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입문 어는 의미에서 여성이 성에 눈 뜨는 것은,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어렸을 때부 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입술,항문,성기의 여러 단계에서 성년기에 이르기까지, 이론 적이고 실제적인 수련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적령기의 젊은 처녀의 색정적인 경험 은 종래의 성적 활동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색정적 경험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난폭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언제나 과거와의 결별을 초래하는 새로운 사건이 된다. 이런 색정적인 경험을 거치는 시기에, 젊은 처녀가 당면하 는 모든 문제는 절박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 위기는 간단히 해결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자살이나 광기를 수반해야 비로서 해결되는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어쨌든 색 정적 경험에 반응하는 방법에 따라 운명의 대부분이 좌우된다. 색정적 경험의 첫걸음이 젊 은 처녀에게 대단히 큰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정신과 의사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것은 전 생애에 영향을 주게 된다.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동시에서 살펴볼 때,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성은 유년기의 성적 본능에서 성숙기로 옮아가는 과정이 비 교적 간단하다. 거기에는 색정적 쾌락의 객관화가 있으며 그것은 그 내재적 존재 속에 실 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초월적 존재 위에 의지화된다. 발기는 이 욕구의 표현이다. 남 성은 성기, 양손, 입 등 육체 전체로 상대방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그는 이 활동에서도 여 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각하고 있는 객체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도구에 대해 주체 로서 머물고 있다. 그는 이 자주성을 잃지 않고 타자에게 몸을 던진다. 이 경우에 여성의 육체는 그에게 하나의 먹이이며, 그는 자기의 육감이 모든 것에 대해 요구하는 특질을 여성에게서 포착한다. 그는 물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 러나 적어도 그는 그것을 포옹한다. 애무와 키스는 반쯤 실패한다. 그러나 이 실패 자체도 하나의 자극이고 희열이다. 사랑의 행위는 그 자연스러운 결말, 즉 오르가슴(성적 황홀) 속에 통일을 발견하게 된다. 성교는 분명한 생리적인 목적을 갖고 있으며, 남성은 사정에 의해, 그를 억압하고 있던 분비물을 방출한다. 그는 발정한 다음에는 완전한 해방의 소원 을 이루며 여기에는 분명한 쾌락이 뒤따른다. 이 경우에 물론 쾌락만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에는 흔히 환멸이 온다. 욕구가 충족되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의 분명한 행위가 성취되면 남성은 다시 완전한 육체로 돌아간다. 그가 여성에게 한 봉사는 자기 자신의 쾌락과 융합되어 있었다. 여성의 색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것은 여성의 입장의 복잡성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성은 자기의 능력을 자기의 생활과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그녀들 의 목적과 상반된 이해관계를 갖는 종에게 희생된다. 이 모순은 여성에게 있어서 그 절정 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특히 음핵과 질이라는 두 기관의 대치에 의해 표현된다. 유아기에는 전자가 에로 티시즘의 중심이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여성들에게는 질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 장하지만, 그것은 거의 날조된 견해이며 제2차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한다. 성년기에도 음핵의 조직은 변화하지 않고, 여성은 한 평생 이 색정적 자주성을 보유한다. 음핵의 경련 은 남성의 오르가슴처럼 반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발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 인 성교에는 간접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며 생식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성이 수 태하게 되는 것은 질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남성의 개입으로 비로서 색정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개입은 언제나 일종의 폭행의 형태를 취한다. 옛날에 여성은 사실상의, 혹은 위장된 형태의 약탈에 의해 어린이의 세계에서 떼어내어 아내로서의 생활에 투입되었다. 그녀를 처녀에서 여성으로 바꾸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처녀성을 빼앗는다거나, 처녀의 꽃을 꺽는다고 말한다. 이런 처녀성의 상실은 연속적인 발 전의 원활한 결말이 아니라,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며 새로운 과정의 시작이다. 그때 쾌 락은 질의 내부 표면의 수축에 의해 얻게 된다. 이 수축은 명확한 오르가슴으로 이루어지 는 것일까? 이것은 아직도 논의되고 있는 점이다. 해부학의 결과도 매우 애매모호하다. '해부 및 임상은 질 내벽의 대부분에 신경이 분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 고 있다.' 고 킨제이 보고서는 말하고 있다. '질내의 많은 외과 수술은 마취약의 도움을 받 지 않고서도 할 수 있다. 질내의 신경은 음경의 바닥에 가까운 내벽 속에 있는 부분에 국 한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신경이 있는 부분의 자극 이외에 '암컷은 질내에 물체가 삽입된것을, 특히 질근육의 수축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느끼는 쾌감 은 아마도 신경의 색정적 자극보다도 근육의 탄력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질의 쾌감이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질의 마스터베이 션이라는 것도 (성숙한 여성에게 있어서는) 킨제이 보고서 이상으로 성행되고 있는 것으 로 생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질의 반응은 대단히 복잡하여 심리적,생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반응은 신경계통 전반에 관계 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 든 면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 밑바닥으로부터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최초의 교접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색정 감각권이 분명히 확립되려면, 신경계통에 일종의'몽타주'를 이루는 것과, 아직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윽고 음핵 감각계통을 덮게 될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실현에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여, 때로는 전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이 두 감각권에서 어느 한쪽을 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둘 중의 하나는 어린시절의 독립을 연장시키고, 다른 하나는 남성과 아이 에게 그녀를 바치는 것이다. 정상인 성행위는 사실 여성을 남성과 종에 예속시킨다. 공격 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며, 그녀는 그의 포 옹에 따를 뿐이다. 보통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정복될 수 있으나, 남성은 페니스가 발기 상태에 있지 않으면 그녀를 정복할 수 없다. 처녀막 이상으로 확실하게 봉하는 질경련과 같은 강한 반항의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의 거부는 극복될 수 있다. 질경련의 경우에도, 남성에게는 그의 완력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육체를 상대로 하여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남아 있다. 여성은 개체인 이상, 그녀의 무기력도 그 본래의 역할과 별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 래서 많은 남성은 그들과 동침하는 여성이 성교를 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따르고 있을 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성의 동의가 없이는 하지 못하며, 그 자연스러운 결말은 남성의 만족이다. 여성은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 이 된다. 그리고 임신은 그녀에게 성적과정의 완성이기는 커녕 오히려 바로 그 순간부터 종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봉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임신,분만,포유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괴롭게 실현되어 간다. 남성과 여성의'해부학적 숙명'은 이처럼 크게 다르다. 그 도덕적,사회적인 입장도 마찬가 지로 다르다. 족장제 문화는 여성을 정결에 바쳤다. 남성이 그 성욕을 만족시키는 권리는 공공연히 인정되는 반면에, 여성은 결혼 속에 갇히게 마련이다. 그녀들에게 성행위는 그것 이 법률이나 의식에 의해 신성시되지 않는 한, 과실이며 타락이고 패배이며 약점이다. 그 녀는 그 정조와 명예를 지켜야 한다. 만일 몸을 함부로 허락하거나 타락하면 그녀는 경멸 의 대상이 된다. 한편 그녀를 정복한 남성에게는 퍼붓는 비난 속에는 찬탄의 뜻도 담겨 있 다. 원시문명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도 침대는 여성에게'봉사'의 현장으로 인식 되고 남성은 선물로 혹은 그녀를 부양함으로써 그 봉사에 대한 감사를 표시해 왔다. 결혼 의 구조 자체가 매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증거이다. 여성이 몸을 주면 남성은 그 대사를 주고 소유한다, 남성이 약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녀와의 정사는 언제나 관대하게 봐왔으나, 운전수나 정원사에게 몸을 맡긴 부인은 사회적으로 명예를 잃게 된다. 인종적 편견이 강한 남부 미국인은 오늘날에도 남북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흑인여성과 동침하는 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들이 권리를 영주의 교만으로 행사해 왔 으나, 백인여성이 흑인과 동침했을 경우에는 노예시대라면 죽음을 당했을 것이고, 오늘날 에는 린치를 당할 것이다. 남성은 어떤 여성과 동침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녀를 '소유했 다'거나'가졌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가졌다'고 말하고 싶을 경우에는 속된 말로 그 남자와'잤다'고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성을 모르는 여성을'정복되지 않은 처녀'라 고 불렀다. 로마인을 메살리나에게'굴하지 않는'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애인 중에 단 한사람도 그녀에게 쾌락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남성에게 성행위는 정복이고 승리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페니스의 발기가 의욕적인 행위의 시시한 모방처럼 보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막상 자기의 경우가 되면 남성 은 누구나 자기 페니스의 발기를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남성의 섹스용어는 군대용어에서 그 발상을 얻고 있다. 애인은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처럼 팽팽하여 사 정할 때에는'발사한다.'그것은 기관총이고 대포이다. 남성은 공격이나 습격이나 승리니 하 는 말을 함부로 한다. 그의 성적 흥분 속에는 어떤 영웅취미가 있다.'어떤 존재의 또 하나 의 존재에 대한 지배로 성립되는 생식행위는 한쪽은 정복자의 느낌을, 다른쪽에는 정복된 자의 느낌을 강요한다. 그리고 가장 문명화된 연애관계를 취급할 때에도 전쟁의 개념에 연 애의 개념을 투영하여, 정복.공격.습격.공방전.패배.항복등의 말을 사용한다. 한 존재가 다 른 존재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더럽히는 쪽에 일종의 자랑스러움을 안겨주고, 더럽혀지는 쪽에는 동의했을 경우라고 다소의 굴욕감을 주게 된다.'라고 뱅다는 쓰고 있다.(유리엘의 보고에서) 이 마지막 구절은 새로운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즉 남성은 여성을 더럽힌다는 신화이 다. 사실 정액은 배설물이 아니다.밤의 오염(몽정)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자 연스러운 목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피가 깨끗한 옷을 더럽히는 경우가 있 다고 해서, 그것이 오물이며 위를 더럽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남성들은 반대로 여성이 불결하다고 주장한다.'습기로 더러워져 있는'것은 그녀 쪽이며 그녀가 남성을 더럽 힌다고 한다. 어쨌든 더럽히는 쪽이 된다는 것은 막연한 우월성을 나타낼 뿐이다. 실제로 남성의 특권 적인 입장은 그의 생물학적.공격적인 역할이 가장으로서 또는 주인으로서 갖고 있는 사회 적 역할에 잘 결합되어 있는 데서 비롯된다. 생리학적인 차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 적인 역할을 통해서이다. 이 사회에서의 남성은 주권자이므로, 그는 그 절대성의 표시로서 욕망의 난폭성을 주장한다. 선천적으로 호색한 남자를 가리켜'강하다', '왕성하다'고 한다. 이것은 남성을 행동인, 초월자로 표시하는 형용사이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물체에 불과하 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는 '뜨겁다'또는'차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녀가 수동적인 성질만 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젊은 여성이 성욕에 눈뜨는 풍토는 청년이 그 주변에서 찾아내는 풍토와는 전 혀 다르다. 그리고 여성이 처음으로 남성과 부딪칠 때의 색정적인 태도는 대단히 복잡하 다. 흔히 처녀는 욕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남성이 그 관능을 눈뜨게 해준다고 말해 왔 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이 전설도 남성의 지배욕을 폭로하고 있다. 남성은 그 생활 의 반려인 여성에 대해, 그녀가 그에게 갖는 정욕까지도 자주적이 아니기를 바란다. 실제 로 남성도 여성과 접촉해야 비로서 정욕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대다수의 젊은 처녀는 남성이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을 때에도 열렬히 그 애무를 고대하고 있다. 이사도라 덩컨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남자아이와 같았던 나의 허리가 갑자기 둥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한없는 기대의 충동을 느낀다. 하나의 호소가 온몸에서 치밀어올랐다. 그 호소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했다. 나는 이제 밤잠을 설치면서 몸이 달아 올라 이리저리 뒤척이고 열병을 앓듯이 괴로워하고 있다. 슈테겔에게 자기 생애의 긴 고백을 한 어느 젊은 여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나한테는'신경의 간지러움' 이 필요했다. 나는 춤 에 열중하여 그 즐거움에 흠뻑 빠지기 위해 춤을 추면서 눈을 감았다... 춤을 추면서 나는 일종의 노출광 같은 짓을 했다. 관능이 수치심을 이겼기 때문이다. 처음 1년 동안 나는 열 심히 춤을 추었다. 나는 잠자기를 좋아하여 많이 잤다. 그리고 날마다 마스터베이션을 즐 겼는데, 대개 한 시간 동안이나 게속되었다... 나는 땀을 흘릴 때까지 마스터베이션을 하 고,피로하여 더는 계속할 수 없게 되면 잠을 자곤 했다... 나는 전신이 활활 달아올라 있었 으므로, 이런 나를 진정시켜주는 남성이 있었다면 싫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특정한 상대 가 아니라, 남성을 구하고 있었다. 오히려 처녀의 고민은 명확한 요구로 나타나지 않는 데 있다. 처녀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그녀에게는 유년시절의 공격적인 에로티시즘이 살아 남아 있다. 그녀의 최초의 충동은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포옹이나 소유의 욕 구를 갖고 있다. 자기가 갈망하는 먹이가 미각이나 후각이나 촉각을 통하여 그녀에게 가치 로 나타났을 때의 성질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성욕은 고립된 영역이 아닌, 관능 과 꿈과 기쁨의 연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청년은 남녀를 불문하고 매끈거리는 것. 크림 같은 것. 번들거리는 것. 부드러운 것. 그리고 탄력있는 것을 좋아한다. 즉 부서 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압력에 휘며,시선이나 손가락 밑을 미끄러져가는 것을 좋아한다. 남 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흔히 유방으로 비유하는 모래언덕의 기분 좋은 온기나 명주의 감 촉, 깃털이불의 솜털 같은 부드러움이나, 꽃과 과일의 우단 같은 살결에 매혹된다. 그리고 젊은 처녀는 파스텔의 창백한 색깔이나 베일의 망사직물, 엷은 모슬린의 향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거친 천이나 자갈.조약돌.쓴맛이나 코를 찌르는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육체를 애무했다. 그 나르시스즘 속에서,막연한 혹은 명료한 동성애적 경험 속에 그녀는 자기를 주체로 설정하고 다른 여성의 육체를 소 유하기를 원했다. 남성에게 부딪칠 때, 그녀는 자기 주먹과 입술로 먹이를 능동적으로 애 무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단단한 근육과 꺼칠꺼칠한 털이 많은 피부, 독한 냄새와 거친 모습을 지닌 남성은 그녀에게 달갑게 생각되기는 커녕 혐오감까지 일으킨다. 르네 비비앙 은 다음과 같이 그런 기분을 표시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취할 자격이 없다. ...나는 추한 남성들의 것이다. 당신의 머리칼이나 눈동자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머리칼이 길고 향기롭기 때문이다. 기질이 강한 여성에게 구체적인 소유의 경향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르네비비앙처럼 동 성애 쪽으로 기울어진다. 아니면 여성처럼 취급할 수 있는 남성에게서만 애정을 느끼게 된 다. 라실드(20세기 초 프랑스의 여류소설가)의 베누스씨의 여주인공은 한 젊은 애인을 사 들여 그 남성을 열렬히 애무하고 즐기지만, 자기의 처녀성은 잃지 않는다. 그 중에는 13,1 4세의 소년이나 유아만 애무하기를 즐기며, 성인남성에게는 몸을 허락하지 않는 여성도 있 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대다수의 여성들은 유년시절부터 일종의 수동적 인 성욕이 발달되어, 포옹이나 애무받기를 좋아하며, 사춘기 이후에는 특히 남성의 팔에 안겨 스스로 육신이 되기를 원한다. '남자는 잘 생기지 않아도 돼'하는 말을 그녀는 자주 들어왔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객체가 갖는 무기력한 특징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정 력과 완력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 속에서도 둘로 나뉘게 된다. 그녀는 자기를 가련한 물체로 변형시 키는 거친 포옹을 원한다. 그러나 난폭과 완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쾌한 방해물이 도 하다. 그녀의 정욕은 그녀의 피부와 손에 동시에 국부화된다. 그리고 한쪽의 요구는 다 른쪽의 요구와 부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거기서 그녀는 가급적 타협을 선택한다. 설사 그녀가 남성적이라고 해도, 바람직한 젊고 매력있는 남성에게 몸을 맡긴다. 미남청년에게 서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가속에서 신부의 희열과 신랑의 희 열 사이에 존재하는 정연한 조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가 상대방 남성에게서 얻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 상의 짐승과 꽃,보석이며 실개천이며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보물을 자기 손으로 잡 을 수 없다.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 때문에 그녀는 거세된 내시처럼 어색하고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소유욕은 이를 구체화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좌절된다. 게다가 남 성은 수동적인 역할을 거부한다. 때때로 젊은 처녀는 그 환경 때문에 상대방이 애무하면 동요한다. 하지만 얼굴을 쳐다볼 마음도 없고 애무에 보답할 생각도 없는 남성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감 중에는, 단지 남성의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 뿐만 아니라 깊은 실망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강조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적인 기쁨 은 오히려 성욕의 자발적인 약동을 억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은 손 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기쁨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적 쾌락과 하나로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수동적인 색정 자체의 여러 가지 요소가 애매모호하다. 접촉처럼 기분 나쁜 것은 없다. 손아귀에 들어 있는 어떤 물건이라도 혐오감 없이 으깨어버리는 남성들 중에도, 풀 포기나 짐승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육체는 명주나 비로드 에 약간 스치면, 때로는 기분 좋게 떨기도 하고 때로는 오싹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나의 어린시절 친구 중에 복숭아 열매를 보기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동 요에서 쾌감으로,초조에서 쾌락으로의 이행은 쉽게 이루어진다. 육체에 감기는 양팔은 피 난처나 보호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한편 감금하여 숨이 막히게 하기도 한다. 쳐녀의 경 우는 그 입장의 양면성 때문에 이 애매성이 영속된다. 그녀의 변신이 성취되어야 할 기관 은 아직 봉인되어있다. 그녀의 육체의 희미하게 불타는 듯한 호소는 전신에 퍼져 있으나, 성교가 이루어지는 곳만은 제외되어 있다. 처녀가 능동적인 색정을 만족시키는 것을 허용 하는 기관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를 수동성으로 단정하는 기관의 실제 경험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수동성도 아주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여성이 흥분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기관 에 여러가지 적극적인 현상이 생겨야 한다. 성감대의 신경감동, 몇 가지 발기조직의 팽창, 분비작용,체온상승, 맥박과 호흡의 항진 등이 그것이다. 정욕과 육감의 쾌락은 남성의 경우 와 마찬가지 여성에게서도 생명력의 소비를 요구한다. 여성의 욕구는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어는 의미에서는 능동적이며, 그것은 신경과 근육의 탄력에 의해 표명된다. 무감동하고 무 기력한 여성에게는 언제나 불감증이 따르게 된다. 체질적인 불감증이 있는지는 의문이지 만, 확실히 심리적인 인자가 여성의 색정능력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생리적인 결함이나 생활력의 감퇴가 성적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확실하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력이 스포츠처럼 의지적인 활동에 소모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성적 욕구를 저하시키는 일은 없다. 스칸디나비아의 여성들은 건강하고 튼튼하고 냉정하다.'정열 적인 기질'의 여성이란,이탈리아나 스페인 여성들처럼 나태와 욕정을 융합시키는, 즉 그 활 기를 모조리 육체에 쏟아 붓는 여성들이다. 자기를 객체가 되게 하는 것, 자기를 수동적이 되게 하는 것은, 수동적 객체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랑에 정열적인 여성이란, 잠들어 있 거나 죽어 있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 속에는 끊임없이 꺼졌다가 다시 발생하는 약동이 있 다. 이 약동이 사라졌을 때 마술적인 황홀이 생기고, 그 속에서 욕망이 영속된다. 그러나 격렬한 열정과, 몸을 맡기고 황홀해지는 상태의 균형은 깨지기 쉽다. 남성의 욕 망은 긴장이다. 그 욕망은 신경과 근육이 긴장해 있는 육체속에 들어갈 수 있다. 기관에 의지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자세나 동작은 남성의 욕망을 저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을 조장한다. 이와 반대로 모든 의지적인 노력은 여성의 육체가 '자기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 여성이 노력과 긴장을 요구하는 성교의 형태를 자연히 거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체위를 너무 급격히 자주 바꾸거나 행위에 너무 의식적인 조작을 요구하는 것은 황홀한 상태를 깨뜨리는 것이다. 급하고 거친 방법은 경련이나 수축, 또는 긴장을 일으키 는 경우가 있다. 여성들은 할퀴고 깨물고, 놀랄 만한 힘으로 그 몸을 활처럼 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을 때이며, 이런 클라이맥스는 우선 모든 억제가 없어지고, 몸의 모든 에너지가 성적으로 집중되어야 도달할 수 있다. 즉, 젊은 처녀가 상대방 남성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만 있어서는 자기 할일을 충분히 수행 한다고 볼 수 없다. 유순하고 무기력하고 멍청하게 있어서는 상대방이나 자기자신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 그녀의 젊은 육체도, 터부나 금기, 편견, 요구로 가득차 있는 그녀의 의식 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하나의 모험 속에서 능동적인 협력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런 조건에서는 여성의 색정의 출발이 결코 순탄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년시절이나 소녀시절에 있었던 사건이 뿌리 깊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저항은 물리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대개 젊은 처녀는 보고도 못 본 체한다. 그럴 때에는 그녀에게 내면적으로 심한 갈등이 일어난다. 엄격한 교육, 죄책감, 어머니에 대한 떳떳치 못한 심정이 강한 장벽이 된다. 처녀성은 어서나 흔히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한 결혼에 의하지 않고 처녀성을 잃는 것은 엄청난 재난처럼 생각된다. 유혹이나 습격에 의해 몸을 빼앗긴 처녀는 명예가 실추된 것으로 생각한다. 평소 같으면 택하지 않았을 남성에게 처녀를 제공하여, 몇 시간 사이에 성적입문의 일체를 정리해 버리려는'첫날밤'도 결코 감당 키 어려운 경험이다. 일반적으로'상황변화'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성격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여성 이 된다는 것은 과거와 영구히 절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다른 어는 것보다 도 극적이다. 그것은 어제와 내일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처녀를 그녀의 생활 에서 주요한 부분이 전개되고 있던 상상의 세계에서 끌어내어, 현실세계에 투입시킨다. 미 셸 레리스는 신혼의 잠자리를 투우와 비교하여'진리의 싸움터'라고 부른다. 이 표현이 가장 충실하게 가장 가공할 의미를 갖는 것은 처녀에 대해서이다. 약혼이나 연애, 구애기간동안, 설사 그녀가 아무리 어린애 같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예절과 공상에 익숙한 세계에서 살 아왔다.구애자들은 로맨틱한, 혹은 적어도 아부하는 말을 지껄였다. 또 속이는 것도 가능했 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진짜 눈에 보이고 진짜 손에 잡히게 된다. 이런 시선과 포옹의 엄연한 현실이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다. 해부학적 선천성과 사회풍습이 남성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한다. 하긴 동정인 젊은 남성에게는 첫 애인이 역시 지도자였다. 그러나 남성은 페니스의 발기가 명백히 표시하는 색정적인 자주성을 갖고 있다. 그의 애인은 그가 이미 갈망했던 대상을 실제로 그의 손에 넘겨준 것뿐이다. 그 대상이란 여성의 육체이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 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그녀의 의존성은 훨씬 뿌리가 깊다. 그 최초 의 경험에서 볼 때 남성에게는 능동성과 결단이 있다. 그것은 그가 상대방 여성을 돈으로 사는 경우나, 또는 그녀에게 구애하여 유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개의 젊은 처녀는 구애를 받고 유혹을 당한다. 그녀 쪽에서 남성에게 프로포즈했을 경우에도 남성은 그들의 관계를 주도한다. 남성이 연상이고 경험도 풍부한 경우가 많다. 이 새로운 모험에 책임을 지는 것은 으례 남성 쪽이다. 남성의 욕망은 보다 공격적이고 절대적이다. 애인이든 남편이든, 남성 쪽이 그녀를 침대로 이끌어가며, 그녀는 몸을 맡기고 복종하는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남성의 이런 권위를 인정하고 있을 때에도 실 제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되면, 다소 걱정이 앞선다. 우선 그녀는 자기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남성의 시선이 두렵다. 그녀가 느끼는 수치심의 일부는 교육의 결과지만, 보다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원래 남녀 모두 자기의 육체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다. 육체는 그 순수한 부동의 존재, 부당한 인내성 때문에 남의 눈으로 보면 인위적이고 부 조리한 우연으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자기자신'이다. 우리는 그것이 남을 위한 존재 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또한 육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남성들 중에는 페니스가 발 기하지 않으면 여성 앞에서 알몸이 되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 사실 육체는 이 발기에 의 해 활동이 되고 힘이 되므로 성기는 이미 무기력한 객체가 아니라, 손이나 얼굴과 마찬가 지로 구체성의 자랑스러운 표출이다. 총각이 처녀보다 수치심을 크게 느끼지 않은 이유의 하나가 이 때문이다. 그 공격정긴 역할 때문에 그들은 남에게 보여지는 입장에 서는 경우 가 적다. 설사 남에게 보여져도 비판을 받을 우려는 별로 없다. 그들의 애인은 결코 무기 력한 특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의식은 박력과 쾌락을 주는 성관계의 기 교 쪽으로 쏠리게 된다. 적어도 그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고, 승부에서 이기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자기의 육체를 의지로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자기의 육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면 그 육체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긴다. 여성은 마음속으로 애무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자기 육체가 남에게 보여지고 만져진다는 사실에 저항감을 느낀다. 유방이나 엉덩이가 유난히 발달된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많은 성 인여성들은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남이 등뒤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언짢게 여긴다. 풋내기 여성이 연인에게 자기 몸을 보여주는 데 동의하기까지는 많은 저항을 이겨내야 한 다. 아마 프리네(그리스의 창녀)와 같은 여성은 남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녀는 서슴지 않고 알몸이 된다. 그녀의 육체미가 그대로 옷이다. 그러나 설사 프리네와 같 은 미녀라 하더라도, 젊은 처녀라면 그대로 옷이다. 그러나 설사 프리네와 같은 미녀라 하 더라도, 젊은 처녀라면 그 육체미를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남성들이 입을 모아 찬미하여 그녀의 젊은 허영심을 확인시켜 줄 때, 비로서 그녀는 자기의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녀에게 하나의 걱정거리로 다가온다. 남성애인의 시선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그것은 심판관이다. 그 애인이야말로 그녀의 모 습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의 용모에 한껏 도취되어 있을 때에 도, 남성이 판결을 내리게 될 순간에는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그녀가 어둠을 요구하고 이 불 속에 몸을 감추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을 때는 공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는 남성의 눈을 통해 자기를 상상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눈은 바로 앞에 있다. 속일 수가 없다. 반항할 수도 없다. 신 비로운 자유가 판결을 내리고, 그 판결은 재심이 불가능하다. 색정적 경험의 현실적인 시 련 속에서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의 강박관념은 드디어 발산되거나 혹은 영구히 확립된다. 많은 처녀들은 너무 굵은 장딴지, 너무 빈약하거나 혹은 너무 부풀어오른 가슴,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허리, 너무 빈약하거나 튀어나온 엉덩이 때문에 몹시 괴로워한다. 혹은 남 에게 말할 수 없는 기형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슈테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감증의 여인에서) 젊은 처녀들은 저마다 스스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우스꽝스러운 걱정거리를 많이 안고 있다.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육체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지, 정상적인 육체라는 확신을 갖고 못하기 때문에 남몰래 괴로워하는지, 그 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처녀는 그녀의'아래 입구'가 제자리에 달려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배꼽으로 성교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처녀는 자기를 남성과 여 성이 혼합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또 한 처녀는 자기는 불구이므로 성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들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있어서의 타 인에게 있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기들의 신체의 어느 부분 을 갑자기 드러내게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처녀가 자기의 것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이 미지의 자기 모습은 혐오감을 일으키는가, 무관심을 초래하는가, 아이러니 를 여기시키는가? 그녀는 남성의 판결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도박은 시작되었다. 남성 의 태도가 나중까지 그처럼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정열과 애정은 여성에 게 자신감을 주게 되며, 그 자신감은 모든 부정을 초월한다. 80세가 되어도 그녀는 남성의 하룻밤 욕망에 의해 피어난 먼 나라의 꽃이며, 작은 새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애인이 나 남편이 서투른 남성이었을 경우에는, 그녀에게 열등 콤플렉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를 토대로 하여 연속적인 신경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는 그것이 한이 되고 그 한은 심한 불감증으로 나타난다. 슈테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충격적인 실례를 보고하고 있다. 30세가 되는 어떤 부인은 14년 전부터 심항 요통 때문에 몇 주일씩 자리에 누워 있어야 만 했다... 그녀가 그 통증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결혼한 첫날밤이었다. 통증이 심했으 나 성교를 하는 중에 남편은 이렇게 외쳤다. '감쪽같이 속았군. 당신은 처녀가 아니야...' 그녀가 느낀 허리의 통증은 그 괴로운 성교의 산물이었다. 그녀의 이 병은 남편에 대한 징벌이 되어, 그는 그 후 자주 치료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 부인은 보냈다... 결혼 첫날 밤은 그녀에게 미래 전체를 결정하는 슬픈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어떤 젊은 여성은 몇 가지 신경증, 특히 완전한 불감증 때문에 나의 진찰을 받았다...결 혼 첫 날밤에 남편은 그녀의 이불을 젖히고 '아니, 당신, 무다리잖아!'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녀는 완전한 불감증으로 통증만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그 첫 날밤의 모욕이 자기의 불감증의 원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불감증 여성의 말에 의하면, 결혼 첫 날밤에 남편이 그녀를 크게 모욕했다고 한 다. 그는 그녀가 옷을 벗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척 말랐군!'그리고 그는 애무하 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순간이 잊을 수 없는 지겨운 시간이었다. 이 얼마나 난폭한 짓인 가! Z. W. 부인도 완전한 불감증이었다. 결혼 첫날밤의 큰 상처는 남편이 처 성교 후 그녀 에게 '당신, 구멍이 너무 크군. 날 속인 거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눈은 위험하다. 손은 또 다른 위협이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폭력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 다. 그녀는 젊은 남성이 유년시절이나 소년시절에 격투를 통해 극복해 온 시련을, 즉 육체 가 타인에게 잡혀 물체처럼 되는 시련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타인에게 잡혀 남성 쪽이 강하게 마련인 격투장에 끌려 온 것이다. 그녀는 공상하거나, 후회하거나, 움직이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남성에게 맡겨지고 그는 그녀를 마음대로 다룬다. 한 번도 격투를 해본 일이 없는 그녀로서는, 격투와 비슷한 이 포옹은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녀는 약혼자나 남자친구, 남성동료, 또는 교양있고 예의바른 남성의 애무에 몸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낯설고 이기주의적이며 완강한 사나이로 변해 있다. 그 녀는 이 미지의 남성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다. 젊은 처녀의 최초의 경험은 문자 그대로 폭 행이며, 남성이 추악하고 난폭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풍습이 거친 시골에서 는 처녀들이 반동의,반강제로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 치욕과 공포 속에 처녀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아무튼 모든 환경, 모든 계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쾌락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이기주의적인 애인에 의해, 또는 결혼의 권리를 방패삼아 신부의 저항 을 모욕처럼 불쾌하게 여기며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분개까지 하는 남편에 의 해, 처녀성을 난폭하게 빼앗기는 일이다. 남성이 예의바르게 점잖을 경우에도, 최초의 접촉은 다소 거칠게 마련이다. 남성은 여성 이 자기 입술과 유방을 애무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또는 넓적다리 사이에서 예상되는 쾌 락을 탐내기 때문에, 불청객으로서 처녀를 찢고 국부로 들어간다. 남편이나 애인의 품에서 넋을 잃고 이것이 꿈꾸어 온 쾌락의 성취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뜻하지 않는 고통을 느끼 는 처녀의 괴로운 놀라움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꿈은 사라지고 심신의 흥분 은 가시고, 사랑은 외과수술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리프만 박사가 수집한(청년과 성욕이 란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발표) 고백 중에서 다음의 대표적인 이야기를 게재하려고 한다. 교양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나 성적으로 무지한 처녀의 경우이다. '나는 한 번만 키스를 주고받아도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18세때 어떤 남 자를 알게 되어 흔히 세상에서 말하듯이 반해 버렸어요.' 그녀는 자주 이 남자와 함께 외 출하고 남자는 그녀에게 쳐녀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몸을 맡겨야 한다. 남자는 성관계 없이 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결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까지는 처녀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먼 곳으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그에게 '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약속한 날 아침에 그 녀는 그 편지를 그에게 건네주었으나, 그는 읽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녀를 호텔로 데리고 갔다. 남성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억압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따라갔다. '나는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 같았어요. 도중에 나는 그에게 난폭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간청했어요... 어떻게 해서 호텔에 도착했는지 나는 통 알 수 없었어요. 다만 한 가 지 남아 있는 기억은 내 몸 전체가 심하게 떨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는 나를 열심히 달랬 지만 오랜 저항이 있은 후에야 겨우 목적을 이뤘어요. 나는 의지의 자유를 잃고 마지못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어요. 나중에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한 기분이었어요.'그녀는 이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 아 9년 동안이나 남자를 거부하고 살아왔다. 그녀가 한 남성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은 9년 후의 일이었다. 이 경우,처녀성의 상실은 일종의 폭행이다. 그러나 동의하고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괴로 운 경우가 있다. 젊은 이사도라 던컨을 어떤 정염이 괴롭혀 왔는지는 잘 아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떤 미남배우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그 쪽에서도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도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그를 꽉 껴안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 다. 드디어 어느날 저녁 그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미친 듯이 나를 소파위로 옮겨 놓았 다. 나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황홀감에 도취되었으나, 이어 고통을 못 이겨 외쳤다. 그때 나는 사랑의 동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최초의 인상은 심한 공포 감과 한꺼번에 여러 개의 이가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도 느끼고 있는 듯 한 고통의 모습이 가엾어서,나는 처음에 나만이 그처럼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이튿날) 나에게는 오직 괴로움에 불과했던 그 경험을 신음소리와 비명속 에서 다시 되풀이 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불구자가 된 느낌이었다. (나의 생애에서) 이런 경험을 한 그녀가, 처음에는 이 애인과 나중에는 다른 많은 애인들과 더불어 대단 히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낙원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경험에서 지금까지 처녀시절의 상상에서처럼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관통이라는 사실이 훨씬 큰 문제이다. 남성은 성교를 할 때 외부기관 만 관여한다. 그러나 여성은 자기의 내부까지 침범당한다. 물론 남성 쪽에서도 여성의 은 밀한 암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기분 나쁘게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동굴 이나 묘헐 입구에서 어린이가 느끼는 두려움, 즉 톱니바퀴나 낫이나 늑대의 덫 앞에서 느 끼는 두려움을 갖는다. 자기들의 발기된 페니스가 점막의 칼집 속에 박힌다고 상상한다. 여성은 한 번 관통되고 나면 다시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녀는 자 기가 드디어 육체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주는 자기 토지에 대해, 주부는 자기 집에 대해'출입금지'의 팻말을 세우고 각각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 특히 여성은 자 기의 초월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자기의 신변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 그녀들의 방,옷장,보 석함은 신성한 것이다. 콜레크는 늙은 창녀에게서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부인, 내 방에는 남성은 한 사람도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어요. 내가 남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파리라는 넓은 도시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자기의 육체가 못쓰게 되었다고 하 더라도 이 여성은 적어도 남에게 출입을 금지한 한 조작의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처녀는 자기 것이라고는 자기의 몸뚱이 하나뿐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 속에 남성이 쳐들어와서 그녀로부터 보물을 빼앗아간다. 빼앗아 간다는 말이야말로 산 경험으로 입증된다. 그녀는 예감했던 굴욕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그 녀는 지배를 받고 굴종을 당하고 내맡기게 된다. 암컷이 대개 그렇듯이, 그녀는 성교하는 동안에 남성의 밑에 있다. 아들러는 여기서 생기는 열등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상위,하위의 관념 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나무에 기어오른다는 것은 대단히 근사한 행동이다. 천국은 땅 보다 위에 있고, 지옥은 아래에 있다. 떨어지거나 내려가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고, 올라가 는 것은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레슬링에서의 승리는 상대방의 어깨를 바닥에 닿게 하 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여성은 침대에 패배의 자세로 드러눕는다. 남성이 마치 고삐나 재 갈에 매여 있는 짐승을 올라타듯 할 때에는 더욱 언짢다. 아무튼 그녀는 자기를 수동으로 간주한다. 애무를 받고 관통하면서 남성이 능동적으로 자기를 소비하는 동안에, 여성은 참게 마련이다. 물론 남성의 것은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니다. 그것은 쟁기도 아니고 검도 아닌 근육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 성은 그것을 마음대로 움직인다. 남성은 가고 오고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한편 여성 그 움직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사랑의 자세를 택하고 성교의 길이와 횟수를 정하는 쪽은 (특히 여성이 미경험인 경우는) 남성이다. 그녀는 자기를 기구처럼 느낀다. 자유는 모두 남성에게 있다. 여성은 바이올린에 비유되고, 남성은 그 바이올린을 켜는 활대로 비유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정신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거문고와 같은 것으로, 그것 을 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남성을 만나야 비로서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는다.'라고 발 자크는 말했다. 이 말 자체가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남성의 발정에는 어떤 빛나는 성격 을 부여하고, 여성의 성적 흥분은 불명예스러운 자기포기로 간주하는 집단적 심상으로 여 성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여성의 내적인 경험이 이 불균형을 확증하고 있다. 젊은 남성과 여성은 육체에 대한 느낌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남성은 이것을 태연하게 인정하고 그 욕망의 충족을 자랑스럽게 요구한다. 여성은 나르 시스즘(자기애)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은 정체불명의 불안하고 무거운 짐이다. 남성의 성 기는 손가락처럼 청결하고 간단하다. 남자아이는 그것을 순진하게 드러내놓고 도전하는 심 정으로 자랑스럽게 친구에게 보여줬다. 여성의 성기는 숨겨져 있고 불안하고 끈적거리고 축축하여, 여성 자신에게도 신비스럽다. 달마다 출혈이 있고 때로는 냉으로 더럽혀지며, 신 비롭고 위험한 생명을 갖고 있다. 여성이 그 욕망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은 그 성기 속에서 자기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큰 이유가 되어 있다. 그 욕망은 부끄러운 형태로 표명된다. 남성은 '팽팽한'데 반하여 여성은 '적셔진다.' 이 말 자체에 젖은 침대나 오줌을 잘못 누어 야단을 맞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남성도 무의식적인 몽정에 대해 이와 동일한 혐오감을 느낀다. 액체를 발사하는 것은 그것이 오줌이든 정액이든 굴욕 감은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능동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만일 액체가 수동적으로 새어 나 오는 경우에는 굴욕감을 느낀다. 그 경우 육체는 벌써 근육이나 괄약근, 뇌신경의 지배를 받아 의식적인 주체를 실현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나의 그릇, 즉 무기력한 물체로 만들어 져 기계적인 기분에 좌우되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육체에서 물이 새어 나올(마치 낡은 벽이나 시체에서처럼) 경우에는, 그것이 액체를 힘차게 발산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 고 액화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붕괴작용이 불쾌한 것이다. 여성의 발정은 마치 조개가 부드럽게 숨을 쉬는 것과 같다. 남성은 격렬성을 지니고 있 는 반면에 여성은 대기성밖에 갖고 있지 않다. 여성의 기대가 열렬한 경우도 있지만, 역시 수동적이다. 남성은 솔개나 수리처럼 먹이를 향해 덤벼든다. 그러나 여성은 마치 육식식물 이나 곤충,어린이가 미끄러져 빠지는 늪처럼 대기하고 있다. 그녀는 빨아먹고 짜먹고 들이 마신다. 그녀는 송진이며, 끈끈이다. 부동의, 침투하는, 점착성의 유혹이다, 적어도 그녀는 은근히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녀에게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남성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내부의 투쟁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가 받은 교육이나 사회가 명한 타부(금기)나 억압위에, 색정경험 자체에서 비롯되는 혐오나 거부감이 겹쳐 있다. 이 양자가 서로 강화 되는 결과가 되어, 최초의 성교 후에 여성은 자기의 숙명에 대해 전보다 더 강한 반항심을 갖기 쉽다. 마지막으로 종종 남성을 적대시하고 성행위를 큰 위험으로 변형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 이 있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두려움이다. 흔히 문명사회에서나 사생아는 결혼하지 낳은 여성에게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핸디캡이 되므로,젊은 처녀는 임신하게 되면 자살을 하거 나,미혼녀가 갓난아기를 목졸라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위험이 강력한 성적 브레이크 (제동기)의 역할을 하여, 많은 젊은 처녀들이 풍습이 요구하는 순결을 지키고 있다. 그 브 레이크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때 그녀들은 애인에게 몸을 맡기면서,남성이 자기 뱃속에 투입하는 무서운 위험에 두려움을 느낀다. 슈테켈이 인용하고 있는 말 중의 하나는 '괜찮겠지요! 괜찮겠지요!'라는 젊은 처녀의 예가 있다. 결혼을 하고서도 아기를 원치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강이 좋이 않다거나, 아기가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경우이다. 애인이든 남편이든 만일 그녀가 그 남성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을 때, 그녀의 색정은 경계심으로 말 미암아 마비된다. 그리하여 남성의 동작을 걱정하면서 감시하거나, 성교가 끝난 후에 본의 아니게 자기 뱃속에 들어간 생명의 싹을 배에서 몰아내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게 된다. 이런 위생적인 작용은 애무의 관능적인 마력을 무자비하게 지워버리고, 하나의 환희로 융 합했던 두 사람의 육체는 완전히 분리된다. 남성의 정액이 해로운 싹처럼 오염으로 생각되 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침대 위에서 남성은 태평스럽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녀는 마 치 더러워진 꽃병을 씻는 것처럼 자기 몸을 닦는다. 어떤 이혼한 젊은 여성은 불확실한 기 쁨을 간직한 결혼 첫 날밤을 치른 다음, 그녀의 신랑이 태평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 욕실에 들어박혀 있어야 했을 때의 불쾌한 심정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이 부부의 파탄은 결정된 것 같았다. 스포이트나 세척기에 대한 불쾌감은 불감 증이 생기는 원인의 하나이다. 좀더 확실하고 편리한 피임법의 존재는 여성의 성적 해방을 위해 크게 유용하다. 미국처럼 피임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처녀로 결혼하는 여성의 수는 프랑스에서보다 훨씬 적다. 이 피임법의 보급은 성행위에서 안도감을 증대시 킨다. 그래도 젊은 처녀는 자기의 육체를 물품으로 취급하기 전에 극복해야 하는 혐오가 있다. 남성에 의해 관통될 때 전율 없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남성의 정욕을 만족 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개'를 하는 것 역시 유쾌한 일이 못 된다. 자궁이 봉인되고,정충에 게 치명적인 어떤 마개를 자기 몸속에 넣어야 하는 냉철한 예방행위를 생각할 때, 육체와 성기의 애매성을 의식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성교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피임도구의 사용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남성도 많다. 성적인 매 순간을 정당화하는 것 은 그 전체의 태도이다. 하나하나 분석하면 혐오스럽게 생각되는 행위도 육체가 본래 갖고 있는 색정적인 위력에 의해 변모될 때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반대로 육 체와 행위를 무의미한 요소로 분해하면 곧 그 요소는 불결하고 외설스러운 것이 되고 만 다. 사랑하는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과 결합되고 융합되어 즐거운 가운데 경험하는 성행위 는 만일 그것이 흥분과 욕망,쾌락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는,그것은 어린이의 눈에 비 친 것처럼 혐오스러운 성격을 띄게 된다. 피임도구의 의식적인 사용에서 생기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예방은 어떤 여성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젊은 처 녀들은 임신의 위협에 대해 아무런 방어책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몸을 맡 긴 남성의 선심 하나에 매달린 채 불안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저항을 통하여 경험하는, 게다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젊은 처녀의 체 험이 때때로 가공할 만한 증상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재적인 조발 성 정신병이 첫경험의 충격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슈테겔은 그 몇가지 예를 들고 있다. 19세가 되는 M. G. 양은 갑자기 심한 착란증이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자기방에서 '난 싫어요! 싫어요,싫어요!' 하고 계속하여 고함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자기 옷을 찢고 알몸으로 복도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 결과 착란증은 가시고, 일종의 긴장상태로 변했다. 그녀는 속기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는 회사의 지배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은 한 명의 여자친구와 두 명의 남자동료와 함께 시골에 놀러갔다. 한 남자동료가 그녀에게 '그건 단지 장난에 지나지 않아요.'하고 굳게 약속하며 자기 방에 서 그 날 밤을 지내기를 요구했다. 그는 사흘 밤을 계속해서 그녀의 처녀성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를 애무했던 것 같다... 그녀는 '마치 개의 콧등과 같은 싸늘한 '태도를 견지하며, 그것은 더러운 짓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감동적으로 '알프레드,알프레 드(지배인의 이름)!'하고 외쳤다. 그녀는 후회했다. (어머니가 알면 뭐라고 할까) 그녀는 집에 돌아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L.X. 양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자주 울음을 터뜨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에 잠도 제 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는 환각에 사로잡혀 주위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창틀에 올라서 서 거리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이 23세의 젊은 처녀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들어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과 공포가 나타나 있었다. 양손은 마 치 자기 몸을 방어하려는 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꼬고 앉은 두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 이 움지기이고 있었다. 그녀는 '안 돼! 안 돼! 안 돼! 짐승 같으니, 이런 남성은 꽁꽁 묶 어놓아야 해, 아이 아파! 아!'하고 외쳤다. 그리고 영문 모를 말을 찌껄였다... 이 발작은 눈물로 조용히 끝났다... 병자는 마치 그것이 의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옷으로 몸을 감싸 며 '안 돼! 를 연발해왔다. 알고 보니 이미 결혼한 직장동료 한 사람이 그녀가 몸이 불편 할 때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그러는 곧 그녀는 자살의 유혹이 따르는 환 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병은 나았지만, 그 후에는 어떤 남성도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진지한 결혼신청도 거절했다. 같은 동기에서 생긴 병도 그처럼 중대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음은 잃어버린 처녀성에 대한 후회가 최초의 성교에서 생긴 정신착란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어떤 23세의 처녀는 여러 가지 공포증에 걸려 있다. 그녀의 병은 키스나 화장실에서의 접촉으로도 임신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남성이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나서 물속에 정액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욕조 를 세 번 씻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상적인 자세로 배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처녀막 파상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 춤을 추거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도 일체 하 지 않고, 성큼성큼 걸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길가에서 말뚝만 눈에 띄어도 난폭하게 처녀 성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 몸을 떨면서 멀리 돌아갔다. 그녀의 공포증의 다른 하나는 기차 안이나 군중 속에서 주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고약 한 일을 당하여 처녀성을 잃고 임신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병의 말기에는 침대나 속 옷에 바늘이 꽂혀 있어, 그것이 자기 성기 속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병자는 밤마다 알몸으로 방 한가운데 서 있고, 한편 그녀의 불행한 어머니는 힘든 속옷 검사를 하 도록 강요당했다... 그녀는 언제나 약혼자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다짐하고 있었다. 검시 결 과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처녀가 아니어서 만일 약혼자가 그 사실을 알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결혼을 연기해 나갔다. 결국 약혼자에게 자기가 어떤 테너가수에게 유혹을 받은 사실 을 고백하고, 그와 결혼하여 병이 나았다.(슈테켈의 <불감증의 여인>에서) 다른 한 예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은 후회(감각적인 만족에 의해 보상받지 못한) 이다. 20세인 H. S. 양은 어떤 여자친구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온 후로 몸이 몹시 쇠약해 졌다. 그녀는 방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고,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요 양원으로 데려갔으나, 상태는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그녀는 누가 자기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웃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 왔으나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나는 죄를 짓기 전에 오지 못했을까요?"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렸다. 나는 더럽혀졌 다.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고, 세계와의 다리는 끊겨 있다.'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녀는 로마에서 약혼자를 만나, 그곳에서 오랜 저항 끝에 그에게 몸을 맡겼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그녀는 그 약혼자와 전혀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 고 고백했다. 그녀는 새 애인을 만나자 병이 나았고, 그에게서 만족을 얻어 그와 결혼했다. 내가 전에 유년시절의 고백을 실은 <빈의 귀여운 소녀>는 그녀가 장성하여 겪은 최초 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세하고 심각한 것이다. 그녀의 소녀시절의 모험은 대 단히 조숙한 성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입문'은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나는 열여섯 살에 관청에 취직했어요.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휴가를 얻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근사한 기회였어요. 사방에서 내게 구혼을 해왔어요... 나는 관청의 한 동료 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공원에 갔어요. 1909년 4월 15일에 있었던 일이에요. 그는 벤치에 앉아 나를 자기 곁에 앉혔어요. 그는 나를 포옹하며 입술을 벌리라고 부탁했 으나,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어요. 그는 내 윗도리 단추를 풀기 시작했어요. 기꺼이 응하고 싶었지만, 아직 내 유방이 작은 것을 상기하고 그가 건드리기만 해도 느꼈을 쾌감 을 단념했어요... 4월 7일, 어떤 기혼자인 동료가 함께 박람회 구경을 가자고 했어요. 우리 는 저녁에 술을 마셨어요. 나는 다소 방심하여 애매한 농담도 지껄이기 시작했어요. 간청 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차를 불러 그 속에 나를 밀어넣고,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내게 키스 를 했어요. 그는 점점 대담해져서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나는 힘껏 저항했으나, 그 가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아요. 이튿날 나는 상당히 찜찜한 기분으로 출근했어 요. 그는 내게 양손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손은 내게 할퀴어 상처투성이였어요... 그는 나 에게 자기 집에 자주 놀러오라고 말했어요...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 승낙했어요... 그가 내 몸을 더듬을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피 했어요. 그런데 나보다 날렵한 그는 갑자기 나를 붙잡고 그의 손가락을 나의 질 속에 넣는 것이었어요. 나는 고통스러워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것은 1909년 6월 어느날에 있었던 일 이에요. 그후 나는 여자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어요. 두 명의 관광객이 우리를 따라왔어요. 그들은 우리 일행과 어울리기를 원했어요. 내 파트너가 된 남성은 내 친구에게 키스하려고 했으므 로 그녀는 주먹으로 그를 한대 갈겼어요. 그러자 그는 등뒤에서 나를 붙잡고 강제로 키스 했어요. 나는 거역하지 않았어요. 그는 따라오라고 나를 유혹했어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는 내게 키스했어요. 그가 내 성기에 키스했기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말했어요. 어떻게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는 내 손에 자기의 성기를 쥐어 주었어요... 나는 그것을 애무했어요... 갑자기 그는 내 손에서 그것을 빼고, 거기서 생기는 일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손수건을 갖다 대었어요... ... 이틀 후에 우리는 함께 리징으로 갔어요. 어느 쓸쓸한 들판에서 그는 갑자기 외투를 벗어서 풀 위에 깔았어요... 그는 자기의 한쪽 다리를 내 양쪽 다리 사이에 넣고 나를 쓰러 뜨렸어요. 그래도 나는 아직 내 입장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했어요. 나는 '나의 가장 아끼는 패물'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애원했어요. 그는 매우 거칠어져서 야비한 말을 내뱉으면서 경찰에 알리겠다고 나를 위협했어요. 그는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자기 페 니스를 내 몸에 집어넣었어요. 나는 죽는 줄만 알았어요. 뱃속이 온통 뒤틀리는 느낌이 들 었어요. 일이 끝났을 때 나는 그가 그다지 싫지 않았어요. 나는 옆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그는 나를 일으켜야 했어요. 그는 두 눈과 얼굴에 키스를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만일 그가 나를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장 님처럼 차 위에 넘어졌을 거예요... 우리는 2등 객실에서 단둘이 있었어요. 그는 다시 이상 한 몸짓으로 내게 다가왔어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기차의 맨 뒷계단까지 도망쳤어요... 드 디어 그는 천한 웃음소리를 내고 뒤쫓는 것을 포기했어요. 나는 그 웃음소리를 잊을 수 없 어요. 나더러 좋은 게 뭔지 모르는 바보 계집애라는 것이었어요. 그는 나를 빈에 혼자 돌 려보내 주었어요. 나는 빈에 도착하자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뭔가 뜨거운 것이 흘러 내리는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집에서 그것을 어떻게 감춰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가 몇 시간을 줄곧 울었어요. 나는 계속해 서 배에 압박감을 느꼈어요. 어머니는 나의 이상한 태도와 식용부진을 보고 무슨 언짢은 일이 있지 않았나 하고 걱정했어요. 그래서 나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지요. 어머니는 겁 내지 말라고 말했어요... 나의 동료는 나를 위로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어요. 그는 컴컴한 저녁때 나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나의 스커트 아래를 애무했어요. 나는 그것을 허락했으 나, 이상한 기분이 들 때에는 너무도 부끄러워 몸을 도사렸어요." 그녀는 여러 번 그와 호텔에 갔으나 동침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부유한 청년을 알 게 되어 그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와 잠자리를 같이했으나 아무 느낌도 없이 다 만 혐오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관청 동료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나, 그에게 싫증이 났다. 그 녀는 사팔뜨기가 되어 여위기 시작했다.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한 젊은 러시아인과 동침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최후의 순간에 그를 침대에서 쫓아냈다. 그 후에 그녀는 어떤 의사와 사귀고, 또 어떤 군인과도 사귀었으나, 성관계를 갖는 것은 거절 했다. 그 무렵부터 그녀는 정신적으로 병들어 요양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요양을 마 치고, 자기를 사랑하는 어떤 남성에게 몸을 맡겨 그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부터 그녀의 불감증은 없어졌다. 유사한 많은 사례 중에서 택한 이와 같은 일들은, 상대방의 난폭한 언행이, 적어도 돌발 성이 언제나 이런 증상이나 혐오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성의 입문에서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폭력이나 불의에 놀라움 없이, 그리고 까다로운 계율이나 장애도 없이 젊은 처녀가 서서히 그 수치심을 극복하여 상대방 남성과 친밀해져서 그의 애무를 즐기게 될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젊은 처녀들이 누리고 있고, 오늘날 프랑스 처녀들이 손에 넣으려고 하는 자유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처녀들은, '네킹(포옹)'도 '페팅(애무)'도 알 지 못한 채 성교에 들어간다. 젊은 처녀가 터부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을수록, 상대방에게 많은 자유를 느낄수록, 그리고 남성의 지배적인 성격이 사라질수록 그 입문은 쉬워진다. 만일 상대방 애인도 젊고 순진하고 소심하여 그녀와 비슷하면 처녀의 저항은 적어진다. 그 러나 그녀의 여성에의 변신은 그만큼 철저하지 못할 것이다. <푸른 보리>에서 클레트의 뱅카는 난폭하게 처녀성을 빼앗긴 이튿날 친구인 필이 놀랄 만큼 평온한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그녀가 상대방에게 '소유되었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 이다. 오히려 자기가 처녀성에서 벗어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큰 정신적인 혼란을 느 끼지 않았다. 필이 놀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여자친구는 남성과의 성적 경험이 없었다. 르노의 팔에 안겨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클로딘은 더욱 충격을 받게 된다. 아직 풋과일 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프랑스의 한 여학생의 말에 의하며, 그녀는 어떤 남자친구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어떤 여자 친구에게 달려가서 "나 C와 같이 잤다. 재미 있었어." 하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미국의 고등학교 선생은 나에게 그 학교 학생들 은 여성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처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들의 상대는 예의를 지 켜서 그녀들의 수치심을 함부로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마음속에 마성을 불러일 으키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젊고 또 그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움을 탄다. 젊은 처녀들 중에는 자진하여 색정적 경험 속에 몸을 던져 성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 해 그런 짓을 되풀이하는 여성도 있다. 이렇게 해서 호기심과 강박관념에서 자기를 해방시 키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녀들의 행위는 이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 로 그 행위는 다른 처녀들이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다. 도 전이나 걱정, 청교도적인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진정한 색정 적인 행위가 되지 못한다. 그 경우에는 위험도 없고 별 쾌감도 없이 하나의 대용품이 될 뿐이다. 성행위에는 불안도 수치도 따르지 않는다. 감동은 단지 표현일 뿐 쾌락이 전 육체 를 덮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처녀성을 잃은 여성은 여전히 젊은 처녀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육감 적이고 격렬한 힘을 지닌 남성을 상대할 경우에는, 그녀들 또한 처녀와 같은 저항을 한다 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동안 그녀들은 아직 미숙한 연령기에 머물러 있다. 애무를 받 으면 간지럼을 타고 키스는 대때로 그녀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육체적인 사랑을 하나의 유희처럼 생각하고, 만일 자기들이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다면 애인의 강한 요구는 그녀들 에게 곧 귀찮고 천해 보인다. 여러 가지 혐오나 공포감, 젊은 처녀 특유의 수치심을 간직 하고 있다. 만일 한평생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면(미국 남성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여성 이 미국 여성들 중에 많다고 한다) 그녀들은 반 불감증 상태로 일생을 보내게 된다. 흥분 과 쾌락 중에 자기를 육체화하는 데 동의하는 여성에게서만 참된 성적 원숙성을 찾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타오르기 쉬운 체질을 가진 여성의 경우에는 무엇이든지 원만하게 진행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여성의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성적 흥분은 남성이 모르는 강도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남성의 욕망은 강하지만 국부적이고, 남성은 욕망 때문에 경직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자의식을 잃는 경우가 없다. 여성은 이와 반대로 완전히 자기를 떠나 육체화된다. 많은 여성들에게 이 변화는 사랑의 가장 관능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마법처럼 두려운 성질을 갖 고 있다. 남성이 자기 품에 안고 있는 여성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여 성은 그 때 자기를 망각하고 환각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흥분은 남성 의 공격적인 열광보다 훨씬 근본적인 변질이다. 이 열기가 그녀를 수치심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그 열기가 식어지면 더욱 수치스럽고 불쾌하기도 하다. 그녀가 그것을 행복으로(혹 은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관능의 기쁨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녀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게 되면, 분명히 자기 것으로 인정하여 주장할 것이다. 아니면 그 녀는 그것을 분노로써 배격한다. 이제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근본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 색정적 생활의 출발점에서 여 성의 권리포기는 확실한 쾌락으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 만일 그렇게 해서 천국의 입구가 열린다면 그녀는 수치심이나 자존심을 좀더 손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고찰한 바와 같이, 처녀성을 잃는다는 것은 소녀시절 에로티시즘의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성취라는 형태를 띠지 못한다. 오히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질의 쾌감은 곧바로 생기지 않는다. 슈테켈의 통계(이것은 많은 성과학자 및 정신분석 의사들이 확증하고 있 다)에 의하면 최초의 성교에서 쾌감을 느끼는 여성은 불과 4%이고 50%는 몇 주일, 몇 달, 또는 몇 년 후가 아니면 질의 쾌감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심리적인 이유가 중 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에게는 때대로 의식적인 사실과 그 성기의 표현 사이에 아무 거리도 없다는 의미에서 여성의 육체는 매우 히스테릭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적인 억압 은 쾌락의 표출을 방해한다.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때때로 영속되며, 점점 강력한 장애가 된다. 많은 경우에 그 장애는 하나의 악순환을 만든다. 애인의 최초의 서투른 태도, 서투른 한마디 말이나 동작, 교만한 미소 따위가 밀월기간 중에, 혹은 결혼생활을 통하여 영향을 미친다. 여성은 곧 쾌감을 경험하지 못한 데 대해 실망하고 원한을 품어,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정상적인 쾌감 을 느끼지 못할 경우에도 남성은 음핵을 자극함으로써 그녀에게 성교의 쾌감을 줄 수 있 다. 이 쾌감은 도덕적인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이완과 진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그것을 거절한다. 질의 쾌감 이상으로 그것은 무리하게 몸에 가해 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이 자기자신의 만족만 생각하는 남성의 이기주의 에 시달린다면, 그녀는 쾌락을 제공하려는 너무나 노골적인 상대방의 의지에 기분이 상하 게 된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을 슈테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지배하 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성 공한 정상적인 성교의 경우처럼, 쾌락이 남성 자신이 얻는 쾌락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 는 것처럼 생각될 때 여성은 그것을 좀더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여성들은 상대방 남성 이 자기들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꺼이 지배를 받는다."고 슈테켈 은 말하고 있다. 만일 그녀들이 이 의사를 분명히 알아차렸을 때에는 반항한다. 많은 여성들은 손으로 애 무를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손은 그것이 주는 쾌감과는 관계가 없는 하나의 도구 이며, 성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기도 만일 욕망에 의해 침투된 하나의 육신이 아니라, 교 묘히 조작된 하나의 도구처럼 생각될 경우에는, 여성은 마찬가지로 반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떠한 대체물도 자기는 정상적인 여성의 감각을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라고 여 길 것이다. 슈테켈은 많은 관찰을 한 후에 이른바 불감증 여성의 욕망은 모두 결국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녀들은 정상인 여성처럼 오르가슴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밖의 모든 처치는 그녀들을 정신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취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남성의 욕망이 강하여 야수적일 경 우에, 상대방 여성은 남성의 품안에서 물건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지나치게 자제하여 너무 이성적일 경우 역시 그는 육신이 될 수 없다. 그는 여성에게 객체화될 것을 요구한 채 자기 자신은 그녀에게 잡힐 틈을 주지 않는다. 그 어느 경우에도 여성의 자존심은 반항한다. 그녀가 자기의 육체적 객체에의 변형과 주체로서의 요구를 조 화시킬 수 있으려면, 자기를 남성의 먹이로 주는 한편 남성도 자기의 먹이로 삼아야 한다. 여성이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일 애인에게 매력이 부족하거나 냉정하거나 서투른 경우에, 그는 그녀의 성욕을 환기 시키는 데 실패하거나, 그녀를 불만족 상태로 방치해 둔다. 그러나 그가 남성적이고 노련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여성은 지배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이 소심하고 재능이 없고 절반쯤 무력하기까지 하더라도, 자 기들을 위협하지 않는 남성에게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여자 애인을 화나게 하거나 원망하게 하는 것은 남성으로서는 서툰 짓이다. 원망은 여성 의 불감증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욕에 대하여 우롱받는 듯한 냉담한 태도로 남성에게 보복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나에게는 결점이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어차피 나는 무시당한 여자이므 로, 나도 사랑이나 욕망이나 쾌락에 빠져 당신에게 몸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 남성이 그녀 를 냉담하게 대하여 굴욕을 주거나, 그녀에게 질투심을 야기시키거나, 사랑의 고백을 머뭇 거리거나, 그녀 쪽에서 결혼을 바라고 있는데 정부로만 취급할 때, 그녀는 이렇게 그와 자 기자신에 대해 보복한다. 불만의 표시는 갑작스럽게 표출되어, 처음에는 매우 순조롭던 관 계 도중에 이런 반동이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여성에게 이런 반감을 일으킨 남성은 자기 힘으로 이를 잘 극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어 사태를 완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애인의 품속에서 외고집만 부리던 여성이 손가락에 약혼 반지를 끼는 순간, 태도가 일변하 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행복해지고 사랑을 받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녀들의 저항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러나 원한을 품고 있는 여성을 행복한 연인이나 아내로 쉽게 일변시키 는 것은 공손하고 정답고 인자한 남성의 태도이다. 만일 그가 그녀를 그 열등의식에서 해 방시켜주면 그녀는 그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다. 슈테켈의 <불감증의 여인>의 근본적인 의도는, 여성의 불감증에 대한 심리적인 원인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다음의 여러 가지 사례는, 불감증이 남편이나 연인에 대한 원망의 표 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G. S. 양은 결혼하기 전부터 어떤 남성에게 몸을 맡겼는데, 자기는 속박받는 것이 싫어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도덕의 노예였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은 그녀의 말만 믿고, 조 금도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외고집은 점점 굳어져 불감증이 될 정도였다. 드디어 애인이 그녀에게 구혼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신경쇠약에 걸려 있는 것을 고백하 고, 이제 결혼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여 보복했다. 행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 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인의 구혼을 기다리기에 지쳐 있었다... 그녀는 질투에 시달리 며 교만하게 구혼을 거절하기 위해 그가 구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후 그녀는 오직 그 애인을 멋있게 벌하기 위해 자살하려고 했다. 그때까지 남편과 쾌락을 즐기면서도 질투가 심한 어떤 여성은, 자기가 병들어 있는 동안 에 남편이 자기를 배반했다고 상상했다. 집에 돌아가면, 남편을 냉대하려고 결심했다. 앞으 로는 남편에 대해 흥분을 느껴서는 안된다. 그는 자기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필요한 때에 만 그녀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 그녀는 불감증이 생겼다. 처음에 그녀는 흥분하지 않기 위해 책략을 썼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곧 고통은 오르가슴으로 바뀌었다. 17세의 처녀가 어떤 남성과 관계를 가져 강렬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19세에 임신하 자, 그녀는 애인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이 서지 않아 그녀에게 낙태를 권 했다.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3주일 후에 남성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3주일 동안 괴로워했던 그 일로, 그 를 용서하지 않아 불감증에 걸리고 말았다. 훨씬 나중에 남편과 마음을 터놓고 진정한 대 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녀는 불감증에서 벗어났다. N. M. 부인은 남편이 자기와 결혼한 지 이틀 만에 옛 정부를 만나러 간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때까지 그녀가 느끼고 있던 오르가슴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자기는 이제 남편 의 눈 밖에 났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실망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불감증의 원인이 되었다. 여성이 자기저항을 극복한 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질의 쾌감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것으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성욕의 리듬은 남성의 성욕의 리듬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보다도 훨씬 뒤늦게 즐긴다. 성교가 시작되어 2분이 지나면, 대다수 남성의 4분의 3은 오르가슴을 경험한다고 킨제 이의 보고는 말하고 있다. 그 생활환경이 성적 상황에 불리하여 오르가슴에 도달하려면 1 0분에서 15분 동안 활발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인텔리 여성과 일생을 통하여 오르가 슴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성은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사정하지 않고 성행위를 연장시키는 특수한 능력이 필요하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행위 도중에 담배를 피운다고 한 다. 서양에서는 카사노바 같은 남성이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 횟수이며, 최고의 자부심 은 상대방 여성을 항복시키는 것이다. 색정적 전통에 따르면, 이런 일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남성들은 흔히 자기 아내의 무서운 요구를 개탄한다. 그것은 광 적인 자궁, 식인 마녀, 굶주린 여성이다. 그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몽테뉴는 이런 견 해를 <수상록> 제3권 5장에서 피력하고 있다. 여성 쪽이 남성보다 사랑의 행위에서는 훨씬 유능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 다. 때로는 남성이었다가 때로는 여성이었던 고대의 신관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 고 그녀들 자신의 입에서도 이 방면에 정통한 로마의 유명한 어느 황제와 황후가 각각 다 른 시대에 그것에 대해 증거를 보여주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그는 하룻밤에 포로로 잡혀온 사르마티아 처녀를 10명이나 유린했다. 그런데 황후는 하룻밤에 그 욕망과 취향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가면서 25차례나 하였다.) 육욕에 불타 그녀는 지쳐버렸지만 아직도 싫증은 느끼지 않는다.(<유베날리스>에서) 카타롤니아에는 이런 재판도 있었다. 어떤 부인이 와서 남편이 너무 치근거린다고 하소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가 그것 을 싫어한 것 같지는 않았다.(나는 신앙 이외에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이에 대해 아라 공 여왕이 유명한 판결을 내렸다. 이 친애하는 여왕은 신중히 생각한 끝에... 정당하고 필 연적인 한계로서, 하루에 여섯 번으로 한정했다. 여왕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여성의 요구 와 욕망을 크게 억제하며 실행하기 쉬운, 따라서 영원불변의 규칙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성에게 관능적인 쾌락은, 남성과 양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질의 쾌감이 그 대로 결정적인 오르가슴에 도달하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 했다. 이 점에 관한 여성의 고백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녀들이 정확하게 말하려고 해도 애매성을 피할 수 없다. 반응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성에게는 성교에 분명한 생리학적인 결말인 사정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많은 의도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결말에 이 르게 되면 그것은 도달점이 되어,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소멸이 된다. 이와 반대로 여성의 경우는, 처음부터 목적이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본래 여성 의 경우에 성교는 생리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관능적인 쾌감을 바라지만, 그녀의 육체는 사랑의 행위의 어떤 분명한 종결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다. 그녀에게 성교가 완료되는 일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것은 어떤 결말도 갖지 않 는다. 남성의 쾌감은 활처럼 상승하고, 어느 일정한 문턱에 도달하면 완성되어 오르가슴의 절 정에서 갑자기 까부라진다. 그 성행위의 구조는 한정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다. 이에 비해 여성의 쾌락은 전신에 퍼져 있고, 생식기관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오르가슴 자체보다는 오히려 질의 수축이 하나의 파동을 형성하고, 그 파동은 리드미컬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지 고 다시 나타나 때때로 극점에 도달한 다음에 헝클어지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재기한다. 즉 어떤 일정한 기한도 정해져 있지 않고 무한을 지향하기 때문에 여성의 색정 능력의 한 계가 되는 것은 분명한 만족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경 또는 심장의 피로나 심리적인 포 만감인 경우가 많다. 여성은 만족을 느끼든 피로하든 결코 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없다. 유 베날리스의 말에 의하면 "피로하지만 아직 싫증은 느끼지 않는다."이다. 남성이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리듬을 옮기려고 생각하거나 그녀에게 오르가슴을 일으 키려고 하면 크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에 그것은 여성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즐기려고 하는 쾌락의 형태를 도중에 깨뜨려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 특유한 형태는 상당히 자유롭게 자기 자신에게 시한을 줄 수도 있다. 질 내에 또는 전 생식계통에 극한되어 있는 일종의 경련이나, 전신에서 발산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 다. 어떤 여성에게는 이런 경련이 오르가슴과 동일시될 만큼 매우 세차게 규칙적으로 일어 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성은 남성의 오르가슴 속에 자기의 기분을 진정시키고 만족스러 운 종결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매우 원활하면서도 조용히 해소될 수도 있다. 성교를 효과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소심하고 단순하며 우직한 많은 남성들이 생각 하는 것처럼 쾌락의 수학적인 동시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색정의 복잡한 형태가 안정되 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을 '즐겁게'하는 것은 시간과 기교, 즉 원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남성 들은 여성의 성욕이 그 분위기 전체에 의해 얼마나 좌우되는가를 모르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경우에 성욕이란 일종의 마술적인 효과를 지닌 것으로, 그것은 자기를 송두리째 내던지기를 요구한다. 만일 말이나 동작이 애무의 마술에 거슬릴 때는 그 신통력 은 즉시 사라진다. 애무할 때 여성이 자주 눈을 감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생리학적으로는 동공의 확대를 보상하는 의미를 갖는 반사작용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는다. 그녀는 모든 무대배경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 이다. 그 순간의 특이성이나 자기 자신의 특이성도, 그리고 애인의 개성도 없애버리고 싶 어한다. 어머니의 품속처럼 불명료한 육신의 어둠 속에서, 자기를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녀는 남성을 자기에게 정면으로 대립시키는 분리의 소멸을 원하며 융합되 고 싶어한다. 이것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은 자기를 객체로 하면서 주체로 머물기 를 원한다. 여성은 그 전신이 욕망이고 착란이기 때문에, 남성보다 깊이 자기를 버린다. 그 러므로 상대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주체일 수 있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 다. 만일 남성이 주지 않고 취하기만 하거나, 또는 자기는 즐기지 않고 여성에게 쾌락을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교묘히 조종당했다고 느낀다. 그녀가 타자로서 자기를 실현하자마 자, 그녀는 비본질적인 타자가 된다. 그녀는 타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육 체가 떨어지는 순간이 언제나 가장 괴롭다. 남성은 성교를 마친 후에 외로움을 느끼든 즐거움을 느끼든, 혹은 자연에 우롱당했다는 기분이 들든 아니면 여성을 정복했다고 느끼든 간에, 어쨌든 육체를 부정한다. 그는 다시 완전무결한 육체로 돌아가 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 가고 싶어한다. 반면에 여성은 그녀를 육체화한 마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육체의 접 촉을 연장하기를 원한다. 남성의 몸에서 떨어지는 것은 새로운 이유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자기에게서 너무나 매정하게 떨어져나가는 애인에게 그녀는 반감을 느낀다. 그러 나 그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한순간 믿었던 두 사람의 빈틈없 는 융합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마들렌 부르둑스의 말처럼 질르의 아내는 남편이 "좋았어?" 하고 묻자 반발하여 남편의 입을 손으로 막는다. 이 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쾌락을 자기 폐쇄적인 분리 된 감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충분해? 더 할까? 좋았어?" 하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분리 를 표명하여, 사랑의 행위를 남성이 마음대로 그 방향을 정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분명히 그럴 심산으로 그런 질문을 한다. 그는 두 사람의 융합이나 상호성 보다는 지배를 요구한다. 그는 결합이 풀리면 다시 자기만이 주체가 된다. 남성이 이와 같은 특권을 포기하기 위 해서는 많은 사랑과 관용을 필요로 한다. 그는 여성이 본의 아니게 수치를 당하고 소유되 었다고 느끼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나 그는 여성이 자진하여 몸을 제공하는 것보다 좀더 많이 그녀를 취하려고 한다. 사랑의 행위를 하나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콤플렉스를 가진 남 성들이 많지 않다면, 여성은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성은 침 대를 투기장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젊은 처녀에게는 나르시시즘이나 자존심 등과 동시에 지배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어느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마조히즘(이성에게 얻어 맞거나 하여 성적 쾌락을 느 끼는 변태성욕)은 본래 여성의 특색 중 하나라고 하며, 이런 경향 때문에 여성은 그 색정 적 숙명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조히즘의 개념은 매우 애매하여,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라 마조히즘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그 하 나는 고통과 성적 쾌락의 결합에 의해 성립되고, 다음은 여성이 색정적으로 남성에게 의존 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성립되며, 또 하나는 자기징벌의 메커니즘 위에 성립된다. 처녀 성의 상실이나 분만 등에 쾌락과 고통이 결합되어 있으며, 자기의 수동적인 역할에 동의하 고 있으므로, 마조히즘적이라고 한다. 먼저 유의해야 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에 일종의 색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그 것이 곧 수동적인 순종이라는 생활태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때로 고통은 그것 을 겪고 있는 개인의 강인성을 높이거나, 흥분, 쾌락이 심하여 마비된 감각을 신선하게 하 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육체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예리한 빛이다. 그 빛은, 거기 실신해 있는 사랑하는 남성을 다시 그곳에 뛰어들게 하기 위해 저승에서 구출한다. 고통이란 정상 적인 의미에서 색정적 흥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서로의 환희를 위한 육체임을 서로 기뻐 하는 두 육체는, 갖은 방법으로 만나고 결합하고 또한 대결하고 싶어한다. 색정 속에는 자 기망각과 격정과 황홀이 있다. 그리고 고통은 자기의 한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 종의 초월이며 극도이다. 고통은 언제나 감각의 영역에서 큰 역할을 한다. 누구나 미묘함 과 괴로움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애무는 고문이 될 수도 있고, 형벌이 나 쾌락을 줄 수도 있다. 포옹은 깨물거나 꼬집거나 할퀴는 것과 쉽사리 이어진다. 이런 행동이 모두 사디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괴작용이 아니라 합일에의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주체는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모욕하는 일 없이 결합하 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남성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실상 고통이 예속의 표명으로서 이해되고 요구되는 경우에만,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녀를 상실한 고통에는 분명한 쾌락이 수반되지 않는다. 분만의 고통은 모든 여 성들이 두려워하고 있지만, 다행히 현대적인 의술이 그것을 없애준다. 그러므로 고통은 여 성의 성욕에서 남성의 성욕과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의 순종이라는 것도 매우 애매한 관념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에 의하면, 대개의 경우에 젊은 처녀는 '상상적'인 것으로서 반신 이나 영웅이나 남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 나르시시즘적인 유희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현실세계에서 이런 권위의 육체적인 표현에 얌전히 따 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젊은 처녀는 종종 자기가 찬탄하고 존경하는 남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보잘것없는 남성에게 몸을 맡긴다. 구체적인 행동의 열쇠를 환상 속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환상이 환상인 한, 자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애무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공포와 기쁨이 혼합된 심정에서 폭행을 꿈꾸는 소녀는 폭행당하기를 원치 않 는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야말로 혐오스러운 파멸이다. 우리는 이미 마리 르 아르두앵의 경우에서 이 모순의 대표적인 예를 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폐기 도중에 있는 영역이 아직 남아 있어서, 나는 거기 들어갈 때면 코를 막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것은 사랑의 관능성을 초월하여, 단지 관능 자체에만 인도하는 영역 이다... 꿈 속에서 내가 범하지 않은 교활한 추행은 하나도 없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를 확인하려고 애썼다.(<검은 돛>에서) 여기서 다시 한 번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경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생애를 통하여 어떤 '착각의 지배'하에서 자기를 '의지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 다. 그러나 내가 시험해 본 모든 사람들은, 나에 비해 너무 평범하여 나는 그들에게 혐오 감을 느낄 뿐이었다. 여성의 성적 역할이 대부분 수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동적인 입 장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남성의 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 지로 마조히즘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은 자기의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애무, 흥분, 돌입 을 자기 자신의 쾌락으로 끌어갈 수 있다. 애인과 굳은 결합을 구할 수도 있고 자기를 상 대방에게 바칠 수도 있다. 이것은 기권이 아니라 초월을 의미한다. 마조히즘은 개인이 타 인의 의지에 의해 순수한 물체가 되려고 생각하는 데서, 즉 자기를 물체로 생각하고 물체 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게 된다. "마조히즘은 자기의 객체성에 의해 타인을 매혹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자기의 객관성에 의해 자기 자신을 매료하기 위한 시도이다.(사르트르 <존재와 허무>에 서) 사드의 쥘리에트나 <규방철학>의 젊은 처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남성에게 몸을 맡기지만 그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므로, 두 사람은 결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채털 리 부인이나 케이트(로렌스의 <사랑하는 여인>의 주인공)도 자기를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맡기는 데 동의하고 있으므로 마조히스트는 아니다. 마조히즘을 운운하기 위하여는 자기가 밖에 놓여 있어야 하며, 이 옮겨진 이중성(제2의 자기)이 타인의 자유 위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여성에게는 진짜 마조히즘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처녀에게 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쉬우며, 또 나르시시즘은 그녀의 자아 속에 자기를 옮기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에로티시즘에 입문하는 첫머리에서 심한 흥분이나 욕망을 느낀다면, 그녀는 자기의 경험을 현실적으로 살려, 그녀가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념적인 극점을 향하여 그 경험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감증 속에서 자아는 자기를 계속 주장한다. 자기를 어떤 남성을 위한 물체로 여기는 것은 실패 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마조히즘은 사디즘(상대에게서 학대를 받는 데서 성적 쾌락을 느끼 는 마조히즘과는 달리, 상대를 학대하여 성적 쾌락을 느끼는 변태성욕)과 마찬가지로 죄의 식을 조성한다. 자기에게는 죄가 있다. 확실히 자기가 객체라는 것만으로도 죄이다. 이런 사르트르의 견해는 '자기징벌'이라는 프로이트의 관념과 일치한다. 젊은 처녀는 그 자아를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고의로 치욕과 복종을 가중시켜 자기 자신을 벌한다. 그녀들이 미래의 애인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여러 모로 벌하여, 미래에 대한 복종을 스스로 벌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애인이 나타났을 때에도 역시 이런 태도를 바꾸 지 않는다. 불감증 자체도 여성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에게 내 리는 징벌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자존심이 강한 여성은 상대방과 자기 자신 을 원망하여 일부러 쾌락을 체험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조히즘이 되면 이런 여성은 남성의 노예가 되어 그를 존경하는 언사를 늘어놓고, 수치와 구타를 당할 것을 자진하여 원한다. 그녀는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극을 받아 자기 포기를 가속화한다. 이것은 마틸드 드 라 몰르(<적과 흑>에 나오는 여성)의 행동에 나타나 있다. 그녀는 쥘리앙에게 몸을 맡긴 것을 후회하고 있다. 때때로 그녀가 쥘리앙의 발 아래 엎드리거나 그의 자의에 따르려고 하거나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자 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반항한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얼음덩이처 럼 싸늘할 것이다. 마조히즘적인 여성이 거짓으로 몸을 맡기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장애를 만들어 그녀에게서 점점 쾌락을 차단해 버린다. 동시에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욕하 는 것은, 쾌락을 아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이 원인이 되어 있다. 불감증에서 마조히즘에 이 르는 악순환은 그 보상으로서 사디즘적인 행동을 수반하면서 영구히 반복된다. 색정적으로 어른이 된 여성이 그 불감증에서, 그리고 나르시시즘에서 해방되어 성적 수 동성을 받아들이면서, 그 수동성을 좀더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마조 히즘의 역설적인 의미는, 주체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재확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를 잊을 수 있는 것은 타자에게 함부로 자기를 주고, 타자를 향한 자발적인 행동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마조히즘 의 유혹에 끌리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성욕에 있어서 수동적 객체로서 여성의 입장은 그 녀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하게 한다. 그 역할은 그녀의 나르시시즘적인 반항과 그 결과인 불감증에 의해 초래되는 자기징벌이다. 많은 여성들, 특히 젊은 처녀들이 마조히스트가 된 다는 것은 사실이다. 콜레트는 자기의 첫사랑의 경험을 말하면서 <나의 수업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젊음과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먼저 도취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죄 많은 도취로, 보기 흉하고 불순한 사춘기의 무분별이었다. 겨우 적령이 될까말까 한 처녀가 중년 남성의 구경거리가 되고 장난감이 되고 음탕한 걸작이 되기를 꿈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녀들은 더러운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속죄한다. 그것은 사춘기에 흔히 있는 신경병, 즉 분필이나 숯을 깨물고, 양칫물을 마시고, 음란한 책을 읽고, 손바닥에 핀을 꽂는 등의 습관과 병행하 는 욕망이다. 마조히즘은 젊은이의 변태행위의 일부이며, 그것은 여성의 성적 숙명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일어나는 분규나 충동을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단지 그 속에 서 헤매거나 도피하려고 하는 태도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절 대로 여성의 색정의 정상적이고 행복한 형태로 볼 수 없다. 사랑의 행복한 형태는, 연애, 애정, 관능 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수동성을 잘 극복하여 상 대방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남녀간에 투쟁이 있는 한, 양 자의 에로티시즘의 불균형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욕망과 존경을 동시에 느낄 때에는 이런 어려운 문제도 쉽사리 해결된다. 남성 쪽에서 그 녀의 자유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녀의 육체를 원한다면, 그녀는 객체가 되는 순간에 자기를 본질로서 재발견하여 자진하여 따르는 복종 속에서 자유로이 머물 수 있다. 그때야말로 연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법으로 공통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쾌락은 그 상 대방 속에 원천을 가지면서 쌍방의 당사자에 의해 분명히 자기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받 는다는 말과 준다는 말은 서로 그 의미를 교환한다. 만족은 감사이고 쾌락은 애정이다. 자 기와 타자와의 상호인식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형태를 취하여 타자와 자기와의 가장 예 리한 의식 속에서 성취된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의 성기를 마치 자기 자신의 몸의 일부로 느낀다고 하고, 어떤 남성들은 여성을 자기가 침입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불확실하다. 타자의 차원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타성이 적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성행위에 감동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이 분리 속에서의 육체적 결합 의식이다. 상대 와 함께 자기의 한계를 부정하고 또 긍정하는 두 존재는 같으면서도 다르기 때문에 놀라 게 된다. 이 다른 점이 양자를 멀리 떼어놓아 고립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다시 결합했을 때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격의 원천이 된다. 여성을 불태우는 부동의 정염, 여성은 남성의 거친 격정 속에 이 정염의 전도된 모습을 보게 된다. 생명으로 부풀어오른 남성의 상징(성 기)은, 마치 여성의 미소가 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남성의 것인 것처럼 그녀의 것이다. 남 녀가 갖고 있는 부는 모두 서로에게 반영되고 상대방을 통하여 재인식되며 동적이고 황홀 한 결합을 이루게 한다. 이와 같은 조화에 필요한 것은 기교적인 세련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이고 색정적인 매력을 토대로 한 육체와 정신의 상호적인 관용이다. 이 관용은 남성의 경우에는 흔히 허영심에 의해 저지되고, 여성의 경우에는 소심에 의해 저지된다. 여성은 그 억압을 극복하지 않는 한, 이 관용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여성의 완전한 성적 성숙이 크게 더딘 것은 이 때문이다. 35세쯤 되어야 그녀는 색정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만일 그녀가 결혼했을 경우, 그녀의 남편은 그 무렵이면 아내의 불감증 에 익숙해진다. 그녀가 새로운 애인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앞날이 길지 않다. 매력이 없어질 무렵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은 겨우 자기욕망 을 인정하게 된다. 여성의 성생활이 전개되는 여러 가지 조건은 이런 사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의 사회적, 경제적 입장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총체적인 관련을 무시하고, 그 이상으로 여성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추상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검토에서 몇 가지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색 정적인 경험은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형태로 그들이 살아 있는 입장의 애매성을 발견하 게 하는 인생체험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육체로서, 또는 정신으로서, 타자로서, 주 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이 충돌이 특히 극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여성의 경우이다. 그 이유는, 여성은 자기를 객체로 파악하고, 쾌락 속에 확실한 자주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그녀는 육체로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로운 초월자인 주체로서의 품위를 회복 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험이 많이 따르므로 종종 좌절한다. 그러나 여성의 입장 자체의 괴로움과 어려움은 남성이 고지식하게 속고 있는 그 '속임수'에서 그 녀를 지켜준다. 남성은 공격적인 역할과 오르가슴의 독선적인 고독에 내포된 허위의 특권 에 쉽사리 속고 있다. 여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한 체험을 갖게 된다. 여성은 수동적인 역할에는 다소 정확하게 적응해도, 능동적인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손해 를 보고 있다. 여성이 남성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 소유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그 먹이이 다. 남성이 상냥하고 애정에 충만한 부드러운 감각세계, 즉 여성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반 면에 여성은 거칠고 살벌한 남성적인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상한 아이러니이다. 여성의 손은 아직도 매끄러운 살갗이나 녹을 듯이 부드러운 육체를 껴안고 싶은 욕망을 잃지 않고 있다. 즉 새파란 소년, 여성, 꽃, 모피, 어린이 같은. 그녀 자신의 일부가 그런 역할을 하고 싶은 만큼, 그녀는 자기가 남성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보물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많은 여성들에게 다소 미완성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동성애의 성향이 남아 있는 것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잡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 성향이 특수한 세력을 갖고 나타 나는 여성도 있다. 모든 여성들이 안고 있는 성적 문제에 대해 사회가 공인하는 고전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또한 반도덕적인 길을 택하는 여성들에 대해 서도 고찰해 봐야 한다. 제4장 동성애의 여성 동성애의 여성이라고 하면, 남자처럼 펠트 모자를 쓰고 머리를 짧게 깎고 넥타이를 맨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이런 여성의 남성 같은 모습은 호르몬 분비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 아 변태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성도착자와 남성 같은 여성을 혼동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터키 왕궁의 후궁이나 매춘부처럼 '여성다움'을 파는 여성 중에도 성도착자가 적 지 않다. 이와 반대로 '남성적인' 여성의 대다수는 성적으로는 정상이다. 성과학자나 정신 분석학자들은 일반사회에서 관찰되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즉 '저주받은 여성들'(성 도착증이 있는 여성)의 대부분은 생리적으로는 다른 여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떤 '해 부학적 숙명'에 의해서도 그녀들의 성욕이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 생리적인 조건이 특수한 케이스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엄밀한 생 물학적 구분은 없다. 동일한 생식조직이 원형적으로 결정된 방향의 호르몬 작용에 의해 각 각 변화되어 간다. 그러나 그 방향은 태아가 성장하는 도중에 빗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래 서 남성과 여성의 중간적인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남성은 남성기관의 발달이 더디기 때문에 여성과 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처녀가(특히 스포츠를 좋아하는) 도중에 남자로 변 하는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H. 도이치는, 결혼한 부인에게 열렬히 반하여 그 여성을 납치 해서 함께 살려고 했던 어떤 젊은 처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날 이 처녀는 자기가 실제로는 남자인 것을 알아차리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기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동성애의 여성을 모두 거짓외모 밑 에 '숨겨진 남성'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양성 생식기관의 형태를 어렴풋이 갖춘 반음 양은 때때로 여성의 성본능을 갖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한 여성은 나치에 의해 빈 에서 추방되었는데, 자기는 남자만을 사랑하지만 정상성욕을 지닌 남자나 남색가 모두에게 호감을 사지 못한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정말 '남성화한' 여성은 남성 호르몬의 영향을 받 아 부차적인 남성적 성본능의 특징을 나타낸다. 언제까지나 미성숙한 여성은 여성 호르몬 이 결여되어 그 발달이 불완전한 채 정지되어 있다. 이런 특색이 다소라도 직접적으로 동 성애의 성향을 조성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정력적이고 공격적이며 왕성한 생활력을 갖고 있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정력을 소비하고 싶어서 완강하게 수동성을 거부한다. 용모를 잘 타고나지 못한 못생긴 여성은 남 성적인 성질을 지님으로써 그 열등성을 커버하려고 한다. 이 경우에 색정감각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그녀는 남성의 애무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생리와 호르몬은 단지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는 데 그치므로 그녀가 자기를 예속시킬 대상을 정하지는 않는디. H. 도이치 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자기가 돌본 폴란드의 부상병에 대 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남성화의 특징을 지닌 처녀였다. 그녀는 간 호사로 종군했으나, 후에 남자 병사의 군복을 입고 싶은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그녀 는 어떤 병사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후에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동성애의 남자로 보이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색정적으로는 여자였 다. 남색가의 생리기관이 완전히 남성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남성적이라는 것만으로 반드시 동성애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생리적으로 정상인 여성의 경우에도 '음핵형'과 '질형'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있었다. 전자는 동성애의 성향으로 기울기 쉽다. 여자 어린이의 성감은 모두 음핵과 관련 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 성감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느냐 더욱 발달하느 냐 하는 것은, 해부학적 조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유소년기의 자위행위, 후에 음핵감각 계가 후에 특권을 갖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오늘의 성과 학은 유아의 자위행위 속에 정상적인, 그리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을 인정하고 있 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발달은 생리적인 인자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심리적인 역사이며, 그것은 생존 앞에서 취하는 주체의 총괄적인 태도에 의존 하고 있다. 마라농은, 성욕은 '일방통행'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남성의 경우에는 완전한 형 태에 도달해 있으나, 여성의 경우에는 '중도'에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동성애의 여성 만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성욕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여성은 '탁월한' 여성형 일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성욕은 개성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남성과 여성의 성욕에 등급을 매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적인 대상의 선택은 여성이 지닌 정력의 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가 성도착증(변태성욕)에서 기관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현상을 본 것은 큰 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도착증은 역시 외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였 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깊이 연구하고 있지 않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의 색정이 성숙되는 것은 음핵의 단계에서 질의 단계로 옮아가는 시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아이가 처음에 어머니에게서 느끼던 사랑을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되는 추이 와 비슷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이 발달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은 거세되어 있는 것을 체념하지 않는다. 그녀는 페니스의 결여를 자기에게 숨긴 채 이를 대신할 만한 대상을 찾으면서 역시 어머니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아들러에 의하면 이 정체상태는 수동적으로 생긴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주체가 권력의지에 의해 자기의 거세된 상태를 분 명히 부인하고, 지배를 받지 않는 남성과 동일화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아기 의 고착이든 남성에 대한 항의이든, 동성애는 하나의 미완성으로 나타난다. 사실 동성애의 여성은 '모자라는 여성'도 아니고, '진보파 여성'도 아니다. 개인의 역사는 숙명적인 발전은 아니다. 순간 순간에 과거는 새로운 선택에 의해 다시 파악된다. 선택방법의 '통상'이라는 것에 어떤 특권적인 가치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 선택의 진정함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여 성에게 동성애는 주어진 입장을 도피하는 하나의 방법, 또는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방법일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의 큰 잘못은, 도덕을 의식한 타협주의에 의해 동성애를 정당하지 못한 태도로 생각한 데 있다. 여성은 객체가 되기를 강요당하는 하나의 존재자이다. 주체로서의 그녀는 남성의 육체를 상대로 해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공격적인 관능을 갖고 있다. 거기서 그녀의 에로티시 즘이 극복해야 할 투쟁이 생기게 된다. 여성을 남성의 먹이로 제공하여, 그녀의 팔에 아기 를 안겨주고 그 주권을 회복시켜주는 제도를 세상에서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자연주의'는 다소 이해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이성애도 다른 해 결이 가능하다. 여성의 동성애는 그 자주성과 육체의 수동성을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 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을 내세운다면, 모든 여성은 동성애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동 성애의 여성은 분명히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젊은 처녀는 모두 남성의 돌입이나 지배를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남성의 육체에 대해 일종의 혐오를 느낀다. 이와 반대로 여성의 육체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이 다. 이것은 이미 지적했지만, 주체로 자인하는 남성은, 이에 따라 각자 분리되어 살고 있 다. 다른 남성을 하나의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나 자기에게도 동시에 남성적인 이상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이와 반대로 자기를 객체로 인정하고 있는 여성은, 자기와 같은 여성이나 자기에게서도 일종의 먹이를 본다. 남색가는 남녀 모두에게 반감을 사는데, 이것은 남성이 지배적인 주 체이기를 강력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녀 모두 동성애 여성에게는 자발적으로 관대하게 대한다. 틸리 백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경쟁자로서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상대이다. 오 히려 나는 흥미를 갖는다. 나는 부도덕하게도 그것을 웃어넘기고 만다." 콜레트도, 클로딘 이 레지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르노에게 이와 똑같이, 단지 흥미있는 태도를 보이 고 있다. 남성은 얌전한 동성애의 여성보다 활동적이고 자주적인 이성애의 여성에게 더욱 괴로움 을 당한다. 남성의 특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이성애의 여성뿐이다. 여성의 동성애는 성별의 전통적인 형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동성애는 여성의 성질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표현이지 그 거부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동성 애의 성향은 사춘기의 젊은 처녀에게, 아직 접촉할 기회나 용기가 없는 이성애의 관계의 대용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의 과도기이며, 수업이다. 열렬한 동성애에 빠졌던 처녀도 그후에는 정열적인 아내, 애인,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여성 성도착자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은, 그 선택의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다. 성도착자의 특징은 여성 이 여성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성만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 흔히 존스와 헤스나드의 주장에 따라, 동성애의 여성을 두 타입으로 나누고 싶어한다. 하나는 '남성을 모방하고 싶어하는' 남성형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을 두려워하는' 여성형 이다. 도착증에서 대체로 두 가지 성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여성은 수 동성을 거부하지만, 다른 여성은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데 여성의 품을 택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들은 대개 서로 반응하고 있다. 택하는 대상과 거절하는 대상의 관계는 서로에 의해 설명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위에서 말한 구별이 모호한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찰 하려고 한다. '남성형'의 동성애 여성을 그 '남성을 모방하는' 의지에 의해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부 당하게 단정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가 사회에서 정하고 있는 남녀 성별의 구별을 그대 로 받아들임으로써 문제를 애매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사실 남성은 오늘날 에는 적극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 즉 남성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여성은 단지 소 극적인 것, 여성적인 것일 뿐이다. 여성이 인간적인 존재로서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세상 은 여성이 남성화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스포츠적, 정치적, 지적 활동 및 다른 여성에 대한 욕망은 '남성다운 항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성이 그것에 대해 자기를 초월하려는 가치 를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이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변태로 보인다. 이와 같은 해석의 기반이 되는 중대한 오해는, 암컷인 인간적 존재에 있어서는 자기를 여성다운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여성다움의 이 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이고 어머니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참다운 여 성'이 전에 거세된 남성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적 산물이다. 여성의 교태 나 순종의 '본능'은 남성에게 남근적 자존심을 불어넣는 것처럼, 여성에게 불어넣어진다.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적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다. 여성이야말로 자 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방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열등의 식'이니 '남성 동경의 콤플렉스'니 하는 사고방식은 나에게는, 드니 드 루즈몽이 <악마의 몫>에서 말하고 있는 그 일화를 상기하게 된다. 어떤 부인이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새떼가 자기를 습격해 온다는 망상에 시달리게 되었 다. 몇 달 동안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으나, 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부인과 함께 병원 뜰을 거닐고 있던 의사는, '새가 그녀를 습격하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여성다워야 한다는 번거로운 규범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자기의 가치가 저하되기 때문에 자기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는, 그녀는 세계와 미래가 눈앞에 열린 완 전한 개인, 하나의 주체, 하나의 자유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남성화와 혼동되는 것은, 오 늘날 여성이 거세를 의미하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벨로크 엘리스와 슈테 켈이 수집한 도착증자의 고백(첫째의 경우는 플라토닉한 것이고, 둘재의 경우는 좀더 본격 적인 것이지만)을 보면, 이 두 사람의 환자는 여성으로 성별되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나는 한 번도 내 자신을 처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뒤숭 숭한 상태에 있었다. 5, 6세 경에 나는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내가 사내아이가 아 니라면, 계집아이도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신체구조를 신비적인 우연처 럼 보고 있었다... 겨우 걸음마를 할까 말까 할 때 나는 망치나 못에 흥미를 느끼고 또 말 을 타고 싶어했다. 7세 경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든 계집아이들이 싫어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자주 울고 화를 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 대해 주고받는 말만 들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요일마다 오빠들이 다니는 학 교의 소년들과 함께 외출했다... 11세 경에... 벌을 받아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15세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남자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여자가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녀들의 보호자가 되고 원조자가 되었다." 슈테켈이 수록한 도착증 여자의 경우는 이러하다. 그녀는 6세까지는 주위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는 사내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 이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까닭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6세 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 다. '나는 나중에 중위가 될 거야. 하나님이 오래 살게만 해준다면 원수가 되고.' 그녀는 말을 타고 군대의 선두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대단히 총명한 소녀로, 사 범학교에서 여학교로 옮긴 것을 불행하게 여겼고 여자다워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반항심이 반드시 동성애적 숙명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소녀들은 자기 몸이 우연히 이렇게 되어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개하고 절망을 느낀다. 콜레트 오드리는 12세 때 자기가 뱃사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몹시 화가 났다. 미래의 여성이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런 제한을 무엇 때문에 거부하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문제는 그녀가 무엇 때 문에 그것을 수락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녀의 타협성은 순종과 소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만일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체념은 곧 반 항심으로 변하여 반발하기 쉽다. 젊은 처녀가 자기는 여자로서 못생겼다고 생각될 경우에 는 더욱 그렇다. 해부학적 조건이 특히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이런 우회에 의해서이다. 추하거나 못생겼거 나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자기에게 합당치 않게 생각되는 여자의 운명을 거부한 다. 그러나 여성다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남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남성적인 특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주어지는 이득이 너무 적다고 생각되기 때문 이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편리한 옷을 부러워한다. 다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이 나 거기서 짐작되는 약속이 여성의 옷차림을 조금씩 소중하게 만들 뿐이다. 만일 거울이 자기의 못난 얼굴을 비추어, 장차 아무 약속도 보장해줄 것 같지 않으면 레이스나 리본은 거추장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제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때문에 '말괄량이'는 끝까지 사내아이로 있고 싶어한다. 아름다운 여성도 개성적인 기획을 실현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자유를 요구하는 여성인 경우에는 남성의 이익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재적 인 상태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행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한다. 그녀를 그 육체의 한계 내 에 밀어 넣으려 하는 남성의 욕망이 그녀에게는 불쾌하다. 젊은 남성이 그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불쾌하게 여기듯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여자친 구에 대하여는, 남성적인 남성이 연약한 남색가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가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런 고분고분한 여자친구와의 공범을 거절한 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남자의 언행을 가장한다. 여성스러운 여자친구와 단짝이 되어 남자 행세를 한다. 이런 연극은 확실히 '남성적인 항의'지만, 그것 은 제 2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자발적인 것, 그것은 자기를 육체적인 먹이로 만든다는 생각에서, 자주적인 주체가 느끼는 분노이다. 여자 운동선수 중에는 동성애자가 상당히 많 다. 근육, 운동, 팽창, 약동을 위한 이 육체를 그녀들은 하나의 수동적인 근육으로 생각하 지 않는다. 이런 육체는 마술적으로 애무를 불러오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잡으려는 파 악력이지 세계의 한 사물이 아니다. 대자적인 육체와 대타적인 육체 사이의 갭은 이 경우 에 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행동적인 여성, 예컨대 육체적인 형태에서도 자기 포기가 불가능한 '건실한 여자'에게서 이와 같은 저항을 찾아볼 수 있다. 양성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면, 이런 장애는 대 부분 해소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성은 여전히 자기의 우월성을 믿고 있으며, 만일 이에 동의하지 않는 여성의 경우에는 매우 불리해진다. 그러나 의지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여성 은 남성과 정면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남성같은' 여성은 흔히 이성애자이다. 그녀는 인간의 권리요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여성적인 성 질을 손상시킬 의도도 없다. 그녀는 남성적인 세계에 접촉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합병시키 려고 생각한다. 그녀의 강인한 감각성은 남성의 난폭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성의 육체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그녀는 수줍은 처녀처럼 저항을 극복할 필요도 없다. 신경이 굵은 동물적인 여성은 성교의 수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느끼지 않는다. 과감한 성향을 지 닌 지적인 여성은 그런 수치감에 저항한다. 투쟁적인 성격으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여성 은,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는 그 대결에 과감히 나선다. 조르주 상드는 젊은 남성들, 특히 '여성적'인 남성을 좋아했다. 그러나 스탈 부인이 여인 들 중에서 젊음과 미모를 구한 것은 만년의 일이다. 자기의 지성의 힘으로 남성을 지배하 고, 그들의 찬탄을 오만하게 받아들인 스탈 부인은 남성들의 품안에서도 자기를 그들의 먹 이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는 마조히즘적 도취에 빠지기도 했으 나, 이런 유희에서도 역시 지배자로 머물러 있었다. 이자벨 에베라르트는 남장을 하고 말 을 몰아 사하라 사막을 질주하는 남성적 용감함을 보였지만 어떤 건장한 저격병에게 몸을 맡겼을 때에도 전혀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남성의 종속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여성이라 고 해서, 반드시 남성에게서 도망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자기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조건이 대단히 좋을 경우에는(그것은 주로 상대방 남 자의 인간됨에 의해 결정되지만) 경쟁의식까지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남 성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여성의 입장을 완전한 형태로 사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적인 인격과 수동적인 암컷으로서의 역할이 이처럼 조화되는 것은,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에 비해 매우 어렵다. 그 때문에 노력하다 중도에서 포기하느니 차라 리 개끗이 단념하는 여성이 많을 것이다. 여성 예술가나 작가들 중에는 동성애자가 많다. 그녀들의 성적 이상이 작품창조를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거나, 강한 정력의 존재를 과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지한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을 하거나 또는 남성들과 겨루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남성의 우월성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체 하지 않고 새삼 스럽게 그것에 대항하여 정력을 소모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육체적 쾌락 속에서 휴식과 안정과 기분전환을 찾고 있다. 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상대에 대해서는 경원하는 것이 더 편하다. 이렇게 해서 여성이기 때문에 강요당하는 구속에서 벗어난다. 물론 '남성적인' 여성에게 그 성의 역할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동기는 그녀의 이성애적 체험의 성질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못생긴 여성은 남성의 경멸에 의해 자기의 불 행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남성이 교만하면 자존심이 강한 여성의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된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불감증의 모든 동기, 즉 원한, 분노, 임신의 걱정, 낙태가 원인인 장애 등은 이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경계심을 갖고 접 근할수록 그런 동기는 더욱 더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지배욕이 강한 여성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언제나 완전한 만족을 주는 해결방법 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성은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자기의 능력을 완 전히 발휘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성애적 관계는 굴욕적인 동시에 자기를 윤택하게 하는 것도 된다.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을 거부하면, 한편으로 자기를 제한하는 것도 된다. 불감증의 여성이 쾌락을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요구하는 것처 럼, 동성애의 여성은 한편으로 정상인 완전한 여성이 되고 싶어한다. 이런 엉거주춤한 주 저는 슈테켈이 연구한 도착증 여성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녀는 남자아이하고만 놀고 싶어하는 '여성이 되는' 것을 싫어했 다. 16세 때 그녀는 젊은 처녀들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그런 처녀들을 몹시 경멸하여 이 때문에 그녀의 색정은 사디즘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 여자친구만 열렬히 사모했다.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육체적으로 관계한 처 녀들에게는 언제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대단히 어려운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최초의 열렬한 동성애의 환멸을 느낀 후로, 그녀는 완전히 육감적인 경험에 몰두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17세 때 어떤 청년 을 알게 되어 그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남성을 자기의 아내로 생각했다. 그녀는 남장을 하 고 술을 마시고 연구를 계속했다. 처음에 그녀는 질경련을 일으켜 성교에서 오르가슴을 느 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 체위를 굴욕적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자진하여 공세를 취하면서 적 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남편을 '미친 듯이 사랑하면서' 그를 버리고 다시 여성과 관계 를 갖게 되었다. 그후 어떤 남성 예술가를 알게 되어 몸을 맡겼으나, 역시 오르가슴에 도 달하지 못했다. 그녀의 생활은 몇몇 시기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어느 기간은 글을 쓰면서 창작에 종사하고, 자기를 완전히 남성으로 느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녀는 사디즘적으로 여성들과 동침했다. 다음은 여성이 되는 기간이 있다. 그녀는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싶어 정신분석을 의뢰했다. 동성애의 여자는 완전히 남성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여성을 상실하는 것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역시 참된 남성적인 자존심을 가질 수 없다. 그녀는 손으로 여자친구의 처녀성을 빼앗거나, 남성이 여성을 차지하는 동작을 그대로 모 방하기 위해 인공적인 페니스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그녀는 역시 거세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여성으로서는 미완성이고, 남성으 로서는 불능인 그녀의 불쾌감은 때로는 정신병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느 여자 환자 는 달비에즈에게 이렇게 말했다.(<정신분석 방법과 프로이트의 학설>에서) "나에게 돌입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건강이 좋아질텐데." 그리고 다른 여성은 자기의 유방이 굳어졌 으면 좋겠다고 호소한다. 동성애의 여성이 자기의 열등성을 보충하기 위해 거만한 태도와 노출증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정신이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때로 다른 여성들을 상대로, '여성적인' 남성이나, 아직 한 남성으로서 미숙한 청년이 여 성을 상대할 때에 하는 것과 비슷한 일종의 관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 가장 현저한 예는 크라프트 에빙이 보고하고 있는 '상도르'의 경우이다. 사롤타는 괴상하기로 이름난 헝가리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를 남자아 이처럼 길렀다. 그녀는 말을 타고 사냥도 했다. 이런 일은 13세에 기숙 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어떤 영국 소녀를 사랑하여 자기는 남자라고 하며 소녀를 유혹했 다. 그녀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지만, 곧 '상도르'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아버지와 함 께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남성적인 스포츠에 열중하고 술을 마시고 매음굴에 출입했다. 그녀는 특히 여배우나 고독한 부인에게 마음이 끌렸는데, 그것도 나이가 지긋한 여성을 택 하여 정말 '여성적'인 것을 사랑했다. "나는 시적인 베일 밑에 감춰진 여성다운 정열을 좋아했다. 여자의 뻔뻔스러움은 나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나는 여자의 옷이나 그 밖에 여성다운 것은 모두 질색이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여성에 대해서는 열정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녀 는 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그 때문에 많은 돈을 썼다. 그동안 그녀는 부다페스 트의 2대 신문에 기사를 쓰고 있었다. 3년 동안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여성과 남자행세 를 하면서 동거하고, 헤어질 때 상대방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에게 열렬한 애정 을 쏟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젊은 여교사를 사랑하여, 결혼흉내를 내면서 동거생활을 했다. 처녀의 가족 과 약혼자는 그녀를 남자라고 생각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미래의 사위를, 발기하는 남근을 가진 훌륭한 남자로 믿었다.(아마도 인조 음경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면도로 수염을 밀기 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그녀의 속옷에서 월경자국을 발견한 하녀는 열쇠구멍을 통해 상도 르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체가 드러난 그녀는 감옥에 끌려갔다가 석방 되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마리와의 이별을 슬퍼하여 독방에서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 고 있었다. 그녀의 체격은 여성으로서 완벽하지는 않았다. 골반은 매우 좁고, 허리도 가늘었다. 유방 은 잘 발달되어 있었으나, 성기는 발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상도르는 17세 때 첫 월경을 하였는데, 그녀는 월경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와의 육체관계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다. 그녀는 남자보다 여자와 동침하기를 좋아하여, 여자를 상대하며 수치심도 느끼는 것이었다. 여자로 취급받으면 몹시 당황하고, 여자 옷을 입어야 할 때에는 몹시 불안해했다. 그녀는 '24세에서 30세까지의 여자에게는 자석처럼 이끌렸다.' 그녀는 여자친구를 애무할 때에만 성적인 만족을 느끼고 애무를 받을 때에는 조금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때로는 발기한 남근 모양의 천 부스러기를 채운 양말을 사 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자를 몹시 싫어했다. 타인의 정신적 평가에는 민감하고,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 다. 그리고 높은 교양과 비범한 기억력도 갖고 있었다. 상도르는 정신분석은 받지 않았으나, 이런 사실의 보고만 보더라도 몇가지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받은 교육과 체질 때문에 자기를 언제나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자기의 여행과 생활에 그녀를 참여시킨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 다. 그녀의 남성적인 성격은 매우 분명하여, 여자들에 대해서도 전혀 상반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를 남자처럼 사랑하고, 상대방 여자에 의한 타협에 전혀 이상함을 느 끼지 않았다. 그녀는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 여자를 지배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랑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남자를 싫어한 것'과 특히 나이가 지긋한 여자를 사랑한 것이 주목을 끈 다. 이것은 상도르가 어머니에 대한 남성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성이 무의식중에 자기 와 동성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려고 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 을 암시한다. 그녀는 어머니와 짝이 되어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언젠가는 지배하려는 희망 을 품고 있던 어렸을 때의 소아적인 태도를 지속해 왔다. 어린이가 어머니의 애정을 충분 히 얻을 수 없을 때, 장성해서까지 이런 애정의 욕구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상도르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머니를 몽상하여, 이것을 다른 여자들을 통해 찾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로써 연상인 '고독한 여인'에게 바치는 '시적'인 사랑을 다른 남성에 대한 깊은 질투와 결부시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녀에게 그런 여자들은 신성시된다. 그녀의 태도는 바랑 부 인에 대한 루소의 그것이며, 샤리에르 부인에 대한 젊은 뱅자맹 콩스탕의 그것과 똑같다. 감상적이고 '여성적'인 청년은 역시 모성애적 애인에게 이끌리기 쉽다. 이런 동성애 여자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결코 자기 어머니와 동일화하는 일은 없다. 어머니를 몹 시 존경하거나 반대로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여자인 것을 거부하면서 여성적인 부드러움으로 둘러싸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서, 그녀는 남자처럼 대 담하게 세상에 뛰어들 수 있다. 그녀도 남자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남자로서는 약하여 연 상인 애인의 사랑을 구하게 된다. 이런 한 쌍의 연인은 고전적인 이성애의 한 쌍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중년부인과 총각의 커플이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성애형의 여자가 그 어머니와 일찍이 가졌던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 했다. 젊은 처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 는 걱정이 많은 어머니에 의해 애지중지 양육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고약한 어머니에 의해 구박을 받아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했을 경우이다. 첫째의 경우는 모녀의 관계가 이 성애와 비슷하다. 그녀들은 함께 잠을 자고 서로 애무하고 젖을 빨기도 했다. 딸은 후에 다른 사람의 품속에서 같은 행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둘째의 경우는 어머니로부터 자기 를 지키고 자기가 느꼈던 저주를 제거해 주는 '상냥한 어머니'를 몹시 원할 것이다. 하벨로 크 엘리스가 이야기하는 어떤 여성은 그 유년시절에 줄곧 어머니를 싫어했는데, 16세 때 연상인 여인에게서 느낀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고아가 갑자기 어머니를 얻은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어른에게 전과 같은 적의를 품지 않고, 어느 정도 존경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매우 순결하여, 나는 그 녀를 어머니처럼 생각했다.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면 무척 즐거웠다. 그녀는 때때로 나를 품에 안기도 하고 무릎 위에 앉히기도 했다... 내가 잠자리에 들면 그녀는 잘 자라면 서 내 입술에 키스해 주곤 했다." 연상의 여자가 원하면 젊은 처녀는 더욱 함차게 포옹하도록 기꺼이 몸을 맡긴다. 보통 그녀 쪽이 수동적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지배와 보호를 받기를 원하고 어린애처럼 귀염과 애무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플라토닉한 것으로 그치든 육체적인 것이 되든, 진정한 연애의 정열을 수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것은 사춘기 처녀가 진화의 도중에 거치는 고전적인 단계이므로, 이것만으로는 동성애의 결정적인 선택을 설명 하기에 충분치 않다. 젊은 처녀는 이런 방법으로, 그녀가 이윽고 남성의 품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방과 안 정감을 동시에 구하고 있다. 연애의 정열적인 시기가 지나면 연상인 언니에게, 어머니에 대해 느끼고 있던 것과 상반되는 감정을 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녀는 그런 감정에서 벗 어나기를 원하면서도 그 힘에 눌려 있다. 상대방이 그녀를 집요하게 붙잡아두려고 하면, 그녀는 '사로잡힌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싸우든 타협하든 언젠가는 이런 환경 에서 벗어난다. 드디어 성숙기를 마친 그녀는 정상적인 여자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 했다고 느끼게 된다. 동성애자로서의 그녀의 운명이 분명히 결정되려면 그녀는 상도르처럼 여자다움을 단호히 거부하거나, 아니면 여자다움이 여자의 품에서 가장 행복하게 꽃을 피 우거나, 어느 한쪽이어야 한다. 즉 유아기 어머니와의 관계의 고착만으로 성적 도착을 충 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도착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선택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는 그 완전한, 혹은 미숙한 성적 경험을 통하여,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조금도 쾌락을 얻을 수 없으며 다른 여성을 상대해야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예감하 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 여자에게는 동성애적인 포옹이 가장 만족을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것은 특히 중요하다. 즉 자기를 객체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반드시 여자 를 동성애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동성애 여자의 대다수는 그녀들이 갖고 있는 귀중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간직하고 싶어한다. 자기를 수동적인 물체로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것은, 주체적인 요구를 개끗이 단념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즉자존재의 형태로 자기발견을 원한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그 타성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려 노력한 다. 고독 속에서 그녀는 현실적으로 자기를 둘로 나룰 수가 없다. 자기 가슴을 스스로 애무 하더라도 그 가슴이 다른 사람의 손에는 그 정체를 어떻게 드러낼 지 알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손 아래서 어떻게 삶을 느끼게 될지 알지 못한다. 한 남자는 그녀 육체의 '대자적' 인 실존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에 대해' 무엇인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손가락이 한 사람의 여자의 몸을 어루만져 확인하고, 또한 그 여자가 자기 몸을 애 무해 줄 때 비로소 거울의 기적이 완전히 나타난다. 남녀간의 사랑은 하나의 행위이다. 각 자가 자기를 떠나 타자가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크게 놀라게 하는 것은, 자신의 수동적인 무기력이 남성 성기의 열광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발기한 남성 성기 속에서 막연히 자기의 매력을 느낄 분이다. 여자들 사이에서 사랑은 관조이다. 애무는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재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분리란 전혀 없기 때문에 투쟁이나 승리나 패배도 있을 수 없다. 정확한 상호성 속에 각자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며 군주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이중성은 공모이다. 콜레트는 말하고 있다. "꼭 닮은 것은 육체적인 쾌락을 보증하기도 한다. 여자치구는 자기의 비밀을 알고, 상대방에게서 애정의 가르침을 받는 자기 몸을 애무하는 듯한 확실성을 기뻐한다."(<이런 쾌락들>에서) 그리고 르네 비비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은 귀여운 여자의 유방처럼 닮았다! 우리들의 육체는 똑같은 형태, 똑같이 외롭고 육중한 운명이 우리의 영혼에 실려 있다. 나는 그대의 미소와 그림자를 얼굴 위에 옮긴다. 나의 정다움은 보다 많은 그대의 정다움과 같아, 때때로 우리가 같은 핏줄에서 태 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그대 속에 있는 나의 아기, 나의 친구, 나의 언니를 사랑한다. 이와 같은 분열은 모성애와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딸 속에서 자기를 인 정하고 자기를 딸에게 옮기는 어머니는 딸에 대해 성적인 애착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품안에 귀여운 육체적 대상을 안아 보호하고, 어린아이처럼 애무하고 싶은 심정은 동성 애의 여자와 같다. 콜레트는 <포도덩쿨>에서 다음과 같이 그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당 신은 어머니와 같은 불안하고 근심에 찬 눈빛으로 내 위로 몸을 기울여 내게 쾌락을 줄 것이다. 정열적인 여자친구를 통하여, 당신이 가져보지 못한 아기를 구하고 있다. 르네 비비앙도 이와 동일한 심정을 말하고 있다. 오라, 나는 병든 소녀처럼, 당신을 데리고 가련다. 울보에다 겁이 많고 마음 약한 병든 소녀처럼. 신경이 날카로운 나의 품안에 당신의 날씬한 몸을 껴안는다. 보라, 나는 병을 고칠수도 있고 보호할 수도 있다. 이 두 팔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거기서 안식할 아늑한 요람 같은 내 품안에 든 연약하고 조용한 당신을 사랑한다.(<합장의 시각>에서) 모든 사랑 속에는(성애이든 모성애이든) 탐욕과 관용, 타자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성애의 여자가 완전 히 일치하는 것은 이 양자가 어린이나 애인(여자)속에서 자기의 연장된 형태나 자신의 반 사된 모습을 애무하는 나르시스트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르시시즘이 언제나 동성애로 인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마리 바슈키 르체프의 예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녀가 쓴 것 중에는 여자에 대한 상냥한 마음의 흔 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적이며, 허영심이 매우 강한 이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남성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을 꿈꾸었다. 그녀는 명성에 도움 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단지 자기만을 우상화하여 추상적인 성공만을 노리고 있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애정어린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경쟁 자와 적으로만 보인다. 사실 어떤 요인도 그것 하나가 결정적으로 작용할수는 없다. 언제나 복잡한 전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유로운 결정에 근거를 둔 선택이 문제이다. 어떤 성적 숙명도 개인 의 생활을 지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색정작용(에로티시즘)은 실조에 대한 그의 총괄 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이 이 선택방법에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날도 남녀 양성은 많은 경우에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기숙사, 여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성적관계로 옮아가기 쉽다. 소녀와 소년의 교우관계가 이성애적 체험을 쉽사리 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동성애가 극히 드물다. 직장이나 사무실에서 여자끼리 일하고 남자와 교제할 기회가 적은 여성은 동성끼리 연인처럼 되기 쉽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그녀들은 생활을 결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이성애의 관계의 결여나 실패는 여자들을 도착성욕 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체념과 애호의 한계를 구분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자에게 실 망하여 여자를 사랑한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래 남자에게서 여자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성애의 여자 와 동성애의 여자 사이를 엄밀히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춘기의 불확실한 시기가 지나면, 정상적인 남성은 결코 남색적인 탈선행위를 하지 않 는다. 