말이 협박이면서 동시에 속임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 사자의 섬뜩한 목소릴 되새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모르도르에 다시 들어선 세력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옛날에 우리를 배반했던 그놈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그 후로 두 번 더 왔습니다만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마지막 사자가 올해가 가기 전에 곧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인의 명을 받고 빌보에게 적이 찾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가능하다면 왜 그가 그 하찮다는 반지를 찾고 있는지 알고자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겁니다. 또 엘론드의 도움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 몰려들고 있습니다. 데일의 브란드왕에게도 사자가 찾아갔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도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우린 그가 항복해 버릴까 두렵습니다. 이미 그 나라 동쪽 국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대답고 해주지 않으면 적은 아마 자기 휘하에 있는 인간들을 움직여서 브란드왕과 다인 국왕을 공격할 겁니다." 엘론드가 말했다. "그래요, 잘 오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적의 음모를 알아내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죽든 살든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고민은 바로 모든 서부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의 일부입니다. 반지! 그 작디작은 반지를, 사우론이 그렇게 하찮게 여긴다는 그 반지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맞부딪쳐야 하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모이신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모두를 여기 모이시라고 청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여러분들은 모두 먼 곳에서 불원천리하고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 함께 모인 것이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것이 나을 겁니다. 지금의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소명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지금까지 서로 따로따로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숨기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현재의 위기상황의 실체를 모든 분들이 정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반지의 내력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 끝맺음은 다른 분이 하시더라도 시작은 제가 하지요." 엘론드가 낭랑한 목소리로 사우론과 권력의 반지, 그리고 먼 옛날 제2시대에 그것들이 만들어지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모두 온 신경을 집중시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이야기 중 일부를 아는 이들은 몇몇 있었으나 전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엘론드가 에레기온의 요정장인들, 그들과 모리아 사이의 우정, 사우론의 함정에 빠지게 된 그들의 지식욕 등을 이야기해 나가자 모두들 공포와 경이의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는 아직 사우론의 겉모습만 봐서는 그의 사악함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모리아의 난쟁이들은 그의 도움을 받아들여 세공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우론은 그들의 비밀을 모두 캐낸 후에 그들을 배반하고 은밀하게 불의 산에서 모든 반지의 주인이 되는 절대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켈레브림보르는 사우론의 음모를 알고 자신이 만든 세 개의 반지를 숨겨 버렸고 그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 에레기온은 전쟁 끝에 폐허가 돼버렸고 모리아의 입구는 막혀 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그는 절대반지를 추적해 왔다. 그러나 그 역사는 엘론드의 저서를 비롯하여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끔찍하고 놀라운 무용담으로 가득 찬 긴 이야기였기 때문에 엘론드가 간략하게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하늘 높이 치솟아올라 오전 한나절이 지나서야 그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는 뉴메노르의 영화와 몰락을 이야기했다. 인간의 왕들이 깊은 바다 속에서부터 파도의 날개에 실려 중간계로 되돌아왔다. 위대한 엘렌딜과 용감한 그의 두 아들 이실두르와 아나리온은 위대한 군주가 되었다. 그들은 아르노르에 북왕국에 세웠고 안두인 강 하구의 곤도르에 남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모르도르의 사우론이 그들을 공격해 왔고 그리하여 요정과 인간들은 마지막으로 동맹을 맺고 길 갈라드와 엘렌딜의 군대를 아르노르에 집결시켰다. 거기서 엘론드는 이야기를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 장엄하게 나부끼던 깃발들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난 그것을 보고 수많은 제왕과 장수들이 벨레드리안드에 모여들었던 제1시대의 영광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당고로드림이 무너지던 날만큼 웅장하거나 아름답지는 못했지요. 요정들은 당고로드림과 더불어 악의 무리가 영원히 멸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까?" 프로도는 혼자 생각에 빠져 있다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엘론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길 갈라드가 돌아가신 것은 아주 먼 옛날이라고 들었거든요." 엘론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난 제1시대의 일까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내 부친은 이렌딜이고 그분은 몰락하기 전의 곤돌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모친은 디오르의 따님 엘윙으로 디오르는 바로 도리아스 왕국의 공주 루디엔의 아드님이 되십니다. 나는 이 세계의 저쪽에서 세 시대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패배와 헛된 승리를 보아 왔습니다. 나는 길 갈라드의 전령으로 그의 군대와 함께 있었습니다. 다골라드 전투에 참가해서 모르도르의 암흑의 문 앞까지 가 보았는데 결국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지요. 길 갈라드의 창 애글로스와 엘렌딜의 검 나르실 앞에선 어느 적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로드루인 산 아래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길 갈라드는 죽고 엘렌딜도 나르실이 부러지면서 함께 죽었습니다. 물론 사우론도 역시 쓰러졌는데 이실두르가 자기 부친의 남은 칼자루로 사우론의 손에서 손가락을 잘라 반지를 뺏었던 것입니다." 이 말로 보로미르가 끼어들었다. "반지가 그렇게 되었군요. 남부에서도 그런 전설이 있었을 텐데 잊혀진 지 오랩니다. 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위대한 반지가 있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만 그의 나라가 멸망하면서 반지도 같이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이실두르가 가져갔군요! 흐음, 대단한 뉴스거립니다." 엘론드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실두르는 반지를 탐낸 것입니다. 반지를 처음 만들었던 오로드루인 화산 속에 반지를 던져 버렸어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실두르가 반지를 손에 넣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처절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질 때 그는 홀로 자기 아버지 곁에 서 있었고 난 키르단과 함께 길 갈라드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실두르는 우리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으로 반지를 가져야겠다고 하도 우겨서 우리는 더 이상 말리지 못했지요. 그러나 이실두르는 반지 때문에 죽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북쪽 사람들은 그 반지를 이실두르의 재앙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로서는 죽는 것이 더 다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지에 관한 소식들은 북쪽에만 전해졌고 그것도 극히 일부에서만 알고 있지요. 보로미르, 당신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실두르가 죽은 글래든 평원의 전투에서는 겨우 세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안개산맥을 헤맨 끝에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 이실두르의 종자였던 오타르인데 그는 엘렌딜의 부러진 칼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어린 나이로 여기 리벤델에 머무르고 있던 이실두르의 후계자 발란딜에게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나르실은 부러지고 빛도 잃었기 때문에 다시 벼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좌중을 한번 둘러본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동맹의 승리를 내가 헛된 것이라고 했던가요?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우린 그 전쟁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사우론은 사라져 버렸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반지 역시 사라져 버렸지 파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암흑의 탑도 무너져 버렸지만 그 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그 터는 반지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반지의 힘이 존재하는 한 그것도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많은 요정과 용감한 인간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아나리온이 전사하고 이실두르가 살해당했으며 길 갈라드와 엘렌딜도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인간과 요정들 사이에 그 같은 동맹이 맺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수가 불어났고 요정은 줄어들어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거지요. 그리고 그날 이후 서부인들은 퇴보를 해 지금은 평균수명도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글래든 평원에서 살육이 있는 후 북부에서는 서역인들의 숫자가 감소하더니 에벤딤 호수 옆의 도시 아누미나스가 폐허가 되고 발란딜의 후계자들은 노스 다운즈의 고원에 위치한 포노스트로 이동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곳도 황량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사자의 제방이라고 부르며 접근하길 꺼립니다. 왜냐하면 아르노르의 주민들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또 적에게 살해당해 이제는 풀만 무성한 언덕 위에 무덤들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 이야기를 이었다. "남쪽의 곤도르 왕국은 더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요. 몰락하기 직전의 뉴메노르의 영광을 회상시키기라도 하듯 한동안 그들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높은 탑과 견고한 요새, 그리고 많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구를 건설했고 왕들이 쓰던 날개 달린 왕관은 다른 많은 종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중심도시는 별들의 요새라고 하는 오스길리아스였는데 그 한가운데로 안두인 대하가 흘러갑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어둠의 산맥 입구에 떠오르는 달의 탑이라는 뜻의 외곽도시 미나스 이딜을 건설하고 서쪽으로는 백색산맥 기슭에 석양의 탑이라는 미나스 아노르를 건설했습니다. 그 왕궁에는 흰 성수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실두르가 서역을 떠나올 때 깊은 바다 속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어 키운 것입니다. 그 씨앗은 원래 에레세아에 있던 것이고 그 이전에는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던 그 옛날 서쪽 끝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간계의 세월이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며 아나리온의 아들 메넬딜의 혈통도 끊어지고 그 성수도 시들어 버리자 서역인들의 혈통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의 피와 섞이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모르도르의 성채를 감시하던 경비병이 조는 사이에 어둠의 세력이 고르고로스로 기어들었고 결국에는 정체를 드러내 미나스 이딜을 공격했습니다. 그 후 그 성은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게 되었지요. 그 성은 미나스 모르굴, 즉 마법의 탑으로 불리게 되었고 미나스 아노르도 새로이 미나스 티리스, 즉 감시탑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두 도시는 계속 전쟁을 벌였고 그 사이에 위치한 오스길리아스는 폐허가 되었지요. 그 와중에 어둠의 세력은 점점 불어났습니다. 많은 생명이 그 전쟁에서 희생되었지요. 하지만 미나스 티리스의 왕들은 적들과 끝까지 싸워 왔습니다. 아르고나스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수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내 이야기도 끝을 내겠습니다. 이실두르의 시대에 절대반지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요정들의 세 반지는 그 지배에서 풀려났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것들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절대반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발견되는 과정에선 내가 한 일이 별로 없으니 다른 분이 말씀하시겠지요."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키 크고 오만한 보로미르가 벌떡 일어났다.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곤도르에 관해 말씀드릴 것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곤도르에서 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곳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여러분께서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멸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위급한 상황에 놓였었으며 또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곤도르에서 서역인의 혈통이 끊어지고 그들의 모든 자존심과 위엄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은 믿지 말아 주십시오. 용감한 우리 곤도르인들이 있었기에 동쪽의 야만족들도 멈칫거리고 있었고 모르굴의 공포도 힘을 죽여 왔던 것입니다. 서부의 보루, 즉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서부 평화와 자유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만일 안두인 수로를 빼앗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멀지 않은 줄 압니다. 이름모를 적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운명의 산 오로드루인에서는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고 암흑의 세력은 더 강성해져 우리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습니다. 적이 안두인 대하 동쪽의 아름다운 땅 이딜리엔에 쳐들어왔을 때 우리에겐 튼튼한 요새와 막강한 무기가 있었음에도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올 6월에도 모르도르의 급습으로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중과부적이었지요. 적은 동부인들, 그리고 그 잔인한 하라드인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패배한 것은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어떤 힘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석자들은 호기심을 느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달빛 아래서 거대한 흑기사의 형체를 보았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그만 나타나면 적은 미친 듯 사기가 오르고 우리 편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말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달아나 버립니다. 동쪽을 지키던 병사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 겨우 되돌아왔습니다. 오스길리아스의 폐허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다리마저 파괴되었지요. 저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다리를 지키다가 다리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헤엄을 쳐 강을 건너고 보니 겨우 네 명만이 돌아왔습니다. 저와 제 동생,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안두인 대하 서안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 등뒤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우리 이름을 들으면 찬사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찬사는 많아도 도와주는 이는 없습니다. 다만 로한에서 우리가 요청하면 도와주러 오기로 했을 뿐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전 엘론드왕을 뵙기 위해 천리길을 달려왔습니다. 백 일하고도 열흘이 넘게 걸린 긴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은 동맹군이 아닙니다. 엘론드왕의 명성은 무력이 아니라 지혜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조언을 구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어려운 수수께끼를 하나 풀기 위함입니다. 지난번 기습을 받던 날 저녁 제 동생은 잠자리를 설치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비슷한 꿈을 다시 꾸었고 저 역시 그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보니 동쪽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천둥소리가 커지는데 서쪽에서는 희미한 별이 맴돌면서 그 사이의 하늘로부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러진 검을 찾으라 그것은 임라드리스에 있다. 그곳에서 조언을 얻으라 모르굴의 마법보다 강한 조언을. 그곳에서 한 징조를 보리라 종말이 멀지 않았다. 이실두르의 재앙이 다시 일어나고 하플링이 나설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미나스 티리스의 영주이신 제 부친 데네도르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역사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부친께서는 임라드리스라는 건 예전 요정들의 언어로, 역사와 고전의 대가인 엘론드가 살고 있는 북쪽의 골짜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동생이 상황의 긴박함을 깨닫고 자신이 꿈을 먼저 꾸었으니 임라드리스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길이 너무 험하고 위험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제가 직접 나선 것입니다. 저의 부친께서 허락하려 하시지 않았지만 저는 멀고먼 길을 헤맨 끝에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이름은 알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엘론드의 저택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 엘론드의 집에서 당신은 그 수수께끼를 풀게 된 것이오." 아라곤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는 엘론드의 앞 테이블에 자기 검을 던졌다. 칼날은 잘려 있었다. "부러진 검이 여기 있소." 아라곤이 말하자 보로미르는 순찰자의 여윈 얼굴과 빛바랜 망토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미나스 티리스와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러자 엘론드가 대신 대답했다. "그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며, 미나스 이딜의 왕인 엘렌딜의 아드님 이실두르의 직계장손입니다. 그는 북부의 듀너데인들의 지도자이지만 그들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프로도는 갑자기 놀라 벌떡 일어나며 마치 반지를 내놓으라는 명령을 듣기라도 한 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건 제가 가질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져야 합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자네도 나도 그 반지의 주인은 아니지. 다만 잠시 동안 자네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것일세." 그러자 갠달프가 엄숙하게 말을 했다. "반지를 내놓게, 프로도! 때가 왔네. 그것을 높이 들어 보로미르가 수수께끼의 나머지를 깨닫게 해주게!" 좌중은 술렁거렸고 모든 이들의 눈길이 프로도를 향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두렵기도 해 몸이 떨렸다. 그리고 어찌된 셈인지 반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고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꺼려졌다. 마침내 그가 떨리는 손으로 그들 앞에 반지를 높이 들어올리자 반지는 희미한 섬광을 발했다. 엘론드가 말했다. "이실두르의 재앙을 보시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반지를 바라보는 보로미르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하플링이라! 그렇다면 드디어 미나스 티리스의 종말이 임박한 것이 아닙니까? 부러진 검은 찾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미나스 티리스의 종말이라고 하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종말이 임박한 것이 사실이오. 여기 이 부러진 검은 주인과 함께 꺾인 바로 그 엘렌딜의 칼입니다. 다른 유품들은 모두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가보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예로부터 이실두르의 재앙, 즉 반지가 발견되면 칼도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찾던 칼을 발견했으니 어떻게 하겠소? 엘렌딜 왕가가 곤도르로 돌아오기를 원하오? 그러자 보로미르는 거만하게 말했다. "나는 무슨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단지 수수께끼의 의미를 물으러 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엘렌딜의 검이 기대 이상의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만일 그것이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정말로 벗어났다면 말입니다." 그는 아라곤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프로도는 자기 옆에 앉은 빌보가 몹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그는 자기 친구가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 것 같았다. 빌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시를 한 수 읊었다.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며, 모든 방랑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설 것이며, 잃어버린 왕관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리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시사하는 바는 많을 것입니다. 만일 엘론드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면 말입니다. 혹시 이 노래를 듣고 백 일하고도 열흘을 달려오신 보람을 얻으시려면 귀기울여 잘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코방귀를 뀌며 앉았다. 그리고는 프로도를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노래는 듀나단의 정체를 처음 알았을 때 내가 그를 위해 직접 지은 거야. 나의 모험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그의 시대가 도래할 때 나도 그와 함께 나가고 싶을 정도지." 아라곤은 빌보를 향해 웃어 보이고 는 보로미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로서는 당신이 의심하는 것을 이해할 만도 합니다. 데네도르의 거실에 위엄있는 모습으로 새겨진 엘렌딜이나 이실두르와는 너무도 닮은 데가 없으니 말이지요. 나는 이실두르의 후손일 뿐 이실두르가 아니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곤도르까지의 거리는 내가 지금까지 걸었던 길에 비하면 극히 짧은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넜으며 황야를 해매기도 하고 별빛마저 낯선 하라드와 룬의 오지까지도 여행을 했소. 그러나 내게 고향이 있다면 그것은 이곳 북부입니다. 왜냐하면 발란딜의 후예들이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찬란한 시대는 이제 어둠 속에 묻혀 있고 우리들은 수도 줄어들었지만 언제나 이 칼은 새로운 주인에게로 전해져 내려왔소. 하지만 보로미르, 이 점은 분명히 밝혀 두오. 외로운 사람들이오, 우리는. 황야의 순찰자, 말하자면 사냥꾼이지요. 그러나 언제나 적의 하수인들만을 사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모르도르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보로미르, 곤도르가 탄탄한 요새였다면 우리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소. 당신들의 견고한 성벽과 빛나는 칼로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지요. 당신은 곤도르 밖은 잘 모를 겁니다. 조금 전에 평화와 자유라고 했소? 우리가 없었다면 북부는 그것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공포가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입니다. 어둠의 무리들은 인적없는 산 속에서, 햇빛 없는 숲 속에서 기어 나오지만 우리를 보면 달아납니다. 만일 우리 서역인들이 잠자고 있다면, 아니 진작에 모두 무덤 속에 들어갔다면 고요한 대지와 순박한 사람들의 잠자리에 어떻게 평화가 깃들일 수 있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있겠소? 그러나 당신들은 찬사라도 받지만 우리는 그렇지도 못합니다. 우리와 맞부딪치면 길손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마을사람들은 모욕적인 별명까지 붙여 줍니다. 지금도 내가 계속 지켜 주지 않으면 적들이 단 하루만에 쳐들어와 심장을 얼려 버리고,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마을에 살고 있는 한 뚱보는 나를 '스트라이더'라고 부릅니다. 꺽다리란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걱정근심없이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음지에서 묵묵히 일할 생각이오. 세월이 바뀌고 풀은 더 무성해졌지만 그 일은 언제나 우리의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다시 변하기 시작했소.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었단 말이오. 이실두르의 재앙이 발견되고 전쟁이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 칼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것이며 나도 곧 미나스 티리스로 갈 계획이오."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이실두르의 재앙이 발견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이 하플링의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이실두르가 죽은 것은 이 시대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어떻게 마법사께서는 이 반지가 그의 반지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반지가 이제 와서 발견되었고, 그것도 이렇게 이상하게 생긴 심부름꾼 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 그 이야기도 곧 하지요." 엘론드가 말하자 빌보가 외쳤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엘론드! 벌써 한낮이에요. 뭘 좀 먹고 기운부터 차려야 하겠습니다." 엘론드가 웃으며 말했다. "귀하께 발언권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드립니다. 자, 이야기하세요. 혹 그 이야기를 아직 시로 만들지 못했다면 그냥 쉬운 말로 하세요. 가능하면 짧게 빨리 끝내시는 것이 건강에도 좋으실 겁니다." 빌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명령을 받았으니 하지요. 이제부터 제가하는 이야기는 진짜이니 혹시 예전에 다르게 들으신 분이 있다면," 하면서 그는 글로인을 흘끔 보았다. "용서하시고 그 이야기는 잊어 주십시오. 그 당시에는 반지를 내 것으로 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섰고, 또 도둑이라는 누명을 벗으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던 겁니다. 이제야 제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는군요. 여하튼 지금부터는 정말 사실 그대롭니다." 빌보의 이야기를 난생 처음 듣는 이들도 있어 그들은 그 늙은 호비트가 골룸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할 때 신기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빌보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도 않은 듯 수수께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야기했다. 만일 말리지만 않았다면 그는 당시의 난쟁이 일행이나 샤이어에서 사라지던 사건까지도 신이 나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론드가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친구.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반지는 당신의 후계자인 프로도에게 넘어갔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리하여 빌보보다는 마음이 덜 내키는 듯했으나 프로도가 반지를 자신이 보관하기 시작하던 때부터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호비튼에서 브뤼넨 여울가지 오는 도중의 이야기에서 여러번 질문이 들어와 그는 대답을 해주었다. 암흑의 기사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전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빌보가 말했다. "잘했다. 중간에 이 친구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더 훌륭했을 텐데 말이야. 몇 군데 기록할 곳이 있었는데, 차라리 나중에 다시 함께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 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사건들만으로도 몇 장은 채울 수 있겠구나!" "예, 이야기가 상당히 길지요. 하지만 저로서도 불확실한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좀더 알아봐야겠지요. 특히 갠달프에 대해서 말이에요." 회색항구에서 온 갈도르가 옆에 있다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엘론드를 향해 말했다. "마법사께서는 이 호비트들의 반지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그 절대 반지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신 모양인데 견문이 부족한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무슨 증거가 있으면 들려주실 수 없습니까? 그리고 하나 더 여쭙고 싶은 것은 사루만은 어떻게 된 겁니까? 반지에 관한 한 그분이 조예가 깊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군요.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그분께 들려 드리면 그분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그러자 엘론드가 대답했다. "그 문제도 모두 관련이 있습니다, 갈도르. 내가 잊어버린 것이 아니니 모두 논의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갠달프께서 밝혀 주셔야 할 텐데, 맨 마지막에 말씀해 주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그분이 어른이 되시니 예의를 차려야지요." 그 말에 갠달프가 입을 열었다. "갈도르, 어떤 이들은 글로인이 가져온 소식이나 프로도가 추격을 받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가 가진 것이 적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반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홉 반지는 나즈굴이 가지고 있고 일곱 반지는 빼앗기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이 말에 글로인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개의 반지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이 반지는 무엇입니까? 반지를 잃어버린 것과 찾는 것 사이에는 강과 산이 다른 것만큼이나 거대한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법사의 지혜의 부족은 드디어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었지요. 적은 우리 등뒤에,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에 와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 정확히는 올 여름까지는 적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몇 년 전에 혼자서 돌 굴두르의 마법사를 찾아갔던 일이 있습니다. 몰래 숨어들어갔지요. 거기서 우리들의 우려는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우리의 옛 원수 사우론이었습니다. 다시 형체를 회복하고 세력을 규합하던 중이었습니다. 역시 기억하실지 모릅니다만 우리가 몇 년 전 그를 공격하려 했을 때 사루만이 말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오랫동안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어둠의 세력이 커지자 사루만도 자기 주장을 거두었고 신성회의에서는 무력으로 사우론을 머크우드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지가 발견되던 해의 일입니다. 우연이라면 참 이상한 우연이지요. 그러나 엘론드께서 예측한 대로 우리는 너무 늦었었지요. 사우론 역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오랫동안 우리의 공격에 대비해 온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이 준비될 때까지 그의 아홉 명의 부하 반지악령들이 빼앗은 미나스 모르굴을 통해 모르도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들에게 굴복하는 체하고 몸을 피해 결국 암흑의 탑으로 되돌아가 암흑의 왕국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신성회의가 열렸지요. 그가 전보다 더 절대반지를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혹시 반지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소식을 들었나 싶어 걱정을 했지요. 그러나 사루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전에 하던 이야기만 되풀이했습니다. 절대반지는 중간계에서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여전히 반지는 분실된 채라는 것을 적이 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잃어버린 것이니까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두려워 마시오. 그는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오지 않았습니까? 반지는 안두인 대하 속에 빠졌고 오래 전 그가 잠자는 동안 강물을 따라 바다로 떠내려갔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바다 속에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갠달프는 입을 다물고 멀리 아개산맥의 연봉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 산 속 깊은 곳에 온 세계를 흔들어 놓을 재앙의 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내 실수였습니다. 사루만의 말을 너무 믿었지요. 그의 배반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상태가 지금처럼 조급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자 엘론드가 그를 위로했다. "우리 모두의 실수지요. 그래도 당신마저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암흑이 우리를 덮쳤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반지가 어떻게 골룸의 손에 들어갔고 또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지켜보았지요. 그가 자기 보물을 되찾기 위해 어둠 속에서 곧 뛰쳐나올 것으로 짐작하고 말입니다. 그는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곧 사라져 버렸지요. 그런데 그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문제를 잠시 보류해 두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그랬듯이 그냥 기다리며 지켜보기로 한 겁니다. 걱정만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섬뜩한 공포가 느껴지면서 의혹이 생겼습니다. 호비트의 반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만일 내 걱정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새나가면 오히려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지요. 암흑의 탑과의 기나긴 전쟁을 돌이켜볼 때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배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이 십칠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쯤 나는 갖가지 행색의 첩자들이, 심지어 짐승이나 새들까지도 샤이어에 모여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걱정은 더 커졌지요. 그래서 나는 서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의 순찰이 두 배로 강화되었지요. 그리고 나서 이실두르의 후손인 아라곤에게 내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나서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저는 좀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골룸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실두르의 후손인 제가 이실두르의 죄과를 속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갠달프와 함께 절망적인 수색에 나섰습니다." 이어서 갠달프가 어둠의 산맥과 모르도르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윌더랜드를 헤맸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서 우리는 골룸이 어둠의 산맥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나는 결국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포기한 와중에도 갑자기 골룸을 찾지 않아도 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절대반지라면 반지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루만이 신성회의에서 한 말이 기억났던 거지요. 그 당시에는 반쯤 흘려 버렸던 말인데 그때서야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아홉, 일곱, 세 개의 반지는 각각 고유한 보석이 있지만 절대반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둥글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작은 반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사람은 그 위에다 보통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무슨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그는 그 표시가 무엇인가는 확실히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것을 알고 있을까? 반지를 만든 사람? 아니면 사루만? 그가 아무리 반지에 조예가 깊다 하더라도 분명히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다. 사우론말고 누구의 손이 반지가 없어지기 전에 그것을 만져 보았을까? 그렇다, 이실두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골룸을 쫓는 일을 포기하고 급히 곤도르로 내려갔습니다. 옛날엔 우리 마법사들도 그곳에선 환대를 받았습니다. 사루만이 제일 환대를 받았지요. 그는 그곳 왕들의 초대를 여러 번 받은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도착하니 데네도르공은 나를 전만큼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더군요. 하지만 못마땅해 하면서도 창고에 쌓아 놓은 두루마리 문서와 서적들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 말씀대로 고대의 기록과 이 도시가 처음 세워지던 때의 자료만 읽으시겠다면 한번 찾아봐도 좋습니다. 내가 보기엔 지나간 세월보다 다가올 날이 더 어두워 보입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서 오랜 세월 동안 연구에 몰두했던 사루만보다 학식이 더 깊지 못하시면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무슨 큰 소득을 올리지는 못할 겁니다. 나도 이쪽 방면에는 좀 아는 바가 있습니다.' 사실 그의 창고에는 고서에 정통한 대가들도 읽을 수 없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말과 글은 후대로 오면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로미르, 지금도 미나스 티리스에 가면 이실두르가 직접 만든 두루마리가 하나 있는데 사루만과 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왕이나 학자들도 그 기록을 해독하지 못할 겁니다. 일부의 기록에도 있듯이 이실두르는 모르도르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곧바로 떠나지 않았던 거지요." 보로미르가 끼어들었다. "북부에서도 그것을 아는 분이 계시는군요. 곤도르에서는 모두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미나스 아노르로 가서 조카 메넬딜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왕위를 맡기기 전에 남왕국의 법도를 가르친 것이지요. 그때 그는 죽은 동생을 기억하면서 서역에서 가져온 흰 성수의 마지막 묘목을 거기에 심었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다시 말했다. "그때 그 두루마리도 함께 남긴 거요. 곤도르에서는 그 점은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그 기록은 바로 반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절대반지는 이제 북왕국의 국보로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엘렌딜의 후예가 이곳에도 있으니 그것에 관한 기록은 곤도르에 남길 것이다. 이는 그 영광스런 순간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나서 이실두르는 반지를 발견하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처음 만졌을 때 그것은 달아오른 석탄처럼 뜨거웠다. 내 손은 시커멓게 눌어붙었고 나는 이 통증에서 완쾌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동안 반지는 벌써 식었고, 그 아름다움이나 모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크기는 작아진 듯하다. 반지에 새겨진 글자는 처음에는 빨간 불꽃처럼 선명하더니 이젠 식어서 겨우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모르도르에는 그렇게 정교하게 샛길 문자가 없어서 에레기온의 요정문자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데 상스럽고 거친 것으로 보아 암흑의 땅의 말인 것 같다. 무슨 나쁜 뜻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나중에 기억할 수 있도록 여기 기록해 둔다. 반지는 아마도 사우론의 뜨거운 손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 검은 손은 손이면서도 불이 타오르듯 뜨거웠고 길 갈라드도 그 손에 죽음을 당했다. 반지가 다시 뜨거워진다면 글자가 다시 선명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사우론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이것에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비록 많은 고통이 거기 담겨 있기는 하나 이것은 내게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의 추적은 끝이 났습니다. 이실두르가 추측한 대로 새겨진 글은 모르도르와 암흑의 탑 하수인들이 쓰던 언어를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우론이 그 절대반지를 완성해 손가락에 끼던 날 세 개의 반지를 만든 켈레브림보르가 그 사실을 알고 멀리서 그가 그 말을 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악한 흉계는 세상에 폭로되었지요. 나는 즉시 데네도르공과 작별하고 북쪽으로 가다가 로리엔에서, 아라곤이 그곳을 지나갔고 골룸이라는 녀석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아라곤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혼자서 얼마나 위험한 고비들을 넘겼는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는 새삼스럽게 할 필요도 없지요. 누구든지 암흑의 문 근처를 헤매거나 모르굴 계곡에서 죽음을 꽃들을 밟아 볼 생각이라면 그런 위험은 각오해야지요. 저 역시 결국에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제가 찾고 있던 것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어떤 진흙탕가에서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발자국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또 급한 걸음이었는데 모르도르가 아니라 그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늪 주위를 따라 계속 추적해 가다가 드디어 골룸을 발견했습니다. 냄새나는 물웅덩이가에 숨어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드디어 그를 붙잡게 된 거죠. 그의 몸은 늪지대의 푸른 진흙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평생 동안 저를 증오할 텐데 걱정이 되는군요. 제가 붙잡았더니 이빨로 깨물길래 혼을 좀 내주었거든요. 그의 입에서 얻어낸 것이라고는 고작 그 이빨자국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제 여행 중에서 가장 힘든 길이었습니다. 골룸의 목에 줄을 걸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 앞장을 세워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끌고 왔는데 배고프고 목이 마르니까 겨우 말을 듣더군요. 그렇게 해서 사전에 약속해 두었던 대로 그놈을 머크우드로 데려가 요정들게 맡겼습니다. 떼어 두고 나니까 살 것 같더군요. 냄새가 정말 고약했지요. 저로서는 그놈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갠달프와 함께 오랫동안 그놈을 심문해야 했기에 할 수 없이 참아야만 했습니다." 갠달프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길고 지루한 작업이었지요.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그가 반지를 잃게 된 경위가 이제 방금 빌보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하긴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지요.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 밖에도 골룸이 그 반지를 글래든 평원근처의 안두인 강에서 주웠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리고 그의 말로는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골룸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었겠지요. 반지의 힘이 그의 수명을 그 동족들보다 훨씬 길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위대한 반지들만이 지니는 능력이지요. 갈도르, 혹시 아직도 의문점이 남아 있다면, 아까 내가 말한 증거가 또 있지요. 당신이 방금 본 이 반지는 둥글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듯하지만 사실 거긴 이실두르가 기록했던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보기 위해선 이 황금빛 반지를 잠시 불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렇게 해보았지요. 그리고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아쉬 나즈그 두르바툴루크, 아쉬 나즈그 그림바툴, 아쉬 나즈그 스라 카툴루크 아그부르줌 이쉬 크림파툴." 마법사의 목소리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고 강렬한 쇳소리로 변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한낮의 태양을 가리는 듯하더니 현관이 잠시 어둠에 휩싸였다. 모두들 몸을 떨었고 요정들은 귀를 막았다. "회색의 갠달프, 지금까지 임라드리스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의 언어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참석자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고나서야 엘론드가 말했다.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도 안 되겠지요. 하지만 엘론드, 나는 지금 당신의 용서를 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서부 방방곡곡에 즉시 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의심을 버리고 우리 마법사들의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적의 이 보물반지에는 그의 모든 원한과 옛부터 전해 오는 마력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에레기온의 장인들이 듣고, 자신들이 사우론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그 말은 바로 사우론이 위세를 떨치던 암흑시대로부터 전해 오는 말입니다.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은 절대반지. 여러 친구분들, 나는 골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으려 했고 또 이야기도 분명치 않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그가 모르도르에 갔었으며 거기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강제로 털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은 절대반지가 발견되었으며 오랫동안 샤이어에 비밀리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하수인들이 거의 우리의 문 앞까지 그것을 추적해 왔었으니 이제 적은 곧, 아니 이 말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이미 우리가 여기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모두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침내 보로미르가 입을 열었다. "그 골룸이란 놈이 덩치가 작다고 하셨습니까? 작지만 말썽꾼이라고요? 그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처리하셨지요? 아라곤이 대답했다. "그냥 감옥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 전에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받았던 모양인데 사우론에 대한 공포가 아직 마음속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머크우드의 날쌘 요정들이 그를 꼼짝 못하게 지키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는 원한도 대단해 그렇게 야위고 지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놀랄 지경이었지요. 지금이라도 풀려나게 된다면 그놈은 무슨 말썽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모르도르를 떠나도록 허락을 받은 것도 분명히 무슨 흉계가 있을 겁니다." "아, 큰일이군요!" 갑자기 레골라스가 외쳤다. 아름다운 그 요정의 얼굴에 대단히 근심스런 표정이 번졌다. "제가 가져온 소식을 이제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나쁜 소식이 되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나니 정말 큰일입니다. 지금 골룸이라고들 부르시는 그 스메아골이 탈출했습니다." 그러자 아라곤은 비명을 질렀다. "탈출! 정말 흉보로군! 그 때문에 장차 큰 화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스란두일 같은 분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하셨을까요?" "경계가 소홀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비가 지나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놈은 외부의 도움도 받았던 것 같고, 우리의 동태가 외부에 필요 이상으로 알려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힘들기는 했지만 갠달프의 부탁대로 주야로 철저하게 감시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을 회복시켜 보라는 당부도 있고 해서 차마 지하토굴 속에 계속 가둬 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더 못된 생각을 할까봐 걱정도 되고 해서지요." "당신들은 나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지 않소?" 글로인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요정왕의 깊은 감옥에 갇혔었던 옛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갠달프가 그의 입을 막았다. "자, 잠깐! 친애하는 글로인, 이야기를 막지 마오. 그 일은 유감스럽게도 오해에서 비롯됐던 것이고 벌서 오래 전에 해결되지 않았소? 만일 요정과 난쟁이 사이에 있었던 모든 원한을 여기 다시 끌어들인다면 우린 지금 당장 회의를 그만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오." 글로인이 일어나 절을 했고 레골라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맑은 날이면 우리는 골룸을 데리고 숲 속을 거닐곤 했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나무들로부터 떨어진 곳에 우리가 자주 올라가곤 했던 키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우리는 가끔 골룸을 가장 높은 가지 끝까지 올려보내 시원한 바람을 쐬게 해주었지요. 물론 나무 밑에는 보초를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내려오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보초들도 따라 올라갈 마음은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나뭇가지에 손뿐만 아니라 발로도 매달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늦게까지 나무 밑에 앉아 있었지요. 바로 그 여름날 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 오르크들이 갑자기 쳐들어왔습니다. 한참 싸워서 우린 결국 그들을 격퇴했습니다. 수가 많고 용감하긴 했지만 그들은 산을 넘어왔고 숲 속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으니까요. 싸움이 끝나고 보니 골룸이 없어졌고 보초들도 살해되거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의 공격이 골룸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골룸은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그 탈주가 어떻게 계획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골룸도 교활할 뿐만 아니라 적의 첩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용이 죽던 해에 쫓겨났던 오르크들이 무리를 지어서 되돌아왔고 머크우드도 우리가 사는 곳을 제외하고는 다시 무서운 땅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골룸을 다시 붙잡지 못했지요. 그의 발자국은 수많은 오르크들과 함께 깊은 숲 속을 향하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더군요. 흔적도 곧 사라져 버렸고 더 이상 추격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돌 굴두르에 가까워졌고 그곳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니까요." 갠달프가 입을 열었다. "흠, 그렇게 도망쳐 버렸단 말씀이지! 그를 다시 쫓을 시간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지요. 아마 그놈은 사우론이나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큰일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갈도르의 다른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지요. 사루만은 어떻게 되었으며 이런 경우에 그는 어떤 충고를 할 것인가? 이 이야기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엘론드께서도 간략하게만 알고 계시지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할 모든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반지의 긴 내력 중에서 맨 마지막 장이 되는 셈입니다." 갠달프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6월 말경 나는 샤이어에 있었는데 까닭없이 불안한 느낌이 들어 말을 타고 그 좁은 지역의 남쪽 경계로 내려가 보았지요. 정체모를 위험이 다가오고있다는 예감이 들었었지요. 곤도르에서 전쟁이 벌어져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는데, 암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에는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몇몇 피난민들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물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얼굴에서 짙은 공포의 그림자를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초록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던 중 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은 풀을 뜯게 내버려 두고 길가의 둑에 앉아 쉬고 있는 한 여행자를 만났지요. 그는 갈색의 래더가스트였습니다. 그 역시 나 같은 마법사인데 머크우드 변경의 로스고벨에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서로 연락이 끊겼던 사이였습니다. '갠달프!' 그가 외치더군요. '당신을 찾고 있었소. 당신이 샤이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외딴 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기까지 찾아 나선 길이오.' '당신 정보가 정확하군요. 하지만 다른 길손을 만나면 그렇게 묻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샤이어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말이오. 그런데 무슨 일이오? 급한 일인 모양인데. 당신은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길에 잘 나서지 않는 성미 아니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급한 전갈이오. 상서롭지 못한 소식이지요.' 그리고는 마치 숲 속에서 누가 엿듣기라도 할 듯 사방을 둘러보고 소리를 낮추더군요. '아홉 나즈굴이 다시 나타났소. 몰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오고 있소. 흑기사 복장으로 말이오.' 나는 그제서야 까닭없이 불안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지요. '적은 뭔가 대단히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오. 하지만 왜 이렇게 멀리 황량한 오지까지 찾아드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무슨 말씀이오?' '어디를 가든지 기사들은 샤이어란 곳에 관해 묻고 있다고 하오.' '샤이어라!' 나는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여덟 명의 나즈굴이 그 무시무시한 대장 아래 뭉쳐 아홉 명의 반지악령으로 떼지어 있을 때는 상대하기 두려운 법이지요. 그는 옛날에는 흉맹한 마왕으로 사악한 마술도 부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죽음의 공포까지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이렇게 물었지요.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누가 당신을 보냈소?' '백색의 사루만이오. 당신 생각에 필요할 것 같으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하더군요. 단, 도움을 청하려면 빨리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을 거라고 했소.' 그 말을 듣고 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백색의 사루만은 우리 마법사들 중에서 최고수이기 때문이지요. 래더가스트 역시 훌륭한 마법사입니다. 그는 색깔을 만들고 바꾸는 데 대가이며, 식물과 짐승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해 특히 새들이 그의 친한 친구들이지요. 하지만 사루만은 오랫동안 적의 마법에 대해 연구해 왔었습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종종 적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고, 돌 굴두르에서 적을 쫓아낸 것도 역시 사루만의 솜씨였습니다. 아홉 나즈굴을 물리칠 수 있는 무슨 무기를 벌써 그가 만들어 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다시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가시오. 당신을 찾느라 내가 시간을 너무 지체했으니 말이오. 시일이 촉박하오. 당신을 찾아보라는 부탁을 받은 게 초여름이었는데 이제야 겨우 왔으니. 당신이 지금 즉시 출발한다고 해도 그에게 닿기 전에 벌써 아홉 기사들은 자기들이 찾던 곳을 발견했을지도 모르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말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를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잠깐만! 우리는 당신뿐 아니라 도와 줄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원조가 필요하오. 우선 당신 친구들인 모든 짐승들과 새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오. 이 문제와 관련된 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루만과 갠달프에게 가져오라고 부탁을 해주시오. 오탕크로 소식을 보내도록 말이오.' '그렇게 하겠소' 그는 대답을 하고는 마치 아홉 나즈굴이 뒤를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떠나 버렸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지요. 그날은 여행을 너무 오래 해 말뿐만 아니라 나도 무척 지쳐 있었고 또 그 문제를 차근차근 정리해 볼 필요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밤을 브리에서 묵으면서 샤이어에 돌아갈 시간이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실수였지요. 그렇지만 프로도에게 편지를 써서 친구인 여관주인에게 맡기고 그가 오면 전해 달라고 부탁은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새벽에 출발해 마침내 사루만이 사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은 안개산맥 최남단에 있는 이센가드란 곳인데 로한 협곡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보로미르에게 물으면 안개산맥과 에레드 님라이스 즉 그의 고향에 있는 백색산맥의 최북단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가 바로 그곳이라고 가르쳐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센가드는 마치 벽처럼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환상의 가파른 암벽입니다. 그 계곡 한가운데에 오탕크라는 석탑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루만이 건축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서역인들이 세운 것인데, 높이가 아주 높고 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하면서도 인공물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탑입니다. 이센가드의 환상지대를 통하지 않으면 그탑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 환상지대에는 출입구가 오직 하나만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아치형 암벽으로 된 문 앞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입구는 경비가 삼엄했는데 문지기들은 나를 보자 사루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더군요. 아치 밑으로 말을 타고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히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탕크 밑에까지 말을 타고 가서 사루만의 층계에 당도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나를 맞이했고 탑 속의 높은 방으로 인도하더군요. 그는 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도착하셨군, 갠달프.'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차가운 냉소라도 품고 있는 듯 그의 눈가에는 흰빛이 감돌았습니다. '늦었소, 백색의 사루만, 당신 도움을 청하러 왔소.' 나는 이렇게 인사를 했지만 어쩐지 사루만은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는 비웃듯 되물었지요. '정말 도움을 청하러 오셨소, 회색의 갠달프? 회색의 갠달프가 도움을 청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구려. 그렇게 현명하고 지혜롭고, 들판을 쏘다니며 남의 일을 참견하지 않는 데가 없는 갠달프께서 말이야!'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사태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소' 하고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응수하더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소. 그런데 당신은 신성회의의 의장인 나에게 지극히 중요한 문제를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소. 그걸 안 지가 얼마나 됐소? 그리고 샤이어의 은신처에 숨어 있으려면 곱게 있을 것이지 뭐하러 이제야 나타났소?' 그래서 난 자초지종을 설명했답니다. '나즈굴이 다시 나타났소. 래더가스트가 그러더군. 강을 이미 건넜다고.' '갈색의 래더가스트라!' 사루만은 더 이상 조롱을 감추지도 않고 웃어 댔습니다. '새들의 친구 래더가스트! 저능아 래더가스트! 멍청이 래더가스트! 그 멍청이는 내가 맡긴 임무만은 썩 잘해 낸단 말이야. 당신이 여기 나타났으니 말이오. 내가 전갈을 보낸 목적은 바로 당신을 이리로 오게 하기 위함이었소 자, 회색의 갠달프, 여기 묵으면서 여독을 풀도록 하시지요. 난 마법사 사루만이자, 반지를 만드는 사루만, 다양한 색깔의 사루만이오!' 나는 그제서야 전에는 흰색이었던 그의 옷이 이제는 다채로운 색깔로 변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빛깔은 눈부실 만큼 현란하게 반짝이면서 변했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죠. '흰색이 더 좋았던 것 같은데.' 그랬더니 어느새 그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흰색! 시작할 때는 그 색이 적격이지. 흰색은 염색을 할 수도 있고, 흰 페이지는 글을 적을 수도 있고, 흰빛은 변할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럴 경우엔 그것은 더 이상 흰색이 아니오. 어떤 사물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그것을 파괴한다면 그는 이미 지혜의 길을 벗어난 것이오.' '당신이 친구로 여기는 그 바보들 중의 하나에게 말하듯 나에게 설교할 필요는 없소. 당신한테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당신을 이곳에 부른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온 연설이라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제1시대는 지나갔고 지금 이 시대도 지나가 곧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오. 그와 함께 요정들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 우리들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오. 우리가 지배하게 될 인간들의 세계 말이오. 그러자면 이 만물을 우리 뜻대로 정리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오. 물론 그것은 우리 마법사들만이 볼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실현하기 위함이오. 그러니 영원한 내 친구이자 협력자인 갠달프, 들어 보시오!' 그리고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더욱더 부드러운 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난 방금 우리라고 했소. 그러나 그건 당신이 내 뜻에 찬성한다는 전제조건 아래서의 이야기요. 하나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소. 옛날의 구태의연한 동맹이나 연합으로는 막아 낼 수도 없고, 요정이나 쓰러져 가는 서부인들에게도 아무런 희망을 걸 수 없소. 당신 앞에,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첫 선택이 바로 이것이오. 그 세력에 동참하는 것 말이오, 갠달프. 그것이 현명한 길이오. 그 길에는 희망이 있소. 승리는 목전에 있으니까 그들에게 협력한다면 후한 보상이 있을 것이오. 그 세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동맹군들 역시 늘어나고 있소. 당신과 나 같은 마법사는 참을성 있게 견디기만 하면 결국에는 그들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고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될 거요. 우리의 생각은 가슴 속에 숨겨 두고 때를 기다립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고귀하게 추구해야 할 목적, 즉 지혜와 규율, 질서를 마음속에 새기고만 있다면 그 과정의 오류와 잘못은 용납될 수 있을 거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들의 나약하고 게으른 친구들이 항상 도와준다면서 방해하기만 했던 모든 것을 드디어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우리의 계획에는 아무런 실질적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소. 다만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지요. '사루만, 난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것은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모르도르에서 보낸 사자들의 입을 통해서였소. 당신이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부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그러자 그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흠, 이 현명한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말이군. 아직은 안 된다? 그러면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어떻소?' 그는 다가와 긴 손으로 나의 팔을 잡았습니다. '갠달프, 이건 어떻소? 절대반지 말이오! 우리가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그 세력도 결국 우리에게 넘어올 거요. 내가 당신을 불러온 진짜 목적은 이것이오. 내가 사방에 풀어놓은 소식통들에게서 당신이 반지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렇지 않소? 그렇지 않다면 왜 아홉 나즈굴이 샤이어를 찾고 있으며,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했던 거요?' 이 말을 하는 그의 두 눈에는 언뜻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번득였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물러서며 말했지요. '사루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한 번에 오직 하나의 손만이 반지를 지배할 수 있소. 그러니 억지로 우리라고 말하지 마오! 여하튼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고 이제 당신의 본심도 알았으니 반지의 소식은 결코 알려 줄 수 없소. 당신은 신성회의의 의장이었지만 결국 가면을 벗고 말았어. 그러니 당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결국 사우론이나 당신에게 굴복하란 뜻이 분명하오. 난 둘 다 택하지 않겠소. 다른 제안은 없소?' 그의 얼굴은 이제 차갑고 무섭게 변해 있었습니다. '있지. 난 당신이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당신의 근심과 고통을 덜어 줄 셈이었지. 세 번째 길은 여기서 쉬는 거야. 영원히!' '영원히라고?' '절대반지의 위치를 나에게 말할 때까지 말이야. 당신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봐야지. 당신이 실토하지 않겠다면 반지가 발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반지의 지배자는 이제 사소한 문제에도 신경을 쓸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길 거야. 가령 회색의 갠달프가 오만무례하게 굴면서 일을 훼방한 데 대한 적절한 보상 같은 것 말이야.' '그렇게 사소한 문제는 아닐 거요.' 나는 그렇게 응수했지만 그는 나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내 말이 공허한 빈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갠달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들은 나를 끌고 가 오탕크의 첨탑 위에 홀로 남겨 두었습니다. 사루만이 별을 고나찰하던 곳이지요. 그곳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은 수천 개의 계단으로 된 좁은 층계밖에 없었고 발 밑은 천길 낭떠러지였습니다. 나는계곡을 내려다보고 한때 그렇게 푸르고 아름답던 곳이 이제 온통 토굴과 대장간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사루만은 사우론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센가드에 늑대와 오르크들을 끌어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는데 아직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솜씨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오탕크의 석탑 중간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안개였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운해로 둘러싸인 고도에서 탈출의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나는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을 서성이며 북으로 진격해 올라오는 아홉 나즈굴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루만의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나즈굴이 다시 나타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 같았습니다. 이센가드로 가던 중 거의 확실한 소식을 들었었지요. 샤이어에 있는 친구들이 매우 염려스러웠지만 일말의 희망이 그래도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프로도가 내가 편지에 부탁한 대로 즉시 샤이어를 떠나 적의 추격이 시작되기 전에 리벤델에 도착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나의 희망이나 공포는 둘 다 근거가 희박했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브리의 뚱보에게 달려 있고 공포는 사우론의 교활함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실 그 뚱보는 손님들 시중 때문에 바빴고 사우론의 힘도 걱정했던 것만큼 무서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센가드라는 함정에 홀로 갇혀 있는 상태에서는,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적의 기사들이 아직까지 샤이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지요." 그때 프로도가 소리쳤다. "저는 보았어요! 앞뒤로 서성대고 계셨는데 머리에서 달빛이 반사되더군요." 그러자 갠달프는 놀라서 이야기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꿈속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막 기억이 나는군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샤이어를 떠난 뒤였던 것 같아요." 다시 갠달프가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그 일이 있는 뒤였군. 그때는 정말 비참했습니다. 내가 그런 궁지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아마 나를 잘아는 분들은 내가 그런 곤경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걱정 하실지도 모릅니다. 회색의 갠달프가 파리처럼 거미줄에 걸리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거미줄이라도 허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처음에 나는 사루만이 말한 대로 래더가스트 역시 배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길에서 만났을 때 그의 음성이나 눈길에서 무슨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는 없었지요. 그랬더라면 이센가드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더라도 좀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겁니다. 사루만 역시 그런 계산을 했을 것이니 래더가스트에게 속을 보이지 않고 속였던 것이지요. 사실 정직한 래더가스트를 유혹해 배반하게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진정으로 찾아다녔고 나도 그의 말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루만의 음모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헝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래더가스트는 내가 부탁한 대로 행동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옛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머크우드로 들어갔습니다. 안개산맥의 독수리들은 멀리까지 날아다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늑대와 오르크들이 모이는 것도 보았고 아홉 기사들이 여기저기 출몰하는 모습과 골룸이 도망쳤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소식을 내게 전하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여름이 끝나갈 즈음의 어느 날 밤에 위대한 독수리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바람의 왕 과이히르가 몰래 오탕크로 날아왔고 그는 결국 탑꼭대기에 서 있던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 데리고 멀리 떠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사루만에게 발각되었지요. 그러나 늑대와 오르크들이 쫓아왔을 때는 나는 이미 이센가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었습니다. 난 과이히르에게 날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아주 멀리까지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땅 끝까지는 안 됩니다. 나는 짐을 나르러 온 것이 아니라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말이 있는 곳으로 가세. 가장 빠른 말이어야 하네. 지금 매우 화급한 문제가 생겼거든' 했더니, '그러면 로한왕이 있는 에도라스로 모셔 드리지요. 거긴 멀지 않습니다' 하더군요. 로한의 리더마크 땅에는 로한의 기사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나도 동의했습니다. 안개산맥과 백색산맥 사이의 그 거대한 골짜기에서 자라는 말보다 더 훌륭한 말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로한인들은 아직 믿을 만한가?' 사루만의 배반에 워낙 놀랐기 때문에 의심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말을 공물로 바칩니다. 해마다 모르도르에 꽤 많은 말을 보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아직 그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지는 않았지요. 만일 당신 말씀대로 사루만이 악의 길에 들어섰다면 로한의 종말도 멀지 않은 세이지요.' 과이히르는 동트기 바로 전에 로한에 나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이제부터는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한에도 벌써 악의 세력이 손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사루만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지요. 로한왕은 내 경고는 전혀 들을 생각도 않고 말을 한 필 줄 테니 떠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가장 날렵해 보이는 말을 한 필 골랐습니다. 내게는 무척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지만 왕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난 가장 훌륭한 말을 선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멋진 말은 본 적이 없었지요."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렇다면 혈통이 좋은 말인가 보군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우론이 말을 공물로 받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소식입니다. 내가 지난번에 로한에 갔을 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보로미르가 끼어들었다. "맹세컨대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적의 거짓말입니다. 나는 로한인들을 압니다. 진실하고 용감한 민족이지요. 우리가 옛날에 양도해 준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동맹국입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모르도르의 그림자는 사방에 깔려 있소. 게다가 사루만이 그들의 코앞에 있으니 로한은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당신이 돌아가는 길에 들러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지요." "적어도 그들은 말을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친형제 이상으로 말을 사랑하거든요. 게다가 리더마크의 말은 암흑의 땅과는 거리가 먼 북부 평원 태생들입니다. 그들은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먼 옛날 자유의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보로미르의 말이 맞소. 내가 탔던 그 말은 어쩌면 역사의 첫새벽에 태어난 말일지도 모릅니다. 나즈굴의 말도, 바람처럼 빠르고 지칠 줄 모르는 그 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준마의 이름은 새도우폭스지요. 낮에는 털이 은빛으로 빛나고 밤에는 마치 어둠속의 그림자처럼 흔적없이 달립니다. 발굽소리의 경쾌함이란 이루다 말할 수 없지요. 아무도 그 말을 타지 못했던 모양인데 내가 타면서 곧 길을 들였습니다.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로한을 출발한 것과 프로도가 호비튼을 떠난 것이 거의 동시일 텐데 프로도가 배로우 다운즈에 있을 때 난 벌써 샤이어에 도착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달리면서도 걱정이 앞섰지요.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나는 내내 기사들의 소식을 들었고 밤낮으로 그들을 따라잡았으나 그들은 여전히 내 앞에 있었으니까요. 내가 알기론 그들은 세력을 분산시켜 두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초록길에서 멀지 않은 샤이어 동쪽 경계에 남아 있었고 일부는 남족에서 샤이어로 잠입해 왔습니다. 내가 호비튼에 도착했을 때 프로도는 이미 떠나고 없더군요. 그래서 갬기 영감과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는데 말만 많았지 중요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지요. 그는 백 엔드의 새 주인에 대해 영 못마땅한 모양이더군요. 계속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없어요. 내 평생에 이런 꼴을 보다니! 최악의 상황이라니까요!' 그는 몇 번씩이나 최악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최악이란 좋은 말이 아니네, 영감. 정말 최악의 경우를 당하면 어쩔려고 그러나?' 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프로도가 호비튼을 떠난 지 일 주일이 채 못 됐고 바로 그날 저녁 기사들이 마을로 몰려왔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급히 말을 몰았지요. 버크랜드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다를까 벌서 막대기로 개미집을 쑤셔 놓은 듯 큰 소동이 벌어졌더군요. 크릭할로우의 집은 모조리 난장판이 되어 문이 열려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간에 떨어져 있는 프로도의 망토를 본 순간 거의 절망적이었지요. 주위를 둘러보고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다면 다소 마음이 놓였겠지만 워낙 급하고 경황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말을 타고 기사들을 뒤쫓았지요. 하지만 그들은 여러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더군요. 속수무책으로 망설이다가 적어도 그들 중 한두 명은 브리로 갔을 거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그리고 여관주인을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분통이 터지기도 해서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요. '그 멍청한 버터버 영감 때문이야! 만일 프로도가 그 영감 때문에 출발이 지연됐다면 그 이름에 걸맞게 온 몸에다 버터를 칠해 버려야지. 그리고는 숯불에 올려 로스구이를 만들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여관에 들어갔더니 그는 벌써 사색이 되어 나를 보자마자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땅속으로 꺼질 듯한 시늉을 하더군요." 그러자 프로도가 놀라 외쳤다. "설마 그를 혼내시진 않으셨겠지요? 그는 매우 친절했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주었습니다." 갠달프는 웃었다. "걱정 말게! 물어뜯지는 않고 조금 짖어 주기만 했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내가 희색이 만연하니 그제서야 몸을 떨길 멈추더군. 그래서 그 늙은이를 힘껏 껴안아 주었지.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자네가 그 전날 밤을 브리에서 묵었고 아침에 스트라이더와 함께 떠난 것을 알았다네. 난 너무 기뻐서 이렇게 외쳤지. '스트라이더와!' 그러니까 버터버는 내 뜻을 잘못 이해하고는 이렇게 변명하더군. '그렇습니다. 걱정이 됩니다만 사실이에요. 그가 먼저 그들 일행에게 접근을 했고 제가 말렸는데도 그들은 그와 함께 떠났어요. 그들은 여기 있는 동안 아주 즐겁게 지냈지요. 멋지게 한바탕 놀았답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해 주었지. '멍청이! 바보! 위대하고 사랑스런 우리의 발리맨! 이건 지난여름 이후 내가 들은 가장 최고의 뉴스일세. 적어도 금덩이 하나쯤의 가치는 있는 거야. 자네 맥주에 앞으로 칠 년 동안 마법의 맛이 깃들이기를 바라네! 오늘밤은 여기서 좀 묵어야겠어. 몇 년 만에 잠을 자는 것 같군.' 그래서 나는 기사들이 어디 있을까 궁금해 하며 그날 밤은 브리에서 묵었습니다. 브리에는 그들 중 단 둘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밤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요. 적어도 다섯 기사가 서쪽에서 왔는데 그들은 마을 입구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일진광풍처럼 브리를 휩쓸고 지나갔다더군요. 브리 사람들은 아직도 공포에 떨면서 말세가 가까웠다고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자신은 없지만 추리를 하자면 이럴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두령은 브리 남쪽 은밀한 곳에 숨어 있고 둘만 먼저 마을로 들어오고 넷은 샤이어로 쳐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브리와 크릭할로우에서 실패하자 그들은 다시 두령에서 되돌아간 것이죠. 그 바람에 동부대로는 그들의 첩자들만 감시를 할 뿐 경계가 다소간 소홀해졌습니다. 두령은 그들 중 일부를 산을 넘어 동쪽으로 똑바로 달려가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와 함께 동부대로를 따라 계속 올라온 겁니다. 나는 질풍처럼 달려서 브리를 떠나 그날 해지기 전에 웨더톱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눈앞에 나타났지요. 그러나 그들은 내가 분노한 것을 알았고, 또 하늘에 해가 아직 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뒤로 물러서더군요. 밤이 되니 그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와 산꼭대기의 아몬 술 원형지대에서 드디어 나를 둘러쌌습니다. 나 혼자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는 정말 벅찼습니다. 아마 옛날 봉화를 피웠던 이래로 웨더톱이 그렇게 빛과 불꽃으로 번득인 적은 없었을 겁니다." 갠달프는 그 순간을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동틀녘에야 나는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북쪽으로 달렸습니다. 거기 더 있어 봤자 소용이 없었던 것이, 우선 그 넓은 지역을 모두 뒤져 프로도를 찾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홉 나즈굴을 뒤에 달고 그를 찾는다는 것은 더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일단 아라곤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를 유인하면서 프로도보다 먼저 리벤델에 도착해 대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명의 기사가 따라오다가 돌아갔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들은 브뤼넨 여울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프로도에게는 다행이었지요. 그들이 프로도 일행의 캠프를 습격할 때는 아홉이 아니라 다섯뿐이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호르웰 강 상류로 올라가서 에튼무어를 지나 다사 남쪽으로 내려오는 어려운 길을 거쳐 마침내 여기 도착했습니다. 웨더톱에서 여기까지 거의 열나흘이 걸렸지요. 우선 트롤들의 고원 암벽지대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었고 게다가 섀도우폭스가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섀도우폭스를 주인에게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우리는 우정이 깊어졌기에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다시 찾아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하간 그 때문에 난 반지보다 겨우 사흘 먼저 여기 도착한 것이지요. 이미 프로도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은 이곳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프로도, 이것이 내 이야기의 끝일세. 엘론드와 여러분께서는 이야기가 너무 길었던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갠달프가 약속을 어기고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전에 없었던 일인 만큼 반지의 사자에게 그 이유를 분명히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모였고 반지도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에 한 걸음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엘론드가 입을 열었다. "사루만의 배신은 슬픈 일입니다. 그를 믿었고, 또 우리의 논의에 그가 항상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적의 마법을 깊이 연구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선하든 악하든 간에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타락과 배신은 유감스럽게도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이야기 중에서는 프로도의 이야기가 가장 놀랍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 빌보말고는 호비트들을 거의 모릅니다만 이제 보니 빌보도 내가 생각했듯이 특이하거나 괴짜인 호비트가 아닌 것 같군요. 내가 지난번 서쪽으로 여행을 한 이후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배로우인들은 여러 가지로 불립니다. 올드포레스트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지금 남아 있는 지역은 과거 북쪽 변경 일부일 뿐이지요. 옛날에는 다람쥐들이 지금의 샤이어에서 이센가드 서쪽 던랜드까지 나무만 타고 다닐 수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곳을 언젠가 여행한 적이 있는데 신기한 생물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봄바딜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그 옛날 언덕을 뛰어다니던 바로 그 인물이 맞는지 몰라도 그는 그때 이미 가장 오래된 생물보다 더 나이가 많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나이가 많고 아버지가 없는'이라는 뜻에서 야르와인 벤아다르라고 불렀었습니다만 그 밖에 다른 이름도 많았지요. 난쟁이들은 폰이라 불렀고 북부인들은 오랄드라고 불렀습니다. 이상한 인물이지요. 오늘 회의에 초청했으면 좋았을걸 그랬어요." "오지 않았을 겁니다." 갠달프가 말했다. 그러자 에레스토르가 물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서 그의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이 반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갠달프는 반대했다. "아니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에게 반지가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편이 옳겠지요. 그는 그 자신의 주인입니다. 반지를 변화시킬 수도 없고 또 타인에 대한 반지의 힘을 사라지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산 속 깊이 스스로 만든 은둔처에 숨어 있습니다. 아무도 그곳을 찾을 수 없고 그 역시 세월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거기서 나올 리가 없지요." 에레스토르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선 아무것도 그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 그가 반지를 영원히 간직하면 어떻겠습니까?" "안 됩니다. 십중팔구는 맡지 않으려 할 겁니다. 물론 온 세상의 자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간청한다면 승낙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할 겁니다. 그에게 반지를 준다면 그는 곧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거나 멀리 던져두기 십상입니다. 그런 것은 그에게 아무 매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매우 불안한 파수꾼이 되겠지요. 이런 점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될 겁니다." 갠달프의 말이 끝나자 글로핀델이 말했다. "여하튼 그에게 반지를 보낸다는 것은 결국 최후의 날을 연기하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그는 지금 멀리 있습니다. 적의 첩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다시 거기까지 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조만간에 사우론은 반지를 숨긴 곳을 찾아낼 것이고, 그러면 모든 힘을 그리로 기울일 겁니다. 봄바딜 혼자서 그 힘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나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결국 모두가 정복되고 나면 봄바딜도 쓰러지고 말겠지요. 최초의 생물이니 최후에 결국 쓰러질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엔 어둠이 덮쳐올 겁니다." 이번에는 갈도르가 나섰다. "야르와인에 대해선 이름밖에 아는 것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글로핀델의 의견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이땅에 없다면 그에게도 없습니다. 사우론에겐 높은 산조차 파괴하고 변형시킬 힘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지금 남아 있는 세력이라고는 이곳 임라드리스의 우리와 회색항구의 키르단, 그리고 로리엔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쓰러지고 마지막으로 사우론이 쳐들어올 때 그들이 적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막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엘론드가 대답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들도 불가능하지요." "그렇다면 적에게 강제로 반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바다 저쪽으로 보내든가 파괴하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글로핀델이 말하자 다시 엘론드가 대답했다. "갠달프의 말로는 우리의 기술로는 반지를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이들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좋든 싫든 그것은 중간계에 속한 것이므로 여기 있는 우리가 그것을 처리해야 합니다." 글로핀델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바다 속에 던져 버립시다. 사루만의 거짓말을 사실로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회의를 하고 있는 이 시간 이미 그의 발길은 악의 길로 들어서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반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믿도록 했습니다. 사실 그 자신이 반지를 노리면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종종 거짓말에도 진실이 담겨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바다 속이라면 반지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갠달프가 나섰다. "영원히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깊은 물 속에도 적의 첩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는 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한 계절이나 일부의 생물들, 아니면 한 시대만을 염려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과연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 위험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갈도르가 말했다. "바다는 해결책이 못 됩니다. 만일 야르와인에게 보내는 것이 위험하다면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제 직감으로도 사우론이 현재의 상황을 보고받는다면 분명 서쪽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를 기다릴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아홉 기사들이 말을 잃은 상태지만 얼마 안 있어 더 날쌘 새 말로 갈아탈 것입니다. 지금 북부로 올라가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변경과 모르도르 사이에는 기울어 가는 곤도르의 세력만 있을 뿐입니다. 만일 적이 백색탑과 회색항구를 공격해 온다면 앞으로 요정들은 깊어 가는 중간계의 어둠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자 보로미르가 나섰다. "그 공격은 당분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곤도르가 기울어 간다고 말씀하셨지만 곤도르는 아직 건재합니다. 말단의 병사들까지도 매우 용감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군세도 아홉 나즈굴을 막아 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곤도르가 지키지 않는 다른 길을 찾아낼 것입니다." 갈도르가 말하자 에레스토르가 나섰다. "그렇다면 글로핀델이 이미 말한 대로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반지를 영원히 숨기든가 아니면 파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다 우리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누가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엘론드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풀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서쪽으로 가는 길은 가장 쉬운 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길은 피해야 합니다. 틀림없이 그들이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요정들이 그 길로 탈출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결국 우리는 어려운 길, 아무도 예견하지 못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혹시 희망이 있다면 그 길뿐일 것입니다.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지요. 모르도르로 말입니다. 우리는 반지를 불의 산 분화구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프로도는 맑은 목소리로 가득 찬 햇빛 반짝이는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아름다운 저택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슴 속으로 막막한 어둠의 공포를 느꼈다. 프로도는 온 몸을 떨고 있는 보로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커다란 뿔나팔을 만지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침내 보로미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런 의논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루만은 배신자이긴 하지만 중요한 암시를 해준 것이 아닙니까? 왜 반지를 숨기거나 파괴하는 것만 생각하시는 겁니까? 반지가 우리 손에 들어왔는데 이처럼 위급할 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우리 자유민은 반지의 힘으로 적을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곤도르인들은 용감합니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언젠가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용기는 먼저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무기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반지가 그처럼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면 반지를 우리의 무기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승리도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엘론드가 말했다. "아, 안 되오. 우리는 절대반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것은 사우론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그의 것이며 사악한 것입니다. 보로미르, 반지는 너무 위력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휘두를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위대한 힘을 소유한 이만이 그 반지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런 이들조차 그 때문에 더욱 치명적인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반지에 대한 욕망, 그것이 바로 그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사루만을 보시오. 만일 현자들 중 한 명이 반지를 가지고, 또 그의 지혜를 이용하여 모르도르의 군주를 무찌를 수 있다면 그는 곧 사우론의 권좌에 스스로 올라앉을 것이며 따라서 또 하나의 암흑의 군주가 탄생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반지가 파괴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 반지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현자들에게조차 위협이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악한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반지를 숨기기 위해 그것을 만지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기 위해 만지는 일은 더욱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보로미르는 의심스럽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곧 스스로 고개를 숙였다. "정 그렇다면 우리 곤도르는 지금의 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적어도 현자들께서 반지를 지켜 주시는 한 우리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혹시 그 부러진 검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검을 휘두르는 손이 그 검뿐 아니라 선왕의 능력까지 물려받았다면 말입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혹시 압니까? 하지만 그것을 곧 시험해 볼 작정이오." "그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사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도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우리 곤도르인들도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엘론드가 말했다. "그 점은 안심하시오. 당신이 알지 못하는 많은 세력과 나라들이 더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안두인 대하가 아르고나스와 곤도르 입구까지 흘러가는 동안 많은 대지를 거쳐간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오." 난쟁이 글로인이 나섰다. "그리고 더욱 안심이 되는 것은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이 힘을 합쳐 동맹을 맺는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위급할 때는 좀 덜 위험한 다른 반지들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드로르의 반지를 발린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들의 일곱 반지는 모두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드로르가 모리아에서 사라진 뒤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발린이 떠나간 데는 그 반지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발린은 모리아에서 어떤 반지도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드로르는 반지를 자기 아들 드라인에게 주었지만 드라인은 도린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돌 굴두르의 토굴 속에서 강제로 빼앗겼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었지요." 글로인이 탄식했다. "아, 그럴 수가! 복수의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하지만 아직 세 개의 반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요정들의 세 반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정왕들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들도 역시 먼 옛날에 암흑의 군주가 만든 것이지요. 지금은 한가히 쉬고 있는 겁니까? 여기 요정왕들께서 계신데 말씀을 해주시지요." 요정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엘론드가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듣지 않았소, 글로인? 세 반지는 사우론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는 만져 보지도 못했소. 그것들에 관해서는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궁금한 분들이 많을 테니 이야기하겠소. 반지는 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쟁이나 정복을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복은 그 반지들의 목적이 아니지요. 그 반지들을 만든 이들은 힘과 지배와 부의 축적을 바란 것이 아니라 이해와 생성, 치유, 순수의 보존을 희망했었습니다. 중간계의 요정들은 슬픈 일도 많이 겪었지만 어느 정도 그런 목적을 이룰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만일 사우론이 절대반지를 손에 넣는다면 세 개의 반지를 이용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은 허물어지고 그 소유자들의 정신과 혼은 모두 그에게 훤히 들여다보이게 됩니다. 세 개의 반지는 차라리 없었던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적의 목적이지요." "하지만 당신 말씀대로 절대반지가 파괴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글로인이 다시 묻자 엘론드는 슬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절대반지가 파괴되면 세 반지가 자유를 되찾아 사우론이 끼친 이 세상의 해악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절대반지가 파괴되면 세 반지도 힘을 잃게 될 것이고 많은 요정들과 그들의 업적도 사라져 결국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자 글로핀델이 말했다. "하지만 사우론을 물리치고 그의 지배에 대한 공포를 영원히 잠재울 수 있다면 모든 요정들은 그러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에레스토르가 말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반지를 파괴하는 문제로 돌아왔군요. 하지만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반지를 만들어 낸 그 불은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절망의 길입니다. 지혜로운 엘론드께서 말리지 않으신다면 나는 차라리 어리석음의 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절망이나 어리석음이라고요? 정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망이란 의심할 바 없는 끝장을 바라보는 이에게만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을 검토해본 뒤 남은 필연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지혜입니다. 거짓된 희망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우둔하게 보이겠지요. 좋습니다. 우리의 겉모습, 적의 눈에 보이는 가면은 어리석음이라 합시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현명하니까 자신의 악의 저울로 모든 일을 정확하게 측정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척도는 욕망, 오직 권력을 향한 욕망뿐입니다. 그는 타인의 생각을 모두 그런 척도로 판단합니다. 어느 누가 반지를 거부한다거나, 우리가 그 반지를 파괴하리라는 것은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반지를 파괴하려고 한다면 그는 일단 논외로 쳐도 좋을 것입니다." 엘론드가 말을 받았다. "당분간은 그래도 되겠지요.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지요. 하지만 강한 자나 지혜로운 이는 그 길을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은 강한 자 만큼의 희망을 가진 약한 이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것은 사실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강자들의 눈이 다른 곳에 닿고 있는 동안 작은 손들은 바로 자신들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빌보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엘론드! 그만하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어리석은 호비트 빌보가 이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끝맺음도 제가 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저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자서전 집필을 계속해 왔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지금 맺음말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지요. 이렇게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전에 많이들 써먹은 말이긴 하지만 훌륭한 맺음말이지요. 이제는 그 말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으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끝을 맺을 수 있다면 새로운 내용을 많이 추가해야겠군요. 정말 골칫거립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보로미르는 놀라서 빌보를 바라보았다. 둘러앉은 모든 참석자들이 그 늙은 호비트의 말을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직 글로인만이 아득한 옛 기억을 되새기며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물론일세, 사랑하는 빌보! 자네가 만일 정말로 이 일을 시작했다면 끝을 내야 옳겠지. 하지만 자네도 잘 알다시피 시작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 어떤 큰일이라도 영웅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네. 자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혹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자네가 농담삼아 그런 용감한 제안을 했다고 믿고 싶네. 자네 힘에는 부치는 일이야, 빌보. 자네가 다시 떠맡을 수는 없어. 이미 지나갔다네. 한마디 충고를 더 한다면 자네의 역할은 이제 기록원의 역할말고는 끝났다는 것이야. 자네는 집필을 완성하게. 맺음말을 바꾸지 말고! 아직 희망은 있네. 그들이 돌아올 때 속편을 쓸 준비를 하게." 빌보는 웃었다. "갠달프 당신에게서 이렇게 듣기 좋은 충고가 나올 때도 있군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듣기 싫은 충고는 모두 결과가 좋았는데 이번의 충고는 그래서 꺼림칙하군요. 저는 아직 제게 그 반지를 책임질 만한 힘이나 운이 남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반지는 컸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아까 그들이라고 하셨는데 누구를 가리키는 겁니까?" "반지를 맡아서 떠날 사자들!" "알았어요! 그게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오늘 회의에서 결정해야 할 전부이자 유일한 안건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요정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난쟁이들은 꿀먹은 벙어리고, 저는 늙은 호비트일 뿐이니! 점심때가 되었는지 배가 출출하군요. 누구 생각나는 이름 없나요? 그렇다면 식사 후에 다시 모이기로 하지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정오의 종이 울렸다. 여전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프로도는 모두의 얼굴을 흘끗 둘러보았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없었다. 모든 참석자들은 눈을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엄청난 공포가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해 왔고 또 막연하게 바라기는 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될 어떤 운명의 선택을 스스로 기다리는 듯한 예감을 느꼈다. 빌보와 함께 리벤델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었다. 마침내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마치 다른 어떤 힘에 이끌려 나오듯 그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길은 잘 모릅니다만 제가 반지를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엘론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프로도는 그의 눈길이 갑자기 날카로운 창끝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가 모두 옳다면 이 일은 프로도 자네의 몫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자네가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일세. 지금은 샤이어의 형제들이 그 고요한 들판에서 일어나 영웅들의 탑과 지혜를 흔들어 놓을 시간이야. 어느 현자가 이것을 예견이라고 했겠는가? 아니 그들이 아무리 현명하다 할지라도 왜 이 순간이 오기 전에 이런 사실을 알려고 애를 썼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무거운 짐일세. 너무 무겁기 때문에 아무도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짐이야. 나는 이 짐을 자네에게 강제로 맡길 수 없네. 다만 자네가 기꺼이 맡아 준다면 자네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해 주고 싶네. 그리고 저 위대했던 과거의 요정친구들 하도르, 휴린, 튜린, 그리고 베렌 등이 여기 모두 모였더라도 자네는 그들과 함께 자리를 했을 것일세." 그때 마루 한구석에서 숨어 엿듣던 샘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불쑥 튀어나오면서 말했다. "하지만 프로도씨를 혼자만 보내는 건 분명 아니시겠지요?" 엘론드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적어도 자네는 함께 가야지. 보다시피 지금 여기서 비밀회의를 하는데도 자네를 떼어놓을 수 없지 않았는가 말이야." 샘은 얼굴을 붉히고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게 되었군요, 프로도씨!"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제15장 반지는 남쪽으로 호비트들은 그날 늦게 빌보의 방에서 자기들끼리만 모여 앉았다. 메리와 피핀은 샘이 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프로도의 동료로 뽑혔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피핀이 말했다. "말도 안 돼! 끌어내 감옥에 가두기는커녕 엘론드께서 상까지 주다니 말이야."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상이라고? 난 그보다 더 무서운 벌은 없다고 생각해. 너희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이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죽으러 가는 길을 상이라니! 어제만 해도 난 내 임무가 완전히 끝나서 여기서 오랫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어." 메리가 말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샘이 부럽단 말이에요. 샘은 따라가고 우리만 여기 리벤델에 남아 있으면 그게 벌이 아니고 뭐예요? 우린 모두 같이 먼 길을 왔고 또 죽을 고비도 함께 넘겼잖아요. 우리고 가야 해요." 피핀도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우리 호비트들은 똘똘 뭉쳐야 해요. 그리고 할 수 있어요. 감옥에 가두지만 않는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갈 겁니다. 이런 일에는 머리를 쓸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해요." 그때 나지막한 창문턱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갠달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넨 빠져야겠군, 페레그린 투크! 하지만 모두들 쓸데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결정된 게 없다니요? 그러면 모두 뭘 하신 겁니까? 몇 시간 동안 말이에요." 피핀이 소리치자 빌보가 대답했다. "이야기를 했지. 모두들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해졌어. 갠달프께서도 말이야. 내가 보기엔 레골라스가 골룸의 소식을 전하자 마치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하신 듯 멍한 표정이더군. 나중엔 어물쩍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야."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렇지 않네. 자네가 잘못 봤어. 난 이미 과이히르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어.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자리에서 제일 놀랐던 건 자네와 프로도였지. 놀라지 않은 건 나뿐이었어." "하여간 좋습니다. 불쌍한 프로도와 샘을 뽑은 것 외에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어. 나도 항상 내가 가게 된다면 동행은 누가 될까 생각해 왔었는데, 내 생각으로는 정찰대의 출발했나요, 갠달프?" "출발했지. 벌써 몇 명이 나갔고 내일은 더 나갈 거야. 엘론드가 내보낸 요정들은 순찰자들, 그리고 머크우드의 스란두일족과 접촉하게 될 거야. 아라곤도 엘론드의 두 아들과 함께 나갔지.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상당한 거리까지 안전을 확보해 놓을 작정이야. 그러니 용기를 내게, 프로도! 여기서 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그러자 샘이 우울하게 말했다. "아니 한참 기다리다 겨울이 와 추워지면 떠난단 말인가요?" 빌보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 그건 일부는 네 탓도 있어, 프로도. 일부러 내 생일을 출발일로 잡았다면서? 생일축하를 아주 희한하게 한다고 생각했지. 새크빌 배긴스네 녀석들이 하필 내 생일날 백 엔드를 차지하게 한단 말이냐? 여하간 여기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고, 어쨌든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는 떠날 수 없어." 겨울이 얼음장 같은 이빨을 드러내 밤새 내린 서리에 바위틈이 갈라지고 나무가 옷을 벗고 호수가 거무스레해질 때 숲길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이것이 네 운명이 될까 걱정스럽구나."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일세. 암흑의 기사들이 어디서 잠복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출발할 수 없거든." 메리가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조리 강물 속에 빠져 죽지 않았나요?" "반지악령들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그들의 우두머리인 악령의 군주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한 그들이 쓰러지고 일어나는 것은 그에게 달린 거야. 우리로서는 그들이 말도 잃어버리고 가면도 벗겨져서 당분간 위험이 덜하기만을 기대할 뿐이지. 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해. 그 동안은 한시름 놓도록 하게, 프로도. 글세, 내가 자네를 도와 줄 방도가 있을지 모르겠네만 이것만 귀띔해 주지. 아까 누군가 일행 중에 머리를 쓸 수 있는 이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하고 함께 갈까 생각 중일세." 프로도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하자 갠달프는 앉아 있던 창턱에서 내려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절하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난 분명히 생각 중이라고 했네. 아직 안심하기엔 일러. 이 문제는 엘론드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뿐 아니라 자네 친구 스트라이더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하거든. 그러고 보니 깜빡 잊었었군. 엘론드와이 약속을 잊고 있었어. 자, 난 가네." 갠달프가 사라지자 프로도는 빌보에게 물었다. "여기선 얼마나 있게 될까요?" "아, 나도 몰라. 리벤델에선 날짤를 계산할 수가 없어. 하지만 꽤 오래 있어야 할 거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겠군. 내 집필을 도와주는 게 어때? 후편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고, 혹시 맺음말을 생각해 봤나?" "예,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모두 슬프고 우울한 것들뿐이라서..." "음, 그러면 안 되지! 책이란 모름지기 끝이 좋아야 해. 이건 어때?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행을 끝내고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아! 그런데 어디서 산단 말이에요? 제가 종종 궁금한 것이 그거랍니다." 샘이 물었다. 호비트들은 지나온 여행과 앞으로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리벤델의 미덕이 거기 있었다. 모든 불안과 공포가 그들의 가슴으로부터 곧 사라진 것이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미래는 모두 잊혀지고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지고 더욱 희망에 가득 차게 되었으며 말 한마디, 노래 한 곡, 식사 한 끼마다 모두 기쁨을 맛보며 만족스럽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아침은 언제나 맑고 아름답게 밝아오고 저녁은 항상 시원하고 상쾌하게 내려앉은 동안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금빛 햇살은 창백한 은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벌거벗은 나무에서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 안개산맥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일어 동쪽으로 불어갔다. 밤하늘에 사냥달이 둥글게 떠오르자 작은 별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남쪽 하늘에서는 낮게 내려앉은 별 하나가 붉은빛을 뿌렸다. 매일 밤 달이 기울고나면 별은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프로도는 어두운 밤하늘에 빛을 발하고 있는 그 별을 창 밖으로 볼 수 있었다. 별은 골짜기 근처 나뭇가지들 위로 지켜보는 첩자의 눈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호비트들이 엘론드의 저택에 머문 지 거의 두 달이 가까워졌다. 늦가을 기운과 함께 11월도 저물어 가고 정찰대들이 돌아왔을 때는 벌써 12월 중순이었다. 그들 중에는 북쪽 호르웰 강의 수원을 지나 에튼무어까지 갔다온 이들도 있었고,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아라곤과 순찰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레이플러드 강과 옛날 북부대로가 교차하던 지점인, 타르밧까지 그레이플러드 강 하류를 살펴보았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정찰대원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안개산맥을 넘어 머크우드까지 수색을 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글래든 강이 흘러나오는 고개를 넘어 윌더랜드와 글래든 평원으로 내려가 드디어는 래더가스트의 옛집이 있는 로스고벨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래더가스트는 거기에 없었으며 그들은 딤릴 스테어라는 이름의 높은 재를 넘어 되돌아왔다. 엘론드의 두 아들 엘라단과 엘로히르는 맨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실버로드를 지나 위험한 지역까지 다녀오는 장거리원정에 대한 결과를 엘론드에게만 보고했다. 정찰대는 어느 곳에서도 기사들이나 그 외 적의 졸개들의 흔적이나 소문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안개산맥의 독수리들로부터도 아무런 새로운 정보를 얻지 못했다. 골룸 역시 흔적도 없었으며 사나운 늑대들만이 점점 늘어나면서 안두인 강 상류에 출몰하고 있었다. 브뤼넨 여울의 홍수에 빠져 죽은 흑마 세 마리는 그 즉시 발견되었고 정찰대는 그 아래 급류가 지나가는 바위턱에서 다른 다섯 마리의 시체와 갈기갈기 찢어져 누더기가 된 검은색 긴 망토 하나를 발견했다. 암흑의 기사들의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북부를 떠난 것 같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적어도 아홉 중 여덟은 설명이 되는군. 속단은 금물이겠지만 짐작컨대 반지악령들은 모두 흩어졌고, 아마 지금쯤은 빈손으로 아무 형체도 없이 모르도르의 군주에게 돌아가는 중일 거야.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네. 물론 적에게는 다른 하수인들이 있겠지만 우리를 추적하려면 먼 길을 여행해서 리벤델 경계까지 와야 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조심만 한다면 쉽게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여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되겠군." 엘론드가 호비트들을 불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프로도를 내려다보았다. "때가 되었어. 반지가 떠나려면 지금 곧 가야 하네. 그러나 반지와 함께 동행하는 이들은 싸움을 하거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수행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그들은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적의 영토로 들어가는 것이니 말이야. 프로도, 반지의 사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여전히 지키겠는가?" "그렇습니다. 샘과 같이 가겠습니다." "하지만 난 자네를 크게 도와 줄 수가 없네. 심지어 지혜로서조차도 말일세. 난 자네 앞길도 거의 내다볼 수가 없고 자네 임무가 어떻게 완수될지도 모르네. 이제 어둠은 안개산맥 기슭까지 다가왔고 그레이플러드 강 경계까지도 안심할 수가 없어. 그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캄캄하게만 보일 것일세. 자넨 많은 적을 만날 거야. 정면으로 달려드는 적도 있을 것이고 변장한 적도 있겠지. 하지만 또한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친구를 만날 수도 있어. 자네가 가는 길목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연락이 되는 대로 모두 전갈을 보낸 생각일세.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너무 위험해져서 어떤 곳은 연락이 안 될 수도 있고, 아니면자네보다 늦게 들어갈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제 자네와 함께 떠날 동료를 뽑아 주겠네. 이것은 그들이 원한 것일 수도 있고 운명의 명령일 수도 있지. 숫자는 적어야 하네. 자네 임무가 워낙 화급하고 은밀하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야. 이럴 때는 제1시대의 갑옷으로 무장을 한 수천 명의 요정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네. 모르도르의 사기만 돋울 뿐이니 말이야." 프로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엘론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반지의 사자를 따라가는 원정대는 사악한 아홉 기사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모두 아홉 명일세. 자네와 자네의 충직한 하인과 함께 먼저 갠달프가 들어가네. 그에겐 이 임무가 가장 중요한 일이며 어쩌면 그가 해줘야 할 마지막 수고가 될지도 모르지. 그 다음으로 이 세계의 자유민들 즉 요정, 난쟁이, 인간의 대표들이 포함되네. 요정의 대표는 레골라스이며 난쟁이들의 대표는 글로인의 아들 김리인데, 그들은 적어도 안개산맥을 넘을 때까지는 동행하기로 했고 혹시 그 너머까지 갈지도 모르네. 인간을 대표해서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 동행할 걸세. 이실두르의 반지에 대해 그는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야." "스타라이더!" 프로도가 외쳤다. 그러자 아라곤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다시 한번 자네 여행에 끼워 주게, 프로도!" "같이 안 가시면 섭섭할 뻔했어요. 저는 보로미르와 함께 미나스티리스로 가시는 줄 알았어요." "거기도 가네. 출발하기 전에 부러진 검을 다시 벼릴 걸세. 자네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수백 마일은 겹치지. 그래서 보로미르도 동행하게 될 거야. 용감한 친구지." 다시 엘론드가 말했다. "둘이 더 남았는데,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우리집안에서 누구 적당한 인물을 찾아보도록 하세." 그러자 피핀은 얼굴이 벌개지며 외쳤다. "그러면 우리 자리가 없잖아요! 우리만 뒤에 남을 수는 없어요. 우리도 프로도와 함께 가겠어요." "앞길이 어떤 것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군." 엘론드가 말하자 갠달프가 뜻하지 않게 피핀의 역성을 들고나섰다. "프로도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도 역시 확실한 모르기는 마찬가집니다. 이 호비트들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알면 감히 나서지 못할 거라는 말씀도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용감하게 나서고 있고 또 뒤에 남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론드, 이번 일에는 알량한 지혜보다도 그들의 우정을 믿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글로핀델 같은 요정이 함께 간다 한들 암흑의 탑을 공격하거나 오로드루인 화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그의 힘으로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농담이 아니시군요. 나는 나름대로 걱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이젠 샤이어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호비트를 샤이어로 돌려보내 샤이어의 방식에 따라 닥쳐오는 위험을 경계하고 대비하게 할 생각이었지요. 특히 둘 중 나이가 더 어린 페레그린 투크만은 여기 있었으면 좋겠는데.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원." 그러자 피핀이 외쳤다. "그러면 엘론드, 저를 감옥에 집어넣든지 자루 속에 넣어 고향에 보내세요. 그러지 않으면 저도 따라갈 겁니다." 엘론드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가게. 이제 아홉 명이 찼군. 이레 후에 출발하도록 합시다." 엘렌딜의 검이 요정 대장장이들의 손으로 다시 버려졌다. 칼날 위에는 초승달과 빛나는 태양 사이에 일곱 개의 별이 새겨진 문장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많은 룬 문자가 새겨졌다.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 모르도르로 전쟁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새로 완성된 검의 광채는 현란했다. 햇빛이 칼날에 반사되면 붉게 빛났고 달빛은 싸늘한 기운으로 바뀌었다. 칼날은 예리하면서도 매우 단단했다. 아라곤은 그 칼에 안두릴, 즉 서역의 불꽃이란 이름을 새로 붙였다. 아라곤과 갠달프는 여행경로와 앞으로 닥칠 난관에 대비하기 위해 함께 앉아서 혹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엘론드의 집에 있던 유서깊은 지도와 역사책들을 뒤척이기도 했다. 가끔 프로도가 그들과 합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가능한 한 빌보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를 썼다. 마지막 며칠간 호비트들은 저녁마다 불의 방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서 베렌과 루디엔의 노래와 위대한 보석, 실마릴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메리와 피핀이 나가 돌아 다니는 낮 동안 프로도와 샘은 빌보의 작은 방에 있었다. 빌보는 아직 완성이 안 된 저서의 일부나 시구들을 읽어 주면서 프로도의 모험을 기록하곤 했다. 출발 전날 아침 프로도는 빌보와 단 둘이 있었다. 그 늙은 호비트는 침대 밑에서 나무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는 뚜껑을 열고 속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여기 네 칼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부러져 있어. 안전하게 보관은 했지만 대장장이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을 잊었구나. 이젠 시간이 없겠지? 네게 이걸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그는 상자에서 가죽칼집에 든 작은 칼을 꺼냈다. 칼을 뽑자 날카롭고 매끄러운 칼날에서 갑자기 싸늘한 빛이 번득였다. "이것이 스팅이다." 그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칼을 나무기둥에 꽂아 보였다. "괜찮다면 가져라. 내겐 이제 더는 필요없을 것 같구나." 프로도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도 있구나." 빌보는 보기보다 좀 무거워 보이는 꾸러미를 꺼냈다. 몇 겹의 낡은 보자기를 풀자 작은 갑옷 윗도리가 나타났다. 쇠고리를 촘촘하게 엮어 만든 것으로 옷감처럼 부드러웠으나 얼음처럼 차갑고 강철 보다 더 단단했다. 그것은 은은한 달빛을 띤 은색이었고 흰 보석이 박혀 있었다. 진주와 수정이 박힌 혁대로 함께 있었다. 빌보는 그것을 밝은 빛 속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빛깔이 곱지? 꽤 요긴하게 쓰일 거야. 도린이 내게 준 난쟁이들의 갑옷인데 미켈델빙에 맡겨 두었다가 올 때 찾아가지고 왔지. 호비튼을 떠나올 때 반지만 빼놓고 내 옛날 여행의 기념품들을 모두 가져왔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전혀 몰랐구나. 지금은 가끔 꺼내보는 것말고는 전혀 필요가 없어. 이 갑옷은 무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지." "글쎄요, 남에게 보이기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나도 옛날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건 겉옷 속에 입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자! 아무에게도 얘기하면 안 돼! 우리만 아는 비밀이야! 네가 이것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겠니. 암흑의 기사들의 칼도 뚫을 수 없을 거다." 그는 마지막 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입지요." 빌보는 갑옷을 입히고 번쩍이는 혁대 위에 스팅을 차게 했다. 프로도는 그 위에 입고 있던 빛바랜 헌 바지와 속옷, 윗도리를 다시 꺼입었다. "넌 그냥 지극히 평범한 호비트일 뿐이야. 하지만 이젠 겉보기와는 전혀 다르지. 행운을 빈다!" 빌보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오늘 이 선물이나 지금까지의 모든 은혜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늙은 호비트는 돌아서서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할 것 없다! 아야! 등이 너무 단단해서 건드릴 수가 없구나. 여하튼 우리 호비트들은 뭉쳐야 해. 특히 배긴스 가문은 말이지.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모쪼록 몸조심하고, 돌아 올 때는 그 동안의 소식과 함께 옛날이야기나 노래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수집해 오면 좋겠다. 난 네가 돌아오기 전에 책을 끝내도록 노력하지. 시간이 있다면 후편도 쓰고 싶은데 말이야."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창문을 향해 돌아서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난론가에 앉아 생각하네 눈앞에 스쳐간 모든 것들을, 여름날을 가득 채웠던 풀꽃과 나비들을. 그리고 가을날의 낙엽과 풀잎 위의 잔 거미줄, 아침안개와 은빛 태양 머리카락에 휘날리는 바람까지. 난롯가에 앉아 생각하네 다시 올 봄의 기약도 없이 겨울이 성큼 찾아올 때 세상이 어떻게 될까. 아직도 세상엔 많이 있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봄이 올 때마다, 숲이 바뀔 때마다 풀빛이 달라지네. 난롯가에 앉아 생각하네 지나간 추억의 벗들을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올 친구들을. 그러나 여전히 앉아 생각하네 지나간 추억의 나날들을 먼 길 돌아오는 발걸음과 목소리를 문간에서 귀기울이며. 이제 춥고 흐릿한 12월말경이었다. 동풍이 발가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와 언덕 위 소나무숲에서 잉잉거렸다. 낮게 깔린 검은 조각구름들이 머리 위로 서둘러 지나가고 있었다. 초저녁의 음산한 어둠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 일행을 둘러쌌다. 그들은 어두워지면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것은 리벤델을 멀리 벗어나기까지는 가능한 한 밤중에만 행군을 하라는 엘론드의 충고 때문이었다. "사우론의 첩자들의 수많은 눈을 조심하시오. 지금쯤은 틀림없이 기사들의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당연히 분노하고 있을 것이오. 하늘과 땅으로 그의 첩자들이 곧 북쪽을 향해 몰려올 것이니 가는 도중에는 머리 위쪽도 꼭 경계를 해야 하오." 그들은 싸움을 벌이지 않고 몰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무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아라곤은 안두릴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었으며 황야의 순찰자들처럼 녹갈색의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보로미르는 안두릴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한 모양의 장검을 차고 있었고 뿔나팔과 함께 방패도 들었다. "산 속 골짜기에서는 나팔소리가 크고 맑지요. 그러면 곤도로의 적들은 모조리 달아나고 맙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팔을 입에 대고 크게 불었다. 나팔소리는 바위에 부딪혀 온 계곡에 메아리쳤고 리벤델의 주민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엘론드가 말했다. "보로미르, 다음에 나팔을 불 때는 신중히 생각하시오. 당신의 나라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을 때나 아니면 정말 긴박한 상황일 때만 불어야 하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전 출정할 때면 항상 뿔나팔을 붑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겠지만 저는 그렇게 한밤의 도둑처럼 숨지는 않겠습니다." 난쟁이 김리는 난쟁이들의 짐을 가볍게 할 때 입는 강철고리 윗도리를 걸치고 허리에는 날이 큼직한 도끼를 찼다. 레골라스는 활과 전통을 들고 혁대에는 흰 장검을 차고 있었다. 젊은 호비트들은 배로우에서 얻은 칼을 각각 가졌고 프로도는 스팅을 찼다. 빌보가 시킨 대로 그는 갑옷을 옷 속에 숨겼다. 갠달프는 지팡이를 들고 옆구리에는 요정의 검 글람드링을 차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외로운산 속에 누워 있는 도린의 가슴에 놓여 있는 오르크리스트와 쌍둥이 검이었다. 엘론드는 그들 모두에게 두툼하고 따뜻한 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모피로 안을 댄 윗도리와 외투를 입혔다. 여분의 식량과 옷가지, 담요를 비롯한 다른 필수품들은 조랑말 한 마리에 모두 실었다. 브리에서 데려온 그 불쌍한 조랑말이었다. 리벤델에 있는 동안 그 조랑말은 놀랄 만큼 변했다. 털에선 윤기가 흘렀고 마치 한창때처럼 원기가 왕성했다. 샘은 그 말에 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만일 데려가지 않으면 빌이 크게 상심할 거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거의 말을 할 정도까지 됐다니까요. 여기 조금만 더 있으면 정말 말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를 쳐다보는 게 꼭 피핀이 대들던 때와 같아요. '샘,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갈 거예요'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빌은 간신히 짐말로 따라가게 되었지만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기가 꺾이지 않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들은 곧 중앙홀 난로 옆에서 작별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은 갠달프를 기다렸다. 열린 문 사이로 한 줄기 희미한 불빛이 새나왔고 창문마다 따스한 불빛이 반짝였다. 빌보는 현관 앞 계단에서 외투를 둘러쓰고 프로도와 함께 말없이 서 있었다. 아라곤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오로지 엘론드만이 이 순간이 아라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어둠 속의 희미한 형체로 비칠 뿐이었다. 샘은 조랑말 곁에 서서 울적한 기분으로 우당탕거리며 바위에 부딪히고 흘러가는 강물을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았다. 여행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는 말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빌, 이 녀석아! 우리를 따라나서면 안 되는 거야. 여기 있으면 봄에 새 풀이 돋기까지는 최고급 건초만 먹을 텐데 말이야." 빌은 꼬리를 한 번 철썩 내저을 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샘은 어깨의 짐보따리를 헐겁게 하고 머리 속으로 그 속에 든 물건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서 빠뜨린 것이 없는지 점검해 보았다. 먼저 가장 중요한 장비인 취사도구,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채워 넣는 작은 소금통, 상당한 분량의 담뱃잎(틀림없이 모자라겠지만), 부싯돌과 부시, 털양말, 아마포, 그리고 프로도가 잊었던 잡동사니들도 있었는데 샘은 그것들이 아쉬울 때 의기양양하게 꺼낼 작정이었다. 점검이 모두 끝났다. 그때 프로도가 중얼거렸다. "로프! 로프가 없어. 이런 멍청한! 어젯밤에 그렇게 말해 놓고도 잊어버렸군. 샘, 로프를 좀 넣으면 어때? 없으면 아쉬울 거야. 그래, 필요할 거야. 이젠 너무 늦지." 그 순간 엘론드가 갠달프와 함께 나와 일행을 불러 모았다. 그는 깍듯이 격식을 차리며 말했다. "작별인사를 하십시다. 반지의 사자는 이제 운명의 산을 향해 떠납니다. 모든 책임은 오로지 그에게만 있습니다. 반지는 버려도 안되고 적의 하수인들에게 넘겨주어서도 안 되며 누가 함부로 만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극히 불가피한 경우에만 일행 중 누구에게 맡길 수는 있겠지요. 다른 분들은 그를 돕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행동은 자유입니다. 여기 나아도 좋고 도중에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옆길로 빠져도 좋습니다. 가면 갈수록 돌아서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의지를 구속하는 아무런 맹세나 약속도 없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의 용기가 얼마나 되는지, 앞길에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여러분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길이 어두워진다고 돌아온다면 그는 배신자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어둠이 내리는 것을 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어둠 속의 길을 강요하는 맹세는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맹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강하게 할 수도 있잖습니까?" 김리는 여전히 우겼다. 그러나 엘론드는 말을 이었다. "오히려 약하게 할 수도 있지요. 너무 멀리까지 내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시오! 안녕히! 요정과 인간과 모든 자유민들의 축복이 그대들과 함께 있기를 기원합니다. 별빛이 그대들의 얼굴을 밝혀 주기를 기원합니다." 빌보는 감기 때문에 콜록거리며 인사를 했다. "행운을... 행운을 빕니다! 프로도, 내 아들아, 네게 일기를 쓰는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만 돌아오면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너무 오래 있지 마라! 안녕!" 엘론드의 많은 가솔들이 어둠 속에서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작별인사를 했다. 웃음소리나 노랫소리, 음악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그들은 엘론드의 저택을 등지고 소리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다리를 건너 리벤델의 협곡을 빠져나오는 길로 가파른 오솔길을 천천히 올라갔고 얼마 후에는 히드 수풀 사이로 바람이 씽씽거리는 황량한 고원에 닿았다. 그리고 눈 아래 불빛이 가물거리는 엘론드의 아늑한 저택을 각각 한 번씩 바라본 뒤 일행은 밤의 어둠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갔다. 그들은 브뤼넨 여울에서 동부대로를 버리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우묵한 분지 사이로 난 소로를 계속 걸었다. 그들의 계획은 그 길을 따라 안개산맥 서쪽으로 며칠간 계속 가는 것이었다. 이곳은 산맥 반대편의 안두인 강 유역 푸른 계곡보다 더 거칠고 황량했다. 자연히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수상한 눈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사우론의 첩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리벤델의 요정들 외에는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갠달프가 앞장을 섰고 아라곤이 그 옆에서 걸어갔는데 그는 어둠 속에서도 이 지역을 대낮처럼 환히 알았다. 다른 이들은 한 줄로 그 뒤를 따랐는데 눈이 밝은 레골라스가 맨 후미에 섰다. 여행의 초반부는 힘들고 지루했기 때문에 프로도는 바람소리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며칠간 흐린 날이 계속되면서 살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를 막을 수 없을 듯했다. 모두 옷을 두텁게 입고 있었지만 움직일 때나 쉴 때나 계속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한낮에는 우묵한 분지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우거진 가시나무숲 밑에 숨어서 새우잠을 잤다. 그리고 오후 늦게 불침번이 깨우면 그제서야 일어나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식사를 했다. 함부로 불을 피울 수가 없었기에 식사는 대개 차갑고 맛이 없었다. 밤에는 다시 길이 보일 때까지 계속 동쪽을 향해 걸었다. 호비트들은 처음엔 매일 지칠 때까지 정신없이 걸었으나 여전히 굼벵이처럼 제자리만을 기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풍경은 언제나 전날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차차 산맥에 접근하고 있었다. 리벤델 남쪽으로부터 산맥은 점점 높아졌지만 방향은 차차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산맥 중심부의 기슭에는 요란한 물소리로 가득한 깊은 계곡과 황량한 야산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길은 거의 뚫려 있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길들도 굴곡이 심했을 뿐 아니라 이따금 급경사의 폭포 위로 인도하거나 위험한 늪지대로 끌고 내려가곤 했다. 길을 떠난 지 두 주일째에 접어들자 날씨가 변했다. 바람이 가라앉더니 남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급히 흘러가던 구름도 녹아 사라지면서 밝은 햇빛이 비쳐왔다. 지루하고 힘든 야간행군 끝에 차갑고 맑은 새벽이 밝아왔다. 여행자들은 호랑가시나무 고목들로 뒤덮인 낮은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나무줄기는 산 위의 바위와 빛깔이 비슷했다. 거무스름한 나뭇잎은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반짝거렸고 열매는 붉게 익어 있었다. 프로도는 멀리 남쪽으로 자신들이 향하고 있는 높은 산맥의 희미한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왼쪽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었는데 가장 높고 가까운 봉우리는 정상이 눈으로 덮인 이빨 모양의 산이었다. 북쪽으로 향한 거대한 바위 절벽은 아직 대부분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햇빛이 비치는 곳은 붉게 반사되고 있었다. 갠달프는 프로도 곁에 서서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 우린 사람들이 홀린이라고 부르는 곳 경계에 와 있는 거야. 행복했던 시절에는 요정들도 여기 많이 살았었는데 그때는 에레기온이라고 불렀지. 도중에 헤매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온 거리는 직선거리로 백삼십오 마일이나 돼. 지형이나 날씨는 전보다 나아지겠지만 위험은 한층 더해질 거야." "위험하건 어쨌건 햇빛을 보니 살 것 같은데요." 프로도가 모자를 뒤로 젖히고 아침햇살을 얼굴 가득히 받으며 대답하자 피핀이 갠달프에게 물었다. "그런데 산맥이 우리 앞쪽에 있잖아요. 지난밤에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건가요?" "아니야, 햇빛이 좋으니 더 멀리까지 잘 봐. 봉우리만 넘으면 산맥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엘론드의 저택에 지도가 많이 있었는데 아마 자넨 볼 생각이 없었겠지?" "가끔 보긴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런 건 프로도가 잘 기억하겠죠." 그러자 레골라스와 함께 올라온 김리가 말했다. "내겐 지도가 필요없어요." 그는 깊숙한 두 눈에 이상한 빛을 띤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곳은 우리 조상들이 계시던 곳이지요. 저 세 봉우리의 모습을 우린 금속과 돌로 수없이 조각했고 또 노래와 이야기도 많이 전합니다. 우리의 꿈속에서는 너무도 생생한 곳이지요. 바라즈, 지라크, 샤투르. 전에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지만 난 저곳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이름까지 기억하지요. 왜냐하면 저 산 속에 카잣 둠, 즉 난쟁이들의 일터가 있었으니까요. 요정들은 저곳을 모리아, 즉 검은 갱도라고 부릅니다. 맨 앞에 있는 것이 바라진바르, 인간들은 레드혼, 요정들은 잔인한 카라드라스라고 부르는 산이지요. 그 다음이 실버타인과 클라우디헤드예요. 요정들은 백색 켈렙딜, 회색 파누이돌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은 지라크지길, 분두샤투르라고 합니다. 거기서 안개산맥이 갈라지는데 그 갈라진 사이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길고 어두운 골짜기가 있지요. 아자눌비자르, 즉 요정들이 난두히리온이라 부르는 딤릴 계곡입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딤릴 계곡일세. 만일 우리가 레드혼 게이트라는 재로 올라서면 카라드라스 저편 아래로 딤릴 계곡을 따라 난쟁이들이 살던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서게 되는 거야. 거기에 가면 미러미어 호수가 있고 실버로드 강 수원이 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샘물이 있지." "켈레드 자람 호수의 물은 검고 키빌 날라의 샘물은 차지요. 그것들을 곧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실컷 즐기세, 사랑하는 난쟁이군! 하지만 자네가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골짜기에서 오래 머물 수 없네. 실버로드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리고나서 안두인 대하로 향한 후 그 다음엔..." 그는 말을 멈췄다. "계속하세요. 그 다음엔 어디예요?" 메리가 재촉했다. "우리의 목적지겠지, 결국. 너무 멀리까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일단계 계획이 무사히 끝난 것을 기뻐하세. 내 생각에 오늘은 밤에도 걷지 말고 여기서 그냥 쉬는 게 좋겠어. 흘린 주변은 공기가 맑거든. 한때 요정이 살았던 곳은 세상이 혼탁해져도 그 요정들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 살던 요정들은 우리 같은 숲 속 요정들과는 다른 종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풀들도 이젠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다만 돌과 바위들이 그들을 슬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우리를 깊이 팠었지. 그들은 우리를 아름답게 다듬었었지. 그들은 우리를 높이 세웠었지. 그러나 그들은 사라져 버렸어.'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라져 버렸어요. 먼 옛날 회색항구를 찾아 떠나 버렸지요." 그날 아침 그들은 호랑가시나무덤불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에서 불을 피웠다. 그날 아침 겸 저녁 식사는 그들이 출발한 이래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 식후에도 그들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밤에 잠을 잘 수 있고 내일저녁까지 계속 머물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오직 아라곤만 불안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듣는 듯 고래를 갸웃거리며 남쪽과 서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골짜기 아래로 되돌아와 다른 동료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메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스트라이더? 뭘 찾고 있어요? 동풍이 다시 그리운 모양이지요?" "아닐세. 하지만 뭔가를 찾고 있지. 전에도 홀린에는 여러 번 온 적이 있었는데 여기엔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에 짐승들의 천구이었지. 특히 새들이 많았어. 그런데 지금은 자네들 소리말고는 사방이 너무 고요하단 말이야. 침묵이 강하게 느껴지네. 사방 몇 마일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자네들 소리에 땅이 울릴 지경이야.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러자 갠달프가 긴장하며 물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오? 인적이 워낙 드문 곳이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호비트들이 넷씩이나 나타나서 동물들이 놀란 것 아니겠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예전과는 달리 감시를 당하고 있는 듯한 두려움이 느껴지는군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조심합시다. 순찰자와 함께 다닐 때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이롭지. 특히 그 순찰자가 아라곤이라면 더욱 그렇고.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조용히 쉬면서 불침번을 세우도록 하지." 그날 첫당번은 샘이었지만 아라곤도 함께 불침번을 섰다. 나머지는 모두 잠이 들었다. 주위가 차츰 적막 속에 빠져들면서 샘은 잠을 자는 동료들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따금 조랑말 빌이 꼬리를 철썩거리거나 발굽으로 땅바닥을 긁는 소리가 섬뜩할 만큼 크게 들렸다. 샘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동쪽하늘에 태양이 떠오르면서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그때 남쪽하늘 멀리서 검은 점이 하나 나타나더니 점점 커지며 바람에 실린 연기처럼 북쪽을 향해 날아왔다. "스트라이더, 저게 뭐예요? 구름 같지는 않는데요." 샘이 아라곤에게 속삭였다. 그는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샘은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곧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원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는 새떼였다. 마치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새떼는 구석구석을 누비며 서서히 가까이 날아오고 있었다. "꼼짝 말고 엎드려!" 아라곤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호랑가시나무덤불 속으로 샘을 끌어당겼다. 한 무리의 새떼가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고도를 낮추며 능선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왔다. 샘이 보기에는 몸집이 큰 까마귀 종류였다. 새떼는 워낙 숫자가 많아서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동안 땅에는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뒤따랐다. 까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새떼가 북서쪽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지고 하늘이 다시 밝아질 때까지 아라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갠달프를 깨웠다. "까마귀떼가 산맥과 그레이플러드 강 사이의 전역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막 홀린을 지나갔는데 원래 이 땅에 살던 무리가 아니고 판곤과 던랜드에서 날아온 크라반이라는 까마귀였습니다. 뭘 찾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남쪽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나 피난하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히 지상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다. 더 높은 하늘에선 매도 몇 마리 보였는데 아무래도 오늘저녁에 다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홀린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군요.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레드혼 게이트도 마찬가진데. 어떻게 발각되지 않고 그곳을 넘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오. 그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어두워지면 출발하자는 의견에는 나도 동의합니다." "다행히 우리가 피운 불이 연기가 적었고 또 크라반떼가 오기 전에 거의 사그라들어 있었지요. 다시는 불을 피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후 늦게 일어나자마자 앞으로 불도 못 피우며 오늘밤 행군을 계속한다는 소리를 듣고 피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불평을 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겨우 까마귀 때문에! 오늘저녁엔 정말 근사한 식사를 기대했었는데, 뜨끈한 걸 말이에요!" 갠달프가 말했다. "흠, 기대는 계속해도 좋아. 앞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멋진 식사가 많을 테니까. 사실 나도 느긋하게 담배도 좀 피우고, 발도 녹이고 싶다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따뜻해질 거란 사실이야." 샘이 프로도에게 중얼거렸다. "너무 뜨거워서 탈이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지금쯤은 그 불의 산이 보일 때도 된 것 같은데요. 다시 말하자면, 이제 여행이 끝날 때도 된 게 아닐까요? 처음에 김리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저기 레드혼인가 뭔가가 거긴 줄 알았어요. 난쟁이들 말은 발음이 어려워서 원!" 샘의 머리로는 도무지 지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걸어온 먼 길만으로도 너무 광대하기에 그로서는 도대체 가늠을 할 수 없었다. 그날 하루종일 일행은 숨어 지냈다. 검은 새들이 이따금 지나갔지만 석양이 빨갛게 물들면서 모두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졌을 때 그들은 출발했다. 카라드라스 봉이 마지막 석양을 받아 아직 불그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반쯤 동쪽으로 길을 틀어 곧바로 카라드라스로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흰별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아라곤의 인도로 그들은 상당한 거리를 걸었다. 프로도가 보기에 홀린에게 고개까지 이르는 길은 한때 널찍하게 잘 닦였던 고대도로의 일부인 것 같았다. 산 위로 보름달이 떠올라 희미한 빛으로 거뭇거뭇한 바위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쓸쓸하고 황량한 폐허에 뒹굴고 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석공들의 손을 거친 것 같았다. 첫새벽이 밝아오기 직전의 차고 쌀쌀한 시간이었다. 달은 벌써 저만큼 내려앉고 있었다. 프로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별빛을 가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별빛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떨었다. "뭔가 지나가는 것 못 보셨어요?" 그는 바로 앞에 가던 갠달프에게 물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뭔가 지나간 것 같네. 혹시 엷은 구름일지도 모르지." 갠달프가 대답하자 아라곤이 중얼거렸다. "속도가 빨랐어요. 바람도 없는데." 그날 밤은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은 전날보다 더 맑았다. 그러나 공기는 다시 차가워졌고 바람은 벌써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들은 이틀밤을 더 걸었다.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점점 더 가팔라졌고 산들은 거대한 장막처럼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사흘째 아침 거대한 봉우리 카라드라스가 그들 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정상에는 은빛 눈이 덮여 있었고 깎아지른 듯한 측면은 아침햇살을 받아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이 거무튀튀하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햇빛도 힘을 잃었고 바람은 이제 북동쪽으로 불었다. 갠달프가 킁킁거리며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뒤를 돌아보며 아라곤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겨울이 깊어지고 있소. 북쪽엔 전보다 눈이 더 왔어요. 산허리까지 눈이 덮였으니 말이오. 오늘밤에는 레드혼 게이트를 오르게 되는데 그 좁은 산길에서 적의 눈에 발각될지도 모르고 또 기습을 받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은 날씨일 것 같소. 아라곤, 그래도 이 길이 낫겠소?" 프로도는 이 말을 엿듣고서야 갠달프와 아라곤이 오래 전부터 시작한 논쟁을 아직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걱정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아라곤이 말했다. "갠달프,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가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 쉬운 데가 있습니까? 예상했듯 못했든 간에 위험은 갈수록 켜집니다. 계속 가는 수밖에 없지요. 산을 넘는 것을 연기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로한 협곡에 가기 전까진 길도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번 말씀하신 대로 사루만이 그렇게 변했다면 그쪽도 마음을 놓을 수 없잖습니까? 지금은 어느 편이 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카라드라스 고개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소? 지난번에 말했던 어두운 비밀의 길 말이오." "그 문제는 이제 그만합시다! 아직은 말입니다. 더 이상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십시오." "더 들어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하오." 갠달프가 말하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들 잠든 후에 다시 한번 각자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오후가 되어 모두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동안 갠달프는 아라곤과 함께 한쪽 옆으로 가서 카라드라스를 바라보고 섰다. 산허기는 벌써 그늘이 져서 음침했으며 산 정상은 회색 구름에 잠겨 있었다. 프로도는 그들을 바라보며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날지 궁금했다. 잠시 후 둘은 되돌아왔고 날씨가 나쁘지만 높은 재를 넘기로 했다고 갠달프가 말했다. 프로도는 안심했다. 그는 갠달프가 말했던 어두운 비밀의 길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아라곤이 그 말만 듣고도 꺼려하는 것을 보면 그쪽을 포기한 것이 잘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레드혼 게이트는 감시되고 있는 것 같소. 그리고 날씨도 대단히 좋지 않아요. 눈이 내릴지도 모르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올라가야 하지만 아무리 빨리 가도 고개 위에 도착하는 데는 이틀이 더 걸릴 거요. 오늘밤은 일찍 어두워질 테니 준비가 되는 대로 빨리 출발합시다."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백색산맥 그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지대의 여행에 관해 조금 아는 게 있습니다. 산을 넘으려면 지독한 추위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니 소리도 없이 몰래 넘어가려고 하다가 얼어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요. 여긴 아직 나무나 덤불이 좀 있으니 모두 힘닿는 데까지 땔나무를 지고 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러면 빌, 너도 짐을 좀더 질 수 있을까?" 샘이 조랑말을 바라보며 말하자 조랑말은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좋소.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이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절대 불을 피워서는 안 되오." 그들은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 빠른 속도였지만 곧 길이 가파르고 험해졌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은 도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산에서 굴러내린 바윗돌로 막혔다. 짙은 구름 아래의 밤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바위 틈새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자정쯤에 그들은 높은 벼랑 밑에 이르렀다. 길은 이제 왼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끼고 돌아가고 있었고 그 위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카라드라스의 험궂은 산허리가 숨막힐 듯 솟아 있었고 오른쪽 깊은 계곡 아래로 암흑의 심연이 뻗쳐 있었다. 일행은 가파른 비탈길을 간신히 올라 절벽 위에 잠시 멈춰섰다. 프로도는 얼굴에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희끗희끗한 눈발이 소매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계속 걸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눈송이는 점차 세차게 어둠 속을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프로도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두 발짝 앞에 서 있는 갠달프와 아라곤의 구부정하고 시커먼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샘이 바로 뒤에서 헐떡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 마음에 안 들어. 눈이란 맑은 아침에 내다보아야 좋은 거지, 이렇게 내릴 때는 침대에 있고 싶단 말이야. 호비튼에 이렇게 내리면 모두들 아주 좋아할 텐데!" 노스파딩의 고지대 외에는 샤이어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눈은 언제나 즐거운 손님이었다. 살아 있는 호비트 중에는(빌보를 제외하고) 아무도 흰 늑대가 얼어붙은 브랜디와인 강을 건너 샤이어에 쳐들어왔던 1311년의 혹독한 겨울을 기억하지 못했다. 갠달프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모자와 어깨 위에 눈이 두텁게 쌓였고 신발 위로도 벌써 발목까지 차올랐다. "내가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거요. 아라곤, 이제 어떻게 해야겠소?" "나도 걱정을 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걱정한 것과는 다릅니다. 이런 남쪽 지방에서는 고산지대를 제외하곤 폭설이 드문데 이건 좀 이상합니다. 우린 아직 그리 높이 올라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산아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긴 항상 길이 뚫려 있었던 곳입니다."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혹시 적의 농간일지도 모릅니다. 모르도르 경계의 어둠의 산맥에서는 폭풍도 그의 의지대로 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는 신비한 마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동조자도 매우 많지요." 김리가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팔이 꽤 길겠군. 우리를 괴롭히려고 북쪽에서 눈을 펴서 구백 마일이나 떨어진 여기까지 날라오다니!"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팔이 점점 길어지는 모양이야." 그들이 쉬는 동안 바람이 잦아들면서 눈발도 약해지더니 이윽고 멎었다. 그들은 다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백 미터도 채 못 가서 바람이 다시 기승을 부렸다. 바람소리가 윙윙거리며 눈발은 이제 눈앞을 가로막는 눈보라로 변했다. 이윽고 보로미르조차도 더 이상 행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호비트들은 거의 반쯤 몸을 수그린 채 키 큰 사람들 뒤를 겨우 따라갔다. 그러나 눈이 계속 이렇게 내린다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이 분명했다. 프로도는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웠다. 피핀이 뒤로 처지기 시작했으며 난쟁이치고는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인 김리도 뒤에서 불평을 하고 있었다. 일행은 말 한마디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사방의 어둠 속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그것은 암벽의 틈새나 골짜기를 지나오는 바람의 장난 같았지만 그들의 귀에는 날카로운 비명이나 요란한 웃음소리로 들렸다. 산비탈에서 돌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고 머리 위로 소리를 내며 쏟아져 바위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따금 그들은 집채만한 바위가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보로미르가 말했다. "오늘밤은 더 이상 못 갑니다. 바람소리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단히 기분나쁜 소리군요. 그리고 떨어지는 바위도 우리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아라곤이 대답했다. "바람소리요. 하지만 당신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오. 이 세상에는 사우론과 손을 잡진 않았지만 두 발 달린 생물만 보면 적대감을 드러내는 못된 것들이 많으니, 그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겠지. 사우론보다도 먼저 이 땅에 나타난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오."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카라드라스는 한때 잔인한 산이라고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지요. 사우론이란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하던 옛날 일이지만 말입니다." 갠달프가 말했다. "우리가 물리칠 수 없는 적이라면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요?" 피핀이 의기소침해서 물었다. 그는 메리와 프로도에게 기댄 채 떨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든지 되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야. 더 이상 갈 수는 없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 절벽이 끝나고 기다란 비탈이 나타나는데 그 바닥에는 야트막하고 널찍한 골이 파여 있네. 따라서 거기선 눈이나 돌을 막아 낼 수는 없을 거야." 갠달프가 말하자 아라곤이 나섰다. "이 폭설 속에서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저녁 지나온 길에는 지금 이곳보다 더 나은 피신처가 없어요." 그러자 샘이 중얼거렸다. "피신처라! 이게 피신처라면 벽 하나에 지붕만 있으면 집이라고 우기겠군." 일행은 이제 함께 모여 가능한 한 절벽 쪽에 바짝 붙어 섰다. 절벽은 남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고 바닥 가까이에 와서는 불쑥 튀어나온 돌출부가 있어 그들은 그것이 떨어지는 돌이나 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돌풍은 사방에서 휘몰아쳤고 눈발은 더욱 굵어졌다. 그들은 벽에 등을 대고 한자리에 우두커니 모여 섰다. 조랑말 빌 역시 낙심한 표정이었으나 참을성있게 호비트들 앞에서 그들을 가리며 서 있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눈은 곧 그의 복사뼈를 뒤덮고도 계속 쌓여 갔다. 만일 키 큰 동료들이 없었다면 호비트들은 완전히 눈 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프로도에게 밀어닥쳤다. 그는 나른한 아지랑이 같은 꿈속으로 가라앉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발끝에는 따뜻한 난로가 놓였고 난로 저쪽 어둠 속에서는 빌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네게 일기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1월 12일의 눈보라, 그걸 보고하려고 되돌아올 필요는 없었어.' '하지만 빌보 아저씨, 저는 휴식과 잠이 필요했어요.' 프로도는 억지로 대답을 했다. 온 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고통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보로미르가 눈 속에 파묻힌 그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갠달프, 이러다가 꼬마친구들이 얼어죽겠습니다. 눈이 머리 위에 쌓일 때까지 앉아 있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지요." 갠달프는 자기 배낭에서 가죽물통을 꺼내며 말했다. "그들에게 이걸 주시오. 모두 한 모금씩만 마시게. 매우 귀한 거니까. 임라드리스의 감로주 미루보르인데 엘론드가 떠나기 전에 주었지. 자, 돌리시오!" 프로도는 따뜻하고 향긋한 감로주를 한 모금 마시자 몸 속에서 새로운 힘이 솟고 쏟아지던 졸음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모두들 다시 원기를 되찾았으며 조금씩 희망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까보다 더 굵은 눈발이 휘몰아쳤고 바람도 더 세게 불어왔다. 보로미르가 불쑥 물었다. "불을 피우는 게 어떻습니까? 갠달프, 이젠 정말 생사의 기로에 온 것 같습니다. 눈 속에 완전히 파묻히면 적의 첩자들에게 발각되지야 않겠지만 만사가 끝장나는 것 아닙니까?" "불을 피울 수 있으면 피워 보시오. 이 눈보라를 견딜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불을 피우든 않든 간에 벌써 우리를 발견했겠지." 그러나 보로미르의 제안에 따라 나무와 불쏘시개를 모아 놓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난쟁이나 요정의 재주로도 도저히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바람이 너무 심하기도 했지만 땔감이 몹시 젖어 있었다. 결국 갠달프가 마지못해 손을 썼다. 그는 장작 하나를 집어 잠시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나우르 안 에드레이스 암멘!' 하는 주문과 함께 지팡이 끝을 장작 속에 집어넣었다. 즉시 파란색과 초록색의 불꽃이 크게 일어났고 나무는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혹시 어디서 지켜보는 눈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내 존재는 발각이 되었군. 리벤델에서 안두인 대하 하구까지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는 모두 볼 수 있도록 '갠달프가 여기 있소'하고 방을 써붙인 꼴이 되었으니 말이야." 그러나 일행은 숨어 지켜보는 눈이나 첩자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불꽃을 보기만 해도 그들이 마음은 따뜻해지는 듯했다. 나무는 신나게 타올랐다. 모닥불 둘레의 눈이 쉭쉭거리며 녹아 그들 발 밑으로 흘러갔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분좋게 불꽃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춤추듯 너울거리는 작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일행은 몸을 웅크린 채 서 있었다. 피곤하고 근심스러운 얼굴들 위로 빨간 불빛이 어른거렸고 등뒤로는 어둠이 검은 벽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는 급하게 타들어갔으며 눈은 여전히 퍼부었다. 불기운이 차츰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누군가 마지막 장작을 던져 넣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새벽이 멀지 않았을 거야."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새벽이 되면 저 구름이 없어질까!" 보로미르는 둘러선 자리에서 빠져나오면서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눈발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바람도 자고 있고요." 프로도는 피곤한 눈으로 어두운 하늘에서 꺼져 가는 불빛 속으로 떨어져내리는 눈송이들을 지켜보았다. 한참 바라보았으나 눈송이는 사그라드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졸음이 다시 모려오기 시작하며 그는 바람이 정말 가라앉고 눈송이도 드문드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히 희미한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눈도 완전히 그쳤다. 시야가 좀더 밝아지며 눈덮인 고요한 세계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들의 피신처 아래쪽으로 크고 작은 눈더미만 보일 뿐 지나온 길은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위쪽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눈이 퍼부을 것 같은 무거운 구름 뒤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김리가 하늘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카라드라스는 우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 올라간다면 다시 눈을 퍼부을 거예요. 가능하면 빨리 하산하는 게 좋아요." 이 말에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하산도 이젠 쉽지 않았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들이 불을 피운 자리에서 몇 발짝만 벗어나도 눈은 호비트들의 키를 넘었고 곳곳에 바람에 밀려온 눈더미가 뭉쳐 있었다. "갠달프께서 불을 들고 앞장서신다면 길이 생길 텐데요." 레골라스가 말했다. 눈보라나 추위 속에서도 그는 크게 고생하지 않았고 일행 중 유일하게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요정이 산을 넘어가 태양을 데려다가 우리를 구해 주면 좋겠는데. 무슨 재료가 있어야 불을 피우는 거지 눈을 태울 수야 없잖나." 보로미르가 나섰다. "좋습니다. 우리 속담에 머리로 안 되면 몸을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몸집이 제일 크니 먼저 길을 뚫지요. 보세요! 천지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것 같지만 사실 눈이 처음 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저기 바위벽을 돌아올 때부터였습니다. 저기까지만 가면 그 다음부터는 쉬울 텐데, 제 짐작으로는 이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그렇다면 나하고 같이 저기까지만 길을 뚫어 봅시다." 아라곤이 말했다. 일행 중에서 키는 아라곤이 제일 컸지만 보로미르도 키만 조금 모자랄 뿐 어깨나 체격은 더 벌어지고 탄탄했다. 그가 앞장을 서고 아라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눈이 가슴께까지 차오른 곳이 많았고 보로미르는 걷는다기보다 그 긴 팔로 수영을 하거나 땅을 파들어가는 것같이 보였다. 레골라스는 한참 동안 입가에 웃음을 띤 채 그들이 힘들여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몸이 좋으니 길을 뚫는다고 했나요? 하지만 쟁기질은 농부가 하고, 수영은 수달이 잘하지만 풀밭이나 나뭇잎, 아니면 흰 눈 위로 달려가는 데는 요정이 최고지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프로도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요정이 긴 구두를 신지 않고 가벼운 신을 신고 있으며 눈 위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녕! 태양을 데리러 갑니다." 그는 갠달프에게 인사를 하면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는 곧 열심히 길을 뚫고 있는 두 사나이를 따라잡아 손을 흔들고는 계속 달려 드디어 바위벽 뒤로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보로미르와 아라곤이 흰 눈 속에서 까만 점이 될 때까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구름이 내리깔리면서 다시 눈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느낌으로는 더 오래된 것 같았겠지만 한 시간 가량 지난 후 드디어 레골라스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 뒤로 보로미르와 아라곤이 모퉁이를 돌아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순식간에 다가와 소리쳤다. "태양은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태양은 남쪽 초원에서 지금 걸어오고 있는데 레드혼 언덕에 내린 눈은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투더군요. 하지만 먼 길을 걸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여러분을 위해서는 희소식을 한 가지 가져왔지요. 저기 모퉁이를 돌아가면 바로 뒤에 가장 큰 눈더미가 있는데, 거기서 하마터면 우리 두 용사께서 깔려 돌아가실 뻔했지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두 분은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눈더미가 높기만 하지 실은 두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거기만 넘어가면 눈이 갑자기 낮아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호비트 발바닥에 묻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김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제가 말한 대로지요. 이건 보통 눈이 아니라 카라드라스의 심술이에요. 요정이나 난쟁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눈더미도 우리의 탈출을 봉쇄하기 위한 것일 거예요." 그 순간 도착한 보로미르가 말했다. "다행히도 당신이 인간들과 함께 있다는 걸 카라드라스가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그것도 요감무쌍한 사나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삽이 없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여하튼 이제 눈 속으로 길을 뚫어 놨으니 요정들처럼 가볍게 달릴 수 없는 분들은 모두 고맙다고 해야 할 겁니다." "눈 속에 길을 만들었다지만 우리보고 어떻게 저기까지 내려가란 말이에요?" 모든 호비트들의 생각을 대변해 피핀이 말했다. "희망을 가지시오! 지치긴 했지만 아직 힘이 남아 있습니다. 아라곤도 마찬가지겠지요. 키 작은 분들은 우리가 날라다 드릴 테니 다른 분들은 우리 뒤를 따라오세요. 자, 페레그린, 자네부터 시작하지." 그는 호비트를 들어올렸다. "내 등에 매달리게! 나도 팔을 써야 할 테니까." 피핀은 아무 연장도 없이 두 팔만으로 만들어 놓은 통로를 보면서 보로미르의 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등에 피핀을 매단 채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양쪽으로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마지막 눈더미에 닿았다. 그것은 가파른 급경사의 절벽처럼 그 좁은 산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잘라 놓은 듯한 뾰족한 꼭대기는 보로미르의 키보다 두 배는 높았다. 그러나 그 중간쯤에 올라갔다 내려가는 다리처럼 생긴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메리와 피핀은 그 반대쪽에 내려서 레골라스와 함께 다른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보로미르가 샘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뒤로 좁기는 하지만 이제는 잘 닦인 길을 따라 갠달프가 빌을 끌고 나타났는데 빌의 등짐 위에는 김리가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라곤이 프로도와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통로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프로도가 바닥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섞인 눈사태가 일어났다. 그들은 절벽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있었으나 날리는 눈가루 때문에 거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앞이 다시 환해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막 지나온 길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을 보았다. "그만, 그만! 이제 떠날 거야!" 김리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마지막 공격과 함께 산의 분노는 정말 끝이 난 것 같았다. 침입자들이 격퇴되고 감히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카라드라스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구름이 갈라지고 햇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눈의 심술도 이젠 끝나 버렸다. 레골라스가 보고한 대로 내려갈수록 눈은 점점 줄어들어 드디어 호비트들도 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곧 전날 밤 처음으로 눈송이를 만나기 시작했던 비탈길 꼭대기에 다시 서게 되었다. 날이 샌 지도 벌써 오래였다. 그들은 거기서 서쪽 평지를 바라보았다. 산기슭에 연해 있는 구릉지대 끝에 그들이 재를 오르기 시작했던 골짜기가 보였다. 프로도는 다리가 아팠다. 그리고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생각과 함께 냉기가 뼛속까지 엄습해 왔고 앞으로 내려가야 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행군을 생각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검은 점들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검은 점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발 아래 멀리, 하지만 낮은 산기슭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검은 점들이 공중을 빙빙 돌고 있었다. "새들이 다시 나타났군!" 아라곤이 그쪽에 가리키며 말했다. 갠달프가 말했다. "이젠 어쩔 수 없지. 적이든 친구든, 아니면 우리와 상관이 있든 없든 빨리 내려가는 수밖에 없소. 카라드라스의 무릎 위에서 다시 하룻밤을 지낼 수야 없지." 레드혼 게이트를 뒤로 하고 지친 몸을 이끌며 비탈길을 내려가는 그들이 등뒤로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카라드라스가 그들을 이긴 것이었다. 제16장 어둠 속의 여행 저녁이었다. 희미한 석양이 성큼성큼 대지에서 사라지고 있을 때 일행은 밤의 휴식을 위해 걸음을 멈췄다. 몸이 매우 피곤했다. 산은 짙어 가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갠달프는 리벤델에서 가져온 미루보르를 다시 한 모금씩 나누었다. 간단히 식사를 한 후 그들은 회의를 가졌다. 갠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오늘밤은 더 갈 수 없소. 레드혼 게이트 공략에 너무 지쳤어. 여기서 쉬도록 합시다." 프로도가 물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아직 우리의 여행길은 남아 있고 끝낼 임무도 있지. 계속 가든지 리벤델로 돌아가든지 두 가지 길밖에 없어." 리벤델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피핀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메리와 샘도 희망에 가득 차 갠달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라곤과 보로미르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프로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저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창피해서 어떻게 돌아갑니까? 돌아간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벌써 막혀 버렸으니." "자네 말이 맞아, 프로도. 되돌아간다는 것은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고 더 큰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지. 만일 지금 이대로 돌아간다면 반지는 리벤델에 있을 수밖에 없지. 다시 출발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조만간 리벤델은 포위될 것이고 잠시 필사의 저항을 하다가 결국 무너지겠지. 반지의 악령들도 무서운 적이긴 하지만 절대반지가 사우론의 손에 다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얻게 될 힘과 공포에 비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계속 가야죠. 길이 있다면 말입니다." 프로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샘은 다시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길이 하나 있기는 있네. 우리가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내가 생각해 둔 길인데 그리 기분좋은 길은 아니야. 지금까지 자네들한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아라곤은 그 계획에 반대해 왔었지. 일단 재를 넘어 보자는 것이었어." 메리가 말했다. "레드혼 게이트보다 더 나쁜 길이라면 정말 무시무시한 길이겠군요. 하지만 말씀해 보세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않아요?" "내가 말하는 길은 모리아의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갠달프가 말하자 오직 김리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에 갑자기 불꽃이 이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모두 모리아라는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다. 호비트들까지도 옛날이야기를 통해 들어 아는 것이 있어서 그곳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길로 모리아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가는 길이 있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아라곤이 넌지시 물었다. 보로미르도 말했다. "그건 불길한 이름입니다. 제 생각엔 구태여 그쪽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산을 넘을 수 없다면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 로한 협곡까지 가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우호적인 관계고 또 제가 올라올 때도 그 길로 왔습니다. 아니면 아예 그곳도 지나쳐 이센 강을 건너 랭스트랜드와 레베닌을 지나 해안지역을 통해 곤도르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보로미르, 당신이 떠나온 뒤로 상황이 많이 변했소. 내가 사루만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나는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할 수만 있다면 이센가드는 피해야 하오. 그리고 우리가 반지의 사자와 함께 가는 한 로한 협곡도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오. 그 다음, 멀리 돌아가는 방법도 가능하겠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그렇게 여행을 하자면 시간이 일 년쯤 걸릴 것이고, 또 아무도 살지 않고 은신처도 없는 곳으로만 숨어다녀야 하오. 그래도 안전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오. 사루만과 적은 감시의 눈을 그쪽에도 뻗치고 있거든. 보로미르, 당신이 북으로 올 때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외로운 나그네에 불과했소. 적은 반지를 쫓는 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 같은 나그네에게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 당신은 반지의 사자와 함께 돌아가고 있고,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언제나 위험한 것이오. 하늘을 가려 줄 방패가 없다면 내려갈수록 더 위험할 거요. 이제 고개를 무모하게 넘어가려던 계획도 실패했으니 우리 형편은 더 어려워졌소. 지금이라도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당분간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면 내가 보기엔 희망이 없소. 따라서 산을 넘지도 말고, 돌아가지도 말고, 뚫고 들어가자는 것이오. 어쨌든 그 길은 적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는 길이 아니겠소?" 그러자 보로미르가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적이 무엇을 예상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건 없건 그는 모든 도로를 다 감시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모리아로 들어간다는 것은 암흑의 탑에 쳐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적의 함정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리아는 불길한 이름입니다." 모리아를 사우론의 요새와 비교한다는 것은 당신이 뭘 모른다는 말이오. 암흑의 군주의 토굴에 가본 자는 우리들 중 나 혼자뿐이오. 그리고 나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옛날의 돌 굴두르에도 가보았소. 바랏 두르의 입구로 들어간 이는 돌아올 수가 없소. 하지만 모리아로 가는 길이 출구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들을 그리로 인도하지도 않을 것이오. 혹시 거기에 오르크들이 있다면 그땐 고생을 좀 해야겠지. 그건 사실이오. 하지만 안개산맥의 오르크들 대부분은 5개군 대전투 때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소. 독수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오르크들이 먼 곳으로부터 다시 몰려든다는 소문이 있다지만 아직은 안전하오. 게다가 난쟁이들이 아직 그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고 푼딘의 아들 발린을 조상의 석실에서 만날지도 모르오. 그리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필요한 길이라면 가야 하지 않겠소?" 김리가 말했다. "갠달프, 저는 함께 가겠습니다. 가서 듀린의 방을 찾아보겠습니다. 닫힌 문만 열 수 있다면 거기 무엇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고맙네, 김리. 자네 말에 힘이 나는군. 함께 그 숨겨진 문을 찾아보세. 우린 해낼 수 있을 걸세. 난쟁이들의 유적지에서는 요정이나 인간이나 호비트들보다는 난쟁이가 더 용감하겠지. 난 모리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닐세. 드로르의 아들 드라인을 찾으러 오랫동안 그 속을 헤맨 적이 있어. 그리고 지금 보다시피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잖은가 말이야!" 아라곤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딤릴 게이트는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나 역시 살아 나왔지만 그 기억은 끔찍한 것입니다. 다시는 모리아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이지만 싫어요." 피핀이 말했다. "저도 반대예요." 샘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물론 싫겠지. 누가 기꺼이 나서려 하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앞장선다면 누가 나를 따라오겠는가 하는 것이지." "제가 갈 겁니다!" 김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라곤도 무겁게 말했다. "나도 가겠습니다. 당신은 내 주장대로 산으로 갔다가 눈 속에서 죽을 뻔했으면서도 내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 이 마지막 경고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때는 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갠달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반지나 우리의 목숨이 아니라 바로 갠달프 당신의 생명입니다. 이제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모리아를 지나가려면 당신께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보로미르가 말했다. "모두들 찬성하지 않는 한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레골라스와 꼬마친구들 생각은 어떠신지? 반지 사자의 이야기도 꼭 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모리아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레골라스가 의사를 밝혔다. 호비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샘은 프로도를 보았다. 마침내 프로도가 말했다. "저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갠달프의 충고를 거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투표를 내일아침까지 연기하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춥고 어두운 곳에서보다는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 갠달프가 표를 얻기 쉽지 않겠어요? 바람이 온통 춤을 추는군요." 이 말에 모두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바위틈과 나무 사이에서 바람이 윙윙 불어왔고 그들을 둘러싼 텅 빈 밤의 대지 위에서는 울부짖는 듯한 아우성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갑자기 아라곤이 벌떡 일어섰다. "바람소리가 이상합니다!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섞여 있소! 와르그들이 산맥 서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갠달프가 말했다.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없겠군. 내가 말한 대로요. 적은 드디어 우릴 찾아냈어. 내일 새벽까지 우리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누가 과연 밤마다 꼬리에 사나운 늑대들을 달고 남쪽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겠소?" "모리아는 멉니까?" 보로미르가 물었다. "카라드라스 남서쪽에 입구가 있는데 여기서 직선거리로 약 십오마일쯤 되오. 둘러서 가면 한 이십 마일 되겠지." 갠달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아침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지요. 보이지 않는 오르크보다는 늑대 소리가 더 무섭습니다." 보로미르가 말하자 아라곤이 칼을 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와르그들이 있는 데는 오르크들도 따르기 마련이오." 피핀이 샘에게 속삭였다. "엘론드의 충고를 들을걸 그랬어요. 난 아무 쓸모도 없어. 위대한 조상 반도브라스의 용기도 사라진 지 오래예요. 늑대소리만 들어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걸. 이렇게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건 처음이에요." 샘도 속삭였다. "피핀, 나도 오싹해요. 하지만 아직 목숨은 붙어 있고 또 우리보다 용감한 친구들과 같이 있잖아요. 갠달프가 무슨 재주를 부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늑대밥이 되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한밤의 공격에 대비해 그들은 지금까지 은신하고 있던 낮은 둔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언덕 위에는 굽은 고목 몇 그루가 엉켜 있었고 사방에는 둥근 옥석들이 빙 둘러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한가운데 불을 피웠다. 어둠 속에 조용히 숨어 있다고 해서 늑대들의 예민한 후각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꾸벅꾸벅 불안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불쌍한 조랑말 빌은 서서 벌벌 떨고 있었다.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사방에서 들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언덕 위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 중 몇몇은 돌무더기 근처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빙 둘러 있는 돌무더기 빈 틈새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그들을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아마도 무리 중 우두머리인 듯 입에서 공격개시를 알리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갠달프가 일어서며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잘 들어라, 사우론의 개들아! 갠달프가 예 있다! 그 더러운 껍데기가 귀하다고 생각하면 어서 꺼져라! 이 원 안으로 들어오면 꼬리부터 주둥이까지 흔적도 남지 않을 줄 알아라!" 그 늑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향해 높이 뛰어들었다. 그 순간 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레골라스가 활을 당긴 것이었다. 처절한 울음소리와 함께 뛰어올랐던 늑대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요정의 화살이 목을 관통한 것이었다. 노려보던 눈동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갠달프와 아라곤이 앞으로 나가 보았으나 늑대들은 모조리 달아나고 없었다. 다시 어둠이 고요하게 그들 주위를 둘러쌌고 잉잉거리는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이 깊어 서편 하늘로 이지러진 달이 기웃거렸고 흩어진 구름사이로 달빛이 이따금 새어나왔다. 프로도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별안간 사방에서 다시 늑대들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수많은 와르그떼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이제 막 그들을 공격할 참이었다. 갠달프가 호비트들에게 외쳤다. "불에 나무를 넣어! 칼을 빼고 등지고 돌아서!" 나무를 넣자 다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프로도는 수많은 늑대들이 돌더미를 넘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 더 많은 늑대들이 계속 밀려왔다. 아라곤의 칼이 우두머리인 듯한 늑대의 목을 관통했고 보로미르의 긴 팔에서 휙 소리가 나며 또 한 마리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 옆에서는 김리가 탄탄한 두 다리를 딱 벌린 채로 난쟁이의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고 레골라스의 화살이 핑핑 시위를 떠났다. 이글거리는 불빛 속에서 갠달프의 몸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덕 위에 높이 세워 놓은 고대왕의 석조상처럼 거대하고 위압적인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마치 구름이 내려오듯 몸을 숙여 불타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들고 늑대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것은 번개와 같은 하얀빛을 뿌렸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로 변했다. 그는 주문을 외었다. "나우르 안 에드레이스 암멘! 나우르 단 이 느가우로스!" 뇌성벽력과 함께 딱 소리가 나더니 그 앞에 서 있던 나무가 커다란 나뭇잎으로 변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그리고 나무에서 나무로 불이 옮겨 붙었다. 언덕 위는 온통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불꽃으로 가득 찼다. 칼날이 다시 불꽃 속에서 현란하게 번득이기 시작했고, 레골라스의 마지막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불이 붙은 채 거대한 늑대의 심장에 가서 박혔다. 늑대 떼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서서히 사그라들어 희미한 불똥과 재만 남았다. 매캐한 연기가 불탄 나무들 위에 자욱하게 덮여 있다가 새벽빛이 하늘 위로 희미하게 밝아오자 검은 구름처럼 언덕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적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샘이 칼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뭐랬어요, 피핀. 늑대도 그에겐 꼼짝 못하잖아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 하마터면 내 머리카락마저 태울 뻔했다니까요." 아침이 환하게 밝아오자 그들은 늑대시체를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없었다. 간밤의 격렬했던 전투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는 시꺼먼 숯으로 변해 버린 나무와 언덕 위에 떨어져 있는 레골라스의 화살들뿐이었다. 화살은 모두 아무 탈이 없었으나 그 중 하나는 화살촉만 남아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걱정했던 대로야. 황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놈들과는 다른 것들이야. 빨리 식사를 하고 출발합시다." 그날 날씨는 다시 변했다. 그들이 재를 내려왔기 때문에 더 이상 눈을 퍼부을 필요가 없어서인지 숲 속을 가는 물체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맑았다. 날씨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듯했다. 바람은 밤새 북풍에서 북서풍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잠잠해졌다. 남쪽 하늘의 구름도 사라지고 하늘은 높고 푸르게 개었다. 그들이 출발준비를 하고 언덕 기슭에 서 있을 때 희미한 햇빛이 산 너머로 비쳐왔다. 갠달프가 말했다. "해질 무렵까지는 입구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은 어떻게 될지 정말 장담할 수가 없어. 먼 길은 아니지만 아마도 돌아가야 하겠지. 아라곤도 이 길은 처음일 테니 안내를 할 수 없을 테고 나도 모리아 서쪽 벽으로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아주 오래 전 일이거든. 바로 저기요." 그는 급경사를 이루며 산그림자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먼 산을 가리켰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절벽의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한가운데에 다른 것들보다 더 우뚝 솟은 회색 봉우리가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재를 내려올 때 원래의 출발지점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왔소. 그 덕분에 삼사 마일 정도 거리를 단축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자, 이젠 서두르는 수밖에 없소. 갑시다!" 보로미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갠달프까지 찾는 것이 발견되기를 빌어야 할지 아니면 그 문이 영원히 닫혀 있기를 바라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마도 십중팔구는 등뒤로 늑대의 추격을 받으며 눈앞에는 출구도 없는 산 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것 같습니다. 앞장서십시오." 김리는 모리아로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 갠달프와 함께 맨앞에서 걸었다. 그들은 다시 일행을 산맥 옆으로 끌어들였다. 서쪽에서 모리아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도로는 원래 그 입구가 있는 근처 산기슭에서 발원하는 시라논이라는 강줄기를 따라 나 있었다. 그러나 갠달프가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최근에 지형이 변했는지 그 강을 찾을 수가 없어 일행은 출발지점에서 남쪽으로 겨우 이삼 마일 정도 내려왔을 뿐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붉은 돌로 뒤덮인 황량한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물줄기는 찾을 수 없었고 물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었다. 그들은 점점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살아 있는 짐승이라고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엔 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 낯선 땅에서 밤을 다시 맞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이었다. 선두에서 길을 헤쳐가던 김리가 갑자기 그들을 불렀다. 그는 나지막한 야산에 올라서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히 달려간 그들은 발 밑으로 깊고 좁은 수로를 발견했다. 강바닥은 완전히 말라버린 채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갈색과 붉은색의 자갈 위로는 물방울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로 이쪽으로 곳곳에 허리가 끊어진 퇴락한 도로가 나타났고 도로 곳곳에는 고대의 교통로임을 말해주는 무너진 방벽과 연석들이 눈에 띄었다. 갠달프가 소리쳤다. "아! 드디어 찾았군. 여기가 바로 시라논 강이 흘렀던 곳이오. 그들은 이 수로를 정문수로라고 불렀는데 왜 말랐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옛날엔 아주 빠르고 시끄럽게 흐르던 곳인데. 갑시다! 서둘러야 하오. 늦었어." 모두들 발이 부르트고 피곤했지만 굴곡이 심하고 험한 길을 고집스럽게 쉬지 않고 몇 마일 더 걸었다. 정오가 지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험상궂은 사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길은 깊은 협곡으로 이어져 높은 봉우리와 멀리 동쪽의 봉우리들만이 겨우 보일 뿐이었다. 갑자기 길이 급하게 구부러졌다. 지금까지 수로 가장자리와 왼쪽 가파른 경사지 사이에서 남쪽으로 향하던 길이 다시 동쪽으로 바뀌었다. 모퉁이를 돌아 꼭대기가 톱니 모양으로 들쑥날쑥한 십 미터 정도의 낮은 벼랑을 발견했다. 벼랑 끝의 비교적 넓은 틈새에서는 물방울이 조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한때는 벼랑을 꽉 채울 만큼 힘찬 폭포가 흘렀던 곳 같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정말 많이 변했군! 하지만 길은 틀림없어. 스테어 폭포는 이제 이 모양이 되었군. 만일 내 기억이 맞다면 암벽 측면에 위를 향하는 계단이 있었고 본도로는 왼쪽으로 벗어나며 비탈길을 서너 굽이 올라가서 정상의 평지에 닿게 되어 있지. 폭포를 지나면 바로 모리아의 방벽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골짜기가 있었는데 시라논 강이 그 사이로 흐르고 그 옆에 길이 있었지.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봅시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돌계단을 발견했다. 김리가 재빨리 계단을 올랐고 갠달프와 프로도가 그 뒤를 따랐다. 꼭대기에 올라가서야 그들은 그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문수로가 말라붙은 이유도 밝혀졌다. 그들 등뒤로 차가운 서편 하늘이 석양빛을 받아 화려한 금빛으로 물들었고 눈앞에는 어두운 호수가 고요하게 펼쳐졌다. 음울한 수면 위로는 하늘빛도 석양도 반사되지 않았다. 시라논 강은 둑으로 막혀 호숫물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두운 호수 저편 끝에는 거대한 절벽이 석양 속에 희미하게 험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더 이상 건너갈 수 없는 막다른 길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 험상궂은 암벽에서 프로도는 문은 고사하고 바위틈이 갈라진 곳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갠달프는 호수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모리아의 방벽이야. 홀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끝에 요정의 문, 즉 모리아의 입구가 있었지. 하지만 이 길이 막혀 버렸으니 어떻게 한다? 아무도 이런 해거름에 이 어두운 호수를 헤엄쳐 건널 생각은 없겠지. 아주 기분나쁜 호수야." 김리가 말했다. "호수 북쪽을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지요. 일단 우리가 따라온 본도로를 올라가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아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호수가 없었다고 해도 조랑말은 계단을 못 올라오게 되어 있었어요." "어차피 조랑말은 굴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어.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둡고 또 곳곳에 좁고 가파른 통로가 있어서 조랑말을 끌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불쌍한 빌!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구나. 불쌍한 샘은 또 얼마나 슬퍼할까." 갠달프가 말했다. "미안하네. 불쌍한 빌은 요긴한 친구였는데 이제 와서 혼자 돌아가게 해야 한다니 정말 유감이야. 내 마음대로 했다면 처음부터 짐을 줄이고 짐승은 데려오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샘이 좋아하는 빌이라도 마찬가지지. 나는 길을 떠날 때부터 결국은 이 길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었거든." 해가 저물고 황혼이 깃든 하늘에 별이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일행은 사력을 다해 비탈길을 올라 호수 측면에 닿았다. 호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겨우 오륙백 미터 남짓으로 보였으나 날이 어두워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수 북쪽 끝은 일행이 선 곳에서 반 마일 거리였고 골짜기 가장자리의 바위능선과 호수 사이에는 협곡이 이어져 있었다. 갠달프가 가리키는 곳까지는 아직 일이 마일 더 가야 했으므로 계속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곳에 이른다 해도 갠달프에게는 입구를 찾아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호수 북쪽 끝에 이르자 좁은 도랑이 앞을 가로막았다. 물은 썩어 녹색을 띠고 있었고 마치 산을 가리키는 호수의 팔처럼 보였다. 김리는 쉽게 도랑을 건넜다. 물은 깊지 않아 발목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김리 뒤를 따라 일행은 한 줄로 조심스럽게 도랑을 건넜다. 물풀 아래로 미끈미끈한 돌이 깔려 있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프로도는 검고 더러운 도랑물이 발에 닿자 섬뜩했다. 샘이 마지막으로 빌을 끌고 마른 땅에 올라서자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물고기 한 마리가 잔잔한 호수를 어지럽힌 듯 퐁당 소리가 나면서 잔물결이 일었다. 재빨리 돌아선 그들은 으스름 그늘 속에서 이는 잔물결을 보았다. 호수 한 지점에서 시작된 동그라미가 점점 커졌다. 지면에 닿는 부분에서 물살은 철썩 부딪히고 다시 조용해졌다. 땅거미가 짙어지면서 한 가닥 남아 있던 저녁놀마저 구름에 가려 버렸다. 갠달프가 서둘러 일행은 필사적으로 뒤를 따랐다. 그들은 호수와 벼랑 사이의 마른 땅에 들어섰다. 길은 종종 폭이 십 미터도 되지 않을 만큼 좁아졌고 굴러내린 바위와 돌로 막힌 곳도 많았다. 가능한 한 호수에서 떨어져 벼랑을 안다시피 길을 따라갔다. 호수를 따라 남쪽으로 일 마일쯤 더 내려가 그들은 호랑가시나무숲에 이르렀다. 나무 그루터기와 죽은 가지들이 얕은 물가에서 썩고 있었다. 아마 옛날의 작은 숲의 잔해이거나 아니면 이제는 물 속에 잠긴 도로의 울타리였던 것 같았다. 프로도는 벼랑 바로 아래에서 호랑가시나무치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를 발견했다. 거대한 뿌리는 벼랑 밑에서 물 속으로 뻗치고 있었다. 멀리 계단 꼭대기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나무는 어렴풋한 벼랑 아래 서 있는 관목숲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들 키보다 더 높고 꼿꼿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짙은 밤그림자를 드리운 채 말없이 도로 끝을 지키는 두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맞았어, 드디어 도착했군! 홀린에서 시작된 요정들이 도로는 여기서 끝이오. 호랑가시나무가 그들의 상징이니 이 나무로 자신들의 영토가 여기서 끝난다는 것을 밝힌 것이오. 이 서쪽 문은 그들이 모리아의 군주들과 교통할 때 쓰던 것이고. 서로 다른 종족들끼리 그렇게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었던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지요. 심지어 난쟁이와 요정들도 말이오." "그 우정이 깨진 것은 난쟁이들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김리가 말하자 레골라스도 덧붙였다. "요정들 잘못이란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러나 갠달프가 말했다. "난 둘 다 들었지만 지금 판결을 내리지는 않겠네. 다만 레골라스와 김리 둘은 당분간 친구가 되어 날 좀 도와 주게. 자네들 둘 다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문은 닫힌 채 감춰져 있고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가능한 한 빠라리 찾아봐야지." 그는 다른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문을 찾는 동안 여러분은 각자 굴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시오. 이젠 착한 조랑말 빌과도 작별인사를 해야겠고 겨울 추위에 대비해 가져왔던 옷들도 모두 버려야 하오. 굴 안에 들어가면 그런 옷들은 필요없을 것이고 또 산 너머 남쪽으로 나가면 소용이 없어질 테니 말이오. 그 대신 조랑말에 실었던 짐, 특히 식량과 물통은 각자 나누어 꾸리시오." 그러자 샘이 참담한 표정으로 화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외진 곳에 불쌍한 빌만 내버려 둘 수 있어요, 갠달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 반대예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이에요!" "샘, 미안하네. 하지만 문이 열리고나면 아마 자넨 모리아의 길고 어두운 통로로 빌을 데리고 갈 수가 없을 거야. 빌과 프로도 둘 중에 선택을 하게." "빌은 내가 데리고만 가면 프로도씨를 따라 용이 숨어 있는 굴속이라도 들어갈 거예요. 사방에 늑대들이 우글거리는데 여기 혼자 내버려 둔다는 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러자 갠달프는 조랑말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겠지. 조심해서 잘 살펴 가거라. 넌 현명한 말이고 또 리벤델에서 많이 배웠지. 풀밭이 있는 곳을 잘 찾아서 엘론드의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자, 샘! 빌은 우리처럼 늑대를 잘 피해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샘은 침울한 표정으로 조랑말 옆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듯 빌이 힝힝거리며 코를 샘에게 들이대고 샘의 귀를 비볐다. 샘은 눈물을 터뜨리며 고삐를 만지작거리더니 조랑말의 등짐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른 일행들도 짐을 하나하나 분류해서 뒤에 남겨 둘 것은 따로 쌓아 두고 나머지는 각자 나누어 맡았다. 이 작업을 모두 끝내고 갠달프를 지켜보았지만 그는 아직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 다. 그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않고 막막한 절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리는 그 주위를 서성이며 도끼로 여기저기를 두드려 보고 있었고 레골라스는 무슨 소리라도 듣는 듯 바위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도착했는데 문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죠?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봐도 문 비슷한 것조차 없는데." 메리가 침묵을 깨고 묻자 김리가 대답했다. "난쟁이의 문은 한번 닫히면 흔적이 없지. 보이지 않는 문일세. 만일 비밀을 잊어버리면 문을 만든 사람조차 들어갈 수 없게 돼 있거든." 그러자 갠달프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 문은 애초에 난쟁이들만 알고 있던 비밀의 문은 결코 아니었지. 완전히 구조가 바뀌지만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라면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야." 그는 다시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두 나무그림자 사이에 반반한 공간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벽 위를 이리저리 쓸어 보면서 뭐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봐, 이제 뭐가 보이는가!" 달빛이 바위 벽면을 교교히 비추고 있었지만 한참을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마법사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돌에 새겨진 가는 은빛의 희미한 선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너무 흐릿하고 가늘어서 달빛에 반사될 때만 반짝 빛을 발했지만 차츰 더 굵고 선명해지면서 전체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갠달프의 키 정도 되는 높이에 요정문자가 둥근 아치형이 두 줄로 새겨져 있었다. 그 밑으로는 군데군데 선이 훼손되긴 했지만 일곱 개의 별로 둘러싸인 왕관 밑에 모루와 망치 그림이 나타났고 다시 그 아래 초승달 모양의 잎이 달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문 한복판에는 찬란한 광선을 내뿜고 있는 별 하나가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듀린의 문장입니다!" 김리가 외치자 레골라스도 말했다. "귀족요정들의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덧붙였다. "피노르가의 별도 있지. 이 그림은 별빛과 달빛에만 반사되는 이실딘이란 금속으로 새겨진 거야. 그리고 중간계에서는 잊혀진 옛날 말을 아는 사람이 만질 때만 눈을 뜨지. 나도 그 말을 들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해 내는 데 한참이 걸렸어." 아치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해 보려고 애를 쓰던 프로도가 물었다. "뭐라고 쓴 것이죠? 저도 요정문자는 좀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모르겠는데요." "이 문자는 제1시대 중간계 서부의 요정문잔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사실이 아니지. 내용은 이런 거야. '말하라, 친구, 그리고 들어가라'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희미하게 '나르비가 만들고 홀린의 켈레브림보르가 그리다' 라고 새겨져 있군." "말하라, 친구, 그리고 들어가라는 무슨 뜻이에요?" 메리가 묻자 이번에는 김리가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지. 당신이 만일 친구라면 암호를 말하라, 그러면 문이 열릴 테니 들어가도 좋다, 이런 뜻이지." 그러자 갠달프가 보충했다. "맞았어. 이 문은 암호로 열리는 문이지. 난쟁이들의 문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이들에게만 열리게끔 만들어진 것이 더러 있어. 그리고 시간과 암호를 모두 알고 있어도 열쇠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 하지만 이 문은 열쇠는 필요없어. 듀린의 시대에는 이 문은 비밀의 문이 아니었거든. 대개는 열려 있었고 문지기가 앉아 있었지. 하지만 일단 문이 닫히면 암호를 아는 이가 말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네. 적어도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그렇지, 김리?" "맞습니다. 하지만 그 암호가 무엇인지는 저도 모르는데요. 나르비와 그의 기술, 그리고 그의 모든 일족은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러자 보로미르가 놀라서 갠달프에게 물었다. "갠달프, 당신도 그 암호를 모르십니까?" "모르오." 모두들 당황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다만 갠달프를 잘 알고 있는 아라곤만이 아무 동요 없이 태연했다. 보로미르는 검은 호수를 바라보고 온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 구석까지 무엇 때문에 끌고 오신 겁니까? 전에 한번 들어가 보신 적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암호를 모른다니 어떻게 된 겁니까?" "보르미르, 당신의 첫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그 암호를 모른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소. 아직까지는 모른다는 말이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요. 그러니." 그는 곤두선 눈썹 밑으로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번득이며 덧붙였다. "여기까지 온 일이 정말 소용없게 되었을 때 그런 질문을 하시오. 그리고 둘째 질문, 당신은 내 이야기를 의심하시오? 아니면 머리가 좀 모자란 거요? 나는 이쪽으로 들어가지 않았었소. 동쪽으로 들어갔단 말이오. 좀더 알고 싶다면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이 문은 바깥쪽으로만 열리게 되어 있소. 안에서는 당신 손으로 그냥 밀기만 해도 열리게 되어 있지. 하지만 밖에서는 주문을 모른다면 무슨 수로도 열 수 없소. 안으로 밀어도 안 된단 말이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마법사의 곤두선 눈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핀이 물었다. "자네 머리로 한번 박아 보게, 페레그린 투크. 만일 그래도 안 된다면 이제 더 이상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내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게. 암호를 생각해 내야 할 테니까. 옛날에는 이런 경우에 쓰는 주문이면 그것이 요정의 것이건, 인간의 것이건, 아니면 오르크의 것이건 모조리 알고 있었지. 지금도 머리 속을 한참 더듬어 보면 이백 가지는 기억해 낼 수 있고. 하지만 몇 가지만 시험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특히 김리에게 난쟁이들이 쓰는 비밀암호를 좀더 물어 볼 필요도 없겠지. 아마도 이 문의 암호는 저기 아치 위의 문자처럼 요정언어로 되어 있을 테니까.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거야." 그는 다시 바위 앞으로 다가가 모루 밑 한가운데 그려진 은빛 별을 지팡이로 가볍게 건드렸다. "아논 에델렌, 에드로 히 암멘! 페나스 노고스림, 라스토 베스 람멘!" 그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은빛 선이 희미해졌으나 회색 바위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말을 순서를 바꾸어서, 혹은 변행시켜서 여러 번 반복해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주문들을 차례로, 때로는 크게, 때로는 부드럽고 느리게 읊어 보았다. 그 다음에는 한 단어로 된 요정언어들을 여러 가지로 말해 보았다. 여전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절벽은 밤의 어둠 속으로 탑처럼 솟아 있었고 하늘 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으며 찬바람이 불어왔으나 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갠달프는 화가 난 듯 다시 벽으로 다가가 양팔을 높이 들고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듯 '에드로, 에드로!' 하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는 지팡이로 벽을 두드리면서 다시 '열려라, 열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갠달프는 계속해서 지금까지 중간계 서부에서 쓰였던 모든 언어로 명령을 반복했다. 잠시 후 그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땅바닥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그때 멀리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조랑말 빌이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떨자 샘이 재빨리 곁으로 다가가 낮은 소리로 안정을 시켰다. 보로미르가 말했다. "말을 보내지 맙시다. 늑대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계속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이 호수가 영 꺼림칙하군요!" 그는 몸을 숙여 큰 돌을 하나 집어들어 어두운 호수 저쪽에 던졌다. 돌은 퐁당 소리와 함께 사라졌으나 그와 동시에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파문이 일었다. 돌이 떨어진 수면으로부터 큰 물결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절벽을 향해 밀려왔다. 프로도가 물었다. "왜 그래요, 보로미르? 나도 이 호수가 기분나쁘고 또 겁이 납니다. 늑대나 문 뒤의 어두운 세계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잔잔한 호수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낫겠어요!" 메리가 말하자 피핀이 물었다. "갠달프는 왜 빨리 문을 못 여는 거지요?" 갠달프는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는지 아니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다시 들려왔다. 파도가 점점 커지며 다가오더니 일부는 벌써 호숫가에서 찰싹거렸다.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마법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맞았어! 그래, 그렇지! 답을 알고나면 모든 수수께끼가 다 그렇듯 너무 쉬운 문제였어." 지팡이를 집어들고 암벽 앞으로 다가선 그는 맑은 소리로 외쳤다. "멜론!" 문 한가운데 있던 별이 잠깐 빛을 내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자 틈새라고는 전혀 없었던 암벽에서 소리없이 커다란 문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서서히 중앙으로부터 갈라져 바깥으로 조금씩 열리더니 드디어 양쪽 벽으로 활짝 벌어졌다. 열린 문 안으로 급경사진 오르막계단이 보였으나 입구 근처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저 안쪽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일행은 모두 놀라서 들여다보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김리도 마찬가지고. 메리가 바로 맞힌 거야. 문을 여는 암호는 항상 아치 위에 새겨져 있는 법이지! 번역이 틀렸던 거야. '친구라고 말하고 들어가라'로 이해했어야 하는 것이니!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는 현자들조차 풀기 어려운 너무 간단한 문제였던 거야. 그때가 좋았지! 자, 갑시다!" 그가 앞장을 서 맨 아랫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순간 몇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프로도는 누군가 자기 발목을 움켜잡는 느낌이 들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조랑말 빌이 공포에 사로잡혀 울부짖으며 호숫가를 따라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뒤를 따라 달려가려던 샘은 프로도의 비명을 듣고 안타까움에 울음을 터뜨리며 돌아왔다. 나머지 일행이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는 마치 수백 마리 뱀이 호수 남쪽에서 헤엄쳐 오기라도 한 듯 호숫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물 속으로부터 구불구불하고 기다란 촉수가 뻗쳐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축축이 젖어 있었다. 손가락처럼 생긴 촉수의 끝이 프로도의 한쪽 발을 붙잡아 물 속으로 끌어당겼다. 샘은 무릎을 꿇은 채 칼로 그 촉수를 베어 내는 중이었다. 촉수가 프로도의 발목을 놓았다. 샘은 프로도를 끌어올리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스무 개 가량의 다른 촉수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어두운 호숫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촉수에선 구역질이 나는 악취가 풍겨왔다. "문으로 들어가! 계단 위로! 어서!" 갠달프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샘을 제외하고 모두 공포에 질린 듯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은 갠달프의 말에 정신이 들어 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샘과 프로도가 겨우 서너 계단을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갠달프가 층계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호숫가의 좁은 땅을 건너온 촉수의 끝은 벌써 바위벽과 문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별빛에 몸뚱이를 번적이면서 문턱 위로 넘어섰다. 갠달프는 돌아서서 지켜보았다.안쪽에서 문을 닫으려면 무슨 암호를 외어야 하는지는 다행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많은 촉수들이 얽히고설킨 채 양쪽 문에 달라붙는 바람에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쾅 닫히고 말았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촉수들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육중한 문을 사이에 두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프로도의 팔을 붙잡고 있던 샘은 어둠 속 층계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목이 메어 울부짖었다. "불쌍한 빌! 불쌍한 빌! 늑대와 뱀이라니! 뱀한테는 도저히 못당할 텐데. 하지만 프로도씨, 전 프로도씨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갠달프가 층계를 내려가 지팡이로 문을 더듬어 보는 소리를 들었다.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층계가 울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법사가 말했다. "휴우, 됐어! 이제 우리 뒤쪽 입구는 닫혔으니 나가는 문은 산 너머 저쪽 출구뿐인 셈이야. 소리를 들어 보니 아마 위에서 바윗돌이 굴러떨어져 문 앞을 가로막아 나무 두 그루도 쓰러뜨린 것 같아. 참아깝군! 시원하게 잘생긴 데다 오랫동안 입구를 지켜 온 나무들인데 말이야." 프로도가 말했다. "전 발이 처음 물에 닿는 순간부터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있는 느낌이 들었었지요. 그게 뭐였어요? 수가 많았지요?"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 촉수들은 모두 한 가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어. 제발로 기어왔거나 아니면 물 속에서 무슨 명령을 받고 온 것이겠지. 땅 속 깊은 곳에는 오르크보다 더 오래되고 더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거든." 그는 호수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든 간에 일행 중에서 유독 프로도를 먼저 잡았다는 사실은 일행에게 강조하지 않았다. 보로미르가 혼자 중얼거렸다. "땅 속 깊은 곳이라! 내 의견은 무시하고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 어둠 속에선 누가 앞장선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말은 사방의 바위벽에 부딪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메아리쳐 울렸다. "내가 있지. 그리고 김리가 나와 함께 앞장을 설 거요. 내 지팡이를 따르시오!" 마법사는 앞장서 계단을 오르며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빛이 퍼져 나왔다. 넓은 통로는 막힌 데가 없고 튼튼해서 일행은 야트막하고 널찍한 이백 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역시 어둠 속으로 천장이 둥글고 바닥이 평평한 통로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여기 층계참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뭘 좀 먹도록 하죠! 식당을 찾을 수야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프로도가 말했다. 그는 발목을 붙잡히던 순간의 공포를 서서히 떨쳐 내면서 갑자기 참기 어려운 시장기를 느꼈다. 그의 제안은 모두의 환영을 받았고 일행은 어둠 속에 무리를 지어 맨 윗계단에 둘러앉았다. 식사를 마치자 갠달프는 일행에게 세 번째로 리벤델의 미루보르를 돌려 마시게 했다. "많이 남진 않았지만 입구에서 그렇게 혼이 났으니 지금은 마셔도 괜찮겠지. 운이 나쁘면 아마 출구에 닿기도 전에 전부 마셔 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물통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게 좋을 거야. 이 굴속에도 우물이나 냇물이 있지만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니까. 딤릴계곡에 내려가기 전까지는 가죽물통에 물을 채울 기회가 없을 거야." 프로도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알 수 없지.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길을 잃거나 사고를 만나지 않는다면 곧장 걸어 사나흘 걸리겠지. 서문에서 동문까지 직선거리로 최소한 사십 마일은 되는 데다 돌아가야 할 곳이 많으니까." 잠깐 동안의 아쉬운 휴식을 마치고 일행은 다시 일어섰다. 모두 가능하면 빨리 여행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에 피곤을 풀 겨를도 없이 서너 시간씩 계속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갠달프가 여전히 앞장을 섰다. 그가 왼손으로 치켜든 지팡이에서 뿌려지는 희미한 빛은 그의 빌 밑을 겨우 비출 정도였다. 그는 오른손에 자신의 검 글람드링을 들고 있었다. 그 뒤를 김리가 따랐다. 그가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두 눈에서는 희끄무레한 빛이 번득였다. 난쟁이 뒤에는 프로도가 자신의 단도 스팅을 빼들고 걸었다. 스팅이나 글람드링의 칼날이 빛을 뿜어 내지 않아 그들은 다소 안심을 했다. 왜냐하면 그 칼은 모두 제1시대 요정들의 작품으로 만일 오르크가 근처에 있다면 차가운 빛을 발하기 때문에었다. 프로도 뒤를 샘이 따르고 그 뒤에는 어둠을 등지고 입을 꽉 다문 엄숙한 표정의 아라곤이 일행을 엄호하며 걸어왔다. 통로는 좌우로 몇 번이나 꺾어지더니 다시 아래를 향했다. 한참동안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평지가 나타났다.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고 이따금 찬바람이 얼굴에 닿기도 했다.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프로도는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비치는 희미한 빛으로 층계와 아치를 비롯해, 어둠 속으로 끝없이 뻗어 있는 울퉁불퉁한 통로와 터널들을 언뜻언뜻 볼 수 있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섬뜩한 기운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김리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말고는 갠달프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적어도 어둠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겁을 먹지 않았다. 종종 갠달프는 방향을 선택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그와 의논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김리도 산 속에서 주로 사는 난쟁이족 글로인의 아들이었지만 모리아의 굴 속은 그의 상상력으로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했다. 갠달프도 먼 옛날의 여행 기억 외에는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이리저리 꼬부라진 길을 잘도 찾아갔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있는 한 그는 언제나 실패하지 않았다. "두려워할 건 없어." 아라곤이 말했다. 여느 때보다 더 오랜 침묵이 흐른 후 갠달프와 김리는 소근소근 의논을 했으며 다른 일행은 뒤에서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다니까. 난 이렇게 깜깜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수많은 여행을 했으니까. 내가 본 것보다 더 놀라운 그의 무용담은 리벤델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 길이 있는 한 그는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는 우리가 무서워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데려왔으니까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가는 길을 찾아낼 거야.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데는 베루디엘 여왕의 고양이보다 더 낫지." 아라곤은 힘주어 말했다. 사실 그들에겐 갠달프가 더없이 훌륭한 안내자임에 틀림없었다. 입구에서 그처럼 필사적인 소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내던지고 온 것이 많았다. 그래서 횃불을 피울 만한 장작이나 도구도 없었다. 갠달프의 지팡이에서 비치는 빛마저 없었더라면 그들은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이 선택해야 할 길이 너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통로 옆 곳곳에 웅덩이나 함정, 혹은 깊은 우물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양쪽 벽과 바닥에도 갈라진 틈이나 구멍이 많았으며 가끔 바로 발 앞에서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중 넓은 것은 폭이 이 미터도 넘어 피핀이 건너뛰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어둠 속 깊은 곳에서는 마치 커다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듯 물이 휘감겨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안 가지고 오면 꼭 이렇게 필요하다니까!" 샘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 자주 나타나면서 일행의 행군속도도 더 느려졌다. 그들은 산 속을 향해 계속 걸었다. 그들이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아무 데서나 쉰다고 해서 그리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포로도는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로 식사도 하고 감로주를 마신 덕분에 한참 동안 용기가 되살아났으나 이제는 공포에 가까운 깊은 불안감에 다시 사로잡혔다. 지난번에 당한 부상은 리벤델에서 완쾌되었지만 그 끔찍한 상처는 그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감각이 더 날카로워져서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가 곧 알아차린 그와 같은 변화의 표시 중 하나는 갠달프를 제외한 일행 누구보다도 그가 어둠 속의 물체를 잘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반지의 사자였다. 반지는 줄에 매달린 채 그의 목에 걸려 있었고 가끔 그에게 심한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주위에서 적의 존재를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칼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 선 동료들은 가끔씩 빠르게 속삭일 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다만 그들 자신의 발소리뿐이었다. 김리의 난쟁이구두에서 나는 둔탁한 소리, 보로미르의 무거운 발걸음, 레골라스의 경쾌한 걸음걸이, 호비트들의 들릴락말락한 부드러운 발소리, 그리고 맨 뒤에서 들려오는 스트라이더 아라곤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안정된 걸음걸이 등이 제각기 또렷하게 들렸다. 일행이 잠깐 걸음을 멈출 때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희미한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도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부드러운 맨발이 살짝 내딛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들었다고 확신을 할 만큼 충분히 크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았지만 일단 시작되고나서는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 계속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메아리일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걸음을 멈출 때도 그것은 한참 동안 계속 또닥거리다가 다시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굴속에 들어선 것은 해가 지고나서였다. 중간에 잠깐 쉰 것을 빼고 계속 대여섯 시간을 걸었을 무렵 갠달프는 걸음에 멈추고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세 갈래의 길이 나누어지는 아치형 입구가 나타난 것이었다. 모두 동쪽으로 방향은 같았으나 왼쪽 통로는 내리막이었고 오른쪽 통로는 그 반대로 오르막이었으며 가운데 통로는 매우 좁긴 했지만 평탄하게 이어져 있었다. "여긴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군." 갠달프는 아치 밑에 서서 자신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혹시 방향을 알려 주는 무슨 기호나 표시가 있을까 싶어 지팡이를 높이 들어보았으나 그런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도 돌아가지 않아. 아마 여러분도 나 못지않게 피곤들 할 테니 오늘밤은 여기서 쉽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여기야 항상 깜깜하지만 바깥에는 지금 달이 서쪽으로 넘어가고 자정이 지났단 말이오." 그러자 샘이 넋두리를 했다. "불쌍한 빌! 지금은 어디 있을까? 제발 늑대한테만 붙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커다란 아치 왼쪽에서 그들은 돌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은 반쯤 닫혀 있었으나 가볍게 밀어 보자 안으로 쉽게 열렸다. 안쪽에는 바위벽을 깎아 만든 넓은 방이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메리와 피핀이 앞뒤가 툭 터진 통로가 아니라 그런 대로 안심하고 쉴 수 있는 휴식처를 발견한 것이 너무 기뻐 무턱대고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갠달프가 외쳤다. "잠깐!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잖나? 내가 먼저 들어가 보지." 그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한 줄로 뒤를 따랐다. "보게!" 땅바닥 한가운데를 지팡이로 가리키며 그는 말했다. 그의 발 앞에서 그들은 우물입구처럼 뚫린 커다란 둥근 구멍을 보았다. 둘레에 녹슬고 망가진 쇠사슬이 한쪽 끝을 검은 함정 속으로 드리운 채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 부서진 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자네들 둘 중 하나는 저 속에 빠져서 지금쯤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떨어질 뻔했어. 안내자가 있으면 말을 잘 들어야지." 아라곤이 메리에게 말하자 김리가 덧붙였다. "이 석실은 세 통로를 지키는 경비초소 같은데. 이 우물은 돌뚜껑을 덮어놓고 경비원들이 사용하던 것이 분명해요. 뚜껑이 부서졌으니 모두 조심들 하세요." 피핀은 우물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모두들 담요를 꺼낸 가능하면 가운데 우물에서 떨어져 벽에 붙여 잠자리를 만드는 동안 그는 우물로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올라와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갑작스런 충동을 못 이겨 옆에 있던 돌을 집어 밑으로 던졌다. 무슨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저 밑에서 마치 동굴 속의 깊은 연못에 돌이 떨어진 듯 풍덩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우물 속으로부터 공명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증폭되어 그들 위에 계속 울려왔다. "저게 뭔가?" 갠달프가 날카롭게 물었다. 피핀이 자기가 그랬다고 자백을 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화를 냈다. 피핀은 그의 눈에서 빛이 번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갠달프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투크 집안은 모두 자네처럼 멍청이뿐인가? 이건 호비트들끼리 소풍나온 게 아니야. 우린 지금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란 말이야! 다음엔 자네가 직접 뛰어들어. 그러면 말썽거리도 없어질 테니까. 이제부턴 좀 조용히 있게!" 그리고 몇 분 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다시 깊은 바닥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똑똑. 소리는 멈추었다가 메아리가 사라지자 다시 반복되었다. 똑똑, 똑똑, 똑똑, 똑. 그 소리는 마치 무슨 신호처럼 불안하게 들려왔으나 잠시 훈 사라져 버렸다. 김리가 말했다. "망치소리 같은데요." "그런 것 같네. 예감이 좋지 않아. 저 멍청이 페레그린이 던진 돌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그 때문에 무슨 탈이 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제발 앞으로는 그런 짓 좀 말게! 이젠 무슨 사고 없이 편히 쉬어야 할 텐데 말이야. 피핀, 자네가 그 벌로 오늘 첫 불침번을 서게." 갠달프는 소리를 지르고는 담요를 뒤집어썼다. 피핀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간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우물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자꾸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담요로 우물을 덮어 버리고 싶었다. 이제는 갠달프도 거의 잠이 든 것같이 보였지만 피핀은 감히 그쪽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갠달프는 조용히 누워 있었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 여행의 기억을 차근차근 돌이켜보면서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와서 길을 잘못 들면 만사가 끝장이었다. 한 시간 뒤 그는 몸을 일으켜 피핀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석에 가서 눈 좀 붙이게, 젊은 친구. 졸린 모양인데 가서 자라고. 난 잠이 안 와서 차라리 불침번이나 서는 게 낫겠어." 그는 문 옆에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문제가 뭔지 알 것 같군. 담배가 모자랐어. 폭설이 내리던 날 아침 이후로 한 대도 못 피웠단 말이야." 피핀이 쏟아지는 잠 속으로 빠져들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마룻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늙은 마법사가 빨갛게 달아오른 나무토막을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잡아 두 무릎 사이에 감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불빛은 잠시 그의 날카로운 코끝을 비추더니 담배연기가 한 모금 뿜어져 나왔다. 잠자는 이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것은 갠달프였다. 그는 동료들을 쉬게 하고 여섯 시간 동안 혼자서 불침번을 선 것이었다. "불침번을 서면서 결정했소. 가운데 길은 예감이 좋지 않고 왼쪽 길은 냄새가 좋지 않아. 밑에 내려가면 틀림없이 썩은 공기가 있을 것 같소. 그래서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이젠 슬슬 떠나야겠소." 두 번 잠시 쉰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여덟 시간 동안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아직은 위험한 곳을 만나거나 무슨 소리를 듣는 일도 없었고 맨 앞에서 도깨비불처럼 반짝이는 갠달프의 희미한 지팡이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통로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들이 판단으로는 갈수록 지대가 더 높아지며 통로 폭도 넓어지고 있었다. 길 양쪽으로 이제 다른 터널이나 굴로 들어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길바닥도 구덩이나 틈새가 없이 평탄하고 단단했다. 한때는 상당히 중요한 통로였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실제로는 이십 마일 넘게 걸었음에 틀림없었지만 직선거리로는 동쪽으로 약 십오 마일 정도 나아간 것 같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프로도는 기분이 다소 풀어졌지만 여전히 까닭모를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등 뒤 먼 곳에서 그들 발소리와는 다른 발소리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호비트들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그리고 모두들 머리 속으로 잠자리가 될 만한 곳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양쪽의 벽이 사라졌다. 그들은 아치형 입구를 지나 어두컴컴한 공터에 들어선 것 같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공기가 따스했지만 이곳은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함께 모였다. 갠달프의 표정이 밝아졌다. "길을 제대로 선택했군. 이젠 좀 살 만한 곳에 온 것 같은데. 내 짐작에는 벌써 산 동쪽에 가까워진 것 같은데. 다만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이 걱정이군. 딤릴 게이트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온 것이 틀림없어. 찬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면 여긴 꽤 넓은 것 같은데 이번엔 어디 진짜 불을 한번 켜볼까!" 그가 지팡이를 높이 들자 번갯불 같은 불꽃이 환하게 일어났다. 큰 그림자들이 그들 등뒤로 물러서며 일행의 눈에는 머리 위 높은 곳에 수많은 돌기둥으로 떠받쳐진 거대한 지붕이 들어왔다. 정면과 측면에는 거대한 빈 방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유리처럼 매끄럽고 윤이 나는 검은 벽이 불빛에 반짝였다. 역시 어두컴컴한 아치가 달린 세 군데 다른 입구를 그들은 발견했다. 정면에 동쪽으로 곧은 통로가 하나 있었고 좌우로도 하나씩 입구가 있었다. 그때 불이 꺼져 버렸다. 갠달프가 말했다. "다시 저 세 방향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겠군. 전에는 산비탈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굴속 높은 지대에 가면 햇빛이 들어오는 길이 있었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아마 그런 곳 같은데 지금은 밤이라서 아침까지는 알 수가 없겠지. 내 말이 맞다면 내일아침에는 햇빛을 볼 수 있을 거요. 오늘은 더 갈 수 없으니 여기서 쉽시다. 지금까지는 일이 잘 풀려서 길도 거의 끝이 나 가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오.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입구까지는 아직 길고긴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하오." 그들은 찬 공기를 피하기 위해 한쪽 구석에 서로 몸을 기대고 웅크린 채 그 커다란 방에서 밤을 보냈다. 동쪽 아치 밑으로 찬바람이 계속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거대하고 공허한 어둠이 사방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일행은 산 속을 깎아서 만든 수많은 방과 끝없이 뻗어 있는 층계와 통로의 웅장함과 적막함에 압도당했다. 호비트들이 근거없는 소문으로만 듣고 멋대로 상상했던 이야기들은 모리아의 참모습이 가져다주는 경이와 두려움에 비하면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었다. 샘이 말했다. "한때는 여기 난쟁이들이 굉장히 많이 살았던 모양이지요. 오백년 동안 이것을 모두 만들자면 오소리보다 더 바쁘게 뛰어다녔겠는데요. 그것도 단단한 바위산 속에다 말이에요.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을까요? 설마 이 캄캄한 속에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이건 굴이 아니야. 위대한 도시 드와도우델프지. 그리고 옛날에는 이렇게어둡지도 않았고 우리들의 노래에 아직 남아 있듯이 화려하고 빛나는 도시였지."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어둠 속에 버티고 서서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메아리가 천장으로부터 울려퍼졌다. 세상은 걸음마를 시작하고, 산은 초록빛, 달님 얼굴엔 아직 흠집 하나 없고 시내와 돌에는 이름조차 없을 때 듀린은 잠을 깨어 혼자 걸었다. 이름없는 산과 골짜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아무도 맛보지 않은 우물에서 물을 긷고 고개 숙여 미러미어 호수 속을 들여다보다가 자기 머리 그림자 위에서 은빛 실에 꿰여 보석처럼 빛나는 별로 만든 왕관을 보았다. 세상은 아름답고 산은 높았다. 지금은 서역 바다 건너 떠나간 나르고스론드와 곤돌린 성의 용맹스런 왕들이 몰락하기 전, 제1시대, 듀린왕의 시대, 그때 세상은 아름다웠다. 옥좌는 바위를 깎아 만들었고 열주가 늘어선 그의 왕궁은 황금지붕에 은을 박은 대청마루, 문 위엔 위엄을 자랑하는 룬 문자가 새겨졌다. 햇빛, 달빛, 별빛은 수정을 깎아 만든 빛나는 램프에서 구름이 앞을 가리고 어두운 밤이 찾아올지라도 언제나 밝고 아름다운 빛을 뿌렸다. 망치는 모루를 내리치고 끌은 쪼개고 조각도는 새기고 칼날은 벼리고 칼자루는 붙이며 파는 이는 파고 쌓는 이는 쌓았다. 에메랄드, 진주, 희뿌연 오팔, 물고기 비늘처럼 얇은 금속, 둥근 방패, 갑옷, 도끼, 칼, 빛나는 창으로 창고는 그득했다. 산 밑에서 음악이 들려와 듀린의 백성들은 피로를 몰랐다. 하프를 켜고 노래를 불렀고 성문 앞에선 트럼펫소리가 울려퍼졌다. 세상은 백발이 되고, 산도 늙어 용광로의 불꽃은 차가운 재가 되고 하프소리도 망치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듀린의 방엔 어둠이 깃들이고 모리아, 카잣 둠, 그의 무덤엔 그림자만이 지키고 섰을 뿐. 그러자 가라앉은 별들은 아직 바람없는 어두운 미러미어 호수에 숨어 있고 깊은 물 속에는 듀린의 왕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샘이 탄성을 올렸다. "멋진데요! 제가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모리아, 카잣 둠, 그의 무덤엔! 하지만 노래를 듣고나니 그 빛나던 램프들 생각에 지금이 더 어두워 보이는데요. 아직도 황금이나 보석이 여기 쌓여 있을까요?" 김리는 말이 없었다. 노래를 마치고난 그는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갠달프가 대답했다. "황금이나 보석? 없네. 오르크들이 여러 번 모리아를 털어가서 상층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난쟁이들도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이젠 아무도 통로를 타고 하층으로 내려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보물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거야. 저 깊은 물 속, 공포의 어둠 속에 보물이 잠겨 있거든." 그러자 샘이 다시 물었다. "그럼 난쟁이들은 왜 다시 돌아오려고 애를 쓰지요?" "미스릴 때문이지. 모리아가 귀한 것은 황금이나 보석 때문이 아니야. 그건 난쟁이들의 장난감일 뿐이지. 그리고 쇠 때문만도 아니고. 쇠는 그들의 하인일 뿐이거든. 그들이 여기서 그런 것들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야. 특히 쇠를 많이 캤지.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면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외부와 교역을 해서 얻을 수 있었거든. 문제는 세상에서 오직 한 곳, 여기서만 나온다는 모리아 은 때문이야. 흔히들 진짜 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요정들은 미스릴이라고 부르지. 난쟁이들은 또 자기네들끼리만 쓰는 이름이 따로 있고. 그 금속은 대략 금의 열 배 정도로 값이 쳐졌는데 이젠 값을 매길 수 없게 되었지. 땅 위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오르크들조차 그걸 캐기 위해 감히 들어가질 못하니까 말이야. 그 광맥은 북쪽으로 카라드라스까지 깊숙이 뻗어 있는데 난쟁이들이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사실 미스릴은 그들이 영화를 이룬 원천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파멸을 가져다준 원인이었지. 욕심이 지나쳐 너무 깊숙이 파들어가다가 그만 듀린의 재앙이라고 불리게 된 괴물을 잘못 건드렸던 것이야. 바깥으로 가지고 나온 것은 거의 모두 오르크들이 모아서 그것을 탐내던 사우론에게 공물로 바쳐 버렸지. 미스릴! 그건 누구든지 탐낼 만한 것이야. 구리처럼 쉽게 구부릴 수도 있고 유리처럼 매끄럽기 때문에 난쟁이들은 그걸 이용해 담금질한 쇠보다 더 단단하면서 한없이 가벼운 금속을 만들 수 있었지. 아름답기는 보통 은하고 비슷하지만 미스릴은 흠이 나거나 변색되는 일이 절대 없지. 요정들도 그것을 대단히 좋아해서 그걸 가지고 이실딘 즉 스타문이라는 금속을 만들었는데 서문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지. 미스릴로 만든 갑옷을 도린이 빌보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군. 지금쯤은 아마 미켈 델빙의 매돔하우스에서 먼지가 뽀얗게 묻어 있겠지." 그러자 말없이 앉아 있던 김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라고요? 모리아 은으로 만든 갑옷이라니요! 그건 왕께나 드리는 선물인데요." "맞는 말일세. 빌보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샤이어 전체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지." 갠달프가 말했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속옷 밑으로 손을 넣어 갑옷 고리를 만져 보았다. 윗도리 속에 샤이어 전체의 무게와 맞먹는 것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빌보는 알고 있었을까? 빌보도 분명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말 왕에게나 어울리는 갑옷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의 생각은 어두운 굴속을 떠나 리벤델로, 빌보에게로, 그리고 빌보와 함께 지냈던 백 엔드의 즐거운 시절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가 잔디를 깎고 꽃밭을 거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모리아와 미스릴, 그리고 반지까지 모두 잊고 싶었다. 다시 주위는 깊은 정적에 휩싸였고 동료들은 하나씩 잠이 들기 시작했다. 프로도가 오늘밤 첫 당번이었다. 보이지 않는 문을 지나 먼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처럼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손이 차가워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귀를 곤두세웠다. 지루한 두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는 모든 신경을 귀에만 집중시켰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지금까지 들었던 상상의 발자국소리도 듣지 못했다. 교대시간 무렵 그는 서쪽 아치 부근에서 마치 희미한 눈동자처럼 생긴 두 개의 빛을 얼핏 본 것 같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보초를 서면서 잠들 뻔했군. 꿈까지 꾸다니.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눈을 비볐다. 그리고 어둠속을 응시하며 선 채로 레골라스가 교대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자리에 누워 그는 곧 잠이 들었으나 꿈은 계속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두 개의 희미한 빛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에서 깼다. 동료들이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의 얼굴 위로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동쪽 아치 위 높은 곳에서 지붕 근처의 통로를 따라 길게 선을 긋고 있었다. 북쪽 아치를 통해서도 멀리서부터 희미한 빛이 비쳐 들어왔다. 프로도는 일어나 앉았다. 갠달프가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니? 드디어 아침이야. 보다시피 내 짐작이 맞았어. 우리는 지금 모리아 동쪽 높은 산 위에 와 있는 거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출구를 찾아 딤릴 계곡의 미러미어 호수를 보게 될 거야." 김리가 말했다. "좋습니다. 모리아는 거대하긴 하지만 이젠 어둠과 공포의 세계가 되었군요. 우리 친척들은 흔적도 없고, 어쩌면 발린은 여길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식사를 마치자 갠달프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피곤하겠지만 밖에 나가서 쉬는 게 더 낫겠지. 설마 모리아에서 하룻밤 더 보낼 생각들은 없으시겠지?" 그러자 보르미르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지요? 저 동쪽 길입니까?" "아마 그래야겠지. 나도 지금 우리의 위치가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겠소. 짐작컨대 동문의 북쪽 상층부 같은데. 내려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소. 저기 동쪽 아치 밑으로 난 길이 옳을 것 같기는 한데, 일단 한번 살펴봅시다. 북문으로 들어온 빛을 먼저 볼까? 그쪽에 창문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긴 통로를 타고 빛이 새어 들어온 것 같은데." 일행은 그를 따라 북쪽 아치 밑으로 갔다.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앞으로 나갈수록 빛은 강해졌고 곧 오른쪽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지방은 높고 평평했으며 돌로 만들어진 문짝은 아직 돌쩌귀에 걸린 채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앞에는 네모난 널따란 방이 있었다. 희미하게 빛이 든 방 안은 어둠에 익숙해진 그들 눈에는 너무 밝게 느껴졌다. 일행은 방에 들어서면서 모두 눈을 깜박였다. 처음엔 알아볼 수 없었던 입구의 여러 물건들을 비켜서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서자 방바닥에 두텁게 깔려 있던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빛은 동쪽 벽으로 높이 나 있는 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은 위쪽으로 경사가 져 그 끝으로 멀리 네모진 푸른 하늘을 한 조각 볼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은 곧바로 방 한가운데 놓여진 석물 위로 떨어졌다. 약 육십 센티 높이의 장방형 석제물체 위에는 커다란 흰 석판이 놓여 있었다. "무덤같이 생겼군." 프로도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혼자 중얼거리며 더 자세히 살피려고 몸을 숙였다. 갠달프가 급히 그 곁으로 왔다. 석판 위에는 룬 문자가 깊숙하게 새겨져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이건 옛날 모리아에서 사용하던 다에론의 룬 문자야. 여기 인간과 요정들의 언어로도 쓰여 있군.” 푼딘의 아들 발린 모리아의 왕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더니, 그럼 그는 죽었단 말인가!" 프로도가 말했다. 김리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17장 카잣 둠의 다리 반지의 사자 일행은 발린의 무덤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프로도는 빌보를 생각했고, 빌보와 그 난쟁이의 오랜 우정을, 그리고 발린이 먼 옛날 샤이어를 방문했던 때를 회상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발린의 무덤 옆에 서고 보니 그런 추억은 마치 천년 전 세상 저쪽에서 있었던 일 같았다. 마침내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발린의 운명이나 그의 일행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해 줄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채광통로가 있는 쪽 벽에 또 하나 작은 문이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양쪽 문 앞에 많은 뼈가 흩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부러진 칼이나 도끼머리, 갈라진 방패, 투구 등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칼날이 시커멓고 둥근 오르크들의 언월도도 있었다. 사방 벽에는 움푹 파인 많은 벽감이 있었고 그 속에는 가장자리에 쇠를 댄 커다란 나무상자들의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상자는 부서진 채 텅 비어 있었으나 뚜껑이 망가진 상자 옆에서 그들은 찢겨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은 여기저기 칼자국이 나 있는 데다 군데군데 불에 그을렸으며 오래된 핏자국처럼 거무튀튀하게 변색이 되어 도무지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갠달프가 조심스럽게 집어 석판 위에 올려놓자 책장이 바스라지며 떨어져 나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프로도와 김리는 옆에서서 그가 매우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것이 모리아와 딤릴 계곡의 여러 난쟁이의 필적으로 쓰여졌으며 주로 룬 문자를 사용했고 군데군데 요정문자가 섞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갠달프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발린 일행이 남긴 기록이야. 약 삼십 년 전 그들이 딤릴 계곡에 도착하던 때부터 기록했던 모양인데, 페이지마다 붙어 있는 숫자가 도착 이후의 햇수를 가리키는 것 같군. 첫 페이지에 1~3으로 적힌 걸 보면 둘째 해는 기록이 아예 없는 것 같고. 들어보게. '우리는 오르크들을 정문에서 몰아내고 방을,' 그 다음 글자는 불에 타서 보이지 않는군. 그렇지. '지켰다. 우리는 골짜기의 밝은 햇빛 아래서,' 이건 뭔가? '많은 적을 죽였다. 플로이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는 적의 대장을 베었다. 플로이는 미러미어 근처의 풀밭에,' 그 다음 한두 줄은 읽을 수가 없고. '우리는 북쪽 21호실에 거처를 정했다. 거기는,' 또 읽을 수가 없군. 채광통로라는 말이 있고 또 '발린은 마자르불의 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김리가 설명했다. "기록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지요." "글쎄, 그 다음은 알아보기 힘들군. 금이란 단어가 있고 듀린의 도끼, 투구라는 말이 적혀 있어. 그리고 '발린은 이제 모리아의 왕이다.' 이렇게 해서 한 장이 끝나는군. 그 다음엔 별표가 몇 개 있고 다른 이의 필체로 '우리는 진짜 은을 발견했다' 그리고 '잘 녹였다'라는 말이 있고. 그렇지, 미스릴이란 단어도 있군. 마지막 두 줄은 '오인은 지하 삼층 삼단의 병기고를 찾으러,' 옳지! '서쪽으로 홀린 게이트까지 갔다.'" 갠달프는 말을 멈추고 몇 페이지를 그냥 넘겼다. "이렇게 급하게 휘갈겨쓴 페이지가 여러 장 있는데 워낙 지워진 부분이 많고 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군. 여기도 여러 장이 빠진게 틀림없고 5라고 적힌 걸 보니까 여기 들어온 지 오 년이란 뜻인 모양인데. 보자! 여기서 찢어지고 더러워진 곳이 너무 많아 읽을 수가 없어.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 확인하는 게 좋겠어. 잠깐! 여기 요정문자로 쓴 좀 크고 굵은 글이 있군." 그러자 마법사의 팔 너머로 들여다보던 김리가 말했다. "오리의 필적일 겁니다. 그는 글씨도 아주 빨리 잘 쓸 뿐만 아니라 요정문자도 종종 썼으니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로 불길한 소식을 적어 놓았을까 걱정이 되는군.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첫 글자는 '슬픔'인데, 그 뒤로는 맨 마지막 '어'자 외에는 읽을 수가 없군. 그렇지, 이제 알겠네. '어제 11월 10일, 모리아의 왕 발린은 딤릴 계곡으로 나갔다. 그는 미러미어 호수를 둘러보러 혼자 나갔다가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오르크가 쏜 화살에 맞았다. 우리는 그 오르크를 죽였지만 훨씬 더 많은... 동쪽의 실버로드 강 상류로부터...' 이 페이지의 다른 부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이건 알겠군. '우리는 정문을 막았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 만일... 오랫동안 견딜 수 있다.' 불쌍한 발린! 겨우 얻은 자리를 오 연도 누려 보지 못하다니. 뒷일이 궁금하지만 그 뒤까지 읽어 볼 시간은 없어. 여기가 마지막 장이군."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읽기가 겁나는군. 비참한 종말을 맞지나 않았나 걱정이 되네. 들어 보게! '우리는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나갈 수 없다. 그들이 다리와 2호실을 점령했다. 프라와 로니, 날 리가 거기서 쓰러졌다.' 그 다음 네 줄은 흐려서 보이지 않는데 '닷새 전에 갔다'는 말만 읽을 수 있군. 그리고 마지막은 '서문 밖의 호숫물이 담벽에까지 올라왔다. 호수의 파수병에게 오인이 붙잡혔다. 우리는 나갈 수 없다. 종말이 다가온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둥, 둥.' 이건 뭘까? 맨 마지막에는 요정문자로 급히 갈겨쓴 글씨로 '그들이 오고 있다'고 되어있네. 이게 끝이야." 갠달프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일행은 갑자기 그 방에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김리가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는 나갈 수 없다? 우리가 들어올 땐 다행히 호숫물이 줄어 들었고 남쪽의 파수병이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군." 갠달프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양쪽 문으로 마지막까지 버틴 모양이야. 하지만 그때는 몇 명 남지 않았겠지. 모리아의 탈환이 그렇게 끝나다니! 용감하긴 했지만 어리석은 시도였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도 푼딘의 아들 발린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지. 그는 여기 조상들의 방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할 테니까. 이 마자르불의 책을 가지고 나가서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 김리, 이건 자네가 보관하는 것이 좋겠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인에게 전해 주게. 그도 기록을 읽고나면 슬퍼하겠지만 어쨌든 반가워할 걸세. 자, 갑시다! 벌써 해뜬 지가 한참 되었어." 그러자 보로미르가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그 방으로 되돌아갑시다. 하지만 이 방에 온 것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이제 우리 위치를 정확히 안 것 같으니까. 김리가 말한 대로 여긴 마자르불의 방이고 우리가 있었던 그 방은 북쪽 끝 21호실이오. 따라서 아까 말했던 동쪽 아치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되오. 21호실은 칠층일 테니까 정문보다는 여섯 층 위인 셈이지. 자, 방으로 돌아갑시다." 갠달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요란한 굉음이었다. 그들 발 밑까지 울리고 있었다. 일행은 깜짝 놀라서 문으로 달려갔다. 마치 거인의 손이 모리아의 굴을 북삼아서 둥둥 치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요란한 나팔소리가 굴 속에 메아리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에 응답하는 나팔소리와 거친 함성이 더 먼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급하게 달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레골라스가 외쳤다. "그들이 오고 있다!" 그러자 김리도 외쳤다. "우리는 나갈 수 없다!" 갠달프가 소리쳤다. "함정이다! 내가 왜 꾸물거렸을까! 옛날 그들과 똑같이 함정에 빠져 버렸군. 하지만 그때는 내가 없었었지. 보자..." 둥둥 북소리가 다시 들리고 사방의 벽이 울렸다. 아라곤이 외쳤다. "문을 닫고 빗장을 채워요! 힘닿는 데까지 막아 봅시다. 아직 희망은 있으니까!" 그러자 갠달프가 반대했다. "안 되오! 갇혀서는 안 되오. 동쪽문은 열어 두시오. 희망이 있다면 그쪽뿐이니." 다시 요란한 나팔소리와 날카로운 아우성이 들려왔다. 복도를 따라 내려오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이 모두 칼을 빼들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글람드링은 희미하게 빛을 뿌렸고 스팅도 칼날을 번득였다. 보로미르가 서쪽에 어깨를 기댔다. "잠깐! 아직 닫지 마시오!" 갠달프가 말했다. 그는 보로미르 곁으로 달려가 자신의 몸을 최대한 늘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리아의 왕 발린의 잠을 깨우는 자는 도대체 누군가!" 구덩이 속으로 돌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거친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일어났다. 소란 중에 명령조의 저음이 들렸다. 둥둥둥. 아래쪽에서는 북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갠달프는 재빠른 동작으로 문 앞 좁은 통로로 나서며 지팡이를 쳐들었다.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불빛이 일어나 방 안과 바깥 통로를 밝혔다. 마법사는 잠깐 동안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뒤로 몸을 빼자 화살이 윙윙거리며 복도에 떨어졌다. "오르크들이오. 굉장히 많은데. 덩치가 크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놈들도 있는데 아마 모르도르의 우루크들인 것 같아. 지금은 뒤로 주춤거리고 있지만 뭔가 뒤에 있는 모양이오. 내 생각에는 거대한 트롤이 여러 놈 나타난 것 같소. 이쪽으로는 희망이 없겠는데."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저쪽으로도 온다면 이젠 가망이 없는 거군요." 그러자 동쪽 문 옆에서 귀를 기울이며 서 있던 아라곤이 말했다. "여긴 아직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쪽은 똑바로 뻗은 내리막 계단인데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 건 분명하군요. 하지만 뒤에 적이 따라오는데 무작정 이 길로 달아나 보았자 소용이 없을 테고 문을 닫을 수도 없습니다. 열쇠는 없고 자물쇠도 부서졌고 또 안에서 열리게 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선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조치를 취해야겠는데요. 그들이 마자르불의 방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칼 안두릴의 날을 손가락으로 벼려 보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복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보로미르가 몸을 던져 문을 닫고 어깨로 밀었다. 그리고 부러진 칼날과 각목으로 문을 걸었다. 그들은 방의 반대쪽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은 무모하게 달아날 수가 없었다. 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충격이 가해지고 고리에 걸어 놓은 쐐기가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비늘이 달린 검은 살결의 거대한 팔과 어깨가 벌어진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밑으로는 발가락이 없는 크고 넓적한 발이 들어섰다. 바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보로미르가 앞으로 달려나가 온 힘을 다해 그 팔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의 칼은 쨍 소리를 내며 옆으로 비껴나가며 떨리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칼날은 이가 빠져 버렸다. 프로도는 갑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보로미르 곁으로 뛰어나가는 동시에 '샤이어!' 하고 소리치며 몸을 숙여 스팅으로 괴물의 발을 찔렀다. 울부짖는 비명이 울리며 발이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프로도의 손에서 하마터면 스팅이 떨어질 뻔했다. 그의 칼날에선 검은 핏방울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보로미르가 다시 몸을 날려 문을 꽝 닫았다. 아라곤이 외쳤다. "과연 샤이어를 지킬 만한 용사로군! 호비트의 칼날이 그렇게 깊이 꽂히다니! 자넨 훌륭한 칼을 가지고 있군,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 문 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계속 덜컹거렸다. 망치와 해머가 동원된 모양이었다. 문이 삐걱거리며 뒤로 휘어지면서 틈새가 갑자기 크게 벌어졌다. 화살이 날아들어와서 북쪽 벽에 부딪히거나 방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나팔소리가 크게 울리고 발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오르크들이 물밀 듯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 셀 수가 없었다. 오르크들은 기세좋게 덤벼들었지만 완강한 수비에 당황하고 있었다. 레골라스는 두 놈의 목줄기를 화살로 관통시켰다. 김리는 발린의 무덤 위에 뛰어오른 다른 놈의 다리를 밑에서부터 잘랐다. 보로미르와 아라곤도 여럿을 죽였다. 오르크들의 비명을 지르며 퇴각하기 시작했고, 샘이 머리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곤 일행은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다. 오르크들의 시체는 모두 열셋이었다. 샘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기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곧 그 오르크를 쓰러뜨렸다. 배로우에서 구한 칼이 드디어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만일 테드 샌디맨이 옆에 있었다면, 샘의 갈색 눈동자에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다. 갠달프가 외쳤다. "자, 이때다! 트롤이 돌아오기 전에 빠져나가야지!" 그러나 그들이 퇴각을 결정하긴 했으나 피핀과 메리가 바깥 층계에 도착하기도 전에 거의 사람 덩치만큼 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갑옷으로 휘감은 오르크 무리의 대장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따라 오르크들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넓고 펑퍼짐한 그의 발은 거무스름했으며 눈은 석탄처럼 시커멓고 혀는 새빨갰다. 그는 큰 창을 휘둘렀다. 거대한 가죽방패로 보로미르의 칼을 강하게 밀어붙여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 그는 아라곤이 휘두르는 칼날 밑으로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날렵하게 뛰어들어 창으로 곧바로 프로도를 찔렀다. 창은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고 그는 뒷벽으로 밀려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샘이 비명을 지르며 창자루를 내리치자 자루는 부러지고 말았다. 오르크가 부러진 창자루를 내던지고 어월도를 빼드는 순간안두릴이 그의 투구 위에서부터 아래로 일직선을 그었다. 불꽃 같은 섬광이 일며 투구가 반으로 쪼개졌다. 오르크는 머리가 갈라진 채 쓰러졌다. 그의 부하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보로미르와 아라곤이 그 뒤를 쫓았다. 둥둥. 아래서 들려오는 북소리는 여전했으며 아주 큰 목소리가 다시 굴 속에 올려퍼졌다. 갠달프가 외쳤다. "자, 마지막 기회다! 빠져나가자!" 아라곤은 벽에 기대 쓰러져 있던 프로도를 옆구리에 끼고, 앞장선 메리와 피핀의 등을 밀며 층계로 향했다. 모두들 그 뒤를 따랐으나 김리만은 레골라스가 잡아끌어야만 했다. 그렇게 위급한 상황임에도 김리는 발린의 무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보로미르는 동쪽 문을 세게 잡아당겨서 돌쩌귀에 끼워 넣었다. 문은 안팎으로 큰 쇠고리가 달려 있었으나 잠기지는 않았다. 프로도가 헐떡거렸다. "난 괜찮아요. 걷을 수 있어요. 내려 주세요!" 아라곤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그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자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지." 갠달프도 말했다. "아직 살았군! 하지만 놀라고 있을 겨를이 없소. 모두 빨리 층계를 내려가오! 맨 밑에 가서 몇 분만 날 기다리다가 만일 내가 가지 않으면 먼저 떠나시오! 빨리 가서 오른쪽 내리막길이 있는지 찾으시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당신 혼자 문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갠달프는 화를 내며 외쳤다. "내가 시킨 대로 하시오! 여기선 이제 칼은 소용이 없소. 가시오!" 통로는 채광창 하나 없이 완전한 암흑이었다. 그들은 내리막계단을 한참 더듬어 내려간 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뿌려지는 희미한 빛만이 저 높은 곳에서 어렴풋이 비쳐왔다. 그는 아직도 문 옆에서 꼼짝도 않고 지키고 서 있는 듯했다. 프로도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샘에게 기댔고 샘은 두 팔로 그를 안다시피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층계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갠달프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프로도에게 들렸다. 그 소리는 굴 속에 메아리를 일으키며 경사진 지붕을 따라 아래쪽으로 울려갔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방의 벽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이따금 북소리가 다시 크게 울렸다. 둥, 둥. 갑자기 층계꼭대기에서 하얀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우르릉 쾅 하는 소리가 육중하게 들려왔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요란해지더니 다시 멈춰 버렸다. 갠달프가 날 듯이 층계를 내려와 그들 한가운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몸을 가누며 말했다. "됐어, 됐어! 끝났어! 내가 할 수 있는 한 다 했지. 하지만 호적수를 만났어! 하마터면 황천 구경을 할 뻔했거든. 하여간 여기 서 있을 시간은 없으니 갑시다! 잠시 빛이 없이 가는 수밖에 없겠는데. 내가 기력을 너무 써버렸어. 자, 자, 갑시다. 김리, 어딨나? 나와 함께 앞장을 서야지. 나머지 분들은 모두 바싹 따라오고!"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며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둥, 둥. 북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소리도 많이 약해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지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밖에 달리 그들을 쫓아오는 발소리나 목소리는 없는 듯했다. 갠달프는 통로가 자신이 예상하는 방향으로 나 있는 듯 오른쪽이나 왼쪽 어디로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이따금 더 낮은 층으로 내려가는 내리막층계가 오십 계단 이상 뻗치기도 했다. 사실 그때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내리막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허공에 발을 디딜 염려가 많았다. 갠달프는 마치 장님처럼 지팡이로 앞길을 더듬어 갔다. 한 시간 남짓 그들은 적어도 일 마일 이상의 길을 걸어 많은 층계를 내려왔다. 여전히 추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탈출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층계 아래서 갠달프가 발을 멈추었다. 그는 헉헉거리며 말했다. "공기가 뜨거워지는군. 지금쯤은 적어도 문과 같은 층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하여튼 동쪽으로 나가는 왼쪽 통로는 빨리 찾아야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텐데. 너무 피곤하군. 오르크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할 수 없어. 여기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김리가 그의 팔을 부축하며 층계에 걸터앉도록 도와 주었다. 김리가 물었다. "아까 문 앞에선 어떻게 된 겁니까? 북을 치던 놈을 만나셨나요?"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강한 상대였어. 그 순간에는 문이 닫히는 주문을 외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지. 그럴 때 쓰는 주문을 많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걸리잖는가? 그리고 문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바깥에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방 안에선 오르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더군. 문은 금세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고. 그들은 모두 자기네들의 그 소름끼치는 말로 떠들고 있어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다만 가쉬, 즉 불이라는 말만 알아들었지. 그 순간 누군가 방에 들어왔어. 문틈으로 그걸 알 수 있었는데 오르크들은 모두 겁에 질린 듯 조용해지더구먼. 그는 쇠고리를 잡아 보고는 그제서야 내가 거기에 주문을 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역주문을 걸어왔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무시무시하고 대단한 힘이었어. 하마터면 내가 당할 뻔했으니까. 한순간 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열리기 시작한 거야. 나도 다시 주문을 외는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게 너무 센 주문이었어. 문이 산산조각 나버린 거야. 방 안의 빛이 구름처럼 시커먼 무엇인가에 가려져 버렸고 나는 층계 밑으로 내동댕이쳐진 거지. 벽도 모조리 무너지고 아마 방의 천장도 무너졌을 거야. 발린이 너무 깊이 묻혀 버렸을까 봐 걱정이 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무서운 놈도 거기 같이 묻혔을 거야. 적어도 우리 뒤쪽 통로는 완전히 봉쇄된 거지. 아! 그렇게 힘든 상대는 난생 처음이었어. 하지만 이제 다 끝난 일이고... 그런데 프로도, 자넨 어떤가? 물어 볼 시간도 없었군. 하지만 난 자네가 아까 말을 했을 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아라곤이 옆에 끼고 나간 호비트는 용감하긴 했지만 죽은 호비트라고 생각했었거든." "제가 왜요?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가벼운 타박상에 통증이 좀 있을 뿐 심하지는 않아요."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과연! 난 그저 호비트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을 따름이야. 내가 진작 알았더라면 브리의 여관에서 좀더 정중하게 대하는 건데 말이지. 아까 그 창에는 멧돼지도 꿰이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나를 관통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땐 정말 망치와 모루 사이에 끼인 줄 알았습니다." 프로도는 이렇게만 말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숨쉬기조차 괴로울 정도로 옆구리가 걸려왔다. 갠달프가 말했다. "자넨 빌보를 닮았어. 전에 그에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자넨 겉보기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 프로도는 그 말에 무슨 다른 뜻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다. 그드릉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김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둠속에서도 상당한 눈이 밝았다. "저 앞에 불빛이 있는 거 같은데요. 햇빛은 아니고... 빨갛습니다. 무슨 불일까요?" 그러자 갠달프가 중얼거렸다. "가쉬! 그들이 말한 게 저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래층이 모두 불바다? 여하간 계속 가볼 수밖에 없지." 불빛은 곧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건 정면 통로 밑에서 피어올라 양쪽 벽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 덕분에 그들은 길을 잘 볼 수 있었다. 앞에 놓인 길은 곧바르게 내리막으로 이어져 한참 가다가 낮은 아치까지 뻗쳐 있었는데 거기에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공기가 매우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치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갠달프가 일행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입구 바로 너머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이 불빛이 반사되어 빨갛게 익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우리를 기다리는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게 분명한데.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우린 지금 정문 바로 밑에 있는 하층 제1단에 와 있는 거야. 이 방은 올드 모리아의 2호실이지. 정문은 가까워. 저기 오른쪽 끝을 지나 왼쪽으로 넉넉 잡아 사분의 일 마일만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넓은 층계를 올라가 도로를 따라가면 1호실이 나오고 그 다음엔 바깥이지! 우선 경계를 해야지."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면에는 또 하나의 동굴 같은 방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룻밤을 묵었던 방보다 더 높고 길었다. 그들은 그 방의 동쪽 끝에 서 있었고 서쪽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두 줄로 높은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나무가 하늘로 뻗친 가지로 천장을 떠받치는 것처럼 조각되어 있었다. 윤이 나는 검은 기둥에는 빨간 불빛이 강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방 저쪽 끝 거대한 기둥 밑에 큰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바로 그곳에서 새어나와 이따금 기둥 밑동과 언저리를 날름거리는 혀로 핥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뜨거운 공기 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중앙통로로 내려왔다면 여기서 꼼짝 못하고 함정에 빠졌겠지. 이젠 우리와 추적자들 사이를 이 불이 가로막아 주겠군. 갑시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소." 갠달프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추격의 북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둥, 둥, 둥. 방 서쪽 끝 어둠 속으로부터 함성과 나팔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둥, 둥. 기둥이 요동을 하고 불꽃이 춤을 추었다. 갠달프가 외쳤다. "이젠 마지막 관문이야! 바깥에 아직 해가 있다면 희망은 있지. 따라오시오!" 그는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빠른 속도로 매끄러운 바닥을 가로질렀다. 거리는 보기보다 멀었다. 달려가는 동안 그들은 뒤에서 발소리와 북소리가 어지럽게 섞인 채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들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함성이 크게 일었다. 그들의 위치가 발각된 것이었다.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프로도의 머리 위로 화살 한 대가 윙 날아갔다. 보로미르가 웃으며 말했다. "녀석들, 불꽃이 가로막고 있는 건 예측 못했을 거다. 우린 반대쪽에 있단 말이다!" 그러나 갠달프가 그들을 불렀다. "앞을 보시오! 다리가 가까이 있소. 여긴 매우 좁고 위험한 곳이지." 갑자기 프로도 앞에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구렁이 나타났다. 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닥이 사라지고 건너편 문까지 돌로 만든 좁은 다리가 놓여진 것이다. 길이는 십이 미터쯤 되어 보였는데 난간도 손잡이도 없었다. 옛날 난쟁이들이 1호실이나 바깥통로까지 적에게 점령당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방책이었다. 다리 위는 겨우 한 줄로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갠달프가 발을 멈추자 모두 그 위에 모여 섰다. "김리, 앞장서게. 그 다음엔 피핀과 메리. 똑바로 계속 가서 문을 지나 층계를 올라가게!" 화살이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하나는 프로도를 맞히고 뒤로 튕겨나갔고 또 하나는 갠달프의 모자를 꿰뚫고 검은 깃처럼 박혀 버렸다. 프로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불꽃 건너편으로 검은 무리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수백 명은 됨직한 오르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불빛에 핏빛처럼 반사되는 창과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둥, 둥.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레골라스가 뒤돌아서서 비록 그의 작은 활로는 먼 거리지만 활시 위에 화살을 메겼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이 아래로 처지며 화살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공포와 경악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두 명의 거대한 트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기다란 석판을 들고 와서 불꽃 위로 지나갈 수 있게끔 그 위에 던졌다. 그러나 레골라스가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은 그 트롤들 때문이 아니었다. 오르크들이 마치 무엇에 겁이라도 먹은 듯 양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군지 똑똑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치 거대한 검은 그림자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사람 모양의, 어쩌면 사람보다도 더 큰 검은 형체가 있었고 그에게는 그들 모두를 꼼짝 못하게 할 만한 공포와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불가로 다가오자 마치 구름이 위를 가린 듯 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불꽃이 나오는 틈새를 쉽게 뛰어넘었다. 불꽃은 마치 반기기라도 하듯 그의 몸을 감싸며 널름거렸고 검은 연기가 공중에 피어 올랐다. 펄럭거리는 그의 털에 불이 붙어 등뒤로 불티가 날았다. 그의 오른손은 널름거리는 불꽃처럼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었고 왼손은 가죽끈이 여럿 달린 채찍을 쥐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절망적인 외침을 토했다. "아! 아! 발록! 발록이야!" 그러자 김리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쳐다보았다. "듀린의 재앙!"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갠달프가 휘청거리는 몸을 지팡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발룩! 이제 알겠군. 어째서 하늘조차 우리를 돕지 않으시는 건가! 난 이미 너무 지쳤는데." 검은 괴물은 불꽃을 휘날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오르크들이 함성을 지르며 걸쳐 놓은 돌다리 위로 쏟아져왔다. 그때 보로미르가 뿔나팔을 뽑아 들고 불어젖혔다. 동굴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잠시 오르크들도 움찔했고 불꽃의 괴물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불꽃이 바람 앞에 맥을 못 추듯 갑자기 메아리도 죽어 버리고 적은 다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갠달프가 다시 힘을 내듯 외쳤다. "다리를 건너! 당신들은 감당할 수 없어! 내가 다리를 지킬 테니 달아나!" 그러나 아라곤과 보로미르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갠달프 뒤에서 버티고 섰다. 나머지 일행은 방 끝에 있는 문을 지났지만 차마 갠달프 혼자 적을 상대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엉거주춤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발록이 다리 앞까지 다가왔다. 갠달프는 왼손으로 지팡이를 붙잡고 기댄 채 오른손에 흰 냉기가 번득이는 글람드링을 들고 다리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다. 적이 그를 마주보며 다시 멈춰섰고 그를 둘러싼 어둠은 거대한 두 개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가 채찍을 높이 들자 가죽끈이 허공을 가르며 딱 소리를 냈다. 그는 코에서 불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갠달프는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넌 지나가 수 없어!" 그가 말했다. 오르크들도 숨을 죽였고 한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나는 아르노르의 불을 휘두르는 비밀의 불의 사자다. 넌 지나갈 수 없어. 어둠의 불, 우둔의 불꽃은 너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어둠으로 돌아가라! 넌 여길 지나갈 수 없다!" 발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서서히 다리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의 키는 불쑥 커졌으며 두 날개도 양쪽 벽에 닿을 만큼 길어졌다. 그러나 갠달프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대한 발록 앞에 홀로 버티고 선 갠달프의 구부정한 회색 형체는 마치 불어오는 폭풍 앞에 선 한 그루 고목처럼 왜소했다. 어둠 속에서 붉은 칼이 불꽃을 일으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글람드링도 흰빛을 번득였다. 쨍 하는 소리가 나며 흰빛이 찔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발록이 뒤로 물러났고 그의 칼은 산산조각이 나 허공이 튀어올랐다. 마법사는 몸을 휘청하면서 다리 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시 균형을 잡고 섰다. 갠달프가 다시 말했다. "넌 지나갈 수 없어!" 그러나 발록은 몸을 날려 한걸음에 다리로 뛰어들었다. 그의 채찍이 빙빙 원을 그리며 쉿쉿 소리를 냈다. 그때 아라곤이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다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혼자는 안 됩니다! 엘렌딜! 갠달프, 나도 여기 있습니다!" "곤도르!" 보로미르 역시 소리를 지르며 합세했다. 그 순간 갠달프는 지팡이를 높이 들어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발 밑 다리를 쳤다. 지팡이는 두 동강 나서 손에서 떨어졌다. 눈이 부실 만큼 흰빛이 어둠 속에서 찬란히 피어올랐다. 다리가 끊어진 것이었다. 발록의 발 바로 앞에서 다리는 끊어졌고 그가 딛고 섰던 돌은 구렁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벼랑 밖으로 돌출한 바위처럼 허공 속에 불쑥 나와 있었다. 무시무시한 비명과 함께 발록은 앞으로 쓰러졌고 그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도 밑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순간 발록은 안간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고 가죽끈은 마법사의 무릎을 휘감아 그를 벼량 끝으로 끌어당겼다. 갠달프는 비틀거리며 넘어지면서 벼랑 끝을 붙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달아나, 바보들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심연 속으로 떨어져 사라져 버렸다. 불빛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왔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구렁 속을 내려다보았다. 아라곤과 보로미르가 달려가려는 순간 남아 있던 다리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아라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일행은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아라곤이 외쳤다. "갑시다! 이제 내가 인도하겠소! 우린 그분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야 하오! 나를 따르시오!" 그들은 문을 지나 오르막계단을 허둥지둥 넘어지면서 기어올랐다. 아라곤이 앞장을 서고 보로미르가 맨 뒤를 지켰다. 계단이 끝나고 넓은 통로가 나타났고 그들은 그 속을 달렸다. 프로도는 샘이 옆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자신도 달리면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북소리에 느릿하고 비장한 느낌을 받았다. 둥, 둥. 그들은 계속 달렸다. 멀리 전방에서 빛이 보이더니 천장에 채광통로가 나타났다. 그들은 더 빨리 달렸다. 그들은 동쪽으로 난 높은 창문에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큰 방을 지나 부서진 큰 문을 통과했다.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눈부신 햇살을 배경으로 서 있는 커다란 아치였다. 정문 양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커다란 경비초소 뒤의 어둠 속에 문을 지키는 오르크들이 숨어 있었다. 문이 이미 부서져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아라곤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오르크 대장을 쓰러뜨리자 나머지는 그의 분노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렸다. 일행은 그들을 개의치 않고 정문을 통과했다. 문을 나선 그들은 오랜 세월에 닳고닳은 넓은 층계를 힘껏 달려 내려갔다. 모리아의 입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절망적인 심정으로 다시 푸른 하늘 아래로 나오게 되었고 불어오는 찬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저쪽 벽에서 화살이 닿는 거리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 달렸다. 딤릴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개산맥의 그림자가 그 위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동쪽 먼 곳에는 황금빛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시간은 겨우 오후 한시경이었다.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흰 구름이 높이 떠 있었다. 그들은 뒤돌아보았다. 산그림자 속으로 정문의 아치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느릿한 북소리가 그 속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왔다. 둥, 둥. 가느다란 검은 연기가 문 밖으로 피어오르고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방의 골짜기는 텅 비어 있었다. 둥. 그제서야 그들은 북받쳐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오열했다. 망연자실 말없이 서 있는 이도 있었고 땅바닥에 엎드린 이들도 있었다. 북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제18장 로스로리엔 "아, 아! 여길 떠나야 하다니." 아라곤은 탄식하며 산 쪽으로 돌아서서 칼을 높이 쳐들었다. "안녕, 갠달프! 그러게 내 말하지 않았던가요? 모리아의 문을 지나가려면 조심해야 한다고. 내가 한 말이 씨가 돼 버리다니! 이제 당신이 없는데 우리한테 무슨 희망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는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희망은 없지만 우린 해내야 해. 복수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 자, 눈물을 거두고 정신들 차리세. 아직 갈 길도 멀고 할 일도 많네." 그들은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산줄기 사이로 어두컴컴한 골짜기가 북쪽을 향해 깊숙이 파여 있었다. 그 산 너머에 하얀 봉우리 세 개가 우뚝 솟아 있었다. 켈렘딜, 파누이돌, 카라드라스. 모리아의 거봉들이었다. 골짜기 꼭대기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작은 폭포들이 하얀 레이스를 친 것처럼 급류를 흘려 보내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희뿌염한 물안개가 자욱했다. 아라곤은 폭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바로 딤릴 스테어라는 곳일세. 운명의 여신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우린 저 폭포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왔을 걸세." 김리가 말했다. "카라드라스가 조금만 덜 잔인해도 그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겠지요. 햇빛 아래서 저렇게 웃고 있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그는 세 개의 연봉 중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흰 봉우리를 향해 주먹질을 하고 돌아섰다.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나고 그 밑으론 넓은 평원이 멀리까지 펼쳐진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남쪽으로 안개산맥이 그들의 눈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골짜기 서쪽의 고지대였기 때문에 바로 밑 일 마일도 못 되는 거리에 있는 호수를 금방 볼 수 있었다. 길쭉한 타원형으로 생긴 그 호수는 북쪽 끝이 긴 창끝처럼 비쭉 나와서 골짜기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다. 남쪽 끝은 산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호숫물은 마치 불켜진 방에서 내다본 맑은 저녁하늘처럼 검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표면은 잔잔했다. 호수를 빙 둘러 보드라운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김리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미러미어 호수가 있군요. 우리말로는 켈레드 자람이라 합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그때 가서 실컷 보게! 하지만 거기 오래 있을 수는 없네.' 이제 이 호수를 다시 보려면 또 먼 길을 걸어서 와야겠지요. 난 이렇게 떠나가는데 그분은 홀로 남아 있어야 하다니!" 일행은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거칠었고 갈라진 바위 틈에서 피어난 히드와 가시금작화 사이로 꼬불꼬불 끝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도 예전엔 저지대의 난쟁이 왕국에서 산 위로 이어진 훌륭한 포장도로였으리라. 길가 곳곳에 비바람에 시달린 연석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바람이 불면 그 가는 줄기를 흐느적거리며 잉잉 소리를 내는 자작나무와 건나무로 뒤덮인 푸른 무덤들이 눈에 띄었다. 길이 동쪽으로 꼬부라질 때면 그들은 미러미어 호수의 잔디밭 가까이 가기도 했다.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꼭대기가 부서진 기둥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김리가 소리쳤다. "듀린의 바위다! 저 신비의 골짜기를 잠깐만이라도 보고 와야겠어요!" 아라곤은 모리아의 입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빨리 갔다오게! 여긴 해가 빨리 지는 곳이야. 오르크들은 어두워지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니까 해가 지기 전에 멀리 도망가야하네. 벌써 그믐이 가까워져서 밤엔 달도 없을지 몰라." 난쟁이는 길에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프로도, 나랑 함께 가요! 켈레드 자람을 못 보고 가면 후회스러울 거예요." 그는 기다란 푸른 비탈을 뛰어내려갔다. 프로도는 상처가 쑤시고 피곤했지만 고요한 푸른 물에 이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샘이 그 뒤를 따랐다. 김리는 돌기둥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위를 쳐다보았다.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린 바위는 여기저기 갈라터졌고 옆에 새겨 놓은 룬 문자도 흐려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난쟁이가 말했다. "이 기둥은 듀린이 처음으로 미러미어 호수를 바라본 지점을 기념하는 거예요. 떠나기 전에 우리 눈으로 직접 한번 봅시다!" 그들은 어두운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호수를 둘러싼 산세가 깊고 푸른 물 속에 비치기 시작했고 그 밑으로 흰 불꽃 형상을 하고 깃털처럼 솟은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하늘엔 아직 해가 떠 있었는데 그 깊은 물 속에는 별들이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듯 떠 있었다. 물가에 웅크린 그들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김리가 탄성을 질렀다. "오, 아름답고 신비한 켈레드 자람! 듀린의 왕관은 여기서 그가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안녕!" 그는 절을 하고 돌아서서 푸른 잔디밭을 뛰어올라 다시 길로 되돌아왔다. "뭘 봤나요?" 피핀이 샘에게 물었으나 샘은 너무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길은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골짜기의 하단부를 벗어나면서 경사가 급해졌다. 그들은 호수 밑을 한참 내려가서 수정처럼 맑고 깊은 샘물을 발견했다. 샘물은 돌 틈에서 넘쳐 흘러 햇빛에 반짝이면서 바위 틈새의 가파른 통로로 졸졸 흘러내렸다. 김리가 말했다. "여기가 실버로드 강의 수원입니다. 마시진 마세요! 얼음같이 차답니다." 아라곤이 말했다. "이 물은 곧 빠른 도랑물이 되어서 다른 산골에서 내려온 물줄기와 합쳐지지. 우리는 이 물길을 따라 몇 마일 더 가야 하네. 이건 갠달프가 정해 놓은 길인데 우선 일차 목표는 저기 실버로드 강과 안두인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숲 속까지 가는 것일세." 그들은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골짜기의 좁은 틈새로 빠르게 흘러내리다가 저지대에 들어서서는 황금빛 아지랑이에 가려 사라졌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저기가 로스로리엔 숲입니다. 우리 요정들의 나라 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이지요. 저 땅의 나무처럼 아름다운 나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가을이 돼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금빛으로 변하거든요. 봄이 오고 푸른 새잎이 나면 그 잎은 떨어지고 가지마다 노란 꽃이 핍니다. 숲은 바닥과 지붕이 온통 금빛이 되지요. 기둥은 은빛으로 변하고요. 나무껍질이 매끄러운 은회색이거든요. 우린 머크우드에서 아직도 로스로리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답니다. 그 숲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요. 지금이 봄이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난 겨울이라도 좋아.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어. 자, 다들 서두르세!" 아라곤이 말했다. 프로도와 샘은 한참 동안을 그럭저럭 일행을 뒤쫓아갈 수 있었으나 앞장선 아라곤이 너무 빠른 속도로 걸었기 때문에 잠시 후엔 뒤로 처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른 아침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샘은 벤 상처가 불같이 화끈거렸고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모리아의 뜨거운 굴 속을 빠져나왔기 때문에 바람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샘은 몸을 덜덜 떨었다. 프로도는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마침내 레골라스가 뒤를 돌아보고 그들이 저 뒤에 처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라곤을 불러세웠다. 모두 걸음을 멈추었고 아라곤이 보로미르에게 따라오라고 말하며 그들 쪽으로 뛰어왔다. 그의 얼굴엔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미안하네, 프로도! 오늘은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또 갈 길이 급해서 그만 자네와 샘이 다친 걸 잊고 있었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나! 모리아의 오르크들이 모두 떼거지로 뒤쫓아온다 해도 자네부터 치료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미안하네. 자, 가세! 조금만 더 가면 쉴 만한 곳이 있으니 거기 가서 어떻게 치료를 해보세. 보로미르, 당신이 샘을 좀 맡아 주겠소?" 그들은 곧 또 하나의 물줄기가 서쪽에서부터 흘러나와 실버로드의 급류와 합류하는 것을 발견했다. 강물은 녹색 바위 위에서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작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근처에는 키가 작고 등이 굽은 전나무가 많았고 비탈길은 골고사리와 월귤나무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폭포 밑으론 다시 평지가 펼쳐졌고 거기서부터 강물은 반짝이는 조약돌 위로 요란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근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벌써 시간은 오후 세시가 다 되었으나 그들은 겨우 이삼 마일밖에 걷지 못했다. 해는 이미 서쪽 하늘로 달아나고 있었다. 