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나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을 망설여 왔다. 이 주제는 특히 여성에게는 자 극적이다. 그리고 이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성들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꽤 많이 써 왔기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여성에 대한 논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그 문제에 대 해서는 왈가왈부 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그런데도 아직도 사람들의 화젯거리는 되고 있다. 그리고 십구 세기에 개진된 많은 어리 석은 견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밝혔다고 볼 수 도 없다. 우선 문제가 있기는 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인가? 도대체 여성이 있기는 한가? 확실히 "영원한 여성"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에서도 여성은 남아 있다."라고 더욱 유식한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여성의 지위가 상실되어가고 있어. 이제 여성이라는 인간은 없어졌어." 과연 아직도 여성이 있는가, 언제까지나 여성은 있는가, 여성이 있는 것이 바람직한 일 인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가. 여성은 이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어떤 지 위를 차지해야 하는가... 오늘에 와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오다 말다 하는 어떤 잡지가 최근에 "여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여자란 무엇인가?"라 는 물음에 "여자는 자궁이다."하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여성문제에 정통한 사 람은 "그것은 여자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하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런 여자도 자궁을 갖 고 있을 텐데 말이다. 인류에게도 암컷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 암컷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다움이 위기에 빠져 있다."고 자주 말한다. "여성다워라, 어디까지나 여자는 여자여야 한다. 여자가 되어라." 하 고 격려하는 소리도 들려 온다. 즉 인류의 모둔 암컷이 필연적으로 여성인 것은 아니다. 이른바 여성다움이라는 위협적인 현실에 오늘의 여성은 참여해야 한다. 여성이란 난소의 분비물인가? 또는 플라토닉한 높은 하늘에 가만히 도사리고 있는 존재 인가? 이것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레이스로 장식된 스커트만 한벌 있으면 충분 한가? 여성들 중에는 여성다움을 애써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모델은 아 직 한번도 제시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모델은 이런 것이다. 하고 예언자의 어휘에 서 빌려 온 듯이 생각되는 애매하고 현혹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다. 성 토마스 시대 에는 양귀비의 수면제 효력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는 본질처럼 생각하고 있 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금에 와서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생물학적, 사회적 지 식은 여자니 유태인이니 흑인이니 하는 것을 주어진 성격으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 다. 그런 확실한 본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성격이라는 것도 상황에 대한 부차적인 반 응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여성에게 일정한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내용도 갖고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까? 계몽철학이나 합리주의나 유명론 일파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즉 여성이 인간적인 존재 속에서 "여성"이라는 말로 멋대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부인들은 이제 여성이라는 그 독특한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시대에 뒤 떨어진 여성이 아직도 자기를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친구들은 그녀에게 정신분석의 진단을 받아 고정관념을 깨끗이 버리라고 권유한다. 내가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현대여성"이 라는 책에 도로시 파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자를 여자로서 취급하고 있는 책에 대하여는 찬성할 수 없다. 누구를 막론하고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인간으로 생각해야 한 다." 그러나 유명론은 시야가 좁은 이론이다. 여권신장 반대론자들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 라고 반박할 만한 소지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분명이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이다. 사실 구체적인 인간은 누구 나 개별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영원한 여성이니 검은 영혼이니, 유태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오늘날 유태인이나 흑인이나 여자의 존재를 부 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부정은 그 당사자들 을 편견으로부터 해방 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고를 조장하게 된다. 어떤 여자도 성을 무시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불성실한 태도이다. 몇 해 전에 어떤 여류작가가 여성작가만 실은 사진첩 속에 자기 사진을 넣는 것을 거절 했다. 그녀는 남성 작가 속에 자기 사진을 넣기를 원했다. 그녀는 이 특권을 얻기 위해 자 기 남편의 힘을 이용했다. 자기는 남성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남성이 받는 것과 같은 존경과 경이를 요구한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예를 하나 들겠다. 어떤 트로츠 키파의 젊은 부인이 성황을 이룬 사회주의 집회에서 그 연약한 몸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연설했다. 그녀는 이렇게 하여 자기의 연약함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성투사처럼 행 동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 여성의 히스테릭한 도전적인 태도는 오히려 자기가 여자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조금만 주변을 돌아 보아도 인류 는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의 옷, 얼굴, 몸집, 미소, 태도, 이해, 일 등이 분명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차이는 피상적인 것이 므로 곧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로서는 이런 차이와 구별이 뚜렷이 존재 한다는 점이다. 여성의 기능으로 여자는 이러저러하다고 정의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면, 그리고 "영원한 여성"으로 여자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면, 지상의 여자들이 존재하는 한, 설사 그것이 잠정 적인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구 자체가 곧 우리에게 해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제시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남자라면 인류 속에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특이한 상황에 대해 책을 쓰고 하 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기 자신을 분명히 정의하려고 하면 먼저 "나 는 여자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무엇을 주장하든 그 근거에는 이 사실이 깔려 있어야 한 다. 그런데 남성이라면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먼저 성에 관한 개체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 사 남성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일이다. 관청의 대장이나 신분증명서에도 남성과 여성의 난이 좌우로 대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양성의 관계는 전극과는 다르다. 남자는 양극과 중성을 대표하여 프랑스어로 homme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본래 라틴어로 vir이라는 말이 homo라는 말로 동화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자는 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성질의 표시에 상호작용이 없고 제한된 것으 로만 생각된다. 가끔 추상적인 토론을 할 때 어떤 남자가 "당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라고 말하여 귀에 거슬린 경험이 있다. 나는 되도록 주관적인 말을 피하 고 "나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항의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신 은 남자 이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고 되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 면 남자라는 점이 별로 특이한 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남자이기 때문만으로 정당한 위치에 서게 된다. 잘못은 여자 쪽에 있다는 것이 다. 옛날 사람들에게 사선의 기준이 되는 절대적인 직선이 엄연히 있었던 것처럼, 실생활 에서 남성적인 전형이 되는 절대적인 정형이 있다. 여성은 난소나 자궁을 갖고 있다. 이런 특이한 조건이 여성을 언제까지나 주관성 속에 갇혀 있게 한다. 여성을 자신의 선으로써 생각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남성은 자신의 신체적인 구조도 특수한 호르몬이나 고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는 자기 몸이 객관적인 세계와 직접적이고 정상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의 몸은 종에게 종속되는 모든 것에 의해 억눌려 있는 것으로, 즉 장애물이나 감옥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은 어떤 성질이 결여 되 어 있기 때문에 여성이다. 우리는 여성의 본성을 자연적인 결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생각해야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 토마스는 이에 동조하여 여자는 "되다만 남자"이며 "우발적인" 존재라고 정의했다. 보쉬에의 말에 의하면 아담의 "여분의 뼈"로 이브를 창조했 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여성의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은 남자이고, 남자는 여 자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에서 정의 내리려고 한다. 여자를 자율적인 존재 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 이 상대적인 존재... ."하고 미슐레도 쓰고 있다. 반다도 유리에의 보고에서 "남자 의 육체는 여자의 육체가 갖는 의미를 제외하고도 그 자신이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 만 여자의 육체가 갖는 의미를 제외하고도 그 자신이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여자 의 육체는 남성의 육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잃게 된다... . 남자는 여자가 없어도 생각될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가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자는 ... 남자가 규정짓는 존재 밖에 되지 않는다. 여자를 섹스라고 부르는 것도,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본질적으로 성적인 존재로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의 미가 정해지고 그 차이가 구별되는 것이지 여성 자신으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여자는 본질 적인 존재에 대한 비 본질적인 존재이다. 남자가 주체며 절대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자이 다. 타자라는 범주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사회나 가장 낡은 신화 속에서도 언제나 동일자와 "타자"의 이중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구별은 처음에는 성의 구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어떤 체험적인 사실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 다. 예컨대 중국사상에 대한 그라네의 연구나 인도와 로마에 대한 뒤메질의 연구에서 이것 이 분명히 드러났다. 바루나와 미트라와 제우스, 태양과 달, 낮과 밤, 이러한 한 쌍에 처음 에는 결코 여성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왼 쪽과 오른쪽, 신과 악마의 대립과 같은 것이다. 타성이란 인류사상의 기본적인 범주이다. 어떤 집단도 자기를 주체로 의식할 때에는 반 드시 타자를 자기와 대립 시킨다. 세 사람의 여행자가 우연히 기차 안에서 같은 칸에 모여 앉으면 다른 승객들은 막연히 적의를 갖는 "타자"가 된다. 어떤 마을사람은 그의 마을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 글에게는 경계해야할 "타자"이다. 어떤 나라의 토착인에게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유태인은 반유태주의에게는 "타자"이고, 흑인은 미국 민 족주의자에게, 원주민은 식민지 경영자에게, 프로레타리아는 유산계급에게 각각 "타자"이 다. 레비스토로스는 미개한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을 면밀히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 론에 도달했다. "자영의 상태에서 문화 상태의 이행은, 생물학적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이중성, 교체, 반대, 좌우 대칭 등의 사고가 그것이다. 이런 대립이 분명히 나타나든 희미하게 나타나든, 그것은 설명해야 할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작인 현실의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사실 자체이다. " 만일 인간 사회의 현실이 상호부조와 우정에 입각한 공존뿐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 목이다. 반대로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의식 자체 속에서 모든 다른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적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쉽게 이해된다. 주체는 대립되는 데서 자기를 세우게 된 다. 자기를 본질적인 존재로 주장하고, 타자를 비본질적인 존재, 즉 객체로 봄으로써 자기 를 확립시켜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의식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대립하려고 한다. 여행을 떠난 토착인은 이웃나라 에 살고 있는 토착인이 이번에는 그를 이방인 취급하는데 대해 기분이 상한다. 마을과 마 을, 씨족과 씨족, 국가와 국가, 계급과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전쟁, 연회, 거래, 계약, 투쟁 등과 같은 것들은 "타자"라는 생각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워 버리고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좋든 나쁘든 개인이나 집단도 서로의 관계에서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 어째서 남녀 사이에는 이와 같은 상호성이 인정 되지 않고, 한쪽만 유일한 본질적 인 존재적인 존재가 되고, 상대방에게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저하고 순전한 타성으로 규정 하게 되었는가? 어떤 주체도 자발적으로 비본질적인 객체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주체에 의해 타자는 타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의 신분에서 주체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그 타자는 그와 같은 상대의 관점에 순순히 복종하고 있다 는 것을 뜻한다. 여자의 이와 같은 복종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한동안 한쪽 범주가 다른 쪽은 완전히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수량적인 불평등이 때때로 한쪽에 이런 특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다수자는 흔히 소수자에게 법률을 강요하거나 그들 을 박해한다. 그러나 여자는 미국의 흑인이나 유태인과 같은 소수가 아니다. 지구상에는 남자와 거의 같은 수의 여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양분된 그룹이 처음에는 서로 독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정에는 양쪽에 서로 모르고 지냈거나 상대방의 주체성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 게 된다. 유태민족의 분산, 미국에서의 노예제도의 도입, 식민지 정복 등은 모두가 획기적 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 경우에 압박받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지난날의 역사가 있다. 그들은 하나의 과거, 전 통, 그리고 때로는 종교나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벨이 여자와 프로레타리 아를 비교한 것은 언뜻 보아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프로레타리아는 수적으로 열세에 놓 여 있지도 않고 근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단을 이론적도 없었다. 그러나 비록 과거에 어 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자와 프로레타리아의 존재를 계급의 범주안에서 설명하고, 특정한 개인을 이런 계급 속에 끌어들여 이유를 밝히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발전이다. 프로레타리아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있었다. 여자 는 그 생리적인 구조에 의해 여자이다. 역사를 마냥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여자는 언제 나 남자에게 종속되어 왔다. 이 의존관계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회발전의 결과는 아 니다. 즉 그것은 새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 타성이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 은 여자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우연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어떤 상황은 다른 시점에서는 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티의 흑인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자연적인 조건은 변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역사적인 현실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결코 변화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여자가 자신을 결코 본질로 복귀할 수 없는 비본질로 간주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이 반전을 시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레타리아는 "우리들"이라고 말한다. 흑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기를 주체로 세워 부르조아나 백인을 "타자"로 바꿔 버린다. 하지만 여자는 관념적인 시 위에 그치는 몇몇 집회를 제외하고는 "우리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들"이라 고 말한다.그리고 여자 쪽에서는 이 말을 자기를 가르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 나 결코 주체로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프로레타리아는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흑인은 아이티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며 인 도차이나인은 인도차이나에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여자의 움직임은 언제나 상징적인 행동 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양보해 주는 것 밖에 얻지 못했으며, 그들 스스로 자진해서 쟁 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단지 주는 것만 받았을 뿐이다. 즉 여자는 대결하여 싸 울 수 있도록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현실적인 수단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들 은 하나로 뭉치게 하는 현실적인 수단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과거도 역사도 종교도 없었다. 프로레타리아처럼 노동이나 이해의 연대성도 갖고 있지 않 았다. 여자들 상호간에 미국의 흑인이나 게토의 유태인이나 생드니 거리 혹은 르노 고장의 노동자가 고유하는 장소의 집단성도 없었다. 여자는 주거, 일터,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아 버지나 남편과 같은 어떤 남서의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남자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을 뿐, 여자들끼리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지 않았다. 부르주아 여성은 부르주아 와 가까이 하고 프로레타리아 여성과는 관계가 없다. 백인 여자는 백인 남자와 어울리고, 흑인 여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프로레타리아는 특권계급을 말살하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광신적인 유태인이나 흑인은 원자 폭탄으로 인류 전체를 흑인화 하거나 유태인만 살게 하려는 꿈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전멸시키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 지 못한다. 그녀를 압박자에게 연결시키려는 고삐는 다른 고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성의 구별은 생물학적 조건이지 이류 역사의 한 모멘트는 아니다. 남녀의 대립은 근원적 인 공존 속에서 생긴 것이며, 여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남녀라는 한 쌍은 두 개의 반쪽이 서로 묶여 있는 기본적인 통합이다. 성으로 사회를 구분짓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바로 이점이 여자의 특징을 근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여자는 두 개의 요 소가 서로 필요한 전체 속에서 "타자"이다. 이와 같은 상호성은 여자의 해방을 보다 쉽게 쟁취할 수 있게 했다고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헤라클레스가 옴팔레의 발치에서 털실을 짜는 것을 돕고 있을 때 그는 정욕에 사 로잡혀 있었다. 왜 옴팔레는 계속해서 권력을 손에 넣는데 실패했는가? 메데이아는 이아손 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어린 자식들을 죽였다. 이 야만적인 전설은 자기 자식에 대한 남자와의 관계에서 여자가 무서운 위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 "리시스트라테"에서 여자의 모임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여자들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남자 의 성적 욕망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 의 희극에 지나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누스의 여자들은 약탈당했을 때 그 약탈자들 에게 완강하게 불임으로 대항했으나, 남자들이 가죽 끈으로 후려치자 이상하게 그 대항은 금세 그쳤다고 한다. 생물학적 욕구, 즉 성에 대한 욕망과 자식을 가지려는 욕망은 일단은 남자를 여자에게 굴복시키지만, 그래도 여자들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해방 시키지 못했다. 주인과 노예도 서 로 경제적인 요구에 의해 맺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주인 과 노예의 관계에서는, 주인은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욕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이 런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나 서둘러 수단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 예는 희망이든 공포든 주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한, 주인에 대해 갖고 있는 욕구를 잠시도 저버릴 수 없다. 이렇듯이 욕구의 정도가 양자에게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압박자에 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완만하게 이루어지는 경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노예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자의 가신이었다. 남녀가 세계를 평등하게 나눈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늘날 여자의 신분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커다 란 핸디캡이 남아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법률 상으로도 여자와 남자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설사 여자의 권리가 추상적으로 인정되어 있더라 도, 오랜 습관과 풍속은 그런 권리가 사회 전반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 다. 경제적으로는 남자와 여자는 거의 모두 두 계급을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이 같다고 하 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거의 모두 두 계급을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이 같다고 하더라도 남자 가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는다. 보수도 많고 성공할 기회도 많다. 남자는 산업이나 정치, 그 밖의 분야에서도 훨씬 많은 지위를 차지하고 요직을 독점한 다. 남자는 이처럼 실제적인 권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남성의 위신이 라는 것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은 교육전반에 남아 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영향 하 에 존재하게 마련인데, 그 과거의 역사는 남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세계의 건설에 참가하기 시작한 현재까지고 이 세계는 아직도 남자 의 손에 꽉 잡혀 있다. 남자는 이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여자도 마찬가지다. " 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남자의 비위맞추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자에게는 상류계급이 제 공할지도 모르는 이득을 모두 단념하는 것이 된다. 영주인 남자는 자기에게 헌신적인 여자 를 물질적으로 보호해 주고 그 생존의 정당성을 책임진다. 여자는 경제적인 위협을 회피하 는 동시에, 자기 힘으로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자유라는 형이상학적인 위험을 회피한다. 사실상 누구에게나 주체를 확립하려는 윤리적인 욕구가 있는 동시에,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사물화시키려는 유혹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행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 고 소외되고 버려진 인간은 초월에서 이탈되어 모든 가치를 상실하고, 자기가 아닌 남의 의지에 희생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손쉽게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때문에 올바로 받아들여야 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피해 버린다. 그러므로 여자를 "타자"로 만들어 버린 남자는 여자 속에서 뿌리 깊은 의존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자는 구체적인 수단을 갖고 있 지 않으므로 행동의 주체가 되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 남자와의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 고, 남자에 의존하는 필연적인 유대를 절감하기 때문에 때때로 여자는 그 타자의 역할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이런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성의 이중성 은 다른 모든 이중성과 마찬가지로 투쟁의 양상을 따고 있다. 양자 중에서 어느 한쪽이 그 우월성을 상대방에게 인정케 하는데 성공하면 이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굳어져 버린다. 남 은 문제는 출발점에서 남자가 어떻게 이기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여자 쪽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혹은 투쟁이 계속되어 분명히 결판이 나지 않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남자에게 속해 있던 이 세계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사태가 달라지 기 시작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런 변화는 바람직한 일인가? 이 변화로 세계가 남 자와 여자에게 평등하게 나눠지는 길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해답이 나와 있다. 그런데 여자가 " 타자"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남자 쪽에서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내린 해석에 의문을 갖게 한다. 그 해석들은 모두 남자 쪽에서 유리하도록 정립된 이론 이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17세기의 여권신장론자인 풀랭 드 라 바르는, "여자에 대해 모든 남자가 쓴 것들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자인 동시에 당사자 이기 때문이 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창조의 왕자라고 느끼며 만족감을 피력하 여 왔다. "나를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신 것을 우리 주 하나님께 찬양하나이다!" 하고 유태인은 아침마다 기도하고 있디. 한편 그 아내들은 체념하고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저 를 하나님의 뜻대로 지으신 것을 찬양하나이다." 플라톤이 신에게 제일 먼저 감사한 은혜 는 자기를 노예로 태어나게 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고, 다음은 여자로 태 어나지 않게 한 것이었다. 남자가 이런 특권을 영원 불변한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특권을 충분 히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보장하려 고 했다. 풀랭 드 라 바르는 다시 말했다. "법률을 제정하고 편찬한 자는 남자였으므로 그 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률학자는 법률을 원칙화 했다." 입법가, 승려, 철학자, 작가, 과학자 들은 저마다 여자의 종속적인 신분을 하늘에서 정한 것이며, 그것이 지상에 서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주력했다. 남자가 만든 종교도 이 지배욕을 반영하고 있 다. 이브나 판도라의 전설이 모든 경우에 이용되었다. 그들은 앞에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나 성 토마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철학 이나 신학도 이용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풍자작가나 모럴리스트는 열심히 여자의 약점을 묘사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프랑스 문학은 전반에 걸쳐서 여성에 대해 심한 비난과 공격을 가해 왔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몽테를랑은 중세의 장 드 밍의 전통을 전통을 약간 부드럽게 손질한 데 불과하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적의는 때때로 이 유가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대부분 무의미한 것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적의에는 교묘히 위 장된 자기번호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성을 비난하는 것은, 다른 성을 옹호하기보다 쉽다."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그 수법이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로마의 민법이 씨족제도가 쇠퇴하여 여자 가 남자 상속자에게 위태로운 존재가 되었을 째, 여자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여성의 우 매함과 연약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에 결혼한 여자를 후 견인의 감독 하에 두기 위해 "여자는 견실하지 못한 동물"이라고 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의 권위를 이용하려고 한 것도 기발하다. 그러나 독신녀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인 정했다. 몽테뉴는 여성에 대한 독선적이고 불공평한 취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성이 이사 회의 규법을 거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규범은 남자가 여자와 의논하지 않고 만 들었으니까.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당연히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하여 여성의 권리신장을 위해 싸우지는 않았다. 매우 민주적인 인물이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그 중에서도 디드로는 여자는 남자와 마찬 가지로 인간적인 존재임을 입증하려 열심히 노력했다. 이보다 조금 후에 스튜어트 밀도 여 성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는 극히 예외적으로 여성을 공평하게 본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와 서 여성논쟁이 여러 당파 사이에 일어났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여성이 생산노동에 참가하 게 되었다. 이 무렵에 와서는 여성해방의 요구로 탁상론에서 벗어나 비로소 경제적인 기초 를 찾게 되었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더욱 공세를 취했다. 부르주아지는 토지 소유권을 대부분 상실했는데도 여전히 견고한 가족제도 안에서 사유 재산이 보장되는 낡은 도덕에 매달려 있었다. 부르조아 계층에선 여성해방이 큰 위협이 되 기 때문에 여성들을 더욱 가정에 묶어 두려고 했다. 노동계층의 남자들이 역시 이 해방을 억제하려고 했다. 여자는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데 길들여져 있으므로 위험한 경쟁자로 모 였던 것이다. 여성의 열등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전에 이용하던 종교나 철학, 신학뿐 아니 라 이제는 과학까지 동원되었다. 생물학과 심리학의 이용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다른 성에게 "차이 속의 평등"을 인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유행어는 대 단히 의미 심장하다. 미국의 흑인에게 짐 크로의 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 락에서이다. 이와 같은 자칭 평등적인 구별은 실제로는 오히려 극단의 차별대우를 가져왔을 뿐이다. 이 두 사실의 일치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인종이든 계급이든 성이든 그것이 열등한 쪽에 강요하는 변명의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영원한 여성"이나 "검은 영혼"이나 "유태인 의 성격"과 같은 종류의 말이다. 하긴 유태인 문제는 다른 양자와 크게 다르다. 반유태인 주의자들에게 유태인은 열등한 존재라기보다 적이며, 이 세상에서 유태인에게는 어떤 지위 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전멸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자의 입장과 흑인은 매우 흡사하다. 오늘날 이 둘은 모두 같은 보호정책에 의 해 해방되는 중이며, 과거의 지배계급은 이들을 "그 당연한 지위", 즉 자신들이 그들을 위 해 정해준 지위에 묶어 두려고 한다. 이 두 경우에서 지배계급은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잘 웃는 "착한 흑인"이나 체념한 흑인의 미덕에 대하여 또는 "참으로 여자다운"여자, 즉 경박 하고 유치하고 무책임한 여자, 남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여자의 미덕에 대해 성실하게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이 둘의 경우에 지배계급은 모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사태에서 의론의 근거를 이끌어 내고 있다. 버너드 쇼의 험담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백인은 흑인을 구두 닦이로 만들어 놓고, 흑인은 구두닦이 밖에 못 한다고 단정한다. "모든 면에서 이와 비슷 한 악순환을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 열등한 상황에 몰려 있을 때 그 개인이 열 등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 에 본질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이다. 실제로 그것은 헤겔이 말하는 동적 인 의미를 갖는다. "하다"는 말은 "되었다"는 것이며, 지금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되어졌다 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전체적으로 본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 즉 그녀들의 상황은 보다 작은 가능성밖에 열려 있지 않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많은 남자는 영속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는 여전히 여성해방이 자기의 도덕과 이익에 위협을 가할 우려가 있다 고 보고 있다. 전에 "에브도 라탱"에서 어떤 남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 려는 모든 여학생은 우리에게서 직업을 빼앗는 거예요." 이 남학생도 자기가 이 사회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특권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해관계 외에도 압박에 의해 보장되는 압박자의 이익 중 하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비열한 자까지도 우월감을 갖는 것이다. 남부 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백인도 "나 는 더러운 깜둥이"가 아니라고 자위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부유한 백인들은 이 자존심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장 평범한 남성도 여성과 비교하여 자신을 반신 처럼 생각하고 있다. 몽테르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사 남성들 사이에서 남자로서 자기 역할을 유지해야 했을 때보다, 여성들 앞에서 자기를 영웅처럼 생각하는 쪽이 훨씬 쉬웠던 것이다. 많은 여 상들은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몽테르랑보다 더 잘했지만. 그리고 1948년 9월에 "피가로 리 테레르" 지에 실린 논문에서 클로드 모리아크 "누구나 그의 뛰어난 독창성을 찬탄하고 있 다" 는 여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우리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무관심한 태도로... 여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말 에 귀를 기울인다. 그 여자의 기지는 본래 우리에게서 얻은 사상을 다소 생기 발랄하게 반 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그 여자가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모리아 크 자신의 사상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사상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그 여자가 남성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남성 중에서도 자신의 독 창적인 사상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모리아크도 자기보다 오히려 데카르트, 마르크스, 지드의 훌륭한 사상을 반영하면서 대화하는 쪽에 관 심이 많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들이라는 애매한 말을 사용하여 성 바울이나 헤 겔, 레닌, 니체와 일체가 되어, 이를테면 그들의 위엄을 빌려,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 기를 나누려는 여자들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모리아크가 말한 "무례 하지 않을 정도의 무관심:을 인내심을 가지고도 참을 수 없는 여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 는 알고 있다. 내가 이 실례를 일부러 강조하는 것은, 이런 남서의 단순한 태도가 언제나 비위에 거슬 리기 때문이다. 여자의 타성을 이용하려는 보다 교묘한 수법도 많다. 남몰래 열등감에 시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기적적인 약이 되는 모양이다. 자신의 사내다움에 자신이 없는 남성일수록 특히 더 여성에 대해 교만하고 도전적이며 경멸적이다. 동성에 대해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여성을 자기와 동일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아량을 갖기 쉽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까지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자","타자"의 신화를 소중히 여긴다. 그들이 거기서 얻은 이득을 깨끗이 포기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 하면 남자들은,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기대 속에 종속되는 여자를 단념했을 때 무엇을 잃 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으며, 앞으로 그런 여자가 자기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지를 모 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자기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체"임을 주장하지 않게 되려면 많 은 희생이 필요하다. 하긴 대 다수의 남성들은 이런 주장을 그다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는 다. 그들은 여성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남자도 민주주의적인 이상에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려고 한다. 가정에서의 여자는 어린이나 젊 은이의 눈에 성인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품위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윽고 그 청년 은 욕망이나 사랑 속에서 귀여움이나 아낌을 받는 여성의 저항과 독립을 경험하게 된다. 결혼하면 그는 상대방 여성을 아내나 아기 엄마로 존중하고, 구체적인 부부생활을 경험하 게 된다. 또한 여자는 남자에 대한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게 된다. 때문에 그는 이제 남녀 사이에는 사회적인 계급이 없고, 여러 가지 전반적인 차이는 있지만 남자 와 여자는 평등하다고 믿고 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아직 여자에게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적인 무능력이다." 남자 쪽에서는 그런 약점을 모두 자연의 탓으로 돌린다. 그가 여자 에게 협조적이고 친절한 태도를 취할 때에는 단지 추상적으로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분명히 보이는 불평등에 대하선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남자가 여자와 겨뤄야 하는 처지가 되면 양상은 반대가 된다. 그는 구체적인 불평등을 내세워 추 상적인 평등까지도 부정하고 그것을 방패로 삼는다. 이처럼 많은 남자들은, 남녀가 평등하므로 이제 여자들은 더 요구할 것이 전혀 없을 것 으로 확신하는가 하면, 한편 여자는 결코 남자와 동등할 수 없으니 그런 요구는 헛된 것이 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자는 사회적인 차별대우가 지니는 큰 영향력을 간파하기 어렵기 때 문이다. 그 차별은 겉으로 보기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지만, 그 정신적, 지적인 영향은 여 자에게는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연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다. 여자의 입장을 크게 동정하는 남자도 여자의 구체적인 처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한계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특권을 방어하려는 남자들의 말을 믿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자에게 가해지는 공격이나 횡포를 잠자코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 여자다운 여자"에게 주어지는 엉큼한 찬사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자기는 그런 운 명은 질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활태도에 남자들이 보내는 감탄에 말려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 여권신장론자들의 논의도 경계해야 한다. 논쟁에 대한 논의만 앞서 서 거들떠볼 아무 가치가 없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문제"가 무익하다 는 말이 들리는 것은 남성의 오만으로 그 문제가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끝나기 때문이 다. 일단 논쟁이 시작됐다 하면 올바른 토론이 전개되지 않는다. 지칠 줄 모르고 애써 입 증하려고 한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우수하냐, 열등하냐, 동등하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담을 창조한 이후에 창조된 이브, 즉 여자는 제 2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 런가 하면 이와 반대로 하나님은 아담을 실험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들고 그 경험을 보완하 여 이브를 만들었을 때 비로서 인간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자의 두뇌는 남자보다 작다. 그러나 몸 전체의 비율로 따져 보면 남자보다 크다. 그리스도는 남 자로 태어났으나, 아마도 그것은 겸손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등등. 어떤 논의에도 곧 반대론이 대두되고, 양쪽 모두 논거가 미약한 경우가 많다. 무제를 정 확하게 파악하려면 이런 상투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논쟁을 오도하는 우열이나 동 등과 같은 막역한 사고 방식을 배제하고 새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럼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할까?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기해도 무방한가? 남자 는 심판관이며 그 당사자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천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사 실 천사는 이런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의 내용을 알지 못하니까. 남녀 양성이란 특수한 경우이다. 천사는 남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자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 남 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나는 여성의 처지를 정확하게 밝히려면 역시 여성이 가장 적 합하다고 생각한다. 에피메니데스를 크레타인의 개념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하나의 궤변이 다. 남자나 여자에게 성실하거나 불성실한 마음을 심어 주는 것은, 어떤 신비적인 본질이 아니다. 그들에게 진리를 많든 적든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처지이다. 오늘날 여성들 중에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회복하고 공평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그런 욕구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제 선배 여성들처럼 투사는 아니다. 대체로 보아 우리는 투쟁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여성에 관한 법률의 논쟁에서도 유엔기구는 끊임없이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미 많은 여성들은 여자로 태어난 것을 소박이나 장에로 느끼고 있지 않다. 많은 문제들이 우 리 여성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훨씬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일반성 은 우리의 태도가 객관적이기를 우리로 하여금 바라게까지 한다. 우리는 남자보다 여자의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여자라는 사실 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직접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데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방금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여자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자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가? 어떤 기 회가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져 있고, 또 거부되고 있는가? 우리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기다 리고 있는 운명은 어떤 것인가? 그들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가? 여성에 관 한 최근의 문헌들이 권리를 요구하려는 의욕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떠들썩한 논쟁의 시대가 지났을 때 나온 이 책도 문제 를 분명히 밝히려는 많은 시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어떤 문제도 전혀 선입견이 없이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앞날의 전망 등은 이미 관심을 예상케 한다. 모든 품성은 각각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다. 어떤 윤리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순수하게 객관적인 서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드러나 있는 원리를 덮어두려고 하지 말고 그런 원리를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면 우수하다, 열등하다, 더욱 좋다, 더욱 나쁘다, 전진 했다, 후퇴했다 등의 말에 대해 페이지마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성에 대해 쓴 몇 권의 책을 훑어보면,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은 공익이나 일반 이익이다.이것들은 그 저자 가 존속시키거나 확립시키기를 원하는 그런 사회의 이익을 의미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시민들의 개인적인 복리를 확보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는 개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기회라는 입장에서 사회제도를 비판한다.그러나 개인의 이익 을 행복과 혼동하지 않는다.이것은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견해이다. 하렘 의 여자들은 선거권을 가진 여자들보다 더욱 행복하지 않은가? 가정주부는 여성 노동자보 다 더욱 행복하지 않은가? 이런 행복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어떤 참된 가치를 갖고 있는가는 더욱 분명치 않다. 남의 행복을 헤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을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다. 정체된 상태 속에 강제로 있어야 하는 사림들에게, 행복이란 부동의 사태라는 걸 구실로 내세워 "너는 행복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것은 실존주의적 모럴이 다. 모든 주체는 투기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자기를 초월자로 내세운다. 그는 다른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무한정 열려 있는 미래를 향 해 성장·발전하는 것만이 눈앞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이다.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존재로 타락하고 자유는 사실성으로 타락한다. 이 전락은 만일 그것이 주체의 동의를 받고 있다면, 하나의 도덕적인 과실이다. 만일 그 것이 강요되어 일어난다면 좌절과 압박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어느 경우에도 그것은 절대 악이다. 자기의 실존을 정당화하기를 원하는 개인은 이 실존을 자기초월의 무한한 욕구로 경험한다. 그런데 여성의 처지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자유인데도 남성들로부터 '타자'로서 살아가도록 강요받는 세계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선택 한다는 것이다.여성은 객체로 고정되도록 강요되고 있다. 여성의 초월은 다른 본질적이고 주권적인 의식에 의해 초월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내재에 갇혀 있게 된다. 여성의 비극은, 끊임없이 본질적인 존재로서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모든 주체의 기본적 인 욕구와 그녀를 비본질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려는 요구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서 빚어 진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여성이라는 신분을 갖고 어떻게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 어떤 길이 열려 있는가? 어느 길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는가? 어떻게 하면 의존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는가? 어떤 현실이 여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으며 여자는 그것을 초 월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앞으로 밝히고 싶은 기본적인 문제이다.즉 우리가 관 심을 갖고 있는 것은 개개인의 기회이며, 이 기회를 행복이라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 유라는 말로 정의 내리려고 한다. 이런 문제도 물론 여성에게 짐이 되고 있는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인 숙명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하다. 그래서 우선 여성의 문제에 대한 생물학, 정신분석학, 유물사관 의 관점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고자 한다.그 다음에 어떻게 "여성의 현실"이 조성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여성은 "타자" 로 규정되었는가, 남성의 견해에서 어떤 결과가 생겼는가를 구 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갇혀 있던 구역으로부터 탈출하여 인간으로서의 공존에 참여하고자 할 때 여성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제1장 생물학적 조건 "여자란? 아주 단순해." 단순한 공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 고, 난소이다. 여자는 한 마리의 암컷이며, 이 암컷이라는 말로 여자의 정체는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입에서 "암컷" 이라는 형용사는 멸시하는 말투로 뱉어진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의 동물성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저 녀석은 수컷이야!" 하고 말하면 우쭐해지기도 한다. "암컷" 이라는 말이 멸시하는 뜻이 되는 것은, 그것이 여자를 자연 현상에 있게 놓아두 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를 섹스 속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동물 의 경우에도 그 성이 남성의 눈에 중요한 경멸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여성이 남성의 마음속에 불안한 적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은 이런 감정 이 생기는 까닭을 오히려 생물학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암컷이라는 말은 남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이미지의 회오리를 일으킨다. 커다란 둥 근 난자가 민첩한 정자를 사로잡아 거세하는 광경이나, 배가 터지게 먹은 괴물 같은 흰 여 왕개미가 노예가 된 수컷에게 군림하는 광경, 사랑을 만끽한 버마재비나 거미의 암컷이 수 컷을 물어 죽이고 먹어 버리는 광경, 발정기의 암캐가 음탕한 냄새를 풍기면서 거리를 뛰 어다니는 광경, 암 원숭이가 노골적으로 음부를 드러내 보이고 상대방의 애간장을 태우면 서 도망치는 광경, 그리고 가장 존대한 동물들인 호랑이, 사자, 표범의 암컷들도 수컷의 위 압적인 포옹 밑에 자빠져 버둥거리는 광경 둥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무기력하고, 방자하고, 교활하고, 우매하고, 냉담하고, 음탕하고, 잔인하고, 비굴한 모든 암컷을 남자는 한꺼번에 여자의 속성 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사실 여자는 하나의 암컷이 다. 그러나 만일 조금이라도 진부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본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두 가 지 문제가 제기된다. 즉 동물계에서 암컷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여성은 암컷으로서 어떤 특수성을 갖고 있는가? 수컷과 암컷은 한 종의 내부에서 생식을 위해 개체가 양분된 것이므로 서로 관련시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을 두 성으로 나눈다는 그 의미 자체가 명확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자연 속에서는 이 자웅의 분리는 보편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동물을 놓고 생각해 보 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적충류, 아메바, 박테리아 등의 단세포족의 번식은 완전 히 성과는 무관하며, 혼자서 분열을 거듭해 나간다. 어떤 후생동물의 경우에는 복분열에 의해 번식된다. 즉 본래 무성으로 발생한 개체가 토막토막 끊겨 나가는 것이다. 혹은 배종 발생에 의해, 즉 성적 현상에 의해 형성된 개체가 토막토막 잘려 나간다.민물의 히드라나 강장동물, 해면류, 연충, 피낭류 등에서 볼 수 있는 발아분열의 현상은 그 예로서 잘 알려 져 있다. 단성생식에서는 무정란은 수컷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충으로 자라게 된다. 수컷 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극히 사소한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예컨대 수정하지 않은 벌의 알도 분열되어 수벌을 낳는다. 진딧물의 경우에는 여러 대에 걸쳐서 수컷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무정란은 암컷이 된다. 섬게, 불가사리, 개구리는 인공적으로 단성번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생동물의 경우에도 두 개의 세포가 합병하여 접합자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으며, 벌의 알이 암컷이 되거나 진딧물의 알이 수컷이 되기 위해서는 수정작용이 필요하다. 일부의 생물학자들은 이런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한쪽만으로 영속 이 가능한 종에서도, 이종의 염색체의 결합에 의한 배자의 갱신은 그 혈통을 젊고 활기차 게 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장 복잡한 형태에 있어서는, 성본능은 없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적인 유기체만이 무성으로 번식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 점점 그 생명력을 고갈시켜가고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오늘에 와서는 가장 의심스럽게 생각되고 있다. 관찰에 의하면 무성번 식은 아무리 되풀이해도 전혀 퇴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테리아의 경우는 이런 현상 이 특히 뚜렷이 나타난다. 단성생식의 실험은 점점 더 빈번하고 대담해져서, 지금은 많은 종의 수컷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세포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환의 유용성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유용성은 근거가 없는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다. 생물 학은 양성의 구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이 아무리 종국목적설에 젖어 있다고 하 더라도, 세포의 구조나 세포의 번식법칙, 또는 근본적인 현상에서도 양성의 구분이라는 결 론을 유도해낼 수 있다. 이종의 생식세포의 존재만으로는 두 성의 분명한 차이를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생식세 포의 분열이 종을 둘로 분리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생식세포가 둘 다 한 개체에 속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그리고 많은 하등동물, 특히 환충류와 연체동물에서 볼 수 있는 양성구유의 경우에 그렇다.이 경우에 번식은 자기수정 이나 교배수정에 의해 이루어진다.이 점에 대해서도 어떤 생물학자들은 분명한 진화론적 의의를 찾아보려고 했다.자웅의 구분을, 즉 다른 생식선이 쌍방의 개체에 속해 있는 조직 을,양성구유가 진화하는 도중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반대로 자웅이체를 원시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경우에 양성구 유는 그 퇴화일 것이다. 아무튼 진화론적으로 생각하여 하나의 조직이 다른 하나의 조직보 다 우수하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여기서 분명 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번식방법이 자연계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과, 모두 종의 영속을 실현하여 생식세포의 이질과 마찬가지로 생식선을 갖는 유기체의 이질이라는 것도 우연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이 수컷과 암컷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어 쩔 수 없는 우발적인 하나의 사실처럼 생각된다.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사실을 설명하려 고 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의 우화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태고에 남 자와 여자와 그 밖의 양성구유자가 있었다. 각자 두 얼굴과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과 밀 착된 두 개의 동체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치 알을 째는 것처럼"두 개로 쪼개 졌다. 그리하여 그 후로 각각의 반신은 다른 쪽 반신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신들 은 그 다른 두 반신을 결합시켜 새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 기가 설명 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랑의 유래뿐이다. 양성에의 분리는 처음부터 기정사실 로 생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분리를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에서 내용과 형식의 협력이 요구된다면, 능동과 수동의 요소가 성이 다른 두 종류의 개체로 분 리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여성을 "우발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이것 은 남성 중심의 입장에서 성의 우연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헤겔은 그 합 리주의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성을 논리적으로 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에 의 하면, 성은 주체가 자기를 구체적으로 유로서 확립하기 위한 중개물이다. "유는 자기의 개체실현의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신장력으로서 자기 속에 생겨나는 것이 며, 자기와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 결합하여 상대방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여 자기를 보충함으로써 유를 자기 본성 속에 포괄하여 그것을 존재로 이끌려는 욕구로서 생 긴다.이것이 교접이다." 그리고 그 앞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양자의 자연의 모습, 즉 오직 하나의 유,하나의 동일한 주체적인 생명이라는 것을 양자 는 이렇게 해서 표시한다." 그리고 헤겔은 이어서 양성이 접근하는 과정이 실현되기 위해 서는 먼저 양성이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증명은 납득할 수 없다.거기에는 모든 사물에서 삼단논법의 세 요소를 찾아 내려는 선입견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종을 향한 개체의 초월은, 이로 인하여 개체와 종이 각각 참된 완성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제3단계가 없이 번식자와 그 자식과의 단순 한 관계 속에서도 실현될 것이다. 즉 번식은 무성인 경우에도 가능한 것이다. 혹은 양성구 유자의 종의 경우처럼, 분화는 동일형의 개체의 특이성 속에 존재할 뿐이며, 번식자와 그 자식과의 관계는 두 종류의 관계일 수도 있다. 헤겔의 설명은 성의 중요한 의미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오류는 언제나 의미와 이유를 혼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성행 위에 의해 양성과 그 상호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성관계는 결코 인간의 본성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지각의 현상학" 속에서 메를로풍티는, 인간의 실존 이 필연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을 수정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이 렇게 말했다. "실존은 자체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데 유용하지 않은 우연의 속성이나 내 용을 갖고 있지 않다. 실존 속에는 단지 사실 같은 것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존 자체가 사실에 의미를 제공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 나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어 서,그것이 없이는 실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도 사 실이다.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 세계의 한 사물이며, 동시에 그 세 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도한 육체의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육체가 이러저러 한 특수한 구조를 갖는 것은 요구되지 않는다. "존재와 무" 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현실은 그 유한성 때문에 죽음에 바쳐지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하고 있다. 즉 시간적으로 한정된 유한한 존 재도 생각할 수 있지만, 만일 인간의 생명에 죽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무너져 "인간은 죽는 것이다" 라는 정의가 경험적인 사실 과는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즉 죽지 않는 존재자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특색의 하나는, 그 일시적인 생명의 활동이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창조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영속은 개체의 생명의 한계와 서로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번식의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종의 존속이 곧 양성의 분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 니다. 그 분화가 존재자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존재의 구체적인 양태를 분명히 밝 히는 것은 바람직 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육체가 없는 의식이나 죽지 않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가 단성생식으로 번식하거나 양성을 갖춘 인간으 로 구성되는 경우를 여전히 상상할 수는 있다. 두 성의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그 견해들은 처음에 전혀 과학적인 근 거를 갖지 않고 단지 사회적인 신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모계제도의 원시적인 사회 에서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생각되어 왔으며,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아버지는 아기의 수태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며, 조상의 정령이 살아 있는 태아의 형태로 어머니 의 체내에 침입한다는 것이다. 이윽고 족장사회가 출현하자 남성은 지식에 대한 권리를 강 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가 출산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어머니는 살아 있는 정액을 뱃속에 품어 살찌게 할 뿐이며, 아버지야말로 유일한 창조자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난자는 정액과 월경의 만남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협동작 용에서 여자는 단지 수동적인 재료를 제공할 뿐이며, 남성의 요소야말로 힘이며 능동성이 고 운동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정액 에 두 종류가 있다고 보고, 약한 쪽은 암정액이고 강한 쪽은 수정액이라고 칭하였다. 아리 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중세기를 통하여 인정받았으며 근대에 이르렀다. 17세기 말에 하베 이는 교접 직후의 암사슴을 죽여 자궁관 속에서 소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난자라고 생각했 으나 사실은 태아였다. 덴마크인 스테노는 그때까지 "여성의 고환"으로 불렸던 암생식선을 난소라고 부르고, 그 표면에서 소포를 발견했다. 1677년에 그라프는 이 소포를 난자로 잘못 알고 소포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난소는 줄곧 남성의 선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같은 해에 " 정액 속에서 극히 미세한 생물"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여성의 자궁 속으로 침입해 들어가 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궁 속에서 성장할 뿐이며 개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되었다. 1 694년에 네덜란드인 하르트 사커는 정충 속에 숨어 있는 난쟁이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1 699년에는 다른 학자가, 정자가 털같은 것을 키우고 그 밑에 작은 인간이 나타난 것을 보 았다고 밝히고, 그도 그 그림을 그렸다. 즉 이 모든 가설에 의하면 여자가 하는 일이란 능 동적인 생명을 지닌, 그리고 이미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진 요소를 살찌게 하는 것뿐이었 다. 이 학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세기까지 논쟁이 계속되었다. 동물의 난자를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현미경의 발명 덕택이었다. 1827년에 베이어가 포유동물의 난자를 식별하였는데 그것은 그라프의 소포의 내부에 포함된 하나의 요소로 생각되었다. 얼마 후에 그 분열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1835년에는 사르코드, 즉 원형 질이 발견되었고, 이어서 세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877년에는 불가사리의 난자 속에 정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여 주는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두 생식세포의 핵이 상칭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이 합일되는 세부현상은 1883년에 비로소 벨기에의 어느 동물학자에 의해 분석되었다. 그러나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완전히 신빙성을 잃게 된 것은 아니었다. 헤겔은 두 성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쪽은 능동적이고 다른 쪽은 수동적이며, 그 수동 성은 당연히 암컷의 숙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요소이며 여성은 수동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발전하지 않는 통일체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자가 능동적인 요소라는 것이 인정된 후에도, 여전히 남성들은 난자의 무기력 성을 지적하여 정자의 활동성과 비교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와 정반대의 경향 이 나타나고 있다. 단성생식의 발견으로 일부학자들은 수컷의 역할을 단지 물리, 화학적인 한 매개물의 역할로까지 축소하게 되었다. 어떤 종에서는 산의 작용이나 인공적인 자극만 으로 난자에 분열을 일으켜 배자를 기를 수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 경우에 남성의 생식세 포는 번식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작해서 그 하나의 유인에 불과하다는 대답한 가설도 나타나고 있다. 생식에 대한 남성의 협력은 장차 언젠가는 불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리고 이것이 많은 여성들의 소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담한 예상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에 나타난 생명과정으로 모든 것을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성번식이나 단성생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유 성생식이 선험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간단한 구조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선험적인 학설이나 애매한 학설을 배제하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기초도 경험적인 증명도 제공하지 못하고,그 가치를 이론적으로 알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이런 사실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암컷이라는 말의 내용을 좀더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생명철학을 제창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적론과 기계론을 대 립시키는 논쟁에서 성급하게 어느 한쪽에 가담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모든 생리학자와 생 물학자가 생명현상에 하나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다소나마 목적론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나도 그들의 용어를 빌려 쓰려고 한다. 생명과 의식의 관계 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단언은 할 수 있다. 모든 생명현상은 하나 의 초월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든 기능 속에는 하나의 투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이다. 내 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대부분의 종에서는 수컷의 생명체와 암컷의 생명체는 생식을 위해 협력한다. 수컷과 암 컷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생식세포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종류 의 해초나 세균은 난자를 만들기 위해 결합하는 세포가 양쪽 다 같다. 이와 같은 동형접합 의 경우는,생식세포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전 반적인 경우에 생식세포는 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유사성은 일목요연하다. 정자 와 난자는 본래 같은 세포가 진화하여 된 것이다. 여성 원세포가 발전하여 난모세포가 되는 것과 원형질적 현상에 의해 정모세포가 발전 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핵현상은 아주 비슷하다. 생물학자 앙셀이 1903년에 발표한 견해는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즉 "발생하기 전에는 중성이던 세포는 그것이 출현할 때에 생식선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수컷이 되기도 하고 암컷이 되기도 한다.그 조건이란 몇 개의 상피세포가 특별한 물질을 만드는 영양소로 변형되는 것이다." 발생할 때의 이러한 유사성은 양쪽 생식세포의 구조에 나타나 있으며,모든 종의 내부에 는 같은 수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그리고 수정할 때에는 그 두 개의 핵이 그 내용물을 혼 합한다. 그리고 양쪽 염색체가 감소되어 그 수는 최초의 절반에 이른다. 이 감소는 양쪽에 서 통일하게 이루어진다. 난자가 마지막 두 번의 분열에서 극체를 형성하는 것은 정자의 마지막 분열과 같다. 오늘날에는 종에 따라서 남성의 생식세포나 혹은 여성의 생식세포가 성별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예컨대 포유류에서는 수놈이 암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질적인 염 색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정자 쪽이다.유전적인 성격의 전달은, 멘델(오스트리아의 목사 ·식물학자·유전학의 창시자,1822~1884)의 통계에 의한 법칙으로 보면 아버지에 의해 서나 어머니에 의해서나 똑같이 이루어진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양자가 서로 만날 때 어 느 쪽의 생식세포도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양쪽이 모두 그 개별성을 희생 하고 결국 난자가 그 양쪽 실체의 전체를 흡수하고 만다. 그러므로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은,적어도 이 생물학적 근본단계에서는 과 오를 범하고 있다. 그 첫째 편견은 여성의 수동성이다. 생명의 불꽃은 두 생명세포의 어느 쪽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양자의 결합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난자의 핵은 정자의 그것 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생명원소이다. 두 번째 편견은 첫번째 편견과 모순되는데도 불구하 고 이 양자는 곧잘 함께 존재하고 있다. 즉 남성의 원소는 폭발적이고 순간적인 생명을 갖 고 있기 때문에 종의 존속은 여성에 의해 확보되어 있다는 견해이다. 실제로 배자는 어머 니의 생식세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생식세포도 존속시켜, 남성 혹은 여성의 형태로 양 쪽의 생식세포를 자손에게 전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몸 세포의 개개의 변신이 이루어진 후 에도 대대로 존속되는 양성 생식세포이다. 이 정도로 서두를 마치고, 다음에 난자와 정자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참으로 흥미있 는 2차적인 차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난자의 본질적인 특징은 태아를 기르고 보호하 기 위한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자가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저 장, 즉 생명이 있는 물질의 저장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물질로 되어 있는 저장이다. 그 결 과 그것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둔중한 형태를 나타내며, 비교적 부피가 크다. 새알의 크기 가 어느 정도인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의 경우에 여성의 난자의 크기는 지름이 0.13 밀리미터이다. 한편 정자는 1입방 밀리미터마다 6만 마리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 로 크기가 작다. 정자의 무리는 밀집되어 실 모양의 꼬리와 길쭉하고 작은 머리를 갖고 있 으며, 활동을 둔화시키는 거추장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이 전신이 생명으로 뭉쳐 있다. 이 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동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난자는 그 속에 태아의 장래가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요소이다. 여성의 조직 속에 간수되거나 혹은 외계에 걸려 있으면서 수동적으로 수정작용을 기다리 고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은 남성의 생식세포이다. 정자는 언제나 노출된 세포지만, 난 자 쪽은 막에 싸여 있기도 하고, 싸여 있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정자는 난 자를 만나자마자 난자를 쓰러뜨리고 뒤흔들어 놓고 그 속으로 침투한다. 이때 남성의 생식 세포는 그 꼬리가 없어지고 머리가 부풀어, 우회운동을 하면서 그 핵에 도달한다. 그 동안 난자는 곧 하나의 막을 형성하여 다른 정자들을 내쫓는다. 수정이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섬게의 경우에는 둥둥 떠 있는 난자의 주위에 정자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 그 주위를 후광처럼 에워싸는 것을 쉽사리 관찰할 수 있다. 그 중에 서 선두주자가 승리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현상이다. 난 자보다 훨씬 작은 대신에 정자는 일반적으로 훨씬 대량으로 산출되므로 한 개의 난자에 대해 다수의 구혼자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난자는 그 본질적인 요소, 즉 핵에 있어서는 능동적이지만, 겉으로는 수동적으 로 보인다. 그 자체만으로 폐쇄되고, 그 자체만으로 부풀어오른 난자에서 칠흑 같은 밤과 즉자존재의 휴식을 연상케 한다. 고대인들이 닫혀진 세계나 불투명한 원자의 형태를 상상 한 것도 구의 형태로서였다. 난자는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 이와 반대로 개방적이고 자질 구레하며 약삭빠른 정자는 실존의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고 있다. 흔히 난자는 내재로, 정 자는 초월로 비유하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이런 비위를 일삼아서는 안 된다. 남성이 여성 의 요소 속에 침입하려면 자기초월과 활동성을 포기해야 한다 즉 정자는 무기력한 물체에 붙잡혀 그 꼬리가 잘리고 삼켜져서 거세된다. 이것은 모든 수동적인 행위와 마찬가지로 미 술적인 불쾌한 행위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의 생식세포의 활동은 합리적이며, 시간과 공간 의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은 멋대로 상상한 것이다. 남 성과 여성의 생식세포는 난자 속에서 하나로 녹아 버린다. 그것들은 자기를 말살하여 전체 속에 용해된다. 난자가 정자를 강제로 삼켜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여성 이 세포의 저장을 멋대로 횡령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합일되 는 행위 속에 서로의 개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아마도 기계론적인 사고에 있어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현상으로 생각될 것이 다. 그러나 현대의 물리학에서는 이런 사고는 떨어진 곳에서의 작용이라는 사고와 마찬가 지로 명확하지 못하다. 첫째로 수태적인 결합에 도달하는 물리, 화학적인 작용의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대비에서 유용한 시사를 받을 수는 있다. 생명 속에는 서로 결합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 생명은 오직 자신을 초월해야만 자기를 유지 할 수 있으며, 또한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조건이 없이는 자기를 초월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언제나 동시에 실현되며, 이것을 구분하면 결국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두 개의 생식세포는 그 결합 속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동시에 자기를 존속시킨다. 그런데 난자 는 그 구조상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을 받아들인다. 난자는 자기 속에서 생긴 생명을 키우도 록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정자는 자기가 생기게 한 생명체의 성장을 보장할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난자는 생명을 새로 일으킬 능력은 없다. 한편 정자는 자유롭게 활동 한다. 난자의 대비가 없으면 정자의 활동도 허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자 없이는 난자는 자기 생명의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생식세포의 역할은 원칙적으로는 동일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양자는 함께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하며, 그 과정에서 양쪽 다 자기를 멸하고 자기를 초월한다. 그러나 생명의 조건이 되고 있는 2차적이고 표면적인 현상에 있어서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필요한 상황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남성의 요소에 의해서이며, 그 생명의 출현을 안정된 몸 안에 정착시키는 것은 여성의 요소의 작용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만으로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무모 한 사람도 있다. "기질과 성격" 이라는 저서에서 알프레드 푸예(프랑스 철학자,1832~191 2)는 난자를 출발점으로 하여 여성 전체를 정의하고 정자를 출발점으로 하여 남서전체를 정의하려고 생각했다. 이런 애매한 유추의 유희에서 자못 심원하다고 자칭하는 많은 이론 이 전개되었다. 이런 가짜 사상이 어떤 자연철학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 다. 유전법칙을 존중한다면 남녀가 똑같이 정자와 난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런 애매 모호한 사상 속에는 중세에서 존중하던 낡은 철학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소우주(인간)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으므로 난자는 작은 여성이고, 여 성은 커다란 난자로 생각할 수 있다. 연금술 시대의 잔재인 이런 황당무계한 사고와, 그들 이 서술하는 과학적인 정확성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현대의 생물학은 중세식 상징주 의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만일 조금만 유념하면, 난자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난자 속에는 아직 여성의 개념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성적 관계는 쌍방의 생식 세포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헤겔의 견해는 정당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의 조직을 그 전체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식물이나 어떤 하등동물, 특히 연체류에서는 생식세포의 분 화는 개체의 분화를 유도하지 못하고, 그 생식세포는 난자와 정자를 함께 생산한다. 양성 이 분리할 경우에도 양자사이에는 조과 종을 구분하는 구분하는 두터운 장벽이 있다. 생식 세포가 본래는 중성의 조직에서 출발하여 구분되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은 공통된 기반 위 에서 출발한 변형처럼 생각된다 .어떤 종류의 동물은(그 대표적인 것은 환형동물의 경우이 다)배자가 처음에 무성이며, 성장하는 도중에 우연히 성이 결정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종에서 성의 결정은 난자의 유전자형의 구조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꿀벌의 무성란은 단성생식에 의해 번식하는 경우에는 주로 수컷만 낳게 된다. 진딧물의 알은 같은 조건에서는 암컷만 낳는다. 알이 수정할 경우에 아마도 몇몇 거미의 경우를 제 외하면 태어나는 수컷과 암컷의 수가 같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분화는 양쪽 생식 세포 중에서 한쪽의 이종성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정자가 수컷이 될 가능성과 암컷이 될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정자 또는 난자가 형성되는 과정 에서 이질적인 생식세포의 특수한 성격이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멘델의 통계적 법칙은 그것이 규칙적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두 성에 있어서 수태과정과 태아의 성장 초기는 동일하게 이루어진다.후에 생식선으로 자라는 상피조직은 처음에는 분화되어 있지 않다. 고환이 뚜렷한 형태를 나타내거나 난소 가 생성되는 것은 어느 정도 성숙된 후의 일이다.이것은 양성구유와 자웅이체 사이에 많은 중간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양성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성의 특징인 기관을 지 니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두꺼비의 경우이다. 두꺼비의 수 컷에게서는 "비테르 씨 기관" 이라는 위축된 자궁을 찾아볼 수 있고, 인공적으로 거기에 알을 낳게 할 수도 있다. 포유동물에게도 이 양성적 요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 인 것으로 고착성 윤충, 남성 자궁, 남성에 있어서의 유선, 여성에 있어서의 "게르트너 씨 관", 음핵 등이 있다. 성의 분리가 가장 뚜렷한 종 가운데도 수컷인 동시에 암컷인 개체가 있고, 양성이 혼합된 경우는 동물이나 인간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비나 갑각 류 중에는 수컷과 암컷의 성격이 일종의 모자이크처럼 병치된 자웅양체의 경우도 있다. 그 것은 설사 배자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더라도, 그 자양을 섭취하는 환경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개비, 꿀벌, 흰개미의 경우는, 유충을 암컷으로 완성시키거나 그 성적 성숙을 저지시켜 일벌로 만드는 것은 영양 여하에 달려 있다. 이 경우에 그 환경적 영향은 유기체 전체에 미쳐 곤충은 일찍부터 성이 결정되고 생식선에는 좌우되지 않는다. 척추동물의 경우에 조정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생식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많은 실 험의 결과, 내분비 환경을 변화시키면 성의 결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 다. 그밖에 접목이나 성장한 동물에게 실시한 거세의 실험에 의해서도 성의 현대적 학설이 나와 있다. 즉 척추동물의 수컷이나 암컷은 몸체가 동일하여 이것을 중성적 요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적인 특질을 부여하는 것은 생식선의 활동이다. 분비되는 호르몬 중에서 어떤 것은 자극제로 작용하고, 어떤 것은 진정제로 작용한다. 생식기계 자체도 체세포적 성질을 갖고 있으며 양성적 원형에서 출발하여 호르몬의 영 향에 따라 뚜렷한 형태를 갖춰 나간다는 것이 발생학에서 입증되었다. 호르몬의 균형이 이 루어지지 못하여 두 성적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명확하게 성이 결정되지 않으면 양성혼합이 생기게 된다. 종속에 평등하게 분배되고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여 동일하게 진화되어 온 양성의 유기 체는, 형체를 완전히 갖추게 되면 매우 대조적으로 보인다. 양자가 모두 생식세포를 만들 어내는 선의 존재에 의해, 즉 난소와 고환에 의해 특징이 규정되며, 정자의 생성과 난자의 생성과정도 앞에서 본 것처럼 유사하다. 이러한 선은 종의 단계에 따라 그 복잡성이 다른 하나의 관 속에 분비물을 방출한다. 즉 암컷은 알을 수란관을 통해 즉시 내보내거나 혹은 일단 그것을 배설구나 분화된 자궁 속 에 두었다가 내보낸다. 수컷은 정액을 외부로 보내거나 혹은 하나의 교접기관을 갖추고 있 어서, 그것으로 암컷의 몸 안에 정액을 주입시킨다. 그러므로 정지된 상태에서 보면, 수컷 과 암컷은 서로 보충하는 두 형태처럼 생각된다. 그 특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 이다. 여성을 난자의 소유자로 정의하고 남성을 정자의 소유자로 정의하는 것은, 유기체와 그 생식선의 관계가 매우 변화하기 쉽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난자 쪽이 정자보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더 많은 생명력을 소비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자가 무한히 많은 양을 분비하기 때문에, 결국 양성의 소비는 균형을 이루게 된다. 정자가 생성되는 동안에 소비하는 예를 들어 배란 속에서 절약의 시범을 찾으려고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배란현상에도 부조리한 낭비가 있고, 난자의 대다수는 전혀 수정 되지 않는다. 아무튼 생식세포와 생식선에서는 유기체 전체의 소우주를 찾아볼 수 없다.그 러므로 유기체 전체를 직접 연구해야 한다. 동물에게 있는 종의 여러 단계를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아래에서 위 로 올라감에 따라 생명이 개체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생명은 종의 유지를 위해 서만 사용되고, 위에서는 독립된 여러 개체를 통하여 생명이 소비된다. 발달되지 않은 종 에서는, 유기체의 기능이 거의 생식기관에 집중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난자가, 즉 암놈이 유력하다. 생명의 단순한 반복행위는 특히 난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놈이라고 해도 몸체의 거의 전부를 복부가 차지하고, 그 생활은 전적으로 배란작업에 소모된다. 암 놈은 수놈에 비해 거대한 몸통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 사지는 매우 빈약하고 신체는 볼품없는 자루에 불과하며, 모든 기관은 난자 때문에 퇴화되어 있다. 이 경우에 구 별된 두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컷과 암컷은 거의 개체로 보기 어렵다. 그 것들은 긴밀하게 결합된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닌 단일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양성구유와 자 웅일체의 중간의 경우이다. 예컨대 게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등각류인 엔토닉스의 경우는, 암놈은 수천 개의 알을 싸 는 부화박층에 뒤덮인 희끄무레한 순대와 같다. 그 알들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수놈과 수 놈의 예비에 해당되는 유충이 있다. 에드리올리드수스에서는 작은 수놈의 예속이 더욱 철 저하다. 수놈은 암놈의 입 아래 달라붙어 있으며, 자기의 소화관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 역할은 단지 생식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암놈도 수놈과 마찬가지로 예속 되어 있다. 즉 암놈은 종에 예속되어 있다. 수놈이 그 배우자에게 매여 있다면, 암놈도 거 기 기생하고 있는 산 유기체나 광물기체에 매여있다. 암놈이 자기 몸을 소모하여 알을 낳 으면, 그것을 작은 수놈이 수정시킨다. 생명체가 좀더 복잡한 형태를 취하게 되면 개체의 자주성이 두드러지고, 양성을 결합하 는 유대는 느슨해진다. 그러나 곤충류는 수놈과 암놈 모두 알에 예속되어 있다. 하루살이 의 경우처럼 대개 부부는 교접과 산란 직후에 죽어버린다. 때로는 윤충류나 모기류의 경우 처럼,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않은 수놈은 수정작업을 마친 후에 죽지만, 암놈은 양분을 섭 취하여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알의 생성과 산란에 어느 정도의 시일이 필요하기 때문이 다. 어미는 다음 세대의 운명이 보장되면 곧 숨을 거둔다. 대다수의 곤충류에서 암놈이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수정작업은 일반적으로 곧 끝 나는 과정인 반면에, 배란과 산란은 오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흰개미의 경우, 여왕 개미는 억지로 양분을 채워넣어 1초마다 하나씩 알을 낳는데 알을 낳지 못하게 되면 무참 히 학살된다. 그러므로 여왕개미의 배에 달라붙어 잇따라 배출되는 알을 수정시키는 수놈 과 마찬가지로 노예인 것이다. 개미나 꿀벌이 조직하는 모권제 사회에서의 수놈은 귀찮은 존재여서 생식의 계절마다 학살된다. 혼인비상의 시기가 되면 수놈은 일제히 굴을 빠져나와 암놈에게 날아간다. 수놈 은 암놈을 붙잡아 수태를 시키면 기운이 빠져 곧 죽어버린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일개 미들이 수놈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출구에서 기다렸다가 죽여버리거나 굶어죽게 한 다. 그러나 수태한 암놈도 역시 슬픈 운명을 안고 있다. 그 암놈은 혼자 흙속에 처박혀 첫 알을 낳을 때에 지쳐서 죽기도 한다. 만일 암놈이 개미굴의 재건에 성공하면 그곳에 12년 동안 갇힌 채 계속하여 알을 낳는다. 성적 기능이 위축된 암놈인 일개미 역시 4년 정도 살 지만, 그 일생은 유충을 키우는데 바치게 된다. 꿀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혼인비상중의 여왕벌을 만난 수펄은 복부가 찢긴 채 지상 에 추락한다. 다른 수펄은 벌통으로 돌아와 무위의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들은 초겨울에 처형된다. 그러나 발육이 불완전한 암놈, 즉 일벌은 부단한 노동으로 살 권리를 얻게 된다. 여왕벌은 사실상 벌통의 노예이다. 여왕벌은 끊임없이 알을 낳는다. 그래서 늙은 여왕벌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여 힘으로 상속권을 빼앗도록 몇 마리의 유충을 기르며, 제일 먼저 부 화된 유충이 다른 유충을 죽여버린다. 어떤 거미의 경우는, 알이 성숙할 때까지 암놈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암놈은 수놈 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서 교미가 끝난 뒤 수놈을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다. 여성공포 신화 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버마재비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습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난자가 정자를 거세하게 되면 버마재비의 암놈은 자기 배우자를 죽여버린다. 이런 사실은 거세에 대한 여성의 동경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버마재비의 암놈이 그와 같은 잔인성을 보이는 것은 특히 인간에게 잡혔을 때이고, 자유의 몸으로 먹을 것이 충분히 있을 때에는 수놈을 잡아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 다. 수놈을 잡아먹는 것은 고독한 개미가 곧잘 자기 알 중에서 몇 개를 먹는 경우와 사정 이 같다. 즉 알을 낳아 종을 영속시킬 수 있는 체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개체끼리 편을 갈라 서로 싸우는 '양성의 투쟁'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개미, 꿀벌, 흰개미, 또는 거미나 버마재비의 경우에도 암놈이 수놈을 노예로 삼아 잡아 먹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암수 양쪽을 다른 방법으로 잡아먹는 종이다. 암놈이 수놈보다 오래 살고 힘이 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암놈은 아무 자주성도 갖고 있지 않다. 산란, 포 란, 유충을 돌보는 것이 암놈의 할 일이고, 그밖의 기능은 완전히 혹은 일부가 위축되어 있다. 반대로 수놈에게는 개체의 생존이 어느 정도 보인다. 대개 수놈이 암놈보다 수태에 서도 주도권을 보여준다. 수놈은 암놈을 찾아 습격하고, 애무하고, 붙잡아 교미를 한다. 그 리고 수놈은 때로는 다른 수놈들과 싸워야 한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운동, 촉각, 파악의 여러 기관은 대개 수놈 쪽이 발달되어 있다. 나비의 암컷에게는 날개가 없는 경우가 많은 데, 수컷에게는 반드시 날개가 있는데다가 색체, 겉날개, 다리, 앞니가 발달되어 있다. 뿐 만 아니라 화려한 색체와 무늬의 사치스러운 외모가 첨가된다. 수놈의 생활은 잠깐의 교미 이외에는 쓸모없고 멋대로이다. 일벌의 근면에 비하면 수펄의 한가로운 생활은 큰 특권이다. 그런데 이런 특권은 언어도 단이다. 그래서 독자적인 징후가 보이는 이런 무위의 생활을 하는 데 대한 형벌로 수컷은 목숨을 빼앗기게 된다. 암컷을 노예상태로 놓아두는 종은, 종에서 도망가려는 수컷을 반드 시 벌한다. 종이 수컷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이다. 생명의 형태가 더욱 진화되면, 생식은 다른 유기체를 생산하게 된다. 이 경우에 생식은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즉 종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 개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혁신적 인 면은 개체의 특이성이 확립됨에 따라 돋보이게 된다. 이 경우에 생명의 지속과 창조는 두 시기로 분명히 구분된다. 이 분리는 알의 수정에 대해 언급할 때에 이미 지적했으나, 생식이라는 현상 전체 속에서 볼 수 있다. 이 분리는 난자의 조직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암컷은 수컷과 동등한 자주성을 갖고, 암컷과 알의 결합에는 밀접하지 않다. 물고 기나 개구리나 새의 암컷은 단지 복부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체와 알의 결합이 긴 밀하지 않을수록 분만에도 열중하지 않게 되며, 어미와 새끼의 관계도 애매해진다. 그리하 여 수컷이 새로 부화된 새끼를 돌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어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물이라는 물질은 난자와 정자를 운반하여 만나게 하는 데 적합하며, 물속에서의 수정은 대개 몸 밖에서 이루어진다. 즉 어류는 교미 를 하지 않는다. 고작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 몸을 서로 비벼대는 정도이다. 암컷은 난자 를 배출하고 수컷은 정액을 배출한다. 그 역할은 동일하다. 암컷이 수컷 이상으로 알을 자 기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어떤 종에 있어서는, 알은 그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혼자서 성장한다. 간혹 암컷이 알을 위해 집을 마련하는 경우가 있고, 또 때로는 수정한 후에 암 컷이 알을 돌보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알을 돌보는 것은 수컷이다. 수컷은 수정된 알을 먹어버리려는 암컷을 멀리 쫓아버리고,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적으로부터 용감하게 알을 지킨다. 격리물질로 싸인 기포를 내품어, 안전한 집을 만드는 물고기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류는 때때로 알을 입 속이나 혹은 해마처럼 배의 주름 속에서 부화시킨다. 개 구리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개구리들은 진정한 교미를 할 줄 모른다. 수 놈은 암놈을 포옹하고, 포옹에 의해 산란을 촉구한다. 알이 배설구에서 나오면 수놈은 정 액을 배설한다. 종종 염주처럼 생긴 알을 수놈이 다리에 감아서 운반하여 부화를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산파두꺼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두꺼비가 그 대표이다. 새의 경우는 암놈이 몸 안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알이 형성되며, 알의 크기도 비교 적 크고, 꽤 고생하면서 낳는다. 알은, 순간적인 교미에 의해 수정시킨 수놈보다는 암놈과 훨씬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알을 부화하여 새끼를 돌보는 것은 보통 암놈이다. 그러나 수놈이 집을 지어 암놈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다. 상당히 드문 일 이지만, 참새의 경우처럼 수놈이 새끼를 까고 기르는 경우도 있다. 비둘기는 암,수가 모두 모이주머니 속에 일종의 젖을 분비하여 새끼를 기른다. 수놈이 양육을 담당한 이 모든 경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수놈이 새끼를 기르기 위해 헌신하는 기간 중에는 정자의 생성이 중지된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수놈은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몰 두하면서 새 생명을 낳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생명이 더욱 복잡한 형태를 취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개체화되어 있는 것은 포유동물이 다. 이들은 생명의 유지와 창조라는 두 시기의 구분이 양성의 분리라는 형태로 분명하게 이루어진다. 암놈과 새끼의 관계도 가장 밀접해지고, 수놈의 새끼에 대한 관심이 점점 적 어지는 것은-척추동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이 분리에 의해서이다. 암놈의 몸 전체는 모 성의 노동에 적응되어 있고, 모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편 성의 주도권은 수놈이 갖게 된 다. 암놈은 종의 먹이인 셈이다. 한 계절이나 두 계절 동안 암놈의 생명은 성적 주기, 즉 성적 충동의 주기에 의해 규정된다. 이 주기의 지속기간은 그 간격의 주기와 마찬가지로 종에 따라 다르다. 이 성적 주기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 동안에 난자(그 수는 종에 따라 다르다)가 성숙되고, 자궁 속에서 보금자리를 만든다. 제2기 동안에는 지방질이 뭉그러져서 희끄무레 한 액체가 되어 흘러나온다. 성적 충동은 발정기간과 일치한다. 그러나 암놈의 발정은 수 동적인 성격을 띤다. 암놈은 수놈을 맞아들일 태세를 취하고 기다린다. 포유동물의 경우에 도-어떤 조류처럼-암놈 쪽에서 수놈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울음소리나 교태나 노출에 의해 수놈을 부르는 데 그친다. 암놈이 교미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도권은 수놈에게 돌아간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에 대한 전적인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컷이 오히려 큰 특 권을 갖게 된 곤충류에 있어서도, 수태행위를 촉구하는 것은 보통 수컷 쪽이다. 어류의 경 우에는 흔히 수컷의 출현과 접촉에 의해 암컷의 산란을 자극한다. 개구리에 있어서는 수놈 이 상대방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놈이 암놈을 크게 지배하는 것은, 특히 조 류와 포유동물이다. 암놈이 수놈을 냉담하게 맞아들이거나 저항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암놈이 도발적이고 동의적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결국 수놈이 암놈을 사로잡는 것이다. 즉 암놈은 사로잡히게 된다. 이 말은 때때로 대단히 정확한 의미를 갖는다. 수놈이 거기에 적응하는 기관을 갖고 있 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놈이 강하기 때문인지, 수놈은 암놈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한다. 교 미할 때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암놈이다. 많은 곤충이나 조류, 포유동물들은 수놈이 암놈에게 성기를 삽입한다. 그래서 암놈은 침범되는 것처럼 보인다. 수놈은 종에 대하여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 갱신에 의해서만 영속되고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을 보호할 임무를 갖고 있는 암놈은 알을 체내에 가둬두며, 알의 피난처 구실을 하는 암놈의 몸은 알을 수놈의 수정행위에서 떼어놓 는다. 그러므로 암놈의 몸은 타파해야 하는 저항체이다. 한편 수놈은 암놈의 체내에 쳐들 어가 능동적인 자기를 실현한다. 수놈의 지배는 교미의 체위에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수놈이 암놈 위에서 교미를 한다. 그리고 수놈이 사용하는 성기는 물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생명을 지닌 모습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하나의 도구이다. 그런데 이 교미에서 암놈의 성기는 생명력이 없는 수용 기에 지나지 않는다. 수놈이 그곳에 정액을 배설하면, 암놈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암놈은 생식에서 근본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성기삽입과 체내수태 로 말미암아 수동적인 교미를 강요당한다. 발정했을 때에는 자진하여 수컷을 구하는 경우 가 있을 정도이므로, 암놈은 성적인 요구를 개체적인 요구로 느끼기는 하지만 성적 경험을 내적인 일로 체험하는 것이지, 세계 및 타자와의 관계로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 유동물의 수놈과 암놈의 근본적인 차이는, 같은 성적 체험을 하는 짧은 시간에 정자가 수 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그의 몸에서 떠나, 그의 생명이 정자를 통하여 자기를 초월해서 타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수놈은 자기의 개체성을 초월하는 순간에 다시 자기를 그 속에 가둬둔다. 이 와는 달리 난자는 성숙되어 여포에서 분리되어 수란관 속에 떨어졌을 때 이미 수놈에게서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 되지만, 밖에서 온 생식세포에게 침입을 당하면 자궁 속에 자리를 잡고 만다. 그러니까 암놈은 먼저 침범된 다음에 소외되는 것이다. 암놈은 각자 성숙단계 에 도달할 때까지 태아를 뱃속에 넣어둔다. 모르모트는 거의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고, 개 는 거의 태아와 분간되지 않는 상태에서 태어난다. 자기 몸을 양분으로 하여 키우는 타자를 밴 암놈은, 임신기간 동안 줄곧 자기이기도 하 면서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이기도 하다. 출산이 지나도 암놈은 자기 유방에서 나오는 젖 으로 새끼를 기른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서 새끼를 자주적인 생명체로 보아야 할지 잘 모른다. 수정했을 때인가, 출산했을 때인가, 아니면 젖을 뗐을 때인가? 암놈이 분리된 개체 의 모습을 취할수록, 모든 분리를 초월하여 생명의 연속이 확립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 이다. 무정란이나 수정란을 배출하는 어류나 조류는, 포유동물의 암놈만큼 새끼의 먹이가 되지는 않는다. 포유동물의 암놈은 새끼가 태어난 후에는 자주성을 회복한다. 암놈과 새끼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끼에 대한 암놈의 헌신은 분리될 때부터 시작된 다. 암놈은 자진해 싸우기도 하며, 공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개의 암놈은 자기 개성을 발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수놈이나 다른 암놈에게도 강하게 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투쟁본능을 갖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의심스러운 다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암놈은 접근하는 수놈을 별로 선택하 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암놈이 개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이 다. 