그런데 정상인 여성이라도(정상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녀시절에 즐긴 동성의 사랑 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자에게 환멸을 느낀 여성은, 동성의 품에서 자기를 배반한 애인을 구하려고 한다. 콜레트는 <방항하는 여인>에서 여성에게 종종 위로를 주 는 변태적인 쾌락에 대해 쓰고 있다. 여성 중에는 일생을 통하여 이런 위안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남성의 포옹에 의해 만족을 얻고 있는 여성이라도, 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쾌 락을 멸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자친구들의 애무는 다만 포옹에 몸을 맡기고 만족감을 느끼면 되기 때문에 수동적이며 관능적인 여성은 그 애무를 거절하지 않는다. 능동적이고 열렬하면 '남녀 양성 소유자'처럼 생각된다. 호르몬의 신비적인 결합 때문이 아니라, 공격 성, 소유욕을 남성의 성질로 보기 때문이다. 르노를 사랑하는 클로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녀는 명실공히 여성이지만, 그래도 상대를 취하여 애무하려는 욕망을 찾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변태적' 욕망은 '정숙한' 여성에게는 용의주도하게 억압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은 순결하면서 도 정열적인 우정의 형태로 또는 모성애의 형태로 은밀히 나타낸다. 이 욕망은 때때로 정 신병의 발작이나 폐경기간에 격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동성애의 여자를 완전히 다른 두 범주로 나누려고 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 진실 한 관계를 감추고 사회적인 희극이 연출되어 남녀의 한 쌍처럼 꾸미는 경우가 있는 것처 럼, 그녀들도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식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쪽이 남장을 하고 다른쪽이 부드러운 여자옷을 입고 있다고 속아서는 안 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극단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녀들의 성본능은 애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의 지배가 싫어 동성애자가 된 여자는, 다른 여자에게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 존심이 강한 남성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기쁨을 느낀다. 전에 남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공동생활을 영위한 세브르의 여학생 사이에는 변태성 연애가 많이 생겨났다. 그녀들은 자기가 여성 엘리트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며 언제까지나 자주적이고 주체로 있고 싶어했다. 특권적인 계급에 반항하여 그녀들을 결합시키는 이 공 모의식이 그녀들로 하여금 매력적인 존재를 여자친구에게서 발견하고 감탄하게 했다. 이 매력적인 존재는 그녀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로 포옹할 때 각자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가 되어 암수 앙성의 효과를 즐길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여자의 품속에서 여자다움을 즐기고 싶어하는 여성도, 어떤 지배자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을 갖고 있다. 르네 비비앙은 여성미를 열렬히 사랑하여 자기도 아름다워지기를 원했다. 그녀는 몸을 단장하고 긴 머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자유 를 누리고 싶었으며 깨끗한채로 있고 싶어했다. 그녀는 결혼에 의해 남성의 노예가 되는 여성을 경멸하는 시를 썼다. 그녀가 독한 술을 좋아하고 가끔 추잡한 말을 지껄이는 것은 남성화의 욕구를 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수많은 결합에서 애무는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역할은 피차 매우 불확실하게 할당된다. 어린애 같은 여자가 모성타입의 여 자에게 청년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남자 품에 안기는 애인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 다. 그녀들은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사랑할 수 있다. 상대가 동성인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결합, 치환, 교환, 희극이 가능하다. 여자친구들 각자의 심리적인 경향에 따라 분위기 전체 에 따라 각각 관계가 안정된다. 상대방을 돕고 생활에 보탬을 주는 여성이라면, 그녀는 남 성의 역할(폭군적인 보호자, 이용만 당하는 무골호인, 존경받는 군주와 같은)을 한다. 정신 적, 사회적, 지적 우월에 의해 지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여 자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상대방의 정열적인 애정의 특권을 받게 마련이다. 남녀간의 동거 생활도 마찬가지로, 두 여자의 공동생활도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것들은 감정 과 이해와 습관 위에 구축된다. 그리하여 실제로 부부생활처럼 보이기도 하고, 낭만적인 경우도 있다. 거기에는 사디즘, 마조히즘, 관용, 정결, 헌신, 변덕, 이기주의, 배반 등이 포 함된다. 동성애 여자 사이에도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도 있고, 매춘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어떤 사정 때문에 특이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동성애는 제도나 풍속에 의해 정당화되어 있지 않고, 습관에 의해서도 규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동성애 는 보다 솔직하게 존속되고 있다. 남녀는 부부라도 마주 대할 때에는 다소 체면을 차린다. 특히 여자는 남자로부터 언제나 어떤 요구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모범적 인 정조, 매력, 교태, 미숙함, 혹은 엄숙한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되고 있다. 여자는 남편이 나 애인 앞에서 완전한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친구들을 상대할 때에는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고 가식이 필요없으며 서로 똑같기 때문에 바닥까지 드러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유사성이 완전한 친밀감을 가져온다. 감각적인 쾌락은 남녀간의 사랑처럼 격렬하거나 현혹적이 아니며, 놀랄 만한 변모도 일으키지 않는다. 남녀의 애인들은 육체에 서 서로 떨어지면 다시 남남이 된다. 그리고 남성의 몸이 여성에게 진저리나게 여겨질 때 도 있다. 남자는 때때로 상대방 여자의 육체 앞에서 흥미를 잃고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육체적인 애정은 좀더 평탄하고 한층 지속적이다. 미칠 듯 한 황홀감으로 무아지경에 이르지도 않지만, 결코 반감어린 냉담에 다시 빠지는 일도 없 다. 상대를 마주보고 접촉하는 것은 침대의 쾌락을 조용히 연장하는 은밀한 기쁨이다. 사라 포송비와 그 여자 애인과의 결합은 아무 장애 없이 5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현세의 주변에 평화로운 낙원을 건설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성에도 약점이 있다. 서로 숨기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이 자기들의 모습을 드 러낼 수 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는 격렬하고 난폭한 상황으로 서로를 몰고가는 경우도 있 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자제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연민과 불안을 느낀다. 여자를 상냥하고 너그럽고 신중하게 다루려고 노력하고, 여자는 남자를 존경하고 조금은 두려워하며 자제하려고도 한다. 남녀는 그 감정이나 반응을 잘 파악할 수 없는 신 비로운 타인을 매정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와 여자 사이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상대의 계락을 서로 간파하고 도발하고 추구하고 대적하고 비열의 밑바닥 까지 상대방을 끌어넣는다. 남성의 침착한 태도는(그것이 냉담이든 자제이든) 여성의 성화 에 부닥쳐 부서지는 방파제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여자친구들 사이에서는 눈물과 발작의 경매가 있다. 잔소리와 변명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그녀들의 끈기는 한이 없다. 제멋대로의 요구, 매도, 질투, 압제, 부부생활에 으레 따르는 이 모든 재해가 사나운 형태로 미친 듯이 날뛴다. 이와 같은 동성애가 때때로 평온하게 지닐 수 있는 것은, 이성애보다 주위의 위협 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지탄을 받아 사회에 잘 어울리 지 못한다. 남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성측에서는(그 성격이나 입장이나 정열의 힘에 의 해) 자기의 애인인 또 한 사람의 여성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을, 즉 결혼을 하지 못하고 이상한 길을 함께 가게 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래드클리프 홀이 <고독한 우물>에서 그 여자 주인공에게 주고 있는 것이 이런 애정이다. 이런 마음의 고 뇌는 병적인 불안이나, 특히 괴로운 질투가 되어 나타난다. 한편 좀더 수동적이고 매혹되는 일이 적은 여자 쪽에서는 사회의 비난을 괴로워할 것이 다. 그녀는 자기를 타락하고 변태적이며 비정상인 여자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이 런 운명을 강요하는 상대방 여자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여자 중에서 한쪽이 아 기를 갖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녀는 자기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을 비관 하면서 체념하거나 혹은 두 사람이 양자를 키우거나 혹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쪽이 어떤 남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기는 때로는 두 여자 사이의 유대를 굳게 하는 경우 도 있지만, 때로는 마찰과 충돌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동성애에 묻혀 있는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성격을 주는 것은 그 색정생활이 아니다. 색 정생활은 오히려 여성적인 세계에 그녀들을 가둬두는 것이다. 남자와 같은 성격을 주는 것 은, 그녀들이 남자가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담해야 하는 모 든 책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들의 입장은, 언제나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 기 때문에 남성적인 정신을 갖기도 하는 고급 창녀형(예컨대 니논 드 랑클로와 같은)과는 정반대이다. 이런 여성의 생활은 역시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동성애 여자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특수한 분위기는, 여자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규 방적인 풍토와 공적 생활의 남성과 같은 독립성 사이의 대조에서 조성된다. 그녀들은 남자 가 없는 세계에서 남자처럼 행동한다. 여자만의 세계는 언제나 조금은 이상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남자가 여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남자들은 그들의 여자(아내나 애인이나 정부)를 통하여 남자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있다. 여자에게 남자의 보호가 미치지 못할 때, 여자는 자기에 대해 공격적이고 조소적이고 적의를 나타내는 우세한 계급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도착성욕'으로서의 여자의 동성애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동성애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면 경멸이나 분노를 일으킨다. 동성연애를 하는 여자의 태도에 많은 도전과 허세가 보이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 좀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에는 자기반성을 별로 하지 않다는 것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타인의 행동은 동성애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자기를 의식하게 한다. 다만 그녀가 나이를 먹었거나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의 여자가 흔히 남장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취미인지 아니면 방어적인 반응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에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들에게는 여자의 옷을 입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물론 남장을 하는 것도 인공적이지만, 이 편이 훨씬 간편하다. 행동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편리하게 한다. 조르주 상드나 이 자벨 에베라르트는 남장을 하고 다녔다. 티드 모니에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남자 바지를 즐겨 입고 있다고 말했다. 활동적인 여성은 누구나 굽이 낮은 구두와 천이 질긴 옷을 선호 한다. 여자가 화장을 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몸을 장식하는 것이며 몸을 장식하는 것은 자기를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전에는 페미니스트도 동성애의 여자와 마찬가지 로 이 문제에 준엄했다. 그녀들은 자기를 상점에 진열하는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남자 복장을 하고 장식이 없는 펠트 모자를 썼다.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장식이 많은 부인복은, 그녀들에게는 자기들이 항거하여 싸우고 있는 사회질서의 상징처럼 생각되 었다. 오늘날에는 현실을 어느 정도 정복하게 되었으므로, 이 상징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보 이지 않게 되었다. 동성애의 여자에게도 그녀가 현실과 싸우고 있는 의식의 강도에 따라 상징은 중요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육체적인 특징이 그런 생활태도를 취하게 했다면 그녀 에게는 간편한 복장이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또한 복장의 역할에는 여자의 파악적 관능성 을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부언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성애의 여자는 비로드나 비 단의 위안을 경멸한다. 그녀는 상도르처럼 그런 것이 자기의 여자 친구에게 입혀지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친구의 육체가 자기 육체를 대신하기를 바란다. 동성애의 여자가 독한 술을 마시고, 독한 담배를 좋아하며, 거친 말을 하고 자진해서 난폭한 운동을 하는 것도 이 때 문이다. 그녀는 색정적으로는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갖고 태어난다. 그녀는 대조에 의해 힘 찬 풍토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와의 교제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 운 요인이 개입된다. 그것은 그녀가 남자들과 유지하고 있는, 다소 애매한 관계이다. 자기 의 남성적인 성격에 자신이 있는 여자는 친구나 동료로서 주로 남자들과 사귀려고 할 것 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남자들과 공통된 관심을 갖고 있는 여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여자는 일, 행동, 예술에서 남자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일하여 성공한다. 거트루드 슈타인은 친구를 초대했을 때 남자들하고만 얘기하고, 여자친구의 접대는 알리스 토클라에 게 맡겼다고 한다. 지극히 남성화된 동성애의 여자는 여자에 대해 상반적인 태도를 취한 다. 그녀는 여자를 경멸한다.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여자로서나 남자로서도 열등 콤플렉스 를 느낀다. 다른 여자들에게 미숙한 여자나 불완전한 남자로 보이지 않을까 하여 걱정한 다. 그 결과 매우 교만한 태도를 보이거나 동성의 여자들에게(슈테켈이 말한 위장하는 여 자처럼) 사디즘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앞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대다수의 동성애 여자는 표면으로는 말없이 남자를 거부한다. 그녀들에게는 불감증이 있는 여자처럼 혐오, 원한, 소심, 자존심이 있다. 자기를 정말 남자와 같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여자로서의 원한에 남성적인 열등감이 가미되어 있다. 남자는 자기들이 손에 넣으려고 하는 먹이를 더욱 교묘히 유혹하여 소유하고 보존하는 경쟁자이다. 그녀들은 여자를 지배하기 위해 갖고 있는 남자의 권력을 증오한다. 그녀들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갖는 힘을 미워하고 여자에게 가하는 오욕을 미워한다. 남자가 사회적 인 특권을 독점하고, 자지들보다 강자라고 느끼는 데 대해 분노한다. 그녀들이 경쟁자(남 성)와 당당히 싸울 수 없고, 상대가 자기를 주먹 한방으로 쓰러뜨린다고 생각 하는 것은 괴로운 굴욕이다. 그녀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다. 클럽 같은 것을 만들어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남자가 필요없다고 시위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허세나 진정한 생활태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희극 을 연출하게 된다. 동성애의 여자는 우선 남자인 체한다. 다음에 동성애의 여자라는 그 자 체가 하나의 유희가 된다. 가장과 위장이 제복으로 바뀐다. 그리고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 난다는 구실로, 자기가 연기하는 역할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녀는 여자라는 입장에 자기 를 가두고 싶지 않았으나, 동성애의 여자의 입장은 자기를 감금해 버린다. 해방된 여자의 작은 그룹처럼 정신의 편협성이나 불구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없다. 그리 고 많은 여자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자기를 동성애의 여자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은 의식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여 '악습에 물든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한다. 쉽게 눈에 띄는 이런 여자들 때문에 사회는 그녀들을 한결같이 악덕처럼, 부자연스러운 겉치레처럼 여기게 하는 악평을 조장하고 있다. 사실 동성애는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고,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다. 이것은 '상황에 있어서 선택되는' 하나의 태도, 즉 동기를 갖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태도이다. 주체가 이 선택에 의해 수락하는 어떤 요인(생리적인 조건, 심리적인 역사, 사회적인 상황)들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결정적이 아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그 일반적인 조건, 특히 색정적인 입장에 의해 설정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나. 모든 인간의 행위처럼 동성애도 그것이 허위와 나태의 비진 실 속에 사느냐, 아니면 명철과 관용과 자유속에 사느냐에 따라 희극과 불균형과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풍부한 체험의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제2편 상황 제1장 기혼부인 사회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혼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이 결혼해 있거나, 과거에 결혼했거나, 앞으로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혹은 결혼하지 못해 고심 하고 있다. 아무리 독신녀가 이런 결혼제도에 실망했거나, 반항하고 있건, 아니면 냉담하거 나 간에 그 독신녀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결혼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결혼 자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성의 생활조건의 경제적인 진화는 결혼제도를 전복해 가고 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자 주적인 개인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진 결합이다. 배우자의 계약은 개인적이고 상호적이다. 간통은 상호간의 계약파기가 된다. 양자가 모두 같은 조건에서 이혼이 가능하다. 이제 여 성은 아기를 낳는 직능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아기를 낳는 것은 그 자연적인 노예작업의 성격을 대부분 상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직능도 의지적으로 맡은 일처럼 되었다. 그리 고 산아는 생산노동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국가는 고용주는 임신기간중에 요구되는 휴양기간을 산모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 이다. 소련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결혼은 단지 부부의 자유에 기초를 둔 개인 상호간의 계약처럼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두 사람에게 부과하는 공적이 의무처럼 보인 다. 앞으로 그중 어느경향이 주류를 이루는가는, 전체적인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어쨌든 남성의 감독적인 지위는 소실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보 면, 현대는 아직 과도기에 불과하다. 여성의 일부만이 겨우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도 옛날의 가치가 아직 남아 있는 사회에 속해 있다. 현대의 결혼은 거기에 영 원히 남아 있는 과거의 빛에 비춰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결혼은 언제나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전혀 다른 형태로 존속되어 왔다. 두 성은 반드시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필요가 양자 사이에 조금도 상호성을 이루지 못했다. 여성은 한 번도 남성이라는 계급을 상대하여, 교환과 계약의 평등한 위치에서 자기들의 계 급을 형성한 적이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남성은 자주적이고 완전한 개체이다. 남성은 특 히 생산자로서 생각되며, 그 생존은 그가 집단에 제공하는 노동에 의해 정당화되어 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생식적, 가정적인 역할에는 어째서 남성과 동일한 품위가 주어져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확실히 남성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어떤 원시민족 중에는 독신남은 혼자서 생활필수품 을 얻을 능력이 없으므로 최하층의 천민처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농촌에서는 조력자로 서의 여성이 꼭 필요한 존재이다. 또한 대다수의 남성들은 노예적인 일은 아내에게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 개인은 안정된 성생활과 자손을 원한다. 사회는 그에게 사회가 영속되도록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지는 않는다. 남성의 사 회는 그 구성원 각각에게 남편으로서, 또는 아버지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한다. 여성은 아 버지나 남자형제가 지배하는 가족에게 노예로서, 가신으로서 끼게 되는 여성은 결혼이라는 명분에 의해 한 남성의 손에서 다른 남성에게로 주어진다. 원시시대의 씨족, 부계의 일족은 여성을 거의 물건처럼 취급했다. 여성은 두 가족집단이 서로 합의하여 제공하는 물건의 일부였다. 결혼이 진화되어 계약의 형태를 취하게 된 후에 도, 여성의 신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결혼지참금을 갖고 있거나 또는 유산 중에서 자 기 몫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여성도 어느정도 한 사람의 시민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지참 금이나 유산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더 그 가족에 예속되게끔 했다. 오랫동안 계약은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미망인인 경우에만 경제적인 자주성을 가질 수 있었다. 혼기를 맞은 처녀에게 선택의 자유 는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다. 독신생활은, 그것이 신성한 성격을 지닌 예외적인 경우를 제 외하고는 여성을 기생적이고 천민적인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결혼은 여자의 유일한 호구지책이며, 그 생활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유일한 방법이 다. 결혼은 여자에게 이중의 의미를 갖게 한다. 여자는 공동체에 자식을 제공해야 한다. 그 러나 국가가(스파르타나 나치스 치하에서 다소 그랬던 것처럼) 직접 여자를 보호하고, 단 지 어머니의 역할만 요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버지의 생식적인 역할을 무시하는 사 회에서도 여자는 남편의 보호 아래에 있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한편, 가사를 맡게 된다.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는 부담은, 남편에 대한 봉사이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선물이나 재산의 일부를 주어야 하고, 또 아내를 부양해야 한다. 사회는 남편을 중개자로 하여 그 봉사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아내가 그 임무를 다하는 대가로 어떤 권리를 갖게 되는 가는, 남편의 의 무에 의해 분명해진다. 남자는 멋대로 부부의 유대를 파기해서는 안 된다. 결혼을 포기하 거나 이혼을 하는 것은 국법의 결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때로는 그 경우에 남편은 경제 적인 것으로 보상해야 한다. 이런 관습은 보코리스의 이집트에서는 남용되는 경우도 있었 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그것이 이혼수당의 형식으로 시행되고 있다. 일부다처제는 언제나 다소 너그럽게 보아왔다. 남성은 그의 침대에서 노예, 제2부인, 첩, 애인, 창녀 등과 동침할 수 있다. 그러나 본부인의 모종의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만 일 본부인이 학대를 받거나, 크게 모욕을 당했을 경우에 그녀는 다소나마 구체적으로 보증 된 비상수단에 호소한다. 즉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별거나 이혼을 요구한다. 이처럼 두 사 람에게 있어 결혼은 부담이자 이익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입장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젊 은 처녀에게 결혼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팔리지 않으면 그녀들은 사회적으로 실격자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그처럼 혈안이 되어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 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세기 중산층에서는 딸의 의견 따위는 무시해 버렸다. 미리 정해 놓은 맞선장소에 나타난 구혼자에게 그냥 내주어버린다. 졸라(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18 40~1902)는 <세대>에서 이러한 습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조스랑 부인은 "실패야, 실패했다니까." 하고 의자에 푹 파묻히면서 말했다. "아!" 하고 조스랑 씨는 말할 뿐이다. "당신은 모르시는군요? 또 혼담이 깨졌단 말이에요. 벌써 네 번이나 실패했어요." 조스랑 부인은 토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알아들었니?" 조스랑 부인은 딸에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넌 왜 또 혼담을 그러쳤느 냔 말이야?" 베르트는 드디어 자기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몰라요, 엄마." 하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부국장이야, 아직 30도 안 됐다구. 장래가 유망하잖아. 달마다 너에게 월급을 갖다줄 수 있잖아. 착실한 청년이라구. 그게 제일이지... 네가 또 저번처럼 망쳤어." "그렇지 않다니까요. 엄마." "춤출 때 둘이서 옆방에 들어가지 않았니!" 베르트는 쑥스러웠다. "그래요. 엄마... 단둘이라 그 사람이 짓궂게 굴었어요. 날 이렇게 껴안고 키스하지 뭐예요. 난 무서워서 그 사람을 서랍장 쪽으로 떼밀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짜증을 내면서 딸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 서랍장 쪽으로 떼밀었다구! 이 바보 야. 남자를 그렇게 떼밀다니!" "하지만 엄마, 글쎄 그 사람이 날 놓아주지 않지 뭐예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놓아주지 않았다구... 이 바보야, 기숙사에라도 처넣야겠다! 도대 체 지금까지 뭘 배운 거야! 문 뒤에서 키스 한 번 한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그것도 말이 라고 에미에게 하니? 남자를 떼밀고 혼담을 모조리 깨버리다니!" 어머니는 세상 물정을 제법 아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끝장이야. 이럴 수가... 넌 정 말 바보야... 넌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니 딴 방법으로 남자를 붙잡아야 해. 귀업게 굴고 섹 시한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그가 손을 잡아도 모른 체하고 장난쯤은 하게 내버려워야 해. 남편을 낚는 거야... 내가 화를 안 내게 됐니, 맘이 내킬 땐 곧잘 하면서 왜 그래? 자, 눈물을 닦고 이 엄마를 널 좋아하는 남자라 생각하고, 이쪽을 좀 바라봐. 알겠어. 자, 부채 를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남자가 그걸 줍다가 네 손을 살짝 만지게 말이야... 긴장해서는 안 돼. 몸을 부드럽게 해야 해. 남자들은 뻣뻣한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상대가 좀 짓궂게 굴어도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래야 남자 쪽이 확 달아오르니까. 알겠어!" 벽시계는 두시를 쳤다. 어머니는 밤을 꼬박 새우는 흥분과, 당장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 는 욕망으로 딸을 마분지로 만든 인형처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정신없이 큰 소리 로 떠든다. 딸은 얼빠진 얼굴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공포와 수치로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이처럼 젊은 처녀는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녀는 부모에 의해 혼담이 이루어 져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스스로 결혼한다. 자기가 아내를 택한다. 그들이 결혼에서 얻는 것은 생활의 신장과 확보일 뿐, 결코 생존을 위한 권리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자진하여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부담이다. 그러 므로 그들은 그 이해득실을 그리스나 중세의 풍자작가들처럼 차분하게 따질 수 있다. 그들 에게 결혼은 하나의 생활양식이지 결코 운명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독신생활의 고독을 택 하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늦게 결혼하고, 또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한다.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세계의 작은 일부를 자기의 영지로 받게 된다. 법률의 보증이 남자 의 폭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다. 그 대신 그녀는 남자의 가신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 로 가장은 남자이며, 따라서 사회에서 그녀를 대표하는 것도 남자이다. 그녀는 남자의 성 을 따르게 된다. 남자의 종교에 속하고, 그 계급에 편입되고, 그 환경에 들어간다. 그 가족 의 일원이 되고, 그의 반신이 된다. 그녀는 남자의 직업에 따라 움직여야한다. 부부의 거처 는 남자의 직업에 따라 결정된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와 단절되어 남편의 세계에 적응한 다. 남편에게 자기의 인격을 맡긴다. 그리하여 그녀는 민법이 독신여성에게 인정하는 권리 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로마의 법률은 여자를 처녀로서 남편의 손에 인도한다. 19세기 초에 보날드는, 여자와 남편의 관계는 아기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1942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민 법은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도 법률이나 관습은 남자에게 높은 권위 를 인정하고 있다. 그 권위는 남자가 부부의 공동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다. 남자야말로 생산자이며, 가족의 이해를 초월하여 사회의 이익을 위하는 것도 그 남자 이고, 집단의 장래를 확립하는 데 협력하면서 사회를 위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도 남 자이다. 초월을 구현하는 것도 남자이다. 여자는 종의 존속과 가사에 몸을 바치고 있다. 즉 내재에 몸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생활은 초월인 동시에 내재이다. 자기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유지 하는 것이 필요하며, 미래를 향해 비약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합쳐서 타자와 교류하면서 자 기 안에서 자기를 확인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이 두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남 자에게 결혼은 바로 그 행복한 종합을 허용하는 것이다. 남자는 그 직업, 그 사회활동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알게 되고, 시간과 우주를 통해 자기확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남 자는 이런 활동에 지쳤을 때 가정을 이루어 거처를 정하고 세계의 한 지점에 닻을 내린다. 그는 밤에 아내가 아이들과 가구를 돌보고 또 그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과거 를 지키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내는 단지 순수하고 동일한 일반성 속에 생활 을 유지하고 가꾸는 일만 할 뿐이다. 그녀는 부동의 종을 영속시킨다. 날마다 일정한 리듬 과 자기가 문을 닫고 지키는 가정의 항구성을 확보한다. 그녀에게는 미래나 세계에 직접 도전할 어떤 계기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녀가 자기를 벗어나 공동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만 남편의 중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늘날에 와서도 결혼은 여전히 많은 점에서 이런 전통적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결혼 은 젊은 남자보다도 젊은 여자에게 훨씬 더 강요되고 있다. 아직도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는 사회계층에서 여자에게는 결혼 이외엔 장래를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농민의 경 우 독신녀는 최하층의 인간이다. 그녀는 아버지나 형제, 혹은 형부의 하녀가 되어야 한다. 도시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혼은 그녀를 남자에게 예속시키지만 한 가정의 여주 인이 되게도 하는 것이다. 어떤 중산층의 환경에서는 젊은 처녀는 여전히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한다. 집에 얹혀서 살아가건, 남의 집에서 종속적인 지위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가장 해 방되어 있을 경우에도 경제적인 특권은 남성의 손에 쥐어져 있으므로 직장을 갖기보다는 결혼 쪽을 택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현재 지위보다 더욱 훌륭한 지위를 갖고 있는 남편을 찾아, 남편이 더욱 빨리, 더욱 높이 출세하기를 기대한다. 옛날이나 지금까지도, 성행위는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봉사로 간주되어 왔다. 남자는 자 기의 쾌락을 느끼고, 그 대신 상대방에게 보상을 제공해야한다. 여자의 육체는 사고파는 하나의 물품이다. 여자에게 있어 육체는 자신이 알아서 이용하는 허용된 자본이다. 여자가 남편에게 지참금을 가져올 때도 있다. 흔히 여자는 가사를 떠맡는다. 집안일을 처리하고 아기를 기른다. 어쨌든 그녀는 남편에게 양육받을 권리를 갖게 되고 전통적인 도덕은 그것 을 권장하기도 한다. 여자의 직업이 대개 불리하고 급료도 싸기 때문에 여자가 이런 안이한 전통에 유혹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혼은 다른 경력보다 훨씬 유리하다. 풍습은 여전히 독신여성의 성적 해방을 어렵게 한다. 프랑스에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법률로도 여자의 자유연 애를 금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간통은 범죄로 규정했다. 여자가 애인을 택하려고 하면 먼 저 결혼할 것이 전제되었다. 엄한 구속을 받고 있는 많은 중산층 처녀들은 오늘날에도 자 유롭기 위해 결혼한다. 상당히 많은 미국 여성들은 그 성적인 자유를 획득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체험은 말리 노프스키(영국의 인류학자, 1824~1942)가 쓰고 있는 것처럼 '독신자의 집'에서 하찮은 쾌락을 맛보고 있는 젊은 원시인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쨌거나 그녀들은 결혼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결혼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어른 취급을 받게 된다. 독신녀는 프랑스보다 미 국에서, 설사 자기 힘으로 살아가더라도,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개인으로서 어엿 한 품위와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어야 한다. 특히 모성은 결혼한 여자에게만 경의를 표한다. 미혼모는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그 아기는 무거운 핸디캡이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처녀들은 장래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면 결혼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한편 어떤 청년도 결혼을 장래의 기본적인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성년남 자로서의 품위를 주는 것은 경제적인 성공일 것이다. 이 품위에 결혼이 포함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특히 농민에게) 그것은 포함되 있지 않아도 무방하다. 현대생활의 조건은, 전보다 안정성이 없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젊은 남자에게도 결혼의 부담이 대단히 무거워 졌다. 반면에 결혼이 갖는 이득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그는 자기생활은 혼자서 꾸려나가기가 한결 쉬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성적 만족도 쉽사리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결혼은 물질적으로 편의를 제공하며(음식점에서 사먹는 것보 다 자기 집에서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에로틱한 편의도 있고(그리하여 자기 집에 매음녀를 갖게 된다), 개인을 고독에서 구해 주고, 가정과 자녀를 갖게 되어 시간과 공간 속에 안정을 얻게 된다. 그것은 그의 생존에 결정적인 목적수행이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 로 보아 남성의 요구가 여성의 공급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딸을 남에게 준다기보다 는 차라리 딸을 치워버린다. 남편을 구하는 젊은 쳐녀는 남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아니 라 그 부름을 유발한다. 중매결혼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온건한 부르주아지는 누구나 이런 결혼의 존속 을 찬성한다. 나폴레옹의 무덤 주변, 오페라 극장, 무도회, 바닷가, 티파티 등에는 미장원 에서 방금 세트한 머리에 새옷을 갈아입고 신랑감을 찾는 처녀들이 수줍은 듯이 아름다운 용모와 조심스러운 대화를 전시하고 있다. 부모가 옆에서 재촉한다. "그만하면 괜찮은 자 리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거야. 다음엔 네 동생 차례다." 가엾은 후보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구혼자는 결코 많지 않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점에서 그녀는 양의 무리와 교환되는 베두 앙 토인의 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콜레트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하고 있다. "재산 도 없고, 직장도 없고, 형제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처녀는 묵묵히 자기에게 돌아온 기회 를 받아들여, 신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클로딘의 딥>) 사교생활은 이처럼 노골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주의 깊은 감시하에 젊은 처녀 에게 교제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좀 더 자유가 허용된 처녀들은 자주 밖에 나가고 대학 강의를 받고 또 남자를 알 기회를 제공하는 직장을 갖게된다. 1945년부터 1947년 사이 에 클레르 르플래 부인이 벨기에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결혼선택에 관해 조사한 것이 있다. (클레르 르플래의 <약혼> 참조) 이 조사는 인터뷰로 실시되었다. 그 문답을 몇 가지 인 용하려고 한다. 문: 중매결혼은 많은가? 답: 이제 중매결혼은 없어졌다.(51%) 중매결혼이 대단히 줄어들었다. 겨우 1%정도이다.(16%) 결혼한 사람의 3%는 중매에 의해서였다.(28%) 결혼한 사람의 5~10%는 중매에 의한 것이다.(5%)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1945년 이전에 많았던 중매결혼은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 나 이해관계, 교제할 기회가 적은 것, 수줍음, 나이 또는 좋은 배우자를 택하고 싶은 욕망 등이 얼마 되지 않는 중매결혼의 동기이다. 이런 결혼은 때때로 성직자의 주선으로 이루어 진다. 어떤 경우, 젊은 처녀는 펜팔에 의해 결혼하는 수도 있다. 그녀들은 자기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리고 여기에 번호를 붙여 특수한 간행물에 게재한다. 이 간행물은 초상화를 게 재한 사람들에게 모두 발송한다. 예컨대 200명의 구혼여성과 거의 같은 수의 구혼남성이 거기에 게재된다. 남자쪽에서도 각자 자기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들은 자기가 그 중매자의 중매로 펜팔을 하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문: 최근 10년 사이에 젊은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약혼했는가? 답: 사교적인 모임에서(45%) 공동연구나 일에서(22%) 사사로운 모임, 체류에서(30%) 소꼽친구들 사이의 결혼은 매우 드물다. 연애는 예기치 않은 일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모 두 인정하고 있다. 문: 결혼 상대를 택할 때에는 돈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가? 답: 결혼의 30%는 오직 돈이 문제가 된다.(48%) 결혼의 50%는 돈이 문제가 된다.(24%) 결혼의 70%는 돈이 문제가 된다.(17%) 문: 부모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답: 부모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58%) 부모는 딸의 결혼을 바라고 있다.(24%) 부모는 딸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한다.(18%) 문: 혼기에 접어든 처녀들은 결혼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가? 답: 처녀는 결혼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36%) 처녀는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다.(38%) 처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을 하기보다는 결혼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26%) 젊은 처녀들은 혼기에 접어든 청년을 쫓아다닌다. 처녀들은 자기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 해 아무하고나 결혼한다. 그녀들은 저마다 결혼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남자가 구애하지 않는 것은 처녀에게 치욕이다. 이것을 면하기 위해 그녀는 아무 하고나 결혼한다. 혼기에 찬 처녀들은 결혼을 위해 결혼을 한다. 결혼에 의해 보다 자유를 누릴 수 있으므로, 결혼을 서두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증언이 일치하고 있다. 문: 결혼을 원하는 태도는 처녀 쪽이 총각보다 더 적극적인가? 답: 처녀들은 젊은 남자에게 자기의 심정을 분명히 표시하여 구혼한다.(43%) 처녀들은 구혼에 남자들보다 더 적극적이다.(43%) 처녀들은 수줍어한다.(14%) 이 점에서도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의 주도권을 잡은 쪽은 처녀 들이다. 처녀들은 자기가 세상을 잘 살아나갈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활 수단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므로 결혼의 길을 택한다. 그래서 처녀 쪽에 서 젊은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그 기세는 대단하다! 그녀들은 결혼하기 위해 필사적 인 힘을 기울인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남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자료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도 중산층의 상황은 벨기에와 마 찬가지이므로, 아마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 같다. 중매결혼은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많은 편이었다. 양성사이의 접근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개최되는 파 티의 회원이 모이는 녹색 변두리 클럽은 지금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구혼광고는 많은 신 문에 줄을 잇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나 언니, 그리고 여성잡지는 파리약으로 파 리를 잡듯이 남편을 잡는 기술을 처녀들에게 노골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낚시이고 사냥이므로,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눈이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된다. 꿈을 버리고 현실주의자가 되라. 교태에 수줍음을 곁들여라. 희망을 너무 크게 갖지 말고, 지나친 과욕도 금물이다. 젊은 남자들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를 경계한다. 벨기에의 한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클레를 르플래의 <약혼> 참조) "남자는 자기가 여자에게 추 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여자가 자기에게 갈고리를 던진 것을 알아차릴 때처럼 불쾌 한 일은 없다." 그들은 함정을 슬기롭게 피하려고 애쓴다. 처녀의 선택은 대체로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결혼하지 못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면 자유로울 수 없다. 대개의 경우에 그녀의 결심 속에는 열의보다는 오히려 계산과 혐오와 체념이 들어 있다. '구혼하는 남자가 대체 로 괜찮게 생각되면(환경, 건강, 직업) 사랑하지 않더라도 결혼을 승낙한다.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머리는 냉정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 처녀는 결혼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다. 결혼은 남자 에게보다 여자에게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결혼을 강하게 희구한다. 그러 나 결혼은 동시에 여자에게 한층 무거운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남자의 경우보다 한 층 더 무정하게 과거와 절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불안 을 느끼는 처녀가 많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아왔다. 결혼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 불안은 더욱 커진다. 신경병이 생기는 것은 이런 시기이다. 젊은 남자 쪽에서도 새로운 책임을 져 야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위 기에서 중대화되는 문제 때문에 생기는 신경병은 남자보다 처녀들이 휠씬 더 많다. 슈테켈 은 신경병적 징후를 보인 많은 처녀들을 진단한 바 있는데 그중에서 실례를 하나 인용하 고자 한다. 슈테켈이 그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구토증에 시달여 밤마다 모르핀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세수하기를 싫어하고, 침대에서 식사를 하고 항상 방에 처박 혀 있었다. 그녀는 약혼했으며, 자기의 약혼자를 열럴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슈테켈 에게 자기는 이미 그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고 고백했다... 나중에 밝힌 바에 의하면, 그 때 그녀는 조금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상대방 남자의 키스가 불쾌했다고 말하기 도 했다. 그녀는 자기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어머니에 대한 반감에서 남자에 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소녀시절에 부모가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낳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 이 되어 밤에 부모의 거동을 엿보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결혼해야 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부모의 침실을 내버려두고 가야 하나? 이건 말 도 안돼.' 그녀는 뚱뚱해지려고 했고, 손을 일부러 긁어 흉하게 만들었다. 바보행세를 하기도 했고 병에 걸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등, 약혼자가 자기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 다. 병은 의사의 치료를 받아 완전히 나았으나 그녀는 어머니에게 파혼하겠다고 애원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집에 남아 어린애처럼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기어코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그녀는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 한 처녀가 오랫동안 앓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처지 때문에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절망한다. 사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병을 앓고 있고, 파혼하지 않고서는 그 병을 고칠 수가 없다. 때로 결혼에 대한 공포증은, 전에 있었던 다른 사람과의 성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처녀성을 잃은 것을 상대방이 알게 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매들 에의 깊은 애정이, 아버지의 집에 대한 애착이 자신이 다른 남성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결혼하기를 결심하는 처녀도 역시 마음 한구 석으로는 은밀하고 집요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결혼 초의 생활을 어렵게 하여, 안정된 행복을 끝내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결혼이 결정되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다. "남편은 이를테면 자기를 사 랑하는 남자의 대리자이지 그 남자 자신은 아니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 은 분리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성질에 내포되어 있 는 것이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 성적인 결합을 집단의 이익을 향하여 초월시 키는 것이지 결코 그들의 개인적인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가부장제도하에 서는 -오늘날에도 회교도는 그렇지만- 부모의 권위로 선택된 약혼자들은 결혼하는 날까 지 서로 상대방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 생각된 생활기획을 감정이나 사랑 의 느낌 위에 구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분별있는 교제에서는 욕망은 그다지 심하지 않다. 그것은 약하고 둔하다. 사랑의 신 은 인간이 사랑 이외의 것으로 결합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예컨대 결혼과 같은 사랑 이외의 명목으로 결합하여 계속되는 교제에는 별로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결혼에서는 당 연히 친족관계나 재산 등이 정숙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존중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과 가족을 그와 동등하게, 혹은 그 이 상으로 생각해서 결혼한다."(제3권 제5장) 남자는 자기가 아내를 위한다는 사실에서, 특히 신부감이 많이 공급될 경우에는 선택에 여유를 갖는다. 그러나 성행위는 여자가 해야 하는 봉사로 생각되고, 그 봉사로서 자기의 이득을 꾀한다고 생각하는 이상, 여자의 개성적인 선택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결혼은 남 자의 자유에 대하여 여자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개성도 존재할 수 없다. 남자의 일생에 걸친 보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사랑 따 윈 단념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어느 어머니가 딸에게 "사랑이란 남자들이나 갖는 야비한 감정일 뿐이야. 정숙한 여자는 그런 걸 가질 필요가 없어." 하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 은 적이 있다. 이것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고 있는 이론을 소박한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제2권, p.25) 어머니나 아내의 여러 가지 관계는 한편으로는 쾌락에 속하는 자연스러운 개별성을 갖 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에서 자기소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개별성을 갖고 있다. 이 개별성이 언제나 다른 개별성에 의해 대치되는 어떤 우연적인 것을 어느 정도 갖 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적 본능에서 생기는 사랑이 지배하는 가정생활에서는 '이 남 편'이 아닌 일반적인 '어떤 남편', 일반적인 '어린이'가 문제이다. 여자의 이런 관계는 감수 성 위에 수립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 위에 수립되는 것이다. 여자의 윤리생활이 남자의 그것과 다른 것은, 여자의 개별성에 의한 구별 속에서나 그 쾌락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보 편적이며, 욕망의 개별성과는 무관하다는 데 있다. 이와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이 양면이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남자는 시민으로서 자기를 의식하는 능력과 보편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는 욕망의 권리를 이렇게 해서 스스로 사들이고, 동시에 이 요강에 대해 자기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이 관 계에는 개별성이 섞여 있어도, 그 윤리적인 성격은 순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 성격이 이런 성질의 것인 이상, 개별성은 아무래도 무방하며, 여자에게는 자기인식이나 타 자에 있어서의 자기인식도 결여되어 있다. 즉, 여자는 그 개별성 속에서 선택한 남편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성 속에서 여성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된다. 여자는 단지 생물의 종으로서, 개성화되지 않은 형태로만 쾌락을 느끼는 데 불과하다. 그래서 여자의 에로틱한 운명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여자는 결혼 이외에 어떤 성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부부사이의 성행위는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욕망과 쾌락은 사회적인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 그러나 남자는 노동자아며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향하여 자기를 초월해 가므로 결 혼하기 전에도, 부부생활 이외에도 우연히 쾌락을 맛볼 수 있다. 어쨌든 남자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정욕을 해소할 수 있다. 한편 여자가 암컷으로서 본질적으로 규정되 어 있는 세계에서는 여자는 어디까지나 암컷으로서 정당화 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생 물학적으로 다르다. 남자는 남편으로서, 또는 생식자로서 종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생식행위와 성적 쾌락 사이에 흔히 분열이 생긴다. 그래서 결혼은 여자의 성생활에 도덕적인 품위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런 윤리적인 품위를 말 살시키고 있다. 이런 식의 여자의 성생활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손상은 남자에 의해 고의적으로 인정되 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자들은 낙천적인 자연주의에 의해 여자의 고통을 보고도 태연스럽게 체념해 왔다. 남자들은 그것을 여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성서가 여자를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은 더욱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한다. 임신의 고통, 짧고 불확실 한 쾌락의 대가로 여자에게 부과된 이 과중한 벌금도 많은 농담거리가 되었다. '5분 동안 의 쾌락, 9개월의 형벌... 나오기보다 들어가기가 훨씬 쉽다.' 이런 대조가 남자들을 곧잘 웃긴다. 이 철학에는 사디즘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의 불행을 즐기고, 그 불행이 경감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 배우자의 성적인 행복을 부인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남자들은 아내에게 쾌락의 자주성과 함께 욕망의 유혹도 거 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몽테뉴는 이에 대해 재미있는 해학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존엄하고 신성한 결합에 방종한 연애의 완력과 광포를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너무 음탕하게 여자를 즐겁게 하여 쾌락이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해서 는 안 된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아내를 다뤄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나는 아름다움과 애욕에 의해 성사된 결혼일수록 급속히 파탄에 이르는 것을 목격했다. 결혼에 는 보다 견고한 불변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중히 결혼에 임하지 않으 면 안 된다. 그 화려한 즐거움은 아무 가치도 없다... 이상적인 결혼은, 만일 그런 결혼이 있다면, 연애가 전제되어야 하며 조건을 거부한다.(제3권 제5장)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아내와의 접촉에서 얻은 쾌락에도 절제가 없으면 비난을 받게 된다. 부정한 성행위 와 마찬가지로, 방종하고 음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최초의 정열이 이런 성행위에서 우리에 게 요구하기 쉬운 후안무치한 애무는 아내에게 실례일 뿐 아니라 유해하다. 이런 식으로 아내들에게 후안무치를 가르쳐서는 아니 된다. 그녀들은 우리의 요구에 의해 언제나 충분 히 성에 눈뜨고 있다... 결혼은 신성하고 경건한 결합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게 되는 쾌 락은 신중하고 진지하고 다소는 위엄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조심스럽고 양심적 인 쾌락이 되어야 한다.(제1권 제30장) 사실상 남편이 아내의 관능을 일깨워준다면, 그것은 일반성 속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로 하여금 관능에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곧,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안에서 쾌락을 찾도록 미리 준비를 시켜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내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몽테뉴의 말대로 '바구니 안에서 똥을 받아 머리 위에 이는 격'이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남자 쪽의 신중함이 오히려 큰 손해 를 보는 상태로 여자를 유도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여자들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생활규범을 거부한다 해도 조금도 잘못이 없다. 그것 은 남자들이 그녀들과 상의하지 않고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들과 그들 사이에는 자 연히 음모와 싸움이 있다. 우리들은 아내들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무분별하게 취급하고 있 다. 여자 쪽이 남자보다 연애에 있어서는 훨씬 유능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도... 우리네 남자들은 절제를 여자들 특유의 것으로 강요했다. 그것도 극형으로 위협하면 서 말이다... 우리는 여자들이 건장하고 튼튼하고 알맞게 기름지고 또 동시에 순결하기를, 즉 뜨겁고도 냉랭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아내들이 타오르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 을 한다고 우리는 말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적인 풍습에 의하면 결혼은 그녀들을 별로 시원 하게 해주지 못한다. 프루동은 이처럼 섬세한 견해는 피력하지 않고 있다. 그는 결혼에서 사랑을 배제하는 것 이 정의에 합당하고 말한다. 사랑은 정의 속에 완전히 묻혀버려야 한다... 약혼한 사람끼리, 부부사이에서도 온갖 성 애적인 접촉은 가정의 존엄과 노동의 애호와 사회적인 의무수행에 적절치 못하며 파괴적 이다. (사랑의 행위를 일단 마치고 나면)... 양치는 목자가 젖을 일단 응결시키고 나면 압 착지를 떼는 것처럼 사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중산층의 사고방식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그들은 결혼 을 열심히 방어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개인주의의 발달은 여자의 정당한 요구를 함부로 억압하는 경향을 거부했다. 생 시몽, 푸리에, 조르주 상드 등, 그밖의 여러 낭만주 의 작가들이 사랑의 권리를 강럭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배제되고 있던 개인적 감정들을 결혼이란 것에 도입시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부애'라는 애매한 관념 이 고안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결혼에서 만들어낸 기적의 열매였다. 발자크는 온갖 모순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결혼과 사 랑은 윈칙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지만, 존중할 만한 제도와 여 성이 물품처럼 취급되는 거래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혼의 생리>에 서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 다. 결혼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하나의 법, 계약, 제도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결혼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부부생활을 지배하는 법, 계약, 제도를 우 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남자는 결혼을 통해 생식과 자녀, 그리고 재산만을 문제시 했다. 그러나 생식 이나 재산, 자녀도 행복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낳으라, 번식시키라'는 말에는 사랑이 포 함되어 있지 않다. 15일 동안 열네 번 만난 어떤 처녀에게 법률과 왕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랑을 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부조리이다. 이것은 헤겔의 이론만큼 분명하다. 그러나 발자크는 곧 비약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한다. 사랑은 욕구와 감정의 조화이다. 행복한 결혼은 부부의 영혼이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 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자는 명예와 기품과 약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욕구를 신성시하는 사회법칙의 이익을 행사한 후에, 그는 감정을 꽃피우는 자연의 은밀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성실하게 사랑해야 한다. 참된 정열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정열적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욕망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자기 아내에게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느낄 수 있다. 발자크는 이어서 '결혼학'을 전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남편으로서 사랑을 받는다는 점 보다도 어떻게 하면 아내에게 속지 않는가 하는 조심성이 중심문제가 되어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게 하거나 지식을 쌓는 일들을 금하기도 하면서, 오로 지 자신의 명예만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바보로 만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대체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애매하고 불합리한 생각에 하나의 의미를 찾아낸다면, 남성 은 한 사람의 여성을 택하여 일반성(여자의 정절을 보증하는 일반성) 속에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남성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원해 아내 로 하여금 사랑에 눈뜨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산이나 자손을 위해 결혼한다면 그는 참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사랑이 없다면, 그러면서도 어떻게 상대 의 정열까지도 끌어낼 만큼 자신의 정열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발자크는 짝사랑 이 상대를 끌어들이기는커녕, 상대에게 귀찮고 혐오스럼움만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는 것일까? 발자크의 서한체 주제소설 <두 사람의 젊은 아내의 수기>에는 그의 자기기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루이즈 드 숄리외는 결혼을 사랑 위에 쌓아 올리려고 한다. 그녀는 정열이 지나쳐 첫 남편을 죽인다. 그 뒤 둘째남편에 대한 미칠 듯한 질투로 그녀는 죽게된다. 르네 드 레스토라드는 이성에 순응하기 위해 자기감정을 희생시킨다. 어머니로서의 기쁨 은 그 희생의 충분한 보상이 되어 안정된 행복을 부여한다. 우리는 먼저 정열적인 루이즈 에게 어떤 저주 -작가 자신이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면- 가 내렸길래 그녀가 그렇게 소망하고 있는 모성이 금지되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결코 임신을 방해하 지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한편 남편의 포옹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르네에게는, 스탕 달이 정숙한 부인네들에게서 혐오감을 느꼈던 그 '위선적인 태도'가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발자크는 신혼 첫날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르네는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네가 말한 남편이라는 이름의 동물은 자취를 감춰버 렸다. 언젠지 모르지만 어느 즐거운 저녁 파티에서 한 애인이 나타났다. 그의 말은 내 영 혼 속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황홀한 심정으로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마음속에서 호기 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가장 달콤한 사랑에 필요한 것, 이를테면 이런 한때의 예기치 않 은 영예는 완벽했었다. 우리가 상상으로나 그리던 신비로운 황홀감, 거리낌없는 흥분, 억지 승낙, 오랫동안 상상했던 영혼을 앗아가는 환락, 거기에는 모든 유혹이 매혹적이었다." 이 아름다운 기적은 그후 자주 되풀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금 앞에서 쓴 편지에서는 르네가 눈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전에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는데, 지 금은 물건이 되어 버렸어." 그리고 그녀는 '부부애'의 밤 대신에 보날드를 읽는 것으로 자 신을 위로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여성으로 입문하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남편이 어떤 방법으로 매혹 자가 되었는지, 그것을 우리는 알고 싶다. 발자크가 <결혼의 생리>에서 보여주는 방법은 대단히 엉성하다. "결혼을 결코 폭행으로 시작하지 말자."든가 혹은 "쾌락의 미묘한 점을 잘 알아차려 그것을 발전시켜서 새로운 양식이나 독창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남편의 재능 이다."라는 식으로 막연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 재능은 역겨운 유희가 된다." 사실 르네는 루이를 사랑하지 않는 다. 소설에 그려져 있는 이 사나이는 어디서 그 재능을 얻게 되는가? 발자크는 문제를 비 겁하게 얼버무리고 있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성적인 감정은 있을 수 없으며, 사랑 의 결여, 구속, 권태는 회한과 초조와 적의보다도 오히려 애정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잘 모르고 있다. 그의 <골짜기의 백합>에서는 한결 더하다. 불행한 모르소프 부인의 운명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혼과 연애를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무리한 억지로, 성공을 위해서는 신의 중개가 필요 하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리저리 돌려서 결국 도달하는 해결방법도 그것이다. 그는 줄곧 결 혼의 모순을 지적한다. 결혼이란 얼마나 기이한 착상인가! 결혼을 더욱 왜곡시키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인 행동 처럼 생각되는 데서 비롯된다. 결혼처럼 결정적인 행위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결정적인 행위는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술 속에 진실이 있다>에서) 난점은 여기에 있다. 사랑이나 호의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결정이 다. 그런데 애정은 결혼에 의해, 즉 결정에 의해 자각되어진다. 결혼을 원한다는 것, 그것 은 가장 자발적인 일인 동시에 가장 자유로운 결정이어야 한다. 그 자발성이란 것 때문에 결혼을 설명하기가 까다로워지는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신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의 반성, 즉 거기서 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반 성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에 하나가 다른 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결정은 천천히 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두 가지 일이 마지막의 빠듯한 순간에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결혼에 대하여>에서) 그러니까 사랑하는 것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째서 의무가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혼에 관한 그의 모든 논문은 이 신비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반성은 자발성을 죽여버리는 천사이다... 반성이 도중에 애정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옳다면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반성을 통하여 하게 되며, 순전히 이 상적으로 느껴진 새로운 자발성이다. 이 자발성은 바로 애정의 자발성에 대응하는 것이다. 결정은 윤리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종교적인 인생관이며, 이 인생관이 애정으로 가는 통로 를 열어, 안팎의 모든 위험에 대해 그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하여 '남편, 즉 훌륭한 남편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한편으로 인생의 엄숙함이 그와 그의 애인 위에 덮쳐 지고 있는데, 연애의 행복을 언제까지나 보유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한편 여성 쪽은 어떤가. 이성은 여성의 것이 아니며, 여성은 '반성'같은 것을 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여성은 사랑의 직접성에서 종교적인 것의 직접성으로 옮아간다.' 이 이론을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면, 사랑하는 남성의 경우는 감정과 의무의 조화를 보증하는 신앙이 라는 행위로 결혼을 결심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결혼하고 싶다고 생 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카톨릭 신자인 할머니는 매우 단순하게도, 신랑 신 부가 제단 앞에서 "네" 하고 선서할 때 그 신랑 신부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결혼하기 전에 호감을 느끼는 것을 인정하고 있 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한평생 지속되도록 결심한다는 것은 역시 기적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세기말 소설가나 극작가는 신 앞에서의 서약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방 법을 통한 결혼에서의 행복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발자크보다 한결 대담하게, 에 로티시즘을 합법적인 사랑에 포함시키는 가능성을 연구했다. 포르토 리슈의 <인정이 많은 여자>는 성애와 가정생활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언 하고 있다. 아내의 지나친 정열에 기진맥진한 남편은 좀더 절도 있는 애인에게서 안정을 구한다. 그러나 '사랑'이 부부간에 하나의 의무라는 폴 에르비외의 역설은 널리 일반에게 인정되고 있다. 마르셀 프레보는 젊은 남편에게 아내를 애인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가르치 고 있으며, 은근하게 에로틱한 말로 부부간의 성적인 쾌락을 암시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주로 합법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극작가이다. 부도덕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관능적이고 심술궂고 도둑질하는 여자 곁에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표현되는 남편이 등장하고 있다. 더구나 이 남편에게서는 정력적이고 유능한 애인으로서의 일면 또한 엿보 인다. 간통소설에 대한 반동으로 결혼을 응호하는소설이 많이 등장했다. 콜레트까지도 이 도덕적인 파도를 타고 <순진한 탕녀>에서, 어리석게 처녀성을 빼앗긴 젊은 아내의 추잡 한 경험을 묘사하고 나서, 이 여자가 남편의 품안에서 쾌락을 알게 한다. 마찬가지로 마르 탱 모리스의 다소 알려진 소설에서, 젊은 여자를 농락한 애인의 침대에 잠시 여행을 시킨 다음에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 남편에게 그 경험을 활용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이와는 다른 이유로 이와는 다른 방법에 의해 결혼제도를 존중하 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개인주의를 신봉하고 있으므로, 성생활과 결혼을 슬기롭게 결합시키 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때문에 부부 사이의 원만한 성생활을 제시해 주는 책들이 해마다 많이 출판되고 있다. 특히 남성쪽에서 여성을 상대로 행복을 어떻게 가꿔나 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나 의사가 '부부생활의 상담역'을 맡고 있다. 여 성도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남성은 여성에게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 어야 한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적 생활의 성공은 단지 기술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알아야 할 일>, <행복한 결혼의 비결>, <두려움 없는 사랑>과 같은 참고서를 젊은 남자가 20권쯤 암기하고 있어도, 그가 아내에게서 그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아내가 반응하는 것은, 심리적인 상황 전체에 대해서이다. 전통적 인 결혼은 여자의 성감을 일깨우고 꽃피우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을 조성하고 있지 못하다. 옛날에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사회에서는, 아내의 처녀성은 그 다지 요구되지 않았다. 신비적인 이유로 결혼하기 전에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는 풍습도 있 엇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어느 지방에는 이런 파렴치한 옛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곳도 있다. 혼기에 이른 처녀에게 결혼 전의 정결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실수한'처녀, 아기 를 낳은 처녀도 그렇지 않은 처녀보다 쉽게 시집가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여성해방을 인정 하고 있는 환경에서는, 처녀들에게 젊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성적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역시 부권주의의 윤리는, 약혼한 딸을 처녀로 남편에게 시집가야 한다고 설명하 고 있다. 딸은 그 태내에 남의 씨를 배어서는 안 된다. 남편은 자기 것으로 여기는 이 육 체를 완전히 독점하고 싶어한다. 처녀성에는 도덕적, 종교적, 신비적인 가치가 씌워져 있으 며, 이 가치는 오늘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에는 이런 지방이 몇 군 데 있다. 신부의 친구들이 신혼부부의 침실 밖에서 웃고 노래 부르면서 대기하고 있으면 이윽고 신랑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피가 묻은 시트를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다. 혹 은 부모가 아침에 이것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노골적인 방법은 아니더 라도 '첫날밤'의 풍습은 아직도 여러곳에 남아 있다. 이런 풍습이 많은 외설문학의 소재로 이용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인 곳과 동물적인 것의 분열은 반드시 외 성을 낳게 마련이다. 인도주의적인 윤리는, 모든 생활경험이 하나의 인간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그 경험에 자유가 깃들기를 요구한다. 참으로 도덕적인 성생활에는 욕망과 쾌락의 자유로운 만족이 있다. 혹은 적어도 성행위 속에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감동적인 투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나 정욕 속에 타자의 개성적인 인식이 선행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본능이 인간 개인에 의해 구제되지 않고 그것을 신이나 사회가 정당화할 때, 두 당사자의 관계는 단지 동물적인 것이 될뿐이다.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현모양처들이 성행 위에 대해 혐오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들은 그것을 대소변의 배설 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고있다. 결혼식 연회에서 그처럼 난잡한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한 현실의 동물적인 작용에 화려한 의식을 겹치는데에는 외설스러운 역설 이 있다. 결혼은 그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공공연히 표시한다. 즉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여러 사람들의 눈앞에서 상징직인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침대에서 은밀히 서로 대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며, 이때만큼은 모 든 시선이 이 두 사람의 포옹을 외면한다. 콜레트는 13세 때 한 농가의 결혼식에 가서 여 자친구들과 함께 신랑 신부의 침실을 몰래 엿보고 크게 당황했다. 신랑 신부의 침실... 분홍빛 싸구려 무명 커튼 아래 좁고 높은 침대가 놓여있다. 날짐승 의 날개와 거위솜털을 다져놓은 베개로 부풀어오른 침대. 땀과 향과 가축의 냄새와 소스의 열기로 뒤범벅이 되었던 오늘 하루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된 침대... 이윽고 신랑 신부는 이 곳에 오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로서는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그들은 이 깊숙한 날개 속에 묻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 싸움이 어떤 것인지는 어머니의 노골적인 말이나 동물의 생태가 나에게 너무나 많이 또는 너무나 적게 가르쳐주었다. 그 다음은? 나는 지금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 침실과 침대에 두려움 을 느낀다.(<클로딘의 집>에서) 소녀는 어린애 같은 두려움 속에서 온 가족의 호화로운 축하연과 밀폐된 침대의 동물적 인 신비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결혼의 냉소적이고 관능적인 측면은 여성을 개성화하고 있지 않은 문명 속에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동양, 그리스, 로마에서는 그렇 다. 그곳에서는 동물적인 작용이 사회적인 의식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에서는 남녀를 모두 개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이 킬킬대는 것은 그 신랑 신부가 자신들의 개성적인 인생체험을 틀에 박힌 의식이나 연설, 꽃으로 에워싸인 형태 속에서 치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야단스러운 장례식의 화려함과 무덤 속의 부패 사이에도 분명히 언짢은 대조가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지하에 묻히면 깨어나지 않는다. 한편 신부는 시장이 걸치는 의식용 3색 훈장이나 성당 오르간 소 리에 따라 인도된 현실체험의 특이한 우연성을 발견하게 될 때 두려움과 놀라움에 어리둥 절하게 된다. 젊은 여성이 결혼식날 밤에 울면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은 가벼운 희극이 라고만 볼 수 없다. 정신질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이 쓰여 있다. 내가 직접 들은 이야 기도 몇 가지 있다. 성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양가의 딸이 갑자기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이야기지만 아담 부인은 자기는 키스한 남자와 결혼하 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후의 성적 결합이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최근에 슈테겔은 어떤 젊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신혼여행에서 남편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그녀는 남편을 미친 사람으로 알고 말을 한마디 도 건네지 못했다."(<불안의 신경증상>에서) 순진한 처녀가 변태성욕자와 결혼하여 오랫 동안 함께 살면서도 상대방이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혼 첫날밤에 집에 돌아와 당신이 신부를 우물 속에 풍덩 빠뜨린다면 그녀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설사 그녀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더라도... '그래, 이것이 결혼이 야. 그래서 결혼이 뭔가를 비밀로 해왔군. 난 그 함정에 빠졌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 로 생각한다. 이런 변을 당하고도 그녀는 여전히 잠자코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랫동안 몇 번이고 우물 속에 그녀를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웃에 아무 소문도 내지 않고 말이다. 이 <신혼의 밤>이라는 제목의 미쇼의 시 한 토막은 그 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오 늘날에는 많은 처녀들이 그런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승낙은 여전히 막연한 것이다. 처녀성을 잃은 행위에는 여전히 폭행의 성격이 남아있다. "혼외보다 결혼 에서의 폭행이 더 많다."고 하벨로크 엘리스는 말하고 있다. 그가 쓴 <출산에 대한 월간 잡지> 9권에서 노이게바우어는 성교를 할 때 남자의 페니스에 의해 여자가 받는 150가지 이상의 부상 사례를 수집하고 있다. 그 원인은 난폭, 만취, 잘못된 체위, 성기의 불균형 등이었다. 하벨로크 엘리스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어떤 부인이 중류층 지식계급의 기혼여 성 6명에게 첫날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 그 여섯 사람에게 있어 성행위는 모두 돌발적인 충격이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은 성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나마 알고는 있는 것 같았지만 역시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아들러도 처 녀성을 잃은 행위의 정신적인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남자가 자기의 모든 권리를 얻게 되는 이 최초의 순간은 때때로 여자의 전 생애를 결정 하게 된다. 경험이 없어 지나치게 흥분한 남편은 그 순간 여자에게 불감증을 안겨주고, 그 후에도 계속되는 졸렬함이나 난폭함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불감증을 만들어 버리는 경 우도 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서툰 초보에 대한 많은 사례를 보아 왔을 것이다. 여기 슈테켈이 기록한 사례가 있다. H. N. 부인은 매우 정숙하게 자라서 첫날밤을 두려워했다. 신랑은 그녀에게 침대에 드 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난폭하게 옷을 벗겼다. 그리고 자기도 옷을 벗어 그녀에게 자기의 알몸과 페니스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려면 혼자서 살 것이지 뭐하러 시집을 왔어. 이 등신아!" 그는 그녀를 침대 에 쓰러뜨리고 난폭하게 처녀성을 빼앗았다. 그 후로 그녀는 불감증에 걸리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앞에서 처녀가 그 성적인 운명을 감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여러 가 지 저항에 대하여 보아 왔다. 섹스의 입문은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하나의 작업이다. 이 입문을 단지 하룻밤 사이에 마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야만적인 행위이다. 최초의 성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도 그것을 그럴 듯한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부조 리이다. 여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이상한 행위가 신성시되어 있고, 사회, 종교, 가족, 친구들 이 모두 자기를 남편의 손에 마치 주인에게 넘겨주듯이 엄숙하게 넘겨주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결혼이 결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이 성행위도 자기의 장래를 속박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절대화 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자기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이 남자는 그녀에게 모든 남자를 구 체화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도 그녀 앞에 미지의 인간으로 나타난다. 한 생애에 걸쳐서 반려자가 되므로 이 미지의 형태는 대단히 큰 중요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한편 남자도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구속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도 걱정과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소심해지고 어색해지며, 반대로 난폭해지기도 한다. 결혼식이 엄숙하기 때문에 첫날밤에 무능해지는 남자가 많다. 자네는 <강박관념과 신경쇠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결혼행위를 완벽하게 성취할 수 없어서 자기들의 운명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 때문에 언제나 치욕과 절망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부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작 년에 대단히 희한한 비극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화가 난 장인이 풀이 죽은 사위를 살페트 리에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장인은 이혼을 청구하기 위해 필요한 의학증명을 얻고 싶 다고 말했다. 사위는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거북하고 부끄러운 느 낌이 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욕정이 너무 격하면 처녀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지나치게 사양을 하면 굴 욕을 느끼게 된다. 여성은 자기들에게는 고통을 주고 자신은 에고이스틱한 쾌락을 즐기는 남자를 한평생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기를 경멸한 것처럼 생각되는 남자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원한을 품게 된다. 한편 첫날밤에 처녀성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것이 불가능 했던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경우도 많다. H. 도이치는, 신부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외과수 술로 처녀성을 빼앗아줄 것을 의사에게 부탁하러 온 소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사례를 몇 가지 들고 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대개 하찮은 것이다. 정상적으로 행위를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여자는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프로이트가 관찰한 하나의 사 례는 남편의 성적 불능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여자 환자는 한 방에서 가운데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다른 방 사이를 뛰어다니며 왔 다갔다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보를 일정한 방법으로 덮은 뒤, 하녀를 불러 그 테이블에 가까이 오게 했다간 곧바로 내보내곤 했다... 이 강박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H. 도이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했다. 그 테이블보에는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었기 때문 에 이것을 펼 때마다 일부러 그 얼룩을 하녀의 눈에 띄게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남 편이 남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첫날밤의 일을 다시 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다시 해보기 위해 여러 번 자기 방에서 신부 방으로 왕복했었다. 침대를 매만지러 오는 하녀 보기가 부끄러워 그는 피가 묻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빨간 잉크를 시트에 묻혀놓았다. 첫날밤의 에로틱한 체험은, 떨어질까 봐 초조해하는 시험을 치르는 것과 비슷하다. 각 자가 자기에게 어려운 문제투성이여서, 상대방을 친절히 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분위 기는 고압적인 자세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것 때문에 아내가 불감증 환자가 되게 하 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전혀 이상하게 여길 일이 못 된다. 한편 신랑에게 어려운 문제 는, 아내를 너무 난잡하게 자극하면 그녀가 모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 들은 특히 미국의 남편을 불능으로 만드는 것 같다. 더구나 대학교육을 받은 부부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킨제이 보고는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가 보다 의식적 이므로 그만큼 더욱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자제하면 성감을 일으키는 데 실 패하게 된다. 이런 모순은 여자의 태도가 애매한 데서 일어난다. 그녀는 쾌락을 원하면서 도 한편으로는 이를 거절한다. 상대방에게 자제를 요구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고민한다. 예외적으로 행복한 경우를 제외하고, 남편은 반드시 바람둥이가 아니면 성불능자로 보인 다. 그러므로 부부행위가 여자에게 흔히 불쾌한 노역에 불과한 것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싫어하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녀에게 큰 형벌이다." 하고 디드로는 말하고 있 다.(<여자에 관하여>에서) 나는 남편이 자기에게 접촉하면 혐오스러워 몸부림치는 한 정 숙한 여성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욕실에 가서 아무리 몸을 씻어도 아내로서의 소임이라 는 그 더러움을 깨끗이 씻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혐오감은, 우리(남성)에 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들의 기관은 한결 관대하다. 다수의 여성들은 그 지극 한 쾌락을 채 맛보지도 못한 채 늙어가고 또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일시적 간질'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쾌감은 여성들에 있어서는 극히 드물지만 우리 남성들은 그것을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남성의 품안에서도, 그 지극한 행복감은 그 녀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여성을 상대해서 그것을 느끼게 된다. 여성들은 우리들보다 감각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보상을 얼른 받지 못하고, 또 확실히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수없이 많이 기대에 어긋나게 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은 합 번도 쾌락이나 도취를 알지 못한 채,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된다. 그녀들은 의사의 증명이나 다른 구실을 만들어, 여성의 의무인 더러움에서 벗어나 려고 한다. 킨제이 보고는, 미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아내들이 "성교횟수가 너무 빈번 하다고 생각하고, 남편들이 자주 접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다. 이런 모순은 결혼이 여 성의 에로티시즘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것을 죽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리아크 는 <테레즈 데케이루>에서 이성적으로 결혼한 젊은 여성의 결혼, 특히 부부의 의무에 대 한 반응을 기술하고 있다. 테레즈는 결혼에서 지배나 소유를 구하기보다는,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테레즈를 결혼으로 몰고간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실제적인 처녀로서, 가정적인 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분명한 지위를 발견하려고 서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위험에서 그녀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테레즈는 약혼시절처럼 얌 전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블록 속에 들어가 박혔다. '그녀는 그 곳에 정착했다.' 하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다. 생클레르의 비좁은 성당 안에서 치러진 그 숨막힐 듯한 결혼식 날, 부인들의 떠드는 소 리가 목쉰 오르간 소리를 지워버리고, 그녀들의 체취가 제단의 향내를 압도한 그 결혼식 날, 그날이야말로 테레즈가 이제 자기는 끝장이라고 느낀 날이었다.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육중한 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 불행한 처녀는 갑자기 눈을 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테레즈는 이제 앞으로는 자기 마음 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 아래를 맴도는 음험한 불처럼 앞으로 그 녀는 가정에 깊숙이 처박혀 잠자코 숨어 있어야 한다... 농민식과 부르조아식이 각각 절반씩 합쳐졌던 그 결혼식날 밤에 처녀들의 현란한 의상 으로 눈부신 군중들이 신랑 신부의 차를 에워싸는 바람에 속도를 낼 수가 없어 천천히 굴 러가야 할 정도였다. 모두들 갈채를 보냈다... 테레즈는 그 후에 계속된 밤에 일어난 일 들을 상기하면서 중얼거린다. "지겨웠어." 그리고 다음에 상기한다. "아니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 이탈리아의 호수지방으로 신혼여행을 하는 동안에 테레즈는 그렇게 괴로웠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는 본심을 보여주지 않는 유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녀는 자신의 육체를 이렇게 가면 속에 감출 줄 알았던 것이며, 그로 인한 쓰디쓴 쾌락을 맛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강제로 밀어 넣어준 이 미지의 감각세계, 아마도 그 세계엔 그 녀를 위한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행복인가? 빗속에 가려진 풍경을 보고 앉아, 날이 개고 해가 비치 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상상하듯, 테레즈는 관능의 기쁨을 발견하고 있었다. 베르나르, 이 얼빠진 눈을 가진 젊은 남자... 쉽사리 속일 수 있는 남자! 울타리 너머 죽통 앞에서 코를 울리고 있는 귀여운 돼지새끼처럼 그는 자기의 쾌락 속에 빠져 있었다. '바로 내가 죽통이야.' 하고 테레즈는 생각했다...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분류하고, 성실한 남자의 애무와 호색한의 애무를 구분하는 것을 그녀는 어디서 배웠을까? 참으로 분명한 것이다... 가엷은 베르나르, 다른 남자보다 특별히 나쁜 사람도 아닌데! 그렇지만 정욕은 우리에 게 접근하는 사람을 괴물로 바꿔버린다. '나는 언제나 죽은 척했다. 저 미치광이, 저 간 질병 환자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나를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여기서 더욱 솔직한 증언이 있다. 슈테켈리 수록한 고백이다. 나는 그중에서 결혼생활 에 관계가 있는 부분만 인용하고자 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28 세의 여성이다. 나는 약혼하여 행복했었다. 이제 비로소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귀염을 받았고, 약혼자는 나에게 찬미 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키스(나의 약혼자는 다른 애무 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나를 화끈 달아오르게 했고, 결혼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 다... 결혼식을 올리는 날 아침에 나는 몹시 흥분하여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미지의 일에 대해 알게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남자가 여자의 질 속에 오줌을 눈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 남편에게 저쪽으 로 가 있으라고 말했다. 사실 이때 난 가벼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 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첫날밤에 옷을 벗는 장면은 그때까지 상상 속에서 중요한 역할 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 그가 대단히 난처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그가 고백한 바에 의하 면, 내 모습을 보고 몹시 흥분했다고 하였다. 내가 빛나고 기대에 찬 청춘. 그 자체로 그 에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옷을 벗고 곧 불을 껐다. 나에게 키스하자마자 그는 나를 소 유하려고 했다. 나는 겁이 나서 몸을 만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 고 싶었다. 사전에 아무 애무 없이 대뜸 그렇게 하기 때문에 겁이 났던 것이다. 나는 그 를 난폭하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 이것을 자주 비난했다. 하지만 난폭한 것이 아니라 서툴 고 센스가 없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여러모로 시도해 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나는 대단 히 불행했다. 자기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나는 애 자신의 어딘가가 잘못 되 있고, 몸 에 결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그의 키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10일이 지나서야 그는 드디어 내 처녀성을 빼앗을 수 있었다. 성교는 몇 초밖에 계속되 지 않았고 가벼운 통증 이외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은 큰 환멸이었다! 그 후 에 성교에서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성공은 대단히 어려웠다. 남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직도 애쓰고 있다... 프라하에서 독신인 시동생의 침대에서 내가 잔 사 실을 알고 나면 그가 무엇을 느끼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행복감을 맛보게 된 것은 이 방에서였다. 남편은 처음 몇 주일 동안은 날마다 나 를 애무했다. 나는 오르가즘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만족은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짧았고, 나는 울고 싶도록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출산 후에... 성교는 점점 불만족스러웠다. 간혹 오르가즘에 도달해도 남편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끝나곤 했었다. 나는 번번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앞으로 그는 얼마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어중간하게 건드려놓고 혼자서 만족을 느끼면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나 는 가끔 성교 도중에 시동생과 분만할 때의 의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남편은 손가락으로 나를 자극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나는 몹시 흥분했으나, 그런 방법은 부끄럽고 불건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도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기간을 통하여 그는 내 몸의 어 느 한군데도 애무한 적이 없다. 어느 날 이제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내게 말했 다... 그는 내 알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옷을 벗지 않았고, 성교 는 밤에만 했기 때문이다. 대단히 관능적인 이 여자는 그 후 애인의 품안에서 완전히 행복해졌다. 약혼은 젊은 처녀에게 점진적으로 성교육을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기간에 처녀가 미 래의 남편을 알아버리게 될 경우에 그녀의 입장은 신부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즉 약혼이 결혼과 같을 정도로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성교는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가 일단 몸을 허락하면, 임신까지 하게 되면 완전히 매이게 되겠 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그녀 쪽에서 파혼을 통보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첫 경험의 어려움은, 만일 사랑이나 정욕을 두 사람이 완전히 공감하고 있을 경우에는 쉽사리 극복할 수 있다. 애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서로 자각하면서 주고받는 기쁨에서 생 리적인 사랑은 그 힘과 품위를 갖게 된다. 그 경우에 그들의 행위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이 없다. 왜냐하면 양쪽 다 그런 행위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바라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벌족인 의욕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야 할 결혼의 원칙이 권리나 의무로 바 뀌어 버리기 때문에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결혼의 원칙은, 그 일반성 속에서 서로 의 육체를 파악하려고 하므로 육체에 도구적인 성격, 따라서 타락한 성격을 부여하게 된 다. 물론 부부생활의 초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성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성적 수련이 때로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첫날밤부터 부부간에 행복한 생리 적인 매력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결혼은 아직도 육체에 수반되는 피의식을 지워버리므 로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언제나 규칙적으로 동거한다. 육체의 친밀성을 조 성하여 성적 성숙에 유리하다. 결혼 초기에 매우 만족스러워 하는 아내를 흔히 볼 수 있 다. 이런 아내는 이런 만족으로 말미암아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므로, 후에 남편이 여러 가지로 속을 썩여도 용서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불행한 부부생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에게 만족을 느끼는 여자들이다." 하고 슈테켈은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 처녀가 일생 을 오직 한 사람의 남자, 성적으로 불만스러운 만자와 동침하는 것은 역시 큰 모험이 아 닐 수 없다. 그녀의 성적인 운명은 오로지 이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것은 레옹블륌이 <결혼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올바로 지적한 모순이다. 습관적인 결합이 결국 사란을 낳을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위선이다. 실제적, 사회적, 도덕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된 부부에게 일생 동안 서로에게 성적 행 복을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의 극치이다. 그러나 이성적 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 연애결혼이 반드시 부부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우선 젊은 처녀가 경험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반드시 성적인 사랑에 부 합되는 것은 아니다. 처녀시절의 플라토닉한 존경과 애정, 몽상, 그녀의 어린애 같은 혹 은 처녀다운 정열 등이 나날의 생활에서 닥치는 모든 시련을 견디게 하고 또 언제까지나 영속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아무리 처녀와 약혼자 사이에서 성실하고 격정적인 매력 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한평생 지속되는 생활설계를 지탱할 만큼 견고한 기반 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콜레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방랑의 여인>에서) 성적 쾌락은 사랑의 무한한 사막 속에서 열렬하지만 대단히 작은 공간밖에 차지하지 못 한다. 이 작은 것이 너무도 불타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안전하지 못한 불꽃의 주위야말로 알 수 없이 막연한 위험이다. 짧은, 아니면 길었던 그 한밤의 포옹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우리들 각자는 서로의 곁에 누워 있는 상대를 위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 전에 이미 육체적인 사랑이 있었다거나, 혹은 결혼 초기에 벌써 그 것에 눈떠 있 을 경우에도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의 욕망은 그들의 개별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성적 사랑에는 확실히 정조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 개성이 외부의 다른 경험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대용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정조라는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면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자발적인 경우에는 에로티시즘의 매력이 매우 빨리 사라진다. 신기하게도 에로티시즘은, 그 순간에 연인 각자에게 육체관계 속에 하나의 무한한 초월로 실존하는 존재를 부여한다. 아마도 이 존재의 소유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특권 적인, 참으로 통렬한 방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간에 적 의, 혐오감, 냉담함이 있으면 에로틱한 매력은 사라진다. 그것은 존경심, 우정 등의 경우 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초월성의 움직임에, 세계 혹은 공동과업을 통해 결합된 두 사람의 존재는 벌써 육체적으로 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결합이 의미를 잃 게 된 사실에서 그들은 그것을 혐오스럽게 여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몽테뉴가 말한 '근 친상간'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에로티시즘은 타자를 향하는 움직임이며, 거기에 에로 티시즘의 본질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부부는 그 결합의 내부에서 서로 '동일체'가 되어 버린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는 어떤 교환도, 또 어떤 증여나 정복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직도 연인과 같 은 기분에 머물러 있다면 마음속으로는 수치를 느끼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은 성행위가 각자 자기를 초월하는 주체적인 경험이 아니라 일종의 공동의 자위행위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상대를 자기의 욕구충족에 필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을, 부부간의 예의가 잘 감추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예의가 제거되면 그것은 분명하게 들 어난다. 예를 들면 라가슈 박사가 그의 저서 <질투의 성질과 그 형태>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를 통해 관찰되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내는 남자의 성기를 자기에게 소유권이 있는 일종의 쾌락의 도구처럼 생각하여, 찬장 속에 간수한 통조림처럼 그것에 탐욕을 느낀다. 만일 남편이 그것을 다른 여자에게 주게 되면 자기 몫이 없어진다. 그녀는 귀중한 정액이 낭비되지 않나 싶어 남편의 팬티를 유심 히 살펴보기도 한다. 주앙도의 <전쟁기록>에는, '남편의 속옷을 살피며, 남편이 잠들어 있는 동안 외도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탐색'하는 아내의 조사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남 성은 남성대로 아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마음껏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킨다. 이 거친 욕구충족이 인간의 정욕을 충분히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외관상 가장 정상으로 보이는 이 포옹 속에 때때로 씁쓰레한 뒷맛을 느끼는 것이다. 여성이 에로틱한 환상을 이용하는 경우는 자주 일어난다. 슈테켈은 25세의 여성이 훨씬 연상인 억센 남성 에게 갑자기 겁탈당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남편을 상대로 가벼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경우를 인용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폭행당하고 얻어맞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 서, 남편을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한편 남편도 마찬가지 꿈을 꾼다. 아내의 몸 위에서 그는 카바레에서 흘끗 쳐다본 댄서 의 넓적다리나 사진에서 본 벌거벗은 여인의 젖가슴을, 혹은 그와 유사한 추억이나 이미 지를 가진다. 또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정욕의 대상이 되어 추행당하는 장면을 상상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타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결혼은 괴상한 도치나 도착을 만들어낸다. 세련된 연기자, 밖으로 모이는 것과 현실 사이의 모든 한계를 최소화하려는 두 파트너의 희극" 이라고 슈테켈은 말한다. 극단에 이 르면 분명히 병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남편은 엿보는 심리학자가 된다. 아내에게서 매력 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다른 애인과 동침하는 광경을 목격한다거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아내가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사디즘적으로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아내의 의식이나 자유가 분명히 노출될 수 있고, 따라서 남편은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실제는 온순한 남자를 지배자나 폭군처럼 보려는 여자에게는 마조히즘적인 요소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수도원에서 경건하게 자랐는데, 낮에는 억척스럽고 지배욕이 강한 편이지만, 밤이면 남편에게 자기를 회초리로 때려 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남편은 마지못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결혼생활에서는 병적인 행위도 규모 있고 냉정 한 모습으로 보이며 또 진지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실 육체적인 사랑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수단 으로만 여길 수도 없다. 육체적인 사랑은 인간생활을 정당화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에 의한 어떤 정당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즉 육체적인 사랑은 모든 인간생활에서 삽 화적인 동시에 자주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 부르조아적인 낙천주의는 젊은 아내에게 결코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어 른거리는 이상은 바로 행복이다. 즉 내재와 반복 속에서 조용히 안정을 유지하려는 이상 적인 생활이다. 부르주아지가 한창 번영을 누리던 한 시기에는 이 이상이 부르주아지 전 체, 특히 지주계층 전체의 이상이었다. 그들에게 오직 과거의 평화적인 보존, 현상유지 따위가 목표였다. 야심도 정열도 방향감각도 없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날들 속에 도금된 평범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를 반성하기보다는 죽음을 향해 조용히 미끄러져 가는 그런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한 소네트>의 작가가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 에피쿠로스나 제논의 사상 의 흐름을 이어받은 이 사이비 철학은 오늘날에는 이미 신망을 잃고 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가능한 일도 아니 라고 생각된다. 남성의 천직은 행동이다. 생산하고, 싸우고, 창조하고, 발전하여, 세계의 전체성과 미래의 무한 속에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결혼은 여성에게 남성과 함께 자신을 초월하게 하지 않는다. 결혼은 여성을 안으로 가두어 버린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는 안정된 생활의 유지가 유일한 목적이 된다. 그 안정된 생활이라는 현재는 과거의 연장으로 된 것이며, 내일의 위협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여성은 남편에게 부부애라는 이름의 존경심과도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녀는 자기가 관리를 맡고 있는 가정의 네 벽 사 이에 세계를 가둬둔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인류의 종을 영속시킬 것이다. 그러나 실존하는 자는 누구나 그 초월성을 단념할 수 없다. 설사 그것을 부정하려고 고 집을 부려도 어쩔 수 없다. 옛날의 부르주아는 기성질서를 보존하고 번영시킴으로써 그 미덕을 과시했고, 신을 섬겼고, 또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제도에, 문명에 봉사했다. 행복하 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을 뜻했다. 여성에게 있어서의 조화된 가정생활 도 최종목적을 향해 초월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여성의 개성과 세계 사이를 중개하는 자 가 남성이다. 남성은 여성의 우연한 사실성에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자신이 아내 곁에서 일을 도모하고, 행동하고, 싸우는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로 그 아내를 정당화한다. 여성 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을 남성의 손에 맡길 뿐이며, 바로 그 점을 두고 남성은 많은 의미 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에게는 비굴하게 체념하는 마음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여성은 바로 그 느낌으로 인해 보상을 받고 있다. 남성의 힘에 의해 인도되고 보호되면서 그녀는 본래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요한 존재가 된다. 둥지 속의 여왕처럼, 자신의 영지 안에서 평화롭게 휴식하면서, 남성을 매 개로 하여 무한한 우주나 시간을 가로질러 이끌려간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주부로서, 여성은 결혼 속에서 사는 힘의 의미를 찾아내게 된다. 이 이상이 현실에 어떤 형태로 나 타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행복의 이상은 귀족의 저택이든 초막이든, 언제나 그 집 울타리 안에서 나타난다. 집은 영구불변과 분리를 구체화한다. 가정이 고립된 밀실로서 형성되어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그 가정만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곳은 바로 그 네 벽 사이이다. 가구나 조상의 초상화 사이로 간직된 과거가 안전한 미래란 바로 이런 것이라며 가르치고 있다. 정원에는 4계절 먹을 야채들이 그 정확한 주기를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같은 꽃으로 장식된 같은 봄이, 그 불변의 여름이, 그리고 한결같은 과일을 영글게 하는 가을이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도, 무한을 향해 결코 일탈하지 않는 얌전한 원을 그리면서 회전할 뿐 이다. 소유지 위에 쌓은 모든 문화에는 집의 비중과 미덕을 노래한 풍요로운 문학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집>이라는 앙리 보르도의 소설에는 집이 가진 모든 부르주아적인 가치를 요약하고 있다. 과거에의 충실, 인내, 저축, 선견지명,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사랑 등등. 집을 노래하는 가수는 여성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가족집단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 은 그녀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역할은 '로마의 귀부인'이 그 저택에서 수행하던 시대 그대로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집이 가부장제도적인 빛을 잃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집은 과거의 과 거의 몇 세대의 기억에 의해 압도되는 공간이 아니며, 다가올 시대를 그 곳에 가둬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거처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은 아직도 가정안에서 옛날에 집이 갖고 있던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존 스타인벡(미국의 소설가, 1 902~1963)은 <캐너리 로드>에서 늙은 여자 방랑객이 남편과 함께 사는 폐물이 된 철관 속 을 양탄자나 커튼으로 열심히 장식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남편이 창문도 없는데 커 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대해도 그녀는 듣지 않는다. 이러한 배려는 여자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신이 멀쩡한 남자라면, 자기 주위의 물건들을 단지 도구로만 볼 뿐이다. 그는 그런 물건들을 각각 그 용도에 따라 처리한다. 그의 질서-여자는 거시서 무질서밖에 찾아보지 못하지만-는 그의 손이 바로 닿는 곳에 담 배나 종이나 일에 필요한 도구가 있는 것이다. 특히 물질을 통하여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일을 하는 예술가-조각가나 화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물질적인 환경에 대해 전혀 무관심 하다. 릴케는 로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처음 로댕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집은 단순한 필요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추위를 피하는 장소였고, 잠을 자기 위한 지붕이었다. 집은 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로, 그 고독이나 명상위에 조금도 부담을 주고 있지 않았다. 로댕 은 자기 안에 자기 집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늘이며, 은신처이며, 평화였다. 그는 자 신의 하늘, 자신의 숲, 무엇에 의해서도 막을 수 없는 강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자기 집을 찾아내려면 먼저 작품이나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남성이 가정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은 전체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기획 속에 자기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성은 결혼생활 속에 갇 혀 있다. 그녀의 소임은 이 감옥을 왕국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정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자신의 신분을 쉽게 정의하는 변증법에 의해 정해져 있다. 여자는 스스로 목이가 됨으로 써 그것을 얻게 된다. 즉 원리를 버림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세계를 단념함으 로써 하나의 세계를 정복하려고 한다. 여성이 스스로 가정의 문을 지킬 때 억울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처녀시절은 지상 전체를 자기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숲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다. 자연계는 제라늄 화분 하나만한 크기로 축소되어 버렸다. 벽 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V. 울프의 한 여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이제 들에서 자라는 풀이나 히드(식물의 이름)의 상태로는 겨울과 여름의 차이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유리창에 어리는 김이나 결빙에 의해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 다. 전에는 너도밤나무 숲을 걸어가면서 여치의 푸른 깃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아름 다움에 감탄하고 도중에 부랑자나 양치는 목자를 만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새털 빗자루 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서성거릴 뿐이다.(<파도>에서) 그러나 여자는 이런 제한을 부정하려고 한다. 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장소에 자기 형편 에 맞는 비용을 들여서, 지상의 동물이나 식물, 이국, 지나간 시대 등을 가둬놓는다. 가 정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유일한 진리가 되기도 한다. 바슐라르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반세계 꼬는 반대의 것의 한 세계'이다. 도피처, 동굴, 태로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준다. 이 어수선한 외면성이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특히 밤에 덧문을 닫으면 여자는 여왕이 된 듯한 느낌이다. 세계를 두루 비추는 정오의 태양은 그녀를 곤욕스럽게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녀는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전등 갓 아래서 여자는 자기 집만 비추는 자기 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목격 하게 된다. 이제 그녀에게는 자기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버지니 아 울프의 다음 문장은 밖의 공간이 어둠에 사라졌을 때 집에 집중된 현실이 어떤 것인가 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밤은 유리창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유리창은 바깥세계의 정확한 모습을 보 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상하게 왜곡시켜 질서, 안정, 확고한 지반 등이 집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와 반대로 바깥엔 유동적인 물체가 늘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하나의 반사와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자기 몸의 주위를 우단이나 실크나 도자기 등으로 에워쌈으로써 여성은 평소의 성생활 에서 만족되지 않던 관능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장식으로 자 기 인격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가구나 골동품을 고르고 만들고 발굴한 것은 여성이었으 며, 그것들을 미적으로 배치할 줄 안 것도 여성이다. 그런 심미감에는 좌우대칭적인 조화 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도구류는 여자의 생활기준을 사회적으로 표시하면서 그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정은 지상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몫 이며, 사회적인 가치가 그녀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의 표시이다. 여성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서 열심히 자기를 탐구한다. 여성이 자기 '보금자리'를 독점하는 것은 가상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사 람에게 도움을 청할 때'에도 그녀는 자기도 손수 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간독하고 비평하 고 점검하면서 하녀들이 일한 결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여성은 자기 주거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인 정당화를 얻어낸다. 그녀는 일을 의생활, 식생활 등, 일반적으로 가족적인 사회의 유지에 힘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성도 자기의 활동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여성을 안에서부터 해방시키기보다 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 활동성이다. 사람들은 가사에 대한 시를 써가며 높이 찬양한다. 가사는 사실 여성을 물질과 싸우게 하고, 또 더불어 살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러한 친밀성을 통해 여성 자신 의 존재를 드러내고 또 학정시켜나가는 것도 사실이다. 마들렌 부르두스는 <마리를 찾아 서>에서 여주인공이 오븐을 닦을 때 느끼는 기쁨에 대해 적고 있다. 잘 닦인 금속이 반짝 이는 이미지를 반사하고 있는 자유와 힘을 그녀는 손가락 끝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지하실에서 올라올 때, 각 층에 이를 때마다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물이 가득찬 양동이의 무게를 사랑한다. 그녀는 언제나 그 특유의 냄새와 까슬까슬한 촉감과 입체감을 지닌 단순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런 물건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물러서지 않고, 불이 꺼진 오븐이나 비눗물 속에 손을 담가 금 속의 녹을 닦아 광택을 내고, 마룻바닥에 초를 칠하고, 테이블 위에 흩어진 찌꺼기를 팔 을 휘둘러 긁어모은다. 그녀의 손바닥과 만지는 물건 사이에는 안전한 양해나 우정 같은 것이 있다. 많은 여류작가들은 금방 다린 셔츠나 비눗물의 파르스름한 빛이나 흰 시트, 반짝이는 구리그릇 등에 대해 애정을 갖고 기술한다. 가정에서 여성이 가구를 청소하거나 닦을 때 에는 "목재에 광택을 내는 손의 상쾌한 참을성을 삼투의 꿈이 받쳐주고 있다."고 바슐라 르는 말한다. 주부는 일을 끝내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쁨을 알고 있다. 그러나 테이블의 광택이나 촛대의 반짝임, 풀을 잘 먹인 속옷의 순백, 이런 귀중한 품질이 분명 히 드러나게 하려면, 우선 소극적인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체의 나쁜 원리는 배제되 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부가 마음을 다 바치는 본질적인 꿈이다."라고 바슐라르는 쓰고 있다. 활동적인 깨끗한 꿈, 즉 불결을 추방하고 이것을 정복하고 얻는 깨끗한 꿈이 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대지와 휴식의 꿈>에서) 청결을 위한 투쟁의 상상력에는 어떤 강한 자극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 상상력은 심술 궂은 분노에 의해 자극 받는 것이 분명하다. 수도꼭지를 닦으면서 여자는 어떤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을까. 기름이 묻은 더러운 걸레에 끈적거리는 지저분한 마분을 묻혀 문질 러댄다. 일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적의가 치솟아 오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천한 일 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걸레가 마르면 즐거운 악의, 억세고 수다스러운 악의가 비로소 나타난다. '수도꼭지야, 너는 거울이 돼야 해. 냄비야, 너는 태양이 돼야 해!' 이윽고 놋 쇠가 반짝거리고 순진한 소녀처럼 활짝 웃을 때 겨우 평화를 느끼게 된다. 주부는 빛나는 승리를 만족스러운 듯이 잠자코 바라본다. 퐁주는 세탁통 속에서 불결과 청결의 투쟁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리아스의 <빨래하는 여자> 참조) 적어도 한겨울 동안 세탁통과 친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대단히 감동적인 어떤 기분이 나 성질을 모를 것이다. 먼저-비틀거리면서-더러워진 빨랫감이 가득 들어 있는 세탁통을 땅바닥에서 단숨에 들 어 올려 가마솥 위에 올려놓고 잠시 이리저리 움직여 본 다음에 화로의 둥근 쇠 위에 잘 고정시켜야 한다. 밑에서 불을 쑤셔 점점 강하게 해야 한다. 자주 미지근한 혹은 화끈거 리는 화로 벽을 만져본다. 다음에 세탁통 안에서 들려오는 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 고, 뚜껑을 열고 분출력의 강도나 물이 어느 정도 끓어오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끝으로 아직 끓는 그릇을 다시 땅에 내려놓는다... 세탁통은 더러운 빨랫감으로 가득차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동,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상층부에 밀려 흘러 이윽고 혐오감으로 구역질이 나게 하는 이 산더미 같은 더러운 빨랫 감 위로 비처럼 떨어진다. 끊임없이 이런 혐오감이 계속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화에 도 달하게 된다... 확실히 속옷은 세탁통에 처넣으면 벌써 때가 대충 빠진다... 그래도 역시 더러운 느낌 을 갖게 되는 세탁통이 감동적인 노력에 의해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처리하여 더러워진 천은 찬물에 헹궈져 새하얀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기적이 이루어진다. 갑자기 무수한 흰 깃발이 펄럭인다. 항복이 아니라 승리의 표시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 지 그 곳에 사는 물질적인 표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은 가사일에 대해 유희의 매력을 줄 수 있다. 소녀는 은그릇에 윤을 내거 나 문잡이를 닦으면서 논다. 그러나 여자가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는 자기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가정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력의 유일 한 보상, 즉 나중에 바라보는 기쁨을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국의 어느 보도기자는, 합중국 남부의 '가난한 백인'들과 함께 몇 달 동안 생활하고 나서, 더러운 주거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끝에 기진맥진한 한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그렸다. 그녀는 남편과 7명의 자녀들과 함께, 벽이 연기로 그을고 빈대가 우글거리는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중요한 방 안의 벽난로는 푸르죽죽한 초벌로 발라져 있고, 테이블 하나와 벽에 걸린 그림 몇 장은 마치 제단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누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G 부인은 눈물이 글썽해져서 말했다. "아! 나는 아집이 아주 싫어요! 이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요!" 수많은 여성들의 운명은 이와 같이, 결코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 듭되는 피로 밖엔 얻지 못한다. 가장 혜택을 누린다고 하는 경우에도 이 승리는 결코 결 정적인 것이 못 된다. 가정주부의 일만큼 시지프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 으로, 한없이 끌어올리는 작업을 계속함)의 형벌과 비슷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날마다 접시를 씻고, 가구의 먼지를 털고, 속옷을 기워야 한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것은 또다시 더러워지고, 먼지투성이가 되고, 터질 것이다. 주부는 한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힘을 빼고 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영구화하고 있을 뿐이다. "닦아 서 뭐합니까. 내일 또 닦아야 할 텐데요." 아직 모든걸 완전히 단명할 수 없는 많은 젊은 처녀들이 이런 실의에 빠져 있다. 나는 16살짜리 어느 한 여학생의 작문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발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 하고 있다. "오늘은 대청소 날이다. 어머니가 응접실을 닦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도망 치고 싶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집에는 절대로 대청소날을 정해두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는 미래를 어떤 산꼭대기를 향해 끝없이 오르는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아이 는 어머니가 접시를 씻고 있는 부엌에서, 몇 해 전부터 오후 마다 같은 시각에 기름 낀 물에 양손을 담그고 꺼칠꺼칠한 행주로 그릇을 닦는 것을 벌견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까지 이 양손은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먹고, 잠자고, 청소를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 러도 하늘에는 기어오르지 못한다. 날마다 어제를 모방한다. 그것은 헛되고 희망이 없는 영원한 현재이다. <먼지>라는 중편소설에서 콜레트 오드리는 시간에 도전하는 슬픈 공허 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튿날 그녀는 소파 밑에 빚자루를 뻗어 무엇인가 꺼내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것이 헌 헝겊조각이나 새털뭉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쓸지 않은 높은 장 위나 가 구 위의 벽 사이에 흔히 쌓이는 먼지덩어리였다. 그녀는 이 기이한 물건을 앞에 놓고 생 각에 잠겼다. 이미 8주 내지 10주일이나 그들이 이 집에 살고 있는데, 쥘리에트의 주의에 도 불구하고 이런 먼지덩어리가 생겨 마치 어린시절 항상 공포심을 심어주던 그 잿빛 짐 승처럼 구석에 숨어 있다. 고운 재와 같은 먼지는 그 동안 얼마나 소홀했는가 하는 것과 이윽고 생기는 포기의 실마리가 된다. 이 먼지는 실내의 공기가 마찰하는 옷, 열린 창문 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통해 만져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쌓이고 또 쌓여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덩어리는 이미 단지 먼지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기양 양하게 분명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쌓이고 쌓여서 폐물이 되었다. 제법 아름답기까지 하 고, 들장미의 송이보다 더욱 투명하고 가볍지만 관계가 없다... 먼지는 청소하는 모든 능 력에 이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점령했다. 청소기는 불가항력의 불결과 싸우는 인간의 노력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를 상징하고 있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그 모든 원인이다. 찌꺼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식사, 어디서 나 섞이는 두 가지 먼지... 어느 가정에서나 계속해서 이런 작은 오물들을 배출해내고 있 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깨끗한 셔츠를 입고 외출하기 위해, 당신의 남 편인 기사의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 마르그리트의 머릿속에는 이런 공식이 들어 있다. '마루를 깨끗이 닦을 것... 놋그릇 을 깨끗이 닦아놓을 것... 그것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생활을 깨끗이 보존하는 것이 그녀 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다. 빨래를 하고 다름질을 하고 장롱 구석에 숨어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것은, 삶을 거부하 면서 죽음을 막는 일이다. 왜야하면 시간은 같은 작용으로 창조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주부는 그 부정적인 양상밖에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태도는 마니교도의 그것이다. 마니교의 특징은, 선과 악의 두 원리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은 적극적인 활동 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악을 소멸시킴으로써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악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마니교적이 아니다. 왜야하면 신에게 몸을 바쳐야 악마와 잘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악마에게만 몰두하 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초월과 자유의 모든 이론은 악의 패배를 선에의 진보에 종속시킨다. 그런데 여성은 보 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집, 방, 더러워진 속옷, 마루 등은 응결된 물건이다. 그런 물건에 스며드는 악의 원리를 여성은 한없이 쫓아버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여성은 먼지, 얼룩, 흙탕물, 때를 공격한다. 여성은 죄와 싸우고, 악마와 싸 운다. 그러나 적극적인 목표롤 향하는 대신에 쉴새없이 적을 쫓아내기만 하는 것은 슬픈 운명이다. 주부는 흔히 분노 속에서 그 운명을 견디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에 대해 '심술 궂다'는 말을 사용했다. 같은 의미의 말은 한 정신분석 학자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 의하면 가정적인 일에 집착하는 것은 사드 마조히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 병 의 특징적인 기벽은 자유가 원치 않는 것을 자유에게 원하게 하는 것이다. 소극성, 불결, 악을 운명으로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주부는 오히려 그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운명을 요 구하면서 광적으로 그 먼지를 향해 사납게 돌진한다. 그녀는 모든 생명의 약동이 뒤에 남 기는 얼룩이나 쓰레기를 통하여 인생 자체를 공격한다. 누구라도 그녀의 영역에 침범하 면, 그녀는 눈을 심술궂은 불꽃으로 빛난다. "발을 닦아라. 너는 뭐든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그걸 만져서는 안돼." 그녀는 주위의 사람이 숨도 못 쉬게 하고 싶어한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소란을 떤다. 모든 일에 수고가 뒤따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곧 잔손이 가야 한다. 그녀는 인생에서 붕괴의 약속, 무한한 노력의 요구만을 보았기에 살아가는 기쁨을 완전히 잃고 있다. 냉혹한 눈과 걱정스럽고 긴장한, 그리고 언제나 불안한 얼굴을 학 있다. 신중과 인색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그녀 는 창문을 굳게 닫는다. 왜냐하면 햇빛과 함께 벌레나 홀씨, 혹은 먼지가 날아들기 때문 이다. 게다가 햇빛은 실크벽지를 망쳐놓는다. 낡은 안락의자는 커버 밑에 숨겨져 나프탈 렌 냄새를 마구 풍긴다. 강한 햇살은 의자의 색깔도 바래게 한다. 그녀는 이런 보물을 찾 아온 손님에게 내보이면서도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녀의 경계심은 점점 심해져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적의를 품게 된다. 가구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쌓여 있지나 않나 해서 흰 장갑을 끼고 살펴보는 시골 주부들이 곧잘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몇 해 전에 파팽 자매가 실연한 것은 이런 종류의 여자들이다. 불결에 대한 그녀들의 증오는 하인이나 세상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침울한 성벽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여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여자들은 남을 증오하는 일이 없다. 콜레트는 '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는 민첩하고 활동적이었으나 열성적인 주부형은 아니었다. 깨끗하고 깔끔하긴 했으 나 냅킨, 각사탕, 술병의 수를 일일이 세거나 하는 병적으로 고독한 정신 상태와는 거리 가 멀었다. 플란넬 천을 손에 들고 이웃과 웃으면서 유리창을 닦는 하녀를 감독하는 그녀 의 입에서 가끔 신경질적인 외침, 참을성 없는 주절거림이 마구 새어 나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도자기 찻잔을 닦고 있노라면 나는 정말 늙어가는 느낌이 들어 요." 그녀는 성실하게 자기 일을 끝낸다. 그리고 집 입구의 두 계단을 넘어서 뜰로 들어 선다. 그러자 금세 그녀의 침울한 흥분과 원한은 사라져버린다. 불감증 또는 불만이 많은 여성, 올드미스, 배반당한 아내, 난폭한 남편 때문에 고독하 고 공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 등이 빠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러한 신경병이다. 나는 이런 할머니를 알고 있다. 그녀는 아침마다 다섯시에 일어나 옷장을 살펴보고 다시 정리 한다. 그녀는 20세 때에는 명랑하고 멋쟁이였던 것 같다.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편 과의 사이에서 난 외아들을 키우며 쓸쓸한 시골에 갇혀 살면서부터, 술병이나 기울이는 남들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물품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남편의 기록>에 나오는 엘 리즈에게는 가사의 취미가 한 세계를 비배하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구나 지나친 생활의욕, 목표가 없이 겉도는 지배욕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간과 공간, 인생과 인간들, 존재하는 모든 것에의 도전이기도 하다. 저녁식사 후 아홉시가 되면 그녀는 몸을 씻는다. 한밤중이다.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 다. 그러나 그녀의 용기는 나의 휴식을 마치 게으름으로 여기는 것처럼 모욕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 엘리즈-'정결하게 하려면 먼저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 집안은 이윽고 무척 깨끗해져서 인간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질 것이다. 휴식을 위하기 위해 침대가 놓여 있다. 그렇지만 푹 쉬기 위해서는 옆 마루 위에 쓰러져 눕는 게 낫다. 침대의 쿠션이 너무나 새것이라서 머리나 발을 대서 공연히 더러워질까 봐 걱정이다. 내 가 카펫을 밟을 때마다 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기계나 걸레를 가진 손이 나를 따라온 다. 밤- '이제 끝났어.' 그녀가 잠잘 때까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하나의 물품이나 가 구를 움직이고 마루나 벽이나 천장을 여기저기 만져보는 일. 아무튼 지금 그녀가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주부이다. 다락 안을 깨 끗이 털고 나서 창가의 제라늄의 먼지를 턴다. 그녀의 어머니-'엘리즈는 언제나 바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 해.' 가사는 확실히 여자에게 자기로부터 멀리 한없이 도피하는 것을 허용한다. 샤르돈은 정 확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도 끝도 없는 자질구레하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집 안에서 남편의 마음에 들 자신이 있는 여자는 곧 하나의 소모점, 방심상태, 자기를 말살시켜버리는 정신적 공허 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 여자가 사물과 자기에게 도전하는 사드 마조히즘은 때때로 성적인 특징도 큰 관련을 가진다. "육체노동을 요구하는 가사는 여자가 들어가야 할 매음굴이다."라고 비올레트 르뒷은 말한다. 청결의 취미는 불감증에 걸린 여자가 많은 네덜란드나 관능의 기쁨에 질서나 순결의 이상을 대립시키는 청교도적 문명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중해 연안의 남쪽 나라가 불결한 속에서도 즐겁게 살아 가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지방에 물이 귀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육체, 그리고 동물적인 것에 대한 스스럼없는 애착은 인간다운 냄새나 때, 혹은 벌레인 이까지도 참아나가게 하 는 것이다. 식사준비는 청소 이상으로 적극적인, 때때로 즐겁기까지 한 노동이다. 먼저 시장에서 보내는 한때는 주부에게 있어서 하루 중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가정의 고독은 기계적인 일로 인해 머리를 쓸 일이 없는 것인만큼 여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된다. 남국의 도시에서처럼, 집 입구에 걸터앉아 지껄이면서 옷을 꿰메거나 빨래를 하거나 야채를 다듬 을 때 여자는 행복하다. 개울로 물을 길러가는 것은 거의 갇혀 사는 회교도 부인들에게는 큰 모험이다. 나는 전에 카빌리의 작은 마을에서는 관에서 마련해 준 광장의 공동수도를 여자들이 깨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침마다 모두 함께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는 개천까지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들에겐 즐거운, 그리고 유일한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거리 모퉁이 가게 앞에 줄지어 서서 물건을 사면서 잡담을 하는 동안 '주부로서 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의 소중함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도 공동체의 일원인 것을 순간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본질적인 것을 비 본질적인 것에 대립시키 는 것처럼 남자의 사회에 자기를 대립시킨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쇼핑은 큰 즐거움 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전이자 또한 발명이다. 지드는 <일기>에서, 유희를 모르는 회교도는 숨은 보물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 한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문명의 시와 모험이다. 주부는 그 유희가 언 젠가 곧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알차고 푸짐한 양배추, 잘 만들어진 치즈는 보물이며, 상인들이 이것을 엉큼하게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상인의 손에 서 교묘히 빼앗아야 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투쟁과 책략의 관계가 형성된 다. 사는 사람은 값싸고 좋은 상품을 손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 살림이 너무 어려워 예산 에 맞추기 위한 고충 때문에 그런다는 차원은 이미 넘어선 것이다. 승부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상품진열대를 의심쩍게 살펴보고 있는 동안의 주부는 여왕이다. 세계는 그 부와 올가미를 던져놓고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거기서 그녀가 노획물을 골라내기를 기다 리고 있다. 테이블 위에다 장바구니에 들어 있는 것을 쏟아놓을 때, 그녀는 허황한 승리 감을 맛보게 된다. 먼저 찬장 속에는 통조림, 즉 미래에 대해 그녀를 지켜주는 소멸하지 않는 물품을 진열한다. 그리고 자기의 권위에 굴복하게 될 야채나 육류를 만족스러운 얼 굴로 바라본다. 가스등과 전등은 불의 마력을 소멸시켜버렸다. 그러나 아직 시골에서는 많은 여자들이 생명력 있는 장작에서 생생한 불꽃을 이끌어내는 환희를 알고 있다. 불이 붙으면 여자는 곧 마녀로 변신한다. 손을 한 번 휘저어서-그녀가 달걀을 깨거나 빵가루를 반죽할 때-또 는 불의 마술에 의해, 재료의 질을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물질은 음식이 되다. 콜레트는 이런 연금술의 마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신비, 마법, 요술이다. 불 위에 냄비나 주전자, 그리고 그 속의 물건을 꺼내 식탁에 올리는 순간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를 식탁 위에서 바라보는 즐거운 불안, 쾌락적인 희망에 찬 순간 사이에 이루어진 모든 것은 신비, 마법, 요술이다. 또한 콜레트는 뜨거운 재의 비밀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형을 즐겁게 묘사하고 있다. 장작불의 재는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맛있게 구워준다. 뜨거운 재 속에 파 묻었던 사 과나 배를 꺼내 보면 이미 주름이 잡힌 채 잘 구워져 그 껍질 속이 마치 두더지의 뱃가죽 처럼 부드러워져 있다. 부엌의 화덕 위에서 사과가 아무리 '마음씨 좋은 할머니'처럼 되 더라도 본래의 껍질을 쓴 채 맛이 든 정도만으로 되어 있다면, 만일 솜씨를 발휘하며 단 지 한 방울 꿀의 눈물을 짜낸 데 불과한 잼에는 아직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세발 냄비에 는 불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체로 친 재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닿지 않게 가까이 있는 감자로 가득찬 이 냄비가 숯불 위에 다리를 버티고 서서 거기서 눈같이 새하얗고 따 끈따끈하고 비늘과 같은 구근을 낳아둔다. 여류작가들은 특히 잼의 시를 노래했었다. 구리냄비 속에서 딱딱하고 순수한 사탕과 과 실의 부드러운 살을 잘 결합시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거품이 일고, 끈적끈적하고, 따 끈따끈하게 정제되는 물질은 위태롭다. 주부가 잘 처리하여 자랑스럽게 단지 속에 넣는 것은 바로 비등하는 용암이다. 그 단지를 종이로 싸고, 거기에 승리한 날짜를 기록할 때, 그녀는 바로 시간을 정복한 샘이 된다. 그녀는 사탕의 함성 속에 지속을 잡아넣고 생명을 단지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요리는 여러 가지 재료의 친밀성에 침투하여 작용하는 것 이 상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물질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창조한다. 가루를 다루는 가운데 그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손도 눈과 마찬가지로 꿈과 시를 지닌다."고 말했다.(<대지와 의지의 꿈> 에서) 이어서 그는 그 '충실한 순응성, 재료에서 손으로, 손에서 재료로 무한히 반사하 는, 손에 가득차게 하는 그 원활성'에 대해 발하고 있다. 가루를 반죽하는 여자 요리사의 손은 '행복한 손'이다. 그 손으로 반죽이 구워지면 가루에 가치가 더해진다. '빵이 구워 지는 것은 이와 같이 대단한 물질적 생성이다. 창백한 흰 가루에서 황금색으로, 그리고 가루에서 빵 껍질로의 생성이다.'(<대지와 의지의 꿈>에서) 여자는 과자나 파이의 성공 속에서 개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한다. 미슐레는 "파이를 만드는 기술처럼 복잡 한 것은 없다. 일정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어려운 그 것은 타고난 재주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선물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어린 소녀들이 언니들이 하는 일을 열심히 모방하여 기뻐하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그녀는 흙덩이나 풀잎으로 대용품을 만들어서 논다. 작은 진짜 솥을 장난감 으로 선물 받거나, 어머니 허락 하에 부엌으로 들어가 과자를 만드는 밀가루를 손바닥으 로 반죽한다든지 따끈따끈한 캐러멜을 자를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정의 다른 여러 가지 일들처럼 반복됨으로써 곧 그 즐거움을 상실 하게 된다. 옥수수빵을 주식으로 하는 인도인 가정에서는 여자는 하루의 절반을 가루를 반죽하고 굽고 데우는 데, 또 집집마다 같은 파이 과자를 만드는 일에 보낸다. 그것은 몇 세기에 걸쳐 똑같다. 그녀들은 이제 조금도 화덕의 마력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장보기를 보물찾기처럼 생각할 줄도 모르고 반짝거리는 수도꼭지에서 황홀감을 느낄 줄도 모르는 날이 온 것이다. 이런 솜씨를 찬양하는 것은 남녀 작가들 뿐이다. 그들 은 가사를 돌보지 않거나 돌보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일상적이 되고 보면, 그 소동은 단조롭고 기계적이다. 언제나 대기상태에 있 다. 물이 끓고, 고기가 알맞게 구워지고, 빨래가 마르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여러 가지 다른 일을 벌려보아도 공허만이 남게 된다. 거의가 따분한 가운데 하는 일들이다. 현재의 삶과 내일의 삶 사이의 비 본질적인 중개에 불과하다. 그런 일을 하는 개인이 생산자이고 창조자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활과 생리작용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자연과 일체가 된 다. 이런 하루하루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남자가 할 때에는 그다지 침울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남자에게 그런 일은 소극적이고 일시적인 한 순간에 불과하고, 남자들은 곧 그 일에서 빠져나간다. 하녀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분업이 여자의 생활을 그대로 일반적이고 비 본 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주거나 식사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주부의 직접적인 목표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진정 한 목적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무명의 기획이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여자가 일에 마 음을 쏟지 위해 거기에 자기의 개별성을 반영시켜 보려는 것도, 또 얻은 결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뜻도 이해가 된다. 그녀는 고유의 의식과 미신을 갖고 있다. '상 차리는 데, 객실을 정돈하는 데, 요리하 는 데'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방법을 고집한다. 자기가 아니면 고기를 장 구울 수조, 윤 을 잘 낼 수도 없다고 믿고 있다. 만일 남편이나 딸이 도와주려고 하거나, 그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곤 그들의 손에서 바늘이나 빗자루를 빼앗아버린다. "당신은 단추도 하나 달지 못해요." 하는 식이다. 도로시 파커는, 자기 집을 정돈하는 데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특색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까 당혹해하는 한 젊은 여성을 동 정어린 익살로 묘사하고 있다. 어니스트 웰든 부인은 잘 정돈된 방의 여기저기를 조금씩 매만지면서 돌아다니고 있었 다. 그렇게 매만지는 솜씨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 하기 전에는 신 혼살림을 차릴 때 집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여기에는 장미꽃을 꽂아두고 저 쪽에 꽂 힌 꽃을 조금 손질하고 하는 식으로 집을 하나의 스위트홈으로 바꿔놓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런 손쉬운 일에 몰두하는 것을 즐기 는 편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어도 밤마다 장밋빛 갓이 달린 전등이 켜지면 이 집을 다른 집과 구별 짓는 아주 특색 있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슬픈 심정으로 반성하는 것이었다. 여성다운 손길을 하는 것은 아내의 역할이 다. 웰든 부인은 책임감이 강한 여자이다. 그녀는 가엾고 불안한 태도로 벽난로 위를 만 져보고, 작은 이리본제 화병을 손에 든 채 방 안을 절망적인 눈으로 둘러보면서 서 있었 다. 이윽고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자기의 참신한 솜씨를 바라보았다. 이 방에 둔 작은 변 화는 놀랄 만했다.(<너무 기쁘다>에서) 여자는 이 독창성 또는 특이한 완성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이것은 샤르돈이 지적한, '끝도 한도 없는 자질구레하고 뒤죽박죽인 일'의 성격을 여자가 되는 일에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주부의 그런 걱정이나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 지 알기 어렵게 하고 있다. 최근의 앙케트(잡지 <전투>가 C. 에베르의 서명으로 1947년에 발표한 것)에 의하면, 결혼한 여자는 평일에 약 3시간 45분 동안을 가사에 소비하고, 휴 일에는 8시간을 바치고 있으므로 한 주당 약 30시간 꼴로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은 여성 노동자나 여성 종업원의 주간 노동시간의 4분의 3에 해당된다. 이 정도의 일이 만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가중된다면 그것은 막대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달리 할 일이 없다면 그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다.(여성 노동자나 종업원은 장소의 이동에 시간을 소비하지만 가정주부는 그렇지 않다.) 어린애가 많으면, 여성의 피로는 더 욱 쌓인다. 가난한 가정의 어머니는 하루종일 무질서한 가사에 매여 기력을 소모한다. 이와 반대로 심부름하는 사람을 두고 있는 부르주아 여성은 매우 한가하다. 그 보상은 권태이다. 그녀들은 권태에 빠져 대부분이 그 일과를 일부러 아주 복잡하게 즐긴다. 그래 서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건강할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사일 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그보다 더 힘든 일도 거뜬히 해낼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신경쇠 약에 걸린 뒤로는 다른 일을 아예 못하고 날마다 집안일에만 몰두하는데도 그 일을 제대 로 끝마치지 못했다. 가장 언짢은 것은 이런 노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속적인 창조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만큼 자기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녀는 오븐에서 꺼낸 과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먹어버리기엔 정말 아깝다! 모처럼 잘 닦아놓은 마루 위를 남편이나 아이들이 흙 묻은 구둣발로 걸어 다니는 것은 질 색이다. 사물은 그것이 유용하게 쓰이자마자 곧 더러워지고 파괴된다. 앞에서도 말한 것 처럼 여자는 그런 물품이 사용되는 것을 아까워한다. 어떤 여자는 곰팡이가 낄 때까지 잽 을 보관한다. 어떤 여자는 객실에 자물쇠를 잠가놓는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을 저지할 수 는 없다. 식료품은 쥐를 불러들이고, 벌레도 달라붙는다. 이불과 커튼과 옷은 좀이 먹는 다. 세계는 돌로 된 꿈이 아니다. 그것은 분해작용(부패)에 위협 받고 있는 너절한 물질 로 되어 있다. 식료품의 재료도 달리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의 고기로 된 시계처럼 불확실하다. 그것은 죽은 물체처럼, 무기물처럼 보이지만, 결국 숨어 있던 벌레들에 의해 시체로 바뀌어 버린다. 물체 속에 자기를 투영하는 주부는 물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세계에 의존하고 있다. 속옷은 더러워지고, 고기는 타고, 도자기는 깨진다. 그것은 절대적인 실 패이다. 물건은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물품으로 불변이 나 안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약탈이나 폭탄이 수반되는 전쟁은 찬장이나 집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내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은 곧 소모된다. 어느 것이나 파괴로 끝나는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는 여성에겐 끊임없는 체념이 따라야 한다. 여성이 그것을 미련없이 승 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자질구레한 희생이 어딘가에서 하나의 기쁨,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가사는 주로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여서, 집에 돌아오는 남편의 눈에 무질서나 태만은 곧 발견되지만, 질서나 청결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 이다. 그는 맛있게 만든 음식에는 큰 흥미를 갖는다. 