김리와 두 젊은 호비트가 전나무 가지로 불을 지펴 물을 끓이는 동안 아라곤은 샘과 프로도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샘의 상처는 깊진 않았지만 보기에 끔찍했다. 아라곤은 샘의 상처를 보며 표정이 굳었으나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야, 샘! 오르크 무리들 중에서 첫 놈을 죽이고 나면 꼭 보복을 받게 마련인데 이만하면 괜찮은 걸세. 오르크들은 칼날에 종종 독을 바르기도 하는데 다행히도 자네 상처엔 독이 없어. 내가 치료하고나면 곧 나을 테니 김리가 물을 끓여 주면 그 물로 상처를 소독하게." 그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열고는 말라빠진 나뭇잎을 몇 장 꺼냈다. "웨더톱 근처에서 구한 아델라스잎이 아직 좀 남아 있는데 너무 말라서 약효가 떨어져 버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물 속에 한 장을 부숴 넣고 그 물로 상처를 깨끗이 씻게. 붕대는 내가 감아 주지. 자, 이젠 자네 차례야, 프로도!" 프로도는 겉옷 안에 입은 갑옷을 보이기가 싫었다. "난 괜찮아요. 난 허기만 채우고 좀 쉬면 됩니다." "안 될 소리. 자네 말대로 망치와 모루가 자네 몸에 무슨 사고를 저질러 놨는지 확인해야겠어. 난 자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야." 그는 조심스럽게 프로도의 낡은 윗도리와 해진 속옷을 벗기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웃음을 터뜨렸다. 은빛 갑옷이 잔물결이 이는 바다 위의 불빛처럼 그의 눈앞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벗겨서 높이 쳐들었다. 갑옷의 보석이 별빛처럼 반짝거렸고 고리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연못 위에 빗방울 듣는 소리처럼 경쾌하게 울렸다. "이것들 보게! 여기 요정왕자님께나 어울릴 멋진 호비트 가죽이있네. 호비트들이 이런 가죽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알려지면 아마 중간계의 사냥꾼들은 모두 샤이어로 몰려들걸." 김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갑옷을 쳐다보았다. "아하, 사냥꾼의 화살도 무용지물이 될 걸요. 이건 미스릴 갑옷입니다. 미스릴! 난 이토록 아름다운 갑옷은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어요. 이것이 갠달프가 말한 그 갑옷이란 말예요, 프로도? 그렇다면 그는 이 갑옷의 가치를 과소평가한 셈이군. 여하튼 그 갑옷은 임자를 제대로 만난 거로군요."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빌보 아저씨하고 매일 그 작은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바로 이것이었군요. 어쩐지 빌보 아저씬 역시 멋진 호비트란 생각이 드는데요. 나중에 돌아가서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로도의 오른쪽 옆구리와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갑옷 속에 보드라운 가죽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갑옷의 고리가 그것을 뚫고 살 속에까지 파고들어간 데도 있었다. 왼쪽 옆구리 역시 벽에 부딪힐 때 살갗이 벗겨져 찰과상을 입었다. 모두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라곤은 아델라스를 우릴 물로 두 호비트의 상처를 씻어 주었다. 짙은 향기가 작은 골짜기에 스며들었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들은 모두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새로운 힘이 났다. 프로도는 곧 통증이 그치고 숨쉬기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며칠 동안 몸이 뻐근하고 상처에 뭐가 스치기만 해도 욱신거려서 고생해야 했다. 그래서 아라곤이 그의 옆구리에 헝겊보호대를 붙여 주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갑옷이 놀랄 만큼 가볍군. 자네가 견딜 수만 있다면 갑옷을 다시 입게. 그런 갑옷을 자네가 입고 있으면 마음이 놓일 거야. 앞으로 안전지대에 들어갈 때까지는 절대 함부로 벗진 말게. 잠잘 때도 물론이야. 하지만 이 여행을 계속하는 한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을거야." 그들은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준비를 갖췄다. 그들은 불을 끄고 모든 흔적을 없앴다. 그리고 골짜기를 벗어나 다시 길로 들어섰다. 얼마 못 가서 태양이 서쪽 산 너머로 사라지고 거대한 산그림자가 산기슭을 점점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 발 밑으로 땅거미가 깔리고 숲 속 분지에선 안개가 일었다. 멀리 동쪽으로 저녁햇살이 아득한 숲과 평원 위로 잔광을 비추고 있었다. 샘과 프로도는 이제 통증도 덜하고 원기도 회복돼 상당히 빨리 걸을 수 있었다. 아라곤은 도중에 잠깐 쉬고 세 시간 동안 계속 행군을 강행했다. 주위는 벌써 캄캄해졌고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하늘엔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아직 그믐달은 뜨지 않았다. 김리와 프로도는 맨 뒤에서 묵묵히 걸으며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지 귀를 기울였다. 한참 있다가 김리가 침묵을 깼다.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걸 보니 이 근처엔 오르크 같은 것들은 없나 봐요. 내 귀는 믿어도 좋아요. 오르크들은 모리아에서 우릴 쫓아낸 데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죠. 사실 우리하고는, 아니 반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쫓아만 내버리는 게 그들의 목적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종종 그들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복수를 하러 멀리 평양에까지 쫓아나오는 경우가 있다지요." 프로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팅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슨 소리가 귓바퀴를 스쳐가는 것 같았다. 어둠이 그들을 둘러싸고 밤길이 더욱 어두워지면서 그는 다시 뭔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저 뒤쪽에서 조그마한 불빛 두 개가 보였다. 아니 얼핏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순식간에 길 옆으로 비켜나 사라지고 말았다. 난쟁이가 물었다. "뭐죠?" 프로도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돌아보았더니 사람 눈 같은 불빛이 두 개 보이더라고요. 모리아에 들어올 때부터 죽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김리는 걸음을 멈추고 땅바닥에 귀를 댔다. "나무하고 돌들이 밤인사 나누는 것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자, 빨리 갑시다. 너무 뒤처졌어요." 차가운 밤바람이 골짜기 위를 향해 거꾸로 불어왔다. 눈앞의 어둠이 가장자리로 물러나간 희미한 회색지대가 넓게 나타나면서 포플러잎 같은 수많은 나뭇잎들이 미풍에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골라스가 소리쳤다. "로스로리엔! 로스로리엔이다! 우린 드디어 황금의 숲에 도착한거예요. 아! 겨울이라 정말 애석하군." 키가 큰 나무의 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아치를 이루고 있었고 강물은 갑자기 늘어진 나뭇가지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무 밑동이 희미한 별빛에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살랑거리는 나뭇잎은 황금빛 낙엽의 색조를 언뜻언뜻 내비쳤다. 아라곤이 말했다. "로스로리엔이라! 숲 속 바람소리를 다시 듣게 돼서 정말 기쁘군. 모리아에선 겨우 십오 마일도 못 벗어났지만 이젠 더 가기도 힘들겠어. 오늘밤 요정들께서 뒤쫓아오는 적에게서 지켜 주길 기도해보세." 김리가 말했다. "요정들이 아직도 이 어두운 숲 속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머크우드의 우리 요정들이 여기까지 내려왔던 것도 벌써 먼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군. 하지만 우린 아직도 로스로리엔엔 누군가 날 이야기가 돼버렸군. 하지만 우린 아직도 로스로리엔엔 누군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이 땅에는 악을 쫓아내는 신바람 함이 있거든. 그렇지만 그들이 누군지 우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어쩌면 북쪽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라곤은 지나간 일을 기억해 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숲 깊숙한 곳에 요정들이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일세. 하지만 오늘밤은 우리 스스로 몸을 지킬 수밖에 없어. 조금만 더 가면 숲 속에 완전히 들어설 테니 거기서 쉴 만한 곳을 찾아보도록 하세." 아라곤은 앞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로미르는 내키지 않는지 그 자리에 붙박혀 서서 물었다. "다른 길은 없나요?" 아라곤은 돌아서서 되물었다. "얼마나 좋은 길을 바라는 거요?" "그냥 평범한 길요. 길 양쪽에 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린 지금껏 계속 이상한 길만 골라 오면서 고생만 잔뜩했습니다. 내가 반대하는데도 모리아로 들어갔다가 결국 해만 입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또 황금의 숲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는군요. 우리 곤도르에서도 여긴 위험한 곳이란 소문이 떠돕니다. 일단 들어가면 살아나오기가 힘들 뿐 아니라 살아나오더라도 다치지 않은 사람은 없답니다." "다치지 않은 이가 아니라 변화되지 않은 이라고 해야 옳을걸. 하지만 보로미르, 한때 현명한 사람들의 살던 그 땅에서 이젠 로스로리엔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곤도르도 드디어 기울어 가는 모양이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지금 우리 앞엔 다른 길이 없소. 모리아로 되돌아가든지, 길도 없는 산 속으로 기어들어가든지, 혼자서 대하까지 헤엄쳐 가든지 맘대로 하시오." 보로미르가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요. 하지만 위험할 걸요." "위험한 건 사실이지. 아름다우면서 위험한 곳이오. 하지만 악인만이, 악을 퍼뜨리는 사람만이 이곳을 두려워할 거요. 자, 따라들오게!" 그들이 숲 속을 향해 일 마일도 채 못 가서 물줄기가 또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서쪽으로 산맥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가 울창한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급류였다. 그들의 오른쪽 멀리 어둠 속에서 그 물줄기가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검은 급류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질러서 실버로드 강과 합쳐지는 지점에서 나무뿌리 둘레로 어렴풋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님로델 강이야! 이 강을 두고 요정들은 옛날부터 많은 노래를 지었지요. 우리 북부에서는 아직도 그 노래들을 부르며 폭포 위에 걸리던 무지개와 물거품 위로 피어오르던 금빛 꽃들을 기억하곤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겨 버렸고 님로델 다리도 부서져 버렸지요. 난 물 속에 발을 좀 담가야겠습니다. 이 물은 피로를 씻는 데 효험이 있답니다." 그는 경사가 급한 강둑을 내려가서 물 속으로 첨벙 들어가면서 외쳤다. "이리들 와요! 물이 안 깊어요. 걸어서 건너도 될 것 같은데요. 강을 건넌 다음에 쉬도록 해요. 폭포소리를 들으면 잠도 잘 오고 슬픔도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은 레골라스를 따라 차례대로 강을 건넜다. 프로도는 얕은 물가에 서서 잠시 피로한 다리 위로 물이 스쳐 지나가게끔 가만히 서 있었다. 물은 차가웠으나 살에 닿아서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걸어 들어가자 물은 무릎까지 차올랐고, 프로도는 여행 중에 쌓인 여독이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일행은 강을 다 건너와서 강변에서 쉬기도 하고 식사도 했다. 레골라스는 그들에게 머크우드의 요정들은 세상이 지금처럼 어두워지기 이전에 안두인 강가에서 뛰놀던 때의 햇빛과 별빛을 아직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서 로스로리엔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마침내 사위는 침묵 속에 빠져들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마치 음악처럼 들려오는 달콤한 폭포소리를 들었다. 프로도는 물 흐르는 소리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레골라스가 물었다. "님로델의 음성이 들리나요? 님로델이란 이름은 옛날 이 강가에 살던 어떤 아가씨 이름이지요. 그녀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를 한 곡 불러 볼까요? 원래 우리 요정어로 지어진 곡이지만 서부어로 옮겨 불러 보지요. 리벨덴에서처럼 말예요." 그는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소리에 섞여 들릴 듯 말 듯한 자그마한 소리로 노랠 부르기 시작했다. 먼 옛날 요정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낮에도 빛나는 별처럼 아가씨의 흰 망토는 금테두리를 둘렀고 구두는 은백색이었다. 아가씨의 눈썹 위에 별이 하나 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도 아름다운 로리엔의 황금가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빛이 하나 있었다. 긴 머리, 하얀 팔다리, 아가씨는 아름답고 자유로웠고 바람이 불면 가볍게 걸어다녔다. 보리수 나뭇잎처럼. 님로델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 맑고 차가운 물가에서, 아가씨의 목소리는 은방울이 구르듯 빛나는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아가씨는 지금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 햇빛 아래일까, 어둠 속일까, 먼 옛날에 벌써 님로델은 사라져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요정의 배는 회색항구에 닻을 내리고, 산그림자 아래서 오랫동안 아가씨를 기다렸다, 노호하는 바닷가에서. 밤새 북풍이 거세게 몰아닥쳐 소리 높여 외치며 요정의 바닷가에서 배를 몰아냈다.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 너머로. 새벽이 희미하게 밝았지만 물은 보이지 않고 집채만한 파도가 흩뿌리는 어지러운 물보라 사이로 산꼭대기가 희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암로스는 아득히 사라져 가는 해변을 보았다. 덮쳐 오는 파도 너머로, 그리고 님로델과 멀어지게 한 반역의 배를 저주했다. 그는 먼 옛날의 요정왕, 나무와 골짜기를 다스렸다. 봄이 되면 나뭇가지가 황금으로 변하는 아름다운 로스로리엔에서. 시위 떠난 화살처럼 그는 뛰어들었다, 키를 놓고 바다 속으로, 날개펼친 갈매기처럼 그는 깊은 물 속을 헤엄쳐 갔다. 흐르는 머리카락 위로 바람이 불고 반짝이는 물거품이 그를 둘러싼 채 씩씩하고 아름답게, 한 마리 백조처럼 사라지는 그를 그들은 보았다. 하지만 서쪽에서 아무 소식도 없었고, 이쪽 바닷가 요정들은 아무도 암로스의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영원토록 영원토록. 레골라스는 끝부분을 약간 더듬으며 노래를 마쳤다. "더 부를 수가 없어요. 이건 겨우 일부밖에 안 되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정말 길고도 슬픈 이야기랍니다. 난쟁이들이 산 속에서 악의 잠을 깨울 때쯤 꿈의 꽃, 로스로리엔에 어떤 슬픔이 닥쳐 왔는지 그 내력이 다 담긴 노래니까요." 김리가 말했다. "우리 종족이 악을 만든 건 아니지." 레골라스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이 악을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악이 나타났어. 그로 인해 님로델 일족의 많은 요정들이 정든 고향을 떠났고, 그녀도 멀리 남쪽의 백색산맥 고개 위에서 사라져 사랑하는 연인 암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배로 돌아오지 못했던 거지. 하지만 봄바람에 새싹들이 살랑거릴 때 그녀와 같은 이름인 폭포 옆에 가면 아직도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네. 그리고 남쪽에서 암로스의 목소리가 바다에서부터 바람결에 실려온다네. 왜냐하면 니몰델은 요정들이 켈레브란트라고 부르는 실버로드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켈레브란트는 다시 안두인 대하로 들어가는데 안두인은 바로 로리엔의 요정들이 배를 타고 떠난 벨팔라스 만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님로델도 암로스도 영영 돌아오지 못했지. 그녀는 폭포 근처 숲의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해. 나무 위에 사는 것이 로리엔 요정들의 관습이었거든. 아마 땅 위보다 더 조용하기도 할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갈라드림, 즉 나무사람들이라고 불렸다네. 숲 속 깊숙이 들어가면 나무들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숲 속 사람들은 암흑의 세력이 찾아들기 전에는 난쟁이들처럼 땅 속을 파지도 않았고 돌로 요새를 짓지도 않았지." "요즘도 나무 위에 사는 것이 땅 위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안전 할 것 같군 그래." 김리가 말했다. 그는 강 건너 딤릴 계곡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라보다가 다시 머리 위에 지붕처럼 덮여 있는 어두운 나뭇가지들을 쳐다보았다. 아라곤이 말했다. "자네 말이 일리가 있구먼, 김리. 우린 집을 지을 수도 없으니 가능하다면 갈라드림들처럼 나무꼭대기에서 쉴 곳을 찾아보세. 이렇게 길가에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건 멍청한 짓이야." 일행은 이제 길에서 벗어나 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를 따라 실버로드에서 떨어져 서쪽으로 숲이 더 우거진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님로델 폭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그루의 나무가 함께 엉켜 있는 곳을 발견했다. 나무들은 강물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나무 밑동은 매우 굵었고 높이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내가 먼저 올라가 보지요. 뿌리든 가지든 간에 나무 타는 데는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는 노래 속에서 이름은 들어 봤지만 나한테도 낯선 나무군요. 이름은 말론이고 노란 꽃이 피는데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은 없어요. 모양이 어떻고 가지가 어떻게 뻗어 있는지 알아보지요." 피핀이 말했다. "어떻게 생겼든 간에 오늘밤에 새들말고 우리들한테 쉴 자리만 제공해 준다면 정말 훌륭한 나무가 분명해요. 횃대 위에서 잘 수는 없잖아요."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럼, 땅 속에 굴을 파게! 자네들 방식대로 말이야. 하지만 오르크들한테 붙잡히지 않으려면 깊이, 그것도 빨리 파야 할걸." 그는 가볍게 뛰어서 머리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렇게 잠깐 매달려 있는 동안 나무 위 어둠 속에서 별안간 무슨 소리가 났다. '다로(요정말로 내려가라는 뜻)!' 명령조의 목소리였다. 레골라스는 두렵고 놀라서 다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나무의 몸통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그는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만!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마세요!" 머리 위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다른 목소리가 낭랑하게 요정어로 말했따. 프로도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산맥 동쪽의 숲 속 요정들이 쓰는 말은 서부의 요정어와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레골라스는 위를 쳐다보며 같은 말로 대답했다. 메리가 물었다. "누구죠?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샘이 대답했다. "요정이에요. 목소리가 안 들려요?" 레골라스가 말했다. "맞아, 요정들일세. 그런데 샘, 자넨 목청이 너무 좋아서 어둠 속이지만 화살을 한 대 먹이겠다는군." 샘은 황급히 손을 입에 갖다댔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들 하지는 말라고 하네. 벌써부터 우리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님로델 강 건너에서부터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북쪽에서 온 요정인 것을 알고 우리가 강 건너는 것을 막지 않았다 하네. 그리고 나중엔 내 노래도 들었다는군. 지금 프로도와 나를 올라오라고 하는데 아마 프로도와 이번 여행에 대해 무슨 연락을 받은 모양이야.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라고 하니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나무 밑에서 망을 보는 게 낫겠어." 어둠 속에서 사다리가 쓰윽 내려왔다. 캄캄하지만 은백색의 희미한 빛을 내는 줄사다리는 잘 보였다. 굵기는 가늘었지만 여러 사람이 매달려도 충분할 만큼 튼튼해 보였다. 레골라스가 날렵하게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자 그 뒤를 프로도가 천천히 올라갔고 샘이 마지막으로 숨소리조차 죽이고 기어올랐다. 말론나무 가지는 밑동에서부터 거의 수평으로 뻗어나와서 다시 위쪽으로 휘어졌고 몸통은 꼭대기에서 다시 수많은 가지로 갈라졌는데 그들은 그 가지 사이에 나무로 된 받침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그런 받침대를 플렛이라 불렀는데 요정들은 탈란이라고 했다. 사다리는 받침대 중앙에 나 있는 둥근 구멍을 통해서 내려왔다. 프로도가 마침내 플렛에 올라서자 레골라스는 다른 세 요정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진한 회색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무 사이에선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일어섰으며 그 중 한 요정이 가느다란 은빛을 반사하는 작은 램프의 덮개를 벗겼다. 그는 램프를 들어 프로도와 샘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불빛을 가리고 요정들의 언어로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프로도가 망설이면서 답례를 하자 요정은 그제서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점잖게 다시 인사를 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우리말만 쓰지요. 숲 속 깊은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과는 거의 접촉하는 일이 없거든요. 북부의 요정들과도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랍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바깥으로 나가서 새소식을 듣거나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외부의 언어를 좀 알지요. 나도 그 중 하납니다. 난 할디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내 동생 루밀과 오로핀은 당신들 말을 거의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리 오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엘론드의 사자들이 딤릴 스테어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리엔을 지나면서 일러 주었거든요. 호비트나 하플링이란 이름을 들어 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당신들이 아직 중간계에 남아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인상이 나쁘지는 않으시군요. 게다가 우리와 같은 요정과 함께 오셨으니 엘론드가 부탁한 대로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외부인들을 절대 우리 땅에 들여놓지 않는답니다. 여하튼 오늘밤은 여기서 묵으셔야겠습니다. 모두 몇 분이십니까?" 레골라스가 대답했다. "여덟입니다. 나와 호비트 넷, 그리고 인간이 둘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아라곤이라고 요정의 친구인 서역인이지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은 이곳 로리엔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숲의 레이디께서도 좋아하시는 분이지요.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분은?" "난쟁이가 한 명 있습니다." 레골라스가 말하자 할디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쟁이! 유감이군요. 우리는 암흑시대 이래로 난쟁이들과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 땅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산에서 왔습니다. 성실한 다인의 부족이지요. 게다가 엘론드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엘론드께서 직접 그를 일행 중 한 명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용감하고 성실했지요." 요정들은 낮은 소리로 함께 의논을 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레골라스에게 뭔가를 묻기도 했다. 드디어 할디르가 승낙을 했다. "좋습니다. 꺼림칙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만일 아라곤과 레골라스가 함께 그를 지키고 책임지겠다면 들어가도 좋습니다. 다만 로스로리엔에 들어갈 때는 눈을 가려야 합니다. 여하튼 논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당신네 일행이 계속 나무 밑에서 기다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며칠 전에 수많은 오르크들이 산맥외곽을 따라 북쪽으로 모리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발견한 후 계속 관찰해 왔지요. 숲 입구에는 지금 늑대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정말로 모리아에서 오는 길이라면 위험은 바로 우리 코앞에 있습니다. 내일아침 일찍 떠나셔야 합니다. 호비트 네 분은 여기서 우리하고 있읍시다. 모두 착한 분들 같군요. 바로 옆 나무 위에 탈란이 하나 더 있으니까 다른 분들은 거기서 쉬도록 하세요. 레골라스 당신이 책임지고 자리를 살펴 드리세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를 부르세요. 그리고 그 난쟁이를 잘 감시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레골라스는 즉시 할디르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고 곧 메리와 피핀이 위로 기어올라왔다. 그들은 헉헉거리고 있었고 다소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메리가 헐떡이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담요 넉 장을 모조리 가져오느라 죽을 뻔했어요. 스트라이더가 다른 짐은 나뭇잎 밑에 깊숙이 숨겨 놨어요." 그러자 할디르가 말했다. "공연한 수고를 하셨군요. 오늘밤은 남풍이 불지만 사실 겨울에는 나무 위에 있으면 꽤 춥지요.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음식과 물을 드시면 추위가 싹 달아납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여분의 털가죽과 외투도 있지요." 호비트들은 이 두 번째 (그리고 훨씬 더 훌륭한) 저녁식사를 매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요정들의 털외투뿐만 아니라 자기네 담요까지 뒤집어쓰고 추위에 대비한 후 잠을 청했다. 모두들 대단히 피곤했지만 샘만 쉽게 잠이 들 수있었다. 호비트들은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층계가 있는 곳에서도 이층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플렛은 침실로서도 그들이 보기엔 영 낙제점이었다. 거기엔 벽도 없고 난간도 없이 다만 한쪽 벽에 얼기설기 엮어 만든 간이벽이 있었다. 그것은 바람 방향에 따라 쉽게 다른 쪽으로 옮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피핀은 누워서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렇게 높은 데서 자다가 굴러떨어지면 어떡하지요?" 샘이 대답했다. "난 일단 잠이 들면 굴러떨어져도 깨지 않을 것 같아요. 이야기를 적게 하면 더 빨리 굴러떨어지겠지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프로도는 한참 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희미한 나뭇잎 지붕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옆에 누운 샘은 그가 눈을 감기도 전에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 두 요정이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운 채 미동도 않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다른 한 요정은 망을 보기 위해 아래쪽 가지에 내려가 있었다. 마침내 프로도는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이는 바람소리와 발 아래 님로델 폭포의 달콤한 웅얼거림을 자장가삼아 레골라스의 노래를 머리 속으로 그리며 잠이 들었다. 밤늦게 그는 잠을 깼다. 다른 호비트들은 잠을 자고 있었으나 요정들이 보이지 않았다. 눈썹 같은 초승달이 나뭇잎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바람은 고요했다. 나무 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거친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발소리가 들렸다.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는 서서히 잦아들면서 남쪽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플렛 가운데로 난 구멍으로 불쑥 머리 하나가 올라왔다. 경계 자세를 취하며 몸을 일으키던 프로도는 그것이 회색 모자를 쓴 요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호비트들을 바라보았다. 프로도가 물었다. "누굽니까?" "이르크!" 요정은 쉿 소리를 내며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말아올린 줄사다리를 플렛 바닥에 던졌다. 프로도가 말했다. "오르크? 무얼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요정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뭇잎들조차 숨을 죽이고 폭포마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로도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몸을 떨었다. 땅바닥에서 붙잡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있어도 보이지만 않을 뿐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르크들은 개처럼 후각이 예민하다고 하며 나무 타는 데는 선수들이었다. 그는 스팅을 빼들었다. 푸른 불꽃처럼 칼날이 번쩍 섬광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빛이 사라지고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갔다. 칼날의 푸른빛이 사라진 걸 보니 안심을 해도 좋겠지만 프로도는 두려움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뚫린 통로로 기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 나무 밑동 근처에서 누군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요정은 아니었다. 숲 속의 요정들은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였었다. 그는 킁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무 밑동의 껍질을 할퀴고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어둠 속을 내려다보았다. 침입자는 천천히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닫힌 이빨 사이로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프로도는 나무의 몸통 중간쯤까지 올라온 두 개의 희미한 눈동자를 발견했다. 눈동자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더니 그 검은 형체는 나무 밑동을 타고 내려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나자 즉시 할디르가 나뭇가지 사이로 올라왔다. "나무 근처에 전에 보지 못한 침입자가 있었소. 오르크는 아니었어요. 내가 나무에 손을 대자마자 달아나 버리더군요. 매우 조심하는 눈치길래 당신네 호비트들 중 한 분인가 했는데 나무 타는 솜씨가 비상한 걸 보고 아니란 걸 알았지요. 비명을 지를까 봐 화살을 쏘지도 못했어요. 싸움을 벌일 수는 없거든요. 오르크들 대부대가 지나갔습니다. 님로델 강을 건너서요. 그 맑은 물에 더러운 발로 들어서다니! 강변의 주도로를 따라갔지요. 무슨 냄새를 찾는 듯 그들은 당신이 있는 곳 근처의 땅바닥을 한참 동안 뒤지더군요. 우린 셋이서 백 명 이상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앞쪽에서 목소리를 흉내내 숲 속으로 유인했지요. 오로핀이 이 소식을 전하려고 우리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으니 아마 지금 들어간 오르크들은 단 하나도 로리엔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내일밤이 되기 전에 북쪽 경계지대에 많은 요정들이 배치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날이 밝자마자 빨리 남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동쪽 하늘에서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왔다. 햇빛은 점점 노란 말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왔고 호비트들은 마치 시원한 여름날 이른 아침해가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이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쳤다. 플렛 남쪽 측면의 틈새로 프로도는 실버로드 강변의 골짜기가 마치 황금빛 바다처럼 미풍을 받아 잔물결이 이는 것을 보았다. 일행이 할디르와 루밀의 안내로 다시 출발했을 때는 아직 새벽공기가 으스스할 때였다. "안녕, 아름다운 님로델!" 레골라스가 외쳤다. 프로도는 뒤를 돌아보다가 회색 나무줄기 사이로 흰 거품이 한 줄기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안녕!" 그는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는 그렇게 수많은 가락이 끝없이 바뀌어 가며 아름다운 음악처럼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실버로드 강 서쪽으로 나 있는 길로 되돌아가 남쪽으로 한참 동안 걸었다. 땅 위에는 오르크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할디르는 곧 숲 속으로 방향을 바꿔 나무그늘이 우거진 강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은 안 보이겠지만 강 건너에 우리 동료가 한 명 있습니다." 그가 새소리 같은 낮은 휘파람을 불자 관목숲 속에서 회색옷을 입고 모자를 뒤로 젖힌 요정이 나타났다. 그의 머리는 아침햇살에 금빛으로 바짝였다. 할디르가 익숙한 솜씨로 회색 로프를 강 건너로 던지자 건너편 요정이 받아 강둑 가까운 나무에 한 끝을 묶었다. 할디르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켈레브란트 강은 벌써 폭이 굉장히 넓어졌지요. 물살도 빠르고 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차갑습니다. 그래서 이런 북쪽 지역에서는 불가피할 경우가 아니면 물에 들어가지 않지요. 그렇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시절에는 다리를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건넙니다. 자, 따라오세요!" 그는 들고 있던 로프 끝을 나무에 단단히 묶고 가볍게 줄 위를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마치 보통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나야 그 위로 걸어갈 수 있지만 다른 분들은 힘들 텐데, 헤엄을 쳐야 합니까?" "아닙니다. 로프가 두 개 더 있지요. 하나는 어깨쯤에 또 한 줄은 허리쯤에 매놓으면 그걸 붙잡고 건널 수 있겠지요." 줄다리가 완성되자 일행은 모두 강을 건넜다. 조심조심 천천히 건너는 이도 있었고 좀더 쉽게 건너는 이도 있었다. 호비트들 중에서는 피핀이 가장 날렵했다. 그는 발디딤이 튼튼해서 한 손만으로도 재빨리 건넜다. 하지만 겁은 나는지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고 건너편 강둑만 바라보고 걸었다. 샘이 시간을 제일 오래 끌었다. 그는 양쪽 로프를 꽉 움켜쥐고 마치 산 속의 벼랑이라도 건너듯 발 아래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자꾸만 내려다보았다. 무사히 강을 건너자 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물론 그때는 새처럼 날아간다거나 거미처럼 걸어가는 방법을 배우란 뜻이 아니라 정원가꾸기를 말씀하신 거지만요. 앤디 삼촌도 이런 재주는 못 부릴 거예요." 마침내 일행이 모두 실버로드 강 동쪽에 모이자 요정들은 두 줄의 로프를 거둬들여 둥글게 말았다. 강 서쪽에 남아 있던 루밀이 다른 하나를 회수해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망을 보기 위해 님로델로 돌아갔다. 할디르가 말했다. "자, 친구들. 이제 여러분들은 로리엔의 네이스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마 삼각주라고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형이 실버로드 강과 안두인 대하 사이에 창끝처럼 뾰족하게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네이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이방인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합의한 대로 난쟁이 김리는 여기서부터 눈을 가려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두 강물이 만나는 삼각형의 꼭지점 즉 에글라딜에 가까이 갈 때까지는 자유롭게 걸어가셔도 좋습니다." 그러자 김리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제안에 동의한 적이 없소. 도둑도 아니고 죄수도 아닌데 눈을 가릴 수는 없소. 그리고 나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우리 동족들은 적의 하수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소. 또 당시네 요정들게 무슨 해를 끼친 일도 없습니다. 내가 레골라스와 다른 동료들을 배반하지 않았듯이 당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우리들의 법입니다. 난 법을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당신이 켈레브란트 강을 건너게 한 것도 많이 양보한 겁니다.” 김리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두 다리를 다부지게 벌린 채 한 손을 도끼자루에 올리고 말했다. "나는 자유민이오. 만일 안 된다면 황야 한구석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진실한 난쟁이로 인정해 주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할디르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로리엔의 영주님과 레이디를 만나 뵈어야 합니다. 당신을 체포할 것인지 아니면 용서할 것인지는 그분들이 판단하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강을 다시 건너갈 수도 없을뿐더러 건너가더라도 비밀초소가 많기 때문에 쉽게 지나갈 수도 없습니다. 아마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화살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가게 될 겁니다." 김리는 허리띠에서 도끼를 빼들었다. 할디르와 그 동료도 활을 잡았다. 레골라스가 투덜거렸다. "제기랄! 난쟁이 고집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잠깐! 여러분이 아직도 나를 통솔자로 인정한다면 모두 내 말을 들어주시오. 난쟁이 혼자 그렇게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레골라스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눈을 가립시다. 그러면 여행이 더디고 따분하겠지만 그게 최선의 방책입니다." 김리가 갑자기 껄걸 웃었다. "그 꼭 참 희한하겠군요! 개 한 마리가 눈먼 거지들을 끌고 가듯이 할디르가 우리 모두를 한 줄로 끌고 간단 말입니까? 레골라스만 나와 함께 눈을 가린다면 나도 기꺼이 눈을 가리지요." "난 요정이고 이들과는 동족이야!" 이번에는 레골라스가 화를 냈다. 아라곤이 다시 말했다. "이젠 요정들 고집도 알아 줘야 한다고 해야겠군. 자, 모두 공평하게 합시다. 할디르, 우리 눈을 모두 가려 주시오." "길을 잘못 들어 발가락이 까진다거나 낙상이라도 하면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이 헝겊으로 눈을 가리자 김리가 말했다. "책임질 일은 없을 겁니다. 이곳 지리는 환한 데다가 길도 모두 똑바로 잘 닦여 있으니까요." 할디르가 말하자 레골라스가 다시 투덜거렸다. "아, 시대의 어리석음이여! 모두가 하나의 적과 싸우는 동료들이면서도 이렇게 눈을 가리고 황금빛 나뭇잎으로 뒤덮인 즐거운 숲길을 걸어야 하다니!" 할디르가 대답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사실 암흑의 군주의 위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때는 바로 그와 맞서 싸우는 동지들간에 분열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로스로리엔에서 보기엔 이제 바깥세상은 리벤델을 빼놓고는 어느 곳에서도 신뢰와 믿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섬 속에 갇힌 형국이 되었고, 그러니 하프의 현보다는 활시위를 더 자주 만지게 되었죠. 지금까지는 양쪽의 강이 우릴 지켜주었지만 어둠이 서서히 북쪽으로 밀려오면서 이제는 그것도 안전한 방어선으로 믿기 힘들어졌습니다. 떠나자고 주장하는 형제들도 있지만 벌써 너무 늦었지요. 서쪽 산맥에는 악의 세력이 커가고 있고, 동쪽 황야는 사우론의 무리들로 가득차 있는 데다 남쪽 로한 협곡도 더 이상 안전한 통로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으니까요. 대하를 타고 내려간다 해도 해변에는 은신처도 없을뿐더러 강어귀에선 적의 감시를 피할 도리도 없지요. 아직 귀족요정들의 항구가 북서쪽 멀리 하플링들의 땅을 지나 있다고 하는데 영주와 레이디께서는 아시는지 몰라도 나는 어딘지 모릅니다."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우리를 보셨으니 이제 짐작은 하실 수 있겠네요. 우리 호비트들이 사는 샤이어 서쪽에 요정들의 항구가 있죠." "바다 가까이에 살고 있다니 호비트들은 정말 행복하신 겁니다! 우리들 중에 그 항구까지 가본 이들도 있지만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 대개는 노래 속에서만 그곳을 기억할 뿐이지요. 가시는 동안 그 항구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지요." "아니예요. 저도 본 적은 없어요. 사실 전 우리가 사는 곳을 벗어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만일 바깥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았더라면 감히 이렇게 고향을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로스로리엔을 보고 싶지 않단 말씀인가요? 사실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어두운 곳이 많지요. 하지만 아직 아름다운 곳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처에서 사랑이 슬픔과 섞이고 있지만 어쩌면 더 강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중에는 어둠이 곧 물러나고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난 다시는 아름답게 빛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기껏해 봤자 그것은 요정들에겐 휴전일 뿐입니다. 아무 탈 없이 바다를 넘어 영원히 중간계를 떠나는 휴전기간에 불과하지요. 아, 사랑하는 로스로리엔! 말론이 없는 나라에 산다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대해 너머 서역에 말론나무가 있다는 소릴 아직 듣지 못했지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할디르가 앞에 서고 다른 요정이 맨 뒤에 선 채 한 줄로 천천히 숲속길을 걸어갔다. 발 밑의 땅바닥은 평탄하고 부드러워 얼마간 걸어간 후 일행은 다치거나 넘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놓고 걸었다. 시력을 잃었기에 프로도는 청각과 다른 감각이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무와 발 밑의 풀잎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머리 위의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는 소리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다른 가락이 섞였고, 오른쪽 먼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하늘 높이 나는 새들의 가늘고 맑은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숲 속 빈터를 지날 때는 얼굴과 손에 따스한 햇빛도 느낄 수 있었다. 실버로드 강 건너편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프로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네이스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 느낌은 강해졌다. 마치 시간의 다리를 건너 제1시대의 어느 한구석, 이제는 사라져 버린 어느 세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벤델에서도 옛날을 회상시키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로리엔에서는 아직 옛날이 오늘 속에 살아 쉼쉬는 것 같았다. 거기서도 악의 소문이 들리고 슬픈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요정들은 바깥세계를 두려워하며 불신했고 숲가에는 늑대들의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로리엔에는 아무런 어둠도 없었다. 그날 그들은 시원한 저녁이 찾아와 나뭇잎 사이로 초저녁 바람이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까지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땅바닥에서 잠을 잤다. 요정들이 그들의 눈가리개를 풀어 주지 않아 나무에 올라갈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다시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걸음을 멈춘 것은 정오가 되어서였다. 프로도는 자신들이 환한 곳으로 나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요정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리아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북쪽지역으로 급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들의 전해 준 여러 가지 소식을 할디르가 일행에게 들려주었다. 밤새 쳐들어온 오르크들은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음을 당하고 일부만 살아 산맥 쪽으로 도망쳤으나 지금 추격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팔이 거의 땅에 닿고 등의 굽은 채 달리는 짐승 같은 이상한 괴물이 발견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짐승 같고 어떻게 보면 짐승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놈은 붙잡히지 않고 달아났으나 요정들은 그가 적과 한패인지 아닌지 몰라서 활을 쏘지 못했다고 했으며 남쪽 실버로드 강을 따라 사라져 버린 모양이라고 했다. 할디르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로스로리엔의 영주와 레이디의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눈을 가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난쟁이 김리까지 말입니다. 아마도 레이디께서 여러분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시는 모양입니다. 리벤델에서 새로 연락이 온 모양이지요." 그는 먼저 김리의 눈부터 풀어 주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용서하십시오! 이젠 친구처럼 지내도록 합시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듀린의 시대 이래로 로리엔의 네이스 숲을 본 난쟁이는 한 명도 없었지요!" 차례가 되어 눈앞이 다시 밝아지자 프로도는 고개를 들어 심호흡을 했다. 그들은 작은 공터에 서 있었다. 왼쪽에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제1시대의 봄날을 연상케 할 만큼 온통 푸른 잔디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마치 두 개의 왕관처럼 나무가 두 줄로 원을 그리고 심어져 있었다. 바깥줄의 나무들은 몸통이 눈처럼 희고 잎이 하나도 없었지만 앙상한 모습으로도 매우 아름다웠고 안쪽 줄에는 역시 은은한 금빛으로 치장을 한 키 큰 말론나무들이 서 있었다. 말론나무들이 빙 둘러싼 중앙에는 하늘을 찌를 듯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으며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 흰 플렛이 보였다. 나무 밑을 비롯해 푸른 언덕 도처에는 별처럼 생긴 작은 금빛 꽃들이 총총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키가 좀더 큰 흰색과 연두색의 꽃이 있었으며 마치 풀밭의 화사한 색조 사이에 스며든 안개와 같았다. 하늘은 쪽빛이었고 오후의 태양은 언덕 위에 이글거리며 나무들 아래로 기다란 초록 그림자를 드리웠다. 할디르가 말했다. "보세요! 이제 여러분은 케린 암로스에 와 계신 겁니다. 옛날에는 여기가 우리 영토의 중심부였지요. 그 행복했던 시절에는 이 암로스의 언덕 위에 그의 저택이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시들지 않는 풀밭 위에 언제나 겨울꽃이 피어 있습니다. 노란 꽃은 엘라노어, 흰 꽃은 니프레딜이라 하지요. 로스로리엔 중심부에는 해질 무렵에 들어가기로 하고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모두들 향기로운 잔디밭에 앉아 쉬는 동안에는 프로도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사라진 세계가 들여다보이는 높은 창문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 세계에는 그의 언어로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빛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추한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모든 형상은 한편으로는 그가 눈을 뜨는 순간 막 빚어진 것처럼 윤곽이 뚜렷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듯 고풍스러웠다. 그가 본 빛깔은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흰빛, 푸른빛, 초록빛, 금빛.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그가 처음 발견하여 새롭고 놀라운 이름을 붙여 준 빛깔처럼 신선하고 매혹적이었다. 겨울이지만 이곳에선 어느 누구도 봄이나 여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다. 땅 위에 자라고 있는 어느것에서도 더러움이나 질병이나 기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로리엔에는 흠이라곤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곁에서 샘이 마치 자신이 현실 속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비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샘이 말했다. "햇빛이 이렇게 곱고 맑을 수가 있을까요? 요정들은 언제나 달과 별만 벗삼아 지내는 줄 알았는데 이곳은 제가 지금까지 들어 본 어느 이야기보다 더 요정다운 데가 있어요. 마치 노래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드는 걸요." 할디르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듯 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은 지금 로스로리엔의 레이디의 권능을 느끼고 계신 겁니다. 나와 함께 케린 암로스로 올라가 보시겠어요?" 그들은 그의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 산뜻한 잔디로 뒤덮인 비탈을 올라갔다. 프로도는 분명히 숨을 쉬고 있고 얼굴에 와닿는 찬바람은 주변의 살아 있는 꽃과 나뭇잎에도 스치고 있었지만 자신이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망각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무시간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그 세계를 지나 다시 바깥세계로 나왔을 때 샤이어의 방랑자 프로도는 여전히 아름다운 로스로리엔의 엘라노어와 니프레딜 꽃들 사이로 풀밭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흰 나무들로 둘러싸인 원형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남풍이 케린 암로스로 불어와 나뭇가지 사이로 잉잉거렸다. 프로도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선 채 태초의 바닷가를 씻어나간 파도소리와 이제는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바다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할디르는 벌써 나무꼭대기의 플렛으로 오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오를 준비를 하면서 사다리 옆의 나무에 손을 대 보았다. 나무껍질의 촉감과 결을, 그리고 그 속에 든 생명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날카롭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목수도 산지기도 아니면서 나무와 나무의 촉감에서 어떤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나무 그 자체의 기쁨이었다. 드디어 꼭대기 위로 고개를 내밀자 할디르가 손을 잡아 남쪽을 바라보게 했다. "먼저 이쪽을 보세요!" 프로도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 수많은 거목들로 뒤덮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것은 녹색탑들이 솟아 있는 도시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온 사방을 뒤덮고 있는 빛과 권위는 거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는 불현 듯 그 녹색 도시로 새처럼 날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쪽으로는 로리엔의 전 지역이 대하 안두인의 푸른 물빛을 향해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강 건너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빛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 건너편 땅은 평평하고 텅빈 채 볼품이 없고 희미했으며 멀리 뒤쪽으로 어둡고 황량한 벽처럼 다시 산이 솟아 있었다. 로스로리엔을 비추는 태양은 그 먼 대지의 어둠까지 밝힐 수 있는 힘을 갖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할디르가 말했다. "저기에 머크우드 남부의 요새가 있지요. 저곳은 온통 검은 전나무숲으로 되어 있는데 나무들이 서로 엉켜 붙어서 가지가 시들고 썩고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있는 높은 바위지대 위에 돌 굴두르가 있지요. 적이 오랫동안 숨어 있던 곳입니다. 적이 일곱 배나 강한 힘을 지니고 다시 저곳에 진을 치고 있지나 않나 우리는 걱정하고 있지요. 요즘 들어 가끔은 검은 구름이 그 위를 떠돌거든요. 이 높은 지대에 올라서면 서로 싸우고 있는 두 세력이 보입니다. 지금도 머리 속으로는 계속 싸우고 있지요. 하지만 빛은 어둠의 핵심을 바로 꿰뚫어보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비밀은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그는 몸을 돌려 재빨리 내려갔고 그들도 뒤를 따랐다. 언덕 기슭에서 프로도는 아라곤이 마치 나무처럼 꼼짝도 않고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금빛의 작은 엘라노어가 들려 있었고 두 눈에는 광채가 서렸다. 프로도는 아라곤이 마치 과거 그 자리에 있던 바로 그 꽃인 양 엘라노어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진 세월의 풍상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자 아라곤은 흰 옷을 입은 헌칠하고 잘생긴 젊은 군주처럼 보였다. 그는 프로도에겐 보이지 않는 어떤 인물을 향해 요정들의 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아웬, 바니멜다, 나미리에! 그리고나서 숨을 내쉬며 다시 현실로 돌아와 프로도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지상의 요정왕국 심장부야. 자네와 내가 함께 걸어가야만 하는 저 어두운 길 너머에 빛이 없다면 나의 가슴은 언제까지나 여기 남아 있을 걸세. 가세!" 그는 프로도의 손을 꼭 잡고 케린 암로스 언덕을 떠났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제19장 갈라드리엘의 거울 해가 산맥 너머로 가라앉고 어둠이 숲 속에 밀려들 무렵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벌써 어두워진 숲 속으로 이어졌고 나무 밑으로는 밤이 찾아들었다. 요정들은 은빛 램프의 덮개를 벗겼다. 얼마 안 가 길은 곧 숲을 벗어나 공터를 향했다. 일행은 초저녁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희미한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눈앞의 널따란 공터는 큰 원을 그리며 양쪽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흐릿한 어둠 속에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으며 물가의 풀밭은 사라져 간 태양을 기억이라도 하듯 진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 초록빛 높은 성벽이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를 듯 말론나무가 빽빽한 초록의 언덕을 둘렀다. 나무의 키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마치 살아 있는 탑처럼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겹겹이 얽힌 나뭇가지와 끝없이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금빛, 은빛, 초록빛의 찬연한 불빛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할디르는 일행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카라스 갈라돈 입성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로리엔의 영주이신 켈레본과 숲의 레이디 갈라드리엘께서 계신 갈라드림 시입니다. 하지만 북쪽에는 문이 없기 때문에 이리 들어갈 수는 없고 남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시가 크기 때문에 꽤 많이 돌아야 합니다." 해자 바깥쪽에 흰 돌로 포장된 도로가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 왼쪽의 도시는 초록빛 구름처럼 갈수록 점점 높아졌고 밤이 깊어질수록 불빛이 밝아지면서 마침내 언덕 전체가 별빛에 불이 붙은 듯했다. 일행은 드디어 백색다리를 건너 도시로 들어가는 정문을 보았다. 문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 양 끝 사이에 남서쪽을 향해 나 있었고 대단히 높고 웅장한 램프가 많이 걸려있었다. 할디르가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네자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프로도는 무지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행자들이 들어서자 문은 다시 닫혔다. 그들은 성벽 양쪽 끝 사이로 난 소로를 재빨리 통과해 나무들의 도시로 들어섰다. 길에서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 위 공중에서 여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멀리 언덕 위에서 나뭇잎에 가랑비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수많은 길을 돌고, 층계를 올라 마침내 높은 지대에 이르렀다. 그들 앞에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고 그 한가운데 분수가 솟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은빛 램프가 샘물을 비췄고 솟아난 물은 은빛 양동이에 떨어져 맑은 시내를 이루며 흘러갔다. 잔디밭 남쪽에 특별히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밑동의 부드러운 표면은 마치 회색 비단처럼 은은하게 빛났으며 한참 위로 올라가서야 나뭇가지들이 구름처럼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거대한 팔을 뻗고 있었다. 그 옆에는 흰 사다리가 세워져 있었고 그 곁에 세명의 요정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원정대가 다가가자 일어섰다. 프로도는 그들이 모두 키가 크고 회색 갑옷에 길고 흰 망토를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할디르가 말했다. "저 위에 켈레본과 갈라드리엘께서 계십니다. 그분들은 여러분께서 위로 올라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요정시종들 중 하나가 작은 뿔나팔을 낭랑하게 불자 나무 위에서 세 번 응답하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할디르가 말했다. "내가 먼저 올라가지요. 그 다음에 프로도, 레골라스의 순으로 올라오시고 나머지 분들은 마음대로 올라오십시오. 이런 층계에 익숙치 않은 분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쉬면서 올라오셔도 좋겠지요."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프로도는 많은 플렛을 지나쳤다. 어떤 것은 이쪽에, 어떤 것은 저쪽에 있었고, 개중에는 몸통 둘레에 설치된 것도 있어 사다리가 그 사이로 통하기도 했다. 지상에서 굉장히 떨어진 곳까지 올라와서야 그는 배의 갑판처럼 넓은 탈란에 이르렀다. 그 위에는 집이 한 채 서 있었는데 얼마나 큰지 지상의 인간들의 저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할디르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선 방은 타원형이었는데 그 한가운데로 말론나무의 줄기가 관통하고 있었다. 꼭대기가 가까워져 줄기는 꽤 가늘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훌륭한 기둥 구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굵었다.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을 비추었으며 벽은 초록과 은빛이고 지붕은 금빛이었다. 안에는 많은 요정들이 앉아 있었다. 나무 몸통 바로 아래 살아 있는 나뭇가지로 위쪽이 장식된 의자 두 개에 켈레본과 갈라드리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요정들의 격식대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아무리 위대한 왕일지라도 손님을 맞이할 때는 일어서는 것이 그들의 법도였다. 둘 다 키가 매우 컸으며 레이디도 영주에 못지 않았다. 그녀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들은 온통 흰색 옷을 걸치고 있었고 레이디의 머리는 진한 금발이었으며 켈레본은 빛나는 은발이었다. 깊은 눈매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그들의 나이를 가늠할 만한 표시가 없었다. 그들의 눈매는 별빛 속의 창날처럼 날카로웠고 깊은 추억을 담고 있는 우물처럼 심오했다. 할디르가 프로도를 그들 앞에 인도하자 영주는 그들의 언어로 환영인사를 했다. 갈라드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켈레본이 말했다. "내 의자 곁에 앉게, 샤이어의 프로도! 모두 들어오면 함께 이야기하지." 프로도의 동료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정중히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오,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삼십팔 년이 지났지만 당신께는 어려운 세월이었겠지요. 하지만 어떻게 끝장이 나든지 이제 종말이 다가오고 있소. 잠시나마 여기 당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시오." "어서 오게, 스란두일의 아들! 우린 요정들이 북쪽에서 여기까지 오는 일도 이젠 참 드물어졌지." "글로인의 아들 김리, 어서 오게. 카라스 갈라돈에서 듀린의 종족 중 한 친구를 만난 일은 있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 온 우리의 금기를 어긴 걸세. 세상은 이제 어두워지고 있지만 더 좋은 날이 멀지 않았고 우리 여러 종족간에 새로운 우정이 맺어질 수 있음을 이번 기회를 통해 보여 주도록 하지." 김리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손님들이 모두 그의 의자 앞에 자리를 잡자 켈레본은 다시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여덟 분이신가? 연락을 받기로는 아홉 분이라 했는데 계획이 변경된 모양이지? 하긴 엘론드와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지난 한 해 동안은 너무 짙은 어둠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아닙니다. 계획이 변경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갈라드리엘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음악과도 같았고 여인의 목소리치고는 깊이가 있었다. "회색의 갠달프도 이들과 함께 출발했었지만 우리 땅에 들어오지 않은 겁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해 보세요. 그에게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로스로리엔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벌써 멀리서부터 보이지 않더군요. 희미한 안개가 그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의 생각과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아아! 회색의 갠달프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셨습니다. 모리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신 겁니다." 이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요정들이 슬픔과 놀람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켈레본이 말했다. "불길한 소식이군요.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슬픈 소식도 많았지만 이처럼 슬픈 소식은 처음이오." 그는 할디르를 향해 요정들의 언어로 물었다. "왜 진작 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나?" 그러자 레골라스가 대신 대답했다. "우린 할디르에게 우리의 임무와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피곤하고 상황이 급박해서 그랬고 나중에는 로리엔의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오느라 그 슬픔을 잠시 잊었던 겁니다." 프로도도 말했다. "우리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손실도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도자였고 또 우리를 모리아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분은 우리를 구하고 대신 떨어지셨지요." "자세히 얘기해 보게." 켈레본이 말했다. 아라곤이 카라드라스 산에서 있었던 일과 그 후 며칠간 벌어졌던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발린과 그의 책, 마자르불의 방에서의 싸움, 그리고 불꽃과 좁은 다리, 갑작스런 습격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먼 옛날의 악의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둠이면서 동시에 불길이었고, 매우 강력하고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레골라스도 덧붙였다. "모르고스의 발록이었습니다. 모든 요정들의 재앙 중에서 지금 암흑의 탑에 도사리고 있는 적을 제외하면 가장 치명적인 재앙 말입니다." 김리도 그 순간의 두려움이 다시 떠오르는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 다리 위에서 제가 본 것은 바로 우리들의 가장 무서운 악몽 속에 나타나는 적, 곧 듀린의 재앙이었습니다." 켈레본이 탄식을 했다. "저런! 우리는 카라드라스 산 속에 공포가 잠자고 있지나 않나 해서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고 있었지. 하지만 모리아에서 난쟁이들이 또다시 그 재앙의 잠을 깨워 놓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당신들이 이렇게 북쪽 경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을 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갠달프가 자신의 지혜를 망각하고 쓸데없이 모리아의 함정 속으로 빠져든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갈라드리엘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갠달프의 일생에는 쓸데없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에 전할 수 없을 뿐이지요. 안내자가 어찌되었든 뒤따른 이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난쟁이를 환영한 것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로스로리엔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면 어느 누가, 심지어 지혜로운 당신 켈레본까지도 고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갈 기회가 생긴다면, 비록 그 속에 용이 우글거린다고 해도 다시 들어가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켈레드 자람 호수의 물은 검고 키빌 날라 샘은 찹니다. 그리고 용맹한 군왕들이 바위산 아래 쓰러지기 전의 제1시대, 그 열주가 늘어선 카잣 둠의 방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분노와 비탄의 표정이 묘하게 섞인 김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옛 이름들을 난쟁이들의 언어로 들은 김리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적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이해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이감이 그의 얼굴에 번지더니 그는 화답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색한 몸짓으로 일어나 난쟁이 식으로 절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로레엔의 살아 있는 땅은 더 아름다우며, 땅 속에 숨겨진 그 어떤 보석의 아름다움도 레이디 갈라드리엘께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켈레본이 다시 말했다. "김리, 내가 자네의 심경을 잘 몰라 그런 심한 소리를 했던 거니 이해하게. 나도 너무 안타까워서 한 소리였으니까. 이젠 각자 원하는 대로 당신들을 도와 주겠소. 특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호비트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갈라드리엘이 프로도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임무는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여하튼 갠달프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여러분이 이 땅에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은 아마 헛걸음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로스로리엔의 영주께서는 중간계의 요정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이시며 제왕의 권력보다 더 나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니까요. 이분은 세상 첫날부터 서부에서 살아 오셨으며 나 또한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이분과 함께 살아 왔습니다. 나는 나르고스론드와 곤돌린이 함락되기 전에 산맥을 넘어왔고 그 후로 오랜 세월 동안 함께 길고 긴 패배와 맞서 싸워왔습니다. 신성회의를 처음으로 소집한 것도 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계획이 어긋나지 않았더라면 회색의 갠달프가 그 회의를 이끌 수 있었고 사태가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하라는 충고가 아닙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길 때나, 중요한 선택을 할 경우에도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미래의 일까지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길은 칼날 위의 길입니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만인에겐 파멸만이 남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모두 진실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희망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말과 함께 그녀는 그들 모두를 한눈에 둘러보고 다시 말없이 하나씩 뚫어지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레골라스와 아라곤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녀의 눈길을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샘은 금방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갈라드리엘은 그들을 눈길에서 풀어 주고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편하게 하시고 오늘밤은 편히 쉬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장시간 날카로운 심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들은 갑자기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켈레본이 말했다. "이제 가보시오! 오랜 고생과 슬픔으로 몹시 지쳤소들. 당신들의 임무가 비록 직접 우리와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모두 완전히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 이 도시에서 편히 쉬도록 하오. 당분간은 앞길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고." 그날 밤 일행은 모두 땅 위에 내려와서 잠을 잤다. 호비트들은 높은 데서 잠자지 않게 된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요정들은 샘터 근처의 나무 사이에 큰 천막을 설치하고 부드러운 침대를 펴주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요정 특유의 음성으로 저녁인사를 하고 그들을 떠나갔다. 한참 동안 그들은 전날 밤 나무꼭대기에서 있었던 일과, 그날 하루 동안의 여행, 그리고 켈레본과 갈라드리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직 그 이전의 일들까지 되돌아볼 용기는 없기 때문이었다. 피핀이 말했다. "왜 얼굴을 붉혔어요, 샘?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이던데요. 아마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죄나 지은 줄 알았을 거예요. 혹시 내 담요라도 한 장 훔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거 아녜요?" 샘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정 알고 싶다면 말해 드리지. 마치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서 있는데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게 싫더라니까요. 그리고 샤이어에 조그맣고도 멋진, 게다가 정원까지 딸린 굴집을 지어 주고 거기까지 날아가게 해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메리가 끼어들었다. "그거 참 희한하네요. 나하고 똑같은 느낌이 들었군요.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경험을 한 모양이었다. 즉 공포로 가득한 앞길의 어둠과 자신이 가장 원하는 어떤 소망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이상한 압박감이었다. 자기 소망은 마음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 임무와 사우론과의 전쟁을 남에게 넘겨 버린 채 그 길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김리도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보로미르도 토로했다. "나도 참 이상하더군. 마치 무슨 시험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 의도대로 우리들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무슨 대단한 선물이나 줄 듯이 우리를 유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나는 그걸 거부했지. 미나스 티리스인들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그는 갈라드리엘이 무엇을 주겠다고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보로미르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당신을 오랫동안 보았는데, 반지의 사자!" "압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겠어요." "좋소. 하지만 조심하시오! 나는 그 요정의 레이디와 그의 계획을 그리 크게 신뢰할 수가 없소." 보로미르가 말하자 아라곤이 엄숙하게 나섰다. "갈라드리엘을 비난하지 마오!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라. 외부인이 사악함을 불러들이지만 않는다면 이 땅에는, 그리고 그녀에게는 악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소. 조심하시오! 어쨌든 난 리벤델을 떠난 이후 오늘 처음으로 마음놓고 잠이나 좀 자야겠어. 그리고 깊이 잠들 수만 있다면 슬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지. 그 동안 심신이 너무 지쳐 버렸어." 그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곧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른 일행도 모두 잠이 들었고 이상한 소리나 악몽이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햇빛이 천막 앞 잔디밭에 가득했고 샘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으로는 자신들이 로스로리엔에 며칠간 머문 것 같았다. 머무는 동안 가끔 가랑비가 내려 만물을 싱싱하고 산뜻하게 씻어 준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화창한 날씨였다. 마치 이른 봄날처럼 짜릿하고도 훈훈한 미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그들은 그윽하고 사려깊은 겨울의 고요를 주위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먹고 마시며 쉬다가 숲 속을 산책하는 일밖에 하는 일이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켈레본과 갈라드리엘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고 요정들은 서부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거의 없었다. 할디르는 그들과 작별하고 북쪽 변경지대로 다시 돌아갔다. 프로도 일행이 모리아의 소식을 전해 준 뒤 그쪽은 엄중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레골라스는 첫날 밤을 그들과 함께 지낸 뒤 가끔 식사시간에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주로 이곳의 요정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숲 속을 산책할 때 종종 김리를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모두들 그의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서야 그들은 함께 앉아서 혹은 거닐면서 갠달프에 대한 추억을 회상해 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이 보았던 혹은 알고 있던 갠달프와의 추억이 모두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들은 부상이 완쾌되고 피로가 회복되면서 더욱더 갠달프를 잃은 슬픔을 통절하게 느꼈다. 일행은 종종 숲 속에서 요정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아름답고 비통한 가락 속에 갠달프의 이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들 또한 그를 잃은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스랜더, 미스랜더, 오 회색의 순례자! 요정들은 갠달프를 즐겨 그렇게 불렀었다. 레골라스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도 자기는 솜씨가 없다면서 그 노래를 번역해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슬픔이 너무 커 그것을 노래로 옮기기 전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하나마 그의 슬픔을 노래로 처음 부른 이는 프로도였다. 사실 그는 도대체 노래를 짓거나 부를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리벤델에서도 그는 비록 머리 속에 많은 노래들의 떠올랐지만 언제나 듣기만 하고 자신이 노래를 부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로리엔의 샘물가에 앉아 요정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생각도 서서히 아름다운 노랫가락으로 모양을 갖춰 갔다. 하지만 샘에서 노래를 들려주려고 시작할 때마다 마치 한 줌의 부스러진 낙엽처럼 노래는 산산이 흩어지고 작은 구절들만 희미하게 남곤 했다. 샤이어의 저녁이 회색으로 물들 때 언덕 위로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첫새벽 동트기 전 그는 떠나갔다 말 한마디 없이 먼 여행길로. 윌더랜드에서 서해의 바닷가까지 북녘의 황야에서 남녘의 산골짝까지 용의 굴과 비밀의 문을 지나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다녔다. 난쟁이와 호비트, 요정과 인간들, 유한, 무한의 생명을 지닌 모든 생물들, 가지 위의 새, 굴 속의 짐승들과도 그는 그들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리한 칼날과, 병을 고치는 손길, 둘러멘 짐 밑으로 구부정한 어깨 나팔소리 같은 음성, 타오르는 횃불 여행에 지친 노상의 순례자. 그가 앉은 자리는 지혜의 보좌 불 같은 분노에 웃음도 빨랐다. 가시박힌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찌그러진 모자를 쓴 노인. 홀로 다리 위에 지키고 선 그를 불꽃과 어둠이 함께 덮쳤다. 부러진 지팡이는 돌 위에 떨어지고 그의 지혜는 카잣 둠 속으로 사라졌다. "와, 빌보씨 뺨치겠는데요!" 샘이 감탄했다. "아니야, 그럴 리는 없지. 하지만 이건 최선을 다한 거야." "혹시 여력이 있다면 불꽃놀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는 게 어떻겠어요? 이렇게 말이에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죽, 녹색과 청색의 별들이 터지고 천둥 뒤의 황금빛 소나기가 꽃비 되어 쏟아진다. "물론 이 정도로는 안 되겠죠?" "글세 그 문제는 샘 자네에게 맡기기로 하지. 아니면 빌보 아저씨가 하시든지. 여하튼 지금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가 않아. 갠달프의 소식을 어떻게 그분께 전해 드려야 할지 걱정이야." 어느 날 저녁 프로도와 샘은 석양을 바라보며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로스로리엔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웠다는 예감이 불현듯 프로도의 뇌리를 스쳤다. 그가 물었다. "샘, 이젠 요정들을 어떻게 생각하지? 아주 오래 전에도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동안 보고 들은 게 많을 테니까 이야기해보지 그래." "정말 많이 봤지요! 그런데 요정들도 참 다양하군요. 모두 요정은 틀림없는데 똑같지는 않아요. 여기 요정들은 집도 없이 방황하는 요정들과는 달라서 오히려 우리 호비트들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가 샤이어에 살기 전부터 여기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지요. 그들이 땅을 만든 건지 땅이 그들을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또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도 없는 것 같아요. 만일 어딘가에 마력이 있다면 아마도 제 손이 닿지 않는 땅 속 깊은 데서부터 명령을 내리고 있을거예요." "어디서든지 그것을 볼 수도 잇고 느낄 수도 있어." "글쎄요. 아무도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은 걸요. 불쌍한 갠달프가 보여 주던 불꽃놀이도 없고 게다가 영주와 레이디도 그 동안 나타나질 않았거든요. 갈라드리엘이 뭔가 근사한 걸 보여 줬으면 좋겠어요. 요정들의 마술 같은 걸 말이에요!" "난 그런 생각은 없어. 지금이 좋은걸. 내가 보고 싶은 건 갠달프의 불꽃놀이가 아니라 그의 부리부리한 눈썹과 불꽃 같은 성질, 그리고 그 음성이야." "맞아요. 무슨 흠을 잡으려던 건 아니에요. 다만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마술을 한 번만이라도 정말 보고 싶단 말씀이지요. 사실 어떤 옛날이야기에도 여기보다 더 멋진 데는 안 나와요. 뭐라고 할까, 마치 휴일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니까요.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할 순간이 다가온 듯한 예감이 들어요. 그렇다면 또 이겨내야지요. 우리 아버지 말씀대로 시작이 반이니까요. 그리고 마술을 부리든 안 부리든 여기 요정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요. 아마 이곳을 떠날 때 갠달프가 가장 아쉽게 느껴질 거예요." "자네 말 그대로 될까 봐 걱정이군. 하지만 난 우리가 떠나기 전에 꼭 다시 한번 갈라드리엘을 만나 뵙고 싶어." 그가 말을 끝내는 순간 마치 그드르이 이야기에 응답이라도 하듯 갈라드리엘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흰 옷을 입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무 밑에서 성큼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짓을 했다. 옆으로 방향을 바꿔 그녀는 카라스 갈라돈 언덕의 남쪽 비탈로 그들을 인도했다. 초록의 높은 산둥성이를 지나 그들은 사방이 막힌 정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어 하늘이 훤히 드러나 보였고 벌써 저녁별이 떠올라 서쪽 숲 위로 흰 불꽃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기다란 층계를 따라 내려간 레이디는 녹색의 깊은 분지 속으로 들어갔고 언덕 위의 샘터에서 시작된 은빛 냇물이 그 속으로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 맨 밑바닥에 나뭇가지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낮은 단 위에 넓고 얕은 은빛 물동이가 있었으며 그 곁에는 역시 은빛 물병이 놓여 있었다. 갈라드리엘은 흐르는 냇물에서 물을 떠서 물동이에 찰랑찰랑하게 담았다. 그리고는 후 하고 물을 불어 표면이 다시 잔잔해지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갈라드리엘의 거울입니다. 두 분을 여기 모시고 온 것은 혹시 원한다면 이 거울 속을 보여 드리려는 뜻에서지요." 바람은 잔잔했으며 골짜기에는 어둠이 찾아들고 있어 그들 곁에선 요정 레이디의 후리후리한 키가 흐릿하게 보였다. 프로도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얼 찾으란 말씀이시지요? 그 속에 뭔가 있나요?" "여러 가지를 거울에게 명령할 수 있지요.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울은 또한 청하지 않은 것까지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보기를 원했던 것보다 더 신기하고 유익한 것들이 가끔 있지요. 모든 것을 거울에 맡겨 버렸을 때 그 속에 무엇이 나타날지는 나도 알 수 없어요. 거울 속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까지도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리 지혜로운 이라도 항상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보시겠습니까?" 프로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샘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런 것을 여러분은 마술이라 하겠지만 그 말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적의 술수에 대해서도 마술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갈라드리엘의 마술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당신은 요정의 마술을 보고 싶다고 했지요." 샘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한번 보도록 하지요." 샘은 프로도에게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고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집을 떠난 지 하도 오래돼서 궁금하거든요. 하지만 기껏해야 별이나 보이든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다른 것들이 나타나겠지요." 레이디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일단 한번 보세요. 물은 건드리지 말고!" 샘은 단 아래쪽으로 올라가 물동이 위로 고개를 숙였다. 물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어두운 그대로였다. "제 짐작대로 별밖에 없는데요." 샘이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 샘은 숨을 죽였다. 별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둠의 베일이 걷히듯 거울이 희끄무레하게 변하면서 점점 밝아졌다. 거울 속에선 햇빛이 반짝이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좀더 자세히 보아야겠다고 작정을 하기도 전에 빛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캄캄하고 높은 절벽 아래 창백한 얼굴의 프로도가 깊은 잠에 빠진 채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다음엔 그 자신이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걷고 있었고 끝없이 돌아가는 층계를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뭔가를 급히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꿈속처럼 환상은 사라지고 나무들이 다시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무가 많지 않아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샘은 화가 나서 외쳤다. "저런! 테드 샌디맨이 나무를 함부로 베고 있어요! 베면 안 되는 나무들인데. 방앗간 지나 바이워터로 가는 도로로 이어진 가로숫길이에요. 가서 한 방 먹였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러나 곧 낡은 방앗간이 사라지고 커다란 붉은 벽돌건물이 그 자리에 세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거울 표면에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떠도는 것 같았다. 샘이 다시 말했다. "샤이어에 뭔가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메리를 돌려보내야겠다시던 엘론드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하겠어요." 그러다 샘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집에 가야겠어요. 백쇼트가 온통 쑥밭이 되었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 손수레에 잡동사니들을 싣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요. 집에 가야겠어요!" 그러자 레이디가 말했다. "혼자서는 갈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기 전에는 주인을 버리고 혼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샤이어에서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제 알았겠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거울은 여러 가지 사건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에요. 미래의 일도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그 환상을 본 사람이 일부러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길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울은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위험한 것이지요." 샘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보지 말걸 그랬어요. 이제는 마술을 더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탁한 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먼 길을 돌아서라도 프로도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겠어요. 만일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요. 만일 내가 본 것이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꼭 혼이 나게 될 거예요." "프로도, 이제 보겠어요? 당신은 요정의 마술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만족한다고 했지요." "제게 권하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게 이래라저래라 충고할 수가 없어요.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뭔가를 보게 될테지만 그것은 유익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좋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프로도, 나는 당신이 이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리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보겠습니다." 프로도는 받침대 위로 올라가 깜깜한 물 위로 고개를 숙였다. 거울이 곧 맑아지면서 황혼의 대지가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검은 산이 어렴풋이 보였고 구불구불한 회색의 긴도로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미하고 작게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커지고 분명해졌다. 갑자기 프로도는 그것이 갠달프라는 생각이 들어 하마터면 마법사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러나 그는 회색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흰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도 흰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가 없었으며 곧 길모퉁이를 돌아 거울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프로도의 가슴 속에 의문이 생겼다. 이것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외로이 여행을 하던 갠달프의 환영인가 아니면 사루만의 모습인가? 거울 속의 광경은 다시 바뀌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아주 작고 선명한 모습으로 빌보가 불안하게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는 모습을 보았다. 책상 위에는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환상이 사라졌다가 프로도는 다시 자신이 그 일부가 되어 나타나는 거대한 역사의 단편들이 마치 환둥기처럼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안개가 걷히고 프로도는 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바다였다. 어둠이 깔린 바다 위에 거센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태양은 구름 사이로 가라앉고 있었고 석양을 배경으로 거대한 배 한 척이 찢겨진 돛을 펄럭이며 검은 형체로 서쪽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강이 번화한 도시 가운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곱 개의 첨탑이 솟은 흰 성채가 나타났고 다시 검은 돛을 단 배가 보였다. 하지만 이젠 다시 문장을 새겨 넣은 깃발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화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태양은 다시 물감처럼 붉은빛을 뿜으며 희미한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역시 그 안개 속으로 불빛이 가물거리는 작은 배가 빠져들었고 프로도는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설 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빛의 세계에 구멍이라도 난 듯 거울 속이 깜깜해졌고 프로도는 그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칠흑 같은 심연 속에서 천천히 작은 눈 하나가 나타나 점점 커지면서 결국 거울을 가득 채웠다. 그 눈동자는 너무 무시무시해서 프로도는 눈길을 돌리거나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이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 눈가에는 불꽃이 이글거렸고 고양이 눈처럼 노란 눈동자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의 검은 부분이 마치 창문처럼 열리며 어둠이 드러났다. 눈동자는 서서히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고 프로도는 그것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물론 자신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그것이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목에 걸린 반지가 바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면서 프로도는 고개를 숙였다. 거울이 뜨거워지면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그는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물을 건드리지 말아요!" 갈라드리엘이 나직하게 외쳤다. 환상이 사라지고 프로도는 은빛 물동이 속에 차가운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맨 나중에 본 것이 뭔지 압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이지요. 두려워 마시오! 하지만 숲 속에서 노래만 부른다고 해서 이 로스로리엔이 저절로 적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은 아니에요. 어쩌면 우리 요정드르이 화살로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프로도,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나는 암흑의 군주의 존재를 느끼고 있고, 그의 마음을, 특히 요정들과 관련된 그의 생각을 읽고 있습니다. 그 역시 나와 내 생각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요. 그러나 아직 문은 닫혀 있습니다!" 그녀는 백옥 같은 두 팔을 들어 동쪽을 향해 거부와 부정의 몸짓으로 두 손을 폈다. 요정들에게서 가장 사랑을 받는 저녁별 이렌딜이 높은 하늘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대단히 밝아서 그녀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희미하게 비칠 정도였다. 별빛이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은빛으로 덮인 반지가 황금처럼 반짝였다. 저녁별이 그녀의 손 위에 쉬러 온 듯 반지의 흰 보석이 빛을 발했다. 프로도는 신기한 표정으로 반지를 응시했다.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감지라도 한 듯 그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은 원래 밝힐 수 없게 되어 있지요. 엘론드도 아마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 눈을 본 반지의 사자에게까지 감출 수는 없게 되었군요. 로리엔, 갈라드리엘의 손가락에 끼인 이 반지는 바로 세 개의 반지 중 하납니다. 이것은 칠석의 반지 네냐이며 내가 그 주인입니다. 적들도 조금은 눈치를 채고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확신은 못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출현이 우리들에게 종말의 서곡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어요? 만일 당신이 실패한다면 우리도 적에게 노출되게 됩니다. 반대로 당신이 성공한다면 또 그땐 우리의 힘도 약화돼 로스로리엔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시간의 물결이 그 위로 휩쓸고 지나가겠지요. 우리는 서쪽으로 떠나든지 아니면 이름없는 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모든 것을 잊고 또 모든 이들에게서 잊혀질 것입니다." 프로도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운명을 거슬를 수는 없지요. 로스로리엔에 대한 요정들의 사랑은 바다보다 더 깊어서 그것의 상실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우론에 복종하느니보다는 기꺼이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겁니다. 이젠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로스로리엔의 운명에 대해서 당신이 무슨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임무만 충실히 수행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반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또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공상을 해보는 것이지요." "당신은 현명하고, 용감하고 아름답습니다. 레이디 갈라드리엘!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절대반지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너무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자 갈라드리엘이 갑자기 맑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말했다. "갈라드리엘이 현명하긴 하지만 오늘 대단한 적수를 만났군요.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의 마음을 시험해 본 것에 대해 이제 점잖게 복수하시는군요.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당신이 지금 내놓으려는 것을 나도 마음속으로 대단히 탐내 왔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만약 절대반지가 내 손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해왔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제 내 눈앞에 나타났군요! 사우론 자신이 일어서든 쓰러지든 간에 그 먼 옛날에 만들어진 악의 반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동을 하는 모양입니다. 만일 내가 협박을 하거나 아니면 강제로 당신에게서 반지를 뺏는다면 사우론의 반지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제 드디어 반지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반지를 내놓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암흑의 군주 대신에 여왕을 세우는 셈이 됩니다. 나는 암흑의 여왕이 되지는 않겠지만 아침과 같이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밤과 같이 무서운 여왕이 될 겁니다! 바다와 태양과 산 위의 눈처럼 아름다운 여왕 말입니다! 폭풍과 번개처럼 무시무시한 여왕 말입니다! 나는 온 땅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이며 만인은 나를 사랑하면서도 또한 두려움에 떨겠지요."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자 반지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며 그녀만을 비추고 주위의 모든 것을 어둠으로 변회시켰다. 프로도 앞에 선 그녀는 이제 거대한 모습으로 놀랄 만큼 아름답고 외경스럽게 비쳐졌다. 다시 그녀가 손을 내리자 빛이 사라졌고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 순간 놀랍게도 그녀는 다시 흰 옷을 입은 가날픈 요정 여인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시험을 이겼습니다. 나는 서역으로 떠날 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갈라드리엘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마침내 레이디가 먼저 말했다. "돌아갑시다! 이제 우리의 길을 선택했으니 당신들은 아침이 되면 떠나셔야 합니다. 운명의 파도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리벤델에서 갠달프에게 몇 번이나 묻고 싶었던 문제였지요. 저는 절대반지를 끼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반지들을 볼 수 있고 또 주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반지를 손에 넣은 이후 오로지 세 번만 그 반지를 꺼보았을 뿐입니다. 욕심을 내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을 파멸시킬 겁니다. 반지는 그 소유자의 능력에 따라 힘을 부여한다고 갠달프가 말해 줬지요? 그 힘을 이용하기 전에 당신은 좀더 강해질 필요가 있고 또 당신의 의지를 많은 사람들의 뜻에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반지의 사자로서, 또 그 반지를 끼고 숨겨진 비밀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벌써 시력이 대단히 날카로워졌습니다. 당신은 흔히 지혜롭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예리하게 내 생각을 꿰뚫어보았지요. 당신은 또한 일곱반지와 아홉 반지를 손에 넣고 있는 그의 눈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 손의 반지도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혹시 나의 반지를 보았나요?" 그녀가 샘을 향해 묻자 샘이 대답했다. "못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레이디의 손가락에서 별 하나를 보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외람된 줄 알면서도 한 말씀 드리자면 프로도씨께서 옳다는 것이지요. 반지는 레이디께서 가지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만 모든 일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녀석들이 저의 아버지를 쫓아내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그 더러운 짓을 하는 놈들을 혼내야 합니다." "좋도록 하시지요.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해요. 아직 멀었어요!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합시다. 갑시다!” 제20장 로리엔이여 안녕 그날 밤 일행은 켈레본의 방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는 레이디와 함께 반가이 그들을 맞이하며 이제 떠날 때임을 알려 주었다. "이제 이 여행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들은 각오를 새로이 하고 이 땅을 떠날 시간이 되었소.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은 이는 여기 남아 있어도 좋겠지만 여기도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오. 로스로리엔의 종말이 임박했으니 말이오. 이곳에 남아 있는 이는 그 순간의 도래를 목격하게 되겠지만 세상의 길이 새로이 열리게 될지 아니면 로리엔이 쓰러져 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갈라드리엘이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두 여행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저는 고향이 남쪽에 있기에 가는 겁니다." "그렇군. 하지만 일행이 모두 당신과 함께 미나스 티리스로 가는 건가?" 켈레본이 물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길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로리엔을 지나서는 갠달프가 어느 쪽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그도 무슨 뚜렷한 계획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켈레본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서부터는 결코 안두인 대하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소. 당신들도 알다시피 로리엔에서부터 곤도르까지는 짐을 가진 나그네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 없소. 오스길리아스의 다리는 파괴되었고 모든 선착장도 이제는 적에게 점령되었잖소? 어느 쪽으로 갈 겁니까? 미나스 티리스로 가려면 서쪽 강변을 따라가야 하고 당신들의 목적지로 가는 데는 좀더 어두운 동쪽길이 빠르오. 어느 쪽을 택할 겁니까?" "저는 물론 미나스 티리스로 가는 서쪽 강변을 지지합니다만 결정은 대장이 내려야겠지요." 보로미르가 말했다. 다른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라곤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켈레본이 말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셨군요.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당신들 중에는 배를 다룰 줄 아는 이가 몇몇 있소. 레골라스는 숲의 격류에 익숙할 것이고 곤도르의 보로미르나 방랑자 아라곤께서도 배를 좀 아시겠지?" 그러자 메리가 소리쳤다. "호비트도 하나 있습니다! 호비트라고 모두 배를 야생마처럼 겁내는 건 아니에요. 우리 집안은 브랜디와인 강가에 살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러면 내가 당신들께 배를 내주겠소. 가능하면 작고 가벼운 배로 말이오. 강물을 따라 내려간다고 해도 배를 몰고 가야 할 곳이 몇 군데 있거든. 산 게비르에 가면 급류가 있고 넨 히도엘을 지나서는 거대한 라우로스 폭포를 만나게 되오. 그 밖에도 위험한 곳이 더 있소. 배를 이용하면 당분간은 힘이 덜 들 거요. 하지만 배가 당신들께 마지막 해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결국 동쪽이나 서쪽을 향해서 강을 떠나야 할 테니까 말이오." 아라곤은 켈레본에게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방향을 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배를 선사하겠다는 제안이 너무도 고마웠다. 다른 일행 역시 표정이 밝아 보였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쳐오든 간에 등짐을 지고 개미처럼 세월없이 걸어가느니보다는 안두인 대하의 거대한 물결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더 좋을 듯했다. 오직 샘만이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여전히 배를 야생마보다 더 무섭게 여겼고 지금까지 겪어 온 수많은 죽을 고비도 배에 대한 공포심을 덜어 주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켈레본이 말했다. "내일 정오까지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포구에서 당신들을 기다릴 겁니다. 내일아침 당신들의 여행준비를 도와주도록 요정 몇을 보낼테니, 자, 이제 그만 내려가서 좋은 꿈들 꾸시오." 갈라드리엘도 인사를 했다. "편히 주무세요, 친구들! 적어도 오늘밤만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편안히 주무시도록 하세요. 여러분 각자가 밟아야 할 길은 이미 발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니까요.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안녕히 주무세요!" 일행은 인사를 하고 자신들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오늘밤이 로스로리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에 레골라스도 함께였다. 그리고 갈라드리엘의 언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함께 의논을 해야만 했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반지를 애초의 계획대로 처리하려면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에 대해 그들은 오랫동안 논의를 했다. 그러나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일단 미나스 티리스로 가서 잠시라도 적의 공포를 피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대장을 따라 강을 건너 모르도르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라곤은 여전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만일 갠달프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면 아라곤의 계획은 자신의 칼을 가지고 보로미르와 함께 곤도르를 도우러 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꿈의 계시가 바로 자신의 소환장이며 엘렌딜의 후계자가 앞장서 사우론과 정면승부를 벌일 시간이 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리아에서부터 갠달프의 짐은 그의 어깨로 옮겨졌고 만일 프로도가 보로미르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로서도 반지의 사자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나 일행 중 어느 누가 프로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그와 함께 장님처럼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만일의 경우 나는 혼자라도 미나스 티리스로 가겠습니다. 그건 내 의무입니다." 보로미르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마치 프로도의 생각을 꼭 알아내고 말겠다는 듯이 그를 응시했다. 마침내 그는 프로도를 향해 중얼거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반지만 파괴하러 간다면 전쟁이나 무기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그리고 미나스 티리스인들도 아무 도움이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암흑의 군주의 무력을 분쇄할 생각이라면 혼자서 그의 영토에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그리고 내던져 버리러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오." 그는 갑자기 자기 생각을 너무 크게 말해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그쳤다. "내 말은 목숨을 내던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이 문제는 튼튼한 요새를 지키느냐 아니면 죽음의 손아귀 속으로 겁없이 걸어 들어가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는 거요." 프로도는 보로미르의 눈에서 뭔가 새롭고 이상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보로미르의 생각이 그의 뒷말과는 다른 것이 분명했다. 내던질 필요가 없다고? 무엇을? 절대반지를? 그는 엘론드의 회의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엘론드의 계획에 찬성했었다. 프로도는 아라곤을 보았으나 그는 혼자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보로미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토론은 그렇게 끝났다. 메리와 피핀은 벌써 잠이 들었고 샘도 졸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이 가벼운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그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요정들의 다가와 식량과 의복 등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잔뜩 내려놓았다. 식량은 대부분 아주 얇은 케이크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겉이 엷은 갈색이 돌도록 구워졌고 속에서 크림 빛깔이 내비쳤다. 김리가 케이크 하나를 집어 수상쩍은 눈으로 살펴보았다. '크램.' 바삭바삭한 한쪽 귀퉁이를 깨물어 보면서 그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면서 그는 나머지를 한꺼번에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요정들이 웃으며 외쳤다. "그만, 그만! 당신은 벌써 하루치를 넘게 먹었어요." "난 이것이 데일인들이 황야를 여행할 때 준비하던 크램의 일종인 줄 알았어요." 김리가 말하자 요정들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렘바스 또는 여행식이라 부르지요. 사람들이 만든 어떤 음식보다 열량도 풍부하고 또 어느 모로보나 크램보다 맛도 좋지요." "정말 그렇군요. 사실 베오른인들의 꿀과자보다도 맛이 더 좋군요. 이건 대단한 찬사랍니다. 왜냐하면 베오른인들은 내가 알기론 빵을 굽는 덴 최고의 기술자들이거든요. 하지만 그들도 요즘 와서는 나그네들에게 과자를 팔지 않는데, 당신들은 정말 친절한 분들이십니다!" "여하간 식량을 절약하셔야 합니다. 한 번에 조금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드셔야 합니다. 이것은 최후의 비상식량으로 쓰시도록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드린 대로 풀잎에 싸서 보관만 하시면 이 과자는 아주 오랫동안 향기를 유지하지요. 미나스 티리스에서 오신 키 큰 손님이라도 이것 한 조각이면 하루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습니다." 요정들은 가져온 포장을 풀어 각자에게 옷을 주었다. 그들 각자의 신장에 맞도록 지은 모자 달린 망토였다. 그것은 로스로리엔 요정들의 손수 짠 가볍고 따스한 비단과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옷으로 색깔은 한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숲 속에 찾아든 아침햇살에 비추어 보면 회색 같아 보였지만 움직이거나 다른 빛이 비치면 그늘 속의 나뭇잎처럼 녹색이 되었고, 밤이 되면 잡초가 무성한 들판처럼 갈색으로 변했고, 별빛 아래선 강물처럼 어두운 은빛을 띠기도 했다. 망토는 은줄이 들어간 푸른 나뭇잎처럼 생긴 브로치로 목둘레를 고정시키게 되어 있었다. 피핀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옷을 보며 물었다. "이것이 마법의 망토인가요?" "그 말씀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만들어진 옷이니 아름다운 망토이며 또 훌륭한 천으로 지어진 겁니다. 혹시 그 말씀이 요정의 옷이냐는 뜻이라면 분명히 옮은 말씀입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 물과 풀, 우리가 사랑하는 로리엔의 첫새벽에 비친 이 모든 것들의 빛깔과 아름다움이 이 옷들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물건에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생각을 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옷들은 갑옷이 아닙니다. 창끝이나 칼날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께서 아주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우선 무겁지가 않고 경우에 따라선 따뜻한 모피 역할도 하고 시원한 베옷도 됩니다. 그리고 숲 속을 걷든지 바위산을 오르든지 하실 때 다른 이들의 눈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정말 놀랄 만큼 레이디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겁니다! 레이디와 시녀들이 손수 이 옷감을 짰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린 어떤 이방인에게도 우리 옷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샘터 옆 잔디밭에서 작별인사를 나눴다. 고향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햇빛 속에 반짝이는 흰 물거품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푸른 잔디밭 저쪽에서 할디르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프로도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디르가 말했다. "다시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려고 지금 북쪽에서 오는 길이지요. 딤릴 계곡은 증기와 연기가 구름처럼 자욱하고 산 속도 시끄럽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울리곤 한답니다. 혹시 그쪽 길을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실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쪽으로 가야 할 때지요." 그들이 카라스 갈라돈을 지나는 동안 초록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 위 나무숲에서는 노랫소리와 이야기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마침내 할디르는 그들을 안내해 언덕 남쪽 비탈을 내려갔고 곧 램프가 달린 거대한 성문과 다리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들은 무능ㄹ 지나 요정들의 도시를 벗어났다. 포장도로를 지나 말론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계속 들어갔다. 은빛 어둠이 깔린 숲 속을 따라 그들은 남동쪽으로 계속 안두인 대하를 향해 걸었다. 약 십 마일쯤 걸어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높은 녹색 담벽을 만났다. 담벽 사이 통로를 경계로 숲이 끝났다. 그들 앞에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빛 엘라노어가 점점이 박힌 찬란한 푸른 잔디가 길게 뻗었다. 눈부신 물빛에 양쪽으로 둘러싸인 풀밭은 좁은 갑을 이루며 길게 돌출돼 있었다. 오른쪽으로 서쪽에는 실버로드 강이 현란하게 반짝였고 동쪽에는 안두인 대하가 검푸른 파도를 넘실거리며 유유히 흘렀다. 그들의 눈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남쪽으로 계속 숲이 펼쳐졌으나 강변은 나무가 드물고 황량했다. 로리엔을 벗어나서는 말론나무도 황금빛 가지를 드리우지 않았다. 강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약간 위쪽으로 실버로드 강변에 온통 흰 나무와 바위로 장식된 포구가 있었다. 여러 척의 크고 작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일부는 금빛과 은빛, 초록으로 밝은 빛을 띠고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흰색이거나 회색이었다. 그들을 위해 회색의 작은 배가 세 척 준비되어 있었고 요정들은 그 안에 그들의 짐을 이미 실어 놓았다. 요정들은 또한 각각의 배에 세 사리씩 로프를 실어 놓았는데 그것들은 보기에는 가늘었지만 매우 튼튼했고 요정들의 망토처럼 감촉이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이건 뭐지요?" 풀밭 위로 풀려 나온 로프 한쪽을 만져 보며 샘이 물었다. 배에 타고 있던 요정이 대답했다. "틀림없는 로프입니다. 로프 없이는 멀리 여행할 수가 없지요! 그것도 길고 튼튼하고 가벼운 로프라야 하는데 이게 바로 그런 로프입니다.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그건 말씀 안하셔도 잘 알아요. 떠날 때 로프를 잊어버렸더니 아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로프 꼬는 건 제가 좀 아는데 이건 재료가 뭔지 모르겠군요. 혹시 비밀은 아니겠지요?" "재료는 히슬레인이란 것인데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군요. 진작 관심이 있으신 줄 알았다면 자세히 말씀드렸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만간에 다시 돌아오시지 못한다면 지금 드린 그 선물만으로 만족하셔야 하겠어요. 로프를 유용하게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할디르가 말했다. "자,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배에 오르십시오. 처음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다른 요정도 말했다. "그 말씀을 잘 들어 두세요. 이 배들은 다른 배들과 달리 가볍게 만들어졌고 장점도 많지요. 아무리 많이 실어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 다루면 제멋대로가 되니까 출발하기 전에 여기 선착장에서 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일행은 이런 순서로 배를 탔다. 아라곤, 프로도, 샘이 같은 배에 탔고 보로미르, 메리, 피핀이 역시 다른 배에 탔으며 나머지 한 척에는 이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레골라스와 김리가 탔다. 배는 넓은 나뭇잎 모양의 깃이 달린 짧은 노로 젓게 되어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아라곤은 시험삼아 실버로드 강 상류로 올라가 보았다. 물살이 급해 배는 천천히 전진했다. 샘은 뱃머리에 앉아 양쪽 뱃전을 움켜쥔 채 불안한 듯 강변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에 반짝이는 햇빛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초원을 지나면서 그들은 강가에까지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황금빛 나뭇잎들이 찰랑거리는 물결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공기는 매우 맑고 고요했으며 하늘 높이 나는 종달새들의 노랫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들은 강물 위에서 급회전을 하면서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강물을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거대한 백조 한 마리를 보았다. 백조의 유려한 목줄기 밑으로 흰 가슴 양쪽에 잔물결이 일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부리를 가진 백조의 두 눈은 노란 보석을 박아 넣은 흑옥처럼 빛났으며 웅장한 흰 날개는 반쯤 펼쳐져 있었다. 백조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음악소리가 강물을 따라 흘러왔고 비로소 그들은 그 백조가 새의 모양을 본떠 요정들의 솜씨로 만들어진 배라는 사실을 알았다. 흰 옷을 입은 두 요정이 검은 노로 그 배의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흰 옷을 입은 갈라드리엘이 헌칠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머리에는 황금빛 꽃으로 꾸민 핀을 꽂고 손에는 하프를 든 채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맑고 시원한 하늘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슬프고도 감미롭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는 나뭇잎을 노래했다. 황금빛 나뭇잎을, 그곳에 자라던 황금빛 나뭇잎을. 나는 바람을 노래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을. 해를 넘고, 달을 지나, 흰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그 일마린의 바닷가에 황금빛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엘다마르의 영원한 저녁, 그 별빛 아래서 나무는 빛났다. 요정들의 도시, 티리온의 성벽 옆 엘다마르에서. 가없이 뻗어내린 세월의 가지 위에 황금빛 나뭇잎이 자랐다. 이별의 바다 너머 이곳에선 이제 요정들이 눈물짓고 있건만, 오 로리엔! 겨울이 온다, 발가벗은 앙상한 세월이. 나뭇잎은 강물 위에 떨어지고 강은 유유히 흘러간다. 오 로리엔! 이 바닷가에서 난 너무 오래 서성였구나. 시들어 가는 왕관에 황금빛 엘라노어를 꽂아 왔구나. 그러나 이제 배를 노래한다면, 어떤 배가 나를 찾아올까? 어떤 배가 나를 싣고 저 넓은 바다 건너로 보내 줄 것인가? 아라곤은 백조의 배가 다가오자 배를 정지시켰다. 레이디는 노래를 끝내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여러분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고 또 이 땅의 축복을 전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켈레본도 말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손님들이었지만 한 번도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소. 그러니 여기 로리엔으로부터 먼 곳까지 여러분을 실어갈 두 강물이 만나는 이곳에서 이별의 오찬을 나누도록 합시다." 백조는 천천히 포구를 향해 나아갔으며 일행도 배를 돌려 그 뒤를 따랐다. 로스로리엔의 중심부 에글라딜 최남단에 있는 푸른 잔디밭에 이별의 오찬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프로도는 갈라드리엘의 아름다움과 그 목소리에 넋을 잃은 채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위험하거나 무서운 존재로 비치지 않았으며 더더욱 신비의 마력을 지닌 여인도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이미 후대인들이 이따금 연상하는 그런 요정의 모습이었다. 존재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고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저 멀리 사라져 버린 그 무엇인가의 살아 있는 환영이었다. 잔디밭에서의 식사가 끝나자 켈레본은 다시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손을 들어 남쪽 갑 뒤편에 있는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려가다 보면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황량한 지대가 나올 거요. 거기서부터 강은 높은 황무지의 바위계곡 사이로 흘러가는데 결국 한참 더 가서 우리말로 톨 브란디르라고 하는 틴드록 섬으로 인도할 겁니다. 강은 그 작은 섬을 가운데 두고 마치 날개를 펴듯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라우로스 폭포에서 만나 천둥처럼 요란하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져 닌달프로 흘러가지요. 당신들 언어로 웨트왕이라 부르는 곳이지. 그곳은 물살이 완만해지면서 물줄기가 갈라졌다 섞이고 하는 광대한 늪지대요. 서쪽 판곤 숲에서 내려오는 엔트워시 강 하구가 여럿으로 갈라지면서 거기서 합류하는데 안두인 대하 오른편으로 그 강 유역에 로한이 있소. 그리고 그 왼쪽에는 황량한 구릉지대인 에민 뭘이 있소. 그곳은 동풍이 부는 곳으로 죽음의 늪과 인적없는 대지가 바라보이고 그 너머로 키리스 고르고스와 모르도르의 암흑문들도 볼 수 있소. 보로미르와 함께 미나스 티리스로 갈 친구들은 라우로스 폭포 상류에서 강을 벗어나 늪지대가 나타나기 전에 엔트워시 강을 건너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엔트워시 강 상류로 너무 올라가면 판곤 숲에서 헤맬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하오. 그 숲은 옛날부터 이상한 곳이었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더욱 알 수 없소. 하지만 보로미르와 아라곤에게는 이런 충고가 필요없겠지요." 보로미르가 말했다. "판곤에 대해서는 미나스 티리스에서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것은 대개 어린애들에게나 어울리는 옛날이야기 정도였습니다. 로한 이북 지역은 이제 우리 곤도르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 되어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먼 옛날에는 판곤이 우리 영토에 인접해 있었지만 직접 그곳에 가서 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확인해 본 지는 너무 오래되었지요. 로한까지는 저도 몇 번 가보았지만 그 북쪽지역은 못 가보았습니다. 이번에 사자로 북쪽에 갔을 때는 백색산맥 언저리로 해서 로한 협곡을 지나 이센 강과 그레이플러드 강을 건넜었습니다. 길고 힘든 여행이었지요. 제 계산으로는 천이백 마일 정도 되는 여정이었는데 그레이플러드 강을 건너다가 타르밧에서 말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몇 달이나 걸렸었으니까요. 그런 여행을 마치고 또다시 여기까지 되돌아오고 보니 이제는 필요하다면 로한과 핀곤 숲을 통과하는 길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더 덧붙일 말도 없지. 하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무시하지는 마오. 옛날이야기에는 종종 지혜로운 이라면 귀기울여 들어야 할 사실이 담겨 있는 법이니까." 갈라드리엘은 잔디에서 일어나 시녀 하나에게서 잔을 받아 흰 꿀술을 따라 켈레본에게 주었다. "이제 이별의 잔을 들 시간입니다. 드십시오, 로리엔의 영주! 비록 해가 지면 밤이 오고 우리의 황혼도 가까워졌지만 슬퍼하진 마세요." 그리고나서 그녀는 그들에게 각각 한 잔씩 따라 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그들을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녀와 켈레본도 의자에 앉았다. 시녀들이 그녀를 웅위한 채 말없이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잠시 일행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이별의 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우리 사이엔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로스로리엔을 찾아왔던 기념으로 떠나기 전에 로리엔의 영주와 내가 약소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일행을 한 명씩 불렀다. "여기 켈레본과 갈라드리엘이 여러분의 대장께 드리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라곤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그의 칼에 맞게 만들어진 칼집을 내밀었다. 칼집에는 금빛, 은빛 꽃잎과 나뭇잎 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보석을 박아 새긴 룬 문자로 안두릴이란 검명과 함께 칼의 계보가 적혀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 칼집에서 빼낸 칼은 녹이 슬지 않으며 싸움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내게 달리 무엇바라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 사이엔 이제 어둠이 내려앉았고 돌아오지 못할 여행길이 눈앞에 있으니 우리가 다시 만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레이디, 당신은 제 소망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가 찾는 유일한 보물을 오랫동안 보호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보물을 제게 주신다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뜻이 아닙니다. 오로지 어둠을 통해서만 저는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의 무거운 마음을 덮어 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면 전해 드리라는 부탁을 받고 간직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녀는 선명한 초록빛 큰 보석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날개를 펼친 독수리 모양의 은빛 브로치에 박혀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높이 치켜들자 보석은 마치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나는 이 보석을 내 딸 켈레브리안에게 주었었고 그 애는 다시 그 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희망의 상징으로 당신께 가는군요. 이제부터 당신은 전에 부여해 드린 이름을 사용하세요. 엘렌딜가의 엘프스톤(요정석) 엘레사!" 아라곤은 그 보석을 받아 자기 가슴에 달았다.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보다 훨씬 더 늠름하고 위엄있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깨에서 오랜 세월의 풍상이 씻겨져나간 것 같았다. 아라곤이 말했다. "주신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켈레브리안과 이븐스타(저녁별) 아웬의 근원이 되시는 로리엔의 레이디시여! 더 이상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레이디는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고 이번에는 보로미르를 향해 돌아서서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선사했다. 그리고 메리와 피핀에게는 은으로 만든 작은 허리띠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꽃 모양의 금빛 걸쇠가 달려 있었다. 레골라스에게는 로리엔의 요정들이 사용하는 활을 선사했다. 그것은 요정들의 머리칼을 꼬아 만든 것으로 머크우드의 활보다 더 길고 튼튼했다. 그녀는 샘에게 말했다. "나무를 사랑하는 키 작은 정원사께는 아주 작은 선물을 준비했지요." 그녀는 뚜껑에 금빛 룬 문자 하나가 새겨진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평범한 작은 회색 나무상자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은 가라드리엘을 의미하는 G인 동시에 정원사라는 G도 됩니다. 이 상자 속에는 나의 과수원에서 가져온 흙이 담겨 있으며 그위에는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축복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길을 인도하거나 위험을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것을 무사히 보관해 고향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그때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당신의 고향이 온통 황량한 폐허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흙을 뿌리면 당신은 중간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게 될 겁니다. 그러면 갈라드리엘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또 당신이 겨울에밖에 보지 못한 이 로리엔의 아름다움을 그 먼 곳에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샘은 귀밑가지 빨개져 상자를 받고는 들릭락말락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공손하게 절했다. "난쟁이께서는 요정들에게서 무슨 선물을 바라실까?" 그녀는 김리를 향해 물었다. 김리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레이디. 저는 레이디를 뵙고 그 아름다운 음성을 들은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자 갈라드리엘은 둘러선 요정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요정들이여 들으시오! 앞으로는 누구라도 난쟁이들이 욕심이 많다거나 무례하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오! 하지만 글로인의 아들 김리! 당신은 분명히 내가 줄 수 있는 무슨 선물을 바랄 텐데... 말씀해 보세요. 당신만 선물을 안 받을 수는 없어요." 김리는 다시 정중하게 절을 하며 더듬거렸다. "진심입니다, 레이디 갈라드리엘. 혹시, 혹시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하늘의 별이 우리의 보석을 능가하듯이 이 땅의 황금보다 더 귀한 레이디의 머리칼 한 올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너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도 그러셔서 그만..." 요정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고 켈레본도 의외라는 듯 난쟁이를 바라보았으나 레이디는 웃고 있었다. "난쟁이들의 솜씨는 혀끝이 아니라 손 끝에 있다고 들었는데 김리에게는 그 말이 해당되지 않는 것 같군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렇게 대담하게 또 이렇게 공손하게 부탁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명한 것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선물을 어디에 쓸 건지 말씀이나 해보시지요." "제가 레이디를 처음 뵈었을 때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소중히 보관하고자 합니다. 만일 제가 고향의 대장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불멸의 수정 속에 보관해 저희 집 가보로 정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난쟁이들의 산과 요정들의 숲 사이의 우정의 표시로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갈라드리엘은 긴 머리채 하나를 풀어 세 올의 금발을 뽑아 김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선물과 함께 이 말씀도 들려 드리지요. 나는 예언은 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헛된 것이니까요. 한쪽에 어둠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내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글로인의 아들 김리, 당신의 손에는 황금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도 그 황금이 당신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프로도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반지의 사자, 이제 당신만 남았군요. 하지만 이 선물을 보시면 알겠지만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도 제일 마지막 순서였던 건 아닙니다." 그녀는 투명한 작은 유리병을 내놓았다. 그녀가 그것을 흔들자 그것은 흰 빛줄기를 내뿜었다. "이 병 속에는 내 샘터 물 속에 비친 이렌딜의 별빛을 담았습니다. 어둠이 그대를 둘러쌀 때 이것은 더 환한 빛을 내뿜을 겁니다. 모든 빛이 사라진 캄캄한 곳에서 이것이 당신을 인도하는 빛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갈라드리엘과 그 거울을 기억하십시오!" 프로도는 유리병을 받았다. 병이 손에서 잠시 빛을 발하는 동안 프로도는 다시 한번 여왕처럼 아름답고 위엄있는, 그러나 결코 두렵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을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갈라드리엘이 몸을 일으키자 켈레본은 그들을 이끌고 포구로 돌아갔다. 황금빛 정오의 태양이 푸른 풀밭 위에 내리쬐고 있었고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일행은 조금전과 같이 배에 올랐다. 로리엔의 요정들이 큰 소리로 작별인사를 하며 긴 회색 장대를 이용해 그들을 강으로 밀어내자 찰랑거리는 강물은 서서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여행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강으로 돌출한 갑의 꼭지점에 가까운 푸른 둑 위에 갈라드리엘이 홀로 서 있었다. 그녀 옆을 지나면서 일행은 마치 그녀가 바다 위로 둥실 떠 뒤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마치 마법의 나무를 돛대로 세운 환한 배 한 척이 잊혀진 해안을 향해 향해하듯 로리엔은 뒤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상한 회색 대지 가장자리에 그들을 처량하게 남겨 둔 채. 그들이 여전히 그쪽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실버로드 강은 대하의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배는 방향을 바꾸어 남쪽을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갈라드리엘의 흰 자태는 곧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서쪽으로 떨어지는 햇빛에 반사된 산꼭대기의 유리창처럼, 산 위에서 내려다본 아득한 호수처럼, 그리고 산골짜기에 떨어진 수정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그녀가 손을 들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랫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아련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바다 너머 요정들의 옛 말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에 그는 그 뜻을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노랫가락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 위안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요정들의 말이 흔히 그렇듯 그것은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고 오랜세월이 지나서야 그는 그 의미를 제대로 번역할 수가 있었다. 그 노래는 요정들이 노래를 부를 때 쓰는 언어로 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중간계에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이 라우리에 란타르 라씨 수리넨, 예니 우노티메 베 라마르 알다론! 예니 베 린테 율다르 아바니에르 미 오로마르디 리쎄 미루보레바 안두네 펠라, 바르도 텔라마르 누 루이니 야쎈 틴틸라르 이 엘레니 오마리오 아이레타리 리리넨 시만이 율마 닌 엔쿠안투바? 안시 틴탈레 바르다 오이올로쎄오 베파냐르 마리아트 엘렌타리 오르타네 아르 일리에 티에르 운둘라베 룸불레, 아르 신다노리엘로 카이타 모르니에 이 팔마리나르 임베 메트, 아르 히시에 운투파 칼라키리오 미리 오이알레. 시바놔나, 로멜로 바놔, 발리마르! 나마리에! 나이 히루발리에 발리마르. 나이 엘리에 히루바, 나마리에! '아, 바람이 부니 나뭇잎이 금빛으로 떨어지고 나무의 날개처럼 무수한 세월이 흘렀구나! 모든 별들이 그녀의 거룩하고 위엄있는 노랫소리에 몸을 떠는 바르다의 푸른 하늘 아래, 서역 바다 건너 높은 방에서 달콤한 꿀술을 순식간에 마시듯 오랜 세월이 지나갔구나! 이제 누가 나의 잔을 채워 줄 것인가? 이제 별들의 여왕, 태초의 별 바르다는 마치 구름을 옮기듯 에버화이트 산에서 그녀의 두손을 거두어 버렸네. 모든 길은 어둠에 휩싸이고, 우리 사이의 넘실대는 파도 위로 회색 대지에서 어둠이 몰려오고, 칼라키리아의 보석 위에는 영원히 안개가 덮여 있네. 이제 동부에서 떠나온 이들은 영원히 발리마르를 볼 수 없다! 안녕! 혹시 당신은 발리마르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혹시 바로 당신이 발리마르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안녕!' 바르다는 이쪽 망명지에 살고 있던 요정들이 엘베레스라 부르는 여인의 이름이다. 갑자기 강이 물길을 바꿨고 양쪽으로 강둑이 높이 솟아올라 로리엔의 빛은 사라져 버렸다. 프로도는 그 아름다운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었다. 일행은 이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모두 눈물로 얼굴이 젖었기에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김리는 아예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있었다. 그는 레골라스에게 말했다. "나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어. 앞으로는 그녀의 선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겠어." 그는 손을 가슴에 대며 말을 이었다. "레골라스, 말해 봐. 내가 왜 이 여행에 나섰지? 정말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난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앞길에 얼마나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던 엘론드의 말씀이 옳았어. 어둠 속의 공포는 과연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었어. 하지만 그것이 내 발길을 돌리게는 못했지. 그렇지만 만일 내가 빛과 환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았다면 난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설령 오늘밤 바로 우리가 암흑의 군주를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의 이별에서 내 인생의 가장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이토록 가슴이 젖을 수가 있다니, 글로인의 아들 김리가!"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아니야! 이것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며, 이 시대에 태어난 모든 이들의 비극이라 해야 할 거야. 흐르는 강물 위로 배를 타고 갈 때 보이는 풍경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글로인의 아들 김리, 자넨 축복받은 존재야. 자네가 슬퍼하는 그 상실은 자네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고 자네는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동료들을 저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자네가 누리게 될 최소한의 보상은 바로 영원히 자네 가슴 속에 생생하게 또 깨끗하게 남아 있을 로스로리엔의 추억이지. 그것은 사라지지도 않고 부패하지도 않는 추억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옳은 말이야. 고마워. 하지만 그런 위로는 다 소용없어.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은 추억이 아니야. 아무리 켈레드 자람 호수처럼 맑다고 해도 그것은 거울밖에 되지 않는 거야. 적어도 난쟁이 김리의 가슴 속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요정들은 보는 것이 우리와 다르지? 그들에겐 기억이라는 것이 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시와 더 가까운 것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난쟁이들은 그렇지가 않아. 여하간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배를 잘 저어야지! 강물은 빠른데 짐이 너무 많아 배가 깊이 잠겨 버렸어. 차가운 강물 속에 내 슬픔을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거든." 그는 노를 잡아 벌써 강심을 벗어나 서쪽 강변을 따라 배를 젓고 있는 아라곤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이렇게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끝없이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양쪽 강변으로 듬성듬성한 숲이 있어 그 너머의 지형을 볼 수가 없었다.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강물은 소리없이 흘러갔다. 적막을 깨뜨리는 새소리조차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태양은 점점 흐릿해졌고 하늘 높이 떠오른 하얀 진주처럼 푸르스름한 하늘위에서 미광을 발했다. 그리고 해는 곧 서쪽으로 졌고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면서 별빛조차 없는 희미한 밤하늘이 나타났다. 그들은 강변 숲그림자 미트올 배를 몰아 밤의 고요와 어둠 속을 계속 헤쳐나갔다. 거대한 나무들의 밤안개 속에서 강물 속으로 목마른 뿌리를 들이민 채 유령처럼 지나치고 있었다. 황량하고 으스스한 날씨였다. 프로도는 강가의 나무뿌리와 유목 사이로 꼬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강물 소리로 어렴풋이 들으며 앉아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꾸벅이며 불안한 잠 속에 빠져들었다. 제21장 안두인대하 프로도는 샘이 깨워 눈을 떴다. 그는 안두인 대하 서쪽 강변의 숲 속 한구석에서 온 몸을 담요로 감싼 채 큰 회색나무 밑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날 밤 거기서 눈을 붙였다. 희뿌연 잿빛 미명이 벌거벗은 가지 사이로 찾아들고 있었다. 김리는 불을 피우느라 그 근처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날이 환히 밝기도 전에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모두들 남쪽으로의 향해를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그들은 적어도 라우로스와 턴드록 섬에 닿기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쪽으로 가든 간에 앞길에 닥칠 위험을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강물이 흐르는 대로 힘을 아끼기 위해 일행이 원하는 대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항해해야 한다는 점은 강조했다. 사실 그는 점점 시간이 급박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로리엔에서 쉬고 있는 동안 암흑의 군주도 한가하게 놀고 있지는 않았으리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날도, 다음날도 적의 동정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지루한 잿빛 시간들이 무료하게 지나겠다. 향해 사흘째가 되면서 풍경이 천천히 바뀌었다. 나무가 점점 드물어지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왼쪽 강변에는 언덕이 멀리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그 위로 불길이 스치고 지나간 듯 대지는 살아 있는 풀잎 하나 없이 온통 시든 갈색이었다. 그 공허를 달래 줄 부러진 나무 한 그루, 갈라진 바위 하나 없는 기분나쁜 황햐였다. 그들은 드디어 남부 머크우드와 에민 뭘의 구릉지대 사이에 위치한 거대하고 황량한 갈색평원에 도착한 것이었다. 도대체 적의 어떤 재앙이, 어떤 전쟁이, 아니면 어떤 사악한 행위가 이 넓은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는지 아라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강 오른편 서쪽에도 역시 나무가 없었으나 지형은 평탄한 편이었으며 드문드문 넓은 풀밭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들은 계속 서쪽 강변을 따라 거대한 갈대숲 사이로 빠져나갔다. 갈대는 키가 너무 커 그 사이로 가는 동안 서쪽 시야가 가려졌다. 거무튀튀하게 시든 갈댓잎들이 가벼운 찬바람 속에 슬픈 소리를 내며 몸을 떨고 있었다. 프로도는 이따금 갈대숲이 터진 사이로 나타나는 풀밭과 저 멀리 황혼의 언덕을 볼 수 있었고 까마득하게 보일락말락한 곳에 안개산맥의 남쪽 끝 능선들이 한 줄기 검은 선처럼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새 외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갈대 사이로 지저귀는 작은 새들이 많이 있었으나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몇번인가 날개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 위로 백조떼가 한 줄로 줄지어 날아 올랐다. 샘이 외쳤다. "백조다! 굉장히 큰데요!" "그렇군. 흑고니야." 아라곤이 대답하자 프로도도 말했다. "이곳은 너무 넓고 황량해서 어쩐지 쓸쓸한 느낌마저 드는군요. 겨울이 끝날 때까진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 따뜻하고 유쾌한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여긴 남쪽이라고 할 수도 없어. 아직은 겨울이고 우린 바다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이 지역은 봄이 갑자기 찾아올 때까지는 날씨가 춥고, 어쩌면 다시 눈이 올지도 모르지. 저 아래쪽 대하와 바다가 만나는 벨팔라스 만까지 가면 날씨도 따뜻하고 즐거운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지. 지금 남서쪽으로 리더마크 북부 평야 저쪽에 보이는 곳이 명마의 산지 로한일세. 조금 있으면 판곤에서 내려오는 림라이트 강이 대하로 흘러드는 곳이 보일 텐데 거기가 바로 로한의 북쪽 경계야. 옛날부터 림라이트 강과 백색산맥 사이의 땅을 로한인들의 영토라고 인정했었지. 풍요롭고 살기 좋은 땅이고 특히 목초지가 유명했는데 이제 세상이 어두워지면서 그들도 강가에서 살지도 않고 강까지 말을 타고 나오는 일이 없어져 버렸어. 안두인이 넓긴 하지만 오르크들의 화살은 강 건너 훨씬 멀리까지 날아가고 또 요새는 아예 강을 건너와 로한의 말들을 약탈한다는 소문도 있지." 샘은 불안한 눈으로 양쪽 강변을 살펴보았다. 전에는 나무 뒤에 누가 숨어 있거나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아서 나무가 두려웠지만 이제는 나무가 제발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 일행이 너무 노출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최전선이라고 할 수도 있는 강 위에서 주변에 아무 은폐물도 없이 덮개없는 작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하루이틀 동안 남쪽으로 꾸준히 내려가면서 그들은 모두 그와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루종일 그들은 노에 매달려 배를 저었다. 강변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갔다. 이윽고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얕아지면서 동쪽으로 기다란 자갈밭이 펼쳐졌고 물 밑으로 굵은 모래가 보였다. 배를 몰기가 수월치 않게 되었다. 갈색평원은 황량한 고원으로 바뀌었고 그 위로 차가운 동풍이 불어왔다. 서쪽의 풀밭은 이제 굴곡이 심한 저지대로 바뀌면서 풀도 시들어 버렸고 덤불진 늪지대로 이어졌다. 프로도는 로스로리엔의 잔디밭과 샘물, 맑은 햇빛과 달콤한 가랑비를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어느 배에서도 이야기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행은 저마다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레골라스의 마음은 너도밤나무숲이 우거진 북부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여름밤의 별빛을 바라보며 뛰놀고 있었고 김리는 마음속으로 금덩이를 만지작거리며 그것이 레이디 갈라드리엘의 선물을 담을 그릇이 될 만한가 궁리하고 있었다. 메리와 피핀은 보로미르가 연신 중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어 불안했다. 그는 이따금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의심이라도 생긴 듯 노를 저어 아라곤의 배 뒤로 바싹 배를 붙이곤 했다. 그럴 때면 뱃머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고 있던 피핀은 전방의 프로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묘한 빛을 볼 수 있었다. 샘은 배가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해 왔듯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불편한 것이라고 훨씬 전부터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양 옆으로 흘러가는 회색 강물과 스쳐 지나가는 겨울의 대지를 응시할 뿐 의기소침하고 처량한 표정이었다. 노를 저어야 할 때도 그들은 샘에게 노를 맡기지 않았다. 넷째날이 저물어갈 무렵 그는 프로도와 아라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너머로 뒤따르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졸음을 참으며 어서 땅에 내려 야영을 했으면 하고 바랐다. 갑자기 그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멍한 상태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눈을 비볐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서쪽 강변 작은 섬에서 야영을 했다. 샘이 프로도 옆에 담요를 덮어쓰고 누웠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한두 시간 전에 배에서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하여간 재미있는 걸 봤어요." 프로도는 샘이 일단 말을 꺼내면 꼭 이야기를 마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받아 줬다. "흐음, 무슨 일인데? 로스로리엔을 떠난 뒤로는 웃음거리가 될만한 건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상한 일이라니까요. 꿈이 아니라면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예요. 일단 한번 들어 보세요. 뭐라 할까, 말하자면 눈 달린 통나무를 본 것 같아요." "통나무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강에는 통나무가 많이 떠다니잖아? 눈만 빼면 되는 거야." "아니에요. 바로 그 눈 때문에 제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김리의 배 뒤로 어둑어둑한 물 위에 통나무가 떠내려오는 게 보였어요. 그래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 통나무가 우릴 천천히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것도 우리처럼 강물에 떠내려간다고 하면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바로 그때 눈을 보았어요. 통나무 이쪽 끝에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위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두 눈을 봤단 말이에요. 게다가 통나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모양은 백조의 발처럼 생겼는데 그보다 훨씬 큰 발이 물 위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더라니까요. 그래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눈을 비볐어요. 눈에서 졸음을 씻은 다음에도 보이면 소리를 지르려고요. 그 괴상한 것이 꽤 빠른 속도로 김리 바로 뒤까지 접근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눈동자가 제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니면 제가 그제서야 졸음에서 벗어난 건지 다시 보니까 없어져 버렸어요. 그렇지만 그 순간 얼핏 무언가 시꺼먼 것이 강둑 아래 어둠 속으로 재빨리 숨는 것을 본 것 같아요. 그리고는 그 눈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 혼잣말로 '샘 갬기, 또 꿈을 꿨구나' 하고 중얼거렸지요.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계속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또 자신이 없네요. 뭐 보신 것 없으세요?" "샘, 그 눈이 이번에 처음 나타난 것이라면 졸음 때문에 네 눈이 통나무와 어둠을 잘못 본 거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처음이 아니야. 난 로리엔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걸 보았어. 그리고 그날 밤에는 플렛 위를 쳐다보던 이상한 짐승을 발견했는데 할디르도 봤다고 했어. 오르크들의 뒤를 쫓아갔던 요정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아! 이제 기억이 나요. 제 기억력이 좋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연결을 시켜 보고 빌보씨의 말씀까지 돌이켜 보면 그놈 이름을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불쾌한 이름이죠. 골룸이 맞죠?" "그래. 플렛 위에서 밤을 보낸 뒤로 한동안 내가 걱정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아마 그놈은 모리아에 숨어 있다가 우리 냄새를 맡고 쫓아온 것 같아. 우리가 로리엔에 있는 동안 냄새를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아마 실버로드 강가 숲 속에 숨어서 우리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본 모양이야." "그렇군요. 좀더 경계를 철저히 해야겠어요. 혹시 한밤중에 그 더러운 손이 우리 목을 조를지도 모르잖아요? 오늘밤엔 스트라이더나 다른 이들을 깨울 필요 없이 제가 불침번을 서겠어요. 내일 잠을 자면 되지요, 뭐. 저는 배에서는 짐밖에는 안 된다고 하셨죠." "다행히 눈이 달린 짐이지. 불침번을 서는 건 좋은데, 단 조건이 있어. 한밤중에 교대하게 날 깨우겠다고 약속하란 말이야." 깊은 잠 속에 곯아떨어졌던 프로도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샘이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알았다. 샘이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부탁하신 대로 깨웠어요. 별로 이상한 건 없어요. 조금 전에 물 튀기는 소리, 아니면 냄새맡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밤이면 강물에서 흔히 나는 소리였어요." 샘이 눕자 프로도는 일어나 앉아 담요로 몸을 싸면서 잠을 쫓았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로도는 다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바로 그때였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검은 그림자가 강 위에 정박한 배들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희끄무레한 긴 손이 뻗어나와 뱃전을 잡고 램프처럼 반짝이는 희미한 두 눈이 차가운 빛을 번득이며 배 안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섬에 있는 프로도를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일이 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프로도는 나직하게 들이쉬는 그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일어나 칼집에서 스팅을 꺼내 그 눈을 겨냥했다. 눈빛은 즉시 사라졌다. 다시 쉿쉿 하는 소리와 물 튀기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 검은 물체는 순식간에 검은 강물 속으로 숨어 버렸다. 아라곤이 잠자다 말고 부르르 떨며 일어나 앉았다. "무슨 일이지?" 그는 낮은 소리로 물으며 벌떡 일어나 프로도에게 다가왔다. "꿈자리가 뒤숭숭했어. 칼은 왜 빼들고 있지?" "골룸이에요. 적어도 제 짐작으로는 그렇습니다." "아! 그러면 자네도 우리의 작은 미행자를 알아차렸군. 모리아에서 님로델까지 계속 우리를 따라왔어. 우리가 배를 탄 후부터 통나무에 매달려 손발로 노를 저어 따라온 끈질긴 놈이야. 밤중에 몇 번 붙잡을 뻔했는데 그때마다 놓쳐 버렸지. 물고리보다 더 미끄럽고 여우보다 더 교활한 놈이야. 강물 여행에 지쳐 떨어지기를 바랐는데 물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여하간 내일부터는 속도를 더 내야 하겠어. 자넨 이제 눈 좀 붙이게. 남은 시간은 내가 지킬 테니까. 그리고 그 불쌍한 녀석도 내 손으로 잡았으면 좋겠어.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만일 못 붙잡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돌려야 해. 몹시 위험한 존재니까. 혼자서 밤중에 우리에게 덤벼들기보다는 근방에 있는 적을 우리 뒤에 붙일 놈이거든." 그날 밤 골룸은 다시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 후로 그들은 경계를 철저히 했지만 항해가 끝날 때까지 골룸을 결코 다시 볼 수 없었다. 아직도 만일 그들을 따라오고 있다면 그는 대단히 신중하고 교활한 미행자였다. 아라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노를 빨리 지었고 강변의 경치는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낮에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어서 휴식을 취하고 밤에만 항해를 계속했기 때문에 주변의 경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레가 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 구름으로 찌푸렸고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지면서 서쪽 하늘 끝에 먹장 같은 구름이 조금 열리며 노랑과 연초록이 섞인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초승달 끝자락이 먼 호수 위에 어른거리듯 모습을 드러냈다. 샘은 그것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다음날은 양안의 풍경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강둑이 높아지고 바위벽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들은 곧 암벽 사이로 지나갔으며 양쪽 강변에는 야생자두, 검은 딸기, 가시나무 등 덤불식물이 우거진 가파른 비탈이 보였다. 그 뒤로는 나지막하게 허물어진 절벽이 있었으며 비바람에 시달린 회색 바위 틈새를 담쟁이덩굴이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다시 그 뒤에는 높은 산등성이들이 솟아 있었고 그 정상에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등이 굽은 전나무들이 서 있었다. 일행은 윌더랜드 남단, 에민 뮐의 회색 산악지대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절벽과 바위 틈새 위에서는 무수한 새떼가 하루 종일 푸르스름한 하늘 위로 검은 원을 그리며 선회했다. 아라곤은 그날 낮에 야영을 하면서 골룸이 혹시 무슨 말썽을 일으켜 그들의 향해가 벌써 황야지대에 알려진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며 새떼의 비상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일행이 다시 출발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그는 기울어 가는 석양 속에서 까만 점 하나를 발견했다. 큰 새 한 마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가끔 선회를 하면서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라곤은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레골라스, 저게 뭐지? 내 생각엔 독수리 같은데." "맞아요. 사냥용 독수리지요. 예감이 좋지 않은데요. 산맥은 여기서도 한참 먼데 말이에요."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는 출발을 연기하세." 여드레째 저녁이 다가왔다. 기분나쁜 동풍이 잠잠해지고 하늘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가느다란 초승달은 일찌감치 어스름 황혼 속으로 떨어졌지만 높은 하늘은 맑았고 멀리 남쪽에는 아직 석양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구름떼가 보였다. 서쪽 하늘은 벌써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자! 하룻밤만 더 야간항해를 합시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린 이제 직선코스에 접어든 것 같은데. 이쪽은, 특히 여기서부터 산 게비르까지는 강을 따라서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어. 하지만 내 계산이 맞다면 산 게비르 급류까지는 아직 몇 마일을 더 가야 할 거야. 물론 그곳에 닿기 전에도 물 속의 암초나 바위섬처럼 위험한 곳들이 있지. 경계를 철저히 하고 노를 빨리 젓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선두의 배에 탄 샘에게 파수의 임무가 맡겨졌다. 그는 앞으로 엎드린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밤은 더욱 어두워졌지만 머리 위의 별은 이상하게 더 반짝거렸고 강물 위까지 어른어른 비쳤다. 노를 쓰지 않고 상당한 거리를 떠내려와 거의 자정에 가까워졌을 무렵 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바로 몇 미터 앞에 물 위로 시커먼 물체가 어렴풋이 보였고 물소리가 요란했다. 물 흐름이 갑자기 왼쪽으로 바뀌며 동쪽 강변을 향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옆으로 휩쓸려가는 순간 그들은 희미한 물거품이 강물 속으로 깊숙이 돌출한 날카로운 암벽에 부딪히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보았다. 배들이 모두 함께 뒤엉켜 버렸다. 자기 배가 앞 배에 부딪히자 보로미르가 외쳤다. "아라곤! 미친 짓입니다. 밤에는 급류를 지나갈 수 없어요. 아니, 밤이건 낮이건 산 게비르에서는 배가 견뎌날 수 없습니다." 아라곤이 외쳤다. "뒤로, 뒤로! 돌려! 최대한 돌려!" 그는 노를 강물 속에 집어넣고 배를 돌리려 애를 썼다. 그는 프로도에게 말했다. "내 계산이 틀렸어. 이렇게 멀리까지 내려온 줄은 몰랐는데. 안두인 대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 그렇다면 산 게비르가 바로 앞에 있는 건데."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배를 저지하면서 서서히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처음에는 흐름이 워낙 거세서 조금씩 돌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동쪽 강변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한밤중에 바라본 동쪽 강변은 더욱 시커멓고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보로미르가 외쳤다. "모두 같이 노를 저어요! 노를 저어! 잘못하면 우리 모두 물귀신이 되는 거요!" 그가 외치는 순간 프로도는 이미 배 바닥이 바위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피융 하는 활시위 소리와 함께 화살이 그들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그 중 몇 대는 그들 사이에 떨어졌다. 프로도는 양 어깨 사이에 화살을 맞고 노를 놓치며 비명을 지르고 앞으로 기우뚱했다. 그러나 화살은 그의 숨겨진 갑옷에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또 하나가 아라곤의 모자를 관통했고 세 번째 화살은 뒷배에 탄 메리의 손 바로 옆 뱃전에 박혔다. 샘은 동쪽 강변 기다란 자갈밭에 검은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것을 본 듯했다. 그들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르크!" 레골라스가 급한 김에 요정들의 말로 외쳤다. "오르크다!" 김리도 외쳤다. 샘은 프로도를 향해 말했다. "골룸 짓이에요. 틀림없어요. 게다가 잠복한 위치도 정말 절묘해요. 강물이 우리를 저놈들 품속에 던져 주고 있잖아요." 그들은 모두 노를 잡아당기며 앞으로 엎드렸다. 심지어 샘까지 거들었다. 그들은 검은 화살촉의 섬뜩한 촉감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머리 위로 씽씽거리며 날아가거나 그들 좌우의 물 속으로 떨어질 뿐 그들을 더 이상 맞히진 못했다. 사방이 캄캄했지만 밤눈이 밝은 오르크들에겐 크게 지장이 될 리가 없었고, 게다가 별빛까지 희미하게 비치고 있어 만일 로리엔의 회색 망토나 요정들이 배를 만들 때 사용한 회색 목재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영락없이 모르도르의 교활한 궁수들에게 훌륭한 표적이 될 뻔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워낙 어두웠기 때문에 배가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서서히 강물의 소용돌이도 약해지도 동쪽 강변의 어둠도 뒤로 물러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강 한가운데로 다시 나와 돌출한 암초들 위로 어느 정도 배를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쯤 방향을 바꿔 다시 전력을 다해 서쪽 강변으로 배를 몰았다. 강물 위로 드리워진 덤불숲의 그림자 아래 그들은 배를 멈추고 일단 숨을 돌렸다. 레골라스가 노를 놓더니 로리엔에서 선사받은 활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강변으로 훌쩍 뛰어내려 둑 위로 몇 걸음 기어올라갔다. 시위를 당겨 화살을 메긴 그는 강 건너의 어둠 속을 뚤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나 강 건너에서는 날카로운 함성이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로도는 고개를 들어 그의 머리 위로 우뚝 선 요정이 목표를 찾아서 건너편을 노려보는 모습을 보았다. 검은 하늘에 점점이 박힌 흰 별들은 마치 왕관처럼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그러나 그때 남쪽으로부터 거대한 구름장이 별빛 가득한 밤하늘 위로 서서히 북상해 왔다. 갑작스런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다. "엘베레스 길도니엘!"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골라스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구름인지 아닌지 거대한 검은 물체가 구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남쪽 하늘의 어둠 속을 빠져나와 모든 별빛을 가리며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밤하늘의 어둠보다 더 검은 거대한 날짐승이었다. 강 건너에서 그 새를 환영하는 함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프로도는 갑자기 냉기가 온 몸을 관통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어깨에 입었던 상처를 연상케 할 만큼 강력한 냉기였다. 그는 몸을 숨기듯 엎드렸다. 갑자기 로리엔의 위대한 활이 소리를 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이었다. 프로도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의 머리 위에서 그 날짐승은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소름끼칠 만큼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며 동쪽 강변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 머리 위 어둠 속에서 비명과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 일어나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그날 밤은 다시 화살이나 고함소리가 동쪽으로부터 날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아라곤은 다시 배를 상류로 몰고 갔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한참 더듬어서 드디어 야트막한 작은 만을 찾아냈다. 그곳엔 물가까지 바싹 붙어 선 몇 그루 키 작은 나무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가파른 암벽이 솟아 있었다. 일행은 동이 틀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밤에 더 이상 움직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배를 서로 바싹 붙어 놓은 채 배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불도 피우지 않았다. 렘바스 조각을 씹으며 김리가 말했다. "갈라드리엘의 활과 레골라스의 눈과 손 덕분이야! 자네는 깜깜한 밤중에도 활솜씨가 대단하더군!" "하지만 맞은 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나도 모르지만 여하간 그 시커먼 게 더 가까이 오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어. 소름이 끼치더라니까. 마치 모리아에서 보았던 어둠이 연상될 정도였어. 발록의 어둠말이야." 김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을 마쳤다. 아직 냉기에 몸을 떨고 있던 프로도가 말했다. "발록은 아니었어요. 그것보다 더 차가운 것이었어. 내 생각에는..." 그는 말을 멈췄다. "당신 생각엔?" 프로도의 얼굴을 한 번 더 볼 심산으로 그의 배에서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보로미르가 물었다. "내 생각에는... 아니, 그만두겠어요.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상당히 놀랐을 겁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럴 거야. 하지만 그놈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오늘밤엔 모두 잠자선 안 되겠어.지금은 밤이니까 괜찮지만 날이 새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르겠군. 무기를 가까이 두도록!" 샘은 손꼽아 셈이라도 하듯 칼 손잡이를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야. 샤이어나 윌더랜드나 달은 마찬가질 텐데, 아니 당연히 똑같을 텐데. 달이 궤도를 벗어난 건가, 아니면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가? 프로도씨, 우리가 나무 위 플렛에 올라갔을 때 달이 지고 있던 걸 기억하시죠? 제 짐작으로는 보름에서 일 주일이 지난 뒤였어요. 그런데 어젯밤이 우리가 여행을 다시 시작한 지 일주일짼데 어째서 금방 손톱 같은 초승달이 튀어나오는 거죠? 그러면 요정들의 나라에선 하루도 지내지 않았단 말이 되거든요. 음, 분명히 기억할 수 있는 것만도 사흘밤은 되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며칠은 더 있었던 게 분명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절대로 한 달까지야 될 리가 없고요. 그러면 거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단 말일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렀던 거야. 내 생각에는 실버로드 강을 따라 안두인 대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현실의 땅을 지나 대해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 속으로 되돌아온 것 같아. 그리고 내 기억으로도 카라스 갈라돈에서는 초승달이든 그믐달이든 달을 본 적이 없어. 밤에는 별빛, 낮에는 햇빛뿐이었거든." 레골라스가 자기 배에서 말을 건넸다. "그래, 거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하지만 변화와 성장이란 것은 모든 것이,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것은 아니지. 요정들에게도 세계는 움직이는 거야. 매우 빨리 움직이기도 하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도 하지. 빠르다는 것은 그들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이 덧없이 지나가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들에겐 슬픈거야. 느리다는 것은 그들이 흘러가는 세월을 세지 않는다는 뜻이야. 지나가는 계절이란 길고긴 강물 위에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에 불과한 것이니까. 하지만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언젠가는 끝이 있게 마련이지."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러나 로리엔에서는 그 시간이 더디 오는 것이겠지요. 레이디의 힘이 거기 작용을 하는 겁니다. 갈라드리엘이 요정의 반지를 간직하고 있는 한 카라스 갈라돈의 시간은 비록 보기에 짧아 보일지라도 언제나 풍요한 시간이에요." 아라곤도 말했다. "로리엔 밖에서는 그 말을 해서는 안 되네. 나한테라도 말이야. 그만하게! 하지만 샘, 사실은 자네가 거기서 계산을 잊어버린 거야. 거기선 요정들에게서처럼 시간이 우리 곁을 너무 빨리 지나간 것이지.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 바깥세상에서는 달이 새로 떴다가 져 버린 걸세. 그리고 어제저녁 초승달이 다시 떠오른 거야. 겨울은 거의 지나갔고, 이제 희망이라고는 거의 없는 봄이 찾아올 걸세." 밤은 소리없이 지나갔다. 강 건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배 안에 웅크린 일행은 날씨의 변화를 느꼈다. 먼 바다로부터 남쪽을 거쳐 날아온 습기찬 구름 덕분에 아침 공기도 훈훈하고 바람도 거의 일지 않았다. 강물이 바위에 부딪혀 철썩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워지는 듯했다. 머리맡의 나뭇가지에서는 이슬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그들 주변의 풍경은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로 변했다. 새벽빛이 서서히 어둠을 몰아내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강 위엔 안개가 자욱했고 강변까지 흰 안개에 휩싸여 제방 위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샘이 말했다. "원래 저는 안개를 싫어했지만 오늘 안개는 어쩐지 행운의 징조 같아요. 이제는 그 빌어먹을 도깨비 같은 놈들한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우리도 길을 찾을 수 없어. 산 게비르를 거쳐 에민 뮐까지 가려면 길을 꼭 찾아야 돼." 아라곤이 말하자 보로미르가 투덜댔다. "왜 하필 급류를 지나 계속 강으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만일 에민 뮐이 우리 전면에 있다면 여기서 이 나뭇잎 같은 배를 버리고 바로 남서쪽으로 가는 겁니다. 거기서 엔트워시 강을 건너기만 하면 우리 곤도르 영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우리가 미나스 티리스로 갈 예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 문제는 결정되지 않았소. 그리고 그 길도 생각보다는 위험한 길이고. 엔트워시 강 유역은 평지에다 늪지대고 또 안개가 대단해서 짐을 지고 걸어가려는 이들에겐 대단히 위험하거든. 나는 가능한 한 배를 버리지 않을 생각이오. 강물은 적어도 놓칠 수 없는 길이니까." 보로미르는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동쪽 강변은 적이 장악하고 있고 게다가 만일 아르고나스의 관문을 통과해 무사히 틴드록 섬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엔 어떻게 하겠습니까? 폭포를 뛰어내려서 늪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아니오! 옛 도로를 이용해 라우로스 폭포 하단까지 배를 운반하는 거요. 그리고 거기서 다시 배를 타면 되오. 보로미르, 당신은 북쪽 층계를 모르는 거요, 아니면 일부러 잊어버린 척하는 거요? 위대한 제왕들의 번성기에 세워진 아몬 헨의 높은 망루도 거기 있잖소? 나는 가는 길에 그 망루를 꼭 올라 보고 싶소. 우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보로미르는 굽히지 않고 이 제안에 반대했지만 프로도가 아라곤을 따르겠다고 분명히 밝히자 승복을 하며 말했다. "위급한 친구를 버리는 것은 미나스 티리스의 법도가 아니오. 그리고 틴드록 섬에 닿으면 제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거기까지만 같이 가겠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만일 거기서도 내 도움이 동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난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날이 밝아지면서 안개도 약간 걷혔다. 일행이 배에 남아 있는 동안 아라곤과 레골라스가 먼저 강변에 내려 보기로 했다. 아라곤은 급류 아래쪽 강물이 비교적 잔잔한 지점까지 배와 짐을 운반할 수 있는 강변도로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요정의 배는 절대 가라앉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목숨까지 산 게비르를 무사히 살아 통과할 수 있다는 건 아니거든. 아직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어. 이곳은 곤도르인들이 만든 길도 없어. 곤도르의 최전성기에도 그들의 영토는 에민 뮐을 넘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만일 길이 있다면 서쪽 강변 어딘가에 산 게비르 상하류를 연결하는 육로가 있을 거야. 옛날에는 가벼운 배들은 윌더랜드에서 오스길리아스까지 여행을 하곤 했고, 또 최근에도 몇 년 전에 모르도르의 오르크들이 불어나자 하류로 이동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직 그 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아라곤의 말에 다시 보로미르가 이의를 제기했다. "내 평생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동쪽에는 오르크들이 우글거립니다. 설사 연결도로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도 여전히 첩첩산중일 겁니다." "남쪽 방향은 어느 길이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야겠지. 우릴 하루만 기다리시오. 그래도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에게 위험이 닥친 것으로 생각하고 새 지도자를 뽑아 그의 지휘대로 행동하시오." 아라곤과 레골라스가 가파른 비탈을 기어올라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프로도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한두 시간이 겨우 지나 한낮이 될까말까할 무렵 정찰임무를 띠고 갔던 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아라곤은 강둑을 내려오며 말했다. "잘됐어. 도로가 있어. 그리고 도로 끝에는 쓸 만한 선착장도 있고.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아. 급류가 시작되는 것이 여기서 반 마일 아래고, 급류 길이는 일 마일도 채 안 돼. 그 다음부터는 물살이 좀 빠르기는 하지만 물도 다시 맑아지고 잔잔해지더군. 아마 배와 짐을 거기까지 운반하는 게 가장 어렵겠지. 길은 여기 강변에서 이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암벽 아래로 나 있는데 북쪽 선착장은 발견하지 못했어. 만일 어딘가에 있다면 아마 우리가 어젯밤 지나왔을 거야. 상류로 올라가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안개 때문에 놓칠 수도 있어. 그러니 내 생각에는 여기서 강을 떠나 가능한 한 빨리 그 도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자 보로미르가 말했다. "그건 이 일행 모두가 인간 남자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과 난 인간 남자이니 한번 해봅시다." 그러자 김리가 나섰다. "우리도 할 겁니다. 짐이 몸무게의 두 배가 나가도 난쟁이는 끄떡없지만 인간들은 다리가 휘청한다던데, 보로미르, 그게 사실이오?" 그 일은 정말 힘든 작업이었지만 결국 무사히 끝났다. 짐을 먼저 배에서 내려 강둑 위로 올렸다. 그 다음에는 배를 물에서 끌어올렸는데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요정들의 무얼로 배를 지었는지는 레골라스도 알지 못했지만 여하튼 놀랄 만큼 튼튼하면서도 가벼웠다. 평지에서는 메리와 피핀 둘이서도 배를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걸어가야 할 도로까지 배를 운반하는 데는 두 사나이의 힘이 절대로 필요했다. 강에서 길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회색 석회석들이 어지럽게 널린 황폐한 곳으로 이따금 잡초와 덤불로 뒤덮인 웅덩이도 있었고, 가시나무숲과 작은 계곡도 나타났으며, 여기저기 내륙의 단구에서 흘러내린 물로 형성된 늪지대도 보였다. 보로미르와 아라곤이 함께 배를 한 척씩 끌고 갔고 그 뒤로 다른 이들은 짐을 지고 열심히 길을 헤쳐나갔다. 드디어 도로 위까지 짐과 배가 모두 운반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길 위로 뻗친 가시덤불이나 굴러떨어진 작은 바위들을 빼놓고는 큰 장애물 없이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안개는 여전히 오른쪽의 허물어질 듯한 암벽과 왼쪽의 강물 모두를 베일처럼 가리고 있었다. 일행은 산 게비르의 날카로운 바위턱과 암초에 강물이 부딪히며 물거품을 일으키는 소리를 들었으나 안개 때문에 볼 수는 없었다. 남쪽 선착장에 짐을 운반하기 위해 그들은 두 번 왕복해야만 했다. 도로가 강쪽을 향해 방향을 바꿔 완만한 내리막을 형성한 곳에 강물이 자그만 연못을 이룬 곳이 있었다. 선착장은 그 얕은 물가에 있었는데 연못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강으로 야트막하게 돌출해 나온 바위벽에 부딪힌 강물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형성된 것이었다. 그 뒤로는 가파른 회색 절벽이 우뚝 서 있고 더 이상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미 짧은 오후가 지나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일행은 물가에 앉아 안개 속에 가려진 산 게비르의 급류가 요동치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피곤에 졸음마저 겹친 데다 저무는 해처럼 기분도 우울했다. 보로미르가 말했다. "흠, 이제 여기 도착했으니 오늘밤은 여기서 세워야 하겠군요. 우린 잠이 부족합니다. 아라곤, 당신은 혹시 밤중에 아르고나스 관문을 통과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린 너무 피곤해요. 우리 건장하신 난쟁이친구분만 빼놓고 말입니다." 김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그럼 가능한 한 빨리 휴식을 취합시다. 내일은 다시 낮에 향해를 해야 할 테니까. 만일 날씨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를 숨겨 준다면 동쪽의 적에게 들키지 않고 상당히 많이 내려갈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밤은 우리 둘이서 교대로 불침번을 서도록 합시다. 세 시간씩만." 새벽녘에 한 차례 빗방울이 떨어진 것 외에는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환히 밝자 일행은 출발했다. 안개는 이미 걷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서쪽 강변에 바싹 붙었다. 나지막하게 보였던 희미한 절벽의 형체가 점점 높아졌고 거뭇한 절벽 기슭에는 강물이 요란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아침나절이 되면서 구름이 점점 낮게 깔리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배에 물이 고이지 않게 배 위에 가죽덮개를 씌우고 엎드렸다. 쏟아지는 잿빛 비의 베일 사이로 좌우전방의 풍경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는 오래 내리지 않았다. 하늘이 서서히 개면서 갑자기 구름이 갈라지더니 조각구름들의 북쪽으로 강의 상류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도 걷혔다. 그들 전방으로 넓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거대한 암벽이 솟아 있고 돌출한 바위턱과 좁은 틈새로 나무 몇 그루가 매달려 있었다. 강폭이 점점 좁아지고 물살이 빨라졌다. 이제 그들은 앞에 무엇이 있을지도 알지 못한 채 배를 멈춘다거나 방향을 바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휩쓸려갔다. 머리 위에는 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이고 양 옆으로는 검푸른 강물이 요동을 쳤으며 전방에서는 빈틈이라고는 한 구석도 없이 에민 뮐의 검은 산들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저 멀리서 두 개의 거대한 바위산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거대한 첨탑이나 돌기둥처럼 보였다. 강물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돌기둥들 사이로 좁은 협곡이 형성되어 강물은 그쪽을 향해 쏜살같이 빨려들었다. 아라곤이 외쳤다. "제왕의 기둥, 아르고나스를 보게! 곧 저기를 지나게 될 텐데, 배를 일렬로 벌려 세우고 가능한 한 거리를 띄워! 강 가운데로 방향을 잡고!" 프로도가 그쪽으로 다가갔을 때 그 거대한 기둥은 마치 탑처럼 그를 맞이하였다. 그 거대한 회색 거인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그것들이 정말 깎아 만들어 놓은 기둥이라는 것을 알았다. 옛 왕국의 위용과 장인들의 솜씨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두 기둥은 과거의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깊은 물 속에 세워진 거대한 받침대 위에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왕의 조상 둘이 있었다. 눈동자는 흐려지고 이마에 금이 갔지만 그들은 여전히 북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왼손은 경고의 표시로 밖을 향해 펼쳐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머리 위에는 곧 허물어질 듯한 투구와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 사라진 왕국을 지키는 말없는 파수꾼으로 그들은 아직 대단한 위엄과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프로도는 외경과 공포에 사로잡혀 배가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감히 쳐다볼 생각도 못한 채 눈을 감고 엎드려 버렸다. 심지어 보로미르마저도 뉴메노르의 파수꾼들의 영원한 그림자 밑으로 작은 나뭇잎처럼 배가 지나갈 때 절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들은 이렇게 아르고나스의 관문을 통과했다. 양쪽으로 높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가파른 절벽이 무섭게 솟아 있었다. 희미한 하늘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였다. 검은 강물이 포효하며 메아리를 일으켰고 그 위로 바람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다. 무릎을 움켜잡고 웅크린 프로도는 앞에 앉은 샘이 혼자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럴 수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야! 이 배에서 나가기만 하면 난 다시는 웅덩이에라도 발을 담그지 않을 거야. 강은 혼자 흘러가게 둬야지." "두려워 말게!" 등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로도는 고개를 돌려 스트라이더를 보았다. 아니, 그는 더 이상 스트라이더가 아니었다. 거기서 있는 이는 오랜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순찰자가 아니었다.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고물에 앉아 익숙하게 노를 젓고 있었다. 모자는 뒤로 젖혀졌고 검은 머리는 바람에 휘날렸으며 눈에는 광채가 번득거렸다. 망명지에서 자신의 영토로 다시 돌아온 국왕의 느름한 모습이었다. "두려워 말게! 나는 내 옛 조상 이실두르와 아나리온의 모습을 뵙길 오래 전부터 갈망해 왔네. 그분들의 그림자 아래 서면 엘렌딜의 후예, 곧 이실두르의 아들 발란딜 가문의 아라돈의 아들 나 엘프스톤 엘레사는 두려운 것이 없네." 그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지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 갠달프가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다스릴 도시의 성곽과 미나스 아노르가 정말 보고 싶구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지?" 협곡은 길고 어두웠으며 부딪히는 물소리와 파도소리가 서로 메아리치며 어울리고 있었다. 수로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처음에는 전방의 시야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겼으나 프로도는 높은 곳에서 작은 빛줄기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점점 커지면서 빠른 속도로 다가왔고 배는 순식간에 눈부신 빛의 세계로 다시 퉁겨나왔다. 이미 정오를 한참 지난 태양은 바람부는 강물 위에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갇혔던 물이 타원형의 길쭉한 호수 위로 퍼져나갔다. 넨 히도엘 호수였다. 호수는 가파른 회색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비탈에는 나무가 무성했지만 정상은 차갑게 빛나는 햇살만 반사할 뿐 헐벗었다. 멀리 남쪽 끝에 봉우리 셋이 솟아 있었다. 중간의 봉우리가 양쪽에서 약간 떨어져 앞으로 다소간 튀어나와 물 위에 작은 섬을 이루고 있었고 강물은 그 양 옆으로 휘어졌다. 천둥처럼 무거운 소리가 바람에 실려 먼 곳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라곤은 남쪽의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톨 브란디르를 보게! 왼쪽이 아몬 로고 오른쪽이 아몬 헨이지. 각각 귀와 눈을 상징하는 거야. 위대한 군주들이 살아 있을 때는 저위에 파수대가 있어서 망을 보곤 했지. 하지만 중앙의 톨 브란디르에는 사람이나 짐승이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다고 하네. 해가 지기 전에 우리는 저기 닿을 걸세. 내 귀에는 벌써 라우로스 폭포가 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어." 일행은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호수 중심부를 따라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노를 잡은 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쪽 산기슭은 벌써 어둠 속에 잠겨 버렸고 태양은 점점 동그랗고 빨갛게 변해 갔다. 여기저기서 희미한 별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세 개의 봉우리가 황혼 속에 어두컴컴한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라우로스 폭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여행자들이 마침내 산그림자 밑으로 들어왔을 무렵 강물 위에는 밤의 그림자가 깊숙이 내려앉고 있었다. 열흘째의 여행은 끝났다. 그들의 등뒤에는 윌더랜드가 있었고 이제 동쪽이냐 서쪽이냐의 선택 없이는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들의 여행은 드디어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제22장 깨진 우정 아라곤은 그들을 강물 오른쪽으로 인도했다. 톨 브란디르 그늘 아래 서쪽으로는 아몬 헨 기슭에서부터 물가까지 푸른 풀밭이 깔려 있었다. 그 뒤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완만한 산비탈이 이어졌고 호숫가를 따라 서쪽으로도 역시 나무가 울창했다. 옹달샘에서 물이 흘러내리며 풀밭을 적셨다. 아라곤이 말했다. "오늘밤은 여기서 야영을 합시다. 파스 갈렌 초원이란 곳인데 옛날부터 여름철만 되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오. 여기까지 아직 적의 마수가 뻗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배를 푸른 강변에 끌어올리고 야영준비를 했다. 경계를 세웠지만 적이 나타날 기미는 전혀 없었다. 혹시 골룸이 용케 계속 뒤따라왔는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무런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어 가면서 아라곤은 점점 더 불안해져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정이 조금 지나서 그는 불침번을 서고 있던 프로도에게 다가갔다. "왜 일어나세요? 차례도 아닌데." "잘 모르겠네. 꿈자리가 사나워서 혼났어. 자네 칼을 한번 빼보는게 좋겠어." "왜요? 적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스팅이 혹시 뭘 가르쳐 줄지 보세." 프로도는 칼집에서 요정의 칼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칼날이 희미한 빛을 내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 "오르크예요!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아요." "걱정이군. 하지만 이쪽 강변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스팅의 빛이 희미한 걸 보니 아마 아몬 로 기슭에 모르도르의 첩자들이 숨어있는 모양이야. 아직까지 아몬 헨에 오르크들이 나타났다는 소리는 못 들었거든. 하지만 미나스 티리스조차 안두인 수로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하는 이 험난한 시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야 아무도 알 수가 없지. 내일은 조심해서 떠나야겠군." 아침해가 불꽃처럼 떠올랐다. 동녘에는 마치 큰불이라도 난 듯 시커먼 구름이 나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검은 구름 아래로부터 시뻘건 불길을 내뿜으며 태양이 맑은 하늘로 떠올랐다. 톨 브란디르의 정상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프로도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섬을 바라보았다. 섬 기슭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 위로 나무들이 비스듬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비탈이 있었고 다시 그 위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회색 암벽이 보였으며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첨탑이 있었다. 그 주위로 많은 새들이 선회하고 있었으나 그 외에 다른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아라곤은 일행을 소집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소. 우리가 오랫동안 연기해 왔던 선택의 날이오. 지금까지는 모두 무사히 왔는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겠소? 보로미르와 함께 서쪽으로 가 곤도르의 전쟁에 출전할 것인가, 아니면 공포와 어둠의 땅 동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결속을 포기하고 각자 헤어져 제 갈 길로 갈 것인가? 어떤 길을 택하든 발리 결정해야 하오. 여기서는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알다시피 적은 동쪽 강변에 숨어 있고 어쩌면 오르크들은 벌써 이쪽으로 넘어왔을지도 모르지." 오랜 침묵이 흘렀지만 움직이거나 말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라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프로도, 미안하지만 이 짐은 자네가 져야 하네. 자넨 엘론드의 회의에서 결정된 반지의 사자니까. 자네의 길이니까 자네만이 선택할 수 있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무슨 말을 함부로 못하겠네. 난 갠달프가 아니야. 비록 그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지금까지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과연 갠달프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할지 나는 모르겠네. 하지만 그가 지금 여기 있더라도 십중팔구 자네가 선택해야 했을 거야. 그것이 자네의 운명이니까." 프로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 천천히 말했다. "저도 급한 건 압니다만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너무 무거운 짐이군요. 한 시간만 혼자 있게 해주십시오. 그때 말씀드리지요." 아라곤은 자상하면서도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 한 시간을 줄 테니 혼자 있게. 그동안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가지만 말게." 프로도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샘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해답이야 불을 보듯 뻔한 건데, 그렇다고 샘 갬기가 건방지게 참견할 수야 없겠지." 프로도는 곧 일어나 저편으로 걸어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보로미르만은 프로도가 아몬 헨 기슭으로 사라질 때까지 예의 주시하는 눈길을 던지고 있었으며 샘이 이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처음에는 시름없이 숲속을 헤매던 프로도는 자신의 발길이 저절로 산비탈 위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작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가 급한 곳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었지만 이젠 모두 닳고 갈라져 버려 틈새로 나무뿌리가 박혀 있기도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한참 올라간 그는 풀밭에 이르렀다. 풀밭가에는 마가목나무가 둘러서 있었고 한가운데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산중턱의 그 작은 풀밭은 동쪽으로 훤히 트여 있어서 이른 아침 햇살이 가득히 비치고 있었다. 프로도는 걸음을 멈추고 발 아래로 저 멀리 강과 톨 브란디르를 바라보았다. 그 전인미답의 섬과 그가 서 있는 곳 사이의 거대한 하늘을 새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라우로스 폭포 소리가 묵직한 방향과 함께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는 바위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동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빌보가 샤이어를 떠난 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갠달프가 말한 것들도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계속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갑자기 그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보로미르였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프로도, 당신이 걱정돼서 왔소. 아라곤의 말대로 여기까지 오르크들이 왔다면 누구든지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되겠지. 특히 당신은 더욱 그렇고.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 마음은 착잡하오. 다행히 당신을 만났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 그래야 나도 안심이 되겠고. 여럿이 모여 놓으면 도대체 이야기에 끝이 안 나거든. 혹시 둘이서만 있으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고맙습니다만 이젠 아무 이야기도 필요없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했으니까요. 다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겁이 날 뿐입니다. 보로미르, 겁이 난단 말입니다." 보로미르는 말없이 서 있었다. 라우로스의 물소리는 여전히 요란했고 나뭇가지 사이로 미풍이 불어왔다. 프로도는 몸을 떨었다. 보로미르는 갑자기 그의 곁에 와서 앉았다. "당신은 지금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아오? 난 당신을 돕고 싶어. 그 어려운 결정에 충고를 하고 싶단 말이지. 내 생각을 들어 보겠소?" "무슨 생각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로미르.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경고의 소리만 없다면 그건 좋은 생각이겠지요." "경고라니! 무엇에 대한 경고란 말이지?" 보로미르가 날카롭게 물었다. "지연시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쉬운 길을 택하지 말라, 내게 지워진 짐을 거부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인간들의 힘과 진실을 믿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힘은 당신이 멀리 고향땅에 있을 때 오랫동안 당신을 지켜온 힘인데." "곤도르인들의 용기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어요.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이 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 성벽이 무너질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용감하게 싸울 거요. 그리고 아직 희망은 있고." "반지가 남아 있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자 보로미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반지! 반지라! 우리가 그 작은 반지 하나 때문에 서로 의심을 하고 공포를 견뎌야 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 작은 반지 하나 때문에! 엘론드의 집에서 잠깐 본 적이 있지만 다시 한번 그 반지를 보여 줄 수 있겠지?" 프로도는 고개를 들었다. 가슴 속에서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그는 보로미르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득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가능하면 숨겨 두는 게 좋습니다." "좋을 대로 하지. 괜찮아. 그렇다고 이야기도 못하는 건 아니겠지? 당신은 항상 그것이 적의 손에서 나쁜 일에 쓰일 경우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좋은 쪽으로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말대로 세상은 변하고 있어. 반지가 있는 한 미나스 티리스는 멸망하고 만다고 했지만 왜 꼭 그래야지? 반지가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우리 손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반지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나쁜 결과로 변합니다." 보로미르는 몸을 일으켜 불안하게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쪽으로 가겠단 말이지? 갠달프, 엘론드, 그 친구들이 당신한테 그렇게 가르친 것뿐이야. 그들 생각으로는 그게 옳겠지. 요정이니 마법사니 하는 그 친구들은 곧 후회하게 될걸. 내가 보기엔 소심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지만, 다 나름대로의 방식이니 어쩔 수 없지. 진실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아. 미나스 티리스의 우리들은 오랫동안 시련을 견뎌왔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마법사의 힘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지만, 다 나름대로의 방식이니 어쩔 수 없지. 진실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아. 미나스 티리스의 우리들은 오랫동안 시련을 견뎌왔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마법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 정의를 세울 수 있는 힘이야. 그런데 봐! 이 어려운 시기에 운명은 우리에게 그 힘의 반지를 가져다준 거야. 나는 그것을 선물이라고 부르겠어. 모로도르에 대항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적의 힘으로 적을 치는 셈이니까. 두려움을 모르는 냉정한 이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어. 위대한 지도자, 전사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아라곤이라면? 만일 그가 거절한다면 이 보로미르는 어떤가? 그 반지는 내게 모든 지휘권을 부여할 거야. 모로도르의 무리들을 쫓아내고 나면 모든 사람들은 나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지 않겠는가?" 보로미르는 위아래로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의 이야기가 성벽과 무기와 군대의 소집에 이르렀을 때 그는 거의 프로도의 존재를 잊고 있는 듯했다. 그는 대동맹을 구상하고 영광의 승리를 꿈꾸었으며 드디어 모르도르를 정복하고 그 스스로 덕망있고 지혜롭고 위대한 왕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내버리라고 하고 있으니! 난 일부러 파괴란 말은 쓰지 않았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건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지. 기껏 우리의 계획이란 것은 당신 같은 하플링 혼자 무턱대고 모르도르로 들어가 적에게 반지를 그냥 넘겨주는 것밖에 안 돼.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그는 다시 프로도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 생각도 그렇지 않은가? 겁이 난다고 했지? 그건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야. 그렇다면 바로 그 생각이 당신의 옳은 생각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겁이 납니다. 그렇게 털어 놓고 보니 더 분명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미나스 티리스로 갈 텐가?" 보로미르가 물었다. 그의 눈에 광채가 일고 얼굴에는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프로도가 말하자 보로미르는 끈기있게 권유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가보면 어떤가? 미나스 티리스는 여기서 멀지않아. 그리고 모르도르로 가는 데도 여기서 가는 것보다 더 멀지도 않고. 우리는 오랫동안 황야를 돌아다니며 적의 동태를 감시해 왔기 때문에 당신한테 필요한 정보도 제공할 수 있어. 프로도, 나와 함께 가세. 그리고 설령 모르도르로 간다 하더라도 여행을 하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낫지 않아?" 그는 호비트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하지만 프로도는 그의 손이 흥분을 억제하느라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나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키가 거의 두 배가 되고 힘에 있어서는 상대도 안 될 거인이었다.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 나는 도둑도 사기꾼도 아닌 진실한 사람이야. 당신의 반지가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는가. 내 말은 그것을 가지겠다는 게 아니라 내 계획을 조금만 도와 달라는 것이야. 잠깐만 빌려주게!"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회의에서는 내게 반지를 맡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에게 무릎꿇고 만다면 그건 바로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야! 도저히 못 참겠군! 바보 같으니라고! 멍청한 고집쟁이! 일부러 사지에 뛰어들어 우리까지 죽이려 하다니! 만일 누군가가 그 반지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건 하플링이 아니라 바로 뉴메노르의 인간이야! 다만 운좋게도 네 손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그건 내것일 수도 있어. 내것이야! 이리 내놔!" 프로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바위 반대쪽으로 가서 그와 마주섰다. 보로미르는 좀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게, 친구. 이리 와! 그 짐을 벗어 버리는 게 어때? 그러면 의심도 공포도 사라질 걸세.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겨. 내가 너무 힘이 세서 빼앗겼다고 해도 좋아. 사실 하플링 너보다야 내가 힘이 셀 테니까." 그는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바위를 뛰어넘어 프로도에게 덤벼들었다. 잘생긴 호남형인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고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프로도는 몇 걸음 몸을 피해 다시 바위 반대편으로 갔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부르르 몸을 떨며 그는 줄에서 반지를 빼내 재빨리 손가락에 끼었다. 보로미르가 다시 덤벼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숨을 헐떡이며 잠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바위와 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프로도를 찾았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 사기꾼 같은 놈! 잡히기만 해봐라! 이젠 네 속셈을 알겠어. 반지를 사우론에게 바치고 우리 모두를 팔아넘길 셈이지? 네 놈은 지금까지 우리에게서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거야. 너희 하플링놈들은 전부 지옥에나 가라!" 그 순간 그는 돌부리에 걸려 얼굴을 땅에 처박고 넘어졌다. 호비트에게 내린 저주가 그 자신에게 씐 듯 그는 한참을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일어나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했어? 프로도! 프로도! 돌아와! 내가 귀신에 홀렸던 모양이야. 돌아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프로도는 이미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미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미친 듯 덤벼들던 보로미르의 흉포한 얼굴과 이글거리던 눈빛을 생각하며 그는 공포와 슬픔에 몸을 떨었다. 얼마 후 홀로 아몬 헨 정상에 이른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다. 안개 사이로 넓고 평탄한 원형의 땅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단단한 판석이 깔려 있고 사방으로는 총안이 있는 흉벽이 폐허가 된 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네 개의 돌기둥 위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마치 길잃은 아이가 산속 왕의 옥좌에 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그 퇴락한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인 안개나라에 온 느낌이 들었다. 반지가 여전히 그의 손가락에 끼여 있었다. 잠시 후 안개의 벽이 여기저기 뚫리면서 많은 환상이 나타났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환상이었지만 모두 바로 눈앞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듯 선명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생생하게 영상들만 환하게 빛났다. 바깥세상은 조그맣게 줄어들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 뉴메노르인들의 눈의 산, 아몬 헨 정상에 있는 눈의 보좌였다. 멀리 동쪽으로는 미지의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평원과 원시림이었다. 북쪽으로는 안두인 대하가 리본처럼 뻗어 있었고 안개산맥이 갈라진 이빨처럼 들쑥날쑥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로한의 광대한 초원이 보였고 이센가드의 첨탑 오탕크가 검은 칼날처럼 솟아 있었다. 남쪽으로는 바로 발 밑에서 안두인 대하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라우로스 폭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물거품이 하얗게 피어오르며 은은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는 하류의 거대한 삼각주 에디르 안두인을 보았다. 수많은 바다새들이 햇빛 속에 흰 무리를 지으며 선회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은초록빛 바다가 끝없는 파도 속에 넘실거렸다. 그러나 사방 어디를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운이었다. 안개산맥은 꿈틀거리는 개미탑처럼 수천 개의 구멍 속에서 오르크들이 튀어나왔고 머크우드의 숲 속에서는 요정과 인간과 사나운 짐승들의 필사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베오른인들의 땅은 화염이 충천했고 모리아는 구름에 덮여 있었으며 로리엔의 숲가에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한의 초원에서는 기사들이 말을 달리고 있었고 이센가드에서는 늑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라드의 항구에서는 전함들이 출항했으며 동쪽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칼과 창을 든 무사들과 말을 탄 궁수들, 그리고 지휘관들을 태운 수레와 짐을 실은 마차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암흑의 군주 휘하의 모든 세력이 출동한 것이었다. 그는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미나스 티리스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었지만 아름다운 도시였다. 흰 성벽과 수많은 첨탑들이 산 속에 아름답고 당당하게 서 있었고 성벽 위 흉장에는 창검이 번쩍이고 포탑 위는 빛나는 깃발로 가득 찼다. 그의 가슴에 희망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미나스 티리스를 대적하는 또 다른 성채가 있었다. 더 거대하고 더 견고한 요새였다. 그의 눈길은 자기도 모르게 동쪽으로 끌리고 있었다. 폐허가 된 오스킬리아스의 다리와 기분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미나스 모르굴의 입구, 그리고 유령 같은 산맥을 지나 그의 눈은 모르도르의 공포의 계곡 고르고로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햇빛 속에서도 어둠에 뒤덮여 있었고 연기 속으로 불꽃이 이글거렸다. 운명의 산도 불타오르며 화염이 충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도 고정되고 말았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위용을 자랑하는 검은 성벽과 흉장, 철의 산, 철의 관문, 철석같이 견고한 첨탑을 보았다. 바랏 두르, 사우론의 요새였다. 희망의 불꽃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그 눈을 느꼈다. 암흑의 탑 속에 잠자지 않는 눈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히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염력이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그것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겠지. 그 눈은 아몬 로를 점령하고 다시 톨 브란디르 너머를 살피기 시작했다. 프로도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주저앉으며 회색모자로 머리를 감쌌다. 그는 스스로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다른 소리도 들렸다. 정말 제가, 제가 그쪽으로 오라고요?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혀 반대쪽에서 또 다른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빼! 반지를 빼! 바보야, 빼! 반지를 빼란 말이야! 마음속에서 두 힘이 싸우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는 양쪽의 예리한 칼끝 사이 한가운데서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다. 갑자기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다시 깨달았다. 그 목소리도 아니고 눈동자도 아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도 이젠 마지막이었다. 그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그 높은 의자 밑에서 밝은 햇살을 받으며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팔처럼 드리워졌던 어둠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림자는 아몬 헨을 놓치고 서쪽에서 서성이다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하늘은 맑아지고 푸르름을 되찾았으며 새들이 가지마다 노래부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벌떡 일어났다. 말할 수 없는 피로가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확고했고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는 큰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난 이제 임무를 수행해야겠어. 한 가지 분명한 건 반지의 마력이 벌써 우리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야. 더 많은 해를 끼치기 전에 반지는 떠나야 해. 난 혼자 떠나야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동지가 벌써 생겼지. 더구나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이들이니 또한 같이 가선 안 돼. 불쌍한 샘, 메리, 피핀! 스트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지. 그의 마음은 미나스 티리스를 향하고 있어. 보로미르가 이제 악의 손아귀에 빠져들었으니 그는 그곳에 정말 필요한 인물이야. 나는 혼자 가야 해. 지금 즉시!" 그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 보로미르가 자신을 발견했던 그 풀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멈춰 섰다. 강변 근처 숲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날 찾고 있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건가?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갈 수 없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야.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난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지만 이해하겠지. 샘은 분명히 이해할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그는 천천히 반지를 꺼내 다시 손가락에 꼈다. 그는 모습을 감추고 바람처럼 가볍게 언덕을 내려갔다. 일행은 오랫동안 강가에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은 불편한 몸을 꿈지럭거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다시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따금 그들은 지금까지의 긴 여행과 수많은 모험들을 이야기하며 반지를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아라곤에게 곤도르와 고대의 역사, 그리고 이곳 에민 뮐 변경에 남아 있는 거대한 유적들에 관해 물었다. 아라곤은 바위를 깎아 만든 제왕들의 동상, 아몬 로와 아몬 헨 정상의 보좌, 그리고 라우로스 폭포 곁의 대층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는 언제나 프로도와 반지로 돌아오곤 했다. 프로도는 어떤 길을 택할까? 왜 그는 망설이는 걸까? 아라곤이 말했다. "그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길인지 고민하고 있어. 당연한 고민이야. 우린 지금까지 골룸의 추격을 받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지. 우리들의 여행 목적이 이미 적에게 발각된 것인지도 몰라. 하지만 미나스 티리스라고 해서 우리 짐을 쉽게 벗어 버릴 수 있는 곳은 아니지. 당분간은 거기서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엘론드조차 자신없다고 했던 일을 데네도르공과 그 병사들이 해낼 가능성은 없어. 반지의 비밀을 지키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이 밝혀져 적이 총공세를 취해 올 때 막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가 프로도의 입장이면 어떤 길을 택하겠는가? 나도 모르겠네. 지금처럼 갠달프가 아쉬워 본 적이 없어." 레골라스가 말했다. "슬픈 일이지만 그의 도움 없이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요. 왜 우리가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프로도를 도와 줄 수 있을텐데. 지금이라도 그를 불러서 투표를 합시다. 나는 미나스 티리스를 지지합니다." 김리도 말했다. "나도 동감이야. 우린 물론 반지의 사자와 동행하도록 뽑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명의 산까지 가겠다는 맹세를 하거나 그런 명령을 받은 일은 없어요. 원하는 데까지만 가는 거지요. 사실 난 로스로리엔을 떠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 하지만 지금 여기까지 와서 이제 마지막 선택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프로도를 버려두고 혼자 갈 수는 없지. 난 미나스 티리스를 지지하지만 프로도가 반대한다면 그를 따르겠어요." 레골라스가 다시 말했다. "나 역시 그와 함께 가겠어요. 여기 와서 그를 떠난다는 것은 배신이야." 아라곤이 말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질세. 그건 정말 배신이지. 하지만 그가 동쪽으로 간다고 해도 내 생각엔 우리 모두 다 따라갈 필요는 없어.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되고. 그 길은 위험한 길이니까 혼자서 가나 두세명이 가나 아니면 여덟이 모두 가나 어렵긴 마찬가지야. 자네들이 내게 결정권을 준다면 나는 세 명의 동지를 선택하겠어. 샘은 도무지 설득이 안 될 테니까 우선 들어가고 그 다음에 김리와 날세. 보로미르는 부친과 국민들이 있는 고향도시로 돌아가고 나머지 일행도 그와 같이 가도록 하게. 만일 레골라스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적어도 메리아독과 페레그린은 그리 가야 하네." 그러자 메리가 외쳤다. "말도 안 됩니다! 우린 프로도를 떠날 수 없어요! 피핀과 나는 그가 어디를 향하건 함께 가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전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었지요. 멀리 샤이어나 리벤델에 있을 때는 달리 생각되었으니까요. 프로도를 모르도르로 보낸다는 것은 미친 짓이자 잔인한 일이에요. 왜 그를 말리면 안 되지요?" 피핀도 말했다. "그를 막아야 해요.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거든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터놓고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불쌍한 분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모르도르에 혼자 간다니 말이나 돼요?" 피핀은 몸을 떨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참 어리석은 양반이에요. 우리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분이라면, 만일 자길 못 막는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길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러자 샘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피핀, 당신은 우리 프로도씨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계시는 게 아니에요. 아니고말고요! 미나스 티리스로 가면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지요? 내 생각에는, 또 그분 생각에는, 미안합니다만 보로미르." 샘은 그렇게 덧붙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보로미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전까지 그는 둘러앉은 일행의 바깥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갔을까? 그 사람 내가 보기엔 요새 조금 이상해졌어요. 물론 우리 일과는 관계가 없겠지만. 아마 자기 말대로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런 모양이니 탓할 것은 못 되겠지요. 여하간 프로도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명의 산 분화구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다만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제 분명한 것은 그분이 겁을 먹고 있다는 점이에요.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물론 그 동안 집을 떠난 뒤로, 우리 모두 그렇지만, 꽤 단련이 되긴했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너무 겁이 나서 반지를 강물 속에 던져 버리고 달아나셨을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 그분이 걱정하시는 건 우리가 아니에요. 그분은 우리가 따라나설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세요. 그것이 또 어려운 문제 중 하나지요. 만일 그분이 용기를 내 모르도르에 간다면 그분은 혼자 가실 거예요. 제말을 잘 들으세요! 그분이 돌아오시면 아마 우리는 한바탕 난리를 쳐야 할 거예요. 틀림없이 혼자 간다고 나설 테니까요." "샘, 자넨 정말 생각이 깊네. 만일 자네 말이 옳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라곤이 물었다. "막아야지요! 못 가시게 해야 합니다!" 피핀이 외쳤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럴까? 하지만 그는 반지의 사자야. 반지의 운명은 그에게 달린 거야.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는 건 우리 도리가 아니지. 설사 그렇게 해본들 성공은 장담할 수가 없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그에게 작용하고 있으니까." 다시 피핀이 말했다. "어쨌든 프로도가 용기를 내고 돌아와서 함께 이겨냈으면 좋겠어요. 기다린다는 건 정말 지겨운 일이에요. 시간도 지나지 않았나요?" "그렇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침나절이 다 지나갔어. 프로도를 찾아보세." 그때 보로미르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숲 속에서 걸어나와 말없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약간 슬픈 표정이었다. 그는 모여 있는 이들의 숫자를 세듯이 잠시 둘러보다가 눈을 땅으로 떨구고 따로 떨어져 앉았다. 아라곤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소, 보로미르? 프로도를 보았소?" 보로미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언덕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동쪽으로 가지 말고 미나스 티리스로 가지고 권했지요. 내가 화를 좀 내자 뒤로 물러서더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렇게 희한한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반지를 낀 모양입니다.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난 그가 여기 돌아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전부요?" 아라곤은 매우 엄한 표정으로 보로미르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샘이 일어서며 외쳤다. "수상해요! 이 사람이 여태까지 뭘 하다가 왔는지 모르겠어요. 프로도씨가 왜 반지를 낍니까? 절대로 낄 리가 없어요. 만일 끼셨다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예요!" 메리도 거들었다. "절대로 반지를 끼는 법이 없어요. 빌보 아저씨와는 달라서 보기 싫은 손님이 오더라도 반지를 끼진 않았어요." 이번에는 피핀이 외쳤다. "그럼 어딜 갔을까? 지금 어디 있지? 시간이 벌써 한참 지났는데." 아라곤이 다시 물었다. "보로미르, 당신이 프로도는 만난 게 얼마나 됐소?" "아마 삼십 분, 아니면 한 시간쯤 됐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리고나서는 한참 돌아다녔거든요. 난 모릅니다! 난 몰라요!"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비참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샘이 외쳤다. "사라지신 지 한 시간이나! 지금 당장 찾아봐야 해요. 당장요!" 아라곤이 외쳤다. "잠깐만! 몇 조로 나눠서 찾아보세. 잠깐! 기다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샘이 먼저 뛰어갔고 메리와 피핀도 그 뒤를 따라 서쪽 숲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프로도! 프로도!'하는 맑은 고음의 호비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골라스와 김리도 달려갔다. 그들 사이에 갑자기 공포와 혼란이 찾아온 듯했다. 아라곤은 신음소리를 냈다. "모두 흩어지면 길을 잃을 텐데. 보로미르,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날 도와 주시오. 저쪽 두 명의 젊은 호비트들을 뒤따라가서 프로도를 못 찾더라도 잘 지켜 주오. 만일 그를 찾거나 무슨 흔적을 발견하면 여기로 돌아오고. 나도 곧 돌아오겠소." 아라곤은 번개같이 뛰쳐나가 샘의 뒤를 쫓았다. 마가목나무 사이 작은 풀밭에 이르러 그는 숨을 헉헉대며 언덕을 오르는 샘을 발견했다. 샘은 계속 '프로도씨!'하고 외쳐 대고 있었다. 아라곤이 소리쳤다. "샘, 같이 가! 우린 따로 떨어지면 안 돼. 여긴 위험한 곳이야. 예감이 이상해. 난 아몬 헨 정상에 올라가서 살펴볼 거야. 이것 보! 내 짐작대로야. 프로도가 여길 지나갔어. 자, 눈을 똑바로 뜨고 따라오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샘은 젖먹던 힘까지 내 따라갔지만 순찰자 스트라이더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곧 뒤처지고 말았다. 아라곤의 모습도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샘은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갑자기 그는 손으로 이마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 샘 갬기! 다리가 짧으면 머리를 써야지. 보자! 보로미르는 성격상 거짓말을 하진 못해.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은 건 분명히 아니었어. 프로도씨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용기를 내서... 드디어 떠나시기로 작정을 하셨다! 어디로? 동쪽이야. 샘도 없이? 그래, 샘도 버려 두고. 안 돼! 말도 안 돼!" 샘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잠깐, 갬기! 한번 생각해 봐! 그분은 강물 위로 날아갈 수도 없고 폭포 밑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어. 게다가 아무 장비도 없으시잖아. 그렇다면 배로 되돌아가신 게 틀림없어. 배 있는 데! 샘, 배 있는 데야!" 샘은 돌아서서 미친 듯이 산길을 뛰어내려갔다. 넘어져 무릎이 까졌지만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렸다. 그는 배를 물에서 끌어올려놓은 강가의 파스 갈렌 초원 가까이에 다가갔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등뒤의 숲 속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입을 벌린 채 꼼짝도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배 한 척이 저절로 강둑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샘은 소리도 지르지 않고 풀밭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배가 물 속으로 띄워지고 있었다. "같이 가요, 프로도씨! 같이요!" 샘은 소리를 지르며 강둑에서 물로 뛰어들어 달아나는 배의 고물을 향해 손을 뻗쳤다. 그러나 바로 일 미터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며 물을 첨벙거리던 샘은 얼굴을 아래로 떨구며 깊고 빠른 물살에 휩쓸려들었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그는 물 속에 잠겨 들었고 강물이 그의 곱슬머리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빈 배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노가 빙글빙글 돌더니 배가 방향을 돌렸다. 샘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텀벙거리며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프로도는 겨우 그의 머리를 움켜잡을 수 있었다. 그의 둥근 갈색 눈동자에 공포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샘, 올라와! 자, 내 손을 잡아!" "살려 줘요, 프로도씨! 물 먹었어요. 손이 안 보인다고요." "여기 있어. 손을 너무 꼭 잡지 마. 널 죽이진 않을 테니까. 허둥대지 말고 물을 발로 차도록 해봐. 잘못하면 배까지 뒤집힌단 말이야. 자, 여기 뱃전을 붙잡아. 노를 쓸 수 있어야지." 노를 몇 번 저어 프로도는 배를 강변에 다시 댈 수 있었고 샘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강변으로 기어올라왔다. 프로도는 반지를 빼고 다시 강변으로 내려섰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사고뭉치가 바로 너야, 샘!" 그러자 샘은 덜덜 떨며 말했다. "아니, 프로도씨, 너무 심해요. 말도 안 돼요. 우리 모두를 버려두고 혼자 가시다니요. 제 짐작이 틀렸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어요?" "무사히 가고 있겠지." "무사해요? 저 같은 조수도 없이 혼자 말입니까? 차라리 저를 죽이고 가지 어떻게 그냥 가실 수가 있어요?" "나하고 같이 가면 그게 바로 죽는 길이야, 샘. 내가 널 꼭 죽음으로 몰고 가야겠어?" "그래도 뒤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난 지금 모르도르로 가는 거야." "잘 알아요. 물론 그쪽으로 가실 줄 알았어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자, 샘! 제발 나를 방해하지 마! 다른 일행들이 곧 나타날 텐데. 또 이야기하고 다투다 보면 용기도 다시 사라질 거도 기회도 없어져. 지금 가야 해. 그 수밖에 없어." "물론이지요. 하지만 혼자는 안 됩니다. 저를 태워 주시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가실 수 없어요. 정 우기신다면 배마다 구멍을 내버리겠어요." 프로도는 어이가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고 용기가 생겼다. "한 척은 남겨 둬. 우리가 써야 할 테니까. 하지만 넌 아무 장비도, 식량도 없이 이렇게 갈 거야?" 그러자 샘은 신이 나서 외쳤다. "잠깐만요, 제 물건을 가져오겠어요. 준비가 다 되어 있지요. 오늘 떠날 줄 알았거든요." 그는 야영지로 달려가 프로도가 동료들의 짐을 실은 배에서 물건을 꺼낼 때 쌓아 놓은 더미에서 자기 짐을 꺼내고 여분으로 담요 한 장과 식량을 좀더 챙긴 다음 달려왔다. "이래서 내 계획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군. 널 떼놓고 가기가 이렇게 힘들 줄 알았겠어. 하지만 샘, 난 기뻐.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야. 이제 가세! 우린 원래부터 같이 다니게 되어 있나 봐. 우리가 떠나가면 남은 이들은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스트라이더가 잘 인도하겠지. 그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아마 그럴 거예요. 십중팔구는요." 이렇게 해서 프로도와 샘은 그들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했다. 프로도가 노를 저어 강변에서 멀어지자 강물은 그들을 곧 톨 브란디르의 험상궂은 절벽 오른쪽으로 몰고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라우로스 폭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샘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섬 남쪽 끝에서 물살을 가로질러 강 건너 동쪽 강변까지 배를 몰고 가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몬 로 남쪽 경사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경사가 완만한 강변을 발견해 배를 그 위로 끌어올리고 커다란 바위 위에 가능한 한 보이지 않게 잘 숨겼다. 그리고 양 어깨에 짐을 지고 에민 뮐의 회색언덕을 넘어가는 길을 찾아 어둠의 대지로 드디어 발을 들여놓았다. 옮긴이 김 번 1959년 울산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 한성대 강사. 주요논문 「죠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세계 연구」외. 김보원 1958년 경북 영양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방송통신대학 전임강사. 주요논문 「토마스 하디의 Jude the Obscure 연구」 「로렌스 스턴의 소설들에 나타난 센티멘탈리즘」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영소설 전통」외. 이미애 춘천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서울대, 국민대 강사. 주요논문 「Joseph Conrad와 공동체의식」외. 반지전쟁 The Lord of the Rings J.R.R. 톨킨 / 김번 김보원 이미애 옮김 2 반지군주 지상의 요정왕들에겐 세 개의 반지 돌집의 난쟁이왕들에겐 일곱 개의 반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에겐 아홉 개의 반지 어둠의 권좌에 앉은 암흑의 군주에겐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은 절대반지 어둠만 살아 숨쉬는 모르도르에서. 차례 제 1 장 보로미르의 죽음 제 2 장 로한의 기사 제 3 장 우르크 하이 제 4 장 트리비어드 제 5 장 백색의 기사 제 6 장 로한의 군주 제 7 장 헬름협곡 제 8 장 이센가드로 가는 길 제 9 장 표류물 제 10 장 사루만의 목소리 제 11 장 팔란티르신석(神石) 제 12 장 스메아골 길들이기 제 13 장 늪지횡단 제 14 장 암흑의 성문 닫히다 제 15 장 향초와 토끼스튜 제 16 장 서역의 창 제 17 장 금지된 웅덩이 제 18 장 교차로 제 19 장 키리스운골의 계단 제 20 장 셸로브의 굴 제 21 장 샘와이즈의 선택 제1장 보로미르의 죽음 아라곤은 마음을 졸이며 급히 언덕으로 내달렸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땅바닥을 살피기도 했다. 호비트들은 걸음이 가벼워 발자국을 남기지 않아 순찰자 아라곤조차도 좀처럼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정상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소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 부근의 습지에서 그는 자신이 찾고 있는걸 보았다. 그는 거기서 멈춰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찾긴 제대로 찾은 거 같군. 저 꼭대기로 올라간 게 틀림없어. 거기서 뭘 봤을까? 그런데 이상한 건, 왔던 길로 다시 언덕을 내려갔단 말이야......" 아라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더 올라가 보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마음은 급하고 시간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날리듯 바위와 계단을 뛰어넘어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언덕 아래와 발 밑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이미 날은 저물기 시작했고 세상은 어스름 속에 희미하게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북쪽에서부터 한 바퀴 빙돌아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올 때까지 다시 구석구석 뒤져 보았건만, 저 멀리 언덕밖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주 높이 떠 있는 독수리같이 생긴 새 한 마리가 천천히 맴을 돌며 지상으로 내려앉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눈앞의 사물들을 살피는 동안에도 그의 예민한 귀는 대하 서쪽의 풀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그 소리 중에 오르크의 거친 비명소리가 섞여 있음을 알고 오싹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깊은 뿔나팔소리가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소리를 제압하고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보로미르의 뿔나팔이다! 위급하구나!" 그는 튀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아! 오늘은 악연이 뻗쳐 하는 일마다 모두 어긋나는구나. 샘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아래로 내려가자 오르크 소리는 한결 약해졌고 대신 뿔나팔소리는 더욱더 처절하게 울려퍼졌다. 그런데 오르크들의 비명소리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갑자기 뿔나팔소리도 뚝 그쳤다. 아라곤은 사력을 다해 더 급히 비탈길을 뛰어내려갔다. 언덕 기슭에 도달하기도 전에 오르크 소리는 이미 한풀 꺾여 잦아들었다. 그가 왼쪽으로 돌아 소리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자 그 비명소리는 뒤로 물러났고, 마침내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번쩍이는 칼을 뽑아 들며 나무들을 헤치고 엘렌딜을 외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파스 갈렌에서 일 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의, 호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숲 속 빈터에서 보로미르를 발견했다. 보로미르는 꼭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보로미르의 몸 여기저기에 검은 깃의 화살이 숱하게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보로미르는 칼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그 칼은 손잡이가 부러져 있었고 그 옆에 두 동강 난 뿔나팔이 놓여 있었다. 죽어 나자빠진 오르크들의 시체가 그 주위에 널려 있었다. 아라곤은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않았다. 보로미르는 힘겹게 눈을 뜨고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침내 천천히 흐릿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프로도한테서 반, 반지를 빼앗으려 했소. 미안합니다.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거요." 그의 눈길은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쓰러진 적들에게 멎었다. 줄잡아 스무 명은 됨직했다. "오르크들이 하플링들을 잡아갔소. 그렇지만 아직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놈들은 그들을 생포해 갔으니까요." 말을 멈추고 그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있어요, 아라곤. 나...... 는 실패...... 했소." 아라곤은 가슴을 훑어내리는 듯한 슬픔을 참아내느라 애쓰며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니오. 그대는 이긴 거요. 아직까지 그대만큼 용감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자는 거의 없었소. 마음을 편히 갖는 거요. 미나스 티리스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보로미르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플링들은 어느 쪽으로 갔소? 프로도도 거기 함께 있었소?" 그러나 보로미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 곤도르 영주의 후계자가 이렇게 쓰러져 버리다니...... 참혹한 종말이로군! 이제 우리 원정대도 완전히 무너진 거야. 실패한 건 오히려 나야. 갠달프가 나를 믿은 건 정말 큰 실수였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보로미르도 내가 미나스 티리스로 가길 원하고 또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도대체 반지와 반지의 사자는 어디갔단 말인가? 무슨 수로 그들을 찾아서 대열을 다시 정비한단 말인가?" 그는 보로미르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레골라스와 김리가 그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들은 사냥꾼처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기어서 비탈길을 올라왔다. 김리는 손에 도끼를 움켜쥐고 있었고 레골라스는 화살이 다 떨어져 긴 칼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막 빈터로 들어선 그들은 뜻밖의 광경에 멈칫했다.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한 그들은 잠시 숙연하게 머리를 숙였다. 레골라스가 아라곤에게 다가가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 우린 숲 속에서 많은 오르크놈들을 박살냈지만 차라리 여기서 함께 싸웠더라면 이런 불행이 닥치지 않았을 것을...... 뿔나팔소리가 나기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너무 늦어 버렸군. 당신은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보로미르가 죽었다네. 나도 방금 여기 왔기에 다치지는 않았어. 내가 언덕 위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그는 호비트들을 보호하다 쓰러졌네." 김리가 소리쳤다. "호비트라고요? 그럼 그들은 어디 있는 거요? 프로도는요?" 아라곤은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맥없이 대답했다. "나도 모르네. 숨이 끊어지기 전에 보로미르가 말해 주기를 오르크놈들이 그들을 생포해 갔다더구먼. 죽이진 않았을 거라고 하더군. 나는 그에게 메리와 피핀을 따라가라고 일렀었네. 그러나 프로도나 샘도 그와 함께 있었는가 물어 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네. 오늘 내가 한 일은 하나같이 어긋나 버렸어. 이제 어떻게 한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먼저 시신을 거둬야지요. 이 더러운 오르크놈들 속에 그를 썩은 고기마냥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어요."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린 서둘러야 해. 그도 우리가 여기서 꾸물거리길 원치 않을 거야. 우리 원정대원 중 누군가가 생포되었다면 우린 오르크놈들 뒤를 쫓아야 당연한 거 아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러나 놈들이 반지사자도 함께 잡아갔는지 아닌지 우리로선 모르지 않나? 그를 저버려야만 하나? 먼저 그를 찾으러 가선 안 될까?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일세."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격식대로 매장을 할 시간도 장비도 당장은 없으니 우선 약식으로 돌무덤을 만드는 게 어떻겠소?" 김리가 말했다. "그러자면 시간도 걸리고 힘들 거야. 물가로 나가야지 이 근처에선 돌 구하기도 힘들어요." 아라곤이 말했다. "그를 라우로스 폭포로 옮겨 안두인 강에 떠내려 보내세. 적어도 곤도르의 강은 그 어떤 사악한 놈도 감히 그의 유골을 욕되게 하지 못하도록 돌봐 줄 걸세."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오르크들의 시체를 뒤져 칼이나 쪼개진 투구 그리고 방패들을 주워 모아 한쪽에 쌓아 올렸다. 아라곤이 외쳤다. "봐! 여기 표시가 있어." 그는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무기더미 속에서 풀잎 같은 날에 황금색과 붉은색 무늬로 장식된 두 자루의 칼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더 뒤져서 붉은색 보석이 박힌 검은색 칼집도 찾아냈다. "이건 오르크놈들 게 아니야. 호비트들이 갖고 다니던 거야. 틀림없이 오르크놈들이 호비트들을 약탈하긴 했지만 칼까지 갖긴 두려웠던 거야. 그 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진 않을 테니까. 모르도르를 파멸시킬 마력이 서린 서역의 작품이거든. 자, 그럼 우리 친구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무기는 갖고 있지 않다고. 헛된 기대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난 이것들을 챙겨 가야겠네." 레골라스도 말했다. "나는 화살통이 비었으니 화살이나 챙겨 가야겠어요." 그는 무기더미와 주변을 뒤져서 상당한 분량의 화살을 찾아냈다. 그것들은 모두 멀쩡했고 오르크들의 화살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어 보였다. 그는 그것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아라곤이 시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이렇게 널브러진 놈들 중엔 모르도르에서 오지 않은 놈도 상당히 끼어 있는 것 같네. 내가 아는 바로는 오르크와 그 족속들은 북부의 안개산맥에서 내려왔지. 그런데 여기 내가 모를 놈들도 섞여 있는데 이놈들 장비는 오르크 양식이 아냐." 거기엔 오르크들보다 키가 훨씬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은 사시인 데다가 굵은 다리와 두툼한 손을 가진 마귀 같은 꼬락서니의 병사들도 넷이나 끼어 있었다. 그들은 오르크들이 통상 쓰는 언월도가 아니라 그보다는 약간 더 짧고 날이 넓은 칼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이나 모양으로 봐서 인간들 것과 비슷하게 생긴 주목으로 만든 화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방패 위에는 검은 들판 한복판에 작고 흰 손이 얹힌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철갑투구 전면에는 흰 금속으로 만든 S자 모양의 이상한 표시가 붙어 있었다. 아라곤이 중얼거렸다. "이런 표시들은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뭘 뜻하는 걸까?" 김리가 말했다. "S는 사우론을 의미하겠지요. 그건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레골라스가 외쳤다. "아냐! 사우론은 요정의 문자를 쓰지 않아." 아라곤도 레골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본명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걸 글자로 쓰거나 부르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네. 그리고 그는 흰색을 쓰질 않네. 바랏 두르를 따르는 무리들은 빨간 표시의 눈을 쓰지......" 아라곤은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 채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선 한참을 기다려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S는 사루만을 뜻하는 것 같네. 이센가드에서는 악이 횡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서부도 안전치 못해. 갠달프가 우려한 대로 배신자 사루만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우리 원정대에 관한 정보를 알아냈음이 틀림없어. 그는 이미 갠달프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을지 몰라. 모리아에서 온 추적자들은 로리엔의 감시망을 벗어났거나 아니면 그곳을 피해서 다른 길로 이센가드에 갔을 가능성도 있어. 오르크들은 빠르거든. 또 사루만은 많은 소식과 정보망을 가지고 있지. 그 새떼 기억나지?"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린 수수께끼를 두고 궁리나 할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닙니다. 우선 보로미르부터 옮기고 볼 일이지요."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고나선 수수께끼에 대해 더 궁리해야 할 걸세. 우리의 진로를 올바로 선택하려면." 김리가 별로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아마도 안전한 길을 잡아 가긴 이미 틀린 것 같은데요." 난쟁이는 도끼로 나뭇가지 몇 단을 쳐왔다. 그들은 활시위로 나뭇가지를 묶고 그 틀 위에 자기들 옷을 벗어 깔았다. 그들은 대충 엮어 만든 들 것 위에 동료의 시신과 추려 놓은 그의 마지막 전리품을 싣고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까지 거리는 실상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보로미르의 체구가 워낙 건장했기 때문에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레골라스와 김리가 파스 갈렌으로 간 사이에 아라곤은 시선을 지켜보며 물가에 남아 있었다. 일 마일 남짓한 거리라 그들의 강변을 따라 서둘러 배를 저어 와도 돌아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레골라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이상해. 기슭엔 보트 두 척만 남아 있고 한 척은 흔적도 보이질 않아요." 아라곤이 곤두선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오르크놈들도 있던가?" 김리가 대답했다. "아니, 아무 기척도 없었어요. 놈들이 있었다면 보트를 죄다 약탈해 가고 거기다 행장까지 그냥 두진 않았을 텐데." 아라곤이 말했다. "가서 좀 살펴봐야겠군." 그들은 보로미르를 보트 한가운데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들은 잿빛 두건과 요정의 옷을 보로미르의 머리 밑에 받쳐 주고 검게 윤이 나는 그의 긴 머리를 곱게 빗겨 양 어깨 위로 가지런히 정돈해 두었다. 그의 허리 근처에선 황금빛 혁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곁에 투구를 놓아 두고 무릎 위엔 쪼개진 뿔나팔과 칼의 손잡이, 파편들 그리고 발치에는 적들의 칼을 모아 놓았다. 그런 다음 뱃머리를 옆에 있는 또 한 척의 보트의 꼬리에 잡아매고는 배를 물가로 끌어냈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힘없이 노를 저었다. 배는 급류를 따라 파스 갈렌의 푸른 초지를 지나갔다. 톨 브란디르의 가파른 비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한낮도 한참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남쪽에선 황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가 아물거리며 사라졌다. 세차게 우르릉거리는 폭포소리가 바람 한 점 없는 대기를 흔들었다.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실은 보트를 띄워 보냈다. 보로미르는 미끄러져 가는 배 위에 평화로운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들이 노를 저어 자신들이 탄 배의 방향을 가눌 동안 강물은 보로미르를 데려갔다. 그를 태운 배는 그들 곁을 떠돌다가 천천히 멀어져서 황금빛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점으로 작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우로스는 여전히 깊은 탄식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하는 보로미르를 영원히 데려가 버린 것이다. 이젠 미나스 티리스에선 아침이면 백색탑 근처를 산책하던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후일 곤도르에선 그 요정의 배가 별이 빛나는 밤에 거품이 일렁이는 폭포를 타넘고 오스길리아스와 안두인 강 어귀들을 지나 그를 대하까지 실어다 주었다고 오랫동안 전해졌다. 세 친구는 한동안 말을 잃고 떠나가는 그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라곤이 입을 열었다. "백색탑에선 그를 찾으려 하겠지만 이제 그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는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풀이 무성한 늪지와 들판을 넘어 로한을 지나 서풍이 불어와서 성벽 근처를 기웃거린다. '오, 떠도는 바람이여! 너는 오늘밤 서쪽에서 어떤 소식을 가져왔느냐? 너는 달빛에 혹은 별빛에 거한 보로미르를 보았느냐?' '나는 일곱 시내와 드넓은 잿빛 바다를 타고 넘는 그를 보았다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땅을 헤매다가 마침내 북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았다오. 그리곤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했다오. 혹시 북풍은 데네도르의 아들의 뿔나팔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른다오.' '오, 보로미르! 나는 높은 성벽에 올라가서 서쪽 멀리까지 내려다봤지만 너는 아무도 없는 그 텅 빈 땅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구나.' 다음엔 레골라스가 노래했다. 대하 어귀에서, 모래언덕과 돌무더기에서 남풍이 불어온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싣고 온 남풍은 성문 근처를 서성이며 신음한다. '오, 그대 한숨짓는 바람이여! 이 밤에 너는 남쪽에서 무슨 소식을 듣고 왔기에 그토록 애절하게 통곡하느냐? 보로미르는 지금 어디 있느뇨?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느라 나는 이렇게 애끓고 잇는데...' '그는 험한 세상, 하얀 나라와 검은 나라에 누워 있다오. 그들 소식은 북풍에게 물으시구려.' '오, 보로미르! 바다로 난 길은 성문을 넘어 남으로 뻗어 있건만 너는 잿빛 바다 어귀에서 울부짖는 갈매기와 함께 떠나더니 돌아오질 않는구나.' 그 다음엔 아라곤이 다시 노래를 받았다. 궁성에서 북풍이 내달아 쾅쾅대는 폭포를 지나 그 깊은 뿔나팔소리는 망루 근처에서 애절하고 차갑게 울린다. '오, 힘찬 바람이여! 너는 오늘 내게 어떤 소식을 가져왔느냐? 용자(勇者) 보로미르의 어떤 소식을?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아몬 헨 아래서 그의 비명소리를 들었다오. 거기서 그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오. 그의 갈라진 방패와 부러진 칼은 물결이 실어왔다오. 그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아름다운 얼굴로 편안히 누워 있었다오. 그리고 라우로스는, 그 아름다운 황금빛 라우로스는 넓은 품안에 그를 끌어안았다오.' '오, 보로미르! 백색탑은 언제까지나 북녘 하늘을, 황금빛 찬연한 라우로스 폭포를 응시할 것이리.' 이렇게 그들은 애도가를 끝마쳤다. 이제 그들은 보트의 방향을 돌려 물결을 거슬러올라가 빠른 속도로 파스 갈렌으로 되돌아갔다. 김리가 말했다. "대장은 우리에게 동쪽 바람에 대해 의문을 남겼지만 난 지금 당장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겠어요." "그래야지. 미나스 티리스 사람들은 늘 동풍을 접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소식을 묻지는 않지. 그나저나 이제 보로미르도 제 갈 길을 잡았으니 우리도 서둘러 길을 정해야 하겠지." 그는 민첩한 동작으로 잔디가 깔린 땅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오르크놈들은 여기 없었네. 만약 놈들이 이리로 왔다면 여기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발자국도 다 지워져 버렸을 걸세. 그런데 우리가 프로도를 찾기 시작한 후로 호비트들 중 누군가가 이 근처를 서성였던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는 시냇물이 흘러나와 대하로 접어들어가는 강기슭 근처까지 살폈다. "이것 좀 보게. 여기 발자국이 똑똑히 보이지? 분명히 호비트 하나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어. 흠, 그런데 얼마나 된 건지 알 수가 없군." 김리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엔 이 일이 어떻게 된 거 같아요?" 아라곤은 대답을 미뤄 두고 지난밤 야영했던 장소로 되돌아가 짐을 살펴보았다. "짐 두 개가 없어. 하난 틀림없이 샘의 것이야. 그 친구 것은 부피도 꽤 크고 묵직한 것이거든. 그렇다면, 일은 이렇게 된 거야. 프로도는 배를 타고 떠났고 샘도 따라갔어. 프로도는 우리가 모두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이곳으로 돌아왔던 것이 틀림없어. 나는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샘을 만나 나를 따라오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 그는 자기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곤 주인이 떠나기 전에 다시 이리로 돌아온 거야. 또 프로도로서도 샘을 두고 떠날 순 없었던 거고." 김리가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그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 아라곤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기있는 결정이기도 하지. 나는 프로도가 굉장히 사려깊은 친구라고 생각하네. 프로도는 어느 누구도 모르도르에서 맞게 될지도 모를 죽음이 늪으로 끌고 가길 원치 않았던 거야. 오로지 자기 혼자 떠나야 함을 알았던 거지. 그러나 그는 막상 혼자 떠나려고 결정한 순간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져 두려움과 회의를 느낀 거야." 레골라스가 말했다. "혹시 오르크들에게 쫓겨 달아난 건 아닐까요." 아라곤이 말했다. "그가 무언가에 쫓겼던 것만은 확실해. 그러나 내 생각엔 오르크들한테 쫓긴 건 아닌 것 같네." 아라곤은 프로도가 갑작스런 결정을 내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보로미르가 죽어가면서 했던 마지막 고백을 그는 오랫동안 비밀로 묻어 두었던 것이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자, 이젠 꽤 많은 것이 분명해졌어. 프로도는 이제 우리 곁에 없고 보트를 타고 갔다는 점, 그리고 샘도 자기 짐을 꾸려 그를 따라갔을 것이라는 점 말이야." 김리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남아 있는 보트를 타고 프로도를 따르든가 아니면 육로로 오르크놈들을 뒤쫓는 것으로 좁혀지는군. 어느 쪽이든 희망이라곤 거의 없지만 말이야. 우리는 이미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아라곤이 말했다. "이제부터 좀 곰곰이 생각해야지. 지금이라도 이 사나운 날의 악운을 바꿀 수 있도록!" 그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오르크들을 쫓겠네. 마음 같아선 모르도르까지 프로도와 함께 가고 싶지만 만일 지금 우리가 그를 따라간다면 프로로 잡혀간 호비트들은 고통을 당하다 죽어 갈 것이 분명해. 이제 반지의 사자와 내 운명은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분명해. 이제 반지의 사자와 내 운명은 갈림길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네. 원정대는 이제 소임을 다했어. 남은 우리는 힘이 남아 있는 한 동지들을 저버릴 순 없네. 자, 이제 돌아가는 거야. 당장 급하지 않은 건 미련없이 훌훌 털어 버리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해야 해." 그들은 타고 온 보트를 끌어올려 나무에 묶어 둔 다음 필요없는 물건들은 놓아 두고 파스 갈렌을 떠났다. 보로미르가 쓰러졌던 빈터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막 오후의 햇살이 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오르크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행적을 남기는 놈들도 별로 없지. 놈들은 길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더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물을 닥치는 대로 베고 쓰러뜨리는 악랄한 놈들이니까. 그러나 그놈들은 그렇게 대단한 속도로 길을 가면서도 지치지도 않아. 나중에 우린 잡초조차 다 뽑혀나간 휑뎅그렁하니 빈 땅에서 놈들을 찾아 헤매게 될지도 몰라." 김리가 말했다. "자, 놈들을 쫓아야지. 우리 난쟁이들은 걸음이 빨라. 그리고 쉽게 지치지도 않지. 그러나 이번에는 꽤 힘든 상대를 만났군. 놈들은 벌써 여길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됐어." 아라곤이 말했다. "그래. 지금 우리에겐 난쟁이의 안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지. 어쨌든 추격을 시작하세. 놈들을 잡을 가능성이 있든 없든 우린 적들을 쫓아야 해. 만약 우리가 전속력으로 쫓아간다면 놈들도 별수 없을 거야. 우린 요정, 난쟁이 그리고 인간의 삼족의 역사에 불가사의로 남을 추격을 개시할 걸세. 삼인의 추격자여, 앞으로!" 그는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뛰쳐나갔다. 그는 나무를 헤치며 나는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결정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번복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재빠른 동작으로 일행을 인솔해 갔다. 그들은 호수 근처의 숲을 지나 가파른 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탈은 이미 해가 떨어진 노을을 배경으로 붉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잿빛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제2장 로한의 기사 땅거미가 짙어졌다. 그들 등 뒤 나무숲에선 안개가 피어올라 안두인 강의 가장자리로 희미하고 낮게 깔렸으나 하늘은 맑았다. 별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서편 하늘 위로 떠오른 차가운 달이 바위들의 윤곽을 희끄무레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그들이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한 둔덕은 돌투성이였기 때문에 오르크들의 발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거기서부터 에민 뮐의 고지대까지는 북에서 남으로 길고 들쑥날쑥한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능선 서쪽 사면은 워낙 가팔라서 오를 엄두를 내기 힘들었고 동편 비탈도 좁은 협곡과 골짜기들로 꽉 들어차 있어 만만치가 않았다. 일행은 그 밤 내내 뼈처럼 딱딱한 땅바닥을 기어 맨 첫 봉우리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랐다가 다시 반대쪽의 깊고 구불구불한 계곡의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해가 뜨기 전 아직 서늘할 때 그들은 거기서 잠시 숨을 돌렸다. 달은 들어간 지 오래였고 머리 위에선 희미한 새벽별들이 흰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도 해는 어두컴컴한 뒤편 구릉 속에 숨어 있었다. 거기서 아라곤은 몹시 난처해 했다. 계곡 아래로 이어진 오르크들의 자취가 거기서 뚝 끊긴 것이다. 레골라스가 근심스레 중얼거렸다. "놈들은 어디로 간 걸까? 대장 짐작대로 놈들은 이센가드나 판곤을 목표로 삼고 그리고 가는 지름길로 곧장 북쪽으로 간 걸까, 아니면 엔트워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 걸까?" 아라곤이 말했다. "그놈들의 목적지가 어디든 강 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걸세. 그리고 아직 로한에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고, 사루만의 힘이 거기까지 미친 게 아니라면 놈들은 로한의 들판을 가장 빠른 길로 질러가려고 할 걸세. 계속 북쪽으로 추적해 보자고." 그 골짜기는 마치 돌로 구유를 깎아 놓은 듯 불쑥 솟은 언덕들 사이로 편편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밑바닥엔 둥글둥글한 자갈이 들여다보이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오른쪽 위로는 험악한 벼랑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고 왼편으론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희미한 그림자 같아 보이는 잿빛 비탈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일 마일 남짓 나아갔다. 아라곤은 허리를 굽혀 서쪽 능선으로 뻗쳐오르는 골짜기들을 수색했다. 레골라스는 그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서가던 레골라스가 큰 소리로 뭐라 외쳤다. 아라곤과 김리는 황급히 그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레골라스는 발치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우린 놈들 가운데 몇 놈을 잡았군. 자, 봐요!" 그들이 처음에 비탈 밑바닥에 깔린 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렇게나 쌓아 둔 오르크들의 시체였다. 오르크가 다섯이나 거기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들 대부분은 여기저기 숱한 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 중 둘은 목이 잘려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검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김리가 말했다. "또 하나 수수께끼가 나타났어요. 하지만 이걸 풀려면 날이 밝아야 하는데 우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잖아." 레골라스가 말했다. "흠, 자네가 그걸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내가 보기엔 이건 우리에게 희망이 될 것도 같은데. 오르크놈들의 적이라면 우리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그리고는 아라곤을 향하여 물었다. "이 구릉에 사는 종족이 누가 있지요?" "없네. 로한인들도 좀체로 이곳까지는 오지 않아. 미나스 티리스에서는 너무 먼 곳이고. 다른 종족 인간들이 이곳까지 사냥을 나왔다면 혹 모를까...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김리가 물었다. "그럼 뭘까요?" "내 생각엔 놈들 가운데 서로 다른 종족까지 내분이 일어난 것 같아. 이놈들은 북쪽에서 온 오르크들이야. 여기 죽은 놈들 중에는 이상한 배지를 단 덩치 큰 오르크는 하나도 없거든.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것 같아. 이 더러운 족속들 간에는 흔한 일이지. 아마 모르긴 해도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놓고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 김리가 말했다. "아니면 포로들 처리 문제로 티격태격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무튼 그 와중에 호비트들 신상에 아무 일이 없기나 바라야지." 아라곤은 그 인근 일대를 수색해 보았지만 더 이상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벌써 동편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별들은 흐릿하게 스러져 갔고 잿빛 아침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북진해 가다가 지면이 움푹 꺼진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엔 아래로 굽이쳐 흘러가는 실개천이 계곡 저 밑바닥까지 길을 하나 내놓고 있었다. 그 밑바닥엔 자갈이 깔린 땅 위로 관목들이 몇 그루 서 있었고 양 옆으로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거기서 아라곤이 갑자기 일행의 걸음을 제지하더니 약간 흥분이 감도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야 놈들의 자취를 찾게 된 모양이군. 이 물길을 좀 보게. 오르크놈들은 아까 거기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곧장 이 길로 달려간거야." 그들은 이제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새로 찾은 흔적을 쫓아갔다. 지난밤의 휴식으로 생기를 얻은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회색 언덕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갔다. 그때 돌연, 한 줄기 미풍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옷자락을 살랑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대하 건너 언덕 저편 하늘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햇무리가 어둑어둑한 대지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그들 눈앞에 펼쳐진 서쪽 세계는 형체도 없이 고요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밤의 어둠은 녹아내렸고 대지는 제 빛깔을 찬란하게 드러내며 되살아나고 있었다. 로한의 드넓은 초원 위로 초록빛이 물결처럼 넘실대고 있었고 계곡 위론 하얀 아침 물안개가 가물가물 깔리고 있었다. 왼쪽으로 멀리 구십 마일 남짓 되는 곳에는 백색산맥이 청보랏빛으로 우뚝 버티고 있었다. 청보랏빛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짙어져 꼭대기는 거의 칠흑 같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거무스레한 꼭대기 위에 쌓인 하얀 눈 위로 아침이 선명한 장밋빛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라곤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곤도르, 곤도르! 훗날 행복한 시간에 너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너를 향해 달리는 강물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곤도르! 산맥 너머, 바다 건너 빛나는 곤도르! 서풍은 소슬하게 불어오고 은빛나무는 옛 왕들의 정원에서 밝게 빛난다. 오, 자랑스런 성벽이여! 순백의 탑이여! 오, 날개돋힌 왕관과 황금의 옥좌여! 오, 곤도르, 곤도르! 이내 몸 언제 가서 다시 은빛나무를 볼 수 있을까? 서풍이 산 넘고 바다 건너 불어올 때는 그 언제인가? 그는 남쪽을 향했던 흐린 눈길을 거두고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만 가세!" 그들이 서 있던 능선 바로 발 밑에서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능선 아래 사십 미터 남짓 되는 곳에서 깎아지른 듯 가파른 벼랑이 끝나고 울퉁불퉁한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다. 로한의 동쪽 경계였다. 에민 뮐은 그렇게 끝나고 로한의 넓푸른 평원이 그들 눈길 닿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머리 위를 쳐다보며 레골라스가 말했다. "저기 좀 봐요. 그 독수리가 또 나타났어. 아주 높이 떠 있는데.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모양이야. 대단한 속도군." 아라곤이 말했다. "내 눈엔 아직 보이지 않아, 레골라스. 그 독수리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이 떠 있는 거야. 지금 자네 눈에 보인다는 새가 전에 내가 봤던 새하고 같다면, 무슨 임무를 띠고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우선은 저 앞쪽을 좀 보게. 더 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저기 평원에 뭔가 움직이고 있어!" 레골라스가 말했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에요. 대부대인 것 같아요. 그 이상은 잘 모르겠군. 어떤 놈들인지도. 아직은 너무 멀어요. 한 삼십육 마일쯤 될까? 워낙 넓은 평원이라 가늠하기가 더 어렵군."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이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저 벌판으로 내려갈 지름길을 찾읍시다." 아라곤이 말했다. "오르크놈들이 택해 간 길보다 더 빠른 지름길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제 그들은 밝은 햇빛 아래서 적들을 쫓기 시작했다. 오르크들은 최대한으로 서둘러서 달려갔던 것 같았다. 이따금 그들은 땅바닥에 버려지거나 떨어진 것들, 식량 자루들, 딱딱한 회색 빵덩어리와 부스러기들, 찢겨진 검은 외투, 돌멩이에 부딪혀 망가진 징박힌 무거운 장화 한 짝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자취를 따라 북쪽으로 급경사진 길을 끼고 나아갔다. 마침내 그들은 요란하게 튀어내린 물줄기에 의해 바위에 깊은 골이 파인 곳에 도착했다. 그 골 사이로 구불구불한 길이 급경사로 내리뻗어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쭉 내려가서 로한의 초지에 당도했다. 초원은 마치 초록빛 바다처럼 에민 뮐의 산자락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떨어지는 물줄기는 후추풀과 수초가 우거진 깊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 졸졸대는 물소리로 짐작컨대 그 물줄기는 푸른 초지의 지하로 길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엔트워시 계곡의 늪지를 향해 잦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구릉지대에서부터 집요하게 따라붙던 겨울을 떨쳐 버린 기분이었다. 여기에선 마치 봄이 벌써 꿈틀거리고 풀잎과 꽃잎 하나하나에 봄의 수액이 다시 차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공기는 한결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또 희미하게나마 봄내음도 맡을 수 있었다. 레골라스는 오랫동안 사막을 헤매다 물을 만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공기를 폐부 깊숙이 한껏 들이키며 말했다. "아, 이 풀냄새! 푹 잠을 자고난 것처럼 기운이 솟는군. 자, 이제 뛰어 봅시다." 아라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여긴 걸음이 가벼운 편이 오히려 유리하겠는걸. 징박힌 장화를 신은 오르크놈들보다 말이야. 이제 우리는 놈들과의 거리를 좀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거야!"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뛰는 그들의 눈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서쪽으로 행진해 갔던 오르크들이 휩쓸고 지나간 초지에는 흉칙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뒤 향기로운 풀밭은 꺼멓게 짓이겨져 있었다. 갑자기 앞서 뛰던 아라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비켜 섰다. "멈춰! 잠깐 기다려!" 그는 오른쪽으로 급히 몸을 틀어 달려나갔다. 거기서부터 거친 발자국과 신발을 신지 않은 듯한 작은 발자국이 갈라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자국들도 얼마 안 가 맨 처음 발견했던 흉칙한 발자국들 앞뒤에서 떨어져 나간 오르크놈들의 발자국과 엇섞여 버렸다. 그러다 돌연 그 작은 발자국들은 방향을 되잡아 틀더니 거친 발자국 속에 묻혀 버렸다. 아라곤은 그 근처에서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찾아 들더니 영문도 모르고 멀뚱하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둘에게로 달려왔다. "맞아. 호비트 발자국이야. 내 생각엔 피핀의 발자국 같아. 피핀이 메리보다는 발이 작거든. 그리고 이것도 좀 보게."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물건 하나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나무라고는 없는 이 초원 지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너도밤나무 이파리처럼 생긴 앙증스런 물건이었다. 레골라스와 김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요정의 외투에 달린 브로치다!" 아라곤이 말했다. "그래, 로리엔의 물건이 괜히 이런 곳에 떨어져 있을 리 없지. 이건 우연히 떨어진 게 아니야. 우리가 뒤따라올 것을 예상하고 표시를 남긴 거야. 피핀은 이걸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들 무리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힌 거지." 김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기는 한 거군. 또 기지를 부릴 여유도 있고 발도 놀릴 수 있는 모양이야. 정말 고무적인 일인데. 우리의 추격이 헛된 것은 아니었군." 레골라스도 말했다. "그런 용기를 냈다가 호되게 당하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럽군. 자, 어서 갑시다. 그 명량한 젊은 친구들이 소처럼 끌려다닌다 생각하니 정말 안쓰럽기 짝이 없어."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서서히 오후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 먼 남쪽 바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새털구름이 미풍에 실려가고 있었다. 해가 뚝 떨어졌다. 그들 뒤로는 그림자가 길게 팔을 뻗고 있었다.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보로미르가 쓰러진 지 하루가 지났고 오르크들은 아직 멀리 앞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이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밤그늘이 그들 주위로 완연히 내려앉자 아라곤은 걸음을 멈췄다. 그날 추적 도중 그들은 딱 두 번 쉬었고 그 휴식도 잠시뿐이었다. 이제 그들이 동쪽 경계선에서 달려온 거리는 약 육십 마일쯤 되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여기서 우린 어려운 선택을 해야겠어. 여기서 쉬면서 밤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힘자라는 데까지 계속 뒤쫓아갈 것인가." 레골라스가 말했다. "만약 우린 여기서 지체하고 있는데 놈들이 계속 행군을 한다면 우리를 훨씬 앞질러 버리게 되겠지요."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오르크놈들도 쉬긴 쉬겠지. 놈들은 원래 탁 트인 곳으로는 다니질 않는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야." "놈들은 밤에도 쉬지 않을 거야." "우리가 이 밤에 행군을 계속한대도 놈들의 자취를 찾긴 어렵잖아? 이렇게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는데." "내 눈길이 미치는 한 놈들 자취는 곧장 일직선으로 향하고 있어. 이 정도 어둠 속에선 자네와 아라곤을 인도할 밝은 눈을 가진 내가 있잖아?" 그러자 아라곤이 끼어들었다. "자네 마음은 충분히 헤아리고 있네. 그러나 만일 말일세, 우리가 길을 잃거나 놈들이 옆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내일 다시 자취를 찾기까지는 상당히 애로가 있을 것이고 오히려 시간도 더 걸릴 걸세." 김리가 말했다. "이런 걱정도 있어요. 우린 오직 빛이 있을 때만 발자국 방향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아까 본 것처럼 호비트 중 누군가가 놈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동쪽이나 모르도르 쪽 대하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놈들은 필시 그를 추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발자국을 찾아 놈들을 추적하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말 거라고요." 아라곤이 말했다.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까 본 오르크 시체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현재로선 사루만의 오르크들이 주도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당연히 놈들은 이센가드로 향하고 있을 거야. 지금까지의 방향이 그걸 입증해 주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지." 다시 김리가 말했다. "그러나 그런 추측을 그대로 믿고 추적을 계속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어요. 만일 어둠 속이었다면 아까같이 피핀이 남겼을지도 모르는 브로치 같은 건 못 찾았을 거야."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래, 자네 말도 맞지만 이런 가능성도 좀 생각해 봐. 오르크놈들은 그 일이 있은 후로 경계를 더 철저히 할 것이고 호비트들 처지도 훨씬 고달플 거야. 만약 우리가 손쓰지 않는다면 다시는 도망칠 꿈도 못 꿀걸.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아직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지만 우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놈들부터 따라잡아야 한다는 거야." 김리는 계속 고집을 피우며 말했다. "그러나 걷는 일엔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이력이 붙었을 만큼 대단한 우리 난쟁이 종족, 그 중에서도 지구력이라면 남못지 않은 나 조차도 이 상태로 이센가드까지 줄곧 달릴 수는 없어. 나도 마음 같아선 빨리 갔으면 좋겠어. 그러나 일보 전진을 위해 지금은 좀 쉬어야겠어. 그리고 쉴 바엔 지금같이 캄캄한 밤이 좋을 거고." 아라곤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까 어려운 선택이라고 말했잖나? 이 논쟁을 어떻게 끝낸다?" 김리는 다소 풀꺾인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우리의 길잡이고 또 추적에 능하니까 당신의 선택해야지요." 레골라스가 말했다. "내 마음은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나 우린 언제나 중지를 모아 행동을 개시해야 하니까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아라곤이 말했다. "자네들은 지금 선택에 서투른 자에게 선택권을 주는군. 우리가 아르고나스를 지나 오면서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해 버린 일들은 항상 어긋나지 않았던가?" 그는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북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둠 속을 행군하진 말도록 하지. 그들 자취를 놓칠 위험이 훨씬 클 것 같아. 달빛이라도 비치면 해볼 승산은 있지만 애석하게도 오늘밤은 달조차 흐릿하게 비치고 있으니까." 김리가 말했다. "그래요. 오늘밤엔 이미 달도 많이 기울었으니까. 갈라드리엘이 프로도에게 준 불빛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라곤이 말했다. "그쪽에 훨씬 요긴하게 쓰일 것을 다 헤아리고 프로도에게 준 것이겠지. 진짜 원정은 프로도 몫이야. 그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추적이란 기껏해야 새발의 피 정도지. 또한 우리의 추적도 애초부터 헛된 것이어서 지금 내가 내린 결정도 사실은 별 소용 없는 짓거리일지도 모르는 일일세. 자, 어쨌든 일단 선택은 끝냈으니 이제부터 시간을 실속있게 쓰도록 하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땅바닥에 몸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톨 브란디르 아랫단에서 잠깐 눈을 붙인 이래로 아직까지 한 잠도 못 잤던 것이다. 그는 동이 채 터오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김리는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해 있었으나 레골라스는 벌써 깨어나 북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라곤이 깨어난 것을 보고 그는 애석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들은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났어요. 그놈들이 지난밤 쉬지 않으리란 걸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요. 이제 오직 독수리만이 놈들을 쫓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라곤이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우린 힘닿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할 걸세." 그리고선 황급히 돌아서서 난쟁이를 깨웠다. "이봐, 그만 일어나게. 이제 떠나야겠네. 놈들의 냄새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 김리는 감기려는 눈을 겨우 뜨고 대꾸했다. "응응, 아직도 캄캄한데. 아무리 레골라스라 해도 해뜨기 전엔 그들을 볼 수 없잖아요." 레골라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이젠 환해지더라도 그들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야. 그놈들은 이미 내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나 싶어." 아라곤이 그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자네 시력이 여의치 않다면 이 초원이 우리에게 낙관적인 소식을 가져다줄 수도 있네. 그놈들의 잔인한 발길에 틀림없이 이 대지도 신음을 토해 놓았을 거야." 그는 지면에 몸을 납작하게 붙이고 귀를 댔다. 그가 그런 동작을 취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일어나지 않아서 김리는 그가 그대로 기절하거나 다시 잠들어 버린 게 아닌가 조바심치고 있었다. 새벽은 고양이걸음으로 슬그머니 그들 곁으로 다가왔고 희끄무레한 잿빛 박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근심이 잔뜩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이 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온통 뒤죽박죽이야. 수마일 내에선 아무 기척도 없어. 적들의 발소리도 흐릿하고. 그런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네. 말발굽소리가 요란해. 아까 잠결에도 언뜻 그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지. 서쪽으로 질주하는 말발굽소리 같았어. 그런데 그 소리는 북쪽으로 옮겨가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레골라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 갑시다." 이렇게 추격의 셋째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가 다시 해가 고개를 내밀길 반복하는 변덕스런 날씨에 그들은 쉬지도 않고, 때로는 잰걸음으로 때로는 뜀박질로 추적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피로해도 이미 그들의 가슴에 당겨진 불길을 끌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들은 램바스를 선물로 준 갈라드리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정을 느꼈다. 렘바스는 그들의 고된 행군에 더없이 훌륭한 활력소가 되었다. 적들의 자취는 방향이 바뀌거나 끊긴 데 없이 북서쪽으로 곧장 이어져 있었다. 또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그들은 민둥민둥한 둔덕 앞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은 더욱 단단해지고 풀이 더욱 짧아졌기 때문에 오르크들의 자취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왼편으로는 엔트워시 강이 초록빛 바탕에 은색 실로 수놓아진 것처럼 긴 선을 그리며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로한인들의 거처는 대부분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안개와 구름을 이고 있는 백색산맥 처마 아래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마 영주들이 왕국 동족인 이 이스템네트에서 많은 마소를 방목했었다. 목부들도 거기서 야영생활을 하면서 마소를 쳤었고 심지어는 겨울철에도 그 일대를 유랑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땅은 텅 비어 있었고 평화로운 고요함과는 사뭇 다른 기괴한 정적이 깔려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무렵 그들은 다시 멈춰섰다. 그들은 이제 로한의 평원을 칠십이 마일이나 지나왔고 에민 뮐의 경계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떠오른 달이 밤안개로 잔뜩 뒤덮인 하늘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고 별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이번엔 추격 도중에 멈추거나 쉰다는 게 정말 내키질 않아. 놈들은 마치 사우론이 바로 등뒤에서 채찍으로 닦달질이라도 하듯 우리의 속도보다 훨씬 앞질러 갔어요. 그놈들은 이미 저 앞 숲 어둠을 뚫고 질주해 가지 않았나 싶은데." 김리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도 산산이 부서지고 지금까지 애써온 보람도 없이 우리의 고생도 끝장나 버리게?" 아라곤이 말했다. "우리의 희망은 꺾일지 모르나 우리 고생만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걸세. 우린 여기서 되돌아가지 않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몹시 노곤하군." 그는 자기들이 지나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이 땅에선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난 이 정적을 믿지 않아. 저 으스름한 달도 믿지 않네. 별들이 흐릿한 데다가 몸까지 노곤해. 예전엔 쫓아야 할 확실한 목표가 있을 때는 좀체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 적들에게는 속도를 더해 주고 우리 앞길은 가로막는 어떤 힘이 우리에게 미치고 있어. 그리고 보면 실제로 사지가 노곤한 게 아니라 느낌이 그런 것 같아." 레골라스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요. 우리가 처음 에민 뮐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난 그걸 느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이상한 힘은 우리 뒤가 아니라 앞쪽에서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로한의 경계를 넘어 초승달 아래 어둠에 묻혀 있는 서쪽을 가리켰다. 아라곤이 중얼거렸다. "사루만이야. 그러나 그도 우리 앞을 가로막진 못해. 일단 우리는 한 번 더 여기서 멈춰야 해. 자 봐. 몰려드는 구름이 달까지 삼키고 있잖아? 날이 밝으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고원과 늪지뿐이야." 간밤을 꼬박 새운 건지 잠을 잔 건지 알 수 없지만 레골라스는 어제처럼 먼저 일어나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일어나요! 일어나! 해가 떠오르고 있어요. 숲 가장자리에서 뭔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길조인지 흉조인지 알 순 없지만 하여튼 우릴 불렀어요. 어서 일어나 보라고요." 그 소리에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출발했다. 점점 언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도 정오 한 시간 전이었다. 비탈길이 먼둥산 위로 북쪽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발에 밟히는 땅의 감촉은 팍팍했고 풀들도 대체로 짧은 편이었다. 갈대와 골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덤불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개천이 있었고 그 옆에는 폭이 약 십 마일쯤 되게 움푹 꺼진 땅이 있었다. 최남단의 비탈 바로 서쪽엔 잔디가 마구 짓밟힌 평원이 있었다. 거기서부터 오르크들의 자취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아라곤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자취를 면밀히 살폈다. "놈들은 여기서 잠시 쉬었어. 그러나 이 흔적도 꽤 오래된 거야. 레골라스, 자네가 예견한 대로 맞아떨어졌어. 지금 이 자리를 놈들이 지나간 건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것 같아. 놈들이 이 정도의 속도로 계속 질주해 갔다면 어제 해질 무렵에는 판곤의 경계선을 이미 넘었을지도 몰라." 김리가 말했다. "내 눈엔 저 멀리 북서쪽의 안개 속으로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풀포기밖에 안 보이는걸. 언덕 위에 올라서면 그 숲이 보일까?" 아라곤이 말했다. "숲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 내 기억으로는 이 구릉은 북쪽으로 이십사 마일 남짓 뻗어 있어. 그 뒤로는 엔트워시 강 어귀의 넓은 대지로 약 사십오 마일쯤 될 거야." 김리가 말했다. "자, 가자고. 내 발은 거리가 길건 짧건 간에 전혀 상관없어. 마음만 덜 무겁다면 속도를 더 낼 수 있을 텐데 말야." 마침내 그들이 구릉지의 능선 가장자리에 다가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장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행군했었다. 이제 그들은 지쳐 가고 있었다. 발을 쓰는 운동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난쟁이조차도 이처럼 끝도 없는 추적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발길을 재촉하던 아라곤은 이따금 지면 위에 몸을 바짝 붙이고 흔적을 살폈다. 레골라스만 지친 기색 없이 가볍고 힘찬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운지 풀밭 위엔 거의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요정인 그는 렘바스만으로도 충분한 기력을 낼 수 있었으며 눈을 뜨고 걸으면서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그런 수면법을 알지 못할 테지만. "자, 저 언덕 꼭대기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긴 비탈을 올라서 이윽고 꼭대기에 도달했다. 꼭대기는 평평했다. 해가 넘어가자 어둠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들은 이정표도 없고 거리를 가늠할 수도 없는 잿빛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멀리 북서쪽으로 사라져가는 빛이 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컴컴한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바로 안개산맥과 그 기슭의 숲이었다. "여기서는 방향을 정할 만한 표시물을 찾을 수가 없겠는데." 김리가 입을 열었다. "음, 이제 다시 발을 멈추고 밤을 지내야 하겠어. 점점 추워지는군." 아라곤이 말했다. "적설지대에서 불어오는 북풍 때문이야." 레골라스도 말했다. "아침이 밝기 전에 동풍으로 바뀌겠지. 쉬어야겠다면 그렇게 하지. 그렇지만 희망을 완전히 버리진 마.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때때로 해가 뜰 때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지." "우리가 추격을 시작한 이래로 벌써 해가 세 번이나 떠올랐지만 아무 도움도 안 됐어." 김리가 말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더 추워졌다. 아라곤과 김리는 잠들었다 깨어나곤 했다. 깰 때마다 그들은 레골라스가 곁에 서 있거나 이리저리 거닐며 자기종족의 언어로 나지막하게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노래에 맞추기라도 하듯 머리 위 견고한 검은 하늘에 하얀 별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들은 함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새벽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해가 솟았다. 희미하지만 밝은 해였다. 동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말끔히 걷어 버렸다. 주위엔 드넓은 대지가 냉랭한 햇살 속에서 을씨년스럽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전면 동쪽으로 이미 수마일 전부터 가끔씩 모습을 보이던 바람센 로한의 고원이 버티고 서 있었다. 판곤의 어두운 숲은 북서쪽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그 그늘진 경계는 아직 삼십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으며 그보다 먼 쪽의 비탈은 연푸른색으로 흐릿하게 보였다. 그 너머로는 안개산맥의 가장 끝 봉우리인 메세드라스가 우뚝 솟아 회색 구름 속에서 떠다니듯 눈덮인 정상을 가물가물 드러내고 있었다. 숲으로부터 흘러나온 엔트워시 강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물견은 빠르고 폭이 좁아서 양 기슭을 침식하고 있었다. 오르크들의 자취는 구릉지대에서부터 강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강을 거슬러 숲까지 살펴보던 아라곤은 멀리 초원 위에서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재빨리 움직이는 거뭇한 반점처럼 보였다. 아라곤은 엎드려 땅에 귀를 대고 진동을 감지했다. 그 옆에서는 레골라스가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요정의 빛나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흐릿한 반점이 아니라 작은 형체의 수많은 기병들을 보았다. 아침햇살에 번쩍이는 그들의 창끝은 마치 육안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멀리 뒤쪽에서 검은 연기가 가느다란 실처럼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텅 빈 들판에는 정적이 깔려 김리까지도 대기를 타고 전해 오는 공기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라곤이 일어서면서 외쳤다. "기사들이다! 많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레골라스도 말했다. "맞아요. 백다섯 명인데. 머리가 노랗고 창이 반짝이는군. 대장은 아주 키가 큰 사나이야." 아라곤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요정 눈은 날카롭군." "그런데 우리와의 거리는 한 십오 마일밖에 안 되겠는데요." "십오 마일이건 삼 마일이건 우린 이 헐벗은 평원에서 저들을 피할 수 없겠어. 여기서 저들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우리 길을 계속 가야 하나?" 김리가 물었다. "기다려야지. 난 지친 상태이고 또 우리의 추격은 수포로 돌아갔어. 아니면 적어도 다른 자들이 우릴 앞선 거야. 저 기병들이 오르크들의 자취를 다시 밟아 내려오고 있잖아. 저들로부터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창에 찔릴지도 모르지요." 김리가 투덜거렸다. "빈 안장이 세 개 보이지만 호비트는 없는데요." 레골라스도 말했다. "난 좋은 소식을 들을 거라고 말하진 않았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우린 여기서 기다리는 거야." 일행은 금세 눈에 띌 어슴푸레한 하늘을 등진 언덕 꼭대기를 떠나 북쪽 비탈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언덕 기슭에서 걸음을 멈춘 그들은 외투로 몸을 감싼 채 빛바랜 풀밭 위에 함께 웅크리고 앉았다. 시간은 느리게 그리고 무겁게 흘러갔다. 바람은 약했지만 살을 파고들 듯 날카로웠다. 김리는 불안하게 말했다. "아라곤, 당신은 저 기병들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앉아 있다가 졸지에 죽게 되는 건 아니에요?" "난 저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지. 저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자들이야. 하지만 신실하고 너그럽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용감하지만 잔혹하지 않고 현명하지만 식견은 별로 없어. 저들은 암흑 이전 인간의 방식대로 많은 노래를 부르지만 책은 전혀 쓰지 않아. 그러나 최근에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 로한의 영주들이 배신자 사루만과 사우론의 위협 속에서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 로한의 영주들은 곤도르인들과 혈연관계는 없지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어. 청년왕 욜이 그 종족을 북부에서 이끌고 온 것은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 전 일이야. 그들은 데일의 바드족, 그리고 숲의 베오른족과 혈연관계가 있지. 그래서 그 종족들 중에도 로한의 기사들처럼 키 크고 잘생긴 자들이 있는 거야. 어쨌든 저들도 오르크들을 좋아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만 갠달프는 그들이 모르도르에 연공을 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얘기한 적이 있지 않아요?" 김리가 말했다. "보로미르가 믿지 않았듯이 나도 그 소문을 믿지 않아." 아라곤이 말했다. 그러자 레골라스도 한마디 덧붙였다. "곧 진실을 알게 되겠지. 이미 그들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드디어 김리조차도 질주하는 말발굽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기병들은 자취를 따라오다가 강에서 방향을 돌려 구릉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처럼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 맑고 힘찬 음성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그 소리는 돌연 천둥 같은 굉음으로 바뀌었다. 선두에 선 기병은 언덕 기슭을 지나쳐 구릉지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부대를 이끌기 위해 길을 벗어났다. 그 뒤에는 번쩍이는 철갑으로 무장한 보기에도 용감한 기사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말을 몰아 긴 대열을 지어 달렸다. 그들이 탄 말은 키가 크고 굳세며 미끈한 다리를 가졌다. 등에 깐 회색 모피가 빛을 발했으며 꼬리가 치렁거렸고 갈기는 당당한 목덜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말들과 그 위에 탄 기사들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들은 키가 크고 사지가 길며 연한 아마빛 머리칼이 가벼운 투구 아래로 흘러내려 등뒤로 나부끼고 있었고 얼굴은 엄격하고 날카로웠다. 그들의 손에는 물푸레나무 만든 긴 창이 들려 있었고 등에는 색입힌 방패가 매달렸으며 벨트에는 긴 칼이 꽂혀 있었다. 무릎 위까지 드리운 갑옷은 잘 닦여져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둘씩 짝지어 말을 달려 지나갔다. 가끔 등자에서 몸을 일으켜 사방을 살펴보는 기사도 있었지만 말없이 앉아 자신들을 주시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무리가 거의 지나쳐갈 무렵 갑자기 아라곤이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로한의 기사들이여! 북쪽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은 겁니까?" 그들은 놀라운 속도와 기술로 말의 방향을 바꾸고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돌진해 왔다. 곧 그들은 언덕 비탈을 넘어 달려 내려와 셋을 포위했다. 아라곤만 일어섰고 김리와 레골라스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주시하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을 포위한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수풀처럼 빽빽하게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들 중 몇몇은 화살을 메긴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이윽고 그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기사 한 명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투구에는 하얀 말꼬리털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창끝이 아라곤의 가슴에서 한 자쯤 될 만큼의 거리까지 말을 몰고 나왔다. 아라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버터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 땅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 기사는 곤도르인인 보로미르와 같은 태도와 어조로 서부의 공용어로 말했다. "나는 스트라이더라 하오. 우린 북쪽에서 왔고 지금 오르크들을 쫓고 있소." 아라곤이 대답했다. 그 기사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을 달려와 그의 옆에 내려선 다른 기사에게 창을 건네준 후 그는 칼을 뽑아 아라곤과 얼굴을 마주하고 서서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 난 당신들을 오르크라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군. 그런데 이렇게 오르크들을 쫓다니 당신들은 정말 그놈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그놈들은 빠르고 잘 무장되어 있소. 또 수도 많고. 만일 그놈들을 따라잡았다면 당신들은 추격자에서 그들의 먹이로 신세가 바뀌었을걸. 그런데 스트라이더, 당신에겐 이상한 점이 있군." 그는 맑고 빛나는 눈을 다시 순찰자에게 돌렸다. "당신이 댄 그 호칭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야. 또 당신의 옷도 이상하고. 당신들은 풀밭에서 솟은 건가? 어떻게 우리 눈을 피한 거지? 당신들은 요정들인가?" "아니오." 아라곤이 대답했다. "우리들 중 한 명만이 요정이오. 멀리 머크우드의 우드랜드에서 온 레골라스요. 그러나 우린 로스로리엔을 거쳐 왔소. 그래서 갈라드리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기사는 놀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눈길은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옛날이야기대로 황금의 숲에 레이디가 계시는 거로군? 그녀의 그물을 벗어난 자는 거의 없다고들 하던데. 이상한 시절이야! 그런데 만일 당신들이 그녀의 은총을 받았다면, 정말 그렇다면 당신들 또한 그물을 짜는 자들이고 마법사들이겠군 그래." 그는 갑자기 레골라스와 김리에게로 차가운 눈길을 돌렸다. "왜 아무 말 않는 거지, 조용히 계시는 양반들?" 김리는 몸을 일으켜 두 발을 벌려 굳게 디디고 섰다. 손은 도끼자루를 굳게 쥐었고 검은 눈은 빛을 발했다. "기병대장,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오. 그러면 나도 내 이름을 밝히고 그 밖의 것도 말하겠소." 기사는 난쟁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점이라면, 이방인이 먼저 자신을 밝혀야지. 어쨌든 내 이름은 요문드의 아들 요머다. 리더마크의 제삼원수지." "그러면 리더마크의 제삼원수, 요문드의 아들 요머여, 글로인의 아들 난쟁이 김리가 당신에게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 말라고 경고하겠소. 당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해서 정당한 것을 나쁘게 말하는데,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오." 요머의 눈에 불꽃이 튀었고 로한인들은 격분하여 뭐라고 지껄이며 창을 뻗치고 죄어들어왔다. "만일 네가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이 서 있었다면 난쟁이 네놈의 그 수염까지 포함해서 머리 전부를 베어 버렸을 거다!" 요머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레골라스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손을 놀려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며 외쳤다. "그는 혼자가 아니오! 당신의 칼이 떨어지기 전에 당신은 죽을거요." 요머는 칼을 치켜들었다. 일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자 아라곤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손을 들어올렸다. "사정을 좀더 알게 되면 왜 당신이 내 동지들을 화나게 했는지 이해할 거요. 우린 로한에, 또 로한의 누구에게도 - 사람이건 말이건 -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소. 내리치기 전에 우리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어떻겠소?" 칼을 내리며 요머가 말했다. "좋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믿기 어려운 시절에 리더마크를 방랑하는 자들은 그렇게 오만을 부리지 않는 게 현명할 거야. 먼저 당신의 본명을 말하라." 아라곤이 말했다. "먼저 당신이 누굴 받드는지 말하시오. 당신은 모르도르의 암흑의 군주 사우론의 친구요 아니면 적이오?" 요머가 대답했다. "나는 오로지 마크의 영주이자 덴겔의 아드님이신 데오든왕만을 받들 뿐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암흑의 땅의 권력자를 받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직 그와 공공연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당신들이 그에게서 달아나고 있는 거라면 이 땅을 떠나는 게 좋다. 지금 우리의 모든 변경지대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고 있고 우린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우린 우리의 것을 지키고, 선하든 악하든 이방의 영주를 섬기지 않으면서 오로지 우리가 살아온 대로 살고 자유롭고자 할 뿐이다. 좋은 시절엔 우리도 손님을 따스하게 환영했지만 요즘엔 지나치는 이방인들이 우릴 냉혹하다고 생각하지. 자, 그러면 당신은 누구이며 누굴 받드는가? 누구의 명령에 의해 우리 땅에서 오르크들을 쫓는가?" "나는 누구도 받들지 않소." 아라곤이 말했다. "그러나 사우론을 받드는 놈들이라면 어느 땅이고 가리지 않고 쫓아가오. 죽지 않을 수 있는 운명을 갖지 못한 인간들 중에 오르크들에 관해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요. 그리고 난 이런 식으로 아무 준비 없이 그들을 쫓지는 않소. 우리가 지금 추격하고 있는 오르크들은 우리의 친구 두 명을 포로로 데려갔소. 이런 급박한 처지에서 말이 없으면 걷는 수밖에 없고 또 허락을 일일이 받을 수도 없는 거요. 그리고 적의 머릿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칼로 베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거요. 내게도 무기는 없지 않으니까." 아라곤은 망토를 젖혔다. 요정의 칼집에 손이 닿자 번쩍 빛을 발했다. 그가 뽑아든 칼 안두릴은 불길처럼 빛을 발했다. 아라곤은 외쳤다. "엘렌딜! 난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이오! 엘레사, 엘프스톤, 듀나단이라고도 불리는, 곤도르의 엘렌딜의 아들 이실두르의 후계자요! 이것은 한때 부러졌다가 다시 버려진 칼이오. 당신은 나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방해하겠는가? 속히 선택하오!" 김리와 레골라스는 놀라서 자신들의 동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가 이런 분위기를 뿜어 내는 것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라곤은 거대하게 보였고 상대적으로 요머는 위축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엄숙하고도 힘이 넘치는 얼굴에서 아르고나스의 왕 조상들이 지녔던 권위와 힘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잠깐 동안 레골라스는 아라곤의 눈썹 위에 하얀 불길 같은 왕관의 흔들리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뒤로 물러선 요머의 얼굴에는 외경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오만한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요즘은 정말 이상한 시절이군. 꿈과 신화가 느닷없이 초원에서 튀어올라 현실로 변하다니. 말씀해 주시오. 무슨 일로 여기 오셨는지.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말의 뜻은 무엇인지. 데네도르의 아들 보로미르가 해답을 찾으려고 떠난 지 오래건만 우리가 그에게 빌려주었던 말은 벌써 혼자 돌아왔었소. 당신은 북방에서 어떤 운명을 가져오신 겁니까?" "선택의 운명이오. 당신은 덴겔의 아들 데오든께 이 말을 전하시오. 사우론 편에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그에 대항해 싸울 것인가 말이오. 이제 전면전이 가로놓여 있소. 이젠 누구도 이제껏 살아온 대로 살 수는 없을 것이며 자기 것을 주장하며 지킬 수 있는 자도 거의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선 차후에 이야기하게 될 거요. 혹 사정이 허락되면 내가 직접 왕께 갈 것이오. 그러나 지금 난 매우 급박하오. 그래서 도움을, 적어도 소식을 청하는 거요. 당신은 우리가 친구들을 데려간 오르크들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소. 자,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무얼 말해 줄 수 있겠소?" 요머가 말했다. "당신들이 더 이상 그놈들을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줄 수 있소. 오르크놈들은 전멸했소." "우리 친구들도?" "우린 오르크들밖에 못 보았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인데. 살해된 시체들을 살펴보았소? 오르크들의 시체말고 다른 시체는 없었소? 우리 친구들은 작아서 당신들 눈엔 어린애처럼 보일 거요. 신발은 신지 않고 회색옷을 입었는데." "난쟁이나 어린애는 없었소. 우린 시체들을 모두 헤아려 무기를 거둔 다음 우리 관습대로 한군데 쌓아 불태워 버렸소. 유골은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소." "우린 난쟁이나 어린애를 말하는 게 아니오. 우리 친구들은 호비트들이오." 김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요머가 물었다. "호비트라고? 그들은 어떤 이들이오? 이상한 이름이군." "이상한 종족에 이상한 이름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소중한 친구들이오. 당신들도 이 로한 땅에서 곤도르를 들쑤셔 놓았던 그 전갈을 들었을 텐데요. 하플링에 관한 이야기 말이오. 호비트가 바로 하플링이오." 그러자 요머 곁에 서 있던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하플링! 하플링이라! 그렇지만 그들은 북부의 옛 노래와 아이들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작은 종족인데, 백주에 우리가 전설 속을 걷는 건지 아니면 녹색 초원에 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 둘 다일 수도 있지. 우리 뒤를 따를 후손들이 우리의 이 시대를 전설로 이야기할 테니까. 녹색 초원이라고 했소? 그것도 전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겠지. 비록 당신이 백주에 밟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라곤이 말하자 그 기사는 그에 신경쓰지 않고 요머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대장, 우린 서둘러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이 야만인들은 제멋대로 공상 속에 있으라고 내버려 두고 갑시다. 아니면 묶어서 왕께 끌고 가든지." 그러자 요머는 자기네 언어로 말했다. "조용히, 요다인. 잠시 저쪽으로 가 있어라. 병사들을 길 위에 집결시켜 엔트웨이드로 달릴 준비를 갖추도록 해라." 요다인은 투덜거리며 물러나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곧 그들은 물러서고 요머만이 아라곤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아라곤, 당신이 말씀하신 건 하나같이 이상한 이야기로군요. 그렇지만 당신이 진실을 말씀하신 것만은 분명하오. 우리 마크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그래서 쉽게 속지도 않아요. 그러나 당신은 전부를 말씀하진 않았소.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사명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소?" "나는 노래 속에나 등장하는 임라드리스에서 몇 주 전에 출발했소. 미나스 티리스의 보로미르가 도행했소. 내 임무는 데네도르의 아들과 함께 그 도시로 가 사우론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르는 그의 종족을 돕는 것이었소. 그러나 나와 함께 출발한 원정대원 중에는 다른 임무를 맡고 있는 친구도 있소. 그 점에 대해선 지금 말할 수 없소. 회색의 갠달프가 우리의 지도자였소." 요머가 외쳤다. "갠달프라고요? 갠달프 그레이함은 우리 마크에서도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당신께 미리 알려 두지만 그 이름은 더 이상 우리 왕께 호의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기억하기론 그가 이 땅에 손님으로 온 적이 많았었소. 내키는 대로 한철이 지나면 오기도 하고 수년 만에 오기도 하고 말이오. 이제 와서 사람들이 말하기론 그가 언제나 이상한 사건들, 대개 불행한 사건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사실 그가 지난 여름 마지막으로 왔던 이후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소. 그때 사루만과 우리의 분쟁이 시작되었소.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루만을 친구로 생각했지만 갠달프가 와서는 이센가드에서 돌발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소. 그는 자신이 오탕크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말하고는 도움을 청했소. 그러나 데오든왕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또 그의 도움도 거절해 버리자 그는 가버렸소. 그 후 왕께서는 자기 앞에서 다시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명하셨소. 격노하셨던 거지요. 왜냐하면 갠달프가 섀도우폭스라는 말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소. 그 말은 왕의 군마 중에 가장 소중한 말이고 오로지 마크의 영주만이 탈 수 있는 메아라스종의 종마였소. 그 종자의 최초 종마는 욜의 위대한 말로서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요. 이레 전에 섀도우폭스는 돌아왔지만 왕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았소. 그 말이 사나워져서 어떤 사람도 길들일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럼 섀도우폭스는 그 먼 북부에서부터 혼자 길을 찾아 돌아왔군! 갠달프와 헤어진 곳은 여기에서 아주 먼 북쪽이었소. 그러나 아! 갠달프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타지 못할 것이오. 그는 모리아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요." "그건 우울한 소식이군요.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에겐. 그렇지만 왕께 가시면 알게 되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라곤이 말했다. "그건 이 땅의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비통한 소식이오. 오래지 않아 절실히 느끼게 되겠지만. 그러나 위대한 자가 떠나 버리면 그보다 덜 위대한 자라도 이끌어야 하오. 나의 역할은 우리의 원정대를 모리아로부터의 기나긴 길로 안내하는 것이었소. 우린 로리엔을 거쳐 왔소. 이건 당신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지요. 그리고 거기서 대하를 따라 십여 마일을 내려와 라우로스 폭포에 다다랐소. 거기서 보로미르는 당신들이 전멸시킨 바로 그 오르크들에게 살해되었소." 