어미로서의 노역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은, 암놈은 때로는 수놈과 대등할 수 있다. 말도 암말은 종마에 못지않게 빨리 달리고, 사냥개도 암캐가 때로는 수캐 못지않게 냄새를 잘 맡으며, 원숭이도 테스트해 보면 암놈이 수놈 못지않은 지능을 갖고 있다. 다만 이런 개성 이 강하게 요구되지 않을 뿐이다. 암놈은 권리의 포기를 요구하는 종의 성질 때문에 자기 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놈의 운명은 암놈과 전혀 다르다.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수놈은 자기초월 속에 자기 를 분리하면서, 자기 속에서 자기를 확립한다. 이 특징은 곤충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다. 집단 속에 섞여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어류나 고래들도, 발정기에는 집단에 서 빠져나와 고립되어 다른 수놈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암놈에게는 직접적인 성본 능이, 수놈에게는 간접적이 된다. 즉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만족 사이에 있는 거리를, 수 놈은 능동적으로 단축시킨다. 수놈은 암놈과 교미하기에 앞서 암놈을 찾고, 암놈에게 접근하여 애무하고, 꼼짝 못하게 한다. 교미, 운동, 포섭의 기능에 필요한 기관은 대개 수놈 쪽이 더 발달되어 있다. 수놈의 체내에서 정자를 증식시키는 생명의 충동은 빛나는 날개와 화려한 비늘이나 뿔, 갈기, 울 음소리나 왕성한 체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수놈이 발정기에 몸에 걸치는 '결혼예복'이나 유혹적인 장식에 도태의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생명력이 수놈 속에서 피우는 대단히 화려한 수꽃이다. 이 생명력의 충만, 교비를 위해 발휘되는 활동력, 그리고 교미할 때 볼 수 있는 암놈에 대한 지배욕, 이것들은 모두 생명적인 초월의 순간에 개체가 개체로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이 암놈은 종 속에 갇혀있는데 수놈에게는 주체적 요소가 있다고 본 것 은 정당하다. 주체성과 분리는 곧 투쟁을 의미한다. 공격성은 발정기 수놈의 특징 중 하나 이다. 이것은 경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암놈의 수가 수놈의 수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투쟁의욕이라는 측면에서 경쟁을 설명할 수 있다. 수놈은 생식에 접어들기 전에 종을 영속시키는 행위를 자기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류와의 투쟁속 에 자기개성의 진실성을 확인하려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종은 암놈에게 붙어 살면 서 그 개체로서의 생명의 대부분을 빼앗아간다. 이와는 반대로 수놈은 종의 생명력을 자기 의 개별적인 생명에 일치시킨다. 물론 수놈도 자기 힘을 초월한 여러가지 법칙에 제약을 받으므로, 수놈에게도 정자의 생성과 정기적인 발정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유기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성충동의 주기보다 훨씬 적다. 정자의 생산이 힘들지 않은 것은 난자의 생산이 힘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암놈에게 정력을 소모하는 일이 되는 것은, 성장한 동물의 체내에서 알이 발달하는 경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미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수놈의 생명력을 감퇴시키지는 않는다. 수놈은 부정본능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수놈은 일단 교미가 끝나면 암놈을 버린다. 수놈이 가족집단-일부일처제이건, 첩들을 거느리건, 가축의 무리건 간에-의 주인으로서 암놈의 곁에 있을 때, 보호나 양육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공동생활체 전체에 대해서이 며, 직접 새끼에게 관심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체로서의 생명을 꽃피우는 데 적합 한 종에 있어서는, 자주성을 위한 수놈의 노력은-하등동물은 죽음을 초래하지만-크게 성 공한다. 일반적으로 수놈은 암놈보다 몸집이 크고, 억세고 대담하다. 수놈은 암놈보다 독립 된 생활을 하며 그 활동 또한 보다 자유분방하고 정복적이며 위압적이다. 동물사회에서 명 령하는 것은 언제나 수놈이다. 자연 속에는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암, 수라는 두 형태도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암, 수 사이에 완전히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동종이형-털이나 반점의 배치 나 여러 가지 색깔 등에서-도 있다. 이와 반대로 어류에서 보아온 것처럼, 양자의 구별을 하기 어렵고 그 기능이 거의 분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특히 고등동물에서는 양성은 종의 생명의 다른 두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양자의 대립은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은 능동성과 수동성이 아니다. 난핵이 능동 적일 뿐만 아니라, 배자의 발달도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 살아 있는 과정이다. 양자의 대 립을 변화와 영속의 대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정자는 난 자 속에 그 활동력이 유지되기 때문에 창조가 이루어지고, 난자는 자기를 초월할 때에만 자기를 유지하며, 그렇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지와 창조라는 능동적인 두 작용에서 생성이라는 종합작용은 같은 방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지란 각 순간의 분산을 거부하고, 순간의 돌발적인 작용에 연속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란 일시적인 통일 속에서 분리된 현재를 돌출시키는 것이다. 또한 암놈은 분열하려고 하는 생명을 연속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개체화된 힘으로서의 새로운 분열은 수놈이 앞장서서 일으킨다. 그러므로 수놈은 자주성 속에서 자기를 확립할 수 있다. 수놈은 종의 에너지도 자기 생명에 곧잘 도입한다. 반대로 암놈의 개성은 종의 이해관계에 의해 눌리고 만다. 암놈은 외부의 힘에 지배를 받는 것, 즉 소외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개성이 확립되어도 양성의 대립은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이 다. 수놈은 힘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어 그 힘의 지배자가 되고, 암놈은 점 점 자기의 예속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암놈은 자기 자신의 이해와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생식력의 이해 사이에서 투쟁이 격화된다. 암소나 암말의 출산은 생쥐나 토끼 의 그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위험하다. 암컷 중에서 가장 개체화되어 있는 인간인 여자도 가장 연약한 암컷, 즉 가장 극적으로 자기 숙명을 살고, 가장 근본적으로 수컷(남성)과 구 별되는 암컷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도 대부분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남녀가 거의 같은 수로 태어난다. (남자 104명에 대해 여자 100명 꼴이다.) 그리고 태아가 발달하는 방법도 같다. 그러나 원상피조직은 여 자인 태아 쪽이 더 오래 중성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그 발달이 도중에 역전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반음양은, 본래 여성적이었던 주체가 후에 남성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남성 적인 유기체는 처음부터 곧장 남성으로 결정되지만, 여성적인 유기체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태아의 이 최초의 망설임은 아직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만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양성의 생식기관은 대칭적인 것으로 완성된 다. 그 어느 쪽의 호르몬도 같은 화학족, 즉 스테롤족에 속하고 모두 콜레스테롤에서 생긴 다. 생식세포의 2차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이 스테롤족이다. 그러나 호르몬의 화학방정식이나 해부학적 특성도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구별하는 것은 그 기능의 발달이다. 여성에 비하면 남성의 발달은 단순하 다. 출생에서 사춘기까지 남성은 대체로 순조롭게 성장한다. 15, 16세경에 정자의 생성이 시작되며, 노년에 니르기까지 지속된다. 그리하여 생식세포의 남성적인 구성을 결정하는 호르몬이 생긴다. 그후 남성은 성생활을 하게 된다. 성욕이 일어날 때나 성교를 할 때에도, 종에 대한 자기초월은 자기초월의 주체적 동기와 하나가 된다. 그는 그의 육체이기 때문이 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태아 때부터 이미 난자세포가 저장되어 있고, 난소에는 약 5만 개의 난자가 여포에 쌓여 있으며, 그중에서 약 400개가 성숙하게 된다. 그것이 태어나면 곧 종이 여성을 소유하여 그 권리를 주장하려고 한다. 여자는 태어 나자마자 일종의 제1차 사춘기를 통과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난모세포는 급속히 성장한다. 그리고 난소는 약 5분의 1 가량 축소된다. 어린 아이 때에는 휴식이 주어진 셈이다. 그때 유기체는 발달하지만, 생식계통은 거의 정지된 상태이다. 여포 중에는 팽창하는 것도 있지만, 성숙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어린 소녀의 성장은 소년의 경우와 비슷하다. 오히려 같은 나이의 남자보다 키가 크고, 체중이 무거운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종이 다시 그 권리를 주장한다. 난소 분비물의 영향으 로 성장중인 여포의 수가 증가한다. 난소는 충혈되고 팽창하며, 난자 중의 하나가 성숙하 여 월경주기가 시작된다. 생식계통은 그 최종적인 크기와 형태를 취하여, 생식세포는 여성 화되고 내분비의 평형이 확립된다. 이런 현상이 '위기'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가 아무 저항 도 하지 않고 종을 자기 체내에 자리잡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투쟁은 여성을 쇠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기에 빠뜨린다. 사춘기 이전에는 남아와 여아의 사망률이 거의 같지만, 14세에서 18세까지는 남자 100명에 대하여 여자 128명, 18세에서 21세까지는 남자 100 명에 대해 여자 105명이 죽게 된다. 위황병, 결핵, 척추염, 골수염 등이 자주 발생하는 것 은 이 시기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춘기가 빨리 오지만, 45세경에 오는 사람도 있다. 그 런가 하면 사춘기가 전혀 시작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소아성으로, 무월경 또는 월경곤란으로 고생하게 된다. 어떤 여성은 남성화의 징후가 보인다. 부신에서 만들어진 분비물 과잉이 그녀에게 남성 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은 결코 종의 폭압에 대한 개체의 승리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다. 종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나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종은 개체의 생활 을 예속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 이원성은 난소의 기능에 나타난다. 남 성의 활력이 고환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활력은 난소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어느 경우에도 거세된 개체는 단지 불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퇴 화한다. 유기체는 형성되지 않거나 잘못 형성되면 전체가 빈약해지고 균형을 잃게 된다. 유기체는 생식계통의 성숙에 의해 비로소 성숙해진다. 그러나 생식현상의 대부분은 주체인 개개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위험에 노출 시키기도 한다. 사춘기에 발달하는 유선은 여성의 몸의 조화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애의 어느 시기에 그것을 절제해도 무방하다. 난소의 분비물은 대부분이 난자 의 성숙과 자궁이 난자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 것은 몸 전체에 조정보다 부조화의 원인이 된다. 여성은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난자의 요 구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다. 여자는 사춘기에서 폐경기까지 자기 속에 전개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녀에게 관계 가 없는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이다. 앵글로색슨족은 월경을 저주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월경주기에는 개인적인 의도가 배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월경이 수태했을 경우 에 태아의 피와 살을 만드는 데 충당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낡은 학설의 정당성은, 여자 는 언제나 임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포유동물의 경우에는 이 발정주기는 한 철밖에 계속되지 않으며, 출혈도 뒤따르지 않는다. 그것을 달마다 고통과 출혈이 따르 는 가운데 치러야 하는 것은, 고등원류와 여자뿐이다. 약 14일 동안 난자를 싸고 있는 '그 라프 씨의 여포'중의 하나가 양을 늘려 성숙해 간다. 그동안에 난소가 폴리쿨린이라는 호 르몬을 분비한다. 14일 만에 배란이 이루어진다. 여포의 안쪽 벽이 찢어지고(이 경우에 가 끔 피가 나기도 한다) 그 반흔이 발전하여 황체를 형성해 가는 동안에 난자가 수란관 속 에 떨어진다. 이때 자궁에 작용하는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의 분비에 의해 특징적인 제2단계, 일명 루테인(난황 색소)이라는 단계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궁이 변화된다. 내 벽의 모세관 조직은 충혈되고, 내벽이 위축되어 생긴 주름으로 레이스가 늘어진 것처럼 보 인다. 이 세포변화는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수정하지 않은 경우에도 이 조직은 소 실되지 않는다. 다른 포유동물이라면 그것은 임파관을 통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궁 내벽의 주름이 뭉그러질 때에는 점막이 박탈되고 모세관 이 열려 핏덩이가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황체가 퇴화하는 한편 다시 점막이 만들어져 새로운 여포단계가 시작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은 아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유기 체 전체를 동요시킨다. 왜냐하면 갑상선과 뇌하수체, 중추신경 계통과 소화기 계통 등 모 든 내장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여성(85퍼센트 이상)은, 이 기간에 장애를 나타낸다. 출혈이 시작되기 전에는 혈압이 오르고 다음에는 내린다. 맥박이 빨라지고 때로는 체온도 상승하여 열이 나는 경우 도 많고, 복부에 통증도 느끼게 된다. 변비에 이어 설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간장비대, 요 폐색, 단백뇨 증상이 일어난다. 많은 여성은 후점막의 충혈(후두통)을 일으키고, 모든 여성 이 시청각장애를 호소한다. 땀이 많이 나고 월경 초에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심하면 월 경기간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신진대사는 증대되고, 적혈구의 수가 감소한다. 그러나 혈액 은 보통 조직 속에 비축된 여러물질, 특히 칼슘염을 운반한다. 이 염분이 난소와 갑상선에 작용하여 비대하게 되며, 뇌하수체를 자극하여 자궁점막에 변화를 일으켜 뇌하수체의 활동 력을 증대시킨다. 선이 이와 같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쇠약해진다. 중추신경 계통이 침해되어 만성적인 두통이 일어나고, 소화기 계통은 과도한 반응을 보인 다. 중추신경 계통에 의한 자동조정력이 감퇴되었기 때문에 반사운동이나 경련성 콤플렉스 가 일어나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된다. 여자는 평소보다 신경이 예민하고 불안하고 신경질 적이고, 심한 정신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자가 자기 육신을 광적인 이물질처럼 느끼고, 크게 상심하는 것은 이 시기이다. 그녀의 육체는 달마다 자기 속에 요람을 만들고 부수는 집요하고 무심한 생명의 희생물이다. 달마다 아기를 낳을 준비를 하고 빨간 주름의 붕괴로 유산한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육체는 자기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는 그녀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다. 수정란이 자궁 속에 내려가 그곳에서 발달할 때에는, 여성은 더욱 심각한 소외감을 느끼 게 된다. 건강하고 영양이 정상일 때에 임신하면, 모체에 해를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인 공리주의가 분명히 드러나보이는 낙천적인 학설과는 반대 로, 임신은 여성에게 개인적인 이득이 되기는커녕 반대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힘든 일이 다. 최초의 몇 달 동안은 흔히 식욕부진과 구토가 따른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축의 암컷 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것이며, 유기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종에 대한 유기체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기체에서 인, 칼슘, 철분이 결핍되며, 철분의 결핍은 나중에 보충하기도 어렵다. 신진 대사의 과잉이 내분비 계통을 흥분시켜, 소화와 신경계통을 흥분시킨다. 혈액은 그 비중이 감소되어 빈혈증을 일으키고, 단식이나 결식한 사람 또는 계속해서 출혈한 사람이나 회복 기 환자의 피와 흡사하게 된다.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좋은 여성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분만 후에 크게 고생을 하지 않고 태아가 소비한 양을 회수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임신중에는 중대한 고장이나 위험한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몸 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위생상태가 나쁘면 여자는 출산 때문에 일찍 늙어 추하게 된다. 이 런 증상이 시골에는 얼마나 많은가, 분만자체도 고통스럽고 위험하다. 육체가 종과 개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위기이다. 분만할 때 아기가 죽거나 어머니가 죽거나 어머니에게 만성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 도 어머니에게 고역이다. 여러 가지 인자-그 주요한 것은 포르게스테론이라는 황체호르몬 인데-가 밀집하여 유선 속에 모유를 분비하게 한다. 젖이 불 때에는 고통이 따르고, 때때 로 발열현상이 일어나며,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에는 자기 자신의 정력을 쏟는 것이다. 분만할 때 극적인 양상을 나타내는 종과 개체의 투쟁은 여자의 몸을 불안하고 연약하게 만든다. 여자는 흔히 뱃속에 병을 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체내에 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 그녀들을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걸리는 병의 대부분 은 외부로부터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체내의 이상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의사자궁염은 난 소의 이상자극에 대한 자궁점막의 반작용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만일 황체가 월경후에도 흡수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으면, 나팔관염이나 자궁내막염의 원인이 된다. 여자가 종의 세력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괴로운 위기를 거쳐야 한다. 40세에서 50세 사 이에 적령기의 역현상인 폐경기가 나타나게 된다. 난소기능은 감퇴하거나 아예 소멸되기도 한다. 이 소멸은 여성의 활력을 약화시킨다. 갑상선이나 뇌하수체 등의 분해작용의 선이 난소의 결함을 보충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폐경기 때는 침체된 기분뿐만 아니라, 발열, 고혈압, 신경과민 등의 상승현상이 나타나며, 때로는 성본능이 재발되기도 한다. 어떤 여성은 그 시기에 지방이 증가되거나 때로는 남성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 분의 여성들은 내분비의 균형이 회복된다. 이때 여성은 비로소 암컷의 굴욕에서 해방된다. 그 활력은 손상을 입지 않았으므로, 거 세된 남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자는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힘의 희생물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 때때로 나이를 먹은 여자를 '제3 의 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사실 그녀들은 수컷은 아니지만 암컷도 아니다. 그리고 이 생리적인 자율성은 그녀들이 이전에는 소유하지 못했던 건강, 균형, 정력으로 나타나는 경 우도 많다. 여성의 경우에는 순전히 성적인 차이 이외에, 다소나마 그 차이와 관련하여 생기는 2차 적인 성적 특이성이 있다. 그것은 생식세포를 결정하는 호르몬의 활동이다. 여성은 일반적 으로 남성보다 키가 작고, 체중도 가볍고, 골격이 약하고, 골반은 임신과 분만작용에 적응 하여 넓다. 몸에 지방이 오르고, 전체적인 모습이 남성보다 둥그스름하다. 전체적인 형태, 피부, 모발계통은 남녀가 뚜렷하게 다르다. 근육의 힘은 여성이 훨씬 약하여 남성의 약 3 분의 2 가량 된다. 호흡능력도 떨어진다. 폐, 기관지, 후두가 여성 쪽이 작기 때문이다. 후 두의 차이는 또한 성량의 차이를 가져온다. 혈액의 비중은 여성 쪽이 작다. 적혈구의 함량 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처럼 몸이 튼튼치 못하고 빈혈을 일으키기 쉽다. 맥박도 빠르고, 혈관계통도 불안정하다. 그래서 금방 빨개진다. 불안정은 여성의 큰 특징의 하나이 다. 남성은 칼슘의 신진대사가 안정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석회염을 훨씬 적게 갖 고 있는데다가 월경과 임신 때에 그것을 배설하기까지 한다. 난소는 칼슘에 접하면 붕괴작 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안정성은 특히 난소에,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 쪽이 훨씬 발달되어 있는 갑상선에 이상을 가져오기 쉽다. 그리고 내분비의 불규칙은 자율신경계통에 영향을 주어, 신경이나 근육의 통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다. 이 안정과 통제의 결여는 혈관의 변화에 직접 결 부된 신경이나 근육에 과민성으로 나타난다. 심장이 뛰고, 얼굴이 잘 묽어지는 증상이 그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눈물이나 요란한 웃음, 신경발작과 같은 경련적인 감정표현을 하기 가 쉽다. 이상과 같은 특징의 대부분은 여성이 종에 종속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 검토에서 내리게 된 명백한 결론이다. 여자는 모든 포유동물의 암컷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소외되어 있고, 또한 가장 심하게 이 소외를 거부하고 있다. 다른 생물의 어 떤 암컷을 보아도 유기체의 생식기능에의 종속이 이처럼 절대적이고 또 이 이상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없다. 발정기와 폐경기의 위기, 달마다 겪는 '저주'(월경), 오랫동 안 그리고 자주 큰 고통이 뒤따르는 임신, 위험한 출산, 질병, 재앙 등이 여자의 특징이다. 여자가 개체로서 자기를 주장하여 자기 숙명에 반역할수록 그 운명은 점점 무겁게 억누른 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하면 훨씬 유리하게 생각된다. 남성의 성생활은 그의 개인생활과 모순 되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위기도 초래하지 않고, 또 일반적으로 큰 변화도 없이 순조롭게 전개된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오래 산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병에 걸리 기 쉽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간도 길다. 위에서 말한 생물학적인 조건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여성이 처한 생애에 가장 중요 한 역할을 하며, 여성의 환경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후의 서술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점 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그 파 악방법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길게 생물학적인 조 건을 연구했다. 그것은 여성을 이해하는 열쇠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조건이 여성에게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이 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이것만으로 남 녀의 계급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여자가 타자인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여자에게 영구히 종속적인 역할을 하는 운명을 안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남녀는 인간으로서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는가? 종에 대해 남녀의 어느 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흔히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생리학뿐이라고 말한 다. 그러나 앞의 물음은, 여자와 다른 생물의 암컷에게 같은 식으로 할 수는 없다. 왜냐하 면 동물은 안정된 형태로 서술할 수 있는 기성의 종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말이 수 말만큼 빨리 뛰는가, 침팬지의 수놈이 암놈보다 지능테스트의 성적이 좋은가를 알아보려 면, 관찰을 종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형성과정에 있다. 순수하 게 정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는 유물론자도 있었다. 심리와 생리의 평행설에 젖어 있는 그들은, 암, 수의 유기체 사이를 수학적으로 비교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런 척도가 즉시 암, 수의 기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법이 불러온 무익한 논의의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뇌가 어떤 신기한 방법으로 사상을 분비하는 것처럼 생각했으므로, 여자의 대뇌의 평균 무게가 남자보다 가벼운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로 생각되었다. 여자의 대뇌의 무 게는 1,000그램에서 1,500그램이고, 남자는 1,150그램에서 1,700그램이므로, 평균하면 여자는 1,220그램이고, 남자는 1,360그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중량은 의미가 없으므로, 상대중량을 고려하기로 했다. 이것을 보면 여성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수정해야 한다. 이런 비교에서는 작은 유기체 쪽이 언제나 이득을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개체를 비교할 경우에 체중을 제외하기 위해서 는, 그것이 동종에 속할 때에는 대뇌의 무게를 체중의 0.56배로 나눠야 한다. 남자와 여자 를 두 변형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남자 체중의 0.56=498승 1360/498=2.73 여자 체중의 0.56=446승 1220/446=2.74 즉 같은 값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밀한 논쟁을 해도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대뇌의 무게와 지능의 발달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 다. 남녀의 호르몬을 결정하는 화학방정식을 심리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와 생리의 평행설 같은 사고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결정적으로 무너진 학설이다. 우리가 특히 이 학설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는 무너 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 럼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낡은 유물이 아직도 행세하고 있다. 나는 또한 여러 가치의 자연적인 단계, 예를 들면 진화의 단계의 존재를 내포하는 고증 학설도 일체 배격한다. 여성의 육체가 남성의 육체보다 소아적이냐 아니냐, 그것이 유인원 의 육체에 가까우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전혀 무의미하다. 막연한 자연주의를 막연한 도덕 론이나 심미론과 혼동하고 있는 이런 논의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류의 경우에 남녀 의 비교는 인간적인 전망에서나 가능하다. 인간의 정의는, 그것이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이다. 여자는 굳어버린 현실이 아니라 생성이다. 그러므 로 여자를 남자와 비교할 경우에도 이 생성의 측면에서 해야 한다. 즉 여자의 가능성을 명 확히 알아봐야 한다. 그처럼 많은 논쟁이 오류를 범한 것은 여자의 능력을 문제삼으면서, 여자를 과거나 현재의 상태로 환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능력이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에야 비로소 분명히 입증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결코 도중에 계산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취한 견해, 즉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의 견해로 볼 때, 만일 육체 가 물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상황이다. 그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우리의 도구이며, 투기의 시도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고, 근육의 힘도 적고, 적혈구가 적고, 폐활량도 적 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지도 못한다. 여성이 남성과 대항할 수 있는 스포츠는 거의 없다. 여성은 격투로 남성에게 도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불안정성, 통제의 결여, 허약성이 첨가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여성의 파악력은 남성보다 제한되어 있다. 여성은 투기에 있어서 남성보다 결단과 끈기가 적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 또한 적다. 즉 여성의 개인적인 생명력은 남성만큼 풍부하지 못 하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 다. 우리가 인간사회의 관점에 서서 육체를 실존에서 출발하여 규정하게 되면, 생물학은 추상적인 학문이 되어버린다. 생물학적 조건(근육의 열등성)이 의미를 갖게 되면 그 의미 는 반드시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약함'은 남성이 지향하는 목표나 남 성이 다루는 기구나, 남성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생각되는 것 이다. 만일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사물에 대한 파악이라는 개념도 무의미 해질 것이다. 이 파악을 위해 체력의 사용이 요구되지 않을 경우나 실용적인 한계 내에서 는, 체력의 차이는 없어진다. 풍습이 폭력을 금하는 곳에서는 근육 에너지는 지배력을 발 휘할 수 없을 것이다. 연약함의 관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면, 생존적, 경제적, 윤리적 관 념이 필요하다. 인류는 반자연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것은 결코 적절한 표현이 못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현상을 만들 어나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 파악할 경우에만 인간에게 현실성을 지니게 된다. 그 인간 자신의 자연(본성)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에 대한 파악과 마찬가지로, 생식기능이 여자에 게 떠맡기는 부담도 추상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다. 모성과 개개의 생명의 관계는, 동물의 경우에는 발정주기와 계절에 따라 자연히 규정되어 있지만, 여자는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 문이다. 사회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출산횟수의 다소에 의해, 또는 임신과 분만에 대한 위생조건에 따라, 종에 대한 여성의 종속의 긴밀도가 다르다. 그러므 로 고등동물의 경우는 개성적인 존재는 암놈보다 수놈이 우세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개인 적인 가능성은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의해 죄우된다. 어떤 경우든, 수놈의 개체적인 특권이 종 속에서 수놈에게 우월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암놈은 어미가 되어 다른 종루의 자치성을 획득한다. 때로는 수놈이 그 지배권을 행 사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추케르만이 연구한 원숭이의 경우다. 그러나 대개의 암, 수는 따 로따로 떨어져 산다. 또한 사자의 경우처럼 암수가 평등하게 가정을 돌보기도 한다. 인간 의 경우는 이 점에 있어서도 다른 동물과 동일시할 수 없다. 인간이 처음부터 명확히 개체 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남녀가 1대 1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부는 본래 함께 사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또한 언제나 보다 큰 집단의 고정적 또는 과도적인 한 단위로 나타난다. 그런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어느 쪽이 종에게 더 필요할까? 생식세포의 단계나 성교 와 임신의 생물학적 기능의 단계에서는, 남성원소는 유지하기 위해 창조하고, 여성원소는 창조하기 위해 유지한다. 이 구별은 사회생활 속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다른 유기체나 기 체에 기생하고 있는 종에게는, 즉 자연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먹이를 제공할 수 있는 종 에게는, 수놈의 역할은 생식작용에 국한된다. 새끼에게 필요한 먹이를 얻기 위해 사냥감을 찾아 투쟁해야 할 때에는 수놈은 새끼의 부양을 위해 힘쓴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 지 않게 된 후 오랫동안 새끼가 자기의 요구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종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때 수놈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수놈이 탄 생시킨 생명은 수놈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해마다 많은 암놈에게 수태를 시키기 위해서는 수놈 한 마리만 있으면 되지만, 새끼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자연의 손에서 새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몇 마리 의 수놈을 필요로 한다. 생산력과 생식력의 균형은 인류역사의 경제적인 환경에 따라 다르 게 실현된다. 이 경제적인 환경은 새끼에 대한 수놈과 암놈의 관계 내지 암, 수의 상호관 계를 규정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생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생물학의 지식만으로는 양성이 종을 영속시키기 위해 연출하는 역할에 대해 그 어느 한쪽 이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요컨대 사회는 종이 아니다. 종은 사회 속에서 실존으로서 자기를 실현해 간다. 종은 세 계와 미래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는 생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개 체는 결코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개체의 존재론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욕망과 위험을 반영 하는 습성, 즉 제2의 자연에 따른다. 주체가 자기를 의식하여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것은, 육체로서가 아니라 터부(금기)나 법률에 예속된 육체로서이다. 그리고 주체가 자기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각각의 가치의 이름에 있어서이다. 이 경우에도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생리가 아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조건은 실존자가 부여하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만일 여성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금한다면,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 갖는 존경과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육체적인 우월성도 권력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인디언 부족처럼, 처녀가 자기 마음대로 남편을 고르는 풍습이 존중된다면, 남 성의 성적 공세는 어떤 주도권도 또 어떤 특권도 제공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긴밀 한 관계는, 자녀에게 주는 여러 가지 가치에 따라서 존엄의 원천도 되고, 경멸의 원천도 될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모자관계 자체가 사회적인 편견에 따라 인정받기 도 못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조건은 존재론적,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전체의 관계에 잘 비춰보 아야 한다. 종에 대한 여성의 종속, 그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여 자의 육체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상황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자 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사회 안에서 육체는 의식 이 행위를 통해 살아나가야만 비로소 진정한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은 '어찌 하여 여자는 타자인가?'라는 우리의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 성에게 자연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를 알아야 한다. 또 인류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만 들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제2장 정신분석의 입장 정신분석이란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룬 커다란 진보는, 정신생활에 나타난 모든 현상 에는 인간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실제로 실존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객관적인 물체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육체이다. 여자는 자기를 암컷 으로 느끼는 한 암컷이다. 물론 여자는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존재여서 체험과 무관한 조 건도 있다. 예컨대 난자의 구조에는 체험이 반영되지 않는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그다 지 중요하지 않은 기관, 예를 들면 음핵 같은 것이 체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이 여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그 감성 속에 자연을 받아들여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하나의 체계가 세워졌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것이 여성에 대한 연구에 공헌한 점만을 알아보려고 한다. 정신분석 에 대해 검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 로, 정신분석은 엄격한 개념의 바탕 위에 서 있지만, 거추장스러울 만큼 융통성이 많다. 정 신분석에서의 용어는 때로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팔루스라는 용어는 분명 히 남성의 생식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같은 용어가 때로는 크게 확대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양물은 남성의 성격이나 상황 전체를 표시하게 된다. 만일 그 학설의 낱말 뜻을 공격하면, 정신분석학자는 그 정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그 정신을 긍정 하면 곧 자기 속에 가둬놓으려고 할 것이다. 학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은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성공을 거두면, 이 학설의 신봉자는 점점 신뢰성이 깊어진다. 대개 정 신분석학자말고 어디서 정신분석학의 진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기독교나 마르 크스주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학자 중에도 이단자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많은 정 신분석학자는. "정신분석학의 가장 큰 적은 정신분석학자이다." 하고 공언한다. 가끔 현학 적일 정도로 학문적인 복잡성을 띠면서도, 여러 가지 애매한 점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지적한 것처럼 '성욕은 실존과 공존한다'는 명제는, 크게 다른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의 모든 현상은 성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모든 성적인 현상은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단정 사이에 타협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상호간을 왕래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성 적'과 '생식적'이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하면, 성욕의 개념이 흐려진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성적 요소란, 생식력을 개방하는 내적인 능력이다." 하고 달비에는 말한다. 그런데 '능력'이라는 관념, 즉 가능의 관념처럼 애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현실 만이 가능의 확증을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기의 체계를 철학적으로 변호하기를 거절했다. 그의 제자들은, 프로이트는 그럼으로써 모든 형 이상학적인 공격을 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내린 모든 단정의 배후에는 형이상학 적인 가정이 숨어 있다. 자기의 용어를 활용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철학을 채택하는 것이 된다. 이런 혼란 때문에 비판하기가 어렵지만, 그 때문에 비판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숙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숙명에 서 여자의 숙명을 끄집어내어, 몇 가지 문제점을 수정하는 데 그쳤다. 프로이트 이전의 성 과학자 마라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욕은 분화된 에너지로 보면, 남성적인 힘이다. 우 리는 오르가슴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르 가슴에 도달하는 것은 '남성적'인 여자이다. 성적 충동은 '일방통행'이며 여자는 단지 그 과정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자 의 성은 남자의 성과 마찬가지로 진화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만을 특별히 연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성욕은 남성과 여성이 어느 쪽에 나 타나건 으레 남성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그는 여성의 성욕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여성의 성욕이 인간의 일반적인 성욕의 복합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 다. 그에 의하면 이 인간 일반의 성욕은 남녀 간에 마찬가지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구순기를 지나 다음으로 항문기를 거쳐, 마지막으로 생식기에 도달한다. 양성이 구분되는 것이 이 시기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선배들이 그 중요성을 충 분히 인정하지 않은 하나의 사실을 해명했다. 남성의 색정은 완전히 페니스(음경) 속에 국 한되지만, 여성에게는 분명히 양분된 색정 계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유아기에 발달하 는 클리토리스(음핵) 계통이고, 또 하나는 성년기에 비로소 성숙되는 질 계통이다. 남아는 생식기에 도달했을 때, 그 발달이 완성된다. 그는 쾌락이 주체성 속에서 추구되는 자애적 인 태도에서 쾌락을 어떤 개체에, 보통은 여성과 결부시키는 타애적인 태도로 옮아간다. 이 이행은 사춘기에 자애의 단계를 지나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페니스는 유아기와 마찬 가지로 특권적인 색정기관으로 머물러 있다. 여성도 나르시시즘(자기애)을 통하여 남성에 대해 그 성욕을 객체화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남성의 경우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여자 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에서 질의 쾌감으로 옮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하나의 생 식기밖에 없지만, 여성에게는 두 생식기가 있다. 그래서 여성은 그 성적 진화가 최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유아기에 머물러, 결국 신경증을 일으킬 확률이 더 높다. 어린이는 자애단계에서 다소 강렬하게 객체에 애착을 느낀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긴 밀히 접근하여 아버지와 동일시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엄청난 요구에 질려, 아버지가 자기를 벌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사내아이가 아버지에게 반감 을 갖고 어머니를 사모하는 경향)에서 '거세 콤플렉스'가 생긴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반 항심을 갖는 동시에 자기의 프라이드를 내면화한다. 이리하여 근친상간의 경향을 비난하는 '초아'가 생긴다. 이런 경향은 억압되어 콤플렉스는 청산되며, 남아는 마음속의 감독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그것이 무참히 짓밟힐수록 초아는 강해진다. 프로이트는 여아의 성장과정을 처음에는 남아와 동일하게 서술했다. 다음에 유아기 콤플 렉스의 여성형태에 엘렉트라 콤플렉스(여자아이가 아버지를 따르고 어머니에게 반감을 느 끼는 경향)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본질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남성적인 측면에서 출발하여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남녀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인정한다. 소 녀는 먼저 어머니에게 고착한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시기에도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이끌 리는 일이 없다. 그 고착은 구순기의 잔재이다. 그때 소녀는 아버지와 동화하려고 한다. 그 런데 5세경부터 소녀는 해부학상 성기의 차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페니스가 달리지 않은 데 대해 일종의 거세 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그녀는 페니스가 잘려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한다. 이렇게 되면 남자가 된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하며, 그녀는 어머니와 동화되어 아버지를 유혹하려고 한다. 거세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서로 협조한다. 소녀가 아버지를 사랑할 때에는 아버지를 닮고 싶어하므로, 그 실망은 그만큼 더 커진다. 한편 이 실망은 그녀의 애정을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그녀가 자기의 열등감을 메우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통하여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어머니에게는 적대감정을 갖게 된다. 이윽고 그녀 속에서도 초아가 형성되어, 근 친상간적인 경향이 억압된다. 그러나 이 '초아'는 연약하다. 최초의 고착의 대상이 어머니 였으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분명치 않다. 아버지 자신이 자 기가 비난하는 애정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금지명령은 경쟁자인 아들의 경우처럼 강하지 않다. 소녀에게는 성기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성의 드라마는 그 남자형제들보다 복 잡하다. 그녀는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반동으로서 여자이기를 거부한 채, 언제까지나 페니 스를 달기를 원하며 아버지와 동화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를 언제 까지나 클리토리스 단계에 머물게 하여, 불감증이나 동성애로 향하게 한다. 이런 경향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비난은, 프로이트가 남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자기를 페니스가 잘린 남성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렸다는 생각은 어떤 것과의 비교, 즉 경중을 의미한다. 많은 정신분석 학자는 오늘날에 와서 여아는 페니스가 없는 것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잘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애석하게 느끼는 심정은 그다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 다. 또한 이것은 단지 해부학적인 대조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많은 소녀들은 훨씬 나중 에야 남자의 신체구조가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시 각을 통해서이다. 남아는 페니스에 대해 프라이드를 느낄 수 있는 체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프라이드 도 그의 자매들의 굴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자매들은 남자의 성기를 단지 외면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다란 혹, 툭 부러질 것만 같은 막대기에 대해 그녀들은 무관심 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혐오감을 느끼는 데 불과하다. 소녀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 은, 남성의 가치에 대해 예비지식을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는 이 선망에 대해 설 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일로 간주한 것이다. 한편 여성의 성욕에 대해 독자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개념은 대단히 애매하다. 이미 남아의 경우에도 순전히 생식기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는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버지가 딸에게 성적 자극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여자의 색정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하 나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춘기가 되어 질의 색정과 관련하여 비로소 여성의 체내에는 여러 가지 색정대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10세 여아의 경우에, 아버지의 키스나 애무가 클리토리스의 쾌감을 일으키는 '내재적 능 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다. 만일 '엘렉트라 콤플렉 스'가 극히 모호한 감성적 성격밖에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감정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는데, 일단 이것을 성욕과 구별하면 프로이트의 학설로는 이것을 정의할 방 법이 없게 된다. 어쨌든 아버지를 신격화하는 것이 여성의 성욕은 아니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일으키는 욕망에 의해 신격화되지 않는다. 여성의 욕망이 지배적인 존재에 대해 일어난다는 사실은 여자에게 하나의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버지 우월성은 사회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역사상 어느 시기에 어떤 권위가, 아버 지가 어머니보다 우월하다고 결정했는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프로이트 자신이 실토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결정은 진보를 의미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 경우에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권위가 아버지에게 주어 진 것은 진보의 힘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하고 그는 마지막 저술(모세와 그 백성) 에서 쓰고 있다. 아들러(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1870~1937)가 프로이트와 다른 점은, 인간생활의 발전을 단지 성욕에서 찾으려는 학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즉 그는 인간생활을 인격 전체에서 찾으려고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는 모두 욕망, 즉 쾌락 의 추구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으나, 아들러는 인간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 다고 생각한다. 그는 행위 대신 동기, 목적성, 계획을 내세운다. 그는 지성에 큰 비중을 두 기 때문에 성적인 것은 상징적인 가치밖에 없다. 아들러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활동은 세 시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인 간에게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열등 콤플렉스가 따르게 된다. 이 모순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현실의 시련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속 임수를 쓰게 된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두려워하는 사회 사이에 간격을 둔다. 여기서 사회 적인 질병인 신경증이 생기게 된다. 여성의 경우, 그 열등 콤플렉스는 자기가 여자인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콤플렉스는 자기에게 페니스가 달리지 않아 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아가 페니스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남아에게 주어진 특권의 상징이기 때문 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지위, 남성 존중의 풍조, 교육 등 모든 것이 남성의 우 월성을 여성에게 믿도록 유도하고 있다. 나중에 성관계를 가질 때 여성이 남성의 밑에 있 게 되는 성교의 체위까지도 또 하나의 굴욕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적인 항의' 로 반항하게 된다. 일부러 남성화하려고 노력하거나, 여성에게 고유한 무기를 사용하여 남 성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어린애의 페니스에서 상당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여자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자 기의 열등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가 된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욱 깊이 자기분열을 일으 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학설의 차이점이나 그 견해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는 없다. 요컨대 전자의 행위에 의한 설명이나 후자의 동기에 의한 설명도 크게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동기를 전제로 하지만, 동기는 행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학설을 종합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 실 아들러는, 목적이나 결말의 개념을 개입시키면서도, 심리적 인간관계의 관념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그와 프로이트의 관계는 정력설과 기계설의 관계와 비슷하다. 충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인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물리학자는 언제나 결정론을 인정하고 있 다. 이것은 또한 모든 정신분석학자에게 공통된 가설이다.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결정론적 요소의 작용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정신분석학자도 여성 에게 모두 같은 운명을 마련해 주고 있다. 즉 여자의 일생은 그 '남성적'인 경향과 '여성 적'인 경향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첫째 경향은 클리토리스 체계 속에, 둘째 경향은 질의 에 로티시즘 속에 나타난다. 여자는 유년기에는 아버지와 동화하려고 하고, 그후 남자에게 열 등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 다. 즉 자기의 자주성을 유지하여 남성화하거나(이것은 열등감 때문에 긴장감을 일으키는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 쉽다), 아니면 순종적인 사랑 속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 이다. 이 해결방법은 여성이 전에 우월자인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한 결 쉽다. 그녀가 애인이나 남편에게서 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이며, 성적 사랑은 여자에 게 지배를 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보상을 받아, 다시 새로운 자주성을 되찾게 된다. 이 운명은 독자적인 역학에 의해 연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해 전개되며, 여자는 저마다 이런 운명에 수동적으로 따르 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 학설에 경험적인 확증을 뒷받침하는 데 대단히 유리하다. 널리 알 려진 바와 같이, 프롤레마이오스(그리스의 천문학자)의 학설을 교묘히 복잡하게 만들어, 유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태연스럽게 행세해 왔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오이디푸스에 도착된 오이디푸스를 겹쳐놓고, 모든 고뇌 속에 욕망을 보여줌으로 써, 결국 프로이트의 학설과 모순되는 사실까지도 그 속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형체를 파악하려고 하면 결국 본질에서 출발하게 되고, 그 형체가 파악되는 방법에 따라 본질은 구체적인 사실로 분해되어 파악된다. 그러므로 만일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개개의 사례를 서술하려고 하면, 그 사례의 배후에 대하여도 프로이트적인 도식을 발견하게 될 것 이다. 다만 하나의 학설이 세부에 관해 얼마든지 임의의 해석을 허용하거나, 혹은 관찰의 결과 통칙과 같은 변칙이 발견될 경우에는, 낡은 틀을 깨뜨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오늘날 에는 정신분석학자들은 모두 프로이트의 개념을 자기류로 고치려고 노력하여, 절충을 시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의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콤플렉스에는 그 자의만으로도 몇 개의 구성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콤플렉스란, 이런 부조화의 여 러 요소에 있는 것이지, 그중의 한 요소가 다른 여러 요소를 대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단지 여러 요소의 집합이라는 개념은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생활은 모자 이크 장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시기에 각각 완벽한 것이며, 그 통일성은 반드 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하여 인간 생명(실존)의 근원적인 의도를 발견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근원에 거슬러올라 가보지 않으면 인간은 마치 방향과 우연성도 없는 충동과 억압의 투쟁을 일삼고 있는 듯 이 보인다. 모든 정신분석학자 중에는 선택의 관념 및 그와 관련된 가치의 관념을 전적으 로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체계의 본질적인 약점이다. 프로이트 는 충동과 억압을 실존적 선택에서 떼어놓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그것을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가치의 개념을 권위의 개념으로 대 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세와 그 백성> 속에서, 그는 이 권위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버지가 그것을 금했기 때 문이라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금했는지는 알 수 없다. '초아'는 하나의 압제에서 나온 명령과 금지를 내면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본능적인 경향 이 작용하고 있으나,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두 현실은 각각 이질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성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통일이 파괴되어 개인이 사회에 이르는 다리도 없었다. 프로이트는 개인과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기묘한 이 야기(<토템과 터부>)를 만들어내었다. 아들러는 거세 콤플렉스는 그 사회와의 관계를 제 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가치의 문제에 한 걸음 더 접근했다. 그 러나 사회가 인정한 여러 가치의 존재론적 근거까지는 거슬러올라가지 못하고, 성욕 자체 속에도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성의 중요성을 간파했 다. 성욕은 분명히 인간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활 전반에 침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미 생리학의 측면에서 고찰한 것처럼 고환의 생명과 난소의 생 명은 모든 세포의 생명과 융합되어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을 지닌 육체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실존자와 역시 성을 가진 육체의 다른 실존자와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성과 관 련이 있게 된다. 그러나 육체나 성이 실존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면,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시 실 존 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견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기정사실로 처리해 버린다. 예컨대 여아는 엉덩이를 내놓고 쭈그리고 앉아 서 오줌을 누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 마찬가지로 남성은 페니스가 있기 때문에 프라이드를 갖는가, 아니면 페니스 속에 그 의 프라이드가 나타나는가 하고 묻기 전에, 프라이드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주체의 주장이 객체 속에 구현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을 최소단위의 궁극적인 조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실존자 중에는 그 이상으로 근원 적인 '존재의 탐구'가 있으며, 성은 그 여러 가지 측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을 사르 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의 <대지>, <공기>, < 물> 등의 저서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의 첫째 진실은, 자기 육체와의 관계 및 같은 사회구성원들의 육체와의 관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에워싼 자연계의 물질에 먼저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일이나 유희나 모든 '다이내믹한 상상' 의 경험 속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인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파악한 세계 전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존재에 접해 보려고 한다. 진흙을 만지거나 구멍을 파거나 하는 것은, 포옹이나 성교 못지않는 근원적인 활동 이다. 인간의 이런 활동 속에서 성적 상징만을 인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멍과 진흙과 벤 자국, 그리고 견고성이나 완벽성 같은 것은 근본적인 현실이다. 인간이 이런 것들에 대해 갖는 관심은 성욕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 가에 따라 성욕이 채색되어진다. 완벽성이 남성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이 여자의 처녀성 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성에의 애착이 그의 눈에 처녀성을 귀중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나 전쟁, 유희, 예술활동 등은 다른 어떤 존재방식에도 환원 될 수 없는 이 사회에서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것들이 성본능과 관계가 있는 특질을 나타 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은 이런 현실과 동시에 이런 색정적인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선택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 통일성을 회복하려면 존재론적인 관점에 의해서여야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선택의 관념을 결정론이나, '집합무의식'이라는 명목으로 배격한다. 이 무의식이 인간에게 기성의 이미지나 보편적인 상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꿈이나 설익 은 행위, 착란, 비유, 인간운명의 유사성 등은 이것(무의식)에 의해 설명된다. 자유를 들먹 이는 것은, 불안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법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실 자유 의 관념은 항구성의 존재와 합치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방법이 그 학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성과를 거두는 것은, 모든 개 개의 사례 중에는 아무도 그 보편성을 부정할 수 없는 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 황과 행위는 반복된다. 결정의 순간은 보편성과 반복 속에서 생기게 된다. "신체적 구조는 운명이다." 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 말에서 상기되는 것은, 메를로퐁티의 "육체는 일반성이다." 라는 말이다. 실존은 실존자의 분리를 통하여 하나가 된다. 그것은 유사한 유 기체 속에서 구현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인 것과 성적인 것의 관계 속에는 불변수가 있 다. 어떤 일정한 시기에 어느 집단의 기술이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는, 그 모든 구성원에게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과 사회적 양상 사이에도 불변관계가 있다. 유 사한 조건 속에 놓인 유사한 인간은, 그 조건 속에서 유사한 의미를 파악한다. 이 유사는 엄격한 보편성을 확립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개개의 사례 속에 일반적인 전형을 찾아볼 수 는 있다. 우리는 상징이 신비로운 무의식이 만든 비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 각의 의미를 지닌 유사를 통하여 하나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모든 실존자에게 실존의 상황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실존이 직면하게 되는 사실성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많은 개인에게 동일하게 밝혀진다. 상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분리인 동시에 공존이기도 한 인간의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개개인의 창의도 거기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방법은 학설이 인정하든 말 든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페니스에 주어진 가치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 의 '소외'에 대한 실존적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자기의 자유에서 오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주체는 사물 속에서 자기를 모색하게 된다. 이것은 도피의 한 방법이 며, 대단히 근본적인 성향이다. 어린이는 젖을 떼어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괴면, 곧 거 울 속이나 부모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소외된 실존을 파악하려고 한다. 미개인은 마나(초 자연적인 힘)나 토템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 그리고 문명인은 개인적인 마음속이나 자 아, 생명, 재산, 일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 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의 최초의 유혹이다. 페니스는 남아에게 이 '분신'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그것은 그에게 자기 것인 동시에 별개의 객체이다. 하나의 완구이고, 이행이고, 또한 자기 자신의 육체이다. 부모나 유모는 그것을 마치 작은 인격체처럼 취급한다. 그것이 어린이에게 "인간보다 보통 더 교 활하고 약고 요령있는 제2의 자아"(알리스 발랭, <어린이의 내적 생활>)가 되는 까닭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비뇨작용이나 그후의 발기가 의지적인 행위와 자발적인 작용의 중간 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것이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의 원천이라는 사실에서 페 니스는 주체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서 또는 자기 이외의 것으로 생각된다. 종으로서의 초월이 그 속에 쉽사리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 그것은 자랑의 원천이 된다. 음경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자기에게 넘치는 생명력을 자기 개성 에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페니스의 크기나 오줌의 분출력, 발기력과 사정력이 남성에게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음경 은 언제나 초월을 육체의 형태로 상징한다. 그리고 남아는 자기가 초월된 것, 즉 아버지에 의해 자기의 초월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것도 현실이므로, 여기서 '거세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의 사고와 다시 만나게 된다. 소녀 는 이 제2의 자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사물 속에 자기를 소외시키지 못 하고, 자기의 완전성을 회복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완전한 개체로 하여 '타 자'로서 자기를 설정하게 된다. 여아가 자기를 남아와 견주어보았는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설사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여아 는 성기로는 자기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결과가 일어난다. 내가 지적하는 이런 사실로 하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페니스가 그런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 실현되는 우월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이 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면, 그녀는 음경과 대등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여아의 미래를 구현하는 인형도 페니스보다 귀중한 소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일부 모계사회에서는, 집단이 그 속에 자기를 소외하는 가면을 여자가 쥐고 있다. 이 경우 에는 페니스의 위광은 크게 소실된다. 육체적인 특권은 언제나 전체 속에 파악한 상황 속 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특권의 기초를 만들에 된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인 관계를 무시 하고는 그 진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한 마리의 암컷이라고 말해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됨에 대하 여 갖고 있는 의식 자체에 의해서는 여자를 정의할 수 없다. 여자는 자기가 그 일원인 사 회 속에서 그 의식을 얻고 있다. 무의식을 비롯하여 정신생활 전체를 내면화하는 정신분석 학의 용어까지도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 개인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콤플렉스니, 경향이니 하는 용어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활 은 세계와의 관계이며, 세계를 통하여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개인이 만들어져나가는 것이 다. 당면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 쪽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특히 정신분 석학은 어째서 여성은 '타자'인가를 밝혀주지 못한다. 프로이트 자신이 페니스의 권위는 아 버지의 우월성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의 우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성과 중에는 대단히 유익한 면도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버릴 수는 없지 만, 우리는 그 방법은 일단 거부한다. 첫째로, 성욕을 하나의 주어진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여성의 성욕에 관한 설명이 빈약한 데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신분석학자들은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남성의 성욕에 서 출발하여 생각할 뿐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매력의 근본적인 상반성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학파나 아들러학파는 여자가 남자의 성기 앞에서 느끼는 불 안과 괴로움을 좌절된 욕망이 도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슈테켈은 이 두 학파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거기에 근원적인 반응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피상적으로 해석하여, 여자는 처녀성의 상실이나 삽입, 임신, 고통을 두려워하며, 이 두려움이 여성의 욕구를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이 설명은 지나치게 합리적이다. 욕구가 고뇌로 변하거나 공 포에 지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여자의 욕구라는 심각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에서 비롯 되는 요소를 근원적인 조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자의 욕구의 특징은 매력과 반발이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동물의 암 컷들은 교미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교태 나 위선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원시적인 행동을 복잡한 행동과 동일시하여 설명하는 것은 부당하다. 반대로 여자의 교태나 위선과 같은 태도의 근원에 원시적인 행동이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성욕'이라는 관념은 어색하다. 왜냐하면, 먼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 욕을 충동이나 에너지로 규정한 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빛이 동시에 황색도 되고 청색도 될 수 있다고 선천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 녹색을 직관해야 한다. 현실에 더 욱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욕을 에너지라는 막연한 말로 규정하지 말고, 성의 의미를 인간의 다른 태도 - 취한다, 붙잡는다, 먹는다, 행한다, 따른다 등 - 의 의미와 비교해 보아야 한 다. 성본능은 대상을 붙잡으려는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색정의 여러 가지 특징을, 색정이 성행위로 나타나는 모습뿐만 아니라, 지각 전체 속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색정을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자의 숙명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한다. 여자를 가치의 세계에 놓 고, 그 행위에 자유의 광대한 영역을 제공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여자는, 자기초월의 확립 과 객체에의 자기소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여자는 모순된 충동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윤리적 해결을 해 나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가치를 권위로, 선택 을 충동으로 대치함으로써 도덕의 대용품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정상이라는 것을 뜻하 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임상의에게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정신분석학 전반 속에서 위험할 만큼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도식이 원칙처럼 되어버렸다. 유물론적 심 리학이 윤리적 창조의 관념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마이 너스'는 설명할 수 있어도 '플러스'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실패는 인정하지만, 창조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주체가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진화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다면 진화는 도중에 정지 될 것이며, 이 정지를 실패와 소극성으로 해석할지언정 절대로 적극적인 결정이라고는 해 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특히 위인들의 정신분석을 이상하게 만든다. 이러저러한 전이, 이러저러한 승화가 그들 가운데서 실현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은 해도, 혹시 그들 쪽에서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닌가, 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지 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자유롭게 세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 는다. 어떤 개인에 대해 설명할 경우에 과거와의 관계만 볼 뿐 그가 자기를 투기하는 미래 와의 관계에서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에게 올바르지 못한 모습만 제공한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정상 이외의 다른 표준은 찾아볼 수 없 게 된다. 여자의 숙명에 대한 설명은 이런 점에서 가장 일목요연하다. 정신분석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동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범 속 에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자연스러운 행동보다도 하나의 다른 모습을 택 하는 것, 즉 존재하는 체하는 것이다. 여자는 두 가지 소외 사이에 서서 헤매게 된다. 남자 인 체하는 것은 여자에게 분명한 실패의 근원이다. 그렇다고 여자인 체하는 것 또한 거짓 이다. 여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객체, 즉 '타자'임을 뜻한다. 그런데 그 '타자'는 자기를 포 기해도 여전히 주체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진정한 문제는 이런 도피를 거부하고 자기를 초원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남성적인 태도나 여성적인 태도가 여자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가 부모의 지시대로 움직일 때에도, 그것은 그 아이가 부모의 계획을 자 유롭게 자기 것으로 삼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즉 그 아이의 행위는 목적에 의한 선택의 결 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들러의 학설에서 주장하는 권력에의 의지란, 일종의 터무니없 는 정력에 불과하다. 그는 초월이 구현되어 있는 모든 계획을 '남성적 항의'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여자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은 남자아이와 같게 되기 위해서이다. 나무 에 기어오르는 것이 여자아이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다. 어머니는 아이 를 '페니스의 대등물'로 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정치에 손을 대는 것 은, 그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현상을 곡해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와 정신분석학자의 견해 사이에는 어떤 병행관계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 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남성의 관점 - 정신분석학자는 남자와 여자를 이 관점에 서 보고 있다 -에서 보면, 소외의 행위는 여성적으로 보이고 주체가 자기의 초월을 설정 하는 행위는 남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자의 역사>를 쓴 도널드슨은, '남자는 인간의 수컷이고, 여자는 인간의 암컷이다'라 는 정의는 균형을 잃어 파손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자만 인간이고 여자는 암컷으로 정의 한 경우를,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여자가 인간으로서 행동할 때마다 남자의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는 유아와 소녀가 아버지나 어머니와 동화하고 싶어하는 것을 지적하여 '남성적' 경향과 '여성적' 경향으로 양분된다고 한다. 한편 나는 여성은 '객체'의 역할, 즉 그녀에게 제시된 '타자'의 역할과 자기의 자유요구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사실에서 견해가 일치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에게 제시된 올바르지 못한 도피의 길에 대해 생각할 경우 에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 프로이트학파나 아들러학파와 같은 의미는 결코 부여하지 않는 다. 우리에게는, 여자는 가치있는 세계 속에서 가치를 찾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실존의 견지에서 이런 세계 전체의 상황을 통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제3장 유물사관의 입장 유물사관의 이론은 대단히 중요한 여러 가지 진리를 밝히고 있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현실이다. 인간사회는 반자연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연을 변혁 한다. 이 변혁은 내적으로, 주관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속에서 객관적으로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도 단지 성을 지닌 유기체로만 볼 수는 없다. 생물학적인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중요성을 갖는 것은 행위 속에 구체적인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은, 그 성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다. 그 의식은, 인간이 도달한 기술적인 진화의 단계를 나타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 하나의 상황을 반 영하고 있다. 앞에서도 고찰한 것처럼, 생물학에서 여자를 규정하는 두 가지 본질적인 특 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세계에 대한 여자의 파악은 남자보다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있고, 여자는 남자보다 종에 엄격히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게 된다. 인류 역 사에서 세계에의 파악은 결코 벌거벗은 육체에 의해 규정되지는 않는다. 손은 물체를 잡는 엄지손가락에 의해 그 힘을 배가하는 도구로서 이미 자기를 초월해 있다. 인류 역사가 시 작되기 전의 가장 오랜 문헌에도 인간은 언제나 무기를 갖고 나타난다. 육중한 막대기를 휘둘러서 야수의 공격을 막아야 했던 시대에는, 여자의 나약한 육체는 분명히 열등해 보였 다. 여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보다 약간 큰 힘을 도구가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 자는 대단히 무능력해 보였다. 그러나 기술이 남자와 여자 사이를 떼어놓는 육체적인 차이 를 없애는 경우도 있다.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우세한 것이 못 된다. 많이 갖는 것은 충분히 갖는 것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근대적인 기계를 많은 사람들이 다룰 경우에, 남성의 힘은 그 일부만 필요로 할 뿐이다. 그 필요의 최저한도가 여성의 능력을 능가하지 않을 경우에 여성은 노동에 있 어서 남성과 동등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에는 단추 하나만 눌러도 거대한 에너지를 작동시 킬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일은 풍습에 따라 그 중요성이 크게 달라진다. 아기를 많이 낳도록 강요받거나,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기를 길러야 할 경우에는 대견해 보인 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아기를 자기 의사대로 낳을 수 있으며 사회가 임산부를 도와주고 아기를 돌봐준다면 어머니의 부담은 훨씬 가벼워지고, 그 대신 노동분야에서 쉽사리 그것 을 보상할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여성의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역사 는 본질적으로 기술의 역사에 좌우된다. 석기시대에 씨족 전원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했 던 시대에는 원시적인 삽과 괭이의 기능이 저조했으므로 농경의 규모도 제한되어, 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은 여성의 체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노동의 원시적인 분화 속에서 남녀 양 성은 이미 두 계급으로 구분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급 사이에는 평등이 있었다. 남자는 사냥과 고기잡이에 종사하고 여자는 가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가정의 임무 중 에는 생산적인 노동, 즉 토기의 제작이나 직조, 원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 는 경제생활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후 구리, 주석, 청동, 철 등의 발견으로 쟁기를 만들게 되어 농업의 규모가 커졌다. 삼 림을 개간하고 벌판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중노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자는 다른 남자의 도움을 구하여 그들을 노예로 부렸다. 여기서 사유재산이 생기게 되었다. 노예와 땅주인인 사나이는 또한 여자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역사적인 대패배'이다. 이 패배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 의한 노동의 구분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 안에서 여자에게 지금까지의 권한을 보강했던 원인, 즉 여자가 집 안 노동에만 종사하고 있었다는 그 원인이, 이제는 집 안에서 남자의 지배를 보장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여자의 집 안 노동은 남자의 생산노동 앞에서 퇴색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남자는 전부가 되었고 여 자는 초라한 부속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권리가 어머니의 권리에 대치되었다. 토지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상속되고, 아내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이것이 사유재산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 가족의 출현이다. 이런 가족 속에서는 여성이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지배자로 군림하는 남성은 무엇보다도 성을 마음대로 취급하게 된다. 그는 노예나 창녀와 동침한다. 그리하여 혼자서 많은 아내를 거느리게 된다. 풍습이 평등한 행동을 인정하게 되면, 여자는 곧 부정으로 보복한다. 그리하여 결혼에는 당연히 간통이 뒤따르게 된다. 이 것이야말로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가정에서의 노예상태에 대해 여자가 취할 수 있는 유 일한 방어수단이다. 여자가 받는 사회적인 압박은 경제적 압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두 성이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되어야만 비로소 평등이 회복된다. 그 해방을 위해서는 모든 여성이 공적인 생산이 복귀해야 한다. "여성해방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녀가 사회적인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집안일이 그녀 에게 아주 적은 부담을 주게 될 때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대규모의 여성노 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근대의 대규모 산업에 의해서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운명과 사회주의의 운명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베벨(독일의 사회주의자, <여성론>의 저자, 1840~1913)이 여성을 위해 쓴 방대한 저서 에도 나타나 있다.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피압박계급이다." 양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기계산업이 가져온 변동에서 비롯되는 경제의 발전이다. 여성문제는 그 노동능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기술이 여자의 능력에 적합했던 시대에는 권위를 가졌고, 능력을 행사할 수 없 게 되면서 위신을 잃게 되었던 여성은 근대사회에서 남성과의 평등을 되찾게 된다. 많은 나라들에서 이런 평등의 구체적인 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낡은 가 부장주의의 저항이다. 이 저항이 타파되는 날부터 평등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미 소 련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사회주의적인 사회가 전 세계에 걸쳐서 실현될 경우에는 남성과 여성은 없어지고, 다만 서로 평등한 근로자만 남게 될 것이다. 엥겔스에 의해 시도된 종합적인 이론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이론보다 진일보하고 있으나, 이 이론 또한 우리를 실망시킨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역 사의 중추가 되어 있는 것은 공유재산제도에서 사유재산제도에의 이행이지만, 그것이 어떻 게 실현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엥겔스 자신이 "지금은 그것에 대하여 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다.(<가족의 기원>, pp. 209~210) 그는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자세히 알지 못하여, 어떤 해석도 암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 가 필연적으로 여성을 예속되게 만들었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유물사관은 설명이 필요한 사항을 당연한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충분한 검토 없이 인간을 재산과 결부시키는 ' 이해'의 유대를 정의할 뿐이다. 그러나 이 사회제도의 근원인 이해는 그 자체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엥겔스의 설명은 표면적인 데 그치고, 그가 발견한 진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물 사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진리를 더 이상 깊이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물사관에서 는 우리가 지적한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전인간과 관계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경제적 인간'에만 관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소유라는 관념도 실존자의 근원적인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 런 관념이 나타나려면 먼저 주체 속에 본질적인 특수성에 뿌리를 내리려는 경향이 있어야 하며, 도한 자기가 독립된 자유로운 존재라는 주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향은 개인 이 객관적으로 그것을 만족시키는 실제적인 수단이 없는 한, 주관적이고 내적인 진실성이 결여된 상태가 될 뿐이다. 인간은 충분한 도구가 없었을 때에는, 세계에 대한 자신들이 힘을 의식하지 못했다. 인 간은 자연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집단 속에서 피동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미지의 힘에 농락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씨족 전체에 동화되어 자기를 생각하 려고 했다. 토템이나 마나나 대지는 집단적인 현실이었다. 청동의 발견은 인간에게 격심한 생산적 노동의 시련 속에서 스스로 창조자임을 발견하도록 허용했다. 자연을 지배하게 되 면 자연은 두렵지 않다. 자연의 저항을 이긴 그는 자기를 자주적인 활동력이라고 생각하 여, 개개의 특이성 속에서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대담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완성을 근원적으로 원치 않았더라면, 이 완성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 을 것이다. 수동적인 주체에는 노동의 교훈도 성과를 남기지 않는다. 주체 자신이 도구를 만들고 대지를 정복함으로써 자기를 단련하고 정복한 것이다. 한편 주체의 확립만으로는 재산을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 도전, 전투, 특수한 투쟁 속 에서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도전이 포틀래치(북미 토인들의 물물교환 파티)의 형태, 즉 경제적 경쟁의 형태를 취하고, 먼저 족장이, 다음의 씨족 전원이 사유재산권을 요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 속에 또 하나의 근원적인 경향이 있어야만 했다. 앞장에서 실존자는 자기를 소외시켜야만 자기를 파악하게 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는 세계를 통하여 다른 양상 밑에서 자기를 구하고, 그것을 자기 모습으로 만든다. 토템이나 마나나 그가 소유한 토지는 씨족이 소외된 실존이다. 개인이 공동생활에서 떠나게 되면, 어떤 특수한 구현을 요구한다. 마나는 먼저 족장 속에서 개성화하고, 다음에는 개개인 속 에서 개성화한다. 동시에 개개인은 땅과 노동의 도구와 수확을 사유화하려고 한다. 그리하 여 자기가 얻은 부에서 인간이 다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이 그와 같은 부에 자기의 생명과 같은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인간과 그 재 산에 대한 '관심'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분명히 밝혀진다. 그러나 이 관계를 도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관계를 이해하려면 도구를 지닌 인간의 모든 태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 태도는 존재론적인 하부구조와도 관계를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도에서 곧 여성 압박을 추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엥겔스의 관점이 불충분한 것이 잇다. 그도 단지 그 청동이나 철제도구와의 관계에서 여성의 육체적인 취약성이 구체적인 열등감으로 나타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능력의 한계는 어떤 일정한 부분에서만 구체적인 불리함을 수반하지 않 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인간이 새로운 도구를 통하여 새로운 요구를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이 초월이고 야만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청동의 도구를 발견했을 때에는 채소밭을 가꾸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넓은 들을 개간하여 경작하려고 했다. 이런 의지는 청동 자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무능 력은, 남성이 부를 늘려 세력을 확장하는 계획에 따라 여자를 다루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다. 여기서 여성의 패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의 내용을 검토하는 것만으로는 여 성이 압박받은 것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성에 의한 노동의 구분도 어쩌면 양성이 우호적으로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만일 인간과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가 우호적이라면, 노예적인 유형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객관적으로 자기의 우월성을 완성시키려는 인간의 제국주의적인 결과이다. 그 속에 '타자'의 근원적인 범주와 '타자'를 지배하려는 근원적인 의지가 없었던 들, 청동도구의 발견이나 여성 압박은 없었을 것이다. 엥겔스는 또한 이 압박의 특수한 성 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양성의 대립을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도 별로 확신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에 의한 노동의 구분과 거기서 비롯되는 압박으로 어느 정도 계급적인 구분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계급의 구분 속에는 생물적인 기반이 전혀 없다. 노동에서 노예는 지배자에 대해 자기를 의식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언제 나 반항 속에 자기의 처지를 실감한다. 이리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 자기의 착취자를 위협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의 소실을 원한다. 나는 서론에서 여성이 남성과 연대책임을 갖게 하는 생활과 관심은 공통적이고 또 남성 이 여성을 협력자로 알기 때문에, 여성의 처지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언급했었다. 여자 에게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욕심은 없다. 여자는 성으로서 자기를 말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성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얼마간의 결과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을 단지 노동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산능력과 마찬가지로, 생식작용은 개인생활이나 사회, 경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 문이다. 쟁기를 다루는 것보다 아기를 낳는 쪽이 보다 유익한 시대도 있었다. 그런데 엥겔스는 이 문제를 외면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는 가족 제도를 소멸시 킬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해결책이다. 소련이 생산 과 생식의 직접적인 수요의 균형이 여러 모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가정에 대한 정책을 자주, 본질적으로 변경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의 말살이 곧 여성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나 나치 시대의 예는, 여성이 국가에 직접 결부되어 있어도 여전히 남성에게 압 박을 받고 있었던 것을 잘 입증해 준다. 진정한 사회주의적 윤리관은 자유를 해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며 개인에게 책임을 지게하지만 개성을 해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여자의 신분에서 생기는 문제로 말미암아 대단히 복잡하다. 임신을 노동이나 군대와 같은 봉사와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자에게 아기를 낳도록 강요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할 일을 법률로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여성의 사생활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나라도 여 성에게 강제로 성교를 시키지 않았다. 여성은 성교나 모성 속에 시간과 힘뿐만 아니라, 본 질적인 가치도 바친다. 합리론적 유물주의가 이 성의 극적인 성격을 무시하려고 해도 소용 없다. 성본능은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성본능이 그 속에 만족감을 거부하는 힘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프로이 트도 말했다. 확실한 것은, 색정 속에는 시간에 대한 순간적 반항과 우주에 대한 개인의 반항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와 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이용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해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연 발생적인 것을 무기물처 럼 다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강요하듯이, 그 이상으로 성적 본능을 강요할 수는 없다. 여성에게 아기를 낳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능한 일이라면, 어머니가 되 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가 되는 상황으로 여성을 몰아넣는 것이다. 법과 풍습이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피임과 낙태와 그리고 이혼을 금지한다. 소련이 오늘날 부활시킨 것은 이런 족장제도의 낡은 속박이었다. 결혼의 가부장주의적인 이론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에게 다시 성적 객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결과가 되었다. 최근의 어떤 담화는 소련 여성들에게 화장을 하고 분을 바르고, 남편의 욕정을 자극하기 위해 요염해지기를 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예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성을 단지 생산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배우자이고, 생식하는 자이며, 성적 객체이고, '타자'이다. 남성은 이 타자를 통하여 자기를 구한다. 전체주의나 독재정치가 아무리 만장일치로 정신 분석학을 금지시켜도 소용없다. 그리고 국가에 충실한 시민들에게 개인적인 드라마가 개입 할 여지가 없다고 선언해도 소용없다. 색정은 그 일반성이 각 개인에게 파악되어 있는 하 나의 경험이다. 그리고 계급은 없어졌지만 개인은 존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에서는, 개인 의 운명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시될 것이다. 즉 성적 구분은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여성을 남성에게 결합시키는 성적 관계는 남성이 여성과 함께 지지하고 있는 관계와 동일 한 것이 아니다. 여성을 아기에게 결합시키는 유대는 다른 어떤 유대와도 비교할 수 없다. 여성은 청동의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계도 여성을 말살할 수 없다. 여성을 위해 모든 권리, 보통인간이 되는 모든 기회를 요구하는 것은, 그녀의 특이한 상황에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여성을 알려면, 남성과 여성 속에서 경제적인 단위밖에 보이지 않는 유물사관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같은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성적 일원론 및 엥겔스의 경제적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는 여성이 모든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남성적 반 항'의 현상으로 해석한다. 이와는 달리 유물론자는, 성은 다소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쳐서 경제적인 조건을 나타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핵과 질 의 범주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 리아의 범주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여성을 가둬두기에는 무력하다. 인간의 경제사처럼 개인의 드라마를 기초로 하여, 인생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실존적 하부구조가 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학성의 가치는 실존자가 육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실존자가 육체로서 다른 육체와 만나 자기를 느끼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그 실존상황을 나타내는 것 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적인 이론에서 옳은 것은, 실존자의 존재론적 의향은 실존자에 게 제공되는 물질적인 가능성에 따라서, 특히 기술이 그의 개방하는 가능성에 따라서 구체 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향을 전적인 인간적인 현실과 일치시키지 않으 면, 성이나 기술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있 어서 초자아에 의해 일어난 억제와 자아의 충동은 우발적인 사실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가족의 역사에 대한 엥겔스의 이론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항도 갑자기 신기한 우연에서 비 롯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우리는 여성을 발견하기 위해 생물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유물사관이 세운 여러 가지 공헌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 성생활, 기술 등은 인간 존재의 총체적인 전망 속 에서 파악되었을 때에만 구체적으로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력, 남근, 도구 등의 가치는, 단지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 원시키는 기본적인 투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1 이 세계는 언제나 남성이 소유해 왔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느 하나 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선사학과 민속학의 성과를 실존주의 철학 의 빛으로 재조명해야만 비로소 남녀 양성의 계급이 이루어진 내막을 이행할 수 있을 것 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 서로 만날 때에는 피차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 다. 만일 쌍방이 이 요구를 관철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양자 사이에 대립의 형태 를 취하든 우정의 형태를 취하든, 긴장상태 속에서 대등한 관계가 형성된다. 만일 어느 한 쪽이 특권을 누릴 경우에는 다른 쪽을 이겨 계속해서 압박하려고 한다. 이것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 이유도 납득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성은 어떤 특권 때문에 이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을까? 인간사회의 원시형태에 대해 민속학자가 제공하는 자료는 크게 모순되어 있다. 그 자료 는 풍부하지만 체계가 서 있지 않아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농경기 이전의 여성의 생활상태를 상상하기는 더욱 어렵다. 오늘과는 전혀 다른 생활상태 속에서 여성의 근육구 조나 호흡기가 남성과 같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는지 그 여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여성도 어려운 노동을 했으며, 그중에서도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런 일을 여성이 말게 된 것은, 짐을 운반할 때 남성은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인간이나 동물의 공격을 막기 위해 빈 손으로 있어야 할 필 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의 역할이 위험하고 더욱 많은 체력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체 로 여성도 전사로서 원정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건장했던 것 같다. 헤로도토스(고대 그리 스의 역사가, BC 480?~425?)의 이야기나 또 다호메이 지방의 아마존 여자에 관한 전설 을 비롯하여 고금의 많은 문헌에 의하면, 여성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이나 복수에 참가한 경 우도 있다. 그때 여성은 남성 못지않는 용기와 잔인성을 발휘했다. 적의 간을 이로 깨문 여성의 사례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쨌든,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 육체적인 특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곤봉으로 맹수와 싸운 시기, 즉 자연의 저항이 강하고 도구가 몹시 유치했던 시대에는 이 육체적인 우월성은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여성 이 아무리 강건했다고 하더라도, 적의에 찬 세계와 싸울 때 출산의 굴욕은 그녀들에게 큰 장해였다. 아마존 여성들은 자기의 유방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것은 그녀들이 적어도 전사 로서의 생활기간 중에는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여성의 경우에는 임신, 출산, 월경이 노동능력을 감소시키고 오랫동안 무능한 상태 에 있을 것을 강요했다. 외적을 막고 자기를 비롯하여 자손의 생활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에게는 병사의 보호가 필요했고, 남성들이 사냥이나 어로에서 얻은 먹이가 필요했 다. 물론 산아제한 같은 것도 없고, 또 자연은 여성에게 다른 포유동물처럼 불임기간을 보 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출산으로 그녀들의 체력과 시간을 대부분 충당해야 했 을 것이다. 