음식을 만든 여자가 으쓱해 보일 때 는 그녀가 제법 잘된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이다. 남편이나 아이들은 말뿐만 아 니라,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기쁨을 표시한다. 요리의 연금술은 계속되어 음식은 죽이 되고 피가 된다. 육체의 보존은 마루를 닦는 것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생명적인 의미를 갖 는다. 분명히 요리하는 여자의 노력은 미래를 향해 초월되어 있다. 외적인 자유에 의존하 여 안주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물체 속에 자기를 소외하는 것만큼은 공허하지 않다고 말 하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요리하는 여자의 일이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식탁에 둘러앉은 손님의 입 속에서 뿐이다. 그녀는 그들의 찬성투표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자기가 만든 요리를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음식을 더 청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만일 입맛이 없는 표정을 지으면 속이 상한다. 감자 프라이가 남편을 위해 있는지, 남편이 감자 프라이를 위해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애매성은 가정부인의 태도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집안을 잘 가꾼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수입 전액으로 가구나 냉장고를 사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활동 영역이 그녀가 만든 행복의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아내의 소망이 대체로 충족되던 시대가 있었다. 행복이 아직 남자의 이상이 고 남자가 무엇보다도 집이나 가족에게 집착하던 시대, 어린이 자신이 부모나 전통이나 과거에 의 형성되었던 시대로, 그 무렵에는 가정을 지배하고 식탁을 주관하는 여성은 여 왕으로 보였다. 오늘날에도 얼마 되지 않는 지주계급이나 족장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부유 한 농민의 가정에서는 여성이 이런 영광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결 혼은 대체로 이미 사멸된 사회풍습의 잔재이며, 아내의 지위는 대단히 하찮아 져 일할 보 람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아내는 과거와 다름없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시절 만큼의 권리는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 보수도 명예도 주어져 잇지 않다. 오늘날의 남성은 자신을 그 속에 가둬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식을 취하기 위해 결혼한 다. 남성은 가정을 갖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거기서 탈출할 자유가 있다. 그는 가정에서 안정을 얻지만, 마음속으로는 방랑자이다. 그는 행복을 경멸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목적 으로 삼지도 않는다. 반복은 그를 권태롭게 만든다. 그는 새로운 모험이나 극복해야 할 저항이나 우의, 즉 두 사람만이 고독에서 자기를 구해주는 우정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 다. 남편보다는 아이들이 더욱 가정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어한다. 그들의 생활은 다른 곳 에 있다.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언제나 타자이기를 원한다. 여성은 불변 과 연속의 세계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남편과 어린이들은 여성이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 은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초월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은 자기가 일생에 걸쳐서 헌 신하는 활동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그로 인해 더욱 자기의 봉사를 억 지로 강요하게 된다. 때문에 그녀는 선량한 어머니나 주부에서 못된 어머니가 되고 성난 악처가 된다. 이와 같이 여성이 가정 안에서 하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도 자주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그런 노동은 사회에는 직접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아무 것 도 생산하지 못한다. 노동이 그 의미를 갖고 품위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이나 행동으 로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생활방식과 일치될 경우이다. 그런데 가사는 주부를 해 방시키기는커녕 남편이나 자식에게 종속시킨다. 그리하여 주부는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녀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비 본질적인 매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민법이 여성의 의무에서 '복종'을 지워버렸다고 해도, 그 입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 다. 여성의 입장은 부부의 의사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제도를 존중하는 공 동체의 기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적극적인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 로, 완성된 한 인격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여성은 집안에서 아무리 존경 받아도 종속되 어 있고, 일인자가 아닌 제이인자이고, 또 다소 기생적이다. 여성을 억누르고 있는 무거 운 저주는 자기 삶의 의의 자체가 자기 수중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훨씬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다. 남성은 남편이기 전에 시민이며 생산자이다. 여성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오로지 아내 일 뿐이다. 여성의 노동은 그녀를 그 신분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여성의 노동은 이 신분에서 그 가치를 이끌어낸다. 여성은 자기 일을 몹시 사랑하고, 진심으로 헌신하는 기쁨을 느끼면서 수행한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을 원망하면서 하게 되면 불쾌한 노예의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일은 여성의 운명으로는 비 본질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 며, 불행한 결혼생활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침대의 서비스와 가사의 서비 스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의되는 신분, 여성이 예속적인 지위를 인정해야만 품위를 발견하 게 된다는 입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젊은 처녀가 유년기에서 사춘기로 접어들 때는 하나의 위기이다. 이 처녀를 성인의 생 활로 밀어 넣는 것은 더욱 큰 위기이다. 다소 당돌한 성적 입문이 여자에게 일으키기 쉬 운 혼란에는,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불안이 겹치게 된다. "마치 무서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결혼에 의해 현실과 삶 속에 던져지는 석, 사랑 과 수치의 모순에 놀라는 것, 신과 짐승의 예상 밖의 인접에 의해 오직 한 사람의 대상 속에서 기쁨, 희생, 의무, 동정,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 참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의 착란이 거기에 나타나 있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혼여행은 이 혼란을 어느 정도 숨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신부는 몇 주일 동안 일상적인 세계 밖으로 던져져, 사회와 한동안 절연된 상태로 시간과 공간, 현 실 속에 자기를 분명히 놓아두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것들 속에 복귀해야 한다. 그래서 새 가정에 돌아왔을 때는 불안해진다. 사실 친정과의 유대는 상대방 남성과 의 그것보다 훨씬 긴밀했었다. 친정을 떠나는 것은 결정적인 이별인 셈이다. 그래서 그녀 는 고독의 불안과 자유의 현혹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다. 친정과의 이별은 경우에 따라서 는 얼마간 고통스럽다. 아버지나 형제자매, 특히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유대가 벌써부 터 끊어져 있는 것이었다면 그나마 그녀는 슬픔을 느끼지 않고 가족과 헤어질 수 있다. 만일 육체의 지배력이 아직 강하고, 실제로 그들의 보호 아래 놓여 있다면, 생활의 변화 는 그녀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설사 그녀가 부모의 집을 떠나 고 싶어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까지 그 일원이었던 가정을 떠나, 그 과거, 확실한 원칙이나 실증된 가치를 지닌 어린이의 세계와 격리되었을 때 그녀는 당혹감을 느끼게 마 련이다. 열렬하고 충실한 성생활이라도 있다면 새로운 내재적인 평화 속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보통 신혼 초기에는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놀라게 마련이다. 성적인 입문에 어 느 정도 성공하였더라도, 그녀의 혼란은 증대 된다. 신혼 이튿날의 그녀에게는 최초의 월 경 때 보였던 반응이 나타난다. 그녀는 흔히 자기가 암컷이라는 최고의 계시 앞에서 혐오 를 느끼고, 이런 경험이 다시 되풀이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녀는 이튿날 다 시 첫날밤과 같은 환멸을 느끼게 마련이다. 초경 때 소녀는 자기가 아직 한 사람의 어엿 한 여성이 아니었다는 데 비애를 느꼈던 것이다. 처녀성을 잃은 지금, 그녀는 이미 한 사 람의 아내이다. 최후의 단계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이 불안한 환멸은 처녀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결혼 자체에도 결부되어 있다. 약혼자와 이미 알 걸 다 알고 지냈거나 혹은 다른 남자들과도 벌써부터 그런 관계를 가졌었던 여성도 결혼에 의해 한 남자의 여자로서의 생활에 완전히 접어들게 된다고 생각하면 흔히 이런 반응을 보이기 쉽 다. 한 사업소의 시초를 경험하는 것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단서가 잡 히지 않는 운명을 발견하는 것처럼 정떨어지는 일은 없다. 이런 결정적이고 요지부동한 바탕 위에 자유가 가장 가차없는 무상성을 띠고 떠오른다. 젊은 처녀는 전에는 부모의 권 위의 보호아래, 반항이나 희망 등으로 그 자유를 행사하고 있었다. 자기가 안전을 누렸던 환경을 거부하거나 이것을 초월하려는 데 자유를 사용해 왔다.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나 와 결혼하기를 동경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결혼했다. 그녀의 앞에는 이제 '다른'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가정의 문은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 고 닫혀졌다. 이 지상의 모든 운명이 거기에 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자기를 기다 리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머니가 했던 일과 같은 일이다. 날마다 같은 습관이 되 풀이될 것이다. 처녀시절에는 양손이 '비어' 있었다. 희망 속에, 꿈 속에 모든 것을 소유 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세계의 작은 일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걱정하고 있 다. 이것뿐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남편, 이 집, 이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렇다 할 욕망도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오직 새로운 책임을 걱정하고 있다. 남편 은 벌써 나이가 지긋하여 권위를 갖고 있어도 이 남자와 성행위를 할 것을 생각하면, 남 편을 존경할 수도 없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할 수도 없고, 어머니가 되어 줄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 해발시켜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다. 새로운 가정의 고독 속 에 자기에게는 다소나마 타인인 남자와 결합되어, 이제는 소녀가 아닌 아내가 되어, 언젠 가는 어머니가 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녀는 몸이 오그라드는 신정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 어떤 목적도 분명히 갖지 않고 세상의 냉혹한 현실 속에 방치된 것이다. 그 리하여 전적으로 부자연한 것에서 비롯되는 권태와 무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젊은 톨스토이 부인의 일기에 절실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비탄이다. 그녀는 정열을 갖고 존경하는 대작가와 약혼했다. 그녀는 야스타야 폴리야나의 나무의 발코니에서 포옹 을 받은 후에 가족과 헤어지고 과거와 절연된 채, 8일 동안 자기보다 17세나 연상인 남자 곁에서 그 육체적인 사랑에 구역질을 느낀다. 이 남자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과거와 흥미 를 갖고 있던 사람이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생활은 단지 잠 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결혼 초기에 대한 이야기와, 처음 몇 해 동안의 일기를 인용 하고자 한다. 1862년 소피아는 결혼하여 그날 밤에 친정을 떠났다. 참을 수 없는 괴로운 느낌이 목을 죄는 긴박감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가족들과, 내 가 깊이 사랑하여 지금까지 언제나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을 느꼈 다... 작별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웠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일부 러 어머니에게 할 작별인사를 맨 뒤에 남겨두었다... 어머니의 포옹에서 몸을 빼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소리를 질렀 다. 나는 그 어머니의 목소리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가을비는 그치지 않았다... 피로 와 고통으로 녹초가 되어 마차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겨우 마냥 울 수 있었다. 레온 니콜 라이예비치는 크게 놀라고 불만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거리로 들어섰을 때 나는 어둠 속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둠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역인 비리울레 프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레온 니콜라이예비치는 다정하게 여러 모로 나를 돌봐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비리울레프에서는 황제가 쓴다는 방을 우리 에게 내주었다. 빨간 레프스로 장식된 가구가 놓인 커다란 방인데도 조금도 친숙감이 들 지 않았다. 우리에게 물주전자를 갖다 주었다. 나는 소파 끝에 몸을 웅크리고 죄수처럼 잠자코 있었다. "차 한잔 따라주지 않을래?" 하고 레프는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 다정한 말을 할 수 없어서, 되도록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24시간 후에 그들은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도착했다. 10월 8일, 소피아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남편이 어떤 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를 괴로워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나는 어떤 완전한 존재, 신선하고 순수한 인간을 사랑하고 싶 다고 언제나 꿈꿔 왔다... 나는 이 어린애 같은 꿈을 단념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나를 껴 안을 때, 그가 이처럼 나를 껴안고는 있지만 내가 그의 첫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이튿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마음이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어젯밤에는 언짢은 꿈을 꾸어, 언제나 그 생각만 한 것이 아닌데도 마음은 역시 무겁고 답답하다.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눈을 들 수가 없어서 아침 내내 줄곧 잠만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 나를 억누르고 있다. 나는 곧 죽을 것만 같다. 지금 이렇게 내게 남 편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남편이 잠들었다. 혼자 있으면 두렵다. 남편의 깊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서글프다. 이 모든 육체적인 관계는 참으로 싫다. 10월 11일. 무섭다! 참으로 슬프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더욱 반성하며 끙끙 앓는다. 남편은 병이 났다. 기분은 좋지 않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은 알지 못했다. 누가 나의 행복 따위를 걱정해 주나! 그런 행복을 나로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만들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슬플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이렇게 사태가 나쁜데, 무엇 때 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남편은 냉담하다. 한편 나는 그이를 점점 더 사랑하고 있다... 부모님들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 난다. 그 무렵에 인생은 얼마나 경쾌했던가! 그런데 지금, 오 하나님! 제 영혼은 찢겨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요... 그리운 어머니, 그리운 타니야, 그들 은 나를 정답게 대해 줬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그들과 헤어졌을까? 슬프다, 두렵다! 그렇지만 리오보치카(레프의 애 칭)는 좋은 사람인데... 전에 나는 생활하고 공부하고 가사를 돌보는 데 정열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끝장이다. 날마다 말없이 팔짱을 끼ㅌ 채 지난날을 되풀이하여 상 기하고 있을 뿐이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즐겁지만 여기서는 불편하다... 리오보치키는 니콜스코이에에 가는 동안, 나더러 오늘은 집네 조용히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그 사람을 나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승낙했고 깊어하고, 나에게서 도망칠 구실을 찾아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을까? 1863년 11월 3일. 나는 자기 일을 잘할 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한다. 남편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현명하고 유능하다. 나한테는 그 어느 하나도 없다. 무언가 하려고 마음만 먹 으면 할 수 있다. 또 할일이 없는 것도 아니가. 그러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기를 좋아하 고 그런 것을 아끼도록 자기를 훈려해야 한다. 가축을 돌보고, 피아노를 치고, 시시한 것 만 많고 재비있는 것은 짧은 독서. 오이를 소금에 절인다... 나는 깊이 잠들어, 우리들의 모스크바 여행에도,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에도 감동이나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뜨고 되살아나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는가? 이 고독이 나를 완 전히 녹여버렸다.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친정에선 그처럼 활기에 넘쳤는데, 이곳에서는 남편이 없으면 우울하다. 그는 고독에 익숙하다. 그는 나처럼 가까운 친구에 게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활동에서 얻고 있다... 그는 가족이 없이 자란 사람이다. 11월 23일. 나는 확실히 활발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천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무 엇을 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나는 가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은 가당찮은 욕망을 느낄 때가 있다... 무엇 때문에 그의 영향이 내게 무거운 짐이 되는가?...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그이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개성만 잃어버릴 뿐이다. 이미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다. 이것이 내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한다. 4월 1일.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큰 결점이다... 남편은 자 신의 일과 영지관리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나는 신경쓸 일이 하나도 없다. 내게도 할일 이 있어야겠다. 거리에 나가고 싶다. 예전에는 이런 아름다운 봄날엔 뭔가 하고 싶은 일 이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무엇이 꿈꾸고 있었던가? 지금은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어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항고 어리석은 동경은 이제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 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견디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4월 2일. 남편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그에게는 사랑의 육체적인 면이 대단히 큰 열할을 하고 있다. 한편 나한테는 점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가고 있다. 젊은 아내가 최초의 6개월 동안에 가족과의 이별이나 고독, 자기운명이 취한 결정적인 양상에 시달림을 받고 잇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혐오하고 우울해진다. 콜레트의 어머니는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결혼한 후에 이와 동 일한 우울을 눈물이 날 정도로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따뜻한 벨기에식 집을 떠났다. 가스냄새가 나는 지하실 부엌, 따끈한 빵, 커피와 작별하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아버지의 유품인 살바토르 로자(이탈이아의 화 가. 시인, 1615~1673)의 그림, 담배함, 기다란 고급 도제 파이프... 펼쳐진 책이나 구겨 진 신문과도 작별한 채, 신부로서 삼림지방의 매서운 겨울이 닥쳐오는 돌계단이 딸린 집 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 집 1층에서 뜻밖에도 백새과 황금빛이 나는 객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2층은 초벽도 제대로 바르지 않은 곳간처럼 쓸쓸했고... 썰렁한 침실은 사랑이나 달콤한 잠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과 명랑하고 순수한 관계를 맺으며 살던 시드는, 자기 집에서 하인과 의심 많은 소작인 밖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큰 집을 밝고 명랑하게 장식 하고, 어두운 부 엌을 하얗게 칠하고, 손수 플랑드르식 요리를 감독하고, 포도가 든 과자를 반죽하고, 첫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르 소바즈는 두 차례의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요리법에 고심하고, 참고 견디고, 밀초를 칠하고 나서 고독으로 여위고 슬퍼하며 울었다... (<클로딘의 집>에서) 마르셀 프레보는 <결혼한 프랑수아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젊은 아내의 들뜬 기분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폴레옹 3세풍의 가구가 놓은 어머니의 집을 생각하다. 방의 거울에 걸어놓은 벨벳, 검은 오얏나무로 만든 만든 옷장, 모두가 낡아빠져 우습게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일제히 기억 속에 현실적인 안식처, 진식처, 진정한 보금자리, 즉 그녀가 헌신적인 애정에 의해 양육되었고, 모든 위험이나 악천후에서 보호받았던 보금자리가 머리에 떠올 랐다. 새로운 융단냄새나 커튼이 없는 창문이나 아무렇게나 쭉 늘어놓은 의자들이 있는 지금의 이 집, 어든가 즉흥적이고 안정감이 없는 이 집의 모습은 결코 보금자리가 못 된 다. 단지 보금자리를 만들 장소에 불과하다... 그녀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록 슬퍼졌다. 마치 사막에 혼자 던져진 것처럼 슬픈 느낌이 들었다. 젊은 여성은 이 진정되지 않은 불안감 때문에 때때로 오랫도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쉽다. 특히 그녀는 신경쇠약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강박관념의 형태로 지난 날의 자유에 마음이 쏠린다. 예를 들면 그녀는 우리가 이미 '소녀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매춘행위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겅우도 있다. 피에르 자네(<강박관념과 신경쇠약>에서)는 어떤 신부가 혼자 집 안에 조용히 있지 못하여 창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 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정신질환의 예를 들고 있다. 이밖에 세계가 진짜로 보이지 않고 다만 환영만 움직여, 종이에 그린 그림의 배경 같다고 말하는 의지상실의 경우도 있다. 자기가 어른이 된 것을 부정하려고 하며 한평생 완강하게 그럿을 부정하는 여자도 있다. 자네가 Qi라는 머릿 글자로 표시하고 있는 다음의 환자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Qi(36세의 여자)는 자기가 10세에서 12세 가량의 소녀라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혼자 있으면 그녀는 깡출거리거나 웃거나 머리를 풀고 어개를 문지르거나 그 일부를 잘라 버리기도 한다. 그년느 자기가 소려라는 꿈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까불 수 없는 것은 유감이야... 나는 어줬으면 해. 쓰다들어주기르 원해. 어린애에게 하는 것처럼 귀엽다는 말을 듣고 싶어... 어린이는 장난을 치고 귀염을 받고 있어. 그 순진한 마음과 애교 때문에 사랑으 받고 있어. 그 대 신 아이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아! 너를 사랑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건 근사한 일이야.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남편에게 할 수 없어. 남편이 알아줄 리가 없으니까. 나 는 정말로 꼬마 계집아이가 되고 싶어. 무릎 위에 앉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필요해... 그렇지만 그럿 안 돼. 나는 아내이고 어머니야. 가정을 잘 지켜야 해. 오, 얼마나 따분한 생활인가!" 남성에게는 결혼이 때때로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많은 남성 정신질환자 는 약혼기간중에, 혹은 결혼 초기에 생긴다. 누이들만큼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왔던 청년은 대개 어떤 단체에 속했던 경험이 있다. 전문학교. 대학. 견습직정. 각종 그룹 등 은 그를 고독에서 지켜주었다. 그는 이윽고 한 사람의 성년남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이런 단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장래의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때로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결 혼한다. 그러나 그는 집단생활의 경험에서 부부를 사회처럼 생각하는 착각에 속게 된다. 연애할 때 정열이 불타는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사회로부터 보 호해 줄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거것은 신혼이 끝나는 직후 부터 두 사람이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이윽고 길들여지고 예속되어지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의 자유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아내는 부담일 뿐 부재는 아니다. 그녀는 남편의 책 임을 경감시키기는 커녕 점점 더 무겁게 한다. 남녀의 성별에는 때때로 나이 차나 교육. 입장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서로 친 숙해지지만 부부는 타인이다. 옛날에는 부부 사이에 깊은 강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란 무 지한 처녀는 어떤 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상대는 세상물정을 잘 알 고 있었다. 젊은 처녀에게 실생활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은 남자 쪽에서 할 일이다. 어떤 남자들은 이런 묘한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보다 총명한 남 자는 자기와 미래의 아내를 떼어놓는 거리를 생각하며 불안을 느낀다. 에디스 훠튼은 자 신의 소설 <순진한 시절>에서, 1870년데의 한 미국 청년이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부담스 러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조심스러운 공포심으로 자기에게 영혼을 맡기려고 하는 젊은 처녀의 맑은 이마, 성실한 눈동자, 순진하고 명랑한 입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조직이 낳은 이 산물 -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처녀는 모든 것을 바라고 있다 - 은 지금 자기에 게는 무관한 여자처럼 생각되었다... 교양있는 점잖은 남자로서 자기의 과거를 약혼녀에 게 숨기는 것이야 하난의 의무일 테고, 과거를 갖지 않는 것이 이 처녀의 의무라면 그들 은 대체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 교묘하게 만들어진 기만적인 조직의 중 심인 처녀는 솔직하고 대담하기 때문에 더욱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그녀는 솔직하다.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안심하고 있다. 자기를 지 킬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준비도 없이 인생의 현실 속 에 하룻밤 사이에 잠겨버린다. 그는 이 너무나 단순한 영혼을 100번이나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낙심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백모와 할머니와 순결주의자인 먼 조상들의 음모에 의해 이처럼 교묘하게 만들어진 이 부자연스러운 순경은, 그의 사적 인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가 이 순결에 대한 영주권을 행사하여 그것을 눈으로 남든 조각처럼 부숴버리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말이다. 오늘날에는 젊은 처녀들이 그처럼 부자연스럽게 자라지 않았으므로 그 골이 그다지 깊 지 않다. 그녀는 인생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기고 있으며 또 준비도 되어 있다. 그 러나 그녀는 남편보다 연하인 경우가 많다. 이 점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유의하 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는 불평등한 성숙의 결과인데도 이를 성의 차별 탓으로 돌 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내는 여성이지 어린애가 아니가. 그녀가 아직 어린애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애 같은 것이다. 남편이나 남편 친구들의 어 른스러운 태도는 아내에게 압박감을 주게 된다. 소피아 톨스토이는 결혼하고 1년이 지나 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노인이다. 그는 바깥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다. 오늘 나는 나 자신이 참으로 젊게 느껴져 짓궂게 장난이라도 치고 싶어 견딜 수 없다! 잠을 자지 않고 빙빙 돌며 춤이리도 추고 싶다. 그런데 대관절 누고와 추지? 늙은 분위기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주위는 모두 늙은 투성이다. 나는 자기의 젊음에 비롯되는 충동을 하나하나 죽여버리고 있다. 그런 젊음은 분별만 따지는 이 환경에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기'를 본다. 그녀는 남편이 기대했던 반려자가 아니다. 남 편은 아내에게 그것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아내 쪽에서는 일종의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아마도 친정을 나올 때 인생길을 안내자를 발견한 심정이었을 테지만, 앞으로는 자기를 '어른'으로 대해 주기를 원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있고 싶지만, 한편 으로는 역시 한 사람의 여자가 되고 깊은 것이다. 연상인 남편은 그녀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도록 다루어 주지 않는다. 설사 나이차이가 문제되지 않을 때에도, 역시 젊은 남녀 를 일번적으로 성장과정이 전혀 다르다. 여자는 여자답게 얌전한 여성적인 가치를 존중하 도록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 한편 나자는 남성적인 도독의 원리에 젖어 있다. 이런 두 사 람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이들 상호간의 충돌은 얼 마 못 가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혼이 보통 여성을 남편에게 종곳시킨다는 사실에서, 부부 사이의 문제는 특히 여성에 게서 더욱 두드러진다. 경혼의 모순은 그것이 성애의 작용과 동시에 사회적인 작용의 양 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반성은 젊은 아내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에 잘 나타 나 있다. 남편은 남성적인 특권을 갖추고 아버지를 대신하는 반신이다. 그는 보호자. 부 양자.후견인.지도자이다. 아내의 생활은 남편의 비호하에 피어나야 한다. 남편이야말로 가치의 보호자이고, 진리의 보증인, 부부생활의 윤리적 정당화이다. 그런데 그는 일개 수 컷이므로, 그녀는 수컷을 상대로 종종 부끄럽고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혹은 마음을 뒤바꿔 놓은 우연적인 경험을 함게 해야하는 것이다. 그는 아내를 이상으로 향해서 확고한 보조 를 하면 나아가도록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내를 이끌어 자기와 함게 그 동물송 속으 로 전락시킨다. 베르나르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머물렀던 파리에서 어느날 밤, 뮤직홀의 무대를 보고 분개하여 그것에서 나왔다. "외국인 이런 것 보다니! 참으로 나라의 수치다. 이런 것으로 우리 프랑스인이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받게 도니단 말이야..." 테레즈는 이 순결 한 남자가 그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어둠 속에서 끈기있는 자기에게 수작을 강요하는 남자라는 것에 크게 놀랐다.(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이루>에서) 지도자와 수신 사이에는 수많은 잡신적인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남자는 때로는 아버 지인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며, 성행위는 신성한 향연이 되어, 아내는 남편의 품에서 완전 한 자기포기로 얻은 결정적인 구원을 발견하는 애인이 된다. 부부생활에서는 이와 같은 정열적인 연애는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다. 때로는 아내가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남편을 사 랑하지만 너무나 존경하는 남성을 품에 몸을 맞기는 것을 망설인다. 슈테켈이 보고하고 있는 부인의 경우가 그렇다. D.S. 부인은 위대한 예술가의 미망인으로 40세이다. 그녀는 남편을 몹시 사랑하면서도 그와의 접촉에서는 완전히 불감증이었다. 이와 반대로 남녀간에 존경심을 일게 하는 타락감을 함께 느끼는 형태로 쾌락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성적인 실패는 남편을 완전히 난폭한 인간으로도 만들어버린다. 그 리하여 육체적으로 미움을 받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멸시를 받게 된다. 경멸이나 반감이 나 원한이 여자에게 불감증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남편은 성적 경험을 한 후에도 여전히 존경을 받고, 그 동물적인 단점을 너그럽게 보아 용서를 받은 경우도 적지 않다. 아델 위고(빅토르 위고의 부인)의 경우가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어 떤 경우에는 남편은 그다지 위력은 없지만 유쾌한 상대가 된다. K. 맨스필드는 이런 상반 성이 취하는 하나의 형태를 중편소설<서곡>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르 사모하고 감탄해하고, 대단히 존 견하고 있었다. 오! 이 세상의 누구보다고 그녀는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솔직하고 또 기품이 넘쳐흐렀다. 실제생활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했고 순진했으며, 또 작은 일에 만족할 술 알고, 사소한 일에 괴로워하기도 했 다. 그가 그처럼 그녀에게 덤벼들지만 않고,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대지 않고, 그런 탐욕 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또 그렇게 호색한이지남 않다면! 그는 그녀에게는 너무 강했다. 소녀시절부터 그녀는 자기에게 덤벼드는 것은 무엇이든 지 질색이었다. 그녀는 그가 참으로 두려워 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당 신, 날 죽일 셈이야!" 그가 그런 말을 하면 그년 역시 무심코 험악한 망을 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그건 사실이다.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그가 싫어서 견 딜 수 없었다. 그렇게 분명한 느김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느낌은 분명하 고, 또 그 하나하나가 사실이었다. 이 낯선 감정, 이 미움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 는 자기 감정을 그 수만큰 작은 보자기에 싸서 하나씩 스탠리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중의 마지막 꾸러미를 예기치 않은 선물로 상대방에게 주고, 그가 그 꾸러미를 펴보았을 때의 얼굴의 상상해 보기도 했다. 젊은 여자가 이처럼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고백하기는 매우 어렵다. 남편을 사랑함으로 써 행복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그리고 가족이 그녀에게 기대하 는 바이다. 또한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녀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싶어한다. 보통 그녀는 결혼생활을 우선 소극적인 기분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남편 에게는 큰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믿으려고 한다. 이 열의는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할수록 병적이고 독점적이고, 질투가 강한 형태를 취한다. 자기가 처음에는 인 정하려고 하지 않은 환멸에서 자기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기를 몹시 바란다. 이런 병적인 집착에 대해 슈테켈은 많은 예를 들고 있다. 한 여성은 결혼하여 처음 몇 해 동안을 어린애 같은 고집 때문에 불감증에 걸리게 되었 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보통 남편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여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애정이 생겨났다. 그녀는 오직 남편을 위해 살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녀는 자기 의지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남편은 아침마다 그녀의 쇼핑이라든가 그밖 의 할 일들에 대한 하루의 프로그램에 대해 일러줘야 했다. 그녀는 그것을 양심적으로 실 행한다. 남편이 미리 지시하지 ㅇ낳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 방에 처박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어디르 ㄹ가든지 따라갔다. 혼자 있지 못하 여,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있기를 워했다. 그녀는 불행하여 몇 시간씩 줄곧 울기도 했다. 남편 걱적을 몹시 하고, 걱정거리가 없으면 굳이 만들어내기도 했다. 두번째의 예는 혼자서 외출하기가 두려워 방 안에서 감옥처럼 갇혀 있는 여자이다. 나 는 이 부인이 남편의 손을 잡고, 언제나 자기 옆에 있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났으나, 이 남편은 아내와 도저히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소피아 톨스토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앞에서 인용한 페이지나 그후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결혼한 직후에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남편의 과거를 비난했고, 또 그가 나아기 들어서 따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상에 대해서도 반감을 느낄 뿐이다. 아무 튼 그는 침대에서는 정욕에 불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이 거칠고 냉정하게 다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피아의 절망적인 외침, 권태로운 슬픔이나 냉담한 고백엔 정 열적인 사랑의 항의가 섞여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옆에 그리운 남편을 놓아두고 싶 어했다. 남편이 자기에게서 떠나 있으면 곧 질투에 시달리곤 했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63년 1월 11일. 나의 질투는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아마도 그를 사랑하고, 오직 그만 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더붕어 그리고 그에 의해서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1863년 1월 15일. 그가 나에 대해서만 꿈꾸고, 생각하고, 나 하나만 사랑했으면 한다. '나는 이 러저러한 것을 좋아해.'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곧 반성하여, 나 자신은 리오보치카가 아닌 누구도, 아무것도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일을 사랑 하는 것처럼, 나는 반드시 어떤 다른 일을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없느면 나는 참 으로 불안하다. 나는 날마다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끼 게 된다. 1863년 10 17일. 니로서는 그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질투하면서 그 의 돛태를 살피고 있다. 1868년 7월 31일. 그의 일기르 다시 일어보면 정말로 우습다. 얼마나 모순투성이인가! 내가 마치 불행한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다니, 우리들보다 사이가 좋은 부부가 있 을까? 나의 사랑은 점점 깊어질 뿐이다. 나는 그를 언제나 한결같이 불안하고 정열적이고 질투에 찬 시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가 냉정하고 자신만만한 것이 가끔 나를 초 조하게 한다. 1876년 9월 16일. 나는 사랑에 관한 내용이 적힌 그의 일기를 열심히 뒤지고 있다. 그 러곤 막상 그것을 발견하면 심한 질투를 느기게 된다. 나는 남편이 떠나 버린 것을 워망 한다. 나는 잠도 잘 수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다. 눈물을 꾹 삼키기도 하고 숨어서 혼 자 울기도 한다. 날마다 미열이 있고, 밤이면 오한이 난다. 내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 문에 벌을 받는 것일까? 이런 페이지 전체를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은, 참된 사랑의 결여를 도독적인 혹은 '시 적인' 흥분에 의해 보충하려는 아내의 헛된 노력이다. 강한 요구나 불안. 질투는 마음의 공허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많은 병적인 질투는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점점 더해 간 다. 질투는, 여자가 있지 않은 연적을 만들어, 그 불만을 객관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 타나는 경우도 있다. 남편이 곁에서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남편은 딴 여자를 가까이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자기의 환멸을 합리화한다. 도독관념. 위선. 자존심. 소심 등에 의해 여자가 거짓말 속에서 완고해지는 경우가 많 다. "남편에 대한 반감이 한평생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우울이나 혹은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고 샤르돈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고집어 말할 수 는 없어도, 반감은 역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젊은 아내가 남편의 지배를 거부하려는 다소간의 노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혼의 밀월과 여기에 이어 지는 불안한 시기가 지나면, 그녀느 ㄴ일단 자주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편은 흔히 연장자이고, 남성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법률상 가장이므로,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우월성을 갖고 잇다 그리고 적어 도 외관상으로는 지적으로 뛰어난 경우도 있다 남편은 아내보다 교양이나 혹은 적어도 직 업 교육상 우월하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사화의 실무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남자 가 하는 일이다. 법률도 조금은 알고 정치도 안다. 그는 정당이나 조황이나 그밖의 여러 단체에 속해 있다 근로자나 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속일 숭 없는 현실의 체험자이다. 즉 일반 남자는 추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시실이나 경험을 존중하고, 다소의 비판렬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많은 여성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그녀들이 책을 읽고, 강연을 듣 고, 어려 취미강좌를 듣고 익혀도, 두서없이 축적한 그 지식이 하나의 교양이 되기는 어 렵다. 그녀들이 추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뇌수의 결함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그런 경험 을 쌓지 못했지 때문이다. 그녀들에게 사상른 유용한 도구이기보다는 오히려 휴희이다. 총명하고 감수성이 강하고 성실하더라도, 지적인 기술이 결여되어 있지 때문에,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고 거기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평범 한 남자라도 쉽사리 그녀를 압도하게 도니다. 그가 잘못했을 경우에도 자기가 옳다고 입 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남자에게 논리는 때때로 폭력일 수 있다. 샤르돈은 <결혼행진 곡>에서 이런 음험한 형태의 압박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알베르는 베르트보다 연상이 고 교양이 있고 지식도 많은 만큰, 자기와 아내 사이에 견해차가 있을 때에는, 아내의 의 견에 대해 일체의 가치를 거부하는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끈질기 게 입증항다. 아내 쪽에서는 다시 반항하여 남편의 주장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려 혹 한다. 남편은 자기 생각을 완강히 고집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하여 부부 사 이에 짓눌리는 듯한 오해가 생견난다. 남편은 아내가 변명은 하지 않지만 그녀는 남편의 현학적인 논리에 어떤 생동감이 숨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편 쪽에서는 지금까지 자기도 뻔히 알고 있는 아내의 무지가 자증스러워, 너는 알 텅기 없다는 식으로 천문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독서를 지도하기도 하면서, 그녀를 그의 말이면 뭐든지 얌전히 받아들이는 경청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자기의 지식부족으로 언제나 남편에게 지기만 하는 젊은 아내는 침목이나 눈물, 또는 거친 태도로 화풀이를 할 수 밖에 없다.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한 베르트는, 어런 발작 같은 요란한 목소리를 듣느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알베르는 굴용과 혼란을 느끼고 있는 아내의 당황한 마음에 그ㅌ까지 상처를 입히려고 오만한 잔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가 잘 알아들을 수 없 는 이론에 굴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드던 그녀는, 이 냉혹한 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쳤 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요." 이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그녀는 경대 위에 놓인 유리 병이 눈에 띄자 갑자기 그것을 알베르에게 집어던졌다. 여성은 때때로 도전한다. 그라나 흔히 어쩔 수 없이 <인형의 집>의 조라처럼 남성이 자 기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을 무조건 수용한다. 남편은 부부의 양심이 되는 것이다. 여성은 소심과 무능과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사항에 대해 공동의견을 갖도록 남편에게 위임하고 있다. 매우 존경하던 남편을 15년 동안 함게 살다가 사별한, 총명하고 교양 있고 자주성을 지닌 한 여성이, 자기의 의견이나 행동을 스스로 정해야 하 는 처지에 놓인 불안한 심정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이 살아 있다면 이럴 때 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남편은 이 런 지도자 겸 주장의 역할을 하기를 좋아한다. 하루종일 자기와 동등한 인간을 상대로 어 려운 일을 하거나 상사에게 복종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기의 절대적인 강자로 느끼고 이론제기를 불허하는 진리를 도도하게 늘어놓고 싶어한다. 그는 직장에서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자기가 옳 았다고 주장하고, 아내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아내에 게 신문이나 새로운 정치정세를 설명하고, 소리내어 읽어주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교양 에 관해서는 자주성이 없어."하고 말할 듯한 기세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해 여자의 무능을 일부러 과장한다. 아내는 이 종속적인 역할을 다소나마 고분고분 받 아들인다. 남편이 곁에 없는 것을 진심으로 한탄하는 아내도, 혼자 있다가 뜻밖에도 자신 의 능력을 발견하고 놀라며 기뻐하는 아내도 있다. 이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일을 처 리하고, 아이를 교육시키고,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결정하고 관리할 능력이 충분히 있 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집에 돌아와 또다시 자기가 무능한 인간으로 보이게 되는 것 을 괴롭게 여긴다. 결혼은 남자를 점점 변덕스러운 제국주의로 향하게 한다. 지배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것은 매우 유혹적인 것이다. 자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내를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이 지상에 전제정치를 가능하게 했다. 남편에게는 인정받고 찬양받고 조언하고 지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명령한다. 군주 행세를 한다. 소년시절부터 일생을 통하여 다른 남자들에게 부대끼면서 날마다 상처를 입고 쌓인 한을, 자기 집에서 아내에게 한때 나마 권위를 휘드르는 것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는 폭력이나 권력이나 완고한 언동을 사용한다. 무섭게 명령하거나 외치면서 테이블을 두드린다. 이런 희극이 여자에게는 하루 하루의 현실의 하나이다. 남편은 자기의 권리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조금이라 도 자주성을 유지하려고하면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가 없이는 숨도 쉬게 하지 못하려는 기세이다. 그러나 그녀는 반항한다. 남편의 위력을 인정하더라도 그 현혹은 곧 사라진다. 자녀들 은 언젠가는 아버지도 단지 우연적인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내는 이윽고 자기 앞에 보이는 남편은 영주나 수령이나 군주의 숭고한 얼굴이 아니가, 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남자에게 이와 같이 예속될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는 다만 일방적이고 부당한 의무를 상징하는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때로는 마조히즘적인 기쁨으로 복종하는 경우도 있다. 아내를 쉽사리 복종시키고 그녀를 마음대로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참으로 순진하다. "아내는 남편이 만드는 것 이다." 라고 발자크는 말했다. 그러나 몇 페이지 앞에서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추상이나 논리의 영역에서는, 여자는 단념하고 남자의 권위에 따르기 쉽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맺혀 있는 사고나 관습과 관련될 경우에는 그녀는 상당히 음험하고 집요한 방법으 로 저항한다. 소녀시절이나 청춘기의 영향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깊다. 왜냐함ㄴ 여자가 그 개인적 인 역사 속에 많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몸에 배인 것을 대체로 여자는 한평생 버리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정치적인 견해를 강요할 수는 있어도, 그녀의 종교적인 신념은 바꾸게 할 수는 없고, 그 미신을 흔들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믿음이 굳어버린 처녀를 아내로 삼고, 그녀에게 깊은 감화를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장 바루아가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그는 낙심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방도시의 그늘에서 찌들어버린 처녀의 두뇌와 무지한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모든 확신, 이 것만은 손댈 여지가 없다." 여자는 가르침을 받은 편견이나, 앵무새처럼 모방하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자기의 비전을 갖고 있다. 이런 저항이 자기보다 현명한 남편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경 우도 있다 혹은 반대로 이 저항이 스탕달이나 입센의 여주인공들처럼, 여성을 남성의 진 실성 이상으로 높이 끄러올리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여성이 남성에 대한 반감에서 - 성 적으로 실망했든, 남성의 강한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든 - 자기 것이 아닌 견해를 일부러 고집한다. 남편을 꺾기 위해 그녀는 부모형제나 혹은 그밖에 자깁다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남성, 고해사 신부나 수녀의 권위에 의지하려고 한다. 또는 분명한 항변을 하지 않고, 무 작정 뭐든지 반대하여 남편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 려고 한다. 물론 실력이 있으면 남편을 현혹시켜 자기 의견이나 방침을 강요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정신적인 권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남편의 정신적인 우위를 도 저히 침해할 수 없게 되면, 그녀는 성적인 면에서 보복하려고 한다. 알레비가 말하고 있 는 미슐레 부인처럼 남편의 요구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나 남편을 지배하겨고 했다. 잠자리에서나, 일하는 테이블에서나, 그녀는 테이블을 노렸다. 그녀는 침대를 방어하기에 앞서 테이블을 방어했다. 그리하여 몇 달 동 안 부부 사이는 정결했다. 드디어 그녀는 침대를 점령하고 이어서 테이블을 점령했다. 그 녀는 여류작가로 태어났다. 이 테이블이 그녀의 진정한 직장이었다. 남편의 품안에서 뻣뻣하게 굴며, 자기의 불감증을 내세우거나 혹은 변덕스럽고 요염한 태도로 남편으로 하여금 쩔쩔매며 그녀에게 애원하는 태도를 취하게끔 한다거나, 혹은 교 태를 부리는 등으로 질투를 유발시키고, 그를 소이거나 하면서 남편의 남성다움에 상처를 입혀 굴욕감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 신중히 할 필요를 느끼고 너무 철저히 공세를 위하기 를 자제하는 경우에도, 그녀의 마음속은 남편을 멸시하는 냉혹성의 비밀이 품위있게 포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비밀을 때로는 일기에 기록하거나, 혹은 가볍게 여자친구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결혼한 여자의 대다수는 자기가 쾌감을 못 느낀다고 가장하기 위해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를 재미있게 서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자기들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부신이 강한 남편의 어수룩함을 고소하게 비웃고 있다. 이런 고백도 아마 하나의 비극일 것이다. 불감 증과 불감의 경계는 화실치 않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불감증을 내세워, 이것으로 자기들 의 원한을 갚는다. 그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승리자이기를 원하는 버마재비에 비유할 만한 여자가 있다. 포옹에서는 무감각하고, 대화에서는 경멸적이고, 행위에서는 폭군적이 다. 프리다가 로렌스에게 취한 태도는, 매벨 도지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것이었다. 그녀 는 남편의 지적 우월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성적인 가치만이 중요성을 지닌다는 자기 자 신의 인생관을 남편에게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그녀는 어느날 메벨 도지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나한테서 받아야 해요. 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 사람은 나한테서 자기 책을 받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보란듯이 말을 이었 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몇 페이지나 썼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는 로랜스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거듭 자기 자신에게 입증해 보이고 싶어한다. 그가 자기만을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자진하여 그렇게 하지 않 으면 그녀 쪽에서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프리다는 자기와 로렌스와의 관계가 보통 결혼한 남녀 사이에서 이루어 지는 평범함 속 에서 전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습관적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녀는 곧 폭탄을 던졌다. 그리하여 그가 자기를 잠시도 잊지 않게 했다. 이처 럼 끊임없이 그의 주의를 끄려는 욕구는, 내가 이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적에게 사용하는 무기처럼 되어 있었다. 프리다는 그의 가장 예민한 곳을 곧잘 자극한다. 낮에 그가 근에 게 냉담하면, 밤에 그녀가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결혼생활은 어느 쪽에서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영원한 싸움터가 되 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소한 싸움에서도 남자 대 여자의 격투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것이 었다. 이와는 전혀 다르지만, 주앙도가 묘사한 엘리즈에게서도 남편을 되도록 비하하려는 무 서운 지배욕을 찾아볼 수 있다. 엘리즈 : 나는 우선 주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크게 경멸한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편 하다. 나의 상대는 건달이나 이상한 괴물 같은 것들 뿐이니까. 그녀는 잠을 깨면 나를 부른다. "이 건달아!" 이것은 술책이다. 그녀는 나를 모욕하고 싶어한다. 내가 자기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하나하나 깨어버리는 것을 그녀는 아주 유쾌하게 여기고 있다. 어처구니없이하는 나의 친구들이나 하인들 앞에서 내가 이런 '형편없는 놈, 어리석은 놈'이라고 지적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도 그녀의 말 을 믿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경멸하기 위해 나의 작품은 거기서 얻는 물질적인 수입만큼 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천천히, 그리고 교묘히 나를 낙심시키고, 그럴 듯하게 나를 모욕하 고, 정확하고 냉정하고 집요한 논리로 나의 자존신을 조금씩 잃게 했고, 나의 사상의 원 천을 고갈시켰다. "당신은 막노동꾼만큼도 가치가 없어요." 하고 어느날 그녀는 청소부 앞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우수하고, 적어도 동등하게 보이기 위해 나를 깎아 내리고 싶어했 다. 나를 경멸함으로써 자기의 위치를 높이고 싶은 것이다. 나를 자기의 발판, 자기에게 유용한 물품으로빡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남편의 기록>에서) 프리다와 엘리즈도 남성을 향하여 자신들이야말로 본질적인 주체임을 자처하기 위해, 남성들에 의해 가끔 개발된 그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남성들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 다. 남성 쪽에서는, 여성들이란 그들의 거세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실제로 셩서의 태도는 더욱 애매하다. 남성의 성을 말살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욕하고 싶어 한다. 여성은 남성의 기획이나 미래에 손상을 주고 싶어한다는 것이 더욱 정화한 말이다. 남편이나 자식이 병들고 피로하여 육체적인 것이 되어버릴 때, 여자는 승리감을 느낀 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녀가 군림하는 가정에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그것을 주부의 권한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깨어진 접시 를 다시 붙이는 것처럼 손질하고, 냄비를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야채의 껍질 을 벗기거나 접시를 씻는 데 익숙한 그녀의 천사와 같은 손을 뿌리치는 것은 하나도 없 다. 로렌스는 프리다의 이야기를 하면서 메벨 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병이 났을 때 자 기 몸에 닿는 이 여자의 손이 어떤 느낌을 주는 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무 겁고 독일적인 손이에요." 여자는 남자에게 그도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 해, 의식적으로 이 손에 무게르 ㄹ주어 남자를 밀어낸다. 주앙도가 말하고 있는 엘리즈처 럼 이런 태도를 철저히 취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결혼했을 당시의 중국 천진에서의 이가 생각난다. 그 덕분에 나는 비로 소 아내와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날 엘리즈는 나를 양털 깎듯이 발가벗겨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춧불로 내 몸을 구석구석 비췄다. 겨드랑이. 가슴. 배꼽... 그녀의 손가락은 북처럼 늘어진 고환의 피부까지도 찬찬히 살폈다 넓적다리의 따라 발 사이, 항 문 언저리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숨어 있던 이를 태우고, 노란 체모뭉치들으 휴지통에다 러리고 난 뒤, 나는 그 벌레와 벌레의 소술에서 동시에 해방되어 새로운 나체와 고독한 광야가 되어버렸다. 여성은, 남성이 하나의 주관이 표현되는 개체이기보다는 수동적인 육체이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는 실존에 반항하여 생명을 만들려고 하며, 정신적인 가치에 반항하여 육체적 인 가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녀는 남자가 뭔가를 기획하는 것을 보고 파시칼(프랑스의 사상가. 수학자, 1623~1662) 같은 유머러스한 생각을 한다. 즉 '남자의 불행은 집 안에 조용ㅎ 처박혀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를 집 안에 가둬두고 싶어한다. 가정생활에 이익을 주지 못하는 모든 활동은 그녀에게 반감을 갖게 한다. 페르나르 팔리시(16세기 프랑스의 도예가)의 아내는 남편이 지금까지 세상에 없어 도 무방한 새로운 에나멜을 발명하기 위해 가구를 태워버린다고 분개한다. 라신(프랑스의 극작가, 1639~16699) 부인은 남편에게 정원의 까치밥나무 열매에만 관신을 갖도록 하고, 그가 쓴 비극은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주앙도는 <전쟁의 기록>에서, 엘리즈가 그의 문 할 작품을 단지 물질적 수입의 미천으로만 생각하는 데 대때로 격분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내가 본 이번 단편소설이 오늘 아침에 나올 거야." 그녀는 빈 정대려는 것이 아니다. 거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이 달에는 300프랑은 수입이 늘겠군요." 이런 충돌이 심하여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 아내는 남편의 지배를 거부하면서도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는 자기의 자주성을 지 키기 위해 싸우지만,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가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끝까 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이중역할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많은 여 성들이 신경질적인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다. 슈테켈은 그런 심한 사례를 들고 있다. Z.T. 부인은 일찍이 성적 쾌감을 느껴보지 못한 여성이지만 교양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너누 훌륭한 것을 참지 못해 남편의 전공 분야를 자기도 공부하여 남편과 동등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년느 약혼시절부터 공 부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유명했고,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녀는 자기는 이런 어리 석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결혼 초기부터 그녀는 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남편 이 만족하여 자기 몸에서 떠난 후, 그녀는 수음에 의하자 않고서는 괘감을 느끼지 못했 다. 그래서 그녀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막상 그녀를 흥분 시키려 하면 이를 거절했다. 이윽고 그녀는 남편의 일을 우습게 여기고 과소평가하기 시 작했다. "남편에게 모여드는 바보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나는 훌륭한 사란의 사생활의 이면을 잘 알고 있다.'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날마다 부부싸움이 계속되어 옥신각신했다. "난 당신의 그 하찮은 글에 ㄴㄹ라지 않아요." 혹은 "당신이 글줄이나 쓴다고해서 내가 당신의 말대로 고분고분 따를 줄 알았어요?" 남편은 점점 자기 제자들에게로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녀도젊은 남자들을 불러들였 다. 이렇게 몇 해를 보내는 도안에, 남편은 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편의 사소한 바람기는 언제나 간과해 버렸다. 그녀는 버림받은 '어린석은 여자'의 친구 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태도가 일변하여 그녀는 쾌감을 느끼ㅈ 못하면서도 주위의 청년들에게 닥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것을 고백했다. 남편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녀는 이때 조용히 이혼할 수도 있었으나, 이혼을 거부했다. 부부느 ㄴ오랜 상담 끝에 화해했다. 그녀는 울면서 몸을 맡기도, 비고소 쾌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이처럼 싸우면서도 헤어질 생각은 한 번도 한 작이 없었다. '남편을 붙 잡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지만, '남편을 놓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직없이다. 이 직업에 는 수련이 필요하다. 신경질적인 신부에게 신중한 시누이가 말했다. "조심해요. 마르셀과 싸움만 하다가는 '실직'을 하게 돼요." 남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질적.정신적인 안정, 자기집, 아내로서의 품 위, 다소나마 연애의 대용으로서의 행복 등등. 여자는 자기의 에로틱한 매력이 자기의 무 기로는 가장 약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런 매력은 습관에 의해 소멸된다. 그리고 유 감스럽게도 매력있는 여자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근는 자기를 불감증에 빠뜨리 기 위운 그 자존심과 자기의 관능적인 열정으로 남편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분열되어 고민한다. 그녀는 또한 습과느이 힘이나 쾌적한 주거의 매력에 기대를 건다. 남 편의 요리에 대한 기호나 자녀에 대한 애정에 의지한다. 그리고 손님접대나 옷매무새로 남편에게 환심을 사려고 한다. 여러 가지 조언이나 감화로 남편에 대해 권위를 가지려고 한다. ㅓㅈㄴ력으 ㄹ다하여 사교계에서의 남편의 성공이나 일에 자기가 반드시 필요한 존 재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전통은 아내에게 '남자를 손아귀에 넣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남편의 약점을 발견하여, 이것을 적당히 쓰담듬어줘야 한다. 아첨과 경멸, 순종과 저항, 감시와 관용을 잘 조절해야 한다. 이 조절은 대단히 어렵다. 남편을 너무 풀어놓아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구속해도안 된다. 아내가 너무 착하염 남편은 도망가버린다. 그가 딴 여자 들을 상대로 소비하는 돈이나 사랑의 정열은 아내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이혼을 당하거나, 아니면 남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위험이 있다. 그란 남편에게 발감기를 일체 금하고, 감시와 강짜와 요구로 그를 지겹게 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때로는 일부러 양보할 필요가 있다. 남편에게 '약속위반'이 있어도 눈을 감아야 한다. 그란 때로는 눈을 번쩍 뜰 필요가 있 다. 특히 결혼한 여자는 자기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 묘령의 처녀를 경계한다. 이런 걱정스러운 연적에게서 남편을 떼어놓기 위해서는, 여행에 데리고 가거나 기분전환을 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풍파두르 부인을 본받아, 가장 위 험성이 적은 다른 경쟁자를 사이에 넣기도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눈물과 신경의 발 작, 자살의 시도 등에 호소한다. 그란 넘 떠들썩하게 공략하면 남편을 집에서 내몰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리하여 남편을 가장 매혹시켜야 하는 때에 오히려 가장 성가신 아내로 전락하기도 한다. 만일 남편과의 승부에서 이기려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눈물과 여장부다운 미소, 고집과 애교를 교묘히 조하시켜야 한다. 본심을 밖으로 드러내보이지 않은 채 계략을 써서 잠자 코 미워하고 또한 두려워하며, 남자의 허영심과 약점을 잘 다루고, 남자의 속셈을 간파하 여 잘 조정하는 것은, 분명히 서글프기끼지 한 기술이다. 여자의 가장 큰 구실은, 결혼에 자기의 전부를 걸도록 강요받고 있다는데 있다. 직없도 갖지 않고, 능력도 없고, 교제범위도 좁고, 이름까지도 자기 것이 아니다.(결혼하면 남편 의 성을 따른다.) 여성은 요컨대 남편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남편에게 버림을 받 게 되면, 여성은 대부분의 경우 안파까으로 득이 될 게 없다. A, 드 몽지나 몽테를랑처럼 소피아 톨스토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란 그녀가 스스로 들어선 그 '위 선적인 부부생활'을 거부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확실히 그녀는 상당히 고약한 여장ㅆ던 것 같다. 그라나 그녀에게 그 폭군을 사 랑하고, 자기의 노예적인 신분을 축복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부부 사이에 성실과 우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두 삶이 서로 자유롭고 구체적으로 평 등해야 한다. 남자만 경제적인 자주성을 갖고, 법률과 풍습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한, 그가 폭군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이 아내를 반항과 책 략으로 내몰게 된다. 부부생활의 비극가 치사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란 결혼 옹호론자들은 부부 사이 의 갈등은 개인적인 불성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결혼제도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에필로그에서 이상적인 한 쌍의 남녀 를 묘사하고 있다. 피에르와 나타샤의 생활이 그것이다. 나타샤는 멋쟁이고 공상적인 처 녀였다. 그런데 이단 결혼하자 화장도 사교도 그리고 일체의 오락에도 무관심하고, 남편 과 자녀에게 헌신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녀는 현모 양처의 모델처럼 행 동한다. 그녀는 전에는 자신의 매력이었던, 타오르는 듯한 생명의 불꽃을 이제는 갖고 있지 않 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얼굴과 육체만 보일 뿐,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강인하고 아름답고, 생식력있는 왕성한 여자만 보일 뿐이다. 그녀는 피에르에게서 자기가 그에게 바치고 있는 것과 같은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녀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도 일체 외출이나 친구와의 교제를 끊고, 가족에게 몸을 바치려고 한다. 그는 클럽의 만찬에 참석할 수도 없고 긴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사무를 보기 위 해 밖에 나가는 것은 예외였다. 그리고 이 일 중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대단히 중요한 과학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에르는 '아내의 엉덩이에 깔려' 있었으나, 그 대가로... 나타샤는 가정에서 완전히 남편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집 안은 이른바 남편의 명령, 즉 나타샤가 미리 짐작했던 피에르의 욕망에 의해 좌우되었다. 피에르가 멀리 떠나가게 되면, 나타샤는 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다.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은 괴롭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는 워만한 상호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아이들과 집과 사랑받고 존경받는 남편 사 이에서 그녀는 거의 티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이 목가적인 그림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나타샤와 피에르는 영혼과 육체처럼 결합되어 잇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그라나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면 그야말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 피에르가 나타샤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로렌스도 남성 의 변심이라는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 라몽은 언제나 자기에게 마음을 비치는 소녀 테레사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의 열렬한 지지자의 한 사람인 앙드레 브르통까지도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 사랑이 대상을 착각하는 경 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니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착각이든 변심이든 여자는 어느 쪽이나 버림을 받게 된다. 억세고 감각적인 피에르는 육체적으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이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타샤는 질투심이 많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는 험악해진다. 남편이 아내와 헤어진다. 그것은 그녀의 생활을 망치게 한다. 남편은 거짓말을 하고 그녀는 싫어하면서도 참고 견 딘다. 이것은 남편의 새활을 파괴한다. 혹은 그들은 타협과 일시적인 방편으로 결혼생활 을 계속한다. 이것은 양쪽을 다 불행하게 한다. 나타샤에게는 아이가 잇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라나 아이는 남편 이 그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안정된 형태의 내부에서만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버림 받아 질투하고 있는 아내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 톨스토이는 나타샤가 피에르의 사상에 맹목적으로따르는 것을 찬탄하고있다. 그란 다른 사람, 역시 여자의 맹목적인 헌 신을 요구하는 로렘스는 피에르나 나타샤를 조롱하고 있다. 한 사람의 남성은, 다른 남성 들이 볼 때엔 흙으로 만든 우상이며 결코 진정한 신이 아니다. 그를 신처럼 숭배하는 것 은 그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잃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남성의 주장에는 대개 서로간의 이론이 있다. 권위가 분명치 않다. 여성은 그것을 판단하 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은 대체로 극히 유순하게 반응할 뿐이다. 여성이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성을 할 수 없는 것을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은 곧 그녀를 무시하 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의 사상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은 자주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 하다. 자기와 관계가 없는 것은 찬성이나 거부를 할 수 없다. 아무리 여성이라도 자기 자 신의 존재이유를 타인에게서 차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피에르 나타샤의 신화에 가장 근본적인 비난은, 그런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 레오와 소 피아(톨스토이 부부)의 결혼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소피아는 남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 으며, 톨스토이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녀를 속였고, 근처의 시골 여자들을 자주 집적거렸다. 그래서 그녀는 질투를 해야했고, 또 우울해지기고 했다. 그녀 는 임신기간중에 때때로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키기도했다. 자녀들은 그녀의 텅빈 마음 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녀에게 가정이란 메미른 사막이었고, 또 그는 생지옥이라 느꼈다. 결국, 그는 숲속의 밤이슬이 내리는 한밤중에, 반나체가 되어 누워 있는 히스테리 노파와 의 평생의 '결합'을 부정하며 집을 뚜쳐나가는 처량한 노인이 되고만다. 확실히 톨스토이의 경우는 예외이다. 세상에는 원만한 가정이 많이 있다. 즉 부부가 하 나의 타협점에 도달하여, 서로를 과롭힌다거나 속이는 일도 없이 함께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악연으로 더불어 사는 사말들도 있다. 그것은 권태이다.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메아리ㄹ 만들어버리고 작자 자기 세계에 처박히 기 시작한다. 그러곤 얼마 지나, 몇 달 혹은 몇해 후에는 두 사람 사이에 할 말이라곤 없 어지는 것이다. 부부란 결국 그 구성원들이 고독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면서 자주성만을 상실하는 공동체 이다. 서로 다아내믹한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않고 정적으로 양자가 동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정신적인 영역에서나 또는 에로틱한 면에서도, 그들은 이제 무엇 하나 주 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다. 도로시 파커는 그의 가장 뛰어난 중편소설의 하나인 <너무 나쁘다>에서, 많은 결혼생활의 슬픈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저녁때였다. 웰튼이 집에 돌아온다. 웰튼 부인이 벨 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 "벌써 와요!"하고 그녀는 명랑하게 말한다. 두 사람은 활기에 넘친 미소를 교한한다. "여보, 당신 줄곧 집에만 있었어?" 그들은 가볍게 포옹한다. 남편의 외투와 모자를 벗어서 걸고, 호주머니에서 신문을 꺼 내 그 한 장을 그녀에게 넘겨준다. "신문 샀어요?" 그녀는 신문을 받으면서 말한다. "그래, 삳신 오늘은 집에서 뭐하고 지냈어?" 하고 묻는다. 그녀는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오늘 한 일에 대해 이것저 것 이야기하려고 생각을 해두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이야기르 길게 늘어놓는다는 것은 별로 흥미롭지도 않을 것 같다. "별로 한 게 없는걸요."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오늘 오후는 어땠 어요?" "좋았어!" 하고 그는 말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러나 말하기 전에 흥미가 사라졌다. 그리 아내 역시 방석의 꽃숭에서 실을 한 오라기 뽑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응, 별일 없었어." 하고 그는 말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곧잘 하는 편이다... 어니스트도 사람들 사이에서 꽤 수다스러운 편이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 약혼시절에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 다. 그때도 별로 이렇다 할 만한 화제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키스를 했고, 마음속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잇따라 떠올랐다. 그란 7년 후의 저 녁에는 키스라거나 그밖의 것들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7년 동안에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그저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그런 게 시들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란 그렇지 않다. 나중에는 신경이 날커 로워진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가끔씩 생기는, 포근하고친밀한 참묵이 아니다. 당신은 뭐가 할일이 있는데,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마치 손님을 청하 여 개최한 파티가 순조롭게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여주인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어니스트는 신문을 열심히 읽어나가려고 하지만, 중간쯤부터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보며 웰튼 부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녀는 델리아에게 할일을 일러 줘야겠다고 주얼거리면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냄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빨랫감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것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더니 그는 벌써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 고 있다. 1년 동안 그들은 300일의 저녁을 이렇게 보낸다. 그러니까 300의 7배 2000일이 넘는다. 이런 부부 사이의 침묵을 쓸데없이 수다보다도 도 깊은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 람도 있다. 확실히 부부생활이 어떤 친밀감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모 든 가족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역시 미움과 질투와 한을 속에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앙도는 이런 친밀감과 진정한 인간적인 우애의 차이를 리렇게 지적하고 있다. 엘리즈는 나의 아내이다. 아니 나의 친구 중의 누구도, 나의 가족 중의 다른 누구도, 내 몸의 어느 부위도 그녀보다 더 친말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우주에서 그녀 가 나를 위해 마련한 위치와, 내가 그녀를 위해 마련한 위치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리고 그것이 내 육체나 영혼의 조직 속에 아무리 깊이 뿌리를 내려도(우리들의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결합의 신비와 드라마는 거기에 있다) 지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이 창문에서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없는 미지의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그녀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독에 희생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길들어버리는 것을 개닫게 된다. 자 기를 버리자 않고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말한다.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부부애라는 걱은 공감이나 감각성, 정열, 우정, 아니 사랑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부부애 자체가 독자적인 것으로 그런 여러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도 적용할 수 없다. 부부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 특수한 본질이나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부부애의 옹호론자들은 그것은 사랑은 아니지만 거기에 대단히 훌륭한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는 근년에 하나의 서사시적인 형식을 생각해 내 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매너리즘이 모험에 대치되고, 정숙은 숭고한 광기이며, 권태는 현 명으로 바뀐다. 가족적인 증오는 사랑의 가장 깊은 형태이다. 사실은 두 사람이 서로 싫 어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결코 진실하고 감동적인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가장 가엾은 관계이다. 각자가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두 사람이 그들의 사랑의 자유로운 승낙에 의해 결합되어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잇다. 톨스토이는 나타샤와 피에르의 결합을 '정의내기리는 어렵지만, 정신과 육체의 그것과 같은 확고한 결합'이라고 칭찬하고 잇다. 정신과 육체를 나눠서 생각하는 이원존적인 가 정에 따르면, 육체는 정신에게 오직 사실성 뿐이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의하면 부부 의 결합에서는 한족이 상대방에게 우연적으로 부여된 필연적 무게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선택된 것이 아닌, 부조리의 존재, 살기 위한 필연적 무게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선택된 것이 아닌, 부조리의 존재, 살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 물질 그 자체로서 맞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두 말 사이에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다. 거기서 속임수가 생기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맡은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 를,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현재라는 상황을 책임지며 맡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에 대한, 자기와 분리된 생생에 대한, 어떤 한 목적에 대한 혹은 어떤 한 미래에 대한 움직 임이다. 무거운 짐이나 압제를 맡는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건적인 관계는 그것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겨질 경우에는 별 가치가 없다. 예컨대 부 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것이 의식에 떠오를 때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다. 부부의 관계에서 도 역시, 어느 한 배우자가 거기서 자유를 상실해 버리는 것을 찬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부애라고 불리는 집착.원망.증오.구속.체념,나태함.위선 등의 복합적인 것들을 세상 에서 자못 존중하는 체하는 것은, 질실의 대용으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다. 우정이나 츄ㄱ 체적인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정직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스러워야 한 다. 자유는 변덕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은 순간을 초월하는 시초이다. 그의 결의 를 유지하거나 혹은 파손하는 것처럼, 그의 일반적인 의지와 개개의 행동을 대립시키는 것은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외부의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 없이 성실 하게 살았을 경우에는 감정은 자유롭다. 이와 반대로 부부애의 구속은 모든 정신적 억압이나 거짓말로 이어지기쉽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부부애'라는 구속은 서로의 진실되게 아는 것을 가로막는다. 일상적인 친밀성 에서는 이해도 공감도 생기지 않는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비밀에 흥미를 갖기에는 그녀를 너무 존중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내에게 어떤 위험이나 괴로운 비밀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정말로 쾌감을 느끼고 있을 까? 참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남편을 따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가? 남편은 그런 질문을 차마 스스로에게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물음은 실례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숙 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정숙하고, 헌신적이고, 충실하고, 순수하고, 행 복하다. 그녀가 곁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병상에 누운 남자의 친구 나 친척, 그리고 간호사에게는 감사한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6개월 동안 줄곧 병상을 지켜 온 아내에겐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당 신의 의무를 다한 거니까." 그녀의 어떤 재질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모두 사회가 보장한 것이고, 결혼이라 는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아내가 보날드(카톨릭 보수 사상가로, 가 정윤리에도 업격하다)의 책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며, 살고 뼈를 지닌 한 개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가 계율로 지키고 있는 것을 정조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도 싸 워야 할 유혹이 있으며, 아마도 거기에 굴복하는 겨웅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내와 정 절과 근신은 쉽사리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은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 근본적으로, 아내의 꿈.환상.노스탤지어, 그녀가 날마다 그속에서 보내고 있는 감정적인 풍토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샤르돈은 <이브>에서 몇 해 동안 부부생활의 일기를 쓰고 있는 남편에 대해 쓰고 있다. 그는 섬세한 뉘앙스로 아내에 대해 말한다. 그 러나 그것은 단지 그의 눈에 비친 아내, 자기에 대한 아내의 모습이며, 그녀 자신의 자유 로운 개인에 대해선 조금도 표현하지 못한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집른 나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 었다. 소박하고 성실한 남편이 아내의 배반을 보고 큰 환멸을 느끼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베른슈타인의 작품에 나오는 남편들은 그 아내가 남편 몰래 돈을 빼돌리고, 심술궂 으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혐오스러운 심저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런 타격을 용 감하게 꾹 참지 만, 아무리 작가가 노력해도, 이런 남편들이 너그럽고 강한 성격의 소유 자로 보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감수성과 선의가 결여된 거칠고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남편은 아내의 기만을 비난하지만, 남편이 그처럼 언제나 속아넘 어가느 것은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아내에게 더덕 자 체가 비인간적인 본질을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실한 여성, 경탄할 만한 어머니, 정숙한 아내 등등이 그것이다. 여성이 생각하고, 꿈꾸고, 잠자고, 욕망을 갖고 속박없이 호흡하면, 즉시 남성의 이상에 배치된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없을 때 비로소 자유럽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자기 남편을 잘 모른다. 날마다 우연성 속에서 남편을 파악하고, 그 것으로 남편의 진정한 모습을 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은 우선 사회에서 다른 남 성들과 어울려 일하게 마련이다. 그의 초월적인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본성을 왜 곡하게 된다. "시인의 아내가 되어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수세식 변소의 끈을 당기는 것을 자주 잊어 버리는 것이다." 하고 엘리즈는 말하고 있다.(주앙도의 <전쟁의 기록>에서) 그래도 그는 시인임에 변함이 없으므로 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아내는 멀리 있는 독자보다도 그를 모르고 있다. 이런 공감을 여성이 하지 못하는 것은 여성의 잘못이 아닌 겨웅가 많 다. 그녀는 남편의일에 참견할 수 없다. 경험도 없고 필요한 교양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날마다 단조로운 가사의 되풀이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계 획을 함게 세워가며 그와 호흡을 같이하려고 해도 되지 않느다. 약간의 특별한 경우에는 아내도 남편에게 참된 동바자가 되기도 한다. 남편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하고 그 일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그녀가 자기의 개성 적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남성만이 행동적이고, 책일을 지는 유일한 자유인이 된다. 그에게 유용한 일에 기쁨을 느끼려면, 그녀가 그를 사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노력의 결과를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여 원망하게 될 테니 말이 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당신은 여왕이라고 추어세우면서 노예처럼 다룬다는 발자크의 법칙 을 잘 지켜, 여성의 영향력이 갖는 중요성을 교묘히 과장한다. 그들은 자싱들이 실제로는 저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르제트 르 블랑은 메테르링크에게 그들이 같 이 썼다는(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책을 두 사람의 공저로 할 것을 요구했을 때 이 속임수에 넘어갔다. 여류 성악가의 <추억>에 쓴 머리말에서 그라세는 가차없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남성은 누구나 자기 생애의 반려가 된 여성을 협력자, 즉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여겨 감사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일은 역시 자기 것이다.'라고 말이다. 모든 행동이나 일에서 가치를 갖는 것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들여다보는 유리구슬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여자도 그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 증거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조언자나 협력자로 삼아도 지장이 없는 경우 가 많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부인은, 남편의 원고를 정서했다. 톨스토이는 후에 그 일 을 딸에게 맡겼다. 그래서 부인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편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 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자주적인 일을 가져야 한다. 부부 생활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아내들의 하루는 거의 동일하게 전개된다. 아침에 남편은 급하게 아내와 헤어진다. 아내는 남편 뒤에서 문 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겨우 자유를 얻어 이제 집 안의 여왕이 된 것이다. 다음은 아이들이 등교할 차례이다. 그녀는 종일 집에 남아 있다. 요람 속에서 움 지이거나 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는 자기 친구가 못 된다. 그녀는 한동안 화장과 자질구레 한 가사를 정리하는 데 보낸다. 가정부가 있으면 지시를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부 엌에서 서성거린다. 아니면 시장에 가서 이웃여자들이나 상인을 상대로 물가 등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점신시간에 돌아와도 그들과 천천히 즐길 시간의 여유가 없다.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산을 차려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릭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그녀는 길고 공허한 오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어린아이를 공원에 데리고 가,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뜨개질이 나 바느질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집 창가에 만지고 고칠일이 남아 있다.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을 뿐,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가정에 대해 막연 히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계획을 세우고 몽상을 한다. 그녀는 권태롭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으 ㄴ하나도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주지 못한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손질한 셔츠를 입게 되거나, 이제부터 마련할 음식 을 먹데 욀 남편과 이이들에 대해서이다. 자기는 다만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 그들은 조 금이라도 고마워할 까? 그녀의 권태는 조금씩 조바심으로 변하고, 그들이 집ㅇ체 돌아오 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입 을 마추고 이것 저것 물어본다. 그들에게는 해야할 숙제가 있고, 어머니는 아니들과 어울 려 놀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결국 어머니에게서 도망쳐간다. 아이들도 기분전환의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 게다가 나쁜 성적을 받아오거나 머플러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 다. 그들은 떠들어대고 뒹굴고 싸우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야단을 쳐야 한다. 아이들은 집에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주기는 커녕 피로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째서?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 일을 하고 있겠지. 손님을 만나고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야. 그러나 그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자시 청춘을 바친 어리 석음을 억울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남편은 아내를 하루종일 가둬둔 자기 집을 향해,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발길을 돌린다. 결혼 초기에는 꽃다발이나 작은 선 물 같은 것도 사가지고 들어오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습관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지금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아내의 영접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발길을 재촉하지 않 는다. 사실 아내는 권태나 낮 동아늬 기다림을 싸움으로 복수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직 장에서 결코 재미있게 보낸 것은 아니다. 그는 피로하다. 자극과 휴식을 동시에 원하는 모순된 심정이다. 아내의 낯익은 얼굴은 그에게 지가를 잊게 하지 ㅇ낳는다. 아내가 집 안에서의 수고를 자기와 나눠 갖기를 원하고, 그녀 쪽에서도 기분전환과 휴식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남편은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자기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 그녀는 자기에게 진정한 휴식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도 위로나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식사할 때와 초저녁 시간은 우울하게 보낸다. 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활기가 없는 잡담을 하고, 친밀감은 감돌고 있지만 각자는 고독하다. 아내는 불안한 마음 으로 주엉ㄹ거린다. - 어쩌면 오늘 밤 ...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환멸 을 느기고, 초조하게 혹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든다. 이튿날 아침, 문을 여는 소리를 들 을 때야 비로소 그녀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여성들의 운명은 가난하고 일이 많을 때에는 더욱 가혹하며, 한가롭거나 심심할 때에는 다소 밝아진다. 그러나 권태.기대.낙심, 이 공식은 대체로 같다. 몇 가지 도피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결혼의 사슬이 상당히 무겁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라면,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지 감당해 나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권위를 내세워 위압적 인 마나님이나 고약한 여자가 되는 겅우도 있다. 또 어떤 여자들은 불행한 희생자의 역할 을 감수하여, 남편이나 자녀의 슬픈 노예가 되어, 마조히즘적(자학적)인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또 어떤 여자들은 혼기에 접어든 처녀에 대해 지적한 바와 같은 나르시 시즘적(자애적)인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녀들도 어떤 계획에서도 자기를 실현할 수 없 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녀들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무제한의 존재로 느끼고, 자기를 인정받지 못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리 그녀들은 자기에 대한 우울한 자기애를 느끼며, 꿈.희 극.병.괴벽.히스테릭한 싸움 속으로 도피한다. 그녀들은 자기 주변에다 비극적인 것들을 조성하거나 혹은 가공적인 세게에 갇혀 있다. 아니엘이 묘사한 '상냥한 뵈데 부인'은 이런 여자이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갇힌 그 녀는 거치고 무지한 남편 곁에서 아무것도 할 기되가 없었다. 사랑할 기회조차 없는 그녀 는 자기 인생의 허무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보상을 소설적인 공상이나 자가 주위에 서 피어난 화초, 혹은 화장이나 자기가 연출하고 있는 인물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남편 은 그러나 그녀의 이런 위로까지도 방해한다. 급기야 그녀는 드디어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녀가 자기를 도피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는 패륜을 이끌 수도 있다. 집념이 범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해관계보다 단지 증오에서 비롯되는 부부간의 범죄도 있다. 그래 서 모리아크는 일찍이 라파르즈 부인이 한 것처럼 남편을 독살한 테레즈 데케이루를 우리 에게 보여준다.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남편을 20년 동안이나 참아왔으나, 어느날 장남 의 도움으로 이 남편을 냉혹하게 교살한 40세의 여자를 석방한 사례가 최근에도 있었다.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명석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진실한 태도로 자기의 처지를 극복하려는 여자에게는 극기 에서 비롯되는 자존심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극히 내면적인, 따라서 추상적인 자유밖에 알 수 없다. 그녀는 모든 기성원치과 가치를 거부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여 경혼생활의 예속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녀의 고결한 신중성, '참으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이다. 체념 속에 굳어버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적극적인 돌파구가 없 다. 그녀는 정열이 넘치고 힘이 솟아나는 한 자기 늘력을 어떻게 해서든지 활용하려고 생 각한다. 그녀는 남을 돕고, 위로하고, 보호하고, 제공하면서 여러 가지 일거리를 늘여나 간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여, 그 활동을 진정한 목표의 달성에 바 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그녀는 때때로 고독감을 느끼고, 헛된 수로 때문에 괴로워하 며 자기를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런 여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는 샤리에르 부인 (<아돌프>의 작가인 뱅자맹 콩스탕의 애인)의 경우이다. 조프레 스코트는 이 여성을 위해 쓴 매혹적인 작품(<젤리드의 초상화>)에서 이 부인을 '불의 이목구비, 얼음처럼 싸늘한 이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르망수가 '북극인의 마음도 뜨겁게 했을 것'이라고 말 한 그 생명의 불꽃을 이 여성에게서 꺼버린 것은 이성이 아니었다. 쥘렌의 정열적인 미 녀를 조금씩 죽여버린 것은 결혼이었다. 그녀는 그 체념 속에서 살려고 했다.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내려면 히로이즘(영웅주의)와 천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여성의 보기 드 문 성격도 자신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결혼제도가 안고 있는 겨함 을 분명히 말해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튈르 양은 재질이 뛰어나고 교양있고 총명한, 정열적인 여자로서 전 유럽을 놀라게 했 다. 그녀는 12명 이상의 구혼은 거절하여 구혼자들은 두렵게 했다. 그란 가장 마음에 드 는 상대는 그쪽에서 사양했다. 그녀는 자기의 관심을 끈 유일한 남자인 에르망슈도 남편 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와 12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이 우정이 나 그녀의 연구과제도 끝내 그녀에게 만족암을 주지 못했다. '처녀와 순교자'는 같은 뜻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이썽ㅆ다. 쥘렌의 생할이 주는 속박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녀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30세 때 그녀는 샤리에르와 결혼했다. 그 녀는 남편에게 발견한 '마음의 성실성'과 공정한 정신'을 존중했다. 처음에 그녀는 이 남 자를 '세상에서 가장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남편'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후에 뱅자맹 콘스탕은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와 같은 활기찬 적극성을 갖게 하려고, 그 를 무척 괴롭혔다.'고 말했다. 그녀는 침착하고 냉정한 남편의 성격을 바꾸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성실하지만 침울한 남편과 노쇠한 시아버지, 애교라곤 없는 두 시누이와 함께 콜롱비에에 갇혀 있는 샤리에르 부인은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뇌사텔의 시골생활은 너 무나 편협하고 평범하여 싫증이 났다. 그녀는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저녁에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그녀의 생활에 한동안 스쳐갔으나 그 후에는 전보다 더욱 고독했다. 그녀는 권태를 뮤즈라고 생각하고 뇌샤텔의 풍속을 소재로 한 소설을 네 권이나 썼다. 교제 범위는 점점 좁아졌다. 한 작품 속에서는 감수성이 예민 하고 생기 발랄한 여자와 선량하지만 냉철하고 둔중한 남자와의 결혼에서 오랫동안 지속 되는 불행을 다루로 있다.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있어 오해나 환멸, 그리 하찮은 워망의 연속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불행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병들었으나 회복한 후에 는 다시 긴 고독속으로 돌아갔다. 그 고독은 그녀와 그녀의 인생의 합작품이었다. "콜롱비에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의 반복과 남편의 소극적이고 참을성있는 온화한 성격이 어떤 활동으로도 메울 수 없는 영원한 공허를 느끼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고 그녀의 전 기작가는 쓰고 있다. 이때 뱅자맹 콩스탕이 나타나 그후 8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정열적 으로 사로잡았다. 그녀는 스탈부인과 이 남자를 두고 다투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해, 그를 단념했다. 그때 그녀의 자존심은 굳어버렸다. 그녀는 어느날 그에게 이렇게 써 보냈 다. "전에는 콜롱비에에서의 생활이 몹시 지겨웠어요. 그래서 밖에서 이곳에 돌아오면 절 망에 사로잡히곤 했죠. 그러나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것에서 참고 견 디면서 살아가려고 해요." 그녀는 이곳에 갇혀 살면서 15년 동안 자기 집 뜰에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운명을 바구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마음을 이기느 스토아 철학자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이다. 포로가 된 그녀는 오직 자기의 감옥 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알프스 산맥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샤 리에르의 존재를 지기 곁에 받아들였다."고 스코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두뇌가 명석한 그녀는 이런 체념은 일종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에게 점점 진심을 털어놓지 않아 점점 더 완고해졌고, 외부에서 보아도 그녀의 마음속의 절망이 느 껴졌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녀는 뇌샤텔에 몰려온 망명궈족들에 게 집을 내어주고, 그들을 보호하고 원조하고 지도했다. 그녀는 인생에 환멸을 느낀 여자 답게 우수한 작품을 쓰고, 가난했던 독일 철학자 휴벨이 이것을 번역했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에게 조언을 하거나 특히 사랑하는 앙리에트에게 로크의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이웃농민들에게는 기꺼이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점점 뇌샤텔의 사교계를 조 심스럽게 피하며 자기 생활의 범위를 조금씩 좁혀갔다. 그녀는 오로지 "습관적인 생활을 되풀이하고 이를 견디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한결같은 친절에도 어쩐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만큼 그녀의 냉정한 태도는 얼음처럼 싸 늘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는 빈 방속을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생각되었다." 때때로 드물게,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생명의 불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샤리에르 부부는 마음이 서로 멀어져 있었으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늙어갔다. 방문객은 그녀의 집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무덤 속에서 도망쳐나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계가 똑딱거리고, 샤리 에르 씨는 아래층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헛간 쪽에서는 탈곡기의 리드미컬한 소리 가 들려왔다... 탈곡기가 인생의 열매를 모조리 떨어뜨렸는데도 생활은 아직도 계속되었 다... 하루의 작은 균열을 절망적으로 메우는 것밖에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작은 소 일거리들로 채워진 생활이 계속된다. 사소한 것이 질색이던 젤리드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 이다." 샤리에르 씨의 생활도 아내의 생활 이상으로 유쾌하지는 못했다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스스로 이런 생활을 택했으며, 그것이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튈르의 미녀'와 같은 보기 드문 개성을 타고난 남자라면 그는 콜롱비에의 메미른 고독 속에 일생을 묻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남자라면 사회에 나가 자기의 기반을 닦고 기획하고, 싸우며, 행동하는 인간으로 살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결혼생활 속에 매몰되어 스탕달의 말대로 "인류에게 소실되었는 가." 세상사람들은 결혼이 남성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인 경우가 많 다. 그러나 결혼은 거의 언제나 여성을 허무하게 만든다. 결혼 옹호론자인 마르셀 프레보 도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나는 미혼의 처녀시절에 대해 알고 있던 젊은 여성과 몇 달 혹은 몇 년 뒤에 만났을 때 변해 버린 그녀의 평범한 성격과 무의미한 생활에 놀란 적이 수없이 많다. 결혼한 후 6개월이 지난 소피아 톨스토이가 쓴 글의 내용도 이와 거의 비슷하다. 나의 생활은 참으로 평범했다. 그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실한 생활, 내면의 생활, 재능, 불후의 명성이 있다.(1863년 12월 23일) 이보다 조금 전에는 다른 탄식을 하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고, 영원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루종일 바늘을 손에 들고 있을 수 있고,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고독 속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겠는가?(1863년 5월 9일) 그녀는 11년 후에 오늘날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 공감할 듯한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오늘, 내일, 달마다, 해마다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지만 침대에 서 얼른 일어날 용기가 없다. 내가 기운을 내도록 누가 도와주지 않겠는가?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먼저 요리사가 온다. 다음은 냐니아의 차례 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앉아 영국 자수를 집어든다. 그 다음엔 아이들에게 문법과 음계 의 연습을 시킨다. 밤에 나는 영국 자수를 두고, 그 사이에 숙모와 피에르는 여전히 트럼 프를 한다... .(1875년 10월 22일) 프르동 부인의 탄식도 이와 똑같은 어조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사상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어떻죠? 당신이 일을 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 나는 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결혼한 후 얼마 동안은 아내가 환상에 의해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남편을 무조건 존경하려고 노력한다. 조금도 거리낌없이 남편을 사랑하고 그와 아이들에게 자기 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느끼려고 한다. 이윽고 남편의 숨김없는 진정한 기분이 드 러난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아이들도 언 젠가는 자기에게서 떠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가정은 그녀의 공허한 자유를 더 이 상 보호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자기를 고독하고 버림을 받은 존재, 즉 하나의 주체 로서 발견하게 된다. 자기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애정이나 습관이 아직 크게 도 움이 되지만, 구제의 수단은 되지 못한다. 성실한 여류작가는 누구나 '30세의 여인'의 마 음에 일어나는 우울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캐서린 맨스필드나 도로시파커나 버지니아 울프의 여주인공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생애의 초기에는 그토록 활발하게 결혼과 모성을 노래했던 세실 소바즈도 나중에는 잔 잔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독신녀와 기혼녀가 자살하는 수를 비교해 보면, 기혼녀는 20 세에서 30세(특히 25세에서 30세까지)사이에는 삶의 혐오로부터 견실하게 보호되어 있으 나,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할브바크스는 이렇게 썼다. " 결혼은 지방에서나 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30세까지는(자살에 대해) 보호하지만 그 이후 에는 점점 효력이 없어진다. 결혼의 비극은 그것이 약속하는 행복을 확실하게 여자에게 제공하지 않는- 행복에 관해서는 보증이 있을 수 없다-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을 불구로 만들고, 그녀를 반복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 여성의 일생의 처음 20년은 참으 로 풍요롭다. 여성은 월경, 성감, 결혼, 모성 등의 경험을 통과하게 한다. 그리고 세계와 자기의 운명을 발견한다. 20세에 가정주부가 되고, 그 후로 한평생 한 남자에게 연결되어 아기를 팔에 안게 된다. 이것으로 그녀의 생활은 이제 끝장이다. 참된 행위, 참된 일은 남성의 특권이다. 여성에게는 그날그날의 살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기운을 쑥 빼놓는 노동이 되기도 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여성에게 체념과 헌신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어떤 두 사람의 생활을 그 생애의 마지막까지 돌보는 데 몸을 바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 우가 많다. 자기를 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그 래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언짢은 것은 이런 그녀의 헌신 자체가 귀찮 은 일처럼 생각된다는 점이다. 남편의 눈에 아내의 헌신이 억압처럼 보여,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최고로 유일한 정당성으로서 그런 태도 를 억지로 아내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로 남편이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모든 것 을 자기에게 제공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이 증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상호적인 의무를 인정하지 않는다. 소피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에 의해 그를 위해 살 고 있다. 같은 것을 나는 그에게 요구한다." 이 말은 톨스토이에게는 거북하게 들릴지 모 른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아내가 자기를 위해 그리고 자기에 의해 살아줄 것을 요구했었 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그렇게 해야만 긍정할 수 있는 태도이다. 아내가 불행하게 되도 록 해놓고는 아내의 불행으로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남편의 이중성이다. 침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이 뜨겁고도 차갑기를 요구 한다. 즉 여성이 전적으로 자기를 제공하되 그 무게로 자기를 누르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 이다. 남편을 지상에 안정시키면서 자유롭게 놓아둘 것, 날마다 단조로운 반복을 거듭하 면서 권태롭지 않게 할 것, 언제나 옆에 있으면서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을 요구하 고 있다. 그는 아내를 전부 소유하고, 자기는 아내의 것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혼자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남성은 결혼했을 때부터 아내를 속인다. 그리고 여성은 남편의 이런 배반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살아 있는 셈이다. D.H.로렌스가 성애에 대해 한 말은 대체로 옳다. " 두 사람의 결합은, 만일 그것이 서 로를 보완하려는 노력이라면 실패로 끝난다. 그것은 원래가 '불구자'끼리의 결합인 것을 예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자주적인 두 생활을 공동으로 영위해야 하며, 은둔이 나, 방황, 도피나 일시적인 구제여서는 안 된다. 아내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격 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노라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는 자기들을 공 동체 즉 닫혀진 밀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으로서의 각자는 사회에 연결되어 있 으며, 그 속에서 혼자의 힘으로 꽃을 피워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개인과 함께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자유의 인식 위 에 이루어진 유대이다. 이와 같은 안정된 한 쌍의 남녀는 결코 유토피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결혼행태 속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육 체적 사랑에 의해 결합되고, 우정과 일에 있어서는 자유롭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정으로 결합되어, 각자의 성적 자유에 속박을 가하지 않는다. 더욱 보기 드문 경우지만, 애인이 며 동시에 친구로서 서로 상대방에게 배타적인 존재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남녀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 우정, 쾌락, 신뢰, 애정, 공동의식, 사랑 등에서, 남녀는 서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희열, 풍요, 힘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결혼의 실패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보날드, 콩트, 톨스토이의 주장과는 달리 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서로 선택되지 않은 남녀가 일생 을 통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상대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부자연 스러움이 위선, 거짓말, 적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결혼의 전통적인 형식은 오늘날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결혼은 아직도 압박감을 주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배우자는 여러 모로 그것을 느낀다. 부부가 갖고 있는 추상적인 권리만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거의 평등하다. 그들은 전보다는 한결 자유롭게 상대방을 택하고, 헤어지는 것도 쉽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부부의 연 령이나 교양의 차이도 옛날처럼 심하지 않다. 남편은 아내가 요구하는 자주성을 인정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부부가 평등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경우도 있다. 오락도 공통적이 다. 캠핑, 자전거, 수영 등등. 아내는 이제 날마다 남편의 귀가를 고대하면서 하루를 보 내지는 않는다. 그녀는 스포츠를 즐긴다. 협회나 클럽에 가입하고, 밖에 나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때로는 얼마간 수입이 있는 가벼운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부 부생활의 경제적인 책임을 계속 맡고 있는 한, 이 자유는 한, 이 자유는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의 요구에 따라 부부의 거주지가 결정된다. 아내는 지방에 서 파리로, 파리에서 지방으로, 식민지로, 외국으로 남편을 따라간다. 생활수준은 남편의 수입에 따라 결정된다. 그 날의, 그 주의 그리고 그 해의 리듬이 남편의 일에 의해 결정 되고, 교제나 우정도 대체로 남편의 직업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된다. 남편은 아내보다 사회적으로 더욱 확실한 지위에 있으므로, 지적, 정치적, 도덕적인 영 역에서 부부생활을 리드해 나가고 있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생활수단을 마련하지 못하 는 한, 이혼은 여자에게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위자료가 남성에게 큰 부담의 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우스울 정도의 적은 위자료로 버림을 받기 때문에 그 만큼 여성이나 어머니의 운명이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본질적인 불평등은, 남편은 노동 또는 행동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자기완 성이 가능하지만, 아내는 아내인 한, 그 자유가 단지 소극적인 형태에 불과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젊은 미국 여성의 처지는 퇴폐기의 해방된 로마 부인을 연상케 한다. 당시의 로마 부인은 두 가지의 생활방식 중 어느 한쪽을 택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은 할머니의 생활태도나 미덕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아갔고, 또 다른 어떤 여성은 공허한 동요 속에서 함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여성들은 전통적인 전형에 따라 '가 정적인 여성'에 머물러 있다. 한편 정력이나 시간을 오로지 낭비하는 데 보내는 여성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젊은 여성이 일단 어머니가 되면 가정의 부담 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불어난다. 현대의 가정생활, 특히 미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노예처럼 만들었다는 말이 흔히 유행 되고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시대부터 남자는 크샨티페(소 크라테스의 아내로 전형적인 악처이다)의 압제를 하소연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예를 알 고 있다. 대학생과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남편의 하루일과 나 먹고 자는 법까지도 자기가 결정하고, 공부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일체의 오 락을 빼앗아버린 것, 그야말로 남편의 자유를 자물쇠로 잠가두려는 것이다. 이런 압제에 대해 남성 쪽이 전보다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그는 여성의 추상적인 권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인 자기를 통해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 성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여성이 강요 받고 있는 무기력과 무생산을 보상하고 있는 것 이다. 남성 쪽이 더욱 많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두 사람의 협력에 표면상의 평등을 실현 하려면 남성 쪽에서 더 많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이 더 받고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 큼 여성 쪽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다. 인간은 압박함으로써 압박받는 자가 된다. 남편이 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주권 자체에 의해서이다. 그들만이 돈을 벌기 때문에 아내는 수표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고, 그들만이 직업에 도전하고 있음으로 아내는 남편을 성공시키려고 그에게 압력을 가하 게 된다. 그들만이 초월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는 그들의 기획이나 성공을 자기 것으로 하여 그 초월성을 훔치고 싶어한다. 거꾸로 말하면 아내가 남편에게 가하는 압제 는 여성의 예속성을 한층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부부생활의 성공, 그 장래, 그 행복, 그 정당화는 남편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가 열심히 남편에게 자기 뜻을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남편과 일심동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의 약점을 무기로 삼는다. 부부생활의 구속 은 남편에게 더욱 일상적인 것이 되어 귀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게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여성이 무료하여 몇 시간씩 남편을 자기 곁에 붙들어두면, 남편은 귀찮아 진다. 요컨대 남편 쪽에서는 아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녀가 필요치 않은데, 그렇 다고 그냥 아내를 방치해 두면 그녀의 생활은 금방 파멸되어버리는 것이다. 양자의 큰 차 이는 여성에게는 의존이 내면화되어 있는 데서 비롯된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노예이다. 한편 남성은 본질적으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구속받는 것은 외부에서이다. 남 성이 자기 쪽의 희생이 많다는 인상을 갖는 것은, 그가 참고 있는 속박이 더욱 명백하여 눈에 잘 뜨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기생동물처럼 그에게 얹혀 살아간다. 기생동물이 승리 하여 주체가 된 적은 없다. 실제로 생물학적으로도 수컷과 암컷은 서로가 상대에게 희생 물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가 모두 종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 찬가지로 부부 사이도 자기들이 만들어내지 않은 제도의 압박을 받고 있다. 남편이 아내 를 압박한다고 말하면 남편은 분개한다. 압박을 받고 있는 쪽은 자기라고 느끼고 있는 것 이다. 사실 그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남성적인 민법, 즉 남성의 이 익을 위해 발달되어 온 사회가, 오늘날에는 여성의 신분을 남녀 양성을 위하여 고통의 원 천이 되는 그런 형태로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결혼이 '직업'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남녀 양쪽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여성은 지금도 이미 난처한 존재이다'라는 구실로 반페미니스트를 주 장하는 남성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혼은 여성을 '버마재비'로 만들고 '거머리'로 만 들고. '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 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의 자립을 금하는 한 여성은 남성에 게 무섭게 매달린다. 여성을 해방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 사회가 일거리를 제공 함으로써 남성은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다. 벌써 이와 같은 적극적인 자유를 얻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연구나 직업을 끝까지 참고 계속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이 어차피 남편의 생활을 위한 희생이라고 알고 있다. 그녀들은 가정에 다소의 보탬이 되 는 정도의 급료밖에 받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소심하고 불안정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부부 생활의 예속에서 그녀들을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버젓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 성들도 거기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변호사의 아 내는 남편이 죽은 후에 연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여자 변호사의 경우에는 그녀가 사망했을 때, 남편에게 연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직업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어 있지 않다. 자기의 직업에서 진정한 독립성을 찾아내 고 있는 여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바깥일을 하는 것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는 오로지 피로를 더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다. 첫째로 대부분의 경우에 아기가 태어나 면 어머니의 역할에 매어있어야 한다. 직업과 모성을 조화시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전통에 의하면 여성에게 구체적으로 자주성을 부여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목적 달성에 몰두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아이이다. 아내로 머물러 있는 것만으 로는 여성은 아직 완전한 개인이 못 된다면, 어머니가 되어야 비로소 그녀는 그것이 되는 것이다. 자식은 여성의 기쁨인 동시에 정당화이다. 자식에 의해 여성은 성적으로나 사회 적으로 자기를 실현한다. 졀혼이라는 제도 역시 자식에 의해 그 의미를 갖게 되며, 목적 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성 발전의 이 최고 단계에 대해 다음에 검토하고자 한다. 제2장 어머니 여자가 생리적인 사명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모성에 의해서이다. 여자의 모든 기능은 종의 존속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자연적인 천직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결코 자연에게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특히 약 1세기 전부 터 출산은 단지 생물학적인 우연에 지배되어 있지 않고, 의지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 어 떤 나라들에서는 산아제한의 정밀한 방법을 공공연히 채택하고 있다. 카톨릭의 영향 아래 있는 나라에서조차 몰래 실시되고 있다. 남자가 사정을 중단하거나 여자가 성행위를 마친 후에 정자를 몸 밖으로 배출한다. 이것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흔히 다투거나 반감을 갖는 원인이 된다. 남자는 자기 의 쾌락을 자제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여자는 세척의 번거로움을 싫어한다. 남자 는 여자가 자주 임신하는 자궁을 원망하고, 여자는 자기 몸 안에 심는 생명의 싹에 두려 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조심했는데도 여자가 '걸렸을' 때에는 두 사람 다 곤혹스러워 한다. 피임법이 아직 초보적인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반자연은 특 히 중대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낙태가 그것이다. 산아제한을 공인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도 역시 이것을 금하고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날 기회는 드물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방법으로, 그녀들의 연애생활에는 언제나 이런 일이 뒤따 르게 마련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이보다 더 위선을 다루는 주제는 적다. 낙태는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이것을 암시하는 것조차도 못마땅하다. 작가가 해산한 여자의 기쁨이나 고통을 그리는 것 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낙태를 한 여자의 이야기를 쓰면 사람들은 지저분한 내 용으로 인류를 혐오스럽게 묘사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출산과 같 은 수의 낙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므로, 여자에게 흔히 있 을 수 있는 위험의 하나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민법은 어디까지나 이것을 범죄로 보고 있다. 즉 이와 같은 델리케이트한 수술은 몰래 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의 합법화에 반대하는 의견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험한 간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실한 의사들은 마그누스 히르슈 펠트 박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병원에서 필요한 예방수단을 정확히 강구 한 후에 진정한 전문의사가 실시하는 낙태수술에는 형법이 주장하는 큰 위험은 없다." 이 와 반대로 현재 하고 있는 것 같은 낙태가 이루어진다면 여자에게 큰 위험이 따른다. 낙 태하는 자의 기술부족과 또 그녀들이 낙태를 하는 조건은, 때로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많은 사고를 일으킨다. 무리하게 출산하는 것은 부모가 키울 힘이 없는 약한 아기를 사회 에 내던지는 격이 되어, 그런 어린이는 빈민구제의 희생이 되거나 순교의 어린이가 되기 쉽다. 그리고 태아의 권리를 그처럼 열심히 보호하는 사회가, 일단 태어난 아기에게는 대 단히 무관심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빈민구제라고 부르는 빈약한 시설을 개량하지 않고, 낙태한 여자의 책임만 추궁 한다. 고아를 잔인한 옥리에게 맡기는 책임자를 그대로 방치하고, 감화원이나 개인 집에 서 어린이를 학대하는 무서운 압제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있다. 태아가 잉태한 여자의 것 임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태어난 아기는 어디까지나 양친의 것으로 인정한다. 같은 주에 이런 두 사건이 일어났다. 즉 한쪽에서는 낙태수술을 한 외과의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자 살하고, 한쪽에서는 자기 자식을 구타하여 빈사상태에 빠뜨린 아버지가 3개월의 금고형을 받게 되었다. 최근에도 어떤 아버지가 부주의로 자기 아들을 디프테리아로 죽게 했다. 그 리고 어떤 어머니는 생사를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구실로 죽어가는 딸아이를 위해 의사 를 부르지 않았다. 묘지에서 아이들이 이 어머니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신문기자들이 이 어머니의 태도에 분개하자, 몇몇 신사들은 자식은 부모의 소유이므로 제3자가 간섭하 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오늘날에는 100만의 아이들이 위험에 놓여있다"고 <스 수아르>지는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수아르>지도 "50만의 어린이가 생리적 혹은 정신적인 위험에 빠져있다"고 게재하 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아라비아 부인은 낙태할 가능성이 없다. 아기를 10명 낳으면, 그 중에서 7,8명은 죽는다.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머니로서의 임무가 너 무 괴롭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모성적인 감정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런 것도 도덕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도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태아의 생명을 가장 존중한다는 사람 들이 성인남자를 전쟁터로 몰아 목숨을 잃게 하는 가장 일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도 부언 해야겠다. 합법적인 낙태에 반대하는 실제의 이유는 조금도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도덕적인 이유 는 결국 낡은 카톨릭의 가르침에 귀착된다. 즉 태아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세례를 받지 못 한 채 죽이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회가 경우에 따라서는 성인인간을 죽이 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나 사형수의 경우가 그렇다. 교회 는 태아에 한해서만 대단히 인도주의적이다. 태아는 아직 세례에 의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과거 종교전쟁 때 그들은 정화되지 않은 비교도를 학살하는 것은 공공연히 장려되었다. 종교재판에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 했을 것이다. 오늘날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범죄자나 전장에서 죽는 병사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교회는, 인간은 자기 손 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며 영혼의 구원은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 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타인의 영혼을 천국에 인도해 주실 것 을 간구하지 않는가? 교회가 그것을 인정하면 인디언학살로 잔인했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는 완고하고 낡은 전통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한 남성의 사디즘과 관계가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1943년 루아 박사가 페탱에게 바친 저서는 그러한 실례의 하나이다. 그것은 악의의 유 물이다. 박사는 낙태의 위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제왕절개수술처럼 위생 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인공유산은 경범죄가 아니라 중범죄로 여겨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것은 외과수술을 하는 방법도 금해야 하며, 임신으로 모체가 위태로울 경 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 생명과 다른 생명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은 부도덕 하다는 주장이다. 박사는 이런 논지에 따라 오히려 모체를 희생시킬 것을 권유한다. 태아 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인 사상을 지 닌 의사들이 모성애를 찬양할 때에는 태아는 모체의 일부이며, 결코 모체의 희생으로 자 라는 기생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몇몇 남자들이 여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 모 든 상황을 거부하는 열성을 보더라도, 아직 반여성적인 사상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많은 젊은 여성을 죽음과 불임과 병으로 몰고 가는 법률은 인구의 증가로 완전 히 무력하다. 합법적인 유산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한 가 지 점은 그런 행위는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돌레리스, 발타자르, 라카시뉴 등 여러 교수들의 말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1933년경에 해마다 50만 것의 낙태가 행해졌다고 한 다. 1941년에 보르도시의 오베르탱 박사는 80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이 마지막 숫자이다. 1948년 3월의 <전투>지에 실은 논문에서 테플라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낙태는 사회에 하나의 풍습이 되어 있다...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 다... 샌현에서 1943년에 1,300회의 검거 중에 750건이 고소되고, 그 중에서 여자는 360 명이 체포되었다. 513명은 1년 이하에서 5년 이상의 실형을 받았다. 이것은 현 내에서 추 정되는 15,000건의 낙태와 비교하면 적은 숫자이다. 전국적으로는 10,000건이 재판을 받 았다. 이른바 범죄적인 낙태는 우리의 위선적인 사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피임 정책과 마찬가 지로 모든 사회계증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다. 낙태한 여자의 3분의 2는 기혼여성이 다... 대체로 프랑스에서는 출산과 거의 같은 수의 낙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낙태수술이 때때로 불완전한 조건하에서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낙태는 임신 부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파리의 법의학연구소에서는 낙태로 죽은 여자의 사체가 매주 두 구 정도 당도한다. 그 리고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낙태는 계급의 범죄라고 불린 적이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피임법은 부르 주아 계층에는 널리 퍼져 있다. 화장실 설비는 수도 시설의 편의를 갖추지 못한 노동자나 농민의 경우보다 그 실행이 한결 쉽다. 중산층 가정의 처녀들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리 고 부부생활에서도 자녀의 부담은 가볍다. 가난과 주택난과 여자가 사회에서 일할 필요가 낙태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있다. 부부가 출산을 제한하려고 결심하는 것은 아내가 두번 어머니가 된 이후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낙태를 한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한편으로는 금발의 두 천사를 안 고 달래는 숭고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전자와 후자는 같은 여자인 것이다. 1945년 10월호 의 <현대>지에 공동 병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보고에, 주느비에브 사로 부인은 병원의 한 방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그 병원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소파수술을 받 은 많은 여자들이 입원해 있었다. 그녀들은 18명 중에 15명은 유산하고 그 절반은 고의로 자극을 받았다. 제9호실 환자는 중앙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아내로 두 번의 결혼에서 10명의 아기를 출산하고, 그 중에서 3명만 살아 남았다. 7번 유산을 했는데 5번은 고의였 다. 그녀는 흔히 트렝글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고 또 정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이 이름을 동료에게 가르쳐주었다. 16세에 결혼한 제16호실 환자는 여러 가지 정사를 경험하고 낙태로 인해 수란관염에 걸려 있었다. 35세인 제7호실 환자는 이렇게 말 했다. "내가 결혼한 건 20년 전이었어. 나는 남편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어. 20년 동안 나는 품행이 방정했는데, 바로 석 달 전에 애인이 생겼어. 오직 한 번, 호텔 방에서 말이야. 그때 난 임신했어... 그러니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지워버렸어. 아무도 몰래 말이야. 남편도 몰라... 그 남자도 물론 몰라. 이것으로 끝난거야. 이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했어. 혼났거든... 소파수술을 말하는 게 아냐. 그게 아니고 딴 거야. 그러니 까... 그건 자존심의 문제야. 내 말 알아듣겠지?" 제14호실 환자는 5년 동안에 다섯 아기 를 낳았다. 그녀는 40세에 벌서 할머니처럼 보였다. 저마다 절망에서 비롯된 체념을 경험 하고 있었다. "여자는 고생을 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하고 그녀는 서글픈 듯이 말했다. 이와 같은 시련의 고통도 생활형편에 따라 큰 변화가 있다. 부르주아식으로 결혼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남편에게 의지하여 돈과 교제가 많은 여자는 유리하다. 이런 여자는 의 술적인 낙태의 허락을 받기가 한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낙태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스 위스까지 갈 수도 있다. 현재의 산부인과의학의 조건이라면 완벽한 위생시설을 갖추고 있 어 경우에 따라서는 마취제를 사용하여 전문의가 시술하면 간단히 끝낼 수도 있다. 그런 여성은 공적인 승인을 받지 못해도 비공식으로 안전한 원조를 받을 수 있다. 전문의의 주 소도 알고 있으며, 양심적인 치료의 대가를 지불할 돈도 있다. 임신 초기에 충분히 손을 쓸 수 있다. 의사도 그런 여자는 소중히 다룬다. 이런 특권을 가진 여성 중에는 이런 생 리적인 변화가 건강에 도움이 되어 혈색도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반대로, 돈도 없고 외로운 젊은 처녀가 주위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과실을 해소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리는 것처럼 비참한 경우는 없다. 해마다 프랑스에서는 약 3 0만 명의 여점원, 여비서, 여학생, 여공, 농촌여자들이 이런 경우를 당하고 있다. 혼외 출산은 아직 대단히 나쁜 일로 여기고 있으므로, 미혼모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이나 영아 살해 쪽을 택하게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실례의 하나는 프리만 박사가 수록한 고백 속에 나와 있다. 이것은 구둣방 직공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베를린의 이야기이다. (<청춘기와 성욕>에서) 나는 10세 연상인 이웃남자와 관계를 맺었어요... 그의 애무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으 므로 상대방이 하는 대로 맡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러 나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고, 여자에 대한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드디어 나는 그에게 순결을 주어버렸어요. 두 달이 지나 슈푀츠 유치원의 보모로 취직하 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임신중이었어요. 그 두 달 전부터 나는 월경이 없었어요. 나를 유혹한 남자는 편지로 월경을 할 수 있도록 석유를 마시고 검은 비누를 먹으라고 당부했 어요. 그때 내가 받은 고통을 지금 여기서 말할 기력이 없어요... 나는 혼자서 이런 비참 한 생활의 밑바닥에 빠져 있어야 했어요. 아기를 낳는 것이 걱정스러워 나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게 되었어요. 그 때부터 나는 남자를 증오하게 되었어요.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사는 긴 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그후 줄곧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나는 18개월 동안 감화원에 들어간 것처럼 살아야 했어요. 그후 그녀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착한 여인이 되어 4년 동안 그 곳에서 살았다. 그 무렵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공무원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여 행복했어요. 나는 애정과 함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어요. 24세 때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는 지금 10세가 되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인 그 남자는 그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그것은 내가 500마르크의 돈으로는 아이를 양 육하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는 아이를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어요. 지금 나는 어떤 남자에게도 흥미가 없어요. 여자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흔히 유혹자 자신이다. 여자가 임신했을 경 우, 남자 쪽에서는 여자를 버리거나 여자 쪽에서 요령있게 처리하거나 자기 몸의 이상을 숨기기를 바란다. 어쨌든 남자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거이다. 여자가 아기를 버 리는 것을 애석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곧바로 지워버리는 결심을 하지 못하거나, 유 산시켜줄 의사를 찾지 못하거나, 돈이 없어서 효과가 없는 약을 먹으면서 시간을 허비하 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초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험이 뒤따르고 고통도 심하다. 여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자기를 구출하려고 한다. 시골에서는 소식자(체내의 장기나 조직 속에 삽입하여 검사하는 금속의 막대 모양으로 된 외과용 의료기구)의 사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수를 한 시골여자는 곳간 사다 리에서 일부러 떨어지거나, 계단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울타리 속에서, 무성한 숲 속에서, 거름구덩이 속에서 목이 졸린 조그만 시체가 발견되기도 한다. 도시에서는 여자가 서로 돕는다. 의사에게 낙태를 부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필 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기 스스로 처리한다. 이런 임시 외과의는 신뢰할 수 없다. 막대기나 뜨개바늘 로 박박 긁어버린다. 어느 의사의 말에 의하면 어떤 여자 요리사가 자궁에 식초를 부어넣 으려고 하다가 방광에 들어가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는 것이다. 난폭한 방법으로 유산 을 하면 정상적인 출산보다 고통이 훨씬 심하고, 신경에 이상을 일으켜 간질 증상을 보이 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위험한 내장질환과 치명적인 출혈을 일으켜 생명을 잃기도 한다. 콜레트는 <그리비슈>에서 무지한 어머니에 의해 카바레의 댄서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진한 비눗물을 마시고 15분쯤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방법은 어머니를 죽이고 아기도 죽이는 결과가 된다. 내가 들은 이 야기의 하나는, 어떤 여자 타이피스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4일 동안이나 처박혀 식음을 전폐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부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의 위험이 죄와 치욕의 위협 과 혼동되는 절망감보다 더 무서운 절망감은 없을 것이다. 가난한 아내가 남편과 협의하 여 낙태를 할 경우에는 불필요한 걱정이 없어 한결 마음이 가볍다. 사회사업을 하는 어떤 부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층계급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조 언을 하고, 기구를 빌려 주고, 마치 티눈이라도 빼듯이 간단히 처리하지만 그녀들은 생리 적으로 심한 고통을 참는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유산한 여자를 수용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겪는 동안이나 또는 소파수술 중에 진통제도 쓰지 않고 도리어 이를 벌 한다. G.사로가 수록한 증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통에 익숙한 여자는 이런 박해에 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은 치욕을 느낀다. 그녀들이 받는 수술이 비밀리에 행하는 범죄라는 인식 때문에 그 위험은 더욱 커지고, 불쾌와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다. 고통, 병, 죽음이 징벌 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고통과 고문, 사고와 징벌 사이에는 물론 큰 차이가 있다. 각오 하고 저지르는 위험을 통하여 여자는 죄의식을 느끼고, 고통과 과실을 이처럼 해석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비극이 도덕적인 양상은 상황에 따라서 강하게 느끼기도 하고 약하게 느끼기도 한 다. 재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자유로운 환경에 의해 대단히 해방된 여자들, 또는 가난과 불행 때문에 부르주아 도덕의 경멸을 배운 여자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 는 다소 불쾌한 시기를 보내야 하지만, 그것이 지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거기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지만, 역시 도덕의 위력에 대해서는 겁을 내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무시한 법률을 마음으로는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하면 괴로워한 다. 그녀들은 우선 상대방에게 애걸하는 굴욕을 당한다. 의사나 산파의 도움을 애써 구해 야 한다. 상대방의 냉대도 각오해야 한다. 혹은 불명예스러운 공모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고의로 다른 사람을 죄에 끌어들이는(대부분의 남자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혐오스러운 입장을 여자는 걱정과 치욕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처치를 부탁하기를 원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녀는 마음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 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기분은 아기를 낳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아 도 자기가 감행하려는 행동의 애매성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낙태는 결코 살 인은 아니지만 단순한 피임수단과 같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절대적 시작인 수태가 이루어졌으므로 그 발전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환각에 시달 리는 여자도 있다. 헬렌 도이치는 심리적으로 극히 정상이지만, 생리적인 문제 때문에 3개월이 되는 태아 를 두 번 지운 한 기혼부인이 두 개의 작은 무덤을 만들고, 아기를 많이 낳은 후에도 경 건하게 보살핀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더구나 유산이 자기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죄의식을 갖기가 쉽다. 어렸을 때 새로 태어난 동생을 질투하여 죽기를 바랐던 욕망에 이 어 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실제로 한 아이를 죽인 것 때문에 죄 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 죄책감이 병적인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일부를 살상했다고 생각하는 여자도 많 다. 그래서 이 살상에 동의했거나 혹은 그것을 권유한 남자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H. 도 이치는 이런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젊은 처녀는 애인에게 반했으나, 두 사람의 행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어린애를 지우자고 자진해서 주장했다. 그런데 막상 병원을 나서자 사랑하는 애인과 다시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단호히 헤어지는 경우는 드물지 만, 그 때문에 남자 전체에 대해 혹은 자기에게 임신을 시킨 남성에 대해 불감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는 낙태를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것을 자연의 장난이 여자에게만 주 는 수많은 사고의 하나로 보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여자 는 남성의 윤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이완될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가치, 즉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도덕적인 세계는 흔들리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왔다. 모성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도 들어왔다. 여자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불편(월경, 질병 등등)이나 가사의 번거로움은 모두 아기를 낳는다는 놀라운 특권에 의해 변호되어 왔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장래를 불리하게 하지 않기 위해 자기작 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여자에게 여자로서의 승리를 단념할 것을 요구한다. 어 린애는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도 아니며 출산은 신성한 일도 아니다. 여자의 뱃속에 생긴 작은 살덩어리는 우연적인, 귀찮은 존재로 이것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갖는 결점의 하나이다. 이에 비하면 달마다 있는 월경의 고역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처녀 때 놀랐던 그 빨간 피가 다시 흐를 때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이 시작된다. 그것은 어린애를 낳기 위한 것이라고 해서 전에는 위안이 되었다. 설사 낙태에 동의하여 그것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여자는 자기의 특징을 희생한 것처럼 느낀다. 그녀는 점점 명 확하게 자기의 성 속에서 저주, 일종의 불구, 위험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여자는 유산의 외상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극에 도달하여 동성연애를 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로서의 삶에 성공하기 위해 여자에게 그 육체적인 가능성을 희생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남성의 도덕규범이 위선인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들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낙태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그것을 편리한 방법으 로 채택한다. 그들은 파렴치하게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자는 상처를 입은 자신의 육체 안에서 이와 같은 모순을 체험하게 된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소심하기 때문에 남자의 위선에 단호히 반항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죄악시하는 불공평 한 처사에 희생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욕과 굴욕을 느끼게 된다. 