그러자 요머가 외쳤다. "당신이 전해 주는 소식은 비통하기 짝이 없군요. 그의 죽음은 미나스 티리스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커다란 손실이오.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었소. 그는 마크에는 좀처럼 오지 않았었소. 언제나 동쪽 변경의 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지요. 내가 보기에 그는 엄숙한 곤도르인이라기보다는 욜의 날렵한 후손들을 닮았고 때가 되면 자기 종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떠오를 것 같았소. 그러나 우린 곤도르로부터 이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소. 그가 언제 쓰러졌소?" "이제 나흘 되었소. 그날 저녁 이후 우린 톨 브란디르의 아랫단으로부터 행군해 온 거요." "걸어서요?" 요머가 놀란 듯 외쳤다. "그렇소, 보다시피." 요머의 눈에는 경이감이 나타났다. "아라돈의 아들이시여, 스트라이더란 이름은 너무 약소하군요. 난 당신께 날개달린 발이란 별명을 달아 드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세 분의 이 행적은 많은 사람의 입에서 기려져야 마땅하겠소. 만 나흘도 되기 전에 백삼십오 마일을 달리다니! 엘렌딜의 후손은 정말 강건하군요. 이제 난 당신께서 충고해 주신 대로 곧바로 데오든왕께 돌아가겠소. 병사들 앞에선 조심스럽게 말했었지만, 우리가 아직 암흑의 땅과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또 왕의 귀에 바싹 대고 비겁한 간언을 올리는 자들도 있소. 그러나 전쟁은 다가오고 있소. 우린 곤도르와의 동맹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싸우는 한 우리도 그들을 도와야지요. 이것이 나와 또 나와 뜻이 같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나의 책임, 즉 제삼원수의 관할은 동쪽 변경이어서 나는 이 지역의 모든 가축과 목자들을 엔트워시 강 건너로 피난시키고 경계병과 날렵한 척후병만을 남겨 두었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사우론에게 연공을 바치지 않는 건가요?" 김리가 물었다. 그러자 요머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우린 그런 일 없었소. 또 앞으로도 절대로 없을 거요. 그런 거짓 소문이 나돈다는 말은 나도 들은 적이 있지요. 몇 년 전 암흑의 군주가 상당한 가격으로 우리말을 사려고 했지만 우린 그가 말을 사주가 상당한 가격으로 우리말을 사려고 했지만 우린 그가 말을 사악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로 거절했었소. 그러자 그는 약탈하러 오르크들을 보냈고 그놈들은 언제나 검은색 말만을 골라서 힘닿는 대로 끌고 갔소. 그래서 이제 여기엔 검은색 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소. 그래서 우린 오르크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거요.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으뜸가는 관심사는 역시 사루만에 관한 것이오. 그가 이 모든 땅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우리와 그는 수개월 전부터 전쟁을 벌였소. 그가 오르크들, 늑대들, 그리고 사악한 인간들을 수하에 끌어들여 다른 사람의 통행을 막으려고 협곡을 봉쇄했기 때문에 우린 동서 양쪽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소. 그런 원수와 협상을 한다는 건 사악한 일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또 갖가지 모습으로 변장하는, 간교에 능한 마법사니까요. 그는 두건을 쓴 노인으로 변장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갠달프와 아주 유사한 모습으로 꾸미고 돌아다녔다고들 하더군요. 그의 스파이들은 교묘히 들락거리고, 또 불길한 새들이 하늘에 널리 퍼져 있소.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지 나로선 알 수가 없소. 그래서 내 마음이 불안한 겁니다. 이센가드에만 그의 편이 있는 것 같진 않소. 당신께서 왕의 거처로 가신다면 직접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가시지 않겠소? 당신이 회의에 잠겨 도움이 필요한 나를 위해 보내진 인물일 것 같다는 생각은 헛된 희망에 불과할까요?" 아라곤이 말했다.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가겠소." 요머가 말했다. "지급 갑시다! 이 흉흉한 때에 엘렌딜의 후계자는 욜의 후손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될 것이오. 지금도 웨스템네트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나 않는지 걱정이오. 사실 이번에 나는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렇게 출정했소. 내가 없으면 궁성에는 경비병이 별로 남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오. 사흘 전 밤에 척후병들이 알리기를 오르크들 무리가 동쪽 성벽에서 내려오고 있으며 그놈들 가운데는 사루만의 흰색 기장을 달고 있는 놈들이 있다는 거였소. 그래서 나는 근심했던 사태를 우려하면서 나의 부대 에오레드를 이끌고 오타크와 암흑의 탑 사이의 삼 마일을 달려 이틀 전 해질녘에 엔트우드의 경계에서 오르크놈들을 따라잡았소. 우린 놈들을 포위했다가 어제새벽에 전투를 벌였소. 애석하게도 열다섯 명의 병사와 열두 필의 말을 잃었소. 오르크놈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훨씬 많았소. 또한 다른 놈들 떼거리가 대하 건너편에서 합세했소. 그놈들의 자취는 이곳에서 약간 북쪽으로 뚜렷하게 나타났소. 역시 이센가드의 흰 손 기장을 단 거대한 오르크들이었는데 그 족속은 다른 오르크놈들보다 더 힘이 세고 사나웠소. 그렇지만 우린 그놈들을 전멸시켰소. 하지만 우린 너무 멀리 나왔어요. 지금 사방에서 우리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있소. 같이 가시지 않겠소? 보시다시피 남는 말들이 있소. 그 검이 할 일이겠다면 김리의 도끼와 레골라스의 활도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난 오로지 내 땅의 모든 사람이 하듯이 말했을 뿐이니 모자란 점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겠소." 아라곤이 말했다. "당신의 정당한 말씀에 감사하오. 그리고 내 가슴은 당신과 함께 갈 것을 원하지만 나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친구들을 포기할 순 없소." "희망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북쪽 변경까지 가도 친구들을 찾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이 뒤쪽에 있지는 않소. 우린 동쪽 성벽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적어도 그들 중 한 명은 아직 살아 있다는 분명한 징표를 발견했소. 그렇지만 성벽과 구릉 사이에선 다른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소. 즉 옆으로 새거나 하지도 않았다는 말이오. 내가 완전히 잘못 본 게 아닌 한." "그렇다면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알 수 없소. 그들은 오르크들과 함께 살해당해 화장되었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건 당신이 절대로 아니라고 했으니 나도 그걸 염려하진 않소. 아마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아니면 포위되기 전에 숲 속으로 끌려갔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소. 아무도 그런 식으로 당신들의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우리가 오르크들을 발견한 후에는 맹세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장담할 수 있지요. 우린 그놈들보다 앞서 숲 경계에 도달했소. 그러나 만일 그 이후로 어떤 생명체가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면 그건 오르크는 아닐 것이고 아마 어떤 요정의 힘에 도움을 받은 자들일 것이오." "우리 친구들도 우리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들은 한낮의 밝은 빛 아래서도 우릴 지나쳤잖소." "그 점을 잊었군요. 너무도 많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이 난리통에 무엇을 확신한다는 건 어렵겠군요. 세상은 너무도 이상해졌소. 요정과 난쟁이가 일행이 되어 우리가 매일매일 접하는 들판을 걸어가고, 숲의 레이디와 이야기를 나눴으면서도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우리 선조들이 마크로 말을 달려 들어오기 오래 전에 부러졌던 그 검이 전장으로 되돌아오다니! 이런 시대에 인간이 무얼 해야 할지 어떻게 판단하겠소?" "해오던 대로 해야지요. 선과 악이 뒤바뀐 것은 아니니까. 또한 요정과 난쟁이에게 적용되는 선과 악은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오. 자기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황금의 숲에서도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참 옳은 말씀이오. 나는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내 가슴이 하고자 하는 행위에 의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을 내 의사대로 자유로이 할 수는 없소. 왕께서 허락을 하시지 않는 한 이방인이 우리땅을 활보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법에 어긋나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위험스러운 시대에 특히 그 명령은 더욱 엄격합니다. 나는 당신께 기꺼이 나와 함께 가실 것을 간청했지만 당신은 응하지 않으시는군요. 세 명에 대항해서 일백 명이 전투를 시작하기는 정말 싫은데 말씀이오." "난 당신들의 법이 이런 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난 사실 이방인이 아니오. 비록 그때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었고 또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는 전에 이 땅에 와서 로한인들과 함께 말을 달린 적이 있었소. 난 그때 당신을 보지는 못했소. 당신은 어렸을 때니까.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부친 요문드공과 덴겔의 아들 데오든과 이야기를 나눴었소. 지난날 같았으면 이 땅의 어느 영주분이라도 내 탐색을 중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을거요. 적어도 내가 할 일은 분명하오. 계속 나아가는 것이오. 자, 요문드의 아들이여. 마침내 선택을 해야만 하겠소. 우리를 도와 주시오. 아니면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를 자유로이 가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것도 안 되겠으면 당신들의 법을 집행하도록 하시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들의 전쟁터나 왕에게 돌아갈 인원은 더욱 줄어들 것이오." 요머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린 모두 서둘러야 할 입장이오. 내 부대는 떠나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으며 당신들의 희망은 매시각 줄어들고 있소. 나의 선택은 이렇소. 당신들은 가도 좋소. 뿐만 아니라 당신들에게 말을 빌려 주겠소. 나는 단지 이것만을 부탁하오. 당신들의 탐색이 결실을 거두건 허사로 돌아가건 그땐 말을 몰아 엔트웨이드를 넘어 메두셀드로오시오. 그곳은 에도라스에 있는 호화로운 궁전으로 지금은 데오든 왕께서 거처하고 계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내가 잘못 판단하지 않았음을 왕께 입증하실 수 있는 겁니다. 당신들과 신의를 지키는 이 일에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심지어 내 목숨까지 거는 것이오. 저버리지 마시오."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아라곤이 대답했다. 요머가 이방인들에게 남은 말을 빌려 주라고 명령하자 병사들 사이에선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어둡고 의혹에 찬 눈길을 던지는 기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오직 요다인만이 드러내놓고 불평했다. "곤도르의 영주로 자처하는 이분께는 합당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마크의 말을 난쟁이에게 빌려 주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아무도 없지. 그러나 걱정 마시오. 앞으로도 그런 말은 듣지 못할 테니까. 난 그처럼 위대하고 재빠르고 아낌을 받는 짐승 등에 올라앉기보다는 내 두 발로 그냥 걸어가겠소."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타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자넨 방해가 될 거야." 레골라스도 말했다. "자, 내 친구 김리, 자넨 내 뒤에 타면 돼. 그럼 모두 괜찮겠지. 자넨 말을 빌릴 필요도 없고 신경쓸 일도 없을 테니까." 아라곤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대한 암회색 말에 올라탔다. 요머가 말했다. "그 말 이름은 하수펠이오. 그 말이 당신을 잘 받들어 전 주인인 개룰프보다 좋은 운이 따르기를 빌겠소." 좀더 작고 가볍지만 다루기 쉽지 않은 사나운 말 한 필이 레골라스에게 주어졌다. 말의 이름은 아롯이었다. 그런데 레골라스는 안장과 고삐를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뛰어 말 등에 올라탔다. 놀랍게도 아롯은 매우 순하게 말을 잘 따랐다. 레골라스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으며 이것은 유용한 짐승을 다루는 요정들의 기술이었다. 김리는 레골라스 뒤편에 태워진 후 친구를 꼭 붙들었다. 보트에 탄 샘 갬기만큼이나 불안했던 것이다. 요머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잘 가시오. 그리고 친구들을 꼭 발견하길! 최대한의 속도로 되돌아와 우리의 칼을 함께 빛내도록 합시다!" 아라곤이 말했다. "돌아오겠소." 김리도 외쳤다. "나도 올 거요. 레이디 갈라드리엘의 문제가 아직 우리 사이에 남아 있으니까. 당신에게 정중한 인사를 가르쳐 드리겠소." 그러자 요머가 답했다. "결말이 나겠지. 이렇게 이상스런 일들이 많은 가운데서는 난쟁이의 도끼질을 받으며 레이디를 칭송하는 법을 배우는 것 정도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 잘 가시오." 이들은 이렇게 헤어졌다. 로한의 말들은 매우 잘 달렸다. 잠시 후 김리가 뒤를 돌아보자 요머의 부대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작게 보였다. 아라곤은 돌아보지 않았다. 길을 재촉해 달리면서도 그는 하수펠의 목 옆으로 머리를 늘어뜨린 채 자취를 살피고 있었다. 오래지않아 그들은 엔트워시 강가에 도달했으며 그곳에서 요머가 말했던 다른 자취를 발견했다. 그 자취는 나무 없는 로한 고원 너머의 동쪽 성벽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라곤은 말에서 내려 지면을 살핀 다음 다시 안장에 뛰어올라 길 한쪽을 따라가며 발자국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수마일을 달린 후 다시 말에서 내려 앞뒤를 오가며 지면을 살폈다. 아라곤은 다시 돌아와 말했다. "눈에 띄는 건 별로 없어. 중요한 자취는 기병들이 통과하면서 모두 뒤섞여 버린 것 같아. 그들의 출격진로는 강쪽에 더 가까웠던 게 분명해. 그렇지만 이 동쪽으로 난 자취는 아직 새롭고 분명해. 여기엔 안두인을 향해 다른 길로 빠진 흔적이라곤 없어. 이젠 옆으로 새나간 발자국이 있나 살펴야겠어. 오르크놈들도 여기부턴 추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하거든. 그러니 그놈들은 기병들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포로를 빼돌리려고 했을지도 몰라." 그들의 말을 달려나감에 따라 날은 차차 저물어 갔다. 나무 없는 로한 고원 위로 낮게 드리워진 회색 구름이 흘러왔다. 안개가 해를 가렸다. 나무로 뒤덮인 판곤의 비탈들이 석양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런 자취도 볼 수 없었다. 가끔 도주하다가 등이나 목에 회색깃의 화살을 맞고 쓰러진 오르크들의 시체가 보이기도 했다. 태양이 거의 기울었을 무렵 그들은 숲 경계에 이르렀다. 나무들 사이의 탁 트인 공지에서 그들은 대규모로 소각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 재는 아직도 뜨거웠으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투구, 갑옷, 갈라진 방패, 부러진 칼, 활과 창, 그리고 그 밖의 전쟁도구들의 잔뜩 쌓여 있었다. 가운데 박힌 말뚝 위에는 도깨비 형상의 거대한 머리가 꽂혀 있었으며 부서진 투구에는 하얀 기장이 새겨져 있었다. 좀더 나아가자 흙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숲가에서 흘러나오는 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 쌓아 올린 것으로 잔디가 새로 덮여 있었고 그 주위엔 열다섯 개의 창이 꽃혀 있었다. 아라곤과 그의 친구들은 전장 주변을 두루 탐색했다. 그러나 태양이 기울어 저녁놀이 어슴푸레하게 내려앉았다. 해질녘까지 그들은 메리와 피핀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김리가 한탄하듯 말했다. "더 이상 못하겠는데. 우리가 톨 브란디르에 도착한 이후 수많은 수수께끼에 부딪혔지만 이번 것이 가장 풀기 어려운데. 나로선 화장된 호비트들의 뼈가 오르크놈들 것과 함께 섞여 있다고밖에 볼 수 없겠어. 만일 프로도가 살아 있어 듣게 된다면 그에겐 너무도 가혹한 소식일 테고 또 리벤델에 있는 늙은 호비트에게도 끔찍한 일이겠지. 엘론드는 그들이 원정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었으니." "그렇지만 갠달프는 반대하지 않았어."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러자 김리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갠달프는 먼저 자신이 나서기로 했고 또 가장 먼저 사라졌어. 그의 선견지명도 허사였어."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갠달프의 계획은 그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안전에 주안점을 둔 것은 아니었네. 비록 결과가 암울하게 끝날지라도 중도에 포기하는 것보다는 시작하는 게 나은 일들이 있어. 난 아직 여기서 떠나지 않겠네. 어쨌든 우린 여기서 아침을 기다려야 해." 전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은 가지를 펼치고 선 나무 아래 자리를 마련했다. 그 나무는 밤나무와 비슷해 보였으며 지난해의 넓은 갈색 잎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그건 마치 길게 뻗친 손가락이 여러 개 달린 깡마른 손 같아 보였다. 나뭇잎들은 밤의 미풍에 흔들리며 음산한 소리를 냈다. 김리는 몸을 떨었다. 그들은 각기 담요 한 장씩만 가져왔었다. "불을 피우지. 난 더 이상 위험에 신경쓰지 않겠어. 오르크놈들, 여름나방처럼 촛불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들라지!" 김리가 말하자 레골라스도 응수했다. "그 불쌍한 호비트들이 만일 숲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불빛을 보고 올지도 모르지."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불을 보고 오르크놈들이나 호비트가 아닌 다른 것이 몰려들지도 몰라. 우린 배신자 사루만의 산악경계에 가까이 와 있어. 또한 우린 나무들을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판곤의 경계에 와 있고."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로한인들은 어제 여기서 거창하게 불을 질렀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보다시피 불을 피우기 위해 나무를 베었고. 그런데도 그들은 이틀밤이나 무사히 지냈잖아요." "그들은 수가 많았어. 그리고 그들은 판곤의 노여움을 개의치 않아. 왜냐하면 그들은 이리로 오는 일이 거의 없고 또 나무 아래로 들어가지 않거든. 그렇지만 우리는 바로 저 숲 속으로 가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 조심하게!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선 안 돼!" 그러자 김리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요. 기사들이 나무조각과 가지를 충분히 남겨 놓았고 또 죽은 나무도 많이 널려 있으니까." 그는 땔감을 모으고나서 불을 지피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아라곤은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말없이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레골라스는 탁 트인 공지에 홀로 서서 숲의 심원한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마치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귀라도 기울이듯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난쟁이가 환한 불꽃을 조그맣게 피우자 모두 바싹 다가가 두건을 둘러쓴 채 몸으로 빛을 가리기라도 할 듯 둘러앉았다. 레골라스는 머리 위로 뻗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봐요! 나무도 불을 반기고 있어." 춤추는 그림자들이 눈을 현혹시킬 수도 있지만 그들 각자에게는 나뭇가지가 불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려고 몸을 뒤트는 것처럼 보였다. 갈색 잎들도 추위에 언 손을 녹이는 것처럼 빳빳이 뻗쳐 서로 몸을 비볐다. 침묵이 흘렀다. 바로 옆에 어둡고 미지의 세계로 놓여 있던 숲이 갑자기 은밀한 목적으로 자신의 거대하고 상념에 잠긴 존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레골라스가 입을 열었다. "켈레본은 우리에게 판곤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말라고 그랬었지. 왜 그랬을까요, 아라곤? 보로미르가 들었다던 숲의 전설이란 무엇일까요?" "난 곤도르와 그 밖의 많은 곳에서 이야기를 들었었지. 그러나 켈레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그것이 다만 참된 지식이 퇴색됨에 따라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전설로만 생각했을 거야. 난 사실 자네에게 그것에 대한 참된 진실을 물어 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숲의 요정이 모른다면 인간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나." 그러자 레골라스가 대답했다. "당신은 나보다 더 멀리 여행했었으니까요. 난 우리 땅에선 이런 사실들을 전혀 들어 보지 못했어요. 내가 들어 본 것은 인간들의 엔트라 부르는 오노드림에 관한 노래들뿐이지요. 판곤은 아주 오래되었죠. 요정들이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곳이니까. 그곳에서 오노드림이 살았다는 노래뿐이었어요." "그래 맞네. 오래되었지. 배로우 고원 옆에 숲만큼이나 오래되었어. 그렇지만 그 숲보다는 훨씬 거대하지. 엘론드가 말하기론 그 두 숲은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 해. 인간들이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고 가장 먼저 태어난 요정들만이 배회하던 제1시대에 이 두 숲은 모두 거대한 숲의 마지막 요새였다는 거야. 그러나 판곤은 그 자체만의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김리가 말했다. "난 알고 싶지 않아. 판곤에 무엇이 살고 있든 간에 나 때문에 짜증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들은 이제 불침번 차례를 정하려고 제비를 뽑았다. 첫 번째는 김리가 맡게 되었다. 나머지 둘은 땅에 드러누웠다. 눕자마자 잠이 밀려왔다. 졸린 목소리로 아라곤이 말했다. "김리! 판곤에선 큰 가지건 작은 가지건 살아 있는 나무를 자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걸 명심하게. 그렇다고 죽은 나무를 찾으려고 멀리 헤매서도 안 돼. 차라리 불이 꺼지게 내버려 두는 게 나아. 급한 일이 있으면 날 깨우게." 그 말과 함께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레골라스는 이미 흰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요정들이 그러하듯이 활기찬 밤과 깊은 꿈 사이를 오가듯 눈을 뜨고 있었다. 김리는 생각에 잠긴 채 엄지손가락으로 도끼날을 만지면서 꼽추처럼 웅크린 자세로 불가에 앉아 있었다. 나무가 바스락거렸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김리가 고개를 들어 보니 불빛이 비치는 바로 가장자리에 허리가 굽은 노인 한 사람이 카다란 망토를 두른 채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눈 위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김리는 순간적으로 사루만에게 발각됐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너무도 놀라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난 아라곤과 레골라스는 몸을 일으키고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무런 a라도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아라곤이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노인장, 무슨 일입니까? 추우면 와서 몸을 녹이시죠." 그러나 아라곤이 앞으로 나서자 그 노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감히 멀리까지 찾아 헤맬 수 없었다. 달도 져버려 너무 어두웠던 것이다. 갑자기 레골라스가 외쳤다. "말! 말!" 말이 없어졌던 것이다. 말들은 말뚝까지 끌고 사라져 버렸다. 셋은 잠시 이 새로운 불운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판곤의 경계에 있었고 이 위험스런 땅에서 유일한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로한인들과는 헤아릴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가운데 어둠 속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들이 힝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해졌다. 차갑게 살랑거리는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마침내 아라곤이 입을 열었다. "자, 말은 없어진 거야. 우린 다시 말을 붙잡을 수가 없어. 그러니 그놈들이 제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견딜 수밖에 없지. 우린 우리 발로 출발했던 것이고 아직 여전히 발은 남아 있는 거니까."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발이라! 그렇지만 그건 탈 수도 없는 데다가 먹을 수도 없잖아." 그는 불 속에 땔감을 조금 던지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자넨 로한의 말은 타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제 벌써 기사가 되려는 거야?" 레골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그럴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은데." 김리가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자면 그는 사루만이었어. 그가 아니라면 누구겠어. 사루만은 두건을 쓰고 망토를 두른 노인의 차림으로 여기저기 다닌다고 한 요머의 말을 생각해 봐. 그가 우리말을 데려갔거나 아니면 쫓아 버렸고 우리만 여기 남아 있어. 내 말을 한번 잘 들어 보라고. 이제 골치아픈 문제가 더 많이 생길 거야." 아라곤이 말했다. "그 말 새겨듣지. 그렇지만 난 그 노인이 두건이 아니라 모자를 쓰고 있었던 점을 중시해. 물론 자네 짐작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이곳이 밤낮을 가릴 것 없이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은 인정해. 그러나 당분간 우린 이대로 쉬는 것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없어. 내가 불침번을 서지. 난 좀 생각할 필요가 있으니까." 밤은 천천히 지나갔다. 아라곤 다음엔 레골라스가, 그리고 그 후엔 다시 김리가 불침번을 서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노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제3장 우루크 하이 피핀은 음산하고 어지러운 꿈을 꾸며 누워 있었다. '프로도, 프로도!' 하고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두운 터널 안에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프로도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수백 명의 끔찍한 오르크들이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고 수백 개의 사악한 팔들이 사방에서 자신의 사지를 움켜잡았다. 메리는 어디 있는 걸까? 그는 이제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와닿았다. 깨어 보니 그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나서야 자신이 꿈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손, 발 그리고 발목은 줄로 묶여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메리가 이마에 더러운 천조각을 동여맨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바로 옆에는 오르크들의 대부대가 일부는 앉아서 또 일부는 그대로 서서 자신들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피핀의 지끈거리는 머리 속에선 기억이 차근차근 이어져 꿈의 자취에서 분리되었다. 그래, 메리와 난 숲 속으로 도망쳤었지. 근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왜 우린 노련한 스트라이더를 무시하고 그렇게 급히 뛰어갔던 것일까? 얼마나 먼 거리였는지,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아주 먼 거리를 소리지르며 달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르크들의 그들 정면으로 부딪쳐온 것이다. 메리와 피핀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오르크들은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다 갑자기 끔찍한 소리를 신호로 수십 명의 오르크들이 숲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메리와 피핀은 칼을 뽑았지만 오르크들은 싸우려들지 않고 다만 그들을 사로잡으려고만 했다. 심지어 메리가 오르크의 팔과 손을 여러 차례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그들을 해치려 들지 않고 사로잡으려고만 했다. 그때 보로미르가 숲 속에서 뛰쳐나왔다. 오르크들은 그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로미르가 닥치는 대로 오르크들을 해치우자 나머지는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로미르와 메리, 피핀이 길을 되잡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다시 오르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줄잡아 백 명 이상 되는 부대였으며 그 중 일부는 몸집이 매우 컸다. 그들은 화살은 비오듯 쏘아 댔다. 그건 모두 보로미르만을 겨냥한 것이었다. 보로미르가 커다란 뿔나팔을 불어 대자 온 숲이 진동했다. 그러자 오르크들은 허둥대며 일순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별 응답 없이 메아리만 들려오자 오르크들은 더 흉맹스럽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핀은 기억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났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보로미르가 나무에 기댄 채 몸에 박힌 화살 하나를 뽑아 내던 모습이었다.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모양이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엾은 머리가 많이 다치지나 않았는지 몰라. 보로미르는 어떻게 된 걸까? 왜 오르크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지? 우린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릴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당장 떠올라 주지 않았다. 그는 춥고 속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갠달프가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엘론드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다만 거치적거리는 동행자나 짐꾸러미에 불과할 뿐이야. 더구나 지금은 오르크들에게 붙잡혔으니 도둑맞은 짐꾸러미에 지나지 않잖아. 스트라이더나 아니면 다른 누가 와서 우릴 내놓으라고 소리라도 치면 좋으련만. 그렇지만 내가 그런 희망을 꼭 품어야만 할까? 그렇게 되면 모든 계획을 내팽개쳐야 하잖아. 혼자 힘으로 도망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가까이 앉아있던 오르크 하나가 낄낄거리며 역겹기 그지없는 오르크말로 옆에 앉은 오르크에게 뭐라고 지껄이다가 피핀이 깨어난 걸 알고 공용어로 말을 걸어왔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는 것이 좋아, 이 얼뜨기 애송이야! 곧 다리를 움직여야 할 테니.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이면 아마 차라리 다리가 없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걸." 다른 오르크도 빈정거렸다. "내 마음대로 널 처리했다면 넌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걸. 난 널 찍찍 울게 만들었을 테니까, 이 더러운 생쥐새끼 같은 놈아!" 그는 피핀에게로 몸을 기울여 누런 이빨을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그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길고 검은 칼을 손에 쥐고 뱀처럼 쉭쉭거리며 또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얌전히 누워 있어. 안 그러면 이걸로 손 좀 봐줄 테니까.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게 네 신상에 좋아. 그렇지 않으면 난 내가 받은 명령도 잊어버릴 수 있는 놈이니까. 염병할 이센가드놈들! 우글룩 우 박론크 샤 푸쉬덕 사루만 글롭 붑호쉬 스카이." 그는 자신들의 언어로 뭐라고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다 차차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잠해졌다. 손목과 발목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래 깔린 돌멩이에 결려 등이 몹시 아팠지만 공포에 질린 피핀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피핀은 고통을 잊기 위해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방에서 떠들썩한 목소리들의 들려왔다. 격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피핀은 그들의 논쟁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르크들은 대개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셋의 다른 종족으로 구성된 것 같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지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즉 어느 길을 택할 것이며 포로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한 오르크가 이렇게 말했다. "이놈들을 그럴 듯하게 죽여 줄 시간이 없단 말이야. 노닥거릴 여유가 없으니 참." 그러자 다른 오르크가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죽이진 않는 거지? 거치적거리기나 하고 또 우린 지금 급하단 말이야. 저녁이 다 됐으니 시간이 없다고." 그러자 몹시 화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명령이야! 뭐든 죽여도 좋지만 하플링들만은 죽이지 말고 사로 잡아서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 한다는 게 내가 받은 명령이란 말이야." 여럿이 동시에 지껄여 댔다. "이놈들이 뭣에 필요하다는 거야? 왜 사로잡아야만 한다는 거지? 이놈들이 대단한 거라도 제공할 건가?" "아니야. 내가 듣기론 이놈들 중 하나가 뭔가를, 전쟁에 필요한 뭔가를, 말하자면 요정들의 음모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거야. 어쨌든 이놈들은 따로따로 심문을 받게 될 거야." "그게 전부야? 그렇다면 여기서 놈들 몸은 수색해서 알아내면 되잖아? 우리가 직접 이용할 수 있는 걸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자 다른 목소리들에 비해 낮지만 매우 사악한 목소리가 비웃듯 들려왔다. "그거 참 재미있는 말이군 그래. 하지만 포로들을 수색하거나 소지품을 뺏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가 받은 명령이야." 또 다른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내가 받은 명령도 마찬가지야. 산 채로 포박하되 약탈은 말라는 거지." 그러자 앞서 말하던 여러 목소리들 중 하나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받은 명령은 아니야. 우리가 암흑의 지하로부터 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은 죽여서 우리 종족의 복수를 하자는 거였어. 난 죽이고나서 북쪽으로 돌아가야겠어." "그렇다면 그 뜻을 바꾸는 게 좋을걸. 난 우글룩이다! 지휘자는 나란 말이야. 난 제일 빠른 길을 택해 이센가드로 돌아가겠다." 화난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자 사악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우리의 주군이 사루만인가 아니면 위대한 눈이신가? 우린 곧장 루그버즈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하를 건널 수만 있다면 그래도 좋겠지. 하지만 우리들 중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까지 내려갈 만큼 배짱좋은 작자는 없을걸." 그러나 사악한 목소리의 오르크는 이렇게 외쳤다. "난 가겠다. 날개달린 나즈굴이 동쪽 제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넌 포로들을 데리고 날아가 루그버즈에서 포상과 칭찬을 독차지하겠지. 우리는 기병들의 나라 로한을 자기 능력껏 빠져나가게 놔둔 채 말이야. 그건 안 돼. 우린 뭉쳐 있어야 해. 여긴 반역자와 도둑들이 들끓는 위험한 지대야." 그러자 우글룩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암, 물론 뭉쳐야지. 그렇지만 난 너같이 야비한 돼지들은 믿지않아. 돼지우리 밖에선 기도 못 펴는 놈들! 우리가 없었다면 네놈들은 모조리 달아나 버렸을 거다. 우린 투사 우루크 하이족이다! 그 막강한 전사를 죽이고 이 포로들을 노획한 건 우리야! 우린 흰 손의 현자 사루만의 부하들이며, 그 손은 우리에게 인간의 살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센가드에서 나와 네놈들을 이끌어 왔으니 앞으로도 우리가 택하는 길로 가야 한다! 난 우글룩이다! 이게 내가 하고자하는 말이야!" 그러자 사악한 목소리의 오르크가 비웃듯 응수했다. "사실 필요 이상으로 긴 연설이었어. 루그버즈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군. 아마 우글룩의 오만한 머리를 어깨 밑으로 끌어내려야겠다고 생각할걸. 그런 해괴한 생각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도 궁금해 할 거고. 혹시 사루만에게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하겠지. 역겨운 흰 기장을 달고 제멋에 겨워 날뛰는 꼴이라니. 사루만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가? 루그버즈는 아마 믿음직한 사자인 나 그리쉬나크와 같은 생각일걸. 그래서 나 그리쉬나크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사루만은 얼간이라고. 그것도 더럽고 믿을 수 없는 얼간이라고. 그러나 위대한 눈이 그를 감시하고 있어. 위대한 눈이 돼지라고? 더럽고 하찮은 마법사의 졸개들이 더러운 입을 잘도 놀려 대는구나. 내 장담하건대 루그버즈의 오르크들은 그 더러운 오르크놈들의 살을 발라먹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 격렬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으며 칼을 뽑는 소리에 이어 무기가 부딪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피핀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오르크들도 싸움에 끼어들었다. 희미한 황혼 속에 커다란 몸집의 검은 오르크가 작은 키에 다리가 굽었으며 어깨가 벌어지고 손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긴 팔을 가진 그리쉬나크와 마주서 있었다. 그들 주위엔 그보다 더 작고 마귀같이 생긴 오르크들이 몰려 있었다. 피핀은 그들이 북쪽에서 온 오르크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칼을 뽑았지만 우글룩을 공격하길 주저하고 있었다. 우글룩이 고함을 지르자 그와 거의 같은 몸집의 오르크들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우글룩은 갑자기 뛰어오르며 재빨리 칼을 휘둘러 적편 오르크 둘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리쉬나크는 옆으로 비켜 났다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른 오르크들은 뒤로 물러섰다. 그 중 하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메리의 몸에 걸려 넘어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것이다. 우글룩의 부하들은 그를 뛰어넘어 다른 오르크에게 넓은 날의 칼을 날렸다. 칼을 맞은 것은 누런 이빨의 오르크였다. 그는 긴톱날칼을 손에 쥔 채 피핀의 머리 바로 위로 무너져 내렸다. 우글룩이 외쳤다. "무기를 거둬! 더 이상 허튼짓은 삼가라! 우린 이제 곧장 서쪽으로 간다. 바로 고원까지 간 다음 강을 따라 숲으로 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한다. 다들 알아들었겠지?" 피핀은 생각했다. '저 추악한 놈이 부대를 통제하는 데 조금만 시간이 지체된다면 내게 기회가 있을 거야.' 가냘픈 희망이 일었다. 시커먼 칼날이 팔목을 스치면서 그의 손에 잡힌 것이었다.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쇠의 감촉도 느낄 수 있었다. 오르크들은 다시 행군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온 오르크들은 여전히 그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 중 둘이 더 죽음을 당하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많은 욕지거리가 오가고 혼란이 일어났으며 피핀은 감시의 눈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발은 아주 단단히 묶였지만 손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피핀은 죽어 넘어진 오르크의 시체를 밀치고는 손목에 묶인 매듭에 칼날을 대고 아래위로 문질렀다. 칼날은 날카로웠으며 죽은 자의 손에 꽉 쥐여 있었다. 끈이 잘렸다! 피핀은 재빨리 끈을 손에 쥐고 느슨한 고리로 엮여 손목 위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히 누워 있었다. 우글룩이 외쳤다. "포로들을 일으켜라! 저놈들에게 어떤 장난도 쳐선 안 돼. 우리가 돌아갔을 때 저놈들이 죽어 있다면 그놈도 죽게 될 거다." 오르크 하나가 피핀을 자루라고 들 듯 붙잡고는 묶인 양손과 가슴사이로 머리를 박고 양팔을 거머쥔 채 거꾸로 떠멨다. 피핀의 얼굴의 그의 목에 짓눌렸지만 오르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또 다른 오르크가 같은 방식으로 메리를 떠멨다. 오르크가 집게발 같은 손으로 마치 쇳덩이라도 잡듯 피핀의 양 발을 꼭 잡았기 때문에 손톱이 살로 파고들었다. 피핀은 눈을 감은 채 다시 음산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갑자기 그는 다시 돌처럼 딱딱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른 밤이었다. 가녀린 달은 이미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르크 일행은 희미한 안개바다 위에 솟아오른 듯 돌출한 절벽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가까운 곳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오르크가 말했다. "척후들이 돌아왔습니다." 우글룩이 으르렁대듯 물었다. "음, 뭘 발견했나?" "기사 한 명을 봤는데 곧 서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젠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 그렇겠지. 그런데 그놈이 사라진 지 얼마나 됐지? 바보 같은 놈들아! 그놈을 죽여 버렸어야지! 그놈은 비상을 외치며 달려갈 거란 말이다. 아침이면 빌어먹을 로한의 기사들이 우리 소식을 전부 알게 될 거란 말이야. 이제 우린 지금보다 배나 더 부지런히 걸어야해!" 그림자 하나가 누워 있는 피핀을 향해 몸을 숙였다. 우글룩이었다. "일어나! 네놈들을 메고 오느라 부하들의 지쳤다. 우린 이제 이어 내려가야 하니까 네놈들도 직접 기어야 해.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걸.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치려고 수작을 부리면 안 돼. 만일 그런 짓을 한다면 네놈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우리 군주께 손해를 끼치지 않고도 네놈들을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 있으니까." 그는 피핀의 발을 묶은 가죽끈을 자른 다음 머리칼을 잡아 일으켰다. 피핀이 비틀거리자 우글룩은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바로 세웠다. 오르크들이 낄낄거리고 웃어 댔다. 우글룩은 피핀의 이 사이로 병 하나를 처박고는 목이 타는 듯한 액체를 강제로 부어 넣었다. 피핀은 뜨겁고 맹렬한 열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발과 발목의 통증이 사라지자 그는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다른 놈도 먹여야지." 우글룩이 말했다. 피핀은 그가 바로 곁에 누워 있는 메리에게로 다가가 발로 걷어차는 것을 바라보았다. 메리는 신음소리를 냈다. 우글룩은 거칠게 메리를 붙잡아 앉힌 다음 머리의 붕대를 떼어 냈다. 그는 작은 나무상자에서 뭔가 검은 것을 꺼낸 상처에 문질렀다. 메리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오르크들은 손뼉을 치며 우우 소리를 지르고 조롱했다. "약을 안 받으려고 하는데. 네놈한테 좋다는 걸 모르는군. 하하! 나중에 볼 만하겠는데." 그러나 우글룩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좀더 속력을 낼 필요가 있었기에 미적거리는 부하들의 기분을 전환시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는 오르크들의 방식대로 메리를 치료한 것이고 그 효과는 신속했다. 우글룩은 메리에게도 억지로 아까의 액체를 한 모금 마시게 한 후 결박을 풀고 일으켜 세웠다. 메리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굳세고 반항적인 표정으로, 그러나 꽤 활기 있는 태도로 일어섰다. 이마의 상처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으나 갈색 흉터는 평생 남게 될 것 같았다. 메리가 말했다. "아, 피핀! 그래 너도 이 행군길에 오른 거야? 우린 어디서 자고 먹는 거지?" 그러나 우글룩이 소리를 질렀다. "자, 입닫쳐! 말하면 안 돼! 말썽을 부리면 모조리 보고될 것이고 그러면 그분께서 네놈들한테 벌을 내리실 거다. 자고 먹는 것도 네 놈들의 충분히 견딜 만큼 괜찮을 거야." 오르크들은 아래쪽 안개에 휩싸인 평원으로 이어진 좁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메리와 피핀은 열둘 아니 그 이상의 오르크들에 의해 서로 격리된 채 내려갔다. 밑바닥에 이르러 풀밭을 걷게 되자 호비트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우글룩이 외쳤다. "이제 곧바로 간다! 서북쪽으로 가는 거야. 루그두쉬, 네가 앞장서라!" 그러자 북쪽에서 온 오르크들 중 몇몇이 물었다. "아침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속 달리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이 풀밭에 앉아 로한놈들하고 피크닉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렇지만 우린 햇빛 아래서 뛸 수는 없어." "내가 뒤에서 네놈들과 함께 달릴 거다. 달려라! 아니면 다시는 네놈들의 그 소중한 동굴을 볼 수 없을 테니까. 흰 손에 맹세코! 어설프게 훈련된 촌놈들을 원정에 내보낼 게 뭐야! 뛰어, 이 염병할 놈들아! 아직 밝기 전에 뛰어!" 그러자 전체가 오르크들 특유의 성큼성큼 달리는 큰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로 밀치고 젖히고 욕설을 퍼부어 대면서 오르크들은 무질서하게 달렸다. 그러나 속도는 대단했다. 호비트에겐 각각 세 명의 감시가 붙었다. 피핀의 행렬이 뒤쪽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이런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졌다. 그는 지난아침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감시병 하나는 손에 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오르크의 술이 목 안에 뜨거운 기운을 남기고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이따금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자취를 찾아 몸을 숙이고 뒤따라 달려오는 스트라이더의 간절한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순찰자 아라곤이라 할지라도 오르크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과 메리의 발자국은 앞뒤의 오르크들의 징박힌 구두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절벽에서 일 마일 정도 내려와서부터는 넓고 얕은 저지대가 비탈져 펼쳐졌다. 저지대 지면은 부드럽고 축축했다. 그곳엔 초생달의 잔광을 받은 안개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오르크들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멈춰라!" 후미에서 우글룩이 갑자기 소리쳤다. 피피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오른쪽 방향으로 길에 벗어나 감시병의 손길을 피해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사지를 펼친 채 풀밭 위로 엎어졌다. "멈춰!" 우글룩이 외쳤다. 잠시 소동과 혼란이 일었다. 피핀은 발딱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크들이 추격해 왔다. 앞쪽에서도 오르크들이 나타났다. 도망칠 가망은 없었다. 피핀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축축한 땅 위에 뒤섞이지 않는 내 표지를 몇 개 남겨 둘 희망은 있어. 그는 묶인 양손으로 목을 더듬어 망토 브로치를 끌렀다. 긴 팔과 잔인한 손톱에 잡히는 순간 그는 그것을 땅에 떨궜다. '이건 언제까지나 여기 놓여 있을 거야.' 그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만일 다른 동지들이 무사히 피했다면 아마 모두 프로도와 같이 갔을 텐데 말이야.' 채찍이 다리에 감겨 와 그는 비명을 삼켰다. 우글룩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만하면 됐어! 그놈은 아직 먼 길을 달려야 하니까. 그놈들 둘 모두 달리게 해! 채찍은 본때를 보여 줄 때만 사용하고.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는 피핀에게 몸을 돌리며 으르렁댔다. "기억해 두지. 벌은 연기되었을 뿐이야. 자, 뛰어!" 피핀도 메리도 이 행군의 후반부에 대해선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흉흉한 꿈과 끔찍한 현실이 고통의 긴 터널 속으로 섞여들었고 희망은 점차 희미해지고 멀어졌다. 가끔 교활하게 다루는 잔혹한 채찍을 맞으며 그들은 오르크들의 걸음을 따르러 애쓰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만일 멈추거나 넘어지면 상당한 거리를 질질 끌려가곤 했다. 오르크의 술로 인한 온기가 사라졌다. 피핀은 다시 추위와 욕지기를 느꼈다. 갑자기 그는 얼굴을 숙이며 잔디 위로 넘어졌다. 살을 쥐어뜯는 듯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억센 손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다시 한번 자루처럼 끌려갔다. 주위엔 어둠이 짙어졌으나 그는 그것이 새로운 밤의 어둠인지 아니면 눈이 멀어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목소리들을 어렴풋하게 들었다. 많은 오르크들의 휴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글룩이 뭐라고 외쳤다. 피핀은 자신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을 깨달았다. 그대로 누운 채 다시 흉흉한 꿈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고통을 오래 피할 수는 없었다. 곧 무자비한 손이 다시 쇠갈고리처럼 그를 움켜쥐었다. 몸이 한참 이리저리 뒤흔들리고나서야 다시 어둠이 물러나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피핀은 이제 아침이 되었음을 알았다. 우글룩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다시 풀밭 위로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그는 절망과 싸우며 잠시 누워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몸 속의 열기로 보아 또 술 한 모금을 먹인 것 같았다. 오르크 하나가 그에게 몸을 숙여 약간의 빵과 말린 살코기 한 점을 던졌다. 그는 허기들린 사람처럼 회색 빵을 씹었지만 고기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아직 오르크가 던져 준, 무슨 생물의 것인지도 모르는, 짐작조차 하기 두려운 살코기를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 앉아 주위를 살펴보았다. 메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강 기슭에 있었다. 앞에는 산맥이 우뚝 서 있었다. 높은 봉우리 하나가 첫 햇살을 받고 있었다. 산맥 앞의 낮은 비탈에는 검은 반점처럼 숲이 펼쳐졌다. 오르크들 사이에서 다시 격렬한 논쟁이 벌어져 고함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북쪽의 오르크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 사이에 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뒤쪽 멀리 남쪽을 손가락질하는 오르크도 있었고 동쪽을 가리키는 오르크도 있었다. 우글룩이 외쳤다. "좋아! 그럼 그놈들은 내게 맡겨. 전에 말한 대로 죽여선 안 돼. 그렇지만 고생고생해서 포획한 것을 내버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여느 때처럼 투사 우루크 하이족에게 맡겨 두라고. 만일 로한놈들이 두렵다면 달려! 달리라고! 저기 숲이 있잖아." 그는 앞을 가리키며 계속 외쳤다. "저리로 가! 그게 네놈들한텐 제일 큰 희망일 테니까. 꺼져 버려! 그것도 빨리! 네놈들 대갈통을 박살내기 전에!" 약간의 욕설과 싸움이 있는 후 백 명 이상의 북쪽 오르크 대부분이 떨어져 나가 강을 따라 산맥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호비트들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과 함께 남게 되었다. 적어도 팔십 명은 되는 이 냉혹하고 사악한 무리는 커다란 몸집에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눈은 사팔뜨기로 큰 활과 짧지만 날이 넓은 칼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 오르크들 가운데 몸집이 좀더 크고 용감한 몇 명은 함께 남았다. "이제 그리쉬나크를 처치해야지." 우글룩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 중에서도 일부는 불안한 듯 남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글룩이 으르렁댔다. "나도 알아! 염병할 놈의 기사놈들이 우리를 발견했다는 걸 말이야. 그렇지만 그건 전부 스나가 네놈 잘못이야. 네놈과 같이 척후를 나갔던 놈들은 모조리 귀를 잘라 버려야 해! 그러나 우린 투사들이다! 조만간 우린 말고기,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고기를 포식하게 돼!" 그 순간 피핀은 왜 그 무리 일부가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그쪽에서 목쉰 외침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그리쉬나크가 다시 나타났고 그 뒤에는 그와 똑같이 팔이 길고 다리가 굵은 오르크들의 사십 명 정도 따라나왔다. 그들의 방패에는 붉은 눈이 그려져 있었다. 우글룩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래, 돌아온 건가? 다시 생각하게 된 거야?" "난 명령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또 포로들이 안전한지 보려고 돌아온 거야." "저런! 헛수고야! 내 지휘하에 명령대로 시행되고 있으니까. 다른 볼일은 없나? 부랴부랴 가느라고 뭘 두고 갔나?" "얼간이 한 놈을 두고 갔지. 또 잃어버리기엔 좀 아까운 몇 놈도 있고. 난 네놈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걸 알기에 그들을 도와 주려고 왔지." 그러자 우글룩이 비웃듯 응수했다. "대단하군! 하지만 네놈들한테 싸울 뜻이 없다면 길을 잘못 택한거야. 네놈들이 갈 곳은 루그버즈야. 로한놈들의 오고 있어. 네놈들의 그 소중한 나즈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엉덩이에 또 한번 불꽃세례를 받기라도 한 거야? 음, 네놈들이 그들을 데려왔다면 쓸모가 있었을 텐데. 나즈굴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말이야." "나즈굴! 나즈굴!" 마치 이 소리의 고약함을 고통스럽게 맛보기라도 하듯 그리쉬나 크는 몸을 떨며 외쳤다. "네놈은 지금 네 더러운 상상력이 미치지도 못하는 심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 우글룩! 나즈굴! 아, 나즈굴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이라고? 언젠가 네놈은 그런 소리를 입에 담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이 원숭이 같은 놈아!" 그리쉬나크는 계속해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위대한 눈께서도 나즈굴을 소중히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래, 날개달린 나즈굴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어. 아직은 아니라고. 그분은 그들이 아직 대하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시는 거야. 너무 일찍 노출되지 않게 하시는 거지. 그들은 대전투를 위해, 그리고 다른 목적을 위해 동원될 것이니까." 그러자 우글룩이 말했다. "네놈은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내 짐작으론 네놈 주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지 루그버즈의 친구들의 이상하게 여기겠군. 그건 그렇고, 이센가드의 우루크 하이족은 언제나 그랬듯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침흘리며 거기 서 있지 마라! 네놈의 어중이떠중이들 모두! 다른 돼지 같은 놈들의 지금 저 숲으로 달아나고 있으니 네놈들도 따라가는 게 좋을걸. 네놈들은 살아서 대하로 돌아가지 못해. 지금 당장 꺼져! 자, 내가 네놈들 꽁무니를 차주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은 다시 메리와 피핀을 움켜쥐어 떠멘 후 출발했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달렸다. 다만 호비트들을 새로운 운반자에게 교대시킬 때만 잠시 멈출 뿐이었다. 원래 빠르고 강건해서인지 아니면 그리쉬나크의 어떤 음모에 자극받아서인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은 점차 모르도르의 오르크들을 앞질렀다. 곧 그들은 앞서 떠났던 북쪽 오르크들마저 따라잡게 되었다. 숲이 가까워졌다. 피핀은 긁히고 찢긴 채 자신을 떠멘 오르크의 불결한 턱과 털투성이 귀에 머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구부린 등과 쉬지 않고 걷고 있는 강인하고 두터운 발들의 보였다. 그 발들은 마치 쇠줄과 뿔로 만들어진 듯 끝없는 시간의 악몽 같은 초침소리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오후에 우글룩의 무리는 북쪽 오르크들을 따라잡았다. 비록 흐릿하고 서늘한 하늘에서 빛나는 겨울태양이었지만 그 밝은 햇살 아래서 북쪽 오르크들은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는 아래로 처졌고 혀는 늘어져 있었다.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은 그들을 조소했다. "구더기 같은 놈들! 햇빛에 푹 쪄졌구나. 로한의 기사놈들은 네놈들을 잡자마자 그대로 먹을 수 있겠다. 그놈들의 오고 있어!" 뒤쪽에서 들리는 그리쉬나크의 고함소리로 보아 이 말은 그냥 조롱이 아닌 것 같았다. 아주 빨리 달려오는 기사들의 무리가 실제로 관측되었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마치 늪에서 허둥대는 무리를 덮치는 밀물처럼 오르크들에게 육박해 오고 있었다.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은 지금까지보다 배 이상 되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달리기경주에서 결승점을 향한 필사적인 마지막 역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피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태양은 안개산맥 뒤로 떨어지고 있었으며 어둠이 땅을 덮기 시작했다. 모르도르의 오르크들도 머리를 치켜들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숲은 어둡고 빽빽했다. 그들은 벌써 숲 가장자리의 나무 몇 그루를 지나쳤다. 차츰 비탈져 가는 길은 갈수록 가팔라졌지만 오르크들은 멈추지 않았다. 우글룩과 그리쉬나크는 모두 마지막 힘을 내라고 재촉하며 입을 모아 소리를 질러 댔다. '이들은 머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거야.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피핀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어깨 너머로 힐끗 돌아볼 수 있도록 간신히 목을 비틀었다. 동쪽 멀리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이젠 오르크들과 수평이 되는 지점까지 평원을 질주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석양에 비친 그들의 창과 투구는 금빛으로 빛나며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오르크들이 흩어지지 않게끔 강줄기를 따라 원형으로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피핀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몹시 궁금했다. '리벤델에 머물 때 좀더 많이 배워뒀어야 했는데. 지도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더 많이 보아 뒀어야 했는데.' 피핀은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원정을 지휘할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게 여겨졌기에. 또 자신이 갠달프나 스트라이더, 심지어 프로도와 갈라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로한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갠달프의 애마 섀도우폭스가 거기서 왔다는 것뿐이었다. 로한이란 이름은 어쨌든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오르크가 아니란 사실을 저들이 알 수 있을까? 이 남쪽지방에선 우리 호비트들을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야수같은 오르크놈들의 궤멸될 것에 대해선 마땅히 기뻐해야겠지만 그보다도 우리들의 살 수 있어야 할 텐데.' 피핀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로한인들이 메리와 피핀을 알아보기도 전에 오르크들과 함께 떼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들 중 일부는 기사에 능숙한 것 같았다. 사정거리에 이른 기사들은 뒤처진 오르크들을 향해 활을 쏴 여럿을 쓰러뜨리고는 그대로 도망치며 응사하는 오르크들의 사정거리 밖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이런 공방이 몇 차례나 계속되었다. 한번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에까지 화살이 날아와 바로 피핀 앞에 가던 자가 거꾸러지기도 했다. 로한의 기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 전에 밤이 되었다. 이미 많은 오르크가 쓰러졌지만 아직도 족히 이백 명은 남아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전 오르크들은 작은 언덕에 당도했다. 그곳은 숲 어귀로부터 채 반 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미 기사들에게 완전히 포위를 당했던 것이다. 작은 무리가 우글룩의 명령을 어기고 숲을 향해 달려갔으나 그들 중 단 셋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쉬나크가 빈정댔다. "흥, 꼴 좀 보지. 훌륭한 지휘야! 위대한 우글룩이 여전히 우리를 이끌고 빠져나가게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우글룩은 그를 무시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 하플링들을 내려놔! 루그두쉬, 네가 두 명을 데리고 그놈들을 감시해라. 더러운 로한놈들이 돌격해 오지 않는 한 그놈들을 죽여선 안 돼. 알겠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겐 그놈들의 필요해. 하지만 그놈들이 소리를 지르게 놔둬선 안 돼. 또 로한놈들에게 뺏겨서도 안 된다. 그놈들 발을 묶어라." 마지막 명령은 즉각 시행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이제 메리와 함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르크들은 소리를 질러 대는 둥 무기를 부딪는 둥 엄청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호비트들은 잠시 함께 속삭일 수 있었다. 메리가 입을 열었다. "난 지금 큰 희망이 있다고는 생각 안해. 난 너무 지쳤어. 발이 풀린다고 해도 멀리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자 피핀이 속삭였다. "렘바스! 넌 렘바스를 좀 갖고 있어? 저놈들의 칼만 압수하고 다른 건 훔쳐가지 않았을 텐데." "그래, 호주머니에 한 꾸러미 있어. 하지만 다 부서지고 말았을 거야. 어쨌든 호주머니에 입을 가져다 댈 수도 없잖아." "넌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그때 사나운 발길질이 날아와 소란이 끝났다는 걸 알려 주었다. 감시병들은 다시 경계의 자세를 갖췄다. 밤은 춥고 고요했다. 오르크들이 모여 있는 야산 주위는 작은 횃불들이 어둠 속에서 금빛과 붉은빛의 완전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횃불의 원은 사정거리 내에 있었지만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오르크들이 불꽃을 겨냥해 쏜 화살들은 모두 허사였다. 마침내 우글룩이 활을 멈추게 했다. 기사들로부터는 아무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안개를 뚫고 달빛이 비쳐들면서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가끔 하얗게 반사되어 어렴풋이 보이기도 했다. 감시병 중 하나가 기사들 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저 빌어먹을 놈들은 해뜨길 기다리는 거야. 우린 왜 병력을 모아 돌파할 생각을 안하는 거야? 우글룩은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자 뒤쪽으로부터 우글룩이 걸어오면서 대꾸했다. "아마 알게 될 거다. 내가 전혀 생각을 못한다는 거냐, 응? 이 찢어죽일 놈 같으니! 네놈은 저 오합지졸들, 구더기 같은 놈들이나 루그버즈의 원숭이 같은 놈들처럼 형편없어. 그런 놈들과 같이 돌격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이다. 저놈들은 무서워서 우는 소리만 내며 줄행랑을 칠 뿐이야. 그리고 저기 말을 타고 있는 놈들은 우리를 박살내고도 남을 정도로 많단 말이다. 저 구더기들이 할 수 있는건 딱 한 가지밖에 없어. 송곳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다는 거, 그것뿐이지. 그런데 내가 듣기론 로한족은 다른 인간들보다 밤눈이 밝아. 그래서 말을 잃어버리지도 않는 거야. 그놈들은 밤의 미풍도 볼 수 있다고 하지. 그렇지만 그 잘난 놈들도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우리 이센가드의 우루크 하이족 대장 마우후르와 그 부하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달려나올 준비를 갖추고 숲 속에 매복해 있다는 사실 말이야." 우글룩의 말을 들은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은 좀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오르크들은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으며 또 우글룩에게 반항적인 태도였다. 몇 명의 경비병을 배치해 두긴 했지만 오르크들 대부분은 땅에 누워 감미로운 어둠 속에서 쉬고 있었다. 이젠 아주 어두워졌다. 서쪽으로 흘러가던 달이 두터운 구름 속으로 묻혀 버려 피핀은 몇 자 떨어진 곳도 볼 수 없었다. 횃불도 야산까지 빛을 뿌리진 못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단순히 새벽을 기다리며 적을 쉬게 내버려 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야산 동쪽에서 갑작스런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로한인 몇 명이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에서 내려 야영지 외곽의 오르크들을 죽이고나서 다시 말을 타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글룩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달려갔다. 피핀과 메리는 일어나 앉았다. 그들을 감사하던 이센가드의 오르크들도 우글룩을 뒤쫓아가고 없었다. 그렇지만 호비트들이 탈출할 마음을 먹기도 전에 이미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털투성이의 긴 팔이 다가와 그들의 목덜미를 잡아 바싹 끌어당겼다. 그들은 둘 사이로 끼어든 그리쉬나크의 거대한 머리와 끔찍스런 얼굴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고약한 입내가 뺨에 와닿았다. 그는 호비트들을 거칠게 다루며 수색하기 시작했다. 피핀은 단단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등 위아래를 더듬거리자 온 몸이 떨려 왔다. 그리쉬나크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흠, 고 녀석들 참 귀엽기도 하지. 멋진 휴식을 즐기고 있는 거냐, 응? 한쪽엔 칼, 채찍 또 한쪽엔 역겨운 창이 버티고 있으니 약간 어색한 자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쪼그만 족속이 너무 큰 일에 끼어들면 안 되지." 그는 손가락으로 계속 둘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눈에서는 창백하고도 뜨거운 불꽃 같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쉬나크는 반지에 대해 알고 있어! 우글룩이 자리를 뜬 사이에 그걸 찾아내려는 거야. 자기가 차지하려고.' 피핀은 다급하게 구는 적의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핀의 가슴엔 섬뜩하고 차가운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그리쉬나크의 욕망을 어떻게 이용할 방도가 없을까 궁리했다. 피핀은 나직이 속삭였다. "그렇게 해선 그걸 찾을 수 없을 걸요. 쉽지 않죠?" 그리쉬나크는 동작을 멈추고 피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걸 찾는다고? 내가 뭘 찾는단 말이야? 너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이 애송이야?" 피핀은 잠시 잠잠히 있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그는 갑작스레 '골룸, 골룸!' 하는 소리를 낸 다음 '하찮은 것, 내 보물' 하고 덧붙였다. 호비트들은 그리쉬나크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깨비 같은 오르크는 낮은 소리로 뱀처럼 쉭쉭거렸다. "오호! 바로 그런 뜻이었나? 오호! 아주, 아주 위험하구먼, 요 깜찍한 것들!" 그제서야 피핀의 의도를 알아차린 메리는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 아마 그렇겠죠. 그리고 우리한테만 위험한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당신 일이니 당신 자신이 제일 잘 알겠죠. 그걸 원하나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럼 그 대신 뭘 줄 수 있나요?" 그리쉬나크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내가 그걸 원하느냐고? 내가 그걸 원하느냐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양팔을 벌벌 떨었다. "그 대신 내가 뭘 주겠냐고? 그게 무슨 소리지?" 피핀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듯 말했다. "내 말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더듬어 찾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우린 당신의 시간과 수고를 덜어 줄 수 있어요. 그렇지만 먼저 우리 다리나 풀어 줘요. 안 그러면 우린 아무 일도, 아무 말도 안할 거예요." 그러자 그리쉬나크는 쉭쉭거리며 대꾸했다. "이런 애송이 같은 놈들 보게. 네놈들이 가진 모든 것, 네놈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때가 되면 밝혀지게 돼 있어. 모든 게 말이야! 네놈들은 아마 심문자를 만족시킬 만큼 아는 게 더 많았으면 하고 바라게 될걸. 틀림없이 그렇게 되고말고. 그것도 곧. 우린 섣불리 심문하진 않지. 그럼, 절대로 서둘러 심문하지 않아. 왜 네놈들 목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지 알아? 요 깜찍한 꼬마들아, 내 이건 진정으로 해주는 말인데, 그건 네놈들한테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또 우글룩의 많은 실수 중의 하나도 아니고." 그러자 메리가 나서서 응수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뭐. 하지만 당신은 아직 먹이를 집에까지 운반하질 못한 거예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당신 뜻대로만은 안 될 걸요. 만일 우리가 이센가드에 당도하게 된다면 결국 이득을 보는 쪽은 위대한 그리쉬나크 당신은 아니겠죠? 결국 우리한테서 찾아낸 모든 것은 사루만의 차지일 걸요. 만일 당신이 독차지하고 싶은 그 뭔가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거래를 할 때라고요." 그리쉬나크는 분통을 터뜨렸다. 사루만이란 이름이 그를 더욱더 분노케 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근방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소리도 잦아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우글룩이나 이센가드의 오르크들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리쉬나크는 다시 으르렁댔다. "네놈들이 그걸 갖고 있단 말이지, 너희 둘 중 하나가?" "골룸, 골룸!" 피핀이 말했다. "다리를 풀어 줘요." 메리도 말했다. 그들은 그 오르크의 양팔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쉬나크는 다시 쉭쉭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네놈들은 더럽고 하찮은 버러지에 불과해! 그런데 다리를 풀어 달라고? 네놈들 몸뚱어리에 있는 힘줄이란 힘줄은 몽땅 다 끊어 버릴 테다! 내가 네놈들 뼈마디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못 뒤질 성싶으냐? 네놈들 둘 모두 너덜너덜하게 조각조각 잘라 주겠다. 네놈들을 차지하기 위해 데려가는데 네놈들 다리의 도움을 내가 꼭 받아야 할 것 같으냐?" 그는 순식간에 그들을 움켜쥐었다. 그리쉬나크의 어깨와 긴 팔의 힘은 대단했다. 그는 호비트들을 각각 양 겨드랑이 밑에 끼고는 꽉 조였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다음 그는 몸을 낮추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삽시간에 야산 가장자리까지 접근했다. 그는 거기서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사악한 유령처럼 그들 사이를 뚫고 어둠 속을 빠져나와 비탈길을 타고 숲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을 향해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쪽에는 횃불 하나만 켜진 탁 트인 공터가 있었다. 십 미터쯤 가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핀 다음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몸을 거의 반으로 접다시피 낮게 구부리고 엉금엉금 기어갔다. 잠시 멈춰 쭈그리고 앉아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이제 누가 뒤쫓아오더라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 순간 기자 기사가 큰 소리로 말을 달랬다. 그리쉬나크는 호비트들을 더 바싹 끌어당기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린 채 칼을 뽑았다. 분명히 그는 포로들이 구원받거나 도망치게 놔두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파멸을 초래한 원인이 된 것이었다. 그가 칼을 빼는 순간 어렴풋하게나마 쇳소리가 울렸으며 또한 불빛에 비친 칼날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시윗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은 매우 능숙한 솜씨로 조준되기라도 한 듯, 또는 어떤 운명의 유도를 받기라도 한 듯 정확히 그의 오른손을 꿰뚫었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으나 곧 잠잠해지고 말았다. 그리쉬나크가 쓰러지자 호비트들은 납작하게 엎드린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료를 돕기 위해 다른 한 명의 기사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시각이 특별히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감각이 있었는지 그 말은 뛰어오르며 그들을 가볍게 넘어갔다. 그러나 기사는 공포에 질려 미동도 하지 않고 요정의 망토를 둘러쓴 채 엎드려 있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내 메리가 움직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진 아주 잘됐어. 그런데 어떻게 날아오는 창을 피하지?" 그에 대한 해답은 즉시 제시되었다. 그리쉬나크의 비명이 오르크들을 깨웠던 것이다. 야산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듣고 호비트들은 우글룩이 자신들의 없어진 사실을 깨닫고 미친 듯이 화가 나서 다른 오르크들을 베어넘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횃불 오른쪽 방향으로부터 즉 숲과 산맥이 잇닿은 곳에서 오르크들이 응답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매복했던 마우후르가 포위한 로한의 기사들을 공격하는 모양이었다. 말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오르크들에게 포위망을 돌파당하지 않기 위해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에도 불구하고 원진을 유지하며 야산 주위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새로 나타난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말을 달려 나갔다. 메리와 피핀은 그 순간 자신들이 저절로 전투영역 밖에 누워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의 탈출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손과 발만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린 도망칠 수 있어. 그런데 매듭까지 손이 닿질 않아. 이로 물어뜯을 수도 없고." 메리가 말하자 피핀이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난 용케도 이미 내 손을 풀어 놨지. 이 매듭은 내가 살짝 걸쳐 놓은 거라고. 우선 넌 렘바스를 좀 먹는 게 좋겠어." 그는 손목에 걸쳐 놓았던 줄을 풀어 버리고는 꾸러미를 풀었다. 케이크는 부서지긴 했어도 여전히 풀잎으로 포장된 상태로 아직은 먹을 만했다. 호비트들은 각기 두세 조각씩 먹었다. 케이크의 맛은 이젠 사라져 간 평온하던 시절의 아름다운 얼굴들, 웃음소리 그리고 깔끔한 음식을 기억하게 했다. 잠시 그들은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상념에 잠겨 케이크를 먹었다. 현재의 상황으로 먼저 의식을 돌린 것은 피핀이었다. "자 이제 떠나야 해. 잠깐!" 그리쉬나크의 칼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으나 너무 무거워 그가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때 피핀 역시 옆에 죽어 쓰러져 있는 다른 오르크에게로 기어가 칼집에 꽂혀 있는 길고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결박을 끊었다. "자, 이제부터야! 몸을 좀 따뜻하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도, 또 걸을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기는 편이 낫겠어." 그들은 땅을 기기 시작했다. 잔디가 길고 나긋나긋하게 잘라나 있어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역시 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더디고 답답했다. 그들은 횃불빛을 피해 벌레처럼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 이윽고 깊숙한 기슭 아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콸콸 흐르는 강 어귀에 다다랐다. 그제서야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란은 잦아들었다. 마우후르와 그의 부하들은 죽었거나 격퇴당한 것 같았다. 기사들은 다시 조용하고 음산한 경계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포위는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구름이 벗겨진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해지기 시작했다. 피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안전한 데 숨어야 해! 안 그러면 곧 다시 발각되고 말 거야. 기사들이 우릴 죽이고난 후에야 오르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는 일어서서 발을 굴려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줄이 마치 쇠줄처럼 발목 살을 파고들었지만 이젠 다시 발이 따뜻해지고 있어. 아직도 좀 저리긴 하지만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메리 넌 어때?" 메리고 일어서며 말했다. "좋아. 그럭저럭 다리를 쓸 순 있어. 렘바스가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 것 같은데? 오르크 술의 열기보다 더 상쾌한 느낌도 들고. 난 그게 뭘로 만든 건지 궁금해. 아예 모르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물 한 모금 마시자." "여기선 안 돼. 강기슭이 너무 가팔라. 자, 앞으로 가자." 그들은 방향을 돌려 천천히 강줄기를 따라 나란히 걸어갔다. 뒤쪽 동편에선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호비트들이 늘 그러듯이 자신들이 포로로 잡힌 후에 겪은 고초를 대단한 일도 아닌 양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털어놓았다. 만일 누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들이 방금 전까지 지독한 고생을 겪었으며 지금도 아무 희망 없이 죽음과 고통을 향해 가는 처지라는 사실, 그리고 친구나 안전책을 발견할 희망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메리가 말했다. "투크, 넌 정말 잘해 낸 것 같아. 만일 빌보 아저씨에게 보고할 기회가 온다면 틀림없이 네 행동은 그분이 쓸 책의 한 장은 차지하게 될 거야. 정말 훌륭했어. 특히 그 털투성이 악당의 술수를 간파해 장단을 맞춘 것은. 그런데 네 브로치를 발견할 사람이 있을까? 내것은 잃고 싶지 않지만 네건 영원히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너같은 수준이 되려면 난 발톱부터 다시 가다듬어야겠어. 이제부턴 이 사촌 브랜디버크가 앞장서겠어. 내 진가가 발휘되는 시점은 바로 지금부터야.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넌 모를 거야. 그렇지만 난 리벤델에 있을 때 배워 뒀지. 우린 엔트워시 강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야. 안개산맥 아랫단 그리고 판곤 숲 안에 있어."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그들 앞에 어두운 윤곽의 숲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는 새벽빛을 피해 밤이 슬금슬금 거대한 숲 아래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계속 앞장서시지, 브랜디버크! 그러기 싫으면 되돌아가자고. 우린 판곤 숲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잖아? 그렇게 많은 걸 아는 네가 그 사실을 잊진 않았겠지?" "물론 잊지 않았지. 그렇지만 내 생각엔 전투의 소용돌이로 다시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 숲이 나을 것 같아." 메리가 대답했다. 그는 앞장서서 수많은 나무의 거대한 가지 아래로 난 길로 걸어 들어갔다. 나무들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래돼 보였다. 긴 수염같이 뻗친 이끼가 미풍에 날리며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호비트들은 어둠 속에서 비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빛 속에서 그들의 작은 형체는 마치 시간의 심연 속에 선 채 야생의 숲에서 처음 맞이하는 새벽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요정아이들 같았다. 대하와 갈색 황야 저 건너편 수십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부터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새벽이 다가왔다. 새벽을 맞이하는 사냥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로한의 기사들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나팔소리들이 서로 응답하듯 들려왔다. 메리와 피핀은 군마들의 울음과 사람들의 노래가 차가운 대기 속에서 맑게 울리는 것을 들었다. 땅끝 저 멀리서 횃불 아치와도 같은 태양의 광휘가 떠올라 오고 있었다. 일출과 함께 기사들은 우렁찬 함성을 토하며 돌격했다. 갑옷과 창이 붉게 번뜩였다. 오르크들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남은 화살을 되는 대로 쏘아 댔다. 호비트들은 여러 명의 기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회하며 돌격을 계속했다. 그러자 이제껏 남아 있던 대부분의 오르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지만 대개 추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어두운 계곡에 몰려있던 한 무리의 오르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숲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곧장 비탈을 올라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메리와 피핀 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숲 아주 가까이까지 달려왔기에 기사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이미 길을 가로막던 세 명의 기사를 쓰러뜨렸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지켜본 것 같아. 저기 우글룩이 있어! 난 저놈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호비트들은 방향을 돌려 숲의 어둠 속으로 깊숙이 달아났다. 그래서 그들은 우글룩이 바로 판곤 숲 어귀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혀 궁지에 몰린 채 최후의 저항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글룩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로한의 제삼원수 요머가 말에서 내려 그와 칼을 맞대고 싸웠던 것이다. 날카로운 시각의 소유자들인 로한의 기사들은 넓은 평원을 가로지으며 아직도 달아날 기력이 남은 오르크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추격이 끝난 후 기사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매장하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오르크들의 시체를 불태우고 재를 날려 보냈다. 오르크들의 침략으로 이렇게 막을 내렸으며 이 소식은 모르도르나 이센가드 그 어느 곳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크들의 시체를 태운 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주의깊은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제4장 트리비어드 호비트들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어두컴컴한 숲속으로 있는 힘껏 도망쳤다. 그들은 개울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가 산맥 비탈을 올라서면서는 점점 더 판곤 숲 깊숙히 빠져들었다. 오르크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지면서 발걸음도 늦춰졌다. 숲속은 공기가 충분하지 않아서인지 숨이 막혀 왔다. 마침내 메리가 멈춰서서 헐떡거리며 말했다. "이 상태론 계속 갈 수 없어. 난 공기가 필요해." "어쨌든 물이나 한 모금 마시자. 난 자꾸만 목이 타." 하고 대꾸하며 피핀은 개울까지 닿도록 꾸불꾸불 뻗어내린 거대한 나무뿌리를 타고 기어내려가 몸을 굽혀 두 손을 모아 물을 조금 떠올렸다. 물은 아주 맑고 차가웠다. 그들은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물을 떠올려 마셨다. 물을 마시자 기분도 다소 상쾌해졌고 힘도 났다. 그들은 잠시 개울가에 나란히 앉아 쓰린 다리와 발에 물을 끼얹으며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박명을 받아 나무들은 어슴푸레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거대한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며 피핀이 말했다.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닐까? 이 개울 이름이 앤트워시든 뭐든 간에 이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우리가 왔던 길로 다시 나갈 순 있을까?" "다리가 말을 제대로 들어 준다면, 그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 "그래, 여긴 너무 공기가 없어서 답답해. 어쩐지 저 멀리 투크바로우의 그레이트 스마이얼 동굴 안에 있는 투크가의 궁성 속의 오래된 방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야. 거긴 아주 넓은 곳인데 수세기 동안이나 가구를 옮기거나 바꾼 적어 없어. 우리 할아버진 아주 늙어서까지 그 안에서 사셨다고 해. 그 방은 그분이 백 년 전에 돌아가시고 나서도 전혀 바뀌지 않았고. 그 할아버지 성함은 게론티우스였는데 그런 분이 바로 내 증조부기 때문에 그래도 그 방은 좀 덜 답답하게 느껴지지. 근데 이 숲의 퀴퀴한 냄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늘어지고 길게 뻗친 저 수염 같은 이끼들을 보라구! 또 나무들은 결코 떨어진 적도, 떨어질 것 같지도 않은 너덜너덜한 마른 잎으로 반쯤은 뒤덮여 있고 너무 지저분해. 만일 이곳에도 봄이 온다면 그 모습이 어떨까 상상할 수도 없어. 봄의 대청소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어쨌든 태양이 가끔은 보이는 것이 틀림없어. 생긴 모습이나 주는 느낌이 빌보아저씨가 적어 놓은 머크우드와는 전혀 달라. 그 숲은 아주 깜깜한 데다가 어둡고 사악한 것들의 안식처라지만 이 숲은 흐릿하고 무서울 정도로 나무들 천지야. 이 숲속에서 생물이 살거나 머문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래, 상상도 할 수 없지. 더구나 호비트들이 산다는 건. 사실 난 이 숲을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마 백 마일을 가도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지금 우리 식량 사정은 좀 어때?" "좋지 않아. 우린 남은 렘바스 두 꾸러미만 가지고 도망쳤어. 다른 건 그대로 남겨두고 말야." 그들은 요정이 준 케이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남아 있는 것들조차 전부 바스라져 있었다. 아주 절약해 먹는다 해도 닷새 이상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메리가 말했다. "그뿐 아냐. 덮을 것도 하나도 없어. 어딜 가든 우린 당장 오늘밤 추위도 면할 방법이 없어." "자, 지금 길을 정하는 게 좋겠어.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어." 바로 그때 그들은 황금빛 햇빛이 숲속으로 한결 깊숙히 비쳐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태양의 빛줄기들이 숲의 지붕을 꿰뚫고 들어온 것 같았다. 메리가 외쳤다. "야호! 우리가 이 나무 밑에 있는 동안 해는 구름에 가려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다 이제야 나온 거야. 아니면 이 숲의 틈새로 빛을 내쏠 수 있을 만치 높이 솟았든지. 어쨌든 그 틈새가 멀지 않을 테니 가서 살펴보자!" 그러나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길은 계속 가팔라졌으며 땅에는 자갈이 울퉁불퉁 튀어올라와 있었다. 계속 걸어감에 따라 햇빛은 점점 강해졌고 그들은 곧 눈 앞에 딱 버티고 선 바위벽에 다다랐다. 그것은 마치 언덕의 사면이나 긴 산맥의 뿌리가 갑자기 끊긴 것처럼 보였다. 바위벽 위에는 나무가 없었으며 태양이 그 단단한 표면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아래쪽에는 나무들이 마치 온기를 얻기라도 하려는 듯 바위를 향해 긴 가지를 꼿꼿이 뻗치고 서 있었다. 지금껏 오로지 회색으로만 보였던 숲이 이제는 환한 갈색과 광을 낸 가죽표면 같은 매끄러운 흑회색의 나무껍질로 번득이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은 어린 풀처럼 초록빛을 발하며 이른 봄의 기운, 또는 순간적인 환상을 느끼게 했다. 바위벽에는 계단 같은 것이 나 있었다. 거칠고 그리 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연적으로 생성된 후 바위의 풍화와 균열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리라. 바위벽에는 숲의 나무들 높이만큼의 턱이 져 있었다. 그곳에는 가장자리에 몇 가지 잡초가 자라고 있었으며 늙은 나무 한 그루가 단지 두 개의 가지만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혹부리영감이 아침햇살을 받고 눈을 깜박이며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메리는 신이 나서 외쳤다. "올라가자! 자, 맑은 공기도 한번 들이켜고 아래도 내려다봐야지." 그들은 바위를 기어올랐다. 만일 그 계단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들보다는 훨씬 크고 다리도 긴 자들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은 바위벽을 오르는 데만 온통 정신을 팔고 있어서 자신들이 생포되었을 때 다친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으며 어느덧 원기도 되살아났다는 놀랄 만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늙은 나무가 서 있는 바위턱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바위턱에 뛰어오른 다음 그들은 등을 기댄 채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 심호흡을 하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숲속으로 고작 삼사 마일 들어왔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듬지들이 평원을 향해 비탈을 따라 행진하듯 늘어서 있었다. 저편 숲 가장자리 근처에선 시커먼 연기가 넘실대듯 큰 소용돌이를 이루며 솟아올라 그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너울너울 퍼지고 있었다. 메리가 입을 열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어. 다시 동쪽으로 불고 있어. 이 위쪽은 서늘하군." "그래, 난 지금의 빛이 단지 한순간 비치다가 모든 게 다시 회색으로 변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 아, 이게 무슨 일이람! 이 텁수룩한 늙은 숲도 이 햇살 속에선 이렇게 달라 보이는데. 지금 이 장소가 좋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 그러자 이상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받았다. "숲이 좋다는 느낌이 든다고? 좋은 일이야! 그렇게 잘 봐주니 고맙군. 돌아서 봐. 너희들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구나. 느낌으로도 너희들이 좋아질 것 같지만. 어쨌든 성급한 판단은 좋지 않겠지. 자, 돌아서 봐!" 그들 어깨 위로 손가락 마디에 혹이 달린 손이 얹혔다. 그들은 각기 부드럽게 그러나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굳세게 몸이 돌려졌다. 그리고는 거대한 두 팔이 그들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특이하게 생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머리가 우뚝 솟은 데다가 목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건장하게 생긴, 거의 오 미터에 달하는 키의 거대한 인간 또는 트롤처럼 생긴 자였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은 회색과 초록의 나무껍질로 만든 옷인지 아니면 그게 바로 그의 살갗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몸에 바짝 붙은 짧은 두 팔은 갈색의 매끄러운 피부로 덮여 있었다. 커다란 발에는 각기 일곱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었다. 기다란 얼굴의 턱 부분은 회색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수염의 뿌리 쪽은 텁수룩하고 잔가지만큼이나 굵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성기고 이끼처럼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호비트들의 눈에 가장 인상적으로 보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 깊숙한 눈은 그들을 느리고 엄숙하게 그렇지만 꿰뚫어보듯이 살피는 것이었다. 초록색이 섞인 갈색 눈이었다. 후에 피핀은 그 눈에 대한 자신의 첫인상을 기술하려고 애쓰곤 했다. '그 눈 안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억과 오랫동안 꾸준히 쌓아 둔 사고로 가득찬 거대한 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바깥쪽 잎새에 부딪는 햇살처럼, 또는 아주 깊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현재를 반짝이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자라는 어떤 것 - 잠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스스로를 뿌리와 나뭇잎 사이, 깊은 대지와 하늘 사이의 그 어떤 것으로만 느끼고 있는 - 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무한한 세월에 걸쳐 스스로의 내부적인 일에 쏟아왔던 바로 그 느긋한 관심의 눈길로 지금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주 낮은 음을 내는 목관악기처럼 굵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흠, 흠.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군. 서두르지 말라, 이게 내 좌우명이야. 만일 너희들 목소리를 듣지 않고 모습만을 보고서는 그냥 작은 오르크들이라고 판단하고 짓밟아 버렸다면 난 잘못을 깨달아야 했겠지. 그러나 난 너희들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어. 멋지고 작은 목소리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옛날의 그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야. 정말이지 너희들은 아주 이상한 종족이군. 모든 게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야!" 피핀은 아직도 놀란 상태이긴 했지만 더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눈길을 받으면서 그는 두려움이 아닌 어떤 호기심 어린 긴장을 느꼈다. "저,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리고 뭐하는 분이시죠?" 늙은 눈에는 경계하는 듯한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깊은 샘같은 그늘에 가리워졌다. 그는 피핀에게 대답했다. "흠, 흠. 난 엔트다. 다들 날 그렇게 부르지. 그래, 바로 엔트란 이름이야. 아마 너희들의 언어로도 엔트라고 할걸. 판곤이라 부르는 언어도 있고 또 다른 언어로는 트리비어드라고도 하지. 그래, 트리비어드라고 하면 되겠군." 메리가 말했다. "엔트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을 뭐라고 부르죠? 진짜 이름이 뭐예요?" "후, 자. 후! 그걸 말하면 비밀이 다 드러나고 말지! 그렇게 성급해 하지 말아. 그라고 지금 묻고 있는 건 나야. 너희들은 내 나라에 있는 거야. 너희들은 누구지? 너희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젊었을 때 배운 계보엔 너희들이 올라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렇지만 그건 아주 오래된 옛날 것이니까 계보가 새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지. 가만있자! 글쎄, 어떻게 하더라? 자, 살아있는 피조물에 관한 지식을 배우자! 먼저 자유스런 종족 넷이 있지. 요정들이 넷 중 가장 오래되었고, 굴을 파는 난쟁이, 동굴은 어둡고, 흙에서 태어난 엔트, 산맥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 말을 타고 다니지. 흠, 흠, 흠. 집짓는 비비, 풀쩍 뛰는 수사슴, 개미사냥꾼 곰, 싸움꾼 멧돼지, 굶주린 사냥개, 겁먹은 토끼. 흠, 흠. 둥지 속의 독수리, 목초지의 수소, 왕관뿔의 수사슴, 가장 빠른 매. 순백의 백조, 차가운 뱀. 흠, 흠, 어떻게 되더라? 음, 흠, 계보가 꽤 길었는데. 어쨌든 너희들은 그 어디에도 들어맞질 않는단 말야!" 메리가 대답했다. "우린 언제나 그 옛날 계보와 이야기에서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돌아다니며 활동한 지도 꽤 오래됐는데도 말이에요. 우린 호비트예요." 그러자 피핀이 덧붙였다. "한 줄 더 만들어야겠어요. 굴집 속에 사는 반만 자란 호비트라고 말이에요. 우릴 네 종족 중에서 덩치 큰 인간 다음 항목에 넣어 주면 되겠는데요." "흠, 좋은 생각이군. 좋아, 그러면 되겠군. 그래 너희들은 굴집 속에서 산단 말이지? 그건 아주 썩 잘 어울리는군. 그런데 너희들을 호비트라고 부르는 건 누구지? 그건 요정들의 언어는 아닌 것 같은데. 오래된 말들은 거의 다 요정들의 언어로 만들어졌지. 요정들이 만들었단 말이야." "그건 다른 종족이 붙여 준 이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붙인 거예요." 하고 피핀이 대답했다. "흠, 흠! 자!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구! 스스로 호비트라 부른다? 그러나 너희 전부를 다 그렇게 부르진 않겠지? 크게 지장되는 일이 없다면 너희들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게 어때?" 메리가 말했다. "그 정도는 지장이 될 게 없죠. 제 이름은 브랜디버크, 메리아독 브랜디버크예요.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그냥 메리라 부르죠." "그리고 난 투크, 페레그린 투크예요. 보통 피핀이라고 부르고 때론 그냥 핍이라고도 하죠." "흠,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너희들은 성질이 급한 종족 같애. 날 믿어 주니 고맙군. 하지만 그렇게 대번에 스스럼없이 굴어선 안 돼. 알겠지만 여긴 엔트들이 수없이 많아. 실은 엔트처럼 생겼지만 엔트는 아닌 것들도 많지만. 괜찮다면 나도 메리, 피핀이라고 부르지. 좋은 이름이야. 난 너희들에게 내 이름은 말하지 않겠어. 어쨌든 지금은 말이야." 어떻게 보면 빈틈이 없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익살을 부리는 것 같은 이상야릇한 표정이 초록빛으로 깜빡이는 눈가에 떠올랐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야. 내 이름은 계속 길어지고 있지. 난 참으로 긴 세월을 살았거든. 그래서 내 이름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이야기와도 같지. 내 이름을 대려면 거기에 관계되는 것들을 우리말로 즉 옛 엔트어로 말해야 하니까. 우리 언어는 사랑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데 아주 긴 시간이 걸려. 왜냐하면 우린 듣고 말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가치가 없는 말은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자......" 하고 말할 때 그의 눈은 점점 작아지고 날카로워지면서 매우 밝은 '현재'의 눈이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속에서 너희들이 하는 역할은 뭐야? 나는 여기서, 여기 아-랄라-랄라-룸바-카만다-린드-오르-부루메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또 냄새맡고 느낄 수 있어. 미안, 미안. 그건 이 땅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일부야. 다른 말로는 뭐라고 하는지를 몰라서 그래. 알았지? 우리가 발딛고 있는 곳, 아침이면 사방을 살펴보며 태양, 숲 너머의 초원, 말들, 구름, 그리고 세상이 펼쳐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곳을 말하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갠달프는 뭘 하고 있어? 그리고 그 부라룸," 하고 말할 때 그는 거대한 오르간이 일제히 울리는 듯 깊이 울리는 불협화음 같은 소리를 우루루 하고 냈다. "그 오르크놈들과 젊은 사루만은 저 아래 이센가드에 있는 건가? 난 소식듣기를 좋아하지. 그렇지만 지금 당장 빨리 대답하라는 건 아니야." 메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맡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빨리 말한다고 해도 아마 꽤긴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렇지만 당신은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죠? 그러니 지금 당장 얘기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우린 먼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우릴 어떻게 하실 거죠?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이 어느 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갠달프를 아시나요?" "그럼, 그를 알지. 진실로 나무를 이해하는 유일한 마법사야. 너희들도 그를 아는가?" 피핀이 침통하게 말했다. "그래요. 알았었죠. 그는 훌륭한 길동무였고 또 우리들의 지휘자였어요." "그렇다면 너희들의 다른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군. 나는 너희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진 않아. 지금 질문이 그 뜻이라면 난 너희들의 동의 없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겠어. 우린 함께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지. 난 어느 편이라는 건 몰라. 난 나의 길을 갈 뿐이야. 그러나 너희들의 갈 길이 내 길과 얼마동안 같을 순 있겠지. 그런데 너희들은 갠달프가 마치 끝나 버린 이야기 속의 인물인 것처럼 얘기하는군." 피핀이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했죠.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지만 갠달프는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떨어져 나간 거예요." "후, 자! 흠, 흠, 아, 음." 트리비어드는 소리를 멈추고 오랫동안 호비트들을 바라보았다. "흠,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자, 자!" 메리가 말했다. "더 듣고 싶으시다면 말해 드리죠. 그러나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우릴 좀 내려주시지 않겠어요? 햇살이 비치는 동안 여기 양지바른 곳에 함께 앉으면 안 될까요? 우릴 들고 계시면 당신도 피곤하실 테니까요." "흠, 피곤할 거라고? 아냐, 난 피곤하지 않아. 난 쉽게 지치지 않아. 그리고 또 난 앉지 않아. 흠, 난 잘 굽혀지는 체질이 아니지. 그건 그렇고 저, 해가 구름에 가려지고 있어. 이곳을 떠나자. 너희들은 이 땅을 뭐라고 부른다고 했지?" "언덕이요?" 피핀이 물었다. "바위턱? 계단이요?" 하고 메리도 물었다. 트리비어드는 생각에 잠긴 채 그 낱말을 반복했다. "언덕. 그래, 바로 그거였어. 그렇지만 그건 세계의 이쪽 부분이 형성된 후부터 변함없이 여기 존재해 온 것에 대한 낱말로는 좀 성급한 것이군. 신경 쓸 것 없어. 여길 떠나자고." "어디로 갈 건가요?" 메리가 물었다. "내 집으로, 또는 내 집들 중 하나로." "먼가요?' "글쎄, 아마 너희들은 멀다고 하겠지.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메리가 말했다. "보다시피 우린 소지품을 전부 잃어 버렸어요. 우리에겐 약간의 식량밖엔 없거든요." "오, 흠!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오랫동안 원기를 지탱시켜 줄 음료수를 줄 테니까. 그리고 만일 우리가 헤어지기로 결정하면 내 나라 밖의 어느 곳이든 너희들이 선택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자, 이제 가지." 트리비어드는 양 팔의 굽은 부분으로 호비트들을 한 명씩 부드럽고도 단단히 잡은 채 단 두 걸음으로 바위턱 가장자리까지 갔다. 나무뿌리 같은 발가락들이 바위를 움켜쥐었다. 그 다음 그는 엄숙하고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숲의 평지에 이르렀다. 그는 신중한 걸음으로 나무들을 헤쳐가며 점점 숲속 깊이 들어갔다. 개울을 따라 산맥의 비탈을 향해 꾸준히 올라갔다. 많은 나무들이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단순히 지나치는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그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지나칠 때 몸을 떠는 나무도 있었고 그가 지나가기 편하게 가지를 들어올리는 나무도 있었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 줄곧 마치 개울물소리 같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호비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스럽게도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던 것이다. 마침내 피핀이 대담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트리비어드, 뭘 좀 물어 봐도 될까요? 왜 켈레본은 우리에게 당신의 숲을 조심하라고 했을까요? 그는 우리에게 숲에 말려드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흐음,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트리비어드는 굉음 같은 소리로 말했다. "만일 너희들이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면 나도 같은 소리를 했을거야. 라우렐린도리난의 숲에 말려드는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건 요정들이 옛날 부르던 이름이고 지금은 줄여서 로스로리엔이라고 부르지. 아마 그게 옳을 거야. 그 숲은 더이상 자라지 않고 이지러져만 가고 있으니까. 옛적에는 노래하는 황금계곡의 땅이었지만 이젠 꿈속의 꽃이지. 아! 그러나 그곳은 어떤 자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기묘한 곳이야. 너희들이 그곳을 빠져나왔다니 놀랍군.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너희들이 그곳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이야, 오랫동안 낮선 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거든. 그곳은 이상한 땅이지. 그리고 이곳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이 여기서 재난을 당했지. 그래 재난을 당했어. 라우렐린도리난 린데로렌도르 말리노르넬리온 오르네마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안에서 사는 자들은 세상에 뒤떨어지고 있어. 이곳도 또 그 황금숲 밖의 어떤 다른 곳도 켈레본이 젊었을 때의 모습은 아니지. 그들은 여전히 타우레릴로메아 툼바레모르나 툼바레타우레아 로메아노르라고 말하곤 하지. 세상은 변했지만 아직 진실된 곳들도 있다는 뜻이야." "무슨 뜻이죠? 무엇이 진실되다는 건가요?" 피핀이 물었다. "나무들과 엔트들이지. 사실 나도 모든 사정을 이해하진 못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어. 우리들 중 일부는 아직도 참된 엔트들이고 우리 나름대로 꽤 활기에 차 있지. 그러나 많은 자들이 너희들도 알다시피 잠들어 가고 있어. 나무가 돼가고 있단 말이야. 물론 대부분의 나무들은 단순한 나무들일 뿐이야. 그러나 많은 나무들은 반쯤 깨어 있고 일부는 완전히 의식을 갖고 있지. 그리고 몇몇 나무는 음, 아, 음, 거의 엔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이런 일이 계속되어 온 거야. 이런 일이나무에 일어나면 어떤 나무들은 좋지 않은 마음을 품기도 해. 물론 그것이 숲 전체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엔트워시강 아래쪽에 있던 몇 그루의 착하고 나이든 버드나무들이 오래전에 죽어 버린 걸 알았어. 참 안된 일이지! 그 나무들은 속이 텅 비었어. 정말이지 모두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어. 그러면서도 어린 잎새처럼 고요하게 향기를 내뿜고 있었지. 그리고 산맥 아래 계곡에는 겉보기엔 아주 건강하지만 속속들이 썩어 있는 나무들도 있어. 이런 현상이 점점 번지고 있는 것 같아, 한때 이 나라엔 아주 위험스런 곳이 몇 군데 있었어. 아직도 매우 흉칙한 곳들도 여럿 남아 있고." "저 멀리 북쪽의 올드 포레스트처럼 말이에요?" 메리가 물었다. "그래, 그래 비슷하지. 그러나 훨씬 더 심해. 내가 알기론 그 숲에는 거대한 암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그래서 기분 나쁜 기억들이 전해 내려오지. 그러나 이 땅에도 어둠이 한번도 걷힌 적이 없는 깊은 골짜기들이 있고 그곳의 나무들은 나보다도 더 오래된 것들이야. 그렇지만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어. 우린 낯선 자들과 무모한 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 또 나무들을 길들이며 가르치기도 하고 걸어다니며 잡초를 뽑기도 하지. 우리 늙은 엔트들은 나무의 목자(목자)들이야.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양들은 양치기를 닮고 양치기는 양을 닮는다고 하지. 그렇지만 그건 아주 느리게 나타나며 또 양과 양치기 그 어느 쪽도 오래 살진 못해. 나무들과 엔트들에게선 그게 훨씬 빠르고 밀접하게 이루어져. 그래서 양쪽이 몇 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적은 대신 다른 것들과 더 잘 융화된다는 점에선 엔트들은 인간들보다는 요정들을 닮았어. 그러나 한편으론 너희들도 알다시피 요정들보다 쉽게 변할 수 있고 외부의 색깔을 받아들이는데 빠르다는 점에서는 인간들과 더 비슷하지. 또는 양쪽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엔트들은 훨씬 성실하게 사물에 기울이는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니까 말이야. 우리 종족 중의 일부는 이제 나무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 버려 그들을 깨우려면 뭔가 큰 일이 필요해. 그들은 귓속말로만 대화를 나누지. 그러나내 나무들 중 일부는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또 그 중에는 내게 말을 건넬 수 있는 나무들도 있어. 물론 요정들이 시작한 일이지. 나무들을 깨워 말하는 걸 가르쳐주고 또 나무들의 말을 배우기도 하고. 요정들은 항상 모든 것들과 말을 나누려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암흑이 닥쳐온 거야. 그러자 그들은 바다 건너로 사라져 버리거나 먼 계곡에 몸을 숨기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들에 대한 노래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 그래, 그래, 한때는 여기서부터 룬산맥 까지가 모두 하나의 숲이었어. 지금의 이 숲은 그 당시 동쪽의 일부에 불과했지. 그것은 광활한 시절이었어! 온종일 거닐며 노래 불러도 텅 빈 언덕들에선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었지. 그 숲은 로스로리엔 같았어. 하지만 더 울창하고 튼튼하고 젊었지. 그리고 공기는 얼마나 향기로웠는지!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는 걸로 한 주일을 보내기도 했었어." 트리비어드는 말을 멈추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커다란 발을 가졌음에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 소리는 노래로 바뀌어 갔다. 호비트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봄날 난 버드나무의 계곡 타사리난을 거닐었다. 아, 봄의 아름다움과 향기여! 그래, 멋진 봄경치였지. 여름날 난 느릅나무숲 오시리안드를 거닐었다. 아, 오시르의 일곱 강가에서의 여름날의 광휘와 음악이여! 그래, 멋진 여름날이 었지. 가을날 난 자작나무가 우거진 넬도레스에 있었다. 아, 노랗고 빨갛게 물든 채 한숨짓던 갈잎들이여! 더 바랄 게 없었지. 겨울날 난 도르소니온고원의 소나무들에게로 갔었다. 아, 바람과 흰 눈과 검은 가지들의 겨울이여! 내 목소리는 솟아올라 창공에서 노래했지. 그러나 이제 그 모든 대지는 파도 아래 누워 있고, 난 암바로나, 타우레모르나, 알다로메를 거닌다. 거대한 뿌리와 타우레모르날로메의 낙엽보다 더 두터운 세월이 쌓여 있는 나의 땅, 판곤의 나라를 거닌다. 노래를 마친 그는 말없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숲은 아주 고요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이 저물며 나무줄기엔 어두움이 감겼다. 호비트들은 앞쪽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가파른 사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안개산맥의 기슭, 즉 메세드라스봉(봉)의 푸르른 협곡에 다다른 것이다. 언덕 아래로 엔트워시강이 상류의 수원으로부터 힘차게 밀려나와 요란한 소리를 내고 흐르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른편으로는 잔디 덮인 긴 비탈이 황혼 속에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비탈 위에는 나무들이 서 있지 않아 하늘이 그대로 바라다보였다. 구름 사이로 호수같이 맑아 보이는 하늘에는 벌써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트리비어드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비탈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호비트들 앞에는 갑자기 드넓은 공지가 펼쳐졌다.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마치 살아있는 문설주처럼 양쪽에 하나씩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이 대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일 뿐, 문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없었다. 늙은 엔트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무들은 가지를 치켜들며 잎을 떨었다. 상록수들의 잎은 거무스름했지만 광택을 내며 황혼 속에서 어렴풋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마치 언덕 측면을 깎아 거대한 공회당이라도 만들어 놓은 듯한 넓고 평평한 공간이 있었다. 양쪽으로는 십오 미터 이상 되는 높이까지 암벽이 경사를 이루며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안쪽에는 암벽을 따라 우뚝 솟은 나무들이 줄지어서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석벽은 가파르게 서 있었지만 밑바닥 쪽은 움푹 꺼져 아치형의 천장이 붙은 얕은 평지로 이어졌다. 또한 그 천장은 그늘을 이루고 있는 나뭇가지를 제외하곤 가운데로 나 있는 길 외의 평지를 덮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샘에서 솟아나온 작은 석수 줄기 하나가 본류에서 벗어나 석벽의 가파른 표면을 따라 은빛 방울로 빛나며 섬세한 커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간수는 나무들 사이의 평지에 만들어진 돌대야 속에 모였다가 흘러 넘쳐 길 옆으로 이어져 숲을 헤치고 달리는 엔트워시강에 다시 합류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트리비어드가 말했다. "흠! 다 왔어! 난 너희들을 우리 엔트의 보폭으로 거의 칠만 걸음에 해당하는 거리까지 데려온 거야. 너희들의 거리로는 얼마나 될지는 오르지만. 어쨌든 우린 메세드라스봉 하단에 와 있는 거야. 이 지명의 일부는 너희들 언어로 하면 아마 웰링홀이 될 거야. 난 이곳을 좋아하지. 오늘밤 우린 여기서 머물 거야." 그는 호미트들을 나무들 사이에 난 통로 같은 곳에 내려 놓았다. 그들은 그의 뒤를 따라 거대한 아치를 향해 나아갔다. 트리비어드는 걸을 때 무릎을 구부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두 다리를 엄청난 폭으로 벌려 걸었다. 그는 발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먼저 커다란 발가락들을(정말 크고 넓었다)땅에 힘차게 내디뎠다. 트리비어드는 잠시동안 떨어지는 샘물 아래 서서 물줄기를 적시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거대한 돌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지만 의자는 없었다. 평지는 이미 어두워졌다. 트리비어드는 두 개의 커다란 물병을 들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물병엔 물이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물병들은 황금빛과 짙은 초록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 빛이 섞이며 평지를 비추자 마치 석양이 어린 잎으로 엮어진 지붕을 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뒤쪽을 돌아다본 호비트들은 평지 안의 나무들도 역시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처음엔 희미했으나 계속 강해지면서 모든 나뭇잎들이 빛으로 된 레이스를 둘러쓴 것처럼 보였다. 초록빛, 황금빛 그리고 구릿빛을 띤 나무도 있었다. 나무줄기 또한 빛을 받아 돌기둥처럼 번들거렸다. "자, 이제 다시 얘기해 볼까? 아마 목이 마르겠지? 피곤하기도 하겠고. 이걸 마셔봐!" 뒤쪽에는 거대한 뚜껑이 달린 여러 개의 키 큰 돌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는 뚜껑 하나를 열고 커다란 국자로 세 그릇을 떠냈다. 하나는 아주 큰 그릇이었고 둘은 그보다 훨씬 작은 것들이었다. "여기가 엔트의 집이야. 안됐지만 의자는 없어. 그렇지만 너희들은 탁자 위에 앉으면 되겠지." 그는 호비트들을 안아 올려 이 미터 정도 높이의 탁자에 앉혔다. 그들은 탁자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흔들며 트리비어드가 준 음료수를 마셨다. 그 음료수는 물 같았다. 그들이 숲 가까이에서 마셨던 엔트워시강의 물맛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 음료수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향취가 있었다. 그것은 희미하나마 밤의 미풍에 섞여 멀리서 실라온 숲의 내음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 음료의 효과는 발끝부터 시작돼 다리와 팔을 거쳐 머리털 끝까지 이르렀다. 상쾌한 기분과 원기가 온몸에 퍼졌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머리칼이 곤두서 물결치듯 자라나는 느낌이 들었다. 트리비어드는 아치 밖으로 나가 발을 씻고 들어와서는 자신의 음료수를 오랫동안 입에서 떼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호비트들에게는 그가 영원히 물병에서 입을 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릇에서 입을 뗀 다음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아아, 흠, 흠! 이제 우린 편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은 바닥에 앉으면 되겠고, 난 누우면 돼. 그래야 이 음료수가 머리까지 올라가 잠들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오른쪽에는 약 오십 센티미터 높이밖에 안 되는, 건초와 고사리가 덮인 거대한 침대가 하나 있었다. 트리비어드는 그 위로 천천히 몸을 기울이다가(허리 부분만을 아주 약간 굽혀서) 마침내 몸을 쭉 펴고 누웠다. 그는 머리 뒤에 손베개를 받치고서 햇빛을 받은 잎새들이 어른대는 것처럼 빛이 너울거리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메리와 피핀은 그 옆 풀더미 위에 앉았다. "이제, 너희들의 이야기를 해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호비트들은 호비튼을 떠난 이후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명확하게 순서에 따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계속 가로챘으며 또 트리비어드가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어 앞의 이야기로 되돌리거나 또는 그 후의 이야기로 뛰어넘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 왜 원정을 시작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트리비어드 또한 무슨 까닭인지 그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 아주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암흑의 기사들, 엘론드, 리벤델, 올드 포레스트, 모리아, 로스로리엔 그리고 갈라드리엘 등, 이 모두에 대해 호기심을 드러냈다. 또한 그는 호비트들에게 샤이어와 그 지방에 관한 사실에 대해 몇 번이나 설명하게 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그 근방에서 엔트를 본 적은 없겠지? 음, 무슨 말인가 하면 엔트와이프를 본 적이 있느냐 그 뜻이야." 피핀이 물었다. "당신처럼 생긴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흠, 음, 아니야. 이제는 나도 정말 모르겠어." 트리비어드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마 너희들의 나라를 좋아할 거야. 그래서 한번 물어 본 거야." 트리비어드는 갠달프에 관한 부분에 특히 관심을 보였으며 사루만의 소행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물었다. 호비트들은 자신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많지 않음을 유감으로 여겼다. 갠달프가 회의에서 말했던 것을 샘이 다소 막연하게 전해준 것이 이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글룩과 그 부하들이 이센가드에서 왔으며 사루만을 군주라고 불렀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돌고돌아 마침내 오르크들과 로한의 기사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까지 이르자 트리비어드는 흠, 흠, 하며 말을 꺼냈다. "자, 자! 그만하면 충분해. 그렇지만 너희들은 내게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았어. 정말이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난 너희들이 갠달프가 원할 정도만을 말했다는 걸 의심치 않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건 나도 알 수 있어. 그게 무엇인지는 아마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혹 그때가 어긋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처음부터 끝까지 야릇한 일투성이군. 옛날의 계보에 올라 있지도 않은 작은 종족이 튀어나오고 또 보라구! 잊혀진 암흑의 아홉 기사가 다시 나타나 이들을 추적하고. 갠달프는 이들을 위대한 원정에 동원하고, 갈라드리엘은 카라스 갈라돈에 숨겨 주고, 오르크들은 이들을 추격하느라 황야의 그 먼거리를 달리고 말이야. 정말 너희들은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든 것 같군. 어쨌든 난 너희들이 폭풍을 헤쳐나가길 바래." "당신의 입장은 어떤 거지요?"메리가 물었다. "흠, 흠, 난 대전(大戰)에 대해서 골머리를 썩인 적은 없어. 그건 대체로 요정과 인간들의 문제니까. 그건 마법사들의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미래에 대해 골머리를 썩이니까. 난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데, 어느 누구도 완전한 내 편은 아니니까 나도 완전히 누구의 편에 들지는 않아. 어느 누구도 나만큼 숲을 돌보지는 않아. 오늘날엔 심지어 요정들마저도 그렇지만 난 다른 어느 종족보다도 요정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아주 오래전 우리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요정들이었지. 비록 그 후 우리들 내부에 분열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분명 잊을 수 없는 크나큰 선물이었어. 그러나 물론 나도 결단코 편을 들지 않는 것들이 있어. 난 그들 부라룸(그는 다시 혐오를 드러내는 굵고 낮은 굉음을 냈다), 그 오르크들과 그 지배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하지. 난 머크우드에 어둠의 그림자가 뒤덮이게 된 사실을 염려했었어. 그러나 그 그림자가 모르도르로 옮겨간 것에 대해서는 한동안 마음쓰지 않았지. 어쨌든 모르도르는 먼 곳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제 바람이 동쪽에서 불고 있고 어쩌면 모든 숲이 시들어 죽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그 폭풍을 저지하기 위해 늙은 엔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야. 헤치고 나갈 수 없으면 파멸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사루만이 문제야. 사루만은 바로 이웃에 있으니 내가 그냥 간과하고 있을 수는 없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어. 그래, 난 근자에 사루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고 있었지."" 사루만은 도대체 누구죠? 당신은 그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피핀이 물었다. "사루만은 마법사야.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난 마법사들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거든. 그들은 대선단이 바다를 건너올 때 처음 나타났지. 그렇지만 그들이 선단과 함께 왔는가는 알 수 없어. 내가 알기론 사루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되었어. 그는 얼마전부터 - 너희들에게는 아주 오래전이 되겠지만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간과 요정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걸 그만뒀지. 그리고는 앙그레노스트 - 로한인들은 이센가드라고 부르는 곳이지 - 에 자리를 잡았어. 처음엔 아주 조용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 그가 신성회의의 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더군. 그러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어. 이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때까지도 사루만은 사악하게 변신한 것은 아닐 거야. 어쨌든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었지. 난 그와 말을 나누곤 했어. 그가 내 숲 주변을 거닐곤 하던 때가 있었거든. 그 당시 그는 아주 정중했지. 난 그에게 스스로는 절대로 알아낼 수없는 많은 사실을 가르쳐 주었지. 그러나 그가 같은 방식으로 내게 보답한 적은 결코 없었어. 그가 내게 무언가 알려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는 계속 그런 식이었지. 내가 기억하기론 - 그를 본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거든 - 그의 얼굴은 안으로 잠긴, 돌벽의 창문처럼 되어 버렸지.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이젠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아. 권력을 잡으려는 거야. 그는 차가운 강철 같은 심장의 소유자여서 자기에게 쓸모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그 어떠한 생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그가 사악한 배신자라는 것은 이제 분명한 사실이야 그는 더러운 족속 오르크들과 결탁했어. 흠! 그리고 그보다 더 좋지 않은 건 그가 오르크들에게 뭔가 위험한 힘을 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야. 이 이센가드 놈들은 사악한 인간들과 아주 흡사해.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특징이지. 그런데 이제 사루만의 오르크들은 여전히 태양을 싫어하면서도 참아낼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사루만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타락한 인간들인지 아니면 사루만이 아예 사악한 인간과 오르크 종족을 섞어 버린 건지 말이야. 그렇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괴악한 짓이지!" 트리비어드는 엔트어로 깊고 은밀한 저주를 한동안 우렁차게 터뜨렸다. "얼마전부터 난 오르크들이 어떻게 감히 내 숲을 그렇게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최근에 와서야 난 그게 사루만의 술수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는 오래전부터 모든 길을 염탐하고 내 비밀을 캐왔던 거야. 그와 그의 더러운 족속은 이제 서슴없이 파괴를 자행하고 있어. 그들은 저 아래 숲 경계지역의 나무들을, 좋은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리고 있어.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베어 넘기고는 썩이는 나무도 많아. 오르크놈들의 해악이지. 그렇지만 대부분은 베어서 횃불로 쓰려고 가져가는 거야. 요사이 이센가드에선 항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지. 정말 저주받을 놈들이야! 그 나무들은 내가 속속들이 말고 있는 내 친구들인데. 이제 영원히 가버리고 말았지만 많은 나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가졌었지. 그리고 한때 노래하는 작은 숲을 이루었던 곳이 이제는 그루터기와 가시덤불만 뒤덮인 황무지가 되고 말았어. 나도 너무 무심했었지. 손을 놓고 있었어. 이제 더 이상 가만있진 않겠어!" 트리비어드는 갑자기 몸을 비틀며 일어서서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빛을 발하는 그릇들이 흔들리려 불길을 토해 냈다. 트리비어드는 눈에서 초록색 불길을 쏟아내며 커다란 금작화 같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외쳤다. "이젠 내가 막겠어! 너희들과 함께 하는 거야. 너흰 날 도와 줄 수 있을 거야. 그건 곧 너희 친구들을 돕는 것이 될 거고 사루만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로한과 곤도르는 전면과 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야. 우리의 갈길은 일치되는 거야. 이센가드!"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우린 함께 가겠어요.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하겠어요." 피핀도 소리쳤다. "그래요! 난 횐 손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요.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가고 싶어요. 난 우글룩에게 붙들려 로한을 지나온 포로여행을 잊을 수가 없어요." "좋아, 좋아! 하지만 내 말은 조금 성급했어. 우린 성급해선 안 돼. 내가 너무 열을 냈던 거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야 해. 왜냐하면 멈추라고 외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내기는 어렵단 말이야." 그는 아치 입구로 걸어가 얼마동안 샘물 아래 서 있었다. 마치 손가락을 헤어가며 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판곤, 핀글라스, 플라드리프, 그래, 그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호비트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남아 있는 우리 종족은 너무도 적어. 암흑시대 이전에 숲을 거닐었던 최초의 엔트들 중에서 딱 셋만 남았지. 요정 식의 이름으로 말하면 나 판곤 외에 핀글라스와 플라드리프뿐이야. 그들은 리플로크, 스킨바크라고도 불리지. 그리고 그 둘은 이 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거야. 리플로크는 졸음에 취해 거의 나무가 되어 가고 있지. 여름 내내 반쯤 잠이 든 채로 깊은 풀 사이에 무릎을 묻고 홀로 서 있으니까. 그 머리칼은 나뭇잎 같지. 겨울엔 깨어나지만 그렇다 해도 요샌 잠에 취해 멀리 걷지도 못하거든. 스킨바크는 이센가드 서쪽 산비탈 위에 살았지. 가장 심한 분쟁이 있었던 곳이야. 그는 오르크들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 종족들과 나무들도 대부분 살해되거나 불탔지. 그 후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고지의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가 자리잡고는 내려오려고 하지 않아. 그러나 난 우리 종족의 젊은이들은 꽤 많이 규합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의 난국을 이해시켜서 일깨울 수만 있다면 말야. 우린 비겁한 종족이 아니거든. 우리 종족이 너무도 적다는 건 정말 유감스런 일이야!" "당신들은 이곳에서 그렇게 오래 사셨다면서 왜 수가 적단 말이죠? 많이 죽었나요?" 피핀이 물었다. "오, 아니야! 무슨 병 같은 걸로 죽은 자는 없어. 다만 생명이 다해 저절로 죽은 자는 있지. 그렇지만 대부분은 나무처럼 돼버린 거야. 원래 우리 종족은 그리 수가 많지 않은 데다 오랫동안 그 수가 증가되지 않았으니까. 끔찍할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엔팅 즉 우리 후세들이 끊긴 거야. 알다시피 우리들은 엔트와이프를 잃어 버렸으니까." "정말 안됐군요! 엔트와이프들은 죽은 건가요?" 피핀이 물었다. "죽은 게 아냐. 난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어. 잃어 버렸다고 했지. 우린 그들을 잃고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야."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크우드에서 곤도르에 이르기까지 엔트들이 엔트와이프를 찾아 헤매는 노래가 퍼졌으니까 말이야. 요정들도 인간들도 불렀지. 그 노래가 모조리 잊혀졌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그 노래들은 서쪽 산맥 너머 샤이어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나 봐요. 우리한테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아니면 그 노래를 한 곡만 들려 주시든지요." 메리가 말했다. "그래, 기꺼이 그렇게 하지. 그러나 완벽하게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고 대략 요점만 말해 주지. 그리곤 우리의 이야기를 끝내야 해. 내일 우린 회의를 소집하고 일을 해야 하니까. 아마 원정을 떠나야 할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우리 이야기는 좀 별스럽기도 하지만 슬퍼. 세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숲도 광막한 야생의 상태였을 무렵 엔트와 엔트와이프, 그땐 물론 아가씨들이었지, 아, 걸음이 빠른 완들림, 일명 핌브레딜의 아름다움이라니...... 하여간 우리들은 함께 거닐기도 하고 함께 지냈지. 그런데 우리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자라지 않았던 거야. 우리 엔트들은 세상에서 흔히 마주치기 쉬운 것들에게 애정을 기울였지만 엔트와이프들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던 거야. 엔트들은 거대한 나무들, 야생의 숲, 높은 언덕을 사랑하며 석간수를 마시고 지나가는 길에 나무들이 떨어뜨려준 과일만을 먹었지. 또 요정들에 대해 거대한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런데 엔트와이프들은 그보다 더 작고 연약한 나무들 그리고 숲 저 너머에 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마음을 쏟으며 수풀 사이의 자두나 봄에 꽃을 피우는 야생능금, 버찌 그리고 여름 물가에 피는 초록색 풀과 가을 들판에 씨를 퍼뜨리는 잡초를 바라보았던 거야. 그들은 이들과 대화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들의 말을 듣고 명령에 따를 것을 바랬던 거야. 엔트와이프들은 자신들의 명령대로 성장하고 열매맺고 잎을 피울 것을 원했지. 엔트와이프들은 질서, 풍요 그리고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야. 즉 사물들이 자신들이 정한 질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그래서 엔트와이프들은 자신들이 살 정원을 꾸민 거야. 그러나 우리 엔트들은 계속 숲을 헤매고 다니느라 그 정원에 자주 들를 틈이 없었어. 그러던 와중에 북쪽에서 암흑이 몰려왔고 엔트와이프들은 대하를 건너 새로운 정원을 꾸미고 새로운 평원을 건설했기 때문에 우린 그들을 만나 보기가 더 힘들어진 거야. 암흑이 붕괴된 이후 엔트와이프들의 정원은 풍요롭게 꽃을 피웠고 평원은 곡식으로 가득했지. 많은 인간들이 엔트와이프의 기술을 배우고 존경하게 되었어. 반면에 우린 인간들에게 다만 하나의 전설, 숲 한가운데 숨어 있는 하나의 비밀일 뿐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엔트와이프의 정원들도 모두 황폐해져 버렸고 우린 그대로 여기 남아 있을 뿐이야. 사람들은 그 정원을 갈색대지라 부르지. 내게 핌브레딜을 보고 싶은 윽망이 솟았던 것은 아주 오래전 ,사우론과 바다의 인간들이 전쟁을 벌였을 때라고 기억해. 내가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이미 처녀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내 눈엔 여전히 아름다워 보였지. 엔트와이프들은 일하느라 허리가 굽고 피부도 갈색으로 변했더군. 머리칼은 태양에 그을려 여문 곡식빛이 되었고 볼은 붉은 능금처럼 변했더라구. 그렇지만 눈은 그대로 우리 종족의 눈이더군. 우린 안두인대하를 건너 그들의 땅으로 갔지만 우리가 본 것은 사막이었어.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거야. 모조리 불타고 뿌리 뽑혀 버린 거야. 그러나 엔트와이프들은 이미 그곳에 없었어. 우린 오랫동안 그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이마다 그들에 대해 물어 보았지. 어떤 이들은 그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서쪽으로 가는 걸 보았다고도 했고, 또 동쪽,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들도 있었어.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데를 다 가봐도 찾을 수가 없었지. 우린 정말 슬펐어. 그런데 야생의 숲이 우리를 부른 거야. 우린 되돌아와야만 했지. 참으로 여러 해 동안 우린 틈나는 대로 밖으로 나가 엔트와이프를 찾았지. 두루 걸어다니며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소리쳐 불렀어.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횟수도 줄었고 거리도 짧아졌지. 그래서 이제 엔트와이프는 우리에겐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았을 뿐이고, 우리 또한 수염이 자라 회색으로 변했어. 우리들이 엔트와이프를 찾는 사실을 가지고 요정들은 많은 노래를 지었지. 또 인간들의 말로도 옮겨지고 그렇지만 우린 그에 관한 노래를 만들지 않았어. 엔트와이프들이 생각날 때면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도 족했기 때문이야.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고 믿고 있어. 그렇게 되면 아마 우리 양쪽 모두 함께 살며 만족할 수 있는 땅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 일은 지금 양쪽 모두가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린 후에야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도 있어. 그리고 그 시기가 마침내 가까워졌다고도 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옛날의 사우론이 고작 정원을 파괴한 정도였다면 오늘날의 그는 모든 숲을 시들어 죽게 할 것 같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얘기한 것을 읊은 노래가 있지.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요정들이 지은 거야. 그 노래는 대하 상류와 하류에서 불려지곤 했어. 그래, 그것이 엔트가 지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유의해야 해. 엔트가 지은 것이었다면 훨씬 더 길어졌을 거야. 그렇지만 우린 그 노랠 알고 있고 때때로 흥얼거리기도 하지. 너희들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되지. 엔트 봄이 너도밤나무의 잎을 펼치고 가지에 수액이 오를 때면 야생숲의 개울에 빛이 흐르고 벼랑가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성큼 걸으며 들이쉬는 산의 대기가 에는 듯 차가울 때면 내게로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이 대지의 아름다움을 말해 다오. 엔트와이프 정원과 평원에 봄이 찾아와 잎새에 열매를 맺을 때면 과수원에 빛나는 눈 같은 꽃잎이 휘날릴 때면 소나기와, 대지를 적시는 햇빛이 향기로운 내음을 발할 때면 난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 내 대지의 아름다움이여. 엔트 온 세상에 여름이 덮인 황금빛 정오가 되면 잠든 잎의 지붕 아래 나무들의 꿈이 펼쳐질 때면 초록으로 서늘한 숲 사이 빈터에 서풍이 불어올 때면 내게로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이 대지가 제일이라고 말해 다오. 엔트와이프 풍성한 열매가 익어가고 딸기가 갈색으로 그을리는 여름이면 황금빛 밀짚과 하얀 이삭이 수확되어 읍내로 들어올 때면 서풍 속아 꿀이 넘치고 사과가 부풀어갈 때면 나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 태양 아래 최상의 이 대지를. 엔트 겨울이 오면, 숲과 언덕을 뒤덮을 황량한 겨울이 오면 나무들이 쓰러지고 별 없는 밤이 해 없는 낮을 삼킬 때면 죽음을 실은 동풍이 불어오고 세찬 폭우가 쏟아질 때면 나 그대 찾아 외치며 그대에게 달려가리라! 엔트와이프 겨울이 와 노래가 끝나고 마침내 어둠이 깔릴 때면 열매맺지 못한 가지가 부러지고 빛과 수확의 시기가 지나면 나 그대를 기다릴 테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함께 억센 빗발 아래로 걸어가리. 함께, 우리 함께 서부로 가리라. 우리 함께 가슴을 쉴 먼 대지를 찾으리." 트리비어드는 노래를 끝냈다. "이런 내용이야. 물론 요정들의 노래답게 명랑하고 빠르고 또 짧지. 난 꽤 공평한 노래라고 생각해. 그러나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엔트들도 우리 입장에서 덧붙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이제 난 일어나 좀 자야겠어. 너흰 어디에 서서 잘 건가?" "우린 보통 누워서 자요. 여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메리가 말했다. "뭐, 누워서 잔다고? 음, 물론 너희들은 그렇겠지. 흠, 흠, 내가 잊고 있었어. 노랠 부르다 보니 옛 시절이 떠올라 젊은 엔팅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한 거야. 자, 너흰 침대 위에 누우면 되겠어. 난 샘물 아래 가서 서 있을 테니까. 잘 자!" 메리와 피핀은 침대 위로 기어올라 부드러운 풀과 양치류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침대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고 따스했다. 빛이 엷어지며 나무들의 광채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바깥 아치 아래 늙은 트리비어드가 양 팔을 머리 위로 든 채 고요히 서 있는 광경을 볼 수는 있었다. 하늘에 돋아나기 시작한 별들이 그의 손가락과 머리에 부딪혀 은빛 방울로 하얗게 튀어 흩어지는 물방울을 비추었다. 물방울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호비트들은 잠이 들었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 이미 서늘한 태양이 뜰 안으로 기어들어와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머리 위에 높게 걸린 구름조각들은 강한 동풍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트리비어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치 옆의 돌대야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트리비어드가 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걸어오면서 흥얼대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 호! 안녕, 메리. 피핀!" 그들을 보자 그는 활기있게 말했다. "늦게까지 잘 자더군. 난 오늘 벌써 수백 걸음을 걸었어. 이제 음료수를 한 잔씩 들고 엔트무트로 가야 해." 그는 어제와는 다른 돌항아리에서 두 사발을 가득 따라 내놓았다. 맛도 지난밤과는 달리 흙내음이 섞이고 그윽했으며 음식에 가까운 질감을 느끼게 해 힘을 북돋는 것 같았다. 호비트들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요정의 과자를 갉아 먹으며 (배가 고팠다기보다는 씹어 먹는 것이 아침식사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음료수를 마시는 동안 트리비어드는 엔트어나 요정언어 또는 다른 이상한 언어로 흥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엔트무트가 어디죠?" 피핀이 물어보았다. "후, 음? 엔트무트가 어디냐고?" 트리비어드는 돌아서면서 말했다. "그건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게 아냐. 그건 엔트들의 회의를 말하는 거야. 요즘엔 그리 자주 열리지 않지. 그래도 내가 이런저런 수단을 부려서 꽤 많이 모이게 했어. 우린 언제나 만나던 곳에서 모이지. 사람들은 그곳을 던딩글이라 부르지. 여기서 남쪽 방향으로 가면 돼. 정오까지 도착해야 돼."그들은 곧 출발했다. 트리비어드는 어제와 같이 호비트들을 양 팔에 안고 갔다. 평지 입구에서 트리비어드는 오른쪽으로 꺾어 개울을 건너셔 나무가 거의 없는 몹시 황폐한 비탈길을 따라 남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비탈길 위로 자작나무와 마가목 덤불이 보였고 그 너머로 어두운 솔숲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트리비어드는 언덕에서 좀 떨어져 나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거기 있는 나무들은 호비트들이 여태껏 봐왔던 그 어떤 나무보다 크고 울창했다. 그들은 잠시동안 처음 판곤 안으로 무턱대고 들어왔을 때처럼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건 이내 사라졌다. 트리비어드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에 잠긴 채 굵고 낮은 음성으로 혼자서 흥얼거렸지만 메리와 피핀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건 단지 붐, 붐, 룸붐, 부라르, 붐 붐, 다라르 붐붐, 다라르 붐 하는 소리로 들렸고 음색과 리듬을 바꿔가며 계속되었다. 그들은 어떤 화답 같은 흥얼대는 소리나 바르르 떨리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 소리는 땅에서 또는 머리 위의 가지에서 또는 나무줄기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트리비어드는 멈추거나 어느 쪽으로 머리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들이 걷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후 피핀은 엔트의 큰 걸음의 수를 헤아려 보려 했지만 약 삼천 번이 지난 다음부터는 헛갈려 그만두고 말았다. 트리비어드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멈추어 호비트들을 내려 놓고선 양 손을 입에 갖다대고 소리를 질렀다. 흠, 흠 하는 우렁찬 소리가 목청 깊은 곳에서 불어내는 뿔피리소리처럼 숲속에 울려퍼졌고 나무들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방향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흠, 흠, 흠 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건 메아리가 아니라 응답이었다. 트리비어드는 이제 메리와 피핀을 어깨 위에 앉히고 다시 계속해 성큼성큼 걸으며 때때로 뿔나팔소리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그에 응답하는 소리들이 점점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 그들은 마침내 음침한 상록수들이 마치 벽을 치듯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에 도착했다. 그 나무들은 전혀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바로뿌리에서부터 가지가 벌어졌고 가시 없는 호랑가시나무처럼 어둡고 반질반질한 잎들이 촘촘히 덮여 있었으며, 올리브빛깔의 크고 반짝이는 봉오리와 함께 뻣뻣하게 뻗친 꽃받침이 많이 달려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그 거대한 울타리를 따라 성큼성큼 몇 걸음 나아간 뒤에 트리비어드는 좁은 입구에 이르렀다. 그 입구 속으론 발길에 닳은 소로가 나 있었는데 느닷없이 길고 가파른 비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호비트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협곡 속으로 내려가고 있음을 알았다. 사발처럼 둥글넓적하고 깊은 그 협곡엔 가장자리가음침한 산록수로 이루어진 높은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안쪽은 평평하게 풀로 덮여 있었으며 사발꼴의 바닥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매우 키 크고 아름다운 자작나무 외엔 나무라곤 없었다. 서쪽과 동쪽에서부터 두 개의 다른 길이 협곡 사이로 내리뻗었다. 여러 명의 엔트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엔트들이 다른 길로 내려오고 있었고 몇 명은 트리비어드를 따라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호비트들은 그들을 눈여겨 보았다. 그들은 호비트족끼리는 누구나 닮아 보이듯이(어쨌든 낯선 이의 눈엔 거의 그렇다) 트리비어드를 닮은 이들을 많이 보게 될 걸로 기대했었는데 닮은 자를 전혀 볼 수 없어 매우 놀랐다. 나무들이 서로 다르듯이 엔트들도 서로 달랐다. 그 중엔 매우 늙은 엔트가 몇 있었는데 (그러나 트리비어드만큼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다), 이들은 정정하긴 하나 매우 오래된 나무처럼 수염이 나고 옹이가 많아 울퉁불퉁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창때의 나무처럼 팔다리가 미끈하고 피부가 매끄러운 키 크고 건장한 엔트들도 있었으나 어린 나무 같은 젊은 엔팅들은 없었다. 모두 해서 약 스물네 명이 풀이 깔린 넓은 계곡바닥에 서 있었으며 역시 그 정도 수의 엔트들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에 메리와 피핀은 주로 그 다종다양함에 압도당했다. 갖자지 형상과 색깔, 각기 다른 허리둘레와 신장, 팔다리의 길이, 손가락 발가락 수(셋에서 아홉에 이르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트리비어드와 비슷해 보이는 엔트들도 있었고 너도밤나무나 떡갈나무를 연상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트리비어드와 아주 다른 가문이라고 여겨지는 엔트들도 있었으며, 보기 흉한 손가락이 달린 커다란 손과 땅딸막한다리를 가진 갈색피부의 엔트들은 밤나무를 연상하게 했다. 또한 많은 손가락이 달린 손과 긴 다리를 가진, 키가 큰 회색피부의 엔트들은 물푸레나무를 연상시켰다. 가장 키가 큰 엔트들은 전나무와 비슷해 보였으며 자작나무, 마가목, 참피나무를 닮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느릿느릿한 음악적인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낯선 호비트들을 빤히 쳐다보며 트리비어드 주위로 가까이 모여섰을 때 그들 모두가 같은 종족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트리비어드처럼 깊고 나이든 눈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윽하고 침착하며 사려깊은 표정과 녹색 광채는 공통된 것이었다. 모두가 트리비어드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서자 곧 호기심을 끌지만 호비트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엔트들은 느릿느릿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한 엔트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어 다른 엔트가 끼어들자 얼마 안 있어 모두가 함께 높고 낮은 리듬에 따라 읊조리기 시작했다. 원의 한쪽에서 소리가 커지는가 싶으면 이내 잦아들고 다른 쪽의 소리가 커지며 요란하게 웅웅거렸다. 피핀은 오가는 낱말을 전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듣기에는 기분좋은 소리였다. 그러나 점차 그의 주의는 산만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그러나 읊조림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엔트들의 말이 무척이나 '서두르지 않는' 성질이기에 이제 인사말 대목이나 지났나 싶었고 또 만일 트리비어드가 출석점검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긴 이름을 노래하는 데 얼마나 맡은 세월이 흘러갈까 하고 생각했다. '엔트들은 예 또는 아니오를 뭐라고 할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하품을 했다. 곧 트리비어드는 그의 기분을 알아챘다. "흠, 하, 피핀!" 하고 그가 말하자 다른 엔트들은 모두 읊조리기를 멈췄다. "너희들이 성급한 종족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어쨌든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지루한 일이지. 이제 너희는 내려와도 좋아. 난 너희들 이름을 말해 줬고 이제 이들도 너희를 직접 보고 너희가 오르크가 아니란 점과 옛 계보에 새로운 종족이 하나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어. 우린 아직 그 이상은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이 모임이 엔트무트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도 상당히 빨리 진행된 편이야. 내킨다면 너희들은 협곡을 거닐어도 좋겠지. 만일 기분을 새롭게 하고 싶다면 저 건너 북쪽 기슭에 좋은 샘물이 있어.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아직 해야 할 말이 좀 있어. 내가 중간중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 주지." 그는 호비트들을 내려 주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깊이 절을 했다. 중얼거리는 음조와 번득이는 눈으로 판단컨대 그러한 행동이 엔트들을 무척 즐겁게 한 것 같았다. 그러난 그들은 곧 자신들의 이야기에 다시 몰두했다. 메리와 피핀은 서쪽에서 뻗어내린 길을 기어올라 거대한 산울타리의 개구멍을 통해 내다보았다. 협곡가장자리로부터 나무로 덮인 긴 비탈들이 솟아올랐고 그 너머로는 가장 먼 능선의 전나무들 위로 하얗고 뽀족한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그들 왼쪽 즉 남쪽으로는 판곤의 숲이 저멀리 회색 어스름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쪽 먼 방향으로 희미하게 녹색 빛이 번득였다. 메리는 그것이 로한평원일 거라고 생각했다. 피핀이 말했다. "이센가드는 어디 있는 거지? 우리가 어디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저 봉우리는 매세드라스봉 같아. 내가 기억하기론 이센가드의 경계는 산맥 끝 갈라진 곳이나 깊은 틈새에 있어. 아마 이 거대한 능선 뒤편일 거야. 저 건너 봉우리왼쪽에 연기나 안개가 일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이센가드는 어떤 곳일까? 하여튼 엔트들이 그곳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 "나도 그래. 내 생각엔 이센가드는 바위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 같아. 그에 공간이 있고 그 가운데 오탕크라 불리는 섬 아니면 바위기둥 같은 게 있을고 그 위에 사루만의 탑이 있겠지. 빙 둘러쳐진 성벽엔 문이 하나, 아니 하나 있을 거야. 또 그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겠지. 산맥에서 시작돼 로한협곡을 가로질 흐르는 개울이지. 이센가드는 엔트들이 달려들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닐 거야. 그렇지만 이 엔트들에 대해선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들은 보기만큼 그렇게 재미만 있는 이들은 아닐 거야. 느리지만 참을성있고 또 슬픔에 잠긴 것 같아. 난 그들이 분기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된다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 반대편에 서진 않을 거야." "맞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앉아서 생각에 잠긴 채 되새김질하는 늙은 암소와 돌진해 들어가는 황소는 전혀 다르겠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갑작스레 올 수도 있고 트리비어드가 그들을 어떻게 분기시킬 건지 궁금해. 그에게 그럴 뜻이 있다는 건 확실해. 그렇지만 그들은 분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트리비어드 자신도 지난밤에 분기했지만 곧 억제했지." 호비트들은 길을 되잡았다. 비밀회의를 하는 엔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고 낮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제 태양은 높은 울타리를 굽어볼 만큼 높이 솟았다. 태양은 자작나무 위로 빛을 발하며 서늘한 노란빛으로 협곡을 비추었다. 거기서 그들은 반짝이는 작은 샘 하나를 보았다. 그들은 상록수들 아래 자리한 거대한 사발 모양의 분지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다시 발가락에 와 닿는 서늘한 풀의 감촉은 기분이 좋았으며 서두를 것 없다는 사실도 유쾌했다. 그들은 용솟음쳐 나오는 샘물까지 기어내려갔다. 그들은 깨끗하고 차갑고 짜릿한 맛이 나는 물을 조금 마시고는 이끼낀 돌위에 앉아 풀밭 위로 군데군데 비치는 햇빛과 가볍게 흘러가는 구름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엔트들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호비트들과는 다른 세계였고, 또 그들이 겪은 바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동떨어진 참으로 낮설고 외딴 세계 같았다. 그들의 마음에 동지들, 특히 프로도와 샘 그리고 스트라이더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 일었다. 마침내 엔트들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올려다보니 트리비어드가 옆에 다른 엔트를 데리고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흠, 흠, 너흴 보려고 왔어. 지겹거나 좀이 쑤시지 않나, 흠? 자, 아직은 좀이 쑤시거나 해서는 안 될 텐데. 우린 이제야 첫 단계를 끝냈어. 이제 이센가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거야. 그러나 무얼 할 것인가 결정하는 데는 그 전 사건의 성격을 검토하는 일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서 긴 시간을 보낼 거란 걸 부인할 수는 없지. 그래서 너희에게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어. 근처에 집이 있지. 이름은 브레갈라드야. 그는 이미 결정을 했기 때문에 집회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흠, 흠, 그는 우리들 중에선 성급한 엔트에 속하지. 사이좋게 지내야 해. 안녕!" 트리비어드는 방향을 돌려 떠나갔다. 브레갈라드는 호비트들을 살펴보며 잠시 서있었다. 호비트들 또한 그의 '성급함'이 어떻게 드러날까 궁금하게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컸고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것 같았다. 팔과 다리의 피부는 반들거리며 빛을 발했고 입술은 불그스름했으며 머리카락은 회록색이었다. 그는 바람을 받는 가느다란 나무처럼 몸을 굽히고 흔들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울리긴 했지만 트리비어드의 소리보다는 높고 맑았다. "하, 흠, 친구들, 산책을 하자구. 난 브레갈라드야. 너희 말로 하면 퀵빔이지. 그러나 물론 그건 별명일 뿐이야.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잘 한다고 채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난 마시는 데도 빨라서 다른 엔트들이 수염을 적시고 있는 동안 다 마셔 버리기도 하지. 자, 함께 가자구." 그는 잘생긴 양 팔을 뻗어 손가락이 긴 손을 호비트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그날종일 그들은 그와 함께 숲속을 거닐며 노래부르며 웃고 지냈다. 퀵빔은 자주 웃었다. 그는 구름 뒤에서 해가 나타나도 웃었고 개울이나 샘을 마주쳐도 웃으며 몸을 굽혀 발과 머리에 물을 튀겼다. 때로는 숲에서 나는 어떤 소리나 속삭임에도 웃었다. 그는 마가목을 볼 때마다 멈춰서며 양 팔을 쭉 뻗치고서 노래를 불렀으며 또 노래하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해질녘에 그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이라고 했자 녹색 제방 아래 잔디 위에 놓인 이끼낀 돌 하나에 불과했다. 주위에는 마가목이 원을 이루고 서 있었고 또 엔트들의 집이 다 그렇듯이 제방에서 거품을 내며 흘러내리는 샘이 있었다. 그들이 잠시 이야기할 동안 숲에 어둠이 깔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엔트무트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이제 목소리들은 더욱 굵고 낮게 들렸으며 좀 여유가 있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간간이 웅장한 목소리 하나가 높고 빨라지는 음조로 솟아오르면 다른 소리들은 잦아들었다. 그들 곁에선 브레갈라드가 조용히 속삭이듯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스킨바크족의 일원이며 그 종족이 살았던 나라가 유린되어 황폐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그의 '성급함' - 적어도 오르크들에 관한 한 - 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 고향엔 마가목이 있었지. 참으로 오래전 세상이 평온했을 때, 내가 어린 엔트였을 때 뿌리를 내린 마가목들이야. 가장 오래된 것은 엔트들이 엔트와이프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심은 거야. 그러나 엔트와이프들은 그것을 보고 미소짓고는 더 희고 탐스런 열매가 자라는 곳을 안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내겐 장미도 그보다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어. 그 나무들은 계속 자라 마침내 나무 하나하나의 그림자는 녹색으로 빛났고 가을에는 빨간 열매가 무거운 짐처럼 매달린 모습은 아름다움이자 경이였어. 새들이 몰려들곤 했지. 난 새들을 좋아했어. 시끄럽게 재잘댈 때도 말이야. 마가목엔 남아돌 만큼 열매가 많이 열렸지. 그런데 느닷없이 새들이 탐욕스러워져서 나무를 쥐어뜯으며 열매를 떨어뜨리고는 먹지도 않게 되었어. 그런 다음 오르크들이 도끼를 들고 와 내 나무들을 베어 버렸지. 내가 다가가 나무들의 긴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들은 몸을 흔들지 않았어. 듣지도 대답하지도 못하고 죽은 채 누워있었지. 오, 오로파르네, 라세미스타, 카르니미리에! 오, 아름다운 마가목이여, 네 머리카락 위에 핀 하얀 꽃! 오, 내 마가목이여, 어느 여름날 너는 환하게 빛을 발했지. 네 피부는 눈이 부셨고 네 잎들은 깃털처럼 가벼웠지. 네 목소리는 서늘하고 부드러웠어. 머리 위에 올려진 황금빛 왕관이여! 아, 죽은 마가목이여, 네 머리카락은 시들어 회색으로 변했구나. 왕관은 내던져지고 네 목소리는 영원히 정적에 잠겼구나. 오, 오로파르네, 라세미스타, 카르니미리에!" 사랑했던 나무들이 쓰러진 걸 애통해 하는 브레갈라드의 부드러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호비트들은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도 그들은 그와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집'에서 멀리 나가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차폐물 역할을 하는 제방 아래에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으며 구름이 더 많이 몰려와 숲이 짙은 회색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햇빛은 거의 볼 수 없었으며 먼 곳에선 집회에 모인 엔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높고 낮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때론 크고 힘차고 때론 낮고 침울했으며 때론 빨라지다가 때론 만가처럼 느리고 엄숙했다. 두번째 밤이 왔지만 여전히 엔트들은 황급히 몰려다니는 구름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별들 아래서 비밀회의를 계속했다. 을씨년스럽고 바람이 센 셋쨋날이 밝아왔다. 해뜰 무렵 엔트들의 목소리가 한차례 떠들썩하게 높아졌다간 다시 잦아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딴라 바람은 약해졌으며 대기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운으로 무거워졌다. 호비트들은 브레갈라드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좁은 골짜기 같은 엔트의 집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는 집회의 소리는 희미하기만 했다. 오후가 되자 산맥을 향해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태양이 구름이 열린 틈새로 길고 노란 광선을 내보냈다. 갑자기 그들은 모든 것이 매우 조용해졌다는 걸 알았다. 숲 전체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엔트의 목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일까? 브레갈라드는 바짝 긴장한 채 꼿꼿이 서서 북쪽을 향해 던딩글을 돌아다보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라훔-라! 하는 커다란 외침소리가 울렸다. 마치 돌연한 세찬 바람이 덮친 것처럼 나무들이 몸을 떨고 굽혔다. 다시 소리가 끊기고 난 후 북소리 같은 엄숙한 행진음악이 시작되었고 두드리는 장단과 울리는 소리 위로 높고 힘찬 노랫소리가 솟아올랐다. 우리가 간다, 북을 울리며 우리가 간다, 타-룬다 룬다 룬다 롬! 엔트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가깝게 그리고 드세게 솟았다. 우리가 간다, 뿔나팔 불고 북을 울리며 우리가 간다, 타-루나 루나 루나 롬! 브레갈라드는 호비트들을 들어올리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행진해 오는 대오가 보였다. 엔트들은 그들을 향해 커다란 보폭으로 몸을 흔들며 힘차게 걸어오고 있었다. 트리비어드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오십 명 가량이 두 줄을 지어 보조를 맞추며 옆구리에 갖다댄 손으로 박자를 맞춰 걸어왔다.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의 빛나고 깜박이는 눈이 보였다. 트리비어드는 브레갈라드와 호비트들을 보고 외쳤다. "흠흠! 큰 소리 울리며 우린 여기 왔다. 마침내 우린 여기 온 거야. 자, 집회에 끼라구. 우린 떠난다. 이센가드로 떠나는 거야." 그러자 엔트들이 일제히 외쳤다. "이센가드로! 이센가드로!" 이센가드로! 이센가드가 돌문으로 둘러싸여 접근을 불허한다 할지라도, 이센가드가 강하고 단단하고 돌처럼 차갑고 뼈처럼 조밀하다 할지라도, 우린 간다,우린 가! 우린 싸우러 간다, 돌을 깨고 문을 부수러! 줄기와 가지가 불타고 있고 화덕이 포효하기에 우린 싸우러 간다! 운명의 무거운 걸음걸이로 북을울리며 암울한 땅으로, 우리는 간다, 우린 간다! 이센가드로 우린 운명과 함께 간다! 운명과 함께 가노라! 운명과 함께! 그들은 남쪽으로 행진해 가며 이렇게 노래했다. 빛나는 눈의 브레갈라드가 대오에 합류해 트리비어드 옆에서 행진했다. 그 늙은 엔트는 이제 호비트들을 다시 맡아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하는 무리의 선두에서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머리를 높이 든 채 자랑스럽게 갔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엔트들에게 닥친 변화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변화는 오랫동안 둑으로 막아 두었던 엄청난 양의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만큼이나 갑작스러워 보였다. "요컨대 엔트들 치고는 좀 빠르게 결정한 편인 거죠, 안 그래요?" 잠시 노래가 멎고 손과 발로 박자 맞추는 소리만이 들릴 때 피핀이 용기를 내 물었다. "빠르다고? 흠! 그래, 정말 그래.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빨랐어. 정말로 난 오랜 세월동안 이들이 이처럼 분기한 것을 본 적이 없어. 우리 엔트들은 분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그리고 우리의 나무들과 우리 생명이 크게 위험하다는 게 분명치 않다면 우린 결코 분기하지 않아. 그런 위험은 사우론과 해양의 인간들 사이의 전쟁 이후론 없었고 우리를 이토록 분개하게 한 것은 땔감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구실도 없이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리는 오르크놈들이야. 또 마땅히 서로 도와야 할 이웃의 배신이고. 마법사들이 그렇게 어리석을 리 없어.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그런 배반에 합당한 지독한 욕은 요정들의 말이나 엔트들의 말 심지어 인간의 말에도 없어. 사루만을 타도해야 해!" 그러자 이번에는 메리가 물었다. "당신들은 정말 이센가드의 성문을 부술 건가요?" "흠흠, 음, 너희도 알다시피 우린 할 수 있어. 아마 너희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모를 거야. 혹시 트롤거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대단히 힘센 자들이지. 그러나 트롤이란 적이 우리 엔트를 모방해 거대한 암흑 속아서 만든 엉터리일 뿐이야. 마치 요정들을 엉터리로 흉내내 만든 오르크처럼 말이야. 우린 트롤보다 더 강해. 우리의 몸은 골회로 만들어졌지. 우린 돌을 나무뿌리처럼 가를 수 있어. 정말 분기한다면 훨씬 빨리 할 수도 있고. 우린 이센가드를 조각조각 갈라 버릴 수도 있고 그 성벽을 부숴 한낱 돌무더기로 만들 수도 있지." "그렇지만 사루만이 당신들을 저지하려 할 걸요. 안 그래요?" "흠, 맞아, 그렇지. 그걸 잊진 않았어. 정말이지 난 그 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어. 그러나 보다시피 많은 엔트들은 나보다 젊어. 그들은 이제 모두 분기했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즉 이센가드를 부수는 일에 전념하고 있어.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 저녁음료를 마실 때쯤 되면 그들도 약간 냉정하질거야. 한잔 생각이 간절해질 거야. 그러나 지금은 행진하고 노래 부르게 놔둬. 우린 갈길이 멀고 또 생각할 시간은 앞으로도 있으니까. 출발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트리비어드는 잠시 다른 엔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해 갔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목소리가 중얼거림으로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침묵에 잠겼다. 피핀은 그의 늙은 이마가 주름지고 찌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다시 얼굴을 치켜들었을 때 피핀은 그의 눈가에서 음울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음울하면서도 불행한 표정은 아니었다. 눈에는 마치 녹색의 광휘가 사고의 어두운 샘 속으로 더욱 깊숙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 친구들. 우린 지금 죽음을 맞으러 가고 있는 셈이 되어 이것이 엔트들의 마지막 행진이 될 수도 있어.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집에 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운명은 어쨌든 조만간 우리를 찾아 낼 거야. 그런 생각이 오래전부터 우리의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었고 또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행진하고 있는 이유야. 성급한 결단이 아니지. 자, 엔트들의 마지막 행진은 적어도 노래하나를 남길 가치는 있을 거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린 사라지기 전에 다른 종족을 도울 수 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엔트와이프에 대한 노래들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어. 난 핌브레딜을 다시 보게 되길 무척이나 바라고 있어. 그러나 내 친구들이여, 노래는 나무처럼 패가 되어야만, 그리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만 열매맺는 거야. 그리고 때로 그것은 때 아닌 때에 시들어 죽기도 하지." 엔트들은 대단한 보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은 우묵하게 내려앉은 기다란 땅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다시 남쪽으로 갑자기 푹 꺼졌다. 이제 그들은 위로, 위로 오르기 시작해 높은 서쪽 능선 위에 이르렀다. 숲은 시들어 죽어 있었다. 그들은 자작나무가 무리져 듬성듬성 흩어진 곳을 지나 단지 몇 그루의 마른 소나무들이 자라는 벌거벗은 비탈에 이르렀다. 해는 어두운 언덕 너머로 떨어졌다. 회색 땅거미가 깔렸다. 피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엔트들의 수가 불어난 것인지 아니면 무슨 영문인지 그들이 가로질러 온 흐릿한 벌거벗은 능선이 있어야 할 곳이 숲으로 가득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숲은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판곤의 나무들이 깨어나 숲이 전쟁에 참가하러 언덕을 넘어 행진하고 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는 혹시 졸음과 그림자 때문에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거대한 회색의 형상들은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다. 많은 가지를 스쳐오는 바람 같은 소음이 일었다. 엔트들은 이제 능선 꼭대기로 다가서고 있었고 노랫소리는 멎었다. 밤이 오고 정적이 깔렸다. 엔트들의 발 아래서 대지가 가냘프게 떨리는 소리와 바람에 날려 떠도는 많은 잎들의 속삭이는 듯한 살랑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정상에 서서 어두운 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산맥의 끝에 위치한 거대한 틈새로 그 이름은 난 쿠루니르, 즉 사루만의 계곡이었다. 트리비어드가 입을 열었다. "이센가드에 밤이 깃들이는군." 제5장 백색의 기사 "뼛속까지 으스스 떨리는데." 양 손을 맞비비고 발을 구르며 김리가 말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일행은 동이 트자마자 아침을 먹었다. 날이 점차 밝아오자 그들은 다시 호비트들의 자취를 찾을 준비를 서둘렀다. 김리가 말했다. "그 노인을 잊으면 안 돼. 난 그 발자국이라도 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자 레골라스가 물었다. "어째서 그렇지?" "발자국을 남기기라도 했으면 겉보기와 달리 보통노인인 걸 확인하고 안심할 수있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지만 아무리 무거운 구두를 신어도 이런 풀밭엔 전혀 흔적이 남지 않을걸. 풀이 길고 억세거든." "순찰자가 보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 아라곤은 구부러진 풀 하나만 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난 아라곤이라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어젯밤 우리가 본 것은 분명 사루만의 사악한 환영이었으니까. 만일 아침햇살 아래서 봤더라도 난 그렇게 확신할 거야. 어쩌면 지금도 그의 두 눈이 판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럴 법한 일이지. 그렇지만 난 그렇게 확신하진 않아. 난 말들을 생각하고 있어. 김리, 자네는 지난밤에 말들이 겁에 질려 도망갔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레골라스, 자네는 말 소리를 들었나? 그 울음소리가 겁에 질린 것처럼 들리던가?" "아뇨, 나도 말 소리를 똑똑히 들었지만 어둠 속만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우리가 겁에 질려 있지만 않았다면 아주 즐거운 감정이 담긴 소리라고 느꼈을 거예요. 그 소리는 오랫동안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났을 때의 소리였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말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이 수수께끼를 풀 도리는 없지. 자,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먼저 자취를 살펴보고 추측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우선 우리가 야영한 곳부터 살피기 시작해서 숲 쪽으로 가지. 지난밤의방문객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가 할 일은 호비트들을 찾는 거야. 만일 그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면 숲속에 숨어 있음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았다면 눈에 띄었을 테니까 말이야. 이곳과 숲의 경계에서도 그들을 찾지 못한다면 전투가 벌어졌던 곳과 잿더미를 뒤져 봐야지. 하지만 그곳은 가망이 더 없을 거야. 로한의 기병들이 너무나 깨끗이 해치웠으니까." 한동안 일행은 땅바닥을 기다시피 지면을 살폈다. 그들 머리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나무가 동풍에 요란스레 잎을 퍼덕였다. 아라곤은 친구들에게서 좀 떨어져 갔다. 그는 강둑 근처의 횃불이 꺼진 채로 버려진 곳에 이르러 전투가 벌어졌던 언덕쪽 지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몸을 더 굽혀 풀밭에 얼굴을 묻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고 친구들을 불렀다.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우린 마침내 자취를 발견한 거야!" 그는 잎사귀 하나를 치켜들어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황금빛이 도는 크고 가냘픈 나뭇잎으로 이제는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로리엔의 말론잎이야. 이 위엔 작은 빵부스러기들이 있고 또 풀밭 속에도 부스러기가 많이 있어. 그리고 자 봐! 끊어진 끈 조각이 있잖아!" 김리도 말했다. "그리고 여기 끈을 자른 칼도 있는데!" 그는 몸을 굽혀 육중한 몸이 짓밟고 간 풀밭 사이에서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짧은 칼을 집어들었다. 칼집도 옆에 놓여 있었다. 김리는 조심스럽게 칼을 들고 조각된 손잡이를 혐오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오르크들의 무기야." 손잡이는 사팔뜨기처럼 흘겨보고 있는 눈과 음흉하게 웃고 있는 입의 끔찍한 두상 모양이었다. 레골라스가 외쳤다. "이건 이제껏 마주친 것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수수께끼로군. 결박된 포로가 오르크들과 포위하고 있는 기사들 모두에게서 빠자나가다니. 그리고는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오르크의 칼로 결박을 자르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렇게 했을까? 다리도 묶였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친 거야? 또 팔도 묶여 있었을 텐데 어떻게 칼을 쓸 수가 있었던 거지? 만일 묶여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끊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또 그런 재주를 뽐내기라도 하듯 이런 데 앉아서 느긋하게 렘바스를 먹다니! 말론잎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실만 보면 이들이 호비트들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아마 이 친구들은 팔을 날개로 바꾸고 노래를 부르며 숲속으로 날아가 버렸을 거야. 그들을 찾는 건 간단해. 우리도 날개만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긴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아. 그 노인이 한 짓이 요술 아니면 뭐겠어? 아라곤, 레골라스의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요? 더 나은 해석을 할 수 있겠어요?" 아라곤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마 할 수 있겠지. 자네들이 고려에 넣지 않은 다른 자취들이 가까이에 있어. 그 포로가 호비트였으며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팔이나 다리가 자유로웠음에 틀림없다는 점엔 나도 동감해. 내 추측엔 손이 자유로웠던 같아. 그러면 이 수수께끼는 훨씬 쉬워지지. 이 자취들을 보면 어떤 오르크가 그를 이곳까지 떠메고 온 것이 분명하거든. 저기 피가 보이지? 오르크의 피야. 이 근처에는 온통 말발자국과 어떤 무거운 것이 끌려간 자취가 깔려 있어. 오르크는 기사들에게 살해된 거고 그 시체는 불을 피운 곳까지 끌려간 거야. 그렇지만 호비트는 눈에 띄지 않은 거지. '사방이 트인곳'에 있진 않았거든. 게다가 밤이었고 또 요정의 망또를 걸치고 있었으니까. 호비트는 극도로 지치고 배가 고팠던 거야. 그러니 쓰러진 적의 칼로 결박을 끊고, 도망가기 전에 음식을 들면서 쉬었다는 점은 그리 놀란 만한 일이 아니야. 어쨌든 아무런 무기나 행장 없이 도망갔더라도 최소한 렘바스라도 가지고 있었으니 다행이군. 그게 호비트다운 점이기도 하겠지. 난 계속 '그'라고 말하고 있지. 물론 메리와 피이 함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 둘이 같이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 친구들 중 하나가 손이 자유롭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리가 물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지. 또 왜 어떤 오르크가 그들을 따로 빼돌리려 했는지도 모르고 그들을 탈출시킬 목적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겠지. 아니, 이제서야 날 당황하게 하던 문제를 이해할 것 같아. 왜 보로미르가 쓰러졌을 때 오르크들이 메리와 피핀을 생포하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말이야. 그놈들은 남은 우리 일행을 찾으려고도 안했고 우리 야영지를 공격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그놈들은 최대한의 속도로 이센가드를 향해 간 거야. 그놈들은 반지사자와 그의 충직한 동지를 잡았다고 생각한걸까? 난 그렇게는 보지 않아. 오르크들의 영주들은 자기들은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 부하들에게 감히 반지에 대해 언급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놈들은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이 못 되거든. 아마 오르크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호비트들을 사로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그 귀중한 포로들을 데리고 몰래 도망하려는 시도가 있었어. 아마 반역일 테지. 그런 족속들에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고 어떤 덩치 크고 당찬 오르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혼자서 포로들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을 거야. 이게 내가 추측하는 바야.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떻게 추측을 하건 이 점만은 믿어도 좋아. 우리 친구들 중적어도 하나는 도망쳤다는 거야. 로한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를 찾아서 도와 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야 필요에 쫓겨 그가 꼭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으니 우리도 판곤에 기가 꺾여선 안 돼." 김리도 말했다. "지금까지 걸어서 로한을 통과한 일이나 이 어두운 숲 판곤이나 내 기를 꺾어 놓기는 마찬가지야." "그럼 숲으로 들어가지." 아라곤이 말했다. 오래지 않아 아라곤은 새로운 자취를 발견했다. 엔트워시강둑 근처의 한 지점에서 그는 발자국들을 찾아냈다. 그건 호비트의 발자국이었지만 너무 흐려져서 그리 중요한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시 숲 경계에 있는 거대한 나무줄기 아래서 더 많은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땅이 메말라서 많은 걸 추리할 수는 없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적어도 한 명의 호비트가 여기 잠시 섰다가 뒤를 돌아봤어. 그런 다음 방향을 돌려 숲으로 들어간 거야." 김리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들어가야죠. 그렇지만 난 이 판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게다가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고. 다른 데는 어디라도 좋으니 제발 이 숲에만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레골라스가 말했다. "옛이야기에서 뭐라고 말하든 난 이 숲이 사악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아." 그는 숲경계에 서서 눈을 크게 뜬 채 귀를 기울이고 어둠 속을 응시하듯 숲을 향하여 몸을 기울였다. "그래, 이 숲은 사악하지 않아. 만일 악한 것이 있더라도 가까이에는 아니야. 다만 음침한 생각을 지닌 나무들이 서 있는 음험한 장소가 희미하게 반향되지만 적어도 우리 가까이에 악의는 없어. 그렇지만 경계와 노여움의 기운은 퍼져 있어."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우리에게 노여워할 이유가 없는데. 난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다구."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건 상관없어. 어쨌든 이 숲은 해를 입었거든.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려 하고 있어.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지 않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돈데." "숨막힐 듯 갑갑해. 이 숲은 머크우드보다 규모는 작지만 곰팡내가 나고 추레해." "오래됐지. 아주 오래됐다구. 이 숲은 너무 오래돼서 자네 같은 젊은 친구와 원정을 떠난 이래 느껴 볼 수 없었던 젊음이 내게 느껴질 정도니까. 이 숲은 아주 오래되었고 갖가지 기억들로 가득차 있어. 평화로운 시절에 여길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김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어련하실려구. 요정은 어떤 종족이건 다 이상하긴 마찬가지지만 자넨 더구나 숲의 요정이니까. 그렇지만 자네가 있어서 맘이 놓이긴 하는군. 자네가 가는 곳이면 나도 가지. 하지만 자넨 활을 단단히 준비해 두라구. 난 도끼를 느슨하게 풀어 놓을테니까. 물론 나무에 쓰려는 건 아니지만." 김리는 머리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서둘러 덧붙였다. "난 다만 아무 준비도 없이 그 늙은이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뿐이야. 자, 갑시다." 김리의 말과 함께 일행은 판곤으로 뛰어들었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자취를 찾는 작업을 아라곤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도 눈여겨 볼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숲바닥은 메말랐고 바람에 쌓인 잎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호비트들이 물가에 머물 거라고 추정했기에 아라곤은 개울 쪽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그는 메리와 피핀이 물을 마시고 발을 씻은 장소를 발견했다. 거기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하게도 호비트의 발자국이,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좀더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좋은 소식인걸. 그런데 이 흔적은 이틀 전 것이야. 그러니 호비트들은 이미 떠났을 거야." 김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죠? 그들을 찾느라 판곤 전체를 뒤질 수는 없잖아요? 우린 식량도 제대로 없는데. 만일 곧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우리도 그들에게 아무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구요. 그들 곁에 앉아서 함께 굶어죽음으로써 우정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그게 진정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계속 가자구." 아라곤이 말했다. 그들은 마침내 트리비어드언덕의 가파르고 험준한 가장자리에 이르러 그 울퉁불퉁한 계단이 높은 바위턱까지 이어진 것을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몰려다니는 구름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비치고 있어 이제 숲은 좀 덜 어둡고 덜 황량해 보였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자,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봅시다. 난 아직 숨이 가빠요. 잠시라도 좀더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싶어." 일행은 위로 올라갔다. 아라곤이 천천히 걸어 제일 뒤에 섰다. 그는 계단과 바위턱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난 호비트들이 이리로 올라갔었으리라고 확신해. 그런데 다른 흔적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흔적들도 있어. 그들이 다음에 어느 길로 갔는지 추정하는데 도움이 될 어떤 것을 이 바위턱에서 보게 될지 궁금하군." 그는 일어서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바위턱은 남쪽과 동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오직 동쪽만 시야가 터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그들이 지나온 평원을 향해 줄지어 선 높은 나무들의 행렬이 보였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우린 너무 돌아서 왔군. 만일 둘쨋날이나 셋쨋날에 대하를 떠나 서쪽으로 길을 잡았더라면 우리 모두가 이곳에 함께 올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자기가 택한 길이 어디에 이를 것인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그렇지만 우린 판곤으로 오길 바라진 않았잖아."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린 여기 와 있어. 멋지게 그물에 걸려든 거야. 자 봐!" "뭘?" "저 나무들 사이를 말이야." "어디? 난 요정의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쉬! 목소리를 더 낮춰. 봐!" 레골라스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숲속에, 방금 우리가 왔던 길 쪽에 말이야. 그자야. 저기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게 보이지 않아?" "보인다! 이제 보인다!" 김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봐요 아라곤! 내가 주의해야 한다고 그랬잖소. 저기 그 노인이 있어. 온통 더러운 회색 누더기를 걸치고서 말이야. 그래서 처음엔 내가 보지 못한 거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형체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들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노인은 아무렇게나 만든 지팡이에 기대어 피곤한 듯 걷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였다면 이들은 친절한 말을 건네며 그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각기 숨은 힘을 지닌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김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점점 다가오는 노인을 응시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레골라스, 활! 활을 당겨! 준비하라구! 사루만이야! 저자가 말을 하거나 마법을 걸도록 놓아 두어선 안 돼! 먼저 쏘라구!" 레골라스는 활을 들었다. 그러나 동작은 더뎠으며 마치 어떤 다른 의지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화살 하나를 느슨하게 손에 쥐었지만 줄에 매기지는 않았다. 아라곤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경계의 빛을 띠고 긴장해있었다. 김리가 다시 나직이 말했다. "왜 기다리는 거야? 뭐가 잘못됐어?" 그러자 아라곤이 조용히 말했다. "레골라스가 옳아. 아무리 두려움이나 의심이 앞선다고 해도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또 대결의 통고도 받지 못한 노인에게 쏠 필요는 없어. 지켜보면서 기다리지." 그 순간 그 노인은 걸음을 빨리해 놀라운 속도로 바위벽 아래까지 왔다. 노인은위를 올려다보았고 그들은 그대로 선 채 내려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두건을 쓰고 그 위에 다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코 끝과 회색수염을 제외한 얼굴의 모든 윤곽이 깊게 그늘져 있었다. 그러나 아라곤은 두건으로 덮인 이마의 그림자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눈빛이 발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그 노인이 침묵을 깼다. "정말 잘 만났군, 내 친구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 자네들이 내려오겠나 아니면 내가 올라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리가 외쳤다. "자, 저자를 멈추게 해, 레골라스!" 그러자 그 노인이 말했다. "자네들과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활을 치우게, 요정선생!" 레골라스는 손에서 활과 화살을 떨어뜨리고 두 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자네, 난쟁이선생, 내가 위로 올라갈 때까지 제발 그 도끼자루에서 손을 떼게!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 노인이 염소처럼 민첩하게 울퉁불퉁한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것을 김리는 돌처럼 굳은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아까의 피로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바위턱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그의 회색 누더기 사이로, 확실히 감지하기엔 너무도 짧은 순간 하얀 섬광이 내비치고는 사라졌다. 김리의 숨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잘 만났네!" 노인은 그들을 향해 오면서 말했다. 그는 그들 앞에 멈춰서서 지팡이에 기댄 채 머리를 내밀고 두건 아래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요정, 인간, 난쟁이 이 모두가 요정들의 옷차림을 하고서 말이야. 이 모든 사정 뒤엔 뭔가 필시 들어 볼 만한 곡절이 있겠지. 이런 일이 자주 눈에 띄는 건 아니니까." "당신은 이 판곤을 잘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 그렇소?" 아라곤이 물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 이 숲을 다 알려면 아마 목이 너댓 개라도 모자랄걸. 어쨌든 난 가끔 이곳에 오지."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겠소? 그 다음에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지요? 아침도 이제 거의 다 갔고 우리에겐 시간을 다투는 용무가 있으니." "내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다 했지. 자네들이 뭘 하고 있는 것이며 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야. 내 이름은," 그는 나직하고 길게 웃으며 말을 끊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아라곤은 전율이, 차가운 전율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에는 듯한 대기가 갑작스럽게 피부를 파고들거나 아니면 차가운 빗줄기가 불안한 잠에 빠진 사람에게 쏟아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 이름은!" 노인은 다시 말했다. "벌써 짐작해 보지 않았나? 자네들은 내 이름을 전에 들은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자네들은 전에 들은 적이 있어. 그건 그렇고 자, 자네들의 이야기는?" 세 친구는 그대로 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네들의 임무를 발설해도 되는 건지 의심이 들겠지? 다행히 난 그 임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내가 생각하기론 자네들은 두 명의 젊은 호비트를 찾고 있는데. 그렇지, 호비트들이지. 마치 그런 이상한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크게 뜰 필요는 없어. 자네들이 들어 본 이름이고 나도 들어 보았으니까. 음, 그들은 이틀 전 이곳에 올라왔다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만났지. 이 말을 들으니 위안이 되는가? 이제 자네들은 그들이 어디로 간 건가 알고 싶겠지? 자, 자, 내가 그 점에 대해서 좀 알려 줄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서 있는 거지? 이제 알았겠지만 자네들의 임무는 이제 더 이상 급박하진 않으니까. 앉아서 마음을 좀 더 편히 갖도록 하지." 노인은 몸을 돌려 뒤편 벼랑 기슭의 낙석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세 친구는 마치 마법에서 풀리기라도 한 듯 비로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김리는 즉시 도끼자루로 손을 뻗쳤다. 아라곤은 칼을 뽑았고 레골라스는 활을 집어들었다. 노인은 아무 낌새도 못 챈 채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하고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 그의 회색 망또자락이 벌어지자 그 속에 입은 횐 옷이 드러났다. "사루만이다!" 김리는 도끼를 들고 그를 향해 뛰어오르며 외쳤다. "말해! 우리 친구들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하라구!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별수가 없는 도끼자국을 머리에 내주겠다!" 그러나 김리가 상대하기에는 그 노인이 너무 빨랐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커다란 바위꼭대기로 몸을 날렸다. 노인은 갑자기 장대하게 커지며 그들 위에 우뚝 섰다. 그의 두건과 회색 누더기가 떨쳐지고 하얀 옷이 빛을 발했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올리자 김리의 손아귀에서 도끼가 빠져 땅바닥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아라곤의 손에 굳게 잡힌 검은 갑작스레 광휘를 뿜었다. 레골라스가 외치며 활을 높이 쏘아 올렸지만 화살은 섬광처럼 사라졌다. 노인이 외쳤다. "미스랜더! 그래 난 미스랜더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잘 만났네, 레골라스!" 그들은 모두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칼은 햇빛에 반짝이는 눈처럼 하앴다. 입은 옷도 하얗게 빛을 발했다. 넓고 시원한 이마 아래 눈은 햇빛처럼 꿰뚫어보듯이 빛났다. 그의 손에는 권능이 있었다. 그들은 경이와 기쁨과 두려움 사이애서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마침내 아라곤이 몸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갠달프! 우리가 절박한 처지에 놓인 이때 당신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곳에서 돌아오셨군요! 내 눈에 뭐가 씌었던 모양입니다, 갠달프!" 김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무릎을 꿇었다. "갠달프라!" 노인은 마치 오랜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쓰이지 않던 낱말을 떠올리듯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이름이야. 난 갠달프라 불렸었지." 그는 바위에서 내려와 회색 망또를 집어들고 몸에 둘렀다. 그건 마치 빛나던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가리운 것 같았다. "그래, 자네들은 여전히 날 갠달프라고 부르겠지."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바로 그들의 오랜 친구이자 길잡이였던 갠달프의 목소리였다. "자, 일어서게, 내 친구 김리. 자네에겐 잘못이 없어. 난 다친 데도 없으니까. 내 친구들! 정말이지 자네들 중 아무도 날 해칠 무기를 가지진 못했어. 자 마음을 풀게.우린 다시 만난 거야. 운명의 갈림길에서.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어. 그렇지만 형세는 바뀌었어." 그가 김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난쟁이는 올려다보며 갑자기 웃었다. "갠달프! 그런데 당신은 지금 횐색 옷을 입고 있잖아요?" "그래, 난 이제 횐색 옷을 입지. 사실 사람들은 날 보고 사루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바로 그의 모습 그대로니까. 그건 그렇고 자, 자네들 이야기를 좀 들려주게! 우리가 헤어진 이후로 난 깊은 물 속과 불길을 거쳤네. 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을 잊어 버렸다가 다시 배웠지. 난 멀리 떨어진 많은 것들은 볼 수 있었지만 바로 가까이에 있는 많은 사실들은 볼 수가 없었어. 자네들이 겪은 일들을 말해 주게." 아라곤이 말했다. "뭘 알고 싶은가요? 우리가 다리 위에서 헤어진 후 일어난 모든 일을 다 말하자면 아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먼저 우리에게 호비트들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무사한가요?" "아니, 그들을 보진 못했소. 에민 뮐의 계곡에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난 독수리들이 알려 줄 때까진 그들이 포로로 잡힌 줄도 몰랐소."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독수리라고요! 난 독수리 한 마리가 높고 멀리 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사흘 전 에민 뮐 상공이었지요." "맞아, 그게 바로 오탕크에서 나를 구해 준 바람의 영주 과이히르야. 난 대하를 관찰하고 소식을 수집하라고 그를 앞서 보냈지. 그의 눈은 날카롭거든. 하지만 언덕과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모든 걸 보지는 못하지. 어떤 것들은 그가 보았고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직접 보았지. 반지는 이제 나도, 아니 리벤델에서 출발한 원정대의 누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어. 반지는 하마터면 적에게 드러날 뻔했다가 간신히 면했지. 내가 맡은 역할도 좀 있었고 높은 곳에 버티고 앉아 암흑의 탑과 힘을 겨루었었는데 결국 어둠이 물러가더군. 그 후 난 피곤했어. 몹시 피곤했지. 그래서 우울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걸어다녔지." "그러면 당신은 프로도에 대해서도 알겠군요! 그는 어떻게 되었나요?" 김리가 물었다. "나로선 알 수 없어. 그는 한 번의 큰 위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 많은 위험이 앞에 가로놓여 있지. 그는 혼자서 모르도르로 가기로 결심하고 출발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혼자가 아니에요. 우린 샘이 그와 같이 갔다고 생각하는데요." 샘이 같이 갔다고?" 갠달프는 눈을 번득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같이 갔어? 내겐 새로운 소식인걸. 하지만 난 놀라지 않아. 잘됐어! 정말 잘됐어! 자네들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군. 그러나 나에게 더 이야기해 줘야 해. 자, 여기 앉아서 자네들의 원정담을 들어 보세." 그들은 갠달프 앞 땅바닥에 앉았다. 주로 아라곤이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갠달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양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아라곤이 보로미르의 죽음과 대하로의 마지막 여행을 이야기하자 노인은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내 친구 아라곤,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짐작하는 모든 걸 말하진 않았소. 가엾은 보로미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사이자 인간 영주인 그에게 그건 가혹한 시련이었소. 그가 유혹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갈라드리엘이 말해 주었지. 그렇지만 그는 결국 이겨 냈소. 난 기쁘오. 젊은 호비트들이 우리와 함께 왔던 것이 결국 보로미르를 죽음으로 이끄는 결과밖에 안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헛된 일이 아니었소.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은 그것뿐이 아닐 테니까. 그들은 마치 산사태를 촉발하는 작은 돌과도 같이 이 판곤까지 떠밀려 온 거요.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난 우루루 무너지는 첫 소리를 들을 수 있소. 그 둑이 터질 동안 사루만을 제거할 필요는 없겠지." "소중한 친구여, 당신은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군요. 여전히 수수께끼같이만 말씀을 하시니." 아라곤이 말했다. "수수께끼라고? 아니오! 난 혼잣말을 한 것이니까. 노인들의 습관이지. 좌중에 가장 현명한 이에게 얘기하는 것은. 젊은이들은 설명을 너무 많이 요구해서 좀 지루하거든.“ 갠달프는 웃으며 농담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햇빛의 반짝임처럼 따스하고 친근한 것이었다. 그러자 아라곤도 말했다. "우리들 고대 뉴메노르가문의 기준으로 볼 때도 난 이미 젊은이는 아닙니다(뉴메노르인의 평균수명은 약 이백 살이며 이때 아라곤의 나이는 여든여덟이었다). 좀더 분명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뭘 듣고 싶소?" 하고 말한 뒤 갠달프는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멈췄다. "내 마음 속을 가능한 한 명백하게 알고 싶다면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하지. 사정은 이렇소. 물론 적은 반지가 나돌아 다닌다는 것과 호비트 한 명이 그걸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소. 지금 그는 리벤델에서 출발한 우리 원정대의 인원과 또 어떤 종족들이란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는 아직 우리의 목적이 뭔지는 명확하게 알아내지 못한 것 같소. 그는 우리 모두가 미나스 티리스로 가는 줄로 생각하겠지. 자신이 우리 입장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아마 그는 우리가 미나스 티리스로 간다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중대한 타격이 될 거라고 생각할 거요. 사실 그는 어떤 강력한 적이 반지의 위력을 발휘하며 전쟁을 걸어 와 자신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나 않을까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소. 다만 그는 우리가 그를 끌어내리기만 하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게 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요. 즉 우리가 반지 그 자체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점은 그의 가장 깊은 꿈속에서도 떠오른 적이 없을 거요. 이 사실에서 당신은 틀림없이 우리의 희망과 행운을 볼 수 있을 거요. 전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처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먼저 전쟁을 벌인 것이오. 먼저 전쟁을 벌인 자는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병력을 이제 움직이고 있는 거요. 의도보다 좀더 이르긴 하지만. 똑똑한 바보요. 왜냐하면 만일 그가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모르도르를 방어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또 반지를 추격하는 데 모든 지략을 쏟았다면, 그랬다면 정말 우리의 희망은 사그라들었을테니까 말이요. 그러나 이제 그의 눈은 모르도르 주변보다는 바깥쪽을 살피고 있소 그리고 그는 주로 미나스 티리스 쪽을 바라보고 있소 이젠 곧장 그의 병력이 폭풍처럼 그곳을 덮칠 거요 그는 원정대를 요격하려고 보냈던 부하들이 실패했다는 걸 아니까. 그들은 반지를 찾지 못했고 또 포로도 데려가지 못했으니까 말이요 만일 그들이 그만큼 해냈다면 그건 우리에게 중대한 일격이었을 것이고 또 치명적이었을 것이오. 그러나 암흑의 탑 속에서 그들의 유약한 충성심이 심판받는 따위를 상상함으로써 괜히 우리 마음까지 어둡게 할 필요는 없지. 적은 실패했으니까. 적어도 지금까진. 사루만 덕택에 말이오." "그렇다면 사루만은 배신자가 아닌가요?" 김리가 물었다. "물론 배신자지. 이중의 배신자야. 그게 이상하지 않아? 사실 이센가드의 배신이야말로 최근 우리에게 부딪힌 가장 큰 타격이었지. 한 사람의 영주나 대장으로 생각한다면 사루만은 아주 강대해졌어. 주된 공격이 동쪽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미나스 티리스를 도와야 할 로한인들을 공격하고 있거든. 그렇지만 위험한 무기는 그것을 다루는 손에도 위험한 법이지. 사루만은 반지를 스스로 소유하거나아니면 적어도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호비트들을 유인하려는 속셈을 가졌어. 그래서 오르크들은 매리와 피핀을 데리고 정신없이 이 판곤의 숲까지 온 것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이리로 오지 않았겠지. 또 그들은 서로 의심을 품은 거야. 그들의 싸움은 로한의 기사들 덕분에 모르도르까진 알려지지 않았지. 그러나 암흑의 군주는 두 명의 호비트가 에민 뮐에서 나포되었는데 자신의 부하들의 의사와는 달리 이센가드를 향해 옮겨진 걸 알았지. 그는 이제 미나스 티리스뿐만 아니라 이센가드까지도 경계하지. 만일 미나스 티리스가 무너진다면 그건 사루만에게도 낭패가 될 거야."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우리 편이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 아쉽군요. 이센가드와 모르도르가 인접해있었다면 우린 지켜보고 기다리기만 하면 됐을 텐데." "먼저 치는 쪽아 더 강하겠지. 그러나 사루만이 반지를 손에 넣지 못하는 한 이센가드는 모르도르와 싸울 수 없어. 그는 결코 지금 싸우려 하지 않을 거야. 그는 아직 자신의 위험을 모르고 있지. 그가 모르는 것은 많아. 그는 전리품을 손에 넣는 것이 급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직접 나섰지. 그러나 이번만은 너무 때가 늦었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전투는 끝났고 결국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거야. 그는 여기 오래 있지 않았어. 난 그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지. 난 그가 어떤 의심을 품고 있는지 알아. 그에겐 숲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러니 그는 기사들이 모든 것을 죽이고 화장시켰다고 믿는 거야. 오르크들이 포로들을 데리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또 자기 부하들과 모르도르의 오르크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지. 또 날개달린 기사들에 대해서도 몰라." 그러자 레골라스가 외쳤다. "날개달린 기사! 산 게비르여울 상류에서 내가 갈라드라엘의 활로 쏴서 떨어뜨렸는데요. 그가 우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무슨 새로운 공포의 존재인가요?" "자네가 활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자넨 단지 그가 탄 새를 죽였을 뿐이지. 물론 그것도 훌륭한 일이야. 그러나 그 암흑의 기사는 곧 다른 것를 탔어. 그들이 바로 나즈굴이야. 즉 아홉 명의 반지악령 나즈굴 중 하나로 흉칙한 새를 타고 있었던 거야. 곧 그들 존재의 두려움이 태양을 가리고 우리 편의 마지막 남은 병사들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거야. 그렇지만 그들도 아직 대하를 건너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는 못했고 사루만은 반자악령들의 이 새로운 모습에 대해 말지 못하지. 그는 오로지 반지에만 몰두해 있거든. '반지가 발견되었을까? 혹시 마크의 영주 데오든이 손에 넣고 그 권능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것이 그가 염려하는 바야. 그래서 그는 로한에 대한 공격을 두세 배나 강화하려고 이센가드로 쏜살같이 달려간 거야. 그런데 격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보지 못한 다른 위험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고. 바로 트리비어드를 잊었던 거야." 아라곤이 마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다시 혼잣말을 하시는 군요. 난 트리비어드를 모릅니다. 난 사루만의 이중적 배신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그러나 두 명의 호비트가 이 판곤까지 오고 또 우리가 그 길고 소득없는 추격을 한 것 이외에 무슨 도움이 됐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김리가 외쳤다. "잠깐! 먼저 알고 싶은 다른 게 있어요. 우리가 지난밤에 본 건 당신이었나요 아냐면 사루만이었나요?" "틀림없이 난 아니야. 따라서 자네가 본 건 사루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분명 우린 아주 닮았으니까. 그러니 자네가 내 모자에 치유할 수 없는 도끼자국을 내려고 했던 것도 용서해야지." "됐어요, 됐어! 당신이 아니었다니 기뻐요." 김리가 말했다. 갠달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친구 난쟁이선생. 어떤 점에선 오인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 놓이는 일이지. 난 그걸 너무 잘 알아. 그러나 난 자네가 날 맞이한 태도에 대해선 탓하지 않았어. 적을 다룰 땐 자신의 손까지도 의심해 보라고 일러 왔던 내가 어떻게 탓할 수 있겠나. 글로인의 아들 김리, 잘했어! 아마 언젠가 자네가 우리 둘을 함께 보고 분간할 수 있는 날이 올 걸세." 레골라스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호비트들은! 우린 그들을 찾느라 멀리까지 왔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 같군요. 그들은 지금 어디 있죠?" "트리비어드와 엔트들과 함께 있지." 갠달프가 말했다. 아라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엔트! 그렇다면 깊은 숲속에 산다는 거대한 나무지기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었던가요? 세상엔 아직도 엔트들이 있습니까? 난 사실 그들이 로한의 전설에나 나오는 가공인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고대의 기억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그러자 레골라스도 외쳤다. "로한의 전설이라고! 아니지요, 윌더랜드의 모든 요정들은 늙은 오노드림(엔트)과 그들의 슬픔에 관한 노래들을 불러 왔지요. 그렇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들은 하나의 기억에 불과한데. 만일 아직도 세상을 걸어다니는 엔트를 만난다면 난 다시 젊어지는 기분일 거야! 그렇지만 트리비어드라! 그건 판곤이라는 말을 공용어로 옮긴 것일 뿐인데? 그런데 갠달프 당신은 어느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 같군요. 그 트리비어드란 이는 누구죠?"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자네도 참 많이 묻는군. 그의 기나긴 내력들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이야기를 하자고 해도 지금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으로는 부족하지. 트리비어드가 판곤 그 자체이며 또한 이 숲의 수호자지. 그는 엔트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이 중간계의 태양 아래 사는 모든 생물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아. 레골라스, 자네도 곧 만나게 될 걸세. 메리와 피핀은 운이 좋았어. 그들은 여기서, 바로 우리가 앉은 이곳에서 그를 만났거든. 그는 이틀 전에 여기 왔다가 호비트들을 저 멀리 떨어진 산맥기슭으로 데려갔어. 그는 이곳에 가끔 오지. 특히 마음이불안하거나 바깥세상의 풍문이 정신을 어지럽힐 때 오지. 난 나흘 전에 그가 숲속을 큰 걸음으로 거니는 걸 봤어. 아마 그도 날 봤을 거야. 걸음을 멈췄었거든. 그렇지만 난 아무 말도 안했어. 나 자신도 생각중이라 머리도 무거웠고 또 모르도르의 거안(巨眼)과 분투를 벌인 후라 피로했기 때문이었지. 그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어."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아마 그도 당신을 사루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와 오랜 친구 사이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난 판곤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갠달프가 외쳤다. "위험하다고? 그렇다면 나도 위험하지. 나도 매우 위험한 인물이야. 만일 자네가산 채로 암흑의 군주 처소에 끌려가지 않는 한 나는 자네가 만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위험한 존재지. 그리고 아라곤도 위험하고 글로인의 아들 김리, 자네는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어. 또한 자네 자신도 위험하지. 어쨌든 판곤이 위험한 건 사실이야. 특히 도끼를 든 자에게는 더욱 위험하지. 판곤 자신도 위험하고 그렇지만 그는 현명하고 친절해. 이제 그의 길고 더딘 분노가 차오르고 있고 숲 전체가 분노로 진동하고 있어. 호비트들이 온 것과 그들이 가져온 소식 때문에 분노가 터진 것이고 그건 곧 홍수처럼 넘칠 거야. 그 분노는 사루만과 이센가드의 도끼들을 향한 것이야. 제1시대 이후로는 한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질 참이야. 이제 엔트들이 깨어나 스스로의 강대함을 확인하게 될 거야." "그들이 어떻게 할까요?" 놀란 듯 레골라스가 물었다. "나도 알 수 없지. 사실 그들 자신도 잘 모를 거야. 나도 궁금해." 갠달프는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셀도 모두 그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갠달프의 무릎 위에 놓인 두 손 위로 재빨리 흐르는 구름 사이로 내비친 햇살이 떨어졌다. 두 손은 마치 물이 가득찬 컵처럼 빛으로 충만해 보였다. 마침내 갠달프는 고개를 들고 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침시간이 많이 지났군. 우린 곧 가야겠어." "우리 친구들을 찾고 트리비어드를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까?" 아라곤이 물었다. "아니. 그건 당신들이 갈길이 아니오. 내가 희망적인 말을 했지만 그건 단지 내 바람일 뿐이지. 희망이 곧 승리는 아니니까. 우리와 우리의 모든 친구들에게 전운이 밀려오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반지를 사용해야만 우리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전쟁이 오고 전쟁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비애와 두려움으로 가득차고 많은 것들이 파괴될 것이고 모든 것이 상실될 수도 있소. 나는 갠달프, 백색의 갠달프요. 그러나 아직은 암흑이 더 강하지." 그는 일어나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멀리 떨어진 어떤 광경을 보듯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동쪽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야. 반지는 이미 손에 닿을 만한 곳을 벗어났어. 적어도 그 점은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우린 더이상 반지를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을 테니까. 우린 이제 내려가 절망에 가까운 위험에 맞서야 해. 그렇지만 치명적인 위험은 제거된 거야." 그는 몸을 돌리고 외쳤다. "갑시다,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 에민 뮐계곡에서 당신이 선택한 바를 후회하지 말 것이며 또 헛된 추격이었다고 생각지 마오. 당신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했소. 그 선택은 정당했고 또 보람이 있었소. 그렇게 했기에 우리는 제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다시 만났다 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을 거요. 이제 호비트를 찾는 일은 끝났소. 다음 행로는 당신이한 약속에 의해 지시되오. 당신은 에도라스로 가서 데오든을 만나야 하오. 당신을 필요로 하니까. 이계 안두릴의 검광(劍光)은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전투에서 떨쳐져야 하오. 로한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소. 게다가 전쟁은 데오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소." "그럼 우린 그 쾌활한 젊은 호비트들을 다시 볼 수 없나요?" 레골라스가 물었다. "난 그렇겐 말하지 않았어. 누가 알겠는가. 인내심을 가지라고. 자네가 가야 하는 곳으로 가게. 그리고 희망을 갖고 에도라스로! 나도 함께 가네." "젊었든 늙었든 간에 그곳까지는 인간이 걸어가기에 너무 먼 길입니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아라곤이 말하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곧 알게 되겠지. 곧 알게 될 거요. 지금 함께 가겠소?" 아라곤이 대답했다. "예, 우린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난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보다 앞서 그곳에 도착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오랫동안 갠달프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는 동안 다른 둘은 침묵 속에서 그들을 응시했다.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은 키 크고 돌처럼 굳건했으며 손은 칼 손잡이 위에 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의 안개 속으로부터 보다 열등한 인간들이 사는 육지 위로 올라선 왕처럼 보였다. 그 앞에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노인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세월의 무게로 구부정했으나 내부에 찬연한 빛을 감추고 있는, 왕을 능가하는 권능의 화신과 갈았다. 드디어 아라곤이 말했다. "당신은 원하는 어느 곳으로든지 나보다 빨리 갈 수 있다고 한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또 당신이 우리의 지휘자이며 기사라는 점도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암흑의 군주는 암흑의 기사 아홉을 거느렸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강력한 백색의 기사가 있습니다. 당신은 불과 심연을 뚫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두려워할 겁니다. 우린 당신이 이끄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레골라스도 말했다. "나도 당신을 따르겠어요. 그런데 먼저 모리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갠달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알겠어요? 친구들에게 어떻게 구출됐었는지도 말해 주지 못할 만큼 촉박한가요?" "난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시간이 없네. 그리고 일 년이란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난 자네들에게 모든 걸 말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말하고 싶은 것만 이야기해 주세요.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김리가 말했다. "자, 갠달프, 발록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말해 주세요." "그 이름은 말하지 말게!" 갠달프가 외쳤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지나간 것 같았다. 그는 죽음처럼 늙은 형상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아주 어렵게 기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난 추락했지. 그도 나와 함께 떨어지고. 그의 불길이 나를 감쌌어. 난 화상을 입었지. 그리고는 우린 깊은 물 속으로 떨어졌고 모든 것이 캄캄해졌어. 그물은 죽음의 물처럼 차가웠지. 내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였으니." "듀린의 다리가 놓인 그 심연은 아무도 그 깊이를 재보지 못했지요." 김리가 말했다. "그러나 빛과 지혜가 닿을 수 없는 곳이긴 했지만 거기에도 바닥은 있지. 마침내 맨 밑바닥 돌에 이르렀어. 그도 그때까지 나와 함께 있었지. 그의 불길은 꺼졌지만 그는 몸을 조르는 뱀처럼 끈적거리는 강력한 존재였지. 우린 살아있는 대지의 저 아득한 심연 속에서 싸웠지. 시간도 흐르지 않는 곳이었어. 그가 날 부여잡았지만 난 그를 베어 넘겨 마침내 어둠 속으로 달아나게 했지. 글로인의 아들 김리, 그 굴은 듀린종족이 만든 것이 아니야. 난쟁이들이 판 가장 깊은 동굴들의 저 아득한 아래쪽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을 갉아 허물고 있어. 사우론조차도 그들을 모르지. 그들은 그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거든. 난 그곳을 지났지만 지금의 태양빛조차 어둡게 할 그 내용은 말하지 않겠어. 그런 절망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바로 나의 적이었지. 그래서 난 그의 뒤를 쫓았지. 이렇게 해서 그는 도리어 날 카잣 둠의 비밀통로로 다시 데려간 거야. 그는 모든 통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더군. 그때부터 우린 쭉 위로 걸어올라가 마침내 끝없는 계단에 이르렀지." "그 계단은 오래전에 없어졌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건 다만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지요.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구요." 김리가 말했다. "그건 실제로 존재하며 또 파괴되지도 않았어. 맨 밑바닥의 지하감옥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수천 개의 계단이 나선형으로 이어져 실버타인산 정상 즉 지라크지길 위에 세워진 듀린의 탑으로 연결되더군. 그 켈레브딜(지라크지길)정상에는 눈 속에 창 하나만이 뚫려 있고 그 앞에 좁은 공간이 펼쳐졌는데 그곳은 안개를 굽어보고 있는 정말 높은 성이었지. 햇빛이 따갑게 내리비쳤고 아래쪽은 모조리 구름에 싸여 있었어.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나도 그를 따랐는데 그의 몸은 새로운 불길로 감싸이더군. 지켜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 만일 누군가가 봤다면 후세에 그 봉우리의 싸움을 노래로 전했을 거야." 갑자기 갠달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무엇을 읊을까? 멀리서 위를 바라본 사람들은 그 산 정상이 폭풍우 속에 휩싸였다고 생각했겠지. 천둥소리가 들리고 켈레브딜정상을 강타한 번개는 갈라져 불의 혓바닥으로 빨려들었으니까.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 주위에는 거대한 연기가 피어올랐지. 증기와 거품도 함께 말이야. 얼음덩이가 비처럼 쏟아지고 난 그놈을 집어던졌어. 결국 그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바위를 부수고 자신도 파멸에 이른 거야. 그러자 암흑이 나를 붙잡았고 그대로 사고와 시간을 초월한 곳에서 방황하며 난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랑을 해야만 했던 거야. 난 무방비상태로 되돌아갔지.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마침내 내가 할 일은 끝났던 거야. 그래서 난 그대로 산꼭대기에 누워 있었지. 뒤쪽 탑이 무너져 내려 먼지가 피어올랐고 유리창은 온데간데가 없어졌지. 폐허가 된 계단은 타버리고 부서진 돌로 메워졌고 난 세상의 단단한 뿔 위에서 탈출할 수도 없이 잊혀진 채 혼자였어. 거기 누워 위를 쳐다보고 있자니 별들이 이리저리 선회하더군. 하루하루가 지상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일생만큼이나 길더군. 귀에는 희미하게 지상의 풍문이 들렸어. 갑자기 솟아오르는 것도 있었고 죽어가는 것, 노래와 울음, 그리고 과중한 무게를 지탱하는 돌들의 느릿하고 계속되는 신음소리가 들렸지. 그랬는데 결국 바람의 영주 과이히르가 날 다시 발견하고 데려온 거야. 난 이렇게 말했지. '난 언제나 자네에게 짐이 될 것 같군, 어려울 때의 친구.' '당신은 지금껏 짐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내 발톱에 잡힌 당신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걸요. 태양이 당신 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이지 난 당신이 더이상 날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놔버려도 당신은 바람을 타고 그냥 떠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길래 난 헐떡이며 말했지. '날 놔버리진 말게. 몸 속에서 다시 생명력을 느낀다네. 날 로스로리엔으로 데려다주겠나?' 그러자 독수리는 이렇게 말하더군. '사실은 그게 내가 갈라드리엘게 받은 명령이지요.' 그래서 난 카라스 갈라돈에 도착해 자네들을 찾았지만 금방 떠났더군. 난 거기서, 시간이 쇠퇴가 아니라 치유를 가져다주는 그 땅의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지. 완전히 치유되고 나서 난 횐색으로 갈아입은 거야. 난 레이디와 의견을 교환했지. 거기서 난 낯선 길을 따라 이리로 온 것이고 그리고 당신들 중두 명에게 주는 전갈을 가지고 왔지. 레이디는 아라곤에게 이렇게 전하라더군. 듀나단 엘레사, 엘레사는 지금 어디 있는가? 왜 그대 종족은 그리 멀리 헤매고 있는가? 사라졌던 이들이 다시 나타날 시간이 가까우리니 회색 기사들이 북에서 말을 달리노라. 그러나 그대에게 정해진 길은 어두우리니 사자(死者)가 바다로 이르는 길을 보고 있노라. 또 레골라스에겐 이런 전갈을 보내셨지. 레골라스 그린리프여, 그대 즐거이 지내왔겠지. 바다를 조심하라! 그대 해변에서 갈매기소리 들을 때 그대 가슴 더이상 숲에 머물지 못하리." 갠달프는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그럼 그분께선 내게는 아무 전갈도 보내지 않으셨어요?" 김리는 이렇게 묻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분의 말씀은 어두운 그림자를 담고 있어. 안 받는 게 더 나은 거야."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위안이 되진 않아." 김리가 말했다. 다시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럼 뭐가 있어야 되지? 그분께서 자네 죽음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씀이라도 하셨으면 좋겠나?" "그래, 달리 할 말씀이 없으시다면 말이야." 이때 갠달프가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래,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하네, 김리! 난 그 전갈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네. 자네에겐 정말 어둡지도 슬프지도 않은 전갈을 보내셨지. '글로인의 아들 김리에게 숲의 레이디의 인사말을 전하시오. 자물쇠보관자여, 그대가 어디엘 가든 내 영혼이 그대와 함께 있노라. 단 도끼를 적절한 곳에 쓰도록 조심하라.'" 그러자 김리는 난쟁이들의 이상스러운 언어로 크게 노래부르며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외쳤다. "정말 당신은 제때에 우리에게 돌아오셨어요, 갠달프! 자, 자!" 그는 도끼를 휘두르면서 말했다. "갠달프, 당신의 머리는 이 도끼에는 너무 신성하니까 어디 쪼갤 만한 걸 하나 찾읍시다." 갠달프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찾을 수 있지. 자, 우린 헤어졌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얘기할 만큼 한 것 같군. 이젠 서둘러야지." 그는 다시 낡고 초라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앞장섰다. 그들은 높은 바위턱에서 내려와 다시 숲을 지나 엔트워시강둑 아래로 나갔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 없이 걸어 이윽고 판곤 경계를 지나 초원으로 나섰다. 그들이 탔던 말들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들은 이리 돌아가지 않았어. 또 지겨운 도보행군이 되겠군." "난 걷지 않겠네. 시간이 없어." 갠달프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음색은 너무도 맑고 날카로워 다른 셋은 그 수염으로 덮인 늙은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세 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아주 멀리서 말의 울음소리가 동풍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놀라움에 질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풀밭에 귀를 댄 아라곤만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대지의 미동이었을 뿐이었지만 꾸준하고 명쾌하게 땅을 치닫는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왔다. 아라곤이 말했다. "한 마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갠달프가 대꾸했다. "당연하지. 한 마리가 우릴 다 태울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자 평원을 바라보고 있던 레골라스가 외쳤다. "세 마리예요. 저 봐요! 하수펠과 아롯이에요! 그런데 그 앞에 달리는 큰 말을 좀 봐요. 난 저런 말은 본 적이 없는데." 갠달프가 말했다. "앞으로도 볼 수가 없을 걸세. 저 말은 섀도우폭스야. 그는 말의 영주 메아라스종 중에서도 최고의 명마지. 로한의 왕인 데오든조차도 저보다 나은 말을 본 적은 없어. 보게나, 물살처럼 빠르게 은빛을 발하며 부드럽게 달리지 않나? 날 태우려고 오는 거야. 백색기사의 말이거든. 우린 함께 싸우러 갈 거야." 늙은 마법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위대한 말은 그들을 향해 비탈을 성큼성큼 달려왔다. 갈기는 바람에 휘날리고 등자와 안장이 빛을 발했다. 다른 두 마리의 말도 멀리 뒤처져 달려오고 있었다. 섀도우폭스는 갠달프를 보자 보속을 줄이며 우렁차게 히잉 하고 울었다. 그리고는 유순한 동작으로 다가와서는 그 의기있는 머리를 숙여 기다란 머리를 노인의 목에다 비벼 댔다. 갠달프도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리벤델부터 여기까지는 먼 길이었지, 내 친구. 자넨 아주 현명하고 신속하게 어려울 때 와주었어. 이제 우린 함께 먼 곳으로 달려가자. 그리고 다시는 이 세상에서 이별하지 말자꾸나!" 곧 다른 말들도 다가와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갠달프는 그 말들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우린 곧 너희들의 군주인 데오든의 처소 메두셀드로 간다. 시간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최대한의 속도를 내주어야겠다. 하수펠은 아라곤, 아롯은 레골라스를 태운다. 섀도우폭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김리는 내 앞에 타는 게 좋겠어. 이제 우린 물을 좀 마실 시간밖에 없어." 그러자 말들은 고개를 숙였다. 레골라스는 아롯의 등에 가볍게 올라타며 말했다. "이제야 지난밤의 수수께끼 중 일부는 알 수 있겠군요. 무서워서 도망했건 아니면 다른 이유로 떠났건 이 말들은 섀도우폭스를 만났고 기꺼이 그와 함께 있었군요. 섀도우폭스가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아셨던가요, 갠달프?" "그래, 알고 있었지. 이 말이 서둘러 와야 했기에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었지. 어제만 하더라도 섀도우폭스는 저 멀리 남쪽에 있었거든. 이 말이 우릴 다시 재빠르게 날라 줄 거야." 갠달프가 섀도우폭스에게 무어라 말하자 말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말들이 아예 못 따라갈 정도의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잠시후 섀도우폭스는 방향을 틀어 야트막한 둑을 골라 강을 건넌 다음 그들을 정남쪽 방향의 나무가 없는, 넓은 평지로 이끌어갔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물결치듯 바람이 불어갔다. 발길이 닿은 자취나 또는 길이 없었음에도 섀도우폭스는 지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갠달프가 외쳤다. "지금 섀도우폭스는 백색산맥의 사면에 있는 데오든의 처소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그만큼 빨라지겠지. 그 주요도로가 강을 가로질러 놓인 이스템네트는 지면이 한결 단단하지만 섀도우폭스는 모든 늪지와 장해물을 잘 알고 있으니까." 오랫동안 그들은 초원과 강변을 따라 달렸다. 때론 매우 긴 풀이 기수들의 무릎위까지 올라와 말들이 초록색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수많은 웅덩이와 질퍽거리는 위험한 습지 위로 잡초가 우거진 지대를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섀도우폭스는 길을 찾아냈으며 다른 말들은 그 말이 디딘 자취만을 따르고 있었다. 이제 태양은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먼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는 마치 태양이 푸른 초원으로 가라앉는 횃불처컴 보였다. 지평선 가까이의 산맥 사면이 벌겋게 물들었다. 연기가 피어올라 초원을 대지 아래로 불태워 사라지게 하는 듯 원반 같은 태양을 둘러싸고 핏빛 무리를 이루었다. 갠달프가 다시 외첬다. "저기가 로한협곡이오. 이곳에서 보면 거의 정서쪽이지. 저 길로 가면 이센가드고." "거대한 연기가 오르고 있어요. 저게 뭘까요?" 레골라스가 물었다. "전쟁이야! 달리자!" 갠달프가 외쳤다. 제6장 로한의 군주 해가 지고 밤이 몰려들어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마침내 그들이 말을 멈추고 내렸을 땐 아라곤마저도 몸이 뻣뻣하게 굳고 몹시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갠달프는 단 몇 시간의 휴식을 허용했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잠이 들었고 아라곤도 바닥에 등을 대고 몸을 길게 눕혔다. 그러나 갠달프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어둠 속에서 동쪽과 서쪽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으며 살아있는 생명체의 흔적이나 소리라고는 없었다. 그들이 일어났을 때 밤하늘에는 줄을 긋듯이 이어진 구름들이 쌀쌀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달빛 아래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계속 달렸다. 김리는 꾸벅꾸벅 졸았다. 만일 갠달프가 붙잡아 흔들지 않았으면 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하수펠과 아롯도 몹시 지쳤지만 저 앞 회색빛 그림자가 되어 달리는 수장 섀도우폭스에게 고무되어 당당하게 달려갔다. 수마일을 계속 질주했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구름진 서쪽으로 사라졌다. 대기는 에는 듯이 차가웠다.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어둠이 회색으로 엷어지고 있었다. 왼쪽 저 멀리 에민 뮐의 어두운 암벽 위로 붉은 빛줄기들이 튀어올랐다. 청명한 새벽이 밝아왔다. 누운 풀 사이로 바람이 불어닥쳐 그들을 지나쳐 쓸고 갔다. 갑자기 섀도우폭스가 발을 멈추고 울부짖었다. 갠달프가 앞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보시오!" 그들은 졸린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정상이 횐 눈으로 덮였으며 검은 줄이 그어진 남부의 산맥이 서 있었다. 산맥기슭을 향해 초원이 기복을 이루며 펼쳐졌으며 거대한 산맥의 중심부로 굽이쳐 들어가는 많은 계곡은 아직 새벽의 빛이 닿지 않아 흐릿하고 어둡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계곡들 중에서도 가장 폭이 넓은 계곡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채 그들 앞길을 터주고 있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 어지러이 선 봉우리들 사이로 가장 높은 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계곡어귀에는 높은 구릉 하나가 초병처럼 외따로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계곡에서 흘러나온 개울이 한 가닥 은빛 실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정상에 오른 그들은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광휘를 볼 수 있었다. 갠달프가 외쳤다. "말해 보게, 레골라스. 저 앞에 보이는 게 뭔지 말이야."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레골라스는 앞쪽을 응시했다. "쌓인 눈더미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이 보이는데요. 개울이 시작되는 계곡 그늘엔 동쪽으로 녹색 언덕이 하나 솟아 있구요. 그 주위엔 도랑과 커다란 벽 그리고 가시울타리가 둘려 있어요. 그 안에는 지붕이 보이는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저택 하나가 녹색 정원 위에 세워져 있어요. 내 눈엔 황금으로 지붕을 이은 것 같은데요. 그 빛은 아주 먼 곳까지 비치는군요. 기둥도 황금빛이에요. 그 앞에는 빛나는갑옷을 입은 인간들이 서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잠에 빠져 있는 것 같군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저 궁성이 바로 에도라스야. 그리고 저 황금빛 궁전이 바로 메두셀드고. 저기에 덴겔의 아들이자 로한의 영주인 데오든이 살지. 우린 날이 밝아오는 때에 맞춰 도착했군. 이제 길은 선명하게 보이지. 그렇지만 더욱 주의해야 해. 전쟁이 도처로 번지고 있고 말의 영주들인 로한인들은 멀리서는 잠든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일러 두지만 데오든 앞에 이르기까지는 절대로 무기를 빼어들거나 불손한 언사를 해선 안 되오." 아침은 화창했다. 그들이 개울에 도착했을 때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개울은 빠르게 흘러내려 언덕기슭 너머에선 넓은 폭으로 휘어 그들이 가는 길을 가로지르고는 동쪽으로 나아가 멀리 갈대 무성한 엔트워시강에 합류했다. 대지는 초록색 일색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초원 위로는 풀이 우거진 개울 양쪽을 따라 많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남쪽 땅에선 버드나무들이 벌써 봄기운을 느끼고 수줍은 듯 가지끝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개울에는 말들이 건너다닌 얕은 여울이 형성돼 있었다. 여울을 건넌 그들 앞에는 밟아 다져 만들어진 길이 놓여 있었다. 그 길은 고지 쪽으로 뻗어 있었다. 벽으로 둘러진 구릉 기슭에서 길은 높고 푸르게 우거진 작은 언덕들 밑으로 이어졌다. 구릉 서쪽 사면에는 풀밭이 깔려 있는데 마치 바람에 나부낀 눈이 쌓이기라도 한 듯 점점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보게들! 풀밭 사이의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에버마인드야. 이곳에선 심벨미네라고 불리지. 사철 내내 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이 안식하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이지. 자, 보라구! 우린 데오든의 선조들이 잠든 거대한 능에 와 있는 거야."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왼쪽에 일 곱개, 오른쪽에 아홉 개의 능이 있군요. 저 황금궁전이 세워진 후 인간의 세월이 저다지도 많이 지났군요." 레골라스도 말했다. "그 이후로 내 고향 머크우드에선 붉은 잎이 오백 번이나 지고 피었지. 그렇지만 우리에겐 찰나에 불과한데." 그러자 아라곤이 다시 대꾸했다. "그러나 마크의 기사들에겐 참으로 오랜 세월이기 때문에 이 능들도 노래 속에서나 기억되는 아득한 역사이며 그 이전의 세월은 시간의 안개 속에 사라진 것이지. 이제 그들은 이 땅을 고향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언어마저 북부의 동족과는 달라진 거야." 말을 마친 아라곤은 요정과 난쟁이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로 나직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거기엔 이상스런 힘찬 선율이 있었기에 그들도 귀를 기울였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저건 로한 언어야. 이 대지와 마찬가지로 저 언어는 풍요롭고도 억양이 강하며 그 밖에도 산맥처럼 준엄하고 강하거든. 그렇지만 저 노래엔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이 가진 비애가 실려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군."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이 노래를 공용어로 옮기자면 아마 이 정도가 되겠지. 이제 그 말과 그 기사들은 어디 있는가? 뿔나팔은 어디 있단 말인가? 투구와 사슬갑옷, 그리고 빛나는 머릿결은 어디 있는가? 하아프를 뜯던 그 손과 달아오른 그 붉은 화톳불은 어디 있는가? 그 샘과 곡물, 그리고 우리의 자랑스런 곡식은 어디 있는가? 모두 산 위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초원을 스치는 바람처럼 스러져 버렸다, 그날들은 구릉 뒤 서부로 사라져 그림자 속으로 꺼져 버렸다. 누가 불타는 죽은 숲의 연기를 거둘 것인가? 누가 바다에서 돌아오는 그 흐르는 세월을 볼 것인가? 청년왕 욜이 얼마나 키 크고 아름다웠던가를 회상하며 로한의 잊혀진 시인은 이렇게 읊었지. 청년왕 욜은 북부에서 말을 타고 내려왔어. 그가 탄 말 펠라로프는 말의 영주로서 발에는 날개가 달렸었다고 하지. 아직도 저녁에 읊조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노래하고 있어." 이런 말을 나누며 일행은 분묘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굽은 길을 따라 초록빛 언덕을 지나 바람이 쓸고 지나간 넓은 성벽과 에도라스를 볼 수 있었다. 성문 앞엔 빛나는 갑옷을 입은 많은 기사들이 앉아 있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멈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자들이여!" 그들은 리더마크의 말로 외쳤다. 그들의 눈엔 놀라움이 떠돌았으며 우호적인 기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음침한 눈으로 갠달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갠달프가 그들이 사용한 말로 외쳤다. "난 당신들의 말을 잘 이해하오. 그렇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방인은 별로 없을 거요 그런데 왜 당신들은 서부의 관습대로 공용어로 말하지 않는 거요? 정말 대답을 듣길 원한다면 말이오?" 그러자 경비병 가운데 한 명이 대답했다.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도 성문을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영주의 뜻이오. 이와 같은 전시에 우리 종족과 곤도르의 문드버그(미나슨 티리스-로한인들은 이렇게 지칭한다)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환영받을 수 없소. 그런 차림으로 아무래도 우리것으로 보이는 말들을 타고 온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우린 여기서 아까부터 당신들을 주시해 왔소. 사실 당신들같이 이상한 기사들이나, 또 이 말처럼 기운찬 말을 우린 별로 본 적이 없소. 내 눈이 마법에라도 걸려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이 말은 메아라스종이오. 당신은 마법사이거나 사루만이 보낸 밀장 아니오? 아니면 사루만의 환영이지? 자, 빨리 대답하시오!" 그러자 아라곤이 답했다. "우린 환영이 아니오. 또한 당신들의 눈이 현혹된 것도 아니오. 이 말들은 물론 당신들이 전에 잘 알고 있었던 바로 당신들의 말이오. 그러나 도둑은 좀처럼 자신이 도둑질을 했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법! 여기 있는 하수펠과 아롯은 마크의 제삼원수인 요머가 이틀 전에 손수 우리에게 빌려 주신 것이오. 이제 우린 약속대로 이들을 데려온 거요. 요머가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경비병의 얼굴엔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요머에 대해선 말할 것이 없소. 만일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데오든왕께서도 틀림없이 그런 말씀을 들으셨을 거요. 그리고 당신들의 방문도 완전히 의외의 일은 아닐 것이오. 웜통이 우리에게 데오든의 분분대로 어떤 자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 바로 이틀 전이었소." 그러자 갠달프가 그 경비병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웜통? 더이상 아무 말 마시오! 내 용무는 웜통이 아니라 바로 로한의 왕 자신에 대한 것이니. 사정이 급하오. 당신이 직접 가거나 아니면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왔다고 전해 주지 않겠소?" 갠달프의 눈빛이 그의 이마에서 번득이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가지요. 그런데 어떻게 성함을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늙고 피곤하신 듯하지만 사실은 아주 강하고 엄격하신 것 같은데." "잘 보았소. 난 마법사 갠달프요. 내가 돌아온 거요. 그리고 보시오! 말도 데려왔소. 여기 다른 어떤 사람도 손댈 수 없는 위대한 섀도우폭스가 있소. 그리고 여기내 곁엔 위대한 왕의 후계자 아라곤이 계시오! 이분이 가시는 곳은 문드버그요. 또한 우리들의 친구 요정 레골라스와 난쟁이 김리도 있소. 이제 가서 당신의 영주께 우리가 성문 앞에 있으며 만일 우리가 입성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고 전하시오." "당신이 말씀하시는 이름들은 정말 이상하군요. 그러나 당신이 이르신 대로 아뢰고 영주님의 뜻을 알아 오겠소.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영주님의 답을 가져오겠소. 그렇지만 너무 기대를 갖진 마시오. 지금은 수상한 시절이니까요." 그는 동료들에게 이방인들의 감시를 맡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후 그는 돌아와 말했다. "날 따라오시오! 데오든왕께선 들어와도 좋다고 하셨소. 그려나 무기는 어떠한 것이라도, 지팡이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여기 두어야만 하오. 경비병들이 간수할 것이오." 검은 성문이 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일행은 길잡이 뒤로 일렬로 걸어들어갔다. 깎은 돌로 포장된 널찍한 길 하나가 위쪽으로 꼬불꼬불 뻗치다가 다시 짧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나무로 지어진 많은 집과 문을 지나쳤다. 길 옆 돌로 만들어진 수로에는 맑은 물이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언덕꼭대기에 이르렀다. 초록 대지 위에 높은 단이 하나 서 있었다. 대지 바닥에 세워진 말머리 조각으로부터 맑은 샘물이 솟아나와 받침그릇을 넘쳐 물줄기에 합류했다. 대지 위로 다시 높고 넓은 돌계단이 깔려 있었으며 그 정상 양편에는 돌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경비병들이 칼을 빼 무릎 위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황금빛머리를 땋아 어깨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초록색 방패에는 태양의 문장이 새겨져있었고 긴 허리갑옷은 밝게 빛났다. 그들이 몸을 일으키자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신장이 큼을 알 수 있었다. 길잡이가 말했다. "저 앞에 문들이 보이지요? 난 이제 성문으로 돌아가야 하오. 잘 가시오! 우리 마크의 영주께서 당신들을 환대하길 빌겠소." 그는 몸을 돌리고 재빨리 길을 따라 사라졌다. 일행은 키 큰 경비병들의 주시를 받으며 긴 층계를 올랐다. 갠달프가 계단 상단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갠달프가 다 올라가자 그들은 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멀리서 오신 분들이여!" 그리고는 화친의 표시로 이방인들 쪽으로 칼자루를 돌렸다. 칼자루에 장식된 초록빛 보석들이 햇빛에 번쩍였다. 경비병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와 공용어로 말했다. "난 데오든왕의 수문장 하마라고 합니다. 난 여러분께서 들어가시기 전에 무기를 이곳에 보관하셔야 한다는 말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레골라스가 은으로 된 칼, 화살통 그리고 활을 건네주었다. "잘 간수하시오. 이것들은 황금의 숲에서 온 것으로 로스로리엔의 레이디께서 직접 주신 것이니 말이오." 수문장의 눈에는 놀라운 빛이 떠돌았으며 마치 손대기 두렵다는 듯이 그 무기들을 벽 옆에 놓았다. "아무도 이 무기들에 손대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오." 아라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안두릴검을 다른 곳에 두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소." 그러자 하마가 대답했다. "데오든왕의 분부입니다." "덴겔의 아들 데오든이 비록 마크의 영주라 할지라도 아라돈의 아들이며 곤도르를 이어받을 엘렌딜의 후손인 나 아라곤의 뜻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오." 그러자 하마는 날쌔게 문 앞으로 몸을 옮겨 길을 막으며 말했다. "비록 귀하께서 데네도르공의 자리에 앉으실 곤도르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데오든왕의 궁전이지 아라곤의 궁은 아니오." 이제 그는 이방인을 향해 칼을 돌렸다. 그러자 갠달프가 끼어들었다. "부질없는 이야기요. 데오든왕의 요구는 쓸데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것도 역시 쓸데없는 짓이오. 어리석은 행동이건 현명한 행동이건 왕은 자신의 궁에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지."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지당한 말씀이오. 나도 이 안두릴검이 아니라면 비록 이곳이 나무꾼의 오두막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집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 것이오." "그 칼의 이름이 무엇이건 귀하가 단신으로 이 에도라스의 모든 병사를 상대로 싸우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여기에 보관하셔야 하오." 하고 하마가 말했다. "혼자가 아니오!" 김리가 도끼날에 손가락을 벼리면서 마치 자신이 베어 넘길 나무를 바라보듯 하마를 향해 험하게 눈을 치뜨며 외쳤다. "혼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자, 자! 우린 모두 친구들이야. 아니면 친구가 되어야 하고. 만일 우리가 싸운다면 돌아오는 건 모르도르의 웃음뿐일 테니까. 내 용무는 급박해. 우선 내 칼은 여기 있소, 하마씨. 잘 간수하시오. 오래전 요정들이 만든 검으로 글람드랑이라 부르지. 자, 이제 날 통과시켜 주시오. 자, 아라곤!" 아라곤은 천천히 칼집을 풀어내 스스로 벽에다 기대 놓으며 말했다. "여기다 놔두오. 그렇지만 당신이든 아니면 그 누구이든 이 칼에 손대지 말 것을 일러 두는 바요. 요정이 만든 이 칼집 속에는 부러졌다 다시 벼려진 검이 들어 있소. 아득한 시절에 텔차르가 벼려 만든 것이오. 엘렌딜의 후계자 외에 엘렌딜의 검을 빼드는 자에게는 죽음이 닥칠 것이오." 하마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아라곤을 바라보았다. "귀하는 잊혀진 시대로부터 전설의 날개를 타고 오신 것 같습니다. 이르신 대로하겠습니다." "음, 안두릴과 자리를 함께 한다면 내 도끼도 여기 두어 부끄럽지 않겠군." 김리도 도끼를 내려 놓았다. "그럼 이제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우린 가서 당신의 주군과 이야기를 나누겠소." 그러나 수문장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는 갠달프에게 말했다. "그 지팡이를, 용서하십시오. 그렇지만 그것도 여기 두셔야 합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외쳤다. "이렇게 어리석다니? 세심함과 무례함은 전혀 다른 거요. 난 늙은이요. 지팡이에기대서 갈 수 없다면 데오든께서 직접 절뚝거리며 나오기 전까지 난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소." 아라곤이 웃으며 말했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맡기기 싫은 소중한 것이 하나쯤 있는 법이오. 어쨌든 당신은 노인에게서 그 의지하는 물건을 떼놓고 싶소? 자, 우릴 들어가게 해주오." 그러자 하마가 말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의지물 이상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갠달프의 지팡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훌륭한 사람은 의심스러울 때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는 법이지요. 난 당신들이 친구이며 존경받을 만한 분들로 아무 사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자,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이제 경비병들이 대문의 육중한 빗장을 들어올리고 천천히 문을 안쪽으로 밀자 거대한 돌쩌귀가 우르르 소리를 냈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맑은 공기에 비해 안쪽은 어두웠으며 따스했다. 홀은 길고 넓었으며 어스름에 싸여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홀을 받치고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빛줄기들이 높은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들어오고 있었다. 지붕의 창을 통해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하늘이 보였다. 바닥에는 갖가지 빛깔의 돌들이 깔려 있었고 신비로운 기호와 이상한 무늬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기둥들이 황금색과 투명한 빛으로 선명하게 조각되어 흐릿하게 빛을 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벽위에는 옛 전설의 주인공들이 수놓아진, 손으로 짠 직물이 걸려 있었으며 어떤 것은 오래되어 희미하게 또 어떤 것은 그림자에 가려 어둡게 보였다. 그 중에 백마를 탄 젊은이의 수(繡)가 빛을 받아 밝게 드러났다. 그는 노란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며 커다란 뿔나팔을 불고 있었다. 머리를 치켜든 채 먼 곳의 전투를 냄새맡고 히힝우는 말의 콧구멍은 넓고 붉었다. 말의 다리 아래로는 희고 푸른 물살이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들고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청년왕 욜이군! 그는 저런 모습으로 북부로부터 켈레브란트평원의 전투에 달려왔던 거야." 일행은 이제 홀 가운데에 놓인 선명하게 타고 있는 화롯불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저쪽 끝 세 단의 층계 위에는 금박입힌 거대한 옥좌가 놓여 있었다. 옥좌에는 노령으로 몸인 너무 굽어 거의 난쟁이처럼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마 위에 걸친 황금 장식고리 아래로 땋아 늘어뜨린 하얀 머리칼은 길고 숱이 많았으며 윤기가 흘렀다. 이마 한 가운데에는 다이아몬드가 흰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염이 눈같이 희게 무릎 위까지 흘러내렸으며 눈은 아직도 환한 빛으로 이글거리며 이방인들을 향해 반짝였다. 그 뒤에는 백색으로 성장한 여인이 서 있었다. 옥좌 발치에는 창백하지만 영리해 보이는 얼굴과 눈꺼풀이 무겁게 처진 눈을 가진 야윈 사내가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노인은 옥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갠달프가 입을 열었다. "반갑소, 덴겔의 왕자 데오든왕이시여! 내가 돌아왔소. 보시오! 폭풍이 몰려들고 있소! 이제 모두가 궤멸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뭉쳐야 하오." 흰 뼈 손잡이가 달린 짧고 검은 지팡이에 무겁게 기댄 채 노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일행은 그가 몸이 굽긴 했지만 아직도 키가 크며 젊은 시절엔 정말 기세좋고 늠름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오든이 말했다. "반갑소. 아마 당신은 환영해 주길 바라겠지만 사실 난 당신을 이 땅에서 환대해야 하는지 의심스럽소, 갠달프. 당신은 언제나 재난을 가져오는 사자였으니까. 당신 뒤엔 까마귀떼처럼 분란이 따라다니고, 또 그 분란은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졌소. 솔직히 말해 섀도우폭스가 빈 안장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을 때 난 말이 돌아온 것을 기뻐했으나 기사가 없었다는 사실에 더욱 기뻤소. 그리고 당신이 마침내 무덤으로 들어갔다는 기별을 요머가 가져왔을 때 난 별로 애통하게 생각지 않았소. 그러나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식은 옳은 게 드물군. 여기에 당신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그리고 과연 당신과 함께 언제나보다 더한층 지독한 해악이 밀려들겠지. 왜 당신을 환영해야 한단 말이오, 폭풍을 알리는 까마귀 같은 갠달프여? 말해 보시오." 그는 다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옥좌 발치에 앉아 있던 핼쑥한 자가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전하의 아드님이시자 마크의 제이원수이셨던 페오드레드께서 서쪽 변경에서 쓰러지셨다는 비통한 소식이 전해진 지 아직 닷새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머는 신임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에게 통솔을 허락하신다면 전하의 성벽을 지킬 병사는 얼마 남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린 곤도르로부터 암흑의군주가 동쪽에서 꿈틀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 이방인들은 당장 돌아갈 생각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보시오, 폭풍의 까마귀선생, 우리가 왜 당신을 환영해야 한단 말이오? 난 당신을 흉보의 사자라고 부르오. 흉보의 사자는 곧 불길한 손님 이라고들 하지요." 그는 말을 마치고 무겁게 처진 눈꺼풀을 잠시 치켜든 채 음울한 눈길로 일행을 쳐다보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그러자 갠달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현명하다고들 말하지, 친애하는 웜통. 그리고 당신의 주군에게도 커다란 힘이 되고 그렇지만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에도 두 부류가 있지. 해악을 불러일으키는 자일 수도 있고, 그대로 방치할 수도 있지만 어려울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는 자일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자 웜통이 응수했다. "그건 그렇소. 하지만 또 한 부류가 있지요. 분란을 일으키는 자, 남의 불행에 쓸데없이 끼어드는 자, 전쟁 덕에 썩은 고기를 먹고 살찌는 자, 이런 자들도 있지요. 당신이 무슨 도움을 가져왔던가요, 폭풍의 까마귀선생? 그리고 지금은 무슨 도움을 가져오셨소? 지난번 당신은 우리에게 도움을 구걸하러 오시지 않았던가요? 그때주군께서 당신 맘에 드는 말을 타고 가라고 이르셨더니 당신은 오만하게도 섀도우폭스를 택했소. 주군께선 몹시 노하셨소. 그러나 당신을 이 땅에서 서둘러 나가게 한 대가로는 그리 큰 희생은 아니었던 것 같소. 똑같은 일이 한번 더 벌어질 것 같군요. 당신은 도움을 주러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오? 병사들을 데려왔소? 말, 칼, 창을 가져왔소? 그렇다면 도움을 주러 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당신이 데려온 것은 뭐요? 회색 누더기를 걸친 세 방랑자들에다 그보다도 당신은 더 꼴불견이니!" 그러자 갠달프가 데오든을 향해 말했다. "요즘 궁중의 예법이 다소 해이해졌군요, 덴겔의 왕자 데오든왕이여! 성문의 경비병이 내 동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가요? 로한의 어떤 영주라도 이와 같은 세분의 손님을 맞은 적은 없을 거요. 이들은 죽을 운명의 인간 - 가장 힘센 인간의 경우라도 - 다수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 무기를 성문 밖에 두고 왔소. 이들의 의복은 회색으로 요정들이 만든 것이오. 이런 옷차림으로 이들은 거대한 위험들을 그림자처럼 꿰뚫고 그대의 궁전에까지 온 것이오." 웜통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요머가 보고한 대로 당신들이 황금의 숲의 여마법사와 한패란 게 사실이오? 드위모르데네(로스로라엔)에선 항상 책략의 거미줄을 짠다더니. 거짓이 아니로군." 김리가 성큼 한걸음 앞으로 나섰으나 갠달프가 어깨를 움켜쥐는 바람에 그 자리에 돌처럼 멈춰섰다. 갠달프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드위모르데네, 로스로리엔에는 인간들의 발길이 닿질 않지. 항상 환히 빛을 발하는 그곳의 빛 인간의 눈에 비치지 않았지. 갈라드리엘! 갈라드리엘! 그대의 샘에서 솟는 맑은 물! 그대의 흰 손 안의 투명한 별! 드위모르데네, 로스로리엔의 영원무구한 나뭇잎과 대지! 죽을 운명의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이여! 노래를 마친 갠달프는 갑자기 돌변했다. 누더기 망또를 벗어 던진 그는 더이상 지팡이에 몸을 의지차지 않고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맑고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현자는 오로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갈모드의 아들 그리마! 너는 한 마리 분별없는 벌레가 되었구나. 이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갈라진 혀는 이빨 뒤에 감춰라! 내 너 같은 종복과 비틀린 이야기나 나누다가 벼락이 떨어지는 꼴을 보려고 그 불과 죽음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우르릉거리며 천둥이 쳤다. 창문으로 새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지고 궁 전체가 마치 밤처럼 캄캄해졌다. 화롯불은 음침한 숯덩어리로 바뀌었다. 꺼진 화로 앞에 우뚝 선 갠달프의 하얀 자태만 보일 뿐이었다.어둠 속에서 그들은 쉿쉿거리는 웜통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군, 제가 지팡이를 가지고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지 않았습니까. 저 바보 같은 하마가 배반한 겁나다!" 그 순간 번개가 지붕을 갈라 버리듯 섬광을 발했다. 그러자 모두가 잠잠해졌다. 웜통은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납작 땅에 엎드렸다. 갠달프가 왕을 항해 말했다. "덴겔의 왕자 데오든왕,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겠소? 그대는 도움을 원합니까?" 그는 지팡이를 들어 높은 창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며 창문으로 푸른 하늘이 높고 멀리 바라보였다. "모든 것이 암울하지만은 않소. 용기를 내시오, 마크의 왕이여. 용기보다 나은 도움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겐 어떠한 조언도 소용이 없는 법! 그러나 난 조언을 할 수 있고 또 당신께 말하겠소. 들으시겠소? 내 말은 꼭 귀로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오. 단지 왕께서 밖으로 나가 주위를 한번 둘러볼 것을 권합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왕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서 뒤틀린 이야기와 비틀어진 간언만을 듣고 계셨소." 데오든은 천천히 일어섰다. 궁전엔 다시 희미하게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인이왕을 부축하자 노왕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조심스럽게 궁전을 거닐기 시작했다. 웜통은 여전히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이 문에 이르자 갠달프가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문을 열어라! 마크의 왕께서 납신다!" 문이 뒤로 밀려나자 살을 에는 듯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언덕 위로부터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갠달프가 왕에게 말했다. "경비병들을 저 계단 아래까지 내려 보내시오. 그리고 공주, 주군은 내게 잠시 맡기시오 내가 돌봐 드리겠소." 그러자 노왕이 입을 열었다. "가거라, 내 사랑스런 조카 요윈! 두려움의 시간은 이제 지나갔다." 여인은 몸을 돌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지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눈가에 차분한 연민의 정을 띠고 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엄숙하고 사려깊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긴 머리칼은 황금빛 물결처럼 흘렀다. 키 크고 가냘픈 몸매에 은빛 허리띠가 둘린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왕족답게 무쇠처럼 강인하고 엄격한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라곤은 이제 처음으로 한낮의 찬연한 햇빛 아래서 로한의 왕녀 요윈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여린 봄날 아침처럼 아름답고도 차갑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도 그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왕의 후계자와 같은 위엄을 풍겼으며 많은 역경을 이겨 온 현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큰 키에 회색 망또를 둘러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커다란 힘을 감추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바위처럼 꼼짝 않고 서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자, 왕이시여! 그대의 대지를 살펴보시오! 자유로운 대기를 다시 호흡해 보시오!" 갠달프가 외첬다. 현관에서는 저 개울 너머의 흐릿한 회색빛을 띤 로한의 푸른 평원이 바라다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빗줄기와 장막이 쳐지고 있었다. 저쪽 서편 하늘에서는 여전히 천둥이 일며 어두움이 깔려 있어 멀리 시야가 가려진 언덕꼭대기부근에서 번개를 볼 수 있었으나 이미 바람은 북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으며 동쪽으로부터 몰려왔던 폭풍우는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멀어지며 세력을 잃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갑자기 한 줄기 햇빛이 내리꽂히듯 비쳤다. 저 멀리 쏟아지는 빗줄기가은처럼 빛을 발했으며 강물은 유리창처럼 가물거렸다. 데오든이 입을 열었다. "여긴 이제 그렇게 어둡진 않구려."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렇소. 또한 어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처럼 당신 어깨를 누르고 있는 노령이 사실은 그렇게 무겁지는 않은 겁니다. 지팡이는 이제 필요없을 거요." 왕의 손에서 검은 지팡이가 떨어져 돌이 부딪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오랜 노역끝에 오랫동안 굽혔던 허리를 펴는 사람처럼 왕은 천천히 몸을 곧추세웠다. 이제 그는 똑바로 서서 푸른 눈을 들어 개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즈음의 꿈은 어두웠지만 이제 새로 깨어난 느낌이오. 당신이 진작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갠달프. 이미 때가 늦어 내 궁정 최후의 날을 보게 되는가 싶어서 말이오. 욜의 아들 브레고께서 세우신 저 높은 궁성도 이제 그리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이오. 불길이 저 궁성을 집어삼킬 것이오. 이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러자 갠달프가 답했다. "해야 할 일은 많소. 그러나 먼저 요머를 부르시오. 당신 이외에는 모두 웜통이라 부르는 그리마의 간언에 넘어가서 요머를 죄수로 감금했다는 내 짐작이 옳지 않소?" "사실이오. 그는 내 명령을 거역했고 또 그리마를 죽이겠다고 내 면전에서 위협했었소." "당신의 신하가 당신은 사랑하지만 웜통이나 그의 간언은 그리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오." "그럴 수 있지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소. 하마를 불러 주시오. 수문장으로는 그리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판명됐으니 이제 전령으로 쓰겠소. 죄있는 자가 죄있는 자를 심판에 넘기게 될 거요." 왕의 목소리는 준엄했으나 갠달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얼굴을 덮고 있던 주름살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하마가 달려와 분부를 받고 간 다음 갠달프는 데오든을 돌의자로 이끈 후 자신은 그 앞 가장 높은 계단에 앉았다. 아라곤과 그 친구들은 곁에 섰다. 갠달프가 말했다. "왕께서 들어야 할 모든 사실을 이야기할 시간은 없소. 그렇지만 만일 내 희망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면 머지않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시간이 생길 겁니다. 보시오! 당신은 웜통의 간계에 의해 꿈속에 끌려들어갔었소.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거대한 위험에 처해 있소. 그러나 이제 당신은 꿈속에 있지 않소. 당신은 살아있소. 곤도르와 로한은 각기 홀로 설 수는 없소. 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적이 짐작 못하는 희망이 있소." 이제 갠달프는 빠르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은밀해 왕 이외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데오든의 눈은 점점 밝게 빛났다. 드디어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갠달프도 일어섰다. 그 높은 곳에서 그들은 함께 동쪽을 바라보았다. 갠달프는 다시 맑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진정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이 있는 바로 저 길에 우리의 희망도 있소. 운명은 아직도 한 가닥 실에 매달려 있소. 우리가 당분간 정복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저곳에 우리의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오." 다른 이들도 동쪽을 바라보았다. 대지와 대지를 갈라놓고 있는 아득한 거리를 넘어 시야가 미치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희망과 두려움을 품고 시야너머의 어두운 산맥을 지나 암흑의 땅에까지 이르렀다. 반지의 사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운명이 매달려 있는 그 실은 얼마나 가녀린가!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긴장시킨 채 바라보고 있던 레골라스는 흰빛이 반짝이는 걸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저 멀리의 감시탑 꼭대기에 반사된 햇빛 같았다. 그리고 훨씬 먼 쪽에서 날름대는 아주 작은 불꽃이 보였다. 그 불꽃은 끝없이 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당면한 위협이었다. 갠달프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른한 기운이 몸을 지배하려고 발버둥치는 듯 데오든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는 몸을 돌려 거대한 궁을 바라보았다. "아! 이 사악한 시대가 나의 몫이라니! 또한 평화를 이루어 냈던 그때가 아니라 이렇게 늙어 버렸을 때 다가오다니! 애석하구나, 용자 보로미르! 젊은이는 가버리고 늙은이가 목숨을 부지해 시들어 가다니." 그는 주름진 두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그 옛날의 힘을 기억하기 위해선 칼자루를 쥐는 편이 좋을 겁니다." 데오든은 일어나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그러나 허리띠엔 칼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리마가 어디다 치웠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어떤 맑은 목소리가 이렇게 울렸다. "자, 받으십시오, 주군! 이 칼은 언제나 주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층계를 올라와 꼭대기에서 몇 계단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바로 요머였다. 투구와 갑옷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손에는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잡이를 왕에게 내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데오든이 준엄하게 물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새로 온 두 사람은 왕의 곧추세운, 의기에 찬 옥체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자에 쭈그려 앉았거나 지팡이에 몸을 기대던 그 노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마가 몸을 떨며 말했다. "소신이 한 짓입니다, 주군. 소신은 요머공이 풀려난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기쁨이 넘친 나머지 소신이 잘못을 저질렀나 봅니다. 그렇지만 다시 풀려났고 또 마크의 원수이니 소신은 공이 명하는 대로 공의 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주군." 그러자 요머도 왕에게 말했다. "주군의 발 아래에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침묵이 흐르는 잠시동안 데오든은 아직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요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어느쪽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검을 받지 않으실 겁니까?" 마침내 갠달프가 말했다. 데오든은 천천히 팔을 앞으로 뻗쳤다. 왕의 손에 검이 들리자 그 가녀린 팔에는 다시 굳센 기운과 힘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검을 치켜들며 허공에 휘둘렀다. 그리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로한의 언어로 전투준비를 명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울려퍼졌다. 이제 일어서라, 일어서, 데오든의 기사들이여! 진정한 정의를 일깨우라, 동녘이 어두워진다! 말을 제어하라! 뿔나팔을 불라! 로한의 기사들이여, 앞으로! 노래가 울려퍼지자 경비병들이 전투의 호출이 내렸는가 의아해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왕을 바라보더니 칼을 빼 그의 발 아자에 놓으며 외쳤다. "명령을 내리소서!" 그러자 요머가 외쳤다. "웨스투 데오든 할! 주군께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걸 보니 정말 기쁩니다. 갠달프여, 그대가 오로지 슬픔만을 몰고 오신다는 말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데오든이 요머에게 말했다. "내 조카 요머, 다시 칼을 받으라! 그리고 하마, 그대는 가서 내 검을 찾으라. 그리마가 감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놈도 데려오라. 자, 갠달프여, 그대는 내가 듣겠다면 조언을 해주겠다고 했소. 그게 무엇이오?" "당신 스스로 이미 받으셨소.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보다 요머를 신뢰하고, 후회와 두려움을 버리고 목전에 닥친 일을 해야 한다는 거요. 요머가 아뢴 대로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모두 지금 당장 동쪽으로 보내야 하오. 시간이 있을 때 먼저 사루만의 위협을 쳐부숴야 하니까 말이오. 만일 실패한다면 우린 멸망하는 것이고, 만일 성공한다면 다음 일로 넘어 가야 할 것이오. 그동안 남아 있는 당신 백성들,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은 산맥 속에 숨겨진 피난처로 급히 보내야 하오. 그들은 이와 같은 불운한 시대에 대비하고 있지 않았소? 양식을 가져가게 하되 서둘러 하도록 하고 또 크든 작든 귀중품을 챙기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해선 안 되오. 위태로운 건 바로 목숨이니까." "좋은 조언이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준비토록 하라! 그런데 갠달프, 내 궁전의 예의가 소홀해졌다고 한 말씀은 사실인 것 같소. 내 손님들이신 그대들은 밤을 새워 말을 달려 오셨는데 지금 아침시간도 그저 다 보내게 하고 있으니 말이오. 잠도 못 주무셨을 것이고 식사도 못하셨겠지. 객사가 준비될 것이오. 그대들은 그곳에서식사를 하시고 나서 주무시도록 하시오." 그러나 아라곤이 말했다. "아니올시다, 전하. 아직은 지친 자들이 휴식을 취할 때가 아닙니다. 로한의 기사들은 바로 출발해야 할 것이며 우리도 도끼와 활과 칼을 들고 가야 합니다. 궁성 벽에 세워 놓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니니까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요머공에게 같이 검을 빼들자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러자 요머가 말했다. "이제 진정 승리의 희망이 있소!" 갠달프도 말했다. "그럼, 희망이 있고말고. 그러나 이센가드는 강하지. 그리고 또다른 위험들이 점차다가오고 있소. 우리가 떠난 뒤 지체하지 마시오, 데오든! 백성들을 시급히 산속에 있는 던해로우요새로 이끌고 가시오." "아니오, 갠달프! 당신은 자신의 치료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시는군요. 그렇게는 안 되오. 내가 직접 싸우러 가겠소.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한다면 전장의 최선두에서 쓰러지겠소. 그래야만 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렇다면 설사 진다고 해도 로한의 패배는 영원히 노래 속에서 영광스럽게 기억될 겁니다. " "마크의 왕께서 말에 오르신다! 로한의 기사들이여, 앞으로!" 로한의 기사들은 이렇게 외치며 서로의 무기를 부딪쳐 쟁강쟁강 소리를 냈다. 갠달프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이 아무 무장도 없이, 또 지도자도 없이 있어서는 안 되오. 왕께서 가신다면 누가 그들을 이끌겠소?" "떠나기 전에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소. 내 고문이 저기 오는군." 그 순간 하마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웜통 즉 그리마가 두 명의 병사 사이에 몸을 움츠린 채 끌려오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며 햇빛을 받은 눈이 깜박거렸다. 하마가 무릎을 꿇고 황금손잡이에 보석이 박힌 장검을 바치며 말했다. "주군, 여기 왕가 전래의 보도(寶刀) 헤루그림을 가져왔습니다. 그리마의 금고 속에서 찾았습니다. 열쇠를 내놓지 않으려 했지만 열어 보니 여러 사람이 잃어 버렸던 물건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자 웜통이 외쳤다. "거짓말이야! 이 칼은 주군께서 친히 내게 주신 것이다!" 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돌려달라고 요구한 거야. 뭐 못마땅한 거라도 있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주군. 소신은 주군과 주군의 소유물을 위해 성심껏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기운을 소진시키시거나 힘을 과하게 쓰시면 안 됩니다. 이 골칫덩어리 나그네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곧 주군의 진지가 준비됩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가지. 그리고 내 손님들을 위한 음식도 내 곁에 차라도록 하라. 주군인 내가 오늘 말을 탄다. 사자들을 파견하라! 그들로 하여금 모든 기사들을 소환케 하라!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강건한 젊은이들, 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오후 두시 이전까지 성문 앞에 모이도록 하라!" "주군! 소신이 걱정했던 대로입니다. 이 마법사가 주군을 홀린 겁니다. 주군의 선조들께서 계셨던 황금궁전과 모든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도 남지 않는 건가요? 마크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겁니까?" "만일 이게 마법에 홀린 것이라 할지라도 네가 속닥이던 간언보다는 훨씬 유익한 것 같구나. 네 술책대로 했다면 머지않아 난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다녀야 했을 거야. 안 되지. 한 명도 남아선 안 돼. 심지어 너 그리마까지도. 그리마도 말을 탈 것이다. 가라! 네겐 아직 네 칼의 녹을 닦아 낼 시간이 있다." 그러자 원통은 바닥을 기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온정을 베푸소서, 주군. 전하를 섬기느라 기력이 쇠진한 소신을 곁에서 떼어 내지 마소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간다 해도 적어도 소신만은 전하 곁에 있겠나이다. 전하의 충직한 그리마를 내보내지 마소서!" "난 너를 불쌍히 여긴다. 그래서 널 내 결에서 떼어 놓지 않겠다. 내가 직접 기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간다. 그러니 넌 나와 함께 가서 네 충성을 입증하도록 하라." 웜통은 이 얼굴 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둘러싼 적들에게 어떤 틈새를 찾으려는 쫓기는 짐승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길고 푸르스름한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비록 연로하시긴 하지만 욜가의 왕으로서 응당 내리실 수 있는 결단이올습니다. 그러나 소신같이 진정으로 주군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쇠잔하신 노령을 염려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신이 너무 늦게 온 것 같습니다. 아마 주군의 별세를 별로 슬퍼하지 않을 다른 자들이 벌써 주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으니까요. 소신이 진정 그들의 술책을 돌이킬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소신의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전하. 전하의 심중을 잘 알아 전하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람이 에로라스에 남아야 합니다. 충직한 섭정을 임명하십시오. 전하의 고문 그리마로 하여금 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모든 일을 맡아 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리 큰 희망을 걸진 않겠지만 어쨌든 전하의 귀환을 저로 하여금 맞이하게 해주시기를 희구하는 바올습니다." 그러자 요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만일 그런 간청으로도 당신이 전장으로 가는 길을 모면할 수 없다면, 웜통, 당신은 그보다는 좀 덜 명예로운 직책을 받을 생각은 없소? 이를테면 식량부대를 메고 산맥 위로 옳기는 일은 어떻겠소?" 그러자 갠달프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웜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오, 요머. 당신은 웜통선생의 심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려. 그는 뱃심좋고 교활한 자요. 지금도 그는 목숨을 걸고 수작을 부릴 기회를 노리고 있는거지. 이미 그는 소중한 내 시간을 몇 시간이나 허비시켰소. 쓰러져라, 이 뱀아!" 그는 갑자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첬다. "배를 깔고 쓰러져라! 네놈은 언제부터 사루만에게 매수되었지? 약속받은 대가는 무엇인가? 다 죽고나면 네놈은 네 몫의 보물을 차지하고, 또 탐하고 있는 그녀를 차지할 작정이었지? 네놈은 오랫동안 공주를 몰래 지켜보았고 또 그녀의 뒤를 유령처럼 쫓아다녔어." 요머가 칼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소. 난 그 때문에 궁정의 법도를 잊고 그를 죽여 버리려 했었소.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었지요." 그가 앞으로 나서자 갠달프가 그를 제지했다. "요윈은 이제 안전하오. 그러나 너 웜통, 네놈은 네 진짜 주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적어도 약간의 보상은 받았고. 그렇지만 사루만은 자신의 거래를 잘 잊는 경향이 있지. 그래서 네놈에게 충고하는 건데 그가 네놈의 충성스러운 봉사를 잊지 않게끔 빨리 달려가서 그 거래를 일깨워 주는 게 좋을 게다." "거짓말이오!" 웜통이 외쳤다. "네놈의 입술에선 그 말이 너무 자주 그리고 쉽게 나오는군. 그렇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보시오, 데오든왕. 여기 뱀 한 마리가 있소. 당신은 안심하고 저걸 데려갈 수도 없고 또 여기 남겨 둘 수도 없소. 저것은 죽여 마땅하오. 그렇지만 저것도 처음부터 저런 모습은 아니었소. 한때는 저것도 인간이었고 또 제 나름대로 당신을 섬겼소. 그러니 말 한 필을 내주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하시오. 그의 선택에 의해 당신은 그를 판단하게 될 것이오." 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네놈은 이 말을 들었지, 웜통? 네가 선택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와 함께 말을 달려 전장으로 가 전투에서 충성을 증명하든지 아니면 어디로든 네놈이 마음먹은 곳으로 지금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할 경우 만일 우리가 어디서고 다시 만난다면 그땐 자비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웜통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데오든의 표정을 살피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몸을 꼿꼿이 세웠다. 양 손이 움직이며 눈이 번쩍였다. 그 눈에 지독한 악의가 담겨 있어 사람들은 한 걸음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며 왕의 발 밑에 침을 뱉고 쏜살같이 달려 층계 아래로 도망쳤다. 그러자 데오든이 외쳤다. "저놈을 쫓아 버려라! 저놈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라! 그렇지만 그놈을 죽이거나 길을 막지는 말고 원한다면 말 한 필을 내 주어라." "그놈을 태우려는 말이 있으면." 하고 요머가 덧붙였다. 경비병 중의 한 사람이 층계를 달려내려갔다. 다른 한 명의 경비병이 샘으로 가서 투구에 물을 떠다가 웜통이 더럽혔던 돌들을 깨끗이 닦았다. 데오든이 말했다. "자, 내 손님들, 갑시다! 가서 급한 대로 원기를 돋울 것을 좀 드십시다." 그들은 거대한 궁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궁전 아래 궁성 안에서는 전령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궁성 안의 사람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병사들이 무장을 갖추는 대로 출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왕의 식탁에는 요머와 네 명의 손님이 앉았으며 요윈 또한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급히 먹고 마셨다. 데오든왕이 사루만에 대해 갠달프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 다른 참석자들은 조용히 있었다. "그의 반역이 얼마나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누가 짐작이나 할 수·있겠소. 그는 원래부터 사악한 자는 아니었소. 그도 한때는 로한의 친구였다는 점을 나는 의심치 않소. 그리고 그의 가슴이 한층 차가워졌을 때도 여전히 당신을 쓸모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준비가 될 때까지 다만 당신에게 우호의 가면을 쓴 채 파멸시킬 준비를 해왔소. 그때 웜통이 임무를 수행하는 건 수월했을 겁니다. 당신이 한 모든 일들은 그대로 이센가드에 알려졌소. 왜냐하면 당신의방은 개방되어 있어서 이방인들이 오고가고 했으니 말이오. 그리고 당신의 귀엔 사고를 말살하고 가슴을 얼어붙게 하며 사지를 쇠약하게 하는 웜통의 간언이 늘 가까이 있었소.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그가 당신의 의사를 좌우했으니까 말이오. 내가 오탕크를 탈출해 당신에게 경고했을 때 그제서야 그 가면이 벗겨졌던 거요. 보려는 뜻이 있는 자에겐 말이오. 그 후 웜통은 당신의 힘 회생되는 걸 막기 위해 항상 당신을 방해하면서 위험스런 곡예를 벌여 온 것이오. 그는 간교한 인물이어서 필요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기도 하고 또 두려움을 이용하기도 했소. 절박한 위험은 서쪽에서 발생했음에도 헛되이 특공대 전원을 북쪽으로 파견해야 한다고 열성적으로 주장하던 그의 간언을 기억하시오? 그는 당신을 부추겨 요머로 하여금 오르크들을 쫓지 못하게 했소. 만일 요머가 당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웜통의 말에 복종했더라면 지금쯤 그 오르크들은 대단한 전리품을 가지고 이센가드에 도착했을 거요. 그게 사루만이 무엇보다도 갈망하던 그 전리품은 아니지만, 하여튼 비밀스런 희망을 간직한 우리 원정대의 두 대원이었던 것이오. 그 비밀의 희망에 대해선 아직 당신께 터놓고 말씀드릴 수는 없소. 그들이 지금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또는 사루만이 우리를 궤멸시킬 어떤 수를 갖고 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소?" 그러나 데오든이 말했다. "난 요머에게 빚진 게 많소이다. 충직한 사람은 완고한 혀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오." "삐뚤어진 눈에는 진리가 뒤틀려 보일 수도 있다는 말씀도 하셔야지." "정말이지 내 눈이 멀었던 거나 매한가지였소. 무엇보다도 손님인 당신께 빛을 지고 있소. 당신은 정말 다시 한번 때맞추어 와주셨소. 출발하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겠소. 뭣이든 말씀만 하시오. 이제 나는 오로지 이 검만 있으면 됐소." "내가 때맞춰 온 것인지는 아직 두고보아야 할 것이오. 그런데 왕께서 주실 선물이라면 난 빠르고 신속해야 할 내 임무에 알맞은 것을 선택하겠소. 나에게 섀도우폭스를 주시오! 전엔 단지 빌리기만 했소. 그걸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난 그를 타고 흑과 백이 뚜렷하게 대립된 커다란 위험 속으로 돌진해야 하오만 내것이 아닌 것은 그 위태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겠소. 게다가 우리 사이엔 벌써 사랑의 유대가 맺어졌소." "잘 말씀하셨소. 기꺼이 드리겠소. 그렇지만 그건 대단한 선물이오. 섀도우폭스에 비길 만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소. 과거의 위대한 군마가 그에게서 재현한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이 나타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다른 손님들께도 병기고에서무엇이든 드리겠소. 칼은 필요치 않겠지만 투구와 갑옷이 있소. 곤도르에서 내 선조들께 보낸 선물들이오. 출발하기 전에 고르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쓸모있기를 바라겠소." 병사들이 병기고에서 갑옷을 날라와 아라곤과 레골라스에게 차려입혔다. 그들은또 투구와 방패도 골랐다. 방패에는 금으로 점이 찍혀 있었으며 초록색, 빨간색 그리고 하얀색의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갠달프는 아무런 무구도 고르지 않았다. 김리는 혹시 신장에 맞는 것이 있더라도 고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에도라스의 보고에는 북부의 산속에서 벼려서 만든 자신의 짧은 허리갑옷보다 좋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머리에 잘 맞는 쇠와 가죽으로만든 투구를 골랐고 또 작은 방패도 집어들었다. 그 방패는 초록 바탕에 달리는 백마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욜가의 상징이었다. "그 방패가 당신을 지켜 주기를! 그것은 내 부왕 덴겔의 시대에,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날 위해 만들어진 것이오." 하고 데오든이 말했다. 김리는 절을 하며 말했다. "마크의 왕이시여! 전하의 문장을 지니게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저는 말에 실려 다니기보다는 말을 떠메고 가겠습니다. 전 제 발을 더 사랑하니까요. 그렇지만 싸움터에 도착하는 덴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당 그래야겠지." 데오든이 이렇게 말하며 일어서자 이어 요윈이 술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페르투 데오든 할! 이제 잔을 들어 기쁘게 들어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들에게 건강이 함께 하길!" 데오든이 잔을 들자 그녀는 손님들에게로 잔을 돌렸다. 아라곤 앞에 이른 그녀는 빛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라곤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잔을 잡는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닿자 아라곤은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윈은 입을 열었다. "잘 오셨습니다, 아라돈의 아드님 아라곤공이시여!" 그러자 아라곤도 답례를 했다. "반갑소, 로한의 숙녀여!" 그러나 아라곤의 얼굴엔 근심이 얽혀 있었으며 이미 미소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술을 마신 후 궁정문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경비병들이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파견했던 전령과 함께 에도라스에 거주하거나 인근에 위치한 모든 영주와 족장들이 모여 있었다. 데오든이 외쳤다. "보라! 난 친히 출정하기로 했소. 이는 아마 내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오. 내게는 후계자가 없소. 내 아들 데오드레드는 전사했소. 그래서 난 내 누이의 아들인 요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바요. 만일 우리 둘 다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땐 당신들이 상의해서 새로운 영주를 선출하시오. 그러나 우선 당장에도 뒤에 남겨진 내 백성들을 통솔할 지배권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겠소. 당신들 중에 누가 남겠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없소? 내 백성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누구요?" "백성들은 욜가를 신망하나이다." 하마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요머를 남겨 둘 순 없네. 또 그도 남아 있으려 하지 않을 거고. 또한 그는 우리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야." "전 요머공을 추천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머공이 마지막 후손도 아닙니다. 주군의 누이이신 요문드님의 따님이시자 요머공의 누이이신 요윈공주가 계십니다. 공주께서는 두려움을 모르시며 기개가 높으십니다. 왕께서 출정하신 동안 공주님을 로한의 영주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리라. 전령들은 백성들에게 요윈공주가 다스릴 것임을 공포하라!" 말을 마친 왕은 성문 앞 옥좌에 좌정한 후 무릎을 꿇고 앉은 요윈에게 검과 갑옷을 내리며 말했다. "잘 있거라, 내 조카여! 어두운 시절이긴 하나 아마 우린 이 황금의 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던해로우는 견고한 요새로 장시간 방어할 수 있을 터이니 만일 전쟁이 여의치 않은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백성들을 이끌고 그리로 가도록 하라." 그러자 요윈이 대답했다. "그런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주군. 저는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하루하루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공주의 눈길은 아라곤을 향하고 있었다. "왕께선 돌아오실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서쪽이아니라 동쪽에 있으니까 말이오." 하고 아라곤이 말했다. 이제 왕은 갠달프와 나란히 층계를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성문을 향해 가면서 아라곤은 뒤돌아보았다. 층계 꼭대기에 요윈이 몸을 꼿꼿이 세운 채서 있었다. 그녀는 왕이 하사한 검을 앞에 세우고 양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갑옷을 걸친 그녀는 햇빛을 받아 은처럼 빛나고 있었다. 김리는 어깨 위로 도끼를 걸치고 레골라스와 나란히 걸어갔다. "자, 드디어 출발이군! 인간들에겐 행동하기 전에 너무 많은 말이 필요하군. 내 손에선 도끼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데 말이야. 물론 로한인들도 일단 돌진하면용맹하다는 건 알지만. 그렇지만 이건 내 마음에 드는 전쟁은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전장까지 간다는 거지? 난 또다시 갠달프의 앞자리에 짐꾸러미처럼 실려 덜렁덜렁 흔들리고 싶진 않은데." "내 생각엔 거기가 다른 어디보다도 안전한 자릴 거 같은데. 어쨌든 전투가 시작되면 갠달프는 자넬 내려 줄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섀도우폭스가 스스로 그렇게 할 거고 도끼는 기수에게 어울리는 무기는 아니니 말이야." "물론 우리 난쟁이들은 기병이 아니지. 내가 베고 싶은 건 오르크들의 머리지 인간의 머리 가죽이 아니라고." 김리는 도끼자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들은 성문 앞에 수많은 청장년 사나이들이 모두 말을 탄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약 천 명 이상이 되어 보였다. 그들의 창은 탄력있는 나뭇가지로 만든 것이었다. 데오든이 앞으로 나서자 그들은 우렁찬 환호를 외치며 환영했다. 왕의 말 스노우메인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아라곤과 레골라스의 말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요머는 자신의 말을 이끌고 기분이 상해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는 김리에게로 다가갔다. "반갑소, 글로인의 아들 김리여! 그대와 약속한 대로 점잖은 말씨를 배울 시간은 아직 없었소. 그렇지만 일단 우리들의 다툼은 접어두는 게 어떻겠소? 적어도 난 숲의 레이디께 대해서 다시는 험담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오." "잠시동안 내 분노를 잊겠소, 요문드의 아들 요머여. 그러나 혹시 당신이 직접 갈라드리엘을 뵙게 되면 그땐 그분이 숙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우호는 끝장이 날 겁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날 용서하구려. 그리고 용서의 표시로 나와함께 말을 탈 것을 간청하는 바요. 갠달프는 주군과 함께 선두에 설 것이오. 어쨌든 내 말 화이어푸트는 당신만 좋다면 기꺼이 우리 둘을 태울 거요." 그러자 김리는 대단히 만족해서 대답했다. "진정으로 감사하오. 만일 내 동지인 레골라스가 우리 결에서 달려도 좋다면 기꺼이 당신과 함께 타겠소." "물론 그렇게 될 것이오. 내 좌측에는 레골라스, 우측에는 아라곤이 달릴 것이고 아무도 감히 우리 앞에 서지 못할 것이오." "섀도우폭스는 어디 있지?" 갠달프가 물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초원 위를 사납게 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합니다. 저기 여울 옆 버드나무숲 사이로 마치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갠달프가 휘파람을 불고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멀리서 고개를 치켜들고 울고 머리를 돌려 화살처럼 달려오는 섀도우폭스가 보였다. 그 위대한 말이 질주해 오는 걸 보고 요머가 말했다. "서풍의 숨결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바로 저런 웅자일 겁니다." 이윽고 말은 마법사 앞에 와 섰다. "선물은 이미 주어진 것 같소." 데오든은 갠달프에게 이렇게 말하고나서 일동을 향해 외쳤다. "자, 모두 들으시오! 지금 여기서 난 현자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시며 이방인 중에서 가장 환영받으시는 내 손님 갠달프 그레이함을 우리 종족이 이어지는 한 영원히 변치 않을 마크의 한 영주이자 대장으로 지명하는 바요. 그리고 그분께 말 중의 왕자인 섀도우폭스를 증정하오." "감사하오, 데오든왕이시여!" 갠달프는 답례하며 갑자기 회색 망또를 젖히고 모자를 내던진 다음 말 등에 올라탔다. 그는 투구도 갑옷도 착용하지 않았다. 그의 눈처럼 흰 머리칼이 바람이 날리고 횐 옷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백색의 기사를 보라!" 아라곤이 이렇게 외치자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따랐다. "우리의 왕과 백색의 기사여!" 모두가 환호했다. "로한인들이여, 앞으로!"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말들은 뒷발로 버티고 서서 히이힝 하고 울었다. 창이 방패에 부딪혀 챙강거리며 소리를 냈다. 왕이 손을 들어올리자 로한의 부대는 거대한 폭풍처럼 우뢰 같은 소리를 울리며 돌진해 나갔다. 요윈은 고적한 궁정 문 앞에 서서 멀리 평원 위로 번쩍이는 창의 행렬이 나아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7장 헬름협곡 에도라스에서 출격했을 때 해는 이미 기울고 있어 기사들의 눈에 비친 로한의 평원은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색산맥 기슭의 구릉을 따라 북서쪽으로 뚫린 길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초록색 평원을 오르내리며 물살빠른 작은 개울들을 건넜다. 멀리 앞쪽에 형체를 드러낸 안개산맥은 그들이 점점 다가감에 따라 어두컴컴하고 커다랗게 비쳐 왔다. 그들 발길 앞에선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곧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부대는 계속 말을 달렸다. 그들은 너무 늦지나 않을까 조바심치며 한번도 멈추지않고 전속력을 다해 질주했다. 로한의 준마들은 빠르고 지구력이 강했으나 갈길은 멀었다. 에도라스로부터 이센강의 여울까지는 백이십 마일이 넘었다. 그들은 그 지점에서 사루만의 부하들을 저지시킨 왕의 병사들을 만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주위로 밤이 몰려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야영하기 위해 정지했다. 그들은 벌써 다섯 시간 이상 달려왔기에 꽤 멀리 진출한 것이지만 아직 앞에는 행정의 반 이상이 남아 있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과 차가운 달 아래서 그들은 거대한 원형을 이루고 야영천막을 설치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은 피우지 않았다. 또한 주위에는 말탄 경비병을 둥글게 배치했으며 기복진 곳들로 척후병들을 내보냈다. 특별한 상황이나 소식 없이 밤은 천천히 흘러갔다. 새벽녘에 나팔이 울리자 기사들은 한 시간 내에 다시 출동했다. 하늘에는 아직 구름은 없었으나 대기중엔 음산한 기운이 스미고 있었다. 이 계절치고는 날이 제법 뜨거웠다. 떠오르는 해는 안개에 싸인 듯 흐릿했으며 점차 동쪽으로부터 먹구름 같은 어둠이 하늘을 덮어 오르고 있었다. 멀리 북서쪽 안개산맥 기슭을 덮고 있는 또다른 어둠은 마법사의 계곡에서 기어 내려온 그림자였다. 갠달프는 요머 곁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레골라스에게로 왔다. "자네 종족은 훌륭한 천리안을 가지고 있지, 레골라스? 삼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참새와 피리새를 구별할 수 있는 날카로운 눈 말이야. 저 너머 이센가드 쪽에 무엇이 보이는가 알려 주겠나?" "상당한 거리로군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서 그쪽을 응시하며 레골라스가 말했다. "어둠이 보입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형체들이 있군요. 멀리 강둑 위에 서 있는 거대한 형체들이에요. 그렇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없군요. 내 시야를 가로막는 건 안개나 구름이 아니에요. 어떤 힘에 의해 그 땅 위를 덮고 있는 그림자예요. 그것이 개울을 따라 움직이고 있어요. 마치 끝없이 늘어선 나무들의 어스름이 언덕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뒤로는 바로 모르도르의 폭풍우가 오고 있어. 캄캄한 밤이 되겠군." 대기 속의 음산한 기운은 점점 더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어두운 구름이 그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하늘은 굽이쳐 얼룩진 구름이 눈부신 햇살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나는 흐릿함 속에서 태양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기울었다. 황혼의 빛줄기가 드리히른산 봉우리들의 가파른 표면을 비춤에 따라 기사들의 창도 불길에 휩싸인 듯 붉게 빛났다. 이제 그들은 백색산맥 최북단의 지맥인 드리히른산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산의 비쭉 솟은 세 개의 봉우리는 저녁놀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르는 빛 속에서 선두에 선 기사들은 검은 반점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한 기병이었다. 그들은 그를 기다리며 멈춰섰다. 마침내 기병이 도착했다. 움푹 찌그러든 투구를 쓰고 금이 간 방패를 든, 심신이 완전히 지친 사람이었다. 천천히 말에서 내린 그는 한참동안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여기 요머공이 계십니까? 드디어 오셨군요. 그렇지만 너무 늦게 또 너무 적은 병력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데오드레드공이 쓰러지신 이후로 사태는 악화일로였습니다. 우린 어제 커다란 손실을 입고 이센강 건너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도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밤에도 새로운 적 병력이 강을 건너 우리 야영지로 쳐들어왔었습니다. 이센가드 전체가 완전히 몰려나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사루만은 강 건너 던랜드의 사나운 고지인들과 유목민들을 무장시켜 우리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우린 완전히 압도당했고 방벽도 무너졌습니다. 웨스트폴드의 에르켄브란드공은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잔존병력 전부를 헬름협곡으로 퇴각시켰습니다. 나머지는 흩어져 버렸습니다. 요머공은 어디 계십니까? 앞쪽엔 아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센가드의 늑대들이 몰려오기 전에 요머공께서는 에도라스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경비병들 뒤에 서 있어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던 데오든왕은 말없이 그대로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그는 말을 앞으로 몰았다. "자, 내 앞으로 오게, 케오를! 내가 왔다. 욜의 후손들의 최후의 부대가 출정했노라. 싸우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전령의 얼굴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환해졌다. 그는 몸을 세운 채 무릎을 꿇고 톱니가 새겨진 검을 왕께 바쳤다. "명령을 내리소서, 주군. 그리고 용서해 주소서. 소신은......" "자넨 내가 겨울 눈을 뒤집어쓴 한 그루 늙은 나무처럼 구부정한 채 저 메두셀드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자네가 출정할 때는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서풍이 불어와 그 나뭇가지를 뒤흔들었지." 데오든은 전령에게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려 경비병들에게 명령했다. "자, 이 친구에게 새 말을 마련해 주어라. 우린 에르켄브란드를 도우러 간다!" 데오든이 명령을 내리는 동안 갠달프는 조금 앞으로 말을 몰아 북쪽 이센가드와 서쪽 황혼을 바라보며 홀로 앉아 있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말했다. "달리시오, 데오든왕! 헬름협곡으로 말을 달리시오! 이센강의 여울로 가서는 안되오. 또 이 평원에서 지체해서도 안 되오. 난 잠시 당신과 헤어져야겠소. 이제 급한 용무가 있으니 섀도우폭스와 나는 달려가야겠소." 그는 아라곤과 요머 그리고 다른 기사들에게 몸을 돌려 외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마크의 왕을 잘 모시오! 헬름의 관문에서 날 기다리시오. 무운을 빌겠소." 그가 섀도우폭스에게 뭐라고 말하자 그 위대한 말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건 마치 저녁놀 속에 은빛 섬광이 순식간에 번쩍이는 것처럼 보였다. 또는 풀밭을 스치는 바람과도 같았으며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그림자와도 같았다. 스노우메인이 그를 따라가려고 콧김을 내뿜으며 뒷다리를 세웠으나 그건 오직 날개달린 새만이 따라갈 수 있는 속도였다. "도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기사 한 명이 하마에게 물었다. "갠달프 그레이함께 서두를 일이 생긴 거야. 언제나 저분은 예기치 못하게 왔다가는 사라지지." "웜통이 있었더라면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그렇구말구. 그렇지만 난 갠달프를 다시 볼 때까지 기다려 보겠어." "아마 오래 기다려야 할 걸요." 기사들은 이제 이센여울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방향을 틀어 남쪽을 향해 달렸다. 밤이 깊어갔으나 그들은 계속 달렸다. 드리히른산의 높은 봉우리들은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우중충하게 솟아 있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초원지대 웨스트폴드계곡이 수마일 저편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골짜기 하나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피난했던 옛 영웅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은 이곳을 헬름협곡이라 불렀다. 그 협곡은 드리히른산 그림자에 덮인 북쪽으로부터 차차 안으로 굽어들어가 들어갈수록 가파르고 좁아졌으며 양편에는 까마귀만이 날아오르는 날카로운 벼랑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협곡 어귀 헬름관문에는 발꿈치 모양의 거대한 암반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돌출부 위에는 오래된 암석벽이 둘러졌으며 그 속에는 탑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전해지기로는 곤도르가 영화를 누리던 아득히 먼 시절에 바다의 왕들이 거인들을 시켜 여기에 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혼버그로서 탑 위에서 울린 나팔소리가 골짜기를 메아리치는 것이 마치 오랫동안 잊혀졌던 병사들의 무리가 구릉 뒤 동굴들에서 전투를 벌이러 뛰쳐나오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지어진 명칭이었다. 옛사람들은 골짜기로의 진입을 차단하지 위해 혼버그에서 남쪽 벼랑에 이르기까지 성벽을 쌓았다. 성벽 아래의 넓은 배수로를 따라 협곡의 개울이 흘러내렸다. 그 개울은 혼로크기슭을 굽이쳐 흐르다가 헬름관문에서 외호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면서 초록의 삼각주 가운데로 흐르는 지류로 합쳐졌다. 지류는 헬름협곡으로부터 웨스트폴드계곡으로 떨어져 흘렀다. 헬름관문의 혼버그에는 지금 마크의 변경에 위치한 웨스트폴드의 영주 에르켄브란드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그는 전쟁의 위협으로 시절이 암울해짐에 따라 성벽을 보수해 요새를 굳게 지킨 것이다. 기사들은 아직 협곡 어귀의 낮은 계곡에 있었다. 그들 앞서 보냈던 척후들의 고함소리와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화살이 윙 하고 날았다. 척후 한 명이 재빨리 말을 몰고 돌아와 계곡에는 늑대기사들이 깔려 있으며 오르크들과 사악한 야만인들이 이센여울로부터 헬름혈곡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많은 우리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깔려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휘자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헤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또 에르켄브란드공의 안위에 대해선 현재까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직 전사하지 않았다면 헬름협곡에 도달하기 전에 적에게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자 데오든이 물었다. "갠달프는 보았는가?" "예, 주군. 횐 옷을 입은 노인이 말을 탄 채 초원 위를 바람처럼 질주하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가 사루만이 아닌가 생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는 해지기 전에 이센가드를 향해 달려갔다고 합니다. 또 그 전에 웜통이 일단의 오르크들과 함께 북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목격되었습니다." "만일 갠달프와 맞닥뜨리게라도 된다면 아마 웜통은 큰 낭패일걸. 어쨌든 내 주변에 옛 고문과 새 고문 둘 다가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구먼. 그러나 갠달프가 말한대로 이 위급한 지경에서는 헬름관문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겠지. 에르켄브란드가 그곳에 있건 없건 간에 말이야. 북부에서 달려왔다는 적이 어느 정도의 병력인지는 알아 보았는가?" "대단한 병력입니다. 퇴각할 때에는 적의 숫자가 배 이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만 소신은 아주 담대한 기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적의 주력은 현재 저희 전 병력의 몇 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요머가 말했다. "그럼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우선 요새를 가로막고 있는 적부터 물리치겠습니다. 헬름협곡에는 몸을 숨길만한 동굴도 수백 개소가 넘고 또 비밀통로를 지나면 언덕 위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비밀통로를 너무 믿어선 안 돼. 사루만은 틀림없이 오랫동안 이곳을 샅샅이 살펴왔을 거야. 어쨌든 우린 이곳에서 오래 견딜 수 있겠지. 가자!" 아라곤과 레골라스가 요머와 함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어둠을 헤치고 계속 말을 달렸다. 어둠이 깊어짐에 따라 길은 남쪽 산맥 기슭으로 오르며 점점 가팔라졌으며 속도도 느려졌다.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서는 거의 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따금 헤매고 다니는 오르크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쏜살같이 도망쳐 버려서 잡거나 죽일 수는 없었다. 요머가 입을 열었다. "사루만에게건 또는 그가 내보낸 지휘관에게건 왕의 부대가 진군했다는 사실이 곧 알려지겠군." 전쟁의 소문은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귀에 거슬리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헬름협곡 속 깊숙히 들어선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 뒤로는 수없이 많은 횃불들이 캄캄한 들판 위에 붉은 꽃처럼 흩어져 너울거리며 기다란 선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그보다 더 큰 불길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라곤이 말했다. "거대한 무리가 우릴 바짝 쫓아오는군." 데오든이 대답했다. "그들은 횃불을 켜들고 있소. 도중에 있는 건초더미와 오두막 그리고 나무들을 태우고 있는 거요. 이곳은 비옥한 평원으로 농가가 많소. 불쌍한 내 백성들!" "지금이 환한 대낮이어서 우리가 폭풍우처럼 저들을 덮칠 수만 있다면! 저들을 뒤에 그대로 두고 갈 수밖에 없다니, 정말 마음이 쓰립니다." 그러자 요머가 아라곤의 말을 받았다. "절대 멀리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곧 헬름의 외호가 보일 겁니다. 참호는 관문 아래로 사백 미터까지 구축되었으니 우린 거기서 싸우면 됩니다." 그러자 데오든이 나섰다. "아니야, 외호를 방비하기엔 중과부적이야. 외호는 길이가 일 마일 이상이나 되고 또 너무 드러나 있으니까." "만일 몰리게 된다면 후위부대가 막아 줘야 합니다." 기사들이 외호에 이르렀을 땐 별도 달도 없었다. 흘러내려온 개울물은 그곳에서 밖으로 나갔으며 개울 옆 도로는 혼버그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앞에 나타난 성벽은 어두운 구덩이 너머 높은 그림자로 서 있었다. 위로 오르자 보초 한 명이 수하를 해 요머가 대답했다. "마크의 왕께서 헬름관문으로 출전하신다. 나는 요문드의 아들 요머다." 그러자 보초는 환호를 울렸다. "기대 밖의 좋은 소식입니다! 어서 서둘러 주십시오. 적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구를 지나 조금 위쪽에 자리잡은 경사진 초지에서 발을 멈췄다. 이제 그들은 다행히도 에르켄브란드가 헬름관문을 수비하기 위해 아직 많은 병사들을 남겨 두었고 또 그 후로도 더 많은 병사가 이리로 후퇴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호의 수비대장인 갬링이라는 노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보병이 약 천 명 정도 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저처럼 너무 늙었거나 여기 있는 제 손자처럼 너무 어립니다. 에르켄브란드공에 관한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어제 웨스트폴드의 정예기사들 중 생존자들과 함께 이리로 퇴각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었습니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머가 말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오. 우리 척후병들은 그에 관한 소식을 얻지 못했소. 그리고 우리 뒤로는 적이 계곡 전체를 메우고 있소." 데오든도 말했다. "그가 무사했으면 좋으련만. 그는 강력한 전사였지. 해머핸드라 알려진 헬름대왕의 무공이 그에게서 되살아난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우린 여기서 그를 기다릴 수는 없다. 이제 전 병력을 성벽 위에 배치해야지. 식량은 넉넉한가? 우린 공성(공성)이 아니라 전투를 벌이려고 급히 출정했기 때문에 군량을 거의 가져오지 않았거든." 그러자 갬링이 대답했다. "뒤편 협곡 동굴 속에는 웨스트폴드의 피난민들 즉 노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상당량의 식량과 많은 짐승들, 그리고 그 사료들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요머가 말했다. "잘됐소. 적은 계곡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있소." "만일 적이 우리에게서 전리품을 기대하고 밀려온다면 아마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왕과 그의 기사들은 계속 전진했다. 개울을 가로지르는 둑길 앞에서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일행은 기다랗게 열을 지어 말을 끌고 혼버그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환영을 받으며 기쁨과 다시 싹트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엔 성과 방벽 모두에 배치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머는 재빨리 병사들로 하여금 차비를 갖추게 하였다. 혼버그에는 왕의 병사들 외에도 웨스트폴드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머는 협곡의 성벽과 탑 위에, 그리고 그 뒤에 자신의 병사들 대부분을 배치시켰다. 왜냐하면 만약 돌격이 감행되어 대병력이 쳐들어올 경우 그쪽의 방비가 가장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차출된 병사들의 보호 아래 말들은 멀리 협곡 위로 이동되었다. 협곡 성벽은 칠 미터 높이에 네 명의 병사가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두터웠으며 키 큰 병사 한 명이 내다볼 수 있는 흉벽으로 엄호되어 있었다. 흉벽 여기저기에는 병사들이 활을 쏠 수 있게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안이 뚫려진 이 흉벽에는 혼버그의 바깥뜰에 있는 문에서 내리뻗은 층계를 통해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뒤편 협곡에서도 세 줄의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성벽 정면은 반반했으며 게다가 거대한 암석들이 절묘하게 쌓여졌기에 그 접합부분에서도 발디딜 틈을 찾을 수 없었으며 꼭대기 쪽은 바닷가 벼랑처럼 돌출되어 있었다. 김리는 성벽 위 흉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레골라스는 활을 만지작거리며 어둠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발을 쾅쾅 굴러 보며 난쟁이가 말했다. "이곳이 휠씬 마음에 드는데.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내 가슴이 뛰었었거든. 여긴 좋은 바위가 있어. 이 나라는 아주 단단한 뼈대를 갖추고 있는 거야. 우리가 외호에서 올라올 때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 우리 종족 백 명에게 일 년 간의 시간만 준다면 이곳을 아무리 대단한 군세가 공격한다고 해도 파도처럼 흩어지게 할 요새로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나도 자네 말을 의심하지 않아. 그렇지만 자넨 난쟁이고 난쟁이들은 사실 이상한종족이지. 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낮이 된다고 해서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만 자네가 있으면 마음이 놓여, 김리. 자네가 그 강한 도끼를 들고 굳건한 다리로 옆에 서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단 말이야. 여기에 자네들 종족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하긴 머크우드의 명사수 백 명을 얻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좋겠지만.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해. 로한인들 중에도 나름대로 명사수가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 수가 너무 적어. 너무 적다구." "활을 쏘기엔 날이 너무 어두워. 이제 정말이지 잠잘 시간이야. 잠! 난 어떤 난쟁이도 느껴 보지 못했을 만큼 졸리다구. 말을 달리는 건 고된 일이야. 그렇지만 내손의 도끼가 잠시도 가만있질 못해. 내게 일렬로 늘어선 오르크들의 목과 도끼를 휘두를 공간만 준다면 모든 피로가 싹 가셔 버릴 거야."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저 아래 계곡에선 여기저기 흩어진 모닥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센가드의 무리들은 소리를 죽여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이 든 횃불이 많은 줄을 이루고 좁고 깊은 골짜기를 굽이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외호로부터 병사들의 고함과 비명 그리고 함성이 터져나왔다. 타오르는 횃불들이 벼랑 너머로 나타나 성벽 앞으로 빽빽히 몰려들었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병사들은 들판 위를 질주해 돌아와 경사로를 올라 혼버그 성문으로 왔다. 웨스트폴드인들의 후진이 성문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적이 가까이 왔소! 우린 화살을 있는 대로 쏘아 오르크들을 외호에 가둬 두었소. 그렇지만 그걸로 그놈들을 오래 묶어 두지는 못합니다. 