그년들은 자기가 낳은 아기의 생명을 보장할 능력도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 요한 사실이며, 여기서 여러 가지 결과가 생기게 되었다. 아무튼 인류의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농경과 사냥, 어로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엄청난 노력의 대가로 땅에서 약간의 자원밖에 얻지 못했다. 그 자원에 비해 태어나는 아기의 수 는 너무 많았다. 이런 불합리한 다산은 여성이 자원의 증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한편, 새로운 수요를 한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종족의 존속을 위 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지나친 다산으로 종족을 존속시켜나갔다. 생산과 출산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은 남성이었다. 그래서 여성은 창조자인 남성과 대결 하는 데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는 특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는 정자에 대한 난자의 역 할과, 페니스에 대한 자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한몫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이 구체적으로 결실 을 보게 되는 것은 남성의 덕분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아 살해, 희생, 전쟁 등에 의해 생산과 출산의 균형은 어느 정도 유 지되어, 집단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는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필요했다. 식량이 풍부했던 시대에는 보호자 겸 양육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어머니인 여성에게 예속시킨 적 이 있다고도 생각된다. 동물의 암컷 중에는 어미가 됨으로써 자주성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인간인 여성이 자주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손 의 필요가 개발해야 할 원료의 필요보다 더욱 절실해서 인류가 가장 출산을 요구했던 시 기에도, 그리고 모성이 가장 존중되었던 시대에도,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제1위를 확 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인류는 단지 자연적인 종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은 종으로서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정체가 아니다.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원시적인 유목민은 자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여 별로 소유한 것이 없고, 또 어떤 고정된 것에 자기를 구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종족의 영 속에 대해 전혀 구체적인 생각을 갖지 못했다. 자기를 후세에까지 남기려고 하지 않았으 며, 자손 속에 자기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속자 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식은 그들에게 부담이 될지언정 재산은 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유 목민 사이에서도 영아 살해가 언제나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살해되지 않은 갓난아기도 냉 담한 무관심 속에 위생이 부실하여 죽어갔다. 그러므로 아기를 낳는 여성도 창조의 자부심 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노리개인 듯이 느껴졌으며, 고통스러운 출산은 무용한 일인 동시에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린아이의 가치를 좀더 인정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임신하거나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활동은 되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기능일 뿐이었다. 어떠한 계획도 거기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여 성이 거기에서 자기의 실존을 강하게 주장할 만한 동기를 찾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생리적인 숙명에 수동적으로 지배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임무와 양립될 수 있는 일은 가사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강요하고 그녀를 반복과 내재 속에 가둬두었다. 이런 일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거의 아무 변화도 없이 계속되고 날마다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은 하나도 생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일벌처럼 단지 생명의 충동에 의해 집단 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물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행위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호모 파베르는 태초부터 한 사람의 발명가이며, 과일을 두들겨 떨어뜨리거나 짐승을 때려 잡기 위해 손에 든 몽둥이나 곤봉은, 벌써 그가 세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는 도구이다. 그는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집으로 운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먼저 통나무배를 타고 파도치는 물의 영역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세계에 병합한다. 이런 행위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힘 을 입증한다. 그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일을 계획한다. 그는 실존자로서 자기 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 자기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는 창조한다. 그는 현재에서 뛰쳐 나와 미래를 열어나간다. 어로와 사냥의 원정이 신성한 성격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의 성공은 출세나 개선으로 받아들인다. 남성은 거기서 자기의 인간성을 확인한다. 오늘날 에도 댐이나 마천루를 건설할 때 그는 이런 자존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주어진 세계를 유 지하기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그의 활동은 이제 하나의 차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큰 존엄성을 제공한다. 거 기에는 종종 위험이 뒤따른다. 피가 단지 하나의 식료품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유 이상 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도살자는 아니다. 그는 맹수와 싸우면서 위험을 무릅쓴다. 전사는 집단이나 자기가 속해 있는 씨족의 위광을 빛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생명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가 아니며, 생명은 그 자신보다 더욱 중요한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게 된다. 여성에게 던져진 가장 고약한 저주는 그녀가 이런 빛나는 역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 위에 서는 것 은 아기를 낳음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킴으로써이다. 인간에게 있어 낳는 성에 우위가 주어지지 않고, 죽이는 성에 그것이 주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비밀을 푸는 열쇠를 쥐게 된다. 생물학에서는 종이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새로 자기를 창조함으로써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창조는, 단지 다른 행태로 같은 생 명이 되풀이되는 데 불과하다. 남성은 '실존'에 의해 '생명'을 초월함으로써 '생명'이 되풀 이된다. 이 초월에 의해 그는 단순한 되풀이에서의 모든 가치를 빼앗는 가치를 창조하게 된다. 동물의 경우는, 목적이 없이 멋대로 행하는 수컷의 행동은 아무 계획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무가치하다. 종에 기여하지 못할 때, 그의 행동은 무익하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종에게 봉사하면서 남성 세계의 외면을 개조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발명하여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그는 지배자로서 여성의 속에서 공모자를 찾아낸다. 왜냐하면 여성도 같은 실존자이며, 초월을 내포하고, 그 목표는 반복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존재 속에서 남성의 주장을 확인하고 발견한다. 남성의 성공이나 승리를 축하하는 제전의 형태로 그녀는 자기를 남성과 결부시킨다. 그녀의 불행은 바로 이 러한 것에서 비롯된다. 즉 자기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반복하는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 그녀의 눈에 '생명'은 그 자체에 존재이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존재이유 쪽이 생명 자체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변증법의 어느 일면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 쪽에 더욱 잘 들어맞는다. 헤겔에 의하면, 주인의 특권은 그가 자기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 놓음으로써 '생명' 보다는 '정신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정복된 노예도 같은 위험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여성은 근원적으로 '생 명'을 주어도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지 않는 실존자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투 쟁은 없었다. 헤겔의 정의는 특히 여자에게 잘 들어맞는다. "지금 한쪽 의식은 의존한 의식이지, 그 의식에게 본질적인 현실은 동물적인 생명, 즉 다른 실체에 의해 주어지는 존재이다." 그러 나 이 관계와 압박의 관계가 다른 점은, 여성도 남성이 구체적으로 얻게 되는 가치를 목표 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열어나가는 미래를 향해, 그녀도 자기를 초월한다. 실제로 여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남성의 가치에 여성의 가치를 대결시킨 적이 없다. 남성의 특권 을 끝까지 유지하기를 원하는 남성들이 이런 구별을 생각해 냈을 뿐이다. 남성들은 여성에 게 고유한 영역 - 생명과 내재의 영역 - 을 만들어 내어, 거기에 여성을 가둬놓으려고 했 다. 그러나 실존자는 모든 성적 구변을 넘어서서 초월의 운동 속에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여성의 복종 자체가 역시 그 증거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오늘날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남성과 동등하게 실존자로 인정받는 것이지, 실존을 생명에 복종시키고, 인간을 그 동물성 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적인 견해는 이처럼 원시 유목민의 생물학적 경제적 상황이 남성의 우위를 가 져올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밝혀주고 있다. 여성은 남성 이상으로 종의 희생물이 된다. 인 류는 끊임없이 그 종으로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 왔다. 도구의 발명으로 생 명을 유지하는 행위는 남성에게는 활동이며 계획이 되었다. 그런데 여성은 출산으로 말미 암아 동물로서 자기의 육체에 얽매인 채 헤어나지 못했다. 남성이 여성의 지배자가 된 이 유는,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의문을 품고 생명보다 삶의 이유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간 의 계획은 시간 속에서 자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지배하고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치를 창출하여 실존 자체를 가치로 만들어간 것은 남 성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생명의 혼돈된 힘을 이겨내고 '자연'과 '여성'을 굴복시켰다. 이제부터 이런 상황이 어떻게 지속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해 갔는가를 알아보려고 한 다. 자기의 내부에서 타자로서 자기를 정의한 이 인간의 일부분에 인류는 어떤 위치를 부 여했는가? 이에 대해 어떤 권리를 인정했는가? 그것을 남성들은 어떻게 정의했는가? 2 위에서 우리는 원시 유목민 속에서 여성의 삶이 대단히 고통스러웠던 것을 보았다. 동물 의 암놈은 출산작용이 자연에 의해 제한되어 출산한 그 개체는 다른 노역에서 거의 완전 히 벗어나 있다. 그런데 가정의 여성만이 때때로 아기를 낳는 도구로서, 또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자로서 요구가 많은 남편에게 지치도록 혹사된다. 적의 집단과 싸우기 위해 공동체 가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던 시대의 여성의 처지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규칙한 출산의 피로에 고된 가사의 피로가 겹쳐졌다. 그런데 일부 역사가는 남성의 우위가 가장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즉 그 우위는 직접적으로 유지되고, 아직 이론으로 강조할 시기는 아니었다고 말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장해가 되고 있는 불리 한 점을 보상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후에 가부장제도하에서처럼 여성을 구박하려고도 하 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 양성의 불평등을 분명히 인정하는 사회제도는 아직 없었다. 도 대체 제도라는 것 자체가 전혀 없었다. 재산도 없으니 상속인도 없고 법률도 없었다. 종교 도 중립적이어서 성별이 없는 토템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제도나 법률이 생긴 것은 유목민이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인간 은 이제 적대세력과 심하게 싸울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세계에서 취하는 태도를 통하여 자 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그 세계와 자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에 와서야 성적 구별은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독특한 성격을 갖기 시작한다. 농업 공동체에서는 여성이 큰 권위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 권위는 토지의 경작에 기반 을 두는 문명 속에서, 어린아이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중요성을 지니게 된 데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한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그 토지의 전유화가 이루어진다. 집단형태 속 에 재산이 형성된다. 그리고 재산은 그 소유자에게 자손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성은 하나 의 신성한 기능이 된다. 많은 종족들은 공동사회 체제에서 살아갔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 공동사회의 모든 남성 의 소유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잡혼에서 결혼제도가 생겼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남녀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집단으로만 존재했다. 즉 그들의 개별성은 순전히 생물적 사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도 일부일부제이 든, 일부다처제이든, 또는 일처다부제이든, 그 형태는 어떠했던 간에 전혀 신비적인 연결을 갖지 못한 일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내에게 전혀 굴종의 근원이 되지 않았으며, 그녀는 그 씨족 중에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같은 토템을 숭배하는 씨족 전체는 신비하게도 같은 하나의 '마나'를 갖고, 물질적으로는 같은 하나의 토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소외의 과정대로, 종족은 이 토지 속에서 하나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파 악한다. 토지의 영속성에 의해 종족은 시종일관하여 하나의 통일체로서 자기를 실현한다. 이와 같은 실존적인 해석에 의해서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족, 인간, 가족과 그리고 상 속권 사이에 존속해 온 동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목민족의 개념 대신에, 농경공동체는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병합하는 생명의 개념으로 바뀐 다. 씨족 전원에게 그 이름을 주고 있는 토템적인 조상을 숭배하고, 씨족은 그 자손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씨족은 자손에게 대를 물려주고, 자손이 개간하는 토지를 통하여 존속하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서 자기의 통일을 내다보고 자기의 실 존을 원한다. 자식에게서 자기를 찾아 자식들을 자기것으로 하고, 자식들 속에 자기를 완 성하고 자기를 초월한다. 그러나 많은 원시민족들은 자식의 출산에서 아버지가 연출하는 역할을 알지 못했다. 그 들은 단지 아이는 어떤 특정한 나무와 바위의 주위나 신성한 장소에서 떠돌아다니는 조상 의 영혼이 여자의 체내에 들어가 화신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민족은 이 체내 의 침입이 가능하려면 여자가 처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밖의 민족들은 그 침입 이 콧구멍이나 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여기서는 처녀의 상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 신비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은 남편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 다. 어머니는 확실히 아기의 출생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자기 체내에 정자를 보유하고 육성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씨족의 생명은 그녀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기는 대개 어머니의 씨족에 속하여 그 이름을 따게 되고, 그 권리를 행사하며, 특히 그 씨족이 소유한 토지를 자기 것으로 한 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재산은 여성에 의해 전해지게 된다. 토지나 농작물은 여성의 손에 의해 씨족의 각자에게 배분된다. 다시 말해서 각자는 그 어머니에 의해 토지와 연결된다. 그래서 신비적인 대지는 여성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여성은 밭과 그 수확에 대해 종교적, 법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다. 토지와 여성을 연결하는 유대는 단지 소속 이상으로 긴밀하다. 모권제도의 특징은 여성의 토지를 동화시키는 데 있다. 양쪽이 모두 그 여러 가 지 변신을 통하여 생명의 영속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생명은 본질적으로 생산이다. 유목민 사이에서는 출산은 거의 우연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토지의 자원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농부는 밭이랑이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개화되는 번식의 신비에 감탄한다. 그는 자기가 가축이나 농작물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으며, 자기의 종족이 다른 인간을 낳고, 그 인간이 밭의 번식을 영속시켜 종족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를 원한다. 그 에게는 자연 전체가 어머니처럼 생각된다. 대지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대지와 마찬가지로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다. 농사짓는 일을 여성에 게 맡긴 이유의 일부는 여기 있었다. 자기 체내에서 조상의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씨를 뿌리는 밭에서 과실이나 이삭이 나게 하는 힘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경우도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법적인 주술의 문제였다. 이 시기에는 인간은 이미 토지의 산물을 주워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지만, 아직 자기의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술과 마법의 중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자기는 수동적이고, 존재 와 죽음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성행위나 토 지를 경작하는 기술의 효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아이나 수확물을 여전히 초자연 의 선물로 생각했으며, 여성의 체내에서 나오는 어떤 신비로운 발산물이 생명의 원천에 묻 혀 있는 자원을 세상에 끌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오늘날에도 인도인이 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인이나 폴리네시아인들 사이에 남아 있으며, 사회의 실제적인 이해 관계와 일치하여 점점 중요성을 띠고 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임무 때문에 가정에 갇혀 살게 된다. 그리하여 남성이 사냥과 어로 와 전쟁을 하는 동안에 여성은 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원시민족의 경 우에는 마을에 제한된 얼마 되지 않는 채소밭 정도를 경작할 뿐이다. 그 일도 가사의 일부 이다. 석기시대의 도구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는다. 경제와 신비가 여성에게 농 사일을 맡기는 데 일치한 셈이다. 차츰 생겨난 가내공업도 여성이 하는 일이었다. 그녀들 은 까는 요와 덮는 이불을 짜고, 도자기를 구웠다. 그리고 상품교환도하여, 장사는 그녀들 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즉 그녀들에 의해 민족의 생명이 유지되고 번식되었다. 아기, 가 축, 농작물, 도구, 그녀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의 번영 일체는 그녀들의 노동과 마술적인 힘에 달려 있었다. 이런 위력은 남성들에게 두려움이 섞인 존경심을 갖게 했으며, 이것은 그들의 제사의식에도 반영되었다. 외부의 자연 전체가 여성 속에 요약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기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타자'를 생각한다. 그는 세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한다. 이 이원성은 처음에는 성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를 동일한 자로 생각하는 남성과 자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여성은 '타자'의 범주에 분류된다. 그리하여 '타자'는 여성을 포함하게 된다. 여성은 처음에는 타자를 혼자서 대표 할 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타자'를 다시 세분할 수 있다. 예컨대 낡은 천지 창조설에서는 흔히 같은 하나의 원소가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두 화신을 갖고 있다. 바빌로니아인들 사이에서는 태양(남성)과 바다(여성)는 우주의 혼돈을 나타내는 이중의 화신이다. 여성의 역할이 높아지면, 그녀는 '타자'의 역할을 거의 모두 병합해 버린다. 그 때에는 풍요의 관념을 숭상하는 데 사용되는 여성의 신이 나타나게 된다. 쉬스에서 발견된 '대여신'의 가장 오래된 초상인 '대모신'은 긴 겉옷을 걸치고 머리를 높이 땋아올리고 있 다. 다른 초상에서는 머리에 탑을 얹고 있다. 크레타섬의 발굴품 속에서도 이런 초상이 몇 개 나왔다. 이 여신은 살찐 엉덩이를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경우도 있고, 비교적 날씬한 몸 매로 서 있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옷을 입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나체로 부풀어 오른 젖가슴 밑에 두 팔을 끼고 있다. 그녀는 천국의 여왕이며, 비둘기가 그 상징이다. 그녀는 또한 지옥의 여왕이며, 그 지옥 에서 기어오르는 뱀이 그 상징이다. 그녀는 산이나 바다, 샘에도 나타난다. 그녀는 곳곳에 서 생명을 창조한다. 설사 죽이더라도 부활시킨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변덕스럽고, 음탕하 고, 잔인하다. 인정이 많은 동시에 가혹하기도 하다. 이 여신은 에게해 군도를 비롯하여 프 리지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등 서아시아 전체에 군림하고 있다. 그녀는 바빌로니아에서는 이슈타르, 셈족 사이에서는 아스타르테, 그리고 그리스인 사이에서는 가이아, 레아, 키벨레 등으로 불린다. 이집트에서도 이시스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남성인 신들은 이 여신에게 굴 복당한다. 천국과 지옥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최고의 신인 여성은, 이 땅에서도 모든 신성한 존재처럼 터부에 의해 에워싸이고, 그녀 자신이 터부가된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위력 때문에 그녀는 마법사나 요술사로 간주된다. 그녀는 기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 여승처럼 승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부족의 정치에 참여하여 단독으로 다스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먼 옛날의 일들은 하나도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부장주의 시대에는 신 화나 유적이나 전설에 여성이 대단히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시대의 추억을 남기고 있다.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 시대는 리그 베다의 시대에 비해 퇴보했고, 리그 베다 시대 는 그 이전의 원시시대보다 퇴보하고 있다. 이슬람 시대 이전의 베두인족들 사이에서는 코 란이 여성에 대해 규정한 법규보다 더욱 우수한 법규가 시행되고 있었다. 니오베나 메데이 아의 위대한 모습은, 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자기만의 소유물로 삼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그리스의 시인. 2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의 저자, BC 800년경)의 시에는, 안드로마케와 헤카베가 고전 그리스 시대의 규방 속으로 숨어버린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원시시대에 참으로 여성 천하가 있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바하 오펜이 제시한 가정을 엥겔스가 다시 거론했다. 그는 모권 제도에서 가부장제도에의 이행 을 '여성의 역사적인 대패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여성 황금시대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여성이 '타자'였다는 것은 양성 사이에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토지든, 어머니든, 어린이든,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동류가 아니었 다. 여성의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던 것은 인간 영역의 피안에서 이고, 그래서 여성은 이 영토 밖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으며, 정치권력도 언제나 남성의 손아귀에 있었다. "공적인 혹은 단순한 사회적인 권위는 언제나 남성들의 것이다."라고 레 비스트로스는 원시 사회에 관한 연구의 결론을 맺고 있다. 대등한 관계에 선 동류나 그와 동일한 형태를 취한 타자는, 남성에게 있어 언제나 남성 적 개체이다. 집단 내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이는 이원성은 남성의 한 집단과 남성의 다른 한 집단의 대립이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일부이며, 남성과 남성 사이의 하나의 교환 도구이다. 과오는 상대의 성을 엄격히 배제한 타성의 두 모습을 혼동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여성을 절대적인 '타자'로서, 즉 - 그 마력은 여하튼 간에 - 본 질적인 것을 보는 한에서는 여성을 또 하나의 주체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 성은 남성의 집단에 대항하여, 자기를 자기로서 내세우는 다른 집단을 만든 일이 일찌기 없었다. 즉 여성들은 남성과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결혼이 기반이 되어야 할 대등한 관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고, 남성과 남성 사이에 여성을 수단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여성은 그 관계의 주요한 계기가 될 뿐이 다."하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 지음 <혈족의 기본구조> 참조) 여 성의 구체적인 상황은 그녀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상속제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제도가 부계이든 모계이든, 또는 무차별, 즉 양계이든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보 호와 감독하에 놓여 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결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아버지 도 는 큰 오빠의 권위 - 이 권위는 그녀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친다 - 에 복종하고 있는가, 아 니면 남편의 권위로 옮겨가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이다. 어쨌거나 "여자는 단지 그 혈통의 상징에 불과하다... 모계 상속제도란 그녀의 아버지나 오빠의 손길이 형제의 마을에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지음 <혈족의 기본구 조> 참조) 여자는 권리의 매개자에 불과하며, 그 보유자는 아니다. 사실은 상속제도에 의 해 정해진 것은 남자의 두 집단 사이의 관계이지, 두 성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여자의 구체적인 상황은 권리의 형태와 굳게 결부되어 있지 않다. 모계제도하에서는 여성이 대단히 높은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족 위에 한 여성 족장이나 여왕이 있다고 해서 여성이 지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의 즉위도 러시아 여성들의 지위를 조금도 개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성 이 굴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내가 자기 친정에 머물 러 있고, 남편이 남의 눈을 피해 슬쩍 잠시 다녀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여성쪽이 남편의 지붕 밑으로 가서 산다. 이 사실만으로도 남성의 우위는 분명하다. 이에 대해 레비 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속양식의 여러 가지 변동의 배후에 가장의 주거의 불변은, 인간사회의 특징인 양성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입증하고 있다." 여성은 아기를 자기 옆에 놓아둔다. 그래서 종족이 차지한 영토의 형태와 그 토템적인 조직은 부합되지 않는 다. 후자는 확고히 기초가 잡혀 있지만, 전자는 일시적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요한 것은 전 자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며 살아가는 장소가 그들의 신비적인 소유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과도기에 가장 일반적인 사회제도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권리가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권리이고, 또 하나는 토지의 소유와 경작에 토대를 둔 권리이다. 이 두 권리가 뒤얽혀 있다. 결혼은 단지 세상의 제도에 지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며, 부부의 가족은 종교적인 의미는 갖고 있지 않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긴밀하게 존재한다. 성에 대해 대단히 자유로운 집단까지도 아기를 낳는 여성은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여성은 자기 아이와 단둘이 자주적인 집단을 이룰 수는 없다. 그리고 형제의 종교적인 보호만으로 는 부족하다. 그래서 남편의 존재가 요구된다. 남편은 때때로 자녀에 대해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자녀는 남편의 씨족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자녀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이다. 남편 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동거와 노동과 공동의 이해관계와 애정의 유대가 생기게 된다. 이 세속적인 가족과 토템적인 씨족 사이의 관계는 여러 가지 결혼의식에 나타나 있 는 것처럼 대단히 복잡하다. 본래는 남편이 다른 씨족에게서 아내를 사거나, 아니면 씨족 과 씨족 사이에 선물 교환이 이루어져 한쪽이 가족의 한 사람을 양도하면 다른쪽이 가축 이나 과일, 노동력을 양도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와 아내가 낳은 아이들을 맡는다고 해 서 아내의 형제들로부터 사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신비적인 현실과 경제적인 현실은 균형이 깨지기 쉽다. 남자는 자기 조카들보다 자기 자 식들에게 훨씬 더 애정을 갖게 마련이다. 이때 그는 아버지로서 자기를 내세우게 된다. 사 회가 발전함에 따라 남성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모 든 사회가 가부장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이 '생명' 이나 '자연'이나 '여성'의 신비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던 시대에도, 남성은 결 코 자기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이 간직하고 있는 위험한 마력이 두려 워, 남성이 여성을 본질적인 존재로 인정할 때에도 그런 위치를 마련해 주는 것은 남성이 다. 그리하여 남성은 자기가 인정하는 이 소외 속에 자기를 본질로 실현하는 것이다. 번식 력은 여성의 몸에 있는 데도 남성은 비옥한 땅의 주인인 것처럼 역시 여성의 주인이다. 여 성에게 그 마법적인 풍요의 화신인 자연도 또한 그런 것처럼 여성은 정복되고 착취되는 운명에 있다.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갖고 있는 위광은 남성에게서 받은 것이다. 남성들은 '타 자' 앞에 무릎을 꿇고 '모성신'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 여신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여도, 그 녀는 남성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남성이 만든 우상은 모두 아무리 사나운 형상으로 만들어져도, 실제로는 남성에게 종속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성은 그것을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이 종속이 아직 인지되지 않았고, 따라서 확립되어 있지 않으나,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남성이 자기를 더욱 분명히 의식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대립시키면, 이 종속 은 곧 수단화된다. 사실 남성이 자기를 비바람에 부대끼는 이전의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 고 있을 때에도 역시 그는 초월과 투기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 벌써 그의 속에서 정신 과 의지가 생명의 혼란과 우연성에 대해 자기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 속에 여러 가지 화신으로 머물러 있는 토템적인 조상은 대개 남성인 것을 알 수 있는 동물이나 나무의 이름을 갖고 있다. 여자는 그 조상의 육체적인 생명을 영속시키기 만, 그 역할은 단지 양육자에 그칠 뿐 창조자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도 여자는 창조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린애와 빵을 제공함으로써 종족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친다. 여자는 언제나 내재에 몸을 바치고 있다. 그녀는 사회에 대해 다만 폐쇄적이고 정지적인 면을 나 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남자는 자연과 인간집단 전체를 향해 이 사회를 열어나가는 기능을 계속해 서 독점하고 있다. 그에게 어울리는 일은 전쟁, 사냥, 고기잡이이다. 외계의 먹이를 정복하 고, 그것을 종족에 병합시킨다. 전쟁, 사냥, 고기잡이는 생명의 확장과 세계를 향한 초월을 나타내고 있다. 남성은 여전히 초월의 유일한 화신이다. 그는 아직 어머니인 대지를 완전히 지배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아직 대지에 대항하여 궐기할 용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지에서 떨어져나가기 를 바라고 있다. 이 의지 속에서 모권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다른 종족과의 결혼의 동 기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사 남성이 자기가 생식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더라도 결혼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결혼에 의해 그는 성인으 로 인정받고, 세계의 일부를 분배받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씨족이나 조상, 그리고 그 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이나 결혼과 같은 모든 세속 적인 영위 속에서, 그는 그 유대에서 벗어나 내재에 대해 초월을 확립하여, 자기를 위해 자기의 뿌리가 박혀 있는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열고자 한다. 각기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속의 양상에 따라 근친상간의 금지는 여러 가지 형태 로 나타나지만, 원시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남자 는 자기가 아닌 것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타자로 생각되는 것과 결합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마나'에 참여해서는 안 되며, 남편에게 외부인 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녀의 씨족에게도 외부인이어야 한다. 원시결혼은 때때로 실제적, 형 식적인 약탈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상대방 의 타성을 더욱 분명히 입증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폭력으로 정복하므로써, 그는 외부의 부를 병합하여 출생에 의해 주어진 숙명의 한계를 깨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여러 가지 형태의 매매 - 선물이나 봉사의 제공 - 별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남성은 조금씩 경험을 수단으로 하여 실제생활이나 그 상징에서도 남성적인 원리가 승 리를 얻게 되었다. '정신'이 '생명'을 이기고, 초월이 내재를, 기술이 마술을, 이성이 미신을 이겼다. 여성의 가치저하는 인류역사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 면, 여성이 지닌 권위의 원천이 되고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가치가 아니라 남성의 취약성 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속에 자연적인 불안한 신비가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성은 자연에서 해방되었을 때, 여성의 세력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남성이 그 노동에 의해 토지를 정복하고 자기 자신도 정복할 수 있게 된 것은 석기시대 에서 청동기시대로 옮아갈 무렵이었다. 농부는 토지나 씨앗의 발아상태나 계절의 우연성에 지배되어 수동적으로 하늘에 빌며 그 결과를 기다린다. 토템의 정령이 인간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농부는 자기를 에워싼 자연의 변덕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 인은 이와 반대로 자기의 의도대로 도구를 만든다. 그는 자기 손으로 그 도구에 자기의 투 기된 모습을 반영한다. 그에게 대적하지만 굴복되는 무기력한 자연에 대해 그는 지배적인 의지로 자기를 주장한다. 그가 모루를 두들기는 속도를 빨리하면, 도구의 완성을 앞당기게 된다. 한편 아무 것도 벼가 익는 것을 앞당길 수는 없다. 이리하여 그는 완성된 사물에서 자기 책임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의 솜씨가 익숙하고 익숙하지 못한 데 따라 사물을 잘 만들 수도 있고 못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만족하게 완성할 수 있도록 신 중하고 유능하게 사물을 제작한다. 그의 성공은 신들의 도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 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는 동료와 경쟁하여 이기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아직 제 사의 의식을 어느 정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기술 쪽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신비적인 가치는 후퇴하고, 실리를 앞세우게 된다. 그는 신들에게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들로부터 떠나 신들을 자기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신들을 올림포스의 하늘 위로 추방하고, 지상의 영토를 자기 것 으로 만든다. 망치의 최초의 일격이 울려 퍼질 때 위대한 목축의 신은 퇴색하고, 인간의 치세가 열린다. 인간은 자기 힘을 알고 있다. 자기의 창조적인 팔과 만들어진 대상의 관계 속에서 그는 인과관계를 체험한다. 땅에 뿌린 씨앗은 싹트는 경우도 있고 싹트지 않는 경 우도 있으나, 금속은 불이나 물에 담가도 기계의 작용에서 언제나 똑같이 반응하기 때문이 다. 이 도구의 세계는 분명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여기서 합리적인 이념이나 논리 나 수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여성숭배는 농경시대에 불가항력적인 지속이나 우발성, 우연성, 기대 및 신비의 치세와 결부되어 있었다. '만드는 사람'(Homo faber)의 종교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정복할 수 있 는 시간의 치세이며, 필연성과 투기(자유로운 계획)와 행동과 이성의 치세이다. 대지와 대 결할 때도 인간은 앞으로는 노동자로서 대결하게 될 것이다. 그는 토지를 비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토지를 휴식시키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며, 어떤 씨앗을 어떻게 뿌 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즉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운하를 파고 땅에 물을 대고 물을 뺀다. 길을 닦고 사원을 짓는다. 그는 새로 세계를 창조한다. 어머니인 여신의 지배하에 남아 있는 민족이나, 모계상속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도 원시문명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여성이 숭배를 받게 되는 것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공 포의 노예, 즉 자기의 무능을 공모자로 삼고 있는 동안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 성이 여성을 숭배한 것은 두려움이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남성은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먼저 여성을 왕좌에서 추방해야만 했다. 이윽고 그는 창조력, 광명, 지성, 질서 등의 남성 적인 원리를 지배자로 인정하게 된다. 어머니인 여신 곁에, 아들이나 혹은 애인인 한 남신 이 나타난다. 그 남신은 아직 여성보다 못하지만, 한 켤레의 신발처럼 닮았다. 이 남신도 번식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이것이 황소이며 미노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머 리에 사람의 몸집을 지닌 괴물)이며, 이집트의 평야를 기름지게 하는 나일강이다. 그는 가을에 죽지만 봄에 소생한다. 비탄에 잠긴 불사신인 어머니, 곧 아내가 그 시체를 찾아내어 전력을 다하여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크레타섬에 나타나는 한 쌍의 남녀 신은 지 중해 연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는 '이시스'와 '호루스'이고 페니키아에서 는 '아스타르테'와 '아도니스'이며, 소아시아에서는 '키벨레'와 '아티스'이고, 고대 그리스에 서는 '레아'와 '제우스'이다. 이윽고 대모신은 실추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예외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여전히 높기 때문에, 하늘의 화신인 '누트'나 비옥한 땅의 화신이며 나일강의 아내 인 '이시스'는 여전히 중요한 여신들이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왕은 태양과 빛과 남성적인 정력의 신 '라'이다. 바빌로니아에서 '이슈타르'는 이미 미남신인 마르두크의 아내에 지나 지 않는다. 천지를 창조하고 그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이 신이다. 셈족(유태 민족)의 신도 남신이다. 제우스가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가이아'와 '레아'와 '키벨레'는 자리에서 물 러나야만 했다. '데메테르'(곡식을 풍요롭게 하는 그리스의 여신)는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2위의 여신이 되어버렸다. <베다>(고대 인도의 바라문교 경전)의 신들은 아 내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들만큼 존경 받지 못한다. 로마의 '큐피터'의 권력에는 당할 자가 없다. 이와 같이 가부장제도의 승리는 우연한 것도 아니고 또한 폭력혁명의 결과도 아니었다. 인류의 시초부터 남성은 그 생물학적 특권에 의해 자기만을 지배적인 주체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실존의 일부를 자연이나 여성 속에 소외시켰으나, 곧 되찾아갔다. 그리하여 '타자'의 역할을 하도록 선고된 여성은 잠시만 권 력을 소유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노예의 경우나 우상의 경우에도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영국의 인류학자, 1854~1941)는 "남자는 신 을 만들고, 여자는 신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자기들의 최고신을 여성으로 하느냐 남성으 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들이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위치는 언제나 남성이 할당한다. 어느 시대에도 여자는 자기 자신의 법률을 제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생산노동을 여성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었더라면 여성은 남성과 함께 자 연을 정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남녀가 함께 신들에게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했을 것 이다. 그러나 여자는 도구의 장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여성이 뒤떨어진 원인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청동과 철의 발명이 생산력의 안정을 완전히 뒤엎어 여성의 열등성이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열등성만 으로는 여성이 당한 압박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여성의 불행은 일하는 남성 옆 에서 노동의 동반자가 되지 못해 인간적인 공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자 가 약하여 생산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만으로는 이 제외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를 동류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의 일하는 방법이나 사고하는 방 식에 참여하지 않고, 언제나 생명의 신비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채 용하지 않고 여성이 남성의 눈에 타자의 차원을 머문 순간부터, 남성은 여성의 압박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확대와 정복을 지향하는 남성의 의지는 여성의 무능력을 저 주로 바꿔 놓았다. 남성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열린 새로운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노예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자기 동류를 노예로 삼았다. 노예의 노동력은 여성이 제 공할 수 있는 노동력보다 훨씬 유효했기 때문에, 여성은 부족 안에서 갖던 경제적인 역할 을 잃게 되었다. 한편 주인은 노예와의 관계에서, 그가 여자에게 행사했던 느슨한 권위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성은 그 번식력 때문에 숭배를 받고 두려움을 주었으며, 남 성과는 별개의 존재로서 타자의 무시무시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어느 의미에서는 남성을 자기에게 의존시켜 왔다. 여자에게는 주인과 노예의 상호 관계가 현실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노예는 어떤 터 부(금기)에 의해서도 보호되어 있지 않고, 한 사람의 굴복한 남자에 불과하며, 차이가 있 다면 열등할 뿐이다. 주인과 노예관계의 변증법적인 작용이 실현되려면 여러 세기가 지나야 할 것이다. 잘 조 직된 족장제도 사회에서는 노예는 인간의 얼굴을 한 소나 말에 불과하며, 주인은 그에게 폭군과 같은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하여 주인의 자존심은 높아진다. 그리고 그는 그 자존 심을 여자에게 돌린다.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이 여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의 권위 가 증대될수록 여자의 격은 낮아 진다. 특히 남자가 토지를 소유했을 경우에는, 그는 여자 의 재산까지 요구한다.(제1편 제3장 참조) 그는 마나와 대지에게 소유되어 있었으나, 이제 그는 하나의 영혼과 얼마간의 토지를 소 유하고 있다. 그는 여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한 여자와 자기 자손을 요구한다. 그는 자기 밭에서 올릴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가족의 노동이 완전히 자기것이기를 요구한다. 그 리하여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 내나 자식을 예속시킨다. 그는 자기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무덤의 피안에서 영혼의 휴식에 필요한 명예를 자기에 게 줄 수 있는 상속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정에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사유재산제도와 연관이 있으며, 이를 위한 상속인의 기능은 경제적인 동시에 신비적이기도 하다. 농업이 본질적으로 마법을 배제하고 창조적인 일로 변모되는 날부터, 남성은 자기를 생식력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기의 수확과 동시에 자기 자식을 요구한다. 원시시대에는 모계의 혈통을 부계혈통으로 대치시킨 혁명보다 더 중요한 사상적인 혁명 은 없었다. 그후에 어머니는 유모나 하녀의 지위로 내려가고, 아버지의 지배권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권리를 보유하고 행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속 에서 아폴로신은 이 새로운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아기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머 니가 낳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기 몸에 들어온 씨를 키울 뿐이다. 낳는 것은 아버지 이다. 여자는 외부로부터 씨를 받아, 만일 신이 인정하면 그 씨를 보존한다." 이런 확신이 과학적인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며, 이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하긴 남성은 기술적인 인과관계의 경험에서 자기의 창조능력에 확신을 갖고, 이로 말미 암아 자기는 생식에서 여성 못지않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념이 관찰을 유도한 셈이다. 그런데 관찰은 단지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역할과 동등한 역할을 인정하게 할 뿐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으로서는, 수태의 조건은 정자와 월경의 만남이라는 가설에 도 달하게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사고, 즉 여성은 단지 물질에 불과하며, "태어나는 모든 존재 속에서 남성의 운동원리가 보다 월등하고 고상하다."는 사고는 모든 인식을 초월한 권력의지를 대변하고 있다. 자손을 완전히 독점함으로써 남성은 여성의 지 배력에서 벗어나 여성에게 대항하여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여성은 실제적인 중요성과 신비적인 권위를 상실하여 단지 생식과 2차적인 일에 헌신하는 하녀에 불과한 존재로 보 인다. 남성은 이 지배를 치열한 전투 결과로 얻은 것처럼 보아왔다. 우주 창조의 가장 오래된 신화의 하나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인의 신화는 7세기에 기록된 문헌에서 남성의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헌은 훨씬 더 오래된 전설을 재현한 것이다. 대양의 남신과 바다의 여신인 아토움과 타미아트는 천지를 비롯하여 모든 위대한 신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신들이 너무 난폭하여 멸망시키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머니, 즉 여성인 타미아트가 자기 자식 중에서 가장 억세고 잘생긴 미남 신 마르두크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마르두크는 그녀와 격전을 벌인 끝에 그녀를 죽여, 그 시체를 두 동강 내였다. 그는 그 절반으로 하늘 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으로 지상세계의 기둥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 그는 우주를 편성하 고 인류를 창조했다. 모권에 대한 가부장제도의 승리를 구가하는 <에우메니데스>의 희곡에서도, 오레스케스 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암살한다. 이와 같은 피비린내나는 승리로 남성의 위력, 즉 질서와 광명인 태양의 위력이 여성의 혼돈을 타파한다. 오레스테스를 무죄로 하기 위해 신들의 법 정은 그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이기에 앞서 아가멤논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낡은 모권은 죽었다. 그것은 남성의 정복은 말하자면 재정복이었다. 남성은 그가 이미 전 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을 다시 손에 넣은 데 불과하다. 그는 권리를 현실과 조화시켰다. 전투도,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 전설에는 깊은 뜻이 있다. 남성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순간 부터 '타자'의 이념을 자기 속에 병합한다. 그날부터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타자'의 존재는 위협이자 위험이다. 낡은 그리스 철학은 - 플라톤도 그 점에 관해 서는 마찬가지지만 - '타성'은 부정과 같으며, 따라서 '악'으로 가르치고 있다. '타자'를 설 정하는 것은, 마니교(인간의 육체는 어둠에서 생기고 그 정신은 빛에서 생기며, 어둠인 악 은 인간을 타락시키려고 하고, 빛인 선은 언제나 인간을 높이려고 한다고 주장하여 세계를 빛과 어둠의 싸움터로 보는 이원론적인 종교로 3세기 초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그 교주이 다)가 하는 일이다. 모든 종교나 법규가 여자를 그처럼 적의를 가지고 다루는 것은 이 때 문이다. 인류가 자기의 신화나 법률을 문자로 편집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던 시기에는, 가부장제도 는 이미 결정적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법규를 제정하는 것은 남성이다. 그들이 여성에게 예속적인 지위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성을 어린이나 가축을 바라보는 것처럼 동정심을 갖고 대한다고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 다. 여성을 압박하도록 법규를 제정하는 입법자들은 여성을 두려워한다. 여성이 간직하고 있는 상반되는 특질 중에서 특히 불길한 면이 남겨져, 여성은 신성한 존재에서 부정한 존 재로 바뀐다. 아담의 반려자로 주어진 이브는 인류를 타락시켰다. 이단의 신들은 인간에게 복수하려고 할 때에는 여자를 지어낸다. 그리고 이런 암컷들 중에서 최초로 태어난 판도라는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재앙을 일으켰다. '타자'란 곧 능동성에 대한 수동성, 통일을 깨뜨리는 잡다 성, 형식에 대립하는 물질, 질서에 대항하는 무질서이다. 여자는 이처럼 운명적으로 악을 타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질서나 광명이나 남자를 창조한 선의 원리와 혼돈의 암흑과 여 자를 창조한 악의 원리가 있다."고 피타고라스(고대그리스의 철학자.수학자. BC 582?~49 7?)는 법률은 여자에게 아무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로마법은 여자를 후견인 아래 두 고,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법은 여자를 '악마의 입구'로 본다. 코란은 여자를 완전히 멸시하고 있다. 그러나 '악'은 '선'을 위해 필요하며, 물질은 이념을 위해 필요하고, 어둠은 빛을 위해 필 요하다. 남자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기의 생명을 영속시키기 위해서 여자는 자기 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여자를 사회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가 세운 질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원죄적인 부정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마누법전'에 잘 나타나 있다. "여자는 정식결 혼에 의해 마치 바다에 흘러드는 강물처럼, 그 남편과 같은 장점을 몸에 지니게 된다. 그 리고 그녀는 죽으면 같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찬사와 함께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는 육 체를 혐오하면서도 헌신적인 처녀와 정결하고 순종하는 아내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여자는 종교적인 의식과 결부되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바라문 승려의 아내나 로마의 사제의 아내는 그 남편 못지않게 신성하다. 부부 사이에서 지배하는 것은 남편이다. 그러나 남녀의 요소의 결합은 역시 생식구조나 생명이나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 요하다. 이 '타자'와 '여성'의 상반성은 여성의 그후의 역사에 반영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성 의 의사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의사는 모순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성은 완전히 병합 되면 일개 물체의 지위로 하락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정복하여 소유하는 것에 자기의 위엄 을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그의 눈에 그 원시적인 마술을 아직 어느 정도 간 직하고 있다. 아내를 어떻게 하녀인 동시에 반려자로 삼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남성이 해결하려고 부심하는 문제의 하나이다. 남성의 태도는 여러 세기 동안데 진전되어, 여성의 운명에 진화를 가져올 것이다. 3 여성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왕좌를 빼앗기게 되었으나, 여성의 운명은 역시 각 세기를 통하여 사유재산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역사는 상속의 역사와 뒤섞여 있는 부분이 많 다. 이 제도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재산의 소유자는 자기의 실존을 사유재산 속에 쇠외 (물질화)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재산을 소유한 자는 자기의 생명보다 재산에 더한 애착을 갖는다. 그것은 이 짧은 생명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 불멸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유형의 화신으로 나타난 육체가 붕괴된 후에도 존속된다. 그러나 이 존속은 사유재산이 소유자의 손에 남아 있어야 실현된다. 즉 그 재산은 소유 자가 그 곳에 존속되어 자기를 인지할 수 있는 그의 자손들에게 속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을 초월하여 그의 것일 수 없다. 그리하여 상속자에게는 아버지의 땅을 경작하고, 아 버지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일무이한 임무가 된다. 그는 이 세상과 지하세 계 속에서 조상들의 영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재산과 자식을 아내와 공유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주장은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관철되지는 못한다. 그러 나 가부장제도가 강력하게 시행될 때에는 그는 아내에게서 재산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모 두 박탈한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아내에게 주지 않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자식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아내가 나온 씨족의 집단과 자식은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 결혼은 여자를 한 씨족에서 다른 씨족으로 대여하는 것의 집단에 부속된다. 그리하여 남편은 그녀를 노예나 가축처럼 사들여, 그녀에게 자기 가문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남편의 가문에 속한다. 만일 그녀가 상속자라면 당연히 그녀는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자기 남편의 집에 넘겨주 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상속자에게 제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여 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한다. 그려는 남 자의 세습재산의 일부가 되어 먼저 아버지의 다음에는 남편 재산의 일부가 된다. 엄격한 가부장제도 하에서는 아버지는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자식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아 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대개 사회가 그의 권한을 제한하여 정상으로 태어난 남자는 모두 살도록 허용한다. 한편 여아를 유기하는 풍습은 널리 퍼져 있었다. 아라비안인들 사이에는 갓난 아기의 대 량살육이 자행되어, 여아가 태어나면 곧 구덩이 속에 내던졌다. 여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너그럽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였다. 이런 사회에선 동정을 받지 못한 여자는 끼어들 수 없다. 어쨌든 여아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출산은 훨씬 부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레위기>에 보면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이 경우에 남아를 낳았을 때보다 갑절이나 긴 정결의식을 요구하고 있을 정도이다. '피의 값'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희생자 가 여자인 경우에는 약간의 보상밖에 요구할 수 없어, 그 값을 남성에 비교하면 마치 자유 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다. 딸에 대하여는 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리고 딸이 결혼하면 아버지는 그 권 한을 모두 남편에게 이양한다. 그녀는 노예나 우마나 물품과 마찬가지로 그의 재산이므로, 남편이 마음대로 많은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다처를 제한하는 것은 경제사 정뿐이다. 남편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고, 사회는 그녀에게 거의 아무 보 장도 해주지 않는다. 한편 여자는 엄격한 정조를 지켜야 한다. 터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모권사회는 대단히 자유로운 풍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결혼 전의 정조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으며, 간통은 그다지 남의 눈총을 받지 않는다. 반대로 여 자가 남자의 사유재산이 되면 그는 그녀가 처녀이기를 원하여, 엄한 벌칙을 정해 완전한 정조를 요구한다. 남의 씨에게 상속권이 넘어가는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었다. 가정이 잘못을 저지른 아내를 죽일 권리를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이 존속 되는 한, 아내의 부정은 대적죄로 간주되었다. 모든 법률은 간통에 관하여 불평등을 유지 하면서, 아내가 가정에 사생아를 들여놓을 위험이 있는 죄의 중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자기 손으로 부정한 아내를 마음대로 처단할 권리는 아우구스투스 대제 이 후로 폐지되었지만, '나폴레옹 법전'은 아직도 아내를 처단한 남편을 배심원이 관대하게 대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여자가 아버지의 씨족과 남편의 가문에 동시에 속해 있던 시기에는, 여자는 서로 뒤섥혀 대립되는 두 유대 사이에서 상당한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두 체계의 쌍방이 각각 그녀에 게 유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흔히 자기 마음에 드는 남편을 택할 수 있었다. 결혼이 사회구조에 깊은 영항을 주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구조에 깊은 영 향을 주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제도하에서는, 그녀는 아버지의 사유재 산이므로 아버지는 마음대로 그녀를 결혼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하여 남편 의 가정에 매여 남편의 물품이며, 그녀가 들어온 씨족의 소유물에 불과하게 된다. 가족이나 사유재산이 분명한 사회의 기반이 되어 있을 동안은, 여지도 완전히 소외된(인 격성을 상실한 상태)채 살게 마련이다. 이것이 회교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교사회의 구조는 봉건적이다. 즉 여러 부족을 통합화여 복종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국가가 나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의 권력을 억제할 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랍민족이 전사이자 정복자였던 시기에 창시된 종교는 여자를 완전히 경멸하고 있다. "남자는 신으로부터 우월 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에게 지참금을 주기 때문에 여자보다 우수하다."고 <코란>은 가르치고 있다. 여자는 현실적인 권력이나 신비적인 권위를 한번도 손에 넣어 본 적이 없다. 베두인족(사막에 사는 아라비아인)의 여자는 힘든 일 에 종사한다. 그녀들 은 쟁기를 다루고 무거운 짐을 운반한다. 이렇게 하여 그녀는 자기 남편과 상호의존 관계 를 갖게 되어 얼굴을 들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다. 베일을 쓰고 집 안에 처박혀 있는 회 교도 여인은 오늘날까지도 사회계층에서 일종의 노예로 머물러 있다. 나는 튀니지의 어느 혈거민 부락의 지하동굴 속에서 본 광경이 생각난다. 그곳에는 네 명의 여자가 몸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애꾸눈에다 이가 빠져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늙은 아내가 매운 연기를 마시며 작은 화덕 위에서 가루반죽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보 다 조금 젊지만 얼굴 모습은 거의 비스한 두 아내가 품속의 어린애를 흔들고 있었다. 그중 의 한 여자는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단과 금은으로 눈부시게 장식한 한 젊은 미인 이 베틀 앞에 앉아서 양털 실오라기를 잇고 있었다. 나는 이 음침한 동굴-내재의 왕국, 자 궁 겸 무덤-을 나오자, 흰 옷을 걸친 눈부시게 깨끗하고 명랑하고 잘생긴 사나이를 만났 다. 그는 시장에서 돌아와 다른 사나이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넓은 세상에서 자기 집인 이 은둔처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왔을 분, 그는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세계에 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시들어버린 노파들이나 그처럼 늙어갈 젊은 아내에게는 동굴 밖 의 세계가 없으며, 간혹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베일을 쓰고 밤을 이용해야 한다. 성서시대의 유태인들도 아라비아인과 거의 같은 풍습을 갖고 있었다. 가장은 일부다처이 고,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 남편에게 처녀로 몸을 맡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간통을 하면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된다. 성서에 쓰여 있는 정숙한 여 인상이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가사에 매여 있다. "여자는 양털과 삼을 매만지 고......아침에는 해 뜨기 전에 일어나고...... 밤에는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게으른 여 자의 빵을 입에 대지 않는다." 여자는 정숙하고 부지런하더라도 부정하다고 하여 터부시된다. 때문에 여자의 증언은 법 정에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전도서>는 여자를 대단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말하고 있다. "여자는 마음이 함정이나 그물과 같고 눈은 사슬과 같아 죽음보다 더 흉하다...... 천 명의 남자 중에서 한 명의 남자를 발견하기는 쉬운, 여자 중에는 한 사람의 여자도 없다."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법률이나 습관에 의해 고인의 형제와 결혼해야만 했다. 이러한 습 관은 동양의 많은 민족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자가 후견인의 보호 아래 있는 결혼 제도인 경우에 반드시 일어나는 문제의 하나는, 미망인에게 주어지는 지위이다. 가장 과격 한 해결책은 그녀들을 남편의 무덤에 생매장하는 것이다. 인도에서도 법률이 이런 대량살 육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누법전'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 아내 가 살아 있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함께 죽는 것은 귀족들 사이의 습관에 불 과했다. 미망인을 상속인들의 처분에 맡기는 경우가 휠씬 많았다. 형수와의 결혼은 때대로 일처다부의 형태를 취한다. 과부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일가의 형제가 모두 남편으로 제공 된다. 이런 습관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 대비하여 씨족을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시저(로마 의 군인.정치가 BC 102~44)의 글에 보면, 브르타뉴에서는 한 집안의 남자들이 몇 사람 의 아내를 공유했던 것 같다. 가부장제도는 모든 면에서 이런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아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함 무라비법전'은 여자에게 몇 가지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일부 상속받을 수 있고, 결혼할 때에는 아버지가 지참금을 제공한다. 페르시아에서는 일부다처 가 관계가 되어 있다. 여자는 아버지가 택한 남편에게 절대로 복종한다. 그래도 그녀는 많 은 동양민족의 여성에 비하면 존경을 받는 편이었다. 근친상간은 금지되어 있지 않아 형제 와 자매 사이에 재결혼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여자는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일곱 살이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결혼할 때까지 교육시켰다. 만일 아들이 상속자로 부적합 했을 경우에는, 그녀도 남편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성년인 아들을 두 지 않고 죽었을 경우에는, 아내는 미성년인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집안관리를 맡을 권리가 있었다.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법규에는, 자손의 존재가 가장에게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분명 히 보여주고 있다. 결혼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었던 것 같다. 1. 여성이 부모가 동의하여 결혼했을 경우, 그때에는 '유권처'하고 불리며, 그 자식은 그 녀의 남편에게 속한다. 2. 아내가 무남독녀일 경우에는 첫 자식은 그녀의 부모에게 양도하여 딸을 대신하게 한 다. 3. 남자가 독신으로 죽었을 경우에는 그 가족이 외부 여자에게 지참금을 주어 다른 남자 와 결혼시킨다. 그녀는 '양자처'라고 불리며, 그녀가 낳은 자식의 절반은 죽은 남자에게 속 하고, 나머지 절반은 살아 있는 남편에게 속한다. 4. 미망인으로 자식을 낳지 않고 재혼한 자는 '하녀처'라고 불리며 재혼하여 낳은 자식 들의 절반은 죽은 남편에게 속한다. 5.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한 여자는, 그 장남이 성년에 도달하여 그녀가 그 아이 아버지 의 '유권처'가 될 때까지는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었다. 만일 남편이 그 이전에 죽으면 그녀는 미성년으로 간주되어 후견인의 관리 아래 놓였다. '양자처' 와 '하녀처'의 제도는 반드시 혈연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 후에 속에서 어떤 남 성도 존속될 권리를 확립해 주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한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이 유대는 남성이 자기의 유한한 생명의 피안에 지상과 지하에서의 불멸성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남성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여성의 신분이 가장 유리했던 것은 이집트였다. 어머니인 여신은 아내가 되어도 그 권위 를 잃지 않았다. 종교적. 사회적인 단위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의 동맹자요 보조자로 간 주되었다. 여자의 마술성에는 큰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 어 아내와 자매를 혼동하는 일도 예사였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권리와 같은 법적 효력을 갖고 상속을 받아 재산을 소유한다. 이런 특수한 행운은 결코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토지가 왕.승려.군 인 등의 상류계급에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토지의 소유는 단지 사용권의 확 보에 불과했다. 토지는 양도할 수 없었으므로, 상속에 의해 물려받은 재산은 별 가치가 없 었으며, 그것을 분배하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세습적인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유롭게 결혼하고 미망인이 되어도 마음대로 재혼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일부다처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 자식들은 모두 적 자로 인정되었으나 진정한 아내는 한 사람뿐이었다. 즉 제사의식에 참여하고 합법적으로 남편과 결합한 아내뿐이며, 그 밖의 아내들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노예에 불과했다. 첫째 부인은 재혼해도 신분이 바뀌지 않았고, 자기 재산을 자유롭게 관리하고 계약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었다. 이집트 왕 보코리스가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을 때에는 여자의 신분은 이미 밀려나기에 는 넘나 강력했다. 보코리스가 계약시대를 열자 결혼까지도 계약제가 되었다. 그 계약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예속적인 결혼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 물이 되었으나, 때로는 남편이 자기 이외의 첩을 두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이기도 했다. 합 법적인 아내는 남편과 동등하게 간주되어, 모든 재산은 부부가 공동으로 소유했다. 이혼할 경우에는 남편이 일정한 금액을 아내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이윽고 이 습관은 여자에게 유 리한 계약형식으로 발전하여, 남편은 아내에게 관습적인 신용을 인정하게 되었다. 간통에는 중형을 내렸으나, 이혼은 양쪽 모두에게 거의 자유였다. 계약의 실천으로 일부 다처는 크게 제한되고, 여성은 재산을 독점하여 자식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금권계급이 생겼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는 법률로, 아내는 앞으로 남편의 허락 없 이 남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 줄 수 없도록 규정하여 그녀들을 영원히 미성년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고대세계에서 유일한 특권적인 법규를 갖고 있던 시대에도 여자들은 사회 적으로 남자와 평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들은 제사의식이나 정치와 관련되어 섭정왕후 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이 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승려나 병사도 남성 이었다. 여성은 보조적인 방법으로만 공동생활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생활에서는 그녀들에게 일방적인 정조가 요구되었다. 그리스인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동양의 풍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다처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첩을 두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다. 많은 후궁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호화로운 솔로몬 왕이나 아라비안나이트의 황제나 임 금, 추장, 부호에 한정되어 있었다. 대개의 남자는 3명에서 4명의 아내로 만족하고 있었다. 농부는 두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없는 이집트를 제외하고, 상속재산을 고스란히 보유하려는 심정에서 부친의 유산에 대한 개인적인 여러가지 권리를 남자에게 주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여자들 사이에 계급이 생 겨, 상속인의 어머니는 다른 아내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일 아내가 재산 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나 지참금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녀는 남편에게 한 인격체일 수 있었다. 남편은 종교적, 독점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서 한 사람의 아 내만 인정하는 풍습이 생겼을 것이다. 사실 그리스의 시민은 거리의 창녀나 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채울 수 있었으므로 적당히 일부다처가 되었던 것이다. " 우리의 정신적 쾌락을 위해서는 기생이 있고,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는 창녀가 있으며, 자 식을 두기 위해서는 아내가 있다."고 데모스테네스(고대 그리스의 응변가, BC 384~322) 는 말하고 있다. 창녀는 아내가 병들어서 월경이 있거나 임신했거나 산후 회복기가 있을 경우에 주인의 침대에서 아내를 대신했다. 그러므로 부인의 방에서 첩이 있는 방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아테네에서는 여자는 자기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해 엄격 히 규제되고 특별한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자는 일생을 미성년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 여자는 후견인의 권리 아래 놓여 있다. 그 후견인은 아버지나 남편, 혹은 남편의 상속 자이기도 하고, 아무도 없을 경우에는 관리로 대표되는 국가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여자의 주인이다. 그들은 물품처럼 여자를 자유롭게 처분한다. 후견인의 권력은 신분 이나 재산에 대해서도 행사하게 된다. 후견인은 그녀의 권리를 마음대로 양도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양녀나 결혼상대로 내준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를 새 남편에게 맡길 수 잇다. 그러나 그리스의 법률은 여자에게 지참금을 보장하고 있어 결혼이 취소되면 그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극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권리도 주어져 있다. 이것은 사회가 그녀에게 제공한 유일한 보상이었다. 물론 모든 유산은 아들 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지참금은 친자관계에서 얻는 재산이 아니라 후견인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봉사이다. 그러나 지참금을 사용함으로써 미망인은 상속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고 부모의 후견 아래로 복귀한다. 부계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하나는, 남자 후계자가 없는 경우의 상속이 다. 그리스인들은 여자 상속제도의 관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여자 상속인은 아버지의 씨 족 중 가장 연장인 근친과 결혼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재산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자식에게 전해져, 토지는 씨족의 재산으로 남는다. 상속녀는 여자 상속인이 아니라, 단지 상속인을 낳는 기계에 불과했다. 이런 관례는 여자를 완전히 남자의 뜻에 맡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집안 남자 중 제일 먼저 태어난 자에 게 자동으로 맡겨지고, 그 남자는 대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을 압박하는 이유가 가족을 존속시켜 재산을 온전히 보유하려는 의지에 있으므로, 여성은 가족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이 완전한 의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만일 사회가 사유재산을 부정함으로써 가족을 부정하게 되면, 여성의 운명은 그 때문에 훨씬 개선될 것 이다. 공유재산제도가 우세했던 스파르타는 여자가 암자와 거의 평등한 취급을 받은 유일 한 도시였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았다. 아내는 남편의 가정에 갇혀 있지 않 았다. 남편은 한밤중에 아내를 은밀히 찾는 것만 허용될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 게 전적으로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우생학적인 이유로 다른 남자가 그녀와 결합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상속이 사라짐에 따라 간통의 개념도 소멸되었다. 자식은 시 전체에 공동으로 속해 있었 으므로 여자들도 한 사람의 남편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혹은 그 반대로 개인이 재산이나 자손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도 아내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남자들이 전쟁을 위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모석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런 시민의 의무수행을 제외하면 어떤 속박도 그녀들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에는 방금 말한 자유로운 여자와 씨족 안에서 살아가는 노예들-가장이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다-외에 창녀가 있었다. 원시민족들 사이에는 길을 가는 여행자에게 아 내를 빌려주는, 신비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매음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생식의 위력을 해방 하기 위한 신성한 매음이 있었다. 이런 습관은 전형적인 고대에 존재했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 경에 바빌로니아의 아내들은 모두 일생에 한 번은 밀리타의 신전에서 한푼의 돈에 외간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그 돈을 신전의 재산에 보태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후 집으로 돌아가 정숙하게 살았다. 종교적인 매음은 존경받는 음악가나 무용가의 계급을 형성하는 이집트의 '아르메'나 인 도의 무희들 사이게 남아 있다. 그러나 대개 이집트, 인도, 서아시아에서는 신성한 매음이 일반적인 의미의 매음으로 전락해 버렸다. 승려계급이 이런 거래에서 사욕을 채우는 수단 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 사이에서도 몸을 파는 매음부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연안지방이나 섬이나 외 국인들이 모이는 도시에서, 핀다로스(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BC 518~483)의 표현을 빌리면 '외국인을 환대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모이는 신전이 있었다. 그녀들이 손에 넣는 돈은 제사의식에 쓰였다. 매음으로 번 돈은 승려들에게 주거나 간접적으로는 그녀들의 생 계에 충당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위선적인 형태로-특히 코린토스에서는- 선원이나 여행자 의 성적 욕구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돈을 벌기 위한 매음이었다. 매음을 제도화한 것은 솔론(그리스 칠현의 한 사람, 아테네의 입법가, BC 640~558)이 다. 그는 아시아인 노예를 사서 아테네의 베누스 신전 옆의, 항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 딕테리온'에 가두어놓고, '포르노트로포스'라는 감독을 두어 그 노예의 재정적인 관리까지 도 책임지게 했다. 창녀에게는 봉급을 주고, 그 이윤은 모두 국고로 들어갔다. 이윽고 사적 인 매음시장인 '카파일레이아'가 열렸다. 붉은 프리아포스(생식의 신, 즉 발기한 남근)가 간판 구실을 했다. 이윽고 여자노예 이외에 신분이 낮은 그리스인 여자를 창부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딕테 리온'은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의 위안소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창부들은 불명예스러운 인간으로 낙인찍혀 사회적인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 자식들조차 그녀들을 봉양할 의무를 갖지 않았다. 그녀들은 꽃다발로 장식된 울긋불긋한 천으로 된 특수한 옷을 걸치고 머리는 사프란으로 염색을 해야만 했다. 딕테리 온 속에 갇혀 있는 여자를 외에 자유로은 창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허가증을 가진 여자에 해당하는 '딕테리아드'와 춤도 추고 피리도 부는 '아울레트리드'와, 주로 코린토스 출신으로 그리스의 저명인사들과 공공연히 어울리 며, 근대의 사교계 여인들처럼 사회적인 역할을 한 고급창녀 '헤타이라'가 그것이다. '딕테리아드'는 해방된 노예나 하류 계층에 속하는 그리스의 노예들 사이에서 볼 수 있 다. 그녀들은 뚜쟁이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갔다. '아울레트리드'는 때때로 그 음악적인 재능으로 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폴 리오르케테스의 정부가 된 라미아이다. '헤타이라'에 대하여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몇몇 여자들은 그 애인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다. 신분상 행동이 자유롭고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으며, 머리가 좋고 교양이 있는데다가 예술가이기도 한 그녀들은 남자들로부 터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았으며, 남자들은 그녀들과의 교제를 환영했다. 그녀들은 가정 을 떠나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성의 압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그리 하여 남성의 눈에 한 동류로서 거의 동등하게 보였다. '아스파시아'나 '프리네', 혹은 '라이 스'에서는 해방된 이런 여자들이 가정의 정숙한 주부보다 뛰어났던 실례를 찾아볼 수 있 다. 이런 훌륭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스의 여성들은 반 노예상태를 강요당하고 있 었다. 그녀들에게는 이것을 항의할 만한 자유도 없었다. 아스파시나나 그녀보다 더욱 정열 적인 사포가 약간의 항의를 시도할 정도였다. 호메로스에게는 여자들이 어느 정도 권리를 행사했던 시대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녀들을 준엄하게 안방으로 돌려보냈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서도 똑같은 모멸을 찾아볼 수 있다. "여자를 믿는 자는 도둑을 믿는 것과 같다." 위대한 고전시대에는 여자는 내실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 "가장 훌륭한 여자는 남자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여자이다."라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공화국 행정에 주부위원회를 설치하고 소녀들에게 자유로운 교육을 시키려고 했던 플라톤 의 경우는 예외이다.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비웃음을 샀다. <리시스트라테>에서, 세상일 에 대한 아내의 질문을 받은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 잠자코 있어. 그렇지 않으면 때려줄 거야... 너는 베일이나 짜고 있으면 돼."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는 일개 미완성품이라는 특질로 인하여 여자이며 가정에 들어앉 아 남자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일반적인 의견을 대변한 것에 불과핬다. " 노예는 의견을 논할 자유가 완전히 박탈당하였다. 여자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나 희박하 여 효과가 없다."라고 그는 단언하고 있다. 크세노폰(고대 그리스의역사가, 군인, 소크라테 스의 제자, BC 430~354?)에 의하면, 남편과 아내는 어디까지나 남이다. "여자처럼 말상 대가 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상하고 신중하고 알뜰하며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 을 하는 주부에다 모범적인 내조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에게 이런 얌전한 지위를 강요하면 서도, 그리스의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여자를 싫어했다.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아르킬로쿠스 는 여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시를 쓰고 있다. 아모르고스의 시모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의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여자는 신의 피조물 중 가장 큰 화근이다. 때로는 유익해 보이기도 하지만, 곧 그 주인에게 애물단지가 된다." 히포낙스의 작품에서는 "아내가 기쁨을 주는 날은 일생에 이틀뿐이다. 결혼식날과 장례식날이다." 이오 니아 사람들은 밀레토스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껏 심술을 부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페소 스의 여주인공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시대의 여성들이 특히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게으르고 까다롭고 낭비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땅이나 바다에도 괴물은 많지만, 그중 에 가장 큰 괴물은 역시 여자이다." 하고 메난드로스(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BC 342~2 92?)는 쓰고 있다. "여자는 당신을 일생 동안 풀어주지 않는 두통거리이다." 지참금제도로 여자가 다소 나은 지위를 얻게 되자, 이번에는 여성의 오만을 개탄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파네스나 메난드로스가 즐겨 사용하던 주제였다. "나는 지참금을 갖고 온 마녀와 결혼했어. 밭과 집에 눈이 멀어 아내로 맞았으나, 오 아폴로 신이여, 이건 최악의 제비뽑기예요." "결혼을 최초를 발명한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만일 당신이 가난하다 는 이유로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자네는 동시에 노예와 거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의 여자들은 엄격하게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품행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가 없 었다. 그러므로 그 육체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남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 는 것은, 결혼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과 예속이었다.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여 자가 가혹한 처지에 놓여 거의 아무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여 모종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복종하면서도 반항할 수 있었다. 연극으로, 눈물로, 수다로, 욕설로 남편을 압도할 수 있었다. 여성을 종 속시키기 위한 결혼은, 한편으로는 남편에게도 하나의 구속이었다.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아내이며 악처로 널리 알려져 있음)의 인격 속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와 부부생활의 불행 에 대한 그리스 시민의 불만이 요약되어 있다. 로마 여성의 역사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가정과 국가와의 투쟁이다. 에트루리아인은 모 계 상속제도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또 왕정시대에도 역시 모권제도와 결부된 이민 족과의 결혼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증거로, 라틴의 왕들은 상속에 의해 왕권을 계승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타르퀴니우스 황제가 죽은 후 부권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농지나 사유지, 가정이 사회의 기본이었다. 그후 여자는 사유재산에, 나아가 가족집단에 엄격히 예속되었다. 법률은 그리스의 여자에게 인정했던 보장을 모두 빼앗아버렸다. 그리 하여 여자는 무능과 굴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공무에서 제외되어 모든 "남성적인 사 무"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시민생활에서 여자는 영원한 미성년자였다. 여자에게 아 버지의 유산을 분배하는 것을 직접적인 방법을 동원해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마음 대로 처분할 수 없게 했다. "후견제도는 후견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라고 가이우스는 말하고 있다. "후견인들은 그 여자의 추정상속인으로서 그녀의 유언에 의해 자 기들에게서 그녀의 유산을 빼앗아갈 수 없고, 또 양도나 빚에 의해 그 유산을 축낼 수 없 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자의 최초의 후견인은 그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없는 경우, 아버지의 친척이 그 직책 을 맡는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남편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결혼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콘페라티오(밀가루나 보릿가루를 바치는 의식)에서 부부 는 신관 앞에서 유피테르 신에게 보릿자루로 만든 과자를 바친다. '코엠프티오'(매매를 뜻 함)는, 평민계급인 아버지가 딸의 소유권을 그 남편에게 물려주는 제도적인 매매이다. 또 하나 '우수스'는 1년 동안 동거한 결과 성사되는 결혼이다. 이 세가지 결혼형태에는 모두 " 남편의 권리"가 수반된다. 즉 남편이 아내의 아버지 혹은 후견인을 대신한다. 그후 남편이 그녀의 신분과 재산에 대해 전권을 갖게 된다. 그런데 12표법(로마 최고의 성문법)의 시 기 이후부터, 로마의 여자는 아버지의 씨족과 남편의 씨족에 동시에 속하게 되어 그 법적 해방의 원천이 된 투쟁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상 '남편의 권리'가 수반된 결혼은 아버지 쪽 의 후견인의 이익을 말살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 쪽의 친척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남 편에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결혼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경우 아내의 재산은 후견인에게 종속된 채로 있게 되어 남편은 아내의 신분에 대한 권리만 갖게 된다. 가정재판소의 임무는 아버지와 남편을 대립시킬지도 모르는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 런 제도로 인해 아내는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가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공식 재판소에소 독립된 재판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 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듯이 씨족은 극도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씨족의 장인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 사람의 시민이다. 그의 권위는 무제한이었으며 처자를 절대적으로 지 배한다. 그러나 처자들은 그의 재산은 아니다. 자식을 낳고 가사에 농사까지 겸하고 있는 아내는 나라를 위해서도 대단히 유익하여 진실로 존경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역사의 흐름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추 상적인 법률만으로는 여자의 구체적인 상황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는 대부분 그 녀가 참여하고 있는 경제적인 역할에 좌우된다. 그리고 종종 추상적인 자유와 구체적인 권 력은 반대방향으로 간다. 로마의 여자는 그리스의 여자보다 법률상으로는 더욱 종속되어 있었으나, 사회에 훨씬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에 깊숙히 갇혀 있는 대신 중심 부인 안뜰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노예가 하는 일을 감독했다. 자녀들을 교 육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일하고, 그의 재 산의 공동소유자로 간주된다. "그대는 가이우스이고 아내는 가이아로다."라는 결혼선서의 문구는 결코 공허한 격식이 아니다. 주부는 '여주인'으로 불렸다. 여자는 가정의 여주인이며 제사의식에 관여했다. 노예가 아 닌 남편의 반려자였다. 여자를 남편에게 연결하는 유대는 대단히 신성했으면, 5세기 동안 단 한 건의 이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자기 방에 갇혀 있지 않고 만찬이나 축제, 극장에도 간다. 거리에 나가면 남자들은 여자에게 길을 비켜주었는데 집정관이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전설들은 역사 속에서 여자에게 큰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사비누스족 의 여자나 루크레티아, 비르기니아의 전설들은 잘 알려져 있다. 코리올라누스는 자기 어머 니와 아내의 탄원에 지고 만다. 로마 민주제도의 승리를 마련한 루키니우스의 법률은 그의 아내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라쿠스 일족의 정신을 연마시킨 것은 코르넬 리아(고대 로마의 귀부인)이다. "어디에서나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남자를 통치하는 우리들을 통치하는 것은 여자이다."고 카토(고대 로마의 정치가, BC 234 ~149)는 말했다. 로마 여성의 법적인 지위는 조금씩 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가부장적인 과두정 치 시대에는, 각 가장은 공화국 안에서 독립된 군주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 확립되자 그것은 재산의 축적과 가족의 권위가 부리는 횡포를 억제했다. 가정재판소는 국가의 재판 소 앞에 존재가 흐려지고, 여자는 점차 중요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여자의 자유를 제한 했던 권력은 본래 네 가지였다. 아버지와 남편이 여자의 신분을 좌우했고, 후견인과 로마 법이 그녀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국가는 아버지와 남편의 대립을 이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국가의 재판소가 간 통과 이혼사건 등을 다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마누법과 후견제를 대립시켜 상호간의 힘 을 악화시켰다. 후견인의 이익을 위해 이미 남편의 권리를 결혼과 분리시켰다. 남편의 권 리는 여자가 결혼계약을 맺는 데 따라서, 혹은 아버지나 국가에서 친절한 후견인을 얻게 됨에 따라서, 후견인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제정시대의 법률에는 후견인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동시에 여자는 자기의 독립에 대 한 구체적인 보증을 얻게 된다. 즉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지참금을 제공할 의무를 지 게 된다. 여자는 결혼이 해소되더라도 부계친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남편의 것이 아니다. 여자는 언제나 이혼에 의해 지참금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어, 남편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남자가 지참금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의 권리를 팔아넘긴 것이다."라고 플라우투스(고대 로마의 희극작가, BC 254?~184?)는 말하고 있다. 공화제 말기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자식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게 되고, 후견인이 있는 경우나 남편의 행실이 바르지 못할 경우네는 자식을 감독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는 원로원인, 자식이 셋이 있고 남편의 다른 친족 이 없을 경우,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유언이 없어도 그의 아내에게 상속할 권리를 주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는 로마가족의 발전이 완성되었다. 178 년 이후부터 어머니는 부계친족을 물리치고 자기 자식들을 상속인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 다. 그 이후 가정은 핏줄의 결합에 기토를 두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간주되었으며 딸들도 남자형제와 마찬가지로 상속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법의 역사 속에는, 지금까지 기술한 것과 모순되는 하나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여자를 가족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자체가 그 여자의 후견인 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력이 여자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부자가 되어 독립을 하게 되면 위험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될 것이라는 견지에서, 한 손으로 여자에게 허용한 것을 다른 손으로 빼앗으려고 했다. 로마의 여성에게 사치를 금한 '오피아법'은 때마침 한니발(카르타고의 장군, BC 247~123)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 을 때 제정되었다. 카토는 유명한 연설에서 이 법령이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 장에 모인 주부들의 시위가 그를 따돌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풍속이 문란해지자 점점 더 엄격한 법률이 잇따라 제정되었으나, 모두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탈법행위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다만, 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개하는 것(계약 에 의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을 금하고, 여자에게서 시민권을 거의 빼앗다시피한 벨 레이우스의 원로인 결의만이 승리를 거두었다. 실제로 여자가 가장 해방되어 있던 시기일 수록 여자의 성의 열등성을 크게 부르짖게 되며, 이것은 내가 이미 말한 남성의 자기옹호 수단의 뚜렷한 실례이다. 즉 딸로서, 아내로서, 자매로서 여자의 권리를, 성을 구실로 삼아 남자들과 평등하게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를 구박하기 위해, '여성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구실로 삼게 된다. 사실 로마의 주부들은 자기의 새로운 자유를 그다지 유효하게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한편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금지된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두 가지 상반되 는 경향 -가정에서 여성을 해방하는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개인으로서의 여자를 박해하는 국가주의적인 경향-에서 여성의 입장은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상속인이며, 남편과 동 등하게 자녀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를 소유하고, 유언을 한다. 지참금제도 덕분에 결혼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이혼을 하고 재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경제적인 독점이나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므 로 추상적인 것에 그쳤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로마의 여성들은 자주 시위를 했다. 그녀들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재 판소를 포위하고, 음모를 꾀하고, 항의하고, 내란을 선동하기도 했다. 행렬을 지어 티베르 강을 따라 '신들의 어머니' 조상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로마에 동방의 신들을 도입 했다. 114년에는 베스타 여인의 축제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대학이 폐쇄되었다. 공적인 생활과 미덕은 여전히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으므로, 가정의 붕괴로 종래의 개인적인 미덕이 시대에 뒤떨어진 무익한 것이 되자, 여자들에겐 추종할 만한 도덕이 없어져버린다. 그녀들은 두 가지 해결방안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자기들의 조상과 같은 가치를 완 고하게 존중하거나, 아니면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걸쳐서도 공화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반려자 및 협력자 가 된 많은 여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플로티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광과 중책을 함께 하고, 사비나는 선행으로 유명해져서 죽기도 전에 사람들이 조상을 만들어 신격화했 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섹스티아가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생사를 같이하고, 파스케아는 폼포니우스 라베우스보다 오래 살기를 거부했다. 파울리나는 세네카와 동시에 자신의 동맥을 끊고, 그 아들 플리니우스는 아리아의 <시인은 슬퍼하지 않는다>를 유명 하게 만들었다. 마르티알리스는 클라우디아 루피나와 비르기니아와 술피키아에게서 완벽한 아내와 현신적인 어머니를 발견하여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혼을 자주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법률은 여전히 간통을 금하고 있었으나, 주부들 중에는 방탕한 생활을 위해 창녀로 등록하는 일까지 있었 다. 이때까지 라틴문학은 여성에 대해 계속 존경심을 품어왔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자 여 성을 비꼬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 일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자기 시대의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유베날리우스는 여자들의 사치나 폭음, 폭실을 탓 하고, 남성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비난했다. 여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소송서류 에 몰두하고, 문법학자나 수사학자와 의논하고, 사냥이나 전차, 쟁기, 검술, 역기에 열중한 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겨루는 것은, 주로 오락적인 취미와 괴벽에 의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높 은 목적을 노리기 위해서 필요한 교육이 그녀들에게는 부족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는 아 무 목적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들에게는 행독이 금지되어 있었다. 고대공화국인 로 마의 여성은 지상에 하나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리와 경제적인 독립이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사슬에 매여 있었다. 퇴폐기의 로마 여성은, 남성이 여전히 구체적이고 유일한 지배자인 세계에서 맹목적인 자유밖에 소유하지 못한, 형식적으 로만 해방된 여자의 전형이다. 그녀들은 '무를 위해' 자유로웠다. 4 여성의 지위향상은 그후에도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대이동과 함께 문명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로마법도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그후 몇 세기 동안 은 야만인(로마인은 다른 민족을 이렇게 불렀다)의 법률이 판을 친다. 경제, 사회, 정치가 일변한다. 물론 여성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기독교의 이념은 여성의 압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물론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나 여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새로운 계율에 가장 열심히 따르는 것은 서민·노예·여자 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초창기에 여성이 로마교회의 멍에를 얌전히 감당하고 있을 무렵 에는, 그녀들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여자도 남자와 함께 순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 의식에서도 여자는 부차적인 역할만 맡게 되었다. 여집사는 병자를 돌보거나 빈민을 구제 하는 세속적인 임무에만 종사했다. 그리고 결혼은 제도상으로 남녀가 서로 정절을 요구하였으나, 사실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성 바울은 극단적으로 반여성적인 유태의 전통을 주장 하고 있다. 바울은 여자에게 표면에 나서지말고 물러나 있기를 요구한다.그는 신·구약성 서에 의거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 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생겼으며, 여자를 위해 남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 해 여자를 지었다."(〈창세기〉에 있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든 것을 가리킨다.) 