남자가 저지른 과실 을 구체적인 형태로 자기 속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과실을 범하고도 시치미를 떼고 여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다. 그는 애원하듯, 위협하듯, 따지듯, 당당한 어조 로 말만 늘어 놓을 뿐 그것도 곧 잊어버린다. 이런 말을 고통의 핏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녀이다. 남자는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그 침묵이나 도피는 남 자들이 만든 도덕규범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여자의 부도덕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 아하는 테마에 불과하므로 놀랄 일이 못된다. 남자들이 공공연히 내세우면서 그것을 몰래 어기는 그럴 듯한 원칙을 여자들은 마음속으로 믿지 않는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칭찬할 때나 남자를 칭찬할 때에도 믿지 않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피를 쏟는 뱃속에 붉은 생명의 단편인 태아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는 처음으로 낙태했을 때 비로 소 이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그녀들의 대다수를 이제 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피임법의 지식이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의 프랑스에서는, 낙태는 궁핍 으로 죽을 운명에 놓여있는 어린애를 낳지 않고 싶은 여자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방도이 다. 슈테켈은 "낙태의 금지는 부도덕한 법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범하게 되는 법률이기 때문이다" 하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산아제한과 인공유산은 여자에게 그 모성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한다. 사실 여자가 임 신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되고 또 어느 정도는 우연에 의해 이루어 진다. 인공수정이 일반화되지 않으면, 여자는 어머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녀가 남자와 접촉하지 않았거나, 남편에게 임신시킬 능력이 없거나, 또는 자기의 체질이 불완전한 경우가 그렇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의사와는 달리 임신하는 경우도 있다. 임신과 모성은 그것이 반항 속에, 체념 속에, 만족이나 열의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각각 크게 다른 체 험을 하게 된다. 젊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결심이나 감정이 반드시 그 강한 욕 망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미혼으로 어머니가 된 여성은 갑자기 자 기에게 닥친 부담에 물질적으로 시달리는 고충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어도, 어린애에게 서 몰래 간직한 꿈의 실현을 발견하고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반대로 임신을 기쁨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젊은 아내가 침묵 속에 그것을 두려워하고 강박관념이나 환상이나 이미 회상할 수 없는 유아기의 기억 등을 통하여 몹시 혐오스럽게 여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여자가 비밀을 간직하기 쉬운 이유의 하 나이다. 그녀들의 침묵은, 여자만의 특유한 경험을 신비로 남겨두고 싶은 심저의 표시이 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순이나 투쟁에 당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 다. "임신에 대한 걱정은 분만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이져지는 꿈이다" 하고 어떤 여성은 말했다.(N. 알) 즉 그것은 그때 비로소 드러나는 복합적인 진실이며, 그녀들은 이 것을 망각 속에 다시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나는 전에, 여자는 유년시절과 사춘기 사이에 모성에 관해 몇 가지 단계를 통과하게 된 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유희였다. 그녀는 인 형이나 어린애 속에서 소유하고 지배할 대상을 발견했다. 사춘기가 되면 자기의 귀중한 인격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것을 그 모성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혹은 콜레트 오드리의 여 주인 여주인공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것을 단호히 거부한다(<잃는 노름>에서) 나는 모래 위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을 유심히 보고 그들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이 아이들을 지배하고, 씻어주고, 엉덩이를 때려 주고, 옷을 입혀 주는 등, 온갖 방법으로 나쁘게 만드는 어른들도 미워했다. 잇따라 아기를 만들고 있는 물렁물렁 한 육체를 지닌 여자를 그리고 자기 아이의 부드러운 살을 만족스러운 듯이 혹 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미워했다. 나의 몸은 나 한 사람의 것이다. 나는 햇볕 에 타고, 소금이 끼고, 가시나무에 긁힌 육체만을 사랑했다. 이 몸은 굳게 봉인되어 있어 야 한다. 여자는 마음속으로는 임신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임신망상이나 여러 가지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모성이 주는 권위를 행사하기를 좋아하지만 그 책 임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처녀가 많다. H.도이치가 인용한 리디아의 경우가 그렇 다. 이 처녀는 16세 때 남의 집에 하녀로 가서,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극진히 돌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아기를 기르기 위해 어머니와 일체화되었던 소아가 몽상의 연장 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자기의 소임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여, 아이들에 냉담해지고, 멋대 로 외출하여 남자와 어울렸다. 즉 그녀는 유희의 시기가 끝나고 자기의 진정한 생활에 관 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 생활에서는 모성적인 욕구는 작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한 평생 어린애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 출산의 생물 학적인 작용에는 혐오감을 갖고 있다. 이런 여성은 산파나 간호원이나 여교사가 된다. 그 녀들은 친절한 아주머니이기는 하지만, 어린애를 낳는 것은 싫어한다. 그녀들 중에는 어 머니가 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지만 연애에 몰두하거나 직업에 전념하여 임 신을 피하는 여자도 있다. 또는 아이가 자기나 남편에게 지울 부담을 걱정하는 경우도 있 다. 여자는 때때로 성적 교섭을 회피하거나 피임법에 의해 고의로 임신을 피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기를 갖는 두려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경우나, 어떤 심리적인 방어과정이 임 신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여성에게는 의학적인 검증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경성 기능 장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튀스 박사는 그 현저한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H부인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자의 생활에 관해 대단히 나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네가 결혼하여 임신을 하게 되면 대단히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언제나 예고해 왔었다... H부인은 결혼한 다음달에 임신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곧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3개월 후에 또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잘못 안 것이었다. 1년 후 에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으나, 의사는 그녀와 남편, 모두에게 불임 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3년 후에 다른 의사에게서 진찰을 받았다. "당신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임신을 하게 될 거예요." 하고 의사는 말했다. 결혼 후 5년이 지나 H 부인과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6년째 아기가 태어 났다. 수태의 수락 혹은 거부는 임신과 같은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임신기간 중에는 소아기의 몽상이나 사춘기의 불안이 되살아난다. 이 시기는 그 어머니나 남편 또는 자기 자신과 갖는 관계에 따라 각각 다른 경험이 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입장을 계승하는 셈이다. 그녀의 완전한 해방은 여기에 있다. 만일 그녀가 아직도 어머니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당분간 그런 상 태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를 돌봐주기를 원한 것이다. 이윽고 태 어난 아기는 자기의 열매라기보다는 남동생이나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만일 그 녀가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으면 아기는 자기를 구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속박할 것이라고 걱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불안이 유산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H.도이치는 이런 경우를 인용하고 있다. 임신한 어떤 젊은 아내가 해산한 후에 남편의 여행에 동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장차 태어날 아기를 어머니에게 맡기지 않 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그러한 고민 때문에 결국 그녀는 사산아를 낳게 되었다. 그녀 는 아이를 몹시 원했으므로 무척 슬퍼할 줄 알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 이상했다. 그러 나 그녀는 아기를 어머니에게 줄곧 맡겨두면, 어머니가 아기를 통하여 그녀를 지배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어떤 처녀는 어머니에 대해 죄악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 여자는 자기가 낳을 아기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저주가 내릴 것 같은 망상에 사로 잡히게 된다. 이 아기는 태어나도 곧 죽거나, 아니면 살아서 자기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마음의 가책이 젊은 여자에게 불안감을 조장하여 임신을 망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 H.도이치가 보고하는 다음의 예에 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자식이 많지만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스미스 부인은, 아들이기를 원했던 어머니가 자신을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언니의 지극한 사 랑으로 별로 마음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그러던 그녀가 결혼을 해 아이를 가지게 되자 임신을 무척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어머니에게 느끼던 그 증오심으로, 자기 자 신이 어머니가 된다는 점을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산달보다 한 달 앞서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두번째로 임신했을 때에는 다시 실패하지나 않나 해서 걱정을 했다. 다 행히 친한 여자친구 한 사람이 그녀와 동시에 임신했다. 이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대단히 다정하여, 두 여자의 임신중에 줄곧 잘 돌봐주었다. 그러나 여자친구 쪽이 한 달 먼저 임 신했으므로, 스미스 부인은 혼자서 출산날을 기다려야 했기에 걱정을 했다. 그런데 놀랍 게도 그 여자친구는 출산 예정일에서 한 달이나 늦어져, 결국 두 여자는 같은 달에 해산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구는 다음 아기도 같은 날에 수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스미스 부인 은 안심하고 다음 임신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이 여자친구가 임신 3개월만에 그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이것을 알게 된 날에, 스미스 부인은 유산을 했다. 그녀는 그 후에는 임 신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던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여자와 아이 아버지의 관계이다. 이미 성숙한 독립적인 여 성이 자기만의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남성적인 남자 를 보면 눈이 빛났는데, 그것은 관능적인 욕망에서가 아니라, 그 남자의 생식적인 능력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아. 이런 여성들이야말로, 인공수정의 기적을 열망하는 모성적인 여 장부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녀들과 함께 살 경우에는, 그녀들은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 <아들과 연인>에 나오는 폴의 어머니처럼 - 자기아기와 폐쇄적으 로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여성이 새로운 책임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남 성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한 사람의 남자가 그녀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그녀는 태어난 아기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수 없다. 그녀가 유치하고 소심할수록 이런 욕구는 강하다. H.도이치는 이와 같은 한 사례에 대 해 이야기하고 있다. 15세의 어떤 젊은 여자가 16세인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했다. 그녀는 처녀시절엔 아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도 잘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막상 자리 자신이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자 당황한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이 곁에 있어주기를 원했다. 남편은 가정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일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걱정 속에 살았다. 아이들의 싸움을 과장하여 말하고, 날마다 일어나는 사소한 일 에 대해서도 몹시 신경을 썼다. 이처럼 많은 젊은 어머니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귀찮은 호소를 지겨워하는 남편을 가정에서 몰아세우는 것이다. H.도이치는 호기심을 끌 만한 여러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가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젊은 여자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생각하여 대단히 행복했다. 그런데 남편이 여행을 떠난 사이에 그만 바람을 피웠다. 곧 어머니가 될 것이고, 또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 얼마 후에 자신이 수태날짜를 잘못 짚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여행 기간에 해당되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남편의 자식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애인의 자식인지 알 수 없어 걱정스러웠 다. 그리하여 원했던 아기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고민하던 끝에 정신과 의 사를 찾아가야만 했다. 얼마 후 남편이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 소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편에게 애정을 갖는 여자는, 남편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따라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느냐, 귀찮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녀는 임신 이나 모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신통치 않게 여기기도 한다. 때로는 두 사람의 애정이나 결혼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아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가 이 아이에 게 느끼는 애정에 따라 그녀의 계획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좌우한다. 그녀가 남편에 게 적의를 품고 있을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아버지에게는 아이에 대한 소유권 을 부인하고 자기는 아이에게 증오하는 남자의 씨라고 하여 증오심을 갖고 대하기도 한 다. 앞에서 슈테켈이 인용한 사례로서, 결혼 첫날밤의 이야기를 했던 H.N.부인은 그후 곧 임신했으나, 그 거친 첫날밤의 공포 속에서 가진 딸을 한평생 미워했다고 한다. 이와 마 찬가지로 톨스토이 부인의 <일기>에 남편에 대한 상반된 감정이 임신 초기에 반영되어 있 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참을 수 없다. 나는 무서운 권태, 공허,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리오바(톨스토이)에게 나는 이미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임신한 나는 그에게 어떤 기쁨도 줄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녀가 느끼는 유일한 쾌락은 마조히즘적인 것이다. 아마도 사랑의 실패 가 그녀에게 자기 징벌의 소아적인 욕구를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어제부터 몸이 아프다. 유산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 뱃속의 통증은 오히려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게 한다. 내가 어려서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어머지는 용서해 주었으나, 내 스스로는 용서되지 않았던 그런 심정이다. 나는 자신을 꼬집고, 아픔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을 찔렀다. 그런데 그것을 꾹 참으며 큰 쾌감을 느꼈다... 아기가 태어 나면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지겹기 짝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생 각된다. 시계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 모든 것이 우울하다. 아, 만일 리오바가!... 그런데 임신을 특히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기와 자기 사이에 연출되는 하나의 연극이다. 그녀는 임신을 풍요로워지는 것으로 느끼는 동시에 큰 손상으로 느낀다. 태아는 자기 몸 의 일부이며, 자기 육체를 잠식하는 기생물이다. 그녀는 태아를 소유하면서 또 그 태아에 게 소유된다. 태아는 미래 전체를 요약하고 있으며, 태아를 몸 안에 갖고 있는 그녀는 자 기를 세계처럼 광활하게 느낀다. 그러나 이 풍요 자체가 그녀를 무로 만들어, 그녀는 자 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려고 하며, 자시 자신의 생명 역시 그로 인해 큰 의미를 가지게 됨으로써 뿌듯한 느낌도 가지게 된다. 그 러나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함에 농락당하고, 우롱당하고,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임신한 여자에게 특이한 것은, 그녀의 육체가 자기를 초월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 이 내재적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육체는 구토와 불안 속에서 자성한다. 그 육체는 자기 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때 육체는 유례없이 큰 부피를 갖게 된다. 기술자나 행동가의 초월에는 주체성이 있다. 미래의 어머니에게서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소멸된 다. 그녀는 자기 몸을 부풀리고 있는 태아와 함께 생명에 휩싸인 애매한 한 쌍을 이루게 된다. 자연의 올가미에 걸린 그녀는 식물이여 동물이다. 그리고 아교질 저장소이고 부화 기이며 하나의 알이다. 그녀는 이기주의적인 육체를 가진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존재가 되고, 때론 젊은이들에 게 조소를 받는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고 의식이며 자유이던 그녀가 이제는 생명의 수동 적인 기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생명은 습관적으로는 실존의 한 보전에 불과하다. 그 런데 임신에서는 그것은 창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과 사실성 속에 이 루어지는 기이한 창조이다. 임신과 수유의 기쁨이 강하여 이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원하는 여자도 있다. 유아 가 젖을 떼면, 물건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된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낳 는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여성은 자기의 자유를 육체를 위하여 소외할 가능성을 열 망하고 있다. 육체의 수동적인 다산성에 의해 자기 생존의 의미가 정당화되는 것처럼 느 끼는 것이다. 만일 육체가, 생명이 전혀 없고 무기력하다면, 타락한 형태에서도 초월을 구현할 수 없다. 육체는 게으르기 쉽고 권태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 새싹이 돋아날 경우, 그것은 나무 포기가 되고, 샘이 되고, 꽃이 되는 것이다. 즉 자기를 초월한다. 그것은 충실한 현재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다. 그 리하여 여자가 옛날에 젖을 뗐을 때 괴로워했던 이별을 보상받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세대의 흐름 속에 복귀하여, 한없이 이어지는 세대의 한 고리가 되어, 다른 육체를 위해, 그리고 다른 육체에 의하여 존재하는 육체가 된다. 그리하여 남성의 품속에서 구했 던 융화, 부여되자마자 거부된 그 융화를 어머니는 자기의 무거운 뱃속에서 어린 생명의 존재를 느끼거나, 또는 그 아이를 자기의 부푼 젖가슴에 껴안음으로써 실현한다. 그녀는 이미 한 주체에 복종하는 객체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 말미암아 불안을 느 끼는 주체도 아니다. 그녀는 이 애매한 현실, 즉 생명이다. 그녀의 육체는 드디어 자기 것이 된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아이의 것이고, 그 아이는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는 그녀에게 아이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거기에 신성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일 찍이 에로틱한 대상이었던 유방을, 지금은 밖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의 원 천이다. 많은 종교화에서도 가슴을 열어 젖힌 성모가 아들에게 인류를 위해 더 큰 은총을 내리도록 애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육체와 사회적인 권외에서 소외된 어머니 는 자기를 '즉자'의 존재로, 하나의 기성가치로 느끼는 평화로운 착각을 한다. 그러나 이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 아이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 는 그녀 속에 만들어진다. 그녀의 육체는 단지 육체를 낳은 뿐이다. 즉 스스로 쌓아나가 야 하는 하나의 실존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에서 비롯되는 창조는 대상을 가치로 서 설정하고, 거기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아이는 아직 그 존재가 정당화되어 있지 않다. 아이는 아직 무상의 분포이며, 가공되지 않은 사실에 불과하다. 그 우연성은 죽음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머니는 한 아기를 원하는 자기의 이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 존재하려고 하는 이 타자에게 그 자신의 존재이유를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육체의 일반성 속에 아기를 낳는 것이지, 그 실존의 개별성 속에 아 기를 낳는 것이 아니다. 콜레트 오드리의 여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녀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가 내 생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아이의 생명은 내 속에 싹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때문에 죽 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일을 앞당길 수 없어, 끝까지 열매를 맺게해야만 하였다. 그 아이 는 나한테서 생겨난 거기 나타났다. 이리하여 그 아이는 내 생명의 내부에서 만들 수 있 는 작품을 닮았다... 그러나 요컨대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잃은 노름>에서) 어느 의미에서 육체화의 신비는 모든 여자에게 반복되고 있다.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신이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면 의식으로서, 자유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 어머니는 이 신비를 위해 자기 몸을 빌려준다. 그러나 그 신비를 지배하지는 못한 다. 자기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 존재의 최고 진리를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런 애매성을 두개의 모순된 환상으로 나타낸다. 어머니는 누구나 자기 아들은 영웅된다 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의 의식과 하나의 자유를 낳는 경이를 표출한다. 그러 나 그녀는 불구자나 기형아를 낳지 않을까 하여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육체의 혐오스러운 우연성을 알고 있으며, 또 자기 속에 있는 이 태아는 단순한 육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환상 중에서 한쪽이 지배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여자는 이 양자 사이에 서 동요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이와는 다른 애매성에도 민감하다. 종이라는 큰 순환 속 에 에워싸여 있는 그녀는 시간과 죽음에 대하여 생명을 확인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불멸을 약속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자신의 육체 속에서 헤겔의 말의 진실성을 절 실히 느끼고 있다. "아기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 아기는 부모에게 "그들의 사랑의 대자존재가 그들로부터 밖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아기는 자기의 대자조재를 "원천과의 분리, 이 원천이 거기서 고갈될 이별 속에" 획득한 것이다. 이 자기 초월은 여 자에게 자기 죽음의 전조 같은 것이 된다. 그녀는 이 분만을 상상할 때 자기가 느끼는 공 포에 의하여 이 진실을 나타낸다. 그때 그녀는 자신 자신의 생명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임신의 의미는 이처럼 애매하기 때문에, 여자의 태도가 모순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여자의 태도는 태아가 성장하는 각 단계에 따라 변하게 된다. 우선 과정의 시초에 는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유의해야 한다. 아이는 아직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 다. 어머니는 몇 단 후에 태어날 이 작은 존재에 대해 꿈도 주고, 요람이나 배냇저고리 등의 준비를 서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모호한 기관의 현상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과 '출산'을 신비적인 현상으로 보는 사 람들은, 여자는 자기가 느낀 쾌락의 성질에 따라 남자가 자기를 어머니로 만든 것을 안다 고 주장하지만, 이런 신비설은 버려야 한다. 그녀는 자기 태내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한 직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불확실한 징후로 임신을 단정할 뿐이다. 월경 이 멎고, 몸이 비대해지고, 유방이 무거워지고, 몸이 불편하고 현기증이나 구토를 느낀 다. 때로는 단순히 병이 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의사가 임신이라고 가르쳐주는 경우도 있 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그것을 초월하는 사명을 갖게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다. 날이 갈수록 자기 육체에서 생겨나, 그 육체와는 다른 작은 살덩어리가 자기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그녀는 신비적인 법칙을 자기에게 억지로 적용하는 종의 먹이이다. 그래 서 일반적으로 이런 소외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구토로 표시된 다. 이 구토는 그때 시작된 위 분비물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포유동 물의 암컷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반응이 크게 나타나는 것은 정신적인 원인에 의 해서이다. 인류의 암컷에서 종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의 예리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자가 아기를 몹시 원할 경우에도, 그 아기를 자기가 낳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는 우선 그녀의 육체가 반항한다. 슈테켈은 <신경성 불안상태> 속에서, 임신한 여자의 구 토는 언제나 어린애를 거부하는 표시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아기에 대한 거부 감이 심할 경우에는 (때때로 고백할 수 없는 이유로) 위장의 변화가 심해진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우리에게, 구토증상이 정신적인 원인으로 심해지는 것은 후두로부터의 배설이 임신이나 태아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시할때만 일어난다고 가르쳤다."고 H.도이치는 말하 고 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부언한다. "임신기의 구토의 심리적인 의미는, 때때로 임 신망상에서 생기는 젊은 처녀의 히스테리성 구토의 그것과 같다." 두 경우에 있어서, 입 으로부터 임신이라는,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낡은 관념이 부활되어 있다. 특히 소아적인 여자에게는 임신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소화기관의 질병처럼 보이기 쉽다. H.도이치가 인용한 한 여자환자는 자기의 토사물 속에 혹 태아의 파편이라고 없나하여 걱정스러운 듯이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와 같은 망상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와 같은 망상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허기증, 식욕결핍, 혐오 등은 태아를 보존하고 싶은 욕망과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의 중간을 마찬가지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는 젊 은 여성은 심한 구토와 악성 변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자기 는 태아를 버리려는 심정과 보존하려는 심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녀 가 분명히 표명한 욕망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요약한 실례는 아르튀스 박사가 <결혼>에서 기술한 것이다. T부인은 임신중에 억제할 수 없는 구토로 시달리고 있었다... 증상이 너무 심하여 임신 중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간단히 정신분석 실 험을 해본 결과, T부인은 자기의 생활감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 친구와 무의식적으로 같은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여자친구는 초산후에 죽었다. 이처럼 원인이 밝혀지자 증상이 차츰 좋아졌다. 2주일 후에도 가끔씩 토하기는 했으나, 더이상 위험한 상태는 아 니었다. 변비, 설사, 구토 등은 언제나 욕망과 불안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는 유산이 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자여유산은 어떤 심리적인 원인을 갖고 있 다. 이런 병적인 증상은 여자가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자기가 받아들이는 일'이 많을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특히 흔히 볼 수 있는 임산부의 입덧은 소아기적인 기원을 갖는 강박관 념이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음식으로 임신하게 된다는 과거의 상상 탓에 임신은 언제나 음식과 관계가 있다. 자기 몸에 이상을 느낀여자는 신경쇠약에 걸렸을 때처럼, 이 이상을 어떤 욕망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이 욕망에 매혹되기도 한다. 전에 히스테리의 개발이 있 었던 것처럼, 전통에 의한 입덧의 개발도 있다. 여자는 이와 같은 입덧이 나기를 기대하 고, 기다리고, 생각해 낸다. 나는 전에 이런 사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임신한 젊은 미혼여성은 시금치가 하도 먹고 싶어서 시장을 헤매었다. 그녀는 시금치가 냄비에서 끓는 것을 바라보면서 참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자기의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 했던 것이다.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므로, 미칠 듯이 초조하여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바심을 쳤던 것이다. 다브랑테스 공작부인은 <수기>에서 입덧을 할 때 의 편식이 그녀의 주위사람들에 의해 강하게 암시되는 경우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임신중에 주위사람들의 많은 배려를 즐거워했다. 이처럼 주위사람들이 여러 모로 돌봐주면, 불안과 구토와 신경과민, 그리고 임신 초기 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고통이 더욱 심해진다.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 그것은 먼저, 어 느날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아, 참 그래"하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크 를 놓고 내 얼굴을 당혹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뭘 먹고 싶어하는지 물어보는 걸 그만 잊어버렸구나." "특별히 먹고 싶은 거없어요" 하고 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아니 먹고 싶은 게 없 다니! 원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네가 주의력이 부족해 서 그래. 내가 네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내가 네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 그 후에 두 사람의 어머니 사이에 의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쥐노는 자신이 기형아를 낳 을까 걱정하여 아침마다 물어보는 것이었다. "로르, 너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베르사이 유에서 돌아온 시누이가 이 질문에 끼여들었다... 입덧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이상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으나, 전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어느날 파인애풀이 들어 있는 정제를 먹으면서,문득 파인애풀은 틀림없이 맛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일단 파인애플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자, 나는 심한 욕망을 느꼈다. 그 마음속의 욕망은 코르슬레가 "지금은 계절이 아니야"하고 말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때 나는 미친 듯이 그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죽을 것만 같은 상태에서는 이르러 몹시 괴로웠다. (쥐노는 무척 애쓴 끝에 보나파르트 부인을 통해 파인애플을 얻을 수 있 었다. 다브랑테스 공작부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것을 받아 냄새를 맡고, 매만지면서 하 룻밤을 보냈다. 의사가 아침에 먹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쥐노가 그녀에게 그 파인애플을 먹으라고 권했을 때에는) 나는 그 접시를 밀었다. "웬일인지 나는 파인애플을 먹을 수 없어요." 그는 그 저주받은 접시를 내 코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정말 그 파인애 플을 먹을 수 없다는 확증이 일어났다. 파인애플을 멀찌감치 밀어낼 뿐만 아니라, 창문을 열고 향수를 뿌려서 그 과일냄새를 몰아내야만 하였다. 그후로 가장 이상한 일은, 억지로 가 아니면 나는 파인애플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위사람들이 너무 마음을 쓰거나, 또는 스스로 자기 일을 너무 걱정하는 여자는 가장 병적인 현상을 나타낸다. 임신의 시련을 가장 쉽게 넘기는 여자는, 한편으로는 출산기능 에 헌신하는 모성형의 여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육체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을 가볍게 극복해나가는 남성형의 여성이다. 스탈 부인은 임신을 마치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슬기롭게 처리했다. 임신이 계속되는 동안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 태아는 이제, 어머니의 뱃속에 정착하여, 두 개의 기관조직이 서로 적용하고, 양자사이에 생물학적인 교환작용이 이루어져, 이것이 여자에게 안정감을 회복시켜준다. 그녀는 이제 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뱃속에 생긴 과일을 소유하고 있다. 임신 초기에 그 녀는 평범한 여자였고, 몸 안에 일어난 은밀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여위어간다. 후 에 그녀는 분명한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며 그 쇠약은 영광의 이면이 된다. 그녀가 괴로 워하는 신체불수는 점점 강화되어 하나의 구실이 된다. 많은 여성들은 임신중에 놀라운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정당화된 것 을 실감한다. 그녀들은 자기 몸을 언제나 관찰하고, 또 변화를 알아보고픈 기분을 가진 다. 사회적 이목 때문에 제 몸을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어쩐지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해도 무방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자기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다 아기를 위하 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에게 노동이나 노력 등을 구하지 않는다. 자기 몸 이외 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녀들은 마음 편히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 다. 그녀들은 휴가중이다. 그녀들의 삶의 의미는 거기, 즉 뱃속에 있으며, 이것이 그녀들 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인상을 준다. "당신만을 위해, 당신의 뜻대로 언제나 불 이 타오르고 있는 겨울날의 작은 난로와 같다. 그것은 도 한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서늘 한 샤워와 같이 거기 있다. 그것은 도 한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서늘한 샤워와 같이 거 기 있다" 고 H. 도이치가 인용한 사례 중의 어떤 여자는 말하고 있다. 마음이 흡족한 여 자는 또한 자기를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만족감도 느끼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소녀시 절 이후로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리고 아내로서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의존적 성향을 괴 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성적대상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다. 그녀는 조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영원을 약속받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자의까지도 소중한 것이 된다. 그것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입덧 때 먹고 싶은 것" 을 생각해 내게 한다. "임신은 여자에게, 다른 경우라면 부당하 게 보일 행위를 합리화시킨다" 고 H. 도이치는 말하고 있다. 그녀의 태내에 다른 생명체 가 있는 것 때문에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게 된 그녀는 이게 겨우 자기 자신을 충분히 즐 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콜레트는 [저녁별] 에서 자기의 임신기의 이와 같은 양상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충족된 여성의 행복감이, 교활하게 유유히 나를 사로잡고 있다. 나는 이제 어떤 불안, 어떤 불행도 하소연할 처지가 못된다. 병 중의 쾌적이라고 할까, 고양이가 빈둥거리며 목 청을 울리는 상태라고 할까. 조용히 나 자신을 평안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로, 아니 속된 말로 뭐라고 부를까? 아무튼 나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 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그렇다. 저녁마다 나는 내 인생의 좋은 한 때의 하나하나에 작별을 고하였다. 나는 그 좋은 한때를 보내기가 아쉬웠다. 모든 것을 쾌적하고 안락한 행복이 지배하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내 체중과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생명체의 작 은 호흡소리로 말미암아 온몸이 온화한 동물성과 무관심에 휩싸여 있었다.하 6월, 7월... 첫딸기, 첫장미, 이 임신을 긴 축하연이라고 부르지 않고,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분만의 고통은 잊어버린다. 그러나 한 번밖에 없는 긴 축하연을 잊을 수는 없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특히 마음이 산만한 때에는 졸음이 와서, 어렸을 때처 럼 땅바닥에서 풀밭이나 따스한 흙 위에서 잠들고 싶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이것은 유 일한 욕망, 건전한 욕망이다. 나는 임신 말기에 이르러 마치 훔친 달걀을 끌고 가는 쥐와 같았다. 몸을 가누기가 어 렵고 옆으로 드러눕는 것도 귀찮았다. 몸이 무겁고 지쳐 있었지만, 아직 축하연은 중단되 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은 나를 특권과 친절한 보호의 큰 방패 위로 운반해 주었다. 이처럼 행복한 임신기를 가리켜, 콜레트는 그녀의 한 여자친구가 "남자의 임신" 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실제로 콜레트는 이런 처지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지 않고, 용감히 참아 나가는 타입의 여성이다. 그녀는 임신을 해도 작가로서의 창작활동에 계속했다. "아이는 자기가 먼저라고 표명했다. 그래서 나는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이렇지 못한 다른 여자들은 더욱 둔하게 된다. 자기의 새로운 중요성을 무한정 되씹고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위에서 격려를 받으면, 남성이 지은 신화의 포로가 된다. 그 녀들은 지성의 명석에 '생명' 의 다산적인 밤을 대립시키고, 분명한 의식에 내면화의 신 비를 대립시키며, 풍부한 자우에 그녀의 배의 무게를 대립시킨다. 미래의 어머니는 자신 을 부식토 경작의 지반. 원천. 뿌리로 느끼고 있다. 그녀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그 수면은 세계가 형성될 때의 혼돈 그것이다. 그녀들 중에는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고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의 보배에 황홀감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세실 소비주가 그이 시 [싹튼 영혼] 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환희이다. 그대의 주위를 나의 생명이 따스한 털실처럼 감싸고 그 속에서 그대는 움츠러든 사지를 가만히 뻗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 솜털 속에서 내가 조심스럽게 애무하는 내 꽃에 맺힌 조그마한 싹의 영혼이여. 내 마음의 한 조각으로 그대의 마음을 만들자꾸나. 오, 솜털처럼 부드러운 나의 과실, 어여쁘고 촉축한 입술.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참으로 신기해요. 내가 조그마한 하나의 유성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 고, 귀엽고 연약한 지구를 내 손으로 빚어만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나 자신이 식물 이나 수액을 가진 대지의 자매인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마치 짐승처럼 땅 위를 걸어가고 있어요. 나는 피리와 잠에서 깨어난 꿀벌과 이슬로 가득찬 그 날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아이는 내 뱃속에서 뛰놀고 있으니까요. 이와는 달리 대단히 요염한 여자들, 즉 자신을 에로틱한 대상으로만 의식하고 자신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있는 여자들은 몸이 이그러지고, 추해져서 관능을 자극할 수 없게 된 것을 괴로워한다. 이런 여자에게 임신은 조금도 축복이나 풍요로 느껴지지 않 고, 자기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사도라 덩컨의 [나의 생애] 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린애가 드디어 나에게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게 한다. 대리석같은 나의 아름다운 육체는 이완되고 부서지고 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때로는 정력을 강 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어린아이는 나의 것, 나만의 소유라고 마음속으로 뇌까리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면서 나는 흔히 젊었을 때의 먼 여행과 방랑과 예술적인 미의 발견 등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들은 이제 옛말이 되어 안개 속에 묻혀 버렸으며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일밖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아기는 어떤 여자라도 만들 수 있는 걸작이다. 나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자면 누구나 다 아이를 갖는다면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 다. 그러나 나는 두려워했다. 무얼까? 그것은 분명히 죽음이나 고통 때문은 아니다. 그것 은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육신은 점점 초라해졌고,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물의 요정 같던 나의 아 름다운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야심, 나의 명성은 어디로 갔는가? 본의 아니게 나는 나 자신이 비참한 패배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인생이라는 이 거인과의 격투에서는 힘이 부친다. 그러나 그때 문득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내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둠 속에 서의 괴롭고 안타까운 기대, 어머니가 된다는 그 영예는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임신 말기에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에 분리가 시작된다. 여자는 태아의 최초의 움직임, 세계의 입구를 두드리는, 갇혀 있는 배의 내벽을 두드리는 그 발길질을 각자 다르게 느낀 다. 어떤 여자는 자주적인 생명의 존재를 알리는 이 신호를 환희로 받아들인다. 다른 여 자는 자기가 다른 인간의 용기가 된 것처럼 생각되어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여기서 태 아와 모체의 결합이 끊긴다. 자궁이 아래로 처져 임신부는 압박과 긴장을 느끼기 시작하 고 숨이 차게 된다. 그녀는 분명치 않은 종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라 금방 태어나려고 하 는 아기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하나의 영상, 희망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무겁게 현존하는 것이 되었 다. 그 현실이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과도기는 불안한 것이다. 분만이 유난히 무섭게 생각된다. 여자가 출산기에 가까워지면서 소아적인 공포가 다시 고개를 쳐 들기 시작한다. 어떤 죄악감으로 어머니에게서 저주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죽거 나 아기가 죽게 된다고 믿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에서 리즈를 등장시켜 분 만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아적인 여성을 묘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죽는다. 분만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귀중한 이 한 덩어리인 혈육의 보배를 자기 뱃속에 언제가지나 간수하고 싶다는 욕망과 귀찮은 존재를 추방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갖게 된다. 오랫동안 키워온 자기 꿈을 손에 갖고 싶어하지 만, 그것이 수반하는 현실적인 새로운 책임이 걱정된다. 이 두가지 욕망 중에서 어느 하나 가 이기는 경우도 있으나,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때로 이 불안한 체험에 단호하게 대 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자기자신이나 주위사람(어머니나 남편)에게 도움을 받 지 않고 혼자서도 훌륭히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기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 세상이나 인생이나 근친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며, 항 의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독립적인(모성형이나 남성적인 여자)는 분만을 앞둔 시기에도, 아니 분만때에도 능동적 이고 과감한 역할을 수행할 용기를 갖는다. 몹시 소아형인 여자는 수동적이 되어 산파나 어머니의 보살핌에 자기를 내맡긴다. 해산 때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자도 있고, 모든 수칙을 거부하는 여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해산의 위기에서 그녀들은 사회에 대한, 특히 모성에 대한 본질적인 태도를 나타낸다고 말할수 있다. 극기적인가, 체념하고 있는가, 버릇없는가, 과격한가, 반항적인가, 무기력한가, 긴장하고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 심리적인 경향이 분만의 시간이나 어려움에 큰 영향을 주게 된 다.(물론 순수하게 생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정상적인 여자는(어떤 가축의 암컷처럼) 자연이 그녀에게 시키 는 이 일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거친 시골여자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미혼녀는 혼자서 분만을 한다. 그러나 혼자 아이를 낳는 경우, 아이를 죽게 한다거나 모체 역시 위험한 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가 여자로서 운명을 실현할 때 역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류에게 자연과 인공이 결코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입증하 고 있다. 자연에 맡기면 여자의 개체로서의 이해와 종의 그것 사이에 충돌이 심하여 산모 나 아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쉽다. 외과수술에 의한 인간적인 간섭이 전에 그렇게 많았던 사고를 크게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는 거의 제거했다. 무통분만법은 "네가 수 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시게 3장 16절)라는 성서의 구절을 사문화 시키고 있다. 이런 방법은 미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에도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영국에서 제정된 1949년 3월의 법령은 이런 방법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런 방법이 제거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엄밀하게 할 수는 없다. 출산은 때로 24 시간 이상도 걸리는가 하면 두세 시간에 끝나는 경우도 있어 일반화할 수 없다. 어떤 여자 는 해산이 하나의 수난이다. 이사도라 덩컨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는 임신중에 줄곧 불안 해 했으며, 그런 심리적인 저항이 출산의 고통을 더욱 증대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대해 말이 많지만, 아기를 낳아본 여자는 그런것을 두려 워하지 않는다. 그런 것과 비교하는 것은 하나의 유희이다. 끊임없이, 아무 가책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잔혹한 악마는 자기 발톱으로 뼈와 신경을 짓이겨 놓는다. 사람들은 이런 고통은 곧 잊어버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외침과 탄식을 다시 듣기 위해서 나의 눈을 감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여자들은 이것을 비교적 견디기 쉬운 시련으로 생각하고 있다. 극히 소수의 여자들은 감각적인 쾌락도 느낀다. "나는 무척 성감적인 여자인가 보다. 출산도 내 게는 하나의 성행위였다. 나의 산파는 대단히 미인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목욕시키고 닦 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분만할 때 창조의 힘 같은 것을 실감했다는 여자도 있다. 그런 사람은 확실히 의지적이 고 생산적인 일을 한 것이다. 많은 여자들은 이와 반대로 자기를 수동적으로 고통을 당하 는 도구처럼 느끼고 있다. 산모와 태어난 아기와의 최초의 관계에도 큰 변화가 많다. 자기의 육체에서 느끼는 공허 감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도 있다. 갖고 있던 보물을 도둑맞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소리없는 벌집 벌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나의 이 피 한 방울을 다시는 너의 연약한 몸에 주지 못한다. 나는 빈집이 되었다. 거기서 죽은 사람은 가져가 버렸다. 세실 소바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또 다음과 같이도 썼다. 너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얼굴에는 이미 다른 하늘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태어났다. 나는 어린 연인을 잃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내 몸에서 피의 공허가 놀란 소란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아주 젊은 어머니라면 경이로운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자기 몸에서 만들어졌고, 또 그 몸에서 나온 생명에 대해 느끼게 되는 것은 신기한 기적이다. 그러나 새 생명을 지 상에 던진 이상한 사건 속에서 어머니는 진정 무엇을 했는가? 그녀는 알 수 없다. 아기는 그녀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녀는 알 수 없다. 아기는 그녀가 자기 몸을 더 나 밖에 있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슬픔이 엇갈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환멸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자는 자기 아기를 자기 손처럼 확신하게 자기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아기가 느끼는 것은 이제 모두 그 아기 속에 들어 있다. 더욱이 그 아기는 뚝 떨어져 있어 그녀에게는 그것이 불투명해졌고, 그러므로 통제도 불가능하다. 그녀는 그를 모르며 낯설기만 하다. 임신중에 그년 그가 없이 살아왔다. 이 꼬마 이방인과 어떤 과거도 공통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그와 곧 친숙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신참자이다. 그녀는 그를 맞아들이는 자신의 태도가 담담한 데 놀랄 정도이다. 임 신중의 상상 속에 있던 아이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며, 그녀는 미래의 어머니상을 여러 모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주 작은 한정된 한 인 간으로 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연적이고 연약하고 방자하다. 아기가 태어나 여기 이렇 게 있다는 현실적인 기쁨에는 단지 그것뿐이라는 후회가 섞여 있다. 많은 젊은 어머니들은 아기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분리 이전에 갖고 있던 아기와의 동물 적인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 그것은 임신보다 더 피로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아기 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게, 임신부가 느끼고 있던 휴식과 평화와 만족의 상태를 계속하 도록 허용한다. 콜레트 오드리는 자신이 쓴 여주인공의 삶을 이렇게 말하고있다. "아기가 젖을 빨 때에 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그것이 몇 시간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그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기가 살찐 꿀벌처럼 자기 가슴에서 떠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없는 여자의 경우, 아기와의 구체적인 유대를 회복할 수 가 없어서 태어났을 당시의 놀라움에 가득찬 그 냉담이 계속되는 여자도 있다. 딸에게 모 유를 먹일 수 없었던 콜레트의 경우도 그 한 예이다. 그녀는 언제나 솔직하게 초기의 모성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결과, 집안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이 아이에게 충분한 애정을 쏟고 있을까? 어쩐지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확실히 경탄 했다.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기라는 놀라운 존재에 대해 그런 감 정을 느끼고 있었다. 장밋빛 새우껍질처럼 투명한 그 발톱, 땅을 밟지 않고 우리 곁에 온 그 발바닥, 지상의 풍경과 푸른 꿈 사이에 놓은 부드러운 속 눈썹, 간신히 째진 쌍각의 음 순이 맞닿아 꽉 닫힌 은행알 같은 그 조그마한 성기, 내가 딸에게 바쳤던 섬세한 찬미, 나 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광경을 보고도, 나는 거기서 현혹 된 어머니의 조심성이나 경쟁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언제 나에게 더욱 곤란한 침해를 가하려는 제2의 징조가 나타날 것인가. 나는 여러 가지 주의, 은밀히 치솟는 질투의 흥분, 거짓 혹은 참된 노파심, 자기가 채권자인 한 생명 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는 자부심, 타인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다소 교활한 의식,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드디어 평범한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래도 내가 완전히 마음을 놓게 된 것은 뜻 모를 말이 아기의 귀여운 입술 위에서 꽃처럼 피어 났을때, 지식이나 장난이나 애정까지도 표준형인 아기를 한 사람의 딸로 만들고 그 딸을 내 딸로 만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새로운 책임을 두려워 하는 어머니도 적지 않다. 그녀들은 임신중에는 자신을 자 기의 육체에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자주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들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는한 인간을 마주 대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 은 병원에서 평온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지낼 동안은 아기를 귀엽게 애무하지만, 집에 돌아 오자마자 무거운 짐으로 느끼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조차 기쁨을 주 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가슴의 형태가 이지러질까봐 걱정한다. 유방이 찌그러지고, 젖꼭지 가 아픈 것을 원통하게 여긴다. 아기가 자기의 기력과 생명과 행복을 빨아먹는 것처럼 생 각된다. 아기는 과중한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존재로, 이미 자기의 일부로 생각되지 않는다. 아기는 폭군이다. 그녀들은 자기의 유체, 자유, 자아 전체를 위협하는 이 꼬마 타인을 적의 를 갖고 바라본다. 이밖에 여러가지 이류가 첨가된다. 여자와 어머니의 관계는 언제나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H. 도이치는 자기 어머니가 만나러 올 적마다 젖이 나오지 않는 젊 은 아내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그녀는 자주 남의 도음을 구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여 자가 자신의 아기를 돌보는 것을 질투하고, 그 아기에 대해 불쾌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어린아이의 관계, 아버지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도 큰 영향을 준다. 경제적, 감 정적 이유의 전체가 아이를 무거운 짐이나 속박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혹은 해방이나 보배 나 안전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적의가 명백한 증오가 되어, 극단적인 무 관심이나 학대로 표시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어머니가 자기의 의무를 의식하여, 이런 나쁜 감정과 싸운다. 거기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생기고, 불안 속에서 임신기의 진 정되지 않은 걱정 같은 것이 지속되는 것이다.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은 아기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 싶은 강박관념이나 무서운 사고를 상상하는 어머니는 아기에게 적의를 품으면서 이것을 애써 억압하려고 하는 것을 인정하 고 있다. 어쨌든 다른 인간관계와 다른 점은, 처음에는 아기가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기의 미소, 더듬는 말투 같은 것은, 어머니가 아기 에게 갖는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 귀엽다, 이런 착한 아기는 없다, 혹은 귀찮고, 신통치 않 고, 보기 싫다라는 것 등의 감정은 어머니에 의해서지, 아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감증으로 불안스럽고 우울한 여자가 아기에게서 다정한 친구, 하나의 온정, 자극을 얻어 우울을 잊으려고 하면, 대개는 환멸을 느끼게 마련이다. 사춘기나 성적 입문이나 결혼의 ' 과도기'처럼, 모성의 그것도 외적인 사건이 자기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여 정상으로 돌리기 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울한 환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소피아 톨스토이에게서 이런 심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9개월 동안이 나의 일생에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10개월째에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녀의 일기에 판에 박힌 기쁨을 쓰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거기에는 슬픔과 책임의 두려움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아기를 낳았다.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을 경험하고 회복되어 조 금씩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기와 남편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속에는 뭔가 깨져 있다. 뭔가가 나에게 너는 앞으로 언제나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가족에게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식에 미숙한 사랑과 남편에 대한 그 호들갑스러운 사랑을 두 려워하던 나로서는 이제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 라고들 말한다. 이런 생각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의 애정은 얼마나 강 한 것인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된다. 이것은 리오바(톨스 토이)의 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톨스토이 부인이 이처럼 남편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하 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반감이 마지못해 응한 포옹에서 생긴 아이 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K. 맨스필드는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애무를 지겨워하는 젊은 어머니의 망설이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식에게 애정과 동시에 일종의 공허한 인상을 느끼 고, 이것을 완전한 무관심과 같은 침울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린다는 정원에서 자신의 막 내아이 옆에서 쉬면서 남편 스탠리를 생각하고 있다. 지금 그녀는 그와 결혼한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 는 스탠리가 아니다. 즉 평소의 스탠리가 아니다. 소심하고, 감수성이 강하고, 순진하고, 밤마다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스탠리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가 스탠리를 보 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번개처럼 가끔 평온한 순간이 있지만, 그 이외에는 언제나 금방이 라도 불이 날 것 같은 집안에서, 난파하는 배위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위험속 에 있는 것은 언제나 스탠리였다. 그녀는 그를 구출하고, 돌보고, 안정시키고, 그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엔 아이 낳는 일을 걱정해 야 했다... 아기를 낳는 것은 여자의 공통된 운명이라는 남편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임신중에는 지치고, 쇠약해지고, 의기 소침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운 것은, 그녀가 자기 어린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서운 여행을 하나하나 경험할 때마다 찬바람이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어린애에게 줄 온정이 남 아있지 않았다. 이 꼬마 사내아이는 자기 어머니의 것이며, 베릴의 것이며, 누구나 원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자기 품안에 안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가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냉담했다. 그녀는 내려보았다... 아이의 미소에는 참으로 기이 한 뜻밖의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린다는 따라 웃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고 냉정하 게 아이에게 말했다.. "난 아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아기는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엄마가 날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는 바보처럼 어머니에게 팔을 내저었다. 린다는 풀 위에 앉았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기만 하니?" 하고 그녀는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엄마 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그렇게 웃지 않을거야..." 린다는 자기에 대한 아이의 큰 신뢰심에 놀랐다. 아니다. 정직해야겠다. 그녀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것...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조용히 아이에게 중얼거렸다. "잘 있었니! 내 야 릇한 아기야..." 이런 사례는 모성본능이라는 것이 그다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 하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인류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어머니의 태도란 그녀의 상황의 전 체에 의해, 그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법은 방금 보아온 것처럼 매우 다양하다. 만일 사정이 불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머니는 어린애에게서 자기를 풍부하게 하는 것 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현실의 보증과 같았다... 이 아이에 의해 그녀는 모든 것 에 먼저 그녀 자신에게 유력한 단서가 생기게 된다. 콜레트 오드리는 어느 젊은 여자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다른 어머 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아이는 내 팔과 내 가슴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처럼 내 힘의 한계에까지 실려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고요와 어둠 속에서 지하로 처박았다. 그 아이는 단번에 이 세계의 무게를 내 두 어깨위에 얹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아이를 원했던 것이다. 나 혼 자서는 모든 게 너무 가벼웠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출산녀'라고 불러야 적합한 여성은, 아기가 젖을 때자마자, 아 니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다음 임신을 원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많은 여성들 은 아이가 자기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이 진정으로 아이를 가졌 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아이는 그녀들의 불명확한 조각이 아니라 세계의 작은 한 부분이 다. 아이는 이미 모체에 달라붙어 은밀히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게 되었다. 출산에서 비롯된 우울이 지나간 후, 소유하는 어머니 로서의 즐거움을 세실 소바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제 너는 나의 작은 연인 엄마의 커다란 침대 위에서 너에게 입을 맞추고 껴안고 너의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잘 있었니, 나의 귀여운 피와 기쁨과 알몸으로 된 조각상이여 나의 작은 화신, 나의 감동... 여자는 아이에게서 페니스의 대용을 발견한다는 말이 있고 또 그런 말이 거듭되어 왔다. 이것은 전혀 옳지 않은 말이다. 사실, 다 자란 남자가 자신의 페니스를 근사한 장난감으로 간주하는 일은 없다. 그의 이 기관이 갖고 있는 가치는 그것이 소유를 보증하는 바람직한 대상물의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성인여자는 남성에 대하여, 그가 취하는 먹이를 부러워하는 것이지 취하기 위한 그 기구 자체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남성의 포옹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공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만족시킨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내어주고, 남자에게서는 얻지 못하는 정부에 필적하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관계는 각각 특이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에게서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받 는 여자에게서처럼, 육체적인 충실감을 발견한다. 그것도 항목에서가 아니라, 지배에서 발 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구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다. 자기 의 먹이, 자기의 분신이 되는 동시에 자연이며 의식인 하나의 타자를 파악한다. C. 오드리 의 여주인공은 자기의 아이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손가락을 위해 생긴 피부, 그것은 모든 고양이나 모든 꽃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아이의 육체는, 여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육체를 통하여, 후에는 이 세계의 도처에서 원한 그 부드러움, 그 따뜻한 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식물이며 동물이기도 하다. 그 눈에 는 비와 개울과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이 있다. 그 발톱은 산호이며, 머리털은 비단같이 부 드러운 풀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형이며, 작은 새이며, 새끼고양이다. 나의 꽃, 나의 진주, 나의 병아리이며 나의 어린 양이다. 어머니는 애인처럼 속삭이고, 애인처럼 소유형용 사('나의'라는 말)를 함부로 쓴다. 즉 애무, 키스와 같은 독점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녀 는 아기를 가슴에 껴안고 자기 팔과, 자기 침대의 온기로 감싼다. 때때로 이와 같은 관계 가 뚜렷한 성적인 특색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앞에서 내가 일부를 인용한 슈테켈이 수록 한 고백에서도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아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아이는 좀처럼 자라지 못하고, 우리는 둘 다 체중이 줄어들었으므로, 기쁜 줄을 몰랐어요.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성적인 것처럼 생 각되어 그에게 가슴을 드러내주면서도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내 몸에 밀착되는 작은 몸뚱 이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그는 작은 손이 내 몸에 밀착되는 작은 몸뚱이 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그는 작은 손이 내 몸을 만지면 나는 몸이 오싹 떨렸어요... 내 사랑이 모두 이 아이에게 흘러들어 갔어요... 아이는 자주 나와 함께 있었어 요. 내가 침대에 누워 있으면,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아이는 침대에 다가와서 내 위에 올 라타려고 했어요. 그리고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애무하고,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더듬으려 고 했어요. 그것은 내게 무척 쾌감을 주어, 아이를 물리치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나는 그애 의 페니스를 가지고 놀고 싶은 유혹과 자주 싸워야 했어요. 아이가 성장하면, 모성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처음에 아이는 '표준아기'에 불과하 다. 그리하여 아이는 다만 일반성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후 아이는 조금씩 개성이 나타난 다. 대단히 지배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자는 이렇게 되면 아이에게 냉담해진다. 이와 반대로 어떤 여자들은(콜레트처럼) 바로 이때 여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모자의 관 계는 점점 복잡해 진다. 아이는 어머니의 분신이며, 그 어머니는 아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하나의 자주적인 주체이므로 반항한다. 그는 이제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 러나 그 미래는 한 사람의 청년과 어른이다. 그것은 하나의 부이며 보물이다. 또한 부담이 고 폭군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관용의 기쁨이다. 그녀는 아이에 게 봉상하고 제공하며 행복을 창조하는 데에 만족을 느껴야 한다. 바로 C. 오드리가 묘사 한 어머니처럼. 그래서 그는 마치 책에 쓰여 있는 것 같은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유년시 절은 책에 쓰여 있는 그것에 비하면 진짜 장미를 그림 엽서에 그린 장미와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의 행복은 내가 키운 젖과 마찬가지로 역시 내게서 나온 것이었다. 연애를 하는 여자처럼 어머니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 대단히 기 뻐한다. 그녀는 자신이 크게 요구될때 비로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게 되며, 이 요구에 기꺼 이 응한다. 그러나 모성애의 곤란과 위대성은 그것이 상호성 위에 서 있지 않는 데 있다. 여자는 자기 앞에 한 사람의 사나이, 영웅, 반신을 상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우연적인 육체속에 잠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은 육체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 린애는 아무 가치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도 없다. 그런 어린애를 상대라고 있는 여자는 역시 외톨이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기가 제공하는 반대급부를 기대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사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용에 대하여는 남자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모성'의 종교가 모든 어 머니는 모범적이라고 선언하게 되면, 거기서 기만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단히 보 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 모성은 나르시시즘, 타애정신, 몽상, 성실, 기만, 헌신, 쾌 락, 멸시 등의 혼합인 것이다. 우리의 풍습은 아이에게 대단히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이의 손발을 묶다시피 하여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으로, 그 어머니는 언제나 욕구 불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여성 은 성적으로는 불감증에 걸려 있거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사 회적으로 남자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세계나 미래에 대해서도 손쓸 여지가 없다. 그녀는 아기를 통하여 자기 인생의 모든 손실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만일 사람들이 오늘날 여성이 놓여있는 상황이 얼마나 여자의 능력발휘를 어렵게 하고, 얼마나 많은 욕망과 반항 심과 자부심 그리고 요구를 마음속에 몰래 간직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 무방비의 아기 가 이런 여자에게 맡겨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녀가 인형을 어르거나 못살게 구는 것처럼 그 행동은 상징적이지만, 이 상징은 아이에 게는 가혹한 현실이 된다. 자기 아이를 때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 면,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에게, 사회에서, 또는 자기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아이가 맞고 있다. 물루지는 (엔리코)에서 이런 괴로운 오해를 표현했다. 엔리코는 어머니가 이렇게 미친 듯이 때리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착란에게 깨어난 어머니는 후회와 애처로움 때문에 맞 는 아이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올테트 르뒷의 (가사)에 나오는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감정을 폭발 시킴으로써 사실은 자기를 버린 유혹자와 자기를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생애에 대해 복수 를 한다. 모성의 이와 같은 잔혹한 양상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위선적인 수치심 에서 '악한어머니'라는 생각을 살짝 숨기고 계모라는 타입을 생각해 낸 것이다. 두번째 어 머니가, 죽은 '좋은 어머니'의 자식을 학대한다. 사실은 세귀르 부인이 현모인 플뢰르빌 부 인과 대조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피쉬니 부인이야말로 그런 어머니이다. 쥘 르나르의 (홍당 무)이래로, 어머니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엔리코), (가사), S. 드 테르바뉴의 (어머니의 증오), 에르베 바쟁의 (주먹에 올려놓은 독사)등이 그렇다. 이런 소설에 쓰여진 내용이 다소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여자는 도덕관념과 자제심에서 자기의 자발적인 충동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억압된 것은 히스테릭한 싸움이나 손찌검, 분노, 모욕, 처벌 등으로 번개처럼 외부에 표출된다. 전적으로 사디즘적인 어머니는 젖혀놓더라도, 유별나게 변덕스러운 어머니는 세상에 얼 마든지 있다.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은 지배이다. 어린애는 장난감이다. 사내아이라면 그녀 는 아무렇지 않게 페니스를 가지고 논다. 계집이라면 인형으로 삼는다. 후에도 그녀들은 꼬마노예가 맹복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한다. 이런 어머니는 허영심이 강하므로 아이를 재주 부리는 동물처럼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질투가 많고 독점적인기 때문에 그 아이를 자기 이 외의 다른 사람과 때어놓는다. 여자는 자기가 아이를 돌본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경우가 적 지 않다. 그녀는 아이를 통해 하나의 상상적인 존재(인간)를 만들어, 이 존재가 자기를 훌 륭한 어머니로서 감사하고, 자기가 그 존재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코르넬리가 자기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이애들이 나의 보배예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 을 때, 그녀는 후세에 가장 나쁜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이와 같은 자존심에 가득찬 제스처를 취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살과 뼈로 된 작 은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그러나 이런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작은 존재만으로 는, 그녀들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녀들은 아이에게 아버지를 닮으라고 가르치거나 닮지 말라고 가르친다.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존경받고 있는 조상의 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 다. 그녀들은 인기 있는 모델을 모방한다. H. 도이치의 말에 의하면, 독일의 어느 여성 사 회주의자는 릴리 브라운을 종경하고 있었다. 이 유명한 여자 선동가에게는 천재적인 아들 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죽었다. 이 여성을 모방하려던 한 부인은 자기 아들을 어디까지 나 미래의 천재로 취급했는데, 그 결과 그 아이는 자라서 도둑이 되었다. 이처럼, 터무니없 는 압제는 반드시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H. 도이치는 다른 사례로 여러 해에 걸쳐 그 생활을 관찰한 한 이탈리아 부인의 경우를 들고 있다. 마제티 부인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는데, 그 자녀들과 사이가 나쁜 것을 늘 개탄하고 있 었다. 그녀는 남편이 도와주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구 보다도 자신이 잘났고, 특히 남편이나 자식들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 밖에서는 매우 신중히, 그리고 점잖게 행동했으나 집 안에서는 대단히 신경질적이어서 심한 말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언 제나 '올라서기'를 원했다. 그녀는 야학에도 다녔다. 16세 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야심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공부를 계속하여 자기의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남편은 훌륭한 노동자였으나, 아내의 공격적 이고 우월감에 가득찬 태도에 반감을 갖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아내에게 여러 번 임 신을 하게 한 것도 아마 복수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남편과 별거하여 한동안 자기 시분 을 체념했던 그녀는 남편에게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식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공부도 잘하여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장녀 루이즈가 16세가 되자 어머니는 딸이 자기와 같은 경험을 되풀이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루이즈를 엄하게 다루었다. 류이즈는 이에 복수하려는 듯이 사생아 를 낳았다. 아이들은 모두 결속하여 행실에 대해 잔소리가 많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처럼 대 응하기로 했다. 그러다간 까닭도 없이 번갈아 그 애정을 쏟는 대상을 바꾸기도 했다. 이것 이 아이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질투를 자극했다. 또 다시 한 딸아이기 남자와 놀아나 성병 에 걸리는가 하면 또 다른 사생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 사내아이는 자라서 도둑이 되었 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자식들에게 너무 높은 이상을 추구했 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완고한 자녀교육과 앞에서 내가 말한 변덕수러운 사디즘은 곧잘 배합된다. 어머니 는 화가 나면 '사람을 만든다'는 구실로 자식들을 억압한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도가 실패 로 돌아가면 반감이 더욱 심해진다. 아이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또 하나의 태도는 자학적인 헌신으로, 이것 역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어머니들은 마음의 공허를 매우기 위해 그리고 분명히 자각하지 못하는 적의로 자기를 벌하기 의해 자식의 노예처럼 된다. 그녀들은 병적인 불안을 한없이 조성하 여, 아이가 자기 곁을 더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근들은 모든 쾌락과 개인적인 생활을 단 념한다. 그리하여 희생자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기가 희생을 치름으로 써 아이에게 일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권리를 얻으려고 한다. 이런 자기포기는 폭군적인 지배력과 결부되기 쉽다. 슬픈 어머니는 자기의 괴로움을 사 디즘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로 삼는다. 어머니의 이와 같은 체념의 도전은 아이에게 죄의식 을 느끼게 하여 그것이 그의 생애에 무거운 체념의 도전은 아이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 여 그것이 그의 생애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격적인 방법보다 이것이 오히려 더욱 해롭다. 이때문에 타격을 받게 되면 아이는 마음이 흔들려 아무 방어자세도 취하지 못한다. 때로는 구타에 의해, 때로는 눈물로 인해 아이는 죄인처럼 되어버린다. 어머니의 변명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에게 약속된 행복의 완성을 아이가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 었다. 자기가 걸려든 기만의 원한을, 순진하고 명랑한 아이에게서 풀어보려는 것이다. 옛날 에는 인형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자매나 여자친구들을 위해, 아기의 시중을 돌 보았을 때에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었으나 지금은 사회와 남편과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자 신의 자존심이 이 이방인 같은 작은 생명에게 마치 자기가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책임을 지운다. 특히 남편은 아이의 결점을 마치 잘못 만든 요리나 아내의 비행으로 돌려 화를 낸 다. 남편의 추상적인 요구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립적인 여자는 가정에서의 고독, 무관심 혹은 권위 때문에 자기가 굴종하고 있는 지배적 인 의지에 아이를 복종시키면서 자기도 따라야 하는 여자들보다 훨씬 명랑하다. 왜냐하면 짐승의 그것처럼 신비적이고, 자연의 힘과 같이 소란하고 무질서한,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하나의 생명을 예정된 틀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잠자코 키울 수 없고, 어른처럼 설득할 수도 없다. 아이는 타이르는 말에 대하여는 울음과 동물성으로 대항하고, 압박에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대면서 그런 애매성을 잘 조작한다. 이렇게 해서 눈앞에 놓인 문제는 확실히 흥미를 자아낸다. 어머니에게 여가가 있을 때에는 제법 교육자답다. 공원에 조용히 놓아둔 아기는 그가 그녀의 뱃속에 들어 있었을 때처럼 또 하나의 알리바이이다. 어머니도 종종 어린애 같은 데가 남아 있으므로 지난날의 유희, 말, 걱정, 기쁨들을 돌이 키우면서 아이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만들거나, 다른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장보러가 거나, 손님을 접대하거나, 또는 특히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있을 때에는 아이는 귀찮고 성가 신 존재일 따름이다. 이제는 아이를 '예의 바르게' 키울 여가가 없다. 먼저 아이가 나쁜 짓 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이는 깨고, 찢고, 더럽힌다. 물건이나 아이 자신에게도 아이는 언제나 위험한 존재이다. 아이는 움직이고, 외치고, 떠들고, 소리를 지른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산다. 이 생명이 부모의 생활을 뒤숭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친자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지 않는다. 여기서 비극이 생긴다. 언제 나 아이 때문에 훼방을 받게 되는 부모는 아이에게 끊임없는 영문 모를 희생을 입힌다. 부 모의 안정과 아이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희생시킨다. 그러므로 아이가 반항하는 것은 당연한다. 그는 부모가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한다. 어머 니는 아이의 의식 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꿈, 두려움, 고집, 욕망은 하나의 불투 명한 세계로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법칙을 부조리한 폭력처럼 느끼고 있는 생 명을, 어머니는 밖에서 암중모색의 방법으로 규제할수 있을 뿐이다. 아이는 성장해도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가지 않은 가치나 관 심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아이는 어머니를 경멸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아이는 자기의 남성적인 특권을 자랑삼아 여자의 명령 같은 것을 비웃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숙제를 하 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를 풀어주거나 라틴어 문장을 번역해 주지도 못한다. 아이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런 보람없는 수고를 눈물이 날 지경으로 따분하게 여기는 때도 있지만, 남편은 그런 일의 괴로움을 별로 알지 못한다. 자기와 마음이 잘 통 하지 않는 존재, 그렇지만 역시 인간적인 존재를 지도, 감독하며, 주로 거기에 반항함으로 써 자신을 확립해 가는 하나의 자유에 간섭하는 그런 일이다. 아이의 성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전자 쪽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거기에 더 만족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인정하고 있는 위력, 그리고 남자들이 구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특권 을 고대하여 많은 여셩들은 아들을 원한다. "아들을 낳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하 고 그녀들은 말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자는 영웅을 낳을 것을 꿈꾼다. 드리고 영 웅은 확실히 남자의 것이다. 아들은 장차 우두머리, 지도자, 장군, 창조자가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의 의지를 지상에 실현할 것이며, 어머니도 그 영원한 성취에 동참할 것이다. 그녀가 짖지 못했던 집, 그녀가 탐험하지 못했던 나라들, 그녀는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소 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아들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 서 어머니의 태도에 모순이 생긴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는 모순이 가장 적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상 모 성에서도 결혼이나 연애의 경우처럼, 여자는 남자의 초월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만일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경험에서 남자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경우에는 어린의 모습으 로 축소된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그녀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장차 그게 뽑내게 될 성기를, 빈정거리는 친숙감을 느끼면서 다룰 것이다. 때로는 "얌전히 굴지 않으 면 떼어버릴 테야"하고 아이를 위협하기도 한다. 가장 겸허하고 얌전한 어머니가 장차 아들을 영웅으로 소중히 키우는 경우에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분명히 하기 위해 아들을 내재적인 현실에 제한하려고 한다. 그녀가 남편을 아이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갓난아기로 취급한다. 어머니가 아들을 거세시키려 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또 너무나 단순하다. 그녀의 몽상은 더욱 모 순되어 있다. 아들이 무한히 뻗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손아귀에 넣고 세계 가 자기 앞에 무릅을 꿇게 하여 이를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들이 우유부단하고, 잘 먹고, 너그럽고, 소심하고 외출을 싫어하도록 유도한다. 운동이나 친구와의 교제를 금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이 자랑 스러운, 대담한 모험가나 운동선수나 천재가 되지 않으면 환멸을 느낀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몽테를랑이 말한 것과 같고 또 모리아크가 <제니트릭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다. 다행히 남자아이 는 이런 압박에서 비교적 쉽사리 벗어날 수 있다. 풍습이나 사회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 고 어머니 자신도 단념하게 된다. 그녀는 남자와 투쟁하여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슬픈 어머니의 역할을 하거나, 자기를 이기는 승리자를 낳았다는 자존심을 곱씹으며 자위한다. 소녀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주장도 한결 강하다. 그리고 모녀의 관계는 더욱 극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 정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분신을 찾아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자기 자신과의 애매성을 모두 딸에게 투영한다. 이 제2의 자아의 타성(타자로서의 성격)이 분명해지면, 어머니는 자기가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갈등은 모녀간에는 더욱 심해지 게 마련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생애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어서, 딸을 통해 자기를 다시 한 번 더 구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적어도 그것을 환멸 없이 받아 들이는 여자도 있다. 이런 여자 는 딸에게 자기의 경험, 혹은 자기가 하지 못한 경험을 할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그리하 여 자기 딸에게 행복한 청춘을 갖게 하려고 한다. 콜레트는 이처럼 균형이 잡히고 너그러 운 어머니의 한 사람을 묘사했다. 기도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딸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기쁨을 찾고 있으므로, 딸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만족 시켜준다. 자기의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도 하고, 또한 자기를 초월하는 이 분신에게 헌 신하여, 어머니가 그 속에 자기를 모두 옮겨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자아를 포기한다. 유일한 걱정은 자식의 행복이다. 그녀는 다른면에는 이기적이 며 냉혹하기까지 하다. 그녀를 두렵게 하는 위험은 열애하는 딸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다. 새비네 부인이 딸 그리냥에게 그러했다. 딸은 기분이 나빠 어머니의 억압적인 헌신에서 벗 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한평생 어머니같이 자기의 책임에 대해 소심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 너무 귀엽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특히 젊은 딸에게 참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모성의 어떤 자학적인 형태이다. 어떤 여자들 은 자기가 여자인 것을 절대적인 저주처럼 여기고 있다. 그녀들은 딸이 또 하나의 새로운 희생자라는 사실에서 쓰디쓴 기쁨을 느끼면서, 바라고 혹은 받아들인다. 이와 동시에 그 딸을 낳은 것을 일종의 죄악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녀들의 회한, 달을 통하여 자기자신에 게 느끼고 있는 연민은 큰 불안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달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 는다. 그리하여 15년, 20년이나 딸과 같은 침대에서 잔다. 딸은 이런 불안한 정열의 불꽃 에 의해 소멸해 버린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기들의 여성적인 조건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 조건을 혐오하고 있다. 그녀들은 반감을 느끼면서 그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들이 자기의 성에 대해 느끼고 있는 혐오는 결과적으로 딸을 남성적으로 키우려고 한다. 그리하여 딸에게 관대한 어머니 는 많지 않다. 딸을 낳았기 때문에 속상한 어머니는 "너도 여자가 되는 거야"라는 그 의미 가 분명치 않은 저주로 딸을 맞아들인다. 그녀는 자기 분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딸을 훌륭 한 인간으로 만들어, 자기의 열등성에 대해 보상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시달 린 약점도 딸에게 심어 주려고 한다. 때로는 딸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물려주려 고 한다. "내게 좋았던 것은 네게도 좋은 거야." "나는 이렇게 자랐으니, 너도 나와 같은 운명에 놓이는 게 바람직해." 이와 반대로 딸이 자기를 닮는 것을 엄하게 금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딸에게 자기 경험이 좋은 경종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동이다. 화류 계 여자는 딸을 수도원에 보내고, 무지한 여자는 딸에게 공부를 시킨다. <가사>에는, 딸 에게서 젊었을 때 자기의 실수로 빚어진 언짢은 결과를 발견한 어머니가 딸에게 열심히 설득한다. 잘 생각해 봐. 만일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죄가 어떻고 해도 나는 그 죄라는 걸 잘 몰랐어. 남자가 너를 불러 도 따라가선 안 돼. 너는 자기 길을 똑바로 가야 해. 뒤돌아 보지 말아. 내 말 알았지? 미 리 일러두었으니까. 그런 일이 네게 일어나서는 안 돼.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엄마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꺼야. 밖으로 내쫓을 테야. 마제티 부인이 딸에게 자기가 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시키지 않으려고 애쓴 나머지, 오히려 그런 실수를 앞당기게 된 사례를 앞에서 보아왔다. 슈테켈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증오의 복잡한 한 사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어머니는 네번째로 딸을 낳았을 때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딸은 귀엽고 매력 있는 아이였는데... 그녀는 이 딸이 남편의 모든 결점을 물려받았다고 구박하 는 것이었다... 이 아이를 임신할 무렵에 한 남자가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이 남자 는 시인이었다. 그녀는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의 괴테의 <친화력>에서처럼, 태어났 을 때부터 남편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그 밖에 그녀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중하는 성격, 상냥함, 신앙, 관능성 등이 그러했다. 그녀는 아이 가 억세고, 꿋꿋하고, 끈기 있고, 순결하고, 정력적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서 보이는 남편의 모습보다도 자기 모습을 더욱 증오하고 있었다. 진정한 정신적인 갈등이 생기는 것은, 소녀가 좀더 성장한 다음이다. 딸이 어머니에게 반항하여 자주성을 갖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혐오스러운 배은망덕이다. 그녀는 자기에게서 벗어나려는 딸의 의지를 묶어두려고 안간힘 을 쓴다. 자기의 분신이 타자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맛 보는 쾌감, 즉 자기의 절대적인 우월성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여자가 맛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식들, 특히 딸을 통해서이다. 만일 그녀가 이런 특권이나 권위를 버 려야 한다면, 그녀는 자기가 훼손된 것처럼 생각한다. 정열적인 어머니건, 반감을 갖는 어 머니건, 자식의 독립은 그 희망을 좌절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이중으로 질투한다. 자기 딸 을 빼았아가는 세계와 세계의 일부를 획득하여 그것을 그녀에게 훔쳐가는 달에 대해서 말 이다. 이 질투는 먼저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일어난다. 어머니는 때때로 남편을 가정에 메어두기 위해 자식을 이용한다. 이것이 실패로 끝나면 그녀는 한을 품게 된다. 반면에 성 공하면 그녀는 곳 반대의 형태로 소아콤플렉스를 부활시킨다. 그녀는 딸에게, 전에 자기는 버림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딸을 몹시 사랑하는 외국인과 결혼한 한 프랑스 여성이 어느날 화가 나 있었다. "난 이 제 외국사람과 사는 것 질색이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딸이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는 경 우가 많다. 어머니는 고된 일로 딸을 괴롭히고, 나이에 비해 무리한 성실성을 요구한다. 그 녀에게는 이 딸이 경쟁자이기 때문에 성인으로 취급한다. 한편 딸도 "인생은 소설이 아니 다. 모든것이 장밋빛일 수 없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을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단지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마구 때린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주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녀에게 못마땅한 것은, 열한두 살의 어린 딸에게 보여줄 우월성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딸은 벌서 가시쯤은 훌륭히 해치월 수 있다. 이제는 작은 여자이다. 그 기 민성이나 호기심이나 영리함은 많은 점에서 성인여자보다 오히려 월등하다. 어머니는 여자 로서의 자기 세계에 군림하기를 원한다. 유일자이고, 다른 사람으로 대처될 수 없는 존재 이고자 한다. 그런데 어린 조수의 총명함은 어머니의 직책을 일반화시켜 버린다. 그녀는 이틀 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서는 집안이 난잡하다고 딸을 알고 몹시 저기압 이 된다. 딸이 완전히 자기를 확립하는 것은 더욱 참을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딸이 가 정의 압박에 못이겨 도움을 청하러가는 여자친구들을 몹시 싫어한다. 그애들은 딸을 함부 로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애들을 욕하고, 딸에게 그애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나쁜 영향을 구실로 교제를 금한다. 자기가 주지 않는 영향은 모두가 나쁜 것이다. 그녀는 딸과 친분을 갖고 있는 자기와 같은 또래의 여자들(교사나 딸의 친구의 어 머니)에게 특히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런 친밀감은 어리석고 불건전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아이의 명료함, 대범함, 유희, 웃음 같은 것도 분통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게게는 관대하다. 그들은 남성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남자를 상대하여 지는 경쟁은 진작에 단념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아닌 다른 여 자가, 어째서 자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특권을 즐기려고 한단 말인가? 함정 속에 포로가 되어 있는 그녀는 딸이 가정에서의 권태를 잊게 할 일과 놀이를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딸의 이와 같은 탈출은 그녀가 존중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딸이 점점 더 자랄수록 원망은 어머니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다. 어머니는 해마다 노쇠해 간다. 반면에 딸은 해마다 더욱 발랄하고 화사해진다. 어머니는, 딸의 앞날에 전개되는 이 미래라는 것은 바로 달이 자기에게서부터 빼앗아가는 것이라 느끼게 된다. 달이 처음으로 월경을 할 때 초조함을 느끼는 어머니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딸이 훌륭한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데 반감을 각게 된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운명적으로 겪었던 반복이나 매너리즘과는 달리 어머니는 이런 기회를 원망하고 혐오한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으므로, 적어도 그것을 축소하거나 말살하려고 한다. 그녀는 딸을 집에 있게 하여, 감시 하고 억압한다. 딸에게 초라한 옷을 입히고,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딸이 화장을 하 거나 외출을 하면 화를 낸다. 그녀는 자기 인생에 대한 모든 원한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이 젊은 생 명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딸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려 하고, 그 기획을 비웃고, 구박한다. 때 때로 양자 사이에 공공연히 싸움이 시작된다. 흔히 젊은 쪽이 이기게 마련이다. 시간이 젊 은 쪽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개운치 않다. 어머니의 태도는 달에게 반 항심을 일으켜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한다. 어머니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딸을 죄인으 로 만든다. 이와 같은 감정이 딸의 장래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패배를 시인하게 된다. 딸이 성인이 되었을 때, 모녀 사이에는 다소 석연치 않은 우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한쪽은 이제 완전히 실망하고 배신당한 심정이고, 다른 쪽은 저주가 뒤따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나이든 여자가 다 자란 아이들과 갖게 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 이가 어머니의 생활에서 가장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생후 20년 사이이다. 지금까 지 서술한 내용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이 위험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언제나 모성애가 여자를 충분히 만족하게 한다는 견해 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불행하고, 히스테릭하고, 불만스러운 어머니가 많다. 12회이 상이나 출산한 톨스토이 부인의 경우가 그 두드러진 예이다. 그녀는 일기의 여기저기에 세 상에서나 자기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이 불필요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쓰고 있다. 아이는 그녀에게 일종의 자학적인 안정을 가져왔다.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나는 이제 젊 다는 느낌을 가질수 없다. 나는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하다." 젊음과 아름다움과 사생활의 체념은 그녀에게 약간의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나이를 먹은 것으로 삶의 의미가 있다 고 느낀다. "아이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내게는 큰 행복이다. 그녀에게 아 이는 남편의 우월을 거부하기 위한 무기이다. 우리들 사이에 평등을 조성하기 위한 나의 유일한 수단이며, 유일한 무기는 아이들, 정력, 환희, 건강이다..." 그러나 권태에 사로잡힌 생활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려면 아이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1905년 1월 25 일, 잠시 흥분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도 모든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일단 사라지면, 나는 이미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아기를 돌보고, 먹고, 마시고, 자고,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것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슬퍼서 어제처럼 울고 싶어진다. 그후 11년이 지나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정력적으로 열띤 의욕에 차서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성급하고, 화를 잘 내고, 얼마나 소리를 잘 질렀던가!...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 영원한 투쟁은 얼마나 서글픈가! 모자관게는 그녀의 일생이라는 전체적인 형태 속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남편과의, 과거 와의, 일과의, 그년 자신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자식속에서 보편적인 어머니의 만병통 치약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이다. 내가 자주 인용한 H.도이치의저서에서 도달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도이치는 정신분석의 경험을 통하여 모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이 작용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여자가 자기를 완결하는 것은 모성에 의해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그 작용이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성실하게 요구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 그 무 거운 짐을 제대로 짊어질 수 있는 심리적, 윤리적, 물질적인 상확 속에 있는 것이 중요하 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비참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울증이나 신경질환에 결려 있는 여자에게 임신을 무슨 치료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 권유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여 자에게나 아이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 균형이 잡힌, 건정하고 책임의식이 있는 여자 라야 비로소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결혼을 무겁게 압박하는 불행은 두 사람이 그들의 힘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그들 의 무기력 속에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며, 각자가 상대방에게 주기 싫어하고 달라고만 요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자기가 창조할 수 없었던 완전성이나 열정이 나 가치를 자식을 통해 얻으려고 꿈꾸는 것은 더한 환멸을 초래하기 쉬운 유혹이다. 아이 가 주는 기쁨은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랄 수 있는 여성에게만 있는 것이다. 즉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초월하려고 하는 여성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확실히 아 이는 어머니가 온 정성을 다 기울여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획의 하나이다. 그러나 모 든 다른 기획과 마찬가지로, 기정사실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기획은 가상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바람직해야 한다. 슈테켈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이는 사람의 대용이 아니다. 아이가 이루지 못한 인생의 목적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아이는 우리 생활의 공허를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다. 아이는 하나의 책임이며, 무거운 의 무이다. 아이는 자유로운 사랑의 가장 고귀한 꽃장식이다. 아이는 부모의 장난감이 아니며, 그들이 살아가려는 욕구의 환성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족되지 않은 야심의 대용도 아 니다. 아이는, 행복하게 살게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와 같은 의무는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자연은 도덕적인 선택을 명령할 수 없다. 도 덕적인 선택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참여를 의미한 다. 어머니가 그것을 모면하려고 하면 인간적인 실존과 자유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 된 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부부의 관계처럼 자유 로이 원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일종의 특권적인 완성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흔히 여자애 대해 '아이가 없어서' 요염하다, 사람이 정열적이다, 동성연애자 다, 야심이 많다 하고 말한다. 그녀의 성생활이나, 추구하는 목적이나 가치는 아이의 대용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없고, 일거리가 없고, 동성연애적인 성향을 충족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거짓과 자연주의 밑에 숨어 있는 하나의 사회적, 인위적인 도덕이 있다. 아기를 갖는 것이 여자의 최고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광고의 슬로 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1의 편경에서 직접으로 내포된 제2의 편견은, 아이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분명한 행복 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모성애는 자연적인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부자연스러 운 (비정의) 어머니는 원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나쁜 어 머니가 있다. 정신분석학이 밝힌 중요한 진리의 하나는, 정상적인 부모도 아이에게는 위험 한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시달리고 있는 콤플렉스, 강박관념, 정신질환등은 그 들의 가족적인 과거 속에 뿌리를 갖고 있다. 자기 자신의 모순이나 분쟁이나 드라마를 가 진 부모는 가정에서의 생활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콤플렉스나 손상된 의식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아이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불행의 연쇄는 끝없이 이 어진다. 특히 어머니의 사드-마조히즘은 딸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고 이것이 다시 그 아이 게 사드-마조히즘적 행위로 나타나 끝없이 이어진다. 세상에서 여자에게 주는 경멸과 어머니에게 주는 존경속에는 심한 아이러니가 있다. 여 자의 공적인 활동을 거부하고 남성이 종사하는 직업의 문을 닫아버린 채, 모든 영역에서 여자의 무능을 공언하면서 인간 형성이라는 가장 어렵고 중대한 일을 여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많은 여성들에게는 지금도 관습이나 전통이란 이름으로, 남자의 특권인 교육, 문화, 책임, 활동을 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여자의 팔에 태평스럽게 아이를 안게 한다. 마치 그녀들이 어렸을때, 남자아이와 비교한 열등성을 인형으로 위로한 것처럼, 여자에게는 사는 것이 혀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여자에게는 살과 뼈로 된 완구를 주어 각 고 놀라는 것이다. 여자가 완전히 행복하거나 성녀가 아닌 한, 자기 권리를 무심코 남용하 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몽테스티외가,여자에게는 가사를 맡기기보다는 국가의 통치를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 고 한 것은 옳은 말 같다. 왜냐하면 기회만 주어지면 여자는 남자와 같은 정도로 이성적일 수 있어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추상적인 사상이나 집중적인 행위 에 있어서 한결 쉽사리 자기의 성을 극복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여자로서의 과거에서 자 유로워지고 자기 입장에서 유지하기가 어려운 감정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그 이상으로 어 려운 일이다. 남자도 가정에서보다는 일에서 훨씬 안정되어 있고 합리적이다. 그는 수학적으로 정확하 게 계산을 한다. 남자가 여자를 상대하여 멋대로 행동할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는 비논 리적이고, 거짓말쟁이이고, 변덕스럽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아이를 상대하게 되면 멋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안이한 태도는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보다, 아이가 어머니에 대 해 자기 방어가 어려우므로 더욱 위험하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일과 집단의 관련 속에서 자기 완성을 이루는 여자이며, 아이를 통하여 억 지로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여자인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아이 자신이 현재 보다 더욱 부모의 슬하에서 독립되어 있고, 또 그의 학업이나 오락 등이 그 아이와 단지 비개인적이며 순수한 관계만 갖고 있는 어른의 감독 아래에서, 다른 또래아이들과의 사이 에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행복한, 적어도 안정된 생활 속에 아이가 하나의 부처럼 생각될 경우에도 아이는 미래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를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에 의해 그 내재성 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있을 경우에도 그녀는 대리에 대 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자기를 초월하려고 한다. 즉, 여자는 여기서도 다시 의존적인 형태 를 취한다. 그녀는 아들의 배은망덕뿐만 아니라 실패하는 경우에도 그녀의 모든 의망은 빗 나가게 된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이나 연애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하고 유일 한 태도이다. 여자의 열등성은, 근본적으로 먼저 생활을 반복하기만 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하편 남자는 실존 그대로의 사실성보다 더욱 본질적이라고 그에게 생각되는 삶의 이유 를 창조하고 있다. 여자를 모성 속에 갇히게 하는 것은 여자의 이런 상황을 연속시키는 것 이다. 오늘날은 여자도 자기초월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뜻있게 하려고 시도하는 활동 에 동참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생명이 하나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녀는 생명을 제공 하는 데 동의 할 수 없다. 그녀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생활에서 하나의 역할을 수행 하려고 하지 않고서는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대포 밥(군대), 노예, 희생자, 또는 자 유로운 인간을 낳는 것은 같지가 않다. 적절히 조직된 사회에서 아이는 대부분 집단에서 부담하고, 어머니도 시중과 원조를 받는 경우에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자가 직장에서 일 하는 것과 양립될 수도 있다. 오히려 직업여성 - 농부, 화학자, 작가 - 은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임신을 한결 쉽사리 감내할 수 있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인 활 동을 하고 있는 여자야말로 아기에게 더욱 많은 것을 줄수 있고, 아이에게는 가장 적은 것 을 요구하게 된다. 노력과 투쟁 속에서 참된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여자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여자가 가정 밖에서 여러 시간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직업과 아이의 양육을 양 립시켜 나가기 어려운 것은 여자가 하는 일이 아직 노예노동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편 가정 밖에서 아이를 돌보고 교육시키려는 노력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그만큼 사회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이나 지하에 기록되어 있는 법도에 따라 어머니와 아기는 일심동체로 상호간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그와 같은 사회적인 결함을 긍정하려 는 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이런 상호간의 심한 구속은 실제로 이중의 혐오스러운 압박을 줄 뿐이다.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으로 사실상 남자와 동등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이다. 정 신분석학자들은 아이가 여자에게 페니스와 동등한 가치를 주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런 속성이 아무리 부러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의 인간 생활을 정당화한다거나, 그것이 최고의 목적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 니의 신성한 권리에 대해서도 귀가 따갑도록 떠들었으나, 부인이 투표권을 획득한것은 어 머니로서가 아니다. 어머니가 된 미혼녀는 아직도 멸시를 받고 있다. 어머니가 찬양을 받 는 것은 결혼했을 때, 즉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을 경우이다. 남편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 고 있는 한, 어머니가 아이를 잘 돌봐도 아이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이 의존하 고 있는 것이다. 모자의 관계는 그녀가 남편과 갖는 관계에 따라 엄격히 규제된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리하여 부부관계, 가정생활,모성애는 그 각각의 요소가 서로 규제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남편과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는 여자는 가사를 즐겁게 해나갈 수 있다. 아이 들에게서 행복을 느끼는 여자는 남편에게 관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화는 좀 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자에게 주어지 여러 가지 일이 상호간에 잘 조절되기 어 렵기 때문이다. 여성잡지는 가정주부에게 부엌일을 하면서도 성적 매력을 잃지 않는 방법이나 임신중에 도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여 교태와 모성과 경제를 조화시키는 비결을 열심히 가 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하는 여자는 결국 그 걱정으로 얼이 빠져 오히려 더 추해질 것이다. 손이트고 임신으로 몸매가 망가져 매력을 유지하기 어렵 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던 여자는 결국 매력을 잃어 남편의 애무를 받지 못하고 아이를 원망하게 된다. 다른 경우, 그녀의 모성이 정말 강하다면 아이는 내것이기도 하다고 남편 을 질투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자주 지적한 것처럼, 가정생활의 이상은 생명의 움직임과 모순되고 충 돌한다. 아이는 깨끗이 닦은 마루의 적이다. 가정을 잘 정돈하고 싶은 마음에서 무심코 발 산하는 질책이나 분노속에 모성애가 실종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순에 늘 시 달리고 있는 여자는 하루하루를 신경질적인 발작이나 히스테릭한 불쾌감속에서 보내게 되 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실패하고 있다. 일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순간이고 확실한 성공사례로서 기록되는 일도 없다. 여자는 자기활동 자체에 의해 서는 결코 자기를 구제하지 못한다. 그녀는 일에 전념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인생의 의의 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 의의는 타인의 자유에 의존하고 있다. 가정에 갇힌 여자는 스스로 실존을 형성해 나갈 수 없다. 그 개체속에 자기를 확인하는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 개성은 가정주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아랍인, 인도인, 그리 고 많은 시골사람에게는, 여자는 단지 그녀가 제공하는 노동에 의해 평가되며 없어져도 미 련없이 교체할 수 있는 일손에 불과하다. 현대문명에서는 여자는 남편에 의해 다소나마 개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타샤처럼 가정에 정열적으로 헌신하여 완전히 자기를 버리지 않는한 일반성으로 취급받 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녀는 다만 한사람의 특색없는 주부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나 타샤는 기꺼이 이런 자기포기를 하여 모든 대립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들을 부정한다. 그러 나 현대의 여성은 이와 반대로 타자에 의해 주부, 아내, 어머니, 여자로서 인정받기를 바라 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생활에서 만족을 찾는다. 제3장 사교생활 가족은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경계선을 넘어 다른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각 가정 은 부부가 들어 앉아 있는 내부에 그치지 않고 또 부부의 생활 수준이나 재산이나 취미의 표현이기도 한다. 즉 가정은 남의 눈에도 전시되는 그런 것이다. 이런 가정과 가정 사이의 사교생활을 리드하는 것은 본래 여자의 역할이다. 남자는 분업에 의한 유기적인 연대성의 유대에 의해 즉 생산자로서, 시민으로서 집단(사회)과 연결되어 있다. 부부는 각각 그들이 속하는 가족과 환경과 인종에 의해 정해진 하나의 사회적인 인력이며, 사회적으로 위치한 다른 그룹들과 기계적인 연대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이와같은 사회적인 인격을 가장 순수하게 대표하는 것이 여자이다. 남편이 직업상 어울 리는 교제는 그가 인정받고 있는 사회적인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여자는 일에 매이지 않으므로 같은 생활수준에 있는 사람들과 언제나 교제할 수 있다. 그 리고 여자는 방문이나 초대에 의해 실제적으로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인간관계는 사교적인 계급제도상의 부류에서 부부의 지위를 높이거 나 혹은 낮추는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여자는 자기 가정의 내부. 아니 자기의 모습까지도 -남편이나 자식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집을 대표하는 여자의 사교적인 의무는 자기를 남에게 과시하는 기쁨과 혼동되 어 있다. 우선 그녀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여줘야한다. 집에서는 일에 몰려 아무 옷이나 걸치고 있다. 그러나 외출하여 손님의 위치가 되면 그녀는 옷을 갈아 입는다. 여자의 화장은 이중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인의 사회적인 품위(생활수준, 재산,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를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여자의 나르시시즘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장은 제복인 동시에 장신구이다.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과로워하는 여자는 화장에 의해 비로소 그 존재 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여자가 가사노동으로 가정을 자기것처럼 만드는 것처 럼 자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동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이렇게 하여 자아를 선택하고 재창조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의 풍습은 이처럼 여자에게 자기의 이미지에 자기를 몰입하도록 장려하고 있 다. 남자의 옷은 그 육체와 마찬가지로 자기초월을 나타내며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 남자 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객체가 되기위한 것이 아니다. 남자의 경우는 그 외관을 인품의 반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 자체가 여자에게 에로틱한 대상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자가 좇는 유행은 여자를 자주적인 개인으로 표시하는 거의 목 적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초월성에서 떼어놓아 남자의 욕망의 먹이로서 여자를 제공하 려고 한다. 세상은 여자의 기획에 힘이 되어주기는 커녕 반대로 그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스커트는 바지만큼 편리하지 못하고 하이힐은 걷기가 힘들다. 가장 우아한 것은 가장 비실 용적인 의상이나 무도화이고 망가지기 쉬운 모자나 양말이다. 여자의 의상은 몸을 가리건 그 몸매를 변형시키건, 혹은 몸에 꼭 맞건간에 여자를 남의 시선에 노출시키기 위한 것이 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자기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소녀에게 있어 화장은 참으로 매력있는 유희이다. 좀더 성장하여 자주성을 갖게 되면 엷은 모슬린이나 에네말화의 거북함에 저항 을 느끼게 된다. 사춘기가 되면 그녀는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 싶은 심정과 그러기를 거부 하는 심정으로 분열된다. 성적 대상이라는 여자의 천직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후부터 그 녀는 기꺼이 몸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여자는 인공의 필요성을 자연에 제공함으로써 화장에 의해 자연과 유사하게 된다. 그녀는 남자에게 꽃도되고 새싹도 된다. 그녀는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그렇 게 된다. 남자에게 물결의 부드러운 파동과 모피의 쾌적한 온기를 주기 전에 그녀는 먼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골동품이나 양탄자나 방석이나 꽃다발의 장식이나 진주, 브 로치나 얇은 비단을 취하여 자기 살에 섞는다. 여자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이란 세계의 불쾌감에 대하여 이런 것들의 아름다운 외관과 그 부드러운 촉감이 보상해 준다. 성에 대한 여자의 감각이 불만일수록, 더욱 이런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동성애의 여자가 흔히 남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흉내를 내거나 사회에 도전하기 위한것만은 아니다. 그녀들은 비로드나 비단의 부드러운 애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대방 여자의 몸에서 그런 것을 취하고 있기 때문 이다. 남자의 거친 포옹에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응하는 경우 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그것을 즐기고 있더라도- 자기 몸 이외의 어떤 육체적인 먹이도 기꺼이 포옹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몸을 꽃으로 바꾸려고 향수를 뿌린다. 그녀가 자기 목에 걸고있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자기 피부의 광채와 구별되지 않는다. 여자는 세계의 모든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에 동화된다. 감각적으로 귀중한 것뿐만 아니라 때 로는 그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갈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보물은 추억이고 다른 보물은 상징이다. 자기를 꽃다발이나 조롱으로 만드는 여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박물관, 상형문자가 되어 있는 여자들도 있다. 조르제트 르블랑은 수기에 자기의 청춘시절을 회상 하여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언제나 회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반 아이크의 속을, 루벤스의 의화의 속을, 메믈링 의 처녀마리아 속을 산책했던 것이다. 어느날 겨울날에 나는 자수정빛 비로드 옷에서 사제 복 같은 데서 떼어온 낡은 은장식을 단 차림으로 브르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긴 소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그것을 질질끌어 일부러 보도를 쓸면서 걸어갔던 것이다. 황색모피 의 두건으로 금발을 싸고, 특히 파격적인 것은 내 이마 한가운데 보석관처럼 다이아몬드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림을 했느냐 하면, 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었 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인습을 등지고 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 모습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고 웃으면 웃을수록 나는 어리석은 생각을 점점 많이했다. 사람들이 나 를 조소한다고 해서 이제와서 나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불명 예스러운 항복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는 달랐다. 고프리의 천사들, 프라 앙젤리 코의 천사들, 번존스나 와트는 나의 모델이었다. 언제나 나는 하늘색이나 황금색 옷을 입 고 있었다. 나의 주위에는 통넓은 나의 옷이 길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정신병원에 가면 삼라만상을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이상한 태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귀중한 물건이나 상징을 무한히 아끼는 여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얼터당토 않은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소녀는 화장 을 하면 곧 요정이나 여왕이나 꽃으로 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장식이나 리본을 달 면 금새 아름다워진 느낌이 든다. 자기가 그 근사한 장식과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순진한 젊은 처녀는 옷의 빛깔에 매혹되면 자기 얼굴빛이 나빠지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이런 대담한 악취미는 예술가나 지식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바깥세계에 매혹된 나머지 자기 얼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고대의 직물이나 옛 보석에 반하여 중국이나 중세의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리는데 열중한다. 그리고 거울을 한 번 힐끗 보고 말거나 독단적으 로 보아넘길 뿐이다. 중년여인들이 때때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흐뭇해 하는것을 보고 사람들은 가끔 놀리 기도 한다. 둥근머리 장식, 레이스, 번쩍이는 의상, 이상한 목걸이 등은 가엾게도 그녀들의 거친 얼굴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그녀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남자 를 유혹하는 것을 단념하고, 어렸을 때처럼 화장이 다시 무상의 놀이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취미가 고상한 여자는 화장에 순전히 관능적 또는 미적 기쁨 만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화장이 자기모습의 조화를 결코 깨어서는 안 된다. 옷의 빛깔은 얼굴빛에 잘 어울리고, 옷의 재단은 몸의 곡선을 부각시키거나 교정해 야 한다. 그녀가 극진히 다루고 있는 것은 몸단장을 한 자기 자신이지 자기를 장식한 물건 은 아니다. 화장은 단지 몸을 단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여자의 사회적인 지위를 표시하는 것이다. 단장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것은 매춘부뿐이며, 이 것은 순전히 성적 대상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다. 예전에는 금발머리와 오의 여기저기를 꽃으로 장식하여 그 직업을 알려주었으나, 오늘날에는 하이힐, 몸에 착 달라붙는 비단옷, 야단스러운 분장이나 진한 향수등이 그 직업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여자가 그런 치장을 하면 매춘부와 같은 옷차림을 했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그런 여자의 색정적인 특색은 사회 생활의 일부이므로 그런 야단스러운 차림새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한다. 그 러나 극단적으로 검소한 옷차림을 한다고 해서 품행이 단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 은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너무 노골적으로 남자의 욕정을 자극하는 여자는 저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정욕 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도 결코 바람직한 여자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여 자를 가리켜 일부러 남자행세를 하고 싶어하는 동성연애자라고 말하거나, 또는 굳이 괴짜 로 자부하는 여자 혹은 반미치광이로 생각된다. 물건취급을 당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 에 대한 도전이며 아나키스트로 간주된다. 그러나 단지 남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기 위해 서라면 여자다운 모습은 지니고 있어야한다.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이 타협을 이루는 것 은 풍습에 의해서이다. 숙녀가 감춰야 할 신체의 부위는 때로는 앞가슴이고 때로는 발뒤꿈 치이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일체 멋을 부리지 않는데 비해 젊은 처녀만은 구혼자를 유 혹하기 위해 매력을 강조할 권리를 갖는다. 많은 농촌사회에서 이런 관례를 볼 수 있다. 어느도시에서는 젊은 처녀에게 대단히 얌전하고 빛깔이 은은한 옷을 입히는데 반하여 나 이가 지긋한 여자에게는 도전적일 정도로 몸에 꼭 맞는 무거운 천으로된 화려한 색깔의 옷이 허용된다. 16세의 소녀가 검정 옷을 입으면 화사해 보인다. 이 나이에는 검정옷을 입 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례는 물론 잘 지켜야 하지만 어떤 경우, 어떤 엄 격한 환경에서도 여자의 성적인 특징은 강조되는 것이 당연하다. 목사의 아내라도 머리를 퍼머하고 엷은 화장을 하고 조금은 유행을 따라 육체적인 매력에 신경을 써야 그녀가 여 성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에로티시즘을 이렇게 사회생활에 도입하는 것은, 특히 파티복에서 잘 나타난다. 파티가 개최되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치와 낭비를 알리기 위해 파티복은 비싸고 여리지 않으면 안 된다. 파티복은 되도록 불편하게 만든다. 스커트는 길고 폭이 지나치게 넓거나 너무 좁 아서 걷기가 불편하다. 보석 치맛단의 장식, 금박, 꽃, 새털깃, 가발에 뒤덮여 여자는 육체 를 가진 인형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육체 자체가 남의 시선을 받게된다. 꽃이 무심히 피 어나는 것처럼 여자는 어깨, 등, 가슴을 드러낸다. 대연회를 제외하고는 남자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탐내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남자에게 허용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춤을 출때 허리를 껴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다운 보배가 깔린 세계에서 왕이 된 기분에 도 취될 수는 있다.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이렇게 되면 연회는 포틀랜치(북미 토인의 연회 로 참석자에게 선물이 분배된다)처럼 된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자기의 재산인 육체를 내보인다. 파티복을 입는 여자는 모든 남성들의 쾌락과 자기 소유자의 자랑 을 위해 여자로 가장한다. 화장은 이런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여자는 의상을 입는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다. 기성질서에 따르는 여자는 겸손하고 품위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 다. 많은 뉘앙스가 가능하며, 그 선택방법에 따라, 연약하고, 어리고, 신비적이고, 순진하 고, 엄격하고, 쾌할하고,침하고, 다소 기발하거나 견손한 여자로 자기를 만들수 있다. 혹은 이와 반대로 개성적인 몸치장으로 세상의 인습에 대한 반항을 나타낼 수도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해방된 여자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성격, 즉 여자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대담한 화장으로 기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스 위튼의 <순진한 시절> 에서 파란 많은 과거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이혼녀는 남편과 헤어 지자마자 가슴을 드러낸 의상을 걸치고 나타난다. 세상의 비난에 대한 반발과 편의주의에 대한 경멸을 알아보기 쉽게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젊은 처녀는 중년 부인의 복장을 하고, 중년 부인은 젊은 처녀의, 창녀는 상 류부인의, 상류 부인은 천한 여자의 복장을 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자 기 신분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유희가 남아 있다. 기교는 예술과 마 찬가지로 상상의 산물이다. 코르셋, 브래지어, 머리염색, 얼굴 성형은 육체나 얼굴 모습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얌전한 처녀라도 일단 성장을 하면, 언뜻 보아 정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회화나 조각, 또는 연극을 하는 여배우와 같다. 그녀는 하나 의 유사한 인간으로서, 이를 통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 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이 암시하는 여자가 된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초상화나 흉상처럼, 비현실저그 필연적, 또는 완벽한 것과 혼돈이 된다. 이것이 그녀를 흡족하게 한다. 그녀는 이 객체에 자기를 소외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을 고정시켜 정당화된 것처럼 생각 하려고 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독백> 을 읽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페이지마다 자기의 여러가지 모습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자기 의상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녀 는 새 옷을 갈아입을 적마다 딴 여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여 새삼스럽게 자기를 열애한다. 나는 엄마에게 숄을 빼앗았다, 머리를 내놓기 위해 숄에 구멍을 내고 양쪽 끝을 꿰메었 다. 고전적인 주름을 지으면서 늘어진 이 숄은 나에게 동양적인, 성서풍의 괴상한 풍요를 주었다. 나는 라페리에르에게 간다. 카롤린리 내게 세 시간 걸려 옷을 한 벌 지어주었다. 이 옷 을 입으면 마치 구름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옷은 모두 영국제 크레이프로 만들어 진 것으로 그녀가 나에게 입혀주었다. 나는 몸매가 날씬하고 우아하고, 키가 커보인다. 주 름이 조화되어, 따스해 보이는 털옷을 걸친, 르페브르가 제작한 초상을 닮았다. 그는 평번 한 천으로 날씬하고 싱싱한 몸매의 선을 잘 나타낸다. 그녀는 날마다 다음과 같은 후렴을 되풀이한다. "검정색 옷을 입은 나는 아름다웠다... 회색 옷을 입어도 아름다웠다... 흰 옷을 입어도 역시 아름다웠다. " 노아우 부인도 모치장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지만, 의상에 실패한 비극을 슬픈 심정으로 <수기> 에 추억하고 있다. 나는 선명한 색체를, 색체의 대담한 대조를 사랑했다. 한 벌의 옷은 풍경처럼, 운명적인 유혹의 손길처럼, 모험적인 사랑의 약속처럼 생각되었다. 서툰 솜씨로 지은 옷을 입을 때 에는 모든 결점이 눈에 띄어 참기 어려웠다. 많은 여자들이 모치장을 이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었 때문인가? 착각일망정 치장 은 세계와 그녀들이 자아를 동시에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인조견 복장을 한 처녀> 라 는 독일 소설에는 가난한 처녀가 리스모피와외투를 열망하는 것을 모사하고 있다. 모피의 부드러움, 그 따스한 애무에 그녀는 관능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값진 모피를 걸친 변 모된 자기를 그리워한다. 그리하여 한번도 차지하지 못한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한번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빛나는 운명을 손에 넣게 된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 한 벌을 보았다. 참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모피, 쾌적하고 포근 하고 정다워 보이는 모피, 나는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이 외투를 아끼고 있었다. 그것은 만성절의 평온한 하늘 같은 위안을 주는 인상을 받게 했다. 그것은 진짜 리스 가죽이었다. 나는 레인코트를 살짝 벗고, 리스 모피의 외투를 몸에 걸쳤다. 이 모피는 내 살결에는 다 이아몬드와 같았다. 그리고 아끼는 물건은 일단 손에 넣기만 하면 결코 다시 돌려줄 수 없 을 것이다. 안감은 본견 모로코 크레이프로 소매에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외투는 완전히 나를 감쌌다. 이것은 내가 휴베르트에게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에게 말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모피외투를 입으면 금방 돋보였다. 이 모피는 나를 사랑하고 나 를 품위 있는 여자로 만즐어주는 남자와 같다. 이 외투는 나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나도 이 외투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의 물체이므로,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진다. 여자가 실크 양말이나 장갑, 모자등을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쉽게 웃어넘길 일이 못 된다. 자기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화장품이나 의상을 위한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다. 프랑스의 경우ㅡ 그 정도 는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모양을 내고 있을수록' 존중된다. 여자가 일자리를 구할 필요가 절실하면, 그만큼 넉넉해 보이는 외모가 필요하다. 즉 맵시는 그녀에거 하나의 무기이며, 간판이며, 호신용 물건이며, 추천장이다. 여자가 멋을 부리는 것도 일종의 굴종이다, 모치장을 하려면 돈이 든다. 비용이 너무 많 이 들기 때문에 때로는 백화점 감시인이, 사교계의 부인이나 여배우가 향수나 실크 양말, 내의 등을 훔치는 현장을 덮쳐야 하는 일도 생긴다. 많은 여자들이 정조를 팔거나 혹은 " 원조' 를 받는 것은, 몸치장 을 하려면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지만 이런 고생은 때로는 큰 기쁨의 원천이 된다. 이 영역에서는 또한 '숨겨진 보물의 발견' , 즉 흥정. 계략. 배합. 발견 등이 있다. 슬기로운 여자라면 창조자도 될 수 있다. 바겐세일 기간은 - 특히 재고판매 기간의 경우는 더욱 - 열광적인 날이다. 새 의상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축제이다. 화장이나 머리손질은 예술작품의 대용이다. 예전보다는 오늘의 여자는 스포츠. 체조. 입 욕. 마사지. 식이요법에 의해 몸을 가꾸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 체중, 몸의 곡선, 피부 색 깔을 이렇게 해서 결정한다. 근대 미학은 여성미에 활동적인 성질을 가미하는 것을 인정하 고 있다. 여자는 근육을 움직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지방의 침입을 막으려 애를 쓴다. 스포츠 방면에서 여자는 훌륭한 하나의 주체로 활약한다. 이것은 우연적인 육체에 관해서 는 여성해방의 일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해방은 종속에로 쉽사리 되돌아오 기가 쉽다. 할리우드의 스타는 자랑스럽게 자연을 극복하지만, 프류듀서 앞에서는 다시 수 동적이 된다.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열중하는 몸단장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있다. 여자의 몸단장에는 - 가사도 드렇지만 - 시간에 대한 도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여자의 육체라는 것 은 시간이 흐를수록 좀먹는 하나의 물체이기 때문이다. 가정주부의 먼지와의 싸움에 필적 하는 이 투쟁을 콜레트오드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이것은 청춘의 탄력 있는 육체가 아니다. 그녀의 팔이나 넓적다리의 근육은 약간 늘어진 피부와 지방층 밑에 유난히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불안하여 다시 한번 일과를 뒤 집어엎었다. 반 시간의 체조로 하루가 시작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15분 동안 마사지를 한다. 몸매를 날씬하게 유지하기 위해 의학서적과 잡지를 자주 뒤적거린다. 과일 주스를 준비하고, 가끔 호르몬 약도 사용하고, 설거지를 할 땐 꼭 고무장갑을 꼈다. 그녀의 두 가지 걱정은 결국 한 가지다. 열심히 몸을 젊게 하고, 열심히 집안을 닦다가, 어느날인가 일종의 휴식기, 즉 임종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계는 비로소 노쇠 와 소모를 잊은 듯이 정지된 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스타일을 가꾸기 귀해 풀에서 레슨을 받고 있다. 미용잡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처방으로 그녀에게 숨돌릴 사이도 없게 한 다. 전저 로저스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는 아침마다 백 번씩 솔질을 해요. 그러 는 데는 정확히 2분 30초가 걸려요. 그래서 내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부드러워요.... " 발꿈치를 예쁘게 하기 위해 날마다 발뒤꿈치를 땅에 대지 않고 발끝으로 서른 번씩 뛰 어오른다. 이 훈련은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루 중에 1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발가락을 향유에 담글 때도 있다. 손을 위해서는 레몬과자를, 빰에는 딸기를 짓이겨 바른 다. (잃는 노름 에서) 얼굴 화장이나 옷 손질도 단조로운 되풀이가 되면 따분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생 성에 따르게 마련인 쇠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일종의 불감증에 걸린 여자나 실의에 찬 여 자들은 삶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녀들은 가구나 잼을 보존하듯, 자기 자신을 현상 그 대로 보존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생존의 적 이 되며, 남을 적대시 하게 된다. 맛좋은 식사는 몸매를 망가뜨린다. 포도주는 얼굴 빛을 해친다. 너무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간다. 태양은 피부를 상하게 한다. 휴식을 취하면 생기 가 없어진다. 일을 하면 피로해진다. 성교는 눈가에 검은 기미를 생기게 한다. 키스는 빰에 염증을 일으킨다. 애무는 유방을 망가뜨린다. 포옹은 육체를 시들게 한다. 어머니가 되면 얼굴이나 몸이 추해진다. 젊은 어머니의 발레복을 보고 아이가 눈이 휘둥그레지면 그녀는 아이를 사납게 몰아세우는데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 엄마를 만지면 안돼. 네 손이 끈적끈적해서 엄마가 더러워지니까. " 마찬가지로 멋쟁이 여자도 남편이나 애인의 성급한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녀는 마치 가구를 커버로 덮어주듯이 되도록이면 남자들의, 세계의, 시간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 어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경을 써도 흰머리나 눈가의 잔주름은 때가 되면 나타나게 마련이 다. 여자는 젊었을 때부터 이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신중해 도 여자에게는 사고가 나게 마련이다. 포도주가 옷에 떨어지기도 하고 담뱃불에 옷을 태우 기도 한다. 이때 얼마 전까지도 사방에 미소를 뿌리면서 자랑스럽게 살롱을 걸어다니던 호 사와 환락의 여성은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가정주부의 고지식하고 엄한 표정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로소 알아차린다. 여자의 화장은 잠시 주위를 비추다가 보람도 없이 사라지는 화려한 불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재산이고, 자본이고, 투자이다. 화장은 대 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것을 망치는 것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해이다. 옷이 얼룩지고 찢어지고 못쓰게 되거나 또는 퍼머를 망쳐놓는 것은, 불고기가 타버리거나 그릇이 깨지는 것보다 더욱 큰 손실이다. 왜냐하면 멋쟁이 여자는, 사물속에 몰입할 뿐만 아니라, 사물 자 체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직접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재봉사나 양재사와의 거래에서 초조해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 나 진지하고 또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옷의 재봉이 잘 되면 그녀는 몽상 속 의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이 낡거나 옷을 망치면, 자기 자신이 못쓰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내 기분과 태도와 얼굴 표정은 모두 의상에 달려 있었다... " 하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쓰고 있다. "알몸으로 산책을 하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육체, 자기 취미, 성격에 꼭 맞는 옷차림을 하든, 이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 이 조건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어색해지고 따라서 크게 낙심하게 된다. 기분이나 마음은 어떤가? 누더기를 연상할 정도다. 그래서 몹 시 속상하여 몸둘 바를 모른다. " 여자들은 대게 너절한 옷차림으로 연희에 가느니, 차라리 단념하는 쪽을 택한다. 사람들 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지 않을 경우에도 그렇다. 하긴 개중에는 " 나는 단지 내 자신을 위해 옷을 입어요" 하고 단언하는 여자도 있지만, 나르시시즘 속에도 남의 시선이 개입되 어 있는 것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다. 멋쟁이 여자가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고집스럽게 자기 신조를 지킨다는 것은 정신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녀가 정상이라면, 반드 시 보아주는 사람을 원하게 된다. "나는 남의 호간을 사려고 한다. 나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해 주오. 리오바(톨스토이) 가 나의 모습을 보아주고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 까. 나의 귀여운 페치아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가. 마치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는 것 처럼 말이다. 리오보치카는 보기 흉한 얼굴에 익숙해 진 것 같다... 나는 머리를 퍼머하고 싶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다. 나는 어째서 남이 보아주 기를 바라고 있을까? 리본이나 타이는 나를 즐겁게 해준다. 나는 새 가죽벨트를 갖고 싶 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 하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소피아 톨스토이는 쓰고 있다. 남편은 이런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남자의 요구는 여기서도 이중적이다. 아내가 너무 매혹적이면 그는 질투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모든 남편들은 어느 정도 칸돌 왕을 닮아 아 내가 자기를 돋보이게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즉 아내가 멋있고 귀엽고ㅡ 적어도 '나쁘지 않은 여자' 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소원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는 기분이 상하여 위뷔영감처럼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 오늘은 정말 보기 흉하구려. 우리가 손 님을 초대하기 때문인가? " 앞에서도 말했지만, 결혼에서는 에로틱한 가치와 사회적인 가치가 잘 조화되기 어렵다. 그런 모순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가 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것은, 남편이 보기에는 천박하다. 다른 여자가 요란한 몸차림을 하면 마음이 끌리는데, 자기 아내가 그 렇게 하면 잔소리를 한다. 이 잔소리 때문에 남자의 욕망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아내가 수 수한 옷차림을 하면 흡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냉담하다. 아내를 매력 없는 여 자로 생각하고 아내에게 불평을 한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좀처럼 아내를 바 라보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아내를 뭐라고 할까" 하고 남의 눈을 통하여 아내를 바라본 다. 이처럼 남편으로서의 견해를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빌려오기 때문에, 남편은 잘못된 선입관을 갖는다. 남편이 다른 여자의 옷이나 태도는 칭찬하면서, 똑같은 것이라도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나무라는 일처럼 아내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언제나 절대로 변치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내의 새로운 옷차림이 나, 헤어스타일의 변화도 의식하지 못한다. 애처가인 남편이나 열애하고 있는 애인의 경우 에도 그녀들의 화장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남자가 여자를 가식없이 열렬히 사랑하고 있 으면, 아무리 어울리는 옷차림을 해도 그것은 가장의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초라 한 옷을 입고 까칠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남자는 여자가 더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무 리 남자의 마음에 드는 옷차림을 하더라도 사랑을 받을 가망은 없는 것이다. 화장은 정복을 위한 도구는 될 수 있겠지만, 방어를 위한 무기는 되지 못한다. 화장기술 은 여러 가지 신기루를 만들어 내어, 공상적인 대상을 사람들의 눈앞에 제공한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육체적으로 서로 껴안고 있으면, 어떤 신기루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부부간의 감정은 육체적인 사랑과 마참가지로 현실의 땅 위에 서 있다. 여자가 몸을 가꾸 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도로시 파커는 한 중편소설에서, 휴가를얻어 집에 돌아올 남편을 고대하던 젊은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장면 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녀는 새 옷을 샀다. 검정색 옷이었다. 남편은 검정색을 좋아했다. 그것은 소박한 옷이 었다. 남편은 소박한 옷을 좋아했다. 값이 굉장히 비쌌지만 그녀는 값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때요. 맘에 들어요. 내 옷? " "그래, 맘에 들어.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언제나 당신이 근사해 보여. " 그녀는 마치 자기가 나무로 만든 마네킹이라도 된 듯싶었다. "이 옷 말예요" 하고 그녀는 약간 경멸하는 듯이 분명한 어조로 한 마디 한 마디 야무지 게 말했다. "이번에 새로 샀어요. 전에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그때를 위해 사두었던 거예요. " "미안, 미안, 그래? 이제 겨우 알았어. 이 옷은 전의 것과는 다르군. 아무튼 근사해. 당신 은 검정색 옷을 입으면 정말 보기 좋아. " "그래서... "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검정 옷을 입고 싶어져요. " 여자가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다른 여자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라고 흔히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질투는 좋은 옷차림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목적이 아니다. 선망과 감탄의 시선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에 의해, 여자는 자기의 아름 다움. 우아함. 취미, 요컨데 그녀 자신의 절대적인 확인을 찾으려고 한다. 여자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옷을 입는다. 즉 자기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 녀는 괴로운 종속상태에 들어간다. 가정주부의 헌신은, 설사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유익하다. 그러나 멋쟁이 여자의 노력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무익한 것이 다. 그녀는 자기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인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절대에의 자부가 그 녀의 추구를 참으로 벅차게 한다. 