이미 그놈들은 개미떼처럼 새카맣게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때를 보여 줬으니 다시 횃불을 쳐들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 자정이 넘었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웠으며 무거운 대기의 정적은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장이 눈부신 섬광에 그을렸다. 가지처럼 갈라진 번개가 동쪽 구릉을 내리쳤다. 그 짧은 순간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자신들과 외호 사이의 전 공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곳은 검은 무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작달막하고 넓게 퍼졌으며 어떤 것들은 높은 투구를 쓰고 검은 방패를 든 키 크고 단단한 체구였다. 수백이 넘는 무리가 계속 외호를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검은 물결은 이 벼랑 저 벼랑으로 성벽까지 솟아올랐다. 계곡에 천둥이 울렸다.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성벽 너머로부터 화살이 빗줄기처럼 빽빽하게 윙윙거리며 날아들어 돌에 부딪혀 쨍 울리고 튀거나 비스듬히 스치고 떨어졌다. 표적에 명중된 것도 간혹 있었다. 헬름협곡으로의 돌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협곡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나 반응이 들리지 않았으며 응수하는 화살도 나오지 않았다. 돌격하던 무리들은 바위와 성벽의 고요한 위압에 눌려 흠칫 멈춰 섰다. 이따금 번개가 어둠을 찢어 놓았다. 이윽고 오르크들이 창과 칼을 흔들어 대며 또한 성벽 위형체가 보이는 자에겐 무조건 화살을 날리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마크의 병사들은 놀라움에 싸여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는 그 광경이, 전쟁의 폭풍에 격렬하게 뒤흔들리며 가시처럼 날카로운 빛을 받아 번뜩이는 거대하고 어두운 밀밭처럼 보였다. 놋쇠나팔소려가 울려퍼졌다. 적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일부는 성벽을 향해, 나머지는 혼버그의 성문으로 난 경사로를 향해 밀려왔다. 가장 거대한 오르크들과 던랜드의 야만인들 중에서도 그 중 포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순간 멈칫했다가 곧 계속 몰려왔다. 번개가 번쩍이자 모든 투구와 방패 위에 그려진 이센가드의 유령 같은 손이 보였다. 그들은 암반의 꼭대기에 올라 성문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러자 드디어 대응이 시작되었다. 폭풍 같은 화살과 돌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적은 갈팡질팡 흩어지며 뒤로 물려났다. 잠시 후 적은 다시 돌진해 왔다가 흩어지고 또 다시 돌진해 왔다. 그때마다 그들은 좀더 높은 지점까지 와서 멈춰섰다. 다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벌떼처럼 몰려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마치 지붕처럼 몸을 엄폐했으며 한편으로는 두 개의 거대한 나무기둥을 날라왔다. 그 뒤로는 오르크 사수들이 밀어닥쳐 성벽 위의 사수들을 향해 우박처럼 화살을 퍼부어 댔다. 그들은 성문에 다다랐다. 강건한 팔들이 반동을 주어 부딪친 나무기둥이 쿵 하는 굉음을 내며 성문을 강타했다. 위에서 세차게 던진 돌에 깔려 하나가 쓰러지면 곧 다른 두 명이 달려와 그 자리를 메웠다. 계속 반복해 그 거대한 충차(衝車)가 부딪혀 왔다. 요머와 아라곤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은 고함치는 소리와 충차들이 부딪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후 갑작스런 섬광이 비쳤을 때 그들은 성문이 위험에 박두했음을 알았다. 아라곤이 외쳤다. "자,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검을 빼들어야 할 시간이오!" 그들은 불길처럼 질주해 성벽을 따라 계단 위로 쏜살같이 나아가 암반 위의 바깥뜰로 내려섰다. 그들은 달려오며 소수의 담대한 검사들을 모았다. 그 곳안 작은 샛문이 하나 있어 그것을 통해 바깥으로 쭉 뻗친 벼랑과 등을 맞댄 서편 성벽으로 나갈수 있었다. 그쪽으로 좁은 길 하나가 성벽과 암반의 가파른 벼랑 사이를 빙 돌아 거대한 성문으로 이어졌다. 요머와 아라곤은 함께 그 문을 통과하여 뛰쳐나갔고 검사들이 바싹 그 뒤를 따랐다. 칼집에서 빼든 두 개의 겸이 하나처럼 번쩍였다. "구스위네! 마크를 위한 구스위네검이여!" 요머가 외치자 아라곤도 고함을 질렀다. "안두릴! 듀너데인을 위한 안두릴검이여!" 그들은 측면으로부터 야만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안두릴검이 하얀 불길로 번쩍이며 솟아올랐다 떨어졌다. 성벽과 탑에서 환성이 올랐다. "안두릴! 안두릴이 전장에 나타났다! 부러졌던 바로 그 검이 다시 빛을 발한다!" 충차를 들이박던 자들은 당황해 나무기둥을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려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패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부서졌으며 모두 쓰러지거나 암반 아래 돌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오르크 사수들은 화살을 날리며 도주했다. 요머와 아라곤은 잠시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멀리서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있었다. 남쪽 산맥에서 아직도 번개가 번득였다. 다시 북쪽으로부터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 왔다. 구름장은 찢겨져 떠돌았으며 그 사이로 별이 빼꼼히 자태를 드러냈다. 서쪽으로 기울던 달이 폭풍의 여파 속에서 노랗게 가물거리며 협곡 측면 구릉 위로 솟아올랐다. "우리가 좀 늦게 온 것 같소." 아라곤은 성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문의 거대한 돌쩌귀들과 빗장들이 비틀리고 휘어졌으며 문짝도 여러 군데 갈라졌다. 그러자 요머가 대답했다. "그러나 성벽 밖 여기에선 그들을 막을 수 없소. 보시오!" 그는 둑길을 가리켰다. 벌써 오르크와 인간의 거대한 무리가 개울 저편에서 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와 그들 주위의 돌을 스쳐지나갔다. "자, 우린 이제 돌아가 안에서 무슨 대책을 새워야겠소. 자, 갑시다!" 그들은 몸을 돌려 달렸다. 그 순간 쓰러졌던 자들 가운데 섞여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여남은 명의 오르크들이 살짝 몸을 일으켜 발소리를 죽이며 빠르게 뒤따라왔다. 두 명이 요머의 뒤꿈치께로 몸을 날려 그를 넘어뜨리고는 순식간에 올라탔다. 그러나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작고 검은 형체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쉰 목소리로 외쳤다. "바루크 카자드! 카자드 아이메누!" 도끼가 번쩍이며 휘몰아쳤다. 두 명의 오르크들은 머리가 달아난 채 고꾸라졌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아라곤이 도우려고 달려오는 순간 요머가 몸을 일으켰다. 샛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자 그 앞에는 돌이 쌓였다. 모든 것이 정돈된 후 요머가 몸을 돌려 말했다. "고맙소, 글로인의 아들 김리여! 당신이 우라와 함께 나왔었던 걸 몰랐었소. 그러나 때때로 불청객이 최고의 손님이 되기도 하지요. 어떻게 거기 있었소?" "잠을 쫓으려고 당신들을 뒤따랐소. 그런데 고지인들을 보니 내겐 너무 큰 것 같아 당신들 칼솜씨나 구경하려고 돌 위에 앉아 있었소." "이 은공을 갚기가 쉽지 않을 것 같소." 난쟁이는 웃으며 말했다. "이 밤이 다하기 전에도 많은 기회가 있겠지요. 어쨌든 흡족합니다. 모리아를 떠난 후 지금까지 나무 이외엔 아무것도 베어 보지 못했으니까요." 김리는 도끼를 툭툭 두드리며 성벽 위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말했다. "둘!" 그러자 레골라스가 받았다. "둘이라고? 그럼 내가 훨씬 잘했군. 비록 지금은 쏘아 버린 화살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야 하지만 말이야. 내 화살 전부를 써버렸거든. 그렇지만 줄잡아 이십 명은 된다고. 그러나 숲 속에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제 하늘은 빠른 속도로 맑아졌으며 지는 달도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빛도 마크의 기사들에게 큰 희망을 주진 못했다. 앞쪽의 적은 줄기는커녕 훨씬 증가된 것 같았으며 거기다 훨씬 많은 병력이 계곡으로부터 밀어닥치고 있었다. 암반에서의 반격은 단지 짧은 유예를 얻었을 뿐이었다. 성문으로의 공격이 배가되었다. 협곡 성벽을 향해 이센가드의 무리들이 파도처럼 포효하며 밀려들었다. 오르크들과 고지인들이 성벽을 완전히 둘러쌌다. 갈고리가 달린 밧줄들이, 끊거나 되던져 버릴 사이도 없이 흉벽 위로 계속 던져졌다. 수백 개의 긴 사다리가 걸쳐졌다. 아래로 팽개쳐져 부서진 것도 많았으나 더 많은 사다리가 뒤이어져 오르크들은 남부의 어두운 숲속에 사는 원숭이들처럼 사다리를 기어올랐다. 성벽 아래에는 시체와 부상자들이 폭풍우 속의 조약돌처럼 쌓여 있었다. 그 끔찍스런 둔덕은 점차 높이 솟았지만 적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로한의 병사들은 지쳐 버렸다. 화살은 이제 바닥이 났고 던질 창도 더 없었다. 칼날은 이가 빠졌으며 방패도 갈라졌다. 아라곤과 요머는 세 차례나 병사들을 집결시켰고 또 안두릴은 세 차례나 적을 성벽으로부터 물리치는 필사적인 돌격에서 불을 뿜었다. 그때 뒤쪽 협곡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개울이 흘러나오는 지하수로를 통해 오르크들이 쥐처럼 기어들었던 것이다. 성벽의 공격이 가장 치열해져 병력 거의 전부가 그리 쏠릴 때까지 그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일부는 이미 협곡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 말과 뒤섞인 채 경비병들과 전투를 벌였다. "카자드! 카자드!" 김리는 벼랑에 메아리치는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며 성벽에 껑충 뛰어내렸다. 그는 곧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아이 오이!" 그는 외쳐 댔다. "오르크놈들이 성벽 뒤에 있다! 아이 오이! 오라구, 레골라스! 우리 둘이 상대하기에 충분한 숫자야. 카자드 아이 메누!" 모든 떠들썩한 소리를 뛰어넘는 난쟁이의 커다란 목소리를 듣고 늙은 갬링이 혼버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외쳤다. "오르크들이 협곡에 들어왔다! 헬름! 헬름! 헬름의 아들들이여, 앞으로!" 그는 많은 웨스트폴드의 병사를 거느라고 층계를 달려내려갔다. 그들의 공격은 맹렬하고도 급작스러웠기에 오르크들은 곧 퇴각했다. 그들은 골짜기 협로 속에 갇혀 모두 살해되거나 또는 비명을 울리며 협곡의 갈라진 틈새로 몰렸다가 몸을 감추고 있던 동굴 수호자들 앞에 떨어졌다. "스물하나!" 김리가 외쳤다. 그는 양손치기로 한 명을 베고 마지막 오르크를 발 밑에 누였다. "이제 내 총계는 레골라스를 넘어설 거야." 그러자 갬링이 말했다. "우린 이 쥐구멍을 막아야 하오. 난쟁이들은 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선생, 우리를 도와 주시오!" "우린 전투용 도끼로 돌을 다듬지는 않소. 또 손톱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 드리지." 그들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작고 둥근 돌들과 깨진 돌들을 모았다. 웨스트폴드인들은 김리의 지시를 받아 지하수로의 안쪽 끝을 메워 마침내 좁은 출구 하나만을 남겨 두었다. 그러자 비로 불어난 협곡 개울이 막혀 버린 수로를 소용돌이쳐 바닥을 침수시키고는 천천히 퍼져나와 이 벼랑에서 저 벼랑까지 차가운 웅덩이를 이루었다. 김리는 말했다. "위쪽은 더 말라 붙겠군. 자, 갬링공, 성벽 위에선 일이 어떻게 돼가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위로 올라가 아라곤과 요머 곁에 서 있는 레골라스에게로 갔다. 요정은 자신의 긴 칼을 갈고 있었다. 지하수로를 통해 침입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에 잠시 공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스물하나야!" 김리가 말하자 레골라스가 받았다. "훌륭해! 그렇지만 내 총계는 이제 스물넷이라고. 바로 여기서의 칼솜씨였지." 요머와 아라곤은 피로한 듯 칼에 기대 서 있었다. 멀리 왼쪽에서는 암반 위에서벌어지는 요란한 전투의 굉음과 아우성소리가 다시 크게 울려왔다. 그러나 혼버그는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난공불락이었다. 성문이 붕괴되긴 했지만 안에서 재목과 돌로 쌓아 둔 바리케이드 안쪽으로는 아직 한명의 적도 통과하지 못했다. 아라곤은 어슴푸레한 별들과 계곡을 둘러싼 서편 구릉 뒤로 기울어가는 달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나 되는 것 같은 긴 밤이로군. 날이 새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그러자 그의 곁으로 다가선 갬링이 대답했다. "새벽은 멀지 많습니다. 그렇지만 새벽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지만 새벽은 언제나 인간들의 희망이오." "하지만 이센가드의 이 앞잡이들, 사루만의 더러운 술책에 길든 이들 반(半)오르크들과 마귀 같은 인간들은 태양을 보고도 움츠러들지 않을 겁나다. 그리고 고지의 야만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자 요머가 대답했다. "들리오. 그러나 내 귀엔 단자 새들의 비명소리나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소." "그렇지만 던랜드의 언어로 외치는 소리도 들립니다. 전 저 말을 알지요. 저건 오래된 언어로 한때는 마크의 서편 계곡에서 사용되었지요. 들어 보시오! 그들은 우리를 증오하고 있으며 지금 상황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우리의 최후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왕! 왕을!' 놈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놈들의 왕을 붙잡을 테다. 포르고일에게 죽음을. 밀짚대가리들에게 죽음을. 북부의 도둑놈들에게 죽음을.' 그들이 우리에게 붙이는 이름들이지요. 곤도르의 영주가 마크의 땅을 청년왕 욜께 증정하고 동맹을 맺었다는 원한을 그들은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 해묵은 증오심에 사루만이 불을 붙인 거지요. 흥분하면 무서문 종족입니다. 이제 그들은 데오든왕을 잡거나 아면 자신들아 죽거나 할 때까지 어둠 속이건 새벽이건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밝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줄 거요. 지키는 병사들이 있는 한 혼버그는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소?" 요머가 대답했다. "음유시인들이 그렇게 읊조립니다." "그럼 혼버그를 지킵시다. 그리고 희망을 가집시다!" 하고 아라곤이 말했다. 그들이 말을 마쳤을 때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윽고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불길이 번쩍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협곡 개울의 물줄기가 쉿쉿 소리를 내고 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져 내렸다. 벌어진 구멍이 둑을 터뜨려 더이상 물줄기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어두운 형체들이 떼지어 밀려들었다. 아라곤이 외쳤다. "사루만의 사악한 술수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놈들은 다시 지하수로로 기어들었던 거야. 그리고는 우리 발 아래 폭탄을 터뜨렸어. 엘렌딜! 엘렌딜!" 그는 둑이 터진 곳으로 껑충 뛰어내렸다. 그때 수많은 사다리가 성벽에 다시 걸쳐졌다. 성벽 너머로, 그리고 성벽 아래로 최후의 공격이 모래언덕을 덮치는 검은 파도처럼 휩쓸며 밀려들었다. 방어선이 휩쓸려 버렸다. 병사들 중 일부는 협곡 속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한걸음 한걸음 동굴로 퇴각하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맞붙어 싸우기도 했다. 다른 병사들은 요새를 향해 후퇴했다. 넓은 계단 하나가 협곡으로부터 암반과 혼버그의 후문으로 뻗쳐 있었다. 아라곤은 계단 맨 아래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안두릴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그 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적의 접근은 잠시 제지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계단으로 밀려온 병사들 모두가 후문을 향해 올라갔다. 뒤쪽 계단 상단부에는 레골라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활시위는 당겨졌지만 남은 화살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그는 겁도 없이 계단에 접근하려는 첫번째 오르크를 쏠 준비를 갖추고 아래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아라곤에게 외쳤다. "이제 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왔어요, 아라곤. 어서 올라와요." 아라곤은 몸을 돌려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달리다가 넘어졌다. 곧바로 적들이 달려왔다. 오르크들이 그를 덮칠려고 긴 팔을 내뻗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맨 앞의 오르크가 레골라스의 화살에 목이 관통돼 쓰러졌지만 나머지는 그를 타넘고 달려왔다. 그때 위쪽에서 내던진 커다란 둥근 돌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떨어져 오르크들은 다시 계곡으로 처박혔다. 아라곤이문에 도착하자 문은 재빨리 닫혔다. 팔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아라곤이 말했다. "일이 고약하게 돼가는군, 친구들."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꽤 고약하지. 그렇지만 우리에게 당신이 있는 한 아직 희망이 없진 않아요. 김리는 어디 있지요?" "모르겠는걸. 성벽 뒤 바닥에서 싸우는 걸 본 게 마지막인데, 적이 휩쓸어 우릴 갈라 버렸어." "아, 저런! 불길한 소식이군." "그는 담대하고 건장하니까 틀림없이 빠져나와 동굴로 들어갔을 거야. 거기도 잠시 동안은 안전할 것이고. 우리보다 더 안전할 거라고. 그런 은신처가 난쟁이의 마음에 들 거야." "그렇게 희망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가 이쪽으로 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김리에게 내 총계가 서른아홉 명이란 걸 말해 주고 싶었거든요." "만일 그가 동굴로 피했다면 아마 자네의 총계를 앞지르게 될걸. 난 그렇게 휘둘러 대는 도끼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아라곤이 웃으며 말했다. "난 가서 화살을 좀 찾아봐야 하겠어요. 이 밤이 지나고, 그래서 활쏘기에 좋게끔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아라곤은 이제 성채로 들어갔다. 거기 와서야 그는 낭패스럽게도 요머 역시 혼버그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웨스트폴드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는 암반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주위로 병사들을 모아 협곡 어귀에서 싸우는 걸 본 게 마지막이었지요. 갬링공이 함께 있었고 그 난쟁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 그들에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라곤은 큰걸음으로 안뜰을 지나 탑 속의 높은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왕이 좁은 창문을 등진 채 어두운 그림자처럼 계곡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무슨 소식이오, 아라곤?" "협곡의 성벽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방어선이 휩쓸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은 이리로 탈출해 왔습니다." "요머도 여기 있소?"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병사들이 동굴로도 퇴각했습니다.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그 중에 요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협곡에서 적을 제지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 다음 그들이 어떻게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보다는 희망이 있을 거요. 그곳엔 저장된 식량이 충분하다니 말이오. 그리고 훨씬 위쪽 바위 틈새로 난 출구가 있으니 공기도 맑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아무도 범할 수 없지요. 그들은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요." "그렇지만 오르크들은 오탕크에서 사악한 무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폭탄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성벽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봉쇄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난 이 감옥 같은 방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소. 병사들을 이끌고 들판으로 말을 달려 적의 창기병 하나라도 잠들게 할 수 있다면 아마 난 전투의 환희를 다시 느낄 수 있을 테고 그 순간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소. 그러나 여기선 난 아무소용이 없소." "왕께선 적어도 여기 마크의 가장 튼튼한 요새 속에서 안전합니다. 에도라스 또는 산속의 던해로우보다 혼버그에서 왕을 지키기가 더 유리합니다." "혼버그는 결코 함락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의심스럽소. 세상은 변했고 한때 강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엔 불안한 걸로 드러났소. 어떤 요새든 어떻게 그와 같은 병력과 그와 같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적개심에 버틸 수 있겠소? 이센가드의 세력이 그렇게 강대해졌다는 걸 알았더라면 갠달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난 아마 거기 맞서 싸우기 위해 이처럼 성급하게 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제 그의 조언은 아침햇살 아래서 들었을 때만큼 좋은 것 같지는 않소."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갠달프의 조언을 판판하지 마십시오." "끝이 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난 여기서 덫에 걸린 늙은 오소리처럼 붙잡혀 끝을 맺지는 않겠소. 스노우메인과 하수펠 그리고 내 친위대의 말들이 안뜰에 있소. 새벽이 오면 난 병사들에게 헬름의 나팔을 울리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을 달려 나가겠소. 그때 나와 함께 말을 달리겠소, 아라돈의 아들이여? 아마 우리는 길을 열거나 아니면 노래로 불릴 말한 최후를 마치게 될 거요. 만일 이후에 우리에 관해 노래를 불러 줄 누군가가 남는다면 말이오." "난 왕과 함께 출전할 것입니다." 아라곤은 말을 마치고 물러나 성벽으로 돌아가 병사들을 격려하며 공세가 치열한곳을 다니며 도움을 주었다. 레골라스가 그와 함께 있었다. 폭발하는 불꽃이 암석을 뒤흔들면서 아래로부터 달아올랐다. 갈고리가 던져졌고 사다리가 걸쳐졌다. 오르크들은 쉴새없이 계속 벽을 기어올랐고 그때마다 방어자들이 그들을 아래로 내리밀었다. 마침내 아라곤이 적의 창을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성문 위로 나섰다. 동쪽 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화평 교섭의 표시로 빈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내밀었다. 오르크들이 고함을 지르며 야유했다. "내려와! 내라오라구! 우리하고 얘기하고 싶으면 네놈들이 이리 내려와! 네 왕을 끌고 내려오라구! 우린 투사 우루크 하이들이다. 내려오지 않으면 구멍에서 끄집어내 주겠다. 숨기만 하는 네놈들의 왕을 끌고 나오라구!" "왕께선 스스로의 뜻에 따라 머무시거나 나오신다." "그렇다면 넌 거기서 뭘 하는 거냐? 왜 내려다보는 거야? 우리의 위대함을 보고 싶어서냐? 우린 투사 우루크 하이들이야!" "난 새벽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이다." "새벽이 어쨌단 말이냐? 우린 우루크 하이들이야! 낮이건 밤이건, 날씨가 좋건 폭풍우가 몰아치건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우린 해가 뜨건 달이 뜨건 상관없이 네놈들을 죽이러 왔다구. 새벽이 어쨌단 말이냐." "새로운 날이 뭘 가져다줄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꺼져라! 새로 밝는 날이 네놈들에게 화를 가져오기 전에." "내려와! 아니면 우리가 널 쏘아 성벽에서 떨어뜨리겠다. 이건 화평 교섭도 아니다. 네놈은 아무 말도 안했어." "아직 이 말이 남았다. 아직 어떤 적도 혼버그를 점령한 적이 없다.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은 한 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북쪽으로 소식을 전해 줄 놈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네놈들은 자신의 위험을 모르고 있다." 무너진 성벽 위에서 적의 무리와 홀로 맞서고 있는 아라곤에게서는 참으로 거대한 권능과 왕자다운 위엄이 드러났기에 고지의 야만인들은 동작을 멈추고 어깨 너머로 계곡을 돌아보거나 일부는 미심쩍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오르크들은 커다란 목소리로 웃어 댔다. 그리고는 아라곤이 껑충 뛰어내리는 순간 성벽위로 창과 화살을 우박처럼 퍼부어 댔다. 굉음이 울리고 폭탄의 불꽃이 일었다. 방금 전 아라곤이 섰던 자리는 연기와 먼지를 일으키며 허물어졌다. 바리케이드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아라곤은 왕이 있는 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성벽이 무너지고 주위의 오르크들이 돌격할 태세를 갖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들 뒤에선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술렁이는 소리가 일었고, 그 소리는 점차 새벽 대기 속에서 이상한 소식을 전하는 많은 목소리들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암반 위의 오르크들은 그 낙심천만한 소식을 듣고는 갈팡질팡 해매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쪽 탑으로부터 느닷없이 그리고 가공스럽게 헬름의 거대한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자는 모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오르크들이 몸을 던져 땅에 엎드린 채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마치 모든 벼랑과 언덕 위에 강력한 전령들이 서 있는 것같이 협곡으로부터 메아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는 병사들이 경이에 휩싸여 귀를 기울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메아리가 잦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팔소리는 계속해서 구릉 속을 굽이쳤으며 맹렬하고 거칠 것 없이 울리며 점차 가깝게 그리고 요란스럽게 서로 응답을 주고받았다. 기사들이 외쳤다. "헬름왕이시다! 헬름대왕이시다! 헬름대왕이 일어서 전장으로 돌아오신 거다. 데오든왕을 위해 헬름대왕께서 돌아오셨다." 그 외침과 함께 왕이 나타났다. 그의 말은 눈처럼 하얬으며 방패는 황금색이었고 창은 길었다. 그의 오른편에는 엘렌딜의 후계자 아라곤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청년왕 욜가문의 영주들이 말을 타고 따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빛이 솟아오르며 밤은 물러갔다. "로한의 기사들이여, 앞으로!" 외침소리와 그 밖의 거대한 소음과 함께 그들은 돌격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성벽을 내려가 둑길 위를 휩쓸고 초원을 스치는 바람처럼 이센가드의 무리를 헤집고 다녔다. 협곡으로부터, 동굴로부터 쇄도해 나오는 병사들의 무시무시한 고함소리가 그 뒤를 이으며 적을 내몰았다. 암반 위에 남아 있던 모든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불어 대는 나팔소리는 계속 구릉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왕과 그 동지들은 쉴새없이 말을 달렸다. 그들 앞에선 적의 대장이나 투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쓰러지거나 도주했다. 오르크도 야만인도 항거하지 못했다. 적들은 기사들의 칼과 창에 등을 돌렸다. 날이 밝아오면서 두려움과 놀라움이 그들을 낚아챘기에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데오든왕은 헬름의 관문에서 말을 달려 거대한 외호까지 길을 쳐 나아갔다. 거기서 왕의 부대는 멈춰섰다. 주위는 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햇빛 줄기들이 동편 구릉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기사들의 창끝을 번쩍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없이 말 위에 앉아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그 대지는 변했다. 이전에 풀로 덮인, 위로 경사진 그 초록의 골짜기가 있던 곳에는 숲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벌거벗고 조용한 거대한 나무들이 가지가 뒤엉키고 백발의 머리를 든 채 겹겹이 서 있었다. 그리고 엉켜붙은 뿌리들은 기다란 초록의 풀밭 속에 묻혀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 밑은 어두웠다. 외호와 그 이름모를 숲의 경계는 약 사백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왕의 부대와 그 숲에 대한 공포로 인해 사루만의 오만한 무리들이 지금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헬름의 관문에서 쏟아져 내려왔기에 이제 외호 안쪽은 텅 비었다. 대신 외호의 바깥쪽에 그들은 파리떼처럼 몰려 있었다. 탈출하기 위해 협곡 성벽 주변을 기어오르기도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동쪽 계곡 사면은 너무 가파르고 돌처럼 단단했으며 서쪽으로부터 그들의 파멸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산등성이 위로 흰 옷을 차려입은 기사 한 사람이 떠오르는 태양 속에 반짝이며 나타났다. 낮은 구릉 위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손에 칼을 들고 도보로 비탈을 서둘러 달려오는 천 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키 크고 강건한 기사 한 사람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그의 방패는 붉은색이었다. 계곡 가장자리에 이르자 그는 거대한 검은 나팔을 입에 대고 힘차게 불었다. 그러자 이편 기사들이 외쳤다. "에르켄브란드다! 에르켄브란드라고!" 그러자 아라곤도 외쳤다. "저 백색의 기사를 봐라! 갠달프가 다시 왔어!" 레골라스도 외쳤다. "미스랜더! 미스랜더! 정말 이거야말로 마법이군! 자, 주문이 변하기 전에 이 숲을 봐둬야겠어." 이센가드의 무리들은 이리저리 허둥대며 고함을 질러 댔으나 어디로 향하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탑에서 다시 나팔소리가 울렸다. 왕의 부대가 외호를 지나 돌진해 내려갔다. 웨스트폴드의 영주 에르켄브란드는 언덕에서 뛰어내려왔다. 튼튼한 발걸음으로 산속을 달리는 수사슴처럼 섀도우폭스가 달려왔다. 그 위에 올라타고 다가오는 백색기사의 위용에 적은 공포로 미쳐 버린 듯했다. 야만인들은 그 앞에서 엎드려 버렸다. 오르크들은 휘청대며 비명을 지르고 칼과 방패 모두를 내던져 버렸다. 속도를 더해가는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연기처럼 그들은 달아났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앞을 가로막은 이상한 숲의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 어둠 속으로부터 아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제8장 이센가드로 가는 길 이렇게 해서 맑게 갠 아침햇살 속에서 데오든왕과 백색의 기사 갠달프는 협곡 개울 옆 초록빛 풀밭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 요정 레골라스, 웨스트폴드의 영주 에르켄브란드, 그리고 황금궁전의 영주들도 있었다. 로한의 기사들이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보다 앞서는 놀라움의 눈으로 그 이상한 숲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커다란 외침소리가 들리며 협곡 동굴로 몰려갔었던 사람들이 내려왔다. 그들 중에는 늙은 갬링과 요문드의 아들 요머, 그리고 난쟁이 김리가 있었다. 그는 투구를 쓰지 않았으며 대신 머리에는 피가 묻은 린넨밴드가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마흔둘이야, 레골라스! 애석하게도 내 도끼날이 상해 버렸어. 마흔두번째 놈이 목에다 쇠칼라를 두르고 있더라고. 어때, 자넨?" "총계에서 자네가 나보다 한 명 앞섰어. 그렇지만 난 자네에게 승리를 내준 걸 언짢아하진 않아. 두 발로 딛고 선 자넬 다시 보게 되니 정말 반갑네." "내 누이와 아들 요머, 어서 오라! 그대의 무사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구나." 데오든왕이 요머에게 말했다. "뵙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마크의 왕이시여!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다시 낮이 왔습니다. 그러나 낮은 이상한 소식과 함께 왔습니다." 요머는 몸을 돌려 놀라운 눈으로 먼저 숲을, 그 다음엔 갠달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번 당신은 위급한 순간에 예기치 않게 와주셨군요." "예기치 않았다고? 난 당신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소." "그렇지만 당신은 그 시간은 말씀해 주시지 않았고 또 어떻게 나타나실 것인가도 알려 주시지 않았지요. 당신은 이상한 도움을 가져오셨습니다. 당신의 마법은 정말 위대합니다, 백색의 기사 갠달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난 아직 내 마법을 보여 주지 않았소. 난 다만 위태로울 때 좋은 조언을 해주었고 또 섀도우폭스의 속도를 잘 이용했을 뿐이지. 당신 자신의 용맹과 밤을 새우며 행군한 웨스트폴드 사람들의 튼튼한 다리가 좀더 많은 일을 한 것이오." 그러자 그들 모두는 한층더 놀라 갠달프를 바라보았다. 숲을 몰래 힐끗 바라보고는 마차 다른 것을 본 것처럼 이마에 손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갠달프는 길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 숲 말이오? 아니오. 나도 당신들처럼 숲을 볼 수 있소. 그렇지만 그건 내가 한일이 아니오. 그건 현자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저건 내 계획보다, 심지어 내 희망보다도 멋지게 이루어졌소." 그러자 데오든이 물었다. "당신의 마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마법이란 말이오? 사루만의 마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오.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더 위대한 현자가 있단 말이오?" "저건 마법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권능이오. 요정이 노랠 부르거나 목금이 울리기도 전에 지상을 걸어다녔던 권능이오. 쇠가 발견되기 전, 나무가 베어지기 전, 달 아래 이 산들이 젊었을 때, 반지가 만들어지기 전, 비애가 생기기 전, 오래전 숲을 거닐었다네." "그렇다면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무엇이오?" "그걸 알고 싶다면 당신은 나와 함께 이센가드로 가야 합니다." 갠달프가 대답했다. "이센가드로?" 모두가 외쳤다. "그렇소. 난 이센가드로 돌아갈 것이오. 뜻이 있는 자는 나와 함께 가도 좋소. 거기서 우리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오." "그렇지만 마크에는 사루만의 요새를 공격할 만한 병사가 없소. 모든 병사를 소집하고 또 부상과 피로가 회복된다 해도 그 숫자로는 충분치 못하오." 데오든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갠달프는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센가드로 갑니다. 거기서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 내 갈길은 동쪽이오. 달이 이울기 전에 에도라스에서 날 찾으시오." 그러자 데오든이 대답했다. "아니오! 새벽이 오기 전 어두운 시간에는 믿기지 않았었지만 이제 우리는 헤어져선 안 되오.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소. 그게 당신의 조언이라면 말이오." "난 이제 가능한 한 빨리 사루만과 이야기를 하고자 하오. 그가 당신에게 대단한 피해를 입혔으니 당신도 그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당신은 얼마나 빨리 달려갈 수 있겠소?" "내 병사들은 전투로 지쳤소. 그리고 나도 또한 피로하오. 멀리 말을 달린 데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소. 아! 애석하게도 내 노쇠는 가장이 아니며 또 웜통의 속살거림 때문만도 아니오. 그건 어떤 의술로도 완전히 치유할 수 없는 병이오. 갠달프 당신조차도 말이오." "그렇다면 나와 함께 달려갈 사람들은 지금 모두 쉬게 하시오. 우린 야음을 틈타 행보할 것이오. 그것도 괜찮소. 왜냐하면 이후부터 우리의 행동은 은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이오. 그러나 너무 많은 병사를 이끌고 갈 필요는 없소, 데오든왕. 우린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화평의 담판을 벌이러 가는 것이니까 말이오." 그러자 왕은 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빠른 말을 가진 기사들을 뽑아 마크의 모든 계곡으로 승리의 소식을 알리도록 내보냈다. 또한 그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로한의 모든 남자를 에도라스로 소환하는 포고령도 지니고 있었다. 만월 후 이틀째 되는날 마크의 왕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소집할 것이었다. 또한 왕은 자신과 함께 이센가드로 갈 병사로 요머와 함께 왕실 기사 이십 명을 선발했다. 아라곤, 레골라스, 김리는 물론 갠달프도 함께 갈 것이다. 난쟁이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뒤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미약한 타격에 불과했고 또 투구가 그 타격을 빗겨 주었지요. 그만한 오르크의 할큄 정도로 날 뒤에 남겨 둘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쉬는 동안 내가 자네 상처를 돌봐 주지." 아라곤이 말했다. 왕은 이제 혼버그로 돌아가 수 년 동안 맛보지 못했던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으며 선발된 기사들도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상당하지 않은 나머지 인원은 모두 힘든 노역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쓰러져 들이나 협곡에 죽어 넘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크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의 시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수의 고지인들은 항복해 왔다. 그들은 겁에 질려 살려 달라고 외쳐 댔다. 마크의 병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압수하고 노역을 시켰다. 에르켄브란드가 포로들에게 외쳤다. "이제 네놈들이 한몫 거들었던 해악을 청소하는 데 협조해라! 그리고 이후에는 결코 무기를 소지하고 이센강을 건너지 않을 것과 또 인간들의 적과 연합하는 일이 없을 것을 맹세해라! 그러면 너희들은 자유로이 너희들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너희가 사루만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아니까 말이다. 많은 너희들 동포가 그를 믿었기에 그 대가로 죽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너희가 승리했다하더라도 그 대가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던랜드인들은 몹시 놀랐다. 왜냐하면 사루만의 말에 의하자면 로한인들은 매우잔혹해서 포로들을 모조리 태워 죽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혼버그 앞 들판 한가운데에는 두 개의 거대한 무덤이 세워졌다. 이스트 데일즈의 기사들이 한편에,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웨스트폴드의 기사들이 묻혀졌다. 혼버그의 그림자 아래 외따로 쌓아진 무덤 속에는 왕의 경비대장 하마가 누워 있었다. 그는 성문 앞에서 전사한 것이다. 마크 기사들의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 이상한 숲의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르크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그 썩은 고기의 더미는 태우거나 파묻기에 너무도 거대했기에 그들은 난처했다. 그들에겐 불을 피울 연료도 거의 없었으며 또 설사 갠달프의 주의가 없었더라도 감히 아무도 그 이상한 숲에 도끼를 대려 하지 않았다. "오르크들은 그냥 놔두지. 아침이 되면 묘안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 갠달프가 이렇게 말했다. 오후가 되자 왕의 선발대는 출발준비를 갖추었다. 장례가 시작되고 왕은 경비대장 하마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의 무덤 위에 흙을 뿌리며 왕은 외쳤다. "정말 사루만은 나와 이 대지에 거대한 손상을 입혔다. 우리가 만나게 될 때 난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데오든과 갠달프 그리고 그 동지들이 외호에서 말을 달려 내려갈 때 태양은 이미협곡 서편 구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로한의 기사들과 동굴에 피신해있던 웨스트폴드의 여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늙고 젊은 병사들이 커다란 무리를 짓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맑은 목소리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으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궁금함과 염려로 곧 조용해졌다. 그들은 그 이상한 숲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은 숲의 경계에서 멈추었다. 말과 사람 모두가 숲으로 들어가길 꺼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회색빛으로 사뭇 위협적으로 보였으며 그림자와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다. 길게 뻗친 가지 끝들은 마치 무엇을 찾는 손가락처럼 아래로 처졌으며 뿌리는 이상한 괴물들의 수족처럼 땅에서 드러나 있어 그 아래로 흙이 어둡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갠달프는 선발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혼버그로부터 뻗은 길이 숲과 마주치는 곳에서 그들은 아치형 대문처럼 뚫린 통로를 발견했다. 갠달프가 앞서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그 통로가 놀랍게도 계속해서 뻗쳐 있으며 그 옆으론 개울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위쪽으로 하늘이 훤히 보여 황금빛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양 옆의 숲은 거대한 측랑을 이뤄 꿰뚫을 수 없는 어둠으로 이미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가지들이 삐걱대며 신음하는 소리, 먼 외침소리 그리고 말없이 웅얼거리는 소리 들이 분개하며 투덜대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오르크나 그 밖의 피조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이제 같은 말에 함께 타고 있었다. 김리는 이 숲이 매우 두려웠기에 갠달프 옆으로 바싹 말을 몰게 했다. 레골라스가 갠달프에게 말했다. "이 안은 열기가 차 있군요. 주위에 어떤 거대한 분노가 느껴지는데요. 당신은 공기의 떨림을 느낄 수 있지요?" "느껴지는군." "그 비참한 오르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을걸."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나아갔다. 그러나 레골라스는 계속 이쪽저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만일 김리가 동의하기만 했다면 숲의 소리에 귀기울이려 가끔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이들은 내가 일찍이 보지 못한 이상스러운 나무들이야. 난 많은 떡갈나무들이 다 늙을 때까지 지켜보았었지. 지금 저 나무 사이를 거닐 여유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저들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 그러니 시간만 있다면 나도 저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김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 돼, 안 돼! 저들은 그냥 내버려 둬! 난 벌써 저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어. 두 발로 걸어다니는 모든 생물들에 대한 증오야. 그리고 저들이 하는 말은 짓이기고 질식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두 발로 다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는 아니야. 그 점은 자네가 잘못 짚었을거야. 저들이 증오하는 건 바로 오르크들이라고. 여기가 저들의 땅이 아니기에 저들은 인간과 요정에 관해서 모르는 거야. 저들이 원래 뿌리박았던 땅은 먼 곳일 거야. 아마 짐작건대 판곤의 깊은 골짜기가 원래 저들의 자리였을 거야." "그렇다면 이게 중간계에서 가장 위험한 숲이구만. 저들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해야겠군. 그렇지만 난 저들을 사랑하진 않아. 넌 저들을 놀랍다고 했지만 난 이 땅에서 훨씬 더 놀랄 만한 것을 보았어. 내 가슴은 일찍이 생성된 그 어떤 숲이나 빈터보다 더 아름다운 그곳으로 가득차 있어. 인간들이 하는 일은 이상도 하지, 레골라스. 여기 북부의 그 경이로운 것들을 보고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그냥 동굴이라고 한다고! 동굴들! 전시에는 재빨리 피할 수 있고 양식을 저장해 둘 수 있는 구멍들이라고 한단 말이야! 내 친구 레골라스, 자넨 그 헬름협곡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동굴들을 본 일이 없지? 만일 그런 동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려지면 난쟁이들은 그냥 바라만 보려고라도 끝없이 몰려올 거야. 그럼, 정말이지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 황금을 내놓길 마다하지 않을걸!" "난 그 동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황금을 내놓겠어. 그리고 만일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면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데 그 두 배를 내놓을 것이고!" "자넨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 농담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지. 그렇지만 자넨 바보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오래전에 난쟁이들이 거들어 만든, 지금 자네네 왕께서 계시는 머크우드 숲 속의 언덕 아래 궁전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궁전도 내가 여기서 본 동굴에 비하면 오두막에 불과해. 여기 동굴들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웅덩이로 흘러들어가는 영원한 음악이 가득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궁전이야. 정말 그 별빛으로 빛나는 켈레드 자람만큼이나 아름답더군. 그리고 말이야 레골라스, 횃불에 불이 붙자 그 둥근 천장 아래로 사람들이 모래깔린 바닥위를 걸을 때, 아! 그때면 말이야, 갖가지 보석과 수정 그리고 고귀한 광물이 벽에 반짝거리는 거야. 그 빛은 마치 갈라드리엘의 활기찬 손처럼 겹겹이 포개진 반투명의 벽을 투과해 나오는 거라고. 꿈결같이 하얗고 빨간 무늬가 새겨진 그 장밋빛 원주들이라니! 또 그 원주에는 천장부터 날개, 로프, 얼어붙은 얇은 구름장 같은 커튼, 창, 깃발, 뾰족탑 등 온갖 것들이 매달려 있는 거야. 고요한 호수가 그 광경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어. 그래서 맑은 유리로 덮인 듯 희미하게 온 세계가 드러나고, 우리 듀린족의 정신일지라도 꿈속에서조차 상상하가 힘든 그런 도시들의 거리와 궁전들이 어떠한 빛도 다다를 수 없는 심연에까지 뻗쳐 있지. 그리고 퉁 하고 은빛 방울이 떨어지면 유리 같은 수면의 둥근 무의들이 그 모든 탈들을 바다 속 해초와 산호들처럼 흔들리게 해. 저녁이 되면 그 원주들은 빛이 바래져 명멸하며 모습을 감추고 횃불에 불이 켜지면 또 다른 방과 꿈이 계속 이어지는 거야. 끝없는 방들이었어, 레골라스. 궁전에 또 다른 궁전이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굽이치듯 뻗은 길은 계속 산맥의 심장부로 이어지고 있고. 아, 그 동굴들! 헬름협곡의 동굴들! 내가 그곳으로 몰려가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재수좋은 일이었어. 그 동굴들을 떠나자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지."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돌아와 그 동굴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물론 자네에게 말이지만, 바라겠네. 하지만 자네 종족 전부에게 말하진 말라구! 자네 말에 의하자면 자네 종족들이 할 일이 별로 남지 않았다면서. 이 땅의 인간들이 자네같이 떠벌리지 않는 건 정말 현명한 일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망치와 끌을 든 분주한 난쟁이들 때문에 성한 것보다는 망가진 게 더 많았을 테니까 말이야." "아냐, 자네는 이해를 못하는군. 어떤 난쟁이도 그런 절경을 망치지는 않아. 듀린의 종족이라면 돌이나 광석을 캐내겠다고 그런 동굴을 망치려 들지는 않는단 말이야. 심지어 거기서 다이아몬드와 금을 캐낼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파헤치지 않을거라고. 자네 같으면 땔감을 구하기 위해 봄철의 나무를 베내겠어? 우리도 그 꽃이 피는 돌이 가득한 그 숲속의 빈터를 돌볼지언정 결코 그 돌을 잘라내진 않아. 조심스럽게 살살 두드려서 - 아마 하루 온종일 노심초사해도 작은 바위 부스러기 하나를 넘지 않을 거야 - 우린 일을 할 것이고, 그러면 해가 감에 따라 새로운 길이 열리고 아직껏 어둡고 빈 공간 같았던 그 심연의 방들도 내보일 수 있을 거야. 빛도 드러낼 수 있을 것이고. 한때 카잣 둠에서 빛을 발하던 램프 같은 새로운 빛을 만들어야 해. 그 구릉이 생겨난 이래 깔렸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말이지. 우린단지 휴식이 필요할 때만 밤이 찾아오는 것을 허용할 거야." "자네 말에 감동했네, 김리! 전에는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지. 자네 말을 들으니 그 동굴들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게 느껴질 정도야. 자, 우리 이런 약속을 하는 게 어때. 만일 우리 둘 모두가 앞에 놓인 위험들을 무사히 체치고 돌아올 수 있다면 한동안 함께 여행하자고. 우선 자네가 나와 함께 판곤을 방문하고 그 다음엔 내가 자네와 함께 헬름협곡의 동굴을 보러 가는 거야."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귀환길은 아닌 것 같군. 그렇지만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면, 그리고 자네가 나와 함께 그 동굴의 경이를 공유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도 판곤으로의 여행을 기꺼이 견뎌내겠어." "약속하지.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우린 한동안 숲과 동굴 양쪽 모두를 뒤로해야 해. 보라구! 우린 숲이 끝나는 곳까지 왔잖아. 갠달프, 이센가드까지는 얼마나 남았지요?" "사루만의 까마귀들이 날아가는 시간으로 보아 약 사십오 마일쯤 되지. 헬름협곡 어귀에서 이센강의 여울까지가 십오 마일이고 거기서 이센가드 성문까지가 약 삼십 마일쯤 되네. 그렇지만 우린 오늘밤 그 거리를 주파하진 않을 걸세." 그러자 김리도 물었다. "거기 도착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요? 당신은 아실 테지만 난 짐작도 못하겠어요." "나 자신도 확실히는 모르지. 나는 어제 해질녘에 그곳에 있었지만 그 후로도 많은 일이 벌어졌을 거야. 그렇지만 자네들이 이 길이 허사였다고 생각지는 않을 거라고 믿네. 비록 아글라론드의 그 반짝이는 동굴을 못 본다 하더라도 말이야." 드디어 왕의 부대는 나무들을 헤쳐 나가 헬름골짜기의 맨 아랫부분에 이르렀다. 그곳으로부터 길이 갈라져 하나는 동쪽 에도라스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북쪽 이센강의 여울로 향하고 있었다. 레골라스는 숲의 경계를 넘어서자 발을 멈추고 아쉽다는 듯 뒤를 돌아보다가 갑자기 외쳤다. "눈이야! 저 가지들의 그림자로부터 밖을 내다보는 눈이 있어요. 전에는 저런 눈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외침소리에 놀라 다른 사람들도 숲을 뒤돌아보았다. 레골라스는 말을 돌려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리가 외쳐 댔다. "안 돼, 안 된다구! 자넨 정신나간 대로 해도 좋지만 제발 난 이 말에서 내리게 해줘! 난 어떤 눈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러자 갠달프도 외쳤다. "가만히 있게, 레골라스 그린리프! 숲속으로 들어가지 말아!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고!" 바로 그때 나무들 사이에서 세 개의 이상한 형체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신화에나 등장하는 거인들처럼 사 미터 가까이 되는 큰 체구에 젊은 나무같이 강건하고 탄탄한 신체였으며 회색과 갈색의 꽉 끼는 짐승가죽을 둘러입은 것처럼 보였다. 사지는 길었으며 손에는 많은 손가락이 달렸고 머리칼은 빳빳했고 턱수염은 이끼처럼 회록색으로 늘어졌다. 그들은 엄숙한 눈으로 밖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사들이 아니라 북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은 긴 손을 입가로 올려 나팔처럼 맑지만 좀더 음악적이고 다양한 외침을 터뜨렸다. 곧 답하는 외침소리가 들려와 기사들이 다시 몸을 돌리자 앞서의 그 거한들과 같은 종족인 듯한 다른 자들이 풀밭을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물을 건너는 왜가리 같은 걸음걸이로, 그러나 속도는 왜가리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북쪽으로부터 걸어왔다. 그들의 발은 긴 보폭을 지으며 움직였다. 기사들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일부는 칼자루에 손을 댔다. 그러나 갠달프가 말했다. "무기는 필요없어. 저들은 목자들일 뿐이야. 저들은 적이 아니야. 정말이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사이 그 거한들은 기사들에게 일별도 보내지 않고 숲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데오든이 입을 열었다. "목자들? 그렇다면 그들의 가축떼는 어디 있소? 어디 있는 거요, 갠달프? 어쨌든 당신에게는 그들이 낯설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그들은 나무의 목자들이오. 노변에서 이야기를 들은 지가 그렇게 오래되었소? 당신네 땅에는 뒤얽힌 옛이야기로부터 당신의 지금 물음에 대한 답을 뽑아낼 수 있는 어린이들이 있을 겁니다. 당신은 엔트, 당신네 말로 하자면 엔트우드라 부르는 판곤숲의 엔트를 본 적이 있소. 왕이여, 당신은 그 이름이 단지 한가한 공상 속에나 나오는 걸로 생각했소? 아니오, 데오든, 그렇지 않소. 그들에게는 당신도 흘러지나가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오. 청년왕 욜에서부터 노왕 데오든에 이르기까지의 그 긴 세월도 그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일 뿐이고 당신 왕가의 그 모든 업적도 하찮은 작은 문제에 불과하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엔트라고? 전설의 음영에 비추어 그 나무들의 경이로운 일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소. 살다보니 정말 이상한 때도 다 겪는구려. 우리는 오랫동안 가축과 대지를 돌보고 집을 짓고 연장을 만들거나 말을 달려 미나스 티리스의 전쟁을 거들어 왔소. 그리고 우린 그걸 인간의 삶,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해 왔소. 우린 우리 국토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선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소. 우리에겐 그런 것들에 대해 노래하는 전설들이 있소만 무심한 관습으로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가르칠 뿐 잊어 버리고 있었소. 그런데 이제야 그 노래들이 이상한 곳으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왔으며 또 태양 아래 가시적으로 걸어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당신은 기뻐하셔야 하오, 데오든왕. 왜냐하면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인간들의 작은 삶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전설로 여겨 왔던 그런 것들의 삶도 위험에 처해 있으니 말이오. 설사 당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당신에겐 동맹군이 없지 않은 거요." "그렇지만 나는 또한 슬퍼해야 하오. 왜냐하면 전쟁의 승패가 어떻게 판가름나게 되든 결국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많은 것들이 이 중간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지요. 사우론의 악은 완전히 치유될 수 없고 또 없었던 것처럼 될 수도 없소. 우리는 그러한 시절을 대면할 운명이오. 이제 우리가 시작한 이 길을 계속해 나갑시다." 부대는 골짜기와 숲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여울로 향하는 길을 따랐다. 레골라스는 마지못해 뒤따랐다. 해는 져서 이미 세상의 테두리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이 구릉의 그림자를 벗어나 달리며 서쪽 로한의 계곡을 바라보았을 때 하늘은 아직도 붉었으며 떠도는 구름 아래에는 타는 듯한 황혼이 깔려 있었다. 검은 날개의 새가 수없이 하늘을 등지고 선회하며 날았다. 일부는 슬픔에 잠긴 듯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 바위 속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요머가 입을 열었다.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이 전장 주변에서 분주했군." 이제 그들은 느릿한 속도로 달렸다. 주위의 평원에는 어둠이 깔렸다. 만월에 가까운 달이 떠오르며 초원은 그 차가운 은색 빛을 받아 회색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갈림길로부터 네 시간쯤 달리고 나자 여울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풀이 덮인 높은 구릉 사이로 흐르는 강변으로 비탈길이 길게 뻗쳤다. 늑대의 울부짖음이 바람을 타고 다가왔다. 기사들은 이곳의 전투에서 쓰러졌던 많은 동료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잔디 깔린 둑 사이로 뻗친 길은 강변으로 이어졌다가 이윽고 저편 기슭에서 다시 위로 오르막길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엔 여울을 가로질러 세 줄의 징검다리가 길게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말이 건널 수 있는 길이 나 있었다. 기사들은 무언가 수상쩍은 느낌을 갖고 그 도강로를 바라보았다. 이 여울은 언제나 돌멩이를 위로 솟구치게 할 정도로 세차게 흘렀던 곳인데 지금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강바닥은 거의 말라 버려 조약돌과 회색 모래의 벌거벗은 황무지가 되었다. 요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량한 곳이 되어 버렸군.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사루만은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도 이센강의 수원지마저 삼켜 버렸단 말인가?"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런 것 같소." 데오든이 탄식하듯 말했다. "아,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들이 마크의 그 많은 기사들을 삼켜 버린 이 길을 꼭 건너야만 하는 건가요?" 그러자 갠달프가 답했다. "이것이 우리가 갈 길이오. 당신의 병사들의 죽음은 애석한 일이오. 그러나 적어도당신은 산에 사는 늑대들이 그들을 삼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요. 늑대들이 포식을 한 것은 그들의 친구인 오르크들 덕택이오. 그런 것이 그들 족속의 우정이란 것이지. 갑시다." 그들은 강으로 말을 몰았다. 그들이 다가가자 늑대들은 울부짖음을 멎으며 슬금슬금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빛나는 갠달프와 섀도우폭스를 보고 겁을 낸 것이었다. 기사들은 강 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건너갔다. 그때 반짝이는 눈들이 저편 둑의 어두운 음영 속에서 음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보시오! 우리의 친구들이 이곳에서 곤욕을 치렀소." 그들은 작은 섬 가운데에 돌로 둥글게 에워싸인, 많은 창이 꽂혀 있는 무덤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이 근처에서 쓰러진 마크의 모든 기사들이 여기 누워 있소." 그러자 요머가 외쳤다. "평화로이 잠들게 하소서! 그리고 이 창들이 썩고 녹슬지라도 이 무덤만은 영원히 남아 이센강의 여울을 지켜 주소서!" 데오든은 갠달프에게 물었다. "이것도 당신이 해주신 일이오, 내 친구 갠달프여? 하루 저녁과 밤에 많은 일을 하셨소이다. " "섀도우폭스의 도움을 받았지요. 그 밖에도 도와 준 이들이 있었고. 난 멀리까지 말을 달렸었소. 그런데 여기 무덤 옆에서 당신에게 위안이 될 말을 해드리겠소. 여울에서의 전투에서 비록 맡은 기사들이 쓰러졌지만 소문보다는 적은 숫자였소. 죽은 자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쫓겨 갔었기에 난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한데 규합했소. 그 중 일부는 에르켄브란드와 합류하도록 보냈고 일부는 당신이 보고계시는 이 노역에 투입했었소. 그리고 이제 그들은 에도라스에 도착했을 거요. 앞서도 당신의 궁전을 지키기 위해 많은 기사들을 그곳으로 보냈소. 내가 알기에 사루만은 당신을 무찌르기 위해 전 병력을 급파했고 그들은 다른 모든 임무를 제쳐 놓고 헬름협곡으로 갔던 것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늑대의 기사들과 약탈자들이 방비되지 않는 사이에 메두셀드로 달려가지나 않았을까 염려했지요. 그러나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당신이 귀환하면 무사한 궁전과 국민들이 환영할 것이오." "내가 거기 머물 시간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궁전을 다시 보게 된다면 기쁘기 그지없겠소." 그 말과 함께 부대는 섬과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강을 건너 건너편 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비탄의 여울을 떠나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 달려갔다. 그들이 나아감에 따라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새로 들리기 시작했다. 이센가드로부터 도강로까지는 아주 오래된 큰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강을 따라 동쪽, 북쪽으로 굽이지며 한동안 강과 나란히 펼쳐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선 방향을 돌려 이센가드의 성문을 향해 곧바로 뻗쳤다. 성문은 계곡 입구에서 십육 마일 남짓 들어간 서편 산허리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갔으나 바로 길위로 말을 달리진 않았다. 왜냐하면 길 옆 땅이 수마일에 걸치는 짧고 탄력있는 잔디밭을 이루고 있었기에 말을 달리기 좋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좀더 빨리 달려 한밤중이 되었을 땐 여울로부터 거의 십오 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밤의 행정을 끝내고 멈춰섰다. 왕이 너무 지친 까닭이었다. 그들은 안개산맥의 기슭에 당도했으며 난 쿠루니르(사루만의 계곡)의 긴 팔과 같은 지맥들이 쭉 뻗쳐 내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달이 서쪽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그들은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버린 계곡만을 볼 수 있었다. 계곡의 짙은 그림자로부터 연기와 증기가 뒤섞인 거대한 소용돌이가 솟아올라 기우는 달빛을 받으며 별이 총총한 하늘위로 금빛, 은빛의 파도를 이뤄 퍼졌다. 아라곤이 입을 열었다. "저걸 어떻게 생각하시오, 갠달프? 마법사의 계곡이 온통 불타고 있는가 봅니다." 그러자 요머도 말했다. "요즘 저 계곡 위로는 언제나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이런 광경은본 적이 없는데요. 이건 연기라기보다는 증기라 하는 게 옳겠군요. 사루만이 우릴 환영하기 위해 무슨 사악한 술책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 이센강의 물을 모조리 끓이고 있는가 보지요 그게 바로 그 강이 말라 버린 이유겠고요." 갠달프가 대답했다.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내일이면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알게 될 거요. 괜찮다면 이제 잠시 쉽시다." 그들은 이센강의 강변에 캠프를 쳤다. 그곳은 여전히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잠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밤늦게 경비병이 소리를 질러 모두가 깨어났다. 달은 보이지 않았고 별들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땅 위로는 밤보다 더 검은 어둠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북쪽을 향해 움직이며 그들을 향해 강 양측을 굽이쳐 올라왔다. 갠달프가 외쳤다. "움직이지 말아! 무기를 빼지 말아! 기다려! 그러면 그냥 지나갈 거야!" 그들 주위로 안개가 몰려들었다. 별이 간간이 희미하게나마 반짝였으나 사방은 칠흑의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는 그림자의 탑들 사이의 좁은 샛길에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 소근거리는 소리, 신음소리, 끝없이 술렁이는 한숨소리가 들려왔으며 발 아래 대지가 진동했다. 두려워하며 앉아 있는 시간이 상당히 오랫동안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어둠과 술렁임은 산맥의 지맥 사이로 사라졌다. 남으로 멀리 떨어진 혼버그에서도 한밤중에 계곡을 휩쓰는 바람과 같은 거대한 소음이 들리며 대지가 진동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으며 아무도 감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아침에 나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르크들의 시체 더미가 온데간데 없어졌으며 그 이상한 숲도 사라졌던 것이다. 헬름협곡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는 마치 거인목자들이 거대한 무리의 가축을 풀어 놓았던 것처럼 풀밭이 짓밟히고 으깨져 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로 아래 일 마일 되는 곳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으며 그 위로 돌이 쌓아 올려져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곳에 오르크의 시체가 묻혔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숲속으로 도망쳤던 오르크들도 그들과 함께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언덕 위에 말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후에 죽음의 고지라 이름붙여졌으며 풀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숲은 헬름협곡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숲은 밤에 왔다가 다시 멀리 떨어진 판곤의 어두운 계곡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오르크들에게 복수한 것이다. 왕과 그 부대는 그날 밤 더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상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한 가지는 이제껏 고요했던 곁의 강물이 갑자기 일깨워진 것이었다. 강물이 급속도로 불어나 돌 사이로 세차게 흘러내렸고 이센강은 언제나 그랬듯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새벽에 그들은 다시 나아갈 차비를 갖췄다. 대기가 회색으로 흐릿해 그들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안개가 끼어 대기는 무거웠으며 주위에는 증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큰길 위를 달려 천천히 전진했다. 길은 넓고 탄탄했으며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들은 왼쪽으로 기다랗게 솟아오른 산맥의 지맥을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법사의 계곡, 난 쿠루니르로 들어섰다. 그곳은 차폐된 계곡으로 오직 남쪽으로만 열려 있었으며 한때는 아름답고 푸르렀었다. 그 안쪽으로부터 이센강이 깊고 거세게 흘러내려 왔었으며 비 모인 구릉 속의 많은 개울과 그보다 작은 샘물이 그리로 흘러들어 강 주변을 쾌적하고 비옥한 대지로 만들고 있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센가드의 성벽 아래에는 아직도 사루만의 노예들이 경작하는 논밭이 있었으나 그 계곡의 대부분은 갖가지 잡초와 가시덤불로 덮인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가시가 달린 관목들이 땅 위로 뻗치거나 수풀과 둑 위로 기어올라 텁수룩한 동굴들을 형성해 작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무가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우거진 풀숲 속에선 아직도 불타고 도끼로 베어진 나무그루터기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급류가 돌에 부딪는 소리 외에는 아주 고요했지만 서글픈 땅이었다. 연기와 증기가 음산한 구름장을 이루어 떠다니다가 움푹 꺼진 곳으로 기어들었다. 기사들은 말이 없었다. 대부분이 자신들의 이 여행이 어떤 음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가슴 속 깊이 미심쩍어했다. 몇 마일 계속 전진하자 길은 크고 평평한 돌로 포장된 넓은 포도로 변했다. 바닥에 포장된 돌들은 솜씨있게 네모반듯이 잘라져 있었기에 이음새에는 풀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포도 양쪽으로는 깊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앞쪽으로 높은 기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기둥 위에는 조각된 커다란 하얀 손과 함께 채색된 거대한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긴 손가락들은 북쪽을 가리켰다. 기사들은 이센가드의 성문에 거의 다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시야를 막아선 안개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짙었다. 마법사의 계곡 속에 있는 팔 모양의 지맥 아래에는 인간들이 이센가드라고 부르는 그 유구한 땅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 자리잡아 왔다. 부분적으로는 산맥이 형성될 때 조성되었으나 과거 서역인들이 이곳에 크나큰 역사를 벌였고 또 사루만이 오래 기거하면서 보강을 한 것이었다. 사루만이 많은 이들에게 마법사의 우두머리로 간주되었던 그의 전성기에 이곳의 구조는 이러하였다. 고리형의 거대한 돌벽이 벼랑처럼 가파른 산허리에서 시작되어 산을 한바퀴 두르고 이어졌다. 그 벽에는 단 하나의 출구만이 뚫려 있었다. 바로 남쪽 벽의 거대한 아치가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검은 바위를 관통하여 긴 터널이 하나 뚫렸고 양쪽 끝은 육중한 철문으로 봉쇄되었다. 철문은 참으로 정교하게 제작된데다 또 생명의 돌 속으로 깊숙히 박힌 철주를 거대한 돌쩌귀로 하여 설치되었기에 빗장을 지르지 않았을 때는 가볍게 한 손으로 밀기만 해도 소리없이 여닫을 수가 있었다. 반향되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안으로 나서게 되면 방대하지만 다소 우묵하게 파였으며 폭이 일 마일 정도 됨직한 거대한 원형의 평원을 마주하게 된다. 한때 이 평원은 푸르렀으며 산맥에서 호수로 흘러드는 개울물에서 수분을 취하는 유실수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사루만이 지배한 근년에 이르러선 초록의 생명은 이미 존재할 수 없었다. 도로엔 검고 단단한 판석이 깔렸으며 그 가장자리엔 나무 대신 대리석과 구리, 쇠로 만들어진 기둥들이 둔중한 사슬로 이어진 채 행진하듯 길게 줄지어 세워졌다. 이곳엔 많은 가옥과 방, 공회당 그리고 통로가 있었지만 모두가 안쪽 벽 속에 들어맞게 설계되었으며 또 지하도를 통해 도로벽과 이어져 있어 수많은 창과 컴컴한 문에서 탁 트인 원형의 평원 전체를 굽어볼 수 있었다. 이곳에선 일꾼들, 하인들, 노예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무기를 소지한 전사들 수천 명이 기거할 수 있었으며 그 아래의 깊은 굴에는 늑대들이 사육되었다. 평원도 군데군데 움푹 파이거나 구멍이 뚫렸다. 땅 속 깊숙히 기둥이 박혀졌고 그 위로 돌로. 만든 둥근 원형 천장이 조성되어 이센가드는 마치 동요하는 사자(死者)들의 무덤 같아 보였다. 대지가 진동했다. 그 기둥들은 많은 비탈과 나선형의 층계를 거쳐 아래쪽 깊숙한 동굴에까지 내리뻗쳤으며 사루만은 그곳에 갖가지 보고, 창고, 병기고, 조병소 그리고 거대한 화덕을 갖추어 놓았다. 거기선 끊임없이 쇠바퀴가 돌고 망치가 쿵쾅거렸다. 밤이면 통기구로부터 붉은빛, 푸른빛 그리고 유독한 초록빛의 증기가 피어올랐다. 모든 도로는 서로 연결되어 이상한 형체의 탑이 우뚝 서 있는 중앙으로 통했다. 그것은 반지형의 이센가드를 매끄럽게 다듬어 냈던 옛날 장인들의 작품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 구릉이 지각변동의 격동을 겪었을 때 대지의 견고한 부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은 섬 위에산봉우리가 우뚝 솟은 형상으로 검고 단단한 암석덩이가 희미하게 번득였다. 다면체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하나로 접합되어 있었으나 꼭대기부분에 이르러선 각기 갈라져 돌출했으며 그 돌출부는 창끝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기둥들의 맨 위 돌출부 사이에는 좁은 공간이 있었고 그 위에 올려진 이상한기호들이 새겨진 돌탑은 지상으로부터 백오십 미터 아상의 높이였다. 이것이 바로사루만의 성채 오탕크로서 그 이름은 우연이건 의도적이건 간에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요정의 언어로 오탕크는 독아산(毒牙山)을 의미했으며 마크의 언어로는 간교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센가드는 견고하고 경이로운 땅으로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위대한 영주들, 서쪽 곤도르의 경비대장들 그리고 별을 관측하는 현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루만이 자신의 변덕스러운 목적에 맞게끔 천천히 변형시켜 왔으며 또 보다 견고하게 조성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망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옛 지혜를 버리고 대신 선택했으며 또 경솔하게도 자신의 고안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책략과 간계는 사실 모르도르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낸 작품은 사실 저 거대한 요새이자 병기고, 감옥, 화덕인 암흑의 성채 바랏 두르를 조그맣게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추종자에 의해 실물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암흑의 성채는 실로 타의 축종을 불허하며 과장을 비웃고 때론 기다리며 스스로의 자부심과 한량없는 힘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다. 사루만의 성채에 대한 평판은 대체로 이러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전해진 기억으로는 웜통처럼 비밀리에 출입했으나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몇몇 외에는 로한인들 중 아무도 이 성 안을 들어가 본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갠달프는 손 모양의 거대한 기둥을 지나 말을 달렸다. 기사들은 그 손이 더이상 흰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랐다. 그 거대한 손은 말라붙은 피로 더러워졌으며 손톱은 붉은색이었다. 갠달프는 개의치 않고 안개 속을 계속 달렸으며 기사들도 마지못해 그를 따랐다. 사방은 마치 갑작스런 홍수라도 났던 것처럼 움푹파인 곳은 물이 가득찼고 또 길 옆으로도 커다란 물웅덩이들이 있었으며 돌 틈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갠달프는 말을 멈추고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저편엔 안개가 걷히고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났다. 그들은 이센가드의 성문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성문은 찢기듯 비틀린 채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주위는 온통 수없이 많은 전쟁의 파편들과 갈라지고 쪼개진 돌이 날려 있어 폐허의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터널은 노출되었고 양쪽 벼랑 같은 벽에는 커다란 구멍들이 뚫렸으며 탑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바다가 노해 일어나 폭풍우를 몰고 구릉을 덮쳤다 하더라도 이보다 큰 파멸을 가져오진 못했을 것 같았다. 건너편의 반지꼴 평원은 부글부글 끓는 커다란 솥처럼 증거를 뿜는 물로 가득차 그 위로 들보와 기둥, 상자와 통 그리고 부서진 톱니바퀴 등 파편들이 가라앉거나 떠다니고 있었다. 비틀어지고 기울어진 기둥들의 조각들이 물 위로 솟아올랐으며 모든 도로가 물에 잠겨 있었다. 멀리 구불구불하게 뻗친 구름 속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섬처럼 바위가 불쑥 드러나 있었다. 오탕크는 폭풍우에도 부서지지 않고 여전히 검고 우뚝한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파리한 물결이 성채의 밑바닥을 찰랑거렸다. 왕과 그 부대는 사루만의 권능이 파괴된 광경을 놀라워하며,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지는 짐작도 못하며 말을 잊고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치 밑의 통로와 폐허가 된 성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거대한 잡석더미가 있었다. 그들은 그 더미 사이에서 거의 분간이 되지 않는 두 개의 작은 형체가 회색 옷을 입은 채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곁에는 막 주연을 끝내고 이제 일거리에서 벗어나 쉬고 있는 듯이 병과 그릇과 접시들이 널려 있었다. 하나는 잠든 것 같았으나 다른 하나는 다리를 꼰 채 머리 뒤에 팔을 받치고서 부서진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입에서 가늘고 푸른 연기를 길게 뿜어 내가도 하고 조그맣게 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잠시 데오든과 요머 그리고 모든 기사들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이센가드의 잔해 가운데 있는 이들이 더할 수 없는 이상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라나 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기를 내뿜던 작은 형체가 갑자기 그 안개와 가장자리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귀는 인간의 반 이상 되어 보이지 않았으나 젊은이로 보이는, 또는 젊은이 같아 보이는 자였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칼로 덮인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그는, 비록 여행으로 더러워지긴 했으나 갠달프의 동지들이 에도라스로 말을 달렸을 때 입었던 것과 똑같은 색깔과 형태의 망또를 입고 있었다. 그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깊숙히 머리 숙여 절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마법사와 그 친구들을 보지 못한 듯 요머와 왕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센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하나이다! 저흰 문지기들로서 제 이름은 사라독의 아들 페리아독입니다. 그리고 가엾게도 피로로 곯아떨어진 제 동지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발로 잠든 친구를 툭 건드렸다.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으로 투크가문입니다. 저희의 고향은 멀리 북부에 있습니다. 사루만 영주께선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웜통과 같은 자와 밀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귀하들처럼 고귀한 손님을 맞으러 이리 나올 겁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그렇게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들에게 접시와 술병에 신경을 쓰지 않을 때는 파괴된 문을 지키고 앉아 이렇게 손님들이 오시는 걸 살피라고 명령한 자가 바로 사루만인가?" 그러자 메리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아니올시다. 선량하신 분이시여, 그는 전혀 이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많은 일에 매달려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이센가드를 넘겨받은 트리비어드에게 명령을 받았지요. 그는 로한의 영주를 합당한 언사로 환영하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전 제 최선을 다한 것이올시다." 그러자 더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는 듯 김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네 동지들은 어떻게 됐지? 레골라스와 난 어떻게 됐느냐구! 이 악당 같은 놈들! 뺨이 복슬털에 싸여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 머리도 쓸 줄 모르는 놈들아! 네놈들 때문에 우린 멋진 추격을 벌였었다구! 네놈들을 구하려고 늪이고 숲이고 가리지 않고 전장과 죽음을 헤치며 육백 마일을 달렸단 말이다! 그리곤 마침내 여기서 네놈들이 성찬을 끝내고 게으름을 피우며 게다가 담배까지 피우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다니! 담배를 피워? 그 담배는 어디서 구한 거야, 이 악당아? 내 가슴은 지금 너무나 맹렬한 분노와 환희로 갈라져 만일 터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정도라구!" 그러자 레골라스도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었군, 김리. 난 저 친구들이 어떻게 저 술을 손에 넣었는지가 더 궁금하지만 말이야." 그러자 피핀이 눈을 뜨며 말했다. "당신들은 추적하면서 한 가지를 알아 내지 못했지요. 그건 바로 당신들보다 총명한 재치를 못 알아본 거라구요. 여기 우리가 승리의 들판에 엄청난 무리의 시체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걸 보고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몇 가지 위락물을 손에 넣었는가 의아하게 생각하니 말이에요." 그러자 김리가 다시 외쳤다.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라고? 난 그걸 믿을 수 없어!"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데오든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 소중한 친구들이 재회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군. 그래 이들이 당신들 원정대원 중 실종되었던 자들이오, 갠달프? 요즘은 정말 놀라운 일들만 일어나도록 된 시절인가 보오. 내 궁정을 떠나온 이래 벌써 많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지만 지금 또다시 내 앞에 전설상의 종족이 서 있구려. 이들이 바로 우리들 중일부가 홀비트라라고 부르는 하플링이 아니오?" 그러자 피핀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호비트올시다, 전하," "호비트라구? 자네들 말은 이상하게 바뀌었군. 그렇지만 그 이름도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 않군. 호비트라! 내가 받은 보고 중엔 그 이름을 정확히 알리는 게 없었어."메리는 머리를 숙였고 피핀도 일어나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자비로우시나이다, 전하. 아니면 전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 있나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 저는 많은 곳을 헤매 다녔지만 지금껏 호비트에 대해 어떤 이야기라도 알고 있는 종족은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은 오래전에 북부에서 왔지. 그러나 난 자네들을 속이진 않겠네. 우리도 호비트에 관해선 아는 게 없지. 우리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는 많은 언덕과 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 모래언덕 속 구멍에 사는 인간의 반 크기의 종족이 있다는 정도니까. 그러나 그 종족의 행동에 관한 전설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별로 행동하지 않고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인간의 눈을 피하고 또 새소리처럼 목소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라지. 그렇지만 더 많은 걸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정녕 그럴 것이올시다, 전하." "일례를 들어 난 그들이 입에서 연기를 내뿜는다는 걸 들은 적이 없어."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올시다. 왜냐하면 그건 저희 사이에서 시작된 지 몇 세대 안 된 재주니까요. 우리 식의 계산으로 1070년경에 정원에 진짜 담배를 처음으로 재배한 자가 바로 사우스파딩의 롱바텀마을의 토볼드 혼블로우어였지요. 어떻게 해서 늙은 토비가 그 식물을 입수하게 되었는가......" 그러자 갠달프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지금 처한 위험을 모르시오, 데오든왕. 이 호비트들은 만일 당신이 필요이상 참아가며 부추겨 주면 이 폐허의 가장자리에 앉아 식탁의 즐거움과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구촌에 이르기까지 먼 친척들의 자질구레한 행적을 이야기할 것이오. 끽연의 역사를 들으려면 다음에 따로 시간을 마련하는 게보다 합당할 것이오. 트리비어드는 어디 있지, 메리?" "북쪽 먼 곳에 있을 거예요. 맑은 물을 마시러 갔어요. 다른 엔트들 대부분도 그와 같이 있고요. 여전히 일하느라 분주하죠. 저 너머에서 말이에요." 메리는 증기가 피어오르는 호수를 가리키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산허리에서산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우르렁대고 덜컹덜컹대는 굉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또한 의기양양하게 부는 나팔소리와 함께 흠흠 소리가 다가왔다. "그럼 오탕크를 지키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둔 건가?" 갠달프가 물었다. 그러자 메리가 대답했다. "저 물바다를 보세요. 퀵빔과 다른 몇몇 엔트가 감시하고 있어요. 평원에 있는 저 말뚝과 기둥 모두가 사루만이 박은 건 아니에요. 퀵빔이 층계 밑바닥 부근의 바위곁에 있을 거예요."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했다. "그렇군, 키 큰 회색 엔트 한 명이 거기 있어. 그런데 양 팔을 옆구리에 댄 채 문 앞의 나무처럼 조용히 서 있군." 갠달프가 말했다. "정오가 넘었어. 그리고 사정이야 어쨌든 우린 이른 아침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 그렇지만 난 가능한 한 빨리 트리비어드를 만나 보고 싶은데. 그가 아무 전갈도 남기지 않았나, 아니면 접시와 술병에 정신이 팔려 잊어 버렸나?" 그러자 메리가 대답했다. "전갈을 남겼어요. 이제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다른 많은 질문들 때문에 못했지요. 마크의 왕과 갠달프께서 북쪽 벽으로 달려오면 거기서 트리비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또 환영받으실 거래요. 덧붙여 말하자면 거기서 최고의 음식을 구경하게 될 거예요. 그건 미천한 소인들이 발견해 선별한 것이랍니다." 제9장 표류물 갠달프와 왕 일행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폐허가 된 이센가드의 성벽을 한바퀴 돌면서 떠나갔다. 그러나 아라곤과 김리 그리고 레골라스는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아롯과 하수펠은 풀밭을 찾아 어슬렁거리게 놓아 둔 채 호비트들 곁에 앉았다. 아라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자! 이제 추적은 끝나고 마침내 다시 만났어.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올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이곳에서 말이야." 그러자 레골라스도 말했다. "높은 분들이 중대한 문제를 논의하러 갔으니 우린 마음 속에 품었던 작은 수수께끼들이나 풀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린 자네들 자취를 좇아 그 숲까지 갔었어. 그렇지만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아." "그렇지만 우리도 당신들에 관해서 알고 싶은 게 많다고요. 그 늙은 엔트 트리비어드에게서 몇 가지는 알게 됐지만 그걸로 족하진 않아요." 하고 메리도 말했다. 그러자 레골라스가 대답했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우리가 추적자였으니 자네들이 먼저 설명을 해줘야지." 김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면 그걸 두번째로 하지. 뭘 좀 먹은 후에 들으면 더 좋을 거야. 난 머리에 부상을 당한 데다 시간도 이미 정오가 지났어. 이 말썽꾼들아, 너희가 말한 전리품의 일부를 우리에게 대접하면 신세를 조금 갚을 수도 있잖아. 음식과 음료수를 내놓는 다면 내게 진 빛을 갚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그냥 듣겠어요? 아니면 폐허라도 그런 대로 온전한 사루만의 경비초소에서 좀더 편안하게 듣는 게 낫겠어요? 저 건너편 아치 아래 말이에요. 우린 길을 감시하기 위해 이리로 소풍을 나와야 했거든요." 하고 메리가 말하자 김리가 냉큼 받아 "감시는 무슨 감시! 그렇지만 난 오르크의 건물이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들어가지 않겠어. 또 오르크들이 먹는 고기나 그놈들이 때려잡은 것에는 결코 손대지 않아!" 하자 메리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하라고 하지도 않아요. 우린 평생이 걸릴 만큼 많은 오르크들을 잡았어요. 그렇지만 이센가드엔 다른 종족들도 많았어요. 사루만은 오르크들을 신뢰하지 않을 정도의 지혜는 갖고 있었지요. 그는 경비는 인간들에게 시켰어요. 내 생각엔 그들이 그의 가장 충직한 노예 축에 들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들은 총애를 받았는지 먹을 것도 좋은 걸 받았더라고." "담배도?" 김리가 물었다. "아니, 그건 없을 거예요." 메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다른 얘기니까 점심식사 후로 미뤄도 될 거예요." "그럼 가서 점심을 들자구." 난쟁이가 말했다. 호비트들이 안내해 그들은 아치를 지나 층계 맨 위에 있는 왼편의 넓은 문에 이르렀다. 그 문을 지나니 다른 작은 문들로 통했으며 그 안에는 난로와 굴뚝이 설치된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 방은 돌을 깎아 만들어졌는데 창문들이 오로지 터널 쪽으로만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아주 어두웠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부서진 지붕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난로엔 장작이 타고 있었다. 피핀이 먼저 말했다. "내가 불을 좀 피워 놓았어요. 안개 속에서 불은 원기를 돋워 주거든. 주위엔 장작이 거의 없어요. 또 우리가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다 축축이 젖은 것이었고요. 그렇지만 굴뚝이 잘 통하니까요. 아마 바위를 뚫어서 위로 구불구불하게 통한 모양인데 다행히 막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바로 불을 사용하지요. 먼저 토스트를 좀 만들어 줄게요. 그런데 빵이 사나흘 묵은 거라서." 아라곤과 그의 동료들은 긴 식탁의 한쪽 끝에 앉았고 호비트들은 안으로 통한 문들 중 하나를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접시, 그릇, 컵, 칼 그리고 여러 가지의 음식을 들고 왔다. 피핀이 말했다. "광이 저기 있는데 운좋게도 홍수를 피했어요." 그러자 메리도 말했다. "그 여물을 보고 코를 쥘 필요는 없어요, 김리. 이건 오르크의 식량이 아니라 트리비어드가 말하듯 인간의 음식이라고요. 포도주를 들겠어요, 아니면 맥주를 들겠어요? 저기 안에 한 통이 있어요. 꽤 괜찮은 거야. 그리고 이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긴데 최고급이라구. 또 당신들이 원한다면 베이컨도 몇 조각 구워 줄 수 있어요. 야채가 없어 유감이지만. 여긴 며칠째 식량 조달이 끊긴 상태거든요. 빵에 바를 것이라곤 버터와 꿀밖에 없어요. 이만하면 됐어요?" 그러자 김리가 대답했다. "그럼, 그럼! 빛이 많이 탕감되었어." 세 친구는 곧 급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두 호비트도 아무 부끄럼 없이 두번째 식사에 달려들었다. "손님들이 드시는데 동무를 해드려야지." 하고 둘은 말하는 것이었다. 레골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웬일로 오늘아침엔 예절을 다 차리는군. 그렇지만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도 아마 자네들은 지금쯤 서로를 동무삼아 또 먹고 있었을걸."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또 그래서 안 될 것도 없잖아요? 우린 오르크에게 잡혀 있는 동안엔 더러운 음식만 먹었고 그 전에는 며칠 거의 굶기까지 했다고요. 원없이 먹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단 말이에요." 아라곤도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자네들 몸이 축난 것 같진 않은데. 정말 혈색이 좋아 보여." 컵 위로 눈을 들어 그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김리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정말 그렇게 보이는데. 저런, 우리와 해어졌을 때보다 머리칼도 갑절이나 길고 곱슬거리잖아. 그리고 내 장담하건대 자네들 둘 다 좀 자란 것 같애. 자네들 나이의 호비트에게도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어쨌든 그 트리비어드란 자가 자네들을 굶기진 않은 모양이지?" 그러자 메리가 대답했다. "굶기지 않았지요. 그런데 엔트들은 마시기만 한다고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마시는 것만으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가 없잖아요. 트리비어드의 음료는 자양분이 많긴 하지만 뭔가 딱딱한 것이 필요했지요. 렘바스조차 기분전환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자네들이 엔트의 강물을 마셔 봤다고?" 레골라스가 놀란 듯 물었다. "아, 그렇다면 김리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 판곤의 음료에 대해서는 이상한 노래들이 불려져 왔거든." 그러자 아라곤도 말했다. "그 땅에 대한 이상한 얘기는 많지. 난 그곳엘 들어가 보진 못했어. 자, 그곳에 대해 그리고 엔트들에 관해 더 이야기를 해보게나." "엔트들," 하고 피핀은 말을 시작했다. "엔트들은 음, 엔트들은 우선 모두 각양각색이예요. 그렇지만 그들의 눈, 그들의 눈만은 아주 이상해요." 그는 몇 마디 더듬거려 보았으나 그 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음음, 당신들은 이미 먼발치에서 몇 명을 보았지요. 어쨌든 그들도 당신들을 보고는 오고 있다고 알려 줬어요. 그리고 예상컨대 여길 떠나기 전에 더 많은 엔트들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러니 당신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되겠죠."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자, 자! 우린 이야기를 중간에서 시작하고 있어. 난 우리의 동지관계가 깨지던 그 이상야릇한 날부터 시작해 제대로 순서를 맞춰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 메리가 대답했다. "시간만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먼저, 식사를 다 마쳤다면 파이프를 채우고 불을 붙여요. 그러면 잠시 우리 모두가 브리와 리벤델에 무사히 돌아온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담배가 가득한 작은 가죽쌈지를 내놓았다. "이런 게 무더기로 있어요. 그러니 떠날 때 당신들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겠죠. 우린 오늘아침 인양작업을 좀 했지요. 피핀과 내가 말이에요. 이리저리 떠다니 는 게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어떤 지하실이나 창고가 물결에 휩쓸려 올라온 것 같더라니까요. 작은 통 두 개는 피핀이 발견했지요. 열어 보니까 이게 기득하더라고요. 더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고급품이고 또 전혀 손상되지도 않았고요." 김리는 약간을 집어 손바닥에 비벼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 보았다. "감촉도 좋고 냄새도 좋은걸." "좋은 거라고요! 김리, 그건 롱바텀마을의 연초잎이에요. 그 통에 분명하게 혼블로우어의 인장이 찍혀 있었어요. 어떻게 그게 이리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루만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지요. 난 그게 그렇게 멀리까지 밖으로 나가는 줄은 전혀 몰랐었어요.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아주 쓸모가 있어요." 메리의 말이 끝나자 김리가 받았다. "그렇겠지, 담뱃대만 있다면 말이야. 애석하게도 내 담뱃대는 모리아에서, 아니면 그 전에 잃어 버렸어. 자네들이 취득한 전리품 중에 담뱃대는 없던가?" "아니, 없는 것 같은데요. 담뱃대라곤 전혀, 심지어 여기 경비초소에서도 보지 못했어요. 사루만은 이 좋은 걸 혼자서만 쓰려고 했나 봐요. 그러니 오탕크의 문을 두드려 담뱃대를 하나 달라고 간청해 본들 소용이 없을 거예요. 어려운 경우를 당한친구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듯 우리도 담뱃대를 함께 사용해야 하겠지요."메리가 말하자 피핀이 가로막았다. "잠깐만!" 그는 저고리 안쪽으로 손을 넣더니 줄에 매달린 작고 부드러운 지갑을 하나 꺼냈다. "난 내 살 바로 가까이에 내게는 반지만큼이나 소중한 보물을 한두 개 간직하고 다니지요. 여기 하나 있어요. 내가 오랫동안 써온 나무로 만든 담뱃대예요. 그리고 여기 또 하나 쓰지 않은 담뱃대도 있어요. 왠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 긴 여행 중에도 나는 이걸 갖고 다녔어요. 내가 가진 연초가 바닥이 나게 되면 도중에 다른 연초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에야 이게 마침내 쓸모를 찾게 된 거예요." 그는 넓고 납작한 대통이 달린 작은 담뱃대를 들어 올려 김리에게 건네주며 농담. 하듯 말했다. "자, 이제 우리 사이의 빚은 청산되었겠지요?" "청산되고말고! 참으로 고결한 호비트다! 이걸로 내가 되레 자네들에게 빛을 진 셈이야." 김리가 이렇게 외치자 아라곤이 말했다. "자, 난 다시 길로 돌아가 바람과 하늘이 어떤 조화를 부리고 있는지 살펴봐야겠어."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 성문 앞에 쌓여진 돌더미 위에 앉았다. 이제 그들은 계곡 저 아래까지 볼 수 있었다. 안개는 미풍에 실려 걷혀가고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이제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지. 갠달프가 말했듯이 그가 다른 곳에서 분주할 동안 우리는 이 폐허의 가장자리에 앉아 이야길 하는 거야. 전에는 좀체 느껴 보지 못한 피로가 몰려오는군." 그는 회색 망또를 둘러 갑옷상의를 감추고는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는 뒤로 누워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연기를 내뿜었다. 피핀이 말했다. "자, 순찰자 스트라이더가 마침내 돌아왔군!"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스트라이더는 결코 떠났던 적이 없어. 난 스트라이더이자 듀나단이며 또한 곤도르와 북부 양쪽에 다 관계가 있지." 그들은 잠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서쪽 하늘 높이 걸린 흰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리비쳤다. 레골라스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읊조리며 하늘과 태양을 꾸준히 올려다보고 누워 있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시간이 갈수록 안개가 바람에 날리고 있어. 자네들 이상한 종족이 그렇게 담배연기에만 파묻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야긴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러자 피핀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 얘기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자 오르크의 숙영지에 꽁꽁 묶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부터 시작이 돼요.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지요?" "샤이어력으로 3월 5일이지." 아라곤이 대답하자 피핀은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했다. "고작 아흐레 전이었군. 우리가 붙잡힌 지가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그 중 절반은 정말 악몽 같았어요. 붙잡힌 이후 사흘간은 아주 끔찍한 날들이었지요. 만일 내가 어떤 중요한 대목을 빠뜨린다면 메리가 보충할 거예요. 난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전부 시시콜콜하게 말하려는 게 아니니까요. 그 채찍질과 오물과 악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건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그는 보로미르의 최후의 전투와 에민 뮐로부터 판곤까지의 오르크들의 이동에 대해 설명했다. 듣고 있던 세 동지는 여러 사항이 자신들의 추측과 일치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자네들이 떨어뜨린 몇 가지 소중한 물건이 있어. 이것들을 다시 찾게 되어 기쁠 테지." 아라곤은 망또 아래 벨트를 풀더니 거기 매달아 두었던 칼집에 꽂힌 두 자루의 단도를 꺼냈다. 그것을 본 메리가 외쳤다. "아니! 이것들을 다시 보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난 내 칼로 오르크 몇 놈을 베었어요. 그렇지만 우글룩이 빼앗았지요. 그가 얼마나 험악하게 노려봤던지! 처음엔 날 찌르려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는 마치 그 칼에 덴 것처럼 멀리 던져 버리고 말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자네 브로치가 있네, 피핀. 이건 아주 귀한 물건이라서 내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었지." "알아요. 그걸 버린다는 건 쓰라린 이별과도 같았어요. 그렇지만 그 밖에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 밖엔 방도가 없었겠지. 위급할 때 귀한 걸 과감하게 포기하지 않는 자는 족쇄를 차게 되지. 자넨 올바르게 행동한 거야." 아라곤이 피핀을 추어세우자 김리도 말했다. "손목 결박을 끊은 건 정말 능숙한 솜씨였어. 자네들에겐 운이 따랐던 거야. 게다가 자네들은 그 운을 야무지게 붙잡은 것이고." 레골라스도 한마디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멋진 수수께끼를 던져 주었고 난 자네들에게 날개가 돋히지나 않았나 생각했지." "불행히도 그렇진 않았지요. 그렇지만 당신들은 그리쉬나크에 대해선 몰라요." 피핀은 말을 멈추고 몸을 떨면서 나머지 끔찍한 순간들 - 동물의 발톱처럼 살을 파고들던 손, 뜨거운 숨결 그리고 털투성이 팔뚝의 괴력 - 에 대해서는 메리에게 설명을 미뤘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모르도르의 오르크들과 루그버즈라고 불리는 존재에 대한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군. 암흑의 군주는 벌써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또 그 졸개들도 많이 알고 있어. 그리고 분명히 그 전투 이후에 그리쉬나크는 어떤 전갈을 강 건너로 보냈을 거야. 붉은 눈이 이센가드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사루만은 스스로 만든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이고." 메리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어느 쪽이 이기든 사루만의 앞길은 처량하지요. 그의 부하 오르크들이 로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의 일은 완전히 뒤틀리기 시작한 거예요." "우린 그 늙은 악당을 언뜻 한번 봤지. 갠달프도 아마 그자였을 거라고 암시하더군. 그 숲의 경계에서 말이야." 김리의 말이 끝나자 피핀이 물었다. "그게 언제였죠?" "닷새 전 밤이었지." 아라곤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메리가 말했다. "보자, 닷새 전이라. 이제 우린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부분의 이야기를 하게 됐군요. 우리가 트리비어드를 만난 건 그 전투가 있은 다음날 아침이었고 그날 저녁엔 그의 집 중의 하나인 웰링홀에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 우린 엔트들의 모임인 엔트무트에 갔었지요. 그 집회는 내 일생 본 것 중 가장 희한한 것이었어요. 그날 온종일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되었으니까요. 그래 우리는 퀵빔이라는 엔트와 밤을 보냈죠. 그런데 사흘째 오후 늦게 엔트들은 갑자기 떨쳐 일어나더군요. 정말 놀라웠어요. 마치 폭풍우가 이는 것처럼 그 숲에 팽팽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느닷없이 터지는 거였어요. 그들이 행진하며 불렀던 노래를 당신들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자 피핀도 맞장구를 쳤다. "만일 사루만이 그 노래를 들었다면 자기 다리로 달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쯤 백 마일이나 도망쳤을 거야. 이센가드가 돌처럼 견고하고 냉혹할지라도 살을 발라낸 뼈다귀처럼 단단할지라도 우린 간다, 우린 간다. 우린 그 돌을 쪼개고 부수러 전진한다! 노래는 이보다 훨씬 더 길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가사가 없고 나팔과 드럼으로 연주되는 음악 같았지요. 아주 흥겹더군요. 그런데 여기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난 그것이 단지 행진곡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라고, 그냥 단순한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지금 와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메리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둠이 깔린 후에 우리는 마지막 능선을 넘어 난 쿠루니르로 왔어요. 그 숲 자체가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던 게 바로 그때였지요. 난 내가 엔트처럼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피핀도 그렇게 느끼고 있더라구요. 우린 겁에 질렸지요. 한참후에야 그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었어요. 숲속에서 움직인 것은 엔트들의 줄임말로 후오른이라는 것이었어요. 트리비어드는 그들에 대해서 별로 많이 말해 주지 않았지만 난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나무처럼 되어버린 엔트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말없이 나무들을 굽어보며 숲 속 여기저기에 또는 숲 경계에 서 있어요. 난 가장 어두운 계곡 깊숙한 곳에 수백씩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는 대단한 힘이 있어요. 그들은 자신을 그림자로 감쌀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이 움직이는 걸 보기가 힘들지요. 그렇지만 분명히 움직여요. 화가 나면 아주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고요. 날씨를 살피거나 바람이 살랑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나도 모르게 사방이 온통 길을 더듬어 나가는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들은 아직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엔트들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트리비어드가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후오른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라더군요. 그렇지만 그들은 이상하게 변해 거칠어졌어요. 만일 주위에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진짜 엔트가 없다면 그들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일 거예요. 그런데 우린 이른 밤에 엔트들과 또 뒤에 살랑거리는 모든 후오른과 함께 긴 협곡을 기어내려 마법사의 계곡 상단부로 진입했지요. 물론 우린 후오른을 볼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대지 전체가 삐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어요. 아주 어두웠고 더구나 구름까지 긴 밤이었지요. 그들은 구릉을 벗어나자 곧 대단한속도로 움직였는데 질풍 같은 소리가 나더군요. 달은 구름 사이로도 볼 수 없었어요. 자정이 넘은 지 오래되지 않아 이센가드의 북쪽에는 거대한 숲이 자리잡게 되었지요. 적에게서는 아무런 도전의 징후도 없었어요. 성채의 높은 창에서 한 줄기 빛이 가물거리는 것이 전부였지요. 트리비어드와 몇몇 엔트들이 주위를 빙 돌아 거대한 성문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어요. 피핀과 나도 그와 함께 갔지요. 우리는 트리비어드의 양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에 나는 그의 몸이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엔트들은 화가 치밀었을 때조차 아주 조심스럽고 참을성이 있더군요. 그들은 숨을 쉬고 귀를 기울이며 깎아 놓은 돌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더라구요. 이윽고 느닷없이 엄청난 소음이 터져나왔죠. 나팔소리가 왕왕대며 울려 이센가드의 성벽에 부딪혀 메아리쳤지요. 우린 발각되어서 전투가 시작된 거려니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사루만의 부하들이 그곳을 떠나 행군해 나가는 것이었어요. 난 이 전쟁이나 로한의 기사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지만 사루만이 로한의 왕과 그 병사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해 쓰러뜨리려는 것은 분명해 보이더군요. 이센가드를 텅 비워 놓고 모조리 출정시켰으니까 말이에요. 난 적들이 가는 광경을 보았는데 행군하는 오르크들의 열은 끝이 없더군요. 또 거대한 늑대를 타고 가는 오르크도 많았고요. 인간들도 대단한 숫자였어요. 그들 대부분이 횃불을 들고 있어 그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큰 키에 검은 머리칼을 가졌는데 표정은 음울했지만 특별히 사악해 보이지는 않는 보통 인간들이더군요. 그렇지만 인간과 키가 비슷하고 도깨비 같은 얼굴에 안색이 누르께하고 옆으로 흘겨보는 사팔뜨기 눈을 한 보기에도 끔찍한 자들도 있었어요. 그들을 보고 그 브리마을와 남부인이 생각났다면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요. 다만 그는 이들처럼 그렇게 명백히 오르크를 닮지 않았던 점만 다를 뿐이었어요." 아라곤이 끼어들었다. "나도 그를 생각했었지. 우린 헬름협곡에서 그 반(半)오르크들의 부대와 대적했었거든. 이제야 그 남부인이 사루만의 밀정이었음이 분명해지는군. 그러나 그가 암흑의 기사들과 함께 일한 건지 아니면 사루만만을 위해 일한 건지는 확실치 않아. 그 사악한 족속들에게서 언제부터 서로 동맹을 맺었으며 또 언제부터 서로 속이기 시작했는지를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메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종족을 다 통틀어 최소한 만 명은 됐어요. 성문을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지요. 일부는 대로를 따라 여울을 향해 갔고 일부는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갔어요. 저 아래 일 마일쯤 떨어진 곳 - 강이 아주 깊게 흐르는 곳인데 - 에 다리 하나가 놓여졌어요. 일어서면 지금도 볼 수 있어요. 그들은 모두 거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끔찍스런 소란을 피워 댔어요. 사태는 로한 쪽에 아주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트리비어드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내 볼일은 오늘밤 이센가드에, 바위와 돌에 있어.' 하고 말하더라고요. 나로선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성문이 다시 닫히자마자 후오른이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오르크들을 맡았던 모양이에요. 아침이 되자 그들은 계곡 저 아래편에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적어도 꿰뚫어볼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으니까요. 사루만이 자신의 모든 병력을 내보내자 곧 우리 차례가 왔지요. 트리비어드는 우릴 내려놓고 성문으로 걸어가 해머로 두드리듯 문을 쾅쾅치며 사루만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응답 대신에 성벽에서 화살과 돌이 날아왔지만 엔트들에게 화살은 아무 소용도 없었지요. 물론 화살이 꽂히긴 했지만 그건 마치날벌레들처럼 화만 돋울 뿐이었지요. 엔트의 몸은 바늘꽃이 같아서 화살이 온몸에 꽂혀도 별 해를 입진 않는가 봐요. 또 그들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아요. 그들의 피부는 아주 두터워서 나무껍질보다 더 강인한 것 같으니까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육중한 도끼로 내리치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들은 도끼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한 명의 엔트를 해치려면 수많은 도끼잡이가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할 거예요. 왜냐하면 한번 내리친 자는 두번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없을 테니까요. 엔트의 팔에서 내뻗는 주먹은 쇠도 얇은 주석판처럼 구겨 버리고 말거든요. 몸에 몇 개의 화살을 맞으니 트리비어드도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어요. 아마 그로선 적극적으로 '성급해'지기까지 했다고 말할 거예요. 그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자 열두명의 엔트들이 성큼성큼 올라갔어요. 화난 엔트는 정말 오싹할 정도로 무서워요. 그들의 손톱과 발톱이 바위에 달라붙기가 무섭게 바위는 마치 빵껍질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겠지요. 백년 묵은 거대한 나무뿌리가 단 몇 초만에 뽑히는 것 같았어요.그들은 밀고 당기고 잡아 뜯고 흔들고 두들겨 댔어요. 쨍그랑 꽝, 우지끈 뚝딱대더니 오 분만에 이 거대한 성문을 짓이겨 버렸고 몇몇은 모래구덩이 속의 토끼처럼 성벽을 부숴 내리기 시작했어요. 사루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어찌할 방도를 몰랐을 거예요. 물론 요즘 들어 그의 마력이 감퇴되기도 했겠지요. 어쨌든 내 생각엔 충분한 부하와 물자 없이 홀로 궁지에 빠지니 담력이 생기지 않은 것 같아요. 내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노회한 갠달프와는 아주 달라요. 난 사루만의 명성이 전적으로 이센가드에 자리잡은 그 능란한 재주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자 다시 아라곤이 끼어들었다. "아냐, 그렇지는 않아. 그는 한때 그 명성만큼이나 위대한 인물이었어. 그의 지혜는 깊고 사고는 섬세했으며 재주는 경탄할 정도였지. 게다가 그는 타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힘을 가겼었어. 현명한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었고 통이 작은 족속은 위압할 수 있었지. 틀림없이 그는 그런 힘을 아직도 갖고 있을 거야. 그와 단 둘이 이야기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내가 알기로 이 중간계에 그리 많지 않아. 그가 패배한 지금에도 말이야 그의 사악함이 드러난 지금도 그와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아마 갠달프, 엘론드 그리고 갈라드리엘 정도밖에 없을 거야."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그렇지만 엔트들은 안전한 걸요. 그가 한번은 그들을 속여넘긴 모양이지만 결코 다시는 그렇게 못해요. 그리고 어찌되었든 그는 엔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들을 계산에서 빠뜨리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지요. 그는 엔트들에 대해 아무런 방책도 갖지 않았고 일단 그들이 일을 벌이자 손을 쓸 겨를조차 없었던 거예요.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센가드에 남아 있던 몇 마리 쥐들은 엔트들이 뚫은 곳곳의 구멍으로 부리나케 달아나더라고요. 엔트들은 이처럼 종말을 맞아서야 항복하고 내려온 두세 다스의 인간들을 잠서 심문하고 보내 주었어요. 그렇지만 오르크들은 몇 명밖에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특히 후오른들에게서는 도망치지 못했을 거라고요. 왜냐하면 그 무렵엔 계곡을 내려갔던 후오른들뿐 아니라 더 많은 수의 후오른들이 이센가드 주위에 완전히 숲을 이루고 서 있었으니까요. 엔트들이 남쪽 성벽의 대부분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또 남아 있던 인간들이 자기를 내버리고 도망쳐 버리자 사루만은 겁을 먹고 황급히 몸을 피했어요. 우리가 처음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마 성벽에 있었던가 봐요. 자기 부대가 장쾌하게 출전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겠지요. 엔트들이 돌진해 들어가자 그는 황급히 성벽을 떠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엔트들이 주위를 충분히 살필 수 있을 만큼 별빛이 밝아졌어요. 갑자기 퀵빔이 '나무도살자! 나무도살자!' 하고 외쳤어요. 퀵빔은 아주 점잖은 엔트지요. 그러나 자기 종족이 오르크의 도끼에 잔혹한 수난을 당해 왔기에 그는 맹렬히 사루만을 증오해요. 그는 안쪽 성문으로부터 길을 따라 뛰어내려갔어요. 화가 나면 바람처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흐릿한 형체 하나가 기둥들이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들락날락하더니 황급히 멀어져 가는 게 보이고 이윽고 성채의 입구에 이르는 층계에 거의 다다랐어요. 그런데 그게 위험천만한 일이었어요. 퀵빔은 그를 쫓느라 열중한 나머지 문을 통해 미끄러져 들어가다가 하마터면 붙잡혀 교살당할 뻔했거든요. 오탕크로 들어가 든든해지고 나자 얼마 안 되어 사루만은 몇몇 소중한 기계를 가동시켰어요. 그 무렵 이센가드 내에는 많은 엔트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퀵빔을 따라왔고 일부는 북쪽과 동쪽으로 몰려갔었지요.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불길과 고약한 연기가 일어났어요. 평원 곳곳에 널린 통풍구와 환기갱에서 내뿜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여러 엔트들이 불에 그을려 물집이 잡혔고 그 중 하나 - 비치보운이라는 이름이었는데 - 는 아주 키가 크고 잘생긴 엔트였는데 어떤 액체의 불꽃에 휩싸여 횃불처럼 타버렸어요. 끔찍한 광경이었지요. 이 광경이 엔트들을 미치게 했어요. 전에 그들이 진짜로 분기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난 마침내 분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본 거예요. 혼비백산케 하는 분노였지요.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나팔소리 같은 굉음을 냈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돌이 갈라져 떨어지기 시작했지요. 메리와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망또로 귀를 틀어막았어요. 엔트들은 윙윙거리는 태풍처럼 날뛰며 기둥을 부수고 환기갱 아래로 거대한 돌덩이를 내던지기도 하고 잎사귀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던져 올리기도 하며 철벽 같은 오탕크 주위를 맴돌았어요. 그 성채는 돌풍 한가운데 휩싸인 것 같았어요. 난 철주들과 석공용 돌덩이들이 수백 길이나 높이 치솟았다가 오탕크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걸 봤어요. 그러나 트리비어드는 침착하더군요. 다행히 그는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 종족이 분노한 나머지 다치게 되는 걸 원치 않았고 또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 사루만이 어떤 구멍으로 빠져나가지 않을까 염려했던 거예요. 많은 엔트들이 오탕크의 철벽에 몸을 부딪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오탕크의 철벽은 매우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하거든요. 아마 그 속에는 사루만의 마법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어떤 마법이 숨어 있는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들은 그 벽을 붙잡을 수도 없었고 또 틈을 내지도 못해 그냥 몸을 부딪쳐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날 뿐이었어요. 그래서 트리비어드가 둥글게 늘어선 엔트들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외쳤어요. 엄청난 그의 목소리는 모든 소리를 위압하더군요. 갑자기죽은 듯이 고요해졌어요. 그 정적 속에서 우린 성채의 높은 창으로부터 울려오는 째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그 소리는 엔트들에게 이상한 효과를 가져다주었어요. 끓어넘칠 듯 격분했던 그들이 이제 얼음처럼 차갑고 냉혹해졌으며 또 조용해졌던 거예요. 그들은 평원을 떠나 트리비어드 주위로 조용히 몰려들었어요. 그는 잠시 다른 엔트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했어요. 아마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노회한 머리 속에 오래전부터 담아 두었던 계획을 설명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나자 그들은 회색빛 속에서 그대로 조용히 사라지더군요. 그 무렵 날이 밝아오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성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어둠속에 너무도 감쪽같이 숨어 있었고 또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에 그들을 볼 수는 없었어요. 다른 엔트들은 북쪽으로 가버렸어요. 그날 온종일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주하게 일했지만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둘만 남겨진 채 보내야만 했어요. 쓸쓸한 날이었지요. 그래서 우린 되도록 오랑크의 창문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어요. 왜냐하면 그 창문들이 아주 위협적인 눈길로 우리를 쏘아보는 것 같았거든요. 우린 꽤 오랜 시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남쪽 멀리 로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또 우리 원정대의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말이에요. 가끔 우린 멀리서 돌이 구르고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산속에서 메아리치는 둔중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오후가 되어 우린 무슨 일인가 알아 보려고 원형의 평원 주위까지 걸어갔어요. 계곡 맨 위쪽엔 후오른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서 있었고 북쪽 성벽 주위에도 또 한 무리가 있더군요. 우린 감히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 안에선 계속 부수고 찢어 발기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지요. 엔트들과 후오른들이 거대한 구덩이와 참호를 파고 웅덩이와 댐을 만들어 이센강물 전부와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다른 모든 개울과 샘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린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지요. 땅거미가 질 무렴 트리비어드가 성문으로 돌아왔어요. 그는 혼자서 흥얼거리며 붕붕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은 것 같더군요. 그가 서서 거대한 팔다리를 쭉 뻗고 깊이 숨을 쉬길래 피곤하냐고 물어 봤더니 그는 '피곤하냐고? 피곤하냐고? 음, 아냐, 피곤하지 않아. 다만 몸이 좀 뻣뻣할 뿐이지. 맛있는 엔트워시 강물을 한번 들이켰으면 좋겠군. 우린 열심히 일했거든. 우린 오늘 이전의 오랜 세월에 걸쳐 해왔던 것보다 더 많은 돌을 깨고 땅을 팠다고. 그렇지만 이젠 거의 끝났어. 밤이 되면 이 성문 근처나 오래된 터널 속에서 얼쩡거리면 안 돼. 물이 터져 나올 거야. 게다가 사루만의 모든 더러움이 씻겨 내릴 때까지는 얼마동안 고약한 물이 계속 흐를 거야.그 다음엔 이센강이 다시 깨끗하게 흐를 수 있겠지.' 하는 거였어요. 그는 다만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해 한가로운 태도로 성벽을 좀더 무너뜨리기 시작했어요. 우린다만 그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 누워 잠잘 수 있을 만한 장소로 어디가 가장 안전할까 곰곰이 궁리하고 있었지요. 그때 길 위로 기사 한 명이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메리와 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트리비어드는 아치 아래 어둠 속에 몸을 숨겼지요. 갑자기 거대한 말 한 마리가 은빛 섬광처럼 성큼성큼 달려왔어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난 그 기사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었지요. 얼굴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옷도 하얗게 번득였어요. 난 그냥 일어나 앉아 입을 벌린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뿐이에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나오질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그가 우리 곁에 멈춰서더니 내려다보았거든요. '갠달프!' 하고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속삭임에 불과했지요. 그가 '안녕, 피핀! 이건 유쾌한 놀라움인걸!' 하고 말했던가? 아냐, 그렇지 않았지요. 그는 '일어나, 멍텅구리 같은투크야! 도대체 트리비어드는 어디 있는 거야? 난 그가 필요해. 어서 말해!' 하고 소리쳤어요. 트리비어드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즉시 어둠 속에서 나와 이상한 만남이 이뤄진 거예요. 난 깜짝 놀랐지요. 왜냐하면 그 둘 다 전혀 놀라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분명히 갠달프는 거기서 트리비어드를 찾을 걸로 예상했고 또 트리비어드는 트리비어드대로 갠달프를 만날 목적으로 성문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우린 그 늙은 엔트에게 모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얘기했었거든요. 그 당시 그가 우리에게 보인 이상야릇한 표정은 기억했지만 나로선 그가 갠달프를 보았거나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성급하게 말하려 하지않는 것이라고만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었어요. '서두르지 마라!' 그의 좌우명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 요정들까지도 갠달프가 자리에 없을 때엔 그의동정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하기를 삼가니까요. 트리비어드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흠! 갠달프! 오셔서 기쁘오. 숲과 물, 가축과 돌은 내가 제어할 수 있으나 여기 있는 마법사는 당신이 처리하셔야겠소.' 그랬더니 갠달프는 이렇게 말했지요. '트리비어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당신은 이미 많은 일을 하셨지만 좀더 수고해 주셔야겠소. 처치해야 할 오르크가 천 명쯤 되오.' 그러더니 그 둘은 구석으로 가서 함께 의논을 하더라고요. 트리비어드에겐 틀림없이 너무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을 거예요. 왜냐하면 갠달프는 너무 급한 나머지 내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기도 전부터 대단한 속도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까요. 그들은 단지 몇 분, 아마 십오 분쯤만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었어요. 이윽고 갠달프가 우리에게 돌아왔는데 한시름 놓아서 그런지 즐겁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표정이더라고요. 그제서야 우릴 보게 되어 반갑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이렇게 물어 봤지요. '그런데 갠달프, 지금까지 어디 계신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동지들도 보셨나요?' 그러자 그는 참으로 갠달프답게 이렇게 대답했어요. '어디 있었건 이렇게 돌아왔잖아. 그래, 난 다른 동지들중 몇을 보았어. 그렇지만 소식을 들으려면 좀더 기다려야 해. 지금은 위험스러운 밤이니 빨리 달려가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만 새벽은 더 밝을 거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린 다시 만나게 돼. 자네들 스스로 자중하고 절대로 오탕크 곁으론 가지 말라고! 안녕!' 갠달프가 가고난 뒤 트리비어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지요. 분명 그는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배웠고 이제 그걸 소화하는 중이었어요. 그는 우릴 바라보며 말하더군요 '흠, 흠, 너희는 내가 생각한 만큼 성급한 족속은 아닌 것 같군. 너희는 결코 내키는 대로 말하진 않았고 또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도 않았어. 흠, 참으로 많은 소식을 알았는걸! 자, 이젠 트리비어드가 다시 바빠져야겠군.' 그는 가기 전에 우리에게 얼마간의 소식을 들려 주었지만 그건 우리 기분을 전혀 북돋워 주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우린 당장은 프로도와 샘 또는 가엾은 보로미르에 대해서보다는 당신들 셋에 대해 더 많은 걱정을 했지요. 왜냐하면 소식을 종합해 보건대 굉장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거나 곧 벌어질 것이고 또 당신들이 그 전투의 한복판에 있을 것이며 결코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고 추측되었기 때문이지요. 트리비어드는 '후오른들이 도와 줄 거야.' 하고 말하고는 그냥 가버려서 오늘아침까지 우리도 그를 다시 보지 못했지요. 깊은 밤이었어요. 우린 돌더미 위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볼 수 없었지요. 어둠이 거대한 안개처럼 온통 우리 주위를 담요같이 둘러싸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대기는 무덥고 무거웠고 살랑거리는 소리, 삐걱대는 소리 그리고 중얼거리는 소리로 가득차 있었어요. 난 전투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후오른들이 더 지나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후 멀리 남쪽에서 천둥이 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고 멀리 로한을 가로지르며 번개의 섬광이 비쳤지요. 가끔씩 수십 마일 떨어진 곳의 산봉우리들이 갑자기 흑백으로 삐쭉 솟았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뒤쪽 산속에선 천둥 같은 소리가 - 실상 천둥은 아니었어요 - 울려와 때때로 계곡 전체에서 메아리쳤어요. 엔트들이 댐을 부숴 저장해 두었던 물을 북쪽 성벽의 틈을 통해 한꺼번에 이센가드로 내리부은 것은 자정쯤이었어요. 후오른들의 어둠이 지나갔고 천둥소리도 멀어져 갔지요. 서쪽 산맥 뒤로 달이 기울고 있었어요. 이센가드가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시커먼 개울과 웅덩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그것들은 평원 위로 터져가면서 달의 마지막 빛을 받아 번득이더군요. 때로 물결이 환기구나 분수공 속으로 흘러내리면서 엄청난 하얀 증기가 쉿쉿거리며 솟아올랐고 연기가 물결치며 떠올랐어요.폭발음이 일고 불길이 타올랐어요. 거대한 소용돌이 모양의 수증기가 선회하며 솟아올라 오탕크 주위를 휘감아 마치 달빛을 받고 타오르는 높은 구름봉우리 같아보였어요. 그리고도 더 많은 물이 쏟아부어져 마침내 이센가드는 온통 김을 내뿜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대한 냄비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자 다시 아라곤이 끼어들었다. "우리도 어젯밤 난 쿠루니르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 구름처럼 일어나는 연기와 증기를 보았어. 우린 사루만이 우릴 상대로 어떤 새로운 마법을 쓰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지." "그자의 소행이 아니었어요!" 피핀이 다시 말했다. "그는 아마 숨이 막혀 캑캑거리고 있었겠지요. 더이상 웃지 못했죠. 아침이 되자, 물론 어제아침이지요, 물이 모든 구멍으로 빠져 버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어요. 우린 저 경비초소에 피신해 있었는데 조금 무섭더군요. 호수가 넘쳐 터널 속을 솟구쳐 나오기 시작해서 층계 위로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거든요. 우린 영락없이 구멍 속의 오르크들처럼 갇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창고 뒤편에서 나선형계단을 발견해 아치의 꼭대기로 나을 수 있었어요. 통로가 부서진 데다 꼭대기 근처는 떨어진 돌들로 반쯤 막혀 있어서 빠져나온다는 게 몸을 쥐어짜는 것 같았지요. 우린 수위보다 높은 그곳에 앉아 이센가드가 물에 잠기는 광경을 보았어요. 엔트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물을 들이부어서 마침내 모든 불길이 꺼지고 모든 동굴이 차버렸어요. 안개가 천천히 모이더니 증발해 오르기 시작해 엄청나게 큰 구름우산이 됐었어요. 틀림없이 일 마일 높이는 되었을 거예요. 저녁에 동편 구릉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떠올랐고 이윽고 산허리에 굵은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해 저녁놀을 지워 버렸어요. 이 모든 일은 아주 고요하게 진행되었죠. 멀리 떨어진 곳에선 몇 마리 늑대가 음울하게 울부짖고 있었어요. 밤이 되자 엔트들은 물을 쏟아붓길 그치고 이센강을 원래 그대로 흐르게 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일의 끝이었지요. 그이후로 물이 빠지고 있는 거예요. 밑바닥의 동굴들 어딘가에 배수구들이 나 있는게 틀림없어요. 만일 사루만이 창문으로 슬쩍 내다본다면 그건 정말 너저분하고 황량한 난장판으로 보였을 거예요. 우린 매우 외로웠지요. 그 폐허에서 말을 건넬 엔트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또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했으니까요. 우린 그날 밤 거의 대부분을 아치 위에서 보냈는데 날씨가 춥고 습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요. 사루만은 여전히 자신의 성채 속에 있었거든요. 밤에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바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어요. 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엔트들과 후오른들이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모두 어디 갔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우리가 기어내려가 다시 사방을 둘러본 것은 안개가 끼고 습기가 찬 아침이었어요. 주변엔 아무도 없더군요. 이상이우리가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의 거의 전부예요. 그 모든 소동이 끝난 후인 지금은 평화스러워 보일 정도지요. 게다가 갠달프가 돌아왔으니 어쩠든 더 안심이 되고요. 이제 난 잘 수 있을 거예요!" 잠시 그들 모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김리가 담뱃대를 다시 채우고 부싯돌과 깃으로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게 한 가지 있어. 웜통에 관한 건데, 자네들은 그가 사루만과 함께 있다고 데오든왕께 말씀드렸지. 그가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아, 그래요, 그자에 대해선 잊어 버렸군요." 다시 피핀이 대답했다. "그자는 오늘아침에야 이곳에 왔어요. 우리가 막 불을 피우고 아침식사를 시작했는데 트리비어드가 다시 나타난 거예요. 그가 밖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요. '너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려고 방금 먼 길을 걸어왔지, 내 친구들. 그리고 너희들에게 전해 줄 겸해서 말이야. 후오른들은 돌아왔어. 모든 게 잘됐지. 정말이지 참 잘됐단 말이야!' 그는 웃으며 자신의 넓적다리를 찰싹 치더군요. '이센가드에 오르크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도끼도 이젠 없는 거야! 그리고 날이 저물기 전에 남쪽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그 중 몇몇은 너희가 보면 반가워하게 될 거야.' 그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우린 길 위에서, 말굽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우린성문 앞으로 뛰어나갔고 난 스트라이더와 갠달프가 부대 선두에서 말을 달려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뚫어지게 바라보았죠. 그런데 웬 사람이 늙고 지친 말을 타고 오더군요. 그는 성질이 배배 꼬인 사람처럼 괴상하게 생겼더군요.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는 안개를 헤치고 다가와 앞에 펼쳐진 폐허와 파괴의 현장을 보더니 안장에 앉은 채 입을 벌리는데 얼굴에 핏기가 가셔 푸르죽죽해질 정도였어요. 그는 너무 당황해 처음엔 우리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우릴 보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말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요. 그러나 트리비어드가 성큼성큼 세 걸음만에 긴 팔을 뻗쳐 그를 안장에서 들어올렸지요. 말은 달아나버리고 그는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어요.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왕의 친구이자 고문인 그리마로서 데오든이 사루만에게 보내는 중요한 전갈을 가져왔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른 누구도 감히 더러운 오르크놈들로 가득한 그 광활한 땅으로 말을 달리려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파견된 것이오. 그리고 난 그 위험스러운 여행을 거쳤기에 지치고 시장하오. 늑대들에게 쫓겨 길을 벗어나 멀리 북쪽으로 돌아와야만 했지요.' 난 그가 트리비어드에게 곁눈질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거짓말쟁이!'라고 말했지요. 트리비어드가 자신의 느릿느릿한 방식대로 몇 분 간이나 그를 바라보자 마침내 그 비열한 인간은 바닥에서 벌레처럼 허우적거리더군요. 드디어 트리비어드는 입을 열었어요. '하, 흠, 난 당신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소, 웜통선생.' 그 이름을 듣자 그자는 움찔하더군요. '갠달프가 이미 이곳에 다녀갔지. 그래서 난 당신에 대해 필요한 만큼 알고 있고 또 당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알고 있지. 갠달프는 하나의 덫에 모든 쥐새끼들을 잡으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거든. 이제 내가 이센가드의 지배자이고 사루만은 성채 안에 갇혀 있어. 그렇지만 당신은 그리로 가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떤 전갈이든 그에게 전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웜통은 '날 보내 주시오, 보내 주오! 난 길을 알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길을 알고 있음은 의심치 않아. 그러나 여기 사정이 좀 변했지. 자, 가서 직접 보지 그래.'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자 그는 아치를 통해 절뚝거리며 걸어가 이윽고 원형의 평원에 이르러 자신과 오탕크 사이에 가로놓인 그 범람하는 물결을 볼 수 있었지요. 그는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날 떠나게 해줘요! 떠나게 해줘요! 이제 내 전갈은 필요가 없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러자 트리비어드가 이렇게 대꾸했어요. '물론 그건 소용이 없지. 그렇지만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어. 갠달프와 당신의 주군이 도착할 때까지 나와 함께 있든지 아니면 저 물을 건너가는 것. 자, 어느 쪽을 택할 건가? 그는 주군이라는 말을 듣자 몸을 떨며 한 발을 물 속에 넣었다가 다시 물러서더군요. '난 헤엄을 못 쳐요.' 하는 거예요. 그러자 트리비어드가 다시 말했어요. '물은 깊지 않아. 더럽긴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텐데, 웜통선생. 자, 들어가시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비열한 자는 범람하는 물결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가버렸어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물은 그의 목까지 차올랐어요. 내가 마지막 본 그의 모습은 낡은 통인가 나무조각인가에 매달려있는 꼴이었어요. 그렇지만 트리비어드는 그를 뒤따라 물 속을 걸어가 그의 진로를 지켜보더군요. 그는 돌아와 말했어요. '자, 그는 들어갔어. 난 그가 쥐새끼처럼 더러운 꼴로 층계를 기어 올라가는 걸 봤지. 성채 안엔 아직도 누군가가 있어. 손 하나가나오더니 그를 안으로 끌어당기더군. 이제 그가 들어갔으니 우리는 그가 마음에 드는 환영을 받기만을 바랄 뿐이지. 난 이제 가서 진흙을 씻어야겠어. 누군가가 날 찾으면 저 북쪽에 있을 거라고 전해 줘. 이 아래쪽엔 엔트가 마시거나 목욕하기에 알맞은 깨끗한 물이 없거든. 그래 내 너희 두 친구에게 당부하는데 성문에서 다가오는 자들을 잘 살피라고. 로한의 군주가 올 테니 잘 봐야 해! 너희가 아는 방식 대로최대한 그를 환영해야 해. 그의 병사들은 오르크들과 위대한 전투를 치렀거든. 아마우리 엔트들보다는 너희가 그런 군주에게 알맞는 환영의 말을 더 잘 알겠지. 내 시대를 통해 푸른 들판에는 수많은 영주들이 있었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언어나 이름을 배운 바가 없어. 그들은 인간의 음식을 원할 테지만 나는 너희가 모든 걸 잘 알아 처리할 거라고 믿어. 그러니 할 수 있다면 너희가 생각하기에 왕이 들기에 적당한 음식을 좀 찾아 보라고.' 이게 얘기의 전부예요. 사실 우리도 그 웜통이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그가 정말 왕의 고문이었어요?" 아라곤이 대답했다. "고문이었지. 그리고 또한 로한에 잠입한 사루만의 밀정이자 충복이었고. 운명은 그가 응당 받아야 할 이상으로 그에게 호의적이진 않았어. 그가 그처럼 굳세고 장엄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된 광경은 틀림없이 충분한 벌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더 지독한 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은가 싶은데." 그러자 이번에는 메리가 말했다. "그래요, 난 트리비어드가 친절한 마음에서 그를 오탕크로 보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는 그 일을 다소 악의적으로 즐기는 것 같았고 목욕하러 가면서는 혼자 웃더라고요. 그 일이 있은 후 우린 표류물을 찾고 이리저리 뒤지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어요. 우린 두세 군데의 창고를 발견했고, 트리비어드가 보낸 몇몇 엔트들이 대단히 많은 양의 물품을 옮겼지요. 엔트들이 이십오 인 분의 인간의 음식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당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 수를 헤아렸던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당신들 셋이 그 위대한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던 거예요.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당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이곳에서 대접을 소홀히 받은 건 아니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올려 보낸 것이나 여기 남긴 것이나 다를 바가 없거든요. 여기가 좀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마실 건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엔트들에게 마실 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이센강물이 있잖아.' 하는 거예요. '그건 엔트들과 인간들 모두에게 상당히 좋은 거야.' 하고요. 그렇지만 난 엔트들이 시간을 내 산에서 흐르는 샘물로 그들의 음료를 좀 빚었으면 하고 바래요. 그랬다면 갠달프가 돌아올 땐 수염이 말려올라갈 테니까요. 엔트들이 가버리고나자 우린 피로하고 또 시장했지요. 그러나 우린 투덜대지 않았어요. 수고한 대가는 족히 얻었거든요. 피핀이 많은 표류물 가운데서 뜻밖의 귀중한 물건 즉 그 혼블로우어의 통들을 발견한 게 바로 양식을 찾는 도중이었어요. 피핀의 말에 의하자면 연초는 음식다음으로 좋은 거니까요. 사정이 그렇게 된 거였어요." "이제 그 모든 걸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김리가 말하자 아라곤도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만 빼고. 사우스파딩에서 온 이 연초가 이센가드에 있는 것 말이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거든. 난 이센가드에 살았던 적은 없지만 여행한 적은 있지. 로한과 샤이어 사이에 있는 인적없는 대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 길로는 상품도, 그 어떤 생물도 지나간 적이 없거든. 특히 공개적으로는 말이야. 난 사루만이 샤이어에 있는 누군가와 내통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해. 웜통 같은 자들은 데오든왕의 궁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발견될 수 있겠지. 그 통들에 날짜가 적혀 있던가?" 그러자 피핀이 대답했다. "그래요. 그건 1417년 작물이었어요. 작년 거죠. 아니지, 이젠 재작년이 되었지. 작황이 좋은 해였어요." 아라곤이 다시 말했다. "흠, 그곳에서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몰라도 이젠 끝이 났으면 좋을 텐데. 그곳은 지금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단 말이야. 어쨌든 갠달프에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큰일에 매달린 그에게는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메리도 말했다. "그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데요. 오후도 이제 많이 지나갔는데요. 가서 한번 돌아봅시다. 스트라이더, 원한다면 당신은 이제 이센가드를 돌아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닐 거예요." 제10장 사루만의 목소리 그들은 폐허가 된 터널을 지나 돌무더기 위에 서서 오탕크의 검은 성벽과 창문들을 응시했다. 주위의 황폐한 광경 속에서도 오탕크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제 물은 거의 빠져 버렸다. 여기저기 찌꺼기와 표류물로 덮인 황량한 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넓은 원형 평원이 대부분 다시 드러났다. 온통 진흙투성이인 데다 구멍이 파이고 철주와 기둥들은 마치 술취한 듯 이리저리 기대서거나 땅에 박혀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주발형 성벽 자리에는 거센 폭풍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둔덕이 쌓였으며 그 너머로는 짓밟힌 푸른 계곡이 산맥의 검은 양 팔 사이로 길게 뻗쳐 있었다. 저편으로부터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북쪽으로부터 오탕크로 접근하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저기 갠달프와 데오든 그리고 기사들이 오고 있어! 가서 그들을 맞이해야지." 메리도 한마디 했다. "조심해서 걸어야 해요. 주의하지 않으면 미끄러져 구덩이 속에 처박힐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그들은 폐허 사이에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성문에서 오탕크로 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길에 포장되었던 판석들은 금이 가고 진흙이 묻어 매우 미끄러웠다. 기사들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바위 아래 그늘에 서서 기다렸다. 갠달프가 그들을 맞으러 앞으로 나왔다. "자, 트리비어드와 나는 흥미있는 토의를 나누고 몇 가지 계획을 짰지. 또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했던 휴식도 좀 취했고. 이제 우린 다시 나아가야 해. 동지들도 모두 쉬며 원기를 회복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러자 메리가 대답했다. "그랬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토의는 담배연기로 시작되고 연기로 끝났어요. 우린 이제 사루만에 대한 증오심도 덜어진 것 같아요." "정말? 음, 난 그렇지 않아. 이제 나에겐 떠나기 전에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이 남아있어. 사루만에게 고별방문을 해야지. 위험하지. 물론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해야만 해. 당신들 중에 원하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가도 좋겠지. 그러나 조심해야해! 그리고 농담을 하면 안 돼!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그러자 김리가 먼저 말했다. "내가 가겠어요. 난 그를 보고 싶고 또 정말 그가 당신과 비슷하게 생겼는지도 알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자네가 그걸 알 수 있겠나, 이 난쟁이 양반아. 사루만은 필요하기만 하다면 자넨 눈에 얼마든지 나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 이제 자넨 그의 모든 위장을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해졌는가? 음, 아마 두고봐야겠지. 그는 한꺼번에 많은 눈길 앞에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엔트들 모두는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라고 했으니 아마 그를 나오도록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자 피핀이 물었다. "위험한 게 뭐죠? 우릴 향해 화살을 날리거나 아니면 불을 뿜어 댈까요? 아니면 마법을 걸려고 할까요?" "그 마지막이 제일 가능성이 크지. 만일 자네가 경솔한 자세로 그의 문 앞으로 달려간다면 말이야. 그러나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는 무엇을 하려고 택할지는 알 수 없어. 궁지에 몰린 야수에게 접근할 땐 위험이 없지 않은 법이야. 게다가 사루만은 자네가 짐작도 못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어. 그의 목소리를 조심해야 해!" 그들은 이제 오탕크 아래에 이르렀다. 그것은 검은색으로 마치 비에 젖은 듯 번들거렸다. 그 바깥면은 이제 막 끌로 조각해 낸 듯 생생한 각을 이루고 있었다. 토대부근에 떨어진 몇몇 작은 부스러기와 박편들이 엔트들의 분노를 말해 주는 전부였다. 동쪽 면 두 기둥이 서 있는 곳에 지상으로부터 상당히 높게 거대한 문이 달려 있었다. 그 위로는 닫혀진 창문 하나가 있어 쇠기둥으로 울타리 친 발코니에 면해 있었다. 문에 이르기까지는 스물일곱 개의 넓은 층계로 된 계단이 있었다. 그 모든 층계석은 어떤 알지 못할 기술에 의해 똑같이 검은 돌로 깎여진 것이었다. 이것이 성채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였다. 그런데 우뚝 솟은 성벽에는 깊숙한 총안(銃眼)이 달린 창문들이 뚫려 있어 아득히 높은 곳으로부터 아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갠달프와 왕은 계단 아래에서 말을 내렸다. 갠달프가 말했다. "내가 올라가겠소. 난 오탕크에 와본 적이 있어 무엇이 위험한지 잘 알고 있소." "나도 올라가겠소. 난 충분히 살았으니 더이상 어떤 위험도 두렵지 않소. 내게 그토록 큰 해악을 끼친 적과 이야기하고 싶소. 요머가 나와 함께 있으니 내 늙은 발이 비틀대지 않도록 돌봐 줄 것이오." "뜻대로 하시오. 아라곤이 나와 함께 갈 것이오. 다른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기다리도록 합시다. 무언가 보거나 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여기서도 충분히 보고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김리가 외쳤다. "아니에요! 레골라스와 난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여기선 우리 각자가 우리들의 종족을 대표하는 거예요. 우리도 가겠어요." "그렇다면 같이 가지." 갠달프는 이렇게 대답하고 계단을 올라갔으며 데오든이 그 곁에서 걸어갔다. 로한의 기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층계 하단 양쪽 말 위에 앉아 자신들의 주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거대한 성채를 음울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메리와 피핀은 자신들이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며 또 안전하지도 못하다고 느끼며 제일 아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피핀이 투덜댔다. "여기서 성문까지는 반 마일밖에 안 돼. 난 슬쩍 빠져서 눈치채이지 않게 경비초소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우리가 뭐하러 왔느냔 말이야. 우린 필요하지도 않잖아." 갠달프는 오탕크의 문 앞에서 지팡이로 문을 두드렸다. 공허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명령하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사루만! 사루만! 사루만! 나오라!" 얼마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마침내 문 위에 난 창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어두운 구멍을 통해서는 아무 형체도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누구야? 뭘 원하는 거야?" 데오든이 움찔 놀라며 중얼거렸다. "난 저 목소리를 알아. 그리고 저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그날을 저주해." 갠달프가 다시 외쳤다. "넌 그의 충복이니 가서 사루만을 데려 오너라, 그리마 웜통! 우리 시간을 허비하게 하지 말고!" 창문이 닫혔다. 그들은 기다렸다. 갑자기 저음의 아름다운 선율로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음성 자체가 사람을 매혹하는 것이었다. 방심한 채로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거의 말할 수 없으며 또 말한다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힘이 거의 빠졌기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게 보통이었다. 대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고 기억할 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말하는 모든 사실을 합당하고 현명하게 들리게 했으며 또 거기 공명되어 듣는 이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들도 그렇게 현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일깨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는 그에 대비되어 더욱 투박하고 귀에 거슬리게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목소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주문에 걸려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는 것이다. 어떤 자에겐 그 목소리와 주문이 말하는 동안에만 효과를 끼쳐 다른 이들이 그 목소리에 취하는 동안에는 마법사의 계략을 환히 들여다본 것처럼 빙그레 웃는 경우도 있었다. 그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문에 정복당한 사람들의 경우 그 목소리와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라도 효력이 지속되어 그 부드러운 소리가 자신에게 속삭이며 재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정신과 의지의 노력 없이는 누구도 동요되지 않을 수 없으며 누구라도 그 목소리의 간청하고 명령하는 바를 물리치지 못했다. 그 목소리의 지배자가 통제하는 한은. 이제 그 소리는 부드럽게 묻고 있었다. "응? 왜 당신들은 내 휴식을 방해하는 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게 전혀 평화를 주지 않을 셈인가?" 그 음조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 부당한 위해를 받고 괴로워하는 그런 소리였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형체 하나가 난간에 기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망또를 두른 노인으로 망또의 색깔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눈을 움직이거나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색깔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높은 이마와 긴 얼굴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어두운 눈을 갖고 있었다. 지금 그의 표정은 엄숙하고 자비로우며 약간 지친 듯해 보였다. 머리칼과 수염은 하얬다. 그러나 입술과 귀 부근에는 아직 검은 숱이 보였다. 김리가 중얼거렸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다시 부드럽게 들려왔다. "음, 당신들 중 적어도 두 사람의 이름은 알고 있지. 갠달프는 너무 잘 알고 있으니 그가 내게 무슨 도움이나 조언을 청하러 왔다고는 기대하지 않소. 그리고 그대 로한의 군주 데오든은 고귀한 문장과 욜왕가의 준수한 용모로 알아볼 수 있소. 오, 타인보다 세 배의 명망을 지녔던. 덴겔의 훌륭한 아드님이시여! 왜 당신은 진작 친구로서 오지 않았소? 서부의 강대한 왕인 당신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소. 특히 근년에 들어서는 당신을 괴롭히는 우매하고 간악한 간언들로부터 당신을 지켜 주고싶었소. 이미 너무 늦은 것이오? 내게 가해진 많은 위해에도 불구하고 - 유감스럽게도 로한인들이 그 일에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 - 여전히 나는 당신을 지켜 줄 것이고 또 만일 날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한 파멸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겠소. 진정 나만이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소." 데오든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둡고 근엄한 눈길로 자신을 굽어보는 사루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다음엔 곁에 선 갠달프를 바라보았다. 동요의 기색이 보였다. 갠달프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아직 내려지지 않은 어떤 호출을 참을성있게 가다리는 사람처럼 돌같이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기사들은 처음엔 사루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런거렸으나 이윽고 주문에 걸린 사람들처럼 아무 말이 없어졌다. 그들에게는 갠달프가 자신들의 주군에게 이렇게 정당하고 격에 맞게 말한 적이 결코 없었던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데오든을 향한 그의 언동은 거칠고 교만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의 그림자, 다시 말해 커다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건 사루만이 비상구 옆에 서서 반쯤 문을 열어 놓고 한 줄기 빛을 들어오게 하는 반면 갠달프는 그들을 암흑 속에서 마크의 종말로 몰아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불쑥 침묵을 갠 것은 난쟁이였다. "이 마법사의 말은 거꾸로예요." 그는 도끼자루를 움켜쥐며 외쳤다. "오탕크의 말로는 도움은 파멸을 뜻하고 구원은 살해를 뜻해요. 명백해요. 더구나 우린 여기 구걸하러 온 게 아니오." "닥쳐라!" 사루만이 외쳤다. 이 순간 그의 목소리는 그리 상냥하지 않았으며 눈에는 빛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난 아직 네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야, 글로인의 아들 김리. 네 고향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 땅의 분란과 별 관계가 없겠지. 그러나 네가 거기에 휩쓸리게 된 것은 너 스스로의 뜻이 아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수행한 그 역할 - 용감한 역할임을 의심치 않지만 - 을 탓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먼저 내 이웃이며 한때는 내 친구였던 로한의 군주와 이야기하게 가만히 있으라고. 데오든왕이여,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 화평을 맺고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한 내 지식이 가져다줄 수 있는 도움을 받으시겠소? 사악한 시절에 대처하는 방안을 함께 의논하고 또 우리가 입은 손해를 선한 의지로 치유하여 양쪽이 가진 것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하지 않겠소?" 여전히 데오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치미는 울분을 참으려고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치미는 의심을 누르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요머가 말했다. "주군! 제 말을 들어 주소서! 지금 우린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던 바로 그 위험에 맞부딪쳤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거두려 출정했는데 결국 갈라진 혓바닥에 꿀을 바른 저 늙은 거짓말쟁이에게 현혹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저 덫에 걸린 늑대는 할 수만 있다면 사냥개들에게도 능히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진정 그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바라는 것이라곤 곤경에서 탈출하는 것뿐이올시다. 그러함에도 주군께선 배신과 살해에 능숙한 이자와 화평을 교섭하시렵니까? 이센의 여울에 묻혀 있는 데오드레드왕자와 헬름협곡에 있는 하마의 무덤을 기억하십시오!" "독이 묻은 혓바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네 혓바닥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 할까, 어린 독사여? " 하고 말하는 사루만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요문드의 아들 요머! 모든 이에겐 자기 직분이 있는 법이오. 전투에서의 용맹이 당신의 직분이고 또 당신은 그로 해서 높은 명예를 얻는 것이오. 당신의 주군께서 적으로 지명하는 자들을 죽이는 일에 만족하시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책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그러나 당신이 왕이 된다면 아마 친구들을 주의해서 선택해야 함을 알아야 할 거요. 사루만의 우정과 오탕크의 힘은 그 이면에 이러저러한 불만거리가 있을지라도 가벼이 내던질 수 없는 것이오. 당신은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아니오. 그것도 다시는 기대할 수 없는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가능했던 것이오. 그 숲의 그림자가 다음번엔 당신을 덮칠 것이오. 그것은 변덕스럽고 분별이 없으며 또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단 말이오. 그리고 로한의 군주시여, 용감한 자들이 전투에서 쓰러졌다고 해서 내가 살인자로 불려야 하겠소? 전투에 나가게 되면 공연히 -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 말이오 - 사람들은 죽는 법이오. 그러나 만일 그 때문에 내가 살인자라면 욜왕가 전체가 살인의 피로 얼룩져 있는 셈이 아니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맡은 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그들은 후에 몇몇 세력과는 화평을 맺었으며 또한 그 정책적 배려가 나쁜 것은 아니었소. 데오든왕이시여, 말씀드리건대 우리, 당신과 내가 평화와 우정을 나누는 게 어떻겠소? 결정권을 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오." "난 평화를 갖겠소." 데오든이 마침내 탁한 목소리로 애써 말했다. 여러 기사가 환성을 올렸다. 데오든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왕은 이번에는 더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소. 우린 평화를 갖겠소. 당신과 당신의 모든 공작이 그리고 당신의 사악한 지배자 - 당신이 우릴 넘겨버리려 하는 - 가 획책하는 모든 수단이 괴멸될 때 평화를 가질 것이오. 당신은 거짓말쟁이요, 사루만.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자요. 당신이 내미는 손은 내겐 단지 모르도르의 마수로 보일 뿐이오. 잔인하고 냉혹한 마수! 비록 나에 대한 당신의 전쟁이 정당한 것이었다 해도 - 물론 그건 정당하지 못했소. 왜냐하면 열 배만 현명했다면 당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먹은대로 나와 내 백성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오 -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웨스트폴드에서의 횃불들과 거기 죽어 누워 있는 어린이들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소? 그리고 당신의 졸개들은 혼버그의 성문 앞에서 이미 죽은 하마의 시체를 난도질했소. 당신의 까마귀들이 즐거워하도록 당신의 목이 그 창가 교수대에 걸릴 때 난 당신 그리고 오탕크와 평화를 맺겠소. 욜왕가로선 그쯤 해두겠소. 난 위대한 선조들의 불민한 자손일 뿐이지만 당신과 손가락을 핥을 필요는 없소. 다른 곳에 도움을 구해 보시오. 당신의 목소리는 이미 마력을 상실한 것 같소." 기사들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사람들처럼 데오든왕을 물끄러미 올라다보았다. 주군의 목소리는 사루만의 음악 같은 소리에 대비되어 그들 귀에는 늙은 갈가마귀의 소라처럼 껄끄럽게 들렸다. 그러나 사루만은 - 한동안 분개로 제정신을 잃었다. 그는 마치 지팡이로 왕을 내리치려는 것처럼 난간 위로 몸을 굽혔다. 기사들에게는 뱀이 공격하기 위해 또아리를 트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가 쉿쉿거리며 말하기 시작하자 가사들은 그의 끔찍한 변모에 몸을 떨었다. "교수대와 까마귀라고! 망령든 늙은이 같으니! 욜가문이란 게 도둑놈들이 악취나는 가운데 술을 마시고 그 애새끼들은 바닥에서 개들과 뒹구는, 이엉으로 엮은 헛간이지 뭔가! 그놈들이야말로 너무도 오랫동안 교수대를 면해 왔지. 그러나 올가미는 서서히 조이고 끝에 가서 팽팽하고 단단하게 당기는 법이야. 할 테면 한 번 목을 매달아 보라고!" 서서히 본색이 드러남에 따라 이제 그의 목소리는 변했다. "왜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군. 사실 나에겐 당신이, 진격하는 만큼이나 줄행랑치는 데에도 재빠른 당신의 하찮은 말 무리가 필요없는데 말이야, 말군주 데오든이여. 오래전 난 당신의 능력과 기지에 과분한 지위를 부여했어. 그리고 지금 또다시 그걸 부여했지. 당신 때문에 오도된 사람들이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분명히 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당신은 내게 허풍과 욕설을 늘어놓았어. 좋을 대로 해봐! 당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당신 갠달프! 적어도 난 당신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또 당신의 수치를 동정하지. 이런 무리와 어울리는 걸 감내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당신에겐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갠달프. 그리고 깊고 멀리 볼 수 있는 고귀한 정신과 눈을 가졌기에 자부심도 가질 만한데 말이야. 아직 나의 조언을 듣지 않겠소?" 갠달프는 몸을 약간 움직여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의 이 마지막 만남에서 아직 다 못한 말이 있소? 아니면 혹시 먼저 한 말 중에 취소할 것이라도 있소?" 사루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취소한다고?" 하고 중얼거리더니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취소한다고? 난 바로 당신을 위해 조언하려 했지만 당신은 좀체 들으려 하지 않았지. 당신은 자존심이 강해서 조언을 좋아하지 않지. 사실 자신의 지혜가 풍부하니까. 그러나 이번 경우엔 당신이 고의적으로 내 의도를 곡해함으로써 판단을 그르쳤다고 생각하오. 당신을 설득하려는 일념에 내 인내심을 잃었던 것 같소. 진정으로 그 사실을 후회하오. 왜냐하면 난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도 품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광포한 자들과 무지한 자들을 대동하고 내게 돌아왔지만 지금도 난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소. 내가 어떻게 악의를 품을 수 있겠소. 우린 둘 다 숭고하고 유서깊은, 이 중간계에서 가장 훌륭한 마법사들의 일원이 아니오? 우리의 우정은 상호간에 이득이 될 것이오. 함께 일한다면 우린 아직도 많은 걸 이뤄 낼 수 있고 세상의 온갖 병패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오.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고 이 좀스런 족속들은 생각에서 지워 버립시다!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결정한 바를 받들도록 합시다! 공동의 선을 위해 난 기꺼이 과거를 시정하고 당신을 받아들이겠소. 나와 상의하지 않겠소? 이리 올라오지 않겠소?" 사루만이 이 마지막 시도에 기울인 힘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의 말이 들리는 범위내에 서 있던 자는 모두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마력은 종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 인자한 왕이 대단히 아끼지만 잘못을 범한 대신을 점잖게 타이르는 투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대화에서 배제된 채 단지 문가에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건 마치 버릇없는 아이들이나 칠칠맞은 하인들이 윗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고서 그게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보다 고상한 기질의 소유자들로 존경받을 만하고 현명했다. 두 사람이 동맹을 맺는다는 건 불가피해 보였다. 갠달프는 오탕크의 고대광실에서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심원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성채로 들어갈 것이다. 문이 닫힐 것이고 그들은 밖에 남아 할당되는 일이나 벌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심지어 데오든의 마음 속에서도 의혹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는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그는 가버릴 것이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그때 갠달프가 웃었다. 환상은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루만! 사루만!"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사루만, 당신은 당신이 걸어야 할 삶의 길을 놓쳐 버렸소. 당신은 왕의 어릿광대가 되어 왕의 고문을 흉내냄으로써 밥벌이를 하고 또 훈장도 타려 했었소. 아, 나를!" 그는 웃음을 누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서로를 이해한다고? 당신은 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소.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 사루만을 너무도 잘 아오. 난 당신의 주장과 행위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또렷하게 기억하오. 지난번 당신을 방문했을 때 당신은 이미 모르도르의 일개 간수였으며 나를 그리로 보내려 했소. 글쎄, 지붕으로 탈출한 자는 다시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번 생각하는 법 아니겠소? 아니오, 난 올라갈 생각이 없소. 그렇지만 사루만, 마지막으로 들으시오! 이리 내려오지 않겠소? 이센가드는 당신이 희망하고 공상한 것처럼 든든한 요새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소. 물론 그 안에는 여전히 당신이 희망을 건 다른 뭔가가 있겠지. 하지만 잠시라도 그걸 떠나 보는 게 낫지 않겠소? 새로운 일을 향해서 말이오. 잘 생각해 보오, 사루만. 이리 내려오시오." 그러자 사루만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스쳤다. 그리고나서 금세 죽은 듯 창백해졌다. 그가 표정을 바꾸기 전 일행은 그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그곳에 머물러 있기도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피난처를 떠나기도 두려운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그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건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차가웠다. 오만과 증오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조롱하듯 말했다. "내려오지 않겠느냐고? 무기를 갖추지 않은 자가 문 밖에서 도둑놈들과 이야기하러 내려간단 말인가? 여기서도 너의 말은 꽤나 잘 들려. 난 바보가 아니고 또 너 갠달프를 믿지도 않아. 몸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난 그 숲의 악마들이 네 명령만 기다리며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러자 갠달프는 진력이 나서 말했다. "배반자들은 언제나 남의 말을 믿지 않지. 그러나 당신은 목숨을 염려할 필요가 없소. 정말로 날 이해한다면 당신도 알겠지만 난 당신을 죽이거나 해치고 싶지 않소. 그리고 내겐 당신을 보호할 만한 힘이 있고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요. 당신은 자유롭게 오탕크를 떠날 수 있소. 그렇게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오." 사루만이 조롱하듯 말했다. "괜찮은 제안 같은데. 참으로 회색의 갠달프다운 방식이야. 그렇게도 겸손하고 너무도 친절하니 말씀이야. 난 네가 오탕크를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떠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아. 그러나 왜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단 말인가? 그리고 '자유롭게' 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조건이 있을 걸로 생각하는데." "떠나야 할 이유는 창가에서도 볼 수 있을 거요. 다른 자들이 당신 생각에 떠오를 것이오. 당신의 졸개들은 궤멸되었고 당신의 이웃은 당신 스스로가 적으로 삼았으며 또 당신은 새로운 당신의 지배자를 속였거나 그러려 했소. 그의 눈이 이쪽을 향할 때 그건 분노의 시뻘건 눈일 거요. 그러나 '자유롭게' 라는 말뜻은 있는 그대로의 의미일 뿐이오. 속박, 구속, 혹은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소. 원한다면 심지어 모르도르로 갈 수도 있소, 사루만. 그렇지만 먼저 오탕크의 열쇠와 당신의 지팡이를 내게 건네주어야 하오. 그것들은 당신 행실의 담보물이 될 것이고 당신이 그것들을 다시 소유할 만하게 되면 나중에 돌려줄 것이오." 사루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눈은 빨갛게 불타올랐다. 그는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나중에! 그래, 네가 바랏 두르의 열쇠들마저 차지하고 또 일곱 왕의 왕관과 다섯 마법사의 지팡이들을 모조리 갖고 또 지금 네가 신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구두를 한 켤레 샀을 때 말이겠지. 겸허한 계획이군. 내 도움이 거의 필요하지도 않은 계획이야! 난 달리 할 일이 있어. 바보처럼 굴진 말라고. 기회가 있을 때 교섭을 하고자 한다면 가서 정신이 맑을 때 돌아와! 그리고 이 멱따는 자들과 네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르는 자질구레한 오합지졸은 두고 오라고! 잘 가게나!" 그는 몸을 돌려 발코니를 떠났다. "돌아와, 사루만!" 갠달프가 명령하듯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깜짝 놀라게도 사루만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질질 끌리듯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난간으로 돌아와 그 위에 몸을 기대고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잡히고 쪼그라들었다. 손은 집게발처럼 무거운 검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갠달프가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하지 않았어.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사루만, 당신은 바보가 되었군. 게다가 신세도 가련해지고. 당신에겐 아직도 우행과 악으로부터 손을 씻고 새로이 봉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나 당신은 머물러서 자신의 오랜 음모들의 끄트머리나 갉작거리는 길을 택했어. 그렇다면 머무르라고! 그러나 경고해 두지만 당신은 다시는 쉽게 나을 수 없을 거야. 동부의 검은 손이 뻗쳐 당신을 구해 주지 않으면 나을 수 없어, 사루만!" 갠달프의 목소리는 힘과 권위가 넘쳐났다. "보라고! 난 네가 배신했던 회색의 갠달프가 아니야. 난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온 백색의 갠달프야. 이제 넌 아무 색깔도 없어. 그리고 넌 마법단으로부터도 또 신성회의로부터도 추방되었어." 그는 손을 들어올리며 또렷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사루만, 네 자팡이는 부러졌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루만의 손에 잡혔던 지팡이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고 그 머리 부분이 갠달프의 발치에 떨어졌다. "자, 가거라!" 갠달프가 소리치자 사루만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져 간신히 기어서 가버렸다. 바로 그 순간 위에서 둔중하고 빛나는 물체 하나가 획 하고 내던져졌다. 그것은 막 사루만이 난간을 떠날 참에 쇠난간을 스쳐 갠달프의 머리 바로 옆을 지나쳐서 그가 서 있던 계단에 부딪혔다. 난간이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계단은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불꽃과 함께 쪼개졌다. 그러나 그 공 같은 물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것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공 모양의 물체로, 계단을 굴러내려 웅덩이 쪽으로 떨어져가자 피핀이 달려가 주워들었다. 요머가 소리쳤다. "지독한 악당놈!" 그러나 갠달프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야, 그건 사루만이 던진 게 아니야. 또 그가 시켜서 한 짓도 아닐 거야. 그건 저 위쪽 창에서 날아왔소. 웜통선생이 이별의 일격을 가한 것 같은데 조준이 잘못된 것이지." "조준이 서툴렀다면 그건 그가 당신과 사루만 둘 중에 누구를 더 증오하는지 마음 속으로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고 아라곤이 말하자 갠달프도 대답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오. 저 두 사람의 교류에는 별로 낙이 없을 것이오. 그들의 말은 서로를 갉아먹게 될 테니까 말이오. 그러나 그 벌은 올바른 것이오. 만일 웜통이 언제고 살아서 오탕크를 나오게 된다면 벌은 그보다 훨씬 중할 것이오." 갠달프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날쌔게 몸을 돌려 무거운 물건을 지고 오듯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피핀에게 외쳤다. "자, 여보게, 그건 내가 다루겠네! 난 자네에게 그걸 처리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어!" 그는 피핀을 맞으러 내려가 황급하게 그 검은 구체를 빼앗아 망또자락으로 감쌌다. "내가 간수하겠어. 이건 사루만이 던져 버리려고 고를 만한 물건이 아니지."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그렇지만 던질 것들이 아마 또 있을 거예요. 토론이 이제 끝난 것이라면 적어도 돌이 미치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납시다." 갠달프가 대답했다. "이제 끝이야! 가지." 그들은 오탕크의 문에 등을 돌리고 내려갔다. 기사들은 환호를 올리며 왕을 맞이했으며 갠달프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사루만의 마력이 깨진 것이다. 그들은 그가 부르자 사루만이 오고 또 기어서 사라지는 걸 보았던 것이다. 갠달프가 말했다. "자, 이 일은 끝났어. 이제 트리비어드를 찾아 일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알려 줘야겠지."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아마 그도 짐작했을 텐데요, 분명히? 일이 달리 끝날 가망도 있었나요?" "비록 될 뻔하긴 했지만 가망성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 그렇지만 내가 시도한 데는 이유가 있었어. 자비를 베푸는 뜻도 있었고 또 자비와는 별 상관 없는 이유도 있었지. 첫째 사루만의 목소리의 위력이 감퇴하고 있음이 드러났지. 폭군이면서 동시에 조언자 노릇까지 할 수는 없거든. 음모가 무르익으면 더이상 비밀로 할 수 없는 거야. 그런데 그가 그 함정에 빠져들어 우리를 호락호락한 상대로 보고 한 명씩-나머지 사람들은 듣고만 있게 하고 - 처리하려고 한 거야. 그때 내가 마지막 선택이자 정당한 선택을 제시한 거지. 모르도르와 사적인 책략 모두를 포기하고 어려운 처지의 우리를 도움으로써 보상을 하라고 말이야.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무얼 원하는지 잘 알지. 그는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었어. 그러나 그는 도움을 주는 대신 오탕크의 힘을 보유하기로 작정했어. 그는 오로지 지배하려고만 들지 봉사하려 하질 않아. 이제 그는 모르도르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있지만 아직도 폭풍우를 지배하는 힘을 꿈꾸고 있지. 불행한 바보야! 만일 동부의 권능이 이센가드로 팔을 뻗친다면 그는 궤멸되고 말 거야. 우린 외부로부터 오탕크를 파괴시킬 수는 없어. 그러나 사우론은 -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자 피핀이 물었다. "그런데 사우론도 정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당신은 그를 어쩔 셈인가요?" "내가? 아무것도! 난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난 지배권을 바라지 않거든. 그가 어떻게 될지는 나로선 무어라 말할 수 없어. 다만 훌륭했던 그 많은 것들이 이제 성채 속에서 곪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군. 어쨌든 우리의 사정이 나빠지진 않았어. 운명의 변전이란 참으로 야릇하군! 증오가 때로는 자신을 해치다니! 내가 생각하기엔 설령 우리가 오탕크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웜통이 내던진 것보다 더 귀한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거야." 느닷없이 이야기를 꿰뚫고 째지는 비명소리가 저 위쪽 열린 창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아마 사루만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내버려 두자고." 이제 그들은 폐허가 된 성문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아치 아래를 빠져나오자 돌더미 옆에서 트리비어드와 열두 명의 엔트들이 성큼성큼 올라왔다. 아라곤, 김리, 레골라스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저기 내 동지 세 명이 있소, 트리비어드. 내가 이야기하긴 했지만 당신은 아직 보지 못했지요." 갠달프는 한 명씩 아름을 일러 주었다. 늙은 엔트는 오랫동안 수색하듯이 바라보고는 차례로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레골라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 당신은 멀리 머크우드에서 오신 거요, 착한 요정양반? 참으로 거대한 숲이었었지!"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사는 우리가 새로운 나무들을 보는 데 지쳐버릴 정도로 거대하진 않아요. 전 판곤의 숲속을 거니는 걸 무척이나 좋아해요. 아직 숲의 경계 안으로는 들어가보지 못했지만요. 그래서 숲을 보지 않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진 않아요." 트리비어드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 전에 당신의 소망이 이뤄지길 빌겠소." "운이 닿는다면 갈 겁니다. 제 친구와 약속하길, 만일 모든 일이 잘 풀리면 함께 판곤을 방문하기로 했지요. 물론 당신의 허락을 얻어서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올 요정은 누구든지 환영이오." "제가 말하는 친구는 요정이 아니에요. 여기 있는 글로인의 아들 김리를 말하는 겁니다." 김리가 깊숙히 고개를 숙이자 벨트에서 도끼가 미끄러져 쨍그랑 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트리비어드의 검은 눈이 난쟁이를 향했다. "흠, 흠! 난쟁이와 도끼라! 흠! 난 요정들에겐 호의를 가졌지. 하지만 당신은 지나친 요구를 하는군. 이건 정말 이상한 우정인데." 레골라스가 말했다. "아마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지만 김리가 살아있는 한 저 혼자서는 판곤에 오진 않을 겁니다. 김리의 도끼는 나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오르크들을 위한 것이지요, 판곤의 영주여. 그는 전투에서 마흔둘이나 베었습니다." "후! 그렇소? 그건 훨씬 좋은 이야기군. 일이란 뜻한 대로 흐르기 마련이자. 하지만 맞으려고 서둘 필요는 없고. 그러나 우린 잠시 헤어져야 하겠소. 낮이 다 가고 있으니. 또 갠달프가 말하길 당신들은 어스름이 깔리기 전에 가야 한다고 했고 또 마크의 군주께선 몹시도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길 바랄 테니까."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렇소, 우린 가야 하오. 지금 가야 하오. 내가 당신의 문지기들을 데려가야 할 것 같소.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없어도 충분히 잘 처리하시겠지요?" "아마 할 수 있을 거요. 그러나 난 그들을 보고 싶어할 것이오. 우린 참으로 짧은 시간 동안에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나 자신 내가 성급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오. 아마 거꾸로 나이를 먹어 젊어지는 것도 같소. 그들은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본 것 중 태양과 달 아래 최초의 새로운 것이었소. 난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오. 난 그들의 이름을 장문의 계보 속에 넣었소. 엔트들은 그걸 기억할 거요. 흙에서 태어나고 산맥처럼 나이가 맡은 성큼성큼 걷고 물을 마시며 사냥꾼처럼 갈증을 느끼는 엔트! 잘 웃고 키 작은 종족 호비트! 엔트와 호비트는 나뭇잎이 새롭게 피어나는 한 친구로 남을 것이오. 잘 가게! 만일 너희들의 즐거운 땅 샤이어에서 소식을 듣거든 기별해 줘!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엔트와이프들에 대해 듣거나 본 것을 말이야. 가능하다면 직접 오고." "그렇게 하겠어요." 메리와 피핀은 함께 말하고 서둘러 돌아섰다. 트리비어드는 그들을 바라보고는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갠달프에게 돌아섰다. "그래, 사루만은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오? 나도 그가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그의 가슴은 검은 후오른의 가슴처럼 썩었소. 그렇지만 만일 내가 제압당하고 내 모든 나무들이 파괴된다면 나라도 숨어들 수 있는 어두운 구멍이 하나 남아 있는 한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온 세상을 당신의 나무로 뒤덮어 살아있는 다른 모든 생물들을 질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지 않았소. 그런데 알다시피 사루만은 그곳에 남아 증오를 키우고 재주껏 음모의 그물을 짤 것이오. 그는 오탕크의 열쇠를 가지고 있소. 그러나 그가 탈출하게 놔둬서는 안 되오." "정녕코 안 될 일아지! 엔트들이 빈틈없이 조치할 거요. 사루만은 나의 허가 없이는 오탕크의 바위 너머로 한발도 떼어놓지 못할 것이오. 엔트들이 그를 감시할 것이오." "좋소. 내가 바라는 바요. 이제 한시름 덜고 다른 일에 매달릴 수 있겠소. 그러나 조심해야 하오. 강물이 빠졌소. 성채 주위로 보초들을 세우는 걸로는 충분치 않을 거요. 오탕크 밑으로 깊은 길들이 파여 있어 머지않아 흔적없이 들고 나고 할 것을 사루만이 고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오. 수고스럽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다시 강물을 쏟아부을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그것도 이센가드가 상시 웅덩이가 되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 출구들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말이오. 지하의 모든 비밀장소가 물에 잠기고 출구들이 봉쇄되면 그때는 사루만도 위층에 머무르면서 창밖을 내다봐야만 할 것이오." "엔트들에게 맡기시오. 우리가 계곡을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뒤질 것이오. 자갈 밑까지도 들여다볼 것이오. 여기서 살기 위해 나무들이 돌아오고 있소. 늙은 나무들, 야생의 나무들이. 우린 그걸 감시의 숲이라 부를 것이오. 내가 알지 못하고는 다람쥐 한 마라조차 여길 지나갈 수 없을 거요. 그 일은 엔트에게 맡기시오. 그가 우리를 괴롭힌 세월의 일곱 배가 지날 때까지 우린 그를 감시하는 데 지치지 않을 것이오." 제11장 팔란티르신석(神石) 갠달프와 그 동지들 그리고 왕과 그의 기사들이 이센가드를 떠난 것은 해가 산맥의 기다란 서쪽 지맥 뒤로 떨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갠달프와 아라곤은 각각 메리와 피핀을 뒤에 태웠다. 왕의 기사들 두 명이 재빨리 말을 몰아 앞서 나가 계곡속으로 들어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느긋한 속도로 뒤따랐다. 성문에는 엔트들이 긴 팔을 쳐든 채 조상들처럼 장엄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웬만큼 내려온 후 메리와 피핀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엔 여전히 햇빛이 비치고 있었으나 이센가드에는 음영이 길게 뻗쳐 있었다. 회색 폐허가 어둠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스라이먼 곳에 트리비어드 홀로 고목 그루터기처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비트들은 멀리 판곤의 경계지역 양지바른 바위턱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했다. 일행은 하얀 손 모양의 조각이 서 있던 곳에 이르렀다. 받침대는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으나 조각된 손은 넘어뜨려져 조각조각 나 있었다. 길 한가운데 기다란 검지가 어스름 속에 하얗게 누워 있었으나 빨간 손톱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엔트들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는군." 갠달프가 말했다. 그들은 계속 나아갔고 계곡엔 밤이 깔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메리는 갠달프에게 물어 보았다. "오늘밤 멀리까지 갈 건가요, 갠달프? 얼마 안 되는 오합지졸이 당신 뒤를 졸랑졸랑 따르고 있는 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오합지졸도 피곤해서 졸랑졸랑 따라가는 건 그만두고 눕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 그 말을 들었나? 그 말을 가슴에 맺히게 기억할 필요는 없어. 자넬 지목해 더 긴 소리를 늘어놓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좋아. 그는 전에 호비트를 본 적이 없었기에 자네들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그는 사실 자네들을 주시했어. 자네 자존심에 위안이 된다면 이 말을 해줘야겠군. 그 당시 그의 가슴 속엔 우리 모두보다 자네와 피핀 둘에 대한 생각이 더 들끓고 있었지. 자네들이 누구며, 어떻게 그곳에 왔고 또 왜 왔는가, 자네들이 알고 있는 게 무엇이며 포로로 잡혔었던가, 만일 그렇다면 오르크들이 전멸당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아 탈출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작은 수수께기들로 사루만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거야. 만일 그의 관심을 자랑거리로 느낀다면, 메리아독, 그에게서 받은 조롱은 일종의 칭찬이란 말일세." "고마워요. 그렇지만 당신의 뒤꽁무니에 매달려 가는 게 더 큰 자랑이에요. 예를 하나 들자면 하나의 질문을 두 번이나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요. 오늘밤 멀리까지 갈 건가요?" 갠달프는 웃었다. "정말 말리지 못할 호비트로군! 모든 마법사들은 호비트 한둘은 데리고 있어야겠어. 우리 마법사에게 낱말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잘못을 고쳐 줄 테니까 말이야. 미안, 미안. 그렇지만 난 사소한 문제들에까지도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거든. 우린 계곡 끝에 이를 때까지 몇 시간 더 느긋하게 달리면 돼. 그렇지만 내일은 빨리 달려야 할 거야. 사실 출발할 때만 해도 이센가드에서 바로 평원 건너 에도라스의 왕의 궁전으로 갈 계획이었지. 그것만도 며칠 걸릴 여행이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고 계획을 바꿨네. 왕이 내일 도착할 거란 사실을 알리러 사자들이 앞서 헬름협곡으로 달려갔지. 왕은 그곳에서 많은 병사들과 함께 산속의 길을 통해 던해로우로 달려갈거야. 지금부터는 밤이고 낮이고 간에 피할 수만 있다면 둘 이상이 공공연하게 평원을 질주해선 안 돼." "두 배로 얻을 것인가 아니면 몽땅 잃을 것인가 하는 식이군요. 난 오늘밤의 잠자리 이상은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봐요. 도대체 헬름협곡과 그 밖의 다른 지명이 의미하는 바가 뭣이죠? 또 어디에 있는 거죠? 난 이 나라에 대하선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다면 무언가를 좀 배워야지.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정을 알고 싶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지금 당장 배울 수는 없겠고 또 내게 배울 수도 없어. 내겐 생각해야 할 급박한 일들이 너무 많거든." "좋아요. 야영지의 모닥불 곁에서 스트라이더에게 매달려 보죠. 그는 당신보다는 덜 퉁명스러우니까요. 그런데 왜 이처럼 모든 걸 비밀로 하죠? 난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우린 이겼어. 그렇지만 그건 사소한 첫번째의 승리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우리의 위험을 가중시킨 거야. 이센가드와 모르도르 사이에는 내가 아직껏 헤아리지 못했던 어떤 연계가 있어. 그들이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는지 확실히 알진 못해. 그렇지만 분명히 그들은 연락을 주고받았어. 난 지금 바랏 두르의 눈이 조급하게마법사의 계곡 쪽을, 그리고 로한 쪽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좋을 텐데." 그들은 계곡 아래로 구불구불하게 뻗은 길을 따라 천천히 전진했다. 돌투성이 바닥 위로 이센강이 때론 멀리 때론 가까이 흘렀다. 산맥으로부터 밤이 기어내려왔다. 안개는 사라졌다. 냉랭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둥글게 차가는 달이 동편 하늘을 흐릿하고 차가운 광채로 가득 채웠다. 오른편 산의 양 허리는 벌거벗은 구릉으로 비탈져 내렸다. 전면에는 넓은 평원이 회색으로 펼쳐졌다. 드디어 그들은 말을 세웠다. 그들은 방향을 돌려 대로를 버리고 향긋한 고지의 잔디로 들어섰다. 서쪽으로 일 마일 가략 가서 그들은 작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골짜기는 남쪽으로 트여 있었고 후면은 둥글게 이어진 돌 바란 산록으로 둘러져 있었다. 돌 바란은 안개산맥의 북쪽 연봉 마지막 산으로 항상 히드가 우거진 곳이었다. 골짜기 양 면은 지난해의 고사리들로 텁수룩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 새봄의 이파리들이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뻗어오르고 있었다. 낮은 기슭에는 가시나무가 무성했다. 일행은 한밤이 되기 두 시간 전쯤 그 기슭 아래 야영지를 설치했다. 그들은 가지를 뻗은 산사나무 뿌리 아래쪽 우묵한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 나무는 수령이 오래되어 비틀리긴 했으나 키 크고 하나하나의 가지가 아직 원기왕성했다. 작은 가지들에선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한 례에 두 사람씩의 불침번이 배치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 후 외투와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잠을 청했다. 호비트들은 따로 한쪽 구석에 오래된 고사리를 모아쌓고 그 위에 누웠다. 마리는 곧 졸음이 왔으나 피핀은 이상스럽게도 잠을 청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몸을 비틀며 움직일 때마다 마른 고사리가 딱딱 부러지며 바스락거렀다. 메리가 물었다. "왜 그래? 개미굴 위에라도 누운 것 같아?" "아냐, 웬지 편안하질 않아. 침대에서 자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매리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손가락으로 세 보라구! 로리엔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계산해 보면 되잖아." "아니, 아니야. 난 침실에 있는 진짜 침대를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리벤델부터 세야지. 그렇지만 난 오늘밤은 어디에서라도 잘 잘 수 있어. "잠시 후 피핀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넌 운이 좋은 거야, 메리. 넌 갠달프와 함께 말을 타고 왔잖아." "음, 그게 어쨌단 말이야?" "그에게서 어떤 정보나 소식을 들었겠지?" "그래, 아주 많이 들었지. 평소보다 더 많이. 그러나 너도 그 전부나 혹은 대부분을 들었잖아. 너도 우리 가까이에 있었고 또 우리가 비밀스럽게 얘기한 것도 아니니 말이야. 만일 네 생각에 그로부터 더 많은 걸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또 그가 허락한다면 내일은 네가 그와 함께 타고 가지 그래." "그렇게 해도 될까? 좋지! 그렇지만 그는 입이 무거워, 안 그래? 전혀 변하지 않았단 말이야." "아냐, 변했어!" 잠에서 약간 깨어나 친구를 근심스럽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히 여기면서 메리가 말했다. "그는 더 현명해지고 깊어진 거야. 내 생각엔 그는 예전보다 더 친절해졌으면서도 더 놀라게 하고, 더 쾌활해졌으면서도 더 엄숙해진 것 같아. 그는 변했어. 그렇지만 우린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볼 기회가 없었어. 하여간 사루만과의 그 마지막 대결을 생각해 봐! 한때는 사루만이 갠달프보다 상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고.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든 간에 사루만은 마법사들의 수장이었어. 백색의 사루만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갠달프가 백색이야. 갠달프가 오라고 하니까 와서 지팡이를 빼앗기고 또 가라고 하니까 가버렸잖아." "그런데 만일 갠달프가 변했다면 어느 때보다도 입이 더 무거워진 것뿐이야." 피핀은 계속 우겼다. "그 유리공 말이야. 그는 끔찍이도 기뻐하는 것 같던데. 그는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거나 짐작하고 있어. 그런데도 그가 우리에게 한마디라도 해줬어? 아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내가 그걸 주워 들었고 또 웅덩이에 빠질 뻔한 걸 막은 것도 나야. 그런데도 그는 '자, 내 친구여, 내가 그걸 간수하겠네.' 하고 말했을 뿐이야. 난 그게 뭔지 궁금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었어." 피핀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아? 그래 그게 널 근심하게 만든 거야? 자, 내 친구 피핀, 길도르의 말 - 샘이 인용하곤 하는 그 말 말이야 - 을 잊으면 안 돼. '마법사들의 일에 간여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예민하며 쉬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사실 우리의 삶 전부가 마법사들의 일에 관련된 것이었어. 난 위험이 따르더라도 약간의 정보를 얻고 싶어. 그 공을 한번 보고 싶단 말이야." "잠이나 자! 조만간 충분히 정보를 얻게 될 테니까. 사랑스런 피핀, 꼬치꼬치 알고 싶다고 투크가의 누군가가 브랜디버크가의 누구를 못살게 한 적은 없었어. 그런데 지금 네가 그러는 것 같지 않아?" "천만에! 내가 하고 싶은 것, 즉 그 돌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 네게 무슨 해가 된단 말이야? 난 내가 그걸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 암탉이 알을 품듯 늙은 갠달프가 올라앉아 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네게서 '네가 가질 수 없으니 잠이나 자!' 라는 말밖에는 들을 수 없다니 섭섭해." "음, 그럼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미안해, 피핀. 그렇지만 정말 넌 아침까지 기다려야 해. 아침을 먹고 나면 나도 네가 바라는 만큼 호기심이 생길 테고 또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마법사를 꼬드기도록 도울 거야.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만일 내가 또 하품을 한다면 귀가 찢어지고 말거야. 잘 자라구!" 피핀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잠은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잘 자라고 말한 지 몇 분도 안 돼 잠이 든 메리의 나직한 숨소리도 잠을 청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게 고요해짐에 따라 그 검은 공에 대한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피핀은 그 구체의 무게를 다시 손에 느끼며 잠시동안 들여다보았던 그 신비로운 붉은 심연을 다시 보았다. 그는 몸을 뒤채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는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는 망또로 몸을 감쌌다. 달은 골짜기 아래로 차갑고 흰빛을 뿌리고 있었으며 수풀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위는 잠든 사람들로 꽉 찼다. 두 명의 불침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언덕 위에 있거나 아니면 고사리 사이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충동에 이끌려 피핀은 갠달프가 누운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는 갠달프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사는 잠든 것 같았으나 눈꺼풀은 완전히 감기지 않았다. 긴 눈썹 아래로 눈이 반짝였다. 피핀은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갠달프에게서는 잠이 깼다는 아무런 표시도 나타나지 않았다. 호비트는 반쯤은 내키지 않는 상태로, 그러나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가려는 충동에 이끌려 마법사의 머리 뒤쪽으로부터 기어갔다. 그는 머리 위에 망또를 펼쳐 놓은 채 담요를 감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즉 그의 오른쪽 허리와 굽힌 팔 사이에는 검은 천으로 싸인 둥근 물체가 솟아 있었다. 그때 그것을 쥐고 있던 갠달프의 손이 슬그머니 미끄러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거의 숨도 쉬지 않으며 피핀은 한걸음 한걸음 기어갔다. 마침내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살금살금 손을 뻗쳐 천천히 그 덩어리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무거운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그냥 잡동사니 꾸러미에 불과한지도 몰라.' 하는 야릇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꾸러미를 내려 놓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그대로 쥐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발끝으로 걸어가 커다란 돌 하나를 찾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재빨리 천을 벗겨 내고 그 속에 돌을 넣고는 마법사의 손 곁에 다시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벗겨낸 물체를 바라보았다. 어둡고 생명이 없는 듯한 그 수정구체가 그의 무릎 위에 놓였다. 피핀은 구체를 들어올려 황급히 자신의 망또로 감싼 다음 잠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갠달프가 몸을 꿈틀거리며 몇 마디 중얼거렸다. 이상한 언어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무엇인가를 찾아 뻗치더니 천으로 싼 돌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나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천치 같은 바보야!"피핀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렀다. "넌 스스로를 끔찍한 분란 속에 밀어 넣고 있어. 빨리 그걸 도로 가져다놔!" 그러나 그는 무릎이 떨려 감히 그 꾸러미를 가져다놓을 수 있을 만큼 마법사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이제 난 그를 깨우지 않고는 절대로 이걸 다시 가져다놓을 수 없어. 좀더 침착해질 때까지는 할 수 없다고. 그러니 우선 한번 봐두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여기선 안 되겠어." 그는 자리를 슬그머니 떠나 잠자리에서 멀지 않은 작은 언덕 위에 앉았다. 달은 계곡 가장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피핀은 무릎을 세우고 그 안에 공을 놓고 앉았다. 그는 그 위로 목을 깊숙히 수그렸다. 그 모습은 마치 탐욕스런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서 떨어진 구석에서 음식사발 위로 몸을 굽힌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망또를 젖히고 구체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주위의 대기는 고요하고 팽팽하게 긴장된 것 같았다. 처음에 구체는 달빛을 받아 흑옥처럼 검게 번득였지만 곧 그 중심부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움직이기 시작해 피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이내 구체 내부가 불타는 것 같더니 공은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내부의 빛이 선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그는 숨이 막혀 버둥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양손으로 공을 거머쥔 채 몸을 굽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깊숙히 굽혀지지 이윽고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잠시 그의 입술이 움찔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목졸린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비명은 귀청을 찢을 듯했다. 기슭에서 불침번들이 달려왔다. 곧 숙영지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도둑이다!" 갠달프는 이렇게 말하며 황급히 구채 위에 망또를 덮었다. "아니 피핀! 이거 정말 탄식할 만한 노릇이군!" 그는 피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호비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뻣뻣한 몸으로 누워 있었다. "고약한 일이야! 도대체 자네 자신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어떤 위해를 끼쳤는지나 아는가!"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초췌해졌다. 그는 피핀의 손을 잡고 얼굴 위로 몸을 숙여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그는 이마 위에 양 손을 얹었다. 호비트는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달빛을 받아 핼쑥한 얼굴로 영문을 모르는 듯 주위에 몰려든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갠달프에게서 몸을 떼내면서 날카롭고 억양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네 것이 아니다, 사루만! 곧 그걸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다, 알겠는가? 그렇게만 전하란 말이다!" 이렇게 외치고는 일어나 도망치려고 발버둥쳤으나 갠달프가 부드럽고 굳세게 그를 붙잡았다. "페레그린 투크! 정신차려!" 호비트는 마법사의 손에 매달려 스르르 주저앉더니 뒤로 넘어지며 말했다. "갠달프! 갠달프!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달라고? 먼저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보게!" "난, 난 그 공을 꺼내서 봤어요." 피핀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안에서 날 겁에 질리게 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 다음엔 그가 와서 날 심문했고 또 날 쳐다봤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게 기억할 수 있는 전부예요." 그러자 갠달프가 냉엄하게 말했다. "그걸로는 안 돼. 자네가 본 것이 무엇이었고 또 무슨 말을 했지?" 피핀은 눈을 감고 몸을 떨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돌려 버린 메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침묵 속에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갠달프의 얼굴은 여전히 냉혹했다. "말해!" 피핀은 낮고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말을 이어나갈수록 점점 명료하고 힘이 들어갔다. "난 어두운 하늘과 높은 흉벽을 보았어요. 또 아주 작은 별들도 보고요. 그건 아주멀리 떨어진 오래전의 세계 같으면서도 견고하고 분명했어요. 이윽고 그 별들이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났어요. 날개달린 것들에 차단되었던 거예요. 난 정말 큰 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공 속에서는 성채 주위를 선회하는 박쥐들 같아 보였어요. 아홉마리였었던 것 같아요. 그 중 하나가 곧바로 날 향해 날아왔는데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졌어요. 그것은 끔찍한 - 아니, 아녜요! 난 말 못하겠어요. 난 그것이 날아와 덮치는 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공을 온통 꽉 채우고는 사라져 버렸어요. 그리고나서 그가 나타났어요.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했지만 나는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 돌아온 건가? 왜 넌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를 소홀히 했지?' 난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래 곧 그가 '넌 누구냐?' 하고 물었지만 난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질문이 나를 겁에 질리게 했고 또 그가 계속 몰아세웠기 때문에 니는 '호비트예요.' 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날 알아보는 것 같더니 비웃기 시작했어요. 마치 칼로 찌르는 듯한 잔인한 웃음이었어요. 난 버둥거렸죠. 그러자 그는 '잠깐 기다려! 우린다시 만나게 될 거다. 사루만에게 이 진귀한 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고 전해라. 곧 그걸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다, 알겠는가? 그렇게만 전하란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날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았어요. 난 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아녜요!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겠어요. 다른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날 보게!" 갠달프가 말했다. 피핀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는 피핀의 머리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 놓았다. "좋아, 더이상 말하지 말게. 자네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 자네 눈엔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거짓은 없어. 그러나 그는 자네와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자넨 여전히 바보, 정직한 바보야, 페레그린 투크. 좀더 똑똑한 자들 같았으면 그와 같은 위기에서 훨씬 더 좋지 않은 행동을 취했을 거야. 그러나 이 말을 잘 들어 둬! 자네는, 그리고 자네의 친구들 모두는 흔히 말하듯 운이 좋아서 구출된 거야. 그러나 행운을 두 번씩이나 기대할 수는 없어. 만일 그때 거기서 그가 자네를 바로 심문했다면 자넨 틀림없이 우리 모두의 파멸의 초래할 정도로 자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다 얘기했을 거야. 그러나 그는 열의가 너무 지나쳤지. 그는 단지 정보를 원했던 게 아니라 자네를 원했던 거야. 그것도 성급하게. 암흑의 성에서 느긋하게 자넬 이용하려고 말이야. 떨 필요없어. 마법사의 일에 끼어들려면 그런 정도는 생각해 두어야 하지. 그렇지만 자, 자넬 용서하겠네. 안심하게나. 걱정했던 것만큼 일이 안 좋게 풀린 것은 아니니까." 그는 피핀을 부드럽게 안아올려 다시 그의 잠자리로 옮겼다. 메리가 뒤따라와 그 곁에 앉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괜찮다면 거기 누워서 쉬게, 피핀. 날 믿어. 다시 손바닥이 가렵거든 내게 말해. 그런 건 고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사랑스런 호비트, 다시는 내 팔 아래 돌덩이를 놓지는 말아. 자, 이제 자네 둘을 잠시 같이 있게 해주지." 갠달프는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오탕크의 신석 주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위험은 가장 예기치 않았던 밤에 오는 법이오. 천만다행이었소." 그러자 아라곤이 물었다. "그 호비트, 피핀은 어떻습니까?" "이제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는 오랫동안 사로잡힌 건 아니오. 그리고 호비트들에게는 놀라운 회복력이 있소. 그 일에 대한 기억 또는 두려움은 아마 빨리 사라질 것이오. 아마 너무 빨리 사라질 거요. 그대가 오탕크의 신석을 간수하겠소, 아라곤? 그건 관리하기 정말 위험한 물건이오." "정말 그렇지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정당한 소유권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틀림없이 엘렌딜의 보고(寶庫)에서 나온 오탕크의 팔란티르신석으로 곤도르의 왕들에 의해 여기 갖다놓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시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소. 내가 보관하겠소." 갠달프는 아라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놀랍게도 그 돌을 들어 아라곤에게 주면서 정중하게 절을 했다. "받으시오, 왕이시여! 당신께 돌아가야 할 다른 것들을 열망하시면서. 그러나 당신의 소유물을 사용하시는 데 내가 조언을 드려도 좋다면, 그것을 사용하진 마시오. 아직은. 신중하셔야 하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고 준비해 온 내가 언제 성급하고 부주의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아직까진 결코 그런 적이 없었소. 그렇지만 막바지에 다다라 넘어져서는 안 되오. 그리고 적어도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합니다. 당신과 여기 서 있는 모든 이들! 다른 누구보다도 그 호비트, 페레그린이 그것의 행방을 알아서는 안 되오. 그 사악한 발작이 다시 그를 찾아올 수도 있소. 왜냐하면 슬프게도 결코 손에 대서는 안될 물건에 이미 손을 댔으며 또 들여다보기까지 했으니 말이오. 사실 이센가드에서 처음 손을 댄 것이 잘못이었고 또 나도 행동을 더 빨리 취했어야만 했소. 그러나나는 사루만에게 정신이 쏠려 있어서 처음에는 그 돌의 진정한 본성을 짐작하지 못했었소. 짐작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오. 이제야 그게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소." "그렇소,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드디어 우린 이센가드와 모르도르 사이의 연계와 그 방법을 알게 되었군요. 많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오." 그러자 데오든도 한마디했다. "우리의 적에겐 강점만이 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취약점도 있구려. 때로 악이 악을 쳐부순다는 오랜 속담도 있지요." 갠달프도 말했다. "그런 일은 많이 보았소. 그렇지만 우린 이번에 이상스럽게도 운이 좋았던 거요. 난 이 호비트 덕분에 중대한 실수를 면하게 된 건지도 모르오. 사실 난 이 돌의 용도를 알아 내기 위해 스스로 시험해 보아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었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나 자신이 그에게 드러나고 말았을 것이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런 난감한 사태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오. 설령 내가 빠져나올 수 있었더라도 그가 날 봤다는 사실 자체가 화가 되었을 것이오. 비밀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는 그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아야 하오." "난 이제 그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아라곤이 말하자 갠달프는 즉시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오. 아직 의혹의 짧은 시간이 남아 있고 우리는 그 시간을 이용해야하오. 적은 그 신석이 아직 오탕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따라서 호비트가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으며 사루만이 고통을 주려고 신석을 들여다보게 했다고 생각할 거요. 그 암흑의 심장은 이제 호비트의 목소리와 얼굴로, 또 그에 따른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을 겁니다. 그가 실수를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우린 그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오. 지금껏 우린 너무 느긋했소. 이젠 움직여야 하오. 이센가드 부근은 더이상 얼쩡거릴 필요가 없소. 난 페레그린 투크를 데리고 앞서 가겠소. 다른 이들이 잠자는 동안 혼자 어둠 속에 누워 있느니 그 편이 그에게도 좋을 것이오." "난 요머와 기사 열 명을 데려가겠소.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겠소. 나머지는 아라곤공이 아무 때라도 인솔해 가면 될 것이오." 데오든이 말하자 갠달프도 찬성했다. "뜻대로 하시오. 그렇지만 엄폐가 되는 산속에 이를 때까지는, 즉 헬름협곡까지는 최대한 속력을 내셔야 하오." 그 순간 그들 위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달빛을 가려 버린 것 같았다. 몇몇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위에서 가해지는 타격을 막으려는 듯 머리를 팔로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맹목적인 두려움과 견딜 수 없는 냉기가 그들을 엄습한 것이었다. 그들은 몸을 움츠리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날개달린 거대한 형체가 검은 구름처럼 달을 가리고 지나갔다. 그것은 공중을 한바퀴 선회하더니 이 중간계의 어떤 바람보다도 빠르게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앞에선 별들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 형체는 사라졌다. 기사들은 돌처럼 굳은 채 몸을 세웠다. 갠달프는 양 팔을 뻗치고 위를 응시하다가양 손을 꽉 쥔 뻣뻣한 자새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나즈굴! 모르도르와 사자야!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어. 나즈굴이 대하를 건너온 거야! 달려라, 말을 달려라! 새벽을 가다려선 안 돼! 재빠른 자가 굼뜬 자를 가다려선 안 돼! 말을 달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달리며 섀도우폭스를 불렀다. 아라곤이 그를 따라갔다. 갠달프는 피핀을 안아 들었다. "이번엔 자네가 나와 함께 타고 간다. 섀도우폭스가 자네에게 자신의 속도를 과시해 줄 거야." 그는 자신이 누웠던 곳으로 갔다. 이미 섀도우폭스가 그곳에 와 있었다. 모든 짐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멘 마법사는 말 등에 올라 앉았다. 아라곤은 피핀을 들어올려 망또와 담요로 감싼 다음 갠달프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잘 있으시오! 빨리 뒤따라 오시오! 섀도우폭스, 가자!" 그 위대한 말이 고개를 들었다. 늘어졌던 꼬리가 달빛 속에 휙휙 움직였다. 그리고는 대지를 박차고 앞으로 내달아 북풍처럼 산맥에서 사라졌다. 메리가 아라곤에게 말했다. "정말 아름답고 평온한 밤인데요. 어떤 녀석은 억세게 운도 좋아요. 그는 잠자는 것보다는 갠달프와 함께 달리고 싶어했거든요. 그런데 저렇게 달려가잖아요. 벌로 여기 그대로 서서 돌로 변해 버리는 대신에 말이에요." "만일 오탕크의 돌을 처음으로 들어올린 게 그가 아니라 자네였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애? 자넨 더 나쁘게 했을지도 몰라. 누가 알겠어? 그렇지만 지금의 자네 운수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그것도 지금 당장. 가서 차비를 갖추고 피핀이 남긴 것도 다 가지고 와. 서둘러!" 재촉을 하거나 길을 일러 줄 필요도 없이 섀도우폭스는 평원 위를 날듯이 달리고 있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센의 여울에 이르러 여울을 건넜다. 기사들의 무덤과 거기 꽂힌 차가운 창들이 회색으로 보였다. 피핀은 회복되는 중이었다. 그의 몸은 따뜻했으나 얼굴에 와닿는 바람은 매서우면서도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는 갠달프와 함께 있었다. 그 신석에 대한 공포 그리고 달을 가리며 지나간 그 끔찍한 그림자에 대한 공포는 안개 속의 사물처럼 또는 한바탕 꿈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난 당신이 안장 없이 말을 타는 줄은 몰랐어요, 갠달프. 안장도 고삐도 없잖아요." "난 섀도우폭스가 아닌 말을 탈 때는 요정들의 방식대로 타지 않아. 그렇지만 섀도우폭스는 마구를 걸치지 않지. 자네가 섀도우폭스를 타는 게 아니야. 섀도우폭스가 자넬 기꺼이 실어 날라 주는 것뿐이고, 또는 실어 주지 않을 수도 있어. 만일 이 말이 실어 주면 그걸로 족한 거야. 그러면 섀도우폭스가 할 일은 자네가 허공으로 날아오르지 않는 한 자네가 등에 남아 있도록 배려하는 거야." "지금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 건가요? 바람처럼 빠르면서도 아주 부드럽게 달리는데요.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운지!" "이 말은 지금 가장 빠른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어. 그렇지만 이건 섀도우폭스에겐 빠른 게 아니야. 이곳의 땅은 강 저편보다 좀 울퉁불퉁하지. 저 백색산맥이 별들 아래로 다가오는 걸 보라고! 저편에 드리히른산의 봉우리들이 검은 창처럼 서 있어. 머지않아 우리는 갈림길에 이르게 되고 이틀 안에 전투가 벌어졌던 헬름협곡에 도착하게 될 거야." 피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수 마일을 달리는 동안 그는 갠달프가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여러 가지 언어로 짤막한 시구를 읊조리는 것을 들었다. 마법사는 마침내 호비트도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중 몇 행이 바람을 뚫고 피핀의 귀에 다다랐다. 거대한 함선들, 위대한 왕들 아홉 번씩이나 무슨 까닭에 저 침수된 땅에서 흐르는 바다를 건너왔던가? 일곱 개의 별, 일곱 개의 돌 그리고 흰 성수 한 그루. "무슨 의미죠, 갠달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지혜의 전설' 을 좀 훑어보는 거야. 호비트들은 이걸 잊어 버렸다고 생각하는데, 전에 알고 있던 것마저도." "아니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마 당신에겐 흥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우리 나름대로 그런 게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시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무엇에 관한 노래죠? 일곱 개의 별과 일곱 개의 돌이라니요?" "고대의 왕들이 지녔던 팔란티르신석에 관한 것이지." "그것들이 뭔데요?" "팔란티르란 이름은 멀리 보는 물체란 뜻이야. 오탕크의 돌이 바로 그 중 하나지." "그렇다면 그건," 피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적이 만든 건가요?" "아니야. 물론 사루만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건 그의 재주로도 또는 사우론의 재주로도 어림없는 것이지. 팔란티르신석들은 서역 너머의 엘다마르에서 온 거야. 요정 놀도르족이 만들었지. 아마 피노르가 손수 만들었을 거야.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햇수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옛날에. 그러나 사우론이 사악한 용도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곤 없지. 불쌍한 사루만! 이제야 알겠지만 그게 그의 몰락이었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기능을 뛰어넘는 기예로 만들어진 고안물을 소지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지. 어리석었지, 그는! 자기 욕심을 위해 그걸 비밀리에 간직하다니. 그는 신성회의의 누구에게도 그런 얘기를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지. 곤도르가 침범당했을 때 신석 몇 개가 파괴를 면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든. 회의 외부의 인간이나 요정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되지 못했어. 오로지 아라곤의 종족들 사이에 보존된 '지혜의 전설' 속에만 전해질 뿐이었지." "그렇다면 고대의 인간들은 그것을 무엇에 사용했을까요?" 그렇게 많은 질문에 대해 꼬박꼬박 대답을 듣게 되어 기쁜 한편 은근히 놀라기도 한 피핀은 이게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궁금해 하면서 또 물었다. "멀리 보는 데,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데 사용되었지.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랫동안 곤도르의 영토를 지키고 통합했어. 그들은 돌들을 미나스 아노르, 미나스 이딜 그리고 이센가드의 오탕크에 두었었지. 그 돌들 가운데 지배권을 가진 돌은 오스길리아스가 파괴되기 전에 그 궁전에 있었어. 나머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어. 어떤 전설 속에도 등장하지 않거든. 그러나 엘론드가에서는 안누미나스와 아몬 술 그리고 회색 배들이 정박한 룬만의 미스론드를 마주보는 탑언덕에 있다고 전해지지. 각각의 팔란티르신석은 서로에게 연락이 가능한데 오스길리아스의 신석은 그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 있었어. 오탕크 성채가 그 시간의 폭풍우를 견뎌 낸 것은 그 안에 팔란티르신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그러나 그것 혼자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의 작은 영상밖에는 볼 수가 없어. 그것은 사루만에게 아주 유용했을 거야. 그런데 도 그는 흡족한 것 같지 않아. 그는 점점 더 멀리 바라보게 되었고 마침내는 바랏 두르에까지 눈이 미친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사우론에게 사로잡힌 거지. 그 외의 팔란티르신석들도 부서졌는지 아니면 파묻혔는지 물에 가라앉았는지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러나 사우론은 적어도 하나를 수중에 넣고 자신의 목적에 길들여 왔음에 틀림없어. 난 그게 이딜의 신석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는 오래전 미나스 이딜을 점령해 사악한 땅으로 변하게 했거든. 그래서 이제 그곳은 미나스 모르굴이라 불리지. 사루만의 두리번거리던 눈길이 언제부터 덫에 걸린 것인가, 그리고 그 이후 어떻게 원격조정되었고 또 조정된 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는 어떤 위협을 받았을까가 이제는 분명해.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물린 꼴이고 독수리의 발톱에 채인 매의 형상이야. 또 쇠그물에 갇힌 거미꼴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감시와 지시를 받기 위해 그 신석으로 다가가야만 했을까. 그리고 오탕크의 신석이 바랏 두르를 향했을 때, 또 철석 같은 의지를 갖지 않은 자가 그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의 마음과 눈이 얼마나 재빨리 사로잡혔을까 궁금하군. 얼마나 강력하게 자신으로 이끌어 당겼을까? 나는 그것을 느껴 보지 않았던가? 지금도 내 가슴은 내 의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해. 그를 물리치고 내가 원하는 바대로, 즉 바닷물과 시간의 넓은 대양 건너 아름다운 티리온탑을 바라보는 데, 순백의 성수와 황금빛 꽃이 무성한 가운데 그 신석을 만드느라 기울인 피노르의 상상을 초월한 손길과 영혼을 감지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 그는 한숨을 내쉬고 침묵에 잠겼다. "이 모든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요. 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요." "아니지, 자넨 알았어. 자네는 그릇되이 또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 그리고 스스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자네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내가 이 모든 사실을 사전에 말해 주지 않은 이유는 나도 일어난 모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마침내 사정을 완전히 이하하게 되었기 때문이야. 바로 우리가 말을 달리면서 말이야. 설령 내가 더 일찍 말했다 하더라도 자네의 욕망을 억누르거나 더 쉽게 물리치도록 하지는 못했을 거야. 오히려 정반대지! 그래, 불에 손을 데어 봐야 확실히 깨닫게 돼.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불에 대한 충고가 가슴에 와 닿는 법이지." "그래요. 만일 지금 내 앞에 일곱 개의 돌 전부가 놓여 있더라도 나는 눈을 감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버릴 거예요." "좋아!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야." "그런데 알고 싶은 게," 하고 피핀이 말을 시작하자 갠달프가 가로챘다. "제발! 만일 자네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말해 줘야 한다면 난 대답하는 데 여생을 보내야 할 거야. 뭘 더 알고 싶어?" 피핀이 웃으며 말했다. "모든 별들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이름과 이 중간계와 천상계 그리고 세계를 갈라 놓는 바다들의 역사에 대해서요. 당연하잖아요. 어떻게 알고 싶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오늘밤은 서두르지 않겠어요. 사실 난 지금 그 검은 그림자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거든요. 난 당신이 '모르도르의 사자다.' 라고 외치는 걸 들었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그것이 이센가드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그것은 날개달린 짐승을 탄 암흑의 기사 나즈굴이야. 그것이 자넬 암흑의 성채로 잡아갈 수도 있었지." "그렇지만 날 잡으러 온 건 아니겠지요?" 피핀은 말을 더듬었다. "내 말은 그게 내, 내가 한 일을 설마 모를 거라는 거예요." "물론 몰랐지. 바랏 두르에서 오탕크까지는 직선 비행거리로 육백 마일 이상이나 되니 아무리 나즈굴이라 해도 그 거리를 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나 사루만은 오르크의 습격 이후로 틀림없이 그 신석을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그의 은밀한 생각이 의도 이상으로 간파되었을 거야. 그러니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사자가 파견된 거지. 그리고 아까의 자네 일이 있었으니 또 다른 사자가 시급히 파견될 거야. 사루만은 자신이 손을 넣은 악행의 마지막 위기에 몰리게 되는 거지. 보낼 포로가 없으니 말이야. 또 멀리 볼 수 있는 신석도 없어졌으니 소환에 응하지도 못하고 사우론으로서는 사루만이 포로를 내놓지 않고 또 신석도 일부러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사루만이 사자에게 진실을 말하더라도 별 소용 없을 거야. 왜냐하면 이센가드는 다 파괴되었어도 사루만은 오탕크 안에서 안전하거든. 그러니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사우론에게는 반역자로 보일 거야.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우리를 끝까지 거부했는데도 말이야. 그런 곤경에서 그가 어떻게 할지는 나로선 짐작할 수 없어. 내 생각에 그는 오탕크 안에 있는 한 아홉 명의 암흑의 기사들에게 저항할 힘이 있고 또 그렇게 할 거야. 그는 나즈굴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나즈굴이 타고 다니는 날개달린 짐승을 죽이려 할 거야. 그럴 경우 로한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단속해야지. 그러나 그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 좋게 나타날지 나쁘게 나타날지는 알 수가 없어. 적이 품은 책략이 사루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혼선을 빚거나 장애에 부딪힐 수도 있어. 또 내가거기에 있었으며 더구나 꽁무니에 호비트들을 데리고 오탕크의 계단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지. 또는 엘렌딜의 후계자가 살아있으며 바로 그가 내곁에 서 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몰라. 만약 웜통이 로한의 무력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아라곤과 그가 내세운 칭호를 기억할 것이니. 그게 바로 내가 걱정하는 바야. 그렇게 되면 우린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되지. 자, 섀도우폭스가 내딛는 걸음걸음이 자넬 암흑의 땅으로 좀더 가까이 데려가는 거야, 페레그린 투크." 피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작스레 냉기가 몰려오기라도 한 듯 망또를 그러쥐었다. 회색 땅이 그들 아래로 지나치고 있었다. "자, 보라구! 웨스트폴드의 계곡이 펼쳐지고 있어. 이제 우린 동쪽 길로 돌아온 거야. 저 건너 어두운 그림자가 헬름협곡 어귀야. 그쪽으로 아글라론드와 반짝이는 동굴들이 있지. 그것들에 대해선 내게 묻지 말아.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김리에게 물으라고. 그러면 자넨 처음으로 자네가 바라던 이상으로 긴 대답을 듣게 될 테니까. 자넨 그 동굴들을 구경하진 못할 거야. 이번 길에서는 말이야. 우린 그대로 달릴 테니까." "난 헬름협곡에서 멈출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럼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나스 티리스로! 그곳이 전쟁의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오! 그럼 그곳은 얼마나 먼가요?" "멀고멀지. 데오든왕의 궁전까지보다 세 배쯤. 그곳까지는 모르도르의 사자들이 날아다니는 거리로 보아 동쪽으로 백 마일이 넘지. 섀도우폭스는 훨씬 먼 거리를 달려야 해. 어느 쪽이 더 빠를 거 같은가? 이제 우린 동틀 때까지 달릴 텐데 동이 트려면 몇 시간 남았어. 그때가 되면 섀도우폭스라 해도 아늑한 분지에서 쉬어야하지. 에도라스에서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자게나. 깨어나면 욜가의 황금빛 지붕위에 비치는 새벽의 미광을 보게 될 테니. 그리고 앞으로 사흘 안에 자넨 민돌루인산의 보랏빛 그림자와 새벽빛에 빛나는 데네도르의 탑을 보게 될 거야. 자, 가자, 섀도우폭스! 달려라, 용자여! 이제까지 결코 달려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이제 우린 네가 태어났고 돌멩이 하나까지 다 아는 그 땅에 와 있다. 자, 달려라! 희망은 오로지 속도에 달렸다!" 섀도우폭스는 전장의 나팔에 소환받기라도 한 듯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의 발굽에서는 불꽃이 흩날렸으며 밤이 질주하듯 그를 스쳐지나갔다. 피핀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발 밑에서는 세상이 대단한 바람소리와 함께 너울대며 굴러가는데 그와 갠달프는 달리는 말의 조상 위에 얹혀진 돌처럼 정지한 것만 같았다. 제12장 스메아골 길들이기 "저, 프로도씨, 우린 궁지에 빠진 것이 틀림없어요." 샘 갬기가 말했다. 그는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린 채 프로도 곁에 서서 눈살을 찌푸리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들 계산이 맞다면 원정대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에민 뮐의 척박한 비탈과 돌멩이 사이를 기어오르고 버둥대며 나아갔다. - 때로는 전진할 길을 찾지 못해 되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빙빙 헤매며 몇 시간 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며 - 시간을 그들은 거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되도록이면 그 이상하게 뒤얽힌 구릉 바깥면에 바싹 붙어 꾸준히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바깥면들은 갈수록 높고 가팔라져 지나갈 수 없는 데다 아래쪽은 급경사의 벼랑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비틀린 바위 너머에는 납빛으로 썩어가는 늪지가 있었고 그곳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새 한 마리도 날지 않았다. 이제 호비트들은 벌거벗고 황량하며 기슭은 안개에 싸인 높은 벼랑 언저리에 서있었다. 그들 뒤로는 구름에 덮인 울퉁불퉁한 봉우리가 버티고 있었다. 동쪽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왔다. 앞쪽엔 일정한 형태가 없는 대지 위로 어둠이 몰려들고 있어 빛바랜 녹색 땅이 음산한 갈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 오른쪽으론 낮에 햇살이 구름을 뚫고 비칠 때마다 단속적으로 희미하게 빛났던 안두인대하가 그림자에 가려 어슴푸레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강을 넘어 곤도르로, 친구들에게로, 인간들 땅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밤의 가장자리에 미동도 않은 채 연기로 감싸인, 먼 산맥의 윤곽처럼 검은 선으로 드러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간간이 먼 곳에서 아주 작은 붉은빛이 지평선을 배경으로 깜박였다. 샘이 말했다. "진퇴양난이군요. 저곳은 일찍이 들어 본 모든 땅들 가운데서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곳이자 또 우리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곳이에요. 그리고 저곳은 아무래도 다다를 수 없는 곳인 것 같아요. 우린 완전히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에요. 내려갈 수가 없어요. 설령 내려간다 해도 저 푸른 대지가 온통 욕지기 나는 늪지라는 걸 알게 될 뿐일 거예요, 틀림없이. 퓨우! 냄새가 나지요?" 그는 킁킁거리며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프로도도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시선을 고정시키고 서 있었다. "모르도르!" 그는 숨죽여 중얼거렸다. "만일 내가 거기 가야 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가서 끝장을 봤으면 좋겠어." 그는 몸을 떨었다. 바람은 에는 듯하면서도 썩는 냄새로 답답했다. 프로도는 눈길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자, 진퇴양난아든 아니든 밤새 여기 머무를 수는 없어. 우린 조금 더 막힌 장소를 찾아 밤을 보내야 해. 아마 날이 바뀌면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샘이 투덜거렸다. "아니면 날이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뀔 뿐일지도 모르죠. 또는 날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고요. 우린 길을 잘못 들었어요." "글쎄 모르겠는걸. 난 건너편 저 그림자 쪽으로 가는 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길이 발견될 것이고. 그런데 그 길이 보여 줄 것은 선일까 악일까? 우리의 희망은 속도에 있어. 지체한다면 적에게 유리할 뿐이야. 그런데도 난 여기서 지체하고 있어. 우릴 조정하는 건 바로 암흑의 의지가 아닐까? 내 모든 선택은 그릇된 것으로 드러났어. 난 오래전에 원정대를 떠나 강과 에민 뮐의 동쪽 방향으로 내려와 전쟁의 평원을 지나 모르도르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어야 했어. 그렇지만 이젠 너와 나 단 둘이서 오르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곳을 지나 다시 길을 잡을 수는 없어. 지금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소중한 시간이 허비되고 있는 거야. 난 지쳤어, 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식량은 아직 남아 있어, 샘?" "뭐라고 부르더라, 아, 그 렘바스란 것뿐이에요, 프로도씨. 양은 꽤 되지만 질리도록 먹어서 있으나마나예요. 사실 이걸 처음 먹어 봤을 때는 다른 음식을 바라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담백한 빵 한 조각과 한 잔, 아니 반 잔이라도 좋으니 맥주가 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야영지부터 이렇게 먼 곳까지 제 요리기구를 낑낑대고 끌고 왔지만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야지요. 우선 불을 피울 연료도 없고 또 요리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에요. 심지어 풀조차 없단 말이에요!" 그들은 방향을 돌려 돌이 많은 계곡으로 내려갔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그나마 구름에 갇혀 있어 밤이 빨리 왔다. 비바람에 풍화된 바위 틈새에 웅크리고 앉은 그들은 추위에 몸을 뒤척이면서도 그런 대로 곤하게 잤다. 적어도 동풍은 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놈을 또 보셨어요, 프로도씨?" 이른 아침 차가운 회색빛 속에서 뻣뻣하게 추위에 언 채 렘바스를 우물우물 씹으며 샘이 물었다. "아니, 지금까지 이틀 동안 전혀 보거나 듣지 못했어." "저도 그래요 그르르! 그 눈은 정말 질겁하게 했었다니까요. 마침내 우린 그놈, 그 처량한 도둑 같은 놈을 떨쳐 버린 것 같아요. 골룸! 만일 그놈의 목을 이 손으로 붙잡을 기회만 생긴다면 그 목구멍에다 그 골룸이란 소리를 도로 집어 넣어 주겠어요."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어떻게 그가 우리를 따라왔는지 모르겠어. 네 말처럼 그가 우릴 놓쳐 버렸을지도 몰라. 이 어둡고 황량한 땅에선 발자국과 냄새가 많이 남겨질 리가 없으니 아무리 냄새를 잘 맡는 그의 코라도 별수 없었을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놈을 영원히 떨쳐 버렸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도 그래. 그렇지만 내 주된 골칫거리는 그가 아니야. 난 이 산속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난 이 구릉을 증오해. 저 죽은 듯한 습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저 건너편 그림자와 우리를 갈라 놓는 것이 없으니 여기 구릉에선 마치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애. 저 그림자에는 눈이 있어. 가자! 어쨌든 오늘은 내려가야만 해." 그러나 그날도 거의 다 지나 저녁이 될 무렵에도 그들은 여전히 등성이를 따라 기어가고 있을 뿐 아무런 탈출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불모의 나라의 고요 속에서 이들은 가끔 돌이 떨어지거나 바위를 딛는 희미한 발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을 갖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만히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면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다만 바위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숨 같은 바람소리만 일었다. 그러나 그 소리 역시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나직하게 쉿쉿거리는 숨소리를 연상시켰다. 그들이 온종일 버둥거리며 조금씩 나아감에 따라 에민 뮐의 바깥 등성이는 점차북쪽을 향해 굽어졌다. 비바람에 풍화된 넓고 울퉁불퉁한 바위면은 참호 같은 작은골로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점점 깊어지고 또 그 수도 많아지는 바위골들 사이에서 길을 찾기 위해 그들은 왼쪽으로 상당히 우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수마일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비탈을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벼랑은 저지의 수평면을 향해 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멈춰섰다. 등성이는 북으로 더 날카롭게 굽어졌고 더 깊은 골짜기에 의해 깊이 갈라졌다. 등성이는 한번에 몇 길씩이나 솟구쳐 올랐다. 칼질을 한 듯 가파르게 깎인 거대한 회색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동쪽이나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서쪽을 향한다면 다시 구릉 한가운데로 돌아가게 되니 단지 더 많은 고생과 시간이 요구될 것이 뻔했고 동쪽으로 간다면 바깥 벼랑으로 나가게 될 것이었다. "이 절벽을 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샘. 어디로 이르게 될지 한번 살펴보자구." "그냥 떨어져 버릴 거예요, 틀림 없이." 그 갈라진 틈은 보기보다 깊은 것 같았다. 조금 내려가다 그들은 말라 비틀어진 옹이투성이의 나무 몇 그루를 발견했다. 며칠만에 처음 보는 나무들로 대부분은 비틀린 자작나무였고 간혹 전나무도 있었다. 대개는 죽어 말라 비틀어졌고 동풍을 맞아 속까지 상해 있었다. 더 포근했던 시절에는 이 골짜기 속에서 아름다운 덤불을 이루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저편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늙고 부러진 그루터기 몇몇만 보일 뿐 더이상 나무는 없었다. 바위의 단층을 따라 내리뻗은 골짜기 밑바닥은 부서진 돌로 울퉁불퉁했으며 계속 아래로 경사져 있었다. 마침내 골짜기 끝에 이르자 프로도는 몸을 웅크리며 기대 섰다. "봐! 우린 꽤 멀리 온 것 같아. 아니면 벼랑이 내려앉았거나. 여기선 절벽이 훨씬 얕고 또 수월해 보이잖아." 샘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별로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로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왼쪽에 버티고 선 벼랑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수월해 보인다고요? 하긴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언제나 쉽죠. 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뛰어내릴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래, 상당한 점프가 될 저야. 약, 음," 프로도는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잠시 서 있었다. "약 열여덟 길 정도 되는 것 같아. 그 이상은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하죠! 이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건 질색이에요. 그렇지만 진짜 내려가는 것보다는 그냥 보기만 하는 게 낫죠." "마찬가지야. 우린 기어내려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할 자야. 봐, 저 바위는 몇 마일 뒤쪽과는 아주 다르다구. 경사가 좀 있는 데다 틈새도 있단 말이야." 사실 그곳은 그리 가파르지 않고 경사가 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성벽이나 방파제가 뒤틀린 것처럼 온통 뒤틀리고 울퉁불퉁했으며 어떤 곳은 계단처럼 넓고 커다란 바위턱이 지고 모서리가 솟아 있었다. "기왕 내려가야 한다면 당장 가는 게 좋아. 벌써 어두워지고 있잖아. 폭풍우가 몰려 오고 있는 것 같아." 동쪽 산맥으로부터 연기가 낀 흐릿한 그림자가 서쪽을 향해 팔을 벌리듯 번져가며 더 짙은 암흑으로 섞여 갔다. 솟아오르는 미풍에 실려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도는 대기의 냄새를 맡아 보고는 의심스러운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망또 밖으로 허리띠를 매 단단히 조이고는 가벼운 짐꾸러미를 등위에 걸머지고 벼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보자." 샘이 침울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렇지만 제가 먼저 가겠어요." "네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뀐 거지?" "바뀌지 않았어요. 다만 '미끄러져 떨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자를 제일 아래에 두라' 는 의미일 뿐이에요. 프로도씨를 덮쳐 같이 떨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한꺼번에 두 명이 떨어져 죽어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프로도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언저리 위로 양 다리를 올려 놓고 몸을 틀더니 발끝으로 기댈 곳을 찾았다. 그가 냉철하고 용감하게 해낼지 아니면 어리석은 짓을 할지는 자못 의심스러웠다. "아냐, 아냐! 샘, 이 바보녀석아! 어디로 갈지 살펴보지도 않고 그렇게 가다간 틀림없이 죽게 돼! 돌아와!" 그는 샘의 겨드랑이 아래를 잡아 다시 끌어올렸다. "자, 잠시 기다려. 침착해야 해." 그는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햇살이 엷어지고 있었다.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난 해낼 수 있어. 그리고 너도 냉정을 유지해. 조심스럽게 날 따라오면 될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참. 이런 빛으로는 바닥도 볼 수 없잖아요. 발이나 손을 가져다놓을 데도 없는 곳에 이른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기어올라와야지." "말하긴 쉽죠. 아침이 되어 더 잘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아요." "아니야!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야 해." 프로도는 갑자기 이상스러운 열정을 가지고 말했다. "난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이 아까워. 난 끝까지 내려가 보겠어. 너는 내가 돌아오거나 부를 때까지 내려오지 마!" 그는 손으로 가장자리의 돌을 쥐고 몸을 아래로 밀었다. 양 팔이 거의 완전히 뻗쳤을 때 그는 발 디딜 곳을 찾았다. "한 발짝만 내려가면! 그러면 이 돌은 오른쪽으로 넓게 뻗쳐. 여기선 아무것도 잡지 않고 설 수 있어. 난......" 그의 말이 끊겼다. 서둘러 다가오던 어둠이 이제 대단한 속도로 돌진해 와 하늘을 삼켰다. 바로 머리위에서 메마르고 날카로운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태워 버릴 듯한 번개가 구릉을 덮쳤다. 한바탕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고 바람소리에 섞여 높고 째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비트들은 이런 소리를 호비튼에서 도망쳐 올 때 마리쉬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 샤이어의 숲속에서 들었을 때도 그 소리는 피를 얼어붙게 했었다. 더욱이 이 황야에서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그 소리는 공포와 절망의 차가운 칼날이 되어 그들의 귀청을 뚫고 심장을 멈추게 했다. 샘은 얼굴을 묻고 납죽 엎드렸다. 프로도는 무심결에 붙잡고 있던 바위를 놓고 양 손으로 머리와 귀를 감쌌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샘은 미끄러지는 소리를 듣고 벼랑 언저리로 기어가 소리쳤다. "프로도씨! 프로도씨!" 그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온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숨을 돌리고 다시 한번 프로도를 불렀다. 불어 대는 바람이 목소리를 다시 목구멍으로 밀어넣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계곡을 윙윙거리는 바람에 실려 '괜찮아, 괜찮다구! 난 여기 있어. 그렇지만 보이지가 않아.' 하는 대답이 희미하게 귀에 와 닿았다. 프로도는 가냘픈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끄러지긴 했지만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약간 미끄러져 넓은 바위턱에 발이 닿았다. 다행히 표면이 안으로 파여 있었고 또 바람이 벼랑벽쪽으로 불었기에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기에 잠시 바위에 얼굴을 대고 안정을 취했다. 어둠이 좀더 짙게 깔린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장님이 된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돌아와요! 돌아오세요!" 그는 위쪽에서 샘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보이지가 않아. 붙잡을 곳도 찾을 수가 없어. 아직은 움직일 수가 없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프로도씨?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하느냐고요?" 샘은 위험할 정도로 몸을 내밀고 소리쳤다. 왜 프로도씨는 볼 수가 없다는 걸까? 확실히 어둡긴 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래쪽에 있는 프로도 - 양 다리를 바깥쪽으로 버티고 벼랑에 기대 서 있는 회색의 쓸쓸한 형체 - 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시 한번 천둥이 울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벼랑으로 차갑게 몰아치는 우박 섞인 비는 눈앞을 가릴 정도였다. "제가 내려가겠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그는 소리쳤다. "아니야, 안 돼! 기다려!" 프로도는 단호하게 외쳤다. "난 곧 좋아질 거야. 벌써 기분이 달라졌는걸. 기다려! 넌 밧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밧줄!" 샘은 흥분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외쳤다. "음, 내가 멍텅구리들에 대한 본보기로 밧줄에 목이 매달릴 그런 위인이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늘 내게 '넌 얼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샘 갬기.' 하고 말하곤 했지. 그래, 밧줄!" 이제 짜증과 함께 재미를 느낄 만큼 회복된 프로도가 소리쳤다. "혼자 주절대지 마. 네 아버지에 대해선 신경쓸 것 없어. 네가 호주머니 속에 밧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어서 꺼내!" "그래요, 프로도씨. 제 짐꾸러미 속에 들어 있어요. 수백 마일이나 가지고 다녔으면서도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러면 어서 한쪽 끝을 이리 보내." 샘은 재빨리 등에서 꾸러미를 내려 풀었다. 정말 그 구석에는 로리엔의 요정들이 만든 회색 밧줄 한 사리가 있었다. 그는 한쪽 끝을 던졌다. 프로도의 눈에서 어둠이 걷히는 것인지 아니면 시력이 회복된 것인지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며 내려오는 회색 밧줄을 보며 프로도는 흐릿한 은빛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시선을 고정시킬 것이 생기자 덜 어지러워졌다. 그는 체중을 앞으로 실은 채 밧줄을 허리에 감고 양 손으로 꽉 잡았다. 샘은 뒷걸음질쳐 벼랑에서 일이 미터 정도 떨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발을 버티고서서 잡아 끌었다. 프로도는 반은 끌려오고 반은 스스로 기어올라와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멀리서 천둥이 울렸고 비는 여전히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다시 골짜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쓸 만한 피신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실개천을 이루고 흐르기 시작한 빗물이 곧 크게 불어나 돌멩이들에 부딪혀 철벅거리며 거품을 내고 벼랑 아래로 떨어져 갔다. "잘못했으면 저 아래서 반쯤 물에 잠기거나 깨끗이 씻겨 내려갔을 거야. 네가 밧줄을 가지고 있었다니 정말 운이 좋았어." "제가 더 일찍 생각해 냈더라면 더 운이 좋았겠죠. 우리가 떠날 때 그들이 보트 속에 밧줄을 넣었던 것 기억하시죠? 요정의 나라에서 말이에요. 전 그게 마음에 들어서 짐꾸러미에 한 사리를 넣어 두었죠. 그게 몇 년 전 일 같아요. 할디르였던가 아니면 그들 종족 중 하나였던가가 '위급할 때 도움이 될 거요.' 하고 말했는데 정말 꼭 들어맞았어요." "나도 한 사리를 가져올 생각을 못한 게 아쉽군. 그렇지만 그렇게 황급한 혼란 속에서 원정대를 이탈했으니. 충분히만 있으면 저 절벽을 내려갈 수 있을 텐데. 네 밧줄은 얼마나 되지?" 샘은 천천히 밧줄을 풀어 양 팔로 길이를 쟀다. "다섯, 열, 스물, 서른 길 정도예요." "누가 이런 일을 생각할 수 있었겠어!" 프로도는 큰 소리로 탄식했다. "누가 할 수 있었겠냐고요? 요정들은 놀라운 종족이에요. 약간 가늘지만 질긴 밧줄이에요. 또 손에는 우유처럼 부드럽게 감기고 조밀하게 엮여서 햇빛처럼 가벼워요. 정말 요정들은 놀라운 종족이에요." "서른 길이라!" 프로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그거면 충분할 거야. 해지기 전에 폭풍우가 가라앉으면 다시 해보자." "비는 이미 거의 그쳤어요. 그렇지만 이 어둠 속에서 다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프로도씨. 게다가 전 아직도 아까 바람을 타고 들린 무서운 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프로도씨는 잊어 버렸는지 모르지만요. 그건 암흑의 기사 소리 같았어요. 그들이 하늘을 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중에서 들렸어요. 전 밤이 지날 때까지 이 틈새에서 쭉 뻗고 누워 있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만 난 암흑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이 가장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필요이상으로 오래 있기는 싫어." 그 말과 함께 그는 몸을 일으켜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사방을 살폈다. 동쪽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있었다. 푹풍우는 걷히고 있었으며 그 중심세력은사우론의 음험한 사고가 지배했던 에민 뮐 위로 그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서 방향을 튼 폭풍우는 우박과 번개로 안두인계곡을 강타하고는 전쟁의 조짐처럼 미나스 티리스로 그 어둠의 장막을 옮겨 갔다. 그리고는 산맥으로 내려와 그 거대한 봉우리들을 휩쓸고 천천히 곤도르와 로한의 접경지대를 지나 마침내 저 멀리 떨어진 로한평원의 기사들까지도 말을 달리며 그 검은 폭풍의 탑이 태양을 가리고 몰려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사막과 악취나는 습지위로는 새파란 저녁 하늘이 열리며 초승달 너머 창공에는 작은 별들이 횐 구멍처럼 창백한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도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난 잠시 시력을 잃은 줄 알았었어. 번개 아니면 그보다 더 고약한 것 때문이었어. 난 그 회색 밧줄이 내려올 때까진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 또 밧줄도 웬일인지 어른거리는 것 같았어." "어둠 속에선 은빛으로 빛나더군요. 처음 집어넣은 이후 꺼내 본 적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을 못하겠지만 지금껏 그걸 몰랐어요. 그런데 계속 내려가시겠다고 생각을 하신다니, 그럼 이 밧줄을 어떻게 사용하실 거예요? 서른 길이면 아마 벼랑 높이에 못 미칠 거예요." 프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걸 저 그루터기에 단단히 매, 샘! 그리고 이번엔 아까 말한 대로 네가 먼저 내려가는 거야. 내가 널 내려 줄 테니 너는 그냥 손과 발로 바위벽을 짚기만 하면 돼. 물론 가끔 바위턱에 발을 디며 날 쉬게 해주면 더 좋겠지. 네가 다 내려가면 나도 뒤따를게.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지는데." 샘도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요. 해야 한다면 당장 해치웁시다." 그는 밧줄을 들어 벼랑에서 가장 가까운 그루터기에 단단히 매고 다른 쪽 끝은 자기 허리에 맸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몸을 돌리고는 벼랑을 내려갈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일은 예상보다 고약하지 않았다. 발 아래를 쳐다보았을 때는 눈이 감겼지만 밧줄이 자신감을 준 것이었다. 곤란한 지점이 한 군데 있었는데 그곳은 돌출부가 없어 발을 디딜 데가 없었고 벽은 가파른 데다 짧은 거리지만 안쪽으로 경사져있었다. 그곳에서 미끄러진 그는 은빛 밧줄에 매달린 채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렇지만 프로도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내려 주어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프로도는 샘이 높이 매달려 있는 동안 밧줄이 다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샘이 바닥에 닿아 '내려왔어요' 하고 소리쳤을 땐 아직 밧줄은 여유가 있었다. 샘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으나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샘이 입은 요정의 망또는 어둠 속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프로도가 그 뒤를 따르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는 허리에 밧줄을 감고 위쪽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바닥에 닿기 전에 다시 자신을 위로 끌어 올릴 수 있게끔 밧줄의 길이를 줄였다. 그는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샘만큼 이 가느다란 회색 밧줄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밧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그곳들은 발디딜 만한 바위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호비트의 튼튼한 손가락으로도 전혀 움켜쥘 수 없는 반들반들한 표면을 이루고 있었다. 어쨌거나 마침내 그도 무사히 밑바닥에 이르렀다. "자, 우린 해냈어! 애민 뮐을 빠져나왔단 말이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우린 곧 발 디딜 단단한 바위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샘은 대답하는 대신 벼랑 위를 응시하다가 외쳤다. "멍청이 같으니! 정말 멍청이야! 내 멋진 밧줄을! 밧줄은 그냥 그루터기에 매여 있고 우리만 이리 내려왔잖아요. 저 밧줄은 우리를 내려올 수 있게 했으니 그 살금살금 움직이는 골룸에게도 안성맞춤의 계단 역할을 할 거 아녜요. 차라리 우리가 어느 길로 갔는지 알려 주는 표시판을 세워 놓는 게 더 낫겠어요. 그게 더 간단할거예요." "만일 우리 둘이 밧줄을 사용하고도 그걸 다시 회수할 방법을 네가 생각해 낼 수 있다면 멍청이라든지 또는 네 아버지가 붙여 준 다른 어떤 별명을 내게 떠넘겨도 난 아무 말 않겠어. 원한다면 다시 기어올라가 밧줄을 풀고 내려오라구!" 샘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아무런 수도 생각이 안 나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저걸 남겨 두고 가고 싶진 않아요. 그뿐이에요." 그는 밧줄 끝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요정의 나라에서 가져온 물건과 헤어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아마 저것도 갈라드리엘께서 손수 만드셨을 거예요, 갈라드리엘!" 샘은 침통하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위를 바라보고는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마지막으로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두 호비트 모두에게 너무 놀랍게도 밧줄이 풀어져 내렸다. 샘은 나자빠졌고 회색의 긴 밧줄이 그의 정수리 위로 조용히 미끄러져 내렸다. 프로도가 웃었다. "누가 저 밧줄을 맸지? 그렇게 오래 지탱되었다니 천만다행이야! 내 온 체중을 네가 맨 밧줄에 맡겼었다니!" 샘은 웃지 않았다. "제가 기어오르고 내리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프로도씨." 그는 기분이 상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그렇지만 밧줄과 매듭에 대해선 웬만큼 안단 말이에요, 프로도씨도 아시겠지만 그건 우리 가문의 내림이에요. 그래, 제 할아버지도 그랬고 제 큰아버지인 앤디는 일 년에 몇 차례나 타이필드마을에서 밧줄 곡예를 했었어요. 저도 샤이어에서나 샤이어 밖에서나 어떤 자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빨리 그루터기에 밧줄을 맬 수 있다구요." "그렇다면 밧줄이 끊어진 게 틀림없군. 아마 바위 모서리에 긁혀서 말이야." "전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샘은 훨씬 더 기분이 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밧줄 끝을 살펴보며 말했다. "끊어진 것도 아니에요. 한 가닥도 끊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문제는 매듭에 있는 게 틀림없겠는데." 샘은 머리를 가로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밧줄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프로도씨. 그렇지만 전 우리가 밧줄을 부르니 저절로 풀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밧줄을 돌돌 사려 짐꾸러미 속에 다시 잘 챙겨 넣었다. "밧줄은 분명 내려왔어.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나 이제 우린 다음 행동을 생각해야 해. 곧 밤이 다가올 거야. 저 별들과 달은 얼마나 아름다워!" "저들을 보니 기운이 나죠, 안 그래요?" "아무래도 저들은 요정과 같아요. 그리고 달이 커지고 있어요. 구름이 계속 끼어있어서 하룬가 이틀인가 달을 못 보았잖아요. 제법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요." "그래, 그러나 이 밝은 달빛이 며칠 이상 지속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엔 저 달이 반쯤 이지러지기 전에 우리가 저 늪을 건널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아." 밤의 첫 어둠 속에서 그들은 여행의 다음 단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샘은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골짜기 입구는 어두운 절벽 사이에서 V자형으로 보였다. "밧줄을 다시 찾게 되어 기뻐요. 어쨌든 우린 그 노상강도 같은 놈에게 수수께끼를 하나 던져 놓은 거예요. 그놈도 저 벼랑에 그 더럽고 덜럭거리는 발을 갖다대볼 거예요!" 그들은 벼랑 근처에서 벗어나 세찬 비에 젖어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황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땅바닥은 여전히 가파르게 내려앉았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그들은 갑자기 시커멓게 입을 벌린 거대한 균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건너뛰기엔 무리였다. 그 깊숙한 곳으로부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균열은 그들 왼편에서 북쪽을 향해 휘어졌다가 다시 구릉 쪽을 향해 나 있어 어둠 속에서는 어쨌든 그들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제 생각엔 벼랑 옆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거기서 구석진 곳이나 아니면 동굴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난 지쳤어. 그래 오늘밤엔 더이상 돌멩이 사이를 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아. 지체하는 것도 싫긴 하지만 말이야. 우리 앞에 분명한 길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다리가 지탱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나아갈 텐데 말이야." 에민 뮐 기슭에서의 행정은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샘도 몸을 피할 구석진 곳이나 움푹 꺼진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로지 벼랑만 우뚝 선 벌거벗은 돌투성이 산기슭뿐이었으며 그들이 나아감에 따라 점점 더 가파르게 솟아올랐다. 마침내기진맥진한 그들은 벼랑기슭에서 멀지 않은 둥근 바위언덕 아래에 몸을 던졌다. 그들은 몸이 돌처럼 굳어질 만한 밤의 추위 속에서 얼마동안 처량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잠을 물리치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써보았으나 잠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이제 달은 높고 선명하게 떠 있었다. 드넓은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가 군데군데 드러난 바위표면에는 가는 달빛이 하얗게 비쳐 차갑기만 한 험한 벽을 흠뻑 젖게했다. 프로도는 일어서서 망또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자! 샘, 네가 먼저 내 담요까지 덮고 잠을 자. 난 보초를 설 겸 잠시 아래위를 살펴볼 테니까."그러다 갑자기 그는 뻣뻣하게 굳어 몸을 굽히고 샘의 팔을 꽉 쥐며 소곤거렸다. "저게 뭐지? 저 너머 벼랑 위를 보라구!" 샘은 그쪽을 쳐다보고 이빨 사이로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쓰쓰! 그놈이에요! 그 골룸이란 놈이라구요! 뱀 같은 놈, 독사 같은 놈! 우리가 조금 기어내려간 걸 수수께끼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니! 저놈을 보세요! 벽 위를 기어다니는 메스꺼운 거미 같아요." 여린 달빛 속에서 가파르고 반들반들한 벼랑 아래로 작고 시커먼 물체 하나가 가느다란 사지를 바깥으로 비스듬히 벌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착 달라붙는 손과 발톱이 어떤 호비트라도 보거나 이용할 수 없었던 갈라진 틈새와 붙잡을 곳들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커다란 벌레처럼 점착성의 발끝으로 그냥 벼랑을 붙어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것은 냄새를 맡아 방향을 찾는 것처럼 머리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천천히 머리를 치켜들어 피골이 상접한 기다란 목 위로 내밀기도 했다. 호비트들은 한순간 달빛에 깜빡거렸다가 재빨리 눈꺼풀에 덮이는 두 개의 작고 희미하게 번들거리는, 전구와 같은 눈동자를 흘낏 볼 수 있었다. "저놈이 우릴 찾을 수 있을까요?" 프로도는 조용히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렇지만 아마 못 찾을 거야. 우호적인 눈길이라고 해도 이 요정의 망또를 보기는 어려워. 나도 네가 몇 걸음만 떨어져 어둠 속에 있으면 볼 수가 없는걸. 또 저놈은 해나 달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어." "그럼 왜 저놈이 바로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조용히, 샘! 아마 그는 우리 냄새를 말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요정들처럼 귀가 예민할 거야. 그는 뭔가를 들었을 거야. 아마 우리 목소리였겠지. 우린 저쪽에서 꽤나 소리쳐 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일 분 전만 하더라도 너무 크게 말하고 있었어." "제기랄! 난 저놈이 지긋지긋해요. 저놈이 자꾸 달라붙는데,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한번 따져 봐야겠어요. 이젠 어쨌든 져놈을 떼쳐 버릴 순 없는 것 같아요." 회색 두건을 끌어당겨 얼굴 위를 깊숙히 덮어쓴 채 샘은 살그머니 벼랑을 향해 기어갔다. 프로도가 뒤따라 가면서 속삭였다. "조심해서! 그를 놀라게 하면 안 돼! 보기보다는 훨씬 위험하다구!" 기어내려오고 있는 시커먼 형체는 이제 벼랑 사분의 삼, 즉 바닥에서 십오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호비트들은 커다란 둥근 바위언덕 그림자 아래 돌처럼 웅크리고 앉아 그를 주시했다. 그는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로 난처한 지경에 처한 것 같았다. 그들은 그가 냄새를 맡느라고 킁킁대는 소리와 함께 간간이 쉿쉿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다. 머리를 치켜들며 침을 뱉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계속 움직여 나갔다. 이제 그들은 귀에 거슬리는 새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취, 쓰쓰! 조심, 내 보배! 급할수록 천천치 해야지. 우린 목을 부러뜨릴 만한 짓을 해선 안 돼. 안 그래, 내 보배? 안 되고말고, 보배, 골룸!" 그는 다시 머리를 치켜들어 달빛에 눈을 깜빡이고는 재빨리 눈을 감으며 쉿쉿거리고 말했다. "우린 달을 싫어하지. 역겹고, 역겹고 오싹하게 만드는 빛이란 말이야. 쓰쓰. 저게 우릴 몰래 살피고 있어, 보배여. 또 우리 눈을 아프게 한다구." 이제 그는 점차 낮은 곳으로 내려왔고 쉿쉿거리는 소리도 점점 날카롭고 또렷해졌다. "어디 있지, 어디 있어, 내 보배, 내 보배여? 그건 우리 거야, 그건. 우리가 그걸 찾고 있다구. 도둑놈들, 도둑놈들, 더럽고 치사한 도둑놈들이야. 내 보배를 가진 그놈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염병할 놈들 같으니! 우린 그놈들을 증오해." 샘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놈은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것 같지 않은데요, 안 그래요? 그런데 그의 보배란 무엇이죠? 바로 그......?" 그러나 프로도가 나직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쉿! 이제 가까워지고 있어. 속삭이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정말 골룸은 다시 멈췄다. 앙상한 목 위에 달린 커다란 머리가 마치 무슨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것처럼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졌다. 어슴푸레한 눈이 반쯤 열려 있었다. 샘은 손가락을 씰룩거렸지만 자제하고 있었다. 분노와 역겨움이 가득한 그의 눈은 여전히 혼잣말로 속삭거리고 쉿쉿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 비열한 형체에서 떠날 줄 몰랐다. 드디어 그는 그들의 머리 바로 위, 땅바닥에서 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그 지점에서부터 벼랑은 약간 안쪽으로 깎여들어 완전히 가파른 골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골룸조차도 붙잡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리부터 먼저 닿으려고 몸을 둥그렇게 구부려 붙이는 것 같더니 갑자기 호각소리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는 타고 내리던 실이 끊긴 거미처럼 몸체 위로 팔과 다리를 말아 올리며 떨어졌다. 샘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껑충 두 번만에 뛰어갔다. 그는 골룸이 일어서기 전에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그는 추락 직후에 무방비상태로 붙잡힌 골룸이 예상보다 완강하는 걸 깨달았다. 샘이 어디를 붙잡기도 전에 긴 팔과 다리가 그의 몸에 감겨 양 팔을 꼼짝 못하게 잡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엄청난 힘의 손아귀는 착 달라붙는 끈처럼 그를 움켜쥐었고 끈적거리는 손가락은 그의 목을 더듬었다. 다음엔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샘으로서는 자신의 단단한 둥근 머리를 돌려 골룸의 얼굴을 받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골룸은 쉿쉿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지만 손을 늦추진 않았다. 만일 샘이 혼자였다면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프로도가 뛰어나와 칼집에서 단도를 뽑았다. 그가 왼손으로 골룸의 부드럽고 가는 머리칼을 잡아 머리를 뒤로 젖히자 독을 품은 흐릿한 눈이 그를 지켜보았다. "놔, 골룸! 이 스팅을 봐라! 옛날에 본 적이 있지? 놔, 놓지 않으면 이번엔 맛을 보게 될 거야! 네 목을 잘라 버리겠어." 골룸은 쓰러지더니 젖은 끈처럼 늘어졌다. 샘은 손가락으로 어깨를 만지며 일어났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으나 보복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야비한 적은 훌쩍거리며 돌멩이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릴 해치지 말아요! 저들이 우릴 해치지 못하게 해줘, 보배여! 우릴 해치지 않겠지요, 그렇지요, 몸집 작은 훌륭한 호비트들이여? 우린 해칠 생각이 없었는데 불쌍한 생쥐를 덮치는 고양이처럼 저들이 달려들었어, 보배여. 우린 정말 외로운데, 골룸. 저들이 우릴 잘 대해 주면 우리도 저들을 아주 잘 대해 줄 텐데, 그럼 그렇고말고." "자, 저걸 어떻게 한다죠? 묶어 버려요. 더이상 우리 뒤를 살금살금 따라올 수 없게 말이에요." 샘이 말하자 골룸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릴 죽이는 거야, 죽이는 거라구. 몸집 작은 잔인한 호비트들아, 이 춥고 메마른 땅에 우릴 묶어 내버려 두다니, 골룸, 골룸!" 골골거리는 목청에서 흐느낌이 샘처럼 솟아나왔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아니야. 만일 우리가 그를 죽인다면 완전히 죽여야 해. 그러나 우린 그렇게 할 수없어. 이치가 그렇지 않아. 불쌍한 자야!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어." 어깨를 문지르며 샘이 말했다. "아니, 해를 끼치지 않았다구요! 어쨌든 저놈은 분명히 해치려 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잠든 새에 우리 목을 조르려는 게 저놈의 계략이라구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하려고 마음에만 품은 것은 다른 문제야." 그는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골룸은 가만히 누워 있었으나 더이상 훌쩍이진 않았다. 샘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프로도는 과거로부터의 목소리를, 멀긴 하지만 매우 선명하게 듣는 것 같았다. 빌보아저씨가 기회 있을 때 그 야비한 자를 찌르지 않은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안타깝다고? 그의 손을 제지한 것은 연민, 연민과 자비! 필요없이 죽이지 않는다는. 난 골룸에게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않아요. 그는 죽어 마땅해요. 죽어 마땅하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살아있는 많은 이들이 죽어 마땅하고 죽은 이들 중에서도 마땅히 살아나야 할 이들이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 자네는 그들을 되살릴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의 심판을 그렇게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네. 심지어 우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만물의 종말을 모두 알 수는 없거든. 프로도는 칼을 내려뜨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지당한 말씀이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걱정되는군요. 어쨌든 당신도 아시게 되겠지만 전 저자를 건드리지 않겠어요. 막상 그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드는군요." 샘은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주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골룸은 다시 우는 소리를 했다. "그래요, 우린 불쌍해요, 보배여. 딱하고 비참해요. 호비트들은 우릴 죽이지 않을 거예요. 훌륭한 호비트들인데."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래, 우린 널 죽이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널 놓아 주지도 않을 거야. 넌 고약한 심보와 해꿎이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해, 골룸. 넌 우리와 함께 가기만 하면 돼. 물론우린 널 감시할 거야. 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넌 우릴 도와야 해. 친절한 행위를 하면 너도 그에 따른 친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골룸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예, 정말 그래요. 훌륭한 호비트들이여! 우린 저들과 함께 가겠어요. 그리고 어둠속에서 안전한 길을 찾아 주겠어요. 그런데 이 춥고 메마른 땅에서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호비트들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 속에서는 일순 교활함과 열망의 빛이 반짝였다. 샘은 그를 쏘아보며 이빨 사이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프로도의 분위기에 무엇인가 야릇한 것이 있으며 그에 관해서는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도의 말에 깜짝 놀랐다. 프로도는 움찔하고 꽁무니를 빼는 골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잖아, 아니면 짐작은 할 텐데, 스메아골." 그는 조용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우린 모르도르로 가고 있어. 그리고 난 네가 그리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믿어." "아취, 쓰쓰!" 마치 그와 같은 솔직함이, 그리고 그 지명을 그렇게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는 게 고통스러운 양 골룸은 양 손으로 귀를 막으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짐작했죠. 그래요, 우린 짐작했어요. 그렇지만 우린 저들이 가는 걸 원치 않았어요, 안 그래요? 아니에요, 보배여, 훌륭한 호비트들은 거기 가선 안 돼요. 재, 잿더미와 먼지 그리고 갈증이 있고, 곳곳에 함정 그리고 오르크놈들이 수없이 있어요. 훌륭한 호비트들이, 쓰쓰, 그런 곳으로 가선 안 되지요." 그러자 프로도는 몰아세웠다. "그래 넌 거기 가본 적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다시 그리로 끌리고 있다는 거지, 안 그래?" 골룸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예, 그래요. 아니에요! 한 번, 그것도 우연히. 안 그래, 보배여? 그래요, 우연이었어요. 그러나 다시 가진 않을 거예요. 안 가고말고요!" 그리고는 갑자기 목소리와 말을 바꿔 목메어 울며 말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날 내버려 둬! 골룸! 넌 내게 고통을 줘! 오, 내 귀여운 손이여. 골룸! 난, 우린.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그걸 찾을 수 없어. 난 지쳤어. 난, 우린 그걸 찾을 수 없다구. 골룸! 골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저들은 언제나 깨어 있어. 난쟁이들, 인간들, 그리고 요정들, 밝은 눈을 가진 끔찍한 요정들 말이야. 난 그걸 찾을 수 없어. 아취!" 그는 일어나 뼈만 남은 앙상한 옹이 모양의 손을 들어 동쪽을 향해 흔들었다. "우린 가지 않겠어요! 당신들을 위해 가진 않겠어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무너져 내렸다. "골룸! 골룸!" 그는 얼굴을 바닥에 대고 징징거리며 말했다. "우릴 보지 말아요! 가버려요! 가서 잠이나 자란 말이에요!"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는 네 명령에 따라 가버리거나 잠들지는 않을 거야, 스메아골. 그러나 네가 진정 그에게서 자유로워지길 원한다면 나를 도와야 해. 그에게로 가는 길로 우리를 안내해 주면 그게 돕는 거야. 그러나 넌 쭈욱 끝까지 갈 필요는 없어. 그의 나라 성문 너머로는 가지 않아도 좋아." 골룸은 다시 일어나 앉아 눈꺼풀 아래로 쳐다보았다. 그는 꽥꽥 소리지르듯 말했다. "그는 저 너머에 있어요. 언제나 거기에 있어요. 오르크놈들이 당신들을 끝까지 데려가 줄 거예요. 대하의 동쪽에서 오르크놈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스메아골에겐 부탁하지 말아요. 불쌍한, 불쌍한 스메아골은 오래전에 사라졌어요. 그들이 그의 보배를 빼앗아가서 그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구요." "만일 네가 우리와 함께 간다면 우리가 스메아골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프로도가 말하자 골룸은 외쳤다. "아니야! 아니라구요, 절대로! 그는 자기 보물을 잃어 버렸어요!" "일어나!" 골룸은 몸을 일으킨 다음 벼랑을 등지고 뒷걸음질을 쳤다. "자! 밤과 낮 중에서 언제가 길을 찾기가 더 쉽겠나? 우린 지쳤어. 그러나 만일 네가 밤을 택한다면 우린 오늘밤 출발할 거야." 골룸은 칭얼대듯 말했다. "커다란 발광체는 우리 눈을 아프게 해요. 하얀 발광체 아래서는 안 돼요. 아직은 안 된다구요. 저게 곧 구릉 뒤로 가려질 거예요. 그래요. 먼저 좀 쉬어요, 훌륭한 호비트들이여!" "그럼 앉아. 그리고 움직이지 말아!" 프로도가 말했다. 호비트들은 그 곁에 각각 앉아 바위벽에 기댄 채 다리를 쉬었다. 따로 약속을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잠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달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구릉으로부터 어둠이 깔려 와 주위의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떠올라 밝게 빛났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골룸은 양 다리를 세운 채 무릎 위에 턱을 괴었으며 넓적한 손발은 밖으로 벌어지게 바닥에 대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마치 무엇을 생각하거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긴장된 모습이었다. 프로도는 샘을 건너다보았다. 마주친 눈길에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은 머리를 뒤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아니 감은 것 같은 상태로 느긋하게 쉬었다. 곧 그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골룸의 양 손은 약간 실룩거렸다.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고 한쪽 눈이, 그리고 또 한쪽 눈이 빠끔히 열렸다. 호비트들은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골룸은 놀랄 만큼 민첩한 동작으로 메뚜기나 개구리처럼 튀어올라 어둠속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건 프로도나 샘이 예상했던 바였다. 골룸이 채 두 걸음도 뛰어가기 전에 샘이 그를 덮첬다. 프로도 또한 달려와 다리를 잡고 내동댕이쳤다. "네 밧줄을 다시 유용하게 쓸 수 있겠는데, 샘." 샘은 밧줄을 꺼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춥고 메마른 땅에서 어디로 가려던 거지, 골룸? 우리는 궁금해. 그래, 우린 궁금하다고. 네놈의 오르크친구들을 찾으려 했던 거겠지? 이 메스껍고 믿을 수 없는 놈아. 이 밧줄이 적당한 곳은 바로 네놈 모가지야, 그것도 단단한 올가미로 말이야." 골룸은 조용히 누워 더이상의 행동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독기를 품은 재빠른 눈길을 던졌다. 프로도가 말했다. "우린 단지 그를 단단히 붙들어 놓기만 하면 돼. 그도 걸어야 하니까 다리나 팔을 묶으면 안 돼. 한쪽 끝은 발목에 묶고 다른 한쪽은 네가 쥐고 있어." 샘이 매듭을 묶을 동안 프로도는 골룸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둘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골룸은 듣기에 아주 끔찍한 가늘고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몸을 뒤틀며 발목에 입을 가져가 밧줄을 물어뜯으려했다. 그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프로도는 그가 정말 고통을 겪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매듭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듭을 살펴보고 지나치게 단단히 조여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실 필요한 만큼 단단히 조여졌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샘은 자신의 말투와는 달리 훨씬 마음이 부드러웠던 것이다. "왜 그러지? 도망치려고 하니까 우린 널 묶는 거야. 그렇지만 우린 네게 고통을 주길 원하진 않아." 골룸은 쉿쉿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매듭이 우릴 아프게 해, 아프게 한다구. 몸을 얼어붙게 하고 깨물듯이 파고든다구! 요정들이 만든 밧줄이지? 염병할 놈들이야! 더럽고 잔인한 호비트들아! 그게 바로 우리가 탈출하려는 이유야, 그럼 그렇고말고, 보배여. 우린 저들이 잔인한 호비트들이란 걸 짐작했어. 저들은 요정들을, 빛나는 눈을 가진 사나운 요정들을 방문했잖아. 우리에게서 이걸 벗겨 줘. 아프단 말이야!" "아니, 벗겨 주지 않겠어." 프로도는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멈췄다. "네가 확실한 약속을 하지 않는 한 벗겨 줄 수 없어." "바라는 대로 맹세를 하겠어요, 그럼 그럼." 여전히 몸을 뒤틀며 발목을 그러쥐고 있던 골룸이 말했다. "아프다니까." "맹세한다고?" "스메아골," 골룸은 눈을 크게 뜨고 이상스런 눈빛으로 프로도를 바라보며 갑작스럽고 분명하게 말했다. "스메아골이 보배에 걸고 맹세하겠어요." 다음 순간 프로도가 벌떡 일어서 다음과 같이 외치자 샘은 다시 한번 그의 단호한 언사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보배에 건다고?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 생각해 봐! 그 모든 반지들을 지배하고, 암흑 속에서 그들을 묶을 절대반지. 너의 약속을 그 반지에 걸겠다고, 스메아골? 그 반지가 널 사로잡을 거야. 그리고 그 반지는 너보다 더 교활해. 반지는 네 말을 기억할 거야." 골룸은 몸을 움츠리며 외쳤다. "보배에 걸고, 보배에 걸고!" "그런데 무엇을 맹세하겠어?" 프로도가 물었다. "아주 착해지겠다는 걸요." 골룸은 프로도의 발치로 기어와 넙죽 엎드려 목쉰 소리로 말했다. 마치 아까의 말이 뼈까지 파고드는 두려움을 안겨 주는 듯 그는 전신을 떨고 있었다. "스메아골은 절대로, 절대로 그가 그것을 가지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해요. 절대로! 스메아골이 그걸 구해내겠어요. 그렇지만 보배에 걸고 맹세해야 해요." 프로도는 준엄한 연민의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야, 그것에 걸고 맹세해선 안 돼. 그게 널 미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넌 오로지 그걸 보고 만지길 원할 뿐이야. 그것에 걸어선 안 돼. 굳이 하려거든 그것의 마력 앞에 맹세해. 왜냐하면 넌 그게 어디 있는지 잘 알잖아. 그럼, 넌 알지, 스메아골. 그건 바로 네 앞에 있어." 일순간 샘에게는 자신의 주인이 커지고 그 앞의 골룸은 움츠러든 것같이 보였다. 장대하고 준엄한 그림자, 회색의 구름으로 자신의 찬연함을 가린 강대한 군주와 그 발치에 낑낑거리는 왜소한 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두 명은 어떤 점에선 이질적이라기보다 유사했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골룸은 몸을 일으켜 무릎께에서 알짱거리며 프로도를 발로 긁기 시작했다. "앉아, 내려 앉아! 이제 네 약속을 말해 봐." 골룸이 말했다. "우린 약속해요. 그래요, 난 약속해요! 난 보배의 주인을 섬기겠어요. 훌륭한 주인님, 착한, 스메아골, 골룸, 골룸!" 갑자기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밧줄을 풀어 줘, 샘!" 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말에 따랐다. 골룸은 곧바로 일어나 매맞고 난 뒤 주인의 다독거림을 받은 개처럼 이리저리 겅중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얼마동안 지속되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쉿쉿 소리와 찡찡 짜는 소리를 덜하는 대신 말을 하게 되었으며 또 자신, 즉 보배에게 말하지 않고 호비트들에게 직접 말하게 되었다. 그들이 곁으로 다가가거나 어떤 갑작스런 움직임을 보이면 그는 움츠러들거나 꽁무니를 빼곤 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요정 망또를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다정하게 굴었으며 보기에 딱할 정도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썼다. 농담을 건네거나 아니면 프로도가 상냥하게 말하기라도 하면 그는 캑캑거리고 깡총깡총 뛰며 웃었고, 만일 꾸짖기라도 하면 울곤 했다. 반면 샘은 그에게 어떤 종류건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보다 그를 더 의심했으며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이 새로운 골룸, 스메아골보다는 차라리 예전의 그를 더 낫게 여겼다. "자, 골룸, 아니면 뭐라 불러야 하건 간에, 이젠 움직여야지. 달이 기울고 밤이 깊어졌으니 출발하는 게 좋겠어." 골룸은 일어서 깡충거리며 동의했다. "예, 그래요, 떠나요. 북쪽과 남쪽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이에요. 내가 그걸 발견했지요. 내가 했다고요. 오르크놈들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아요. 모르니까요. 오르크놈들은 저 늪지를 가로지르지 않고 몇 마일이 되든 빙 돌아가요. 당신들이 이 길로 가게 된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당신들이 스메아골을 발견한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구요. 그럼요. 스메아골을 따라요!" 그는 몇 걸음 가더니 뒤따라 오기를 재촉하는 개처럼 미심쩍게 뒤돌아보았다. "안 돼요, 안 돼! 스메아골은 약속했어요." 그들은 밝은 별이 비치는 한밤중에 출발했다. 골룸은 잠시 그들을 자기가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이끌어 가더니 이윽고 에민 뮐의 가파른 언저리에서 멀어져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아래의 방대한 늪지를 향해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재빨리 그리고 부드럽게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모르도르 성문 앞 황야 전역엔 캄캄한 정적만 깔려 있었다. 제13장 늪지 횡단 골룸은 머리와 목을 앞으로 내민 채 때로는 발뿐 아니라 손까지 사용해가며 재빨리 움직였다. 프로도와 샘은 그를 따라가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뒤처지기라도 하면 그는 뒤돌아와 그들을 기다리곤 했다. 얼마후 그는 그들이 먼저 지나왔던 좁은 골짜기 입구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릉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여기예요! 이 아래 안쪽으로 길이 하나 있어요. 이제 우린 그것을 쭉 따라가 저 너머로 가는 거예요." 그는 늪지를 향해 남동쪽을 가리켰다.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도 늪의 냄새가 독하고 역겹게 다가왔다. 골룸은 가장자리를 따라 아래위로 돌아다니더니 마침내 그들을 불렀다. "여기예요! 이리로 내려갈 수 있어요. 스메아골은 한 번 이 길로 갔었어요. 나는 오르크놈들을 피하느라 이리로 갔었어요." 그가 길을 인도했고 호비트들은 그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기어 내려갔다. 갈라진 틈새의 깊이가 오 미터쯤 되고 가로지른 거리는 사 미터 가량밖에 안 돼 그리 어렵진 않았다. 밑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구릉으로부터 흘러내려와 저 너머의 웅덩이와 수렁으로 합류되는 작은 개울들 중 하나였다. 골룸은 오른쪽 즉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 얕고 돌이 많은 개울 속에 발을 담가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걸어갔다. 그는 물을 대하게 되니 매우 즐거운 것 같았다. 그는 혼자서 낄낄 웃기도 하고 가끔은 쉰 목소리로 노래 같은 걸 부르기도 했다. 춥고 메마른 땅 우리 손을 얼얼하게 우리 발을 꼿꼿하게 얼리는구나. 바위와 돌들은 살점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오랜 뼈와도 같구나. 그러나 개울과 웅덩이는 축축하고 서늘해 우리 발에 더없이 좋구나. 그래 우린 바라노니, "하하! 우리가 바라는 게 뭔지 맞힐 수 있어요?" 그는 곁눈질로 호비트들을 보면서 말했다. "알려 주지요. 그는 오래전에 그걸 맞혔었어요. 배긴스 말이에요." 그의 눈에 반짝이는 불꽃이 일었다. 샘은 어둠 속에서 그 반짝임을 보고 기분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숨쉬지 않고도 살아있고 죽음처럼 차가우며 결코 목말라 하지 않으나 언제나 마셔 대고 갑옷을 입었으나 쨍그랑거리지 않는다. 마른 땅에서 익사하고 섬을 산이라 생각하고 샘을 한 모금 공기라 생각한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것, 널 만나면 얼마나 기쁜가! 우리가 오직 바라는 건 참으로 즙이 많고 달콤한 한 마리 물고기! 이런 말들은 프로도가 골룸을 길잡이로 택했을 때부터 걱정해 왔던 문제를 샘으로 하여금 더 절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건 바로 식량 문제였다. 그러나 프로도는 그 문제를 생각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골룸은 생각해 봤을 것 같았다.정말 골룸은 그 외로운 방랑 속에서 어떻게 자기 몸을 부지했을까? '그렇게 잘해 내진 못했겠지만.' 하고 샘은 생각했다. '저놈은 몹시 굶주려 보여. 물고기가 없다면 호비트 고기맛이 어떤가 시식해 보지 않을 만큼 입맛이 까다롭진 않을 거야. 우리가 졸 때를 포착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렇지만 저놈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적어도 이 샘 갬기만은.'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 적어도 프로도와 샘의 지친 발걸음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 캄캄하고 구불구불한 골짜기 속을 비칠대며 걸어갔다. 골짜기는 동쪽으로 굽어져 계속 나아감에 따라 넓어지고 점차 얕아졌다. 드디어 하늘이 아침의 첫 회색빛으로 흐릿해졌다. 골룸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으나 하늘을 쳐다보고 걸음을 멈췄다. "곧 날이 밝아요." 마치 일광이 그의 말을 엿듣고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스메아골은 여기 머무를 거예요. 난 여기서 멈출 거라고요. 그러면 저 노란 발광체가 날 볼 수 없을 거예요." "우린 해를 보면 반가울 텐데. 그렇지만 우리도 여기서 멈추겠어. 너무 지쳐서 현재로선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어." "저 노란 발광체를 반가워하다니 현명하지 못해요. 당신들이 드러나고 만다고요. 훌륭하고 현명한 호비트들이라면 스메아골과 함께 여기 머물러야 해요. 오르크놈들과 그 밖에 역겨운 것들이 이 근처에 있어요. 그놈들은 먼 곳까지 볼 수 있어요. 나와 함께 여기 숨어 있어요." 그들 셋은 골짜기 바위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쉬었다. 바위벽은 이제 키 큰 사람의 실장보다 그리 높지 않았고 바닥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깔려 있었으며 건너편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프로도와 샘은 바위에 앉아 등을 기대고 쉬었다. 골룸은 개울로 들어가 물을 헤치고 휘저었다. "우린 음식을 좀 들어야겠는데, 배고픈가, 스메아골? 우리에겐 나눠 먹을 게 아주 적어. 그렇지만 줄 수 있는 만큼은 네게도 주겠어." 배고프냐는 말을 듣자 골룸의 흐린 눈 속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 눈은 야위고 누런 얼굴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옛 태도로 돌아갔다. "우린 굶주렸어, 그래 굶주렸다고, 내 보배여. 저들은 뭘 먹을까? 저들에게 맛있는 물고기가 있을까?" 그는 핏기없는 입술을 핥으며 노란 이빨 사이로 혓바닥을 축 늘어뜨렸다. 프로도가 말했다. "아니 물고기는 없어. 우리에겐 이것뿐이야." 그는 렘바스를 한 움큼 들어 보였다. "그리고 여기 개울물이 마시기 적당하면 물도 있는 거고." 골룸도 말했다. "그래요, 그래. 좋은 물이에요. 마실 수 있는 동안 그 물을 마셔요, 마셔! 그런데 저들이 가진 게 뭐지, 보배여? 깨물어 먹는 건가? 맛있는 걸까?" 프로도는 렘바스 일부를 떼내 잎사귀에 싼 채로 그에게 건네주었다. 골룸은 킁킁대며 잎사귀의 냄새를 맡더니 안색이 변했다. 역겹다는 발작적 반응이 오랜 적의와 함께 얼굴에 떠올랐다. "스메아골이 냄새를 맡아 봤어요! 요정의 나라에서 온 잎사귀! 에이! 악취가 나요! 그 나무에 오르면 손에서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내 멋진 손에서 말이에요." 그는 잎사귀를 떨어뜨린 다음 렘바스를 조금 물어뜯었다. 그리고 침을 내뱉고는 한바탕 기침을 터뜨리며 몸을 뒤챘다. "아취! 아냐!" 그는 다급히 지껄여 댔다. "당신들은 불쌍한 스메아골을 숨막혀 죽게 만들려는 거로군요. 난 그런 먼지와 재를 먹을 수는 없어요. 그대로 굻을 수밖에. 그렇지만 스메아골은 괘념치 않아요, 훌륭한 호비트들이여! 스메아골은 약속했어요. 굶을 거예요. 호비트들의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 굶을 거예요. 가엾은 말라깽이 스메아골!" "미안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먹어 보면 이 음식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넌 먹어 볼 수조차 없는 것 같군. 어쨌든 아직까진 말이야." 호비트들은 말없이 렘바스를 씹었다. 샘은 어쨌든 예전보다 맛이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골룸의 행동이 그로 하여금 그 맛을 다시 느끼게 해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분이 평온하지 못했다. 식사하는 사람 곁에서 무언가 먹을 것을 기다리는 개처럼 골룸은 호비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한 조각 한 조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쉴 차비를 차릴 때야 비로소 그는 그들이 자기도 먹을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감춰 두지 않았음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 외따로 앉아 조금 훌쩍거렸다. 샘은 그리 나직하지 않은 소리로 프로도에게 속삭였다. 그는 골룸이 듣든 못 듣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프로도씨, 우린 잠을 좀 자야 해요. 그렇지만 약속을 했건 안했건 간에 저 굶주린 악당을 곁에 두고 둘이 다 잠을 잘 수는 없어요. 장담하지만 스메아골이건 골룸이건 저놈이 그렇게 단시간 안에 자기 습성을 바꾸진 않을 거예요. 프로도씨께서 먼저 주무세요. 제가 더이상 눈꺼풀을 지탱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깨울게요. 저놈이 묶여 있지 않는 한 전처럼 교대로 자는 거예요." 프로도도 공공연하게 말했다. "아마 네 생각이 옳겠지, 샘. 그에게 변화가 있긴 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변화이고 또 얼마와 깊은 변화인지는 나도 아직 확신할 수 없어. 그렇지만 진지하게 말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현재로선 말이야. 어쨌든 원한다면 불침번을 서라구. 난 더도 말고 두 시간만 자게 해주고 그 후에 깨워 줘." 프로도는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에 말을 마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잠이 들었다. 골룸은 더이상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몸을 웅크리고는 곧 잠이 들었다. 이윽고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쉿쉿거라는 숨결을 나지막하게 토하면서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샘은 둘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는 자신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골룸을 가볍게 쿡쿡 찔렀다. 그러나 골룸은 양 손을 펴고 실룩거렸을 뿐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샘이 몸을 숙여 그의 귀에다 '물고기.' 하고 속삭여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숨결조차 변하지 않았다. 샘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잠이 들었군. 만일 내가 너 골룸과 같다면 넌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야."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밧줄과 칼에 대한 생각을 억누르고 프로도 곁으로 가 앉았다. 깨어나 보니 하늘은 어둠침침했다. 그들이 아침식사를 했을 때보다 더 밝아진 것이 아니라 어두워진 것이었다. 샘은 벌떡 일어섰다. 잠자는 동안 - 적어도 아홉 시간 동안 - 에 낮이 지나가 버렸음을 깨달았지만 그건 새로 충만한 원기와 배고픔만으로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프로도는 이제 몸을 길게 뻗치고 누운 채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골룸은 보이지 않았다. 샘은 아버지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커다란 말[言]의 창고에서 자신을 책망하며 붙여 줬던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했다. 또한 당분간 경계할 필요는 없다던 프로도의 생각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 둘 모두가 무사했으며 목이 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얼마간 후회하듯 중얼거렸다. "불쌍한 놈이야! 그런데 어디로 간 거지." "멀지 않아, 멀지 않다구!" 그의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쳐다보자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골룸의 커다란 마리와 두 귀가 보였다. "이봐, 뭘 하고 있는 거야?" 샘은 그를 보자마자 의심이 되살아나 외쳤다. "스메아골은 배가 고파. 곧 돌아갈 거야." 샘이 소리쳤다. "지금 돌아와! 어서! 지금 돌아와!" 그러나 골룸은 사라져 버렸다. 샘이 지르는 고함소리에 프로도가 깨어나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았다. "이봐! 뭐가 잘못됐어? 시간이 얼마나 됐지?" "모르겠어요. 해가 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놈이 가버렸어요. 배고프다고 하고서 말이에요." "걱정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그는 돌아올 거야. 앞으로 당분간은 그 약속이 유효할 거라구. 어쨌든 그는 자신의 보물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프로도는 자신들이 매우 굶주린 골룸을 곁에 두고 몇 시간 동안이나 곯아 떨어졌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별로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아버지가 네게 붙여 준 그 심한 이름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넌 녹초가 되도록 지쳤었고 또 이제 둘 다 쉬었으니 일이 잘된 거라구. 게다가 우리 앞에는 어려운 길, 최악의 길이 놓여 있으니 말이야." "식량에 대해선데 말이에요, 우리가 이 일을 끝내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게 될까요?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죠? 이 렘바스는, 이걸 만든 이들을 깎아내리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사실 위장을 흡족하게 해주진 못해요. 하긴 다리의 힘을 지탱시켜 주는 데는 최고지만요. 어쨌든 매일 얼마씩은 먹어야 하는데 그 양이 늘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헤아려 보기엔 글쎄, 삼 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것도 물론 허리띠를 졸라 매고 조금씩만 먹어야 하겠지만요. 지금까지 우린 좀 헤펐어요." "일을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몰라. 우린 산속에서 너무 지체했어. 그렇지만 내 절친한 친구 샘와이즈 갬기, 내 진정한 친구 중의 친구 샘, 그 뒤에 어떻게 될 건지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 거야. 우린 그 일을 수행할 뿐이야.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어? 그리고 설령 우리가 해낸다 하더라도 그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만일 저 절대반지가 불 속으로 던져지고 또 우리가 바로 그 옆에 있다면 말이야, 샘, 우리에게 다시 빵이 필요할까? 난 그럴 거라고 생각지 않아. 만일 운명의 산까지 이를 수 있을 만큼 우리 사지가 지탱된다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일 거야.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일 거야." 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프로도의 손을 잡고 그 위로 몸을 수그렸다. 눈물이 떨어지긴 했으나 손에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옷소매를 끌어 올리며 몸을 바로 세운 다음 이리저리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어 보려고도 하고 또 애써서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지겨운 녀석이 어디 있는 거지?" 실제로 골룸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그러나 너무 조용히 돌아왔기에 그들은 그가 앞에 나설 때까지 전혀 기척을 듣지 못했다. 그의 손과 얼굴은 온통 검은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아직도 무언가를 씹으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씹는 게 무엇인지 물어 보거나 짐작해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렁이나 딱정벌레 아니면 구멍에서 잡은 끈적끈적한 어떤 것이겠지. 으! 저 역겨운 녀석! 불쌍한 놈!' 샘은 이렇게 생각했다. 골룸은 개울에서 한껏 물을 마시고 몸을 씻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입술을 핥으며 그들에게 왔다. "이제 한결 나아요. 좀 쉬었나요? 계속 갈 준비가 됐어요? 훌륭한 호비트들이 예쁘게도 자던걸. 이제 스메아골을 믿나요? 아주, 아주 좋아요." 행정의 다음 단계는 바로 전 단계와 꼭 같았다. 나아감에 따라 골짜기가 점차 얕아지고 바닥의 경사는 완만해졌다. 바닥엔 돌이 점점 적어지고 대신 흙이 훨씬 많아졌다. 양 옆의 비탈들은 점점 얕아져 그냥 제방처럼 보였다. 계곡은 구불구불 굽이치며 뻗치고 있었다. 그날 밤도 거의 다 지나갔지만 달과 별이 구름이 가려 오로지 가녀린 회색빛이 서서히 퍼지는 것으로 날이 밝아옴을 알 수 있었다. 으스스하게 차가운 시간에 그들은 물줄기가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제방들은 이끼가 자라나 흙둔덕이 되었다. 개울은 썩어가는 바위의 마지막 시렁 위로 콸콸 흘러 갈색 늪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결을 느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른 갈대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쉿쉿 우르르 들렸다. 양 옆과 앞쪽으로 넓은 늪과 진창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멀리 죽 뻗어 희미한 박명 속에 잠겨 있었다. 어둡고 냄새나는 웅덩이들에서 안개가 연기처럼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움직이지 않는 대기 속에서 그 악취는 숨막힐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제 거의 정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성벽처럼 둘러선 모르도르의 산악이 짙은 안개로 항해할 수 없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검은 통나무 모양의 구름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호비트들은 전적으로 골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안개가 자욱한 속에서 그들은 사실 자신들이 늪지 북쪽 경계 바로 안쪽에 와 있으며 또한 그 늪지의 대부분이 자신들 앞 남쪽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만일 그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시간이 지체되는 한이 있더라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 험난한 길을 피해 모르도르 성문 앞 그 과거의 전장인 다고르라드의 황량한 평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길을 택한다고 해서 크게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돌투성이의 평원 위엔 몸을 가릴 곳이 없었고 또 그곳을 가로질러 오르크들과 적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길이 뻗어 있었다. 아무리 로리엔의 망또라 할지라도 거기서 그들을 가려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로도가 물었다. "이제 우린 어디로 향하는 거지, 스메아골? 사악한 냄새가 나는 이 늪지를 건너야만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혀 없어요. 만일 호비트들이 저 어두운 산속으로 가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를 보고 싶다면 말이지요. 뒤로 좀 가고 또 조금 돌아서 가면," 그는 앙상한 팔로 북쪽과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나라 바로 그 성문에 이르는 메마르고 차가운 길을 마주할 수 있어요. 수많은 그의 졸개들이 손님을 살피려고 거기에 있을 거예요. 손님을 발견하면 좋아라하며 바로 그에게 데려가려고 말이에요. 그의 눈은 언제나 그 길을 감시해요. 오래전에는 그 눈이 스메아골을 포착하기도 했죠." 스메아골은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이후 스메아골은 자신의 눈을 사용했어요. 그래요, 난 그 이후 눈과 발 그리고 코를 이용했어요. 그래서 다른 길을 알아요. 더 어렵고 또 그다지 빠른 길은 아니지만 그가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이게 좋아요. 스메아골을 따라와요! 늪지를 뚫고 짙은 안개를 헤치며 안내할 수 있어요. 조심스럽게 스메아골을 따라와요. 그러면 그가 당신들을 포착하기 전에 먼 길을, 꽤나 먼 길을 갈 수 있을 거예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벌써 날이 밝았다. 바람 없고 음산한 아침이었으며 늪지의 악취가 육중한 제방에 깔려 있었다. 해는 낮게 드리운 구름을 뚫고 나올 수 없었다. 골룸은 계속 가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다시 출발해 곧 침침하고 고요한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선 주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떠나온 산이나 지금 가려고 하는 산 중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골룸, 샘 그리고 프로도의 순으로 일렬을 지어 천천히 걸어갔다. 셋 중 프로도가 가장 지친 것 같았다. 천천히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 뒤로 처졌다. 얼마 안 가 호비트들은 하나의 거대한 늪으로 보였던 그곳이 사실은 웅덩이들과 매끄러운 진창들 그리고 구불구불 굽이쳐 반쯤 목이 졸린 것 같은 물줄기들로 그물처럼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민활한 눈과 발만이 그 속에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골룸은 분명히 그런 민활함을 지니고 있었고 또 그게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혼잣말로 중얼거릴 동안에도 긴 목 위의머리는 언제나 이쪽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게 하고 조금 앞으로 나가 몸을 웅크리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바닥을 점검해보거나 귀를 땅에 바싹 붙이고 소리를 들어 보기도 했다. 음울하고 지루한 날씨였다. 차갑고 끈끈한 겨울이 이 버려진 나라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푸른 것이라고는, 별로 밝지 못한 강물의 어둡고 기름 뜬 표면 위의납빛 잡초찌꺼기뿐이었다. 죽은 잡초들과 썩어가는 갈대들이 오랫동안 잊혀진 여름철의 너덜너덜한 그림자처럼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날이 조금 밝아졌고 안개가 걷히며 점점 맑아졌다. 세상의 부패와 온갖 연기 저 위쪽에선 이제 태양이 눈부신 거품이 이는 평온한 나라에서 황금빛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 있는 그들로선 흐리고 어슴푸레하며 아무런 색깔이나 온기를 전해 주지 못한 채 지나치는 태양의 흔적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태양이 보인다는 그 미약한 징후만으로도 골룸은 얼굴을 찌푸리며 움찔거렸다. 그는 길을 멈추게 하고 커다란 갈색 갈대밭으로 피해 들어가 쫓기는 작은 짐승처럼 웅크려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는 깊은 정적이 깔려 있었다. 다만 속이 빈 씨앗깃털들의 가냘픈 떨림과 그들로선 느끼기 힘든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전율하는 부러진 잡초들이 정적의 표면을 스칠 뿐이었다. "새 한 마리 없군!" 샘이 침울하게 말했다. 골룸도 말했다. "없지, 새는 없어요. 멋진 새들!" 그는 이빨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여긴 새라곤 없어요. 뱀, 지렁이 그리고 웅덩이 속에 사는 것들은 있어요. 그런 것 들은 수없이 많지만 새는 없다고." 그가 한탄하듯 말하자 샘은 혐오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골룸과의 여정 셋쨋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좀더 행복한 땅에서라면 저녁의 그림자가 길어질 시간에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깐씩 멈춰 쉬고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잠깐씩 멈춘 것은 쉬기 위해서라기보다 골룸을 돕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이젠 그조차도 대단히 조심해서 앞으로 가야 했으며 때때로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죽음의 늪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땐 날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몸을 수그리고 일렬로 밀착해 골룸이 취하는 모든 동작을 주의 깊게 따르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늪지는 고여 있는 넓은 소택지로 이어지면서 더욱 질척거렸다. 소택지 속에선 꼴록꼴록 소리를 내는 진흙 속으로 빠지지 않고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땅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들의 몸이 가벼웠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 중 아무도 그곳을 뚫고 나가는 길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대기 전체가 너무 칠흑같이 어두워서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불빛이 보였을 때 샘은 눈을 비볐다. 그는 자기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먼저 왼쪽 눈으로 불빛 하나를 보았는데 그것은 곧 희미하게 빛나는 도깨비불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다른 불빛들이 나타났다. 일부는 흐릿하게 빛나는 연기 같았고 일부는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깜박이는 촛불 같았다. 그 불빛들은 숨겨진 손길에 의해 펼쳐진 괴기스런 시트처럼 여기저기 너울거리며 춤췄다. 그러나 샘 이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샘은 마침내 더 견딜 수가 없어 나직하게 소리죽여 말했다. "이게 전부 뭐야, 골룸? 이 불빛들 말이야. 이제 우리 주위를 온통 감쌌어. 우린 함정에 빠진 거야. 저들은 누구지?" 골룸은 위를 바라보았다. 앞에는 캄캄한 물결이 있었으나 그는 이쪽저쪽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그래, 불빛이 온통 우리를 감쌌어요. 정신 나가게 하는 불빛이야. 무덤에서 나오는 인광들이야. 맞아, 맞다구. 그것들에 신경쓰지 말아요! 쳐다보지도 말고! 주인님은 어디 있지?" 샘이 뒤를 돌아다보니 프로도는 다시 뒤처져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그는 몇 걸음 되돌아갔다. 그는 감히 멀리까지 가거나 속삭이는 이상으로 소리쳐 부를 수 없었다. 그는 파리한 불빛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긴 프로도에 걸려 넘어졌다. 양 옆구리에 걸쳐진 두 손에서는 물과 진흙에 뚝뚝 떨어졌다. "오세요, 프로도씨! 그것들을 쳐다보지 마세요! 골룸은 그것들을 보면 안 된대요. 그를 따라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저주받은 곳을 벗어납시다!" 프로도는 꿈속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좋아! 난 가고 있어. 계속 가자구." 샘은 다시 서둘러 앞으로 나가다가 어떤 오래된 뿌리나 덤불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넘어지며 양 손을 짚었지만 끈적거리는 진흙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소택지의표면에 얼굴이 닿을 뻔했다. 희미하게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불쾌한 냄새가 났고 불빛은 깜박이고 너울대고 빙빙 돌았다. 일순간 아래의 물결이. 더러운 유리를 낀 창문처럼 보였고 그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수렁에서 손을 빼낸 다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달려갔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저 물 속에 죽은 이들이, 죽은 얼굴들이 있어요. 죽은 얼굴들이!" 골룸이 웃었다. "죽음의 늪이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이 늪의 이름이에요. 인광들이 비칠 때 속을 들여다보면 안 된다구." 골룸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들은 누구죠? 그들은 뭐하는 자들이에요?" 샘은 덜덜 떨며, 자기 뒤에 서 있던 프로도에게 몸을 돌리고 물었다. 프로도는 꿈결 같은 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그렇지만 나도 그들을 봤어. 인광이 비칠 때 웅덩이 속에서 말이야. 그들은 모든 웅덩이 속에 창백한 얼굴로 깊이깊이 누워 있어. 내가 본 것들 중에는 사악해 보이는 얼굴들과 슬퍼 보이는 고귀한 얼굴들이 있었어. 아름답고 의기양양해 보이는 얼굴들도 많았지만 그들 머리칼에는 잡초가 엉켜 있었어. 그러나 모두가 구린내를 풍기며 썩어가고 또 죽어 있어. 그들 사이에는 무시무시한 빛이 있어." 프로도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난 그들이 누군지 몰라. 그렇지만 내 생각엔 거기서 인간들과 요정들 그리고 오르크들을 본 것 같아." 그러자 골룸이 말했다. "맞아요, 맞아. 모든 게 죽었고 썩었어요. 요정들과 인간들 그리고 오르크들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의 늪이죠. 스메아골이 젊었을 때, 보배가 내게 오기 전 젊었을 때 듣기론 굉장한 전투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대단한 전투였대요. 긴 칼을 든 장신의 인간들과 무시무시한 요정들 그리고 날카롭게 외쳐 대는 오르크들이 암흑의 성문 앞 평원에서 몇 달 몇 날 동안을 싸운 거예요. 그러나 그 이후 이 늪지가 생겨나 그 무덤들을 삼켜 버렸고 지금도 계속 뻗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지금 제3시대 이전의 일이야. 죽은 자가 아직 저 아래 있을 리가 없어! 암흑의 땅에 무슨 사악한 술수를 걸어 놓은 게 아니야?" 하고 샘이 물었다. 골룸이 대답했다. "누가 알겠어. 스메아골은 몰라요. 그들에게 닿을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어. 우리가 한번 시도해 봤지, 그렇지 내 보배? 난 한번 해봤다구. 그렇지만 그들에게 닿을 순 없었어. 아마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형체들인가 봐. 만질 수는 없지, 내 보배. 모두가 죽었어." 샘은 스메아골이 그들을 만져 보려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며 몸을 떨었다. "음, 난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구! 계속 걸어서 여길 빠져나가는 게 어때?" 그러자 골룸이 대답했다. "그럼, 그럼! 그렇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호비트들도 저 사자들과 동지가 되어 작은 인광을 발할 거야. 스메아골을 따라와요. 불빛은 쳐다보지 말고." 골룸은 소택지 주위에서 길을 찾느라 오른쪽으로 기어갔다. 그들은 몸을 숙이고 가끔 골룸이 했던 대로 손을 사용하며 바싹 뒤따라갔다. '만일 이런 길이 계속된다면 우린 작고 귀여운 세 골룸이 되고 말 거야.' 하고 샘은 생각했다. 드디어 그들은 캄캄한 소택지의 끝에 이르러 기기도 하고 또는 섬처럼 떨어져 있는 위태로운 덤불들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깨끔발로 뛰어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기도 했다. 가끔 그들은 구덩이처럼 악취가 나는 물 속에 손을 짚거나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거의 목에까지 진흙이 달라붙어 구린내가 났고 콧구멍에서조차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들은 밤이 깊어서야 마침내 단단한 땅바닥에 이를 수 있었다. 골룸은 혼자 쉿쉿거리며 중얼댔다. 그러나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즉 촉각과 후각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형체를 파악하는 신비한 기억력이 혼합된 감각에 의해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가를 아는 것 같았으며 또 가야 할 앞길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이제 계속 가는 거예요, 훌륭한 호비트들! 용감한 호비트들이여! 물론 몹시, 몹시도 지쳤지요. 우리도 그래, 내 보배, 우리 모두도. 그러나 우린 주인님을 저 사악한 불빛에게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해. 그럼, 그렇게 해야 하구말구." 이 말과 함께 그는 다시 출발했다. 그가 거의 속보로 키 큰 갈대들 사이 기다란 샛길 같아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자 그들도 비틀대며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따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라도 한 듯, 아니면 기분이 상한 듯 쉿쉿 소리를 내며 의심쩍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샘은 근 몸짓을 오해하고 으르렁거렸다. "뭐야? 킁킁댈 필요가 있어? 코를 싸쥐어도 악취 때문에 졸도할 지경인데. 네가 킁킁대고 프로도씨도 킁킁대고 온 세상이 킁킁대는군." 그러자 골룸이 대답했다. "맞아, 맞다구. 그리고 샘도 킁킁대지! 불쌍한 스메아골이 냄새를 맡지만 착한 스메아골은 그걸 참아내, 훌륭한 주인님을 돕기 위해서야.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아. 공기가 움직이고 있어요. 변화되고 있어요. 스메아골도 의아하게 생각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그는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이 커져 이따금 몸을 한껏 세우고 목을 빼서 동쪽과 남쪽을 살폈다. 호비트들은 한동안 골룸을 미심쩍게 하는 것을 듣거나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셋 모두가 멈춰서서 킁킁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프로도와 샘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높고 잔혹한 울부짖음을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은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대기가 진동했다. 날씨는 더 차가워졌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며 서 있으니 멀리서 바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에 싸인 불빛들이 흔들리며 희미해지더니 꺼져 버렸다. 골룸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바람이 늪지 위를 스쳐지나와 자신들을 덮치는 가운데 몸을 흔들며 뜻모를 소리를 주절대고 있었다. 