또 "로마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무슨 일에서나 아내는 남편을 띠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육체가 저주를 받는 종교에서는, 여자는 악마의 가장 두려운 유혹으로 보 게 된다. (〈창세기〉에서 이브를 유혹한 것은 마귀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여, 그대는 악마의 문이로다. 그대는 악마도 감히 정면으로 공략하지 못한 자도 설복시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던 것은 너 때 문이다. 너는 상복과 누더기를 걸치고 언제나 물러가 있어야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말 했다. "아담이 이브를 죄로 유인한 것이 아니고, 이브가 아담을 죄로 유인했다. 여자가 죄 로 유인한 자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했 다. "모든 야수 중에서 여자보다 더 해로운 짐승은 없다." 교회법이 제정되었던 4세기경에는, 결혼은 인간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독교의 완전무결한 덕에 배치되는 행위였다."도끼를 손에 들고,혼인의 무익한 나무를 뿌 리째 베어 쓰러뜨려야 한다."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쓰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6세 이후로 성직자에게 독신생활을 요구하게 되면서 여자의 위험한 성격이 점점 강조되어, 로마교회의 교부들은 저마다 여자의 미천함을 말하고 있다. 성 토마스가 여자는 '우연의' 불안전한 존 재요, 남자가 되려다가 만 인간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있는 것은, 이 전통에 충실한 조치 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인 것처럼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하고 그 는 쓰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지배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며, 그 주인에 대해 아무 권한 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교회법은 여자를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지참금제도 이외의 어떤 결혼제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의 직무에 종사하는 것 을 금할 뿐 아니라 법전에서 증언하는 것도 금지하여, 그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들은 그다지 극단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으나, 교회 교부들의 영향을 받고 있 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율법은 여자를 아내와 어머니로서 존중하는 대신 아내와 어머니의 임무에 예속시켰다. 여자의 무능력은 여자라는 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의 상황에서 온 것이다. 이혼은 금지되고, 결혼은 공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어머니도 자식 에 대해 아버지와 동등한 권한을 갖고, 지식의 상속에 대해서도 같은 권리가 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어머니는 자식의 법적인 후견인이 된다. 벨레이우스의원로원 결의안은 수정되 어, 앞으로 여자는 제3자를 위하여 중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대신 계약을 맺을 수는 없었으며 지참금을 양도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자식들의 세습재산으로, 여자가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을 금지했다. 야만족(로마인 이외의 민족을 가리킴)인 게르만족에게 점령된 지방에서는, 이 법률과 게 르만족의 풍습이 병행하여 지켜졌다. 게르만인의 풍습은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 만 우두머리를 인정했다. 평화시에는 가족이 하나의 자치사회였다. 그것은 모계상속에 근 거를 둔 씨족과 가부장제도하의 씨족의 중간체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의 형제는 아버지와 같은 권한을 가져 질녀에 대해 자매의 남편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폭력이 모든 능력의 원천인 사회에서는 여자는 사실상 완전히 무기력했다.그러나 여자가 의존하고 있는 가정에서의 권한의 이원성에 의해 보장되는 권한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 는 예속되어 있었으나 존중되기는 했다. 남편은 돈으로 아내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매입금은 아내의 재산, 즉 그녀만의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지참금을 주 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받을 수 있고, 부모가 살해당했을 경우에는 살해자가 지불하는 보상금의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가정은 일부일처제였으며, 간통은 엄하게 처벌 하고, 결혼은 존중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후견하에 있었으나, 남편과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 었다. "평화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아내는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하며, 남편과 함께 살고, 남 편과 함께 죽는다." 라고 티커투스는 쓰고 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군 량을 운반하고 옆에서 격려했다. 과부가 되면 죽은 남편의 신분의 일부가 그녀에게 양도되 었다. 여자의 무능력은 육체적인 열세에 의한 것이지 정신적인 열세 때문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승려나 예언자들은 여자였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보다 유식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유산을 상속할 때 당연히 여자의 몫으로 돌아갈 물품 중에 보석이나 서적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전통은 중세기 동안 변함이 없었다.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 존하고있었다. 클로비스 시대에는 멍디엄(프랑크족의 법률.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내나 자 식을 후견하는 권리)이 여자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게르만의 순결을 포기하였다. 메로빙 왕조와 카를링 왕조 치하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성행하였다. 여자는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생사여탈의 권한을 쥐고 있는 남편의 의사에 따라 이혼을 당했다. 여자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취급되었 다.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기는 했으나, 단지 남자의 소유물로서, 자녀의 어머니로서였다. 아무 증거도 없이 여자를 '창녀'라고 부르면, 모욕죄로 간주되어 남자에 대한 모든 모욕보 다 15배가 되는 배상을 해야만 했다. 기혼여성의 유괴는 노예가 아닌 인간 한 사람을 살 해했을 때와 같은 죄로 간주했다. 기혼여성의 손이나 팔을 잡는 것은 15수 내지 30수(프 랑스의 화폐단위)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 그리고 낙태는 100수의 벌금형에 처하여 금지했 다. 결혼한 여자의 살해는 노예가 아닌 남자를 살해한 것보다 네 갑절의 죄에 해당되었다. 임신할 수있는 여자는 노예가 아닌 남자보다 3배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 을 수 없게 되면 그 여자는 모든 가치를 잃게 된다. 만일 노예와 결혼하면 그녀는 법률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부모는 그 딸을 죽여도 무방했다. 여자는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가 강력해지면서 로마에서 완성되었던 진화의 기미 가 나타나, 무능한 어린이나 여자를 보호하는 일은 가족법이 아니라 공동사회의 부담이 되 었다. 샤를마뉴 대제(8세기 프랑크 황제)이후로 여자를 압박하는 멍디엄은 왕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이내가 본래의 후견인을 잃었을 경우에만 개입했다. 그 러나 점차 가족의 권리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이 변화가 프랑크족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멍디엄은 후견인에게 하나의 책무가 되어, 그는 그 피후견인을 보호할 의 무를 갖게 되었다. 이 보호는 피후견인을 이전과 같은 노예상태에 머물게 했다. 중세 초기의 난세를 지나 봉건제도가 정착되자, 여자의 지위는 오히려 더 불안정하게 되 었다. 봉건적인 법률의 특징은 지배권과 재산권, 공민권과 개인권 사이에 혼동이 일어난다 는 점이다. 이것은 이 제도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했던 경위 를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정치적인 능력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모든 개인권을 인정받지 못 했다. 사실 11세기까지는 질서는 주로 폭력의 기반 위에서 유지되고, 소유권은 무력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봉토는 법률학자들의 말처럼 '군대의 지배하에 둔 땅'을 가리킨다. 여자 는 봉토를 지킬 수 없으므로, 소유할 수도 없었다. 봉토가 상속되어 세습재산이 되면서 여 자의 지위가 달라졌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게르만족의 법에는 모권의 잔재가 남아 있어, 남자 상속인이 없을 경우에는 딸이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세기경에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하에 대하여는 언제나 군무에 종사할 것을 요 구했다. 여자가 상속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분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 후견 인을 필요로 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가진 권한을 받아 영 지를 장악하고, 재산의 용역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스 시대의 여자 싱속인처럼, 아내는 영지를 전달하는 자이지 영지를 보유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도 해방되어 있지 않 았으며, 오히려 영지에 흡수되어 부동산의 일부가 되었다. 영지는 이미 로마 씨족시대처럼 가족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주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여자도 영주의 것이었다. 여자 에게 남편을 골라주는 역할도 영주가 하였다.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남편보다 도 영주에게 바쳤다. 아기는 영주의 재산을 지키는 가신이 되고, 여자는 영지에 속하는 노 예이며, 주어진 남편의 '보호'를 통한 이 영지의 주인인 영주의 노예이다. 여자의 처지가 이처럼 비참한 시대도 드물었다. 여자 상속인이란, 곧 토지이며 성이었다. 그리하여 구혼자들은 이 먹이를 자기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다. 결혼을 자주 하는 것은 남 자에게는 영지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혼하는 경우도 증가되었다. 교회는 그것을 위 선적으로 허용했다. 혈족결혼은 7촌까지 금지되고, 친족관계는 혈연관계와 마찬가지로 대 부나 대모와 같은 정신적인 관계에 의해서도 정해지므로, 결혼의 해소에는 언제나 어떤 구 실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1세기에는 네 번 혹은 다섯 번이나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있다. 또 여자가 만일 과부가 되면 곧 새 남편을 맞아들여야 했다. 무훈을 찬양하는 시에서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전사 한 제후의 과부들을 모아 한꺼번에 재혼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지라르 드 비엔'에서는, 부르고뉴 후작부인이 자진하여 왕에게 새 남편을 청원한다. "제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렇 다고 비탄에 잠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에게 강건한 남편을 물색해주십시 오. 저의 영지를 지켜야 하니까요." 많은 서사시는 왕이나 영주가 처녀와 과부를 강제로 농락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 고 남편이 선물로 받은 아내를 푸대접하는 것도 찾아볼 수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학대 하여 얼굴을 때리고 머리채를 움켜잡고 발길로 찼다. 보부아지의 관습법 속에서 보마누아 르(프랑스의 법학자,〈보부아지 관습법〉을 편찬, 1246~l296)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남 편이 아내를 '적당히 처벌하는'것이었다. 이와 같은 군국문화는 여자에게 오직 경멸감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여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에게는 자기의 말이 훨씬 값진 보물로 생각되는 것이다. 무훈을 찬양한 시에서는 언제나 젊은 처녀 쪽에서 남자에게 접근해 간다. 그리하여 결혼하게 되면 여자쪽에 일방적인 정절이 요구된다.그리고 남자는 자기 생활에 여자를 관련시키지 않는다. "기마시합을 할 때 여자에게 조언을 구하러 가는 기사에게는 저주가 내릴지어다." 그리 고〈르노 드 몽토방〉(7세기 기사 이야기) 속에는 다음과 같은 지독한 구절이 있다. '깨끗 이 단장된 방에 들어가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수를 놓고 명주에 염색이나 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는 참견하지 마. 우리가 하는 일은 검으로 싸 우는 거야. 잠자코 있어!" 때로는 여자도 남자처럼 거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여 자는 처녀시절부터 모든 육체적인 단련에 익숙하여 말도 잘 타고 매사냥도 한다. 그녀들은 별로 교육을 받지 않아 수치심도 모르고 자랐으며, 성의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식사나 목 욕의 시중도 들고, 잘 자도록 안마를 해주는 것도 그녀들의 몫이다. 그녀들은 결혼 후에도 야수를 뒤쫓고, 길고 어려운 순례도 떠난다. 남편이 멀리 가 있을 때는 그녀가 대신 영지 를 지킨다. 이런 여자 성주는 완전히 남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므로 '남자 못지않은 여자'(virago)라 고 불리며 감탄의 대상어 된다. 이런 여자는 욕심 많고 간사하고 잔인하며 부하를 구박한 다. 역사나 전설은 이런 여자들 중에서 몇 사람에 대한 추억을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자 성주 오비는 천주각보다 더 높은 탑을 짓게 한 뒤 비밀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즉시 건축가의 목을 베었다. 그녀는 또 남편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그 남편이 몰래 돌아와 그녀를 살해했다. 로제 드 몽고메리의 아내 마비유는 자기영지의 귀족들을 거 지로 만들고 기뻐했다. 결국 귀족들은 그녀의 목을 베어 복수했다. 영국의 헨리 1세의 딸 인 사생아 줄리안은 브레튀유의 성에 틀어박혀 헨리 1세에게 반항하고 불의의 습격을 가 했는데, 이 때문에 심한 보복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어디까지나 예외이다. 보통 여 자 성주는 얌전히 실을 잣고, 기도하고, 남편을 기다리면서 권태로운 나날을 보냈다. 12세기에 지중해 연안의 남부 프랑스에서 있었던 '우아한 사랑'(amour courtois:중세 시인들이 노래한 기사와 귀부인 사이의 우아한 사랑)이 여자의 처지를 개선했다고 말한다. 그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우아한 사랑은 여자 영주와 그 젊은 부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카타리파의 사교적 정신 이나 성모숭배와 결부시키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시랑에서 출발한 세속 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랑의 궁정(cours d'amour)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확 실히 알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은 여인 이브에 대항하여 로마교회가 ' 구세주의 어머니'를 찬양하기로 한 것이다. 성모숭배는 대단히 중요시되어 13세기에는 신 이 여자로 분장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여성 신비설이 종교적으로 널리 유포되 었다. 한편 귀부인들은 성내 생활의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주위에 환담과 예절과 시가(詩 歌)의 영화를 꽃피우게 할 수 있었다. 베아트리스 드 발랑티누아, 알리에노르 다키텐, 그리 고 그녀의 딸인 마리 드 프랑스, 블랑슈드 나바르를 비롯하여 교양있는 부인들은 연금을 지불하여 시인을 초대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남부에, 다음에는 북부의 문화의 꽃 이 피어, 그것이 여자를 새로운 매력으로 장식했다. 궁정연애는 때때로 플라토닉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중세의 연애시를 많이 쓴 궁정시인)는 아마도 자기의 보호자인 여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겠지만 자기 의 소설에서 간통을 추방하여 랑슬로와 게니에브르 왕비의 연애 이외에는 죄가 되는 연애 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봉건제도하의 남편은 후견인이자 폭군이기도 했으므로, 아내는 결혼생활 밖에서 애인을 구했다. 궁정연애는 형식적인 도덕의 야만성에 대한 보상 이었던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연애는, 고대에서는 공적 사회 밖에서만 이루어졌다. 고대의 관능적 사랑이 멈춰진 지점에서 중세가 재출발한다. 즉 중세는 간통에서 출발한다"고 앵겔스는 지 적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제도가 지속되는 한 연애는 이런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 다. 사실 예절(궁중의 예절, 여자에 대한 중세 기사의 부드러운 태도)은 여자의 처지를 완화 해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는 못한다. 여성을 해방으로 이끄는 것은 종교나 시가 와 같은 관념의 형태가 아니다. 봉건시대 말기에 여자가 어느 정도 사회에 진출하게 된 것 은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해서였다. 왕의 최고권력이 봉건제후에게 미치게 되자, 영주는 그 권리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특히 여자의 결혼을 결정하던 그의 권리는 서서히 박탈되었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피후견인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는 권리가 후견인의 손에서 박탈되어 후견에 따르는 이익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제후가 군무 대신에 금품을 상납하게 하자, 후견인제도 자체도 소멸된다. 여자는 군무를 수행할 수는 없지만, 화폐로 채무를 갚 는 것은 남자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영지는 이제 단순한 세습재산에 불과하였고 남녀가 평등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어진다. 실제로 독일이나 스위스·이탈리아에서는 여자들에게 아직 종신후 견제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프랑스는 보마누아르의 말에 의하면, "여자와 남자는 그 가치 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풍습은 여자에게 후견인으로서 보 호자를 주었다 여자가 더이상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후견인도 필요없게 된다. 여자 라는 이유만으로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히지 않게 된다. 독신녀나 과부는 남성이 갖고 있는 모든 권리를 소유한다. 재산이 있으면 지배권은 그녀의 것이다. 영지가 있으면 그녀는 그 것을 통치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재판을 하고 계약에 서명하고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적인 활동을 하여, 군대를 지휘하고 전투에 참가하는 여성도 있다. 잔 다르 크크(프랑스의 애국소너, 백년전생 때 16세의 나이로 프량스군을 진두지휘하여 오를레앙 성을 탈환함, 1412~1431)이전에도 여군은 있었다. 그러므로 오를레앙의 소녀(잔 다르 크)는 놀랍긴 하지만 비웃음을 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자의 독립을 훼방하는 원인은 참으로 다양하여,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육체적인 열세는 이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자가 결혼했 을 경우에는 역시 얌전히 종속되어 있는 편이 사회에도 유익하다. 그러므로 남편의 권리는 봉건제도가 소멸된 후에도 남게 된다. 여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되는 모순이 나타난 다. 즉 사회에 가장 완전하게 합류된 여자가 권리를 가장 적게 소유하는 여자라는 모순 말 이다. 시민적인 봉건제도에서도 결혼은 군사적인 봉건제도 시대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후견인이다. 부르주아지 사회가 형성되었을 때에도 이전의 법률을 준수한다. 관습법(관습 중에서 법 적 효력을 갖는 것)에 있어서도 봉건법과 마찬가지로, 결혼이외에서만 여성의 해방이 있 다. 독신녀나 과부는 남자와 같은 자격을 갖지만, 결혼을 하면 여자는 남편의 후견하에 있 게 된다. 그리하여 남편은 아내를 구타할 수도 있고, 아내의 행위·교제·편지를 감시하고,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의해 아내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다. "결혼이 성립되면 즉시 두 사람의 재산은 결혼의 효력에 의해 공동소유가 되어, 남자의 권리 아래 놓인다." 하고 보마누아르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습재산의 이익을 위해서 는 귀족과 시민계급의 경우에, 단 한 사람의 주인이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남편 에게 종속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녀를 무능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 도 거리끼지 않을 경우에는 큰 폭으로 여러 가지 자격이 여자에게 인정된다. 봉건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혼한 여자는 고의로 사유재산에 희생되어 왔다. 남 편의 재산이 많을수록 이 예속상태가 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자의 종속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것은 부유층에서이다. 오늘날에도 가부장제도의 가족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부유한 지주계급이다. 남자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권력을 장악할수록 권위를 갖고 가 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공통된 빈곤은 부부관계를 평등하게 만든다. 여성을 해방한 것은 봉건제도 도 아니고 로마교회도 아니다. 가부장제도의 기족형태에서 공정한 부부제도의 가족형태로 옮아간 것은 오히려 농노제도에서였다. 농노와 그 아내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가옥과 가구와 도구를 공유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무 재산도 갖고 있지 않은 아내의 지배자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을 결합하고 있던 노동과 이해의 유대가 아내를 동료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농노제도가 폐지 되어도 빈곤은 그대로 남았다. 부부가 평등한 모습은 농경의 작은 공동체에서나 직인사회 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물건도 아니고 고용인도 아니다. 그런 것은 부유한 남편이 갖는 사치품이다. 가난한 남자는 자기를 그 배우자와 결합시키는 평등성을 통감하게 된다. 여자는 자유로 운 노동 속에서 경제적·사회적인 역할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자치성을 획득한다. 중세의 희극이나 우화시에서 반영하고 있는 직인·소상인·농부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아내를 구 타할 수 있는 특권 이외에는 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아내 쪽에서도 책략을 갖고 남편에게 대항하여, 부부는 결국 피장파장이 된다. 이와는 달리 부유한 여자 는 예속되는 대신에 한가하게 놀고 먹는다. 중세의 여자는 아직 약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여자는 마을의 주민회의 에 참가하고, 삼부회의(귀족·승려·평민의 세 계급이 모인 국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한 예비집회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남편이 자기권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동산뿐이고, 부동산을 처분하려면 아내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구정체(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정체)동 안에 실시된 여러 법규가 제정된 것은 l6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풍 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여자를 가정에 묶어두려는 남자의 의도에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여자에게 대단히 모멸적이었던 로마법의 영향을 엿볼 수 있었 다.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우매함과 취약성에 대한 가혹한 비난은 법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구실로 쓰이고 있다. 남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기 위한 이유를 나 중에 찾아낸다.〈과수원의 몽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고 약한 소질 중에서 법적인 면에서 아홉 가지 고약한 소질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째, 여자는 나면서부터 화근이고... 둘째, 여자는 그 본성이 욕심쟁이이고... 셋째, 그녀들이 바라는 것은 매우 변덕스럽고... 넷째, 여자는 생각부터가 저질이고.. 다섯째, 여자는 사람 을 기만하고... 게다가 여자는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민법에서 유언의 증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여자는 언제나 명령받은 것과는 싱반되는 일을 하며... 여자는 주제넘게 나서기를 잘하고, 자기의 수치를 태연스럽게 드러낸다. 또 교활하고 심술 궂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자는 견실하지 못한 동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남편도 당황하리만큼 증오심에 불타 있고 사악의 온상이며 모든 말썽의 출처이자 모든 부정에의 길이다." 이와 비슷한 문장을 이 시대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장의 재미는, 하나 하나의 비난이 여성에 대한 법률의 부당한 조치를 잇따라 변호하여, 여성의 낮은 지위를 정당화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의 일'은 모두 여자에게 금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는 벨레이우스의 원로원 결의가 부활된다. 장자상속권과 남성의 특권 때문에, 여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때에는 하위에 놓이게 된다. 독신일 때는 딸은 언제 나 아버지의 후견 하에 있다. 아버지는 딸을 결혼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수도원에 가둬둔 다. 사생아의 어머니에게는 자식의 아버지의 승인을 청구할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것도 분 만비용과 양육비를 받을 권리밖에 없다. 결혼하면 그녀는 남편의 권위 아래 속한다. 남편 은 주거를 정하고, 가정생활을 지시하고, 아내가 간통했을 경우에는 이혼을 한 뒤 수도원 에 가두거나, 심지어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낼 위임장을 손에 넣게 된다. 남편의 서명이 없이는 어떤 증서도 무효이다. 여자가 사회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로마법적인 의미에서 지참금 정도로 국한 된다. 그런데 결혼은 해소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재산에 대한 처분권이 아내의 손에 돌 아오려면 남편이 죽어야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생기게 된다. "아내는 원래 친 구가 아니다. 다만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는 자기 자본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설사 그 자본에 대한 여러 가지 권리를 소유 하고 있을 경우에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자본은 여자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내 용도 제공하지 않는다. 즉 여자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인 인연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자 식들까지도 에우메니데스 시대처럼,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머 니는 자기보다 권한이 월등하고 자손의 참된 지배자인 아버지에게 자식을 '낳아주는'사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배나무는 배의 임자에게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 는 자기 자식을 제공하는 남편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할 때에 이용하는 논리의 근거이기도 하다. 구정체 때에 프랑스 여성예 대한 법률은 이런 것이었다. '벨레이우스법'은 판례에 의해 조금씩 폐기되어갔지만,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법전'의 제정을 기다려 야만 했다. 아내의 품행이나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남편이며, 아내는 남편에 대해 서는 절대적으로 의리를 지켜야 한다. 즉 아내는 공공기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거의 없 고, 가족 이외의 개인과 자주적으로 교제하는 경우도 없다. 아내는 남편의 동료라기보다 노동과 어머니의 임무로 보아 하녀와 같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물건의가치와 존재 역시 그 녀의 재산이 아니고 가족의 재산이며, 따라서 가장인 남편의 재산이다.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여자의 처지는 이 이상 자유로웠다고는 말할수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도 후견인제도가 남아있다. 또 어떤 나라에는 결혼한 여자의 권리는 거의 없고 지켜야 할 도덕은 더욱 엄하다. 유럽의 법전은 모두 여자에게 불 리한 교회법이나 로마법 그리고 게르만법을 토대로 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래서 나라마다 사유재산과 가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런 제도의 요구에 따르고 있다. 이 모든 나라에서 '정숙한 여자'를 가정에 예속시킨 결과의 하나가 매음이다. 창녀는 외 관상으로는 사회의 버림을 받고 있지만,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를 수행하고 있 다. 기독교는 그녀들에게 모욕을 주고 있지만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있다. "창녀를 제거하 면 방종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훨씬 후에 성 토마스는-혹은 적어도〈제도론〉제4권에 같은 이름으로 서명한 신학자-이렇게 말하고 있 다. "사회의 내부에서 창녀를 제거해 보라. 방탕이 온갖 무질서로 사회를 교란시킬 것이다. 도시에 창녀가 있는 것은, 마치 궁전에 하수도가 있는 것과 같다. 하수도를 제거하면, 궁전 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오물처리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중세의 전기(前期)에는 남녀간 의 풍속이 자유로워 창녀가 필요없었다. 그런데 시민적인 가족제가 확립되어 일부일처제도 가 엄격해지면서 남자는 가정 밖으로 쾌락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샤를미뉴의 법집회가 그것을 엄격히 금했으나 허사였다. 성 루이도 1254년 창녀를 추방 할 것을 명하고, 1269년에는 매음지역을 파괴할 것을 명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주앵빌 의 말에 의하면, 다미에트에서는 창녀의 막사가 왕의 막사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훨씬 후에 와서 프랑스에서의 샤를 9세의 노력, 18세기 오스트리아에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사회구조가 매춘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l788~1866)는 이렇게 호언했다. '창녀는 일부일처제도의제단에 바친 제물이다." 유럽의 도덕사를 쓴 레키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있다. "악덕의 전형인 창녀는 미덕의 가장 적극적인 호위자이다." 창녀의 지위가 유태인의 지위와 비교되고, 그녀들이 자주 유태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 연하다. 고리대금업과 사금융업은, 로마교회에서 혼외의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금지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고리대금업자나 사랑의 자유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직업은 혐오스러운 계급의 전유물이 되어, 유태인 거류지나 적선구역에 국 한되었다. 파리에서는, 이런 여자들은 아침에 매음굴에 와서 밤에 소등 종이 울리면 돌아 가곤 했다. 그녀들은 특정한 거리에 살아야 했으며, 그곳을 떠날 권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매음굴이 성밖에 있었다.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옷에 신분을 나 타내는 표시를 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흔히 사용된 것은 한쪽 어깨에 달아맨 화려한 색 깔의 장식끈이었다. 정숙한 부인이 몸에 걸치는 견직물이나 모피·목걸이를 그녀들에게는 금한 적도 있었다. 그녀들은 법률상 악인으로 취급되어 경찰이나 법관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으며, 그녀들을 그 주거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는 이웃의 한 남자가 청구하는 것으로 도 충분했다. 그녀들의 대다수는 생활이 어렵고 비참했다. 매음굴에 갇혀 있는 창녀도 있었다. 프랑스 의 여행가 앙투안 드 랄랭은 15세기 말 발렌시아의 스페인 매음굴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곳은 "작은 도시만한 크기로, 주위는 담이 에워싸고, 문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문 앞에는 안에서 나쁜 짓을 한 자를 처단하기 위해 교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입구에 한 사나이가 버 티고 서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의 무기를 빼앗고, '돈을 갖고 있으면 맡겨요. 돌아갈 때 틀림없이 돌려줄 테니까.' 하고 말한다. 돈을 맡기지 않아 밤중에 도둑에l게 털려도 문 지기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곳에는 매음굴이 밀집된 거리가 서너 개 있는데 집집마다 비로드와 비단으로 요란하게 단장한 여자를 대기시키고 있다. 모두 2,3백 명쯤 될까. 저마 다 자기 방을 아름다운 천으로 둘러치고 있다. 공정가격은 스페인 화폐로 4드니에인데, 이 것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술집과 카바레도 있다. 낮에는 더위 때 문에 이곳을 자세히 돌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밤이 되면 창녀들이 입구의 아름다운 동불 옆 에 앉아 있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다. 시(市)에는 두 사람의 의사가 고용되어, 매주 창 녀들을 검진하여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성병에 걸려 있지는 않는지 조사하여, 만일 병자 가 있으면 시의 유지들이 비용을 걷어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는 참으 로 잘 정비된 감독조직에 놀라고 있다. 많은 창녀들이 자유를 누리며, 개중에는 풍족하게 사는 여자들도 있다. 그리스의 창녀시대와 마찬가지로, 고급 매음부들은 '정숙한 여자들'의 생활 이상으로 독립된 길을 열어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특이한 것은 독신녀의 입장이다. 독신녀에게 주어진 법률상의 독립은 아내의 예속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독신녀는 이례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사회의 풍습은 법률 이 그녀에게 제공한 모든 것을 박탈하려고 한다. 그녀는 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 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인 추상적인 권리이다. 그녀는 경제적인 자주성도 없고, 사회적인 위신도 없다. 노처녀들은 대개 아버지의 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거나, 혹은 수도원에 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에는 불복종과 죄과(罪科)밖에는 다른 형태의 자유가 없 다. 그래서 쇠퇴기의 로마 여자들은 오직 악덕에 의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자들의 해방이 소극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소극성은 여전히 여자의 운명이 된다. 이런 여건 하에서는 여자가 행동하거나, 혹은 단순히 자기의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을 갖 는 것조차 흔치 않다. 노동계급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압박이 남녀의 불평등을 없앤다. 그 대신 그것은 개인에게서 모든 기회를 빼앗아 버린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에서는, 여자 는 여자이기 때문에 구박을 받게 된다. 즉 기생적인 생활밖에 하지 못한다.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다. 여자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현하려면 예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여왕이나 여섭정은 이런 희귀한 행복을 갖게 된다. 그녀들의 주권이 그녀들을 보통 여자의 신분 이상으로 높여주는 것이다. 프랑에서는'살리카법'이 여자에게 왕위계승을 금하고 있 다. 그러나 그녀들은 남편을 도와, 혹은 남편이 죽은 후에 큰일을 하기도 한다. 성 클로틸 드·성 라드공드·블링슈드 카스티유 등이 그런 예이다. 수도원의 생활은 여자를 남자에게서 독립시킨다. 여수도원 원장 중에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엘로이즈는 연애뿐만 아니라 수녀로도 유명했다. 여자를 신과 결부시키는 신비로운, 그리고 자주적인 관계에서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영혼에서 영감과 힘을 얻게 된 다. 그녀들은 사회가 지불하는 존경에 의해 어려운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잔 다르크의 모 험은 기적에 속한다. 게다가 이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은 엉뚱한 짓으로밖에 볼 수없다. 그러나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의 전기는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활발 한 자선활동과 깊은 내면생활을 표시하는 신탁에 의해 위대한 명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녀는 성공에 필요한, 일반 여성들에게는 결여된 권위를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형수에게 설교할 때, 방황하는 사람들을 선도할 때, 가정과 도시 사이의 분쟁을 진정시킬 때 그녀의 영향력에 호소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집단의 지지를 받아 거리에서 거리 로 교황에의 순종을 설득하고, 주교와 군주들과 널리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드디어는 피렌 체에서 아비뇽으로 교황을 알현하러 가는 사절로 뽑혀 평화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여 왕은 신권에 의해, 성녀는 빛나는 미덕에 의해 사회에서 남자와 동등한 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다른 여자들에게는 겸손이 요구된다. 크리스틴 드 피장(1363년경 베 니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생활한 여성작가. 그의 작품들은 15세기 사회의 귀중한 문헌 이다)의 성공도 놀라운 행운이었다. 과부인 그녀는 여러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으므로 펜으 로 생계를 유지해 나갈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로 중세기 남성들의 견해는 여성에게 별로 유리하지 못했다. 하긴 연애시인들은 연 애를 소리 높이 찬양했다. '연애수법'을 소재로 수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앙드레 르 샤플랭의 시와 유명한〈장미이야기〉가 있으며, 여기서 작가 기용 드 로리스는 젊은이들에게 귀부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길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음유시인들의 문학에 영향을 받은 이런 문학 이외에 한편으로는 여자를 몹시 공격하는 부르주아적인 감흥에서 쓰여진 작품이 있다. 풍자시나 희극, 단시 등은 여자의 태만과 교태·음란 등을 비난하고 있다. 여자의 최악의 적은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을 적대시한다. 로마교회는 결혼을 성스 런 일로 취급하면서도, 기독교도의 엘리트들에게는 그것을 금했다. 여기에 '여성논쟁'의 근 원적인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은〈마테올루스의 탄식〉에서 대단히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 다. 이것은〈장미 이야기〉의 제1부가 나온 지 15년 후에 출판되었고, 100년 후에 불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마티외는 아내를 얻음으로써 성직(聖職)을 잃게 되자 자기의 결혼 을 저주하고 나아가서는 여성과 결혼 전체를 저주한다. 결혼과 성직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여자를 지으셨는가? 결혼 속에 평화는 없다. 이것은 악마가 만 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자기가 한 일을 알지 못한 것이 된다. 마 티외는 여자가 심판의 날에 부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느님은, 결혼은 천국에 이 르기 위한 연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꿈에 천국에 가게 된 마티외는 수많은 님편들이 " 잘 왔소, 잘 왔소. 당신은 참된 순교자요!" 하고 외치면서 자기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본다. 같은 성직자였던 장 드 밍이 쓴 책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젊은이에게 여자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그는 먼저 연애를 공격한다. 연애는 원한의 니라요, 연애는 사랑이 낳은 원한 그는 남자를 노예상태로 몰아넣어 녹여버리는 결혼을 공격한다. 그리고 여자를 매도한 다. 한편 여성 옹호론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여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논리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연약한 여성 옹호자들에게 이용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능가한다. 즉 물질적인 면에서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 로 지음을 받았다. 장소의 면에서도 아담은 낙원 밖에서 지음을 받고 이브는 낙원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 잉태에 있어서도 여자는 신을 잉태하였다. 이것은 남자가 하지 못하는 일 이다. 신탁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사후에 한 여성, 막달라 마리아 앞에 니타나셨다.그리고 승천에 있어서도 지복(至福)을 누린 한 여성, 마리아가 천사의 무리보다 상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반대론자는 그리스도가 먼저 여자들의 앞에 나타나신 것은 여자들이 말이 많 은 것을 아시고, 자신의 부활을 빨리 알리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15 세기에도 계속되었다.〈결혼의 열다섯 가지 즐거움〉의 저자는, 가엾은 남편의 불운을 재 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외스타슈 데샹은 같은 주제로 끝없이 긴 시를 썼다.〈장미 이야기〉의 논쟁이 시작된 것 은 이 무렵이다. 여기서 비로소 여성이 동성을 옹호하기 위해 펜을 든다. 크리스틴 드 피 장은 '사랑하는 신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성직자를 통렬히 공격한다. 성직자들은 즉시 장 드 밍을 변호한다. 그러나 파리대학 총장인 제르송은 크리스틴의 편을 든다. 그는 더욱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마르탱 르 프랑은 200년 후까지도 읽힌 '귀 부인의 머릿수건'이라는 약간 조리없는 책을 써서 논쟁에 가담했다. 여기에 크리스틴이 다 시 뛰어들었다. 그녀는 특히 여자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여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아들과 마찬가지로 딸도 학문을 배우게 한다면, 그녀들도 남자처럼 모든 예술과 학문을 깊이 습득하고 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 쟁은 사실상 여성에게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를 위해 아무도 현재의 처지 와 다른 사회적인 역할을 요구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성직자의 생 활과 결혼생활을 대립시키는 데 있었다. 즉 결혼에 대한 교회의 애매한 태도가 일으킨 남 성의 문제였다. 이 분쟁은 루터(독일의 종교개혁자, 1483~1546)가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부정함으써 단번에 해결되었다. 여자의 신분은 이런 문학적인 논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 는다. 희극이나 우의시의 풍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비웃을 뿐 변혁하려고 하지 않은 채 여자를 무시하지만 여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연애시는 여자를 찬양하지만, 이런 찬양은 남녀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논쟁' 또한 부차적인 현상으로서, 사회현실을 반영 하기는 하지만 개혁은 하지 못한다. 여자에 관한 법규는 15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특권층에서는 여 자의 구체적인 신분이 진보되었다. 이탈리아의 문예부흥기는,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강렬 한 개성의 개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개인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잔 다리공이나 잔 드 나플, 그리고 이사벨 데스트와 같은 강력한 여군주가 등장했다. 그리고 남자처럼 무기를 들고 싸운 용감한 여자 용병대장도 있었다. 지랄로모 리아리오의 아내는 포를리 시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히폴리타 피오 라멘티는 말라노 공의 군대를 지휘하여 파비아 포위전에서 귀부인의 군대를 이끌고 성벽 으로 진격했다. 시에나의 여자들은 자기들의 시를 몽뤼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3천 명의 여자로 구성된 3개 부대를 편성하여 여자가 지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자들 은 교양과 재능이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이자라 노가라, 베로니카 감바라, 가스파라 스탐 파라, 미켈란젤로의 여자친구인 빅토리아 콜론나, 그리고 특히 메디치 가문의 로랑과 쥘리 앙의 어머니인 루크레치아 코르나부오니가 있다. 그녀는 특히 많은 찬가와 성 장 밥티스트 와 성모 마리아의 전기를 썼다. 이들 특출한 여자들 중에는 고급 창녀들이 많았다. 행동의 자유에 정신적인 자유까지 향 유하는데다가 직업이 있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이들 고급 창 녀들을 존경하고 감탄했다. 그녀들은 미술을 보호하고 문학과 철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글 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사벨라 드 루나, 카타리나 디 상 첼소, 시인이며 음악 가인 임페리아는 아스파지아와 프리네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급 창녀들 에게 자유는 방종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귀부인이나 고급 창녀의 호화로 운 주연과 죄악은 전설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다음 세기에서도 지위나 재산으로 세속적인 도덕에서 벗어난 여자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자유도 대체로 이런 방종이었다. 세속적인 도덕은 여전히 중세와 마찬가지 로 엄격했다. 대담한 행동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할 수 있었다. 여왕은 언제나 특권을 누리는 입장에 있었다. 카테린느 드 메디치, 엘리자베스 당글레테르, 이사벨 라 카톨리크는 위대한 여군주들이다. 몇몇 위대한 성녀도 존경을 받았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놀라운 운명도 성 카타리나의 경우와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토 대로, 자기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손에 넣는다. 그녀는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미덕을 최고 도까지 높임으로써, 고백자들을 비롯하여 기독교 세계에서의 지지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수녀의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남자들 처럼 모험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여행하고 기획하여 끝까지 수행하였다. 사회도 그녀가 하 는 일을 방해하지 않았다. 책을 쓰는 것도 건방지게 보지 않았다. 고백자들이 그녀에게 그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놀라운 행운에 의해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회만 주어지면 여자도 남자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행운은 대단히 불평등한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16세기에는 여성들 이 아직도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안 드 브레타뉴는 그 무렵까지 남성들만 출입했던 궁정에 많은 여성을 불러들여 여관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때 그녀는 그녀들의 소양보다는 교육을 걱정했다. 재능이나 지적 수준이나 저술에 뛰어난 여자들은 거의가 귀 부인들이었는데 레츠 공작부인, 리뉴롤 부인, 루앙 공작부인과 그 딸 안 등을 들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들은 왕실의 여자들로서, 여왕 마르고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를 들 수 있 다. 프레트 뒤 귀예는 평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루이즈 라베(16세기의 프랑스 여류시 인)은 고급 창녀였던 것 같다. 하여튼 그녀는 행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여자는 주로 지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교생활이 발달 되고, 교양이 보급되었다. 살롱에서 여자들은 눈부신 역할을 했다. 여자는 사회의 건설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교나 미술이나 문학에 전념할 여가를 갖게 되었다. 여자를 위 한 교육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대담이나 독서나 가정교사의 지도와 공개강연 등 을 통해, 여자는 남편보다 뛰어난 학식을 얻기도 했다. 구르네 양, 랑부예 부인, 스퀴데리 양, 라파예트 부인, 세비네 부인 등은 프랑스 문단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크리스티나 여왕, 그리고 많은 문학자들과 교신한 슈르망 양도 같은 명성을 얻었다. 이런 교양에서 얻은 명성으로, 여자는 조금씩 남성의 세계에 참여하는데 성공한다. 야심 있는 여자는 문학이나 연애론을 떠나 정치에 관심을 두었다. 1623년에 교황의 특사는 이 렇게 쓰고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온갖 큰 사건이나 중대한 음모의 배후에는 대개 여자 가 도사리고 있다." 콩데 공작부인은 '부인의 결속'을 선동한다. 안 도트리시(프랑스 루이 13세의 왕비)는 여성을 고문으로 앉힌다. 리슐리의 재상은 데귀용 공작부인의 의견에 귀 를 기울였다. 몽바종 부인과 셰브뢰즈 공작부인, 몽팡시예양, 롱그빌 공작부인, 안 드 공자 그, 그밖의 많은 부인이 '프롱드의 난'(17세기 프랑스의 내란으로 마자랭 재상파에 반항하 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남) 동안에 수행한 역할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끝으 로 맹트농 부인(루이 14세의 애첩)은 슬기로운 여성 조언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 마나 큰가를 보여주었다. 여자가 격려자로서, 조언자로서, 모사가로서 가장 효과적인 역할 을 하는 것은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서이다. 스페인에서는 오르시니 공의 부인이 가장 권위 있게 지배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들 귀부인과 나란히 중류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몇 사람의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 즉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여배우가 나타난 것이다. 여자가 무대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545년이다. 1592년에는 아직 한 사람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17세기 초엽에 는 여배우의 대부분이 배우의 아내였다. 이어서 그녀들은 사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업에 서도 독립을 획득한다. 고급 창녀 중에서는 프리네와 임페리아에 이어 니농 드 랑클로(당시 일류문인 및 학자 들과 교류한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창녀라고 할 수 없다)에게서 그 본보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여자임을 이용하여 여자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 살면 서 남성의 자격을 손에 쥐게 된다. 행동의 자유는 그녀로 하여금 정신의 독립을 얻게 했 다. 니농 드 랑클로는 당시의 여자들에게 허용된 최대한의 자유를 누렸다. 18세기에 들어오면 여자의 자유와 독립은 더욱 향상된다. 풍속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엄 격하여 처녀들은 간단한 교육밖에 받지 못했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을 하거나 수 도원에 들어갔다. 차츰 기반을 닦은 신흥계급인 부루조아는, 아내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요 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붕괴로, 사교계의 부인들은 자유로운 행동이 허용되어 상류 부르 주아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이제 수도원이나 결혼생활도 여자를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시기에도 대다수의 여성에게 자유는 소극적, 추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쾌락의 추구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야심적인 여성들은 행동의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살롱의 생활은 크게 발전했다. 조프랭 부인, 뒤 드팡 부인, 레스피나스 양, 에피네 양, 탕생 부인 등이 살롱에 서 수행한 역할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성이 후원자로서 혹은 조언자로서 작가의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문학이나 철학,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뒤 샤틀 레 부인(볼테르의 애인)은, 개인적으로 물리연구실과 화학실험실을 소유하고 실험과 분석 을 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생활에 개입하였다. 프리 부인, 메위 부인, 샤토뇌프 부인, 퐁파두르 부인, 뒤 바리 부인들은 차례로 루이 15세를 조종했 다. 그늘에서 간섭하는 여자를 갖지 않은 대신은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몽테스키외는 프 랑스에서는 모든 일이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 국가 속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콜레 또한 1789년 전야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녀들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한 채 그들을 조종하고 있어서, 프랑 스인들은 여성의 의해 생각과 느낌이 좌우된다." 사교계 여성들과 함께 명성을 날린 여배 우나 화류계 여성들도 있다. 소피 아르누, 쥘리 탈마, 아드리엔 르쿠브뢰르(모두 18세기 프랑스의 명배우들) 등의 경우가 그렇다. 이와 같이 구정체시대 전반에 걸쳐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시도한 여자들이 가장 접근하 기 쉬운 것은 문화 분야였다. 그러나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정점에 도달한 여자는 없었 다. 이것은 여자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교양은 상류층 여자들의 소유물이지, 여성 전체의 소유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 천재는 흔히 집단에서 배출된다. 특권층의 여자들도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을 훼방하는 주변의 장애물 에 봉착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성 테레사나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재와 같은 여자의 비약에 는 방해물이 없었으나 여류작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탁하여 대항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저서에서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 더라면 하고 가정하고, 그 여동생의 운명을 묘사했다. 셰익스피어가 학교에서 라틴어 문법, 논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그녀는 부모의 감시하에 걸레조각이나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오빠처럼 결단을 내려 출세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뛰쳐나갔더라도, 자유분방 하게 살아가는 여배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에게 덜미를 잡혀 강제결혼을 하거나,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버림을 받고 비탄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녀가 다니엘 디포(로빈슨 크루소의 작가)가 묘사한 몰 플랜더스와 같은 창녀가 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는 극단을 지도하거나 희곡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버지니 아 울프는 영국에서 여류작가들은 언제나 반감을 샀다고 지적하고 있다. 존슨 박사는 여류 작가를 뒷다리로 걸어다니는 개에 비유했다. "그것은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사람을 놀라게 한다."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남의 의견에 신경을 쓴다. 특히 여자는 여기에 좌우되기 쉽다. 그러므로 여류예술가는 태연하게 밀고 나가는 것만도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그녀들은 자주 이 투쟁에서 지쳐버린다. 17세기 말의 귀족으로 자식이 없는 윈힐시 부인이 글을 쓰는 모험을 했다.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녀가 감수성이 뛰어난 시적인 천재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증오와 분노와 공포 속에서 정력을 소모했다. 아, 펜을 잡는 여자는 크게 교만한 자로 보여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어라. 그녀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여자의 처지에 대한 분개로 일관되어 있다. 뉴캐슬 후작부인 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귀부인인 그녀는 글을 쓰다가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녀는 "여자 는 바퀴나 올빼미처럼 살다가 구더기같이 죽는다."고 분노에 찬 글을 썼다. 모욕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된 그녀는 영지에 갇혀 살아야 했다. 대범한 기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그후에는 괴로움을 달래는 태작 밖에 쓰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평민 출신에다 미망인인 아프라 벤 부인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펜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를 따르는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19세 기가 되어서도 여류작가는 몸을 숨기고 작품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들은 '자기 만의 방'이 없었다. 즉 마음의 자유를 갖는 데 필수조건의 하나인 물질적인 독립을 성취하 지 못했다.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프랑스 여성의 처지는 사교계의 발전과 그 지적 생활의 긴밀 한 결합으로 인해 이보다는 다소 유리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성들이 여성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일으켰고,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플라톤학파의 학설이 연애나 여성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만흥 문인들이 여성을 변호했다. '유덕한 귀부인의 방주'나 ' 귀부인 기사' 등이 간행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에라스무스(네덜란드 인문주의자, 1466~1 536)는 '작은 상원의원'에서, 코르넬리아를 통해 여성의 불만을 신랄하게 토로했다. "남자 는 폭군이에요... 남자는 우리를 장난감으로 취급하고... 우리를 세탁부나 부엌데기로만 알 고 있어요." 에라스무스는 여자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15세기의 철학자)는 '여성의 고귀성과 우수성에 대하여'라는 유 명한 저서에서 여성의 뛰어난 자질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논지는 유태 밀교의 낡은 논법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즉 이브는 생명을 뜻하고, 아담은 대지를 뜻한다. 여자는 남자 보다 나중에 지음을 받았으므로 남자보다 더 완벽하다. 여자는 낙원에서 태어났으나, 남자 는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물에 빠져도 떠오르지만, 남자는 가라앉는다. 여자는 사 람의 갈비뼈로 지음을 받았으며, 흙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 여자의 월경은 만병을 치료 한다. 이브는 모르고 잘못을 저질렀을 뿐 죄를 지은 것은 오히려 아담이다. 그래서 신은 남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신은 부활한 후에도 여자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여자가 남자보다 덕이 많다고 선언하고 여성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뛰어 난 부인"의 예를 든다. 이것은 이런 변호에 으레 뒤따르게 마련인 농지이다. 끝으로 그는 남성의 횡포를 공격한다. "모든 권리를 짓밟고, 본래의 평등을 무참히 침해하는 등 남성의 횡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자유를 여성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런데, 여자는 아기를 낳고, 두뇌도 남자에게 뒤떨 어지기는커녕 더욱 영리하다. 여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하느님 의 명령이나, 필연성,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관례나 교육, 노동, 그리고 주로 폭력과 압박에 의해서이다." 그는 남녀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여성이 존경받기를 원하고 있다. 이 저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여성 옹호론인 '난공불락의 요새' 나 플라톤풍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에로에의 '완전한 여자들'도 대성공이었다. 생 시몽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자, 1760~1825) 학설의 선구를 이룬 흥미 로운 책 속에서 포스텔은 인류 재생의 어머니인 새로운 이브의 도래를 예고하여, 그 여성 을 만났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은 죽었지만, 자기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앙리 2세의 딸)는 자신의 저서 '나의 식견'에서 보다 온건하게 여성 속에는 신성이 있다고 언명했다. 그러나 여성의 변호에 가장 주력한 작가는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프랑수아 1세의 여동 생, 문재로 알려졌으며 '엡타메롱'의 저자)로, 그녀는 방자한 행동에 반대하여 감상적 신비 주의와 오만하지 않은 정숙을 이상으로 내걸고 여성의 명예와 행복을 위해 결혼과 연애를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이에 대해 물론 여성의 적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아그 리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남녀의 논쟁' 속에는 중세의 낡은 논의가 반복된다. 라블레는 '제 3의 서'에서 마티외와 데샹의 전통을 이어가는 결혼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즐겼다. 그렇지 만 텔레므의 행복한 수도원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여성이었다. 반여성론은 1617년에 자크 올리비에의 '여성의 악과 결점의 알파벳'에 의해 다시 기세 를 올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새의 몸에 여성의 얼굴을 한 괴물(그것은 신화에 나오는 악 랄한 여자의 상징)의 손과 사치스러운 날개, 암탉처럼 집안 살림이 엉망이라는 표시로 암 탉의 다리를 하고 서 있다. 알파벳의 글자 하나하나에 그녀의 결점이 하나씩 쓰여 있다. 이번에도 낡은 노쟁을 재연시킨 것은 교회의 인사들이었다. 구르네 양은 '남녀평등론'으 로 이를 반박한다. 종교가들이 여성을 악평하기 위해 성 바울과 로마교회의 교부들과 복음 전도가의 말을 인용하는 동안에, '풍자적 시집과 작은 방' 같은 자유사상가의 문학이 여성 의 품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또한 마튀랭 레니에(17세기 초의 시인)와 그 일파 들의 풍자시에 무한한 주제를 제공했다.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여성 옹호론자들이 아그리 파의 주장을 다투어 받아들여 부연설명을 했다. 뒤 보스크 신부는 '정숙한 부인'에서 여자 에게도 교육을 받도록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아스트레'(오노레 위르페의 연애소설)을 비롯 하여 많은 연애문학이 단시와 14행시, 비가 등의 형식으로 여성의 장점을 찬양했다. 여성이 거둔 성곡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야기시켰다. 재원들(17세기의 여류문인들)은 세상의 반감을 사게 되고, '우스꽝스러운 재원들'이나 그후에 나온 '여학자 들'(모두 몰리에르의 희극)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여자의 적이 아니었다. 그 는 여자의 강제결혼은 맹렬히 공격했고, 처녀들을 위해 감정의 자유를 요구했으며, 아내를 위해서는 존경과 독립을 요구했다. 이와 반대로 보쉬에는 그의 설교에서 여자에게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초의 여자 (이브)는 아담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를테면, 남자의 축소판이었다. 두뇌도 크기에 비례했 다."고 설교했다. 여자를 공격하는 부알토(고전주의 문예비평가, '시학'의 저자)의 풍자시는 수사의 연습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프라동, 르냐르, 페로 등이 맹렬히 반격했다. 라 브뤼예르나 생 테브르몽도 여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시대에 가장 단호했던 페미니스트는 1673년에 데카르트(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 며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1596~1650)의 영향을 받아 '남녀평등론'을 저술한 풀랭 드 라 바르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남성은 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무슨 일에나 동성의 편의를 도모하고, 여성은 습관적으로 그 종속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자유도 없고, 교 육의 기회를 간진 적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업적으로 여자를 판단할 수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해부학상으로 차이는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남성 에게 유리하지는 않다. 풀랭 드 라 바르는 결론적으로 여자를 위해 교육을 제대로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퐁트넬은 여성을 두둔하여 '세계 복수론'을 썼다. 그리고 페늘롱(종교가, ' 텔레마크'의 저자)이 맹트농 부인과 플뢰리 신부를 따라. 자신의 교육 계획안에서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장세니슴파(17세기 프랑스의 얀센이 창시한 교의를 신봉하는 구 교의 일파. '포르 라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남. 파스칼도 이 교파에 속함)의 대학 교수 인 롤랭은 이와 반대로 여자들도 진지하게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에도 양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1744년 암스테르담에서 '여성의 영혼에 관한 논 설'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직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은 여자는 세상이 끝나 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때문에 지음을 받은 목적에 쓸모가 없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자의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극 단적인 주장은 하지 않았지만 루소(프랑스의 사상가, 1712~1778)도 이 점에서는 부르주 아의 대변자로서, 여자가 그 남편과 어머니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여성의 교육 은 모두 남성과 관련시켜 실시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양보하고, 남자와의 불공평을 참도록 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18세기의 민주적, 개인주의적인 이상은 여성에게 유리했다. 여자는 대다수의 사 상가들 눈에 강한 성(남성)과 동등한 인간적 존재로 비쳤다. 볼테르는 여자의 운명의 불공 평을 고발했다. 디드로는 여자의 열등성은 대부분 사회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여성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동정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모든 관습 중에서 법률의 가혹성이 여성을 적대시하며 자연의 가혹성과 결탁하고 있다. 여자는 저능아 취급을 당해 왔다." 몽테스키 외는 역설적으로 여자는 가정생활에서는 남자에게 복종해야겠지만, 모든 면에서 여자는 정 치적 활동에 관심을 갖게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가정의 주인이 되는 것은 비합리적이 고, 반자연적이다... 여자들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비합리적이지도 반자연적이지도 않 다." 엘베시우스(프랑스의 철학자, 진보적인 18세기 사상가, 1715~1771)는 여자의 열등 성은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달랑베르(프랑스의 철학자, 1717~17 83)도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시레 부인과 같은 여성의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경제적 인 여권론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여공의 비참한 생활에 분개하여 부인노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사람은 '파리 의 풍경'을 쓴 메르시에이다, 콩도르세(18세기 프랑스의 진보적 철학자, 수학자, 1743~1 793)는 여자가 정치활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남자를 대등하게 간주하 고, 종래의 비난에서 여자를 옹호했다. "여자는... 원래 공정한 감정을 지니지 못하여 양식 보다 감정에 따른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천성이 아니라 교 육과 사회생활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여자가 법률에 의해 억압받을수록 여자 의 세력은 위험성을 띠게 된다... 만일 여자가 자기 세력을 유지할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며 또 그것이 여자에게 자기를 지키고 압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 때, 그 세력은 자연히 감소되어갈 것이다." 대혁명(프랑스혁명)에 의해 여성의 처지가 크게 변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 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의 제도와 가치를 존 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혁명의 대부분은 남성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정체 동안에 근로계급의 여자가 여성으로서는 가장 독립적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자는 장사를 할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자기 직업을 자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리 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봉사, 세탁부, 접시닦이, 소매상 등으로 생산에 참가하여 가정 이나 소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물질적인 독립으로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서도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서민여성들은 외출을 하거나 술집에도 드나드는 등 거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편의 협력자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여자가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은 경제적 인 면이지, 성의 분야가 아니었다. 시골에서는 여자가 농사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하녀처럼 취급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이나 자녀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 지도 못하고, 남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하여 피로한 몸에 어머니로서의 부담까지 맡아야 했 다. 그러나 고대의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이처럼 일하는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 에 소중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남녀가 재산을 공유하고, 이해관계나 관심도 공통되었다. 여자는 가정에서 큰 권한을 가 지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은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인격적인 존재로 자기를 확립하고, 권 한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심과 굴종의 전통이 그녀들을 무겁게 짓눌러, 국회(귀족, 승려, 시민으로 구성된 삼부회의)의 기록에서 여성이 권리를 요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여성의 권리요구는 한정되어 있었다. 즉 "여자가 전문으로 하는 직업은 남자가 하지 못하 게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시위나 소란이 일어났을 때, 남자와 함께 행동한 여자 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르사유에 '빵장수 부부와 그 사환'(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왕비 및 왕자가 빵장수로 가장하여 도망치려고 한 것을 가르킴)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 구하러 간 것도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기획을 지휘한 것은 서민이 아니고, 또 그 성과를 차지한 것도 서민이 아니었다. 시민층의 여성 중에서 자유를 위해 열렬히 협력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롱랑 부인, 뤼실르 데물랭,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 등이 그들이다. 그중의 한 사람은 사태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즉 마라를 암살했을 대의 샤를로트 코르데의 경우가 그렇다. 여권론자들의 운동도 더러 있었다. 올랭프 르 구즈는 1789년에 '인권 선언'과 맞먹는 '여권 선언'을 제 출하고, 그중에서 그녀는 남성의 특권을 모두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1790년에는 '가엾은 자코트의 동의'를 비롯하여 유사한 고발문에서 같은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콩도 르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올랭프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 졌다. 그녀가 창간한 신문 '성급한 자'와 때를 같이하여 여러 가지 신문이 발간되었으나 오 래 가지는 못했다. 여성의 집회는 거의 모두 남성의 집회와 합병되거나 흡수되었다. 1793년 무월(프랑스 대혁명 당시 추분 후 30일부터 시작되는 공화력 제2월, 즉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28일에, 공화 혁명파의 부인협회장인 여배우 로즈 라콩브가 여 성 대표단을 이끌고 도의회에 나타났을 때, 쇼메트 의장은 성 바울과 성 토마스에게서 가 르침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발언을 했다. "여자는 언제부터 자기 성을 버리고, 남자가 되는 것이 허용되었는가? ... '자연'은 여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자식을 돌보고, 자질구레한 가사, 모성으로서의 여러 가지 마음씀, 이런 것이 당신들의 일이다." 여성은 도의회의 입장 이 금지되고, 정치수업을 하는 집회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1790년에 장자상속권과 남자의 특권이 폐지됨에 따라 남자와 여자는 상속에 관해서는 평등해졌다. 1792년에는 이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결혼의 엄한 속박이 완화되었 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승리에 불과했다. 부르주아의 여성들은 가정에 얽매여 있었으므 로, 여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여성은 권리에 눈뜬 독립된 계급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는 기생적인 생활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참 여를 할 만한 여자들은 계급 때문에 지장을 받고, 한편 행동적인 계급에 속하는 여자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그늘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경제적인 실권이 노동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일하는 여성은 지금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처럼 기생적이었던 여성이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능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혁명 후의 혼란기에 여성은 무정부주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나 사회질서가 회 복되자 다시 엄한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근대 프랑스 여성에게 불행한 일은, 여자에 관한 법률이 군사독재시대에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세기에 걸쳐서 여성의 운명을 결 정했던 '나폴레옹법전'은 여성해방을 크게 지연시켰다. 군인이 으레 그렇듯이 나폴레옹도 여자에게 모성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후계자인 그는 사회구 조를 파괴하면서까지 아내의 지위보다 어머니의 지위를 존중할 의사가 없어, 사생아의 입 적을 금하고, 사생아의 어머니와 사생아의 신분을 가혹하게 제한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식 으로 결혼한 아내의 신분이 어머니로서의 위엄에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에도 봉건적인 모순이 남아 있었다. 딸과 아내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고, 이 때문에 변 호사나 후견인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독신녀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게 되었 다. 이에 비해 결혼에는 옛날부터 유지되어온 부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간통했을 때는 징역형 에 처하거나 이혼할 수 있었다. 간통현장에서 살해해도 법이 용서했다. 이와는 달리 남편 은 첩을 자기 집에 끌여들였을 때에만 벌금이 부과되었고, 이런 경우에만 아내는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부부의 거처를 결정하는 것도, 자녀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큰 권한을 갖 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어떤 장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빚을 얻으려면 남편의 허가 를 받아야 했다. 남편은 아내의 신분과 그 재산에 대해서도 부권을 행사했다. 19세기 전반을 통하여 법률은 이 엄격한 '나폴레옹법전'을 더욱 강화하였고, 여자에게서 모든 양도권을 박탈했다. 1826년 왕정이 복고되자 이혼을 폐지하고, 1848년의 입법의회 도 그 부활을 거부했다. 이혼의 자유는 1884년에야 겨우 부활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 기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이 시기처럼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이 강화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18세기부터 이어받은 정신의 자유도 가정의 도덕을 파괴할 수 없었으 며, 그것은 19세기 초에 조세프 드 메스트르나 보날드(두 사람 모두 완고한 보수주의자) 와 같은 반동사상가들이 정한 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신의 뜻에 따라 질서의 가치를 세우고 엄격한 계급사회를 요구했다. 사회에서 가장 작은 세포인 가정은, 사회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마치 아내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왕권과 대신 의 관계는 대신과 백성의 관계와 같다."고 보날드는 말하고 있다. 이혼은 물론 금지되고, 아내는 가정에 얽매이게 된다. 보날드는 또 "여자는 가정에 속해 있고, 정치적 사회에는 속해 있지 않다. 자연은 여자를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지었으며, 공무에 종사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19세기 중엽 르 폴레가 가족에 대해 정의했을 때도 이런 계 급제도를 존중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오귀스트 콩트(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1798~1857)도 남녀 사이에 계급을 둘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양성 사이에는 "심신 양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모든 종류의 동물, 특히 인간의 경우에 양성을 깊이 갈라놓고 있다." 여자 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는 것'을 뜻하며, 이 때문에 '인류의 완성형'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다. 이 생물학적 소아의 상태는 지적인 취약성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적인 존 재에게 적합한 역할은 아내나 주부이며, 여자는 남자와 경쟁할 수 없다. "지도도 교육도 여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보날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가정에 매여 있고, 이 소규모의 사회(가정)는 아버지가 통치한다. 여자에게는 가정을 통치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다만 관리하 고 조언을 할 뿐이다. 여자에 대한 교육은 제한해야 한다. "여자와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그럴 엄두도 내지 않겠지만, 저술가가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콩트는 사회의 발달에 따라 가정 밖에서의 여자의 노동은 폐지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저 작의 제2부에서 콩트는 클로틸드 드 보(콩트의 애인)에 대한 사랑의 영향을 받아, 여자를 거의 신성시하고 위대한 존재로 추어세우고 있다. '인류'의 제전에서 실증주의 종교가 민중 에게 경배하게 하려는 대상은 여성이다. 그러나 여자가 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적인 면뿐이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사랑한다. 이런 점에서, 즉 순수성과 사랑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를 능가한다. 여자는 남자 보다 훨씬 더한 타애주의자이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체계에서 보면, 여자는 역시 가정에 갇혀 있게 된다. 이혼은 금지되고, 과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아무 권리를 갖지 못한다. 여자는 주부 겸 교육자에 불과하다. 발자크(프랑스의 소설가,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1799~1850)는 이보다 더욱 노골적으 로 이와 동일한 이상을 말했다. "여자의 운명과 그 유일한 명예는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 게 하는 것이다." 하고 그는 '결혼의 생리학'에서 쓰고 있다. "아내는 계약에 의해 손에 넣 는 재산, 즉 동산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소유하면 하나의 자격이 되니까. 요컨대 아내는 엄 밀히 말해서 남편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그는 여기서 부르주아지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 다. 부르주아지는 18세기의 자유와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진보적인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점점 반여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발자크는 '결혼의 생리학'의 첫머리에서, 이 애정을 무시 한 결혼제도가 여성을 당연히 간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나서, 남 편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아내를 완전히 억압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자에 게는 교육이나 교양이나 개성을 신장시키는 것은 일체 금한 채 강제로 불편한 옷을 입히 고, 영양부족이 될 만큼 절식을 장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이 프로그램을 충실히 실행 에 옮겼다. 그리하여 여자는 부엌과 가사에 얽매이고 품행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독립적 인 일은 제지하는 번거로운 예의범절에 매여 살아야 한다. 그 보수로서 여성은 존경을 받 고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아내란 때로는 왕좌에 앉을 줄도 아는 노예이다." 하고 발자 크는 말했다. 집착하지 않아도 좋은 상황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상석을 양보하거나 굽실거 린다. 남자들은 원시사회처럼 여자에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게 하는 대신 힘든 고역과 걱정 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결국 여자를 모든 책임으로부터 행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기 처지의 안이함에 속아넘어가, 남편이 원하는 어머니나 주부의 역 할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상 부르주아 여성의 대부분은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여성은 그 교육이나 기생적인 입장 때문에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의 권 리를 요구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며, 설사 그런 대담한 여자가 나타나더라도 거의 후원을 받지 못한다. "사슬에 매여 있는 것보다 사슬에 매어두는 것이 한결 쉬운 일이다." 하고 버 나드 쇼(영국의 극작가. 비평가, 1856~1950)는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 여성은 계급의 특권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사슬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는 여성해방이 부르주아 사회를 약화시킨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남자에게서 해방되면 노동 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사유재산에 대해 남편의 권리에 부수된 권리밖에 갖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만일 이 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그것을 더욱 개 탄할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노동계급의 여성과는 연대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직 물여공보다는 자기 남편에게 더욱 친근감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이해를 자기라는 이 해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완강한 저항도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기계주의의 출현은 토지 라는 부동산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노동계급의 해방과 함께 여성해방을 가져왔다. 모든 사 회주의는 여자를 가정에서 빼앗아버림으로써 그 해방을 쉽게 한다. 예컨대 공유재산제를 꿈꾸어온 플라톤은, 여자들에게 스파르타에서 향유하는 것과 같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다. 생 시몽이나 푸리에 카베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더불어 '자유여성'을 공상하게 되었다. 만인의 협력이라는 생시몽의 사상은, 모든 노예제도, 즉 노동자의 노예제도와 여자의 노예 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은 인간이라는 견지에서 생 시몽을 비롯하여 그 후의 르루, 페코, 카르노 등이 여성의 해방을 요구했으나 불행하게도 이 합리적인 이론은 이 학파 안에서 득세하지 못한 채 전반적으로 여성다움 때문에 여성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자에도 불리한 방법이다. 사회의 단위는 남자와 여자라는 구실로, 앙팡탱은 목사 2인조 중의 한 사람을 여자로 하 여, 이 한 쌍을 부부목사라고 부르려고 했다. 그는 여성 구세주에 의해 보다 좋은 세상이 도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성친구' 일행은 이 여성 구세주를 찾아 이집트에 가기도 했 다. 그는 여성의 해방과 육체의 복권을 혼동한 푸리에의 영향을 받고 있다. 푸리에는 정열 의 욕구에 따르는 자유를 만인을 위해 요구하여 결혼을 폐지하고 연애를 대치하려고 했다. 여성을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연애지능체로 보았던 것이다. 카베도 공상적 공산주의에 의해 남녀의 완전한 평등이 실현될 것을 약속했으나 여자와 정치활동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사실 생 시몽파의 운동에서는 여자가 별로 큰 역할을 차지하지 못했다. '신여성'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단기간 간행을 계속한 클레르 바자르만 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정도이다. 그후에 많은 군소 잡지들이 발간되었으나 그 주 장은 모두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여성의 해방보다는 여성의 교육을 요구했다. 카르노와 그 후의 르구베가 강조한 것도 여성교육의 향상에 대해서였다. '협력자로서, 정신을 혁신하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관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일관되어, 빅토르 위고(프랑스의 소설 가, 시인, '레미제라블'의 저자, 1802~1885)의 작품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남성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남성과 대립시켜 직관이나 감성을 인정하고 이성은 인정치 않는 이런 가르침은 오히려 여성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여자는 지지자들의 졸렬함에 의해서도 품위를 떨어뜨리게 된다. 1848년에는 여 자들이 집회를 열고 신문을 발간했다. 외제니 니부아예는 '여성의 소리'라는 신문을 발간하 고 카베도이에 협력했다. 여성 대표단은 파리시청에 몰려가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 으나,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1849년에는 잔 드쿠앵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선거운 동을 전개했으나 웃음거리가 되었다. '베쉬비엔' 운동이나, 이상한 복장을 하고 활보하던 불르메리스트의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의 가장 지적인 여자들은 이런 운동을 외면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스탈 부인은 동료인 여자의 입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장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조르주 상드는 자유연애를 위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여성의 목소리'에 기고하는 것은 거절했다. 그녀의 요구는 특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플로라 트리스 탕은 여성에 의한 민중의 해방을 믿고 있었으나 그녀의 진심은 여성의 해방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해방에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 스테론이나 지라르댕 부인은 여권운동에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전개된 개혁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평등 속에 정의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여권운동에도 유리했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특이한 예외가 있다. 프루동(프랑스의 사회주 의자, 1809~1865)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농민 출신이기 때문이겠지만 생 시몽파의 신비주의에 맹렬히 반대하여 약간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여성을 가정에 가둬두려고 했 다. '주부냐, 창녀냐'의 양자택일 속에 여성을 몰아넣으려고 했다. 그때까지 여권운동에 대 한 공격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사회주의자들과 싸 우면서 '샤리바리'(1832년에 창간된 풍자파 잡지)에게 야유의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프루동은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그는 르루가 주최한 사 회주의 여성대회에 이의를 제기하여 잔 드쿠앵을 공격했다. '정의'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그 는 "여자는 남자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개인으로서 그는 남자밖에 인정 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도 평등을 전제로 한 협력은 없고, 단지 결합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 그 첫째 이유는,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3분의 2이다. 또한 여성은 지능과 정서에서 같은 비율로 남성에게 뒤떨어진다. 그러므로 합계하면 여자 의 가치는 3X3X3에 대해 2X2X2의 비율, 즉 27분의 8이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여성, 즉 아당 부인(여류작가)이 단호하게 대응하고 데리쿠르부인이 소극적으 로 대응한 데 대해 프루동은 '창녀 정치, 근래의 여성'에서 반박했다. 그러나 그도 반여성 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노예이고 거울과 같은 '착실한 여성'에 대해서는 열렬한 찬사 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찬사와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아내조차 자신이 이상 적이라고 찬사한 여자의 생활을 조금도 행복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포루동 부인이 남긴 편지는 오직 비탄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현실의 상황을 전진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희미하게 반영할 뿐이 었다. 여성은 가정에서 나와 공장에서 생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이후로 잃어왔던 경제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런 일대 변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계였다. 왜냐하 면 남녀 노동자 사이의 체력 차이는 거의 상실되기 때문이다. 공장의 급속한 약진은 남자 노동자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자의 협력이 필요했 다. 이것이 19세기 여성의 운명을 변혁하여, 여자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일대 혁명이 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중대한 의미를 인정하여,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에 의해 필연적 으로 유도되는 해방을 여성들에게 약속했다. "여성과 노동자는 모두 사실상 피압박자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베벨은 말했다. 그리고 양자가 모두 산업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그 생산 노동이 갖는 중요성 덕분에 압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엥겔스는 여성의 신분이 사유재산의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권제 도를 가부장제도로 바꾸어 여성은 세습재산에 예속시킨 불행한 과거가 있었으나, 산업혁명 은 이 실추를 회복시키고 나아가 여성의 해방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 다. "여성이 사회적인 규모로 생산에 참가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극히 미미한 정도를 차지 할 때, 여성의 해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여성의 노동을 대규모로 허 용할 뿐 아니라, 정식으로 이것을 요구하는 근대의 대공업에 의해서이다." 19세기 초에는, 여자는 남성 노동자보다 더욱 비참하게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가내공업을 '스 웨팅 시스템'(땀투성의 구조)이라 불렀다. 쉴 사이 없이 일해도, 여공의 임금은 필수품을 살 수 있는 액수가 되지 못했다. 쥘 시몽은 '여공'에서, 더욱 보수적인 르루아 볼리외는 '1 9세기의 부인 노동'에서, 지독한 혹사의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후자는 2만 명 이상의 프 랑스 여공이 하루에 50상팀도 못 되는 임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여공들이 서둘러 공장 을 옮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장에서 나오면 바느질과 빨래, 집안청소 등 어느 일이고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싸구려 노예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스나 양품, 잡화의 생산까지도 공장이 빼앗아가버렸다. 그 대신에 무명이나 양모, 견직공업에서 직공을 대량으로 채용했 다. 여자는 특히 제사와 방직공장에서 많이 채용했다. 공장주는 대개 남자보다 여자 직공 을 선호했다. "여공이 일을 잘하고 임금이 싸다." 이 악랄한 문구는 여성노동의 비극을 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는 노동에 의해 인간으로서 존중되었으나, 그것은 무척 고달프고 긴 시간의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제사나 방적공장은 열악한 위생조건하에서 운영되었다. 블랑카는 "리옹의 장식줄 제조공장에서 일부 여공들은 거의 벨트에 매달린 채 양손과 양발 을 동시에 움직이면서 일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1831년에 견직물 여름에는 새벽 3시부터 밤중까지, 겨울에는 5시부터 밤 11시까지, 그 러니까 하루에 17시간씩 일했다. "그녀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불결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 다. 이런 처녀들의 절반은 견습기간이 끝나기 전에 폐병에 걸린다. 고통을 호소하면 불평 분자라고 비난을 받는다."하고 노르베르 트뤼캥은 말하고 있다. (트뤼갱의 '어떤 프롤레타 리아의 수기와 모험담', 돌레앙의 '노동운동사' 제1권에서 인용) 게다가 감독은 젊은 여공 들을 욕보이기도 한다. "감독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불쾌한 수단을 사용했 다. 즉 빈곤과 굶주림을 이용했다."고 '리옹 사건의 진상'의 익명의 저자는 쓰고 있다. 여자는 농사와 공장일을 겸하기도 했다. 악랄한 착취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주에서 "공장주인 E씨가 내게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는 이 방적기계에 여자만 채용하며, 특히 결 혼한 여자, 그중에서도 가정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여자를 채용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런 여성은 독신녀보다 열심이고, 고분고분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껏 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자의 장점이 역으로 이용되어, 여자의 천성인 도덕적인 부드러운 요소가 그녀를 예속시키고 괴롭히는 수단이 된다."고 쓰고 있다. '자본론'을 요약 하고 베벨을 부연하여 데르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의 여자는 거의가 애완동물이나 노역동물이다.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남자에 의해 부양을 받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 할 때에도 남자에게 부양된다." 여공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시스몽디와 블랑키는 여성이 공장에 다니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원인의 일부는, 여성은 처 음에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 조합을 조직할 줄 모른 데 있었다. 여성의 조합이 처음 결 성된 것은 1848년으로, 처음에는 생산조합이었다. 이 운동의 발전은 다음의 일람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대단히 느린 속도로 발전하였다. 1905년 조합원 총수 781,392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69,405명 1905년 조합원 총수 957,120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88,906명 1912년 조합원 총수 1,064,413명에 대하여 여자의 수는 92,336명 1920년에는 1,580,967명의 노동자 중에 조합에 참가한 여자 노동자 및 근무자의 수는 239,016명이고 농사일을 하는 여자 중에서는 1,083,957명 중에 여자 조합원 수는 불과 36,193명에 불과하다. 즉 조합원 노동자의 총수 3,076,585명 중에 여자 조합원은 292,0 00명이 된다. 여성들에게 새로 열린 가능성을 앞에 두고 그녀들이 이처럼 위축되어 움직 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체념이나 복종의 전통과 연대책임 및 집단의식의 결여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여자의 노동은 오랫동안 좀처럼 법규화되지 못했다. 법률이 간섭하기 위해서는, 1874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에도 제정시대에 여러 차례 여성운동이 전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에 관한 규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미성년 여자의 야 간 작업을 금하고, 일요일과 일반 공휴일에 휴가를 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하루 노동시 간의 제한을 12시간으로 정한 것과 21세 이상의 여자에 대하여는, 광산이나 채석장에서의 갱내 작업을 금하는 것이었다. 여자 노동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892년 11월 2일로, 여자의 야간작업을 금하고 공장에서의 하루의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의 모든 위법행위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1900년에는 하루의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제한되었다. 1905년에 1주일마다 하루의 휴가를 의무적으로 주게 되었다. 1907년, 여자 노동자는 자기수입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1909년에 임산부에게 유급휴가가 보장되고, 1911년에는 1892년의 규정이 강제적인 효력을 발생한다. 1913년에는 분만 전후에 여자의 휴가에 관한 시행세칙이 마련 되고, 위험하거나 과중한 일이 금지되었다. 이와 같이 서서히 사회법규가 제정되어, 여자의 노동은 위생상의 보장까지 지켜지게 되 었다. 예컨대 여자 판매원에게는 의자를 제공해야 하고, 점포에 오래 세워두는 것이 금지 되었다. F. I. T(국제 노동사무국)는 출산시의 휴가를 비롯하여 여자 노동의 위생상의 여 러 가지 조건에 관한 국제거인 규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여자 노동자의 체념적인 무기력의 두 번째 결과는, 그녀들이 싼 임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의 임금이 이처럼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주장 이 다양하다. 즉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여자의 요구가 남자의 요구보다 약했다 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며, 그것은 오히려 나중에 첨가한 해석에 불과하다. 여자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던 것처럼, 착취자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들은 노임을 지불하지 않고 제품을 시장에 내보내는 형무소와 가격경쟁을 해야 했으며, 또 여자 들끼리 일자리를 놓고 경합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자는 부부공동체가 존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남편의 가정에 매여있는 여성은 대개 집안살림에 용돈을 보태는 정도로 만족한다. 그녀는 가정 밖에서 일하지만, 가정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 노동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수입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가 요구하는 보수보다 적게 받아도 만족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저임금으로 만족하므로, 여자 의 보수는 물론 고용주에게 가장 유리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프랑스에서 1889년에서 1893년에 걸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남자와 같은 하루의 취업시간에 대하여, 여자 노동자는 남자 봉급의 절반 밖에 받지 못했다. 1908년의 조사에 의하면 여자 가내노동자의 최고임금은 1시간에 20상팀을 초과하지 못하고 최하는 5상팀까 지 있었다. 이처럼 착취를 당하는 여자는 얻어먹지 못하고 보호자가 없이는 살아갈수 없었 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1918년에는, 여자는 남자의 절반밖에 보수를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탄갱 속에서 캐내는 같은 양의 석탄에 대해 여자는 남자의 노임보다 2 5%가 적었다. 1911년에서 1943년에 걸쳐서 프랑스에서 여자의 봉급은 남자에 비해 급 속히 상승되었으나, 여전히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고용주들은 여자가 낮은 임금을 감수한다는 이유로 선호했는데 이 때문에 남성 노동자 측으로부터 항의가 제기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여성의 이해 사이에는, 베벨이나 엥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연대관계는 없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의 흑인 의 임금문제와 비슷하다. 어떤 사회의 피압박 소수자들은 그들이 소속된 계급 전체에 대한 무기로 압박자에 의해 이용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피압박 소수자는 적으로 보인다. 흑인과 백인, 여자 노동자의 남자 노동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조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남자 노동자가 그 값싼 경쟁자에게 위협을 느껴 서로 겨루게 된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여성이 조합을 결성했을 때, 비로소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동시에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의 진부는 계속되었다. 1900년에 프랑 스에서는 옷이나 피혁제품, 장례용, 가방, 유리제품이나 파리로 보내는 일용품을 만들고 있 는 가내 여공의 수는 90만 명이나 되었으나, 이 수는 그후에 크게 줄어들었다. 1906년에 는 일할 수 있는 나이(18세에서 60세까지)에 있는 여성의 42%가 농업, 공업, 상업, 은행, 보험회사, 그밖의 자유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동향은 1914년에서 18년에 걸친 인 적 자원의 위기와 세계대전의 위기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촉진되었다. 하류 부르주아지나 중류 부르주아지는 이 움직임을 따르려고 결심하고, 여성들도 자유직업에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최신 조사의 하나에 의하면, 18세에서 60세까지의 여성 중에 프랑스에서는 약 42% 핀란드에서는 37%, 독일에서는 34.2%, 인도에스는 27.7%, 영국에서는 26.9%, 네덜란드에서는 19.2%, 미국에서는 17.7%가 생산활동을 하는 인구였다. 다만 프랑스와 인도의 경우에 숫자가 이처럼 올라간 것은 농업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농민을 제외하면 프 랑스에서는 1940년에는 50만 명의 고용주, 1백만 명의 여자 종업원, 2백만 명의 노동자, 1백50만 명의 여자인부 혹은 실업자로 되어 있다. 여공 중에는 65만 명의 가내 여공이 있 다. 120만 명이 가공공업에서 일하고, 그중에서 44만 명은 섬유공업에서 31만5천명은 의 복공장에서, 38만 명은 재봉공으로 가내에서 일하고 있다. 상업, 자유직업, 공무원의 수는 프랑스, 영국, 미국이 거의 비슷하다. 여자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하나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생식의 역할과 생산업 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여자가 가사에만 종사하고 세계의 건설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여자의 고유한 생식기능 때문이었다. 동물의 암놈에게는 주기적인 발정기가 있어서 암놈의 체력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 은 적령기에서 갱년기까지 여성의 수태능력을 제한하지 않고 있다. 