한 마디만 핀잔을 들어도 벌써 그녀가 쓰고 있는 모자는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의 공치사로 기분이 흐뭇해지지만 한마디의 부정 으로 그녀는 낙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라는 것은, 현상이 무한히 계속된 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녀의 결정적인 승리는 영원히 얻어질 것 같지 않다. 멋쟁이 여자가 그처럼 손상받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미인 중에도, 자기는 아름답지 못하고 우아하지도 못하며, 자기 가 모르고 있는 심판자의 절대적인 칭찬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비통하게 자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들은 실현이 불가능한 '즉자' 를 목표로 삼고 있다. 우아의 법칙을 스스로 구현 하여 누가 어디서 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는 최고의 멋쟁이 여자는 극히 드물다. 이런 여성 은 자기가 법령을 만들어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는 셈이다. 그녀들의 전성기가 지속되는 한 그녀들은 자기를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볼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 성공은 무엇 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화장은 곧 외출이나 손님 초대와 관련된다. 원래는 이것이 화장의 목적이었다. 여자는 새로 마련한 의상을 걸치고 살롱에서 살롱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돌아다닌다. 자기가 가 정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가를 다른 여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대한다. 특히 의식적인 경우에는 '방문' 에 남편을 동반한다. 그러나 대개는 남편이 일하는 동안에 아내는 '사교의 임무' 를 수행한다. 이런 사교의 모임에 풍기는 갑갑한 권태에 대하여는 수없이 묘사해 왔 다. 그것은 '사교의 의무감' 에서 모이는 여자들은 서로 이렇다 할 화제를 갖고 있지 못하 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아내와 의사의 아내를 연결할 공통된 흥미는 하나도 없다. 뿐만아 니라, 같은 의사인 뒤풍 박사의 아내와 뒤랑 박사의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이야 기 속에 자기 아이의 장난이나 살림 고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품위가 없다. 그래서 날 씨가 어떻다느니, 최근에 유행하는 소설에 대한 소문이나, 남편에게서 얻어들은 의견을 몇 마디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부인의 손님 접대' 의 풍습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러나 지금도 프랑스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방문' 의 고역이 남아 있다. 미국인은 깨끗이 대화를 중단하고 대신 트럼프 놀이를 하는데 이것도 이 게임을 즐기는 여자가 아니면 달 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교는, 이런 쓸데없는 인사치레보다는 좀더 매력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 다. 손님 초대는 단지 자기 집에 타인을 맞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집에 마술을 걸어 마법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교술의 발휘는 축제인 동시에 포틀래치 이다. 그 집 여주인은 자기 의 모든 보물들, 즉 은그릇. 백포. 유리그릇 등을 전시한다. 집 을 꽃으로 장식한다. 시들기 쉽고 무익한 꽃은 지출과 시치인 파티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병속에서 피어나 이찍 시들게 되는 꽃이야 말로 환희의 불꽃, 향기, 몰약, 신주 이며 제물이다.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과 값비싼 포도주가 놓여 있다. 다음은 손님의 식욕 을 채워주면서도 그들의 욕구를 미리 알아차려서,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을 마 련하는 것이 문제이다. 식사는 하나의 신비스러운 의식이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묘사한 대목에서 이런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때 문이 열리면 에이프런과 흰 모자를 쓴 써비스걸들이 우아한 자태로 오가기 시작 한다. 그녀들은 욕망의 시녀라기보다는 신비한 수녀들이다. 메이페어(런던의 상류층 주택 지) 의 주부들이 한 시간 반에서 두시간에 걸쳐서 올리는 종교의식이다. 손을 한 번 흔들 면 오가던 발길이 멈춰진다. 그때 눈을 녹이는 환각이 나타난다. 먼저 무료러 제공하는 음 식물이 나온다. 다음에 식탁은 컵. 은그릇. 바구니. 빨간 과일이 담긴 그릇으로 꽉차게 된 다. 갈색 크림의 베일이 넙치를 싼다. 냄비에는 저며진 닭고기가 국물에 잠겨 있고, 불길은 아름다운 빛깔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이윽고 포도주와 커피가 나오자, 사람들이 꿈꾸 는 즐거운 환상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눈은 조용히 명상에 잠긴다. 그늘 눈에는 인생이 마치 음악처럼 신비롭게 떠오른다... 이런 신비를 주재하는 여성은, 자기야말로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이며, 행복 과 유쾌함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장본인이란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손님을 서로 결 합시키는 것은 그녀의 주선에 의해서이며, 어떤 사건이 생기는 것도 그녀에 의해서이다. 그녀는 기쁨과 조화를 마음대로 조성하는 원천이다. 이것이 바로 댈러웨이 부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자. "좋아요. 좋구말구요. 그런데 당신이 이 야희를 여는 의도는 무엇이요? "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이러하다. (이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할 수 없다.) "그 야회는 희사예요... " 누구는 남 케닝턴에 살고 누구는 베이스웨터에, 또 어떤 사람은 메이페어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녀는 줄곧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정말 안되었다' 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한데 모을 수 없을까? " 그래서 그들은 한데 모은 다. 이것은 희사이다. 그것은 결합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선물이다. 그녀가 남에게 줄 것은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가령 누가 그녀를 대신하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잘했 다고 자부하고 있다. 어쨌든 자기가 그것을 실현한 것이니까. 타인에 대한 이런 봉사를 순전히 너그러운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면, 연회는 축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의 관례적인 행사가 되면, 연회는 향연이지만 곧 하나의 제도 로 변모되고, 선물은 의무로, 축연은 부자연스러운 의식이 되고 만다. '요릿집에서의 음식' 을 즐길 때에는, 초대받은 여자는 이것을 갚아야 하는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접 이 지나쳤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X 씨는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속셈이었어요" 하고 그녀 는 얄미운 듯이 남편에게 말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세계대전 중에 포르투갈의 어느 작은 읍에서 는 다과회가 연회중에 가장 값진 것이 되었다. 손님이 모일 적마다, 여주인은 지난번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 과자를 손님에게 내 놓아야만 했다. 이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느날, 여자들은 앞으로 다과를 내놓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게 되었다. 바로 이 런 경우, 파티는 본래의 정답고 푸짐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고역이 된다. 파티의 명 랑한 즐거움을 표시하는 음식까지도 걱정거리가 된다. 유리그릇이나 식탁보에도 주의를 기 울여야 하고, 샴페인이나 비스킷의 양에도 일일이신경을 써야 한다. 찻잔이 하나 깨지거나 소파의 비단천이 조금만 타도 손해이다. 이튿날에는 청소하고 제대로 정돈해야 한다. 그리 하여 가욋일이 늘어나는 것을 여자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녀는 주부의 운명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의존 관계를 실감한다. 풀무, 구운 고기, 푸줏 간, 요리사, 임시 고용인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언짢은 구석이 보이면 곧 미간을 찌푸리는 남편의 기분에 좌우된다. 그녀는 가구나 포도주를 평가한다. 야회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손님들에게 달려 있다. 다부진 여성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가 아 니면, 평온한 마음으로 이 시련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개가를 올릴 수 있으면 그녀는 그에 만족한다. 그러나 많은 주부들이 이 점에서는 버지니아 올프가 묘사한 댈러웨이 부인 과 비슷하다. "이런 승리...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광과 흥분을 애호하면서도, 그녀는 동시에 그 공허와 겉치레의 허식을 느끼고 있었다. " 여자는 이 승리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을 때에만 참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허영심에 시달릴 뿐이 다. 그리고 '사교' 에서 전적으로 자기 인생의 용도를 발견한 만큼 부유한 여자는 매우 드 물다. 사교생활에 힘쓰는 여자는 흔히 그것에 의해 만족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한다. 진정한 '살롱' 은 문학적 또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자는 이것을 수단으로 삼아 남자들을 좌우하는 힘을 얻고, 자기도 개성적인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결혼한 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결혼한 여자는 일반적으로 일시적인 성취감이나 쾌락으 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일시적인 성취감이나 쾌락은 결혼한 여자에게 좀처럼 부 여되지 않고 설사 부여되어도 가벼운 기분전환은 되지만 그만큼 피로를 느끼게 된다. 사교 생활은 '근사한 몸단장' 을 하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들 사이 의 진정한 유대를 가지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교는 여자를 고독에서 구하지 못한다. 미슐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생각하면 괴로운 일이지만, 여자는 둘이 함께가 아니면 살 아가지 못하는 상대적인 존재로, 흔히 남자보다 고독하다. 남자는 도처에 사회집단을 발견 하여 새로운 유대관계를 맺는다. 여자는 가족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가족 때문 에 시달리고 있다. 온갖 무거운 짐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사실상 여자는 격리되어 갇혀 있으며, 어떤 목적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교유' 의 기쁨을 모르고 산다. 그녀가 하는 일은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독립에 대한 애착이나 습관을 몸에 익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고독 속에 살아 간다. 이것은 소피아 톨스토이가 한탄하고 있는 불행의 하나였다. 결혼은 그녀를 친정이나 처 녀시절의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콜레트도 <나의 수업시절> 에서, 젊은 아내가 시 골에서 파리로 이사와서 생활터전을 잃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긴 편지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편지로는 얼굴을 마주 대할 때와는 다르며, 그녀는 여 러 가지 실망을 시도(어머니) 에게 알리지 않는다. 젊은 여자와 가족 사이에는 진정한 친 밀성이 상실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나 자매도 참된 친구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주 택난 때문에 많은 젊은 부부가 남편 또는 아내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할 수 없이 동거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여자끼리 우정을 맺어 그것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이것은 여자에게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자의 우정은 남자들이 알고 있는 여러가지 대인관계와는 매우 다른 양상 을 갖게 된다. 남자들은 사상을 통하여 자기들 사이에 각자의 기획을 개인으로서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여자의 운명이라는 공통성 속에 폐쇄되어 있으므로 그녀들의 폐쇄 된 생활에서 일종의 '피차일반' 이라는 심정에 의해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들은 의견 을 제시하거나 의논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고받는 것은, 마음속의 비밀이나 살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일종의 반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동맹을 한다. 그 반세계의 여러가지 가치는 남자의 세계의 그것을 보다 우월한다. 그녀들이 이렇게 단결하면, 자기들의 사슬을 떨쳐버릴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여 자는 서로 자기 남자에 대한 불감증을 고백하고, 남자의 강한 정욕이나 서투른 솜씨를 낸 소하고 성의 세계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일반 남자들이 도 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우월감을 야유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한다. 임신, 출산, 아이의 질병, 자기 자신의 병, 살림걱정 등이 인간의 중요한 사건이 된다. 여자가 하는 일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리나 살림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전하면서 그녀들은 구전에 근거를 둔 은밀한 기술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여자들은 때로는 도덕적인 문제를 서로 검토하기도 한다. 여성잡지의 '소식란' 은 이런 의견교환의 좋은 전형이다. 남자들만을 위한 '우정 통신' 같은 난의 설치는 상상할 수 없다. 남자는 남자끼리 자기들 의 세계인 사회에서 만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여자들만의 영역을 먼저 정하여 이 것을 측정하고 탐구해야만 한다. 그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몸단장이나 요리나 편물 등의 방법에 대해서다. 이런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 여자들의 수다 나 과시욕 속에 때로는 여자의 참된 고뇌가 들여다 보인다. 여자는 남자가 만든 법전이 자 기들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여자가 그것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자가 예상하 고 있다는 것도 여자들은 알고 있다. 즉, 남자는 겉으로는 금하고 있으면서도 낙태, 간통, 과실, 배반, 거짓말을 여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여성의 독특한 도덕의 법전' 을 정하려고 한다. 여자가 자기 친구들의 행위를 낱낱이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은 꼭 악의에서만이 아니다. 여자는 다른 여자의 행위를 심판 하고 자기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도덕적인 착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자들의 관계에 가치가 주어지는 것은,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 는 언제나 남자 앞에서 자기를 가장한다. 그녀는 비존질적인 타자인 체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표정, 화장, 신중한 말투로 남자 앞에서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거짓말 을 하고 있다. 이런 연극을 하기 위해 여자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남편이나 애 인의 곁에서 여자는 누구나 어느 정도 '나는 나 자신이 아니다' 하고 생각하고 있다. 남자 의 세계는 준엄하다. 그래서 선이 분명하고,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빛은 너무 강렬하고, 감촉은 거칠다.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마치 무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 자는 무기를 갈지만 싸우지 않는다. 몸단장을 궁리하고, 얼굴을 새로 단장할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꾀를 마련한다. 무대에 나사기 전에 슬리퍼와 실내옷을 걸치고 분장실을 서성거 리고 있다. 여자는 이런 아늑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콜레트는 여자친구인 마르코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짤막한 속내 이야기, 집안에 처박혀 있을 때의 놀이, 여자들의 일터에 있을 때와 같은, 또는 병중 회복기의 여가와 같은 시간... 콜레르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에게 조언자 노릇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르코는 몹시 더운 오후에 발코니의 차일 밑에서 내의를 꿰메고 있었다. 솜씨가 서툴지 만 정성들여 바늘을 놀리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는 데 대해 기쁨 을 느끼고 있었다... "속치마에는 푸른 리본을 달아서는 안돼요. 속옷은 장미빛이 더 예쁘고, 살색에도 가깝 지요. " 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우더나 루주의 빛깔, 눈꺼풀을 아름답게 그리는 딱딱한 선에 대해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정말이예요? " 하고 그녀도 말했다. 나는 연하이 지만 권위를 앓지 않았다. 나는 빗을 집어 그녀의 앞머리에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눈초리를 불꽃처럼 환히 드러나게 하고, 관자놀이 가까이 광대뼈 위의 엷은 루주를 살짝 발라 솜씨를 과시했다. 조금 앞에서는 마르코가, 정복하고 잎은 어떤 청년을 만나기 위해 초조하게 몸치장을 하 는 장면이 있다. ...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을 씻으려고 앴다. 나는 그것을 말렸다. "내게 맡겨요. " 나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윗 눈꺼풀을 이마 위에 치켜올리고 속눈썹의 마스카 라가 눈물에 망가지지 않도록, 금방이라도 흩어내릴 듯한 두 눈의 눈물을 잦아들게 했다. "잠깐 더 기다려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 나는 그녀의 화장을 완전히 고쳐주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떨고 있었다. 그녀는 잠자 코 내가 하는 데로 맡겼다. 내가 마치 가축이라도 손질하는 것처럼 느꼈던지, 그녀는 안도 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나는 끝으로 그녀의 파우더 퍼프에 장미빛이 더 많은 파우더를 채 워두었다.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 무슨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돼요. 이를 악물고서라도 눈물을 꾹 참아야 해요. " ... 그녀는 앞머리와 이마 사이에 손을 가져갔다. "지난 토요일에 그 재고판매 때 본 까만 옷을 사두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고급 양말을 빌려주지 않겠어요? 이제 사러갈 시간이 없어요. " "좋아요, 빌려드리지요. " "고마워요, 옷에 꽃을 꽂으면 밝아보이지 않을까요? 아니, 코르셋에는 꽃을 꽂을 수 없 지요. 이리스의 향수는 유행이 지났는데 정말이예요? 당신에게는 물어볼 게 아주 많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콜레트는 <투투니에> 라는 다른 책에도 여자의 생활의 이런 이면을 많이 묘사 하고 있다.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해 하는 세 자매가 밤마다 어렸을 때부터 정든 낡은 소파에 모여든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그날에 있었던 걱정거리를 상기하고 내일의 투쟁에 대하여 충분한 휴식, 포근한 잠, 따뜻한 목욕, 감상적인 눈물, 그런 한때의 기쁨을 맞보면 서 긴장을 푼다. 그녀들은 서로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각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종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자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진실 이다. 이 일시적인 따뜻한 친교가 남자와의 허식적인 교제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도 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처녀시절처럼 상대방 여자에게서 이중의 특권을 발견한 다. 그녀는 상대방의 조심스러운 눈에 비친 자기의 멋있는 의상과 잘 정돈된 집 안을 자랑 스럽게 여긴다. 결혼한 후에도 흉금을 털어놓을 구 있는 여자친구는 누구보다도 그럴 듯한 구경꾼이다. 그리고 결혼한 후라도 그런 여자친구는 욕망의 대상이며, 바람직한 상대처럼 보인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처녀는 누구나 조금은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남편의 포옹이 서툴 경우에 여자의 이런 성향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 여자는 동성 과의 교제에서 관능적인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정상적인 남성에게서는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여자의 감각적인 결합은 상승하여 흥분된 감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막연한 애 무나 정확한 애무로 나타난다. 그녀들의 포옹은 또한 심심풀이를 위한 유희에 불과한 경우 도 있다. 터키 후궁의 여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녀들은 항상 시간을 보낼 걱정을 라고 있다. 그러나 이 포옹이 일차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여자와 여자의 친밀한 관계가 진정한 우정으로 지향되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 는 본능적으로 남자보다 강한 연대성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런 연대성 속에서 도 각자 다른 여자에 대해 자기를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저마다 남성의 세계 에 눈길을 돌리고, 그 세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여자와 여자의 관계는 개성에 의거하여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직접 이 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관계에는 곧 적의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전쟁과 평화> 의 나타샤는 자기 가족의 여자들에게 호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 들에게 자기 아기의 침대를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타샤도 그녀들에게 질 투를 느끼고 있었다. 피에르의 눈에 그녀들이 저마다 '여자' 로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여자끼리의 화해는 서로 상대를 동일시 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같은 이 유로 여자는 그 친구를 배척한다. 여주인은 자기 하녀와 훨씬 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이 런 현상은 남색가라면 모를까 남자와 그 하인이나 운전수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주 부와 하녀는 서로 비밀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공범도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들 사이 에는 냉담한 경쟁심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주인은 일을 하지 않지만, 그 일의 책임과 공 적은 자기가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남과 바꿀 수 없는 존재, 꼭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내가 없으면 곧 집안이 엉망이 돼" 하고 그녀는 히스테릭한 심정으로 하녀의 잘못을 발견하려고 한다. 만일 하녀가 일을 너무 잘하면, 그녀는 자기만의 제일이 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돌보는 보모나 가정교사, 유모, 또는 일을 도와주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괜히 짜증을 부린다. 그리고 그녀들이 '나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을 무시한다고 구실을 붙인다. 사실 그녀는 의지도 특별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를 약오르게 하는 것은 타인이 자기의 직분을 자기처 럼 잘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때때로 가정생활을 어둡게 하는 가족간의 또는 피고용인 과의 모든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다. 여자는 그 개성적인 재능을 인정받을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점점 극성스럽게 여와노릇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자가 다른 여자를 적대시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교태와 연애에서 두드러진다. 젊은 처녀의 이런 경쟁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이것 이 한평생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요조숙녀나 사교계 여성의 이상은 자기가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런 여자는 자기 이마에 영광이 빛나지 않 으면 몹시 괴로워한다. 다른 여자의 이마에서 실오라기 같은 영광의 그림자만 보여도 괴로 워한다. 다른 여자가 표를 모으면 그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빼앗아간 표이다. 그런데 독자 적인 것이 아닌 절대란 대체 무엇일까?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면,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찬미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자기 친구들이 얻는 표면적인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도 사랑 자체에 위험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 을 당해 애인을 빼앗기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여자가 친하면 친할수록, 두 사람의 공존은 위험하다. 속내 이야기를 듣는 여자는 부지불 식간에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눈을 통하여 보고, 그 마음, 그 육체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친구가 반한 상대방 남자에게 마음이 쏠려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경우에 친구로서의 신의가 있기 때문에 감정에 지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는 그림자와 같 은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고 초조해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유혹에 넘어가 몸 을 내맡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조심스럽게 사랑을 하는 동시에, '친구'를 피한 다. 이 상반성 (사랑과 미움의 공존) 때문에, 여자는 좀처럼 우정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남성의 그림자가 그녀들 위에 언제나 무겁게 덮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말 하지 않을 때에도 남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생존 페르스의 시를 적용할 수 있다. 태양은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엄연히 존자하나니. 여자들은 힘을 합해 남자에게 복수하고, 모욕하고, 저주하고, 남자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가 규방 속에 가만히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우연성과 따분함과 권태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유명계는 모태의 아 늑함을 얼마간 간직하고 있지만 역시 유명계이다. 곧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여자는 잠자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곧 들어가게 될 화려한 객실에 대 한 상상 없이는 축축한 욕실에서의 유유자적한 목욕은 없다. 여자와 여자는 감옥의 친구이 다. 서로 힘을 합쳐서 이 감옥생활을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하고 탈출할 준비도 함께 한 다. 그러나 해방자는 남성의 세셰에서 올 것이다. 이 남성의 세계는 대다수의 여자에게 결혼한 후에도 그 화려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광 휘를 잃은 것은 남편일 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자의 순수한 본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다. 그래도 여전히 남자는 우주의 진리요. 지상의 권위, 경이, 모험, 주인, 여자를 눈여겨 보는 시선, 먹이, 쾌락 그리고 구원이다. 남자는 역시 초월성의 화신이며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숙한 나내라도 이런 '남자' 를 완전히 담념하고 속된 한 인간과 침울하게 마주 바라보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은 용납하기 여려운 일이다. 여자는 어린시절 의 습관에 따라 지도자를 갖고 싶어한다. 남편이 이 역할에 실패하면, 다른 남자에게 의지 하게 된다. 때로는 아버지, 형제, 숙부, 친척 중의 어떤 남자, 소꿉동무가 옛날 그대로의 위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이런 남성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직업상, 여자의 상담역이나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다. 신부와 의사가 이들이 다. 전자와는 무료로 상담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이 있다. 그는 고해실에서 여신도의 말을 순순히 들어줘야 한다. 신부들은 '성구실의 빈대' 나 '성수반의 개구리' 에게서는 될 수 있 는 대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교구의 신도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자기들의 임무 이며 그런 여신도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 교회는 그런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므로 그녀는 지도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음의 지도자' 는 그 여신도에게 자기의 정치적인 견해를 주입하여 투표를 좌우한다. 때로는 신부가 자기들의 부부생활까지 간섭을 한다고 화를 내는 남편도 적지 않다. 신부 는 규방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규제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교육에도 개입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행동 전체에 대한 충고도 한다. 남자에게서 신을 발견했던 여자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인 한 남성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한편 의사는 상담에 사례를 요구하기 때문 에 이렇지는 않다. 그리고 의사는 무례한 환자에게는 불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정확하고 집요하게 추구한다. 색광인 여자들이 찾아가는 남자의 4분의 3은 의사이다. 한 남자 앞에 알몸이 되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게 노출증적인 쾌락을 제공한다. "나는 좋아하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에만 만족을 느낀다는 여자를 몇 사람 알고 있다" 고 슈테켈은 말했다. 특히 노처녀 중에는 몸에 별로 이상이 없는데도 잘 보아달라고 하면서 의사를 찾아오는 여자환자가 많다. 그리고 암이나 유독감염 (유산에 의한) 공포에 떨며, 그것을 그실로 진찰을 받으러 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노처녀인 B. V. 는 43세, 부유한 여자이다. 달마다 한 번 월경을 마친 후에 반드시 검진 을 받으러 온다. 어딘지 모르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진찰해 달라고 한다. 그녀는 달마다 의사를 바꾸고 빈번히 같은 연극을 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옷을 벗고 테이블이나 소파 위 에 누우라고 말한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 거절한다. 의사가 여러 모로 설득하면 겨우 옷을 벋는다. 나는 처녀이므로 점잖게 다뤄 달라고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그녀에게 항 문을 살펴보는 것뿐이라고 말하여 암심시킨다. 검진이 시작되면 대개 성적 쾌감을 느꼈다. 항문을 살펴보는 중에 그것이 반복되어 강렬해진다. 그녀는 언제나 가명으로 나타나 진칠 이 끝나면 곧 비용을 지불하고 병원을 떠난다... 그녀는 의사에게 강간을 당하고 싶어서 장 난삼아 그렇게 했다고 고백한다. L. M. 부인은 38세의 기혼녀이다. 남편과는 완전히 불감증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정신분석을 받으러 온 것이다. 3회 받고 나서 애인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애인도 그녀에게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을 때 비로 소 성적 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 두세 번 진찰을 받고 나 서 다른 의사에게 상담하러 가고 싶었다. 그녀는 가끔 치료를 받았다. 그것은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끝으로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자궁의 위치를 교정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마사 지를 했다. 마사지를 할 적마다 몇 차례의 성적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의사가 자기 몸에 손을 대었을 때 처음으로 성적 쾌감을 느꼈고, 그 이후부터 이런 검진을 받는 것을 좋아하 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본 남자는 자기 육체의 매력이나 마음의 아름다움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고 상상하기 쉽다. 병적인 경우에는 상대방 신부나 의사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 각까지 하는 것이다. 그녀가 정상인 경우에도 상대방 남자와 자기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종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거기 서 자기 생활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안정감 같은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의 생활을 도덕적인 권위로 지탱하는 데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좀더 로맨틱한 흥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이 남편을 속이거나 헤어지고 싶 지 않다면, 그녀들은 젊은 처녀가 남성들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한 수단에 호소하기도 한 다. 즉 그녀들은 공상적인 정열에 도취하는 것이다. 슈테켈은 그와 같은 사례를 많이 인용 하고 있다. 그녀는 기혼 여성으로 정숙한 상류층에 속해 있는데 신경쇠약 증상이 있었다. 어느날 밤, 그녀는 오페라 극장에서 자기가 테너 가수에게 반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듣고 흥분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열렬한 펜이 되어, 그의 노래를 들으러 가고, 사 진을 사고, 그 남자를 꿈꾸고, '숭배하는 미지의 여성으로부터' 라는 헌시와 함께 꽃다발을 보냈다. 그녀는 드디어 러브레터를 쓰기로 결심했다. (서명은 역시 미지의 여성이라고 앴 다. )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열적으로 그를 짝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숙한 아내로 있는 것이 행복했다. 어떤 부인은 빈의 유명한 배우인 카인츠를 ㅕㄹ렬히 숭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 이 대예술가의 수많은 초상화를 수집하여 카인츠실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모퉁이에 는 카인츠 문고도 있었다.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것, 이 사람에 대해 쓴 책, 팜플릿, 신문 등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위에는 예술가의 서명이 들어 있는 사진 을 붙여놓았다. 그 우상이 죽었을 때 그녀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고 카인츠에 관한 강연을 들으러 돌아다니기 위해 긴 여행을 했다. 카인츠 숭배가 이 여성의 색정과 관능을 면역시 켰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루돌프 발렌티노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눈눌을 흘리게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기혼 부인도 젊은 처녀도 영화의 영웅을 숭배한다. 그녀들이 수음을 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부부간에 포옹할 때 떠올리는 환상은 이 영웅의 모습인 경우가 적지 않다. 때 때로 또 이런 영웅들은 조부. 형제. 선생의 옛 모습이 되어, 소아기의 어떤 기억을 부활시 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의 주위에는 살과 뼈를 지닌 남자들도 있다. 그녀가 성적으로 만족하고 있 건, 불감증이건, 남편에게 실망하고 있건 완전한. 절대적인. 배타적인 사랑의,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는 이런 현실의 남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날마다 만나는 남편의 시선은 이제 그녀의 모습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 기엔 부족하다. 아직 신비에 찬 눈이 그녀 자신을 신비스러운 존재로 발견해 주기를 바라 고 있다. 자기의 고백을 친절히 들어주고, 퇴색한 사진을 신선하게 소생시키고, 입가에 보 조개와 깜박거리는 속눈썹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에게는 자신이 최고라는 의식이 필요하 다. 사람들이 자신을 더 이상 탐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못한 것이다.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화합을 이루고는 있지 만, 다른 남자들의 곁에서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싶어한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바치고 있는 숭배에, 남자들도 가담하도록 유인한다. 그녀는 유혹하고 즐겁게 해주며 금단의 사랑 을 꿈꾸고 흐뭇해 한다. 즉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는 한 사람과 깊은 정을 맺는 것보 다는 많은 숭배자를 매혹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젊은 처녀들보다 더욱 열렬하고 세련 되어 있으므로, 그녀의 교태는 남자들에게 그 가치와 위력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가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도 한 남자를 소유하는 데 성공한 만큼, 더욱 대담해질 수 있다. 그리 하여 그녀는 큰 희망도 위험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여자는 한동안 정숙한 기간을 유지한 다음에 반드시 이런 유희적인 교태에만 머물러 있 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남편에 대한 원한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일종의 복수라고 아들러는 주 장하고 있다. 이것은 좀 지나친 말 같다. 그러나 실제로 아내는 애인의 유혹에 넘어가기보 다는, 남편에게 도전하고 싶다는 욕구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 "그이는 이 세상에 하나밖 에 없는 남자가 아니야 내 마음에 드는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나는 남편의 노예가 아니야. 그이는 자신만만해하지만, 한 번 속아보라지. " 남편을 우롱하는 것이 여자에게 중요한 의 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춘기의 처녀가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이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자신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애인을 갖는 것처럼, 원한에 의해 남편 에게 매여 있는 아내는 애인에게서 고백의 상대를 구하고, 희생자가 된 자기 모습을 보아 줄 사람과 남편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일에 공모자를 구한다. 그녀는 남편을 사람과 남편이 가치를 깍아내리는 일에 공모자를 구한다. 그녀는 남편을 경멸할 자료를 제공한다는 구실 로 애인에게 끊임없이 남편의 이야기를 한다. 만일 애인이 그런 상대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녀는 기분이 상하여 애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거나, 위안을 줄 수 있는 다른 상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원한보다는 오히려 있는 다른 상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원한보다는 오히려 실망 때문에 애 인의 품에 안기는 경우이다. 그런 여자는 결혼에서 사랑을 찾지 못한다. 젊었을 때 기대했 던 감각적인 쾌락이나 희열을 느끼지 못한 채 체념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 이다. 결혼은 여자에게서 모든 애로틱한 만족을 빼앗아가고, 그 감정의 자유와 개성을 부 정하므로, 필연적이고 아이러니컬한 논리에 의해 여자를 간통으로 이끌어간다. 몽테뉴는 말한다. 우리는 여자를 어렸을 때부터 사랑에 익숙하도록 가르친다. 그 모습. 화장. 지혜. 말씨 등 모든 교육은 주로 여기에 치중한다. 가정교사는 여자아이에게 주로 사랑의 얼굴을 마음 에 새겨준다.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여자가 그것을 오히려 역겹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이처럼 간절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제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엘겔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일부일처제도와 함께 두 가지 사회적인 인간형이 항구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내의 정부와 간부의 남편이 그것이다... 일부일처제도와 창녀제도가 존재하는 한편 간통이 불가 피한, 금지되어 있는, 엄중히 처벌되는, 그러면서도 이것을 근절하기는 불가능한 하나의 사 회제도가 있다. 부부의 포옹이 여자의 성감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호기심만 자극하게 되면 콜레트의 <순 진한 탕녀>에서 처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침대 속에서 성교육을 완성하려고 한다. 만일 남편이 그녀의 성감을 잘 일깨우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개인적인 애정 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남편이 가르쳐준 쾌락을 맛보고 싶어한 다. 모럴리스트들은 아내가 애인에게 정을 쏟는 것에 분개한다. 부르주아 문학이 남편의 모 습을 훌륭하게 그리려고 노력한 것을 앞에서 지적한 바가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에 즉 다 른 남자들의 눈에 연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써 남편을 옹호하려고 하 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이 그 아내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혐오스럽게 보이는 두 가지 특색이 있다. 먼저 아내에게 서을 눈뜨게 하는 대단히 거북한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이라는 것이다. 폭행을 당하고 싶은 욕망과 얌 전히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처녀의 모순된 요구는 대개 남편을 실 패로 끝나게 한다. 그 결과 여자는 영구히 남편의 품안에서 불감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애인을 상대할 때에는 양상이 달라진다. 그녀는 처녀를 빼앗길때의 고통이나 수 치스러운 굴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당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도 없다. 대 강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첫날밤 때보다 더욱 솔직하고 그다지 민 감하지 않고 별로 무지하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욕망, 감정과 흥분을 혼돈 하지 않는다. 애인을 택했다는 것은 그 사나이를 분명히 원했기 때문이다. 이 명석함이야 말로 선택의 자유의 표시이다. 그것이 남편에게 부담이 되는 또 다른 결함이다. 보통, 남편은 주어진 생태이지 선택된 상대는 아니다. 체념하고 받아들였거나 가족에 의 해 맺어진 것이다. 설사 사랑으로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남편은 이미 주권자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의무의 형태를 취하고 남편은 흔히 폭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애 인의 선택도 주위의 상황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는 비교적 자유가 많이 주 어진다. 결혼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지만, 애인을 갖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여자는 남자 에게 마음이 이끌려 따르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의 욕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애인은 일상생활의 관습적인 접촉으로 유혹 되지 않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는 떨어져 있는 타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애인과의 접촉에서 자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부와 접촉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애인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여자가 무엇보 다도 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타인에 의해 점유디어 경이를 느끼고 자기 자신의 속 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녀들은 애인과 헤어지면 절망적인 허무감을 느낀다. 자네는 이런 우울증상의 많은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이 우울증은 여자가 애인에게서 구하여 찾아 낸 것이 공허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39세의 여자로 5년 동안 어떤 문학가의 일을 도와준 후에 버림을 받은 것을 비 관하여 자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대단히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굉장히 폭군적이 었으므로 나는 오직 그의 일을 도와줄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다른 여성은 31세로, 사랑하던 애인과 해어져 병에 걸렸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의 책상에 놓인 잉크병이 되고 싶어요" 하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다. "나는 혼자만 있으면 곧 권태로워져요. 남편은 내 머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놀라게 하 지 못해요... 단지 상식만 갖고 있을 뿐. 나는 지겹기만 해요." 이와 반대로 그녀의 애인에 대하여 그녀는 놀라운 사람이에요. 동요하거나 함부로 감동하거나 환희하거나 방종하지 않 아요. 언제나 자제력을 잃지 않고, 상대를 슬퍼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할 만큼 냉정해요. 그러면서도 대담하고 침착하고 지성적이고, 마음이 섬세하여 나를 얼떨떨하게 했어요... 이와 같은 충만감과 즐거운 자극을, 관계를 가지는 초기 단계에만 느끼는 여성도 있다. 애인이 곧 쾌락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처음에는 조심스러워 잘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흔 히 있다 그녀들은 남자를 원망하고 혐오한다. 이런 메살린형은 몇 번이고 경험을 쌓으면서 애인을 차례로 바꾼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실패로 현명해진 여자가 이번에는 자기와 잘 어 울리는 남자에게 이끌려, 두 사람 사이에 영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때때 로 그 남자가 남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수가 있다. 아델 (빅토르 위고의 부인) 을 유혹한 이유도 아마 생트 뵈브가 빅토르 위고와 대조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었 을 것이다. 슈테켈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P. H. 부인은 8년 전에 어떤 체육클럽의 한 회원과 결혼했다. 그녀는 가벼운 난관염으 로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으러 갔다. 그녀는 의사에게 남편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남편은 난폭한 사람이었는데 결국 다른 여자를 가까이 했다. 그것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이혼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다니다가 마침 남편 과 성격이 정반대인 비서와 알게 되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정다운 편 지를 보내어, 여러 모로 부인을 위로했다. 두 사람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공명하게 되었 다... 최초의 키스는 그녀의 불감증을 소멸시켰다... 이 남자는 정력은 비교적 약한 편이었 으나 여자쪽에서는 처음으로 강한 성적 흥분을 느꼈다. 이혼한 두 사람은 결혼하여 매우 행복하게 살았다... 키스나 애무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력이 넘치던 전 남편은 이 여자를 불감증이라 비난하지 않았던가. 모든 연애관계가 이와 같이 동화처럼 원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젊은 처녀가 부모의 집 에서 자기를 해방시켜줄 사람을 꿈꾸는 것처럼, 결혼생활의 멍에에서 자신을 구제해 줄 애 인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애인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까지 열렬했던 남자가 갑자 기 냉정하여 도망치는 이야기는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의 테마이다. 남자가 소극적이어서 여자쪽이 상처를 입게 되고, 원망이나 반감이 싹뜨면서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 다. 연애관계가 안정되면 가정과 같은, 부부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도 권태. 질투. 신중. 책략 등 결혼에 뒤따르기 쉬운 모든 결함이 발견된다. 그리고 여자는 이런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남자를 우ㅏㄴ하게 된다. 아무튼 간통은 풍습이나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가부장제도적인 전통이 남아있는 우리 문명에서는 부부생활의 부정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도덕한 일에 대해 잘못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서가 아니라 이기심에서 악덕이 생기게 하며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만든 법규가 너무 엄하기 때문에, 여자로 하여금 그녀들 에게 무리하지 않은 부도덕에 오히려 더욱 열중하게 하여, 원인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 온다. " 이런 엄격성이 생기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아내의 간통은 가족 속에 다른 남 자의 아들을 불러들여 정당한 상속자에게서 재산을 빼앗을 위험이 있다. 남편은 주인이고 아내는 그 소유물이다. 사회의 변화, 산아제한의 실천은 이런 이유를 많이 소멸시켰다. 그 러나 여자를 독립시키지 않고 의존상태에 머무르게 하려는 의지는 지금도 여자에게서 기 존의 금지령을 해제하지 않고 있다. 여자는 흔히 그것에 익숙해 있다. 그녀는 부부간의 사 랑이 가져다주는 기쁨 같은 것에는 눈을 감는다. 종교나 도덕심이나 정숙성을 남자와 마찬 가지로 지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의 속박은 특히 신대륙과 구대륙의 작은 도시에서는 남편에게 가해지는 속박보다 훨씬 크다. 남편이 자주 외출하고, 여행하고 탈선 행위를 해도 세상은 관대한다. 그러나 나내가 탈선하면 부인으로서의 평판과 지위를 잃게 된다. 여자가 이런 세상의 눈을 교묘히 기만하는 모습을 작품에 묘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포르투갈의 한 작은 도시는 여자에 대한 감시를 엄격하게 하여 젊은 아내가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따라나선다. 그러한 한 이발사가 그 가계의 위층에 세들어 있는데 그가 퍼머와 빗질을 하는 사이에 연인들이 서둘러 포옹 을 한다. 큰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한결 자유롭다. 그러나 흔히 이용되는 5시에서 7시 사이 의 데이트도 이런 부도덕한 감정을 행복하게 살리지는 못한다. 몰래 숨어서 다급하게 해야 하는 간통은 인간적인 자유로운 관계가 되지 못한다. 여기에 따르게 마련인 거짓말은 부부 관계에서의 모든 품의를 말살해 버린다. 오늘날에는 여자가 부분적으로 성적인 자유를 얻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부부생 활과 성적 만족을 조화시키는 것은 그런 여성에게도 아직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결혼 은 일반적으로 반드시 육체적인 사랑을 수반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남자가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인정되지만 바람기를 갖고 있다. 사실상 남자가 성적으로 방자한 것이 아내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의는 그것이 구속을 나타내지 않는 한 그만큼 더 순박하 고 덜 상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에게도 같은 것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자식들을 위해 그와 함께 가정을 이뤄나가기를 원하지만, 한편 다른 남자와의 포옹도 경험하고 싶어한다. 간통을 타락으로 보는 것은, 신중과 위선의 타협이다. 자유와 성실의 계약은 결혼이 지 닌 결함의 하나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뒤마프스의 '프랑시옹' 의 머리에 떠오 른 신통치 않은 문구인 "여자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 가 아직 다소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이 차이는 전혀 자연적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만큼 성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는데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없다. 정욕이 억압된 여자는 신경질적인 아내가 되 고, 변태성욕적인 어머니가 되고, 괴팍한 주부가 되고, 불행하고 위험한 인간이 된다. 어쨌 든 설사 그녀들의 정욕이 남자보다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여길 이유는 조금도 없다. 차이는 전통과 현대사회가 결정하고 있는 남녀의 성적 상 황의 총체에서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아직 여자의 사랑의 행위를 남자에 대한 일종의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를 마치 여자의 주인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여자가 대등하지 않은 남자에게 자기를 맡기면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잃게 된다. 그 승낙은 항복과 타락의 성질을 띠게 된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용인하 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아델 위고는 정력적인 남편 이 다른 침대로 옮기는 것을 미련없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사랑의 포옹에서 여자는 객체가 되고 먹이가 된다. 남편은 그녀가 외부세력 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 아내로 보이지 않고 남에게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여자는 침대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끼고 이를 원하며, 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다. 그리고 남성의 위력을 실감하고, 자기를 이처럼 소유하여남자 전체를 나타내보이는 남 성을 시인하며,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남편이 아내의 입을 통하여 다른 남자 에 대한 그리움의 메아리를 듣고 화를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당하고 능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샤리에르 부인이 젊은 뱅자맹 콩스탕과 헤어진 것 은 콩스탕은 두 사람의 남성적인 부인 사이에서 여성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스탈 부인의 혐오스러운 감화의 흔적이 보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몸을 맡기 는 남자의 노예가 되고 반영이 되는 한 그녀의 부정은 상호간의 부정보다 남편에게서 더 많이 초래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자가 자주성을 분명히 유지하고 있더라도 남편이 애인에 의해 나쁜 영향을 받을까봐 두려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여자는 남자와 자게 되면 비록 단 한번, 서둘러 소파 위에서라도 본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물며 애인을 소유한 것으로 자부하는 남자가, 그녀의 남편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바타유의 <애정> 이나 케셀의 <밤의 미인> 에서는 여자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애인을 택하게 하고 있다. 그녀는 그런 애인을 상대하여 감각적인 만족을 얻지만, 그녀는 존경하는 남편 보다 그가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남녀가 서로 자유계약을 맺은 한 쌍에 대해 쓰고 있다. 그 러나 메이가 키요에게 자기가 어떤 남자친구와 잤다고 말하자, 키요는 그 남자가 그녀를 자기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괴로워한다. 그는 메이의 자유를 존중 하는 길을 택했다. 아무도 누구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다른 남자가 달콤한 생각을 했다고 상상하자, 그것이 메이의 입을 통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굴욕을 느끼게 된다. 사회는 자유로운 여자와 유혹에 약한 여자를 혼동하고 있다. 연애를 하는 남자도 자기가 이용하는 상대방의 자유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남자는 애인이 자기의 유혹에 넘 어갔다, 자기에게 이끌렸다, 자기가 정복했다, 유혹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라면 자기도 개인으로서 상대방 남자의 허영심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 나 그녀로서도 존경할 만한 남편에게까지는 자기의 오만을 강요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못될 것이다. 여자로서는 남녀평등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남자와 평등하게 행동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간통. 우정. 사교생활은 모두 결혼생활 에서는 기분전환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속박을 견디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속박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요컨데 그것은 모두가 거짓 도피범에 불과하며 그것이 여자 에게 인생을 올바로 개척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제 4 장 창녀와 정부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결혼은 직접적인 성관계로서 매음을 동반하고 있다. 모르 간은 "매음제도는 가정에 던져진 검은 그림자로서 문명속에까지 인류에게 따라다닌다. " 고 말했다. 남자는 용의주도하게 그 아내를 정결로 묶어두지만, 자신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그 제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그들의 지혜를 칭찬하는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그 아내들을 불러 주 연에 참석시켰다. 그러나 술에 거나하게 취하여 정욕을 마음대로 발산시켜야 할 때에는 아 내를 사실로 돌려 보내어 자기들의 무절제한 정욕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대신에 이런 존경을 할 의무가 없는 여자들을 불러들였다. 화려한 궁전의 위생을 보장하려면 하수도 시설이 필요하다고 신부들은 말하고 있다. 그 리고 말드빌 역시 평판이 좋은 한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더욱 혐오스러운 본능의 용렬함을 피하기 위해선 일부 여성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 " 미국의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이 노예에 대해 말한 논거의 하나는 남부의 백인은 이 제도에 의해 노예적인 노동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상호간에 더욱 민주적이고 세련된 관 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여자들의 계급이 존재하는 것 은 정숙한 여자들을 가장 신사적으로 존경심을 갖고 대할 수 있다. 창녀는 속죄양이다. 남 자는 그 비열한 정욕을 그녀를 통해 발산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을 경멸한다. 법규가 그 녀를 경찰의 감독하에 두든 몰래 숨어서 활동하든 상관없이 그녀는 천민으로 취급된다. 경제적인 입장에서 보면 창녀의 처지는 기혼녀의 입장과 대조적이다. "매음에 의해 자기 를 파는 여자들의 유일한 차이는 그 계약의 금액과 기간이다" 하고 마로는 말했다. (<사 춘기>에서) 성행위는 아내나 창녀 모두에게 하나의 임무다. 전자는 유일한 남자와 종신 계약을 맺고, 후자는 각각 지불해 주는 몇 사람의 손님을 갖게 된다. 전자는 한 남성에 의 해 다른 모든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고, 후자는 모든 남자들에 의해 각각 배타적인 속 박으로부터 옹호되어 있다. 어쨌든 그녀들이 육체를 제공하여 얻게 되는 이득은 경쟁에 의해 정해진다. 남편은, 자 기가 다른 남자의 아내와 계약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즉 부부의 임무 이행은 은 혜가 아니라 계약의 실행이다. 매춘에서는, 남성의 정욕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종의 것 인 이상, 어떤 육체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있다. 기혼녀와 창녀는 남자에게 개성적인 매력 을 입증하지 않으면 남자를 잘 이용할 수 없다. 이 양자 사이의 큰 차이는 본부인은 아내 로서 억압을 받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존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존중도 억압을 받는 동안에 줄어들게 된다. 한편 창녀는 인격으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성 노예제 도의 모든 양상이 동시에 요약되어 있다. 여자에게 매음을 하게 하는 동기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날에는 롬브로조의 주장을 믿는 사람이 없다. 그는 창녀와 범죄자를 비교하여 양자를 모두 변질자로 간주했 다. 통계가 분명히 밝히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창녀의 지적인 수준은 중위권에서 약간 처지고 일부는 분명히 지능박약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신적인 능력이 약한 여자들이 아무 특기도 요구하지 않는 직업을 자진하여 택하기도 하지만, 그 대다수는 정상이고 일부는 대 단히 총명하기까지 하다. 여자에게는 어떤 유전적인 숙명이나 생리적인 결함도 없다. 사실 가난과 실업으로 가득찬 세계에서는 어떤 직업이 생기면 거기에 쏠리는 사람들이 있다. 경찰이나 매음이 존재하는 한 경관과 창녀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다른 일 들보다 수입이 많으면 어쩔 수 없다. 남성의 요구에 따라 생기는 이런 장사에 눈이 휘둥그 래지는 것은 대단히 위선적이다. 이것은 범세계적이고 극히 당연한 경제적인 과정이다. 1857년에 파랑 뒤샤틀레는 그 조사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매음의 원인 중에서 가장 명백한 것은 직업의 부족과 불충분한 급료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 보수파의 모럴 리스트는 냉소하면서, 창녀의 슬픈 신세타령은 순진한 손님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사실 많은 창녀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직업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 때문에 그녀의 본성이 타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병폐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이 런 직업이 아직 많은 여성들로부터 그다지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째서 이런 장사를 택했는가 하고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는 어째서 그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창녀의 대다수가 하녀 출신이라는 것은 특히 주목된다. 그것은 파랑 뒤샤틀레가 모든 나라에 대해 확인한 것으로, 독일에서는 릴리 브 라운이 조사하고 벨기에에서는 리케르가 조사한 결과였다. 창녀의 약 50퍼센트는 하녀였 다. 이 사실은 하녀의 방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혹사를 당하고 압박을 받 으며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만능 하녀나 시녀는 미래에 대해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한다. 때로는 집주인의 바람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가정적인 노예에서, 하녀로서 의 정사에서, 혹은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고용살이를 하는 여자들은 대 개 떠돌이이다. 파리 창녀의 80퍼센트는 지방이 아니면 근교에서 올라온 여자라고 한다. 자기 집이 가깝거나 세상의 평판에 구애를 받는 여자는 일반적으로 나쁘게 여기는 이런 직업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도 없게 되면 도덕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은 그녀에게 아무 울타리도 되지 못한다. 중산층은 성행위를 특 히 처녀성을 엄한 터부로 에워싸고 있지만, 농민이나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는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조사가 일치하고 있다. 즉 아무렇지도 않게 처녀성을 빼앗기고 그후에도 또 알게 된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여자가 많다. 비자 르 박사는 100명의 창녀에 대해 실시한 조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명 은 11세에 처녀성을 잃고, 2명이 12세, 2명이 13세, 6명이 14세, 7명이 15세, 21명이 16 세, 19명이 17세, 17명이 18세, 6명이 19세에 각각 처녀성을 잃고 그밖의 하녀들은 21세 이후이다. 그 중에서 5퍼센트는 몸이 아직 성숙되기도 전에 폭행을 당했다. 반수 이상이 사랑에 의해 몸을 맡겼다고 했으며, 그밖에는 무지에서 동의했던 것이다. 최초로 유혹한 상대방은 대개 젊은 남자이다. 그리고 대개 직장. 친구. 동료. 소꼽친구 등이고, 다음은 군 인. 직장상사. 하인. 학생 등이다. 바자르 박사의 조사표에는 여기에 2명의 변호사와 건축 가. 의사. 약사가 각각 1명씩 포함되어 있다. 흔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젊은 여성에게 성에 눈뜨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고용주 자신인 경우는 별로 없고, 그의 아들이나 조카 또는 친구가 대부분이다. 코망주도 그의 연 구에서 45명 (12세에서 17세) 의 젊은 처녀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들 모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미지의 남자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녀들은 조금도 쾌락을 느끼 지 못한 채, 무작정 남자의 뜻에 따랐던 것이다. 특히 비자르 박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좀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보르도의의 G 양은 18세에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호기심에서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떤 마차 속으로 끌려가 알지 못하는 한 상인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 13세의 어떤 소녀는 길에서 만난 낯선 남자에게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몸을 맡기고, 그후에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M 양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17세 때 어떤 낯선 젊은 남자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 그 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R 양은 17세 때 젊은 남자에게 순결을 빼앗겼는데 그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 녀가 병든 여동생을 찾아 이웃 의사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였다. 그는 그녀가 빨리 집 에 돌아갈 수 있도록 차에 태우고, 실제는 자기가 드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치고는 그대 로 거리 한복판에다 버린 것이다. B 양은 15세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번도 만난본 적이 없는 젊은 남자에게 순결을 빼앗겼다. 그리고 9개월 후에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S 양은 14세때 어떤 젊은 남자가 자기 여동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기에 그 집에 함께 갔다가 순결을 빼앗겼다. 그 남자는 여동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매독에 걸려 있었다. 그 래서 그녀는 매독에 감염되었다. R 양은 18세때 기혼자인 사촌오빠와 함께 옛 전쟁터를 방문했는데 참호 속에서 그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 그녀는 임신하여 가족과 이별해야만 했다. C 양은 17세때 어떤 여름밤에 바닷가 호텔에서 알게 된 젊은 남자에게 처녀성을 빼앗겼 는데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두 어머니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임질에 감염되었다. L 양은 13세때 라디오를 들으면서 백부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 한편 백모는 일찍 자기 를 좋아해서 옆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동적으로 몸을 허락한 젊은 처녀는 역시 이 때문에 처녀 성 상실의 정신적인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 난폭한 경험이 그녀의 장래에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지만, 그녀들에 대해 정신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또 이런 여자들은 자기 신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서툴고, 설사 이야기 해도 상투적인 언사만 늘어 놓는 것이 고작이다. 일부 여자들은 닥치는 대로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맡긴 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매음망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가정의 불화, 싹트기 시작하는 성욕에 대한 두려움, 어른다워지려는 욕망 등에 의해 창녀의 흉내를 내는 젊은 처녀들도 있다. 그녀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남자아이들을 자주 찾아가며 교태와 도발적인 행동을 한다. 아직 어려서 성에 눈뜨지 않고 성감도 발달하지 못한 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 장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녀들의 말을 곧이듣는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쉽사리 행동으로 옮겨간다. "문이 한 번 열린 다음에는 그 문을 닫기가 어려워요" 하고 14세의 어린 창녀가 말했다. (마로의 <사춘기>에서) 그러나 처녀를 잃고 나서 곧바로 거리에 나서서 손님을 물색할 결심을 하는 처녀는 들물다. 대개 그런 여자는 자기를 범한 최초의 남자에게 매달려, 그와 함께 살면서 떳떳한 직업을 갖는다. 애인에게 버림을 받으면, 다른 남자가 그녀를 위로해 준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한 남자의 것이 아니므로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무방하 다고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애인이 -최초의 남자와 다음 남자-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부추긴다. 부모의 뜻에 따라 매음을 하는 처녀들도 적지 않다. 어떤 가족의 경우는 -저 유명한 아 메리카의 주크 가문처럼- 여자들이 모두 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젊은 여자 부랑배 중 에도 근친에게 버림을 받은 소녀가 많다. 그녀들은 거지로 시작하여 거리로 나서게 된다. 1857년에 파랑 뒤샤틀레는 5천명의 창녀에 대해 조사한 결과 그중에서, 1,441명은 가난 때문에, 1,425명은 유혹에 넘어가 버림을 받아서, 1,225명은 부모가 방치하여 그렇게 되 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조사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밖에 병으로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거나 실직한 여자를 매음으로 내모는 경 우도 적지 않다. 병은 가뜩이나 위태로운 생계를 파탄으로 몰아 시급히 새로운 대책을 강 구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출산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생 라자르 갱생원에 수용 되어 있는 여자의 반수 이상은 적어도 한 아이를 갖고 있다. 많은 경우에는 3명에서 6명 을 키운다. 비자르 박사는 그중에 14명의 아기를 낳은 여자가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그가 이 여자를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8명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 박사의 말에 의하면, 아 이를 버리는 여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처녀가 아이를 기르기 위해 창 녀가 되는 경우도 있다. 박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그녀는 19세 때 시골에서 60세의 주인에게 처녀성을 빼앗겼다. 그때는 아직 가족과 함 께 살고 있었으나 임신을 했기 때문에 가족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는 후에 건강한 여 아를 낳아 잘 키웠다. 출산한후에 그녀는 파리에 와서 유모의 일자리를 얻었는데 29세 때 부터 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그후 33세부터 매음을 시작했다. 건강도, 삶의 의욕도 잃은 그녀는 지금 생 라자르 갱생원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다. 전쟁중과 그후의 혼란기에 매춘이 성행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지에 부분적으로 발표된 <어느 창녀의 생활>의 저자는 그 시작을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나는 16세 때 30세나 연상인 남자와 결혼했다. 내가 결혼한 것은 부모의 집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나에게 아이를 낳게 할 궁리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집 안에 머물러 있겠지, 나갈 수 없을 테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내가 화장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영화구경도 함께 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참고 견뎌야 할 시어 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날마다 집에와서 언제나 그 못된 자기 아들의 편을 들었다. 나는 첫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자크라고 지었다. 14개월 후에 나는 피에르라는 둘째아이를 낳 았다... 나는 무척 권태로워 간호사가 되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은 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파리 교외에 있는 어느 병원의 부인병동에서 일하게 되었다. 말괄량이 간호사 한 사 람이 나에게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남편과 자는 것이 차라리 고역이었다고 한다. 여러 남자들 가운데서 나는 여섯 달 동안을 단 한 번도 정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진짜 이주민인 망할 놈이, 그러나 얼굴 하나는 굉장한 미남인 한 청년이 내 방에 들어와서... 그는 나에게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과 파리에 갈 것을, 그리고 이젠 일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는 나를 감쪽같이 속였다... 나는 그와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 달 동안은 참으로 행복했다... 어느날 그가 옷차림이 화려한 멋쟁이 여자를 데리고 왔 다. 그녀는 말했다. "이 여자는 고집이 세겠어." 처음부터 거리에 나서진 않았다. 나는 손님을 부를 생각이 없 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거리의 병원에서 간호사 일자리까지 얻었다. 그러나 나 는 오래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군 그래. 여자가 진 정으로 남자를 사랑한다면 그 남자를 위해 일하는 거야." 나는 울었다. 병원에서는 참으로 쓸쓸했다. 드디어 나는 잠자코 미장원으로 끌려갔다. 쥘로는 내가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 았나 하고 유심히 살폈다. 그는 경관이 나를 잡으러 올 경우 나에게 미리 알려 주기 위해 내 뒤를 따라 다녔다...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이것은 기둥서방이 거리에서 망을 보고 손님을 부르는 창녀의 고전적인 이야기 그대로이다. 이 기둥서방의 역할을 남편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때로 는 여자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L.페브르는 1931년에 510명의 젊은 창녀에 대해 조 사했다. (<감옥의 젊은 창녀.부랑녀>에서) 이에 의하면 그녀들 중의 284명은 혼자 살고, 132명은 한 사람의 정부와 살며, 84명은 여자친구와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대개 그녀 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의 발췌(그녀들의 철자 그대로)를 인용하고 있다. 17세의 나 쉬잔은 매음에 빠져 있었는데 특히 창녀를 상대했다. 나와 오랫동안 사귄 한 사람은 샘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거리를 떠났다... 15세하고 6개월인 나 앙드레는 어느 댄스 홀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위해 부모 곁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남자처럼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나는 그녀와 4개월 동안 함께 지냈다. 그리고... 14세인 잔, 나의 가엾은 아빠는 이름이 X였다. 그는 1922년에 부상병으로 병원에서 죽 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재혼했다. 나는 졸업증명서를 얻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졸업증명서 를 받은 후에 나는 재봉 기술을 배워야만 했다... 그런데 벌이가 시원치 않아 나는 계부와 자주 말다툼을 했다... 나는... 거리의 X부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갔다. 열흘 후부터 나는 2 5세 가량 되는 그 집 딸과 단둘이 있었다. 나는 이 여자에게서 매우 이상스러운 것을 발견 했다. 어느날 그녀는 마치 청년처럼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망설였으나, 쫓겨나기가 두려워 결국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그때 나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거리가 없으면 숲으로 가서 여자들을 상대로 몸을 팔았다. 나는 대단히 너그러운 친절한 부인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으로 매음을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막 상 해보니 발이 묶여 몸을 뺄 수 없었다는 사례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폭력이나 거짓 약 속이나 속임수에 의해 벗어날 수 없는 톱니바퀴 속에 들어가버린 "백인매매"의 경우는 비 교적 보기 드물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의사와는 반대로 그 일에 매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직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본은 정부나 포주가 제공하며 이것으로 그들은 그 녀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여 그녀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대부분을 가로챔으로써 그녀가 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마리 테레즈는 거기서 빠져나오기까지 여러 해 동안 힘 겨운 투쟁을 계속했다. 나는 결국 쥘로가 나의 돈을 탐낸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서 떠나면 조금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집에서는 수줍어서 손님에게 가까이 가서 '올라타요'하 고 말할 수 없었다. 쥘로의 여자친구가 옆에서 나를 감시하고 내가 벌어들인 돈을 세어보 기도 했다... 쥘로가 내게 보내온 편지에는 밤마다 여주인에게 돈을 넘겨주라고 쓰여 있었 다. 그렇게 하면 도둑을 맞지 않을 테니까... 내가 옷을 사려고 하면 여주인은 쥘로가 내게 돈을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 빨리 그 집에서 떠날 결심을 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여주인은, 여느 때와는 달리 검진을 받기 전에 주던 솜뭉치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잡혀 병원에 가야만 했다...나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사 창가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악마의 소굴에 4주일밖에 있지 않았다... 나는 바르베스에서 전과 같이 며칠 일했으나 쥘로가 몹시 원망스러워 파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말다툼을 했다. 그는 나를 마구 때리고 한번은 나를 창 밖으로 내던지려고 했 다... 나는 시골로 가기 위해 어느 소개자와 의논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쥘로와 아는 사이 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베롬 거리 근처에서 소개자가 데리고 다 니는 두 여자와 마주쳐 나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튿날 나는 짐을 싸들고 혼자서 T라는 섬을 향해 떠났다. 3주일 후, 나는 사창가가 지 긋지긋하여 의사가 검진을 왔을 때 편지를 써서, 더 이상 일이 불가능하다는 처방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쥘로는 마장타 거리에서 나를 만나자 마구 구타했다. 그래서 나는 얼굴 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쥘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독일로 가기로 계약을 했다. 문학 작품에는 '쥘로'와 같은 타입의 남자가 전형화되어 있다. 이런 남자는 창녀를 보호 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그녀에게 화장품을 살 돈을 빌려주고, 그녀를 다른 여자들과의 경 쟁으로부터, 경찰로부터-때로는 그 자신이 경찰관 노릇을 하여- 그리고 유객으로부터 지 켜준다. 손님중에는 공짜로 즐기려는 자도 있고 개중에는 여자를 상대로 사디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자도 있다. 몇 해 전에 마드리드에서 한 파시스트인 청년 귀족이 추운 밤에 창녀를 강물 속에 집어 던지고 즐거워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술에 취한 학생들이 때때로 여자를 산골에 데 리고 가서 밤중에 발가벗겨 길거리에 버리고 오기도 했다. 창녀는 돈을 받아내고 학대를 피하기 위해 한 사람의 남자를 필요로 한다. 그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지주도 된다. "혼자 서는 일도 잘 안 되고 또 흥미도 별로 못 느껴 그냥 끌려가게 돼요"하고 어떤 여자들은 말 한다. 그녀들이 기둥서방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직 업에 종사하고 또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대단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종교적인 사랑도 잘 이루어지며 어떤 창녀는 정열적인 자기 희생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그녀는 남자가 자기에게 휘두르는 폭력 에 남자다움을 발견하고 점점 그에게 복종한다. 그녀들은 남자 곁에서 질투나 고뇌도 느끼 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의 기쁨도 알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남자에게 적의와 원한만을 품는 경우도 있다. 마리 테레즈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그녀가 남자에게 잠자코 지배를 받는 것은 두려움에서이며 아주 지쳐 있기 때문이 다. 이럴 경우에 그녀는 때때로 손님 중에서 고른 애인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여자들은 저마다 쥘로 같은 남자 이외에 애인을 갖고 있었다. 자신도 그랬다고 마리 테 레즈는 쓰고 있다. "나의 애인은 굉장한 미남으로 어부였어요. 그는 나를 무척 사랑했으나,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매우 사이좋게 지냈어요. 그는 동침을 하지 않고 이야기만 하기 위해 내 방에 들어왔어요. 그는 나에게 이런 데서 발을 빼야 한 다고 말했어요. 이곳은 내가 있을 데가 못 된다는 것이 있어요." 그녀들은 또 여자를 상대로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창녀의 대다수는 동성연애자이다. 이런 여자가 몸을 파는 장사를 하게 된 동기는 동성애의 정사이며, 또 대다수가 여자 친구 들과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안나루엘링에 의하면, 독일에서는 창녀의 20퍼센트가 동성연 애자라고 한다. 페브르는 형무소의 젊은 여죄수들이 노골적으로 음탕한 편지를 주고받으 며, 일생을 맺은 친구라는 서명을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편지는 여학생들이 가슴속에 정열의 불꽃을 태우면서 쓰는 경우와 흡사하지만, 후자는 훨씬 얌전하고 수줍은 구석이 있지만 전자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리 테레즈의 생활 속에 -그녀는 어떤 여자로부터 관능적인 쾌감을 처음으로 배웠지만-싫은 손님이나 난폭 한 기둥서방의 면전에서 사이좋은 친구가 어떤 특권적인 역할을 하는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쥘로가 한 계집애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신을 신발조차 없는 불쌍한 하녀였다. 나는 벼 룩시장에서 여러 가지 일용품을 사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러 갔다. 그녀는 무척 얌전하고, 또 여자들을 좋아했으므로 나와는 서로 마음이 맞았다. 그녀는 내가 간호 사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우리는 종종서로 장난을 즐기기도 하고 일하러 가는 대신 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우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이런 친구는 대체로 여자들 속에만 파묻혀 사는 고지식한 부인 곁에서 마음의 벗이 되 는 남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여자친구라면 좋은 상대가 되어 함께 있어도 그 관계가 자유롭고 부담이 없어 이쪽에서 탐낼 수도 있다. 창녀가 남자들에게 지쳐서 혐오감을 느끼 고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휴식과 쾌락을 구하는 것은 다른 여자의 품속이다. 아무튼 앞에서 지적한, 여자와 여자를 직접 결합시키는 그 공범성이 다른 어느 경우보다도 강해진다. 인류의 반수와의 관계가 상거래의 성격을 띠고 있는 창녀는 사회에서 천민 취급 을 받고 있으므로 자기들끼리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 서로 경쟁상대가 되고 질투하 고 모욕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하나의 반 세계을 구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크게 필요 로 하고 있다. 그녀들은 이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 품위를 발견하게된다. 창녀끼리는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상대이며 다른 사람으로 대치할 수 없는 증인이기도 하 다. 이 동료야말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옷과 모자를 칭찬해 준다. 그러나 그 옷과 모자는 다른 여자들의 선망과 찬미의 시선을 받게 되면 그 자체가 목적처 럼 생각된다. 창녀와 유객의 관계에 대하여는 그 의견이 다양하고, 하나하나의 겨우도 여러 가지로 변 한다. 흔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의 애인에게는 자유로운 애정표시인 키스가 보존되 고, 사랑의 포옹과 직업상의 포옹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 남자들의 여러 가지 증언은 그들의 허영심 때문에 향락의 연극에 속아넘어가기 쉬우므로 종잡을 수 없다. 흔히 육체적 인 피로가 뒤따르는 손님 마구 받기나 쇼트 타임이나 올나이트, 또는 단골손님들이 겹치는 상황에서는 형편이 또 달라지게 마련이다. 마리 테레즈는 한평생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장사를 해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즐겁게 상기되는 몇몇 밤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동료들도 모두 애인 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손님으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고, 심지어 남자가 돈 에 궁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녀들은 모두 냉정하게 일하고 있다. 어떤 여자는 모든 손님에게 다소 경멸감이 섞인 무관심밖에 갖고 있지 않다. "아, 남자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자는 뭐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남자의 머릿 속에 심어줄 수 있다!" 하고 마리 테레즈는 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여자는 남자에 대해 혐오스러운 원한을 품고 있다. 그녀들은 특히 남자들의 고약한 버릇에 구토를 느낀다. 그 들이, 아내나 애인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변태적인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매음굴에 가는지, 아니면 매음굴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을 자극하여 그런 고약한 버릇을 조장하는지 모르지만,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상상을 요구한다.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인 이 지칠 줄 모르는 상상력을 갖고 있는 것을 특히 개탄하고 있다. 비자르 박사에게서 치료 를 받은 여자환자들은, 그에게 "남자는 누구나 많든 적든 변태적인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 다."고 하였다. 나의 한 여자친구는 보종의 병원에서 오랫동안 젊은 창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창녀는 대단히 머리가 좋은 여자로, 처음에는 하녀로 일하다가 몹시 사랑하 는 정부와 동거생활을 했다. "남자는 모두 변태예요. 우리 그이만 빼놓고요. 그래서 난 그 사람을 좋아해요. 만일 그 사람에게 그런 고약한 버릇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헤어질 거예요. 손님도 처음에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그렇다면, 다음에 왔을 때에는 여러 가지를 요 구해요... 당신이 자기 남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두고봐요. 남자는 다 그래요." 이런 고약한 버릇 때문에 그녀는 남자를 징그러워했다. 나의 또 다른 여자친구는 1943년에 프레네에서 어떤 창녀와 친하게 되었다. 이 창녀는 유객의 90퍼센트는 고약한 버릇이 있고 약 50퍼센트는 수치스러운 남색가라고 주장했다.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두렵게 했다. 어떤 독일군 장교는 그녀에게 알몸으로 꽃을 안고 방 안을 걸어다니기를 요구하고, 그동안에 그는 새가 날아다니는 흉내를 내었 다. 다정하고 돈도 많은 남자였으나, 그녀는 그 남자가 나타나면 언제나 도망쳤다. 마리 테 레즈는 그것이 보통 성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고 힘도 덜 들지만, 이런 악취미를 몹시 싫어 했다. 상상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 세 여자들은 남달리 총명하고 다감한 성품을 갖고 있었 다. 그녀들은 남자가 정상적인 거래를 하지 않고 일반손님 이상으로 유별나게 굴면, 곧 양 심에 가책을 느끼고, 자유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단지 거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수익이 많다고 해서 악취미에 전념하는 여자도 있다. 유객에 대한 그녀들의 적의에는 종종 계급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헬렌 도이치는 안나라 는 여자의 신상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녀는 금발의 아름다운 창녀로 순진하고 얌전했으나, 어떤 부류의 남자에게는 분노를 터뜨렸다. 그녀는 노동자의 딸이었다. 아버지 는 술고래이고,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 있었다. 이 불행이 그녀로 하여금 삶에 대한 혐오감 을 느끼게 했다. 이런 장사를 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구혼을 받았으나 그 혐오감으로 인하 여 결코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웃 젊은이들이 그녀를 타락시켰다. 그녀는 그 장사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결핵에 걸려 입원하게 되자, 이번에는 의사들마저 몹시 증오했다. 훌륭한 남자들이 미웠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그들의 예의와 성의가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 이다. "이 남자들은 내가 그 친절이나 품위나 자제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짐승 같은 짓을 곧잘하는 것을 모르는 줄 아나봐." 하고 그녀는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 말고는 정신 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 하나를 유모에게 맡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결핵으로 죽었다. 또 한 사람의 젊은 창녀 쥘리아는 15세 때부터 만나는 모든 청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 으나 가난하고 약한 남자만 사랑했다. 그런 남자와 어울릴때에는, 그녀는 정답고 친절했다. 그러나 다른 남자들은 아무리 매정하게 다루어도 무방한 야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성 본능을 뚜렷이 만족시키지 못하는 데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어머니나 아이라는 말 또는 그와 비슷한 어감을 가진 말을 하면 정신적으로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창녀는 자기의 처지에 어떤 식으로건 정신적으로 적응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전적 선천적으로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들에게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회에 이렇게 합류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신상을 카드에 기입하는 경찰의 훈 계가 무의미한 객설이라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손님으로 찾아오는 남자들 역시이 매음굴에서 한 발자국을 나서서 과시하는 듯한 고상한 감정 등에도 그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마리 테레즈는, 베를린에서 동거했던 빵집 여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누구나 다 좋아해요. 돈만 생긴다면 말예요. 부인... 돈을 받지 않고 동침해도 남자 는 마찬가지로 생각해요. 저 계집은 창녀라고 말예요. 돈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녀라 는 거예요. 다만 교활한 창녀라는 거지요. 남자에게 돈을 요구하면 나중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난 네가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하거나 "기둥서방이 있나?" 하고 말해요. 돈을 받건 안 받건 창녀이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래, 네 말이 옳아." 하고 여 주인은 대답하더군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어요. "당신은 신발 배급표를 받는 데 반 시간이 나 줄을 서지요. 나는 반 시간이면 한 놈을 낚아요. 나는 신발을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 가 애교만 잘부리면 그 값도 받아내요.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창녀들의 생활이 괴로운 것은, 그녀들의 도덕적, 심리적인 입장 때문이 아니다. 거의 대 부분이 물질적인 조건이 불행의 근원이다. 기둥서방이나 포주에게 착취를 당하여 그녀들은 불안한 생활을 하며 그녀들의 4분의 3은 돈이 한푼도 없다. 그런 직업에 종사한 지 5년 후에는 약 75퍼센트가 매독에 걸린다고 많은 창녀들을 치료해 온 비자르 박사가 말하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여자는 놀라운 속도로 감염된다. 임질이 발병 해 수술을 받아여 하는 경우가 25퍼센트나 된다. 20명중에 한 사람꼴은 폐병에 걸리고 60 페센트는 알코올이나 약품중독에 걸린다. 그리고 40페센트는 40세 전후에 죽는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예방을 하고 있는데도 간혹 임신하여 대체로 악조건 하에서 수 술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급 창녀는 괴로운 장사이다. 그녀들은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타 격을 받고, 경찰의 횡포와 굴욕적인 의학상의 검사와 손님의 자의에 맡겨져 매독.임질.궁핍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물건 취급을 당하고 있다. 하급 창녀에서 고급 창녀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단계가 있다.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가 자기의 완전한 일반성으로 거래하여, 경쟁에 의한 비참한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는 데 비 해, 후자는 자기의 개성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점이다. 잘만 하면 후자는 높은 신분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미모, 애교, 성적 매력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 그 여성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남성의 욕망을 통하여 그녀의 가치가 드러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성이 그녀의 가치를 세상사람들의 눈앞에서 분명히 선언할 때 비로소 그녀는 잘 팔리게 된다. 19세기에는 '화류계 여성'이 그 기둥서방에 대해 권위를 갖고 있었으며, 그녀를 첩의 지 위에까지 끌어올린 것은, 저택이나 마차나 진주였다. 남자들이 그녀를 위해 돈을 물 쓰듯 하는 한, 그녀의 가치는 확립되어 있었다.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는 불량슈 당티니와 같 은 타입의 여자를 소멸시켰다. 이제는 교명을 날릴 수 있는 반사교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야심에 불타는 여자가 명성을 얻으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한다. 최근에는 첩의 형태가 영화 스타로 나타난다. 남편이나―특히 할리우드에서―진실한 여인이 항상 따 라다니지만, 그녀는 역시 프리네나 임페리아나 황금의 투구와 비슷하다. 그녀는 남자들의 꿈에 '여자'를 주고 그 대가로 남자들에게서 재산과 명성을 받는다. 어느 시대나 매음과 예술 사이에는 불확실한 통로가 있었다. 그것은 미와 관능을 애매하 게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욕망을 낳는 것은 미가 아니다. 그런데 플라톤적인 연 애론은 육욕을 위선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프리네는 자기 가슴을 노출시킴으로써 아테네의 최고 법원의 고관들에게 순수이념을 관조시켰다. 나체의 전시는 예술적인 구경거리가 된 다. 미국의 스트립쇼는 옷을 벗는 것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었다. '예술적 나체'라는 이름 으로 외설스러운 사진을 수집하는 노신사들은, "나체는 순결하다."고 주장한다. 사창가에서 고르는 순간은 이미 구경거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더욱 복잡해지면, 순님들 에게 보이는 살아 있는 그림이나 예술적인 포즈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가치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창녀는 육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데 만족하지 않고, 특수한 재능을 보여주려고 노 력한다. 그리스의 '피리 부는 여자'는 음악과 춤으로 남자들을 유혹했다. 울레드나일의 여자들은 배춤을 추고, 스페인의 여자들이 바리오 쉬노 말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결국 남 자의 마음을 끌기 위한 세련된 방법에 불과하다. 나나가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후원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이다. 어떤 뮤직홀은 ―전에 어떤 카페 콘서트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지 만―매음 장소와 다를 바가 없다. 여자가 자기 몸을 드러내는 직업은 모두 정사의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긴 '걸'이라는 명칭이 붙은 여자들, 즉 택시걸·스트립쇼걸·곡마 단걸·핀업걸(에로 잡지의 선정적인 삽화에 포즈를 취하는 여자)·마네킨걸·가수·여배 우들 중에도 자기들의 색정생활과 직업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여자들도 있다. 직업은 특 기나 창의를 필요로 할수록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 진 여자는 자기의 매력을 더욱 비밀리에 거래하도록 유혹하기 쉽다. 이와 반대로 화류계 여자는 자기를 알리바이(부재증명)에 이용할 수 있는 직업을 원한 다. 콜레트가 쓴 레어처럼 남자에게서 '예술가'라는 말을 들으면, 예술가라고요? 내 애인들 은 당치도 않은 말만 하는군요. 하고 대답할 여자는 보기 드물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녀 에게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 명성이다. 장사의 토대가 되는 '명성'이 만들어질 수 있 는 장소는 스크린이나 무대이다. 신데렐라는 언제나 멋진 왕자만 꿈꾸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남편이든 애인이든 그녀는 그가 방자한 폭군으로 변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보다도 그녀는 일류 영화관 입구에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걸린 장면을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 려고 하면 대개 남자의 신세를 져야 한다. 그리고 남자들―남편이나 애인이나 팬―은 자기 의 재산이나 명성의 일부를 그녀에게 나눠주고 자기의 승리를 확인한다. 인기 여배우를 첩 과 비슷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이나 대중에게 인기를 얻어야할 필요성 때문이다. 이 두 부 류의 여자들은 사회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첩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자 기의 육체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인격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이용하는 여자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런 여자들의 태도는 창작자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다. 창작자는 작품 속에서 자 기를 초월하여 숙명을 뛰어넘고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며 미래를 개척한다. 기생은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인간의 초월에 아무 길도 개척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자기의 이득을 위해 인간을 농락하려고 한다. 인기를 얻으려고 남자 에게 기대는 수동적인 여자의 입장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마력으 로 남자를 자기의 외식의 함정에 빠뜨려 그것을 자기의 먹이로 삼을 수 있다. 그녀는 남자 들을 자기와 함께 내재 속에 가둬놓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자는 일종의 독립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느 남자의 소유도 아니다. 저축한 돈과 마치 물건을 팔듯 파는 자신의 이름으로 경제적인 자립을 확보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여자 는 주부나 하급 창녀가 아니라 첩이었다. 문예부흥기의 유녀나 일본의 게이샤는 같은 시대 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누렸다. 프랑스에서 가장 용감하게 자립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여성은 아마도 니농 드 랑클로일 것이다. (프랑스 여류작가. 그녀의 살롱에는 자 유 사상가들이 출입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여자로서의 무기를 철저히 이용하는 여자는 남성 못지않은 자기의 위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들을 물건처럼 남자에게 맡기는 성에서 출발하여, 자기를 주체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처럼 자립할 뿐 아 니라 거의 남성을 상대하여 살아간다. 그녀들은 언행이 자유로워―예컨대 니농 드 랑클로처럼―제일 귀중한 정신의 자유에까 지 자기를 높일 수 있다. 특히 뛰어난 여자들의 주위에는, 정숙한 여자를 상대하기엔 너무 나 따분해하는 예술가나 작가들이 모여든다. 남성이 마음에 그리는 여자의 신화가 가장 매 력적인 화신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상류의 창녀들 속에서이다. 이런 여자는 다른 어떤 여 자보다도 육체적이고 의식적이고 우상적이고 영감의 샘이며 뮤즈이다. 그리하여 화가나 조 각가들은 그녀를 모델로 삼고 싶어한다. 그녀는 시인들의 꿈을 키운다. 지식인은 그녀 속 에서 여자의 '직관의 보고'를 발굴한다. 그녀는 가정주부보다 현명해지기 쉽다. 왜냐하면 위선 속에 싸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능이 뛰어난 여자라면 에제리아(로마신화에 나오는 누마폼필리우스의 아내이며 동시에 조언자)처럼 남자에 대한 내조의 역할만으로는 만족하 지 못한다. 그녀는 남에게서 얻은 찬사의 가치를 자주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 다. 즉 자기의 수동적인 가치를 적극화하려고 한다. 자주적인 주체로서 세계에 나타나, 시 나 산문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한다. 이렇게 해서 임페리아는 이탈리아의 유녀 들 가운데서 유명해졌다. 또 그녀는 남자를 도구로 이용하여 남성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경 우도 있었다. 이른다 '위대한 애첩'들은 권력을 지닌 애인을 통하여 세계지배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런 여자의 해방은 성적인 면에서도 나타난다. 남자에게서 돈을 우려내거나 또 그에게 서비스를 시키는 가운데서 여자는 자기의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발견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돈은 정화의 역할을 하여 성의 투쟁을 없애버린다. 화류계 여성이 아닌 많은 여자들 이 애인에게서 수표나 선물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은 단지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에게 지불하게 하는 것―그리고 뒤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남자에게 지불하는 것―은 남자를 하 나의 도구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자는 자기가 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아마도 남자는 그녀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 성적인 소유는 착각이다. 그녀쪽이 경제라는 훨씬 견고한 지반 위에서 남자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여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녀가 남자의 포옹에 몸을 맡기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타 인의 의지에까지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억지로 쾌락을 줄 수는 없다. 쾌락은 오히려 여분의 이득처럼 생각된다. 그녀는 포로가 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돈을 지불받기 때문이다. 창녀는 불감증에 걸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정실인 것 같다. 창녀에게 자기 마음과 복부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매우 편리한일이다. 감상적이고 정열적이면 무심코 남 자에게 억압되고 착취당하고 독점되고 시달림을 받을 우려가 있다. 그녀가 받아들이는 포 옹에서 ―특히 처음에는―혐오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성의 횡포에 대한 반항심 이 불감즐으로 나타나게 된다. 창녀나 첩들도 가정부인과 마찬가지로 쾌감을 가장하고 거 래방법을 서로 전수한다. 남성에 대한 이와 같은 모욕이나 혐오는 이 내기에서 그녀들이 확실히 이길 자신을 갖고 있지 못한 증거이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 남자에게 기대 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녀들의 운명이다. 어떤 남자도 결정적으로 이런 여자들의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남 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창녀는 남자가 원치 않으면 모든 생활수단을 잃게 된다. 신인 여배우도 자기의 장래가 남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타도 남자의 후원 을 잃게 되면 빛이 희미해진다. 오슨 웰스에게 버림을 받은 리타 헤이워스는 알리 칸을 만 나기까지는 고아처럼 가엾은 모습으로 유럽 각지를 헤매다녔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내일 일을 마음놓을 수 없다. 그녀의 무기는 마법이고 마법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와 보호자(남편 또는 연인)와의 관계는 정숙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처럼 거의 떨어 질 수 없는 밀접한 사이이다. 그리하여 남자에게 잠자리에서의 소임을 다해야 할 뿐 아니 라, 옆에 있어 주고 대화의 상대가 되고 그의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고 특히 허영심에서 비 롯된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정해 놓은 여자에게 하이힐이나 비단 스커트를 사주는 것은 기둥서방에게는 이자가 붙어 돌아오는 투자이다. 남자가 상인이나 제조업자라면 정부에게 진주와 모피옷을 사주면서 그녀를 통해 자기의 부와 권력을 입증하게 된다. 여자쪽에서 보 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돈을 낭비하기 위한 구실이 되든, 자신이 노예가 되어 있 는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에게 뿌리는 금품은 바로 풀 수 없는 쇠사슬이 된다. 게다가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의상이나 보석은 정말로 그녀의 것일까? 헤어지게 되면 남자는 이런 것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전에 사샤 기트리가(프랑스의 배우, 작가) 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여자가 자기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패트런(후원자)을 붙잡고 있으려면 정상적인 결혼생활이라면 수치스러웠을 간계·술책·거짓말·위선 등을 이용해야 한다. 그녀가 이런 비굴함을 가장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가장하는 것 자체가 비굴한 일이다. 아름답고 유명한 동안은 지금의 남자가 싫으면 다른 사람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모는 성가시며 망가 지기 쉬운 보물이다. 남자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여자는 시간이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자기의 육체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늙어가는 데 대한 싸움이 가장 비장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이런 여자의 경우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져 명성을 얻고 있을 경우에는 얼굴이 노쇠 한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재산인 이 명성을 얻으려면, 그 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제, 즉 여론의 전제에 굴복해야 한다.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사실상 얼마나 비굴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녀들의 몸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다. 프로듀서가 그녀들의 머리 색깔에서 체중, 몸매, 타입까지 결정한다. 뺨의 선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이빨도 뽑는다. 절식, 체조, 의상, 화장 이 매일의 고역이다. 사생활을 공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외출에서 정사까지 노출된다. 즉 사생활이란 것도 공적 생활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이 렇게까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빈틈이 없는 여자라면, 자기의 광고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 요구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스타는 금세, 아니면 서서히 인기 가 떨어지게 된다. 자기의 육체만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창녀는 인기를 사고파는 여자에 비하면 아직 예속 의 정도가 낮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진정한 직업을 가지고 개성을 인정받아 성공한 여 성―여배우, 성악가, 무용가―은 창녀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여자들은 진정한 독립 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은 한평생 불안한 처지에 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대중과 남자들을 유혹해야 한다. 남의 첩이 된 여자는 대개 그 의존심이 몸에 배어 있다. 그녀는 세상에 굴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상류사회를 동경하여 그 풍습을 흉내낸다. 부르주아적인 규범에 의해 여자로서 존중되기를 원한다. 원래가 부르주아의 기생충이므로 그 사상을 받 아들인다. 그녀는 사상이 온건하다. 최근까지 그녀는 자기 딸을 수도원 기숙사에 보내고 싶어했고, 나이를 먹으면 자기는 성당의 미사에 나가 회개할 것이다. 그녀는 보수주의자의 진영에 속해 있다. 이 세상에 확고한 지위을 쌓은 것을 자랑하는 여자이므로 세상이 변하 기를 바라지 않는다. 출세하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고 있으므로 우애나 인류애가 우러날 리 가 없다. 수없이 노예적인 애교를 떨면서 성공을 손에 넣은 그녀는 인류 전체의 자유를 진 심으로 원할 리가 없다. 졸라는 이런 특징을 나나를 통해 강조했다. 나나는 소설이나 연극에 대해 분명한 자기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상한 작품, 자기를 꿈꾸게 하고 자기 영혼을 키워주는 작품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화주의 자에게는 반감을 갖고 있었다. "어머, 얼굴도 씻은 적이 없는 그런 더러운 놈들이 대체 어 쩌자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면 모두 행복하잖아. 폐하께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국민을 위해 보살펴주시잖아? 민중이라니, 더러운 자식들 같으니!" 그녀는 그 민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민중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었다. "생각해 보셔요. 그런 자들이 만든 공화국이 민 중을 위해 얼마나 불행할지... 오! 하나님이 되도록 오래 폐하를 지켜주시옵소서!" 전시에는 상류 창녀만큼 노골적으로 애국심을 과시하는 사람도 없다. 고귀한 감정을 가 장하여 그녀는 공작부인의 고귀한 수준에까지 자기를 끌어올리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천해 빠진 말투로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하며 혼자서 문제를 제기하고 혼자서 결론을 짓 는다. 그녀들은 가슴 구석구석까지 성실성을 모조리 상실하고 있다. 거짓말과 과장으로 말 이 꼬인다. 그녀의 일생은 일종의 과시이다. 그 말과 표정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 파트너를 상대로 사랑의 연극을 한다. 때 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연극하기도 한다. 세상을 향해서는 신중하게 매력 있는 연극을 한 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를 정결의 본보기, 신성한 우상처럼 생각한다. 완고한 불성실은 그 녀의 내면 생활을 지배하고 위선이 진실처럼 생각된다. 그녀의 생활에도 때로는 자연스러 운 감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좋아하거나 반하거 나 때로는 항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의나 감정이나 쾌락에 너무 치중하면 금세 지 위를 잃게 된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바람을 피울 때 간통한 아내처럼 용의주도하게 된다. 자기의 보호자나 세상의 여론에서 숨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의 애인에게 자기의 많은 것을 바칠 수 없게 된다. 애인은 하나의 기분전환·돌파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보통 그녀는 자기의 처세에 관한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 진실한 사랑에 깊이 빠질 여유가 없다. 기생을 관능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도 적지 않다. 자기들을 강제로 지배하는 남자들에 대 한 적개심에서 그녀들은 다른 여자들의 가슴속에서 육감적인 안식과 동시에 일종의 보복 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회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사내아이 를 도와주고 예뻐하는가 하면, 계집아이를 자진하여 키우기도 한다. 아무튼 남성적인 인격 을 지닌 상대를 좋아한다. 그녀는 동성연애자이든 아니든 여성 전체에 대해 앞에서 말한 복잡한 관계를 갖게 된다. 즉 그녀는 남성에게 억압을 받는 모든 여성이 요구하는 반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심판자 겸 증인으로서 또는 상담자 겸 공범자로서 여자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여자끼리의 경쟁심은 절정에 도달한다. 자기의 일반성을 상품화하는 항간의 창녀에게도 경 쟁상대가 있다. 그러나 동료가 모두 장사를 할 수 있을 경우에는 싸움을 하면서도 그녀들 은 서로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려고 애쓰는 애첩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특권적인 지위를 노리는 여자에게 깊은 적의를 품는다. 여성의 파렴치가 화제 에 오르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애첩의 가장 큰 불평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립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생활이 사실은 무수한 의존의 거짓이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유까지도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라셸과 같은 여배우나 이사도라 덩컨 같은 무용가는 설사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경우에도, 그녀들을 필요로 하고 정당화하는 하나의 직업을 갖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서 하나의 구체 적인 자유에 도달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예술이나 직업은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그녀들은 거기서 진정한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기 여배우를 감독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영화는, 그녀에게 창의나 창조적인 활동의 진보를 허용하지 않 는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이용당할 뿐이고, 자기 자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 래도 인기 여배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진기한 일이다. 더욱 일반적인 정사에서는 초 월에의 길은 전혀 열려 있지 않다. 여기서도 내재 속에 갇혀있는 여성에게 권태가 뒤따른 다. 졸라는 나나를 내세워 이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나나는 이런 호화로운 왕궁과 같은 곳에서 살면서도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녀 는 밤새도록 남자들을 옆에 두고 화장서랍 속에까지 돈을 갖고 있었으나, 그래도 만족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비어 있는 곳이 있고 그녀를 권태롭게 하는 틈이 있었다. 그녀는 하는 일도 없이 나날을 단조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으며, 그저 이 한가하고 조용한 수도원 같은 생활 속 에 잠긴 채 마치 집 안에 갇혀있는 매음부처럼 하루종일 빈둥빈둥 살아갔다. 다만 잠자는 일, 그리고 남자를 기다리는 일, 아니면 어리석은 쾌락에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미국 문학은,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숨막히게 하는 할리우드의 무거운 권태를 자주 다 루었다. 그것에서는 여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남자 배우들까지도 권태를 느끼고 있다. 프 랑스에 있어서도 공식 외출은 흔히 고역이다. 젊은 병아리 스타의 사생활은 보통 나이가 지긋한 남자 후원자의 손에 있다. 이 남자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신사들이 생각 하고 있는 일은 젊은 여자에겐 낯선 일일 뿐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녀는 따분 하기 짝이 없다. 밤이나 낮이나 함께 붙어 다니는 여배우가 된 20세의 젊은 처녀와 45세 의 은행가 사이에는 중산층의 부부생활에서보다 더욱 깊은 갭이 놓여 있다. 이런 후원자에게 딸린 여자가 자기의 쾌락과 사랑과 자유를 희생하여 바치는 목표는 출 세이다. 가정주부의 이상은 남편과 자식에 대한 그녀의 관계를 원만히 감싸는 조용한 행복 이다. '출세'는 시간을 통해 전개된다. 그러나 그 출세 역시 하나의 이름으로 요약되는 내 재적인 물건임에 변함이 없다. 이름은 사회의 단계를 하나하나 올라감에 따라 광고에서나 사람들의 입에서 크게 부풀어오른다.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그녀들은 신중히, 혹은 대담하 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옷장 속에 고급 내의를 간수하는 가정주부의 만족을 맛보는 여자도 있고, 모험에서 황홀감을 느끼는 여자도 있다. 어떤 여자는 끊임없이 위험 에 직면하여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치를 잠자코 지탱해 나가는 데 만족하고, 어떤 여자는 헛되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바벨탑처럼, 자기 명성을 한없이 쌓아올린다. 그중에는 연애를 다른 활동과 병행하여 제법 모험가답게 행동하는 여자도 있다. 마타 하리처럼 스파이이기 도 하고 비밀정보원이기도 한다. 보통 그녀들은 스스로 기획의 주도권을 잡지 않고, 오히 려 남성의 손에 잡힌 도구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녀들의 태도는 모험가의 그것과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 모험가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실성과 진정한 의미의 모험의 중간에 있다. 그녀는 기존의 모든 가 치, 즉 돈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정복한다는 행 위 속에 소유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녀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는 주관적인 성공이다. 그녀도 이 개인주의를 니힐리즘에 의해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 니힐리즘은 어느 정도 체계화되어 있으나 그 이상으로 남자에게 적의를 갖고, 다 른 여성들을 적대시한 체험에서 생긴 확신이다. 만일 그녀가 도덕적인 정당성의 필요성을 느낄 만큼 충분히 지적인 여자이라면, 다소 동화된 니체주의를 내세울것이다. 즉 속인에 대한 초인의 권리를 내세울 것이다. 그녀의 인격은 단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은 혜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귀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면서도 전체 에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남자에게 바치고 있는 여성의 숙명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남자를 잘 이용하는 여자는 자기 숭배에 빠져 있다.그녀가 자기 명성을 그처럼 귀중 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명성 속에 나르시시 즘의 정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제5장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여자의 일생은―여자는 아직도 암컷의 직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남자의 일생에 비 하면 훨씬 더 생기적인 운명에 지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운명의 곡선은 남성의 그것에 비 해 고저가 더욱 심하고 연속되어 있지 않다. 여자의 일생의 각 시기는 평온하고 무사하다. 그러나 한 시기에서 다음시기로 옮겨갈 때에는 위험이 고조되어, 남자의 경우보다 훨씬 결 정적인 위기를 조성한다. 사춘기와 첫 성적 경험과 월경폐쇄가 그것이다. 남자가 줄곧 일 관되게 나이를 먹어가는 데 비해, 여자는 갑자기 그 여자다움을 빼앗기게 된다. 아직 젊은 시기에 그녀는 성적 매력과 수태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두 가지에서는 사회와 자기 자 신에 대해, 존재의 의미와 행복해질수 있는 기회를 끌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후로 그 녀는 미래를 빼앗긴 채 성인이 된 생애의 절반을 살아가야 한다. '위험한 연령(갱년기)'의 특징은, 몇 가지 기관의 고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고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지닌 상징적인 가치 때문이다. 자기의 여자다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지 않는 여자들에게는, 이 위기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집 안팎 에서 고된 일을 하는 여자들은, 월경의 굴욕이 사라진 것을 안도감으로 맞이한다. 끊임없 이 임신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는 농부의 아내나 노동자의 아내는 그제서야 이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뻐할 정도이다. 이 경우에도―이밖에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여자의 병은 육체 자체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생리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정신적인 비극이 시작되고 생 리현상이 다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비극이 끝난다. 확실한 고장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여자는 늙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성숙 한 남자에게는 연애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 있다. 성욕은 젊었을 때처럼 심하지 않다. 그리 고 남자는 물체로서의 수동적인 가치가 요구되지 않으므로, 얼굴 모습이나 육체가 변해도 그 매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35세쯤 되어야 겨우 비로소 모든 억제를 극복하고 색정적 개화에 도달한다. 여자의 정욕이 더욱 심해져서 이것을 악착 같이 채우고 싶어하는 것도 이 나이이다. 그녀는 자기가 지닌 성적 가치에 남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남편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여자가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업에서 좋은 보호자를 얻기 위해서는,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여자는 남성을 통해서만, 세계에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남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자기와 하나가 되어 있는 이 육체가 무너 져가고 있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괴로운 듯이 자문한다. 그녀는 저항한다. 머리 염색, 피부 정형, 화장술등은 그녀의 청춘을 얼마간 연장시키는 데 불과하다. 적어도 그녀 는 거울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정이 드디어 시작되어, 젊 은 시절에 쌓아올린 누각이 자기 속에서 무터져 가려고 할 때, 그녀는 죽음의 숙명 자체에 접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다.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자기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심취되었던 여성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는 자기 자신의 일을 남달리 걱정하고 있으므 로, 언젠가는 지불기일이 올 것을 예상하여 미리 피난처를 마련한다. 물론 그녀도 자기의 파괴를 괴로워한다. 그러나 적어도 불의의 기습을 당하지 않고 재빨리 적응해 간다. 자기 를 망각하고, 헌신적으로 희생해온 여자 쪽이 훨씬 갑작스러운 계시에 당황하게 된다. '나 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데 이 지경이 되어버렸어!' 그때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하는 큰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난다. 그녀는 피난처에서 마저 쫓겨나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갑자기 외ㅣ톨이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갑 자기 경계선에서 밀려나버린 그녀는 헛되이 살아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다. 이제 육 체에는 희망이 없다. 그녀는 이 새로운 전도 앞에서 과거를 되돌아본다. 한 금을 그어 결 산할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결산한다. 그리고 인생이 자기에게 부 과한 비좁은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 짧은 생애를 앞두 고, 안타까운 미래 앞에 선 젊은 처녀와 같은 행동을 취한다. 그녀는 자기의 유한성을 거부한다. 그녀는 가난한 생활에 비해 자기의 인간성은 매우 풍 부한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 수동적으로 숙명에 말없이 따라온 것을, 기회를 빼앗기고 기만당하여 부지불식간에 청춘 시절을 흘려보내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라고 생각 하게 된다. 남편이나 환경이나 일과가 자기에게 부적당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남 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보통사람 이상으로 뛰어난 여자라는 생 각 때문에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그녀는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한 채 갇혀 있다. 그 비밀이 야말로 그녀의 불행한 심경을 푸는 신비한 열쇠이다. 그녀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해력이 많은 마음의 상대 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자기의 심정을 끝없이 토로하기도 한다. 밤낮 없는 후회와 비탄이 되풀이된다. 젊은 처녀가 자기 미래의 모습을 가상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의 과거를 '그 럴 수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자기가 놓친 기회를 상기 하고 아름다운 회상에 잠긴다. H.도이치가 인용한 여성의 경우를 보면, 그녀는 젊어서 불행한 결혼을 청산하고, 두번째 남편과 오랫동안 평온하게 살아왔으나 45세 때 첫남편을 몹시 그리워하여 우울증에 빠졌 다. 그녀는 어렸을 때와 젊었을 때의 흥미가 재현되어 당시의 이야기를 한없이 되풀이했 다. 부모와 자매, 소꼽친구들에 대해 잠자던 그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멍하니 우울한 공상에 잠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실패한 생활을 과거의 추억을 통해 단숨에 회복하려고 한다. 가련한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자기 속에서 발견한 이 훌륭한 인품 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그 가치를 강조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경험에 의해 성숙해진 그녀는, 드디어 자기가 인정받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재 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먼저 비장한 각오로 노력을 하여 시간을 정지시키려고 한다. 모 성적인 여자의 경우는 아직 자기에게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생명을 다시 한번 창조하고 싶어한다. 한편 육체적인 여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애인을 정복하려고 한다. 요염한 여자는 전보다 더욱 남자의 마음에 들려고 한다. 그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이 이처럼 젊었다고 느낀 적이 그 전엔 한 번도 없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시간의 흐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 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옷을 젊게 입기 시작하고, 앳된 표정이나 행동을 위한다. 나이든 여자는 자기가 색정적인 대상이 못 되는 것은 단지 자기 육체가 이제는 남에게 신선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과거와 인생 경험이 싫든 좋든 자신을 한 인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싸우고 사랑하고 원했고 괴 로워하고 즐거워했다. 이러한 자주성은 남자에게 위협이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부 정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유난히 여자다움을 과장하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향수를 뿌려 서, 자기를 매력 있고 우아한 여자가 되게 하려고 한다. 그녀는 앳된 목소리로 말하고 순 진한 눈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처녀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녀는 말하는 대신 에 새처럼 재잘거린다. 손뼉을 치면서 깔깔댄다. 그녀는 진지한 마음으로 이런 연극을 한 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갖게 된 새로운 흥미로 말미암아, 낡은 습성을 벗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출발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투신할 만 한 목적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조바심은 공허하고 지리멸렬한 형태 를 취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상하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 다. 그녀는 특히, 늦기 전에 어렸을 때나 처녀시절의 소원을 모두 실현하려고 한다. 어떤 여자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어떤 여자는 오락이나 창작이나 여행을 시작한다. 또 어떤 여자는 스키나 외국어를 배우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거부해 왔던 그 어떤 것도―역시 늙기 전에―받아들이려고 한다. 지금까지 억제했던 남편에 대한 혐오감을 분명히 드러내 고, 그의 품에 안겨도 불감증을 느낀다. 또는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억제해온 정열에 빠져 격렬한 요구로 남편을 궁지에 몰아넣 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 포기했던 마스터베이션(자위행위)을 다시 하기 시작한 다. 그리고 동성애적인 성향―거의 모든 여성에게 유충과 같은 형태로 잠재해 있는―이 분 명히 드러난다. 때로는 그 경향이 자기 딸에게 쏠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친구를 상대로 이 감정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롬 랜도는 그의 작품 〈성, 인생, 신앙〉에서 자신이 들 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X부인은 이제 50세를 앞두고 있는 여자였다. 25년 전에 결혼하여 장성한 자식이 셋이난 되고, 시의 사회자선단체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런던에 서, 자기보다 10세 연하인 같은 자선사업에 종사하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Y양은 그녀에게 다음 여행 때에는 자기 집에 묵으라고 권했다. X부인은 이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머무른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이 그녀는 Y양을 열렬히 포옹하 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거 듭 변명했다. 그녀는 그날 밤을 자기 여자친구와 하얗게 새운 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 다. 그녀는 그때까지 동성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Y양과의 일을 생각하면서 정열을 불태웠다. 생전 처음으로 남편의 애무와 키스가 시들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분명히 결말을 짓기 위해 그 여자 친 구를 다시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열은 더욱 타오를 뿐이었다. 이 관계는 그녀가 오늘날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으로 그녀늘 채워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죄 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서 자기의 입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또 도덕적인 이유로 변호할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이 경우에 당사자는 자발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여 자는 종종 의식적으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게 될 그 런 소설 같은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가정을 떠난다. 그것은 가정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여, 차라리 고독을 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험을 찾는 마음에서이도 하다. 모험과 마주치면, 그녀는 허겁지겁 그 속에 뛰어든다. 슈테켈이 인용한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B.Z.부인은 40세로 아이가 셋이나 있으며,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해에 그 녀는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생을 헛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키를 타러 갔 다가 30세의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곧 B.Z.부인의 딸을 좋 아하게 되었다. 부인은 애인을 자기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했다. 모 녀 사이에 입 밖에 내지는 못했으나, 대단히 격렬한 동성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어머니의 결심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윽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향으로 빠져들었다. 남자가 때때로 밤중에 어머 니의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딸에게 몰래 가는 것이었다. B.Z.부인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녀 는―그때 그녀는 46세였다―슈테켈의 진찰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딸도 결혼할 계획을 단념했다. 그래서 Z.부인은 다시 모범적인 아내로 돌아가 신앙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단정하고 정숙한 전통에 억압되었던 여성이 언제나 행동으로까지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에로틱한 환상으로 가득차고, 그녀는 그 환상을 낮에도 그리게 된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격렬한 관능적인 애정을 표시한다. 아들에게 근친상간적인 강박관념을 품는다. 그녀는 잇따라 젊은 남자에게 연정을 갖는다. 사춘기의 소녀처럼 언제나 강간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무의식중에 매음을 꿈꾸기도 한다. 그녀의 경우도 욕망, 공 포의 상반성은 불안을 낳고, 그 불안은 신경증을 일으키기 쉽다. 이렇게 되면 괴상한 행동 으로 이웃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이런 행동은 그녀의 상상 속의 생활을 나타내고 있 을 뿐이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사춘기보다 중년의 동요기에 더 모호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경에 접어든 여성에게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인격붕괴의 감정이다. 이 감정으로 말미 암아 그녀는 모든 객관적인 목표를 잃게 된다. 건강한 몸인데도, 신변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 중에는 기묘한 이중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를 의식으로 활동체로 자유로 느끼고 있다면 숙명에 좌우되는 수동의 객체는 마치 타 인처럼 생각된다. 자동차에 치인 것은 내가 아니다. 거울에 비치 할머니의 '내가'아니다. 이처럼 자기를 젊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동시에 이처럼 자리를 늙었다고 느낀 적이 없는 여성에게는, 이 두 가지 자기의 모습을 융화시킬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추이가 자기를 좀 먹는 것은 꿈속에서의 일이다. 그리하여 현실은 멀어지고 희박해진다. 동시에 그녀는 이미 환상과 자기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한다. 그녀는 시간이 뒷걸음을 쳐서, 자기의 분신이 벌 써 자기를 닮지 않고, 일어나는 사실마다 자기를 배반하는 이 괴상한 세계보다는 차라리 그녀는 마음속의 명료함을 신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도취, 계시, 망상에 이끌린다. 이 때 연애는 전보다 더 그녀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자기는 사랑을 받 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색광의 십중팔구는 여자이다. 그리고 그 대 부분이 40세에서 50세 사이의 연령층이다. 그러나 그처럼 대담하게 현실의 벽을 넘는 것 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여자들은 꿈속에서도 인간적인 애정에 절망하 고 신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요부, 색골, 음탕한 여자가 갑자기 신앙에 빠지는 것은 폐경기 에 이르러서이다. 여성이 그 자주성에 눈떠서 품게 되는 운명이니 비밀이니 이해되지 않는 인격이니 하는 막연한 생각은 종교속에서 합리적인 통일을 발견하게 된다. 신앙을 갖게 된 여자는 자기의 실패한 인생을 구세주가 내린 시련으로 생각한다. 자기의 영혼은 불행 속에서 큰 공덕을 얻어 특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 는 하늘이 자기에게 계시를 내렸다거나―크뤼드네르 부인(18세기 프랑스의 여류작가)처럼 ―신으로부터 종교적인 사명을 받았다고 믿고 싶어한다. 현실감각을 다소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이 위기 동안에 여러 가지 암시를 받기 쉽다. 여자의 혼은 정신적 지도자 의 강렬한 영향력이 미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여자는 미심쩍어 보이는 권위에도 열심히 매달린다. 종파, 심령술사, 점쟁이, 주술사, 사기꾼들에게 이런 여자는 가장 좋은 먹이이다. 그것은 단지 현실세계와의 접촉이 두절되어, 모든 비판적인 감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녀가 절대의 진리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녀는 구원을 받음 으로써, 세계를 구원하는 약, 처방, 열쇠를 얻는 것이다. 자기의 특수한 처지와 분명하게 적합하지 못한 이론을 전보다 더욱 경멸한다. 그리하여 자기에게만 특별히 마련된 이론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영감, 신탁, 계시, 기적 같은 것이 그녀의 주위에서 힘을 발휘한다. 때로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충고자나 혹은 자신의 내부 목소리에 따라 장사, 사업, 모험에 뛰어든다. 또 때로는 진리나 궁극적인 예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녀의 행동엔 언제나 열광적인 감격이 뒤따르게 된다. 폐경의 위험은 여성의 일생을 무참하게 둘로 절단시켜버린다. 여성에게 '새로운 인색'의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단절이다. 그녀의 눈앞에는 '다른'시간이 열린 것이다. 그녀 는 개종자와 같은 열의를 가지고 거기에 접근해 간다. 그녀는 연애에, 인생에, 신에, 예술 에, 인류에 새로운 관심을 갖는다. 이런 것에 몰입하여 자기를 숭고하게 여긴다. 그녀는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간파한 눈으로 지상을 바라보고, 아직 아 무도 올라간 적이 없는 정상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상 자체는 변치 않는다. 정상에도 여전히 손이 미치지 못한다. 신의 계시는 받 았지만―설사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신의 계시라 하더라도―그 의미는 좀처럼 해독할 수 없다. 마음의 등불은 꺼진다. 그뒤에는 거울에 비친, 어제보다 더 늙은 한 여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열광의 시기 대신에 우울한 낙담의 시간이 계속된다. 신체의 컨디션이 이 리듬 을 그대로 반영하여, 호르몬 분비의 감소가 뇌하수체의 이상 활동에 의해 보충된다. 그러 나 이 교대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은 특히 심리상태이다. 흥분, 환상, 열광 등은 과거의 여 자의 숙명에 대한 일종의 방어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불안감에 시달 리게 된다. 생명은 이미 쇠진되었지만, 아직 죽음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절망에 도전하는 대신 자주 거기에 도취되는 편을 택한다. 그녀는 푸념과 아쉬움과 하소연을 뇌까리고 있 다. 이웃과 근친에게서 그녀는 음모를 상상한다. 같은 연배의 자매나 여자친구가 있으면 함께 피해망상을 갖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병적으로 질투하여, 남편 의 친구들과 자매, 심지어 남편의 직업에까지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불행을 ―실제로 있든 없든―연적의 책임으로 돌린다. 질투의 병적 현상이 가장 많은 것은 50세 에서 55세 사이의 연령층이다. 폐경기의 고민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연장된다. 여자는 좀처럼 늙을 결심을 하지 못한 다. 만일 자기의 매력을 개발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여자는 싸워나갈 것이다. 만일 성욕이 여전히 왕성하면 그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럴 경우도 드물지 않다. 메테르니히 공비에게, 대체 여자는 몇살이 되면 육체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몰라, 나는 아직 65세니까."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몽테뉴에 의하면 여자의 성욕에 '약간의 청량제'만을 제공하는 결혼생활은, 여자가 나이 를 먹어갈수록 점점 불충분한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때때로 나이가 들면 서, 젊었을 때의 저항과 냉담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녀가 겨우 정욕의 불길을 알게 될 무렵에, 남편은 그 훨씬 전에 그녀의 냉담함에 체념하고 자기도 냉담해진다. 오래 함께 살 아 매력이 없어진 아내에게는, 부부간의 정열을 불러일으킬 힘이 거의 없다. 그녀는 야속 한 나머지 '나는 나대로 살테야'하고 결심하고, 전과 같이―전에 애인을 가진 적이 있으면 ―애인을 갖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애인이 생기지 않는다면 허사이다. 그래서 쫓아다니게 된다. 수단방법을 총동원 한다. 몸을 맡기는 체하면서 자기 쪽에서 강요한다. 품위있게 행동하고 친절을 베풀며, 고 마움을 표시하는 따위는 모두 함정이다. 그녀가 젊은 남자를 노리는 것은 발랄한 육체를 좋아해서만이 아니다. 청년이 곧잘 어머니와 같은 애인에 대해 느끼는, 이해관계를 떠난 애정을 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도 공격적이고 지배 적이 된다. 레아를 만족시키는 것은 셰리의 미모와 함께 그 순종이었다. 스탈 부인은 사십 고개를 넘어서는 그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동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었다. 소심한 풋내기 남자가 손에 넣기 쉽다. 유혹이나 술책이 효과가 없을 때에도 악착 같은 여성에게 는 아직 마지막 수단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돈으로 남자를 사는 것이다. 이런 음탕한 여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는 중세의 〈사랑의 표시〉라는 민간 설화이다. 어떤 젊은 여자가 몸을 허락한 답례로, 상대방 남자에거서 조그마한 '사랑의 표 시'를 하나씩 요구하여 그것을 장롱 속에 간직한다. 드디어 그것이 어느날 장롱에 가득차 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번에는 남자 쪽에서 하룻밤을 보낼 적마다 '사랑의 표시'를 요구하여 이번에는 남자의 장롱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녀가 받은 '사랑의 표시'는 하나도 남김없이 남자에게 돌려줘 결국 다른 것으로 그 값을 치러야만 했다. 어떤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이러니컬하게 생각한다. 그녀들은 에제 쓸모가 없게 된 것 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쪽에서 그 '사랑의 표시'를 돌려 줄 차례가 된 것이다. 돈은 그녀 들에게 창녀의 경우와 반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정화의 역할을 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돈은 남자를 하나의 도구로 바꾸어 일찍이 그녀가 젊은 시절의 오기만으로 거부해 온 정 욕의 자유를 주게 된다. 그러나 이성적이라기보다 로맨틱한 여성 패트런(후원자)은 때때로 애정과 찬미와 존경의 환영까지 사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상대방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주고 싶기 때문에 준다고까지 생각한다. 여기서도 젊은 남자는 적합한 애인이다. 왜냐하면 젊은 남자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아량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리고 젊은이게게는 어딘가 '신비로운'면이 있다. 남자도 자기가 '돕는'여자에게는 이 신비 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비에 의해 거래의 노골적인 양상이 수수께끼로 위장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눈속임이 오래 계속될 리가 없다. 남녀의 투쟁은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결투로 변하여, 여성은 배반을 당하고 우롱되고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분별 있는 여 자라면, 망설이지 않고 '무장해제'를 결심한다. 설사 아직 완전히 정열이 식지 않았다고 하 더라도 말이다. 여자가 드디어 나이 먹는 것을 받아들인 그날부터 그녀의 입장은 달라진다. 그때까지 그 녀는 아직 젊은 여자로 자기를 추하게 변형시키는 불가사의한 재해와 싸우는 데 열중했었 다. 그러나 이제야 그녀는 다른 존재로 성을 잃은 대신에 완성된 존재, 노년기의 여자가 된다. 이것으로 갱년기의 위기는 청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여자가 살 기 쉬워진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시간의 숙명에 대해 싸우기를 단념하면 다음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지상에 자기가 있을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인생이,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야 여자는 겨우 자기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때가 되 면 그녀는 나이를 구실로 자기에게 내려진 고역을 면하게 된다. 남편을 너무나 잘 알기 때 문에 이제는 남편도 두렵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포옹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그의 옆에― 우정이나 무관심이나 혹은 적의를 품고―자기 생활을 마련한다. 남편이 먼저 노쇠했을 경 우에는 그녀가 부부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녀는 유행이나 세론을 무시하고, 사교적인 의무 나 섭생이나 미용 등의 손질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셰리가 복원되어 돌아왔을 때에 레아처럼, 이제는 양재사에게서도 코르셋 제조자에게서도 미용사에게서도 해방되어, 식도 락 속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아이들은 이제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여 집을 나간다. 의무에서 해방된 그녀는 그제서야 겨우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여자의 경우나 '여자의 역사'속에서 말한 사실이 되풀이 된다. 즉 그 녀는 아무 쓸모없게 되엇을 때, 이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부장제인 사회는 여자가 하는 모든 직능에 예속 의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활동의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에 비로소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50세경이 되면 그녀는 완전한 실력을 갖게 되고, 경험에 의해 풍부해진 것을 느끼게 된다. 남자는 이 나이가 되면, 높은 신분과 가장 중요한 지위 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자는 이때 은퇴하낟. 헌신하라는 가르침만 받아온 여자에게 이 제 아무도 그 헌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쓸모가 없어져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 게 된 그녀는 희망이 없는 긴 앞날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그래도 그녀는 선뜻 체념하지 않는다. 때로는 비탄에 빠져 남편에게 매달리고, 전보다도 남편의 시중을 잘 든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타성은 깊이 뿌리박혀 있다. 자기가 남편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내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거나, 남편은 이제 자 기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부부의 공동생활을 무사히 계속해 나 가려고 보살피는 것도, 혼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것도 따분한 노력이다. 그녀는 자식에게 희망을 갖는다. 자식들만은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세계와 미래가 열려 있 다. 그녀는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가려고 한다. 나이를 먹고서도 아이를 낳을 기회를 가진 여자는 자기를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다른 여자들은 할머니가 될 시기에 그녀는 아직 젊은 어머니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40세에서 50세 사이에 어머니는 자식이 어른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식이 자기 곁을 떠날 때가 되어 그녀는 자식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애쓴다. 그녀가 그 구제를 남자아이에게 기대하느냐, 여자아이에게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태 도가 달라진다. 보통 큰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남자아이쪽이다. 지평선 저쪽에서 나타나 는 것을 꿈에 그리던 훌륭한 남성의 모습이 드디어 과거의 저쪽에서 그녀에게 다가온 것 이다.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보물를 언젠가 이 아이가 자기에게 채워줄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그녀는 아이의 뺨도 때리고 매질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그런 일들은 잊고 있었다. 자기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 는, 그때부터 벌써 세계와 그리고 여자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반신이었다. 이제야 이 아이 는 모성의 영광이 빛나는 그녀를 인정해 준다. 남편의 횡포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그녀 가 가졌던, 혹은 갖지 못했던 애인에 대한 복수를 해줄 그 아이는 그녀에게 해방자가 되고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멋진 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처녀와 같은, 유혹 과 과시의 거동을 다시 보인다. 아들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자기는 아직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이 있으므로, '누나'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아들이―미국영화의 등장인물을 모방하여―어머니를 놀려주고 웃겨주고 까불면서도 존경해 준다면, 그녀는 꿈속에서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자기 뱃속에서 키운 아이의 남성적인 우월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감정의 어느 정도까지를 근친상간의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할까? 그녀가 아들의 팔에 기대는 자기를 상상하며 즐기고 있을 때 '누나'라는 말이 다소 미심쩍은 환상을 얌전 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즉 자기를 감시하고 있지 않 을 때에는 그녀의 공상이 탈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공상이나 환상은 언제나 현실적인 행위의 숨은 욕구를 표 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그것만으로 자족한다. 그것은 하나의 욕구의 완결된 성취이며, 공상의 만족만을 요구하는 어머니가 농담으로 자기 아들을 애인 으로 볼때에는 문자 그대로 농담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에로티스즘이 이러한 관게에서는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남녀관계임에는 틀림없다. 그 녀는 여성으로서 마음속으로 아들에게서 지배적인 남성을 동경하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 못지않은 정열로 자기를 그의 수중에 맡기고, 이 선물과 교환하여 신이 알지 못하는 곳까지 오르기 를 원하고 있다. 연애하는 여자가 이런 승천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애인의 자유의지에 호소하고, 자기는 기꺼이 위험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에 이쪽에서도 여러 가지 요구를 한다. 어머 니는 낳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에게 신성한 권리가 있는 듯이 생각된다. 자기가 자 식을 만든 것, 자기 재산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기를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 는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처럼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를 가장 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의 육체를 창조하여 하나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든 다. 그녀는 그 존재의 행위, 작품, 가치를 자기 것으로 횡령한다. 자기의 과실을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격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대리에 의해 산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들이 무능하거나 깡패, 낙오자, 열등생,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영웅으로 키우고 싶다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다. 자기 아 이를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존중하고, 설사 아이가 실수를 해도 그 자유를 인정하고, 무슨 일에나 뒤따르게 마련인 위험을 아이와 함께 책임지는 어머니는 대단히 보기 드물다. 그보 다 훨씬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피를 나눠받은 자식을 쉽게 영광이나 죽음으로 몰아 넣어 사람들에게 지나친 칭찬을 받는 스파르타의 어머니와 비슷한 어머니이다. 아들이 지 상에서 해야 하는 일은, 어머니의 존재를 뜻있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존중하는 가치를 손 에 넣는 것이다. 어머니는 신인 아들의 기획이 자기 이상과 일치하며 그것을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요구 한다. 여자는 저마다 영웅이나 천재를 낳고 싶어한다. 그런데 영웅이나 천재의 어머니는 모두 자식 때문에 마음고생이 유난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머니가 탐내어 갖기를 꿈꾸 었던 전리품을 아들은 대개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며 손에 넣는다. 그리하여 그가 그 전리 품을 어머니에게 바칠 때 어머니는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원칙적으로 아들이 하는 일 을 인정하고 있을 경우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히는 모순과 비슷한 모순에 빠져 고민하게 된다. 아들은 자기 인생―동시에 어머니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한 목표를 향해 그런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 그는 이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떤 목적을 높이 세우려고 하면, 그는 어머니가 자기에게 준 선물의 가치에 의심을 품게 된다. 어머니는 이에 대해 분개한다. 그 녀는 자기가 낳은 이 육체가 자기에게 최고의 존재로 생각되지 않으면, 남자에 대해 지배 자로서 군림할 수 없다. 아들에게는 그녀가 고통 속에 완성한 이 작품을 망가뜨릴 권리가 없다. "피곤하겠구나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야."