주위는 조금 밝아져 사방을 에워싼 형체없는 안개의 표류를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는 구름장이 부서져 조각조각 흩어졌다. 남쪽 고지에서는 표류하는 안개 속으로 달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달을 보고 잠시 마음이 밝아졌으나 골룸은 움츠러들며 그 하얀 발광체에 욕설을 퍼부었다. 프로도와 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선해진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다가 다가오는 그것을 보았다. 저주받은 산으로부터 날아오는 작은 구름장 같은 그 물체는 모르도르에서 발진된 시커먼 그림자로 날개가 달리고 뭔가 불길한 것을 예감케 하는 거대한 형체였다. 그 형체는 달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죽음 같은 울부짖음을 토하고선 맹렬한 속도로 바람을 앞질러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앞으로 쓰러져 아무렇게나 차가운 대지 위에 엎드렸다. 그러나 공포의 그림자는 다시 선회해 날아와 이번엔 더욱 낮게, 바로 그들 위를 지나치며 그 무시무시한 날개로 늪의 악취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사우론의 분노의 속도로 모르도르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바람이 굉음을 울리며 불어갔으며 죽음의 늪은 벌거벗고 황량한 모습으로 남았다. 그 벌거벗은 황무지는 눈길이 미치는 곳까지, 심지어 멀리 떨어진 위협적인 산맥에 이르기까지 발작적인 달빛으로 얼룩졌다. 프로도와 샘은 사악한 꿈에서 깨어나 친밀한 밤이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음을 확인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러나 골룸은 기절한 듯 땅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가까스로 그를 정신들게 했지만 그는 한동안 얼굴을 들려 하지 않고 다만 크고 넓적한 양 손으로 머리 뒤를 잡은 채 양 팔꿈치를 모아 앞으로 엎드려 있었다. 그는 갑자기 울부짖었다. "악령들이야! 날개달린 악령들! 그 보배가 그들을 지배해. 그들은 모든 것, 모든것을 봐. 아무도 그들에게서 숨을 수 없어. 저 빌어먹을 하얀 발광체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모든 걸 보고해. 그는 알아, 그는 안다구. 아취, 골룸, 골룸, 골룸!" 그는 달이 톨 브란디르 저 너머 서쪽으로 기울어 완전히 진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일어났다. 그때부터 샘은 골룸에게서 다시 변화를 감지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욱 알랑거리고 친밀한 체했다. 그러나 샘은 간간이 그의 눈가에 나타나는 이상한 표정 - 특히 프로도를 향한 - 에 놀랐다. 게다가 그는 서서히 다시 예전의 말투로 돌아가고 있었다. 샘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었다. 프로도가 탈진할 정도로 지친것 같았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입조차 벌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하소연도 하지 않았지만 점점 무게가 늘어가는 짐을 진 사람처럼 힘겹게 걸었다. 그가 점점 더 더디게 발을 질질 끌며 걸었기에 샘은 가끔 골룸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해야만 했다. 사실 모르도르의 성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프로도는 목에 건 줄에 달린 반지가 더욱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이제 그것을 자신을 대지로 끌어당기는 실제적인 무게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눈 - 그는 그것을 혼자 이렇게 불렀다 - 때문에 휠씬 더 마음이 어지러웠다. 걸어가는 데 그를 움츠리게 하고 몸을 숙이게 하는 것은 반지의 끌어당기는 무게라기보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눈, 크나큰 권능으로 모든 구름의 장막과 대지와 육체를 파뚫고 포착하려고, 그 죽음과도 같은 응시의 눈길 아래 벌거벗은 채 꼼짝 못하게 묶어 두려고 기를 쓰는 적의의 눈을 점점 더 두려운 마음으로 의식한 때문이었다. 장막은 그 눈이 능히 투시할 수 있을 만큼 무르고 얇았다. 프로도는 그 의지의 현재 위치와 중심을 마치 눈을 감고도 태양의 방향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의지를 마주하고 있었으며 그 권능이 이마에 거세게 부딪혀 왔다. 골룸도 아마 꼭 같은 종류의 어떤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에 대한 압박감과 아주 가까워진 반지에 대한 탐욕 그리고 얼마쯤은 차가운 쇠를 두려워한 나머지 했었던 비굴한 약속 사이에서 그의 비열한 가슴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호비트들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프로도는 그런 사실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샘은 자신의 주인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그 검은 의혹의 그림자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프로도를 자기 앞에 세우고 그의 모든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피며 혹 그가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부축해 주고 서투른 말로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했다. 드디어 날이 밝자 호비트들은 자신들이 그 기분 나쁜 산맥에 얼마나 다가왔나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대기는 이제 더 맑고 차가워졌다.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모르도르의 성벽은 더이상 시야 한구석의 막연한 위협이 아니었으며 요지부동의 암흑 성채처럼 음산한 황야를 가로질러 험악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불붙지 않는 토탄의 늪과 말라 금이 간 진흙평원으로 이어지며 늪지는 끝이 났다. 눈 앞의 대지는 사우론의 성문 앞에 깔린 사막을 향해 길고 낮은, 무자비하게도 아무것도자라지 않는 비탈을 이루며 솟아올랐다. 회색빛이 계속 비치는 동안 그들은 그 날개달린 공포의 대상이 다시 나타나 그 잔인한 눈길로 자신들을 염탐할까 두려워 검은 바위 아래 벌레들처럼 움츠리고 숨었다. 이 행정에서 남은 것이라곤 점차 커지는 두려움의 그림자였으며 그 속에선 어떤 기억을 들추어도 의지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틀밤 동안 더 그들은 길도 없고 지루한 그 대지 가운데에서 버둥거렸다. 대기는 메말랐으며 숨을 헐떡이게 하고 입을 바싹 마르게 하는 독한 악취로 가득찬 것 같았다. 골룸과 함께 길을 나선 지 닷새째 되는 날 아침 그들은 다시 한번 발길을 멈추었다. 앞에는 새벽의 어둠 속에 거대한 산맥이 지붕같이 펼쳐진 안개와 구름에 닿아 있었다. 산맥 바깥쪽은 거대한 석벽과 울퉁불퉁한 언덕들로 흩어져 있었으며 이제 십이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프로도는 겁에 질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록 죽음의 늪과 인적없는 대지의 메마른 황야가 무섭긴 했었으나 이제 더디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그의 움츠러든 눈앞에 펼쳐진 이 나라는 훨씬 더 끔찍했다. 사자들의 얼굴이 깔렸던 그 죽음의 늪에서도 최소한 푸른 봄의 초췌한 환영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봄도 여름도 결코 오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엔 아무것도 살지 않았다. 심지어 썩은 것을 먹는 더러운 생물들조차 살지 않았다. 마치 산맥이 주위에 내장의 오물을 토해놓은 듯한 웅덩이들이 희뿌옇게 색바랜 재와 꼬물꼬물 움직이는 진창들로 숨막힐듯이 메워져 있었다. 으깨져 가루가 된 바위의 높은 둔덕들과 불에 타고 독에 오염된 거대한 원추형의 대지가 불결한 묘지처럼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흐린 빛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르도르 앞의 폐허에 이른 것이다. 모르도르 노예들의 음산한 노역의 영구적인 기념비로서 그들의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 버려도 지속될 그곳은 대해가 몰려들어와 망각으로 씻어내지 않는 한 영원히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지고 병든 땅이었다. "메스꺼워요." 샘이 말했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악몽이 숨어 있는 잠에 빠져든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 어둠을 거쳐야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잠시 그곳에 선 채 잠을 미루었다. 좀더 밝아졌다. 헐떡이는 구덩이들과 유독한 둔덕들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명해졌다. 해가 떠올라 구름과 긴 깃발 모양의 연기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햇빛조차 더러워져 있었다. 호비트들은 빛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 빛은 그들이 암흑의 군주의 잿더미를 헤매는 작은 유령들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너무도 적대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지쳐 더이상 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쉴 만한 장소를 찾았다. 한동안 그들은 화산암찌끼 둔덕 그림자 아래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역한 냄새와 증기가 새어나와 목구멍을 압박해 숨막히게 했다. 골룸이 먼저 일어났다. 그는 주절대며 욕설을 퍼부어 대더니 호비트들에게는 한 마디 말이나 눈짓조차 없이 네 발로 기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프로도와 샘은 그를 따라 기어가 거의 원형을 이룬 넓은 구덩이 - 서쪽으로 높은 둑이 쌓여진 - 에 다다랐다. 그곳은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추웠으며 밑바닥엔 기름기 있고 많은 색깔이 뒤섞인 더러운 개흙이 깔려 있었다. 그 더러운 구덩이 속에 몸을 움츠린 채 그들은 그 눈의 주의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갈증이 그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골짜기에서 채웠던 물병에는 단지 몇 방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골짜기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평화와 아름다움의 장소였던 것 같았다. 호비트들은 번갈아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처음엔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둘 중 누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태양이 내려가고 있을 무렵 샘이 졸기 시작했다. 프로도가 파수를 볼 차례였다. 그는 구덩이의 비탈에 등을 기대고 누웠으나 자신을 누르는 부담감을 가볍게 해주진 않았다. 연기가 줄무늬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이상한 환영들, 달리는 시커먼 형체들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얼굴들을 보았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시간을 잊어 버렸으며 이윽고 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샘은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깨어났다. 저녁이었다. 프로도는 잠이 든 채 거의 구덩이 밑바닥까지 밀려가 있었으므로 그가 불렀을 리는 없었다. 골룸이 곁에 있었다. 일순간 샘은 그가 프로도를 깨우려는 줄 알았으나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골룸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스메아골은 꼭 같은 목소리로, 다만 찍찍거리기도 하고 쉿쉿거리기도 하며 자신의 또 하나의 생각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 눈에 흐릿한 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나타났다. "스메아골은 약속을 했어." 첫번 생각이 말을 했다. 대답은 곧 나왔다. "그래, 그래, 내 보배여. 우린 약속했지, 우리 보배를 구하고 그가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로. 절대로 못하게 하기로. 그런데 그것이 한걸음 한걸음 그에게로 가까이 가고 있어. 그 호비트가 그걸 어떻게 하려는 건지 우린 궁금해. 그럼, 궁금하지." "난 몰라. 난 어쩔 수가 없어. 주인이 그걸 가졌어. 스메아골은 그 주인을 돕기로 약속했어." "그래, 그래, 주인을 돕기로 했지. 그 보배의 주인 말이야.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인이라면, 그렇다면 우린 스스로를 도울 수 있고 또 여전히 약속을 지키는 셈이야." "그러나 스메아골은 아주아주 착한 자가 되겠다고 말했어. 훌륭한 호비트야! 그가 스메아골의 다리에서 잔혹한 밧줄을 벗겨 주었어. 그는 내게 친절한 말도 한다구." "아주 아주 좋아. 응, 내 보배여. 착해지자구, 물고기처럼 착해지자구, 귀여운 보배여. 그러나 우린 자신에게 그렇게 하자구. 물론 그 훌륭한 호비트를 해치진 말구, 그럼 안 되지." "그렇지만 보배는 그 약속을 간직하고 있어." 스메아골의 목소리가 반대했다. 상대방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걸 받아들여 우리가 간직하자구! 그러면 우리가 주인이 될 거야, 골룸. 다른 호비트, 그 고약하고 의심많은 호비트를 기게 만드는 거야, 그럼, 골룸!" "그러나 그 훌륭한 호비트는 그렇게 하지 않는 거지?" "오, 그럼. 내키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는 배긴스 가문의 일원이야, 내 보배여. 그래, 배긴스가 일원이지. 배긴스가의 어떤 놈이 그걸 훔쳐갔잖아. 그걸 발견하고도 그놈은 아무 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린 배긴스가를 증오해." "아냐, 이 배긴스는 아니야." "아냐, 모든 배긴스를 증오해. 보배를 가진 모든 종족을 증오해. 우리가 그걸 가져야 해." "그렇지만 그가 볼 거야, 그가 알 거라구. 그가 우리에게서 뺏아갈 거야." "그가 보고 또 알겠지. 그는 우리가 그의 의지에 어그러져 그 바보스러운 약속을 하는 걸 들었어, 그럼. 그걸 가져야 해. 악령들이 수색하고 있어. 그걸 가져야 한다구." "그를 위해서 가지는 게 아니야!" "아니지, 귀여운 보배. 만일 그걸 가지면 우린 도망칠 수 있어. 심지어 그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다구, 안 그래? 아마 우린 악령들보다도 강하게, 아주 강하게 될 수 있을 거야. 스메아골군주가 될까? 골룸대왕? 유일무이의 골룸! 매일 하루에 세 번씩바다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먹는 거야. 가장 귀하신 골룸! 그걸 가져야 해. 우린 그걸 원해, 그걸 원해, 원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들은 두 명이야. 그들은 금방 깨어나 우릴 죽일 거야." 스메아골은 남은 기력을 모아 우는 소리를 했다. "지금은 안 돼. 아직은 안 된다구." "우린 그걸 원해. 그러나," 여기서 마치 새로운 생각이 든 것처럼 오랫동안 말이 끊겼다. "아직 안 된다구 응? 아마 안 되겠지. 그녀가 도울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그럴 수 있지, 그래." "아냐, 아니라구! 그런 식은 아냐!" 스메아골은 울부짖듯 말했다. "그래! 우린 그걸 원해! 우린 그걸 원한다구!" 두번째 생각이 말을 할 때마다 골룸의 긴 손이 천천히 뻗어져 프로도를 향해 가다가 스메아골이 다시 말을 할 때면 홱 움츠러들곤 했다. 마침내는 긴 손가락들이 구부러져 실룩거리며 양 팔이 프로도의 목을 할퀼 것처럼 뻗쳤다. 샘은 그 토론에 정신을 빼앗긴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반쯤 감은 눈꺼풀 아래로 골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골룸의 위험은 주로 그의 배고픔, 즉 호비트들을 먹고 싶은 욕망에서 오는 것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룸은 반지의 그 무서운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라는 대명사는 물론 암흑의 군주였겠지만 그녀는 또 누구인지 샘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조그만 놈이 헤매다니다가 사귄 추잡한 친구들 중 하나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다가 샘은 생각의 요점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정이 급박해져 위험스런 지경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몹시 무거웠지만 그는 간신히 기운을 내 일어나 앉았다. 그는 얼핏 신중해야 하며 또 자신이 그 토론을 엿들었다는 걸 드러내선 안 된다고 느꼈다. 그는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시간이 어떻게 됐지?" 그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골룸은 이빨 사이로 쉿쉿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잠시 긴장해 위협적인 태도로서 있더니 곧 네 발로 기어 구덩이를 올라왔다. "훌륭한 호비트들! 훌륭한 샘! 졸리지, 그래, 졸릴 거야. 착한 스메아골이 파수를 설게! 그런데 벌써 저녁이야. 어스름이 기어오르고 있어. 가야 할 시간이야." '꼭 적당한 시간이군.' 샘은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그런데 이젠 정말로 골룸을 풀어 놓더라도 데리고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저주스러운 놈! 숨이나 막혀 버렸으면 좋겠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구덩이를 내려가 프로도를 깨웠다. 아주 이상하게도 프로도는 원기를 되찾은 것같이 보였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가고 아름다운 환영이 이 질병의 땅으로 그를 찾아왔었다. 그것에 관해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기분이 좋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신적인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다. 골룸은 개처럼 즐거워하며 그를 맞이했다. 그는 긴 손가락을 꺾어 딱딱 소리를 내기도 하고 프로도의 무릎을 앞발로 긁으며 낄낄 웃으며 재잘거리기도 했다. 프로도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넌 우릴 잘 그리고 충실하게 안내해 주었어. 이제 마지막 단계야. 우릴 성문까지 데려다줘. 그럼 네게 더이상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 않을 테니. 우릴 성문까지 데려다줘. 그리고나선 넌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아. 단 우리의 적에게로는 가지 말고." "성문까지요, 예?" 골룸은 놀라고 겁에 질린 듯 생쥐처럼 찍찍거렸다. "성문까지라고 말했어! 그래요,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착한 스메아골은 부탁하신 대로 합니다, 그럼요. 그런데 가까이 가게 되면 우린 아마 알게 될 거예요. 알게될 거라구요. 그건 전혀 멋있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오, 아니에요, 오, 아니라구요!" 그러자 샘이 말했다. "허튼 소리 말아! 그런 건 네가 신경쓸 필요 없어." 어스름이 깔리는 가운데 그들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천천히 죽음의 땅을 헤쳐나갔다. 멀리 가지 않아 그들은 전에 날개달린 형체가 늪 위를 스쳐지나갔을 때 느꼈던 그 두려움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악한 냄새가 풍기는 땅바닥에 웅크린 채 발길을 멈췄다. 그러나 음울한 저녁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위협적인 존재는 아마 바랏 두르로부터 어떤 급한 전갈이라도 받았는지 머리 위로바람같이 지나가 버렸다. 얼마후 골룸이 일어나 뭐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떨고 다시 앞으로 기어갔다. 자정이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 두려움이 세번째로 닥쳐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서운 속도로 서쪽을 향해 날아 훨씬 위쪽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골룸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고 또 자신들의 접근이 발각되어 쫓기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훌쩍이며 말했다. "세번째예요! 세 번은 위헙이에요. 그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걸 감지한 거예요. 또 보배도 감지했어요. 보배가 그들의 주인이거든요. 우린 이 길로는 더이상 갈 수 없어요, 안 돼요. 소용없어요, 소용없다구요!" 어떤 상냥한 말로 구슬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프로도가 화가 나서 명령을 내리며 칼자루에 손을 대자 골룸은 다시 일어섰다. 그는 으르렁대며 일어서더니 매맞은 개처럼 앞서갔다. 그들은 지루한 밤이 지날 때까지 계속 비틀거리며 나아가 또 다른 두려움의 날이 밝을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말없이 걸었다. 귓가에 쉿쉿거리는 바람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제14장 암흑의 성문 닫히다 다음날이 새기 전에 모르도르로의 여정은 끝이 났다. 뒤편에는 늪과 사막이 있었고 앞쪽에는 해쓱한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산맥이 어둡고 험악한 봉우리들을 이고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모르도르의 서편으로는 에펠 듀아스의 어슴푸레한 봉우리들 즉 암흑산맥이 행진이라도 하듯 지맥을 펼치고 있었으며 북쪽으론 에레드 리뒤의 헐벗은 봉우리들과 등성이가 잿빛으로 널려 있었다. 이들 산맥이 서로 맞닿은 사이엔 리슬라드와 고르고로스의 음침한 평원을 둘러싼 거대한 산벽과 사나운 뉴르넨 내해밖에 없었으며 북쪽으로 뻗은 긴 지맥들 사이에 깊고 좁은 골짜기가 하나 있었다. 이곳이 적의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 키리스 고르고르, 즉 유령의 통로였다. 양쪽으론 높은 벼랑이 버티고 서 있었으며 그 입구로부터 헐벗고 검은 두 개의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두 언덕 위에는 강대하고 높은 모르도르의 두 이빨(탑)이 서 있었다. 오랜 옛날 사우론을 격파해 패주시킨 후 자신의 힘에 의기양양했던 곤도르인들이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세운 건물들이었다. 그러나 곤도르는 쇠하고 사람들은 잠에 빠져 오랜 세월 동안 그 탑들은 비어 있었다. 그때 사우론이 돌아온 것이었다. 황폐했던 감시탑들은 보수되고 무기로 가득 채워졌으며 또 경계 병력이 끊임없이 보충되었다. 돌처럼 무표정한 그 탑들 안에는 북, 동, 서를 빤히 내려다보는 음침한 창구들이 뚫려있었으며 각 창구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계하는 눈들로 가득찼다. 고갯길 어귀를 가로질러 암흑의 군주는 벼랑과 벼랑을 연결하는 누벽을 쌓아 올렸다. 그곳엔 단 하나의 철문이 있었고 총안이 뚫린 흉벽 위로 경비병들이 끊임없이 왔다갔다했다. 누벽의 암반은 산 아래 양편으로 백 개소나 되는 동굴과 구덩이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전투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는 오르크들이 개미떼처럼 출격의 태세를 갖추고 잠복해 있었다. 사우론에게 소환을 당했거나 아니면 암흑의 성문 모라논을 열 수 있는 암호를 알지 못하는 한 아무도 이 모르도르의 이빨을 무사히 통과할 수는 없었다. 두 명의 호비트는 절망의 눈길로 그 탑들과 성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성벽 위로 시커먼 경비병들의 움직임과 성문 앞의 순찰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에펠 듀아스의 최북단 벽 그림자 아래 바위로 된 골짜기를 응시하며 누워 있었다. 무거운 대기를 가르고 똑바로 나는 까마귀의 거리로 계산한다면 그들이 숨어있는 곳에서 가까운 탑까지의 거리는 이백 미터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언덕 밑에서 불이라도 피우는지 탑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낮이 되자 담황색 태양은 에레드 리뒤의 생기없는 산등성이 위로 깜박였다. 그때 느닷없이 놋쇠나팔이 요란하게 울렸다. 감시탑에서 먼저 나팔이 울리자 멀리 산속에 숨겨진 막사와 전초들에서도 응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층 먼 저지대애서도 바랏 두르의 강건한 뿔피리와 북도 따를 수 없는 소리가 멀지만 깊고 불길하게 울려퍼졌다. 두려움과 노역의 끔찍한 하루가 이 모르도르에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야간경비병들은 그들의 지하참호로 다시 들어가고 주간경비병들이 근무지로 행진해 나오고 있었다. 흉벽 위에서는 희미한 쇳빛이 번득였다. 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드디어 당도했군요. 저기 성문이 있지만 제게는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멀어 보여요. 이거 참, 만일 아버지가 지금의 절 본다면 아마 한두 마디 했을 거예요. 그는 발걸음을 조심하지 않으면 고약한 종말을 맞이할 거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렇지만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아마 그는 '내가 그렇게 말했잖니, 샘.' 하고 말할 기회를 잃게 되어 섭섭할 거예요. 그게 더욱 애석한 일이죠. 제가 그의 늙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 그는 아마 숨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우선 전 세수를 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절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요. 전 지금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물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오르크놈들에게 성 안으로 들어올려 달라고 말할 예정이 아니라면, 우린 더이상 갈 수가 없으니까요." 골룸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소용없어. 우린 더이상 갈 순 없어. 스메아골이 그렇게 말했잖아. 그 성문으로 가보면 알게 될 거라구. 그리고 지금 우린 보고 있어. 그래, 내 보배, 우린 보고 있는 거야. 스메아골은 호비트들이 이 길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오 그럼, 스메아골은 알고 있었지." "그럼 대체 뭣 때문에 우릴 이 길로 끌고 온 거야?" 샘은 올바르게 또는 합당하게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아 이렇게 쏘아붙였다. "주인이 그렇게 말했어. 주인은 '우릴 성문까지 데려다줘.' 하고 말했어. 그래서 착한 스메아골은 그렇게 한 거야. 주인이 그렇게 말했어, 현명한 주인이 말이야." "내가 그랬지." 하고 말하는 프로도의 얼굴은 엄숙하고 표정이 없었으며 결연했다. 그는 더러워지고 수척했으며 피로에 시달렸으나 더이상 웅크리지 않았으며 또 눈도 맑게 빛났다. "모르도르로 들어가려고 그렇게 말했었지. 그리고 난 다른 길은 모르니 이 길로 가겠어. 난 누구에게도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 않겠어." 그러자 골룸은 앞발로 그를 더듬으며 비탄에 잠긴 듯 외쳤다. "아니, 안 돼요, 주인님! 저 길은 안 돼요. 안 된다구요. 그 보배를 그에게 가져다주지 말아요. 그가 그걸 손에 넣으면 우리 모두를, 이 세상 전부를 삼켜 버릴 거예요. 그걸 간직해요, 훌륭한 주인님! 그리고 스메아골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요. 그가 그걸 가지게 해선 안 돼요. 이곳에서 떠나요. 더 좋은 곳으로 가서 그걸 귀여운 스메아골에게 돌려줘요. 그래요, 그래. 주인님, 그걸 돌려줘요, 네? 스메아골이 그걸 안전하게 간직하고 또 착한 일을 많이 할 거예요. 특히 훌륭한 호비트들에게요. 호비트들은 고향으로 가는 거예요. 저 성문으로 가선 안 돼요!" "난 모르도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러니 난 가겠어. 만일 하나의 길밖에 없다면 난 그 길을 택해야 해. 그 뒤의 일은 어쩔 수 없어." 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프로도의 표정만으로 족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그 일에 대해 어떤 진정한 희망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명랑한 호비트였기에 절망이 늦춰질 수 있는 한 희망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 그들은 비참한 종말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껏 주인을 충실히 섬겨 왔다. 그것이 그가 여기까지 온 주목적이었으며 또 그는 여전히 주인을 충실히 섬길 작정이었다. 주인 혼자 모르도르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샘이 그와 함께 갈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골룸을 떼어 낼 것이었다. 그러나 골룸은 아직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양 손을 꼭 쥔 채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며 프로도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이 길은 안 돼요, 주인님! 또 다른 길이 있어요. 그래요, 정말 있어요. 더 어둡고 더 찾기 힘든 은밀한 길이에요. 그렇지만 스메아골은 거길 알아요. 스메아골이 보여드릴게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프로도는 날카로운 눈길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골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정말! 또 다른 길이 있어요. 스메아골이 발견했어요. 아직도 있는지 가서 봅시다." "이전엔 그 길에 대해 말한 적이 없잖아?" "말 안했죠. 주인이 묻지 않았으니까요. 주인은 뭘 할 건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는 불쌍한 스메아골에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는 다만 '스메아골, 성문까지 데려다줘. 그 다음엔 잘 가라구. 스메아골은 달아나서 착해질 수 있어.' 하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난 이 길로 모르도르에 들어갈 작정이야.' 하고 말하잖아요. 그래서 스메아골은 겁이 났어요. 훌륭한 주인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는 약속했어요. 주인이 약속하게 만들었죠. 보배를 구하기로. 그러나 만일 꼭 길로 간다면 주인은 그걸 그에게, 곧바로 그 암흑의 손에 갖다주게 될 거예요. 스메아골은 둘 모두를 구해야 하고, 그래서 옛날에 있었던 또 다른 길을 생각한 거예요. 훌륭한 주인님, 스메아골은 아주 착해요. 그리고 언제나 도울 거예요." 샘은 얼굴을 찌푸렸다. 만일 눈길로 골룸의 몸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어디로 보나 골룸은 진정으로 근심하고 있었고 프로도를 돕기 위해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샘은 엿들었던 토론을 상기하고는 오랫동안 밑에 잠겨 있던 스메아골이 꼭대기로 떠올랐다고는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토론에서 스메아골이 이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샘의 추측은 이러했다. 두 분신인 스메아골과 골룸(아니면 샘이 마음 속으로 붙인 대로 사기꾼과 악당)은 휴전과 동맹을 맺었다. 어느 쪽도 적이 반지를 손에 넣는 걸 원치 않았다. 양쪽 모두 프로도가 붙잡히는 걸 막고 가능한 한 - 어쨌든 악당이 그의 '보배'를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있는 한 - 오래 그를 자신들의 눈 아래 두고 싶어했다. 샘은 정말 모르도르로 가는 또 다른 길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프로도씨가 뭘 할 예정인지 저 늙은 악당의 어느 쪽도 모르고 있는 게 다행이야.' 샘은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프로도씨가 그 보배를 영원히 끝장내려고 한다는 걸 저놈이 안다면 곧바로 분란이 일어날 거야. 어쨌든 늙은 악당은 적을 몹시도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어떤 종류의 명령을 받고 있거나 아니면 받았기 때문에 우릴 도와 주다가 붙잡히기보다는, 그리고 그 보배가 혹시 녹아 버리게 놔두기보다는 적에게 우릴 넘겨 주려고 할 거야.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래. 그리고 바라건대 프로도씨도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프로도씨는 누구 못지않게 현명하시지만 마음이 여리거든. 그게 그분의 성격이지. 그분이 다음에 뭘 할 것인지는 어떤 갬기라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거야." 프로도는 즉각 골룸에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느리지만 빈틈없는 샘의 머리 속에 이런 의구심이 지나가는 동안 그는 키리스 고르고르의 어두운 벼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은신한 곳은 사면이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그 위치는 언덕과 바깥쪽 석벽 사이에 놓인 긴 도랑 같은 계곡보다 약간 높았다. 계곡 가운데에는 서쪽 감시탑의 시커먼 토대가 서 있었다. 모르도르의 성문으로 향한 길이 이제는 아침햇살 속에 먼지투성이로 선명하게 보였다. 길 하나는 북쪽으로 구불구불하게 뻗쳤고 다른 하나는 동쪽 에레드 리뒤 기슭의 안개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으며 세번째 길은 그들을 향해 뻗쳐 있었다. 탑 주위로 급히 굽어진 그 길은 좁은 골짜기를 이뤘다가 그들이 있는 움푹 꺼진 분지 아래로 이어졌다. 그 길은 산맥양쪽을 따라 뻗으며 서쪽으로, 즉 그들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쪽 에펠 듀아스의 사면을 덮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그 길은 산맥과 대하 사이의 좁은 땅으로 계속 이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로도는 평원에서 커다란 소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늪과 그 너머 황야에서 밀려온 연기와 증기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대부대가 행진중인 것 같았다. 여기저기 창과 투구들이 번쩍이는 모습이 보였으며 커다란 무리의 기병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것 같지만 실상 며칠밖에 되지 않은, 멀리 아몬 헨에서의 환영을 상기했다. 그러자 한순간 가슴 속에서 격렬하게 꿈틀댔던 희망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나팔소리는 도전을 알렸던 것이 아니라 환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사라진 용자들의 무덤에서복수의 사자처럼 일어난 곤도르인들이 암흑의 군주를 공격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드넓은 동부의 땅에서 달려온 다른 종족의 인간들로서 암흑의 군주에게서 소환을 받고 몰려온 것이었다. 밤 동안 성문 앞에서 야영하고 있다가 이제 그의 불어나는 권능을 더하기 위해 안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대부대였다.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이 거대한 위협에 그렇게 가까이 와 있는 자신들의 위험을 새삼스레 감지하기라도 한 듯 프로도는 재빨리 머리 위로 가냘픈 회색 두건을 끌어당기고는 분지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골룸에게로 몸을 돌렸다. "스메아골, 널 한 번 더 믿겠어. 정말이지 그렇게 해야만 하나 봐.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네게 도움을 받는 게 내 운명이고 또 너는 너대로 사악한 목적을 품고오랫동안 쫓아온 나를 도와야 할 운명을 지닌 모양이야. 지금까지 넌 잘해 왔고 또 약속도 충실히 지켰어. 정말 충실하게 지켜 왔어." 그는 샘을 흘끗 바라보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너는 두 번이나 우리의 운명을 손에 쥐었지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또 넌 지금껏 추구해 온 것을 빼앗으려고도 하지 않았어. 세 번째의 결과 역시 좋게 되기를 바래. 그렇지만 스메아골, 일러 두지만 넌 위험에 처해 있어." "그래요, 주인님! 무시무시한 위험이죠! 생각만 해도 스메아골의 뼈가 흔들리지만 스메아골은 달아나지 않아요. 훌륭한 주인님을 도와야 하니까요." "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위험을 말한 게 아니야. 너 혼자에게만 미친 위험을 얘기 한 거야. 넌 네가 보배라고 부르는 것에 걸고 약속을 지키기로 맹세했어. 그걸 기억해. 그 보배가 너로 하여금 그 약속을 지키도록 할 거야. 그러나 또 그 보배는 그 약속을 비틀어 너를 파멸로 이끄는 방법도 강구할 거야. 벌써 넌 비틀어지고 있어. 넌 방금 전에 우둔하게도 너 자신을 네게 드러냈어. '그걸 스메아골에게 돌려줘요.' 하고 말했어.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마! 그런 생각이 네 마음 속에 자라나게 해서는 안 돼! 넌 그걸 결코 다시 가질 수 없어. 그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넌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도 있어. 넌 결코 그걸 도로 가질 수는 없어. 스메아골, 난 최후의 위급한 순간에 그 보배를 사용할 거야. 그리고 그 보배는 오래전에 널 길들여 놓았으니 만일 내가 그걸 끼고 네게 명령을 한다면, 심지어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거나 불 속으로 몸을 던지라고 해도 넌 복종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내 명령은 바로 그런 것이 될 거야. 그러니 주의해서 생각해야 해, 스메아골!" 샘은 찬동의 눈길로, 그러나 또한 놀라움의 눈으로 프로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샘이 예전에 알지 못했던 표정과 음조가 있었다. 경애하는 프로도씨의 친절은 너무도 심한 것이어서 어떤 때는 사실에서 눈이 멀어진다고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프로도씨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아마 늙은 빌보씨나 갠달프는 제외하고)라는 양립할 수 없는 믿음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골룸도 그 나름대로 프로도의 친절과 눈멂을 혼동하고 유사한 실수를 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골룸의 실수는 이해할 여지가 더 많았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그를 무안하게 했고 또 겁에 질리게 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훌륭한 주인님' 이란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또렷하게 하지 못했다. 프로도는 한동안 참을성있게 기다리더니 이윽고 덜 엄하게 말했다. "자, 이제 골룸이든 스메아골이든 네가 정말 원한다면 내게 그 또 하나의 길에 대해 말해 줘.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분명한 길을 두고도 우회하는 걸 정당화시킬수 있을 만한 희망이 그 길에 있는가 보여 주고. 난 급하단 말이야." 그러나 골룸은 가련한 처지에 있는 데다가 프로도의 위협에 기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중얼거리고 찍찍대며 말을 중도에 끊고 바닥을 기면서 그들 모두에게 '작고 불쌍한 스메아골' 에게 상냥하게 대해 줄 것을 애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에게서 어떤 명료한 설명을 얻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후 그가 조금 차분해지자 만일 에펠 듀아스 서쪽으로 굽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둥그렇게 늘어선 어두컴컴한 숲 사이의 통행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프로도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오스길리아스와 안두인대하의 교각들 사이로 길 하나가 뻗어있으며 그 중앙부부터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골룸이 말했다. "계속, 계속, 계속 가야 해요. 우린 그 길로 가보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사람들 말로는 삼백 마일쯤 가면 잔잔할 때가 없는 대수역에 이를 거라고 해요. 거기엔 물고기들이 많아서 커다란 새들이 잡아먹는대요. 멋진 새들이죠. 그렇지만 우린 가본 적이 없어요. 애석하게도 기회가 없었어요. 더 나가면 넓은 대지가 있어요. 하지만 그곳엔 노란 발광체가 몹시도 뜨겁고 구름도 거의 없어요. 또 시커먼 얼굴을 한 그곳사람들은 아주 사납다고 해요. 우린 그런 곳은 가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럼! 네 길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돼. 그런데 세번째 갈림길은?" "아, 예, 아, 예, 세번째 갈림길이 있죠. 그건 왼쪽 길이에요. 그 길은 커다란 그림자를 향해 구불구불하게 뻗치며 오르막을 이루고 있어요. 검은 바위를 돌아서면 갑작스레 머리 위에 나타나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숨고 싶어질 거예요." "그걸 볼 수 있다고? 그게 뭔데?" "옛 요새예요.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지금은 아주 무시무시해요. 오래전 스메아골이 젊었을 때 우린 남쪽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요, 우린 저녁이면 버드나무가 즐비한 대하 제방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물론 대하도 훨씬 젊었을 때죠. 골룸, 골룸." 그는 한탄하듯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남쪽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들은 빛나는 눈을 가진 키 큰 인간들과 돌로 지은 그들의 집 그리고 그들 왕의 은빛 왕관과 하얀 성수에 관한 것들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지요. 그들은 아주 높은 탑들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는 은처럼 하얬어요. 그 속에는 달처럼 생긴 돌이 하나 있고 그 주위로 거대한 흰색 성벽이 둘려있어요. 오, 그래요, 그 달의 탑에 대해선 이야기가 더 많아요." 프로도가 말했다. "그럼 바로 엘렌딜의 아들 이실두르가 세운 미나스 이딜이겠군. 적의 손가락을 자른 이가 바로 이실두르였지." "맞아요. 그의 검은 손엔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걸로도 부족한 건 없어요. 그리고 그는 이실두르의 도시를 증오했어요." 골룸은 덜덜 떨며 말했다. "그가 증오하지 않는 것도 있나? 그런데 그 달의 탑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지?" "음, 주인님, 그 높은 탑과 하얀 집들 그리고 성벽은 예전처럼 지금도 그곳에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아요. 그가 오래전 그곳을 정복했어요. 그곳은 이제 아주 끔찍한 곳이 되었어요. 여행자들은 그 도시를 보면 몸서리를 치고 그 그림자가 덮이지 않는 곳으로 기어 간답니다. 그렇지만 주인님은 그 길로 가야 할 거예요. 그게 유일한 다른 길이니까요. 거기는 산도 더 낮고, 오래된 길은 계속 위로 뻗어 결국 꼭대기 어두운 고갯길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계속 내려가요. 고르고로스까지요."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잦아드는 동시에 골룸은 몸을 떨었다. 그러자 샘이 물었다. "그런데 그 길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 거란 말이야? 분명 적은 그 산맥 주변을 샅샅이 알고 있을 것이고 또 그 길도 여기처럼 엄중하게 방비되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 탑은 비어 있는 게 아니겠지, 안 그래?" 골룸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오, 그럼, 비어 있지 않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아주 무시무시한 것들이 살고 있어. 오르크놈들이. 그래 언제나 오르크들이 있어. 그렇지만 더 고약한 것들, 더 고약한 것들도 있어. 그 길은 성벽 바로 아래로 뻗어 성문을 지나치지. 그 길 위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그들에게 파악돼. 안에 있는 것들, 침묵의 감시자들은 모조리 알고 있어." "그래 네 조언이란 게 거기에 닿더라도,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지금과 꼭 같은 곤경이나 아니면 더 나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길로 가자는 거야? 그걸 확인하려고 또 한번 남쪽 그 먼 길을 돌아야 한단 말이야?" "아냐, 그렇지 않아. 호비트들은 이해하려고 해야 해. 그는 그 길로는 공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의 눈은 모든 방향을 살피지만 아무래도 주의를 더 기울이는 곳이 있어. 단번에 모든 걸 볼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너도 알다시피 그는 대하에 이르기까지 그림자산맥 서쪽의 모든 나라를 정복했고 지금도 그 교두보를 지키고 있어. 그는 누구라도 커다란 전투를 치르거나 아니면 숨길 수도 없고 숨기더라도 곧 발각될 많은 전함을 이끌지 않고는 달의 탑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단정해." "넌 그가 무얼 하고 있고 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최근까지 그와 이야기를 해온 거야? 아니면 단순히 오르크놈들과 지껄여서 알게 된 거야?" "넌 훌륭한 호비트가 아니야. 분별도 없고." 골룸은 샘에게 화난 눈길을 던지고 나서 프로도에게 몸을 돌리고 계속 말했다. "그래요, 물론 스메아골은 주인님을 만나기 전에는 오르크놈들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아주 멀리 돌아다녔으니까요.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많은 종족들이 말하고 있는 사실들이에요.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위험한 곳은 바로 이 북쪽이에요. 그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암흑의 성문을 나설 거예요. 대부대가 나올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까요. 그러니 그는 저 아래 서쪽은 걱정하지 않아요. 거기엔 침묵의 감시자들이 있거든요." 샘이 기죽지 않으려는 듯 말했다. "바로 그래! 그러니 우리가 거기까지 찾아가 그 성문을 두드리고 모르도르로 가는 바른 길을 택한 건지 그 침묵의 감시자들에게 물어 봐야 한단 말이야? 아니면 그들은 너무 말이 없어 대답도 안할까? 도무지 사리에 맞질 않아. 차라리 그럴 바에야 여기서 그냥 들어가는 게 낫겠어. 힘들여 먼 길을 걸을 필요 없이." 그러자 골룸이 쉿쉿거리며 말했다. "농담하지 마! 그건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아니야. 아니고말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야. 도대체 모르도르에 들어가겠다는 말부터가 사리에 맞지가 않아. 그렇지만 주인님이 '난 가야 해.' 라거나 '난 가겠어.' 하고 말한다면 어떤 방도를 취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저 끔찍한 도시로 가면 안 돼요, 안 돼. 당연히 안 된다구요. 이 모든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스메아골이, 훌륭한 스메아골이 도울 수 있는 게 바로 이 대목이에요. 스메아골이 다시 도와 주려는 거예요. 그는 그걸 발견했고 또 알고 있어요." "네가 뭘 발견했지?" 프로도가 물었다. 골룸은 웅크리고 앉았으며 그의 목소리는 다시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요. 그 다음엔 계단, 좁은 계단이 있어요. 그래요, 아주 길고 좁은 거예요. 그리곤 더 많은 계단이 있어요. 그 다음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터널이, 어두운 터널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틈새를 지나면 큰 고개 위로 길이 나 있어요. 스메아골이 그 암흑을 빠져나온 게 바로 그 길이었어요. 그러나 그건 몇 년 전의 일이에요. 그 길은 이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마 없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아마도." 그러자 샘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어쨌든 말로는 아주 쉬운 것 같거든. 만일 그 길이 아직 있다면 그곳도 경비되고 있을 거야. 안 그래, 골룸?" 샘은 자신의 말을 듣는 골룸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는 걸 보았다. 아니면 보았다고 생각했다. 골룸은 뭐라고 중얼대긴 하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로도가 단호한 태도로 물었다. "정말 경비되고 있지 않은 거야? 그리고 그 암흑 속에서 탈출했다고, 스메아골? 어쩌면 탈출한 게 아니라 무슨 사명을 받았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게 아니야? 몇 년 전에 죽음의 늪에서 널 잡았던 아라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그건 거짓말이에요!" 아라곤이란 이름을 들은 골룸은 쉿쉿거리는 소리로 부정하며 눈에는 사악한 빛을 띠었다. "그는 나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래요. 난 오로지 내 미약한 힘에 의존해서 탈출했어요. 사실 난 보배를 찾으라는 말을 들었고 당연히 보배를 찾고 또 찾았어요. 그렇지만 암흑의 군주를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 보배는 우리 것이었어요. 주인님께도 말하지만 그건 내 거였어요. 난 내 힘으로 탈출했어요." 프로도는 이 문제에 한해서만은 골룸의 말에 의심스런 점이 없으리란 이상스런 확신을 느꼈다. 즉 그가 어떻게 해선지 모르도르에서 탈출할 길을 발견했고 또 그것이 자신의 약삭빠른 재주에 의한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례로 그는 골룸이 '나' 라고 말한 사실을 중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드물게 있는 일이지만 과거의 진실과 정직에서 아직 남아 있는 어떤 부분들이 한순간 솟아오르는 표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점에서 골룸을 신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프로도는 적의 간계를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 '탈출' 은 묵시적으로 허락되거나 조작된 것으로 암흑의 탑 내부에서 다 알려진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이건 간에 골룸은 분명히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다시 묻겠는데 그 은밀한 길이 정말 경비되고 있지 않아?" 그러나 골룸은 아라곤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뚱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번만큼은 진실을, 아니면 적어도 일부분의 진실을 말했는데도 여전히 의심받는 거짓말쟁이의 갖가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경비되지 않고 있어?" 프로도는 다시 물었다. 그러자 골룸은 뿌루퉁하게 대답했다. "아마 경비하고 있겠죠. 이 나라에선 안전한 곳이라곤 없으니까요. 안전한 곳이라곤 없어요. 그러니 그 길을 한번 가보든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요.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들은 그에게서 더이상 아무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위험한 곳과 높은 고갯길의 이름은 말할 수 없거나 아니면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곳은 바로 풍문에 떠다니는 무시무시한 이름 키리스 운골이었다. 아라곤이라면 아마 그들에게 그 이름과 거기 내포된 의미를 말해 줄 수 있었을 것이고 갠달프라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 둘뿐이었다. 아라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갠달프는 사루만의 배반으로 인해 이센가드의 폐허에서 사루만과 씨름하며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루만에게 최후통첩을 던지고 또 팔란티르가 오탕크의 계단에 요란스럽게 부딪혔을 때에도 갠달프는 언제나 프로도와 샘와이즈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희망과 연민을 품은 채 그 먼 거리를 넘어 그들을 찾고 있었다. 갠달프가 가버렸다고, 멀리 떨어진 모리아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가버렸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프로도는 아몬 헨에서처럼 갠달프의 염려와 희망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갠달프가 말해 줬던 모든 사실을 상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선택에 관해선 아무런 조언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아직 암흑의 땅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들은 너무도 이르게, 정말 지나치게 이르게 갠달프의 안내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야 할지 갠달프는 말하지 않았었다. 아마 그로서도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북방에 있는 적의 요새 돌 굴두르 안으로 한 번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암흑의 군주가 다시 권력을 잡고 부상한 이래 모르도르 안으로, 불의 산과 바랏 두르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었을까? 프로도는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샤이어에서 온 자그만 하플링, 조용한 시골의 단순한 한 호비트에 불과한자신이 위대한 이들이 갈 수 없었거나 감히 가지 못한 길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받고 있는 것이다. 이건 너무 잔인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해인가 아늑한 봄날 - 이젠 너무도 멀어진 시간이라 세상의 청년기에나 해당될 법하게 여겨지는 - 은빛나무와 금빛나무들이 아직 꽃을 피우고 있었을 때 자신의 거실에서 스스로에게 이 운명을 떠맡겼었다. 이것은 너무도 잔인한 선택이었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만일 두 길 모두가 공포와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선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낮이 되었다. 그들이 숨어 있는 회색의 작은 골짜기 - 두려움의 땅에서 아주 가까운 - 에 깊은 정적이 깔렸다. 그것은 마치 그들을 주위의 온 세계에서 차단하는 두터운 장막처럼 느껴지는 정적이었다. 하늘은 덧없는 연기로 줄이 그어진 채 창백한 둥근 천장같이 보였으며 골똘한 생각에 무거워진 대기의 거대한 심연이 갈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높고 멀어 보였다. 해를 등지고 나는 독수리조차 그 운명의 무게 아래 묵묵히 움직이지 않고 얇은 회색 망또로 몸을 감싼 채 앉아 있는 호비트들을 발견하진 못했을 것이다. 혹시 한순간 비상을 멈춘 독수리는 아주 작은 형체의 골룸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랬더라도 아마 웬 인간의 아이가 굶어죽어 아직도 너덜너덜한 옷가지에 해골과 거의 뼈처럼 하얗게 여윈 팔다리만이 붙어 있는 채 누워 있다고, 그래서 한 입 쪼아 먹을 것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로도는 무릎 위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나 샘은 양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치고서두건 너머로 텅 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샘은 어두운 새의 형체가 시야 안으로 선회해 들어와 빙빙 맴돌고는 다시 선회해 가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곧 두 개의 다른 형체가 눈에 들어왔고 뒤이어 또 하나가 뒤를 따랐다. 보이기는 작게 보였지만 아무튼 그것들은 대단한 길이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짐승들로서 대단히 높이 날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비록 이번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 리 압도적이거나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암흑의 기사들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전조적 두려움, 바람을 타고 다가왔던 울부짖음과 달그림자와 함께 다가왔던 그 어쩔 수 없는 공포가 일었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프로도 또한 그걸 느꼈다. 생각이 중단되었다. 꿈틀거리며 몸을 떨긴 했지만 그는 위를 쳐다보지 않았다. 골룸은 구석에 몰린 거미처럼 몸을 웅크렸다. 날개달린 형체들은 선회하다가 급강하해 다시 모르도르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샘은 깊이 숨을 내쉬며 쉰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 기사들이 다시 하늘에 나타났어요. 전 그들을 봤어요. 그들도 우릴 봤을까요? 그들은 아주 높이 떠 있었어요. 만일 그들이 전에 보았던 암흑의 기사들이라면 대낮의 햇빛 속에서는 많은 걸 보지 못할 거예요, 안 그래요?" "그래, 아마 못 볼 거야. 그렇지만 그들이 탄 짐승은 볼 수 있을 거야. 지금 그들이 타고 다니는 그 날개달린 짐승은 아마 다른 어떤 새들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을 거야. 그것들은 썩은 고기를 먹는 거대한 새들과 같아. 그것들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어. 적이 경계를 취하고 있는 모양이야." 두려움의 순간이 지나가자 주위를 감쌌던 정적도 깨졌다. 한동안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섬에 있었던 것처럼 주위로부터 단절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노출되었고 위험이 다가왔다. 그러나 프로도는 여전히 골룸에게 말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거나 자신의 가슴 속과 기억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몸을 움직이며 일어선 다음 결정을 내릴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외쳤다. "들어 봐! 저게 뭐지?" 새로운 공포가 일었다. 노랫소리와 함께 쉰 목소리로 외치는 함성이 들렸다. 처음엔 멀리서 들렸으나 차차 가까워졌다. 그들은 암흑의 사자들에게 발각되어 무장한 병사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온다고 생각했다. 이들 사우론의 무시무시한 충복들에겐 어떤 속도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듯했다. 그들은 귀기울이며 웅크렸다. 목소리들과 무기와 마구가 쨍그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프로도와 샘은 칼집 속에서 단도를 느슨하게 빼두었다. 도주는 불가능했다. 골룸은 천천히 일어나 벌레처럼 분지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씩 몸을 들어올려 그는 울퉁불퉁한 돌 사이로 분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목소리들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해 서서히 사라져갔다. 멀리 모라논의 성벽 위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골룸이 조용히 뒷걸음질쳐 분지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더 많은 인간들이 모르도르로 들어가고 있어요. 음산한 얼굴들이에요. 우린 전에는 저런 인간들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스메아골은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사나워요. 검은 눈에 길고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귀에는 황금귀걸이를 달았어요. 그래요, 아름다운 황금이 무척 많아요. 그리고 일부는 볼에다 빨간 칠을 하고 빨간 망또를 걸친 데다 깃발과 창끝도 빨개요. 또 그들은 커다란 대못이 박힌 노랗고 검은 둥근 방패를 들었어요. 그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인간들 같아 보여요. 거의 오르크놈들만큼이나 나쁜 족속들인데 덩치는 훨씬 커요. 스메아골은 그들이 대하 끝 저 남쪽에서 온 걸로 생각해요. 그들은 저 길을 올라왔고 계속 암흑의 성문으로 나갔어요.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뒤따를 거예요. 계속 더 많은 족속들이 모르도르로 오고 있어요. 어느 날엔가는 모든 족속들이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거기 혹시 올리파운트들도 있어?" 낯선 곳의 소식을 알고 싶은 나머지 두려움도 잊고 샘이 물었다. "아니, 올리파운트는 없어. 올리파운트가 뭔데?" 골룸이 물었다. 샘은 일어서서 양 손을 뒷짐지고선 - 시를 읖을 땐 늘 그러듯이 - 입을 열었다. 생쥐 같은 회색빛에 집채 같은 큰 몸집 코는 뱀과 같고 풀밭을 걸을 때면 대지가 흔들리고 숲을 지나치며 나무가 부러진다. 입에는 뿔피리를 물고 남쪽으로 걷는다. 커다란 귀를 늘어뜨리고 세월의 경계를 넘어 뚜벅뚜벅 돌고 돌며 바닥에 눕지 않는다. 결코 죽지도 않는다. 나는 올리파운트 모든 것 중 가장 크고 거대하고 나이 많고 장대하다. 날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한다. 날 보지 못하면 결코 믿지 못한다. 나는 늙은 올리파운트 결코 죽지 않는다. 샘은 암송을 마치고 말했다. "이게 샤이어에서 전해지는 시야. 터무니없는 소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우린 우리 전설이 있거든.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도 듣고 있고. 옛날에는 호비트들도 때로 여행을 다니곤 했어. 많은 이들이 돌아왔다거나 그들이 말한 것을 다 믿는다는 건 아니야. 속담에도 있듯이 브리로부터의 소식은 샤이어에서의 이야기만큼도 확실하지 않지. 그러나 난 저 아래 멀리 떨어진 태양의 땅에 사는 덩치 큰 종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우리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스워팅이라고 불리는데 올리파운트를 타고 싸운다고 해. 그들은 올리파운트의 등에 집이며 탑이며 온갖 것을 싣고 다녀. 올리파운트들은 서로 바위와 나무들을 던지고 그래서 네가 온통 빨간색과 황금으로 장식한 남부에서 온 인간들이라고 했을 때 내가 올리파운트는 없냐고 한 거야. 그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위험하든 안하든 간에 한번 보고 싶거든. 그렇지만 이제 난 올리파운트를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아. 아마 그런 야수는 없는가 봐." 샘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룸이 말했다. "그럼 올리파운트란 없어. 스메아골은 그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는 그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고 또 존재하길 바라지도 않아. 스메아골은 여기서 나가 어딘가 더 안전한 곳에 숨고 싶어. 스메아골은 주인이 가기를 바래. 훌륭한 주인님, 스메아골과 같이 가지 않겠어요?" 프로도는 일어섰다. 그는 온갖 근심의 와중에서도 샘이 자랑삼아 옛날 난롯가에서 읊던 시를 선보였을 때 웃을 수 있었고 그 웃음이 그를 망설임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하얀 올리파운트를 탄 갠달프가 천 마리의 올리파운트를 이끌고 우릴 도와주러 달려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우린 아마 이 사악한 곳으로 길을 낼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우리에겐 지친 다리 외에 아무것도 없어. 자, 스메아골, 세번째가 가장 좋은 결말을 맺기를 바래. 난 너와 함께 가겠어." 골룸은 프로도의 무릎을 톡톡 치며 기뻐 소리쳤다. "선량하고 현명하고 훌륭한 주인님! 선량한 주인님이야! 그럼 이제 훌륭한 호비트들은 바위 아래 바싹 붙어서 쉬어요. 저 노란 발광체가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누워서 쉬어요. 그때가 되면 우린 빨리 갈 수 있어요. 우린 어둠처럼 부드럽고 빨라야 해요!" 제15장 향초와 토끼스튜 일광이 비치는 몇 시간 동안을 그들은 이리저리 그늘을 찾아 움직이며 쉬었다. 드디어 그들이 은신한 작은 분지로 긴 그림자가 덮이고 차차 어둠이 온 골짜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간의 음식과 물을 아껴서 먹었다. 골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물만은 즐거이 받아 마셨다. 골룸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이제 곧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대하를 따라 좋은 물이 흘러내려요. 좋은 물이 있는 땅으로 가는 거예요. 아마 스메아골은 먹을 것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너무 배가 고프거든요. 그럼요, 골룸!" 그는 크고 넓적한 양 손을 쪼그라든 배 위에 얹었다. 눈에는 푸른빛이 떠올랐다. 드디어 그들이 분지를 떠나 서쪽으로 기어 그 미지의 길을 향해 유령처럼 떠날 때는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달은 이제 만월에서 사흘이 지났지만 자정이 될 때까지 떠오르지 않았기에 이른 밤인데도 매우 어두웠다. 높이 솟은 모르도르의 이빨들에선 하나의 빨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외에는 이 모라논의 불침경계를 말해 주는 표시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불모의 나라를 떠나는 동안 그 빨간 눈은 계속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감히 길을 따라 걷지 못하고 우측으로 약간 떨어진 채 되도록 길 방향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드디어 밤이 이슥해지고 그들이 어지간히 지쳤을 때 - 그들은 한 번밖에 쉬지 않았다 - 가 되어서야 그 불타는 눈은 작은 점으로 줄어들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그들은 산맥의 좀더 낮고 어두운 북쪽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향했다. 이제 그들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오래 쉬지는 않았다. 골룸은 지금의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모라논에서 오스길리아스의 십자로까지 거의 구십 마일에 이르렀으며 그는 그 거리를 단 네 번의 밤행군만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곧 강행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넓고 쓸쓸한 회색 땅에 새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은 거의 이십사 마일이나 걸었기 때문에 햇빛을 무릅쓰고 가려고 해도 호비트들은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점점 밝아오는 빛 속에 그들 앞에는 벌써 덜 척박하고 덜 황량한 땅이 드러나고 있었다. 왼편으로는 아직도 산맥이 어렴풋하게나마 불길한 자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쪽으로 약간 기운 남쪽 길을 볼 수 있었다. 길 저편으론 어두운 구름 같은 칙칙한 빛깔의 숲으로 덮인 비탈이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히드, 금작화 그리고 그들이 알 수 없는 관목들로 우거져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키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호비트들은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생기가 솟았다. 신선하고 향기로운 공기는 저 멀리 떨어진 노스파딩의 고지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일시적이라도 근심에서 벗어나, 암흑의 군주의 지배 하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완전히 척박해지지 않은 땅을 걷는 것은 즐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잊지는 않았으며 또한 어두운 산 뒤에 가려 있지만 암흑의 성문이 아직도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빛이 내리쪼이는 동안 사악한 눈길을 피해 은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불안 속에 낮이 지나갔다. 그들은 히드관목 사이에 깊숙히 누워 변화 없는 느릿느릿한 시간을 세었다. 그들은 여전히 에펠 듀아스의 그늘에 있었으며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끔 태양을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로도는 골룸을 신뢰하는지 아니면 너무 피곤해 신경을 쓸 수가 없음인지 깊고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샘은 골룸이 가끔 은밀한 꿈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푸푸 숨을 몰아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잠을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골룸에 대한 불신보다는 배고픔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배불리 먹을 수수한 식사, '냄비에 요리한 무언가 뜨거운 것' 을 원했다. 다가오는 밤과 함께 대지가 무정형의 회색으로 바뀌어가자 그들은 다시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 골룸은 그들을 남쪽길로 이끌었다. 이제 위험은 더 커졌지만 그들은 좀더 빠르게 전진했다. 앞쪽이나 뒤쪽에서 그들을 향해 오는 말발굽소리나 발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밤이 깊어지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모라논으로부터 삼십 마일 가량은 새로 보수되었으나 그 남쪽으로는 황폐해졌다. 아직 튼튼하고 곧게 뻗은 부분에서는 옛 인간들에 의해 세워진 건조물이 눈에 띄기도 했다. 산허리를 깎고 놓여진 길도 있었으며 항구적인 석공술로 세워진 아치형의 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길가 숲에 삐죽이 드러난 부서진 기둥이나 또는 잡초와 이끼 속에 내던져진 포석 이외에는 모든 석고의 자취가 사라졌다. 히드관목과 고사리들이 길가에 무성하게 자리잡아 가끔은 길 위까지 번지고 있었다. 결국 길은 아주 좁아져 시골의 오솔길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 좁은 길도 구불구불 비틀리진 않고 스스로의 확고한 진로를 고수해 그들을 가장 빠른 행로로 이끌어 주고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인간들이 한때 이딜리엔이라 부른 땅, 경사를 이룬 숲과 빠른 물살의 개울들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의 북쪽 변경으로 들어섰다. 별과 둥근 달이 떠 있는 밤은 상쾌했다. 호비트들은 앞으로 갈수록 대기의 향기가 짙어짐을 느꼈다. 골룸도 가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투덜대는 것으로 보아 그걸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날이 새는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길은 양 측면이 가파른 굴착로를 이룬 채 돌투성이의 산등성이를 헤치고 뻗쳤다. 그들은 서편 등성으로 기어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하늘엔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산맥은 긴 만곡을 이루며 이제 훨씬 먼 동쪽으로 떨어졌다. 서쪽으로 길을 틀자 그들 앞엔 그리 가파르지 않은 비탈이 흐릿한 안개속에 뻗어내리고 있었다. 주변엔 전나무, 삼나무 그리고 송진이 흘러내리는 노송과 함께 샤이어에선 볼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사이엔 꽤 넓은 공지가 있었다. 사방에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풀들과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리벤델에서 시작된 기나긴 여정은 고향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이어졌지만 그들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차폐된 이 지역으로 올 때까지는 계절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봄은 활짝 피었다. 이끼와 곰팡이가 자라났고 나무들은 잎이 푸르렀으며 잔디에선 작은 꽃들이 매달렸고 새들은 노래하고 있었다. 이제 황량해진 곤도르의 장원 이딜리엔은 아직껏 머리칼이 헝클어진 숲의 요정의 사랑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은 남쪽과 서쪽으로 좀더 따뜻한 안두인대하의 계곡들과 접하고 있었다. 그 계곡들은 에펠 듀아스에 의해 가려졌으나 산그림자 아래 들어 있지는 않았고, 에민 뮐에 의해 차단되었으나 남쪽의 대기와 먼 바다의 습기찬 바람에는 열려 있었다. 그곳엔 오래전에 심어진 거대한 나무들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가운데 노령으로 쇠락해 갔고 냄새가 코를 찌르는 텔레빈나무와 올리브, 월계수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향나무와 돌을 휘감고 자라난 백리향, 파랗고 빨갛게 피어난 개꽃들, 새로 싹이 돋아나는 파슬리 그리고 샘의 원예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가지가지 형태의 풀들이 있었다. 동굴들과 바위벽들은 벌써 갖은 종류의 이끼들로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었다. 개암나무 덤불 사이엔 아네모네가 피어 있었고 풀밭에는 반쯤 벌린 백합이 머리를 끄덕였다. 진한 초록의 풀밭 옆에는 웅덩이가 있어 안두인대하로 흘러가는 개울들이 그 서늘한 곳에서 쉬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벗어나 언덕으로 내려갔다. 덤불을 헤치고 걸어가니 달콤한 내음이 주위로 피어올랐다. 골룸은 기침과 헛구역질을 했지만 호비트들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샘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려 댔다. 너무도 마음이 느긋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흐르는 개울을 따라 걸었다. 개울은 작고 맑은 웅덩이로 이어졌다. 침식된 가장자리에 온통 이끼가 장미덩굴로 덮인 웅덩이는 대야처럼 오목한 암반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주위론 이리스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고 어둡고 부드럽게 찰랑이는 수면 위엔 수련이 떠돌았다. 웅덩이는 깊고 소금기가 없었으며 한쪽 가장자리로 잔잔하게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웅덩이물로 몸을 씻고는 흘러드는 물에 입을 대고 양껏 마셨다. 그리고는 은신해 쉴 곳을 찾았다. 이곳은 아직 아름다워 보였지만 적의 영역 내부인 것만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길에서 멀리 벗어나진 않았으나 그 작은 공간에서도 옛 전쟁의 상흔과 함께 암흑의 군주를 섬기는 추악한 종족과 오르크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처들을 보았다. 오물과 쓰레기 구덩이, 함부로 베어 넘겨져 고사한 나무들 그리고 그 껍질 위에 거칠게 새겨진 알지 못할 사악한 기호들과 사나운 눈의 표식 등이 그것이었다. 잠시 모르도르에 관해선 잊은 채 웅덩이로 흘러드는 개울로 기어차려가 생소한 식물과 나무들을 냄새 맡으며 만져 보던 샘은 언제나 떠나지 않았던 위험을 다시 상기했다. 그는 아직도 불길에 초토화된 상태 그대로인 원형의 공터에서 까맣게 타고 부서진 뼈와 해골 무더기를 발견했다. 찔레덤불과 인동덩굴 들이 그 무시무시한 향연과 살육의 장소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살육이 벌어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동료들에게 돌아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룸이 긁어 파헤치지 않게 그 뼈들을 그대로 놔두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샘이 말했다. "숨을 곳을 찾아 봐요. 더 내려가지 말고요. 저는 더 높은 곳이 좋아요." 그들은 웅덩이 위쪽으로 얼마간 되돌아가 짙은 갈색의 양치류덤불을 발견했다. 그 너머론 늙은 삼나무가 간간이 섞인 어두운 빛깔의 월계수나무숲이 제방을 따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맑고 따뜻한 조짐을 보이는 낮시간을 그곳에서보내기로 하였다. 이딜리엔의 작은 숲들과 빈터를 따라 거닐기엔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오르크들이 한낮의 햇빛을 꺼린다 하더라도 이곳엔 그들이 숨어 지켜볼 장소가 너무도 많았으며 또 그 밖의 사악한 눈길들도 널리 깔려 있었다. 사우론은 많은 종복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골룸 또한 노란 발광체 아래에선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태양이 에펠 듀아스의 등성이 너머로 얼굴을 내밀면 그는 그 빛과 열 아래 정신을 잃고 움츠리곤 했다. 샘은 오는 도중 계속 식량에 대해 걱정해 왔었다. 통과할 수 없었던 암흑의 성문에 대한 절망이 지나간 이상 그 프로도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사명이 완수된 후의 일에 대해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정을 계산한다면 사정이 악화될 경우에 대비해 요정들의 길양식을 최대한 절약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전에 삼 주일 차의 양식밖에 없다고 계산한 후 벌써 엿새 또는 그 이상의시간이 흘러갔던 것이다. '만일 그 기간 내에 그 불의 산에 도착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 샘은 생각했다. '그리고 잘하면 돌아갈 희망도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어!' 그는 긴 야간행군을 마친 뒤라, 그리고 또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 뒤라 더욱 허기를 느꼈다. 그가 진실로 원한 것은 백쇼트 로우에 있는 오래된 부엌의 불 옆에서 하는 저녁 또는 아침식사였다.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골룸에게 몸을 돌렸다. 골룸은 이제 막 그들에게서 살금살금 떨어져 나가 양치류 속을 네 발로 기어가고 있었다. "어이, 골룸! 어디 가는 거야? 사냥하러 가는 거야? 좀 보자구, 늙은 코주부야. 넌 우리 식량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나도 한번 음식을 바꾸어 봤으면 좋겠거든. 네 새로운 좌우명은 '언제나 도울 차비가 되어 있다.' 지. 배고픈 호비트에게 뭐 적당한 것을 구해 줄 수는 없어?" "할 수 있어.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부탁한다면, 상냥하게 부탁하기만 한다면 스메아골은 언제나 도와 줘." "좋아, 부탁하지! 만일 이 말로 충분치 못하다면, 내 간청하지!" 골룸은 사라졌다. 그는 얼마동안 보이지 않았으나 프로도는 렘바스를 몇 입 먹은 다음 갈색 양치류 속에 자리잡고 잠에 빠졌다. 샘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들 사이로 슬그머니 기어들고 있는 이른 일광 아래서 그는 프로도의 얼굴과 땅바닥에 늘어뜨린 두 손을 뚜렷하게 보았다. 문득 치명상을 입은 후 엘론드의 처소에 누워있던 프로도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 곁에서 지켜보던 샘은 하나의 빛이 내부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빛이 더욱 뚜렷하고 강했다. 프로도의 얼굴은 평화로웠으며 두려움이나 근심의 자취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늙어 보였다. 마치 전성기에 조각되었던 윤곽이 이전에는 숨겨져 있다가 이제야 많은 섬세한 선으로 드러나듯이 프로도의 얼굴은 늙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얼굴이 변한 것은 아니었고 샘 갬기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난 저분을 사랑해. 저분이 저런 모습으로 누워 있으면 가끔 어떤 빛이 비쳐 나와. 그렇지만 빛이 비치건 안 비치건 난 저분을 사랑해." 골룸은 기척없이 돌아와 샘의 어깨 너머로 프로도를 보더니 눈을 감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며 다시 기어가 버렸다. 샘은 잠시후 그에게로 갔다. 골룸은 무언가를 씹으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옆엔 작은 토끼 두 마리가 놓여 있었고 그는 탐욕스런 시선으로 토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메아골은 언제나 돕는다구. 그는 토끼들을, 맛있는 토끼들을 가져왔어. 그런데 주인님은 잠이 들었고 샘도 자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지금 토끼를 원하지 않아? 스메아골은 돕고 싶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어." 그러나 샘은 전혀 토끼를 싫어하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요리를 한 토끼고기는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호비트들은 요리할 줄을 안다. 그들은 글을 깨우치기 - 대개의 호비트들은 결코 완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데 - 보다 요리하는 기술을 먼저 배운다. 그리고 샘은 호비트들 식으로 치더라도 훌륭한 요리사였으며 원정중에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숙영지에서 요리를 했었다. 그는 아직도 쓰임새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짐꾸러미 속에 요리기구를 몇 가지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부싯깃통 하나,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끼워진 두 개의 작고 얕은 냄비, 그리고 나무 숟갈 하나, 짧은 포크 하나와 몇 개의 꼬챙이가 있었다. 또한 짐꾸러미 밑바닥 나무상자 속엔 점차 줄어드는 귀중품인 소금이 약간 숨겨져 있었다. 그렇지만 요리를 하려면 불과 또 그 밖의 것들이 필요했다. 샘은 칼을 꺼내 깨끗이 씻고 날을 세운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동안이라도 잠든 프로도를 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자, 골룸, 네가 해줄 일이 하나 더 있어. 가서 이 냄비들에 물을 채워다줘." "스메아골은 물을 가져오겠어. 그런데 저 호비트에겐 무슨 일로 그렇게 많은 물이필요하지? 그는 물을 마시기도 했고 또 씻기도 했는데." "네가 신경쓸 일이 아냐. 짐작할 수 없다면 곧 알게 되겠지. 그러니 물을 빨리 떠올수록 빨리 알게 될 거야. 내 냄비를 못쓰게 하면 안 돼. 만일 그런다면 네 머리로 포를 뜨고 말 거야." 골룸이 멀어져 간 사이 샘은 다시 한번 프로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조용히 자고 있었다. 샘은 그의 얼굴과 손이 너무도 야윈 것에 주목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야위셨어. 호비트로선 정상이 아니야. 이 토끼들을 다 요리하고 나서 깨워드려야지." 샘은 바싹 마른 양치류를 한 더미 긁어 모은 다음 작은 가지와 부러진 나무들을 모으느라 제방 위로 기어올라갔다. 샘은 나뭇가지를 꽤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양치류 덤불 바로 바깥쪽의 제방에서 잔디를 얼마만큼 잘라내 얕은 구멍을 판 다음 그 속에 연료를 채웠다. 부싯돌과 깃으로 그는 능숙하게 작은 불길을 일구었다. 불에서는 연기가 거의, 아니 전혀 나지 않았으며 대신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그가 불 위로 몸을 숙여 불길을 가리며 더 큰 장작을 올려 놓고 있을 때 골룸이 냄비를 조심스레 들고 혼자 뭐라고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냄비를 내려 놓은 골룸은 그제서야 샘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가느다랗게 쉿쉿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매우 놀라고 또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취! 쓰쓰! 안 돼! 어리석은 호비트야! 바보같이! 그래, 바보같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구!" "뭘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샘이 놀라서 물었다. "빨간 혓바닥처럼 날름대는 그 메스꺼운 걸 만들면 안 돼." 골룸은 쉿쉿거렸다. "불, 불 말이야! 그건 위험해! 그럼! 그건 태우고 또 죽인다구. 그리고 적을 불러들일 거야, 그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젖은 나무를 올려 놓아 짙은 연기를 내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해도 별수 없어. 어쨌든 난 지금 그 위험을 감수할 거야. 난 이 토끼들을 삶을 거라구!" 그러자 골룸은 놀라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토끼를 불로 삶아! 스메아골, 불쌍하고 굶주린 스메아골이 아껴 둔 그 멋진 토끼를 망쳐 버리려구! 뭣 때문에 그래, 뭣 때문에? 이 어리석은 호비트야! 그것들은 어리고 연해서 맛이 좋아. 먹어, 먹으라구!" 그는 벌써 가죽이 벗겨진 채 모닥불 옆에 놓인 가까운 쪽의 토끼를 낚아 채려고 했다. "자, 자!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는 거야. 우리 빵이 널 숨막히게 하듯이 날고기는 날 숨막히게 하니까. 네가 토끼 한 마리를 준다면 그건 내거야. 내 마음대로 요리해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난 그렇게 할 거야. 넌 날 지켜볼 필요가 없어. 가서 한 마리 더 잡아 너 좋을 대로 먹으라구. 어디 은밀하고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가서 말이야. 그러면 너도 모닥불을 보지 않아서 좋을 것이고 난 너를 보지 않게 될 테니 양쪽 모두 더 만족스러울 거야. 네게 위안이 된다면 난 되도록 모닥불에서 연기가나지 않도록 하겠어." 골룸은 투덜대며 물러서더니 양치류 속으로 기어갔다. 샘은 냄비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토끼고기와 함께 필요한 건 약간의 향초와 채소 그리고 특히 감자야. 빵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향초는 어떻게 구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그는 혼잣말을 하다가 나직하게 골룸을 불렀다. "골룸! 세번째 도움이 모든 걸 다 이루는 거야. 향초가 좀 필요해." 양치류 속에서 골룸의 머리가 솟아올랐으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도움을 줄것 같지도 않았으며 또 호의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월계수잎 몇 장하고 약간의 백리향과 개꽃이면 돼. 물이 끓기 전에 말이야." "안 돼! 스메아골은 기분이 좋지 않아. 그리고 스메아골은 냄새나는 풀들을 좋아하지 않아. 불쌍한 스메아골은 굶어죽거나 아니면 몹시 아프기 전에는 풀이나 채소를 먹지 않아, 그렇지, 보배?" "부탁한 대로 하지 않으면 스메아골은 이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들어앉게 될 거야. 샘이 그 속에 그놈의 머리를 처넣겠어. 그리고 제철이라면 무우와 당근 그리고 감자도 찾아 보라구. 장담하지만 이곳엔 모든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만일감자 여섯 개를 가져온다면 크게 보답을 하겠어." "스메아골은 가지 않겠어. 오, 안 되지, 보배여. 이번엔 안 된다구. 그는 겁이 났고 또 아주 피곤한 데다 이 호비트는 상냥하지 않아, 전혀. 스메아골은 채소건 당근이건 또 감자건 파내지 않을 거야. 그런데 감자라는 게 뭐지, 보배여, 감자가 뭔가?" "감자! 우리 아버지의 낙이었고 공복을 채우는 데는 아주 좋은 거지. 어쨌든 넌 발견하지 못할 테니 찾아볼 필요도 없어. 그렇지만 착한 스메아골은 내게 그 풀들을 가져다줄 거야. 그러면 난 널 더 좋게 생각하게 될 거야. 더구나 네가 마음을 고쳐먹고 태도를 바꾼다면 난 네게 감자 몇 개를 요리해 줄 거야. 갬기가 튀긴 물고기와 함께 감자튀김을 대접하겠어. 그건 싫다고 하지 못할 거야." "아니, 아니야! 우린 싫어! 맛있는 물고기를 끓이고 그을리다니! 지금 당장 물고기를 그냥 주고 메스꺼운 감자튀김은 그만두라구!" "오, 넌 정말 어쩔 수 없는 놈이야. 잠이나 자!"결국 그는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도가 누워있는 곳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잠시 샘은 명상에 잠겨 물이 끓을 때까지 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햇빛이 더 강해지면서 대기가 따스해졌다. 잔디와 잎에선 이슬이 사라졌다. 이윽고 칼로 자른 토끼고기가 향초들과 함께 두 냄비 속에서 바글바글 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샘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간간이 포크로 고기를 찔러 보고 국물의 맛을 보면서 근 한 시간 동안 고기가 익도록 내버려 두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을 때야 그는 모닥불에서 냄비를 들어 내고 프로도에게 다가갔다. 샘이 그를 내려다보고 서자 프로도는 눈을 반쯤 떴다가 이윽고 꿈속에서, 포근하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평화로운 꿈에서 깨어났다. "아, 샘! 쉬지 않았어? 뭐가 잘못됐어? 시간이 얼마나 되었지?" "동튼 지 두 시간쯤 되었어요. 아마 샤이어의 시간으로는 조금만 더 있으면 여덟시 반이 될 거예요. 그러나 잘못된 건 없어요. 비록 스프와 양파 그리고 감자가 없어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프로도씨를 위해 약간의 스튜요리와 국물을 마련했어요. 몸에 좋을 거예요. 좀 식으면 컵에 담든지 아니면 냄비째로 그냥 드셔도 돼요. 주발이나 다른 그릇은 전혀 없거든요." 프로도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넌 좀 쉬었어야 했어, 샘. 그리고 이곳에서 불을 피우는 건 위험해. 그렇지만 시장기가 도는군. 흠! 여기서 냄새맡아 볼 수 있을까? 뭘 끓였지?" "한 쌍의 토끼예요. 스메아골의 선물이지요. 아마 지금쯤 골룸은 후회하고 있겠지만요. 그런데 같이 넣을 것이라곤 몇 가지 풀밖에 없었어요." 샘과 프로도는 양치류 덤불 안쪽에 앉아 그 오래된 포크와 숟갈을 함께 사용하며 냄비째로 스튜를 먹었다. 그들은 각기 요정들의 길양식 반 조각씩을 먹었다. 그것은 성찬과도 같았다. 샘은 나직한 소리로 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봐, 골룸. 나와! 아직 마음을 바꿀 시간이 있어. 익힌 토끼를 먹어 보고 싶다면 아직 조금 남았다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음, 아마 자기 먹을 걸 찾으러 갔나 봐요. 마저 먹어 치우지요." "그 다음에 넌 잠을 좀 자야 해." "제가 졸고 있는 동안 잠들면 안 됩니다, 프로도씨. 전 그놈이 확실히 믿기지 않아요. 그놈 속에는 아직도 악당 - 나쁜 골룸을 뜻하는 거죠 - 이 있고 또 점차 강해지고 있어요. 그놈이 절 먼저 목조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요. 그놈은 샘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요,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식사를 마친 후 샘은 요리기구를 닦기 위해 개울로 갔다. 돌아가려고 일어서면서 그는 비탈 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언제나 동쪽으로 깔려 있던 증기인지 안개인지 아니면 어두운 그림자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로부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태양은 주변 나무들과 빈터들에 황금빛 광선을 뿌렸다. 그때 샘은 햇빛을 받은 청회색 연기가 가느다랗게 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연실색한 그는 그것이 자신이 끄는 것을 잊었던 모닥불에서 오르는 연기임을 알았다. "안 돼! 저렇게 연기가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갑자기 그는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휘파람소리를 들었던가? 아니면 어떤 이상한 새가 지르는 소리인가? 만일 휘파람소리였다면 그건 프로도가 있는 방향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또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샘은 가능한 한 빨리 언덕을 뛰어올랐다. 타다 남은 장작 하나가 바깥쪽 끝까지 타버려 가장자리의 양치류에 옮겨 붙었고 그 양치류들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남은 모닥불을 밟아 끄고 재를 흐트려 뗏장들을 구멍 속에 넣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프로도에게 기어갔다. "휘파람소리와 그 응답소리를 들었지요? 바로 몇 분 전에요. 단순한 새소리였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들리진 않았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가 새소리를 흉내내는 것 같았어요. 아마 제가 피운 작은 모닥불이 연기를 낸 모양이에요. 제가 재난을 자초한 거라면 전 절대로 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혹 그럴 기회조차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러자 프로도가 속삭였다. "쉿!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두 명의 호비트는 작은 짐꾸러미를 묶어 도망치기에 알맞도록 챙긴 다음 양치류 속으로 더 깊이 기어들어갔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낮고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점점 가까이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청천벽력과 같이 하나의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여기야! 바로 여기가 그 연기가 나왔던 곳이야! 그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 틀림없이 양치류 속이야. 우린 올가미에 걸린 토끼처럼 잡을 수 있어. 그러면 그게 대체 어떤 요물인지 알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뭘 알고 있는지도 알게 되겠지요."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곧 네 명의 인간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양치류를 헤치고 다가왔다. 도주나 은신이 더이상 불가능했기에 프로도와 샘은 벌떡 일어나 등을 맞대고 작은 단도를 꺼냈다. 그들이 자신들이 본 것에 놀랐다면 그들의 포획자들은 훨씬 더 놀랐다. 키 큰 인간 네 명이 서 있었다. 둘은 끝부분이 넓고 빛나는 창을 들었고 다른 두 명은 거의자신들의 키만큼이나 되는 거대한 활과 초록색 깃이 달린 화살이 든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모두가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었으며 마치 이딜리엔 숲의 빈터에서 눈에 뜨이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위장한 것처럼 초록색과 갈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초록색 긴 장갑이 양 손을 덮고 있었고 아주 매섭게 빛나는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초록색 두건과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바로 보로미르를 연상했다. 왜냐하면 그 인간들의 거동과 신장 그리고 어법은 그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우린 우리가 쫓던 것들을 발견한 게 아니군. 그런데 이들은 도대체 뭐지?" 한 사람이 말했다. "오르크는 아닌데." 프로도의 손에서 반짝이는 작은 단도를 보면서 쥐었던 칼자루에서 손을 놓으며 다른 사람이 말했다. "요정들인가?" 세번째 사나이가 미심쩍은 듯 말했다. "아니! 요정들은 아니야!" 그들 중 가장 키가 큰, 지휘자인 듯 보이는 사나이가 말했다. "요즘은 요정들이 이 이딜리엔을 거닐지는 않아. 그리고 요정들은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 적어도 그렇게 들었지." 그러자 샘이 말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이겠어요. 충심으로 감사해요. 그리고 우리에 대해 토론을 마친 다음에는 아마 당신들이 누구이며 또 우리 두 명의 지친 여행자들을 쉬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지 말해 주겠죠?" 그러자 그 키 큰 초록의 인간은 무섭게 웃으며 말했다. "난 곤도르의 대장 파라미르다. 그렇지만 이 땅엔 여행자들이라곤 없지. 오로지 암흑의 탑 아니면 백색탑을 추종하는 이들만 있을 뿐이야."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우린 그 어느 쪽도 아니오. 파라미르대장께서 뭐라고 하시든 우린 여행자들이오." "그렇다면 서둘러 너희들 자신과 용무를 밝혀라. 우리에겐 할 일이 많고 또 지금여긴 수수께끼나 풀거나 화평의 교섭을 할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야. 자, 너희 패거리의 세번째 놈은 어디 있지?" "세 번째 라고요?" "그래, 저 아래 웅덩이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았지. 그 살금살금 피해 달아나는 놈 말이야. 그놈은 환대를 못 받을 상판이더군. 추측건대 오르크들의 염탐꾼 아니면 그 앞잡이일 거야. 그런데 그놈은 어떤 간교한 술수로 우릴 따돌리고 도망쳤어." 프로도가 대답했다. "난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르오. 그는 단지 도중에서 만난 우연한 길동무일 뿐이니 우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소. 만일 당신들이 그와 마주치거든 목숨만은 살라주시오. 그를 우리에게 데려다주시거나 아니면 보내 주시오. 그는 단지 가엾고 좀 모자라는 자일 뿐이고 우리가 얼마동안 돌보아 주었지요. 그런데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린 많은 강을 건너 저 북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샤이어의 호비트들이오. 나는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이고 저 친구는 내 하인이자 훌륭한 동료로서 햄패스트의 아들 샘와이즈라 불리는 호비트지요. 우린 먼 길을 왔소. 리벤델 혹은 임라드리스라 불리는 곳에서 왔지요." 이 말을 들은 파라미르는 깜짝 놀라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동료는 일곱이었소. 그 중 한 명은 모리아에서 잃었고 우리 둘은 라우로스 폭포 위쪽 파스 갈렌에서 다른 동료들과 헤어지게 되었소. 우리 동료 여섯 가운데 우리 호비트종족 둘, 난쟁이 하나, 요정 하나가 들어 있고 나머지 두 명은 당신들 인간이었소. 그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아라곤이었고 또 한 사람은 남쪽에서 왔다고 한 보로미르였소."그러자 네 명의 사나이 모두가 외쳤다. "보로미르라구!" "데네도르영주의 아들 보로미르 말인가?" 이렇게 외친 파라미르의 얼굴은 준엄하게 굳었다. "너희들이 그와 함께 왔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소식이군. 작은 이방인들이여, 데네도르의 아들 보로미르는 백색탑의 경비대장이자 우리의 최고지휘관으로 우리는 그를 몹시도 아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 둬야 해.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이며 또 그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빨리 말해 봐. 해가 떠오르고 있어." "보로미르가 리벤델에 가져왔던 그 수수께끼는 당신들에게도 알려져 있나요?" 프로도가 응답했다. 부러진 그 검을 찾으라. 임라드리스에 있으리. 파라미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알려지고말고. 그걸 외는 걸 보니 너희들도 그 말을 알고 있는 게 사실인가 보군." "내가 아까 이름을 말한 아라곤이 바로 그 부러진 검을 갖고 있소. 그리고 우리는 전설 속에 나오는 그 하플링이오." "그건 알겠어." 파라미르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알겠어. 그런데 이실두르의 재앙이란 것은 뭐지?" 프로도가 대답했다. "그건 비밀이지요. 시간이 지나면 명백해질 것이오." "그것에 관해 더 많이 알아야겠어. 그리고 너희들이 무슨 일로 저편 그림자 아래의 동쪽을 향해 이렇게 멀리까지 나왔는지도 알아야겠고." 파라미르는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긴 했으나 그 지명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야. 우리에겐 할 일이 있어. 너희는 위험에 처해 있어. 어쨌든 너희는 오늘은 들로든 길로든 멀리 갈 수 없었을 거야. 한낮이 되기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타격이 올 거야. 그렇다면 죽음을 당하든지 아니면 다시 안두인대하를 향해 신속하게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너희와 또 나 자신을 위해서 두 사람의 경비병을 남겨 두겠다. 이 땅에선 현자라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자를 신뢰하지 않지.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를 나누지." 프로도는 깊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잘 가시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유일의 적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의 친구요. 만일 우리 하플링들이, 아주 강하고 담대해 보이는 당신을 섬기기를 바랄 수 있다면, 내 사명이 허락한다면 우린 당신과 함께 가겠소. 당신들의 검 위에 빛이 내리기를 바라겠소." "하플링들은 다른 면에선 어떨지 몰라도 예의는 바른 종족이군. 잘 있게나들." 호비트들은 다시 앉았으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 의심하는 바에 대해선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어두운 월계수나무 그림자 아래엔 두 명의 인간이 경계를 하며 그대로 남았다. 낮의 열기가 더해 감에 따라 그들은 간혹 가면을 벗고 열을 식혔다. 프로도는 그들이 창백한 피부와 검은 머리칼, 회색 눈, 그리고 슬픔을 띠었지만 긍지가 가득한 얼굴을 소유한 잘생긴 인간들임을 알았다. 그들은 나직한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옛 방식을 따라 공용어를 쓰다가 이윽고 그들 자신의 언어로 바꾸었다. 귀를 기울이던 프로도는 그들의 언어가 요정의 언어라는 사실을, 아니 그 언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언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그는 경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역의 영주들과 같은 계열인 남부의 듀너데인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얼마후 그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을 함에 있어 느리고 신중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곤도르의 병사 맵룽과 담롯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이딜리엘의 유격대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폐허가 되기 전의 이딜리엔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후예들이었다. 데네도르영주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 안두인대하를 은밀히 건너- 어떻게 또는 어디로 건넜는지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 에펠 듀아스와 대하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오르크나 그 밖의 다른 적들을 섬멸할 유격대원을 선정한 것이었다. "여기서 안두인의 동쪽 강변까지는 대충 삼십 마일의 거리요. 우린 이처럼 멀리까지 나오는 일이 별로 없지.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임무를 띠고 있소. 우린 하라드인들을 매복 기습하기 위해 온 거요. 저주받을 놈들이지." 맵룽이 말하자 담롯도 덧붙였다. "그래, 저주받을 남쪽의 인간들이야! 옛날 곤도르와 남방 하라드 사이엔 우호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래는 이뤄졌었다고 하지요. 그 시절 우리의 경계는 안두인 어귀너머의 남쪽까지 뻗어서 그 왕국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움바르는 우리의 지배권을 인정했었소. 그러나 그건 오래전의 일이오. 양쪽 사이에 왕래가 이루어진 건 정말 오래된 일이고 이제 최근에야 우린 그들이 적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동쪽에서도 수많은 자들이 그랬듯이 그들 또한 적에게로 넘어가 버렸거나 아니면 적에게로 되돌아간 거요. 그들은 언제라도 적의 의지를 따를 차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난 곤도르의 운명의 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도 명이 다 되었어. 적의 세력과 악의는 그처럼 거대하니까." 그러자 맵룽이 다시 받았다. "그렇지만 우린 그대로 주저앉아 적이 모든 걸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요. 그들 저주받을 남부인들은 암흑의 탑의 군세를 늘리기 위해 지금 옛 길로 행군해 오고 있지요. 그래, 곤도르의 옛 기술로 만들어진 그 길로 오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파악하기론 그들은 새 지배자의 너무도 강력한 권능에 지배되어 그의 암흑의 그림자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한층 더 마음 놓고 오고 있고 우린 그들에게 또 하나의 교훈을 안겨 주려고 온 거요. 그들의 거대한 병력이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다는 것이 며칠 전 우리에게 보고되었지. 우리 계산에 의하면 그들 중 한 무리가 정오 조금 전에 지나게 되어 있소. 갈림길 사이로 뚫어진 저 도로로 말이오. 저 길은 뚫려 있긴 하지만 그들이 지나칠 순 없지! 파라미르가 지휘하는 이상 지나가지 못한다구. 그분께서 지금 모든 위험을 주도하고 계시오. 그러나 그분의 생명은 마법으로 수호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에 쓰이기 위해 운명이 그분을 도와 주고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도 곧 정적 속으로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빈틈없이 경계되고 있었다. 양치류 덤불 가장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던 샘이 빼꼼히 밖을 내다보았다. 날카로운 호비트의 눈으로 그는 더 많은 인간들이 주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작은 숲이나 덤불 그늘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 한 명씩 또는 몇 명씩 열을 지어 비탈을 살그머니 오르내리거나 갈색과 초록의 옷으로 은폐한 채 풀숲과 덤불을 헤치며 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파라미르와 그 동료들처럼 두건과 가면을 쓰고 손에는 긴 장갑을 긴 채 무장을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들 모두가 지나가 보이지 않았다. 해는 남쪽으로 솟아올랐다. 그림자가 작아졌다. '그 괘씸한 골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샘은 좀더 짙은 그늘 속으로 다시 기어들면서 생각했다. '오르크로 오인되어 창에 찔리거나 노란 발광체에 지글지글 구워져 버리면 딱 좋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만 어쩐지 그놈은 무사하게 도망쳐 숨어 있을 것만 같은데.' 그는 프로도 곁에 누워 졸기 시작했다. 뿔나팔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일어나 앉았다. 이제 한낮이었다. 나무그림자 속에서 경비병들은 긴장한 자세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더 세찬 뿔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위쪽으로부터 비탈의 꼭대기를 넘어 들려왔다. 샘은 비명소리와 사납게 외치는 고함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마치 멀리 떨어진 동굴에서 나는 것처럼 희미했다. 곧 싸우는 소리가 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숨어 있는 바로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는 쇠가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 쇠투구에 칼이 쨍그랑대는 소리 그리고 칼날에 방패가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괴성과 비명이 들렸고 또렷하고 세차게 '곤도르! 곤도르!' 하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백 명이나 되는 대장장이들이 한꺼번에 쇠를 두드리는 것 같군요. 이제 제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너무 가까워졌어요." 샘이 말했지만 소음은 더 가까워졌다. 담롯이 외쳤다. "그들이 오고 있어! 봐! 남부인들 중 일부가 함정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줄행랑치고 있어. 저기 가잖아. 우리의 전사들이 그들을 쫓고 있어. 대장이 앞장서서 말이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샘은 이제 경기병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커다란 월계수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잠시 그는 비탈을 뛰어내려가는 빨간 옷 차림의 가무잡잡한 인간들이 초록옷 차림의 전사들에게 쫓겨가다가 칼로 베어넘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중에서는 화살이 빽빽하게 날았다. 그때 갑자기 그들이 은신해 있던 제방 가장자리 너머로 한 사람이 작은 관목들을 넘어뜨리며 그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황금빛 목테 아래에는 초록색 화살깃이 달린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는 몇 미터 떨어진 양치류 덤불로 떨어졌다. 그의 진홍색 옷은 갈가리 찢어졌고 놋쇠를 겹쳐 만든 상체의 갑옷도 갈라졌으며 황금빛 리본으로 맨 까만 땋은 머리도 흠뻑 피에 젖어 있었다. 갈색 손은 아직도 부러진 칼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는 샘이 본 최초의 인간 대 인간의 전투였으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죽은 이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인간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또 정말 사악한 인간인지 아니면 어떤 거짓이나 협박에 속아 고향을 떠난 것으로 사실은 평화로운 고향에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지나않았는지 궁금했다. 순식간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왜냐하면 맵룽이 그 추락한 몸뚱이를 향해 걸음을 옳긴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소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단한 비명과 외침이었다. 그 속에서 샘은 황소가 울부짖는 듯한 커다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거대한 충차들이 땅바닥을 울리는 듯한 커다란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담롯이 그 동료를 향해 외쳤다. "조심해! 조심! 발라(서역의 수호신)들이시여! 옆으로 비끼게 해주소서! 무마크! 무마크다!" 놀랍고도 두렵게도, 또한 샘에게는 즐겁게도 하나의 거대한 형체가 나무들을 부러뜨리며 비탈 아래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집채만큼 큰, 아니 그보다 훨씬 큰 움직이는 회색 언덕같이 보였다. 아마 두려움과 경이감 때문에 호비트들에게는 더 커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라드의 무마크는 정말 엄청난 몸집의 야수로서 지금으로서는 중간계에서 그와 같은 거수를 볼 수는 없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혈족들은 단지 과거 그 동물의 장대함을 상기하게 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는 경비병들을 향해 계속 다가오다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옆으로 비껴났다. 발 아래 땅을 진동시키며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으로 비껴난 것이었다. 거대한 다리는 나무와 같았고 배돛 같은 엄청난 두 귀는 밖으로 펼쳐졌으며 긴 주둥이는 막 덮칠 것 같은 거대한 뱀처럼 위로 치켜져 있었다. 또한 작고 빨간 눈은 광란하는 것 같았다. 끝이 위로 구부러진 뿔피리 같은 구부러진 송곳니들은 황금빛 띠로 묶였는데 거기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몸 주위에는 진홍빛과 황금색장식들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다. 등 위에는 작은 탑 같은 것이 숲을 헤쳐 오느라 산산이 부서진 채 달려 있었다. 그러나 목에는 아직도 조그만 인간 하나 - 사실은 강대한 전사 하라드인의 거구였지만 - 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 거대한 야수는 맹목적인 분노로 웅덩이와 덤불을 헤치며 계속 큰 소리로 울부짖고 지나갔다. 옆구리의 세 겹 가죽 위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으나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스치거나 부러지고 말았다. 양쪽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으나 그 야수는 많은 이들을 따라잡아 짓뭉개 버렸다. 이내 그 야수는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멀리로부터 울부짖는 소리와 쿵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샘으로서는 그 야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탈출해 황야를 배회하다가 마침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지 또는 계속 광란을 부리다가 이윽고 대하에 몸을 던져 물결에 삼켜졌는지 결코 듣지 못했다. 샘은 깊이 숨을 들어쉬었다. "그건 올리파운트예요! 그러니 올리파운트가 아직 있단 말이에요! 제가 하나를 봤으니까요. 놀라운 수명인걸! 그러나 고향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음, 이 일이 수습되면 잠을 좀 자야겠어요." 맵룽이 말했다. "잘 수 있을 때 자는 게 좋겠지. 대장께서 다치지 않으셨다면 돌아오실 거야. 그리고 그분께서 오시면 우린 신속히 출발할 것이고. 우리의 행동이 적에게 알려지면 곧바로 우린 추격을 당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 멀지 않았어." 그러자 샘이 말했다. "가야 한다면 조용히 가라구요. 내 잠을 방해할 필요는 없잖아요. 난 밤새 걸었단 말이에요." 맵룽이 웃었다. "난 대장께서 자넬 여기 내버려 둘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샘와이즈군. 곧 알게 될 테지." 제16장 서역의 창 샘은 불과 몇 분밖에 졸지 않은 것 같았는데 깨어나 보니 늦은 오후였으며 파라미르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 습격에서의 생존자들 전부가 모여 있었는데 이백 내지 삼백의 병력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반원 형태로 앉아 있었고 파라미르는 그 가운데 땅바닥에 자리 잡았으며 프로도는 그 앞에 서있었다. 야릇하게도 그건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 같아 보였다. 샘이 양치류에서 기어나왔으나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줄지어 앉은 사람들 맨 끝에 앉았으며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주인을 돕기 위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열심히 지켜보며 귀를 기울였다. 가면을 벗은 파라미르의 얼굴은 당당하고 근엄했으며 날카롭게 파고드는 눈길 뒤에는 예지가 깔려 있었다. 끈질기게 프로도를 응시하는 회색의 눈에는 의심이 깃들여 있었다. 곧 샘은 몇 가지 점에서 대장이 프로도의 설명에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즉 리벤델에서 출발한 원정대에서의 그의 역할과 그가 원정대를 떠난 이유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곳에 대해 의심스러워했다. 특히 그는 자주 이실두르의 재앙에 대해 언급했다. 프로도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자신에게 감추고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실두르의 재앙이 다시 나타난 건 분명 하플링이 오는 것에서 비롯되는 거야. 아마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을걸." 파라미르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명된 그 하플링은 바로 당신이고, 틀림없이 당신이 그것 - 그게 무엇이건 간에 - 을 당신이 말한 그 회의에 가져갔고 또 거기서 보로미르가 그것을 본거야. 부인할 텐가?" 프로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그렇지만 난 당신에게서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왜냐하면 보로미르가 관련된 문제는 나에게도 관계가 있으니 말이야. 옛 전설에 따르자면 오르크의 화살하나가 이실두르를 살해했다고 하지. 하지만 보로미르는 그 수많은 오르크 화살들 가운데 하나를 보고 그것을 이실두르의 재앙이라고 여기진 않았을 거야. 당신이 그 물건을 간직하고 있나? 당신은 그게 비밀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프로도는 대답했다. "아니오. 내가 그러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오. 원래 그건 내 소유가 아니오. 그것은 위대한 인물이건 또는 어리석은 인물이건 간에 죽을 운명을 타고난 자의 소유가 될 순 없소. 다만 누군가가 꼭 그 소유를 주장할 수 있다면 그건 단지 모리아에서 라우로스에 이르기까지 우리 원정대를 지휘했으며 아까 내가 거명한 바 있는 아라돈의 아들 아라곤일 겁니다." "왜 그렇지? 엘렌딜의 아들들이 세운 나라의 왕자 보로미르가 아니고?" "아라곤은 바로 이실두르 엘렌딜의 아들로부터 몇 대를 내려온 직계후손이오. 그리고 그가 지닌 검이 바로 엘렌딜의 검이오." 원형으로 늘어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움의 수런거림이 터져나왔다. 몇몇은 '엘렌딜의 검! 엘렌딜의 검이 미나스 티리스에 오다니! 대단한 소식이야!'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파라미르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아라곤이란 이가 언제고 미나스 티리스로 온다면 그 위대한 주장은 입증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명백한 증거가 필요할 거야. 내가 엿새 전에 출정할 때까지 그는 오지 않았어. 당신 원정대의 누구도 오지 않았어." "보로미르도 그 주장을 납득했소. 정말이지 보로미르가 여기 있다면 그가 당신의모든 물음에 답해 줄 것이오. 그리고 그가 라우로스에 있었던 것은 꽤 된 일이지만당신의 도시로 직행할 예정이었으니 만일 당신이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그 대답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원정대 속에서의 내 역할도 알고 있소. 왜냐하면 회의석상에서 임라드리스의 엘론드께서 직접 내게 그 역할을 맡겼기 때문이요 그 사명을 띠고 난 이 나라로 들어왔소. 그러나 내 임의대로 그걸 원정대원 이외의 사람에게 드러낼 수는 없소. 그렇지만 적에게 대항하길 원하는 이라면 그 사명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던 간에 프로도의 어조는 당당했으며 샘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라미르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좋아! 내 일에나 신경써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당신은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인 것 같군. 보로미르가 오면 모든 것을 말할 거라고 그랬지? 그가 돌아오면이라고 말했어! 당신은 보로미르의 친구였나?" 가슴 속에 자신을 공격했던 보로미르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프로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를 주시하는 파라미르의 눈은 좀더 냉철해졌다. 드디어 프로도는 입을 열었다. "보로미르는 우리 원정대의 용감한 일원이었소. 그래요, 나는 그의 친구였소. 나로선 말이요." 파라미르는 무섭게 웃었다. "그럼 보로미르가 죽었다면 무척 슬퍼하겠군?" "진정으로 슬퍼할 것이오." 프로도는 파라미르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죽, 죽다니요? 그가 죽었다는 말이고 또 당신이 그걸 안단 말이오? 당신은 날 말장난으로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오? 아니면 지금 거짓말로 날 꾀어들이려는 거요?" "난 상대가 오르크라 할지라도 거짓말로 꾀진 않아."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죽었으며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아는 것이오? 당신은 출발할 때 원정대의 누구도 그 도시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해선 그의 친구이자 동지인 당신이 내게 말해 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러나 우리가 헤어질 때 그는 살아있었고 또 강했소. 그리고 내가 아는 한으로는 그는 살아있을 것이오. 비록 세상에는 분명 위험한 일이 많긴 하지만." "정말 위험이 많지. 그리고 배신도 적지 않고." 샘은 갈수록 이 대화에 더 안달하고 화가 났었지만 이 마지막 말에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원형 대열의 중앙으로 내달아 프로도 옆으로 올라갔다. 그는 말했다. "죄송해요, 프로도씨. 그렇지만 이 대화는 충분히 오래 계속되었어요. 그에겐 프로도씨께 그런 말할 권리가 없어요. 다른 누구를 위한 만큼이나 보로미르나 이 모든 거창한 인간들을 위해 프로도씨께서 그 모든 위험을 겪어 오신 마당에 말이에요. 이 보세요, 대장!" 그는 양 손을 허리에 짚고 마치 과거 과수원에 들어온 꼬마들의 '시건방진 말' 에 응수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파라미르 앞에 자리잡고 섰다. 약간의 술렁거림이 일었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또한 약간의 웃음기도 돌았다. 땅바닥에 앉은 자신들의 대장이 양 다리를 떡 벌린 채 격분에 가득찬, 털이 곤두선 젊은 호비트와 대면하고 있는 광경은 그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보세요! 당신이 노리는 게 뭡니까? 모르도르의 모든 오르크들이 우릴 덮치기 전에 요점을 이야기하자구요! 만일 내 주인이 보로미르를 살해하고 도망쳤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까놓고 말하고 그만둡시다! 그 다음 당신이 어떻게 할 작정인지나 알자구요. 하지만 소위 적에 대항한다는 자들이 남들이 방해받지 않고 나름대로 본분을 다할 수 있게끔 놓아 둘 수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만일 지금의 당신을 볼 수 있다면 적은 무척 기뻐할 겁니다. 새로운 친구를 얻었다고 생각할 거라구요!" "성급히 굴지 말아!" 파라미르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자네보다 훨씬 현명한 주인을 앞질러 말하지 말라구. 그리고 나에게 위험을 깨우쳐 줄 이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어쨌든 난 어려운 문제에서 판단을 공정하게 하기위해 짧은 시간이나마 할애하는 거야. 내가 자네처럼 성급하다면 오래전에 자넬 죽였을지도 몰라. 난 곤도르영주의 허락없이 이 땅에서 발견되는 모든 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난 필요없이 인간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으며 또 필요할 때조차 즐거이 하진 않아. 헛되이 말하지도 않고. 그러니 안심하게. 자네 주인 곁에서 잠자코 있어." 샘은 얼굴이 벌개진 채 무겁게 내려앉았다. 파라미르는 다시 프로도를 향했다. "데네도르의 아들이 죽은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 죽음의 소식엔 많은 날개가 달려 있어. '밤은 때때로 가까운 혈족에게 소식을 가져다준다' 고 하지 않는가. 보로미르는 바로 내 형님이야." 비애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보로미르영주가 지녔던 무구(武具) 중에 어떤 특별한 것을 기억하는가?" 프로도는 한층 더한 어떤 함정이 아닌가 염려하며 이 토론이 종국에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그는 보로미르의 교만한 손아귀에서 어렵게 반지를 구해냈었는데 이제 저렇게 많은 호전적이고 강건한 인간들 속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파라미르가 외모는 형을 많이 닮았지만 덜 이기적이며 보다 엄격하고 현명한 사람이란 사실을 감지했다. "보로미르가 뿔나팔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잘 기억하는군. 정말 그를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아마 지금 상상으로도 그걸 볼 수 있겠지. 동부의 들소를 잡아 만든 거대한 뿔나팔이지. 가장자리엔 은색이 칠해져 있고 고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어. 오랜 세대에 걸쳐 우리 가문의 장자가 그 뿔나팔을 지녀왔지. 그리고 급박할 때 그것을 불면 곤도르의 경계 내 - 물론과거 영토를 기준으로 - 에선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 여기 출정하기 닷새 전에, 그러니까 열하루 전 이맘때 난 그 뿔나팔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어. 북쪽에서 울리는 것 같았는데 마치 마음 속의 메아리에 불과한 것처럼 소리가 희미했어. 우리는, 내 아버님과 나는 나쁜 징조라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가 가버린 후 우리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또 변경에 있는 어떤 감시병도 그가 지나는 걸 본 일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사흘 뒤 밤에 또 다른, 더 이상한 일이 내게 생겼어. 나는 여리고 파리한 달 아래의 회색빛 어둠 속에서 안두인강가에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물줄기를 응시하고 있었어. 갈대들이 슬픈 듯 살랑대고 있었지. 이젠 우리의 적들이 부분적으로 점령해 침략의 교두보로 쓰는 오스길리아스 부근의 강변을 우린 늘 그렇게 감시해 온 거야. 그런데 그날 한밤중이 되자온 세상이 잠들었지. 그때 난 보았어. 아니면 본 것 같았지. 보트 한 척이 회색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며 물 위로 흘러왔는데 뱃머리가 높은 그 이상한 모양의 보트에는 노를 젓거나 키를 잡은 사람이 없었어. 두려움이 일더군. 왜냐하면 창백한 빛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거든. 그러나 난 일어나 둑으로 가서 물결 속으로 걸어 들어갔어. 그것에로 끌려들어간 거지. 그러자 보트는 나를 향해 방향을 틀더니 속도를 늦추고 내가 손을 뻗으면 잡힐 만한 거리로 흘러갔지만 나는 감히 손을 대지 못했어. 그것은 마치 무거운 짐이 실린 것처럼 물에 깊이 잠겨 흘러갔고 내 눈 아래를 지나갈 때는 맑은 물에 거의 잠긴 것 같았어. 그리고는 한 전사가 물에 안긴 채 잠들어 누워 있는 게 보이더군. 그의 무릎엔 부러진 칼이 놓여 있었어. 몸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지. 내 형 보로미르의 시신이었어. 난 그의 무구와 칼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지. 오직 한 가지 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뿔나팔이었어. 또 한 가지 알 수 없던 것은 그의 허리에 두른 아름다운 황금혁대였지. 난 외쳐 댔지. '보로미르! 뿔나팔은 어디 있는 겁니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오, 보로미르!' 그러나 그는 가버렸어. 보트는 강의 흐름을 타고 희미하게 반짝이며 암흑 속으로 계속 가버렸어. 그건 꿈 같으면서도 꿈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깨어남이 없었거든. 난 그가 죽어 바다까지 흘러가 버렸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아."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아! 그건 정말 내가 아는 보로미르의 모습이오. 왜냐하면 그 황금혁대는 로스로리엔에서 갈라드리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니까요. 당신이 보다시피 우리에게 요정의 회색옷을 주신 것이 바로 그분이었소. 이 브로치도 꼭 같은 솜씨로 만든 것이고요." 그는 목 아래로 망또를 잡아매는 초록과 은빛의 잎사귀 모양의 브로치를 만졌다. 파라미르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름답군. 그래, 똑같은 세공기술로 만든 거야. 그래, 그럼 당신은 로리엔을 지나온 건가? 옛날엔 라우렐린도리난이라 불린 곳이지만 지금은 인간들의 지식 밖에 놓인 지 오래되었지." 파라미르는 새롭게 놀란 눈으로 프로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당신에게서 이상하게 보였던 여러 가지를 이제야 이해할 것 같군. 내게 더 말해주지 않겠나? 보로미르가 고향땅이 보이는 곳에서 죽었다는 건 생각하기에 너무 비통해서 그래." "아까 말한 것처럼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소. 비록 당신의 이야기로 내 전신엔 불길한 예감이 감돌지만 말이오. 당신이 본 것은 환영, 즉 이미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사악한 운명의 어떤 그림자라고 생각되오. 진정 그게 적의 어떤 거짓술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나도 옛 전사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잠든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아니면 적의 술수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적의 술수는 가슴을 역겨움으로 가득 채우지만 내 가슴은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었겠소? 어떤 보트라도 톨 브란디르에서 돌투성이의 언덕을 넘을 수는 없었을 텐데. 그리고 보로미르는 엔트워시강과 로한의 평원을 가로질러 고향으로 가고자 했소. 게다가 비록 물이 가득 찼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보트가 거대한 폭포를 타넘고 또 격랑을 일으키는 웅덩이를 지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로선 모르겠어. 그런데 그 보트는 어디서 온 건가?" "로리엔에서 가져온 겁니다. 우린 그와 같은 보트 세 척에 나눠 타고 안두인강을 내려가 그 폭포까지 갔었소. 그것들 또한 요정들이 만든 것이지요." "당신은 비밀의 땅을 지나왔군. 그러나 당신은 그 땅의 위력을 거의 모르는 것 같아. 만일 인간들이 황금의 숲에 거하는 마법의 여주인과 거래가 있었다면 그들은 이상한 것들을 추구했을 거야.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이 태양의 세계 밖으로 걸어간다는 건 위험하지. 그러나 그곳은 과거로부터 변한 것이 거의 없다고 하니 말이야. 보로미르, 보로미르!" 그는 다시 외쳤다. "죽지 않는 그 숲의 숙녀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그녀는 무엇을 본 건가? 그대의 가슴에선 무엇이 살아났는가? 왜 그대는 라우렐린도리난으로 가버린 채 그대의 길로 로한의 말을 타고 돌아오지 않는 건가?" 그는 다시 프로도를 향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물음들에 대해 당신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러나 여기서나 지금 당장은 안 되겠지. 그렇지만 당신이 내 이야기를 환영이라고 생각할까 봐선데 이 말은 해주지. 보로미르의 뿔나팔은 믿기는 어렵지만 사실 돌아오긴 했어. 돌아오긴 했는데 도낀지 칼인지에 의해 둘로 갈라졌어. 그 조각들은 각각 강변에 이르렀지. 하나는 곤도르의 경비병들이 있는 갈대숲에서 북쪽 엔트워시강의 합류점 아래서 발견됐고 또 하나는 강에 볼일이 있던 사람에 의해 넘치는 물 위에 떠있는 것이 발견되었어. 이상한 일이지만 결국 살인은 알려진거야. 이제 그 장자의 뿔나팔은 소식을 기다리며 높은 의자에 앉아 계시는 데네도르영주의 무릎 위에 두 조각이 된 채 놓여 있어. 그래도 당신은 그 뿔나팔이 갈라진 데 대해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가?" "그렇소. 난 그것에 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뿔나팔소리를 들었다고 한 날은 - 당신의 계산이 맞는다면 - 우리가 헤어진 날이고 또 나와 내 친구가 원정대를 떠난 날이었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 온몸이 두려움으로 떨립니다. 만일 보로미르가 그때 위험에 처해 살해되었다면 다른 모든 동지들도 무슨 일이 없나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들은 내 혈족과 친구들이었는데. 이제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너그러이 봐주지 않겠소? 난 지치고 슬픔에 잠겼으며 두려워요. 나도 언젠가 살해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전에 꼭 해야 할, 아니면 시도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만일 그 원정대에서 우리 두 하플링만이 살아남은 거라면 더욱 서두를 필요가 있어요. 곤도르의 용감한 대장 파라미르여, 당신은 돌아가서 할 수 있는 동안에 당신의 도시를 방어하세요. 그리고 날 내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가게 내버려 두세요."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눴지만 내겐 아무런 위안도 없소. 그런데 분명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걱정을 끌어내는군. 로리엔의 요정들이 다시 그에게 온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로미르를 그렇게 장례치르듯 해서 보냈겠소? 오르크들이나 적의종복들은 아니요. 추측건대 당신의 원정대 중 몇은 아직 살아있소. 그러나 그 북부행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건 간에 나는 더이상 당신 프로도를 의심하지 않소. 만일 어려운 시절이 내게 인간의 말과 얼굴에서 정과 사를 판단할 예지를 주었다면 하플링에게서도 최소한 짐작은 하지 않겠소? 비록," 파라미르는 여기서 잠시 미소를 띠었다. "당신 프로도는 이상한 데가 - 아마도 요정과 같은 분위기일 거요 - 있지만. 그런데 우리 둘의 이야기에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가 깔려 있는 것 같소. 난 마땅히 당신을 미나스 티리스로 데려가 데네도르 영주께 답하게 해야겠지. 만일 내 결정이 도시에 해가 되는 것이라면 내 목숨은 의당 박탈될 것이오. 그래서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성급히 결정하진 않겠소. 그렇지만 우린 더이상 여기서 지체하지 말고 곧 움직여야 하오." 그는 벌떡 일어나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주위에 몰려 있던 병사들은 즉시 작은 무리로 나뉘어 정렬해 이쪽저쪽의 바위와 나무들 사이로 재빨리 사라졌다. 이윽고 맵룽과 담롯만이 남았다. "자, 당신들 프로도와 샘와이즈는 나와 내 호위병들과 함께 갈 거요. 당신들의 목적지가 어디건 당신들은 저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갈 수는 없소. 그 길은 며칠 간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 작은 전투가 있은 후에는 지금까지보다 더 엄중하게 감시될 것이오. 그리고 어쨌든 당신들은 지쳤으니까 오늘은 멀리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오. 또 우리도 지쳤소. 지금 우린 여기서 십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비밀장소로 가고 있소. 오르크들과 적의 밀정들도 아직 그곳을 발견하진 못했지. 그리고 설령 발견한다 해도 우리는 많은 적에 대항해서도 그곳을 상당히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거기서 쉴 수 있을 것이오. 물론 당신들도 함께 말이오. 아침이 되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 또한 당신들을 위해서도 무엇이 최선일지 결정하겠소." 프로도로서는 이 요청 내지 명령에 동의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곤도르인들의 습격이 이 이딜리엔의 행정을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당분간은 어쨌든 그게 현명한 진로 같았다. 그들은 곧 출발했다. 맵룽과 담롯이 약간 앞서고 파라미르는 프로도와 샘을 데리고 뒤처져 걸어갔다. 호비트들이 몸을 씻었던 웅덩이를 지나 그들은 개울을 건너긴 제방을 오른 다음 줄곧 서쪽으로 뻗은 내리막길을 따라 삼림지로 들어갔다. 호비트들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동안 그들은 소리를 죽여 이야기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중단한 것은 샘와이즈군이 일깨워 준 대로 시간이 급박해서일 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터놓고 논의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내가 이실두르의 재앙이라는 것을 내버려 둔 채 내 형의 문제로 돌아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소. 당신은 내게 전적으로 솔직하진 않았소, 프로도."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난 진실에 관해선 이야기할 수 있는 데까지 말씀드렸지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오. 오히려 당신은 어려운 지경에서 현명하고 능란하게 대답한 것 같소. 그렇지만 난 당신을 보고 그 이야기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거나 짐작했소. 당신은 보로미르와 우호적인 사이가 아니었거나 또는 우호적으로 헤어지지 않았소. 당신과 샘와이즈에게도 어떤 불만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오. 난 그를 무척이나 사랑했기에 물론 그의 죽음을 기꺼이 복수하겠지만 또한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이었다는 것도 잘 아오. 난 이실두르의 재앙이라는 것이 당신들의 문제이며 그것 때문에 원정대원 간에 불화가 일었다고 감히 추측해 보고 싶소. 분명 그건 어떤 종류의 굉장한 보물일 것이고 그런 것이 있으면 동지들 사이에서도 화평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오. 설령 옛 교훈들에서 교훈을 배웠다 하더라도 말이오. 내 말이 거의 맞지 않소?" "가깝긴 하지만 적중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원정대에 의심이, 에민 뮐에서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불화는 없었어요. 그러나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옛 교훈들은 보물에 관한 경솔한 언급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지요." "아,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대로군. 당신의 고민은 보로미르 한 사람과 관계되는 것이었군. 그는 그 물건을 미나스 티리스로 가져오길 바랬소. 아, 비통한 일이오! 나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무척 알고 싶소만 또한 그를 마지막 본 당신의 입술을 막을 수밖에 없는 비틀린 운명이라니. 그가 과오를 저질렀든 아니든 난 이 점을 확신하오. 그는 어떤 일을 성취하려다 장하게 죽었다는 것을 말이오. 그의 얼굴은 심지어 생전보다 더 아름다웠으니까. 그런데 프로도, 난 처음에 이실두르의 재앙에 대해 당신을 심하게 다그쳤소. 용서하시오. 그런 시간과 장소에서 그건 현명치 못한 일이었소.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소. 우린 어려운 싸움을 치렀던 데다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신경쓸 일이 많았소. 그러나 난 당신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소.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빗나가게 했던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이 이 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오. 즉 세상에는 널리 퍼지지 않는 고대의 지식 중 많은 부분이 미나스 티리스의 지배자에게는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오. 비록 우리의 몸 속에도 뉴메노르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사실 우리 가문은 엘렌딜의 혈통은 아니오. 우리는 우리의 혈통이, 왕이 전쟁에 나가고 없을 때 그를 대신해 지배했던 훌륭한 섭정 마르딜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고 있소. 곤도르 최후의 왕은 아나리온 왕족의 마지막이었던 이르누르왕으로, 그에게는 후사가 없는 데다 다시 돌아오지 못했소. 아주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그때부터 섭정의 가문이 도시를 통치해 온 것이오. 난 내 형 보로미르의 소년시절을 기억하오. 우리는 함께 우리 부조(父祖)들에 관한 전설과 도시의 역사를 배웠었소. 그런데 언제나 그는 아버지가 왕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었소. '만일 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섭정이 왕이 되는 데는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까요?' 그가 이렇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좀더 작은 왕국이었다면 아마 몇 년이면 되었겠지. 그러나 이 곤도르에서는 만 년이라도 부족할 것이다.' 하고 대답했소. 아, 가엾은 보로미르. 이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해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소?" "있지요. 하지만 그는 언제나 아라곤을 예의바르게 대했어요." "그건 의심치 않소. 당신이 말하듯 그가 아라곤의 주장을 납득했다면 그를 무척 존경했을 것이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소. 지금까진 아무도 그런 주장을 미나스 티리스에 전달한 적이 없었으며 곤도르와의 전쟁에서 이긴 자도 없었소. 그런데 이야기가 좀 빗나갔군. 데네도르 가문의 우리는 오랜 전통으로 인해 많은 옛 지식을 아오. 게다가 우리의 보고에는 많은 것들이 보존되어 있소. 구겨진 양피지에, 돌에, 은박과 금박에 다양한 문자로 쓰여진 책들과 명판들이 있소. 그중 일부는 아무도 판독할 수 없으며 또 대부분은 아직 아무도 그 자물쇠를 연 자가 없었소. 나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것들을 얼마만큼은 판독할 수 있었는데, 그 회색의 순례자가 온 것은 바로 그 기록들 때문이었소. 난 어린아이였을 때 그를 처음 봤는데 그 후로도 그는 두세 번 왔었소." "회색의 순례자라고요? 그의 이름은 뭐지요?" "우리는 요정의 방식대로 그를 미스랜더라고 불렀고 그도 그 이름에 만족해 했소. 그는 '내 이름은 나라의 수만큼이나 많지.' 하고 말했소. 또 '요정들 사이에선 미스랜더, 난쟁이들에겐 타르쿤, 젊은 시절 지금 잊혀진 서방에서는 올로린이었고 남쪽에선 인카누스, 북쪽에선 갠달프라고 불리지. 단 동쪽에는 가지 않았고.' 하고 말했소." "갠달프! 난 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장 총애받는 고문, 회색의 갠달프지요. 그는 우리 원정대의 지도자였는데 모리아에서 실종되었어요." "미스랜더가 실종되었다고! 당신의 동지들에게는 사악한 운명이 따라다니는 것 같구려. 그렇게 위대한 지혜와 권능의 소유자가,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해낸 그가 사라질 수도 있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지식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정녕 믿기 어렵소. 그가 단지 당신들을 떠나 자신이 가려던 곳으로 간 건 아니오?" "비통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난 그가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어요." "거긴 어떤 두려운 대단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겠소. 아마 저녁때 말해 줄 수 있겠지. 지금 생각하건대 미스랜더는 단순한 지하의 전승자라기보다는 이 시대에 행해지는 위대한 행적의 지휘자였소. 그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 그 꿈을 해석해 주었더라면 우리는 굳이 사자를 파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는 아마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보로미르의 파견이 결정되었던 것이오. 미스랜더는 결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또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도 않았소. 어떻게 해선지 모르지만 그는 데네도르영주께 보고의 비장품을 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소. 그가 누구에게 자세히 가르쳐 준다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난 그때 그에게서 얼마간 배웠소. 그는 언제나 곤도르의 초창기에 다고르라드에서 벌어졌던 대전쟁 - 바로 이 전쟁에서 적은 궤멸되었었소 - 에 관해서 조사하고 또 묻곤 하였소. 그리고 그는 이실두르에 관한 이야기를 몹시 알고 싶어했소. 그러나 우린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게 너무도 적었소. 왜냐하면 그의 종말에 관해선 어떤 확실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제 파라미르의 목소리는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그러나 약간은 알거나 추리해서 언제나 마음 속에 품어온 사실이 있소. 즉 이실두르는 곤도르를 떠나 죽을 운명의 인간들 사이에서 사라지기 전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적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소. 미스랜더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바로 거기 있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그때는 그게 오로지 옛 전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관계되는 문제로 보였소. 우리의 꿈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토론될 때 나는 이실두르의 재앙이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전설에 따르면 이실두르는 매복했던 오르크들의 화살에 살해되었고 또 미스랜더도 그 이상은 내게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 물건이 무엇인지 나는 결코 짐작조차 하지 못하지만 권능과 위험이 담긴 어떤 보물인 것만은 틀림없소. 혹시 암흑의 영주가 고안해 만든 무서운 무기인지도 모르지요. 만일 그것이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라면, 무서움을 모르고 교만하며 때로는 무분별하기까지 하고 언제나 미나스 티리스의 승리(물론 거기엔 자신의 영광도 포함되지만)만을 열망하던 내 형 보로미르가 그것을 탐내고 또 거기 유혹되었으리라고 난 능히 짐작할 수 있소. 그가 그런 사명을 띠고 갔다는 사실이 비통할 뿐이오! 사실 아버지와 원로들에 의해 차남인 내가 선발되었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더 연장자이며 더 대담하다며 - 둘 다 맞는 말이오 - 앞으로 나섰고 그의 기세는 도저히 만류할 수 없는 것이었소. 그러나 더이상 두려워 마시오! 난 그게 대로에 놓여 있다고 해도 절대로 집지 않을 것이오. 미나스 티리스가 몰락하고 있으며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나뿐일지라도, 나는 곤도르와 나의 영광을 위해 암흑의 군주의 무기를 쓰지는 않을 것이오. 아니오, 난 그러한 승리는 바라지 않소,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여." "우리의 회의도 그러한 승리를 바라지 않았고 나도 그래요. 난 그런 문제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프로도도 확고하게 말했다. "나 자신으로선 백색의 성수가 왕의 궁정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은빛 왕관이 돌아오고 미나스 티리스가 평화로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소. 또 미나스 아노르가 과거처럼 빛으로 충만하여 노예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다른 여왕들 사이의 한 여왕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상하게 군림하는 모습을 보고 싶소. 모든 것을 삼키려는 파괴자에 대항해 우리가 목숨을 지키려는 한 전쟁은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난 번쩍이는 칼을 그 날카로움 때문에, 화살을 그 날램 때문에, 전사를 그의 영광 때문에 사랑하지는 않소. 난 오직 그들이 지키는 나라, 뉴메노르의 인간들이 사는 도시를 사랑할 뿐이며 내 도시가 기억과 오랜 전통과 아름다움 그리고 현재의 지혜로 사랑받게 하고 싶소. 노인과 현자의 위엄을 경외하는 것 이상의 두려움의 대상으로는 결코 만들고 싶지 않소. 그러니 날 두려워하지 마시오! 난 당신에게 더 말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소. 또한 내가 정곡에 가깝게 말하고 있는지 알려 달라고도 말하지 않겠소.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날 신뢰한다면 당신이 지금 추구하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나는 조언을 해줄 수도 심지어 도와 줄 수도 있소." 프로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마터면 도움과 조언을 받고 싶은 욕망에 굴복해 이 현명하고 공정해 보이는 엄숙한 젊은이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해 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를 제지했다. 그의 가슴은 두려움과 서글픔으로 무거웠다. 만일 최악의 사태를 우려하는 대로 원정대 중 자신과 샘만이 남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들만이 사명의 비밀을 관할하는 셈이었다. 경솔한 말보다는, 옳지 않을지 몰라도 불신이 더 나았다. 그리고 파라미르를 쳐다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보로미르에 대한 기억이, 반지의 유혹이 일으킨 그 무서운 변화의 기억이 상기되었다. 그들은 서로 달랐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아주 유사했던 것이다. 그들은 회색과 녹색의 그림자들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늙은 나무들 밑을 지나며 한동안 침묵 속에서 계속 걸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많은 새들이 노래했고 윤기나는 지붕을 이룬 이딜리엔 상록림의 거뭇한 잎새들 위로 태양이 빛났다. 샘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다만 귀기울여 듣기만 했지만, 동시에 그는 호비트의 예민한 귀로 주변에서 이는 삼림의 모든 나직한 소리들에 주의를 쏟았다. 한 가지 그가 주목한 것은 그 모든 이야기에서 골룸의 이름이 한번도 거론되지 않은 것이었다. 다시는 그 이름을 듣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라고 느꼈음에도 그는 기뻤다. 그는 자신들이 외따로 떨어져 걷고 있지만 바로 가까이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담롯과 맵룽이 앞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지정된 장소로 빠르고 은밀하게 가고 있었다. 한번은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이 마치 뒤에서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뒤를 돌아다보자 작고 어두운 그림자가 나무둥지 사이로 미끄러지듯 숨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들이 잊으려고 한다면 내가 그 늙은 악당을 굳이 상기할 필요도 없고 나도 잊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계속 나아가 마침내 삼림이 점차 성기기 시작하고 땅은 더 가파르게 아래로 경사진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다시 오른쪽 옆길로 들어서자 곧 좁은 골짜기 속의 작은 강에 이르렀다. 이 강은 바로 아까 웅덩이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이제는 기세 좋은 급류로 불어나 양편에 너도밤나무와 회양목 숲을 두고 깊이 강바닥을 파면서 돌멩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몽롱한 빛 속에 저지대와 넓은 초원이 보였고 멀리 안두인대하는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파라미르가 말했다. "아,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실례를 해야겠소. 지금까지 명령보다는, 당신들을 살해하거나 포박해선 안 된다는 예의를 앞세웠던 사람이니 용서해 주기 바라오. 그렇지만 어떤 이방인도, 심지어는 우리와 함께 싸우는 동맹 로한인이란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칙이오. 그러니 눈을 가려야 하겠소."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요정들도 필요할 때는 그런 방식을 취하지요. 우리는 눈을 가린 채 아름다운 로스로리엔의 경계를 지나쳤어요. 난쟁이 김리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지만 호비트들은 감내했었지요." "내가 인도하는 곳은 아름답지는 않소. 그러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겠다면 나도 기쁘겠소." 그가 나직하게 부르자 맵룽과 담롯이 나무들 사이에서 나와 그에게로 왔다. "이 손님들의 눈을 가려라. 단단히 하되 불쾌하지는 않게. 손은 묶지 말고 이들은 보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난 이들이 자진해 눈을 감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발이 허청이면 눈을 깜박이게 되는 법이지. 비틀거리지 않게 인도해라." 두 호위병은 녹색 스카프로 호비트들의 눈을 가린 다음 그들이 쓰고 있던 두건을 거의 입에 닿을 정도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각각 손을 이끌고 걸어갔다. 그 길의 이 마지막 일 마일에 대해 프로도와 샘이 아는 것은 모두 어둠 속에서 짐작한 것뿐이었다. 얼마후 그들은 자신들이 아래쪽으로 가파르게 경사진 통로 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통로는 매우 좁았기에 그들은 양편 돌벽을 스치며 일렬로 나아갔고 호위병들은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뒤에서 따라왔다. 간간이 울퉁불퉁한 곳에 이를 때면 그들은 잠시 위로 들려졌다가 다시 내려놓아졌다. 오른편에서는 계속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커졌다. 드디어 그들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맵룽과 담롯이 몇 바퀴 그들의 몸을 빨리 돌렸기 때문에 그들은 방향감각을 잃었다. 위로 약간 올라가니 좀 추워지는 것 같았고 개울소리가 희미해졌다. 그 다음 그들은 들려져 많은 계단을 내려간 다음 모퉁이를 돌았다. 갑자기 다시 물소리가 들렸는데 이제는 세차게 흐르고 부딪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사방은 온통 물소리가 가득찬 것 같았으며 그들 손과 뺨에는 가랑비 같은 것이 와 닿았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잠깐 동안 그들은 멈춰서 있었지만 눈이 가려져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파라미르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눈가리개를 풀어 줘라." 스카프가 풀리자 그들은 눈을 깜박이며 숨을 헐떡였다. 그들은 현관계단이라 말할 수 있는 윤나는 돌바닥 위에 서 있었다. 앞쪽으로 휘장처럼 드리운 폭포수는 너무도 가까워서 팔을 뻗치면 닿을 것 같았다. 폭포수는 서쪽을 향하고 있어 햇빛은 항상 여러 가지 빛깔로 갈라져 통과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요정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소진되지 않는 빛의 금과 은, 루비, 사파이어, 자수정 등으로 엮어진 휘장처럼 보였다. "운이 좋아 제시간에 당도해 우린 당신들의 인내에 보답할 수 있겠소. 이것이 바로 일몰의 창 헤네스 안눈폭포요. 수원(水源)의 나라 이딜리엔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폭포지요. 이방인으로 이 폭포를 본 이는 거의 없소. 그렇지만 뒤편에는 이에 어울릴 만한 왕궁은 없소. 자, 들어갑시다." 파라미르가 말할 때 해가 기울며 떨어지는 폭포로 황혼이 비쳐들었다. 그들은 방향을 돌려 낮고 험악하게 생긴 아치 밑을 통과했다. 곧 그들은 넓고 울퉁불퉁한 데다 지붕은 들쑥날쑥하게 경사진 바위로 된 방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횃불이 반짝이는 벽에 흐릿한 빛을 비추었다. 벌써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고 계속 다른 사람들이 어둡고 좁은 문을 통해 두셋씩 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짐에 따라 호비트들은 동굴이 짐작보다 크고 또 대단한 양의 무기와 식량이 비축되어 있음을 알았다. 파라미르가 말했다. "자, 여기가 우리의 은신처요. 그리 안락한 곳은 아니지만 마음 놓고 밤을 보낼 수는 있소. 여긴 적어도 축축하지 않고 또 따뜻한 불은 없지만 음식이 있소. 한때는 저 물이 이 동굴을 통해 저 아치 밖으로 흘렀었지만 옛 장인들에 의해 골짜기 저 위쪽으로 수로가 바뀌어서 두 배 높이의 폭포로 떨어지는 것이오. 이 동굴에 이르는 길은 하나만 빼고 모조리 막혀 버렸소. 나갈 길은 오로지 둘뿐이오. 당신들이 눈을 가리고 들어온 저 통로, 아니면 저 휘장을 통해 칼처럼 날카로운 돌로 가득한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이제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잠시 쉽시다. " 호비트들은 한구석으로 안내되어 원한다면 누울 수 있게끔 낮은 침대 하나를 제공받았다. 그 동안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조용하고 질서 있게 일을 해 진행이 빨랐다. 벽에서 가벼운 식탁들이 내려져 받침대 위에 설치되었고 식기가 올려졌다. 식기는 대부분 수수한 것들로 장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꽤 잘 만든 것들이었다. 둥글고 커다란 접시들과 유약을 발라 구은 갈색 그릇, 둥글게 다듬어진 회양목주발과 접시들은 모두 매끄럽고 깨끗했다. 여기저기 윤나는 청동잔과 물그릇이 놓였고 식탁 중앙 대장의 자리에는 은으로 만든 잔이 놓였다. 파라미르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남부인들을 추격하다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척후병으로 도로 부근에 남아 있다가 이제 막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남부인들에 대해 모조리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무마크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보고하지 못했다. 적의 후속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오르크 밀정도 전혀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했다. "보고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나, 안본?" 파라미르는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물었다. "예, 없습니다. 적어도 오르크놈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간 이상한 것은 보았거나 아니면 본 것 같습니다. 어스름이 짙어질 때라 물체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니까 어쩌면 다람쥐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에 샘은 귀를 세웠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그 검은 다람쥐에게서 꼬리는 못 보았습니다. 그건 마치 그림자 같아 보였는데 제가 가까이 다가가니까 나무 둥지 뒤로 모습을 감추고는 다람쥐만큼이나 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대장께선 이유없이 동물을 죽이는 것을 달갑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고 또 그때가 바로 그런 상황 같아서 저는 화살을 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확실히 쏘아 맞히기에는 너무 어두웠던 데다 그 동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뭇잎 사이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잠시 머물렀다가 서둘러 돌아왔지만 몸을 돌렸을 때 위쪽 높은 곳에서 그 동물이 저를 향해 쉿쉿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혹시 커다란 다람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적의 위험에 직면한 머크우드의 짐승들 일부가 여기 우리의 숲을 헤매고 있나 봅니다. 그곳엔 검은 다람쥐들이 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그건 좋지 않은 조짐일 거야. 우리는 이 이딜리엔에 머크우드의 탈출자를 맞이하는 건 원치 않으니 말이야." 샘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들을 향해 힐끗 눈길을 돌렸다고 느꼈다. 그러나 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와 프로도는 드러누워 횃불을 바라보았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프로도는 잠이 들었다. 샘은 자기 자신과 씨름이라도 하듯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았다. '그는 괜찮은 사람일 거야.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번드르르한 말이 더러운 가슴을 감출 수도 있으니까.' 그는 하품을 했다. '일 주일이라도 잘 수 있겠어. 그렇게 하면 몸이 한결 좋아질 텐데. 또 주위에 이렇게 거대한 인간들이 있는 터에 나 혼자 깨어 있다 한들 무슨 수가 있겠어? 아무것도 없어, 샘 갬기. 그렇지만 어쩠든 넌 계속 깨어 있어야 해.' 샘은 용케도 생각대로 했다. 동굴 출입문 쪽은 이제 빛이 희미해졌고 떨어지는 폭포의 휘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이건 저녁이건 또는 밤이 되건 폭포소리는 결코 음조를 바꾸지 않고 계속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잠에 관해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듯했다. 샘은 눈을 찌르기라도 하듯 두 주먹을 갖다댔다. 이제 더 많은 횃불이 켜졌다. 저장한 술통들이 열리고 있었다. 폭포에서 물을 길어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은 대야에서 손을 씻었다. 넓은 구리대야와 하얀 수건이 준비되자 파라미르도 씻었다. "손님들을 깨워라. 물도 갖다주고. 식사시간이야." 프로도는 일어나 앉아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샘은 시중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앞에 대야를 들고 서 있는 키 큰 사람을 얼마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부디 바닥에 놓으시오, 선생. 그게 내게도 더 편하겠는데요." 그리고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또 즐거워서 바라보는 가운데 샘은 차가운 물 속으로 머리를 처넣고는 목과 귀에 물을 끼얹었다. "저녁식사 전에 머리를 씻는 게 당신네 나라의 습관이오?" 시중들던 사람이 묻자 샘이 대답했다. "아니오, 아침식사 전에 하죠. 하지만 잠이 모자랄 때 목에 물을 끼얹는 것은 마치 시들어 버린 상추에 내리는 비와도 같죠. 자, 이제 난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은 깨어났어요." 그들은 파라미르의 옆자리로 안내되었다. 그들 키에 알맞게, 술통을 받친 후 그 위에 생가죽을 깔아 놓았다. 파라미르와 모든 병사들은 식사 전에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잠시 묵념을 했다. 파라미르는 프로도와 샘에게도 같이 하자고 눈짓을 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우린 언제나 이렇게 합니다. 과거의 뉴메노르 쪽을 향해, 그리고 그 너머에 현재까지 존재하는 요정들의 고향을 향해, 또 그 요정들의 고향 너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향해 묵념하는 것이오. 당신들에겐 식사 때 그런 관습이 없소?" 프로도는 이상스럽게 촌스럽고 조야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없어요. 하지만 손님일 경우에는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또 식사 후에도 일어나서 감사를 드리지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파라미르도 말했다. 그처럼 긴 여정과 야영 그리고 고적한 황야에서 지낸 시간 이후의 저녁식사는 호비트들에게는 진수성찬과도 같았다. 그들은 차갑고 향기로운 옅은 황색 술을 마시고 깨끗한 손과 칼 그리고 접시로, 버터 바른 빵과 소금을 친 고기와 마른 열매 그리고 아주 좋은 붉은색 치즈를 먹었다. 프로도도 샘도, 나오는 음식은 하나도 마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어 번 더 이어지는 순서도 마다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핏줄과 지친 사지로 퍼지자 그들은 마음이 느긋해지며 즐거워졌다. 로리엔을 떠난 후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파라미르는 그들을 동굴 안쪽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커튼으로 가려진 곳으로, 의자 하나와 발판 두 개가 날라져 왔다. 벽에 뚫린 구멍 안에서 흙으로 만든 램프가 타올랐다. "당신들은 곧 자고 싶을 거요. 특히 식사하기 전에는 눈을 감으려 하지 않는 훌륭한 샘와이즈군은 더할 것이고. 고귀한 시장기의 날을 무디게 하기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날 두려워해선지는 모르겠소만. 그러나 식사 후에 너무 빨리 자는 것은 - 특히 오래 단식을 한 후에는 - 좋지 않소. 잠시 이야기를 합시다. 리벤델에서부터의 여정엔 틀림없이 이야깃거리가 많을 거요. 그리고 당신들 또한 아마 우리와 이곳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겠지. 우선 내 형 보로미르와 늙은 미스랜더 그리고 로스로리엔의 아름다운 종족들에 대해 말해 주오." 프로도는 이제 완전히 졸음에서 벗어나 기꺼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음식과 술로 마음이 느긋해지긴 했으나 조심성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샘은 혼자 환하게 미소를 짓거나 흥얼거리며 프로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가끔 동의의 찬탄을 터뜨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많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원정대의 목적과 반지로부터 꽤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주로 그들이 겪었던 모든 모험들 - 황야에서 벌어졌던 늑대들과의 전투와 카라드라스 아래 설원에서, 그리고 갠달프가 추락한 모리아에서의 분투 - 에서 보로미르가 수행한 용감한 역할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파라미르는 다리 위에서의 전투담에 가장 감동했다. "오르크들이나, 또는 당신이 발록이라 부른 그 괴물을 놔두고 도망쳐야 했던 것은 보로미르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을 거요. 비록 그가 제일 나중에 도망쳤다 할지라도 말이오." "사실 그가 제일 늦게 후퇴했지요. 아라곤이 억지로 퇴각시켰어요. 갠달프가 추락한 이후 그만이 길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만일 우리같이 돌보아 주어야 할 미약한 족속들이 없었더라면 아라곤이나 보로미르는 결코 도망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요." "차라리 보로미르형이 거기서 미스랜더와 함께 추락해서, 라우로스폭포 위쪽에서기다리던 죽음의 운명에까지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걸."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젠 당신들에 대해 말해 주세요." 프로도는 이야기의 핵심을 다시 한번 비끼며 이렇게 말했다. "난 미나스 이딜과 오스길리아스 그리고 굳건하게 저항해 온 미나스 티리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오랜 전쟁을 치르며 당신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지요?"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느냐는 거요? 우린 오래전부터 아무런 희망도 품고있지 않았소. 엘렌딜의 검이 정말 돌아온다면 다시 희망에 불이 당겨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요정이나 인간들로부터 예기치 못했던 다른 도움이 있지 않는 한 사악한 시대를 지연시키는 이상의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적의 힘은 점점 거대해지는데 우리의 힘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쇠퇴해 가는 종족이며 봄을 기대할 수 없는 가을과도 같소. 뉴메노르인들은 거대한 영토의 해안지역 도처에 정착했지만 그 대부분이 사악하고 우매한 짓거리에 빠져들었소. 많은 사람들이 암흑과 마법에 완전히 유혹당했지요. 일부는 나태와 안일에 빠졌고 다른 일부는 서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쇠퇴해 버려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소. 일찍이 곤도르에서는 사악한 술수가 행해지거나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적이 영예롭게 거론된 적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옛 서역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와 아름다움은 가인(佳人) 엘렌딜의 아들들의 영토에 오랫동안 유지되었소. 그러나 차츰 노망에 빠져들어, 파멸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라졌었을 뿐인 적을 죽였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쇠퇴를 초래한 것은 바로 곤도르였소. 뉴메노르인들은 과거 그 왕국을 상실한 원인이었던 영원한 생에 대한 열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기에 오히려 죽음을 상존하게 했던 거요. 왕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보다 더 호화롭게 지었고 후손들의 이름보다는 옛 선인들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겼소. 후손이 없는 영주들은 고색창연한 궁전에 앉아 문장학에만 열중했으며 무기력한 사람들 또한 밀실에 틀어박혀 불로장생약을 조제하거나 아니면 높고 차가운 탑 속에서 별들을 연구했소. 그리고 아나리온 왕가의 마지막 왕에게는 계승자가 없었소. 그 뒤에 곤도르를 통치하게 된 섭정들은 더 현명하고 운세도 좋았소. 더 현명하다는 건 그들이 해안의 억센 종족에 대항해, 그리고 에레드 님라이스의 강건한 산악인들에 대항해 군세를 보강했기 때문이오. 그들은 북부의 오만한 종족들과 휴전을 맺었소. 그들은 맹렬하고 용감한 인간들로서 때로 우리를 침공하기도 했지만 거친 동부인들이나 잔인한 하라드인들과는 달리, 멀지만 우리의 친족이었지요. 12대 섭정 키리온(내 아버님은25대지요)와 시대에는 그들이 달려와 방대한 켈레브란트 평원에서 우리의 북부지대를 강점했던 적을 무찌르는 데 일조하기도 했소. 그들이 바로 우리가 이름 붙여 준바 있는 말의 명조련사 로한인들이오. 그 후 우리는 그들에게 로한이라 불리는 칼레나르돈 평원을 할양해 주었지요. 그곳엔 오랫동안 사람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오. 그들은 우리의 동맹국이 되어 위급할 때면 도움을 주고 북쪽국경과 로한협곡을 방어해 주며 충실한 이웃 역할을 해왔지요. 그들은 우리의 학문과 관습 중 원하는 부분을 배웠으며 그들의 영주조차 필요할 땐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하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자신들 선조들의 생활방식을 지키고 자신들의 기억을 고수하며 자기들 사이에선 그들만의 북부어를 사용하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합니다. 키 큰 사나이들과 아름다운 여성들 모두 용감한 데다 아름다운 금발에 빛나는 눈동자를 소유한 강건한 사람들이오. 그들을 보면 제1시대 인간들의 청년기가 연상됩니다. 정말이지우리 학문의 대가들이 말하듯 그들은 우리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지요. 즉 그들은 초기의 뉴메노르인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족이지요. 그들은 인간의 친구라 불리는 황금빛 머리의 요정 하도르의 후예가 아니라 서역의 부름을 거부한 채 바다 건너로 가지 않았던 그 아들들과 백성들의 후예일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소. 즉 고귀한 이들 내지 서역인이라 불리는 뉴메노르인과, 중등의 인간들로 황혼의 인간들이라 불리는 로한인과 그 친족들, 그리고 암흑의 인간들과 야만인들이 그 셋이오. 그러나 이제는 로한인들이 기예와 품위면에서 여러 가지로 향상되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닮게 되었는지 더 이상 우리는 '고귀한 이들' 이라는 호칭을 내세울 수 없게 되었소. 우리 또한 황혼의 중등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오. 비록 옛것에 대한 기억은 아직 가지고 있지만. 우리 또한 로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무용 그 자체를 좋은 것으로, 하나의 유희이자 목적으로 사랑하며 또 전사는 단순히 무기를 다루어 살해하는 재주 이상의 많은 기술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를 다른 기술을 가진 사람보다 상위로 여기기 때문이오. 그것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오. 심지어 내 형 보로미르 또한 그랬소. 그는 뛰어난 무용의 소유자로 그 이유로 해서 곤도르 제일의 사나이로 꼽혔지요. 사실 그는 정말 용감했소. 미나스 티리스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후계자도 그처럼 전투에서 강건하거나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또는 거대한 뿔나팔로 그렇게 강력한 소리를 내지는 못했소." 파라미르는 한숨을 내쉬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때 샘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 가운데에는 요정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군요, 대장." 그는 파라미르가 이야기하는 가운데 요정들에 관한 부분에서 공경의 태도를 보인사실을 주목했다. 이 사실은 그가 제공한 음식과 술 그리고 그의 정중한 태도에서보다 더한층 샘을 경복케 하고 의심을 사라지게 했다. "정말로 그렇다네, 샘와이즈군. 그건 내가 요정들에 대해서 그리 많은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자네 말은 우리가 뉴메노르로부터 이 중간계로 넘어오며 변한 점을 지적하는 거야. 자네는 미스랜더의 동지였고 또 엘론드와 이야기를 나누어 봤으니 알겠지만 뉴메노르인들의 선조 에다인은 최초의 전쟁에서 요정들과 협력해 싸웠고 그 대가로 요정들의 고향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바다 한가운데의 왕국을 부여받았던 것이야. 그러나 중간계에선 암흑시대부터 적의 간계 때문에, 그리고 또 시간의 완만한 흐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느라 인간과 요정은 멀어지게 된 거지. 이제 인간들은 요정들을 두려워하고 의심하면서도 사실 그들에 관해선 거의 알지 못하지. 그리고 우리 곤도르인들 또한 다른 인간들과 다름없이, 즉 로한인이나 거의 다름없이 되어 가는 중이야. 암흑의 군주를 적으로 하는 로한인들조차 지금은 요정들을 회피하며 황금의 숲에 대한 언급조차 두려워하는 거야. 그렇지만 우리들 가운데는 가능하다면 요정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들도 아직 약간은 있지. 그리고 이따금 비밀리에 로리엔으로 가기도 하고. 돌아오는 일은 좀체 없지만 말이야. 나는 물론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이 일부러 제1시대의 존재를 찾아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난 순백의 레이디와 이야기를 나눈 자네가 부럽군." 그러자 샘이 외쳤다. "로리엔의 레이디! 갈라드리엘! 그녀를 보셔야 합니다. 정말 그러셔야 해요, 대장. 전 한 호비트에 불과하고 또 고향에서도 정원을 돌보는 게 소임이기 때문에, 아시겠지만 시에는 그리 능통하지 못하지요. 시를 짓는 데는 말이에요. 가끔은 재미있는 조각글을 짓지만 진짜 시에는 못 미치지요. 그래서 제가 뜻하는 바를 대장께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노래로 불러야 하거든요. 로리엔에 관한 노래를 들으시려면 스트라이더 - 아라곤이죠 - 나 늙은 빌보씨를 만나셔야 할 거예요. 그렇지만 저도 그녀에 관한 노래를 하나 지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녀는 아름다워요, 대장! 사랑스럽지요! 때로는 꽃이 만발한 거대한 나무 같기도 하고 때로는 작고 가녀린 하얀 수선화 같기도 해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면서도 달빛처럼 보드랍지요. 햇빛처럼 따스하면서도 별 위에 내린 서리처럼 차갑기도 하지요. 눈 덮인 산처럼 고귀하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제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 머리칼에 데이지꽃을 꽃은 봄철 아가씨만큼이나 명랑하지요. 그러나 이런 설명도 사실 한 무더기의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제가 뜻한 바와는 한참 벗어난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가 보군. 위험한 만큼 아름답고 말이야." "전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선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느끼기엔 사람들이 스스로의 위험을 지니고 로리엔으로 가서는 그곳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 같아요. 즉 자신이 위험을 가지고 가는 거란 말이지요. 그렇지만 아마 당신은 그녀를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녀는 그 자체로 그만큼 강하니까요. 당신이, 당신이 말이에요, 그녀를 향해 몸을 던지면 암초에 부딪힌 배처럼 산산조각이 나거나아니면 강물에 빠진 호비트처럼 익사하고 말 거예요. 그렇다고 바위나 강을 탓할 수는 없죠. 그런데 보로......" 샘은 말을 멈추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서? 자넨 '그런데 보로미르는' 하고 말하던 참이었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가 스스로의 위험을 지니고 갔다는 말인가?" "그래요, 대장. 당신 형님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말해도 용서하세요. 그런데 당신은 그 문제에 계속 관심이 있군요? 전 리벤델에서 길을 떠난 이래 줄곧 보로미르를 지켜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이해하시겠지만 프로도씨를 돌보려는 것이었지 보로미르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가 원하던 것을 로리엔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적의 반지를 탐하게 된 거예요!" "샘!" 프로도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그는 잠시 자기만의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났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다시 주홍색으로 벌개지며 샘이 말했다. "용서하세요. 우리 아버지는 늘 '네가 그 큰 입을 열 때면 언제나 실언이 나와.' 하고 말하곤 했는데 그게 참으로 옳은 말이었어요. 어이구, 어이구!" 샘은 몸을 돌리고는 있는 힘을 다 짜내 파라미르를 직시했다. "자, 보세요, 대장! 하인이 멍텅구리라 해서 제 주인을 이용하려 하지는 마세요. 당신은 요정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 관해 말하면서 아주 능숙하게 저를 방심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속담엔 거죽보다는 마음이란 말이 있어요.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속마음을 내보일 기회예요." 파라미르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느릿 느릿하게 그리고 아주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래, 그게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야! 세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생각되었던 그 절대반지야. 그런데 보로미르가 그걸 억지로 뺏으려 했던가? 그리고 당신들은 용케 피했단 말이지? 그리곤 줄곧 달려서 마침내 내게 왔단 말이지! 그래서 여기 황야에서 당신들 두 하플링과 나와 또 내가 부르면 곧 달려올 많은 병사들 그리고 반지들 중의 반지가 함께 자리를 하게 된건가. 참으로 야릇한 운명이야! 곤도르의 대장 파라미르가 속마음을 내보일 시간이라고? 하하!" 그는 일어나 아주 굳고 엄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회색눈이 번들거렸다. 프로도와 샘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등을 벽에 기댄 채 서로의 몸을 나란히 붙이고 칼자루를 더듬어 찾았다. 침묵이 흘렀다. 동굴 속의 사람들은 말을 그치고 무슨 영문인가 하며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파라미르는 다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후 그는 다시 엄숙한 얼굴로 돌아갔다. "애석하구나, 보로미르! 그건 너무도 가혹한 시련이었소! 인간들에게 위험한 것을 지니고 그 먼 나라에서 온 당신들 두 이방인은, 당신들이 내 슬픔을 얼마나 더 가중시켰는가 모를 것이오. 또 당신들은 내가 하플링을 판단하는 것만큼 인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군. 우린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오. 우리 곤도르인들은 말이오. 우린 좀체로 떠들지 않으며 말한 바는 반드시 실행하거나 실행하기 위해 죽는 이들이오. 난 '대로상에서 발견한다 하더라도 줍지 않겠다.'고 말했소. 내가 그 물건을 탐낼 그런 인간이고, 또 아까 말했을 때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난 내 말을 맹세로 여길 것이고 또 지킬 것이오. 더구나 난 그런 인간이 아니오. 아니, 나는 보고는 도망쳐야 할 위험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 만큼 현명한 사람이오. 편히 앉으시오! 그리고 안심하게, 샘와이즈. 만일 자네가 실수를 한 것 같다면 그게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게. 자네의 가슴은 충직할 뿐 아니라 민감해서 자네의 눈보다 더 분명하게 본 거야. 왜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게 그 사실을 밝히는 게 더 안전하기 때문이야. 그건 자네가 사랑하는 주인을 도운 것이기도 할 거야.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겠어. 그러니 안심하게. 그러나 다시는 큰 목소리로 그 물건을 거명하지 말게. 한 번으로 족하니까." 호비트들은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앉았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작은 손님들과 어떤 종류의 농담을 나눴고 이제는 그게 끝났다는 걸 눈치채고는 다시 마셔대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 프로도, 이제 드디어 우린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소. 만일 당신이 다른 이의 부탁으로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 물건을 스스로 떠맡았다면, 난 당신에게 동정과 경의를 표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그걸 숨겨 두고 사용하지 않는 데 대해 경탄하는 바이오. 당신은 내게 새로운 종족이며 새로운 세상이오. 당신의 모든 종족이 당신과 같소? 당신들의 땅은 평화와 만족의 나라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또 그곳에선 정원사들이 크게 존경을 받겠지요." "그곳에도 모든 이가 선한 건 아니에요. 그러나 정원사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요." 프로도가 대답했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그곳 호비트들도 태양 아래 이 세상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피곤해 하기도 할 거요. 심지어 자신들의 정원에서도 말이오. 당신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데다 여독으로 피곤하기도 할 테니 오늘밤은 이만 잡시다. 두 분 모두 가능하다면 편히 쉬시오. 두려워 마시오! 난 혹시 유혹을 당하게 되어 그 시험에서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보다 낮은 가치의 인물로 떨어지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현재 아는 것 - 이걸로 충분한데 - 이상으로 알고 싶지도 않소. 이제 쉬시오. 그러나 의향이 있다면 먼저 당신들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그리고 무얼 하려는지만 말해 주시오. 왜냐하면 나는 감시하고 기다리고 생각해야 하니 말이오. 시간이 흘러가오. 아침이면 우린 각자에게 지정된 길로 빨리 가야 할 거요." 프로도는 두려움과 충격이 지나감에 따라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이제 지독한 피로가 구름장처럼 내리덮쳤다. 그는 더이상 시치미를 떼거나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난 모르도르로 들어가는 길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 고르고로스로 가던 중이었지요. 난 불의 산을 찾아 그 물건을 운명의 심연 속으로 던져야 해요. 갠달프가 그렇게 말했지요. 내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지만." 파라미르는 엄숙한 얼굴로, 그러나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프로도를 붙잡아 부드럽게 들어올려 침대까지 날라다 누이고는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그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 곁에는 하인을 위해 또 하나의 침대가 놓였다. 샘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윽고 머리를 깊숙히 숙이고는 "잘 주무세요, 대장. 당신은 기회를 받아들이셨어요." 하고 말했다. "내가 그랬다고?" 파라미르가 말했다. "예, 대장. 그리고 당신의 속마음을, 가장 고귀한 성품을 보여 주셨어요." 파라미르는 미소를 지었다. "주제넘은 하인이군, 샘와이즈. 그러나 자네 말은 옳지 않아. 사실 칭찬받을 만한 일에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 그러나 이 일엔 칭찬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난 내가 했던 바의 행동과 다른 행동을 할 유혹이나 욕망을 품지 않았으니까." "아, 좋습니다, 대장. 당신은 제 주인에겐 요정 같은 데가 있고 또 그게 좋고 참된 거라고 했지요. 그렇지만 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도 음, 음, 갠달프를, 마법사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 자넨 멀리서도 뉴메노르의 분위기를 알아챌 수 있을 테니. 잘 자게!" 제17장 금지된 웅덩이 프로도가 깨어나 보니 파라미르가 자신에게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일순 그는 묵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사렸다. "두려워할 것 없소." 파라미르가 말했다. "벌써 아침인가요?" 프로도는 하품을 하며 물었다. "아직은 아니오. 그러나 밤은 거의 다 지나 보름달도 지고 있소. 나와 같이 좀 가지 않겠소? 당신의 조언을 듣고 싶은 문제도 있고 하니. 잠을 깨워 미안하오만 같이 가봅시다." "그러지요." 프로도는 따스한 담요와 모피를 벗고 몸을 약간 떨면서 말했다. 불기가 없는 동굴은 추웠다. 정적 속에서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망또를 걸치고 파라미르를 따라갔다. 어떤 경계의 본능으로 갑자기 깨어난 샘은 주인의 빈 침대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두 개의 흐릿한 형체 즉 프로도와 한 명의 인간이 이제 희미한 빛으로 가득한 아치 아래 드러난 것을 보았다. 그는 연이어 깔린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그들을 좇아갔다. 동굴 입구로 나가니 이제 폭포의 휘장은 비단과 보석으로 눈부시게 치장되어 있었다. 녹아드는 고드름 또한 달빛에 빛났다. 그러나 샘은 발을 멈추고 서서 그 광경에 경탄할 겨를도 없이 옆으로 방향을 틀어 동굴 벽의 좁은 통로를 따라 프로도를 따라갔다. 그들은 캄캄한 통로를 따라가다가 이윽고 젖은 긴 계단을 올라 바위를 뚫고 만들어진 깊고 긴 수갱을 통해 높이 번득이는 하늘빛에 비친 작고 평평한 층계참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두 개의 긴 계단이 놓여 있어 하나는 계속 개울의 높은 제방까지 뻗쳐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꺾어졌다. 그들은 앞의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탈의 그것처럼 구불구불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정지한 어둠을 지난 그들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난간이 없는 넓고 판판한 바위 위였다. 오른쪽으로는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철벅이며 가파른 수로를 따라 쏟아지는 개울이 급류를 이루고 흘렀다. 급류는 거의 그들 발 밑까지 물결쳐 왔다가는 다시 입을 벌린 수로를 통해 곤두박질쳤다. 물가에는 말없이 아래를 응시하고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프로도는 몸을 돌려 둥그렇게 굽이치며 떨어지는 매끄러운 물결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길을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새벽이 가까워진 듯 세상은 고요하고 차가웠다. 멀리 서쪽으로 보름달이 둥글고 하얗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쪽 거대한 계곡에는 흐릿한 안개가 아련히 빛을 발했다. 마치 은빛 연기로 넓은 만이 형성된 듯한 그 아래로는 안두인대하의 서늘한 밤물결이 넘실거렀다. 그 너머로는 새카만 어둠만이 깔려 있어 곤도르 왕국의 백색산맥 에레드 님라이스의 봉우리들이 만년설을 뒤집어쓴 채 유령의 이빨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도는 잠시 그곳 높은 바위 위에 서서 이 방대한 밤의 대지 어딘가에서 자신의 오랜 동지들이 걷고 있는지 자고 있는지 아니면 안개에 감싸인 채 죽어 있는지를 생각하며 전율을 느꼈다. 왜 자신은 망각의 잠에서 깨어나 이곳에 와 있는가? 샘도 똑같은 물음에 답을 얻으려 애썼지만 다만 프로도의 귀에만 들릴 만한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같이 웅얼댈 수밖에 없었다. "전망이 좋군요, 프로도씨. 그렇지만 뼈가 아니라 심장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그러나 파라미르가 먼저 대답을 했다. "곤도르의 새벽이지. 아름다운 이딜(달)이 이 중간계를 떠나며 민돌루인봉의 횐머리타래에 빛을 던지는 거야. 몸은 좀 떨리더라도 볼 만한 광경이지. 그러나 내가당신들을 데리고 와 보여 주려고 한 것은 이게 아니오. 샘와이즈, 자네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으니 그 벌로 주위를 경계하는 게 좋겠군. 그러면 술 한 모금이 뒤따를 테니까 말일세. 자, 잘 살피게." 그가 말없는 경비병을 지나쳐 위로 오르자 프로도는 뒤를 따랐으나 샘은 뒤로 처졌다. 그는 이미 이 축축한 높은 바위 위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파라미르와 프도로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으로는 개울이 거품을 일으키며 오목한 수로로 쏟아져 바위 속 깊은 타원형 분지 주위로 소용돌이치다가 이윽고 좁은 출구를 찾고는 더 조용하고 평탄한 유역으로 흘러갔다. 달빛은 아직 폭포기슭으로 비껴내려 분지의 잔물결에 부딪혀 번득였다.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쪽 제방 위에서 작고 검은 물체 하나가 프로도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형체는 프로도가 바라본 순간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 화살처럼 물살을 가르며 폭포의 격랑과 포말 사이로 사라졌다. 파라미르는 곁에 서 있던 사람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자, 저게 뭐 같은가, 안본? 다람쥐? 물총새? 머크우드의 밤웅덩이에 검은 물총새가 있던가?" 안본이 대답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새는 절대 아닙니다. 분명히 사지가 있는 데다가 자맥질도 사람처럼 하고 또 아주 능숙합니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요? 휘장 뒤 우리 은신처로 올라오는 길을 찾는 걸까요? 그렇다면 드디어 우리도 발각된 것 같습니다. 이미 이렇게 활도 준비해 두었고 거의 저만큼은 쏠 줄 아는 궁사들도 배치해 두었습니다. 대장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미르는 프로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쏠까요?" 잠시 대답을 못하던 프로도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니오! 아니오! 쏘지 마세요." 만일 그럴 용기만 있었다면 샘은 프로도보다 더 빠르고 크게 '예!'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들의 말만 듣고도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파라미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게 뭔지를 아시오? 자, 이제 보았으니 왜 저것을 살려 두어야 하는지 말해 주시오. 우리가 나눈 그 이야기 속에서도 당신은 한번도 저 도둑고양이같은 동지를 언급한 적이 없었소. 또 나도 한동안 그자에 관해 개의하지 않았소. 그자를 붙잡아 내 앞에 데려올 때까지는 말이오. 나는 휘하의 가장 예민한 사냥꾼들을 보내 그자를 잡게 했지만 결국 따돌려져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소. 그런데 어제 땅거미가 질 무렵 안본이 여기서 그자를 본 것이요 그런데 이제 그자는 단순히 고지대에서 토끼잡이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침범을 했소. 그 자가 감히 이 헤네스 안눈까지 들어왔으니 이미 목숨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요. 그런데 저놈은 참으로 놀라운 놈이오. 그처럼 은밀하고 교활하게 웅덩이 속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바로 우리 창문 앞까지 기어들었으니 말이오. 저놈은 인간들이 밤새 경비도 하지 않고 잠 잘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프로도가 대답했다. "두 가지 대답이 있겠지요. 하나는, 그가 인간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교활한 그일지라도 이렇게 감쪽같이 숨겨진 곳에 인간들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조심성보다도 더 강력한 지배욕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파라미르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놈이 욕심이 이끌려 이곳에 왔다고? 그럼 저놈이 당신의 막중한 짐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이오?" "그래요. 더구나 그 자신이 그것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지요." 파라미르는 경악으로 격하게 숨쉬며 말했다. "저놈이 그걸 가졌었다고? 이 문제는 갈수록 더 새로운 수수께끼에 말려드는군. 그럼 저놈은 그것을 찾으려고 당신을 쫓고 있는 것이오?" "아마 그럴 겁니다. 그건 그에게 정말로 소중하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말한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 "그럼 저놈은 지금 뭘 찾고 있는 거요?" "물고기지요. 보세요!" 그들은 어두운 웅덩이를 응시했다. 작고 검은 머리가 바위 그림자 밖으로 드러났다. 잠깐 아주 잔물결이 은빛을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그 머리는 한쪽 물가로 헤엄쳐 가더니 이윽고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개구리 같은 몸체를 드러내며 제방을 기어올랐다. 그리고는 주저앉아 은빛을 발하며 몸을 뒤채는 것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마지막 달빛이 웅덩이 가장자리의 바위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라미르는 나직하게 웃었다. "물고기라! 그렇다면 덜 위험스런 욕망이지.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헤네스 안눈의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저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아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안본이 말했다. "활은 조준이 됐습니다. 쏘지 말아야 합니까, 대장님? 무단으로 침입한 데에 대해선 죽음이 우리의 법입니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말했다. "기다리게, 안본. 이건 보기보다 어려운 문제 같군. 이제 무슨 말을 하겠소, 프로도? 왜 목숨을 살려 줘야 한단 말이오?" "저자는 가엾게도 배가 고픈 겁니다. 게다가 자신의 위험을 몰라요, 당신들의 미스랜더 즉 갠달프라면 그런 이유로, 또는 다른 이유가 더 있더라도 죽이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그는 요정들에게도 역시 저자를 죽이지 못하게 했었지요. 나로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짐작하는 바 또한 여기서 말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저자가 어떤 점에서인지 우리의 사명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당신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저자는 우리의 길잡이였어요." 파라미르는 외쳤다. "길잡이라고! 문제가 점점 더 야릇해지는군. 프로도, 난 당신을 위해선 많은 일을 해줄 용의가 있지만 이 점은 용인할 수 없소. 저 교활한 떠돌이가 제 마음대로 이곳을 활보하게 내버려 두어 나중에 마음내키는 대로 당신들과 다시 합류하거나 아니면 오르크들에게 붙들려 고문에 못 이겨 이곳에 관한 것을 지껄이게 할 수는 없단 말이오. 저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붙잡아야 하오. 또 신속히 붙잡을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죽여야 하오. 그런데 깃달린 창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저 갖가지로 변장하는 미꾸라지를 도대체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겠소?" "내가 조용히 내려가지요. 당신들은 계속 활을 겨누고 있다가 만일 내가 실패한다면 적어도 나를 쏠 수는 있을 거예요. 난 도망치진 않아요." "그럼 빨리 가서 해보시오. 만일 저놈이 여기서 목숨을 건진다면 그는 여생을 당신의 충직한 하인으로 보내야 할 것이오. 프로도씨를 제방까지 안내해 드리게, 안본. 그리고 발소리를 죽이고. 저놈에게도 코와 귀가 있으니까. 자네 활은 이리 주게." 안본은 투덜거리며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 층계참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다시 다른 계단을 올라 마침내 그들은 빽빽한 덤불로 덮인 좁은 출구에 이르렀다. 말없이 지나면서 프로도는 자신이 이제 웅덩이 남쪽 제방 꼭대기에 있음을 알았다. 날은 아직 어두웠고 폭포는 사라져 간 서편 하늘의 여린 달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골룸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약간 앞서 나아갔고 안본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안본은 프로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속 가시오. 오른편을 주의하시고 만일 웅덩이에 떨어지면 고기를 잡고 있는 당신의 동지 이외엔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소. 그리고 당신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가까운 곳에 궁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프로도는 골룸처럼 양 손을 사용해 길을 더듬고 몸의 중심을 잡으며 앞으로 기어갔다. 바위는 판판했지만 미끄럽지는 않았다. 그는 멈춰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뒤쪽 폭포의 끊임없는 낙수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곧 앞쪽 멀지 않은 곳에서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고기, 맛좋은 물고기. 흰 발광체가 드디어 사라졌어, 내 보배. 이제 편안하게 물고기를 먹을 수 있어. 아니, 편안하진 않아, 보배여. 보배를 잃었으니까. 그럼, 더러운 호비트들, 야비한 호비트들이야. 우릴 내버리고 가버렸어, 골룸. 그리고 보배도 가버렸어. 불쌍한 스메아골만 외토리가 되었어. 보배는 안 돼. 야비한 인간들, 그들이 그걸 뺏아갈 거야, 내 보배를 훔쳐갈 거야. 도둑놈들이야. 우린 그놈들을 증오해. 물고기, 맛좋은 물고기는 우릴 강하게 만들어 줘. 눈을 밝게, 손가락을 단단하게 해줘. 그놈들의 목을 졸라 버리자, 보배여. 기회만 있으면 그놈들 모두를 목졸라 버리자. 맛좋은 물고기, 맛좋은 물고기!" 중얼거리는 소리는 폭포소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쉿쉿거리며 계속되었고 목을 꼴록꼴록 울리는 희미한 소리간 가끔 끼어들었다. 프로도는 연민과 역겨움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그는 어서 중얼거림이 멈춰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안본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프로도는 다시 기어가 그에게 사격을 명령하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다. 골룸이 게걸스레 먹으며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아마 그들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정확하게 한 대만 명중시킨다면 프로도는 그 끔찍스런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골룸은 이제 그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하인은 섬김의 대가로 주인에게 권리를 갖는 법이다. 특히 위기에서 섬겼음에 대해선 말할 나위도 없다. 골룸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갠달프라면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스메아골!" 그는 나직이 불렀다. "물고기, 맛좋은 물고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메아골!" 그가 좀더 크게 부르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스메아골. 주인이 널 찾아왔다. 주인이 여기 있어. 이리 와, 스메아골." 숨을 들이쉬는 것 같은 나직한 쉬쉿 소리 이외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이리 와, 스메아골! 우린 위험에 처해 있어. 인간들이 발견하면 널 죽이고 말 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이리 와. 주인에게 오라구!" "싫어요! 훌륭한 주인이 아니에요. 불쌍한 스메아골은 남겨 두고 새로운 친구들한테 가버려요. 주인은 기다릴 수 있어요. 스메아골은 식사를 아직 끝내지 않았어요." "시간이 없어. 물고기를 가지고 어서 와. 오라구!" "아니에요! 식사를 끝내야 해요." 프로도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스메아골! 보배가 화를 낼 거야. 나는 보배를 꺼내 네 목에 뼈가 걸려 다시는 물고기맛을 보지 못하게 하라고 말할 거야. 어서 와! 보배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날카롭게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골룸이 어둠 속으로부터 마치 잘못을 저질러 야단을 맞은 개처럼 네 발로 기며 나타났다. 입에는 먹다 남은 물고기가 물려있었으며 손에도 또 한 마리의 물고기가 있었다. 그는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까지 프로도에게 바싹 다가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그의 흐린 눈이 빛을 발했다. 이내 그는 입에서 물고기를 빼고 일어서며 속삭였다. "훌륭한 주인님! 훌륭한 호비트! 불쌍한 스메아골에게 돌아와요. 착한 스메아골이 왔어요. 이제 갑시다, 빨리. 발광체가 없을 동안 숲을 헤치고 갑시다. 그래요, 오세요. 갑시다!" "그래 우린 곧 갈 거야. 그렇지만 당장은 안 돼. 약속한 대로 너와 같이 가겠어. 다시 약속하지. 그러나 지금은 안 돼. 넌 아직 무사하지 못해. 내가 널 구해 줄 테니 날 믿어." 골룸은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우리가 주인을 믿어야 한다구? 왜죠? 왜 당장 가지 않지요? 다른 호비트는, 그 신경질적이고 무례한 호비트는 어디 있지요? 어디 있어요?" 프로도는 폭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에 있어. 난 샘 없이는 가지 않을 거야. 우린 그에게로 돌아가야 해." 그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건 정말 속임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파라미르가 골룸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마 골룸을 포로로 잡아 포박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이 불쌍한 배반자에게는 프로도의 행위가 배신으로 보일 것이다. 언제이든지 간에 프로도가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유일한 방법으로 그를 구해 주었다는 걸 이해시키거나 믿게 하긴 불가능할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양쪽 모두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 달리 어떤 방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리 와! 그러지 않으면 보배가 화를 낼 거야. 우린 이제 개울을 따라 올라 돌아가는 거야. 계속 가자구, 계속. 네가 앞장서!" 골룸은 킁킁 냄새를 맡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며 얼마간 기어갔다. 곧 그는 멈춰서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저기 뭔가가 있어요! 호비트가 아니에요." 갑자기 그는 뒤로 돌았다. 그의 퉁방울눈에서 푸른빛이 일었다. 그는 쉿쉿거리며 말했다. "주인이, 주인이! 사악해! 속임수야! 배신이야!" 그는 침을 뱉고는 흰 손가락이 달린 긴 팔을 뻗치며 달려들었다. 그 순간 뒤로부터 안본의 거대한 검이 그를 내리덮쳤다. 크고 굳건한 손이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꼼짝을 못하게 했다. 그는 온통 물에 젖고 진흙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몸을 뒤틀며 뱀장어처럼 버둥거리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물고 할퀴기도 했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부터 두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그러지 않으면 네놈의 몸을 고슴도치처럼 바늘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겠다. 가만 있으라구!" 골룸은 축 늘어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골룸을 단단하게 묶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살살, 살살해요. 그에겐 당신들에게 대적할 힘이 없어요. 될 수 있는 한 아프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만 하지 않으면 그는 한결 조용해질 겁니다. 스메아골! 이들은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내가 너와 함께 가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게 하겠어. 이들이 나도 함께 죽이지 않는 한 말이야. 주인을 믿어!" 골룸은 몸을 돌려 그에게 침을 뱉았다. 사람들은 그를 집어들어 눈에 두건을 씌우고 들고 갔다. 프로도는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그들을 따랐다. 그들은 덤불 뒤 개구멍을 거쳐 계단과 통로를 따라 내려가 다시 동굴로 돌아갔다. 두세 개의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사람들은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있던 샘은 사람들이 운반해 온 축 늘어진 꾸러미에 야릇한 눈길을 던졌다. "잡았어요?" 그는 프로도에게 물었다. "그래. 음, 아냐. 내가 잡진 않았어. 그는 날 믿었기 때문에 내게로 온 것 같아.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은 정말 싫어." "저도 그래요. 그렇지만 저 골칫덩이가 있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될 수가 없을 거예요." 한 사람이 다가와 호비트들에게 손짓을 해 동굴 안쪽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파라미르가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머리 위 틱이 진 벽에는 램프가 밝혀져 있었다. 그는 자기 옆에 놓인 등발이 없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부하에게 말했다. "손님들을 위해 술을 가져 와. 그리고 그 포로도 데려오고." 술이 날라져 왔고 이어서 안본이 골룸을 운반해 왔다. 그는 골룸의 머리에서 두건을 벗겨 낸 후 제 발로 서게 하고는 그 옆에 섰다. 골룸은 눈동자의 적의를 두텁고 파리한 눈꺼풀로 숨기며 눈을 깜박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비린내(그는 아직도 손에 한 마리를 쥐고 있었다)가 나는 것이 영락없이 비참한 포로의 몰골이었다. 성긴 머리카락을 무성한 잡초처럼 뼈만 앙상한 이마 위에 엉클어 놓은 채 그는 훌쩍였다. "풀어 줘요! 풀어 달라구요! 끈이 아파요. 그래요, 끈이 아프다구요. 그리고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 비참한 생물을 내려다보며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연민이나 놀라움의 빛이 전혀 없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네놈은 포박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단 말이지? 다행히도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 그러나 네놈은 오늘밤 들어오면 죽는 곳에 온 거야. 이 웅덩이의 물고기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단 말이다. " 골룸은 손에서 물고기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물고기를 원치 않아요." "물고기에 대한 대가가 아니야. 단지 이곳에 와 웅덩이를 바라본 것만으로도 죽음의 형벌을 받게 돼. 지금껏 여기 있는 프로도의 간절한 부탁으로 네 목숨은 부지되고 있는 거야. 그가 말하기를 네가 적어도 그에게선 몇 마디 감사의 말을 들을 만큼 도움을 주었다는 거야. 그렇지만 넌 내 의문을 풀어 주어야 해. 네 이름은 뭐지? 넌 어디서 온 거냐?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거야? 네가 하는 일은 뭐지?" 그러자 골룸이 대답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름도, 하는 일도, 보배도, 아무것도 없다구요. 다만 배가 비어 시장했을 뿐이에요. 그래요, 배가 고팠던 거라구요. 불쌍한 녀석이 몇 마리 작은 물고기를, 더럽고 뼈만 앙상한 작은 물고기를 잡은 벌로 죽인다니요. 참으로 현명하고 참으로 정당하군요." "그렇게 현명하진 못하지. 그렇지만 정당하긴 해. 그래, 아마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지혜에 어울릴 만큼은 정당하지. 그를 풀어 주시오 프로도." 파라미르는 허리띠에서 작은 칼을 빼내 프로도에게 건네주었다. 골룸은 그 몸짓을 오해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프도로는 달래듯 말했다. "자, 스메아골! 날 믿어야 해. 난 너를 버리지 않아. 할 수 있는 한 진실하게 대답하라구. 그게 네게 이가 되지 해가 되지는 않아." 그는 골룸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끈들을 자르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말했다. "이리로 와! 날 쳐다봐! 이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느냐?" 골룸은 눈을 들어 마지못한 듯 파라미르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모든 빛이 사라진 음침하고 파리한 눈길로 맑고 흔들림없는 곤도르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곧 골룸은 눈을 떨어뜨리며 움츠러들더니 이윽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떨며 훌쩍거리고 말했다. "우린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았구요. 절대 여기 온 적도 없고 다시 오지도 않겠어요." "네 마음 속에는 잠겨진 문들과 닫혀진 창들이 있고 그 뒤엔 어두운 방들이 있어. 그러나 그 점에서 네가 진실을 말한 걸로 판단된다. 네겐 잘된 일이야. 넌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으며 또 말이나 신호로 살아있는 자를 결코 이리로 데려오지 않겠다고 어떤 식으로 맹세하겠느냐?" 골룸은 프로도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주인이 알아요. 그래요, 주인님이 내 마음을 안다구요. 주인님이 우릴 구해만 준다면 그에게 약속을 하겠어요. 우린 그것에 걸고 약속하겠어요, 그래요." 그는 프로도의 발치로 기어가서는 칭얼거렸다. "구해 주세요, 훌륭한 주인님! 스메아골이 보배에게 약속해요, 굳게 약속해요. 절대로 다시 오지 않고 절대 말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안해요, 절대로 안한다구요!" "그만하면 됐소?" 파라미르는 프로도를 향해 물었다. "예. 여하튼 당신은 이 약속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의 법대로 집행하셔야 해요. 그 외엔 방도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난 나에게 오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했어요. 난 신의없는 자가 되기는 싫습니다." 파라미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좋소."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골룸을 향해 말했다. "널 너의 주인에게,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에게 넘기겠다. 그가 널 어떻게 처리할건지 밝혀 달라고 해라!" 그러자 프로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오나 파라미르공이시여, 아직 당신은 바로 그 프로도에 관한 처리는 밝히지 않으셨어요. 그러니 그걸 확실히 알 때까지는 그도 그 자신이나 그 동지들에 관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지요. 당신의 판결은 아침까지 미뤘었는데 이제 그때가 가까웠습니다. " "그럼 내 심판을 밝히겠소, 프로도. 더 높은 권력을 떠받드는 내 입장에 주어진 권한의 범위 내에서 밝혀 두오만 당신은 곤도르의 영토 내에선 과거의 가장 먼 경계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소. 다만 당신 자신이나 당신과 동행하는 어떤 자라도 무단으로 이곳에 올 수는 없소. 이 심판은 만 일 년 동안 유효할 것이며 그 다음은 시효가 지날 거요. 만일 당신이 그 기간 내에 미나스 티리스로 가서 그 도시의 영주이자 섭정이신 분을 알현하지 않는다면 말이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영주께 내 심판을 추인받고 그 기간을 종신으로 연장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겠소. 그 기간 내에는 당신의 보호하에 있는 어떤 자라도 내 보호와 곤도르의 방패 아래 있게 될 것이오. 대답이 되었소?" 프로도는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됐습니다. 그리고 만일 참으로 높고 고귀한 분께 제가 얼마간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전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큰 가치가 있소. 자, 그럼 이자를, 이 스메아골을 당신의 보호 하에 두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샘은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만한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어느 호비트라도 그랬을 것처럼 그도 파라미르의 그 정중한 말에 한숨을 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샤이어에서라면 그와 같은 문제에 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감사의 말과 절이 필요했을 것이다. 파라미르는 골룸에게 몸을 돌리며 말한다. "그럼 네게 일러 두지. 넌 죽음의 심판을 받고 있어. 그러나 프로도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널 해치지 않겠다. 그렇지만 어느 곤도르인에게든지 너 혼자 헤매는 것이 발견되면 그 심판은 곧바로 실행된다. 그리고 만일 주인을 잘 섬기지 않는다면 곤도르 안이건 밖이건 간에 넌 즉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제 대답해라. 어느 쪽으로 갈 테냐? 프로도의 말로는 네가 길잡이였다고 하는데. 그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었지?" 골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비밀로 덮어 두지 않겠다. 대답해라! 아니면 심판을 뒤집을 테니!" 그러나 골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내가 대신 답해 드리죠. 그는 내가 요청한 대로 암흑의 성문까지 데려다주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통과할 수가 없었지요." "그 이름없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린 문은 없소."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걸 알고 우리는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잡았습니다. 그가 말하길 미나스 이딜 부근에 길이 하나 있다고, 아니 있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미나스 모르굴이오." 파라미르가 정정해 주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그 길은 그 오래된 도시가 있는 계곡 북쪽 사면의 산맥 속으로 뻗쳐 올라가는 것 같아요. 그 길은 높은 고개로 올라 거기서 그 너머까지 내리막이 된답니다." "그 높은 고개의 이름을 아오?" 파라미르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다시 말했다. "키리스 운골이오." 그 순간 골룸은 날카롭게 쉿쉿거리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파라미르는 골룸을 향해 말했다. "내 말이 맞지?" 골룸은 마치 무엇에 찔린 듯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에요! 그래요, 그래. 그 이름을 한 번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이름이 우리에게 중요할 게 뭐예요? 주인이 들어가야만 한다고 말해서 우린 어떤 길을 찾아야만 했고 게다가 다른 길은 전혀 없다구요." "다른 길은 없었다고? 그걸 어떻게 알지? 저 어둠의 왕국 경계를 구석구석 살펴본 자가 있단 말인가?" 파라미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오랫동안 골룸을 바라보았다. 곧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자를 끌고 가게, 안본. 부드럽게 대해 줘라. 그렇지만 잘 감시해. 그리고 스메아골, 폭포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지 말아라. 그 바위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명도 못 채우고 죽을 테니까. 이제 가서 물고기나 먹으라구." 안본은 움츠린 골룸을 앞세우고 걸어나갔다. 구석진 곳에는 커튼이 드리워졌다. "프로도, 내 생각엔 당신이 이 일을 매우 현명치 못하게 처리하는 것 같소. 난 당신이 그자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지 않소. 그자는 사악하오." "아닙니다. 완전히 사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전적으로 사악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자에게는 악의가 뱀처럼 육신을 좀먹고 있어 사악함이 점차 커지고 있소. 그자의 인도를 받는다고 당신에게 좋아질건 없을 거요. 만일 당신이 그 자와 헤어지겠다면 난 그자를 자신이 거명하는 곤도르 변경의 어느 지점까지라도 안전하게 데려다주게 하겠소."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는 오랫동안 해온 대로 날 뒤쫓아오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난 그를 내 보호 하에 두고 그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겠다고 몇 차례나 약속을 했지요. 저에게 그와의 약속을 어기라고 요구하시진 않으시겠지요?" "그러진 않겠소. 그러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소. 특히 친구가 자신이 처한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땐 약속을 깨라고 충고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러나 그렇게 하진 않겠소. 만일 그가 당신과 동행하겠다면 이제 당신은 그를 감당해야 하오. 그렇지만 난 당신이 키리스 운골로 가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자는 그곳에 대해 아는 바를 당신에게 전부 말해 주지는 않았소. 난 그자의 마음 속에서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간파했소. 키리스 운골로 가지 마시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암흑의 성문으로 되돌아가 경비병들에게 이몸을 넘겨 주고 말아야 할까요? 당신은 그곳에 관해 어떤 사실을 아시기에 그토록 그 이름을 두려워하시나요?"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소. 요즘엔 우리 곤도르인이 그 행로를 가본 적이 없소. 우리들 젊은이들 중엔 아무도 그곳을 가본 이가 없으며 또 암흑산맥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소. 그곳에 관해 우리가 아는 바는 단지 오래된 이야기와 지난 시절의 풍문들뿐이오. 그러나 미나스 모르굴 위쪽의 고갯길들에는 어떤 음흉한 공포의 대상이 자리잡고 있소. 만일 키리스 운골을 거명하면 노인들이나 전승지혜의 대가들은 얼굴색이 하얘져 말을 잃을 것이오. 미나스 모르굴의 계곡은 아주 오래전에 악의 수중에 들어갔소. 추방되었던 적이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이딜리엔의 대부분을 우리가 장악하고 있을 동안에도 그곳은 위협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 도시는 한때 견고했던 곳이고 미나스 티리스의 자매 도시로 기품있고 아름다운 곳 미나스 이딜이었소. 그러나 그곳은 적이 처음으로 권능을 발휘해 지배했던 사악한 인간들에 의피 점령되었소. 적이 몰락한 후로는 정처없이 지배자도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그 군주들은 음흉한 사술에 빠져든 뉴메노르인들이었다고 하오. 적이 그들에게 권능의 반지를 주어 장악한 후 그들은 끔찍하고도 사악한 살아있는 악령이 된 것이오. 그가 가고나자 그들은 미나스 이딜을 탈취해 거처로 삼고 그곳과 그 부근의 모든 계곡을 온통 황폐화시켰소. 그곳은 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왜냐하면 폐허가 된 성벽 속에는 형체없는 두려운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이오. 거기엔 아홉 명의 군주가 있는데 그들이 비밀리에 섬기며 그 권위를 준비해 온 그 지배자의 귀환이 이루어진 후 그들은 다시 강성해졌소. 곧이어 아홉 악령의 기사들이 암흑의 성문으로부터 출정했고 우린 그들을 버터 낼 수가 없었소. 그들의 성채에 접근하지 마시오. 발각되고 말 것이오. 그곳은 잠들지 않는 악의 장소이며 눈꺼풀없는 눈들로 가득한 곳이오. 그쪽으로 가지 마시오!" "그렇지만 당신은 내게 다른 어느 길로 가라고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듯 당신께서 직접 나를 그 산맥이나 그 너머까지 안내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성회의의 엄숙한 서약에 의해 난 그 산맥을 넘어 길을 찾거나 아니면 찾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비참한 종말이 무서워 그 길을 거부하고 돌아선다면 내가 인간들과 요정들에게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내가 그 물건, 당신의 형을 욕망으로 미치게 만든 그 물건을 가지고 곤도로로 가기를 바라십니까? 그것이 미나스 티라스에 어떤 마력을 발휘할까요? 온통 썩은 것으로 가득찬 죽음의 땅을 사이에 끼고 서로를 바라보고 히죽이 웃는 미나스 모르굴이 두 개가 되지 않겠어요?" "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요?" "모르겠소. 난 다만 당신이 죽음이나 고통의 길로 가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오. 그리고 미스랜더라면 이 길을 택하리라고 생각지 않소." "그렇지만 그는 가버렸으니 난 내가 찾을 수 있는 길들을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찾을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그건 가혹한 운명이고 절망적인 사명이오. 그러나 최소한 그 안내자 스메아골을 조심하라는 내 충고는 명심하시오. 그자는 얼마전에 살생을 저질렀소. 나는 그자에게서 그것을 읽었소." 파라미르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 우릴 이렇게 만나자마자 헤어지는군요,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여. 다정한 인사를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소. 난 이 태양 아래서 언젠가 다시 당신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을 수가 없구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은 당신과 당신 종족에게 보내는 내 축복을 받고 떠날 것이오. 음식이 준비될 동안 잠시 쉬시오. 사실 난 그 기어다니는 스메아골이 어떻게 그 물건을 소유하게 되었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그걸 잃었는지에 관해 알고 싶지만 그 문제로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진 않겠소. 바라기 힘든 일이지만 만일 당신이 산자들의 땅으로 돌아와 우리가 양지바른 벽 옆에 앉아 과거의 슬펐던 일을 웃어 넘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때 말해 주겠지요. 그때까지, 아니면 뉴메노르의 멀리 보는 신석이 볼 수 있는 그 너머의 또 다른 시간까지 안녕히 지내시오!" 그는 몸을 일으켜 프로도에게 깊숙히 고개를 숙이고는 커튼을 걷고 동굴로 걸어나갔다. 제18장 교차로 프로도와 샘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시 누운 채 휴식을 취했다.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후 세숫물이 준비되었고 그 다음에는 삼인분 음식이 차려진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파라미르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전날 벌어졌던 전투 이후 한잠도 자지 않았지만 피로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라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중에 허기로 고생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당신들에겐 길양식이 거의 남은 것 같지 않기에 여행자들에게 알맞은 음식을 행랑 속에 조금 넣게 했소. 이딜리엔에서는 마실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지만 생생한 죽음의 계곡 임라드 모르굴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물은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오. 또한 이 사실도 알려드려야겠소. 내 척후병들과 경비병들 전부가, 심지어 모라논이 보이는 곳까지 갔던 이들까지 모두가 귀환했는데 그들은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했소. 그 땅이 팅 비어 있다는 거요. 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발소리나 나팔소리 또는 활시위소리 등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정적이 이름없는 대지를 휩싸고 있는 거요. 이게 어떤 조짐인지 모르겠소. 그러나 이제 시간은 어떤 종말을 향해 빠르게 흘러가고 있소.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소. 여유 있을 때 서두르시오. 준비가 됐으면 갑시다. 곧 태양이 떠오를 것이오." 호비트들의 행랑(전보다 약간 더 무거웠다)과 함께 윤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튼튼한 지팡이 두 개가 날라져왔다. 지팡이는 끝부분에 쇠가 박혔으며 머리부분에는 무늬가 새겨지고 가죽끈이 달려 있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당신들께 드릴 마땅한 선물이 없구려. 그렇지만 이 지팡이를 받으시오. 황야를 걷거나 기어오르는 데 쓸모가 있을 겁니다. 백색산맥의 인간들도 그런 것을 사용하지요. 물론 이것들은 당신들 키에 맞게 잘라 새로 쇠를 박은 거요. 이것들은 곤도르의 목공들이 애용하는 레베스론이라는 아름다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고 길을 찾아 다시 돌아오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지요. 부디 그 효능이 당신들이 들어가는 암흑의 땅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오." 호비트들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프로도가 사례를 했다. "참으로 관대한 영주시요. 반(半)요정 엘론드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길을 가는 도중 은밀하기 예기치 않은 우정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지요. 분명 저는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러한 우정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우정을 얻게 된 것은 정말 전화위복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사람들이 한쪽 구석에서 골룸을 데리고 나왔다. 비록 그는 프로ㄷ에게 바싹 붙어 파라미르의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파라미르는 다시 프로도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이 길잡이는 눈을 가려야 하오. 그러나 원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하인 샘와이즈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소." 사람들이 눈을 가리자 골룸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프로도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우리 셋 모두의 눈을 가려 주세요. 내 눈을 맨 먼저 가리고요. 그러면 아마 아무 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그의 말대로 눈을 가리운 후 그들은 헤네스 안눈의 동굴 밖으로 인도되었다. 통로와 계단을 지나자 그들은 신선하고 감미롭고 서늘한 아침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가린 채 그들은 얼마간 완만한 길을 오르고 내리며 계속 걸었다. 드디어 파라미르가 가리개를 풀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다시 숲에 서 있었다. 이제 그들과 개울이 흐르던 협곡 사이에는 기다란 남향의 비탈이 가로놓여 있어 폭포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쪽 나무들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그것은 세상이 그곳에서 끝나고 오로지 하늘만을 면한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라미르가 말을 꺼냈다. "여기서 우리의 길은 갈라지오. 내 권고를 받아들이겠다면, 아직은 동쪽으로 가지 마시오. 계속 곧장 가시오. 그래야 몇 마일 동안 숲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서쪽으로는 때론 급작스럽게 가파르고 때론 긴 언덕비탈을 이루며 거대한 계곡으로 꺼져들어가는 절벽이 있소. 그 가장자리와 숲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마시오. 내 생각엔 당신들은 당분간은 햇빛을 받으며 걸을 것 같소. 그 땅은 거짓된 평화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사악함은 잠시 물러가 있을 뿐이오. 잘 가시오, 갈 수 있는 동안!" 그는 자기 종족의 방식대로 몸을 굽혀 호비트들을 포옹하고나서 양 손을 그들의 어깨에 올려 놓은 채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모든 선한 이들의 선의가 함께 할 것이오!" 그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파라미르는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떠나 약간 떨어진 채 서 있던 두 명의 호위병에게로 갔다. 초록색 차림의 그들 세 사람은 호비트들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움직여 눈깜짝할 새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파라미르가 서 있던 숲은 마치 꿈이 지나간 것처럼 텅 비고 황량해 보였다. 프로도는 한숨을 내쉬고 남쪽을 향해 돌아 섰다. 골룸은 그 모든 예절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려는 양 나무둥치를 파헤치고 있었다. 샘은 그를 보고 또 배가 고파진 건가 생각하며 말했다. "자, 이제 다시 출발이야!" 그러자 골룸이 말했다. "이제 갔어? 역겹고 악독한 인간들이야! 아직도 스메아골은 목이 아프다구, 정말이야! 가자!" 프로도도 말했다. "그래, 가자! 그러나 만일 네게 은총을 베푼 이들에게 험담밖에 할 수 없다면 입을 다물고 있어!" "훌륭하신 주인님! 스메아골이 농담을 했을 뿐이예요. 언제나 용서해 주시죠, 그럼, 그렇지요. 오, 그래요. 훌륭하신 주인님, 훌륭한 스메아골!" 프로도와 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행랑을 메고 지팡이를 손에 쥔 다음 그들은 이딜리엔의 숲속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그날 두 번 휴식을 취하며 파라미르가 준비해 준 음식을 먹었다. 말린 과일과 소금에 절인 고기는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기에 적합했으며 빵은 신선함을 유지할 동안 먹기에 충분했다. 골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태양이 그들 머리 위를 지나 지기 시작하자 서쪽 나무들 사이로 새들어온 빛은 황금색이 되었다. 그들은 내내 서늘한 초록 그림자 아래로 걸었으며 주위는 고요했다. 새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거나 아니면 벙어리가 되어버린 듯했다. 고요한 숲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왔으며 그들은 땅거미가 지기 전에 지쳐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이 헤네스 안눈으로부터 이십일 마일 이상을 걸었던 것이다. 프로도는 늙은 나무 아래 깊은 구덩이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샘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는 몇 번 깨어났지만 골룸을 볼 수가 없었다. 골룸은 호비트들이 쉬기로 결정하자마자 몰래 빠져나간 것이었다. 그는 근처 어떤 구덩이에서 혼자 잠을 자려는지 아니면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먹이를 찾아 해매 다닐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빛이 가물거리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둘을 깨웠다. "일어나요, 일어나! 아직 남쪽과 동쪽으로 가야 할 길이 멀어요. 호비트들은 서둘러야 해요!" 그날은 정적이 좀더 짙어졌을 뿐 그 전날과 별 다름 없이 지나갔다. 대기가 음산해져 숲속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곧 천둥이라도 칠 것 같았다. 골룸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느라 가끔 걸음을 멈추고는 혼자 중얼대며 더 속도를 내야 한다고 재촉하곤 했다. 주간행군이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 오후의 햇살이 쇠약해짐에 따라 숲은 점점 성겨지며 나무들은 더 크고 드문드문해졌다. 거대한 감탕나무들이 넓은 공지에 어둡고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물푸레나무가 섞여 있었다. 떡갈나무들 또한 거인 같은 자태로 갈색과 초록이 뒤섞인 봉오리를 막 내밀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이제 잠들려고 접혀진 하얗고 푸른 잎의 아기똥풀과 아네모네로 알록달록한 긴 초록의 풀밭이 펼쳐졌다. 히아신드도 드넓게 자리잡은 채 매끄러운 화관의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짐승이건 새건 살아있는 생물은 볼 수 없었으나 골룸은 이 탁 트인 곳에서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은 긴 그림자들을 따라 재빨리 옮겨다니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들이 숲의 경계에 이르렀을 무렵 빛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들은 뱀처럼 뒤틀린 뿌리를 제방 아래로 뻗친 옹이투성이의 늙은 떡갈나무 아래 앉았다. 앞엔 길고 희미한 계곡이 자리잡고 있었다. 음산한 저녁하늘을 배경으로 계곡 기슭으로부터 다시 푸른 회색빛의 숲이 남쪽으로 뻗쳤다. 오른쪽으로는 곤도르의 산맥이 불길 같은 반점이 얼룩진 하늘 아래 멀리 붉게 타올랐다. 왼쪽으론 어둠이, 즉 모르도르의 우뚝 솟은 성벽이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계곡이 뻗어나와 안두인대하를 향해 점차 넓은 골을 이루어 가파르게 내리뻗었다. 바닥으로는 세찬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프로도는 개울물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가르고 다가오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그 옆으로 이쪽 편에는 창백한 리본처럼 아래로 구불구불 도로가 나 있어 가물대는 석양빛이 전혀 닿지 않는 차가운 회색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프로도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림자진 바다 위에 떠도는 것처럼 고적하고 음울한 오래된 탑의 높고 희미한 첨단부와 들쑥날쑥한 첨탑들을 본 것 같았다. 그는 골룸에게 몸을 돌렸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 "예, 주인님. 위험한 곳이에요. 이건 달의 탑으로부터 강가의 폐허가 된 도시로 뻗치는 도로예요. 그 폐허의 도시는 아주 기분나쁜 곳인데 적으로 가득찼어요. 우린 인간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요. 호비트들은 궤도에서 멀리 벗어났어요. 이젠 동쪽으로, 저기 위쪽으로 가야 해요." 그는 어둠 속에 잠긴 산맥을 향해 말라빠진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 우린 이 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요. 오, 안 돼요! 잔인한 종족들이 저 탑에서 내려와 이리로 온다구요." 프로도는 그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지금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에 잠긴 텅 빈 폐허까지 내리뻗친 길은 고적하고 내버려진 듯 보였다. 그러나 대기 속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사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다시 멀리 뾰족탑들이 어둠 속으로 잠기는 것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물소리가 차갑고 잔혹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악령들의 계곡에서 흘러나온 오염된 개울 모르굴두인의 물소리였다. "어떻게 한다? 우린 먼 길을 걸어왔어. 뒤쪽 숲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누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볼까?" 프로도가 말하자 골룸이 대답했다. "어둠 속에선 숨을 필요가 없어요. 호비트들이 숨어야 하는 건 낮시간이에요. 그래요, 낮이라구요." 그러자 샘도 말했다. "자, 한밤중에 다시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린 잠시 쉬어야 해.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어둠의 시간은 남을 거야. 만일 네가 길을 안다면 우리를 멀리까지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말이야." 골룸은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나무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숲의 경계를 따라 한동안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사악한 도로가 가까운 곳에서는 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간 의논한 후 그들은 커다란 가시나무의 갈래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줄기에서 뻗어나온 두터운 가지들은 좋은 은신처를 제공했으며 또한 꽤 안락한 피난처가 되었다. 밤이 내려앉으면서 지붕 같은 나무 아래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프로도와 샘은 물을 조금 마시고 빵과 말린 과일을 먹었지만 골룸은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호비트들은 눈을 감지 않았다. 골룸이 깨어났을 때는 자정이 약간 지났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호비트들은 눈꺼풀이 없는 골룸의 흐릿한 눈이 자신들을 향해 번득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늘 그랬듯이 귀를 기울이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도 이전에 보았듯이 밤의 시간을 알아 내기 위해 그가 늘상 하는 방식이었다. "쉬었나요? 잘 잤어요? 이제 갑시다." 골룸이 말하자 샘이 으르렁대듯 대답했다. "우린 쉬지 못했어. 자지도 못했고 그렇지만 가야 한다면 가겠어." 골룸은 곧장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네 발로 땅을 짚었고 호비트들은 그보다 느리게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골룸을 앞세워 동쪽의 어둡고 비탈진 땅으로 다시 나아갔다. 거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제 밤이 꽤 깊어져, 걸려 넘어지고나서야 나뭇가지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지면은 더 울퉁불퉁해져 걷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골룸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그들을 인도해 찔레덤불이 우거진 황야를 헤치며 때로는 깊은 틈새나 어두운 구덩이를 돌고 때로는 관목으로 뒤덮인 시커먼 분지 속으로 내려갔다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약간 내려갔을 경우 올라가는 비탈은 언제나 더 길고 가팔랐다. 그들은 꾸준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처음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다보니 그들이 떠나온 숲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것은 광대한 짙은 어둠처럼,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더욱 어두운 밤처럼 깔려 있었다. 동편에서 거대한 칠흑의 어둠이 희미하고 뿌연 별들을 삼키며 서서히 번져오고 있었다. 지는 달은 뒤쫓는 구름을 벗어났지만 그 주위로는 빛바랜 누런 광채가 둘려 있었다. 마침내 골룸이 호비트들에게 돌아섰다. "곧 날이 밝아요. 호비트들은 서둘러야 해요. 사방이 탁 트인 이런 곳에서 어물거리는 건 안전하지 않아요. 서둘러요!" 그가 보속을 빨리 하자 그들은 지쳤지만 그 뒤를 따랐다. 곧 그들은 거대하고 가파른 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최근에 있었던 불길로 타 버린 빈터가 놓여 있었지만 등성이 대부분은 금작화와 키 작고 거친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꼭대기로 다가갈수록 금작화의 덤불은 점점 더 우거졌다. 아주 오래되고 키가 큰 금작화는 아래쪽은 가늘고 줄기가 길쭉했지만 위쪽으로 갈수록 빽빽해졌으며 벌써 노란 꽃을 피우고 있어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고 빛을 발하며 여린 향기를 발산했다. 가시달린 잡목의 숲은 높이 솟아 있어 호비트들은 똑바로 서서도 가시로 덮인 길고 메마른 낭하를 지날 수 있었다. 그 넓은 산등성이 저편에서 그들은 발을 멈추고 은신하기 위해 뒤엉킨 가시나무숲 아래로 기었다 지면까지 휘어진 가지들엔 오래된 찔레덤불이 아지러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는 죽은 가지와 관목으로 기둥을 이루고 봄의 첫 잎새와 싹들로 지붕이 이어진 빈터가 있었다. 그들은 잠시 누워 있었으나 너무도 지쳐 한동안은 음식조차 먹을 수 없었다. 은신처와 구멍을 통해 밖을 빼꼼히 내다보며 그들을 천천히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날은 새지 않고 다만 죽은 듯한 갈색의 어스름이 계속되었다. 동쪽에서는 금방이라도 비를 내리쏟을 듯한 짙은 구름 아래 칙칙한 붉은빛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건 새벽의 붉은 여명이 아니었다. 그 사이의 어지러이 널린 대지를 가로질려 에펠 듀아스산맥이 그들을 험악하게 노리고 있었다. 산맥 아래쪽은 밤이 두텁게 깔린 채 빠져나가지 않아 캄캄하고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으나 위쪽은 타는 듯한 붉은빛을 배경으로 뻐죽삐죽한 봉우리들과 등성이들의 윤곽이 견고하고 위협적으로 드러났다.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산맥의 사면이 어둠 속에서 어둡고 캄캄하게 도드라져 서쪽으로 뻗고 있었다. 프로도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지? 저 멀리 시커먼 덩어리 너며 있는 게 그 모르굴계곡의 입구인가?" 그러자 샘이 대답했다. "벌써 그곳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 우린 오늘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텐데요. 비록 낮이더라도 말이에요." 그러나 골룸은 의견이 달랐다.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우린 곧 교차로로 가야 해요. 그래요, 교차로로요. 저 너머에 있는 길이에요, 주인님." 모르도르 위에 걸린 붉은빛이 사그라들었다. 동쪽에서 거대한 증기가 피어오르자 더한층 깊은 어스름이 그 위로 기어올랐다. 프로도와 샘은 약간의 음식을 먹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지만 골룸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그들의 음식은 전혀 손도 대지 않았으며 물만 조금 마시고는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덤불 밑으로 이리저리 기어다니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냥하러 가는 거겠죠." 샘은 이렇게 말하며 하품을 했다. 이번에는 그가 먼지 잘 차례였고 그는 곧 깊은 잠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찾으러 백 엔드의 정원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등에 무거운 짐을 졌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야 했다. 어찌된 셈인지 도처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으며 가시나무와 고사리가 맨 아래쪽 울타리 근처의 화단을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만 난 너무 지쳤어." 하고 중얼거리며 샘은 자신이 찾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내 담뱃대!" 하고 말하는 동시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눈을 뜨고서 왜 자신이 울타리 아래 드러누워 있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으니라구! 담뱃대는 네 꾸러미 속에 있잖아." 샘은 담뱃대는 꾸러미 속에 있지만 연초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이 백 엔드에서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일어나 앉았다. 거의 어두워진 것 같았다. 왜 프로도씨는 차례를 깨뜨리고 계속 자게 내버려 두었을까, 저녁까지 계속해서 말이야? "주무시지 않았나요, 프로도씨? 시간이 얼마나 됐죠?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날이 밝아지지 않고 어두워지고 있는 거야. 점점 더 어두워져. 내 생각에는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어. 그리고 넌 다만 세 시간 가량 잤을 뿐이야." "무슨 일인지 궁금해요.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나요?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폭풍우 가운데에서 최악의 것일 거예요. 우리는 울타리 아래 박혀 있지 말고 깊은 구멍 속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거예요." 그는 귀를 기울였다. "저게 뭐죠? 천둥인가요, 북소린가요, 아니면 무슨 소리지요?" "모르겠어. 저 소리가 시작된 지 이제 한참됐어. 때론 지면이 떨리는 것 같고 때론 둔중한 공기가 귀를 울리는 것 같아." 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룸은 어디 있지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안 돌아왔어. 흔적도 소리도 없었고." "음, 전 그 녀석을 참을 수가 없어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여행에 휴대하는 것 중에는 길 가다 잃어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게 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오고서 이제 사라져 버리는 건, 또 그것도 우리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 시점에 사라져 버리는 건 바로 그 녀석다운 짓이에요. 말하자면 그 녀석이 무슨 쓸모가 있을 건가 하는 게 문젠데 저는 그 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넌 그 늪을 잊고 있어. 난 그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하긴 저도 그놈이 덫에 걸리지 않길 바래요. 프로도씨 생각도 그렇겠지만 어쨌든 그놈이 다른 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린 어쩔 수 없이 분란을 겪어야만 할 거예요." 그 순간 우르릉 하는 울림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크고 깊게 들렸다. 발 아래 대지가 떨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린 분란을 겪어야 할 것 같군. 우리의 여정도 끝나가고 있는 게 아닌지 몰라."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늘 '생명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 고 말하곤 했어요. 또 '그리고 음식이 필요하지.' 하고 덧붙이곤 했지요. 좀 드시고 나서 주무시도록 하세요, 프로도씨." 샘이 생각하기에 오후라고 해야 마땅할 시간이 흘러갔다. 은신측에서 내다보니 그림자도 없는 회갈색 세계가 아무런 특색도 없고 색깔도 없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덥지는 않았다. 프로도는 몸을 뒤척이며 때로는 뭐라 중얼거리며 불편한 잠을 잤다. 샘은 그가 갠달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 번쯤 들은 것 같았다. 시간은 끝없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샘은 뒤쪽에서 쉿쉿거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골룸이 네 발로 기며 번득이는 눈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골룸은 나직하게 말했다. "일어나요, 일어나! 잠꾸러기들 같으니, 일어나라구! 일어나요, 시간이 없어요. 우린 가야 해. 그래요, 곧장 가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샘은 의심스런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웬지 겁이 났거나 아니면 흥분한 것 같았다. "지금 가자고? 무슨 속셈이야? 아직 시간이 안 됐어. 차 마실 시간도 안 됐단 말이야. 적어도 차 마실 시간이 있는 품위있는 자리라면 말이야." 골룸은 쉿쉿거렸다. "바보같이! 우린 품위있는 곳에 있지 않아. 시간은 급히, 그래 빨리 달리고 있어. 꾸물댈 시간이 없어. 우린 가야 해. 일어나세요, 주인님. 일어나요!" 골룸이 프로도를 할퀴듯 붙잡자 프로도는 소스라치며 깨어나 벌떡 일어나 팔을 그러쥐었다. 골룸은 몸을 비틀어 빼고는 뒷걸음쳐 물러나며 쉿쉿거리고 말했다. "바보같이 행동해선 안 돼요. 우린 가야 해요. 어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그들은 골룸에게서 아무것도 캐낼 수가 없었다. 어디에 갔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서두르는 것인지 그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샘의 가슴에는 의심이 가득했고 또 겉으로 드러냈지만 프로도는 마음 속에 이는 생각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짐을 들어올리고는 점차 짙게 몰려오는 어둠 속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골룸은 가능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몸을 숨기고 또 훤히 트인 공간에서는 몸을 지면에 닿을 정도로 숙인 채 뛰어 건너며 매우 은밀하게 언덕 사면 아래로 인도했다. 그러나 이제 빛은 아준 흐릿해져 눈이 밝은 야생동물이라 하더라도 두건을 쓰고 회색 망또를 걸친 호비트들을 거의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난쟁이들만큼이나 조심스럽게 걷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나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며 나아갔다. 약 한 시간 동안 그들은 말없이 일렬로 걸었다. 그들의 가슴은 어둠과 완벽한 정적에 짓눌려 있었다. 정적은 먼 곳에서 들리는 천둥소리나 구릉의 움푹 파인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은 희미한 굉음에 의해서만 이따금 깨질 뿐이었다. 그들은 은신처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산맥을 향해 위로 경사진 길고 울퉁불퉁한 비탈을, 골룸이 찾을 수 있는 한 곧바른 길을 따라갔다. 곧 앞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띠 모양으로 둘러선 나무들이 검은 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점차 가까인 다가서면서 그들은 그것들이 매우 오래된 엄청나게 큰 나무들임을 알았다. 마치 폭풍과 번개가 쓸고 지나갔으나 그 나무들을 죽이거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뿌리를 뒤흔들지는 못한 것처럼 윗부분은 마르고 부러졌어도 여전히 높이 치뻗치고 서 있었다. "교차로예요, 맞아요. 우린 저 길로 가야 해요." 골룸이 말했다. 은신처에서 떠난 후 처음 한 말이었다. 골룸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비탈 위로 인도했다. 얼마후 그들 앞엔 갑자기 남향로가 나타났다. 그 길은 산맥의 바깥쪽 기슭 주위로 구불구불 뻗어나가다 이윽고 거대한 원형의 나무들 사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골룸이 나직한게 말했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에요. 이 외엔 길이 없어요. 전혀 없다구요. 우린 교차로로 가야 해요. 그렇지만 서둘러야 해요. 조용히!" 적들의 야영지 내에 들어온 척후병들처럼 그들은 은밀하게 도로 쪽으로 기어내려가서는 제방 아래의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갔다. 마침내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 당도한 그들은 아치형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의 황폐한 공간을 발견했다. 그 중앙에는 네 갈래의 길이 만나고 있었다. 뒤로는 모라논으로 가는 길이 놓였고 앞으로는 그 길이 남쪽으로 길게 뻗쳤으며 오른쪽으로는 오스길리아스로부터 지어진 오래된 길이 교차점에서 왼쪽 동편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따라가야할 길이 바로 그 어둠의 길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잠시 그대로 서 있던 프로도는 하나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곁에 서 있는 샘의 얼굴 위에서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려 보니 나뭇가지들이 아치를 이룬 그 너머로 오스길리아스로 가는 도로가 쭉 펼쳐진 리본처럼 거의 곧게 서쪽으로 내리뻗어 있었다. 이젠 그림자 속에 잠긴 처량한 모습의 곤도르 너머 저 멀리에서 태양은 마침내 거대한 구름장막을 벗어나 기분나쁜 불길로 타오르며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붉게 타오르는 석양빛이 거대한 석상 위를 비춰 아르고나스의 거대한 돌기둥처럼 장엄하게 보이게 했다. 그것은 세월에 닳고 거친 손길에 훼손을 당한 석상이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으며 그 자리엔 모조품으로 대충 다듬은 둥근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돌 중앙엔 커다란 붉은 눈 하나가 조잡한 손길로 새겨져 있었다. 커다란 의자와 무릎 부분 주위엔 휘갈겨쓴 글씨로 모르도르의 더러운 종족이 사용하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프로도는 갑자기 직사광선에 끌려 늙은 왕의 머리를 보았다. 그것은 길가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저걸 봐, 샘! 왕에게 다시 왕관이 씌워졌어!" 눈동자는 텅 비어 있고 조각된 수염은 부서졌으나 높고 준엄한 이마 위엔 금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작은 횐 별 모양의 꽃들이 핀 덩굴꽃 한송이가 마치 죽은 왕을 조상하듯 왕의 이마를 감았고 돌로 된 머리칼 틈새에는 노란 꽃이 반짝였다. "영원히 정복할 수는 없는 거야!" 프로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잠시후 왕의 머리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태양이 완전히 물 속에 잠기자 마치 램프 위에 천을 덮어 씌운 것처럼 캄캄한 밤이 되었다. 제19장 키리스 운골의 계단 골룸은 겁에 질려 안달을 하며 프로도의 망또를 잡아당기고는 쉿쉿거렸다. "가야 해요. 여기 서 있어선 안 돼요. 서둘러요!" 프로도는 마지못해 서쪽을 등지고 길잡이가 이끄는 대로 동쪽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원형으로 늘어선 나무를 떠나 산맥을 향해 길을 따라 기어갔다. 길은 얼마간 곧게 뻗더니 곧 남쪽으로 굽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그들이 멀리서 보았던 바위의 거대한 사면 바로 아래로 이어졌다. 그 바위는 그들 위로 위압적인 모습으로 시커멓게 드러났으며 뒤편 어두운 하늘보다 더 어두웠다. 길은 그 그림자 아래로 기어가듯 이어졌고 그림자의 모퉁이를 돌고서는 다시 동쪽으로 가파르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프로도와 샘은 더이상 자신들의 위험에 대해 깊이 걱정하지도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프로도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그의 목에 달린 짐이 다시 그를 아래로 잡아당겼던 것이다. 거대한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이딜리엔에선 거의 잊혀졌던 그 무게가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발길이 닿는 땅이 가팔라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지친 듯 눈길을 들었다. 골룸이 말한 대로 반지악령들의 도시가 보였다. 그는 암벽에 기대 몸을 웅크렸다. 그림자의 심연같이 길게 경사진 계곡이 멀리 산맥 속으로 거슬러 올랐다. 에펠 듀아스산맥의 시커먼 사면을 자리삼아 미나스 모르굴의 성벽과 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주위의 대지와 하늘 모두가 어두웠으나 그곳만은 빛이 밝혀져 있었다. 그건 물론 과거 달의 탑 미나스 이딜의 대리석 성벽 속에 간직되었던 아름다운 달빛은 아니었다. 그 빛은 달빛보다 훨씬 창백했으며 부패물에서 나오는 역겨운 발광체처럼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성벽과 탑에는 마치 끝없는 어둠의 심연을 응시하는 듯한 수많은 총안과 창문이 뚫려 있었다. 탑의 첨단부는 어둠을 경계하는 거대한 유령의 머리처럼 이리저리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셋은 한동안 몸을 움츠리고 내키지 않는 눈길로 위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골룸이었다. 그는 다시 절박하게 그들의 망또를 잡아당겼지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둘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했다. 그들은 마지못해 한발 한발을 떼어놓았다. 발을 들었다가 다시 내디디는 사이가 몇 분씩이나 되는 것 마냥 시간은 거의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느릿느릿 하얀 다리에 이르렀다.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는 계곡 가운데의 개울을 건너 북쪽 성벽의 바깥 둘레로 열린 시커먼 성문을 향했다. 양쪽 제방으로 넓은 평지가, 옅은 하얀색 꽃들이 가득한 그림자진 초지가 깔려 있었다. 그 모습은 스스로 광채를 발하며 아름답게도 보였지만 동시에 편치 못한 꿈속의 일그러진 형체처럼 섬뜩했으며 또 욕지기나는 희미한 납골당의 냄새를 피웠다. 대기 속엔 부패한 냄새가 진동했다. 다리는 초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인간과 짐승의 형상을 본뜬 정교한 조상들이 세워져 있었으나 모두 더럽고 보기에 역겨웠다. 흐르는 물소리는 조용했으며 물결에선 증기가 올랐다. 다리 주위를 휘감고 오르는 증기는 몹시도 차가웠다. 프로도는 현기증이 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갑자기 자신의 의지 이외의 어떤 힘에 이끌린 것처럼 그는 비틀거리며 무엇을 찾는 듯 양 손을 내뻗고는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머리를 내두르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샘과 골룸은 그를 따라 뛰어갔다. 샘은 프로도가 다리 입구에서 비틀거리다가 막 쓰러지려는 순간에 팔을 잡았다. "그 길이 아니에요! 아니, 그 길이 아니라니까요!" 골룸이 나직하게 부르짖었다. 이빨 사이로 휘파람처럼 새어나오는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찢는 듯해 그는 겁에 질려 땅바닥에 웅크렸다. 샘은 프로도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멈추세요, 프로도씨! 돌아오세요! 그 길이 아니에요. 골룸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번만은 저도 그의 생각에 동의해요." 프로도는 눈두덩 위로 손을 들어 언덕 위의 도시로부터 시선을 가렸다. 빛을 발하는 그 탑에 홀렸던 것이다. 그는 성문을 향해 뻗은 희미한 도로를 뛰어가고픈 욕망과 싸웠다. 드디어 그는 간신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목에 걸린 반지가 자신을 거역해 줄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성에서 시선을 거두자 잠시 눈이 멀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은 조금도 꿰뚫어볼 수 없었다. 겁에 질린 동물처럼 땅바닥을 기던 골룸은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샘은 비틀거리는 주인을 받들고 이끌어가면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골룸을 따랐다. 개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는 암벽의 갈라진 틈새가 하나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샘은 자신들이 좁은 소로에 접어들었음을 알았다. 그 소로는 처음엔 큰 도로가 그랬던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송장 같은 꽃들이 핀 초지 위로 뻗더니 계곡의 북쪽 사면 속으로 굽이쳐 올라가며 점점 더 어두워졌다. 호비트들은 소로를 따라 나란히 걸어갔다. 앞서가는 골룸은 가끔 멈춰서 그들을 향해 손짓을 할 때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손짓을 할 때면 그의 눈은 마치 불길한 모르굴의 광채를 발하는 듯, 아니면 그에 합치되는 자기 몸 안의 기운이 발산되는 듯 초록과 흰색으로 반짝였다. 프로도와 샘은 줄곧 두려운 눈길로 어깨 너머를 힐끗거렸다가는 곧 다시 눈을 돌려 소로를 내려다보면서도 그 죽음과 같은 번득임과 어두운 눈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낑낑대며 천천히 나아갔다. 독기서린 개울이 내뿜는 악취와 증기를 벗어나 위로 오르자 숨쉬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머리도 맑아졌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사지는 마치 짐을 지고 밤새 걸었거나 아니면 거센 물결을 헤치고 헤엄을 친 것처럼 극도로 힘이 빠졌다. 마침내 그들은 잠시 멈추지 않고는 더 나아갈 수가 얼었다. 프로도는 발을 멈추고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이제 그들은 커다란 혹덩이 같은 벌거벗은 바위의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앞에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 있었다. 소로는 그 상단부를 빙 돌아 이어졌는데 그 폭은 절벽에서 튀어나온 돌출부 정도에 불과했고 게다가 오른쪽으로는 갈라진 틈이 있었다. 소로는 산의 가파른 남쪽 사면을 가로질러 뻗쳐 드디어는 그 위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쉬어야겠어, 샘. 이봐, 그게 무거워, 몹시 무거워. 이걸 얼마나 멀리까지 운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쨌든 저 길을 더 따라가기 전에 좀 쉬어야겠어." 그는 앞쪽의 길을 가리켰다. "쉬! 쉬! 쉬!" 골룸이 황급히 그들에게 되돌아오며 소리냈다.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절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프로도의 소매를 잡아 끌며 앞길을 가리켰다. 그러나 프로도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못하겠어." 그는 피로와 피로 이상의 것에 짓눌렸다. 마치 정신과 육체가 묵직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쉬어야겠어." 골룸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움과 불안감이 더했는지 대기 속의 보이지 않는 귀가 엿듣는 걸 막기라도 할 듯 손을 저으며 쉿쉿거렸다. "여기선 안 돼요. 여기서 쉬어선 안 된다구요. 바보 같은 짓이에요. 눈들이 우리를 볼 수 있단 말이에요. 다리까지 온다면 우리를 발견할 거라구요. 떠나요! 어서 올라가요, 가요!" 샘도 말했다. "가요, 프로도씨. 이번에도 그의 말이 옳아요. 우린 여기 머물러선 안 돼요." 프로도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말하는 것처럼 아득한 소리로 말했다. "좋아. 해보지." 그는 지겨운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 순간 발 아래 바위가 떨리고 흔들렸다. 어느 때보다 요란한 거대한 굉음이 지면을 울리며 산맥 속을 메아리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붉은 섬광이 밀어닥쳤다. 동쪽 산맥 저 너머로부터 솟아오른 섬광은 하늘로 치솟아 검은 먹구름을 붉게 물들였다. 그림자와 차갑고 죽음 같은 빛의 계곡 속에서 섬광은 극히 격렬하고 사나워 보였다. 톱니 모양의 칼처럼 보이는 봉우리와 산등성이들이 고르고로스에서 분출되는 불길을 배경으로 유난히 시커멓게 돌출돼 있었다. 이윽고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미나스 모르굴이 응답했다. 검푸른 번개가 확 타올랐다. 탑에서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구릉에서 갈퀴 모양의 푸른 불길이 음산한 구름 속으로 솟아올랐다. 대지에선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고 도시에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맹금들이 내는 것 같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와 격정과 두려움으로 날뛰는 말들의 새된 콧소리가 뒤섞여 대기를 찢으며 다가와서는 귀의 한계를 벗어난 음의 높이까지 치솟았다. 호비트들은 그쪽을 향해 돌아 귀를 손으로 막은 채 납작 엎드렸다. 끔찍한 외침소리가 넌더리나도록 길게 울리다가 침묵으로 끝맺어짐에 따라 프로도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좁은 계곡을 가로질러 이제 그의 눈길과 거의 수평을 이룬 곳에 사악한 도시의 성벽이 서 있었으며 이빨이 번득이는 벌려진 입처럼 움푹 꺼진 성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성문으로부터 대규모의 병력이 나왔다. 병사들은 암흑처럼 어두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프로도는 희멀겋게 빛나는 성벽과 도로를 배경으로 줄줄이 늘어선 작고 검은 형체들이 소리없이 빠르게 행진하며 끝없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앞으로는 거대한 무리의 기병들이 정렬된 그림자들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며 다른 누구보다 큰 자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그는 두건을 쓴 위에 무섭게 빛나는 왕관 모양의 투구를 쓴 외에는 온통 검은색 차림의 기사였다. 그는 이제 아래쪽 다리 근처로 다가왔다. 프로도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진정 아홉 반지악령 중의 군주가 무시무시한 부대를 전장으로 이끌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온 것인가? 차가운 손을 들어 치명적인 칼로 반지의 사자를 내리친 사나운 왕이 이곳에, 정녕 이곳에 있었다. 묵은 상처가 고통으로 고동쳤으며 프로도의 가슴에는 한기가 밀어닥쳤다. 온몸이 두려움으로 짓눌린 채 주문에 걸린 듯 꼼짝도 못하고 있는 바로 그때 그 기사는 다리 입구 앞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부대 역시 그 뒤에 정지했다. 잠시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흘렀다. 아마도 반지악령들 중의 제일인자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 것은 프로도의 목에 걸린 반지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계곡 속에 어떤 다른 권능이 존재함을 감지하고 한순간 마음이 어지러웠다.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둠을 훑어보느라, 공포를 자아내는 왕관투구를 쓴 검은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프로도는 다가드는 뱀 앞의 한 마리 새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는 반지를 끼어야 한다는 압박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 압박이 컸음에도 그는 거기에 따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반지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설사 그걸 낀다 하더라도 자신에겐 모르굴의 왕을 대적할 권능이 아직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기가 꺾이긴 했지만 그의 의지는 그 압박감에 복종하길 거부했다. 그는 다만 외부로부터 거대한 권능이 부딪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었다. 그 권능은 그의 손에 들러붙어 그것을 행사하려 하지 않고 다만 판단을 중지하며 (마치 먼 곳의 어떤 옛이야기를 생각하듯이) 마음 속으로 주시하는 동안 손을 차츰 목에 걸린 사슬로 움직이게 했다. 그제서야 그 자신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그는 억지로 손길을 돌려 가슴 부근에 보이지 않게 매달려 있던 다른 물건을 잡았다. 손에 닿는 촉감은 차고 단단했다. 그건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왔으나 그때까지는 거의 잊고 있던 갈라드리엘의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것을 만지는 순간 반지에 대한 온갖 상념은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반지악령 중의 군주는 몸을 돌려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다리를 가로질러 달렸고 검은 부대 전원이 그를 뒤따랐다. 아마도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은 요정의 망또를 둘러쓴 프로도를 볼 수 없었을 것이며 왜소한 적수의 마음이 강력해졌기에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급했던 것이다. 결전이 순간이 닥쳤기에 그는 위대한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서부로 진격해야 했다. 곧 그는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구불구불 휘어진 도로를 따라 사라졌으며 여전히 그 뒤로는 검은 대군의 행렬이 이어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실두르가 강성했던 시절 이후 이 계곡에서 그처럼 거대한 병력이 출동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토록 강력한 무기를 갖춘 사나운 무리가 안두인대하를 도하해 공격해 온 일도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출격한 무리는 모르도르의 여러 무리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도 아니었다. 프로도는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갑작스레 파라미르를 생각했다. '드디어 폭풍우가 닥친 거야.' 그는 생각에 잠겼다. '창과 칼의 그 거대한 진용이 오스길리아스로 향하고 있어. 파라미르가 제때 알게 될까? 짐작은 하겠지만 그 공세의 시간을 알았을까? 알았다 한들 아홉 반지악령 중의 군주가 가는데 이제 누가 그 여울을 방어할 수 있을까? 게다가 또 다른 병력도 밀려닥칠 텐데. 내가 너무 늦었어. 만사가 끝장이야. 길에서 너무 꾸물댄 탓이야. 다 끝났다구. 내 사명을 수행한다 한들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할 거야. 내 성공을 들을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거라구. 허사가 되고 말 거야.' 자신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프로도는 한탄했다. 그 동안에도 모르굴의 무리는 계속 다리를 건너갔다. 그때 아주 멀리서 마치 날이 밝아 문들이 열리는 볕든 이른 아침나절의 샤이어에 관한 기억들 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깨세요, 프로도씨! 깨어나시라구요!" 그 목소리가 만일 '아침식사가 준비됐어요.' 하고 덧붙여 말했더라도 그는 거의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일어나시라구요, 프로도씨. 그들은 갔어요." 철컹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미나스 모르굴의 성문들은 닫혀 버렸다. 창기병의 마지막 행렬이 도로 아래로 사라졌다. 탑은 여전히 계곡 전면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씽긋 웃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 속의 빛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나직하게 내리덮인 어두운 그늘과 정적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경계의 분위기엔 빈틈이 없었다. "일어나세요, 프로도씨! 그들은 갔어요. 우리도 가는 게 좋아요. 제 말을 알아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저곳에선 아직도 뭔가가 꿈틀대고 있어요. 눈이, 아니면 적어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 무엇이 말이에요. 우리가 한군데 오래 머무를수록 그만큼 빨리 우리를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어서요, 프로도씨!" 프로도는 머리를 치켜들고 곧 일어섰다.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약한 기분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이제 곧 그 반대의 기분을 느끼게 될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면서 그는 섬뜩한 미소까지 지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해내야만 하며 그리고 파라미르, 아라곤, 엘론드, 갈라드리엘, 갠달프 또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성공을 알게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목적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깨달았다.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또 다른 손엔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쥐었다. 벌써 손가락 사이로 선명한 빛이 샘솟듯 퍼져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유리병을 다시 가슴 속에 밀어넣은 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모르굴의 도시로부터 돌아서 위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갔다. 그의 모습은 어두운 심연 속의 한 줄기 가물거리는 회색빛에 불과했다. 미나스 모르굴의 성문들이 열렸을 때 골룸은 호비트들을 내버려 두고 돌출부를 따라 그 너머의 어둠 속으로 기어갔던 모양이었다. 이제 그는 이빨을 딱딱 마주치고 손가락을 소리나게 꺾으면서 기어 돌아왔다. 그는 쉿쉿거리며 말했다. "바보 같으니! 바보! 서둘러요! 위험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지나가지 않았어요. 서둘러요!"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돌출부로 기어올랐다. 다른 위험들을 그렇게 많이 겪어 왔지만 암벽에서 튀어나온 돌출부는 둘 모두에게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은 그리 오래 계속되진 않았다. 길은 다시 산허리가 융기한 둥근 모퉁이로 이어지더니 거기서 갑자기 바위 속의 좁은 입구로 통했다. 그들은 골룸이 말했던 첫 계단에 도달한 것이다. 어둠이 더 짙어져 그들은 손이 미치는 거리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골룸이 일이 미터 앞에서 그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그의 눈은 흐릿하게 빛을 발했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조심해요! 계단이에요, 아주 많아요. 조심해야 돼요!" 확실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양쪽에 벽이 있어 프로도와 샘은 처음엔 한결 쉬운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계단은 사다리처럼 가팔랐다. 그리고 위로 기어올라감에 따라 그들은 뒤편의 길고 시커먼 내리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계단은 좁고 간격이 고르지 않아 처음 생각과는 달리 위험스러웠다. 계단은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했으며 어떤 단은 허물어졌고 또 발길이 닿자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호비트들은 힘들여 나아갔다. 마침내 그들은 손가락에 필사적인 힘을 기울여 앞쪽 계단에 매달린 채 통증이 이는 무릎을 억지로 굽히고 길 지경에 이르렀다. 계단이 가파른 산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감에 따라 그들의 머리 위로는 암벽이 더욱 높게 솟아올랐다.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 드디어 그들을 향해 빤히 내려다보는 골룸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우린 올라온 거예요. 첫 계단은 지났어요. 이렇게 높이 올라오다니 정말 솜씨좋은 호비트들이에요. 솜씨가 아주 훌륭해요. 계단 몇 개만 더 지나면 끝이에요, 그래요." 샘과 프로도는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매우 지쳤지만 그를 따라 마지막 계단을 기어 올라가선 주저앉아 다리와 무릎을 문질렀다. 그들이 있는 깊고 어두운 통로는 비록 경사는 한결 완만하고 계단도 없었지만 앞쪽은 여전히 높이 치솟은 것 같아보였다. 골룸은 그들이 오래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직 또 다른 계단이 남았어요. 훨씬 긴 계단이에요. 다음 계단을 다 올라가서 쉬어요. 아직은 안 돼요." 샘은 신음소리를 냈다. "더 길다고?" "그럼, 더 길다구. 그렇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아. 지금까진 일직선 계단을 올라왔지만 이제부터는 나선형이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뭐가 있지?" "곧 알게 될 거야. 그럼, 곧 알게 된다구!" "넌 터널이 하나 있다고 말한 것 같은데. 터널이나 아니면 뚫고 지나가야 할 어떤게 없어?" "아, 그래, 터널이 하나 있어. 그렇지만 그곳을 지나기 전에 쉴 수가 있어. 그곳을 지난다면 거의 꼭대기에 다다른 셈이야. 지나기만 한다면 꼭대기에 이른 거나 마찬가지야. 아, 그럼!" 프로도는 몸을 떨었다. 기어오르느라 땀이 났지만 이젠 춥고 끈적끈적하게 느껴졌고 거기다 위쪽의 보이지 않는 고지에서 불어내리는 차가운 바람이 어두운 통로로 새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자, 계속 가지! 이곳은 앉아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통로는 몇 마일이나 계속되는 것 같았으며 차가운 바람이 계속 머리 위를 지나쳐 마침내 모진 바람으로 거세졌다. 산맥은 죽음과 같은 섬뜩한 숨결로 그들의 기를 꺾어 높은 곳의 비밀에 접근하지 못하고 다시 방향을 돌리거나 아니면 그 너머의 어둠 속으로 날려 버리려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오른쪽으로 벽을 만질 수 없게 되어서야 그들은 끝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검고 형체없는 거대한 암흑과 짙은 회색 어둠이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금시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구릉 아래로 간간이 흐릿한 붉은빛이 깜박여 그들은 앞쪽과 양 옆으로 거대한 봉우리들이 지붕을 떠받친 기둥처럼 높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넓은 바위턱 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몇백 미터나 기어올라온 것 같았다. 위쪽에는 벼랑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벽면 사이로 커다란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골룸은 절벽 가까이로 이끌었다. 거기서부터는 오르지 않고 걸어가도 되었다. 어둠 속에서 지면은 울퉁불퉁하고 위험했으며 낙석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모르굴계곡에 들어온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샘도 프로도도 더이상 짐작할 수 없었다. 밤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한번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암벽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앞에는 계단이 펼쳐졌다. 그들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길고 지루한 오르막길이었지만 그 계단은 산허리 속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거기서 거대한 벼랑의 표면이 뒤쪽으로 비탈졌고 그 위를 가로질러 계단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었다. 어느 한 지점에서 길은 어두운 틈새를 따라 이어졌으며 프로도가 아래를 힐끗 쳐다보자 모르굴계곡의 방대하고 깊은 죽음 도시에서 무명의 고갯길까지 이르는 악령들의 도로가 실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길은 계속 이어지다가 마침내 짧고 곧바른 마지막 계단을 올라 다시금 또 다른 평지에 닿았다. 그 소로는 거대한 협곡 속의 큰 고갯길에서 떨어져 나왔다가 에펠듀아스의 보다 높은 곳의 어느 작은 틈새 밑바닥으로 위험스런 진로를 잡았다. 호비트들은 양쪽으로 커다란 교각들과 들쑥날쑥한 봉우리들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엔 밤보다도 더 검은 거대한 균열들이 나 있었다. 잊혀진 세월이 볕을 쬐지 못한 돌을 깎고 갉은 것이었다. 무서운 아침이 정말 이 어둠의 땅에 오고 있는지 아니면 저 너머 고르고로스의 분란 속에서 사우론이 일으킨 거센 불길을 응시하고 있는지는 호비트들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하늘의 붉은빛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프로도는 눈을 들자 저 먼 앞쪽에서 그리고 저 높은 곳에서 이 험난한 도로의 정점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동편 하늘의 음산한 적색을 배경으로 가장 높은 산등성이에는 갈라진 균열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 틈새는 각기 뿔 모양의 돌이 얹혀진 두 개의 시커먼 기둥 사이에 좁고 길게 파여진 것이었다. 그는 잠시 멈춰서서 더욱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왼쪽의 뿔은 높고 가늘었으며 그 속에서는 붉은빛이 타올랐다. 아니면 저 너머 대지의 붉은빛이 구멍을 통해 빛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것이 바깥 고갯길 위로 자리잡은 암흑의 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샘의 팔을 건드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기분나쁘게 생겼어요." 샘은 이렇게 말하고 골룸에게 돌아서며 으르렁댔다. "저처럼 네가 말한 길도 계속 감시되고 있었던 거야. 넌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골룸이 말했다. "모든 길은 감시되고 있어. 그래, 맞아. 당연히 그렇지. 그렇지만 호비트들은 어떤 길이든 시도할 수밖에 없잖아. 이 길이 감시의 눈이 가장 뜸한 곳이야. 아마 그들 모두가 큰 전투를 치르러 가버렸을 거야. 아마도 말이야." "아마도라구?" 샘은 툴툴거리며 다시 프로도에게 돌아 섰다. "저곳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직 한참 더 올라가야 해요. 그리고 터널도 남아 있어요. 그러니 프로도씨께선 지금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시간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린 길고긴 시간을 계속 걸어왔어요." "그래, 우린 쉬어야 해. 바람이 불어닥치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 쉬면서 힘을 모으자구. 마지막 남은 길을 위해서 말이야." 그는 그 거리를 주파하면 다 된 거라고 느꼈던 것이다. 저 너머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 벌어질 사태는 아득하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온 정신은 이 철통 같은 벽과 감시를 뚫고 넘는 일에 쏠려 있었다. 일단 그 지난한 일만 해낼 수 있다면 어쨌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키리스 운골 아래의 돌같이 굳은 어둠 속에서 여전히 낑낑대느라 암담한 시간 속에 지쳐빠져 있는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 개의 커다란 암벽 사이의 어두운 틈새에 주저앉았다. 프로도와 샘은 약간 안쪽으로 앉았고 골룸은 입구 근처의 땅바닥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기서 호비트들은 식사를 했다. 그들은 이것이 이름없는 대지로 내려가기 전의 마지막 식사일 것이라고, 아마 함께 할 수 있는 최후의 식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곤도르의 음식 약간과 요정들의 길양식을 먹고 물을 마셨다. 그러나 물은 아끼기 위해 입술을 적실 정도만 마셨다. "언제 다시 물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저 너머에서도 물을 마실 수 있겠지요? 오르크놈들도 물은 마시겠죠?" "그럼, 물은 마시지.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지. 그런 물은 우리에게 맞지 않을 테니까." "그럼 더더욱 병 속에 물을 간직해 두어야겠군요. 그런데 이 위쪽엔 물이 전혀 없어요. 물소리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어쨌든 파라미르가 말하길 모르굴에선 물을 전혀 마시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요." "임라드 모르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우린 아직 그 계곡에 있는 건 아니니까 만일 물을 발견한다면 거기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로 흘러드는 물일 거야." "전 목이 말라 죽기 전까진 그 말을 믿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곳엔 뭔가 사악한 기운이 감돌아요." 샘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냄새도 나는 것 같구요. 맡으셨어요? 갑갑한 게 이상한 냄새예요. 기분이 좋지 않아요." "여기 있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어. 계단이나 돌이나 숨결이나 뼈다귀 모두 말이야. 또 대지, 공기 그리고 물 모두가 저주받은 것 같아.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그 속에 놓여 있어." "예, 그래요.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이곳에 대해 더 맡이 알았더라면 우리는 여기 있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나 흔히 일은 그런 식으로 되고 말지요. 옛 얘기와 노래 속의 용감한 행동들이 그렇잖아요, 프로도씨. 전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르곤 하죠. 이야기 속의 훌륭한 이들이 그런 일을 찾아 나서죠. 그들이 그런 일을 원하는 것은 삶이 얼마간 따분하고 그런 일들이 자극적이며 일종의 오락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사정이 그런 얘기들과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 얘기들이 우리 마음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느냐 하는 게 아닐 거예요.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발길을 돌릴 기회가 많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또 그들이 그렇게 했더라도 우린 알 수가 없었겠죠. 그랬으면 그들은 그대로 잊혀졌을 테니까요. 우린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만 모두 좋은 결말을 맺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해요. 적어도 이야기 속이 아니라 밖에 있는 이들은 말이에요. 그렇지만 대개는 고향에 돌아와 예전과 똑같진 않더라도 별탈은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연로한 빌보씨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될까요?" "나도 궁금해. 그렇지만 모르겠어. 진짜 얘기는 으레 그런 법이지. 네가 좋아하는 어떤 얘기라도 택해 봐. 넌 그게 어떤 종류의 얘긴지, 결말이 행복한 건지 아니면 슬픈 건지 알거나 짐작할 수 있어. 그렇지만 얘기 속의 사람들은 모르지. 그리고 너도 그들이 알게 되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고 말이야." "그래요, 프로도씨. 물론 원치 않죠. 베렌은 자신이 당고로드림에서 무쇠왕관으로부터 그 실마릴보석을 얻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국 얻었죠. 거기다 우리보다도 악조건이었고 더 위험했어요. 물론 그 얘긴 길죠. 행복한 시기를 지나 슬픈 부분으로 접어들고 또 그 후에도 계속되죠. 그 실마릴보석도 계속 옮겨지다가 결국 이렌딜에게로 가게 되었죠. 그런데 프로도씨, 왜 제가 진작 그걸 생각지 못했을까요! 우리에게, 아니 프로도씨께 숲의 레이디께서 주신 그 별 모양의 유리병 속에 그 빛이 얼마간 담겨 있잖아요. 아니, 생각해 보세요. 우린 결국 같은 얘기 속에 들어 있어요. 그 얘기는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그 위대한 얘기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 건가요?" "그럼, 얘기로선 절대 끝나지 않지. 그렇지만 그 안의 인물들은 나타났다가 자신들의 역할이 다하면 사라지는 거야. 우리의 역할도 조만간 끝날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도 얼마간의 휴식과 잠을 취할 수 있겠군요." 샘은 이렇게 말하고 음울하게 웃었다. "제 말뜻은 단지 그뿐이에요, 프로도씨. 평범한 일상의 휴식과 잠 그리고 깨어나 정원에서 아침일을 하는 것 말이에요. 언제나 제가 바랄 수 있는 건 기껏 그 정도인 것 같아요. 모든 크고 중요한 계획들은 저 같은 자가 할 일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우리가 노래나 얘기 속에 실릴 수 있을지 궁금해요. 물론 우리를 노래한 얘기가 하나 있죠. 그러나 프로도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뜻하는 건 문자로 옮겨져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난롯가에서 얘깃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빨갛고 검은 철자로 된 거창한 책으로 읽혀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겠죠. '프로도와 반지에 대해 들어 보자.' 아니면 '그래요, 그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얘기 중 하나예요. 프로도는 아주 용감했어요, 그렇죠, 아빠?' '그렇지, 호비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지. 대단한 호비트야.'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너무 대단하구만." 프로도는 이렇게 말하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길고 맑은 웃음을 웃었다. 이런 소리는 사우론이 중간계로 돌아온 이후 이 일대에선 한번도 들린 적이 없었다. 갑자기 샘에게는 모든 돌들이 귀를 기울이며 몸을 구부리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도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다시 웃었다. "글쎄, 샘, 네 말을 들으니 그 얘기가 정말 씌어진 것같이 유쾌하군. 그렇지만 넌 중요한 인물 한 명을 빠뜨렸어. 담대한 샘와이즈 말이야. '샘에 관해서 더 듣고 싶어요, 아빠. 왜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이 넣지 않은 거죠, 아빠? 전 그게 좋아요. 들으면 웃음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샘이 없었다면 프로도도 그렇게까지 해내진 못했을 거예요, 안 그래요, 아빠?' 이렇게 말하게 될 거야." "저, 프로도씨, 놀리시면 안 돼요. 전 진지하게 말한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좀 너무 빨리 가고 있어. 샘, 너와 난 아직 그 얘기의 가장 아슬아슬한 대목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거야. 십중팔구 이 대목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거야. '이제 책을 덮어요, 아빠. 더이상 읽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라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예요. 이미 완료되어 위대한 얘기의 일부가 된 일들은 다르다구요, 뭐 심지어 골룸조차도 얘기 속에선 착한 인물이 될 수 있을 테고 어쨌든 프로도씨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나은 인물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자신이 한때 직접 꾸미는 얘기를 좋아했어요. 그놈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악당으로 생각할까요?" 샘은 골룸에게로 돌아서며 불렀다. "골룸! 넌 주인공이 되고 싶으냐? 이번엔 또 어디로 가버렸지?" 입구의 어둠 속에 그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 모금의 물은 받아 마셨지만 음식은 거절했었고 그 후엔 잠을 자려고 웅크린 것 같았었다. 그들은 전날 그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목적 중 적어도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물을 찾으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또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슬며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슨 목적이란 말인가? "그놈이 말도 없이 살금살금 사라져 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지금은 특히 그래요. 그놈이 바위라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런 곳에서 음식을 찾고 있을 리는 없잖아요. 이끼 조가리도 없는데 말이에요." "지금 그런 걸 걱정해 봤자 소용이 없어. 그가 없었다면 우린 이만큼도 올 수 없었어. 심지어 고갯길이 보이는 데까지도 올 수 없었다고. 그러니 우린 그가 하는 방식을 감수해야지. 만일 그가 믿을 수 없는 놈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전 그놈을 감시하겠어요. 믿을 수 없는 놈이라면 더더욱이요. 이 고갯길이 감시되는지 아닌지 그놈이 말하려고 하지 않은 걸 기억하세요? 지금 저기 탑이 보이는데 저건 버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프로도씬 그놈이 그들을, 오르크들이건 다른 무엇이건, 데리러 간 거라고 생각진 않으세요?" "아니, 그렇게 생각진 않아. 설사 그가 어떤 사악한 일을 꾸미고 있다 할지라도 - 그럴 거라고 보진 않지만 -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오르크들이나 적의 졸개들을 데려오진 않을 거야. 왜 그가 지금까진 기다리고 기어오르느라 고생을 하며 자신이 두려워하는 이 땅에 이렇게 가까이 왔을까? 우리를 만난 이래 그는 아마 몇 차례나 우리를 오르크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었을 거야. 그건 아니야.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그건 그가 비밀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작고 개인적인 술수일 거야." "옳은 말씀이에요, 프로도씨. 그 말씀을 듣고 크게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놈은 저를 오르크들에게 넘겨 주는 건 입에 손맞추는 것만큼이나 기꺼이 할 거예요. 그렇지만 전 그놈의 보배를 잊고 있었어요. 제 생각엔 그놓은 언제나 그 '불쌍한 스메아골을 위한 보배' 를 노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놈에게 어떤 집념이 있다면 바로 그 하나의 집념이에요. 그렇지만 우릴 이렇게 높이까지 데리고 온 것이 그놈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저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십중팔구 그 자신도 알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난 그가 얼빠진 머리 속에 또 하나의 명료한 계략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내 생각에 그는 할 수 있는 한 보배를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애쓸 거야. 왜냐하면 만일 적이 그걸 갖게 되면 그건 그에게도 마지막 재앙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그는 그냥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야." "그래요, 제가 전에 말할 대로예요, 적의 땅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내부에 있는 악한 마음이 더 드러나요.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만일 언제고 우리가 그 고갯길에 닿으면 그놈은 우리가 그 소중한 것을 가지고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거예요. 분란을 일으킬 거라구요." "우린 아직 거기에 당도하지 않았어." "그래요. 하지만 당도할 때까지는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요. 만일 우리가 낮잠 자는 것을 보게라도 된다면 골룸은 곧장 우릴 덮칠 거예요. 그렇다고 물론 프로도씨가 지금 주무셔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제가 곁에 있을 때는 안전해요. 프로도씨께서 편안히 주무시는 걸 보는 건 제게 기쁨이에요. 제가 지키겠어요. 프로도씨께서 제 팔을 베고 주무신다면 누구라도 저 몰래는 프로도씨께 손을 댈 수 없을 거예요." "잠이라!" 프로도는 마치 사막에서 서늘한 초원의 신기루를 본 사람처럼 한숨을 지었다. "그래, 난 이런 곳에서라도 잘 수 있어." "그럼 주무세요, 프로도씨. 제 무릎에 머리를 누이세요." 몇 시간 후 앞쪽 어둠 속으로부터 기어온 골룸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샘은 머리를 옆으로 늘어뜨린 채 힘들게 숨을 쉬며 돌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깊은 잠에 빠진 프로도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샘은 한 손을 주인의 이마 위에 그리고 또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두 호비트의 얼굴에는 평화가 깃들여 있었다. 골룸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여위고 굶주린 얼굴에 이상야릇한 표정이 스쳤다. 눈에서 반들거리는 빛이 스러지며 눈동자는 회색으로 변하고 늙고 지쳐 보였다. 고뇌의 경련이 몸을 뒤틀게 하는 것 같았으며 이어 마치 어떤 내면의 논의에 빠진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고갯길 쪽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그는 가까이 다가와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어 조심스럽게 프로도의 무릎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 감촉은 거의 애무하는 것과 같았다. 잠든 두 호비트 중 하나가 잠시라도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자신의 수명을 훨씬 넘어 친구와 친척들보다 오래 살아온, 세월에 쭈그러들고 늙고 지쳐 버린 호비트를, 굻주리고 가련한 호비트를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감촉에 프로도가 몸을 꿈틀거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샘이 깨어났다.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골룸이었다. 그는 '프로도씨를 더듬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거칠게 소리쳤다. "어이, 뭐 하는 거야?" 골룸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훌륭한 주인님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넌 어디 갔던 거야? 살그머니 없어졌다가 또 살금살금 돌아오다니, 이 늙은 악당아." 골룸은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눈에서 녹색 섬광이 일었다. 툭 튀어나온 눈에 사지를 구부린 모습은 영락없이 거미 같았다. 앞서의 늙은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살금살금이라고! 호비트들은 언제나 그처럼 예의바르지, 그래. 오, 훌륭한 호비트들! 스메아골이 다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비밀통로로 데려다줬어. 그는 피곤하고 목이 마른데도 저들을 안내하고 길을 찾았는데 저들은 살금살금이라고 해. 아주 훌륭한 친구들이야. 오, 그래 보배여, 아주 훌륭해." 샘은 그를 더 믿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구. 그렇지만 네가 날 놀라게 해 잠이 깼단 말이야. 게다가 난 사실 잠이 들면 안 되는데 잠이 들어서 그 때문에 신경이 좀 날카로워졌지. 그런데 프로도씨는 저렇게 지쳤어도 내게도 눈을 좀 붙이라고 권하셨어. 음, 사정이 그렇게 된 거라구. 미안해. 그런데 넌 어디 갔었지?" "살금거렸지." 말하는 골룸의 눈에서는 녹색 섬광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난 내 말이 그리 진실에서 동떨어진 거라고 생각진 않아. 그리고 이젠 우리 모두가 함께 살금거리고 가는 게 좋아. 시간이 얼마나 됐지? 아직 오늘이야 아니면 내일이 온 거야?" "내일이야. 호비트들이 잠이 든 사이 벌써 내일이 된 거야. 어리석고 워험한 짓이지. 만일 불쌍한 스메아골이 살금거리고 감시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우린 곧 그 말에 넌더리가 날 거야. 그렇지만 걱정 말라구. 내가 프로도씨를 깨울테니까." 그는 프로도의 이마에서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프로도씨! 일어나시라구요." 프로도는 몸을 꿈틀거리며 눈을 뜨더니 샘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날 너무 일찍 깨우는 거 아냐, 샘? 아직도 어둡잖아." "그래요. 여긴 언제나 어둡죠. 그렇지만 골룸이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벌써 새날이 밝았대요. 그러니 우린 계속 걸어가야 해요. 마지막 남은 길을 말이에요. "프로도는 숨을 깊이 몰아쉬고 일어나 앉았다. "마지막 남은 길이라구. 어이, 스메아골! 음식 좀 찾았어? 좀 쉬었나?" "스메아골에겐 음식도, 휴식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살금거리니까요." 샘은 쯧쯧 혀를 찼지만 성미를 억눌렀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 스메아골. 그 말이 참이든 거짓이든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건 현명치 못한 일이야." "스메아골은 주어지는 건 받아야 해요. 그는 참으로 많은 걸 아시는 호비트, 친절한 샘와이즈님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거든요." 프로도는 샘을 쳐다보았다. "그랬어요, 프로도씨.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그가 옆에 있는 걸 보고 제가 그렇게 말했지요, 전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 그건 지나간 일로 생각해. 그런데 이제 우린 그 지점까지 온 것 같은데. 너와 난 말이야, 스메아골. 말해 줘. 샘과 나 둘이서만 남은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린 고갯길이 보이는 곳에 있어. 그러니 이제 우리끼리 남은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너와 나와의 약속은 끝난 거야. 넌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 자유야. 적의 부하들에게 가는 것만 아니라면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아 돌아갈 수 있어. 그리고 언젠가 내가 너에게 보답할 날이 있을 거야. 나 아니면 날 아는 이들이 말이야." 골룸은 우는 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직은 아니라구요. 오, 아녜요! 직접 길을 찾을 수는 없어요. 오, 정말 안 돼요. 터널이 가까워요. 스메아골은 계속 가야 해요. 쉬지도 못하고 음식도 못 구했지만 아직은 가야 해요." 제20장 셸로브의 굴 골룸이 말했듯 지금은 정말 낮시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찌푸린 하늘이 조금은 덜 캄캄해져 연기 덮인 거대한 지붕처럼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호비트들로서는 거의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균열된 곳과 구멍들에서 아직껏 꾸물대는 깊은 밤의 어둠 대신 회색빛 그늘이 주위의 무표정한 세계를 감쌌다. 골룸이 앞장을 서고 호비트들은 그 뒤를 따라 나란히 양 옆으로 서 있는 보기 흉한 석상 같은 돌기둥들과 갈라지고 비바람에 마모된 암벽 사이로 난 긴 협곡을 계속 올라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쯤 앞쪽에, 아마 일 마일도 채 안 되는 곳에, 거대한 회색 암벽이 있었다. 그건 마지막으로 융기한 육중한 암벽이었다. 그건 아주 어두워 보였으며 그들이 다가감에 따라 차츰 솟아오르더니 마침내 그 너머의 모든 시야를 차단하면서 우뚝 앞을 가로막았고 그 아래로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샘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아! 그 냄새! 점점 짙어지고 있어요." 그들은 곧 그림자 아래로 들어서며 동굴의 입구를 보게 되었다. "이게 입구예요. 터널 출입구예요." 골룸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그 터널이 토레치 운골 즉 셸로브의 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굴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건 모르굴의 초지에서 맡았던 역한 부패의 냄새와도 다른, 안쪽 어둠 속에 쌓이고 쌓인 오물의 악취였다. "이게 유일한 길인가, 스메아골?" 프로도가 물었다. "예, 그래요. 우린 지금 이 길로 가야 해요." "너는 이 굴을 지나 본 적이 있는 거야? 참, 너는 아마 고약한 냄새를 꺼리지 않는 모양이군." 샘이 말하자 골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우리가 무얼 꺼리는지를 몰라, 그렇지, 보배? 그럼, 모른다구. 그렇지만 스메아골은 견딜 수 있어. 그래, 그는 지나가 본 적이 있어. 오, 그럼, 쭉 지나가 봤지. 이게 유일한 길이라구." 샘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 냄새는 뭐지? 뭐 같으냐 하면, 음, 말하고 싶지 않아, 분명 속에 백 년도 더 된 오물이 가득찬 오르크들의 동굴 같아."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자, 오르크든 아니든 이게 유일한 길이라면 우린 이 길로 가야 해." 깊은 숨을 들이쉬며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들은 완전한 어둠 속에 놓였다. 모리아의 빛없는 통로 이후 프로도나 샘은 이와 같은 어둠을 겪어 본 일이 없었으며, 추측하건대 모리아보다 이곳이 더 깊고 짙은 것 같았다. 모리아에서는 움직이는 대기와 메아리 그리고 공간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공기가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여 있어 갑갑했으며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암흑 그 자체로 만들어진 검은 증기 속을 걷고 있었다. 그 암흑은 호흡할 때 눈뿐 아니라 심장까지 실명시키는 것 같았고 따라서 색깔과 형체 또는 빛에 대한 기억마저 생각 속에서 사라졌다. 밤은 항상 존재했었고 또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잠시동안 느낌을 가질 수는 있었고 발과 손가락의 감각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예민해진 것 같았다. 놀랍게도 벽의 촉감은 매끄러웠고 바닥은 대체로 곧고 평탄했으나 계속 오르막길을 이루고 있었다. 터널은 높고 넓었다. 넓이는 호비트들이 쭉 뻗친 손으로 옆벽을 간신히 만지면서 나란히 걷는데도 거의 둘 사이가 벌어질 정도였다. 먼저 들어간 골룸은 몇 발짝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아직 그런 일들에 신경을 쓰는 동안 바로 앞에서 쉿쉿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얼마후 그들의 감각은 점점 둔해졌고 촉각과 청각 모두가 마비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들어왔을 때의 의지와 힘으로 돌파하겠다는 생각과 저편 높은 문에 도달하고픈 욕망으로 더듬으며 걸어갔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 오른쪽에 섰던 샘은 벽을 더듬어 보고 측면에 하나의 입구가 있음을 알았다. 잠시 그는 덜 답답한 공기를 어렴풋이 들이마셨다. 그들은 그 입구를 지나쳤다. "이곳에 통로가 있어요." 샘은 힘들여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리를 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여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오르크들의 냄새가 짙은 곳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 샘은 오른쪽에서 프로도는 왼쪽에서, 넓기도 하고 좀 좁기도 한 서너 개의 입구를 발견하며 지나쳤다. 그렇지만 따라가는 길이 곧바르고 굽어지지 않았으며 계속 위로 뻗치고 있었기에 아직은 그 길이 큰길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길이 얼마나 길며 그들이 이 상황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아니면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어오름에 따라 공기는 더욱 숨쉬기에 안 좋았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가끔 칠흑 같은 어둘 속에서 탁한 공기보다 더 짙은 어떤 장애를 감지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그들은 머리에 또는 손에 무엇인가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식물의 긴 줄기 또는 늘어진 덩굴 같았지만 그들로선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악취는 계속 더해 갔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감각이기라도 한 듯 후각은 더 날카롭게 악취를 느꼈으며 그것은 대단한 고통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며칠, 아니 몇 주일이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샘과 프로도는 굳게 손을 맞잡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벽을 더듬던 프로도의 손에 갑자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옆 허공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거기엔 그들이 이제껏 지나친 어떤 것보다 훨씬 큰 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프로도가 비틀거릴 정도로 고약한 악취와 강렬한 적의가 쏟아졌다. 그 순간 샘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프로도는 메스꺼움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샘의 손을 그러쥐며 잘 나오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일어나! 모든 게 여기서 나오고 있어. 악취와 살의가 말이야. 자, 빨리!" 그는 남은 힘과 의지를 모아 샘을 끌어일으키고 사지를 움직이게 하였다. 샘은 계속 비틀거렸다. 한 발, 두 발, 세 발, 마침내 여섯 발짝.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무서운 입구를 지났다. 어쨌든 보이지 않는 적은 그 적대적 의지가 당분간 그들을 풀어 준 듯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들은 여전히 손을 맞잡고 힘들여 나아갔다. 그런데 그들은 곧이어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터널이 갈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어느 쪽 길이 더 넓고 더 곧게 뻗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택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을 안내해 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선택을 그르치면 틀림없이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샘은 헐떡이며 말했다. "골룸은 어느 길로 갔죠? 그리고 왜 기다리지 않은 걸까요?" 프로도는 애써 외쳤다. "스메아골! 스메아골!"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꺽꺽 갈라졌으며 소리는 입술에서 떨어진 순간 전혀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메아리도, 심지어 공기의 떨림조차 없었다. 샘은 툴툴거렸다. "이번엔 정말 가버린 것 같아요. 이곳이 바로 우릴 데려오려고 했던 곳이라구요. 골룸! 언제고 다시 잡힌다면 네놈은 후회하게 될 거다!" 곧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고 휘젓다가 왼쪽의 입구가 막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거나 아니면 육중한 바위로 막힌 곳 같았다. 프로도가 속삭였다. "이게 그 길일 리 없어. 옳든 그르든 다른 쪽을 택할 수밖에 없지." 그러자 샘도 헐떡이며 말했다. "그것도 빨리요! 이 근처엔 골룸보다 더 나쁜 어떤 게 있어요. 무언가가 우릴 쳐다보고 있는 걸 느낄 수가 있어요." 그들이 몇 발짝 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게 깔린 정적속에서 놀랄 만큼 느닷없고 끔찍스럽게 들려온 소리였다. 꼴록꼴록거리고 부글부글대는 소음과 악의에 찬 쉿쉿거리는 소리였다. 그들은 몸을 돌렸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빤히 바라보면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며 돌처럼 꼼짝않고 서 있었다. "함정이에요!" 샘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칼자루에 손을 댔다. 그러면서 그는 그 소리가 들려온 무덤 같은 어둠을 생각했다. '지금 늙은 톰이 우리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주위엔 어둠으로 둘러싸이고 가슴 속은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채 서 있던 그는 갑자기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의 빛으로 창 없는 구덩이 속에 오래 숨어 있던 자의 눈에 비치는 한 줄기 햇빛처럼 처음엔 거의 견딜 수 없을 만금 밝았다. 이윽고 그 빛은 녹색, 황금색, 은색, 백색을 띠었다. 요정의 손길에 의해 그려진 작은 그림 속에서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갈라드리엘이 로리엔의 풀밭 위에 서 있고 그녀의 손에는 선물이 놓여 있었다. '그대, 반지의 사자여,' 그녀의 말은 멀지만 또렷이 들렸다. '그대를 위해 난 이걸 준비했어요.' 부글거리는 쉿쉿소리가 더 가까워졌고 무엇인가로 이어진 듯한 거대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악취가 밀려들었다. "프로도씨! 프로도씨!" 하고 외치는 샘의 목소리에는 활기와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갈라드리엘의 선물! 별 모양의 유리병 말이에요! 어둠 속에서 빛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별 모양의 유리병!" "별 모양의 유리병?" 프로도는 자다가 깨어나 영문을 모르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 그래! 왜 내가 그걸 잊었었지? '다른 모든 빛이 꺼질 때의 빛!' 지금은 정말 빛만이 우릴 도울 수 있어." 그는 천천히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높이 쳐들었다. 그 병은 동쪽 짙은 안개를 헤치고 떠오르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이윽고 그 빛은 점점 밝아져 프로도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길을 당기고는 다시 은빛 불길로 타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마지막 실마릴보석을 이마에 단 이렌딜이 높은 석양의 도정에서 직접 내려온 것처럼 눈부신 빛으로 이루어진 미세한 하트 모양의 섬광이었다. 그 앞에서 어둠은 물러섰으며 수정 구체의 중심에서 반짝이는 빛은 그걸 쥔 손을 흰 불길로 감싸 버렸다. 프로도는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으면서도 그 모든 가치와 능력을 짐작하지 못했던 이 놀라운 선물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모르굴의 계단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었으며 또 그것의 계시적인 빛이 두려워 결코 사용할 생각도 못했다. "아이야 이렌딜 엘레니온 안카리마!" 프로도는 이렇게 외쳤지만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또 다른 소리가 구덩이의 탁한 공기에 구애받지 않고 명료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계에는 다른 세력들, 즉 밤의 권능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오래되고 강했다. 게다가 아주 오래전 어둠 속을 거닐던 밤의 여신은 요정들의 그러한 주문을 듣고도 개의치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문은 그녀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주문을 외치면서도 프로도는 어떤 거대한 적의가 자신을 덮치려 하며 죽음과 같은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느꼈다. 터널 아래쪽 멀지 않은 곳에서, 즉 그들이 서 있는 곳과 그들이 비틀거리고 휘청댔던 입구 사이에서 그는 점차 눈에 띄기 시작하는 눈들, 두 개의 거대한 무리를 이룬 많은 창이 달린 눈들을 감지했다. 다가오던 위험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별 모양 유리병의 광채는 그 눈들의 수많은 각들에 부딪고 꺾여 반사되었고 각들의 반짝임 뒤에는 파리한 죽음같은 불길이 안으로부터 차근차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사악한 음모가 가득한 깊은 웅덩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것들은 괴물처럼 소름끼치는 눈들로서 야수적이면서도 계략과 끔찍스런 환희를 듬뿍 담은 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걸려든 먹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도와 샘은 악의에 가득찬 그 눈들의 무시무시한 응시에 눈길이 사로잡힌 채 겁에 질려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이 물러서는 만큼 그 눈들도 다가왔다. 프로도의 손은 떨리며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 순간 환희에 찬 눈의 주문과 무분별한 공포에서 벗어난 그들은 방향을 돌려 함께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다본 프로도는 그 눈들이 무서운 기세로 곧장 달려들고 있음을 보았다. 죽음의 냄새가 구름처럼 그를 에워쌌다. 프로도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서, 그만 서라구! 달아나 봤자 소용없어." 그 눈들은 천천히 다가왔다. "갈라드리엘!" 프로도는 이렇게 외치며 혼신의 용기를 짜내 다시 유리병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눈들은 걸음을 멈췄다. 마치 어떤 불안의 조짐을 느껴 마음이 어지러운지 그 눈은 흐릿해졌다. 그러자 프로도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우행인지 절망의 소산인지 아니면 용기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유리병을 왼손에 쥔 채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스팅은 번쩍거렸다. 요정이 만든 날카로운 칼날은 은빛 불꽃을 튀겼으며 가장자리에서는 파란 불길이 너울거렀다. 이윽고 유리병을 높이 쳐들고 칼을 든 채 샤이어의 호비트 프로도는 그 눈들에 대항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눈들은 동요했다. 그 빛이 다가옴에 따라 눈들은 불안감을 보였다. 하나하나씩 눈들은 흐릿해지며 천천히 물러났다. 그처럼 치명적인 광휘가 그 눈들을 괴롭힌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하에서 눈들은 해와 달 그리고 별로부터 무사했었는데 이제 별 하나가 땅 속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별이 다가오자 눈들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씩 눈들은 어두워졌다. 눈들은 돌아섰다. 그러자 빛이 닿지 않는 저편 너머에서 거대한 어둠이 몸을 들어 밀려왔다. 눈들은 사라졌다. "프로도씨! 프로도씨!" 샘이 소리쳤다. 그는 칼을 빼든 채 싸울 태세를 갖추고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별들의 영광이에요! 요정들이 이 얘기를 듣게 된다면 노래로 만들 거예요. 제가 살아서 그들에게 얘기해 주고 그들이 노래하는 걸 들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데 계속 나가지 마세요, 프로도씨! 저 굴로 내려가선 안 돼요. 지금이 우리에겐 유일한 기회예요. 이제 이 더러운 구멍에서 빠져나갑시다!" 그들은 다시 돌아서서 처음엔 걷다가 나중엔 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아감에 따라 터널의 바닥은 가파르게 솟아올랐고 성큼성큼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굴의 악취로부터 벗어나 사지와 가슴에 힘이 되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여전히 감시자의 적의가 잠복해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눈이 보이지 않았겠지만 여전히 굴하지 않고 죽음을 노리고 있었다. 차갑고 흐릿한 공기가 흘러와 그들을 맞았다. 드디어 입구, 터널의 끝이 그들 앞에 놓였던 것이다. 지붕없는 곳을 갈망하며 헐떡이면서 그들은 뛰쳐나왔다. 잠시후 그들은 다시 뒤로 물러서면서 깜짝 놀라 비틀거렸다. 입구는 어떤 장애물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돌이 아니었다. 폭신하고 약간 나긋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튼튼하고 꿰뚫을 수 없는 것으로 공기는 새어들었지만 빛은 통하지 않는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한번 더 돌진해 보았지만 뒤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프로도가 유리병을 높이 쳐들어 보니 빛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가 아니기에 그 어떤 빛도 통과시키지 않는 회색의 막이었다. 그 막은 유리병이 발하는 광채도 통과시키거나 비치지 못하게 했다. 터널의 폭과 높이를 가로질러 짜여진 거대한 직물은 엄청나게 큰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처럼 정밀했으며 촘촘하고 매우 컸다. 하나하나의 실은 밧줄처럼 두꺼웠다. 샘은 무섭게 웃었다. "거미줄이군! 이게 전분가? 거미줄이? 그런데 대체 어떤 거미가? 덤벼들어서 뭉개 버려요." 그는 화가 나서 칼로 거미줄을 베었지만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실은 약간 튕겨졌다가 활시위처럼 도로 퉁겨져 칼날을 물리치고 칼과 팔 모두를 치솟게 했다. 샘이 세 번이나 온 힘을 다해 내리치니 마침내 수많은 줄 가운데 단 하나가 뚝 끊어져 꼬이며 넝쿨처럼 감겨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 한쪽 끝이 샘의 손에 세차게 부딪혀 그는 비명을 지르며 흠칫 뒤로 물러서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이런 식으로 길을 트려다가는 며칠이 걸리겠어요. 어떡해야 하죠? 그 눈들이 돌아왔나요?" "아니, 보이지 않는데. 그렇지만 그들이 날 쳐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음모를 꾸미며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져. 만일 이 빛이 약해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곧장 다시 달려들 거야." 피로와 절망을 뛰어넘는 화증에 사로잡혀 샘이 비통하게 말했다. "드디어 함정에 걸렸군요. 그물에 걸린 모기 신세라구요. 파라미르의 저주가 그 골룸 녀석을 물어뜯어 주었으면! 그것도 깊숙하게!" "그런 소리로는 지금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안 돼. 자, 단도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구. 이건 요정들이 만든 칼이야. 이게 만들어진 벨레리안드의 어두운 협곡에도 공포의 거미줄이 있었어. 그러니 네가 파수병이 되어 그 눈들을 제지하고 있어. 자, 별 모양의 유리병을 받아. 두려워하지 말고 그걸 쳐들고 감시하라구." 프로도는 거대한 회색 그물로 다가가 팽팽하게 당겨진 끈들을 가로질러 날카로운 칼날을 가져다댔다간 다시 떼며 내리쳤다. 파랗게 번득이는 칼날이 풀을 가르는 낫처럼 내리가르자 끈들은 잘라지며 튀어올라 뒤틀리며 축 늘어졌다. 커다란 틈새가 하나 생겼다. 그는 계속 내리쳐 마침내 손에 닿는 범위 안의 거미줄을 모조리 찢었으며 왼쪽 부분은 들어오는 바람에 축 늘어진 베일처럼 흩날렸다. 함정이 무너진 것이었다. "자, 계속, 계속 가는 거야!" 절망의 바로 그 어귀로부터 탈출한 것에 대한 격렬한 환희가 그의 온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의 머리는 독한 술을 한 모금 들이켠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는 큰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그토록 어두운 이 땅도 프로도에게는 밝은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연기는 위로 퍼져올라 한결 엷어졌으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르도르의 붉은 눈은 음울한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프로도는 갑작스런 희망의 아침을 목격한 것 같았다. 그는 거의 암벽 꼭대기에 도달했었으며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와 있을 뿐이었다. 키리스 운골은 검은 등성이에 새겨진 희미한 눈금처럼 갈라진 틈이 되어 양편 어둡게 도사린 바위 사이로 내다보였다. 조금만 달리면, 단거리경주에서처럼만 달리면 그는 완전히 통과하게 될 것이다! "고갯길이야, 샘!" 터널의 숨막힐 듯한 공기에서 벗어났기에 이제 높고 거칠게 울려퍼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상관하지 않고 외쳤다. "고갯길이야! 달려, 달리라구! 그럼 우린 완전히 통과하게 될 거야. 아무도 우릴 제지할 틈도 없이 빠져나가게 될 거야." 샘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다리를 놀려 뒤따라갔다. 그러나 자유로워져 기쁘면서도 샘은 어딘가 불안했다. 그는 달려가면서도 그 눈들 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괴물이 뒤쫓아올 것을 염려하며 연신 터널의 어두운 입구를 힐끔힐끔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나 프로도나 셸로브의 술책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셸로브에겐 그 굴에서 나오는 출구가 여러 개 있었던 것이다. 거미의 형체를 가진 사악한 셸로브는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왔다. 셸로브는 아주 오랜 옛날, 지금은 바다 아래 잠겨 버린 서역 요정들의 땅에 살았던 괴물들과 한종족이었다. 오래 전 베렌이 루디엔을 만나기 전 도리아스의 공포의 산맥에서 싸웠던 바로 그 괴물들과 한종족이었다. 셸로브가 어떻게 파멸에서 벗어나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암흑시대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셸로브는 거기 살고 있었다. 사우론보다 앞서, 그리고 바랏 두르의 첫 돌을 놓기에 앞서 셸로브는 아무의 구속도 받지 않고 요정들과 인간들의 피를 빨아 마셨으며 그림자 같은 거미줄을 짜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성찬을 궁리하며 몸을 살찌워 왔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 셸로브의 음식이었으며 그녀가 토해 내는 것은 어둠이었다. 그녀의 작은 새끼들, 자신이 죽인 그 끔찍한 남성괴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에펠 듀아스로부터 동쪽 구릉까지, 돌 굴두르와 머크우드의 요새들에까지 퍼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불행한 세상을 어지럽히는 데 있어 운골리안트의 마지막 후예인 그녀, 위대한 셸로브에 필적할 수는 없었다. 이미 수년 전 골룸은, 모든 어두컴컴한 구멍들을 모조리 살펴보던 스메아골은 셸로브를 본 적이 있었으며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악한 의지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골룸이 걷는 모든 길에 따라붙어 그를 빛과 참회로부터 멀게 했다. 거기다 그는 셸로브에게 성찬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셸로브의 욕망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탑이나 반지 또는 정신과 손으로 고안해 만든 어떤 물건을 좋아하지도 또 그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오로지 다른 모든 생물의 죽음이었으며 자신만이 홀로 생명을 포식해 산맥도 자신을 포용할 수 없고 어둠도 자신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육체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을 성취한다는 건 아직 요원한 일이었고 지금의 셸로브로선 사우론의 권세가 커져 빛과 살아있는 생명들이 그의 영역을 떠나는 동안 자신의 굴속에 숨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곡 속의 도시는 죽은 듯이 고요해져 요정이나 인간들은 얼씬거리지도 않게 되었고 다만 운나쁜 오르크들만 나타날 뿐이었다. 오르크는 맛이 없는 데다 또 경계를 늦추지 않는 족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먹어야만 했기에 오르크들이 아무리 분주하게 새로운 우회로를 뚫더라도 항상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새 길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그녀는 맛좋은 음식을 갈망했다. 그리고 골룸이 그걸 가져다준 것이었다. 골룸은 에민 뮐에서 모르굴계곡에 이르는 위험한 길을 걸어오며 사악한 분위기에 사로잡혔을 때마다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두고보라구, 두고봐. 아마, 그래, 아마 그녀가 뼈다귀와 옷을 집어던질 때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준 불쌍한 스메아골에 대한 대가로 그 보배를 말이야. 그러면 우리가 약속한 대로 보배를 구해 내게 될 거야. 오, 그럼! 그리고 우리가 무사히 손에 넣게 되면 그땐 그녀도 알게 되겠지. 그럼, 그때 가서 우리는 그녀에게 되갚아 주는 거야. 그때 가서 모든 자들에게 되갚아 주는 거라구!" 골룸은 간교하게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셸로브에게는 그 속셈을 감추고 있었다. 심지어 호비트들이 잠든 새에 셸로브에게 가서 그 앞에 깊숙히 머리를 조아렸을 때에도 그랬다. 사우론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녀가 어디에 은거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셸로브가 굶주린 채, 그러나 악의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채 그곳에 은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적이 만족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녀의 존재는 그의 기술로 고안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경계보다도 확실한 감시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크들이 유용한 종복들이긴 했지만 그는 풍족하게 거느리고 있었다. 