문명에 의해 조기의 교 전을 금지하기도 하고, 임신과 임신 사이에 최소한 2년의 휴식을 여자에게 제공하도록 규 정한 인도의 한 부족의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러 세계를 두고 여성의 임신은 조절 되지 않았다. 이미 고대부터 주로 여자들이 사용한 정제나 좌약, 질전 등의 피임방법이 있었으나, 이 것은 창녀들이나 의사들의 비밀에 속해 있었다. 풍자시인들로부터 불임을 비난받은 퇴폐기의 로마의 여성들도 아마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는 피임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18세기까지 그 흔적을 찾 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많은 여성들이 임신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바람기가 있는 여자들도 방종한 연애의 대가로 자주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시대에 따 라서는 인구를 줄일 필요를 통감하기 했으나 동시에 국가는 국력의 쇠퇴를 두려워했다. 위 기나 빈궁한 시기에는 독신자의 결혼연령이 늦어져 자연히 출산율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역시 젊어서 결혼한 여자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만큼 낳은 것이었으며, 유 아의 사망만이 살아 있는 아기의 수를 줄이고 있었다. 이미 17세기의 퓌르 신부(1656년, ' 프레스외'에서)는 여자들의 운명인 '사랑의 혹'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그리고 세비네 부인 (17세기의 여류문인)은 자기 딸에게 빈번한 임신을 피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맬더스주의적인 경향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먼저 부유층이, 이어서 국민 전체가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기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합리 적이라고 생각하여, 피임의 수단이 풍속에 도입되었다. 1778년 사회통계학자 모로는 이렇 게 쓰고 있다. "종의 번식을 낡은 시대의 함정으로 보는 것은 상류계급의 여성들만이 아니 다. 인간 이외에는 어떤 동물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 혐오스러운 비밀은 시골에도 진 출했다.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자연을 속이고 있다" '중절성교'의 습관이 먼저 부르주아자에 게, 이어서 시골사람이나 노동자에게 퍼졌다. 옛날부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쓰여온 콘돔 은 피임기구가 되고, 1840년경에 고무가 발견된 후에 특히 널리 보급되었다. 앵글로색슨 계의 여러 나라에서는 '산아제한'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전에는 불가능했던 두 가지 기능, 즉, 성적 기능과 번식 기능을 분리시킬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발견되었다. 오스트리아 반 의 의학계의 연구는 수태작과 거기에 합당한 여러 가지 조건을 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동 시에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암시했다. 프랑스에서는 피임의 선전이나 페서리와 질전 등의 판매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아제한'은 널리 보급되었다. 낙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법률에 의해 공공연히 인정하기는 않았다. 로마법은 태아의 생 명에 대해 특별한 보호를 하지 않았으며, 한 인간으로 보지않고 모체의 일부로 간주했다. "아기는 태어나기 전에는 여자의 일부, 즉 내장의 일종이다" 쇠퇴기에는 낙태를 정상적인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입법자는 출산의 장려를 원할 때에도 낙태를 굳이 금지하려고 하지 는 않았다. 아내가 남편의 의사를 어기고 출산을 거부했을 때에는, 남편은 아내를 벌할 수 있었으나 그 경우에 죄가 되는 것은 아내의 불복종이었다. 동유럽이나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명 전반에 걸쳐 낙태는 법률에 의해 허용되었다. 기독교는 태아에게 혼을 부여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도덕관념을 뒤집어놓았다. 그후로 낙태는 태아 자신에 대한 범죄가 되었다. "자기가 낳을 수 있는 수의 아기를 낳지 않는 여 성은 모두 같은 수의 살인을 범하는 것이 된다. 임신한 후에 자기 몸에 위해를 가하는 여 성도 마찬가지다."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다. 비잔틴에서 낙태는 단기간의 금 고형에 처할 뿐이었다. 영아살해를 실천했던 야만족(여기서는 로마인 이외의 민족)사이에 서는, 낙태는 어머니의 의사를 거슬러 폭력으로 무리하게 했을 경우에만 처벌되었다. 그럴 경우에는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 보상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회는 이 '살인죄'에 대하여 태아의 추정나이를 불문하고 가장 엄한 처벌을 규정했다. 여기서 끝없는 의론의 표적이 된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어느 시 기에 혼이 육체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성 토마스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그 시기를 남아의 경우는 40일째경 여자는 80일째경으로 잡고 있다. 그때 혼이 들어간 태아 와 혼이 들어가지 않은 태아 사이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중세기의 회죄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임산부가 그 태아를 45일 이전에 지웠을 때 그 여자는 1년의 회죄를 받게 된다. 60일 이 되었을 때에는 3년 그리고 그 태아에게 혼이 들어 있을 때에는 살인자로 취급해야 한 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단서를 달고 있다. "기르기 어려워 태아를 지우는 가난한 여자와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지우는 여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556년 앙리 2세는 임신의 은닉에 관해 유명한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에는 단순한 은닉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 낙태에 같은 죄가 적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 다. 사실 이 칙령은 영아의 살해를 금하려는 것이 취지였으나, 이 칙령을 빙자하여 낙태의 주범과 방조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혼이 들어간 태아와 들어가지 않은 태아의 차별 은 18세기경에 없어졌다.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벡카리아는 아기를 갖는 것을 거부하 는 여성을 변호하고 있다. 1791년의 법전은 이런 여성을 용서하고 있으나, 그 공범자는 ' 20년의 쇠사슬'로 처벌하고 있다. 낙태가 살인이라는 사고방식은 18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1810년의 법률은 낙태자와 그 방조자에게 금고와 징역형 에 청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산모의 생명을 구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의 사들은 자주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 법률이 너무 엄격하여 배심원들은 오히려 그 세 기 말에는 이 법률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범인이 체포된 경우는 극히 드물고, 체포되어 도 8할 가량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3년에는 다시 새로운 법규가 제정되어, 수술의 방조자 및 시술자에게 징역형을 가했 다. 그러나 그 임산부에게는 금고나 벌금만 부과했다. 1939년에 제정된 새 법령은 특히 낙태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여, 집행유예의 은전은 일체 베풀지 않기로 했다. 1941년에는 법률에 의해 낙태는 국가치안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낙태를 경범죄로 취급했다. 다만 영국에서는 금고나 징역으로 다스려 지는 중죄였다. 전반적으로 보면 법률이나 법정은 낙태한 여자에 대하여는 그 방조자들보 다 훨씬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엄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 다. 1917년에 공포된 교회법의 조항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낙태를 하려는 자가 한 번이라도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산모도 예외 없이 무선고 파문을 받는다." 이유는 일체 참작하지 않는다. 산모에게 미칠 죽음의 위험도 마찬가지이다. 교황은 다시 최근에도 어머 니의 생명과 아기의 생명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전자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선 언하고 있다. 산모는 세례를 받았으므로 하늘나라에 갈수 있지만 - 이상하게도 지옥은 전 혀 안중에 없다 - 태아 쪽은 영원히 해소(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기가 가는 곳)에 가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 소련에서는 1936년 전에 낙태가 공공연히 인정되었 는데 이것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법률이 금하는 여러 나라에서 낙태의 사례는 상당한 수에 이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그 수를 80만에서 100만 - 즉 출산 수와 같은 수 - 으로 추산하고 낙태하는 여자의 3분의 2는 모두 한두 자녀를 두고 있는 기혼녀이다. 편견이나 반대나 낡은 도덕의 잔재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개인에 의해 통제된 출산에의 이행이 자유출산으로 실현된 것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산부인과 의술 의 발달은 출산의 위험을 크게 감소시키고, 분만의 고통을 점점 해소시키고 있다. 최근 - 1949년 3월 - 에 영국에서는 일종의 마취법을 반드시 실시할 것을 법령으로 정하고 있 다. 이 방법은 미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으며, 프랑스에서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인공수정에 의해 생식기능도 제어할 수 있는 진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변화는 특히 여성에게는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여성은 임신의 횟수를 줄여, 그 노예가 되는 대신 에 그것을 자기 생활에 조화시킬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여성이 자연으로부터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 육체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식에의 굴종에서 거 의 벗어나 경제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자기의 전인격을 손에 넣게 되었다. 생산에의 참가와 생식에의 굴종에서 해방된 이 두 인자의 합류에서 여성의 처지가 크게 진화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엥겔스가 예언한 것처럼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인 신분은 필 연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는 콩도르세에 의하여, 영국에서는 매리 울스톤크 라프트의 저서 '여권옹호'에서 발단되어, 19세기 초에 생 시몽파가 이를 계승한 여권운동 은 그 구체적인 기반이 결여되어 있는 동안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여성 의 권리요구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공업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부동산은 동산에 밀려나 가족집 단 단위의 원칙은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가동자본의 소유자는 전과 같이 재산에 소유되는 대신에, 일방적으로 그것을 소유하여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가 실질적으로 남편에게 결합된 것은 세습재산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세습재산이 폐지되면 부부는 이제 1대 1이 되며, 자식도 이해의 견고성에 필 적할 만큼 견고한 유대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집단 대신 개인이 확립된다. 이 진보는 자본주의의 근대적인 형태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미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미국에서는 이 혼이 성행하고 남편과 아내는 벌써 잠정적인 결합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농촌 인구가 주축을 이루고, '나폴레옹법전'에 의해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후견 아래 놓 여 있는 프랑스에서 이 진보는 지지부진하다. 1884년에는 이혼제가 제정되어, 남편이 부 정을 저질렀을 때에는 아내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형법에서 남녀의 차 별은 여전히 유지되어, 아내가 범했을 경우에만 부정이 인정되었다. 후견의 권리는 1907 년에도 조건부로 인정되어 1917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극복되었다. 1912년에 사생아를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게 하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의 신분이 개정되기 위해서는 1938년과 194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해에 여성에게 복종의 의무가 폐지되었 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일가의 장이며, 그가 주거를 결정한다. 그러나 아내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남편의 선택에 반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내의 능력은 증대되었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은 충분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 권리는 결혼의 계약과 법률에 의 해서만 제한을 받게 된다."는 애매한 문구 속에서, 그 조항의 후반은 전반을 인정하지 않 고 있다. 부부의 평등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치적인 권리의 획득은 프랑스나 영국.미국에서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다. 1867년 에 스튜어트 밀(19세기 영국의 철학자.경제학자)은 영국 의회에 대하여, 그때까지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없는 부인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최초의 변론을 했다. 그는 자기 저서 속에서 가정과 사회에서의 남녀평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법의 이름으로 여성을 남성 에게 종속시키고 있는 사회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 막는 주요한 장해의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완전한 평등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여성들은 포세트 부인의 지도하에 정치적으로 단합한다. 프랑스의 여성 들은 마리아 데라스므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녀는 1866년에서 1871년에 걸쳐서 여러 차 례의 공개강연을 통하여 여성의 처치를 연구하고, 부정한 아내에게 배반을 당할 남편에게 "그 여자를 살려두지 말자."고 충고한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춘 희'의 저자, 1824 ~ 1895)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진정한 여권론자는 레옹 리쉬 에였다. 그는 1869년에 '여자의 권리'를 창간하고, 1878년에 열린 여권국제회의를 주선했 다. 그러나 투표권 문제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한 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그 쳤다. 30년 동안 프랑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은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성의 손에 의해 투표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위베르틴 오클레르였다. 그녀는 '여성투표'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여성시민'이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러자 그녀의 영향을 받아 많은 협회가 설립되었으나 그 협회들의 활동은 별다 른 성과가 없었다. 여권운동의 이런 약점은 내분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자 는 여자로서의 연대성을 갖지 못하고 처음부터 각자의 계급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 르주아 여성의 이해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이해가 일치하지 못했다. 혁명파의 여권론은 생 시몽파나 마르크스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루이 미셸이라는 한 여성이 여권운 동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녀의 주장은 이 운동이 계급투쟁을 위해 총동원되어 야 하는 힘을 옆길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결국 그녀는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의 폐지로 여성의 처자는 자연히 개선된다고 주장했다. 1879년에 사회주의 연맹이 남녀평등을 제창한 후로, 여권운동과 사회주의의 제휴를 부 정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 대신에 모든 노동자의 해방과 더불어 자유를 기대하게 되 어,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해는 2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부르주아 여성은 현 실 그대로의 사회에서 새로운 권리를 요구했다. 그녀들은 혁명가가 될 의사는 없고 단지 술, 애로문학, 매음을 금지하는 풍속개혁을 시도하는 데 그쳤다. 1892년에 '여권회의'가 열려 운동을 전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897년에는 재판에 여성이 증 인으로 설 수 있는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다만 변호사를 개업하려고 했던 여성 법 학박사들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1898년에는, 여자는 상사재판소에서 선거권을 얻게 되고, 노동 참의회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얻었으며, 빈민구제 참의회 및 미술학교에의 입학 허가를 얻게 되었다. 1900년에는 여권론자들이 새 회의를 소집했으나, 대단한 성과는 얻 지 못했다. 그런데 1901년에 비비아니가 비로소 여성투표권 문제를 의회에 제안했다. 다만 그는 투 표권을 독신여성과 이혼녀에게만 한정시켰다. 이 무렵부터 여권운동은 힘을 얻게 된다. 19 09년에는 여성투표권을 위한 '프랑스 연맹'이 설립되어 브륀슈위그 부인의 지도하에, 강연, 집회, 회의, 시위 등의 운동을 일으켰다. 1909년에는 뷔송이 지방의회의 선거권을 여성에 게 부여하는 뒤소수아의 제안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토마가 여성투표권 을 위한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1918년에 되풀이되고, 이듬해에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1922년에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 경위는 상당히 복잡하다. 혁명적 여권주의와 브륀슈위 그 부인의 이른바 독립 여권주의 이외에도 기독교적 여권주의가 가세하여,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1919년에 여성투표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보드리앙르 대주교와 세르티앙주 신부도 이 노선에 따라 열심히 선전했다. 사실 카톨릭 신자들은 프랑스 여성이 믿음이 독실한 보수적이며 종교적인 요소를 대표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급진파들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들(급진파) 이 반대한 것은, 여성에게 투표를 허용했을 경우에 표가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원에서도 카톨릭계의 많은 의원들과 공회동맹의 일부 의원, 극좌 정당의 의원 들은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찬성했으나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32년 까지 상원은 지연작전을 써서, 여성투표권에 대한 제안을 토의하기를 거부해 왔다. 그런데 1932년에 들어와서, 하원이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을 가결하자, 상원은 여러 회기에 걸쳐서 토의한 결과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공보'에 발표된 의사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 속에는 반여권론자들이 반 세기에 걸쳐서 출판한 많은 저술 에 개진해 온 논의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여성을 위하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시키 고 싶지 않다는 식의 동정적인 논의이며, 프루동류에 '창녀냐, 주부냐'의 양자택일에 만족 하는 '진정한 여성'이 찬양을 받는다. "여자가 투표 같은 것을 하게 되면 매력을 잃게 될 것이다. 여성은 우상화되어 있다. 그 위치에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성은 투 표자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잃을 뿐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여자는 투표용지 따위를 필요 로 하지 않아도 남성을 다스리고 있다." 등등. 한편 더욱 진지하게 가정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반대도 있다. 여성이 있을 곳은 집이 다. 정치논의는 부부 사이에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개중에는 극히 온건한 반여권론 도 있다.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 여자는 병역에 복무하지 않는다. 매춘부에게도 투표를 시 킬 심산인가? 그리고 교만하게 자기네 남성의 우월성을 단언하는 자도 있다. 투표는 책임 이지 권리가 아니며 여자에게는 그 자격이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지능도 낮고 교육도 떨어진다. 만일 여자가 투표하게 되면 남자가 여성화되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는 정치교 육을 할 수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지능도 낮고 교육도 떨어진다. 만일 여자가 투표하 게 되면 남자가 여성화되어버릴 것이다. 여자에게는 정치교육을 할 수 없다. 여자는 남편 이 시키는 대로 투표할 것이다. 만일 여자가 자유로워지고 싶으면, 먼저 양장점에서부터 행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많으므로 곤란하다 는 순진한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이 모두가 내용이 빈약한 반대의견인데도, 프랑스 여성 이 그 정치적인 능력을 획득하기까지는 1945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에 1893년부터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오스트레일리 아도 1908년에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 승리가 대단히 어려웠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국은 여자를 강압적으로 가정에 묶어두었다. 제인 오스틴은 숨어 서 글을 쓰고, 조지 엘리어트(영국의 여류소설가, 1819~1880)나 에밀리 브론테(영국의 여류소설가 '폭풍의 언덕'의 작가, 1818~1848)가 되기 위해서는 큰 용기나 특이한 운명 이 필요했다. 1888년에 영국의 어떤 학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는 하나의 종족이 아닐 뿐 아니 라, 종족의 절반도 되지 못하고 오직 생식을 위한 하나의 아종에 불과하다." 포세트 부인 이 19세기 말에 여성투표권 운동을 일으켰으나, 그것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운 동이었다. 여성의 권리요구가 독특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1903년경에 팽크허스트 일가가 런던에서 '여성 사회정치동맹'을 창립하면서부터이다. 이 단체는 노동당과 손을 잡고 대담 하게 전투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여성이 순수하게 여성으로서 분명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며, 이 운동은 영, 미 '여성 참정권 운동자'의 모험에 흥미있는 한 페 이지를 첨가하고 있다. 그녀들은 15년에 걸쳐서 어떤 면에서는 간디의 태도를 연상케 하는 강압적인 정책을 밀 어붙이고, 폭력을 거부하며, 교묘히 그 대용품을 고안해 냈다. 그녀들은 자유당의 집회 도 중에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앨버트 홀에 침입하거나 아스키스 후 작의 대신실로 몰려가기도 하고, 하이드 파크나 트라팔가 광장에서 집회를 여는가 하면 플 랭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연설도 했다. 시위할 때 경관을 모욕하거나 돌을 던져 소 송사태도 일으켰으며, 구치소 안에서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금을 모아 수백만 명 의 남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여론화함으로써, 드디어 1907년에 200명의 의원이 여 서투표권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후 해마다 이들 중의 몇몇 의원이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법률을 의회에 상정했으나, 빈번히 같은 논의 끝에 기각되었다. 1907년에 '여성사회정치동맹'은 의회를 목표로 첫번째 난입을 감행했는데, 여기에는 어 깨띠를 두른 여공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귀족 여성도 가담하였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해 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일부 탄광에서 기혼여성들의 취업을 금한 것이 도화선이 되 어, 랭커셔의 부인 노동자들이 여성사회정치동맹의 지원을 받아 런던에서 궐기대회를 감행 하였다. 1909년에는 또다시 검거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때 투옥된 여권론자들은 장기간의 단식투쟁으로 응수했다. 그녀들은 석방이 되자 새로 대열을 짜고, 그중의 한 사람은 석회 를 칠한 말을 타고 엘리자베스 여왕 행세를 했다. 1910년 7월 18일에 여성의 투표권에 관한 법안이 상정되었는데, 이날 9킬로미터에 이르는 행렬이 런던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법안이 부결되자 다시 새로운 집회와 새로운 체포작전이 있었다. 1912년에 그녀들은 전보다 과격한 작전을 감행하여 빈 집을 불태우고, 그림을 찢고, 화 단을 짓밟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로이드 조지(제1차 세계대전 당 시의 영국 수상)와 에드먼드 그레이(영국 정치가)경에게 잇따라 대표를 파견했다. 그녀들 은 앨버트 홀에 숨어서 로이드 조지가 연설하는 동안 시끄럽게 방해하였다. 전쟁이 일어나 자 그녀들의 활동은 중지되었다. 이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사태를 진척시켰는지는 알기 어 렵다. 영국 여성에게 투표권은 1918년에 제한된 형태로 주어졌고, 이어서 1928년에는 그 제한이 철폐되었다. 그녀들에게 이런 성공을 안겨준 것은, 주로 전쟁중에 행한 구가에 대 한 봉사 덕분이었다. 미국 여성들은 처음부터 유럽 여성들보다 해방되어 있었다. 19세기 초에, 여자들은 남자 들이 수행하는 고된 개척자의 일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 히 하고 싸웠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대단히 존중되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녀들의 처지는 유럽 여성들과 비슷해졌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호의는 여 전히 유지되었고, 여성은 교양에 대한 특권과 가정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를 잃지 않고 있었 다. 또한 법률은 여성에게 종교적, 도덕적인 역할을 부여했으나, 사회의 요구는 여전히 남 성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1830년경부터 일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또 흑인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도 일으켰다.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노예제도 반대론자 회 의가 그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퀘이커교도인 루크레시아 모트가 여권론 자협회를 창설했다. 1840년 7월 18일, 세네카폴스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그녀들은 앞으로 미국 여권론의 시범이 되고 퀘이커교의 색채가 농후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게 지음을 받고, 창조주에 의해 빼앗길 수 없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정부는 이 권 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남성은 결혼한 여성을 죽은 시민으로 만들어버린 다... 남성의 활동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뿐인데도 남성들은 그 여호와의 특권을 가로 채버렸다." 이로부터 3년후에 해리엣 비처 스토 부인은 흑인을 위한 여론을 불러일으킨 '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썼다. 에머슨과 링컨은 여권운동을 지지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여성들은 여기에 열렬히 참가했다. 그러나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수정안에 "피부의 색깔도 성의 구별도... 투표권 장애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써넣으려고 했던 그녀들의 요구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그 수정안 조항의 하나가 두 가지로 해석되어, 여권운동의 위 대한 지도자 앤터니 양은 이것을 구실삼아 동료 14명과 함께 로체스터에서 투표를 실시했 다. 결국 그녀는 1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1869년에 그녀는 여성의 투표권을 획득 하기 위해 전국적인 규모의 연맹을 결성했고, 같은 해에 와이오밍 주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1893년에야 겨우 콜로라도 주가, 1896년에 아이다호 주와 유타 주가 그 뒤를 따랐을 뿐 그후의 발전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유럽의 여성들보다는 훨씬 더 성공하고 있었다. 1900년에 미국에서는 500만 명의 여성 근로자가 있었고, 그중에서 130만 명은 공업에, 50만 명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상업과 공업, 사무계통과 그밖의 모든 자유직업에 여성의 진출은 눈부실 정도였다. 여변호사와 여의사가 배출되고, 여자 목사만 해도 3,373명이나 되었다. 메리 베이커 에디가 '크리스천 사이언스 처치'를 설립했다. 여성들은 클럽에 모이는 습관이 몸에 배고, 1900년에 클럽은 2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9개 주에 불과했다. 1913년에는 여성의 투표권 요구운동이 영국의 투쟁적인 운동을 본받아 조직되었다. 두 사람의 여성, 도리스 스티븐스 양과 젋은 퀘이커교도인 앨리스 폴이 이 운동을 지휘했다. 그녀들은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고, 계속해서 강연회나 행진 등 여 러 가지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여성의 투표가 인정되고 있는 9개 주에서는 여성 유권자들이 대거 수도로 몰려가, 전국 적인 여성투표권을 요구했다. 시카고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이 자신들의 성을 해방하기 위해 하나의 당파를 결집하여, '여성당'으로 발전했다. 1917년 여성투표 찬성론자들은 새로운 전술을 세웠다. 그녀들은 백악관 정문 앞에서 깃발을 들고, 추방되지 않도록 문살에 몸을 붙들어 맨채 차례로 농성을 벌였다. 그녀들은 6개월 만에 체포되어 옥스카카의 감옥에 수 감되었으나, 단식투쟁 끝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다시 계속된 시위행렬이 폭동으로 번졌다. 정부도 드디어 하원에 여성투표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승인했다. 여성당의 집행위원회는 워 싱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그 회기 끝에 여성투표권을 위한 수정안을 하원에 제출하여 19 18년 1월 10일에 가결되었다. 다음은 상원에서 표를 얻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월슨 대통령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여권론자들은 다시 시위에 들어가, 백악관 입구에서 집회를 열 었다. 대통령은 상원에 요청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정안은 두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1919년 6월에 이 수정안이 가결된 것은 공화당 회의에서였다. 그후 10년 동안은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1928년 하바나에서 열린 제 6차 미국 공화당 주 의회에서 여성은 국제여성위원회 창립할 수 있게 되었다. 1933년의 몬테비데오협정은 국 제적 규약에 의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19명의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여성에게 남 성과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규약에 서명을 했다. 스웨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여권운동이 일어났다. 스웨덴 여성들은 오랜 전통의 이름으 로 '교육, 노동, 자유'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이 투쟁을 감행한 것은 주로 여류문학가들 로서, 처음에는 이 문제의 정신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강력한 단체로 뭉쳐 서 진보당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곧 보수당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핀란드의 여성들은 1906년에, 노르웨이의 여성들은 1907년에 투표권을 획득했으나, 스웨덴의 여성 들은 몇 해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라틴 여러 나라들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법률 못지않는 가혹한 풍 속으로 여성을 압박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여권운동의 발전을 철저히 억압 했다. 파시스트가 집권한 이탈리아는 교회에 협조를 구하고, 가정을 존중하고, 여성의 노예 화의 전통을 연장함으로써 여성을 국가권력과 그 남편에게 이중으로 예속시켰다. 독일에서 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1790년에 학생 히펠이 최초로 독일 여권운동을 선언했다. 19세기 초에는 조르주 상드의 여권운동과 비슷한 감상적인 여권 운동이 성행하였다. 1848년, 독 일 최초의 여권론자인 루이제 오토는 조국의 변혁에 협력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그 여권론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적이었다. 그녀는 1865년에 '독일 여성총동 맹'을 결성했다. 한편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베벨과 함께 남녀불평등의 폐지를 요구했다. 1892년 클라라 제트킨은 당 고문으로 취임했다. 여러 종류의 여성 노동자단체와, 연맹으 로 단결한 사회주의 여성동맹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독일 여성들은 1914년 여성 국민군을 조직하려다가 실패했으나 전쟁 수행에는 열심히 협력했다. 독일이 패전한 후에 그녀들은 투표권을 얻어 정치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파 르타쿠스단에서 립크네히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다가 1919년에 암살되었다. 대다수 의 독일 여성들은 질서유지 편에 섰고 그중의 몇 사람은 국회에 진출했다. 결국 히틀러는 해방된 여성들에게 다시 한 번 '부엌, 신앙, 자녀'라는 나폴레옹의 이상을 강요했던 것이 다. "여자가 한 사람이라도 섞여 있다는 것은 국회의 불명예이다."라고 히틀러는 선언했다. 나치즘은 반카톨릭적이며 반부르주아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제공 했다. 사생아의 어머니와 사생아에게 주어진 보호는, 여성을 결혼의 속박에서 크게 해방시 켰다. 스파르타의 경우처럼 여성은 어떤 개인의 소유이기에 앞서 국가의 소유이며, 그 때 문에 여성은 자본주의제도하에서 살고 있는 부르주아 여성 이상의, 또 어느 의미에서는 그 이하의 자주성이 주어지게 되었다. 여권운동이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소련이었다. 이 운동은 19세기 말에 지식층인 여 학생들 사이에서 먼저 일어났으나, 그녀들은 자신들의 입장보다는 혁명운동 전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들은 '민중속에 들어가' 니힐리스트의 방식에 따라 오크라나와 싸 웠다. 베라 자술리치는 1878년에 트레포프 경시청장을 살해하였다. 러일전쟁 때 여자들 은 남자들을 대신하여 많은 직장에서 일했다. 그녀들은 자기의식에 눈뜨기 시작했으며, 러 시아 여권동맹은 남녀의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했다. 의회 안에 여권 신장을 여구하는 위원 회가 설치되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여성 노동자의 해방이 실현된 것은 혁명에 의해서였다. 1905년부터 여성 노동자들은 지 방에서 시작된 대중의 정치적 파업에 많이 참가하여 바리케이드의 선두에 섰다. 1917년의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에 그녀들은 빵과 평화와 출전한 남 편들의 귀환을 요구하며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데모를 했다. 그리고 10월의 봉기에도 참 가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그녀들은 침입자에 대한 소련의 투쟁에서 경제적으 로나 군사적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충실히 따라 여성해방 을 노동자의 해방과 연결지었고, 여성에게 정치, 경제적인 평등을 부여했다. 1936년의 헌법 제 12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소련에서 여성은 경제, 문화, 공무, 정치의 생활 전반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이 원칙은 국제공산주 의동맹에서도 다시 한 번 천명되고 있다. "법률상으로나 공공생활에 있어서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인 평등, 결혼법과 가족법의 근본적인 변혁, 청소년의 보호 및 교육의 국가 부담, 여 성을 예속시키는 이데올르기 및 전통에 대한 조직적인 계몽과 투쟁을 요구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여성은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와 같은 임금을 받게 되고, 생산에 의욕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최근에 프랑스 소비에트 협회에서 편찬한 팸플릿에 의하면, 1939년의 보통선거에서 도, 군, 시, 읍, 면 의회에는 457,000명, 사회주의공화국 최고회의에는 1,480명의 여성 대의 원을 배출했으며, 전소련동맹 최고회의 의원은 227명이나 된다. 또한 1천만 명 가까운 여 성들이 조합에 가입하고 있다. 여성은 소련 노동자 및 근로자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스 타하노프(소련 노동생산력 증가 운동)에도 많은 여성들이 참가하고 있다. 지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소련 여성들의 눈부신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들은 제철, 광산, 뗏목, 철도 등 지금까지 주로 남자들의 직업으로 간주되어 왔던 생산 부문에도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리고 비행사나 낙하산병으로서 수훈을 세웠고 빨치산 부대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공공생활에 참가하자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즉 가정에서의 여성 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내 하는 것이었다. 여성을 가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노 력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예컨대 1924년 11월 16일,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은 공 식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가정의 개념과 가족관계가 존속되는 한 혁명도 무효이다." 자유결혼의 존중이나 이혼의 편의, 낙태의 법적인 인가에 의해 남성에 대한 여 성의 자유가 확립되고, 출산휴가나 탁아소 유치원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어머니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감정적이고 모순된 여러 가지 증언에 의해서는 여성의 구체적인 처지가 어떠한가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분 명한 것은 오늘날에는 인구 재증가의 필요로 인하여 전과는 다른 가족정책을 실시하고 있 다는 점이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세포로 간주되며, 여성은 노동자인 동시에 주부이다. 성도덕은 매우 엄격하다. 1936년 6월에 법령이 공포되고 1941년6월 7일에 강화된 법 령에 의해 낙태는 금지되고, 이혼제도도 거의 폐지되었다. 또한 간통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여성들은 모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긴밀히 예속되어, 자기 가정에 단단히 매여 있으면서도 생산노동에 의해 품위를 얻고 또 정치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특이한 것으로서, 이 특이성에 대해 세밀히 연구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여의치 않은 처지에 있다. 최근 유엔에서 열린 여성문제위원회는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모든 국가에서 인정할 것 을 요구하는 한편 그 입법을 촉구하기 위해 몇 가지 동의를 가결하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 을 거쳐 성공을 거둔 것으로 생각된다. 미래는 종전에 남성의 차지였던 사회에 여성이 점 점 더 깊이 동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면, 거기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결론은 여자의 모든 역사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에 흑인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 라 백인문제도 있는 것처럼(뮈르달의<미국의 딜레마>참조) 그리고 '반유태주의는 유태인 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J.P.사르트르, <유태인 문제에 관한 고찰>참조)인 것처 럼 여성의 문제는 언제나 남성의 문제였다. 남성들이 그 출발점에서 육체적인 힘과 함께 정신적인 권위를 얻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이미 고찰한 바와 같다. 남성들은 가치를 만들 고, 풍습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 여성은 이런 지배력을 차지하기 위해 남성과 싸운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몇 사람의 여성들-사포, 크리스틴 드 피상, 메리 울스톤크라프 트, 울랭프 드 구즈 등-이 자신들의 가혹한 숙명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때로는 집단적 으로 의사를 표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오피아법에 반대하여 단결한 로마 주부들의 경우 나, 영국과 미국의 여성투표권 운동가들의 경우처럼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한 것은 남성 쪽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을 때 뿐이었다. 여성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리고 남성들은 여성 의 운명을 여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가 존중한 것은 언제나 자 기 자신들의 계획이나 걱정, 욕구였다. 남자들이 어머니인 여신을 숭배한 것은 자연이 그 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동기에 의해 자연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할 수 있게 되자 곧 가부장제도를 마련했다. 그후부터 여자의 운명은 가족과 국가의 항쟁이 결정해 나갔다. 기독교도가 여성에게 지정해 준 조건 속에 반영하고 있는 것은 신 앞에서, 세계 앞에서, 자기 자신의 육체 앞에서의 기독교도의 태도이다. 중세에 '여성논의'라고 불린 것도 결혼과 독신에 대한 남자 성직자와 속인 사이의 논쟁이었다. 결혼한 여자에게 후견인제도를 마련 한 것은 사유재산에 의거한 사회제도였고, 오늘의 여성을 해방시킨 것도 남성들이 이룬 기 술혁명이었다. '산아제한'에 의해 자식을 많이 키우는 가정을 줄이고, 여성을 어머니의 비 참한 처지에서 일부 해방시킨 것은 남성의 도덕관념의 진화였다. 여권운동 자체도 결코 여 성의 자주적인 움직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부는 정치가의 손에 쥐어진 도구였고, 일부는 더욱 깊은 사회동향을 반영한 부대현상이었다. 여성은 지금까지 독립된 계급을 형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역사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육체나 생명이나 내재로서, 즉 타자로 서의 여성의 군림을 요구한 이론도 결코 여성의 표현이 아닌, 남성의 이데올르기였다. 대 다수의 여성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을 변 혁하려고 노력한 여성들도 자기들의 개별성에 몰두하여 그것을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여성들이 세계의 움직임에 참여하게 된 때는, 남 성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남성들의 견해에 따를 때뿐이었다. 이런 참여는 전체적으로 보면 2차적이며 부가적인 것이다. 여성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했던 계층은 피압박계급이며, 노동자로서의 그녀들은 남자 노 동자 이상으로 노예상태에 놓혀 있었다. 지도층에서의 여성은 기생물이며, 따라서 남성의 법률에 예속되어 있었다. 즉 어느 경우나 여성의 행동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법률과 관습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여성은 구체적으로는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했 다. 고대 로마공화국에서는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주부에게 구체적인 권한이 부여되었으나 법적으로는 조금도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농촌 문화에서나 상업적인 소부르주아 사회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가정에서는 안주인겸 하녀였고, 사회적으로는 미성년자였다. 이와 반대로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에는 여성은 해방되었다. 그런데 남성의 가신을 면하게 되자 마자 그녀들은 영토를 잃게 된다. 때문에 여성은 방종이나 낭비와 같은 행동밖에 할 수 없 는 소극적인 자유만 얻게 된다. 로마제국의 퇴폐기와 르네상스 시대, 18세기나 집정관 시 대가 바로 그러했다.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때는 굴종의 신분이었고, 해방이 되었을 때는 처신에 서툴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결혼한 여성은 사회어서 자기 지위를 차지 했으나 권리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신여성은, 정숙한 여자든 창녀든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대신 2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생활 에서 배제되었다. 이 법률과 관습의 대립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겼다. 즉 자유연애는 법률에 의 해 금지되지 않았으나 간통은 위법행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과오를 범한' 처녀는 상처를 입게 되지만, 아내의 부정은 관용되는 경우가 많다. 17세기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롭 게 애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처녀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묘 한 제도에 의해 여성은 꽁꽁 묶여 있다. 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이중의 구속에서 여성이 자립을 하려면 예외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남성에 필적할 만한 사업을 이룬 여성은 사회제 도에 힘입어 모든 성적 차별을 초월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었다. 이사벨라 여왕이나 엘리자 베스 여왕,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즉 그녀들은 지 배자였다. 일단 사회적으로 그런 여건이 사라져도,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것이 전혀 열등성 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왕의 비율은 명군의 비율을 훨씬 능가할 정도이다. 종교도 이와 같은 변화를 이루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나 성 테레사는 여성의 모든 생리 적인 조건을 초월한 거룩한 영혼이었다. 그녀들의 세속의 생활이나 영적인 삶, 행동, 저술 활동은 소수의 남성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이르고 있다. 그밖의 여성들이 세계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없었던 것은, 그녀들이 여자로서의 조건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들은 소극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활동밖에 하지 못했다. 쥐디트(적장 호로페르네스를 잠자리에서 목 벤 유태의 여걸)나 샤 를로트 코르데(공포정치 때 마라를 암살한 소녀)나 베라 자술리치(러시아의 여성혁명가, 페테르부르크의 경시청장을 저격함)는 암살을 실행했다. 프롱드당의 여성들은 음모를 꾸몄 다. 대혁명때와 코민(파리 혁명정부)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질서에 반항하여 싸웠다. 적극적인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금지되는 반면, 권리나 능력 이 수반되지 않는 자유에는 완강히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여성들은 고작 해야 먼 발치에서 남성들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뿐이었다. 아스파지아나 맹 트농 부인, 위르생 부인은 남성의 조언자였다. 그나마도 남성이 들어주는 것이 전제가 되 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표면화될 때부터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을 지킨다. 그녀들은 전쟁은 일으켜도 작전을 계획하는 데는 참여할 수 없었다. 정치가 음모화한 범위 안에서만 정치를 좌우했다. 세계의 지배권이 여자의 손에 쥐어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 다. 여자는 기술이나 경제에도 영향을 준 일이 없고 나라를 세우거나 파괴한 적도 없으며, 세계를 발견한 적도 없었다. 여자들에 의해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 적은 있지만, 그녀들은 행동인이라기보다는 원인의 역할을 더 많이 했다. 루크레티아(BC 6세기의 부인, 타르퀴니 우스 콜라티누스의 처로 정숙했으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고대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의 왕자 섹스투스에게 능욕을 당하자 남편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살함)의 자살은 상징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다. 피압박자에게 남아 있는 길은 죽음뿐이다. 기독 교도를 박해할 때나 사회와 국가가 붕괴한 직후에 여성은 그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 나 아직까지 순교자가 세계를 변화시킨 예는 없다. 여성들이 시위를 하거나 행동을 개시했 을 때도, 남성의 결단에 의해 그것을 유효하게 발전시킨 경우에만 가치를 발휘했다. 비처 스토 부인의 주위에 모인 미국 여성들은 노예제도에 대해 여론을 일으켰으나, 남북전쟁의 참된 원인은 감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1917년 3월 8일의 '부인의 날'은 러시아혁 명을 앞당겼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다. 여걸의 대다수는 기이한 타입의 인간으로, 그 행동의 중요성보다는 그 운명의 특이성에 의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모험가나 괴짜였다. 그러므로 잔 다르크나 롤랑 부인, 플로라 트리스탕 같은 여자들을 리슐리외(프랑스의 정치가, 1585~1642)나 당통(프랑스의 혁명 정치가, 1759~ 1794), 레닌 등과 비교하면 그녀들의 위대성은 지극히 주관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녀들은 역사적인 행동가라기보다는 모범적인 인물들이다. 위대 한 남성은 대중 속에서 태어나, 환경이 그를 밀어준다. 그런데 여성은 역사의 흐름 밖에 있으며, 환경은 그녀들에게 장애일 뿐 발판이 되어주지 못한다. 세계의 모습을 바꾸기 위 해서는 먼저 거기에 견고하게 닻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성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여성이다. 신권에 의 해 행동을 일으키도록 지시를 받지 못하면(그리고 이 경우에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능 력을 발휘했으나)야심을 품고 영웅심이 강한 여자에 불과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의 여 류역명가, 1870~1919)나 퀴리 부인과 같은 여성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성이 이 세계를 자기 무대로 여기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이런 여성들은 여성의 역사적인 무가치를 결정한 것이 그녀들의 열등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입증했다. 그녀들의 역사적인 무가치야말로 여성들을 열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여성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데 가장 성공한 문화적인 영역에서 명백히 드러 난다. 그녀들의 운명은 문학과 예술의 운명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게르만인들 사이에서 예언이나 승려직은 여성들의 차지였다. 그녀들은 세계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계 발에 의해 자기 우주의 한계를 넘어 다른 우주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때에는 여자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에 꽃피운 우아한 신비주의나 휴머니즘에 대한 호기심, 미에의 취향, 또 17세기의 궁정문학이나 18세기의 진보주의적인 이상은 여러 모 로 여성을 찬양했다. 그 당시에는 여성들이 시의 주제가 되고,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여성들은 한가한 시간을 활용하여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데 전념했고, 작가의 조언자이며 비판자, 또는 독자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경쟁자가 되었다. 여성이 남성의 마음을 개발하는 감성이나 도 의심을 북돋아, 자기 자신의 숙명에 간섭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여성교육은 대부분 여성의 힘으로 쟁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적인 여성들이 연출한 집단적인 역할은 크지만, 그녀들의 개인적인 업적은 전체적으로 보아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 여성 이 사상이나 예술분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행동에 참가하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런데 예술이나 사상도 행동 속에 생동적인 원천을 갖고 있다. 현실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재창조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유리한 입장이 아니다. 이 경우에도 조건을 뛰어넘어 부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는 개성의 완성이란 거의 불 가능한 것이다. "스커트를 입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하고 마리 바슈키르체프(19세기 러시아의 여류화가)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탕달도 "여자로 태어난 천재는 인류의 행 복을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말했다. 사실 인간은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라면서 천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처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여권론자들은 역사의 예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순된 논법을 이끌어냈다. 첫째로 여자는 지금까지 위대한 것을 한 가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로 여성의 환경 은 위대한 여성의 출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 속에는 기만 이 있다. 몇 사람의 특권여성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메울 수도 변명할 수도 없다. 여성의 성공이 이처럼 낮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환경이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크리스틴 드 피상이 나 풀랭 드 라 바르, 콩도르세, 스튜어트 밀, 스탕달 등이 주장한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도 여성에게는 기회가 별로 주어져 있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들 중의 대다수가 새로운 신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들의 이런 요구는 여성다운 성품으로 찬양을 받자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인류 전 체에 있어서처럼 자기들도 초월이 내재를 능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들은 추상적인 권 리와 구체적인 가능성이 합치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양자가 합치되지 않으면 자유도 기만 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원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바로 그 과도기에 해당된다. 언제나 남성에 게 속해 온 이 세계는 지금도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가부장제의 여러 제도와 가치 는 거의 옛날 수준 그대로이다. 추상적인 권리도 곳곳에서 여성에게 완전히 인정되어 있다 고 말할 수 없다. 스위스에서는 아직도 여자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고, 프랑스에 서는 1942년에 제정된 법률이 완화된 형태로 여전히 남편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 나 방금 말한 대로 추상적인 권리만으로는 여자가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을 하기는 어렵다. 남녀 사이에는 오늘날까지도 진정한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첫째로 결혼생활이 주는 부담은 여전히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모성의 과중한 부담은 '산아제한'의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실시에 의해 경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엄격 히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낙태가 널리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불법적인 낙 태수술로 몸을 해치고 있으며, 여러 차례의 출산으로 쇠약해지기 쉽다. 가사에서 아기의 시중까지 거의 모든 것을 여자 혼자 맡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반여권론의 전통이 뿌 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가 맡아온 일을 거드는 것을 남자의 수치로 생각 한다. 그 결과 여자는 가정생활과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조화시키기가 남자보다 어렵다. 사 회가 여자에게 이런 노력을 요구할 경우에는, 아내의 생활은 남편의 생활보다 훨씬 더 힘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농촌여성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프랑스에서 농촌여성들은 거의가 생산 노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다수가 결혼을 하고 있다. 독신녀는 아버지의 집이나 오빠, 언 니의 집에서 하녀나 마찬가지로 일을 하며, 한 가정의 주부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의 지배 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농촌여성들은 풍습과 전통의 차이에 따라 맡고 있는 역할이 다 양하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의 농촌여성은 식탁에서 상석에 앉지만, 코르시카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없다. 그러나 어디서든 농촌여성들은 가정경제에 대단히 중 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자와 책임을 분담하고, 남자와 이해를 같이하며, 남자와 재산 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존중되고, 또 여자 쪽에서 실제로 가정을 지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농촌여성의 위치는 고대의 농업공동체에서 여성이 차지했던 위치를 연상케 한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정신적인 힘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녀 들의 구체적인 생활은 남자들보다 훨씬 괴로웠다. 채소밭을 가구고 닭이나 양, 돼지를 키 우는 일은 주로 여자가 맡았 다. 그 밖의 힘든 일도 거들어야만 했다. 즉 마구간을 치우고 비료를 주고 씨를 뿌리고 빨 래를 하고 김을 매고 풀을 베고 삽질을 하고 제초를 하고 곡식을 거둬들이고 포도를 따고, 때로는 짐수레에 밀집, 건초, 재목, 장작, 거적 등을 싣고 내리는 것도 거들어야 한다. 게 다가 식사준비에서 빨래나 바느질 등의 가사도 해야 한다. 그리고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어려운 일도 여자만의 몫이다. 아침에는 새벽에 일어나 닭이나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남 자들의 아침식사를 마련하고, 아기를 돌보고, 들로 숲으로 밭으로 일하러 간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점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마치면 다시 저녁때까지 들일을 하러 간다. 저녁식 사가 끝나면 바느질을 하고 집 안을 치우고 옥수수를 터는 등의 밤일이 기다리고 있다. 또 한 임신기간 동안에도 건강을 돌볼 여가가 없기 때문에 몸이 곧 망가져서 나이보다 일찍 늙고 병에 시달리게 된다. 남성이 사회생활에서 찾아내는 얼마간의 보상도 그녀들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일요일이나 축제 때는 시내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주점에서 술도 마시고 트럼프도 하고, 사냥이나 낚시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 남아 잠시도 쉴 새가 없다. 다만 하녀를 부리는 유복한 농촌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고, 노동에 지치는 일 없이 가정 에서 큰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개의 시골노동은 여성을 우마와 같은 처지로 전락시키 고 있다. 장사를 하거나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여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비교적 큰 특혜를 누렸다. 중세 이후로 법률에 의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런 여자들이었다. 잡화상이나 밀 크상, 여관이나 담배가게의 여주인은 남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독신녀이건 과부이건 그 녀들은 사회에서 훌륭히 자립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해도 그녀들은 남편과 똑같은 자주성을 지니게 된다. 그녀들은 가정과 같은 장소에서 일할 수 있으며, 그 일도 대체적으로 힘들지 않은 행운을 누렸다.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공이나 여사무원, 비서나 판매원 등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녀 들은 자기의 직업과 가사를 조화시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 (장보기, 식사분비, 청소, 바느 질 등은 날마다 적어도 3시간 반, 일요일에는 6시간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공장이나 사무 실에서 하는 노동시간에 이를 가산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간이 된다.) 자유직업에 대해 말하면, 여변호사나 여의사, 여교사의 경우에 설사 가사에서 남의 도움 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가정과 아이는 역시 그녀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걱정거리이자 핸디 캡이 된다. 미국에서의 가사노동은 편리한 기계 덕분에 한결 간편하게 치르고 있다. 그러 나 직업여성에게 요구되는 몸치장과 맵시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부담이 있게 마련이다. 그 리고 가정과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노동으로 자립을 하려는 여성들은 남자 경쟁자보다 훨씬 불리한 여건에 놓여 있 다. 대부분의 직업에서 여성의 봉급은 남성보다 적다.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전문직종을 맡 기지 않아,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느 남성 공원보다 급료가 싸다. 그리고 같은 일을 해 도 여성들의 보수가 더 낮다. 여성은 남성들의 세계에 있어서 신참자이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서도 적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도 같은 여자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남녀가 모두 언제나 남성 쪽을 신뢰한다. 여성인 것이 무슨 결함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특이한 존재이다. 여자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남자 후원자가 있는 것이 효과적이다.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가장 중요한 부서를 장악하 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경제적으로 두 세습적인 계급을 구 성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성의 현재의 신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야흐로 형성되어가고 있는 새로운 문명 속 에 완강히 살아남아 있는 오랜 전통이다. 근시안적인 관찰자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오늘날 여성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여성들이 능력이 없어 이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 실 여성의 처지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여건에 적응하기가 대단히 어렵 다. 여성에게도 공장이나 사무실, 대학 등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이 여성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 중의 하나이며, 결혼만 하면 다른 모든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랑의 행위는 미개한 사회에서처럼 여성에게 직접, 간접으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는 서비스로 간주되어 있다. 소련 이외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현대여 성은 자기 육체를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매음은 묵인되고 교태는 장려되 고 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부양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알고 있다. 또한 결혼한 여자가 독신녀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위엄을 지니게 된다. 풍습은 아직 독신녀에게 남자 독신자와 같은 성적 자유를 인정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독신녀가 어머 니가 되는 것은 거의 금지 되어 있으며, 사생아의 어머니는 스캔들의 대상이 된다. 신데렐 라의 신화가 언제까지나 인기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처녀에게, 행운과 행복을 혼자서 손에 넣으려는 어렵고도 막연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수려한 왕자에게' 그것을 기 대하는 편이 낫다고 격려하고 있다. 특히 처녀는 왕자에 의해 자신의 신분보다 훨씬 높은 계급에 이르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것은 그녀가 한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그녀의 노력과 이익을 갈라놓기 때문에 불길하다. 여성에게 가장 큰 핸디캡은 아마도 이런 양분을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부모는 지금도 자기 딸을, 그 개성을 신장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결혼에 잘 적응하도록 키 우고 있다. 그리고 딸 역시 그 편이 더 실속이 있다고 간파하여 자진해서 그것을 바랄 정 도이다. 그래서 대체로 여자들은 자기 형제들만큼 전문능력을 익히지 못하고, 신체도 튼튼 하게 단련하지 못해 자기 직업에 열중하지 않는다. 결국 직장에서 언제나 밑돌게 되고, 여 기서 악순환이 발생하여 이번에는 이 열등의식이 좋은 남편을 구하려는 욕구를 강화하게 된다. 이익에는 으레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만일 부담이 너무 무거우면, 그 이익 도 고역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노동자의 대다수에게 노동은 불쾌한 고역이며, 특히 여성의 경우 고역은 구체적 으로 사회적인 존경이나 행동의 자유, 또는 경제적인 자립 같은 구체적인 획득으로 보상되 지 않는다. 여공이나 여사무원의 대다수가 일할 권리 속에 의무만을 느끼기 때문에, 결혼 에 의해 노동에서 해방되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성은 자기를 의식했 고, 또 노동에 의해 언제나 결혼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결혼에 얌전히 예속 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가정생활과 직업의 양립이 자신에게 벅차고 고 된 곡예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일에 대한 유혹이 있는 한(일부의 인간을 살찌우는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이런 특권층의 남성들에게 몸을 파는 권리를 여성에게 인정하고 있는 한) 여성들이 자립 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남성들보다 훨씬 큰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유혹은 장애이며, 그것도 가장 위험한 장애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유혹 속에 는 하나의 기만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근사한 결혼의 복권에 당첨되는 여성 은 1천 명에 한 명꼴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여성들을 일터로 유인하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눈에 한가하고 즐거운 낙원을 비춰준다. 이 지상에 튼튼하게 매여 있는 여성들보다 선택된 특권층의 여성들이 찬양을 받는다. 남성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경제적인 특권, 그들의 사회적인 가치, 결혼의 영예, 남성 에게 의존할 때의 효과, 이 모든 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 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여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부하의 신분이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자를 어떻다고 평가하는 대로 자기를 인 식하고 자기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남성이 꿈에 그리는 여성의 모습을 중요시 하며 살아가야 한다. '남성을 위한 존재'가 여성의 현실 여건에서 중요한 기본요인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제1장 역사는 언제나 남자가 모든 실권을 장악해 온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사회의 초기부터 남자는 여자를 종속적인 신분으로 억눌러두는 것이 유리 하다고 생각했었다. 남자들이 만든 법률은 본래 여자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여자는 구체적으로 '타자'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남성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도움이 되었 으며,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존재론적, 윤리적인 욕구에도 합치하는 것이었다. 주체가 자기를 확립하려고 할 때, 그 주체를 한정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타자'가 필요하 게 된다. 자기 이외의 실재를 통해서만 주체는 자기에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생활이 결코 만족이나 안식이 아니라 불만과 활동과 투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자는 눈앞의 '자연'과 부딪치게 된다. 남자는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자연은 그를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자연은 순전히 추상적인 대립물로 나타나, 장애물로서 외부에 머물 러 있거나, 수동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여 남자에게 동화되어버린다. 남자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소유한다. 이런 경우 남자는 역시 혼자이다. 돌을 던질 때도 혼자이고 과일을 소화할 때도 혼자이다. '타자'가 거기 있다는 것은, 그 '타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참된 타성이란, 나의 의식과 별개이면 서 동일한 의식인 것이다. 각자를 그 내재성에서 떼어내어, 그 인간이 그의 참된 존재를 완성하고, 초월로서, 목적을 행하는 탈출로서, 투기(자유로운 계획)로서 자기완성을 가능하 게 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나의 자유를 확립시켜주는 이 타인의 자유는, 또한 나의 자유와도 충돌한다. 이 것이 불행한 의식의 비극이다. 의식은 각각 자기만을 최고의 주체로 인정하기를 원한다. 각자 타인을 노예로 삼아 자기를 완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예 쪽에서도 노동과 공포 속 에서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느낀다. 변증법적으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주인이 비본질적인 인간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서로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할 때, 즉 자기와 상대를 객체와 주체로 인정할 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우정이나 관용은 상당한 미덕이다. 확실히 이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이며, 인간은 이것을 통하여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진실은 끊임없이 형성되어가면서 부단히 소멸되는 투쟁의 진실 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초월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 꿔 말하면, 인간은 '존재'이기를 그치고 자기 실존을 짊어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도 덕적인 태도에 도달하게 된다. 이 회심에 의해 그는 일체의 소유를 단념하게 된다. 왜냐하 면 소유는 존재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참된 지혜에 도달하 는 회심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이 필 요하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 혼자서는 자기를 이룰 수도 없고 또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도 항상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 일생은 절대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매우 어려운 기회이 다. 그런데 남자는 어려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위험을 무서워한다. 그는 생명과 휴식, 실 존과 존재와 같은 모순된 것을 갈망하고 있다. '정신의 불안'은 자기발전을 위한 대가이며, 객체와 자기와의 거리는 자기에 대해 자기가 존재하기 위한 대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불안 속에서 평온을 꿈꾸고, 의식을 지니면서 불투명한 만족상태를 꿈꾸고 있다. 남자의 이 꿈이 구현된 것이 바로 여자이다. 여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자연과, 남자와 너무나 일치하는 동류 사이의 바람직한 중간적인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를 자연의 적의에 찬 침묵으로도 대하지 않고, 상호존중의 가혹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여자는 유일한 특권 으로서 하나의 의식이지만, 그래도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은 가능한 일로 생각된다. 여자에 의해 남자는 자유의 상호성 속에서 그 근원을 갖는 지배자와 노예의 엄격한 변증 법에서 벗어날 한 가지 수단이 주어졌다. 태초에 해방된 자유로운 여성들이 있었는데 남성이 그녀들을 예속시킨 것이 아니며, 성 의 구별 자체가 곧 계급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여성을 노예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노예 중에도 여자가 있었지만, 그러나 자유로운 여자, 즉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권위를 지닌 여자도 언제나 있어 왔다. 여자 쪽에서 남자의 지배권을 받아들여, 남자는 자기를 객체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반항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절대로 본질로 돌아가지 않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일방적으로 절 대적인 '타자'로 보여졌다.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는 모두 남자가 소중히 여기는 이런 확신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그리스신화가 그러하며, 이것이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속에 전해졌다. 이브는 남자와 동 시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른 재료로 지은 것도 아니고, 아담을 지을 때 사용한 흙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출생부터가 자주 적이 아니었다. 신은 처음부터 그녀 자신을 목적으로 하여, 그녀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해 여자를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신은 여자를 남자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신은 아담의 고독을 구제하기 위해 여자를 만들었으며, 여자의 기원과 목적은 남편 속에 있다. 여자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남자의 보충물이다. 그래서 여자는 적합한 먹이로 보인다. 여자는 설익고 불투명한 의식을 지닌 자연이며, 그 의식은 본래 순종하기에 알맞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그런 존재이기를 기대했다. 남 자는 여자라는 하나의 존재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한편, 순종의 자 유에 의해 자기 자유를 점점 확보하려고 한다. 여자가 되어도 좋다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 겠지만, 남자는 모두 여자라는 존재가 있기를 바란다. "여자는 만든 신에 감사해야 한다.""남자에게 여자를 주었으니, 자연은 선한 것이다." 이 런 글귀나 이와 비슷한 글귀 속에서, 이 세계에서의 남자의 존재는 필연적인 하나의 권리 이며, 여자의 존재는 단지 하나에 우연에 불과하다고 태연스럽게 그리고 순진하게 단정하 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반가운 우연이다. 여자는 '타자'처럼 봉지만, 동시에 남자가 그 허 무를 느끼고 있는 실존과의 대조에서 하나의 충실한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타자'는 주체 의 눈에 객체로 보임으로써 존재로 인식된다. 실존자가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구와 불만이 여자 속에 구체화되어 있으므로, 남자는 여자를 통해 자기합일을 이루려고 노력하 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게 '타자'의 유일한 구체화를 나타냈던 것은 아니며, 또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언제나 불면의 지위를 유지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우상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달라진 시기도 있었다. 국가가 개인을 희생시킬 때, 남자 는 자기 개인의 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스파르타의 여성은 국가에 헌신했으므 로 그리스 여성보다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의 어떤 몽상에 의해 서도 변형되는 일이 없었다. 수령숭배는 나폴레옹이나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경우에도, 다 른 것의 숭배는 일체 배제한다. 군국주의적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여자는 이미 특권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민들이 자기들의 생활에 어떤 의미를 부 여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여자가 신격화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대로 모든 인간을 동일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장차 어떤 인간도 객체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예언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에서는 '타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택한 군인이나 투사라 할지라 도 그 직업에 만족하는 남자는 극히 드물다. 남자가 개인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의 눈 에 여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독일 병사들이 프랑스의 창녀에게 보낸 편지를 본적이 있는데, 그 속에서는 나치즘에도 불구하고 독일류의 '푸른 꽃'의 전통이 소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아라공이나 이탈리아의 비토니리와 같은 공 산계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애인이나 어머니 같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여성의 신화는 아마도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자기를 확립함에 따라 '타자'의 신비적인 특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직 이 신화는 모 든 남성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모든 신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희망과 공포를 '초월'(집에 머물어 있는 여성의 생활이 '내재'라면, 밖에 나와 일하는 남성의 생활은 '초월'이다.주어진 환경에 안주하는 것 이 '내재'이고 현실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타개하는 것이 '초월'이다)의 하늘을 향해 던 지는 '주체'가 필요하다. 여자는 자기를 '주체'로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투기(자 유행사)를 반영하는 남성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자들은 자기 자신의 종교도 시도 갖 지 못하고 있다. 꿈꾸는 것조차도 남자의 꿈을 통해서 본다. 여자들이 숭배하는 것은 남자 들이 만들어 낸 신들이다. 남자들은 자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위대한 남성의 모습을 만들 어내었다. 헤라클레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제우스의 아들), 프로메테이스(그리스신 화에 나오는 영웅, 제우스를 속여 불을 훔쳐 인류에게 줌), 파르치발(중세의 유럽 전설에 나오는 군인,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됨) 같은 영웅들의 운명 속에서 여자는 단지 제2 의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하긴 여자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전형적인 남성상도 있기는 하다. 아버지, 유혹자, 남편, 질투하는 남자, 효자, 불효자 등. 그러나 이런 전형을 정한 것 도 남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화가 갖는 높은 품격에는 이르지 못한 평범한 전형이다. 이와는 달리 여자는 오직 남자와의 관계에서만 규정된다. 남녀 양성의 불공평한 성의 신 화의 일방적인 구조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다만 '성'이란 말만으로도 여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프랑스어는 단지 '성'이라는 말만으로 여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와 육체적 쾌락과 위험이 여자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섹스와 육체를 대표하는 것은 남자라는 진실은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외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의 모습도, 세계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세계를 자기들의 관점에서 보고, 그 관점을 절대적인 진리와 혼동하고 있다. 신화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좀처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떠오르 진 않는다. 신화는 변덕스럽고 모순투성이이고, 쉽게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여자는 데 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이고, 오디트(적장을 죽인 전형적인 열녀)이고, 아스파지아(고대 의 창녀)이기도 하고,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이기도 하고, 판도라(마녀의 상징) 이기도 하고,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이기도 하다. 또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 모 마리아이기도 하다. 여자는 우상이기도 하고 하녀이기도 하며,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어둠(악마)의 세력이기도 하다. 여자는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재주꾼이기도 하고 수다쟁이기도 하고 거짓말쟁이기도 하다. 여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기도 하고 마법사이기 도 하다. 여자는 남자의 먹이이며, 남자를 파멸시키는 원천이다. 남자가 자신에게 없기 때 문에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 즉 남자의 부정적인 측면이고, 또 남자의 존재이유이기도 하 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의 사상가,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1813~1855)는 이렇게 말 했다. "여자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불순하고 복잡한 그 무엇이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 여러 가지로 표현하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모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인생행로의 여려 단계>에서) 그 원인은 여자를 그 자신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으로 고찰하지 않는 데있다. 즉 소극적 으로 남자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고찰하기 때문이다. 여자 이외에도 다른 '타자'가 있다 고 하더라도 여자는 여전히 '타자'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불투명성은, 바로 '타자'의 관념의 불투명성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여자를 '타자'와 관련시켜 규정하는 한, 인간적인 조건이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타자'란 악을 뜻한 다. 그러나 그것이 선에 필요할 경우에는 선이 된다. 여자는 남자를 통하여 '전체'에 도달 한다. 그러나 여자를 '전체'에서 분리시키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는 무한에의 입구이기도 하고,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자는 어떤 개념도 구체화하지 못한다. 여자를 통하여 희망에서 실패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선에서 악, 악에서 선으로의 이행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어떤 각도에서 여자를 보아도 이 상반성이 먼저 눈에 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자연'으로서, 또한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을 찾는다. 그러나 자연은 남자에게 여러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갖게 한다. 남자는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지만, 자연 에 의해 파멸되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죽어간다. 자연은 남자의 생명의 원천이며, 또 그가 자기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을 그 안에 가두고 있는 물질의 덩어리이고, 또한 최고의 현실이다. 자연은 우연이고, 이념이고, 유한이고, 전체이다. 자연은 정신에 대립하기도 하고, 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자연은 둥 지도 되고 적도 되고, 흡사 생명이 솟아나는 혼돈된 암흑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생명 자체 로 생각되기도 하며, 또 생명의 피안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여자는 '어머니','아내', 그리고 '이념'으로서 이 자연을 요약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서로 융합되기도 하고 대립되기도 하면서 각각 이중의 형태를 갖고 있다. 남자는 자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태어났으며, 자기가 사는 데까지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이 강력한 권한을 행 사하는 사회가 출현한 후로, '생명'은 그의 눈에 이중의 형태로 보였다. 생명은 의식이고 의지이며 초월, 즉 정신인 동시에 물질이며 수동성이고 내재, 즉 육체이기도 하다. 아이스 킬로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는 올림포스 산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참된 창조자는 남성적인 요소라고 언명했다. 형태나 수, 운동도 남성적 요소에서 비롯되었 다. 데메테르(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에 의해 보리이삭은 자라지만, 보리이삭이 자라는 원리와 이치는 제우스에게 있다. 여자의 생식력은 수동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여자는 흙이고 남자는 씨앗, 여자는 물이 고 남자는 불이다. 창조는 흔히 불과 물의 결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생물 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뜨거운 습기이다. '태양'은 '바다'의 남편이었다. '태양'이나 불은 남 성신이다. 그리고 '바다'는 대개 모성을 상징한다. 생명이 없는 조용한 물은 타오르는 햇빛 을 받아 비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농부의 노동으로 파헤쳐진 대지는 잠자코 그 이랑 속에 씨앗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대지의 역할은 중요하다. 싹을 키우고 지키고,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대지이다. 그래서 '모신'의 지위가 실추된 후에도, 인간은 계속해서 풍요의 여신들을 숭배한다. 농작물과 가축의 번영은 키벨레(주피터의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덕분이다. 이 여신은 인간이 생명의 은인이다. 인간은 물도 불도 마찬가지로 찬미한다. "바다에 영광이 있으라! 거룩한 불꽃으로 에워싸인 바다의 파도에 영광이 있으라! 파도 에 영광이 있으라! 불꽃에 영광이 있으라! 불가사의한 모험에 영광이 있으라!"하고 괴테는 <파우스트(제2부)>에 쓰고 있다. 남자는 '대지'를, 브레이크(영국 시인)가 말한 '대지의 부인'을 숭배한다. 인도의 어떤 예언자는 제자들에게 땅을 쟁기로 파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공통된 어머니를 농사일로 상처를 입혀 갈라지게 하는 것은 죄악이야... 어머니의 가슴을 단도로 찌를 수 있느냐? 어머니의 살을 뼈까지 벨 수 있느냐? 어떻게 감히 어머니의 머리칼을 자 를 수 있느냐?" 인도 중부의 바이어족도 '쟁기로 자기의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을 파헤치는 ' 것을 죄악을 생각했다. 이와 반대로 아이스킬로스는 오이디푸스 왕에게, 그는 "대담하게도 자기를 만들어 준 거 룩한 이랑에 씨를 뿌렸다."고 말했다. 소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2대 비극시인)는 '아버지의 이랑'이라는 말과 '씨를 뿌리는 계절에 한 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 먼 밭의 소유자인 농부'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집트의 어떤 노래 속의 애인(여자)은 "나 는 대지예요!"하고 외친다. 이슬람의 문서 속에선 여자를 '밭... 포도를 영글게 하는 밭'이 라고 부르고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한 찬미가에서 '우리들의 자매인 대지, 우리 를 키우고, 각양각색의 꽃과 초목과 여러 가지 과일을 생산하는 우리의 어머니'에 대해 말 하고 있다. 미슐레(프랑스의 19세기 역사가)는 아키에게 흙탕물에 목욕하면서 "친애하는 어머니여!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나와 당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원하는 생명주의적 낭만주의를 주장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때에는 대지나 여성의 마술적인 중요성이 남성의 협력작용보다 더 뛰어 나 보였다. 남성은 다시 한 번 모성의 암흑과 혼연일체가 되어 거기에서 자기 생명의 참된 원천을 찾아보려고 했다. 어머니는 우주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거기서 수액을 빨아올리는 뿌리이고, 젖과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며. 흙과 물로 된 재생력이 풍부한 진흙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의 태도는 자기 육체의 조건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자기를 실격한 신으로 생각한다. 그의 불행은 빛나는 하늘에서 추락하여 어머니의 뱃속 깊숙한 혼 돈된 어둠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저 불꽃, 남자가 그 속에서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능동적이고 순수한 입김을 여자는 대지의 진흙 속에 감춰둔다. 남자는 자기가 '하나', '전 체', '절대정신'과 같은 순수이념처럼 필연적인 것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는 유한한 육체 속에, 자기가 선택도 하지 않고 초대를 받지도 않은 장소와 시간속에, 무익하고 거추장스 럽고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갇혀 있다. 육체의 우연성은 존재의 우연성이다. 이것을 남자 는 자기의 고독과 부당한 우연 속에 경험한다. 그것은 그를 죽음에 바치고 있다. 자궁(무 덤처럼 닫힌 은밀한 자궁)속에서 형성되어가는 흐늘흐늘한 아교질은 끈적거리는 썩은 고 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섬뜩하여 얼굴을 돌리게 한다. 생명이 형성되어가는 장소는 모두, 발아이든 발효이든 붕괴에 의해 형성되므로 혐오를 느끼게 한다. 단백질의 태는 죽음의 부 태 속에서 완결되는 순환의 시작이다. 우연과 죽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남자는 탄생된]사실 에 혐오를 느낀다. 남자는 자기의 동물적인 인연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출산이라는 사 실에 의해, 파괴적인 '자연'이 남자를 지배하고 있다. 미개인 사회에서는 출산에 대한 것이 크게 터부시되었다. 특히 태반은 공들여 태워버리거나 바다에 던져야 했다. 태반을 손에 넣은 자는, 누구나 그 아기의 운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태아를 기른 태반은 태아가 의존한 증거물이다. 태반을 깨뜨리면 아기는 비로소 자주적인 존재로 살 수 있다. 출산할 때의 불결은 모체에 파급된다. <레위기>(율법을 기록한 구약성서)를 비롯한 고대의 법률은, 모두 산모의 정화와 의식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산모의 배나 유모의 부푼 유방 앞에서 아이들이나 젊은 처녀나 남자들이 엉겁결에 당혹감을 느끼고, 그런 심정 을 냉소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뒤피트랑 박물관에서는 구경꾼들이 무덤이라도 파헤치는 듯한 병적인 호기심으로 밀랍 의 태아나 알코올에 담근 태아를 들여다본다. 사회가 그것을 아무리 감싸더라도 잉태작용 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래서 남자는 아기 때에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능적으로 애착 을 느껴도,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육체 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육체를 무시하려고 하며, 어머니에게서 정신적인 인격만 보려고 한다. 그가 어머니를 순결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 의 질투심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육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려는 심정 때문이다. 청 년은 친구들과 함께 걸어갈 때, 어머니나 자매나 가족 중의 여성을 만나면 당황하여 얼굴 을 붉히기 일쑤이다. 그 이유는, 그녀들의 모습이 그가 뛰쳐나오고 싶어하는 내재의 영역 으로 그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거기서 뽑아버리고 싶어하는 뿌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포옹해 주거나 뺨을 비비면 소년이 언짢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 서이다. 그는 가정을,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을 거부한다. 그는 아테네 여신처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무장하고, 불사신으로 어른의 세계에 나타나고 싶은 것이다. 잉태되 었다는 것, 그리고 출산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숙명적인 저주이며, 그의 존재를 더럽히는 오점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생숭배는 언제나 사자숭배와 연 결되어왔다. '어머니의 대지'는 뱃속에 그녀의 자식들의 유골을 삼켜버린다. 인간의 운명의 실을 짜는 것은 여자들-파르카에(로마신화에서 생사를 주관하는 세 여신)나 모이라이(그 리스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이지만, 그 실을 끊어 버리는 것도 그녀들이다. 전설 속 에서 '죽음'은 대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죽음은 여자들이 일이므로 죽은 자를 슬퍼 하는 것도 여자가 할 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인 여성'은 암흑의 얼굴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발생하고, 모 든 것이 언젠가는 거기로 돌아가는 혼돈이며, 허무이다. 이 암흑 속에, 낮에 분명히 보였던 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물질의 일반성과 불투명성 속에 갇혀 있는 정신의 밤, 수면과 무의 밤이다. 바다 밑은 암흑이다. 여자는 옛날의 뱃사공들이 두려워했 던 '마음의 심연'이다. 대지의 내부도 암흑이다. 남자를 삼켜버리려고 대기하고 있는, 번식 의 이면인 이 밤은, 남자에게 두렵기 짝이 없다. 남자는 하늘이나 햇빛이나, 햇빛이 반짝이 는 산꼭대기와 푸른 하늘의 수정같이 맑은 냉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발 밑에는 습하고 후 덥지근하고 캄캄한 심연이 그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많은 전설을 영웅이 동굴이나 심 연이나 지옥과 같은 어머니인 암흑 속에 떨어져 영구히 파멸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반성이 작용한다. 출생이 언제나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죽음 은 또한 다산성과 결부되어 있다. 혐오스러운 죽음은 새로운 탄생도 되어, 그때에는 축복 을 받는다. 죽은 영웅은 오시리스(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수호신)처럼 봄마다 부활하여 새로운 출산에 의해 재생된다며 K. 구스타프 융(스위스의 심리학자, 콤플렉스라 는 개념도 그에게서 나왔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리비도의 변신>에서) "남자의 가장 큰 소원은 죽음의 검은 파도가 생명의 파도가 되는 것, 죽음과 그 싸늘한 포옹이 어머니의 무릎이 되는 것이다. 마치 바다가 태양을 삼켜 해저에서 그것을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태양신의 바다에의 몰입과 그 빛나는 재현은 많은 신화에 공통된 테마이다. 그래서 남자 는 살기를 원하면서 또한 그와 동시에 휴식이나 수면이나 허무도 갈망한다. 그는 불멸을 원치 않는다. 죽음을 사랑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무기물질은 어머니의 품속이다. 생명 에서 해방되는 것은 진실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즉 자기완성이다. 이것을 깨달은 인간 은 무감각한 흙덩이로 돌아가는 것을 축제처럼 즐겁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니체는 쓰고 있다. 초서는 죽을 수 없는 노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기도하게 한다. 지팡이를 짚고 나는 낮이나 밤이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문인 대지를 두드리며 말한다. 오 어머니여,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소서. 남자는 자기의 개별적인 실존을 확립하고, 자기의 '본질적인 차이'에 자랑스럽게 안주하 기를 바라지만, 또한 자아의 경계를 타파하여 물과 대지와 밤에, '허무'에, '전체'에 융합하 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를 유한성에 가두고 있지만, 여자에 의해 남자는 자기 본래의 한 계를 초월할 수 있다. 여기서 여자에게 주어진 애매한 마력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나, 오늘날까지도 여자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 이것은 남자가 자 기 육체의 우연성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여자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직 미성숙한 소녀는 아무 위협을 주지 않아, 전혀 터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신성한 성격도 갖지 않는 다. 많은 원시사회에서는 그런 소녀의 성기도 순결한 것으로 생각하여, 남자아이와 여자아 이가 꼬마 때부터 에로틱한 놀이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여자가 부정하게 생각되는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때부터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처음 으로 월경이 시작된 날부터 그 소녀를 감시하는 엄격한 터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자가 특히 존경을 받던 이집트에서도 월경기간중에는 줄곧 갇혀 지냈다. 흔히 여자를 지 붕 위에 올라가게 하거나 마을 외곽에 있는 오두막 속에 감금하여, 그 모습을 보거나 몸에 닿는 것도 금기되었다. 더욱이 월경중인 여자는 스스로 자기 몸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된다. 날마다 이를 잡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있는 민족 사이에서는, 여자에게 막대기를 주 어 몸을 긁게 한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만져서도 안 되고, 또 음식을 입에 대는 것 을 금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머니나 자매가 숟가락으로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주게 했다. 또한 월경기간에 그녀의 몸에 닿은 물건은 모두 불태워야 했다. 이 첫번째 시련이 지나면 월경 터부는 어느 정도 완화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엄격했다. 특히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몸 안에서 피가 흐르는 여자는 7일 동안 부정하다. 그 몸은 만진 자는 그날 하루 동안 부정하다. 여자가 잠자는 침대는 모두 부정 하고, 그녀가 앉은 자리도 부정하다. 그녀의 침대를 만진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하며, 그날 하루 그도 부정하다." 이 문장은 임질에 걸린 남성에게 생기는 부정을 다룬 내용과 같으며, 또한 정화를 위한 의식도 양자가 동일하다. 월경이 끝나면 7일 후에 제사장에게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갖고 가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모권사회에서는 월경이 두 가지 상반작용을 한다고 생각한 점이다. 월경은 사회활동을 방해하고 생명력을 파괴하고 꽃을 시들게 하고 과일을 떨어뜨리지만, 반면에 유익한 효능도 갖고 있다. 경수나 마약이나 약제, 특히 외상이나 피하출열을 치료 하는 데 쓰인다. 지금도 일부 인디언 사회에서는, 개천에 출몰하는 도깨비를 퇴치하러갈 때 월경의 피를 헝겊에 적신 뭉치를 뱃머리에 놓아둔다. 그 피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초자 연적인 적을 퇴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일부 도시에서는, 젊은 처녀들 이 자기들의 첫 월경 때의 피가 묻은 속옷을 아스타르테의 신전에 공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가 출현한 후에는, 여자의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수상한 액체에 대하여는 불길한 효능만 생각하게 되었다. 플리니우스(로마의 장군, 23~79)는 <박물지>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월경이 시작된 여자는 농락물을 썩게 하고, 화초를 시들게 하 고, 싹을 죽이고, 과일을 떨어뜨리고, 꿀벌을 죽여버린다. 만일 그 여자가 술에 손을 대면 술은 식초로 변한다. 우유는 시큼해지고...." 영구의 어떤 노 시인을 이와 비슷한 정서가 담긴 시를 썼다. 오, 월경이 시작된 여인이여, 너의 재앙으로부터 자연을 지켜야겠다. 이와 같은 신앙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고 있다. 1878년 영 국 의학협회의 한 회원은 영국 의학회지에 게재한 보고서에서 "월경중인 여자의 손을 만진 사이 썩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언명하고, 그 경우에 햄이 썩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 금세기 초에 북부의 제당공장에서는 영어로 커스라고 부 는 월경중인 여자는 공장에 들어가지 말라는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설탕이 검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이공의 아편공장에서는 여자를 고용하지 않는다. 월경의 작용으로 아 편이 변질되어 시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여러 시골에 남아 있다.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은 누구 나 자기가 월경중이거나 월경중인 여자가 옆에 있기만 해도 마요네즈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앙주 지방에서 최근에 어떤 늙은 정원사가 그 해에 수확한 능금주를 지하실에 보관한 후에 주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댁의 젊은 부인이나 여자 손님 주에 월경이 있는 날에는 술을 보관한 지하실 앞을 지나가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부인들 때문에 사과가 발효되지 않으니까요." 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한 여자 요리사는 어깨를 치켜올리고 말했다. "그것(월경) 때문에 능금주가 발효되지 않다니 말도 안 돼. 그것이 망쳐놓는 것은 비계뿐이야. 월경중인 여자 앞에서 고기를 소금에 절여 서는 안 되지. 썩어버리니까." 이런 혐오감과 모든 경우에 출혈이 일으키는 혐오감을 혼동하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피 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요소이며, 생명과 죽음을 겸한 신비로은 마나(본래는 멜라네 시아 토민의 말로, 초자연적인 힘을 뜻함)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이 침투되어 있다. 그러나 월경의 고약한 힘은 더욱 독특한 것으로, 그것은 여자를 위태롭게 한다. 샤고족들 은 딸에게 성교육을 할 때, 월경의 피를 조심스럽게 감추도록 가르친다. "엄마에게 그런 걸 보여서는 안 돼, 엄마가 죽어버리니까. 친구에게 보여서도 안 돼. 그 친구들 중에 나쁜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닦은 헝겊을 가져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너는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못해. 그리고 그 헝겊을 길가나 숲속에 버려도 안 왜. 고약한 사람이 그것을 나쁜 일에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그 헝겊은 땅 속에 묻어야 해. 피가 아버 지나 형제자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해. 만일 눈에 띄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된단다." (레비스토로스의 <혈족관계의 원초적 형태>에서 인용) 알레우트족(북태평양 군도의 주 민)은 아버지가 초경중인 딸의 모습을 보면, 그 딸은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될 위험이 있다 고 생각했다. 이 기간중에 여자는 귀신에 씌어 위태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 이다. 일부 원시민족은 월경은 뱀에게 물려서 일어나는 것이며, 여자는 뱀이나 도마뱀과 수상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월경에는 파충류의 독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는 월경과 임질을 비슷한 것으로 본다. 여성의 성기의 출혈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수상한 상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니(19세기 프랑스 시인)도 더러워진 것과 병에 걸린 것을 동일시하여 "여자, 열두 번이나 더렵혀지는 병든 아이"라고 썼다. 체내의 불가사 의한 연금술의 산물인 여성의 주기적인 출혈은 달의 주기와 묘하게도 일치한다. 달에도 위 험한 변덕이 있다. 여자의 몸은 유성이나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는 무서운 톱니장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 다는 것이다. 별과 조수의 운명을 결정하고, 인간에게 불안한 작용을 하는 우주적인 힘에 여자가 농락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것은, 월경의 영향이 크림을 변질시키고 마요네즈를 손상시키고, 발효나 부패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월경은 깨지기 쉬운 물건을 파괴하고 바이올린과 하프의 줄을 끊게 한다고도 말한다. 