하고 그녀는 그의 귀가 따갑도록 타이 른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를 낳는 것도 헛수고가 아닌가. 아이가 게으름뱅이거나 칠칠치 못하면 제일 먼 저 화를 내는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아들이 출정하면 살아 돌아 오기를 바라지만 훈장도 받아오기를 원하다. 아들이 일을 잘하여 출세하기를 원하지만 과 로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녀는 자기 자식이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언제나 안타까워하면서 보고만 있어야 한다. 자식이 길을 잘못 들지 않을 까 걱정하고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성공하면 병에 걸리지 않을 까 걱정한다. 설사 마 음을 놓는다고 하더라도 나이와 성의 차이는 그녀와 아들 사이에 참된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청하 지 않는다.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의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지 하나의 육체를 낳았을뿐만 아니라 완전히 필요한 한 존재의 기초를 만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까지 자기의 존재가 정당화되었다 고 느낀다. 그러나 권리가 일이 되지는 못한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의 행운의 행위를 영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녀는 자기의 신에게 자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위선적인 헌신은 무참히 드러난다. 며느리 가 그녀에게서 그 직책을 고스란히 빼앗아 버린다.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는 다른 여자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적의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했었다.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우연한 사실을 신성한 신비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녀는 인간의 의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가치는 기존의 것이며 모두 자연에서 과거에서 생긴다. 그녀는 자유로운 행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은 자기에게서 생 명을 받은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알지도 못했던 이 여자에게서 아들이 무엇을 받았단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유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게 한 것은 어떤 마법 의 힘이 틀림없다. 그 여자는 위험한 곡예사이다. 어머니는 그 속임수가 들통이 나기를 손 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고약한 여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붕대로 감아주는 손길이 부드 러운 어머니를 마음속에 그리며, 아들의 얼굴에 불행의 표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해도, 그녀는 기어코 그것을 찾아낸다. 그가 아무 불행도 말하 지 않는데도 그녀는 그를 동정한다. 그리고 며느리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며느리의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해 일일이 과거나 습관을 대립시켜 침입자의 존재 자체를 부당하게 보려고 한다. 인간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해석한다. 아내는 그것을 통하여 자 기가 세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남성을 남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잡아두기 위해 그를 그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한다. 자기 남편이 부자가 되고 유력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젊은 아내의 계획에 어머니는 아들의 변치 않는 본질의 철 칙을 대치시키고 있다. 이 아이는 몸이 약하므로 과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임신했을 때에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투쟁이 격화된다. '아이의 출 생은 부모의 죽음을 의미한다.'이 진리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때이다. 자기 아들 속에 살아남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아들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런데 그 생명은 그녀가 없어도 살아간다. 그녀는 이미 어머니 가 아니다. 그녀는 단지 사슬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 그 증오가 병적이 되어 신경 질환이 생기고 범죄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르페브르 부인이 오랫동안 미워하던 며 느리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며느리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대개 할머니가 된 여자는 이런 적의를 극복한다. 때로는 할머니가 갓난아이를 완고하게 자기 아들만의 아이로 생각하여 그 아이를 독점적으로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 젊은 어머니, 즉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되찾아간다. 그래서 질투를 느낀 할머니는 아 이에 대해 불안의 가면 아래 적의를 품은 애매한 애정을 느낀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태도는 대단히 상반적이다. 그녀는 아들에게서는 신을 찾지만, 딸에 게서는 자기 분신을 찾아낸다. '분신'이란 애매한 인격이다. 그것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살해한다. 포의 단편이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마르셀 슈봅이 한 이야기에서 찾 아볼 수 있는 것처럼, 장성한 딸은 어머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에 게 살아남는 것을 허용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행동은 자기 아이의 성장에서 파멸의 약속을 발견하느냐 재생의 약속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많은 어머니들은 적의 속에서 경화된다. 그녀는 자기에게서 생명을 얻은 배은망덕한 딸 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익숙해진 여자가 젊고 발랄한 딸에 게 자기의 기교를 빼앗기는데 대해 질투하는 것은 많이 지적되었다. 모든 여자들 중에서 경쟁자를 미워한 여자는 자기 딸마저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게 된다. 그녀는 그 딸을 멀리 하고 격리하여 딸에게서 기회를 빼앗을 궁리를 한다. 정숙하고 훌륭한 '아내' 또는 '어머 니'가 되는 것을 명예로 알던 어머니도 자기의 입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는 열성은 변치 않는다. 그녀는 딸이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항상 강조하고 딸이 하는 일을 유치한 유희처 럼 생각한다. 딸은 결혼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아이를 낳기에는 몸이 너무 약하다. 그래서 그 딸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아기를 갖고 싶어해도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 다. 어머니는 집요하게 비판하고 비웃고 또한 불행을 예고한다. 그녀는 되도록 자기 딸을 영원한 어린애로 머무르게 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딸을 제 것처럼 여기고 딸의 생활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어머니의 기도는 대개 성공했 다. 이런 불길한 영향 때문에 많은 젊은 여자들이 아기를 낳지 못하고 유산하거나 자기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키울 수도 없고 자기 가정을 꾸려나가지를 못한다. 그녀들의 결 혼생활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딸들은 불행하게 되고 외톨이가 되어 어머니 의 품안에서 최고의 피난처를 찾게 된다. 만일 어머니에게 반항하면 두 사람을 영원히 대 립시켜 싸우게 한다. 어머니는 기대에 어긋난 딸의 불순하고 독집적인 태도에 대한 분노 는 무작정 사위에게 터뜨리게 된다. 자기 딸과 마음이 잘 맞는 어머니도 이에 못지않게 전제적이다. 그녀는 자기의 성숙한 경험을 무기로 삼아, 청춘을 다시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가거에서 벗어남 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구제하려고 한다. 자기가 얻지 못한 몽상 속의 남편과 일치된 사위 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고르려고 한다. 남자를 좋아하든 딸을 염려하든, 그녀는 마 음 한구석에서 이 사위가 결혼하는 상대는 사실은 자기인 것처럼 상상하고 싶어한다. 그 녀는 자기 딸은 통하여 부와 성공과 명성에 대한 그녀의 오랜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자기 딸을 일부러 정사로 밀어넣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자주 묘사되어 왔다. 딸을 감독한 다는 구실로, 자기가 그 생활을 가로채는 것이다. 나는 자기 딸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자기 침대에 끌어들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딸이 어머니의 이런 후견인 역할을 언제까지나 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남편 이나 진실한 패트런(후견자)을 발견한 그날부터 그녀는 어머니에게 반기를 든다. 처음에 는 사위를 사랑했던 장모가 이제는 그에게 적의를 갖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배은망덕을 개탄하고 희생자로 자처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적으로서의 어머니가 된다. 많은 여성들은 이와 같은 실망을 예상하고 자기 자식들이 장성하면 일부러 무관심한 체한다. 이때 그녀 는 자식에게서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어머니가 폭군이 되지 않고 또 자식들에게 서 푸대접도 받지 않으며 자식들의 생활에서 진정한 이들을 얻으려면 관용과 무사의 흔치 않은 조화가 필요하다.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어머니가 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연장이다. 그 속에 딸에 대한 적의가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여자들이 타락한 자기 딸에게 낙태와 기아 와 암매장을 강요하는 것은 단지 남의 눈을 의식해서만이 아니다. 그녀들은 딸이 어머니 가 되지 못하게 금하는 것을 달가워한다. 그녀들은 혼자서 특권을 독점하려 애쓴다. 정당 하게 결혼한 딸에게까지도, 어머니는 딸이 아이에게 상관하지 말고 모유를 주지 말고, 멀 리하라고 충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들 자신이 이 작은 존재를 냉담하게 묵살하기도 한다. 아니면 그녀들은 아이를 야단치고 벌을 주고 구박한다. 이와 반대로 그 딸과 마음이 맞는 어머니는 때때로 아이를 젊은 어머니 이상으로 끔찍 이 사랑한다. 젊은 어머니는 미지의 작은 꼬마가 태어나 다소 당황하지만, 할머니는 꼬마 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시간을 초월하여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젊은 산모가 된다.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자기 자식에게서 느끼지 못한 소유와 지배의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된다. 따라서 폐경이 이후로 그녀가 단념했던 모성의 모든 욕망이 기적적으로 충족된다. 자기야말로 어머니라고 실감한다. 그리하여 아기의 시중을 기꺼이 맡아 아이에게 온갖 정 성을 기울여 헌신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어머니가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겨우 조 력자로서의 역할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그 역할은 전에 그녀의 곁에서 연상의 여자가 맡 았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왕좌에서 추방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물론 질투도 느끼게 된 다. 사위의 어머니에 대하여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속한 생각이 들면 처음에 그 녀가 아이에 대해 느꼈던 자연스러운 애정도 사라진다. 할머니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불 안은, 그녀의 감정의 상반성를 표시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그 아기가 자기가 소유하는 범 위내에서는 무척 귀여워하지만, 한편 자기에게 낯선 꼬마라고 하여 미워한다. 그녀는 이런 반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아이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을 단념 하고도, 만일 그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녀는 손자의 생활 속에서 수호신과 같은 특권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권리나 책임을 느끼지 않고 손자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한다. 그들을 통하여 자기의 나르시시즘적(자 애적)인 꿈을 애무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현재 그 우연성과 무상성 속에 있는 살과 뼈를 지닌 작은 존재이다. 그녀는 교육자는 아 니다. 그녀는 추상적인 정의나 법칙의 화신이 아니다. 그래서 때때로 할머니와 손자의 부 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자가 후손이 없거나 또는 혈연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들이 나 손자와의 자연스러운 혈연관계가 없을 경우에는 그녀는 때때로 인위적으로 그와 비슷 한 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에게 모성적인 애정을 제공한다. 그녀의 애정 이 플라토닉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녀가 눈여겨 보아온 젊은이를 '아들처럼' 사 랑한다고 말한다고 그것을 모두 위선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거꾸로 어떤 어머니의 감정 도 연애적이다. 바랑 부인(소년 루소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준 여성)과 같은 사랑으로 어떤 젊은 남성을 어른이 될 때까지 소중히 돌봐주고 도와주기를 즐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 다. 그녀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의 원천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되고 토대가 되기를 원한 다. 그녀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그 애인에게서 정부라기보다는 어머니로서의 자기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무성적인 여성이 여자아이를 상대로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경우에도 그녀들의 관계는 다소 성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플라토닉한 것 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그녀가 그 사랑하는 젊은 처녀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기적적 으로 젊어진 그녀의 분신이다. 여배우, 여류 무용가, 여류 성악가 등은 교육자가 되어 학 생을 지도한다. 교양 있는 여성은-콜롱비에(스위스의 지명)의 고독 속에서의 샤리에르 부 인처럼-제자들을 가르친다. 믿음이 독실한 여성은, 주위에 정신적인 양녀를 모아놓고 화 류계 여성은 사창가의 주인이 된다. 그녀들이 후배의 양성에 열의를 보이더라도, 그것은 결코 순수한 흥미에서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기가 다시 변신하기를 열정적으로 바라고 있 다. 그녀들의 폭군적인 관용은 혈육으로 이루어진 모녀 사이와 같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 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양손자를 맞아들이기도 한다. 대고모들이나 대모들은, 할머니들의 그것과 같은 역할을 기꺼이 맡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가 그 후계자 속에-자연적이든 혹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자기의 기울어져가는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그녀가 그런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인생의 지도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해도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투쟁과 사건 속에 휘말 려 실망과 비극 속에 소멸해 버리거나 또는 소극적으로 협력하여 체념해 버리는 것이 보 통이다. 어머니는 늙어가고 할머니는 지배욕을 자제하면서 그녀들은 그 한을 숨기고 있 다. 그리고 자식들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식들에게서 많은 도 움을 바라지는 못한다. 미래의 사막을 앞에 두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고독과 후회와 권태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 늙은 여성의 애처로운 비극을 언급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쓸모없게 된 것을 알고 있다. 중산층의 여자는 일생을 통하여 하찮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러나 자식이 장성하고 남편이 성공하고 적어도 지위가 안 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죽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부인의 바느질'은 이 무서운 권 태를 얼버무리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다. 양손은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움직이 고 있으나 참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것은 거의 대부분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만든 물건을 처치하기가 어려워 때때로 애를 먹 기도 한다. 그것들은 친구나 자선단체에 주기도 하고 선반이나 테이블에 가득 늘어놓는 것이 고작이다. 그 무상성 속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한 수 있는 놀이도 아니다. 정신이 비어 있으므로, 기껏해야 알리바이(부재증명)가 될 정도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참으로 초라한 심심풀이이다. 여성은 바늘로 그날그날의 허무를 따분하게 짜고 있는 것이다. 수채화, 음악, 독서등도 대동소이한 역할을 하고 있다.할 일 이 없는 여성은 이 세계에 발판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권태 를 달래기 위한 것이다.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행동성은 반드시 내재의 허무에 빠지게 마련이다. 한가한 여성 은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집어던지고,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자수를 두면서 하품을 하고, 결국은 수화기를 든다. 실제로 이런 여성이 가장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것 은 사교생활 속에서이다. 외출하고 방문하고-댈러웨이 부인처럼-손님접대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녀는 온갖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가한다. 이제 자기의 생활을 갖지 못하고, 남의 존재에 의해 자기를 살린다. 멋쟁이 여자에서 유한마담으로 된다. 그녀는 관찰하고 비평 한다. 그녀는 자기의 무위를, 주의 사람들에세 비평과 충고를 일삼는 것으로 메운다. 자 기의 경험을, 자기에게 요구도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만 일 경제사정이 허락하면 그녀는 살롱을 내려고 한다. 이런 방밥으로 남의 기획이나 성공 을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한다. 뒤데팡 부인(18세기 프랑스에서 유명한 살롱의 주인)이나 베르뒤랭 부인(프루스트의 작중인물)이, 자기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루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기의 중심이 되고 교차로가 되고 인스피레이션을 제공하는 여자 가 되고, 그리고 하나의 '분위기'를 조성하면 그것은 이미 행동의 대용물이 된다. 세계의 움직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직접적인 다른 방법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 자선사업'이나 무슨 '협회'같은 것이 있고, 특히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클럽에 모여 트럼 프를 하거나 문학상을 분배하거나 또는 사회 개조를 꿈꾸기도 한다. 양대륙에서 이런 조 직의 특색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 속에 그 존재이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조 직이 추구하는 목적은 단지 하나의 구실에 그친다. 그것은 카프카(1883-1924, 독일의 작 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의 우화와 마찬가지로 경과한다. 아무도 바벨탑을 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공상적인 터전의 주위에는 어느새 큰 집 단이 생겨, 스스로 다스리고 확정하고 사회의 불화를 시정하는 데 열성을 부린다. 그래서 자선사업을 하는 여성들은 시간의 대부분을 이런 조직을 결성하는 데 보내게 된다. 그녀 들은 간부를 선정하고 회칙에 대해 의논하고 서로 토론하고 다른 경쟁상대의 협회와 권위 를 겨룬다. 그녀들에게서 자신들의 빈민, 병자, 부상자, 고아를 빼앗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들을 남의 소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병자나 고아가 죽어가는 쪽이 낫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사회의 부정이나 악정을 제거하여, 그녀들의 헌신을 필 요없게 만드는 정치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자기들을 인도주의적인 선행을 하는 자가 되 게 하는 전쟁이니 굶주림을 오히려 환영한다. 그녀들의 눈에는 오히려 방한모나 짐짝이 군인이나 배고픈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털실이나 소포를 받기 위해 특별 히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들 단체의 몇몇은 실제적인 효과를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존경받는 '어머 니'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 이것은 여성의 기생적인 생활이 낳은 산물인 여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의 영향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의학, 예술, 과학, 종교, 법률, 건강, 위생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므로 그녀들은 그 많은 기관의 회원으 로 있는 동안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단지 '소일 거리'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하고 필립 윌리(미국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녀들의 노력은 일관된 건설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어떤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취미나 편견을 과시하거나 뭔가에 이용하려고 할 뿐 이다. 예컨대 문화적인 영역에서 그녀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을 많이 사들이는 것 은 이런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독서는 혼자서 하는 트럼프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 다. 문학은 기획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할 때, 독자가 더욱 넓은 미래를 향해 행동하 는 것을 도울 때, 비로소 의미와 품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녀들도 인간행동의 움직임과 합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여성은 책이나 예술작품을 그대로 삼켜서 내재 속에 묻 어버린다. 그림은 장식품이 되고 음악은 상투어가 되고 소설은 벽에 걸어둔 모자처럼 공 허한 몽상이 된다. 베스트셀러의 나쁜 영향에 책임이 있는 것은 미국 여성이다. 그런 책 들은 단지 인기를 얻기 위해 쓰여졌을 뿐 아니라 도피병에 걸린 유한마담들을 기쁘게 하 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녀들의 활동성 전체에 대해서는 필립 윌리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그녀들은 정치가들이 엄살을 부리는 비굴한 인간의 될 정도로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 목사들은 위협한다. 은행장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학교 교장을 공격한다. 그녀들은 조직체를 잇따라 만들지만 실제의 목적은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이기주의적인 욕구에 비굴하게 타협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녀들은 가능하면, 도시에서 주에서 젊은 창녀들을 추방한다... 그녀들은 버스의 노선을 노동자들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결정한다... 시장사례로 문지기에게 배상금의 일부를 넘겨준다. 클럽은 부인 에게 남의 문제에 개입하여 수다를 떨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신랄한 비난 속에는 많은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정치나 경제, 그리고 어떤 실제적 인 기능에도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나이먹은 부인들은 사회에 구체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녀들은 행동이 가져다주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어떤 건설적인 기획도 세울 만한 능력이 없다. 그녀들의 도덕은 칸트의 지상명령처럼 추상적이고 형식적 이다. 그녀들은 진보의 길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고 금지만을 외친다. 새로운 상황을 적극 적으로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존재하는 것을 공격하여 악을 배제하려고 한 다. 이것이, 그녀들이 언제나 무슨 모임을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알 코올에 대해, 매음에 대해, 외설책에 대해 단순하고 소극적인 노력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목한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음주금지의 실패로, 프랑스에서는 마르 트 리샤르가 통과시킨 법안의 실패로 입증되었다. 여성이 기생적인 존재인 한, 그녀는 보 다 나은 세계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중에는 어떤 기획에 전력을 기울이는 활동적인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그 녀들은 막연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녀들은 자주적인 생산 자가 되어 지금까지 고찰해 온 기생적인 입장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환은 극 히 드물다. 사적 또는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의 대다수는 도달해야 할 결과를 목 표로 삼지 않고 당장 하고 있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래서 그 일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 에 불과할 경우에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녀들 중의 대다수는 이 때문에 괴로워한다. 과거의 생활이 이미 끝난 여자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미래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 젊은이 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그들은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아 주위는 온통 사막과 같다. 그들은 모든 행동에 앞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그러나 청년은 어쩔 수 없이 남자로서의 생활에 이끌려간다. 그리하여 그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임과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세계속에 던져져 결심하고 착수한 다. 나이든 여성은 미래를 향해 새출발을 하도록 권유받아도 "이미 늦었어"하고 비통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장래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는 너 무 일찍 은퇴한다. 그녀에게는 활동력, 신념, 희망, 분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의 숙명이었던 생활의 되풀 이 속에 도피한다. 그녀는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정행활에 열중하거나 혹은 점점 신앙에 몰입하거나 샤리에르 부인처럼 극기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갖혀버린다. 그리하여 진부해지고 냉담해지며 에고이스트가 된다. 나이든 여성들이 저마다 평정을 찾는 것은 그 생애가 끝날 무렵, 투쟁을 포기하고 죽음 의 접근이 그녀에게서 미래의 고뇌를 제거했을 때이다. 그녀의 남편은 대개 그녀보다 연 상이므로 그녀는 남자가 노쇠하는 모습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기쁜 마음으로 옆 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복수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녀는 그 상심을 즐 겁게 견디어 간다. 상처한 남자가 몹시 괴로워하는 것은 자주 주목되어왔다. 남자는 결혼 에서 여자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얻고 있으며, 특히 그 만년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 무 렵에는 세계가 가정의 테두리 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현재의 나날은 이제 더 이상 미래를 향해 있지 않다. 그날그날 단조로운 리듬을 확보해 주고 그를 지배하는 것은 아내이다. 공직을 잃게 되면, 남성은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적어도 가정의 통솔권이라는 것이 있다. 남편에게는 그녀가 필요하 지만 그녀에게는 남편이 귀찮을 뿐이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독립에서 자부심을 이끌어낸 다. 그리고 그녀들은 세상을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때 일생 동안 속 고 살아온 것을 알아차리에 된다. 그리하여 보다 이성적이 되고 회의적이 되어 때때로 재 미있는 야유를 한다. 특히 진실하에 살아온 여자는 남자에 대해 어떤 남자에게서도 기대 할 수 없는 지식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자의 공적인 모습이 아니라 동료들이 없을 때 남자가 무심코 보여주는 우연적인 개인을 옆에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여자들 사이에서만 보여주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알고 있다. 무대의 이면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은 기만과 거짓은 폭로해도 진리를 발견하기에는 역부 족이다. 즐겁든 괴롭든간에, 늙은 여성의 지혜는 문자 그대로 소극적이다. 그것의 이의이 고 항의이며 거부이다. 즉 비생산적인 지혜이다. 그 행동이나 사고에 있어서 기생적인 여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는 금욕적인 도전이 아니면 회의적인 아니러니이다. 여자 는 생애의 어느 연령층에서도 효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에게 가해진 여러가지 비난과 공격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지만, 여자의 근본적 인 신분은 지금도 여전하며 이 신분이 그대로 여자의 성격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자는 '내재 속에 파묻혀 있어서' 반항심을 갖는다. 조심스럽고 인색하다. 진리나 정 확성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고 비열할 정도로 공리적이다. 거짓말쟁이이고 연극을 잘하며 이기적이다... 이러한 모든 비평에도 정당성이 있기는 하 다. 다만 이렇게 비난 받는 여자의 행실은 결코 호르몬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 며, 또한 여자의 두뇌구조 속에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견지에서 여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반복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인 조건의 전체속에 이른바 '영원한 여성'을 파악할 수 있 을 것 같다. '여성의 세계'를 남성의 세계와 대립시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여성이 지 금까지 자기들만의 자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형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새 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남자가 지배하는 집단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인 지위만 주어진다. 여자들은 단지 동료로서 상호간에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통일된 공동체 가 형성되는 유기적인 연대성이 없다. 그녀들은-엘레우시스 신비극(고대 그리스에서 대지 의 신을 섬긴 제사의식으로 그리스 연극의 기원이 되어 있다)시대부터 오늘날의 클럽, 살 롱, 직장 등에서도-언제나 독립적인 '반 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결합하려는 노력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그 역시 남성의 세계 안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입장에 모순 이 생기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속에 편입된 동시에, 이 세계에 불신을 표시하고 있 는 영역의 양쪽에 걸터앉아 있다. 전자에 의해 분명한 신분이 주어짐과 동시에 후자 속에 서 갇혀지낸다. 그래서 어디서나 침착하게 자리를 잡을 수 없다. 그녀의 순종에는 언제나 거부가 뒤따르고, 거부에는 그림자처럼 수락이 수반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태도는 혼 기를 맞은 처녀의 복잡성과 비슷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더욱 지탱하 기 어렵다. 어른이 된 여자로서는, 처녀처럼 인생을 꿈꾸고 있을 수는 없다.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전체적으로 남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여성도 인정하고 있다. 이 세계를 형성하 고 관리하며 지배하는 것은 남성들이다. 여성은 이 새계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고 있지 않 다. 여성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이고 의논자이다. 따라서 폭력의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 주체로서 서본 적도 없다. 육체와 집 안에 갇혀서, 인생의 목 적과 가치를 결정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에 대해 자신은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을 '영원한 어린이'가 되게 하는 슬로건에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 흑인노예, 식민지 원주민에 대해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동안은 "너희들은 큰 어린애야. "하고 말해 왔다. 그것은 타인이 강요하는 진리나 법률을 송두리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운명도 복종과 존경이다. 여성은 이미 자기의 위치가 주어 져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마음속으로도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현실은 여자에게 하나의 불투명한 존재이다. 사실상 여자는 물질을 조작할 수 있는 기 술을 습득하지 못했다. 여성은 물질(소재)이 아닌 생명을 상대한다. 이 생명은 도구로는 지배할 수 없다. 단지 그 비밀의 법칙에 따를 뿐이다. 여성에게는 세계가 하이데거가 정 의한 것처럼, 그녀의 의지와 목적사이에 매개자로 존재하는 '도구의 전체'로 보이지는 않 는다. 세계란 완강하여 제어하기 힘든 저항이다. 세계는 숙명에 지배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자의에 침투되어 있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한 방울의 피가 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신비는 어떤 수학으로도 공식화할 수 없 다. 어떤 기계도 그것을 촉진시키거나 지연시킬 수 없다. 여자는 어떤 정교한 장치로도 조절할 수 없는 시간의 저항을 경험한다. 여자는 달의 리듬에 순응되고 성숙되어지며, 이 윽고 부식되는 자기의 육체속에서 그것을 느끼게 된다. 또 날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여 자에게 인내와 수동을 가르친다. 이것은 연금술이다. 불과 물에 복종하고 '설탕이 녹는 것을 기다려야'한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오르고 빨래가 마르고 과일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가정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기술적인 활동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초보적인 기술이어서 인과율의 법칙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단조롭다. 그러나 이런 분야에 도 단순하지만 자의가 있다. 빨면 줄어드는 천이 있고 그렇지 않은 천도 있다. 곧 없어지 는 얼룩도 있고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도 있다. 저절로 부서지는 물건도 있고, 식물 처럼 싹이 나는 먼지도 있다. 여자의 정신은 언제나 대지의 신비를 숭배하는 농경사회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여자는 마술을 믿고 있다. 여자의 수동적인 색정은, 욕구를 의지나 공격으로 여기지 않고 점쟁이 (지하의 온천을 알아맞히는 점쟁이)의 추가 흔들리는 인력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 는 데 연유한다. 여자의 육체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성기는 발기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온천수가 마법사의 막대기를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여성 은 파도나 방사, 혹은 전류같은 것에 에워싸여 있는 듯이 느낀다. 영의 감응이나 점성술, 방사요법, 메스메르(독일의 의학자, 동물의 자력이론의 창설자, 1734-1815)의 축연, 접신 술, 무당, 투시술, 돌팔이의사를 믿는다. 종교에 원시적인 미신을 도입한다. 큰 양초나 봉납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대인처럼 성자에게서 자연의 정령을 그대로 구현한 인간 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성자는 여행자를 지켜주며, 어떤 성녀는 임산부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성자는 분실물의 소재를 가르쳐준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신기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는다. 그녀의 태도는 주술과 기도의 그것이다. 어떤 성과 를 얻기 위해 시험을 거친 의식에 복종한다. 따라서 여성이 관례를 따르기를 좋아하는 까 닭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여성에게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적인 분출이 아니다. 언 제나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므로 단지 과거를 반추해 볼 따름이다. 만일 말과 관용어를 알고 있다면, 시간과 생식력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식 자체도 달이나 계 절의 리듬에 따른다. 임신이나 개화의 주기는 동일한 반복의 연속이다. 이런 주기적인 움 직임 속에서 시간의 생성은 단지 완만한 퇴보일 뿐이다. 시간은 얼굴을 망가뜨리는 것처 럼 가구나 의류도 손상시킨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산적인 힘은 조금씩 쇠퇴한다. 그러 므로 여성은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해 가는 시간이라는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성은 세계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만 아 니라 이 세계의 한가운데, 즉 거대하고 혼돈된 성운 속에 놓인 것처럼 잊혀진 존재가 되 어있다. 여자는 남자의 논리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모른다. "여자는 필요하다면 남자 못지않은 훌륭한 논리를 구사한다."고 스탕한은 지적했다. 그 러나 여성에게는 좀처럼 이런 논리를 이용할 기회가 오지 않는다. 삼단논법은 마요네즈를 잘 만들거나 우는 아기를 달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다. 남자의 이론은, 여자가 경험하 고 있는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남자의 세계에서 여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 로, 그녀들의 의식은 어떤 기획의 형태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과 구별되지 않는 다. 실효성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실한 느낌도 없다. 여자는 다만 이미지와 언어를 상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크게 모순된 주장도 쉽사리 받아들인다. 자기 능력 밖에 있는 영역에서의 신비성을 분명히 밝히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막연한 지식으로 만족하고 있다. 여성은 당, 의견, 장소, 인가, 사건을 혼동하고 있다. 여성의 머릿속은 기이한 혼란상태에 있다. 요컨대 사물을 분명히 고찰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의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하면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스스로 비판, 검토, 판단하기를 단념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우월한 계급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남자는 신은 만들고, 여자는 이것을 숭배한다."고 프레이저는 말했다. 남성은 스스로 만든 우상앞에 전적인 확신으로 무릎을 꿇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성은 길을 가다가 그런 거대한 조각을 만나게 되면 사람이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 린다. 특히, 여성은 '질서'나 '법'이 특정한 한 사람의 지도자에세게 구현되는 것을 좋아 한다. 올림포스에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단 하나의 신이 있다. 놀라운 남성의 본질이 하나의 원형 속에 집결되어 있으므로, 아버지, 남편, 애인은 그 희미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이 이런 위대한 토템(숭배의 대상)에 바치는 숭배는 성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 도 유머러스한 이야기이다. 사실 여성은 이런 토템을 항하여 자기의 주체의식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유아기의 꿈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블랑제, 페탱, 드골 같은 장군들은 언제나 많은 여성 팬을 갖고 있었다. 최근 <위마니테>지의 여 성기자들이 감격에 넘치는 필치로 그 훌륭한 제복을 묘사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장군, 독재자-독수리의 눈초리와 의지적인 턱-는 진실한 세계가 요구하는 천상의 아버지 이며,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는 절대적인 보증자이다. 남성 세계의 영웅이나 법률에 대한 여성의 존경은, 무기력과 무지에서 비롯된다. 여성 은 정확한 판단에 의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정한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광신적인 힘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정열적이며 완강하고 어리 석다. 신앙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고 반이성적이며 반역사적이다. 또한 일체의 반증을 무시해 버린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 존경은 경우에 따라서 두 가지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나는 여성이 법의 내용에 정열적으로 기울어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법의 공허한 형식에만 열중하는 경우이다. 여성이 기성사회의 질서에서 이득을 얻고 있는 특권층인 경 우에는 이 질서가 확고부동하기를 원하여 완고한 보수파의 태도를 보인다. 또한 그런 여 성은 다른 제도, 도덕, 법률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은 자기를 초월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으므로 역사를 하나의 생성으로 생각한다. 가장 보수적인 남자고 어떤 종류의 진화는 불가피하며 자기 행위나 사상을 거기에 적응시 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여자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그 필연성을 이해 하지 못한다. 미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어한다. 만일 아버지나 형제 또는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은 우상이 깨어지면, 여자는 공허한 하늘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우상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남북전쟁 때 남부인 중에서 가장 열렬히 노예제도를 주장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또 보어전쟁 때, 프랑스에서 코뮌에 대해 가장 열광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여자들이었다. 여자는 행동의 무기력을 노골적인 감정으로 보상하려고 한다. 승리했을 경우 육식동물 처럼 맹렬히 적에게 덤벼들고, 패배했을 경우에는 일체의 화해에 완강히 저항한다. 여자 의 사상은 단순한 태도에 불과하므로, 낡은 주의, 주장을 지키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19 14년에는 정통 왕조주의자가 되기도 했고, 1949년에는 황제파가 되기도 했다. 남자는 때 로 미소를 지으면서 일부러 여자를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자기는 자제하면서 자신이 제 시한 의견이 광신적인 형태로 여자에게 반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반면에 자기의 생 각이 그와 같이 일방적으로 완고한 양상을 띠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자가 이처럼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강한 조직을 가진 문명이나 계급속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여자의 신앙은 맹목적이므로 법 또한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존중한다. 법이 변해도 그 위신은 남는다. 여자의 눈에는 힘이 권리를 창출한다. 여자가 남자에세 인정하 고 있는 권리는 그 힘에서 비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집단이 해체될 때 정복자에세 제 일 먼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여자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인다. 여성이 지닌 특징의 하나는 체념이다. 한 예로, 폼페이의 폐허를 발굴했을 때, 남자는 하늘을 향해 도전하거나 도망가려고 애씀으로써 반항의 자세로 굳어 있었다. 반면에 여자 들은 몸을 굽힌 채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화산, 공관, 주인, 남자에 대 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는 고생하기 위해 태어났어. 이것이 인생이야... 할 수 없어."하고 그녀들은 말한다. 이 체념이 때때로 찬양을 받는 인내를 낳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육체적인 고통을 훨씬 잘 참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욕주의적인 용기도 갖는다. 남성과 같은 공격적인 대담성을 없지만, 많은 여성은 그 수동적인 저항의 도용한 강인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위험, 빈곤, 불행에 대해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하게 저항한 다. 여성들은 아무리 서둘러도 이길 수 없는 시간을 존중하여 결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 는다. 어떤 기획을 하여 그 침착함과 완고함을 적용하여 훌륭하게 성공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여자는 일편단심이다."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 너그러운 여성의 경우에는, 이 체념이 관용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녀는 모든 갓을 용서하고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인간이나 사물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만 있을 수 있다고 행각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는 이런 태도를 소중한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극기심으로 굳어버린 샤리에르 부인의 경우가 그러한다. 소심한 신중성으로 나타 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은 언제나 물건은 파괴하여 새로 만들기보다는 보존하고 수선하고 조정하려고 한다. 혁신보다는 타협이나 화해 쪽을 선호한다. 19세기, 노동해방운동에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가 여성이었다. 플로라트리스탕이나 루 이드 미셸같은 여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소심한 주부들이 자기 남편에게 위해를 가하 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했던가. 그녀들은 파업, 실업, 빈곤을 두려워했을 뿐만아니라 반항 을 죄악으로 여겨 걱정했다. 그녀들은 복종을 위해 복종하고 모험보다는 관습을 택한다. 노상에서보다 집 안에서 사소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쪽이 훨신 용이했기 때문이다. 여자들 의 운명은 언젠가는 부서지고 말 물건의 운명과 같아서 사소한 행복을 잃게 되면 모든 것 을 잃은 것처럼 생각한다. 자유로운 주체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확립함으로써, 모 든 파멸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 여자에게는 이런 최고의 수단이 주어져 있지 않다. 여자는 한 번도 자유의 능력을 체험 해 본적이 없으므로 해방을 믿지 않는다. 세계는 알 수 없는 숙명에 지배되어 있으며, 그 것에 반항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해 도 그런 위태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해 본 적이 없으므로 열의를 갖고 달려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자에게 미래를 개척해 주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지 않 을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한 후 제시된 목표에서 자기가 한 일을 확인하면, 여성은 남성 못지 않게 용감해지고 대담해질 것이다. 여성이 흔히 비난을 받는 많은 결 점, 용렬, 옹졸, 소심, 인색, 게으름, 경솔, 비굴 등은 단지 여성의 앞날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관능적이며 내재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 다. 그러나 여성은 그 내재 속에 갇힌 것이다. 하렘에 갇혀 있는 여자 노예는 병적으로 장미향수를 탄 목욕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심심풀이라도 해야만 견딜 수 있는 것 이다. 침침한 규방-닫혀진 집이거나 혹은 부르주아지의 가정-속에서 숨이 막히는 정도에 따라 여자는 감각적인 쾌락을 찾아 그곳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육체적인 쾌락을 심하게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감각적인 만족을 느끼지 않기 때 문이다. 성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남자의 횡포에 시달리며 추잡한 짓을 참아야 하는 여자는 크림소스로 잘 취하는 술로, 비로드로, 물이나 태양으로, 여자친구들이나 애인의 애무 등으로 자위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대단히 '육체적'인 인간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여자의 입장이 그 동물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여자라고 해서 남자의 경우보다 그 육체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육체의 작 은 속삭임을 듣고 이것을 확대한다. 감각적인 쾌락도 예리한 고통도 직접적이고 돌발적 인 승리로 이어진다. 순간적인 난폭함에 의해 미래와 세계가 부정된다. 육체의 정염이외 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화려한 순간동안 그녀는 아무 부족이나 불만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여자가 이와 같은 내재의 승리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내재 가 그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경박성은 '추잡한 물질주의'와 같은 원인을 갖고 있다. 또한 여자는 하루하루를 가득 메우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 각한다. 여자가 매력과 기회를 날마다 하는 화장이나 옷치장에서 이끌어낸다. 그러나 여 자가 하는 일은 시간의 흐름처럼 공허한 것이다. 그녀가 수다스럽고 낙서를 좋아하는 것 은 그 무위와 여가를 얼버무리기 위해서이다. 자기에게 불가능한 행위를 말로 대신하려고 한다. 사실 여자가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어떤 기획에 참여할 경우에는 남자 못지 않게 활발하고 효과적으로 또 묵묵히 고통을 참아나간다. 여성은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언제나 지배자의 발끝에 엎드려 자기를 때린 손에 키스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참된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사실 이다. '신상에 관한 상담'에서 남편에게 배반당한 아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하는 충고에 는 비굴한 복종이 내포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는 기세를 올려 녹초가 되도록 싸움을 하고 나서도 결국은 남자가 던져주는 빵조각을 주워먹는다. 그러나 남자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고 이유인 여자가 남성의 지지가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온갖 굴욕을 참아야 한다. 노예는 '인간의 품위'를 자각할 방법 이 없다. 고작해야 궁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여자가 비속하고 가정적이며 인색 하고 타산적이라면, 그것은 음식을 만들고 오물을 청소하는 것으로만 생활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런 일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거대하다거나 위대하다는 의식을 가질 수 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의 우연성과 사실성 속에 일상생활의 단조로운 반복을 유지 해 나가야 한다. 단조로운 생활을 거듭하고 되풀이할 뿐이므로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시간이 원주처럼 둥글게 회전하여 어디에도 이끌려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 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일에 쫓기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속에 소외된다. 이 사물에의 의존성은 남자에세 의지하는 데서 비롯되지만, 여자가 무엇 때문에 저축심이 강하고 인색한가를 알 만하다. 여자의 생활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식량, 옷, 주거 등은 만들어내거나 보존하는 데 소비된다. 이런 것은 동물적인 생활과 자유인의 삶 (실존) 사이에 놓인 비본질적인 매개물이다. 비본질적인 수단이 갖고 있는 유일한 가치는 효용이다. 주부는 효용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녀 자신도 가까운 사람에게 유효 한 사람인 것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비본질적인 역할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곧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다-정치가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 그리고 수단의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본다. 그리하여 주부의 세계에서는 효용이 진리, 미, 자유보다 높이 평가되며, 이런 관점으로 세계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중용, 범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도덕 을 채택한다. 이런 여자에게 대담성, 열의, 무사, 위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 런 성품은 자유가 모든 예견을 넘어서 전개되는 미래를 통하여 도래할 경우에만 나타난 다. 세상은 여자를 부엌이나 침실에 가둬두고도, 시야가 좁은 데 놀란다. 날개를 잘라놓 고 날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만일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면 그녀는 결코 현재 속에 갇 혀 잇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를 그 자아나 가정의 한계속에 가둬놓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자기애), 이기주의, 허영, 과민성, 악의 등을 비난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모순을 지적 할 수 있다. 여자는 타인과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다. 각자 자기 가정에 몰두하고 있으므로 일상적인 경험을 통하여 연대성의 요구나 이익을 알 기회가 없다. 그 러므로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를 초월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자기와 친숙한 영역이 나 사물을 지배할 수 있고 그곳에서 일시적인 주권을 발견할 수 있는 영역에 완강하게 머 물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잠그고 창을 가려도 여자는 자기 가정 안에서조차 절대적인 안전을 찾아볼 수는 없다. 여자는 감히 남자의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멀리서 바라다보이는 남자의 세계에 에워싸여 있다. 더욱이 그 남자의 세계를 기술이나 명확한 논리 또는 지식 으로 파악할 수 없으므로 어린이나 원시인처럼 위험한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끼 고 있다. 여자는 거기에 현실의 마술적인 사고방식을 투사한다. 사물의 진행방향이 그녀 에게는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고, 한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여성 은 가능과 불가능을 식별하지 못한다. 누구나 믿으려고 한다. 모든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 여 그것을 퍼뜨리고, 공황을 일으킨다. 여성은 안전할 때에도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 다. 피동이 강요되어 있는 여자에게는 분명히 내다볼 수 없는 미래가 전쟁, 혁명, 기아, 빈곤의 환상으로 가득차 있다. 여성은 행동할 수 없으므로 불안하다. 남편이나 아들이 어떤 일에 뛰어들거나 사건에 휘말렸을 경우, 그 위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에게 있어 남성들의 기획이 나 그들이 따르고 있는 규칙은 어둠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길을 제시해 준다. 그렇다고 해 도 여성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연한 어둠 속에서 허둥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 므로 걱정만 한다. 상상속에서는 가능한 모든 일들이 같은 현실성을 갖게 마련이다. 기차 는 탈선할지 모르고 수술은 실패할지 모르며 사업은 망할지도 모른다. 여성이 오랫동안 우울한 심정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력한 망령이다. 근심, 걱정은 기성세계에 대한 불신의 표시이다. 여성에게 이 세계가 위협으로 가득찬 영문 모를 재앙 속에 멸망할 것처럼 생각된다면, 그것은 여성이 이 세계에서 행복하지 않 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성은 단념하는 것을 단념하지 못하고 있다. 굴종을 받아들이고 있 는 것은, 마지못해 취하는 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누구와도 의논한 적 없이 여성이 되었다. 여성에게는 반항할 용기가 없다.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이다. 그녀의 태도 는 끊임없는 항의이다. 여성의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사, 성직자, 인생상담원들-은 그런 고백이 언제나 한탄인 것을 알고 있다.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들은 각자 자기의 불 이익을 호소하고 자신의 불운, 사회, 남자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자유인은 실패를 한 다 해도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떳떳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 은 모두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그녀의 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도 타인이다. 따라서 일체의 치료법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줄기차게 불평을 늘어놓는 여성에게는 여 러가지 해결방법을 권유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두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이다. 여성은 자기가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즉 무기력한 분노 속 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변화를 제의하면 그녀는 하늘은 향해 두 팔을 쳐들고, "결국 그런 말을 할 줄 알았어요! "하고 말한다. 자기의 불쾌는 이런저런 구실보다 더욱 깊은 곳에 근원이 있으며, 그것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웬만한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계가 자기와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반대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계 전체를 원망한 다. 여성은 사춘기부터, 아니 유년기부터 자기 신분에 불복해 왔다. 세상은 여성에게 보 상을 약속했다. 자기의 기회를 포기하고 남성의 손에 맡기면 이득이 100배나 되어 돌아온 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지금은 속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전체를 고발한다. 원한은 의존의 이면이다. 모든 것을 맡겨서는 절대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그러 나 여성은 남성의 세계도 필요로 하고 있다. 만일 이 세계를 전적으로 의심하고 반항하 면, 여성은 머리 위에 지붕이 없어져 위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부의 생활에서 가르침을 받은 마니교도(3세기 초에 파르시아인 마니가 세운 종교로 세계를 선인 빛과 악 인 어둠의 싸움터로 보았음. 채식, 불음, 단식,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악의 배제도 주장 함)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행동하는 자유인은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선이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는 어떤 이상을 정하고, 이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자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행 동 속에서 모든 해결의 애매함을 경험한다. 정의와 부정, 이득과 손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동 밖에 앉아 있으며, 마음속으로도 윤리적인 문제를 생각하기는 거부한다. 선은 실현되어야 한다. 만 일 실행되지 않으면 거기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며, 죄가 있는 자는 벌해야 한다. 여성은 어린이처럼 선과 악을 단지 흔해 빠진 그림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니교는 선택의 고민을 없앰으로써 정신적으로 사람들은 안정시킨다. 하나의 불행과 더 작은 불행, 현재의 이득과 보다 큰 미래의 이득 사이에 서서 결단을 내리는 것과 패배 와 승리를 손수 결정하는 것은 큰 모험이다. 마니교도에게 좋은 곡식과 나쁜 이삭은 분명 히 구별된다. 그들은 단지 나쁜 이삭을 빼버리면 되는 것이다. 먼지는 그 자체가 나쁘다. 청결하려면 더러운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청소하는 것은 낡은 물건과 더러움을 몰아내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사고방식에 따라 유태인은 나쁘다, 프리메이슨 단원(1723년에 런던에서 결 성된 세계주의 운동의 비밀결사로, 국제적 형제애, 성실, 신의를 신조로 한다)은 나쁘다, 과격파가 나쁘다, 정부가 나쁘다 하고 생각한다. 여성은 언제나 누군가에, 또는 뭔가에 반대한다. 반 드레퓌스(프랑스의 대위. 독일에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었 으나 후에 진범이 나타나 무죄가 됨. 1959~1935)운동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격렬했다. 여성은 악의 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 좋은정부'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집에서 먼지를 몰아내는 것처럼 악을 몰아내는 것이다. 열광적인 드골파 여성에게 드골은 청소부의 왕처럼 보였다. 그가 빗자루나 걸레를 손에 들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닦아내어 청결한 프랑스를 만드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 속에 머물어 있다. 당장은 악이 선을 침범하 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이나 볼셰비키, 프리메이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은 더욱 구체적으로 자기의 울분을 해소시킬 상대를 찾는다. 남편은 여성에게 알맞은 희생자 이다. 남성의 세계가 바로 남편 속에 육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사회는 그를 통하 여 여성을 구박하고 기만할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만일 일이 잘못 되면 그가 나쁜 것이가. 남편이 저녁에 돌아오면 그녀는 어린 자식, 행상인, 가계, 물가 에 대해 지껄이고, 류머티스나 날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에세 책임을 느끼게 하 고 싶은 것이다. 때때로 그녀는 남편에게 특수한 불만을 품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성이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병이 있고 근심이 있을지 모른다. ' 그것은 여성의 영우와 다르다.'그는 특권을 갖고 있으며, 아내는 언제나 이것을 불공평하 게 생각하고 있다.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갖고 있는 적의가, 그들에게서 멀리하기는 커녕 오히려 결합시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남성은 아내나 애인이 싫어지면 그들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은 미워하는 남성에게 보복하기 위해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을 탓하고 비난하는 길을 택하는 것은,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 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최고의 위로는 자기를 비참한 수난 자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의 인생은 남성이 정복해 버렸다. 여성은 패배 자체에서 하 나의 승리를 얻어내려고 한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눈물이나 히스테릭한 발작에 빠지게 된다. 여성이 그처럼 쉽사리 울 수 있는 것은 생활 자체가 무기력한 반항 위에 서 있기 때문 이다. 물론 여성은 생리적으로 남성보다 교감신경조직을 자제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기 도 하다. 교육은 여성에게 무저항이 될 것을 가르쳤다. 여기서는 습관적인 규칙이 큰 역 할을 하고 있다. 디드로나 맹자맹, 콩스탕과 같은 남자들도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러나 남성은 풍습이 그런 것을 금한 후로 울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사 회에 대해 실패했다는 태도를 취하려는 버릇이 있다. 남성은 사회에 동의한다. 불행한 일 이 일어나도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는 그 불행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쉽사리 타도 되지 않는다. ' 그런데 여성은 사소한 장해가 생겨도 세계의 적의나 짓궂은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 그 러면 가장 안전한 은신처인 자기 자신 속에 급히 도망쳐버린다. 여성의 두 볼에 흘러내린 미지근한 눈물의 흔적,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눈빛, 이것은 여성이 괴로워하고 있는 영 혼의 뚜렷한 표시이다. 피부에는 부드럽고 혀에는 약간 짭짤한 맛을 주는 눈물은 동시에 부드럽고 씁쓸한 애무이다. 얼굴은 인자한 눈물이 흘러내려 빛나고 있다. 눈물은 탄식인 동시에 위로이기도 한다. 그것은 열인 동시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냉각이기도 하다. 그것 은 최고의 도피이다. 천둥비처럼 돌발적으로 갑자기 내리는가 하면 태풍이 되고 파도가 되고 소나기가 되어, 금세 한탄의 샘으로 변화시키고 검게 찌푸린 하늘로 만들어버린다. 그 눈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안개에 싸이게 된다. 그것은 눈동자가 아니라 비가 되 어 녹아내린다. 장님이 된 여성은 자연물의 수동성을 되돌아간다. 여성은 패배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녀는 그 패배속에 가라앉는다. 수직으로 가라앉아간 다. 그리하여 그 속에 빠진다. 그녀는 폭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성에게서 도망가 버린다. 남성은 이런 여성의 태도를 불성실하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여성이 투쟁은 출발에서부터 이미 불성실한다. 여성의 손에는 어떤 효과적 인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기서도 마법적인 주술에 호소한다. 자기 의 흐느낌이 남성을 분노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점점 그런 방벙을 취하게 된다. 여성은 눈물만으로 자기의 반항을 잘 표현할 수 없으면, 히스테릭한 언쟁을 벌인다. 그 런 지루하고 거친 태도가 남성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다. 환경에 따라서는 아내를 구타하 기도 한다. 또 다른 환경에서는 남성 쪽이 강하고 그 주먹이 효과적인 도구인 것이 분명 하므로, 오히려 모든 폭력을 자제한다. 그러나 여성은 어린애처럼 여러가지 상징적인 광 란을 연출한다. 남성에게 덤벼들어 할퀴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스처에 불과한다. 여성은 특히 신경질적인 발작으로, 육체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거부를 몸으로 표현하 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광적인 동작을 취하기 쉬운 것은 생리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외계에 던져진 에너지가 그 대상물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여 일어나는 내면화의 하나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능력의 낭비이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에게는 좀처런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을 댈 수 없는 다 큰 아들이나 남편, 또는 애인을 상대할 때 그녀는 광적인 절망에 빠 진다. 톨스토이 부인의 광적인 발작은 매우 의미심장한 면을 갖고 있다. 그녀가 남편을 조금 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잘못이며, 그녀의 일기를 통해 보더라도 그녀 는 결코 관대하거나 상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솔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여성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잘못이었건 정당했건 상관없이 그 녀가 살고 있던 상황이 혐오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한평생 남편의 포옹이나 모 성, 고독 등 남편으로부터 강요되는 있는 생활방식에 대해 불평하면서 참고 살아왔다. 톨 스토이의 새로운 결심으로 싸움이 격화되면, 그녀는 적과 싸울 무기가 없어 자기의 무력 한 의지로 적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거부의 연극만 되풀이된다. 거짓 자 살, 거짓 가출, 꾀병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그녀 자 신도 정력이 소비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도 없다. 자기의 반항심을 자제해야만 하는 이유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또 그런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부의 한계에 도달한 여성에게 열려있는 출구는 확실히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것은 자 살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보다 자살하는 경우가 적은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통계 가 매우 애매하다(할프 박스의 <자살의 원인>참조). 자살에 성공한 경우는, 여성보다 남 성의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자살미수는 여성쪽이 더 많다. 그것은 아마도 거짓으로 기분을 만족시키는 여성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살을 많이 연기하지만 진실로 자살을 원하는 경우은 남성보다 적다. 여성이 잔인한 방법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자살에서 총기나 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필리어(셰익스피어 의 희극 <햄릿>의 등장인물)처럼 투신자살을 선호한다. 이것은 수동적이고 어둠에 찬 물 과 여성의 친근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물 속에서는 생명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처럼 생 각된다. 대체로 여기서도 앞에서 지적한 애매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은 자기가 싫어하 는 일을 진심으로 버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별의 연극을 곧잘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괴롭히는 남편의 곁에 머무르게 된다. 그녀를 괴롭히는 인생과 인연을 끊으려는 시늉은 하지만 실제로 자살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녀는 결정적인 해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자기의 처지를 항의한다. 그러나 거기서 탈출하지는 않는다. 항의로 이해되어야 하는 여성의 행위는 참으로 많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전하는 심정으로 남편을 배반하는 여성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이미 보아왔다. 남편이 꼼꼼하고 검소하면 여성은 일부러 경솔해지고 낭비하기도 한다.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은 "여자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고 비난한다. 여성에게는 '정확성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이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이 지체하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요염한 여성은 그런 방벙으로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면 자신의 값어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은 남자를 잠시 기다리게 하여, 자신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랜 '기다림'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여성의 생활 전체가 기다리는 것이다. 내재와 우연성의 혼돈 속에 갇 힌 채 자기 삶의 의미가 언제나 남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들의 경의와 찬사를 기다리고 있다. 살아가는 이유와 가치, 심지어 존재 자체를 그들에게서 얻기를 기 다리고 있다. 생활비도 수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설사 자기 손에 수표첩을 갖고 있더라도. 매주 혹은 매월 남편에게서 돈을 받더라도 그것은 먼저 남편이 그만한 돈을 손 에 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식료품 가게에 물품대를 지불하거나 새 옷을 사려면 그 만큼 남편의 돈을 여분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성은 남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좌우된다. 여성은 남성의 생활에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지만 남성은 여성의 생활 전체 이다. 남편은 가정 밖에 일터를 갖고 있지만, 아내는 종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애인 사이에서도 남성 쪽이-설사 그가 정열적이라고 하더라도-자기의 일에 지장이 없는 상황에 한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정한다. 잠자리에서도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기다리 고 자기 자신의 쾌락을 -때로는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은 고작 애인이 정한 시간에 늦게 가는 것과 남편이 지시한 시간에 완전한 준비를 마치지 못하는 정도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도 소중하다는 것을 확인시 킨다. 독립을 요구하고 잠시 본질적인 주체가 되어 상대방이 수동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따르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한 보복이다. 아무리 남성을 잠시 '멍청하게'만든다고 하더라도 남성의 자의에 따르면서 보내는 무한한 시간의 보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들의 지상권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받아들이며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지만, 차츰 남성의 지배에 항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종종 비난을 받는 '반항심'이 생기게 된다. 여성은 일정한 자주적인 영역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리나 가치를 앞세워 남성들의 그것과 싸우지 못하고, 단지 남성들 의 진리와 가치를 부정할 뿐이다. 여성의 부정은 남성에 대한 존경과 한이 섞여 있는 정 도에 따라 논리가 정연하기도 하고 엉성하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여성은 남성이 만들 어놓은 체계의 모든 허점이나 결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적발하려고 열심히 노 력한다. 여성은 논리나 기술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남성의 세계에 대한 발판을 갖고 있지 않다. 반대로 남성이 사용하는 도구의 위력이 여성의 영역에 접근하면 힘없이 사라져버린다. 남성이 일부러 여성을 무시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경험의 한 분야가 있다. 그러나 여성 은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대단히 정밀한 솜씨를 자랑하는 설계기사도 가정에서는 조회 의 신처럼 행동한다.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고 셔츠에는 풀이 잘 먹여있고 떠들썩하던 아이들은 침묵한다. 출산해 내는 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는 것 못지않게 신속 한 행위이다. 남성은 이와 같은 기적을 조금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기적은 마 술과는 조금 다르다. 기적은 합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세계속에 원인이 없는 사건의 근 본적인 비연속성을 갑자기 나타내는 것으로 이에 대하여는 어떤 사고도 대항하지 못한다. 한편 마술적인 현상은 은밀한 힘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순종동의 의식은-그것을 이해하지 는 못하지만-그 연속적인 발전을 느낄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조화의 신인 아버지에 게는 기적적이며 그 성장을 뱃속에서 참아온 어머니에게는 마술적이다. 남성의 경험은 분명하게 이해하기는 쉽지만 여러 곳에 허점이 있다. 반면 여성의 경험 은 애매모호한 것이지만 충실하다. 이 불투명성이 여성을 순중하게 만든다. 여성에게 남 성의 태도는 경솔하게 느껴진다. 남성은 독재자, 장군, 재판관, 관료, 법전, 추상적인 원 칙 등이 갖는 경박성을 지니고 있다. 한 주부가 어깨를 추켜올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 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남자들은 생각이 없어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 남자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인생에 대해 무지해요. "여성들은 버마재비의 신화(버마재비 의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를 희생시킨다는 것)를 경박하고 귀찮은 수필의 상징으로 대항한다. 이런 견해를 갖고 있는 여성이 남성의 논리를 거절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논리는 여성으로서의 자기의 인생체험에 적용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이론이 남성 의 손에서 폭력의 음험한 형태를 유도하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남성들의 단호한 긍정은 여성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여성을 딜레마속에 가두어 놓고 동의와 거부의 양자 택일을 강요한다. 이 경우, 여성으로서는 공인되어 있는 체계에 동의해야 한다. 찬성하지 않으면 체계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는 그런 대담한 일을 할 수 가 없다. 여성은 다른 사회를 만들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사회의 일원인 것도 아니다. 여성은 반항과 예속의 어중간한 위치에서 남성의 권위에 마지못해 따르고 있다. 이런 불확실한 복종의 결과를 억지로 여성에게 짊어지게 한다. 남성은 언제나 자유 의지로 노예가 된 반려자라는 환상을 좇고 있다. 여성이 그처럼 양보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의 추론의 기초가 되는 가정도 남성 스스로가 택한 것임을 알고 있다. 여성이 이런 근본적인 가정을 의심하려고 하지 않는 한, 남성이 여성의 입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성도 그것이 전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남성의 이론에 좀 처럼 승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는 고집이 세다, 비논리적이다 하며 화를 내고 비난한 다. 여성은 주사위가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내기하기를 거절한다. 그렇다고 진리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은 오히려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성장과 발전이 그녀에게 동일원리를 의 심하게 하거나, 그녀를 에워싼 마술적인 현상이 인과율의 관념을 상실하게 하는 데 그치 지 않는다. 남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성 자신은 온갖 원리나 가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애매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남성의 도덕은 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기만이라 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그가 정한 미덕과 법전을 당당하게 강요한다. 그러 면서 은밀히 그 법전에 따르지 않도록 유인하며 어느 정도 이런 불복종은 기대하기까지 한다. 만일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그가 배후에 몸을 감추고 있는 저 화려한 정면은 붕 괴될 것이다. 남자는, 시민은 보편적인 적을 향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품위를 갖게 된다는 헤겔의 사상을 즐겨 방패로 삼는다. 남자는 한 개인으로서 욕망이나 쾌락을 구할 권리를 갖고 있 다. 그러므로 그와 여자의 관계에는 이미 도덕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로운 행동도 보장된 다. 반면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가치가 보장되는 여러 가지 관계를 맺게 된다. 자기도 하 나의 자유이며,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법칙에 따라 다른 자유와 대립된다. 그 러나 여자를 상대할 경우에 그는 실존자답게 살기를 그만두고, 즉자존재의 환영 속에 빠 져 비진정한 계획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폭군이 되고 사디스트가 되고 난폭해지거나 혹은 유치해지고 마조히스트가 되고 불평분자가 된다. 그리고 자기의 집념이나 고약한 버 릇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공적인 생활에서 얻은 권리를 내세워 긴장을 풀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테레즈 테메이루처럼-남편의 공적인 말이나 고상함과 대조를 이루는 개인적인 탐 욕이나 이기심에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는 입으로는 인구증가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만 실제로 자기는 필요 이상의 아기를 낳지 않는다. 정결한 아내를 칭찬하면서도 이웃에 사는 남의 아내를 유혹한다. 낙태는 범죄라고 법으로 규정한 것도 남성이지만 해매다 낙 태해야하는 처지에 몰리고 있는 100만의 프랑스 여자도 남성에 의해 생긴 것이다. 남편이 나 애인이 이런 해결방법을 권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는 이런 방법을 취해야 함을 암암리에 계산하고 있다. 여성이 죄를 범해여 그 책임을 져주기 를 바라고 있다. 여성의 부도덕이 남성에 의해 존중되는 도덕적 사회의 조화를 위해 필요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성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매음에 대한 남성의 태도이다. 남성이 요구하 기 때문에 매춘부가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악적은 비난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악 습에는 대단히 관대한다. 매춘부들이 세상 남자들(특히 신사를 자처하는)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자기의 육체를 밑천으로 살아가는 매춘부를 패덕의 여인이나 타락한 여인으로 보지만, 그런 육체를 상대하는 남성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세기 말, 어떤 사창가에서 열두세 살 먹은 소녀 두 사람을 경관이 발견했다. 이 소녀 들은 상당한 고위층 인사가 단골손님이라고 말했다. 한 소녀가 그 신사의 이름을 대려고 입을 열자 검사는 당황하여 그것을 막았다. "훌륭한 분의 이름을 더렵혀서는 안 돼! "국 가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은 신사는 소녀의 처녀성을 빼앗아도 훌륭한 분이었다. 이 사람에 게도 약점이 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편적인 윤리의 영역에 적을 두 지 않은 소녀-장군도 아니고 위대한 프랑스인도 아니며, 단지 한 소녀에 불과한-는 자기 의 도덕적인 가치를 성본능의 우연한 장소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타락한 여 자, 탈선한 여자, 감화원에 보내야 하는 불량소녀이다. 남성은 여성을 상대로 자기의 체면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여성에게는 불명예가 되 는 공범행위를 할 수 있다. 여성은 이런 미묘한 점을 잘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남자가 공공연히 여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성은 자기도 원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도 남성에게 주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주지 않는다. 정결하고 성실한 아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은밀히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 길 것이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을 하고 필요하다 면 낙태도 한다. 남성은 공공연히 그런 여성의 행위를 부정한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므 로. 그러나 내심으로는 여성의 연약함이나 불임증을 감사하고 있다. 마치 임무를 완수하 면 보상을 듬뿍주지만 붙잡히면 총살당하는 것을 방치하는 간첩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 다. 남성의 부도덕의 결과는 여성이 짊어지게 된다. 훌륭한 신사들이 살고 있는 견고하고 화려한 궁전을 위해 하수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창녀뿐만 아니라 여성 전체이 다. 이런 처지에서 품위, 명예, 성실 온갖 남성적인 미덕의 찬사를 퍼부어도 여성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도덕가인 남성으로부터 타산적이고 가식적이며 거 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여성은 조용히 냉소하고 있다. 남성도 돈이나 성공에는 욕심을 부린다. 또 일을 하여 그것들을 획득하는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기생적인 역할이 주어질 뿐이다. 모든 기생자는 필연적으로 착 취자가 되게 마련이다.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향락 을 즐기기 위해 생식하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성적 서비스에 의해 남성의 혜택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착취의 도구가 된다.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몸을 파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와 보호자 사이에는 공정한 거 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연극하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그 녀가 타자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실존자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려고 해도 여전히 주체이다. 남성은 여성을 객체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객체로 만든다. 그녀가 자진하여 객체가 되려고 하는 순간, 그녀는 자유로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 에 그녀의 근원적인 배신이 있다. 가장 수동적인 여성일지라도 역시 의지적이다. 그래서 온전히 남성에게 몸을 맡기고 있으면서도 그를 보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속았다고 느끼게 된다. 여성은 남성에게 바쳐진 존재로서 먹이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남성은 이 먹이를 여자 스스로 자유의지로 자기에게 제공해 주기를 요구한다. 침대에서 그녀에게 쾌락을 느끼기 를 요구한다. 가정에서는 여성이 남편의 우월성과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 다. 그러므로 그녀는(다른 때에는 수동적인 연극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자주성이 있는 체해야 한다. 그녀는 자기에게 빵을 제공하는 남편을 위해 싸움과 눈물, 사랑의 황홀, 신 경질적인 발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받아들이고 있는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남성은 자기의 권리와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여성에게 연극을 하도록 유도한 다. 여성 쪽에서는 그 거짓 능력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즐기는 보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애인이나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속아넘어간 남성의 단순한 허영심을 재미있어 한다. "그들 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무 기뻐서 울어주기를 원하고 있어" 하고 반감을 갖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식당 옆에서 주인을 욕하는 하인들과 비슷하다. 여성도 이와 같은 결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부장적인 압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 주인을 쳐다보는 것처럼 남성을 올려다보는데 익숙하므로, 하인과 같은 파렴치한 근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성의 특색 중에서 어느 하나를 놓고 보더라 도, 그것이 근원적으로 타락한 본성이나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모두 가 하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인 제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허위가 있다. "고 푸리에는 말했다. "상품에 있어서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급지와 밀수입은 분리 할 수 없다. "여성의 결점이 그 입장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남성도 잘 알고 있다. 양성 의 계급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은 여성을 경멸하는 근거로 삼로 있는 성질을 여성에게 조장하려고 한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여자가 나쁜 결함을 갖고 있으면 남편이나 애인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여성다운 매력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들은 그와 같은 여성스러움과 여성의 결함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만일 여성이 불 성실하고 경박하며 비겁하고 게으르지 않다면 그 매력을 잃게 된다. <인형의 집>에서 헬머는 남성이 약한 여성의 어린애 같은 과실을 용서해 줄 때, 자기가 얼마나 정당하고 강하며 분별력 있고 너그러운가를 느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른슈타인(프랑스의 극작가)이 묘사한 남편들은-작가와 공모하여-돈을 훔치 고 심술궂고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여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한다. 남편들은 여성 위에 군 림하여 너그럽게 몸을 굽히는 것으로써 남성으로서의 현명함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의 인종 불평등론자나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자들 역시, 흑인은 도벽이 있고 게으르 며 거짓말쟁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으로 흑인 스스로 자신들의 무가치를 입증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압제자에게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게 된다. 만일 흑인이 끝까지 정직하고 성실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고집에 센 놈이라고 욕한다. 여성의 결점도 예외는 아니 어서 여성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장식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논리적인 원리나 도덕적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법칙에 대해 회의적인 여성은 보편적인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의 눈에 세계는 잡다한 집합체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이웃 여자의 험담 쪽을 쉽사리 믿게 된다. 그겨는 책을 소중 히 여기기는 하지만 쓰여진 글 사이로 시선이 갈 뿐,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쇼핑 행렬이나 사교장에서 낯선 사람이 말한 일화는 쉽사리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된다. 여성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마술이고, 영역 밖에서는 모든것이 신비스럽 다. 여성은 진실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확신 을 갖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경험도 좋고, 강조된다면 남의 경험도 무방하다. 여성을 가정에 고립되어 다른 여자들과 활동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자기를 특이하고 특수한 경우처럼 생각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운명이 자기에게 유리한 예외의 경우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이론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생기 는 영감을 믿는다. 그리고 그 영감이 신이나 세계의 어떤 신비로운 영으로부터 오는 것으 로 믿기 쉽다. 어떤 불행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야'또는 이와 반대로, '나만은 예외가 되겠지'하 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은 특혜를 좋아한다. 상인은 그녀에게 특별히 할인해 주고 교통 순경은 통행증이 없어도 통과시켜줄 것이다. 여성은 자기 미소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누구나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준 남성은 없다. 여성은 자기가 이웃집 여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교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아무리 경험을 쌓아도 생각을 취소하지는 않는다. 여성은 잇따라 실패해도 총계 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견고한 반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산발적으 로 남성들을 비난할 뿐이다. 여자끼리 잠자리나 출산, 미래의 예상이나 미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의 원망에서 당연히 생길 법한 반감의 세계를 세우기에 는 확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너무나 상반되고 감정적이다. 남자란 어린아이처럼 상처받기 쉬운 육체이며 순진한 존재이다, 귀찮은 수펄이다, 치사한 폭군이다, 이기적이며 허영심이 강하다. 그러나 영웅이나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남성의 욕망은 조잡한 정욕이며 그 포옹은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고역이다. 그러나 그 거친 정열이나 남성적인 정욕은 조화의 신이 지닌 생산력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과연 남자야! "하고 황홀감에 빠져 여성이 말할 때, 그것은 남성의 정력과 사회적인 실력에 감 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쌍방에 동일한 창조적인 우월성이 나타나 있다. 여성은 남성이 대예술가, 대실업가, 장군, 지도자인 것을 상상할 때, 그런 남자가 정열적인 애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사회적인 성공은 언제나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성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켜주는 남성은 천재로 인정받기 쉽다. 결국 여성이 남성적 인 신화를 살리고 있는 셈이다. 남근(양물)의 형태는 로렌스나 그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활기찬 정력과 동시에 인간적인 초월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침대의 쾌락 속 에 세계의 정령과의 신비로운 결합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남성을 신비적으로 숭배하는 여 성은 남성의 영예속에 자기를 몰입시키고, 거기서 자기를 재발견하게 된다. 남성의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모순은 쉽사리 제거된다. 어떤 남성들은-일상생활에서 남성의 초라함을 여성에게 보인 남성들은-인산의 비참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남성의 위대성 이 고양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자의 모습이 하나로 용해되는 것도 여성은 용납한다. "내가 유명해지면 R... 은 반드시 나와 결혼해 줄 것이다. 그 허영심이 채워질 테니까. 내 팔은 끼고 걸어가면서 그는 가슴을 펼테지. " 자기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사랑한 어떤 처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는 이 남자를 미친 듯이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남자가 그녀의 눈에는 인색하고 교만 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다. 신도 약점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 자유속 에서 그 인간성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진정한 존경뿐 아니라 약점도 간과하 지 않을 것이다.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는 남자를 손아귀에 넣을 줄 알고 남자 를 잘 조종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데, 사실은 남자의 위력에 굴복하면서 남자의 약점에 아양을 떠는 것에 불과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행위 속에 완성되는 상대방의 인격에는 조 금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증거이다. 그녀는 단지 우상과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일반적 인 본질 앞에 맹목적으로 엎드리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라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성한 후광과 같은 것으로 응결된 기성의 가치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지닌 개인은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빛나보인다. 당사자는 대단치 않다. 오히려 그 남성이 갖고 있는 특권 자체에 질투를 느껴 심술궂은 심정으로 그를 눌러버리고 싶어한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애매함은 그녀 자신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녀가 갇혀 있는 영역은 남성의 세게에 의해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남자 역시 조종을 받고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마법과 같은 힘에 협력하면 여성도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자연을 극복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역시 사회를 지배한다. 정신은 소멸되어버린다. 여성은 이 불확실성을 방패로 하여 도시보다 정원에, 사상보다 질병에, 혁명보다 출산에 더 많은 진 실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녀는 바하오펜(스위스의 문학가로 <모권>의 저자)이 꿈꾼 대지나 어머니의 지배를 회 복하여 자기 안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도 그 안에 초월성을 갖고 있는 실존자이므로 자기가 갖혀 있는 이 영역을 변형시켜 야만 가치를 높일 수 있다. 그녀는 여기에 초월적인 차원을 부여한다. 남성은 사고가 가 능한 현실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세계에 살고 있다. 반면 여성은 사고가 허락되지 않는 하 나의 마술적인 세계를 상대하고 있다. 그녀는 그 세계에서 현실적인 내용을 갖지 않는 사 고방식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자기의 실존을 올바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늘에 자기 운명 의 순수한 이념을 바랄 뿐 행동은 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 자기의 모습을 내세운다. 추론 은 하지 않고 꿈을 꾼다. 그래서 여성은 육체적이면서도 공적이고 지상적이면서도 천상벽 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인생은 냄비를 닦는 것으로 보내지만, 그것 또한 훌륭한 소설이 다. 남성의 부하이지만 자기를 남성의 우상처럼 생각한다. 자기의 육체속에서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사랑을 찬양한다. 생명의 우연한 사실성밖에 경험하지 못하면서도 이 상에 봉사하는 수녀가 된다. 이와 같은 상반성은 여성이 그 육체를 파악하는 방법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다. 종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달마다 출혈하고 수동적으로 생식하는 그 육체는 분 명한 쾌락을 확보할 수 없다. 육체에는 자연히 고통이 생기고 고통은 육체를 괴롭힌다. 여성은 자기 안에 위협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 내부에서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근육과 내장을 규제하는 교감신경계통과 내분비계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히스테릭한 육체이다. 그 육체는 여성이 감당하기를 거부하는 반응도 나타난다. 흐느낌, 경련, 구토 등을 일으켜 육체는 그녀를 거역하고 있다. 육체는 그녀의 가장 친밀 한 진실이지만 그것은 수치스러운 진실이기도 하여, 여성은 이것을 숨기려고 한다. 그러 나 또한 육체는 그녀의 훌륭한 복사이기도 한다. 그녀는 그것을 거울에 비추고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행복의 약속이고 예술품이며 살아 있는 조각이다. 그녀는 형태는 만들 고 장식하여 남에게 보여준다. 거울을 향해 미소를 지을 때, 그녀는 자기의 육적인 우연 성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때때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여 자기가 여주인공이며 동시에 육체 라는 데 놀란다. 자연은 그녀에게 좌우대칭적으로 이중의 얼굴을 갖게 한다. 요리할 때 냄비에 야채를 제공하는 한편, 신비적은 감동도 느끼게 한다. 여성은 주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서, 들 이나 숲속으로 도망치는 자유를 단념한다. 그것보다는 가정에서 평온하게 채소밭을 일구 는 쪽을 택하고, 꽃을 가꾸어 화병에 꽂는다. 그러나 그녀는 달빛이나 석양을 바라보고 흥분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상의 동물이나 식물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식량이나 장식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자연의 은총이나 마술인 생명의 진액이 흐르고 있다. 생명은 단지 내 개와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빛의 눈부신 면도 갖고 있다. 뱃속에서의 다산에 의해 자연과 화해하고 있는 여성은 자연의 정령이다. 여성은 활기를 불어넣는 정력이 입김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 불만의 상 태로 머물러 있고 미완성의 처녀라고 느끼는 정도에 따라 영혼은 무한히 뻗어 있는 길 위 에서 끝없는 지평선 쪽으로 흡수되어간다. 남편, 자식, 가정에 매여 있는 여성은 스스로 도취된 듯한 심정으로 주체성을 회복한 기분으로 서 있다. 여성은 이제 아내도 어머니도 주부도 아니다. 한 인간일 뿐이다. 그녀는 수동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도 하나의 의식, 하나의 자유의 주체임을 상기한다. 물의 신비나 산봉우리의 웅장한 모습 앞에서는 남성의 최고권리 같은 것은 사라져버린다. 그녀가 히스 의 풀밭 사이를 걸어갈 때 손을 개울물에 적실 때 그녀는 타인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예생활을 통하여 그 독립을 유지해온 여성은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유를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것 에서 그저 약간 산뜻한 도취를 느끼는 구실을 발견하는데 그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영혼의 황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육의 세계와 시적인 세계에 이중으로 속해 있는 것은, 여성이 다소나마 믿고 있 는 형이상학과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생명과 초월을 혼동하려고 한다. 즉, 그녀는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여기에 친근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기피 한다. 그녀는 스토아 철학자나 16세기의 신플라톤학파의 철학과 유사한 자연주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성들이 나바르의 여왕 마르그리트를 선두로 하여, 그런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철학에 심취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마니교 도적인 여성이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낙천주의자이고 싶어하는 깊은 욕구를 갖고 있다. 행동의 모럴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다. 행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주어진 것은 선이라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피노자가 이성에 의해 인정하고 라이프니츠가 계산에 의해 인정한 선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다. 여성은 하나의 살아 있는 조화와 같은 선, 단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해 잘 적응할 수 있는 선을 요구한다. 조화라는 사고는 여성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의 하나이 다. 그 사고방식에는 부동의 완전성과 전체나 개개의 요소도 직접 정당화하는 견해와 여 성이 전체에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은 조화의 세계에서 남성 이 행동으로 구하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여성도 세계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세계에 요구 되어 있다. 그리하여 선의 승리에 협력하고 있다. 여성들이 하늘의 계시처럼 생각하는 순간은, 그녀들이 편안히 휴식하고 있는 현실과 자 기들이 조화를 발견하는 때이다.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 <등대로의 산 책> 속에서- 그리고 K. 맨스필드가 그 작품 전체에서 여주인공들에게 최고의 보상으로 제 공하는 빛나는 행복의 순간이다. 자유의 도약이라는 기쁨은 남성만의 것이다. 여성이 알 고 있는 것은 평화의 충실감과 같은 인상이다. 여성은 언제나 거부, 비나, 요구와 같은 긴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평정이 큰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긴다. 여성이 아름 다운 오후나 저녁의 고요를 즐기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만 숨은 영 혼의 참된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위선이다. '선'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 다. 세계는 조화되어 있지 않다. 어떤 개인도 자신의 필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이 아니다. 사회가 여성에게 제공하는 최초의 보상은 종교이다. 서민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유로 여성에게도 종교가 필요하다. 어는 성과 계급을 내재 속에 가둬두려면, 거기에 초 월의 환상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남성에게는 자기가 정한 법전의 배경을 산에게서 찾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여성에게 언제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데다가 그 권위가 지고의 존 재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유태인이나 마호메트교도나 기 독교도에게는 신권에 의해 남성이 주인으로 되어 있다. 신을 공경하면 압박을 받고 있는 자의 마음에서 모든 반항심을 질식 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믿기 쉬운 여성의 특성을 이용 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앞에서 존경과 신앙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신은 그녀에게 장관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며, 인간 창조의 신비는 발전소의 신 비와 결부된다. 그러나 특히 여성이 종교에 열중하기 쉬운 것은 어떤 깊은 욕구에 응하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자유에 기여한 근대 문명 - 여자에게도 그러했다 - 에 있어서 종교는 이미 속박 의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반의 도구로 나타난다. 여성에게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열등 감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대신, 신의 그늘에서 주권자인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말 해 믿을 것을 권고한다. 여성이 신에게 그 내재성을 바침으로써 그 초월성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혼의 우열이 결정되는 것은 하늘에서이지 지상의 일에 의해서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이 지상의 생활에는 단지 잡무가 있을 뿐이다. 구두를 닦거 나 다리를 놓는 것은 모두 공허한 일이다. 사회적인 차별을 초월하여 양성의 평등이 회복 된다. 그래서 소녀가 처녀는 남자형제보다 훨씬 열렬히 신앙에 몰입한다. 그의 초월성을 다시 초월하는 신의 눈동자는 남자에게는 굴욕감을 둔다. 이런 강력한 신의 보호를 받게 되면, 자기는 언제까지나 어린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느끼고 있는 거세보다 더욱 근본적인 거세이다. 한편 영원한 어린이(여성을 가리킴)는 자기를 천사의 자매로 변형시켜주는 이 시선 속 에서 구원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남자아이가 갖고 있는 페니스(남성)의 특권을 부인한다. 성실한 신앙은 소녀에게 모든 열등의식을 제거하는 데 매우 우용하다. 그녀는 이제 남성 도 여성도 아닌 신의 피조물이다. 많은 위대한 성녀가 지닌 남성적인 확고한 정신도 그것 에 연유한다. 성녀 브리지트나 시에나의 성녀 에카테리나 등은 자존심을 갖고 세계를 지 도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녀들은 남성의 권위 같은 것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에카 테리나는 남성인 고해신부들을 가혹하게 다루기도 했다. 잔다르크나 성녀 테레사도 남성 이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 로마교회는, 신이 결코 여성에게 남성의 보호에서 벗 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유념하고 있다. 죄악소멸 선언의 거부나 파문과 같은 무 서운 무기는 남성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끝까지 자기의 환각을 믿고 고집 을 부린 잔 다르크는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신의 의지 자체에 의해 남성의 계율에 복종 하는 여성이지만 신의 은총 안에서 남성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확실한 수단을 찾아낸다. 남성의 논리는 신비에 의해 빛을 잃게 된다. 남성의 자존심은 죄악이 된다. 남성들이 애써 활동하는 것은 비단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악한일이기도 하다. 신이 지은 세 계를 무엇 때문에 새로 개조하려고 하는가? 여성의 수동적인 자세가 오히려 신성화된다. 노변에서 묵상에 잠긴 그녀는 자기가 정치적인 집회 등에 뛰어다니는 남편보다 신에 가깝 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 다. 반항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명과 정신의 종합이 정확히 성취된다. 어머니는 하나의 육체를 낳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원자의 비밀 따위를 연구하는 것보다 고상한 일이다. 여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협력 하는 것으로 남성에게 그 여성적인 특질(여성스러움)의 영광을 분명히 요구할 수 있다. 신은 이렇게 여성 일반에게 품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여성 개개인을 높은 하늘로 도피 시키면서 마음의 기둥을 발견하게 한다. 인간적인 인격으로서는 별로 가치를 갖지 못하지 만, 일단 신의 영감의 이름으로 행동하면 그 의지는 신성불가침한 것이 된다. 기용 부인 은 어떤 수녀의 병에 관해 "신의 말씀으로 명령하고, 그 같은 말씀에 따라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앙이 독실한 여성은 자기의 권위를 겸손한 복종으로 위장한다. 그녀는 아기를 기르고 수도원을 관리하고 자선사업을 하면서 초자연 적인 힘 안에서 순종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신을 소홀 히 하는 것과 같다. 남성도 이런 구원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은 어차피 같은 필요를 갖는 동 료들과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남성의 갈등은 모두 가 인간관계에서 일어난다. 여성은 이제, 자기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신 의 의지를 내세운다. 여성에게 이런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관계가 타인과 관련될 경우에도, 숭고한 침묵 이 법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면적인 갈등에 있어서이다. 사실상 여성은 자기의 욕 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를 구실로 삼는다. 불감증에다 마조히스트인 동시에 사디스트 인 그녀는 육체를 단념하고 희생자를 가장한다. 자기 주위의 모든 생명적인 약동을 말살 해 버리고 자기를 성화한다. 자기를 무로 만들고 손상을 입게 함으로써 선택된 계급에 속 하려고 한다. 그녀가 남편이나 자식에게서 모든 지상의 행복을 빼앗고 학대하면 그들에게 천국의 좋 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 코르토나의 마르그리트는 "죄를 범한 자기를 처벌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의 과실을 보상하기 위해"자식을 학대했다고, 그녀의 전기를 쓴 사람은 말했다. 그녀는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거지들을 배불리 먹인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식에 게 먹을것을 주었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하지도 않는데 생긴 자식을 미워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도덕적인 분노라는 구실로 울분을 터뜨릴수 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일 것이다. 한편, 행실이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한 여자도 신과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는 죄가 소멸되어 정화될 수 있다는 확신은 흔히 믿음이 깊은 여성에게 대담한 행동을 하게 한다. 금욕주의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택하든 오만이나 겸손을 택하든 간에 그녀가 자기의 구원에 대해 갖는 걱정은 그녀가 무엇보다도 선호하는 기쁨, 즉 자기 성찰에 몰두하게 한 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헤아리고, 자기 육체의 전율을 엿보고 있다. 그녀의 내부에는(임신하면 아기를 갖는 것처럼) 신의 은총이 담겨 있으므로 그렇게 해도 무방하 다. 스스로 자기를 조심스럽게 검토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고해신부)에게 마음을 고백한 다. 옛날에는 군중 앞에서 고백하는 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코르토나의 마르그리트는 자 기의 허영심을 벌하기 위해 자기집 발코니에 올라가서 해산을 하는 여자처럼 큰 소리로 외쳐댔다고 한다. "코르토나의 주민들이여, 일어나시오. 촛불을 들고 죄 많은 여자의 고 백을 들으러 밖으로 나오시오!" 하고 말이다. 그녀는 자기 죄를 낱낱이 고백한뒤 하늘을 향해 그 비참함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요란스럽게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보이는 나르시시즘의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출증적 욕구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종교는 여성에게 자기 만족을 허용해 준다. 노스탤지어(향수)의 욕구를 갖고 있는 지도 자, 아버지, 애인,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 신을 마련해 준다. 몽상을 조장하고 공허한 시 간을 매워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확인한다. 성이 없는 하늘나라에 가장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가짐으로써 체념을 정당화한다. 오늘날 여성이 교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교회가 여성의 해방을 쉽게 하는 조치에 대 하여 그처럼 반감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종교가 필요하다. 종교를 영속 시키려면 여성, 즉 '진정한 여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여성의 성격 전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확신, 가치, 지혜, 도덕, 취미, 행 동 등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놓인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성에게 초월이 거부되어 있 다는 사실은 대개 영웅주의, 무사, 반항, 초연, 고안, 창조와 같은 가장 고귀한 인간적인 태도를 여성에게는 금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남성에게서도 흔한 것은 아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비본질적인 중간자적인 영역에 갇혀 있는 남성도 많다. 노동자는 혁명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정치활동을 통하여 그런 영역에서 벗어난다. 그러 나 중류층에 속하는 남성들은 그런 처지에 안주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처럼 일과를 되풀 이하고 기성가치에 만족하며 여론을 존중하며, 지상에서 단지 막연한 쾌락만을 추구한다. 대부분이 샐러리맨, 상인, 관료들로서 아내에게 조금도 내세울 것이 없다. 요리와 빨래를 하면서 살림을 꾸려가고 아기를 키우는 안 쪽이, 규칙에 예속되어 있는 남편보다 더 많은 창의성이나 독립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남성은 하루종일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갑갑한 옷차림으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 다. 그러나 여성은 편안한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이웃 여자와 담소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마음대로 행도할 수가 있다. 작은 모험을 하거나 어떤 결과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남편처럼 습관이나 체면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카프카가 선별하여 묘사한 관료의 세계(그 격식과 어리석은 행동과 목적을 잃은 행동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남성의 것이다. 여성은 현실에 더욱 밀착되어 있다. 남성이 숫자를 나열하거나 또는 정어리의 통조림을 현찰로 바꿀 때 그는 단지 추상적인 것만을 파악하고 있다. 요람 속에서 자라는 유아, 흰 내의, 구운 고기 등은 가장 감촉하기 쉬운 소유물이다. 그러나 여성은 바로 이런 목적들을 추구하는 동안에 그 우연성 - 상관적으로 자기 자신의 우연성 - 느끼기 때문에, 그 속에 자기를 소외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난다. 여성은 자유에 머물러 있다. 남성의 사업은 기획인 동시에 도피이다. 그는 자기의 경력이 나 자기가 연출하는 인물에 의해 자기를 소모시킨다. 그는 의젓하고 진실한 체한다. 여성 은 남성의 논리와 도덕을 의심하고 있으므로 그런 함정에는 빠지지 않는다. 스탕달의 여 성을 존중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여성은 자기 입장의 애매성을 자존심 속으로 도망쳐서 얼버무리지 않는다. 여성은 인간 적인 품위의 가면 뒤에 숨지 않는다. 여성은 자기의 자유로운 생각이나 감동, 자발적인 반응 등을 있는 그대로 발견한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그녀의 남편과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덜 지루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이 자기가 섬기는 남편의 충실한 아내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남성은 흔히 일반적인 사 고를 말한다. 즉, 그가 읽은 신문이나 전문적인 책 속에 있는 말과 표현을 지껄이는 것이 다. 그러나 여성은 한정되지만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여성다운 감수성'은 얼마간 신화나 연극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 성이 남성보다 자기가 세계에 대해 조심스럽다. 그녀는 성적으로 남성적인, 즉 거친 분위 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보상으로서 그녀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래 서 여성의 연약한 애교가 생겨나지만 섬세한 느낌도 준다. 또 활동영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손이 닿는 대상물을 귀중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개념이나 기획 속에 가둬두지 않 기 때문에 여성은 그 풍요함을 발견하다. 여성의 도피욕망은 축제를 좋아하는 기분에도 나타나 있다. 꽃다발과 과자, 푸짐하게 차린 식탁을 남에게 베풀기를 무척 좋아하고, 또 여가의 공허를 타인에 대한 아낌없는 봉사로 변화 시키기를 좋아한다. 또 웃음, 노래, 장 신구, 골동품 등을 좋아하고, 자기의 주위에서 파닥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붙잡 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거리의 풍경, 하늘의 모습이나 그 밖의 무엇이라도 말이다. 초대 나 외출은 그녀의 시야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남성은 대개 이런 기쁨에는 동참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가 집에 돌아오면 명랑했던 목소리는 침묵을 지킨다. 따라서 가정에 있는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따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취한다. 여성은 고독이나 이별 중에서 자기 생활의 특성을 이끌어낸다. 과 거나 죽음,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훨씬 깊은 내면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처럼 여성이 자기 마음, 육체, 정신, 모험에 흥미를 갖는 것은, 자신이 지상에서 그런 운 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야심이나 직업에 몰두하고 있는 남성보다 현실을 보다 정열적이고 파토스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여성에게는 감동에 깊이 빠지거나 자기의 감각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생각할 여가와 취 미가 있다. 그런 상상력이 몽상으로 그치지 않을 때 그것은 공감을 준다. 여성은 타인을 각자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려고 하며, 자기 안에 그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남편이나 애인 에 대해서도 완전한 동일화가 가능하여 상대방의 기획이나 걱정을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남성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이다. 여성은 세계 전체에 섬세한 주 의를 기울이고 있다. 세계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생각되는 것이다. 개개인과 각각의 사물 은 그녀에게 대답이 될 수 있다. 여성은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이윽고 노년에 이르면 그녀를 배반한 기대는 아이러니로 변하고, 때로는 구미를 돋우는 시니시즘으로 변하기도 한다. 남성의 기만은 이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는 남 성이 세운 장엄한 건축물에도 우연적이고 어리석으며 무의미한 이면이 분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의존성은 거기서 몸을 떼는 것을 용납하기 않는다. 또한 여성은 자기에게 부과된 헌신 속에 고귀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남편을 위해 애인을 위해 자식을 위해, 그 녀는 이제 자기를 조금도 돌보지 않게 된다. 때때로 여성은 스스로 자기의 처세방법을 생 각해 내어야 한다. 그러나 기성의 판에 박힌 듯한 수단이나 평범한 방법으로는 남성들처 럼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그녀가 선의로 충만할 경우에 그녀에게는 남편의 오만한 확신보다는 진정한 생활태도에 더 가까운 불안은 느낀다. 그러나 여성이 이런 훌륭한 장점을 지니려면, 남성에 비해 자기에게 강요된 허황된 것 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상류계층에서는 여성이 남편들의 열렬한 동조자가 된다. 그들 이 제공하는 이득에 매이기 때문이다. 상층 부르주아의 부인이나 귀족의 부인들은 앞에서 도 말한 것처럼 언제나 그 계급의 이득을 확보하기 위해 남편보다 더 완고했다. 인간으로 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희생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사 고력과 비판정신 심지어 자발적인 생명의 약동까지 말살시켜버린다. 세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남성의 법전이 강요하는 이상에 영합한다. 그 결과 어디에서도 성실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는 가사나 자녀의 시중에서 하나의 독립을 발견한다. 거기 서 빈약한 대로 구체적인 경험을 이끌어낸다. 이와는 달리 남의 봉사를 받고 있는 여성은 세계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도 갖고 있지 않다. 꿈, 추상, 공허 속에 살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사고의 실제효용을 모르고 있다. 그녀들의 말은 입 속에서 이미 의미를 잃고 있다. 금융가, 실업가, 때로는 장군들까지도 자진하여 수고를 감당하고 걱정하며 모 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 특권을 불공정한 거래에서 얻고 있지만 아무튼 자기 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아내들은 손에 얻는 모든 것의 보상으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그만큼 더 맹목적인 신념으로 시효 에 걸리지 않는 자기의 권리를 믿고 있다. 이런 여성의 공허한 오만과 그 절대적인 무능 과 완고한 무지는 그녀들을 인류가 탄생시킨 가장 불필요하고 가장 무능한 존재로 만들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여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 지로 무의미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하거나 열등하거나, 혹은 동등하다는 것을 결정하 려고 하는 비교론이 무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성과 여성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 다. 만일 이 상황 자체를 대조해보면 남성 쪽이 크게 유리한 것이 분명하다. 즉, 남성은 세계 속에 그의 자유를 투기하는 구체적인 가능성을 훨씬 많이 갖고 있다. 필연적인 결과 로 남성의 의욕을 실현하는 쪽이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성에게는 뭔가를 하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이 그 한계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대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각자 자유롭게 그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기만적인 함정이나 성실을 가 장한 속임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남성이나 여성을 노리고 있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그 자유가 여성에게는 추상적이고 허망한 것이므로, 반항의 형태로 밖에 올바 로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열린 길이다. 여성의 유일한 자유는 상황의 제한을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개척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체념은 책임에 대한 포기이며 도피이 다. 여성에게는 자기를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달리 출구가 없는 것이다. 이 해방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의 입장에서 경 제적인 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각자 외롭게 개인적인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여 성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있다. 그녀들은 자기의 실존(삶)을 그 내재성 속에서 정 당화하려고 한다. 즉, 내재 속에 초월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런 절박한 노력 - 때로는 우 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감동적이기도 한 - 은 감옥에 갇혀 있는 여성이 그 감옥을 영 광의 하늘로, 즉 자신의 예속적인 처지를 숭고한 자유로 바꾸려는 것이다. 나르시스트인 여성이나 정열적인 사랑을 하는 신비적인 여성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제1장 나르시시즘의 여성 나르시시즘은 흔히 모든 여성의 근본적인 태도인 것처럼 말해 왔다.(헬렌 도이치의 <여 성심리> 참조) 그러나 개념을 함부로 확대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깨어버리는 것이다. 마 치 라 로슈푸크(17세기 프랑스의 사상가로 인간행위의 동기를 에고이즘으로 보았다)가 에 고이즘의 개념을 깨어버린 것처럼 자신을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하여, 주체가 그 속에 도 피해 버린 것이다. 여성에게서는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태도 -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 이든 - 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는 이미 고찰했다. 실제로 여성은 환경적으 로 자기를 돌아봐야 하고, 자기에게 사랑을 바치는 경우가 남성보다 많다. 모든 사랑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요구한다. 여성을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두 길을 지나 나르시시즘으로 인도된다. 주체로서 그녀는 불만을 경험한다. 어린시적, 그녀에게는 남자아이의 페니스에 해당되는 제2의 자아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후에도 그녀의 공격적 인 성욕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적인 활동이 그녀에게 금지되 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 어 머니, 부부의 역할에서도 그 개별성을 인정 받지 못한다. 남성의 진리는 그가 짓는 집이나 그가 개척하는 삼림이나 그가 치료하는 환자 속에 있 다. 여성은 계획이나 목적을 통하여 자기를 완수할 수 없으므로, 자기 인격의 내재성 속 에서 자기를 파악하려고 한다. 시예스(프랑스의 정치가, 대혁명 당시에 제헌의원, 제3계 급에 관한 논문이 있음. 1748-1836)의 말을 들어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모든 것이 되려고 한다." (시예스의 말이란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정치적인 질서에서 그것은 현재 까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무엇인가 되기를 바란다.'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국한시켜 그것을 전체와 혼동할 만 큼 과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이다."라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말 하기도 한다. 남성은 행동해야 하므로, 자기와 대립된다. 여성은 힘없이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위치를 정할 수 없고, 자기의 척도를 측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떤 중요 한 목적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여성이 자기의 욕구에 자기 자신을 추천할 수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 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스스로를 객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녀에게 자기를 완전 히 소외할 것을 권장하고 사춘기는 그녀의 육체를 수동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가르쳤다. 그것은 그녀가 비단이나 비로드에 감격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애인 같은 시 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 자위의 쾌락을 즐기면서 남성적인 주체와 여성적 인 객체로 나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달비에스가 이렌의 증상을 연구했는데, 이렌 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다. 더나아가 나는 나를 소유하고 싶다. 심한 경우에는, 나는 나를 수태시키고 싶다." 마리 바슈키르체프가 아래와 같은 글을 쓸 때, 그녀 역시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 다. "아무도 나의 팔과 나의 가슴을 보아주지 않는 것은 따분한 노릇이야. 이렇게 활기차 고 젊음으로 넘쳐 있는데." 시실, 자기 자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타자가 되고, 의식의 빛을 받아 자기를 객체로 파 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분신이란 몽상에 불과하다. 어린이의 경우에 이 꿈을 구체 화하는 것은 인형이다. 여자아이는 인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육체 속에서보다 더욱 구체 적으로 자기를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자기 사이에서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둘이 될 필요가 있다. 노아유 부인은 <나의 생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인형을 사랑했다. 생명이 없는 인형에게 내 생명을 나눠 주었다. 인형이 담요나 새털이불로 푹 싸여 있지 않으면, 나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는 분신의 순수한 고독을 맛보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순수하게. 나 자신이 되고 싶은 이 소망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맹렬히 느끼고 있었다... 아, 나의 달콤한 공상. 슬픔으로 가득찬 심정일 때는 언제나 나의 곁에 또 하나의 나인 안나가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이 내 목을 양팔로 감싸며 위로하고 나를 이해해 준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생을 통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만나,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위로보다는 용기를 주며 나를 도와주었다. 사춘기로 접어든 그녀는 이제 인형과 함께 자는 것을 그만둔다. 그런데 여성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에게서 불리되었다가 다시 합체하려고 노력할때, 거울의 마법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오토 랑크는 신화나 꿈 속에 나타난 거울과 분신의 관계를 규명했다. 거울에 비 친 반영이 자아와 동일화되는 것은, 특히 여성의 경우이다. 남성미는 초월성의 표시이며, 여성미는 내재에 따르는 수동성을 갖는다. 여성미만이 시선을 멈추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거울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자기를 능동성, 주체성의 소유자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되 기를 원하는 남성은 자기의 영상 따위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영사은 그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 남성의 육체는 그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자기가 객체임을 알고, 또 자진하여 그렇게 되므로 거울 속에서 진정한 자 기를 보는 느낌을 갖게 된다. 수동적으로 비쳐지는 거울의 반영은, 그녀 자신처럼 하나의 물체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의 육체, 즉 자기의 육체를 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에 보이는 생명이 없는 기질에 찬미와 욕망으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노아유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내 속에 있는 큰 지적 재능보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허영심을 느끼곤 했 다... 육체적인 쾌락만이 영혼을 완전하게 만족시켜 준다. '육체적인 쾌락'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막연하고 애매하다. 영혼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지성은 아직 증명되어 있지 않지만 보여진 얼굴은 현재 거기에 분명히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거울의 틀 속에 미래 전체가 집약되어 있다. 이 좁 은 한계 밖에서는 사물은 무질서한 혼돈일 뿐이다. 세계는 '유일자'라는 영상이 빛났던 이 한 족각의 유리에 환원된다. 그 영상 속에 빠지는 여성은 모두 공간과 시간에 절대자 로서 군림한다. 그녀는 남성이나 재산, 명예, 애욕 등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는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나머지, 그것을 불멸의 대리석에 새기고 싶어했다. 자기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나의 육체미에 놀 란다. 나의 조상을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결혼을 하지 않고 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조상은 꼭 만들어야 한다. 나는 차츰 보기 흉해지고 망가지게 될 것이다... 남편을 얻어야 한다. 나의 조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세실 소렐(19세기의 유명한 여배우)은 데이트를 준비하는 자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거울 앞에 있다. 나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다. 나는 나의 긴 머리칼과 싸우고 있 다. 나의 빗 밑에서 불꽃이 튄다. 황금빛 햇살처럼 빛나는 머리칼 한가운데서 나의 얼굴 은 마치 태양과 같다. 나는 어느날 아침에 카페의 화장실에서 만난 한 젊은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술에 조금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치 자기의 영상을 삼켜버 리려는 듯이 입술을 거울에 가까이 대고,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머, 예뻐라. 나는 정말 아름다워!" 무당과 우상을 한 몸에 겸한 나르시스트는, 영광의 후광에 싸여 영원 속을 날아간다. 구름의 저쪽에서 무릎을 끓은 인간들이 그녀를 숭배한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 '신'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요. 나는 나의 신이에요."하고 메제로프스키 부인은 말 했다. 신이 되는 것, 그것은 즉자와 대자와의 불가능한 통합을 실현하는 것이다. 어떤 사 람이 이 통합에 성공했다고 상상하는 순가, 그는 희열과 찬양과 충만이 넘칠 것이다. 루셀(프랑스의 작가,1877~1933)은 어느날 다락방에서 자기의 머리 위로 영광의 후광이 에워싸는 것을 느끼고 한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의 모습을 한 - 그녀의 생각으로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 의해 생명이 주어지 - 미,용망,사랑,행복의 모습을 거울 에서 본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이 놀라운 계시의 약속을 추구하려고 한다. "너야말로 내 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야."하고 어느날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 나 는 너무 기뻐서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절세의 미인이 아닌 경우 에도, 여성은 자기 영혼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도취하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발레리라는 여성의 모습에다 자기를 투영한 소설에 서 크리드네르 부인은 자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내가 아직 어떤 여자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아무리 우 아한 여자나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그녀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미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정신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그녀를 본 사람은 그녀가 너무나 섬세하고 날씬하여 마치 삼색오랑캐꽃과 같다고 한다... 뛰어나게 아름답지 못한 여성들도 때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은 잘못이다. 그녀들은 육체로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 실만으로도 감동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젊은 여성의 순수한 풍요로움만으로도 충분하다. 여성들은 자기를 개별적인 주체라고 생각하여 종으로 서의 여성의 특질에 개성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얼굴이나 육체 속에 그녀들은 우아하고 진귀하며 자극적인 어떤 특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여성이라고 느끼는 것만으로 도 그녀는 아름답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거울은 가장 좋은 도구이기는 하지만, 분신의 유일한 기구는 아니다. 마음속으 로 자기와 대화하면서, 누구나 자기의 쌍둥이 형제를 만들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내며 가사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여성은, 자기의 모습을 원하는 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가를 갖고 있다. 그녀는 처녀시절에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무한한 현 재 속에 갇혀 있는 지금, 그녀는 자기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속에 하나 의 미적 질서를 끌어들여 자기의 우연적인 생활을 하나의 숙명으로 바꿔버린다. 여성이 유년기의 추억에 몹시 집착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여류문학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남성이 쓰는 자서전에선 유년기가 그리 큰 위리를 차지하지 못한 다. 여성은 이와 반대로 유년기의 이야기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유년기는 그녀들의 소 설이나 이야기에서 유전적인 재료가 된다. 친구나 애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성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그녀들은 이 시기에 향수를 느끼 고 있다. 그 무렵엔 그녀들의 머리 위에 얹어진 자애와 권위에 가득찬 아버지의 손을 의 식 할 수 있었으며, 또한 독립의 기쁨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보호와 지 지 속에 그녀들은 자주적인 개인으로서의 밝은 앞날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 이나 연애에 의해 불충분한 보호를 받으며 현재 속에 갇힌 하녀나 객체가 되어 있다. 어 린시절, 그녀들은 세계에 군림하여 나날이 그것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들은 우주에서 분리되어 내재와 반복에 몸을 바치고 있다. 그녀들은 권력의 상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일반성 속에 흡수되어버 리는 것, 즉 아내나 어머니나 주부 등 수많은 평범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각자 독자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그녀는 자기의 인생수업과 친구들의 그것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로부터 그녀 는 개별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독특한 인 간이며, 독자적인 기회가 약속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감동 적인 마음으로 되돌아 본다. 자신은 그 무렵의 자유와 자의와 주권을 포기했다. 또 어느 정도는 배반한 것이다. 여성이 된 그녀는 어린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자기 안 에서 죽어버린 그 아이를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소녀'라는 말은 그녀를 감동시킨다. 이 런 말은 잃어버린 독창성을 새삼 부활시켜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이 귀중한 유년기를 멀리서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 을 자기 내부에 재생시키려고 한다. 자신의 취미, 사상, 감정이 대단한 신선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그녀는 난처한 모습으로 허공을 쳐다보거나, 목걸이를 만 지작거리고, 반지를 돌리면서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나는 언제나 이 모양이야... 정말 이상해. 나는 물을 보면 흘려버려... 아! 나는 시골이 무척 좋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괴물처럼 보이고, 각자의 의견은 세계에의 도전처럼 생각된다. 도로시 파커 (현대 미국의 여류작가)는 이처럼 보편화된 특징을 생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웰튼 부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활짝 핀 꽃으로 애워싸여 있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여자처럼 생각 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자기가 이처럼 꽃을 사랑하고 있 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 가냘픈 고백에는 변명에 가까운 어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듣는 사람에게 그녀의 취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 그녀 의 이야기 상대가 깜짝 놀라, "설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하고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때로는 사소한 편애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다. 마치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은 섬세한 신경이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다소 어리둥 절한 모습으로, 자기가 얼마나 색체나 시골, 놀이, 신나는 곳, 아름다운 천, 멋지게 만든 옷, 그리고 태양 등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자주 고백한 것은, 꽃에 대한 애정이었다. 이 취미는 다른 어느 취미보다도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것 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은 이와 같은 분석을 자진하여 행동으로 확증하려고 한다. 그녀는 색체를 고를 때 도, "초록색, 이것은 내 색깔이에요." 하고 말한다. 그녀는 좋아하는 꽃이나 향수, 음악 가, 미신, 버릇 등을 소중히 여긴다. 그녀가 자기의 개성을 화장이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녀가 부각시키는 인물은 그녀의 지성, 집착, 소외의 깊이 에 적응하는 일관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다. 어떤 여성은 닥치는 대로 몇몇 특징을 혼합한 다. 그리고 다른 여성은 계통적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미 말한 것처럼, 여성은 유희와 현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인 생이 비통하거나 진기한 소설로 구성된다. 때로는 이미 씌어진 소설이 활용되기도 한다. 나는 몇몇 처녀들로부터 <먼지>의 주디에게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못생긴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골짜기의 백합>을 읽으세요. 그 소설은 내 이야기를 쓴 거예요."하고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이시든 백합을 경 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여성들은 더욱 막연하게 중얼거린다. "내 일생은 진짜 소설 같아요." 그녀들의 이마 위에는 행운이나 불운의 별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일 은 나한테만 일어나요." 하고 그녀들은 말한다. 그녀들에게 액운이 따르든 행운이 미소를 지어보이든, 그녀들은 저마다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세실 소렐은 그의 <추억>을 통하여 변함없이 순진한 필치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사 교계에 데뷔했다. 내가 처음에 사귄 친구는 천재와 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그리 고 나르시시즘의 특이한 기념비가 된 <나의 생애의 책>에서 노아유 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날 여자 가정교사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대신 숙명이 찾아왔다. 숙명은 강하면 서도 약한 여성을 전에 우대해 준 것 만큼이나 학대했다. 숙명은 그녀를 파도 사이에서 희롱하고, 그녀는 마치 꽃다발을 얻기 위해 목청을 돋우어 노래부르는 오펠리아처럼 보였 다. 숙명은 그녀 쪽에서 최후를 정식해 달라고 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죽음 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나르시시즘을 소재로 한 문학의 예로서 다음의 1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전에는 자그마하고 동그스름한 손발과 혈색이 좋은 뺨을 가진 튼튼한 소녀였으나, 지금은 약하고 병에 잘 걸리는 체질로 바뀌어 감성적인 처녀가 되었다. 모세가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한 것처럼 어쩌면 신비로운 생명의 샘이 쏟아져나올것도 같았지만, 나는 떳 떳하게 자기의 용기를 자랑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체력이나 행운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잇다. 사람들이 자기는 푸른 눈을 갖고 있다거나 작지만 튼튼한 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잇다. 나는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영혼과 조화의 힘에 의해 나는 내 목소 리에 맞춰서 살아왔다는 것을. 여성은 미모와 인기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경우, 자진하여 희생적인 인간이 되는 쪽을 택한다. 그녀는 '슬픈 어머니'나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한 아내가 되려고 고집을 부 린다. 자기 눈에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슈터켈이 말한 우 울증에 걸린 여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H. W. 부인은 창백한 얼굴에 검은 옷을 입고 하소연하기 위 해 나를 찾아온다. 그녀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슬프기 짝이 없다. 실패한 일생, 엉망이 된 가정생활! 그녀가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하마터면 그녀와 함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후 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녀는 역시 실패한 인생을 한탄 하면서 희망의 폐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초로의 조짐이 나타나자 그것은 또 다른 푸념의 씨앗이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요? 그렇게 예쁘다는 칭찬을 듣던 내가!" 그녀의 탄식은 더욱 늘어갔고, 그녀의 절망은 더욱 높아갔다. 그녀의 불행한 신세가 친구들에게 모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푸념을 늘어놓아 듣는 사람들은 우울하게 했다... 이것은, 자기는 불행하고 고독하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또 하나 의 표시이다. 이 고뇌의 미로에는 출구가 없다... 이 여성은 이 비극적인 역할에서 쾌락 을 찾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라는 생각에 도 취되어 있었다. 그녀로 하여금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려고 한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 아갔다. 가엾은 웰튼 부인, 교만한 안나 드 노아유 부인, 슈테켈의 불행한 환자를 비롯하여 특 이한 숙명의 낙인이 찍힌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자기가 남에게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녀들의 주위는 그녀들의 특이성을 전혀, 혹은 충분히 인정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이와같은 타인의 무지와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자기들이 마음속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많은 여성들이 자기들에게 대단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유년기와 청년기의 여러 가지 삽화를 몰래 간직하고 있다. 그 녀들은 드러난 자기의 과거가 진실한 경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르시스트가 소중히 여기는 여주인공은 생활 속에서 현실화하는 것이 불가능하 기 때문에 환상에 불과하다. 이 둘의 합일은 구체적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 은 일종의 숨은 원소이며, 고대인이 생각한 연소와 마찬가지로 애매한 일종의 '힘'이나 ' 효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성은 그 실재를 믿고 있지만, 그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면 무형의 죄를 고백하려고 안달하는 신경쇠약 환자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느끼게 된 다. 어느 경우에도 '비밀'은,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알아 차리는 열쇠를 자기 안에 갖고 있다는 허망한 신념에 불과하다. 신경쇠약 환자에게 이런 환상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 의 의지결핍과 무기력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불가해한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처 럼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행동 속에 자기를 표명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여성의 신 비라는 유명한 전설이 그녀를 더욱 그런 방향으로 부추기기 때문에 확고 부동한 것이 된 다. 자기 몸에 묻어둔 보물을 가득 갖고 있는 여성은, 행운의 별을 젊어지든 불운의 별을 짊어지든 운명에 지배된 비극의 주인공의 조건이 자기에게 갖춰진 것처럼 생각된다. 그녀 의 생활 전체가 하나의 신비극처럼 보인다. 엄숙하게 고른 의복 밑에는 제복 차림의 여사 제와 충실한 손으로 장식되어 숭배하도록 제공된 우상이 양립되어 있다. 그녀가 살고 있 는 집은 전당이 되고, 그곳에서는 그녀의 예배가 전개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옷에 주 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자기 방을 정돈하는 데 신경을 쓴다. 책상 옆에는 낡은 긴 의자가 놓여 있어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 긴 의자를 약 간 밀기만 해도 나는 그와 마주앉을 수 있다... 서가를 등지고, 양쪽으로 그림과 화초가 놓인 학자품의 책상에 가까이 앉으면, 전과 같이 그 검은 나무로 가려지지 않으므로 책상 다리 끝까지 보인다. 소파 위에는 만돌린과 기타가 걸려 있다. 그 한가운데 창백하고 작 은 손을 가진 금발 처녀를 앉혀 보라. 여성은 객실 속을 으스대며 걸어갈 때, 애인의 팔에 몸을 기댈 때 자기의 사명을 완수 한다. 그녀는 자기 미모를 세계에 뽐내는 비너스이다. 세실소렐이 자기를 그린 회화를 찢 었을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다. '미'를 옹호한 것이다. 그녀의 <수기> 를 보면, 그녀는 일생을 통하여 사람들을 예술의 '숭배'로 인도한 것이 분명하다. <나의 생애>에서 자기를 묘사한 이사도라 덩컨도 마찬가지이다. 출연이 끝난 후에, 고대 의상을 결치고 머리에 장미관을 장식한 나의 모습은 무척 아름 다웠다. 나는 왜 이 매력을 이용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루 종일 정신노동에 종사한 남자 가 이 호화로운 품에 안겨 노고에 대한 위로와 미와 망각의 몇 시간을 발견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르시시즘의 여성도 마음이 너그러운 때가 있다. 거울 속에 비춰보기보다는 다른 사람 의 찬사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 모습이 아름다운 후광에 에워싸이는 것을 바라보고 싶어한 다. 호의적인 관중이 없을 때에는 고해신부나 의사, 정신분석의에게 가서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관상쟁이나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꼭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예요."라고 어떤 풋내기 여배우는 말했다. 그녀는 여자친구들에게 자기 이야 기를 한다. 특히 애인에게서 열심히 증인을 구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여성은 자신의 자 아를 금세 망각하게 마련이다. 많은 여성들은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녀들이 절대 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은밀한 침실보다 더욱 광대한 무대를 원한 다. 그래서 현대식 생활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자기를 보아주는 눈, 자기 말을 들어주는 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역할에는 가능한 한 많은 관중이 필요하다. 마리 바 슈키르체프는 자기 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들어와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본다. 즉, 나는 무대에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더 앞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훌륭한 무대를 사기로 결심했다. 사라(프랑스의 여배우)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저택과 더 큰 아틀리에를 짓겠다. 한편 노아유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잇다.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모인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광장에서 참 석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내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변명하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 은 솔직한 고백을 하여 안심시켰다. "나는 텅 빈 객석 앞에서 연기를 하는 건 싫어요."하 고. 화장이나 대화는 흔히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의 욕구를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야심 적인 나르시스트는 더욱 진귀하고 변화가 많은 방법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특 히, 자기 생활을 갈채의 대상으로 하는 한 편의 연극으로 보고 태연스럽게 자기를 연출하 면서 기뻐한다. 스탈 부인은 <코린>에서 자기가 하프를 반주하면서 시를 낭독하여 이탈리 아 군중을 매료했을 때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다. 코페(스위스의 주네브 호반에 있 는 마을)에서 살 때 그녀가 즐긴 놀이의 하나는 비극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페드로로 분 장한 그녀는 이폴리트로 가장한 젊은 연인들에게 자진하여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었다. 