가끔 셸로브가 식욕을 채우기 위해 그들을 잡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들을 얼마큼 떼어내 줄 여력이 있었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가끔 맛있는 것을 던져 주듯 (사우론은 셸로브를 고양이라고 부르곤 했지만 물론 그녀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치 않았다) 사우론은 다른 더 좋은 처리 방안이 없는 포로들을 그녀에게 보내곤 했다. 그가 포로들을 그녀의 굴로 몰아넣으면 그녀가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고가 들어왔다. 이렇게 그들 둘은 서로의 책략을 즐기며 어떤 공격도, 분노도, 사악한 의지의 종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직껏 어떤 파리도 셸로브의 거미줄을 빠져나간 적이 없었으며 더욱이 이제 그녀의 격정과 굶주림은 한층 더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가엾은 샘으로선 자신들이 자초한 이 재난에 대해 어떤 두려움,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 두려움은 무겁게 짓눌러 달려간다는 자체가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었고 발에 납덩이가 달린 듯한 느낌이었다. 주위에는 두려운 그 무엇이, 또 앞의 고갯길에는 적들이 있는데도 주인은 홀린 듯 그들을 맞으러 무턱대고 달리고 있었다. 그는 뒤쪽 어둠과 왼쪽 벼랑 밑 짙은 어둠에서 눈을 돌려 앞을 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두 개의 형체는 그의 두려움을 한층 배가시켰다. 프로도가 칼집에 넣지 않고 여태 손에 쥐고 있던 칼이 파란 불길로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이제 하늘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탑의 창은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샘은 중얼거렸다. "오르크놈들이야! 우린 결코 이처럼 무턱대고 달려가선 안 돼. 사방에 오르크놈들이, 그리고 오르크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있어." 다음 순간 그는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오랜 습관으로, 간직하고 있던 그 소중한 유리병을 손으로 감쌌다. 한순간 그의 손이 빨갛게 빛났다. 다음 그는 주위를 밝히는 그 빛을 가슴 근처의 주머니에 깊숙히 찔러 넣고 요정의 망또를 당겨 덮었다. 이제 그는 걸음을 빨리하려고 애썼다. 주인은 그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다. 프로도는 스무 걸음쯤 앞서 계속 그림자처럼 달리고 있어 그 회색의 세계 속에서 모습이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샘이 유리병의 빛을 감추자마자 셸로브가 나타났다. 왼쪽 약간 앞에서 그가 일찍이 본 것 중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악몽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형체가 벼랑 아래 그림자진 시커먼 구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셸로브는 거미와 아주 흡사했지만 몸집은 그 어떤 거대한 야수보다 훨씬 더 컸으며 무자비한 눈의 사악한 의지로 더욱 끔찍해 보였다. 기가 꺾여 물러섰던 바로 그 눈들이 밖으로 쭉 내민 그녀의 머리에 몰려들어 다시금 무서운 빛으로 번득였다. 커다란 뿔이 달린 데다 줄기처럼 짧은 목 뒤에는 공기를 잔뜩 집어넣은 거대한 자루같이 엄청나게 부풀어오른 몸뚱이가 양 다리 사이에서 흔들리며 축 늘어져 있었다. 그 거대한 몸체는 검은 바탕에 검푸른 반점으로 얼룩졌으나 아래쪽 복부는 색이 옅었고 악취를 내뿜었다. 다리는 굽었고 등 위쪽 높은 곳에는 혹 모양의 커다란 마디들이 솟아 있었으며 머리칼은 무쇠가시처럼 치뻗쳤고 다리 끝에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달려 있었다. 셸로브는 철벅거리는 소리를 내는 부드러운 몸체와 접혀진 사지를 굴의 출구로부터 빼내자마자 때론 삐걱이며 달리기도 하고 때론 뛰어오르기도 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다. 그녀는 샘과 프로도 사이에 있었다. 그녀는 샘을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빛을 발하는 유리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시 피하는 것인지 오로지 하나의 먹이, 프로도에게만 정신을 쏟았다. 유리병을 지니지 않은 프로도는 아직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턱대고 달려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셸로브는 더 빨랐다. 몇 번만 도약하면 프로도를 잡을 기세였다. 샘은 숨이 찼지만 마지막 남은 숨까지 모아 고함을 질렀다. "뒤를 조심하세요! 조심하라구요, 프로도씨! 저는,"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외침은 덮여져 버렸다. 다리에 무언가가 감기며 끈적끈적한 긴 손 하나가 그의 입을 가로막고 또 하나의 손이 목을 졸랐다. 급습을 당한 샘은 공격자에게로 쓰러졌다. 골룸이 그의 귀에 대고 쉿쉿거렸다. "잡았어! 보배야, 우린 드디어 잡았어! 그 역겨운 호비트를. 우리가 이놈을 잡고 셸로브는 다른 놈을 잡을 거야. 오, 그럼, 스메아골이 아니라 셸로브가 잡을 거야. 스메아골은 결코 주인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네놈은 잡았어, 이 더럽고 메스꺼운, 살금살금거리는 놈!" 그는 샘의 목에 침을 뱉았다. 배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주인이 처한 위험을 보면서 지체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절망감이 샘에게 갑작스런 힘을 주었다. 그것은 느릿느릿하고 아둔한 호비트라고 생각했던 골룸의 예상을 뛰어넘는 그런 힘이었다. 골룸 자신도 그보다 더 재빨리 또는 사납게 몸을 뒤틀 수는 없었다. 입을 막았던 손이 풀리자 샘은 목을 조른 손아귀를 뿌리치고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챘다. 그의 손에는 칼이 쥐여져 있었고 왼손에는 파라미르가 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는 자신의 적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골룸은 재빨랐다. 그의 긴 오른팔은 쏜살같이 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은 바이스처럼 억셌다. 그가 천천히 그러나 가차없이 손을 내리눌러 샘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쳤다. 골룸은 여전히 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샘은 최후의 계략을 썼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고는 뒤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샘에게서 이런 단순한 계략조차 예상치 못했던 골룸은 쉿쉿거리며 일순간 목을 조르던 손을 늦췄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샘의 오른손을 그러쥐고 있었다. 샘은 몸을 빼내 우뚝 섰다가 골룸에게 잡힌 손을 축으로 해서 재빨리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았다. 샘이 왼손으로 지팡이를 휘두르자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골룸의 팔꿈치 바로 아래 딱 하고 맞았다. 골룸은 비명을 지르며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샘이 달려들어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바꿔 쥘 새도 없이 그대로 또 한번 거칠게 타격을 가했다. 골룸이 뱀처럼 잽싸게 피했기에 머리를 겨냥한 타격은 등허리를 가로질러 떨어졌다. 지팡이는 금이 가며 부러졌다. 사실 골룸은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긴 했다. 뒤에서 덮치는 것은 그의 오랜 술수였으며 실패한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앙심 때문에 앞뒤를 못 가리고 목을 조르기 전에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몇 마디 말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빛이 너무도 급작스레 어둠 속에 나타난 이래 그의 멋진 계획은 모조리 어긋나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몸집에 버금가는 크기의, 격노해 날뛰는 적과 마주선 것이다. 이 싸움은 그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샘은 땅에서 칼을 집어들었다. 골룸은 비명을 지르며 네 발로 기어 옆으로 피하고는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달아나 버렸다. 샘이 그를 잡으려 할 땐 이미 놀라운 속도로 굴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샘은 칼을 들고 그를 쫓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엔 격렬한 분노와 골룸을 죽이고자 하는 욕망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따라잡기 전에 골룸은 사라져 버렸다. 그때 어두운 굴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자 프로도와 그 괴물에 대한 생각이 샘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주인의 이름을 외치며 맹렬하게 돌진해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골룸의 음모는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제21장 샘와이즈의 선택 프로도는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그 위로는 괴물이 몸을 굽히고 있었다. 셸로브는 자신의 제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샘이 바싹 다가올 때까지 그의 존재도 또 그의 고함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진해 오면서 샘은 프로도가 벌써 발목에서 어깨까지 두꺼운 줄로 묶여졌고 괴물이 그 거대한 앞다리로제물의 몸을 반쯤 들어올린 상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곁에는 요정의 기술로 만들어진 스팅이 옅은 빛을 뿌리며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프로도의 손에서 떨어진 것이다. 샘은 어찌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며 자신이 용감하다거나 충직하다거나 아니면 분노에 들끓고 있다거나 하는 감정을 되새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주인의 칼을 왼손에 그러쥐곤 곧바로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라고는 오로지 작은 이빨밖에 갖추지 않은 왜소한 동물이 쓰러진 동료 위에 버티고 선 뿔과 가죽의 거대한 성채 같은 야수에게 달려드는 야만적 동물의 세계에서도 이보다 더 격렬한 돌격은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작은 고함소리 때문에 기분좋은 꿈에서 깨어난 듯 셸로브는 끔찍한 적의의 눈길을 던지며 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겪어 온 그 어느 것보다도 맹렬한 적의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번쩍이는 칼날이 셸로브의 발을 베어들어와 갈고리 같은 발톱을 잘라 버렸다. 샘은 괴물의 두 다리 속으로 뛰어들어가 재빨리 손을 치켜들어 괴물의 수그린 머리 위에 떼지어 있는 눈들을 찔렀다. 커다란 눈 하나가 깨졌다. 이 애처로운 공격자는 괴물의 독침과 갈고리 발톱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채 바로 배 아래 서 있었다. 부패한 빛을 발산하는 거대한 복부 아래에서 샘은 그 악취로 인해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분노는 삭지 않아 그는 또 한번의 타격을 가했다. 괴물이 그를 깔아뭉개 그와 그의 하찮고 건방진 용기를 질식시키기 전에 필사의 힘을 발휘해 요정의 칼로 괴물을 길게 베었다. 그러나 셸로브는 다른 괴물들과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눈이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오래된 가죽은 부패해 혹이 생기고 우둘투둘했으며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층층의 세포로, 내부로부터 점점 두터워졌기에 칼날이 매우 깊이 베어들어갔으나 그 보기에도 끔찍한 가죽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호비트가 아닌 요정이나 난쟁이가 칼날을 갈아 베렌이나 튜린의 강력한 손길을 빌어 베었다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셸로브는 타격에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거대한 자루 같은 복부를 샘의 머리 위로 부풀어 올렸다. 상처에선 독이 거품처럼 부글부글 솟아났다. 이제 셸로브는 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엄청나게 큰 몸체로 샘을 내리눌렀다. 눈 깜짝할 사이의 동작이었다. 샘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자신의 칼은 떨어뜨리고 요정의 단도를 양손으로 잡은 채 그 무시무시한 무게에 대항했다. 셸로브는 자신의 잔혹한 의지의 추진력으로 어떤 전사의 손보다도 강대한 힘을 발휘해 스스로의 몸을 날카로운 칼끝에 밀어댄 것이었다. 샘이 아래로 짓눌림에 따라 칼 끝은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셸로브로선 사악한 세계에 살면서 이러한 고통을 겪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또 겪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옛 곤도르의 가장 대담한 기사조차도, 또 함정에 빠진 가장 야만스런 오르크조차도 이처럼 대항하거나 자신의 소중한 살에 칼날을 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율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쓸고 지나갔다. 다시 몸을 들어 올려 고통으로부터 급히 빠져나오며 셸로브는 뒤틀리는 사지를 아래로 굽히고는 발작하듯이 도약해 뒤쪽으로 달아났다. 지독한 악취에 어질어질한 채 그리고 양 손으론 아직도 칼자루를 굳게 쥔 채 샘은 프로도 곁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는 눈앞의 안개를 뚫고 프로도의 얼굴을 희미하게 알아보고는 스스로를 자제해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리자 괴물은 단지 몇 발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리 모양의 긴 코에선 독이 거품처럼 질질 흘러나왔고 상처입은 눈에서는 녹색 분비물이 똑똑 떨어졌다.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 몸을 추스리느라 들썩이는 복부를 땅에 대고 커다란 두 다리를 밀면서 웅크리고 있었다. 이번엔 짓눌러 독침으로 찔러 죽일 생각으로 충분한 독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필연코 죽인 다음 갈가리 찢을 심산이었다. 괴물을 바라보고 또 그의 눈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면서 샘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처럼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왼손으로 가슴 속을 더듬어 원하던 것을 찾았다. 유령 같은 공포의 세계 속에서 그 촉감은 차갑고 단단하고 믿음직했다.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이었다. "갈라드리엘!" 그가 힘없이 외치자 멀리 떨어졌지만 아주 또렷한 응답이 들려왔다. 그건 샤이어의 사랑스런 어둠 속에서 총총한 별들 아래로 거니는 요정들의 외침이었으며 또 엘론드의 저택 불의 회당에서 잠결에 들려오던 요정들의 음악소리였다. 길도니엘 아 엘베레스! 그러고나자 혀가 속박에서 풀리며 샘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로 이렇게 외쳤다. 아 엘베레스 길도니엘 오 메넬 팔란디리엘 레 날론 시 딘구루도스! 아 티로 닌 파뉠로스! 이 외침과 함께 그는 비트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다시 햄패스트의 아들 호비트 샘와이즈로 돌아왔다. 그는 외쳤다. "자, 오라구, 이 더러운 놈아! 잔인한 네놈이 내 주인을 해쳤으니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우리는 계속 길을 가야 할 몸이지만 먼저 네놈을 처치해야겠다. 덤벼! 이 맛을 다시 한번 보라구!" 그의 불굴의 용기가 효능을 가동시키기라도 한 듯 손에 쥔 유리병이 갑자기 하얀 횃불처럼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은 창공으로 솟아올라 굉장한 빛으로 어두운 대기를 물리치며 별처럼 타올랐다. 셸로브의 얼굴이 이런 공포로 달아오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유리병에서 발산된 광선들은 그녀의 상처입은 머리 속으로 파고들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며 깊은 각인을 남겼고 빛의 무서운 파동은 이 눈에서 저 눈으로 퍼져갔다. 내부에서의 번개에 의해 시력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고통에 싸인 채 괴물은 앞다리를 휘저으며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는 손상된 머리를 젖히면서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뒤쪽 어두운 벼랑에 나 있는 굴의 입구를 향해 발톱으로 땅을 파헤치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샘은 계속 다가갔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계속 다가가자 마침내 셸로브는 꽁무니를 빼면서 급히 달아나려고 몸을 뒤채고 흔들었다. 굴에 이르러 억지로 몸뚱이를 밀어 넣는 순간 샘은 다리를 겨냥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셸로브는 푸르스름한 점액을 남기고는 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시에 샘은 땅에 쓰러져 버렸다. 셸로브는 사라졌다. 그 후 굴 속에 누워 적의와 비참한 처지를 달래며 암흑의 느린 세월 속에서 깨진 눈들을 치유하다가 다시 한번 암흑산맥 협곡에 굶주림을 달래기 위한 그 무시무시한 올가미를 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샘은 혼자 남겨졌다. 싸움이 벌어졌던 이름없는 대지가 저녁을 맞이할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주인에게 기어갔다. "프로도씨, 사랑하는 프로도씨!" 그러나 프로도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굴에서 빠져나온 것에 기뻐 맹렬히 앞으로 달리다가 뒤에서 달려든 셸로브에게 목부분에 날카로운 독이빨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프로도씨, 사랑하는 프로도씨!" 이렇게 부르고는 오랫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허사였다. 샘은 가능한 한 빨리 묶인 줄을 풀어 내고는 프로도의 가슴에 그리고 입에 귀를 가져다댔지만 아무런 생명의 기척도, 심장의 가냘픈 고동도 느낄 수 없었다. 주인의 손과 발을 비비며 이마를 쓸어 보았지만 이미 몸은 싸늘했다. "프로도씨, 프로도씨! 절 여기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당신의 샘이 부르고 있잖아요! 제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시면 안 돼요! 정신차리세요, 프로도씨! 오, 깨어나세요! 소중한 분, 내 소중한 분! 제발 정신차리세요!" 다음 순간 파도처럼 격한 분노가 밀려 와 그는 격분한 나머지 허공을 치고 돌멩이를 던지고 고함을 지르며 주인의 몸 주위에서 날뛰었다. 그러나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인에게로 돌아와 그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갑자기 그 얼굴이 로리엔의 갈라드리엘이 거울 속에서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영상 속의 모습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건 프로도가 창백한 얼굴로 거대하고 어두운 벼랑 아래 깊이 잠들어 누워 있는 영상이었다. 그때 그는 주인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돌아가신 거야! 잠드신 게 아니라 돌아가신 거야!" 이렇게 중얼거리자 마치 그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프로도의 얼굴은 독약이 끼얹어진 것처럼 검푸르게 변하는 것 같아 보였다. 샘은 절망감에 휩싸여 머리를 숙이고는 회색 두건을 얼굴 위로 뒤집어썼다. 그의 가슴에 밤이 밀려들며 그는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어둠이 지나가 샘이 눈을 들어 보니 주위에는 어둠이 밀려 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더디게 돌아갔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었고 프로도 또한 그 곁에 죽은듯 누워 있었다. 산맥이 붕괴되지도 땅이 폐허로 변하지도 않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껏 프로도씨와 헤치고 온 이 길이 결국 허사가 되었단 말인가?" 그러자 이 여행을 시작할 당시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저에겐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어떤 일이 있어요. 전 그 일을 해야만 해요, 프로도씨." "그렇지만 내가 무얼 할 수가 쓰지? 프로도씨를 묻어 드리지도 않은 채 이대로 산꼭대기에 내버려 두고 고향으로 갈 수는 없잖아. 아니면 계속 가야 할까? 계속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의구심과 두려움이 그를 뒤흔들었다. "계속 간다? 그게 내가 해야만 할 일일까? 그것도 프로도씨를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둔 채?" 마침내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프로도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추스려 주었다. 차가운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 올려 놓고 한쪽 끝에는 자신의 칼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파라미르가 준 지팡이를 놓았다. "만일 제가 계속 가야 한다면 프로도씨의 스팅을 가져가야 해요. 그렇지만 대신에 제 칼을 여기 놓아 두겠어요. 지난날 두 바퀴 수레에 탄 늙은 왕 곁에 놓였듯이 말이에요. 빌보씨께서는 당신께 그 아름다운 은빛 강철갑옷을 주셨지요. 그리고 프로도씨, 당신은 별 모양의 유리병을 빌려 주셨는데 저는 이제 계속 어둠 속에서 지낼테니 제게 필요할 거예요. 그건 제게 과분하지요. 또 숲의 레이디께서 당신께 드린거구요. 하지만 아마 그분도 이해하실 거예요. 당신은 이해하십니까, 프로도씨? 전 계속 가야만 하니까요." 그러나 그는 갈 수 없었다. 아직은 갈 수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프로도의 손을 잡았다. 그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그는 주인의 손을 잡은 채 어떻게 할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일으켜 새로운 여행 - 복수를 위한 - 을 계속 하기 위해 힘을 내려고 애썼다. 일단 갈 수만 있다면 그는 골룸을 잡을 때까지 이 세상 어떠한 험로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잡히는 날엔 골룸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복수 때문에 주인을 떠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었다. 그런다고 주인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를 되살릴 방법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 둘이 같이 죽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제 외로운 여행이 남은 것이다. 그는 번쩍이는 칼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뒤쪽 어둠의 벼랑과 무(無)로의 아득한 추락만이 존재하는 곳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쪽으로 도망칠 여지는 없었다. 그건 해야 할 일이 아니었으며 프로도를 애도하는 길도 아니었다. 그가 하려고 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하나?"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고 그제서야 그 어려운 대답 -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 을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한번의 외로운 여정이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다. "뭐라고? 나 혼자서 그 운명의 분화구로 간다고?" 이러한 생각에 그는 몸을 움츠렸으나 한편으론 결의가 더 굳어졌다. "뭐라고? 내가 프로도씨 반지를 빼내 간직한다고? 회의에서는 그에게 맡긴 건데?" 그러나 대답은 곧 나왔다. "그리고 회의는 프로도씨께 동지들을 주었어. 그 사명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 원정대원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거야. 그 사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해선 안 돼.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원정대원이 아니라면! 늙은 갠달프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여기 있었으면 좋으련만. 왜 내가 외토리로 이런 결심을 해야 하지? 난 분명 일을 그르칠 거야. 게다가 주제넘게 나서서 반지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내 일이 아닐 텐데. 그렇지만 넌 주제넘게 나선 게 아니야. 네가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거야. 그리고 올바르고 적당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너도 알겠지만 프로도씨도 또 늙은 빌보씨도 적임자는 아니었어.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단 말이야. 아, 나는 결심을 해야 해, 결심을 하겠어. 그러나 분명 난 일을 그르치고 말 거야. 그걸로 샘 갬기도 끝장이 날 테고. 어디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여기서 발각된다면, 더구나 프로도씨가 그 물건을 지닌 채 발견된다면 적이 손에 넣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로리엔과 리벤델 그리고 샤이어와 그 밖의 모든 것이 종말을 맞게 돼.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어. 시간을 허비하면 정말 끝장이 날 거야. 전쟁은 시작되었고 십중팔구 사태는 벌써 적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어.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조언이나 승낙을 얻을 계제가 아니야. 아니지. 그들이 와서 날 죽여 프로도씨의 시체에 겹쳐 놓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여기 앉아 있든지 아니면 지금 당장 그걸 가지고 떠나는 수밖에 없어."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그걸 내가 간직하는 거야, 그거야!" 그는 몸을 숙였다. 그는 매우 부드럽게 조임쇠를 풀고 프로도의 짧은 상의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런 다음 다른 손으로 머리를 일으키고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목걸이를 빼냈다. 머리를 다시 조용히 눕혔다. 프로도의 고요한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샘은 다른 어떤 징표보다도 더 뚜렷하게 프로도가 죽었으며 원정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안녕히 계세요, 프로도씨, 내 사랑하는 분이시여! 당신의 샘을 용서하세요. 만일 용케도 그 일을 마치게 되면 곧장 이리로 돌아올 겁니다. 그땐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제가 올 때까지 편히 쉬세요. 그리고 어떤 더러운 놈도 당신 곁에 오지 않기를 빌어요. 만일 숲의 레이디께서 제 말을 들어 주셔서 한 가지 소원을 허락하신다면 제가 바라는 건 오로지 돌아와서 당신을 뵙게 되는 것이에요. 안녕!" 그는 자신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반지의 무게 때문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그러나 무게가 적어지기라도 한 듯 아니면 샘에게 새로운 힘이라도 솟은 듯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고 그 다음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그 짐을 지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유리병을 들어올린 채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 빛은 여름날 저녁볕의 부드러운 광휘로 은은하게 타올랐으며 프로도의 얼굴은 다시금 고운 빛깔을 띠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오래전 어둠을 지나쳐 버린 이의 그것처럼 요정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샘은 그 마지막 모습에 쓰라린 위안을 안고 몸을 돌려 그 빛을 감추고는 짙어가는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가 가야 할 길은 멀지 않았다. 터널은 뒤쪽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었고 그 갈라진 틈까지는 이백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어스름 속에 길이 보였다. 그것은 오랜 세월의 통로로 밟아 다져진 오솔길로서 양쪽에 벼랑이 나 있는 기다란 골 속으로 완만하게 솟아올랐다. 그 골은 급격히 좁아졌다. 샘은 곧 넓고 얄팍한 층계로 길게 이어진 계단에 이르렀다. 이제 오르크의 탑이 시커먼 얼굴을 찌푸리며 바로 위에 있었고 그 속에선 붉은 눈이 불타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층계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 마침내 그 갈라진 틈에 이르렀다. 그는 중얼거렸다. "난 결심했어." 그러나 그가 완전하게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최선의 길로 나아가고 있긴 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의 기질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갈라진 틈의 가파른 측면들이 그를 에워쌈에 따라 그는 실질적인 정상에 도달하기 전에 그리고 이름없는 대지로 내려가는 소로를 바라보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는 한동안 참을 수 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꼼짝하지 않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몰려드는 어둠 속에서 굴의 입구는 아직도 작은 반점처럼 눈에 보였다. 그는 프로도가 누워 있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아래 땅바닥에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쓰러져 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흐른 눈물로 인한 착각인지도 몰랐다. "돌아가서 그분을 보고 싶은 내 소망, 내 단 하나의 소망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일찍이 그가 뗀 발걸음 중에서 가장 무겁고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몇 걸음에 불과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떼면 그는 내려가게 되었을 것이고 결코 그 장소를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느닷없이 고함소리와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는 돌처럼 굳어 그 자리에 섰다. 오르크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앞에도 뒤에도 있었다. 쿵쿵거리며 걷는 발소리와 날카로운 고함소리였다. 오르크들은 먼 곳으로부터, 아마 탑으로 들어가는 어떤 입구로부터 갈라진 틈으로 오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뒤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방향을 돌렸다. 그들이 터널로부터 나오자 작고 붉은빛들이, 횃불들이 깜박이며 멀어져가는 게 보였다. 마침내 추격이 개시된 것이었다. 탑은, 붉은 눈은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발각된 것이었다. 이제 앞에서 다가오는 횃불들의 흔들리는 불꽃과 쇠 부딪는 소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그들은 곧장 꼭대기에 이르러 그를 덮칠 것이다. 결심을 하는 데 너무 긴 시간을 끌었던 것이었고 이제 그 결심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어떻게 탈출하거나 생명을 건지거나 반지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반지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또는 결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목걸이를 벗어 반지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오르크들의 선두가 바로 앞의 갈라진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순간 그는 반지를 끼었다. 세상이 변해 버려 단 한순간에 한 시간 동안의 생각으로 가득찼다. 곧 그는 시력이 희미해지는 대신 청각이 예리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셸로브의 굴 속에서와는 사정이 달랐다. 이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어둡지 않고 다만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반면 그 자신은 거기 회색의 흐릿한 세계에 홀로 서 있는 작고 시커멓고 견고한 바윗덩이 같았으며 왼손을 내리누르는 반지는 선명한 황금의 구체 같았다.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기는커녕 끔찍하리만치 두드러져 보인다고 느꼈다. 그는 어딘가에서 하나의 눈이 자신을 수색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멀리 모르굴계곡에서 돌이 부서지는 소리와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 아래쪽 바위 아래에선 어떤 막다른 통로에서 길을 잃고 더듬는 비참한 처지의 셸로브의 부글부글 속끓는 소리, 탑의 지하감옥에서의 목소리, 터널에서 나오면서 질러 대는 오르크들의 외침소리, 귀를 멍멍하게 하는 포효하는 듯한 오르크들의 발소리, 대기를 진동시키는 아우성소리가 들렸다. 그는 벼랑에 기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들은 유령의 부대처럼 진군해 올라갔다. 그 모습은 안개 속에서 뒤틀려 보이는 회색 형상들 같았고 악몽 속에 나타나는 어슴푸레한 불길을 든 악마 같았다. 그들은 그를 지나쳐갔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바위 틈새로 들어가 몸을 숨기려 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터널에서 나온 오르크들과 아래로 행군해 가는 다른 오르크들이 만난 것 같았다. 그러자 양 패거리는 허둥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양편의 소리를 듣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반지가 언어에 대한 이해력을 부여해 준 것 같았다. 아니면 반지가 단순히 이해력만을, 특히 반지의 제조자인 사우론의 부하들에 대한 이해력을 부여해 관심을 갖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고 자신의 말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분명 반지는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에 다가갈수록 권능이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베풀어 주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기였다. 지금 샘은 모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낮게 엎드려 숨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애태우며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들이 얼마나 가까운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소리는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어이, 고르백! 이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전쟁은 벌써 끝난 거야?" "군율 위반이야, 이 덩치만 큰 멍청아! 그래, 넌 뭘 하고 있는 거냐, 샤그라트? 거기 잠복해 있는 데 벌써 싫증이 난 거냐? 내려와 싸우려는 거야?" "네놈이야말로 군율을 위반했다. 이 고갯길을 지휘하는 건 나야. 그러니 말을 삼가란 말이다. 뭐 보고할 게 있나?" "아무것도 없어." "하이! 하이! 요이!" 하는 고함소리가 대장들의 수작에 끼어들었다. 더 낮은 곳에 있던 오르크들이 갑자기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병사들도 뒤따라 달려갔다. "하이! 하이! 여기 뭐가 있다! 바로 길에 누워 있어. 첩자야, 첩자!" 뿔나팔이 요란스럽게 울리고 으르렁대는 소리들이 웅얼거렸다. 샘은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고 위축된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주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인가? 오싹하게 할 정도로 잔인한 오르크들의 소행에 대해서 그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원정대와 자신의 모든 결심을,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두려움과 의구심을 내던져 버렸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였었으며 또 지금 어디인가를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가 있을 곳은 주인 곁이었다. 그는 프로도를 향해 다시 계단과 오솔길을 달려 내려가며 생각했다. '얼마나 될까? 적어도 탑에서 삼사십 명이 왔고 아래서는 그보다 더 많이 온 것 같은데. 저놈들이 날 붙잡기 전에 내가 얼마나 많이 죽일 수 있을까? 칼을 뽑자마자 저놈들을 그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럼 난 얼마 가지 않아 끝장이 날 거야. 나를 기려 줄 노래가 남기나 할까? 샘와이즈가 어떻게 이 높은 고갯길에서 쓰러졌고 또 그 주인 곁에 얼마나 많은 시체들을 쌓아 올렸는지를. 아니야, 아무도 노래해 주지 않을 거야. 당연히 그럴 수 없겠지. 반지가 발견될 테고 그러면 더이상 어떤 노래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지. 내 자리는 프로도씨 곁이야. 엘론드와 회의 그리고 온갖 지혜를 갖춘 위대한 영주들과 숲의 레이디께서도 이걸 이해해야만 해. 그들의 계획은 틀려 버렸어. 난 그들의 반지사자가 될 수 없어. 프로도씨가 없이는 말이야.' 그러나 이제 오르크들은 그의 흐릿한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는 자기 몸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으나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거의 탈진할 정도로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리가 움직여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걸음은 너무도 느렸다. 오솔길은 수마일이나 되어 보였다. 안개 속에서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직 상당한 거리였다. 땅바닥에 누운 형체의 주위에 떼지어 있었다. 그 중 몇몇은 개처럼 냄새의 흔적을 찾느라 몸을 숙인 채 이리저리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힘차게 달려가려고 애썼다. "달려, 샘!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너무 늦어 버릴 거야!"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칼집 속의 칼을 느슨하게 뽑아 두었다. 그의 의도는 즉시 스팅을 뽑은 다음...... 오르크들은 무언가를 들어올리며 우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칼칼거리고 웃기도 했다. 왁자한 소란이 일었다. "야, 호이! 야, 하이 호이! 위로! 위로!" 그러자 누군가가 외쳤다. "이제 떠나자! 빠른 길로! 다시 지하문으로 가잔 말이야! 징표로 보아 셸로브는 오늘밤 우릴 괴롭히지 않을 거야." 오르크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운데에 선 네 명은 어깨 위로 무언가를 떠메고 있었다. "야, 호이!" 그들은 프로도를 떠메갔다. 그들은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샘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힘들여 나아갔다. 오르크들은 터널에 당도해 안으로 들어갔으며 계속 밀치고 당기는 둥 대단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샘은 계속 다가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파랗게 흔들리는 빛을 발하는 칼을 빼들었지만 오르크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헐떡이며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제일 후미에 섰던 오르크까지 시커먼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그는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얼굴 위로 소매를 끌어당겨 더러운 얼룩과 땀과 눈물을 닦아 냈다. "저주받을 더러운 것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들을 쫓아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터널 속은 그에게 더이상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엷은 연무 속에서 벗어나 좀더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 간 정도 같았다. 피로가 점차 더해 갔으나 그의 의지는 그만큼 더 굳어졌다. 저 앞쪽에 횃불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오르크들은 원래 굴 속을 신속히 이동하는 족속인데다 이 굴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셸로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도시로부터 산맥을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로서 이 굴을 자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시대 전에 셸로브가 거처를 삼았었던 본 터널과 거대한 둥근 구덩이가 얼마나 아득한 시절에 만들어졌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군주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고가기 위해 그들은 그 굴을 피해 스스로 그 주변으로 수많은 샛길을 파놓았었다. 오늘밤 그들은 밑으로 깊이 내려가려 하지 않고 벼랑 위의 감시탑으로 이어지는 옆 통로를 찾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에 만족해 아주 기분이 좋았기에 달려가면서도 자신들 방식대로 재잘거리고 떠들어 댔다. 그들의 새된 목소리가 죽은 듯한 대기를 뚫고 단조롭고 딱딱하게 들렸다. 샘은 그 중에서 두 목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었다. 그 두 목소리는 더 컸으며 그에게 더 가까웠던 것이다. 두 분견대의 대장들이 언쟁을 벌이며 맨 뒤에서 가고 있었다. "오합지졸들이 야단법석을 벌이지 못하게 할 수 없나, 샤그라트? 셸로브가 덮치면 어떻게 할 거야?" 한쪽이 먼저 이렇게 투덜거렸다. "허튼소리 말아, 고르백! 네놈 부하들이 더 떠들고 있잖아. 어쨌거나 떠들라고 내버려두라구. 셸로브에 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아마 못 위에 주저앉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대신 울어 줄 수도 없잖아. 셸로브가 내갈긴 더러운 오물이 보이지 않아? 한번만 더 떠들지 말라고 하면 백번째야. 그러니 웃게 내버려두라구. 우린 상당한 횡재를 한 거야. 루그버즈가 원하던 것을 찾았으니 말이야." "루그버즈가 그걸 원하다구, 응?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하지? 내겐 요정 같아 보이던데 좀 작은 편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런 게 뭐가 위험하지?" "보기 전에는 모르지." "아하! 그러니 그들이 너에게 어떻게 될 건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말이지? 그들은 우리에게 자기들이 아는 걸 다 말해 주진 않아, 안 그래? 절반도 말해 주지 않는다구. 그렇지만 그들도 실수를 할 수 있어. 심지어 꼭대기에 있는 자들까지 말이야." "쉿, 고르백!" 샤그라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이상하게 예민해진 청각을 갖게 된 샘조차도 그가 말하는 내용을 간신히 포착할 수 있었다. "그들도 실수를 하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곳에 눈과 귀를 깔아 두었어. 어쩌면 내가 그 중 어떤 것에 걸려 들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네 말에 의하자면 저 아래 나즈굴이 그렇고 또 루그버즈도 그래. 어떤 일이 거의 낭패에 이를 뻔한 거야." "거의라구!" "그래. 그렇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자구. 지하로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거기서 애들이 계속 나아갈 동안 우리가 얘기를 좀 할 곳이 있으니까 말이야." 곧 횃불이 사라졌다. 그러자 우르르 하는 굉음이 들렸고 샘이 달려가는 순간 쿵 하는 충돌음이 퍼졌다. 그는 오르크들이 방향을 돌려 프로도와 자신이 시도했다가 막힌 것을 발견했던 바로 그 입구로 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도 그대로 막혀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어쨌든 오르크들은 그 안으로 통과해 들어간 것이다. 안쪽으로부터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다시 탈을 향해 산맥 속을 관통하며 깊숙하게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샘은 절망적이었다. 오르크들은 어떤 음험한 목적을 가지고 주인의 몸을 떠메가고 있는데 그는 따라갈 수가 없다니. 장애물을 떠밀기도 하고 몸을 던져 부딪쳐 보기도 했지만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안쪽 멀지 않은 곳에서, 또는 멀지 않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두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혹시 무언가 도움되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잠시 서서 귀를 기울였다. 미나스 모르굴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고르백이 혹시 밖으로 나온다면 그때 슬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고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난 몰라. 보통 소문이란 날개돋힌 듯 빠른 법이지. 그렇지만 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캐려고 하지 않아. 그게 안전하거든. 그르르! 그 나즈굴들을 생각하면 오싹해져. 그들은 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네게서 육체를 벗겨내 어둠 속으로 깨끗이 보내 버릴 수 있어. 그렇지만 그분은 그들을 좋아해. 사실 요즘은 그들이 그분의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거든. 그러니 툴툴거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너한테 말이지만 저 아래 도시에서 일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어." "그럼 넌 여기서 셸로브와 한패가 되어야겠군." "나즈굴이 모두 없어진다면 그러고 싶어. 그러나 지금은 전쟁중이야. 전쟁이 끝나면 모든 사정이 좀더 편해질 수 있겠지." "전쟁은 잘돼 간다던데." "그렇다고 하겠지.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나 어쨌든 전쟁이 잘돼 간다면 우리에게도 좀더 여유가 생기는 거야. 어때, 기회가 오면 나와 함께 슬쩍 빠져서 쓸 만한 놈 몇 데리고 우리 힘으로 한번 시작해 보는 게? 아주 손쉬운 약탈거리도 많고 거창한 왕초들이 없는 어딘가에서 말이야." "아! 옛날처럼 말이지." "그래. 그렇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말아. 마음이 별로 편치 않아. 내가 말했듯이 왕초들도, 그래,"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왕초들도 실수를 할 수 있어. 넌 어떤 일이 거의 낭패할 뻔했다고 그랬지? 내가 알기론 정말 낭패를 보았어. 그러니 우린 잘 살펴봐야 해. 불쌍한 우루크들이 낭패가 된 일을 언제나 정상으로 돌려 놓지만 언제나 얻는 건 보잘것없는 공치사뿐이야. 그러니 잊지 말라구. 적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아. 또 만일 적들이 그를 이긴다면 우리도 끝장이야. 그런데 이봐, 너는 언제 출동명령을 받았지?" "한 시간쯤 전에.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기 바로 전이지. 이런 전갈이 왔었어. '나즈굴이 꺼림칙하다고 함. 계단에 첩자가 나타날지 모름. 이중경계를 펼 것. 계단 꼭대기까지 순찰할 것.' 그래서 내가 곧장 온 거야." "불길한 일인데. 보라구, 내가 알기로는 침묵의 감시자들은 이틀 전부터 뭔가 불안해 했어. 그런데도 하루 더 순찰하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고 또 루그버즈에도 아무런 전갈이 가지 않았어. 위대한 눈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고 또 나즈굴들은 전장으로 나간 거야. 그래서 루그버즈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거지." "위대한 눈은 다른 곳에서 바쁜 모양이지. 아마 저 서쪽 먼 곳에서 무슨 거창한 일이 벌어지고 있나 봐."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만 그 동안에 적이 계단을 오른 거야. 그런데도 넌 뭘하고 있었지? 특별 명령이건 아니건 넌 감시를 계속해야 했잖아? 네가 하는 일이 뭐야?" "됐어, 그만 해! 내게 내 임무를 가르치려 들지 말아. 우린 이상없이 경계에 만전을 기했어. 우린 재미있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이야." "재미있다고!" "그래,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지. 빛과 고함과 그 밖에 모든 것이. 셸로브는 계속 활동했어. 내 부하들이 셸로브와 그의 살금거리는 부하를 보았어." "그의 부하라고? 그게 뭐야?" "틀림없이 너도 본 적이 있을 거야. 덩치는 작고 야윈 데다 시커먼 놈이지. 거미같기도 하고 아니면 굶어죽은 개구리 같기도 해. 이전에도 여기 온 적이 있었어. 몇 년 전에 처음 루그버즈에서 나왔는데 그때 상부에서 통과시켜 주라는 명령을 받았었어. 그때 이후 그는 계단을 몇 번 더 올라왔었지만 우린 그냥 내버려 뒀었지. 셸로브와는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인 모양이더군. 하긴 잡아먹기에도 좋지 않은 놈이지. 셸로브는 상부의 명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거든. 어쨌든 넌 계곡에 훌륭한 경비병을 두었더군. 이 모든 소란이 있기 전날 그는 이 위쪽에 있었어. 지난밤 우린 그를 봤지. 어쨌든 내 부하들이 보고하기를 셸로브가 무슨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했는데 전갈이 오기 전까지는 좋은 징조 같았어. 난 셸로브의 그 부하녀석이 그에게 장난감을 하나 가져다주었든지 아니면 네가 전쟁포로든지 뭐든지 선물을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 그가 재미를 보고 있을 땐 난 끼어들지 않아. 사냥에 들어간 셸로브에게선 빠져나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다고! 저 뒤쪽에서 일어난 일을 보지 못했어? 난 마음이 편치 못하단 말이야. 계단을 오른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건 빠져나갔어. 그것은 셸로브의 거미줄을 끊고 깨끗이 빠져나갔다구.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란 말이야!" "음, 그렇지만 마침내 셸로브가 붙잡았잖아, 안 그래?" "잡았다구? 누굴 잡아? 이 자그마한 녀석 말이야? 이 녀석 한 놈뿐이었다면 셸로브는 오래전에 벌써 식량창고에 가져다놓았을 거야. 그런데도 루그버즈가 이 녀석을 원했다면 넌 거기 가서 그를 데려와야 했을 거야. 네겐 잘된 일이지.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한 놈이 아니었단 말이야." 여기서 샘은 좀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해 바위에 귀를 바싹 가져다댔다. "셸로브가 묶었던 줄을 끊은 건 누구겠어, 샤그라트? 거미줄을 잘라 내고 탈출한 바로 그 자야. 그걸 모르겠어? 그리고 누가 그 위대한 셸로브의 몸에 못을 박았겠어? 난 같은 자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는 어디 있지? 그가 어디 있는 거야, 샤그라트?" 샤그라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너도 잘 아다시피 아직껏 셸로브의 몸에 못을 박은 자는 아무도 없었어. 물론 그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생각해 봐. 불운한 옛 시절 이래, 대공략 이래 나타났던 어떤 다른 반역자보다 더 위험한 누군가가 이 부근을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무언가가 잘못된 거야." "그렇다면 그게 뭐야?" "모든 징표로 보건대, 샤그라트대장, 아마 요정일 거야. 어쨌든 요정의 칼과 도끼를 가진 전사 한 명이 돌아다닌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가 네 구역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넌 그를 발견하지 못했어. 정말이지 재미있는 일이야." 고르백은 이렇게 말하고 침을 뱉았다. 샘은 자신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 미소를 지었다. "음, 넌 언제나 너무 어둡게 본다구. 넌 그 징표들을 네 좋을 대로 판단할 수 있겠지만 난 달리 생각할 수도 있어. 여하튼 난 모든 지점에 경비병을 배치해 두었었어. 그리고 난 한번에 한 가지씩 처리할 거야. 우리가 붙잡은 녀석을 한번 보게 될 때 그때서야 난 다른 것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할 거라구." "내 짐작으론 네가 그 자그마한 녀석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없을걸. 그는 실제적인 위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구. 날카로운 칼을 지닌 그 커다란 녀석은 어쨌든 그를 그렇게 가치있는 녀석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땅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쳐 두었잖아. 요정들이 으레 하는 비열한 수법이지." "곧 알게 되겠지. 자, 우린 이만하면 충분히 얘기를 나눴어. 가서 포로를 한번 보자구." "그놈을 어떻게 하려는 거야? 먼저 발견한 건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 뭔가 취득물이 나온다면 그건 나와 내 부하들의 차지야." "야야, 난 명령을 받은 몸이야. 명령을 위반하면 내 배나 네 배나 성할 수가 없어. 경비병이 발견한 모든 침입자는 탑 속에 수용해 두어야 해. 포로의 옷을 벗겨 모든 물건, 옷, 무기, 편지, 반지 또는 장신구에 대해 즉각 루그버즈에 자세히 보고해야 하고 또 오로지 루그버즈에만 보고해야 해. 그리고 그가 누굴 보내거나 손수 올 때까지 감시대의 모든 자는 포로를 안전하게 원상태 그대로 감금해 두어야 해.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그때는 죽음이야. 내가 이제 하려는 것도 명령을 그대로 따르려는 거야." "벗긴다구, 응? 이빨, 손톱, 머리칼 모두를 말이야?' "아니, 그런 건 벗기지 않아. 포로는 루그버즈의 소관이야. 그러니 안전하고 또 온전하게 놓아 두어야 해." "그건 어렵겠는데. 이제는 썩은 고기에 불과하잖아. 루그버즈에서 저런 걸 가지고 뭘 하려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 차라리 가마솥에 넣는 게 낫겠는걸." "이 바보야! 넌 똑똑한 소리를 해왔어. 그렇지만 다른 자들은 알고 있지만 네가 모르고 있는 일이 많아. 만일 조심하지 않으면 네 자신이 가마솥에 들어가거나 셸로브의 밥이 되고 말 거야. 썩은 고기라구! 셸로브에 대해 아는 게 그것밖에 안돼? 셸로브가 줄로 묶을 때는 고기를 먹으려는 거야. 그는 죽은 고기는 먹지 않아. 차가운 피도 빨아먹지 않고. 이 녀석은 죽은 게 아냐!" 샘은 비틀거리며 바위를 꽉 잡았다. 어둠의 세계 전부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 충격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버둥거리는 바로 그때 그의 몸 깊은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바보야, 그분은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 네 가슴은 그걸 알고 있었어, 네 머리를 믿어선 안 돼, 샘와이즈. 그건 네 가장 좋은 부분이 못 돼. 네 문제점은 결코 네가 진정으로 어떤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야. 이제 어떡할 거야?' 당장은 꼼짝 않는 바위에 기대선 채 그 역겨운 오르크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이외에 방도가 없었다. 샤그라트가 다시 말했다. "이봐. 셸로브에겐 독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야. 사냥을 할 땐 그냥 목에다 가볍게 한번 건드릴 뿐이야. 그렇게만 해도 뼈를 발라 낸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린다구. 그때 마음대로 요리하는 거야. 늙은 우프트하크를 기억해? 그는 며칠 간이나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구석에 매달린 것이 발견됐는데 완전히 깬 상태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잖아. 우리가 얼마나 웃었다구. 아마 셸로브가 잊어 버렸던 모양이지만 우린 그를 건드리지 않았어. 셸로브의 일에는 끼어들어서 이로울 게 없으니 말이야. 이 자그맣고 더러운 녀석도 몇 시간만 있으면 깨어날 거야. 잠시 메스꺼운 기분이 지나면 말짱해진다구. 만일 루그버즈가 그냥 내버려 둔다면 말이야.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어리둥절해 하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말이지. 우리가 다른 일은 할 수 없다 해도 어쨌든 몇 가지 이야기는 해줄 수 있겠지. 이놈은 멋진 루그버즈에 가본 적이 없을 테니까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을 테지. 이건 생각보다 더 재미있겠는데. 가자!" "말해 두지만 아무 재미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린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어." "좋아! 그렇지만 내가 네 입장이라면 루그버즈에 전갈을 보내기 전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그 덩치 큰 녀석을 잡겠어. 새끼고양이는 잡고 어미는 놓쳤다고 말한다면 그리 멋지게 들리지 않을 거야." 목소리들은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샘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충격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던 그에게 이제 격렬한 분노가 밀려들었다. "내가 모든 걸 그르쳤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제 그들이 프로도씨를 데려갔어. 악마들이, 더러운 놈들이! 결코 주인을 떠나선 안 돼, 결코! 이게 내가 지켜야 할 올바른 규범이었어. 난 그걸 가슴 속에서 알고 있었지.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이제 난 프로도씨께 돌아가야 해. 어떻게 해서든지, 어떻게 하든지 말이야." 그는 다시 칼을 뽑아 칼자루로 바위를 두드렸다. 그러나 둔중한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그러나 칼날이 환하게 빛을 발해 그는 희미하게나마 살펴볼 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위가 육중한 문처럼 생겼으며 자기 키의 두 배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위로는 작은 아치 모양의 공간이 있었다. 아마 그건 셸로브의 침입을 막으려고 세워 놓은 장애물로서 그 괴물의 간지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자물쇠를 안쪽에 대 놓은 모양이었다. 샘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올라 바위 위쪽을 붙잡고 기어오른 다음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빛을 뿌리는 칼을 잡은 채 모퉁이를 돌아 구불구불한 터널을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갔다. 주인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그는 피로도 잊고서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끌어냈다. 이 새로운 통로는 계속 구부러지고 방향을 바꾸었기 에 그는 멀리까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두 명의 오르크를 따라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다시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꽤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샤그라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하려는 게 바로 그거라구. 그를 꼭대기방에 똑바로 세워 둘 거야." "뭣 때문에? 아래쪽에는 감옥이 없나?" "그렇게 해야 제일 안전해. 알겠어? 이놈은 귀중한 포로야. 난 내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아. 네 부하도 마찬가지고 또 재밋거리에 미쳐 있는 너도 난 내가 원하는 곳에 둘 거야. 그리고 네가 말을 조심하지 않는다면 못 오게 할 거야. 저 꼭대기가 좋아. 거기라면 안전할 거야." 그러자 샘은 외쳤다. "그럴까? 넌 네가 붙잡지 못한 위대하고 덩치 큰 요정의 전사를 잊고 있어!" 그 말과 함께 샘은 달려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지만 터널이 워낙 마술에 걸려 있었든지 아니면 반지가 부여하는 특별한 청각 때문에 착각을 했든지 거리를 잘못 계산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두 명의 오르크는 여전히 얼마큼 앞쪽에 있었다. 이제 그들은 붉은빛을 배경으로 검고 작달막하게 보였다. 드디어 통로는 곧바로 펼쳐져 비탈 위로 이어졌다. 끝에는 거대한 이중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아마 탑의 저 아래쪽 깊은 방들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프로도를 떠멘 오르크들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고르백과 샤그라트는 성문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샘은 갑자기 터져나오는 새된 노랫소리, 룬나팔소리, 징소리 그리고 끔찍스런 외침소리를 들었다. 고르백과 샤그라트는 이미 문에 당도했다. 샘은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그의 작은 목소리는 그 소란 속에 묻혀 버렸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거대한 문은 쿵 하고 닫혀 버렸다. 안에서 쇠빗장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걸렸다. 성문은 닫혔다. 빗장 걸린 놋쇠판에 몸을 던져 부딪친 샘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바깥 어둠 속에 있었고 프로도는 살아있지만 적에게 붙들려 버린 것이었다. 옮긴이 김 번 1959년 울산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 한성대 강사. 주요논문 「죠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세계 연구」외. 김보원 1958년 경북 영양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방송통신대학 전임강사. 주요논문 「토마스 하디의 Jude the Obscure 연구」 「로렌스 스턴의 소설들에 나타난 센티멘탈리즘」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영소설 전통」외. 이미애 춘천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서울대, 국민대 강사. 주요논문 「Joseph Conrad와 공동체의식」외. 제1장 미나스 티리스 피핀은 갠달프의 망또자락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이 질주가 시작된 이래 너무 오랫동안 갠달프의 망또에 푹 둘러싸여 혼란스런 꿈속을 헤매고 있었기에 아직도 완전히 잠을 깬 건지 아닌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둠의 세계가 뒤로 밀려나며 귓가에는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스쳐지나갔다. 빙글빙글 도는 듯한 별들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른편 남쪽으로 산맥이 길게 뻗어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어둠이 짙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잠결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또 어디를 지 나왔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그 기억은 불확실하고 몽롱한 것이었다. 대단한 속력으로 출발한 이래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 새벽녘 찬란한 금빛 광선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에는 조용한 도시에 도착해 언덕 위 커다란 빈 집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또다시 날개달린 어둠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고 지나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갠달프가 부드럽게 피핀을 달래 주었고, 피핀은 마치 꿈결처럼 사람들이 지나가며 두런거리는 소리, 갠달프가 지시하는 소리들을 들으며 구석이 자리를 잡고 과히 편치 못한 잠에 빠져 들었었다. 그리고 그 밤중에 다시 질주가 시작됐었다. 오늘이 그가 신석을 본 지 이틀, 아니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그는 이런 끔찍한 기억을 더듬으며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었다. 바람소리는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귓전을 울렸다. 국경 너머에서 노란 불꽃이 피어올라 하늘을 불태웠다. 피핀은 더럭 겁이 나 몸을 움츠렸다. 갠달프는 지금 어디로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걸까. 그는 눈을 비비고나서야 동쪽 어둠 속에서 거의 보름에 가까워진 달이 떠오르는 중이라 는 것을 알았다. 밤은 아직 그리 깊지 않아 몇 시간 더 어둠 속의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갠달프?" "곤도르로. 지금 아노리엔을 지나고 있지." 잠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후 피핀은 갠달프의 망또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저게 뭐예요? 보세요! 불, 붉은 불이에요! 이 근처에 용이라도 있나요? 보세요, 저기 또 있어요!" 그러나 갠달프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섀도우폭스에게 외쳤다. "가자, 섀도우폭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구나. 봐라! 곤도르의 봉화가 타오른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야. 아몬딘의 봉화! 엘레나크의 봉화! 점점 서쪽으로 전달되고 있는 거야. 나르돌, 에렐라스, 민 리몬, 칼렌하드 그리고 로한의 국경 할리피렌으로!" 섀도우폭스는 느릿느릿 걸어 가다가 목을 들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어둠 저편에서 다른 말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세 명의 기사가 말을 몰고 그들을 지나쳐 마치 달빛 속의 유령처럼 서쪽으로 사라져갔다. 섀도우폭스도 다시 굽을 모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뒤로 어둠이 썰물처럼 스쳐 지나갔다. 갠달프는 곤도르의 풍습과 그 영주가 방대한 국경선을 따라 높이 솟은 봉우리들에 봉화대를 설치한 사실, 그리고 위급할 때 북쪽의 로한이나 남쪽의 벨팔라스에 전령을 파견하기 위해 항상 말을 대기시켜 놓는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해 주었으나 피핀은 다시 졸음이 쏟아져 와 거의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북부의 봉화가 타오른 지도 상당히 오래됐지. 그렇지만 고대의 곤도르에는 그런 것이 아예 필요가 없었어. 그들은 일곱 개의 신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피핀은 신석이란 말을 몸을 움찔했다. "무서워할 건 없어. 잠이나 자게. 자넨 프로도처럼 모르도르로 가는 게 아니라 단지 미나스 티리스로 가는 거니까 말이야. 지금으로선 거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을거야. 만일 곤도르가 함락되거나 반지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샤이어도 더이상 안전할 수는 없겠지." "아무래도 위안이 되는 이야긴 아니군요." 그러나 잠은 여전히 쏟아져 왔다.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쪽 달빛을 받으며 구름 위에 떠 있는 횐 산봉우리들이었다. 그는 프로도가 지금 어디 있는지, 혹시 모르도르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죽고 말았는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날 밤 프로도 역시 곤도르 저편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피핀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말 위에서의 하룻밤이 또 지나갔다. 새벽녘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느껴졌고 주위에는 음산한 회색 안개가 깔려 있었다. 섀도우폭스는 땀을 흘리며 콧김을 내뿜고 있었지만 여전히 목을 꼿꼿이 세운 채 피로한 기색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옆에는 중무장을 한 기사들이 서 있었고 그들 뒤에는 안개 속에서 성벽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벽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있어 아직 밤이 채 걷히지 않았음에도 복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망치소리, 흙 바르는 소리, 바퀴소리 등등. 횃불이 안개 속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갠달프는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피핀은 그들에 지금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 지휘자 같아 보이는 기사가 말했다. "사실 우린 당신을 압니다, 미스랜더. 또 일곱 개소 성문의 통과암호도 알고 계시니 들어가실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린 당신과 함께 온 저 사람은 모릅니다. 누구지요? 북쪽 산에서 내려온 난쟁인가요? 요즘엔 이방인을 환영하지 않지요. 특히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거나 우리한테 도움을 줄 만한 힘을 갖춘 전사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난 저 사람을 데네도르공 앞에서라도 보증할 수 있소. 그리고 무용(武勇)이란 것이 반드시 키에 비례하는 건 아니오. 잉골드, 그대는 이 친구보다 두 배는 키가 크지만, 그는 그대보다 더 많은 격렬한 모험과 전투를 겪어 왔소. 또한 그는 우리가 소식을 가져온 그 이센가드의 폭풍 속을 막 지나온 길이라 무척 지쳐 있소. 그렇지만 않다면 그를 깨울 텐데 말이오. 그의 이름은 페레그린이고 아주 용감한 사람이오." "사람?" 잉골드는 의심스러운 듯 반문했고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피핀은 이제 완전히 깨어나 외쳤다. "사람! 물론 아니오! 난 호비트고 또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필요한 때만 빼곤 별로 용감하지도 않아요. 그래요, 갠달프가 당신들을 속인 거예요." 그러자 잉골드가 말했다. "위대한 일을 한 이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지요. 그런데 호비트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갠달프가 대답했다. "하플링이오. 물론 그 노래 속의 하플링은 아니고."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오르자 그는 덧붙였다. "이 친구가 아니라 그 동족 중의 하나지." 그러자 피핀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난 그와 같이 여행한 친구예요. 당신네 나라의 보로미르도 함께 있었지요. 저 북쪽 눈 속에서 날 구하고는 결국 많은 적들에게 살해되었지만요." "조용히! 슬픈 소식은 그의 부친에게 먼저 알려야지." 갠달프가 이렇게 주의를 주자 잉골드가 말했다. "벌써 예상하고 있는 일입니다. 근래에 이상한 전조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어쨌든 통과해도 좋습니다. 미나스 티리스의 영주께선 그 아드님의 소식을 들려 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실 테니까요. 그가 인간이건 아니면......" "호비트예요. 당신들의 영주께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난 용감한 보로미르를 생각해서라도 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럼 조심해 들어 가시지요." 잉골드가 말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섀도우폭스는 성벽 사이의 좁은 문을 통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잉골드가 뒤에서 외쳤다. "요즘같이 도움이 필요한 때에 데네도르공과 우리 모두에게 좋은 자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미스랜더! 당신은 습관처럼 항상 슬픔과 위험의 소식만을 가져온다고들 말하지만 말입니다." "자주 오지 않고 도움이 필요할 때만 오니까 그런 소리들을 하겠지. 좋은 충고로 말하자면, 펠레노르의 성벽 수리에 너무 오래 시간을 끌고 있다는 말을 해야겠는걸. 이렇게 폭풍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는 용기가 가장 좋은 방어책이 될 거요. 희망을 가지시오. 난 나쁜 소식만을 가져온 건 아니니까. 자, 어서 흙손을 치우고 칼을 정비할 시간이오." "이 일은 저녁 전에 끝날 겁니다. 여기가 방어선 성벽의 마지막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이쪽은 우방 로한과 인접한 곳이니까 공격당할 위험이 제일 적은 곳이지요. 그들 소식을 알고 계신가요? 그들이 도우러 올까요?" "그렇소. 그들은 올 거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당신들 후방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소. 이쪽, 아니 이젠 그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소. 하지만 부디 용기를 내시오. 폭풍의 까마귀 갠달프가 아니었다면 그대들은 로한의 기사들을 보기는커녕 아노리엔으로부터 수많은 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오. 아직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지. 부디 안녕히! 졸지 마시오." 갠달프는 이제 람마스 에코 너머의 넓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곤도르인들은 이딜리엔이 함락되자 맏은 인원과 장비를 들여 외벽이라 불리는 성벽을 건조했다. 성벽은 산맥 기슭으로부터 삼십여 마일 이상 길게 뻗어 나오다가 다시 돌아들어, 펠레노르평원을 완전히 둘러쌌다. 펠레노르는 아름답고 기름진 도시평원으로 안두인대하의 깊은 수면을 향해 길게 뻗쳐 있었다. 도시의 성문으로부터 가장 먼 부분은 동북쪽으로, 시에서 십이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 성벽은 험준한 강둑 위에 강을 따라 축조되었다. 사람들은 그 성벽을 아주 높고 튼튼하게 쌓았다. 왜냐하면 그 성벽은 오스길리아스의 다리로 통하는 길목이자, 무장된 탑 사이의 차단선으로 통하는 길을 방어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시에서 가장 가까운 성벽은 약 삼 마일 정도 떨어진 것으로 남동쪽 방면의 성벽이었다. 남이딜리엔의 에민 아르넨산 중턱을 돌아나가던 안두인대하는 그곳에서 서쪽으로 급히 꺾였고, 외벽은 바로 그 강둑에 세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쪽 영지로부터 역류를 거슬러 오는 배들을 위한 할론드부두가 있었다. 도시평원은 넓은 경지와 많은 과수원으로 아주 풍요로웠으며 농가에는 곡식건조장, 창고, 가축우리, 외양간 등이 있었다. 고지대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울이 흘러내려 푸른 들을 통해 안두인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거주하는 목자나 농부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의 일곱 원형구역 안에 살거나 아니면 로사나크의 산속 깊은 계곡에서, 또는 훨씬 남쪽 다섯 갈래의 빠른 지류가 흐르는 아름다운 레베닌에서 살았다. 산맥과 바다 사이에는 거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도 곤도르인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혈통은 흐려졌으며 또 그들 사이에는 곤도르왕국이 세워지기 전 암흑의 시대로부터 계보가 이어져 온 키가 작고 피부가 거무스레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너머 벨팔라스의 거대한 영지에는 임라힐왕자가 바다에 면한 성 암로스에 살고 있었다. 그는 고귀한 혈통을 가진 이로 그의 종족 역시 푸른 눈의 꿋꿋한 사람들이었다. 갠달프가 한참 말을 몰아가고 있는 동안 하늘에는 햇살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피핀은 몸을 일으켜 망또 밖을 내다보았다. 왼쪽으로는 동쪽의 삭막한 어둠을 끌어들이는 안개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거대한 산맥이 서쪽에서 갑자기 끊어지며 머리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이 거대한 계곡이 앞으로 다가올 전쟁과 협상의 자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강물로 길을 내고 터져 나온 것 같아 보였다. 에레드 님 라이스의 흰 산맥이 끝나는 곳에서 그는 갠달프가 말한 것처럼 민돌루인산의 거봉과 그 깊은 골짜기의 짙은 자줏빛 안개, 그리고 밝아오는 태양 아래서 하얗게 빛나는 긴 산등성이를 보았다. 산기슭에는 방어준비를 갖춘 도시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도시를 둘러싼 일곱 겹의 성벽은 너무 튼튼하고 오래돼 보여 마치 인간이 축조한 것이 아니라 땅의 뼈로 이루어진 거인이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 피핀이 경이롭게 성벽을 바라보는 동안 성벽은 회색에서 흰색으로 점차 변하며 햇빛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태양이 동쪽 어둠을 넘어 모습을 드러내며 도시 정면으로 빛을 보냈다. 피핀은 크게 탄성을 올렸다.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은 엑델리온탑이 하늘을 향해 자태를 드러내며 진주와 순은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흉벽에는 하얀 깃발이 아침 선들바람에 펄럭였고 은으로 만든 트럼펫 같은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 갠달프와 페레그린은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곤도르의 성문에 이르렀다. 그들이 다가가자 철로 된 성문이 열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외쳤다. "미스랜더! 미스랜더! 당신을 보니 정말 폭풍우가 다가온 걸 알겠군요." "당신들 머리 위에 와 있지. 난 폭풍의 날개를 타고 왔소. 자, 비켜 주시오. 난 데네도르공께서 섭정의 권한을 갖고 계시니 먼저 그를 만나야겠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곤도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 때가 된 것이요 자, 비켜들 주시오." 사람들은 그의 앞에 타고 있는 호비트와 그가 탄 말에 호기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갠달프의 말에 따라 길을 비켜 뒤로 물러섰다. 이 도시에서는 말을 거의 기르지 않았으며 영주의 전령마를 제외하면 길에서 말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섀도우폭스를 보고 서로 속삭였다. "아마 저 말은 로한의 왕이 기르는 커다란 말 중 하나겠지? 이제 곧 로한인들이 달려오면 우리 힘은 배가될 거야." 그러나 섀도우폭스는 길게 구부러진 길을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성은 미나스 티리스의 건조양식대로 산기슭을 일곱 단으로 깎아 단마다 성벽을 쌓았고, 성벽마다 성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성문은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뚫려 있었다. 가장 큰 성문은 성곽 동쪽에 있었으며 그 다음 성문은 남동쪽, 세번째는 북동쪽, 이런 식으로 엇갈리게 성문을 세워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궁성으로 가는 길은 첫 성문을 지나면 다음 성문까지는 언덕을 따라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최초의 성문에서 맨 위 일곱번째 성벽까지, 첫 구역을 제외한 전 궁성을 둘로 가르는 거대한 차단벽이 축조되어 있어 성문을 나설 때마다 다음 성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벽에 난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또 자연적인 산세와 고대의 인력, 그리고 뛰어난 기술에 힘입어 큰 성문 뒤의 넓은 광장 끝에는 동쪽에서 보면 마치 배의 용골처럼 날카로운 망루가 솟아 있었다. 그 망루는 맨 위 성벽까지 연결된 차단벽의 앞부분으로 전체가 흉벽으로 싸여 있었다. 그래서 맨 위 궁성에 사는 사람들도 배 돛대 위의 선원처럼 삼백삼십 미터 아래에 있는 맨 아래 성문 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동쪽을 향해 열려 있는 궁성의 입구도 차단벽과 마주치기 때문에 터널은 꺾여져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결국 궁성에서부터 맨 아래 성벽까지 긴 경사면의 흉벽으로 둘러싸인 차단벽이 성곽의 중추가 되는 것이었다. 궁성에 들어서면 백색탑 발치에 있는 궁정과 분수의 광장에 도달하게 된다. 백색탑은 기단에서 첨탑까지 쉰 길이나 되는 높고 아름다운 건물로 평지로부터 삼백 미터나 되는 높이에서 섭정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 도성은 실로 견고한 것으로 적이 배후로 돌아 민돌루인산 기슭을 점령해 성곽이 산에 이어지는 견갑부 언덕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최소한의 인원으로도 능히 지킬 수 있는 요새였다. 또한 그 견갑부가 되는 언덕은 다섯번째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서쪽 절벽까지 견고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산과 탑 사이의 가장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기에 죽은 왕과 영주를 위한 둥근 지붕의 건물과 무덤들이 있었다. 피핀은 이센가드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튼튼하며 아름다운, 아니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크고 장엄한 도성을 경이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시는 해가 바뀜에 따라 조금씩 황량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표시에는 적정 인구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길을 가다 본 커다란 건물과 궁성의 문과 벽에는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아름답고 이상한 모양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피핀의 생각으로는 과거 이 도시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이나 그 친족들의 이름 같았다. 그러나 길은 아주 넓고 조용해 보도 위에는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고 건물에서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으며 문이나 창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일곱번째 성문으로부터 걸어나왔을 때, 프로도가 이딜리엔의 습지를 걸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어 벽과 지붕, 그리고 왕관을 쓴 왕의 머리처럼 보이는 종석이 달린 아치를 비추고 있었다. 궁성 안에서는 말을 타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갠달프는 말에서 내렸다. 섀도우폭스는 주인의 부드러운 지시에 따라 자기에게 적당한 장소로 혼자 걸어갔다. 궁성 경비대원들은 검은 옷을 입었으며 투구는 왕관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모양으로 생겼지만 머리에 꼭 맞도록 얼굴 옆으로 가리개가 뻗쳐 있었다. 가리개 윗부분에는 흰 바다새 날개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장식은 고대 곤도르 영화의 유물인 미스릴로 만들어졌기에 은빛으로 빛났다. 그들의 검은 겉옷 위엔 은색 왕관과, 찬란한 별들 아래 눈처럼 하얀 나무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은 엘란딜의 후계자의 제복으로, 한때 신성한 흰 성수가 서 있던 분수의 궁정을 지키는 경비대원 외에는 아무도 입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 질문도 받지않고 통과되었다. 갠달프는 하얗게 포장된 궁정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아침햇빛 속에서 달콤한 분수가 솟았고 주위엔 푸른 잔디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중앙에는 분수대를 굽어보는 말라죽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 분수 물방울이 그 말라비틀어진 가지에 부딪혀 다시 분수대의 물로 떨어졌다. 피핀은 갠달프 뒤를 열심히 따라가며 이 광경을 보았다. 슬퍼 보였다. 왜 저런 말라죽은 나무를 이렇게 다른 모든 것들이 잘 가뀌진 궁정에 방치해 둔 것인지 의아했다. '일곱 개의 별과 일곱 개의 신석 그리고 흰 성수 한 그루.' 전에 갠달프가 중얼거렸던 이 말이 생각났다. 어느새 그는 빛나는 탑 아래 큰 홀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게 되었고 말없고 키큰 경비원을 지나 마법사의 뒤를 따라 차갑게 뻗친 석탑의 그림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은 길고 텅 빈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갠달프가 피핀에게 말했다. "말을 조심하게, 페레그린. 지금은 호비트의 말재간을 부릴 때가 아니니까. 데오든은 친절한 노인이지만 데네도르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오만하고 민감하지. 비록 왕이라 불리지는 않지만 훨씬 더 고귀하고 막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야. 어쨌든 자네가 보로미르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있으니 주로 자네에게 질문할 걸세. 그는 보로미르를 무척 사랑했지. 지나칠 정도로 말이야. 아마 서로 닮지 않았었기에 그랬던 모양이야. 그렇지만 그가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자네에게 말을 하게 한다면 그건 나보다는 자네에게서 뭔가를 알아 내기가 쉬울 거라는 계산에서일 거야.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면 안 되네. 특히 프로도의 일에 대해선 절대 침묵을 지켜야 해. 그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 내가 맡을 테니까. 그리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라곤에 관해서도 말하지 말게." "왜죠? 스트라이더에게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요? 그도 이리 온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요? 어차피 곧 도착할 텐데요 뭘." "아마. 그렇지만 그가 오더라도 아무도 미리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게 좋아. 데네도르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게 더 나을 거야. 적어도 우리로 인해 그가 온다는 사실이 알려져선 안 돼." 갠달프는 윤이 나는 금속 대문 앞에서 멈췄다. "자, 피핀, 이제 와서 자네에게 곤도르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건 너무 늦은 일이야. 하긴 샤이어에서 새집이나 뒤지며 놀고 있었을 때 미리 배워 뒀더라면 좋았겠지만. 내가 말한 대로만 하게. 힘있는 군주에게 아들의 사망소식을 알리며 또 왕권을 주장할 사람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이 정도면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지?" "왕권이라고요?" 피핀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 지금까지 오는 동안 세상일에 먹통인 채로 잠자고 있었다면 이젠 깨어날 시간이야!" 그는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으나 열어 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핀은 거대한 홀을 들여다보았다. 홀에는 긴 기둥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측랑이 있어 창문으로부터 새어든 햇빛이 홀 안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대리석 기둥들은 위로 치솟아 여러 가지 기묘한 짐승과 식물 무늬가 새겨진 기둥 머리에 닿아 있었고 그 위로는 여러 가지 색깔의 장식 격자가 걸린 황금빛 원형 천장이 어둡게 반영되고 있었다. 장중한 홀 안에는 액자나 역사를 담은 그림 또는 피륙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물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원주기둥 사이에 돌로 조각된 일단의 조상들만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핀은 아르고나스의 파괴된 돌들을 연상하며 오래전에 죽은 왕들의 조상을 보고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여러 계단으로 된 단 맨 위에는 왕관 모양으로 조각된 대리석 천개(天蓋) 아래 높은 옥좌가 놓여 있었고 그 뒤 벽은 꽃이 만개한 나무 모양의 조각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옥좌는 비어 있었다. 단의 맨 아래 넓은 계단에 검고 장식이 없는 돌의자가 놓여 있었으며 한 노인이 발치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금빛 손잡이가 달린 흰 막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향해 긴 홀을 걸어가 그의 발의자 삼 보 정도 앞에 섰다. 갠달프가 먼저 말했다. "미나스 티리스의 영주이자 섭정이신, 엑델리온의 아드님 데네도르 만세! 난 이 암울한 때에 충고와 소식을 전하러 왔소."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피핀은 그의 굳센 뼈와 상앗빛 피부의 얼굴 그리고 검고 깊게 빛나는 눈과 긴 매부리코를 보고 보로미르보다는 아라곤을 연상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사실 암울한 때지. 당신은 항상 그런 때에 오곤 했소, 미스랜더. 하지만 내겐 곤도르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전조들도 나 자신의 암울함보다 무겁진 않소. 내가 듣기론 당신이 내 아들의 죽음을 본 자를 데려왔다던데, 바로 이 친구요?" "그렇소. 두 명 중의 하나지요. 한 명은 지금 로한의 데오든왕과 함께 있고 머지않아 이리로 오게 될 겁니다. 이들은 보다시피 하플링이오. 물론 예언에서 말하는 바로 그는 아니지만." "정말 하플링이군. 그렇지만 그 저주받은 말들이 들려와 우리의 회의를 혼란시키고 내 아들을 결국 죽음으로 이끈 임무로 이끌어간 이래 그 이름은 내게 그리 호감을 주지 않소. 오, 내 아들, 보로미르! 우린 지금 네가 필요한데! 네 대신 파라미르가 갔어야 했는데!"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가 간 것이 옳았소. 슬픔 때문에 공정함을 잃진 마시오! 보로미르는 기꺼이 그 임무를 맡았고 아무에게도 대신하게 하는 수고를 끼치지 않았소. 그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자신이 원하는 건 스스로 하는 사람이었소. 난 함께 여행하며 그의 기질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자리요. 공께서는 우리가 오기 전에 그 사실을 알고 계셨소?" "이걸 받았소." 데네도르는 들고 있던 막대를 내려 놓고 무릎 위에 놓았던 물건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의 두 손에는 중간부분부터 갈라진, 은장식이 달린 들소뿔나팔이 들려 있었다. "그건 보로미르가 늘 지니고 다니던 뿔나팔인데!" 피핀이 외치자 데네도르가 말했다. "그래. 우리 집안의 장자가 그래 왔듯이 지금은 내가 다시 지니게 된 거지. 이 나팔은 곤도르의 왕가가 끊기기 전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선조 마르딜의 부친 보로딜께서 룬평원에서 아로의 들소를 사냥한 후 쭉 전해 내려온 거니까. 열사흘 전 북쪽국경에서 이 나팔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대하를 타고 깨진 채 내게로 오게 된 거야. 다시는 이 나팔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그는 말을 멈췄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그는 피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대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건가, 하플링?" "열사흘, 열사흘......" 피핀은 말을 더듬었다. "예, 저도 그쯤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가 뿔나팔을 불 때 전 옆에 있었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어요. 오르크들만 더 많이 몰려왔죠." 그러자 데네도르는 피핀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음, 그대가 거기 있었다? 더 말해 보게. 왜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지? 그리고 내 아들같이 용감한 사나이가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서 그대는 어떻게 빠져나온 건가? 또 오르크 따위가 감히 어떻게 그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피핀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두려움도 잊고 말했다. "가장 용감한 사나이라도 단 한 대의 화살로 쓰러질 수 있는 법이지요. 게다가 보로미르는 수많은 화살에 맞았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나무 옆으로 쓰러지며 옆구리에서 검은 깃털이 달린 화살을 뽑아내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전 정신을 잃고 포로가 되었지요. 그 이상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전 그가 용감한 사람이었기에 그를 알았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는 암흑의 군주 부하들에게 습격당한 저와 제 친구 메리독을 구하려다 죽었어요. 비록 자신이 쓰러져 우릴 구하진 못했지만 그에 대한 경의는 변함이 없습니다." 피핀은 노인의 눈에서 자존심이 상처받은 듯한 동요를 보았고, 또한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아직 경멸과 의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위대한 인간의 영주라도 북쪽 샤이어의 하플링, 호비트에게서 작은 경의를 받을 수도 있겠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빚에 대해 그대의 충성을 요구해도 될까?" 피핀은 회색 망또를 걷고 작은 칼을 빼 데네도르의 발 밑에 놓았다. 노인의 얼굴에 마치 추운 겨울 저녁의 차가운 햇빛과도 같은 창백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깨진 뿔나팔을 내려 놓고는 손을 벌리고 말했다. "내게 칼을!" 피핀은 칼을 들어 자루 쪽으로 바쳤다. "이 칼은 어디서 온 건가? 수많은 세월을 지나온 건데. 이 칼은 틀림없이 아주 먼 옛날 북쪽 우리 조상들이 만든 칼이렸다?" "그건 우리 고향 경계에 있는 작은 언덕에서 발견된 겁니다. 지금은 악당들이 살고 있어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그대에겐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얽혀 있는 것 같군. 늘 그렇듯 겉모습만 가지고 사람을, 아니지 하플링을 평가하긴 어렵군. 난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네. 적어도 그대는 몇 마디 말로 기가 꺾이진 않을 것 같아 보이니까. 또한 그대는 우리 남쪽 사람들한테는 발음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예의바르게 말할 줄도 아니까. 우린 앞으로 닥쳐올 날에 대비해 크건 작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온갖 종족의 도움이 필요할 때이기도 하지. 자 충성의 맹세를!"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자네 마음이 결정됐으면 이 칼자루를 잡고 공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 하게." "전 결심했어요." 노인이 무릎 위에 칼을 올려 놓자 피핀은 칼자루를 잡고 데네도르가 하는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주군께서 자유를 주시거나 죽음이 평화를 주거나 아니면 세상이 종말을 맞을 때까지, 궁핍하거나 풍요하거나, 평화시에나 전시에나, 살았건 죽었건 간에 주군의 명에 따라 말하고 말하지 않고, 행하고 행하지 않고, 오고 갈 것을 곤도르와 곤도르의 섭정께 충성과 제 일신으로 맹세합니다. 이상을 하플링, 샤이어의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이 서약합니다." "나 왕의 섭정이자 곤도르의 영주인, 엑델리온의 아들 데네도르는 충성의 서약을 듣고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충성에는 사랑, 무용에는 명예, 배반에는 복수로, 행해진 바에 반드시 보답할 것을 약속하노라." 그리고나서 피핀은 칼을 돌려 받아 칼집에 다시 넣었다. "자, 이제 그대에 대한 첫번째 명령이다. 내게 숨김없이 말하라. 그대의 이야기를 말하고 또 내 아들 보로미르에 대한 기억도 남김없이 말하라. 자, 여기 앉아서 시작하게." 데네도르가 발의자 곁에 놓인 작은 은종을 치자 곧 시종이 나타났다. 피핀은 그제서야 들어올 때 보지 못한 문 옆 양쪽 협실에 시종들이 서 있었음을 알았다. "손님들께 포도주와 음식과 의자를 가져다드려라.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그리고나서 데네도르는 갠달프를 향해 말했다. "다른 데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아 지금 당장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뿐이오. 아마 이 일보다 더 급한 일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겐 이 일이 가장 급박하오. 그렇지만 이 어려운 시기의 종말쯤에는 다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겠지요." "빠를수록 좋겠지요. 내가 이센가드에서 여기까지 사백 마일 이상을 바람처럼 달려온 건 단지 이 예의바른 작은 전사 하나만 보내 드리기 위해서는 아니니까 말이오. 공께는 데오든왕이 치른 커다란 전투와, 이센가드를 격파하고 내가 사루만의 지팡이를 부러뜨린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물론 내게도 중요하오. 하지만 나 자신의 심사숙고로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해선 이미 충분히 알고 있소." 그는 갠달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피핀은 둘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으며 그들 눈 사이에는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도화선이 연결된 것 같았다. 데네도르는 실제로 갠달프보다 더 군주답고 아름답고 강하고 나이들어 보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더 위대한 마법사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피핀은 감각적으로 갠달프에게서 더 큰 힘과 깊은 지혜와 감춰진 권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이도 갠달프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도대체 그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피핀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그것을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스스로 이상하게 느꼈다. 트리비어드가 마법사들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갠달프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갠달프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이리로 왔고 또 언제 떠날 것인가? 그가 이런 생각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데네도르였다. 그는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말하듯 신석은 없어졌어도 곤도르의 영주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고 또 많은 소식을 접하고 있소. 자, 앉으시오." 곧 시종들이 의자 하나와 그보다 조금 작은 걸상 하나를 가져왔다. 한 사람은 은병과 잔 그리고 하얀 케이크를 쟁반에 받쳐 가지고 왔다. 피핀은 걸상에 앉았으나 노영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그렇게 느꼈을 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피핀은 그가 신석을 입에 담으며 자기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진 것 같았다. 그는 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비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야기를 시작하지, 내 가신이여. 내 아들과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이의 이야기는 정말 듣고 싶은 것이니까." 피핀은 그 거대한 홀에서 곤도르의 군주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으며, 또 때때로 질문을 받기도 하며 이야기를 해야 했던 그 시간을, 더구나 옆에는 갠달프가 앉아 분노와 조급함을 애써 감추며 보고 듣는 가운데 이야기를 해야 했던 그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데네도르가 종을 울렸을 때 피핀은 마치 탈진한 듯한 느낌이었다. '아홉시는 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세번째 아침을 먹을 수 있겠구나.' 피핀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데네도르는 시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스랜더를 방으로 모셔라. 그리고 동행한 친구도 좋다면 같이 있게 하고 이 하플링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음을 알리도록 해라.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이라고 소개해라. 또 그에게 이급 통과암호를 가르쳐 주게 해라. 대장들에게는 세시 종이 치자마자 이리로 모여 나를 기다리도록 하라고 전해라." 데네도르는 다시 갠달프를 향해 말했다. "친애하는 미스랜더, 그대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오시오. 내 짧은 수면 시간을 빼고 언제라도 좋소. 내 어리석은 이탈을 탓하셔도 좋소만 지금은 좀 쉽시다." "어리석다고? 천만에.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리석을 수 없는 사람이오. 당신은 슬픔마저도 방패로 이용할 수 있지 않소.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호비트에게 한 시간이나 질문을 한 목적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이 이해한다면 그걸로 좋소. 자존심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이나 충고도 무시하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으니. 또한 당신은 자신의 의도에 알맞은 그런 충고만을 내놓지 않소? 아직까지 곤도르의 영주는, 아무리 가치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구가 된 적은 없었소. 그리고 그에겐 곤도르의 이익과 법률보다 더 가치있는 목적이란 있을 수 없소. 더욱이 왕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한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문제요." "왕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한이라고 그랬소? 좋소, 경애하는 섭정. 아마 이제 거의 관심조차 가진 사람이 없을 그런 문제에 대해 당신의 왕국을 안정시키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겠지요. 그런 점에선 당신은 온갖 도움을 받게 될 것이오. 그러나 난 이점을 밝혀 두겠소. 곤도르건 아니건, 크건 작건 간에 어떤 나라의 법률도 내것은 아니오. 그러나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한 위험에 빠진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가내 관심사요.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새날에 아름답게 자라 열매맺고 다시 꽃을 피울 그 어떤 것이 이 암울한 밤을 지나 이어질 수만 있다면, 곤도르가 멸망할지라도 난 내 임무가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거요. 왜냐하면 나 역시 대리하는 섭정이기 때문이오. 당신은 아직 모르오?" 말을 마친 갠달프는 돌아서서, 보조를 맞추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하는 피핀과 함께 성큼성큼 홀을 걸어나왔다. 가는 도중 갠달프는 피핀을 바라보지도, 또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안내인은 홀의 문에서 분수의 광장을 지나 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 사이의 길로 인도했다. 여러번 길을 꺾어 돌아 그들은 견갑부 언덕이 이어진 북쪽 금상벽에 면한 건물에 이르렀다. 조각된 넓은 계단을 올라 안내인은 그들에게 무늬없는 황금및 벽지로 단장된 밝고 공기좋은 방을 보여 주었다.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아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긴 의자가 하나 있었고 양쪽에는 커튼 쳐진 작은 방이 있어 안에는 잘 정리된 침대와 물병 그리고 대야가 보였다. 방엔 길고 좁은 창이 세 개나 있어 아직 안개에 싸인 안두인대하의 거대한 굽이 북편으로 에민 뮐산맥과 라우로스폭포가 멀리 보였다. 피핀은 돌로 된 창문턱 너머로 밖을 내다보기 위해 긴 의자 위에 올라섰다. 안내인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피핀이 말했다. "제게 화가 나셨나요, 갠달프? 하지만 전 최선을 다했어요." "사실 그랬지." 갠달프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그는 피핀 곁에 앉아 팔로 피핀의 어깨를 두르고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피핀은 의아해져 바로 곁에 앉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너무 즐겁고 명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갠달프의 얼굴에서 근심과 슬픔의 그림자밖에 볼 수 없었으나 이제 자세히 보니 그 이면에는 큰 기쁨이 깔려 있었다. 그건 마치 터져 오는 환희의 분수처럼 한 나라 전체를 웃게 할 만한 그러한 기쁨이었다. "사실 자넨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또다시 그 끔찍한 두 늙은이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어쨌든 곤도르의 영주는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네에게서 알아냈을 거야. 자넨 보로미르가 모리아를 빠져나온 이후에도 원정대를 지휘하지 못했다는 것과 일행 중에 앞으로 곤도르에 오게 될 고귀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그 유명한 칼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감출 수는 없을 거야. 사람들은 곤도르의 옛이야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보로미르가 떠난 후부터 데네도르는 이실두르의 재앙에 관한 전설을 숙고했을 거야. 그는 이 시대의 다른 인간들과는 좀 달라. 그의 계보야 어찌되었건 그의 피 속엔 틀림없이 고대 서역왕족의 고귀한 피가 흐르는 것 같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보로미르에게선 그것을 볼 수 없지. 하지만 또 한 아들인 파라미르에게선 그 점을 엿볼 수 있어. 그는 깊은 통찰력을 가졌지. 만일 그 힘을 집중시킨다면 아마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을 거야. 그를 속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 꼭 명심해 두어야 하네. 자넨 이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니까 말이야. 자네가 왜 그랬는지 나로선 잘 모르겠네만. 어쨌든 잘한 일이겠지. 너그러운 행위가 차가운 충고보다 더 낫다는 생각에서 난 자넬 제지하지 않았네. 그는 자네 행동에서 즐거움과 함께 감동도 느낀 것 같아. 또 이제 자넨 근무시간만 아니면 미나스 티리스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됐지. 그렇지만 다른 일면도 있음을 알아야 하네. 자넨 그의 신하가 되었고 그는 그 사실을 잊지 않을 테니 말이야.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자, 내일 일까지 미리 근심할 거야 없겠지. 다만 내일은 오늘보다 사태가 더 악화될 거야. 앞으로 계속 그러기가 쉽겠지만. 더이상 내가 도와야 할 일은 없어. 전체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지만 각 부분은 움직이고 있고 또 내가 절실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데네도르의 후계자 파라미르야. 내 생각에 그는 지금 궁성에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내겐 소식을 얻을 만한 시간이 없었거든. 난 이제 가봐야 해, 피핀. 영주의 회의에 가서 얻을 수 있는 걸 찾아 봐야지. 적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전력을 다해 게임을 시작할 거야. 장기 말들은 최선을 다해야겠지. 곤도르의 전사,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 전력을 점검하게." 갠달프는 문을 향해 걸어나가다가 돌아섰다. "난 지금 급하다네, 피핀. 자네가 좀 도와 줘야겠어. 피곤하지 않으면 쉬기 전에 가서 섀도우폭스를 찾아 어떻게 있는지 좀 봐주게. 곤도르인들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들이라 동물에게도 잘해 주겠지만 말에 대해서는 아는 계 별로 없으니 말이야." 갠달프가 나가자 궁성의 탑에서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은방울소리 같은 종소리가 세 번 울리고 그쳤다. 일출 후 제3시를 알리는 소리였다. 잠시후 피핀은 방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서 길을 살펴보았다. 이제 해는 밝고 따스하게 내리비쳐 탑과 커다란 건물들은 서쪽으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푸른 하늘 높이 민돌루인산이 눈으로 희게 덮인 거봉을 드러냈다. 궁성 안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근무 위치와 순번을 교대할 시간이 되었는지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피핀은 중얼거렸다. "샤이어에선 지금이 아홉신데.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창문을 열고 맛있는 아침을 먹을 시간이지. 아, 맛있는 아침식사! 저 사람들은 아침을 벌써 먹었나? 그럼 점심은 언제, 어디서 먹는 걸까?" 그때 피핀은 궁성 중앙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좁은 길을 따라오는 백색과 흑색의 갑옷을 입은 사나이를 보았다. 피핀은 갑자기 외로운 생각이 들어 그에게 말을 걸어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은 피핀을 향해 똑바로 걸어와 말을 걸었다. "당신이 하플링 페레그린이오? 당신이 섭정과 우리나라에 충성을 서약했다고 들었지요. 환영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피핀과 악수했다. "난 바라노르의 아들 베레곤드요. 난 오늘아침 근무가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암호와 그 밖에 궁금해 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러 왔소. 나 역시 당신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지요. 우리가 아는 옛이야기에는 당신들에 관해 별로 말해 주는 게 없거든요. 소문으로밖에는 당신들 하플링에 대해 잘 모르지요. 더구나 당신은 미스랜더의 친구가 아니오? 당신은 그를 잘 아시오?" "글쎄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어려서부터 그를 '알아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근엔 함께 긴 여행도 하고요. 그렇지만 그는 두꺼운 책과 같아서 내가 읽은 부분은 한두 페이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하긴 몇 사람을 빼면 내가 누구보다도 그에 관해 많이 알고 있는 거겠죠. 내 생각인 우리 원정대 중 아라곤만이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사람일 거예요." "아라곤? 그는 또 누굽니까?" 피핀은 말을 더듬었다. "아......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이지요. 아마 지금 로한에 있을 겁니다." "당신도 로한에서 왔다고 들었소. 난 그 나라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우린 그들의 도움에 희망을 걸고 있으니까 말이요. 참, 당신의 의문을 채워 주는 게 내 임무였다는 걸 잊었군요. 자, 뭘 알고 싶습니까, 피핀씨?" "음,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게 있긴 한데, 물어 봐도 될까요? 아침식사 그리고 그 밖의 식사는 어떻지요? 내 말뜻은, 이해하신다면, 식사시간은 언제고 또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식사하는 곳은 어딘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점은요? 난 여기까지 오면서 현명하고 사려깊은 사람들이 사는 데 오면 한 잔의 맥주를 마실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더군요." 베레곤드는 엄숙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노병이로군요. 노병들은 돌아와서 먹을 음식과 술을 생각하며 전쟁터에 나간다고 하지요. 비록 나 자신은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말이요. 그럼 당신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소?" "글쎄요. 엄밀히 말하자면 먹긴 먹었죠. 그렇지만 당신들의 친절하신 영주님의 배려로 겨우 한 잔의 술과 한 조각의 케이크를 먹었을 뿐이에요. 더구나 그 대가로 난 한 서간이나 진땀을 했어요. 그건 아주 배고프게 하는 일이었지요." 베레곤드는 웃으며 말했다. "식탁에선 몸집이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일을 한다고 하지요. 당신 역시 이 궁성의 다른 사람들처럼 조금은 먹었군요. 지금 이곳은 요새이자 방어탑이고 곧 전쟁터가 될 곳이니까요. 우린 새벽에 일어나서 어렴풋할 때 몇 술 뜨고는 근무하러 나가곤 합니다. 그렇지만 실망할 건 없어요." 그는 피핀이 실망한 듯 보이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 힘든 일을 한 사람들은 점심 전에 힘을 얻기 위해 뭘 좀 먹곤 합니다. 우린 근무에 따라 정오 전후쯤에 점심을 먹는데 저녁때와 마찬가지로 여럿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지요. 자, 갑시다. 조금만 걸어가면 먹을 걸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성벽 위로 올라가 아침 경치를 보며 먹읍시다." 그러자 피핀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잠깐만요. 당신의 정중한 말을 듣고나니 내 식탐, 아니 허기가 좀 가신 것 같군요. 당신들이 미스랜더라고 부르는 갠달프가 내게 섀도우폭스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은 로한의 왕께서 눈동자처럼 아끼는 말인데 갠달프의 노고에 대한 대가로 준 거예요. 또 말의 주인도 사람만큼이나 그를 아끼니까 만일 당신들이 갠달프의 노고가 가치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호비트에게 베푼 친절처럼 그 말에게도 신경을 써줘야 할 거예요." "호비트?" 베레곤드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요, 우린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죠." "그 말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억양이 이상하다고 해서 아름다운 언어가 지장을 받지는 않지요. 호비트는 정말 아름다운 언어를 가졌군요. 자, 이제 갑시다. 나한테도 그 훌륭한 말을 소개시켜 주겠지요? 이 석벽의 도시에서는 동물을 보기가 힘들지만 난 동물을 사랑합니다. 난 원래 시골 태생이고 그 전엔 이딜리엔에서도 살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염려할 건 없어요. 이건 예의를 갖춘 짧은 방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곤 곧바로 음식을 찾으러 갑시다." 피핀은 섀도우폭스가 잘 돌봐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성 밖 여섯번째 성벽 구역에는 좋은 목장이 있어 전령병을 위한 말들이 사육되고 있었다. 전령들은 데네도르나 그 외의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를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이나 기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섀도우폭스는 피핀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리며 기분좋은 듯이 울었다. "잘 있었나? 갠달프도 시간이 나는 대로 곧 와볼 거야. 지금은 아주 바빠서 나보고 대신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 잘 있는가도 보고 말이야. 아주 편안한 것 같은데? 긴 여행이었으니 푹 쉬어야지." 섀도우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굴렀다. 또 그는 베레곤드가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옆구리를 툭툭 치게 내버려 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친구는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게 아니라 이제부터 한바탕 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힘있고 당당한 말이야! 마구는 어디 있지요? 틀림없이 값지고 아름답겠지?" "이 말에게 어울릴 만큼 값지고 아름다운 마구는 없지요. 이 말에겐 마구가 필요없어요. 만일 이 말이 당신을 태우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다음은 혼자 다 알아서 하지요. 그렇지만 태우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굴레나 채찍이나 마구도 이 말을 길들일 수 없어요. 안녕, 섀도우폭스. 참고 기다리게. 싸움은 곧 시작될 거야." 섀도우폭스는 고개를 들고 울부짖었다. 목장 전체가 진동했으며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아야만 했다. 그들은 구유가 가득찬 것을 보고 목장을 떠났다. "자, 이제 우리 구유로 가볼 시간이군." 베레곤드가 말했다. 그는 피핀을 다시 궁성으로 데리고 돌아가 탑 북쪽에 위치한 문 앞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긴 계단을 내려가 등불이 밝혀진 넓은 복도에 이르렀다. 옆으로 문들이 나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열려 있었다. "여기가 우리 경비대원들의 식품창고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열린 문 안으로 소리를 질렀다. "안녕, 타르곤. 아직 좀 이르지만 여기 영주께 새로 충성을 맹세한 친구가 한 명 와 있다네. 이 친구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 아주 오래 여행한데다가 아침부터 너무 힘든 일을 해서 배가 고프다네. 뭐 먹을 걸 좀 주게." 그들은 빵과 버터, 치즈 그리고 지난겨울에 저장해 약간 주름이 갔지만 아직 신선하고 맛있는 사과와 가죽부대에 담긴 새로 빛은 맥주를 받아 나무접시, 컵과 함께 바구니에 담아 밖으로 나왔다. 베레곤드는 동쪽으로 뻗어 있는 흉벽으로 안내했다. 성벽턱 아래로 총안이 뚫려 있었고 돌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바깥세상의 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곤도르의 현 상황과 관습, 생활방식 또한 샤이어와 그 밖에 피핀이 본 이상한 지방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베레곤드의 놀라움은 점차 커갔으며 의자 위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어 대다가 가끔 발돋음을 해 성 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는 호비트를 경이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당신은 우리 기준으로 어린이, 그것도 아홉 살 정도 된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세상에 대해 꽤 안다는 우리 노인네들도 거의 들어 본 적도 없는 위험을 겪고 놀라운 일을 봤다는 건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난 처음 우리 섭정께서 당신을 고대의 의식에 따라 기사로 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적 기분에서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그건 내가 잘못 생각한 거로군. 내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겠소?" "물론이지요. 사실 당신은 오해한 게 아니에요. 난 우리 호비트의 기준으로도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아요 사 년이 더 지나야 샤이어에서 말하듯 성년의 나이가 차게 되니까요.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요. 자, 이리 와서 저 아래 보이는 것들에 대해 좀더 얘기해 주세요." 해가 하늘 위로 솟아오름에 따라 골짜기의 안개도 걷히기 시작했다. 아직 채 흩어지지 않은 안개는 횐 구름조각처럼 머리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궁성의 하얀 깃발들을 펄럭이게 했다. 대충 눈대중으로 십오 마일 정도 떨어진 골짜기 저편으로 안두인대하가 회색 빛으로 빛나며 북서쪽으로부터 흘러내려 남서쪽으로 꺾어지며 거세게 흘러 더 멀리 백오십 마일도 더 돼 보이는 바다 쪽을 향해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피핀의 시야에는 펠레노르평원이 한눈에 펼쳐져 들어왔다. 그러나 점점이 흩어진 농가와 낮은 담들 그리고 헛간과 외양간들은 볼 수 있었지만 소나 그 밖의 짐승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평원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뚫려 있는 큰 도로와 그보다 작은 길들은 성문을 향해 오는 마차와 나가는 마차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은 말을 타고 온 기사가 급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성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차들은 주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가 언덕을 끼고 도는 대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주도로는 넓고 잘 닦여 있었으며 동쪽 가장자리에는 말이 달리는 푸른 잔디길이 뻗어 있었고 그 바깥쪽으로 석벽이 세워져있었다. 말을 탄 기사들도 오갔지만 도로 대부분을 메운 것은 남쪽으로 향한 마차들이었다. 그러나 일견 혼잡스러워 보이는 도로도 실상은 질서가 잘 잡혀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로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하나는 좀 빠른 마차가 달리고 있었고 또 한 길은 여러 색깔로 장식된 소가 끄는 커다란 짐차들이 그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제일 서쪽 한 갈래는 사람들이 끄는 작은 인력거들이 열을 짓고 있었다. "저건 툼라덴과 로사나크 그리고 산골을 지나 레베닌까지 가는 길이오. 저 마차들은 피난해야 하는 노인들과 부녀자들을 태우고 가는 겁니다. 정오까지는 성문 앞 삼 마일 지점까지 완전히 소개될 예정이지요. 그건 명령이에요. 필요한 일이지만 또한 슬픈 일이기도 하지요." 베레곤드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 사실 이 도시에는 그나마 아이들이 적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떠나게 되었으니! 하긴 떠나지 않고 뭔가 할 일을 찾는 아이들도 몇몇 있지요. 내 아들도 그 중 하나고." 그들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피핀은 당장에라도 오르크들이 평원으로 쏟아져 나오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으로 동쪽을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피핀은 안두인대하의 거대한 굴곡부 중앙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보이는 건 뭐죠? 또 다른 도신가요, 아니면 다른 뭔가요?" "도시였지요. 이 궁성이 일개 요새에 불과했을 때 저곳이 곤도르의 수도였지요. 저곳이 바로 적이 탈취해 불태운, 안두인강을 끼고 있는 오스길리아스의 폐허예요. 그렇지만 우린 데네도르공께서 젊으셨던 때에 저 도시를 되찾아 거주지가 아닌 요새로 재건한 다음 우군의 교두보로 삼았지요. 그러자 미나스 모르굴에서 잔인한 기사들이 공격해 온 겁니다." "암흑의 기사들?" 피핀은 공포의 기억이 되살아나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소. 흑색의 기사들이었지요. 당신이 한 얘기 중엔 그들에 관한 건 없었지만 당신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려." "그들을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그들과 가까운 곳에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말을 마치고 대하 위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 앞에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어둠만이 가득찬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육십 마일 이상 떨어져 어렴풋하게 보일락말락하는 들쑥날쑥한 산봉우리들이거나 그 너머의 더 어두운 구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핀에게는 그 어둠이 점점 커지고 한데 뭉쳐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태양을 잠식하는 듯이 보였다. "모르도르에 아주 가깝다고요? 그렇지요, 바로 저기지요. 우린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어둠의 그림자는 늘 의식하며 살아왔지요. 어떤 때는 멀고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가깝고 어둡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지금 저 어둠은 점점 더 커지며 깊어지고 있어요. 우리의 불안과 공포도 함께 커져갑니다. 지금부터 일 년쯤 전에 잔인한 기사들이 교두보를 다시 점령하고 우리의 용감한 전사들을 학살했지요. 보로미르가 이쪽 강안을 다시 탈취해 지금 우린 오스길리아스의 절반만을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마 잠깐에 불과하겠지요. 우린 또다른 맹공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마 얼마 안 돼서 적은 대공세를 취할겁니다." "언제쯤이라고 예상하지요? 난 지난밤에 봉화가 오르는 것도 보고 또 전령이 달려가는 것도 보았거든요. 갠달프는 전쟁이 시작된 신호라고 하던데요. 그는 몹시 서둘렀었어요. 그런데 이젠 다시 모든 게 서서히 진행되는 것 같거든요." "그건 지금 모든 게 준비되었으니까 그렇겠지요. 마치 태풍 전의 정적과 같은 때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왜 지난밤에 봉화를 올렸죠?" "포위당한 다음에 청하는 구원은 이미 늦은 것이니 그렇지요. 하지만 나로선 지휘관들의 회의 내용을 알 수야 없지요. 그들은 여러 가지 소식을 받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데네도르공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그는 깊은 통찰락을 지녔지요. 사람들은 데네도르공이 탑 속 가장 높은 방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할 때면 미래도 예측할 수 있고 때로는 적과 싸우며 그 마음을 읽는다고 말들을 해요. 그래서 나이보다 더 늙고 지쳐 보인다고 하지요. 어쨌든 지금 우리 대장 파라미르께서 위험한 임무를 맡아 강 저편에 가 계시니 아마 무슨 소식이 있겠지요. 그래도 봉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내 생각을 말하지요. 내가 보기엔 지난밤 레베닌에서 소식이 온 것 같아요. 안두인강 하구에는 남부인 움바르의 해적들이 이끄는 함대가 있어요. 그들은 오래전부터 곤도르의 권위를 우습게 알아 왔고 지금은 적과 연합해 그의 공격을 돕고 있는 거지요. 이들 때문에 우리가 기대했던 레베닌과 벨팔라스꼭 원군에 차질이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린 북쪽 로한의 도움을 한층 더 기대하는 것이고 당신이 가져온 승전보가 우릴 기쁘게 하는 거예요." 그는 말을 멈추고 일어서 북쪽, 동쪽 그리고 남쪽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또한 이센가드에서의 일에서 우리가 거대한 그물의 전략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이건 단순히 이딜리엔이나 아노리엔에서의 매복이나 약탈 정도의 작은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건 오래전부터 계획된 대전이고 우린 그 속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하게 된 거지요. 전해지기론 저 내륙의 바다 너머 극동에서도, 북쪽 머크우드와 그 너머에서도 그리고 남쪽 하라드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해요. 그러니 지금은 전 세계가 암흑의 그림자로 뒤덮이느냐 벗어나느냐 하는 사활의 시험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페레그린씨, 우린 이런 자부심을 또한 가지고 있지요. 우린 지금까지 영겁과 같이 오래된 그리고 바다보다도 깊은 암흑의 군주의 증오에 정면으로 맞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가 그의 힘이 가장 집중된 주 공격목표가 될 겁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미스랜더도 그렇게 급히 달려온 거겠지요. 만일 우리가 무너진다면 누가 지탱할 수 있겠소? 페레그린씨, 우리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피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는 거대한 성벽과 탑들, 용맹스린 깃발들을 바라보고나서 다시 동쪽의 점점 커져가는 어둠으로 시선을 돌리며, 암흑의 긴 손가락과 숲과 산에서 보았던 오르크들, 이센가드의 배신, 악마의 눈을 가진 새들, 샤이어의 오솔길까지 왔던 암흑의 기사들, 날개달린 나즈굴들을 생각했다. 그는 몸이 으스스 떨리는 것과 함께 희망이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때 아주 잠깐동안 암흑의 날개가 지나가기라도 한 듯 햇빛이 움츠러들며 어두워졌다. 그는 거의 감각적으로 하늘 저 높은 곳으로부터 아주 희미하지만 가슴을 찌르는 듯한 차갑고 잔인한 울부짖음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하게 질려 성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저게 뭐지? 당신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요?" 베레곤드가 물었다. "예. 종말, 운명의 그림자, 하늘을 나는 잔인한 기사들!" 피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 운명의 그림자! 미나스 티리스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드는군요. 밤이 오고 있어요. 피가 식어 버리는 느낌이에요." 잠시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피핀은 전과 다름없이 태양이 빛나고 깃발이 순풍에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지나갔어요. 그렇지만 난 아직 절망하지 않아요. 갠달프도 한때 죽은 줄 알았지만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거든요. 우린 한 다리만 남아도, 아니 무릎으로 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견뎌 낼 수 있을 거예요!" "좋은 말이오!" 베레곤드는 일어나 이리저리 큰 걸음을 떼놓으며 외쳤다. "다른 모든 것들이 종말을 맞는다 해도 곤도르는 멸망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많은 적들이 몰려온다 해도 이 성벽을 탈취하려면 시체로 산을 쌓아야만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다른 요새도 많이 있고 산으로 나가는 비밀통로도 있지요. 푸른 골짜기엔 희망과 역사가 지속될 겁니다." "난 좋든 나쁘든 빨리 결판이 났으면 좋겠어요. 난 사실 전사도 아니고 전쟁은 생각조차 하기 싫거든요. 더구나 도망갈 수도 없는 벼랑 끝에서 기다리는 건 무엇보다도 싫어요. 벌써 얼마나 초조하고 지루한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꼼짝 않고 적의 움직임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라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로한에서도 갠달프가 아니었더라면 공격을 하지 못했을거예요." "당신은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부분을 찌르는군요. 그렇지만 파라미르공만 돌아오시면 상황이 달라질 게예요. 그는 아주 대담한 분이시지요.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요. 요새 사람들은 전설과 노래책에서 많은 것을 배워 현명해질 수 있고 또 그런 분이 동시에 강하고 판단력이 빠른 대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믿지 않지요. 하지만 파라미르공은 그런 분이십니다. 보로미르보다 덜 무모하고 덜 열성적으로 보이지만 불굴의 정신은 절대 뒤지지 않지요. 그렇지만 지금 뭘 하고 계실까? 우린 저 너머 산으로 공격해 갈 수 없어요. 우리의 세력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적이 나올 때까진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손은 더 무거워지는 거지요." 그는 칼집으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피핀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피핀이 이 나라에서 본 다른 남자들처럼 키가 크고 꿋꿋하고 고귀하게 보였으며 전쟁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 손이 깃털처럼 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피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소리내 말하지는 않았다. '갠달프는 장기 말이라고 했지?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만 다른 쪽 말이나 아닌지 모르겠어.' 그들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갑자기 정오의 종의 울리자 궁성 안은 감시병을 제외한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가느라 부산해졌다. "나와 함께 가겠소? 오늘은 내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좋겠소. 아직은 당신이 어디 소속될지를 모르니 말이오. 어쩌면 섭정은 직속기사로 생각하고 계신지도 모르고 어쨌든 환영받을 겁니다. 또 시간 있을 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겠지요." "기꺼이 같이 가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난 좀 외로우니까요. 제일 친한 친구를 로한에 두고 와서 지금은 말을 하거나 농담을 나눌 사람이 전혀 없으니 말이에요. 혹시 당신들 부대에 들어갈 수 없을까요? 당신이 대장인가요? 그렇다면 날 받아 주세요. 아니면 날 위해 그렇게 말씀을 좀 드려 주시든지요." 그러자 베레곤드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난 대장이 아니오. 난 특별한 관직이나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도 아니고 그저 궁성 제3경비대에 속한 평범한 병사에 불과해요. 하지만 페레그린씨, 곤도르의 탑 경비대의 한 병사가 된다는 건 이 도시에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고 나라 전체를 통해 명예스럽게 여겨지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내겐 과분한 직책이군요. 우리 방으로 다시 데려다주세요. 만일 갠달프가 아직 오지 않았으면 당신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지요." 갠달프는 숙소에 없었고 소식도 남겨 놓지 않았다. 피핀은 베레곤드를 따라가 3경비대의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들 피핀을 환영했기에 그를 데려간 베레곤드 역시 자랑스러워했다. 벌써 궁성 안에는 미스랜더의 동행과, 그가 데네도르와 가진 밀담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나눠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한 하플링의 왕자가 북쪽 그들의 나라로부터 오천의 병력을 이끌고 와 곤도르와 연합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로한의 기사들 모두가, 비록 키는 작지만 아주 용감한 하플링 전사를 한 명씩 대동하고 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피핀이 이런 희망을 깨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보로미르와 우정을 맺었으며 또 데네도르까지 그에게 명예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에 대한 새로운 경의를 감하진 않았다. 그들은 그가 와준 데 대해 크게 감사하고 바깥세상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아주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원하는 만큼의 음식과 맥주를 잔뜩 가져다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문제는 갠달프의 충고에 따라 '주의'를 하는 것이었기에, 호비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혀가 지나치게 자유롭게 돌아가지 않게 신경을 썼다. 마침내 베레곤드가 일어나서 말했다. "자,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이군. 난 지금부터 저녁때까지 근무시간이야. 내가 알기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아까 말한 대로 외롭다면 이 도시를 안내할 유쾌한 안내인이 하나 있는 게 좋겠지? 내 아들녀석이 기꺼이 함께 다닐 걸세. 좋은 애야. 내 제안이 마음에 든다면 성 맨 아래 원형구역으로 가서 등 제작거리인 라스켈러다인에 있는 오래된 객사를 찾아 보게. 그럼 거기서 아직 도시에 남아 있는 몇몇 아이들 중에서 그앨 보게 될 거야. 문이 닫히기 전에 큰 성문에서 아래를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는 밖으로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곧 따라나갔다. 조금씩 안개로 흐려져 가긴 했지만 아직 날씨는 맑은 편이었고 남쪽 지방이라곤 하지만 3월치고는 좀 더웠다. 피핀은 좀 졸렸지만 숙소로 돌아가면 따분할 것 같아 아래로 내려가 도시를 둘러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섀도우폭스를 위해 남긴 음식 몇 조각을 가지고 갔다. 사료는 넉넉해 보였지만 섀도우폭스는 그가 가져간 음식도 잘 먹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구부러진 길을 여러 번 돌아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길을 가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마주 지나치는 사람들의 태도는 정중했으며 곤도르식대로 가슴에 손을 대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가 지나가면 뒤에서는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안에 대고 어서 나와 미스랜더의 동행 하플링의 왕자를 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공용어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피핀은 최소한 에르닐 이 페리아나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는 금세 알게 되었고 자신이 도성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그 이름이 먼저 전달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치로 둘러진 길과 아름다운 소로를 지나 맨 아래 성벽의 가장 넓은 원형 구역에 이르렀다. 그는 등 제작거리를 찾았는데 그 길은 큰 성문 쪽을 향해 나 있었다. 그는 오래된 객사를 찾았다. 그것은 비바람으로 인해 회색으로 변색된 석재 건물로 양 옆에는 길 반대편 쪽으로 익면벽(翼面壁)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잔디밭이 깔려 있었다. 그 뒤에 창문이 많이 달린 집이 있었으며 정면에는 원주기둥으로 기게 열린 베란다가 있어 잔디밭을 향해 계단이 놓였다. 기둥 사이에서 소년들이 놀고 있었다. 피핀이 미나스 티리스에 와 아이들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피핀은 멈춰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들 중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오자 다른 아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소년은 피핀 앞에 서서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어디서 왔지? 도시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사실이지. 하지만 나도 이제 곤도르인이 되었다고 하던데." "자, 이리 와! 우린 모두 성인이야. 그런데 넌 몇 살이지? 이름은 뭐고? 난 벌써 열 살이야. 키도 곧 백오십 센티가 될 거고. 너보다 크단 말이야. 게다가 우리 아버진 키가 제일 큰 경비대원이라고. 네 아버진 누구지?" "무엇부터 먼저 대답할까? 우리 아버진 샤이어의 투크배로우 근처에 있는 휘트웰 농원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지. 또 내 나인 스물아홉이야. 적어도 그 점에선 널 능가하겠지? 키는 백이십 센티밖에 안 되고 앞으로도 옆이 아니라 위로는 더 자랄 것 같진 않지만." "스물아홉!" 소년은 이렇게 외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은 정말 나이가 들었군요. 우리 아저씨 이올라스하고 나이가 같은데요. 하지만 난 당신을 거꾸로 세울 수도 있고 넘어뜨릴 수도 있어요." 소년이 이렇게 덧붙이자 피핀도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도 네게 똑같이 해줄 수 있을걸. 우리 자그마한 고향에선 다들 레슬링 기술을 알고 있단 말이야. 또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다만 우리 고향의 기준으로 치면 난 사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고 힘이 센걸. 난 아직까진 아무도 날 거꾸로 세우게 놔둔 적이 없었어. 그러니 만일 네가 그런 짓을 하다가 헛수고로 그치면 난 널 죽일지도 몰라. 너도 좀더 크면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아직도 날 손쉬운 노리개감이자 낯선 꼬마쯤이라 생각한다면 하나 경고해 두지. 난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라. 난 사납고 난폭하고 대담한 하플링이란 말이야!" 피핀이 이렇게 말하며 무서운 표정을 짓자 소년은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으나 곧 주먹을 쥐고 눈에는 적의를 띤 채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피핀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낯선 이의 말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되지. 난 싸움꾼이 아니야. 그렇지만 어쨌든 도전할 땐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겠지?" 그러자 소년은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경비대원 베레곤드의 아들 베르길이에요!"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지. 넌 아버질 그대로 닮았거든. 너희 아버지와 난 친구 사이야. 널 찾아보라고 날 보내셨지." "그럼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베르길은 갑자기 얼굴에 실망의 기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제발 아버지 마음이 바뀌어서 여자들과 같이 가라고 한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더구나 마지막 마차도 이미 떠나 버렸잖아요." "네 아버지가 보낸 전갈이 별로 좋은 내용이 아닐진 모르지만 네 생각만큼 나쁜 건 아니야. 네가 만일 날 거꾸로 세우기보다 시내구경을 시켜 주고 또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게 더 좋다면 그렇게 하라고 전하시던데. 대신 난 네게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베르길은 마음이 놓여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잘됐어요. 자, 가요. 우린 성문으로 구경가려던 참이었어요. 같이 가요." "거기 무슨 일이 있니?" "해지기 전에 외곽 부대의 지휘관들이 남쪽길로 오기로 돼 있어요. 지금 가면 볼 수 있을 거예요." 베르길은 좋은 말벗이었으며 메리와 헤어진 이래 피핀이 만난 가장 좋은 동행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따라가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웃었다. 어느새 그들은 성문을 향하는 군중 속에 묻혀 버렸다. 피핀이 경비병에게 이름과 암호를 말하자 그는 경례를 하고 통과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동행한 소년까지 내보내 주었으므로 피핀에 대한 베르길의 존경심은 한층 깊어졌다. "아주 좋은데요! 우리들은 어른과 함께가 아니면 통과가 안 되거든요. 이제 더 잘 볼 수 있겠어요." 성문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띠나스 티리스로 통하는 모든 길들이 만나는 포장된 광장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은 남쪽을 향했다. 곧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저기 먼지가 일어나. 그들이 오고 있는 거야." 피핀과 베르길은 맨 앞쪽으로 나가 기다렸다. 멀리서 나팔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트럼펫소리가 크게 울렸고 사람들은 환성을 울렸다. "훠롱! 훠롱!" 피핀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베르길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훠롱이 온다는 거예요. 늙은 뚱보 훠롱, 로사나크의 영주예요.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지요. 만세 ! 왔어요. 훌륭한 훠롱!" 선두에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커다란 말이 걸어왔다. 그 위에는 어깨가 넓고 몸집이 장대한 회색 수염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비록 늙었지만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무겁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그 뒤로 먼지를 뒤집어쓴, 전투용 도끼를 든 잘 무장된 병사들이 엄숙한 얼굴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피핀이 본 곤도르인보다 키가 약간 작고 얼굴이 거무스레했다. 사람들은 계속 환호를 보냈다. "훠롱! 진실한 마음, 진실한 친구! 훠롱!" 그러나 로사나크인들이 지나가자 다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적다니! 이백 명 정도밖에 안 되잖아? 저보다 열 배는 기대했었는데. 아마 움바르의 해적함대 때문일 거야. 그래서 십분의 일밖에 원군을 낼 수 없었나 봐. 조금이라도 오는 게 낫긴 하지만." 지원부대들은 이렇게 환호와 갈채 속에서 속속 입성해 곤도르의 도시를 경계하기 위해 즉각 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원군이 도착할 때마다 기대보다는 너무 적었다. 링글로계곡 사람들은 그 영주의 아들의 인솔로 도보로 삼백 명이 입성했다. 거대한 블랙루트계곡 모르손드에서는 장신의 두인하르가 두 아들 두일린, 데루핀과 함께 오백 명의 사수를 인솔하곤 왔다. 롱스트린드 너머에 있는 안팔라스에서는 영주인 골라스길의 근위병을 제외하면 장비가 빈약한 사냥꾼과 목자들 그리고 여러 작은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이 섞여서 입성했다. 라메돈에서는 몇 명의 용감한 산사람들이 지휘자도 없이 입성했다. 어촌인 에디르에서는 어부들 중에서 뽑힌 몇백 명이 왔다. 피나스 겔린의 푸른 숲에서는 아름다운 헐루인이 푸른 갑옷으로 무장한 삼백 명의 용사를 인솔해 왔다. 마지막으로 데네도르의 친족인 돌 암로스의 왕자 임라힐이 배와 은색 백조의 문장이 그려진 황금및 기치를 앞세우고 보무당당하게 입성했다. 그는 완전히 무장된 회색 말을 탄 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그 영주만큼이나 장대한, 회색눈과 검은 머리의 칠백 전사가 노래를 부르며 입성했다. 이것이 전부로 삼천 명도 채 안 됐다. 더이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들의 외침과 행진하는 소리는 도시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구경꾼들은 잠시 조용히 서 있었다. 밤이 깊어 가며 바람도 불지 않아 먼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벌써 성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으며 붉은 해는 민돌루인산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도시를 덮기 시작했다. 피핀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마치 거대한 먼지와 연기가 뒤덮인 듯 하늘은 잿빛을 띠고 있어 엷어지는 햇살이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에는 석양이 짙게 타올라 민돌루인산은 점점이 번지는 화염을 배경으로 검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핀은 옆에 소년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하루가 격노 속에 끝나는구나!" "저녁종이 울리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정말 그렇게 될 거예요. 가요! 성문을 닫는다는 트럼펫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들은 성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통과해 손을 맞잡고 도시로 돌아왔다. 그들이 등 제작거리에 도착했을 때 탑들의 종 모두가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나왔고 성벽을 따라 세워진 병사들의 막사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베르길이 말했다.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겠어요. 아버지께 안부인사 전해 주세요. 보내 주신 친구에 대해서도 감사한다고요. 그리고 아저씨도 다시 놀러 오세요. 전 이제 아저씨와 즐겁게 지낼 수 있게 전쟁이 안 일어나길 바랄 지경이에요. 그럼 우린 로사나크의 할아버지댁에 갈 수 있을 텐데요. 봄에 거길 가면 정말 좋지요. 숲과 들에 꽃이 만발해 있을 때니까요.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도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적들은 우리 영주님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우리 아버진 정말 용감하시거든요. 안녕, 다시 오세요." 소년과 작별하고 피핀은 궁성으로 바삐 돌아왔다. 길이 아주 멀게 느껴졌으며 배가 고프고 더웠다. 밤의 어둠이 빠르게 몰려들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식사시간에 늦었지만 베레곤드는 반갑게 맞이하고 아들 소식을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앉았다가 이상스레 불안한 느낌이 든 피핀은 갠달프를 보러 가기 위해 그들과 작별했다. 베레곤드는 그들이 앉아 있던 궁성 북쪽 작은 집 문 앞까지 따라나와 물었다. "길을 찾을 수 있겠어? 이렇게 어두운 데다 도시전체에 등화관제령이 내려졌는데. 성벽 밖으로 절대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야. 참, 자네한테 한 가지 들려 줄 명령이 있소. 내일아침 데네도르공께서 부르실 거야. 우리 3경비대에 배속되지 않을 것 같아 섭섭해. 그렇지만 우린 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안녕, 잘 자게." 숙소는 테이블 위에 작은 등불 하나밖에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다. 갠달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피핀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는 벤치로 기어올라가 창 밖을 내다보려 했으나 밖은 마치 잉크병처럼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려와 창문을 닫고 침대로 갔다. 잠시 그는 누운 채 갠달프를 기다리다가 편안치 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밤중에 그는 불빛 때문에 깨어났다. 협실 커튼 너머로 갠달프가 이리저리 방 안을 서성대는 것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들이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양피지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파라미르는 도대체 언제나 돌아오는 건가?" 피핀은 커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음, 전 완전히 잊혀진 줄 알았어요. 다시 보게 되니 마음이 놓여요. 오늘은 아주 긴 하루였어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하지만 밤은 너무 짧을 걸세. 난 잠시 혼자 쉴 필요가 있어 돌아왔지. 자넨 시간이 있을 때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날이 밝으면 데네도르에게 자넬 데려가야 해. 아니지, 날이 밝으면이 아니라 그가 부를 때지. 어둠이 시작되었어. 다시는 새벽이 오지 않을 거야." 제2장 회색부대의 통과 메리가 아라곤에게 돌아왔을 때 이미 갠달프를 태운 새도우폭스의 말발굽소리는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는 파스 갈렌에서 짐을 잃었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센가드의 잔해에서 건져 낸 작은 꾸러미 하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수펠에게는 이미 안장이 지워져 있었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말 옆에 바싹 붙어서 있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원정대 중 우리 네 명만이 남았군. 우린 같이 가야지. 하지만 우리끼리 가게 되진 않을 것 같아. 왕도 함께 떠나기로 한 모양이니까. 날개달린 어둠이 지나간 다음부터 아마 밤중에 산으로 돌아갈 작정을 한 것 같아." "그리고는 어디로?" 레골라스가 묻자 아라곤이 다시 말했다. "아직은 알 수 없지. 왕은 나흘 전에 에도라스에서 발령한 소집을 점검하러 갈 거야. 그곳에서 전쟁 소식을 좀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지. 그리고나서 로한의 기사들은 미나스 티리스로 진군하겠지.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누가 나와 같이 가겠는가?" "난 함께 가겠어요." 레골라스가 말하자 김리 역시 외쳤다. "나도 함께!" "음, 그렇지만 내가 택할 길은 훨씬 더 어두울 거야. 나 역시 미나스 티리스로 가겠지만 어떤 길로 갈지는 결정하지 않았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시간이 임박했네." 그러자 메리도 말했다. "날 떼어 놓지 마세요. 지금까지 별로 유용한 일은 못했지만 그래도 난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돌아보게 되는 짐꾸러미같이 처박혀 있기는 싫어요. 또 로한의 기사들한테 짐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왕께서는 궁으로 돌아가면 자기 옆에 앉아 샤이어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내 생각엔 자넨 왕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 같아, 메리. 하지만 그 마지막 환락을 너무 기대하진 말게. 데오든왕이 메두셀드의 옥좌에 편히 앉게 될 날은 그리 금방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이 잔인한 봄엔 많은 희망이 스러져 가고 있거든." 곧 스물네 마리의 말 전부가 떠날 준비를 갖췄다. 김리는 레골라스 뒤에, 메리는 아라곤 앞에 올라탔다. 그들은 어둠 속을 빠르게 달려갔다. 이센여울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뒤쪽에서 기사 한 명이 왕에게로 급히 말을 몰고 달려와 말했다. "주군, 일단의 기사들이 우리 뒤를 쫓고 있습니다. 여울을 건널 때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지금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무섭게 달려오고 있으니 아마 곧 우릴 따라잡을 것 같습니다." 데오든은 당장 부대를 정지시켰다. 기사들은 말을 돌려 창을 움켜잡았다. 아라곤은 말에서 먼저 내려 메리를 내려 준 다음 칼을 빼들고 왕 옆에 버티고 섰다. 요머와 왕의 가신들은 후미로 달려갔다. 메리는 전보다 한층 더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느껴졌으며 싸움이 시작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왕의 소부대가 전부 사로잡히거나 패배해 자기 혼자 어둠을 틈타 도망쳐서 어딘지도 모르는 로한의 끝없는 황야를 헤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절대 안 되지!' 그는 결심했다. 그는 칼을 빼들고 허리띠를 졸라 맸다. 구름에 가려 침침했던 기울어 가는 달이 갑자기 구름에서 벗어나 다시 밝은 빛을 뿌렸다. 그들 모두가 이제 말발굽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여울로부터 이어진 길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창에 부딪힌 달빛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추적자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왕의 부대보다는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이 오십 보 앞까지 다가왔을 때 요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지, 정지! 그대들은 누군데 감히 로한의 평원에서 말을 달리는가?" 추적자들은 급히 말을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달빛 속에서 한 기사가 말에서 내려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화평의 표시로 손바닥을 밖으로 한 채 손을 들고 나왔지만 로한의 기사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십 보 앞에서 그는 멈춰섰다. 달빛을 등진 그의 검은 몸체는 아주 컸다. 그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한? 로한이라고 했소? 그건 반가운 말이군. 우린 아주 먼 곳에서 로한을 찾아급히 달려왔소." 그러자 요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찾은 거요. 저 여울을 건넜을 때 그대들은 이미 로한에 들어선 것이오. 하지만 여긴 데오든왕의 영토요. 아무도 왕의 허가 없이 이곳에서 말을 탈 수 없소. 그대들은 누구요? 그렇게 서둘러 온 이유가 뭐요?" "난 북부의 순찰자 듀나단 할바라드요. 우린 아라돈의 아드님 아라곤공을 찾고 있는데 로한에 계시다고 들었소." 그러자 아라곤이 외쳤다. "그대들은 마침내 찾게 된 거야." 아라곤은 말고삐를 메리에게 건네 주고 앞으로 걸어나가 그를 껴안았다. "할바라드! 자넬 만나다니 정말 생각도 못한 기쁜 일인걸!" 메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것이 왕의 주변에 병사들이 많지 않을 때 요격하려는 사루만의 마지막 흉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은 데오든을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칼을 다시 꽂았다. 아라곤은 왕에게 돌아서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이들은 내가 살던 먼 곳에서 온 내 동족들입니다. 그러나 왜 왔으며 또 몇 명이나 되는지는 할바라드가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저는 삼십 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이 급히 끌어모은 우리 친구 전붑니다. 하지만 엘라단과 엘로히르 형제가 전쟁에 가담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왔습니다. 저흰 아라곤공의 소환을 듣자마자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하지만 난 자네들이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소환한 적은 없는데. 난 자네들을 늘 그리워했지. 특히 오늘밤 같은 땐 이야. 그렇지만 난 전갈을 보낸 적이 없어. 어쨌든 이리 오게. 그런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도 되니까. 자넨 우리가 위험 속을 서둘러 달리고 있다는 걸 알겠지. 만일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자네들도 함께 가세." 데오든왕은 이 말을 듣고 아주 흡족해서 말했다. "아주 좋소. 만일 공의 친구들도 모두 그대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이 삼십 명의 기사는 수효로 판단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 될 것이오." 기사들은 다시 출발했다. 아라곤은 듀너데인들과 함께 말을 달리며 북쪽과 남쪽 소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엘로히르가 그에게 말했다. "난 당신께 보내는 아버님의 전갈을 가져왔소.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면 사자(死者)의 길을 기억하라.' 는 전갈이오." "난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소. 하지만 그 길을 택한다는 건 정말 급한 경우가 아니면 안 되지." 그러자 엘로히르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곧 알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그런 얘긴 그만하는 게 낫겠소." "자네가 갖고 있는 건 뭔가, 친구?" 아라곤은 할바라드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할바라드는 창 대신에 마치 군기라도 되는 양 검은 천으로 싸고 가죽끈으로 묶은 긴 지팡이를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이건 리벤델의 숙녀께서 공에게 보내는 겁니다. 그분은 비밀리에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셨습니다. 또 전갈도 보냈지요. '이제 시간이 없어요.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모든 희망이 사라질 거예요. 그래 전 당신께 당신을 위해 만든 것을보내 드립니다. 안녕, 엘프스톤.'" 그러자 아라곤이 다시 물었다. "자네가 들고 있는 게 뭔지 알겠군. 당분간 자네가 계속 갖고 있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수많은 별들 아래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에 잠겨 그날 밤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한마디도 더 말하지 않았다.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혼버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쇠하기 시작하고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그들은 잠시 쉬며 논의했다. 메리는 레골라스와 김리가 깨울 때까지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레골라스가 깨우며 말했다. "해가 중천에 데 있어.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일어나 일하고 있는데. 자, 지금 이근처를 봐두는 게 좋아, 이 게으름뱅이야." 김리도 말했다. "사흘 전 여기서 전투가 있었지. 레골라스하고 난 내기를 했는데 내가 오르크 한 놈 차이로 이겼거든. 가서 좀 보란 말이야. 여긴 동굴들도 있어, 메리. 신비의 동굴들이지. 레골라스, 한번 가보지 않겠어? 어때?" "안 돼. 시간이 없어. 조급한 마음으로 구경하면 경이로움도 반감되잖겠어? 평화와 자유를 되찾게 되면 같이 돌아와 동굴을 보겠다고 약속했잖아. 벌써 정오야. 내가 듣기론 정오에 식사를 하고 떠난다고 했어." 메리는 일어나 하품을 했다. 몇 시간의 수면으론 충분치가 않았다. 피곤하고 기분이 우울했다. 그는 피핀이 그리웠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쓸데없는 짐처럼 느껴졌다. "아라곤은 어디 있어요?" 그러자 레골라스가 대답했다. "버그의 높은 방에. 내가 보기에 그는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은 것 같아. 몇 시간 전에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며 그리로 갔어. 그 동족인 할바라드만 따라갔지. 그에겐 어떤 걱정거리와 미심쩍은 문제가 있는 모양이야." 김리도 말했다. "그 새로 온 사람들은 이상한 친구들이야. 하나같이 장대하고 품위가 있어서 로한의 기사들도 그 옆에 서면 어린애 같아 보일 지경이거든. 게다가 돌로 만들어진 양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이야. 아라곤도 그렇지만. 그리고 말도 없거든." "그렇지만 그들도 일단 말을 할 때면 아라곤처럼 정중하잖아. 자넨 엘라단과 엘로히르 형제를 잘 봤나? 다른 이들보다 덜 감은 옷을 입은 이들 말이야. 정말 요정의 왕자들답게 아름답고 용감하지. 얼론드의 아들들에겐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이야." 레골라스가 이렇게 말하자 메리가 물었다. "그들은 왜 왔을까요? 당신들은 알아요?" 이제 그는 옷을 다 입고 어깨에 망또를 걸쳤다. 그들 셋은 버그의 파괴된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김리가 매리의 물음에 먼저 대답했다. "소환에 응해 왔다고 자네도 들었잖아. 리벤델에 이런 전갈이 왔대. '아라곤에게 동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듀너데인은 로한에 있는 아라곤에게 달려가라!' 그런데 그들도 이 전갈이 누구에게서 온 건지 의아해 하더군. 내 생각엔 갠달프가 보낸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나 레골라스는 그와 의견이 달랐다. "아니야, 갈라드리엘이야. 북쪽에서 회색부대가 올 거라고 갠달프를 통해 알리지 않았었어?" 그러자 김리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숲의 레이디!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과 바람을 잘 읽으시지. 그런데 우린 우리 동족들이 와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건가, 레골라스?" 그러자 레골라스는 문 앞에 서서 빛나는 눈동자를 저 멀리 북쪽과 동쪽으로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엿보였다. 그는 말했다. "난 누가 올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아. 우리 동족은 전쟁에 참가하러 일부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을 거야. 우리 고향에도 이미 전쟁이 시작됐으니까 말이야." 얼마동안 세 친구는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파괴된 문을 지나쳐 길 옆 잔디 위에 무더기로 쌓인 시체들을 지나 헬름의 방벽에 이르러 골짜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르크들의 시체를 태운 재는 거대한 검은 돌로 덮여 있었고 휴오른들이 짓밟고 지난 자국이 선명했다. 방벽과 들, 그리고 그 너머의 부서진 성벽에서는 던랜드인들과 버그의 수비대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스럽게도 조용해 보였다. 마치 폭풍이 지난 다음의 골짜기와도 같았다. 그들은 다시 버그의 홀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왕은 이미 와 있었으며 그들이 들어서자 메리를 불러 자기 옆에 앉게 했다. 왕이 말했다. "이건 내가 약속했던 자리와는 좀 다르지. 여긴 에도라스의 아름다운 궁전이 아니니까.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할 친구는 가버렸고. 그대와 내가 메두셀드의 높은 테이블에 함께 앉을 날은 그리 금세 오진 않을 거야. 지금 돌아가는 길은 연회를 베풀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니 말일세. 그렇지만 어서 들게.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나선 나와 함께 타고 갈 거야." "제가요? 그거 정말 좋은데요!" 메리는 놀란 한편 기뻐서 외쳤다. 그에게는 이 친절한 말보다 더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멀었다. 그는 더듬거렸다. "전 늘 다른 사람에겐 방해만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꼭 해내고 싶습니다." "의심하지 않네, 그댈 위해 고산의 조랑말을 준비해 놨지. 그놈은 우리가 가는 길에 어느 말에도 뒤지지 않고 빨리 달릴 걸세. 우린 버그에서부터는 평지가 아니라 산길을 따라 던해로우를 거쳐 요윈이 기다리고 있는 에도라스로 갈 작정이니까 말이야. 그대가 원한다면 내 시종기사가 될 수 있네. 이곳에 내 근위시종기사를 위한 갑옷은 없는가, 요머?" "여긴 큰 무기고는 없습니다, 주군. 하지만 그에게 맞을 만한 가벼운 투구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장에 맞는 갑옷이나 칼은 없겠습니다만." "칼은 제게 있습니다." 메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칼집에서 빛나는 작은칼을 뽑으며 말했다. 그는 이 노왕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솟아남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나서 외쳤다. "데오든왕이시여, 샤이어의 메리아독의 칼을 바쳐도 될까요? 꺼리시지 않으신다면 제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기꺼이 받겠네." 왕은 그의 늙은 손을 호비트의 갈색 머리 위에 얹어 축복했다. "자, 일어서게, 메리아독, 메두셀드의 가신, 로한의 기사여! 이 칼을 받고 영원히 간직하게." "저는 주군을 아버님처럼 모실 것입니다." "그리 오랫동안은 아닐 거야." 데오든왕이 말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들고 나서 요머가 말했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주군. 나팔을 불게 할까요? 그런데 아라곤은 어디 갔습니까? 자리에도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들지 않았는데요."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떠날 준비를 갖추게 해라. 그리고 아라곤공에겐 시간이 됐다고 알리게 하고". 왕은 메리를 옆에 대동하고 호위병들을 거느린 채 버그의 문을 지나 기사들이 모여 있는 풀밭으로 나왔다. 이미 많은 기사들이 말에 올라 있었다. 이젠 대부대였다. 왜냐하면 왕은 버그에 수비대원 몇 명만을 남겼을 뿐 나머지는 에도라스에 집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미 밤에 천 명의 창병이 떠났으며 왕을 모시고 가기 위해 서쪽 습곡과 평원으로부터 온 오백 명의 병사가 남아 있었다. 그들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창과 활, 칼로 무장한, 규율이 엄정한 순찰자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짙은 회색 망또를 걸치고 있었으며 두건은 투구와 머리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들의 말들은 튼튼하고 당당했으며 갈기가 흩날렸다. 그 중 한 마리는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바로 그 말은 북쪽에서 데려온 아라곤의 말로 이름은 로헤린이었다. 그들의 안장이나 마구는 보석이나 금으로 장식되거나 다른 어떤 장식물도 달려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주인들도 망또를 어깨에 고정시키는 별 모양의 은브로치 외에는 아무런 배지나 표식도 달지 않았다. 왕은 스노우메인에 올라탔고 메리도 그 옆에 서 있던 스티바라는 조랑말을 탔다. 곧 요머가 아라곤과 함께 나왔으며 할바라드도 검은 천으로 싸인 지팡이를 안고, 늙었다고도 그렇다고 젊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키 큰 두 요정과 함께 걸어나왔다. 그들 엘론드의 두 아들은 서로 매우 닮아 사람들은 둘을 거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검은 머리와 회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요정들로 은회색 망또 아래에는 빛나는 갑옷을 똑같이 입고 있었다. 그들 뒤로 레골라스와 김리가 걸어왔다. 그러나 메리는 아라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의 무게가 가해진 듯 놀랍도록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회색으로 변한 피곤한 그의 얼굴은 엄숙했다. 그는 왕의 말 곁에 서서 말했다. "난 지금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상한 전갈을 받은 후 먼 곳으로부터의 새로운 위험을 알게 되었지요. 오랫동안 고심했습니다만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데오든 왕이시여, 지금 던해로우를 향해 출발하면 언제쯤 도착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요머가 대신 답했다. "지금 정오가 막 지났으니 오늘부터 사흘째 되는 날 밤이 되기 전에 홀드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만월 다음날이 되겠지요. 왕께서 명하신 소집일은 바로 그 다음날입니다. 로한의 전력을 다 모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립니다." 아라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흘."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야 비로소 소집이 시작된다? 더 앞당길 순 없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아 보였으며 얼굴에서는 동요의 기색이 사라지기 사작했다. "그렇다면 왕이시여, 난 허락을 얻어 내 동족들과 새로운 진로를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공공연하게 우리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내겐 은밀히 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동쪽 가장 빠른 길을 택해야 하니 사자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사자의 길!" 데오든은 몸을 떨며 말했다. 요머도 아라곤에게 몸을 돌리고 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메리가 보기에 아라곤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 같았다. 데오든이 말했다. "만일 그런 길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문은 던해로우에 있소. 그렇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통과할 수 없소." 요머 또한 말했다. "아, 아라곤, 내 친구여! 난 우리들이 함께 전장에 나가길 바랐소. 하지만 그대가 사자의 길을 택한다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고 우린 이 태양 아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길을 택할 거요. 그렇지만 난 우리가 다시 전장에서 만날 수 있다고 믿소, 요머. 비록 우리 사이를 모르도르의 전군이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그대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소, 친애하는 아라곤공. 다른 사람이 감히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한 길을 가는 것이 그대의 운명일지도 모르지요. 그대와의 이별은 날 슬프게 하오. 또 우리의 전력은 그대가 없음으로 해서 약화되겠지요. 그러나 난 이제 산길로 가야겠소. 더 지체할 시간이 없구려. 안녕히!" "위대한 무훈을 빕니다, 왕이시여. 안녕, 메리! 자넬 찾아 판곤숲까지 오르크를 추격하면서 무사하길 빌었네만 이제 누구보다 안전한 보호자에게 자넬 맡기네. 레골라스와 김리는, 내 바람이지만, 나와 같이 추격을 계속할 걸세. 그렇지만 자넬 결코 잊지 않겠네." "안녕!" 메리는 이 이상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가 왜소하게 느껴졌으며 사자의 길이라는 음울한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당혹스럽고 기가 죽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더 피핀의 천성적인 쾌활함이 그리웠다. 기사들은 이미 떠날 차비를 갖추었으며 말들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해 그는 차라리 빨리 떠나기를 바랄 지경이었다. 데오든이 요머에게 지시하자 그는 손을 펴들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와 함께 기사들은 출발했다. 그들은 방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 동쪽으로 급히 꺾어져 약 일 마일 정도 산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 산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아라곤은 방벽에 올라 그들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할바라드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저기 가는 세 친구를 난 좋아하네. 특히 제일 작은 친구는 더. 그는 자신이 어떤 결과를 향해 가는지 모르고 있어. 그렇지만 안다고 해도 기꺼이 갈 거야." "사이어족은 몸은 작지만 아주 훌륭한 친구들이지요. 그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린 그 마을을 오랫동안 힘들여 지켰습니다. 그건 억지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우린 같은 운명의 실로 얽혀 있거든. 그렇지만 아! 여기선 일단 헤어질 수밖에. 자, 난 뭘 좀 먹어야겠어. 우리도 곧 떠나도록 하세. 가세, 레골라스, 김리!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세." 그들은 버그로 돌아갔다. 아라곤은 홀의 테이블에 앉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 다른 이들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레골라스가 참지 못해 말했다. "어서요! 마음 편히 어서 말하고 어둠을 치우는 게 좋아요. 새벽에 이 음울한 곳에 온 후 무슨 일이 있었소?" "난 혼버그의 싸움보다 더 음울한 투쟁을 치렀지. 오탕크의 신석을 보았다네." "그 저주받은 돌을 봤다고요!" 김리가 공포와 경악에 가득차 부르짖었다. "그럼 그에게 뭔가 말했소? 갠달프조차 마주보기 두려워하는 그에게 말이오?" 그러자 아라곤은 눈을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넨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잊었군. 난 이미 에도라스의 성문 앞에서 내 지위를 공공연하게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걱정되는가? 아닐세, 김리." 그는 얼굴을 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마치 여러 날 밤을 새우 고 힘드는 일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난 신석의 합법적인 주인이고 그걸 사용할 힘과 권리를 갖고 있네. 적어도 난 그렇게 판단했지. 그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야. 힘은 충분해, 거의."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건 아주 힘들고 피곤한 싸움이었어.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침내 신석을 내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됐지. 그건 그로서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는 날 의식했어. 그래, 김리, 그가 날 봤어. 그러나 자네가 보는 것과는 다른 얼굴의 날 보았지. 만일 이 일이 그에게 이롭게 돌아간다면 내가 실수한 것이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네. 내가 살아서 땅 위를 걸어 다닌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일 거야. 여태까진 몰랐을 테니까. 오탕크의 눈도 데오든의 갑옷을 뚫고 볼 수는 없었거든. 하지만 사우론이 이실두르와 엘렌딜의 검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이제 그의 거대한 야심이 채워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이실두르의 후계자와 그 검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거지. 난 이 복원된 검을 보여 줬어. 그는 아직 어떤 두려움도 초월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진 못했네. 그에겐 의심이 싹트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그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러니 더 빨리 공격의 손길을 뻗치지 않겠어요?" 김리가 묻자 아라곤은 대답했다. "성급한 공격은 대개 빗나가는 법이지. 우린 적을 조여 놔야 해. 그리고 더이상 적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선 안 돼. 보게, 친구들. 신석을 제어할 수 있게 된 후 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됐네. 난 곤도르 남쪽에서 미나스 티리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려는 예기치 못한 위험이 다가오는 걸 봤어. 그것을 급히 막지 못하면 아마 열흘 안으로 미나스 티리스는 함락되고 말 거야." "그렇다면 함락될 수밖에 없겠는데요. 도우러 갈 병력도 없고 또 있다 해도 그 시간까지 갈 수는 없잖아요?" 김리가 다시 말했다. "보낼 병력이 없으니 직접 가야지. 그리고 함락되기 전에 연안지대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산으로 나 있는 길이야. 바로 그것이 사자의 길이지." 김리는 다시 외쳤다. "사자의 길! 그건 정말 기분나쁜 이름인데. 그리고 아까 보니 로한사람들도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살아있는 사람이 정말 무사히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무사히 지난다 해도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모르도르의 공격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이에요?" "로한인들이 이 땅에 온 이래 산 사람은 아무도 그 길을 이용하지 못했지. 왜냐하면 그 길은 그들에겐 닫혀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이실두르의 후계자는 이 암울한 시기에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 길을 이용할 수 있어. 들어 보게. 이건 전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것이야. 엘론드의 아들들이 리벤델에 계시는 그들 아버지로부터 받아 내게 가져온 전갈 말이야. '아라곤으로 하여금 예언자의 말과 사자의 길을 기억하게 하라.'" 그러자 레골라스가 물었다. "예언자의 말?" "포노스트의 마지막 왕 아르베두이 시대에 예언자 말베스가 한 말이지." 지상에 거대한 어둠이 덮여 암흑의 날개는 서쪽에 닿는다. 종말이 다가온다. 사자들이 깨어난다. 위맹자(僞盟者)의 속죄시간이 되었기에. 에레크의 바위에 다시 모이리니 산을 울리는 뿔나팔소리 들리리라. 누구의 나팔소리인가? 누가 그들을 부르는가, 어슴푸레한 여명에, 잊혀진 그들을? 그들이 서약한 주군의 후계자, 북쪽에서 오리라, 도움이 필요하리라. 그는 사자의 길을 지나리라."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음울한 길이겠군요, 틀림없이. 그 시는 더 음울하고." "자네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같이 가자고 하겠네만. 난 바로 그 길을 택한 걸세. 물론 나도 좋아서 가는 건 아니야. 필요 때문에 가는 것뿐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각자 자기 의사에 따라 같이 가지 않아도 좋아. 같이 간다면 커다란 노고를 치러야 할 것이고 또 무서운 공포와 맞닥뜨려야 할 테니까.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고." "길이 어떤 위험으로 이끌지라도 함께 가겠어요." 김리가 용감하게 말하자 레골라스도 말했다. "나도 물론 함께 갑니다. 난 죽은 사람은 두렵지 않으니까." "죽은 자들이 싸우는 법까지 잊어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일 그렇다면 일부러 방해하러 가는 길밖에 안 될 테니까 말이에요." 김리가 이렇게 덧붙이자 아라곤이 답했다. "에레크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사우론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맹세를 깼던 것이니까 저주가 풀리려면 다시 싸워야 하는 거야. 에레크에는 이실두르께서 '뉴메노르로부터 가져 오셨다는 검은 바위가 서 있지. 언덕 위에 있는데 거기에서 산의 왕은 곤도르가 개국될 때 이실두르와 동맹을 맺었다고 전해지지. 그런데 사우론이 돌아와 다시 강성해지자 이실두르께서 동맹의 맹세를 실행할 것을 촉구하셨지만 그들은 따르지 않았던 거야. 그들은 이미 암흑의 시대부터 사우론을 숭배하고 있었거든. 그러자 이실두르께서 왕에게 말씀한 거야. '그대가 최후의 왕이 되리라. 그리고 서역의 힘이 암흑군주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입증될 때 난 그대와 그대 종족에게 이 저주를 내리겠노라. 그대들은 맹세가 수행될 때까지 절대로 안식을 얻을 수 없으리라. 이 전쟁은 무한하리만큼 지속될 것이고 모든 것이 끝나기 전 그대들은 소환을 받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이실두르의 격노 앞에서 도주했지. 그 후에도 감히 사우론의 편에 들 수 없었고 그들은 산속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스런 장소로 모습을 감추고 다른 인간들과 교류를 끊은 채 오지에서 점차 그 수가 감소되기 시작한 거야. 그 안식을 얻지 못한 사자들이 에레크의 바위 주위와 그들이 과거 살았던 고장에서 무서운 공포를 퍼뜨리며 떠돌고 있는 겨야. 그렇지만 이제 달리 어디에서고 원군을 기대할 수 없으니 난 그 길로 가야 하는 거야." 그는 일어서서 '가자!' 하고 외치며 칼을 뽑았다. 칼은 버그의 어슴푸레한 홀 안에 빛을 뿌렸다. "에레크의 바위로! 난 사자의 길로 간다. 뜻 있는 자는 날 따르라!" 레골라스와 김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나 아라곤을 따라 홀을 나섰다. 풀밭에는 두건을 쓴 순찰 자들이 굳은 듯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말에 올랐다. 아라곤은 자신의 말 로헤린에 올라탔다. 그러자 할바라드가 커다란 뿔나팔을 불었으며 그 소리는 헬름의 방벽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와 함께 그들은 바람처럼 골짜기로 달려갔다. 버그와 방벽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은 경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데오든이 산길을 따라 천천히 전진하고 있을 때 아라곤의 회색부대는 빠르게 평원을 질주해 다음날 에도라스에 닿았다. 그들은 잠시 쉰 후 다시 계곡을 가로질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던해로우에 이르렀다. 요윈공주는 그들을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듀너데인들이나 엘론드의 아름다운 아들들보다 더 강인해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주로 아라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데오든이 떠난 후 급히 알려온 짤막한 소식들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들을 들을 수 있었다. 헬름스 디프에서의 전투와 적에 대한 공세 그리고 데오든과 그 기사들의 돌격을 전해 들으며 그녀는 눈을 빛냈다. 얼마후 그녀가 말했다. "여러분, 피곤하실 테니 우선 우리가 급한 대로 마련한 숙소에서 불편하시더라도 하룻밤 쉬도록 하십시오. 내일은 더 좋은 숙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라곤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공주. 우리에게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린 오늘밤만 묵고 내일아침 해가 뜨자마자 떠날 것입니다." 그러자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유형당한 요윈에게 소식을 전해 주시려고 일부러 그 먼 길을 돌아와 주셨나 보군요.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사실 누구라도 그런 일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공주, 사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이 던해로우에 있지 않았다면 이리로 올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아라곤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길을 잘못 드셨군요. 던해로우에서는 남쪽이나 동쪽으로 나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셨을 때처럼 급히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아닙니다, 공주.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닙니다. 난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계곡에서 나가는 길이 있지요, 난 그 길로 가려고 합니다. 내일 난 사자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자 공주는 마치 갑자기 무엇에 찔린 사람처럼 창백해져 그를 쳐다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공주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라곤, 당신의 임무라는 것이 죽음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에요. 그들은 산 사람이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내게는 허용할 것입니다. 어쨌든 난 헤쳐 나갈 겁니다. 다른 길은 이제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미친 짓이에요. 명성과 무용을 갖추신 이분들을 그 어둠 속으로 끌고 가시면 안 돼요. 이분들을 도움이 필요한 전장으로 인도하세요. 제발 여기 계시다가 제 오빠와 함께 가주세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한결 밝아질 것이고 희망도 더 커질 거예요." "미친 짓이 아닙니다, 공주. 난 약속받은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역시 자신들 뜻대로 하는 겁니다. 만일 여기 남아 로한의 기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난 혼자라도 반드시 사자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들은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아라곤에게서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은 그녀의 심적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에게 친절한 접대에 대한 감사의 말과 함께 그만 쉬러 가겠다는 양해의 말을 하고 침소로 갔다. 그러나 아라곤이 레골라스와 김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숙소로 향했을 때 요윈이 그를 따라와 불렀다. 돌아서 보니 그녀는 흰 옷을 입고 있어 마치 어둠 속의 빛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아라곤, 왜 당신은 그 무서운 길로 가려 하시나요?"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우론과의 전쟁에서 내 임무를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난 위험한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 마음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면, 난 저 북쪽 리벤델의 아름다운 계곡에서 노닐고 있을 것입니다." 잠시 그녀는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는 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올려 놓았다. "당신은 준엄하고 단호한 군주로군요. 그런 분들이 명성을 얻는 법이지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만일 꼭 가셔야 한다면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산속에 숨어 있는 데는 지쳤어요. 저도 나가 위험과 전쟁에 마주쳐 보고 싶어요." "당신에겐 백성들과 함께 있어야 할 책임이 있소." "전 그 책임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왔어요. 그렇지만 저도 욜의 자손으로, 단순한 여인이 아닌 여전사 아니에요? 전 주춤거리기만 하고 너무 오래 기다려 왔어요. 더이상 주춤거리지 않고 저도 제 뜻대로 인생을 살아선 안 되는 건가요?" "그런 자랑스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왕이 돌아오실 때까지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책임을 맡지 않으셨소? 만일 당신이 아닌 다른 원수나 대장이 그런 책임을 맡았다면 지루하다 해서 책임을 버리고 전장으로 달려나가려 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통렬한 어조로 외쳤다. "전 항상 그런 책임만을 맡아야 합니까? 기사들이 떠나면 뒤에 남아 그들이 명성을 얻는 동안 집이나 돌보고 그들이 돌아오면 음식과 침대나 준비해야 한단 말인가요?"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르오. 그땐 아마 명성이 따르지 않는 용감한 행위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방어하기 위해 행한 용감한 무용을 기억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칭송받지 못한다 해서 용감한 행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말씀은 이런 뜻일 뿐이에요. 당신은 여자다, 당신 일은 집안에 있다, 그러나 남자들이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해서 더이상 집이 필요치 않게 되면 그때 집에 남아 불에 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 욜의 자손이고 시중드는 여인네가 아니에요. 전 말을 탈 줄도 알고 칼도 다룰 수 있어요. 고통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오, 공주?" "우리예요. 필요할 때나 아니면 늙어 버려 위대한 일을 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다음에야 열릴, 빗장 잠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 말이에요." "그렇다면 왜 당신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내가 택한 길을 가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입니까?" "위험하다는 이유로 말리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 위험에서 도피하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당신의 칼로 명성과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전장으로 가시라는 것입니다. 전 고귀하고 강한 힘이 쓸데없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공주. 그러니까 당신에게 말하는 거요. 여기 계시오. 당신은 남쪽에는 볼일이 없으니 말이오." "당신과 함께 가는 이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다만 당신과 헤어질 수 없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나까요." 공주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음날 아침, 해가 아직 동쪽 산등성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늘에 아침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자 아라곤은 출발준비를 했다. 그의 부대는 이미 모두 말에 올랐고 아라곤이 안장에 오르려 할 때 요윈이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왔다. 그녀는 기사의 복장을 한 채 칼을 차고 있었다. 그녀는 컵을 들고 와 쾌속을 기원하며 입술에 대고 약간 마신 다음 아라곤에게 넘겨 주었다. 아라곤은 술을 마시고나서 말했다. "안녕, 로한의 공주여! 난 그대의 가문과 그대, 그리고 그대의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마셨소. 오빠께 말을 전해 주시오. 우린 어둠 너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오." 가까이 서 있던 레골라스와 김리에게는 그녀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렇게 당당하고 엄한 여인의 울음은 더욱 슬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정말 가시는 건가요, 아라곤?" "그렇소." "어제도 부탁드렸지만 정말 제가 따라가는 걸 허락지 않으실 건가요?" "안 됩니다, 공주. 나는 물론이거니와 그대의 왕과 오빠의 허락도 받지 못했는데, 안 되오. 그들은 내일까지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난 한시가 급합니다. 안녕!" 그러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안 되오, 공주." 아라곤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안장에 올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다만 그를 잘 알고 또 가까이 있던 사람들만 그가 간직한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윈은 양 옆구리에 손을 부르쥐고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사자의 길 관문이 있는 저주의 산, 검은 디모르버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돌아서서 마치 앞이 안 보이는 것처럼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백성들은 한낮이 되어 그 알 수 없는 이방인들이 다 가버릴 때까지 무서움에 질려 숨어 있었기에 이 이별의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요정인간들이야. 자신들이 속한 어두운 곳으로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시절인데 말이야." 태양은 아직 그들 앞에 우뚝 선 저주의 산 검은 등성이로부터 솟아오르지 않아 그들은 회색 여명 속에서 말을 달렸다. 고대의 비석들 사이로 들어섰을 때부터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상태에서 딤홀트에 이르렀다. 레골라스조차 오래 견디기 힘든 검은 숲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산의 중심으로 연결되는 분지를 찾았다. 그 오른쪽에는 마치 운명의 손가락처럼 보이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피가 식는 것 같아." 김리가 말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아 그의 말은 발 밑 축축한 전나무 잎 위로 스러지는 것 같았다. 말들이 그 위협적인 바위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아 기사들이 내려 끌고 가야만 했다. 그들은 마침내 골짜기 맨 아래까지 내려왔다. 가파른 바위벽이 있었고 벽에는 어둠의 문이 밤의 입처럼 열려 있었다. 문의 아치에는 이상한 기호와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었지만 너무 희미해 읽기가 힘들었으며 문에서는 공포를 돋우는 기운이 회색 연기처럼 뿜어 나오고 있었다. 일행은 멈춰섰다. 인간의 유령은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레골라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바라드가 말했다. "이건 정말 악마의 문이로군. 하지만 내 죽음이 저 너머에 있더라도 난 이 문을 지나겠소. 그렇지만 말들은 가지 않으려 하겠는데." 그러자 아라곤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가야 해. 그러니 말들도 가야지. 이 어둠을 통과하더라도 그 앞에는 긴 여정이 남아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사우론의 승리를 도와 주는 게 돼. 자, 날 따르라!" 아라곤이 앞장섰다. 모든 듀너데인과 말들은 그 강한 의지에 끌려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의 말은 주인을 매우 사랑했기에 주인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그들도 문의 공포에 기꺼이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로한의 말인 아롯은 앞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며 보기에 딱할 정도로 땀을 흘리고 떨었다. 그러자 레골라스가 말의 눈을 손으로 가린 다음 그 무서운 길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를 말 귀에 불러 주며 문을 통과시켰다. 이제 문 밖에는 난쟁이 김리만 남게 되었다. 그는 무릎이 떨렸으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건 도대체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이야! 요정이 지하로 가는데 난쟁이가 못 가다니 말이야!" 그는 이렇게 외치며 뛰어들었다. 그러나 문지방을 넘는 그의 발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달린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자 세상의 수많은 깊은 땅 속을 대담하게 걸어다닌, 글로인의 아들 김리마저도 눈 앞에 펼쳐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아라곤은 던해로우에서 준비해 온 횃불을 높이 쳐들고 맨 앞에서 전진했으며 후미에는 엘라단이 역시 횃불을 들고 따르고 있었다. 김리는 그 뒤에서 비틀거리며 엘라단을 따라잡으려 애를 썼다. 그에겐 침침한 횃불빛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일행이 멈추면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중얼거림 같은 끝없는 속삭임이 사방을 둘러싸는 것 갈았다. 일행을 공격하거나 전진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으나 난쟁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짙은 공포를 느꼈다. 더구나 이제 돌아설 수도 없다는 사실이 공포를 가중시켰다. 뒤쪽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리가 우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며 이렇게 나아가던 김리는 후에라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길은 겨우 양쪽 벽을 가늠할 정도였었는데 갑자기 일행은 양 벽이 탁 트인 거대한 공지에 이르렀다. 이제 너무도 지독한 공포로 난쟁이는 더이상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횃불을 든 아라곤이 전진함에 따라 저 멀리 앞쪽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아라곤은 잠시 멈춰 섰다가 무엇인가 알아 보기 위해 다시 전진했다. 난쟁이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 친구에겐 두려움이란 게 없나? 다른 동굴에서라면 난 글로인의 아들 김리가 황금의 광휘를 보고 제일 먼저 달려가겠지만, 여긴 아니야, 그냥 내버려둬!" 그렇지만 곧 그도 가까이 다가가 엘라단이 양 손에 횃불을 쳐들고 있는 가운데 아라곤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앞에는 장대한 남자의 유골이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동굴 안이 건조했기에 마구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쇠사슬 갑옷은 광채를 발했다. 허리띠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었으며 땅바닥을 향한 뼈만 남은 머리 위에는 역시 황금으로 장식된 투구가 씌워져 있었다. 유골은 이제 희미하게 보이는 동굴 벽 가까이에 있었으며 그 앞에는 굳게 닫혀진 돌문이 있었다. 손가락 뼈는 돌문의 갈라진 틈새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금이 가고 부러진 칼이 옆에 놓여 있어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바위를 내려쳤었음을 보여 주었다. 아라곤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일어서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엔 결코 심벨미네(에버마인드화. 로한의 왕릉에만 피어나는 작고 흰 꽃)가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홉 능과 일곱 능(에도라스에 있는 로한의 두 계열의 왕릉)은 이미 푸른 잔디로 덮였는데,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결코 열 수 없었던 문 앞에 누워 있었다. 어디로 통하는 것인가? 왜 지나려 했는가?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그건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돌아서서 후미를 따라온 속삭이는 어둠을 향해 다시 외쳤다. "그대들의 보고와 비밀은 저주받은 세월 속에 묻어 두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만을 서두르라! 우릴 통과시키고 따라오라! 난 그대들을 에레크의 바위로 소환한다!"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마치 그 정적이 대답이기라도 한 듯 속삭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쳐 타오르던 횃불을 꺼버렸으며 다시 켤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의 한두 시간을 김리로서는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재촉했지만 그는 늘 후미에 처져 마치 자신을 붙잡으려는 듯 슬슬 다가오는 공포와 여러 사람의 발소리 같은 어둠의 소리에 쫓기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짐승처럼 네 발로 땅을 더듬으며 더이상 참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그는 이 길 끝에 이르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그렇지도 못하면 완전히 미쳐서 뒤에서 따라오는 공포에 맞닥뜨리기 위해 돌아 달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어둠의 꿈속에서 돌이 떨어지듯 아주 강하고 분명한 물소리를 들었다. 조금씩 밝아지면서 일행은 높은 아치형의 넓은 문을 통과했다. 그 옆으로는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문 너머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절벽 사이로, 아래로 급경사를 이루는 길이 한 갈래 뚫려 있었다. 길은 너무 깊고 좁아 검은 하늘에는 몇 개의 작은 별만 보일 뿐이었다. 김리는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때는 여전히 그들이 던해로우를 출발한 날로서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김리로서는 마치 몇 년이나 지난 다른 세계의 땅거미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일행이 다시 말에 오르자 김리도 레골라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이 한데 몰려 앞으로 나아갈 때 저녁이 몰려와 짙푸르게 어스름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의 기운은 여전히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레골라스가 김리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돌아보자 난쟁이는 바로 그 면전에서 빛나는 요정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들 뒤에는 엘라단이 맨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었지만 그가 이 일행의 진짜 후미는 아니었다. 레골라스가 말했다. "사자들이 따라오고 있어. 난 인간과 말들의 그림자, 구름처럼 희미한 깃발 그리고 안개 속의 겨울 잡목숲 같은 창들을 볼 수가 있어." 그러자 엘라단이 덧붙였다. "그래, 사자들이 따르고 있지. 그들은 소환을 받았으니까." 일행은 갑자기 바위 틈새에서 삐어져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협곡에서 벗어났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계곡이 펼쳐졌고 옆을 따라 흐르던 시내는 여러 갈래의 폭포가 되어 차갑게 떨어져 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김지가 말하자 엘라단이 대답했다. "우린 돌 암로스의 성벽에 닿는 바다로 흘러가는 차가운 강 모르손드의 수원으로부터 내려온 거야. 그러니 더이상 이곳 명칭을 물을 필요는 없겠지. 사람들은 여길 블랙루트라 부르지." 모르손드계곡은 산맥 남쪽 가파른 면을 향해 길게 뻗쳐 있었다. 그 가파른 사면은 푸른 풀로 덮여 있었으나 지금 시간에는 해가 졌기에 모두 회색으로 보였다. 아래쪽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계곡은 풍요로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아라곤이 돌아서지 않고 모든 사람인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외쳤다. "기운을 내게, 친구들! 달리자, 달려! 오늘에 다 가기 전에 에레크의 바위에 도착해야 한다. 아직 갈길이 멀어!"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곡평원을 달려 격류 위에 걸린 다리를 지나 평지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작은 마을의 집들에서는 불이 꺼졌고 문이 잠겼으며 들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선불맞은 사슴처럼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는 똑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사자의 왕! 사자의 왕이 오고 있어!" 아랫마을에서는 종소리가 들려 왔으며 아라곤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모조리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회색부대는 말이 지쳐 비틀거릴 때까지 사냥꾼처럼 질주를 계속했다. 결국 한밤이 되기 바로 전 그들은 마치 산속 굴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에레크의 바위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그 언덕과 주변 빈 들에는 사자의 공포가 깊게 드리워 있었다. 언덕 위에는 반쯤 땅에 묻힌, 사람 키만한 커다란 공 모양의 검은 바위가 서 있었다. 그건 사람들이 말하듯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인 양, 전혀 땅에서 형성된 바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역인의 전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바위가 뉴메노르의 폐허에서 온 것으로 이실두르가 상륙해서 세워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계곡의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 바위에 접근하거나 그 근처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이 어둠의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끔 공포의 시간에 모여 바위 주변에서 속삭인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바위로 다가가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서 멈춰섰다. 그러자 엘로히르가 아라곤에게 나팔을 건네 주었고 아라곤은 나팔을 불었다.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은 저 멀리 깊은 동굴로부터 마치 답하는 나팔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언덕 주위에 거대한 무리가 몰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맥에서 마치 유령의 입김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라곤은 말에서 내려 바위 옆에 서서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위맹자들이여, 왜 왔는가?" 그러자 그에 답하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우리의 서약을 이행하고 안식을 얻기 위해."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마침내 그 시간이 되었단. 난 안두인대하의 펠라기르항으로 간다. 그대들은 날 따르라. 이 땅에서 사우론의 종복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난 서약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할 것이며 그대들은 안식을 얻고 영원히 떠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난 곤도르의 왕 이실두르의 후계자 엘레사이기 때문이다!" 그 말과 함께 그는 할바라드에게 들고 온 그 커다란 표식을 꺼내 펼치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검은색이었으며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었을지라도 그 같은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정적이 흘러 아무런 속삭임이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행은 바위 옆에서 야영했으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불안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차갑고 맑은 새벽이 밝아오자 아라곤은 일행을 깨운 다음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한 속도의 여정으로 이끌었다. 그들을 이끈 것은 오로지 그의 의지력이었다. 그러한 일을 참고 해낼 수 있는 이는 북쪽의 듀너데인과 난쟁이 김리 그리고 요정 례골라스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탈랑의 지협을 지나 라메돈에 이르렀고 뒤에서는 여전히 음산한 공포의 기운을 발산하는 어둠의 무리가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키릴강안의 칼렘벨에 이르렀을 무렵 해는 피처럼 붉은빛을 뿌리며 저 멀리 서쪽 피나스 겔린산맥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키릴강안의 소읍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전장으로 나갔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사자의 왕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산으로 도망쳐 버려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다음날에는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으며 회색부대는 모르도르의 폭풍의 어둠속으로 달려가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사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제3장 로한의 소집 이제 사람들은 어둠의 습격과 전쟁을 맞이하기 위해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피핀이 도시의 큰 성문 앞에서 돌 암로스의 왕자가 기치를 날리며 진군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무렵 로한의 왕은 산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기울어 가는 햇살 속에서 로한의 기사들은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었다. 어둠은 이미 산기슭을 덮고 있는 전 나무숲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왕은 이제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길은 거대한 헐벗은 바위산을 끼고 돌아 낮게 속삭이는 듯한 숲의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길게 구부러진 열을 짓고 계속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내 그들이 골짜기 맨 아래에 도착했을 땐 그 깊은 곳에 이미 저녁이 찾아와 있었다. 해는 보이지 않았다. 폭포 위로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들 발 밑으로 빠르게 흐르는 시냇물은 소나무로 덮인 산벽 사이를 가르며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내려 암벽에서 분출되어 넓은 계곡에서 합류했다. 기사들이 그 물줄기를 따라오자 그들 앞에는 저녁의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해로우데일이 펼쳐졌다. 스노우본강이 지류들과 합쳐져 바위에 부딪혀 흰 물거품을 뿜으며 에도라스와 푸른 언덕 그리고 평원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골짜기 오른편 먼 곳에는 거대한 스타콘산이 구름에 싸인 채 거용을 드러냈단. 그 만년설로 덮인 날카로운 거봉은 서쪽 석양에 물들어 동쪽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먼 세계에까지 빛을 발하는 듯 보였다. 메리는 긴 여행 중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이 낯선 나라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 없는 세상처럼 침침한 어둠 속을 통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끝 없이 펼쳐진 산사면 들과 첩첩한 바위벽들 그리고 안개에 싸인 험한 절벽들뿐이었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물소리, 어두운 숲의 속삭이는 소리, 바위 갈라지는 소리 등을 들으며 그 소리 뒤의 거대한 정적을 느꼈다. 그는 산을 사랑했으며 멀리 이어진 첩첩한 산맥을 생각하길 즐겼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중간계의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위용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괌막함에서 벗어나 조용한 방 불가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천천히 여행을 했으나 거의 쉬지 않고 왔기에 그는 매우 피곤했다. 거의사흘 동안 계속 아래 위로 흔들리며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고 많은 강을 건너왔다. 때때로 길이 넓어지면 왕 옆에서 말을 몰곤 했으며 뒤따르는 기사들은 텁수룩한 회색 조랑말 위에 앉은 호비트와 커다란 백마를 탄 로한의 영주가 나란히 가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곤 했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고향과 호비트족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왕으로부터 마크와 그 옛 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특히 마지막 날은 뒤에서 나누는 로한의 기사들의 단조롭고 느린 이야기를 들으며 그 언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며 묵묵히 왕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언어는 비록 샤이어에서 보다는 더 풍성하고 강하게 쓰여졌으며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도 많았지만 그걸 조합시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때때로 몇몇 기사가 맑은 목소리로 장쾌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메리는 무엇에 관한 노래인지는 잘 모르면서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중 그는 계속 외로움을 느꼈지만 이 저녁에는 특히 어느 때보다 심했다. 그는 피핀이 이 낯선 세계의 어디로 간 것일까를 생각했으며 아라곤과 레골라스, 김리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차갑게 울리며 프로도와 샘 생각이 났다. '난 그들을 잊고 있었어!' 그는 스스로에게 나무라듯 중얼거렸다. 더구나 그들이 우리 나머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데.난 그들을 도우러 왔었지. 그런데 그들은 수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을 테니.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야.' 그는 몸을 떨었다. "아, 해로우데일! 여행은 이제 거의 끝이 났구나." 요머가 말했다. 그들은 멈춰있다. 좁은 협곡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아주 가팔랐다. 마치 높은 창문을 통해 보는 것처럼 한눈에 저 아래 박모의 거대한 계곡이 비쳐 왔다. 강안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쳐 왔다. 데오든이 말했다. "이제 이번 여행은 끝난 것 같군. 하지만 내겐 아직 훨씬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 지난밤이 만월이었으니까 내일은 마크의 기사들들 소집하기 위해 에도라스로 가야겠군." 그러자 요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제 간언을 좀 들어 주십시오! 소집이 끝나면 돌아오셔서 이기든 지든 전쟁이 끝날 때까진 여기 계셔 주십시오." 데오든은 웃었다. "아니야, 내 아들아. 자네가 내 곁에 있는 한 웜통처럼 내 늙은 귀에 부드러운 말을 불어넣어서는 안 돼 !" 그는 몸을 세우고 뒤쪽 박모 속에서 긴 열을 이루고 있는 기사들을 돌아본 다음 말을 이었다. "서쪽으로 달려갔던 그 며칠 동안이 아주 긴 세월처럼 느껴지는군. 난 다시는 지팡이에 의지하진 않을 걸세. 만일 전쟁에서 진다면 산속에 숨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리고 만일 이긴다면 내가 쓰러져 죽은들 마지막 힘을 다했다면 그게 뭐 슬픈 일이겠나? 자, 어쨌든 다시 출발하세. 오늘밤은 던해로우요새에서 묵을 테니까. 적어도 하룻밤의 휴식은 남아 있는 셈이지. 자, 달려가자!" 그들은 점점 짙어가는 어스름 속에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스노우본강은 골짜기서편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바위 위로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얕은 여울로 다가갔다. 여울에는 경비대가 있었다. 왕이 다가가자 바위 뒤 그림자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왕을 보고 기쁨에 넘쳐 외쳤다. "데오든왕! 데오든왕! 마크의 왕께서 돌아오셨다!" 그러자 누군가 길게 뿔나팔을 불었다. 나팔소리는 계곡에 메아리첬다. 이어 다른 뿔나팔소리들이 이에 호응해 울렸으며 강 저편에는 불이 밝혀졌다. 갑자기 위쪽으로부터 거대한 트럼펫의 합주가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분지에서라도 퍼져나온 듯 하나의 소리로 모여 바위벽에 부딪고는 구르며 퍼져나갔다. 마크의 왕은 이렇게 서쪽으로부터 백색산맥 발치의 던해로우로 영광스러운 개선을 한 것이었다. 그는 남아 있던 기사들이 운집해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갠달프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았던 남아 있던 지휘관들은 왕의 개선이 알려지자마자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여울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들의 대표격인 해로우데일의 수장 던헤르가 말했다. "주군, 사흘 전 새도우폭스를 타고 바람같이 에도라스로 달려왔던 갠달프에게서 승전보를 들었습니다. 저흰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갠달프는 또 기사들의 소집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군의 명령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날개달린 어둠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날개달린 어둠? 우리도 그것을 봤지만 그건 우리에게서 갠달프가 떠나기 전날밤이었는데."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그날 아침 끔찍한 형상으로 에도라스 상공을 날아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메두셀드의 지붕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아와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울부짖음을 토했지요. 갠달프는 들판에 있지 말고 산 밑 골짜기로 피해 주군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습니다. 또 정 필요한 때가 아니면 불을 켜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믿음직한 말로 들렸기에 저희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주공께서 계셨더라도 그렇게 지시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여기 해로우데일에는 그런 끔찍한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잘했소. 난 이제 요새로 가, 쉬기 전에 원수들과 지휘관들을 만나야겠소.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들 오라고 전해 주오." 이제 길은 폭이 기껏해야 일 킬로밖에 안 되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곧장 동쪽으로 뻗쳤다. 저녁무렵이라 거친 풀로 덮인 사방의 평원과 초지는 회색으로 드넓게 펼쳐졌으며 골짜기 앞쪽으로는 거대한 스타콘산 연맥의 제일 바깥 봉우리가 오랜 세월강물에 침식되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평원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 있었다. 일부는 길 양편에 모여들어 서쪽에서 돌아오는 왕과 기사들을 향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사람들 뒤쪽에는 막사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으며 말들도 열을 지어 말뚝에 매어져 있었다. 또한 산더미 같은 무기와 새로 심은 관목숲처럼 삐죽삐죽 솟아 빛나는 창들이 보였다. 이제 대부대도 어둠에 잠겼으며 고지로부터 찬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등불은 켜지 않았으며 화톳불도 피우지 않았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메리는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와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점점 깊어가는 어둠 때문에 그 수효를 어림잡을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수천 명 이상의 대부대로 보였다. 그들을 죽 훑어보고 있는 동안 왕의 부대는 계곡 동쪽에 있는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갑자기 오르막길이 시작되었고 위를 쳐다본 메리는 깜짝 놀랐다.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걸쳐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걸작으로 생각되는 길 위에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마치 뱀이 또아리를 튼 형상으로, 가파른 암벽을 가로지르며 위로 뚫려 있었다. 말들도 올라갈 수 있었고 마차는 천천히 끌어올려질 수 있었지만 만일 경비가 이루어진다면 공중으로 날아오지 않는 한 어떠한 적도 이 길을 오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길이 꺾여지는 곳마다 사람의 모습을 본떠 조각된 거대한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석상들은 다리를 엇갈려 쪼그리고 앉아 투박한 팔로 커다란 배를 감싼 자세였으며 팔다리는 매우 거대하고 투박해 보였다. 오랜 세월 속에서 석상들의 얼굴은 지나는 사람들을 서글프게 응시하는 듯한 검은 동공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히 침식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그들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석상들을 푸켈맨이라 불렀지만 이제는 신경을 써서 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에겐 이제 아무런 공포나 외경의 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스름 속에서 어렴풋이 바라보이는 석상들에게서 경이의 눈길을 떼지 못하던 메리는 거의 연민의 정이라 할 만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후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벌써 몇백 미터나 올라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쪽에는 여울을 건너, 준비된 막사로 향하는 기사들의 긴 대열이 여전히 바라보였다. 왕과 그 경호병들만이 요새로 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왕의 부대는 절벽 가장자리에 이르러 암벽 사이에 난 길을 걸어올라 작은 경사면을 넘어 넓은 고지로 나왔다. 피리엔펠드라 불리는 이곳은 풀과 히드로 덮인 고지대로 아래쪽엔 거대한 산맥의 저지대를 깊이 흐르는 스노우본강이 흐르고 있었다. 남쪽에 스타콘산, 북쪽엔 이렌사가의 톱니 같은 연봉들이 보였으며 그 가운데로 기사들의 눈 앞에 다가서는 것은 거무칙칙한 소나무로 덮인 저주의 산 터모츠버그의 음산하고 가파른 검은 암벽이었다. 고지는 볼품없는 두 줄의 석조물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석조물들은 어스름 속에서 숲 쪽으로 계속 이어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석조물들을 따라가면 디모르버그산의 암흑의 딤홀트에 이르게 되며 그곳엔 위협적인 모습의 돌기둥들과 금지된 문이 어둠 속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잊혀진 고대인들의 걸작 던해로우였다. 그들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져 노래나 전설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건설했는지, 도시로였는지 비밀스런 사원으로였는지 아니면 왕들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는지 아무도알 수 없었다. 그들은 듀너데인들이 서안에 배로 도착해 곤도르를 건국하기 이전의 그 암흑시대에 공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져 버렸으며 다만 푸켈맨만이 남아길모퉁이에 서 있는 것이었다. 메리는 죽 이어진 석조물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풍우에 침식되었으며 검은색 띤 채 기울어진 것들도 있었고 아주 쓰러진 것들도 있었다. 또 금이 가거나 부서진 것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굻주린 이빨들처럼 보였다. 그는 도대체 이들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왕이 이들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는 돌길 양편으로 막사가 여럿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막사들은 숲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절벽 가장자리 쪽에 움츠린 듯 세워져 있었다. 피리엔펠드의 오른쪽 넓은 곳에 좀더 많이 세워져 있었으며 왼쪽에는 큰 천막을 중심으로 더 작은 막사들이 서 있었다. 진영으로부터 한 기사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 나왔으며 왕 일행도 그를 향해 길을 꺾어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메리는 그 기사가 석양에 빛나는 머리칼을 길게 땋아 늘인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전사처럼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칼까지차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외쳤다. "마크의 왕 만세! 이렇게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래, 아무 일 없었겠지, 요윈?" 데오든이 물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메리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느낌과 함께 이렇게 강인한 모습의 여인에게서는 잘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물론 갑자기 집을 떠나 이리로 피난해야 했던 사람들에겐 힘드는 길이었습니다. 전쟁이 푸른 초원으로부터 저희를 밀어낸 지 이미 오래되어서 불평하는 말들도 간혹 있었지만 뭐 특별히 안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이젠 보시다시피 잘 정돈이 되었습니다. 주군을 위해 숙소를 준비해 두었지요. 전 여기서 주군의 승전보와 또 돌아오실 날짜까지 모조리 듣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아라곤이 여기 왔었군. 아직 여기 계신가?" 요머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분은 떠나셨어요." 하고 말하며 요윈은 눈을 돌려 동쪽과 남쪽의 검은 산맥을 바라보았다. "어느 쪽으로 떠났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한밤중에 오셨다가 어제 아침해가 산 위로 오르기도 전에 떠나셨어요."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넌 슬퍼하고 있구나, 내 딸아. 무슨 일이 있었지? 말해 봐라. 그가 그 길에 대해 이야기를 했구나? 저 사자의 길 말이다." 그는 디모르버그를 향한 석조물의 어두운 열을 가리켰다. "예, 주군. 그분은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셨어요. 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가버리셨어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길은 갈라졌구나. 그는 사라졌다. 우린 그 없이 달려야 하고 그만큼 희망도 줄어들었다." 요머가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키 작은 히드와 고지의 풀밭을 지나 왕의 천막에 이르렀다. 거기서 메리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으며 자신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 침소 곁에 작은 숙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왕과 상의하기 위해 왔다갔다하는 가운데 혼자 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져 서쪽으로 반쯤 보이는 산맥 위에는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으나 동쪽은 어둡고 별도 없었다. 이제 그 석조물들의 대열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 디모르버그의 웅크리고 있는 듯한 거대한 어둠은 칠흑처럼 캄캄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메리는 혼자 중얼거렸다. "사자의 길? 그게 뭘 뜻하는 걸까? 이제 나만 남고 모조리 떠나 버렸구나. 모두어떤 운명을 향해 떠났어. 갠달프와 피핀은 동쪽의 전장으로, 샘과 프로도는 모르도르로, 그리고 스트라이더와 레골라스, 김리는 사자의 길로. 곧 내 차례도 오겠지. 도대체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의논들을 하고 있는 거지? 왕은 어떻게 하실 작정일까? 그분이 가시는 곳으로 나도 따라가야 하는데." 그는 이런 우울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막사 안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나 찾아 나섰다. 그러나 바로 그때 트럼펫소리가 울리며 왕의 시종 한 사람이 와 왕의 식탁에서 시중을 들라고 불렀다. 천막 안쪽에는 수놓은 발로 가려지고 가죽이 깔린 작은 공간이 있어 지금 그곳에 놓인 작은 탁자 주위에 데오든과 요머, 요윈 그리고 해로우데일의 수장 던헤르가 앉아 있었다. 메리는 왕에게 시중을 들기 위해 그의 의자 옆에 시립했지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노왕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얼굴을 돌려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게, 메리아독. 서 있을 필요 없어. 내가 이 땅을 다스리는 한 그대는 항상 내 옆에 앉아 이야기로 내 마음을 밝게 해주어야 하네." 왕의 왼편에 호비트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지만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침묵 속에서 식사를 계속했다. 마침내 메리는 용기를 내 가슴 속에서 괴롭히는 문제를 물어 보았다. "주군,전 두 번씩이나 사자의 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건 어떤 길이지요? 그리고 스트라이더 - 이건 아라곤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 는 어디로 간 겁니까?" 데오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요머가 말했다. "우리도 잘 모른다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지. 사자의 길이라면 자네도 이미 그길의 첫걸음을 걸어 본 거야. 이건 불길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 우리가 아까 걸어 올라온 길이 저 너머 딤홀트의 그 문으로 통하는 길이네. 그러나 그 너머에 무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러자 데오든이 말했다. "그래, 아무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은 별로 들을 수 없는 옛 전설 가운데 그곳에 대한 것이 좀 있었다네. 만일 우리 욜의 가문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이어져온 이 오래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디모르버그 아래의 문은 어떤 잊혀진 종착지로 통하는 산 아래의 비밀통로로 이어진다는 거야. 그러나 브레고왕의 아들 발도르께서 그 문으로 들어가 그 후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아무도 감히 그곳에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 새로 지어진 메두셀드의 완공을 신에게 감사하는 브레고왕의 연회에서 발도르께서는 술잔을 비우고 경솔하게 맹세했기에 그분은 결국자신에게 보장된 옥좌에 오를 수 없게 된 거야. 사람들은 암흑의 시대로부터 사자(사자)들이 그 길을 지키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비밀 장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들 말하지. 그러나 가끔 그들이 그림자처럼 문을 빠져나와 돌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네. 그러면 해로우데일 사람들은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까지 꼭 닫고는 무서움에 떤다는 거야. 그렇지만 그들이 자주 나오는 건 아니고 꼭 아주 불안한 시기에 나타나 죽음을 몰고 온다고 하지." 요머도 낮은 소리로 말했다. "또 해로우데일에 이런 말도 있네. 얼마전 달도 없는 밤에 아주 큰 무리가 정렬해서 지나갔다는 거야.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마치 약속한 회합에라도 가는 것처럼 돌길을 따라 올라가 산으로 사라졌다고 하네." "그럼 왜 아라곤이 그 길로 간 거죠? 그 이유를 아세요?"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친구인 자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이 땅의 살아있는 사람으로 그의 목적을 알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지." 하고 요머가 말했다. 그러자 요윈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분은 처음 궁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변했어요. 더 엄숙하고 더 나이 들어 보였지요. 그분은 마치 사자에게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처럼 홀린 듯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데오든왕이 말했다. "아마 그는 부름을 받았을 거야. 마음 속으로는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만 그는 위엄있는 왕다운 인물이지. 이 점을 위안으로 생각해라, 내 딸아. 이 손님을 위해서라도 너의 슬픔을 위안할 만한 말이 필요한 것 같구나. 옛날 우리 욜의 후손들이 북쪽에서 나와 위험한 시기에 피난처가 될 만한 험준한 곳을 찾기 위해 스노우본강에 이르렀을 때 브레고와 그의 아들 발도르께서 요새의 계단을 올라 그 문 앞까지 갔다더란다. 문지방에는 도대체 나이를 짐작할 수없는 키가 크고 위엄있는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마치 오래된 석상처럼 보였다고 하지. 사실 그분들은 그를 지나 문을 넘으려 할 때까지 그가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아서 진짜 석상인 줄 알았던 거야. 그런데 그때 그에게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땅 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고 또 놀랍게도 서역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던 거지.'이 길은 닫혀 있다.' 그래서 그들은 멈춰서서 그를 보고는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러나 그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어. '이 길은 닫혀 있다.'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 '이 길은 사자들이 만들었고 시간이 될 때까지 사자들이 지킨다. 이 길은 닫혀 있다.' 그래서 발도르가 말했지. '그 시간이 언젭니까?'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어. 왜냐하면 바로 그때 노인은 죽어 고개를 떨구었거든. 그 밖에 그 산의 거주자들에 대한 소식에 대해선 우린 전혀 모르고 있지. 그러나 그때 말한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면 아라곤은 통과할 수 있겠지." 요머가 물었다. "대담하게 그 문에 부딪혀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시간이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겠습까? 그렇지만 저 같으면 다른 아무 피난처도 없고 또 저 혼자 모르도르의 전군을 앞에 두고 있다 해도 그 길로는 가지 않을 겁니다. 아, 이렇게 필요한 때에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이 그런 홀림에 빠져 버리다니! 지금은 굳이 땅 밑으로 들어가 찾지 않아도 사악한 것들이 도처에 수없이 많지 않은가? 전쟁이 박두했는데." 그때 밖에서 데오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와 경비병이 제지하는 소리가 들려와 요머는 말을 멈췄다. 곧 경비대장이 발을 젖히고 말했다. "곤도르의 전령이라고 하는 기사가 여기 와 있습니다. 그는 즉시 주군을 뵙고자 합니다." "들여 보내라!" 데오든이 말했다. 키가 큰 사람이 들어왔는데 하마터면 메리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그는 보로미르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곧 그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보로미르의 동족인지 크고 회색눈을 가진 당당한 사나이로 보로미르와 닮아 보였지만 사실은 낯선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좋은 금속제 갑옷 위에 검푸른 망또를 걸친 기사로 그의 투구 앞면에는 작은 은색 별이 달려 있었다. 그의 손엔 검은 깃과 강철로 만든 미늘촉이 달린 화살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화살촉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데오든에게 그 화살을 바쳤다. "곤도르의 우방 로한의 영주 만세! 저는 이 전쟁의 표식을 가져온 섭정 데네도르의 전령 히르곤입니다. 곤도르는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로한은 우릴 도와 주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곤도르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선 전하의 최대한의 신속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데네도르공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붉은 화살!" 데오든은 마치 오래 기다린 동시에 막상 두려운 느낌도 없지 않은 부름을 받은 사람처럼 화살을 받으면서 말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내 재위중엔 마크에 붉은 화살이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지. 정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단 말인가? 그런데 데네도르공께선 내 최대한의 신속한 도움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가?" "아마 전하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래지 않아 미나스 티리스는 포위될 것이고 만약 전하께 포위를 깰 만한 힘이 있으시지 않다면 그 전에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데네도르공께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도 우린 기마대로 탁 트인 곳에서 싸우는 데 더 익숙하다는 사실과 또 우린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라 소집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텐데. 하지만 미나스 티리스의 영주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소식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히르곤? 왜냐하면 그대가 보다시피 우린 이미 전쟁을 치렀고 준비가 안된 상태도 아니니까. 회색의 갠달프가 우리와 함께 있었고 지금도 우린 동쪽의 전쟁에 대비해 소집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데네도르공께서 이 일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신지 또는 추측하고 계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상황은 매우 급박합니다. 우리 주공께선 전하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과 오랜 맹약을 기억시켜 드리며 사정하시는 것이고 전하께서 행하실 수 있는 미덕을 원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동부의 여러 왕들이 모르도르와 연합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북쪽에서부터 다골라드 평원까지는 작은 접전과 전쟁의 소문이 무성합니다. 남쪽에서는 하라드인들이 움직이고 있어 우리의 전 해안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쪽에서는 조력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제발 서둘러 주십시오.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는 곳은 바로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이며 만일 파도가 거기서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 물결은 로한의 아름다운 평원까지도 휩쓸어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 산속의 요새도 더 이상 피난처가 될 순 없을 것입니다." 데오든이 이에 대답했다. "정말 어두운 소식이로군. 그렇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건 아니지. 그러나 데네도르공께 이렇게 전하게. 로한은 자신의 위기라고 느끼지 않더라도 그를 도우러 갈 것이라고. 그러나 우린 배신자 사루만과의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또 지금상황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북부와 동부의 경계를 소홀히 할 수도 없다네. 또한 암흑의 군주가 보유하고 있는 힘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아마 우린 미나스 티리스앞에서 견제를 당할 것이고 그는 그 여력으로도 대하를 건너 왕의 성문을 칠 수 있을 것일세. 그렇지만 이젠 이런 소심한 신중론은 그만 두도륵 하세. 우리는 갈 걸세. 내일아침 소집이 있네. 군기가 정비되는 대로 우린 떠날 걸세. 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한 만 명의 창병을 평원으로 보낼 예정이네. 그렇지만 내 근거지를 비워둘 순 없으니 그보다 조금 줄어들지도 모르지. 어쨌든 적어도 육천의 군사는 확실하게 내 뒤를 따를 걸세. 그러니 데네도르공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마크의 왕이 몸소 곤도르로 간다고 전하게. 그러나 길은 멀고 또 사람과 짐승들은 도착해서도 싸울 힘이 남아 있어야만 하니 적어도 내일부터 일 주일 후에 그대들은 북쪽에서 욜의 아들들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야." "일 주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꼭 그 정도가 필요하니까 그런 것이겠습니다만 만일 기대치 않았던 원병이 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 왕께서 일 주일 후에 도착하신다면 그땐 아마 폐허가 된 성벽밖엔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왕께선 아마 백색탑에서 벌어질 오르크와 남부인들의 잔치 정도는 방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기껏 그 정도라도 우린 하겠네. 그러나 나 자신이 지금 전쟁과 긴 여행으로부터 막 돌아왔고 지금은 좀 쉬어야겠네. 오늘밤은 여기서 쉬게. 그럼 로한의 소집을 볼 수 있을 게고 그 광경에 보다 기쁜 마음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빨리 달려갈 수 있을 게야. 회의는 아침에 하는 게 제일 좋지. 밤에는 생각이 이리저리 바뀌기 쉬운 법이니까." 그 말과 함께 왕은 일어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일어섰다. "자, 이제 각자 쉬러들 가서 숙면을 취해 두게. 그리고 자네, 메리아독, 오늘은 더 이상 자넬 부르지 않을 걸세. 그렇지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 부름에 준비하고 있어야 하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사자의 길로 함께 가자고 하시더라도.""그 불길한 말은 하지 말게. 그 이름보다 더 불길한 길도 있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아직 자네에게 어떤 길로든지 나와 함께 가지고 명령한 일이 없네. 잘 자게!" "난 다 돌아온 다음에야 다시 불려지게끔, 뒤에 혼자 남아 있진 않을 거야! 난 남지 않을 거야, 결코 남지 않아." 이 말을 계속 혼자 중얼거리다가 결국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일어나게, 일어나, 홀비트라씨." 그는 소리쳤다. 마침내 메리는 깊은 꿈에서 빠져나와 깜짝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그가 보기인 아직 깜깜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왕께서 자넬 부르시네.""그렇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 "오늘은 해가 뜨지 않을 거야, 홀비트라씨. 이렇게 잔뜩 구름이 끼어 있으니, 다신해가 안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렇지만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시간도 정지한 건 아니야. 어서 서두르게." 황급히 옷을 주워 입으며 메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다. 하늘은 갈색으로 보였으며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둡고 침침하고 그림자가 없었으며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서쪽 저 멀리까지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거대한 어둠의 손길 틈으로 조금 새어나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구름조차도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무거운 어둠의 지붕이 걸린 듯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게 아니라 더 약해지고 있었다. 메리는 많은 사람들이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낮게 속삭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어둡고 슬퍼 보였으며 어떤 사람은 떨고 있는 듯했다. 메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왕에게로 갔다. 곤도르의 기사 히르곤이 왕 앞에 있었으며 그 옆에는 그와 비슷하게 생기고 같은 옷을 입었으나 키가 좀 작고 우람한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메리가 들어설 때 그는 왕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모르도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전하. 어제 석양무렵부터 시작됐습니다. 제가 전하의 영토 동부 산악지대로부터 검은 기운이 일어나 하늘을 덮는 걸 본 이후밤새 말을 달려오는 동안 이 어둠은 별을 잠식하며 계속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젠 이 거대한 구름이 이곳부터 어둠의 산맥까지 전 지역을 덮어 버렸고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전쟁이 이미 시작된 겁니다." 잠시 왕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결국 우린 마지막 순간까지 오게 됐군.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갈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전쟁에 말이야, 그렇지만 이젠 적어도 숨을 필요는 없게 됐지. 우린 전 속력으로 가장 빠른 길로 당당히 진군할 수 있게 된 거야. 이제 당장 소집이 시작될 것이고 조금도 지체하진 않을 걸세. 그런데 미나스 티리스엔 군비가 충분한가? 우린 당장 시급히 떠나 서둘러 가려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의 식량과 물 외엔 더 이상의 짐 없이 가야만 하거든." "우린 오랫동안 충분한 군량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최소한의 짐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 주십시오." 히르곤이 말했다. "그렇다면 전령관을 부르게, 요머. 기사들을 정렬시키도록 하라." 데오든이 말했다. 요머가 밖으로 나가자 즉시 요새의 트럼펫이 울려퍼졌으며 아래에서는 거기에 답하는 많은 울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젯밤 메리에게 들렸던 것처럼 맑고 용감하게 들리지 않았다. 탁한 공기 속에서 나팔은 무디고 거칠게 울려 불길한소리같이 들렸다. 왕은 메리를 향해 말했다. "난 전장으로 가네, 메리아독군. 이제 곧 떠날 거야. 난 그대의 서약을 풀어 주겠네. 물론 우정은 그대로 지속되겠지만. 그댄 여기 머물러 있게. 그리고 원한다면 내대신 이 땅을 통치할 요윈공주를 섬겨도 좋네." "그렇지만, 주군." 메리는 말을 더듬었다. "전 주군께 제 칼을 바쳤습니다. 전 여기서 이렇게 주군과 이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데오든왕이시여! 그리고 제 친구들 모두 그 전장으로 갔는데 저만 뒤에 남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린 크고 빠른 말을 타고 갈 거야. 그대의 용기는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그런 말을 탈 순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절 말잔등에 묶거나 아니면 등자에 매달거나 아무렇게나 하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메리는 간청했다. "만약 제가 말을 탈 수 없다면 비록 먼 길이겠지만 전 뛰어서라도, 뛰다가 발이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몇 주일 늦게 도착한다 하더라도 꼭 가겠습니다." 데오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기보다는 나와 함께 스노우메인을 타고 가는 게 낫겠네. 적어도 에도라스까지는 같이 가서 메두셀드를 보세. 나는 그 길로 가야 하니까. 거기까진 스티바가 그댈 태우고 갈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평원에 이르를 때까진 빠른 질주는 시작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러자 요윈이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리 와요, 메리아독. 내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옷을 보여 주겠어요."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건 아라곤이 나에게 준비하라고 부탁한 거예요. 당신이 전장에 가려면 무장을 해야 하니까요. 난 그러겠다고 말했지요. 내 마음 속에선 이상하게도 당신에게는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그것이 꼭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막사 사이를 지나며 요윈이 말했다. 이제 그녀는 메리를 왕의 경비대 막사 가운데 있는 한 임시 숙영소로 데려갔다. 거기에 있던 병기 담당자가 그녀에게 작은 투구와 둥근 방패와 기타 장구를 가져왔다."우리에겐 당신한테 맞을 만한 갑옷이 없어요. 그렇다고 지금 새로 만들 시간도 없지요. 그 대신 여기 아주 질긴 가죽상의가 있어요. 또 허리띠와 단도도 있고요. 칼은 갖고 있지요?" 메리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가 준 방패는 김리에게 준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그 앞면에는 흰 말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들을 다 가져가세요. 그리고 무훈과 함께 영원히 간직하세요. 자, 이제 안녕, 메리아독씨. 그렇지만 당신과 난 다시 만날 거예요." 마크의 왕이 그의 기사들을 동쪽 길로 인솔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어둠은 한창 기세좋게 퍼져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이 무겁고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강건한 사람들이었고 또 왕에 대한 충성이 깊은 국민들이어서 에도라스에서 피난온 부인네와 어린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거주하는 막사를 지날 때에도 울음소리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운명이 그들에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들은 조용히 그것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서 왕은 이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의 백마에 올라탔다. 비록 그의 높은 투구 아래로 보이는 머리칼은 눈처럼 하얬지만 그는 당당하고 크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경이의 눈으로 올려다보았으며 그에게 외경과 흠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 옆 넓은 들판에는 거의 오천오백쯤 되는 기사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정렬해 있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벼운 짐을 진 여분의 말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하나의 트럼펫이 울렸다. 왕이 손을 들자 마크의 대군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용맹한 기사들인 왕의 가진 열두 명이 앞장을 섰다. 그 뒤 오른쪽에 요머를 대동한 왕이 가고 있었다. 그는 요새 위에서 요윈과 작별했는데 그건 슬픈 이별이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앞으로 가야 할 길로 마음을 쏟았다. 그 뒤로는 곤도르의 전령들과 나란히 스티바에 탄 메리가 가고 있었고 그들 뒤에는 역시 왕의 가신 열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굳고 표정없는 얼굴로 서서 대기하는 병사들의 대열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그 긴 대열의 거의 끝에 이르렀을 때 대열 속에서 날카롭게 호비트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메리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작고 여윈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맑게 빛나는 회색눈을 보자 그는 몸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그건 마치 다른 희망을 전혀 갖지 않고 오직 죽음을 좇아가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더해로우와 업본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 바위에 부딪히며 흐르는 스노우본강 옆으로 나 있는 회색길을 따라 내려왔다. 마을에서는 어두운 문가에서 슬픈 얼굴의 여인네들이 그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후세에 오래도록 노래되어진 이 동쪽으로의 위대한 장정은 나팔소리도 하프소리도 합창소리도 없이 시작되었다. 침침한 아침 어두운 던해로우에서 가신과 대장들을 동반한 덴겔의 아들께서 에도라스로 떠난다. 안개에 싸인 마크 통치자의 옛 궁으로, 어둠으로 덮인 황금빛 들보의. 작별을 고하신다, 그의 백성들과 궁전과 보좌와 신성한 곳, 빛이 사라지기 전 연회를 즐기던. 왕은 전진하고 공포가 뒤따른다. 운명은 앞에 놓여 있고 충직한 신하가 따른다, 서약을 하고 완수해 낼. 데오든께서 가신다, 닷새 낮과 밤을. 욜의 후손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폴데와 펜마르크와 피리엔숲을 지나 육천의 창기병이 곤도르로 민돌루인 아래의 강성한 문드버그로 남쪽 왕국의 바다왕의 도시, 적에게 포위되고 불로 둘러싸인. 운명이 그들을 핍박하고 어둠이 삼켜 버렸다. 말과 기사들, 멀리 말발굽소리가 정적으로 사라지고 노래만이 말해 준다. 왕이 에도라스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상으로는 정오무렵이었지만 어둠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왕은 아주 잠깐 머물렀고 나중에야 집결지로 온 약 육십 명 정도의 기사들이 그의 부대에 합류해 보강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다시 떠날 차비를 차리고 나서 그의 시종에게 친절하게 작별을 고하려 했다. 메리는 남기고 떠나지 말 것을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그러나 데오든은 말했다. "전에 말한 대로 이번 여행은 스티바 같은 동물로는 안 되는 걸세. 그리고 우리가 곤도르의 평원에서 가지려 하는 이번 전쟁에서 비록 그대가 검의 시종이자 몸집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가졌다고 하지만,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메리아독군?" "그건 아무도 미리 알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군, 절 곁에 있지 못하게 하실 거라면 무엇 때문에 저를 검의 시종으로 받아들이셨습니까? 전 후세에까지 항상 뒤에 남아 있기만 하던 녀석으로 전해지길 원치 않습니다." "그댈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자넬 받아들인 걸세. 그리고 이럴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는 거야. 우리 기사들 중엔 아무도 자넬 짐으로 떠맡으려 하는 사람이 없을거야. 만약 전쟁이 내 성문 앞에서 벌어진다면 그댄 후세의 음유시인들에 의해 기억될 만한 무용을 보이겠지. 그렇지만 데네도르가 다스리는 문드버그는 여기에서 삼백육 마일이나 떨어져 있단 말일세. 더 이상 긴말하지 않겠네." 메리는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어서 기사들의 대열을 바라보았다. 벌써 부대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안장을 살피기도 하고 말을 돌보기도 했다. 점점 낮아지는 하늘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한 기사가 다가와서 호비트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메리는 그를 올려다보고 아침에 봤던 그 젊은 기사라는 걸 알았다. "그댄 마크의 군주께서 가시는 곳으로 가길 원하고 있지. 난 그대의 눈에서 그걸 읽을 수 있어." "그래요.""그렇다면 나와 같이 가세. 난 저 들판 멀리까지 나갈 때까지 그대를 내 망또 아래 감추고 내 앞에 태우고 갈 수 있어. 그리고 어둠은 계속 깊어가니까 그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어서 가세."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성함은 모르지만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모르는가?"그 기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날 던헬름이라 부르게." 그래서 왕이 출발할 때 메리아독은 던헬름 앞에 앉아 있었고 그들을 태운 큰 회색 말 윈드폴라는 크게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던헬름은 유연하고 잘 짜인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다른 기사들에 비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으로 그들은 달려갔다. 에도라스로부터 동쪽 삼십육 마일 되는 지점인 스노우본강이 엔트워시로 흘러드는 버드나무숲에서 그들은 그날밤 야영을 했다. 그리고 계속 폴데를 지나서 펜마르크를 지났다. 그 오른쪽으로는 곤도르 국경 옆의 할리피리엔의 어두운 그늘 아래 산기슭을 따라 울창하게 우거진 참나무숲이 보였으며, 왼쪽으로는 엔트워시강 어귀의 늪지대 위에 안개가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전진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전쟁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아주급히 달려와 로한의 황량한 고지대로 오르크의 대부대가 진군해 와 동쪽 국경을 침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요머가 외쳤다. "달려라! 달려! 이제 돌아서기엔 너무 늦었다. 엔트워시의 소택지는 우리 측면을방어해 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건 속력이다. 달려라!" 이렇게 데오든왕은 자신의 영토에서 떠나, 지나온 구부러진 길들이 차차 시야에서 계속 사라졌으며 칼렌하드, 민 리몬, 에레라스, 나르돌 등의 봉화대들도 하나씩 뒤로 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봉화들은 타오르지 않고 있었다. 들판 전체가 어렴풋하고 조용했다. 그들 앞에선 어둠이 계속 깊어 갔으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희망이 점점 엷어져 갔다. 제4장 곤도르 공성 피핀은 갠달프에 의해 깨워졌다. 방에는 창문을 통해 희미한 미광만이 비쳐들고 있었기 때문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마치 뇌우가 밀려오기 전처럼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지금 몇시죠?" 피핀이 하품하며 물었다. "제2시가 지났지.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야. 자넨 새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영주에게 소환됐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가 아침식사를 준비해 놨을까요?" "아냐.그건 내가 준비했지. 오늘 정오까진 더이상의 식사는 없어. 식량은 이제 배급제가 되었거든." 피핀은 아주 유감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위해 차려진 작은 빵과 터무니없이 조그만(그가 보기에) 버터 한 조각 그리고 묽은 우유 한 잔을 바라보았다. "절 왜 이리 데려왔죠?" 피핀은 말했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자네가 더이상 장난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그리고 여기 온 것이 마음에 안 든다지만 다 자네가 자초한 것이라는 걸 잊어선 안 돼." 피핀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그는 갠달프와 함께 다시 한번 차가운 회랑을 지나 탑의 홀로 내려갔다. 거기엔 데네도르가 마치 끈기있는 늙은 거미처럼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피핀이 보기 엔 마치 어제 본 이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갠달프에겐 자리를 가리켜 앉으라고 신호했지만 피핀은 잠시 주의를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곧 노인은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 페레그린군. 어젠 유용하게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하는데, 어땠나? 이 도시의 식탁이 그대 기대에 못 미쳤을 거란 염려는 들지만." 피핀은 자신의 말과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도 이 군주가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슷하게 추측하고 있을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대는 어떤 임무를 맡길 원하는가?" "전 주군께서 임무를 지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어떤 자리에 적합한가를 안다면 그렇게 하겠지. 그렇지만 그대를 내 곁에 두면 곧 알게 되겠지. 내 방 시종이 야전 수비대로 이동시켜 달라고 상신을 해왔으니 그대가 잠시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게. 그대는 내 시중을 들고 전갈을 가져오고 또 만일 전쟁이나 회의로 바쁘지 않을 때면 내게 이야기나 들려 주면 되네. 노래부를 줄 아나?" "예, 우리 호비트들 중에서라면 꽤 잘하는 편이지요. 하지만 저흰 이런 불안한 때나 이런 큰 홀에 어울릴 만한 노래는 모릅니다. 바람이나 비보다 더 거친 것들에 대한 노래는 거의 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 노래들도 대개 웃기는 것 아니면 먹는 것에 관한 것들뿐입니다." "왜 그런 노래들은 내 홀이나 이런 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항상 어둠의 그림자 아래서 지켜온 우리들이 그 어두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던 땅의 메아리를 들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비록 감사의 말은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철주야 해온 노력이 보람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자위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피핀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는 미나스 티리스의 영주 앞에서 샤이어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 못했다. 하물며 그가 제일 잘 아는 웃기는 노래는 더욱 그러했다. 그 노래들은 이런 상황에는 너무 조야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당장 노래해야 하는 시련에 봉착하진 않았다. 데네도르는 갠달프를 향해 로한인들과 그들의 정책과 또 왕의 조카인 요머의 위치에 대해 물었다. 피핀은 데네도르가 외국으로 나가본 지가 굉장히 오래 되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멀리 떨어진 곳의 사건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 이윽고 데네도르는 피핀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궁성 병기고로 가서 탑의 제복과 장신구를 받게. 준비가 돼 있을 거야. 어제 명령했으니까. 무장이 갖춰지면 돌아오게." 그는 지시대로 했다. 피핀은 곧 흑색과 은색의 이상스럽게 생긴 옷차림으로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흑옥 같은 검은 강철로 만든 작은 사슬갑옷을 입었으며, 양 옆에 검은 날개 장식이 달리고 중앙에 은색 별이 빛나는 높은 투구를 썼다. 갑옷 위엔 가슴 부분 위에 성수(聖樹)의 표식이 수놓아진 검은색 짧은 반코트를 걸쳤다. 그의 낡은 옷은 개켜서 치웠지만 로리엔의 회색 망또만은 근무시간중이 아니라면 입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제 그는 정말 사람들이 부르듯이 하플링의 왕자 에르닐 이 페리아나스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별로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엔 다시 그늘이 덮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어둡고 침침했다. 해뜨지 않은 새벽부터 저녁때가 될 때까지 어둠은 점점 깊어만 갔고 도시사람들 모두가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위 하늘에는 암흑의 땅으로부터 전쟁의 바람을 실은 거대한 구름이 빛을 삼키며 점점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그 아래 땅 위에는 바람도 없이 정적만 감돌고 있어 마치 안두인대하의 전 유역이 끔찍한 폭풍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11시 무렵 마침내 근무가 끝나 얼마간의 휴식시간을 얻은 피핀은 밖으로 나와 무거운 마음도 달래고 시중드는 일에 힘도 돋울 겸 먹고 마실 것을 찾으러 갔다. 그는 식당에서 이제 막 펠레노르평원 저편의 둑길 위에 있는 경비탑에 전령으로 갔다가 돌아온 베레곤드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같이 성벽으로 걸어나갔다. 왜냐하면 피핀은 우뚝 솟은 궁성 안에서조차 마치 숨이 막힐 듯 갇혀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제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눴던 동쪽을 향한 총안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 석양무렵이었지만 거대한 어둠의 장막은 거의 서쪽 끝까지 확장되어, 바다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은 아주 잠깐 마지막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프로도가 교차로에서 넘어져 있는 왕의 머리를 만지며 본 것도 바로 그 석양이었다. 그러나 민돌루인 그늘 아래 있는 펠레노르평원은 그 빛마저 비치지 않아 회색으로 음울하게 보였다. 피핀은 오면서 겪은 수많은 위험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방랑자같이 앉아 있었던, 지금은 거의 잊혀질 듯 까마득하게 생각되는 어제가 이제는 마치 몇 년이나 이전의 일같이 느껴졌다. 지금의 그는 경비대의 당당하고 좀 칙칙한 제복을 입은,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이 도시의 작은 한 병사였다. 지금이 이런 상황이 아닌 다른 시절이고 다른 장소라면 아마 피핀도 이 새 복장을 즐거워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엄한 주인에게 이 위험한 시기에 아주 열성적으로 시중을 드는 하인일 뿐이었다. 갑옷은 무거웠으며 투구는 머리를 짓눌렀다. 망또는 옆에 올려 놓았다. 그는 저 아래 어두운 평원에서 시선을 거두며 하품을 하고나서 한숨을 쉬었다. "자넨 오늘 피곤한가 보지?" 베레곤드가 물었다. "그래요, 아주. 아무 일 없이 기다리는 데 진력이 났어. 난 영주께선 갠달프와 왕자와 그 밖의 높은 사람들하고 논의를 하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 동안 문가에 서서 발꿈치로 문을 톡톡거리고 있었어요. 더구나 난 다른 사람들이 먹는 동안 배고픈 채로 그 시중을 드는 데는 전혀 익숙하질 않거든요. 베레곤드, 그건 호비트한텐 너무 지독한 시험이에요. 아마 당신은 내가 그걸 훨씬 더 영광스럽게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영광이 무슨 소용 있는 거예요? 또 이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도 무슨 소용이 있는 거죠? 도대체 이게 무슨 징조야? 공기가 이렇게 탁하고 어두우니 말이에요! 당신은 동쪽에서 바람이 불 때면 이런 어둠을 자주 경험해 봤나요?" "아니. 이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야. 이건 그의 사악한 한 수단이지. 그가 사람들의 생각과 논의를 무겁고 어렵게 만들려고 불의 산으로부터 뿜어나오는 독의 열기를 보내는 거야. 사실 그의 의도대로 되고 있지. 나는 파라미르공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어. 그분은 결코 당황해 질리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가 암흑으로부터 빠져나와 강을 건너 올 수 있으실지 어떻게 알겠어." "그래요. 갠달프도 역시 기다리고 있어요. 내 생각엔 여기서 파라미르를 볼 수 없어서 실망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자신은 지금 또 어딜 간 거지? 그는 점심 식사 전에 영주의 회의석상을 떠났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는 안 좋은 소식을 예감한 것 같아요." 갑자기 그들은 말하다 말고 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은 듯 얼어붙어 버렸다. 피핀은 손으로 귀를 틀어 막은 채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흉벽 너머를 내다보며 파라미르 얘기를 하고 있던 베레곤드는 몸이 굳은 채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핀은 이 전율할 만한 소리를 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소리는 그가 사이어의 마리쉬에서 오래전에 들었던 바로 그것으로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증오에 차 있어 듣는 이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고들며 절망케 했다. 얼마후 베레곤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왔어. 용길 내서 봐! 저 아래 그 끔찍한 것들이 있어." 피핀은 주저하다가 다시 자리에 올라가 성벽 아래를 보았다. 펠레노르평원은 아래쪽에 침침하게 펼쳐져 있어 저 멀리로 대하가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때아닌 밤의 그림자처럼 빠르게 강을 선회해 오는 독수리보다 더 크고 죽음보다 더 끔찍한 썩은 새매처럼 생긴 다섯 마리의 새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흉벽 사정거리 안까지 내리덮치듯 날아와 성벽 위를 선회했다. 피핀은 낮게 속삭였다. "암흑의 기사들! 하늘을 나는 암흑의 기사들! 그런데 저것 좀 봐요, 베레곤드. 그들은 뭔갈 쫓고 있지요?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저기 한곳으로 내리덮치곤 하잖아요! 저 들판에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여요? 어둡게 보이는 작은 것들 말이야. 그래요, 말탄 사람들이야. 넷인가 다섯인가? 아! 더이상 차마 볼 수가 없어. 갠달프! 갠달프, 우릴 구해 줘요!" 또 다른 날카로운 소리가 들렀다가 사라졌다. 그는 마치 사냥당한 짐승처럼 헐떡이면서 벽에서 물러났다. 그 전율할 만한 소리를 뚫고 약하고 희미하게 저 아래로부터 끝이 높게 올라가는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베레곤드가 외쳤다. "파라미르! 파라미르공이시다! 이건 그의 소리야! 용감하신 분! 그렇지만 저 끔찍한 더러운 새매들이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말고 다른 진짜 무기를 가졌다면 저분께서 어떻게 성문까지 오실 수가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봐! 그분 일행은 계속 달리고 있어. 그들은 성문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아, 말들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어. 봐! 사람들이 떨어졌어. 그래도 그들은 뛰고 있어. 아니, 한 사람은 그대로 타고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있잖아. 틀림없이 저분이 우리 대장이야. 그는 사람과 동물을 다 통제할 수 있거든. 아! 저 더러운 것들 중 하나가 그에게 덮치고 있어. 도와 줘! 도와 줘! 아무도 도우러 나가지 않는 거야? 파라미르!" 그 소리와 함께 베레곤드는 뛰어나가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베레곤드가 자신이 사랑하는 대장 생각밖에 여념이 없는 동안 피핀은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이 부끄러워 일어나서 밖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엔 북쪽으로부터 어두운 평원에 떨어지는 작은 별과 같은 은백색의 섬광이 비쳐 왔다. 그 빛은 성문으로 달려오는 네 사람 방향으로 화살처럼 날아와 점점 크게 비쳤다. 그 투명한 빛이 사방에 섬광을 뿌리자 어둠조차 그 앞에선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 빛이 다가왔을 때 피핀의 귀엔 마치 자기 앞의 벽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커다란 외침이 들려온 것 같았다. 피핀은 외쳤다. "갠달프! 갠달프! 가장 어두운 순간에 항상 나타나 주시는군요! 어서 달려요! 어서, 백색의 기사! 갠달프, 갠달프!" 그는 마치 큰 경주에서 전혀 격려가 필요없는 기수에게 소리치는 구경꾼처럼 크게 외쳐 댔다. 그러나 내리덮치고 있던 검은 그림자도 이제 이 새로 온 방해물을 의식했다. 한 마리가 그를 향해 선회하며 다가가자 그는 한 손을 쳐들었으며 거기에선 한 줄기 흰 광선이 쏟아져 나와 위쪽으로 쏘아졌다. 그 나즈굴은 길게 울부짖으며 궤도를 바꿨고 다른 네 마리도 대오가 흔들렸다. 그들은 빠르게 나선형으로 선회하며 동쪽으로 날아가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그러자 펠레노르평원도 잠시 덜 어두워진 것 같았다. 피핀은 말을 탄 사람과 백색의 기사가 만나,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제 성으로부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곧 그들은 다른 성벽 아래로 들어가 피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이 성문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곧바로 탑의 섭정에게 갈 것이라 짐작한 피핀은 급히 궁성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높은 성벽 위에서 그 질주와 구출을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 섞여 들었다. 곧 아래 성벽에서 올라오는 길 위로 아우성소리가 들려왔으며 파라미르와 미스랜더의 이름을 외치며 갈채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핀은 횃불들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말을 몰고 오는 두 기수를 볼 수 있었다. 한 기사는 이제 빛을 다 써버렀거나 아니면 감추고 있는 듯이 어스름 속에서 더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맑은 흰색 옷차림이었고 다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두워 보였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마부에게 섀도우폭스와 다른 말을 넘기고 문의 보초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갠달프는 이제 다시 회색 망또를 걸치고 아직 눈에서는 불을 뿜으며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갔고, 초록 일색의 옷차림을 한 다른 한 사람은 피곤하거나 부상당한 듯 약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들이 문루 아래로 등불빛을 받고 통과할 때 피핀은 앞으로 밀고 나가 그들의 얼굴을 봤다. 파라미르의 창백한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숨을 멈췄다. 그건 지독한 공포와 고뇌를 겪었으나 이젠 그것을 이겨 내고 다시 평정을 찾은 그런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가 당당하고도 우울하게 잠시 경비병과 서서 얘기를 할 때 피핀은 그를 보며 그가 그의 형 보로미르, 자신이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으며 그 위대해 보이면서도 또한 친절한 태도에 감복한 인물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파라미르를 본 순간 그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경모의 감정을 느꼈다. 그건 마치 가끔 아라곤이 보여 주는 그런 고귀한 혈통의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 아마 아라곤보다 더 고귀하진 않겠지만 더 가깝고 이해하기 쉬운 그런 분위기였다. 후세에 인간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높은 혈족의 지혜와 우수를 간직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제야 그는 베레곤드가 왜 그렇게 애정어린 어조로 파라미르의 이름을 말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어둠의 날개들 속으로라도 기꺼이 사람들이 뒤따를, 또한 피핀 자신도 따를 만한 대장이었다. "파라미르!"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게 외쳤다. "파라미르!" 그러자 도시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귀에 선 이상한 소리를 들은 파라미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곤 크게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 온 거지, 하플링? 더구나 탑의 제복을 입고 도대체 어떻게?" 그러자 갠달프가 그 옆으로 와 말했다. "그는 하플링의 땅에서부터 나와 함께 온 거요. 나와 함께 말이오. 그렇지만 여기서 더이상 지체하지 맙시다. 여러 가지 말할 것과 할 일이 많고 더구나 그대는 지쳤으니까. 그는 우리와 함께 갈 거요. 사실 그래야만 하지. 왜냐하면 그가 나보다 쉽게 자신의 새 직책을 잊지 않았다면 이 시간엔 다시 그의 주인한테 시중들러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자, 피핀, 우릴 따라오게." 마침내 그들은 영주의 사실에 도착했다. 목탄화로 주변에 편안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곧 술이 나왔다. 피핀은 거의 의식되지 않은 채 데네도르의 의자 뒤에서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나올 얘기가 아주 궁금했기에 이번에는 지루한 줄을 몰랐다. 파라미르는 흰 빵과 술을 마시고 그의 아버지의 왼쪽 낮은 의자에 앉았다. 그 반대편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로 조각된 의자 위에 갠달프가 앉았다. 처음에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파라미르는 열흘 전에 자신이 지니고 떠났던 임무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이딜리엔에서의 소식과 함께 적과 그 동맹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하라드인들과 그들의 거수(巨獸)를 물리친 길에서의 싸움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이런 얘기들은 지휘관들이 영주에게 보고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으로 이젠 그들의 무용의 성가를 높이는 데도 별 도움이 안 되는 사소하고도 별 소용 없는 국지적인 전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파라미르는 피핀을 보며 말했다. "이젠 이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북쪽의 전설에서 빠져나와 이 남쪽 땅에 있는 하플링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요." 그러자 갠달프는 똑바로 앉으며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제 막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피핀의 입을 눈짓으로 막았다. 데네도르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얘기된 것보다 그 눈짓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아 내기라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가운데 파라미르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주로 갠달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끔 전에 만났던 이들의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듯 피핀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가 프로도와 그의 하인과의 만남 그리고 헤네스 안눈에서의 사건들에 이르자 피핀은 의자를 움켜쥔 갠달프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손은 아주 희고 늙어 보였는데 피핀은 그 손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지독한 전율과 함께 갠달프, 바로 갠달프까지도 떨고, 아니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파라미르는 그 여행자들과의 이별과, 그들이 키리스 운골로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을 그쳤으며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갠달프가 일어서며 외쳤다. "키리스 운골? 모르굴계곡? 언제요, 파라미르, 언제? 그들이 그대와 헤어진 게 언제요? 그들이 언제쯤 그 저주받은 계곡에 도착할까?" "난 그저께 아침에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그들이 곧장 남쪽으로 갔다면 거기부터 모르굴두인계곡까진 사십오 마일 정도 됩니다. 그리고 거기부터 서쪽의 저주받은 탑까지 십오 마일의 거리지요. 아주 빨리 가더라도 오늘 이전엔 거기 닿기가 힘드니까 아마 그들은 아직 거기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난 당신이 무얼 걱정하고 계신지 압니다. 그렇지만 이 어둠은 그들의 모험관 상관없습니다. 이 어둠은 어제저녁부터 시작되어 지난밤에는 이딜리엔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지요. 제가 보기엔 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서 그 여행자들이 저와 헤어지기 이전부터 어둠의 시간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갠달프는 마루를 걷기 시작했다. "그저께아침, 그럼 거의 사흘을 간 건데! 그대와 헤어진 곳이 얼마나 먼 곳이지?" "약 칠십오 마일쯤 되는 곳이지요. 그렇지만 난 더 빨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 난 대하의 긴 삼각주 섬 캐르 안드로스에 있었습니다. 우린 말을 이쪽 강안에 매두고 북쪽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해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말탈 수 있는 다른 세 명과 함께 달려온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스길리아스의 여울을 지키는 수비대를 보강하기 위해 그리로 보냈습니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그는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데네도르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잘못? 왜 그런 걸 묻는 거냐? 그들은 네 휘하에 있는 사람들인데. 아니면 넌 네 행동 전부를 내가 판단해 주길 바라는 거냐? 사실 넌 오랫동안 내 충고 없이 네 생각대로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내 면전에선 그렇게 겸손해지는 거냐? 그래, 넌 늘 그래왔듯이 아주 교묘하게 말을 했다. 그렇지만 넌 네가 말하면서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많이 떠드는 거나 아닌지 하는 눈길로 미스랜더를 보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오랫동안 네 마음을 차지해 왔지. 내 아들아, 난 비록 늙었지만 아직 노망하진 않았다. 난 늘 그랬듯이 보고 들을 수 있지.네가 내게 절반밖에 말하지 않은 것이나 아니면 아예 말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 내게 비밀이 될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게다. 난 수수께끼의 해답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아, 보로미르, 네가 가버리다니......" "제 행동을 아버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실 줄 알았더라면 이런 무거운 꾸지람이 내리기 전에 아버님의 충고를 들을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파라미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랬다면 네 행동이 바뀌었을까? 내 생각엔 그래도 넌 네 뜻대로 했을 것 같은데. 난 널 잘 알어. 언제나 넌 옛날의 품위있고 신사다운 왕처럼 고상하고 관대하게 보이길 원하지. 만일 네가 평화로운 때에 그 보좌에 앉는다면 그건 썩 어울리는 일일 게야. 그렇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신사다움은 곧 죽음으로 보상받는 거다. " "그럴 겁니다." 파라미르는 말했다. 그러자 데네도르는 다시 외쳤다. "그럴 거라고? 그러나 네 죽음만이 아니네, 파라미르공. 네 아비의 죽음, 그리고 이제 보로미르가 가버린 이상 네가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네 국민들의 죽음이야." "그렇다면 아버님께선 우리 처지가 바뀌었더라면 하고 바라십니까?" 파라미르가 물었다. "그래, 난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보로미르는 내게 충실했고 또 마법사의 생도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애였다면 아비의 필요를 기억했을 게고 행운이 가져다준 것을 그냥 내던져 버리지는 않았을 게다. 그애라면 내게 큰 선물을 가져왔을 거야." 잠시 파라미르의 조심성이 무너졌다. "전 왜 형이 아닌 제가 이딜리엔에 있어야 했는지 아버님께 묻고 싶습니다. 적어도 한번은 아버님의 충고가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죠. 그 임무를 형에게 맡긴 분은 바로 이 도시의 영주이십니다." "내 자신이 타 놓은 잔에 더이상 쓴 맛을 섞지 말아라. 내가 수많은 밤을 혀 위에 그 쓴 맛을 느껴 왔고 아직도 더 쓴 것이 남아 있다는 예감을 느끼지 않는 줄 아느냐? 이제야 그걸 찾았다. 그렇지 않으냐? 내게 닥친 바로 이 불운이 그것이 아니냐!"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진정하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보로미르가 그걸 당신에게 가져오진 않았을 거요. 그는 죽었고 또 훌륭하게 죽었소. 그에게 안식이 있기를!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소. 그가 만약 그것에 손을 뻗쳐 움켜잡았다면 마음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는 그걸 자신이 가지려 했을 것이고 그가 돌아오면 당신은 아들을 제대로 몰랐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데네도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당신은 보로미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겠지, 그렇지 않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난 그의 애비로서 그가 나에게 그걸 가져왔으리라 확신하오. 아마 당신은 지혜롭겠지, 미스랜더.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교활하다고 해도 모든 지혜를 다 가진 건 아닐 거요. 마법사들의 거미줄과 같은 계략이나 바보들의 성급함과는 다른 혜식이 있을 수도 있소. 이 문제에 있어선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학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소." "그렇다면 당신의 지혜란 뭡니까?" "적어도 피해야 할 두 가지 어리석음은 알고 있지. 그걸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는것. 또 지각없는 하플링들이 사는 곳에서 바로 적의 영토로 그걸 보냈다는 사실, 그건 바로 당신과 내 자식이 한 일이지만, 그건 미친 짓이라는 사실 말이오." "그렇다면 데네도르공 같으면 어떻게 했겠소?" "아무것도. 그러나, 적이 다시 찾게 된다면 우리에게 분명히 닥쳐올 파멸을 걸고, 멍청이들이나 바랄 그런 모험 속으로 그것을 던져 넣는 그런 일은 결단코 안했을거요. 그건 깊이 잘 감추고 지켰어야만 했소.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고 그의 손아귀에서 멀리 메어 놓는 거요.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둬 우리가 다 죽어 버려서 더이상 고통받을 수도 없게 된 후에야 그가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요." "당신은 늘 그렇듯이 곤도르만 생각하는군요, 영주. 그러나 다른 사람들, 다른 생물들, 그리고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요? 또한 나는 그의 종복들도 동정하는 거요." "만일 곤도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어디서 도움을 찾을 수 있소? 만일 내가 그걸 이 궁성 지하에 갖고 있을 수 있다면 우린 더이상 어둠의 끔찍함을 참지 않아도 될 것이고 최악의 순간을 염려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회합도 방해받지 않아도 될 것이오. 내가 그것의 유혹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날 잘 모르는 것이오." 그러나 갠달프는 다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을 믿지 않소. 만일 내가 당신을 믿었다면, 난 그걸 당신의 보호 아래 갖다놓고 나와 다른 이들의 고뇌를 걷어 버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당신의 말을 들으니 보로미르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더 못 믿게 됐소. 잠깐, 분노를 참으시오. 난 그것에 대해선 나 자신도 믿지 못하오. 그래서 기꺼이 선물로 제공됐을 때에도 난 그걸 거절했었소. 당신은 강하니 어떤 문제들에 있어선 스스로를 제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 손에 들어가면 당신을 정복하고 맙니다. 만일 당신이 그걸 민돌루인산 아래 깊이 묻는다 해도 그건 마치 어둠이 번지듯 당신 가슴 속에서 불타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후에 따를 더 나쁜 결과가 우리에게 닥쳐오게 될 거요." 잠시 데네도르의 눈이 갠달프를 바라보며 타올라 피핀은 다시 한번 그들 사이의 긴장된 의지의 대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말을 받아넘길 때마다 그들의 시선은 칼날처럼 번득이며 서로를 꿰뚫는 것같이 보였다. 피핀은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갑자기 데네도르가 신경을 늦추고 차분함을 찾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일 내가 가졌다면! 내가 가졌다면! 그런 만일이란 말은 쓸데없는 거지. 이미 그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만 시간만이 그것 앞에 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였는가를 보여 주겠지. 그 시간은 그리 멀지 않을 거야. 남아 있는 모두는 다 자기 방식대로 적과 싸우되 일치되어야지. 가능한 동안엔 희망을 갖고 그 후라도 여전히 자유롭게 죽을 배짱 정도는 남게 되겠지." 그는 말을 끊고 파라미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오스길리아스의 수비대를 어떻게 보느냐?" 파라미르는 대답했다. "전력이 그리 대단치 못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딜리엔부대를 보내 보강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못할 거야. 첫번째 공세가 취해질 곳이 바로 거기니까. 아마 거기엔 강건한 대장이 필요할 게다." "거기도 그렇고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죠." 파라미르는 대답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형님! 저도 역시 그를 사랑했지요." 그는 일어섰다. "이제 물러가면 안 될까요?" 그는 몸을 휘청하며 아버지의 의자에 기대섰다. "그래, 넌 지쳤지. 내가 듣기론 네가 하늘의 사악한 어둠에 쫓기며 멀리서부터 급히 달려왔다더구나." "그건 더이상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럼 안하마. 가서 쉬도록 해라, 내일은 더 힘드는 일이 있을 테니." 모두 영주에게 물러가겠다고 말한 뒤 아직 쉴 시간이 있을 때 쉬려고 갔다. 갠달프는 작은 횃불을 든 피핀을 데리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들 숙소를 향했다. 그들은 집에 들어와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나서야 마침내 피핀이 갠달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말해 주세요. 아직 희망이 있나요? 프로도에게 말이에요. 물론 우리 자신도 포함되겠지만." 갠달프는 피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놓으며 대답했다. "원래 그 희망이란 것이 크진 못했잖나. 아까 들은 대로 멍청이의 희망일 뿐이지. 더구나 키리스 운골이란 말을 들으니......" 그는 말을 멈추고 마치 어둠을 꿰뚫고 동쪽을 보기라도 할 듯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중얼거렸다. "키리스 운골! 왜 그 길로 간 거지?" 그는 돌아섰다. "지금 난 그 이름을 듣고는 거의 절망할 지경이야, 피핀. 그러나 파라미르가 가져온 소식에서 난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지. 우리 적은 마침내 전쟁을 시작했고 프로도가 아직 자유로울 때 첫 움직임을 보인 것이 분명하거든. 그는 이제 이리저리 눈을 돌리느라 자신의 영토 안은 신경을 쓰지 않을 거야. 그리고 피핀, 난 멀리서부터 그가 조급히 굴고 있으며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그는 예상보다 빨리 시작했지. 뭔가가 그를 동요시킨 거야." 갠달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서 있다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아마, 아마도 자네의 어리석음이 도움이 됐는지도 몰라. 자 보자, 그는 약 닷새 전에 우리가 사루만을 격파하고 신석을 얻었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렇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린 그걸 별로 유용하게 쓸 수도, 또 그가 모르게 쓸 수도 없는데. 아! 혹시, 아라곤이? 그의 시대가 다가왔지. 그에겐 속으로 감추고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네, 피핀. 그는 대담하고 확고한 사람이고,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큰 모험을 해볼 사람이지. 아마 그일 거야. 그가 그 신석을 사용해서 적에게 스스로를 내보여 도전했을 거야.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그래, 로한의 기사들이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서 알 수 있겠지. 우리 앞엔 끔찍한 날들이 놓여있네. 지금 가능할 때 자두게." "그렇지만," 피핀이 말했다. 그러자 갠달프가 물었다. "그렇지만 무엇? 오늘밤엔 한번만 더 대답해 주지." "골룸이요.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그놈과 함께, 심지어 그를 따라갈 수 있어요? 그리고 파라미르도 그들이 가는 곳을 당신과 마찬가지로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뭔가 잘못된 건가요?" "그건 지금 대답할 수가 없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선 프로도와 골룸이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다시 만나리란 생각이 들어.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말야. 그러나 키리스 운골에 대해선 오늘밤에 더이상 얘기하지 않겠네. 배반, 난 그 비참한 동물에게서 배반의 예감을 느끼네. 그렇지만 그렇게 되어야 할지도 몰라. 배반자는 흔히 스스로를 배반하고 의도하지 않은 좋은 결과를 낳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잘 자게." 다음날 아침도 갈색 어스름 속에서 시작되어 파라미르의 귀환으로 잠시 들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날개달린 어둠은 그날 다시 보이진않았지만 가끔 도시의 하늘 높은 곳에서 희미한 울부짖음이 들려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굳어지게 했고 마음 약한 일부 사람들은 떨며 흐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파라미르는 다시 떠났다.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그분에겐 쉴 시간도 안 주는군. 영주께선 그를 너무 몰아 대는 것 같아. 이제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형까지의 두 몫을 해내야만 하나 봐."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북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한의 기사들은 어디 있는 거지?" 사실 파라미르는 자신의 뜻에 따라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의의 의장은 그 도시의 영주였으며 그는 그날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굽힐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그는 회의를 소집했다. 거기 모인 지휘관들은 모두 남쪽의 위협으로 전력이 너무 약화되어 만약 로한의 기사들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들 영토 내에서도 먼저 공격할 만한 힘이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동안 성벽을 보수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데네도르는 주장했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공들여 만든 외벽 람마스를 쉽게 포기할 순 없지. 그러면 적은 강을 건너기 위해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적은 전력으로 이 도시를 공격할 수 없어. 북쪽의 캐르 안드로스는 늪지대라 안 되고 남쪽 레베닌은 강이 넓어서 많은 배가 필요할 테니 말야. 그가 힘을 다할 곳은 바로 오스길리아스지. 전에 보로미르가 그를 거기서 격퇴했을 때도 그랬지만." 그러자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건 단순한 하나의 시도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통로를 지키느라 우리 손실의 열 배를 적에게 돌려 준다 해도 우린 후회할 상황입니다. 그는 우리의 일개 중대를 전멸시키기 위해 일개 군단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전력을 가졌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전력으로 밀고들어온다면 멀리 부대를 내놓았다가 철수시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임라힐왕자도 말했다. "그리고 캐르 안드로스는 어떻게 합니까? 오스길리아스가 수비된다면 그곳도 역시 보강되어야 합니다. 우린 좌측의 위험을 잊어선 안 됩니다. 로한인들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파라미르는 암흑의 문에 거대한 전력이 집중되고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일 개 군단 이상이 거기에서 몰려나와 그 통로 이외의 곳으로도 공격해 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데네도르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쟁에선 모험이 많은 법이지. 캐르 안드로스엔 수비대가 있으니 더이상 군세를 보낼 순 없어. 그러나 난 대하와 펠레노르를 싸움도 않고 넘겨 줄 순 없어. 혹시 여기 주군의 뜻에 끝까지 거역할 만한 지휘관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침내 파라미르가 말했다. "전 아버님의 뜻에 거역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님은 형님을 잃으셨으니까요. 제가 가서 그의 역할을 대신하겠습니다. 만일 아버님이 명령하신다면요." "난 그렇게 명령한다." "그렇다면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나 제가 돌아오면 절 좀더 좋게 생각해 주십시오." "그건 네가 돌아올 때의 행동에 달렸지." 그가 동쪽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을 나눈 사람은 갠달프였다. "경솔하게 비탄에 사로잡혀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되오. 그댄 전쟁과는 또 다른 필요를 위해 여기 꼭 있어야 하니까. 그대 아버님은 그대를 사랑하시오. 끝나기 전에 깨닫게 되실 거요. 안녕!" 이렇게 파라미르는 다시 떠났고 그와 함께 가길 원하고 또 시에서 할애될 수 있는 병사들이 같이 떠났다.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어둠을 통해 황폐한 도시를 바라보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도대체 저기 무슨 일이 있을까 의아해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북쪽을 바라보고 로한의 데오든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곤 했다. "그들이 올까? 그들이 오랜 동맹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래, 그들은 올 거야. 너무 늦게 올지는 몰라도 생각들 해보게. 그가 붉은 화살을 받은 건 기껏해야 그저께 정도일 거야. 그런데 여기서 에도라스따진 굉장히 멀거든." 다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밤이었다. 여울로부터 급히 달려온 전령은 미나스 모르굴로부터 대군이 쏟아져 나와 오스길리아스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으며 또한 남쪽의 잔인하고 장대한 하라드인들이 연합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우린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게 그 암흑의 기사라는 걸 알았어요. 그에 대한 공포가 그에 앞서 강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 불길한 소식과 함께 피핀이 미나스 티리스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 저물어갔다. 이제 파라미르라 할지라도 그 여울을 오래 지킬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 편히 자러 가지도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이미 어둠은 더이상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정점에 이르러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으며 삭막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또다시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안두인의 통로가 적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었다. 파라미르는 펠레노르 성벽으로 퇴각하여 병사들을 둑길요새에 재집결시켰으나 열 배 이상의 적군에게 포위당해 버렸다는 것이다. 전령은 말했다. "그분이 무사히 펠레노르를 질러온다 할지라도 아마 적은 곧바로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적은 통로를 차지하는 데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우리가 바랐던 만큼은 못 됐지요. 치밀한 계획이 준비되었던 것 같습니다. 적들이 비밀리에 동오스길리아스에다가 수많은 뗏목과 거룻배를 준비해 놓은 것을 우린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갑충떼처럼 떼를 지어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우릴 격파한 건 바로 암흑의 대장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가 온다는 말만 듣고도 더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요 심지어 적들마저도 그에게는 모두 질려 있어서 그의 명령이라면 자기끼리라도 서로 죽일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난 여기보단 거기서 더 필요하겠군." 갠달프는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달려갔다. 그에게서 나는 빛도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날밤 내내 피핀은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성벽 위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없는 어둠 속에서 비웃기라도 하듯 한낮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을 때 피핀은 펠레노르의 성벽이 서 있는, 침침하게 보이는 저 건너편 쪽에서 갑자기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감시병들이 큰 소리를 질렀으며 도시의 모든 남자들은 무장을 갖추었다. 이제 가끔씩 붉은 불길이 오르는 것이 보였으며 무겁게 깔린 대기를 통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들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적들이 성벽을 점령했구나! 적들이 성벽 틈을 파괴해 버렸나 봐. 적이 몰려오고 있다!" 베레곤드는 절망해서 부르짖었다. "파라미르는 어디 계신 건가? 그분이 돌아가셨다고는 제발 말하지 마!" 첫번째 소식을 가져온 것은 다름아닌 갠달프였다. 그는 늦은 아침 무렵에 소수의 기사들과 함께 마차대열을 호위하고 왔다. 마차 안에는 둑길요새의 폐허에서 구출할 수 있었던 부상병들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당장 데네도르에게로 갔다. 도시의 영주는 그때 백색탑 홀 위의 높은 방에 피핀을 대동하고 앉아 북쪽, 남쪽, 동쪽을 향한 침침한 창을 통해 둘러싸고 있는 운명의 어둠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양 어두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대부분 그의 눈길은 북쪽을 향해 있었으며 가끔은 마치 아주 먼 곳의 말발굽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고대의 비방이라도 가진 듯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파라미르가 돌아왔소?" 그가 묻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내가 떠날 때까진 아직 살아있었소. 그는 펠레노르의 퇴각이 궤멸되지 않도록 후위부대와 함께 남아 있기로 했소. 그는 아마 충분히 오래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르오. 그러나 난 염려됩니다. 그는 지금 너무 강대한 적과 맞붙어 있으니까요. 내가 두려워했던 적이 나타난 거요." 그러자 피핀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직분도 잊고 외쳤다. "암흑의 군주가 나타났단 말인가요?" 데네도르가 쓰게 웃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페레그린군! 그는 모든 것이 다 정복되어 나에게 항복을 받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는 다른 이들을 무기로 사용하지. 다 모든 위대한 군주들이 현명하다면 그러듯이 말일세, 하플링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아들까지 희생시켜 가며 이 탑 속에 앉아 고민하고 지켜보고 또 기다리고 있겠는가? 나도 아직 칼을 들고 싸울 수 있는데도 말이야." 그는 일어서서 검은색의 긴 망또를 젖혔다. 그러자, 아! 그는 그 아래 사슬갑옷을 입고 흑색과 은색의 칼집에 긴 자루가 달린 장검을 차고 있었다. "그래서 난 계속 걸어왔고, 그래서 난 그 오랜 세월을 잠자고 있었던 거야. 나이와 함께 내 몸도 연약해지고 소심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지." 그러자 갠달프가 받았다. "그러나 이제 바랏 두르의 군주 아래 여러 대장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존재가 그대의 외성을 차지해 버렸소. 그는 바로 절망의 암흑, 사우론의 손에 들린 공포의 투창, 그 옛날 앙마르의 군주인 마왕, 반지악령 나즈굴의 대장이오." "그렇다면 미스랜더, 그대는 그대의 적을 만난 것이군. 나로 말하자면 이미 전부터 어둠의 탈의 무리 가운데 누가 진정한 대장인가를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이 말을 전하려고 일부러 돌아온 거요? 아니면 적에게 압도당해 도망한 거요?" 피핀은 갠달프가 분노를 터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떨렸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의 주력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그리고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이 맞다면 인간 남자의 손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으며 현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운명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오. 어쨌거나 암흑의 군주는 지금 당장 앞으로 나서진 않을 거요. 아까 당신이 말한 그 지혜에 따라 그는 뒤에서 그의 종들을 광란으로 이끌며 나을 테니. 내가 온 이유는 아직 치료받을 수 있는 부상자들을 호송하기 위한 거요. 람마스의 성벽은 이제 많이 파괴되어 곧 모르굴의 대군이 여러 곳으로 넘어들려 할 거요. 그리고 나는 또 이 말을 전하고자 왔소. 곧 평원에서의 전투가 시작될 거요. 돌격대가 정비되어야만 하오. 기병들로 이루어진 돌격대 말이오. 거기에 우리의 연약한 희망이 달려 있소. 왜냐하면 적이 준비가 안 된 것이 바로 그거니까. 그들에겐 기병이 별로 없소." "그렇지만 우리도 역시 별로 없소. 이제 로한의 원군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맞춰져있군." 데네도르가 대답하자 갠달프가 다시 말했다. "우린 아마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게 될 거 같소. 캐르 안드로스의 패잔병들이 이미 도착했으니까. 그 섬은 점령됐소. 어둠의 문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군세가 북동쪽을 가로질러 오고 있소." "사람들은 당신이 나쁜 소식을 전하는 데 쾌감을 느낀다고들 말하지, 미스랜더. 그렇지만 나에게 그건 이미 새 소식이 아니오. 난 어젯밤부터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또 돌격대로 말하자면 이미 생각해 놓았소. 자, 내려가 봅시다."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성벽 위의 감시병들의 눈에 야전부대의 퇴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지치고 부상당한 사람이 많이 끼어 있는 소부대가 정렬도 안된 상태로 들어왔으며 일부는 마치 무엇엔가 쫓기는 듯 급히 뛰어들어왔다. 저 동쪽 먼 곳에서 불꽃이 보이기 시작해서 점점 들판 여기저기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집들과 외양간들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러 곳으로부터 붉은 불꽃이 마치 강처럼 어둠을 헤치고 오스길리아스로부터 성문에 이르는 넓은 길을 향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적이야. 방벽이 함락됐어. 무너진 성벽을 넘어 그들이 몰려오는 거야. 횃불을 들고 오는 모양이야. 우리 편 병사들은 어디 갔지?" 저녁무렵이 되었고 사방은 너무나 침침해 궁성 위에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서 보아도 이제 평원이 잘 보이지 않았으며 다만 계속 늘어나고 있는 불꽃들만이 그 길이와 속도를 더해 가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성으로부터 약 일 마일쯤 되는 거리에 아까보다는 더 정렬이 잘 된 부대가 뛰지 않고 행진해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감시병들은 숨을 멈췄다. "파라미르가 저기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는 사람과 짐승을 통제할 수 있거든. 그분은 아직 해내고 있어." 이제 퇴각한 주력부대는 약 사백 미터 앞에 이르렀다. 뒤쪽 어둠으로부터 후위부대의 잔존인원인 소규모의 기병들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후미로 돌아가 다가오고 있는 불꽃의 대열에 마주섰다.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적의 기병대가 휩쓸어 왔다. 불꽃의 대열은 갑자기 격류가 되어 밀려와 횃불을 든 오르크들과 붉은 기를 든 사나운 남부인들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파도처럼 퇴각하고 있는 부대를 휘몰아쳤다. 그리고 어두운 하늘로부터 날개달린 어둠, 나즈굴이 울부짖음을 토하며 살육의 현장으로 내리꽂듯 하강해 왔다. 이제 퇴각군은 궤멸되기 시작했다. 벌써 사람들은 이리저리 미친 듯 내달으며 무기도 내던져 버리고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며 땅으로 쓰러지곤 했다. 그러자 마침내 궁성으로부터 나팔소리가 울리고 데네도르가 돌격대를 내보냈다. 성문 뒤 어두운 곳과 성벽 아래 숨어서 그의 신호를 기다리던 시에 남아 있는 기병 전원이었다. 이제 그들은 네굽을 모아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 도전했다. 성벽 위에서도 역시 호응하는 큰 외침이 들렸다. 돌격대 선두엔 돌 암로스의 백조기사들이 그들의 왕자와 더불어 푸른 기치를 앞세우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암로스, 곤도르를 위하여! 암로스, 파라미르를 위하여!" 그들은 퇴각군의 양 측면을 타고 적에게 번개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나 한 명의 기사가 그들을 앞질러 바람처럼 빠르게 평원을 질주해 나갔다. 섀도우폭스를 탄 그는 다시 한번 베일을 벗고 치켜올린 한 손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즈굴은 이 흰 불꽃의 적수와 대적할 그들의 대장이 아직 모지 않았기에 날카로운 비명을 토하며 물러갔다. 모르굴의 대군은 질풍 속의 불똥처럼 흩어져 깨져서 아무것도 의식 못하고 미친 듯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먹이에 눈이 팔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힘을 얻은 야전부대는 돌아서서 그 추격자들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살육자들이 살육되기 시작했다. 퇴각이 맹습으로 바뀌었다. 들판은 부상당한 오르크들과 사람들로 뒤덮였으며 횃불은 내던져져 소용돌이 같은 연기 속에서 꺼져 갔다. 기병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네도르는 더이상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적은 저지당해 일시적으로 물러갔으나 동쪽으로부터 여전히 대군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다시 퇴각을 알리는 나팔이 울려 퍼졌다. 곤도르의 기병들은 멈춰섰다. 그들 대열 뒤에 야전부대가 재정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천천히 그들은 성으로 행군해 왔다. 그들이 성문을 지나 당당하게 입성할 때 사람들은 그들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환호를 울렸으나 아직 마음 속에는 동요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대 인원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라미르는 삼분의 일의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그는 들어왔다. 그의 부하들이 입성했다. 기사들도 돌아왔고 그 후미에 암로스의 기치와 왕자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말을 탄 채 그 살육의 들판에서 발견한 그의 동족 데네도르의 아들 파라미르를 안고 있었다. "파라미르! 파라미르!" 사람들은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안아 궁성의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는 구부러진 길로 갔다. 백색의 기사가 공격해 오자 달아나던 나즈굴이 던진 창에, 그때까지 후미에서 하라드의 대장과 맞서고 있던 파라미르가 쓰러진 것이었다. 돌 암로스의 돌격이, 쓰러진 채 남부인의 붉은 칼에 학살당할 위기에 처한 그를 구했던 것이다. 임라힐왕자는 백색탑으로 그를 안고 와 말했다. "주군의 아들은 위대한 무용을 남기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바를 다 이야기했다. 그러나 데네도르는 일어나서 그의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방에다 그를 위한 침대를 만들라 분부하고는 파라미르를 눕힌 후에 방을 나왔다. 그는 홀로 탈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밀실로 올라갔다. 거기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 방의 작은 창문 사이로 잠시 창백한 빛이 비쳐 나오다가 섬광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데네도르가 다시 내려와 파라미르에게로 가 그의 옆에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을 때 그의 얼굴은 그의 아들의 얼굴보다도 더 죽음의 빛을 띤 것같이 보였다. 이제 성은 적으로 둘러싸여 공성에 들어갔다. 람마스는 깨어졌으며 펠레노르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성벽 밖에서 온 마지막 소식은 성문이 닫히기 전 북쪽으로부터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졌다. 그들은 아노리엔과 로한으로부터 도시로 통하는 지점을 지키던 수비대의 잔존인원이었다. 그들을 인솔하고 온 사람은 바로 닷새 전 아직 태양이 떠오르고 아침햇살 속에 희망이 남아 있을 때 갠달프와 피핀을 맞아들인 잉골드였다. "로한인들로부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로한은 이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이 온다 해도 우리에겐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우리가 소식을 들었던 새로운 대군이 안드로스를 거쳐 강을 건너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했습니다. 눈 휘장을 단 오르크대군과 우리가 여태껏 보지 못한 종류의 무수한 인간들이었습니다. 키는 크지 않지만 체격이 당당하고 용맹스러우며 난쟁이들처럼 수염을 기르고 도끼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동부의 야만지대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이 북쪽 길을 장악하고 대군세가 아노리엔으로 들어갔습니다. 로한인들은 올 수 없습니다." 성문은 닫혔다. 한밤내 성벽 위의 감시병들은 바깥 들판에서 적들이 풀과 나무를 태우고, 보이는 사람들을 죽었건 살았건 무조건 난도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을 넘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침햇살이 어둠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비쳐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밤에 겁에 질려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원은 행군하는 그들 부대로 꽉 차 있었고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는 데까지 도시를 둘러싸고 더러운 세균이 번식하듯 검고 칙칙한 붉은색의 막사가 수없이 들어서 있었다. 오르크들은 개미처럼 움직이며 성벽 사정거리 바로 너머에 성을 둥글게 싸고 깊은 참호를 파고 있었다. 참호들이 만들어짐에 따라 각각의 참호에는 불이 켜졌는데 어떻게 켰으며 어떤 연료를 사용하는지, 기술인지 마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그 작업은 계속됐으며 성 안에서는 전혀 막을 도리도 없이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참호열의 양 끝이 완성되자 커다란 마차들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곧 수많은 오르크들이 참호 뒤에 숨어서 투척기를 빠르게 설치했다. 그러나 성 위에는 거기에 이를 정도의 활을 쏘거나 그 작업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엔 사람들은 웃으며 그 기계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의 바깥벽은 뉴메노르의 기술과 힘이 사라지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매우 높고 두껍게 쌓아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벽은 오탕크의 탑처럼 단단하고 두꺼우며 탄력도 있어 그것을 떠받들고 있는 초석을 파괴하지 않는 한 어떤 강철이나 불로도 깨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안 돼. 그 이름없는 적이 직접 오지 않는 한. 또 그가 온다 해도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한은 안 돼."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게 얼마나 될 것 같은데? 그는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수 많은 강국을 몰락시킨 무기를 가지고 있잖아. 바로 굶주림 말야. 길은 차단됐고, 로한은 오지 않을 거야." 그러나 투척기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에 탄환을 낭비하지 않았다. 모르도르의 가장 큰 적에게 퍼붓는 이 공격을 명령하고 있는 것은 약탈자나 오르크의 대장이 아니었다. 원한의 힘과 마음이 그것을 수행하고 있었다. 커다란 석궁들이 장치되고 많은 외침과 밧줄과 축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것들은 무섭게 높이 발사되어 성벽 위로 바로 날아들어 첫번째 원형구역 내에 거대한 울림과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그 탄환들은 떨어지자 이상한 비밀장치에 의해 화염이 되어 터졌다. 곧 성벽 안에는 화재의 위험이 발생해 손이 비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저기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잡으러 뛰어다녔다. 다음번 투척엔 덜 파괴적이지만 훨씬 더 끔찍한 탄환이 날아들어왔다. 성벽 뒤의 거리들에는 땅에 부딪고도 타오르지 않는 작은 탄환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달려가 뭔가를 확인한 사람들은 크게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적들은 도시 안으로 오스길리아스와 람마스와 평원에서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의 머리를 던져 넣었던 것이다. 그들은 보기에 끔찍했다. 어떤 것들은 부서지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고 어떤 것들은 심하게 짓이겨져 있었지만 많은 머리들은 아직 형태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큰 고통 속에서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모두가 눈꺼풀없는 눈의 더러운 낙인이 찍혀져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훼손되어 있었지만 가끔은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얼굴들도 있었다. 살았을 때 당당 하게 무장하고 걷던 모습, 들에서 쟁기질을 하던 모습, 산의 푸른 골짜기에 살며 가끔 휴일에 도시로 오곤 하던 얼굴들. 사람들은 성문으로 밀려드는 비정한 적들을 향해 헛되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은 서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저주에 개의치 않으며 짐승이나 썩은 새매처럼 거친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미나스 티리스에는 모르도르의 대군에 맞서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강심장의 소유자는 얼마 없었다. 암흑의 탑 군주는 굶주림보다 더 빠른 무기인 공포와 절망이라는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즈굴이 다시 날아왔고, 그들의 군주가 이제 힘을 증대시키고 공세를 한층 강화했기에 가끔 악의를 담고 터져나오는 그들의 소리는 사악함과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들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살로 배를 채우려고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성 위에서 선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야와 사정거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하늘을 찢는 무서운 소리를 발하곤 했다. 그들이 울부짖을 때마다 점점 더 참기 어려워졌다. 마침내 아주 대담한 사람들마저도 그 숨은 위협이 하늘을 덮을 때면 땅에 몸을 던지거나 신경이 마비된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리고 서서 암흑에 정신을 잃어 더이상 싸울 생각도 잊고 오로지 어디 숨거나 기어들어갈 일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다. 이 암흑의 날 하루종일 파라미르는 백색탑 안의 침대에 누워 절망적인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 성 전체와 거리에 퍼져 나갔다. 그 옆에는 그의 아버지가 앉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며 더이상 도시의 방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피핀은 우루크 하이의 손아귀에 잡혔을 때도 이보다 더 끔찍한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임무는 영주의 시중을 드는 것이라 그는 거의 잊혀진 상태로 불꺼진 방문 옆에서 자신의 공포를 최대한 억제하며 서 있었다. 그에게 보이는 바로는 데네도르의 거만한 의지에서 무엇인가가 꺾인 것 같았으며 단호한 정신이 함몰된 것처럼 늙어보였다. 슬픔과 자책으로 그렇게 된 듯싶었다. 그는 그 눈물 없는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데네도르의 분노의 눈길 아래 서 있는 것보다 더 참기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더듬거렀다. "울, 울지 마십시오, 주군. 아마 그는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갠달프에게 여쭤 보셨나요?" "마법사 말은 더이상 입에 올리지 말게. 그 바보의 희망은 사라졌어. 적은 그걸 발견했어, 그래 이제 그의 힘은 정점에 달했지. 그는 우리 생각도 읽을 수 있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파멸을 자초할 뿐이야. 난 내 아들을 필요없는 위험으로 감사도 축복도 없이 내몰았고, 이제 그는 혈관에 독이 흐르는 채 여기 누워 있어. 아니야, 아니야, 이제 전쟁이 어떻게 되더라도 내 가계는 끊어진 것이고 설정의 계통도 종말을 맞이한 거지. 