특히 월경은 물질과 생명의 중간 유기물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피이기 때문이라기보 다도 생식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생명의 발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대인은 난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므로 월경을 정자의 보조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사실은 이 피가 여자를 부정하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피 는 여자가 부정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 피는 여자에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에 나오게 되며, 이 피가 사라지면 여자는 다시 불임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태아가 형성되는 뱃속에서 나오는 이 피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출산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부정한 여자에 고나한 여러 가지 터부 중에서도, 그 여자와의 성교를 일체금지하는 규정 이 가장 엄격했다. <레위기>는 이 규정을 어긴 남자에게는 1주일간의 부정의 형벌이 언 도되었다. 마누법전(고대 인도의 법전)은 더욱 엄격하다. "월경으로 오염된 여자를 가까이 하는 남자는 지혜와 몸과 기력을 크게 잃게 된다." 고행승회는 월경중인 여자와 성교한 남 자에게 보름 동안 속죄를 명했다. 월경중일 때는 여성적인 원소가 최대의 위력을 발휘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밀한 접촉으로 그것이 남성적인 원소를 정복해 버리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분명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여자에게서 무서운 모성적인 본질을 발견하는 것 두려워하고 있다. 남자는 어떻게 해 서든지 여자의 이 양면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민족과의 결혼이나, 혹은 더욱 현 대적인 형태로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월경중이거나 임신 중, 혹은 수유기간중과 같이 특히 여자에게 생식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시기에는 남자 가 여자를 성적으로 멀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설명에는 어느 정 도의 수정이 필요하지만, 이런 태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을 밑받침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경계하는 것은, 여자가 뭐라고 파악하기 어려운 세계의 애매한 원천 또는 생명의 불가해한 생명의 일면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주나 신들과 일단 분리된 사회가 그것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여성의 이 런 성격에 의해서이다. 오늘날에도 베두인족이나 이로쿼이족에서는 전답을 수확하는 역할 을 여자가 담당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자는 땅속의 소리를 듣고, 바람이나 나무 의 말을 포착했다. 여자는 무당이나 점쟁이나 예언자였다. 죽은 자나 신들은 여자의 입을 통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자는 이런 능력을 갖고 있어서 영매사, 수상가, 카드 점쟁이, 예언가, 신을 영접한 자가 되기도 한다. 여자는 사물의 소리를 알아듣고, 유령을 본다. 남 자가 식물적 또는 동물적인 생명의 품속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에는, 예컨대 힘 을 되찾기 위해 대지를 만진 안타이오스(포세이돈과 대지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그와 싸울 때, 그를 땅에 집어던져 그의 어머니인 대지와 그가 접촉하게 될 때마다 전보다 더 큰 힘 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그를 들어올려서 죽였다고 함)처럼 여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합리주의적인 문명시대에도, 지하의 신들에 대한 숭배는 계속되었다. 평소에는 공적인 종교생활과는 별도로 그것들을 숭배했으며, 엘레우시스(고대 그리스의 신 비극)의 경우처럼, 비의의 형태를 취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이 갖는 의미는, 독립과 정 신에의 의지를 강조하는 태양숭배가 갖는 의미와 정반대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남자는 황홀에 의해 자기의 고독에서 탈출을 시도하므로, 거기에 신비극이나 주신 제의 목적이 있다. 남성들에 의해 정복된 세계에서는 남성적인 신인 디오니소스가 이슈타르나 아스타르테 가 갖고 있던 원시적인 마력을 빼앗아버렸으나, 그래도 그의 주의에는 많은 여성이 날뛰고 마이나스나 튀나스, 박케(이들은 술의 신 박카스의 제식에 참가했던 여승들이다)는 남자들 을 종교적인 도취로, 성스러운 광기로 몰아넣었다. 신전에서 벌어진 매음행위의 역할도 유 사한 것이다. 생식력을 폭발시켜 소통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오늘날에도 민간축제의 특 징은 색욕의 해방이다. 거기서 여자는 쾌락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기를 초월하 여 열광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존재가 자기의 내부에 소유하고 있는 잃 어버린 비극적인 것, '눈부신 기적'은 침대 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고 바타유는 쓰고 있다. 색욕의 해방에서, 남자는 애인을 포용하고 육체의 무한한 신비 속에 빠져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남자의 정상적인 성욕은 '어머니'를 '아내' 에게서 격리시킨다. 남자는 생명의 불가해한 연금술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그 자 신의 생명은 대지의 향기로운 산물을 달게 먹으면서 살고 있다. 남자는 그런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고자한다. 남자는 물속에서 나온 비너스(미와 사랑의 여신)를 탐낸다. 가부장제도가 시행되는 사회에서는, 최고의 창조주는 남성이므로 여자는 먼저 아내의 모 습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어머니이기 전에 이브는 아담의 배우자이다. 남자에게 여자가 주 어진 목적은, 남자가 땅을 소유하여 경작하는 것처럼, 그녀를 자시 소유로 하여 수태시키 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자연을 자기 영토로 만든다. 남자가 성행위 에서 요구하는 것은, 오직 주관적인 잠깐의 쾌락만이 아니다. 남자는 정복하고 불잡고 소 유하기를 원한다. 남자에게 여자를 갖는다는 것은 그녀를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보습이 밭이랑에 파고드는 것처럼 그녀 속에 파고든다. 그리하여 자기가 경작하는 땅을 자 기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여자를 자기것으로 만든다. 경작하고, 심고, 씨를 뿌리는 비유는 문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있었다. 그 예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다. "여자는 밭 이고 남자는 씨앗이다."하고 마누법전은 말하고 있다. 앙드레 마농의 그림 중에, 남자가 삽 을 손에 들고, 여자의 성기인 뜰을 파는 것이 있다. 남자가 공포와 욕망 사이, 즉 정체불명의 힘에 사로잡힌다는 공포심과 그 힘을 사로잡으 려는 의욕 사이에서 망설이는 모습은, '처녀성'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 속에 분명히 반영되 어 있다. 때로는 남성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바라고 요구하는 처녀성은, 여성 이 지닌 신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가장 불안하면서도 가장 매혹적 인 것이다. 남자가 자기를 에워싼 힘에 압도되는 느낌을 갖느냐, 혹은 그런 힘을 자랑스럽 게 굴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느냐에 따라서, 아내가 처녀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 을 싫어하기도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극히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여자의 위력이 크게 생각되 었기 때문에, 두려움 쪽이 우세했다. 그래서 여자는 결혼 첫날밤 이전에 처녀를 상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마르 코 폴로는, '티베트인은 아무도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처녀배척에 대해서는 흔히 합리주의적인 해석을 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의 성욕 을 자극한 적이 없는 아내는 남자가 원치 않는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아랍의 지리학자인 엘 베크리가 슬라브인에 대해 보고한 바에 의하면, "남자는 결혼하여 여자가 처녀인 줄 알 게 되면 아내에게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여자로서의 가치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당신을 좋 아하여 처녀성을 빼앗은 남자가 한 사람쯤은 있었을게 아냐'하고 말하며 그 아내를 쫓아낸 다."고 한다. 일부의 미개인은 이미 어머니가 된 경험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생식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여자하고만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널리 퍼진 처녀회피의 습관이 생기게 된 진정한 동기는 더욱 신비스런 것이다. 어떤 종족은 여자의 질 속에는 뱀이 한 마리 살고있으며, 처녀막이 찢어질 때 남 편의 성기를 깨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녀막의 출혈은 월경의 피와 마찬가지로 남성의 정력을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서운 위헙을 여기에 결부시키고 있다. 이 런 상상을 통해서 여성적인 요소는 그것이 자연 그대로일수록 더 큰 위력과 피해를 내포 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처녀성의 상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예를 말리노프스키가 쓴 글에서 찾 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토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의 유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딸 들 중에서 처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때로는 어머니나 언니 또는 나이든 여인이 일부러 딸의 처녀성을 빼앗아 소녀시절에 질구를 넓히는 경우도 있다. 또는 성숙기에 도달 했을 때 나이든 여자들이 막대기나 뼈나 돌로 질을 넓히는데, 그것을 외과수술쯤으로 생각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다른 종족은 딸이 사춘기가 되면 거친 성교육을 강요한다. 남자들은 그녀를 마을 에서 끌어내어, 도구를 사용하거나 폭력을 사용하여 처녀성을 빼앗는다. 가장 자주 행하는 의식의 하나는 길을 가는 이방인에게 처녀를 맡기는 방법이다. 이것은 그 부족의 남자에게 만 위험한 마나(초자연적인 힘)에 이방인은 그다지 민감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 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고, 그 마나의 화를 자기들이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음에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승려나 의사, 추장 또는 부락의 우두머리가, 결 혼식 전날밤에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는 방법이다. 말라바르 연안에서는 이 역할을 바라문 승려가 맡는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의무적으로 이를 실행하여 많은 수고비를 요구한다. 모든 신성한 물건들은 속인에게는 위험하지만, 그 자신이 신성화된 인간은 위험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경계해야 하는 해로운 힘을 승려나 족장 이 제압할 수 있는 이유도 납득이 간다. 로마에는 이런 풍습이 상징적인 의식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프리아포스신 석상의 음경 위에 신부를 앉히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신부의 생식력을 높이고, 그녀의 내부 에서 너무 강하게 솟아나 오히려 해로운 액체를 흡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밖에 남편은 또 다른 방법으로 자기 몸을 지킨다. 자기가 신부의 처녀성을 빼앗되, 이 위험한 순간에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의식을 통해서 행동으로 옮긴다. 예를 들면 마을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막대기나 뼈조각을 사용하여 처녀성을 빼앗는다. 사모아에서는 흰 헝겊을 감 은 손가락을 사용하여, 피로 물든 그 헝겊을 구경꾼들에게 나눠준다. 남편이 제대로 아내 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에도 정자가 피에 오염되지 않도록 3일이 지나기 전에는 아내의 체내에 정액을 사정해서는 안 된다. 신성한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기능 때문에, 좀더 개화된 사회에서는 이런 피가 적 당한 상징의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결혼식이 끝난 이튿날 아침에, 친족 이나 친구들 앞에 피가 묻은 시트를 내보이는 마을이 있다. 이것은 가부장제도의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짐승의 거친 성질은, 그것을 길들일 줄 아는 주인에게 소중한 가치가 된다. 인간은 야생마의 혈기나 번개나 폭포의 맹위를 자기의 번영을 위한 도구로 바꾸었 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여자가 지닌 모든 것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젊은 딸에게 부과하는 순결의 계율은 확실히 합리적인 동기에서였다. 아내에게 정조를 요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혼녀의 순결도 아버지가 자기 재산을 남의 자식에게 넘겨줄 위 험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아내를 자기의 재산으로 간주할 경우에, 처녀성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직 접적인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소유라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결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소극적인 방법으로 소 유하려고 한다. 어떤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에게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아직 어느 누구의 소유도 도지 않은 것처럼 바람직하게 생각되는 것은 없다. 이 경우에 정복은 유일하게 절대적인 사실로 보이 지 때문이다. 처녀지는 언제나 탐험가들의 마음을 끈다. 이전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산악 을 정복하려고 하며, 그 산중턱에 새로 길로 내기 위해 해마다 여러 명의 등산가가 목숨을 던지기도 한다. 또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지하동굴로 목숨 을 걸고 들어간다. 남자들이 이미 정복한 물건은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자연과의 연 결이 끊어지면, 그것은 가장 뛰어난 효능을 잃게 된다. 사나운 급류는 거리의 광장에 있는 분수의 물보다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처녀의 육체에는 지하를 흐르는 샘의 싱싱함이 있 고, 피지 않은 꽃봉오리의 새로움이 있고, 햇빛을 받은 적이 없는 진주의 광택이 있다. 동 굴이나 신전, 비원 등은 아직 어떤 의식도 없이 영혼이 부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두운 장소이므로, 남자는 아이들처럼 이에 매혹된다. 자기만이 손에 넣고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은, 자기가 창조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모든 욕망이 추구하는 목적의 하나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소멸시키려는 것이며, 거 기에는 파괴정신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처녀막을 파괴하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침입하는 것보다 더욱 친밀하게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게 된다. 이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작 용으로, 그는 상대방을 분명히 수동적인 대상으로 삼고,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 의미는, 아직 아무도 그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는 장미꽃을 꺾기 위해 가시덤불 속을 애써 헤치고 들어간 기사의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는 장미꽃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줄기 를 꺾는다. 이렇게 해서 그것을 정복한 것이 된다. 이 비유는 대단히 분명하여 속어로 '꽃 을 꺾는다'고 말하면 여성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표현에서 'defloration' (처녀성 상실, 또는 낙화라는 의미)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처녀성은 젊음과 결부되지 않으면 이런 색정적인 매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지 못 하면 그 신비성은 다시 불안한 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많은 남자들은 결혼이 너무 늦은 처녀에 대해 일종의 성적 반발을 느낀다. '올드 미스'를 까다롭고 심술궂은 아주머니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저주는 그녀들의 육체 자체 속에 있다. 어떤 주체의 대상도 되지 않고, 어떤 욕망도 탐내지 않았으며, 남자들의 세계에 의해 끝내 그 위치가 발견되지 않은 채 꽃을 피우고 시들어버린 육체, 목적지에서 벗어난 그 육 체는 미친 사람의 전달 불능의 사고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만 든다. 처녀로 짐작되는 아직 아름다운 사십대의 여자를 두고, 한 남자가 "저 속에는 거미 줄을 잔뜩 치고 있을 테지..." 하고 천한 비평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아무것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지하실이나 곳간은 불결한 신비에 가득차게 된다. 유령 따위가 나타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버림을 받으면 집은 폐가가 된다. 여자의 처녀성은 신에게 바쳐지지 않으면 악마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이기 쉽다. 남자의 지 배를 받지 않은 처녀나 남자의 권력에서 벗어난 늙은 여자는, 다른 여자보다 마녀처럼 보 이기 쉽다. 즉 어차피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바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으므로, 만일 그 녀가 남자의 속박을 얌전히 감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악마의 속박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 이다. 꽃을 꺾는 <처녀성의 상실의> 의식에서 악마를 쫓아내거나 반대로 처녀성에 의해 정화 되면, 배우자에게 바람직한 먹이로 보일 수도 있다. 이 여자를 품에 안음으로써 사랑하는 남자는 생명의 모든 보물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 남자에게 그녀는 지상의 생물의 전부이며 꽃의 전부가 된다. 그녀는 영양이며, 사슴이며, 백합이며, 장미이며, 솜털이 이는 복숭아이 며, 향기로운 딸기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보석이며, 나전이며, 마노이며, 진주이며, 명주이 며, 푸른 하늘이며, 싱싱한 샘이며, 맑은 공기이며, 불꽃이며, 땅이며, 물이다. 동서양을 불 문하고 시인들은 모두 여체를 꽃이나 과일, 또는 새로 변형시키고 있다.이에 대해서도 고 대.중세.근대에 걸쳐 예를 들려고 하면, 한 권의 두꺼운 시집이 될 것이다. 유명한 <아가> 속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대의 눈은 새끼비둘기와 같고... 그대의 머리칼은 염소의 무리와 같고... 그대의 이는 털을 깎은 양의 무리와 같고... 그대의 뺨은 석류 열매와 같고... 그대의 두 유방은 두 마리의 어린 사슴과 같고... 그대의 혀는 벌꿀과 우유 맛이 난다. <비법 17>에서 앙드레 브르통(프랑스의 시인, 현실주의의 창시자, 1896 ~ 1966)은 이 영원한 '아가'를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외쳤을 때의 멜뤼신. 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에서 솟아오르는 듯이 일어난다. 그 녀의 아랫배에는 8월의 보리가 풍요롭게 물결치고, 상체는 제비 날개의 곡선 같은 허리의 선에서 불꽃처럼 튀어오르고, 그녀의 가슴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놀라고, 타는 듯한 입에서 작열하는 숯불에 비쳐져 눈이 먼 담비와 같다. 그리고 양팔은 노래부르면서 향기를 뿜는 시냇물의 넋이다..." 남자는 여자 위에서 빛나는 별과 잠긴 달을, 햇빛과 동굴의 어둠을 다 시 발견한다. 그래서 여자는 덤불 속의 찔레나무이기도 하고, 정원의 탐스러운 장미이기도 하다. 님프와 숲속의 여신, 바다의 마녀, 물의 정령이나 천사는 들과 숲.호수와 바다 등에 거주한다. 이와 같은 정령신앙은 남자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뱃사람들에게 바다는 위험하고 배신하며 다루기 어렵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애정을 느끼는 여자와 같 다. 교만하고 반항적이고 순결하고 짓궂은 산악은, 목숨을 걸고 그것을 정복하려는 등산가 에게 여자와 같다. 이런 비유는 성적 승화의 표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자와 자연 사이 에는 성욕 자체만큼이나 근원적인 친밀성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를 소 유하는 데서 본능의 만족 이외의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자연'을 정복 하는 중간대상으로서의 가장 적합하다. 여자말고 다른 것이 이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남자가 젊은 동성자의 육체에서 해변의 모래나 밤의 포근한 감촉, 인동덩굴의 향기 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지의 육체적 소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성적 행위에 국 한되어 있지 않다. 슈타인벡은 그의 소설 <미지의 신에게>에서, 자기와 자연 사이의 중개 자로서 이끼낀 바위를 택한 한 남자를 보여준다. 콜레트가 <암코양이>에서 묘사하고 있 는 젊은 남편은 귀여워하는 암코양이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 이유는 야생적이고 얌전한 동 물을 통하여 너무나 인간적인 아내의 육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세계에의 실마리를 찾 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여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다나 산에서도 완전하게 구 현될 수 있다. 그것들은 남자에게 한결같이 수동적인 저항을 하여, 남자에게 자기를 성취 하는 기회를 준다. 그것은 결국은 굴복당할 거절이며, 손에 넣을 수 있는 먹이이다. 바다와 산이 여자라면, 그것은 여자도 또한 상대방 남자에게는 바다나 산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남자와 세계의 매개역할이 어떤 여자에게나 허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 다. 남자는 상대에게서 자기의 생식기관의 보조적 기관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상대인 여자가 생명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불가해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젊음과 건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품에 안을 때, 남자는 모든 생명엔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는 열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욕심꾸러기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가 미인이기를 원한다. 여성미의 이상은 변하지만, 몇 가지 요구는 변치 않는다. 특히 여자는 운명적으로 누군가에게 소유되게 마 련이므로, 그 육체는 확고하게 수동적인 특성을 보여줘야 한다. 남성미는 능동적인 작용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력.순발력.유연성이다. 그것은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되는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초월'의 표현이다. 여성의 이상이 이처럼 되는 것은, 스파르타나 파시스 트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에서처럼, 여자를 국가의 목적을 위해 제공할 뿐 개인의 목적 을 위해 제공하지 않으며 여자를 주로 모성으로만 생각하고 에로티시즘을 인정치 않는 사 회에서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에게 재산이 될 경우에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여자의 육체가 순수한 사실성(상황)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자의 육체는 주체성의 구현으로 파악되지 않고, 내 재성 속에 고정된 하나의 물체로 파악된다. 그 육체는 세계의 다른 부분에 작용해서는 안 되며, 자기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의 기대가 되어도 안 된다. 즉 그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여자에의 요구가 가장 소박하게 나타난 것이 호텐토트족에서 볼 수 있는 미 인의 이상형이다. 그들은 둔부가 커야 미인으로 여긴다. 둔부는 육체에서 가장 둔감한 부 위, 즉 목적 없이 주어진 육체의 한 부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유럽인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의도도 없이 단지 거기 있다는 것밖에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데도 지방이 발달된 그 부조리한 사치가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형태나 조화의 관념이 개입되어 있는 가장 세련된 감각을 지닌 문명사회에서도, 흉부와 둔부는 그 발달의 무목적성과 우연성 때문에 특별한 대상으로 남아 있다. 때때로 풍습이나 유행은 여성의 육체를 초월(어떤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내재'이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초월'이다)에서 강제로 떼어놓는 데 주력해 왔다. 전족을 한 중국 부인은 제대로 걸 어다니지 못하고, 할리우드 영화스타의 매니큐어를 한 손톱은 그녀의 손을 자유롭게 움직 일 수 없게 하고, 하이힐이나 코르셋, 패니어(살을 넣어 둥글게 퍼지게 한 스커트)나 퍼싱 케일(고래뼈의 테를 넣어 펼친 스커트)은 여체의 곡선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무능력을 높 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너무 비대하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거나 또는 반 대로 너무 여위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거나, 불편한 옷이나 예의범절에 의해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여자는 남자의 눈에 자기 소유처럼 보이는 것이다. 화장이나 보석류 도 육체나 얼굴의 화석화에 일조를 한다. 장식품의 역할은 대단히 복잡하여, 일부 미개인 사이에서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역할은 여자를 우상으로 변형 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애매한 우상이다. 남자는 그것이 육체로 되어 있기를 원한다. 그 아 름다움은 꽃이나 과일과 같은 아름다움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또한 조약돌처럼 매끄럽고 딱딱하고 오래 가야 한다. 장식품의 역할은 여자를 더욱 자연과 비슷하게 하는 동시에, 여 자를 자연에서 떼어놓는다. 즉 약동하는 생명에 인공으로 굳어버린 필연성을 부여하게 된 다. 여자는 몸에 꽃이나 모피.보석.패각.깃털을 뒤섞어, 자신을 초목이나 표버.다이아몬드나 진주층으로 만든다. 장미나 백합과 같은 향기를 발산하기 위해 자기 몸에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깃털이나 명주.진주.향수는 그녀의 육체와 체취에서 발산시키는 동물적인 생 기를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입술이나 뺨을 붉게 칠하여 가면의 확고부동성을 부여한다. 그 눈동자는 짙은 마스카라에 에워싸여 이미 이상하게 반짝이는 장식물에 불과 하다. 엮어지고 지져지고 매어진 머리칼은 그 은밀한 식물적인 신비로움을 잃게 된다. 장식된 여자 속에 '자연'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남자가 원하는 대로 인간의 의지에 의해 개조된 것이다. 여자에게서 자연이 충분히 개화하고, 그 자연이 엄격히 억압되어 있 을수록 바람직하다. 부자연스러운 인공적인 여자가 언제나 욕정의 이상적인 대상이 되어왔 던 것이다. 구르몽은 여자의 머리칼은 시냇물이나 초원의 풀처럼 자연 그대로 물결치게 하 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냇물의 물결이나 이삭의 파도처럼 애무할 수 있는 것은 베로니카 레이크(미국의 영화배우, 긴 금발이 매력적이었다)와 같은 여자의 머 리이지, 실제로 자연 그대로의 더벅머리가 아니다. 여자가 젊고 건강할수록, 신선하고 윤기있는 육체가 영원히 싱싱하게 보일수록 기교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도 역시 남자가 포옹하는 이 먹이의 육체적 약점과 그 육체를 노 리고 있는 파괴를 남자의 눈에서 숨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우연적인 숙명 을 두려워하고 변함없는 필연적인 모습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얼굴이나 몸매에서 하나의 엄격한 이상을 추구한다. 미개인 사이에서는 이 이상은 단지 일반적인 형태의 완성에 불과하다. 두터운 입술과 납 작한 코를 가진 민족은 두터운 입술과 납작한 코를 가진 비너스를 만들어낸다. 문화가 발 달되면, 더욱 복잡한 미학의 기준이 여자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의 용모나 몸 의 균형이 조화를 이룰수록 그 여자는 자연적 산물의 변화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남자를 기쁘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여자에 게서 자연, 그러나 변형된 자연을 파악하길 원하면서도 남자는 오히려 여자를 인공에 맡긴 다. 여자는 자연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반자연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기퍼머나 탈모크림 이나 브래지어의 문명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고지대의 흑인국가나 중국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서 그렇다.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1667 ~ 1745)는 셀리아에 게 바친 유명한 시에서 이러한 기만을 고발했다. 그는 바람을 피우는 여자의 화장도구를 불쾌하게 묘사하여, 그 육체의 동물적인 예측을 신랄하게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분개하고 있는 것은 이중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 가 동물이나 식물인 동시에, 인공적인 틀 위에 숨어 있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파도 사이에서 올라올 때나 양장점에서 나올 때, 알몸으로 있을 때나 옷을 입고 있 을 때나 모두 좋아한다. 즉 인간세계에서 만나는 그대로, 스커트 밑에 알몸이기를 원한다. 도시의 인간은 여자에게서 동물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입대한 시골 젊은이에게는 매음굴이 도시가 지닌 매력의 전부이다. 여자는 들에도 있고 목장에도 있지만, 동시에 바빌론(문화 가 퇴폐한 대도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여자의 최초의 거짓이고 최초의 배신이다. 그것은 생명 자체의 배 신이기도 하다. 생명은 아무리 아름다운 외형을 지녀도, 언제나 노쇠와 죽음의 씨앗을 지 니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부리는 것 자체가 여자의 가장 소중한 장점을 파괴하게 마련이 다. 출산의 무거운 짐으로 여자는 성적 매력을 잃게 된다. 아기를 낳지 않더라도 갱년기가 어면 매력이 사라진다. 병들거나 못생겼거나 늙은 여자는 배척을 받았다. 그런 여자를 가 리켜 식물처럼 시들었다거나 쭈그러졌다고 말한다. 물론 남자에게도 노쇠는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다른 남자를 육체로서 경험하지 않고, 또 그런 자주적인 다른 육체와는 추상적인 연대성만을 갖는다. 때문에 남 자가 육체의 퇴화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자기에게 운명이 걸려 있는 여자의 육체에서 이다. 비용(프랑스의 시인, 1431 ~ 1463)의 <투구상인의 아름다운 아내>에선 남성의 적의에 찬 눈을 통해서 자기 육체의 노쇠를 바라본다. 늙은 여자나 못생긴 여가는 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섞인 증오감을 준다. 그런 여자에게서는 '모성'의 불안한 모습 이 엿보이고 '아내'의 매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내'도 위험한 먹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탐스런 금발에서 물방울을 튀기면서 파 도 사이에서 나타나는 비너스에게도 데메테르 여신(대지의 여신)은 살아 있다. 남자는 여 자에게서 얻는 쾌락을 통하여 여자를 자기 소유로 삼으면서, 그녀 속의 생식력을 각성시킨 다. 남자가 여자에게 침입하는 곳과 여자가 아기를 낳는 곳은 같은 기관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도 남성은 참으로 많은 금기에 의해 여성의 성기의 위협에서 보호받고 있다. 그 반대도 반드시 진실은 것은 아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도 없다. 남성은 속 되고 종교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남근이 신의 위엄으로까지 추앙되는 경 우는 있지만, 남근숭배에는 공포의 요소가 조금도 보이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여자가 그 것으로부터 신비적으로 보호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여자에게 적합한 것뿐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모권사회에서는 대단히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으나, 그것 은 단지 여자의 유년시절이나 소녀시절에서처럼, 성교가 생식의 관념과 결과되지 않는 기 간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키는 <독신자의 집>에서, 자유롭게 동침하는 젊은이들이 자기의 정사를 예사로 과시한다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이 경우에 미혼녀는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성행위는 태연스럽게 할 수 있는 안전 하고 비종교적인 쾌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면, 남편은 남이 보는 앞에서 아내 에게 전혀 애정의 표시를 해서는 안 되고, 손으로 만져서도 안 되며, 두 사람의 친밀한 관 계를 암시하는 행동은 일체 모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여자는 어머니라는 두려 운 존재가 되고, 성교는 하나의 신성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후로 이 행위는 금단과 경계로 에워싸이게 된다. 그래서 밭을 갈 때나 씨를 뿌릴 때나 묘목을 심을 때에도 성교는 금지된다. 그 이유는 풍요로운 수확, 즉 공동체의 복지에 필요한 힘이 개인의 성교로 낭비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풍요와 결부된 힘에 대한 경의에서 그것을 절약하도록 명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절제는 남편의 정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남자가 사냥을 나 가거나 전쟁준비를 할 때에는 절제가 요구된다. 여자를 가까이하면 남성적인 정력이 약화 되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의 전력을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나 성교를 피해야만 했다. 남자 가 여자에 대해 느끼는 공포심은, 일반적인 성관계의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나 그 반 대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특히 <레위기>에서 여자와는 무관한데도 몽정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사회에서도 소음은 위험시하고 죄악시한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그것을 행하고있다. 고독한 쾌락을 악덕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회, 특히 부모의 간섭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정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 젊은이도 적 지 않다. 피든 정액이든 자기의 실질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불안한 것이다. 자기의 생명, 자 기의 마나<초자연적 능력>가 자기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주관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통하지 않고 색욕을 체험 할 수 있더라고, 객관적으로는 남자 의 성욕 속에 여자가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이 양성구유의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남자의 육체구조는 여자의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 설사 여자가 실제로, 혹은 상상중에 주어져 있 지 않은 경우에도, 남자는 자기의 성을 발견함으로써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 면, 남자가 여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본능의 육체화로서이다. 현실체험의 내재적인 면과 초월적인 면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다. 내가 두려워하거나 원 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나 지신의 실존의 여러 가지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이건 내가 아닌 것을 통해서만 내게 일어난다. 몽정이나 음경의 발기 등에는 분명한 여자의 모습은 아니더 라도, 적어도 '자연'이나 '생명'의 형태로 비자아가 포함되어 있다. 남자는 자기가 아닌 것 에서 마술에 걸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여자에게 보여주는 상반성은, 자 기의 '성'에 대한 그의 태도-그것을 과시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는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자는 자기의 페니스를 친구의 그것과 도전적으로 비 교하기도 한다. 최초의 발기는 그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한다. 성인이 된 남자는 성기를 초월과 권력의 상징으로 본다. 그는 그것을 튼튼한 근육처럼 자랑하는가 하면, 한편 마법의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자랑한다. 그것은 하늘이 준 특혜가 지닌 우연한 자유이며, 자유로이 성취된 특혜이다. 남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런 면에서이다. 그러나 남자는 거기에 숨겨진 술책을 알아차린다. 남자는 성기에 의해 자기를 내세우려 고 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성기는 충족되지 않은 정욕에 시달리고, 갑자기 발기 하고, 때로는 꿈속에서 자위한다. 그것은 괴상하고 변덕스러운 생명력을 발휘한다. 남자는 '정신'으로 '생명'을 이기고, 능동성으로 수동성을 이기려고 한다. 그의 의식은 자연을 멀리 하고, 그의 의지는 자연을 마음대로 조형한다. 그러나 그는 성의 양상을 통해 자기속에서 생명과 자연과 수동성을 재발견한다. "생식기는 의지의 참된 중심이며, 그 반대의 극은 두뇌이다."하고 쇼펜하우어는 쓰고 있 다. 여기서 그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고뇌와 죽음이 따르는 삶에의 집착이다. 그리고 두 뇌란 삶을 관념화함으로써 삶에서 해탈하는 사고력을 가리킨다. 그에 의하면, 성에 대한 수치심은 인간이 자기들의 어리석은 육체적 집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의 학설이 지 닌 독특한 염세주의 사상에는 동의 할 수 없지만, 성과 두뇌의 대립관계 속에서 인간의 이 원성을 발견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인간은 주체로서 세계를 설정하고 자기가 설정한 우주 밖에 머물러서, 그 지배자가 된 다. 만일 그가 육체로서 또는 성으로서 자기를 파악한다면, 그는 이미 자율적인 의식이나 투명한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세계속에 휘말려서, 멸망해야 할 한정된 대상이 되어 버린다. 생식행위는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동시에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페니스는 생 식의 아버지로서 생식의 어머니인 자궁과 대조를 이룬다. 여자의 뱃속에서 새로운 싹으로 나온 남자는 자기 자신도 그 싹을 지니고 있으며, 생명을 제공하는 종자에 의해 자기 자신 의 생명이 부인되는 것이다. "아기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 하고 헤겔은 말했다. 사정 은 죽음의 약속이며, 개체를 부정하고 종을 확립하는 것이다. 성기의 존재와 그 활동은 주 체의 자랑스러운 개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생명에 의한 정신의 부정은 성을 파렴치한 대상으로 만든다. 남자는 페니스를 초월과 활동으로서, '타자'를 지배하는 방법으로서 파악하고,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찬양 한다. 그러나 페니스를 통해 자기가 '생명'의 불가해한 힘에 농락되는 수동적인 육체에 불 과하다고 생각될 때, 남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 수치심은 아이러니컬하게 위장되 기 쉽다. 남의 성기는 흔히 웃음을 자아낸다. (페니스의) 발기는 의지적인 동작을 닮고 있 지만 사실은 수동적이므로, 때때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생식기의 형태를 떠올리 기만 해도 우스워진다. 말리노프스키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함께 생활한 미개인들은 치부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 만으로도 깔깔대며 웃었다고 한다. 외설스럽거나 추잡한 농담도 대개 이런 유치한 말의 유 희와 큰 차이는 없다. 일부 미개인 사이에서는 밭의 잡초를 뽑는 기간중에는, 여자들이 마 을에 온 이국남자를 마음대로 농락해도 무방했다. 여자들이 총출동하여 그 남자에게 덤벼 들어, 가끔 초죽음이 되게 하기도 한다. 이때 부족의 남자들은 여자의 이 용감한 행동을 웃으면서 구경한다. 이 폭행에 희생된 남자는 수동적.종속적인 육체가 된 것이다. 그는 그 녀들에 의해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 그 남편들에게 소유된 셈이다. 이와는 달리 정상적인 성교에서는 남자 쪽이 여자의 소유자로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남자가 그 육체적 조건의 불투명성을 가장 분명히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남자가 그 성욕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기 것으로 삼는 한 방법이 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소유의 꿈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참 된 소유에서는, 타자는 타자로서 소멸된다. 즉 그것은 소비되고 파괴된다. 그러나 <아라비 안나이트>의 터키 황제가 아닌 이상, 새벽에 그의 침대에서 여자가 물러나자마자 그녀의 목을 자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 긴 후에도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남자가 포옹한 후에 양팔을 벌리면, 먹이(여자)는 그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여 자는 원상으로 돌아가, 마찬가지로 새 애인에게 일시적이나마 언제든지 소유될 수 있는 것 이다. 남자의 꿈의 하나는 언제까지나 자기 것이 되게끔 여자에게 '낙인을 찍는' 일이다. 그러 나 아무리 거만한 남자라도 여자에게는 단지 추억을 남길 뿐이며, 아무리 불타는 이미지도 감각에 비하면 냉담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실패를 다룬 문학은 많다. 여자가 자기의 육체를 한 남자에게만 바치지 않고 여러 남자에게 바친다고 해서 바람둥이니 배신자니 하 고 몰아세우며 남자는 여자에게 이 실패를 객체화시킨다. 여자의 배반은 그 이상으로 부도 덕한 행위이다. 여자 쪽이 그 애인을 먹이로 삼는 것이다. 육체만이 다른 육체에 접촉할 수 있다. 남자가 갈망하는 육체를 정복하려면 자기 자신이 육체가 되어야 한다. 이브는 아 담이 그녀를 통해 자기의 초월을 완성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녀는 그를 '내 재'의 암흑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아들은 거기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캄캄한 모암, 정부는 쾌락의 도취 속에서 그 모암의 캄캄한 점토 속으로 다시 한 번 남자를 가둔다. 남자는 그녀를 소유하길 원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에게 소유된다. 체취.땀.피로.권태 등 많은 문학은 육체로 화한 의식의 이 음울한 수난을 그려왔다. 때때로 혐오감을 내포하 고 있는 욕정은 그것이 충족되면 혐오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성교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 다." "육체는 슬프다." 남자는 애인의 품안에서 확실한 안정을 발견한 적도 없다. 이윽고 그는 다시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여자 전반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여 자에 대한 욕구로 나타난다. 이때 그 여자는 특히 상대방 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남자의 성적 욕구는 허기나 갈증처럼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욕구로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를 개별적인 여자의 육체와 결합시키는 유대 는, '타자'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탄생된 불순하고 풍요로운 복부와 같은 신비로운 유대, 즉 일종의 수동적인 힘이다. 그것은 마술이다. 남자를 현혹시키는 마녀나 요술쟁이처럼 여자를 묘사하는 대중소설의 틀에 박힌 문구는, 신화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여자는 마술에 몸을 바친다. 알랭(프랑스의 철 학자, 1868 ~ 1951)은 이렇게 말했다. "마술이란 사물 속에 흩어져 있는 정신이다." 어 떤 행위가 능동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수동적인 원인에서 비롯될 경우에는 마술이 다. 남자들은 여자를 언제나 천부적인 '내재'로만 보아왔다. 여자는 농작물을 생산하고 아기 를 낳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다. 여자는 주체가 아니며, 초월하지도 못 하고, 창조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유동체로 충만한 개체일 뿐이다. 남자가 그러한 신 비를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여자는 그런 특질 때문에 의식에 참가한 여승으로서 존경을 받 는다. 그러나 남자가, 사회가 자연을 이기게 하고, 이성이 생명을, 의기가 무기력한 여건을 이기게 하기 위해 싸울 때에는, 여자는 마녀로 취급받게 된다. 승려와 마술사는 엄연히 구 별된다. 승려는 신들이나 법률과 협력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그 모든 구성원의 이름 으로 통제된 힘을 조종하는 반면에, 마술사는 사회에서 이탈하여 신들이나 법률에 반항하 고, 자기 정념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들의 세계에 완전한 일원이 되어 있지 않다. '타자'로서 여자는 남자들과 대립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능력을 남자들의 사회 를 통하여 미래를 향해 초월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분리되고 대치되어 있기 때 문에 남자들을 분리의 고독 속으로, 내재의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자는 그 노랫소리에 이끌린 뱃사람들을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인어 이다. 자기를 연모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변하게 한 키르케(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마녀)이 며, 어부를 늪 속에 끌어들이는 물의 요정이다. 여자의 포로가 된 남자는 이미 의지도 자유로운 계획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시 민도 아니며, 욕망의 노예가 된 육체이다. 그는 사회에서 제외되고, 순간 속에 갇혀 있으 며, 고뇌에서 쾌락을 위해 수동적으로 우롱당하고 있다. 사악한 마녀는 의무에 대해 정욕 을, 시간의 통합에 대해 현재의 순간을 내세워, 길손을 그 고향에서 멀리 떠나게 하여 망 각에 도취되게 한다. 남자는 '타자'를 독점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소유에 실패하면, 그는 그 '타자'가 되려고 하지만 일체가 될 수 없다. 그 래서 그는 자기를 소외하고, 자기를 상실하며, 자기를 자기자신과 무관하게 하는 미약을 마시고, 흘러가는 죽음의 강물 속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를 죽음에 바치게 된다. 애인은 상대방 남자에게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여 마지막 수면 속에 몸을 맡기게 한다. '연애'를 '죽음'으로 잇는 이 연결은 트리스탄 전설(중세의 전형적 인 연애소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비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깊은 진실을 내 포하고 있다. 육체에서 태어난 남자는 사랑 속에서 육체로서의 자기를 성취하고, 육체는 무덤으로 향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여기에도 '여자'와 '죽음'의 연결이 분명히 드러난다. 위 대한 수확의 여인(죽음의 신)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풍요성이 역전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녀는 또한 허망한 부드러운 육체 속에 해골이 들여다보이는 무서운 신부의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남자가 애인으로서의 여자, 또는 어머니로서의 여자에 대해 사랑하고 또 미워 하는 것은, 자기의 동물적인 숙명이 응고된 모습이며, 자기실존에 필요하지만 이 유한성과 죽음에 운명적으로 결부된 생명이다. 남자는 태어난 날부터 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야말 로 '어머니'가 구현하고 있는 진리이다. 생식작용에 의해 남자는 자기를 부정하고 종을 주 장한다. 이것을 그는 아내의 포옹 속에서 분명히 알게 된다. 불안과 쾌락 속에 생식행위를 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자아를 망각한다. 애인과 어머니를 구별하려고 해도, 그는 두 사 람에게서 단지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자기의 육체적 조건을 의식하게 된다. 그는 이 조 건을 수행하고 싶어하여 어머니를 존경하고 애인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한편 혐오와 두려 움으로 말미암아 그녀들에게 반역한다. 이러한 신화의 대부분을 종합한 뜻깊은 문장이 장 리샤르 블로크(프랑스의 소설가, 188 8 ~ 1943)의 <쿠르드족의 밤> 속에 나온다. 거기에는 어느 거리에서 약탈이 감행되는 동안에, 사드라는 젊은이가 자기보다 훨씬 연상이지만 아름다운 한 여자와 포옹하는 장면 이 있다. "밤은 사물과 감각의 윤곽을 점점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여자를 포옹하고 있지 않았다. 세계의 개벽 이후로 줄곧 계속해 온 끊임없는 여행의 목적지에 드디어 도달했던 것이다. 주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끝도 형체도 없는 무한한 공간 속에 그는 점점 용해되어 갔다. 즉 모든 여자가 하나의 거대한 대지, 욕망처럼 음울하고 여름처럼 작열하는 대지에 용해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감춰진 힘을, 비단을 두른 것처럼 부드럽고 늘씬한 허벅지나 상아 언덕 같은 무릎을 두려움이 뒤섞인 감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여자의 미끈한 허리에서 어깨까지 척추를 더듬어 올라 갔을 때,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돔 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복부가 그를 간단없이 부르고 있었다. 그 것은 모든 생명이 태어났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탄력있는 부드러운 대해, 조수와 수평선 과 무한한 표면을 지닌 은신처 중의 은신처였다." "그때 이 감미로운 외피를 뚫고 그 미의 원천에 단숨에 도달하고 싶은 격정이 그를 사로 잡았다. 동시에 충동이 두 사람을 서로 감쌌다. 여자는 이제야 지표처럼 갈라져서 내장을 열고, 오로지 애인의 정기를 가득 삼키기 위해 존재했다. 살인적인 황홀경에 이르렀다. 서 로 찌르고 찔리는 듯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고립되고, 분리되고, 떨어져나온 인간, 그는 이제야 자기 자신의 실체에서 벗어 났다.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드디어 영혼과 육체가 합쳐져 우주의 물질 속으로 흘러 들어가려고 했다. 그날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 상의 생존의 한계를 벗어나 주체와 객체, 물음과 대답을 같은 열광 속에 용해시켜버리고, 모든 비존재를 존재에 통합하여, 최후의 몸부림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는 행복." "...악궁사가 왔다갔다할 때마다 그가 마음대로 다루는 귀한 악기에서 점점 날카롭게 진 동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자기 마지막 몸부림이 사드를 황홀의 절정에서 떼어내어, 대 지와 진흙 속으로 던져버렸다." 여자의 정욕이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연인을 양다리 사이에 껴안고 놓지 않는다. 남자는 문득 정욕이 다시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그의 눈에는 여자가 자기 정기를 빼앗는 적 대세력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여자와 관계하면서, 그녀의 유방을 깊이 깨물어 그녀를 죽게 한다. 이리하여 어머니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죽음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순환 의 고리가 닫혀진다. 이 경우에 육체의 드라마에서 어떤 면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남자가 취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만일 그 남자가 생명은 하나뿐이라는 관념을 갖지 않고, 자기의 개채적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동물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회 교도들 사이에서는, 여자는 가장 비천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여자가 가정에서 나와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봉건적인 사회제도다. 전쟁 제일주의의 이상을 반 영하여 남자를 직접 죽음에 바치고, 여자에게서 그 마력을 박탈해 버린 종교 때문이지만, 마호메트교도가 누리는 천국에서의 즐거운 대향연에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사나이라면 지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므로 남자는 자기 자신이나 여자를 경계할 필요가 없으며, 유유히 여자를 향락할 수 있는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는, 여자를 과일이나 잼, 고급 케이크나 향유와 다를 바 없 는 촉감이 좋은 쾌락의 원천처럼 취급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관능 만족주의는 지중해 연안의 국민들 사이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순간적으로 만족을 느끼고 영생을 갈망하지 않으며, 하늘과 바다의 빛을 통하여 '자연'의 밝은 면을 파악하는 남방인들은 탐욕스럽게 여자를 사랑한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여자를 경멸하고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다. 여자의 육 체가 주는 즐거움과 모래나 물이 주는 즐거움 사이에 별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 나 자기에 대하여도 육체에의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시칠리아 섬에서의 대화>에 나오는 비토리니는 일곱 살 때 여성의 나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일을 놀라운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나 로마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는 이 본 능적인 태도를 밑받침하고 있다. 그리스인의 낙천주의 철학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이원론을 뛰어넘었다. 열등한 자는 우수한 자에게 종속되므로 세상은 우수한 자에게 유리하다. 이런 조화된 사상은 육체에 대해 전혀 적의를 갖지 않는다. 이데아의 하늘이나 '도시' 또는 '국 가'에 눈길을 돌리고, 자기를 '누스'(그리스어로, 마음이나 이성을 뜻함)나, 혹은 시민으로 서 생각하고 있는 개인은, 자기의 동물적인 조건을 초월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남자가 향락에 빠지든, 금욕주의를 실천하든 남자의 사회에 완전히 억압된 여자는 이차적인 중요 성밖에 갖지 않는다. 합리주의는 결코 완전한 승리를 거둔 적이 없고, 그 사회에서도 색욕에 관한 체험은 모 순된 성격을 띄고 있다. 의식이나 신화나 문학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여자의 매력이나 위험은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자에게 다시 무서운 위력을 안겨 준 것은 기독교이다. 이성에 대한 두려움은, 불행한 인간의식의 고뇌의 한 형태로 나타났 다. 기독교도인 남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육체와 영혼, 생명과 정신이 완전 히 구분된다. 육체를 영혼의 적으로 삼은 것이 원죄이다. 육체적인 애착은 모두 악으로 본 다. 그리스도에 의해 속죄되어 천국에 인도되었을 때에 한해서만 남자는 구제된다. 그러나 인간은 근원적으로 부패해 있다. 그 탄생에 의해 남자는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천국의 문이 열릴 가능성은 있지만, 인간의 자 연적인 존재에는 언제나 저주가 뒤따른다. 악은 절대적인 현실이며, 육체는 죄이다. 그리고 물론 여자는 언제나 '타자'일 따름이므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육체로 생각되지 않는다. 기독교도에게 혐오스러운 '타자'인 육체는 여자와 구별되어 있지 않다. 대지와 성욕과 악 마의 유혹은 모두 여자에게서 구체화된다. 로마교회의 장로들은 한결같이 이브가 아담을 원죄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야겠다. "여자여, 너야말로 악마에게 이르는 문이다. 너는 악마도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한 자(아담)를 설득시켰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 도 너 때문이다. 너는 언제라도 상복과 누더기를 걸치고 사라져야 한다." 기독교 문학은 모두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혐오감을 자극하려고 노력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 자를 '하수도 위에 세운 전당'이라고 정의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기와 배설기의 혼합 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강조한다. 즉 인간은 오줌과 똥의 중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여 자의 육체에 대한 기독교의 혐오감은 대단하여, 기독교는 그 신(성자)을 굴욕적인 죽음에 바치는 것은 동의하지만, 출생의 더러움만은 모면하려고 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한 것을 가리킴) 동방교회에서는 에페수스의 교의회가, 서방에서는 라테란의 교의회가 그리스도의 처녀분만을 주장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장로들-오리게네스.테르툴리아누스.히 에로니무스-은 마리아가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피와 불결 속에서 분만했다고 생각했 으나, 결국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이겼다. 처녀의 태는 드디어 닫혀지고 만다. 중세 이후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여자에게는 치욕으로 간주되었다. 이 혐오로 인해 과학도 오랫동안 마비되어 왔다. 린네(18세기 스웨덴 생물학자, 1707 ~ 1778)는 '자연'에 관한 저서에서, 여자의 생식기에 대한 연구를 '더러운 것'으로 여겨 배 척했다. 프랑스의 의사 드로랑은 "이성과 분별력이 있어 남자라고 불리는 신에 가까운 동 물이, 점액으로 더러워진 채 육체의 가장 아랫부분에 부끄럽게 위치하고 있는 치부에 마음 이 쏠리고 있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개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영향 이외에도 다른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으며, 또 기독교적 사고방식 자체도 단순하지 않은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특히 청교도의 세계 에서는 육체를 증오하는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포크너(1922년 노벨문학상 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1897 ~ 1962)의 <8월의 빛>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성에 대한 최초의 경험은 그의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힌다. 처음으로 성교를 하고 나서 구토를 느낄 정도로 동요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어느 나 라의 문학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사실상 매우 드물더라도, 그것이 이처럼 자주 묘사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특히 청교도주의가 침투한 앵글로색 슨계의 나라에서는, 여자는 대부분의 청년들과 많은 어른들의 마음에 많든 적든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다. 이 두려움은 프랑스에서도 상당히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미셸 레리(프랑스의 시인)는 <장년의 남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에게는 여자의 성기를 불결한 것으로, 혹은 하나의 상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피가 묻고 축축하고 불결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위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병에 대한 사고방식이 이런 공포를 대변하고 있다. 병을 옮겨주기 때문에 여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옮겨왔다는 이유로 병이 혐 오스럽게 생각된다. 과도한 성교만으로도 임질에 걸린다고 믿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누군가 가 내게 말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성교에 의해 남자는 근육의 힘이나 두뇌의 명석함을 잃고, 몸에서 인이 소모되어 감수성이 둔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음에서도 같은 위험 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에선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이 자위행위 를 정상적인 성행위보다 해롭다고 보고 있다. 합법적인 결혼과 번식의 의지가 색욕의 피해 에 대해 자기방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성행위에는 '타자' 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타자'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여자의 얼굴이다.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자기 육체의 수동성을 가장 분명히 경험하게 된다. 여자는 흡혈귀이 며, 음탕하고 식충이다. 여자의 성기는 남자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어떤 정신분 석학자는 이런 상상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려고 했다. 여자가 성교에서 얻는 쾌락은 모두 여자가 남자를 상징적으로 거세하여 남자의 성기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는 데서 비롯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설 자체가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이런 학설을 주장한 의사들은 조상으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공포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공포의 원천은 '타자'속에 그것을 아무리 병합해도, 타성이 남는다는 데 있다. 가부 장제도의 사회에 이르러서도 여자는 원시사회에서 갖고 있던 불안한 힘의 대부분을 보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결코 '자연'그대로 방치되지 않고, 터부로 포위되고 의식에 의 해 정화되어 승려의 감독하에 놓여졌다. 남자에겐, 절대로 여자에게 본래의 모습 그대로 접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의식이나 성례를 거친 후에야 여자를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이 의식이 여자를 대지나 육체에서 분리시켜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여자가 갖고 있는 마력을 교묘히 유도할 수 있다. 마치 피뢰침이 발명되고 발전소가 생긴 후로 뇌전기를 유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을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남자의 여자에 대한 관계를 결정하는 진자운동의 다른 일면을 찾아볼 수 있 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소유이면 사랑하고 남이면 두려워한다. 그리고 여자가 두려운 타 자일수록 남자는 그녀를 자기 소유로 삼기 위해 더욱 애를 쓴다. 남자가 여자의 인격의 존 엄성을 자기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자의 마력은 가부장적인 가족관계 속에서 완전히 길들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여자는 사 회 속에 우주의 힘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뒤메질(프랑스의 신화학자, 1898 ~ 1986)은 저서 <미트라 바루나>에서, 인도에서도 로마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권력을 확립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바루나와 로물루스 간다르바와 루페르키에 있어서, 그것은 공격이고 유괴이고 난폭이고 광란이다. 이때의 여자는 강탈되고 학대를 받 아야 할 준재로 보였다. 강탈당한 시비누스 여자들이 불임녀가 되었다는 걸 알고 로마인들 은 산양의 가죽끈으로 그녀들을 때렸다. 폭력에 다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미트 라와 누마와 바라문 여승들과 로마의 여제관들은,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합리적인 질서와 안정을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그때 여자는 복잡한 의식이 수반되는 결혼에 의해 남편과 결합되어, 남편과 협력하면서 모든 여성적인 힘을 그의 지배에 맡기게 된다. 로마에서는 사체의 아내가 죽으면, 그 사제는 사임한다. 이집트에서 이시스(이집트의 여 신, 오시리스의 누이이며 아내가 됨)는 모신으로서의 최고의 권력을 상실한 후에도 여전히 너그럽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현명한 여자로서, 오시리스(이집트의 신으로 죽은 자의 보호 자)의 훌륭한 아내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자가 이처럼 남자의 동료나 보좌역, 그 반신이 될 때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식이나 혼이 주어진다. 남자도 인간의 본질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심하고 의지할 수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마누법전'은 본처에게는 그 남편과 같은 천국이 약속되어 있었다. 남성이 개성화하여 자기의 개성을 요구할수록, 그는 아내의 개성과 자유를 인정하게 된다. 자기의 운명에 무관심한 동양 남자들은 향락의 대상이 되는 한 아내로 만족한다. 그러나 서양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만일 그 남자가 자기 존재의 개성을 자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면 그는 자기 이외의 순종적인 자유의 개체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스 남자는 규방의 포로인 여자에게서 그가 요구하는 동등한 인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육체와 마 찬가지로 그 육체 속에 의식과 자유가 깃든 남자의 애정을 요구하게 된다. 아니면 그 자주 성과 교양.재치가 남자와 거의 맞먹는 창녀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러나 사정만 허락된다면, 남자의 요구를 가장 잘 만족시켜주는 것은 아내이다. 로마의 시민은 기혼부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했다. 로마의 시민은 코르넬리아(스키피오의 딸이 며 그라쿠스의 아내, 로마 어머니의 이상적인 타입, BC 189 ~ 110년경)와 아리아 속에 자기의 분신을 갖고 있다. 어떤 점에서 남녀의 평들을 선언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여자의 육 체를 혐오한다. 만일 여자가 육체로서의 자기를 부인한다면, 여자는 남자와 같은 자격으로 구세주에 의해 죄의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와 나란히 천상의 환희가 약속된 영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남녀가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서 천사 와 거의 마찬가지로 중성화되어, 성령의 도움으로 함께 지상의 유혹을 물리치게 된다. 여 자가 자신의 동물성을 부인하면 원죄의 육체화에서 벗어나 오히려 원죄를 이긴 선택된 사 람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신 구세주은 남성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끼리 서로 협력해야 한다. 또한 여기서 인간은 가장 비천하고 가장 타락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의를 표명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신이지만, 전인류를 지배 하는 것은 여자, 즉 '어머니인 처녀'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위대한 여신의 낡은 특권을 부 활시키는 것은, 사회를 초월한 여러 교파뿐이다. 로마교회는 가부장적 사회를 표현하고 거 기에 봉사한다. 거기서는 여자를 역시 남자의 부속품이라고 본다. 여자는 남자의 충실한 여종이 되어야 축복받은 성녀도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세의 중반에 와서 남성에게 바람 직한 가장 완전한 여성상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얼굴은 영광에 싸여 있다. 그것은 죄많은 여인 이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그녀는 뱀을 발로 밟아 죽인다. 이브는 원죄의 중개자였지만, 성모는 구원의 중개자이다. 여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어머니'로서였다. 여자를 변형시키고 복종시키려고 한다면, 그 모성 속에서 행해야 한다. 마리아의 처녀성은 특히 하나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 고 있다. 즉 그 사람을 통하여 죄의 속함을 받은 여자는 육체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 는 남편에게 만져진 일도 없고 소유된 일도 없다. 아시아의 대모신에게도 남편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계를 낳고, 혼자서 그 위에 구림하고 있었다. 변덕을 부려 음탕한 적도 있었지만, 그 '어머니'로서의 위대성이 아내의 굴종적인 신분에 의해 감소되지는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성욕에 수반되는 더러움을 모른다. 여류전사 미네르바(로마신화 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의 계보에 속하는 마리아는 상아탑이며, 난공불락의 성채이다. 고 대의 여승들도 기독교의 대부분의 성녀들과 마찬가지로 처녀였다. 선에 바쳐지는 여자는 순결해야 한다. 그녀는 그 여성적 요소를 누구에게도 정복되지 않은 완벽한 형태로 유지해 야 한다. 마리아에게 아내로서의 성격이 거부된다면, 그것은 마리아 속에 '어머니로서의 여 인'을 더욱 순수히 고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종속적인 역할을 받아들여야만 마리아는 찬양받을 수 있다. "나 는 주의 여종이로소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가 그 아들 앞에 무 릎을 꿇는다.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의 열등성을 인정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리아 신앙에서 이룬 남성의 결정적인 승리이다. 즉 마리아 신앙은 완전한 패배에 의한 삶의 갱생이다. 이 슈타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신화에 나오는 애욕의 여신, 생명의 원천임), 아스타르테(고대 시리아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키벨레(프리기아 지방의 생식력이 풍부한 대지의 여신)와 같은 고대의 여신들은 잔인하고 방자하고 음탕하며, 세력이 막강했다. 삶과 죽음의 원천인 그녀들은 남자를 낳아 자기들의 노예로 삼았다. 기독교에서는 삶과 죽음이 신의 의지에 속해 있으며,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남자는 거기서 영원히 벗어나 대지는 단지 그 뼈가 묻히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의 영혼의 운명은 어머니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전개된다. 세례의식은 태반을 소각하거나 강물에 던지는 의식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지상에는 더이상 마술이 활동할 여지가 없고, 신이 유일한 왕이다. 자연은 본래 악 한 힘을 갖고 있으나, 신의 은총 앞에서는 무력하다. 모성도 자연현상으로서 아무 힘도 쓰 지 못한다. 만일 여자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된 오점을 자기 안에서 극복하려고 한다면, 이 경우에 남은 유일한 일은 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다. 신의 의지는 여자를 남자에 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속에 의해 여자는 남성의 신화 속에서 새로운 역할 을 맡을 수 있다. 여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 권리를 분명히 포 기하지 않을 때는 패배하여 짓밟히게 되지만, 가신으로서는 존경을 받는다. 여자는 그 원 시적인 특징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변하여 불길한 것이 길한 것 으로 된다. 악한 마력이 선한 마력으로 변한다. 여자는 여종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숭배 를 받을 권리를 얻게 된다. 여자가 복종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로서이므로, 사모와 존경을 받는 것도 어머니로서이 다. 모성의 오랜 두 모습 중에서, 오늘날 남성은 상냥한 모습만을 인정하려고 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한을 받으며 육체와 유한한 생명밖에 갖지 못한 남자는 외부의 '자연'과 '역 사'속의 한 개체에 불과하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제한되고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 상 남자와 비슷하지만, '자연'에 속해 있으며 '생명'의 무한한 흐름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 서 여자는 개체와 우주의 중개자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모습이 안심할 수 있고 신성하게 보일 때, 남자가 애정을 가지고 그녀 쪽으로 향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자연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게 되면 남자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연에서 벗어나면 다시 자연으 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가족이나 사회 안에 완전히 안주하여 법률이나 풍습과 조화를 유지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선'의 화신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가 속해 있는 자연도 선이 된다. 어머니는 이미 정신의 적이 아니다. 설사 아직 신비에 싸여 있을 경우에도, 그것은 남자는 여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모든 것을, 따라서 자기가 아닌 여자도 거두어들이려고 한다. 어머니를 숭배함으로써 남자는 어머니가 갖는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자기 속에 어머니를 인정하는 것이며, 대지와 생명과 과거와의 연결로서 여성을 자기가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비토리니의 <시칠리아 섬에서의 대화>에서, 주인공이 어머니의 곁으로 찾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땅, 그 향기, 그 열매, 유년 시절, 조상의 추억, 전통, 즉 그 의 개인적인 존재가 그를 떼어놓았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남자의 마음에 자기초월의 긍지를 높여주는 것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남자는 어머니의 팔을 뿌리치 고 모험과 미래와 전쟁을 향해 출발하는 자를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만류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출발은 그다지 감동적인 것이 못 될 것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뿐이며, 애써 손에 넣은 승리가 못 된다. 그러나 남자는 어머니의 양 팔이 언제나 자기를 맞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웅은 활동의 긴장이 풀리면 어머니의 곁에서 내재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한다. 어머니는 피난처이며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곳이 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애무를 받고, 다시 자연의 태내에 기어들어가, 자궁이나 무덤 속처 럼 조용히 생명의 큰 흐름에 몸을 맡긴다. 남자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가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시선 아래서는 죽음까지도 길들여져, 탄생과 대칭이 되어 모든 육체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 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대 신화의 파르카 여신들(로마신화에서 남자의 생명 을 조종한다는 지옥의 세 여신)처럼, 지금도 역시 죽음과 결부된다. 죽은 자를 매장하고, 그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역할을 죽음을 생명에, 사회에, 선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어머니'에 대한 숭배를 권장하고 있다. 만일 어머니가 그 아들을 죽음에 내주도록 승낙한다면, 사회는 아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힘 때문에, 사회는 어머니를 자기에게 예속시 키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처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를 온갖 미덕으로 장식하고, 그래서 하나의 종교를 만들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 는 불경이니 모독이니 하고 비난한다. 어머니는 도덕의 수호자가 된다. 어머니가 할 일은 남성의 봉사자, 권력의 봉사자로서 자기 아들을 규정된 길로 조용히 인도하는 것이다. 사 회가 낙천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애정으로 충만한 권위를 순순히 받아들일수록, 그 집단 속에서 어머니는 변형된다. 미국의 엄마는 필리 윌리가 <살모사의 시대>에서 묘사한 것 같은 우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공인된 이데올로기는 가장 철저한 낙천주의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찬미하는 것은 곧 출생과 생명과 죽음을 사회적.동물적인 형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오귀스트 콩트(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의 창시자, 실증주의의 시조, 1798 ~ 1857)가 여자를 미래 인류의 신으로 받든 것도 이 종 합의 완성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모든 반역자들은 어머니의 상에 저항한 다. 그들은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풍습과 법률의 여자 수호자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사회가 강요하려는 조건을 거부하는 셈이다. '어미니'를 후광으로 장식하는 존경과 '어머니'를 에워싸는 금기는 어머니가 불러일으키 는 육체적인 애정에 자발적으로 섞이는 혐오감을 억압한다. 그래도 잠재적인 형태로 바뀐 모성에 대한 혐오감은 남아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 다.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중세 이후로 이런 혐오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제2의적인 신화, 즉 장모의 신화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우화시에서 통속희극에 이르기까지 어떤 금기로도 보호받지 않는 장모를 통하여 남자는 모성 전체를 조롱한다. 남자는 사랑하는 아 내가 그 어머니의 태내에서 태어난 것을 증오한다. 장모는 노쇠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기가 낳은 딸도 노쇠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장모의 비만이나 주름살은 젊은 아내 에게 약속된 비만과 주름살을 예고한다. 즉 젊은 아내의 미래는 이처럼 비참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장모 옆의 젊은 아내는 이미 한 개체가 아니라 종의 한 시기일 뿐이다. 그녀 는 탐나는 먹이나 사랑하는 반려자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개별적인 실존은 보 편적인 생명 속에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특이성은 보편성에 의해 조종을 받게 되고, 정신의 자율성은 그녀가 과거와 육체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된다. 남자가 우 스꽝스러운 등장인물 속에 객관화하는 있는 것은 이런 조롱이다. 그런데 남자의 조소 속에 서 그처럼 원한이 섞여 있는 것은, 아내의 운명이 전인류의 운명, 즉 자기의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도 전설이나 이야기는 후처에게서 나타나는 모성 의 잔인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백설공주를 죽여버리려고 한 것은 계모이다. 고약한 계 모-예를 들면 세귀르 부인(프랑스의 여류 동화작가)의 여러 작품에 나오는 소피를 회초리 로 때리는 피쉬니 부인-속에는, 잘라낸 머리를 모아 목걸이로 하는 고대의 칼리가 살아 있다. 그런데 신성시되는 '어머니'의 뒤에는, 초목의 즙과 별빛을 남자에게 유용하게 하는 흰 마녀의 무리가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눈빛이 자애로운 할머니들, 친절한 하녀들, 요양원 의 수녀들, 어떤 시중도 잘 들어주는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는 간호사들, 베를렌이 꿈꾼 것 같은 애인 등... 상냥하고 사려깊으며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갈색머리의, 때로는 아기에게서 하듯이 이마에 키스해 주는 여자. 이런 여자는 포도넝쿨이나 맑은 물의 청명한 신비를 간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들은 붕대를 감아 치료해 준다. 그들의 지혜는 말없는 생명의 지혜이며, 잠자코 이해해 준다. 그 녀들 옆에서 남자들은 모든 교만을 잊어버리고, 몸도 마음도 내맡기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이런 여자들 사이에서는 힘겨루기가 전혀 필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그 비인간적인 힘을 부러워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령을 터득한 지혜로운 여자는, 남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자기를 그의 하녀로 인정 하고 있다. 남자가 이런 여자의 지혜로운 힘에 잠자코 따르는 것은, 이런 순종을 통해 자기가 그녀 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매나 어린시절의 여자친구, 청순한 소녀들, 그리고 장차 어머니가 될 여자들은 모두 이 축복된 무리에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까 지도 그 성적 매력이 사라졌을 때에는, 많은 남자들에게는 애인보다는 오히려 아기 어머니 로 보인다. 어머니가 성화되어 굴복한 이래로, 마찬가지로 성화되어 굴복한 아내 속에서 두려움 없이 어머니의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재인식하는 것은 육체를 재인식하는 것이며, 결국 육체의 결합이나 아내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결혼의식에 의해 그 마력의 무기가 박탈되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된 선량한 아내는 남자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아내는 완전히 남편의 소유가 되므로, 남 편과 같은 본질을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가이우스라면 나는 가이아로다." (로마의 결혼식 에서 사용하는 서약문)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따고, 남편의 신을 믿고, 남편은 아내를 책 임진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반신이라고 부른다. 남편은 아내를 그 집이나 토지 나 가축 등 재산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편은 아내를 통 하여 남들에게 자기 세력을 과시한다. 아내는 남편의 척도가 되며, 이 세상에서 남편이 차 지할 몫이다. 동양 사람들은 뚱뚱한 아내를 선호한다. 아내에게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어 있는 것이 사 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남편에게 명예로운 일이다. 회교도는 되도록 많은 아내를 거느리 고, 그 아내들이 원기왕성해 보일수록 존경을 받는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여자에 주어진 역할의 하나는 생활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미모.매력.지성.맵시는 자가용과 마찬 가지로 남편의 부를 나타내는 외적 표시이다. 돈이 많은 남편은 아내를 모피나 보석으로 장식한다. 돈이 없는 남편은 아내의 착한 성품과 알뜰한 살림솜씨를 자랑한다. 백수건달이 라도 자기를 섬기는 여자를 손에 넣으면, 이 세상에서 커다란 뭔가를 소유한 느낌을 갖는 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주인공은 이웃을 초대하여 자기가 얼마나 단호한 태도로 아 내를 얌전하게 길들였는가를 이야기한다. 남자에게는 다소나마 칸다울레스 왕(리이아의 왕)과 비슷한 면이 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내를 내세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사회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욱 사사로운 자랑도 남자에게 맛보게 한다. 남자는 자기가 여자에게 주는 지배력에 만족하며 으스댄다. 여자가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받을 경우에는, 보습이 밭고랑을 간다는 자연현상적인 비유에 더욱 정신적인 상징이 첨가된다. 단지 색욕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지적으로 남편은 아내 를 형성한다. 남편은 아내를 교육하고 각인을 찍고, 영향력을 남긴다. 남자가 좋아하는 몽 상의 하나는 자기의 의지를 사물 속에 침투시켜, 그 형체를 만들고 그 실질속으로 돌입하 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여자는 절호의 '부드러운 반죽'이며 얌전히 빚어져 세공하는 대로 이 루어진다. 만들어지는 대로 되면서 또한 저항도 하므로, 남자의 작업은 영속될 수 있다. 너 무 쉽게 마음대로 되는 재료는 오히려 좋지 않다. 여자의 귀중한 점은, 그녀 속에 있는 무 엇인가가 어떠한 포옹에서도 자꾸만 빠져나가는 데 있다. 남자의 손아귀에 좀처럼 들어오 지 않으면 그만큼 더욱 정복할 가치가 있으며, 남자는 이를 정복하여 지배자가 되려고 한 다. 여자에 의해서 남자 속에 하나의 미지의 존재가 눈을 뜨고, 그것이 자기 모습인 것을 남자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부부간의 은밀한 향락 속에 남자는 자기의 억센 동물성을 자각 한다. 그는 '수컷'이다. 상대적으로 여자는 '암컷'이다. 그런데 이 암컷이라는 말은 때에 따 라서는 즐거운 여운을 남긴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핥아주고 지켜주고 목숨을 걸고 구해 주는 암컷은, 인류의 모범이다. 남자는 감동을 느끼면서 아내에게서 이런 인내와 헌신을 요구한다. 가장이 가정에 가둬 두고 싶어하는 것은 역시 '자연'이다. 그 자연은 사회나 가족이나 가장에게 유익한 모든 미 덕을 지닌 자연이다. 어린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남자에게 공통된 욕망의 하나는, 사물의 내부에 숨어 있는 비밀을 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실망을 안겨준다. 인형 의 복부가 찢어져 내부가 밖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은 내면성을 갖지 못한다. 살아 있는 생 명체의 내면은 더욱 알기 어렵다. 여자의 복부는 내재의 깊이를 상징한다. 그것은 그 비밀 의 일부를 드러낸다. 특히 여자의 얼굴에 쾌락이 그려져 있을 때에 그렇다. 또한 그것은 비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생명의 은밀한 고동과 그 신 비를 망가뜨리지 않고 그대로 손에 넣을 수 있다. 여자는 인간세계에 동물의 암컷의 기능을 들여온다. 또한 여자는 생명을 유지하고 내재 의 영역을 지배하는 자궁의 온기와 내면성을 가정에 들여온다. 그리하여 과거가 쌓이고 미 래가 예시된 가정을 지키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낳고, 이미 낳은 아기 를 기른다. 남자는 여자의 덕택으로 세계를 무대로 일하고 행동하며, 그 속에서 소모되는 실존은 다시 한 번 자기의 내재 속에 가라앉아 회복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는 지상에 닻을 내린다. 여자에 의해 나날의 연속성이 유지된다. 남자가 외부세계에서 어떤 우연에 봉착하더라도, 여자는 그에게 식사와 수면을 연속적으로 제공해 준다. 남자의 활동 으로 파괴되고 소모되는 모든 것을 여자가 수습하여 보충해 준다. 피로한 노동자의 식사를 마련하고, 병들었을 때에는 돌봐주고, 옷도 꿰매고 빨래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부부의 세계에 넓은 세계 전체를 끌어들인다. 불을 지피고, 집안에 꽃을 기르 고, 태양과 물과 대지에서 발산하는 것을 손질한다. 베벨(유명한 <부인론>의 저자)이 인 용한 어느 부르주아 작가는 이 이상을 다음과 같이 그럴 듯하게 요약하고 있다. "남자는 그 심장이 자기를 위해 고동칠 뿐만 아니라, 그 손으로 자기 이마를 닦아주고, 평화와 질서와 정적을 자기 주위에 무언의 권위를 주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 그는 가정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 따스하고 신비로운 향기를 모든 것에 뿌리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 다." 기독교가 출현한 후로, 여성상이 어느 정도 내면화된 것은 분명하다. 남자가 여자를 통 하여 파악하려고 하는 미.따스함.친절은 이미 감각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자는 사물의 감미로운 외모를 보여주는 대신에 사물의 혼이 된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육체의 신비보다 더욱 깊게 세계의 진리가 반영하는 은밀하고 순수한 것이 있다. 여자는 집이나 가족이나 가정의 혼이다. 나아가 큰 집단, 도시나 지방이나 혹은 국가의 혼이다. 융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도시는 시민을 그 태내에 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어머니로 비유되어 왔다. 그래서 키벨레(대지의 신)는 머리에 탑을 이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어머니인 조국'이라는 말도 한다. 그런데 여자를 상징하는 것에는 양식을 제공하는 토양뿐만 아니라, 더욱 복잡한 현실도 있다. 구약성서나 <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이나 바빌론은 단지 어머니에 그치지 않는다. 그 것은 아내이기도 하다. 처녀인 도시도 있고, 바벨이나 티르와 같은 창녀적인 도시도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로마교회의 '장녀'라고 불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같은 라틴계의 자매 이다. 프랑스나 로마.게르마니아를 상징하는 조각이나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나 리용을 나타내는 여인상에서는, 여자의 역할이 아니라 다만 여자다움이 나타나 있을 뿐 이다. 이런 식의 동화는 다만 비유적으로 쓰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남자들이 이 동 화를 감정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여행가가 방문한 나라의 열쇠(그 나라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뜻함)를 여자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여자나 스페인 여자를 가슴에 품을 때, 여행자에게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감미로운 본질을 손에 넣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새 도시에 도착하면, 나 는 언제나 먼저 사창가를 찾아간다."라고 어떤 저널리스트가 말한 적이 있다. 계피가 들어 있는 초콜릿 한 개가 지드(프랑스의 작가, 1869 ~ 1951)에게 스페인이라는 나라 전체를 알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국 여자의 키스는 상대방 남자에게 그 나라의 동물.식물.전통. 문화 등 모든 것을 알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자가 그 나라의 정치제도나 경제적 부 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자는 그 육체적인 정수와 신비로운 마나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정치가, 1790 ~ 1869)의 <그라지엘라>로부터 로티(프랑스의 군인.소설가, 1850 ~ 1923)의 장편소설이나 모랑(프랑스의 소설가, 1888 ~ 1976)의 단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이 한 지방의 혼을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미뇽.실비(모두 네르발 소설의 주인공)은 각각 이탈리아.발래.프로방스.코르시 카.안달루시아의 가장 심오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괴테가 알자스의 여인 프레데리카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독일인에게는 독일병합을 상 징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반대로 콜레트 보도슈(모리스 바레스의 소설 주인공)가 독일 사람과 결혼하기를 거절할 때, 바레스(프랑스의 소설가, 1862 ~ 1922)의 생각에는 알자 스가 독일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레스는 또한 베레니스(바레스 소설의 여자주 인공)라는 한 소녀를 통해 에그 모르트라는 거리와 세련되고 섬세한 문명 전체를 상징하 고 있다. 그녀는 또한 작가 자신의 감수성도 대표한다. 남자는 자연과 도시와 세계의 혼인 여자 속에서, 신비로운 자기의 분신을 발견한다. 남자의 혼, 그것은 프시케(그리스신화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사랑을 받은 미소녀로, 영혼의 운명을 상징함)이며, 한 여자이다. 에드거 포의 <울라륨>속에서 프시케는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서 언젠가 거인 같은 삼목이 늘어선 길을 나는 나의 혼과 함께 헤멘 적이 있다. 늘어선 삼목을 나의 혼은 프시케와 함께... 이리하여 나는 프시케를 달래어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말 했다. '그 입구에는 뭐라고 씌어 있나요?'" 그리고 말라르메는 극장에서 '혼 또는 우리의 관념'(즉 인간의 지성에 나타나는 신)과 대화할 때, 그것을 "대단히 기품있는 이상한 (원문 그대로)부인"이라고 불렀다.(<극장에서 의 소묘>에서) 꿈과는 다른 조화된 나 그 침묵에서 이윽고 순수한 행위가 나타난다.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여자! 불가사의한 나... 발레리(프랑스 시인, 1871 ~ 1945)는 혼에게 이렇게 묻는다. 기독교의 세계는 님프와 요정 대신에 그다지 육체적이 아닌 존재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가정과 풍경과 도시와 그리 고 인간까지도 여전히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여성적인 것이 따라다니고 있다. 사물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이 진실은, 하늘에서 빛나는 경우도 있다. 완전한 내재인 ' 혼'은 동시에 초월자, 즉 '이념'이다. 도시나 국가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실재나 제도도 여 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로마교회'.'유대교회'.'공화제'.'인간성'은 여성적이고, 또한 '평 화'.'전쟁'.'자유'.'혁명'.'승리'도 그렇다.(이 낱말들은 프랑스어로 여성형이다.) 남자는 이 이상을 본질적인 '타자'로서 자기 앞에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여자가 타자성의 감각적인 형상이라는 이유로 여성화한다. 그래서 언어나 초상화에서의 비유는 대개 여성이다. '혼'이기도 하고 '이념'이기도 한 여자는 또한 그 양자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여자는 기 독교도를 신에게 인도하는 성총이며, 단테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이고, 페트라르 카(이탈리아의 시인, 1304 ~ 1374)를 시의 높은 정상으로 이끄는 라우라(페트라르카의 시에 의해 전해지는 영원한 여인)이다. '자연'과 '전령'을 동일시하는 모든 교의에서 여자 는 조화.이성.진리로서 나타난다. 그노시스교파는 '예지'를 소피아라는 여자로 하고, 속죄와 세계의 창조까지도 그녀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벌써 육체가 아니라 영광 으로 가득찬 실체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대신 그 위대성을 그대로 존경 한다. 에드거 포의 창백한 여자 망령은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아다닌다. 중세 기사들의 연 애나 17세기의 프레시외(17세기에 멋과 문재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모든 훌륭 한 전통 속에서는, 여자는 더이상 동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에테르와 같은 존재이며, 바람 결이고 햇빛이다. 그리하여 여자의 '밤'의 불투명은 투명으로, 어둠은 청순으로 변하게 된 다. 다음에 인용한 노발리스(독일 시인, 1772 ~ 1801)의 글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밤의 황홀, 하늘의 졸음이여. 너는 내게로 내려왔다. 풍경은 조용히 상승하고, 그 풍경 위를 해방되고 재생된 나의 정신이 날아갔다. 그 글은 구름으로 변하고, 그 구름 저쪽에서 나는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변모된 모습을 보았다." "캄캄한 밤이여, 그러면 우리는 너의 마음에 드는가?... 귀한 향유가 너의 양손에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 줄기의 빛이 너에게서 떨어진다. 너는 영혼이 육중한 날개를 지니고 있다. 몽롱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기쁨에 떠는 진지한 얼굴이 나 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흐트러진 고수머리 아래로 '어머니'의 그리운 청춘을 알 아본다... '밤'이 우리들의 마음에 열어준 무한한 눈은 반짝이는 별보다 더욱 거룩하게 생 각된다." 여자가 아래쪽으로 이끄는 유혹은 역전되어, 이제 남자를 대지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 리지 않고 하늘로 불러올린다.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처녀 마리아'가 갱생하여 '선'에 몸을 바친 여자 중에서 가장 완성된, 가장 널리 존경받 는 모습으로 문학과 초상화에 나타나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음은 중세의 열렬한 기독교도가 마리아에게 바친 기도를 발췌한 것이다. "... 지극히 고귀한 마리아님, 그대는 풍요의 이슬이고 환희의 샘이고, 자비의 운하이며, 우리가 목마름을 축이는 맑은 물이 고인 우물이나이다." "그대는 하나님이 고아에게 젖을 주시는 가슴..." "그대는 모든 선한 것의 진수이고 알맹이며 핵심이나이다." "그대는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는 속임수를 모르는 여자이나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제물을 씻어 맑게 하는 연못이요, 문둥병을 고치는 생명의 약이요, 살 레르노(이탈리아의 도시 이름)나 몽펠리에(프랑스이 도시 이름)에서도 견줄 자가 없는 명 의로소이다." "그대는 손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는 성모, 아름다운 흰 손가락으로 코와 입을 고쳐놓고, 새로운 귀를 만드십니다. 그대는 독에 감염된 환자를 고치시고, 중풍을 회복시키고,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나이다." 이런 기도 속에서 이미 지적한 여성적인 특성의 대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마리아는 풍 요.이슬.생명의 원천이다. 많은 비유가 마리아를 우물이나 맑은 물, 또는 샘으로 비유하고 있다. "생명의 샘"이라는 표현은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 중 하나이다. 마리아는 창조하지는 않지만, 비옥하게 한다. 땅 속에 감춰진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한다. 그녀는 사물의 표면 아래에 갇혀 있는 심오한 현실, 즉 핵이며 진수이다. 그녀에 의해 욕망이 가라앉는다. 그녀 는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자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생명이 위험에 직면한 장소에 나타 나 그것을 구출하여 회복시키고, 치료하고, 강건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명이 신으로부터 비 롯되는 이상, 인간과 생명의 매개자인 그녀는 또한 인류와 신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악마 의 문'이라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했다. 그러나 변모한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다. 화가는 마리아가 낙원으로 향한 문과 창을 여는 모습을 즐겨 그리고 있다. 또 대지와 하 늘 사이에 사다리를 놓는 마리아도 그린다. 더욱 분명한 것은, 마리아가 변호사가 되어 아 들(그리스도) 옆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변호하는 모습2이다. 마지막 심판을 그린 많은 그림에는, 유방을 드러내고 그 영광스러운 모성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애원하는 마리아 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외투자락 속에 남자아이들을 비호한다. 그 자애에 넘치는 애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나 전쟁터까지 그들을 따라간다. 자비의 이름으로 신의 심판 을 누그러뜨린다. 미소를 지으면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선'쪽으로 기울이는 '저울 질하는 성모'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자비와 애정의 역할은 여자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 다. 여자는 사회에 합류되어도, '생명'의 슬기로운 관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한계 를 교묘히 벗어난다. 남성이 원하는 건설과 자연의 우연성 사이에 있는 이런 거리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가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여자가 유순하여 남자의 일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풍부하게 하여 눈에 거슬리는 선을 부드럽게 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 거리는 합당한 것이 된다. 남성 신은 엄격한 '숙명'을 대표한다. 반면에 여신 쪽에서는 독단적인 친절과 변덕스러운 애호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엄격히 심판한다. 성모는 자비롭고 친절하다. 지상 에서도 남자는 법칙과 이성과 필연성의 옹호자이다. 여자는 남자와 남자가 믿는 필연성과 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알고 있다. 여자의 입가에 떠오르는 신비로운 아이러니와 여자의 융 통성있는 관용은 거기서 비롯된다.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남자의 상처를 치 료했다. 여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죽은 자를 매장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존심을 상 하게 하는 것과 그의 의지를 꺾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여자는 남자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정신에 육체를 종속시키면서도,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지킨다. 그리고 여자는 딱딱하고 고지식한 남성 건축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모난 부위를 부드럽게 완화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호화로운 아름다움과 뜻하지 않은 우아함을 도입한 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갖는 힘은, 남자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조건을 겸손하게 깨닫도록 부드럽게 촉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여자의 환상이 아닌, 통렬하고 아이러니컬한 애 정으로 충만한 지혜의 비밀이다. 경박성이나 변덕.무지까지도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미덕이 된다. 여자는 남자가 살려고 선택하는 세계이면서도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 세계의 안팎에 서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기존의 의의나 유용한 목적을 위해 도구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신비를 대립시킨 다. 여자는 도시의 도로나 경작된 밭에 시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시는 일상적인 산문의 피 안에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여자는 훌륭한 하나의 시적인 현실이다. 그것은 남자가 무엇이 되려고 결의하지 않는 것을 모두 여자 속에 투기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꿈 을 구체화하고 있다. 꿈은 남자에게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낯선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동경할 수는 있지만 도달할 수는 없다. 깊은 내재이며 먼 초월이기도 한 신비로운 '타자'는 그 모습을 꿈에 나타낸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아는 꿈 속에서 네르발을 찾아가고, 그에게 꿈의 형태로 전세계를 준 다. "그녀는 한 줄기 밝은 빛을 받아 자라기 시작하여, 이윽고 정원이 점점 그녀의 모습으 로 변하고, 꽃밭이나 나무는 그녀의 옷을 장식하는 장미나 레이스가 되어갔다. 한편 그녀 의 얼굴이나 팔은 하늘에 떠도는 붉게 물든 구름에 그 윤곽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변 모함에 따라, 그는 그녀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그 본래의 크기에서 사라져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도망가지 말아다오!'하고 나는 외쳤다. 자연이 너와 함께 죽어버리니 까." 여자는 남자의 시적 활동의 실질이므로, 여자가 남자에게 영감의 샘으로 보이는 것은 당 연하다. 시신 뮤즈는 여자이다. 뮤즈는 창조자와 창조자가 길어올리는 자연의 원천 사이의 중개자이다. 그 정신이 자연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여자를 통하여 남자는 침묵의 심연과 풍 부한 밤의 심연을 탐지한다. 뮤즈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 자 주인에게 순종하는 여종이 된 얌전한 시발라(고대의 여선지자)이다. 여자의 충고는 구 체적이고 실제적인 영역에서도 유용한 경우가 있다. 남자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달성하고 싶어하며, 다른 남 자의 충고를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는 여자가 다른 가치를 내세워, 즉 자 기 것보다 더욱 본능적이고 더욱 현실에 맞는 지혜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말을 걸어올 것 이라고 상상한다. 에게리아가 의논하러 온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직관'이다. 남자는 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듯이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이런 '직관'은 사업이 나 정치에까지 도입된다. 아스파시아와 맹트농 부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크게 활약하고 있다. 남자가 기꺼이 여자에게 맡기는 또 하나의 직능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활동의 목적이 며, 또한 결단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가치의 척도도 되며 훌륭한 판 단자도 된다. 남자가 '타자'를 꿈꾸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확인되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와 동류인 남자들의 확인을 받으려면 언제 나 긴장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외부의 시선이 그의 생활이나 사업, 그리고 자기 자신에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기를 원한다. 신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너무나 낯설고 불안하다. 신앙의 전성시대에도, 믿음을 위해 화형대에 오른 것은 극소수의 신비가 에 불과했다. 이런 신과 같은 역할이 가끔 여자에게 주어진다. 남자와 가까이 있고, 남자에게 지배되 어 있는 여자는, 남자에게 관계가 없는 가치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타자'이므 로 남자의 세계에서 떠나 있으며, 따라서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언제나 용기와 힘과 미의 유무를 알려주는 동시에, 외부에서 그 보편적인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여자이다. 남자들은 협력이나 투쟁에 몰두하여 서로에 대해 구경꾼의 입장에 설 수 없다.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냉정히 바라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들의 활동에 서 떨어져서, 경쟁이나 투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의 입장은 이 관찰의 역할을 하기 쉬 운 것이다. 기사가 말을 타고 결투를 하는 것은 그 귀부인을 위해서이고, 시인이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녀들의 공감이다. 라스티냐크(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인간 희극>등 여러 작 품에 등장하는 젊은 야심가)가 파리를 점령하려고 했을 때 그는 먼저 여자를 손에 넣으려 고 한다. 그것은 여자의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만이 남자에게 줄 수 있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발자크는 자기 소설의 젊은 주인공들 속에 자기 자신이 젊었을 때 일어난 이야기를 삽입시켰다. 그는 젊었을 때 연상인 애인 옆에서 자기교육을 시작했다. 여자가 교육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골짜기의 백합>에서만이 아니다. <감정교 육>(플로베르의 소설)이나 스탕달의 소설에서, 그리고 많은 교육소설에서 여자는 역시 이 런 역할을 맡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자는 자연인 동시에 반자연이다. 여자는 '자연'과 마찬가 지로 '사회'도 구현한다. 중세의 연애시나 <데카메론>이나 <아스트레>(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위르페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한 시대의 문명과 문화가 요약 되어 있다. 여자는 유행을 만들고, 살롱에 군림하고, 여론을 이끌고 반영한다. 명성이나 명 예는 여자의 것이다. "군중은 여자이다." 라고 말라르메는 말했다. 청년은 여자의 곁에서 ' 세계'니 '인생'이니 하는 목잡한 혀실에 눈을 뜨게 된다. 여자는 영웅이나 탐험가나 개인주 의자가 무엇보다 먼저 목표로 삼는 표적의 하나이다. 고대에서는 페르세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메두사의 목을 베고 안드 로메다를 구출하여 결혼함)가 안드로메다(이디오피아의 왕녀. 바다의 괴물에게 희생되어 바위에 매달려 있다가 구출되어 괴물을 죽인 페르세우스의 아내가 됨)를 해방시키고, 오르 페우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명인. 아내 에우리다케롸 결혼한 첫날밤에 그녀가 뱀 에게 물려 죽음)가 에우리다케를 찾아 지옥까지 가도, 트로이가 미녀 헬레나를 지키기 위 해 싸운 것을 볼수 있다. 