크뤼드네르 부인은 숄춤으로 자기를 과시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발레리>에 이 렇게 쓰고 있다. 발레리는 푸른 모슬린 숄을 집어 이마 위에 머리칼을 올리고, 머리로부터 숄을 걸쳤다. 숄을 관자놀이에서 어깨로 늘어졌다. 이마는 고풍스럽게 윤곽이 잡히고, 머리칼은 숨겨졌 으며, 눈꺼풀은 내리깔려 평소의 미소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머리를 기울이자, 숄은 팔과 가슴 위로 가볍게 떨어져 푸른 옷과 맑고 부드러운 얼굴은 마치 코레지오(이탈리아의 화 가)가 그린 온화한 체념을 나탸내는 그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올려뜨고 미소 를 지었을 때에는 그야마로 셰익스피어가 그린 기념상 옆에서 '고뇌'에 미소를 짓는 '인 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발레리의 모습이야말로 볼 만하다. 수줍고, 고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불안해지 고, 유혹하고, 감동시키고, 눈물을 자아낸다. 위대한 정신에 충족되었을 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배울 수는 없지만 일부 뛰어난 사람들이 자연에서 은밀히 가르침을 받 는 대단한 매력을 갖고 있다. 만일 환경만 허용한다면 나르시시즘의 여성에게는 연극계에 뛰어드는 것처럼 깊은 만족 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조르제트 르블랑(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의 애인으로, 그의 전기를 썼다)은 말하 기를, 연극은 내가 거기서 구하고 있던 것, 즉 감격의 동기를 내게 주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은 '행동의 유희'처럼 기질이 과격한 사람들에게는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표현은 적절하다. 여성은 행동할 수 없으므로, 자기를 위해 행동의 대용품을 생각해 낸다. 연극은 일부여성에게 매우 적합한 대용품이다. 물론 여배우라 하더라고 그 추구하 는 목적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연극이 생계를 위한 하나의 수단, 즉 단지 작업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명성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의 개가이다. 유명한 여배우인 라셀(19세기 프랑스 의 희극배우)이나 두제(19세기 이탈리아의 여배우)는 자기가 창조하는 역할 속에서 자기 를 초월한 진정한 예술가이다. 서투른 여배우는 이와 반대로 자기가 하는 연극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거기서 오는 명예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려고 한다. 완고한 나르시스트는 상대방에게 자기를 줄 줄을 모르므로 연애 나 예술에도 한계가 있다. 이런 결점은 여성의 모든 활동분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명성을 약속하는 여러 가지 길에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대담하게 그 길에 뛰어드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회화 나 조각, 문학 등은 훈련을 거쳐야 한다. 즉, 엄한 수업을 요구하며, 고독한 노력을 필요 로 한다. 많은 여성들은 이 분야에 손을 대지만, 적극적인 창조욕구가 없는 한, 곧 단념 하고 만다. 끈질기게 밀로 나가는 여성도, 대개 일을 하는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명예를 갈망하여, 이를 위해서 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만스 러운 세월을 보내고 나서 이것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늘 나는 내 자신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 스탈 부인이나 노아유 부인처럼, 여성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자기숭배에 빠져 있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많은 여류작가들을 억누르고 있는 결함의 하나는 자기 자 신에 대한 만족이다. 그것이 그녀들의 성실성을 손상시켜 한계를 제공하고 가치를 떨어뜨 리고 있다. 우월감을 갖고 있는 여성의 대다수는 그것을 세상에 분명히 보여줄 실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들의 야심은 남성을 중개자로 이용하여 그 남자에게 여성의 가치를 설복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은 자유로운 의도에 의해 개성적인 가치창출을 목표를 삼 지 않고, 기존의 가치를 자기들의 자아에 병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세력이나 명성을 보유 하고 있는 남성 - 자기가 시상이나 영감을 제공하여 - 과 일체화되려고 한다. 그 두드러 진 예는, D. H. 로렌스와 메벨 도지(로렌스의 애인)의 관계이다. 나는 그의 정신을 유혹하여, 그에게서 억지로 무엇을 탄생시키고 싶었다... 나한테는 그의 정신과 그의 의지와 창조력, 빛나는 환상이 필요했다. 필요한 이런 도구를 자유로이 사용하기 위해 나는 그의 피를 지배해야만 했다...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남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대리인을 통해 일종의 활 동력과 생산의 기쁨을 얻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할일이 없다는 적막감에 대한 일종 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더 앞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로렌스가 '나'를 통하여 승리를 얻고, 나의 경험과 나의 관찰과 나의 도를 이용하 여 훌륭한 예술적인 창작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르제트 르블랑은 메테를링트에게 있어서 '양식과 불꽃'이 되기를 원 했다. 그녀는 시인이 지은 책에 자기 이름이 씌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이 경우, 유 르신(17세기 스페인의 궁전에서 활약한 여성)이나 스탕달 부인처럼 자기의 목적을 분명히 설정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들을 이용하는 야심가인 여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고 단지 자기를 과시하려는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남 의 일에 편승하고 싶어하는 여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반드시 그것에 성 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실패를 자신에게 숨기고, 자기가 굉장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스럽고 바람직하며 뛰어나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랑을 받고 기대를 갖게 하고, 찬양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르시스트는 모두가 벨리즈(몰리에르의 희곡 <여류학자>의 등잔인물로, 오만한 여성의 전형)이다. 로렌스에게 헌신한 순진한 브레트(D. H. 로렌스의 애인 베르사의 애칭)도 자신이 대단히 매력적이며 귀여운 여자라고 자부하고 있다. 당신이 마치 짐승처럼 호시탐탐 노리는 눈빛으로 탐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나는 눈을 올려뜨고 바라봅니다. 당신을 도발적인 섬광이 눈동자에게 빛나는 목양신입니 다. 당신의 얼굴에서 그 섬광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엄숙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런 착각은 진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클레랑보(프랑스의 작곡가, 1676~ 1747)가 색정광증을 일종의 '직업적인 착란'으로 간주한 것도 일리가 있다. 자기를 여성 으로서 느끼는 것은 자기를 타인의 정욕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며, 사라을 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연애망상증에 걸린 10명의 환 자 중에서 9명 정도가 여성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녀들이 가공의 애인에게 바라는 것이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의 반영인 것은 분명하다. 그녀들은 그 애인이 무조건적 인 가치를 지닌, 말하자면 성직자, 의사, 변호사와 같은 뛰어난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녀 들의 행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그녀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은 어떤 여성보다도 우수하고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색정관증은 여러 가지 정신병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마찬가지 이다. 환자는 대단히 훌륭한 남성의 사랑에 의해 장식되고 찬양된다. 그 남성은 갑자기 그녀의 매력에 이끌려서 - 그녀에게는 전혀 그런 의사가 없는데도 - 우회적이기는 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관계의 본질적인 특색은, 강하고 화 려한 반신이 짝사랑을 하여, 기묘하고 애매한 행동으로 정열을 표명한다는 것이다. 정신 과 의사들이 보고하고 있는 많은 예증 속에서 전형적인 예를 소개하겠다. 페르디에르의 기사(<색정광증>에서)를 요약한 것이다. 그녀는 마리이본이라는 48세의 여성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전 국회의원이며, 국무차관, 변호사협회 회원, 교단 이사인 아쉘 선생을, 나는 1920년 5월 12일부터 알고 있었다. 그 전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어서 법원에 갔었다. 멀리서 그 사람의 건장한 몸집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 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눈과 눈이,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나는 첫눈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가 먼 저 사랑을 고백했다. 그것은 1922년 초의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따로 객실로 맞아들이곤 했다. 어느날 그는 아들도 밖에 쫓아 냈 다... 어느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곧 그 의 감정이 격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며 서로 이미 감정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다음에도 나는 그의 방에 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이오. 오직 당신뿐이요. 당신 이외 에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 내 마음을 알아주시겠지요." 나는 깜짝 놀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선생님, 고마워요."하 고 말했을 뿐이다. 어느날 그는 자기 방에서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는 자기를 수행하는 남자를 쫓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그 남자에게 돈을 주고 말했다. "이봐, 나를 그냥 내버려둬. 지금 부인과 같이 있잖은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나의 양손을 꽉 잡았다. 제1회 변론 때, 그는 자기가 독신이라는 것을 일부러 알 리려고 했다. 그는 내게 애정을 표시하기 위해 앞뜰로 가수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는 내 방 창 밑 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그는 문 앞에서 코뮌느 의 곡을 부르게 했다. 나는 바보였다. 나는 그의 구애에 응해야했다. 그런데 나는 아쉴 선생의 정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그는 내가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 했다. 좀더 분명히 고백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복수를 했다. 아쉴 선생은 내 가 B에게 호감을 갖고 있은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내 사진을 이용하여 나를 저주했다. 책이나 사전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올해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사진을 이용했다. 내 병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이런 착란은 쉽사리 피해망상으로 변한다. 극히 정산인 경우에도 이런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나르시스트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정열적인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기가 상대방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파악하게 되면, 그녀는 곧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모두 질투나 원망 탓으로 돌린다. 자기의 실패를 음흉한 음모의 결과 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실패는 오히려 그녀에게 자신이 중요하다는 관념을 점점 굳게 갖 도록 한다. 그녀는 쉽사리 과대망상 또는 그 반대의 양상인 피해망상에 빠진다. 자기 세 계의 중심에 서서 그 외의 다른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녀는 이제 자신의 세계의 절대적인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의 희극은 현실생활을 희생하여 전개한다. 가공의 인물이 가공된 대중의 찬탄을 요구한다. 완전히 자아의 먹이가 된 여성은 구체적인 세계에의 모 든 발판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과 어떤 현실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는다. 스탈 부인 은, 만일 그녀의 '찬미자'들이 그날 밤 일기에 쓴 조소를 예감했더라면 그처럼 즐겁게 사 람들 앞에서 페르드를 낭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스트는 자신이 스스로 보 여주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의 눈에 비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 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이토록 자기응시에 몰두해있으면서도, 자신을 잘못 판단 하여 쉽사리 오류를 범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지껄여댄다. 그녀가 지껄일 때에는 자기가 맡은 배역, 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 다. 마리 바수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다.' 점잖은 관중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여기고, 어린애 같은 멋대로의 대사나 멋있는 자세로 연기의 효과를 발휘하 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녀는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가 인정하는 것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의 처지나 신상에 동화되지 않는 것은 그녀와 상관이 없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인생체험을 하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도취와 고뇌, 모성애의 순수한 기쁨, 우정, 고독, 눈물, 웃음 등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이나 감동은 조직된 것이다. 분 명히 이사도라 덩컨은 아이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여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과장된 제스처로 아이들의 재를 바다에 뿌렸을 때에는 여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생애>에서 그녀가 슬픔을 회상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 고서는 읽을 수 없다. 나는 내 육체의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나는 눈을 통하여, 쭉 뻗어 드러내놓은 두 다리 나 부드러운 가슴, 그리고 잠시도 정지되지 않은 채 조용히 파도치는 두팔을 바라본다. 1 2년 전부터 나는 지쳐 있었다. 가슴에는 끊임없는 고뇌와 슬픔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이 두 눈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여성은 자아숭배 속에서 불안한 장래에 대처할 용기를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하는 첫단계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가 막혀버린다. 자신의 내재성 속에 애인을 가둬두려고 하는 여성은 자기와 함께 애인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나 르시스트는 가공의 분신 속에 자기를 소외시켜 자기를 무로 돌아가게 한다. 그녀의 추억 은 얼어붙고, 판에 박힌 행동과 말을 반복하고, 내용이 완전히 비어버린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 한다. 여성의 많은 '일기'나 '자서전'이 그처럼 빈곤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 이다. 자기예찬에 몰두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성은 자기를 아무것으로도 만들지 못 하여 결국 무를 예찬하게 된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리 시치미를 떼어도 이 무를 자각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그 분신 사 이에는 현실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이 분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 스트는 완전히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충실한 존재로 파악할 수 없다. 그녀는 즉자가 그대로 대자라는 환상을 언제까지나 보유할 수 없다. 그녀의 고독은 모든 인간의 고독처럼, 우연성과 피투성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여성은 - 신앙이라도 갖지 않는 한 - 언제나 군중이나 소란, 또는 타인을 찾아 자기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자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큰 잘못이다. 외려 더욱 답답한 노예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와 타인의 의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한 객체로 자기를 만든다. 그녀의 육체와 용모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손상되기 쉬운 몸뚱이이다. 그리고 우상을 장식하고 그 우상을 위해 대를 만들고 성당을 세우는 것은 돈이 드는 일이다. 마리 바슈 키르체프가 자기 모습을 불멸의 대리석에 새기기 위해서 금전결혼도 불사한 것은 이미 보 았다. 이사도라 덩컨이나 세실 소렐이 그녀들의 옥좌 옆에 높이 쌓아올린 황금이나 향, 몰약은 남성의 부로 지불된 것이다. 여성에게 운명을 제공하는 것은 남성이므로, 여성은 자기 힘으로 복종시킨 남성의 양과 질에 의해 자기의 성공의 정도가 측정된다. 그러나 여 기서도 상호관계가 작용한다. 버마재미(교미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의 암놈 을 수놈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놈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여성은 자기를 우상화하기 위해 그녀의 숭배자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녀의 옷 을 입거나 숨을 쉬는 데도 남성의 의식하여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르시시 즘의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가 있는 것은 창녀와 마찬가지이다. 어느 특정한 남성의 지 배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론의 독재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를 타인과 연결시키는 유대는 상호교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타인의 자유의사에 의해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또한 활동성을 통한 목표로서 자유를 인정한다면, 그녀는 나르시스트가 되지 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태도가 보여주는 모순을 자기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세계 (그녀의 눈에는 오직 자기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에서 인정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타인의 찬동은 비인간적이며 신비롭고 변덕스러운 권위이다. 그녀는 이것을 마법에 의해서라도 손에 넣으려고 한다. 외면적인 오만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의 여성 은 자기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허영심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는 점점 찬사나 성공을 갈망하고 자기 주위의 음모를 의심하게 된다. 그녀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위협을 느끼며 분신의 어둠 속에 빠져 끝내는 대개 자 기 주위에 편집광의 망상을 쌓아올린다. 그녀에게야말로 성서의 다음과 같은 계율이 특별 히 적용된다.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그 생명을 던져버리라." 제2장 연애하는 여자 '연애'라는 말은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남녀 사이를 떼 어놓는 중대한 오해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이런이 지적한 것처럼 연애란 남성의 인생에 는 하나의 일시적 관계에 지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인생 자체이다. 니체는 이와 동일한 말을 <즐거운 지혜>에서 이렇고 말하고 있다. 연애라는 똑같은 말이 남성과 여성에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여성이 연애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명백하다. 그것은 단지 헌신에 그치지 않고 육체와 정신 을 막론하고 무제한으로 완전히 제공하는 것이다. 여성이 연애를 하나의 신앙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이 무조건성이다. 그리고 여성의 신앙은 이것말고는 없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 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과 마찬가지의 감정을 자기의 경우에도 상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전적인 포기의 욕구를 동 일하게 느끼는 남성이 있다면, 그는 이미 남성이 아닐 것이다. 남성에게도 열렬한 애인이 되는 시기가 있기는 하지만 '위대한 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성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격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남성은 결코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사 애인의 말에 무릎을 끓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를 소유 하여 자기에게 소속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독립적인 주 체로 남아 있으며, 사랑하는 여성은 많은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여성 을 자기들의 실존에 일체화시키려고 하며, 결코 그녀 속에 자기의 실존을 몰입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성의 경우 연애는 애인을 위한 완전한 자기포기이 다. 세실 소바주(20세기 초의 프랑스 여류시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성은 연애를 할 때 자기 인력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여성은 애인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인이 없는 여성은 산산히 흩어진 꽃다발과 같 다. 사실은 여기서 자연법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상황의 차이가 남녀의 사랑에 대한 사고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주체이며 자기 자신인 인간이라면, 초 월에의 고귀한 소원을 지닐 때에는 세계에 대한 행동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야 심에 가득차서 행동한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존재는 자기의 주체성 속에서 절대를 발견하 지 못한다. 내재를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는 행위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의존의 영역 안에 처박혀서, 어렸을 때부터 남성의 예속물로 자랐기 때문에, 남성에게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지배자를 발견하는 데 익숙하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욕구가 말살되어 있지 않은 여성이 원하는것은, 이런 우월한 존재에 대해 자기 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며, 지배적인 주체와 결합하여 융합되는 것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가르침을 받아 온 남성 속에 몸과 마음을 몰입하는 것 이외에 그녀가 택할 길은 없다. 어차피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폭군 - 부모나 남편이나 보호자와 같은 - 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신을 섬 기는 편이 낫다. 그녀는 자진하여 예속을 선택했기 때문에 자기의 예속을 자유의 표시처 럼 생각하려고 한다. 그녀는 보잘 것 없는 비본질적인 객체인 자기 입장을 자진해서 받아 들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육체나 감정, 행위를 통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을 최고 의 위치까지 높이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최고의 존재로 삼는다. 그녀는 그의 앞에 자 기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연애는 그녀에게 하나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아온 바와 같이, 젊은 여성은 처음에는 자기를 남성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것을 단념하면 이 번에는 한 남성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남성다움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특정한 남성의 개성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남성을 사랑하고 있 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될 남성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고 이렌 르벨리오티는 쓰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남성은 그녀와 같은 계급과 인종에 속해 있어야 한다. 이성의 특권은 이 범위 안에서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식민지 관리의 딸에게 있어 토 인은 인간의 범주에 끼지 못한다. 젊은 여성이 '아랫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자기에 게는 연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굴욕감을 맛보기 위해서 이다. 여성은 보통 남성의 우월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남성을 원한다. 이윽고 그녀는 남성의 대다수는 유 감스럽게도 우연적이고 세속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처음에는 남성에 대 해 좋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남성은 자기의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노골적 으로 그것을 배반하지만 않으면 된다. 개탄스러운 실패가 그처럼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눈이 멀어버린다. 여성에게 비친 남성의 가치는 경우에 따라서 체력이나 체격, 재력, 교양, 지성, 권력, 사회적인 지위나 군복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애인에게 남성의 본질이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밀해졌기 때문에 애인의 위력이 파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처음 키스할 때, 또는 날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동안에, 또는 결혼 첫날 밤에 그것들은 쉽사리 붕괴 된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 있는 연애는 환각에 불과하며, 현실적인 경험이 따르지 않는 다. 사랑의 욕구는 육체적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정열적인 사랑이 된다. 반대로 사랑은 육 체적인 포옹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성적으로 지배된 여성이 처음에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남성에게 감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여성은 자 기가 잘 알고 있는 어떤 남성도 신으로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애는 세상사람 들 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나 자식, 가정, 오락, 사교, 허영, 성욕, 출세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성은 대개 한 번쯤은 '위대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대용품을 발견하 여 거기에 덤벼든다. 연애는 미완성의 상처를 받는, 비참하고 불충분한 허위의 모습으로 그녀를 찾아오지만, 자기의 생명 전체를 거기에 바치는 여성은 대단히 드물다. 열렬한 연 애를 한 여성은 대부분 젊었을 때 풋내기 연애에 애를 태우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남편, 가정, 자식과 같은 전통적인 여성의 숙명을 받아들였거나, 심한 고독을 경험했거나, 혹은 어떤 일을 시작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다. 실패한 자기의 인 생을 선택 받은 한 사람에게 바침으로써 그 실패를 한꺼번에 만회할 기회를 발견했을 때, 그녀들은 이 희망에 전력투구를 하게 된다. 아이세 양이나 쥘리에트 드루에(빅토르 위고 의 애인), 다규(프랑스의 여류작가, 음악가 리스트의 애인) 백작부인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거의 30세에 가까웠으며, 쥘리 드 레스피나스(18세기의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는 40세 에 가까웠다. 그녀들은 그때까지 아무 목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보람 있게 생각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여 연애 이외에는 돌파구가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경우에도, 역시 이 길은 대다수의 여성에게 가장 매혹적이다. 자기 삶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젊은 남성도 마찬가지로 연상의 여성에 게 이끌려, 그녀에게서 지도자, 교육자, 어머니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장과정이나 풍습, 마음의 소리 등이 그가 자기포기라는 안이한 해결책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연애를 하나의 중간단계로 생각할 뿐이다. 남성의 행운은 - 유년기나 성년이 되어서도 - 가장 어렵긴 하지만 한편으론 가장 확실하기도 한 길을 가도 록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불행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편한 고갯길로 내려가도록 유혹한다. 자기를 위해 투쟁할 것을 권유 받는 대신에, 적당히 순응하면 황홀한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녀가 신기루에 속은 것을 알 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그때쯤 그녀는 기진맥진해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여성은 애인 속에서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싶 어한다. 그러나 여성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좋아했던 것은 그가 남성이기 때문이지 아버 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성이 이 마력을 조금씩은 갖고 있다. 여성은 어 떤 인간을 다른 인간 속에 재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보호하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녀는 가정 속에 깊숙이 융합되어, 수동적인 평화를 경험했 다. 연애는 그녀에게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돌려준다. 또 유년시절도 돌려준다. 그 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머리 위의 지붕을, 그리고 세계속에 방치된 자기를 보호해주는 벽 을, 그녀의 자유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법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어린시절의 꿈은 많은 여성의 연애에 수반된다. 여성은 애인이 자기를 '나의 귀여운 소녀, 나의 귀여운 아기'라고 불러주면 행복감을 느낀다. "당신은 정말 귀여운 아기 같 아" 라는 말이 가장 확실하게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이라는 걸 남성들은 잘 알고 있 다.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로워하는 여성이 많다는 것은 이미 보아왔다. 많은 여성들은 어 린아이처럼 행동하여, 그 태도나 화장 속에서 어린시절을 무한히 연장하려고 노력한다. 남성의 품에서 다시 한 번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여성들을 황홀하게 한다. 다음과 같 은 유행가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품에 포근히 안겨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오 내 사랑... 대화나 연애편지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문구는 '베이비 나의 베이비'라는 애인의 속 삭임이다. 그리고 여성은 자기를 '당신의 소녀, 당신의 어린꼬마'라고 말한다. 이렌 르벨 리오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체 그 사람은 언제, 나를 지배할 그 사람은 언제 찾아올 까?" 그리고 그 남성을 만났을 때에는 "나는 당신을 남성이라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 람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쓰고 있다. 자네가 연구한 어떤 신경쇠약증의 여성은 분명히 이런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강박관 념과 신경쇠약>)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계 안에서는, 내가 행한 어리석은 행동이나 훌륭한 행동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완전히 줄 수 있고, 나의 존재 전체를 또 하나의 다른 존재에게 의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항에 대한 동경이다. 상대는 신이라도 좋고, 남성 혹은 여성이라도 무방하다. 다만 나보다 훨씬 뛰어나 스스로 내 인생을 살아 나가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돌보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나를 충분히 사랑하 고 나의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복종하 며, 모든 과실을 피하게 하고 친절한 애정으로 나를 완성으로 인도해 주는, 그런 상대를 발견하고 싶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사랑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 다. 숭배하는, 그리고 숭배를 받을 만한 열렬한 사도가 되는 것, 자기의 이상을 위해 살 고 죽으며, 일체의 의혹에서 떠나 그것을 믿는 것, 끝으로 야수성에 대한 '천사'의 마지 막 승리를 손에 넣는 것, 그의 품속에 완전히 안기고, 그의 비호 속에 아주 작아져서 송 두리째 파묻혀 완전히 그의 것이 되고, 자기는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여러 가지 사례에 의해 이미 알게 된 것처럼, 이 자기소멸의 꿈은 실제로는 존재하려는 강한 의지이다. 모든 종교에서 신에 대한 숭배는 신자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구원의 염원 과 일치되어 있다. 우상에게 자기를 완전히 맡겨 버림으로써 여성은 자기의 소유와 우상 속에 요약되어 있는 세계의 소유가 동시에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대개 여성이 먼저 애 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아의 정당화와 찬양이다. 많은 여성은 상대방으로부터 사랑 을 받지 못하면 연애에 뛰어들지 않는다. 상대방이 사랑의 표시만 해도 연애에 빠지는 경 우도 자주 있다. 젊은 처녀는 남성의 눈을 통해 자기의 꿈을 그리고 있다. 남성의 시선에 서 여성은 비로소 자기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세실 소바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의 곁으로 걸어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작은 발을 앞으로 내밀고, 뒤축이 달린 하이 힐 속의 작은 발을 생각하면, 그것을 감싸고 있는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진다. 장갑 속의 손이나 팔, 얼굴의 가냘픈 움직임에도, 내 목소리의 진동에도 나는 가득찬 행복을 느낀 다. 여성은 분명히 자신은 높은 가치를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그녀는 자기가 애인에 게 갖게 한 사랑을 통하여 자위할 수 있다. 그녀는 애인 속에서 한 사람의 증인을 발견하 고 크게 기뻐한다.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지고 말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이튿날 찾아오도록 허락함으로 써, 그에게 애인도 친구도 아닌 내 생활과 내 모습의 열렬한 관찰자를 남겨두고 싶은 그 런 욕망에 지고 만 것이다... "할머니가 되지 않는 한 어떤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다는 허영은 좀처럼 포기할 수 없어."라고 언젠가 바로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미들턴 머리(현대 영국의 평론가, 캐서린 맨스필드의 남편)에게 보낸 한 편지에 캐서린 맨스필드는 자기가 멋있는 연보랏빛 코르셋을 사왔다는 말을 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 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유감이에요!" 자기를,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꽃이나 향수나 패물처럼 느끼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 자기 자신도 부유하게 만들 지 못하고,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애는 이를테면 건판과 같이 흐리고 아무것도 없는 음화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나타내는 현상액과 같은 것 이다. 연애를 통하여 여성의 얼굴과 육체의 곡선, 어렸을 때의 추억, 옛날의 눈물, 옷, 그리고 습관과 그녀의 전부와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 된다. 그녀는 자기가 섬기는 신의 제단에 바쳐진 훌륭한 제물이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기 전까지는, 그의 시선이 그녀를 만족시키기 전 까지는, 그녀는 퇴색되고 음침한 세계 속에서 별로 아름답지도 못한 한 사람의 여성에 불 과했다. 그가 그녀를 포옹한 순간부터 그녀는 불멸하는 진주의 광채 속에 서 있었다.(메 리 웨브의 <그늘의 무게>에서)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여성의 허영심에 잘 영합하는 교묘한 남성이, 설사 육체적인 매력이 전혀 없더라도 정열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법칙'과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남성들에게 찬사를 받는 여성은 자기가 마치 값진 보물이 라도 된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이사도라 덩컨의 말대로 다눈치오(이탈리아의 작가, 1863 -1938)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다눈치오가 한 여성을 사랑할 때에는 그 여성의 영혼을 지상에서 끌어올려 베아트리체 가 영광스럽게 살고 있는 나라로 데려간다. 그는 잇따라 모든 여성에게 차례차례 신성을 부여하고 그녀를 높이높이, 그야말로 베아트리체와 같은 단계에까지 끌어올린다... 그는 좋아하는 여성에게 잇따라 빛나는 베일을 씌워준다. 그녀는 속인들 위에 우뚝 나타나 신 비로운 빛에 싸여 걸어다닌다. 그런데 시인의 변덕이 끝나고 다른 여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 그 빛나던 베일은 사라지고 후광도 사라져 그녀는 다시 본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 간다... 다눈치오에게 특유의 마법으로 찬사를 받는 것은, 이브가 천국에서 뱀의 목소리 를 들었을 때 느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쁨과 견줄 수 있는 것이다. 다눈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에게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이사도라 덩컨의 <나의 생애>에서) 성은 연애 속에서만이 에로티시즘과 나르시시즘을 무리없이 조화시킬 수 있다. 이미 앞 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대립이 있으며, 그것이 여성이 자기의 성 적 숙명에 적응하기 어렵도록 하고 있다. 자기가 육체적인 대상, 즉 먹이가 되는 것은 그 녀가 자기에게 바치고 있는 숭배와 모순된다. 그녀에게는 남성의 포옹이 자기 몸을 손상 시키고 더럽히며, 자기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불 감증을 선택하여 자아의 완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동물적인 쾌락 과 고귀한 감정을 분명히 분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슈테켈이 보고하고 있다. 앞에서 결혼과 관련하여 이미 인용한 D. S. 부인의 경우이다. 존경하는 남편과 함께 살면서 불감증이었던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 역시 예술가로, 뛰어난 음악가였던 젊은 남자의 애인이 되었다. 그녀의 애정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이어 서, 그 남자의 옆에 있지 않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의 생활은 로타르에 대한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품에서도 여 전히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한 남자가 그녀의 길을 돌려놓았다. 그는 억세고 난폭한 산지기로, 어느날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녀를 간단히 자기 것으로 만 들어 버렸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그가 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품에 서 참으로 강렬한 오르가슴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그의 품에 안겼어요. 나는 거친 황홀감을 느꼈으나, 로타르 생각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이 느껴졌어요. 나는 폴을 무척 싫어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로타르예 요. 그렇지만 폴은 나를 만족시켜줘요. 나는 로타르의 모든 것에 마음이 끌려요. 나는 쾌 락이 탐나 일부러 매춘부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상류사회 부인에게는 쾌락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그녀는 폴의 청혼을 거절하지만, 그와 계속해서 동침한다. 그때 그 녀는 딴 사람이 되어, 평소에는 할 수 없는 노골적인 말이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슈테켈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동물성에의 전락이 오르가슴의 조건 이 되어 있다. 이런 여성들은 육체적인 사랑을 존경이나 애정과 같은 감정과는 조화될 수 없는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다른 여성들에게는 반대로 이 타락감은 남성의 존경과 애정과 찬양을 통해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그녀들은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다. 파렴치하고 아둔하고 오만한 여성이 아니면, 육체 관계를 피차 서로 반반씩 이득을 보는 쾌락의 교환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남성도 마찬가 지로(아니 아마도 여성 이상으로) 자기를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상대방에게는 반항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기를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는 대개 여성 쪽이다. 이 경우에 오직 감격적인 찬탄만이, 그녀가 패배라고 생각하고 있는 행위의 굴욕 을 보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성행위는 그녀에게서 깊은 소외를 요구한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 속에 빠져 있다. 눈을 감은 채 자기도 잊 어버리고, 무료하게 물결에 따라 흔들리고 폭풍에 휩쓸려 묻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 밤은 육체의 방이고 자궁의 밤이며 무덤의 방이다. 무로 돌아감으로써 그녀는 전체와 합쳐져 자아가 소멸된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갈 때, 그녀는 지면에, 침대위에, 빛속에 다시 한번 던져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을 회복한다. 그녀는 정복당한 여자, 하나의 먹이, 하나의 물체이다. 그녀에게 사랑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이때이다. 젖 을 뗀 아이가 부모의 인자한 시선을 찾는 것처럼 자기를 지켜보는 애인의 시선에 의해 여 성은 자기의 육체가 억지로 떨어져나왔던 전체 속에 되돌아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 녀가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진정한 쾌락을 경험했을 경우에도 육체 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성적 흥분은 감정이 되어 연장된다. 남 자는 그녀에게 관능적인 쾌락을 주면서 그녀를 자기 쪽에 단단히 결박시킨다. 그러나 남 자는 더이상 그녀에게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는 이 잠시 동안의 무관심이나 남자가 일시적이 아닌 절대적인 애정을 표시하지 않으면 용서하려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그 순간의 내재는 초월된다. 타는 듯한 추억은 이제 후회가 아니라 보물이 된다. 관능적인 쾌락이 사라짐으로써 희망과 약속이 된다. 그리고 쾌락은 정당화된다. 그 리하여 여성은 성생활을 자랑스럽게 즐길 수 있다. 그녀가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흥 분,쾌락,정욕은 이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선물이다. 그녀의 육체는 이제 하나의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송가이고 불꽃이다. 그녀는 이제 색정의 마법에 정열적으로 몸을 맡길 수 있다. 밤은 빛으로 변하고, 사랑하는 여성은 이제 두 눈을 뜨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 자, 그 시선이 자기를 찬양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볼 수 있다. 그를 통하여 허무는 존재로 충만해지고, 존재는 가치로 바뀐다. 그는 이미 어둠의 바닷 속에 가라앉지 않고 날개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자기포기는 신성한 황홀경이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맞이할 때, 여자는 마치 성모가 성령에 의해 또는 신자가 거룩한 빵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자기 몸에서 그를 살게 하기 위해 그의 방문을 받아들인다. 경 건한 찬송가와 외설스러운 노래 사이의 추잡한 유사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신비적인 사랑이 언제나 성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를 하는 여성 의 성욕은 신비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나의 신, 나의 숭배자, 나의 주인... 무릎을 꿇은 성녀와 침상위에 누운 사랑하는 여자 의 입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한편 한 여자는 그리스도를 찌른 창에 자기 몸을 던져 성혼을 맞아들이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신의 사랑에 의해 불타기를 바란다. 다른 여자도 동 일한 것을 기대한다. 창,화살,칼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어느쪽이건간에 그것은 같은 꿈, 유년시절의 꿈이고 신비로운 꿈이며 사랑의 꿈이다. 즉 여성은 남성의 품에 안겨 자 기를 포기함으로써 당당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무로 돌아가려는 욕망은 흔히들 마조히즘과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헬렌 도이치의 논 문 <여성의 심리>에서). 그러나 색정에 대한 진술에서 주의를 촉구한 것처럼, 내가 타인 에 의한 나의 객관화로 인하여 매혹되려고(사르트르 <존재와 허무> 참조) 노력할 때가 아 니면, 다시 말해서 주체의식이 자아를 돌아보고 그것을 굴욕적인 상태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가 아니면,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연애를 하는 여성은 다만 자기 속에 소 외된 나르시스트가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실재에 도달하는 타자의 매개가 되는 동시에 자신도 무한이 되려는 강한 욕구를 갖는다. 그녀는 먼저 자기를 구제하기 위해 연애에 열중한다. 그러나 우상숭배적인 연애의 아이러니는, 자기를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도 결국은 그것 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감정은 신비적인 차원으로 나 타난다. 신에게 자기를 찬미해 주고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신의 품에서 용해되어 자기를 잊으려고 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사랑의 성녀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 런 감격과 금욕적인 열광의 순간에는 순교자를 부러워했다." 다규 부인의 이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녀를 애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경계를 제거하여 자기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 리려는 욕구이다. 이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다. 황홀한 결합의 꿈이다. 조르제트 르부강에 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한 것도 같은 꿈이다. "그 무렵에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이 세 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을 거예 요. 그의 마음의 양식과 불꽃이 되는 거예요 하고 말예요." 이와 같은 결합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이 먼저 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것이 다. 애인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그녀는 자기를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존재에 편입되고 그의 가치에 참여하여 정당화된다. 안젤리우스 실레시우스의 말에 의하 면, 신비주의자마저도 신은 남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들이 자기 자신을 신에게 바치더라도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남성이 주문을 많이 하면 할 수록 여성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위고가 쥘리에트에게 강요한 칩거는 그녀의 마음을 억 압했지만 그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난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남 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적극적 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가정을 꾸민다. '우 리들의 단란한 집안'이라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녀는 그의 의복시중을 들어준다. '나는 당신이 옷을 더럽히고 구겨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면 나 혼자서 그것을 빨아 서 꿰매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신문을 읽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편지나 노트를 분류하고, 원고를 정서한다. 시인이 그런 일의 일부를 딸에게 맡기면 그녀는 무척 섭섭해 한다. 연애를 하 는 모든 여성에게서 비슷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필요하다면 그녀는 애인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폭군화한다. 그녀의 인격 전체와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삶의 시 간이 그에게 바쳐짐으로써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그녀는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만 소유하려고 한다.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부탁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정이 많은 애인은 일부러 여러가지 부탁을 생각해 낸다. 그녀는 연애 속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그랬던 것, 자기의 과거와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하 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 연애 속에 자기의 미래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한다. 즉, 미래를 의미있 게 하기 위해 그녀는 모든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그에게 자신을 맡겨버리려고 한다. 이렇 게 해서 그녀는 자기의 초월에서 해방된다. 그녀는 그 초월을 본질적인 타인의 초월에 종 속시키고 그의 신하나 노예가 된다. 그녀가 처음 애인 속에 자기를 몰입시킨 것은 자기를 발견하여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녀는 그 속에서 조금씩 자기를 잃어갔 다. 그리하여 일체의 현실은 타자 속에 있게 되었다. 출발점에서 나르시시즘의 숭고화라 는 형태를 취하고 있던 연애는 헌신의 고달픈 기쁨 속에서 완성되어 때로는 자학으로까지 인도되는 경우가 있다. 위대한 정열의 초기에는, 여성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욱 우아해진다. "아델르가 내 머리를 매만져줄 때 나는 내 이마를 유심히 바라본다.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마니까." 하고 다규 부인은 쓰고 있다. 그녀는 그런 얼굴.육체.방.자아 속에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애인을 매개로 하여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그녀는 모든 교태를 중단해 버린다. 애인이 원한다면, 사랑보다도 더욱 귀중했던 자신의 얼굴까지도 변형시킨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다. 그녀 는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유물 전체를 지배자의 영토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그가 경멸 하는 것이라면 부정해 버린다. 그녀는 자기의 심장의 고동 하나하나, 피 한 방울, 뼈까지 도 그에게 바치고 싶어한다. 순교의 꿈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제공하는 것을 극도로 확대하는 것, 애인이 밟는 땅이 되는 것,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애인에게 불필요한 모든 것을 분노에 차서 없애버린다. 그 녀의 자기헌신이 완전히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마조히즘이 나타나지 못한다. 예컨대 쥘리 에트 드루에의 경우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열애하는 나머지, 그 녀는 때때로 시인의 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범했을지도 모르는 실수를 용서해 달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는 분노를 느끼면서 자기자신을 돌아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 나 관대한 정열에서 마조히스트의 열광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일이다. 부모 앞에서의 어린애와 같은 기분으로 애인 앞에 있는 여성은 옛날 부모 곁에서 경험 한 죄책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한, 그에게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자신에 대해 반항한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남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 을 때, 그를 독점하고 그를 행복하게 하고 그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할 때, 그녀의 나르시 시즘은 혐오나 굴욕, 자기에 대한 증오로 급변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기 형벌로 이끌어간 다. 그것은 잠시 동안일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한평생 희생자로 자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인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자기를 학대하는 데 열중한다. 이때 그녀의 태도는 마조히즘 적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런 경우와 그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남성의 자유와 그 힘의 확인일 경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흔해 빠진 이야기지만 - 그리고 이것 은 사실로 보이지만 - 매춘부는 정부에게 얻어맞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자기 가 얻어맞고 거칠게 취급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의지하고 있는 남성의 힘과 권리와 지배력에 감탄하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그가 다른 남성을 학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그에게 위험한 경쟁을 부추긴다. 그녀는 그가 자기의 환 경 속에서 인정하고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남성의 자의에 기꺼이 복종하는 여성은, 또한 자기에게 가해지는 압제속에 최고의 자유 의 증거를 발견하고 경탄한다. 만일 어떤 원인으로 애인의 위엄이 실추되었을 경우, 그 남성의 완력이나 자의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애인이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런 완력이나 자의는 전혀 가치가 없다. 타인의 자유의 먹이가 되어 있 는 자기를 실감하는 것은 도취할 만한 일종의 기쁨이다. 타인의 위압적인 의지에 의해 자 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실존자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피부 속에 살고 있으면 따분해진다. 맹목적인 복종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의 유일한 기회이다. 여성은 애인의 덧없는 꿈이나 그의 명령에 의해 노예,여왕,꽃,암사슴, 매춘부,하녀,시신,반려,어머니,자매,어린이로도 변한다. 여성은 복종과 같은 성질을 간직 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릴 때까지 이런 변신에 즐겁게 순응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색정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마조히즘은 타인과 자기자신에게 실망하여 불만을 느끼는 여성이 접어드는 길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자기포기라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아니다. 마조히즘은 무참히 상처를 입고 실패한 모습으로 자의식의 존재를 계속하려고 한 다. 사랑은 본질적인 주체를 위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인간적인 사랑의 최고의 목적은 종교적인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상대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가치의 척도와 세계의 진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 있다. 그 러므로 그에게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되어 지기자신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녀는 그가 읽는 책을 읽고, 그가 좋아하는 그 림이나 음악을 좋아하고 그와 함께 보는 경치, 그의 사상에만 흥미를 갖는다. 그녀는 그 의 우정이나 적의, 의견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삼는다. 자기 마음에 묻고, 들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대답이다. 자기 폐 속에 그가 이미 호흡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어한다. 그녀 가 그에게 받지 않는 과일이나 꽃에는 향기도 맛도 없다. 그녀의 공간감각조차도 바뀌게 된다. 세계의 중심은 그녀가 서있는 지점이 아니라 애인이 있는 곳이다. 모든 길은 그의 집에서 나와 그의 집으로 통한다. 그녀는 그의 말을 사용하고 그의 동작을 되풀이하며 그 의 취미와 그의 버릇을 몸에 배게 한다. "나는 히스클리프예요." 하고 <폭풍의 언덕>의 캐더린은 말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모든 여성의 외침이다. 그녀는 애인의 또다른 몸이고 반영이며 그의 분신이다. 그녀는 곧 그 남자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의 세계는 우연성 속 에 붕괴되는 대로 방치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그의 세계 속이다. 사랑하는 여성의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성에 의해 그 남성의 일부로 인정되는 것이 다. 그가 '우리들'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녀는 그에게 결합되어 그와 일심동체가 되며 그 의 지위를 나눠갖고, 그와 함께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군림한다. 그녀는 이 즐거운 '우리 들'이라는 말을, 지나치다고 생각될 만큼 자주 되풀이한다. 세계에서 필요한 목적을 향해 자기를 버리고, 그녀에게 필요한 세계를 회복시켜주는 절대로 필요한 존재에게 필요한 존 재가 됨으로써,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면서 놀라운 소유를 체험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그처럼 큰 기쁨을 주는 것은 그런 확실이다. 그녀는 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듯한 느낌을 갖는다. 훌륭한 질서를 갖는 세계에서 자기의 위치가 확실히 주어진 이상, 그것이 두번째 위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녀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이상,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녀는 안식과 행 복을 느낀다. 위고의 그늘에 있는 쥘리에트 드루에의 운명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예로운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은 누구를 막론 하고 신이 아니다. 신비가인 여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의 관계는 그녀의 뜨거운 신앙 하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신격화된, 신이 아닌 남성은 바로 눈앞에 있다. 연애하는 여성 에게 고민이 생기는 것은 거기서이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그녀의 숙명은, 쥘리 드 레 스피나스의 유명한 말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나의 생애의 단 한 순간에도, 그대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남성에게도 사랑에는 역시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오래가지 않거나 가슴 을 에는 듯이 심하지는 않다. 뱅자맹 콩시탕은 쥘리에트 레카미에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 이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깨끗이 잊어버린다. 스탕달은 몇 해를 두고 메틸드를 못 잊 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생을 파괴한다기보다는 그의 인생에 아름다움을 가미하는 슬픔이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남성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살고 있 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마음속에 지옥을 만들게 된다. 모든 연애하는 여성은 안데르센이 쓰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위해 물고기의 꼬리를 인간의 다리와 교환하여, 걸을 때마다 바늘로 된 산이나 타오르는 불 위를 밟는 느낌이었다는 인어의 이야기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여자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남자에게 여자는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숭배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바치는 여성을 정당화하 는 것은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우연성, 즉 상대방의 결점이나 한계, 선천적인 무상성을 그대 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구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관 계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을 우상화하는 연애는 사랑하는 남성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거짓말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곧 드러난 다. "그 남자는 당신이 그처럼 끔찍이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하고 주 위 사람들은 연애하는 여성의 귀에 소근거린다. 연애하는 여성이 기베르백작(레스피나스 양이 열렬히 사모하던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운운할 때, 후세 사람들은 동정어린 미소를 금치 못한다. 자기 우상의 결점이나 평범함을 발견하는 것은 여성에게 참으로 괴로운 환 멸이다. 콜레트는 - <방랑의 여인>이나 <나의 수업시대>에서 - 이 쓰라린 고통에 대해 자 주 언급하고 있다. 그 환멸은 아버지의 위신이 무너지는 것을 본 어린이가 느끼는 실망보다 더욱 비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기의 존재 전체를 바친 이 남성은 바로 자기자신이 선택한 사 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된 남성이 깊이 사랑할 만한 남성인 경우에도, 그는 요 컨대 지상의 인간이다. 지고의 존재 앞에 고개를 속인 여성이 사랑하고 있는 상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녀의 가치를 '괄호'속에 넣기를 거부한다. 즉, 가치란 인간적인 존재 속에 원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심각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 다. 그런 착각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 앞에 향을 피우고 머리를 숙이지만, 그에게 친구는 아니다. 그녀 는 남성도 이 사회에서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의 계획이나 목적도 자기자신과 마찬가지 로 손상되기 쉽고 연약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성을 신앙이나 진리처럼 간주함으로써, 그녀는 망설이게 되고 불안을 느끼는 그의 자유를 오인하고 있 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인간의 척도를 적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으로 여성의 많은 모순 이 설명된다. 여성이 애인에게서 어떤 호의를 요구하고 그가 그것을 들어주었다고 치자. 그때 그는 너그럽고 부자이고 훌륭하고 당당하고 신격화된다. 만일 거절하면, 그는 곧 인 색하고 잔인한 악마나 짐승 같은 존재로 생각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 같다. '좋소'라는 대답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어 여성을 놀라게 한다면 '안 돼요'라는 거절에 놀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거절이 그처럼 남성의 추악한 이기주의를 표시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좋소'를 그처럼 찬미하는 것일까? 초인과 비인간 사이에 인간을 위 한 장소는 없는 것인가? 땅에 굴러떨어진 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이다. 사랑받는 남성으로서 실제로 자기가 사람들이 추앙하는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탈취자임을 자수하든 지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는 숭배를 받지 못하면 걷어챈다. 사랑하는 남성의 이마에 에워싸인 영광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여성은 그의 모든 약점을 부인한다. 그녀가 그에게 빌려준 이미지와 그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녀는 실망하여 화를 낸다. 만일 그가 피 로를 느끼거나 경솔한 짓을 했을 때, 심한 허기나 갈증을 느낄 때,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 거나 자기모순에 빠졌을 때, 그녀는 그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불만을 느낀 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자기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일체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기 재판관을 재판하고, 그가 그녀의 지배자로 어울리게 하기 위해 그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녀가 그에게 바치는 숭배는, 현존보다는 부재에 의해 더욱 만족을 느 끼는 경우가 많다. 살과 뼈로 된 인간과 대결하지 않기 위해 죽었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영웅에게 몸을 바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녀들의 꿈을 깨뜨려버린다. 그래서 염세적인 표현이 나오게 된다. '수려한 왕자님을 믿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단지 가엾은 존재이다.' 거인이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 다면 인간이 난쟁이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열적인 여성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저주의 하나는 이것이다. 처음에 지녔던 그녀의 관대한 마음은 곧 강한 요구로 변하기 쉽다. 그녀는 일단 타자 속에 소외되었다가 다시 자기를 되찾으려고 한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존재를 보유하고 있는 타자를 자기쪽으로 끌 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남성에게 자기를 완전히 바친다. 그런데 남성이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을 갖추려면 언제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자기를 비워둬야 한 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순간을 바친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마다 그녀의 눈앞에 있어야 한다. 그녀는 그를 통해서만 살려고 한다. 그는 그녀를 살게 하기 위해 몸을 바쳐야 한 다. "때때로 나는 당신을 어리석게 사랑해요.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당신만을 생각하 고 있는데, 당신이 나만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부당한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요." 하고 다규 부인은 리스트에게 쓰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전부이고자 하는 소원을 꾹 참으려고 한다. 레스피나스양의 한탄에도 이 와 비슷한 호소가 있다. 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즐거움이 없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알아줬으 면! 당신이 놀든 일을 하든 몸을 움직이고 있기만하면 그것으로 족해요. 나의 행복은 당 신이에요. 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을 만날 수 없거나 한평생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아요. 처음에 사랑을 하는 여성은 애인의 소원을 만족시키기에 열중했었다. 그녀는 - 마치 전 설에, 자기 직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방황하고 다닌 소방수처럼 - 상대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것을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다. 만일 그녀가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녀는 자기를 쓸모없는 비참한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 애인은 실제로 느끼지 도 않는 뜨거운 정열을 가장한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를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슬로 묶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연애의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많은 남성들 - 로렌스나 몽테를랑 - 이 반감을 갖고 이것을 지적해 왔다. 연애는 폭군 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뱅자맹 콩스탕은 <아돌프>에 서 한 여성의 헌신적인 정열이 오히려 남성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는 경우를 생생하게 묘 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희생을 나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열성적이어서 자기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도 일일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고 엘레오노르에 대해 잔인 하게 말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것은 실제로는 애인을 속박하는 것이며, 그는 주는 사람으 로 보이는 이득조차 얻지 못한다. 여성은 자기가 이것저것 억지로 떠맡기는 무거운 짐을 남성이 고맙게 받아주기를 요구한다. 그녀의 전제는 끝이 없다. 연애하는 남성도 전제적 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 만족한다. 그런데 여성의 헌신에는 한이 없다. 애인을 믿고 있는 남성은, 그녀가 자리를 비우거나 그에게서 떠나 일을 하는 것을 불쾌하 게 여기지 않고 승낙한다. 그녀가 자기 것임을 확신하면 그는 사물보다는 자유를 소유하 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반대로 여성에게 애인의 부재는 언제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롭다. 그는 하나 의 목표이며 재판관이다. 그가 다른 여성에게 한눈을 파는 것은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 된 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은 그녀에게서 훔친 것이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빼앗겨버린다. 설사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더라도 그가 자기 마음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면 그 역시 그녀를 버리고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그녀는 그가 잠드는 것조차 싫어한다. 보들레르는 잠자는 여성에게 감동한다. "가엾은 애인이여, 그대의 아름다운 눈은 피로 한가." 프루스트 알베르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남성의 질투는 단지 독점적인 소유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성이 어린이처럼 안심하고 순진하게 잠들어 있을 때에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남성에게는 그 확신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신이나 지배자는 내재의 안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초월이 붕괴된 모습 을 여성은 적의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동물적인 나태를 혐오한다. 벌 써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연성에 몸을 맡긴 육체를 혐 오한다. 비올레트 르뒷은 이런 감정을 다음과 같이 힘있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남자를 미워한다. 그들의 항복한 모습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들의 무의식적인 안일이, 그들의 지각 마비가, 그들의 맹목적인 얼굴이, 그들의 당연한 듯한 포식이, 그들의 무능한 긴장을 미워한다... 나는 잠들어 있는 내 남자의 입에서 뿜어져나 오는 장밋빛 거품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나는 그에게서 존재의 거품 이상을 바라지 않았으나 그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밤의 눈시울이 죽음의 눈시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나이가 사나울 때에는 나는 그의 맑은 눈시울 속에 숨어버렸다. 일 단 수면이 시작되면 그 눈시울은 냉혹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휴식을, 자기를 위해 만들 수 있는 그의 잠든 모습을 나는 미워한다. 나는 그의 꿀 같은 이마를 미워한다. 그는 자기 안에서 휴식하기에 바쁘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뭔 가를 되찾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날개를 치면서 날아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기질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지상을 떠나 기어오르 고 살피고 기대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도달하고 고민하고 승리하고 또한 패배했다. 그 것은 진실한 감정이었다. 우리는 허무라는 새로운 감정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당 신은 잠들어 있다. 당신의 소멸은 공정하지 못하다. 잠들어 있는 나의 남자가 몸을 꿈틀거리자 나의 손은 부지중에 정액으로 축축해진다. 그것은 숨막히게 하는 난폭한 종자가 들어 있는 50개의 주머니를 간수하는 곳간이다. 잠 들어 있는 사나이의 고환이 내 손에 떨어졌다... 나는 종자의 작은 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다. 경작된 밭을, 손질한 과수원을, 변화된 수력을 못박힌 4개의 널빤지를 끌어올린 그 물을, 나는 손에 쥐고 있다. 과일,꽃,선택한 짐승을 쥐고 있다. 메스,가위,바늘,권총,핀 셋을 쥐고 있다. 그래도 아직 나의 손은 가득차 있지 않다. 잠들어 있는 세계의 정자는 영혼의 연장인 밧줄에 불과하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때에는,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 신은 잠들어서는 안 된다. 잠들면 신은 진흙이 되고 육체가 된다. 신은 눈앞에서 사라 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창조물은 무로 돌아가고 만다. 남성의 잠은 여성에 게 탐욕이며 배반이다. 남성도 때로는 잠든 애인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다만 그를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그가 자기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에게 그녀 이외의 것을 생 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그곳에, 그 방 안에, 침대에, 그녀의 품에 - 마치 성궤 속 의 신처럼 - 가둬두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여성의 소원이다. 여성은 일종의 형리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을 자기의 수인으로 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 로 연애의 처참한 모순의 하나이다. 수인이 되어버리면 신은 그 신격을 빼앗긴다. 여성은 자기의 초월을 남성에게 위탁하여 그것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성은 초월을 전세계 로 가져가야 한다. 만일 두 연인이 불타는 정열에 삼키워버리며, 자유는 모두 내재 속에 타락하여 두 사람에게 죽음 이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게 된다. 이것이 <트리스탄과 이졸 데>의 신화가 갖는 의미의 하나이다. 오직 상대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애인끼리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 죽게 된 다. 마르셀 아를랑(현대 프랑스의 작가)은 <타향>속에서 자신을 멸하는 연애의 이 완만한 괴로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이 위험을 알고 있다. 질투의 발작을 일으켰을 경 우를 제외하고, 그녀는 남성에게 그가 계획하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만일 그가 눈부신 활 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 그는 이미 영웅이 아니다. 새로운 무용을 발휘하기 위해 출발하는 기사는 애인을 화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녀의 발 밑에 평안히 앉아 있으면 그녀 는 그를 경멸한다. 이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이다. 여성은 남성을 완전히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소유가 가능한 모든 조건 또한 뛰어넘기를 요 구한다. 자유는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피안의 인간'인 실 존자를 여기에 가둬두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런 시도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는 당신을 사랑의 이상대로, 즉 앞뒤를 재지않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정신없이 절망적으 로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쥘리 레스피나스 양은 쓰고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듯한 연애 는 분명한 이성을 지닐 때 정말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애인에게 영웅,거인,반신이 되기 를 요구하는 여성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바치지 않도록 남성에게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그를 완전히 휩싸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정열, 즉 자기의 모든 권리의 완전한 포기는 바로 이와 동일한 감정이 또 하나 의 성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만일 두 사람이 연애로 인하 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 그야말로 공허의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소 유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를 붙들어 주는 인간, 자기 자신을 내던지지 않 고, 연애중에 자기의 자아를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여성은 자기 를 내던지고, 남성은 그것으로 자기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적어도 사랑하는 남성을 풍요롭게 하는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그에 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그에게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려고 한다. 필요 성에는 단계가 없다. 만일 그가 '그녀 없이는 못 산다'면, 그녀는 자기를 그의 귀중한 존 재의 기반처럼 생각하고 여기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를 섬기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그도 그녀의 봉사를 고맙게 여겨야 한다. 헌신의 일반논리에 따라 증여는 요구로 바뀐다(<피뤼스와 시네아스>에서 이것을 지적했다). 소심한 여성은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그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정말로 나인가? 남성은 그녀를 소중히 여기고, 특별한 애정과 욕망으로 인해 더욱 그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여자 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여성은 대부분이 맹목적이다. 그녀는 단수속에 일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 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남성은 그녀들에게 쉽사리 이 환상을 갖게 한다. 처음에는 그도 그 환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정욕 속에는 때때로 시간에 도전하는 듯한 열광적 인 면이 있다. 그가 그 여성을 원하는 순간에는 그도 그녀를 정열적으로 대하고, 그녀 이 외에는 안중에 없다. 그 순간은 확실히 하나의 절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절대이 다. 속아넘어간 여성은 영원을 지향한다. 그녀는 남편의 포옹으로 신성화되어 자기가 지 금까지 줄곧 신성하여 신에게 바쳐졌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도 그녀 혼자서 말이다. 그러나 남성의 정욕은 격렬하지만 일시적이다. 일만 충족되면 곧 사라진다. 한편 여성 이 그의 포로가 되는 것은 대개 연애 이후이다. 모든 삼류소설이나 유행가의 주제는 이것 이다. "젊은 사나이가 지나가고, 처녀는 즐겁게 노래부르고 있었다... 젊은 사나이는 즐 겁게 노래부르고 있었다. 처녀는 울고 있었다." 남성이 지속적으로 그 여성과 결합되어 있을 경우에도 그녀가 반드시 그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필요이다. 그녀의 자기포기는, 그 권위를 회 복한다는 조건에서만 비로소 그녀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상호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고민하거나 자기를 속여야 한다. 대개 그녀는 쉽게 거짓말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는 남성의 사랑을 그녀가 그에게 갖고 있는 사랑의 정확한 반영인 것 처럼 사랑한다. 그래서 정욕을 사랑으로, 발기를 정욕으로, 연애를 신앙으로 생각한다. 남성에게 그녀에 대해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한다. 나를 사랑해? 어제와 다름없어? 언제까 지나 사랑해 줄 거야? 그녀는 그가 진지한 대답을 할 여유가 없을 때나 그런 대답이 불가능한 장소를 택하여 교묘히 질문한다. 포옹하고 있을 때나 병의 회복기, 흐느껴울 때나 역의 플랫폼 등에서 그녀는 당돌하게 질문한다. 답변을 이끌어내면 그녀는 도깨비의 목이라도 자른 것처럼 의 기양양하지만 답변을 얻지 못하면 그녀는 침묵으로 말을 대신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 성은 대개 어느 정도 편집증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 친구는 멀리 있는 애인에 게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이렇게 말했다. "헤어질 생각이라면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위해." 이윽고 그에게 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정말로 헤어질 생각이라면 편지 같은 건 보내지 않을 거예 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수기를 읽어도 어디서부터 병적인 착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공포에 떠는 여성의 펜에 의해 쓰여진 남성의 행위는 언제나 정상이 아니 다. 남성은 변절자,사디스트,억압심리자,마조히스트,악마,바람둥이,겁쟁이나 혹은 그 전 부를 합친 것이 되어, 미묘한 심리적인 설명도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 "X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샘이 많아 내가 외출할 때에는 베일을 쓰라고 해요. 그러나 그는 매우 변덕스러워 사랑을 무척 경시하기 때문에, 내가 벨을 누르면 출입구에 서 맞아줄 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요." 혹은 "Z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러 나 그는 자존심이 강해 자기가 살고 있는 리용에 와서 같이 살자는 말도 내게 하지 않았 어요. 그래도 나는 리용에 가서 그의 집에서 묵었어요. 일주일 후에, 싸우지도 않았는데 그는 나를 쫓아냈어요. 그후에 나는 두 번 그를 만났어요. 세번째 내가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이야기 도중에 끊어버렸어요. 이상한 사람이에요." 이 불가해한 이야기는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야 분명해진다. "나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 지 않았어요." 라거나 "나는 그녀에게 우정은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와 함께 한 달 을 사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너무 집착이 강하면 정신병으로 발전하기 쉽다. 색정광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애인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 이나. 이렇게 해서, 미치광이의 착란은 언제나 현실의 저항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정 상인 여성은 나중에는 진실에 복종하여 자기가 상대방 남성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 되기까지는 그녀도 역시 조금은 속인다. 서로 사랑하는 경우에도 그녀는 감추려는 것이 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남자 는 그녀가 없어도 자기를 정당화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녀가 그에 의해 정당화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영웅 혹은 단지 남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유 를 손에 넣게 되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필요없게 된다. 여성이 의존을 감수하는 것은 약하 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강한 남성에게서 상호의존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강한 기상을 가진 여성은 연애에서 침착성을 찾지 못할 것이다. 모순된 목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찢기고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될 수 없는 그녀는 귀찮고 밉살스러운 존재가 된다. 이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이다. 사랑하는 여성이 현명하고 그다지 완고하지 않을 경우에 는 쉽사리 체념한다. 그녀는 전부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도움이 된다는 것만 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다른 여성이 그녀를 대신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 가. 그러나 현재 있는 여자는 자기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평등한 거래를 요구하지 않고 예속을 인정한다. 그때 그녀는 사소한 행복을 느 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 속에서도 그 행복에는 그림자가 없지 않다. 연애를 하는 여성은 아내보다 훨씬 괴로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아내라 할지라도 정열적으로 사랑 하는 여성은 살림살이도, 어머니로서의 용무도, 평소의 일거리도, 즐거운 놀이도 아무 가 치가 없게 된다. 그녀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남편의 존재분이다. "당신이 옆에 있지 않으면, 나는 햇볕을 보는 것도 귀찮아요. 모든 것이 생기가 없어지고, 나는 벌써 의자 위에 벗어던진 옷가지와 마찬가지예요." 하고 세실 소바주는 결혼 초에 쓰고 있다. 정열적인 연애가 결혼 밖에서 생겨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앞에서도 보아왔다. 연애에 완전히 일생을 바친 사례는 쥘리에트 두루에의 경우이다. 그녀는 오직 무한정 기 다릴 뿐이다. "언제나 동일한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즉 당신을 한없이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리하여 나는 마치 쳇바퀴 속에 갇힌 다람쥐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 나와 같은 기질을 타고난 여자에게 일생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얼마나 따분한 날인가! 나에게는 하루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그처럼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너무나 빨 리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당신이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나는 또다시 하루가 영원처럼 생각돼요. 나는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신을 기다리는 쪽이 나으니까요." 위고는 쥘리에트에게 부유한 보호자인 데미도프 공작과 손을 끊게 한 후에 그녀가 옛남 자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작은 셋방에 가둬두고 12년 동안이나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갇혀 있는 가엾은 희생자'라고 생각하 지 않고 여전히 그의 애인인것에 만족하여 가끔 이루어지는 그와의 만남을 즐기는 데 그 쳤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그리운 빅토르. 그러나 내 마음은 슬프고 고 뇌로 가득차 있어요. 당신을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고, 간혹 만나도 당신은 거의 내 사람이 아녜요. 결국 이 모두가 드문 일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게 돼요." 하고 1841년에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독립과 사랑을 융화시키려고 꿈꾼다. "나는 독립과 노예를 동시에 원하고 있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으로 독립하고, 오직 연애에 대해서만 노예이고자 한다." 그 러나 여배우로서 완전히 실패한 후 그녀는 '한평생' 단지 애인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자 기의 우상을 섬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너무나 공허했다. 위고에게 해마다 3, 4 00통 정도 써보낸 1만7천 통의 편지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위고가 찾아오기까지 그녀 는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후궁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하루하루가 권태 의 사막이라는 것이다. 남성이 그녀를 자기 것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그녀는 이미 존재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애를 하는 여성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사랑 받는 여성 이외의 어떤 무엇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 이외의 무엇도 그녀의 눈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가 존재하기 위하여는 애인이 그녀의 곁에서 그녀만을 대해야만 한다. 그 녀는 그의 방문과 그의 욕구와 그의 각성을 기다린다.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나면 그녀는 곧 다시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패니 허스트의 <뒷골목>이나 레이먼의 <비바람>의 여주 인공처럼 순수한 사랑의 사도나 희생자를 짓누르는 저주는 이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운명 을 자기 손으로 헤쳐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인간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일 수 있다. 사랑하는 남성이 자기에게 뛰어올 것과 자기를 사랑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여성에게 기다림이란 눈부신 약속이다. 그 러나 부재를 실재로 바꾸는 사랑의 오만한 도취가 지나가면 부재의 공허 속에 불안이라는 고뇌가 혼재하게 된다. 남성은 이제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애인을 만날 때마다 놀라워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이제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하고 만일 그가 이유를 물으면, "당신은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요.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언제나 이제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거든 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이 "그는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해요. 그는 나만 사랑해요." 하고 말하면서 아무리 엄청난 환상을 품어도 질투 의 고뇌는 생기게 마련이다. 정열적이고 모순된 단정을 태연스럽게 하게 하는 것은 기만 의 특징이므로 자기를 나폴레옹이라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미치광이는 자기가 이발소의 사 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여성이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하고 자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 나 그녀는 그보다는 훨씬 많이 의심한다.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녀는 남자의 정열이 차츰 식어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기만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녀는 연적이 나타났다고 상 상한다. 그녀는 사랑을 자유로운 감정으로 보는 동시에 마법적인 저주로 보고 있다. 그러 므로 그녀는 자기 남자가 자유 의사에 의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는 음모를 꾸민 여성에게 발목을 잡히고,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남자가 지금도 자유롭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여성이 자기에게 동화되지 않 는 한에서, 즉 그 내재성 속에서 파악한다. 그가 부부로슈(조르주 쿠르도린의 중편소설의 주인공. 대단한 호인으로 친구나 애인에게 이용만 당한다.)를 쉽사리 농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여자도 자기에게서 쉽사리 떠나갈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무척 괴롭 다. 그에게 질투는 연애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발작에 불과하다. 질투가 심하여 살상하 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불안이 그에게서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질투는 그에게는 하나의 파생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일이 잘 진행되지 않거나 생활에 시달릴 때 그는 아 내에게 우롱당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남성을 그 타성에서, 그 초월에서 사랑하고 있는 여성은 자기가 언제나 위 험에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부재라는 배신 행위와 부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녀는 자기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질투하기 시작한다. 무리한 요구 를 하는 것은 여성의 본성이므로 이것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있는 것이다. 그녀 의 비난이나 불평은 그 구실이 어떻든간에 질투를 통해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녀는 기다 림의 초조함과 권태, 의존의 괴로움과 불완전한 존재밖에 되지 못하는 불만을 표현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때마다 그녀의 운명 전체가 위험에 처하 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의 존재 전체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만일 애인의 눈길이 잠시라도 다른 여자에게 쏠리면 안절부절 못한다. 만일 그가, 그녀도 얼마 전에 다른 남자를 오랫동안 바라본것을 채근하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달라요." 그녀의 말이 맞다. 여성의 시선이 쏠린 남성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증여는 여성의 육체가 침범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남성 이 탐내는 여성은 곧 바람직한, 그리고 부러워하는 객체로 변한다. 그리하여 소외된 그녀 는 '단순한 육신으로 추락한다.' 따라서 그녀는 언제나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사 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일시적 인 정욕이 준 것을 다른 여자의 웃는 얼굴이 빼앗아 갈 수 있다. 그녀를 '오색찬란한 불 멸의 빛'에서 현실의 어둠 속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그녀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 사랑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 른다. 애매한 것이든 명확한 것이든 근거가 없는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질투는 여성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이기 때문이다. 배반이 확실하 다면 사랑을 신앙으로 삼기를 단념하거나 그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 한 일이며, 연애를 하는 여성이 결정적인 진리를 발견할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머뭇 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깜짝깜짝 놀라기를 잘하는 여성은 자주 질투하여 상대방을 오해하 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위고가 가까이하는 모든 여성을 의심하는 괴로움을 느꼈으나 위고가 8년 동안 사랑했던 레오니 비아르를 경계하는 것을 잊고 있었 다. 불만 속에서는 모든 여성이 연적이요 위험한 존재로 보인다. 여성은 사랑하는 남성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우애를 죽여버린다. 질투는 그녀의 고독을 심화시키 고 그녀의 의존을 더욱 거북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속에서 권태를 방지하는 하나의 수단을 발견한다. 남편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과제이다. 애인을 지키는 것을 일종의 성직 이다. 행복한 사랑에 빠져 차림새를 게을리한 여성은 위협을 느끼면 다시 옷차림에 신경 을 쓴다. 화장,살림,사교술이 투쟁의 시간이 된다. 투쟁은 강장제와 같은 것이다. 승리할 자신이 있는 동안, 여성 투사는 그 속에서 일종의 강렬한 쾌락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패 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금까지 기꺼이 승낙한 증여를 비굴한 예속으로 변모시켜버 린다. 남성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공격한다. 여성은, 설사 오만한 여성이라도 상냥하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수단,신중함,간계,미소,매력,순종 등이 그녀의 최대 의 무기이다. 나는 어느날 밤 초인종을 누른 그 집의 젊은 여자를 생각한다. 두 시간 전에 그녀와 헤 어졌을 때, 그녀는 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옷차림에도 무심한 채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 었다. 지금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녀는 평소의 얼굴을 회복하고 있 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두려움과 위선으로 위축되어, 밝은 미소의 배후에서 모든 고통을 각오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머리를 단정히 빗고 뺨과 입 술을 붉게 칠하고 눈이 부신 흰 레이스의 블라우스를 입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화려안 옷은 전투의 무기이다. 안마사나 미용사는 무익하게 생각되는 손질을 손님들이 얼마나 비 장하고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애인을 위해 새로운 유혹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헛된 일이다. 처음에 그를 유인한 또는 다른 여자가 그를 유인할지도 모르는 타자의 모습을 자 기 속에 부활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애인에게도 남편의 경우와 같은 이중의 불가능한 요구가 있다. 즉, 그는 자기 애인이 완전히 자기 것인 동시에 타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그의 꿈에 합치하는 동시에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모든 것과 다르기 를, 즉 자기의 기대와 맞기를 원하면서도 예상 밖의 경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모순이 여성을 크게 괴롭히고 그녀에게 실패를 안겨준다. 그녀는 애인이 원하는 대 로 되려고 노력한다. 그녀들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을 확립시켜주는 연애의 초기에 참으로 화려했던 많은 여성들이 전과 같이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 일방적인 굴욕감으로 몸서리친다. 여성은 남성에게 맹목적으로 몸을 바침으로써 처음에 그에게 매 력을 주었던 큰 자유를 잃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기의 반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충실하게 반영되면 그는 권태를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닥치는 불 행의 하나는, 그 연애 자체가 그녀를 일그러뜨려서 그녀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이 미 이와 같은 노예,하녀,거울,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녀가 스스로 이것을 알아차릴 때 비탄은 그녀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린다. 그녀는 눈 물,요구,말다툼 속에서 완전히 매력을 잃게 된다. 존재자는 행동하는 그 자체이다. 그녀 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의식의 주체에 몸을 맡겨 자기가 하는 일은 일체 단념했다. "나 는 사랑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해요." 하고 쥘리 레스피나스 양은 쓰고 있다. <사랑뿐인 나>라는 소설의 표제(도미니크 롤랭의 작품)는 사랑하는 여성의 표어이다. 그녀는 사랑자 체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대상을 빼앗기게 되면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때때로 그녀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때 그녀는 자기의 자유를 다시 확립하고 자 기의 타성을 다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교태를 부리기 시작한다.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탐내게 되면, 그녀는 무뎌진 애인의 흥미를 다시 끌 수도 있다. 이것은 많은 통속 소설이 오래 전부터 써먹은 테마이다. 멀어진 애인과의 사이가 오히려 그녀에게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경우가 있다. 알베르틴은 남성의 눈앞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며, 진부한 여 성으로 보인다. 남성에게서 떠나 있으면 그녀는 신비로운 여성으로 돌아가, 질투하는 프 루스트는 다시 그녀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조작은 미묘하다. 만일 남성이 그녀들의 의도를 간파하면 결국 그녀들은 비 굴한 노예근성을 남성의 눈에 드러내보인 것이 될 뿐이다.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남성이 그 애인을 경시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 소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도 그녀가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부정에 의해 이 경 시,애착 중 어느 한쪽이 파괴되는 것일까? 남성이 냉담한 여성에게 화를 내어 등을 돌리 는 경우도 있다. 그녀가 자유로운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녀가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 위험을 알고 있다. 그녀의 교태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 렵게 된다. 이 유희를 교묘히 연기하기란, 연애하는 여성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애인을 존경하는 범위내에서 그를 속이기를 싫어한다. 속인다면 그가 어떻게 그녀의 눈에 신으로 머무를 수 있겠는가? 설사 그녀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자기의 우상을 파괴한다. 또 만일 지면 그녀는 파멸된다. 어디에도 제재할 길이 없는 것이다. 신중히 연애하는 여성 - 이 두 낱말은 상반되지만 - 은 애인의 정열을 애정이나 우정, 습관으로 바꾸려고 한다. 혹은 그녀는 견고한 유대에 의해, 즉 자식이나 결혼에 의해 자 기에게 단단히 붙잡아매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연애에 결혼의 소원이 뛰따르게 된다. 이것은 완전한 욕망이다. 교묘한 그녀는 연애의 초기에 관용을 이용하여 빨리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열심히 추진할 경우, 그녀는 이미 애인이라고 부 를 만한 가치가 없게 된다. 사랑하는 여성은 애인의 자유를 영원히 사로잡으려고 열망하 지만 그것을 파멸하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생을 두고 자유로운 거래가 지속되는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애와 신앙은 파탄을 일으키기 쉽다. 레스피나스 양은 모라와의 관계에서 다행히 초기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싫증을 느낀 이유 는 기베르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기베르를 싫어할 차례가 되었다. 다규 부인과 리스트의 사랑이 파탄을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은 가혹한 변증 논리 때문이었다. 즉, 리 스트를 그토록 멋있게 보이도록 했던 혈기,생명,야망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랑으로 돌아 서게 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수녀(유명한 사랑의 서한집 <포르투갈의 글>의 필자)는 버 림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다눈치오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게 한 정열은 그의 바람기를 대가로 받았다. 애인끼리의 불화가 남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는 남성으로서의 생활을 따로 갖고 있다. 버림을 받은 여성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 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요? 하고 물어도 그녀는 그 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것이었던 세계를 재로 만들어버리고 새로운 나 라를 택했으나 이제 그 나라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녀는 믿고 있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우정을 끊어버렸다. 이제는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지붕을 다시 잃어 그녀의 주위는 어디나 사막이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어떻게 새로운 생활을 다 시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전에 수도원으로 도피했던 것처럼 착란 속으로 도피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이 지나치게 이성적일 경우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 레스피나스 양처럼 곧 죽어버리거나 아 니면 불에 태워지거나 한다. 고뇌는 오래 계속되기도 한다. 10년 혹은 20년 동안 여성이 한 남성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오고 그녀가 마련한 제단 위에 그 남자가 계속 앉아 있을 경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파멸이다. 40세의 한 여자가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자크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말예요." 그녀는 옷차림과 머리 모양과 화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으나 까칠하 게 지쳐버린 얼굴로 새로운 사랑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무리였다. 한 남자의 그늘에서 20 년을 지내온 다음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이 40이면 아직 여생이 많이 남아 있는데. 또 한 사람의 여성을 생각해 본다. 그녀는 고통으로 얼굴이 부어올랐는데도 아름다운 눈과 품위 있는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양 볼에 눈물의 흔적을 남긴 채 사람들 앞에 서 잘 보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 신은 그녀를 위해 지어낸 말을 다른 여자에게 하고 있다. 왕좌에서 쫓겨난 여왕에게는 자기가 정말로 한 번이라도 왕국에 군 림하고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에서 멀어진다. 아직 젊다면 회복될 기회가 있다. 새로운 사 랑이 그녀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때로 그녀는 유일하지 않은 것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보다 더욱 겸손하게 거기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대개는 과거의 실패를 한 꺼번에 만회하기 위해 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거기에 대처해 간다. 절대적인 사랑의 실패 가 유익한 시련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여성이 자기를 되찾을 힘을 갖고 있을 경우이다. 아벨라르(프랑스의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 1079~1142)와 헤어진 엘로이즈는 표류하 지 않았다. 그녀는 수도원을 지도하며 자기를 위해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콜레트의 여주인공들은 사랑의 실패로 좌절되기에는 자존심과 생활력이 너무 강했다. 르네 메레(콜레트의 소설 <방랑하는 여자>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가 일을 통하여 자기를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도(콜레트 어머니의 애칭)는 딸에게 그녀의 감정적인 숙명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콜레트가 단지 사랑에 빠진 여자만 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타인의 손에 자기를 완전히 념겨주는 이 관대한 실수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초래하는 죄는 별로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 자유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때에는 연인이 서로 상대방을 자기 자신처럼 또는 타자처럼 느끼고, 어느 쪽에서도 우월을 포기 하지 않고 또 서로를 불구로 만들지 않으며 함께 세계 속에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로에게 사랑은 자기를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자기 인식>이라는 저서에서 남성이 사랑에서 요 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연애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자기의 눈에 나타나게 한다. 자기 이외에, 자기에게 보완이 되는 것과 접촉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인식의 형태로서의 연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광경 속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대지를 보여 준다. 여기에 큰 비밀이 있다. 세계는 타자이고 나도 타자이다. 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맙게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 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년에게 연애가 갖는 중요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스탕달이나 말로가 "나도 타자이다." 라고 말하게 한 기적에 얼마나 놀라고 있는가는 앞에서 이미 보아왔다. 그러나 귀스도르 프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에게, 그녀 자신으로부터, 그녀 자신에게 불가결한 중개자가 되고 있다." 고 쓰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성의 상황은 남성 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은 타자로 나타나지만 그는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고, 그 의 새로운 양상은 그 인격의 전체에 통합되어버린다.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녀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대자존재로서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목적을 향해 자기를 투기하며 매개물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단을 향 해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말로가 쓰고 있는 기요와 메이(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관계처럼 대등한 연애가 가능하게 된다. 루소에 대한 바랑 부인이나 셸리에 대한 레아(콜레트의 소설 <세스>의 등장인물)처럼, 여성이 남성적이고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성 은 자기를 타자로만 인정하고 있다. 그녀의 대타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어 있다. 사랑은 그녀에게 자기로부터 자기로의 중개수단이 아니다. 주체적인 실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이 창조한 여자애인 속에 잠겨 있다. 그녀의 구제 는 그녀를 창조해냈고 또한 한순간에 소멸시킬 수도 있는 이 전체적인 자유에 완전히 의 존해 있다. 그녀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또 확실한 의지도 갖지 못한 채 자기의 운명을 손 아귀에 쥔 인간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일생을 보낸다. 자기 자신의 운명을 불안한 듯이 무 기력하게 지켜보는 타자에게 맡겨져서 위험에 처해 있다. 본의 아니게 폭군이 되고 잔인 한 인간이 된 그 타자는 그녀와 그의 소원에 어긋나 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 랑하는 여성은 바라고 있던 결합 대신에 가장 쓰라린 고독을 느끼고 합의 대신 흔히 증오 를 경험하게 된다. 연애는 여성에게 운명적으로 의존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는 절박한 시도이다. 그러나 설사 동의한다고 하더라고 의존하는 삶은 오직 두려움과 굴 욕 속에서만 영위되는 것이다. 연애는 여성에게 최고의 목적 달성이라고 남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다. "여성답게 사랑함으로써 여성은 점점 깊게 여성이 된다"고 니체는 말했다. 그리고 발자크는 "높은 차원에서 남성의 생활은 명예이고, 여성의 생활은 연애이다. 마치 남성의 생활이 끊임없 는 행동인 것처럼 여성의 생활은 끊임없는 헌신이어야만 남성과 대등할 수 있다"고 말했 는데, 이것도 하나의 잔인한 속임수이다. 그녀의 헌신을 남성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 문이다. 남성은 그가 요구하는 무조건의 헌신도 그를 오만하게 하는 우상숭배와 같은 연 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기에게 주어지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상관없 는 조건하에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남성은 여성에게 달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가 주 면 귀찮게 여긴다. 그녀는 자기의 헛된 증여에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무 익한 존재임을 알고 난처해 한다. 여성이 연약한 처지에서가 아닌 강건한 입장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발견 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 면, 그때 비로소 연애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샘이 되어 치명적인 위험이 사라질 것 이다. 그때까지는, 연애는 여성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여자, 상처를 받아 자립할 수 없는 여자에게 부담이 되는 저주를 가장 감동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게 바 람직한 것은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는 감옥과 같은 사랑을 남성은 오히려 최고의 구제책으 로서 권고한다. 이런 운명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랑의 순교자들이 증언해 왔다. 제3장 신비주의자인 여성 사랑은 여성에게 최고의 천직이라고 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을 바칠 때 그에게서 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만일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배반을 당하거나 혹은 소원이 너무 클 경우, 그녀는 진짜 신에게 그 신성을 숭배하려고 한다. 물론 남성들 중에도 이런 정염을 불태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남성은 보기 드물고 또 그들의 신앙은 대단히 세련되고 지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천국과의 혼례라는 환희에 몸을 바친 여성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런 여성은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인 형태로 그것을 경 험한다. 여성은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다. 여성은 대개 남성이 왕좌에 앉아 있는 천국에서 자기를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남성도 천국처럼 구름에 싸여 있다. 육체 를 싸고 있는 베일을 통하여 남성의 권위가 나타난다. '사랑하는 남성'이란 언제나 다소 비현실적인 존재이며, 그는 애매한 증거에 의해 자기를 숭배하는 여성과 교감한다. 그녀 는 일종의 신앙행위를 통해서만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그가 훌륭 하게 보일수록 그의 행위는 그녀에게 점점 불가사의한 것이 된다. 색정광의 경우 이 신앙 이 모든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다. 여성은 현존을 체득하기 위해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필요가 없다. 상대가 의사이건 사제이건 또는 신이건 그 녀는 확실한 증거를 인정하고, 자기 마음속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의 물결을 공손히 맞 아들인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이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도 초월 자의 방향, 즉 절대자의 방향을 지향하는 하나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여성에 게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우연적인 존재를 구제하기 위해, 자기의 실존을 지고의 인격 으로 구현시킨 전체에 결부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애매성은, 실로 많은 경우에서 - 병리학적인 경우도 있고, 정상적인 경우도 있다 - 찾아볼 수 있으며, 사랑하는 남성은 신격화되고 신은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 여기에는 페 르디에르가 색정광에 관한 저서에서 보고한 한 사례를 인용하는 데 그치려고 한다. 말하 고 있는 것은 환자 자신이다. 1923년에 나는 <프레스>지의 어느 기자와 서신 교환을 했어요. 나는 날마다 그의 인생 안내의 기사를 읽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나는 그가 나의 질문에 대답하고 충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나는 연애편지를 썼어요. 열심히 써보냈어요... 1924년, 갑자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신이 한 여자를 찾으시다가 내게 이야기하러 오시는 것으로 생각되었어요. 나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교회를 짓기 위해 택함을 받은 것 같 은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내가 어떤 중요한 단체의 중심인물이 되어 여자환자를 의사들 에게 치료받게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바로 그 무렵에 나는 클레르몽의 요양소로 옮겨졌어요... 그곳에는 세계 개조의 희망에 불타는 젊은 의사들이 있었어요. 나는 독방 에서 손가락으로 그들의 키스를 느끼고 손바닥으로 그들의 성기를 느끼게 되었어요. 한번 은 그들이 말했어요. "당신은 민감하지 못하지만 관능적인 여자야. 이쪽을 향해 봐." 나는 뒤돌아보고 그들을 몸으로 느꼈어요. 매우 기분이 좋았어요... 부장인 D. 박사는 마치 신과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내 침대 옆에 다가왔어요. 나는 일이 심상치 않 은 것을 알아차렸어요. 그는 마치 내게 홀딱 반했다고 말하려는 듯한 얼굴로 나는 바라보 았어요... 그의 초록빛 눈은 하늘과 같은 파란빛으로 변하고, 무서울 정도로 크게 떴어 요... 그는 다른 환자에게 말을 걸어 효과를 확인하고 나서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포로가 되어 그에게서 떠날 수 없었어요. 새것이 생긴다고 먼저 것을 잊을 수는 없는 거예요. 나에게는 여러명의 애인이 새로 생겼지만(나의 애인은 15, 6명은 되었 어요.) 그에게서 떠날 수는 없었어요. 그는 정말 죄인이에요... 12년 전부터 이미 나는 줄곧 그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내가 그를 잊으려고 하면 그는 다시 나타나곤 해요... 그는 때때로 좀 비웃는 듯이 "어 때, 내가 무서워졌나. 당신은 아무리 많은 남자와 어울려도 언제나 나에게 돌아올거야." 하고 말해요. 나는 자주 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약속하고 만나러 갔어요. 작년에 나는 그 를 만났어요. 그는 점잖을 빼었어요. 그는 정열이 식어 있었어요. 나는 머쓱해서 돌아왔 어요...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그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그는 내 남편이에요. 그러나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행위는 한 번도 한 적이 없 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 올라와, 그리면 당신은 지상의 인간이 안될 테니 까." 하고 그는 때때로 말했어요. 이것으로 알 수 있겠지요. 나는 신을 찾을 적마다 남자 를 찾게 돼요. 지금은 어떤 종교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요. 이것은 병리학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독실한 믿음을 가진 많은 여성들중에도 인간과 신 사이에서 오는 혼란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분명치 않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해를 듣는 신부이다. 자기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고해하는 여자의 말을 육신의 귀로 듣지만 그녀를 에워싼 그의 시선 속에 빛나는 것은 초자연의 빛이다. 그는 신의 인간이며 인간의 외모로 나타난 신이다. 기용 부인(17세기 프랑스의 신비주의 자)은 라콩 신부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스러운 은총의 위력이 영혼을 통하여 그에게서 나에게로 왔다가 다시 나에게서 그에 게 돌아가 그도 같은 효과를 맛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무감각한 기분에서 그녀를 건져내어 그녀의 영혼을 다시 감 격으로 불타게 한 것은 이 신부의 힘이었다. 그녀는 그 위대한 신비주의적인 시기의 전부 를 그의 곁에서 보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일치여서, 이미 나는 그를 신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녀는 사실상 한 남자를 사랑한 것 일 뿐 신은 사랑하는 시늉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신과 함께 그 남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페르디에르 환 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막연히 추구한 것은 최고가치의 원천이었다. 모든 신비주 의적인 여성의 목적은 이것이다. 남성의 중개는 그녀가 천국의 무인지경을 향해 날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유희와 현실, 행위와 마술, 실체와 상상물은 분명히 구별할 수 없 기 때문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녀의 육체를 통하여 현존하게 하는 경향이 강하 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생각하면 흔히 말하고 있듯이 신비주의자와 색정광을 동일시한 다. 색정광도 지고의 존재의 사랑에 의해 자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느낀다. 지고의 존재가 연애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상대방으로부터 받고 있는 사랑 이상으로 열렬히 사 랑한다. 그는 자기 감정을 은밀한 신에 의해 명백하게 알게 된다. 그는 자기가 택한 여성 의 정열이 부족한 데 대해 질투하고 초조해하는 나머지 그녀를 처벌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모든 특색은 신비 주의적인 여성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은 사랑의 불꽃에 의해 불타오르게 한 영 혼에게 영원히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 때문에 눈부신 최후의 영광을 마련해 주신다. 그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불꽃에 몸을 맡기는 일뿐이다. 색정광이 플라토닉하거나 혹은 성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을 오늘날에는 인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적인 여성이 신에게 바치는 감정 속에는 육체가 얼마간의 자리를 차 지하고 있다. 그녀의 뜨거운 정열은 지상의 연인들이 경험하는 정열과 유사하다. 앙젤 드 폴리뇨가 성프란체스코를 껴안은 그리스도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그녀에 게 말했다. "이처럼 너를 껴안아줄거야. 육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욱 강하게... 네가 나를 사랑한 다면 나는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리다." 기용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랑은 잠시 도 나를 쉬게 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에게 말했다. 오, 나의 사랑이여, 이제 족하다. 놓 아다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로 영혼을 관통하는 듯한 사랑, 나를 기절하게 하는 듯한 사랑을 나는 원하고 있다... 오 신이여,... 가장 관능적인 여자에게 내가 느끼고 있 는 것을 느끼게 하신다면 이처럼 진실한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즉시 거짓 쾌락을 버릴 것 입니다." 성 테레사의 유명한 환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천사는 양손에 금빛 나는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 창으로 내 심장을 찔렀 다. 천사가 그 창을 뺄 때에는 마치 창자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신에 대한 사랑 에 불타 있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몸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것과 내 의식 속의 남편이 창자를 찌른 화살을 빼낼 때 창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언어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이런 에로틱한 용어를 빌려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건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비가인 여성도 마찬가지로, 단 하나 의 육체를 다루고 지상의 사랑에서 말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태도까지도 빌려온다. 그녀는 자기를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녀가 인간에게 자기를 바칠 때와 같은 행위를 한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감정의 가치를 조금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앙젤 드 폴리뇨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까칠하고 창백해지거나 기름지고 혈색이 좋을 때 그리고 눈물의 홍수 속 에 울고불고할 때 그리고 갑자기 졸도할 때 이런 현상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 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그녀의 '과도한 감수성'으로 설명하 는 것은, 마치 마약의 '최면효과'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육체는 절대로 주체적인 경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체적인 형태를 취한 주 체 자체이며, 주체는 그 통일적 존재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의 반대자나 찬미자가 성 테레사의 법열에 성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녀를 히스테리 환자 로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히스테리 환자의 불명예는 그 육체가 그 고정 관념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집념에 사로잡히고 그 자유가 저주를 받아 무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고행자는 자기 몸에 대해 지배력을 갖고 있으므로 신체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육체의 찌푸린 얼굴이 자유의 약동 속에 은폐되는 경우도 있 다. 성 테레사의 문장을 읽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맹렬한 정욕 속에 기절한 성녀를 표현한 베르냉의 조각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녀의 감동을 단순한 '성적 승화'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억압된 성욕이 신에 대한 사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애하는 여성도 처음에는 대상이 없는 정욕에 시달리다가 이어서 그 정욕이 어느 개인 에게 정착되는 것이 아니다. 애인의 현존이야말로 그에게로 향한 그녀에게 불안을 일으키 고 있다. 이리하여 성 테레사는 신과의 결합을 요구하여 그 일치를 대뜸 자기의 육체 속 에 이룬 것이다. 그녀는 신경이나 호르몬의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구석구석까지 스며 있는 그녀의 강렬한 신앙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성 테레사 자신도 이해 하고 있었던 것처럼 신비한 체험의 가치는 그 주체적인 경험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 라 그 객관적인 힘에 의해 측정된다. 법열의 여러 가지현상은 성 테레사의 경우나 마리 알라코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의 사명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 다. 성 테레사는 개인과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의 극적인 문제를 지적인 방법으로 설정 한다. 그녀는 일체의 성적 구별을 초월한 의미를 갖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쉬조 나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위치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뚜렷하게 빛나는 하나의 예외이다. 그녀의 많은 아류가 보여주는 것은 세계와 구원에 대한 여성적인 사고방식이 다. 그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초월체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기가 여성인 데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여성은 신의 사랑 속에서, 먼저 사랑하는 여성이 남성의 사랑에 대해 요구하는 것, 즉 자기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극치를 구하고 있다. 그녀에게 사랑스럽게 쏠리는 지고의 시선은 그녀에게 기적적인 선물이다. 기용 부인은 처녀시절과 신부시절을 통하여 줄곧 사 랑을 받고 찬미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려왔다. 현대 신교파의 신비주의자인 베에 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특별히 정다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슬픈 일은 없다."" 크뤼데네르 부인은 신이 언제나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했 다. 그 결과 생트 뵈브(19세기의 프랑스 비평가)는 "애인과의 마지막 순간에 신이여, 저 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합니다. 저의 과분한 행복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정도였다. 하늘전체가 그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을 때,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성의 마음 을 충족시키는 도취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과 합일한 그녀의 이미지는 신과 마찬가지로 무한하며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 고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져 경배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속죄되며 사랑을 받 는 자기의 영혼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녀가 포옹하는 것은 그녀의 분신이며 신의 매개로 말미암아 무한히 신성하게 된 그녀자신이다. 성녀 앙젤 드 폴리뇨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예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귀여운 딸, 나의 딸, 나의 사랑하는 딸, 나의 전당이여, 나의 딸, 나의 귀여운 여 자여, 나를 사랑하여라.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것보다 훨씬 많 이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의 삶 전체, 마시고 먹고 잠드는 삶 전체가 내게 합당하다. 나는 네 안에서 여러 백성들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는 일을 하려고 한다. 나는 네 안에서 알려지고, 내 이름이 네 안에서 많은 백성으로부터 찬양을 받을 것이다. 나의 딸, 나의 귀여운 아내여, 나는 너를 한없이 사랑한다. 내가 너에게 기대한 것보다 훨씬 다정한 나의 딸이여, 나의 기쁨이여. 전능하신 신의 마음은 지금 너의 마음 위에 있다. 전능하신 신은 네 안에 많은 사랑을, 이 거리의 어느 여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맡겼다. 신은 너를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머지 이제 너의 잘못은 마음에 걸리지 않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 나는 네 안에 엄청난 보배를 맡겼다. 신의 택함을 받은 여성은 이처럼 열렬하고 또 이처럼 높은 데서 내려온 사랑의 고백에 정열적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연애하는 여성의 상투적인 수단인 자기소멸에 의해 애인과 결합하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사랑하고 자기를 잊고 자기를 없애는 것이다." 하고 마리 알라코크는 쓰고 있다. 종교적인 황홀은 이 자기포기 의 육체적인 모방이다. 주체는 이미 보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며 자기의 육체를 망각하 고 육체를 부인한다. 이 포기의 완벽성과 수동성의 열성적인 수락에 의해 빛나는 지고의 '현존'이 새겨진다. 기용 부인의 정적주의는 이 수동성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녀의 경우 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종의 전신불수 속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깨어 있을 때에도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의 대부분은 신에게 수동적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 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기의 육신을 파괴하여 자기를 없애는 데 몰두한다. 금욕주의는 남성인 성직자나 종교가에 의해서도 실행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이 그 육신 을 모욕할 때 지나치게 심한 것은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다. 자기 육체에 대한 여성의 태 도가 얼마나 애매한가에 대하여는 이미 보아 온 바와 같다. 그녀는 굴욕과 고통을 통하여 육체를 영광으로 변화시킨것이다. 쾌락을 위한 육체로서 애인에게 바쳐지는 것으로 그녀 는 일종의 전당이 되고 우상이 된다. 그녀는 분만의 고통으로 갈가리 찢겨져서 영웅을 창 조한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은 육신을 자기 것으로 요구할 권리를 갖기 위해 자기의 육 신을 학대하려고 한다. 육신을 모욕함으로써 육신을 자기구제의 도구로 끌어올리는 것이 다. 이것으로 일부 성녀들이 기괴한 행위를 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성 앙젤 드 폴 리뇨가 나환자들의 손발을 씻은 물을 달게 마신 사례가 이를 말하고 있다. 이 음료는 우리들의 목을 기분좋게 적셔주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맛은 우리에 게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맛좋은 물을 처음 마셨다. 나환자의 상처에서 떨어져나 온 비늘 같은 살갗조각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토해내는 대신에 삼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성체를 받아 모셨을 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때 느낀 무상의 행 복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마리 알라코크가 병든 여자의 토사물을 혀로 핥아서 깨끗이 치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 다. 그녀는 그 자서전에서 설사를 한 자의 변을 입안에 넣었을 때 느낀 행복감에 대해 쓰 고 있다. 예수는 그녀의 입술을 성심에 세 시간 동안 밀착시켜 그녀에게 보상해 주었다. 신앙이 육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같이 유난히 관능적인 나 라에서이다. 아브뤼즈(중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성들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지면에 있는 조약돌을 핥아서 혀를 찢는다. 이 모든 행위에 의 해 그녀들은 점점 자기 육신을 욕되게 함으로써 육신을 구제한다. 구세주를 모방하고 있 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 위대한 비적에 대해 남성보다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감응한다. 신은 여성에게 남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때로는, 후광에 싸여 순 백으로 찬란히 빛나는 지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신은 그녀에게 결혼의상 을 입히고 관을 씌운 뒤 손을 잡고 천국에 인도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대개 그는 육적 인 존재이다. 예수가 성 카타리나에게 주어 그녀가 손가락에 낀 눈에 보이지 않는 결혼 반지는 할례(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남성의 양피를 잘라내는 행위로, 오늘날의 포경 수술과 마찬가지이다.) 때, 그에게서 잘라낸 '육의 반지' 였다. 특히 그의 육체는 학대를 받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를 이들의 유해를 껴안은 성모마리아나 십자가 아래 서서 가장 사랑하는 예수의 몸에서 떨어져내리는 피에 몸을 적시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라 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자학적인 환상을 만족시킨다. 신의 굴욕 속에 그녀는 '남성'의 실 추를 찬미한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힌 기진맥진한 예수의 모습은 야수나 단 도나 남성의 제물이 되어 새하얀 피부를 피로 물들인 순교한 여성의 도착된 모습이다. 그 녀는 때때로 자기를 순교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녀는 '남성'이, 즉 신인 '남성'이 그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낀다. 십자가에 매달려 부활의 영광을 약 속받은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이것을 몸으로 입증한다. 그때 이마는 가시관 밑에서 피 를 흘리고 손, 발, 옆구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칼에 찔려 있다. 카톨릭 교회가 산출한 321명의 성흔 소지자 중에 남성은 단지 47명뿐이다. 다른 사람들 -헝가리의 엘레나, 십자가의 잔, G. 도스탕, 오잔드 망투, 클레르 드 몽팔콩-은 여성으로 서 대체로 갱년기를 넘긴 여성이 많다. 가장 유명한 카테리나 에메리크는 일찍이 성흔을 받았다. 24세때 그녀는 가시관의 고통을 받기를 원했더니, 눈부신 젊은 남자가 그녀의 머 리에 가시관을 씌웠다. 이튿날 그녀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부어오르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4년 후에 법열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상처에 서 예리한 칼날 같은 뾰족한 빛이 새어나와, 성녀의 양손, 양발, 옆구리에서 핏방울이 솟 구쳐나오게 했다. 그녀는 피땀을 흘리며 피를 토했다. 현재도 성 금요일에는 테레즈 뇌만이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관람객들에게 보여 경배하게 하고 있다. 성흔 속에서 육체를 영광으로 바꾸는 신기한 연금술이 이루어 지고 있다. 성흔은 피투성이가 된 고통의 형태에서 신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피를 순수한 황금 불꽃으로 변모시키는 데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이것으로 잘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인간의 왕의 옆구리에서 흘러 내리는 피에 대 한 고착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시에나의 성 카테리나는 거의 모든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언 급하고 있다. 앙젤 드 폴리뇨는 예수의 심장과 옆구리에 뚫린 상처를 지켜보는 데 몰두하 고 있다. 카테리나 에메리크는 '피투성이가 된 속옷'과 같은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빨간 속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보는 것이었다. 마리 알리 코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심에 세 시간이나 젖어 있었다. 신자의 예배물 로서, 사랑의 빛의 화살을 등에 짊어진 빨간 핏덩이를 신자에게 경배하도록 권한 것은 그 녀였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에 의해 피에서 영광으로 가는 여성의 큰 꿈인 것이다. 어떤 여성은 황홀, 환각, 신과의 대화등 내적인 체험만으로 만족한다. 그밖에 행동을 통하여 이 경험을 세계에 전할 필요를 느끼는 여성도 있다. 행동을 정관에 연결시키는 데에는 전 혀 다른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성 카테리나나 성 테레사, 잔 다르크와 같은 행동적인 여 성이 있다. 그녀들은 자기가 세운 목적을 잘 알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냉정하게 생각한다. 그녀들의 계시는 그 확신에 객관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불과하다. 그 확신은 그녀들에게 자기가 설정한 길을 의혹없이 가도록 용기를 준다. 한편 기용 부인이나 크뤼데네르 부인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성도 있다. 그녀들은 정 열적인 신앙을 꾹 참아온 끝에 갑자기 자기가 '사도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들은 자기의 임무에 대하여는 그다지 분명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언제나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부지런한 여자처럼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이 건 별로 문제시하지 않고 다만 뭔가 일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크뤼데네르 부인 은 대사의 아내로서, 여류작가로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낸 다음에는 자기의 가치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내면화한다. 그녀가 알렉산더 1세의 운명을 손에 넣은 것은 분명한 계 획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교류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로 자기를 확인하기 위 해서였다. 여성은 조금만 재능이 있으면 자기가 신성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줄로 생각하 기 쉽다. 더구나 자기가 신에게 선택된 여성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사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애매한 교리를 설교하고 자진하여 교파를 세운 다. 그리하여 여성은 스스로 감탄하는 단체의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의 인격을 증대시키는 흥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신비주의적인 정열은 연애나 나르시시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동적이고 독립된 생활 속에서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이런 개인적인 구제의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자기의 분신이나 신등의 비현실과 관계를 맺건 현실적인 존재와 비 현실적인 관계를 조성하건 어느 경우에도 그녀는 세계에 대해 발붙일 기반을 갖지 못한 다.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남아있 다. 자유를 올바로 실현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능동적인 행동에 의해 그것을 인간사회 속에 투입하는 것이다. 제4편 해방 제1장 독립한 여성 프랑스 법전은 이미 복종을 아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지 않으며, 시민이면 누구나(여성도)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민으로서의 자유도 경제적인 자립이 수반되지 않으면 허울 좋은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정식으로 결혼한 여성이건 창 녀이건 남자의 손에 의해 부양되고 있는 여성이 투표용지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남성 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처럼 풍습이 여성에게 구속을 강요하지 는 않더라도 그것은 소극적인 허용에 불과하여 여성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종속적인 신분에 갇혀 있다. 여성이 남성과의 거리를 크게 축소시킨 것은 노동이다. 여성이 기생물이 되지 않게 되 면서 여성의 의존성을 토대로 삼았던 체계는 붕괴되어 가고 있다. 그녀와 세계와의 사이 에는 이제 남성의 매개가 필요없게 되었다. 종속자로서의 여성을 억압했던 저주는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르시시즘, 연애, 종 교를 통하여 절망적으로 추구하려고 존재한다.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은 초월을 다시 회복한다. 그녀는 자기 기획 속에서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확립한다. 그녀가 추구 하는 목적이나 자기 손으로 벌어들이는 돈, 권리 등을 생각하면 자기 책임을 느끼게 된 다. 많은 여성들이 이점을 의식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도 그러하다. 나는 어느날 날품팔이 여성이 호텔의 바닥을 닦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부터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한 적이 없어요. 혼자 벌어서 살아왔어요." 이 여성은 록펠러처럼 스스로를 만족스러워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선거권과 직업만 내세워 여성이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오늘날 에는 일하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일하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세계뿐이다. 현재 노동자의 대다수는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사 회구조가 여성의 신분을 어느 정도 개선하였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수정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던 이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남성이 새긴 상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노동문제가 복잡한 원인은 여기에 있다. 최근, 사상이 온건한 어떤 유력한 여성이 르노 공장의 여공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적 이 있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여공들은 공장에서 일하기보다는 가정에 머물러 있는 쪽을 원하고 있다. 그녀들은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계급에 속하여 경제적인 자립을 구 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공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가사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들에게 한 주일에 40시간쯤 일할 경우에 공장과 가정 중에서 어느쪽을 택하겠느냐고 물어 보라. 아마 전과는 다른 대답을 할 것이 다. 그리고 그녀들이 근로자로서 자기들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 세계, 기쁨과 긍지를 갖고 그 완성에 참가할 수 있는 세계에 분명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가정과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것도 얼른 승낙할 것이다. 오늘날 일하는 여성의 대부분은(농촌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여 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들은 사회나 남편에게서도 실질적으로 남성과 대등하게 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정치적인 신념을 갖고 조합에 가입하여 싸우며 밝은 미래를 믿고 있는 여성만이 보답이 적은 나날의 피로에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가를 빼앗긴 채 복종의 전통을 이어받아왔으므로 여성이 정치적, 사회적인 의식을 겨우 확장하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동의 대가로 당연히 기대해도 좋은 정신적, 사회적인 이득을 받을 수 없다면 여성이 아무 정열도 느끼지 못하고 속박을 감수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여점원, 여자 종업원, 여비서가 남성에게 의지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잘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이 그 육체를 아낌없이 주어야만 참여가 허락되는 특권계급의 생활은 젊은 여성에게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급료는 적은데 생활 수준은 높다. 그래서 남성의 유혹에 끌리게 된다. 자기의 보수에 만족하면 최하층의 생활에 몰리게 된다. 좋은 집에서 살 수 없고 좋은 옷 을 입을 수도 없으며 오락도 즐길 수 없는데다가 연애도 제대로 하기 어렵다. 도덕가는 금욕을 역설한다. 실제로 이런 부류의 젊은 여성의 식사는 카르멜 수도회의 수녀 못지 않 게 간소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신을 애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잘 꾸려나가 려면, 남성들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고용주인 남성은 파 렴치하게 미리 계산하고 있어서 여성에게는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급료밖에 주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도움에 의해서도 환경을 개선하여 참된 자립을 획득하는 여성도 있지만 반대 로 자기의 일을 버리고 남성의 시중을 드는 것이 본업이 되기도 한다. 대개의 여성은 양 쪽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일거리가 있기 때문에 애인에게 구속을 받지 않고 애인 덕분에 일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직업과 남성의 비호라는 이중적인 예속을 체험하기도 한다. 기혼녀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대개 약간의 보탬이 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받고 있는 여성에게는 남성의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경우 에도 여성의 개성적인 노력에 의해 완전히 자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직업을 가짐으로써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주성을 얻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 우리가 여성의 기능성이나 그 장래를 논할때에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이 런 사람들이다. 지금은 그런 여성의 수가 아주 적더라도 그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권론자와 반여권론자의 논쟁이 전개되는 것도 이들 여성들 사이에서이다. 후자의 주장은 현재 해방된 여성은 사회에 나가서도 이렇다 할 중요한 일 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녀 자신도 거의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자는 그녀들이 획득한 결과를 과대평가하여 혼란에는 시선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여성이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녀들이 새 로운 지위에 안정을 찾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녀들은 아직 과정에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정신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남성과 동 등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헌신하는 방법은 그 녀의 생활 전체의 형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규정된다. 여성이 어른의 생활에 참여할 때 조차 남성과 동일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같은 눈으로 보아주지 않는 다. 그녀에게는, 세계(사회)는 남성과 다른 전망 속에 나타난다. 여성이라는 사실은 오늘 날 지주적인 한 인간에게 특수한 문제를 안겨준다.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특권, 유년시절부터 그가 느껴온 특권은 인간이라는 천직과 남성 이라는 운명이 완전하게 조화되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근과 초월의 일체 화로 말미암아 남성의 사회적, 정신적인 성공은 그에게 남성적인 위력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남성은 분열되어 있지않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단지 물 건이 되고 먹이가 되는 것만 허용되어 있다. 주체성이라는 지고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요 구를 단념하라는 것이다. 이 갈등이야말로 해방된 여성의 위치를 특징짓는 특이한 것이 다. 해방된 여성은 거세되지 않기 위해 암컷의 역할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자 기의 성을 거부하는 것도 자기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남성은 성이 있는 인간이다. 마 찬가지로 여성도 성이 있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완전한 개인, 즉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여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의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 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흔히 "지적인 여성은 몸단장을 소홀히 한다." 고 비난해 왔으나 한편 "만일 당신들이 우리와 동등한 자가 되고 싶다면, 얼굴에 분을 바르거나 손톱을 빨 갛게 물들이기를 그만두라." 고 설교하기도 한다. 후자의 충고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 성답다는 관념은 습관이나 유행에 의해 인위적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그 관념은 여성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이런 여성다움도 시대와 함께 진화된다. 그 표준은 남성이 채택하고 있는 표준에 접근 하는 방식으로 진화되고 있다. 바닷가에서는 남성의 바지가 여성의 전용이 되었다. 이런 것도 문제의 근저에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만 드는 것은 개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표준형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은 성적, 사회적 으로 가치를 하락시키게 된다. 사회는 성적인 가치를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그 속성을 거부해도 남성의 속성을 얻을 수는 없다. 남성으로 변장한다고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변장한 여성이다. 동성애도 그것은 그것대로 분류되어 있다. 중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적인 태도는 반드시 실제적인 반대를 다소 내포하고 있 다. 젊은 처녀들은 다만 습속을 약간 경멸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녀는 그런 태도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자기가 만든 새로운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결 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성의 법망을 빠져나가면 그 사람은 폭도가 된다. 괴상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이것은 내 마음에 들어 그렇게 할 뿐이에요." 하고 태연한 태도로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자기의 기호에 따르는 것이 남의 시선을 끄는 괴상한 짓이라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반대로 색다른 모습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은 일반관례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적 극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아닌 한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 은 시간과 힘의 낭비이다. 남에게 거역하고 싶지 않고 사회적으로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 지 않은 여성은 여성이라는 신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이 직업에서 성공하려면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풍습은 자주적이고 활동적인 남성의 요구로 정해지기 때문에 -획일성은 남성에게 특히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자주성을 지닌 활동가라 도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하고 있는 세계에 살짝 끼어들어야 한다. 여성만의 좁은 영역에 갇혀 그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는 만큼 여성이 하는 일은 많 아지게 마련이다. 여성들은 화장이나 가사를 어려운 기술로 만들어버렸다. 