그럼 모두가 다 잡히고 말 때까지 비천한 족속이 왕족의 잔류자들을 산속에 숨어서 다스리게 되겠지." 사람들이 도시의 영주를 애타게 찾으며 문으로 왔다. 그러나 데네도르는 말했다. "아니야, 난 내려가지 않겠다. 난 내 아들 곁에 있어야 해. 얘는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도 몰라. 이제 거의 죽어 가지만 말이야. 그대는 아무나 좋은 대로 따라가게. 그 회색의 바보라도 말이야. 비록 그의 희망은 깨졌지만. 난 여기 남겠다." 그래서 곤도르의 시를 최후로 방비하는 데 명령을 내린 사람은 갠달프였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선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밝아지며 어둠의 날개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쉬지 않고 궁성에서 성문까지, 성벽 남쪽에서 북쪽까지 계속 돌아다녔으며 빛나는 갑옷을 입은 돌 암로스의 왕자도 그와 함께 있었다. 왕자와 그의 기사들은 실제로 뉴메노르인의 혈통이 흐르고 있는 듯 끝끝내 품위와 용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 옛얘기가 맞는 모양이야. 저 사람들 가계엔 요정의 피가 흐른다는 말 말이야. 아주 옛날에 그 땅에 님로델의 요정들이 살았었다거든." 그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님로델의 노래 구절을 읊조리기도 하고 또 까마득히 멀어져 간 안두인계곡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버리면 다시 어둠이 사람들을 뒤덮어 사람들의 마음은 다시 차갑게 식어 버렸으며 곤도르의 용맹은 재로 스러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침침한 공포의 낮에서 절망적인 밤의 어둠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제 첫번째 원형구역 안에는 불길이 방치된 채 여기저기서 맹위를 떨치며 타오르고 있었다. 외벽 위의 돌격대는 이미 여러 지점에서 퇴각로가 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실한 이는 별로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두번째 성문 안으로 이미 물러가 있었다. 전장 저 멀리 대하에는 이미 급속하게 다리가 놓여져 하루종일 병력과 군수품이 쏟아지듯 도하돼 왔다. 한밤중이나 되어서 이 이송은 좀 뜸해지기 시작했다. 적의 선봉대는 불이 타오르는 참호 사이에 만들어 놓은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계속 진격해 왔다. 그들은 성벽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의 손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계속 몰려들었다. 비록 그들의 불빛은 한때 곤도르가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었던 사수들에게 훌륭한 표적이 되었지만 실상 그들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힐 만한 군세가 성벽 위엔 남아 있질 않았다. 도시의 사기가 이민 저하된 것을 간파한 적의 보이지 않는 대장은 공세를 가중시켰다. 오스길리아스에서 만들어진 공성탑이 어둠 속을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다. 백색탑의 방으로 전령들이 다시 왔으며 그들이 아주 급박해 보였기에 피핀은 들어오게 했다. 데네도르는 파라미르의 얼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첫번째 원형구역이 불타고 있습니다, 주군. 주군의 지시는 무엇입니까? 주군께선 아직 영주이시자 섭정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미스랜더를 따르고 있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벽에서 도망쳐 수비벽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왜? 그 바보들은 왜 도망치지? 기왕 다 타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먼저 타죽는 게 나을 텐데. 너희들의 불더미로 돌아가라! 나? 난 내 화장대(火葬臺)로 가겠다. 내 화장대로! 데네도르와 파라미르에겐 무덤이 필요없다. 무덤이 아니야! 미이라가 되어 긴 잠을 자진 않겠다. 우린 서쪽으로부터 이곳에 배가 오기 전 야만인의 왕들처럼 화장될 것이다. 서역인은 끝났어. 돌아가 타버려라!" 전령들은 인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이제 데네도르는 일어서서 잡고 있던 파라미르의 열오른 손을 놓으며 슬프게 말했다. "그는 타고 있어, 벌써 타고 있어. 내 아들의 정신의 지주는 무너졌어." 그리고 그는 천천히 피핀 쪽으로 걸어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녕! 안녕, 팔라딘의 아들 페레그린! 그대의 봉공은 짧았지만 이제 다 된 것 같군.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겠지만 난 그대의 의무를 해제하겠네. 자, 이제 그대가 원하는 식대로 죽으러 가게나. 그대가 원하는 사람하고 말이야. 비록 그대를 이 사지로 끌어들인 멍청한 자네 친구하고라도 말이지. 내 가신들을 이리 보내고 자넨 가게. 안녕 !" "전 작별을 고하지 않겠습니다, 주군." 피핀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는 호비트다은 기분에 사로잡혀 일어서서 노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잠시 주군을 떠나겠습니다. 지금 당장 갠달프를 찾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바보가 아닙니다. 전 그가 생을 포기할 때까진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전 주군께서 살아계신 동안엔 제 충성의 맹세와 주군께 대한 봉공에서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적들이 이 궁성까지 온다면 전 주군 옆에 서서 제게 주신 이 무기의 값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대 좋을 대로 하게, 하플링군. 그러나 내 삶은 끝났네. 내 가신들을 보내게." 그는 파라미르에게 돌아섰다. 피핀은 그를 떠나 가신들을 부르러 갔다. 여섯 명의 강하고 잘생긴 가신들이 왔으나 그들도 이 부름에 떨고 있었다. 데네도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파라미르의 침대에 따뜻한 이불을 덮고 그것을 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그대로 시행해 침대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동요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은 천천히 걸어갔으며 데네도르는 지팡이를 짚고 그들을 따랐다. 피핀이 제일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백색탑 밖으로 걸어나와 마치 장례식으로 향하는 것처럼 낮게 드리운 구름이 둔중하게 타오르는 불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그들은 궁정을 걸어 가다가 데네도르의 명령을 받고 시든 성수 옆에 멈춰섰다. 궁성 아래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음 외에는 모든 것이 조용했으며 그들은 죽은 가지에서 어두운 연못으로 떨어지는 구슬픈 물방울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궁성의 문을 통과해 걸어나왔으며 문지기들은 의혹과 놀람의 눈길로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왼쪽으로 꺾은 그들은 마침내 여섯번째 원형구역의 후미 쪽 성벽에 있는 한 문에 이르렀다. 그곳은 펜 홀렌이라 불리는 곳으로 장례식 때 외에는 잠겨 있어 도시의 영주와 무덤의 표식을 가진 사람 그리고 사자의 집을 돌보는 사람만이 그 길로 지날 수 있었다. 그 문을 지나면 구부러진 길을 따라 민돌루인의 절벽 그늘 아래 있는 좁은 대지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왕과 섭정의 무덤이었다. 길 옆 작은 집에 문지기가 앉아 있다가 그들이 오는 모습을 무서움에 질려 바라보고는 손에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영주의 명령에 따라 그는 문의 자물쇠를 열고 조용히 문을 열었고 그들은 그에게서 등불을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등불빛을 받아 빛나는 고대의 벽과 많은 둥근 기둥이 달린 난간 사이로 들어갔다. 그들이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느린 발소리가 반향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적막의 거리, 라스 디넨에 이르렀다. 그곳은 창백한 빛을 발하는 둥근 건물과 텅 빈 홀들과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초상이 있었다. 그들은 섭정의 무덤으로 들어가 침대를 내려놓았다.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피핀은 자기가 지금 아치형의 지붕이 덮인 넓은 방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벽은 장막이 쳐져 있어 작은 등불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방 안에는 희미하게 대리석으로 조각된 테이블들이 열을 지어 놓여 있는 것이 보였으며 그 위에는 머리 아래 돌을 받치고 손은 가슴 위에 포개놓은, 영원히 잠든 시신들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는 넓고 비어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데네도르의 신호에 따라 그들은 파라미르를 그 위에 내려놓았고 데네도르는 그 옆에 누워 아들과 같은 수의를 덮었다. 그러자 그들은 임종을 보는 슬픈 사람들마냥 그 옆에 머리를 숙이고 섰다. 그러자 데네도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우린 기다리겠다. 그러나 미이라 제작자들을 보내진 말아라. 빨리 나무를 가져와서 이 밑에 쌓고 기름을 부어라. 내가 신호하거든 횃불을 갖다대거라. 그대로 시행하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안녕!" "잠깐 물러가겠습니다, 주군." 피핀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그 죽음의 집으로부터 무서움에 떨며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는 중얼거렸다. "불쌍한 파라미르! 갠달프를 찾아야만 해. 불쌍한 파라미르! 분명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내 눈물이 아니라 약이야. 아, 어디서 갠달프를 찾아야 하지? 아마 잔뜩 일에 둘러싸여 있겠지.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나 미친 사람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을거야." 문에서 그는 경비하러 남아 있던 시종 한 명에게 말했다. "주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천천히 해야 해요. 파라미르가 살아있는 동안엔 이 안으로 불을 가져가선 안 돼요. 갠달프가 올 때까진 아무 짓도 하면 안 돼요." "미나스 티리스의 주인이 누군데? 데네도르공인가 아니면 회색의 방랑자인가?" "회색의 방랑자말고는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피핀은 말하고 돌아서 구부러진 길을 따라 그의 발이 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나와 깜짝 놀란 문지기를 지나 문을 빠져나왔다. 그는 궁성들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가 지날 때 보초가 소리쳐서 그는 그것이 베레곤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있다. "어딜 그렇게 달려가는가, 페레그린?" 그는 소리쳤다. "미스랜더를 찾으러." 피핀이 대답했다. "영주의 전령은 급할 것이고 나 때문에 지체돼서는 안 되겠지만 자네가 괜찮다면 빨리 좀 말해 주게. 도대체 어떻게 돼가나? 우리 주군은 어디로 가신 거야? 난 이제 막 근무에 들어왔지만 그분이 닫힌 문으로 갔으며 사람들이 그 앞에서 파라미르를 모셔 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래요. 정적의 거리로 갔어요." 베레곤드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그분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던데 그러면 이제 정말 돌아가셨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직 아니에요. 내 생각엔 아직까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도시의 영주께선 도시가 함락되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신 것 같아요. 그는 뭣엔가 홀린 것 같고 위험스러워요." 그는 데네도르의 이상한 말과 행동을 서둘러 이야기했다. "나는 당장 갠달프를 찾아야 해요." "그렇다면 자넨 전장으로 가야 할 거야." "알아요. 주군께선 날 의무에서 해제시켜 주셨어요. 그렇지만, 베레곤드,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끔찍한 일을 막아 줘요." "주군께서 명령할 때를 제외하곤 흑색과 은색의 제복을 입은 자들은 위치를 벗어나지 말라고 지시하셨는데." "그렇다면 명령과 파라미르의 생명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지요. 그리고 명령으로 말하자면 내 생각엔 당신이 복종하는 사람은 이미 영주가 아니라 광인인 것 같아요. 난 달려가야 해요.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지요." 그는 시의 외곽으로 계속 달려 내려갔다. 화염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갔으며 그의 제복을 본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마침내 그는 두번째 성문을 지났는데 거기엔 거대한 화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조용해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전투의 외침도 무기가 부딪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끔찍한 비명과 큰 충격과 함께 깊은 폭발의 반향음이 들려왔다. 그는 무서움과 놀람으로 거의 무릎까지 떨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을 굳게 제어하며 모퉁이를 돌아 성문 아래의 넓은 공지로 들어섰다. 그는 갑자기 멈춰섰다. 갠달프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움츠려 버렸다. 한밤 이후 대규모 공격이 계속되었다. 북이 울렸다. 북쪽과 남쪽에서 끝없이 적들이 성벽으로 압박해 왔다. 또한 불꽃 속에서 붉고 단속적인 빛을 받으며 길을 따라 거대한 탑들과 기계를 끌고 큰 짐승들, 하라드의 무마킬들이 올라왔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부하들이 하는 공격과 그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는지에 관해선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목적은 수비력을 시험해 보고 곤도르인들을 바쁘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력을 기울일 곳은 성문이었다. 그것은 강철과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깨뜨릴 수 없는 돌로 만든 탑과 흉벽으로 방어되고 있었지만 바로 그곳이 열쇠였으며 높고 깨뜨릴 수 없는 성벽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했다. 북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다. 불길이 치솟았다. 거대한 기계가 들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수십 미터나 돼 보이는 거대한 보이는 충각(衝角)이 강철 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모르도르의 암흑의 대장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주조된 것으로 그 끔찍한 머리부분은 사악한 늑대의 형상으로 검은 강철로 주조돼 있었으며 파멸의 저주가 새겨 있었다. 그들은 그것에 고대의 지하 공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론드란 이름을 붙였다. 큰 짐승들이 그것을 끌고 오르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호위했으며 뒤에는 그것을 사용할 트롤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성문 주위의 수비는 아직 견고했다. 돌 암로스의 기사들과 돌격대 중에서 가장 용감한 이들이 교각에 남아 있었다. 화살과 창이 빽빽하게 날아갔다. 공성탑들이 와르르 무너지거나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다. 성문 좌우의 성벽 앞은 잔해들과 시체들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광기에 사로잡힌 적들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그론드가 다가왔다. 그 지붕부분은 불에도 타지 않았고 가끔 그것을 끄는 큰 짐승들이 그들을 호위하는 오르크들을 수없이 짓밟으며 쓰러지기도 했지만 곧 그것들은 길에서 치워지고 다른 짐승이 그 자리에 채워졌다. 그론드가 다가왔다. 북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렸다. 시체의 산을 밟고 끔찍스런 그림자가 나타났다. 크고 두건을 썼으며 검은 망또를 두른 기사였다. 천천히 시체들을 밟고 넘어 날아오는 창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다가왔다. 그는 멈춰서서 차갑게 빛나는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행동은 수비자들과 적들 모두에게 두려움을 몰고 왔다. 사람들의 팔은 양 옆으로 늘어 뜨려졌으며 활도 울지 않았다. 잠시동안 모든 것이 정적에 휩싸였다. 북이 요란하게 울렸다. 막대한 힘으로 그론드는 앞으로 돌진되었다. 성문에 부딪쳐 울렸다. 도시 전체에 구름 속의 천둥과 같은 무거운 울림이 퍼졌다. 그러나 철문과 강철 기둥은 그 충격을 견뎌 냈다. 그러자 그 암흑의 대장이 등자에서 일어나며 끔찍한 소리로 크게 부르짖었다. 그소리는 사람의 가슴뿐 아니라 돌까지도 찢을 듯한 힘과 공포를 동반한 잊혀진 언어였다. 그는 세 번 부르짖었다. 그때마다 그 거대한 충각이 부딪쳤다. 그러자 마지막 돌진과 함께 갑자기 곤도르의 성문은 부서졌다. 마치 어떤 저주에 의해 타격을 받은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쇠가 부딪힐 때의 섬광이 일어나며 문은 땅 위에 조각조각 흩어져 버렸다. 나즈굴의 군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불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거대한 검은 모습이 절망적인 위협처럼 커져 가며 비쳐들었다. 아직 어떤 적도 지난 적이 없는 성문의 아치 아래를 나즈굴의 군주가 들어왔고 그의 모습을 본 모두가 도망쳤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성문 앞 공지엔 섀도우폭스를 타고 갠달프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세상의 말 중에서 섀도우폭스만이 그 공포를 견디며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마치 정적의 거리에 있는 조상처럼 서 있을 수 있었다. "너는 여기 들어을 수 없어." 갠달프가 말했다. 그 거대한 어둠이 멈춰섰다. "너를 기다리고 있는 그 심연으로 돌아가라! 돌아가! 너와 네 주인을 기다리는 무(無)로 떨어져 버려라. 가라!" 암흑의 기사는 두건을 젖혔다. 그러자, 아! 그는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붉은 불꽃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망또 아래의 어깨는 넓고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입으로부터 죽음처럼 음산한 웃음이 새나왔다. 그는 말했다. "늙은 바보! 지금은 나의 시간이야. 죽음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이제 죽어서 헛되이 저주하거라!" 이 말과 함께 그는 칼을 높이 쳐들었으며 칼날로부터 불꽃이 쏟아내 내려왔다. 갠달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저 뒤편 도시 궁정 쪽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수탉은 마법이나 전쟁과는 상관없이 죽음의 어둠 저 너머에서 새벽과 함께 오고 있는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맑고 쨍쨍하게 울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저 멀리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나팔, 나팔, 나팔소리들. 민돌루인의 어두운 산기슭에서도 희미하게 메아리쳐 들려왔다. 북쪽의 커다란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한의 기사들이 마침내 온 것이었다. 제5장 로한기사들의 질주 날이 어두워 담요에 싸인 채 땅에 누워 있던 메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밤의 공기는 가라앉아 있고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주변의 보이지 않는 숲의 나무들이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로 덮인 언덕과 산기슭에서 나는 희미한 북소리처럼 들렸다. 그 진동은 갑자기 멈췄다가 다시 다른 쪽에서 나오기도 했고 가까이에서 느껴졌다가 멀리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감시병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감시병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사방을 로한의 부대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말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들이 소나무 잎으로 덮인 땅 위에서 움직이고 가볍게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동아노리엔의 대로 옆의 드루아단숲 긴 이랑으로부터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에 있는 엘레나크봉화대 주변의 소나무숲에서 야영하고 있었다. 메리는 아주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나흘이나 말을 타고 왔으며 걷히지 않는 깊은 어둠이 조금씩 더 그의 가슴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겐 뒤에 남아 있을 핑계도 충분했고 더구나 왕의 명령까지 받았는데도 왜 자기가 그렇게 기를 쓰고 오려고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또한 노왕이 자기가 명령을 어긴 것을 알고 있는지 또 그래서 화가 나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던헬름과 그들이 속해 있는 에오레드를 통솔하는 원수 엘프헬름 사이에는 어떤 묵계가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메리를 못 본척했으며 그가 말해도 못 들은 척했다. 그는 던헬름이 가져가는 자루 하나에 불과한 것 같았다. 던헬름은 위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메리는 자기가 작고 필요없으며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불안한 시간이 다가왔고 부대는 위험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미나스 티리스의 외벽으로부터 하루의 여정도 남지 않는 곳에 와 있었다. 척후병들이 미리 보내졌다. 일부는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급히 돌아와 그들 앞의 도로가 봉쇄되었다고 보고했다. 적의 대군이 아몬 딘 서쪽 삼 마일 지점에 주둔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구 마일도 안 되는 길까지 일부 군세가 이미 진격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르크들이 길 옆의 산과 숲을 뒤지며 다니고 있었다. 왕과 요머는 밤에 자지 않고 회의를 열었다. 메리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피핀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불안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불쌍한 피핀, 거대한 돌의 도시에 갇혀서 외롭고 무서울 텐데. 메리는 자기가 요머와 같은 큰 기사여서 나팔이나 다른 걸 불며 전속력으로 달려가 그를 구출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는 일어나 이제 좀더 가까이에서 다시 울리는 북소리를 들었다. 곧 그는 낮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반쯤 가린 희미한 등불이 숲속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 큰 그림자가 희미하게 다가오다가 그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나무뿌리인 줄 알고 욕을 했다. 그는 그 목소리가 원수 엘프헬름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난 나무뿌리가 아니에요. 자루도 아니고, 당신 발에 멍든 호비트예요. 당신이 내게 해주실 수 있는 최소한의 치료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시는 거지요." "이 악마 같은 어둠 속에 이렇게 숨을 수 있는 게 무엇이건 간에, 우리 왕께선 우리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란 분부를 내리셨지. 신속한 이동 명령이 떨어질 거야." 그러자 메리는 불안스러워 물었다. "그럼 적들이 오고 있나요? 저것이 그들 북소린가요? 아무도 저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난 내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니지, 아니야. 적은 길 위에 있지 산 위에 있는 게 아니야. 그대는 숲의 원주민, 오세의 소리를 들은 것이지. 그들은 그 소리로 먼 곳에서도 의사소통을 하거든. 그들은 아직도 이 드라우단숲에 산다고 해. 몇 명 남지 않은 몰래 숨어사는 옛 시대의 유민들로 야수처럼 사납고 예민하다고 하지. 그들은 곤도르나 마크와 함께 전쟁으로 나가진 않지만 그들 역시 지금 이 어둠과 오르크들의 출현에 동요되었거든. 그들은 지금 상황이 거의 그렇게 보이듯이 다시 암흑의 시대가 돌아올까 겁내고 있는 거야. 사실 그들이 우릴 공격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들은 독화살을 사용한다고 하거든. 또한 그들은 숲속 싸움에 있어서는 누구와도 비교가 안되니까 말이야. 그러나 그들은 데오든왕께 지원을 제의해 왔어. 그들 추장 한 사람이 지금 왕께 와 있지. 저쪽에 불빛이 보이지? 나도 이 이상은 몰라. 자 이제 나도 왕명을 수행하러 가야지. 이제 다시 꾸리게나, 자루씨!"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메리는 이런 원주민이나 독화살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독한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그는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무척 알고 싶었다. 그는 일어서서 숲 사이로 사라지려고 하는 불빛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곧 그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왕을 위해 설치된 작은 막사가 있는 공간에 이르렀다. 위쪽을 가린 큰 등불이 가지 위에 걸려 있어 아래쪽으로 원형의 맑은 빛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데오든왕과 요머 그리고 그들 앞 땅 위에 오래된 돌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남자가 이상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매끈하지 않은 뺨엔 듬성듬성한 수염이 마치 마른 이끼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는 짧은 다리에 퉁퉁한 팔을 가진 뚱뚱하고 나무그루터기같이 생긴 사람으로 허리 부근만 풀로 가리고 있었다. 메리는 그를 전에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곧 그는 던해로우의 푸켈맨을 기억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그 오래된 석상에 생명이 불어 넣어진 것이거나 아니면 오랜 옛날 잊혀진 장인들이 모델로 사용한 그 생물이 영겁의 세월 속에서 이어져 온 것 같았다. 메리가 가까이 기어갔을 때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곧 그 원주민이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소리는 깊은 후음처럼 들렸는데 놀랍게도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끊기는 식의 말투였고 알 수 없는 소리가 가끔 섞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아니야, 말타는 사람의 추장. 우리는 싸우지 않는다. 사냥만 한다. 숲속에서 고르군을 죽인다. 오르크족을 미워한다. 당신들도 고르군을 미워한다. 우린 우리 할 수 있는 거 도운다. 원주민은 잘 듣고 잘 본다. 우린 길을 다 안다. 우리들은 돌건물들 생기기 전부터 여기 살았다. 귀 큰 사람들이 바다에서 오기 전부터 여기 살았다." 그러자 요머가 답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전쟁에서의 도움이다. 당신과 당신의 종족은 우릴 어떻게 돕겠는가?" "소식을 준다. 우린 산 위에서 내다본다. 우린 큰 산에 올라가 아래를 본다. 돌의 도시는 닫혔다. 그 바깥은 불타고 있다. 이젠 안에도 거기로 가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만 고르군과 멀리서 온 인간들이," 그는 울퉁불퉁한 짧은 팔을 들어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의 길에 앉아 있다. 아주 많이, 말탄 사람보다 많이."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사람의 넓은 얼굴과 검은 눈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불쾌함으로 무뚝뚝하게 들렸다. "우리는 거칠고 자유롭다. 그러나 어린애는 아니다. 난 위대한 추장, 간 부리 간이다. 난 많은 것을 계산할 수 있다. 하늘의 별들, 숲의 나뭇잎들, 어둠 속의 인간들. 당신들은 스물의 열다섯 배의 스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더 많다. 큰 싸움이 벌어지면 누가 이길까? 그리고 돌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건 더 많다." 그러자 데오든이 탄식했다. "아! 그는 너무도 날카롭게 사실을 이야기하는군. 정찰병이 보고한 바로는 그들이 길을 가로질러 참호를 파고 난항를 쳐 놓았다던데. 우린 그들을 급습해서 통과하긴 어렵겠는데." "그렇지만 우린 최대한의 속도가 필요합니다. 문드버그가 불타고 있습니다!" 요머가 말했다. 그러자 추장이 다시 덧붙였다. "간 부리 간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길만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는 함정도 없고 고르군도 다니지 않는, 우리들과 동물들만 알고 있는 길로 안내할 것이다. 돌건물족이 더 강했을 때 많은 길들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사냥꾼이 짐승고기를 파헤치듯 산을 깎아 내렸다. 우리들은 그들이 돌을 먹는 줄 알았다. 그들은 드루아단에서 리몬까지 커다란 마차로 달렸다. 그들은 더이상 오지 않는다. 길은 우리가 아닌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산 위와 산 아래로 그 길은 수풀과 나무 아래 뚫려 있고 그 너머에 리몬이 있고 내려가면 딘이 있어 다시 말탄 사람의 길로 나가게 된다. 우리들은 당신들에게 그 길을 알려 줄 것이다. 그럼 당신들은 고르군을 죽이고 빛나는 칼로 이 나쁜 어둠을 물리쳐서 우리들이 다시 숲속으로 자러 갈 수 있게 한다. " 요머와 왕은 자신들의 언어로 서로 의견을 나눴다. 마침내 데오든이 원주민에게 돌아섰다. "우린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우리가 뒤에 적을 남기고 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돌의 도시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 그것이 보존될 수 있다면 오르크의 대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충직하다면, 간 부리 간, 그럼 우린 그대에게 푸짐한 보상을 할 것이고 당신은 마크와 영원한 우정을 나누게 될 것이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친구가 될 수 없고 아무런 선물도 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암흑에서 살아난다면 그땐 숲의 우리들을 우리끼리만 있게 놔두고 더이상 짐승처럼 사냥하지 말아라. 간 부리 간은 당신들을 함정으로 빠뜨리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말탄 사람들의 추장과 함께 갈 것이고 만일 당신들을 잘못 이끌었다면 당신들은 그를 죽여도 된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데오든이 명령을 내리자 요머가 물었다. "적을 비켜 지나가 다시 길로 나서려면 얼마나 걸리는가? 우린 당신이 인도한다면 천천히 말을 몰 수밖에 없을 것이고 길도 좁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간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말타지 않고도 빨리 갈 수 있다. 길은 저쪽 스톤웨인골짜기로 말 네 마리가 갈 정도로 넓다." 그는 손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시작과 끝 부분은 좁다. 우리들은 여기서 딘까지 해뜰 때에서 정오 사이에 갈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요머는 데오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길잡이에게 최소한 일곱 시간은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해서 열 시간 정도는 잡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예측 못한 일이 우릴 방해할지도 모르고 또 만일 우리가 한 줄로 걸어가야 한다면 산에서 나왔을 때 다시 전열을 정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을까요?" "누가 알겠는가? 계속 한밤처럼 같은데." 그러자 간이 끼어들어 말했다. "어둠뿐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밤은 아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린 그걸 느낄 수 있다. 벌써 해는 동쪽 산맥을 오르고 있다. 시간은 하루의 시작 무렵 이다." 다시 요머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곤도르의 위기에 맞춰 도착할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메리는 더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빠져나와 진군의 부름에 준비하기 위해 갔다. 이것이 전투 전의 마지막 장이었다. 메리 생각에는 이들 중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피핀과 미나스 티리스의 화염을 생각하고는 스스로의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그날은 모든 것이 다 잘 진행되어 길에서 그들을 요격하려 기다리는 적의 기척을 보거나 듣지 못했다. 원주민은 조심스런 사냥꾼처럼 차폐물을 잘 이용했기 때문에 오르크나 순찰감시병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포위된 도시로 점점 가까이 갈수록 주위는 더 침침해졌고 기사들은 마치 사람과 말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긴 대열을 짓고 나아갔다. 각 부대마다 숲의 원주민이 붙어 인도했으며 늙은 간은 왕 옆에서 따라갔다. 기사들이 그들의 야영지를 뒤로 하고 울창한 숲을 넘어 스톤웨인골짜기로 나가는 길을 찾느라 처음에는 말을 끌고 걸어가 시간이 지체되어 예상보다 출발은 좀 늦어졌다. 선두가 아몬 딘의 동쪽 기슭 너머로 뻗쳐 나르돌에서 딘까지의 동서를 잇는 산맥의 거대한 틈새를 덮고 있는 회색 덤불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그 틈새를 따라 오래전에 잊혀진 마찻길이 아래로 뚫려 도시에서부터 아노리엔으로 통하는 주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세월 속에 나무가 무성히 길을 차지해 수없는 세월 동안 쌓인 나뭇잎들에 덮여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덤불은 기사들이 전장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 보호막의 구실을 해주었다. 그 너머에는 길과 안두인유역이 펼쳐져 있었고 동쪽과 남쪽으로 헐벗고 바위투성이의 산사면이 뒤틀린 모습으로 서로 만나 첩첩이 쌓이기 시작해 민돌루인의 거대한 산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선두는 멈추어 섰으며 그들 뒤로 긴 대열이 스톤웨인골짜기에서 빠져나와 산개해 회색숲 아래의 숙영지로 이동했다. 왕은 지휘관들을 회의에 소집했다. 요머가 길을 정찰하기 위해 정탐병을 보내자 간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말탄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다. 우리들이 이 나쁜 대기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봤다. 그들이 곧 와서 나한테 말할 것이다." 지휘관들이 모였다. 그러자 숲으로부터 메리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간과 비슷하게 생긴 푸켈 형의 다른 원주민들이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다. 그들은 간에게 이상한 후음의 언어로 말했다. 곧 간은 왕을 향해 말했다.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를 말한다. 첫째, 경계하라! 아직 딘 저편 한 시간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주둔하고 있다." 그는 어두운 봉화대를 향해 서쪽으로 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곳과 돌종족의 새 성벽 사이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다. 거긴 아주 바쁘다. 성은 더이상 서 있지 않다. 고르군이 땅의 진동과 검은 쇠봉으로 그것을 깨뜨렸다. 그들은 경계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기 편이 모든 길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하며 늙은 간은 이상한 꿀룩꿀룩 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건 아마 그의 웃음소리인 모양이었다. 요머가 외쳤다. "좋은 소식이오! 이런 어둠 속에서도 다시 희망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적의 책략이, 그에게는 안됐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됐습니다. 이 저주받을 어둠이 우리의 보호막이 돼 주었습니다. 지금 곤도르를 파괴하고 돌 하나하나까지 내던져 버리고 싶은 그의 욕심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제 가장 큰 걱정을 덜어 준 셈입니다. 사실 그 외성은 우리에게 큰 장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거기까지 갈 수만 있다면 조용히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데오든은 간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그대에게 감사하오, 숲의 간 부리 간이여. 소식과 길안내에 대해 감사하며 행운이 함께 하길 빌겠소." "고르군을 죽이라! 오르크족을 죽이라! 그 밖에 다른 어떤 말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 이 나쁜 대기를 몰아 내고 빛나는 칼로 어둠을 쫓아 내라!" 간이 이렇게 외치자 데오든왕이 답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멀리까지 달려왔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공격할 것이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는 내일이라는 시간만이 보여 줄 것이오." 간 부리 간은 웅크리고 앉아 작별의 표시로 자신의 각질 이마를 땅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그는 떠날 것처럼 일어섰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놀란 숲속 동물이 이상한 냄새를 맡듯 얼굴을 위로 쳐들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바람이 바뀐다." 그는 이렇게 소리치고 눈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종족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려 다시는 로한의 기사들이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돼 멀리 동쪽에서 희미한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원주민들이 이상스럽고도 비우호적으로 보였지만 아무도 그들이 자신들을 속여 함정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엘프헬름이 말했다. "우린 더이상 안내자가 필요없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평화로웠던 시절에 문드버그까지 와봤던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그들 중 하납니다. 우리가 길로 들어서면 곧 남쪽으로 꺾이게 되고 그러면 도시까지 약 이십 마일 정도 남게 되는 겁니다. 그 길의 대부분은 양 옆으로 풀밭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로 곤도르에서 제일 빨리 달린다고 여겨지는 전령들이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큰 소요 없이 빨리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요머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힘드는 일을 하러 가야 하고 최대의 전력이 필요하니, 난 이제 쉬고 밤중에 떠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평원에 도달해 왕께서 전투신호를 보낼 때는 내일 중 그래도 가장 밝을 무렵이 될 것이오." 이 제안에 왕은 동의했고 지휘관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엘프헬름이 곧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정탐병들은 회색숲 너머에서 두 사람밖엔 다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 구의 시체와 두 마리 말뿐이었답니다." 요머가 물었다. "그래, 그것은 어떤 것들이었소?" "우선, 주군, 그들은 곤도르의 전령이었습니다. 한 명은 히르곤 같아 보였습니다. 그 손은 아직 붉은 화살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만 머리가 잘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죽기 전에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본 바에 의하자면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적들이 외성을 차지했거나 아니면 공격하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늘 그래왔듯이 역참에서 새 말로 갈아타고 달려왔다면 아마 이틀 전 밤에 여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시로 가지 못하고 돌아오던 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면 데네도르는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니 우리가 을 것에 희망을 걸 수가 없을 것 아닌가!" 데오든이 탄식했다. 그러자 요머가 위로하듯 말했다. "긴박할 때 늦는 건 참기 어려우나 늦는 것이 안 오는 것보단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말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처럼 이런 옛 속담이 더 진실과 가까웠던 적은 없었을 겁니다." 밤이었다. 길 양편으로 로한의 대군이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길은 민돌루인산 기슭을 지나 남쪽으로 꺾어졌다. 그들 앞으로 곧장 저멀리 검은 하늘 아래 붉은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긴 산등성이가 그 빛을 배경으로 어두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펠레노르평원의 람마스 근처까지 다가갔으나 아직 낮이 되지는 않았다. 왕은 선두 대열의 중간에서 말을 몰고 있었고 그의 가신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엘프헬름의 에오레드부대는 그 다음에 따라가고 있었는데 메리는 던헬름이 이제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계속 앞으로 나가 왕의 호위대 바로 후미에서 말을 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깐의 정지가 있었다. 메리는 전위에서부터 나오는 조용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에 앞서서 거의 성 가까이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온 정찰병들이었다. 그들은 왕에게로 왔다. "거기엔 큰 화염이 있습니다, 주군.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고 들판은 적들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파괴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성벽 위엔 이미 몇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고 모조리 부수기에만 바쁜 것 같았습니다." 또 한 사람이 덧붙여 말했다. "원주민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군? 저는 위드파라라고 합니다만, 전 평화로웠던 때에 곤도르의 고지에 산 적이 있어 그곳의 공기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바람이 바뀌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이 희미합니다만 바다 냄새를 싣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새로운 소식이 올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외성을 통과하실 때즘엔 이 어둠을 헤치고 새벽이 올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드파라, 그대는 영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 데오든은 이렇게 말하고 뒤쪽에 서 있는 가신들에게 돌아서서 아주 분명한 소리로 크게 외쳤기에 제1진인 에오레드부대의 여러 기사들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 이제 때가 되었다, 욜의 후손, 마크의 기사들이여! 적들과 화염이 그대들의 앞에 있고 우리들의 집은 저 멀리 뒤에 있다. 그러나 비록 그대들이 외지에서 싸운다 할지라도 거기서 얻는 영예는 영원히 그대들에게 돌아가리라! 그대들은 서약을 했으니 이제 그것을 이행하라! 왕과 나라와 동맹을 위해!" 사람들은 방패에 창을 부딪혀 울렸다. "요머, 내 아들아! 그대가 제1진 에오레드를 이끌라. 중앙의 왕의 기치 바로 뒤를 따르라. 엘프헬름, 그대는 성벽을 통과할 때 그 우익을 맡으라. 그림볼드는 좌익에서 부대를 인솔하라. 다른 부대들은 이 세 선봉대를 바짝 따르도록 하라. 적이 있는 곳은 어디나 가리지 말고 공격하라. 아직 우린 평원의 상황을 잘 모르니 지금 당장 다른 작전을 세우진 않겠다. 자, 이제 어둠을 두려워 말고 진격하라!" 위드파라의 예견이 어떻게 나타날지 는 모르지만 아직은 깊은 어둠이 그대로 깔려있었기에 선봉대는 최대한 빨리 달렸다. 메리는 던헬름 뒤에 탄 채 왼손으론 그를 붙잡고 다른 손으론 칼집에서 칼을 쉽게 뺄 수 있도록 느슨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왕이 한 말의 진실성을 쓰라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그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메리아독?' '바로 이거지.' 그는 생각했다. '기사를 방해하고, 말발굽에 밟혀 죽지 않으려고 기껏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외성까진 삼 마일도 안 되었다. 그들은 곧 그곳에 도착했다. 메리에겐 너무 빠른 것 같았지만.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으며 무기가 부딪는 소리가 잠깐 들렸지만 잠시동안뿐이었다. 성벽 주위에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오르크들은 깜짝 놀라 곧 살해되거나 도망쳐 버렸다. 람마스 복문의 폐허 앞에서 왕은 다시 멈췄다. 제1진 에오레드는 그의 뒤로 다가가 그를 둘러쌌다. 엘프헬름의 부대는 오른편 저쪽에 있었지만 던헬름은 왕 가까이에 다가가 있었다. 그림볼드의 부하들은 꺾어져서 성벽 사잇길로 동쪽을 향해 돌아갔다. 메리는 던헬름 등 뒤에서 내다보았다. 저 멀리 약 십 마일 이상 되는 거리에서 커다란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그곳과 기사들이 있는 곳 사이에는 가장 가까운 데가 거의 삼 마일쯤 떨어져 보이는 초승달 모양으로 이어진 불꽃이 있었다. 그는 들판을 조금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지만 아침이 올 희망은 보이지 않았으며 바뀐 것이든 아니든 바람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곤도르의 평원을 향해 로한의 기사들은 마치 사람들이 절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제방 틈새로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듯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전진했다. 그러나 암흑의 대장의 마음과 의지는 모조리 쓰러져 가는 도시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자신의 계획에 생긴 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후 왕은 자신의 대군을 공성의 화염과 평원 외곽 사이로 들어가게 하려고 약간 동쪽으로 길을 틀게 했다. 아직까지 그들은 공격받지도 않았고 또 왕이 공격개시의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다시 한번 멈춰섰다. 이제 도시는 가까웠다. 공기중엔 타는 냄새가 있었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말들도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스노우메인을 탄 왕은 아무 움직임 없이 마치 고뇌와 공포에 갑자기 엄습당한 사람처럼 미나스 티리스의 고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움츠러들고 나이에 짓눌린 사람처럼 보였다. 메리 역시 거대한 공포와 의심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가슴이 서서히 두근거렸다. 확신이 흔들리는 불안정한 시간이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안 온 것보다 못하다! 데오든도 늙은 머리를 숙이고 서서 떨며 산속으로 달아나고픈 충동을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메리는 확실히 변화가 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는 것이다! 밝은 빛이 보였다. 멀리 아주 멀리 남쪽에서 구름이 침침하게 회색 덩어리로 구르고 이리저리 밀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에 아침이 온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마치 도시 아래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섬광이 치솟아 올랐다. 아주 짧은 순간 그것은 흑색과 백색으로 찬란하게 빛나 그 정점은 마치 반짝이는 바늘끝처럼 보였다. 그러자 다시 어둠이 덮였고 들판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숙여졌던 왕의 몸이 갑자기 꼿꼿하게 들렸다. 그는 다시 크고 당당해 보였다. 등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그전 어느 인간이 낸 소리보다 훨씬 더 맑은 목소리로 크게 부르짖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데오든의 기사들이여! 끔찍한 사악함이 깨어났다, 불과 학살! 창은 떨리고 방패는 부서지니, 칼의 날, 붉은 하루, 태양이 떠오르기 전! 이제 달려라, 달려! 곤도르로 달려라! 이 외침과 함께 그는 왕의 기수(旗手) 구스라프에게서 커다란 뿔나팔을 받아 사방으로 울리도록 불었다. 그러자 따르던 대부대의 모든 나팔들이 이에 호응해 소리높여 울렸으며 이 로한의 나팔소리는 평원 전체와 산맥으로 폭풍과 우뢰처럼 퍼졌다. 이제 달려라, 달려! 곤도르로 달려라! 갑자기 왕이 스노우메인에게 소리치자 말은 질풍같이 달려나갔다. 그의 뒤에는 푸른 초원 위를 달리는 백마가 그려진 그의 기치가 바람에 펄럭였으나 그는 지나치게 빨리 달렸다. 그의 뒤로 그의 가신들이 질풍처럼 달렸지만 왕은 계속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요머가 그리로 투구 깃털이 날리도록 말을 달리고 에오레드의 선진도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밀려갔지만 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치 홀린 듯이 보였으며 옛날 그의 조상들의 투혼이 핏속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그는 스노우메인 위에 마치 옛날 아직 이 세계가 젊었을 때 발라의 전투에서의 위대한 오로메와 같이 늙은 신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의 금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것은 마치 태양처럼 빛났으며 그의 말발굽에 스친 풀잎들은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침이 왔다. 바다로부터 아침과 바람이 몰려왔다. 어둠이 걷히고 모르도르의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울부짖으며 달아나거나 죽음을 맞았으며 분노의 발굽이 그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로한의 병사들은 전투의 환희에 빠져 적을 물리치며 노래를 불러 그들의 아름답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한 노랫소리는 도시까지 들렸다. 제6장 펠레노르평원전투 곤도르공략을 지휘한 것은 오르크의 매장이나 강탈자가 아니었다. 어둠은 그 주인이 계획한 것보다 너무 일찍 깨졌다. 행운은 그 순간 그를 배반했고 세상 또한 그에게서 돌아섰다. 승리는 그의 손아귀에 잡히려는 순간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의 팔은 길었다. 그는 아직 거대한 힘을 조정하고 명령하고 있었다. 왕이자 반지악령인 나즈굴의 군주, 그는 많은 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문을 떠나 사라졌다. 마크의 데오든왕은 강과 길 사이에 놓인 길에 도착해서 이제 일 마일도 떨어져있지 않은 도시를 향했다. 그는 새로운 적을 찾으러 속도를 약간 늦추었고 기사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왔으며 던헬름도 그들과 함께 왔다. 그 앞 성벽 가까이에서는 엘프헬름의 부하들이 공성기계 사이에서 적들을 찌르고 죽이고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펠레노르평원의 북쪽 거의 절반이 회복됐으며 적들의 막사가 불태워 졌고 오르크들은 사냥꾼에 쫓기는 짐승처럼 강으로 달아났다. 로한인들은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포위망을 완전히 와해시키지는 못했으며 성문도 뺏지 못했다. 성문 앞에는 많은 오르크들이 있었으며 평원 절반에는 아직 싸우지 않는 대군이 여전히 우글거리고 있었다. 길 저편 남쪽으로는 하라드인들의 주력부대가 있어 그들 지휘관의 기치를 둘러싸고 기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 지휘관은 퍼져오는 빛 속에서 최전방에 몇 명 되지 않는 기사들만으로 호위된 왕과 왕의 깃발을 발견했다. 그는 진한 분노에 사로잡혀, 붉은 바탕 위에 검은 뱀이 그려진 자신의 기치를 휘날리며 많은 부하들과 함께 초원 위의 백마를 향해 달려갔다. 남부인들의 뽑아든 언월도는 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데오든도 그를 보았으며 적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노우메인에게 소리쳐 적을 맞으러 달려나갔다. 그들의 부딪힘은 격렬무비했다. 그러나 북쪽 로한왕의 흰 분노가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창이 더 길고 기술도 더 뛰어났으며 격했다. 그들은 수는 열세였지만 마치 숲속으로 떨어지는 벼락처럼 남부인을 헤치고 달렸다. 공세의 정면으로 덴겔의 아들 데오든이 달려 들었으며 그의 창은 적 지휘관을 떨어뜨려 눕히며 부르르 떨었다. 왕은 칼을 뽑아들고 적들의 기치로 달려들어 깃대와 기수를 베어 버리고 그 검은 뱀을 땅에 처박았다. 그러자 적들 기병 중에 살아남은 자들은 돌아서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아! 왕의 영예로운 바로 그 순간에 그의 금방패에 그늘이 졌다. 새로운 아침이 하늘로부터 얼룩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그에게로 닥쳐왔다. 말들이 주춤거리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말에서 떨어져 땅 위에 엎드렸다. 데오든은 외쳐 댔다. "이리 오라! 이리 와! 욜의 후손이여, 일어나라! 암흑을 두려워 말라!" 그러나 스노우메인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하늘에 대항하듯이 뒷발로 일어서며 크게 울부짖고 쓰러졌다. 검은 창이 말을 꿰뚫은 것이었다. 왕도 역시 그 밑에 깔려 쓰러졌다. 거대한 어둠이 구름이 떨어지듯 가까이로 내려왔다. 그러자 아! 그것은 날개달린 생물이었다. 만약 새라고 할 수 있다면 어느 새보다 더 컸고 깃털이나 다른 어떤 털도 하나도 나 있지 않았으며 박쥐날개같이 생긴 거대한 날개 앞쪽으로 발톱이 달린 발이 솟아 있었고 악취를 풍겼다. 이것은 고대의 생물에 속하는 것인데, 그 종족이 달 아래 잊혀진 차가운 산맥에서 머무르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와,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 마지막 생물을 낳았고 그들은 악으로 물들게 된 것이다. 암흑의 군주가 그들을 붙잡아 썩은 고기를 먹여 마침내 그것은 날아다니는 모든 다른 것들의 힘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생물을 자기 부하에게 탈것으로 제공했다. 그것은 계속 아래로 내려와 발톱달린 날개를 펼치며 울부짖고는 스노우메인의 몸에 올라 앉아 긴 목을 구부리고 발톱으로 살을 헤집고 있었다. 그 위에는 검은 옷을 입은 거대하고 위협적인 형체가 앉아 있었다. 그는 강철로 된 왕관을 쓰고 있었으나 그 관과 옷 사이에는 단지 끔찍한 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즈굴의 군주였다. 어둠이 걷히기 전에 그는 그 새를 부르러 하늘로 돌아갔었기에 이제 그는 다시 파멸을 안고 돌아와 희망을 절망으로, 승리를 죽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거대한 검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데오든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신들은 주변에 살해되어 쓰러져 있거나 아니면 말들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그곳으로부터 멀리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자신의 영주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기에 두려움을 초월한, 충실한 젊은이 던헬름이었다. 그는 어둠이 닥쳐올 때까지 메리를 무사히 뒤에 태운 채 그 전투를 치러 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윈드폴라는 두려움에 미쳐 날뛰며 그들을 내동댕이치고 들판으로 달려가 버렸다. 메리는 놀란 짐승처럼 네 발로 기었으며 끔찍한 전율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 버렸고 몸이 어딘가 아픈 듯 느껴졌다. 메리의 가슴은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왕의 신하! 왕의 신하! 너는 그분 곁에 있어야 해. 주군을 아버님처럼 모시겠다고 말했잖아." 그러나 그의 의지는 이에 답하지 않았고 그의 몸은 떨려서 감히 눈도 못 뜨고 얼굴도 들 수 없었다. 그때 그는 마음 속의 어둠으로부터 던헬름의 말소리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마치 예전에 자기가 알던 어떤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꺼져라, 더러운 드위머랙(악령에 해당하는 로한어), 썩은 새매의 군주! 죽은 이를 평화롭게 놔둬라!" 그러자 차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즈굴과 그 먹이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 아니면 그는 그대 차례가 되더라도 그대를 죽이지 않고 모든 어둠 너머의 비탄의 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그대의 육체를 먹어치우고 그대의 오그라든 정신만이 눈거풀없는 눈 앞에 벌거벗겨져 남게 될 것이다. " 칼이 뽑히는 소리가 울렸다. "네 뜻대로 해라. 그러나 가능한 한 난 널 막겠다." "날 막아? 이 바보. 어떤 인간 남자라도 날 막을 순 없다!" 그러자 메리의 귀엔 그 순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마치 던헬름이 웃는 소리 같았는데 그 맑은 소리는 강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난 남자가 아니다! 넌 지금 여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난 요문드의 딸 요윈이다. 넌 나와 나의 영주이자 인척인 분 사이에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불사의 몸이 아니라면 이제 꺼져라! 살아있는 놈이건 죽지 않는 어둠이건 간에 그분을 건드리면 내가 쳐부수겠다." 날개달린 생물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반지악령은 마치 어떤 의혹을 느낀 듯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잠시 경이로움에 메리는 두려움을 잊었다. 그가 눈을 뜨자 그 앞에 갈려 있던 어둠이 걷혔다.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 거대한 짐승이 앉아 있어 그 주변은 어둠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절망의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나즈굴의 군주가 희미하게 보였다. 약간 왼쪽으로 자신이 던헬름이라 불렀던 그녀가 그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려 주었던 투구가 이제는 벗겨졌으며 매듭에서 풀려난 그녀의 빛나는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창백하게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와 같이 잿빛을 띤 그녀의 눈은 단호하고도 사납게 빛났지만 그의 볼에는 아직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손에 칼을 든 그녀는 적의 끔찍스런 눈에 맞서 방패를 쳐들었다. 그는 요윈이자 또한 던헬름이기도 했다. 메리는 던해로우에서 떠날 때 본 그 얼굴의 인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아무 희망도 갖지 않고 오로지 죽음을 찾아 떠난 듯한 사람의 얼굴. 그는 연민, 경이로움과 함께 자신의 내부에서 갑자기 호비트들 특유의 천천히 달아오르는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녀가 죽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필사적인데! 적어도 그녀는 아무 도움도 못 받고 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적의 얼굴이 자신에게로 돌려지지는 않았지만, 메리는 그 죽음의 눈길이 자기에게로 쏟아질까 두려워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는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인에게 의혹과 함께 살기의 눈길을 던지고 있던 암흑의 대장은 마치 그를 진흙 속의 한 마리 벌레쯤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듯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 거대한 짐승이 날개를 쳐 더러운 바람이 밀려왔다. 그것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째지는 소리와 함께 요윈에게 빠르게 덮쳐와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했다. 로한의 여인, 왕의 어린 조카인 그녀는 비록 호리호리하지만 강철 칼날인 양 아름답고도 무섭게 보였으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고도 치명적으로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그녀는 내뻗친 머리를 날카롭게 두동강냈으며 잘라진 그 머리는 돌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그 거대한 몸집이 커다란 날개를 펼친 채 죽어 땅으로 떨어져 내려오자 그녀는 날쌔게 뒤로 뛰어 물러났고 그 짐승의 죽음과 함께 어둠도 걷혀 버렸다. 그녀 주위로 빛이 비쳐들어 그녀의 머리칼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빛났다. 분노에 가득찬 키 크고 위협적인 암흑의 기사가 일어서서 그녀 정면으로 탑처럼 육중하게 다가들었다. 마치 독액처럼 귀로 스미는 증오의 외침과 함께 그는 미늘창을 내리쳤다. 그녀의 방패가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나가며 팔이 부러졌다. 그녀는 무릎이 떨려 비틀거렀다. 그가 암운처럼 그녀에게 몸을 숙일 때 그의 눈은 빛을 발했다. 그는 죽이기 위해 미늘창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자신도 날카로운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비틀거렸고 그의 창은 그녀의 몸을 지나 땅에 꽂혀 버렸다. 메리의 칼이 그의 검은 옷을 찢고 갑옷마저 꿰뚫으며 뒤에서부터 그의 강건한 무릎 뒤쪽을 찌른 것이었다. 메리는 울부짖었다. "요윈! 요윈!" 그녀는 비틀거리며 마지막 힘을 다 짜내 그 거대한 몸체가 자기 쪽으로 기우는 순간 그의 왕관과 옷 사이로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은 불꽃을 튀기며 여러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왕관은 땡그렁 울리며 굴러떨어졌다. 요윈은 앞에 쓰러진 적 위로 넘어졌다. 그러나 그 옷과 갑옷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들은 찢어진 채 아무렇게 내던져진 듯 형체없이 땅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러자 떨리는 대기 속으로 찢어질 듯한 울부짖음, 죽어 육신 없고 말라비틀어진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 올라가며 차차 사라져 가 다시는 이 세상 이 시대에 들을 수 없었다. 이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 눈물로 온통 눈앞이 가린 메리가 마치 한낮의 올빼미처럼 눈을 껌뻑거리고 서 있었다. 눈앞을 가린 눈물의 안개 사이로 그는 이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요윈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으며 가장 영예로운 순간에 쓰러진 왕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그를 깔고 넘어진 스노우메인이 고통으로 옆으로 굴렀기 때문이었다. 말이 그의 주인에게 화가 된 것이었다. 메리는 몸을 굽혀 왕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 데오든이 눈을 떴으며 그 눈은 아주 맑았다. 그는 아주 힘들여 조용하게 말했다. "안녕, 홀비트라! 내 몸은 망가졌어. 나는 내 조상님들께 가는 거야. 이제 용기있는 그들 대열에 나도 부끄러움없이 낄 수 있게 됐어. 난 검은 뱀을 쓰러뜨렸네. 찌푸린 아침 그리고 즐거운 낮, 그리곤 찬란한 황혼이야!" 메리는 말을 할 수 없었으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주군. 제가 명령을 어긴 것과 이 순간에도 우는 것밖엔 주군께 다른 아무 일도 못해 드리는 것을요." 늙은 왕은 미소를 지었다. "슬퍼하지 말게! 자낼 용서하네. 위대한 선심은 거절되지 않는 법이지. 영예로운 삶을 누리게. 그리고 자네가 다시 파이프를 물고 편히 앉게 될 때가 되면 날 생각해 주게! 이젠 전에 약속한 대로 자네와 메두셀드에 앉아 있을 수도 또 자네의 연초 이야기도 못 듣게 됐으니 말일세." 그는 눈을 감았다. 메리는 그의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곧 그는 다시 말을 했다. "요머는 어디 있지? 내 눈이 어두워져 가는데 난 죽기 전에 그를 봐야 해. 그가 내 뒤를 이어 왕이 돼야 해. 그리고 요원에게도 말을 전해야 하는데. 그애, 그애는 날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런데 이젠 다시는 그앨 볼 수 없다니. 내 친딸보다 더 사랑하는 그애를." "주군, 주군!" 메리는 외쳤다. "그녀는 지금," 그러나 그 순간 큰 소란이 일어나 그들 주위는 온통 나팔과 트럼펫소리로 가득찼다. 메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전투를 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잊고 있었다. 그에겐 왕이 그의 죽음으로 달려온 것이 몇 시간이나 된 일처럼 생각됐지만 실상 그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막 벌어지려고 하는 커다란 전투의 바로 한복판에 놓이게 될 위험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적의 군세는 대하로부터 길로 급히 진격해 오고 있었으며 성벽 아래로부터도 모르굴의 군단이 밀려오고 있었고 남쪽으로부터는 기병을 앞세운 하라드의 보병과 함께 전투탑을 짊어지고 오는 무마킬의 거대한 등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흰 투구깃을 꽃은 요머가 다시 모아 정비한 로한의 선진을 이끌고 있었으며 성 안에서는 남아 있던 모든 군세가 밀려나와 그 선두에 돌 암로스의 백조가 성문으로부터 적을 몰아 내고 있었다. 잠시 메리의 머리에는 어떤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갠달프는 어디 있지? 그는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가 왕과 요윈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요머가 급히 그곳으로 달려왔으며 그와 함께 살아남은 왕의 가신들도 이제 다시 말을 진정시켜 달려왔다. 그들은 경악의 눈으로 거기 쓰러져 있는 죽은 짐승의 시체를 바라보았고 그들의 말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요머는 안장에서 내려 왕의 곁으로 다가왔지만 슬픔과 절망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기사 한명이 거기 죽어 쓰러진 왕의 기수 구스라프의 손에서 왕의 기치를 뽑아 내어 높이 세웠다. 천천히 데오든은 눈을 떴다. 기치를 보자 그는 요머에게로 넘겨 주라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만세! 마크의 왕! 이제 승리로 돌진하라! 요윈에게 내 인사를 전해 주게!" 마침내 왕은 요윈이 바로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울며 외쳤다. "데오든왕! 데오든왕!" 그러나 요머는 그들에게 외쳤다. 지금은 슬퍼 말라! 돌아가신 이는 용감했고 종말은 위대했다. 그 분의 능이 쌓아질 때 여인네들이 울 것이다. 이제 전쟁이 우릴 부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외치며 울고 있었다. "가신들은 여기 남으라. 전투에 훼손되지 않도록 이 들판에서 이분의 시신과 여기 누워 있는 그의 기사들을 영예롭게 모시고 있으라." 그리고 그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가며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그는 쓰러져 있는 자신의 누이 요윈에게까지 갔으며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잠시 심장이 화살에 관통당한 사람처럼 헉 하며 섰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으며 차가운 분노가 끓어올라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요윈! 요윈!" 마침내 그는 부르짖었다. "요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 이 무슨 악의 장난이란 말이냐! 죽음, 죽음, 죽음! 죽음이 우리 모두를 삼키는구나!" 그는 주위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도 또 성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대부대의 선두로 무섭게 박차를 가해 돌아가며 뿔나팔을 불고 공격을 명하는 커다란 외침을 토했다. 평원 전체로 그의 맑은 외침이 퍼져나갔다. "죽음! 달려라, 파멸과 이 세상의 종말을 향해 달려라!" 그의 외침과 함께 대부대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한 인들은 더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크고 무섭게 소리를 합쳐 죽음을 외쳤으며 왕의 시신을 지나 속도를 높여 거대한 파도가 밀려가는 것처럼 남쪽을 향해 돌진해 갔다. 호비트 메리아독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을 껌뻑이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허리를 숙여 요윈이 준 초록색 방패를 집어들어 등에 멨다. 그리고는 떨어뜨린 칼을 찾아 보았다. 그는 타격을 가한 후 팔이 마비되어 칼을 떨어뜨렸으며 지금도 왼팔밖에는 쓸 수 없었다. 칼은 찾을 수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건 마치 불 속으로 던져졌던 나뭇가지처럼 연기를 뿜으며 비틀리고 타오르다가 완전히 재로 변해 버렸다. 이렇게 서역인의 작품 배로우 다운즈의 칼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오래전 듀너데인이 아직 초창기였고 앙마르의 죽음의 왕국과 그 마왕이 그들의 가장 큰 적이었을 때, 북왕국에서 오래전부터 천천히 그 칼을 벼려온 사람이 그것의 운명을 알았더라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그 칼이 아니었다면, 또한 어떤 다른 훨씬 힘센 이가 그것을 사용했다면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를 적에게 가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살을 꿰뚫고 보이지 않는 무릎 뒤에 연결된 주문을 깨뜨렸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창대에 망또를 걸쳐 만든 들것 위에 왕을 모시고 도시로 향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요윈을 역시 정중하게 받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아직 죽은 가신들은 들판에서 옳길 수 없었다. 왕의 가신 중 일곱이 거기서 쓰러졌으며 그 중에는 그들 대장인 됴르와인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적과 끔찍한 짐승에게서 분리해 그들 주위에 창을 쌓아 놓았다. 그리고 후에 모든 것이 다 끝났을 때 사람들은 돌아와 그 짐승의 시체를 불태웠다. 그러나 스노우메인은 무덤을 파고 묻었으며 그 위에 곤도르와 마크의 글자로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충성된 신하 그러나 왕의 재앙 라이트푸트의 새끼, 쾌속의 스노우메인 스노우메인의 무덤에는 풀이 푸르게 잘 자랐지만 그 짐승이 탄 땅은 언제까지나 검었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이제 천천히 그리고 슬프게 메리는 운구인들 옆을 걸어갔으나 더이상 전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지쳤고 고통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그의 팔은 냉기로 떨렸다. 바다로부터 폭우가 밀려와 마치 모든 것이 데오든과 요윈을 위해 우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회색의 눈물이 도시의 화염을 끄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곤도르인의 선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돌 암로스의 왕자 임라힐이 그들 앞으로 말을 몰아 왔다. "그대들은 뭘 운반하고 있소, 로한의 친구들?" 그가 외쳤다. 그러자 로한인들이 답했다. "데오든왕이오. 그분이 돌아가셨소. 그러나 이젠 요머왕께서 전장으로 달려가셨소. 바람에 나부끼는 흰 투구깃털을 단 분이오." 그러자 왕자는 말에서 내려 왕과 그의 위대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시신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그리고 일어서서는 요윈을 보고 놀라 물었다. "분명히 이건 여인이 아니오? 로한에서는 여인들까지도 우리를 도우러 전쟁에 온 것이오?" 그러자 로한인들은 비통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단 한 분뿐입니다. 요머의 누이 요윈공주이십니다. 우린 지금껏 그녀가 함께 오시는 걸 몰랐고 그래서 지금 더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왕자는 비록 창백하고 차갑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손을 만졌다. 그리고는 외쳤다. "로한의 친구들! 그대들 가운데 의사는 없는가? 이분은 치명상을 입은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살아있소!" 그리고 그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신의 갑옷에 달린 팔목보호대를 그녀의 차가운 입술 앞에 대보았다. 그러자, 아! 거기엔 아주 희미하게나마 입김이 서리는 것이었다. "서두르시오!" 라고 말한 그는 도움을 요청하라고 자신의 기사 한 명을 신속하게 성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누워 있는 이들에게 몸을 숙여 작별을 고하고는 다시 말에 올라 전장으로 달려갔다. 이제 펠레노르평원에서는 싸움이 격렬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기가 부딪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말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크게 들렸다. 나팔과 트럼펫이 울렸고 무마킬들도 전장으로 내몰리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도시의 남쪽 성 아래에서는 이제 곤도르의 보병들이 여전히 그곳에 큰 군세를 형성하고 있던 모르굴의 군단을 내몰고 있었다. 그러나 기병들은 요머를 돕기 위해 동쪽으로 달려갔다. 장신의 휴린, 관문의 수장, 로사나크의 영주, 푸른 고지의 헐루인 등과 함께 아름다운 임라힐 왕자와 그의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러나 로한인들에게는 그들의 도움이 빨리 이를수록 좋은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행운은 다시 요머에게 등을 돌린 듯했으며 그의 분노가 자신을 함정으로 이끈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한 저돌적인 공세는 적의 선진을 완전히 궤멸시켰었고 그의 기사들의 거대한 쐐기 모양의 대형은 남부인들의 대열을 흐트려 적의 기병을 물리치고 보병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었다. 그러나 무마킬이 나타나자 말들은 감히 접근하려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거나 이리저리 도망쳐 버렸다. 그 거대한 야수는 싸우지도 않은 채 거대한 수성탑과 같이 버티고 서 있었기에 그 주위로 하라드인들이 몰려들었다. 더구나 하라드인들만 따져도 공세를 취한 로한인들의 세 배나 되었으며 곧 사정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오스길리아스로부터 새로운 적들이 평원으로 강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도시를 약탈하고 곤도르를 유린하기 위해 대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대장은 이미 사라졌으나 모르굴의 부관 고스모그가 그들을 전장으로 내몬 것이었다. 그들은 도끼를 든 동부인들과 간드인들 그리고 진홍빛을 띤 남부인들과 흰 눈과 붉은 혀를 가진 반(半) 트롤처럼 생긴 하라드 극변의 인간들이었다. 일부는 로한인들 후방으로 급히 밀려갔고 다른 일부는 곤도르의 병사들에게로 핍박해 나아가 로한과의 결합을 저지하고 있었다. 날씨마저도 곤도르에 등을 돌리는지 이른 낮 시간부터 큰 바람이 일어나 비를 북쪽으로 밀어 내고 햇빛이 비쳐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흔들리게 했다. 성벽 위에 있던 감시병들은 맑은 대기를 통해 저 멀리에서 공포의 대상을 보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지막 희망도 스러져 버렸다. 안두인대하는 할론드의 굴곡부에서부터 도시의 사람들이 몇 마일을 바라볼 수 있게 흐르고 있어서 눈이 좋은 사람들은 강 위로 오고 있는 배는 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실망의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반짝이는 강을 배경으로 바람을 탄 검은 선단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풍에 바람을 잔뜩 실은 검은 돛과 수많은 노로 빠르게 다가오는 거대한 전선들이었다. 사람들은 외쳤다. "움바르의 해적들! 움바르의 해적들이다! 봐! 움바르의 해적들이 오고 있어! 그렇다면 벨팔라스도 함락된 것이고 에디르와 레베닌도 넘어갔겠구나! 해적들이 밀려오고 있다! 이거야말로 종말로 향하는 마지막 일격이구나!" 사람들은 도시 안에 명령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제멋대로 종각으로 달려가 경종을 울렸다. 또 어떤 사람들은 퇴각을 알리는 트럼펫을 불기도 했다. 사람들은 외쳐 댔다. "성 안으로 돌아와! 성 안으로! 모두 죽기 전에 빨리 성 안으로 돌아와!" 그러나 전선을 빠르게 몰고 온 바람이 그 소리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로한인들에젠 그런 소식이나 경고가 사실 필요없었다. 그들 자신이 그 검은 선단을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할론드에서 채 일 마일도 안 되는 곳에서 첫번째 적들이 요머와 부두 사이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는 동안 새로운 적들이 뒤쪽으로부터 밀려나와 그를 왕자에게서 떼어 놓고 있었다. 이제 요머는 대하 쪽을 바라보고 희망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처음에 감사하던 바람에게 이젠 저주를 퍼붓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르도르의 대군은 용기를 얻었고 새로운 욕구와 분노에 사로잡혀 맹공의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제 요머의 상황은 어려워졌지만 그의 마음은 다시 맑아졌다. 그는 가능한 모든 군세를 자신의 기치 아래 모이게 하기 위해 뿔나팔을 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최대의 방어벽을 구축하여 노래로 기억될 만한 항전을 이 펠레노르평원에서 치르려 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 마크의 최후의 왕을 기억할 사람이 서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는 의문이었지만. 그는 작은 푸른 구릉으로 말을 몰아 그곳에 자신의 기치를 세워 백마가 바람에 나부꼈다. 모든 의혹과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아침햇살로 나는 칼을 높이 들고 태양 속에 노래부르며 간다. 희망의 끝으로 나는 달린다, 마음이 찢어질 때까지, 이제 분노로, 이제 파멸로, 그리고 붉은 황혼! 그는 웃으며 이 시구를 읊었다. 다시 한번 강한 전쟁의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상처입지 않았고 젊었으며, 또한 그는 왕, 거친 민족의 영주인 것이다. 보라! 그는 절망 속에서도 웃으며 다시 검은 선단을 바라보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칼을 빼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경이와 환희의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선단을 다시 본 순간 하늘 높이 칼을 치켜들며 노래를 불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를 따랐다. 그러자, 아! 놀랍게도 가장 앞장선 배 위에는 높다란 기치가 꽂혀져 있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 기치에는 흰 성수가 꽃피워져 있었다. 그것은 곤도르의 표식이며 또 그 주변엔 엘렌딜 이후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어떤 군주도 사용할 수 없었던 일곱 개의 별과 그 위를 장식한 왕관의 문양이 있었다. 그 별들은 엘론드의 딸 아웬이 보석으로 수놓은 것이기에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왕관은 미스릴과 황금으로 주조된 것이기에 아침 하늘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사자의 길을 지난 이실두르의 후계자이자 아라돈의 아들인 엘레사, 아라곤이 바다로부터 곤도르의 왕국까지 바람을 타고 온 것이었다. 로한인의 기쁨은 환호와 칼의 반짝임으로 터져 나왔으며 도시의 기쁨과 경이는 트럼펫의 음악과 종소리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모르도르의 대군은 당혹감에 사로잡혔으며 자기편 배가 적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이 마법과 같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어두운 죽음의 느낌에 휩싸였다. 운명의 조수가 다시 그들과 맞서게 된 것이며 종말이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쪽으로 돌 암로스의 기사들이 햇빛을 증오하는 트롤인간과 간드인 그리고 오르크들을 핍박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요머의 코앞에서 쫓기던 적들이 곧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전선에서 할론드의 부두로 뛰어내린 병사들이 북쪽을 향해 질풍처럼 밀려갔기 때문이었다. 레베닌, 라메돈을 비롯한 남쪽 영지의 용맹한 전사들을 이끈 레골라스와 도끼를 휘두르는 김리, 기치를 든 할바라드, 이마에 별이 있는 엘라단과 엘로히르 형제 그리고 북쪽의 순찰자들인 정의의 팔 듀너데인 등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맨 앞엔 새로 불꽃이 당겨지기라도 한 듯 빛을 발하고 있는, 고대의 용맹이 그대로 재현된 나르실, 즉 서역의 광휘 안두릴을 손에 든 아라곤이 달리고 있었으며 그의 이마엔 엘렌딜의 별이 달려 있었다. 마침내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라곤과 요머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칼을 짚고 서로를 바라보고 즐거워했다. "이렇게 우린 모르도르의 대군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나게 되었소. 내가 혼버그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아라곤이 말하자 요머가 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희망은 가끔 우릴 속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그땐 그대가 예지력을 가졌다는 걸 몰랐지요. 그러나 기대치 않던 원군은 두 배나 반가운 것이고 또 이렇게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들은 서로 굳게 손을 맞잡았다. "그렇지만 그대는 충분히 일찍 온 건 아니오. 우린 이미 많은 손실과 슬픔을 감내했으니까요." 요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걸 말하기 전에 복수부터 하도록 합시다." 아라곤이 말했고 그들은 다시 전장으로 같이 달려갔다. 아직 그들은 길고 어려운 전투를 앞에 두고 있었다. 남부인들은 대담하고 끈질긴 사람들이었으며 절망으로 열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부인들도 억세고 전쟁에 단련되어 있어 쉽게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들판 이곳저곳, 타버린 농가나 우리, 작은 구릉이나 언덕, 성벽 아래나 들판 곳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무리를 이루고 날이 거의 저물 때까지 계속 저항했다. 그러자 마침내 민돌루인산 너머로 해가 지고 하늘 전체가 새빨간 놀로 덮여 산과 언덕들이 모두 피로 물든 것같이 보였다. 대하도 붉게 물들었고 펠레노르평원의 풀들도 황혼에 붉어졌다. 그 시간이 되어서야 곤도르의 전투는 끝이 나 람마스구역 안에는 살아남은 적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하로 도망쳐 들어가 죽거나 붉은 물결에 휩쓸린 사람을 빼곤 모조리 살해당했다. 모르굴이나 모르도르로는 거의 돌아가지 못했으며 하라드로는 먼 곳으로부터 이야기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곤도르의 분노와 공포에 대한 소문만이. 아라곤과 요머와 임라힐은 도시의 성문으로 돌아갔으며 이제 그들도 기쁨과 슬픔을 잊을 만큼 지쳐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무기 다루는 힘과 기술이 뛰어났기에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분노했을 때 그들 앞으로 나서거나 감히 쳐다볼 수 있는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이들은 부상을 입었거나 불구가 되었거나 아니면 들에서 죽었다. 훠롱은 혼자 말을 잃은 채 싸우다 도끼에 살해되었고 모르손드의 둘린과 그 동생은 둘 다 무마킬의 눈을 쏘려고 사수들을 인솔해 그 괴수에 가까이 접근하다가 깔려 죽고 말았다. 아름다운 헐룬은 피나스 겔린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됐고, 그림볼드는 그림슬라데로, 정의의 팔의 순찰자 할바라드는 북쪽의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갈 구 없게 되었다. 용맹한 전사와 무명전사, 지휘관과 병사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실로 큰 전투로 그 숫자는 어떤 이야기에서도 다 헤아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먼 훗날 로한의 시인은 '문드버그의 무덤'이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읊었다. 떠오르는 태양 아래 산중의 뿔나팔소리 들었다, 남왕국에서 검들의 광휘 흘렀지. 돌의 땅으로 군마들은 질주했다, 아침 바람처럼. 전쟁은 시작됐지. 용맹한 덴겔의 후손 데오든이 쓰러졌다, 그의 황금및 홀과 푸른 초원으로, 북쪽의 대지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지, 대군의 고귀한 영주님. 하딩과 구스라프, 던헤르와 표르와인, 대담한 그림볼드, 헤르파라와 헤루브란드, 혼과 파스트레드, 먼 외지에서 싸우고 쓰러졌다. 문드버그의 무덤 아래 흙 속에 누워 있다네, 그들의 동맹자, 곤도르의 영주들과 함께. 아름다운 헐룬, 바다 옆 산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 늙은 훠롱, 꽃으로 덮인 계곡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나라 아르나크로 영원히 승리와 함께 돌아갈 수 없었어, 장대한 사수들 데루핀과 둘린, 그들의 검은 수원으로, 산 그림자 아래 모르손드의 호수로 돌아갈 수 없었어. 아침의 죽음, 해질녘의 죽음 영주들은 천천히 떠났네, 이제 영원한 잠으로, 대하 유역 밭 아래. 대하는 눈물처럼 음울하고, 은빛으로 빛나며 붉게 물결치고, 사납게 노호하며 피로 물든 물거품 황혼에 불타 올랐다. 황혼에 봉화대 불타 오르듯, 람마스 에코에 붉은 이슬 맺혔지. 제7장 데네도르의 화장 성문에서 어둠의 그림자가 물러간 후에도 갠달프는 아무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다. 그골나 피핀은 마치 짓누르던 커다란 중압감이 치워지기라도 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는 뿔나팔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자신의 가슴을 기쁨으로 채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 후 몇 년 동안 멀리서부터의 뿔나팔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패 피핀은 갑자기 자신의 임무가 생각나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갠달프는 몸을 움직여 새도우폭스에게 뭐라 이르고는 곧 성문을 통과해 나가려고 했다. "갠달프, 갠달프!" 피핀이 외치자 새도우폭스가 멈춰섰다.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건가? 흑색과 은색의 제복을 입은 자들은 영주가 허락하지 않는 한 궁성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이 도시의 법률이 아니던가?" 갠달프가 묻자 피핀은 대답했다. "그분이, 그분이 절 보냈어요. 그렇지만 전 아주 놀랐어요.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저 위에서 일어나려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영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전 그가 자살하지나 않을까, 더구나 파라마르까지 죽이려 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요.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으세요?" 갠달프는 열린 성문을 통해 내다보고는 벌써 들판에서 들려오는 전투소리를 들었다. 그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난 가야 해. 암흑의 기사는 떠났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에게 재앙을 몰고 올 거야. 난 시간이 없어." 그러자 피핀은 외첬다. "그렇지만 파라미르는요! 그는 죽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누군가가 말리지 않는다면 그를 산 채로 태우고 말 거예요." "그를 산 채로 태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빨리 말해 보게!" "데네도르는 무덤으로 갔어요. 그리고 파라미르도 데리고요. 그는 우리 모두가 타버리게 될 것이고 자기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가신들은 화장대를 만들고 그 위에 있는 영주와 파라미르를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분이 장작과 기름을 가져오라고 시킨 사이에 전 빠져나와 일단 베레곤드에게 말하고 왔지만 그는 자기 자리를 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근무중이니까요. 그리고 그가 제지할 만한 힘이 있겠어요?" 피핀은 이렇게 말을 쏟아 놓고 떨리는 손으로 갠달프의 무릎을 잡았다. "파라미르를 구할 수 없어요?" "아마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야. 그래,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면 내가 가야 하겠지. 하지만 사악함과 슬픔이 이 일에 따를 걸세. 심지어 우리 성채 안에서라도 적은 우리를 가격할 힘이 있으니까. 지금 벌어지는 일은 바로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야." 그는 이렇게 결심하자 빠르게 행동으로 들어갔다. 피핀을 붙잡아 자기 앞에 올려앉하고는 섀도우폭스에게 길을 돌리라고 말했다. 그들은 뒤쪽으로부터 전투의 소란을 들으면서 미나스 티리스의 길을 따라 올라갔다. 절망과 공포로부터 되살아난 모든 사람들이 무기를 잡고 서로 외쳐 대고 있었다. "로한이 왔다!" 지휘관들이 소리치고,부대가 집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성문으로 행진해 가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임라힐왕자는 소리쳐 그들을 불렀다. "어디고 가십니까, 미스랜더? 로한인들이 곤도르의 평원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린 모든 전력을 집결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답했다. "그대는 최대한, 아니 그 이상의 인원을 모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서두르도록 하시오. 난 가능할 때 돌아오겠소. 지금은 날 기다리지도 않을 데네도르공에게 용무가 있소. 영주 부재시니 통솔을 맡으시오." 그들은 계속 나아갔다. 궁성 가까이까지 올라왔을 때 그들은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고, 저 멀리 남쪽 하늘에서 빛을 뿌리며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앞에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너무 늦게 온 것이나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햇빛을 보고도 크게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갠달프가 말했다. "어둠은 지나갔지. 하지만 이 도시엔 여전히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궁성 문에서 그들은 경비병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베레곤드가 간 거로군요." 피핀은 약간 희망적으로 말했다. 그들은 길을 돌아 금지된 문을 향해 급히 나아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문지기가 그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살해당했으며 열쇠는 누군가가 끌러갔다. 갠달프가 말했다. "다 적이 획책한 계획에 따라 벌어진 거야. 이런 일이 그가 좋아하는 것이지. 같은편끼리 싸우게 하는 것, 충직함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 이제 그는 말에서 내려 섀도우폭스에게 마구간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내 친구, 자네와 난 벌써 전에 평원으로 달려갔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다른 일들이 날 지체시키는군. 내가 부르면 곧 달려오게!" 그들은 문을 지나 가파르게 부러진 길을 따라 걸어내려갔다. 불빛이 비쳐 길 옆으로 서 있는 긴 원주기둥들과 조상들이 회색 유령처럼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갑자기 정적이 깨지며 저 아래로부터 고함소리와 칼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리는 도시가 건설된 이래 이 신성한 장소에서 한 번도 들린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라스 디넨에 이르러 거대한 돔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섭정의 방으로 급히 다가갔다. "멈춰라! 멈춰! 이 미친 짓을 당장 멈춰라!" 갠달프는 문 앞의 돌계단으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거기엔 칼과 함께 횃불을 든 데네도르의 시종들이 있었으며 계단 제일 위쪽 현관 앞엔 흑색과 은색의 경비대 제복을 입은 베레곤드가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시종들이 문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시종 두 명이 이미 그의 칼에 쓰러져 신성한 장소를 피로 얼룩지게 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저주하며, 영주에 대한 불복종자이자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갠달프와 피핀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자의 방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데네도르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빨리, 빨리! 내가 명령한 대로 시행하라! 이 변절자들에게 날 내맡길 셈이냐! 아니면 내가 손수 해야만 한단 말이냐!" 위쪽에서 베레곤드가 왼손으로 붙잡고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그 뒤쪽으로 크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도시의 영주가 나타났다. 그의 눈에서는 불꽃 같은 빛이 흘렀고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갠달프가 계단으로 뛰어오르자 사람들은 그로부터 쓰러지듯 비켜나며 눈을 가렸다. 그가 들이닥치는 순간 마치 어두운 곳에 하얀 섬광이 밀려온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올리자 데네도르의 손에 들렸던 칼은 허공으로 날아가 뒤쪽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데네도르는 놀란 사람처럼 갠달프에게서 뒷걸음질쳤다. 마법사가 말했다. "이게 뭐요, 영주? 죽음의 집은 산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오. 그리고 성문앞의 전투로도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오? 왜 사람들이 이 신성한 곳에서 싸우는 것이오? 우리의 적이 이곳 라스 디넨에 오기라도 한 것이오?" "언제부터 곤도르의 영주가 그대에게 대답할 의무를 가지게 됐소? 또 내가 내 시종들에게 명령할 수조차 없단 말이오?"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광기와 사악함에 사로잡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의지에 대항할 수도 있소. 당신 아들 파라미르는 어디 있소?" "그는 안에 누워 있소. 불타고 있소. 벌써 불타고 있단 말이오. 그들이 내 아들의 몸에 불을 붙였소. 그러나 곧 모두가 타게 될 거요. 서부는 끝났소. 서부 전체가 거대한 화염에 휩싸일 것이고 모든 것이 멸망할 거요. 재! 재와 연기만이 바람에 날려 갈 거요." 영주를 사로잡은 광기를 확인한 갠달프는 벌써 끔찍한 일이 저질러지지나 않았나 걱정스러워 베레곤드와 피핀을 대동하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데네도르는 뒤로 물러서 안에 있는 테이블 곁에 섰다. 그들은 열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파라미르를 발견했다. 그 아래에는 장작이 높이 쌓여 모조리 기름에 젖어 있었으며 심지어 파라미르의 옷과 담요에도 기름이 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연료에 불이 붙여지지는 않았다. 갠달프는 자신의 회색 옷 아래는 빛의 힘을 숨겨놓듯, 내부에 간직했던 힘을 드러냈다. 그는 나뭇단 위로 뛰어올라 환자를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다시 뛰어내려 그를 안은 채 문으로 갔다. 그 순간 파라미르는 신음소리를 토하며 꿈속에서 아버지를 불렀다. 데네도르는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의 눈에선 불꽃이 사라졌다. 그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을 내게서 데려가지 마오! 그앤 날 부르고 있어."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가 부르지. 그러나 당신이 아직 그에게 올 수 없소.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이제 삶을 찾아야 하고, 어쩌면 못 찾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이 할 일은 당신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곧장 가는 거요. 거기서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도 그 사실을 마음속으로부터 알고 있겠지." "그는 다시 깨나지 못해. 전쟁은 소용없어. 왜 우린 더 살길 바라야만 하는 거지? 왜 우린 나란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거지?" "곤도르의 섭정, 당신에겐 당신의 죽음의 시간을 명령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소. 암흑의 힘의 지배를 받는 이방의 왕들만이 스스로를 오만과 절망 속에서 죽이고, 동족을 죽음에서 편히 하기 위해 살해하는 그런 짓을 하오." 이렇게 말하고 파라미르를 안은 채 죽음의 방문을 나선 갠달프는 자신이 가져다 놓았던, 현관 앞에 놓여 있는 들것 위에 그를 눕혔다. 데네도르는 그들을 따라나와 몸을 떨며 서서 아들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모두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고뇌에 가득찬 영주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몸을 비틀거렸다. 갠달프가 말했다. "갑시다! 우린 도움이 필요하오. 아직 당신이 할 일이 많이 있소." 그러자 갑자기 데네도르는 웃었다. 그는 다시 몸을 당당하고 곧게 세우며 방 안의 테이블로 재빨리 돌아가 베고 있던 베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문 쪽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그 덮개를 벗겼다. 그러자, 아! 그는 손에 팔란티르신석을 들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동안 신석은 그 내부에서 뿌려지는 광휘로 점점 밝은 빛을 내뿜는 것처럼 보였으며, 붉게 비춰진 영주의 야윈 얼굴은 마치 단단한 돌로 깎은 것 같았고 검은 그림자로 그늘져 고귀하고 오만하며 또한 끔찍해 보였다. 그의 눈이 빛을 발했다. "오만과 절망! 그대는 백색탑이 눈 멀었다고 생각했는가? 아니야. 난 그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아 왔어, 이 회색 바보야. 그대의 희망은 단지 무지에서 나온 거지. 가서 열심히 치료해 보시지! 가서 싸우라고, 헛되이. 하루쯤은 평원에서 작은 승리를 거둘 여지가 있을 거야. 그러나 거기 쏟아지고 있는 힘에 대항하는 것에는 승리가 있을 수 없어. 이 도시에는 지금 그 손의 첫번째 손가락이 뻗쳐졌을 뿐이야. 동부 전체가 움직이고 있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의 희망이었던 바람이 그대를 속여 안두인 위로 검은 돛을 띄워 보내고 있어. 서역은 끝난 거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모두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거야." "그런 충고는 적의 승리를 확실하게 해줄 뿐이오." 갠달프가 이렇게 말하자 데네도르는 비웃듯 대답했다. "그럼 희망을 계속 갖고 있게! 내가 그대를 모르는 줄 아는가, 미스랜더? 그대의 야망은 나 대신 통치하는 것이지. 북쪽, 남쪽, 아니 서쪽의 모든 권좌 뒤에 서서. 난 그대의 마음과 계략을 읽어 왔지. 그대가 이 하플링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한 사실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내 방 안으로 염탐을 하라고 들여보낸 것을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대화 속에서도 나는 그대의 원정대원 전부의 이름과 목적을 알아 냈지. 그래 ! 그대는 왼손으로 나를 모르도르에 대한 방패막이로 잠시 사용하고 오른손으로는 북쪽의 그 순찰자를 내 자리에 앉히려 하는 거야. 그러나 난 그대에게 말하네, 갠달프 미스랜더. 난 그대의 도구가 되지는 않을 거야. 난 아나리온 왕족의 대리 섭정이란 말이야, 난 벼락 왕족 아래의 늙은 시종 자리로 내려가지는 않을 거야. 그가 설혹 자신의 권리을 내게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단지 이실두르의 후손일 뿐이야. 나는 그런 오래전부터 권위와 왕권을 박탈당한 누더기집안의 마지막 후손에게 고개를 숙이진 않을 거야." "그대의 의지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난 내 평생 진행되어 온 대로 해갈 거야. 그리고 내 앞 선조들이 해온 대로. 이도시의 평화 속에서 군주가 되고 그 자신의 의지가 있는, 마법사의 제자가 아닌 아들에게 대를 이어주는 것이지. 그러나 운명이 이것을 방해한다면 난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줄어든 삶도 아니고, 줄어든 사랑도 아니고, 줄어든 명예도 아니지." "내가 보기엔 성실하게 임무를 물려받은 섭정이라면 사랑이나 명예가 감소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적어도 당신은 당신 아들이 아직 죽음이 확실치 않은 때에 그의 선택을 박탈할 권리는 없지." 이 말을 들은 데네도르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신석을 팔 아래 낀 채 작은 칼을 꺼내 들고 들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베레곤드가 뛰어들어 파라미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데네도르가 외쳤다. "그래! 그대는 이미 내 아들의 마음 절반을 훔쳤었지. 그런데 이젠 내 기사들의 마음마저 훔쳤고 급기야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게서 아들을 훔쳐 가게 하는구나. 그렇지만 적어도 여 기서만은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내 자신의 종말을 조정할 순 없어." 그는 자신의 시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리로 와라! 너희들 모두 겁쟁이가 아니라면 이리 와라!" 그러자 그들 중 두 명이 계단을 달려 올라와 그에게로 왔다. 그는 한 사람의 손에서 재빨리 횃불을 뺏어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갠달프가 말릴 겨를도 없이 그는 연료에 홰를 갖다대어 금방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자 데네도르는 테이블로 뛰어올라 화염과 연기에 휩싸인 채 발 밑에 있던 섭정의 지팡이를 집어들고는 무릎에 대고 부러뜨렸다. 그 조각을 불 속으로 던진 후 그는 몸을 굽혀 가슴 위에 양 손으로 팔란티르신석을 움켜잡은 채 테이블 위에 몸을 눕혔다. 후에 전해지기로는 그 신석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지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신석에서 다만 불꽃에 타버린 늙은 손들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갠달프는 슬픔과 경악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문을 닫았다. 잠시 그는 생각에 잠겨 조용히 문턱에 서 있었으며 바깥의 다른 사람들은 안에서 나오는 불길의 탐욕스런 소음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데네도르의 비명이 들려왔으며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시는 살아있는 사람의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갠달프가 말했다. "이렇게 엑델리온의 아들 데네도르는 가버렸구나." 그리고 그는 그곳에 아연실색한 채 서 있는 베레곤드와 영주의 시종들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또 이렇게 그대들이 알고 있던 곤도르의 나날도 가버렸지. 좋게건 나쁘게건 이제 그건 끝났으니까. 여기선 안 좋은 일이 있었지. 그렇지만 이제 그대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날려 버리게. 그건 모두 적이 조정한, 그가 만든 일이니까. 그대들은 그대들과는 무관한 상호대립적인 의무라는 그물에 잡혀 있던 거니까. 그러나 맹목적인 복종에 눈멀었던, 영주의 가신 제군, 생각해 보게. 만일 베레곤드의 반역이 아니었던들 백색탑의 대장, 파라미르도 역시 불타 버리고 말았을 거야. 이 불쾌한 장소에서 쓰러진 그대들의 동료들을 안고 나가게. 우리는 곤도르의 새 섭정 파라미르공을 평화로이 쉴 수 있는 곳으로, 또는 그의 운명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편히 죽을 수 있는 곳으로 모셔갈 테니." 갠달프와 베레곤드는 들것을 들고 요양원으로 운반했으며 그들 뒤에는 고개를 떨군 피핀이 걸어갔다. 그러나 영주의 시종들은 무엇에 맞은 사람들처럼 사자의 집에선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갠달프가 라스 디넨의 끝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자 둥근 지붕이 갈라져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돌이 쏟아져 내림과 동시에 사자의 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은 줄어들지 않고 폐허 속에서 춤추듯 타올랐다. 그러자 공포에 질린 시종들이 도망쳐 나와 갠달프를 따랐다. 마침내 그들은 입구로 돌아왔다. 베레곤드는 슬픈 얼굴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난 이 일을 영원히 후회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미친 듯 조급했는데 그는 내말을 듣지 않고 칼을 들이댔거든" 하고 그는 그 죽은 문지기에게서 뺏았었던 열쇠를 꺼내 문을 잠근 후 말했다. "이것은 이제 파라미르공께 드려야지."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임라힐왕자가 영주 부재중에 통치를 하고 있네. 그러나 그가 여기 없으니 우선 내가 관리를 할 수밖에. 난 그대가 그 열쇠를 도시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간직하도록 명하겠네." 이제 그들은 도시의 높은 구역으로 들어와 아침 햇살 속에 요양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원래 앓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들이었는데 지금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 건물들은 제6원형구역 안의 남쪽 성벽 쪽으로 궁성 가까이에 있었으며 그 주변은 도시에서는 유일한 정원과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엔 의술이 있거나 의사를 돕는 데 익숙하기에 미나스 티리스에 머무는 것이 유일하게 허용된 몇몇 부인들이 살고 있었다. 갠달프와 그 일행이 요양원 정문으로 들것을 운반해 가고 있을 때 저 아래 성문앞 들판으로부터 찢어질 듯 커다란 비명소리가 일어나 대기를 꿰뚫고 바람에 실려 멀어져갔다. 그 비명은 너무 끔찍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잠시 멈춰섰으며 그 소리가 사라져 가자 갑자기 그들은 어둠이 동쪽으로부터 밀려온 이래 느껴 보지 못했던 어떤 희망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사방이 조금 더 환해지고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온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갠달프의 얼굴은 어둡고 슬퍼 보였으며 베레곤드와 피핀에게 파라미르를 요양원 안으로 운반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옆의 성벽으로 올라가 새로 떠오른 태양아래 흰 조상처럼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시각으로 거기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았다. 요머가 전장의 선봉에서 달려나와 들판에 쓰러져있는 사람들 곁에 선 것을 본 그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망또로 몸을 가리고는 성벽에서 내려왔다. 요양원에서 나온 베레곤드와 피핀은 갠달프가 생각에 잠겨 문 앞에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말했다. "친구들, 그리고 이 도시와 서역의 모든 이들이여! 커다란 슬픔과 위대한 무용이 이루어졌다. 우린 울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뻐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네. 우리 적들의 대장이 파멸되어 그대들은 그의 마지막 절망의 울부짖음을 들은 것이야. 그러나 그는 거대한 재난과 손실을 끼치고 사라졌어. 데네도르의 광기만 아니었던들 내가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적의 손길이 이렇게 길게 뻗칠 줄이야! 아! 그렇지만 이젠 그가 이 도시의 심장부에까지 힘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비록 섭정들은 그들 자신들만의 비밀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겠지만 오래전부터 난 이 백색탑에도 오탕크와 마찬가지로 일곱 신석 중의 하나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 지혜로웠던 시절에는 데네도르도 그 자신의 한계를 아니까 그 신석을 사용하거나 사우론에게 도전하려고는 안했지. 그러나 그의 지혜는 사라졌어. 내 생각엔 자신의 영토가 점차 위험해지자 그는 신석을 보고 결국 속게 된 것 같아. 보로미르가 떠난 후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을. 그는 암흑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을 만큼 강대하긴 했지만, 또한 그 힘이 그에게 보게 한 이상을 보지는 못한 것이지. 그가 얻은 지식은 틀림없이 그에게 도움이 된 적도 있을 거야. 그러나 그에게 보여진 모르도르의 강대한 힘의 영상은 그의 마음이 결국 파멸될 때까지 절망감을 계속 자라게 한 것이야." "이제 저도 그 이상스럽던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피핀은 이렇게 말하면서 생각나는 기억에 몸을 떨었다. "파라미르가 누워 있던 방에서 영주가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난 그가 늙고 지쳐버린 것같이 변했다고 느꼈어요." 그러자 베레곤드도 말했다. "우리들 여럿이 탑의 최상층에서 이상한 빛을 본 것이 바로 파라미르께서 탑으로 옮겨진 바로 그 시간이었지요. 하지만 우린 그 전에도 그 빛을 봤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오래전부터 영주께서 때때로 그의 적과 마음 속의 싸움을 벌이신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아! 그렇다면 내가 추측한 것이 옳았군! 사우론의 힘이 미나스 티리스에 침투한 거야. 그래서 난 여기 머물러 있었던 거지. 또한 앞으로도 당분간 머물러야 하겠어. 파라미르뿐 아니라 다른 돌볼 일이 또 있을 것 같으니까. 이제 나는 저기 온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저 평원에서는 나를 매우 슬프게 한 일이 벌어졌어. 또 더 큰 슬픔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자, 나와 같이 가세, 피핀! 하지만 베레곤드, 자네는 궁성으로 돌아가서 수비대장에게 일어난 일들을 말해야겠지. 걱정되는 건 그가 원칙대로 자넬 경비대에서 쫓아내지나 않을까 하는 건데. 그렇지만 그에게 내 충고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면 자넨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한다고 전하게. 자네 대장의 경호와 시중을 들게 말이야.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깨어난다면 자네가 그 옆에 있어야지. 그를 불에서 구해낸 건 바로 자네니까. 자, 가게! 난 곧 돌아올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피핀과 함께 도시 하층지대로 내려갔다. 서둘러 가고 있을 때 바람이 회색 비를 몰고와 불들을 다 꺼버려 그들 앞에는 커다랗게 연기만 솟아오르고 있었다. 제8장 요양원 미나스 티리스의 파괴된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메리의 눈은 눈물과 피로로 안개가 낀 듯했다. 그는 사방에 널려 있는 잔해와 시체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불길과 연기 그리고 악취가 퍼져 있었다. 많은 기계들이 불타거나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며 시체들도 마찬가지였고 여기저기엔 거대한 남쪽의 야수들이 반쯤 타거나 돌에 맞아 죽었거나 아니면 용감한 모르손드 궁수들의 화살에 눈이 관통된 채 나자빠져 있었다. 흩뿌리던 비가 잠시 멈춰 태양이 다시 비췄다. 그러나 도시 하층지대는 여전히 악취 섞인 연기에 가득차 있었다. 벌써 사람들은 전투의 잔해들을 치워 길을 정리하고 있었다. 성문으로부터 환자용 침대가 운반되어 왔다. 그들은 부드러운 베개 위에 요윈을 조심스럽게 눕혔고 왕의 시신 위엔 커다란 황금빛 덮개를 덮었다. 그리고 사방을 횃불로 둘러싸 햇빛속에서 여리게 비치는 횃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렇게 데오든과 요윈은 곤도르에 이르렀으며 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타버린 원형구역의 재와 연기 속을 지나 돌길을 따라 계속 위로 올라갔다. 메리에게는 그 길이 끔찍한 꿈속에서 잘 알 수 없는 희미한 목적지를 향하듯 끝없이 길고 의미없는 여행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앞의 횃불빛이 깜빡이다가 사라져 버려 그는 어둠 속에서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건 무덤으로 가는 길이야. 우린 영원히 거기 있게 되겠지.' 그러나 갑자기 그의 꿈속으로 생기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메리! 널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는 눈을 들었고 눈 앞 안개가 조금 걷혔다. 피핀이었다! 그들은 좁은 길에서 얼굴을 맞대고 서 있었고 그 길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훔치고 나서 물었다. "왕은 어디로 모셨지? 요윈공주님은?" 그는 비틀거리며 문턱에 주저앉아 다시 울기 시작했다. 피핀이 말했다. "그들은 궁성으로 올라갔어. 난 네가 걸으면서 잠이 들어 길을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들 사이에서 널 찾을 수가 없기에 갠달프가 날 보낸 거야. 불쌍한 메리! 널 다시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넌 아주 지친 것 같은데. 더이상 말 시켜서 피곤하게 하진 않을게. 그렇지만 이것만 말해 봐. 너 어디 다친 거니?" "아니. 응. 아니. 난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오른손은 그를 찌른 다음부터 쓸 수가 없어, 피핀. 내 칼은 나무조각처럼 타버리고 말았어." 피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래,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나랑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내가 널 안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넌 더이상 걷는 건 무리 같아. 이렇게 걸어오게 해선 안 되는 건데 말이야. 그렇지만 넌 그들을 이해해야지. 이 도시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거든, 메리. 전장에서 돌아오는 불쌍한 작은 호비트 한 명쯤은 못 보고 지나갈 정도로 말이야." "못 보고 지나가는 게 항상 나쁜 건 아니야. 난 아까도 못 보고 지나쳐졌거든, 그...... 아! 안 돼, 안 돼. 난 말할 수 없어. 도와 줘, 피핀! 다시 어두워져 가. 내 팔이 너무 차가워 졌어." "내게 기대, 메리! 자, 가자! 한발씩. 그리 멀지 않아." "날 묻으러 가는 거니?" "사실 그렇진 않아." 피핀은 가슴 속이 두려움과 연민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하게 들리도록 애쓰며 말했다. "아니야, 우린 요양원으로 가고 있는 거야." 그들은 큰 건물과 4구역의 성벽 사이의 길에서 꺾어져 궁성으로 가는 주도로로 다시 접어들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발씩 한발씩 걸어올라갔으며 그 동안 메리는 비틀거리며 뭔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거기까지 데려갈 수 없겠는데.' 피핀은 생각했다. '좀 도와 줄 사람이 없을까? 여기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때 한 소년이 뒤에서부터 뛰어오고 있었다. 옆을 지나칠 때 보니 바로 베레곤드의 아들 베르길이었다. 피핀이 외쳤다. "이봐, 베르길! 어디 가는 거지? 널 다시 보게 되니, 또 아직 살아있는 걸 보니 기쁘구나." "난 지금 의사들에게 심부름을 가고 있어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베르길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거기 가서 그들에게 내가 전장에서 돌아온 호비트 - 넌 페리안이라 알고 있겠지만 - 를 데리고 있다고 전해만 주면 돼. 내 생각엔 그가 더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거든. 만약 미스랜더가 거기 있으면 이 소식을 기뻐할 거야." 베르길은 계속 달려갔다. '난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하고 피핀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메리를 조그맣게 볕이 든 보도 위에 조용히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아 메리의 머리를 무릎으로 받쳐 주었다. 그는 친구의 몸과 팔, 다리를 부드럽게 쓸어 보고 손을 잡았다. 그의 오른손은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졌다. 갠달프 자신이 직접 그들을 찾으러 나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는 메리에게 몸을 굽혀서 이마를 살짝 만져 보고는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말했다. "메리는 이 도시로 영예롭게 모셔졌어야 했는데. 그는 내 믿음에 훌륭하게 답을 한 거야. 만약 엘론드가 내게 양보하지 않고 자네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슬픔은 더 커졌을 거야." 그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전쟁이 불안한 상태에 있는데 또 내 손엔 책임이 지워졌군." 이렇게 파라미르와 요원과 메리는 요양원의 침대에 눕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보살핌을 잘 받았다. 이 시대의 모든 학예는 고대의 전성기에 비하면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곤도르의 의술만은 여전히 발달되고 있었기에 상처나 고통, 그리고 바다 동쪽의 모든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 기술이 뛰어났다. 물론 노쇠만은 예외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도 아무런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도 점차 다른 곳의 인간들보다 긴 수명을 누릴 수 있다고는 할 수 없게 되어 갔으며 그들 중에서 아주 순수한 혈통을 유지한 몇몇 가문을 제외하면 백 살 이상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원기를 유지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기술과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치료할 수 없는 질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나즈굴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암흑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 증상을 보인 사람들은 천천히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어가 아무 말도 못하게 되고 죽은 듯이 차가워지다가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보기에는 하플링과 로한의 공주에게 이 질병이 깊이 침투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아침이 가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꿈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치료를 담당한 사람들은 혹시 그들의 상처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그들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빼놓지 않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는 얼굴에 회색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라미르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갠달프는 이 사람 저 사람 돌보면서 다녔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바를 그에게 다 말해 주었다. 이렇게 바깥에서는 미심쩍은 희망과 이상한 소문들과 함께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갠달프는 여전히 기다리고 돌보며 나가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붉은 황혼이 하늘에 가득차고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환자들의 회색빛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그들 얼굴이 부드럽게 물들어 마치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단순한 희망의 장난이었다. 요양원에서 일하는 여인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부인 이오레스가 파라미르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울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사랑했기에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말했다. "아! 만인 이분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사람들이 말하듯이 옛날처럼 왕이 계셨더라면 옛 전설에 말하길 '왕의 손은 의사의 손'이라 했는데. 또한 그것으로 적법한 왕이라는 것이 밝혀진다고 하는데."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갠달프가 말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 될 거요, 이오레스! 당신 말대로라면 이들에게 희망이 있지. 아마 왕이 곤도르에 정말로 돌아왔는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도시에 전해진 이상한 소문을 듣지 못했소?" "전 여기저기서 울고 비명지르는 소리에 신경쓰기에 너무 바빴지요. 제가 바라는건 오로지 저 중얼거리는 병마가 이 집에 들어와 환자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그러자 갠달프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벌써 하늘의 놀은 다 타버려 황혼에 물들었던 산들은 색이 희미해지고 평원 위로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이제 해가 지고 있을 때 아라곤과 요머와 임라힐은 다른 지도자들과 기사들과 함께 도시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아라곤은 말했다. "저 거대한 화염에 싸인 황혼을 보시오! 저것은 많은 것들의 종말과 몰락의 표시이자 세상 조류의 변화를 뜻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도시와 영토는 아주 오래 섭정의 통치 하에 평화로웠으니 내가 초청받지 않은 이런 상황에 들어간다면 전쟁중에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의심과 논란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난 우리나 또는 모르도르 어느 한 편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까지 입성하지도, 또 내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겠소. 난 이 평원에 막사를 세우고 도시의 영주가 맞이하러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 그러나 요머가 말했다. "이미 그대는 왕의 기치를 올렸고 앨렌딜 왕가의 표식을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그대 권리에 대한 도전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아니오. 난 다만 시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할 뿐이오. 그리고 또한 나는 적과 그 부하들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싸울 마음이 없소." 그러자 임라힐왕자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데네도르의 친족 한 사람이 조언을 해드려도 상관없으시다면, 제생각엔 공께서 현명하게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강한 의지와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고 또 늙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분은 그 아들이 가버린 이래 이상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전 공을 마치 걸인처럼 이렇게 남아 계시게 할 순 없습니다." 아라곤이 대답했다. "걸인이 아니오. 도시와 돌건물에 익숙지 않은 순찰 자들의 지도자라 여기시오." 그는 자신의 기치를 접어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북왕국의 별을 떼어서는 엘론드의 아들들에게 맡겼다. 임라힐왕자와 로한의 요머는 그와 작별하고 몰려 있는 사람들을 지나 궁성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탑의 홀에 이르러 설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의자가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단 앞 의식대(儀式臺)위에 마크의 데오든왕이 안치된 것을 보았다. 그 주위에는 열두 개의 횃불이 꽂혀 있고 로한과 곤도르의 기사 열두명이 서 있었다. 의식대의 커튼은 푸른색과 흰색 이었으며 시신 위에는 가슴까지 황금빛 이불이 덮여져 그 위에 칼이 놓이고 발치엔 방패가 놓여졌다. 횃불빛이 그의 백발에 닿아 마치 분수 속의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얼굴은 아름답고 젊어 보였다. 그러나 거긴 젊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초월적 평화로움이 깃들여 있어 마치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왕 옆에 조용히 서 있다가 임라힐이 말했다. "섭정은 어디 계신가? 또 미스랜더는 어디 가신 거지?" 기사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곤도르의 섭정께서는 요양원에 계십니다." 그러자 요머가 물었다. "내 누이 요윈은 어디 모셔 놓았는가? 분명히 왕 옆에 격식에 부족함없이 모셔졌으라 생각했는데? 그녀를 어디다 모신 건가?" 그러자 임라힐이 말했다. "하지만 요윈공주는 이리로 모셔올 때까지는 살아 계셨소. 아직 모르고 계셨소?" 그러자 기대치 않았던 희망과 함께 새로운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급히 홀에서 나갔다. 임라힐왕자도 그를 따랐다.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저물어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그리로 갠달프와 회색 망또로 가린 사람이 같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갠달프에게 인사하고 물었다. "우린 섭정을 찾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가 요양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가 무슨 상처를 입었나요? 그리고 요윈,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녀는 안에 누워 있고 아직은 살아있지만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소. 그렇지만 파라미르공은 그대들이 들은 대로 악의 일격에 부상당했소. 지금은 그가 섭정이오. 데네도르는 가버렸으니까. 그의 집은 재가 되었소."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슬픔과 경악에 잠겼다. 그러나 임라힐이 말했다. "곤도르와 로한이 같은 날 각각 영주를 잃었다면 승리는 기쁨을 잃은 것이고 비싸게 치러진 것인데요. 요머공이 지금 로한인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도시는 그럼 그동안 누가 다스리게 되지요? 아라곤공께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망또로 가리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는 이미 왔소," 그러면서 문 옆 등불 아래로 걸어 나오자 그들은 바로 그가 아라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갑옷 위에 로리엔의 회색 망또를 걸치고 있었으며 갈라드리엘의 푸른 보석 이외의 다른 표식은 달고 있지 않았다. "갠달프께서 청하시기에 왔소. 그러나 지금의 난 아르노르의 듀너데인의 지도자일 뿐이오. 그러니 파라미르가 일어날 때까진 돌 암로스의 영주가 도시를 통제하는게 원칙이겠지요. 그렇지만 난 우리가 적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은 갠달프가 우리 모두를 지휘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갠달프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급박하니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갑시다.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건 단지 아라곤께서 오시는 것뿐이오. 곤도르의 현명한 부인 이오레스가 말했소. '왕의 손은 의사의 손, 그것으로 적법한 왕임을 알리라.'" 아라곤이 앞장서서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은 뒤를 따랐다. 문에는 궁성의 제복을 입은 두 명의 경비병이 서 있었다. 한 명은 키가 컸으나 다른 한 명은 어린이 정도의 크기밖에 안 돼 보였다. 그는 그들을 본 순간 놀람과 기쁨으로 크게 소리쳤다. "스트라이더! 얼마나 멋진 일이야! 제가 검은 배들 안에 당신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해적들이라고만 외치면서 제 말을 듣지 않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한 거죠?" 아라곤은 미소를 지으며 호비트의 손을 잡았다. "정말 잘 만났어! 그렇지만 지금은 여행 얘기할 시간은 아닌 것 같아," 그러나 임라힐이 요머에게 말했다. "우리 주군을 저렇게 부르는 모양이지요? 아마 주군은 다른 이름으로 왕관을 쓰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아라곤이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말했다. "바로 그렇소. 난 고대의 언어로는 엘레사, 엘프스톤 그리고 엔비냐타르 즉 부활자요." 그리고는 가슴에 달렸던 푸른 보석을 손으로 잡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만약 내 왕가가 다시 세워질 수 있다면 그 이름은 스트라이더가 될 것이오. 고대어로 하면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을 거요. 나와 내 후손들은 텔콘타르라 불릴 겁니다. " 말을 마친 그들은 요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병실로 가는 동안 갠달프는 요윈과 메리아독의 용감한 행적과 병세를 들려 주었다. "오랫동안 난 그들 곁에 있었는데, 처음 죽음 같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는 마치 꿈속에서처럼 뭘 중얼거리고 있었소. 난 그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지요." 아라곤은 먼저 파라미르에게로 가 보았고 그 다음 요윈, 마지막으로 메리를 살펴보았다. 환자들의 얼굴과 상처를 다 보고나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난 내게 주어진 모든 힘과 기술을 다 쏟아야 하겠소. 우리 동족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제일 큰 힘을 가진 엘론드가 여기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매우 지쳤으며 또한 슬픔에 잠긴 것을 본 요머는 말했다. "우선 공께선 좀 쉬셔야 하겠소. 그리고 적어도 뭘 좀 드셔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아라곤은 대답했다. "아니오. 지금 이 세 사람, 특히 파라미르에겐 시간이 없소. 최대한 서둘러야 합니다. " 그리고는 이오레스를 불러 물었다. "이 요양원에 약초가 저장되어 있소?" "예, 있긴 있습니다만 제가 필요하리라 생각하는 것에는 좀 부족할 거예요. 그렇지만 더이상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는 잘 모르지요. 이 끔찍한 불에 다 타버려서 모든 게 다 엉망이 돼버렸어요. 더구나 심부름할 아이들은 너무 적고 게다가 길도 전부 막혀 버렸거든요. 로사나크로부터 이곳에 운송이 끊긴 진 이제 셀 수조차 없이 오래되었으니까요! 하여튼 왕권을 가진 분은 잘 아시겠지만 저흰 이 요양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때가 되면 그건 알게 되겠지. 지금은 말재주부릴 시간이 아니니까. 여기 아델라스는 있소?"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적어도 그런 이름의 약초는 모릅니다. 제가 가서 약사에게 물어 보고 오지요. 그 사람은 옛날 약초 이름도 다 아니까요." "그건 일명 왕의 풀이라고도 하오. 아마 그대는 그 이름은 알겠지. 요새 시골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니까." "아, 그거요! 그럼요. 처음부터 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제가 알았겠지요. 그런데 그건 저희한테 없는데요. 확실합니다. 저흰 그게 무슨 약효가 있다는 소린 들어 보질 못했거든요. 사실 전 숲에서 그 풀을 보면 제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왕의 풀, 이건 참 이상한 이름이야. 왜 그렇게 불리는지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왕이라면 내 정원에 더 아름다운 꽃들을 심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 풀은 찧어 보면 냄새는 달콤하지요 달콤하다는 게 적당한 표현이라면 말씀이에요. 그러니 어쩌면 몸에 좋을지도 모르지요." "아주 몸에 좋지. 그렇다면 부인, 당신이 정말 파라미르공을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이 도시에 그 약초가 있다면 당신 혀만큼만 빨리 내게 가져오시오." 그러자 옆에 있던 갠달프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내가 이오레스를 내 뒤에 태우고 로사나크까지 가겠소. 그녀는 날 그 숲으로 안내해야지, 물론 동생들한테는 말고. 섀도우폭스는 그녀에게 '빨리' 라는 말의 참뜻을 가르쳐 줄 게야." 이오레스가 나가자 아라곤은 다른 부인들에게 물을 데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파라미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파라미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쉬기조차 거의 힘들어 보였다. 아라곤은 갠달프에게 말했다. "그는 기력이 거의 고갈되었소. 그렇지만 이건 부상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걸 보시오! 상처는 아물었거든. 그대가 생각하듯이 그가 나즈굴의 타격을 받았다면 그는 아마 그날 밤에 죽었을 거요. 이 상처는 네 생각엔 남부인의 화살에서 온 것 같아요. 누가 그걸 뽑았나? 누가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임라힐이 대답했다. "제가 뽑았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지혈했습니다. 하지만 전 다른 일이 급했기에 그 화살을 보관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가 기억하기에 남부인들이 쓰는 화살 같았습니다. 그 상처는 그리 심하거나 치명적인 게 아니었으니 제 생각엔 그 어둠 위로부터 화살이 날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열과 고통은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라곤이 대답했다. "탈진과 아버지의 현 상태에 대한 슬픔 그리고 부상과 암흑의 입김, 이런 것들이 다 합쳐진 것 같소. 그는 이번 외성의 전투에 나가기 전에도 이미 어둠의 그림자 아래서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을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오. 아마 그가 외각 요새를 지키려 싸우고 있었던 중에도 암흑이 서서히 그를 침식해 왔을 거요. 그의 노력 덕에 내가 조금은 더 빨리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로 약사가 들어왔다. "귀인께서 흔히 시골사람들이 왕의 풀이라 부르는 약초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전문용어로는 아델라스라고 하는 것이고 또 발라의 언어를 아는 사람들은......" 아라곤이 말을 가로챘다. "내가 찾았소. 그대가 그걸 아세아 아라니온(왕의 풀에 해당하는 발라어)이라 하든 왕의 풀이라 하든 그걸 갖고 있기만 하다면 무슨 문제겠소." "죄송합니다. 전 공께서 단순한 전투지휘관이 아닌 현자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 저흰 여기서 아주 심한 환자나 부상병만을 돌보고 있기에 그런 것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린 그 풀에서 탁한 공기에 좀 좋은 향기를 주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머리를 맑게 하는 정도 이외의 약효는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우리의 착한 이오레스 같은 여인네들이 뜻도 잘 모르고 되풀이하는 고대의 시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별문제겠습니다만. 어둠의 숨결이 불어올 때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그리고 모든 빛이 사라졌을 때 아델라스여 오라! 아델라스여 오라! 죽어가는 이에게 생명을 왕의 손에 네 몸을 누이고! 이건 제 생각엔 노파들의 기억 속에서 잘못 전해져 온 엉터리 시가 아닐까 의심스럽니다만, 그 시에 정말 무슨 뜻이 있는가는 귀인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어떤 늙은이들은 그 약초의 향기를 두통에 쓰기도 한답니다." "그렇다면 왕의 이름으로 명하니 그대는 즉시 가서, 그대보다 학식은 없을지 몰라도 더 현명한 그 노인을 데려오도록 하라." 하고 갠달프가 소리쳤다. 이제 아라곤은 파라미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이마에 한 손을 올려 놓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마치 어떤 큰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라곤의 얼굴은 무척 힘드는 사람처럼 점점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으며 가끔 파라미르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때마다 점점 목소리가 약해져 마치 아라곤 그 자신이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혼자 어떤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며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베르길이 뛰어들어와 옷에 싸온 여섯 장의 풀잎을 내놓았다. "왕의 풀이에요. 그렇지만 그리 신선한 것 같진 않아요. 이 풀들은 적어도 두 주일 전에 딴 것이거든요 그래도 약효가 있을까요?" 그는 파라미르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라곤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효력이 있을 게다. 최악의 상태는 지났으니까. 자, 이제 좀 쉬거라." 그가 풀잎 두 장을 들어 손바닥 사이에 넣고 입김을 불며 비벼 갈자 거기에선 곧바로 아주 생생한 향내가 풍겨나 방 안을 가득 채워 마치 공기 그 자체가 깨어나 진동하며 기쁨을 쏟아 내는 듯했다. 그 잎들을 끓는 물이 담긴 병에 집어넣자 당장에 모든 사람의 기분이 밝아졌다. 향내는 모든 사람에게 꿈결 같은 봄의 아름다운 세계가 보아는 어떤 대지 위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태양 아래 신선한 아침을 맛보는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라곤은 새 힘을 얻은 사람처럼 일어나 웃음을 지으며 물이 담긴 병을 파라미르의 얼굴 아래 갖다댔다. 이오레스가 옆에 서 있는 한 여인네에게 말했다. "자, 봐! 누가 저걸 믿을 수 있을까? 내 생각보다 더 효력이 있는 것 같아. 저건 마치 내가 처녀였을 때 본, 어느 왕이라도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을 찾기 힘든 임로스 멜루이의 장미꽃 같아." 갑자기 파라미르가 몸을 움직이며 눈을 떠 그 위에 몸을 숙이고 있는 아라곤을 보았다. 그러자 그를 알아본 듯한 표정과 그에 대한 애정이 눈에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주군, 주군께서 절 부르셨습니다. 그래 왔습니다. 왕께서 내리실 명령은 무엇입니까?" "더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말고 이제 깨어나라! 그대는 지쳤으니 이제 좀 쉬고 음식을 든 후에 내 돌아올 때를 준비하고 있으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군. 이미 왕께서 돌아오셨는데 누가 게을리 누워만 있겠습니까?" "잠시 쉬시오. 난 날 필요로 하는 다른 이들에게 가보아야 하겠소," 아라곤은 이렇게 말하고 갠달프, 임라힐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나 베레곤드와 그 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피핀은 갠달프를 따라 나가 문을 닫으며 이오레스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왕이시다! 너도 들었지? 내가 뭐라고 했어? 의사의 손이라고 했잖아!" 곧 왕이 정말로 그들에게 돌아왔으며 전투 후에는 치료의 손길을 가져왔다는 말이 요양원 밖으로 나가 도시 전체로 퍼졌다. 아라곤은 요윈에게로 가 말했다. "이건 아주 강한 타격으로 입은 심한 부상인데. 부러진 팔은 적절하게 치료가 됐으니 그녀가 살 힘만 있다면 곧 나을 텐데. 부러진 건 방패를 들었던 팔이지만 사실 더 나쁜 건 칼을 썼던 팔이오. 비록 부러지진 않았지만 이 팔은 아예 생명을 잃은 것 같소 아! 그녀는 자신의 정신과 육신 모두의 힘에 겨운 적을 상대한 것이오. 그런 적을 상대할 사람은 그 자신이 파멸되지 않으려면 강철보다 더 단단한 몸을 가져야만 했소. 그가 행하는 길에 그녀를 세워 놓은 것은 정말 지독한 운명이오. 그녀는 왕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데. 그렇지만 난 아직도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또 그녀와 불행을 알았을 때 난 마치 한 송이 백합처럼 꼿꼿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꽃을 본 것 같았소. 그런데 한편으론 마지 요정 장인들이 강철로 만든 것처럼 아주 강해 보이기도 했소. 그렇다면 어떤 서리가 그녀의 피를 얼음으로 변하게 해 여기 쓰디쓴 달콤함으로 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상당한 채 곧 죽게 될 지경이 되었단 말이오. 그녀의 병은 오늘 이전부터 시작됐던 건 아니오, 요머?" "그대가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모든 일에서 그렇듯이 그대를 비난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내가 알기론 내 동생 요윈은 그대를 보기 전까진 어떤 서리에도 상처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웜통이 있어 왕께서 그의 유혹에 빠져 계실 때도 그녀는 걱정과 고통을 나와 함께 나누고 커져 가는 두려움 속에서도 왕을 돌봤지요.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만든 요인은 아닙니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친구여! 그대는 말도 있고 무용도 지녔고 자유로운 들판도 갖고 있소, 그러나 여인의 폼으로 태어난 그녀는 적어도 그대의 것에 비길 만한 정신과 용기를 갖고 있소. 그녀는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노인의 시중을 들며, 그가 비열하게 계획된 불명예스러운 노망에 빠지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의 위치가 그가 기대는 지팡이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맛보아야만 했소. 그대는 웜통이 단순히 데오든의 귀에다만 독액을 흘려 넣었으리라 생각하오? '노망한 늙은이! 욜의 집안이란 산적들이 악취를 들이켜 애새끼들은 개들과 함께 마루를 기어다니는 초가 외양간이 아니고 뭐야?' 그대는 이런 소리를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소? 바로 웜통의 선생, 사루만이 한 소리요. 난 웜통이 그보다 더 교활하게 이 말을 돌려서 했으리라는 걸 의심치 않소. 만일 그대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책임감이 그녀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미 전에 그 말을 들었을 게요.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모든 삶이의미 없어지고 규방의 닫힌 벽 안에서 마치 야수가 우리에 갇혀 있듯 갇혀 어둠을 바라보며 홀로 암흑 속에서 무어라 외쳤을지 누가 알겠소." 그러자 요머는 자신들이 함께 겪은 과거를 다시 생각하는 것처럼 조용히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라곤이 말했다. "나도 역시 당신이 본 것을 보았소, 요머.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아름답고 용감한 여인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보다 더 쓰라리고 부끄러운 일은 아마 없을 거요. 절망에 빠진 그녀를 남기고 던해로우를 떠나 사자의 길로 들어선 이후 난 슬픔과 연민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소. 또한 그 길에서도 그녀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공포를 느낄 수는 없었소. 그렇지만, 요머, 난 그대에게 그녀가 나보다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소 그녀는 그대를 알고 사랑하지만 나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허상에 대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오. 영예와 위업 그리고 로한의 평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지에 대한 동경,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소. 아마 난 그녀의 몸을 치료해 어둠의 골짜기에서 불러 낼 힘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렇지만 그녀가 무엇의 부름에 깨어날지, 희망인지 망각인지 아니면 절망일지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소. 그리고 만일 절망이라면, 내 능력 밖의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죽게 될 것이오. 아! 그녀의 행위는 가장 용감한 여왕의 대열에 오를 만한 것인데!" 아라곤은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정말 백합처럼 희고 서리처럼 차가웠으며 돌처럼 굳어 보였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요문드의 딸 요윈이여, 일어나라! 그대 적은 이미 사라졌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진 않았으나 다시 깊게 숨을 쉬기 시작해 흰 이불 아래서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라곤은 아까처럼 아델라스및 둘을 비벼 끓는 물에 집어넣고 그 물로 그녀의 이마와 이불 위에 올려진 차갑고 감각없는 오른팔을 닦았다. 그러자 정말 아라곤에게 어떤 잊혀진 서역의 힘이 있었는지 아니면 요윈공주를 부른 그의 목소리의 힘이었는지 약초의 달콤한 기운이 방 안에 퍼져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은 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냄새가 아니었고, 아주 맑고 깨끗하고도 여린 공기였으며 마치 별들의 천장 아래 눈덮인 높은 산맥이나 저 멀리 바닷물에 씻긴 은빛 해안에서 새로 만들어져 아무도 들이마셔 보지 못한 그런 공기처럼 느껴졌다. "일어나시오, 요윈, 로한의 공주!" 아라곤은 다시 부르고 그녀의 오른손을 쥐며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았다. "일어나시오! 어둠은 물러갔고 모든 암흑은 다시 정화되었소."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요머에게 쥐여 주곤 물러서며 말했다. "부르시오!" 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요윈, 요윈!" 요머는 눈물을 홀리며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뜨고 말했다. "요머! 오빠를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군요. 사람들은 오빠가 살해당했다고 했거든요. 아니지, 그건 단지 내 꿈속의 어두운 목소리였나 보지. 제가 얼마나 잠자고 있었지요?" "그리 오랜 아니란다, 내 동생아! 그렇지만 더이상 그 생각은 말아라." "전 이상하게 피곤하군요. 좀 쉬어야겠어요. 그렇지만 이건 얘기해 줘요. 마크의 왕께선 어떻게 되셨지요? 아! 그게 꿈이었다고는 마세요. 전 그게 꿈이 아니란 걸 잘 아니까요 그분은 예견하신 대로 돌아가셨지요." "그분을 돌아가셨어. 그렇지만 그분은 내게 딸보다 더 사랑스런 요윈에게 작별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단다. 그분은 지금 곤도르의 궁성 안 큰 홀에 누워 계신단다." "슬픈 일이에요. 그렇지만 예전 욜의 왕가가 양치기의 가문보다도 못하게 추락한 것 같던 때 제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왕의 시종 하플링은 어떻게 됐나요? 요머, 오빤 그를 리더마크의 기사로 맞으셔야 해요. 그는 아주 용감하거든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옆방에 누워 있소, 내가 곧 가볼 겁니다. 요머공은 잠시 여기 남아계시오. 그리고 그대가 다시 건강해질 때까진 전쟁이나 적들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 안 되오. 그대가 다시 일어나 건강과 희망을 되찾는 것을 보는 건 아주 큰 기쁨이오, 용감한 공주님." "건강이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적어도 제가 채울 수 있는 빈 안장이 있고 또할 일이 있는 동안은요. 그렇지만 희망? 그건 모르겠어요." 갠달프와 피핀은 메리의 방으로 가 이미 아라곤이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불쌍한 메리!" 피핀은 울며 침대 옆으로 달려갔다. 그가 보기에 메리는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슬픔의 세월이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어두워 보였다. 갑자기 피핀은 메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라곤이 말했다. "두려워할 건 없어. 난 제 시간에 왔거든. 내가 그를 다시 불렀지. 그는 지금 지치고 슬픔에 잠겨 있어. 요윈공주가 받은 상처, 그 끔찍한 것을 쳐서 입은 상처를 그도 입었거든. 그렇지만 이건 치료될 수 있어. 그는 아주 강하고 낙천적인 정신을 가졌거든. 그의 슬픔은 쉽게 잊혀지진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진 못할 것이고 아마 그에게 지혜를 줄 거야." 그리고 아라곤은 손을 메리의 머리에 올려 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다가 눈꺼풀을 살짝 만지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델라스의 향취가 과수원의 향기나 아니면 벌들이 나는 햇볕 속의 히드꽃처럼 풍겨 나오자 갑자기 메리는 깨어나 말했다. "배가 고픈데. 몇시나 되었지요?" 피핀이 대답했다. "저녁시간이 지났지. 너한테 뭐 좀 먹을 걸 갖다주는 게 여기서 허용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아마 허용할 거야. 그리고 그의 명성이 드높은 이 미나스 티리스에서 찾을 수 있는 거라면 이 로한의 기사가 원하는 건 뭐라도 좋겠지." 메리가 외쳤다. "좋아요! 그럼 우선 저녁식사를 하겠어요. 그리고 그 후에 담배파이프." 그 순간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니, 담배파이프는 아니에요. 전 다신 담배파이프를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왜 그래?' 피핀이 묻자 메리는 천천히 대답했다. "음, 그분은 돌아가셨어. 그건 내게 모든 기억을 일깨워 주거든. 그분은 나와 함께 담배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돼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건 거의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나 다름이 없었어. 난 이제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리고 그날, 피핀, 그분이 이센가드로 오셔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신 그날을 생각하지 않고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을 것 같애."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렇다면 담배를 피우고 그를 생각하게나. 그는 친절한 마음씨를 가졌던 분이고 또한 위대한 왕이시자 동맹의 서약을 이행하신 분이니까. 그분은 어둠으로부터 마지막 아름다운 아침으로 달려나오신 거야. 자네가 그분을 모신 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건 즐겁고 영광스러운 기억이 될 거야." 메 리는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럼, 스트라이더가 만일 줄 수 있다면 저는 담배를 피우고 생각하겠어요. 제 짐 속에 사루만의 고급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통에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메리아독, 만일 내가 전쟁 통에 자기 장구도 내팽개치는 그런 부주의한 전사에게 담배를 주려고 산을 넘어 화염과 칼이 난무하는 곤도르의 영토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야. 만일 자네 짐을 다시 찾지 못한다면 이 요양원의 약사를 부르러 보낼 수밖에. 그러면 그는 자네한테 그런 약초가 무슨 효용이 있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 약초를 시골사람들은 웨스트맨스위드라 부르고 고상한 달로는 갈레나스라하고 또 더 교육받은 사람들의 언어로는 또 뭐라고 한다고 얘기할 거야. 또 자기도 잘 모르는 반쯤 잊혀진 시구를 덧붙일 거고. 그리고나서야 자네한테 실망을 안겨주며 이 집엔 그런 약초는 없다고 하고는 언어의 역사만을 남겨 두고 자네에게서 떠나갈 걸세. 하지만 나도 다른 수가 없다네. 내가 던해로우를 떠난 뒤엔 이런 침대에서 자본 적도 없었고 먹은 것도 전혀 없으니 말야." 메리는 그의 손을 쥐고 입을 맞췄다. "정말 미안해요. 바로 나가 보세요. 브리에서의 그날 밤 이후 우린 당신한테 정말 짐만 됐었거든요. 그렇지만 이런 때 그렇게 가볍게 얘기하는 게 우리 습관이거든요. 우린 너무 많은 말을 할까 봐 걱정하지요. 농담이 어울리지 못할 때면 우린 제대로 말을 못해요." "나도 그걸 잘 알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같은 방식으로 자네를 놀렸을 리가 있나. 샤이어가 영원히 번성하길!" 이렇게 말한 아라곤은 메리의 손에 입을 맞추고 방에서 나갔으며 갠달프도 같이 갔다. 피핀은 방에 남아 말했다. "저런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갠달프는 빼고 말이야. 난 그들이 서로 친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사랑스런 바보야, 네 침대 옆에 네 꾸러미가 있잖아. 내가 널 만났을 때 넌 꽁무니에 그걸 매달고 있었어. 물론 스트라이더도 아까부터 그걸 봤어. 어쨌든 내것도 있으니까. 자, 어서. 이건 롱바텀 산(産)이야. 내가 가서 음식을 찾아 볼 동안 파이프에 채워 놓아. 그 다음에 좀 즐기자구. 아 참! 우리 투크와 브랜디버크집안은 이런 고지에서 오래 살 수 없지." 그러자 메리가 대꾸했다. "그래, 난 살 수 없어. 어쨌든 아직까진. 그렇지만 피핀, 적어도 우린 이제 그들을 볼 수도 있고 찬양할 수도 있지. 내 생각엔 누군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를 사랑해야 할 것 같아. 우린 어딘가로 떠나고 어떤 뿌리를 찾았고 샤이어의 땅은 깊지. 그러나 더 깊고 더 높은 곳이 많은 것 같애. 개퍼영감일지라도 그가 알건 모르건 간에 그들이 없다면, 자신이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농장에서 일할 수는 없을 거야. 난 이제 그들을 조금은 안 것 같아 기뻐.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담뱃잎은 어디 있어? 그리고 깨지지 않았는지 나 모르지만 짐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줘." 아라곤과 갠달프는 이제 요양원 원장에게 가서 파라미르와 요윈이 거기 머물러 오랫동안 세심하게 돌보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먼저 아라곤이 말했다. "요윈공주는 곧 일어나 떠나려 할 거요.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오. 어떻게 해서든지 적어도 열흘 동안은 머무르게 해야 하오." 그러자 갠달프도 말했다. "파라미르로 말하면 그는 곧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될 거요. 그러나 그가 완전히 회복해서 일을 볼 수 있을 때까진 데네도르의 광증에 관한 이야기 전부를 해줘선 안 되오. 지금 저기 있는 베레곤드나 페리안이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오!" "그럼 지금 제가 돌보는 또 다른 페리안, 메리아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장이 물었다.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그는 아마 내일쯤 일어나게 될 거요. 잠시동안이겠지만. 그는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시오. 자기 친구가 돌보면 걸을 수도 있을 테니까." 원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은 놀랄 만한 종족입니다. 아주 강한 체질을 가진 것 같습니다." 요양원 문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라곤을 보기 위해 몰려와 있어서 그들이 나서자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저녁식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몰려와 부상당했거나 암흑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는 그들 친족이나 친구를 고쳐 달라고 사정했다. 아라곤은 일어나 나와 엘론드의 아들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밤새 그 일을 했다. 그러자 도시 전체에 이야기가 퍼졌다. '정말 왕께서 오셨다.' 그들은 그가 푸른 보석을 달고 있기에 그를 엘프스톤이라 불렀으니 그가 태어날 때 앞으로 얻게 될 이름이라 예언되었던 것이 그의 백성들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망또를 걸치고 도시를 빠져나가 새벽녘에 막사에 도착해 아주 잠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처럼 생긴 흰 배, 즉 돌 암로스의 기치가 탑에서 휘날렸으며 그것을 본 사람들은 왕이 돌아온 것이 꿈이었던가 하고 의아해 했다. 제9장 마지막 회합 전투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약간의 구름이 끼고 서풍이 부는 아름다운 날씨였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일찍 일어나 도시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메리와 피핀이 매우 보고 싶었던 것이다. 김리가 말했다.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니 정말 기쁘군. 우린 로한까지 오면서 그들 때문에 큰 수고를 치러야 했는데 그게 헛된 일이 아니라면 더 좋으니까 말이야." 요정과 난쟁이가 함께 미나스 티린스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이 이상한 동행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운 얼굴의 레골라스가 맑은 목소리로 요정의 노래를 부르며 아침 거리를 걸어가는 한편 그 옆에서는 레골라스와 바짝 붙어선 김리가 수염을 흩날리며 주위를 둘러보며 갔기 때문이었다. 김리는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멋진 돌작품들이 좀 있군 그래. 하지만 별로 잘 다듬어지지 못한 것들도 있고 또 길은 좀더 잘 설계될 수도 있었겠는데. 아라곤이 이 도시로 돌아오면 내가 산의 석공 기술을 제공해야겠어. 그럼 우린 이 도시를 좀더 당당하게 만들 수 있을거야." 그러자 레골라스도 말했다. "여기엔 정원이 더 필요한걸. 집들이 너무 썰렁해. 여긴 자라나서 기쁨을 주는 것들이 부족해. 만일 아라곤이 자신의 이 도시로 돌아오면 숲의 요정들이 노래를 불러 줄 새들과 죽지 않는 나무를 선물할 거야." 마침내 그들은 임라힐왕자의 거처에 도착했다. 왕자를 본 레골라스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실제로 요정의 피가 섞인 인간을 발견한 것이었다. 레골라스가 외쳤다. "만세, 영주님! 님로델의 주민들이 로리엔의 숲을 떠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인데 아직 암로스의 부두에서 바다 건너 서쪽으로 떠나 버리지 않은 분을 만나게 되다니!" 그러자 왕자가 대답했다. "우리 고향 전설도 그렇게 말하고 있소. 그러나 먼 옛날부터 거기선 아름다운 종족을 한 명도 볼 수 없었소. 이 슬픔과 전투의 한복판에서 그대를 보게 되니 정말 놀랍소. 그대는 뭘 찾고 있소?" "난 임라드리스로부터 갠달프와 함께 떠난 아홉 원정대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 친구인 이 난쟁이도 그렇습니다. 우린 아라곤공과 함께 왔지요. 하지만 지금 우린 우리 친구 메리아독과 페레그린을 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당신 보호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신들은 요양원에서 그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리로 안내하지요." "안내자 한 사람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 공. 아라곤이 당신에게 보내는 전갈도 있으니까요. 그는 지금 다시 도시로 들어오길 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지휘관회의를 열 필요가 있어서 그는 당신과 로한의 요머께서 자기 막사로 오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말이죠. 미스랜더는 이미 거기 있습니다." "그리 가겠소." 임라힐은 말하고 정중한 인사와 함께 그들과 헤어졌다. 레골라스는 김리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인간의 아름다운 군주이자 위대한 대장이야. 이 어려운 시절에도 곤도르에 저런 사람이 있다면, 전성기엔 그 영화가 정말 대단했을 거야." "하긴 저 훌륭한 돌조각품들도 다른 것들보다 오래된 것이고 또 첫번째 작품들일거야. 인간들이 시작한 일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야. 봄에 서리가 내리질 않나, 여름에 안개가 끼질 않나.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약속을 못 지키지." "그렇지만 그들이 뿌린 씨가 싹트지 않는 경우도 드물어. 폐허와 부패 속에서도 그들은 항상 숨어 있다가 언젠가 기대치 않았던 시간과 장소에 다시 피어난단 말이야. 인간의 행적은 우리들의 행적을 능가할 거야, 김리."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정도의 기대 외엔 이루어진 게 없는 것 같아." 난쟁이가 말하자 레골라스도 덧붙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요정으로선 대답할 수가 없지." 그때 왕자의 시종이 와 그들을 요양원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요양원 정원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즐거운 것이었다. 잠시 그들은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바람부는 원형구역 안에서 아침햇살 아래 짧으나마 평화로운 한때를 즐길 수 있었다. 메리가 피곤함을 느끼자 그들은 요양원의 풀밭을 뒤로 하고 성벽 위에 앉았다. 남쪽으로는 안두인대하가 햇빛에 반짝이며 흘러가 레골라스의 시야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레베닌과 남이딜리엔의 넓고 푸른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레골라스는 잠시 태양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그는 대하 위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흰 바다새들을 보고 소리쳤다. "봐! 갈매기야! 저들은 먼 내륙으로 날아가고 있어. 저들을 보면 난 경이로움과 함께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우리가 펠라기르에 가기 전까진 난 저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서 해전을 벌이러 나갈 때 저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어. 그때 난 몸이 굳은 듯 가만히 서서 이 중간계의 전쟁을 잊었지. 그들의 울부짖음은 내게 바다를 얘기해 주는 것 같았거든. 바다! 아! 난 아직 그걸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우리 종족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모두 바다를 향한 깊은 동경이 움츠리고 있거든. 아! 갈매기! 난 너도밤나무 아래에서나 느릅나무 아래에서나 다시는 평화로움을 얻질 못할 거야."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이 중간계에는 아직 우리가 못 본 것들이 수없이 많고 또 우리가 해야 할 큰일도 있어. 그런데 모든 아름다운 종족(요정)들이 부두로 달려간다면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들은 더 삭막한 세상을 보아야만 하잖아." 그러자 메리도 말했다. "삭막하고 끔찍하겠지! 레골라스, 당신은 부두로 가선 안 돼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건 이 현명한 난쟁이 김리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 - 크건 작건 간에 말이에요 - 도 있단 말이에요. 적어도 나 자신이 그러니까요. 더구나 더 지독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땐 더 그렇지. 이 전쟁이 벌써 끝났고, 게다가 아주 잘 끝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 피핀이 소리쳤다. "그렇게 우울해 하지 마! 지금은 태양이 빛나고 있고 또 우린 적어도 하루이틀은 여기 함께 있을 수 있잖아. 난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 어서요, 김리! 당신과 레골라스는 오늘아침에만 벌써 열두 번이나 스트라이더와 함께 한 이상한 여행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잖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자세하게는 말하려 하지 않았어요." 김리가 대답했다. "여긴 지금 태양이 비치고 있지. 하지만 그 길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둠의 기억이 있어.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난 어떤 우정을 위해서라도 그 사자의 길로는 가지 않았을지도 몰라." 피핀이 다시 물었다. "사자의 길? 난 아라곤이 그 말을 하는 걸 들었는데, 그래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궁금했었어요. 당신이 더 자세히 말해 주겠죠?" "기꺼이는 아니야. 그 길을 생각하면 난 부끄럼을 느끼게 돼. 나 글로인의 아들 김리가, 인간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해 온 내가, 지하에서라면 어떤 요정보다 더 용감하다고 믿어 온 내가 그걸 하나도 입증할 수 없었어. 난 그 갈을 오로지 아라곤의 의지에 이끌려서만 들어갈 수 있었어." 그러자 레골라스가 끼어들었다. "또한 그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였지. 그를 알게 된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게 되니까. 심지어 그 차가운 로한의 숙녀까지도 말이야. 우리가 던해로우를 떠난 건 자네가 거기 오기 전날 이른 아침이었어, 메리.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은 지독한 공포에 사로잡혀 우리가 가는 걸 감히 볼 엄두도 못 냈지. 다만 저 아래 요양원에 부상으로 누워 있는 요윈공주만 예외였어. 헤어질 땐 크게 슬퍼했고 그걸 본 나까지 슬퍼할 정도로." "아! 난 내 생각밖엔 할 여유가 없었어. 아니야! 난 그 여행 얘기는 못하겠어." 김리는 이렇게 말하고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피핀과 메리는 그 얘기를 매우 듣고 싶어했기에 마침내 레골라스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다 얘기해 줄게. 난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니까. 더구나 내 생각엔 인간의 음영들은 힘도 없고 약할 거 같으니까 말이야." 그는 산맥 아래 있는 그 저주받은 길과 에레크에서의 음울한 회합 그리고 안두인대하를 따라 펠라기르에 이르기까지의 이백팔십 마일이나 되는 장정에 대해 빠른 속도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검은 바위에서 떠나 나흘 밤낮을 달리고 닷새째가 되었지. 그런데 아! 난 모르도르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왜냐하면 그 어둠속에서도 그 그림자의 대군은 보기에 점점 강대해지고 끔찍해지는 것 같았거든. 내가 보니 일부는 말을 타고 있었고 일부는 그냥 뛰고 있었는데 모두 다 굉장히 빨리 달리고 있었지.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눈들은 빛나고 있었어. 라메돈의 고지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우리를 거의 따라잡아 둘러쌌는데 아마 아라곤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앞질렀을 거야. 그가 명령하자 그들은 다시 뒤로 물러섰지. 난 심지어 인간의 음영들조차 아라곤에게는 복종할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도음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우린 하루 동안은 밝은 가운데 달렸지만, 그리곤 아침없는 날들이 시작되었어. 그래도 우린 계속 달렸지. 우린 키릴과 링글로를 지나 사흘째 되는 날 길 라인하구 위쪽 린히르에 도착했어. 거기에선 라메돈사람들이 여울에서 강을 따라 올라온 움바르와 하라드의 사악한 무리들과 싸우고 있더군. 그렇지만 수비대나 적들이나 우리를 보고는 사자의 왕이 왔다고 소리를 지르며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 버렸지. 단지 라메돈의 영주 앙보르만이 우리에게 맞설 용기를 가졌어. 아라곤은 그에게 어둠의 대군이 지나간 후에 부하를 모아 뒤따르라고 명령했지. 그는 '이실두르의 후계자가 펠라기르에서 그대의 도움을 기다리노라.' 하고 말했어. 그리고는 다시 모르도르의 동맹군들을 몰아 내며 길라인을 지나 잠시 쉬었지. 그러나 곧 아라곤은 일어나 외쳤지. '보라! 벌써 미나스 티리스는 공격당하고 있다. 우리가 도달하기 전에 함락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린 밤이 새기 전에 다시 말에 올라 레베닌의 평원으로, 말들이 달릴 수 있는 한 최대 속도로 달렸지." 레골라스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쉰 다음 남쪽으로 눈을 돌려 부드러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케로스에서 에루이로 은빛 물결 흐른다, 레베닌의 푸른 초원에서! 무성하게 풀잎이 뻗어나고,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순결한 백합화가 살랑거리고, 맬로스, 알피린의 금종(봄철 레베닌에서 피는, 작고 종소리처럼 울리는 금빛꽃) 울린다, 레베닌의 푸른 초원에서, 바닷바람 속에서! "우리들의 노래에서는 그 초원이 푸르렀어. 하지만 실제 앞에서 본 그 초원은 어둠 속에서 침침한 황무지처럼 보였지. 그 바람부는 초원 위로 풀과 꽃들을 짓밟고 우린 하루 밤낮을 적을 쫓아 달려 마침내 대하의 하구까지 왔어. 그러자 난 내 마음 속에서 바다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어둠 속에서 강물은 아주 넓어 보였고 수없이 많은 바다새들이 울어 대고 있었거든. 아! 그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들이란, 참! 숲의 레이디께서 내게 그들을 주의하라고 그러셨잖아? 이젠 난 그들을 못 잊을 거야." 그러자 김리가 끼어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때 우린 치열한 전쟁터에 이르게 되었거든. 거기 펠라기르에는 움바르의 주력함대가 있었지. 커다란 전선이 오십 척쯤 됐고 그보다 작은 배들은 수없이 많더군. 우리에게 쫓겨 달아난 적들이 먼저 그 부두에 닿아서는 공포를 전해 주었지. 어떤 배들은 이미 닻을 올려 강을 오르거나 먼 해안으로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고 작은 배들은 불타올랐어. 하지만 이제물가에까지 몰린 하라드인들은 절망에 빠져 우리를 향해 돌아섰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보고 웃기 시작했어. 그들은 여전히 대단한 군세였거든. 그렇지만 아라곤이 멈춰서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지. '이제 오라! 검은 바위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소환한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 뒤에 처져 있던 어둠의 대군이 밀물처럼 밀어닥쳐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어. 난 희미한 고함소리와 엷은 나팔소리 그리고 셀수 없을 정도의, 멀리서 들리는 듯한 속삭임을 들은 것 같았어. 그건 마치 아주 옛날 암흑시대의 잊혀진 전투의 반향처럼 들렸지. 창백한 빛을 뿌리며 검이 뽑혔어. 그렇지만 난 그들의 검이 정말 힘을 발휘했는가는 모르겠어. 사실 사자들은 공포외에 다른 무기가 필요없었거든. 아무도 그들 앞에 맞서지 못했지. 그들은 닻을 내린 배 위로 몰려갔다가 다시 강을 타고 이미 도망치고 있던 배 위까지 밀려갔어. 그러자 쇠사슬로 노에 묶여 있던 노예들을 제외한 선원들 모두가 겁에 질려 미친듯 바다 위로 몸을 던져 버렸지. 우리는 도망가는 적들 사이로 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가랑잎처럼 날려 버리고 마침내 강안에 이르렀어. 그리고 아라곤은 남아있는 큰 전선 한 척마다 듀나단 한 사람씩을 타게 해 배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위무하고 두려움을 달래 주었어. 그 어둠의 날이 지나기 전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남은 적은 하나도 없었지. 모두 빠져 죽거나 아니면 자기네 나라로 도망갈 작정으로 남쪽을 향해 말도 못 타고 달아나 버린 거야. 모르도르의 계략이 그런 공포와 어둠의 분노로 인해 좌절되었다는 게 정말 이상스럽고도 놀라운 일이더군. 그 자신의 무기가 치명타가 되어 돌아간 것이지." 그러자 레골라스도 거들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바로 그 시간에 난 아라곤을 보고 생각했지. 그 자신이 그 반지를 가졌더라면 그 강인한 의지로 해서 얼마나 위대하고 무서운 군주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모르도르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의 정신은 사우론이 이해하기엔 너무 고귀하니까. 그는 루디엔의 자손이 아니야? 그 가계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결코 몰락되지 않을 거야." 김리도 말했다. "그런 예언은 난쟁이의 시야로서는 알 수 없는 거야. 그렇지만 그날 아라곤은 정말 강대했지. 모든 검은 선단이 그의 손에 있었거든. 그는 가장 큰 전선을 자신의 것으로 정하고 올라섰지. 그는 적으로부터 뺏은 트럼펫을 크게 불도록 했어. 그러자 어둠의 대군이 강안으로 물러서더군. 거기에서 그들은 불타는 배의 화염에 붉게 빛나는 눈 외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지. 아라곤은 그 사자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어. '이제 이실두르의 후계자의 말을 들으라! 그대들의 맹세는 이행됐도다. 이제 돌아가서는 계곡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이제 떠나 편히 잠들라!' 그러자 그 대군 앞으로 사자의 왕이 나서 자기 창을 꺾어서 내던졌어. 그는 정중하게 절하고 돌아섰고, 그러자 그 회색 부대 전부가 갑작스런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지. 난 그때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이었어. 그날 밤 우린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사이에 잠시 쉬었어. 왜냐하면 거긴 풀려난 포로가 많았고 또 습격을 받아 잡혀 왔던 곤도르인 노예들도 해방에 됐거든. 또 곧 레베닌과 에디르의 주민들이 많이 몰려왔고 라메돈의 앙보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기병들과 함께 왔지. 이제 그들은 사자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우리를 돕고 또 이실두르의 후계자를 보러 온 거야. 이미 그 이름의 소문이 어둠 속에서 불처럼 번져 나갔거든. 이제 이 얘기의 끝부분에 이르렀군 그래. 그날 저녁과 밤 동안에 많은 배들이 떠날 준비가 되어 사람들이 승선했어. 그래서 아침에 드디어 출발하게 되었지. 그게 바로 그저께 아침이고 또 우리가 던해로우에서 떠난 지는 닷새째밖에 안 되는데 난 마치 긴 세월을 지난 느낌이었어. 그런데도 아라곤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다급해서 이렇게 말했어. '펠라기르에서 할론드정박지까지는 백이십오마일이나 돼. 우린 할론드에 내일까진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 끝나고 말 거야.' 그래서 노마다 풀려난 사람들이 붙어서 힘껏 저었지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 배는 대하 위로 천천히 가고 있었어. 남쪽에선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았지만 바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부두에서 거둔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갑자기 레골라스가 웃으며 말했지. '네 수염을 들어 봐, 듀린의 아들아! 이런 말이 있잖아. 모든 것이 무너질 때 희망이 솟아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무슨 희망을 보았는지는 말하지 않았지. 밤이 되어 어둠은 점점 더 깊어졌는데 우리 가슴은 불타오르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북쪽 멀리에서 구름 아래서 붉은 화염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그때 아라곤이 말했지. '미나스 티리스가 불타고 있다.' 고 말야. 그렇지만 사실 한밤중에 희망이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어. 남쪽을 바라보고 있던 에디르의 선원이 바다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고 말했거든. 그래서 곧 범선들은 돛을 올렸고 우리는 점차 속도를 얻어 마침내 이물에 부딪는 흰 물거품으로 새벽이 비치기 시작했어. 그래서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린 바람을 타고 어둠이 걷힌 햇빛 속에서 전투의 기치를 휘날리며 아침 제3시에 도착한 거야.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그건 정말 위대한 날이자 위대한 시간이었어." 레골라스도 말했다. "뒷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위대한 행위의 가치가 감소되진 않겠지. 사자의 길을 지난 것은 위대한 일이었어. 그러니까 만일 내일이라도 곤도르에 찬양의 노래를 부를 사람이 단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해도 그 위대함만은 그대로 남을 거야." 그러자 김리가 다시 말했다. "정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아라곤과 갠달프의 얼굴이 아주 침울해 보였거든. 저 아래 막사에서 그들이 지금 무얼 논의하는지 궁금해. 나도 메리처럼 이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빨리 끝났으면 좋겠거든. 그렇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난 외로운산의 동족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내 몫을 다하고 싶어." 레골라스도 말했다. "나도 위대한 숲의 동족들을 위해, 또한 흰 성수의 영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어." 그리고 그들은 각기 생각에 잠겨 지휘관들이 회의를 열고 있는 동안 조용히 이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임라힐왕자는 레골라스, 김리와 헤어지자 곧 요머에게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도시에서 내려가 데오든왕이 전사한 곳에서 멀지 않은 들판에 세워진 아라곤의 막사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갠달프, 아라곤 그리고 엘론드의 아들들과 함께 회합을 가졌다. 갠달프가 먼저 말했다. "공들, 곤도르의 섭정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을 먼저 들어 보시오 '그대들은 하루쯤은 펠레노르평원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거기 새로 투입되는 그 힘에 대항해서는 절대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난 그가 빠졌던 절망의 틈으로 여러분까지 밀어 넣고자 이 말을 하는 게 아니오. 단지 이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신석은 보여줌에 있어서 절대로 거짓을 담지 않소. 바랏 두르의 군주라 할지라도 그건 마찬가지요. 아마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본 것을 오인하도록 이끌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데네도르가 그걸 통해 자신에 적대하는 동맹군이 모르도르에 엄청나게 집결했으며, 또 더 많이 모이는 중이라는 걸 보았을 때, 그가 사실을 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거요. 첫번째 적의 공세를 물리치는 데도 우리 힘이 충분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소. 다음번 공세는 더욱 치열할 겁니다. 그러니 데네도르가 본 대로 이 전쟁은 마지막 희망도 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여기에 그대로 머물며 공성을 계속하든 아니면 대하 너머로 무모한 전진을 하든 간에 승리는 무력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소. 그대들 앞엔 최악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오. 신중하게 하자면 지금 견지하고 있는 요새를 더욱 강화해 공세를 기다리는 것이겠고 그러면 최소한 종말을 조금은 늦출 수 있겠지요." 그러자 임라힐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미나스 티리스나 돌 암로스 또는 던해로우까지 물러나 거기서 모래성 안에 앉은 어린애처럼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새로운 복안이 될 수 있을 거요. 그대는 이미 데네도르의 시대에 그와 비슷한, 아니면 그보다도 못한 일들을 해오지 않았소? 그러나 지금은 아니오. 난 그것을 신중한 계획 중 하나로 말한 것뿐이오. 내가 지금 주장하는 젓은 그런 신중론이 아니오. 난 다만 무력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거요. 그러나 난 여전히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소. 물론 무력으로가 아닌. 왜냐하면 지금 이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바랏 두르의 근원이자 사우론은 희망인 그 힘의 반지가 가고 있으니까.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이제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또 사우론의 입장을 이해하리라 믿소. 만일 그가 다시 그걸 되찾는다면 여러분의 용맹은 헛된 것이 될 것이고 그의 승리는 더 빠르고 완벽하게 될 것이오. 이 세계가 지속되는 동안 그 종말을 예측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일 거요. 그러나 만일 그 반지가 파괴된다면 그도 역시 파멸할 것이고 그 파멸은 너무도 완전해 그가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를 정도일 거요. 그 반지를 잃는다면 그는 애초 그의 탄생에서부터 부여받을 힘을 잃는 것이고 그 힘과 함께 시작되거나 만들어진 모든 것이 붕괴되어서 그는 영원히 손발을 잃은 상태로 어둠속에서 스스로를 좀먹는 작은 악령으로 떨어져 다시는 형태를 회복하거나 강해질 수 없는 거요.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의 거대한 악이 제거되는 겁니다. 물론 또다른 악한 무리가 올지도 모르지요. 사우론 자신도 종복이나 밀정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이 세계의 모든 조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뒷시대의 후손들이 깨끗한 세계를 갖게 하기 위해 우리가 처한 이 시대에 할 일을 하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악을 몰아 내는 것이오. 우리 후손들이 어떤 악을 다시 맞게 될까 하는 것은 지금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사우론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고 자신이 잃은 그 귀한 물건이 다시 발견된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는 아직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있으며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달려 있는 거요. 그는 지금 커다란 의문에 빠져 있소.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으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 그걸 다룰 만큼의 힘이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내가 올바로 추측했는지는 몰라도, 아라곤, 그대가 오탕크의 신석에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소?"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혼버그에서 떠나기 전에 난 그걸 보았소. 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또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 신석이 내게 왔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그러니까 반지의 사자가 라우로스에서 동쪽으로 떠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고, 내 생각엔 사우론의 눈은 그 자신의 영지에서 밖으로 돌려졌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권좌에 돌아온 후 도전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만일 내 시도에 대한 적의 공세가 그렇게 신속할 줄 알았다면 난 감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땐 그대에게 충고를 구하기엔 너무 시간이 없었지요." 요머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가 반지를 찾게 될 경우 모든 것이 다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게 된다면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걸 얻었다면 왜 그는 자신의 공격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소. 또한 그는 우리처럼 적에 대한 염려가 없을 때 까지 기다려 자신의 힘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오. 그리고 우린 그것의 완전한 힘을 조종하는 것을 하루에 배울 수는 없소. 사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주인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소. 그러니 그는 우리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누르고 그 반지의 주인이 되기 전에 싸움 벌일 시간을 찾을 거요. 그리고 그 시간이 갑작스러운 것이라면 그 반지는 그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지금 살피는 중이오.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니까. 그의 나즈굴들이 지금 나가 있소. 사람들은 지치고 졸려서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오늘 해뜨기 전에 이 평원 위를 지나갔소. 그는 여러 가지를 분석하고 있는 거요. 그에게서 보물을 뺏어간 검이 다시 벼려졌으며 행운의 바람이 우리에게로 돌아선 것이며, 그 첫 공세가 예기치 못한 패배를 당한 것이며 그의 가장 강한 대장이 파멸된 것이며 등등을 말이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의심은 점점 커져 가고 있소. 그의 눈은 이제 똑바로 우릴 향하고 있어 다른 모든 움직임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소. 우리는 계속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는 거요. 그러니 이것이 내 제안이오. 우린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소. 현명한 일인지 어리석은 일인지는 몰라도 반지는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미 파괴하러 보내졌소. 그것 없이는 우린 힘으로 그를 꺾을 수 없소. 그러니 우린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의 시선을 그의 진정한 위험으로부터 떼어 놓아야 하오. 우린 무력으로 승리를 얻을 순 없지만, 무력에 의해 반지의 사자에게 대단치 않은 기회라도 주어야만 하오. 아라곤왕이 이미 시작했듯이 우리도 계속해야 하오. 우린 사우론이 마지막 주먹을 날릴 때까지 밀어붙여야 합니다. 우린 그의 숨은 힘을 다 끌어내 그의 영지가 텅 비도록 해야 하오. 우린 그에게 당장 진격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에게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성급하게 새로운 반지군주의 권능을 꿈꾸며 야망과 탐욕으로 그 미끼를 물 겁니다. 그러면서 말할 겁니다. '보라! 그는 자신의 목을 너무 빨리, 너무 멀리 내밀었구나. 이리 오게 하라. 와서 내가 준비해 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보게 하라. 내가 그것으로 잡아 그가 오만하게도 가져갔던 것을 다시 영원히 내것으로 하리라.' 우린 용기를 내서, 또 작은 희망을 갖고서 그 덫으로 눈을 뜨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들, 우린 아마도 암흑의 전쟁으로 이 살아있는 땅으로부터 완전히 파멸돼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일 바랏 두르가 무너진다 해도 우린 새 시대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오. 그렇게 죽는 것이 여기 그대로 앉아 새 시대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아라곤이 말했다. "내가 시작한 만큼 난 계속 나가겠소. 우린 희망과 절망이 맞붙은 바로 가장자리까지 와 있소. 움츠리는 것은 죽는 것이오. 사우론에 대한 오랜 노고가 이제 절정에 달한 갠달프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입시다. 이분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을 거요. 그렇지만 난 아무에게도 명령하지는 않겠소. 다들 자신의 의지대로 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엘로히르가 말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북쪽에서 여기까지 왔소. 그리고 우리아버님 엘론드께서도 바로 그런 제안을 보내셨소. 우리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요머도 말했다. "나로 말하면 이런 깊은 문제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소. 그러나 난 알기를 원하지도 않소. 내가 아는 것은 내 친구 아라곤왕께서 나와 나의 백성을 도와 주셨다는 사실이고 그것으로 충분하오. 난 그분이 부르는 곳에 갈 겁니다. 난 가겠소." 임라힐도 말했다. "저로 말하면 아라곤왕께서 요구하시든 안 하시든 간에 그분의 왕권에 충성을 바칩니다. 그분의 바람은 저에겐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가겠습니다. 그러나 잠시 전 곤도르의 임시섭정이라는 위치에서 그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직 신중론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습니다. 우린 좋은 결과뿐 아니라 나쁜 결과에도 준비를 해두어야 하니까요. 우리가 승리를 거둘지도 모르며 만일 정말 그럴 희망이 있다면 곤도르는 방비되어야만 합니다. 전 승리를 거둔 후에 폐허가 된 도시, 파괴되어 버린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우린 로한사람들로부터 우리 북방에도 아직 접전하지 않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말입니다." 갠달프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오. 난 그대에게 이 도시를 무방비상태로 두고 가자고 제안한 것은 아니오. 사실 우리가 동쪽으로 이끌 병력은 전투의 도전을 할 정도면 되지 모르도르에 본격적인 공세를 가할 정도로 대부대일 필요는 없소. 그리고 우린 빨리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난 지휘관들을 부른 거요. 우리가 최대한 이틀 안에 소집해 이끌 수 있는 군세는 어느 정도요? 물론 그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기꺼이 갈 만한 강한 사람들이어야 하겠고." 그러자 요머가 대답했다. "병사들은 다 지쳤고, 가볍건 위중하건 간에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린 또한 많은 말을 잃었는데 그건 감내하기 어려운 손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곧 떠나야 한다면 난 이천 이상은 동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 인원의 다른 로한병사가 도시 방어를 위해 남을 수 있겠지요." 아라곤이 말했다. "이 평원에서 싸웠던 사람들만 가지고 계산할 필요는 없소. 빼앗겼던 남부 영지에서 지금 새로운 군세가 오는 길이오. 난 이틀 전에 로사나크를 지나 이리로 오도록 펠라기르에서 사천 명을 보냈소. 두려움을 모르는 앙보르가 인솔하고 있으니 만일 이틀만 기다린다면 우리가 떠나기 전에 그들은 여기 당도할 거요.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을 수 있는 어떤 부유물이라도 타고 대하를 따라 날 따르라는 명령을 받았소. 바람이 이렇게 부니 그들은 곧 당도할 것이고 이미 할론드에 여러 척이 들어왔소. 내가 볼 때 우리가 칠천의 기보병을 이끈다 해도 도시에는 첫 공세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나은 방어력이 남게 될 것 같소." 임라힐이 다시 물었다. "성문이 파괴되었습니다. 다시 보수할 기술자들을 지금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다인의 왕국 에레보에 그런 기술이 있소. 우리의 희망이 소멸돼 버리지 않는다면 그때 내가 그 산의 기술을 요청하러 글로인의 아들 김리를 보내겠소. 그렇지만 사람이 성문보다는 나을 거요. 만일 사람들이 포기한다면 적에 대항하는 데 성문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이것이 영주들의 회합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그들은 그날로부터 이틀째 되는 날 아침 가능하다면 칠천의 병력으로 진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험난한 땅이었기에 병력 대다수는 보병이 될 것이었다. 아라곤은 남쪽에서 얻었던 약 이천의 군사를 이끌기로 했고 임라힐은 삼천오백을 인솔하며 요머는 말을 타진 않지만 보병으로 훌륭한 몫을 담당할 오백의 인원을 보내는 동시에 자신은 정예기병 오백을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또한 다른 오백의 기병이 엘론드의 아들들과 듀너데인 그리고 돌 암로스의 기사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모두 육천의 보병과 기병 천이었다. 그러나 말도 아직 있으며 전투도 가능한 약 삼천의 로한 주력부대는 엘프헬름의 지휘 하에 아노리엔에 있다는 적을 막기 위해 서부도로에서 잠복하기로 했다. 곧 쾌속의 기병정찰대가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북쪽, 동쪽 그리고 오스길리아스와 미나스 모르굴가도(街道) 쪽으로 파견되었다. 마침내 전력을 일일이 점검하고 공격작전을 숙의하고 진격로를 정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임라힐왕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틀림없이 이건 곤도르 역사상 가장 우스운 놀음입니다. 전성기를 생각하면 그 당시 선봉부대 정도밖에 안 될 칠천의 인원으로 산맥을 넘어 암흑의 땅 난공불락의 성문으로 돌격하다니 말입니다. 마치 철갑기사에게 어린아이가 실과 버들가지로 만든 활을 들고 위협하는 거나 같지요. 만일 말입니다, 미스랜더, 암흑의 군주가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많은 것을 안다면 우리를 로고 두려움을 느끼는 대신 조소하며 마치 침을 갖고 덤비는 파리처럼 새끼손가락으로 퉁겨 버리지 않을까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아니오, 그는 파리를 사로잡아 침을 뺏으려 할 거요. 그리고 우리들 중에는 천 명의 철갑기사에 값할 만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 있지 않소? 아니오, 그는 웃지 못할 거요." 아라곤도 말했다. "우리 역시 웃지 않소. 만일 이것이 우스운 놀음이라면 그건 웃어 버리기엔 너무 쓰라린 것이 될 것이오. 아니지요. 이건 거대한 모험의 마지막 행위가 될 겁니다. 어느 편에건 간에 이번 일은 이 경기의 종말을 뜻하게 될 거요." 그러면서 그는 안두릴을 뽑아 햇빛 속에서 광채를 뿌리며 말했다. "너는 마지막 전투가 치러질 때까지 다시는 칼집에서 쉬게 되지 않을 것이다" 제10장 암흑의 성문 열리다 이틀 후 서부의 군세는 펠레노르평원에 모두 집결했다. 아노리엔으로부터 반전했던 오르크들과 동부인들은 자신들이 지난번 격파했던 로한인들에 의해 유린당해 흩어져 변변히 싸움도 못하고 캐르 안드로스를 향해 도주했다. 그래서 그쪽의 위협도 해소되었으며 남쪽에서 새로운 군세가 당도해 도시의 방어는 충실해졌다. 정찰병들은 동쪽으로 죽은 왕의 교차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도로에는 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보고해 왔다. 이제 마지막 공세의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레골라스와 김리는 다시 아라곤, 갠달프와 한부대가 되어 떠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듀너데인과 엘론드의 아들들과 함께 선봉을 이루었다. 그러나 메리는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그들과 함께 갈 수 없었다. 아라곤은 이렇게 말했다. "자넨 이런 여행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야. 하지만 수치스러워 할 건 없어. 만일 자네가 이 전쟁에서 더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자넨 위대한 명예를 획득했으니까. 페레그린이 가서 샤이어족을 대변할 수 있어. 또 그 친구도 여지껏 기회가 허용하는 만큼은 잘해 왔지만 자네의 행위에 비견될 만한 일은 하지 못했으니, 자넨 그에게 위험의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만 사실 지금은 모두가 위험한 상황이야. 비록 모르도르의 성문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일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여기에서건 아니면 검은 파도가 닥치는 다른 어느 곳에서건 자네도 역시 최후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거야. 자, 안녕 !" 그래서 메리는 지금 의기소침한 채 서서 군대의 소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베르길이 그 옆에 있었는데 그도 역시 풀이 죽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지금 도시 부대와 함께 출정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행위가 판결될 때까지 경비대에 합류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피핀은 곤도르의 전사로서 베레곤드와 같은 부대에 소속돼 출정했다. 메리는 그가 장신의 미나스 티리스인들 사이에서 키는 작지만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정렬해 있는 것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침내 트럼펫이 울리고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대별로 꺾어져 동쪽으로 전진해 갔다. 그들이 제방으로 가는 큰길로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메리는 거기 서 있었다.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는 창과 투구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는 이제 친구도 없이 외롭다는 생각을 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가 아끼는 모든 이들이 이제 멀리 동쪽 하늘 아래 덮인 어스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그의 마음에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거의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절망감 때문에 되살아나기 라도 한 듯 팔의 통증이 다시 느껴졌으며 자신이 허약하고 늙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햇빛도 약해진 것 같았다. 베르길이 손으로 그를 잡아 정신을 차리게 하며 말했다. "가요, 페레그린씨.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직 아픈 것 같은데요. 내가 의사들에게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요. 그들은 다시 돌아올 거예요. 미나스 티리스인들은 결코 패하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이제 그들에게는 엘프스톤왕이 계시잖아요. 또 경비대의 베레곤드도 있고요." 정오가 되기 전에 군세는 오스길리아스에 이르렀다. 거기에선 징발이 가능했던 모든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적이 만들고 도망가면서 일부 파괴한 부두 시설을 수리하고 있었고 전리품과 다른 비품들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 동안(東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방어벽을 급히 구축하고 있었다. 선봉대는 옛 곤도르의 폐허를 지나 넓은 강을 건너 고대 영화로웠던 시대에 만들어진 해의 탑과, 지금은 미나스 모르굴의 저주받은 장막 속에 가린 달의 탑을 연결하는 긴 직선도로에 이르렀다. 그들은 오스길리아스에서 오 마일 되는 지점에서 첫날 행군을 마치기 위해 정지했다. 그러나 기병들은 계속 진군해 저녁이 되기 전에 교차로의 거대한 원형 숲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다 조용했다. 적의 자취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외침소리나 군호도 들리지 않았다. 또 길가의 바위나 잡목숲으로부터 화살이 날아오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전진하면서 그 지역의 경계가 계속 강화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와 돌, 풀잎과 나뭇잎들도 다 그들의 움직임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은 걷혀 있었고 저 멀리 서쪽 안두인계곡 위에 황혼의 해가 걸려 있어 산맥의 흰 봉우리들이 대기 속에서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에펠 듀아스에는 어두운 음영이 덮어누르고 있었다. 아라곤은 원형 숲으로 꺾어지는 사거리마다 트럼펫주자를 세워 커다란 소리로 팡파레를 불게 했으며 전령들은 크게 외쳤다. "곤도르의 영주들께서 돌아오셨다. 이제 그분들께 속한 이 땅을 다시 회수하신다." 조상 위에 올려졌던 끔찍스런 오르크 머리는 이제 다시 끌어내려져 산산이 부숴졌으며 고대 왕의 두상이 다시 제 자리에 올려졌다. 그 두상은 아직도 흰색과 금색의 꽃 모양 왕관이 씌워져 있어 사람들은 오르크들이 그 위에 더럽혀 놓은 낙서와 오물을 힘들여 닦고 깎아 냈다. 곧 열린 회의에서는 미나스 모르굴을 먼저 공격해야 하며 그곳이 함락되면 철저하게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라힐이 말했다. "아마도 그리로 나가는 길이 북쪽 성문보다 암흑의 군주를 공격하는 데 더 쉬울겁니다." 그러나 갠달프는 이 의견에 극력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 계곡엔 사람들을 광기와 공포로 유도하는 지독한 악이 존재하며 또한 파라미르가 가져온 소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반지의 사자가 그 길을 택했고, 정말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그곳으로 모르도르의 경계를 돌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주력부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르도르가 모르굴통로로 새로운 군세를 보내거나 남쪽으로부터 그의 동맹군이 증원될지도 물라 교차로의 수비를 위해 강력한 경계병들을 배치해 놓았다. 그 경계부대에는 이딜리엔의 길을 잘 알아 교차로 주변의 숲이나 사면에 잠복할 수 있는 사수들을 주로 배치했다. 그러나 갠달프와 아라곤은 모르굴계곡의 입구 쪽으로 선봉대와 함께 전진해 그 악의 도시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어둡고 생명의 기척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있던 오르크들과 모르도르의 하등생물들은 전투에서 궤멸당했고 나즈굴은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곡의 대기는 공포와 적의로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그들은 악의 다리를 부숴 버리고 그 악취나는 들판에 불을 지른 후 떠났다. 다음날, 즉 그들이 미나스 티리스에서 출발한 지 사흘째 되는 날 군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교차로에서 모라논까지는 수백마일의 거리였지만 그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직접 가볼 때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행군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했지만 또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어 앞길에는 기마정찰병들을 보내고 길 양편으로는 보병들을 보내 정찰하게 했다. 특히 동쪽 편으로 잡목숲이 짙게 우거져 있고 돌이 많은 협곡과 바위언덕이 있었으며 그 너머로는 에펠 듀아스의 긴 산사면이 위로 뻗치고 있어 더많은 경계를 쏟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좋고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었으나 어둠의 산맥 주위에 덮인 음영과 슬픈 안개를 걷을 수는 없었고 그들 뒤편에서 때때로 큰 연기가 일어나 바람 속으로 흩어지곤 했다. 가끔 갠달프는 트럼펫을 불게하고 전령관에게 '곤도르의 영주들이 오셨다! 모두 이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항복하라!' 고 외치게 했다. 그러자 임라힐이 말했다. "곤도르의 영주라고 하지 말고 엘레사왕이라 외치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직 즉위하신 건 아니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또한 전령관이 그 왕호를 사용한다면 적은 좀더 생각해야만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후엔 하루 세 번씩 엘레사왕께서 오셨다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그 도전에 응답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비록 외견상으론 아무 동요없이 전진하는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지휘관에서 하급 병졸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의 마음은 무거웠으며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악의 전조가 점전 더 무겁게 실려왔다. 그들이 처음으로 전투의 도전을 받은 것은 교차로로부터 행군한 지 이틀이 거의 지날 무렵이었다. 오르크와 동부인들의 강력한 군세가 매복해 있다가 선두를 공격한 것이었다. 그곳은 바로 파라미르가 하라드인들을 요격했던 곳으로 길 동쪽의 산등성 이를 깊이 가로지르는 통로였다. 그러나 서부군 지휘관들은 마브룽이 지휘하는 헤네스 안눈에서 온 능숙한 정찰병들에게서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고 있었기에 매복병들이 도리어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기병들이 서쪽으로 넓게 산개해 적의 측면과 후면으로 육박해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은 살해당하거나 동쪽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 승리가 지휘관들의 마음을 아주 밝게 해주진 못했다. 아라곤은 말했다. "이건 단지 가장된 공격일 뿐이오. 내 생각엔 이 공격의 주목적은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적을 얕보게 해 유인하려는 것인 듯싶소."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즈굴이 출몰해 군대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며 따라다녔다. 아주 높이 떠 날아 레골라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어둠이 깊어 가고 햇빛이 엷어지는 것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반지악령들이 적을 향해 낮게 날아 내려오거나 울부짖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내뿜어 대는 끔찍한 공포의 기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희망없는 여행이 계속되었다. 교차로를 떠난 지 나흘 째 되는 날, 즉 미나스 티리스를 출발한 지 엿새 째 되는 날 마침내 그들은 살아있는 땅의 끝에 이르러 키리스 고르고르통로의 성문들 앞에 펼쳐진 황량한 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에민 뮐을 향해 북과 서로 뻗어 있는 늪지와 황야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곳이 너무도 황량하고 거기에 깔려 있는 공포의 대기가 너무도 깊어서 일부 병사는 용기를 잃고 더이상 북쪽을 향해 걷지도 말을 몰지도 못했다. 그들을 본 아라곤의 눈에는 분노보다는 연민의 정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하이나 저멀리 서부로부터 온 젊은이들 아니면 로사나크로부터 온 농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모르도르는 어릴 때부터 악의 이름이었으며 그들의 단순한 삶에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믿기 어려운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사실로 나타난 악몽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들은 이 전쟁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무슨 운명으로 이러한 곳으로 이끌려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었다. 아라곤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돌아가라! 그러나 명예를 지켜 뛰지는 말고! 또 그대들도 할 일이 있을 것이니 부끄러워할 없다. 그대들은 캐르 안드로스에 이를 때까지 계속 남서쪽으로 가라. 만일 그곳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면, 내 생각엔 그럴 가능성이 클 것 같은데, 또 그대들이 할 수 있다면, 그곳을 탈취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곤도르와 로한을 위해 끝까지 사수하도록!" 그러자 그의 자비로운 마음에 감복한 일부 병사는 두려움을 떨어 내고 계속 전진했으며 나머지 병사들도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능할 것 같은 임무를 듣고는 새로운 희망을 얻어 떠났다. 이미 교차로에 많은 사람을 남겼기에 서부의 지휘관들은 채 육천도 안 되는 병사로 마침내 암흑의 성문과 모르도르의 힘에 도전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매순간 도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또한 이제 주력부대에서 정찰병이나 소수부대를 파견하는 것은 일종의 병력낭비에 불과했기에 한데 몰려서 전진하고 있었다. 모르굴계곡에서 진군한 지 닷새째 되는 날 해질녘에 그들은 마지막 야영을 준비했으며 막사 주위에 죽은 나무와 히드를 모아 불을 놓았다. 그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고 희미하게 보이는 많은 것들이 그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또한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바람도 자버려 주위의 모든 공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구름도 없었고 달도 이제 차오르고 있었지만 땅으로부터 연기와 김이 솟아나온 모르도르의 안개 속에 가려져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차가워졌다. 아침이 되자 바람이 다시 일기 시작했지만 북쪽에서 불어왔으며 또 차차 거세지고 있었다. 밤에 배회하던 것은 이제 사라져 주위는 텅 빈 듯 보였다. 북쪽의 악취나는 우묵한 곳에는 모르도르의 더러운 종족의 분출물인 슬래그와 깨진 바위조각 그리고 메마른 흙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남쪽 가까운 곳에는 키리스 고르고르의 거대한 성벽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 그 한가운데에는 암흑의 성문이 있었고 그 양편으로 삐죽 솟은 첨탑이 거대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지휘관들은 마지막 행군에 임해서 동쪽으로 굽은 옛 길로부터 방향을 돌려 숨어 있는 산의 위험을 피하며 프로도가 그랬던 것처럼 북서쪽으로부터 모라논으로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험상궂게 생긴 아치형의 암흑의 성문에 속한 거대한 세 짝의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흉벽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바보 같은 행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이른 아침의 희미한 여명 속에 한기를 느끼며 도저히 희망을 갖고 공격해 볼 도리가 없는 탑과 성벽 앞에 외로이 서있었다. 만일 그들이 대단한 힘을 가진 공성기구를 가져왔거나 또는 적에게 성문과 벽을 지킬 인원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고 해도 희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모라논 주변의 모든 언덕과 바위마다 적들이 잔뜩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뒤쪽엔 그늘진 좁은 골이 뚫려 더러운 무리들이 우글거리고 잠복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나즈굴 모두가 몰려와 첨탑 상공을 독수리 모양 선회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는 있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적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아라곤은 이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진형으로 군사들을 배치하여 오르크들이 수년의 노동으로 쌓아 올린 마른 돌과 흙으로 된 거대한 두 개의 구릉에 자리를 잡게 했다. 모르도르를 향한 그들 앞쪽에는 마치 해자(垓字) 모양으로 김이 나는 거대한 진흙바다와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수렁이 가로놓여 있었다. 모든 진형이 갖추어지자 지휘관들은 암흑의 성문을 향해 기병들과 기수들, 전령관들과 트럼펫주자들로 이루어진 대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진격을 개시했다. 갠달프가 이편의 주전령관으로 나섰으며 아라곤은 엘론드의 아들들, 로한의 요머 그리고 임라힐과 함께 진격했다. 레골라스와 김리, 페레그린도 역시 진군의 명령을 받아 가고 있어 모르도르의 적 모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은 소리가 들릴 정도까지 모라논으로 접근해 기치를 펼치고 트럼펫을 불었다. 전령들도 버티고 서서 모르도르의 흉벽 너머로 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오라! 암흑의 땅의 군주는 나오라! 그로 하여금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라! 그는 그릇되이 곤도르로 군세를 내보냈으며 그 영토를 약취했다. 이제 곤도르의 왕께서는 그가 악을 속죄하고 영원히 사라질 것을 요구하신다. 나오라!" 긴 침묵이 따르고 성벽과 성문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우론은 이미 계획을 세워 놓아 이 생쥐들을 격살하기 전에 먼저 잔인하게 희롱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 생각대로 진행되어 지휘관들이 이제 다시 물러나려고 하는 순간 정적이 갑자기 깨졌다. 산으로부터 천둥소리처럼 커다란 북소리가 길게 울려나왔으며 바위를 흔들고 사람의 귀를 멀게 할 정도의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암흑의 성문 증 가운뎃문이 큰 소리와 함께 젖혀지듯 열리고 안으로부터 암흑의 탑의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엔 크고 산악하게 생긴 형체가 말 - 그걸 말이라 할 수 있다면 - 을 타고 나왔다. 그가 타고 있는 동물은 몸집이 아주 크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머리는 흉칙한 모양으로 생겨 살아있는 동물의 머리라기보다는 해골처럼 보였고 눈과 코에서는 불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 기사는 온통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높은 투구도 역시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지악령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바랏 두르탑의 부관으로 그의 이름은 아무런 기록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이름을 잊어 스스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사우론의 입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검은 뉴메노르인이라 불리던 종족에 속한 배교자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은 사우론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간계에 거점을 마련하고는 그를 숭배하고 악의 지식에 탐닉한 종족이었다. 그는 처음 암흑의 탑이 일어설 때 그 종복으로 들어갔으며 자신의 교활함으로 인해 그 군주의 총애를 점차 크게 얻게 되었다. 그는 엄청난 마법을 익혔으며 사우론의 마음을 많이 간파하여 그 어떤 오르크보다 더 잔인해져 갔다. 지금 걸어나온 기사가 바로 그였으며 그는 검은 갑옷을 입은 소부대와 붉은색의 악의 눈이 그려진 기치 하나만을 대동했을 뿐이었다. 이제 서부 지휘관들 몇 보 앞에 멈춰선 그는 그들을 아래위로 훑어본 다음 웃으며 말했다. "이 오합지졸 중에 나를 상대할 만한 권능을 지닌 자가 있는가? 아니면 나를 이해할 만한 지혜를 가진 자가 있는가? 적어도 그대는 아니야." 그는 아라곤 쪽을 향해 냉소를 흘리며 비웃었다. "왕을 만들려면 요정의 보석조각이나 이런 어중이떠중이 집단보다 더 나은 뭐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왜냐고? 산속의 어떤 강도라도 이런 정도의 졸개들은 이끌수 있단 말이야!" 아라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 응시해 잠시 그들은 힘을 겨루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라곤이 움직이거나 무기로 손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움찔하며 마치 무력으로 위협을 받은 것처럼 물러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난 전령이자 사자이니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런 법이 있다면 사자가 좀더 덜 무례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관습일 텐데. 그리고 아무도 그대를 위협하지 않았어. 전갈을 다 전할 때까지 우릴 겁낼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그대의 주인이 새로운 지혜를 짜내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종복들과 함께 그대는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될 거야." "그래, 그렇다면 그대가 대변인인가, 회색수염 늙은이? 우린 그대에 대해 때때로 듣지 않았는 줄 아는가? 그대가 이리저리 방황해 가며 안전한 거리를 두고 온갖 음모와 악행을 꾸미는 걸 말이야. 그렇지만 이번엔 코를 너무 멀리까지 내밀었는걸, 갠달프선생. 그대는 감히 위대한 사우른의 발 앞에 어리석은 그물을 친 자가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보게 될 거야. 난 그대에게 보여 주라는 지시를 받은 표식을 가지고 있지. 이리로 감히 다가올 용기가 있다면 특히 그대에게 말이야." 그가 경호원 중 한 명에게 지시를 보내자 검은 천으로 싼 꾸러미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사자는 그것을 한옆에 놓고 거기 에서, 지휘관들에게는 놀랍고도 실망스럽게 먼저 샘이 가지고 다니던 것과 같은 작은 칼을 꺼냈고 다음에 요정의 브로치가 달린 회색 망또를 꺼냈으며 마지막으로 프로도가 해진 옷 속에 입고 있던 미스릴갑옷외투를 꺼냈다. 그들 눈 앞에는 어둠이 다가왔으며 그 조용한 한순간에 마치 세계가 멈춰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가슴은 죽음을 느꼈으며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임라힐왕자 뒤에 서 있던 피핀은 비통한 외침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러자 갠달프가 그를 다시 뒤로 밀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조용히!" 그러나 사자는 크게 웃어 젖혔다. "흥,당신들에겐 다른 꼬마가 또 있었군 그래, 당신들이 그들에게서 무슨 쓸모를 찾았는지는 모르겠군. 그렇지만 그들을 모르도르에 밀정으로 보낸 건 당신들이 늘 저지르는 바보짓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지. 어쨌든 이 꼬마가 적어도 이 표식들을 전에 본 적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 당신들이 헛되이 부정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난 이 꼬마에게 감사해야겠는걸."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난 그것을 부인할 생각이 없다. 사실 난 그것들 모두와 그 유래까지 잘 알고 있지. 그대, 사우론의 더러운 입이 비웃고는 있지만 사실 모르고 있는 것까지 말이야. 그런데 그대는 왜 그것들을 이리 가져온 건가?" "난쟁이 외투, 요정의 망또, 멸망한 서역의 칼, 그리고 샤이어의 생쥐마을로부터 온 밀정, 흥, 더이상 그만두지. 우린 잘 알고 있어. 이건 음모의 표시들이야. 자, 아마 이것들을 지녔던 자는 당신이 잃기엔 너무 슬픈, 아니면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그런 생물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남아 있는 작은 지혜만이라도 모아 빨리 의논해 보지 그래. 사우론께서는 밀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안색이 공포에 질리고 눈에 경악의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다시 웃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경기가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그는 당신에게 소중하지, 그래. 아니면 그의 임무가 당신이 실패하길 바라지 않는 그런 것인가? 그렇겠지. 그런데 이제 그는 우리의 위대한 탑에서 고안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술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랜 세월 고통을 참아 내야 할 것이고 결코 풀려날 수 없는 거야. 그가 변하거나 파멸되지 않는 한 말이지. 또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게고 그러면 당신은 자기가 한 짓을 보게 될 거야. 만일 당신이 우리 주군의 조건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이건 틀림없이 시행될 것이다. " "조건을 말해 보라." 갠달프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에서 꺾이고 패배한 늙고 생기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가 조건을 수락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건은 이렇다." 사자는 그들 하나하나를 웃음을 짓고 둘러보며 말했다. "곤도르의 천민들과 그들에게 현혹된 동맹군들은 우선 위대한 사우론에게 다시는 공공연하게나 비밀리에거나 무력으로 대들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당장에 안두인대하 건너로 물러가라. 안두인 동쪽의 모든 땅은 영원히 사우론 혼자만의 것이 될 것이다. 안두인 서쪽은 안개산맥과 로한협곡까지 모르도르의 속국이 될 것이며 그곳의 신민들은 무기를 가질 수 없고 그들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데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엄하게도 파괴해 놓은 이센가드를 재건하는 데 협조해야 할 것이며 그곳은 사우론의 소유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부관이 거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사루만이 아니라 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지." 사자의 눈을 보고 그들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그 부관일 것이며 서부에 남은 모두를 자기 압제 하에 넣을 것이다. 그는 폭군이 될 것이고 그들은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갠달프가 말했다. "이건 포로 한 명을 인도하는 대가로는 너무 엄청나군. 당신 주인은 수많은 싸움을 통해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을 이 교환의 대가로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곤도르평원에서의 전투에서 희망을 잃어 이제 말장난에나 매달리겠다는 건가? 그리고 우리가 그 포로의 가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면, 우린 사기술의 주군 사우론이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리라는 것에 어떤 확신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포로는 어디 있는가? 그를 이리 데리고 나와 우리에게 인도하라. 그런 연후에야 우린 그 제안을 검토해 보겠다." 그러자 무서운 적과 말을 받아 넘기며 열중해서 주의깊게 상대를 지켜보던 갠달프에게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그 사자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사우론의 입과 무례한 말장난을 하려 하지 말라! 확신이 필요하다! 사우론은 아무도 내주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사우론의 관용을 간청한다면 먼저 그의 명령을 이행하라. 이것이 그의 제안이다.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만둬라!" "우린 이걸 받아들이겠다." 하고 갑자기 갠달프가 소리치며 망또를 걷어 젖히자 어둠 속으로 마치 칼날 갈은 하얀 섬광이 빛을 발하며 쏟아져 나왔다. 그의 치켜든 손 앞에서 추한 사자는 뒤로 물러섰으나 갠달프가 달려들어 그를 붙잡아 표식들, 즉 외투와 망또와 칼을 빼앗으며 말했다. "우린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이걸 가져가겠다. 그러나 네 제안으로 말하자면 우린 그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제 네 사자로서의 임무는 끝났고 죽음이 임박했으니 어서 꺼져라. 우린 여기에 신의없고 저주받은 사우론과 말장난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더욱이 그의 노예와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꺼져 버려라!" 모르도르의 사자는 더이상 웃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로 인해 마치 먹이에 다가서다가 가시 돋힌 막대로 콧등을 얻어맞은 야수처럼 일그러졌다. 격렬한 분노에 가득한 그는 입에서 침을 흘리며 목구멍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분노의 소리를 간신히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의 무서운 얼굴과 끔찍한 눈을 보았을 때 그는 공포가 분노를 억누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서 타 온 생물에 뛰어올라 그의 부하들과 함께 미친 듯 네굽을 늘고 키리스 고르고르를 향해 달렸다. 그 부하들이 달려가면서 긴 나팔 신호음을 불자 그들이 채 성문에 닿기도 전에 사우론은 덫을 튀겼다. 북이 울리고 불길이 올랐다. 모라논의 모든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문들로부터 마치 수문을 올렸을 때 격류가 소용돌이치며 밀려나오듯 대군이 쏟아져 나왔다. 지휘관들이 다시 말에 올라 뒤로 물러나자 모르도르의 대군으로부터 조롱하는 고함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멀리 서 있는 망루 뒤편 에레드 리뒤의 어둠 속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동부인 군세가 가까이로 밀려들자 먼지가 대기를 뒤덮었다. 모라논 양편의 산들로부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르크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서부인들은 포위됐으며, 곧 그들이 서 있던 회색 구릉들 주변은 그들보다 백 배는 되어 보이는 적의 바다로 온통 둘러싸여 버렸다. 사우론은 강철덫 속에 달아 놓았던 미끼를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아라곤에게는 전열을 배치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다. 그는 갠달프와 함께 할 구릉위에 서 있었으며 거기엔 성수와 별의 기치가 아름답고도 결사적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다른 구릉에는 로한과 돌 암로스의 기치, 즉 백마와 은빛 백조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구릉 주변은 창과 칼로 빽빽히 들어찬 포위망으로 모든 길이 차단되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첫 공세가 예상되는 모르도르 정면 쪽에는 엘론드의 아들들이 버티고 있었고 듀너데인이 그 왼편을 둘러쌌으며 오른편은 크고 아를다운 돌 암로스인들을 이끈 임라힐왕자와 탑의 경비대 중에서 선발된 기사들이 맡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트럼펫이 울렸으며 화살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양은 이제 모르도르 뿌연 안개로 덮인 남쪽을 향해 떠오르고 있어 짙은 연기 속에서 마치 하루의 종말이라도 되는 양, 아니면 빛의 세계의 종말이라도 되는 양 멀리서 음침한 붉은빛을 던지고 있었다. 또한 몰려드는 어둠 속에서 나즈굴이 죽음의 차가운 외침을 토하며 날아와 모든 희망을 꺼버리고 말았다. 갠달프가 제안을 거절해 프로도가 그 탑의 고통 속으로 맡겨지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 것을 듣는 순간 피핀은 공포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을 억제하고 임라힐 부하들과 함께 곤도르의 최전선에 베레곤드와 나란히 섰다. 그는 모든 것이 다 파멸 속에 있는 것 같아, 빨리 전사해 자기 생의 쓰라린 이야기를 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메리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렀다. 공격하려고 진군해 오고 있는 적들을 보며 마음 속으로 빠르게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래. 이제 어쨌든 나도 그 불쌍한 데네도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어. 지금이 죽을 자리라면 메리하고 함께 있는 게 좋을 텐데.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죽는 거지 뭐. 하지만 메리는 여기 없으니 나보다 쉬운 종말을 맞이하길 빌 수밖에. 어쨌든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는 끌을 뽑아 날을 살펴보았다. 칼날 위에 새겨진 뉴메노르의 문자들이 황금빛과 붉은빛을 찬란하게 뿌렸다. '이 칼은 바로 이런 때를 위해 만들어 졌다지. 그 더러운 적의 사자를 이 칼로 칠 수 있었다면 나도 메리 정도의 공을 세우는 건데 그랬어. 그렇지만 일이 다 끝나기 전에 그런 짐승 몇 마리는 잡을 수 있겠지. 아, 다시 차가운 햇빛과 푸른 풀밭을 볼 수 있다면!'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첫번째 공세가 닥쳐 왔다. 구릉 앞 진흙탕에 막힌 오르크들은 그 앞에 정지해 이쪽 수비대를 향해 화살을 퍼부어 댔다. 그려나 그들 사이로 야수처럼 울부짖는 대부대의 고르고로스 트롤들이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인간보다 더 크고 건장했으며 단지 꽉 끼는 각질 비늘그물옷만을 입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소름끼치는 가죽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검고 큰 둥근 방패와 함께 울퉁불퉁한 손에 무거운 해머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진흙탕으로 뛰어들어 건너오며 고함을 질러 댔다. 폭풍처럼 몰려온 그들은 곤도르인들의 수비선으로 뛰어들어 투구와 머리를 가릴 것 없이, 또 팔과 방패를 가릴 것 없이, 마치 달구어진 굽은 쇠를 내리치는 대장장이처럼 마구 해머를 휘둘러 댔다. 피핀 옆에 있던 베레곤드도 몹시 얻어맞아 쓰러졌으며 그를 내리친 거대한 트롤대장은 손톱을 뻗치고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이 끔찍한 괴물들은 흔히 쓰러뜨린 적의 목을 잡아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피핀이 위를 향해 찔렀다. 서역의 문자가 새겨진 칼이 거인의 가죽을 꿰뚫고 치명적으로 깊이 파고들자 검은 피가 쿨럭이며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거인은 그들을 덮치며 마치 바위가 굴러떨어지듯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피핀에게는 암흑과 함께 악취와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으며 거대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는 마치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 속에서 이렇게 생각했으며, 잠깐이지만 마음 속으로부터 웃음이 흘러나와 마치 모든 의심과 염려와 공포를 마침내 다 내던져 버린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잊혀짐 속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마치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저 위 잊혀진 세계에서 울려나오고 있는 듯했다. "독수리가 오고 있다! 독수리가 오고 있다!" 한순간 더 피핀은 생각을 주저했다. '빌보! 아니야! 그건 아주, 아주 오래전의 그분 이야기에 나오는 건데. 이건 내 이야기고 이젠 끝난 거야. 안녕!' 이제 그의 영혼은 산란되었으며 눈은 더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제11장 키리스 운골탑 샘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곧 온갖 절망과 고통이 되살아났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오르크들의 성문 밖 짙은 어둠 속이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문을 부술 양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부딪치고 정신을 잃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온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올랐지만 곧 추워서 몸을 떨었다. 샘은 성문으로 기어가 바싹 귀를 갖다댔다. 성안 저 멀리서 오르크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소란을 멈춘 것인지 더 멀리 가버린 것인지, 정적만 감돌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고 어둠 속에서 환상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생각을 계속하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성문을 통해 오르크들의 성 안으로 들어갈 가망은 없었다. 문이 저절로 열리자면 며칠이고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프로도씨를 구출해 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다 죽어야 한다. "아마 죽게 되겠지. 그게 훨씬 쉬울 거야." 그는 단호한 어조로 중일거리며 스팅을 칼집에 꽂고 성문에서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갈라드리엘의 빛을 사용하지도 않고 샘은 천천히 왔던 길을 더듬어 나갔다. 가면서 프로도와 함께 교차로를 떠난 이후에 겪었던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도무지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날짜라는 개념이 잊혀질 뿐 아니라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망각되고 마는 암흑의 대지에 와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우리를 생각이라도 하는지 모르겠어. 멀리 있는 그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샘은 허공에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그는 서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셸로브의 굴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저 바깥 서부는 지금 샤이어력으로 3월 14일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 아라곤은 펠라기르로부터 검은 함선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고, 메리는 로한인들과 함께 스톤웨인계곡을 달려오고 있었다. 이 무렵 미나스 티리스에서는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피핀은 데네도르의 눈에서 이글대는 광기를 보고 있었다. 이들의 걱정과 두려움에서 프로도와 샘에 관한 생각이 배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프로도와 샘, 그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멀리 있는 친구들의 걱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생각만으로는 햄패스트의 아들 샘와이즈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샘은 완전히 혼자였다. 이윽고 샘은 오르크통로의 석문에 이르렀다. 문의 손잡이나 빗장을 찾을 수 없어 전에 했던 대로 석문을 타고 올라가 가볍게 땅바닥에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셸로브의 굴 입구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섰다. 셸로브의 거대한 거미줄이 찢어진 채 여전히 찬 공기에 흔들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악취나는 어둠 속을 뚫고 나온 뒤라 샘에게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찬 공기를 마시자 샘은 기운이 솟았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기어나갔다. 불길할 정도로 사방이 적막했다. 빛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건 어두운 낮이 종말을 고할 때의 어스름이었다. 모르도르에서 만들어져 김을 내며 서쪽으로 흘러가는 거대한 안개가 머리 위로 낮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아래쪽 구름과 연기 덩어리에 이제 막 불이 붙기라도 한 듯 빨갛게 노을이 물들었다. 샘은 고개를 들어 오르크들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좁은 창마다 일제히 불이 밝혀져 마치 작고 빨간 눈동자처럼 보였다. 무슨 신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와 절망으로 인해 잠시 사라졌던 오르크들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샘이 생각할 때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즉 이대로 계속 가서 탑의 정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 무릎에는 힘이 없었으며 스스로 느낄 정도로 떨고 있었다. 샘은 탑과 그 뾰족한 정점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길 옆 바위를 감싸고 있는 짙은 어둠 속을 찬찬히 살폈고 귀도 바짝 긴장시켰다. 프로도가 쓰러져 있던 곳을 지날 때 여전히 셸로브의 악취가 풍겼다. 계속 걸어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그는 절대반지를 끼고 샤그라트 일당으로부터 몸을 숨겼던 바로 그 벼랑에 이르렀다. 샘은 주저앉았다. 잠시 더이상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고개에서 모르도르를 향해 한 발짝만이라도 내디딘다면 그 한 걸음이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발길이 되고 말리라. 샘은 뚜렷한 이유없이 절대반지를 꺼내 끼었다. 곧 엄청난 반지의 무게를 느꼈고 모르도르의 눈(사우론의 눈)에 어린 살기가 전보다 훨씬 강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쳐놓은 어둠을 꿰뚫어보며 불안과 의혹의 촉수를 내뻗고 있는 눈이었다. 샘이 느끼기에 청각은 여전히 예민한 것 같았지만 눈에 비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어느것이나 윤곽이 선명하지 않고 희미했다. 길 양측의 석벽은 마치 안개 속처럼 희끄무레하게 보였고 멀리서 셸로브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렸다. 또한 금속이 부딪는 소리와 거친 고함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갑자기 샘은 벌떡 일어나 길 옆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반지를 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오르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탑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를 듣고 착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절벽 왼편, 샘의 머리 바로 위에 탑의 정점이 보였다. 샘은 몸서리를 치고 억지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오르크들이 무슨 극악한 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명령이 있을 테지만 그 어떤 명령일지라도 오르크들의 잔혹성이라면 꺼릴 게 없을 것이다. 지금 프로도를 고문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잘게 토막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한 줄기 희망이 비쳤다. 탑 안에서는 오르크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샤그라트와 고르백이 서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추측만으로 희망을 점치기엔 너무 성급했지만 샘에게는 대단한 공기를 주는 사건이었다.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프로도에 대한 사랑이 다른 어떤 생각도 물리쳐 버렸다. 그는 무심코 큰 소리로 외쳤다. "프로도씨, 갑니다!" 샘은 곧장 달려가 고갯길을 넘어 버렸다. 그러자 길은 즉시 왼쪽으로 꺾이면서 급한 내리막으로 변했다. 샘은 이제 모르도르로 들어선 것이었다. 샘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샘으로서는 좀더 뚜렷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어쩌면 어떤 불길한 예감이 그렇게 지시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중얼거렸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앞을 똑똑하게 볼 수 있는 게 낫겠지. 안개 속에서 헤매는 건 싫어." 샘이 본 모르도르의 대지는 딱딱하고 무정하며 냉혹했다. 정면에는 에펠 듀아스산맥의 상봉이 아래의 깊은 계곡을 향해 깎아지른 듯 절벽으로 내리닫고 있었다. 골짜기 저편 봉우리는 이보다 훨씬 낮았지만 송곳니처럼 삐죽 솟은 바위들이 깊이 팬 톱니모양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 봉우리가 바로 모르도르의 내벽인 험상궂은 모르가이연봉이었다. 그 산마루 너머 저 멀리, 실은 바로 머리 위가 되겠지만, 작은 불꽃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광활한 어둠의 호수 너머에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로부터 연기가 피어올라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기둥을 형성했다. 아랫부분은 암홍색을 띠었지만 위로 갈수록 검어져 결국엔 이 저주받은 땅을 덮고 있는 저 하늘로 흩어져 갔다. 샘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불의 산 오로드루인이었다. 이 화산은 이따금 잿빛 원추형 봉우리 깊은 분화구에서 엄청난 파동과 굉음을 일으키며 용암을 분출해 냈다. 용암은 갈라진 틈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바랏 두르 쪽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뜨겁게 달아 있기도 하고 자갈지대로 흘러들면서 마치 땅에서 튀어나온 용처럼 뒤틀린 모습으로 식기도 했다. 마침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장면을 샘이 본 것이었다. 서쪽으로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에펠 듀아스산맥으로 인해 온전히 볼 수 없는 불의 산의 불꽃이 지금 시커멓게 두드러진 바위와 대조를 이루며 붉게 타고 있었다. 수십 개의 바위는 마치 피에 젖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 무시무시한 불빛 아래 서 있던 샘은 갑자기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바로 왼편에 키리스 운골탑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반대쪽에서 보았던 그 탑의 정점은 그냥 망루에 불과했다. 동쪽 정면은 아래 벼랑의 바위턱으로부터 전부 세 개의 단이 높은 계단처럼 층을 이루며 위로 뻗쳐 있었다. 그 뒷면은 거대한 절벽과 면해 있었으며 뾰족한 능보가 하나씩 층을 이루고 있어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졌다. 북동쪽과 남동쪽 측면은 뛰어난 석공의 솜씨였다. 샘이 서 있는 곳에서 육십 미터쯤 아래에 위치한 최하층에는 총안이 뚫린 흉벽이 있었는데 내부는 좁은 방이었다. 남쪽 출입구는 대로변으로 나 있었고 바깥 담장은 절벽 가장자리와 만나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속 굽어지며 어둠 속으로 내려가다가 모르굴고개와 합류했다. 그렇게 계속되어 모르가이봉의 들쑥날쑥한 바위틈을 뚫고 고르고로스계곡으로 들어가 더 멀리 바랏 두르까지 이어졌다. 샘이 현재 서 있는 좁은 윗길에서는 한단 더 내려가 급경사를 지나야만 탑 출입구 가까운 벽 아래 대로에 닿을 수 있었다. 탑을 지켜보던 샘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성채는 모르도르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게끔 세워진 것이었다. 이 탑은 오래전 인간과 요정의 최후동맹 이후 서역인들이 사우론의 잔당을 감시하기 위해 이밀리엔 방어벽의 동쪽 전초기지로 세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齒]의 탑 나르코스트와 카츠코스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감시가 소홀했던 탓에 반역자에 의해 반지악령의 군주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랫동안 악의 무리들이 이 탑을 장악해 온 것이다. 모르도르로 돌아온 사우론은 이 탑이 쓸모가 있음을 알았다. 당시만 해도 그의 종복은 몇 되지 않았고 겁먹은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탈출을 막을 목적으로 이용했다. 또한 적이 성급하게도 은밀하게 모르도르로 진입하려 할 때, 그가 비록 모르굴과 셸로브의 공격을 물리친다 해도 이것이 마지막 경비탑으로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곳곳에 보초가 깔려 있을 저 벽을 지나 출입구를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시가 심한 저 길을 지날 수가 없을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짙게 깔려 있는 저 어둠도 어두운 데서 눈이 밝은 오르크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악조건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즉 출입구를 빠져나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샘은 절대반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엔 공포와 위험만이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폭발하고 있는 불의 산을 본 순간 반지의 무게에 변화가 있었다. 머나먼 옛날 그 반지를 벼려 만들었던 바로 그 화산 분화구에 가까워질수록 반지의 무게는 더 무거워져 급기야는 어떤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된다. 샘이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반지는 줄에 매여 목에 걸려 있음에도 자신의 존재가 훨씬 커졌음을 느끼는 듯했다. 마치 찌그러진 자신의 그림자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모르도르의 성벽마다에 엄청난 불길한 징조가 도사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샘은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고통을 감수차면서 절대반지를 끼든지 아니면 암흑의 골짜기 저편 지하요새에 버티고 있는 악마를 불러내 도전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미 반지는 그의 의지와 이성을 갉아먹으며 샘을 유혹하고 있었다. 머리속에서는 무수한 환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위대한 영웅 샘와이즈가 불칼을 들고 암흑의 땅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무수한 군사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바랏 두르는 전복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 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빛났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고르고로스계곡은 꽃과 수목의 등산이 되어 열매를 맺었다. 이제 그는 절대반지를 끼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샘이 의연하게 버틸 수 있던 것은 프로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평범한 호비트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환상이 자신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더라도 샘은 이미 자신이 진 짐을 혼자 감당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왜소하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에게 명령해야 하는 왕국만한 정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가꿀 수 있는 작은 뜰의 자유로운 정원사, 그것이 그가 바라는 전부이며 자신이 해야 할 책무였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런 잡생각은 속임수야. 그놈이 날 더럽히고 협박했어. 큰 소리로 쫓아 버리기도 전에 말이야. 여기서 내가 반지를 끼게 되면 그놈은 날 타락시킬 거야. 이건 분명한 사실이야. 봄날의 서리처럼 희망이 없어. 내 모습이 꼭 보이지 않아야 할 때라도 반지를 껴서는 안 돼! 낀다면 무게 때문에 걸을 수도 없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한다지?" 샘은 단호했다. 이제 더이상 지체 않고 출입구로 내려가야 했다. 그림자와 환상을 떨쳐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겁많고 왜소한 호비트의 본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탑의 성벽을 지나면서 그는 반지의 도움 없이도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리는 외벽 뒷방에서 들려왔다. 샘이 길 절반쯤 왔을 때 시커먼 출입구에서 두 명의 오르크가 달려나왔다. 그들은 다행히 샘이 있는 쪽이 아닌 대로 쪽을 향했는데 갑자기 넘어지면서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샘은 화살을 보지 못했지만 누군가 흉벽이나 문 뒤에서 그들을 쏜 것으로 짐작했다. 샘은 왼편 성벽에 붙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타고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석조물은 구 미터나 올라가다 계단을 거꾸로 매단 것같이 돌출된 부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갈라진 틈이나 돌출된 곳이 전혀 없었다. 길은 출입구뿐이었다. 샘은 계속 기어갔다. 탑 안에는 샤그라트와 고르백 일당이 각기 몇 명씩이나 있는지, 그리고 싸우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것인지 궁금했다. 전에 본 바로는 샤그라트의 편이 한 사십 명쯤 되었고 고르백은 그 두 배가 넘는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물론 샤그라트의 순찰대는 그가 통솔하는 전 수비대의 일주에 지나자 않을 테지만. 틀림없이 프로도와 전리품을 놓고 싸우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샘은 발을 멈췄다. 눈으로 본 듯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 미스릴코트! 프로도가 입고 있는 걸 보았을 테지. 샘이 들은 바로는 고르백이 그걸 몹시 탐내고 있었다. 바랏 두르의 명령이 지금으로서는 프로도의 생명을 지켜 주는 유일한 장치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오르크들이 프로도를 죽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샘은 중얼거렸다. "서둘러야 해, 이 게으름뱅이야! 자, 이제부터야." 샘은 스팅을 뽑아 열린 출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출입문 아치를 막 지나려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셸로브의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듯 충격을 받았다. 장애물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무엇인가가 길을 막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 뒤 어둠 속에 두 개의 조상이 서 있었다. 거대하치 버티고 선 조상은 꼭 왕처럼 당당해 보였다. 각각은 세 개의 몸체에 머리도 셋이 달려 있었고 하나는 밖을 또 하나는 안쪽을, 나머지 하나는 출입문 입구를 보고 있었다. 머리는 독수리처럼 생겼으며 무릎 위에 놓인 손 역시 독수리발톱과 같았다. 괴물들은 꼼짝도 않고 있었지만 판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몸 속에는 무자비한 경계심이 깃들여 있어 적을 알아보는 것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누구도 무사히 통과할 수 없었다. 침입이든 탈출이든 이 괴물들이 저지하는 것이었다. 샘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다시 한번 돌격했다. 그러다가 딱 멈추고는 가슴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나 샘으로서는 달린 어떤 방도가 없었기에 다시금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천천히 꺼내 높이 쳐들었다.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지면서 시꺼먼 아치 밑의 어둠을 밀어 냈다. 괴물들은 여전히 꼼짝 않고 표정없이 앉아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꺼먼 눈알에서 번득이는 광채가 샘을 순간적으로 움츠리게 했지만 차츰 그들이 동요하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쏜살같이 달려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나 그가 유리병을 가슴 속에 집어넣는 순간 괴물들이 제정신을 찾았다. 샘은 등 뒤에서 쇠막대기가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괴물들이 귀가 째지는 비명을 내질러 탑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답신인 듯한 종소리가 거칠게 한번 울렸다. 샘은 부르짖었다. "일이 벌어졌구나. 초인종을 눌렀으니 누구든 나와라! 샤그라트에게 위대한 요정의 무사가 요정의 병기를 들고 찾아왔다고 일러라!" 반응이 없었다. 샘은 앞으로 전진했다. 손엔 든 스팅에서 푸른빛이 번득였다. 안뜰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포도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오른편 발치에 단도를 등에 맞은 사수 둘이 보였고 그 너머에 더 많은 시체들이 흩어져 있었다. 칼에 베이거나 화살에 맞아 쓰러진 것도 있었지만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르다가 물어뜯기도 하면서 죽어 넘어진 시체들이 둘씩 엉겨 있기도 했다. 시커먼 피로 얼룩진 포도는 미끄러웠다. 제복을 입은 시체가 둘 눈에 띄었다. 하나는 붉은 눈을 표식으로 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유령 같은 얼굴의 시체로 더럽혀진 달을 표식으로 달고 있었다. 뜰 건너편에는 탑의 최하부에 커다란 출입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붉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덩치 큰 오르크 하나가 뮨 앞에 쓰러져 있었다. 샘은 그 시체를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으나 거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살폈다. 출입문에서 뒤쪽 산비탈을 향해 메아리가 울리는 넓은 복도가 이어졌다. 벽 선반받이에서 횃불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복도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수많은 문들이 보였지만 바닥엔 두어 구 시체가 뻗어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아까 들었던 우두머리들의 말을 생각하면 프로도는 죽었든지 살았든지 탑꼭대기 방에 있을 가능성이 큰데 찾으려면 꼬박 하루가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샘은 중얼거렸다. "뒤쪽일 거야. 탑 전체가 뒤쪽을 정점으로 솟아 있거든. 어쨌든 우선은 이 불빛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 샘은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정말 내키지 않는 발길이라 천천히 내딛었다. 다시금 공포가 엄습했다. 적막 속에서 그의 발소리만이 점점 크게 울려퍼졌고 그 소리는 마치 커다란 손으로 돌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 같았다. 시체들, 적막, 횃불 아래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듯한 시커멓고 축축한 벽, 문간과 어둠 속에 것들인 죽음의 공포, 출입문에서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는 살기, 이런 것들은 단순히 얼굴을 찡그리고 말 성격의 것들이 아니었다. 불확실하고 무시무시한 이런 상상보다 차라리 싸움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한번에 너무 많지 않은 적들과 대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샘은 이 탑 어딘가에 결박당해 있거나 고통 속에 빠져 있을, 아니면 죽어있을지도 모르는 프로도에게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횃불 아래를 지나 복도 끝의 커다란 아치문 가까이 이르자 이곳이 바로 지하통로의 출입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 저멀리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와 샘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자 발소리가 들렸다. 바로 머리 위에서 누군가 계단을 울리며 급히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달리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손은 이미 줄을 잡아당겨 반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반지를 끼지는 않았다. 반지를 움켜쥔 손을 가슴 앞에 모았을 때 오르크 하나가 덜거덕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른쪽 컴컴한 출입구에서 샘을 향해 달려나오고 있었다. 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르크는 고개를 들어 샘을 보았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고 충혈된 눈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오르크는 갑자기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손에 단검을 쥔 채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겁에 질린 호비트가 아니었다. 어른대는 불빛을 배경으로 잿빛 어둠에 둘러싸인 거대한 형상이었다. 손에 들린 스팅어서는 예리한 섬광이 번쩍였다. 다른 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있는 것이 마치 막대한 힘으로 파멸을 몰고 올 알수 없는 무기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몸을 웅크렸던 오르크는 공포에 질린 듯 비명을 지르며 왔던 길로 달아나버렸다. 순간적으로 용감해지곤 하는 강아지일지라도 이 순간의 샘보다 더 용맹스러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샘은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쫓았다. "자, 요정무사를 가로막을 수 있는 잔 아무도 없다! 내가 간다. 네놈은 올라가는 길을 안내만 하면 돼. 그렇지 않으면 네놈 가죽을 벗겨 버리겠어!" 그러나 오르크는 식사를 배불리 했는지 행동이 민첩했으며 길도 익숙했다. 하지만 샘으로서는 낯선 길이었고 게다가 배가 고팠다. 계단은 높고 경사가 급했으며 휘어져 있었다. 샘은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오르크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올라가는 발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이따금 질러 대는 비명소지가 벽을 타고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모든 소리는 천천히 잠겨들고 있었다. 샘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이제 제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기운이 솟았다. 반지는 다시 집어넣고 벨트를 조여 매면서 중얼거렸다. "놈들이 스팅과 나를 보고 그렇게 진저리를 친다면 이건 기대했던 것보다 희망적인 상황이야. 어쨌든 샤그라트와 고르백의 부하들이 내가 할 일을 대신 다 해놓은 것 같거든. 겁에 질린 저 쥐새끼말고는 살아남은 놈이 하나도 없는 게 분명히." 그 순간 샘은 석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딱 멈춰있다. 한 대 얻어맞은 듯 그는 자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놈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아까 그 소름끼치는 비명의 주인은 누구였단 말인가? 샘은 울부짖듯 외쳤다. "프로도, 프로도씨야! 프로도씨! 그놈들이 프로도씨를 죽였다면 어떻게 하지? 어쨌든 이제 곧장 달려갑니다!" 샘은 계속 위로 올라갔다. 층계참이나 상층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횃불이 켜져 있는 것 외에는 계단은 어두웠다. 샘은 계단 수를 세어 보았으나 이백이 넘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머리 위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샘은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살아남은 놈은 그 쥐새끼말고도 또 있는 듯했다. 더이상 숨을 내쉴 수도 무릎을 구부릴 수도 없겠다 싶을 때 계단은 끝이 났다. 샘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목소리는 이제 가깝게 들려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지금 서있는 곳은 바로 탑의 세번째 단이 되는 맨 꼭대기의 평평한 지붕이었는데 나지막한 난간이 달린 탁 트인 공간으로 폭이 이십 미터쯤 되어 보였다. 지붕 한가운데에는 돔식 천장이 붙은 계단이 나 있었고 동쪽과 서쪽을 향한 낮은 문이 달려 있었다. 동쪽 문으로 저 아래 광활한 어둠에 싸인 모르도르평원이 보였고 저 멀리 화산도 눈에 들어왔다. 깊은 분화구에서 이제 막 분출된 용암이 강을 이루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에 멀리 떨어진 이 탑꼭대기까지 붉게 비켰다. 서쪽 전방은 작은 탑의 기반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 있었다. 정면 상단의 바로 뒤쪽에 위치한 탑의 정점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마루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창에 빛이 비쳐들었다. 샘이 서 있는 곳에서 십 미터도 채 안 떨어진 곳에 문이 있었다. 열려있었지만 어두웠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 샘은 동쪽 문에서 돌아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위엔 온통 오르크들의 시체로 널려 있었고 절단된 머리와 사지가 곳곳에 흩어져 나뒹굴었다.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함소리와 함께 병기로 일격을 가하는 괴음, 그리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샘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분노에 찬 오르크의 외침이었다. 거칠고 난폭하며 차디찬 그 소리로 샘은 샤그라트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가지 않겠다고? 이 빌어먹을 놈, 스나가! 내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날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이리 와 봐! 방금 라드벅이란 놈에게 해준 것처럼 네놈 눈알도 뽑아 버리고 말겠다. 그리고 새로 신병이 들어오면 그땐 널 셸로브에게 보내 주지." 그러자 스나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장이 죽기 전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걸요. 내가 두 번이나 말했듯이 고르백의 부하가 먼저 입구로 나갔고 우리 편은 아무도 나가지 않았어요. 락두프와 무즈가시가 달려나갔지만 칼에 맞고 말았죠. 창문으로 봤다니까요. 그들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렇다면 이젠 네놈이 가야지. 난 여기 남아 있어야만 해. 그런데 난 부상을 당했단 말이야. 더러운 반역자 고르백이란 놈은 바랏 두르의 지하토굴에 처넣어야 해!" 샤그라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더러운 이름과 저주의 소리만 반복되어 울려퍼졌다. "난 그놈한테 내것보다 더 좋은 걸 줬는데도 그놈은 날 찔렀어. 그러니 네가 가야해! 내 말을 안 들으면 잡아먹고 말 테다. 이 소식이 바랏 두르에 전해져야 한달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지하토굴로 가게 될 거야. 네놈도 마찬가지지. 여기서 슬그머니 빠져나갈 수는 없어." 그러자 스나가가 소리쳤다. "당신이 대장이든 아니든 나는 저 계단으로 다시 내려가지 않겠어. 안 가! 단도를 버리시오. 반항하면 창자에다 화살을 박아줄 테니. 여기서 벌어진 일들이 그자들의 귀에 들어갈 때면 당신은 더이상 나의 대장이 아닐걸. 난 지금껏 이 탑을 지키기 위해 구린내나는 모르굴의 변절자들과 싸웠는데 당신들 두 고귀한 대장들이 약탈품을 놓고 싸우는 바람에 쑥밭이 되고 말았어." 그러자 샤그라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 명령이다! 싸움을 건 건 고르백이야. 저 귀한 코트를 뺏으려 했잖아." "당신이 그자를 부추긴 셈이지. 기세등등하게 만들어 놓은 거야. 어쨌든 그자가 당신보다는 눈치가 빨랐어. 염탐꾼 중에 위험천만한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말을 그자가 여러 번 했지만 당신은 들으려 하지 않았지. 지금도 믿지 않고. 내 말은 고르백이 옳았다는 거야. 싸움을 잘하는 대단한 놈이 한 놈 들어왔어. 피투성이 손을 가진 요정의 일당이 아니면 더러운 곤도르놈일 거야. 당신도 종소리를 들었지. 경계상을 무사히 통과했는데 그건 곤도르놈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 그놈은 계단에 있어. 난 그놈이 계단을 떠날 때까진 내려가지 않겠다는 거야. 당신이 설사 나즈굴이라 해도 말이지." "그래? 네놈 마음대로 하겠단 말이지? 그놈이 이리로 오면 나만 내버려 두고 달아나겠단 말이지? 안 돼! 그렇겐 안 돼! 그전에 내가 네놈 배때기에 빨간 구멍을 뚫어 줄 테다!" 몸집이 작은 오르크가 쏜살같이 망루를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 뒤로 몸집이 큰 샤그라트가 쫓아나왔는데 몸을 웅크리고 있어 긴 팔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한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피를 흘리고 있는 듯했다. 다른 팔로는 커다란 검은 꾸러미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 계단 출입문 뒤에 웅크리고 있던 샘은 그의 흉악한 얼굴을 얼핏 보았다.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엔 마치 손톱에 할퀸 것 같은 상처가 나 있었다. 삐져 나은 송곳니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으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샘이 보고 있는 동안 샤그라트는 지붕을 돌며 스나가를 쫓아갔다. 이윽고 덩치가 작은 오르크가 고개를 숙여 샤그라트를 피하고는 소리를 지르며 망루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자 샤그라트가 멈춰섰다. 난간 옆에 서서 헐떡거리며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동쪽 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샤그라트는 들고 있던 꾸러미를 바닥에 놓고 오른손으로 붉은 단검을 뽑아 들고 칼날에 침을 뱉었다. 그리곤 난간으로 가서 몸을 기대 멀리 아래쪽 뜰을 내려다보고 두 번 소리를 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샤그라트가 등을 지붕 꼭대기로 향한 채 흉벽 위로 몸을 굽혔을 때 샘은 놀랍게도 쓰러져 있던 시체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기어가서 손을 뻗어 꾸러미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한 손에는 자루가 짧게 잘려나간 뭉툭한 창을 들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증오 때문인지 쉿 하는 소리가 이빨 새로 새어 나왔다. 순간 샤그라트는 뱀처럼 날렵하게 몸을 비키고 홱 돌아서서 적의 목에 칼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고르백! 아직 죽지 않았었구나! 이제 완전히 마무리지어 주지." 샤그라트는 쓰러진 시체 위로 달려들어 미친 듯이 발로 짓밟았다. 또한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칼로 찌르고 난도질했다. 이윽고 만족한 듯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소름끼칠 정도의 환성을 내질렀다. 잠시후 피묻은 칼을 핥아 이빨 사이에 물고 꾸러미를 집어들고는 계단 출입문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갔다. 샘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른 쪽 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반드시 발각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괴물 같은 오르크와 숨바꼭질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샘은 반지를 끼지도 않고 샤그라트와 대적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그러나 모르도르의 종복들에겐 비밀스런 힘으로서, 또 위험적인 존재로서 반지는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스팅을 움켜쥐고 있었다. 칼날에서 반짝이는 빛은, 무시무시한 요정나라의 무자비한 별빛같이 오르크의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샤그라트는 보물을 들고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멈춰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다시금 오르크들 방식대로 그는 옆으로 펄쩍 뛰었다. 샘이 달려들자 묵직한 꾸러미를 방패겸 무기로 이용해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샘은 비틀거렸다. 샤그라트는 그 틈을 타 계단 아래로 뛰어 달아나고 말았다. 샘은 욕을 하며 뒤를 쫓았지만 얼마 안 가 멈추고 말았다. 프로도를 생각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오르크가 망루 안으로 되돌아간 사실을 기억했다. 또 한번의 양가택일을 해야만 했다.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샤그라트가 빠져나가면 얼마 안가 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며, 단일 그를 뒤쫓는다면 탑 위 남은 저 오르크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이대로 따라간다고 해도 샤그라트를 놓치게 될지도 모르고 또 그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샘은 잽싸게 돌아서서 계단을 다시 달려 올라왔다. 그는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또 다시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나중에야 어찌되건 우선 꼭대기로 올라가 보는 게 당연해." 멀리 아래쪽에서 귀중한 꾸러미를 안은 샤그라트가 계단을 뛰어내려가 마침내 뜰을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만일 샘이 그를 볼 수 있었고 또 그에게 닥친 불행을 알았다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샘의 온 정신은 추적의 마지막 단계에 쏠려 있었다. 샘은 망루의 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곧 오른쪽에서 희미한 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빛은 또 하나의 계단으로 통하는 입구로부터 새나오고 있었다. 계단은 어둡고 좁아 보였으며 둥근 벽을 따라 망루로 휘돌아오르고 있었다. 샘은 조용히 오르기 시작했다. 왼쪽 문에서 기름이 녹아 흘러내리는 횃불 있는 데 까지 갔다. 그 문 맞은편에 서쪽이 내다보이는 창이 있었다. 언젠가 프로도와 함께 터널 입구에서 올려다본 적이 있는 붉은 눈 중 하나가 바로 이 창이었다. 샘은 재빨리 그곳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등뒤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목으로 감아드는 듯한 느낌 때문에 두려웠다. 샘은 동쪽으로 난 창문 바로 곁으로 갔다. 망루 한가운데 에서 통로로 이어지는 문 위에 또 횃불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명멸하는 횃불의 미광과 창틈으로 새어드는 붉은 빛만 비쳐들 뿐 복도는 어두웠다. 계단은 여기서 끝이 났다. 샘은 통로로 기어들었다. 양 옆으로 나지막한 문이 모두 잠겨 있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샘은 중얼거렸다. "기껏 올라왔더니 막다른 길이야! 이건 탑꼭대기가 아닌데. 이제 어떻게 하지?"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올라왔다.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단 몇 분이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아까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나 그는 아무런 방도도 없었다. 샤그라트라든가 스나가, 그 밖의 어떤 오르크에게도 샘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프로도 생각뿐이었다.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기를,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지치고 낙담한 샘은 통로가 있는 층 계단에 앉아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쥐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가 왔을 때 이미 희미하게 타고 있던 횃불이 탁탁 소리를 내다가 꺼져 버렸다. 어둠이 조수처럼 밀려와 그를 덮어 버렸다. 오랜 추적과 슬픔이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 가슴 속에 깃들인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상에 이끌려 샘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둡고 냉랭한 탑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외롭고 지친 호비트의 목소리를 요정의 군주가 부르는 노랫소리로 착각할 오르크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샤이어의 동요와 고향땅의 유성 빛처럼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른 빌보의 시 한 토막을 웅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힘이 솟아나며 목소리가 커졌다. 단순한 곡조에 잘 맞는 가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서쪽 대지는 태양 아래 봄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나무에는 싹이 트고, 시냇물이 흐르고, 멋쟁이 새들이 즐겁게 노래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이면 흔들리는 너도밤나무 갈라진 머리칼 사이에 흰 보석 같은 요정의 별이 열린다. 긴 여정이 끝난 여기, 깊이 깔린 어둠 속에 내 비록 있지만 높고 튼튼한 모든 탑을 넘어 가파른 모든 산을 넘어 온갖 어둠 위로 태양은 떠오르고 별들은 영원토록 머무른다. 그러나 낮이 끝났노라 말하지 않을 것이며 별에게 작별을 고하지도 않으리라. "높고 튼튼한 모든 탑을 넘어," 노래를 다시 되풀이하다가 그는 갑자기 그쳤다. 그에 응답하는 희미한 음성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들렸다. 무슨 소린가 들렸는데 목소리는 아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위 위 통로의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돌쩌귀가 삐걱 소리를 냈다. 샘은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히고 오르크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야! 거기 있는 놈, 이 더러운 쥐새끼 같은 놈아! 찍찍 소리를 그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 처치해 주겠다. 듣는 거냐?" 대답이 없었다. 스나가는 다시 외쳤다. "좋아. 직접 가서 네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겠다." 문이 다시 삐걱 했다. 샘은 문 귀퉁이로 열린 문 안에서 명멸하는 빛과 밖으로 나오는 오르크의 희미한 형상을 보았다. 그는 사다리를 들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모든 문제가 일시에 밝혀졌다. 탑의 맨 꼭대기방은 통로 천장의 들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었다. 스나가는 들고 있던 사다리를 위를 향해 고정시키고 기어올라가 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빗장을 빼는 소리가 들렸다. 끔찍스런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조용히 자빠져 있어. 시키는 대로 안하면 혼날 거다! 이렇게 편안하게 자빠져 있는 것도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재미를 보고 싶지 않으면 아가리 닫쳐. 알아들었어? 주의를 주지!" 채찍소리가 났다. 그 순간 샘의 가슴은 분노로 불이 붙고 말았다. 벌떡 일어난 샘은 한 마리 고양이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머리를 내밀어 보니 크고 둥근 방 한가운데였다. 천장에는 빨간 등불이 매달려 있었고 서쪽을 향한 창은 높고 어두웠다. 창 아래 벽옆에 어떤 물체가 엎어져 있었고 그 위에 시커먼 오르크가 양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두번째로 채찍을 들어 올렸지만 내리 치지는 못했다. 소리를 지르며 샘이 바닥 위로 뛰어올랐다. 손에는 스팅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르크는 빙빙 돌며 피하려고 했지만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샘은 채찍을 든 손을 내리쳐 버렸다. 오르크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울부짖으며, 하지만 머리를 숙인 채 필사적으로 샘에게 달려들었다. 샘의 두번째 가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오르크를 잡으려 하다가 균형을 잃고 자빠졌다. 일어서려 할 때 비명소리와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빠져나가려던 오르크는 사다리에 걸려 들창 아래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샘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이에게 달려갔다. 그는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냄새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기절해 있는 거지꼴이었다. 팔은 위로 뻗어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등에는 끔찍한 채찍자국이 가로로 길게 나 있었다. 샘은 외쳤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프로도씨! 프로도씨! 샘이에요! 제가 왔어요!" 샘은 그를 반쯤 일으켜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프로도가 눈을 떴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직도 꿈인가? 다른 꿈은 끔찍했는데." "꿈이 아니에요. 사실입니다. 저예요. 제가 왔어요." 프로도는 샘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 조금 전까지 채찍을 든 오르크가 있었는데 갑자기 샘으로 변하다니. 저 아래서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신호를 보내려고 했었어. 그건 꿈이 아니었겠지? 그게 너였어?" "그래요, 프로도씨. 저도 거의 희망을 포기했었지요. 프로도씨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 됐어, 샘. 사랑하는 샘!" 프로도는 샘의 포근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마치 자다가 놀라 어린아이가 애정어린 목소리나 손길로 두려움을 떨치고 안도하는 모습 같았다. 샘은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한없이 행복했지만 그냥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프로도를 찾아 내긴 했지만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구출해 내야만 한다. 샘은 프로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프로도씨! 일어나세요!" 어느 여름날 아침 백 엔드에서 커튼을 걷으며 그랬듯 쾌활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프로도는 한숨을 쉬며 일어나 앉아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떻게 이리 온 거지?"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어디 딴 곳으로 가야 해요, 프로도씨. 지금 이곳은 프로도씨가 잡히기 전에 터널 근처에서 함께 보았던 그 탑꼭대기예요.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하루는 더 지난 것 같은데요." "그 정도밖에 안 됐어? 몇 주일이 지난 것 같은데. 기회가 있을 때 전부 얘기해 줄게. 내가 무엇에 얻어맞았었지? 암흑 속에 쓰러져 더러운 꿈을 꾸었어. 그러다가 깨어 보니 꿈보다 더 나쁘더군. 오르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어. 지독하게 독한 술을 내 목에 부어 넣었던 것 같애. 점차 정신이 들더니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었어. 그들은 옷을 벗기더니 그 중 두 놈이 다가와 자세히 살피다가 만족스럽게 웃기도 하고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계속 질문을 했어. 난 미치는 줄 알았지. 그놈들의 손톱과 눈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그놈들 얘길 하고 있는 한 잊을 수가 없죠. 그놈들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서 떠야 해요.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프로도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걸을 수 있어. 다치진 않았어, 샘. 아주 지쳤을 뿐이야. 여기가 좀 아프긴 한데." 그는 목 뒤 왼편 어깨를 가리켰다. 그가 일어서자 마치 불길에 휩싸인 사람처럼 벌거벗은 살갗이 등불빛에 새빨개 보였다. 그는 한두 걸음 떼어 보았다. 약간 기운이 솟는 듯 말했다. "한결 좋아. 혼자 있을 때 감시병이 있을 때나 움직여 볼 생각도 못했어.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진 말이야. 굉장히 덩치가 큰 두 놈이 싸움을 벌인 것 같아. 나하고 내 소지품 때문들 말이야. 난 여기서 떨고 있었지. 얼마후에 죽은 듯 잠잠해졌는데, 더 기분이 안 좋아지더군." "그래요,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요. 원래 이백 명 정도 있었던 것 같거든요. 샘 갬기가 감당하기엔 다소 벅찰 만한 숫자라고 말씀하시고 싶겠지만, 그놈들은 그 많은 숫자를 자기네들이 다 죽인 거예요.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얘기를 여기서 다하자면 한이 없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프로도씨께서 이렇게 벌거벗은 채 암흑의 땅을 걸어가실 수는 없는데." "내게 있던 건 모조리 다 뺏어 갔어, 샘. 알겠어? 모조리 말이야." 프로도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말에서 프르도는 다시 한번 자신이 당한 불행을 뼈저리게 느끼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원정은 실패로 끝났어, 샘. 여기서 나간다 해도 우린 달아날 수 없어. 요정만이 탈출할 수 있겠지 멀리, 중간계 밖으로, 바다 건너 아주 멀리. 어둠을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멀리 일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아니에요, 프로도씨. 전부 다 빼앗아 가지는 못했어요. 원정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요. 프로도씨께 용서를 구하며 제가 그것을 빼 냈거든요. 지금 제가 보관하고 있어요. 제 목에 매달고 있는데 엄청나게 무겁군요." 샘은 반지와 줄을 더듬어 찾았다. "이제 프로도씨께서 다시 보관하셔야겠지요." 그러나 샘으로서는 프로도에게 다시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프로도가 외쳤다. "네가 갖고 있다고? 지금 갖고 있어? 샘, 넌 정말 대단한 친구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어조가 싹 바뀌었다. "이리 줘!" 일어서 소리치며 내민 프로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당장 이리 내놔! 네가 갖고 있어선 안 돼!" 샘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러죠, 프로도씨. 여 기 있습니다." 샘은 천천히 반지를 꺼내 줄을 머리 위로 빼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모르도르예요. 여기서 나가면 불의 산이 보여요. 그래서 이 반지는 대단히 위험하거든요. 무게도 대단하구요.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지니시기가 너무 힘들면 제가 좀 거들어도 되겠지요?" "안 돼!" 프로도는 줄에 매단 반지를 샘의 손에서 낚아챘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 날강도 같은 놈!" 두려움과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샘을 노려보며 그는 헐떡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손으로 반지를 꽉 움켜쥐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야 시야가 밝아지는 모양이었다. 한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쓸었다. 상처와 두려움으로 여전히 멍한 상태이긴 했지만 아까는 어떤 무시무시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프로도의 눈 앞에서 샘이 추악한 오르크로 변해 있었다. 탐욕스런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신의 보물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환상은 사라졌다. 눈 앞에 샘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마치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흘렀다. 프로도가 외쳤다. "샘!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어떻게 했어? 용서해 줘! 네가 모두 잘해 냈는데 말이야. 반지의 무서운 위력 때문이었어.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길 바랐는데! 하지만 날 걱정하진 말아, 샘. 내가 이 짐을 끝까지 져야 해. 달라질 순 없는 거야. 나와 이 운명 사이에 네가 끼어들 수는 없는 거야."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샘이 말했다. "알고 있어요, 프로도씨. 하지만 제가 도울 수는 있는 거죠? 우선 여기서 모시고 나가야겠어요, 지금 당장. 아시겠어요? 당장 말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옷이 필요하고, 음식도 좀 구해야겠는데. 옷은 문제가 없겠어요. 모르도르에 있으니 모르도르식으로 차려입어야겠죠. 달리 방도가 없어요. 프로도씨와 제가 오르크옷을 입으면 잘어울리겠죠? 자, 이걸 두르고 계세요." 샘은 회색 망또를 벗어 프로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보따리를 내려 바닥 위에 놓은 뒤 칼집에서 스팅을 뺐다. 칼날은 이제 거의 빛을 발하지 않았다. "이걸 잊고 있었군요, 프로도씨. 그놈들이 모조리 벗어간 것은 아니에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스팅과 유리병은 제게 빌려 주셨었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이건 잠시만 더 빌려 주셔도 되겠죠? 지금 가서 좀 찾아 보고 오겠어요. 프로도씬 여기서 조금씩 걸으면서 다리를 풀고 계세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조심해, 샘! 서둘러 다녀오고 살아남은 오로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운에 맡기고 해보죠 뭐." 샘은 들창 문으로 가서 사다리를 내려갔다. 잠시 후 그의 머리가 다시 나타나더니 긴 칼을 바닥으로 던지며 말했다. "쓸 만한 게 있더군요. 그 자식은 죽었어요. 채찍질했던 놈 말이에요. 허둥대더니 목이 부러졌나 봐요. 자, 이 사다리를 위로 끌어올려 두세요. 제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는 절대로 사다리를 내리시면 안 돼요. 제가 엘베레스 하고 말할게요. 요정들 말이니 오르크들은 그 말을 모르겠죠." 잠시 프로도는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갖가지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는 일어서서 회색망또를 감아쥐고 다음을 정리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왔다갔다하면서 방 구석구석을 살피기도 했다. 두려움 때문에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난 느낌이 들 때 아래에서 샘이 낮은 소리로 엘베레스, 엘베레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도는 즉시 사다리를 내렸다. 샘은 커다란 꾸러미를 머리에 올려 놓은 채 가쁜 숨을 내쉬며 올라와 바닥에 쿵 하고 내려 놓았다. "서두르세요, 프로도씨! 우리한테 맞을 만한 작은 것을 찾아 다녔는데 이것으로 대충 때워야겠어요. 서둘러야 해요. 산 놈이라고는 한 놈도 보지 못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감시당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날아다니는 추악한 그 기사놈들 중 하나가 캄캄한 이 어둠 속 어딘가 높은 데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요." 샘은 꾸러미를 풀었다. 프로도는 내용물을 보자 구역질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몸으로 가지 않으려면 이것들을 입어야만 했다. 프로도는 털이 긴 모피바지와 더러운 가죽웃옷을 입고 그 위에 탄탄한 쇠사슬갑옷을 걸쳤다. 오르크한테는 좀 짧았을 것 같지만 프로도에겐 너무 길고 무거웠다. 그 위로 날이 넓은 칼이 든 짧은 칼집이 매달린 벨트를 졸라맸다. 오르크가 쓰는 투구도 몇 개 있었는데 그 중에 철테를 두른 검은 투구가 프로도에게 맞았다. 철테는 가죽으로 싸여 있었고 부리 모양의 코덮개 위에 악마의 눈이 새빨갛게 그려져 있었다. 샘이 말했다. "모르굴의 물건인 고르백의 칼이 더 낫지만 그놈의 소지품을 갖고 모르도르로 가는 건 좋지 못할 것 같어요. 일이 다 끝난 다음에라도 그건 좋지 않을 거예요. 자, 다 됐어요, 프로도씨. 이제 얼굴에 가면을 쓰고 팔을 길게 늘어뜨리기만 하면 프로도씬 완벽한 오르크가 되겠는데요. 자, 이렇게 하면 감쪽같을 거예요." 설은 커다란 검은 망또를 프로도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 이제 다 됐습니다! 방패를 들어도 좋겠는데요." "샘, 넌 어쩌고? 함께 가지 않을 거야?" "죽 생각해 봤는데요, 프로도씨. 제가 입었던 옷을 조금이라도 남겨 놓으면 안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어떻게 없애 버릴 수도 없고요. 이 옷 위에 오르크 갑옷을 껴입을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든 가리긴 가려야겠는데 말이죠." 샘은 꿇어앉아서 자기 망또를 조심스럽게 말았다. 놀랍게도 망또는 아주 작은 뭉치가 되어 자루 속에 들어갔다. 샘은 일어나 짐을 등에 짊어진 다음 오르크모자를 쓰고 어깨엔 검은 망또를 걸쳤다. "자, 이만하면 다 됐지요. 빨리 나가야겠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프로도가 말했다. "샘, 난 줄곧 달릴 수는 없을 것 같애. 네가 몇 군데 주막을 알아 봤겠지? 아니면 요기할 것을 구한다더니만 잊어 버렸나?" 샘은 당황해 하며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걸 어쩌지요. 프로도씨 때문에 저도 얼마나 배가 고픈데요. 물이나 음식이 제 입으로 들어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요. 프로도씨를 찾아 헤매느라고 벌써 잊어 버렸어요. 잠깐, 가만 있어 보세요. 파라미르가 우리한테 준 음식말고도 렘바스가 충분히 남아 있었는데요. 한데 지금 물통엔 물이 한 방울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우리 둘 목을 축이는 데도 부족할 거예요. 오르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나요? 아니면 그놈들은 더러운 공기와 독만 먹고 사는 건가요?" "그늘들도 먹고 마시지. 그들을 길러 낸 어둠은 흉내만 낼 줄 알았지 만들어 낼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 그놈들이라고 다른 것은 없어. 어둠이 오르크에게 생명을 준 게 아니라 망쳐 놓은 거야. 그놈들도 살아가려면 다른 생물들처림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없으면 썩은 물, 썩은 고기도 먹을 거야. 하지만 독은 먹지 않을걸. 그놈들이 내게 먹을 걸 줬었어. 그러니 너보단 내가 낫겠지. 여기 어딘가에 음식과 물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걸 찾을 시간이 없어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상황이 나아. 너와 헤어져 있는 동안 난 조금은 운이 있었어. 그놈들이 전부 다 가져간 건 아니거든.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 가운데서 식량주머니를 찾았단 말이야. 물론 그놈들이 샅샅이 뒤져 보긴 했지만 아마 렘바스의 생김새와 냄새가 비위에 몹시 거슬렸던 모양이야. 골룸이 싫어한 이상으로 말이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또 짓밟혀 뭉개진 것도 있지만 난 주워 모았지. 아마 네가 생각했던 양보다 크게 부족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파라미르가 준 음식은 그들이 먹어 버렸고 내 물통도 박살을 내놨어." "그렇다면 더 할 말이 없지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물 때문에 좀 고생이 되겠는데요. 자, 프로도씨, 이제 나가요! 더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어요." "샘, 네가 한입 먹지 않으면 난 여기서 꼼짝도 않겠어. 자, 렘바스를 먹고 네 물통의 물도 마시도록 해. 희망은 거의 없어. 그러니 내일 음식까지 걱정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일은 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이윽고 그들은 출발했다. 사다리를 내려온 샘은 떨어져 죽은 오르크 시체 곁에 사다리를 내려 놓았다. 계단은 어두웠으나 불의 산에서 비쳐 오는 불빛이 꼭대기에 여전히 반사되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변장을 위해 각자 방패를 들었다. 한없이 이어진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내려오자 보니 이제 떠나온, 그들이 다시 만났던 그 방이 따사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 긴 계단을 달리고 있었다. 키리스 운골탑의 모든 것들이 죽었을지는 몰라도 그 탑의 두려움과 악은 여전히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바깥들로 통하는 문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모르도르의 미광이 어렴풋이 비치는 정문 양쪽에 시커멓게 버티고 선 그 적의에 가득한 경계상들이 벌써부터 자신들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끔찍한 오르크의 시체를 지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아치에 닿기 전에 그들은 멈춰서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이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 프로도는 도전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샘, 못 가겠어. 쓰러질 것 같아. 뭐가 뭔지 모르겠어." "프로도씨, 일어서세요. 정문이에요. 저건 악마의 상이에요. 하지만 전 무사히 통과했었어요. 빠져나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보다 더 위험할 것도 없어요. 자, 지금부터예요!" 샘은 다시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꺼냈다. 그의 대담무쌍함에 경의를 표하듯, 이미 그와 같은 일을 치러 낸 듬직한 갈색 호비트의 손을 영광스럽게 빛내려는 듯 유리병은 갑자기 빛을 뿌렸다.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바깥뜰이 마치 번개처럼 현란한 빛으로 가득해졌다. 빛은 사라지지 않고 한결같이 비쳐졌다. "걸도니엘! 엘베레스!" 샘이 외쳤다. 왠지 모르게 그는 샤이어에서 만난 요정들과, 숲에 숨어 있던 암흑의 기사들을 물리쳤던 그들의 노래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프로도도 외쳤다. "아이야 엘레니온 안칼리마!" 가는 줄이 툭 끊어지듯 갑자기 경계상들의 의지가 풀리는 순간 프로도와 샘은 앞으로 고꾸라질 듯 내달렸다. 눈을 번득이는 거대한 괴물들을 지나 정문을 통과했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들 발뒤꿈치에서 아치 윗부분이 무너져 내리며 그 위의 벽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경계상들의 높고 소름끼치는 울부짖음이 하늘 높이 울렸다. 그러자 어둠 속 저 높은 곳에서 응답이 들렸다. 시꺼먼 하늘에서 날개달린 형상이 소름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구름을 가르고 쏜살같이 내리꽃혔다. 제12장 암흑의 대지 샘은 유리병을 재빨리 품속에 넣고 외쳤다. "달리세요, 프로도씨! 아니, 그쪽이 아니에요. 그쪽 벽에는 낭떠러지가 있어요. 절 따라오세요." 그는 길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낭떠러지의 돌출한 부분을 쉰 걸은 정도 달렸을 때 탑에서는 이미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위기에서 우선은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웅크린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부서진 정문 옆 성벽에 내려앉은 나즈굴이 괴성을 질러 대자 낭떠러지 전체가 울렸다. 그들은 겁에 질려 비틀비틀 걸어갔다. 얼마 안 가서 길은 다시 동쪽으로 급히 꺾어졌기에 잠시동안이지만 탑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노출된 길을 재빨리 지나가면서 그들은 흉벽 위에 커다란 검은 형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노출된 길을 재빨리 지나가면서 그들은 흉벽 위에 커다란 검은 형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그들은 깎아지른 듯 높은 석벽 사이로 들어섰다. 이곳은 급경사를 이루며 모르굴도로와 이어지는 합류점이었다. 여전히 오르크는 보이지 않았고 나즈굴의 울부짖음에 별다른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적이 오래가지 않으리란 것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추적이 시작될 것 같았다. 프로도가 말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샘. 우리가 진짜 오르크라면 달아날 게 아니라 탑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누구라도 우릴 보면 당장에 정체를 알아차릴 거야. 어쨌든 이 길에서 벗어나야 해." "하지만 어떻게요? 날개 없인 나갈 수가 없는데요." 에펠 듀아스 산맥의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절벽과 안쪽 봉우리 사이의 깊은 계곡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합류지점을 지나 가까운 곳에 가파른 내리막길을 넘어 돌로 만든 다리가 계곡 위에 놓여 있었다. 다리는 모르가이연봉의 급경사와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프로도와 샘은 필사적으로 달려 다리를 건넜다. 거의 다 건너 다리 끝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뒤에서 추적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뒤쪽 저멀리, 산중턱의 키리스 운골탑이 흐릿한 빛을 발하며 어렴풋이 보였다. 갑자기 탑에서 거칠게 종이 울리며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나팔소리도 들렸다. 오로드루인산의 꺼져가는 불빛조차도 차단된 암흑의 계곡에 들어선 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거운 철군화소리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샘!" 프로도가 외쳤다. 그들은 나지막한 다리 난간으로 기어올랐다. 다행히도 깊은 구렁으로 빠져드는 무시무시한 내리받이는 더 이상 없었다. 모르가이연봉의 사면들이 여기선 이미 길과 같은 높이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방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계곡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자, 가요, 프로도씨. 잘 있어라!" 샘은 이렇게 외치고 먼저 달렸다. 프로도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뛰어내리면서도 말탄 기수들이 다리 위를 질주하는 소리와 그 뒤를 우르르 따라 달려오는 오르크들의 요란한 발소리를 들었다.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결국 떨어진 곳은 사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구덩이였고 쿵 하는 소리말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나는 것이었다. 떨어진 곳에는 엉킨 덤불이 있었던 것이다. 샘은 그대로 꼼짝 않고 누워 긁힌 손을 가만히 핥았다. 말발굽소리와 사람의 발소리가 지나가자 샘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기랄! 모르도르에도 식물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미리 알았더라면 바로 이걸 찾아 봤을 텐데요. 이 가시는 길이가 삼십 센티는 되는 것 같아요. 온몸에 박혔어요. 나도 그 갑옷을 입는 건데." "오르크갑옷에도 가시가 뚫고 들어온걸. 가죽웃옷도 별수 없고 말이야." 그들은 덤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지만 가시덤불은 철사처럼 질길 뿐 아니라 짐승의 발톱마냥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마침내 그들이 빠져나왔을 때 망토는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프로도가 속삭였다. "샘, 아래쪽으로 가자. 최대한 빨리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북쪽을 찾는거야." 바깥세상에는 다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모르도르의 어둠 너머 저멀리 중간계 동쪽 먼 곳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밤인 듯 캄캄하기만 했다. 화산은 마지막 연기를 뿜으며 불을 누그러뜨렸다. 빛나던 광휘는 절벽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이델리엔을 떠난 후로 줄곳 불어오던 동풍도 이제 멎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말라 버린 잡목숲을 헤매기도 하고 또 바위를 기어오르기도 하며 힘들여 천천히 내려갔다. 이윽고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앉았다. 땀이 흘렀다. "샤그라트가 물 한 컵을 준다면 기꺼이 악수하겠어요." 샘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갈증만 심해질 뿐이야." 프로도는 지치고 현기증이 나 바닥에 몸을 뻗고 누웠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던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샘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일어나, 샘! 어서 일어나! 또 떠날 시간이야." 겨우 몸을 일으킨 샘이 말했다. "아이구 깜짝이야! 잠이 들었었나 봐요. 제대로 잠을 자 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눈이 저절로 감겨 버렸어요." 이번에는 프로도가 앞장을 섰다. 정확한 방향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북쪽이라 추측하며 걸어갔다. 계곡은 온통 자갈밭이었다. 프로도가 갑자기 멈춰서면서 말했다. "이건 아무 소용이 없어, 샘. 도저히 못 견디겠어. 이 갑옷 말이야." "지금 같으면 필요도 없잖아. 피곤할 때는 미스릴코트도 무겁게 느껴졌는데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 무거워. 사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어? 우린 싸워 이기지도 못할텐데 말이야."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칼이 들어올 수도 있고 화살이 날아올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골룸이 아직 살아있어요. 이 어둠 속에서 칼에 맞을지도 모르는데 프로도씨가 가죽옷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이봐, 샘. 난 이제 지쳤어. 피곤해. 사실 희망도 없지. 하지만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그 화산까지 가는 노력은 계속해야 해. 반지 하나만 해도 벅찬데 이런 짐까지 걸치느라고 난 죽을 지경이야. 이건 벗어야겠어. 그렇다고 내가 네 은혜를 모른다고는 생각지 말아. 네가 날 위해 이걸 찾아오느라고 시체 속을 누비고 다닌 걸 생각하면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정도야." "그런 말씀 마세요, 프로도씨. 아!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업고 가고 싶어요. 정 그러시다면 벗으세요." 프로도는 망토를 벗은 뒤 오르크의 쇠사슬 갑옷을 벗어 던져버렸다. 그는 약간 몸을 떨었다. "정말 필요한 건 따뜻한 옷이야. 추워진 건지 나이면 내가 오한이 든 건지." "제 망토를 드릴게요." 샘은 짐을 풀어 요정의 망토를 꺼냈다. "괜찮지요, 프로도씨? 오르크의 망토로 몸을 단단히 싸고 벨트를 맨 다음 이걸로 몸을 덮으세요. 오르크식은 아니지만 따뜻할 거예요. 그리고 프로도씨를 보호하는데는 어떤 다른 무기보다 나을 거예요. 레이디가 만드신 거니까요." 프로도는 망토를 받아 걸치고 브로치를 채웠다. "훨씬 나은데! 훨씬 가볍기도 하고. 이제 갈 수 있겠어. 그런데 이 칠흑 같은 어둠이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탑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브랜디와인과 우디엔드, 그리고 백 엔드와 물방앗간의 물을 기억하려고 했었지. 이제 그것들을 볼 수도 없을 텐데." "이번엔 프로도씨가 물 얘길 했어요. 레이디가 우릴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얘길 들을 수만 있다면 전 그분께 이렇게 말하겠어요. '레이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과 물이에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그저 깨끗한 물과 평범한 햇빛을 원해요. 도와주세요.'하고요. 하지만 여기서 로리엔까지는 너무 먼 길이군요." 샘은 한숨을 쉬며 에펠 듀아스 산맥의 정상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제 에펠 듀아스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시 출발했지만 얼마 안 가 프로도가 멈춰섰다. "암흑의 기사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애. 잠시 가만 있는 게 좋겠어." 커다란 바위 아래 웅크린 채 서쪽을 향해 앉았다. 얼마동안 말없이 있다가 마침내 프로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나갔어." 그들은 일어서며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왼편 저멀리 남쪽으로 잿빛으로 변한 하늘을 배경으로 넓은 지역에서 걸쳐진 산봉우리들이 검은색 형태를 드러냈다. 등 뒤는 밝아오고 있었으며 빛줄기는 북쪽을 향해 뻗어 갔다. 하늘 높은 곳에서 전쟁이 벌어져 생명계로부터 불어온 바람은 가스와 연기를 그들 고향인 암흑의 땅으로 몰아넣고 있었으며 소용돌이치던 모르도르의 구름들은 가장자리가 찢겨진 채 물러나고 말았다. 음울한 하늘 아래서 희미한 빛이 감방의 더러운 유리창으로 비껴드는 활기없는 아침햇살처럼 모르도르로 스며들고 있었다. 샘이 말했다. "저걸 보세요, 프로도씨! 저길 좀 봐요. 바람이 바뀌었어요.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나 봐요. 이제 사우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저기 어둠이 흩어지고 있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때는 3월 15일 아침이었다. 태양은 동쪽에 드리워진 어둠 위로 솟아올랐고 남서풍이 불어왔다. 이 시각 펠레노르평원에서는 데오든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프로도와 샘이 지켜보는 동안 빛은 에펠 듀아스산맥의 능선을 타고 퍼져갔다. 바로 그때 서쪽으로부터 대단히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가 보였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비치는 긴 빛줄기 때문에 검은 점으로 보였지만 점점 커지더니 여전히 어두운 상태로 남아 있던 하늘로 번개처럼 잠겨들어 순식간에 그들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것은 날아가면서 긴 비명을 질렀다. 바로 나즈굴의 비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지 못했다. 그건 암흑의 탑 바랏 두르에 비보를 전하는 비탄의 울부짖음이었다. 반지악령의 군주가 죽은 것이다. 샘이 외쳤다. "제가 뭐랬어요.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샤그라트는 전쟁이 문제없다고 그랬지만 고르백은 믿지 않았었지요. 역시 고르백이 옳았어요. 일이 잘돼가고 있나 봐요. 프로도씨, 여전히 희망을 못 가지시겠어요?" 프로도는 한숨을 지었다. "그래, 대단한 희망은 못 돼, 샘. 저 산맥 너머 멀리 떨어진 곳이야. 우린 지금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는 거야. 난 너무 지쳤어. 반지가 너무 무거워, 샘. 또 그것이 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어. 마치 불붙은 수레바퀴 같은 게." 생기에 넘쳤던 샘은 다시 풀이 죽고 말았다. 그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프로도를 바라보며 손을 잡았다. "기운을 내세요, 프로도씨. 제가 바랐던 것 중 하나는 얻었잖아요. 한 줄기 빛 말이에요. 하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위험이 될 수도 있겠지요. 조금 더 가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쉬어요. 우선 렘바스 한 조각만 드세요. 그럼 기운이 나실 거예요." 그들은 렘바스 한 조각을 나눠 바싹 마른 입 속에 넣고 억지로 씹으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잿빛 어스름 정도에 불과했지만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의 계곡 깊숙이 와 있다는 사실을 그 빛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계곡 북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바닥은 원래 강바닥이었지만 지금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자갈길 저편으로 서쪽 절벽 아랫단에 꼬불꼬불한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오솔길이 서쪽 다리 끝에 있던 모르굴의 주도로를 지나던 바로 그 길이었고 바위를 깎아 만든 긴 계단 하나로 계곡 바닥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둘은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길은 키리스 운골과 일명 철의 턱이라 불리는 카락 앙그렌 즉 이센마우드협곡을 연결하는 순찰병이나 전령들이 급할 때 주로 이용했던 것이다. 호비트들이 이 길로 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빨리 간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게다가 프로도는 모르가이의 길없는 골짜기든 아니면 자갈길이든 더 이상은 기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뒤쫓는 무리들이 그들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리라고는 예상을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평지로 통하는 동쪽이나 서쪽 고갯길을 먼저 수색할 것이다. 프로도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는 가정 하에 탑의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방향을 잡을 예정이었다. 물론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원정의 최후 단계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갈길에서 벗어나 오솔길로 들어서 얼마간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왼편으로 절벽이 머리 위에 돌출해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는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길은 계속 꺾어졌으며 그때마다 그들은 칼자루를 움켜쥐고 경계를 취해야만 했다. 날은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오로드루인산에서 여전히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로 솟구친 연기는 대기의 저항을 받기로 했지만 한없이 높이 올라 바람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지붕을 형성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중앙의 기둥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터벅터벅 걷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 멈춰섰다. 믿기지 않지만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들어 보니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였다. 검은 절벽이 마치 거대한 도끼로 쪼개진 듯 갈라져 있었는데 그 좁은 틈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햇빛을 받고 공중으로 올라온 바닷물의 응집체인 달디단 빗물이 운나쁘게도 이 암흑의 땅으로 마지막 여행을 해와 땅 속으로 스며들고 마는 것이었다. 물은 마치 작은 실개천처럼 바위틈에서 떨어져 길 반대편으로 흘러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 순식간에 생명없는 돌틈으로 사라져 갔다. 샘은 잽싸게 달려가면서 말했다. "레이디를 다시 뵙게 되면 이렇게 말하겠어요. '빛을 주시더니 물도 주셨군요.'라고 말이에요. 프로도씨, 제가 먼저 마실게요." "좋아, 둘이 마실 만큼은 충분히 되겠는데 뭐."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 말은요, 이 물에 독이 있다거나 무슨 이상이 있을까 봐 먼저 마셔 보겠다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래. 하지만 우리 함께 운에 맡기지. 우리의 행운에 말이야. 아, 그래도 조심해! 아주 찰 거야." 물은 그다지 차지는 않고 시원했지만 맛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집에서라면 쓰고 기름기가 있다고 불평했겠지만 지금의 그들에게는 이 물맛조차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려움이나 조심성이 끼어들 틈도 없을 만큼 갈증에 시달린 후라 그들은 실컷 마셨다. 샘은 물통을 가득 채웠고 프로도 역시 기분좋게 출발했다. 쉬지 않고 몇 마일 가다 보니 어느 순간 길이 넓어지고 옆에는 담이 시작되었다. 또다른 오르크들의 요새가 근처에 있다는 증거였다. 프로도는 어둑어둑한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고 말했다. "자, 여기서 방향을 바꿔야 해. 동쪽으로 말이야. 저 위 어딘가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만한 기운은 아직 남았으니까. 그 후에 쉬기로 하지." 계곡바닥은 이제 길보다 조금 아래 있었기에 그들은 기어내려가야 했다. 그들은 곧장 계곡 저편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엔 어둠이 덮인 웅덩이가 여럿 있었다. 계곡 상층에서 흘러온 가느다란 물줄기가 웅덩이들로 모이고 있었다. 서쪽 산맥의 외곽지대는 죽어 가고 있었지만 모르도르가 죽은 땅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거칠고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계곡 건너편 모르가이 골짜기에는 키 작은 관목들이 은밀하게 자라고 있었다. 억센 잿빛 풀더미는 바위와 자리를 다투었고 바위 위에는 시든 이끼가 덮여 있었다. 엉클어진 가시덩굴이 곳곳에 구불구불 촉수를 뻗쳤다. 침같이 기다란 가시가 있는가 하면 낚시바늘처럼 구부러진 가시도 있었다. 음울한 색조의 딱딱하게 오그라든 낙엽을 매단 나무에 변덕스런 싹이 제멋대로 돋아나기도 했다. 암갈색인지 회색인지 검은색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힘드는 파리들이 마치 오르크들의 붉은 점처럼 생긴 눈을 달고 붕붕거리며 쏘아 댔다. 굶주린 작은 곤충들이 구름처럼 떼를 지어 가시덤불을 춤추며 맴돌았다. 샘이 팔을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오르크의 갑옷도 소용없고, 차라리 오르크의 가죽이 있어야겠어요." 마침내 그들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둘은 경사가 느린 협곡을 올라왔는데 아직 마지막 바위산을 볼 수 있는 곳까지는 멀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샘, 여기서 좀 쉬어야겠어. 가능하다면 잠도 좀 자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 음울한 곳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릴 것 같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나지막한 바위 위에 발처럼 늘어진 가시덤불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들은 우선 식사부터 했다. 앞으로 남은 최악의 순간들을 위해 귀중한 렘바스는 아껴 두고 샘의 꾸러미에 있던 파라미르가 준 음식 절반만 먹었다. 시든 과일과 소량은 훈제육, 그리고 물을 조금 마시는 정도였다. 계곡 웅덩이에서도 물을 마셨지만 여전히 갈증은 계속됐다. 모르도르의 대기에는 갈증을 유발하는 독특한 쓴맛이 배 있었다. 물을 생각하자 샘마저 활기를 잃었다. 모르가이연봉 너머에는 거대한 고르고로스대평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샘이 말했다. "프로도씨가 먼저 주무세요. 다시 날이 어두워지는데요. 이제 밤이 거의 가까워진 것 같아요." 프로드는 한숨을 쉬더니 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샘은 엄습해 오는 노곤함을 떨쳐 버리려고 애쓰며 프로도의 손을 잡은 채 밤이 깊어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만에 졸음을 쫓을 양으로 기어나와 밖을 내다보았다. 모르도르는 부서지는 소리, 삐걱이는 소리, 그 밖의 은밀한 소리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목소리나 발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에펠 듀아스산맥 너머 서쪽 밤하늘에는 여전히 어슴푸레한 빛이 남아 있었다. 시커멓게 높이 솟은 바위산 위 구름조각 사이로 흰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이 잠깐 보였다. 버려진 땅에서 본 그 아름다움은 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샘은 얼마간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 줄기 선명하고 차가운 광선처럼 샘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암흑은 언젠가 사라지고 말 하찮은 것이며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영원불멸의 빛과 지고한 아름다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탑에서 불렀던 그의 노래는 희망이라기보다 오히려 도전이었다. 그땐 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주 잠깐동안, 자신의 운명 심지어 프로도의 운명조차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샘은 가시덤불 속으로 기어들어와 프로도 곁에 누웠다. 온갖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둘은 손을 잡은 채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샘은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할 기분이었지만 프로도는 한숨을 쉬었다. 간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고 또 악몽에 시달렸는지라 깨어나도 개운치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막중한 반지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의 힘은 새로 얻은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알 수 없었으며 얼마나 잤는지도 몰랐다. 약간의 음식과 물을 먹은 후 그들은 협곡을 따라 계속 경사진 길을 올라갔다. 협곡은 미끄러운 돌과 자갈의 급경사에서 끝이 났다. 모르가이연봉의 정상은 풀 한 포기 없이 헐벗은 들쑥날쑥한 톱니 모양이었다. 한참 헤맨 후 그들은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간신히 백 보쯤 오르자 정상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르도르의 마지막 방벽 경계가 되는 두 개의 시커먼 바위산 사이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섰다. 오백 미터쯤 아래로 내륙평원이 흐릿한 어둠 속으로 드넓게 펼쳐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서풍으로 바뀌었고 드높게 떠있던 구름들이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음산한 고르고로스에는 회색장막이 드리워졌다. 평원에 길게 깔린 연기는 움푹 들어간 곳마다 자리를 잡았고 갈라진 틈에서 새나오기도 했다. 저멀리 사십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운명의 산이 보였다. 산기슭은 잿더미로 덮여 황량했고 거대한 봉우리는 하늘 높이 솟아 연기뿜는 정상을 구름으로 가리웠다. 이제 불은 흐릿해지고 화산은 연기를 뿜으며 잠들어 있었다. 마치 잠든 야수처럼 위험스럽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 뒤로 거대한 어둠이 마치 천둥구름처럼 불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둠은 북쪽에서 뻗어나온 잿빛산맥의 거대한 산줄기 위로 우뚝 솟은 바랏 두르를 감싸고 있었다. 암흑의 힘은 눈을 자신의 내부로 돌려 불안과 위험으로 가득찬 소식을 숙고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번쩍이는 검 안두릴과 엄숙하고 위엄 있는 제왕의 얼굴이 바로 위험의 소식이었다. 이 순간에는 다른 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대한 요새 전체가 어둠에 잠겨 문과 탑 모두가 닫혀 있었다. 프로도와 샘은 이 증오스런 대지를 혐오와 경이가 섞인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선 곳에서 연기를 뿜는 화산까지, 그리고 그 산을 둘러싼 모든 대지가 죽은 땅이었다. 불에 타 말라 버린, 버려진 땅이었다. 이 땅의 군주가 노예와 병사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리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수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모르가이연봉 가장자리를 따라 남쪽으로 줄을 지어 선 야영지가 보였다. 천막들도 있었고 작은 마을처럼 정착된 곳도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기지는 그들 바로 아래에 있었다. 거대한 곤충서식지처럼 길고 낮은 건물들과 곧게 뻗은 황량한 길들이 보였다.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가 모르굴과 교차하는 지점에는 수많은 형체들이 줄을 지어 서둘러 행군하는 것이 보였다. 샘이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에요. 희망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저렇게 많으니 음식은 물론이고 샘이나 물은 있겠지만요. 내 눈에 이상이 없다면 저들은 분명 사람이지 오르크는 아니거든요." 프로도나 샘으로서는 연기를 뿜는 산 너머 이 광활한 대지 남쪽으로 누르센 호숫가에 노예들이 일군 경작지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공물을 조달하는 나라들까지 대로가 뚫려 있어 탑의 군사들이 여러 가지 물품과 전리품, 그리고 새로 포획한 노예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곳 북부에는 탄광과 대장간이 있었으며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전쟁을 위해 병사들을 소집하고 있었다. 장기판의 장기알을 다루듯 암흑의 힘은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첫 선발대가 서쪽 국경의 남쪽과 북쪽에서 저지당하자 그들을 잠시 후퇴시킨 다음 새로 정비한 병력으로 보복 공격을 하기 위해 키리스 고르고르 주변에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공격으로부터 산을 보호하려는 심산이었다면 이 이상 완전한 배치는 없을 것 같았다. 샘이 말했다. "이런! 저들이 뭘 먹고 마시든 우린 손도 댈 수 없겠어요. 내려갈 길이 없잖아요. 그리고 내려간다 해도 저렇게 우글거리는 한복판을 어떻게 지나가겠어요?" "노력해 봐야지.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은 편이야. 난 통과하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못했거든. 희망이 없긴 마찬가지지.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는 거야. 현재로서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피해 다니는 방법밖에 없겠는데. 북쪽으로 가서 평원이 좁아진 곳을 찾아 봐야겠어." "하지만 뻔한 일이에요. 좁은 곳에서는 오르크와 인간들이 더 빽빽하게 들어차 있겠죠.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럼 가서 직접 보자구." 프로도는 이렇게 말하고 앞장을 섰다. 얼마 가지 않아 모르가이를 타고 계속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옾은 곳으로는 길이 없고 깊은 계곡만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올라왔던 협곡을 다시 내려가 계곡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쪽 길로 짐작했던 대로 골짜기에 아무렇게나 쌓은 오르크들의 요새가 보였다. 시커먼 동굴 입구에 돌로 만든 오두막이 몇 채 모여 담장 하나에 둘러싸여 있었고 쥐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편에 빽빽이 자란 가시덤불에 몸을 바싹 붙이고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이삼 마일 가자 오르크의 요새는 등 뒤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음을 놓고 숨을 돌리려는 순간 거칠고 큰 오르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둘은 나지막한 갈색 관목 뒤로 재빨리 몸을 감췄다. 오르크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두 명의 오르크가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갈색 누더기를 걸치고 짐승의 뿔로 만든 활을 들고 있는, 작은 체구에 피부가 검고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놈으로 영락없는 정탐병이었다. 또 한 놈은 샤그라트 일당들처럼 몸집이 큰 전투대원으로 사악한 눈 표식을 달고 있었다. 그는 등에 활을 메고 끝이 뭉툭한 짧은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 역시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종족이 다른 듯 서로 독특한 말투의 공용어를 사용했다. 호비트가 숨은 곳에서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왜소한 오르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계곡 너머 오르크 요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 난 돌아가겠어. 돌에다 코를 아무리 갖다대 봐야 소용이 없는 짓이야. 흔적이 없잖아. 네가 우겨서 냄새를 놓친 거야. 