기사 이야기중에는 잡혀간 공주를 구출하는 것보다 용감한 행위 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멋진 왕자"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지 않거나, '나귀 의 가죽부대'에 선물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그밖에 무슨일을 했겠는가? 왕이 양치는 처 녀를 아내로 삼는 신화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기쁘게 한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믈을 나눠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쓸모없는 부는 추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신 데렐라>의 신화는 필립 윌리(현대 미국의 소설가)의 <살모사의 세대>에서도 달콤하게 묘사되어 있듯이, 번영한 나라에서 많이 잃히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서 남자들은 자신의 부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년동안 번 돈이지 만,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주지 않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오슨웰스(미국의 영화배우 감 독)는 특히 <시민 케인>에서, 이 극단적인 거짓선심을 드러내고 있다. 케인이 한 무명가 수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여 그녀를 유명가수로 내세울 결심을 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확 인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에도 소규모의 '시민 케인'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하나의 영화 <면도날>에서는, 주인공이 대단한 지혜를 얻고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발견한 그 지혜의 유일한 용도는 한 사람의 창녀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구출하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남자는, 기증자 해방자 속죄자로서의 자기를 꿈꿀 때에도 여자의 예속을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기 위해서는 악마나 거대 한 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가 어려운 일에 호기심을 갖고 있으면, 여자에게 어느 정도 독립을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정복하는 것은 해방시키거나 부여하는 것보다 더 욱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일반남성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은, 남자의 지배에 자유의지로 복종하는 남 자, 토론 없이는 남자의 사상을 받아들지 않지만 결국은 남자의 이론에 굴복하는, 즉 지성 으로 남자에게 저항 하지만 끝내는 설복당하는 그런 여자이다. 남자는 자부심이 강할수록 위험한 모험을 즐긴다. 얌전히 승낙하는 신데렐라를 아내로 삼기보다는 펜데실레이아(아마 존의 여왕 여장부)를 정복하는 것이 더 근사하다고 니체는 말했다. "전사는 위험과 도박을 사랑하는 남자는, 정복할 가망이 있는 한 여자가 아마존(남성화한 여자)으로 변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남자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그 투쟁이 그에게는 하나의 도박에 그치는 반면, 여자는 거기에 자기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해방자로서, 정복자로서 남 자의 참된 승리이다. 왜냐하면 여자가 자유의지에 의해 남자를 자기 숙명으로 인정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여지를 차지한다.'는 표현은 이중의 포함하게 된다. 대상으로서의기능과 심판자 로서의 기능은 분리할 수 없다. 여자가 인격으로 보였을때부터, 남자는 여자의 동의가 없 이는 여자를 정복할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사야한다, 멋진 왕자를 만족 시키는 것은 숲속의 잠든 미녀의 미소였다. 기사의 용감한 행위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행복과 감사로 가득찬 공주의 눈물이다. 바꿔 말하면,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시선에서 풍 기는 추상적인 냉혹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쉽사리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웅주의와 시는 유혹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여자는 유혹을 받으면서 영웅주 의와 시를 찬양한다. 개인주의자의 안목으로 보면, 여자는 더욱 본질적인 특질을 갖고 있 다. 그의 눈에는 여자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척도로서가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재능 과 그라는 존재 자체의 계시로 비쳐진다. 남성은 동성인 도료에게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 객관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인 척도에 의해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의 일부, 특히 생식 능력은 여자에게만 흥미의 대상이 된다. 그가 남성적이고, 매혹적이고, 유혹적이고, 친절하 고, 잔혹하다는 것 등은 모두 여자의 눈에서 보았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런 은밀한 능력 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 싶으면, 그는 여자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는 여자에 의해 타자로 서, 가장 깊은 자아이기도 한 타자로서 자기 눈에 비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 음은 개인주의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잘 표현한 말로의 문장이다. 키요는 다른사람의 목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리고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러나 남의 생명은 ? ... ... 타인에 있어, 나라는 존재는 내가 행한 것만이 전부이다 ... ... 그러나 메이에게만은, 그라는 존재는 그가 행해 온 행위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메이는 그녀의 전기이외의 존재였다. 포옹, 인간에게 고독을 잊 게 하는 그런 포옹도 결코 인간에게 도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이 본연의 마음속으로부터 집착하고 있는 저 광인에게, 유례없는 괴물에게나 도움을 부는 것이었다. 키요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메이만이 그를 키요 지조르로 보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그를 가장 긴말한 반려자로 삼아왔다. .... 세상남자들은 내동지가 아니 다. 그들은 나를 주시하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다. 내 동지는 나를사랑하는 사람이다. 내 동지는 나를 보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해도, 아무리 비천한 것을 해도, 또 살사 배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 이에 개의치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한 행위나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 는 한 나를 사랑하는 인간이다. 함께 죽을 정도로. 키요의 태도가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상호성을 갖고 있어 그가 메이에게 있 는 그대로의 진정한 모습으로 자기의 사랑해 주기를 요구하고, 또한 그녀에게도 그가 좋아 할 듯한 달콤한 모습을 반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요구는 많은 남자의 품 위를 떨어뜨린다.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모습이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후광으로 장식된 신격화된 자기의 이미지를 상대방 여자의 두 눈동자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흔히 물로 비유되어온 이유는 여자는 남자의 나르시스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기 때문이다. 그는 선의 또는 악의를 가지고 여자를 대한다. 그러나 어느경우에도 그가 여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가 자기 밖에 있어서 자기 내부에서 파악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자의 내면은 무이며, 자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 중 에 자기를 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육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타인의 모 습을 빌린 자기의 신격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보상이다. 그에게 세계의 요약인, 자기 가치나 법칙을 강요한 존재를 자기품에 껴안았을때, 그가 포옹하고 있는 것 은 유례없는 괴물, 즉 자기 자신이다. 이리하여 남자는 자기 것으로 만든 이 타자와 합일함으로써 자기자신에게 도달하기를 원한다. 보물 약탈물 도박이나 위험 뮤즈 안내자 심판자 중개자 거울 등 여자는 그속에서 주체가 재한을 받지 않고 자기초월을 하는 , 주체에 대항하지만 부인은 하지 않은 타자이 다. 여자는 끊임 없이 타자이면서 종속물이 되는 타자이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의 기쁨이 나 승리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만일 여자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남자들은 여자를 일부러 만들어내었을 것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조작없이도 존재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몽상의 수현인 동시 에 그 실패이기도 하다. 여성상중에서 그 반대의 모습을 즉시 탄생시키지 않은 것은 하나 도 없다. 여자는 삶과 죽음, 자연과 인공, 낮과 밤이다. 어느 면에서 여자를 보려고 해도 비본질은 필연적으로 본질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같은 진자운동을 발견하게 된다. 성모 마리아나 베아트리체 속에는 이므나 키르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마녀) 역시 존재한다. 키에르케르고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에 의해 인생속에 관념성이 들어온다. 여자가 없 었더라면 남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남자들이 젊은 소녀의 덕택에 천재가 되었다 ... 그러나 처녀와 결혼한 덕택에 천재가 된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관념성 속에서 생산적이 되게 하는 것은 소극적인 관계일 경우이다 ... 여 자와의 소극적인 관계는 우리를 무한하게 만든다 ... 여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는 남자를 대 단히 유한하게 만든다. 즉 여자는 남자가 자기의 초원을 투기하는 관념에 머무르는 한 필 요하지만,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자기에게 한정된 객관적인 현실일 경우에는 해로운 것이 다. 키에르케고르는 약혼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자완 유일한 가치 있는 관계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한다. 무한의 타자로 만들어진 여자의 신화는 곧 그 반대를 야기시킨다 는 의미에서 그의 생각이 옳다. 여자는 허무의 무한 , 실질이 없는 이상이므로, 유한과 범용 그리고 동시에 허위로서 모 습을 나타낸다. 라포르그(프랑스의 시인,1860 ~ 1887)는 여자를 그런 모습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그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도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잘 못에 증오심을 표시하고 있다. 오필아나 살로메는 사실 하찮은 여자에 불과하다. 햄릿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오필 리아는 나를 자기의 소유물로서, 그리고 내가 그녀의 친구들의 소유물보다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우수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등불을 켤 시간이 되 면 나에게 쾌락과 안락에 관해 알마나 많은 말을 속삭였는지 모른다 ! 여자는 남자를 꿈꾸게 한다. 그런데 여자는 안락이나 국냄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여 자의 정신을 운운하지만, 여자는 육체에 불과하다. 연애를 하는 남자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사실 삶의 일상성을 대표한다. 여자는 어리석고, 소심하고, 인색하고 따분하다. <우리들의 작은 반려자> 라는 시에 이것 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어떤 격식도 몸에 익히고 무구의 취미에도 맞은 혼을 갖고 있어요. 나의 다양한 얼굴의 꽃을 꺾어요. 내 입술을 빨아요. 그렇지만 소리가 나지 않게 해요.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돼요. 아무도, 나 자신도 앞날을 분명히 꿰뚫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당신에게 손을 내밀 만큼 우리의 사랑은 평등하지 않아요. 당신은 단지 순진한 수컷에 불과하지만, 나는 영원한 여성이에요. 나의 목적은 멀리 별 속으로 사라졌어요! 위대한 여신 이시스는 바로 나예요! 나의 베일을 벗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의 오아시스만을 꿈꾸세요. 남자는 여자를 종속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의 소유를 바람 직하게 했던 동기를 여자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여자의 매력은 가정이나 사회에 합류하면 변모한다기보다는 소멸된다. 하녀의 신분으로 전락한 여자는 벌써 자연의 풍부한 보물이 깃든 자유분방한 벅이가 아니다. 기사 연애가 생긴 후호는 결혼이 사랑을 죽인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아내는 지나치게 멸시를 받거나 혹은 과분하게 존경을 받거나, 또는 너무 평범하여 이미 색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본래 결혼의식은 남자를 여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된다. 결혼은 남자에게도 일종의 종속이다. 결혼했 을 때 남자는 자연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생기발랄한 젊은 처녀를 탐낸 나머지, 남자는 뚱뚱한 중년부인과 깡마른 노파를 한평생 먹여살려야 한다. 그의 샐활을 미화해야 할 우아한 보석이 짜증스럽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아내, 전형적인 악처)는 남자들이 언제나 최대의 혐오감을 갖고 이야기한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설사 아내가 젊을 때라도 결혼에도 어떤 기만이 숨겨 져 있다. 결혼은 색욕을 사회화하려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것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색정은 원래 시간에 대한 순간의 요구와 집단에 대한 개체의 주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 그것은 모든 통제에 반 역한다. 그것은 반사회적인 원리를 포함한다. 풍속이 제도나 법률의 엄중성에 굴복한 적은 한번도 없다. 연애는 어느 시대에나 이런 것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해 왔다.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연애는 관능적인 양상으로 청년이나 혹은 창녀에게 호소했다. 중세 의 기사연애는 육체적인 동시에 플라토닉하여, 언제나 남의 아내가 대상이었다. 트리스탄 (중세의 전설, 그 비련의 주인공)은 간통의 서사시이다. 1900년경 여자의 신화를 새로 지은 시대는 간통이 모든 문학의 주제가 되었다. 일부 작 가들, 예를 들면 베른스탱(프랑스의 극작가, 1876 ~ 1953)은 부르주아 제도를 옹호하려 는 비장한 심정으로, 색용과 연애를 결혼속에 다시 한 번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포르토 리슈(프랑스의 극작가, 1849 ~ 1940)의 <사랑하는 여자>쪽에 훨씬 더 많은 진실이 있다. 간통은 결혼 자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혼의 목적은 남자에게 자 기 아내만 상대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여자들은 그에게 눈부신 매력을 갖 고 있다. 그러므로 드는 당연히 그런 여자들에게 눈길을 돌릴 것이다. 이 경우에 여자들도 공범자가 된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자기들에게서 모든 무기를 빼앗으려는 질서에 반항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자연에서 떠어 놓기 위해, 의식이나 계약에 의해 남자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여자는 인격의 존엄성을 인정 받을 정도로 지위가 높아지고, 자유가 주어졌다. 자유 란 모든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흉악한 세력에 사로 잡혀 있는 자에게 자 유가 주어지면 위태로운 인간이 된다. 남자가 혼미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더 위 험하다. 남자는 여자를 하년를 삼고 그 초월성을 박탈해 버린다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여자 를 자가들의 세계에 받아들인다. 여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소극적인 용도로 밖에 쓰이지 못 한다. 그것은 자기를 거부하는데 사용된다. 여자가 사로잡힌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 롭게 된다. 여자는 자연이 준 힘을 되찾으려면, 이 인간적인 특권을 단념해야 한다. 여자는 낮에는 충실한 하녀의 역할을 하지만, 밤이면 암코양이이나 암사슴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인어의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혹은 빗자루를 타고 악마의 무도회를 향해 날아간 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남편에게 이 밤의 마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주인에게는 자기의 변신을 숨기는 것인 안전하다. 연자가 먹이로 택하는 것 은 외간남지들이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들에게 여전히 식물이나 샘 별 마법사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정에 빠진다. 이것 은 그녀의 자유가 취할수 있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자기의 요구 사상 의 식을 초원하여 부정을 저지른다. 그녀는 객체시되어 자기를 소유하려는 모든 주체에게 바 쳐지게 된다. 규방에 들어 앉아 있건, 면사포에 가려져 있건, 그녀가 누구의 욕정도 불러일 으키지 못한다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는 것은 이미 남편이나 사회에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진하여 이 운명의 공범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는 거짓말과 간통에 의하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남자에게 일 방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실증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의 질투 심이 그렇게 재빨리 머리를 쳐드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는 언제나 까닭없이 의심을 받고, 사소한 혐의로 단죄되기 쉅다. 제 네비에브 드 브라방(전설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 이나 데스데모나(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남편에게 부당하게 의심을 받아 살해당함)의 경우가 그 렇다. 아무 혐의도 없는데, 그리셀다(11세기 부도덕한 여인의 전형)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받게 되었다. 여자가 숙명적으로 시기와 의혹의 대상이 되어 있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여자의 죄를 입증할 필요는 없다. 그녀 쪽에서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 면 된다. 질투가 자취를 감추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소유는 결 코 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남에게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그 샘 을 소유할 수는 없다. 질투하는 남자믐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마치 물의 본질이 유동적인 것처럼 여자도 본능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힘으로도 자연의 진실을 거역 할 수 없다. 모든 문학을 통하여, <아리비안 나이트>,(데카메론>에서도 여자의 교활한 지혜가 남자 의 경계심을 이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가 옥리처럼 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의지때문만이 아니다. 사회가 여자의 행실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남편으로 서의 남자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각 시민은 자기가 실제로 아버지의 아들로서 공인될 필요 가 있으며, 그와 같은 경제적 종교적인 이유로 여자에게 순결이 강요된다. 한편 사회가 여 자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것을 여자에게 강요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남자의 이중의 요구는 여자를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소유가 되는 동시에 타인이기를 요구한다. 하녀인 동시에 마녀인 여자를 몽상한다. 그런데 남자가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은, 이 욕망 중에서 전자뿐이다. 후자는 남자가 마음과 육체 깊숙이 몰래 숨겨둔 음험한 요구이다. 그것은 도덕과 사회에 위배된다. 그것은 타자처럼ㅡ 혹은 반항하는 자연처럼, 악녀처럼 고약하다. 남자는 자기 세운 사회에 강요하려고 하는 '선'을 자기 자신은 완전히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악' 과 부끄러운 내통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악이 불쑥 표면에 나타나면, 그는 곧 이것을 토벌하려고 한다. 그는 밤에는 어 둠속에서 여자를 원죄로 유혹하면서, 낮에는 원죄와 원죄를 여자를 배척한다. 한편 여자쪽 에서도 그녀들 자신이 은밀한 침실에서 죄를 비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점점 열렬하게 정숙을 존중하게 된다. 원시인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성기는 세속적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여자의 성기 는 종교적 마력적인 힘을 갖고 있다. 가장 근대화된 사회에서도 남자의 성적 과실은 죄가 없는 장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대개 너그럽게 봐준다. 남자는 사회의 법규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다. 남자는 집단적인 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않은 개 구쟁이 아이에 불구하다. 그러나 여자는 사회에서 탈선하면, '자연'과 악령에게 돌아가 억 제할 수 없는 마력을 집단에 일으키게 된다. 그녀들이 저지른 방탕한 행위에 대한 비난에 는 언제나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남편이 그 아내를 정숙하게 단속하지 못하면 자가도 아내의 괴실에 책임의 일부를 지게 된다. 남편의 불행은 사회에 하나의 불명예가 된다. 그중에는 아내의 죄에 대한 연대책임 을 모면하기 위해 님편이 아내를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격한 사회도 있다. 그리고 다 른 사회에서는 아내가 간통했을 경우에 그 남편을 벌하여 소란을 부리거나, 그를 알몸으로 당나귀에 태워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가 남편을 대신하여 죄를 범한 아내에게 징 벌을 내린다. 그녀가 모욕한 것은 그 남편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미신적이고 신비적이고 관능적이며, 육체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스페 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컬데롱(스페인의 극작가 시인 1600 ~ 1681)이나 로르카(스페 인 극작가), 발레 인클란(스페인의 소설가, 1870~ 1936)은 이런 주제로 많은 희곡을 썼 다. 로르카의 베르나다 알바의 집에서는 마을의 주부들이 유혹을 받은 딸을 벌하기 위해 그녀가 죄를 지은 곳을 빨갛게 핀 숯불로 지진다. 발레 인클란의 <신의 말씀>에서는 간 통한 여자를 악마와 춤추는 마녀처럼 보고 있다. 여자의 감음이 드러나면 마을사람들이 모 여 그녀의 옷을 벗기고 강물에 빠뜨린다. 많은 전설에서 전하는 것을 보더라도 간음한 여자는 이처럼 옷을 벗가고 , 복음서에 쓰 여 있는 것처럼 돌로 쳐죽이거나 생매장을 하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처벌이 갖은 의미는, 이렇게 해서 사회적인 신분을 박탈하고 여자를 자연의 손에 돌 려준다는 것이다. 여자는 음란죄로 자연의 나쁜 해독을 사회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그 죄의 보상은 일종의 신성한 북새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가은데서 다른 여작들은 죄를 지은 여자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학살한여, 이번에는 자가들의 신비로운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사회와 협조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유익한 영기를 발산시킨다. 이 야만적인 잔인성은 미신들이 줄어들고 공포가 소멸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 나 지금도 시골에서는, 신도 가정도 갖지 못한 집시 여자를 사람들은 의혹의 눈초리로 대 한다. 자유분방하게 그 매력을 발휘하는 여자, 즉 탕녀 독부 요부 등은 여전히 백안시된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요부들중에는 키르케의 모습이 살아남아 있다,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 만으로 마녀로 취급되어 화형울 당하는 여자도 있다. 그리고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에 대 한 시골 도덕의 위선적인 분노 속에는 낡은 공포심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런 위험이, 모험심이 강한 남자에게는 오히려 여자를 대단히 매혹적인 유희의 소재로 삼는 계기가 된다. 그는 남편의 특권을 버리고 , 사회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거부하고 대뜸 여자를 정복하려는 한다. 그는 여자가 저항하더라도 자가 것으로 만들려고 하며, 여자가 남자가 거역하녀 자유로워진다. '숲속의 짐든 미녀'도 불쾌하게 잠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자가를 깨우는 남자가 '멋진 왕자'임을 알아보지 못할 경우도 있고, 미소를 짓지 않을 경우 도 생각할 수 있다. <시민 케인>의 경우가 그렇다. 남자가 보호하는 여자는 피압박자이 며, 그의 관용은 권력과 전제에의 의지인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영웅의 아내는 남편이 들려주는 무용담을 냉담하게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시인이 동경 하는 뮤즈는 그의 시를 들어면서 하품을 한다. 여장부라도 투쟁이 싫어 거절하는 경우가 있고, 한편 그 투쟁에 참가하여 끝까지 싸워 이기는 경우도 있다. 퇴폐기의 로마의 여자나 오늘날의 많은 니국 여성들은 자의와 자기 중심의 규정을 남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신데렐 라는 어디로 갔는가? 남자는 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여자가 남자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남자는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여자는 자유로워진 순간부터 자신이 자유로이 창조하는 것 이외의 숙명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 투 쟁관계가 조성된다. 남자와 동등해진 여자는, 여자가 남자에게 이질적인 '자연'이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두려운 존재가 된다. 아기를 키우는 헌신적으고 인내심이 강한 암컷이 탐욕스 럽고 사나운 짐승으로 역전한다. 질이 나쁜 여자도 '대지' 나 '생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대지는 무덤이고 생명은 무자비한 투쟁이다. 근면한 꿀벌이나 어미닭의 신화 대신에, 깨물어죽이는 버마재비나 거미의신화가 등장한다. 여자는 이제 아기에게 젖 을 먹이는 암컷이 아니라 수컷을 잡아 먹은 암컷이다. 난소는 이제 무진장의 창고가 아니 라, 정자가 거세되어 물에 빠져죽는 생명 없는 물질로 된 함정이다. 자궁, 이 태평스럽게 들어 앉은 동굴은 액체를 빨아들이는 과육 육식동물 경련하는 암투의 심연이 된다. 그 속 에는 한 마리의 뱀이 살고 있어서 남자의 정력을 모조리 삼켜버린다. 같은 논리는 욕정의 대상을 혐오스러운 마녀로 만들고, 하녀를 배신자로, 신데렐라를 식인귀로 만들며, 모든 여 자를 남자의 적으로 바꿔버린다. 이것은 기만적인 태도를 자기만의 유일한 본질로 설정하 고 싶어했던 남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그러나 이런 적대적인 면도 여자의 결정적 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라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원론이 깃들어 있다. 피타고라스 는 선의 원리를 남자로 비유하고, 악의 원리를 여자로 비유했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악을 초원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속 죄와 구원의사상을 내세워 지옥의 영벌이라는 용어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기독교 인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여자가 분명히 드러난 것은 신성화된 여자와의 대립에 있어서였 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논의에서 어떤 남자들은 자기들이 몽상 에 어긋나는 저주받은 여자만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실은, 만일 남자가 여자속에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지가 그런 양면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 자는 생명이 의미를 갖는 가치와 반가치를 모두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다음 에 든 예에서는, 헌신적인 '어머니와 불성실한 '애인'의 형태를 취한 선과 악이 분명히 대 립되어 있다. 영국의 오랜 민요인 <나의 아들 랜달>에서는 애인에게 속아 독을 마신 젊 은 기사가 어머니의 품에서 죽으러 돌아온다. 리슈팽(프랑스의 소설가,1849 ~ 1926)의 <새 잡는 끈끈이>는 이보다 더한 비장감과 악취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천사 같은 미카엘라는 요부인 카르멘과 대조된다. 어머니와 정숙한 약혼자, 인내심이 강한 아내가 요 부나 마녀가 남자들의 마음에 입힌 상처를 헌신적으로 치료해 준다. 분명한 이 양극단의 타입 중간에도 여러가지 애매한 타입이 있다. 가엾은 녀자, 냘미운 여자, 죄지은 여자, 남에게 희생된 여자, 교태를 부리는 여자, 연약한 여자, 천사 같은 여 자, 악마 같은 여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행동과 감정이 남자를 자극하여 풍족 하게 해주는 셈이다. 여자의 복잡성이 또한 남자를 매혹시킨다. 남자에게 쉽사리 현혹되는 것은 하녀이다. 여 자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그 불확실성이 여자를 스핑크스로 만든다. 파리의 가장 유명한 창가의 하나가 이 '스핑크스'라는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다. '여성다움'이 강조되던 무 렵,코르셋이 유행하던 시대,폴 부르제(프랑스의 소설가,1852 ~ 1935)나 앙리 바타유(프 랑스의 극작가,1872 ~ 1992)나 프렌치 캉캉 시대에는 이 스핑크스의 주제를 연극 시 가 요 등에서 많이 다루었다.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신기한 스핑크스여!" 와 같은 가 사가 그 한 예이다. 여성의 신비에 대해 몽상하거나 의존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남자들 이 여자에게 자락이 긴 옷이나 스커트 제비꽃 긴장갑 하이힐 등을 버리지 말도록 오랫동 안 권장해 온 것도 이 신비를 옹호하기 위해서 였다. '타자'속에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 은 무엇보다도 그 타자에의 욕구를 부추기게 된다. 왜냐하면 남자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타자'이기 때문이다. 알랭 푸르니에(프랑스의 소설가, 1886 ~ 1914)는 그의 편지에서 영국 여자가 남자처럼 악수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지만, 이는 프랑스 여자의 수줍어하는 듯한 조심성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자가 먼 나라의 공주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비밀에 싸인 채 미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푸르니에는 실생활에선 여자에게 남달리 정중했던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 소년시절과 청춘시절의 꿈, 잃어버린 낙원에의 향수 등 모든 것을 한 여자, 접근하기 어렵 게 보이는 것이 제일의 금빛어린 초상을 그렸다. 남자는 여자의 결점이 신비스러움을 조성 한다면 그 결점까지도 사랑한다. "여자는 변덕스러워야 해." 하고 어떤 남자가 알아들을 만 한 여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변덕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에게 물결 같 은 인상을 준다. 거짓말은 매혹적으로 반영되어 여자를 장식한다. 교태나 간사스러움까지 도 남자를 취하게 하는 향기를 여자에게 준다. 거짓말쟁이이고, 종잡을 수 없고, 정체불명 이고, 속다르고 겉 다른 여자가 남자의 모순된 정욕에 가장 잘 작응한다. 여자는 한 없는 변신을 하는 '마야'이다. 스핑크스는 대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처 녀성은 남자에게 가장 불안한 비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난봉꾼일수록 점점 거기에 매력 을 느낀다. 처녀의 순결은 그것이 장차 어떤 방종으로 흐르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되 며, 또 어떤 악덕이 그런 순진한 처녀에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동물이나 식물에 가깝지만, 이미 사회의 과습에 잘 순응하고 있는 처녀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그녀의 수줍은 여성스러움은 두려움이 아니라 다소의 불안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처 녀가 여성적 신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처녀'가 점점 드물어졌기 때문에, 처녀숭배는 오늘에 와서는 다소 시대에 뒤진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강티용(프랑스 의 현대 희곡작가,<마야>는 그의 대표작)이 크게 성공한 희곡에서 마야에게 부여한 창녀 의 얼굴은 그위광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구체적인 여성형 의 하나로 악덕과 미덕의 교차를 가장 잘 발휘하는 타입이다. 이런 여자는 소심한 청교도 에게는 악 치욕 질병 징벌의 화신이다. 그녀는 공포와 혐오를 일으킨다. 그녀는 어떤 남자 의 소유도 되지 않고, 어떤 남자에게도 몸을 맡기면서 그런 거래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년은 원시의 음탕한 모신의 두려운 독립성을 재발견하고, 남자의 사회에서 합리화 되지 못하며, 여전히 불길한 힘을 갖는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육체를 다소 저주받은 것 으로 생각하고 있는 앵글로색슨인은 특히 그렇게 느낀다. 이와 반대로 육체를 겁내지 않는 남자는 창녀의 육체가 지닌 관대한 긍정을 사랑하게 된다. 어떤 도덕에 의해서는도 진가를 잃지 않는 여성다움을 이런 여자에게서 발견하게 된 다. 일찍이 별이난 바다와 단짝이 되었던 여자의 마력을 남자는 그녀의 육체에서 다시 찾 게 되는 것이다. 헨리밀러 같은 사람은 창녀와 동침할 때 삶과 죽은과 우주의 심연 자체의 깊이를 헤아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자기를 혼쾌히 맞아주는 질의 축축한 암흑속에서 그 는 신과 합일한다. '타락한 여자'는 위선적인 도덕의 세께에서 추방된 일종의 비인간이므 로, 그런 여자는 공인된 모든 미덕에의 반역자로 간주해도 부방하다. 그 더러운 행위가 그 녀를 진정한 성녀족에 속하게 한다. 비하된 것이야말로 언젠가는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애의 눈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보았다. 위선적인 미덕보다 죄는 쉽사리 천 국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의 <조와 벌>의 남자 주인 공)는 자기를 범죄로 인도한 남성적인 오만 자존심을 소냐의 발 밑에 바친다. 그는 모든 남자에게 숨어 있는 분리에의 의지를 살인에 의해 격화시켰다. 그래서 사란들의 눈밖에 난 천한 창녀는 긍의 자포자기한 고백을 누구보다도 잘 받아들인다. '타락한 여자'라는 말은 큰 파문을 일으킨다. 많은 남자들도 타락하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극 성을 띠고 악에 도달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악마적인 사나이도 극악한 범죄 앞에 서는 벌벌 떤다. 어떤 여자는 슬며시 사탄을 불러들이는 검은 미사를 대수롭지 않게 행할 수 있다. 여자는 남성세계의 변두리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자와 관계된 행위는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도 인간이므로 여자를 통해서 인간의 법도에 대항해 음험한 반역을 행할 수도 있다. 뮈세(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18010 ~ 1857)에서 조루주 바팅유(프랑스 소설가 사상가,1887 ~ 1962))에 이르기 까지 추하고 매혹적인 방 탕은 언제나 창녀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사드 후작(프랑스 작가,사디즘이라는 용어는 그에 게서 비롯됨, 1740 ~ 1814)이나 자허 마조흐(오스트리아의 작가,마조히즘은 그의 이름 에서 비롯된, 1836 ~ 1895)가 집요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은 여자의 육체에서 였다. 그들늬 추종자들이나 '변태성욕'을 만족시키고 싶은 남자는 우선 창녀를 찾아가는 것이 보 통이다. 창녀는 여자중에서 가장 남자에게 고분고분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에게서 가장 멀리 도망치는 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녀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처녀 어머니 아내 자매 하녀 애인 열녀 상냥한 후궁 등 여기에 열거한 여성상 중에서 남자의 유동적인 갈망을 한몸에 지닌 여자는 하나도 없다. 남자가 여러가지 양상을 띤 '신화'의 이러저러한 면에 집착하는 이유와, 그가 그것을 어 떤 특정한 여자에게서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를 캐는 것은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학의 과제 이다. 그러나 모든 콤플렉스 강박관념 정신병에는 이 신화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많은 노 이로제의 원인은 이 금기가 갖은 현혹적인 매력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터부가 미리 정 해져 있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외적인 사회적 억압만으로는 이 터부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금기는 실제로 단순한 규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여러가지 의미 를 갖고 있으며,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그 한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검토해 보는 것은 흥미로있는 일이다. 이것은 흔히 본능적인 경향과 사회적인 규제와의 투쟁에서 오는 산물이라고 보기 쉅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 주체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이다. 어머니의 유방에 대한 아기의 집착은 먼저 보편 성과 내재성에서 볼때, 직접적인 형태에서의 '생명'에의 집착이다. 이유의 거부는, 개체가 전체에서 분리되면 곧 옹게 마련인 고독의 거부이다. 그후에 개체가 점점 개체화되고 분리 됨에 따라,비로소 그의 육체에서 떠난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그가 갖은 애착에 성적이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게 된다. 그때에는 그의 관능성은 간접화되어, 이질적인 대상을 향한 초 원이 된다. 그러나 어린이가 자기를 주체로 하여 살아가는 시기가 빠를수록 자기의 자주성 에 반발하는 육체적인 유대가 귀찮게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애무에서 벗어나려 고 하며,어머니의 낡은 권위나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 즉 때로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 해서까지도 일종의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특히 어머니의 육체로 보는 것은 망측한 일이며 언짢은 일로 생각되어, 애써 어머니의 육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한다. 어린이가 자가 아버지나 계부나 어머니의 애인에 대 해 느끼는 혐오증 중에는 질투심보다는 오히려 분노가 있다. 자가 어머니가 육체적인 존재 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가 애써 잊느려는 하는 자기자신의 탄생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위대한 우주적인 현상의 위엄을 부여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 어머니 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모든 개체를 감싸는 '자연'을 구현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어머니가 남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가 어 머니를 소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모든 소융의 피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내와 애인과 같은 초라한 존재여서는 안된다. 물론 사춘기가 되어 그의 성감이 남성화되면, 어머니의 육체에서 자극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를 통하여 그가 일반적인 여성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허벅지나 유방을 보고 싹튼 이 육체가 어머니의 것임을 의식하면 대개 사라진다. 불륜도 종종 일어난다. 혼란한 연령층인 청년시절은 혐오가 신성모독을 유발하여,금제에서 유혹이 파생되는 비뚫어진 연령이기 때 문이다. 그렇다고 아들이 먼저 어머니와 자기를 원한다고 다음에 외적 저항이 개입되어 그 를 압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저항에서 오 히려 정욕이 생기게 된다. 이런 금제는 가장 정상적인 것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정욕을 억제하는 사회적인 규범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존경심은 근원적인 혐오의 승화이다. 젊은 남자가 어머니를 육체로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어머니를 변형시켜, 사회가 제 시하는 성화된 여자의 순결한 이미지에 동화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세대에도 유용한 '어머니'의 이상상을 강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사고방식에 의해 추앙될 경우에만 어 머니는 그런 힘을 갖는다. 그리고 여자는 누구나 '여자'의 , 따라서 '어머니'의 보편적인 본 질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태도가 아내나 애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관능적으로 어머니에게 정욕을 느낀 청년을, 어머니를 통하여 여자 일반에 대한 정욕 을 느낀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욕은 어떤 여자에 의해서도 진정되게 마련이다. 그는 근친상간의 향수에 빠지는 일도 없다. 반대로 자기 어머니에게 플라토닉한 애정과 존경울 갖고 있는 젊은이는 언제나 여자가 어머니의 순결을 나눠가지 고 있기를 원한다고 말할수 있다. 병적인, 또는 정상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성본능의 중요성, 따라서 일반적으로 여자의 중 요성은 잘 알려져 있다. 때로는 여자이외의 대상이 여성화되는 경우가 있다. 여자는 대부 분 남자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의 육체를 통해서도 여자를 창조 할 수 있다. 남색의 경우에도 양성의 구별은 유지된다. 그러나 보통 남자가 '여자'를 찾는 것 을 물론 여성적인 존재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에 의해 여자에게 있는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통하여 행복과 고뇌, 악덕과 미덕, 욕망과 체념, 헌신과 전제와 같은 인생 수업, 즉 자기 수업을 하는 것이다. 여자가 도박이고 모험이지만, 동시에 시련이기도 하다. 여자의 승리의 개가이지만, 고통 과 실패를 극복한 개가이기도 하다. 여자의 파멸의 소용돌이요, 지옥과 죽음의 미혹이다. 여자를 통하여 의의가 비로소 존재한다. 여자는 남자의 행동과 감정의 실질적인 내용, 남 자의 자유를 자극하는 모든 가치의 화산이다. 남자는 아무리 큰 환멸을 느낄 우려가 있더 라도, 그의 모든 꿈이 포함되어 있는 나의 꿈만은 결코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여자는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호소하는 전 부이며, 남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전부이다. 여자는 '자연'과 남자 사이의 지혜로운 중개자 이며,또한 모든 지혜에 반항하는 분방한 '자연'의 유혹이다. 여자는 선에서 악에 이르는 모 든 도덕적인 가치와 그 반대되는 가치를 육체적으로 나타낸다. 여자는 행동의 실질이며, 행동의 훼방꾼이고, 세계에 대한 남의발판이며,그 실패이자. 이런 존재로서의 여자는, 남자 가 자기 실존에 대해 성찰하거나 표현할 경우에 언제나 그 근원에 존재한다. 그런데 여자 는 남자를 그 자신으로부터 따돌리고, 침묵과 죽음속에 가라앉히려고 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의 하녀이며 반려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구경꾼과 자기 심판자도 되어 자기를 그 존재에서 인정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무관심과 모멸과 조소로 그를 거역한다. 남자는 자가가 원하는 것과 두려 워하는 것, 사랑하는 과 미워하는 것을 여자 속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추구하고, 또한 여 자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자는 비본질의 모습에서 점부이다. 여자는 완전히 '타자' 이다. 그리고 타자인한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며,여자에게 기대되는 것과 별개의 것이 다. 여자는 전부이므로 정확하게 여자는 이랭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자는 영원한 어긋남이다. 자기에게 도달하는데도, 존재자 전부와 화해하는 데도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 하는 실존의 어긋남 그 자체이다. 제2장 이상과 같이 여성신화가 집단적으로 나타난 것을 분석해 보았다. 이제 그덧을 획인하기 위해 다음 몇 사람의 작가에게 볼 수 있는 개별적 또는 혼합적인 형태를 실펴보고자 한다. 몽테를랑,D.H.로렌스,클로델,브르통,스탕달 등의 여성관은 그런 의미에서 특히 대표적이라 고 생각된다. 1. 몽테롤랑, 혹은 혐오의 양식 알리 드 몽테롤랑(1896 ~ 1972) :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 한 체험을 작품으로 썼다. 그의 작품은 인간들의 혼란속에서의 동요와 고민을 적나라하게 그렸고, 생명을 동적인 양상에서 파악하려고 하여, 행동적인 자아의 확립을 목표로 전쟁 투우 연애 스포츠가 수단이 되어서 나타난 남성적 정력을 찬미한다. 언제나 남성적 가치를 찬양하고 여성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하다. 제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스에 협력한 혐의로 국외에 추방되었다가 다시 문단에 복귀함. <꿈>,<투우사>,<올림픽>,<젊은 처녀들>, <욕망의샘에서> 등 소설 및 희곡 다수. 몽테롤랑은 피타고라스의 이원론을 남성들의 편리에 이용한 긴 전통ㅇ속에 이름을 남기 고 있다. 그 역시 니체의 '영원한 여성'을 찬양하는 것은 허약한 시대뿡이고, 영웅은 '위대 한 모성'에 반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웅주의 전문가인 그는 여성을 왕위에 서 밀어내려고 한다. 여자는 밤이고 무질서이며 내재이다. 그는 "이러한 암흑은 순수한 상 태의 여자 그자체이다."(<여성론>에서) 라고 톨스토이 부인에 대해 쓰고 있다. 몽테롤랑의 말에 의하면, 여성의 담점을 무슨 장점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 것은 현대 남성들의 어리석음과 저열성을 보여주고 것이라고 한다. 여자는 우매성,완고한 무지,현실파 악 능력의 부족 등을 지적해야 할 텐데 오히려 여자의 본능이나 직관, 통찰력에 대해 운운 하고 있다. 사실 여자는 관찰자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다. 여자는 사물을 보는 능력이 나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여자의 신비성은 하나의 책략이며, 여자가 갖고 있는 무 한한 보물이라고 것도 허무의 깊이를 말할 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해를 끼칠 뿐이다. 몽테롤랑에게 큰 적은 우선 어머니이다. 그가 젊었을 때 쓴 희곡<추방>에서는, 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머니를 등장시키고 있다. <올림픽>에서는 스포츠에 전 념하고 싶어하는 청년이 어머니의 비겁한 에고이즘에 의해 차단된다. <독선자>나 <젊은 처녀들>에서도 어머니는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머니의 죄는 자기 아들을 언제까지나 자기 태내의 어둠속에 가둬두려고 하는 것이다. 아들을 독점하여 자가 존재의 무이간 허무를 메우려고 함으로써,어머니는 그를 병신으로 만든다. 어머니처럼 한심한 교 육자는 없다. 아들의 날개를 잘라버리고, 그가 오르고 싶어하는 봉우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아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런 비난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몽테롤랑이 여성,어머니에게 던지고 이쓴 표면적인 비난의 이면에서는, 영성에 대한 혐오가 숨어 있으며, 그 이유가 자신의 출 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고,또 신이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남자이며,'탁월한 인간'이고, 몽테롤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다. 신의 몸은 만일 신에게 몸이 있다면 강인하고 유연한 근육으로 된 의지 일 수응 있으나, 생명과 죽음이 깃들어 있는 육체는 아니다. 그는 자가가 싫어하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야 하는 육체,허망하게 상처받기 쉬운 이 육체를 지니게 된 책임을 어머니 에게 돌리고 있다. "아킬레스(호머<일라스>의 주인공, 그리스의 영웅>)의 몸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유일한 부분은 어머니의 손이 누르고 있던 곳이었다."(<이성론>에서) 몽테롤랑은 인간의 조건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자존 심은, 육체를 통해 세께를 참여하는 자유가 갖는 위험을 처음부터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것 이다. 그는 연줄도 뿌리도 제거하고 오직 산속의 장군처럼 자기속에 틀어박히는 주관적인 태도를 꿈꾸고 있다. 자기의 육체적인 근원이 상기 되어, 이 몽상이 방해를 받을 때마다 같은 태도를 취한다. 즉 그런 조건을 극복하는 대신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몽테롤랑의 눈에는 애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해로운 존재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 가 자기 안에 신을 부활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말한다. '여자의 몫은 생명 속의 자발 적인 부분이다. 죽 여자는 감가으로 살아가고, 여자는 자가초원에 대한 충동을 느끼지 못 하고,위대성에 대한 감각도 없다. 여자는 애인의 약점만 사랑하고 강점을 사랑하지 않으며, 애인의 고통만 사랑하고 기쁨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가 항복하여 불행하게 되기 를 원하며,남자에게 그의 비참함을 획인시키려고 한다. 남자는 여자를 능가하기 때문에 여 자의 손이 남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는 여자가 남자를 붙잡기 위해, 남자를 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언내리려고 한다. 여자는 자기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기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가 필요하다.' 몽테롤랑은 도미니크의 눈을 통해 라늘라그(파리에 있는 산책장 소)를 산책하는 여자들의 모습을,"그녀들은 연체동물과 같은 모습으로 애인의 팔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위장된 커다란 될 태충과 같은." (<꿈>에서)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여자 운동선수를 제외한 모든 여자는 예속에 적합한 불완전한 존재이다. 여자들은 적당한 근육이나 뼈대도 갖추지 못하여 세계에 대해 손을 쓸 기만이 없다. 그래 서 그녀들은 애인이나 남편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몽테롤랑은 버마재비의 비유 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즉 여자에게 사랑이란 상대방을 잡아 먹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자기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빼앗는다. 톨스토 이 부인의 "나는 남편에게 의지해 살고, 남편을 위해 살고 있어요. 나는 남이 나를 위해 그와 똑같이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라고 말을 인용하여, 이런 미친 둣한 사랑의 위험 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전도서>의 당신의 불행을 바라는 남자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여자보다 낫 다."는 말에서 놀라운 진실을 찾고있다. 그는 "결혼한 사람은 반쪽 인간이 된다."는 리요테 (프랑스의 장군)의 경험을 인용한다. 특히 "뛰어난 남자"에게는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고 그는 단정한다. 결혼은 우스꽝스러운 속인화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부인이라거나, 단테 부부 댁의 만찬에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래서는 위대한 사람의 위엄이 말이 아니다. 특 히 결혼은 영웅의 장엄한 고독을 파괴한다. "영웅은 자신에게서 한눔을 팔지 않아야 한다." (<여성론>에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몽테를랑이 선택한 것은 '대상이 없는 자유'이다. 즉 그는 세 계에 참여하는 진정한 자유보다도 자주성의 착각을 택한 것이다. 그가 여자에 대해 옹호하 려는 것은 이런 소극적인 자유행사이다. 여자는 벅차고 무거운 짐이 된다. "그것은 사랑하 는 여자가 팔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똑바로 걸어갈 수 없다는 비통한 상징이었다." (<젊은 처녀들>에서) "내가 불타면 그녀는 그것을 깨버린다. 내가 파도 위를 걸어가면, 그녀가 내 팔을 붙잡기 때문에 나는 가라 앉게 된다."(<젊은 처녀들>에서) 야자는 모자라 고 빈약하고 소극적이어서, 그매력은 단지 착각일 뿐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여자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 몽테롤랑은 그야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사자가 모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젊은 처녀들>에서)라고 큰소리를 칠뿐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즉 혼자서 자기를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무거 운 짐을 지기를 일체 거절하고 스스로 힘이 장사라고 생각하기는 쉅다는 것이다. 몽테롤랑 은 쉬운 길을 택했다. 그는 얻기 어려운 가치를 예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것을 쉬운 방법으로 손에 넣을 궁리를 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기에게 주는 왕관만이 쓸만한 가치가 있다." 고 <파시파에>(그리스신화 에서 미노스의 아내)에서 왕은 말한다. 편리한 원칙이다. 몽테롤랑은 자기 이마에 감당하 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관을 쓰고 자줏빛의상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왕관이 색종이 로 만들어졌고,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임금처럼 알몸이라는 것인 남의 눈에는 잘 보인 다. 꿈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다니는 것은 실제로 육지의 길을 걸어가는 것 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그리고 사자인 몽테롤랑이 여성인 모기가 무서워 도망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는 현실의 시련을 두려워하고 있다. 만일 몽테롤랑이 영원한 여성의 신화를 진정으로 타파했다면 축하해야 할 것이다. 여자 가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도우려면, '여자'를 부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이미 보아온 것처럼 그는 우상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괴물로 바꿨을 뿐이다, 그도 이 '여성'이라는 정체불명의 애매한 본질의 존재를 믿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성 토마스의 뒤를 이어 그도 여자는 부정적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남자다 움이 없기 때문에 여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성이 감수해야 하는 불변의 숙명이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자는 인간의 최하층에 놓이게 된다. 그런 여자는 남자가 될 수 도 없고,여자이기도 포기하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풍자만화나 가짜에 불과하다. 여자는 육체이지만, 의식에 의해 조금도 현실성이 부여 되지 않는다. 자기가 유리할 때에는 플라 톤주의자로 돌변하는 몽테롤랑은 여성과 남성의 '이념'만이 존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인간은 존재의 외모만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를 자주적인 주체로 설정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흡혈귀'를 가차 없이 단죄한 다. 그래서 그는 앙드레 아크보(<젊은 처녀들>의 여자 주인공)의 초상을 그려서, 자기를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하려는 여자는 모두 얼굴이 흉한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려 고 한다, 물론 안드레는 얼굴이 추하고 무뚝뚝하고, 옷은 초라하고 불결하며, 손톱이나 손 목은 때투성이이다. 어설픈 교육을 받은 것이 그녀의 여성다움이 완전히 없애버렸다. 코스 탈(<젊은 처녀들>의 남자 주인공)은 그녀가 총명한 여자라고 보증한다. 그런데 몽테롤랑 은 이 여자를 묘사할 때마다 그녀의 어리석음을 독자에게 믿게 한다, 코스탈은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테롤랑은 독자에게 그녀를 혐오스러운 여자로 생각 하게 한다. 이 교활한 불투명성으로 여성지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근원적인 결함 때문에 그녀가 얻으려고 하는 모든 남성적인 특질을 일그러뜨리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몽테롤랑은 여자 운동선수에게만 예의를 인정한다, 육체의 자극적인 행위를 통하여 그녀 들은 하나의 정신,혼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래도 그녀들을 그런 높은 경지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간단하다. 몽테롤랑은 여자 1천미터 경기에 우승한 선수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 다 음,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는 그녀를 간단히 유혹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 런 불명예를 안겨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도미니크는 아르방이 자기를 불렁올린 정상에 잠 자코 머물러 있지 못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정신과 혼 덩어리였 던 여자가 지금은 향기를 발산하고 숨이 차서 잔기침을 하고 있다."(<꿈>에서) 아르방은 화가 나서 그녀를 쫓아낸다. 스포츠훈련으로 자기 속의 육체를 죽여버린 여자를 사람들은 존경할지 모른다. 글러나 여자의 육체 속에 자주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의식이 깃들면 여자의 육체는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여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순수한 육체 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몽테롤랑은 동양적인 여자의 다소곳한 태도를 긍정한다, 이세상에서 약한 성(여성)은 향 락의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비천하지만 하나의 쓸모있는 위치를 차지한다, 남성이 여 성에게서 얻은 쾌락 속에만 여자의 존재사치를 발견한다. 이상적인 여자는 완전히 어리석 고 절대적으로 순종행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기꺼이 남자를 맞어 들이고, 남자에게 절대 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르방이 자기가 필요할때 소중히 여기는 두스라는 여자가 바로 그렇다. "두스, 무척 어리석고, 어리석을수록 매력이 있는 여자 ...... 연애할 때 외에 는 쓸모가 없고, 쓸모없게 되면 남자가 단호히 멀리하는 여자."(<꿈>에서) 그리고 쾌락과 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얌전한 애완 동물 같은 아라비아 처녀인 라디자의 경우가 그렇다. 또한 스페인 열차속에서 만난 '여성동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너무나 어리 석어 보여 나는 그녀에게 정욕을 느끼기 시작했다."(<카스티유의 공주>에서) 작자는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역겹게 보이는 것은 영리한 테할 때이다. 여자가 동물서을 괴시할때에는 초인의 면노가 있다."(<젊은 처녀들>에서) 이렇게 말해도 몽테롤랑은 중도의 회교국 군주와는 다 르다. 첫째로 그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는 "병악하고, 불결하고, 산뜻한 맛이 전혀 없다." (<젊은 처녀들>에서)코스탈은 젊은 남자의 머리향기가 여자의 머리향기 보다 강렬하다고 털어 놓는다. 그는 솔랑주의 곁에 있으면,"들척지근한 역겨운 냄새와 근 육도 신경도 없는 흰 달팽이 같은 육체"(<젊은 처녀들>에서)에 자주 구역질을 느낀다.그 는 좀더 자기에게 어울리는 포옹, 대등한 자끼리의 포옹을 꿈꾸고 있다. 거기에는 정복된 힘에서 생기는 감미로움이 있다. 동양남자는 여자를 관능적으로 즐긴다. 그래서 애인 사이 에는 육체적으로 평등한 관계가 형성된다. <아가>의 정열적인 기원이나 <아라비안 나이 트>의 이야기나, 사랑하는 여자를 찬양하는 수많은 아라비아 시에 그것은 나타나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질이 나쁜 여자도 있지만, 기분좋은 여자도 많다. 관능적인 남자는 그녀 들의 품에 편안히 몸을 내밭기고, 조금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몽테롤랑의 주인공은 언제나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대방에게 빼앗기지 않고 빼앗는 것이, 뛰어 난 남녀간ㅇ에 이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공격적이고 남성적인 순간으로 생각되는 정욕의 순간에 대해 즐겨 말하지만,쾌락의 순간은 교묘히 피 해버린다. 아마 몽테롤랑 자신도 그럴때에는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체취를 발산'하 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누가 그의 체취를 맡고, 그땀내를 느낄 수 있겠 는가 ? 무장이 해제된 그의 육체는 누구를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몽테롤랑 의 앞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의식뿐인,투명하고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의 의식에 쾌락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그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방해가 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주는 쾌락에 대해서는 즐겨 말하자만, 자기가 상 대방으로부터 받은 쾌락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 않는다.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존관계 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에게 원하는 것은,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카스티유 의 공주>에서) 관능적인 쾌락에 뜨거운 만족을 느끼는 것은 공범관계를 나타내는것이다. 그는 그런 관 계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배자의 고독을 택한다, 그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곤능의 만족이 아니라, 두뇌적인 만족이다. 여자 앞에서는 "사나운 말이나 투우에게 접근할 때와 같은 느낌이 든다. 말이나 황소 앞에서처럼 여자 앞에서도 자가의 힘을 시험 한다는 불안한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카스티유의공주>에서)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여 힘을 겨루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시합에서 뜻밖의 점 수를 조작하여 일방적으로 판정을 내리기도 할 것이다. 소나 말을 상대하면 자기가 심판관 일 수 있어 훨씬 안전하다. 여자를 상대할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잘 선택하기만 하 면, 자신이 마음대로 할수 있는 독무대가 된다. "나는 대등한 연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여자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명한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 지 않는다. 왜 그는 자식은 원하면서 대등한 상대는 원치 않는가 ? 차라리 자기에게 대등 한 상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면 몽테롤랑은 더욱 정직해 보일 것이다. 자기가 대등한 상대가 두려운 것이다. <올림픽>을 쓸 무렵 느는 스포츠를 속임수가 끼어 들 수 없는 등 급치와 엄밀한 승부를 찬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테롤랑 자신은 이교훈을 이해하지 못했 다. 그후의 작품과 생활태도를 보면,그는 작중인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대결을 회피한다. 단 지 동물이나 경치, 어린이나 어린이와 같은 여자를 상대로 택하고, 자신과 대등한 사람은 절대로 상대하지 않는다. 일찍이 스포츠의 엄밀한 정확성에 반했던 몽테롤랑은 자기의 비겁한 자존심이 비판 받 을 우려가 없는 여자만 애인으로 받아들인다. 수동적이고 식물적이고 유아적이고 어리석어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만을 택한다. 그는 여자가 자의식을 갖는 것을 철저히 피하려고 한 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의식의 흔적을 발견하면, 반사저그올 모을 움츠리고 돌아선다. 여자 를 상대하녀 주체와 주체외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남자의 왕국 에서 여자는 단지 상아서 움직이는 하나의 물체여야 한다. 여자를 절대로 주체로 보지 않 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몽테롤랑의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위세가 당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적당주의의 도덕 을 갖고 있다. 즉 자기 자신밖에 염두에 없다. 그가 여자에게 이끌린다기보다는 여자를 자 기에게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안전한 상태로 즐기기 위 해서이다. 여자의 실존은 절대로 열등하며, 남자의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절대 우원성을 드 러낼 뿐이다. 그래서 아르방은 두스가 우매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전설에 나오는 거위를 아내로 삼은 반신의 기분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다." (<꿈>에서) 코스탈은 솔랑주의 몸 을 만지자마자 곧 굉장한 사자로 변한다. "다가 앉아 마자 그는 곧 젊은 처녀의 허벅지 위 로(옷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자가 고깃덩어리를 발로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그 손 을 그녀의 중심부에 댄다."(<젊은 처녀들>에서)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세상남자들이 슬금 슬금하고 있는 이 거동을 코스탈은 "영주의 원시적인 손버릇"(<젊은 처녀들>에서)이라고 말한다. 만일 여자의 육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애무하는 남자나 남편이 모만일 여자의 육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애무하는 남자나 남편이 모두 몽테롤랑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강렬한 변신을 쉽사리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막연히 이 여자 의 얼굴에서 냄새를 맡았다. 마치 사자가 두발사이에 움켜쥔 고깃덩어리를 찢어먹는 동작 을 때때로 중지하고 그것을 핥는 것처럼."(<젊은 처녀들>에서) 남성이 여성에게서 얻는 쾌락은 이런 살벌한 자존심에서만은 아니다. 이런식으로는 여성이란 남성이 마음대로 안전 하게 자기 마음의 불꽃을 시험해 보는 역할을 할뿐이다. 코스탈은 어느날 밤에 고통이 지겨워 닭다리를 맛있게 뜯어먹을 정도로 고뇌의 유희에 빠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놀이는 그렇게 자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밖에도 강렬하고 묘한 즐거움이 있다. 예컨대 자비심이다. 코스탈은 자비심에서 여자들이 보내온 어떤 편지에는 답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친절하게 돌봐주기도 한다. 영감을 받은 시골처 녀에게 보낸 설교조의 유식한 편지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내 글을 이해 할지 모르겠소.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보다는 낫겠어요." (<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때로는 상대방 여자를 자기가 좋아하는 이미지대로 상상하고 즐거워한다. "나는 당신이 내게 훈장처럼 되기를 바라오 ... 당신이 나와는 별개의 것이 되 도록 하기 위해, 나는 당신을 내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않은 것이오."(<젊은 처녀들>에서) 그는 솔랑주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호탕한 기분을 가장 흐뭇하게 느끼는 것은 여자와 동침할때이다. 기 쁨 휴식 열정 힘 쾌락의 공급자인 그는, 자기가 아낌없이 제공하는 그런 부에 크게 만족한 다. 그는 상대방 애인에게 빚지는 일이 전혀 없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더욱 획신하기 위 해 여자들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설사 성교가 편등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도 여자는 일방적인 채무자이다. 여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나, 남자는 빼앗는다. 그러므로 그는 솔랑주의 순결을 빼앗은 날에 그녀를 화장 실로 쫓아버리고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라도, 남자 가 그녀때문에 신경을 쓴다는것은 말도 안 된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남성이며, 여자도 섭리에 의해 세척기로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코스탈의 자존심도 여기에 이르면 참으로 비 열하고 교양없는 외무사원과 다를 바가 없다. 여자의 첫번째 임무는 남자의 관대한 요구에 얌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솔랑주가 그의 애 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될때, 코스탈은 크게 화를 낸다. 그가 라디자를 귀여워하는 까닭도, 그가 그녀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기쁨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자기가 맹수라도 된듯 싶고,당당한 군주가 된 것같이 기뻐한다. 그러나 빼앗기고도 만족을 느끼는 여자가 한나의 가련한 존재의, 의식의 대용품이 고동 치고 있는 생명없는 육체에 불과하다면, 빼앗고 만족을 부는 도취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상하기만 하다. 코스탈은 어째서 그런 하찮은 것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는가? 이런 모순이 결국 허영심에 불과한 자존심의 정체를 밝혀준다. 강자의, 관대한 인간의, 주인 된 자의 보다 더 미묘한 즐거움은 가없은 인정에 대한 연 민이다. 코스탈은 때때로 여동생에 대한 오빠와 같은 우애와 천한 자에 대한 동정과 '여성 의 연민'을 느끼고 감동한다. 냉혹하다고 생각했던 인간에게서 뜻밖의 친절을 느꼈을 때 감동적인 면이 있을까? 그는 여자라는 병든 동물의 베갯머리에 몸을 굽힐때 그런 숭고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자 운동선수까지도 패하고 다치고 지쳐서 기진 맥진한 모습을 보기를 좋아한다. 코스탈은 여자들이 달마다 겪는 병(월경)을 지겹게 여기 면서 "여자가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아는 날에는 언제나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젊은 처녀들>에서)고 털어 놓았다. 그도 이 연민의 정에 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약속을 지 키지는 못해도 여러가지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앙드레에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솔랑주에게 결혼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사라지는 순 간, 이런 약속은 휴지가 되어버린다. 그는 스스로 유희의 규칙을 정하고, 자기 자신을 상대 로 그 유희를 즐기고 있다. 몽테롤랑에게 있어 여자는 가엾고 열등한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는 여자가 경멸 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요건과 경멸의 갈등을 감동적인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아, 경멸하는 자를 탐내다니, 얼마나 큰 비극인가 ! ...... 같은 동작으로 끌어 당기고, 물리치고, 성냥개비의 입장,즉 언제나 소홀히 취급되는 자의 입장에서는 손가락을 델 걱정만 없으면, 이 운동은 분명히 유쾌한 것이다. 만일 경멸하는 자를 탐내는 것이 자 기 멋대로의 쾌락이 아니라면, 그는 자기가 존경하는 자를 탐내는 것을 일부러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방은 도미니크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욕정의 대상을 그렇게 경멸하지 않이도 되었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선량한 스페인의 무희 가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가 가난하기 때문인가, 가문이 초라하기 때문인가 , 교양이 없기 때문인가 ? 몽테롤랑의 눈에는 이것도 결점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녀가 여 자라는 것만으로 무조건 경멸한다. 그는 여성의 신비가 남성의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공상이 여성의 신비를 창조한다고 단정한다. 그런데 그도 자기의 주관성이 요구하는 것을 대상속에 투영하고 있다. 여자가 경멸할 만하기 때문에 경멸하는 것이 아니 라, 여자를 경멸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게 여자가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여자와 몽테롤 랑 사이의 거리가 크게 벌어질수록 그는 점점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가 작품의 주인공과 상대를 그처럼 초라한 여성으로 택하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알 수 있 다. 그는 위대한 작가 코스탈의 상대역으로 성욕과 권태에 시달리는 시골 올드 미스와 지 혜가 모자라며 이기적이며 극우사상을 가진 주부를 배치하고 있다. 이것은 큰 인물을 일부 러 작은 자로 제는 격이다. 이러한 경솔한 결과로 몽테롤랑 작품의 남자 주인공은 우리 눈 에 몹시 초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좋다. 코스탈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부하니까. 여자의 아무것도 아닌 약점이 그의 자만심을 부풀리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들>의 1절은 특히 의미심장 하다. 코스탈과 동침하기 전에 솔랑주는 밤화장을 한다. "그녀는 화장실에 갔다. 그때 코스 탈은 전에 기르던 암말이 생각났다. 그 암말은 거만하고 신경질적이어서, 그가 올라타고 있을때에는 대소변을 보지 않았다. "여기에는 육체에 대한 혐오(셀리아가 배변을 본다고 말한 스위프트가 생각난다), 여자를 가축과 동일시하려는 생각, 오줌을 누는것 하나에도 여자에게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코스탈은 분개하고 있지만, 자 기도 방광과 결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땀과 체취로 더러워진 여자에 대 해 구토를 느낄 때, 그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다. 그는 자기를 강철 같은 근육과 성기를 지배하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경멸은 욕망보다 고상하다." 고 몽테롤랑은 <욕망의 샘에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알바로눈 "나의 빵은 혐오이다."(<산타아고의 스승>에서)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는 즐기 고 있으면서 경멸이라니 ...... 우리는 남을 깔보고 비판함으로써 자기가 비난하는 타인과 자신은 전혀 다른 인간인 것처럼 느끼고,자기에게는 흠잡을데가 조금도 없는 것처럼 느껴 져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몽테롤랑은 일종의 도취감에 취해 한평생 인간에 대한 경멸을 계속할 것이다. 자기의 머 리가 좋다고 믿기 위해서는 남의 어리석음을 적발하면 되고, 자가가 용감하다고 믿기 위해 서는 남의 비겁한 태도를 지적하면 된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때, 그는 패한 동족 에게 유쾌한 경멸을 퍼부었다. 자기 자신은 프랑스인도 아니고,패전국민도 아니다. 그는 공 중을 날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완곡한 표현으로 남을 비판하고 있지만, 미리 패전 을 막기 위해 남보다 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는 장교로 종 군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고도 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남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는 자기의 혐오감을 개탄하는 체하지만, 그것은 그 혐오를 보다 성실하다고 느끼고 그 것을 더욱 즐기기 위해서이다. 사실은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여 자를 비열속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처녀들을 돈과 보석으로 유혹하여 즐긴 다. 여자들이 그의 불순한 선물을 받아들이면 그는 무척 기뻐한다. 앙드레를 괴롭히는 즐 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타락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 때문에 그녀를 상대로 사디스트적 인 유희에 빠진다. 그리고 솔랑주에게 영아살해를 부추긴다. 그녀가 그 계획을 승낙하자 코스탈의 정욕이 갑자기 불타오른다. 그는 경멸의 황홀속에 미래의 조인을 자기 것으로 만 든다. 이런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모충의교훈이다 숨은 의 도는 어찌되었든, 그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몽테롤랑은 모충에게 오 줌을 갈기면서 그중에서 어떤 것은 살려두고 어떤 것은 죽여버리며 즐거워한다. 삼아남으 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모충에게는 조롱삼아 연민을 베풀어 기회를 준다. 이놀이는 그를 도취하게 한다. 모충이 없었더라면, 오줌을 누는 것은 단지 배설행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사를 결정하는 도구가 된다. 기어다니는 벌레에게 오줌을 갈기는 사나이 는 신의 전제적인 고독을 맛보게 된다. 보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동물에게 때로는 잔인히게, 때로는 부드럽게,공평하게,변덕스럽게,주기도 하고 다시 빼앗기 도 하며,만족시키고,동정하고,화를 낸다. 남자는 이처럼 멋대로 즐기고 잇는 것이다. 그는 지배자이고, 자유의몸이고,유일한 존재 이다. 그러나 동물은 모름지기 동물다워야 한다. 그는 일부러 그런 동물을 골라서 그약점 을 어루만져주고 철저하게 동물로 취급하기에 전념하며, 한편 동물쪽에서도 어느새 자기들 의 처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루지애나 주나 조지아 주의 백인들은 흑인들의 사소한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피부색깔이 자기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우 월성을 거기서 획인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그런 흑인의 한사람이 자기는 결백하다고 우기기라도 하면, 한층 더 박해를 가한다.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에서는 계획 적으로 인간이 타락하도록 만든다. 군주들은 그런 비열한 행위에서 자기가 초인적인 본질 을 갖고 있는 증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치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몽테롤랑이 나치스 이념의 찬미자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태양의 차륜인 나치스의 만자 십자형이,'태양'의 축제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기뻐했다. "태양의 '차륜'의 승리는 단지 '태양'의 승리,이교국의 승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회전한다는 태양원리의 승이이다. 나는 오늘날 그원리늬 승리를 본 다. 내가 지금까지 찬미했던 그 원리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가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어떤 훌륭한 감각을 가졌기에 "힘의 위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독일인을 본받아라고 프랑스인에게 강요했는지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안이하 고 비겁한 취미때문에 대등한 자들 앞에서 도망친 그는 같은 동기에서 정복자 앞에 무릎 을 꿇는다. 이렇게함으로써 그는 정복자에게 동화된 기분을 느끼게 된디. 그리하녀 자기도 정복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이 황소이냐,모충 이냐,여자야,혹은 생명 자체이냐,자유이냐의 차이뿐이다. 그는 이미 승리하기 이전부터 "전체주의의 마술사들"을 예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 술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지금까지 줄곧 니힐리스트로 인간을 혐오해왔다. "인간은 지도 할 가치가 없다."(이처럼 미움을 받을 만큼 인간이 나쁜 잣을 했을 리가 없는데. <욕망의 샘에서>에서) 그는 마술사들처럼 어떤 사람들 - 인종이나 국민이나 혹은 몽테롤랑 자신 - 은 남에게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의 윤리관의 전쟁이나 박해를 정장화하여 이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그의 태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 윤리관을 자세히 검토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가 어떤 근거에 서 여자들을 비판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치스 신화에는 역사적인 기반이 있었다. 그 니힐리즘은 독일의 절망의 표시였다. 영웅 숭배는 수백만의 병사가 목숨을 버리는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몽테롤랑의 태도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목적이 없고, 단지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선택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의식속에는 주권에 대한 요구구가 있다. 그러나 이주권은 모험을 통해서만 획립된다. 어떤 우월성도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주관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위나 업적 사이에만 단계가 만들어질 수가 있다. 가치는 부단히 획득되는 것이다. 몽테롤랑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잇다. "모험을 통해 손에 넣은것 이외에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몽테롤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위험에 드러내놓으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과 정면으 로 대결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귀찮은 장애물이다." 라고 <죽은 영왕>에서 왕 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 허영심이 강한 남자가 자기 주위에 조성하는 흐뭇한 '동화의 세계'를 현실의 인간이 부인하기 때문이다.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인간은 인정할수 없다. 몽테롤랑의 작품 중에 인간과인간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공존이야말로 살아 있는 위대한 드라마인데,그는 이것을 회피하고 있다, 그 가 그린 주인공의 언제나 동물 어린이 여자 풍경을 앞에 두고 혼자 서 있다. 그의 주인공 은 자기의 정욕이나(<파시파에>의 여왕처럼) 자가 욕구의 포로(<산티아고의 스승>처럼) 이며, 그옆에는 아무도 없다. <꿈>에서의 아르방조차도 동료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 프리 네가 살아 있을 때 아르방은 그를 멸시하고, 그가 죽자 그의 시체를 향해 그를 찬양한다. 몽테롤랑은 실생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에서도 오직 한 가지 의식만 인정한다. 그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진다. 하나의 주체만 있을 경우에는, 주체와 주 체 상호간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연애는 경멸하여 마땅하다고 한다. 그럼 우정은 존귀하 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정에는 내장이 빠져 있다." 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연 대관계를 일방적으로 배격한다. 영웅은 인간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공간과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나는 현대의 외부사정에서나,또는 과거 어느 시대의 외부사 정에도 흥미를 느낄 만한 적절한 이유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몽테롤랑은 타인의 신상 에 일어난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외부의 일은 나에게는 한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나를 스쳐지나가면서 내 속에 빛을 비출 때에만 그것을 사랑했 다 ......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행동 따위는 불가능하다. " 정열과 정력과 용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은 어느 하나도 신뢰할 수 없었기 때 문에, 그것을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것은 초월이 일체 금지된 것과 같다. 몽테롤 랑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연애와 우정은 보잘것 없는 것이며, 경멸이 행동을 방해한다. 몽테롤랑은 예술을 위한 예술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도 믿지 않는다. 다음에는 쾌락의 내재만 남나 된다. "나의 유일한 야심은 자기의감각을 남보다 더 잘 사용하는 것이었다." (<욕망의 샘>에서) 하고 그는 1925년에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 평화와 시에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욕망의 샘>에서) 그리고 1941년에는 "그런데 남을 비난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이 세월은 나에게 쾌락으로 가득찬 하나의 꿈이었다. 내가 인생과 얼마나 밀접한 접촉을 했던가!"(<하지>에서) 그것도 좋다고 하자. 그러나 그는 여자의 내재 속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여자를 그렇게 경멸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는 어머니나 애인의 독점적인 애정에 대해, 한층 고귀한 어 떤 위대한 목적을 대치시키려고 하는가? 그도 역시 '독점'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과 의 밀접한 접촉'에 관해서라면, 몽테롤랑보다 월등한 여성이 얼마든지 있다. 하긴 그는 좀 이상한 쾌락, 동물이나 소년, 미성숙한 소녀에게서 얻는 쾌락을 특히 즐긴다. 그는 자기에 게 반한 애인이, 그녀의 열두살 난 딸과 자기가 동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분개하 고 있다. 이것은 실로 태양답지 않은 치사한 행위이다. 그는 여자의 관능에도 남자의 관능 에 못지 않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하여 남녀의 순위 를 매긴다면 아마도 여자가 남자보다 우세할 것이다. 이 점에서 몽테롤랑의 모순은 참으로 크다. 그는 '교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이 무가치하므로 모든 가치가 동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승인하고 보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의 이런 관대한 사고방식이 가정의 어머니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독일군이 점령 했을 때 영화나 신문잡지를 검열하는 '종교재판'을 요구한 것은 바로 그이다. 그는 미국 무희의 허벅지에 구토를 느끼지만, 투우의 번들거리는 성기를 보면 흥분한다. 취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동화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 체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이 대 방탕아는 남의 방탕을 보고 역겨워하면서 침을 뱉는 가? 그 방탕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모든 도덕은 몽테롤랑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 점에 대해 그는 향락을 누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대 답할 것이다. 향락을 누리는 방법이 문제이다. 쾌락은 체념의 반면이 되어야 한다. 그 향락 주의자가 동시에 자기 속에서 영웅이나 성인의 소질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곧잘 자기의 쾌락을 자기 나름대로 높이 평가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몽테롤랑의 나르시 즘적인 몽상이 그런 여자들의 몽상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몽상이다. 이 몽상에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내용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몽테를랑이 위대하다, 신성하다, 영웅주의 운운하는 말은 아이들의 장난 에 불과하다. 몽테를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자기의 우월성을 시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는 그 효과적인 술에 취하기 위해 구름 속에 숨어버렸다. '유일자'는 과연 지고하다. 그는 신기루의 방 안에 틀어박힌다. 거울이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반사하여, 자기 혼자 온 세계 를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은 자기의 포로가 된 은둔자에 불과하다. 그는 자 유를 누리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의 자유를 자기의 자아를 위해 소외시키고 있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판화에서 모방한 형에 따라 몽테를랑의 조상을 만든다. 아르 방은 거울에 자기의 우매한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고 도미니크를 옆으로 밀어낸다. 이런 아르방이야말로 노예적인 상태의 좋은 표본이다. 우리는 남의 눈을 통해서만 바보로 보인 다. 교만한 아르방도 평소에 경멸하고 있는 집단 의식에 자기를 복종시키고 있다. 몽테를랑의 자유는 일종의 태도이지 현실은 아니다. 목적이 없어 행동이 불가능하기 때 문에 그는 제스처로 위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흉내이다. 여자는 그에게 알맞는 상대 이다. 여자는 그의 상대역을 맡고, 그는 주역을 독점하여 월계관을 쓰고 왕의 옷을 걸친다. 다만 모든 것은 그의 사유의 무대에서 이루어진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하늘 아래 공공의 광장에 나서면, 배우는 눈이 부셔서 서 있을 수가 없어 다리를 비틀거리다가 쓰러진다. 문 득 이것을 알아차리고 코스탈은 외친다. "여자에 대한 이 '승리'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 닌가!"(<젊은 처녀들>에서) 그렇다. 몽테블랑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치나 공적은 장난에 불과하다. 그를 열중하게 하는 용감한 행위도 단지 제스처에 불과하며 결코 기도는 아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자 살이나 파시파에의 용기, 결투에서 단칼로 베기 전에 상대에게 자기 우산을 받쳐준 일본 무사의 아량에 감동한다. 그러나 그는 "적의 인격이나 사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하지>, P.211)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1941년에 특별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 목적 여하 를 불문하고 전쟁은 모두 아름다우며 용도 여하를 막론하고 힘은 언제나 위대하다는 것이 다. "우리가 영웅인 동시에 성자라는,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인간관을 유지하려고 하면, 신념없는 투쟁이라는 형식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하지>, P.211) 그런데 모든 주의, 주장에 대해 고상한 무관심을 표시한 몽테블랑이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국가주의적 혁명으로 기울어지고, 그의 고귀한 자유가 굴종을 택하고, 영웅적 예지의 비밀을 항독 지 하운동에서 찾지 않고 정복자들에게서 찾은 것은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 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죽은 여왕>나 <산티아고의 스승>에서 볼 수 있는 위선적인 숭 고는 결국 이런 허황된 것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포부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이들 희곡 속에서, 교만한 두 남자가 단지 인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 여자를 자기의 공 허한 자존심 때문에 희생시키는 것은 볼 수 있다. 이 여자들은 애정과 지상의 행복을 원했 다. 그 죄로 한 사람은 목숨을, 한 사람은 영혼을 빼앗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무슨 명목으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작가는 아무 근거도 없 다고 교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는 왕이 기네스를 죽이는 데 뚜렸한 동기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살인은 평범한 정치적 범행으로 끝난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녀를 죽여 야 하는가? 아마도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란, 태양의 원리는 당연히 지상의 평범한 습성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는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어떤 목적도 밝히지 않는다. 파괴를 원한다는 것뿐이다. 몽테를랑은 알바로와 관련하여 어떤 책의 서문에서, 현대의 일부 남성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강렬한 신념, 외부현실에 대한 경멸, 파괴에의 취미, 무의 미한 것에 대한 광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산티아고의 스승이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이러한 광포에서 비롯된다. 그는 신비라는 화려한 미명으로 장식된다. 신비보다 행복 을 택하는 것은 평범한 생각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제물과 희생은 인간적인 목적이 있 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개별적인 애정이나 개인의 행복을 초월하는 목적은 애정이나 행복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미디넷(파리의 서민층 처 녀)의 모럴' 쪽이 공허한 선경보다 참된 것이다. 생활과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높은 이상도 생기게 된다. 이네스 드 카스트로가 부헨발트에 있는 것 과, 왕이 국사를 빙자하여 독일대사관으로 달려가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많은 미디넷들이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동안, 몽테를랑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중할 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포식하고 있는 헛된 말은 공허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하 다. 초인주의적인 신비설은 현대의 폭력행위를 모두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삼고 있는 두 편의 희곡 중에서, 하나는 육체적인 살인, 또 하나는 도덕적인 살인에 의해 그런 신비설이 주장되고 있다. 사납고 고독하고 불우한 알바로가 잔혹한 심문관이 될 우려도 충 분히 있다. 외면당한 왕이 히믈러(나치 장군의 한 사람)가 될 우려도 있다. 부녀자를 살해 하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약한 남자와 유태화된 기독교도를 죽이고, 고매한 이상의 이름을 내걸고 죽여서 이득이 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죽인다. 부정적인 신비주의자는 부정하는 것밖에는 자기를 주장할 길이 없는 것이다. 참된 초월 은 미래를 향한 적극적인 전진이다. 가짜영웅은 자기가 멀리 왔다는 것, 하늘 높이 날아다 니고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 언제나 후방이나 발 밑을 바라본다. 내려다보고, 비난하고, 압박하고, 박해하고, 괴롭히고, 죽인다. 그는 이웃에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보다 자기가 뛰 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몽테를랑이 '인생과의 접촉'을 중지하고, 거만하게 우리에게 가리키 는 절정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라비아의 양수차를 끄는 당나귀처럼, 나는 남남이 되어 같은 장소를 끊임없이 빙빙 돌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은, 나는 새 물을 길어올리지 못한다." 몽테를랑이 1927년에 쓴 이 고백에 첨가할 말은 별로 없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화형대에 불을 켜대었더라면 좋았 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인 해결법이었다. 그는 자기숭배 속에 도피하는 길을 택했 다. 그는 세상을 풍부하게 할 수 없어서, 거기에 투신하지 않고 자기 모습을 비추는 것만 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자기 눈에만 보이는 환영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활에 질서를 세웠 다. "귀인은 어떤 경우에도 여유가 있다. 패배했을 경우에도 그렇다."(<하지>, P.312)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패배할 경우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왕으로 자부한 다. 그는 니체에게서 '여자는 영웅의 노리개'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영웅이 되기 위해서 는 여자를 노리개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코스탈의 말대로 "결국은 얼마나 장난 같은 짓인가!" 2. 로렌스, 혹은 남자의 자존심 D.H 로렌스(1885 - 1930):영국의 소설가, 시인. 현대문명에 짓눌린 여러가지 기형, 특히 남녀관계의 타락을 지적하고, 일종의 신비적인 에로티시즘을 주장함. 그는 옛 스승의 아내를 사랑하여 함께 독일로 도망했다가 후에 결혼했다. 그는 성의 의의를 중시하여 노골 적이고 대담하게 작품에 취급했다. 그중에서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편의 아내와 산지기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로 유명하다. <아들과 연인>, <무 지개>, <날개 있는 뱀> 등의 역작을 통해, 인간생활은 정신과 육체의 올바른 균형을 이 루지 못하면 건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로렌스는 몽테를랑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에게는 남녀의 특이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양쪽을 '생명'의 진실에 끌어들인는 것이 문제였다. 그 진실은 표 상(의식 내용)이나 의지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물성을 배격 하지 않는다. 로렌스는 성기와 두뇌의 대립을 부정한다. 그에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우주적 낙천주의가 있다. 남근 속에 표시된 생명의욕은 환희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사상과 행동의 원천을 찾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허한 개 념과 무가치한 메커니즘에 빠지고 만다. 단지 성주기(월경주기)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재 속에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완 전한 현실-성과 죽음-도 육체의 옥토에서 떨어져나온 생활보다는 낫다. 남자는 안티오스(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 대지를 활력의 원천으로 삼음)처럼 때때로 대 지와의 접촉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여자를 요구하는 남성다움의 표시가 전부여야 한다. 따라서 여자는 위안물도 먹이도 아니다. 그녀는 주체에 대한 객체가 아니라, 정반대의 극 의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극이다. 이 진리를 간과한 남자들, 예컨대 나폴레 옹과 같은 사람은 남자로서의 생활에 실패했다. 이런 남자는 실패자이다. 자기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성을 최고도로 성취하는 데서 개인은 자기를 구제할 수 있 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적인 관계 속에서 결코 자존심이나 자아의 고양을 찾아서는 안 된 다. 자기의 성을 의지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자아의 장벽을 부수고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개인적인 지배욕을 단념해야 한다. 해산을 하는 여자를 표현한 저 작 은 조각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강렬한 감각의 중압 밑에서 무의미할 만큼 추상화된, 무척 공허하고 예리한 얼굴."(<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이런 황홀은 희생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다. 남녀의 한쪽이 다른쪽에게 얌전히 삼켜지는 것이 아니다. 남녀가 모두 한 쌍에서 부서진 파편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성은 상처가 아니다. 양쪽이 모두 훌륭한 극을 지닌 하나의 완전한 존재이다. 한쪽이 그 남성다움에 의해 확립되고, 다른쪽이 여성다움으로 확립될때, "각자 성의 양극 사이에 교 류가 이루어진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성행위는 당사자의 어느 한쪽이 정복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를 통하여 이루게 되는 훌륭한 완성이다. 우르술라와 비 르킨이 서로 상대를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별의 균형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그가 그녀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초월하는 신비적이고 구체적이고 황홀한 다른 현실이었다."(<사랑하는 여인들>에 서) 뜨거운 애정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상대방에게 도달한다. 즉 연인끼리 함께 '타자'에, '전체'에 도달하게 된다. 폴과 클라라라가 서로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아들과 연인> 에서)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그의 생명과 함께 호흡하는 강렬하고 야생적이고 불가사의한 생명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자기들의 힘을 초월한 것을 느끼고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 무수한 초목이 뻗는 움직임이, 별의 선회가 시 작되었다." 채털리 부인과 멜러즈도 이와 같은 우주적인 환희에 도달한다. 서로 상대와 몸을 섞음으 로써 두 사람은 나무와 햇살과 비와 섞이게 된다. 로렌스는 이 이론을 '채털리 부인의 변 호'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결혼은 계속적이고 근본적으로 남근과 관계가 없으면, 즉 태양 과 대지와 달과 별과 유성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날과 달과 계절과 해와 세기의 리듬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피의 교감이 없으면 결혼은 무의미 하다. 피야말로 영혼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피와 여자의 피는 서로 섞일 수 없는 영원히 이질적인 두 강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강은 그 굴곡으로 생명 전체를 에워싸고 있 다. "남근은 여자의 피의 계곡을 채우는 혈액의 부피이다. 남성의 피로 이루어진 힘찬 강 은 여성의 피의 강을 그 가장 깊은 곳에서 에워싼다... 그러나 어느 쪽의 흐름도 그 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결합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신비의 하 나이다." 이 결합은 생명을 기적적으로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개성'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 럼, 개성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서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면 그런 시도는 실패하게 마 련이다. 그때에는 양쪽의 생명의 흐름을 가로막는 "개인적이고 창백하고 싸늘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적인"(<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성욕이 있을 뿐이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 을 하나의 도구로 보며, 두 사람 사이에 증오가 싹튼다. 예를 들면 채털리 부인과 마이켈 의 경우가 그렇다. 이 두 사람은 자기의 주관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알코올이나 아편이 주는 것과 비슷한 흥분을 느끼는 경우는 있어도, 그 흥분에는 대상이 없다. 상대자의 현실 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로렌스라면 코스탈을 가차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그는 제라드에게서 그런 오만하고 이기 적인 남성을 묘사하고 있다. 제라드가 구드런과 같이 지옥에 떨어지는 책임의 대부분은 그 에게 있다. 지능적이고 방자한 그는 무의미한 자기주장에 만족하여, 인생에 대해 완강히 저항한다. 사나운 암말을 제어하는 즐거움 때문에, 그는 저쪽에서 기차가 요란하게 달려올 때 울타리에 그 암말을 매어놓고, 빠져나오려고 날뛰는 옆구리를 피로 물들이며 자기의 억 센 힘에 스스로 도취된다. 이와 같은 지배욕은 그 대상이 되는 여자를 비천하게 한다. 연약해진 그녀는 노예로 변 하게 된다. 제라드는 미네트 위에 몸을 기댄다. "난폭한 취급을 당하는 데서 그 존재이유 를 갖고 있는 듯한, 폭행을 당하는 노예의 순진한(그녀의) 시선은 제라드의 근육을 떨게 했다... 그의 의지만이 유일한 의지이며, 그녀는 그의 의지의 수동적인 실체에 불과했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지배이다. 여자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면, 남자가 지배하는 것 은 하찮은 것이다. 그는 빼앗아서 풍족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라드는 구드런을 품에 안는다. "그녀는 제라드 자신의 풍요롭고 자랑스러운 실 체였다... 그녀는 제라드 속으로 사라지고, 그는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곁을 떠나면 그는 금세 고독하고 공허해진다. 그리고 이튿날 여자는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여자의 기질이 강할 경우에는, 그녀에게도 남자의 요구와 동일한 요구를 불러일으 킨다. 그녀는 끌리기도 하면서 반발하여, 마조히즘적이 되기도 하고 사디즘적이 되기도 한 다. 구드런은 미친 듯이 날뛰는 암말의 허리를 허벅지 사이로 죄는 것을 보고 흥분한다. 그리고 제라드의 유모에게서 옛날에 "그녀가 그의 작은 엉덩이를 꼬집었다."는 말을 들었 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흥분했다. 남성의 거만은 여성의 저항을 자극한다. 채털리 부인이 산지기의, 그리고 우르술라가 비르킨의 성적 순수성에 정복되어 구제되는 반면에, 제라드 는 구드린을 끊임없는 투쟁 속으로 끌어들인다. 부친상을 당하여 상심한 그는 어느날 밤에 그녀의 품속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생명의 대온천이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근사하게 생 각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며 실체였다. 그녀의 여자다운 가슴에서 발산하는 부 드러운 기적적인 영기가 병들어 시든 그의 뇌수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그것은 마치 병을 낫게 하는 수액 같기도 아고, 생명 자체를 쓰다듬어주는 파도 같기도 하여, 그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가슴에 조용히 안겨 있는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날 밤에 그는 여성과의 합일이 어떤 것인가를 예감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의 행복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구드런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제라드를 자기 어깨 위에 잠들게 하고, 자신은 깨어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마음은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먹이가 된 자가 받는 징벌이다. 그 는 혼자서는 고독을 깰 수 없다. 자기의 장벽을 쌓음으로써 남에게도 장벽이 되었다. 이제 는 타인과 합일할 수 없다. 결구 제라드는 구드런과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해 죽는다. 이와 같이 남녀 양성은 어느 쪽도 본래는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쪽도 주체가 아 니다. 여자는 먹이가 아니고, 단순한 구실도 아니다. 말로(프랑스의 소설가, 정치가)도 지 적한 것처럼, 로렌스에게는 인도인의 경우와는 달리, 여자가 하나의 풍경처럼 무한과 접촉 할 기회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프랑스어판 서 문에서) 이것도 여자를 하나의 객체로 삼는 한 방법이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현실 적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합일이야말로 그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러므로 로렌스가 호 의적으로 묘사한 남성인물은, 애인에게서 육체의 선물을 휠씬 능가하는 것을 요구한다. 예 를 들면 폴은 감상적인 희생정신에서 자기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폴 은 감상적인 희생정신에서 자기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비르킨은 우르술라 가 자기 품에서 단지 쾌락만을 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냉정하든 정열적이든, 자기 속에 파묻혀 사는 여자는 남자를 고독하게 내버려둔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배척한 다. 