남성은 자기의 옷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활동적인 생활에 어울리도록 편리하게 되어 있으므로 복잡한 궁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옷차림이 인품의 일부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성이 손수 옷을 손질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다. 그런 손질은 남성 대신 누군가 친절한 여성이거나 돈으로 고용한 여성이 해준다. 여성은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볼 때 자기의 외관도 함께 보고 있다 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그녀는 화장을 통하여 판단되고 존중되며 욕망의 대상이 된다. 원래 여성의 의 상은 무기력하게, 일하는 데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도 여성의 의상은 비활동적으로 되어 있다. 양말은 금방 찢어지고 구두 뒤축은 쉬 망가지며 밝은 색깔의 블라우스나 드레스는 더러워지기 쉽다. 주름은 곧 늘어진다. 그러 나 여성은 대개 손수 매만져야 한다. 친구도 친절히 도와줄 수 없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으므로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퍼머, 화장품, 새 옷 장만 등으로 지출 이 많다. 여비서나 여학생들은 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짜깁기를 할 양말이나 빨아야 할 블라우스, 다리미질을 해야 할 스커트 등이 기다리고 있다. 상류사회 부인은 이런 일 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좀더 치밀하게 멋을 부려야 한다. 그녀는 쇼핑이나 옷의 가봉 등 으로 시간을 보낸다. 전통은 여성에게 자기의 집에 대해 남성과 달리 여러 모로 신경을 쓸 것을 강요하고 있다. 독신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시에 새로 부임한 관리는 간편하게 호 텔에 머무를 수 있으나 여성의 경우는 자기 집에서 살게 된다. 그 주거는 자기가 손질해 야 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소홀히 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게으 름이 용납되지 않는다. 옷치장이나 가사에 주로 시간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 만이 아니다. 여성은 자기자신의 만족을 위해 어디까지나 여성다운 여성이기를 바라고 있 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자신이 이룬 생활과 어렸을 때의 유희나 처녀시절의 환상 등에 의해 조성된 여성의 숙명을 아울러 지님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통해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의 꿈을 갖고 있다. 여성은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남근적인 자존 심에 대항하여 자기의 이미지를 숭배하고 있다.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며 남자를 매혹시 키고 싶어한다. 그녀는 어머니나 언니에 의해 둥우리 속에 갇혀 사는 취미를 익혀왔다. 자기의 가정이 그녀의 독립적인 꿈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다른 방법으로 자유를 손 에 넣은 후에도 그녀는 이 옛 꿈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남성 본위의 세계에서 사는 데 거북함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어딘가에 자기의 은신처를 찾으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이 은신처야말 여성이 자기 내부에서 찾아온 내적인 도피의 상징이다. 여성다운 전통에 순종하는 그녀는 마루를 닦으며 남성처럼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지 않고 손수 요리를 만든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 일과 피로를 가중시키 고 있다. 만일 그녀가 완전한 여성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최대한의 기회를 살려 남성이라는 다 른 성에 접근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된다.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성 이라는 장소이다. 여성이 완전한 개인으로서 남성과 대등하게 되기 위해서는 마치 남성이 여성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처럼 남성의 세계에 접근해야 한다. 즉, '타자'에 접근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타자의 요구가 쌍방에게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와 명 성을 얻게 되면 그것은 내재적인 가치처럼 보여 여성의 성적 매력은 더욱 증가될 수 있 다. 그러나 자주적인 능동성은 여성의 여성다움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여성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로운 여성 -특히, 자기의 상황을 깊이 생생하고 있는 인텔리 여성- 은 여 성으로서의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녀가 오직 남성을 유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는 요 염한 여성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몸단장에 전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방면에 밝은 사람의 충고를 따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멋을 부리는 일에는 언제나 아마추어의 경 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다운 매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초월이 내재를 타락시키는 미묘 한 육신의 꿈틀거림을 보여야 한다. 즉, 자진하여 바친 먹이가 되어야 한다. 지적인 여성은 자기가 몸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의식의 주체 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기의 시선을 마음대로 묵살하거나 구름 사이로 엿보이는 하늘의 한 조각이나 물웅덩이로 바꿔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가 무기력한 조각에서 활기찬 인형으로 변모하기 위해 세계로 항해 약동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지적인 여성은 실수를 걱정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 이 의식적인 정열은 역시 능동성이다. 그 래서 실패한다. 그녀는 여기서 폐경기의 현상과 비슷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자기 나이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자기의 두뇌작용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중년 여성은 젊은 처녀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꽃을 꽂고 요란한 장신구를 달고 울긋불긋한 천 을 몸에 휘감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러 어린애 같은 놀라운 몸짓을 한다. 장난질을 하고 깡충깡충 뛰고 수다를 떤다.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장하여 일부러 경솔한 행동을 취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실제는 근육을 크게 신장시키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 에 눈꺼풀을 내려뜨거나 입을 오무려 반동근을 수축시키는 여배우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적인 여성은 자기를 망각하고 상대에게 완전히 맡기는 태도를 흉내 내려고 몸을 떤다. 그녀는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초조해 한다. 얼빠진 듯 한 순진한 얼굴에 갑자기 예리한 지성이 섬광처럼 스쳐간다. 애교 있던 입술이 꽉 다물어 진다. 그녀가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고분고분한 여동생들처럼 남의 호감을 사려는 순수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매혹시키고 싶은 욕구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것이 골수에 스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 방면에 서투르다는 것을 의 식하게 되면 비굴한 자기자신이 얄밉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번엔 보복하기 위해 남성의 무기를 들고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다. 그녀는 듣는 대신에 지껄이고, 어려운 시상이나 개성적인 감정을 터뜨린다. 말상대에게 반대하여 그를 억누르려고 한다. 스탈 부인은 전 격적인 승리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슬기롭게 혼합했다. 그래서 좀처럼 대적하는 남성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 여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 도전적인 태도는 남성들을 지 배하기보다는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에게 이런 도전적인 태도를 유발시키는 것은 남성들이 여성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만일 남성이 노예가 아닌 대등한 사랑을 하려고 하 면 -남자들 중에도 오만한 생각이나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그 렇게 생각하고 있다- 전처럼 여성도 여성다워지려고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더 욱 자연스러워지고 단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여성이리는 것을 그다지 괴 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남성들은 여성의 새로운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이제 자기들이 선천 적으로 불운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오늘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일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다움을 소홀히 하지도 않고 자기의 성적 매력을 잃지도 않는다. 이런 성과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안정으로의 첫걸음이지만-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이 원하는 관계를 남녀가 각각 이성과의 사이에 맺으려고 하면 여성의 경우에 아직도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여성의 성생활이나 감정생활에는 많은 장애가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 여성에게는 결국 아무 권 리도 주어져 있지 않다. 성적, 감정적으로 말하면 기혼 여성이나 창녀도 근본적으로 불만 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독립한 여성에게 보다 많은 어려움이 뚜렷이 니타난다. 그것은 체념을 택하지 않고 투쟁을 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적인 문제는 죽음속에서 침묵의 해결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살려고 노력한 여성은 의지나 욕구를 포기한 여성보다 더 타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후자를 본받으라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 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남성과 비교했을 경우이다.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책임감을 갖고 세상과 치열한 투쟁을 계속해 온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뿐 아니라 행복한 성적 모험에서 오는 긴 장의 완화와 기분전환을 원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게 이런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환 경이 남아 있다. 만일 그녀가 이 자유를 행사하면 금세 평판이 나빠져서 일생을 망칠 위 험을 무릅쓰게 된다. 적어도 세상은 그녀에게 괴로운 위선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성이 사 회적인 존경을 받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눈을 감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십중 팔구는 엄격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장 유리한 경우에도 -즉 남의 이목을 두려워할 필 요가 없을 경우에도- 여성의 입장은 남성과 동등하지 못하다. 이 차이는 전통에서 비롯되 기도 하지만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지니고 있는 개성적인 성질에도 그 원인이 있다. 육체의 흥분을 진정시키고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일시적인 포옹을 남성은 쉽게 경험 할 수 있다. 여성을 위한 사창가를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여성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있었 다. (17호)라는 소설에서 여성이 '택시보이'라고 부르는 남성을 상대로 '성적 위안'을 얻 기 위해 가는 집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이런 시설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창녀들만 출입했다. 창녀들은 언제나 손님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자기가 돈을 내게 되자 무척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의 기둥서방들은 그 집을 폐쇄시켰다. 이런 해결 방 안은 어리석고 공상적일 뿐만 아니라 동의할 수도 없으며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여성 은 남성처럼 기계적으로 위안을 얻지 못한다. 그런 상황은 대다수의 여성들에게는 관능적 인 위안으로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될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방법은 현재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하룻밤이나 한 시간의 남성 파트너를 거리에서 주워오는 해결법 -설사 그것이 모든 자기 억제를 극복할 수 있는 억센 기질을 타고난 여성이 혐오감 없이 남성과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은 남성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다. 성병에 대해서도 전염 에 주의하는 쪽은 오히려 남성이므로 위험은 여성에게 더 크다. 그리고 아무리 신중을 기 해도 임신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낮선 타인과의 관계 -난폭한 형태로 성립 되기 쉬운 관계- 에 있어서는 남녀의 체력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남성은 자기 집으로 여성을 데리고 와도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조금만 경계하면 된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을 집으로 데리고 올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인 데 두 사람의 젊은 여성이 파리에 와서 견문을 넓히려고 대형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돈 후 에 몽마르트르에서 두 사내를 초대했다. 두 여자는 결국 소지품은 물론 폭행과 협박을 당 했다고 한다.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는 이혼한 40세 여성의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는 세 아이와 늙은 부모를 양육하기 위해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했다. 아직 아름답고 매력도 남아 있었으나 사교생활을 하거나 모양을 내거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적 당한 상대를 유혹하여 연애할 여가는 전혀 없었다. 하긴 그런 유혹 같은 것은 그녀에게 지겹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욕구는 대단히 간절했다. 자기도 남성과 같이 정욕을 진정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때때로 밤이 되면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남성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어느날 밤, 불로뉴의 무성한 숲속에서 한두 시간 남자와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고 하는데 상대방 남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때 이름과 주소를 묻고 또 만나자고 하면서 같이 살기를 원했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자 남자는 화가 나서 그녀를 마구 구타했 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협박하고는 그녀 혼자 놓아두고 가버렸다. 여성이 애인에게 애정을 느낄 경우 남성이 정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처럼 그를 돌봐주 고 생활을 도와주고 싶어도 그것은 돈많은 부인만 가능한 일이다. 남성에게 돈을 주고 그 를 도구로 만들어 한껏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는 그런 거래에 만족하는 여성도 있다. 그러 나 색정과 감정을 분명하게 분리하려면 상당히 나이를 먹어야 할 것이다. 젊은 여성의 경 우에는 이 양자의 결합은 앞에서도 보아온 것처럼 대단히 깊어진다. 남성의 경우에도 이 육체와 의식의 분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여성의 대다수는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기만이 따르므로 여 성은 남성보다 훨씬 민감하다. 돈을 지불하는 손님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 있 는 셈이다. 상대는 손님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자존심은 색정극 의 애매성을 잘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자진하여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모욕을 느끼기 쉽고 한층 민감하므로 남성보다 머리가 명석하다. 그러므로 한결 교묘한 속임수가 아니면 그녀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남성을 돈으로 사는 것은 설사 여성에게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정욕을 충촉시키면서도 인간의 폼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남성은 즐기고 있을 때에나 여성으로 하여금 즐기게 할 때에도 유일한 주체로 자처한다. 그리하 여 오만한 정복자가 되거나 관대한 증여자가 되거나 혹은 이 양자를 겸하게 된다. 반대로 여성에서는 남성을 자기의 쾌락에 봉사하게 하면서 자기가 준 증여로 남성의 정욕을 채우 게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하거나 남성의 마음을 끌도록 친절을 부리는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남성의 정욕을 부추긴다. 그 래서 자기의 욕구충족을 남성에게 강요할 때조차 그의 정욕을 만족시켜준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성은 자기에게 유리한 확신을 갖고 진심으로 관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을 유혹할 때에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푸른 보리)에서 '백의 여인'은 필의 애무를 갈망하면서도 거만하게 그에게 말한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이나 굶주린 사람밖에는 사랑하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남성이 자 기에게 애원하도록 교묘히 유도하고 있다. 콜레트는 쓰고 있다. "그녀는 갑갑하고 어두운 왕국으로 달려갔다. 그 왕국에서 그녀의 자존심은 하소연을 비참한 고백으로 생각하며 그 녀와 같이 졸라대는 여성처럼 자유의 환상을 마시게 된다." 바랑 부인(루소의 후원자이고 애인이었던 여성)은 이런 여성의 전형이다. 자기의 욕구에 관대한 인상을 주기 위해 연하 의 애인이나 불행한 애인 등 자기보다 한 단계 신분이 낮은 애인을 택한다. 그러나 개중 에는 튼튼한 남성을 상대하는 대담한 여성도 있다. 그녀는 상대방 남성이 예의나 공포에 의해서만 굴복할 경우에도 그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성을 함정에 빠뜨려 붙잡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여 성이 있는가 하면 자진하여 몸을 맡기면서도 자기는 빼앗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나는 얻는 편이에요." 하고 어떤 젊은 여기자가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사실상 폭 행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 일에 있어서는 아무도 타자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말 을 하는 여성은 이중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남성은 혈기를 앞세워 공세를 취하여 유 혹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적극적으로 상대방 여성의 동의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앞 에서 인용한 스탈 부인의 경우는 별도로 치더라도 대부분의 여성은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녀는 자기 몸을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대다수 의 남성이 자기들의 역할에 매우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개별적으로 정감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또 그들은 일반성 속에(동물적으로) 여성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역할 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역할을 맡게 되면 그들은 상대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한 다. "남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성은 남자를 두렵게 해요." 하고 어떤 젊은 남성이 내게 말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어른들이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자가 주도권을 쥐는 것은 질색이야." 여성이 너무 세게 나오면 남성은 꽁무니를 빼게 된다. 남성은 정복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는 단지 남성의 먹이가 되면서 그를 잡는 수밖에 없 다.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며 복종을 약속해야 한다. 만일 여성이 성공하면 그녀는 이런 마술적인 수단을 스스로 실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자주성을 재발견했다고 생각할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의 경멸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녀가 자진하여 보인 호의를 남성에게 거절당하면 큰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 문이다. 남성도 여성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되면 몹시 화를 낸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단지 자기의 기도가 실패한 것뿐이다. 한편 여성은 홍분, 기대, 약속 가운데서 스스로 육체가 될 것에 동의한 것이다. 여성은 자기 몸을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은 잃어버린 상태로 있다. 이와 같은 패배에 초연하다면 맹목적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총명한 것이다. 설사 유혹에 성공하더라도 승리는 역시 애매하다. 사실 세론에 의하면 이기는 것 은 남성이며 그는 여성을 소유하게 된다. 여성은 남성처럼 자기의 욕망을 자주적으로 충 족시키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욕망의 먹이이다. 남성은 그 개성에 종으로서 의 힘을 통합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종의 노예이다. 여성은 때로 순 수한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된다. "마리, 거기에 누워. 너의 몸뚱이 위에 타보지 않은 것은 버스뿐이야," 이처럼 여성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고 개방되어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녀는 성적 흥분이라는 마술 에 호락호락 넘어가며 남성에 의해 매혹되어 마치 나무열매처럼 따먹힌다. 때로 그녀는 소외된 능동성의 존재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질 안쪽에는 남성의 정액을 먹으려 는 탐욕스러운 뱀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 아무튼 여성을 단순히 자귀롭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자유로운 여성과 유혹에 약한 여성을 혼동하는 버릇이 있다. 약 하다는 관념 속에는 저항이나 억제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부족이나 자유의 부정이 라고 할 수 있다. 여류문학은 이 편견과 싸우려고 했다. (그리젤리디스)에서 클라라 말로는 그 여주인공이 유혹에 이끌려가지 않고 자기가 요구 하는 행동을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여성의 성적인 행동에서 자유를 인 정하기 때문에 대단히 활발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남성이 '자고 싶은 여성' 을 경멸 하는 체하면서 그녀들의 호의를 이용하여 많은 여성을 불감증에 빠지게 한다. 그녀들은 말썽을 일으키거나 남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질색이다. 뜬소문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상대하는 남자와의 거래 자체에서 실제로 어려움 을 겪게 된다. 여론은 남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때문이다. 대개 남성은 침대를 공격적인 우위성의 활동무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받으려고 하지 않고 가지려고 한다. 교환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빼앗으려고 한다. 여성이 그에게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여성 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는 여성의 동의가 패배이기를 바라고 여성이 속삭이는 말이 자 기가 그녀에게서 억지로 이끌어낸 고백이기를 바라고 있다. 여성이 남성의 쾌락을 인정하 는 것은 스스로 남성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된다. 클로딘이 신속하게 르노에게 순종하려고 할 때 르노는 선수를 써서 그녀가 자진하여 몸 을 맡기려고 할 때조차 강제로 그녀를 소유하려고 한다. 그 싸움에서 그녀가 눈을 뜨고 자기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려고 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도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자인 페 랄은 발레리가 끄려고 하는 전등을 굳이 켜놓으려고 한다. 자존심이 있고 권리를 요구할 줄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접근할 때는 적대자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여성의 무기는 남성보다 훨씬 약하다. 먼저 남성에게는 체력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를 강요 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앞에서도 보아왔듯이 남성의 성욕에는 긴장과 능동성이 잘 조화되지만 여성은 수동성을 거부하면 자기를 관능적인 향락으로 이끌어가는 유혹을 저버 리게 된다. 그 태도나 움직임에 있어서 상대방을 지배하는 시늉을 하면 쾌락에 잘 도달할 수 없다. 자존심에 구애받는 여성의 대다수는 불감증에 걸리게 된다. 애인에게 지배적이 거나 혹은 자학적인 경향을 만족시켜주는 남성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종에 서 완전한 성적 만족을 얻는 여성은 더욱 드문 것이다. 여성에게는 이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조히즘의 방법이다. 종일 일 하고 싸우고 책임을 지고 모험을 하면 밤에 자극이 강한 흥분상태에 몸을 맡기는 것은 휴 식이 된다. 사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성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여성이 남성의 강압적 인 의지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분명히 자기가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 날마다 남성들 속에서 살고 있는 여성은 좀처럼 남성의 무조건적인 지 상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조히스트는 아니지만 대단히 '여성다운', 지금까지 남 성의 품에서 자기포기로 기쁨을 맛본 여성의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17세 때부터 여러 차례 남편을 바꾸고 애인을 잇따라 사귀어 크게 만족을 느낀 이 여성은 어떤 어려운 일도 무난히 해내었다. 그녀는 그 일을 하는 동안에 남성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불감증에 걸렸다고 투덜댔다. 즉 그녀는 남성들을 휘어잡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 면서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자기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이 남성의 우월성 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남성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남성에게서 느끼는 존경심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침대에서 남성이 거칠게 나올 때 그가 과시하려는 남성다움 도 노련한 여성의 눈에는 유치해 보인다. 그는 단지 그녀에게 오래된 거세 콤플렉스나 그 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나 혹은 그밖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여성이 애인의 자의에 좌우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가 상대 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인생의 한순간을 살고 있는 어른이지 혼자서 지껄이는 어린애가 아니다. 마조히스트인 여성은 남달리 환멸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일도 용서해야 하는 모성 애적인 친절은 그녀가 몽상하고 있던 자기포기가 아니다. 그녀는 남성에게 지배되고 예속 되어 있는 체하면서 어리석은 유희에 만족하거나 혹은 훌륭한 남성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상대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혹은 불감증이 되거나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녀가 서로 대등하다고 인정하게 되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유 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녀의 어느쪽에도 다소의 겸손과 약간의 관용만 있으면 승리와 패배의 관념은 없어진다. 그리하여 사랑의 행위는 자유로운 교환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 으로 말하면 이성인 개인을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더 어렵다. 남성쪽이 우월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은 많은 여성에게 다정한 존중을 바칠 수 있다. 그들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성은 우선 애인을 전과는 다른 세 계로 유도하여 그가 자기 곁에서 탐색하도록 하는 특권을 갖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한동 안 호기심을 일으키거나 즐거워한다. 다음엔 여성의 입장이 한정되고 종속적인 것이므로 그녀의 모든 장점은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잘못은 모두 용서하게 된다. 스탕달은 레날 부인과 샤스텔레 부인이 모두 마땅치 않은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칭찬하 고 있다. 여성은 잘못된 생각을 하거나 별로 지적이지 않다거나 통찰력이 부족하거나 용 감하지 못해도 무방한 것이다. 남성은 그런 여성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남성은 그녀는 그 상황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대체로 옳다. 남성은 이 여성이 전에 이러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고 상상한다. 그녀는 전혀 한 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외상을 줄 수 있고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곧 여성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지만 이 때문에 남성 을 유혹하여 쉽사리 애정을 느끼게 하는 신비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남성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성은 남에게 의존 하지 않고 존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을 사랑하려면 그 현존, 그 진실 속에서 이지 애매한 약속이나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다. 그는 자기 행동이나 사상에 책임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변명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의 행위, 목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으면 그 와의 우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쥘리앙은 정통왕조파(사상적으로 그의 반대파)의 여성을 사랑할 수 있으나 라미엘(스탕달의 소설의 여주인공)은 자기가 경멸하는 사상을 가진 남 성을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타협해도 좋을 듯이 보이지만 여성은 좀처럼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남성이 유년시절의 초록빛 낙원을 그녀에게 열어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기들 두 사람에겐 공통된 이 현실세계에서 그를 만난다. 남성은 자기자신만을 내세운다. 그는 이기적이고 완고하여 상대에게 몽상을 즐기게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면 여성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는 점잔을 뺀다. 재미가 없고 따분한 인간이라 옆에 있으면 갑갑하다. 다만 아주 젊은 남성이라면 그의 주위에는 거리낌없는 동화 같은 분위 기가 조성된다. 그래서 신비나 미래의 약속을 구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는 구실을 찾아볼 수도 있다. 또 그들을 가볍게 다룰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숙한 여성에게 매력적으 로 보인다. 그런데 대개 젊은 남성은 젊은 처녀를 좋아한다. 여성도 30대가 되면 성년의 남성 쪽으 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그녀는 필시 그런 남성들 가운데서 존경이나 우정을 손상시 키지 않을 남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남성이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그녀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그녀가 몸과 마을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한 편의 이야기, 하 나의 연애극을 연출하고 싶을 때 여성에 대해 우월감을 갖지 않고 여성도 자기와 대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남성을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은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여성은 문제를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회를 잡는다. 자존심이나 관능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해결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그녀는 실망, 굴욕, 회한, 원한 등을 은밀히 마 음속속에 숨기고 있다. 이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여성 쪽 이 훨씬 많다. 남성은 다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거기서 쾌락이라는 이득을 찾 아 내지만, 여성은 그 경우에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설사 그녀가 남성에게 냉담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예의상 포옹에 공손히 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남성이 무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면 여성은 어리석은 일에 애쓴 것을 괴 로워하게 마련이다. 만일 그녀가 쾌감을 느낄 수 없다면 속아서 노리개가 되었다고 느끼 게 된다. 그러나 정욕이 충족되면 언제까지나 애인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 쾌락을 기 대하여 일시적인 연애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때에도 그것이 진정한 마음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쾌락은 그녀를 해방시키기커녕 구속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합의에 따라 남성과 손을 끊었을 때에도 그녀는 상처를 입게 된다. 여성이 옛 애인에 대해 정답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경우는 남성의 경우보다 훨씬 드물다. 여성은 색정과 자유로운 성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일부일처제로 몰아넣는다. 교제나 결혼은 여성 쪽이 남성보다 직업과 조화되기가 훨씬 어렵다. 애인이나 남편은 그 녀에게 직장을 그만두기를 요구한다. 이때 여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망설이게 된다. 자기 쪽에서도 남성의 열정을 애절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의 사슬에 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자)와 비슷하다. 남자의 요구에 그대로 따르면, 그녀 는 또 다시 예속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거절하면 그녀는 따분한 고독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대개의 남성들이 자기의 배우자가 직장에 계속 나가는 것을 용납한다. 가정 의 평화를 위해 직장을 희생하는 젊은 여성을 다룬 콜레트이베르의 소설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 되어버렸다. 자유로운 두사람의 공동생활은 각자에게 풍요로움을 준다. 그리고 각자의 독립을 보장받는다. 자활이 가능한 여성은 남편을 부부생활의 노예상태에 서 해방한다. 남편의 노예상태는 그녀 자신의 노예상태의 대가이다. 만일 남성이 이해심 이 많은 친절한 사람이면 애인끼리나 부부는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고 관용 속에서 완전 한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 남성 쪽이 오히려 헌신적인 하인의 역할을 떠맡는 경우도 없 지 않다. 조지 엘리엇의 곁에서 루이스는 군주와 같은 남편에게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정의 조화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여성이다. 여성이 가정을 관리하며 혼자서 자녀를 돌보고 교육한다. 그리고 남성은 이것을 자연스러우며 당 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또 여성 쪽에서도 결혼하게 되면 그 생활에 뒤따르는 여러 가 지 일거리들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편이 여성다운 여성과 함께 살면 얻게 되었을 여러 가지 이득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한다. 아내라는 개념이 전통적으로 그렇듯이 그녀는 우아하고 좋은 주부가 되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려고 한다. 띠라서 일 이 고되게 마련이다. 남편을 위해 자기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자기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자신 인 동시에 남편의 그림자이고자 한다. 자기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 이상으로 남편의 걱정을 함께 나누고 그의 성공에 협력하려고 한다. 남성의 우월성을 존중하도록 교육을 받아왔으므로, 제1위를 차지하는 것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 로는 그 제1위를 빼앗으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면 가정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염 려한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확립하려는 욕구와 자기를 부정하려는 욕구가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그 열등성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하나 있다. 그녀는 출발점에서 남성만큼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자기쪽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불공평을 보상할 책임은 그녀에게 있지 않다. 그녀에게 그런 책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선량한 남성이라면 여성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 여성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씨나 인정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남성은 무 방비 상태이므로 남성에게 '달라붙고' 남성을 '삼켜버리는' 여성들의 먹이가 될 위험성도 있다. 남성과 같은 독립을 획득한 여성은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들과 성적으로 교섭을 갖는 큰 특권이 있다.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은 자기의 생활에 기생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들의 약점과 정욕의 요구에 따라 상대방 여성을 속박하지도 않을 것이 다. 다만 상대방 남성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성이 흔치 않은 것이다. 남성은 여성을 속박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여자들 스스로 구속의 쇠사슬을 멋대로 마음속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성에게 연애하는 여성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대와 꿈 과 희망의 20년 동안, 젊은 처녀는 자기를 구원해 줄 영웅의 신화를 마음속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직장을 통하여 독립을 획득해도 아직 광휘에 찬 자기포기의 욕구를 버릴 수는 없 다. 그녀가 처녀시절의 나르시시즘을 쉽사리 극복하려면 정확하게 남아와 마찬가지로 교육 을 받아야 한다. 그녀는 청춘시절에 빠졌던 자아숭배를 어른이 된 후에도 생활 속에 계속 해 나간다. 직업에서 성공하면 자신감이 생겨 자기 모습을 더욱 훌륭히 장식하려고 한다. 그녀는 하늘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자기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어 인정해 주 기를 바라고있다. 매일같이 그녀는 남성들을 평가하며 그 점수는 상당히 짜지만 그래도 역시 '남성' 을 경외하고 있다. 때문에 남성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그 발치에 엎드리는 시 늉을 한다. 신에 의해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자기만의 노력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기보다 쉬운 일이다. 세상도 그녀에게 주어진 이 구원의 가능성을 믿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므 로 그녀는 그것을 믿는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완전히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녀는 연애하는 여자에 불 과하다. 그녀는 때때로 타협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같은 연애, 자기를 포기하는 연애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 연애는 그녀의 모든 생각과 시간을 악착같이 점령하 여 전제적이 된다. 직장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그녀는 연애 속에서 열심히 피난처를 구한 다. 그녀의 실패는 히스테릭한 울부짖음이나 무리한 소원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며 애 인이 그것을 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직업에의 열의가 높아지 거나 하지는 않는다. 흔히 그녀는 커다란 연애에의 왕도를 가로막는 그런 생활양식에 대 해 화를 낸다. 여성들이 편집하는 어느 시사잡지에서 10년 동안 일한 여성이 내게 말하기 를, 직장에서 정치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언제나 연애 이야기만 했다고 한 다. 어떤 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육체만 사랑한다고 불평하는 가 하면 어떤 여성은 이와 반대로 남성은 여성의 관능적인 매력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여성의 지성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투덜댄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남성과 대등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또 실제로 대등해야 한다. 그리고 기 획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결의로 참가해야 한다. 이제부터 이에 대해 고찰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아직도 그리 흔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인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여성의 직능이 하나 있다. 그것 은 모성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산하제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어머니의 역 할을 거부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프랑스에서는 고통스럽고 비용이 드는 낙태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여성은 자기가 원하여 낳은 것 도 아닌데 아기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 여성에게 아이에 대한 부담이 많다 는 것은 여성이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낳는 것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기때문이다. 사생아의 어머니는 스캔들의 표적이 되고 아이에게도 비합법적인 출산은 결함이 된다. 여성이 결혼 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혹은 육체를 망가뜨리지 않고 어머니가 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인공수정이 많은 여성에게 흥미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은 그녀들이 남성의 포옹을 싫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모성이 이윽고 사회에서 인정받게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 이다. 시설이 좋은 탁아소나 유치원이 없기 때문에 여성의 능동성을 마비시키기 위해서는 아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는 아이를 부모, 친구, 하녀에게 맡기지 않으면 직장에 서 일을 계속할 수 없다. 불임과 부담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불임은 대부분의 경우에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부담을 받아들이면 일과 양립하기 어렵게 된다. 오늘날 자유로운 여성은 직업에 대한 관심과 성의 사명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그 균형을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양보를 하거나 희생을 치르거나 곡예와 같은 재주를 부려야 하며 또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흔히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신경질이나 연약성의 원인은 생리학적인 조건보다는 방금 언급한 말 속에 있다.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가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핸디캡을 주고 있는가를 결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중에서 월경장해가 문제시되는 경우도 많지만 일이나 행동 에 의해 이름이 알려진 여성의 경우를 보면 그런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달마다 겪은 장해가 가벼웠기 때문에 그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반대 로 활동적이고 야심적인 생활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런 특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 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성은 이런 생리적인 불쾌감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운동선수나 활동적인 여성은 그 고통을 그다지 문제시하 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처럼 괴로워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 고통은 생리적인 원인에 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례에 이런 것이 있다. 가장 정력적인 부인이 매월 24시간 동안 침대에 누운 채 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나 그 때 문에 그녀가 하는 일에 지장을 받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여성을 괴롭히는 불쾌 감이나 병의 대부분의 원인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부인과의사의 견해도 마찬가 지이다. 앞에서 말한 정신적인 긴장이나 해야 할 노력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모순 때문에 여성은 힘을 완전히 소모하여 기진맥진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병이 결코 상상 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 병이 나타내는 여성의 상황이 현실적인 것처럼 병도 현실적 인 것이며 괴로운 것이다. 여성의 상황이 그 신체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상 항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직업여성이 사회에서 당연한 지위를 차지하더라도 그것에 신경 을 쓰지않게 되면 신체의 균형이 잘 잡히게 된다. 여성의 직업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것이 이루어졌나를 분명히 알고 거기서 장래를 예상 할 때,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 전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괴로운 처지에서도 여 성이라는 것 때문에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 부담을 진 채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에 종사한 다. 객관적인 여건도 여성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신참자로서 적의를 갖고 있거나 적어 도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 속에서 하나의 길을 닦으려고 하면 언제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블랙 보이) 에서 젊은 아프리카 흑인의 야심이 처음부터 얼 마나 방해를 받았으며, 백인의 경우라면 겨우 출발점에 불과한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에도 얼마나 오랜 투쟁을 해야 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에 온 흑인들도 -자기자신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비슷한 곤란을 겪고 있 다. 여성이 열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은 먼저 그 수업시절에서이다. 앞에서 젊은 처녀 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말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공부하는 동 안, 즉 그녀가 직장에서 일한 처음 몇 해 동안, 이 가장 중요한 몇 해 동안에 조금도 망 설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많은 여성들은 언제나 출발점에 서부터 핸디캡을 갖게 마련이다. 실제로 18세에서 30세 사이에 앞에서 말한 것 같은 정신 적인 갈등이 극한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이 자기 직업의 장래를 결정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가족과 함께 살거나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거나 여성의 노력은 남자의 그것처 럼 주위사람들이 존중하는 경우가 드물다. 여러 가지 용무나 힘든 일을 그녀에게 강요하 고 그녀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녀 자신은 아직 교육으로 틀에 박혀 있다. 언니들이 따르 는 가치를 존중하고 유년기나 청춘기의 꿈이 떠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녀는 과거의 유산과 미래의 이득을 원만히 조화시키지 못한다. 때로는 여성 으로서의 자기 운명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순결이라든가 동성애, 남성화된 처녀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녀는 일부러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변장도 한다. 도전적 인 태도, 연극, 분노, 이러한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다. 한편 자주 여성다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녀는 마조히즘과 공세적인 태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교태를 부리 고 남성을 유혹하고 사랑에 빠진다. 의문에 빠지고 동요하고 힘을 분산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기 일쑤이므로 올바른 기획에 전력투구를 하지못한다. 결국 자기가 히는 일에서 이득도 별로 취하지 못하며 그 일을 포기하기가 쉽다. 자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여성의 정신상태를 크게 악화시키는 것은, 그녀들과 같은 사 회에 속하여 출발점에서는 같은 여건과 기회를 갖고 있으면 기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존재이다. 남성은 특권계급에 속하는 자들을 보면 기분이 상하지만 자기 계급에는 연대성을 느낀다. 대체로 남성은 출발점에서 기회가 균등하면 거의 같은 생활수 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은 같은 조건이라도 남성의 매개에 의해 많은 차이가 생 긴다. 친구가 결혼하거나 혹은 남의 덕에 편안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 힘으로 성공해 야 하는 여성은 유혹을 느낀다. 어쩐지 자기는 일부러 고생이 가장 많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의 장애에 부딪칠 적마다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았 을까 하고 자문자답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 머리로만 해결해 나가야 하다니요!" 하고 어느 가난한 여학생이 불만스럽게 나한테 말한 적이 있다. 남성은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움직인다. 여성은 언제 나 결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 목표를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전진한다. 소심하고 자신이 없는 발길이다. 그녀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녀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유식하고 머리가 좋은 여성을 달 가워하지 않는다. 여성이 지나치게 성공하면 남편이나 애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그 래서 그녀는 그만큼 자기를 더 경박한 여성으로 보이려고 할 뿐 아니라 도약하려는 힘을 무리하게 억제한다. 언젠가는 자기 자신의 일 때문에 일어나는 걱정에서 해방되고 싶은 희망과 자기 일에 매여 있으면 앞으로 편안히 살아갈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걱정이 합 세하여 연구나 직업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한다. 여성이 여성이기를 원하는 한, 그녀의 자주적인 입장에서 일종의 열등감이 생기게 된 다. 반대로 그녀의 여성다움은 그녀에게 직업에서 성공할 기회를 의심케 한다. 이것이 가 장 중요한 문제점이다. 이런 사례가 있다. 14세의 소녀들에게 앙케이트를 제출했더니, 그 녀들은 저마다 "소년들이 더 유리하다, 그들은 쉽게 공부할 수 있다." 고 대답하는 것이 었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재능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부모나 선생들이 소 녀의 지적 수준은 소년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학생들조차 그렇게 생각 한다. 사실 고등학교에서는 수업내용이 같지만 여학생의 교양은 남학생에게 떨어진다. 예 외는 있겠지만 철학 과목의 여학생반은 남학생반보다 성적이 확실히 떨어진다. 여학생의 대다수는 언제까지나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없다. 그녀들은 형식적으로만 공부한다. 그래 서 학구열이 있는 여학생들도 경쟁심을 잃게 된다. 시험이 쉽게 출제되면 그녀들의 실력 부족이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중요한 시험을 치르게 되면 여학생들은 실력부족을 진심으 로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 부족의 원인을 공부하는 방법이 서툴렀기 때문으 로 생각지 않고 성이라는 불우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불 평등을 체념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성공의 기회가 인내와 근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려고 결심한다. 이것은 참으로 졸렬한 사고방식이다. 특히 창의나 독창성, 또는 세 밀한 고안을 필요로 하는 연구나 직업에서는 이런 타산적인 태도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다. 토론이나 과외 독서, 또는 정신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산책 등은 그리스어의 원 전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따분하게 편찬된 두꺼운 문법책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양심적 인 여학생은 권위의 존경이나 박식의 무게에 눌리고 눈을 가리고 일정한 방향만 보이게 하여 비판정신과 지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그 악착스러운 방법은 긴장과 권태를 가져온 다. 세브르(프랑스의 유명한 여자고등학교)의 입시 준비를 하고 있는 반에서는 조금이라 도 발랄한 개성은 질릴 수밖에 없는 숨막히는 분위기에 지배되어 있다. 수험생은 스스로 도형장을 만들고 있지만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일단 책을 덮으면 전혀 다른 생각 을 하게 된다. 그녀는 공부와 오락이 함께 융합되는 풍부한 시간, 정신적인 모험이 열을 올리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맥이 풀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남녀공통의 선발시험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 하려고 했던 어떤 여학생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한두 해만 공부하면 합격하겠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4년은 걸려요." 언제나 시 험에 잘 출제되는 칸트의 철학책을 읽고 준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다른 여학생은 "그 책 은 너무 어려워요. 그건 남자들이나 읽을 책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성은 시험 에서 가산점수라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패배의식 을 갖고 출발하기 때문에 성공할 기회를 송두리째 남성에게 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배주의 때문에 여성은 대수롭지 않은 성과로 만족하기 쉽다. 그녀들은 감 히 큰 희망을 갖지 못한다. 표면적인 소양만 몸에 지닌 채 일을 시작하고 큰 야심을 억눌 러버린다. 그럭저럭 자활할 수만 있어도 큰 업적을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많은 여 성들처럼 자기 운명을 남성의 손에 맡길 수도 있다. 자주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아직도 많 이 노력해야 한다. 그녀는 그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그 때문에 피로를 자초하게 된 다. 뭔가를 손수 해보려고 선택한 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대견하게 느껴진다. "여성으로서 는 이것만으로도 대단해." 하고 생각한다. 선례가 없는 색다른 직업을 택한 어떤 부인이 "만일 내가 남성이라면 일류가 되어야 한 다고 느꼈을 테지만,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프랑스에서 나 하나뿐이므로, 나로서는 이것으로 만족해요." 하고 말한 기억이 난다. 이런 겸손에는 조심성이 깃들어 있다. 여성 은 더 출세하려다가 좌절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여성은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겁쟁이가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상류계급은 하류계급의 출세자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 백인은 흑인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남성은 여의사를 싫어한다. 그리고 하류계급 출신 중에서 그 들의 특유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운명을 극복한 사람에게 강한 반감 을 느끼고 있으며 이들도 권력자 쪽에 가담하려고 한다. 남성에 대한 존경심이 몸에 밴 여성은, 특히 의사, 변호사, 사장 등의 직업에서 그런 남성을 열심히 찾는다. 남녀를 막 론하고 여성의 지시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 윗자리에 있는 남성들이 설사 여성을 존중한 다 해도 언제나 여성에게 다소의 동정을 베풀기를 잊지 않는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인간적인 결함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특질이 기는 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뢰를 받지 못한 여성은 그 신뢰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은 출발점에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여성은 어떤 증거를 보여야 한다. 만일 그녀가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주어진 본질이 아니다. 훌륭히 발전하여 좋은 결과에 도달 하는 것이다. 불리한 편견이 자기에게 무거운 부담이 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 편견 을 극복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보적인 열등감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방어의 반동을 일으켜 과장된 오만을 가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의사는 대다수가 그런 과장이 많거나 또는 너무 적다. 만일 그녀들이 자연 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면 위험이 없어진다. 여성으로서의 생활 전체로 보아 그녀들은 명령하기 보다는 오히려 유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한 명령을 받기를 좋아하는 환 자는 단순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면 실망한다. 이 사실을 의식한 여의사는 일부러 단호 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녀는 자신만만한 남자 의사의 호감을 사는 원만 한 인간성을 잃게 된다. 남성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길들여져 있으므로 환자는 그의 능력 을 믿는다. 그는 마음대로 행동하여 믿음직스러운 인상을 준다. 여의사는 환자에게 그런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경직되거나 망설이는 등 지나친 반응을 보인다. 사무, 관 리에서 그녀는 사소한일에 구애되고, 걸핏하면 도전적인 태도를 보인다. 연구할 때와 마 찬가지로 그녀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원만한 태도나 자유로운 비약이나 용기가 결여되어 있 다. 성공하려고 안달을 한다. 그녀의 행동은 도전과 추상적인 주장만 되풀이한다. 여기에 확신의 결여에서 비롯된 최대의 결함이 있다. 주체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너그 러운 마음으로 목표를 항해 전진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에 요구하는 가치의 증거를 제 시하려고 노력한다. 담대하게 목적달성을 위해 매진하면 후회하게 될지 모르지만 한편 뜻 하지 않은 성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심성은 평범이 되어버린다. 모험이나 무상의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취미나 순수한 지적인 호기심 등은 여성에게서 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여성들이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경력을 갖고 싶어한다.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 지배되고 에워싸여 그 천장을 뚫을 용기가 없다. 정열적 으로 자기의 기획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기 삶을 여전히 내재적인 기획처럼 생 각하고 있다.어떤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하여 주관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이것은 특히 미국 여성들의 특징이다. 그녀들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어하며 그 직업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녀가 하는 일의 내용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다. 여성은 작은 실 패나 평범한 성공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기가 소침해지는가 하면 오만해지 기도 한다.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 일을 가볍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남들이 의혹의 눈으로 보는 일에 성공하면 승리감에 도취된다. 여성이 광적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사소한 성공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지나온 길을 재어보므로 비약이 저해된다. 이런 방법으 로 명예로운 일은 할 수 있겠지만 위대한 일은 하지 못할것이다. 여기서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남성도 대다수가 극히 평범한 운명밖에 개척하지 못한다. 여성이 -극히 보기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아직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약자로 보이는 것은 남성들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여러 가지 이유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장래의 일은 알 수 없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할 경우에 오 늘의 여성에게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자기망각이다. 자기를 잊으려고 하면 우선 정확한 자기발견을 확인해야 한다. 남성의 세계에 막 들어온 신참자로서 남성의 도움을 별 로 받지 않은 여성은 아직도 자기탐구에 전념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적용되지 않는 부류에 속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녀들의 직업이 여성다움을 주장하는 것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조건을 예술적인 표현에 의해 초월하려고 하는 여성들, 즉 여배우, 무용가, 성악가 등이다. 그녀들 은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자유를 독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며 지금도 특권적인 지 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에는 여배우라는 직업은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앙왔다. 이런 지나친 엄격성이 오히려 그녀들에게 커다란 도덕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남성의 색정적인 유혹에 익숙하여 창녀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남성들에게 에워싸여 보내고 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속박 에서 벗어난 그녀들이 누리고 있는 큰 이득은, 직업상의 성공이 남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실현 하면서 동시에 여성으로서도 자기를 완성한다. 여러 가지로 상반되는 갈망 사이에서 분열 되기는커녕 나르시시즘을 자기 일을 통해 정당화할 수 있다. 즉, 의상, 화장, 매력 같은 것 이 그 직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 기를 보여주면서 활동한다는 것은 자기 모습에 매혹되어 있는 여성을 크게 만족시킨다. 이 전시는 행동의 대용(이것은 조르제트 르블랑의 말이지만)이 될 정도로 상당한 기교와 연 구를 필요로 한다. 유명한 여배우가 되면 더욱 높은 이상을 갖게 된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그 여건을 초월하여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세계에 의미를 제공하면서 자기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이 특권에도 함정이 숨겨져 있다. 여배우가 나르시시 즘의 기쁨이나 허용된 성의 자유를 자기 예술생활의 일부로 삼지 못하고 자기숭배나 색욕 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이런 가짜 예술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영화, 영극을 통해 남성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용할 수 있는 자본으로 서의 명성을 얻을 생각만 하고 있다. 남성의 도움을 받는 것은 편리하므로 직업상의 위험 이나 대부분의 노동에 따르는 엄격성에 비하면 유혹을 느끼기 쉽다. 여성다운 운명, 즉 남 편, 가정, 자녀를 갖고 싶은 욕구와 사랑의 매혹과 출세하려는 의지는 좀처럼 조화되기 어 렵다. 그런데 특히 그녀가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탄은 여배우로서의 재능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단지 거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진실한 일도 하찮게 본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자기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여 졸렬한 연기로 자기 배역을 망쳐버린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망각하는 고귀한 정신이 없다.그러므로 자기를 초 월할 가능성도 없어진다. 라셸이나 뒤세 같은 여배우는 이런 암초를 뛰어넘은 보기 드문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예술을 자아의 하인처럼 여기지 않고 자기의 개성을 예술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가짜 여배우는 그 사생활에서 나르시시즘의 모든 결함을 드러내보인다. 허 영심이 강하고 민감하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전세계를 연극 무대처럼 생각한 다. 오늘날의 여성에게 표현 예술만 허용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여러 가지 창 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성은 환경 때문에 문학이나 예술에서 구제를 찾기 쉽다. 남성 세계의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여성은 그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을 파악하지 못한다. 특수한 하나의 관점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다. 그 세계는 그녀에게는 도구나 개념의 전체가 아니 라 감동이나 정서의 원천이다. 그녀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상의, 그리고 은밀한 사물의 성질이다. 현실에 대하여는 부정과 거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현실 속에 몰입하지 못 한다. 그녀는 말로만 현실에 항의한다. 자연을 통하여 자기의 영혼의 모습을 찾는 몽상에 빠진다. 그녀는 자기의 존재에 '도달'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그 실패를 상 상의 영역에서밖에는 만회하지 못한다. 유인한 목적을 갖지 못한 내면생활의 허무 속에 빠 지지 않기위해 그리고 반항하면서 따르고 있는 주어진 여건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기위해 자기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와는 별도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를 갖게 된다. 그래서 여성은 수다쟁이와 낙서가로 알려지게 된다. 대화, 편지, 일기에 자 기 생각을 쏟아붓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약간의 야심만 있느면 그녀는 수기, 자서전, 소 설을 쓰고, 자기 감정을 시로 펴현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이런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많 은 여가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여성을 창조활동으로 향하게 하는 환경ㅇ이 오히려 장해가 되어 극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매일의 심심풀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려고 해도, 그 그림 이나 글은 규수의 작품으로 취급되므로, 더 이상 시간이나 공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러므로 그 작품은 그 정도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 여성이 자기 실존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붓과 펜을 들어 작품활동에 전념하는 것은 갱년기 이후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늦다. 제대로 훈련을 거치지 못했으므로 아마추 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훨씬 젊었을때부터 시작하더라도 예술을 진지하게 생 각하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그녀는 무위에 길들여져 있고 실생활에서 엄격한 수련의 필요 성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끈기 있는 노력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기술을 습득 하기 위해 고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번번이 망가뜨리고 다 시 시작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 혼자 암중모색하는 노력을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호감을 사려면 속임수를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왔으므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책략으 로 해결하려고 한다. 마리 바슈키르체프가 고백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 나는 애써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 나는 내 자신을 관찰했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다..." 그녀는 일하는 연기는 좋아하지만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마술적인 힘을 믿어 마술과 행위, 상징적인 태도와 효과적인 행동을 혼동한다. 미술학교 학생으로 변장하고 화구를 손에 든다. 이젤 앞에 앉아 눈길은 흰 화폭과 거울 사이를 이리 저리 방황한다. 그러나 꽃다발이나 사과바구니는 제 발로 캔버스 위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 다. 책상 앞에 앉아서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자기는 작가라고 상상하 는 것으로 평온한 알리바이(부재증명)를 확보한다. 그러나 사실은 백지 위에 글자를 써야 하며 그 글자가 남의 눈에 어떤 의미를 갖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속임수는 정체를 드 러낸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충분하지만 예술작품은 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확고한 객제이차. 이것을 만들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콜레트가 위 대한 작가가 된 것은 단지 타고난 재능이나 기질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의 펜은 생활의 도 구였다. 솜씨가 좋은 장인이 그 도구로 공들여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는 공들여 작품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클로딘>에서 <하루의 탄생>까지 아마추어에서 전문가가 되어 갔다. 그 과정을 동아보면 엄한 수련의 결실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전달이라는 욕구에 어떤 문제가 숨어 있는가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녀들의 나태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자기를 주어진 일정 한 존재로 생각해 왔다. 지금도 재능은 은총처럼 그 사람의 내부에 담기는 것으로 믿고 있 다. 그녀들은 재능을 노력하여 얻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매혹시킬 때에도 있 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밖에는 모르고 있다. 타고난 매력이 작용하느냐 못하는냐 의 문제일뿐이다.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에 대해 행동의 발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마 찬가지로 흔히 자기를 표현하려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반성하면 서 공들여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글을 쓰는 것과 미소를 짓는 것이 동일하다. 그녀들은 자기의 운수를 시험해 본다. 성공하면 다 행이고 실패해도 그만이다. 자기자신에게 확신을 갖거나 노력하지 않은 채 문학작품이나 그림에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소심하므로 조금이라도 언짢은 비평을 받으면 의기소침 해진다. 실수가 발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번 실수를 하면 불구와 마찬 가지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민감성을 보 여주기가 일쑤이다. 실수에세 많은 교훈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에 흥분하거나 낙심할 뿐 이다. 불행하게도 자발적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단수한 행위가 아니다. 평범한 역설 은- <타르브의 꽃>에서 폴랑이 설명하는 것처럼- 흔히 주관적인 인상의 직접적인 표현 과 혼동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기에게 형성된 이 미지를 가장 특이한 개성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겨우에도 그녀는 단지 평범한 틀에 박 힌 문구를 사용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것을 지적하면 그녀는 크게 놀라 야 속한 마음으로 펜을 내던진다. 그녀에게는 일반 독자는 자기 나름의 안목과 생각으로 읽으 며 대단히 신선한 표현이라도 독자들의 낡은 회상을 상기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자기의 내면에 파고들어 거기서 강렬한 인상을 포착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 는 것은 귀중한 재능이다. 콜레트의 작품에서 독자들은 남성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발성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비록 이 두 말이 모순되는 것 같 지만- 잘 반성된 자발성이다. 클레르는 어떤 인상은 거부하고 충분히 의식하는 것만을 받 아들일 뿐이다. 아마추어는 말을 개인 상호간의 관계나 타자에의 호소로 파악하지 않고 자 기 감수성의 직접적인 표현으로만 사용한다. 그런 사람은 말을 선택하거나 삭제하면 자아 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자기의 어느 부분도 희생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자기 를 쌓아올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 아끼기만 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허영심이 생기게 된다. 장난삼아 문학이나 예술을 하려고 하는 많은 여성들 중에 오래 계속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첫번째 장애를 뛰어넘은 여성들도 대개는 나르시시즘과 열등감 사이에서 머뭇 거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망각하지 못하는 결함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보다 귀찮고 무거 운 짐이 될 것이다. 그녀들의 주요한 목표가 자아를 추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며 성공이라 는 형태에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 녀들은 예술 속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려고 결심했다. 명예욕이라는 고정 관념이 그녀와 현실 사이에 개재한다. 사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 는다. 예술은 그녀에게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야심적이고 공허한 꿈만으로는 색채와 얼 굴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고귀한 심정으로 창작에 주력하지 않고 그림을 단지 생활의 장식 으로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문학작품이나 회화는 그녀가 본질적인 현실(그녀 자신)을 전 시하게 하는 비본질적인 매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흥미로운- 때로는 유일한- 주제는 그녀의 인경이다. 비제 르블렁 부인은 지칠 줄 모르고 화폭에 그녀의 정다운 모성 애를 그린다. 여루작가는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역시 자기에 대해 말 하고 싶어한다. 연극평에서도 필자의 키나 체격, 또는 머리색깔이나 성격의 특징 등을 추 측할 수 있다. 물론 자아라고 해서 언제나 혐오스러운 것은 아니다. 고백 이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은 없다. 다만 그 고백은 어디까지나 성실해야 하며 그 작가는 고백할 만한 내용 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성의 나르시시즘은 그녀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빈약하게 한다. 자기만을 응시 하고 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 자체가 틀에 박히게 된 다. 작품에서 자신의 진정한 체험을 발견하는것이 아니라 평범한 문구로 쌓아올린 공상적 인 우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들이 그 소설에서 뱅자맹 콩스탕이나 스탕달처럼 자아를 반 영했다고 해서 비난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어리석은 선녀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젊은 처녀는 생생한 현실에 두려움을 느껴 많은 불가사의를 이용하여 도피하고 있다. 유 감스럽게도 어른이 되어도 역시 세계나 그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그녀 자신을 시적인 안개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장 밑에서 진실이 드러나 매력 있는 성과 를 얻는 경우도 없지 않다. <먼지>니 <충실한 요정>이 있는 반면에 싱겁고 도피적인 소 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세상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 여성이 그런 세상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여성이 제라르 드네르발이나 에드거 앨런 포처럼 대담한 비사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소심함에 대해 여 러 가지 변명을 한다. 남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그녀는 자기가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으로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나닌가 하여 두려워한다. '규수작가'라는 말은 이제 좀 낡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불쾌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작가로서 남의 기분에 거역할 용기가 없다. 독창적인 작가는 살아 있는 동안 으레 어떤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새로움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불쾌하 게 한다. 여성은 남성이 다루는 영역인 사상과 예술의 세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깜짝 놀 라면서 기뻐한다. 그리고 매사에 조심한다. 감히 휘젓거나 깊이 파고 들거나 폭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고상하고 울륭한 취미를 보여서 문학을 하려고 한 뻔뻔 스러움을 용서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녀는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선택된 우아함, 감미 로움, 자부심 등을 통해 알리려고 한다. 이 모든것은 그녀가 '베스트셀러'를 쓰는 데 도움 을 준다. 그러나 그녀가 미지의 길로 접어들어 모험을 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 다고 여성이 행동이나 감정에 있어서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가둬두지 않 으면 안될 정도로 특이한 여성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괴상하고 특이하다. 그러나 그녀들이 기묘한 특성을 발휘하는 것은 일상생활, 대화, 편지에 서이다. 만일 그녀들이 새삼스럽게 글을 쓰려고 할 때면 그녀들은 문화라는 세계에 의해 짓눌리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은 남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남성이 구사하는 기술 자체를 사용하여 의논하거나 의사를 표시하는 여성 은 자신이 없는 자기개성을 질식시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여학생처럼 쉽사리 공부에 열중 하여 현학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성의 엄격함과 남성다운 태도를 그대로 본받게 될 것 이다. 뛰어난 이론가가 될지도 모르고 또 확고한 재능을 습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여성은 자기 내부에 깃들어 있던 특성을 배제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미치광이 같 은 여성도 있고 유능한 여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그 재능속에 이와 같 이 특이한 광기를 갖고 있는 여성은 한 사람도 없다. 지금까지 여성의 재능에 제한을 가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겸손한 태도이다. 많은 여성들 은 나르시시즘이나 허황된 불가사의라는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며 그것을 폭로해 왔다. 이제 이런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세계를 뛰어넘어서 고개를 치켜들려 고 신중함을 완전히 버리는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성이 많다. 그녀들은 위협받고 있는 계급 속에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민계급의 시인인 것이다. 선택된 형용사를 구사하여 이른바 '질' 의 문명의 세련을 노래한다. 그녀들은 행복이라는 중산층의 이상을 높이 들고 자기들 계급 의 관심을 시의 빛깔로 위장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에게 언제나 여성이기를 설득하는 기만 적인 교향악을 작곡한다. 옛 집, 정원과 채소밭, 정다운 할머니, 고집 센 아이들, 빨래, 잼, 의상, 객실, 무도회, 고생이 많은 정숙한 아내, 헌신과 희생이 따르는 부부의 여러 가지 애 환, 청춘의 꿈, 분별에서 오는 체념은 이제 바닥이 날 정도로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앙의 여류작가들의 테마로 많이 사용했다. 그녀들은 이런 테마에 의해 명예와 돈을 손에 넣었으나 우리들의 세계관을 풍족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드녀들보다 이 불 공정한 사회를 규탄해 마지않는 반항심이 강한 여성 쪽이 훨씬 흥미를 끈다. 권리회복을 요구하는 문학은 강력하고 성실한 작품을 낳을 수 있다. 조지엘리엇은 반항 속에 빅토리아 왕조 치세하에 있는 영국의 세밀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남김없이 그렸다. 그 러나 버지니아 울프가 주의를 촉구하고 있는것처럼,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 엇 등은 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정력을 소극적으로 소모해야 했으므로 역량 있는 남성작가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숨이 가쁠 것이다. 그녀들에게 는 승리를 발판으로 하여 자기들을 속박하고 있는 밧줄을 한꺼번에 끊을 만한 여력이 남 아 있지 않다. 그녀들에게서는 스탕달의 아이러니나 자연스러운 태도, 그리고 침착한 솔직 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같은 풍부한 경험도 없다. 그 리하여 <미들마치>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전쟁과 평화>에 미치지 못하고, <퐁풍의 언 덕>도 위대한 작품이지만 <카라마조프의 형제>가 갖고 있는 스케일은 따르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이 자기를 확립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을 여성으로 가 둬두려는 천 년 이래의 성적 제한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총명한 자각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전 통적인 여성은 미망에 속은 의식이며 속임수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 여성은 자기의 의존성 을 숨기려고 하지만 이것은 그 의존성에 동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의존성을 드러내어 고발하는 것은 하나의 해방이다. 철저한 해명은 굴욕이나 수치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은 최후의 승리에 대한 예비 스케치이다. 끝까지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속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여류작가들은 여성을 위해 가장 큰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여성의 문제에 지나치게 저항해서 세계에 대해 공평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우려도 있다.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광대한 전망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녀들은 착각이나 허위의 베일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일단 자기들의 일이 끝 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소극적인 용기로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진리 자체는 애매한 것이고 심연이며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존재를 지적한 다 음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재창조해야 한다. 속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여성은 신기루를 제거하는 데 용기를 탕 진하고 현실의 입궤 떨며 멈춰 있다. 여성의 자서전에는 성실하여 감동을 주는 것이 있지 만 <고백>(루소의저서)이나 <에고티즘의 회상>(스탕달의 작품)과 견줄 만한 것은 하나 도 없다. 우리들 여성은 아직 현실을 명확히 바라보는 데만 열중하고 그 밝은 저편에 있는 다른어둠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은 결코 변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하고 어떤 남성작가가 내게 말한 적이 있 는데 옳은 말로 생각된다. 여성은 이 세계를 검토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것만으로 크게 놀라 눈을 크게 뜨지 못하고 이 세계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단지 사실의 목록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녀들이 때때로 그 우수성을 발휘하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 한 관찰에 있어서이다. 그녀들은 뛰어난 보도기자가 된다. 앙드레 비올리스가 인도차이나, 인도에서 행한 현지답사를 능가한 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녀들은 분위기나 인물묘사에 능 하여 그 미묘한 상호관계를 지적하고 그 인물들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영혼의 은밀 한 움직임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는데 능하다. 윌러, 캐더, 에디스 훠튼, 도로시 파커, 캐서 린 맨스필드 등은 날카로운 특이한 수법으로 개인, 풍토, 문명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었다. 히스클리프와 같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남성을 훌륭히 묘사할 수 있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그녀들은 남성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밖의 것은 거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내면과 경험, 여자의 세계에 대하여는 교묘히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녀들은 목적물에 숨어 있는 은밀한 내용에 마음이 이끌려 자기자신이 느끼는 감각의 특이 성에 매혹을 느끼고 있으므로 생생한 체험을 뉘앙스가 풍부한 형용사나 감각적인 이미지 로 곧잘 표현한다. 그녀들은 사물과 사물의 관계보다는 사물 자체에 더 흥미를 느끼므로 흔히 문장보다 어휘쪽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녀들이 가장 깊은 애정을 갖고 탐구한 영역의 하나는 '자연'이었다. 젊은 처녀나 아직 완전히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여성에게 자 연은 바로 남성에 대한 여성과 같은 관계에 있다. 즉, 자아 자체와 그 부정, 왕국과 유형지 의 관계도 그것이다. 자연은 타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마음대로 변한다. 여류작가가 그 체험과 꿈을 가장 친절하게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황야나 채소밭을 이야기할 경우이 다. 생기라든가 계절의 기적을 물뿌리개나 화병, 화단 속에 가둬두는 여성이 많다. 식물이 나 동물을 가둬두지 않는 대신 그런 것들에 기울이는 세심한 애정으로 그것들을 자기 것 으로 만들려고 하는 여성도 있다. 콜레트나 캐서린 맨스필드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리 고 자연이 갖고 있는 비인간적인 자유를 통하여 자연을 이해하고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며 타자인 이 존재에 합일하기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여성도 있다. 이 방법은 루소가 창시했으나 에밀리 브론데,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마리웨브 등이 이 방법을 취했다. 주어진 것을 초월하여 자연의 은밀한 영역까지 탐구하려고 한 여성은 더욱 적어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죽음을 문제삼았고, 버지니아 울프는 생명을, 그리고 캐서린 맨스필드는 일상적인 우연성과 고뇌를 다루었다. 그러나 여성은 아 무도 <심판>, <백경>, <율리시스>, <예지의 일곱기둥>을 쓰지 못했다. 그녀들은 인간 다운 삶을 겨우 살기 시작했으므로,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들의 작품에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색채나 또는 어두운 유머가 없는 이유를 설명 해 주고 있다. 그녀들은 세계를 괄호 속에 넣어서 보류하거나 세계에 대해 질문하거나 하 지 않는다. 그리고 모순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남 성도 대다수가 이와 똑같은 한계 안에서 살고 있다. 여성이 평범하게 생각되는 것은 '위대 하다'고 부르기에 합당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예술가와 비교했을 경우이다. 여성의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그 운명이 아니다. 어째서 여성에게는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왜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런 조건이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인가- 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문학, 철학은 인간이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이다. 즉, 그것은 창조자의 시도이다. 그런 포부를 마음속에서 키우려면 먼저 자기를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 로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여성은 교육이나 풍습에 의해 제약을 받아 세계에 도전할 힘이 제한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치열하다고 해서 몸을 뺄 수는 없다. 만일 이 세계를 다시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가장 심한 고독에서 고개를 쳐 들어야 한다. 여성에게 특히 결여된 것은 고뇌와 자존심 속에서 고독과 초월의 수업을 쌓 는 것이다. 마리 비슈키르체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혼자 산보하거나 마음대로 거닐면서 튈러리 공원벤치에 걸터 앉 는 자유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데 절대로 필요한 자유이다. 누군가 동행 이 있을 때나 혹은 루브르에 가기 위해 마차를 기다리거나 함께 갈 처녀가 가족을 기다려 야 할때,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리고 이 자유가 없으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할 수 없다. "의식 은 이런 하찮고 끊임없는 훼방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날개가 떨어질 뿐이 다. 이것이야말로 좀처럼 여성 예술가를 볼 수 없는 커다란 원인의 하나이다." 실제로 창조자가 되려면 자기를 소중히 키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즉 여러 가지 광 경이나 지식을 자기 생활 속에 도입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초월이라는 자유로운 운동을 통하여 손에 언ㅎ어야 한다. 정신이 그 모든 부를 지닌 채 공허한 하늘로 비약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하늘을 정신으로 채워야 한다. 그런데 만일 무수한 맛줄이 끈질기게 정신을 지 상에 결박하고 있으면 비약은 좌절된다.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도 혼자 외출하여 튈러리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 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거리는 이런 여성에게 깊은 적의를 푸고 있다. 곳곳에서 눈과 손이 대기하고 있다. 만일 멍하게 정처없이 거닐고 있다면 카페의 테라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혹은 혼자 영화관으로 간다면 금세 어떤 불쾌한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녀는 의상이나 태도로 위엄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그녀를 이 지상에, 자기자신 에게 못박아놓는다. 결국 그녀의 날개는 땅에 떨어진다. 로렌스는 18세때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여행을 했다. 절므ㅇㄴ 여성이 이런 무 모한 짓을 한다면 아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렌스가 1년 후에 반쯤 사막으 로 된 위태로운 나라를 도보로 행한 탐험을 여성이 한다는 것은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 체험에는 헤아릴 수 없는 중요한 장래성이 있는 것이다. 이때 개인은 자유와 발견에 도취하여 지상 전부를 자기 영토처럼 생각하는 것을 ㅐ우게 된다. 그러나 여성은 완력의 훈련에서 제외된다. 여성은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그 수동성에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사내아이가 주먹으로 싸움 을 할 때에는 자기 힘을 신뢰하고 망설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여자아이에게는 적어도 스 포츠나 모험을 솔선하여 하거나 장애물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세계의 한가운데서도 고독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 다. 그러나 유일자, 지고자로서의 세계와 대립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성에게는 모든 것 이 외적인 여러 가지 존재에 의해 지배되고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연애를 할 경우에도 자 기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포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불행이나 불운은 때때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시련이 된다. 에밀리 브론 테가 힘찬 야성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거슨 고독의 덕택이었다. 그녀는 자연, 죽음, 운 명과 대결하여 자기의 힘 이외에는 아무 도움도 요구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루브그는 못생 긴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모습의 숭배에 빠지거나 자주성이 없는 물체가 되거나 남의 먹이 가 되거나 남에게 올가미를 걸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완벽하게 정신 과 자유의 주체였다. 그런데 여성이 현실세계와의 괴로운 대결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성을 결박하고 억누르고 있는 전통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게 한다. 여서이 평범한 길을 가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위대하게 보는 남성은 어떤 형태로나 그 양 어째에 세계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 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처리해 왔다.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성공하기도 하 고 혹은 실패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들은 처음에 이 엄청난 짐을 한 몸으로 떠맡았던 것이 다. 여성은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세계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 거나 세계의 죄를 자기 죄로 느끼고 그 영광을 자기 명예로 생각하려면 특권계급에 속해 야 한다. 세계를 수정하거나 깊이 고찰하여 그 비밀을 파헤쳐 정당화하는 것은 세계에 대 해 명령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알아차리고 세계에 대해 자기의 공적을 나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으 로서 자기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우리에게 모범적인 인간으로 생각되고 천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인간은 그 개개의 실존에서 인류 전체의 운명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일에 대해 여성으로서 자신있게 대처한 사람은 없었다. 반 고흐와 같은 사람이 여성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여성이라면 보리나즈(벨기에의 탄 광지대)에 파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자기자신의 죄로 느끼고 속죄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화가의 생활방식- 아를르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거나 카페나 창녀촌에 드나들면서 감수성 을 키우는 동시에 그 예술도 성장하게 하는것-은, 여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은 결코 카프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회의와 불안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그녀는 결 코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고뇌를 알아차리지 못행ㅆ을 것이다. 겨우 성 테레사만이 완 전한 고독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갈 정도이다. 그녀는 지 상의 게급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있었으므로 성자인 장 드 라 크루아처럼 머리 위 의 천장 아래 안도 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똑같은 어둠과 똑같은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는 똑같은 허무가 신에게는 똑같은 충족이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인 간이 성의 구별을 초월하여 자유로운 실존의 고난에 가득찬 영광 속에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때 , 비로소 여성은 자기의 역사, 문제, 회의,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하나로 결부하 여 생각할 수 있다. 생활과 작품 속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비밀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의 비 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녀가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고 싸원야 하 는 이상 창조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성의 한계를 설명하여면, 그 신비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 상황을 문제 삼아야 한다. 미래는 여전히 활짝 열린 체이다. 여성에게는 '창조적인 천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유명했던 여권반대론자였던 마르트 보렐리 부인이 주 장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저술에서 여성의 비논리성과 우매함의 사례를 밝히려고 했으나 그 저술 자체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창조적인 '천성'은 타고난다는 견해는, 실재파의 낡은 간판 속에 있는 '영원한 여성'이라는 관념과 함께 버려야 하는 성질의 것이 다. 여성은 신경이 허약하므로 가치 있는 일은 전혀 창조할 수 없다고 반여성파는 구체적 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천재는 신경쇠약환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아무튼 프루스트의 예는 심리적, 생리적인 불균형이 무능력이나 평범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충분 히 입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성질을 규정하는 노거에 대하여 그것을 어떻게 생각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켜 영원한 진리를 확립하는 것으 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고 있으므로 역사적인 사실은 단지 역사적으로 나타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불과하다. 천재적인 작품- 단지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 하지만- 을 완성할 가능성이 여성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성이 천재일 수 있겠는가? 유서 깊은 유럽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예술가나 작가를 한 사람도 갖고 있지 않는 야만 적인 미국인을 경멸해 왔다. 이에 대해 "우리에게 이러저러하게 살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 리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제퍼슨은 핵심을 찌르는 답변을 했다. 흑인에게서는 한 사람 의 휘트먼(미국의 시인, 1819~1891)도 탄생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인종주의자에 대해 흑인도 같은 답변을 한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도 라신(프랑스의 시인, 1639~1699)이 나 말라르메(프랑스의 시인, 1842~1898)와 견줄 수 있는 어떤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 자유로운여성은 지금 겨우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여성이 득세할 때에는 아마도 랭보 (프랑스의 시인, 1854~1891)의 예언이 적중될 것이다. "시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한없이 지속되었던 여성의 노예상태가 깨어지고, 여성이 자기 를 위해 자기 힘으로 사는 때가 돌아오면, 지금까지 증오의 대상이었던 남성이 여성을 놓 아줄 터이므로 여성도 시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것이다. 그녀들의 사상의 세계는 우리 남성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기이한 것, 불가해한 것, 혐오스러운것, 그리고 참으로 감미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사상의세계'가 남성의 사상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 여성은 남성의 사상의 세계에 동화함으로써 해방되려고 한다. 여성이 어느 정도까지 개별적이며 그 개성이 어느 정도로 중요성을 간직할지 알기 위해서는 매우 대담한 예상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성의 가능성이 억압되고 인류를 위해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여성 자신을 위해서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여성 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결론 "아니, 여성은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우리는 권태와 부패로 말미암아 여성을 색다른 존 재, 미지의 존재, 성이라는 무기 이외에는 아무 무기도 갖지 못한 존재로 규정해 버렸다. 이것은 영구히 싸움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정당당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도 의미 하고 있다. 즉 열애하는가 하면 곧 증오하는 상대이지 우리의 솔직한 동료가 아니다. 집단 정신으로 무리를 지어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존재, 영원한 작은 노예가 갖는 시기심이다." 쥘 라포르그의 이같은 말에 동의하는 남성이 많을 것이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언제나 ' 음모와 싸움'이 그치지 않고 우애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 다. 사실 오늘날 남성이나 여성은 서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양자의 사이가 나쁜 것이 선천적인 저주인지 혹은 남녀가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인류 역사의 일시적인 과도기의 현상일 따름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설이야 어떻든 생리적인 숙명이 '수컷'과 '암컷'을 그와 같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적대시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 유명한 버마재 비의 암컷도 먹이가 없거나 종족번식을 위해서가 아니면 수컷을 잡아먹지 않느다. 고등동 몰에서 하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체는 종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는 종과는 다 른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인류는 자연의 사실성을 어떤 방법으로 두르느냐에 따라서 규정된다. 사실 아무리 극도 의 불신을 갖는다 해도 남녀 양성 사이에 순전히 생리적인 의미에서의 적대관계를 발견하 는 것은 불간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런 적의를 생리학과 심리학의 중간지대라는 정신분석 학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여성이 남성의 페니스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거세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니스에 대한 소아기적인 욕망은 어른이 된 여성의 생활에 서 그녀가 여성인 것을 불구라고 생각할 때에만 중요성을 가즌다. 그녀가 남성의 성기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페니스가 남성의 특권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뿐이다. 남성을 거세시키고 싶다는 여성의 몽상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충분히 인정된다.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에게서 초월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이 원하는 것은 훨씬 더 애매하다. 여성은 모순된 방법으로 이 초월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여성이 그 초월을 존경하면서 부정하고 초월 속으로 뛰 어들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초월을 억류해 두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드라마는 순수하게 성적인 문제만 전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적 본능이 인간 의 운명을 규정하거나 인간의 행동에 포함된 문제점을 푸는 열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 인 적이 없다. 성적 본능은 상황 전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상황을 규정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성의 싸움은 남녀의 해부학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성의 싸움이라고 말하면 으 레 '관념'의 상공에서 불확실한 본질과 본질, '영원한 여성'과 '영원한 남성'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양자의 장렬한 싸움이 지상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역사적으로 다른 시기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 점에 대하여는 유의하지 않 고 있다. 내재 속에 갇혀 있는 여성은 남성도 이 감옥에 감금하려고 한다. 이렇게되면 감옥도 세 계와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며 여성은 그곳에 갇혀 있는 것을 더 이상 고생으로 여기지 않 을 것이다. 어머니, 아내, 애인(여성)은 여간수가 되는 것이다. 남성의 손에 의해 법제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열등성을 없애려면 남성의 우위를 깨버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 녀는 남성을 불구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대적한다. 남성 이 말하는 진리나 가치를 부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다. 그 녀가 내재나 열등성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항구적인 본질이나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졸렬 한 선택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내재와 열등성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압박은 전 쟁상태를 야기시킨다. 이런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실존자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면 반드시 자기의 존엄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오늘날에는 남녀간에 전개되는 싸움의 양상이 변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감옥에 가두 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남성을 내재의 영역으로 끌어오려고 하 지 않는 대신 자진하여 초월의 및 가우데 떠오르려고 한다. 이때에도 남성의 태도에 따라 새로운 분쟁이 생기게 된다. 남성은 좀처럼 여성을 '놓아주려고'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기는 지고한 존재이고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이며 본질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싶은것이다. 그는 상대방 여서을 자기와 대등한 자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남성의 이런 불신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다. 이것은 이제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다.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계급에 대적하고 특권계급은 이를 저지한다. 두 초월이 대결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두 자유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고 하지 않고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정신적인 면이나 성적인 면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여성다운'여성은 스스로 수동적인 먹이가 되면서 남성도 육적인 수동성으로 만들려고 한다. 여성은 스스로 순종적인 물체가 되어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켜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사슬로 묶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이른바 '해방된 여성'은 능동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수동을 거부한다. 엘리즈와 그녀의 친구들은 남성의 활동성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그녀들은 정신보다 육체를 자유보다 우연성을 창조적인 용기ㅗ다 평범한 상식을 상위에 둔다. 그러나 '근대적인'여성은 남성적인 가치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 각하고 행동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성을 무시하지 않고 자기도 그들과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한 이 실권회복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리고 그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성의 교만이다. 그러나 남성을 위해 변호해 둘 필요가 있 는 것은 여성은 일부러 트럼프의 카드를 뒤섞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메벨 도지와 같은 여성은 우선 여성다운 매력으로 로렌스를 정복한 다음에 그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저 의를 갖고 있다. 많은 여성들은 자기가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구체적인 성과를 통 하여 보여주기 위해 먼저 성적인 매력으로 남성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녀는 고풍스 러운 존경과 새로운 평가를 동시에 구하고 그것을 낡은 마술과 새로운 권리라는 양쪽에 승부를 내걸고 두 경기장에서 겨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조한 남성이 방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시기심이나 반감에서 여성에게 반드시 필요한 티켓을 나눠주지 않고 당당히 승부하라고 요구할 때에는 남성에게도 이중성이 있는 것이 다. 사실상 여성의 존재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 투쟁이 남녀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를 드 러난 적은 없다. 여성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주체성이 주어진 객체로서 남성 앞에 서게 된다. 그녀는 자기 를 자기로서 살아가는 동시에 타자로서도 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며 대단히 부조 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녀가 자기의 연약함과 자기의 힘 쌍방을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은 깊이 자성한 행위가 아니다. 단지 자발적으로 강요된 수단, 즉 수동이라는 수단에 의 해 구제를 원하며 한편으로는 능독적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확실히 이런 방법은 '정정당당한 싸움'은 아닐 테지만 여자가 살고 있는 애매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다. 그런데 남성이 여성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려고할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하나의 함정 이 된다고 분개한다. 남성이 여성의 비위를 맞춰주고 남성의 먹이로서 만족시켜줄 경우 여 성이 자립하려는 소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남성은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고 여성 쪽에서는 손해를 본 것처럼 생각된다. 남녀가 서로 상대방을 대등하다고 인정하지 않는한, 즉 여성인 것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지속되는 한 갈등은 그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여성다움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남녀간에 어 느 쪽이 더 열심일까? 자기를 해방시킨 여성도 그 여성다운 특권만은 남겨놓기를 원한다. 남성 쪽에서는 그렇게되면 여성은 거기에 당연히 제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의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이 다른 쪽을 변호하기보다 쉽다."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비난 이나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사실 순환논법을 깨뜨리는 것이 어렵다면 그 것은 남녀 모두 상대방의 희생이 되며 자기희생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순수한 자유 속에서 대결하고 있는 두 적수사이라면 화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이 싸움은 쌍방에게 모 두 무익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 복잡성은 각자의 진영이 적의 공범자이기도 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여성에게는 자주 포기의 꿈이 있고 남성에게는 소외의 꿈이 있다. 진실하지 못 한 생활태도에서는 얻는 것이 없다. 각자가 안일에 유혹되어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남녀가 서로 상대방을 증오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며 자기자신의 무 기력에서 오는 실패이다. 처음에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킨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여성을 과소평 가하는 것은 인류의 발전에 필요한 한 단계였다. 거기서 양성의 협력이 생겼을지도 모른 다. 압박이란 그러한 목적으로 압박하는 타자속에 자기를 소외함으로써 도피하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 남성에게서 이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대다수의 남성들이 거기에 따르고 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연인은 애인에게서 석상의 모습을 한 자기를 찾고 았다. 그는 상대방 여성에게서 자기의 사나이다움과 그 절내권과 그 직접적인 현실성의 신 화를 추구한다. "남편은 영화관 같은 데는 절대로 가지 않아요."하고 아내가 말한다. 그리 하여 남성의 불확실한 의견은 영원한 대리석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그러나 남성 자신 은 스스로 자기 분신의 노에가 되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 는가! 더구나 그 이미지 속에 안주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이미지는 뭐니뭐니해도 여성들의 변덕스러운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언젠가 유리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남성은 남성적이고 위엄 있는 우월자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남성인 자신도 연극하 지만 상대방에게도 연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도 공세적이고 불안한 처지에 있다. 여성 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적으를 품고 자기의 콤플렉스를 청산하고 승화시키고 전 환시키 위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들을 유혹하고 두려워하는 데 얼마나 말은 시간 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여성에게 자유를 주면 남성도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남성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여성을 사슬로 묶어두기 위해 여전히 속임수를 쓰 고 있다. 여성이 속고 있다는 것을 많은 남성들은 잘 알고 있다. "여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여성의 진정한 불행은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 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남성들은 오랫동안 여성들의 이 불행을 위장하려고 노력해 왔다. 후견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여성에게 '보호자'를 두었다. 그 보호자가 종전의 후견인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해 도 그것은 여성에게 이득이 된다. 여성에게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하고 가정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여성을 지키는 것이며 그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여성이 해야 하는 단조로운 소임, 즉 가사나 육아를 시적인 베일에 숨겨온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아왔다. 그리 하여 여성은 자유 대신에 '여성다움'이라는 가짜 보석을 받게 된다. 발자크는 여성에게 여 왕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면서 실제는 노예로 취급하면 된다고 남성들에게 권고했는데 이것 은 그간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많은 남성들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대신 여성 은 참으로 복받은 존재인 것처럼 설득하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과학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하층 계급의 이득(Low-Class Gain)'이 라는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에도- 이처럼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노동 자는 '체면을 지켜야'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만큼 이득이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룸펜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길바닥에서도 잘 수 있지만 보몽 백작이나 방델(프랑스의 실업가) 같은 가엾은 신사들에게는 이런 즐거움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몸에서 이를 잡는 태평스러운 거지들이나 채찍으로 얻어맞으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쾌활한 흑인들이나 또는 굶어죽 은 자식을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매장하는 수스의 쾌활한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책 임을 지지 않는'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고통도 책임도 걱정도 없는 그녀는 확실히 '팔 자가 좋은'편에 속한다. 곤란한 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모든 나라들에서 이 '팔자가 좋은'쪽의 인간이 완고한 철부지로- 이것은 아마도 원죄와 관련이 있을 테지만- 자기 은인(남성)에게 줄곧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이건 분에 넘치는군요. 나는 당신이 주는 것으로 만족하니까요."하 고 말이다. 그러나 훌륭한 자본가나 관대한 식민지 경영자나 자존심이 강한 남성들은 한치 도 양보하지 않는다. "복을 놓쳐서는 안 돼. 잘 간직하여라!" 남성은 여성에게서 평소에 압박자가 피압박자에게서 발견하는것 이상의 공범성을 발견 하게 된다. 남성들은 그 점을 이용하여 교묘히 속여서 여성의 운명을 여성에게 강요하면서 도 여성이 그런 운명을 원했다고 시치미를 뗀다. 여성이 받는 교육은 모두가 반항이나 모 험의 길을 막아버린다. 사회전체는- 존경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사랑이나 헌신, 자기희생 의 미덕을 찬양하면서도 애인이나 남편이나 자식들은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싶어하지 않 는다는 것을 숨기고 거짓말을 가르침다. 여성은 안이한 길을 가도록 훈련되어 있으므로 이 런 거짓말을 곧이 듣는다. 이런 것이 여성에게 범하는 최악의 범죄이다. 어렸을 때부터 일 생을 통하여 여성에게 이런 자기 포기야말로 여성의 천직인 것으로 가르쳐 여성을 타락과 부패로 몰아넣는다. 자기의 자유 자체에 불안한 고뇌를 느끼는 모든 실존자는 이런 자기포기의 유혹을 느끼 게 마련이나 어린이를 하루 종일 놀게 하여 게으른 버릇을 기르고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 고 유용한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어른으로 장성했을때 무느하고 무 지한 길을 택했다고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여성에게 자진하여 자기의 실존을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을 가프쳐주지 않고 키운다. 그래서 그녀는 태연스 럽게 남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지도를 받는다. 그녀는 자기의 존재를 실 현시키는 노력은 전혀하지 않고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가 유혹 에 넘어가는 대상은 물론 나쁘다. 그러나 그녀를 유혹한 것은 바로 남성이다. 그러므로 그 녀를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 남녀 사이에 어떤 분규가 일어나면 서로 그런 상황이 일어나 게 한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이 그런 상황을 일 으켰다고 남성을 탓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치를 따지거나,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 어요..." 하고 말이다. 그러나 남성 쪽에서는 여성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비난한다. " 넌 아무것도 몰라. 넌 무능한 여자야..." 하고 말이다. 피차에 상대방을 공격하면 자기를 정당 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의 잘못은 또한 다른 쪽의 잘못이기도 하다. 남녀간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은 한쪽이 제안하고 다른 쪽이 그것에 따르는 상황에서 비 롯된 모든 결과를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 불평등에 있어서의 평등' 같은 애매한 개념을 사용하여 한쪽이 그 전제주의를 감추고 다른 쪽이 자기의 무기력을 그 개념 아래 감추고 있지만 이런 개념은 검토해 보면 곧 정체가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남성이 보장해 준 추상적인 평등을 요구하고 남성은 구체 적으로 눈에 보이는 불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준다'와 '받는다'는 말의 애매한 의미에 대한 막연한 논쟁ㅇ이 모든 남녀관계에 언제까 지나 계속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성은 모든 것을 준다고 한탄하고 남성은 여성이 모 든 것을 받는다고 불평한다. 주고 받는 교환은- 이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다- 제공되 는 상품이 팔 사람이 아니라 살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여성은 이해하여야 한다. 남성은 여성이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성에게 가르쳐서 여성 을 속였다. 사실 그녀는 남성에게 하나의 위로이고 쾌락이고 반려이며 비본질적인 재물일 뿐이다. 그런데 남성은 여성에게 그녀의 실존의 의미이며 이유이다. 그러므로 주고받는 교환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속에 불평등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남성 이 애인과 한께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에 그는 자기 직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거나 친구 들을 만나 유익한 교제를 하거나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는 남성에 게 시간은 실질적인 부이다. 그것은 돈이고 명성이고 쾌락이다. 이와 반대로 할일이 없어 서 권태로운 여성에게 시간은 무거운 짐이어서 그녀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면 그녀에게 이득이 된다. 즉 남성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순수한 이득이다. 대체로 남녀관계에서 남성의 흥미를 가장 크게 끄는 것은 거기서 비롯되는 성적인 이득 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성은 사랑의 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꼬박 여자와 함께 지내면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쪽은- 예외의 경우는 별도로 치고- 남아도는 사간을 모조리 애인과 함께 보내고 싶어한다. 순무를 사주지 않으면 감자를 팔지 않겠다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애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같이 외출하는 시간을 덤으로 주지 않 으면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성 쪽이 이에 대한 비용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균 형을 잘 잡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남성의 정욕의 강도와 그가 희생시키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너무 많은 시간을 요구하거나 지장 을 주면 남성에게는 대단히 귀찮은 존재가 된다. 마치 강물이 그 물줄기에서 벗어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남성은 너무 많은 시간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갖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남자의 요구를 조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균형을 유지하려면 이중의 긴장이 필요하다. 즉 여성은 남성이 자기를 싼값으로 '갖는다'고 생각하 고 남성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설명은 다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 나 남성이 샘이 많고 독점욕을 갖고 여성 전체를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애정이나 정욕, 그리고 연애 자체 속에도 이런 갈등을 지적할 수 있다. 남성은 언제나 자기 시간으로 '다 른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쪽에서는 자기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남성 쪽에서 보면 여성이 그에게 바치는 시간은 증여로 생각하지 않고 무거운 짐으로 여 긴다. 보통 남성은 자기가 여성보다 나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므로 참으려고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어느 정도의 호의를 갖고 있으면 입장의 불평등을 너그 럽게 보상해 주려고도 한다. 그러나 동정하는 것을 무슨 큰 공로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 여 사소한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곧 여성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여 화를 낸다. "나는 너무 호인인가 보다."하고 말이다. 여성 쪽에서는 값진 선물을 한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자기를 거지처럼 취급하고 있는것 같아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여성이 종종 잔인성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여성은 불우한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권층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다. 그녀는 다만 자기를 돌볼 생각만 하고 있다. 만일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애인을 원망할 기회를 갖게 되면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별로 주는 것이 없으면 그녀는 야성적인 기쁨을 나타내면서 남성에게서 전부를 되찾으려고 한다. 이 때 남성은 자존심이 상하여 평소에 결멸한 교제 자체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알 게 된다. 그는 저자세를 취하여 여성에게 어떤 약속이라도 하려고 한다. 막상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할 때에는 여성에게 당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협 박했다고 비난한다. 한편 여성은 그의 인색함을 비난한다. 그리하여 쌍방이 모두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경우에도 한쪽을 옹호하고 다른 쪽을 비난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불공평 속에서는 공평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식민지 행정관은 토착민에게 그리고 장군은 병사에게 선심을 쓸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식민지 행정관이나 장군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러나 남성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성은 본의 아니게 죄인도 되고 자기가 저지르 지 않은 과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도 본의 아니게 희생자가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남성에게 반항하고 잔인해진다. 이렇게 되면 남성은 불공평의 공범자가 된다. 그리고 과실을 자초한다. 때로는 요구가 많은 희생자(여성)에게 압도되거나 잡아먹힘다. 이때에는 자기를 얼빠진 인간으로 생각한다. 자기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면 달갑지 않은 타협도 한다. 선의의 남성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성보다 마음이 더욱 분열된다. 즉 어느 의미에서는 패자 쪽에 서는 것이 언제나 마음 편하다. 그러나 만 일 여성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고 자립할 수 없으며 운명의 무게로 남성을 괴롭히는 것도 싫어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꼼짝없이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게 된다. 만족스러운 해결을 할 수 없는 이러한 경우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난다. 만족스러운 해결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처지를 규정하고 있는 조건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 하는 남성은 자기가 희생자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생활 전체를 그에게 의 논하던 여성을 빈 손으로 내쫓으면 여성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공평한 방법에 의해 희생 자가 될 것이다. 불행은 개인의 부도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기만은 상대방에게 서 로 죄를 전가하려는 데서 생기게 된다- 개개인의 행동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생긴다. 여성 은 '찰거머리'이다. 무거운 짐이다. 그녀도 이 때문에 괴로원하고있다. 그것은 그녀가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빨아먹는 기생충의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자립적인 생 명 조직을 제공해야 한다. 그녀가 세계와 싸우고 거기서 자기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취하 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존성은 없어질 것이다. 남성의 의존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 면 틀림없이 남녀 모두 현재의 상황보다 나아질 것이다. 남녀가 평등한 세계는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이 약속한 것도 바로 그런 세계였다.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조건에서 남성과 같은 급료를 받고 일하게 된다. 성적 자유는 숲속에서 인정된다. 성행위는 이제 보수를 받는 '서 비스'로 생각되지 않을것이다. 여성은 그것과는 별도로 살아갈 수단을 가져야 한다.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해약할 수 있는 자유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의 무도 자유로워진다. 즉 산아제한이나 인공유산이 인정되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똑같은 권 리가 주어진다. 그녀들은 결혼해도 좋고 하지않아도 무방하다. 출산 휴가 때에는 사회에서 급료를 지급하고 사회가 아기도 돌봐준다. 이것은 아기를 어머니에게서 '빼앗는'것이 아니 라 부모에게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 제도, 풍속, 여론 그밖에 모든 사회적인 여건을 바꾸기만하면 남녀가 참으 로 동등하게 될까? "여성은 언제나 여성이야." 하고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여성에게서 여성 적인 것을 제거해 버리면 결국 남성이 되지도 못하고 괴물이 되어버릴 것을 예언하는 사 람도 있다. 이런 생각은 오늘의 여성이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 시 말하거니와 인간사회에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나도 없으며 측히 여성은 문명 이 점차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성의 운명에는 본래 타인이 간섭했다. 이런 간섭의 방법이 달랐더라면 여성도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은 호르몬이나 신비적인 본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밖에 있는 의식을 통하여 그녀가 자기의 육제나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 하는 방법에 의해 규정된다. 청년과 처녀를 떼어놓는 심연은 어렸을 때부터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만들어진'존재인 것을 도저히 부인할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배후에 언제까지나 이런 과거를 끌고 다니게 된다. 만일 이 과거가 지닌 무게를 잘 검토해 본다면 여성의 운명이 영원 속에서 확고부동하 게 고정되어 있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이 그 처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경제적 인 조건만 시정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이 요소는 여성이 진화하 는 데 첫째 요인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요인이 예고하고 요규하는 정 신적, 사회적, 문화적인 결과가 분명히 뒤따르지 않는 한 새로운 여성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그런 여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나 미국이나 소련, 어디서나 그 렇다. 그러므로 오늘의 여성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그런 신여성은 대개 ' 진정한 여성'이 남장을 한 형태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신여성은 자기의 복장이나 자기 의 육체 속에서도 어쩐지 침착하지 못하다. 그녀는 새로운 피부를 만들어야 하고 참된 자 기 옷을 만들어야 ㅏㄴ다. 그러나 집단적인 발전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 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교육자도 고립되어서는 '남성이라는 인간'과 동일한 '여성이라는 인간'을 개 조할 수 없다. 소녀가 소년으로 양육되면 자기가 예외라고 생각하므로 거기서 또 새로운 종류의 성의 유행이 생기게 된다. 스탕달은 이 사실을 잘 알고 " 숲속의 나무 전체를 한꺼 번에 바꿔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남녀 양성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회를 상정한다면 그런 평등은 새로운 출발점으로부터 개개인에게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자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형제들과 같은 요구 같은 우대 같은 엄격성 같은 자유로 교육을 받고, 그들과 같은 공부 같은 유희를 하고 같은 장래가 약속되어, 그녀가 볼 때 분명히 대등하다고 생각되는 남녀에 에워싸여 있었더라면 '거세 콤플렉스(여자가 페 니스의 결여에서 느끼는 열등감)'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사내아이가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고 어머니를 사모하는 경향)'의 의미는 크게 수정될 것이다. 어머니가 부부생활의 물질 적, 정신적인 책임을 아버지와 동일하게 담당한다면 그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에게 영속적으로 위신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주위에서 남성적인 세계가 아니다. 남녀 양성적인 세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설사 딸이 아버지에게 훨씬 강한 애정을 느끼더 라도- 이것도 확실한지 알수 없지만- 그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는 무력감이 아니라 아버 지와 겨루어보고 싶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수동성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나 스포츠로 자기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고 남자아이와 능동적으로 대항하므로 페니 스의 결여는 '열등감'을 갖게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남자아이는 '열등콤플렉스'가 심어져 있지 않고 여성을 남자와 동등시하는 습관을 붙이게 되면 우월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것이다. 여자아이는 나르시시즘이나 몽상 속에서 헛된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을것이다. 그리고 자 기를 주어진 운명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세운 계획을 적극적으로 완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젊 은 처녀가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청춘시절에 자유롭게 미래를 향해 초월해 간다면 그 시 기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월경이 그녀를 갑자기 여성의 운명에 처박는다고 해서 혐오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운명에 대해 두려움 이 섞인 혐오감을 느끼지 않게 되면 그 미숙한 처녀시절의 색정을 좀더 평온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일관된 성교육이 그녀에게 이런 위기를 잘 넘기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남녀공학에 의해 '남성'의 엄숙하고도 두려운 신비는 생겨날 여지가 없 어질 것이다. 날마다 즐거운 교제와 자유로운 경쟁으로 말미암아 그런 신비감은 사라질 것 이다. 이와 같은 일관된 방법에 대한 반대론은 언제나 성의 터부에서 비롯되는데 아이들에게 호기심이나 쾌락을 억제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런 방법으로는 단지 억압이나 강박관념이 나 신경병을 초래할 뿐이다. 젊은 처녀의 극단적인 감상주의나 동성애적인 열광이나 플라 토닉한 정열등에는 무지한 어리석음이나 헛된 정신소모가 따르게 되며 어린애 같은 유희 나 정확한 경험보다 더욱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젊은 여성에게 가장 유익하게 생각 되는 것은 남성속에 반신을 찾지 말고 학우, 친구, 동료를 찾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실존 을 분명히 감당해 나가고 여기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이나 연애는 자유로운 초월의 성격을 띠고 자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1대1의 대등한 관계로 체 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모든 어려움을 붓 한 번 움직여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가장 총명하고 관대한 교육을 할 경우도 어린이가 자기 힘으로 스스로 경험하는 것을 생략해 줄 수는 없다. 바람 직한 것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어린이의 앞길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불량소녀'로 낙인을 찍어 배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벌써 하나의 진보이다. 정신분 석학은 어린이의 생활을 중시하여 부모에게도 어느정도 게몽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이 성 에 대해 그 초보적인 지식을 얻고 교육을 받는 현재의 여건은 참으로 한심하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견해에 반대하는 사고방식에는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인간으 로서 누구나 갖고 있는 조건의 우연성이나 비참함을 여성에게서 모두 제거하라고 요구하 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여성에게 주라는 것이다. 여성은 어떤 신비적인 운명에 놀아나는 희생자가 아니다. 여성의 이러저러한 특성은 모 두 선입견에서 그 중요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여성의 개별성을 이해하면 그것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성이 그 성적 경험을 통하여 남성의 지배를 절실 히 느끼고 흔히 그것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난소 때문에 언제까지나 남성에게 무릎을 꿇고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지어서는 안 된다. 남성의 공세적인 성질이 영주와 같은 특권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전력을 다하여 남성의 절대권을 내세우려는 사회제도 안에서이다. 그리고 여성이 성행위에서 자기를 수동적으로 느끼는 것 을 미리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근대적인 여성들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성생활에 대해서 는 아직 옛날 그대로 예속된 전통에 따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 밑에 드러누워 남자 에 의해 관통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불감증으로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만일 현실이 지금과 다르다면 사랑의 몸짓과 자세가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의미도 지금과는 다를 것이 다. 예를 들어 애인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지배하고 있는 여성은 그 우월적인 무위를 즐기는데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거나 활기차고 악착같이 자기의 정력을 소모하고 있는 남성을 복종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 성적으로 균형이 잡혀 승리나 패배의 관념이 교환이라는 생각으로 변한 많은 남녀의 짝들이 존재한다. 사실 남성도 여성과 마찬 가지로 하나의 육체이다. 따라서 수동적이고 호르몬과 종의 노리개이며 자기의 정욕이 노 리고 있는 불안한 먹이이다. 그리고 남녀는 동일하게 육신의 열광 속에 빠져 있으며 이러 한 성행위는 자주적인 동의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피차에 의지적인 증여이며 능동성의 발 휘이다. 남녀는 각자 자기 나름으로 육체와된 실존의 기이한 애매성에서 살고 있다. 남성과 여성 은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양자가 모두 자기에 대해 싸우 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싫어하는 부분을 상대방에게 투사시켜 그것과 싸우고 있다. 애 매한 자기의 여건에서 살지않고 타자에게 투사한 그 싫어하는 것을 찾게 하여 자기를 위 해 명예를 남겨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양자가 진정한 자존심에서 비롯된 겸손한 마음으로 그 입장을 살려나간다면 그들은 서로 동등한 자로 인정하고 우애를 느끼면서 성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적인 존재를 여러 모로 구별하는 모든 특이성ㅂ다 대단 히 중요한 것이다.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주어진 조건이 아니다. 예전 사람이 '덕' 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는것'의 기준에 의해 규정된다. 남녀 양성에 의 해 육체가 정신, 유한성, 초월과 같은 드라마가 연출된다. 양성은 함께 시간에 침식되고 죽 음의 위협을 받으며 타지에 대해 동일한 본질적인 욕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유 에서 같은 영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다면 거짓특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양자 사이에 우애도 생갈 것이다. '여자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이미 사회가 남성과 대등한 여성을 만들어내었을 터이므로, 위에서 본 모든 고찰은 유토피아적인 공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 런 문제에 대하여는 언제나 악순환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원을 그리지 않는다. 어떤 계급을 열등한 상태로 유지하면 그 계급은 열등한 채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순환을 타파할 수 있다. 흑인에게 투표를 시키면 그들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투표할 수 있게 된다.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면 여성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억 압자가 자발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때로는 피압박자의 반항이 때 로는 피압박자의 반항이 때로는 특권계급의 진화 자체가 새로운 여건을 조성한다. 그리하 여 남성들은 자기 이득을 위해 부분적으로 해성을 해방시켰다. 여성으로서는 오직 지위의 상승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나타난 성과에 의해 고무된다. 지금부터 얼마나 시 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나 장차 여성이 완전한 경제적, 사회적인 평등을 누리게 될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 결과는 내면적인 변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어쨌든 몇몇 사람들은 "설사 그런 세계의 도래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세계가 아니다." 하고 항의할 것 같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면 인생에서 '맛을 내는 소금'이 없 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상유지를 지속시키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밝은 미래에 미소를 지어보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사라져가는 과 거에 눈물을 뿌린다. 노예매매를 폐지했기 때문에 진달래와 동백꽃으로 장식한 대농원이 황폐화되고 남부(미국)의 정교한 문명을 모두 멸망시킨 것은 사실이다. 아름다운 고대의 레이스는 시간이 다락방 속에서시스티나 사원의 거세된 가수들(15세기경의 시스티나 사원 의 성가대)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멸망되었다. 일종의 '여성다운 매력'은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리려고 한다. 진귀한 꽃, 레이스, 거세된 가수의 맑은 목소리, 여성다운 매 력, 이 모든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야만저인 태도라고 비난하는데 대하여는 나도 동감이 다. '매력 있는 여성'이 그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면 랭보를 환희에 몰아넣었던 '백치의 그 림, 문 위의 장식, 무대 배경, 곡마단의 광고, 야한 간판, 저속한 삽화'보다도 더욱 열광시 킨다. 그것은 가장 근대적인 기교로 장식되고, 가장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져 먼 옛날부터 테베, 크레타, 치첸 잇사(고대 멕시코의 도시) 등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가시덤불 한가운데 세워진 토템(동물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헬리콥터이고 새이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기적이다. 그녀의 장식된 머리칼에서는 나무 잎사귀 소리가 하나의 사상이 되 고 그녀의 젖가슴에서는 말이 샘처럼 쏟아져나온다. 남성들은 이 경이를 향햐 탐욕스럽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가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 경이는 사라져버린다. 아내나 애인은 담담하게 지껄이고 있다. 그 말은 그녀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젖가슴도 마 찬가지이다. 이처럼 순간적이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기적 때문에 남녀 양성에게 혐오스 러운 상황을 영속시켜도 무방할까. 꽃의 아름다움이나 여성의 매력을 감상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런 보물이 한편으로는 피나 불행에 의해 보상된다면 그런 보물은 아낌없이 버리 는 것이 좋다. 사실 이런 희생은 남성에게는 무척 괴롭게 생각되는 것 같다. 여성이 자기완성을 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남성은 별로 없다. 여성을 경멸하는 남성들은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을 소중히 여기는 남성들도 그 경우에 자기가 잃어 야 하는 것을 너무 과대하게 생각한다. 현재의 진화의 정도는 단지 여성의 매력을 위협하 는데 그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자기를 위해 살기 시작하면 남성의 그림자나 매 개물로서의 기능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 기능 덕분에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자연의 침묵과 다른 자유를 요구하는 조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 성에게 자기와 똑같은 형태를 하고 동시에 수동적인 물체인 그 존재는 대단한 보물로 보 인다. 그가 상대방 여성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신화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원인이나 구실로 삼고 꺽는 경험은 역시 현실적인 것이다. 이 이상이 귀중하고 친밀하고 정열적인 경험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여성의 종속, 열등성, 불행이 그녀에게 특이한 성격을 제 공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여성의 자립으로 남성이 많은 수고를 덜게 되어도 남성 이 많은 편의를 잃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는 할 수 있어도 다가올 미래의 세 계에서는 없어지는 성적 모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 행복, 시, 몽상 등이 완전히 추 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빈약한 상상력은 언제나 미래를 쓸쓸한 것으로 내다보게 된 다. 이것은 경계하자. 미래는 아직 추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저마다 지금까지 자기였던 것 이 미래의 세계에는 없어진다고 해서 한탄하기 쉽다. 그러나 미래의 인류는 자기 육체 속 에서 자유 속에서 미래를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이 그의 현재가 되어 그것을 더 욱 사랑하게 된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육체적 애정관계가 생기게 될 것이다. 현재 이미 남녀 사이에는 지난 몇 세기에서는 볼 수 없던 정신적, 혹은 성적인 우정, 적대감, 공범관계, 우의를 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획일주의, 즉 권태로 몰아넣는다고 단정하는 선전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나는 미래의 세계에 권태가 완전히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자유가 획일을 조성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로 남녀 사이에는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색정, 즉 그 성적인 세계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특유의 감각과 감성 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육체와 남성의 육체 및 아이와의 사이에 갖는 관계가 남성이 자신의 육체와 여성의 육체 및 아이와의 사이에 갖는 관계와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차이 속의 평등'이라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우는 사람들은 평등 속에도 자유 가 존재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단조로움을 가져오 는 것은 제도이다. 젊고 아름다워도 터키 후궁의 여자들은 술탄(황제)의 품에 안기면 모두 동일하다. 기독교는 여성에게 혼을 부여함으로써 색정에 죄와 전설의 의미를 알게 했다. 여성 최고의 개성을 회복시켜줘도 사랑의 포옹에는 황홀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남녀가 실제로 대등해지면 향락적인 연회, 방탕, 황홀, 정열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육욕과 정신, 순간과 시간, 내재의 현혹 과 초월의 호소, 쾌락의 절대와 망각의 허무 등을 대립시키는 모순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다. 실존의 긴장, 격동, 희열, 실패, 승리 등은 역시 성본능 속에 구체화될 것이다. 여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킨다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 속에 여성을 가둬두지 않는다 는 것이지만 이런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여성이 대자적으로 살아가더라도 역 시 남성과 대립하여 살게 될 것이다. 서로 주체로 인정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어디까지나 타 자이다. 남녀관계의 상호성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 데서 생기는 기적, 즉 욕구, 소유, 사랑, 꿈, 모험 등을 없애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 준다. 정복한다. 결합한다는 말- 은 여전히 그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인류의 절반인 노예상태 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위선적인 사회구조가 폐지될 때 비로소 인류를 둘로 나눈 ' 분활'의 그 참된 의미가 밝혀져 한쌍의 남녀가 그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필연적인 관게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이다." 하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다.(<철학적 저작> 제6권에서) "이 관계의 성격에 따라 남성 이 종으로서의 존재, 즉 남성으로서의 자기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를 드러내게 된 다. 남녀의 관계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남성의 자연적인 태도가 어느 정도까지 인간적인 것이 되었는가, 혹은 인간적인 존재가 어느 정도까지 자연적인 존 재로 되어 있는가, 그의 인간성이 어느 정도까지 자연이 되어 있는가 등을 보여준다." 이 이상 의사표시를 잘 할 수는 없다. 이 주어진 현실세계에 자유의 지배를 도래시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하여 분명한 우애를 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