놈들은 계곡을 따라간 게 아니라 산 위로 올라간 거란 말이야. 내 말을 들었어야지." "네놈 같은 꼬마 정탐병이 무슨 대단한 장기를 가졌다는 거냐? 네놈들 그 건방진 코보다는 눈이 훨씬 낫지." 몸집이 큰 오르크가 말하자 작은 녀석이 외쳤다. "그러면 네놈은 그 눈깔로 뭘 봤지? 망할 놈! 네놈은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누굴 탓하는 거야? 내 탓은 아니야.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일 뿐이니까. 처음에는 번쩍이는 옷을 입은 커다란 요정이랬다가 나중에는 작은 난쟁이인간이랬다가 다음엔 또 반역자 우루크 하이족이라든가. 아니면 그 모두를 합친 거라겠지." "정신이 나간 거야. 소문대로라면 대장 몇쯤은 머리가 날아갈 거라던데. 탑이 공격당해서 네놈 같은 전투병 몇백 명이 쓰러지고 포로가 달아났다니까. 너희들 전투병들이 하는 짓이 그 모양이니 전쟁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오는 게 당연하지." "좋지 않은 소식이 있다니, 누가 그래?" 전투병 오르크가 외쳤다. 그러자 정탐병도 지지 않고 소리질렀다. "뭐야? 없다고는 누가 그래?" "네놈 말은 못된 반역자나 할 수리야. 닫치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말겠어!" "알겠어. 알겠단 말야! 입 다물고 생각 좀 해보겠어. 그런데 휙 달아난 그 시꺼먼 놈은 어찌된 거야? 칠면조같이 달아난 놈 말이야?"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그놈도 별수 없을걸, 틀림없어. 염병할! 놈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생포하란 지시가 떨어졌단 말이야." "지시만 하지 말고 자기네들이 놈을 직접 잡아 보지 그래. 내가 도착했을 땐 벌써 그놈이 쇠사슬갑옷 같은 걸 모조리 헤집고 다닌 뒤로 제대로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만들어 놨단 말이야." 정탐병이 투덜거리자 전투병도 말했다. "그래서 그놈은 산 거야. 난 말이야, 그놈을 잡으라는 지시가 있기도 전에 화살을 쐈었단 말이야. 오십 보 정도 거리에서 정확하게 놈 등에다 쐈는데 그냥 달아나고 말았어." "얼간이 같은 놈! 그렇게 놓치다니. 네놈은 먼저 쏘긴 잘 쏘면서도 너무 느려서 쫓아가질 못한단 말이야. 그래서 꼭 우리 정탐병을 불러 오게 만들지. 한두 번이야 벌써?" 이렇게 말하고 정탐병 오르크는 달려가 버렸다. "돌아오지 못해? 상부에 보고할 거다!" 전투병이 외쳤다. "누구한테? 네 그 높으신 샤그라트한테? 그는 이제 대장도 아니야." "나즈굴한테 네 이름과 번호를 보고할 테다. 나즈굴 중 하나가 지금 탑에 있단 말이야." 전투병은 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정탐병은 멈춰섰다. 그는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협잡꾼 같은 놈! 넌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해! 네놈 일당들한테 끝까지 충실하지도 못할 거고! 비명이나 질러 대는 그 괴물 경계상들한테나 가보지 그래. 그들은 아마 네놈을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걸. 적이 그들을 먼저 해치우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들은 일번초소에서 벌써 해치웠다던데. 난 그렇길 바라." 그러자 손에 창을 들고 있던 큰 체구의 오르크가 그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바위 뒤에서 뛰쳐나온 정탐병은 달려오는 전투병 오르크의 눈에 화살을 쏘아 명중시켰다. 오르크가 쿵 하며 쓰러져 버리자 정탐병은 그대로 계곡을 건너 사라져 갔다. 호비트들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샘이 일어나며 말했다. "정말 정확하게 명중시켰는데요. 이렇게 멋진 우정이 모르도르 전체에 쫙 깔려 있다면 우리 문제는 절반이나 줄어들 텐데 말이에요." "쉿, 조용해, 샘. 또 다른 놈들이 있을지도 몰라. 지금까지 우리가 붙잡히지 않은 건 정말 놀랄 만한 일이야. 우리가 방심했던 사이에 그들은 뒤를 바짝 쫓고 있었던 거야. 하긴 저렇게 서로 싸워 대는 게 모르도르의 정신인지도 몰라. 듣기로는 오르크들은 자기 편끼리도 항상 싸운다는 거야. 하지만 샘, 우린 마음을 놓아선 안 돼.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우리를 증오하고 있거든. 그것도 줄기차게 말이야. 아까 두 녀석도 우릴 발견했다면 말다툼을 그치고 당장 우릴 먼저 죽이려고 했을 거야."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샘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칠면조같이 생긴 놈이라고 하던 말 들으셨지요, 프로도씨? 골룸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래, 기억나. 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이상했었어. 그건 그렇고, 샘,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러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있었던 일을 모조리 말해 줘. 물론 조용하게 말이야." "알겠어요. 하지만 그놈을 생각하면 열이 나서 목소리가 커질 텐데요." 호비트들이 가시덤불 밑에 앉아 있는 동안 모르도르의 어렴풋했던 미광마저 다시 저물어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이 되었다. 샘은 골룸의 배신과 셸로브의 공포,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오르크와 상대했던 모험담을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프로도는 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한참만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이제 떠나야겠어. 결국 붙잡혀서 이 고생이 헛수고로 끝나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어둡지만 유리병을 쓸 수는 없으니 네가 계속 보관해, 샘. 난 손바닥 말고는 가지고 있을 데도 없는데 이렇게 어두울 때는 양 손 모두 비워 두는 게 좋을 테니까. 스팅은 너한테 주겠어. 난 오르크 칼이 있으니까. 하긴 적에게 한 방 먹이는 일은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겠지." 어둠 속에서 길도 나 있지 않은 곳을 걸어가기란 여간 힘들고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없이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그들은 천천히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자갈바닥의 동쪽 기슭을 따라 몇 시간이고 걸었을 떄 서편 산기슭으로 잿빛 어스름이 깔렸다. 산 너머 대지 위에는 태양이 솟은 지가 이미 한참된 것이다. 호비트는 다시 어둑한 곳으로 들어가 교대로 잠을 청했다. 샘은 눈을 뜨자마자 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이윽고 프로도가 일어나 식사문제와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자 샘은 안달이 나서 물었다. "프로도씨,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요,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고 계신 거예요?" "아니, 정확히는 몰라, 샘. 리벤델에서 떠나기 전에 모르도르의 지도를 봤었지만 기억이 희미하거든. 그 지도는 적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만들어진 거야. 하나 분명히 기억나는 건 북쪽 어느 지점에 서쪽 산줄기와 북쪽 산줄기가 서로 만나는 곳이 있다는 거야. 그곳에 다리가 있는데 탑에서 한 육십 마일 정도 될 거야. 건너기 좋은 지점 같았어. 물론 그리로 가면 운명의 산에서 더 멀어지겠지. 한 육십 마일 돌아가게 되는 거야. 아마 우린 지금 북쪽 다리에서 사십오 마일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을 거야. 별일 없더라도 일 주일 내로 운명의 산에 닿기는 힘들겠지. 모르긴 몰라도 가까이 갈수록 반지의 무게가 더 가중될 거고 따라서 내걸음은 더 느려지겠지." 샘은 한숨의 쉬며 말했다. "제가 염려했던 대로군요. 어떻게 하죠?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사도 줄여야겠어요. 아니면 좀더 빨리 가든지요. 여지껏 이 계곡에서 빠져나가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식량은 이제 렘바스밖에 안 남았어요." 프로도는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좀더 빨리 걷도록 하지, 샘. 자, 가자! 또 걷는 거야." 날은 아직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걸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도중에 몇 번 잠시 쉬기는 했지만 지친 발로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걸어갔다. 시커먼 하늘 끝자락이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바위 밑 어둑한 구멍으로 숨어들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품이 상층기류에서 모르도르의 연기를 몰아 내고 있었다. 곧 그들은 주변 몇 마일 이내의 대지를 살펴볼 수가 있었다. 모르가이연봉과 다른 봉우리 사이에 움푹 파인 게곡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고 안쪽 산마루는 에펠 듀아스산맥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비하면 바위턱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쪽으로는 고르고로스평원을 향해 수직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앞쪽에서 수로는 부서진 바위계단을 앞에 두고 끊겨졌다. 에펠 듀아스산맥의 주봉으로부터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산줄기가 동쪽으로 사온 산줄기 하나와 맞닿고 있었다. 두 산줄기 사이에는 카라그 앙그렌 즉 이센마우드가 좁게 통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너머로 우둔계곡이 펼쳐졌다. 모라논성벽 안의 우둔계곡에는 모르도르의 병사들이 방어할 목적으로 수많은 땅굴과 무기고를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는 지금 모르도르의 군주가 서부 지휘관들의 총공세에 맞설 대규모의 부대를 긴급히 소집하고 있었다. 길게 뻗어나온 산줄기에는 요새와 탑들이 보였으며 횃불이 빛을 뿌려 댔다. 좁은 통로에는 흙담이 세워져 있었고 깊이 판 참호는 다리 하나로만 연결이 되었다.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고성 두르당이 서쪽 주봉에서 갈라져 나온 귀퉁이 부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성은 우둔계곡 근처에 운집한 수많은 오르크요새 중 하나였다. 날이 조금 밝아지자 그 성에서 이어지는 굽은 도로가 보였다. 호비트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한두 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그 도로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측면 바위턱을 따라 평지로 내려와 이센마우드까지 이어졌다. 호비트들은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펴보고 북쪽으로 올라온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 평지는 안개가 짙어 군대의 이동이나 야영지를 볼 수가 없었지만 그 지역이 온통 카라크 앙그렌의 감시망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로도가 말했다. "샘, 우린 막다를 길에 이른 것 같애. 계속 간다면 저 오르크탑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겠지. 되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저 성에서 내려오는 도로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다고 서쪽으로 갈 수도 없고 동쪽으로 내려갈 수도 없으니." "그렇다면 저 길로 가야죠, 프로도씨. 운에 맡기는 거예요. 모르도르에서도 운이란게 따를지 모르지만요. 이제 더 이상 헤매고 돌아가니거나 되돌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죽기살기로 덤비는 게 낫겠어요. 식량도 다 떨어져 가고 있으니 말이에요." "좋아, 샘! 네가 앞장서. 넌 아직도 희망을 좀 갖고 있는 모양이지? 난 완전히 잃었는데 말이야. 샘, 난 달릴 수도 없어. 그제 네 뒤를 따라 걸어가야겠어." "떠나기 전에 프로도씨, 뭘 좀 드시고 주무셔야 해요. 자, 이리 오세요." 샘은 프로도에게 얇은 렘바스 한 조각과 물을 먹게 하고는 자기 망토를 말아 머리 밑에 받쳐 주었다. 프로도는 기진맥진해 앞길을 의논하려고도 안했다. 그런 프로도에게 샘은 지금 마시게 한 물이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는 것과 렘바스 역시 자기 몫을 주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잠이 들자 샘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야윈 얼굴에 주름이 있었지만 잠든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샘은 혼자 중얼거렸다. "다녀올게요, 프로도씨. 잠시만 혼자 계셔요. 물을 수해 올 테니까요." 샘은 삼려시 기어나와서는 날렵하게 자갈길을 뛰어 계곡바닥으로 내려가 말라 버린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 가다 보니 바위턱이 나타났다. 오래 전에는 작은 폭포였음이 분명했다. 지금은 말라붙어 정적만 감돌고 있었지만 샘은 한가닥 희망을 걸고 몸을 숙여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발짝 기어롤라가자 산 위에서 흘러내려온 시커먼 실개천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거기서 넘쳐나온 물이 돌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물은 마실 만했다. 샘은 양껏 마시고 물통에 가득 채워 넣었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그림자 같은 시커먼 형체가 프로도가 있는 은신처 부근에서 쏜살같이 달아났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샘은 미친 듯 달려갔다. 놈은 눈치빠르게 숨어버렸지만 샘은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샘은 놈의 덜미를 잡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샘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쪽 낭떠러지로 달아나는 어렴풋한 뒷모습뿐이었다. 샘은 중얼거렸다. "휴우, 운이 좋았어.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는데. 사방에서 킁킁거리고 다니는 오르크놈들만 해도 충분한데 이 무슨 일이람! 그놈은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어야 하는건데!" 샘은 프로도 곁에 와 앉았다. 프로도를 그대로 자게 놔둔 샘 자신은 잠을 잘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꼈고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 그는 조용히 프로도를 깨웠다. "프로도씨, 골룸이 근처에 있어요. 제가 본 놈이 골룸이 아니라면 그놈은 쌍둥이일 거예요. 물을 구하러 잠깐 갔었는데 막 돌아오려는 순간에 그놈이 숨어서 찾고 있는 걸 봤어요. 우리 둘 다 잠이 들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더 이상 졸음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이런! 샘, 어서 누워 눈 좀 붙여. 내 생각엔 오르크보다는 골룸이 좀 나을 것 같아. 어쨌든 골룸은 우릴 오르크에게 넘기진 않을 테니까. 자기 자신이 잡히기라도 하면 몰라도." "하지만 그놈도 강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을 거예요. 프로도씨, 잠들면 안 돼요! 풀몽에 물이 가득 있으니까 실컷 드세요. 가다가 다시 채우면 되니까요." 말을 마치자 샘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샘이 잠에서 깼을 때 날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프로도는 뒤쪽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자고 있었다. 물통은 비어 있었다. 골룸이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모르도르의 밤이 다시 찾아왔고 산마루 위에는 횃불이 타고 있었다. 이제껏 지나온 여정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위험한 고비가 될 길을 향해 호비트들은 출발했다. 그들은 먼저 웅덩이에 들렀다가 성에서 내려오는 길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들은 이센마우드에서 이십 마일 정도 되는 지점에 섰다. 담장이나 난간이 없는 비교적 좁은 길이었으며 길 측면의 낭떠러지는 내려갈수록 험해졌다. 사방이 괴괴했다. 잠시 귀를 기울여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들은 일정한 속도로 동쪽을 향해 걸었다. 약 십이 마일 가량 갔을 때 그들은 멈춰섰다. 길은 방금 지나온 곳보다 조금 북쪽으로 굽어졌다. 이미 지나온 직선도로는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위험은 거기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쉬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발짝 채 못 가 갑자기 밤의 정적을 깨고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았지만 뒬르 돌아보았을 때 깜박이는 횃불이 모퉁이를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 프로도가 추적을 벗어나 달아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두려워했던 일이야, 샘. 모든 걸 운에 맡겼는데 아마 우리에겐 운이 따르지 않나 봐. 함정에 빠진 거야." 프로도는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암벽을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몇 길이나 되는 암벽을 깎아 이 길을 닦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가 어둠에 잠긴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프로도는 길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우린 완전히 함정에 빠진 거야." "그런 것 같군요. 할 수 없지요.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샘도 프로도 옆에 있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오르크들은 대단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맨 앞에선 오르크가 횃불을 들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어둠 속에서 붉은 횃불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횃불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샘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무릎 앞에 방패를 놓아 자신들의 발도 가렸다. '놈들이 제발 그대로 빨리 달려가고 지친 놈 둘만 남기면 좋을 텐데.' 샘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선두의 오르크는 고개를 숙인 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암흑의 군주의 전쟁에 마지 못해 끌려나온 왜소한 종족이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행군을 끝내고 채찍질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이들 옆에서 몸집이 크고 사납게 생긴 우루크 둘이 채찍을 휘두르며 대열 앞뒤로 왔다갔다 독려하고 있었다. 대열이 하나씩 지나갔다. 환하게 비치던 횃불은 이미 저만큼 앞서고 있었다. 샘은 숨을 죽였다. 이제 대열의 반 이상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독려하던 놈들 중 하나가 길 옆에 웅크린 그들을 보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놈들! 일어서!"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큰 소리로 대열을 멈추게 했다. "어서 일어서, 굼벵이 같은 놈들아! 축 늘어져 앉아 있을 때가 아니란 말야!" 그는 그들 쪽으로 한 발 다가서 앞에 놓인 방패를 보았다. "탈주병들인가? 네놈들 부대는 어제 벌써 우둔계곡에 집결하기로 되어 있잖아? 그걸 모르진 않겠지. 새끼들, 일어서! 말 안 들으면 번호를 상부에 보고할 테다!" 이 말에 호비트들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여전히 몸을 수그릴 채 발이 아픈 병사처럼 절뚝거리며 대열 후미로 걸어갔다. 그러자 오르크가 다시 외쳤다. "거기가 아니야! 세 줄 앞! 그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그땐 정말 맛을 보여 준다!" 그는 호비트들 머리 위로 긴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두르고 나서 고함을 지르며 대열을 빠른 속도로 이끌었다. 가엾은 샘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행군이었는데 프로도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행군은 고문이자 악몽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머리 속을 비우고자 애쓰며 필사적으로 버텨나갔다. 땀에 젖은 오르크들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프로도는 잇는 힘을 다 쏟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고생을 하며 따라가고 있는건지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살짝 빠져나갈 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큰 오르크가 뒤로 빠지며 그들을 놀려 댔다. "자!"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들 다리에 채찍질을 했다. "채찍을 맛보면 금방 힘이 솟지. 보조를 맞춰, 굼벵이들아! 네놈들이 정신이 번적 들게 한 대 더 쳐주지. 네놈들 부대로 지각 귀환했을 땐 온몸이 채찍자국으로 가득 차게 될걸. 잘해 봐. 지금이 전쟁중이란 걸 모르냐!" 그렇게 몇 마일을 달리자 길은 평지 족으로 길게 경사를 이뤘다. 마침내 프로도는 남은 기력마저 소진했고 정신이 흩어져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샘은 자신도 보조를 맞추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프로도가 쓰러지지 않게 있는 힘을 다해 도와 주었다. 어느 순간에 모든 일이 끝장이 날지 몰랐다. 프로도가 기절하거나 쓰러지게 되면 모든 것이 들통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이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저 감독놈을 죽여 버리자.' 샘은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샘이 칼자루에 손을 댄 순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대열은 이미 평지로 나와 우둔계곡 입구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서쪽에서 이어진 길과 남쪽에서 이어진 길이 바랏 두르에서 뚫린 도로와 한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길마다 병사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서부의 지휘관들이 진격해 오고 있었기에 암흑의 군주는 병사들을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도 각 부대의 대규모 인원이 교차로에 한꺼번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교차로는 성문 바로 앞이었으나 성벽 위에 밝혀 둔 횃불로도 그 와중을 비추진 못했다 부대는 서로 먼저 입성하기 위해 욕설을 퍼부었고 서로 밀치는 통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감독들이 고함을 지르고 채찍을 휘둘러 댔지만 별 소용 없이 싸움이 벌어졌고 칼을 뽑은 병사들마저 있었다. 중무장을 하고 바랏 두르에서 온 우루크족이 두르당 부대를 향해 공격을 가하자 대열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샘은 기진맥진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프로도를 끌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자 그들 위로 오르크들이 엉겨 넘어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호비트들은 손과 무릎으로 천천히 기어서 수라장에서 벗어나 마침내 길 바깥쪽으로 굴러 내려왔다. 거기엔 칠흑 같은 밤이나 안개가 짙을 때면 병사들이 이용하는 높은 언덕이 있었다. 언덕을 평지보다 몇 미터 높게 둑처럼 쌓아 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너무 어두워 달리 숨을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샘은 큰길에서 멀리 벗어나 횃불이 비치지 않는 곳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도씨, 조금만 더 기어가서 쉬어야 해요." 프로도는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 짜내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켜서는 이십 미터쯤 기어갔다. 그리고는 얕은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13장 운명의 산 샘은 누더기가 된 오르크 망또로 프로도의 머리를 받쳐 주고는 로리엔의 회색 망토로 둘의 몸을 덮었다. 샘은 저 아름다운 요정의 땅을 생각했다. 요정들이 짠 이 옷이 어떤 마술이라도 부려서 이 섬뜩한 황야에서 자신들을 감쪽같이 숨겨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싸우고 고함지르는 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걸로 보아 병사들이 이센마우드를 통과한 모양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뒤섞여 혼잡할 테니 당분간은 자신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샘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프로도에게도 억지로 마시게 했다. 프로도가 다소 정신을 차리자 샘은 소중한 렘바스 한 조각을 먹였다. 그들은 너무도 지쳤기에 별로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땀이 식은 데다 딱딱한 바위의 냉기가 온몸에 스며들며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북쪽으로부터 어둠의 문을 지나 키리스 고르고르고개를 넘어온 찬 공기가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다시 잿빛 어스름이 감돌았다. 높은 산 위에는 서풍이 불었지만 어둠의 땅 방벽 뒤 바위 위를 감도는 공기는 살을 엘 듯 차갑고 숨막히게 하는 죽은 공기였다. 샘은 구덩이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는 온통 담갈색의 황량하고 단조로운 황야였다. 근처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샘은 불과 이백 미터 북쪽에 있는 이센마우드성벽 위에서 노려보고 있을 감시의 눈길을 생각하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저 멀리 남동쪽으로는 운명의 산이 마치 어두운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솟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늘 높이 올라갔던 연기는 다시 동쪽으로 꼬리를 끌며 거대한 구름이 되어 온 대지 위를 뒤덮었다. 북동쪽으로는 몇 마일 채 안되는 곳에 잿빛산맥의 연봉들이 아치 우울한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뒤로 우뚝 솟은 흐릿한 산봉우리들은 낮게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처럼 떠돌았다. 샘은 거리를 대충 어림잡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도 생각했다. 위협적인 운명의 산을 바라보면서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십 마일은 돼 보이는데. 저런 몸으로는 프로도씨가 걸어서 꼬박 일 주일은 걸릴 거야." 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중 새로운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의 튼튼한 심장엔 여태껏 희망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돌아갈 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식량은 기껏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밖에 지탱이 안 될 것이며 임무를 마치고나면 그 끔찍한 황야 한복판에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결국은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샘은 생각했다. '떠날 때 명심했던 건 무엇보다 프로도씨를 끝까지 돕는다는 거였어. 그러니 프로도씨와 함께 죽는 것도 내 소임이지. 그래, 난 반드시 내 소임을 다할 거야. 하지만 바이워터를 다시 보고 싶은데. 로지 코튼과 그의 동생들, 그리고 아버지와 여동생 마리골드도 보고 싶어. 모두 다 정말 보고 싶어. 프로도씨가 정말 돌아올 희망이 없었다면 갠달프는 그분을 이렇게 보내지 않았을거야. 그가 모리아에서 떨어진 다음에 모든 게 빗나가고 말았어. 그리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희망이 사라지자 그건 새로운 힘이 되어 나타났다. 샘의 평범한 호비트 얼굴은 안으로 다져진 의지로 인해 엄숙하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절망과 피로, 그리고 끝도 없이 가야만 하는 황야,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을 돌과 강철로 이루어진 샘물이 자신의 몸과 탈바꿈되는 듯한 느낌이 들며 샘은 사지에 전율을 느꼈다. 샘은 전혀 새로운 책임감을 느끼며 옆으로 눈길을 돌려 다음에 취할 조치를 생각했다. 날이 좀 밝아오면서 놀라운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아니라 멀리서 보았을 때 그냥 멋없이 광활하고 밋밋하게 보였던 대지가 실은 온통 파괴되고 황폐한 땅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고르고로스평원은 물렁물렁한 진흙땅이었을 때 거대한 돌과 벼락에 무수히 강타당한 듯 커다란 구덩이가 곳곳에 파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큰 구덩이에는 깨진 바위가 둘레에 이랑처럼 테를 치고 있었으며 사방으로 갈라진 틈이 보였다. 이곳은 정말 예리한 시선을 가진 감시병만 없다면 기어가서 숨고 또 기어가서 숨을 수 있는 곳이었다. 빨리 갈 필요도 없고 기력도 튼튼한 사람에게라면 안성맞춤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목숨이 부지하는 한 갈길이 먼 데다 지치고 허기진 그들에게는 이 땅은 견디기 힘든 형벌처럼 여겨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샘은 프로도에게 갔다. 깨울 필요도 없이 프로도는 이미 일어나 바위에 등을 기댄 채 구름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프로도씨, 죽 둘러보고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길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던데요. 기회를 봐서 달아나는 게 좋겠어요. 가실 수 있겠어요?" "그래, 가야지." 그들은 다시 출발했다. 이 구덩이에서 저 구덩이로 재빨리 몸을 날려 숨었다가 다시 기어가곤 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북쪽 어두운 방향이었다. 가장 동쪽으로 난 길은 줄곧 그들을 따라왔지만 마침내 산자락을 끼고 돌아 저 멀리 짙은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둠이 깔린 길에는 오르크도 인간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암흑의 군주는 병사들의 이동을 이미 끝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요새에 버티고 앉아 자신을 거역해 장막을 찢고 나간 세상의 바람을 두려워하고, 또 대담하게도 자신의 구역 안으로 들어왔다는 스파이에 대한 소식으로 골치를 썩이느라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몇 마일 채 못 가 멈추고 말았다. 프로도는 완전히 기진한 상태였다. 발각될까 두려워 몸을 잔뜩 숙이고 기어가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음박질쳐야 하는 이런 전진을 프로도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샘은 이런 사정을 생각하고 말했다. "프로도씨, 어두워지기 전에 길로 돌아가야겠어요. 다시 한번 운에 맡겨 보죠. 지난번엔 운이 없었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을 거예요. 곧장 몇 마일만 더 가서 쉬도록 하지요." 샘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큰 모험을 시도하고 있었다. 프로도는 반지의 무게 때문에 자신을 지탱하기조차 힘들어 샘의 말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제시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둔덕으로 올라가 바로 암흑의 탑으로 직행하는 고행의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행히 운좋게 도중에 살아있는 방해물을 만나진 않았다. 밤이 되자 그들은 모르도르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거대한 폭풍이 불어닥칠 것처럼 천지가 온통 괴괴했다. 서부의 지휘관들이 이미 교차로를 지나 임라드 모르굴의 죽음의 평원에 불을 지른 뒤였다. 필사적인 원정은 계속되어, 절대반지가 남으로 남으로 가는 동안 왕의 깃발들은 북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호비트들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힘이 들었다. 길은 점점 험해졌고 기력도 쇠약해졌다. 낮 동안에는 적을 볼 수 없었지만 밤에는 이따금 길 옆 후미진 곳에 들어가 불편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 수많은 발소리와 달려가는 말발굽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협적인 힘이었다. 엄청나게 위협적인 악의 힘이 어두운 베일 뒤 왕좌에 앉아 깊은 생각과 악의에 가득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그 위협은 세상의 종말을 고할 때 밤의 장막이 밀려오는 것처럼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음울한 밤이 천지를 뒤덮었다. 서부의 지휘관들이 생명의 땅 경계에 거의 다가선 이 순간 두 호비트는 공허한 절망의 시간에 이르렀다. 그들이 오르크의 대열에서 빠져나온 지 나흘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기나긴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 동안 프로도는 말 한마디 없이 반쯤 몸을 구부린 채 비틀거리며 걷기만 했다. 눈에는 더 이상 발 아래 길이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샘은 프로도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지의 무게는 점점 가중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고 있었다. 마치 주먹질을 피하려는 듯,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무시무시한 눈으로부터 겁먹은 자신의 눈을 가리려는 듯 가끔씩 왼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샘은 몇 번이나 보았다. 떄로는 오른손을 슬그머니 가슴께로 가져가 움켜쥐었다가는 의지를 회복해 천천히 내리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자 프로도는 주저앉았다.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두 팔은 축 늘어뜨린 프로도의 힘없이 매달린 양 손이 미약한 경련을 일으켰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질 때까지 샘은 프로도를 지켜보았다. 뭐라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샘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샘 역시 지쳤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아직 견딜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 렘바스가 큰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벌써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 빵이 먹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진 못했다. 이따금 샘은 맛있게 먹었던 평범한 빵과 고기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요정들이 준 렘바스는 여행자들이 다른 음식 없이 그것만으로 지탱해 나갈 때 효과가 더 커진다. 즉 의지력과 인내심을 강화시키며 근육과 뼈에 대단한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은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길이 동쪽으로 이어져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산은 그들 오른편, 즉 거의 정남쪽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재로 뒤덮여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물! 물!" 샘이 중얼거렸다. 그동안 샘은 스스로 물 마시길 극도로 자제해 왔다. 바싹 말라 버린 입 안의 혀가 부어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자제에도 불구하고, 갈길이 며칠 더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은 물통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오르크들의 길로 오지 않았더라면 오래전에 물은 바닥이 나버렸을 것이다. 물을 구할 수 없는 지역인지라 급히 군대를 이동시켜야 할 경우에 대비해 노상에 가끔 물탱크를 비치해 두었던 것이다. 그 중 한 물탱크에서 샘은 물을 뜰 수 있었다. 오르크가 마시다 남은 물은 탁한 색깔로 썩어 가고 있었지만 그들 처지에선 그것조차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전의 일이었고 앞으론 그런 희망도 전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샘은 졸기 시작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넋빠진 눈으로 기어오는 검은 형체를 보았다. 들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엇엔가 고통에 시달려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외침소리도 들었다. 샘은 일어나 사방이 짙은 어둠에 잠긴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분명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백한 눈빛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 혐오스런 그 밤은 끝내 가기 싫은 듯 천천히 흘러갔다. 아침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두침침했다. 운명의 산이 가까워지자 공기가 매우 탁했을 뿐 아니라 암흑의 탑에서 사우론이 만들어 낸 어둠의 장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프로도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샘은 그 곁에 섰지만 말을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를 일으켜야만 했다. 한참후 샘은 몸을 굽혀 프로도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귀에 대고 말했다. "프로도씨, 일어나세요. 떠날 시간이에요." 마치 갑작스런 벨소리에 놀라 깬 것처럼 프로도는 벌떡 일어나 앉아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운명의 산과 그 사이에 놓은 황무지를 보자 그는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어, 샘. 말할 수 없이 무거워. 정말 너무 무거워." 샘은 그런 소리를 해봤자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엾은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프로도씨, 제가 대신 가지고 갈게요. 정말 그러고 싶어요. 제겐 힘이 아직 남았으니까요." 그러자 갑자기 프로도의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저리 비켜! 내게 손대지 마! 이건 내거야! 꺼져!" 그는 그렇게 외치며 칼자루에 손을 댔다. 그러나 곧 목소리가 변하더니 애처롭게 말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샘. 자넨 이해해야 돼. 이건 내가 맡아야 할 짐이야. 나 아니면 누구도 질 수 없어. 그리고 이젠 너무 늦었고 샘, 자넨 이 문에서는 나를 도울 수가 없어. 난 지금 반지의 힘에 거의 사로잡혔어. 이젠 포기할 수 없어. 자네가 이 반지를 가져가려고 하면 아마난 미쳐 버리고 말거야." 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프로도씨, 생각해 보니 필요없는 짐들이 있어요. 조금이라도 빔을 줄여야지요. 이제부터 저쪽으로 곧장 갈 테니 필요없는 것들은 가지고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렇게 말하여 샘은 운명의 산을 가리켰다. 프로도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야." 프로도는 오르크의 방패를 집어던지고 투구도 벗어 버렸다. 그리곤 잿빛 망또를 끌어내리고 단검이 꽂힌 무거운 허리띠도 풀어 바닥에 내팽겨쳤다. 누더기가 다 된 검은 옷마저 찢어 버리고는 소리쳤다. "자, 이제 난 오르크가 아니야. 정당한 것이든 아니든 무기는 갖지 않겠어. 그놈들이 잡아가려면 가라지 뭐." 샘도 프로도처럼 오르크의 물건들을 벗어 던지고는 자루에 든 것도 모두 꺼냈다. 지금까지 힘들여 끌고 다녔던 만큼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가장 아까운 것은 요리기구들이었다. 버릴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프로도씨, 그 토끼고기 생각나세요? 우리가 파라미르와 만나기 전에 앉았던 따스한 제방에서 말이에요. 그날 제가 올리파운트를 봤었지요." "아니, 난 생각나지 않아, 샘. 적어도 그런 일이 었었다는 건 알겠는데 자세하게 기억하진 못하겠어. 음식맛, 물맛, 바람소리, 나무, 풀, 꽃, 달과 별, 이런 것들은 전혀 기억나질 않아. 샘, 지금 난 어둠 속에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있는 거야. 나와 회전하고 있는 불꽃 사이에는 아무 가리개가 없어. 지금 눈을 뜨고 있는데도 또렷하게 나타난단 말이야. 그 밖의 것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 거야." 샘은 그에게로 가서 손에 입을 맞췄다. "그게 빨리 사라질수록, 우리는 빨리 쉴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밖에 어떤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샘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물건들을 다시 주워 모으며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이렇게 남의 눈에 띄게 물건을 방치해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골룸이 우리가 벗어 던진 오르크옷을 주웠을 거야. 하지만 칼까지 집진 않았겠지. 그놈은 빈 손일 때가 문젠데 말이야. 내 요리기구를 슬쩍하게 놔둘 순 없지." 샘은 벌판 갈라진 틈새에 물건들을 던져 넣었다.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해 온 요리기구가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조종처럼 슬프게 들려왔다. 그는 다시 프로도에게 가서 요정의 밧줄을 조금 잘라 그의 허리에 두른 다음 잿빛 망또를 꼭 묶어 주었다. 남은 밧줄을 다시 잘 감아 자루에 넣은 다음 남은 렘바스와 물통을 챙겼다. 스팅은 허리띠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으며 가슴 언저리 웃옷 주머니엔 길라드리엘의 유리병과 또 자신에게 준 작은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운명의 산을 바라보며 다시 출발했다. 이제는 몸을 숨기겠다는 생각조차 포기한 채 온갖 피로와 사라져 가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사방이 암흑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의 심장부를 향해 꺾일 줄 모르는 의지로 파고드는 작은 적의 위험을 알릴 수 있었겠지만 마침 나즈굴들과 그들의 검은 날개들은 다른 용무로 밖에 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르도르 외곽에서 힘을 합쳐 서부의 지휘관들을 미행하느라 암흑의 탑에까지는 생각을 쏟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프로도는 새로운 힘을 조금 얻은 것 같아 보였다. 프로도의 짐이 다소 가벼워지긴 했지만 그 정도로 그런 힘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는 기대 이상으로 빨리 걸었다. 땅은 무척 험했지만 부지런히 걸어 운명의 산은 점차 가까워졌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미약한 빛마저 자취를 감추려 하자 프로도는 다시 축 늘어져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의 노력으로 인해 남아 있던 힘마저 다 써버린 것이다. 마지막 휴식 때 프로도는 말했다. "목말라, 샘." 그리고는 더 말이 없었다. 샘은 그에게 한 모금의 물을 주었다. 남은 물은 한 모금 정도뿐이었다. 샘 자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다시금 모르도르의 밤이 엄습하듯 찾아왔다. 샘은 물에 관한 여러 가지기억에 잠겼다. 푸른 버드나무 그늘이 드리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든 시냇물과 샘이 춤추듯 잔물결을 일으켰다. 졸리 코튼, 톰, 닙 형제와 그들의 여동생 로지와 함께 바이워터에서 수영할 때 발끝에 느껴지던 차가운 진흙의 감촉이 다시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샘은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야. 더구나 거긴 너무 먼 곳이고. 돌아가는 길은, 있다고 해도 저 산을 통과해야만 하는 거야." 샘은 잠이 오지 않아 혼자서 토론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씩씩하게 말했다. "이봐, 우린 기대했던 것보다 성과가 좋아. 어쨌든 잘 시작한 거야. 그 먼 길을 절반은 온 것 같거든. 이제 하루만 더 버티면 도착할 수 있어."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바보 같은 소리, 샘 갬기. 프로도씨가 설사 몸을 움직일 수 있으시다 해도 지금까지처럼 걸을 수는 없어. 하루씩이나 말이야. 그리고 너도 그렇지. 프로도씨께 남은 물과 음식을 다 드리고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나는 버틸 수 있어. 갈 거야." "어디로?" "그야 물론 운명의 산까지지."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샘 갬기? 그 다음엔 말이야. 목적지에 도착하면 뭘 어떻게 할 건데 그래? 프로도씨는 혼자서 아무 일도 못하실텐데 말이야." 샘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고 매우 당혹스러웠다. 사실 그는 어떤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수행해야 할 일에 대해 프로도가 자세하게 말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샘은 막연히 반지를 불 속에 던져 넣어야 한다는 정도밖엔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그 이름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운명의 불구덩이! 글쎄, 프로도씨께서 그곳을 찾아 낼 수 있으신지 모르겠어." "그것 봐, 소용없는 짓이야. 프로도씨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 넌 깡충거리고 낑낑대기만 할 줄 아는 바보란 말이야. 네가 그렇게 억척스럽지 않았더라면 벌써 여러 날 전에 같이 누워 편안하게 잘 수 있었을 거 아냐. 하지만 넌 이제 꼭 그렇게 죽을 거야. 그게 아니면 더 비참한 꼴이 되든가. 이제라도 그대로 드러누워 모든 걸 포기하는 편이 나을 거야. 끝내 정상에 닿진 못할 테니까." "나는 가고 말 거야. 내 뼈다귀만 빼고 나머진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내 등과 심장이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프로도씨를 끌고 올라가고 말 테야. 그러니 말싸움은 그만두자!" 바로 그때 샘은 땅바닥에서 어떤 미동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땅 밑에 가두어진 천둥과 같이 깊고도 먼 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구름 아래로 빨간 불길이 잠깐 깜박이다기 이내 사라졌다. 운명의 산은 편치 않은 잠에 빠졌다. 오로드루인으로 가는 원정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샘 스스로 견딜 수 있을 거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입이 너무 말라 한 입의 음식도 넘길 수가 없었다. 사방은 여전히 암흑에 잠겨 있었다. 산의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폭풍이 다가오는 듯했고 멀리 남동쪽으로 검은 하늘 아래 불빛이 가물거렸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사방에 가득찬 독한 연기였다. 숨쉬기기 함들고 고통스러웠다.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들의 의지는 굴복되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앞으로 전진했다. 운명의 산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그들이 무거운 머리를 들었을 때 산은 거대한 모습으로 그들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엄청난 양의 재와 화산암 그리고 불탄 바위들, 그 속에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화산추가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 있었다. 낮 동안의 어스름도 끝이나 다시 진짜 밤이 오기 전에 그들은 엉금엉금 기다가 넘어지곤 했다. 프로도는 하품을 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샘은 그 곁에 앉았다. 놀랍게도 샘은 약간의 피로만 느낄 뿐 머리는 다시 맑아지는 듯했다. 더 이상 마음 속의 토론으로 정신이 산란해지는 일도 없었다. 절망적인 논쟁의 주제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이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의지가 확고해졌으므로 이제 죽음만이 그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경계심만 가중되었다. 온갖 위험은 이제 정점을 향해 집중되고 있음을 샘은 알았다. 바로 내일이 운명의 날이 될 것이다. 마지막 모험, 최후의 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언제 올 것인가? 밤은 끝없고 영원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흘러가 죽어 버려 결국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음의 암흑이 시작되고 나면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샘은 프로도의 손을 더듬었다. 싸늘하게 떨고 있었다. 샘은 중얼거렸다. "담요는 버리고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는 자신의 몸으로 프로도를 감싸듯 부드럽게 안았다. 그러다 그는 잠이 들었다. 나란히 잠든 그들에게 원정의 마지막 날이 희미한 빛으로 찾아들었다. 전날부터 방향이 바뀌며 잦아들던 서풍이 이제 다시 북풍으로 바뀌어 일기 시작했다. 호비트들이 누워 있는 어둠속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양빛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자, 최후의 그날이야!" 샘은 이렇게 소리지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프로도에게 몸을 숙여 가만히 일으키자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프로도는 온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다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간신히 두 눈을 뜨며 높이 솟아오른 운명의 산 검은 경사면을 쳐다보고 측은하게도 두 손으로 기기 시작했다. 이를 본 샘은 가슴 속에서 눈물이 솟아날 지경이었지만 말라 버린 그의 두 눈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샘은 중얼거렸다. "내 등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프로도씨를 모시고 가겠다고 했어, 난. 꼭 그렇게 할 거야." 샘은 외쳤다. "프로도씨! 제가 대신 그 반지를 가지고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프로도씨와 반지를 함께 메고 가면 돼요. 일어나세요! 자, 프로도씨. 제 등에 업히세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일러 주세요." 프로도가 업히자 두 팔은 목 둘레로 축 늘어졌고 다리는 그의 팔 밑에 착 달라붙었다. 그 순간 샘은 비틀거렸다. 그러나 무게는 가볍게 느껴졌다. 사실 샘은 자신이 프로도만이라도 업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걱정 이상으로 그 저주받은 반지의 엄청난 무게를 자신이 분담할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과는 달리 예상 밖의 무게였다. 프로도가 칼의 상처와 통증뿐 아니라 슬픔과 공포로 가득한 객지의 오랜 방황으로 인해 몸무게가 다 빠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샘 자신에게 마지막 원기라도 솟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쩄든 샘은 고향땅 샤이어의 풀밭에서 어린 호비트를 등에 업고 장난을 치고 뛰놀 때처럼 어렵지 않게 프로도를 업을 수 있었다. 샘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출발했다. 북쪽 산기슭에 도착했다. 약간 서쪽으로 자리잡은 그곳은 잿빛 긴 비탈을 이루고 있으며 더러 끊기긴 했지만 그리 가파르진 않았다. 프로도는 아무 말도 없었다. 샘은 기력이 다하고 의지마저 꺾여 버리기 전에 어서 빨리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채 있는 힘을 다해 걸어 올라갔다. 경사가 심한 곳을 피해서 이리저리 돌아가기도 하고 가끔씩 비틀대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올랐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등에 업은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해 뱀처럼 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자 업고 있던 프로도를 가만히 내려 놓았다. 프로도는 눈을 뜨고 숨을 내쉬었다. 산 아래쪽에 퍼져 있던 독한 연기를 벗어나게 되자 숨쉬기가 훨씬 쉬워졌던 것이다. 쉰 목소리로 프로도는 말했다. "고마워, 샘.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 전 모르니까요." 샘은 뒤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력으로 상당히 높이 올라온 것을 알고 놀랐다. 불길하게 우뚝 솟은 운명의 산은 산 아래서 보았을 때 훨씬 높아 보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프로도와 함께 올랐던 에펠 듀아스의 고개보다는 낮은 듯했다. 거대한 산기슭의 헝클어진 지맥은 평지에서 약 천 미터 정도 솟아 있었으며 그 위로는 중앙에 다시 그 절반 정도의 높이로 화산추가 솟아 있어 마치 꼭대기에 톱니 모양의 분화구로 덮개를 한 거대한 가마나 굴뚝 같아 보였다. 그들은 이미 산 아래로부터 절반 이상을 올라온 것이었다. 저 아래 고르고로스 평원은 연기와 어둠에 싸여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목구멍이 다 말라 버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탄성이 나올 뻔했다. 서쪽으로부터 허리띠처럼 생긴 길이 뱀처럼 산을 감싸고 올라 이쪽에서 보이는 길의 끝부분은 마침 동쪽 화산추 발치에 닿고 있었다. 샘은 현재 위치에서 그 길의 진입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비탈의 경사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다시 솟았다. 샘은 중얼거렸다. "그래, 길이 있는 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겠지. 만일 저 길이 없었다면 나도 끝장이 난 거지 뭐." 그 길은 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바랏 두르에서 사마스 나우르 즉 불의 방까지 이어진 사우론의 길이었던 것이다. 암흑의 탑 서문으로부터 시작된 그 길은 깊은 계곡 위에 거대한 다리를 놓아 이어져서는 평원을 가로질러 연기를 피우는 두 개의 협곡 사이를 지나 드디어 운명의 산 동쪽의 긴 비탈길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감아돌며 오르는 그 길은 화산추까지 이르는데 그곳에서 연기를 피우는 정상까지는 여전히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암흑에 둘러싸인 사우론의 요새의 눈의 창이 정면으로 보이는 어두운 입구였던 것이다. 화산폭발로 인해 길은 종종 막히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수많은 오르크가 동원되어 복구되었다. 샘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길은 보이는데 어느 방향으로 올라가야 할지 몰랐다. 우선 쑤시는 등을 풀어야만 했다. 그는 프로도 곁에 잠시 드러누웠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서서히 빛이 밝아왔다. 갑자기 샘은 알 수 없는 긴박감을 느꼈다. 누군가 '지금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늦는다!' 하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샘은 온몸에 불끈 힘을 주며 일어섰다. 프로도 역시 그런 외침을 들은 듯 무릎을 대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는 숨찬 소리로 말했다. "기어서 가겠어, 샘." 그들은 한발 한발 마치 작은 회색 곤충처럼 기어서 비탈을 올라갔다. 마침내 그들은 길을 찾았다. 깨진 돌조각과 재로 다져진 길은 넓었다. 프로도는 기어서 그 길까지 올라가서는 마치 어떤 강제적인 힘에 의해 동쪽을 향해 몸이 돌려지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저 멀리 사우론의 암흑이 드리워져 있었다. 암흑의 세계로부터 일어난 돌풍 탓인지, 아니면 내부의 엄청난 소동으로 말미암아 동요하는 것인지, 주위를 에워싼 구름이 소용돌이를 치다가 잠시 흩어졌다. 바로 그 때 사방의 어둠보다 더 시커멓게 윤곽을 드러낸 바랏 두르의 첨탑들과 가장 높이 솟은 탑침이 보였다. 한순간 그저 응시하기만 하던 빨간 눈의 불길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커다란 창문에서 솟아나오는 듯 북쪽을 향해 찌를 듯 쏘아보았다. 곧이어 다시금 어둠이 뒤덮여 무시무시한 환영은 사라졌다. 암흑의 눈이 샘과 프로도에게 미처 주의를 돌릴 겨를도 없이 서부의 지휘관들이 북쪽 평원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암흑의 힘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동했기에 악의에 찬 그 눈길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쓰러졌다. 그는 손으로 목 언저리를 더듬어 줄을 찾았다. 샘은 무릎을 굽혀 그 곁에 앉았다. 프로도는 거의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도와 줘, 샘! 도와 줘, 샘! 내 손을 잡아 줘! 막을 수가 없어." 샘은 프로도의 두 손을 손바닥이 맞붙게 모아 쥐며 입을 맞추고나서 자신의 손에 감싸 쥐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샘은 중얼거렸다. "그가 우릴 발견했어! 모든 게 끝장이야. 아니 곧 끝장나겠지. 이봐, 샘 갬기, 이젠 정말 끝 중에서도 끝인 모양이야." 샘은 프로도를 다시 업고 그의 손을 자기 가슴 쪽에 끌어당겼다. 그러자 프로도의 두 다리는 허공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샘은 고개를 숙이고 전력을 다해 오르막길을 올랐다. 길은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키리스 운골에서 본 것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주로 남쪽과 서쪽 비탈이 용암으로 뒤덮였을 뿐 이쪽 길은 막히지 않고 제대로 뚫려 있는 점이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길의 흔적을 찾기 힘들거나 가로로 갈라진 틈이 있었다. 얼마간 동쪽을 향하던 길은 갑자기 예리한 각도로 꺾여 잠시 서쪽을 향했다. 꺾인 부분의 길은 오래전 이 산의 분화구에서 토해진 후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시달린 바위산을 깊이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 길을 돌 때 샘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온전하게 시야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작고 검은 돌조각 같은 검은 형체가 바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무거운 물체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는 앞으로 넘어졌다. 프로도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샘의 손등이 찢겼다. 머리 위에서 증오에 가득찬 소리가 울렸다. "나쁜 주인! 우릴 속였어! 스메아골, 골룸을 속이다니. 그 길로 가면 안 돼! 그 보물에 해를 입히면 안 돼! 스메아골한테 내놔! 우리에게 줘! 내놓으란 말야!" 간신히 몸을 일으킨 샘은 즉시 칼을 뽑았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골룸과 프로도가 한데 엉겨붙어 있었다. 골룸은 프로도를 마구 할퀴며 반지와 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완력으로 보물을 빼앗아 가려는 이러한 공격이 프로도 내부에서 꺼져 가고 있던 불씨에 불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격노해 맞싸웠다. 골룸은 물론이고 샘조차 놀랄 정도였다. 골룸이 전과 다르게 변하지 않았다면 싸움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골룸은 간절한 희망과 무서운 공포에 이끌려, 갈증과 배고픔, 그리고 고독에 시달리면서 걸어온 험난한 길 때문에 가혹한 변화를 감수해야만 한 것이었다. 그는 뼈와 가죽만 남은 형편없는 말라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힘은 적을 향한 적의에 따르지 못했다. 프로도는 그를 내동댕이치고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떨어져라! 떨어져!" 프로도는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가 가죽웃옷 아래 있는 반지를 움켜쥐고 외쳤다. "떨어져라! 이 비열한 놈! 썩 꺼져버려! 이젠 네놈도 끝장이야. 네놈이 날 속이거나 죽일 순 없어, 이젠!" 바로 그 때 샘은 에민 뮐의 그림자 아래로 이들 두 적수가 환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한 형체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생명체의 그림자와 같이 보였으며, 완전히 패배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악한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그 앞에 흰 옷을 입은 형체는 동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가슴에 불의 바퀴를 쥐고 있었다. 그 불 속으로부터 명령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썩 꺼져라!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다시 날 건드린다면 넌 운명의 불길 속에 던져질 거다!" 그러자 웅크리고 있던 형체는 깜박이는 두 눈에 공포와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동시에 가득 담고 뒤로 물러나 사라졌다. 환영이 사라지자 프로도가 다시 보였다. 손을 가슴에 얹은 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그 발치에는 골룸이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땅바닥에 대고 있었다. "조심해요! 덤벼들지도 몰라요." 샘이 소리치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다시 외쳤다. "빨리요, 프로도씨! 가세요! 가세요! 시간이 없어요. 이놈은 제가 맡을 테니 어서 가세요!" 프로도는 마치 멀찍이 선 사람을 바라보듯 하며 말했다. "그래, 가야겠어, 샘. 안녕! 이젠 정말 끝이야. 이 운명의 산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 안녕!" 프로도는 돌아서서 느린 걸음이지만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자, 드디어 네놈을 처치할 수 있게 됐다!" 샘은 소리치며 칼을 뽑아 싸울 준비를 하고 앞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골룸은 덤벼들지 않았다. 골룸은 바닥에 픽 쓰러지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우릴 죽이지 말아. 비정한 칼로 우릴 베어선 안 돼. 제발 살려 줘. 잠시만 더 살아있게 해줘. 항복이야. 우리가 졌어. 보물이 파괴되면 우리도 죽고 말아. 같이 재로 변하고 말아." 그는 앙상한 긴 손가락으로 길 위의 재를 움켜쥐며 말했다. "재!" 샘의 손이 마구 떨렸다. 그의 머리 속은 험악한 기억과 분노로 끓어올랐다. 수천 번 죽여 마땅한 이 반역의 살인마를 죽이는 것이 천만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망설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완전히 패배해 비참하게 호롤 이 잿더미에 쓰러져 있는 놈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잠시이긴 했지만 절대반지를 갖고 있던 골룸이 아닌가. 그 절대반지에 예속된 운명으로서 다시금 살아 평화와 안락을 찾을 수 없게 된 골룸의 영혼의 고뇌를 샘은 희미하게나마 짐작해 보았다. 하지만 샘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에이, 저주받은 놈! 구린내나는 놈! 썩 꺼져 버려! 난 네놈을 발로 차버릴 수 있을 때가 아니면 널 믿지 않아. 꺼지지 않으면 이 비정한 칼로 네놈을 베겠어." 골룸은 사지를 뻗치며 일어나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샘이 발길질을 하려 하자 그는 길 아래로 뛰어 달아났다. 샘은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갑자기 프로도가 궁금해져 위쪽을 쳐다보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샘은 걸음을 재촉해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만일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골룸이 다시 돌아서 뒤따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골룸은 두 눈에서 광기를 발하며 잽싸게 그러면서도 아주 신중하게 바위틈에 몸을 숨기며 뒤따라 기어오르고 있었다. 길은 계속 위로 향하다가 다시 꺾어졌다. 화산추 바깥면을 따라 절단된 부분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로서 이 산 측면에 자리한 검은 문에 닿아 있었다. 그 문은 바로 사마스 나우르의 문이었다. 저 멀리서 남쪽으로 향해 연기와 안개를 가르며 떠오르고 있는 태양은 침침한 붉은색 원판 모양으로 불길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산을 에워싼 저 아래 모르도르의 평원은 마치 죽은 대지처럼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양 어둠에 잠겨 괴괴했다. 샘은 떡 벌어진 통로 입구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칠흙같이 어둡고 열기로 가득했으며 요란한 소리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프도로씨! 프로도씨!"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잠시 서 있는 동안 공포로 인해 심장이 고동쳤다. 샘은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물체가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을 꺼내 보았지만 떨리는 손 안에서 차갑고 창백한 빛만 지닌 채 이 숨막힐 듯한 어둠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가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사우론의 영토에서도 그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옛날 사우론이 중간계에서 최고의 세력을 떨쳤을 때 그 힘의 용광로였던 곳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힘도 여기서는 기세를 펴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샘은 몇 발짝 더듬거리며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위를 향히 획을 그으며 높은 지붕을 강타했다. 그 순간 샘은 여기가 산의 화산추 속으로 뚫린 긴 터널 내지는 동굴 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눈 앞에서 바닥과 양 측면 벽이 커다랗게 갈라져 있었는데 바로 그 틈에서 붉은 빛이 비쳐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아래로부터 마치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소리 같은 요란한 굉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또다시 빛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그 운명의 틈 가장자리에 서 있는 프로도가 눈에 들어왔다. 빛으로 형체는 거무스름하게 보였지만 그는 마치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꼼작도 않고 똑바로 서 있었다. 샘이 외쳤다. "프로도씨!" 그러자 프로도는 몸을 움직이여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여태껏 샘이 들어 본 중에서도 가장 또렷하고 힘찬 것으로 운명의 산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을 압도하며 지붕에, 벽에 울려퍼졌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지만 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아니, 하지 않겠어. 이 반지는 내것이야!" 그렇게 외치면서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순간 프로도는 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샘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소리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세게 강타하는 바람에 샘은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고 나뒹굴었다. 검은 물체가 그를 덮친 것이었다. 샘은 꼼짝도 못했으며 잠시 사방은 어둠에 잠겼다.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자기소유라 주장하며 손에 끼는 순간 바랏 두르의 거대한 힘이 뒤흔들리며 탑의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진동을 했다. 비로소 암흑의 군주가 그를 알아차리고 어둠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돌려 대평원으로부터 이곳 문을 주시했다. 비로소 사우론은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깨달았다. 적의 책략이 이제서야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고, 한편으로는 그를 에워싼 검은 연기처럼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그는 지금 마지막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온갖 술수와 음모의 그물로부터, 온갖 책략과 전쟁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의 영토 전체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떨렸고 군대도 활동을 중단했다. 갑자기 조종대를 잃은 그의 부하들이 풀이 죽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가 두목의 관심 밖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장악하고 있던 힘이 이제 운명의 산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의 소환에 따라 반지의 악령, 나즈굴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바람보다 더 빨리 질풍을 일으키며 운명의 산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샘은 일어셨다. 현기증이 났으며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두 눈으로 들어왔다. 앞을 보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벼랑 끝에서 골룸이 미친 듯 뭔가와 싸우고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내던지며 벼랑 끝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뒤로 물러서고, 바닥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줄곧 씩씩거리기만 할 뿐 말은 없었다. 아래쪽에서 불길이 타올라 붉은빛이 환하게 뿌려졌다. 동굴 전체가 불빛과 열기로 가득했다. 그 순간 갑자기 골룸이 긴 손을 자기 입 근처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어금니가 번득이는가 하더니 무엇인가를 물어 뜯었다. 그러자 프로도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프로도가 벼랑 끝에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골룸은 미친 듯 춤을 추며 반지를 치켜들었다. 잘라진 손가락 하나가 반지에 끼워져 있었다. 반지는 살아 있는 불같이 빛을 발했다. "보물! 보물! 보물! 내 보물! 아, 내 보물!" 골룸이 외쳐 댔다. 그러나 그는 반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벼랑 끝에 걸려 잠시 버둥대가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버렸다.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보물!'하는 그의 마지막 외침이 울려 왔고 이제 그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굉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불길이 솟아 지붕을 뚫고 올라갔다. 쿵쿵 소리는 이제 거대한 폭음으로 변했고 산 전체가 요동을 쳤다. 샘은 프로도에게 달려가 그를 문 밖으로 끌어 냈다. 모르도르평원 위 사마스 나우르의 문턱에서 샘은 놀라움과 공포로 인해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휘몰아치는 구름이 잠깐 보였다. 구름 사이로 드높은 권세를 자랑하며 쌓아 올린 산만큼이나 높이 솟은 탑들과 흉벽들이, 거대한 궁정뜰과 지하토굴, 절벽처럼 깎아지른 창없는 감방들, 그리고 강철과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문들이 보이는가 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탑들이 무너져 내리고 산들도 허물어졌다. 성벽도 산산조각이 나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으며 증기를 뿜으며 피어오르는 거대한 연기의 탑들이 위로 위로 솟아오르다가 마침내는 위압적인 파도처럼 쓰러지고 정수리가 물결치다가 거품을 일으키며 땅 위로 퍼져 갔다. 그때 멀리서 우르르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으로 변했다. 땅이 진동을 하며 갈라지고 융기하자 오로드루인산 전체가 얼레에 감긴 연처럼 들어올려졌다. 꼭대기로부터 불이 토해졌다. 하늘에는 번개가 번쩍였고 천둥이 요란했다. 후려치는 채찍마냥 검은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폭풍의 중심부를 뚫고 구름을 가르며 온갖 다른 소리들을 무색게 하는 굉장한 울부짖음과 함께 나즈굴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오던 반지악령들은 곳곳에 나뒹구는 폐허와 충돌하여 조각조각 흩어져 버렸다. "자, 이것으로 끝이 난 거야, 샘 갬기."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프로도는 지칠 대로 지쳐서 창백하기까지 했지만 긴장감도, 광기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 그의 두 눈에는 평화가 깃들여 있었다. 무거운 짐도 이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고향 샤이어에서 즐겁게 지내던 때의 다정한 프로도로 돌아와 있었다. "프로도씨!" 샘은 소리치며 무릎을 꿇었다. 천지가 파멸 속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샘은 환희를, 엄청난 환희를 맛보았다. 짐이 사라졌다. 프로도씨도 구출되었고 다시 자유로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순간 피를 흘리는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가엾은 손! 동여맬 것도 없고, 약도 없어요. 차라리 그놈한테 내 손가락을 주는 건데. 하지만 그놈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가고 말았어요." "그래. 하지만 자넨 갠달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 골룸이 할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던 말 말이야, 샘. 그가 없었다면 난 그 반지를 파괴하지 못했을 거야. 최후의 순간까지 와서 우리의 원정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어. 그러니 그를 용서하기로 하지. 원정은 성공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말이야. 자네가 지금 나와 같이 여기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샘. 모든 것이 다 끝난 이 순간에 말이야." 제14장 코르말렌평원 언덕 주위에서는 모르도르의 대군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서부군의 지휘관 들은 밀려드는 적군들 틈에서 분전하고 있었다. 태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나즈굴의 날개 아래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졌다. 아라곤은 마치 오래전의 일이나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의 일에 몰두한 사람처럼 고요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기치 아래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밤이 깊어갈수록 밝게 빛나는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는 갠달프가 싸늘하고도 흰빛을 발하고 서있어 어두운 그림자도 그의 몸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서부인들을 포위한 모르도르군은 마치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언덕을 향해 돌진해 왔으며 무기가 부딧거나 깨지는 굉음 사이로 성난 짐승 같은 그들의 울부짖음이 섞여 들렸다. 갠달프는 갑작스런 환영이라도 본 듯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청량한 북쪽 하늘을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올리며 쩡쩡 울리는 소리로 외첬다. "독수리들이 온다. " 그러자 그에 응답하는 외침들이 일어났다. "독수리들이 온다! 독수리들이 온다!" 외침소리에 놀란 모르도르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체 이겐 무슨 징후인가 얼떨떨한 표정들을 지었다. 중간계의 생성 초기부터 잇닿아 솟아있던 산맥의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들에 둥지를 틀었던 늙은 도론도르의 가장 강력한 후계들이자,북쪽 모든 독수리들 중에서가장 위대한 바람의 왕자 과이히르와 그 형제 란드로발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손발을 후들후들 떨며 머뭇거렸다. 그들에게 분노와 증오심을 불어넣 으며 조종해 온 암흑의 힘이 이제 흔들렸기에 그들은 그 힘의 강제속에서 풀려난것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맞부딪치고 있는 적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게된 모르도르의 졸개들은 공포에 질렸다. 서부군의 지휘관들은 암흑의 질곡으로부터 새로 솟아오른 희망으로 마음이 부풀어 크게 외쳤다. 포위되었던 언덕으로부터 곤도르와 로한의 기사들,북방의 듀너데인 그리고 그 밖에 주위에 몰려 있던 서부군 전체가 전투적인 창기병들을 앞세워흩어지는 적들을 추적해 나왔다. 그러자 갠달프가 다시 한번 손을 들며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멈추라,서부의 용사들이여! 멈춰 기다리라! 운명의 시간이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발 아래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맥 위로 높이 솟은 암흑의 첨탑들 저 너머로부터 거대한 어둠이 빠르게 공중으로 솟아올라 불꽃으로 타올랐다. 대지가 신음하며 타올랐다. 그 날카로운 첨탑들은 흔들리며 깨어져 부서져내렸다. 그 위력적인 성채가 분쇄된 것이었다. 암흑의 성문 역시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자 먼 곳으로부터 처음엔 미약했으나 점점 커져 하늘에까지 이르는, 길게 메아리치는,마치 시끄러운 북소리 같은 파멸의 핑음이 울려왔다. 갠달프가 외첬다. "사우론의 지배는 끝이 났다! 반지의 사자가 드디어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지휘관들은 남쪽 모르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구름의 장막을 배경으로 검고 거대하며 꿰뚫을 수 없는 그림자가 머리에 번개를 쓴 채 온 하늘을 덮어 버릴 듯한형상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자는 땅 위를 덮어 그들에게거대하고 위헙적인 손을 뻗쳤다. 그러나 끔찍하면서 이미 무력해진 손길이었다. 그림자는 잠시 그들 위에 머물렀지만 곧 불어닥친 광풍으로 날려가 버리고 정적이사방을 감쌌다. 지휘관들은 머리를 숙였다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 적은 이미 달아나고 있었으며 모르도르의 마력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림 사라지고 있었다. 한참 달라 붙어 뜯어먹던 거대한 먹이가 갑자기 힘을 얻어 일었을 때의 개미들처런 사우론의 피조물들 즉 오르크와 트롤들 그리고 주문에 걸렀던 짐승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고이리저리 날뛰다가 스스로 죽음에 돌진하거나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또는 희망없는 어두운 굴 속으로 은신하려고 울부짖으며 달아났다. 그러나 룬과 하라드인들, 동부인들과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곧 서부 지휘관들의 취엄과 영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사악한 노역에 가장 오래 깊이 빠져 있었으며 서부인들을 뿌리깊이 증오하는 거만하고 대담한 자들은 이제 최후의 결전을 위해 대오를 정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력을 다해 등쪽으로 도주하고 있었으며 무기를 던진 채 자비를 구걸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제 갠달프는 전투지휘를 아라곤과 다른 영주들에게 맡기고 언덕 꼭대기에 올라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거대한 독수리, 바람의 왕자 과이히르가 날아 내려와 그의앞에 앉았다. 갠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친구 과이히르,그대는 나를 두 번이나 태워 주었.지.세번째가 모든 것에 대한 포상을 해줄 걸세. 물론 그대가 내킨다면 말이지. 내 늙은 믐 불타 버릴 뻔했던 지라크지길에서 그대가 구해 주었을 때보다 몸무게가 더 나가지는 않을 걸세." "당신 몸이 돌로 단들어졌을지라도 당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태워다 드려야하지요." 하고 과이히르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세. 그대 동생하고 또 가장 빠른 빠른 한 친구 더 데리고 가세.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나즈굴의 날개를 능가하는, 바람보다도 더 빠른 속도가 필요하니까 말일세 " "지금은 북풍이 불고 있지만 우린 그보다 더 빨리 날아갈 수 있을 겁니다. " 과이히르는 이렇게 대답한 후 갠달프를 태우고나서 란드로발과 젊고 재빠른 메빌도즈와 함께 남쪽을 향해 속력을 다해 날아갔다. 그들은 우둔과 고르고로스를 지나며 아래쪽 대지가 파멸과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앞에는 운명의 산이 불을 내뿜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 가는 지금 너와 함께 있어서 다행이야,샘." 프로도가 말했다. "네, 프로도씨, 우린 함께 있어요." 샘은 프로도의 다친 손을 부드럽게 자기 가슴 위에 올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우린 같이 있지요. 이제 긴 여행은 끝났고 그 험난한 과정도 겪었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포기하는 것은 어쩐지 저답지가 않은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겠지.그렇지만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렇지. 희망이 사라지고 종말이 오는 거야.우리는 이제 기다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파멸과 붕괴 속에서 탈출구는 없어." "하지만 프로도씨, 여기 몰락의 틈바구니, 이 위험한 곳에서 최소한 조금 더 멀리갈 수는 있지 않을까요? 자,프로도씨, 어쨌든 길을 따라 내려가 봅시다. " "좋아, 샘. 네가 원한다면 가겠어." 그들은 일어서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들이 진동하는 암흑의 산 기슭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사마스 나우르는 거대한 연기를 뿜어 내고 있었고 찢겨진 산봉우리에서는 엄청난 화염이 쁨어져 나와 폭포를 이뤄 흘러내렸다. 프로도와 샘은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힘이 몸과 정신모두로부터 급슥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암흑의 산 기슭의 나지막한 잿빛 언덕에 이르렀지만 그곳으로부터 더 빠져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언덕은 오로드루인의 화염격류 속에서 그리 오래 견딜 수 없는 하나의 작은 섬이었다. 그 주변의 땅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갈라진 깊은 틈과 구덩이로부터 연기와 불꽃을 분출했다. 암흑의 산은 경련을 일으키며 숱한 균열을 만들어 냈고 화염의 강이 그들을 향해 서서히 밀어닥치고 있었다. 곧 그들은 화염의 심연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뜨거운 재가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이제 그대로 서 있었다. 샘은 아직도 프로도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정말 굉장한 이야기 속에 남겠지요,프로도씨? 전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해질지 궁금해요. '아홉 손가락의 프로도와 운명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라고들 말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리벤델에서 한 손을 가진 베렌과 위대한 보석의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사람들은 숨을 죽일 거예요. 참 듣고 싶은데! 우리 이야기의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까지 두려움을 떨치려는 노력으로 이런 말을 하며 샘은 바람이 불어오는북쪽으로 시선을 돌켠다. 그곳 하늘은 마치 차가운 바람이 돌풍이 되어 암흑과 파멸의 구름을 몰아내 버린 듯 청명하게 개 있었다. 바로 이때 바람처럼 날아온 과이히르가 예리한 눈으로 그들을 발견하고는 하늘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증에서 선회했다. 땅은 흔들리며 헐떡거리고 불의 강이 다가오 는 가운데 버려진 두 명의 작은 형체가 손을 잡고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과이히르가 그들을 발견하고 급강하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힘이 다해서인지 아니면 연기와 뜨거운 공기에 질식했는지 또는 마침내 절망에 굴복했는지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려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과이히르와 란드로발 그리고 재빠른 메넬도르는 급히 날아 내려갔다. 반지의 산자들은 꿈속에서처럼 어떤 운명이 닥쳐온 줄도 모르며 암흑과 불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운반되었다. 샘은 깨어나자 자신이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으며 그 위로는 넓은 밤나무가지 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그 어린 잎 사이로 연록색과 금빛의 햇살이 비쳐드는 것을 알았다. 대기는 달콤한 향기로 그윽했다. 그는 그 냄새, 이딜리엔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런! 얼마나 오랫동안이나잠들었던 거지?" 그는 생각했다. 그 향기는 양지바른 강둑 아래 조그마한 모닥불을피워 놓았던 그 시절을 생각게 해 그 사이의 모든 일들은 깨어나는 의식에서 멀어졌었기 대문이었다. 그는 몸을 쭉 뻗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참 굉장한 꿈을 꾸었구나. 이제 깨어나서 다행이야!'그는 중얼거렸다. 샘은 일어나 앉아 자기 옆에 프호도가 누워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손은 머리 밑에 다른 한 슨은 담요 위에 놓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담요 위에 올려진 오른손에는 셋째손가락이 없었다. 그 순간 완전히 기억이 되살아난 샘은 크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꿈이 아니었구나! 도대체 우리가 어디 있는 거지?' 그러자 뒤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딜리엔에,왕의 보호 아래 있지.그리고 왕께서 자넬 기다리신다네," 이 말과 함께 흰 옷을 입고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흰 눈처럼 빛나는 수염을 늘어뜨린 갠달프가 나타나 그의 앞에 섰다. "자, 샘, 기분이 어떤가?' 그러나 샘은 그대로 침대 위에 다시 쓰러져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놀라기도 한 한편 기쁨에 넘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헐떡이며말했다. "갠달프! 우린 당신이 돌아가셨을고 생각했어요. 하긴 저 자신도 죽은줄 알았지만요.슬픈 일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게 된 건가요?세상이 어떻게 되었지요?' "암흑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렀지." 갠달프는 이렬게 말하며 웃었다. 그 소리는 음악 같기도 하고 말라붙은 땅 위에흐르는 개울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샘은 수없이 많은 나날들을 웃음소리나 기쁨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는 그가 느꼈던모든 기쁨의 메아리처럼 귀에 부딪혀 왔다. 그러나 샘은 울음을 터뜨렀다. 그리고는마치 달큼한비가 봄바람을 몰고 온 후 태양이 더 화창하게 빛을 발하듯 울음을 멈추고 환하고 넘쳐 흐르게 웃으며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소리쳤다. "기분이 어떠냐고요?글쎄,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요.제 기분은,글쎄" 그는 허공에 팔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겨울이 끝난 후의 봄처럼, 나뭇잎 위의 햇살처럼, 트림펫과 하프와 그리고 제가 들어 봤던 모든 노래들처럼 느껴져요!" 그는 말을 멈추고 프로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프로도씨는 어떤가요? 손이 저렇게 되다니! 그렇지만 다른 데는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러길 바래요. 프로도씨는 잔혹한 고통을 겪었거든요." 그러자 프로도가 일어나 앉으며 웃음을 띄고 말했다. "그래 다른 곳은 다 괜찮아.네가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어. 샘, 이 잠꾸러기야. 난 오늘아침 일찍 일어났었는데 지금은 아마 거의 정오쯤 되었을걸." "정오라구요? 도대체 어느 날 정오란 말씀이세요?' 샘은 날짜를 계산해 보려 애쓰며 말했다. 갠달프가 대답했다. "새해 14일이야.샤이어력으로는 4월 8일이고 하지만 앞으로 곤드르에서는 사우론이 멸망하고 자네들을 왕 앞으로 데려온 날,즉 3월 25일에 신년이 시작될 걸세.왕께서 자네들을 돌보아 주셨고 지금 자네들을 기다리신다네. 자네들은 그분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거야.준비가 되면 내가 자네들을 그분께 자네들을 안내하지." "왕이라고요? 무슨 왕 말입니까? 누군데요?'"곤도르의 왕이자 서부왕국의 영주이지. 그분은 자신의 옛 영토를 되찾으셨다네.곧 대관식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은 자네들을 기다리시지." "우린 뭘 입어야 할까요?'샘이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행중 입었던 낡고 떨어진 옷이 침대 옆 바닥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네들이 모르도르로 가는 길에 입었던 옷이지. 프로도, 자네가 암흑의 땅 에서 입었던 오르크의 누더기도 길이 보존될 걸세 물론 나중에 다른 옷을 구해 주겠지만, 아무리 값비싼 비단옷이나 갑옷 아니면 으리으리한 문장이라도 그 옷보다더 명예로울 수는 없지." 그리고나서 그는 환하게 빛을 발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도대체 뭘 들고 계시는 거죠?' 프로도가 물었다. "그래, 자네들의 보물을 가져왔지. 자네들이 구조되었을 때 샘,자네 몸에 있더군. 갈라드리엘의 선물 말이야. 프로도,자네의 유리병과 샘, 자네의 상자야. 다시 찾게되어 반가울 테지." 그들은 몸을 씻고 옷을 입은 다음 가볍게 조금 요기를 하고 갠달프를 따라갔다. 그들이 누워 있던 너도밤나무숲을 빠져나오자 햇빛을 받고 타오르는 기다란 연록색 잔디밭이 진흥빛 꽃과 암록색 잎이 무성한 당당한 나무숲에 인접해 있었다. 그들 뒤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으며 앞에서 꽃이 만발한 둑 사이로 개울이 흘러내려 잔디밭 끝에 았는 푸른 숱으로 흘러갔고 멀리 그 너머에서 희미한 물빛이 반짝였다. 그들이 숲의 입구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은색과 검은색 제복을 입은 키 큰 호위병들이 늘어서 그들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며 맞아들였다. 그러자 누군가 길게 트럼펫을 불었고 그들은 노래하는 시냇물 곁의 나무들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이윽고 넓은 잔디밭에 이르자 그 너머로 은빛 아지랑이로 둘러싸인 넓은 강이 있었고 그곳엔 나무가 울창한 길쭉한 섬이 보였다. 기슭에는여러 척의 배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평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분에 따라 무리를 지어 햇살을 받고 정렬해 있었다. 호비트들이 가까이 가자 그들은 칼을뽑고 창을 흔들며 뿔나팔과 트럼펫을 불고 여러 언어로 일제히 노래했다. 호비트 만세 ! 최고의 찬사로 칭송하라! 주이오 이 페리아인 아난! 아글골르니 페리안나스! 최고의 찬사로 칭송하라, 프로도왁 샘와이즈를! 다우르 아 베르하엘, 코닌 엔 안눈! 에글레리오! 그들을 칭송하라! 떼글레 리오! 그들을 칭송하라! 코르마콜린도르, 아 리이타 타리엔나! 그들을 칭송하라! 반지의 사자들, 최고의 찬사로 그들을 칭송하라! 놀라움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프로도와 샘은 눈을 빛개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들은 요란한 군중들 사이에 녹색 잔디가 깔린 높은 자리가 셋 있는 것을 보았다. 오른쪽 자리 뒤에는 푸른 잔디 위에 자유로이 뛰노는 커다란 백마가 그려진 깃발이,그리고 왼쪽 자리 뒤에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백조 모양의 흰 배가 항해하는그림이 그려진 깃발이 각각 꽂혀 있었다. 그러나 중앙의 가장 높은 권좌 뒤에는 빛나는 왕관파 일곱 개의 빛나는 별 아래 흑빛 들판에 꽃이 만발한 흰 성수가 그려진커다란 기치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단. 권좌 위에는 갑옷을 입었지만 투구는 쓰지않은 사람이 커다란 창을 무릎에 걸쳐 놓고 앉아 있었다. 이제 신분이 크게 변해인간들의 군주이자 왕이신 고귀한 분이 되었지만 즐거운 표정에 회색 눈 그리고검은 머지칼을 가진 그를 호비트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프로도가 그에게 달려가잔 샘도 그 뒤를 따르며 외쳤다. "모든 일 중에 이게 바로 극치야! 스트라이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건 거야!"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래,샘. 바로 스트라이더지.자네가 내 인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 브리로부터 무척 긴 여정이었지? 우리 모두에게 길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자네들의 여정이 특히 가장 어두운 암흑의 길이었어." 그리고나서 아라곤이 무릎을 굽혀 절을 했기에 샘은 놀라고도 당혹해 했다. 아라곤은 오른손으론 프로도를,왼손으론 샘을 각각 잡고 권좌로 이끌어 앉힌 다음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과 지휘관들에게 몸을 돌려 모든 이들에게 들릴 만한 커다란소리로 외첬다. "이들을 최대의 찬사로 칭송하라!" 즐거운 환성이 울려퍼졌다가 사라지자 곤도르의 한 음유시인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노래부르기를 청했다.샘의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시인은 이렇게 시작했다. "보라! 한 점 부끄럼 없는 용기의 제후와 기사들이시며,왕과 왕자들이시여,곤도르의 가인들이시여, 로한의 기사들이시여, 그대 엘론드의 아들들이시여, 북부의 듀너데인이시여, 요정과 난쟁이들이시여, 샤이어의 용감한 이들이시여, 서부의 모든 자유민들이시여,이제 제 노래를 들어 보시오 그대들께 아흡 손가락의 프로도와 운명의 반지라는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크게 웃으며 일어나 외쳤다. "아,위대한 영광과 명예! 내 모든 꿈이 실현되다니!" 그리고나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었으며 그러한 와중에 음유시인의 청랑한 목소리가 솟아오르자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는 가끔은 요정의 말로 때로는서부의 언어로 노래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아름다운 언어들 격동되고 넘쳐 흘렀으며 칼날 같은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생각은 고통과 기쁨이 함께 어우러져 흘렀고 축복의 포도주로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해가 기울어지며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자 그는 노래를 끝냈다. "그들을 최고의 찬사로 찬양하라!" 그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라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준비되어 있던 커다란 천막으로 가 먹고 마시며 어두워질 때까지 즐겼다. 프로도와 샘은 각기 다른 막사로 안내되어 옷을 벗었다. 그들의 옷은 차곡차곡 개켜져 정중하게 보관되었고 깨끗한 아마옷을 받았다. 그러자 갠달프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팔엔 프로도가 모르도르에서 빼앗겼던 칼과 요정의 망또 그리고 미스릴코트가 들려 있었다. 샘에게는 금박입힌 갑옷파 요정의 망또를 가져왔다. 망또는얼룩이 지워지고 찢긴 곳은 수선되어 있었다. 그는 그들 앞에 칼 두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프로도가 말했다. "전 더이상 칼을 원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적어도 오늘밤만은 칼을 차야 하네." 갠달프가 말하자 프로도는 원래 샘의 것이었으나 키리스 운골에서 자신이 찼던 작은 칼을 잡으며 말했다. "요정의 단검은 네게 주겠어,샘." "안 돼요, 프로도씨! 빌보씨께선 그걸 프로도씨께 주셨어요. 스팅은 바로 그분의 코트에 딸린 거예요 빌보씨께선 다른 이가 그 칼을 차는 것을 원치 않으실 거예요." 결국 프로도가 찰 수밖에 없었다. 갠달프는 마치 그들의 시종이나 되는 듯 무릎을꿇고 검대를 매주고는 일어서서 그들의 머리 위에 은장식을 올려 놓았다. 이렇게 차려입고 그들은 대향연에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앤 갠 달프와 로한의 왕 요머,임라힐왕자 그리고 주요 지휘관과 함께 김리와 레골라스가있었다. 묵념이 있은 후 술이 나오자 왕의 시중을 드는 두 명의 종자가 나섰다. 한 명은미나스 티리스 경비병들의 은색과 흑색의 제복을 입었으며 다른 하나는 흰색과 녹색으로 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샘은 이 거대한 장정들의 군대에서 이런 어린 소년들이 무얼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자 샘은 놀라 소리첬다. "보세요,프로도씨! 여길 보세요! 이게 피핀 아니에요?페레그린 투크씨라고 해야겠지요.그리고 메리씨! 저런 키가 많이 자랐군.우리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겠는데요" 그러자 피핀이 샘을 향해 말했다. "정말 얘기가 많지요. 연회가 끝나는 대로 얘기해 줄게요.그 동안 갠달프께 여쭤보세요. 갠달프는 이제 잘 웃긴 하지만 그전처럼 가깝게 대해 주진 않아요. 메리와난 지금 좀 바쁘거든요. 보시다시피 우린 각기 미나스 티리스와 마크의 기사들이니까요." 마침내 흥겨운 날도 그 끝에 이르렀다.해가 지고 둥근 달 안두인패하의 안개너머로 서서히 떠올라 흔들리는 잎새로 반짝일 때 프로도와 샘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이딜리엔의 속삭이는 나무들 아래 앉았다. 그들은 메리와 피핀,갠달프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고 얼마후 레골라스와 김리도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프로도와 샘은 라우로스폭포가 있는 파스 갈렌에서 동지들의 우애에 금이 갔던 그사악한 날 이후에 친구들에게 일어난 숱한 사전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묻고 대답할 것은 여전히 많았다. 샘의 마음 속에 오르크들과 말하는 나무들, 거대한 평원, 질주하는 기사들, 반짝이는 동굴,황금궁전,항해하는 커다란 배,전투 등등이 연상되자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모든 놀라운 일들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메리와 피핀의 큰 키에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세워 놓고 프로도와 자신이 직접 등을 맞대 보고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 친구들 나이에 이런 키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단 말이에요! 정상보다 삼 인치나 더 크니 말이지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난쟁이든가." 그러자 김리가 말했다. "물론 자넨 난쟁이가 아니지. 몇 번이나 말해 줬잖아. 엔트들의 음료를 계속 마셨는데도 맥주를 마신 것하고 달라진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말이야." 그러자 샘이 말했다. "엔트들의 음료라고요? 또 그 앤트에 관한 얘기지요? 도대체 엔트란 게 뭔지 나는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모든 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몇 주일은 걸릴거예요"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정말 그럴 거예요.그렇지만 그 다음엔 미나스 티리스의 탑에 프로도씨를 가두고겪은 모든 일을 적으라고 해야 할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절반쯤은 잊어 버릴 테고그러면 늙으신 빌보씨께선 몹시 실망하실 테니까요." 마침내 갠달프가 일어서며 말했다. "왕의 손은 치유의 손길이라네, 친구들. 하지만 그분이 전력을 다해 자네들이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게 애쓸 때까지 자네들은 거의 죽음의 문틱에 이르렀었다네.자네들은 축복을 받아 오래 자긴 했지만 이젠 또 잘 시간이야." 그러자 김리도 말했다. "샘과 프로도뿐 아니라 자네 피핀도 자야 해. 자네가 내게 끼친 그 잊을 수 없는고통 때문에 난 자네를 사랑한다네. 자네를 발견한 그 마지막 전장을 난 잊을 수없을 거야.난쟁이 김리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그때 죽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한 무더기의 시체 밑에서 보이는 것이 발뿐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호비트의 발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무수한 시체들을 들춰 내고 자네를 발견했을 때 난 꼭 자네가죽은 줄 알고 내 수염을 모조리 뽑아 버릴 뻔했지.자네가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건 이제 겨우 하루 전이니 이제 잠자리에 들게나.나도 자러 가겠어." 그러자 레글라스도 말했다. "난 이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겠어. 그것으로 충분한 휴식이 되니까. 우리 요정의 영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우리들 증 일부는 이곳으로 이주하게 될 거야. 우리가 오게 되면 이곳은 축복받은 땅이 되겠지, 한동안은. 한 달,한평생, 인간의 백 년일지라도. 하지만 이곳은 안두인대하가 가까이에 있고 안두인은 바다로 통하지.바다! 바다로,바다로! 흰 갈매기 우짖고 바람이 불고 하얀 포말이 흩날린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둥근 해가 지고 있다. 잿빛 배,잿빛의 배여,그들이 부르는 소릴 듣는가,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동족의 목소리를? 떠나겠네, 떠나겠네, 날 낳아 준 숲을. 우리의 나날은 저물어 가고 있다. 외롭게 흘러가는 그 넓은 강을 따라. 따지막 해안'에서 구르는 파도는 멀리 흐르고, '잊혀진 섬'에서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럽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요정의 고향 에레세아. 낙엽이 지지 않는 영원한 우리들의 땅. "레골라스는 이렇게 노래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모두들 자리를 떴으며 프로도와 샘도 잠자리에 들었다. 희망차고 평화로운 아침에 깨어난 그들은 며칠을 이렇게 이딜리엔에서 보냈다.대군이 야영하고 있는 코르말렌평원은 헤네스 안눈과 가까운 곳이기에 밤이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암석의 입구를 지나 캐르 안드로스섬을 안고 흐르는 안두인대하로 합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비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지나첬던 장소를 둘러보며 다녔다. 샘은숲의 그늘이나 은밀한 장소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그 거대한 올리파운트를 볼 수있기를 바랐다. 곤도르 공략 당시에는 그 거수도 상당수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난 아깝게도 많은 것을놓친 것 같아." 그 동안 대군은 미나스 티리스로 귀환할 준비를 마첬다. 지친 사람들은 휴식을 취했고 부상자들은 완쾌되었다. 어떤 이들은 동부인과 남부인들을 완전히 진압하기위해 계속 전투를 벌였으며 또한 이제 막 모르도르의 북쪽 성채를 파괴한 병사들이 돌아왔다. 마침내 5월이 가까워지자 서부의 지휘관들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부하들과 함께 배에 올라 캐르 안드로스로부터 안두인대하를 따라 오스길리아스로 향했고 거기서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그들은 펠레노르평원에 이르러 서부인들의 마지막 유물이자 암흑과 화염을 지나 새로운 나날을 맞이한 곤도르인의 도시, 거대한 민돌루인산 아래의 백색의 탑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평원 한복판에서 그들은 커다란 천막을 치고 아침을 기다렸다. 그날은 4월의마지막날이었으며 왕은 해가 뜰 무렵 그의 성으로 입성할 것이었다. 제15장 섭정과 왕 곤도르의 수도 미나스 티리스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졌다. 매일매일의 희망없는 아침마다 몰락의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밝은 태양과 화창한 날씨는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영주는 불에 타 죽었으며 로한의 왕 역시전사해 성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한밤중 그들에게 돌아왔던 왕은 어떠한 무력이나용기로도 정복할 수 없는 끔찍한 암흑의 세력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다시 떠났으며 그 후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대군이 모르굴협곡을 떠나 산그림자 밑북쪽으로 간 이후 단 한 사람의 전령도 오지 않았으뎌 구릉에 덮인 동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문조차 들을 수 없었다. 지휘관들이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요윈은 자신을 돌봐 주던 여자들에게 옷을가져오라고 말한 다음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옷을 입히고 린넨 붕대로 팔을 고정시키자 그녀는 요양원 원장에게로 갔다. "원장님,마음이 불안해 더이상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습니다. " 그러자 원장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특별히 주의깊게 보살피라는 명령을 받았지요. 적어도 일 주일은 더 누워 계셔야 합니다. 그렇게 명령을 받았거든요.제발 다시 돌아가 누우십시오" "전 완쾌되었습니다. 이 왼팔만 빼놓곤 최소한 몸은 완쾌되었습니다. 또 왼팔도 이제 편안하고요.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다시 아프게 될 겁니다. 그런데전황은 어떻습니까? 간호부들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군요" "전혀 새로운 소식이 없습니다. 영주들께서 모르굴협곡으로 떠났다는 사실 이외 에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복쪽에서 온 새로운 영주께서 총지휘관이라고 하더군요. 그분은 위대한 영주이자 치유자라고 합니다. 치유의 손이 칼도 휘두를 수있다는 사실이 내겐 이상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옛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과거에는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곤도르에서는 그런 일이 없거든요 오랫동안 우리 같은 치유자들은 기사들이 만든 상처를 꿰매는 데 종사해 왔지요.사실 그들이 없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여전히 많을 겁니다. 세상은 불운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고 있으니 굳이 전쟁으로 배가시키지 않아도 충분하지요." "원장님,전쟁이 일어나는 데는 둘도 아닌 단 하나의 적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칼이 없는 사람들도 칼에 찔려 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암흑의 군주가 군대를 일으켰는데 당신은 곤도르인들에게 약초나 뜯으라고 하시겠습니까? 몸의 병을 치유한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은 아니지요. 극심한 고통 속에 죽는다 할지라도 전장에서죽는 것이 항상 나쁜 것도 아니고요.허락된다면 전 이 암흑의 순간에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원장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눈을 빛내며 우뚝 선 그녀는 주먹을 움켜쥔 채 동쪽으로 향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후 그녀는 다시 그에게로 몸을 돌렀다. "제가 할 일이 전혀 없을까요?누가 이 도시를 지휘하지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런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요. 듣기로는 로한의 기사들을 지휘하는 이가 있고 곤도르인들은 휴린공이 통제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법적으로는 파라미르공이 이 도시의 섭정입니다. " "그분은 어디서 뵐 수 있지요?" "여기 계십니다. 그분은 심하게 부상당하셨었지만 지금은 쾌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뭐라실지는‥‥‥" "절 그분께 데려다주시겠어요?그러면 알게 되겠지요," 파라미르는 요양원 정원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햇빛이 그를 따스하게 비춰 그의 혈관으로 다시 생명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원장이 와서 부르자 그는 돌아서 로한의 왕녀 요윈을보았다. 그는 그녀의 부상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동했으며 예민한 눈으로 그녀의슬픔과 불안을 알아차렸다. 원장이 소개했다. "영주,이분은 로한의 요윈공주이십니다. 이분께서는 왕과 함께 오셨다가 심한 부상을 입으시고 지금은 제 보호 아래 계시지요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시고 이 도시의 섭정과 면담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자 요윈이 말했다. "영주,이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불펀하게 하는 건 이 요양원 의 불성실이나 보살핌의 결핍이 아닙니다. 치유를 바라는 이에게 여기보다 더 적합할 곳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나태하게 빈둥거리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바랐지만 죽지 않았고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라미르가 신호하자 원장은 절을 하고 물러갔다. "내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나 또한 이 요양원의 환자일 뿐입니다‥‥ 그는 연민의 정이 깊은 사람이었기에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비탄에 잠긴 아르다움에 심장이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그의 진지하고 다정한 눈을 보았지만 그녀 자신이 기사들 사이에서 성장했으므로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마크의 어느 기사와도 능히 대적해 물리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만일 내 능력 밖의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도와 드리습니다. 파라미르가 말하잔 요윈은 대답했다. "저를 내보내도록 원장에게 명령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요윈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그녀의 심적 용기는 꺾였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키가 큰 이 사람, 강하면서도 유연한 이 사람은 자신을 제멋대로의 여자이며 길고 어려운 작업을 끝까지 수행할 만한 굳건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어린애로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파라미르가 대답했다. "나 자신도 원장의 보호 하에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이 도시에서 내 권한을 아직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원장의 충고에 귀를 기 울일 것이며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의 직무상의 일에서 그의 뜻을 거스르지않을 것 입니다. " "하지만 저는 치료를 바라지 않아요.저는 제 오라버니 요머처럼, 아니면 그 이상으로 데오들왕처럼 전쟁엔 나가고 싶어요. 이제 그분은 돌아가셔서 명예와 평화를 누리고 계시니 저보다 훨씬 나은 처지라 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기운을 차렸다 하더라도 다른 지휘관들을 따라가기엔 너무 늦었소 하지만 바라건 바라지 않건 머지않아 전쟁에서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닥쳐을 것입니다.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치유자가 명하는 대로 한다면 당신 자신의 방식대로죽음에 대면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과 나,우리는 참을성있게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 요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치 봄의 희미한 첫번째전조에 모진 서리가 녹듯 내면의 무엇인가가 부드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반짝이는 빗방울처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올라 뺨을 흘러내렸다. 그녀의 자신에 찬머리가 약간 숙여졌다.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치유자들은 아직 일 주일이나 더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창문은 동쪽으로 나 있지도 않아요"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젊고 슬픔에 잠긴 처녀의 소리였다. 파라미르의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창문이 동쪽을 향해 있지 않다고요? 그것은 제가 조치하지요 원장에게 명을 내리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요양을 하신다면 당신이 원'는 대로 이 정원에서 햇빛 속을 거닐게 해드리지요.우리의 모든 희망이 함께 가버린 동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 또한 걷고 기다리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때로 나와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눠 주신다면 내 근심도 훨씬 덜게 될것입니다. "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떠올랐다. "영주, 제가 어떻게 당신의 근심을 덜어 드릴 수 있습니까?그리고 저는 살아있는사람들의 이야기를 원치 않습니다. "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로한의 요윈공주, 당신이 아름답다는 말을 해야겠소 우리의 산과 계곡에는 아름답고 빛나는 꽃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처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곤도르에서 당신같이 아름답고 슬픔에 찬 꽃이나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암흑이 우리 세상을 지배할 때까지 이제 단 며칠만이 남았기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흑이 닥칠 때 나는 동요없이 그것을 직시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태양이 아직 빛나고 있을 때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질것입니다. 당신과 난 둘 다 암흑의 그림자 아래를 지나왔고 한 사람의 손길이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끌어 내 주었으니까요." 그러자 요윈이 말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암흑의 그림자는 아직도 제 위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저에게 치유를 기대하지 마십시요 저는 여전사이며 제 손은 무기로 거칠어졌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방에 감금되어 있지 않아도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허락해 주셨으니 이제부턴 가끔 바깥을 산책하겠습니다. " 요윈은 절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파라미르는 오랫동안 정원을 혼자 거닐었다. 이제 그의 눈은 동쪽의 성벽보다는 요양원 안을 향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 원장을 불러 요윈에 관해 그가 아는 사실을 모두 들었다. 원장이 말했다. "하지만 영주,우리와 함께 있는 호비트에게서 더 많은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왕과 함께 왔고 나중에 그 왕녀와 함께 있었다고들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파라미르는 메리를 불렀고 그날이 지나기 전에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라미르는 메리가 말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제 로한의 왕녀 요윈의 슬픔과 불안에 대해 무엇인가 이해하게 되었다고생각했다. 그 청명한 저녁 파라미르와 메리는 정원을 산책했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파라미르가 나오자 그는 요윈이 성벽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흰 옷을 입은 채 햇빛 속에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가 부르자 그녀는 내려왔다. 그들은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며 잔디 위를 거닐다가 푸른 나무그늘에 앉았다. 이후로 그들은 매일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원장은 창문으로 내다보며 내심 기뻐했는데 그것은 치유자로서 그의 근심이 가벼워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전조가 사람들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지만 그가 돌보는두 사람이 잘 지내며 매일 기운을 얻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요윈이 처음 파라미르를 만난 이래 이와 같이 닷새가 지났다. 그들은 도시의 성벽위에 함께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에 관한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침울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 또한 더이상 화창하지 않고싸늘했다. 밤부터 인 바람이 북쪽으로부터 살을 엘 듯이 불고 있었고 또 새로운 바람이 계속 일었다. 주위의 대지는 잿빛으로 황폐해 보였다. 그들은 따뜻한 옷과 두툼한 외투를 입었으며 요윈은 푸른 망또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와 목둘레에는 은빛 별이 장식되어 있었다. 파라미르가 그 옷을가져오게 해 그녀를 감싸 주었으며 옆에 선 그녀의 자태가 실로 여왕처럼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망또는 일찍이 돌아가신 자신의 어퍼니 즉 안로스의 필두일라스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득한 옛날의 아름다움과 그의 첫번째 슬픔을 간극한 것이었기에 그 옷이야말로 요윈의 아릎다움과 슬픔에 적합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요윈은 별 장식이 있는 망또를 걸치고도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잿빛 땅거머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맑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윈, 무엇을 찾소?" "암흑의 성문인 저기에 있지요? 그리고 그분은 지금쯤 곳으로 가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분이 떠나신 지 이레가 되었어요." "이레가 되었다! 이런 말 한다고 나를 나쁘게 생각진 말아 주십시오. 지난 이레는내가 알게 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기쁨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당신을 보게된 기쁨과, 이 어두운 시간의 공포와 의혹이 점점 깊어가는 고통이지요.요윈, 이 세상이 지금 당장 종말을 고해 내가 발견한 것을 그렇게 빨리 잃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녀는 친절한 눈으로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영주, 당신이 발견한 것을 잃으신다고요? 요즘 같은 시절에 무엇을 발견하시고또 잃어 버릴 수 있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어요.하지만 그런 얘기는 그만두는게 좋겠어요. 말을 안하는 게 낫겠어요. 전 지금 어떤 무시무시한 벼랑 위에 서 있고 발아래 구멍은 완전히 암흑인데 내 뒤에 빛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돌아볼 수 없으니까요. 몰락의 일격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소, 우리는 몰락의 일격을 기다리고 있소" 파라미르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벽 위에 서 있는 동안 바람이 잠자고 빛이 희미해지며 태양은 침침해지고 도시와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침묵한 듯 보였다. 바람소리도, 목소리도, 새들의 지저귐이나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또는 그들의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들 심장의 고동마저 잠잠해지고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손을 붙잡고 꼭 쥐었다. 여전히 그들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부터 거대한 암흑의 산이 세상을 삼켜 버릴 듯 파도처럼 솟아오르고 그 뒤로 번개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대지가 전율하며 도시의 성벽이 진동했다. 한숨소리가주변의 대지에서 올라오고 그들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헌다. "뉴메노르를 연상시키는구려." 파라미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뉴노르길고요?' 요윈이 물었다. '그렇쇼 몰락한 서역인들의 나라말이요 푸른 평원과 언덕 너머로 기어오르턴거대한 어둠의 파도, 그 피할 수 없는 암흑을 연상시키는구려. 종종 그런 꿈을 꾸었소" "그렇다면 암흑이 몰려오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피할 수 없는 암흑이?' 요윈은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파라미르가 말했다. "아니오, 단지 그것은 마음 속의 그림이었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알겠소. 깨어나는 나의 이성은 거대한 악이 닥쳐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말하고 있지만 내 심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오. 내 팔다리는 기운이 넘치고 어떤이성도 부정할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이 느껴지요 로한의 백의왕녀 요윈이여, 이 순간 나는 어떤 암흑도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소!"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와 같이 그들은 곤도르의 성벽위에 서 있었다. 거센 바람이 일어 그들의 흑발과 금발을 휘날렸다. 암흑의 그림자가 떠나고 태양을 가리웠던 그림자가 사라지며 빛이 쏟아졌다. 안두인의 강물은 은처럼 빛을 발하고 도시의 모든 집들에서 사람들이 웬지 모를 기쁨을 느끼며 노래를 불렀다. 정오를 지나 해가 기울기 전에 동쪽으로부터 전갈을 지닌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와 서부의 지휘관들에게서의 희망찬 소식을 전했다. 이제 노래하라, 그대 아노르 탑의 사람들이여, 사우론의 제국은 영원히 종말을 고했으니, 암흑의 탑이 무너졌으니. 노래하고 기뻐하라,그대 수호탑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암흑의 성문은 부서지고 그대들의 왕이 승리를 거둬 그 문을 통과하셨으니. 노래하고 즐거워하라,그대 서부의 모든 자손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그대들과 함께 평생 머무실 것이니. 시들어 버린 성수는 재생할 것이며 왕께서 고귀한 장소에 심으셔 이 도시를 축복할 것이니. 모든 이들이여 노래하라! 곤도르의 거리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은 황금빛으로 화창했고 봄과 여름이 결합해 곤도르의 평원에서 향연을 열었다. 캐르 안드로스로부터 발빠른 기사들이 달려와 그간의 소식을 전했으며 도시는 왕의 입성을 준비했다. 메리는 명을 받아 물건을 실은 짐마차를 몰아 오스길리아스로 갔고 거기서부터 캐르 안드로스로 배를 타고 갔다. 하지만 파라미르는 가지않았다. 이제 완쾌되었으므로 그는 도시의 섭정으로서 일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잠시동안의 일이고 그 임무는 자신을 대신할 왕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요윈 역시 오빠로부터 코르말렌평원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다. 파라미르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여러 가지 일로 바밖기에 그녀를 볼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요양원에 머물며 홀로 정원을 산책했고 그녀의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 온 도시에서 그녀만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듯 보였다. 요양원 원장은 이를 염려해 파라미르에게 알렸다. 파라미르는 그녀를 찾아와 다시 한번 함께 성벽 위에 올라갔다. "요윈, 당신 오빠께서 기다리시는 코르말렌평원으로 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지 않고 왜 여기 남아 계시오?'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모르시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소.하지만 어느것이 진실인지는 나로는 알 수 없군요." "저는 수수께끼를 하고 싶지 않아요.더 쉽게 얘기해 주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말씀해 드리겠소. 첫째, 당신이 가지 않는 이유라고 내가 추측하른것은 당신을 부른 것이 오빠이며 이제 엘렌딜의 후계자르서 전정에 승리한 아라곤왕을 보는 것은 기쁨을 주지 않기 때문이오. 또 하나의 추측은 내가 가지 않았기에 당신 역시 내 가까이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요. 어쩌면 이 두 가지 추측이 다 맞아 당신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지도 모르지요. 요윈,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소.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전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했어요.하지만 누구 동정도 바라지 않아요." "그것은 알고 있소. 당신은 아라곤왕의 사랑을 원했지요. 그분은 고귀하고 권력이있는 분이며 당신은 명성과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또한 지상의 모든 이보다 더 높이 오르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어린 병사의 눈에 비친 위대한 지휘관처럼 그분은당신께 위대하게 보였겠지요. 사실 그분은 위대하며 모든 인간들의 군주이자 가장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당신에게 연민과 이해심만을 보여 주었기에 당신은 전장에서의 용감한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작정했지요. 요윈,나를 보시오!" 요윈은 파라미르를 오랫동안 숙고하듯 바라보았다. 파라미르가 맡했다. "요윈, 부드러운 심성의 선물인 연민을 경멸하지 마시오! 하지단 나는 당신에게연민을 베푸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고귀하고 용감한 여인이며 잊혀지지 않을 명성을 스스로 이룩했고 또한 요정들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소.나는당신을 사랑합니다. 한때 당신의 슬픔을 동정했었지요. 하진만 지금, 당신이 슬픔을모르고 두려움이나 결핍이 없다 하더라도,또 당신이 곤도르의 축복받은 황비라 할지라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것이요 요윈,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소?' 그 순간 요윈의 마음에는 동요가 있었다. 아니면 마침내 그녀가 스스로의 마음을이해하게 되었다. 갑자기 그녀의 겨울은 사라졌고 햇살이 빛났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전 미나스 아노르, 태양의 탑에 서 있습니다. 보세요! 암흑의 그림자가 사라졌어요. 이제는 여전사가 되지 않겠어요. 또 위대한 기사들과 겨루지도 않을 것이고 학살의 노래를 즐겨 부르지도 않겠어요.저는 치유자가 되어 황폐하지 않고 자라나는 만물을 사랑하겠어요." 마지막으로 그녀는 파라미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더이상 여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그러자 파라미르는 유쾌하게 읏었다. '그것 참 잘됐군요. 나는 왕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로한의 백의왕녀가 원한다면나는 그녀와 결혼하겠쇼 그리고 그녀가 바란다면 강 건너 아름다운 이딜리엔에 살며 정원을 만들고 더 행복한 나날을 보내겠소 백의의 숙녀만 같이 간다면 그곳에서 모든 것들이 기쁨으로 자랄 것입니다. " "그러면 전 제 동족들을 떠나야 하는 겁리까, 곤도르의 사나이시여? 또한 자신만만한 당신의 동족들이 '저기 북쪽의 거친 여전사를 길들인 영주가 지나간다. 그래우리 뉴메노르족에서는 선택할 여인이 없었단 말인가?하고 당신 뒤에서 수군거리게 하실 건가요?'' "그렇게 하겠소" 파라미르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안고 햇살이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그녀에게입맞췄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성벽 위에 서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않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았고 그들이 손을 잡고 성벽에서 내려와요양원으로 들어갈 때 그 주위에서 발하는 빛을 보았다. 파라미르는 요양원 원장에 게 맡했다. "여기 로한의 요윈이 왔소. 이분은 이제 완치되었소" 그러자 원장이 답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저의 보호 하에서 보내 드리며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다시는 상처나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저는 당신의 오라버님 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 도시의 섭정이신 파라미르공의 보살핌을 추천하겠습니다." 그러자 요윈이 말했다.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저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제게는 가장 축복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왕이 돌아을 째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도시에서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민 리몬에서 피나스 겔린까지, 심지어는 먼해안가까지 곤도르 전역에 소식이 퍼졌기에 도시로 올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서둘러 모여들어 도시는 사람들의 인파로 홍수를 이루었다. 여인들과 아이들이 꽃을 들고 다시 도시의 집으로 돌아왔다. 돌 암로스에서는 가장 숙련된 하프연주자들이 왔으며 레베닌계곡에서 바이올린과 플루트, 피리연주자들과 맑은 목소리의 가수들이 몰려왔다. 마침내 성벽에서 들판의 천막이 바라보이는 저녁이 다가왔다. 그날 밤 사람들이새벽을 기다리는 동안 밤새 불이 타올랐다. 청명한 아침에 그림자가 더이상 드리워지지 않는 동쪽 산들 위로 태양이 떠올랐을 때 도시의 모든 종이 울리고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성채의 백색탑 위에는 햇빛을 받은 눈처럼 빛나는 은빛 섭정의 깃발이 다른 문장이나 의장을 달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걸려졌다. 이제 서부의 지휘관들은 대군을 이끌고 도시로 향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일출 속에서 눈부시게 번쩍이며 또 은빛 물결같이 파문을 일으키며 열을 맞춰 행진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성문 앞 이백 미터 지점에서 멈추었다. 아직 성문은다시 세워지지 않았고 그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관문이 설치되어 그 양편에는 은색과 흑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긴 칼을 빼든 채 서 있었다. 관문 에는섭정 파라미르와 통제의 열쇠를 지닌 휴린 그리고 곤도르의 여타 지휘관들이 서있었으며 그 옆에는 마크의 왕 경호대장인 엘프헬름원수와 기사들을 대동한 로한의 숙녀 요윈이 있었다. 그리고 관문 안 양편으로 다채로운 색깔의 옷을 입고 화관을 두른 사람들이 물밀듯 늘어서 있었다. 미나스 티리스 성벽 앞에는 사방에서 온 기사들과 곤도르와 로한의 병사들, 도시민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엑서 온 사람들로 에워싸인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은색과 회색의 갑옷을 입은 듀너데인이 행렬로부터 걸어나오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 앞으로 아라곤왕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은으로 띠를 두른 검은색 갑옷을 입었고 순백의 긴 망또를 걸첬으며 그것은 멀리서도 그 빛이 보이는 커다란 녹색 보석으로 목 주위에 고정되었다. 그는 투구를 쓰지 않았고 다단 이마에 가느다란 은띠로 별 모양의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와 함께 백색 갑옷을 입은 로한의 왕요머와 임라힐왕자, 갠달프가 걸어왔고 그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란 네 명의 자그마한 인물들이 같이 왔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노파 이오레스는 그들을 보고 놀라는 임로스 멜루이에서 온 친척여자에게 말했다. "아니야, 저들은 어린애들이 아니야. 저들은 멀리 있는 하플링의 나라에서 온 페리안나스들이야. 그곳에서 상당히 명망있는 귀족들이래. 내가 요양원에서 한 이틀보살펴 주어서 알아.저들은 몸집은 작아도 아주 용감하다지.그들 중 하나는 자기주인과 함께 암흑의 나라로 가서는 그 군주와 맞서서 혼자 싸웠다는 거야. 그리고 그 탑에 불을 질렀다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도시에서는 그렇게들 이야기해. 엘프 스톤과 함께 걸어오는 이가 바로 그이일 거야. 그들은 아주 친한 사이라니까. 엘프 스톤왕께선 아주 놀라우신 분이야.말씀하시는 데 유약하시지 않으시면서도 속담에 서처럼 황금의 마음을 가지셨어. 게다가 그분은 치유의 손을 가지셨지. '왕의 손은 치유의 손'이라고 내가 말했거든. 그분이 왕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밝혀지게 된 거 야. 미스랜더가 내게 이렇게 말했어. '이오레스,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오래도록 기 억할 것이오'하고 말이야. 그리고" 그러나 이오레스는 시골에서 온 친척에게 새로운 사실을 계속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트럼펫이 울려 사방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던 것이다. 그러자 관문에 서있던 파라미르와 휴린이 앞으로 나갔고 궁성기사들의 높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네 명의 기사가 은띠로 묶인 레베스론 나무상자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파라미르는 아라곤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곤도르의 마지닥 섭정이 임무를 사직할 것을 청합니다. " 그러면서 그는 흰 막대를 바쳤다. 그러나 아라곤은 막대를 쥐었다가 다시 건네 주며 말했다. "그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 헐통이 이어지는 한 그것은 그대와 그대 자손에게 영원히 부과될 것이오. 이제 그대의 임무를 수행하시요" 그러자 파라미르가 일어나 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곤도르인들이여, 이 도시 섭정의 말을 들으시오! 보시오! 마침내 왕권을 되찾으러 오신 분이시오! 이분은 아라돈의 아드님 아라곤왕이시며 아르노르왕국 듀너데 인의 군주이시자 서부대군의 지휘관이시며 북방의 별을 보유하셨고 복원된 위대한 칼의 주인이십니다. 이분은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셨고 또한 치유의 손길을 내려 주 신 엘프스톤이시자, 뉴메노르의 후계 엘렌딜의 아드님이신 이실두르의 아드님 발란 딜 혈통의 엘레사이십니다. 이분께서 도시에 입성하셔서 왕이 되셔야 할까요?" 그러자 전군과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예'라고 외쳤다. 이오레스는 친척에게 다시 말했다. "저건 이 도시의 의식의 일부 불과한 거야. 저분은 이미 입성하셨었거든. 저분 이 내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이때 파라미르가 다시 외첬기에 그녀는 말을 멈춰야만 했다. "곤도르인들이여,현자들은 왕이 되기 위해선 부왕이 서거하시기 전에 직접 왕관 을 계승받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부왕이 누워 계신 능데 홀로 가서 그 손에 서 왕관을 가져오는 젓이 관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므 로 내가 섭정의 권한으로서 과거 우리 선조들의 시절에 통치하셨던 마지막 왕, 이 르누르대왕의 왕관을 라스 디넨으로부터 이리 가져왔습니다. " 그러자 호위병들이 걸어나왔고 파라미르가 상자를 열어 옛 왕관을 치켜들었다. 그것은 궁성기사들의 투구와 같은 모양이었으나 더욱 고상한 순백색이었으며 양쪽 날개는 바다새의 날개를 본떠 진주와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곧 바다를 건 너온 왕의 상징이었다. 일곱 개의 보석이 고리형으로 박혀 있었으며 그 가장 위에 는 불꽃처럼 빛을 뿌리는 커다란 보석이 있었다. 아라곤은 왕관을 건네 받은 다음 번쩍 치켜들고 외쳤다. "에트 이렐로 엘도렌나 우툴리엔. 시노메 마루반 아르 힐딘냐르 텐 암바르 메 타!" 이것은 딜렌딜이 바람의 날개를 타고 바다로부터 왔을 때 한 말로서 '위대한 바다로부터 난 이 중간계로 왔노라. 나와 내 후손들은 이곳에서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머무를 것이다!'란 의미 였다. 그러나 아라곤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왕관을 머리에 쓰지 않고 다시 파라미르에게 주면서 말했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응기로 내가 다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소. 이에 대한 감사 의 표시로 나는 반지의 사자께서 내게 왕관을 가져오고 미스랜더께서 씌워 주셨으 면 하오. 그분이야말로 성취에 대한 모든 노력의 정점이었으며 이는 곧 그분의 승 리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프로도는 앞으로 나와 파라미르로부터 왕관을 받아 갠달프에게 주었고 갠달프는 무릎을 꿇고 앉은 아라곤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며 말했다. "이제 왕의 시대가 도래했소! 발라의 왕좌가 지속되는 한 축복이 있으라!" 아라곤이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침묵 속에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야 그 본모습 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바다의 왕들처럼 키가 큰 그는 주위의 사람 들보다 한층 두드러져 보였다. 고대의 인물들처럼 보이면서도 넘쳐 흐르는 젊음이 가득한 그의 이마에는 지혜가,손에는 힘과 치유력이,주변에는 후광이 둘러져 있었 다. 그러자 파라미르가 외쳤다. "대왕 만세 !" 그 순간 모든 트럼펫이 울리며 왕이 앞으로 나서자 휴린이 관문을 열었다. 하프와 바이올린,플루트가 맑은 목소리의 노래와 어우러지는 가운데 왕은 꽃으로 덮인 거리를 지나 궁성으로 입성했다. 성수와 별이 그려진 왕의 기치가 가장 높은 탑 위에내걸리고 엘레사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노래는 그 후 수없이 만들어졌다. 그의 통치 하에서 그 도시는 처음 영광을 누렀을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 나무와 분수들로 가득차고 성문은 미스릴과 강철로 주조되었으며 거리는 흰 대리석으로 포장되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 와서 일했고 숲에 살던 사람들 또한 도시 에 가는 것을 즐겼다. 모든 사람의 병이 치유돼 건강을 누렸으며 모든 가정이 남녀 노소의 웃음소리로 가득찼으며 창문은 닫혀지지 않았고 뜰은 사람들로 붐볐다. 제 3시대가 끝난 후 새로운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사라져 간 나날들의 기억과 영 광을 간직했다. 대관식이 끝난 후 왕은 왕좌에 앉아 판결을 내렸다. 동부와 남부 그리고 서쪽의 던랜드와 머크우드의 경계와 여타 수많은 지역과 부족에서 사절단을 보내 왔다. 왕 은 스스로 굴복해 온 동부인들을 사면하고 석방했으며 하라드인들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모르도르의 노예들 또한 누르넨호수 근방에 땅을 주어 살게 했다. 또 용감 한 행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과 보상을 내렀다. 마지막으로 궁성의 경비대 장이 베레곤드를 데려와 판결을 받게 했다. 왕이 말했다. "베레곤드, 그대는 그대 칼로써 살상이 금지된 구역, 핼로우스에 피를 뿌렸다. 또한 섭정이나 지휘관의 허락없이 그대 직무구역을 이탈했다. 예전이라면 이에 대한마땅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이제 난 그대 운명을 선고하겠다. 전장에서의 용기를 고려해, 그보다도 그대 행위가 파라미르공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인을 고려해형벌은 면제하기로 한다. 다만 즉시 궁성의 경비병직을 박탈할 것이며 당장 미나스티 리스를 떠나야 한다. " 그러자 베레곤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마음 속까지 상처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왕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실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제 이딜리엔의 왕자 파라미르공의경비대인 백색기사단에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그대는 그 대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지휘관으로서 명예와 평화를 누리고 그대의 모든 것을걸고 생명을 구해 드렸딘 왕자를 섬기면서 에민 아르넨에 살게 될 이다. " 그제서야 베레곤드는 왕의 은총과 정의로움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무릎을 꿇고왕의 손에 입을 맞춘 다음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떠나갔다. 아라곤은 파라미르에게이딜리엔을 영지로 하사한 다음 궁성이 보이는 에민 아츠넨에 거주할 것을 명했다. "왜냐하면 모르굴협곡의 미나스 이딜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요 시간이 지나면 정돈이 되겠지만 상당 기간은 아무도 그곳에 살 수가 없을 것이니 말이오" 왕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왕은 로한의 요머와 서로 껴안고 말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주고받는다는 보상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대와 나는 형제이니까 말이요 과거의 행복한 시절에 북쪽으로부터 욜이 말을 달려 왔고 그 이후 그보다 더 축복받은 동맹관계는 없었소 어느 쪽도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자,우린 데오든왕을 챌로우스에 안장했으니 그대만 동의한 다면 그분은 곤도르의 왕들 사이에서 편안히 쉬실 수 있소.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 면 그분을 다시 로한으로 모시고 가 동족들 사이에 안치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요머가 대답했다. "왕께서 평원에서 내 앞에 나타난 이후 난 왕을 사랑해 왔고 그 사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우리나라로 돌아가 여러 가지를 정리하 고 정비해야 하겠소. 그리고 서거하신 분을 위해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오겠소 잠시동안 그분은 여기서 쉬도록 해주시요" 요윈은 파라미르에 게 말했다. "이제, 전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오라버니의 일을 도와 드리겠어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로서 사랑했던 분께서 편히 쉬시도록 안치되면 들아오겠어요." 이와 같이 즐거운 나날이 지나갔다. 로한의 기사들은 떠날 준비를 갖춘 후 북쪽 길로 떠나갔다. 성문으로부터 펠레노르평원의 외벽까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송했다. 멀리로부터 왔던 사람들은 기뻐하며 다시 고향으 로 돌아갔고 도시는 전쟁의 상처와 암흑의 기억을 제거하고 새로이 재건하려는 노력으로 분주했다. 호비트들은 레골라스, 김리와 함께 미나스 티리스에 계속 머물렀다. 왜냐하면 아라곤이 아직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결국에는 우리의 모임도 끝을 맺어야 하겠지.하지만 자네들을 좀더 오래 붙잡아두고 싶네. 아직 자네들이 참여했던 행위들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거든.내가 성년이 된 이후 항상 고대해 온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네. 그날이 왔을 때 내 친구들이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걸세." 하지만 그날에 대해서 그는 더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았다. 반지의 동지들은 아름다운 집에서 갠달프와 함께 머물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프로도는 갠달프에게 물어 보았다. "아라곤이 말하는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아세요? 우린 여기서 행복하고 또 떠나고싶진 않지만, 매일 시간이 흘러가고 빌보씨가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또 우리 고향은 샤이어거든요." "빌보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도 똑같이 그날을 기다리고 있고 자네들이 무엇 때문에 지체되는지 잘 알고 있네.또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지금은 기껏해야 5월이고 아직 한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지. 모든 것이 변해 버려서 마치 한시대가 지나가 버린 듯하지만 사실상 자네들이 원정을 떠난 것은 아직 채 일 년도되기 전의 일이야." 그러자 프로도는 피핀을 향해 달했다. "피핀, 자넨 갠달프가 전보다 덜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었지? 그땐 아마 지치셨던 모양이지만 이젠 회복하신 것 같은데."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식탁 위에 무엇이 차려질지 미리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잔치를 준비하느라 애쓴 사람은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법이네. 놀라움은 칭찬의 소리를 더 높여 주는 것이니 말일야.그리고 아라곤 자신도 어떤 신호를 기다리고 있지." 그러던 어느 날 갠달프가 보이지 않자 동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했다. 하지만 갠달프는 밤중에 아라곤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와 민돌루인산 남쪽 기슭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몇 세대 전에 만들어진, 지금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따라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은 왕의 무덤 핼로우스로 이어지는 것 으로 오로지 왕들만이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 높은 봉우리 들이 눈 아래 보이는 고원에 이르렀다. 이제 아침에 되었다. 그들은 저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도시의 탑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하얀 연필처럼 보였으며 안두인의 골짜기들은 정원 같았고 어둠의 산맥은 황금빛 안개로 막이 쳐진 듯했다. 그들의 시선이 회색의 에민 윌에 닿자 라우로스의 반짝임은 멀리 떨어진 별의 광휘처럼 보였다. 강은 펠라기르까지 닿는 리본처림 풀려 나가고 있었으며 그 너머로 하늘가 에 은은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다였다. 갠달프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바로 당신의 영토이자 앞으로 더 위대한 왕국의 심장부가 될 긋이요 이 제 제3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소 당신의 임무는 이 새 시대의 시작을 정리하고 보존될 만한 것은 보존하는 것이겠지요. 많은 것이 구조되었지단 또한 많은 것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 반지의 권능의 시대도 끝났지요. 당 신에게 보이는 모든 대지가 이제 인간들의 거주지가 될 것이오 지금부터는 인간들 의 시대이며 더 오래된 종족들은 사라지거나 떠나가게 될 것이니 말이요" "내 소중한 친구 갠달프,나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게 아직 도 당신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 "아니, 이제 더이상은 필요가 없네. 내 시대는 제3시대였소. 나는 사우론의 적이 었고 이제 내 일은 끝이 난 거요.난 곧 떠날 겁니다. 이제는 당신과 당신의 백성들 이짐을 떠맡아야 합니다. " "하지만 난 불사의 몸이 아닙니다. 나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고,또 비록 순수한 뉴메노르의 혈통을 지녔기에 보통 인간들보다는 더 오래 살긴 하겠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할 겁니다. 지금 여자들의 뱃속에 있는 아이들이 태어나 노년에 이를 때쯤이면 나 역시 노쇠해질 겁니다. 만일 당신이 내 뜻을 저버린다면 내가 죽어 버린 후 그 누가 곤도르와,또한 이 나라를 자신의 여왕처럼 사랑하는 백성들을 다스린 단 말입니까? 샘의 정원에 있는 성수는 여전히 시들어 말라 있소. 언제나 그것이 소생할 기미를 보이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갠달프가 말했다. "푸르른 대지에서 눈을 돌려 저 황량하고 차가운 땅을 보시오!" 아라곤이 몸을 돌리자 그 뒤로는 눈 아래로 흘러내린 경사진 암벽이 있었고 그 황폐한 곳에는 한 줄기 식물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기어올라 눈덮인 곳 가장자리 에서 채 십 센티도 되지 않는 어린 나무를 발견했다. 그것은 벌써 길고 맵시있는 어린 잎을 내밀고 있었다. 잎의 윗부분은 검고 아랫부분은 은색이었으며 그 가느다 란 꼭대기에 달린 조그만 꽃송이는 눈처럼 반짝거렸다. 아라곤은 크게 외쳤다. "예! 우투비엔예스! 마침내 발견했구나! 이것이 바로 가장 오래된 나무의 가지 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 있었을까? 이건 아직 수령이 칠 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러자 갠달프도 와서 보며 말했다. "틀림없이 이건 아름다운 님로스혈통의 나무요. 님로스는 갈라딜리온의 묘목이었 고 갈라딜리온은 텔페리온 즉 가장 오래된 나무'의 과실이었소 그 누가 이 나무가 정해진 시간에 여기서 싹을 틔운 이유를 말할 수 있겠소? 이곳은 오래된 신성한 곳이니 아마 왕의 가계가 끊기기 전에, 또 궁정의 성수가 시들기 전에 씨를 옮겨 심어 놓은 것 같소.그 나무의 씨는 발아하는 일이 드물지만 그 안의 생명은 오랜 세 월 동안 잠을 자기도 하기에 아무도 그 깨어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 발아되면 그것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끔 옮겨 심어져야 합니다. 마 치 예전 엘렌딜의 혈통이 북쪽 황무지에 숨어 있듯이 이 씨는 이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님로스의 계보는 당신의 가계보다 더 오래된 것이오, 엘레사왕." 그러자 아라곤은 부드럽게 그 어린 나무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아! 그것은 땅에 뿌리를 슬쩍 대고 있었기라도 한 듯 상처 하나 없이 들려졌다. 아라곤은 그것을 궁 성으로 가져갔다. 시든 성수는 뽑아 냈지만 그대로 태워 버리지 않고 핼로우스의 주도로인 라스 디넨에 정성을 다해 안치했다. 아라곤은 궁정 샘가에 새 성수를 심 었다. 성수는 신속하게 성숙해 갔다. 그리고 6월에 들어서자 꽃을 만개했다. "이제 신호가 왔으니 그날이 멀지 않겠군." 아라곤은 이렇게 말하고 성벽 위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하지 바로 전날 아몬 딘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해 한떼의 가인들이 북쪽으로 부터 말을 타고 오고 있으며 이제 펠레노르외벽 거의 가까이까지 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왕은 말했다. "마침내 그들이 왔구나! 모든 이들은 준비를 서둘러라!" 하지 바로 전날 밤 하늘은 사파이어처럼 푸르렀고 동쪽에서는 하얀 별이 빛을 발했다. 서쪽 하늘이 아직 황금빛에 물들어 있을 때 말을 탄 사람들이 차갑고 향기로운 대기를 가르고 미나스 티리스의 성문으로 다가왔다. 제일. 앞에는 은색기를 든엘로히르와 엘라단이 말을 몰고 있었으며 그 뒤를 글로핀델과 에레스토르 그리고 리벤델의 전 가족이 따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갈라드리엘과 로스로리앤의 영주 켈레본이 백마를 타고 왔으며 그들과 함께 그 나라의 요정들이 머리에 흰 보석을 단채 회색 망또를 입고 왔다. 마지막으로 요정과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현자 엘론드가 고대 뉴메노르의 번성한 도시 안누미나스의 기치를 안고 왔으며 그 옆에는 그의 딸 이븐스타 아웬이 회색말을 타고 왔다. 이마에 별을 단 아웬이 달콤한 향기를 발산하며 저녁 어슴푸레한 빛 속에 다가오는 것을 본 프로도는 경이로움으로 찬탄하며 갠달프에게 말했다. "이제야 무엇을 기다렸는지 알겠어요! 이것이 마지막이지요 이제는 낮뿐 아니라 밤도 역시 축복받을 거예요.그리고 밤의 두려움은 사라진 커지요." 왕이 손님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자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엘른드는 안누미나 스의 깃발을 왕에게 건네 주고 자신의 딸과 왕의 손을 맞잡게 해주었다. 그들은 함 께 도시로 들어갔으며 하늘에는 모든 별들이 끝을 피운 듯했다. 엘레사왕 즉 아라 곤은 리드 2일(한해의 중간날)밤 왕의 도시에서 아웬 운도미엘과 결혼했다. 이로써 그들의 긴 세월의 기다림과 노고는 완성된 것이었다 제16장 여러 이별 축하의 날이 지나자 반지의 동지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로도가 왕에게 갔을 때 그는 왕비 아웬과 함께 궁정 샘가에 앉아 있었다. 샘가의 성수는 아웬이 부르는 발리노르의 노래에 맞춰 몸을 키우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 프로도를 환영했다.아라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네. 자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지. 자,내 친애하는 벗이여,나무들도 그 부모의 대지에서 더 잘 자라는 법이지. 하지만 자네는 서부 어느 지방에서나 환영을 받을 걸세.자네 동족들은 위인들의 전설에서 큰 명성을 얻은 적이 별로 없었지만, 이젠 사라져 버린 그 어느 대단한 나라들보다 자너 동족의 고향이 더 큰 명망을 얻게 된 거야." 그러자.프로도가 대답했다. "제가 샤이어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먼저 리벤델로 가 야 하지요.전 이런 행복한 나날에 빌보아저씨가 빠진 것이 섭섭하거든요.엘론드의 가족들과 함께 오시지 않아서 전 무척 서운했어요." 그러자 아웬 이 말했다. "그것이 놀라웠나요, 반지의 사자님? 당신은 이미 파괴된 그 반지의 권능을 알고 있잖아요? 그 마력이 행했던 모든 일들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지만, 당신의 친척 빌보씨는 그 반지를 당신보다 더 오래 가지고 계셨지요.따라서 당신들 종족의 평 균치를 따지자면 빌보씨는 상당히 연로하신 편이에요. 또 빌보씨는 마지막 한 여행 을 빼놓고는 다시는 긴 여행을 하지 않으시려고 하세요. 그분은 거기서 당신을 기 다리시지요." "그렇다면 곧 떠나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러자 아라곤이 대답힌다. "이레가 지나면 우리도 함께 갈 걸세 우리도 로한까지 갈 것이니까. 이제 사흘 후 면 데오든왕을 모시고 가 마크에 안장하기 위해 요머왕이 이리로 오실 것이고 우 리 또한 돌아가신 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함께 가기로 했으니 말이야.자네가 가 기 전에 우선 난 파라미르가 전에 자네한테 했던 약속을 확증시켜 주지.즉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은 곤도르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단 말이야. 자네의 장거 에 값할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주겠네만,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 엇이든 가져가도 좋고 또 자네는 왕자처럼 행장을 차리고 가게 될 걸세." 그러자 아웬왕비도 말했다. "난 엘론드의 딸로서 당신께 선물을 드리겠어요. 아버님 엘론드게서 회색항구로 떠나실 때 난 같이 가지 않을 겁니다. 내 선택은 바로 과거 루디엔의 선택이었고 나 또한 그녀처럼 좋은 일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도 선택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반지의 사자여, 때가 되고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나 대신 가게 될 거엑요. 만일 상처가 계속 쑤시고 그 짐에 대한 기억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면 서역으로 가서 당 신의 고통과 괴로를 치유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당신이 삶과 함께 인연을 맺은 엘 프스톤과 이븐스타의 기억을 기념해 이것을 달아 주세요." 그녀는 가슴에 걸 있던 은고리에 달린 별 모양의 흰 보석을 풀어 프로도의 목 에 걸어 주었다. "공포와 암흑의 기억이 당신을 괴롭힐 때면 이것이 도와 줄 거예요." 사흘이 지나자 왕이 말했던 대로 로한의 요머가 마크의 가장 훌륭한 기사들을 인 솔하고 미나스 티리스로 왔다. 환영이 끝나고 또두 커다란 연회장 메레스른드에 모 여 식탁에 둘러앉았다. 요머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놀라움에 어안이 벙벙해졌 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난쟁이 김리를 불러 말했다. "글로인의 아들 김리,그대는 도끼가 준비되었겠지?' "아닙니다, 왕이시여. 하지만 필요하시다면 곧 가져오겠습니다. " '스스로 판단하시오 황금숲의 숙녀데 대한 경솔한 말이 우리 사이이 오갔었지? 자, 이제 난 그녀를 내 눈으로 보았소." "그렇다면, 왕이시여,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군?' "안됐지만, 난 그녀가 살아있는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하진 못하겠소." "그렇다면 제 도끼를 가지러 가야겠군요." "하지만 우선 난 변명을 좀 해야겠소.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보 았다면 그대가 바라는 말을 기꺼이 했을 거요. 하지만 지금 난 아웬 이븐스타왕비 를 첫째로 꼽겠소. 그리고 내 말을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결투를 하겠고 자, 내 칼을 가져오라고 할까?' 그러자 김리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전하. 결투는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전하는 저녁(이븐스타)을 선택하셨 지만 저는 아침(갈리드리엘)에 제 사랑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은 영 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 마침내 출발의 날이 다가왔다. 위대한 인물 집단이 도시로부터 북쪽으로 여행할 준비를 마첬다. 곤도르의 왕과 로한의 왕은 핼로우스로 가서 라스 디넨의 무덤에 이르러 데오든왕을 황금의 관에 옳기고는 침묵 속에 도시를 통과했다. 관은 커다란 마차에 실렸으며 로한의 기사들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앞에는 왕의 깃발이 나부꼈 다. 메리는 왕의 기사였으므로 마차에 타 왕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다른 등료들에게는 체구에 따하 말이 준비되었다. 프로도와 샘와이즈는 아라곤 옆에서 말을 몰았고 갠달프는 섀도우폭스에 탔다. 피핀은 곤도르의 기사들과 일행 을 이뤘으며 레골라스와 김리는 항상 그랬듯이 아롯에 함께 올라탔다. 아웬왕비, 캘레본과 갈라드리엘, 엘론드와 그 아들들, 돌 암로스와 이딜리엔의 왕 자들,그 밖에 많은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함께 떠났다. 일찍이 마크의 어느 왕도 덴 겔의 아들 데오든같이 장대한 행렬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은 적은 없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아노리엔을 지나 아몬 딘 아래 껏빛의 숲에 이르렀 다. 그곳에선 생물은 전혀 찾안볼 수 없었지만 언덕으로부터 아스라이 북소리가 들 려왔다. 그러자 아라곤은 트럼펫을 불게 한 다음 전령으로 하여금 외치게 하였다. "자, 엘레사왕께서 오셨다! 왕께서는 간 부리 간과 그 동족에게 드루아단숱을 영 원히 하사하셨다.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그들 허락없이 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 그러자 북소리는 한층 크게 울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마침내 보름 간의 여행 후 데오든의 마차는 로한의 고원을 지나 에도라스에 이르 렀다. 황금궁전은 빛으로 가득했으며 아름다운 벽걸이로 장식되었꼬 궁전이 건축된 이래 가장 커다란 연회가 벌어졌다. 사흘 후 마크인들은 데오든의 장례를 준비했 다. 돌아가신 왕은 생전에 소지했던 무기와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물건들과 함께 돌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그 위에는 커다란 봉분이 쌓아졌다. 그 위에는 푸른 잔디와 흰 에버마인드로 덮였다. 이제 배로우평원 동편에는 여덟 개의 봉분이 있게 되었 다. 왕의 기사들은 백마를 타고 무덤 주위를 돌며 음유시인 글로오윈이 지은 노래,즉 덴겔의 아들 데오든왕의 노래를 불렀다. 글로오윈은 그 이후 다른 노래는 전혀 짓 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들의 느린 노랫소리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믓하는 사람들조 차 감동시켰다. 하지만 그 가사는 북쪽의 천둥 같은 말발굽 소리와 켈레브란트평원 의 전장에서 울부짖는 청년왕 욜의 함성을 들려 주는 것으로 마크인들의 눈을 빛 나게 했다. 왕들의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사이 헬름의 나팔소리가 산을 울렸으며 마침내 암흑이 닥쳐와 데오든왕은 분연히 일어나 암흑을 헤치고 불을 향해 질주해 태양이 다시 민돌루인에 빛을 발할 무렵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의혹을 넋어, 암흑을 넘어, 날이 밝을 때까지 햇빛 속을 노래하며 달리셨지,칼을 빼들고 희망의 불을 붙이시고, 희망으로 끝맺었지. 죽음을 넘어, 두려움을 넘어, 몰락을 넘어 상실을 넘어, 생 명을 넘 어, 영원한 영광으로! 메리는 녹색 봉분 발치에 서서 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크게 외첬다. "데오든왕,데오든왕이시여,안녕! 잠시동안이었지만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분이시 여 ! 안녕히 !" 장례가 끝나고 여자들의 곡도 잠잠해져 마침내 데오든만 무덤에 홀로 남겨지자 일행은 황금궁전에서 대연회를 베풀고 슬픔을 멀리했다. 왜냐하면 데오든은 장수를 누렸을 뿐 아니라 그 위대한 선조들보다 더 명예로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마크의 관습에 따라 왕들을 추모하고 건배할 시간이 되자,태양 같은 금발을 휘날 리며 요윈은 요머에게 가득찬 잔을 건네 주었다. 그러자 학식있는 시인이 일어나 마크의 왕들을 차례로 읖기 시작했다. 청년왕 욜, 황금궁전의 건립자 브레고, 불운한 발도르의 동생 알도르, 프레아, 프레아윈, 글드 윈, 데오르, 그람, 마크의 위기글 헬름스 디프에 은거한 헬름, 이렇게 서쪽편 아홉 개의 봉분의 주인들이 거명되었다. 여기서 일단 헐통이 끊기고 동쪽편 봉분의 왕가 가 이어진 것이었다. 헬름의 조카 프레알라프, 레오파, 왈다, 폴카, 폴크와인, 펜겔, 덴겔 그리고 데오든이 그들이었다. 데오든이 불려졌을 때 요머는 잔을 비웠다.그러 자 요윈은 시종들에게 잔을 채우라고 지시했고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새로운 왕에 게 건배하며 외첬다. "마크의 왕 요먼 만세!" 연회가 끝나갈 무렵 요머가 일어나 말했다. "지금 이 자리는 선왕 데오든 장례연입니다만 헤어지기 전에 기쁜 소식을 전해 드치겠습니다. 선왕께서는 내 누이 요윈에게는 친아버님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내 가 이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을 기뻐하실 겁니다. 이 궁전이 처음 맞아 보는, 여러 지역의 훌륭하신 분들,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곤도르의 섭정이자 이딜리엔의 왕자 이신 파라미르공께서 로한의 요읜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러므로 그들은 여러분 모두 앞에서 혼약을 맺을 것입니라." 파라미르와 요윈이 앞으로 나와 손을 잡자 모든 이들이 건배하며 축복을 보냈다. 다시 요머가 말했다. "이렇게 해서 마크와 곤도르의 우정은 새로운 끈으로 묶여졌으니 그만큼 즐거 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아라곤도 말했다. "요머,그대의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를 곤도르에 기꺼이 내주다니 그대는 인 색한 사람이 아니시오!" 그러자 요윈은 아라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치유자이신 전하,제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라곤은 대답했다. "그대를 처음 본 이래 항상 그대의 행복을 기원했소. 그대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 또한 치유되는 것 같소." 연회가 끝나자 떠나야 할 사람들은 요머왕과 작별인사를 나뒀다. 아라곤과 그의 기사들, 로리엔과 리벤델에서 온 이들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파라미르와 임라 힐은 에도라스에 머물렀고 아웬 이븐스타 역시 그대로 머물러 그녀의 친지들과 작 별했다. 그녀의 아버지 엘론드는 딸과 함께 언덕으로 올라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 누었기에 그들의 마지막 이별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의 헤어짐은 세상의 종말 을 넘어서까지 지속될 쓰라린 것이었다. 손님들이 떠나기 전 요머와 요윈은 메리에게 왔다.요머가 먼저 말했다. "자,안녕,샤이어의 메리아독,마크의 홀드와인이여! 가서 행운을 찾고 곧 돌아와 우리의 환영을 받길 바라네). 옛날의 왕들이라면 문드버그평원에서의 자네의 공적에 대해 마차에 다 실을 수 없을 만큼의 선물을 주었겠지.그런데 자넨 무기를 제외하 곤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했지.그 말을 수락하겠네.사실 실제로 내게는 그런 용 감한 행위에 값할 만한 물건은 없으니 말이야.하지만 내 누이는,아침이 다가을 때 의 마크의 나팔소리와 던헬름의 기념으로 이 작은 물건을 받아 주길 바란다네." 그러자 요윈은 메리에게 오래된 나팔을 주었다.그것은 녹색띠가 달린 작고도 정 교하게 만들어진 은나팔로서 말에 탄 기사들과 함께 위대한 미덕을 기리는 룬문자 가 조각되어 있었다. 요윈은 말했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보예요.난쟁이들이 만든 것으로 용 스카다의 보물창고에 서 찾은 것입니다. 청년왕 욜께서 가져오셨지요.곤경에 처한 이가 불면 적의 마음 에 두려움이 생기고 친구들의 가슴 속에는 즐거음이 넘쳐 도우러 올 거예요." 메리는 그것마저 거절할 수 없었기에 나팔을 받고 요윈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들 은 그를 포옹한 다음 얼마간 이별하게 되었다. 이제 손님들이 떠나갈 준비가 끝나자 이별의 잔을 돌려 우정을 나눈 다음 길을 떠났다. 그들은 헬름스 디프에 도착해 이틀 간 머물렀다. 거기서 레골라스는 김리와 의 약속을 이행해 그와 함께 반짝이는 동굴로 갔다. 레골라스는 돌아와 침묵을 지 키며 김리만이 그 동굴을 제대로 묘사할 만한 표현을 알 것이라고만 말했다. "사실 언쟁에서 난쟁이가 요정을 이겨 본 적은 이제껏 없었지.자, 이젠 판곤으로 가서 묵은 셈을 청산하기로 하지." 그들은 디프로부터 이센가드로 올라와 그 동안 엔트들이 분주하게 해놓은 일들을 보았다. 원형으로 쌓여졌던 돌들은 모두 부서지고 제거되었으며 그 내부는 나무로 꽉 들어찬 정원이 되었고 그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 중앙에 맑은 호수를 이루고 있 었다. 그 가운제 난공불락의 첨탑 오탕크가 우뚝 서 있어 맑은 호수에 그림자를 비 추었다. 잠시 그들은 예전 이센가드의 성문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오탕크에 이르는 이끼 낀 길 입구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마치 파수병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변화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다른 생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흠 흠'하는 소리가 들리며 트리비어드가 퀵빔을 데리고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성큼 성큼 다가왔다. "오탕크의 트리가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시고 계신 것은 알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아서 계곡 위에서 일하고 있었지요.하지만 당신들도 동쪽과 남쪽에서 열심 히 일했다고 들었지요. 내가 들은 소식은 모두 좋은 것이었소" 트리비어드는 그들의 공적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말을 멈 추고 갠달프를 오래 바라보았다. "자, 이리 오십시요 당신이 가장 강력한 분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소 당신의 모든 노력은 좋은 결실을 맺었지요. 자,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여기는 어떻게 오셨 소?'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당신의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려고 들렀소, 친구여. 그리고 이루어진 모든 일에 대한 당신의 도움을 감사드리려고 왔쇼" "흠,공정하신 말씀.확실히 우리 엔트들도 한몫했지요.여기 살았던 그 저주받을 나무도살자를 처치하는 일뿐 아니라, 흠, 더러운 눈에 검은 손, 안짱다리에 냉혹한 발톱,더러운 배에,피에 굶주린 모리마이테신카혼다들이 쳐들어 왔었지요.물론 당 신들같이 성미 급하신 분들에겐 이 벌레 같은 오르크들의 이름은 너무 길 테지요. 그놈들은 강 건너 북쪽에서 내려왔는데 라우렐린도리난에는 여기 계신 위대한 분 들 덕택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요." 그러면서 그는 로리엔의 영주 부부에게 절을 했다. ' 더러운 놈들은 월드에서 우리를 만나게 되어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지요 우리 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지요. 다른 종족들도 우리에 대해 모르 기는 마찬가지겠소만. 하여간 우리를 기억할 놈들은 많지 않을 것이요 왜냐하면 살 아 도망친 놈들이 얼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강물이 처리해 주었으니 말 이오 하여간 당신들에게는 잘된 일이었소 그놈들이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로 한의 왕은 멀리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고 아니면 돌아을 고향을 잃었을지도 모르 지요."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우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지요 미나스 티리스나 에도라스는 그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 "'결코'란 우리 엔트들에게는 너무 긴 말이지요.당신 말은 당신 왕국이 지속되는 동안이란 뜻이겠지요.어쨌든 당신 왕국은 우리 엔트들에게도 길게 여겨질 만큼 오 래 지속될 것이오." 그러자 갠달프도 말했다. "새초운 시대가 시작되었소.그리고 이 시대는 인간의 왕국이 당신들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오,내 친구 판곤.그런데 말해 보시오 내가 부탁한 일 은 어떻겐 되었소? 사루만은 어떻소? 그는 아직 오탕크에 싫증을 내지 않았소? 당 신이 해놓은 일을 창문으로 보고 경치가 더 나아졌단고는 생각지 않을 텐데?' 메리는 트리비어드가 오랫동안,거의 교활한 시선으로 갠달프를 쳐다본다고 생각 했다. "아! 당신이 그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요.오탕크에 싫증이 났느냐고요?나중 에야 무척 싫증이 났겠지요.하지만 자기 탐보다는 내 목소리에 더 싫증이 났을 겁 니다. 흠! 내가 긴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아니,최소한 여러분 기준으로는 길게 여겨 질 만큼 해주었지요."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당신 이야기를 들으려고 머물러 있었소? 당신이 오탕크로 들어갔었소?' "흠! 오탕크에 들어가다니요! 그가 창가에 와서 들었지요.다른 방법으로는 소식 을 들을 수가 없으니 말이오 게다가 내 목소리는 싫어했지만 소식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지요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 듣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 소식에다 그가 생각해야 마땅할 여러 가지 것들을 덧붙여서 말해 주었지요.그는 아주 싫증 을 내더군요.항상 성미가 급했지요 결국 그것이 그의 파멸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 오" "내 친구 판곤, 당신은 신중하게 "머물렀다'든가 '급했다'든가 '되었다'란 말을 골라 쓰시는구려. 현재'는 어떻게 된 거요? 그가 죽었소?' "내가 아는 한 죽지는 않았지요 그는 가버렸소. 그렇소,이레 전에 가버렸소 내가 가게 내버려 두었지요 기어나왔을 때 보니 남은 것이라곤 거의 없더군요 그리고 벌레 같은 그 부하놈은 거의 창백한 그림자와 다를 바가 없었지요.자,내가 그를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한 약속은 다시 말하지 마시오,갠달프.나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 상황이 달라져 난 그가 더이상 해를 끼치지 못할 때까지 붙잡아 놓았던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을 감금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일이 없다는 것 을 이해하셔야 하오. 필요가 없는데도 우리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보기는 싫지요. 독이 없는 뱀은 기어다녀도 괜찮을 테니 말인요"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소.그렇지만 그 뱀은 아직 하나의 이빨이 남아 있소. 그는 목소리의 독을 가지고 있지요.아마 그가 당신 마음의 약한 부분을 알고 당신 마저 설복시킨 것 같쇼 자,그가 가버렸다니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쇼 이제 오탕크 의 탑은 원래의 주인인 왕에게 돌아갈 것이오 비록 그것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지 만." 그러자 아라곤이 말했다. "그것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엔트들이 오탕크를 지키고 내 허락없이 아무 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면 여기 모든 계곡을 엔트들에게 주겠소" 그러자 트리비어드가 답했다. ' 탑은 잠겨 있지요. 사루만에게 잠그고 열쇠는 달라고 했쇼 퀵빔이 가지고 있 습니다. " 퀵빔은 바람에 휘어지는 나무같이 절을 하고는 아라곤에게 강철고리로 연결될 두 개의 검고 커다랗고 정교한 열쇠를 넘겨 주었다. 아라곤이 말했다. '그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릴니다. 이제 작별을 고해야겠소 그대의 숲이 평화롭게 번창하기를! 이 계곡이 울창하게 되면 그대들이 한때 거닐었던 산 서쪽 편에도 남을 공간이 있소" 트리비어드는 슬픈 표정을 지 었다. "숱은 울창해지고 우거지겠지만 엔트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엔팅이 없으니 말이오" "하지만 이제는 찾을 희망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르지요.오랫동안 막혀 있던 동쪽 대지도 당신들에게 개방될 것이요" 그러나 트리비어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기에는 너무 멀고 또 그곳에는 인간들이 너무 많지요. 어쨌든 난 대접할 생각 도 잊고 있었군 그래! 여기서 잠깐 쉬어가시지 않겠소? 판곤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을 단축하려는 분이 혹시 계신지?' 그는 켈레본과 갈라드리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골라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남쪽이나 쪽으로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레골라스는 김리에게 말했다. "이리 와 봐,김리, 난 판곤의 허락을 얻어 엔트숲의 요지로 들어가 중간계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을 찾아 볼 거야.자네도 나와 같이 가서 약속을 이행 하는 게 어때?그렇게 한 다음 계속 여행해 머크우드의 고향으로 돌아가세나." "마침내 여기서 반지 원정대의 행로는 끝나게 되었군." 썩 내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김리는 이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약속한 대로 날 도와 주러 내 나라로 돌아와 주기 바라네." 아라곤이 말했다. 그러자 김 리가 대답했다. "우리 영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언제라도!" "자,호비트들이여,안녕! 이제 자네들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것이고,나도 자 네들한테 위험이 닥칠까 잠 못 이루는 밤은 없겠지.가능한 한 소식을 보낼 것이고 또 우리들 중 몇몇은 때때로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시 모이는 일은 없을 것 같군." 그러고나자 트리비어드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 작별인사를 했고 켈레본과 갈라 드리엘에게는 경의를 표하며 천천히 세 번 절을 하고 말했다. "우리들이 그루터기 옆에서, 바위 옆에서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쇼 아바니 마르, 바니말리온 노스타릴. 우리가 이처럼 종말에야 만나게 된 것은 슬픈 일이오 이제 세상은 변하고 있고 나도 그것을 물 속과 땅에서 느끼고 공기에서 냄새 맡을 수 있소 아마 우리는 다시는 만나게 되지 못하겠구려." 그러자 켈레본이 말했다. "이 세상의 최연장자여,난 잘 모르겠소" 그러나 갈라드리엘이 말했다. "중간계에서는 만나지 못하겠지요.파도 아래의 대지가 다시 솟아오를 때까지 말 이지요.그 다음에 타사리난의 버드나무숲에서 봄에 만나게 될 겁니다. 안녕히!" 마지막으로 메리와 피핀이 엔트에게 인사를 했고 엔트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즐거 운 표정을 지었다. "자,유쾌한 친구들,가기 전에 나와 함께 한 모금 또 마시겠나?' "물론이지요." 그들이 대답하자 그는 그들을 데리고 나무그늘로 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돌항아 리가 놓여 있었다. 트리비어드는 대접 세 개에 가득 채워 하나씩 들고 마시게 했다. 그러면서 트리비어드는 대접 너머로 그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하게,조심해! 내가 처음 봤을 때보다 자네들은 벌써 키가 많이 자랐어." 그들은 웃으며 대접을 비웠다. "자,안녕! 자네들의 나라에서 엔트와이프들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꼭 전해 줄 것 을 잊지 말게나." 이렇게 말하며 그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나무들 사이 로 사라졌다. 여행자들은 이제 더욱 속도를 내 로한헙곡을 향했다. 아라곤은 피핀이 오탕크신 석을 들여다보았던 그 장소 가까운 곳에서 그들과 작별했다. 아라곤은 호비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위험 속에서 그들을 인도했었다. 호비트들은 그와 의 작별을 무척 섭섭해 했다. "우리에게 친구들을 볼 수 있는 신석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그러면 멀리서도 친 구들에게 말할 수 있잖아." 피핀이 이렇게 말하자 아라곤이 대답했다. "미나스 티리스의 신석이 보여 주는 것은 자네가 보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 자네 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남은 셈이지.하지만 오탕크의 신석은 왕이 가져야겠 어, 내 영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 백성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페레그린 투크,자네는 곤도르의 기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자네 직책에 서 풀어 준 것은 아니야.자네는 지금 휴가를 받아서 가는 것이고 난 곧 자네를 부 를 걸세.그리고 샤이어의 친구들,내 영토는 북쪽에도 있고 언젠가는 내가 그곳에 갈 거라는 것을 기억해 주게." 그리고나서 아라곤은 케레본과 갈라드리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갈라드리엘이 그에게 말했다. "엘프스톤,그대는 암흑을 헤치고 희망에 이르렀고 소망을 이루었지요.앞으로의 나날을 행복하게 보내세요." 켈레본도 말했다. "친척이여,안녕히! 그대의 운명은 내 운명과 달라 그대의 보석이 끝까지 그대와 함께 하길 빌겠소." 이렇게 그들은 이별했다. 그때는 마침 일몰 시간이었고 얼마후 그들이 뒤돌아보 았을 때 서부의 왕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지는 태양이 그들을 비춰 그들의 마구는 붉게 빛났으며 아라곤의 흰 망또는 불꽃처림 타을랐다. 아라곤 이 녹색의 돌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에선 녹색의 불이 솟아을랐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지들은 이센을 따라가며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로한협곡 을 지나 황야를 건너 던랜드 경계를 통과했다. 던린드인들은 요정이 그 나라에 별 로 간 적이 없었음에도 그들을 두려워해 달아나고 숨었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아직 대집단이었고 필요한 것을 구비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유있게 길을 가며 필요할 때마다 야영을 하고 쉬었다. 왕과 작별한 지 엿새째 되는 날 그들은 오른쪽으로 안개의 산맥을 끼고 내려오 는 숲을 통곽하게 되었다. 해질 무렵 그들이 넓은 들판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가는 노인을 따라잡게 되었다.그는 회색인지 더러 워진 흰색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발치에는 또 한 명의 거지 가 몸을 웅크린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 갠달프가 말을 걸었다. "자, 사루만!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아직도 내가 가고 오는 것을 명령하고 싶은가?내 이 몰 락한 모습으로 만족하지 믓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텐데. 어쨌든 내가 일할 시간은 끝나 가고 있 네. 이젠 왕께서 맡으실 테니. 당신이 오탕크에서 기다렸더라면 왕을 뵐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왕께서는 지혜와 은총을 보일셨을 것을." "그렇다면 빨리 떠나길 잘했군.나는 왕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말이야.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면 말해 주지.난 그의 영토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지." "그렇다면 당신은 또 한번 길을 잘못 들었군.내가 보기엔 당신의 이 여행은 희망 이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조롱할 셈인가? 우린 기꺼이 당신 을 도울 텐데." "나를? 흥, 제발 내게 미소를 짓지 마시지. 난 당신들의 찌푸린 얼굴이 더 좋으니 까. 여기 계신 레이디 또한 난 믿지 않아.항상 나를 미워했고 당신을 위해 계략을 꾸며 왔으니까 말이야. 이 레이디께서는 틀림없이 내 처지를 비웃는 재미를 보려고 당신들을 이 길로 이끌었을 거야.당신들이 쫓아온다는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그 런 재미를 주진 않았을 텐데." 그러자 갈라드리엘이 말했다. "사루만,우리에겐 당신을 쫓아다니는 것보다 더 급박한 일이 있소. 오히려 당신 이 행운을 잡았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걸.이제 당신에겐 마지막 기회가 왔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다행이군.또 거절하는 수고를 덜게 될 테니 말이야.내 모 든 희망은 사라졌지만 당신들의 희망을 나눠 갖진 않겠어.당신들에게 혹시라도 희 망이 있다면 말이야." 잠깐동안 그의 눈에는 불이 붙었다. "꺼져 버려!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를 헛되이 오래 해온 것이 아니란 말야. 당신 들은 스스로를 몰락시켰고 그 사실을 알고 있지.난 방랑하면서 당신들이 내 성을 무너뜨릴 때 당신들의 성도 함께 부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위안을 받을 거야. 자,그 넓은 바다를 어떤 배로 건너갈 수 있을까?' 그는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아마 유령들이 가득한 회색의 배겠지?' 그는 소리내 웃었는데 그 소리는 탁하고 섬뜩했다. "이 바보야, 일어서 !" 그는 발치에 앉아 있던 또 다른 거지에게 소리치며 막대기로 내리첬다. "뒤돌아봐! 이 고상하신 분들께서 우리 길로 가신다면 우린 다른 길로 가야지. 일 어서.안 그러면 저녁엔 빵껍질 하나 주지 않을 거다. " 그 거지는 몸을 돌리며 낑낑거렸다. "불쌍한 그리마! 불쌍한 그리마! 항상 얻어맞고 욕이나 먹고! 그를 죽이고 싶어! 그를 떠나고 싶어 !"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를 떠나라!" 하지만 웜통은 침침한 눈에 겁을 싣고 갠달프를 쳐다보며 발을 질질 끌고 사루만 뒤로 숨어버렸다. 그 비참한 두 사람은 일행을 지나 호비트들 앞을 지났다. 사루만 은 발을 멈추고 호비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동정심을 느끼며 그를 보았 다. "이 꼬마들,너희들도 고소한 꼴을 보려고 왔단 말이지?너희들은 거지가 뭘 원하 는지도 모르는가? 너희들은 필요한 건 다 가지고 있지.음식에 좋은 옷, 또 담뱃대 에 넣을 최상품 연초도 가지고 있겠지.그래,맞아! 그 담배가 어디서 난 것인지 난 알고 있지.너희들은 거지한테 담배조차 주지 않는가?' "내게 있다면 주겠어요." 프로도가 이렇게 맡하자 메리가 덧붙였다. "잠깐 기다리시겠다면 내게 남은 것을 드리지요" 그는 말에서 내려 안장에 걸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사루만에게 고무로 된 주머니를 건네 주었다. "여기 있는 것을 가지세요.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이건 이센가드의 표류물에서 얻은 거니까요." "내거야, 내거. 비싼 값을 치른 거지 !" 사루만은 주머니를 움켜쥐며 소리첬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더 많이 가졌을 테니 기념으로 이걸 주는 거겠지. 하지만 도 둑이 거지 것을 빼앗아 다시 조금이라도 돌려준다면 거지는 고마워해야겠지. 네 녀 석들이 고향에 돌아갔을 때 생각보다 사정이 좋지 않다면 꼴 좋을 거다. 오랫동안 너희들 고향에 담배가 없어지기를!" 그러자 메 리가 말했다. '고맙소 그렇다면 나와 함께 긴 여행을 한 그 주머니는 돌려주시지요.그건 당신 것이 아니니까.그 담배는 넝마에 싸시지요." "도둑은 도둑질을 좀 당해도 싼 법이지." 사루만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등을 돌리고 웜통을 발로 차며 숲 쪽으로 가버렸다. 피핀이 입을 열었다. "참 놀랍군.도둑이라니! 오르크들이 우릴 잡아 로한 전역을 끌고 다닌 데 대한 우리의 주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자 샘 이 말했다. "아 참,그가 우리 고향에 대해 한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데.고향으로 돌아갈 시간 인 데." "물론 그렇지만 우린 빌보아저씨를 만나야 하니까 더 빨리 갈 수는 없어. 무슨 일 이 있어도 우선은 리벤델로 가야 해." 프로도가 말하자 갠달프가 이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사루만은 정말 안됐군! 완전히 볼품없이 됐으니 영 나아질 것 같지 않아.그래도 난 트리비어드의 생각이 옳다고 동의할 수는 없어. 아마 아직은 사소하고 치졸한 해악을 끼칠 수 있을 거야." 다음날 그들은 북쪽 던랜드로 계속 갔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푸르고 쾌적 한 지대였다. 9월이 되어 이제 금빛 낮과 은빛 밤이 거듭되었고 그들은 여유있게 여행해 스완플리트강에 도착했다. 저지대로 급슥도로 떨어지는 폭포 동쪽 편에는 오래된 개여울이 있었으며 멀리 서쪽으로는 안개 속에 잠긴 호수와 작은 성들 사 이로 그레이플러드까지 이어진 오솔길이 있었다. 호수에는 수많은 백조들이 갈대숱 에 모여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에레기온으로 왔다. 마침내 어느 아름다은 날이 밝아와 어렴풋이 안개 너머로 희미한 빛줄기가 비칠 무렵 그들은 낮은 언덕에 세워 둔 텐트에서 낮 은 구릉 사이로 높이 솟은 세 개의 봉우리가 햇살에 비친 광경을 보았다. 카라드라 스,켈레브딜 그리고 파뉘드흘봉 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모리아에 가까이 온 것이었 다. 여기서 그들은 이레 동안 지체했다. 왜냐하면 또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왔기 때문 이었다. 이제 곧 켈레본과 갈라드리엘 그리고 그들의 동족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 꿔 레드혼 게이트를 지나 딤릴 스테어를 내려간 다음 실버로드로,그들의 고향으로 갈 것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서쪽 길로 온 것은 엘론드, 갠달프와 이야기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호 비트들이 깊은 잠에 빠진 후 그들은 별빛 아래 함께 앉아 지나가 버린 시절들과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한 일과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거나 앞으로의 나날에 대해 이 야기를 나누었다. 만일 어떤 방랑자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다면 그는 아무것도 보 거나 듣지 못했을 것이고 다만 무인도에서 잃어 버린 과거의 잊혀진 기억들이 기 념물로 조각된 회색 형체들을 본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 말하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생각이 교차되는 동 안 눈만이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다 끝내자 그들은 '세 개의 반지'가 사라질 시간이 될 때까 지 당분간 작별하게 되었다. 회색 망또를 걸친 로리엔의 요정들은 산 쪽으로 말을 달려 금방 암석과 그 그림자 사이로 사라져 갔으며 리벤델로 향한는 이들은 언덕 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칟내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섬광이 일었고 그 이후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갈라드리엘이 작별의 표시로 자신의 반지를 쳐들었 었다는 것을 프로도는 알았다. 샘은 돌아서면서 한숨을 쉬었다. "로리엔으로 돌아간다면 좋겠는데 !" 마침내 어느 날 저녁 그들은 리벤델의 깊은 계곡 가장자리에 있는 높은 습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여행자들에게 항상 갑작스레 나타난 듯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들 은 저 아래 반짝이는 엘론드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습지에서 내려가 다리를 건너 문 앞에 이르자 모든 이들이 엘론드 일행의 귀환을 기뻐했으며 집집마다 불 을 밝히고 노래를 불렀다. 호비트들은 무엇을 먹거나 몸을 씻기도 전에,심지어 망또를 벗을 여유도 없이 빌 보를 찾아갔다. 그들은 빌보의 작은 방에서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방은 종이와 펜과 연필들로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고 빌보는 조그맣고 밝은 불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늙었지만 평화롭게 보였으며 좀 졸린 듯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그는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어이, 여보게들! 그래, 이제들 돌아왔가? 내일이 또 내 생일이라네.자네들 참 잘 했네.내가 백스물아흡 살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나?일 년만 더 살도록 허락된다 면 올드 투크씨와 비기게 되는 걸세. 그를 이기고 싶네만 두고봐야 알겠지." 빌보의 생일잔치 후 네 명의 호비트들은 며칠 더 리벤델에 머물렀다. 그들은 대개 빌보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빌보는 식사때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시간 을 자기 방에서 보내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대해서 그는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그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깨어나곤 했다. 불가에 둘러앉아 그들은 빌보에게 차례로 여 행과 모험에서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 그는 조금 기록을 하는 척 했으나 곧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깨어나면 '참 굉장하구먼! 정말 놀라워! 그런데 어디까지 했더라.'하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빌보가 잠들기 시작한 그 부분 부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주의를 끈 유일한 부분은 아라곤의 대관식과 결혼식 장면이 었다. "물론 나도 결혼식에 초대받았었지.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기다려왔었으니까. 그 런데 어찌된 셈인지 막상 그 일이 닥치자 난 여기서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 었어. 게다가 짐싸는 게 아주 번거로운 일이어서." 거의 두 주일이 지나갔을 때 프로도는 창 밖을 내다보고 밤 사이에 서리가 내려 거미줄이 흰 그물처럼 된 것을 알았다. 그러자 갑자기 빌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애 최고로 아름다운 여름이 지난 이후 날씨는 여 전히 맑고 청명했으나 벌써 10월이 되었고 곧 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이었다. 게다 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하지만 그를 재촉한 것은 날씨 걱정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지금이 샤이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샘도 그와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지 전날 밤에 이렇게 말했었다. "프로도씨,우린 멀리 여행하고 많은 것을 봤지만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있을 것 같지 않아요.여기엔 모든 것이 조금씩 섞여 있어요 샤이어,황금의 숲,곤도르,왕 들의 궁성,초원과 산, 들,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떠날 때가 된 느낌이 들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도 걱정이 되구요." "그래, 샘, 모든 것이 다 있지. 바다를 빼놓고 말이야." 프로도가 대답했다. 그는 이제 혼자 중얼거렸다. "바다를 빼놓곤 말이지." 그날 프로도는 엘론드에게 말을 했고 그들은 다음날 아침 떠나기로 결정했다. 갠 달프는 기쁘게도 이렇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가야 할 것 같네.최소한 브리까지만이라도. 버터버를 만나 보고 싶 어 ." 저녁때 그들은 빌보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그래,자네들이 가야 한다면 가야겠지.유감스럽네만.자네들을 그리워하게 될 거 야. 하지만 자네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도 족하지. 그런데 지금 몹시 졸립 구먼." 그리고나서 그는 프로도에게 미스릴코트와 스팅을 주었다. 벌써 주었었던 사실을 잊어 버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 권의 책을 건네 주었는데 그것은 빌보가 여 러 차례에 걸쳐 그의 거미 같은 글씨로 쓴 것으로 붉은 표지 위에 "요정의 언어를 번역, B.B'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샘에게는 금이 담긴 조그만 주머니를 주었다. "용 스마우그로부터 뺏은 것 중에서 마지막 남은 걸세, 자네가 결혼을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거야." 샘은 이말에 얼굴을 붉혔다. "자네 젊은 친구들한텐 충고밖에는 줄 것이 없군.' 그는 메리와 피핀에게 달했다. 그리고는 본보기가 될 만한 훌륭한 충고를 마치자 샤이어의 관습대로 한 가지를 덧불였다. "모자에 비해 자네들 머리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하게나. 자네들이 성장을 곧 멈 추지 않는다면 모자나 옷이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걸세." 그러자 피필이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 올드 투크를 이기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블로우어를 이기 려고 애써도 되잖아요?' 빌보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두 개의 예쁜 담뱃대를 꺼냈다. 그것은 입부리가 진주 로 장식되었고 섬세하게 세공된 은제품이었다. "이것으로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날 생각해 주게. 요정들이 날 위해 만들어 준 것이 지만 난 이젠 담배를 피우지 않거든." 그러다 그는 갑자기 졸기 시작하더니 잠깐 잠이 들었다. 그는 다시 깨어나 달했 다. "그런데 어디까지 했더라? 참, 선물을 주던 중이었지. 그러니 생각나네만, 프로도, 네가 가지고 간 내 반지는 어떻게 되었지?" "잃어 버렸어요,아저씨.아시다시피 없애 버렸지요." "참 안됐구먼! 그걸 다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니지,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그걸 없애려고 자네들이 갔었지? 하지만 모든 일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너무 많은 일 들이 그 반지와 뒤섞여 있어서 말이야.아라곤,신성회의,곤도르,로한의 기사들,남 부인들과 올리파운트, 그런데 샘, 자넨 정말 그것을 보았나? 그리고 동굴과 탑, 황금 의 나무들, 그리고도 기상천외한 것들 말이야. 내가 여행에서 돌아을 땐 너무 직선 길로 돌아왔어.갠달프가 세상구경을 시켜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하지만 그 랬더라면 돌아오기 전에 내 집이 경매처분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더 곤란했겠지.어 쨌든 지금은 너무 늦었어.여기 앉아서 모험담을 듣는 것이 사실은 더 편하다네.불 가는 안락하고 음식은 맛이 좋지. 또 원할 때는 요정들을 볼 수 있으니까. 더 이상 뭘 원할 수 있겠나?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오, 문을 나서면 내리막길 길은 저 멀리 아득히 이어졌는데 할 수 있는 이들은 따라가야지. 그들에게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지만, 마침내 나는 피곤한 발을 이끌고, 불켜진 집으로 향한다오, 저녁의 휴식과 수면을 위해서." 빌보는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가슴 위로 떨구고 곤히 잠이 들었다. 방에 밤이 깊극지며 불빛은 더 밝게 타을랐다. 그들은 잠들어 있는 빌보를 바라보 고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얼마동안 그들은 침묵을 지키며 앉 아 있었다. 샘은 발을 둘러보며 벽 위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프로도씨,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이 분은 글을 많이 쓰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마 이제 우리 이야기는 안 쓰실 모양이에요." 그 말에 마치 빌보가 듣고 있기라도 한 듯 한쪽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보다시피 난 잠이 많아졌다네.쓸 시간이 있으면 난 시를 쓰고 싶어.내 사랑하는 프로도,네가 가기 전에 이 방을 좀 정리해 주지 않겠니? 내 기록과 종이들,그리고 일기도 모아서 네가 좀 가지고 가라구.난 자료를 모아서 정리할 시간이 없어.샘에 게 도와 달라고 하지. 그리고 네가 꿰맞춰서 제대로 형태를 갖춘 다음 돌아오라구. 내가 훑어보겠어. 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까다롭지는 않을 거야." "물론 제가 그 일을 하겠어요.그리고 곧 돌아올 거예요. 이젠 더이상 위험하지 않 으니까요. 이젠 왕이 계시고 그분께서 모든 길들을 정리하실 거예요." '고마워,사랑하는 프로도. 정말 내 마음에서 커다란 부담을 덜어 주었어."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갠달프와 호비트들은 빌보의 방에서 빌보와 작별했다. 밖은 날이 차가워 졌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엘론드와 그 동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프로도가 문간에 서 있을 때 엘론드는 그에게 즐거운 여행을 빌며 축복한 다음 말했다. "프로도,자네가 금방 돌아을 예정이 아니라면 아마 이리로 돌아을 필요가 없을 걸세.내년 이맘때 나뭇잎이 떨어지기 전 황금빛으로 변했을 푸렵 샤이어의 숲에서 빌보를 찾게나. 나도 그와 함께 있을 걸세."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고 프로도 혼자만 이 말을 간직했다. 제17장 고향으로 가는길. 마침내 호비트들은 고향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샤이어를 다시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지만 프로도의 몸이 불편했기에 처음에는 천천히 말을 몰 았다. 브뤼넨여울에 도착했을 때 프로도는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듯했다. 잠시 그의 눈은 어느 누구도,주위의 사물들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날 온종일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날은 10월 6일이었다. "자네 어디 아픈가,프로도?' 갠달프가 프로도 옆을 지나며 조용히 물었다. '네,그래요 어깨가 아파요 상처가 쑤시고 암흑의 기억이 짓눌러요.꼭 일 년 전 오늘이었어요" "안됐네! 완전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도 있는 법이라네." "제 경우가 그런 것 같아요 이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제가 샤이어로 간다 하더라도 과거와 같지는 않을 거예요 저 자신이 이미 과거와 같은 호비트가 아니니까요. 저는 칼과 가시와 이빨 그리고 오랫동안 짊어졌던 짐으로 상처를 입었 어요. 어디에서 휴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갠달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고 프로도는 마치 전날의 암흑을 기억 하지 못하는 듯 명랑해졌다. 그 이후 여행은 순조로웠고 매일매일이 빨리 지나갔 다. 이제 그들은 한가롭게 말을 달려 가을햇살에 나뭇잎이 붉고 노란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숲속에서 종종 멈추었다. 마침내 그들은 웨더톱에 도착했다. 저녁무렵이어서 언덕그림자가 길 위에 길고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자 프로도는 그들에게 서둘라고 재촉하며 언덕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망또로 몸을 감싸면서 그림 자 속을 질주했다. 그날 밤 날씨는 변해 비를 동반한 바람이 서쪽으로부터 불어와 세차고 차가운 비를 뿌렸다. 낙엽들은 공중에서 새처럼 선회했다. 그들이 체트우드 에 도착했을 때 나무들은 이미 헐벗었고 브리언덕은 장대 같은 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10월 마지막 날 거칠고 축축한 저녁에 다섯 명의 여행객은 오르막길을 지나 브리 의 남문에 도착했다. 그것은 꼭 잠겨 있었다. 비가 얼굴을 후려치고 어두워가는 하 늘에는 낮게 깔린 구름이 급히 지나갔다. 환영받기를 기대했던 그들은 약간 실망했 다. 몇 차례 소리를 지르고나서야 문지기가 나왔는데 손에는 곤봉을 들고 있었다. 그 는 겁에 질린 의심스런 눈길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갠달프가 끼여 있고 또 그 일행이 호비트들임을 알자 그 이상스런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굴을 펴고 일 행을 환영했다. 그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들어들 오시요 이 불한당 같은 날씨에 춥고 축축한 이곳에 선 채로 소식을 들을 수야 없지요.하지만 조랑말주점에 가면 틀림없이 환영할 겁니다. 거기서 모든 이야 기들을 듣게 되시 겠지요." "그리고 자네도 우리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겠지.그런데 해리는 어떤가?' 갠달프가 웃으며 이렇게 묻자 문지기는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가버렸어요.하지만 발리맨에게 묻는 게 나을 거예요.좋은 저녁이 되시길!" "자네도!" 그들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길가 울타리 뒤로 나지막한 오두막이 세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울타리 너머로 일행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빌 퍼니의 집은 울타리가 부서지고 너저분했으며 창문은 모두 널판지로 막혀 있었 다. "샘, 사과로 그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피핀이 묻자 샘이 대답했다. "아니오,난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해요.하지만 난 그 불쌍한 조랑말이 어떻게 됐 는지가 궁금해요 늑대가 으르렁대며 그 말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거 든요." 마침내 그들은 조랑말주점에 도착했다. 외양으로 보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지막한 창문의 붉은 커튼 뒤로 불빛이 새나왔다. 그들이 벨을 울리자 놉이 문으로 나와 조금 열고는 슬쩍 내다보았다.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들을 보자 그는 놀라 소리쳤다. "버터버씨,버터버씨! 그들이 돌아왔어요!" "그들이 돌아왔어?내 본때를 보여 주지!" 버터버의 소리가 들리고 돌진하듯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손에 곤봉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자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험상궂게 찡그려졌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밝아졌다. "놉, 이 얼간이야! 옛 친구들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냐! 몇 번씩이나 이렇게 날 놀라게 할 셈이야?자, 그런데 당신들은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다시 볼 수 있으리 라곤 생각조차 못했는데. 정말 생각조차 못했어. 스트라이더와 함께 황야로 가버렀 고 온통 어둠의 인간들이 들끓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당신들을 다시 만나니 반갑 군. 특히 갠달프 당신을 만나서 말이에요. 들어오세요, 어서! 전에 쓰던 방을 드릴 까?그 방은 비어 있어요.요즘은 대부분의 방이 비어 있지요.숨길 것 없이 얘기하 겠는데 당신들도 곧 알게 되시겠지.곧 저녁식사를 준비하겠어요.하지만 지금은 손 이 달려서 말이야.놉, 이 얼간이야 ! 봅한테 말해라! 아참, 잊고 있었군. 봅은 밤에 집으로 가지. 자, 놉, 손님들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가라. 물론 갠달프께서는 직접 마구간으로 가시겠지요. 처음 그 말을 보았을 때 말씀드렸지만 정말 훌륭한 말이에 요. 자, 들어오세요. 편안하게 쉬세요." 최소한 버터버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숨가쁘게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주 조용했다. 거실에서는 두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 다. 그가 들고 온 촛불빛 아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주인의 얼굴은 이전보다 주름살 이 많아지고 수심을 띠고 있었다. 그는 거의 일 년이 지난 그 이상한 밤에 그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방으로 안내했 다. 그들은 그를 따라가며 은근히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발리맨은 용감한 얼굴을 하 고 있었지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 않고 기다렸다.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저녁식사가 끝나자 버터버는 식사가 어땠는지를 묻기 위해 방으로 왔다. 실제로 음식은 좋았고 조랑말여관의 맥주나 음식은 맛이 변하지 않았 다. "자,오늘밤은 응접실로 가시자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은 피곤하실 거 야.게다가 오늘저녁 응접실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요.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삼십 분만 제게 할애해 주신다면 우리끼리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씀 이 에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우리도 바라는 바지.우린 피곤하지 않네.한가롭게 왔거든.좀 춥고 배고프고 옷 이 젖었었지만 그건 자네가 다 해결해 주지 않았나.자, 앉게! 자네에게 담배가 있 다면 고맙겠네만." "글쎄 다른 것을 요구하셨더라면 전 기뻤겠는데요,바로 그게 저획에게 부족한 거 예요. 저희가 직접 가꾼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충분치 않거든요 요즘엔 샤이어에서 전혀 오지 않아요.하지만 구해 보지요" 그는 하루나 이틀 정도 피울 수 있을 만큼의 연초를 가지고 돌아왔다. "사우스린치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는 최상품이지만 늘 얘기했듯이 사우 스파딩산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물론 다른 점에서는 브리가 최고지만요." 그는 불가의 큰 의자에 앉았고 갠달프는 난로의 다른 편에 앉았다. 호비트들은 그 들 사이의 낮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몇 시간 동안 버터버에 게 소식을 들려 주기도 하고 또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말 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주인에게 놀랍고도 혼란스러우며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 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버터버는 자기 귀를 의심하듯 '그런 말씀은 아니겠지 요.'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배긴스씨,그런 얘기가 아니겠지요.아니 언더힐씨(프로도의 가명)던가요? 너무 뒤 죽박죽이 되었군요.갠달프,그런 말씀이 아니겠지요? 내참! 우리가 사는 시대에 누 가 그런 일을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도 많이 했다.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고 했다. 장사도 순조롭지 않을 뿐더러 최악의 상태라고 했다. "외부에서 브리로 오는 사람이 전혀 없어요. 브리주민들도 대개 집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지요. 기억하시겠지만 작년에 초록길을 올라온 새로운 사람들과 악당들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어요.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왔지요.어떤 사람들은 곤란을 피해 도망온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대개는 도둑질과 나쁜 짓을 일삼는 악당들이에 요. 여기 브리에서도 심각한 사건이 터졌지요 정말 전쟁이 있었거든요. 몇 명이 살 해되었지요.죽었단 말이에요 제 말을 믿으실지 모르지만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했다. "물론 믿치.몇 명이나 그렇게 됐나?' "셋하고 둘이지요." 버터버는 큰 종족과 작은 종족을 구분해 말했다. "불쌍한 매트 헤더토스하고 로울리 애플도어,또 언덕 너머에서 온 탐 픽손,멀리 에서 온 월리 뱅크스,스태들 출신의 언더힐가 한 사람이지요.모두 좋은 사람들이 었어요 정말 섭섭했습니다. 서문 문지기였던 해리 고트리프하고 빌 퍼니는 외지에 서 온 녀석들과 합세해서 함께 떠나 버렸어요.아마 싸움이 벌어졌던 날 밤에도 그 놈들이 그 낯선 녀석들을 끌어들였을 거예요 우린 연말에 그놈들을 성 밖으로 몰 아냈었거든요 그런데 새해 초에 싸움이 벌어졌지요.폭설이 내린 다음에 말이에요 이제 그놈들은 강도가 되어서 아르체트 너머 숲과 북쪽 황야에 숨어 살지요.마치 빗날이야기에 나오는 험악한 시절이나 한가지예요 길을 다니는 것이 불안해서 아 무도 멀리 가려고 하지 않고 또 일찌감치 문들을 단속하지요.마을 성벽에는 감시 원을 세워 둬야 하고 밤이면 성문도 많은 사람이 지켜야 한다니까요."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는데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던데요? 우린 천천히 그것도 아 무 경계도 하지 않고 왔는데 말이에요.문젯거린 모두 뒤쪽에 남겨 두고 왔다고 생 각했거든요." "그렇지 않으니 유감이지요.사실 그놈들이 당신들을 건드리지 않은 건 그리 놀라 운 일이 아니에요.칼과 투구,방패 등으로 무장한 일행을 공격하진 않으니까요.아 마.그들은 그런 무장을 보게 되면 다시 생각하게 되겠지요.실은 나도 당신들을 보 았을 때 좀 놀랐으니까요." 그제서야 호비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자 신들의 무장을 보고 놀라 쳐다보았음을 깨달았다. 그들 스스로는 무장을 한 동료들 과 전장에서 말 달리는 데 익숙해졌기에 자신들의 망또 아래 엿보이는 빛나는 갑 옷과 곤도르와 마크의 투구,방패에 새겨진 아름다운 전쟁의 문장이 그들 고향에서 는 이상스럽게 보이리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갠달프는 흰 옷에 푸 르고 은색이 나는 커다란 망또를 둘렀고 옆구리에 긴 칼 글람드링을 찬 채 거대한 회색 말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갠달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겨우 우리 다섯을 두려워할 정도라면 우리가 여행 중 만난 적 적들에 비하면 대단한 놈들이라고 하긴 어려울 거야.하지만 어쨌든 간에 우리가 머무는 동안 에는 쳐들어오지 않겠구먼?' 그러자 버터버가 물었다. "얼마나 머무실 건데요? 당신들이 얼마간이라도 저희와 함께 계셔 주신다면 직 하게 말해 정말 다행이겠어요.아시다시괴 저흰 이런 일에 익숙지가 않으니 말이지 요.순찰자들은 모두 철수했다고 하더군요.지금까지 우린 그들의 노고를 진정으로 인정해 주지 못한 거예요.주변에는 강도보다도 더 위험한 것들이 많았죠 지난 겨 울인 울타리 너머에서 늑대들이 울부짖고 숲에는 검고 무서운 그림자 같은 형체들 이 어슬렁거렀지요.생각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요.정말 무시무시한 때였 어요." 갠달프가 대답했다. "그랬겠지. 거의 모든 곳이 아직도 상당히 흔란스럽지.하지만, 기운내게, 발리맨! 자네들은 큰 위험에 마주해 있었지만 더 깊이 빠지지 않은 것이 다헐이니까. 이젠 좋은 시절이 오고 있다네. 순찰자들도 돌아왔지. 우리가 함께 왔으니 말이야. 게다 가 왕도 다시 돌아오셨으니 그분도 곧 여기까지 염려를 해주시게 될 거야. 초록길 도 다시 통행이 가능해질 것이고 왕의 사자들이 북쪽으로 가게 될 거야.그러면 다 시 왕래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악의 무리들은 모두 황야에서 쫓겨나게 된다네. 이젠 더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사람들이 과거 황야였던 곳을 목초지로 바꾸게 되겠지." 그러나 버터버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높은 분들이 몇 분 길로 다니신다면 그놈들도 나쁜 짓이야 못하겠지요.하 지만 우린 그 폭도와 강도들에게 질렸어요. 우린 아예 브리 근처에 이방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지요. 낯선 이들이 여기저기 야영하거나 자리를 잡고서 황야를 갈가리 헤발기는 것을 우린 원치 않아요." "발리런,누구도 자네를 간섭하지 않을 걸세, 이센과 그레이플러드 사이에는 떠칠 간o?나 여행해야 브리에 당도할 만큼 되는 층분히 넓은 땅이 있고 또 브랜디와인 남쪽 해안에도 넓은 땅이 있지 않나.예전꼰는 여기서 백 마일쯤 떨어진 북쪽 초록 길 끝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다네. 노스다운에 말일세." "'사자(촐)들의 방벽'에 말인가요?그곳은 귀신이 나오는 덴데요 강도들 빼고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지요." 버터버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순찰자들은 간다네.사자들의 방벽이라고 말했나?오랫동안 그렇게 불러 왔지만 사실 그곳의 본 이름은 포노스트 에레인(왕의 북쪽 요새)이었네.왕께서 언젠가는 그 곳으로 오실 것이고 그때쯤이면 귀인들이 말을 달릴 걸세." "그건 좀 더 희망적으로 들리는군요. 틀림없이 제 장사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그 분이 브리를 그냥 버려 두시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러실 걸세.그분도 브리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시니 말이야." "그러세요?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성 안 높은 옥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 어떻게 이 브리를 아실까요? 게다가 황금으로 만든 잔으로 포도주를 드실 텐 데.이 조랑말주점이나 맥주 같은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실 거예요,물론 갠달 프,제 맥주야 맛이 좋지요.지난가을에 맥주맛을 칭찬하고 가셨잖아요.그 이후로 도 맥주맛은 변하지 않았어요. 요즘 곤란한 가운데서도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지 요" 그러자 샘도 말했다. "하지만 그분도 당신의 맥주가 맛이 좋다고 늘 그러시던데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구요?' "물론이지요. 그분은 바로 스트라이더예요. 순찰자들의 대장 말이에요. 아직도 모 르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버터버의 표정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넓은 얼굴에 눈이 점점 둥그 렇게 커지더니 마침내 입을 쩍 벌리고 헐떡거렸다. 그늘 숨이 좀 가라앉자 소리첬 다. "스트라이더라구! 그가 왕관과 그 모든 것,황금의 잔을 갖게 되었다구! 도대체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 그러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최소한 브리에게도 더 좋은 시절로 가고 있는 거지." "그렇기를 바랍니다. 이건 올 한 해 중 가장 멋진 얘기예요.오늘밤에는 가벼운 마 음으로 편안히 잠잘 수 있겠군요.당신들은 생각거리를 많이 주었지만 내일까진 그 것을 미뤄 둬야겠어요.전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당신들도 그러시는 게 좋으 시겠지요? 자, 놉, 이 게으름뱅이야!" 그는 자기 이마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놉! 가만있자,그러니 뭐 생각나는 게 있군." "버터버씨,또 무슨 편지 부치는 걸 잊으시기라도 하셨나요?' 메리가 묻자 버터버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브랜디버크씨,그 얘기는 이제 그만둬 주세요.그런데 당신 때문에 또 잊었군 요. 무슨 생각이었더라? 놉, 마구간, 바로 그거야. 제가 보관하고 있는 게 있지요. 빌 퍼니와 말 도난 사건을 기억하시죠? 여러분이 그놈한테 샀던 그 조랑말이 여기 있 어요. 혼자서 돌아왔답니다. 어디 갔다 왔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마치 늙은 개처럼 텁수룩하고 또 옷걸이마냥 비쩍 말랐지만 살아있더군요.놉이 돌봐 주 었지요." 그러자 샘이 외첬다. "뭐라구요! 내 빌 말이에요? 아버지가 뭐라 하시건 간에 난 운좋게 태어난 놈이 에요.또 하나의 희망이 실현되었으니까요.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지요?' 샘은 마구간으로 가서 빌을 보고나서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행은 다음날 종일 브리에 머물렀다. 버터버는 더이상 장사가 안 된다고 투정을 할 새가 없었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선 사람들로 그의 집은 왁자지껄 붐볐던 것이다. 예의상 호비트들은 저녁무렵 거실에 잠깐 들러 많은 질문에 대답했다. 브리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았기에 프로도에게 책을 썼느냐고 묻는 사람이 꽤 됐다. "아직 못 썼어요 고향에 가서 정리할 겁니다." 그는 브리에서 벌어진 일들도 다루어서,멀리 남쪽에서 벌어진 보다 덜 중요한 사 건들을 다룰 그 책에 약간의 흥미를 불어 넣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자 젊은이들 중 한 명이 노래를 청했다. 그러자 모두 그 말에 침묵하며 인상을 찌푸렸으므로 그 요청은 반복되지 않았다. 분명 사람들은 기괴한 사건을 또다시 보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행이 머무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브리의 평화로움을 깨뜨릴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났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 었으며 밤이 되기 전에 샤이어에 도착하기엔 꽤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브리사람 들은 모두 나와 그들을 전송했으며 그들 모두는 지난 일 년 그 어느 때보다 더 즐 거운 듯했다. 전에 여행자들이 무장한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무장을 보 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흰 수염을 날리는 갠달프는 햇빛을 가린 구름 같은 푸른 망또에서 온통 빛을 발했으며 네 명의 호비트들은 잊혀진 전설 속에 등장하 는 무사 수업중의 기사들 같았가.왕에 관한 이야기를 비웃던 사람들조차 그 이야 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버터버가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의 여행과 귀향에 행운이 있기를! 우리가 들은 소식이 사실이라면 아 마 샤이어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을 겁니다.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 만 한 근심은 다른 근심을 몰아 내는 법이지요. 전 우리가 처한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은 이미 많이 변해 돌아오셨으니 문젯 거리를 즉시 처리하시겠지요.행운이 있으시길 빕니다. 가끔 이곳에 들러 주시면 무 척 기쁘겠어요." 그들은 작별을 고하고 서문을 지나 샤이어로 향했다. 조랑말 빌이 그들과 함께 갔 다. 그는 예전처럼 짐을 잔뜩 진 채 샘 옆에서 걸어갔으며 만족한 듯이 보였다. "발리맨이 말한 게 어떤 일인지 궁금한데." 프로도가 말하자 샘이 대답했다. "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어요. 전에 갈라드리엘의 거울에서 보았을 때 나무들 은 모조리 잘라지고 늙은 아버지는 로우에서 쫓겨나셨더군요. 좀더 서둘러 돌아왔 어야 할 걸 그랬어요." 그러자 메리도 말했다. "사우스파딩에 분명 뭔가 잘못된 일이 있어요. 이렇게 연초가 부족하다니 말이이 요." "무슨 일이건 간에 로도가 그 장본인일 거야.확실해." 피핀이 말하자 갠달프도 끼어들었다. "깊이 관련돼 있겠지만 장본인은 아닐 거야.자네들은 사루만을 잊어나 보군. 그 는 모르도르보다도 먼저 샤이어에 관심을 가졌었거든." "갠달프가 우리하고 함께 계시면 어떤 문제라도 금방 해결이 될 텐데요 뭘." 메리가 말하자 갠달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같이 있지만 곧 그렇지 않게 되네.난 샤이어로 가지 않겠어.하니 자네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네. 자네들은 바로 그런 일을 하도록 훈련받았잖나.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나? 내 시간은 끝난 거야. 이젠 일을 바로잡거나,바로잡게 도와 주 는 건 내 일이 아니야. 그리고 친구들, 자네들에겐 도움이 필요없어. 이미 성장했으 니 말이야.아주 크게 성장했어, 자네들은 이미 위대한 인물들이야.난 자네들 중 아 무에 대해서도 불안하지 않아. 자네들이 알고 싶다면 말해 주지.난 이제부터 다른 길로 가서 봄바딜과 긴 이야기를 나눌 걸세. 내 일생 해본 적이 없을 만큼 긴 이야 기를 말이야.그는 이끼를 줍는 자였고 난 계속 구르도록 운명 지워진 돌이었지. 하 지만 내 굴러갈 나날이 끝나가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을 거 야" 얼마후 그들은 봄바딜과 헤어졌던 동쪽 길에 이르렀다. 그곳으로 다가가면서 봄 바딜이 나와 환영해 주지나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지만 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쪽으로 배로우 다운즈에 안개가 끼고 멀리 올드 포레스트 위에도 짙은 안개가 덮여 있었다. 그들은 멈춰섰다. 프로도는 안타까운 듯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옛 친구분을 다시 한번 뵙고 싶은데요.그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틀림없이 전처럼 잘 지내고 있을 걸세.전혀 고통받지 않았을걸.아마 우리가 한 일이나 본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거야. 엔트들을 만난 것만 빼고 말이지. 나중 에 그를 만나러 갈 시간이 있을 거야,하지만 내가 자네들이라면 지금은 길을 재촉 해 고향으로 가겠네. 그렇지 않으면 문이 닫히기 전에 브랜디와인다리에 도착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 길에는 문이 없는데요. 잘 아시잖아요. 물론 버크랜드성문이야 있지만 거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걸요." 메리가 이렇게 말하자 갠달프가 대답했다. "전에 없었다는 얘기겠지. 이젠 문 몇 개를 보게 될 걸세.그리고 자네 생각보다는 버크랜드에서 좀더 곤란을 겪게 될 거야.하지만 자네들은 잘 처리해 나갈 걸세.잘 가게, 친구들! 마지막 작별은 아닐세. 아직은 말이야. 잘 가게들!" 그는 섀도우폭스를 타고 길을 벗어났고 그 거대한 말은 녹색 제방을 뛰어 넘었 다. 갠달프가 소리를 지르자 말은 북풍처럼 배로우 다운즈를 향해 사라져 갔다. "자, 이제 우린 같이 출발했던 네 명이 되었군요.나머지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갔어오.마치 천천히 사라져 가는 꿈 같은데요." 멘리가 달하자 프로도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내게는 그렇지 않아.마치 다시 잠드는 것처럼 느껴져," 제15장 샤이어전투 비에 젖은 피곤한 몸으로 일행이 브랜디와인에 도착한 것은 황혼무렵이었다. 길 은 과연 막혀 있었다. 다리 양 끝에는 담장못이 박힌 커다란 문이 세워져 있었고 강 저편에는 이층짜리 새 집들이 서 있었으며 일직선으로 난 좁은 창문에서는 희 미한 불빛이 새나오고 있어 샤이어답지 않게 음울해 보였다. 그들은 바깥문을 두드렸으나 처음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시후 놀랍게도 누 군가가 뿔나팔을 불었고 곧 창문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야! 꺼져 버려! 들어을 수 없다. '일몰과 일출 사이에는 출입금지'라고 써진 경고문도 안 보여?' 그러자 샘이 소리쳐 대답했다. "물론 이 깜깜한 데서 경고문을 읽을 수야 없지.하지만 샤이어의 호비트들이 이 처럼 비가 오는 밤에 밖에 서 있어야 한다면 그 경고문을 찾아 내자마자 찢어 버리 겠다. " 이 말에 창문이 닫히더니 한 무리의 호비트들이 손전등을 들고 좌측 집에서 쏟아 져 나왔다. 그들은 저쪽 문을 열었다. 그들 중 몇 명이 다리를 건너왔다. 그들은 일 행을 보고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메리는 그들 중 하나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자,빨리! 홉 헤이워드! 자네가 날 몰라봤다면 이젠 알아야지.난 메리 브랜디버 크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동이야? 또 자네 같은 버크랜드 출신이 여기서 무슨 짓 을 하고 있는 거야? 자넨 헤이성문에 있었잖아." "맙소사! 틀림없는 메리씨로군! 당신은 죽었다고들 하던데.올드 포레스트에서 실 종됐다고 했어.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군." "그럼 빗장 새로 보며 하품이나 하지 말고 어서 문을 열게." "미안하지만 메리씨, 우린 명령을 받았거든." "누군 명령인데?' "백 엔드에 계신 대장의 명령이지." 그러자 프로도가 놀라 물었다. "대장? 대장이라? 로도를 말하는 건가?' "그럴 겁니다,배긴스씨.하지만 요새는 그저 대장이라고 불러야 하지요." "아, 그래! 어쨌든 그가 배긴스란 성을 떼어 버렸다니 반갑군.그렇지만 지금이야 말로 배긴스가문이 그를 잘 다루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때지." 문 너머에 있는 호비트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들 중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그가 듣게 될 거야.당신들 시끄럽게 군다면 대장의 경호원들인 인간들을 깨우 게 될 거야." 그러자 메 리 가 외첬다. "우리가 그를 놀라서 벌떡 일어나게 해주지.만일 자네 말이 그 고귀하신 대장께 서 황야의 악당들을 고용했다는 뜻이라면 우린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은 아니구먼."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전등불빛으로 경고문을 읽고는 떼어 찢은 다음 문 너머로 던져 버렸다. 호비트들은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피핀, 이리 와! 우리 둘이면 층분하지." 메리와 피핀이 문을 기어오르자 호비트들은 도망을 쳤고 곧 아까와는 다른 나팔 소리가 들렸다. 오른편의 더 큰 집에서 크고 육중한 인간이 문간의 불빛을 등지고 나타났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문을 부순다고? 꺼져 버려라! 안 그러면 네놈들의 그 더럽 고 조그만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그러나 그는 칼들이 번쩍이는것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를 본 메리가 외쳤 다. "빌 퍼니! 만일 십 초 내에 문을 열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네 몸에 칼자국이 날 거야. 문을 열고 얼른 꺼져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네놈은 악당이자 강도야," 빌 퍼니는 주춤거리더니 발을 질질 끌고 와서 문을 열었다. "열쇠를 이리 내놔!" 메리가 말하자 그 악당은 머리 위로 내던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뺑소니를 쳐버 렸다. 그가 말 옆을 지날 때 그 중 한 마리가 됫발질로 그를 걷어찼지만 그는 비명 을 지르며 어둠 속을 그대로 달려갔다. 그 이후 그에 관한 소문조차 들을 수 없었 다. 샘은 조랑말에게 말했다. "잘 했어, 빌 !" "자네가 말한 경호원은 그 정도로 됐고, 대장은 나중에 보기로 하지. 우선 우린 방 이 필요한데 자네들은 다리목여관을 헐고 대신 이 음산한 집들을 지은 모양이지? 그렇다면 우린 여기 들어야겠는데." 메리가 이렇게 말하자 홉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메리씨,그건 허응되지 않는 일이라서‥‥‥‥ "뭐 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낯선 이를 받아들인다거나,여분의 음식을 주는 것 등등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작년에 흉작이었나? 아니면 무슨 일이야? 작년 여름과 추수철은 날씨가 좋았을 텐데." "날씨야 좋았지요.농사를 많이 짓기는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요.온통 수확량을 재고 실어 나르는 추수꾼들과 분배자들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분배하는 것보다는 모아들이는 데 더 신경을 썼거든요.그래서 우리들은 그 곡식들을 두 번 다시 보지도 못했지요." 그러자 피핀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자, 이 모든 일은 오늘밤 내게는 너무 피로한 것 같아. 먹을 것은 우리한테 있으 니 어서 방이나 주게. 여지껏 지내 왔던 어떤 방보다도 지금의 나한테는 나을 거 야." 문에 섰던 호비트들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분명 어떤 규칙이 깨어져야 하는 것 이다. 그러나 전부 무장을 하고 있는 네 명의 노련한 호비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도 없었고 특히 그들 중 둘은 너무 크고 건장해 보였다. 프로도는 문을 다시 잠그 라고 명령했다. 주위에 악당들이 득실거릴 테니 어쨌든 보초를 세우는 것이 지각있 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나서 네 명의 동료들은 위병소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그 곳은 가구도 없는 누추한 곳이었고 불이 잘 피지 않을 것 같은 작고 초라한 벽난로 가 있었다. 이층에는 딱딱한 침대들이 줄지어 놓였고 벽마다 경고문과 규칙들이 붙 어 있었다. 피핀은 그것들을 모조리 찢어 버렸다. 맥주도 없고 음식도 조금밖에 없 었지만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훌릉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피핀은 규칙 제4조를 어기고 다음날 분의 나무들을 불 속에 넣었다. "자,샤이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는 동안 담배 한 대 어떨까?' 그러자 홉이 대답했다. "지금은 연초가 없어요. 대장 경호원들한테만 조금 있지요. 모두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연초를 실은 수레 몇 대가 사우스파딩에서 산 포드 쪽으로 내려갔다더 군요.그건 당신들이 떠난 다음이니까 작년말 경이었어요.하지만 그 이전에도 조금 씩 은밀하게 빠져 나가곤 했지요 그 로도가," 다른 호비트 몇이 소리첬다. "입 닫쳐,홉 헤이워드! 그런 얘기를 해선 안 된다는 걸 알잖아.대장이 듣게 되면 우리 모두 곤란하게 될 거야." 그러자 홉은 화가 나서 말했다. "너희들 중 누군가가 고자질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거 아냐." 샘 이 말리듯 말했다. "됐네,됐어.그걸로 충분해.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고 환영도 없고,맥주도 담배도 없는 데다가 규칙투성이에 오르크들 같은 이야기나 하니! 이제 좀 쉬기를 바랐는 데 앞으로도 더 할 일이 있을 뿐이로군! 우선 잠을 자고 아침까진 잊어야겠어." 그 '대장'은 확실히 정보를 입수하는 수단이 있었다. 다리에서 백 엔드까지는 사십 마일은 족히 되었으나 누군가 서둘러 길을 간 모양이었다. 프로도와 그 친구들은 곧 그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그들은 명확한 계획이 없었고 처음엔 크릭할로우로 같이 가 휴식을 좀 취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호비튼으로 곧장 가려고 작 정했다. 다음날 그들은 길을 따라 꾸준히 말을 달렸다. 바람은 잤으나 하늘은 잿빛 이었고 땅은 슬프고 황량해 보였다. 그러나 11월초였고 이제 가을의 시작이었다. 주 위 여러 곳에서 불이 타오르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연기는 거대한 구름이 되어 우디 엔드 방향으로 피어올랐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다골에서 약 이십이 마일 가량 떨어진 길 왼편의 프로그모튼 이라는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프로그모튼에 있는 '표류하는 통나무'는 훌륭한 여관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 동쪽 끝에 도착 했을 때 '길 없음'이라 쓰여진 커다란 팻말이 붙은 울타리가 눈에 띄었다. 그 뒤에는 깃털달린 모자를 쓴 파수꾼들이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는데 일면 위엄을 부리는 듯하면서도 겁에 질린 눈치였다. 프로도는 읏음을 참으며 물었다. "이 게 다 뭐야?' "배긴스씨, 상황이 이렇습니다. " 깃털을 두 개 단 파수꾼의 우두머리격인 호비트가 말했다. "당신들은 문을 부수고 경고문을 찢었으며 문지기를 공격하고 불법침입했을 뿐 아니라 허락받지 않고 샤이어의 건물에서 잠을 자고 음식으로 보초를 매수한 혐의 로 입건되 었습니다. " "그 밖에 또 없나?' "그것만으로도 체포하기엔 충분합니다. " 그러자 샘이 말했다. "몇 가지 더 첨가할 수 있지.자네들 대장 이름을 불렀고 그 여드름투성이 얼굴을 찔러 주고 싶어했으며 자네들이 꼭 바보처럼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만, 그만둬요. 조응히 따라와야 한다는 게 대장의 명령입니다. 우린 당신들을 바이워터까지 데리고 가서 대장 경호원들에게 인계할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대장 이 심문할 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록홀스(샤이어의 감옥)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면 긴 말을 안하는 게 좋겠지요." 프로도와 그 동료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파수꾼들은 당황해 했다. 프로도가 말했 다. "웃기지 말게.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그리고 내킬 때 갈 거야. 난 우연히도 그 백 엔드에 갈 걸세만 자네들도 같이 가겠다고 우긴다면 마음대로 하게." "좋습니다,배긴스씨.하지만 당신들은 체포된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결코 잊지 않겠네.하지만 자네를 용서하지.난 오늘은 더이상 길을 가고 싶지 않 으니 여관까지 안내해 준다면 참 고맙겠군."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여관은 폐쇄되었거든요. 마을 저쪽 파수꾼들의 집 이 있으니 그리로 모셔다드리지요." "좋아, 앞장서게. 따라갈 테니 까." 샘은 파수꾼들을 바라보다가 그 중 아는 호비트를 찾아 냈다. "이봐,로빈 스몰버로우. 이리 와 봐! 자네하고 얘기 좀 하세." 화가 났지만 감히 참견하지 못하는 우두머리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며 스몰버 로우는 뒤로 처져 말에서 내린 샘과 나란히 걸었다. "이봐,콕 로빈! 자넨 호비튼 출신인데 이렇게 프로도씨와 그 친구들을 잡으러 오 다니 좀더 지각이 있어야겠어.그런데 여관이 폐쇄되었다기 그게 무슨 소린가?' "여관은 모조리 폐쇄뤘어. 대장은 맥주를 못 마시게 하거든. 최소한 그렇게 일이 시작됐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맥주는 대장 경호원들이 몽땅 차지해 버 린 것 같아.그리고 대장은 주민들이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그래서 꼭 어디 가야 할 때면 파수꾼들한테 가서 용무를 보고해야 해." "자네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관계가 있다니 부끄러워해야지.자넨 여관 바깥 쪽보다는 안쪽을 더 좋아했잖아, 근무중이건 비번이건 간에 항상 여관에 들락거렀 지." "할 수만 있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만 날 나무라진 말게.어떻게 하겠 는가?난 이미 칠 년 전 이런 일이 있기 전에 파수꾼이 되었다는 건 잘 알잖아. 여 기저기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고 새로운 소식도 듣고 또 좋은 맥주가 어디 있 는지 알 수가 있었지.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어." "그렇다면 그 일을 그만둘 수도 있잖아.훌릉한 직업이 아니라면 그 파수꾼을 그 만두는 거야." "그렇게 허용되지도 않아." "그 '허용되지 않아'란 말 한 번만 더 들으면 화내겠어." 샘이 말하자 로빈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화를 낸다고 해도 난 유감스럽게 생각진 않을 거야.만일 우리 모두가 함께 화를 내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문제는 그 대장 경호원들이거 든. 그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닌단 달이야. 만일 우리같이 작은 호비트가 권리를 찾으 며 항거라도 하면 곧장 록흘스로 끌고 가거든. 처음엔 시장님 월 위트푸트노인을 끌고 갔고 다음엔 더 많은 호비트들을 끌고 갔어.최근엔 더 나빠졌다고 해.그들을 종종 때리기도 한다더란 말이야." 샘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왜 자넨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거야?누가 자넬 프로그모튼으로 보 냈지?' "누가 보낸 것이 아니하 우린 여기 파수꾼 집에 머물고 있는 거야. 지금 우린 제1 이스트파딩 부대야. 파수꾼은 전부 다 해서 수백 명이 되지만 새로은 규칙 때문에 더 필요하다고 하더군.대부분은 자기 뜻과 달리 여기 있지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야. 샤이어에도 허풍떨며 남의 일에 상관하길 좋아하는 작자들이 있으니까.또 대 장하고 그 경호원들을 위해 첩자 노릇을 하는 자들도 있어." "아,그래서 자네가 우리 소식을 들었군!" "그래 맞아.지금 우린 소식을 서로 전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예전 속달 우편제를 사용해 각 지점마다 특별 전령을 대기시키거든.어젯밤에 위트퍼로우에서 비밀 전갈을 가지고 간 녀석이 있었지. 여기선 또 다른 녀석이 그걸 받아가지고 갔 고 그러자 오늘 오후에 자네네 일행을 체포해 곧장 록홀스로 가지 말고 바이워터 로 데리고 오라는 전령이 온 거야.대장은 자네네들을 직접 한번 보시겠다는 거야." "프로도씨를 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걸." 프로그모튼의 파수꾼 집은 다리의 위병소만큼이나 나빴다. 그것은 단층으로 똑같 이 생긴 좁은 창문들이 나 있고 추한 벽돌로 아무렇게나 지어진 집이었다. 실내는 습기차고 어두웠으며 몇 주 동안 닦지 않은 긴 식탁에 식탁보도 없이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음식은 식탁과 방 안에 걸맞는 것이었다. 일행은 그곳을 떠나게 되 자 기뻤다. 바이워터까지는 약 십팔 마일 가량 되었고 그들은 아침 열시에 출발했 다. 좀더 일찍 출발할 수도 있었지만 지체되는 것에 화를 낸 이는 파수꾼 대장뿐이 었다. 서풍이 자면서 비가 그쳤지만 날은 점점 차가워졌다.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려고 나왔던 몇몇 호비트들은 웃는 것이 허용되는지 아닌 지 확신은 못하면서 그 행렬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열두 명의 파수 꾼들이 죄수들을 '호송'한다고 했지만 일행의 선두에는 메리가 말을 탄 채 선도하고 있었으며 프로도와 그 친구들도 그 뒤를 말을 타고 따랐다. 메리와 피핀, 샘은 편히 앉아 이야기하며 웃고 노래를 불렀지만 반면 파수꾼들은 엄하고 중대한 표정을 지 으려 애를 쓰며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고 오히려 슬프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들 일행이 마지막으로 지나친 이는 울타리를 자르고 있던 건장한 시골노인이었 다. "어이 ! 지금 누가 누구를 호송하는 거지?' 노인이 이렇게 조롱하자 두 명의 파수꾼이 열을 빠져나가 그에게로 갔다. 그러자 메리가 우두머 리 에 게 외쳤다. "대장! 자네 부하들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게.내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두 명의 호비트들은 우두머리에게 질책을 받고 실쭉해서 돌아왔다. "자, 가세나!" 메리가 말했다. 네 친구는 파수꾼들이 아무리 빨리 걸어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말 걸음을 조종했다. 햇빛이 비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들은 이제 헉헉대 며 땀을 흘렀다. 스리 파딩 바위에서 파수꾼들은 따라가기를 포기했다. 그들은 정오에 단 한 번 쉬 었을 뿐 거의 십사 마일이나 걸었던 것이다. 오후 세시경이 되자 그들은 배가 고프 고 발이 아파서 보조를 맞출 수가 없었다. "자,자네들 편하게 오게나! 우린 먼저 갈 테니." 메 리가 말하자 샘도 외첬다. "잘 가게, 콕 로빈! '청룡정'에서 기다리지. 그곳이 어딘지 잊지 않았다면 달이야. 오는 길에 빈둥거리지 말게나!" "당신들은 체포령을 어기고 있어요. 당신들이 말이오! 난 책임질 수 없어요!" 우두머리가 가련하게도 이렇게 외치자 피핀이 대답했다. "아직 여러 가지 더 많이 어기게 되겠지만 자네한테 책임져 달라고 부탁하지 않 을 거야. 행운이 있기를!" 일행은 급히 말을 몰아 태양이 멀리 서쪽 지평선 위로 화이트 다운즈를 향해 가 라앉기 시작했을 때 바이워터의 넓은 연못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 로 고통스러운 충격을 맛보았다. 이곳은 프로도와 샘의 고향이었으며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사랑하는 곳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집 몇 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집은 불에 타버린 듯했다. 연못 북쪽 둑 위에 줄 지어 있던 쾌적하고 오래된 호비트들의 집은 버려진 채 황폐해졌으며 물가로 곧장 이어지던 그들의 정원은 잡초가 무성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연못가를 따라 추 한 집들이 새로 지어진 것이었으며 호비튼로가 강둑 가까이에 뻗어 있었다. 전 에는 이곳에 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서 있었는데 지금은 모조리 사라진 것이었 다. 경악하며 백 엔드 쪽 길을 올려다보자 멀리에서도 보이는 벽돌로 쌓은 커다란 굴뚝이 있었다. 그것은 저녁하늘에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샘은 정신이 나간 듯 외첬다. "프로도씨, 전 당장 가봐야겠어요.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겠어요. 우리 아버지도 찾아야 하고요." "우선은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아야 해요.아마 그 대장이란 놈이 악당 들을 대기시켜 놓았을 거예요.상황이 어떤지 얘기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메리가 이렇게 말했으나 바이워터의 집과 굴들은 모두 굳게 문이 잠겨 있었고 그 들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호비튼의 마지막 집인 청룡정에 이르렀으나 그 집은 인적이 없었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다. 그들은 주점 벽에 축 늘어진 자세로 기대고 선 여섯 명의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인간들은 사팔눈에 누르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샘 이 말했다. "브리에 있던 빌 퍼니의 친구들 같은데." 그러자 메리도 중얼거렸다. "이센가드에서 본 놈들 같아요." 불한당들은 손에 곤봉을 들고 허리에 뿔나팔을 차고 있었지만 그 밖에 다른 무기 는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일행이 길을 올라가자 그들은 벽에서 떨어져 길로 걸어나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 중 가장 크고 악하게 생긴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냐? 이 이상 갈 수 없어. 그런데 파수꾼들은 어디 있 지?' "열심히 걸어오고 있겠지. 아마 발이 약간 아픈가 보던데. 우린 여기서 기다리겠 다고 했지." 메리가 대답하자 그 악당은 자기 동료에게 말했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었어.그 조그만 바보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샤키한테 그 랬었잖아. 우리가 직접 갔어야 했는데." 그러자 메리가 다시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우린 이곳에서 노상강도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런 놈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 "뭐, 노상강도? 네놈들 말투가 겨우 그 정도냐? 말버릇을 고쳐야겠는데. 아니면 우 리가 고쳐 주지. 네놈들 조그만 바보들은 너무 거만해졌단 말이야. 대장의 친절한 마음씨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아. 이제 샤키가 오셨으니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될 거란 말이야." 그러자 프로도가 조용히 물었다. "그게 뭐지?' "이 시골도 이제 잠에서 깨어나 모든 것을 정돈할 필요가 있단 말이지.샤키가 그 렇게 하실 거야. 네놈들이 그렇게 건방지게 군다면 아마 그분은 더 몰인정하게 대 하실걸. 네놈들에겐 강한 대장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네놈들은 오늘이 다 가기 전 에 그 강한 대장을 뵙게 될 거다. 그러면 네놈들도 한두 가지 배우게 되겠지, 이 쥐 새끼 같은 조그만 놈들아." "너희들 계획을 알게 되어 기쁘군.난 지금 로도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도 역시 너희들 계획을 듣는데 관심이 있겠지." 프로도가 이렇게 말하자 악당은 웃음을 터뜨렸다. "로도라구!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걱정하지 말라구.그는 샤키가 말하는 대로 할 테니까.우린 대장이 문제를 일으키면 갈아치을 수도 있단 말이야.알겠어? 만일 조그만 놈들이 쓸데없이 자꾸 끼어들려고 한다면 우린 그를 해칠 수도 있어. 알겠 어?' "그래,알겠어. 우선 너희들이 이곳에서 시대에 뒤떨어지고 정보에도 어둡다는 사 실은 분명히 알겠어.너희들이 남부를 떠난 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 너희들 악당 들의 시대는 끝이 났어.암흑의 탑은 무너졌고 곤도르에는 왕이 돌아오셨지. 이센가 드 또한 파괴되었고 너희들의 귀하신 두목은 황야의 거지가 되었어. 오는 도중 만 났었지. 이젠 이센가드에서 깡패들이 오는 게 아니라 초록길을 따라 왕의 사신들이 오는 거야." 그러자 악당은 프로도를 보며 웃었다. "황야의 거지라구? 정말 그래? 뽐내 봐라, 이 조그만 허풍쟁이야. 그렇다고 해서 네놈들이 오랫동안 빈둥거리고 살았던 이 기름진 땅을 우리가 떠날 줄 아느냐? 왕 의 사신이라구?잘됐구먼.보게 되면 잘 주목해 두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프로도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 조롱했다. 그러나 이 말은 피핀에게 너무 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코르말렌평원을 생각힌다. 그런데 여긴 이 사팥뜨기 악당은 반지의 사자를 향해 조그만 허풍쟁이라고 부르다 니 말이다. 그는 망또를 뒤로 젖히고 번쩍이는 칼을 뽑았다. 그가 말을 달려 나가자 은색과 흑색의 곤도르 의장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는 외첬다. "내가 왕의 사자다! 네놈은 왕의 친구이자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 중 한 명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네놈은 악당일 뿐 아니라 바보로구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아니면 이 거인의 칼로 네놈을 쑤시겠다. "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에 칼이 번득였다. 메리와 샘도 칼을 뽑고 피핀을 지원 하러 달려나갔지만 프로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악당들은 뒤로 물러섰다. 브리의 농 부들을 겁주고 놀란 호비트들을 위헙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거리였었다. 그러나 빛나는 칼을 겨눈 무서운 얼굴의 용감한 호비트들을 본단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 온 호비트들의 목소리에는 이제껏 그들이 들어 보지 못한 음조가 실려 있었다. 그 음조는 그들로 하여금 공포에 질려 소름끼치게 하였다. 이번에는 메리가 외쳤다. "꺼져라! 만일 네놈들이 또다시 이 마을을 괴롭힌다면 후회하게 될 거다. " 세명의 호비즈가 앞으로 나서자 악당들을 몸을 돌려 호비튼로 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달아나면서 뿔나팔을 불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은 아닌데요." 메리가 맡하자 프로도가 대답했다. "하루도 이르진 않았어.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몰라. 최소한 로도를 구하기엔 말이야. 불쌍한 바보 같으니. 하지만 안됐어." 그러자 피핀이 말했다. "로도를 구한다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를 파멸시킨다고 해야지요." "자넨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아,피핀. 프로도는 사정이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을 거야.그는 심성이 좋지 않은 바보였을 뿐이고 아마 지금쯤은 그도 사로잡혀 있을 거야.악당들은 꼭대기에 올라앉아 그의 이름으로 곡물을 약탈하고 강도질하고 헙 박해서 만사를 운영하고 파괴하고 있는 거야.하지만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빌지는 않겠지. 내 생각에 그는 지금 백 엔드에 갇혀 있을 거야. 겁에 질렸겠지. 우린 그를 구하는 데 힘을 써야 해." "정말 어리둥절하근요. 여행 끝날 무렵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바로 샤이어에서 반 오르크들인 악당들과 싸워야 하다니. 그것도 로 도 핌플을 위해서 말이에요." "싸운다고? 글쎄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기억해 두게 호비트들이 적편으로 넘어 갔더골도 호비트들을 죽이거나 해선 안 돼.내 말은 그저 겁이 나 악당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 편이 된 호비트의 경우에라도 그렇다는 거야. 샤이어에선 아직까지 어떤 호비트도 고의로 다른 호비트를 죽인 적이 없었고 지금 도 그건 마찬가지야.그리고 피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는 게 좋아.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손쓰기를 삼가게." 그러자 메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악당들이 많이 있다면 틀림없이 싸워야 할 거예요.프로도, 그저 충 격받은 채 슬퍼하면서 로도나 샤이어를 구할 수는 없잖아요." 피핀도 말했다. "물론 안 되지. 그들을 두 번이나 겁주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 그놈들은 기습 을 당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지금 나팔부는 소리를 들었죠? 분명 이 근처에 다른 악당들이 있을 거예요.숫자가 늘면 더 대담해지겠지요. 또 우린 오늘밤 어디서 묵 어야 할지 생각해야지요. 아무리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린 네 명밖에 안 되잖 아요." 그러자 샘 이 대답했다. "내게 생각이 있어요. 우선 사우스 레인에 사는 톰 코튼네 집으로 가는 거예요.그 분은 항상 뚱뚱한 노인으로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모두 내 친구들이었지요." 그러나 메리가 반대했다. "안 돼요. 안전한 곳으로 숨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또 악당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놈들은 우릴 급습해서 구석으로 몰아 넣고 태워 죽 이려고 할 거라구요.안 돼요.우린 지금 즉시 어떻게 해야 해요." "무엇을 한다는 거지?' 피핀이 묻자 메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샤이어를 분기시키는 거지! 우리 동족을 깨우자고! 보다시피 그들도 이런 상황 을 싫어하잖아.한두 명의 악당이나 우쭐대느라고 정말 상황이 어떤지를 모르는 몇 몇 바보들을 빼고 모두가 말이야.샤이어의 주민들은 너무 오랫동안 편안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야. 하지만 도화선만 있어 봐. 그들 모두가 불처럼 타오를걸. 그 대장의 경호원이란 놈들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쫓아 내려는 거지. 우린 시간이 얼마 없는 거 야.샘,의향이 있다면 코튼의 농장으로 빨리 가요.그분은 이 근방에선 신망이 있고 또 건장한 어른이니까요. 어서 가요! 난 로한의 나팔을 불어 악당들이 들어 보지 못한 음악을 들려 주겠어요" 그들은 마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샘은 방향을 바꿔 코튼의 집이 있는 남쪽 오솔길 을 따라 전속력으로 말을 달렀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때 그는 청명한 나팔소리 가 하늘을 울리며 멀리 언덕과 들판으로 메아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 부름의 소리 는 너무도 강하고 호소력을 가졌기에 샘은 거의 돌아갈 뻔했다. 그의 조랑말이 뒷 다리로 일어서며 울부짖었다. "자, 가자! 우린 곧 돌아갈 거야!" 그는 메리가 나팔의 음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들었고 버크랜드의 나팔소리는 대기를 흔들며 위로 퍼졌다. 깨어라! 깨어라! 공포와 불과 적들! 깨어라! 불이다! 적이다! 깨어나라! 샘은 뒤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로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앞 쪽에서는 땅거미 속에서 빛이 솟아올랐고 개들이 짖으며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 다. 그가 오솔길 끝에 닿기도 전에 농부 코튼이 세 아들 톰,졸리, 닉을 데리고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도끼를 들고 길을 막았다. "아니! 이건 악당이 아닌데.크기로 보면 호비트야.그런데 기묘한 복장을 하고 있 군 그래." 샘은 농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넌 누구냐? 이게 무슨 일이야?' "샘 이에요 샘 갬기. 제가 돌아왔어요." 농부 코튼은 가까이 다가와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를 응시했다. "음, 목소리는 맞군. 얼글도 예전과 다름이 없고 하지만 그런 옷을 입은 자넬 길 거리에서 만났으면 그냥 지나쳤겠어.자넨 다른 지방에 갔었던 모양이군.우린 자네 가 죽은 줄 알고 걱정했었지." "죽지 않았어요.프로도씨도 아무 일 없고요. 친구들과 함께 왔어요.그들은 지금 샤이어를 분기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우린 악당들과 그 두목을 몰아내려고 해요, 이 제 시작이지요." "훌륭하네,훌륭해! 그래,마침내 시작했군! 난 일 년 내내 일으켜 보려고 몸이 근 질근질했지만 주민들이 도와 주려고 하질 않더라구. 게다가 돌봐 줘야 할 아내와 로지가 있잖은가. 악당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자, 가자, 얘들아! 바이워터가 일어섰으니 우리도 한몫 끼어야지." "코튼부인과 로지는 어떤가요?그들만 내버려 두는 건 안전하지가 않을 거예요." "닙스가 함께 있어.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자네가 가서 돌보게나." 코튼은 씩 웃으며 말하고는 아들들과 함께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샘은 서둘러 코튼의 집으로 갔다. 넓은 안마당 층계 위에 있는 크고 둥근 문 옆에 코튼부인과 로지가 서 있고 그 앞에 닙스가 쇠스랑을 들고 서 있었다. "나예요! 샘 갬기예요! 그러니 닙스,날 찌르진 말게.하긴 갑옷을 입고 있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층계를 올라갔다. 그들은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 보았다. "안녕하세요, 코튼부인 ! 안녕, 로지 !" 로지가 말했다. ·,안녕,샘?어디에 갔었어요? 당신이 죽었다고들 하던데요.하지만 난 봄부터 당신 을 만나길 기대해 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서둘러 오지 않았겠지요? 샘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마 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서두르고 있어. 우린 악당들을 처리하려고 하거든. 난 곧 프로도씨께 돌아가야 해. 코튼부인과 로지가 어떻게 지내는지 잠깐 보려고 왔지." ·,우린 잘 지내고 있네.하지만 이 날강도 불한당놈들만 없으면 더 잘 지내겠지." 코튼부인이 말하자 로지도 외쳤다. "자,어서 가세요. 지금껏 프로도씨를 보살피고 다녔다면 이렇게 위험한 때 왜 분을 두고 왔어요?' 샘에게 이 말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일 주일은 생각해야 대답할 수 있거나 아 니면 전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조랑말에 올라탔다. 그가 막 달려나글려 할 퍼 로지가 뛰어내려왔다. "샘, 당신 너무 멋있어요. 이제 가세요! 하지만 몸조심하고 악당들을 물리치자마 자 곧 돌아와야 해요." 샘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을 전체가 분기해 있었다.많은 젊은이말고도 이미 백 명도 더 되는 건장한 호비트들이 도끼와 망치, 긴 칼, 단단한 막대기를 가지고 모여 들었고 몇 명은 사냥활을 가지고 있었다. 외진 농가로부터 더 많은 호비트들이 몰 려들고 있었다. 몇몇 주민은 큰 불을 피웠다. 생기를 돋우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불을 피는 것 이 대장에 의해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불은 더 밝게 타 올랐다. 메리의 지시에 따라 다른 호비트들은 마을 양 끝 길을 가로질러 방벽을 쌓 아 올렸다. 파수꾼들은 마을 끝에 도착해서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자 그들 대부분은 모자에서 깃털을 떼어 버리고 반란에 가담했다. 그렇지 않은 파수꾼들은 슬슬 꽁무니를 뺐다. 샘은 프로도와 그 친구들이 톰 코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그 주위를 바이워 터 주민들이 둘러싼 채 경탄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농부 코튼이 물었다. "자, 다음 할 일은 뭔가?' "사정을 더 알기 전에는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악당들은 얼마나 되 지요?' "그건 알기 어렵네.그놈들은 이리저리 옮겨다니거든.호비튼으로 가는 길에 있는 헛간에도 한 오십 명 가량 있더군.하지만 이리저리 도둑질하면서 돌아다니니까 확 실하게 알 수는 없어. 또 그놈들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놈 주변에도 한 이십 명 넘 게 될 거야.대장이란 름은 백 엔드에 있지.아니 적어도 전엔 거기 있었지.하지만 실제로 한두 주일 전부터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네.인간들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 게 한니까 말이야." "그놈들이 호비튼에만 사는 건 아니겠죠?' "아니지,더 많이 있으니 유감이지.남쪽 롱바텀과 산 포드 근처에도 꽤 여럿이 가 있지. 우디 엔드에도 있고 웨이미트엔 그놈들 창고가 있어. 또 록홀스라고 부르는 곳도 있어. 미켈 델빙에 있던 그 곡물창고 딸이야. 놈들은 거길 감옥으로 만들어서 자기네한테 반항하는 호비트들을 가둬 두고 있어. 어쨌든 다 합해도 삼백 명 이상 은 되지 않을 거야.우리가 뭉치기만 하면 쳐부술 수 있어." 그러자 메\리가 물었다. "놈들한테 무기가 있나요?' "더러운 짓을 할 때 쓰는 채찍과 칼, 곤봉이지. 지금까진 보여 준 건 그게 다 야.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다른 무기가 나을 걸세. 어떤 놈들은 활도 가지고 있 지. 그놈들이 우리 주민 한둘을 쏜 적이 있거든." '그거 보세요,프로도 우리는 싸워야 할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놈들이 먼저 살인 을 시작했잖아요." 메리가 이렇게 말하자 코튼이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다네.최소한 먼저 활을 쓴 건 투크였어.자네 아버 님 페레그린씨는 처음부터 로도와 상대를 하지 않으셨고,누군가 꼭 우두머리 노릇 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적법한 사이어의 다인이 해야지 벼락출세한 녀석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 로도가 경호원 인간들을 보냈을 때도 그분은 입장을 바꾸지 않으셨어.투크가는 운이 좋아 그린 힐이나 거대한 스마이얼 같은 큰 굴을 가지고 있어서 불한당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악당들이 그들 땅에 발을 들여 놓 도록 허락하지도 않았고 놈들이 접근하려고 하면 투크씨가 활을 쏘았지, 기웃거리 던 놈 셋을 쏘셨어. 그 후로 악당들은 더 악랄해졌지단. 그놈들은 투크가를 엄중하 게 감시하고 있다네.지금은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거나 나을 수가 없어." 그러자 피핀이 외쳤다. "루크가 만세! 하지만 이젠 누군가 다시 들어가야겠지요. 난 스마이얼로 가겠어 요. 나하고 투크바로우로 같이 갈 친구 없어요?' 피핀은 여섯 명의 젊은이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달려가며 외첬다. "곧 다시 만납시다! 들판 너머 십사 마일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침까지 우리 투크 가 친척들과 함께 오겠어요." 그들이 길어가는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가자 메리는 뒤에다 대고 나팔을 불었다. 주 민들은 환호했다. 프로도는 가까이 서 있는 주민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난 살인은 원하지 않아요.악당들에 대해서도 말이지요.호비트를 해치지 믓하게 막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러자 메리도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호비튼의 강도들은 곧 올 거예요. 그놈들이 그저 이야기나 나누 자고 오는 건 아니겠지요.그놈들을 적절하게 다루도록 노력해야겠지만 최악의 사 태에도 대비해야 할 거예요.자,저한테 계획이 있어요." "훌릉하군. 그럼 자네가 준비를 맡게." 프로도가 말했다. 바로 그때 호비튼 쪽으로 보냈던 호비트들이 뛰어 돌아왔다. "그놈들이 와요! 한 스무 명 가량 돼요.그런데 두 놈은 서쪽으로 가던데요." "아마 웨이미트로 갔을 걸세. 악당들을 더 데리러 말이야. 가고오는 데 각각 십오 마일이 니 까 아직은 그놈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메리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 급히 뛰어다녔고 코튼은 무기를 지닌 호비트를 빼놓 곤 모두 집으로 들어가 있게 했다. 그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곧 커다란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일단의 악당들이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장벽을 보 고 비읏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자신들에게 대항할 만한 호비트가 있으리라곤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호비트들은 장벽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네! 이제 채찍에 맞기 전에 집으로 가 잠이나 자!" 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불을 꺼! 집 안으로 들어가서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붙 잡아다 록홀스에 처넣을 테니까.들어가! 대장이 화를 내고 계신다. " 어느 누구도 그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악당들이 지나가가 그 들은 조용히 뒤를 따라갔다. 인간들이 모닥불에 가까이 갔을 패 그긋에는 코튼 혼 자 불을 쬐고 서 있었다. 우두머리가 그에게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코튼은 천천히 그를 보며 말했다. "나도 네놈한테 그걸 물어 보려던 참이야. 여기는 네놈들 땅이 아니고 또 네놈들 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 "그래? 하지만 우린 네놈이 필요한데. 얘들아, 저놈을 끌고 가자. 저놈을 록흘스로 데려가라.먼저 조용하게 만들어 주고" 인간들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멈춰섰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 지자 그들은 농부 코튼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듬 속에는 그림자 아래서 밀려나온 호비트들이 원형으로 둘과싸고 있었다. 거의 이백 명 가량 되었는데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메리가 앞으로 나서며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우린 좀전에도 만났었지. 여기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했었어. 이제 다시 경고한 다. 너희들은 불빛 속에 서 있고 사수들이 네놈들을 둘러싸고 있어.만일 네놈들이 이분이나 또는 다른 누구한테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한다면 네놈들은 골 벌집이 될 거야. 가지고 있는 무기는 다 내려놔!" 우두머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하지단 그는 동료들이 스무 명이나 되었기에 겁을 먹지 않았다. 위헌한 상황을 이해하기엔 그는 너무도 호비트들을 모르고 있었기에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돌진하는 편이 더 쉽겠다 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외첬다. "저놈을 잡아라!" 그는 왼손엔 긴 칼,오른슨엔 곤봉을 들고 호비튼을 향해 돌진하기 위해 호비트들 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메리를 향해 야만스런 일격을 겨누 었으나 그 순간 넉 대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버렀다. 다른 놈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바로 항복했다. 무기는 빼앗기고 밧 줄로 묶여 자신들이 세웠던 텅 빈 오두막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들은 손과 발이 묶 인 채 갇혔고 보초가 그들을 지켰다. 죽은 우두머리는 끌고 가 매장했다. "끝나고 보니 너무 쉬운 것 같은데.우리가 쳐부술 수 있다고 내 말했었잖아.하지 만 우리에겐 신호가 필요했던 거야.메리,자네는 제때 돌아왔네." 코튼이 말하자 메리는 대답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만일 아까 계산하신 것이 틀림없다면 우린 아직 놈들 십 분의 일도 처리하지 못한 셈이니까요. 다음 공격은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군 요. 그리고나서 대장이란 놈을 만나 봐야겠어요." "왜 지금은 안 된단 말이에요? 지금은 여섯시밖에 안 됐고 난 아버지를 보고 싶 은데.코튼씨,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세요?' 샘이 묻자 코튼이 곧바로 대답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시지.그놈들이 백쇼트 로우를 파낸 것은 그분께 큰 타격이 었어. 그분은 지금 대장 경호원들이 약탈하다 남은 시간에 지은 새 집 중 한 채에 계신다네. 바이워터에서 일 마일쯤 되는 곳이야. 자네 아버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한테 오셨어. 다른 불쌍한 호비트들보다는 꽤 잘 드신 것 같더군.물론 규칙에 반 대한 호비트들 중에선 말이야.난 그분을 우리집에 계시게 하고 싶었네만 허용되지 않았어." '고맙습니다, 코튼씨.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전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 그 놈들이 얘기하는 대장이라든지 샤키라든지 하는 것들이 아침이 되기 전에 거기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알겠네,샘. 젊은 친구 한둘을 뽑아서 그분을 우리집으로 모셔 오도록 하지. 강 건너 옛 호비튼마을 가까이까지 갈 필요는 없을 거야. 여기 있는 졸리가 길안내를 할 걸세." 샐은 출발했다. 메리는 밤 동안 마을 주위를 지킬 보초와 방벽을 지킬 경비원을 정비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프로도와 함께 코튼네 집으로 가서 따뜻한 부엌에서 가 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코튼가족은 예의삼아 그들의 여행에 관해 몇 가지 물었 지만 대답에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지금 샤이어의 상황이 더 큰 관 심거리였던 것이다. 농부 코튼이 말했다. "이 모든 일이 핌플 때문에 시작됐어.프로도,당신이 떠난 다음 이런 사태가 벌어 졌소. 핌플 그 녀석이 우스꽝스런 생각을 했펀 거야.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다른 주민들한테 명령하고 싶어했지.그 녀석은 사실 그때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잇었어. 그런데도 항상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했지.그 녀석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방앗간도 맥아저장고도 여관도 농장도 연초농원도 모조리 차지해 버렸지.아마 그 녀석은 백 엔드로 오기 전에 벌 써 샌디맨의 방앗간을 샀을 거야. 물론 그 녀석은 사우스파딩에서 지 애비가 물려 준 유산으로 시작했겠지. 그리고 제일 좋은 연초를 상당량 팔았던 것 같아.은밀하 게 외부로 실어 날랐거든.그런데 작년말부터는 연초뿐 아니라 다른 곡물도 상당량 내보내기 시작한 거야. 물건이 달리기 시작했고 겨을에는 더 심해졌다네. 주민들은 분개했지만 그 녀석은 변명거리를 갖고 있었지. 많은 인간들,대개는 악당들이 커다 란 수레를 끌고 와 남쪽으로 물건을 실어 가거나 일부는 아주 상주하게 되었지.점 점 더 많은 인간들이 몰려들었다네.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채 알아차리기도 전 에 그놈들은 샤이어 전역에 퍼져서 멋대로 나무를 베고 땅을 파서 헛간이나 집을 지었지. 처음에는 곡물이나 그 밖의 손실에 대해 핌플이 보상을 했지만 얼마 안 있 어 놈들은 주인행세를 하며 멋대로 아무거나 가져가게 된 거야. 그러자 약간의 소 동이 있었지만 충분한 정도는 아니었지. 시장인 월이 백 엔드로 항의하러 갔지만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다네. 도중에 악당들이 붙잡아 미켈 델빙에 있는 굴 속에 가 둬 버린 거야.지금도 거기 있을 걸세.그 후,새해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땔 거야. 더이상 시장도 없게 되고 핌플 스스로 행정관 아니면 대장이라고 행세하게 되었지. 누군가 '주제넘은'짓을 하려 들면 월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됐다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인간들한테 줄 것을 빼곤 담배도 남지 않게 되었어. 대장은 맥주도 금지 해 버렸지. 물론 인간들은 빼고 말이야. 모든 주점과 여관은 폐쇄되었고 규칙은 점 점 길어졌지만 모든 물자가 점점 더 모자라게 되었지.그 악당들이 소위 '공정한 분 배'를 위해 곡물을 거둬들이는 동안 자기 것을 조금도 감추지 못한 이들은 특히 심 했지.그놈들의 공정한 분배란 자기들은 가지고 우린 가져선 안 된다는 뜻이야.물 론 파수꾼들 집에서 남은 것을 분배하긴 했지만 그건 먹을 수도 없는 거였지.아주 나쁜 상황이었어. 그런데 샤키란 놈이 온 다음에는 정말 완전히 몰락하게 된 상황 이었지." 그러자 메 리가 물었다. "그 샤키란 놈이 누구예요?어떤 악당놈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요." "그 악당 중의 우두머리지. 우리가 그놈 얘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작년 9월말 추 수할 무렵이었어. 우린 그놈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백 엔드의 진짜 두목이라지.악 당들은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대개 시키는 일이라는 게 모조리 파괴하고 불 태우고 부숴 버리는 것이고, 이젠 살인까지 하지.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율도 이젠 의미가 없어졌어. 놈들은 나무를 베어서 나뒹굴게 하고 집을 태우고선 더 짓지도 않아.샌디맨의 방앗간을 좀 보라구.핌플이 백 엔드에 오자 그걸 부숴 버렀어.그리 고는 더러운 인간들을 데려와 더 큰 방앗간을 짓고 바퀴와 그 밖의 이상한 장치들 로 가득 채웠지. 단지 그 바보 같은 테드 녀석만이 그걸 기뻐하면서 한때 자기 아 버지가 주인이었던 방앗간에서 인간들을 위해 바퀴를 닦아 주며 일했다네. 핌플은 더 많은 곡물을 더 빨리 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지.그 녀 석은 그 비슷한 다른 방앗간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제분하려고 해도 곡물이 있 어야 하잖아. 새 방앗간이 생겼다고 해서 예전보다 할 일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샤키란 놈이 온 후에는 더이상 제분도 않는다네.항상 망치질에 연기와 악 취만 뿜어 내고 있거든, 그래서 호비튼은 밤에도 조응하지 않다네. 그리고 놈들이 고의로 오물을 내부어서 저지대의 물을 온통 오염시켰지. 그건 브랜디와인까지 흘 러갔어.그놈들이 샤이어를 사막으로 바꿔 버릴 생각이라면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 야. 그 바보 같은 핌플이 이 모든 것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닐 거야. 틀림없이 그 샤 키란 놈의 짓이지." 그러자 톰이 끼어들었다. "맞아요.그놈들은 심지어 핌플의 늙은 어머니 로벨리아마저 끌고 갔어요.아무도 그 노인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핌플은 자기 어머니를 좋아했지요.호비튼 주민 몇 명이 보았대요.그녀가 낡은 우산을 가지고 오솔길로 내려오는데 악당들이 큰 수레 를 끌고 올라가고 있었대요. 그녀가 먼저 '어디들 가는 길이야?하니까 '백 엔드로'했 다지요. 그러니까 '또 뭣 하러?하니까 '샤키를 위해 헛간 몇 채 짓게.', '누가 그렇게 시킨 거야?, '샤키가 시켰지.길을 비켜, 이 늙은 할망구야.'하니까 '이 더러운 도둑놈 들아,샤키란 놈 꺼져 버리라고 해라!'했다는 거예요.그러면서 우산을 번쩍 들고 자 기 키의 두 배는 되는 우두머리한테 덤볐다지요. 하니까 놈들은 그녀를 붙잡아 노 령도 상관하지 않고 록홀스에 가둬 버렸대요.그놈들이 끌고간 다른 호비트들을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가 더 많지만 어쨌든 그녀가 큰 용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 은 부정할 순 없지요." 이야기 중간쯤 샘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들어왔다. 갬기는 더 늙어 보이지는 않았 지만 약간 귀가 먹었다. "안녕하세요, 배긴스씨! 이렇게 돌아오신 것을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하지 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불만도 있지요.항상 말했듯이 백 엔드를 파시는 게 아니 었어요.거기서 모든 재앙이 시작됐거든요.샘의 말에 따르자면 당신은 다른 지방에 서 암흑의 인간들을 쫓아 산 위를 헤매고 다녔다는데, 난 뭣 때문에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그 동안 놈들은 여기서 백쇼트 로우를 파내고 내 감자밭을 모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갬기씨,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왔으니 최선을 다해 보상을 해드리지요." "그보다 더 공정한 말씀은 없을 겁니다. 항상 말했듯이 프로도 배긴스씨는 진짜 신사시거든. 그 성을 가진 다른 호비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지만요. 그런데 우리 샘에 대해선 만족스러우셨나요?' "정말 만족스러웠지요. 믿을 수 있으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샘은 이제 중간계 전체 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예요.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바다까지 그리고 '위대한 강'을 넘어서까지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샘은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는 듯이 프로도를 보았다. 로지가 눈을 빛내며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샘이 이상한 무리들과 함께 지냈다는 것은 알겠지만 아직도 이해해야 할 것이 더 많은 것 같군요.옷은 어떻게 된 겁니까?갑옷이 잘 어울리건 아니건 간에 난 갑 옷 입는 건 반대니까요." 농부 코튼가족과 모든 손님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밤 사이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얼마 안 있어 틀림없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었다. "백 엔드에는 악당이 한 놈도 남지 않은 모양인데.하지만 웨이미트에서 언제 몰 려올지 모르지." 하고 코튼이 말했다. 아침식사 후 투크의 영지에서 보낸 전령이 말을 타고 왔다. 그는 매우 활기에 차 있었다. "다인이 우리 전체를 봉기시켰어요. 소식은 불처럼 도처로 퍼져 나가고 있지요. 우리 영지를 감시하던 악당들 중에 살아남은 놈들은 남쪽으로 달아났어요.다인인 그 강도들을 멀리 쫓아내려고 뒤쫓아갔지요. 하지만 그분은 할애할 수 있는 주민들 과 함께 페레그린씨를 이리 보내셨어요." 그러나 그 다음 소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밤새 나가 있었던 메리는 열시경 말을 타고 돌아왔다. "사 마일쯤 떨어진 곳에 악당들이 상당수 있더군요.그놈들은 웨이미트에서 오는 중인데 흩어졌던 놈들도 거기 끼어든 모양이에요.대략 백 명 정도 됩니다. 오면서 아무 데나 불을 지르고 있어요. 저주받을 놈들!" 그러자 코튼이 말했다. "이제 그놈들은 말 들어 볼 것도 없이 무조건 죽이려 들 거야. 만일 투크가에서 원병이 곧 도착하지 않는다면 안전한 곳에 숨어 말씨름할 것 없이 활을 쏘는 게 나 을 거야. 일이 해결되려면 싸움이 있어야 할 거요,프로도씨." 그러나 투크가의 호비트들은 빨리 왔다. 피핀을 선두로 한 건장한 호비트 백 명 가량이 투크바로우와 그린 힐로부터 행군해 온 것이다. 이때쯤 메리 역시 악당들을 상대할 만한 건장한 호비트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틱.놈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고 전령이 알려왔다. 악당들은 마을 전체가 항거하기 위해 봉기한 것을 알고 있었 으며 모반의 중심지인 바이워터부터 잔인하게 진압할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가 그 들은 비록 냉혹하게 보이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전술을 이해할 만한 지도자가 없었 다. 그들은 전혀 경계를 취하지 않고 다가왔으며 머리는 신속하게 전략을 세웠다. 악당들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동쪽 길을 따라 쉬지 않고 바이워터 쪽으로 접어들 었다. 그 길은 약간 경사진 오르막이었고 양편에는 높은 제방이 있었다. 이백 미터 쯤 전진했을 때 그들은 구부러진 길 위에 농가의 낡은 수레들이 엎어진 채 길을 막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들은 그들 머리 위 양편 제방에 호비트들이 늘 어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뒤쪽에도 다른 호비트들이 들에 숨겨 놓았던 다른 수레들로 퇴로를 막아 버렸다. 위쪽에서 메리가 외쳤다. "자, 네놈들은 함정으로 걸어 들어온 거다. 호비튼에서 왔던 네 동료들도 똑같았 지.한 놈은 죽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됐다. 무기를 버려라! 그리고 이십 보 뒤로 가 서 그 자리에 앉아라. 이탈하는 자는 무조건 활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악당들은 이런 말에 쉽게 수그러들려 하지 않았다. 몇몇은 명령을 따르려 했지만 곧 동료들이 전의를 북듣아 주는 것 같았다. 이십 명 가량이 뒤로 물러서며 수레 방벽을 공격하다가 여섯이 화살에 맞았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돌격해 호비트 둘을 죽이고 그대로 우디 엔드 쪽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달려가던 놈들 중 둘이 더 쓰러졌다. 메리가 뿔나팔을 크게 불자 멀리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은 멀리 못 갈 거야.지금 이 근처는 우리 사수들로 들끓고 있으니까." 피핀이 말했다. 뒤쪽 오솔길에 여전히 함정에 빠져 있던 여든 명 가량의 인간들이 제방을 기어오 르려 했기에 호비트들은 그들을 베거나 활로 쏘아야 했다. 그러나 가장 힘세고 필 사적인 놈들은 이제 도망할 길도 없고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는 길밖에 없었기에 맹렬하게 호비트들을 공격했다. 몇 명의 호비트들이 쓰러지며 다른 호비트들이 주 춤하는 사이 오른쪽에 있던 메리와 피핀이 건너와 싸움에 가담했다. 메리는 혼자서 거대한 오르크같이 생긴 사팔눈의 짐승 같은 우두머리를 해치웠다. 그리고나서 그 는 자신의 통솔 하에 있는 호비트들을 빼내 남아 있는 인간들을 포위하게 했다. 마침내 전투는 끝났다. 거의 일흔 명 가량의 악당들이 죽어 들판에 쓰괴졌고 열둘 은 포로로 사로잡혔다. 호비트 쪽은 열아홉이 죽고 서른 명 가량이 부상당했다. 죽 은 악당들은 수레에 실어 근처의 오래된 구덩이에 운반해 매장했다. 그 후 그곳은 '전투매장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쓰러진 호비트들은 언덕 위 무덤에 안장되었고 나 중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일대는 공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옛낱 노스파딩에서 벌 어졌던 1147년의 그린필드전투 이래 샤이어에서의 유일한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인 1419년의 바이워터전투가 끝이 났다. 다행히 인명 손실은 적었지만 전투는 『레드 북』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투에 참가한 모든 호비트들의 이름은 명부에 기 록돼 샤이어의 역사가들이 암기하는 바 되었다. 코튼가문의 명성과 부는 이때부터 급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명부에도 가장 상위를 차지하는 이름은 지휘관 메리아독과 페레그린이 었다. 프로도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칼을 빼진 않았고 주로 동료들의 죽츰에 격분한 호 비트들이 항복한 적들을 살해하지 말도록 말리곤 했다. 싸움이 끝나고 됫처리를 맡 긴 다음 메리와 피핀,샘은 프로도에게로 가 함께 코튼의 집으로 다시 말을 달렸다.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프로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 이제 그 대장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야." "물론이에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그리고 너무 부드럽게 대해 주지 말아요. 그놈이 이 악당을 끌어들였으니 그놈들이 저지른 모든 해악에 책임이 있잖아요." 메리는 이렇게 말했다. 코튼은 이십 명이 넘는 건장한 호비트들을 뽑고 말했다. "백 엔드에 악당이 남지 않았으리란 것은 짐작일 뿐이야.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 으니까." 그들은 걸어서 출발했다. 역시 프로도,섬,메리,피핀이 앞장을 섰다. 이때가 그들 인심에서 가장 슬픈 시간이었다. 앞에는 거대한 굴뚝이 솟아 있었고 강을 건너 옛 마을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새로 지은 조잡한 집들 사이로 역시 새로 지은 방앗간이 찌그러지고 더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거대한 벽돌 건물은 시냇물 위에 자리잡은 채 연기와 악취를 뿜으며 물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바이워터가로의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지고 없었다. 그들은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려다보고 놀라 숨을 멈췄다. 심지어 샘이 거울에서 봤던 환영도 지금 그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한 마음의 준비로선 층분치 못했 다. 서쪽 편의 옛 농장은 파괴되었고 그 자리엔 타르칠을 한 헛간들이 일렬로 늘어 섰으며 밤나무는 모조리 베어졌다. 제방과 울타리도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풀도 없 이 짓밟힌 들판에는 커다란 수레들이 제멋대로 서 있었고 백쇼트로우는 입을 벌린 모래와 자갈의 채석장이 되어 버렸다. 그 너머 백 엔드는 여기저기 멋대로 세운 오 두막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놈들이 그걸 베어 버렀어! 파티나무'를 베어 버렀단 말이야!" 샘은 이렇게 소리치며 예전 빌보가 그 그늘 아래서 고별연설을 했던 나무가 서 있던 곳을 가리켰다. 그것은 베어진 채 들판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마치 이것이 불 행의 마지막 타격이기라도 한 듯 샘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방앗간 마당 나지막한 택 위에 험악하게 호비트 한 명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더럽고 손도 시커맸다. 그는 빈정대듯 샘을 향해 말했다. "왜 맘에 들지 않는단 말이냐,샘. 넌 항상 마음이 약했지.난 네녀석이 항상 주절 거리던 대로 배를 타고 가버린 줄 알았지.그래 뭣 때문에 돌아온 거냐? 이제 샤이 어에는 우리가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보이는군.얼굴 씻을 시간은 없어도 벽 위에 앉아 있을 시간은 있구.하지 만 샌디맨,난 이 마을에 청산할 셈이 있어.더이상 빈정대지 않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네 지갑으로는 엄두도 못 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테드 샌디맨은 벽에 침을 뱉았다. "제기랄! 너희들은 날 건드릴 수 없어, 난 대장의 친구란 말이야.너희들이 건방지 게 군다면 대장이 손봐 주실걸." 그러자 프로도가 샘을 제지하며 말했다. "샘, 저 바보에게 더이상 말을 낭비할 것 없어. 저렇게 된 호비트가 많지 않기만 바랄 뿐이야.저건 인간들이 저지른 손해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야." 메리가 외첬다. "샌디맨, 이 더럽고 무례한 녀석아.셈도 할 줄 모르는 놈아.우린 지금 네놈의 그 고귀한 대장을 없애려고 올라가는 길이다. 벌써 경호원들은 다 처리했지." 테드는 입을 떡 벌렀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메리의 지시에 따라 행군해 오는 호비 트들을 본 것이었다. 그는 방앗간으로 뛰어들어가면서 큰 소지로 나팔을 불었다. "이제 힘 들이지 말고 그만 불어라.내게 더 좋은 게 있으니까." 메리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은나팔을 꺼내 불자 그 청명한 소리는 언덕 위로 울려퍼졌다. 그러자 호비튼의 굴과 헛간,집 들에서 호비트들이 쏟아져 나와 환호하 며 일행을 따라 백 엔드로 올라갔다. 오솔길 맨 위에 이르러 행렬은 멈추어 섰다. 프로도와 그 동료들만이 계속 걸어 가 마침내 과거 사랑했던 옛 집에 도착했다. 정원에는 오두막과 헛간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서쪽 창문 가까이에 세워져 햇빛을 차단하는 것들도 있첬다. 문은 온통 흠집투성이가 됐고 초인종은 사슬이 풀린 채 늘어져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문을 밀자 문은 그냥 열렸다. 안은 냄새가 고약했고 오물로 가득차 엉망진창이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듯했다. "그 형편없는 로도란 놈은 어디 숨어 있는 거야?' 메리가 말했다. 모두 방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쥐말고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보 이지 않았다. "헛간을 좀 찾아보라고 할까?' 그러자 샘도 덧붙였다. "여긴 모르도르보다 더 지독한데요. 훨씬 더 지득해요 가슴이 아프군요. 여긴 내 고향이고 난 예전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여기가 바로 모르도르라네. 모르도르가 만들어 낸 작품이니까 달이야. 사루만은 스스로를 위해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사실은 모르도르가 원하는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로도처럼 사루만에게 넘어간 자도 마찬가지지." 프로도가 말하자 메리도 혐오감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갑시다. 그가 꾸민 이 모든 재앙을 알기만 했었다면 내 지갑을 사루만의 목구 멍에다 처넣는 건데." "물론, 물론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내가 너희들의 귀향을 이렇게 환영해 줄 수 있는 거지" 문가에 사루만이 서 있었다. 그는 배가 부르고 즐거운 듯 보였으며 눈은 적의와 즐거움으로 빛을 발했다. 갑자기 프로도는 사실을 깨닫게 돼 '샤키 !'하고 외쳤다. 사루만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도 그 이름을 들었던가? 이센가드에서 부하들이 그렇게 부르곤 했지. 아 마 애정의 표시일 거야(오르크어에 어원을 둔 말로 부친,노인네를 뜻함).그렇지만 날 여기서 보게 되리라곤 기대하지 못했겠지." "예기치 못했소 하지만 짐작할 수도 있었겠지요.비열한 방법으로 자그만한 재앙 을 꾸미는 것 말이오. 갠달프는 아직도 당신에게 그 정도의 힘은 남았다고 내게 경 고했었지요." "물론 할 수 있지.그리고 자그마한 재앙 이상도 일으킬 수 있고 너희들은 날 웃 겼어. 너희 저열한 호비트녀석들이 위대한 이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또 하찮은 자 신들의 존재에 한심하게 기뻐하는 꼴이라니 달이야.너희들은 모든 일을 잘 끝냈으 니 이제 한적한 이 시골에서 편안하고 멋진 나날을 보내리라 생각했겠지.사루만의 집을 파괴하고 사루만을 쫓아내고나서 너희집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리라 생각했 단 말이야. 갠달프가 돌봐 줄 테니까." 사루만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그렇게 해줄 것 같아? 그는 졸개들이 맡은 일을 끝버자마자 내던져 버린 거야.그런데도 네놈들은 그 뒤를 쫓아다니느라 꾸물거리고 수다를 떨면서 두 배가 넘는 거리를 들아왔지. 그래서 난 생각한 거야. '저놈들이 저런 바보들이라면 내가 가서 먼저 한수 가르쳐 줘야겠어.한 가지 잘못을 저지르면 한 가지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하고 말이지. 만일 시간과 인간이 좀더 충분했다면 더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었을 거야.하지만 이미 너희들이 일생을 바쳐 일해도 원상태로 복 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업이 이루어졌어.그것을 생각하머 내가 당한 손해와 견 주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 "만일 이런 일에서밖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당신을 동정할 수밖에 없 겠군요. 그건 단지 기억이 주는 즐거움에 지나지 못해요. 이제 당장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마을의 호비트들은 사루만이 한 헛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백 엔드의 문에 몰려 들었다. 그들은 프로도의 말을 듣고 분개하며 중얼거렀다. "그놈을 가게 내버려 두다니! 그놈을 죽여야 해! 악당! 살인자! 그를 죽여!" 사루만은 호비트들의 적의에 찬 얼굴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롱하듯 말 했다. "죽이라고? 용감한 호비트들! 자신있다면 죽여 보지 그래! 하지만 내가 가졌던 것을 다 잃었다고 내 능력이 모조리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를 치는 자 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내 피가 샤이어에 얼룩진다면 이곳의 모든 대지는 고갈되 고 다시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 호비트들이 주춤했으나 프로도가 말했다. '그의 말을 믿지 마시오 그는 타인의 기세를 꺾고 속일 수 있는 목소리를 빼곤 모든 능력을 잃었소. 하지만 그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또 도움도 되지 않아요. 가시오, 사루만. 가장 빠른 길로 떠나시 오!" "웜! 웜 !" 사루만이 부르자 가까이 있는 오두막으로부터 웜통이 개처럼 기어나왔다. "다시 길로 나서게 됐다, 웜! 이 멋진 분들과 군주들께선 우리가 다시 정처없이 헤매는 것을 원한다니까 말이야. 가자!" 사루만이 등을 돌리자 웜통 또한 발을 질질 끌며 그 뒤를 따랐다. 사루만이 프로 도 옆을 지나갈 때 그의 손에서 칼이 번쩍였다. 그는 신속하게 프로도를 찔렀다. 그 러나 칼은 숨겨진 갑옷에 부딪혀 딱 부러지고 말았다. 샘이 이끄는 열두 명의 호비 트들이 앞으로 됐어나와 악당을 땅에 내던졌다. 샘은 칼을 뽑았다. 그러나 그 순간 프로도가 소리쳤다. "안 돼,샘! 그를 죽여선 안 돼. 날 해치진 못했어.난 어떤 우에라도 그가 이렇 게 죽는 건 바라지 않아. 그는 한때 위대한 이였고 우리가 감히 손을 들어 항거할 수 없는 고귀한 혈통을 가졌었어. 이제 타락한 그를 치유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야.하지만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으니 그를 그냥 보내 주 는 게 좋을 것 같아." 사루만은 일어서서 프로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이와 존경과 증오가 뒤 섞인 이상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입을 열었다. "호비트,많이 성장했구나.그래, 많이 자랐어. 이제 현명해지고 또 잔인해졌군. 넌 내 복수의 달콤함을 빼앗아 갔고 이제 거기다 자비의 빛을 더해 주니 말이야. 자, 이제 떠나 다시는 너희를 괴롭히지 않겠다. 하지만 너에게 건강과 장수를 빌어 줄 거라고 기대하진 말아라.너는 그 둘 중 어느것도 가지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그건 내 작품이 아니야.난 단지 예언할 뿐이지." 그는 걸어갔고 호비트들은 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무기를 잡은 그들 손은 너무도 꽉 쥐어 하얗게 되었다. 웜통은 망설이다가 그의 주인을 따라갔다. 프 로도가 그를 불렀다. "웜통! 당신은 그를 따라갈 필요가 없소.당신은 내게 악한 일을 하지 않았소.좀 더 건강해져 당신의 길을 갈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얼마간 쉬게 해주겠소" 웜통은 멈춰서더니 얼마간 마음이 흔들리는 듯 뒤돌아보았다. 사루만이 돌아섰다.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그는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없겠지! 밤중에 살짝 밖으로 나왔을 때도 그냥 별을 보러 나왔던 거겠지.그 런데 불쌍한 로도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던가? 웜, 네놈은 알고 있겠지? 자, 말 좀 해보실까?' 웜통은 겁을 먹고 훌쩍거렸다. "안 돼, 안 돼요!"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지. 그 불쌍하고 조그만 녀석, 너희들의 친애하는 대장은 웜통이 죽였지.그렇지 웜? 틀림없이 잠자는 놈을 찔러 죽였을 거야.매장했기를 나 도 바란다네.웜통이 최근에 무척 굶주리긴 했지만 말이야. 자, 웜통은 그다지 착한 놈이 아니야. 이 녀석은 내게 맡기는 게 좋을걸." 웜통의 붉은 눈에 증오의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이 시켰잖아요, 당신이 !" 그는 쉿쉿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루만은 비웃듯 말했다. "넌 항상 샤키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안 그래, 웜통? 자, 이제 그가 따라오라고 명령 하는 거야!" 그리고나서 그는 기어가는 웜통의 얼굴을 발로 차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순간 찰깍 하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웜통이 일어서더니 숨겨 두었던 칼을 꺼내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사루만의 등으로 뛰어골라 그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며 목을 자르 고는 고함을 지르며 길을 달려갔다. 프로도가 채 정신을 차리고 말 한마디 하기도 전에 세 대의 호비트 화살이 시위를 울리며 날아가 웜통을 꿰뚫었다. 주위에 모여 있던 호비트들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사루만의 시체 위에 회색빛 안개가 끼더니 불에서 일어난 연기처럼 천천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언덕 위에 창백한, 수의를 입은 형상을 그려 냈다. 잠깐 그것은 서쪽을 바라보며 그대로 떠 있었으나 서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방향을 바꿔 한숨소리와 함께 흩어 져 사라져 버렸다. 프로도는 연민과 공포에 싸여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동안 마치 죽음의 오랜 세월이 갑자기 시체에 모습을 드러낸 것처림 보였다. 그것의 오그라들 고 주름진 얼굴은 누더기가 된 두개골 위에 살을 덮어 놓은 것 같았다.그 옆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더러운 망또자락으로 그는 시체를 덮고 몸을 돌렀다. 샘이 입을 열었다. "자,저렇게 종말을 맞았군요.참 역겨운 종말이에요.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어요 하지만 어쨌든 시원하게 떼쳐 버리게 됐군요." "전쟁의 마지막 종말일 거예요." 메리가 말하자 프로도 역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그렇기를 바라네.마지막 불행이기를.하지만 여기 이 백 엔드의 문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내 모든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최소한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 했는데." 그러자 샘이 우울하게 말했다. "전 이 혼란을 깨끗이 치울 때까지 끝났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제19장 회색항구. 모든 것을 다 정리하기에는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샘이 우려했던 것과 달 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싸움이 있던 다음날 프로도는 미켈 델빙으로 가 죄 수들을 록홀스에서 풀어 주었다. 그들이 찾아 낸 첫번째 호비트는 프레데가 볼저로 그는 이제 더이상 뚱뚱하지 않았다. 그는 스카티언덕 근처 브로켄보어즈에 숨어 있 었는데 악당들이 굴에 연기를 피웠기 때문에 일단의 호비트들과 함께 잡혔던 것이 다. "자네도 우리하고 같이 가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불쌍한 프레데가!" 너무 약해져 걸을 수 없는 그를 부축하며 피핀이 말했다. 그는 간신히 한쪽 눈을 뜨고 용감하게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작은 소리로 말했 다. "아니, 이 목소리가 큰 거인이 도대체 누구지? 조그만 피핀 아니야! 지금 자네 모 자 치수가 어떻게 되나?' 그리고 로벨리아도 있었다. 불쌍하게도 좁고 어두운 감방에서 나온 그녀는 무척 늙고 여위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기 발로 절뚝거리며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녀는 환영을 받았다. 여전히 우산을 잡은 채 프로도의 팔에 기대 걸어나왔을 때 호 비트들은 박수를 치떤 환호했다. 그녀 또한 완전히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평생 호비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로도가 살해된 소식 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백 앤드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 엔드를 프로도에 게 돌려주고 하드보틀의 브레이스거들가,즉 자기 친척들에게 갔다. 이듬해봄 그 불쌍한 노파가 죽었을 때-그녀는 이미 백 살이 넘었다-프로도는 무척 놀라고 감동했다. 그녀는 곤경으로 해서 가정을 잃은 호비트들을 위해 자신의 돈과 또 로도의 재산 중에 남은 것 모두를 남겨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배긴스가문 의 불화는 끝이 났다. 늙은 월 위트푸트는 누구보다도 록흘스에 오래 있었지만 다른 호비트들보다는 덜 가혹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시장의 임무를 다시 맡기 전에 충 분한 섭생이 필요했다. 그래서 위트푸트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프로도가 그 대리 인으로 일하기로 동의했다. 그가 시장대리로서 한 유일한 일은 파수꾼들에게 그들 고유의 임무를 되찾아 주고 또한 그 수를 줄인 것이었다. 악당들의 잔존 세력을 소 탕하는 일은 메리와 피핀에게 맡겨졌으며 곧 끝이 났다. 남쪽의 강도들은 바이워터 전투 소식을 들은 후 그곳에서 달아났고 다인에게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해가 다 가기 전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숲속으로 몰렸고 결국 모조리 투항 해 경계지역으로 보내졌다. 그 동안 복구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샘은 아주 바쁘게 뛰어다녔다. 호비트 들은 필요할 때면,그리고 의욕이 생기면 꿀벌처럼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호비트 소년소녀들의 작지만 민칩한 손뿐 아니라 노인들의 닳고 각질이 있는 손에 이르기 까지 모든 연령의 호비트들이 기꺼이 일손을 제공했다. 율(샤이어력에서 한 해의 첫 날과 마지막날.이 이틀은 어느 달에도 속하지 않는다)이 되기 전에 '샤키의 경호원'들이 지었던 오두막과 건물은 흔적도 없게 되었으며 그 벽돌들은 오래된 토굴집들을 좀 더 안락하고 건조하게 복구하는 데 사용됐다. 헛간과 광,버려진 토굴,그리고 특히 미켈 델빙의 지하도와 스카티의 옛 채석장에 악당들이 숨겨 놓았던 많은 양의 음 식과 맥주 등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해 율은 누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활기 에 넘첬다. 새 방앗간을 헐어 내기 전 호비튼에서 행해진 첫번째 일은 언덕과 백 엔드 주위 를 정리하고 백쇼트 로우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새로 생긴 모래구덩이의 앞부분은 평평하게 다듬어져 커다란 그늘진 정원이 되었고 뒤로는 언덕을 향하고 앞으로는 남쪽을 향한 새 굴들이 파졌다. 샘의 아버지는 세번째 굴집을 다시 갖게 되었다. 그 는 누가 듣건 상관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항상 말했듯이 말이야 아무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은 나쁜 바람이야. 그리고 끝이 더 잘 끝나야 더 좋은 것이지." 새로 난 길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토론이 벌어졌다. '전투의 정원'이라는 안도 있었고 더 나은 스마이얼즈'라는 안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분별력있는 호 비트들의 방식대로 그것은 그저 '새 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것을 샤키의 종말 이라고 부르는 것은 순전히 바이워터주민들의 농담이었다. 나무가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 샤키의 명령에 따라 샤이어 전역에서 나무들이 무 자비하게 베어졌던 것이다. 샘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슬퍼했다. 왜냐하면 이 손실은 복구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고 그의 증손대쯤 가야 샤이어의 본래 모습으 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주 동안 너무도 바빠 지나간 모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갈라드리엘의 선물을 기억했다. 그는 그 상자를 꺼내 다른 여행자들(호비 트들은 그들 일행을 이렇게 불렀다)에게 보여 주며 조언을 구했다. "자네가 언제쯤 그것을 생각해 낼지 궁금했었지. 열어 보게." 프로도가 말하자 샘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부드럽고 미세한 회색 가루들이 가 득 들었으며 중앙에는 은빛 혈암이 있는 견과처럼 생긴 씨앗이 하나 있었다. "이것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샘이 말하자 피핀이 제의했다. "바람부는 날 공중에다 던져서 스스로 알아 하도록 놔두지요." "어디에다가요?' 그러자 이번에는 메리가 대답했다. "한군데를 골라서 그곳 식물들이 어떻게 되나 보지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주민들이 고통을 당했는데 이걸 모두 내 정원에다 뿌리면 갈라드리엘이 좋아하시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이번에는 프로도가 말했다. "샘, 네가 가진 모든 기지와 지식을 다 이용하지. 그리고나서 네 일을 도와 주고 향상시키는 데 그 선물을 사용하게나.그리고 아껴서 말이야.많지는 않지만 하나 하나가 다 가치있는 걸 거야." 샘은 특히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은 나무가 있던 곳에 묘목을 심고 흙 속 뿌리에 그 귀증한 가루를 조금씩 뿌렸다. 그는 이 일을 하느라고 샤이어 전역을 오르내렸 고 그가 호비튼과 바이워터에 특히 관심을 쏟았다고 해서 비난할 이는 없었다. 마 침내 이제 미량의 가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거의 샤이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스리 파딩스톤으로 가서 축복을 하며 공중에 날렸다. 그 조그만 은빛 씨앗을 그는 과거 파티나무가 있던 파티정원에 심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이 일 어날까 궁금하게 여겼다. 겨우내 그는 가능한 한 참을성을 발휘했고 어떤 일이 일 어날지 끊임없이 나가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느라 노력했다. 봄은 그의 열정적인 희망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무들은 마치 시간이 촉박 해 이십 년 동안에 할 일을 일 년에 다 하려는 듯 싹을 의우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파티정원에는 아름답고 싱싱한 나무가 솟아올랐다. 그 나무는 은빛 껍질과 기다란 잎사귀를 가지고 있었고 4월이 되자 황금빛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것은 말론(황금나 무)이었고 인근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나무로 여겨졌다. 후에 더욱더 아름답고 품위 있게 자라남에 따라 그 나무는 널리 알려졌으며 그것을 보기 위해 긴 여행을 해오 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산 서쪽 바다 동쪽에 있는 유일한 말론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중 하나였다. 샤이어에서의 1420년은 정말 경이로운 한 해였다. 시기에 맞춰 완벽할 정도의 햇 살이 내리쬐고 달콤한 비가 내렸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즉 생성과 풍요의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중간계에서 반짝이다 사라져 가는 여름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빛이 비쳐들었다. 그해에 태어나거나 잉태된 아이들 은-그 어느 해보다 많았는데-모두 아름답고 건강했으며 대부분 이전의 호비트들 에게는 드물었던 풍성한 황금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과일이 풍성하게 수확돼 어린 호비트들은 딸기와 크림으로 거의 목욕을 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오얏나무 아 래 잔디에 앉아 한번 먹기 시작하면 조그만 피라밋 더미를 만들고야 일어났다. 병 에 걸린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풀도 너무 잘 자라 제초를 담당한 호비트를 제외하 곤 모두 만족스러웠다. 사우스파딩의 포도나무는 열매로 가지가 축 늘어졌으며 연초 생산량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모든 곳에 곡물이 많이 수확되어 추수기에는 헛간마다 빈 공간이 없었 다. 노스파딩의 보리는 특히 훌릉해 1420년산 맥주는 오랫동안 기억되었고 하나 의 전설이 되었다. 실제로 한 세대가 지난 후 한 노인이 주막에서 맥주 한 파인트 를 마시고 한숨을 쉬고 잔을 놓으며 "1420년산 맥주는 정말 훌륭했어.'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잼은 처음에는 프로도와 함께 코튼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새 길'이 완성되자 아버지와 함께 옳겨 갔다. 다른 일말고도 그는 백 엔드를 정리하고 복구하느라 바 빴다. 그러나 그는 종종 샤이어를 떠나 숲에서 일을 했다. 그는 3월초에 집에 있지 않아 프로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달 십삼일에 농부 코튼은 프로도 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목에 건 목걸이에 달린 흰 보석을 움켜쥐 고 있었으며 반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영원히 가 버렸어.이젠 모든 것은 어둡고 텅 비었어." 그러나 증세는 곧 사라졌고 25일 샘이 돌아왔을 때 프로도는 회복되어 자신에 대 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 백 엔드는 정리가 끝났고 메리와 피핀이 옛 가 구와 도구를 가지고 크릭할로우에서 돌아와 곧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프로도는 말했다. "이제 이리 와서 나와 같이 살 텐가,샘?' 샘은 약간 난처한 듯했다. "원치 않는다면 급히 올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아버님이 가까이 계시니 좋지 않은 가.또 과수댁 럼블부인이 아버님을 잘 보살펴 드릴 거야." "그게 아니에요, 프로도씨." 샘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면 뭔가, 샘?' "로지, 로우즈 코튼 말이에요. 그녀는 제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 아요.아직 제가 터놓고 말한 적이 없으니 그녀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요.제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우선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 때가 돼 말을 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당신은 일 년이나 낭비했는데 무엇 때문에 더 기다려야 해요?그래서 전 이렇게 말했어요.'낭비했다고? 난 그렇게 말할 수 없어.' 하지만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저도 이해해요. 전 정말 둘로 갈라 진 느낌 이 들어요." "알겠네.자넨 결혼하길 원하고 또 나와 함께 백 엔드에 살고도 싶단 맡이지?그 렇다면 여보게,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게.그리고 로지와 함 께 옮겨 오게.백 엔드에는 자네가 아무리 식구가 많기를 바란다고 해도 방은 충분 해.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샘 갬기는 로우즈 코튼과 1420년 봄(이해는 그들의 결혼 때문에 또한 오래 기억되었다)에 결혼하고 백 엔드에 와 살았다. 샘이 자신을 운이 좋 다고 생각했다면 프로도는 자신이 더 운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샤 이어 전체를 통해 그처럼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는 호비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 구작업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동안 그는 많은 글을 쓰고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조용 한 나날을 보냈다. 그해 한여름에 열린 '바자회'에서 그는 시장대리직을 사임했고 늙은 월 위트푸트가 다시 칠 년 간 바자회를 주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메리와 피핀은 얼마간 크릭할로우에서 함께 살았으며 버크랜드와 백 엔드 사이에 는 꾸준한 왕래가 있었다. 두 젊은 호비트는 자신들의 노래와 이야기,장신구와 경 이로운 방문객들로 샤이어에서 이채를 띠었다. 주민들은 그들을 '귀족적'이라고 말 했으며 그 말은 좋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이 빛나는 갑옷을 입고 훌륭한 방 패를 든 채 먼 곳의 노래를 부르며 말을 달리는 것을 볼 때 호비트들의 마음은 들 뜨곤 했다. 그들은 비록 키가 커지고 몸집도 강건해졌지만 다른 면에서는 별로 변 하지 않았으며 이전보다 더 공정하게 말하고 더 명랑하고 쾌활해진 것이 달라졌다 면 달라진 점 이 었다. 그러나 프로도와 샘은 필요할 때만 섬세하게 짜여진, 아름다운 브로치로 목부분 을 고정시키게 만들어진 긴 회색 망또를 입을 뿐 보통 때는 평상복으로 지냈다. 프 로도는 흰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있었으며 종종 보석을 만지곤 했 다. 이제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갔고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샘은 다른 어느 호비트보다 바쁘고 기뻤다. 주인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제외하고 는 어떤 것도 그해에 걱정되는 일이 없었다. 프로도는 샤이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조용히 물러났으며 샘은 주인이 고향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고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다. 그의 행적이나 모험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고 알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들의 경탄과 존경은 대개 메리아독과 페레그린에게 그리고 (샘 자신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샘에게 쏟아졌다. 가을이 되자 옛 고통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어느 날 저녁 샘이 서재에 들어갔을 때 주인이 아주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매우 창백했으며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프로도씨, 무슨 일이세요?' "난 상처를 입었었지.상처를 입었어.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야." 그리고나서 그는 일어났다. 고통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한참후에야 샘은 그날이 10 월 6일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이 년 전 그날 그들은 웨더톱 아래 작은 계곡에서 암 울한 시간을 보낸 바 있었다. 세월이 흘러 1421년이 되었다. 프로도는 3월이 되자 다시 앓았지만 샘에게는 다른 신경쓸 일이 많았기에 애써서 그 사실을 숨겼다. 3월 25일 샘과 로지의 첫 아기가 태어났다. 샘은 그날을 기록해 두었다. "저, 프로도씨, 전 지금 난처한 입장에 빠졌어요. 프로도씨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린 첫 아기 이름을 프로도라 지을 작정이었지요.한데 사내애가 아니라 딸애거든 요. 다행히 저보다는 로지를 많이 닮아서 아주 예쁜 아기예요.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샘,옛 관습이 좋지 않은가?로우즈처럼 꽃이름을 따게나.샤이어의 여자 중 반은 꽃이름을 따른 거잖나.더 좋은 이름이 있을까?' "프로도씨 말씀이 옳아요.여행중에 아름다운 꽃이름을 몇 가지 들었지만 그 이름 들은 매일 부르고 쓰는 덴 좀 거창한 것 같아요.아버지는 늘 '이름은 짧게 지어라. 그래야 이름을 부르기 전에 다시 짧게 줄일 필요가 없으니까.'하고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꽃이름이라면 길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아름다운 꽃이어야만 하지요.제 생 각앤 아기가 아주 예쁘고 앞으론 더 아름다워질 것 같거든요." 프로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럼, 샘, 엘라노어가 어떨까? 로스로리엔의 초원에서 본 그 자그마한 금빛 꽃, 태양별이라는 꽃 말이야." "좋아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예요." 샘은 기뻐 소리질렀다. 어린 엘라노어가 거의 육 개월쯤 되고 1421년도 가을에 접어들었을 무렵 프로도 는 샘을 서재로 불렀다. "목요일이 빌보아저씨 생신이라네,샘.그러면 그분은 올드 투크씨를 능가하게 되 는 거야. 백서른하나가 되시는 거야." '렇군요. 정말 놀라우신 분이세요" "그런데 샘,자네와 내가 떠난 동안 로지 혼자 일해 나갈 수 있는지 알아 봐 주겠 나? 물론 이제 자넨 오래 떠나 있을 수야 없겠지만 말이야." 프로도는 질투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물론 그럴 수야 없지요, 프로도씨." "그렇겠지. 하지만 신경쓰지 말게. 로지에게 이 주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게.그리고나서 자네는 아주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전 프로도씨와 함께 리벤델로 가서 빌보씨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있고 싶은 곳은 바로 여기예요 저는 둘로 쪼개졌나 봐요." "불쌍한 샘.아마 그렇게 느껴지겠지.하지만 곧 나아질 걸세.자네는 굳세고 흔들 리지 않는 호비트니까.앞으로도 그럴 걸세." 다음 이틀 동안 프로도는 샘과 함께 자신의 원고와 글들을 홅어보고 열쇠를 넘겨 주었다. 수수한 붉은 표지로 된 큰 책은 거의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 몇 장은 가 느다랗고 두서없는 빌보의 필체였으나 대부분은 강하고 유려한 프로도의 필체였 다. 그것은 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제80장은 미완으로 여백이 남아 있었다. 속표지 에는 여러 제목이 달렸는데 줄을 긋고 다시 쓴 흔적들이 있었다. 나의 일기. 나의 대단치 않았던 여행. 그곳에서 그리고 다시 여기로.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가. 다섯 호비트들의 모험. 위대한 반지의 이야기. 빌보 배긴스가 자신의 관찰과 친구들의 기록을 통해 편집함.반지의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튼가. 이 부분에서 빌보의 기록이 끝났고 그 이후는 프로도가 기록한 것이었다 반지군주의 몰락과 왕의 귀환 (작은 이들이 본 바를 기록함.샤이어의 빌보와 프로도의 회상록.친구들의 기록과 현 인들의 지식으로 보완되었음) 리벤델에서 빌보가 번역한 '전승록'의 초록을 첨부함. "아니,거의 다 끝내셨군요,프로도씨! 끊임없이 써오셨군요." 샘은 경탄해 외쳤다. "난 완전히 끝냈어, 샘. 나머지는 자네를 위한 걸세." 그들은9월 21일 함께 출발했다. 프로도는 미나스 티리스에서부터 그를 태우고 왔 던, 지금은 스트라이더라 불리는 조랑말을 탔고 샘은 그가 사랑하는 빌을 타고 떠 났다. 아름다운 황금빛 아침이었고 샘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짐작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들은 언덕을 넘어 스톡 로드를 택해 우디 엔드를 향했다. 그들은 조랑말들이 걷 는 대로 맡기고 여유있게 나아갔다. 그린 힐에서 야영을 한 후 9월 22일 해가 기울 어 갈 무렬 숲의 경계에 들어섰다. "바로 저 나무가 어둠의 기사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 숨었던 거예요,프로도씨. 이젠 마치 꿈슥의 일 같아요." 샘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부러진 참나무를 지나 방향을 바꿔 개암나무숲 사이의 언덕길을 따라 내려갔다. 동쪽 하늘에는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샘은 조용히 기억 속에 잠겨 있었다. 곧 그는 프로도가 나지막하 게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그건 과거에 부르던 노래였지만 가사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모퉁이를 돌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새로운 길, 비밀의 문이. 종종 지나치곤 했지만 언젠가 그날이 오면 달 서쪽, 태양의 동쪽으로 나 있는 숨어 있는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거야. 마치 그 노래에 대한 응답이기라도 한 듯 저 아래 계곡으로부터 노랫소리가 길을 따라 울려왔다. 아! 엘베레스 길도니엘! 실리브렌 펜나 미리엘 오 메넬 아글가르 엘레나스 길도니 엘, 아! 엘베 레스! 우린 기 억한다네, 나무 아래 이 먼 곳에 사는 우리들은, 서쪽 바다에 비치는 별빛을. 프로도와 샘은 그림자 아래 앉아 기다리며 여행자들이 그들을 향해 오는 동안 가 물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그들은 길도르를 비롯한 아름다운 요정들이었다. 샘은 그 가운데 섞여 있는 이들 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이 함께 왔던 것이다. 엘론드는 회 색 망또를 걸치고 이마에는 별을 달았으며 하프를 쥔 손에는 크고 푸른 보석이 박 힌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바로 그 반지가 요정의 세 반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빌 랴였다. 갈라드리엘은 백마를 타고 빛나는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녀 자신이 부 드러운 빛을 발하는 듯 보였기에 그녀의 옷은 마치 달을 가린 구름과 같았다. 그녀 의 손가락에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세 반지 중의 하나인 네냐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에는 얼어붙은 별처럼 명멸하는 흰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 뒤를 자그만 회색 말을 타고 졸면서 따라오는 이는 바로 빌보였다. 엘론드는 그들에게 정중하고 품위있게 인사를 했고 갈리드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자,샘와이즈 당신이 내 선물을 훌릉하게 사용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이제 샤이 어는 전보다 더 축복받고 사랑스러운 곳이 될 거예요." 샘은 절을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사실 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빌보가 눈을 떴다. "어,프로도! 자,오늘로서 난 올드 투크를 이겼네.그러니 시합은 끝난 거야.이젠 다른 여행 준비가 되었다네. 자네도 가는가?' "네,저도 갑니다. 반지의 사자들은 함께 가야지요." "프로도씨, 어 디로 가시는 거예요!"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게 된 샘이 소리첬다. "샘, 항구로 간다네." "그럼 전 함께 갈 수 없는 건가요?' "그래, 아직은 항구를 지나 그 너머로 갈 수 없다네. 자네도 얼마간 반지의 사자이 긴 했지만.하지만 자네에게도 그 시간이 올 걸세.너무 슬퍼 말게나,샘. 자넨 항상 두 쪽으로 갈라져 있을 수는 없어. 여러 해 동안 자네는 하나로 합쳐진 삶을 누리 게 될 거야.자네에겐 즐겨야 할 일도,존재해야 할 이유도,또 할 일도 너무 많아." "하지만 그 큰 일을 이루신 프로도씨도 샤이어에서 오랫돌안 즐거운 나날을 보내 실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샘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도 한땐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내 상처는 너무 깊어.난 샤이어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이제 구해졌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어. 무엇인가 위험에 빠졌을 때 이런 일은 종종 있는 거야.누군가는 포기하고 잃어 버려야 다른 이들이 그것을 영유할 수 있지.하지만 자넨 내 상속자야.내가 가진 모든 것과 가지게 될 모든 것 을 자네에게 남겨 주겠네.또한 자네에겐 로우즈와 엘라노어가 있잖은가. 이제 꼬마 프로도가 태어날 테고 꼬마 로지와 메리,골디록스,피핀,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의 아기들을 갖게 될 걸세. 자네의 손과 기지는 어디에서나 필요할 거야.물론 자네는 오랫동안 시장이 될 거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원사로 남을 걸세. 또 자네는 『레 드 북』을 읽어 주고 지나간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 사람들에게 그 '커다란 위험'을 상기시켜 주어 그들의 사랑스런 대지를 더 사랑하게 만들 걸세. 자네의 역할이 지 속되는 동안 자넨 그런 일들로 누구보다도 바쁘고 행복할 거야.자, 이제 함께 가 세." 그리고나서 엘론드와 갈라드리엘은 말을 타고 갔다. 이제 제3시대는 끝이 났고 반 지들이 지배하는 시대도 지나간 것이다. 그 시절의 이야기와 노래는 결말이 난 것 이었다. 이제 더이상 중간계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 고귀한 헐통의 요정들이 그들과 함께 갔다. 그들 중 샘과 프로도,빌보는 슬프긴 하지만 비통하지 않은,축복받은 슬 픔을 느끼며 말을 달렸다. 그리고 요정들은 즐거이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밤 동안 샤이어의 중앙지역을 통과했지만 야생동물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다만 방랑자들만이 어둠 속 나무 밑을 재빨리 스쳐지나가는 어렴풋한 빛을 보거나 또는 달이 넘어가고 있을 무렵 풀밭 사이로 흐르는 빛과 그 림자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샤이어를 지나 화이트 다운즈 남쪽 변방으로 갔 고 파 다운즈와 타워스에 도착해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스론 드에 이르러 룬의 긴 협만에 위치한 회색항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이 항구 입구에 이르자 신성한 뱃사공 키르단이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인사 했다. 그는 키가 매우 컸으며 수염이 길었고 별처럼 빛나는 눈을 빼곤 아주 늙어 보였다. 그는 인사하며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소." 그리고나서 키르단은 그들을 항구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흰 배 한 척이 있었으며 부두에는 온통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다 가오자 프로도는 그가 갠달프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에는 세 반지 중의 하나인 위대한 나랴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에 박힌 보석은 불처럼 빨갰다. 이제 갠달프와 그들은 함께 떠날 것이기에 배를 탈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샘은 가슴 깊이 슬퍼했다. 그리고 이별이 쓰라린 것이라면 집으로 흘로 돌 아가는 길은 더 비통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요정들이 배에 오르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메리와 피핀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피핀은 그 와중에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프로도, 전에도 우릴 떼놓고 달아나려다 실패했었지요 이번에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역시 실패예요. 하지만 이번에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은 샘이 아니라 갠달프 예요." 그러자 갠달프가 말헌다. "그랬지. 혼자 돌아가는 것보다는 셋이 함께 돌아가는 게 나을 걸세. 자, 마침내, 여기 해안에서,중간계에서의 우리의 친교에 끝을 맺게 되었군.마음 편히 돌아가게 나.울지 말라고 하진 않겠어.눈물이라고 전부 다 불행의 눈물은 아니니까." 프로도는 메리와 피핀에게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샘에게 입을 맞춘 다음 배에 올랐다. 돛이 펼쳐지고 바람이 불자 배는 천천히 길고 회색으로 빛나는 부두를 따 라 미끌어져 갔다. 프로도가 들고 있던 갈라드리엘의 유리병이 반짝이다가 사라져 버렸다. 배는 높은 파도 사이로 들어가 서쪽으로 계속 항해했다. 한밤중에 비가 내 리자 프로도는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수면 위에 퍼지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마치 봄바딜의 집에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회색빛 비의 장막이 은빛 유리로 변해 걷혀진 것처럼 보였고 그는 흰색 해안과 그 너머 태양 아래로 펼쳐진 녹색의 대지 를 보았다. 그러나 샘이 항구에 서 있는 동안 저녁은 어둠으로 깊어갔다. 그리고 잿빛 바다를 보는 동안 그는 물 위에서 그림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림자는 곧 서쪽으로 사 라져 버렸다. 그는 밤이 이슥해지도록 중간계의 해안에 부딪는 파도의 한숨소리와 나직한 속삭임을 들으며 서 있었다. 그 소리는 그의 가슴 깊은 곳어 가라앉았다. 그 의 곁에는 메리와 피핀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마침내 세 친구는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그 들은 샤이어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 길고 어두운 여정을 함께 하는 서로에게서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그들은 고원을 지나 동쪽 길을 달렸고 메리와 피핀은 버크랜드로 갔다. 벌써 그들 은 노래를 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샘은 방향을 돌려 해가 저물 무렵 언덕 으로 올라 계속 달렸다. 집에서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며 로우즈와 엘라노어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우즈 는 그를 의자에 앉히고 꼬마 엘라노어를 두릎에 올려 주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자, 이제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