양쪽이 육체와 정신을 서로에게 모두 주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주고받음이 실현되면 두 사람은 서로 언제까지나 정절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는 일부일처제의 찬성자이 다. 존재의 개별성에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여러 가지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 그런데 남 근 중심의 결혼은 일반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전류가 제대로 흐르고 있을 때에는, 어떤 변화에의 욕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만으로 완전히 닫혀진 결정적인 유동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선물과 서로의 정절에 의해 진정한 상호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런데 좀처 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로렌스는 남성의 주권을 열렬히 믿고 있다. '남근 중심의 결혼'이 라는 말과, 성적과 남근적이라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하다. 신비스 럽게 결합하는 두 사람의 피의 흐름 중에서 남근적인 흐름 쪽에 특권이 있다. "남근은 두 하천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리듬을 유일한 흐름에 결 합기킨다." 그러므로 남자는 단지 결합된 두 요소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연결의 요인도 된다. 그것은 남녀를 초월한다. 즉 "미래로 통하는 다리는 남근이다." 로렌스는 '어머니 여 신'의 숭배 대신에 남근숭배를 대치 시키려고 한다. 그가 우주의 성적 성격을 분명히 부각 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는 여자의 배가 아니라 남자의 생식력이다. 그는 여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수컷의 강렬하고 은근한 부름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를 등장시킨다. 그가 묘사하는 여성 등장인물들은 아름답고 건강하지만, 상대방을 도취시키는 매력은 없다. 이와는 달리 남성 주인공들은 상대방의 마 음을 이끄는 야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생명'이 갖는 불가해한 힘찬 신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은 남성이라는 동물이다. 여자들은 이 마법에 매료된다. 어떤 여자는 여우에게 홀리기도 하고, 어떤 여자는 종마에게 반하기도 한다. 구드런은 황소의 무리에게 흥분하여 도전한다. 그녀는 수토끼의 용감한 저항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 린다. 이와 같은 우주적인 특권 위에 사회적인 특권이 생기게 된다. 아마도 남근의 전류가 격렬하고 공격적이어서, 또한 그것이 미래에 걸쳐 있기 때문이겠지만-로렌스는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생명의 기치를 들고 나아가는'(<무의식의 환상>에 서) 것은 남자가 하는 일이다. 남자는 목적을 향하고 있으며 '초월'을 구현하고 있다. 여자 는 자기의 감정에 마음을 빼앗겨, 완전히 내면성에 머물러 있으며, 운명적으로 '내재'에 안 주한다. 남자는 성생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남자에 의해 성생활은 초월된 다. 남자는 성적 세계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거기서 탈출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속에 처 박혀 살아간다. 사상과 행동도 남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근을 차지하지 못한 여자 는 그 어느 쪽에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뒤따르지 않는 연기이다. "여자는 아래쪽에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 극을 갖고 있다. 여자의 깊은 극의 성질은 아래로 향하는 조류, 즉 달의 인력이다. 남자는 그와 반대로 위로 향한다. 태양과 대낮의 활동으로 향하는 극을 갖고 있다."(<무의식의 환 상>에서) 여자에게 "가장 심오한 의식은 배와 허리에 깃들어 있다... 만일 그녀가 위쪽을 향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언젠가는 닥칠 것이다." (<무의식의 환상>에서) 행동의 영 역에서 적극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남자이다. 여자는 정서면에서 적극적이다. 로 렌스는 보날드(프랑스의 정치사상가, 군주정치와 카톨릭의 옹호자, 1754 - 1840)나 콩 트(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1798 - 1857)나 클레망 보텔(20세기 초의 프랑스의 저 널리스트) 등의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여자는 그 실존을 남자에 게 종속시켜야 한다. "여자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이 지향하는 심오한 목적을 믿어야 한 다."(<무의식의 환상>에서) 그때 남자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과 감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 아내가 당신을 신뢰하여, 당신에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할 때,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당신을 사 랑하는 아내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느끼게 된다..."(<무의식의 환상>에서) 로렌스는, 남자는 이와 같은 아내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큰 기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만일 그의 기획이 눈가림에 불과할 경우에는, 그 부부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될 것이 다. 오히려 여성주기(월경주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낫다. 즉, 피에르와 나타샤(톨스토이 의 <전쟁과 평화>의 주요 등장인물)처럼 서로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느니, 안나 카레니 나와 브론스키(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들), 카르멘과 돈 호세(메리메의 <카르멘>의 주인공들)처럼 사랑과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하면, 로렌스가 주장하는 것은 프루동이나 루소식의, 아내가 남편으 로부터 자기 삶의 의의를 찾아내는 일부일처제의 결혼이다. 로렌스는 역할의 교대를 요구 하는 여자들을 몽테를랑 못지않게 증오한다. 여성이 '위대한 모성'의 역할, 생명의 실상을 보존하는 역할을 거절한다면, 욕심꾸러기인 여자는 남자를 불구로 만들어, 그를 '내재' 속 에 빠뜨리고 궁극적인 목적에서 이탈하게 할 것이다. 로렌스는 모성을 저주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자기가 육체적인 존재임을 기뻐하고 자기의 탄생을 받아들여, 어머니를 깊이 사랑 한다.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들이, 참된 여성의 훌륭한 본보기처럼 쓰여 있다. 어머니야말로 순수한 헌신과 완벽한 관용과 생생한 온정을 남김없이 그 아들에게 바치고 있다. 그녀들은 아들이 한 사람의 어엿한 사나이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남 자를 어린이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이기주의적인 연인(여자)이다. 그녀는 남성의 비약 을 가로막는다. "여자들의 유성인 달은 우리를 뒤로 끌어당긴다." (<무의식의 환상>에서) 애인은 언제나 사랑을 얘기한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은 빼앗는 것이며, 그녀가 의식하는 자신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미움에 가깝다. 자기를 상대방에게 줄 줄 몰라 무서운 공허감에 시달리는 허미온은 비르킨을 자기의 포로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 는 실패하여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녀가 그를 찌르며 느낀 관능적인 황홀감은 쾌락의 에 고이스틱한 경련과 같은 것이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로렌스는 의식을 요구하는 셀룰로이드나 고무인형과 같은 현대여성을 혐오한다. 여자가 성적으로 자각하면, 곧 "온통 두뇌적으로 행동하고, 자동적인 의지의 명령에 따라 인생을 살아간다." 로렌스는 여성이 자주적인 관능을 갖는 것을 금한다. 여성은 자기를 주도록 되 어 있지 빼앗도록 되어 있지 않다. 로렌스는 멜러즈의 입을 통해 동성연애를 하는 여성을 혐오하고 있다. 남자에 대해 초연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자도 역시 비난한다. 폴은 미리엄이 그의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당신 멋져요." 하고 말할 때 모욕을 당한 것 같 아 기분이 상한다. 구드런도 자기 애인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때, 미리엄과 같은 과오를 범 하게 된다. 이런 관조적인 태도는 오히려 남녀 사이를 떼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페니스를 하찮게 여기거나 남자의 몸놀림을 우스꽝스럽게 보는 냉정하고 지적인 여성의 빈정거림과 마찬가지이다. 집요한 쾌락의 추구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거기에도 이반을 가져오는 짜 릿하고 고독한 향락이 있으므로, 여자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로렌스는 여성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독립적이고 지배적인 여성을 많이 묘사했다. 우 르술라와 구드런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우르술라는 독점욕이 강한 여자였다. "남자는 나 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몸을 맡겨야 한다."(<사랑하는 여인들>에서) 그후에 그녀는 자기 의지를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구드런은 끝까지 완강하다. 지적이고 예술가 타입인 그녀는 남자의 독립과 행동의 가능성을 크게 질투한다. 자기의 개성에 대해서는 손 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한다. 빈정대기를 잘하고 소유욕이 강하여, 언제난 자기 주관 속에 파묻혀 있다. 누구보다도 솔직한 까닭에 가장 심 각한 것은 미리엄의 모습이다.(<아들과 연인>에서) 구드런의 실패는 제라드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미리엄은 폴을 상대로 불행한 자기의 짐을 혼자서 지고 있다. 그녀도 역시 남자가 되기를 원하며, 남자를 미워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자기의 일반성 속에 인 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 때문에 생명의 큰 흐름이 그녀를 꿰 뚫고 있지 않다. 그녀는 마녀나 여승을 닮을 경우는 있어도, 절대로 바카스신의 여제사관 은 닮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기의 머릿속에서 재창조한 뒤 거기에 어떤 종교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감동하는 일이 없다. 그런 열정이 오히려 그녀를 생명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녀는 시적이고 신비적이어서 순응성이 없다. "그녀의 극단적인 노력은 도리어 무위로 끝났다... 그녀는 무능하지는 않았으나, 적절한 동작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내면적인 기쁨만 추구한 채 현실을 두려워한다. 성욕도 두려워한다. 폴과 동침할 때 그녀의 마음은 공포 속에 움츠러든다. 언제나 지성이 앞서고 생명이 뒷전으로 밀린다. 즉, 그녀는 반려자가 아니다. 애인과 융합되기를 거절한 다. 그녀는 상대방 남자를 자기 속에 흡수하려고 한다. 남자는 그녀의 이런 의지에 기분이 상한다. 그녀가 꽃을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다. 마치 그녀가 꽃의 마음을 잡아 뽑으려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매도한다. "당신은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야. 당신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해.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신은 뭔가가 결핍되어 그 빈자리를 사랑으로 메우고 싶어해." 성욕은 공허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존재의 표현이어야 한다. 여자가 사 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들이 남성적인 힘을 손에 넣고 싶어하는 갈망이다. 폴의 어머 니는 미리엄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를 그에게서 빼내어, 삼켜버리려고 한다." 젊은 처녀는 애인이 병들면 간병을 할 수 있 기 때문에 기뻐한다. 그를 돌봐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요하는 하 나의 방법이다. 그녀는 폴에게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폴에게 '아편이 주는 열병과 같은 정 열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에게 기쁨과 평화를 줄 수는 없다. 그녀의 사랑의 깊숙한 곳에서, 그녀 자신의 은밀한 곳에서, "폴이 그녀를 사랑하여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 는 폴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폴은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는 평정을 찾아 클라라에 게로 간다. 아름답고 발랄하며 동물적인 이 여자는 남자에게 자기를 아낌없이 준다. 그리 하여 두 사람은 자신들을 초월하여 황홀한 순간에 도달한다. 그런데 클라라는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이 환희는 폴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는 데 실패한다. 다른 여자도 그를 자기 것으로 만 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개별화되면, 그것은 곧 공허한 에고이즘으로 변하여 에로 티시즘의 기적은 소멸된다. 여자는 개인적인 사랑을 단념해야 한다. 멜러즈도 동 시프리아노도 애인에게 사랑을 속 삭이려고 하지 않는다. 케이트가 모범적인 여성인 테레사에게 동 라몽을 사랑하느냐고 물 었더니 화를 낸다.(<날개 있는 뱀>에서) "그 사람은 내 생명이에요." 하고 그녀는 대답한 다. 그녀가 그에게 허용한 선물은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존심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생명을 구현하고 있다면, 남자도 여 자에게 생명을 구현하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느끼 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피곤하게 하고 경직시키는, 완고하고 언센 힘을 버릴 것이다. 새로운 생 명의 물 속에, 무언의 예찬을 노래하는 심장 속에 깊숙이 빠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주신 바커스의 제전에 초대되어 도취에 빠진다. 애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그의 품 에서 자기를 추구하지 않고, 그와 함께 비와 나무와 봄의 꽃과 조화를 이룬다. 이와 마찬 가지로 우르술라는 비르킨의 수중에서 자기의 개성을 포기하고, '별의 균형'에 도달한다. 로렌스의 이상을 남김없이 반영하고 있는 작품은 <날개 있는 뱀>이다. 동시프리아노는 ' 생명의 깃발을 들고 나아가는' 사나이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사명에 전력 투구한다. 그 결과 그에게 남성은 초월되고 신성에까지 드높여진다. 그가 신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절대적인 헌신을 받을 만하다. 케이트는 처음에 서구적인 편견 에 사로잡혀, 그런 남자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고 자기 개성과 제한된 실존을 고집한다. 그 러나 차츰 생명의 위대한 흐름을 받아들여 시프리아노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다. 이것은 노 예의 복종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있기로 결심하기 전에, 그녀는 그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에게 인식시킨다. 그는 이것을 인정한다. 사실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한다.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그의 반려가 되고자 한다. 그녀는 그의 목적, 그의 가치, 그의 세계를 채택 한다. 이런 복종은 에로티시즘 속에 표명된다. 로렌스는 여자가 몸을 뒤흔드는 경련에 의해 혼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일부러 여자에게 오르가슴을 주지 않는다. 동 시프리아노는 여자에게 이런 쾌락이 다 가오는 것을 느끼면 케이트에게서 몸을 뺀다. 결국 그녀는 이런 자주성까지도 단념하게 된 다. "그녀의 뜨거운 의욕과 정욕은 진정되어 사라져갔다. 그녀는, 대지에서 소리없이 솟아 나 신비로운 효능을 가진 온천처럼, 부드러운 순종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이것으로 로렌스의 소설이 무엇보다도 '여성교육'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어렵다. 남자는 그런 질서에 자주적으로 순응하는 반면 에, 여자는 남성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외부의 의식과 의지의 모습 을 취할 때 진정으로 복종이 나타난다. 자주적인 순종은 묘하게도 자주적인 결정과 비슷하 다. 로렌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실패자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예지의 깊은 뜻을 알고 있다. 우주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오래전부터 완벽한 것이 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므로 오만한 개인주의자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교만해 보 이기도 한다. 신이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 신은 로렌스 자신이 다. 한편 여성은 그들의 신성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남성이 하나의 남근이고 두뇌가 아 니라면, 남성적인 성질이 몸에 밴 인간은 남성의 특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악한 자가 아닌 선한 자도 될 수 있다. 다만 종속자로서이다. 로렌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도 역시 '참된 여성'의 이상, 즉 자기를 '타자'로 분명히 인정하는 여성의 이상 이다. 3. 클로델과 주의 여종 폴 클로델(1868 - 1955):프랑스의 상징과 시인, 극작가, 외교관. 앙드레 지드, 발레리, 프루스트와 함께 프랑스 20세기의 4대 작가로 알려져 있음. 열렬한 카톨릭 작가로 20세기 전반의 문학계 및 청년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6년 브라질 공사, 1919년 덴마크 공사 를 거쳐, 1921 - 1926년 일본 대사, 1927 - 1933년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작품으로 <인질>, <잔 다르크>, <피안의 미사>, <마리아에의 알림>, <정오의 분할>, <사탱 신 발> 등이 있음. 클로델의 카톨릭주의의 특이한 점은, 악도 선으로 변하게 하는 완고한 낙천주의이다. " 악에도 그냥 버려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정오의 분할>에서) 클로텔은 결국, 창조주의 생각과 같게 귀착되는 관점(창조주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을 취 하여,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을 동정하고 있다. 지옥과 원죄가 없으면, 자유와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신은 무에서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이미 인간의 과실과 속죄를 예정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브가 신의 명령(선악과를 먹지 말라는)을 어겼기 때문 에, 그 딸들은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교회'의 신부들이 여자를 얼마나 냉대했 는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자가 신의 뜻을 따르면, 여자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여자! 옛날 지상의 낙 원에서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신에게 한 봉사, 여자와 신 사이에 이루어진 깊은 공감, 죄과를 통해 그녀가 속죄를 위해 맡긴 육체!"(<소피의 모험>에서) 여자는 죄의 원천이며, 인간이 낙원을 잃게 된 것은 그녀의 탓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속죄받아, 이 세계는 다 시 축복을 받고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처음에 살게 한 그 환희의 낙원에서 한 발짝도 나간 일이 없다."(<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이 세상은 모두 '약속의 땅'이다."(<루아르 에 쉐르에서의 대화>에서) 신의 손길에서 나온 것은 어느 하나도, 주어진 것의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신의 모든 작품과 함께 신에게 기도 한다. 신이 만드신 것에는 어느 하나도 무익한 것이 없고, 어느 하나도 우리의 구원과 무관한 것이 없다." (<사탱 신발>에서) 또한 세상 에 필연적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서로 관련되며, 서로 필요 로 한다."(<마리아에의 알림>에서) 이리하여 여자는 우주의 조화 속에 그 위치를 차지하 게 된다. 그것은 결코 평범한 위치가 아니다. "이 '허무'의 덧없는 꽃에 '영원'을 연결한다. ' 악마'에게는 처치하기 곤란한 일종의 불가사의한 정열이 있다."(<소피의 모험>에서) 물론 여자가 파괴적일 수도 있다. 클로델도 레쉬(<교환>의 여주인공)를 통해 남자를 파멸로 인도하는 고약한 여자를 보여주고 있다. <정오의 분할>에서 이세는 남자에게 사 랑의 올가미를 씌워 그의 생활을 짓밟는다. 그러나 이 파멸의 위험이 없으면, 구원도 이루 어지지 않는다. 여자는 "신이 그 경탄할 건조물 속에 일부러 가져온 위험의 요소이다." (<소피의 모험>에서) 남자가 육체의 유혹을 경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들의 생활에 극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들 속에 숨어 있는 적, 이 강렬한 자극제이다. 만일 우리들의 영혼이 사나운 적의 침범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잠들어버리겠지만, 그렇 지가 않아서 우리의 영혼은 벌떡 일어난다... 승리를 위해 연마하는 것은 투쟁이다."(<아침 햇살 속의 검은 새>에서) 남자가 영혼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정신의 길을 통해서만 이 아니라 육체의 길도 통한다." 그리고 남자에게 호소할 때 여자의 육체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을까?"(<사탱 신발>에서) 남자를 잠이나 안일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모두 유익하다.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우리들의 평범한 이성에 의해 정돈된 우리의 개인적인 작은 세계 속에 하나의 교란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효력을 갖게 된다.(<입장과 제안>에서) 때때로 여자는 단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기만자일 뿐이다.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바로 여기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현재 있는 것의 즐거움에 현재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해진 것이다. 나는 오류의 얼굴을 한 진리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도시>에서) 그런데 착각도 유용한 경우가 있다. 수호천사가 도냐 프루에즈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것 이다. "'죄까지도! 죄도 쓸모가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 것은 잘한 일이었나요?' '네가 그 사람에게 욕망을 가르친 것은 잘한 일이었어.' '환영에의 욕망도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환영의 욕망도요?' '욕망이란 현실에 있는 것을 바라는 거야. 환영은 현실에 없는 것을 바라는 거지. 환영을 통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을 바라는 거야.'"(<사탱 신발>에서) 신의 뜻에 의하면 프루에즈는 로드리그에게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검'이었다.(<사탱 신 발>에서) 그러나 신의 손에 의해 여자는 이런 검이나 환상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현세의 부는 언제나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남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우주의 감각적인 미의 모든 화신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찬의 노래여야 한다. "그대는 얼마나 아름다 운가. 비올렌, 그대가 있는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마리아에의 알림>에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산들바람보다도 부드럽고, 신록의 잎사귀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 같은 그녀... 마치 그녀는 연약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어린 꿀벌처럼 보 이기도 하고, 큰 암사슴처럼, 혹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녀 비올렌>에서) "나에게 그대의 향기를 맡게 해다오. 마치 제단처럼 윤기가 흐르도록 물로 씻은 뒤에 노 랗고 파란 꽃을 피운 대지의 향기 같은... 또한 밀짚과 초목에서 발산하는 여름의 향기 같기도 하고, 가을의 향기 같기도 하다..." (<도시>에서) 사랑하는 여자는 자연 전체를 축도해 놓은 존재이다. 장미, 백합, 별, 과일, 새, 바람, 달, 태양, 분수이며, "대낮의 햇빛을 받은 거대한 항구의 평화로운 속삭임"(<사탱 신발>에서) 이다. 아니 훨씬 그 이상의 것, 자기와 대등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밤의 생생한 모래 속에서 빛나는 한 점인 하나의 별이, 내게는 하나의 별 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했다. 나와 같은 인간적인 어떤 사람으로..."(<사탱 신발>에서) "너는 앞으로는 외톨이가 아니다. 네 안에는 너와 함께 영원히 헌신적인 여성이 있다. 영원히 너의 것이 되어 다시는 도망치지 않는 자, 너의 아내가 있다."(<도시>에서)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신뢰하는 사람. 우리를 품에 안고 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나직한 목소리의 반려자."(<굳 은 빵>에서) 남자는 그녀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껴안음으로써, 이 지상에서 뿌리를 발견하고, 이 세 상에서 자기를 성취한다. "나는 이 여자를 택했다. 그것이 나의 가치척도와 이 지상에서의 몫이 된다."(<도시>에 서) 그녀가 남자에게 가벼운 짐은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멋대로 행동하도록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윽고 어리석은 남자는 자기가 이 부조리한 인간과 이 무겁고 까다로운 큰 짐과 함께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새삼 놀란다. 그처럼 많은 옷과 많은 머리칼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는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릴 엄두도 내지 못한다."(<정오의 분할>에 서) 이 무거운 짐은 보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한 보물이에요." 하고 비올렌은 말 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을 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자기 운명을 달성한다. "여자가 되는 것이 꺾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리고 장미가 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물며 여자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힘센 사자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우리는 어쩌면 좋은가, 남자의 품안에서만 여자가 될 수 있고, 남자의 마음속에서만 술 잔이 될 수 있으니."(<세 목소리의 칸타타>에서) "그러나 나의 영혼아, 말해 다오. 나는 헛되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나를 꺾을 사명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있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 마음, 그것을 채우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세 목 소리의 칸타타>에서) 물론 이 남녀의 결합은 신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신성하며 영원 속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마음속의 의지가 동의해야 하며, 개인의 의사에 따라 파기할 수 없다. "두 사 람의 자유로운 인격이 주고받는 사랑와 동의를 신은 대견스러운 일로 보시기 때문에, 그것 을 하나의 은총의 의식으로 삼으셨다. 여기서도 이 은총의 의식은 마음의 절실한 소원을 구체화 하고 있다."(<입장과 제안 2>에서) 그리고 "결혼은 쾌락이 아니라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자기 이외의 목적을 위해 서로 상대방에게 만족하도록 두 영혼을 단련하는 것이다."(<사탱 신 발>에서) 이 결합에 의해 남녀는 서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 자 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의 내부에 있는 이 영혼,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 던 것은 그 사람이다!... 내게로 다가와서 손을 내민 것을 그 사람이다... 내 배필로 정해졌 던 상대는 그 사람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의 근원이었던 것은 그 사람이다! 그러니 까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토비와 사라의 글>에서)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으로 생각했던 나 자신의 어느 부분. 아! 하나님, 그것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 로 살아 있습니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그리고 그 존재는 그것이 보충하는 존재에게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 된다. "그에게는 그 대가 필요했다." 하고 프루에즈의 '천사'는 말한다. 그리고 로드리그는 "필요치 않은 것 이 외에, 무엇을 죽음이라고 부르는가? 언제부터 그녀는 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 가? 내가 그녀에게, 나의 존재 없이는 그녀가 자기 자신일 수 없는 것은 언제였는가?" (<사탱 신발>에서) "남의 시선이나 남과의 신비로운 관계 밖에서 만들어지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고 사람들 은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의 말에 따라서 나는 존재하게 된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같은 하나가 서로 메아리치고 있다. 우리를 이루어나갈 때, 오리온이여, 당신이 사용했던 재료가 조금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깎은 재료로 나는 만들어진 것이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이 결합의 기적적인 필연성 속에서 낙원을 되찾고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로, 일찍이 낙원에 존재했던 인간이 다시 만들어졌다."(<성자의 노트>에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마치 보라색이 오랜지색과 섞여서 빨간색이 되는 것처럼."(<사탱 신발>에서) 서로가 하나의 타자의 모습을 통하여 완벽한 '타자'에게, 즉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 신이다."(<성자의 노트>에 서) "만일 당신이 처음에 내 눈동자 속에서 천국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그처럼 천 국을 동경했을까?(<성자의 노트>에서) "아! 여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당신이 가질 수 없는 '신'을 그 얼굴에서 보게 해다오." (<사탱 신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모든 생물체에게 공통된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는 자기만으로는 온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자기를 실현하는 최고의 '선'은 우리 외부의 누구라는 느낌을."(<입장 과 제안 1>에서) 이리하여 남녀 서로가 상대방 속에 현세에서의 자기 생명의 의의와 그 생명의 불안전성 의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천국을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상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나만 이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의 불완전한 것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다."(<사탱 신발>에서) "내가 그대에게 요구했던 것, 그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시간과는 양립되지 않고 영원 과 양립된다."(<모욕받은 아버지>에서) 그러나 남녀의 역할은 똑같지 않다. 사회할동에서는 분명히 남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클로델은 계급제를, 특히 가족의 계급제를 인정한다. 가장은 남편이다. 안느 베르코 르는 그 가정 위에 군림한다. 동 펠라즈는 도나 프루에즈라는 꽃을 돌보는 정원사로 자처 하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녀는 그 명령을 거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성 이라는 것만으로 특권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한 집안의 남자와 자신을 비교하다니, 얼마 나 주제넘은 여자인가!" 하고 시뉴는 자문한다.(<인질>에서) 논밭을 경작하고 대성당을 짓고 검을 잡고 싸우며 세계를 탐험하고 토지를 정복하고 행동하고 기도하는 것은 남자이 다. 이 지상에서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남자를 통해서이다.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 일 뿐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 남아, 기다리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나는 뒤에 남아, 언제나 그곳에 있는 사람이에요." 하고 시뉴는 말한다. 그녀는 그가 먼 곳에 가서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쿠퐁텐의 재산을 지키며 그 의 가계를 빈틈없이 관리한다. 여자는 전사에게 희망의 원조를 제공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제공한다."(<도시>에서) 그리고 연민의 원조도. "나는 그 사람이 가엾은 생 각이 든다. 어머니를 찾아서, 신뢰와 수치감 때문에 모욕을 당한 여자에게로 갈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교환>에서) 그리고 '황금의 머리'는 죽음을 앞두고 중얼거린다. "이것이야말로 부상자에 대한 격려, 불구자에 대한 자주, 죽어가는 자에 대한 반려..." 이처럼 여자가 남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클로델은 여자에게 불평하지 않 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몽테를랑과 로렌스가 강조하는 남성의 자부심을 모독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남자가 자기를 육으로 된 비참한 존재로 알고 자기의 기원과 이에 대응하 는 죽음에 대해 잊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아내든지 마르트의 말을 할 수 있 다. "그래요, 당신에게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녜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에게서 그 생명을 되돌려받기 위해 이 세상에 왔어요." 거기서 남자는 여자를 앞에 놓고 "채권자 앞에 나온 빚쟁이처럼 자책의 동요를 느낀다."(<교환>에서) 그러나 이런 연약한 태도는 강한 힘에 굴복되어야 한다. 결혼에 의해 아내는 자기를 맡 아주는 남편에게 '자기를 재공한다.' 랄라는 자기에게 한쪽 다리를 얹어놓은 쾨르브 앞에 누워 잠든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아버지에 대한 딸의, 오빠에 대한 여동생의 관계는 군신 의 관계이다. 시뉴는 조르주의 수중에서 봉건군주에 대한 기사의 맹세를 한다. "당신은 영주이고, 나는 불을 지키는 천한 무녀."(<인질>에서) "신참 기사처럼 나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영주님! 오, 나의 오라버니여, 당신 손 안에서 수도를 맹세하는 수녀처럼 맹세를 하 게 하여 주십시오. 오, 나와 한 집안의 남성이여!"(<인질>에서) 신하의 가장 큰 미덕은 지조와 충성이다. 여자는 상냥하고 겸손하고 참을성이 많지만, 가문과 집안의 명성에 대하여는 자랑스럽게 여기며 용감하다. 자존심이 강한 시뉴 드 쿠퐁 텐이라든지,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은자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 통을 한몸에 걸머지고, '황금의 머리'의 임종을 지켜본 후에 그 옆에서 죽어가는 '황금의 머리'의 왕비의 경우가 그렇다. 여성은 흔히 중재자나 조정자로 묘사된다. 여자는 마르도케 의 명령에 순종하는 에스터이며, 승려들에게 복종하는 유디트이다. 여자의 연약함, 소심, 수치 같은 것은, 남편의 것이기 때문에, 또한 자기 것이기도 한 대의에 충성함으로써 극복 할 수 있다. 여자는 그 헌신 속에서 자기를 세상에서 귀중한 도구로 삼는 힘을 이끌어낸 다. 여자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복종 속에 위대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눈에는, 그녀는 완전하고 자주적인 한 사람의 인격체이다. 남자의 경우에 존재는 초월되고, 여자의 경우에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현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녀간의 차이이다. 초월이 완성 되는 것은 현세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신은, 그녀의 반려자(남편) 못지않게 직접적인, 아니 더욱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이 시뉴에게 말을 거 는 것은, 남자(승려)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비올렌은 신의 목소리를 고독한 자기 마 음속에서 듣는다. 그리고 프루에즈는 천사하고만 교류한다. 클로델이 묘사하는 가장 숭고 한 인물은 여자이다. 시뉴, 비올렌, 프루에즈 등등. 그가 말하는 거룩한 상태란 단념(포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는 인간의 투기(자유로운 계획)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인 의지를 갖는 경우도 적다. 여자는 주는 것이 본성이다. 얻기 위해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완 전한 헌신에 더욱 가깝다. 지상에서 기쁨이 초극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이 기쁨은 정당하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이다. 시뉴는 교황을 구 하려는 확고한 동기에서 희생을 감수한다. 프루에즈는 로드리그와 금욕적인 사랑을 하고 있으므로, 처음에는 할 수 없이 단념한다. "그럼 당신은 내가 당신의 품안에 부정한 여자로 안기기를 바랍니까?... 그러면 나는 당 신의 마음속에서 죽어갈 여자에 불과하고, 당신이 기대하는 영원한 별은 되지 못할 거예 요."(<사탱 신발>에서) 그런데 이 연애가 허용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그녀는 현세에서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가 그녀에게 이렇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프루에즈여, 나의 자매여, 빛 속에서 나를 영접하는 신의 딸이여. 천사들의 눈에 비친 프루에즈, 그가 모르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너. 프루에즈 이다. 너는 그에게 주기 위해, 그런 너를 만든 것이다."(<사탱 신발>에서) 그녀도 인간이고 여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반발없이 단념하지 못한다. "저 사람은 이런 내 기분을 모를 거야."(<사탱 신발>에서) 그러나 그녀는 자기와 로드 리그와의 진정한 결혼은 거절에 의해서만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을 때, 그 불가능한 결혼에 그가 영구히 나에 게 묶여 있을 때, 나의 강력한 육체의 기중기에서, 그리고 이 냉혹한 공허에서 도망칠 방 법이 없게 되었을 때, 나의 허무와 함께 그의 허무를 그에게 입증했을 때, 그의 허무 속에 서 나의 허무가 입증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야말로 나는 상처를 입고 도망갈 곳도 없는 그를 신에게 데려가고, 청천벽력을 맞게 하리라. 그때 비로소 나에 게 남편이 생기고 나는 신을 품에 껴안을 수 있게 된다."(<소녀 비올렌>에서) 비올렌의 결심은 더욱 신비적이고 더욱 부조리하다. 그녀는 합법적인 인연에 의해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합할 수 있는데도 나병과 맹목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크, 아마도 그럴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정당하기에는,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바람직하기에는, 우리는 서로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사탱 신발>에서) 그런데 여자들이 이처럼 특별히 신성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영웅적인 행위를 감행하 는 주된 이유는, 클로텔처럼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남녀 양 성은 어느 쪽도 보조적 성의 안목으로 보면 '타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남자인 그의 눈에 ' 완전한 타자'로 비치기 쉬운 것은 역시 여자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초월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자가 우리에게 주는 성총과 비슷한 힘이 생긴다."(<사탱 신발>에서) 여기서는 남성만을 나타낼 뿐 인간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들의 불완전성에 대한 무한의 호소 이다. 어느 의미에서 이것은 종속의 새로운 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성자들의 영적 교류에서도 각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매개가 된다. 그러나 여자는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남자에 대한 좀더 분명한 구원의 매개체이다. <사탱 신발>은 로드 리그의 구원의 서사시이다. 극은 그의 형제가 그를 위해 신에게 드리는 기도로 시작되어, 프루에즈에 의해 성인의 경지로 인도된 로드리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 서는, 여자는 이런 방법으로 최고의 자주성을 획득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사명은 그녀 속에 내면화하여, 남자를 구제하거나 남자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고독 속의 자기 자신 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피에르 드 크라옹은 비올렌에게 그 숙명을 예언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의 희생으 로 얻은 신기한 과일을 딴다. 결국 그는 대성당의 돌 속에서 남자들에게 그녀의 덕을 찬양 하게 된다. 하지만 비올렌은 이런 일을 자기 혼자서 해낸 것이다. 클로델 속에는, 베아트리 체에 대한 단테나, 그노시스(기독교의 한 이단)교도나, 여자를 '탄생의 주'라고 부른 생 시 몽파의 전통과 비슷한,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남녀가 모두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는 여자에게도 하나의 자주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여자는 자기를 '타 자'로 만듦으로써(나는 신의 하녀) 자기를 주체로 실현한다. 여자가 '타자'가 되는 것은 자 기 존재 안에서이다. <소피의 모험>에 나오는 한 구절은 클로델의 견해를 거의 남김없이 요약하고 있다. 신 은 여자에게 "아무리 크게 변했다고 해도 그 얼굴은 신의 완전성의 한 모방이다. 신은 여 자를 바람직하게 지으셨다. 신은 여자에게 시작과 끝을 동시에 부여하셨다. 신은 여자에게 당신의 목적을 위탁하여, 여자가 그 속에서 만들어진 창조의 수면을 남자에게 제공할 수 있게 하셨다. 여자는 운명의 지주이다. 여자는 선물이다. 여자는 소유의 가능성이다... 여자 는 창조주를 언제나 그 작품에 연결시키는 애정의 일환이다. 여자는 '그'를 이해한다. 여자 는 보고 행하는 영혼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창조의 인내와 능력을 나누어 가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성을 이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에서는 클로델은 다소 근대화된 카톨릭의 전통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상에서 여성의 사명은, 그 초자연적인 자주성에 아무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꾸로 여성에게 이 자주성을 인정함으로써, 카톨릭교도는 이 세상에서 남성의 특권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여성을 고귀하게 여기지만, 이 세상에서는 여성을 하녀로 취급한다. 그리고 여성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할수록 그녀를 구원의 길로 가게 한다. 어린이, 남편, 가정, 토지, 국가,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며, 부르 주아 사회가 끊임없이 할당해 온 역할이다. 남성은 자기의 활동을 제공하고, 여성은 자기 의 인격을 제공한다.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 계급제도를 신성시하는 것은 조금도 개선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영구히 고정 시키려는 것이다. 4. 브르통, 또는 시 앙드레 브르통(1896 - 1970):프랑스의 시인, 아라공, 스포 등과 함께 다다이즘에 이 어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이다. 처음에는 일종의 정신혁명과 함께 사회혁명에도 열의를 보였 으나, 1935년에 공산당과 결별한 후로 정치적 입장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연통관>, <나자>, <비법 17번> 등이 있음. 클로델의 종교적 세계와 브르통의 시적 우주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여자에게 부여하는 역할에는 유사점이 있다. 즉, 여자를 교란의 요소로 보는 것이다. 여자 는 남자를 내재의 게으른 잠에서 이끌어 낸다. 입, 열쇠, 문, 다리 등 낱말은 다르지만, 여 자는 모두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이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은, 외계를 잠깐만 관찰하면 알 수 있지만, 하늘을 살색의 커 다란 꽃으로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안심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신에 대해 가장 두려운 장애물이다." 한 사람의 다른 여자에 대한 사랑은 그를 '타자'에의 사랑으로 인도한다. "인류에 대한 사랑의 수문이 활짝 열리는 것은 한 인간에 대한 선택적인 사랑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이다..." 브르통에게 천국은 이국의 하늘이 아니다. 바로 현세에 있다. 그것은 일상의 평범한 베 일을 벗길 줄 아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특히, 정욕은 그릇된 인식의 유혹을 배격한다. "현 대에 와서는 성의 세계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우주탐구의 욕구에 대해 언제나 타파하기 어려운 어둠의 핵을 대립시켜 왔다." 신비와 충돌하는 것은 신비를 발견하는 유일한 수단 이다. 여자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언제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그 복잡한 얼굴이 겹쳐서 '스핑크스의 궁극의 변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형성한다. 그래서 여자는 계시이다. "그대는 비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하고 브르통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그 리고 좀더 나아가서 "그대가 내게 준 계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부터, 나는 그것이 하 나의 계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여자는 시라는 것이다. 제라르 드 네르발(프랑스의 시인, 1808 - 1855)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비와 오렐리아(모두 네르발의 작품 속의 여자주인공)의 경우, 여자는 추억이나 환영과 같은 확실성밖에 없다. 꿈은 현실 이상으로 진실하며,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르통의 경우에 이 일치는 완벽하다. 오직 하나의 세계만 있는 것 이다. 시는 사물 속에 객관적으로 현존하며, 여자는 분명히 살과 뼈를 지닌 존재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은 꿈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날도 달 력의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4월 5일이니, 4월 12일이니, 10월 4일이니, 5월 29일이니 하는 것처럼) 날짜가 카페나 거리 모퉁이의 평범한 액자 속에 꽂혀 있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어떤 색다른 특징에 의해 돋보인다. 나자(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여자주인공)는 " 다른 모든 통행인들과는 반대로 몸을 뒤로 젖히고 걸어간다... 참으로 기묘하게 화장을 하 고... 나는 전에 그런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브르통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그 녀는 생긋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의미 심장하여,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광란>에서는 "막 돌아온 이 젊은 여자는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불의 옷을 걸치고 있을까?... 그리고 1934년 5월 29일, 그녀는 그곳에서 무척 아름다웠다고 분명히 단언할 수 있다."(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즉석에서 시인은 그녀가 자기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줄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일시적이고 제2의적인 역할 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연통관>에서 달릴라의 눈에 비친 어린이와 같다. 그런데 그때에 도 그녀의 주위에는 사소한 기적들이 일어난다. 그 달릴라와 데이트한 날에 브르통은 오랫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삼손이라는 한 친구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접하게 된다. 또 때로는 기적 같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5월 29일에 본 낯선 여자, 즉 뮤직홀에서 수중쇼의 1 막을 연기해 보인 물의 요정은, 전에 어떤 레스트랑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물의 요정, 식 사를 하다'라는 쇼프로의 인기에 의해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인과 그녀와의 첫 나들이는 그보다 11년 전에 쓴 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마법사인 여자 중에 가 장 이상한 여자는 '나자'이다. 그녀는 미래를 예언한다. 그녀의 입에서 그녀의 친구가 그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말과 이미지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상상과 의지는 신의 계시이다. "나는 방황하는 영혼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순수한 직관에만 의지하고, 언제나 기적과 비슷한 독특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 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객관적인 우연이 이상한 일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관심하여, 규칙이나 이성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자유로운 정신, 말하자면 어 떤 마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불러올 수는 있어도 절대로 예속시킬 수 없는 공중의 정령의 일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예언자요, 무녀요, 접신자인 그녀는 네르발을 방문했던 비현실적인 존재와 비슷하다. 그녀는 초현실세계의 문을 연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줄 수가 없다. 여자가 자기를 성취하여 현실 속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사랑 안에서이다. 개별적으로, 개별적인 숙명을 받아들이면서(세계를 부평초처 럼 떠도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그녀는 '전체'를 한몸에 표현할 수 있다. 그녀의 미가 최고 조에 도달할 때는, '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 존재하도록 요청된 모든 것이, '지금' 이것이 존재하려는 것 속에 아름답게 잠겨 비치는 거울에 의해 여자가 되는" 그런 밤의 한때이다. 브르통에게는 , '그 장소와 표현형식을 발견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 속에 진리를 간직하 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주고받는 사랑, 물론 육적인 사랑 속에서만 가능하 다. "사랑하는 여자의 초상은 미소짓는 얼굴을 보이는 그림과 같은 모습이어야 할 뿐만 아 니라, 질문을 던지는 신탁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 자체가 이념이나 그림의 모 습 이상의 것이 아니면, 그 초상은 신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여자는 '물질세계의 주 춧돌'이 되어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자에게는 이 세계 자체가 '시'이며, 그는 이 세계 에서 실제로 베아트리체를 소유해야 한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은 아무것도 거기에 간섭할 수 없는 온전한 자력이 발생하는 유일한 것이며, 육체는 태양이 되고 또 그 육체에 찍혀진 훌륭한 흔적이 되며, 정신은 힘차게 솟아나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금잔화와 백 리향 사이를 언제까지나 흘러간다." 이런 불멸의 사랑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브르통의 태도의 모순은 <연통관>에서 <비법 17>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영원한 사랑을 여러 여자에게 바치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사회적인 환경이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여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오를 통하여 그는 실제로 한 사람의 여자를 찾 고 있다고 한다. 설사 지금까지 사랑했던 몇몇 얼굴을 기억하고 있더라도 그는 "모든 여자 의 얼굴 중에서 한 여자의 얼굴밖에 찾아내지 못한다. 즉 마지막으로(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사랑한 여자의 얼굴 말이다." "또한 나는 전혀 다른 외모를 지닌 얼굴들에서 서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기의 사랑>에서 그는 물의 요정에게 묻 는다. "그대가 그토록 고대했던 그 여자냐, 오늘에서야 그대는 내 앞에 올 수 있었느냐?" 그런데 <비법 17>에서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에, 나는 대뜸 당신을 알아차렸다."라고 말한다. 새로 개조되어 완성된 세계에서는, 남녀 사이에 서로 절대적인 증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가 전부라면, 어떻게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여 지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여자이기도 한다. 그녀의 개성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례적인 것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그녀는 유일한 여자이므로 내게 언제나 또 다른 여자, 즉 또 하나의 다른 그대 자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저기 다투 어 피어나는 수많은 꽃을 통하여, 나는 결국 빨간 속옷이나, 잿빛 속옷으로 갈아입는 그대 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똑같이 유일한 여자에 대해 브르통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상호적인 연애란, 미지의 것이 나를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욕구에 의해 신격화된 더욱 놀랍고 더욱 생기발랄한 나의 사랑하는 여자의 충실한 모습을 비치는 그런 거울의 장치이다." 이 유일한 여자, 육체적인 동시에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여자는 초현실 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정체불명의 물체와 같은 마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시인이 고물시장 에서 발견하거나, 꿈속에서 발명하는 구두 모양의 스푼이나 늑대 모양의 탁자나 대리석 모 양의 각설탕에 해당된다. 그녀는 갑자기 그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물건들의 신비감 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풀이나 돌의 신비감도, 그녀는 모든 것이다. 숲의 화재와 같은 머리를 한 나의 여자 뜨거운 번개와 같은 생각을 지닌 모래시계와 같은 몸집의 ...해초와 봉봉과자 같은 성기를 지닌 나의 여자 ...초원 같은 눈을 가진 나의 여자 그녀는 미 자체이다. 브르통에게는, 미는 바라보는 개념이 아니라, 정열을 통해서만 발견 할 수 있는(따라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이다. 여자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 미가 존 재한다. "진정 서로 선택한 두 존재의 융합이 옛 태양시대의 (지금은 없는) 가치를 모든 것에 회복시키는, 그러나 또한 알래스카의 분화구 주위의 화산재 밑에 눈을 묻는, 자연의 변덕으로 고독이 맹위를 떨치는 그런 모순된 지대의 인간 도가니의 밑바닥과 같은 그런 장소에, 이미 몇 해 전에 새로운 미를 찾아가는 것을, 오로지 정열적인 목적에서 미를 찾 아가는 것을 나는 권유했다." "몸부림을 칠 듯한 미는 에로틱하고 베일에 싸여 있으며, 폭약이 장치되어 있고, 마법의 분위기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여자를 통해서이다. "본질과 존재 의 융합이 최고도로 실현되는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하여, 오직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애인들에 의해 실현되고, 그와 동시에 전 세계에 실현된다. "사랑에 의해 성취되는, 유일한 존재 속에 행하는 세계의 영원한 재창조, 재색칠은 무수한 광명에 의해 지상의 앞날을 비 춘다" 모든(또는 거의 모든) 시인에게 여자는 자연의 화신이다. 그러나 브르통에 의하면 여자는 자연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해방한다. 자연은 명백한 언어로 말하지 않으므로, 그 진리를 파악하려면 그 비법을 통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진리란 자연의 미와 같으며, 사는 그 반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열쇠이다. 여자는 여기서 시와 구 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개자이다. 여자가 없으면 천지도 침묵 을 지킨다. "그녀, 즉 자연은 빛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나를 섬기기도 하고 나에게 반역하기 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사랑의 용광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사랑의 용광로 에서 불꽃이 나를 향해 피어오르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사랑이 없을 때 나는 공허 한 하늘을 알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 나에게는 커다란 불꽃 무지개만이 부족하였다. 나는 둘이서 막 점화하여 세차게 타오르는 잔 나뭇가지의 모닥불 을 쬐는 그대의 눈을, 그대의 마법의 손을, 내 생명의 불길 위로 오가는 그대의 투명한 손 을 눈이 부시도록 바라본다." 브르통에게는 사랑하는 어떤 여자도 모두 자연의 경이이다." "고색창연한 우물의 내벽을 기어가는 잊지 못할 한 포기의 작은 고사리." "...눈이 부신 참으로 엄숙한 그 무엇... 자연 의 위대한 물리적인 필연을 연상케 하는 한편, 막 피어나기 사작한 늘씬한 꽃의 무기력을 한결 절실히 느끼게 하는 그 무엇." 그러나 거꾸로 자연의 모든 경이는 사랑하는 여자와 융화된다. 동굴이나 꽃이나 산에 감격했을 때 그가 찬미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이다. 테 드의 계단 위에서 손을 말리는 여자와 테드 그 자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거리는 제 거된다. 오직 한 번의 기도 속에서 시인은 그 양자의 가호를 빈다. "놀라운 테드여, 내 생 명을 붙잡아다오! 천국과 지옥의 입구여, 나는 그런 당신의 수수께끼 같은 모습, 자연의 미를 찬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모습을 좋아한다." 미는 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깊은 밤'과 융화된다. 그것은 진리이고 영원이며 절대이다. 여자가 해방하 는 것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 그 필연적인 본질(플라톤이 상상한 고정된 본질이 아니고), '폭약을 장치한' 본질이다.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는 보물은, 그대를 알게 된 후, 제한할 수 없는 저 광야를 여는 열쇠뿐이다. 그 광야에는 다만 한 포기의 풀이 생명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 풀은 끊임없이 자라서, 결국 계속 넓어지는 진폭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시간의 끝 까지, 그대와 나 사이인 여자와 남자는, 자기 차례가 오면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울 어가는 햇빛 속을 길이 끝날 때까지, 생명과 생명이 망각되는 끝까지 나아갈 터이니 말이 다. 최대의 희망(내가 말하는 희망은 다른 모든 희망을 집약한 희망을 말한다)은 모든 사 람의 것이 되어 만인에게 영속되고, 상호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서로의 절대적인 제 공이 모든 사람의 눈에, 생명 위에 놓인 유일한 자연인 동시에 초자연인 다리가 되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여자는 사랑을 품고 또 품게 함으로써, 어떤 남자에게나 유일한 그리고 가능 한 구원이 된다. <비법 17>에서는 여자의 사명이 확대되고 부각된다. 그것은 인류를 구 제하는 것이다. 본래 브르통은 육체의 권리회복을 요구하는 점에서, 정욕의 대상으로서의 여자를 찬양하는 푸리에(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1772 - 1837)의 전통과도 이어져 있 었다. 그가 개혁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생 시몽의 사상에 귀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남성은 지배적이다. 그 결과 구르몽(프랑스의 작가, 1858 - 1915) 은 랭보(프랑스의 시인, 그의 시는 반역정신으로 일관하여 시행의 전통을 깨고 자유시의 창시자가 됨, 1854 - 1891)를 매도할 때 계집애 같은 기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했 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에서 상당히 떠들썩하면서도 파산으로 기울고 있는 남성의 사상 을 배격하고, 여성의 사상을 계발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패배한 여 자, 남자의 상상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그것은 어느 정도의 시 련을 겪고 나서, 재발견된 여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는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남자의 사고방식 때문에 갇혀 있는 지옥에서 빠져 나와 자각할 것을 배워야 한다."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평화의 역할이다. "평소에 나는 그때그때 여자의 목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데 대해 놀랐다. 그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대단히 아름답고 소중한 두 목소리(하나는 남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른 하나는 어린이와 같은 신뢰를 불러일으 키기 위해)를 가능한 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데 놀랐다. 여자를 거부하고 경계하는 큰 외침, 여전히 권위를 갖고 있는 이 외침을 듣지 않게 되려면 어떤 기적, 어떤 미래를 기다 려야 하는가... 장차 전혀 다른 기적을 행하게 될 단순히 여자다운 여자가 격투의 상대인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당신들은 형제이다'하고 말할 때는 언제일까?" 오늘날 여성이 환 경에 올바로 적응하지 못하여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것은, 여성을 전체적으로 냉대한 결과 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성이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생명의 샘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 로,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멜뤼진(토요일마다 발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선녀), 무서운 생명에 다시 사로잡힐 것 같은 자갈이나 수초, 밤의 솜털 따위의 하등한 첨가물을 지닌 멜뤼진. 내가 상기하는 것은 그녀이며, 나로서는 이 야만스러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자는 그녀밖에 없다고 생 각된다. 그녀는 여성 전체를 대표한다. 그녀는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모습이다. 그 인간적인 기반을 박탈당하고, 흔들리는 뿌리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 그러나 그 덕분에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천우적인 연결을 보유하고 있는 여자이다. 인간으로서의 기 반을 빼앗긴 여자, 전설에서는 남자의 불안과 질투로 인해 여자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편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생에서 여성의 참된 가치가 회복될 때까지, '예술에서 남성에게 등을 돌리고 여성의 편을 드는' 시기가 도래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 예술은 감각적인 모든 세계에 그런 여자가 군림하도록 작용되어야 한다." 어째 서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인가? 브르통은 이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 를 택하는 것은, 그녀를 다른 여자와 대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속에, 오직 그녀 속에만, 시각이 다른(브르통이 강조하고 있다) 프리즘이 완전히 투명한 상태로 유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단지 인간적인 존재로만 취급되면 남성의 인간적인 존재와 마찬가지가 되어 몰 락하는 세계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과 시의 진상인 이 '여성적인 요소'만이, 인류 를 구제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사회에 도입할 수 있다. 브르통의 견해는 오로지 시적인 것으로, 여성도 시의 세계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타자' 로서이다. 그는 여성의 숙명도 상호적인 사랑의 이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 은 사랑 이외의 사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못한 것은 조금도 없 다. 남자의 사명도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여성 자신에게도 사랑이 세계의 열쇠가 되며, 미의 계시인가 하는 점이다. 여자는 상대방 애인 속에서 그런 미를 발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 속에서일까? 여자는 하나의 감각적 인 존재를 통하여 시를 실현하는 시적인 활동이 가능할까? 여자는 즉자의, 직접의, 즉 남 자에게 시적인 존재이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브르통은 주체로서의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고약한 여자에 대해서도 절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전체에서 볼 때(몇몇 선언이나 팸플릿으로 군중을 매도하고 있지만) 그는 지상의 장애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채, 숨은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여성이 그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여성이 대단히 훌륭한 '입'을 갖고 있기 때문 이다. 자연 속에 깊숙히 닻을 내리고, 대지에 접근해 있는 여성이 천국의 열쇠로 보이는 것이다. '소피아(지혜)' 속에 '속죄'를, 나아가서는 창조의 원리까지 깃들어 있다고 본 그노 시스교도나 베아트리체를 길 안내자로 택한 단테나, 라우라의 죽음에 의해 광명이 비쳐진 페트라르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브르통 속에는 비교적인 자연주주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자연에 가장 깊이 닻을 내리고, 대지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천국의 열쇠도 되는 것이 다. 여성은 진리, 미, 시로의 전체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여성은 '타자'의 모습 아래에서 의 전체이며, 자기 자신을 제외한 '전체'이다. 5. 스탕달, 혹은 진실의 로마네스크 스탕달(1783 - 1842):본명은 마리 헨리 베르,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와 함께 리얼리 즘의 선구자이며 근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위고를 중심으로 한 30년대의 낭만파와 대립 하였다. 정열과 자아예찬에 의한 인생 추구를 그의 본명에 따라 '밸리즘'이라고도 하며, ' 살고 쓰고 사랑하다'라는 묘비명으로도 유명함.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의 작가. <연애론>의 여성관은 보부아르의 견해와 일치되는 점이 많다. 현대를 떠나 내가 다시 스탕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자'가 악녀, 님프, 새벽별(성모 마리아의 상징), 요부로 잇따라 변장한 가장무도회에서 빠져나와, 현실적인 육체를 지닌 여자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한 남자를 만나는 것이 마음 든든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소년시절부터 여자를 감각적으로 사랑했다. 그는 여자들 속에 청춘기의 동경을 투영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미지의 여성을 위험에서 구출하여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을 공 상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열망한 것은 이렇다. "매력있는 여자를 만나 서로 사랑한다. 그녀는 내 영혼을 알아준다." 그는 만년에 가장 사랑한 여자의 이름 머릿글자를 땅에 썼다. "나는 무엇보다도 몽상을 좋아했다." 하고 고백했다. 이 몽상의 중 심이 된 것은 언제나 여자의 이미지였다. 그런 여자에 대한 추억은 경치에도 생명을 부여 하여 생기가 넘치게 한다. "돌르에서 큰 길을 지나 아르부아에 도착할 무렵, 도중에서 본 암석의 선은 , 나에게는 메틸드(스탕달이 가장 사랑했던 이탈리아 여성)의 영혼을 보는 듯 이 명확한 이미지였다." 그는 음악, 그림, 건축, 그밖에 좋아한 모든 것을 불행한 남자애인의 심정으로 사랑했다. 로마를 산책한 글을 쓰면 페이지마다 한 여자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여자들이 그에 게 느끼게 했던 아쉬움, 그리움, 슬픔, 기쁨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심적 경향을 알게 되 었다. 그는 여자들에게서 비평을 받고 싶어한다. 살롱에 출입하는 그녀들에게 자기의 재기 를 보여주려고 한다.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고통은 모두 여자에게 달려 있으며, 여자들 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는 남자의 우정보다 여자의 우정을 좋아했다. 여자에게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작품의 착상을 얻었다. 그는 주로 여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나는 1900년에 롤랑 부인이나 멜라니 길베르... 같은, 내가 사랑하는 영혼에게 내 글이 읽히기 를 바란다." 이런 여성은 그의 생활의 실제내용이기도 했다. 대체 그녀들의 이런 특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롤랑 부인은 프랑스 혁명기의 여걸로, 유명한 수기가 있다. 멜라니는 여배우로 한동안 스탕달과 동거한 여성이다.) 이 섬세한 마음을 지닌 남자친구(스탕달)는 여성의 진실한 모습을 사랑했기 때문에, 여 성의 신비성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그는 어떤 본질로도 여자를 규정한 적이 없다. '영원 한 여성'이라는 사상은, 그에게는 현학적이고 우스꽝스럽게 생각된다. "2천 년 이래로 현학 자들은 여자 쪽이 에스프리(정신)가 민감하지만, 남자는 여자보다 정신이 견실하다고 되풀 이하여 주장해 왔다. 여자는 남자보다 생각이 섬세하고, 남자는 여자보다 주의력이 강하다 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이 잘 손질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던 파리의 한 무지 한 사나이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단정하여, 나무는 날 때부터 잘려져 있다고 말했다."(<연애론>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각자가 살고 있는 상 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어째서 여자는 그 애인보다 로맨틱한가? "수틀 앞에 앉아 있 는 여자는 기계적으로 손만 놀리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애인에 대해 몽상한다. 한편 남자 쪽은 평원을 질주하는 기병대와 같아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아 한 동작이라도 그르치면 질 책을 받게 된다." 세상사람들은 여자에게 양식이 없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이성보다 정서를 선호한다. 이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평범한 습관에 의해 여자는 가족에게 아무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조금도 소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아내에게 소유지 중에서 두 자리쯤 선택하여 관리를 맡겨보라. 그녀는 틀림없이 장부를 당신보다 더 잘 처리할 것이다." 역사상 여성 중에 천재가 적은 것은, 사회가 여성에게 자기표현의 수단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나는 천재는 만인의 행복을 위하는 것은 애초부터 진출이 막혀 있 다고 볼 수 있다. 그녀들에게 자기 실력을 말휘할 수단이 우연히 주어졌을 경우, 그녀들은 가장 얻기 어려운 재능을 소유하게 된다." 여성에게 최악의 핸디캡은 교육의 기회가 막혀 있다는 것이다. 압박자는 언제나 피압박자를 하찮은 존재로 머물게 하려고 노력한다. 남자 는 고의적으로 여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여자가 갖고 있는 가장 훌륭 한 소질은 헛되이 잠재워두고 있다. 그런 소질이 그녀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행복에 크게 유용한데도 말이다." 10세 때의 소녀는 형제보다 더 활발하고 더 영리하다. 20세가 되면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기지의 사나이가 되고, 여자아이는 요령없고 소심하고 거미를 무서워 하는 큰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그녀가 받은 교육 때문이다. 여성에게도 남자아이와 같은 정도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 반여성론자들은 교육을 받은 현명한 여성을 '여자답지 못한 여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비난은 교육을 받은 여자는 아직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식 에서 비롯된다. 만일 여성에게 남성같이 교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자도 자연스럽게 교 양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자를 불구로 만들어놓고, 자연에 위배된 법도로 구 속하려고 한다.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결혼을 시키고, 정결을 강요하고, 이혼이 비행이 라도 되는 것처럼 책망한다. 노동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는데도, 여성의 대부분을 무위 속에 방치한다. 이와 같은 여성의 생활조건이 스탕달에게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그는 여 기서 여성을 비난하는 모든 원인을 간파한다. 여성은 천사도, 악마도, 스핑크스도 아니다. 여성은 우매한 사회풍습이 반쯤 노예로 만든 인간이다. 그녀들 중에 가장 뛰어난 여성들이 그들의 압박자들을 추하게 하는 결함을 스스로 피하 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피압박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남자보다 열등하지 않고 우수 하지도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역작용에 의해 불행한 그 입장이 오히려 그녀들에게 유익하 게 된다. 스탕달이 얼마나 '근엄한 정신'을 배격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돈, 명예, 지 위, 권력 이런 것은 그에게 가장 시시한 우상처럼 보였다. 참으로 많은 남자들이 그런 우 상 때문에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다. 현학자, 권력자, 부자, 남편 등은 그런 자기 안에서 모 든 생명과 진실한 불꽃을 질식시켜버린다. 고정관념이나 빌려온 감정을 주입하고, 사회의 관습에 복종하는 속이 비어 있는 인물, 이런 얼빠진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세계는 권태의 사막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음산한 늪지대에서 잠자코 살아가는 여성이 많다. '편협한 파리 적인 사고'를 가진 인형들이거나 위선적인 독신자들이다. 스탕달은 '정숙한 체하는 여자나 그 특징인 위선에 대해 큰 혐오'를 느꼈다. 그런 여자는 자기들의 하찮은 일에서 남편이 과시하는 것과 같은 근엄성을 보인다. 교양이 없어서 어리 석고, 시기심이 많고, 허영심이 강하고, 수다스럽다. 무위한 생활을 하는 탓으로 심술궂고, 냉혹하고, 인정미가 없고, 교만하다. 남에게 해로운 여자가 파리나 지방에도 많다. 레날 부 인(<적과 흑>에 나오는 여성)이나 샤스텔레 부인(<뤼시앙 뢰방>에 나오는 여성)의 고귀 한 모습의 배후에 그런 것이 우글거리고 있다. 스탕달이 가장 증오하면서 공들여 묘사한 것은 롤랑 부인이나 메틸드 부인과 정반대인 그랑데 부인(<뤼시앙 뢰방>에 나오는 여성)일 것이다. 미인이지만 표정이 빈약하고 남을 얕보는 매력없는 여자. 그녀는 그 '유명한 부덕'으로 상대방을 두렵게 하지만, 영혼으로부 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수치심을 모르고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역할을 의식하는 데 급급하며, 다만 외면적으로 위대성을 모방할 뿐이다. "그녀는 개성이 없다. 그래서 나를 따 분하게 한다." 하고 뢰방(뤼시앙의 아버지)은 생각한다. "아주 합리적이고 자기 계획의 성 곡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녀의 야심은 오직 남편을 장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정신은 무미건조하다." 신중하고 타협적인 그녀는 언제나 연애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에 게 고귀한 마음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메마른 영혼 속에 정열이 생겨도, 그것은 빛을 내지 못하고 타버리도록 방치했다. 스탕달이 여자에게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아보려면, 위와 같은 여성상의 반대를 생각하면 된다. 먼저 근엄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여자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중요한 일들에 손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일 때문에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스탕달이 무엇 보다도 높게 평가하는 자연성, 순진성, 관용성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이 많다. 스탕달이 사 랑한, 그리고 애정을 갖고 작품에 묘사한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특성이 거기에 있다. 여성도 자유롭고 진실한 존재이다. 그녀들의 자유는 어떤 여자에게는 참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보인다. '이탈리아풍의, 루크레티아 보르지아풍의 고급창녀'였던 앙젤나 피에트라그 루아(스탕달이 젊었을 때 사랑했던 이탈리아 여자), 또는 '뒤 바리 부인풍의 창녀인 아쥐 르 부인(그녀도 스탕달이 사랑했던 여자)은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서 가장 인형적이 아닌 프랑스 여자'로, 공공연히 사회풍습에 도전한다. 라미엘(<라미엘>의 여자주인공)은 습관 이나 풍속이나 법규를 조소한다. 상세베리나 부인은 열정적으로 음모에 가당하여 범죄 앞 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다른 여자들은 지성이 뛰어나 대중 위에 초연하다. 망타(스탕달의 애인)나, 사회를 경멸 하고 그런 사회에서 자기를 구별하려고 하는 마틸드 드 라몰르도 그런 타입의 여자이다. 다른 여성들에게는 자유가 소극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샤스텔레 부인에게 두드 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제2의 적인 모든 일에 일체 무관심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의 사나 의견에 얌전히 따르면서도 부르주아적인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무관심을 사 람들은 유치하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순진한 쾌활성의 원천이 된다. 클레리아 콩 티(<파르므의 승원>에 나오는 여자)는 신중성이 돋보인다. 그녀는 무도회나 세상의 젊은 처녀들에게 습관이 되어 있는 오락에 대해서는 언제나 냉담하다. '주위에 대한 경멸이나 어떤 막연한 공상에 대한 아쉬움에서' 그녀는 언제나 방심한 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세상 을 판단하고, 그 저열함에 분개하고 있다. 영혼의 독립성이 가장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은 레날 부인(<적과 흑>에 나오는 여자)이 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체념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 그녀의 섬세한 마 음과 예리한 감수성은 저속한 자기 주위에 대한 혐오감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녀에게 서는 전혀 위선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고귀한 심성을 갖고 있 었다. 그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 속에 숨어 있는 이 불꽃의 열기는 밖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신을 완전히 불태우기 위해서는 한 번 입 김을 훅 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여자들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의 참된 가치의 원천은 외부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그녀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세력이 된 다. 그녀들은 그런 세계에서 꿈, 욕구, 쾌락, 감동, 창의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으로 권태를 추방해 버린다. 저 '활동적인 영혼' 자체인 상세베리나는 권태를 죽음보다도 두려워하고 있 다. "권태 속에 정체되어 있는 것은 죽지 않는 체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뭔가에 열정을 갖고 행동하여 언제나 쾌활하다." 모든 여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유치하든 생각이 깊든 간에, 경솔하든 신중하든 간에, 대담하든 은밀하든 간에, 모두 인간이 빠지는 깊은 잠을 거부하고 있다. 자기의 자유 를 순수하게 보유하고 있는 이런 여자들은 일단 자기에게 적합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 정 열을 쏟아 곧 히로이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기력이나 에너지는 전적으로 앙가주망의 강 렬한 순수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그녀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매력을 주기에는 충분치않다. 순순한 자 유뿐이라면, 그것을 존중하지만 감동을 느끼지는 못한다.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자 유가 장애를 헤쳐나가 자기를 완성하려는 노력이다. 여자의 경우, 투쟁이 심한 만큼 이런 노력이 더욱 감동적이다. 외부의 구속에서 벗어난 승리는 그것만으로도 스탕달을 기쁘게 한다. 그는 <이탈리아 기록>(이탈리아의 옛날 기록을 소재로 하여 쓴 단편소설집)에서 여자주인공들을 수도원에 깊숙이 가두거나, 그녀들을 시기하는 남편의 집에 가둬놓고 있 다. 그런 여자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책략을 써야 한다. 비밀의 문, 줄사다리, 피 묻은 상자, 유괴, 감금, 살인, 정열과 반항의 광분, 이런 것들이 갖가지 수단에 의해 행동 으로 옮겨진다. 죽음이나 가혹한 고문이 그가 그려보이는 격앙된 영혼의 대담성을 더욱 두 드러지게 드러낸다. 더욱 원숙한 후기작품에서도 스탕달은 여전히 이렇게 현저한 로마네스크를 사랑하고 있 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난 로마네스크의 분명한 표시이다. 입과 미소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양자도 구분할 수 없다. 클레리아는 파브리스와 통신하기 위해 알파벳을 고안하여 연애를 새로 창출했다. 상세베리나는 결코 신중하게 행동해 본 적이 없 는 언제나 경솔한 혼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가 음모를 꾸며 대공을 독살하고, 파르므의 승원을 침수시킬 때, 그녀의 혼은 전모를 드러낸다. 그녀가 감행하기로 결심한 숭고하고도 광적인 폭거야말로 그녀의 혼이다. 마틸드 드 라 몰르가 창에 기대놓은 사다리는 연극의 소도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자존심에 찬 무모함, 이상취미, 도발적 용기의 구현이다. 이런 혼을 지닌 자의 품성은 적에게 에워싸였을 때 비로소 분명히 드러 난다. 감옥의 벽, 군주의 의지, 가족의 엄격성 등. 그런데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구속은, 자기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경우에 자유의 갈 등은 가장 불안정하고 통렬하다. 그가 그리는 여자주인공들이 가혹한 포로일수록 스탕달의 공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인습을 완전히 타파하는 창녀(숭고하든 숭고하지 않든 간 에)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신중함이나 수치심으로 억제하는 메틸드에게 더욱 깊 은 애정을 보내고 있다. 뤼시앙 뢰방은 해방된 여성 타입인 오캥쿠르 부인의 곁에서 즐기 고 있지만,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순결하고 얌전하고 곧잘 주저하는 샤스텔레 부 인이었다. 그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세베리나의 전적인 혼을 찬양하다. 그러나 클레리아를 더 좋아한다. 파브리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이다. 그리고 자존심과 편 견과 무지에 얽매여 있는 레날 부인은 아마도 스탕달이 창조한 모든 여성 중에서 가장 그 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는 즐겨 여성인물을 시골의 비좁은 환경 속에서 어리석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감시를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여자가 교양도 없고, 허망한 사상에 얽매여 있는 것을 선호한다. 레날 부인과 샤스텔레 부인은 모두 완고한 정통 왕조주의자이다. 전자는 소심한 성격에 아무 경험도 없는 여자이고, 후자는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으나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두 여자 모두 자기의 과오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나 사회 풍습의 희생자이다. 시가 좌절에서 생기는 것처럼, 로마네스크는 과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사리를 잘 판단 하여 행동하는 명쾌한 태도를 냉정하게 인정하거나 비난한다. 한편 암흑 속에서 자기 길을 탐구하는 고결한 용기나 책략을, 우리는 걱정과 동정과 빈정대는 심정으로 찬탄한다. 그녀 들은 기만당하고 있으므로, 수치심, 자존심, 미묘함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매혹적인 미덕 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결점이다. 그것은 거짓말, 노여움, 과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여자가 사소한 일이나 '감정적으로만 중요성을 갖는 일'에 자존심을 느끼는 것은, '이른바 중요한' 모든 사물은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수치심은 자기가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의존관계에서 비롯된다. 행동으로 자기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 자는 그 존재 전체를 걸려고 한다. 타인의 의식, 특히 애인의 의식에 의해 자기의 진실이 밝혀지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녀들은 이것이 걱정스러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도피, 저주, 반항, 기만 속에서도 가치를 발견하려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여자들의 이런 태도는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경이 어색하고 기만적인 형태 로까지 표현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 자신이 감동되어 다소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자 유가 자기함정에 빠져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는 듯이 보일 때 그것은 가장 인간적이다. 그 래서 스탕달에게도 가장 매혹적으로 보인다. 스탕달이 작품에서 다루는 여성은 그 마음에 예기치 않은 무제가 떠올랐을 때 감동적이다. 그때에는 어떤 법이나 수단 또는 분별등, 밖 에서 주어진 어떤 전례도 지도력이 되지 못한다. 그녀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고독은 자유의 극단적인 순간이다. 클레리아는 자유주의사상으로 성장한 총명하고 분별있 는 여자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배운 의견은 옳든 그르든, 정신적인 갈등에 아무 도움도 주 지 못한다. 레날 부인은 자기가 존중하던 도덕을 어기고 쥘리앙을 사랑항다. 클레이아는 그녀의 이성을 거역하고 파브리스를 구제한다. 이 두 경우에, 모든 가치에 대한 동일한 초월을 볼 수 있다. 이 대담성이 스탕달을 감격 하게 한다. 그리고 이 대담성은 대부분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으므로 더욱 감동적이다. 레 날 부인에게는 과감성이 순진성에 가려져있다. 그녀는 아직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므로 그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마치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만 살 았기 때문에 정열의 찬란한 불꽃 앞에서 무방비상태가 되는 느낌이다. 신과 지옥을 망각하 고 사랑을 받아들여 현혹된다. 이 불꽃이 꺼지면 그녀는 다시 남편이나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간 다. 그녀는 자기의 판단에만 의지하지만 명백한 증거에는 꼼짝도 못 한다. 그녀는 쥘리앙 을 다시 만나자 자기를 그에게 맡긴다. 그녀의 후회와 고해신부가 그녀에게 억지로 쓰게 한 편지 등은, 이 열렬하고 성실한 그녀가 사회에 의해 갇혀 있던 감옥에서 탈출하여 행복 한 천상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먼 길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알려준다. 클레리아에게는 마음의 갈등이 더욱 뚜렷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성실과 애인에 대 한 동정 사이에서 망설이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속에서 좀 더 그럴싸한 명분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탕달이 인정하는 가치의 승리는 위선적인 문명의 희생자들에게는 패배로 생각되므 로, 그에게 더욱 빛나 보인다. 그는 그런 자들이 믿고 있는 허위에 대하여 정열과 행복의 진리가 승리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책략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클레리아가 성모 에게 파브리스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도, 눈을 감는 조건으로 그의 키스와 포 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스탕달은 샤스텔레 부인의 망설임과 마틸드 드 라 몰르의 모순된 행동도 모두 애정어리 아이러니로 보고 있다. 단순하고 당연한 목적에 도달하기위해 이처럼 많은 우여곡절과 숨 은 승리와 패배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대단히 재미있는 희극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우스 운 데가 있다. 등장하는 여배우가 비판자인 동시에 당사자이며,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속 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법령만 있으면 충분한 데, 복잡한 여러 갈래의 길을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성은 고결한 마음을 괴롭힐 수 있는 가장 존중해야 할 배려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 기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기를 원한다. 타인의 평가보다 자기평가를 높이 사고, 자 기를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로 실현한다. 이 메아리 없는 독한 마음의 갈등은, 내각의 위기 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샤스텔레 부인이 뤼시앙 뢰방의 사랑에 응할까 말까 망설이 고 있을 때, 그녀는 자기와 세계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 남을 신뢰해도 괜챦을까? 자기 자 신의 마음을 믿어도 좋을까? 사랑이나 맹세의 가치는 무엇인가? 믿고 사랑하는 것은 무분 별한 행위인가, 고귀한 형식인가? 이런 의문은 인생의, 개개인 또는 모두의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분별이 있다는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한 기존의 의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경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열적이고 사려깊은 여성은 기존의 가치를 순간순간 음미하고 검토한다. 그녀는 의지할 것이 없는 자유의 부단한 긴장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녀는 순식간에 전부를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스탕달이 여성의 이야기에 영웅적인 모험의 색조를 가미하는 것은, 그녀들이 불안 속에서 이런 모험 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생에 건 것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각자의 몫이며, 그 녀의 유일한 몫인 실존의 의미 자체인 것이다. 미나 드 방겔(같은 이름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의 과감한 생활방식은 어처구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모럴을 거기에 걸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생애는 오산이었을까? 그녀의 행복은 8개 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실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열렬한 혼백이었다." 마틸드 드 라 몰르는 클레리아나 샤스텔레 부인만큼 솔직하지 않다. 그녀는 자기의 행동 을 사랑이나 행복의 명백한 증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으로 규제하고 있 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높이는 것이, 굴복하는 것보다 저항하는 것이 과연 자존심을 살리는 것인가? 그녀도 여러 가지 의문에 사로잡혀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그 자존심을 걸려고 한다. 이것은 무지와 편견과 기만의 어둠을 통하여 정열이 출렁대는 강렬한 빛 속에 진실하게 사는 이유를 열렬히 탐구하는 것이다. 여자의 이와 같은 생활방식에 로마네스크한 영광을 부여하는 것은, 거기에 행복이냐, 죽음이냐, 위대한 승리냐, 굴욕이냐 하는 무한한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물론 자기가 발산하는 매혹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자기를 응시한 채 어떤 역 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자기를 롤랑 부인과 비교하는 그랑데 부인 은 이것만으로도 그녀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마틸드 드 라 몰르에게 매력 이 있는 것은, 그녀가 하고 있는 코미디 속에서 혼란을 일으켜 자기 마음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오히려 자기 마음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의지에서 벗어 나는 정도에 따라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순수한 여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 는다. 레날 부인은 자기 매력을 모르고 있으며, 샤스텔레 부인은 자기의 총명을 알지 못한 다. 이 점이 이들 여성의 애인이 되는 남성의 가장 큰 기쁨의 하나이므로, 그 연인에게 작 가나 독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연인이란 이런 은밀한 부를 드러내주는 증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 져 있을 때, 레날 부인이 보여주는 그 생기발랄한 태도, 주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샤 스텔레 부인의 '섬세하고 변화무쌍하고 깊이있는 정신', 이런 것은 연인만이 찬양할 수 있 다. 상세베리나 부인의 기상은 다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지만, 연인만이 그 혼백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다. 여성을 상대로 남성은 관조의 기쁨을 맛본다. 그는 좋은 경치나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도취된다. 여성은 그의 마음속에서 노래하고, 하늘에 색조를 더한다. 이런 계시에 의해 남 성들은 자각한다. 여성의 섬세함과 감수성과 열정을 이해하려면, 자기도 섬세하고 민감하 고 정열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성의 감정은 여러 가지 뉘앙스와 마음의 한 세계를 이 루고 있으며, 이 세계의 발견은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살찌게 한다. 레날 부인의 곁에 있는 쥘리앙은, 자기가 되려고 결심했던 그 야심가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그는 자기 를 새로이 선택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단지 표면적인 욕구만을 갖고 있다면 여성 을 유혹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연애는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준다. "베르테르식의 사랑은 영혼을... 미의 감각이나 즐거움에 개방하다. 설사 초라한 옷을 걸 치고 나타나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부라는 것이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것과 관계되는 인생의 새로운 목표이며, 그것에 의해 모든 양상이 변한다. 정열적인 연애는 남성의 눈에 자연 전체를 마치 어제 창조된 새로운 것처럼 그 숭고한 경 관과 더불어 비춰준다." 사랑의 나날의 매너리즘을 깨뜨리고, 권태를 추방한다. 스탕달은 권태를 큰 악으로 본다. 거기에는 살기 위한, 혹은 죽기 위한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연인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으며, 이것만으로 하루하루가 하나의 모험이 되기에 충분하다. 스탕달에게 망타의 집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줄사다리나 피묻은 상자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이상기호를 표현하고 있다. 사랑, 곧 여자는 실존의 참된 목적을 분명히 알려준다. 미, 행복, 감각과 세계의 신선미 등을. 그것은 남성에게서 혼을 빼앗아갔다가 다시 소유하게 한다. 사랑하는 남성은 애인과 동일한 긴장과 모험을 알고 있다.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자기를 경험하게 된다. 쥘리앙이 마틸드가 세워놓은 사다리 밑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는 앞으로의 전생애를 여기에 걸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순간에 그의 진가가 분명해진다. 여성을 통하여, 여성의 영향하에, 여성의 반동에 의해, 쥘리앙과 파브리스와 귀시앙은 인생수업을 하게 된다. 스탕달에 의하 면 여성은 시련, 보상, 심판자이자 친구로서, 헤겔이 한때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던 것이 되 어 있다. 그것은 상호간의 인식중에 같은 진리를 부여하는 다른 의식으로, 그 진리는 여성 이 다른 주체에게서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랑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행복한 한 쌍의 남녀는 세계도 시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둘만으로도 만족해하고 절대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여성은 단순한 '타자'여서는 안 된다. 여성 자신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결코 여자주인공을 남성 등장인물과의 관계로만 다루지 않았다. 그는 여성 등장인물에게 그 자신의 운명을 부여하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서 그는 일찍이 어떤 소설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더욱 희귀한 기도를 시도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한 여성 등장 인물 속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는 마리보가 마리안느라는 인물에게, 리처드슨이 클라리 스 할로라는 인물에게 한 것처럼 약간 몸을 굽혀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쥘리앙 의 운명에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이 여자 주인공의 운명과 하나가 된다. 그 때문에 라미 엘의 모습은 좀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스탕달은 처녀의 주위에 온갖 장애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가난한 시골처녀로 무지하고 온갖 편견으로 뭉쳐진 사람들에 의해 거칠게 성장한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짤막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날부터 자기가 갈 길의 모든 도덕적인 장벽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녀의 자유로운 정신은 호기심이나 야심, 희열의 여러가지 충동을 스스로 책임지게 한다. 이런 마음에는 물질적인 장애가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 자신이 평범한 사회에 서 자기 능력에 상응한 생애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쥘리앙의 운명이다. 있는 그대 로의 사회에는 위대한 혼이 있을 곳이 없다. 남녀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스탕달이 그토록 로마네스크이며 동시에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주목해야한다. 흔히 페미 니스트는 모든 일에 보편적인 입장을 취하는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다. 스탕달이 여성 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유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 는 여성을 해방한다고 해서 연애가 그 때문에 손해를 볼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 히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해지기 때문에 남성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므로 사랑이 보다 진 실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어떤 특징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특징의 가치도 거기에 나타나 있는 자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로마네스크는 결코 세계에서 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상황에 놓인 별개의 두 존재가 자유 속에 대립되어 서로 상대방을 통하여 실존의 의의를 찾으면서 언제나 위험과 약속으로 충만한 모험을 하면서 살아갈 것 이다. 스탕달은 진리를 신뢰하고 있다. 인간이 진리를 회피하면,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게 된다. 진리가 빛나는 곳에 미와 행복과 사랑과 환희(그 자체속에서 의의를 갖는)가 빛나는 것이 다. 그래서 스탕달은 진실을 가장한 기만을 배격하는 동시에 거짓된 신화의 시도 거부한 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현실만으로 충분하다. 그에 의하면 여성은 오직 인간적인 존재일 뿐이다. 몽상으로도 그 이상 매혹적인 것을 만들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예에서, 개개의 작가에게 집합적으로 커다란 신화가 반영된 것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여성은 우리에게 육체로 나타난다. 남성의 육체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애인 의 포옹 속에서 재창조된다. 여성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자연을 육체화하고 있다. 짐승, 피의 골짜기, 피어난 장미, 요부, 언덕의 곡선, 이런 것으로서 여성은 남성에게 부식 토, 수액, 세계의 감각미와 영혼을 제공한다. 여성은 신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 여성은 현세와 내세와의 매개자일 수 있다. 미의 신 또는 무녀로서 초자연적, 초현실의 문 을 열 수 있다. 그녀는 내재에 바쳐져 있다. 그 수동성에 의해 평화와 조화를 풍기고 있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면 금세 버마재비나 식인귀가 된다. 어쨌든 여성은 주체가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특수한 '타자'이다. 즉 남성이 갖는 수단(척도)의 하나, 그 균 형, 구제, 모험, 행복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각자에게 다르게 윤색된다. '타자'는 각각 '개인'이 자기를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남성은 자기를 자유 또는 초월로서 주장하지만, 이것에 모두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몽테를랑의 경우, 초월은 하나의 상태이다. 그는 초월자로서 영웅의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다. 여성은 지상에, 그의 발 아래서 굴러다니고 있다. 그는 여성과 자기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을 좋아하여, 때때로 여성을 자기 쪽으로 끌어올리고는 다시 던진다. 그는 결코 끈적거리는 암흑의 장소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로렌스는 초월을 남근 속에 둔다. 남근은 여성을 통해서만 생명과 힘이 된다. 그러므로 내재도 선이고 필요이다. 땅에 닿지 않으려는 가짜영웅은 반신이기는커녕 한 사람의 인간 도 되지 못한다.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부이며 뜨거운 샘이다. 그러나 여성은 개인 적인 초월은 일체 단념한 채 남성의 초월을 키우고 돕는 것에 그쳐야 한다. 클로델도 이와 동일한 헌신을 여자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여성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이며, 남성은 행위에 의해 생명의 약동을 연장해 나간다. 카톨릭신자 에게는 이 지상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가 공허한 내재 속에 잠겨 있다. 유일한 초월자는 신 이다. 신의 눈에는 행동하는 남성이나, 남성에게 봉사하는 여성 모두 동등하다. 자기의 지 상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어쨌든 구원은 자주적인 기도이다. 브르통의 경우는 성의 계급질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남성이 그 초월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의식적인 사고는 어리석은 기만이며, 전쟁과 만행, 관료주의, 인간성의 부정 등은 여 기서 비롯된다. 진리는 오히려 내재, 현실의 불투명한 모습 자체이다. 진정한 초월은 내재 를 뒤집을 때 성취된다. 브르통의 태도는 몽테를랑과 정반대이다. 몽테를랑은 여성에게서 해방되기 때문에 전쟁을 사랑하낟. 브르통은 여성이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성을 존경 한다. 전자는 지성과 주관성을 혼동하고 주어진 세계를 거부한다. 후자는 지성은 세계의 중심에 객관적으로 현존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의 고독을 채워주기 때문에 몽테를랑에 게는 해를 끼친다. 브르통에게는, 여성이 그를 주관성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계시가 된다. 스탕달의 경우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은 거의 신화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 다. 여성도 하나의 초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휴머니스트에게 있어서는 자유와 자유가 상호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서 자기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인생이 '짜릿한 소금맛'을 갖기 위해서는, '타자'가 또 하나의 타자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별과 같은 안정'을 원하지 않 고, 혐오의 양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우주나 시 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우주나 시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자유만을 상대하려 한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투명한 자유로 경 험한다. 다른 사람들(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이지만)은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로 생 각하지만, 자기 안의 불투명한 어떤 것의 포로라고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여자 속에 이 ' 어둠의 깨어지지 않는 핵'을 투사한다. 몽테를랑에게는 거기서 불투명한 기만이 생기는 아들러적 콤플렉스가 있다. 자부와 공포 가 섞인 것을 그는 여성 속에 구체화하여 생각한다. 그가 여자에 대해 갖는 혐오는, 자기 자신에게서 느껴지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는 기분이다. 여성 속에 자기의 불만스러운 결 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짓밟아버리려는 것이다. 여성은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모든 괴물 을 던져 버리려는 구멍이다. 로렌스의 일생은, 이와 비슷한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콤플렉스는 순전히 성적인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보상의 신화적 가치를 지 니고 있다. 작가가 충분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은 남성의 능력이 여성에 의해 높이 평가된 다. 그가 동 시프리아노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있는 케이트를 묘사했을 때, 그는 남성이 프리다(로렌스의 애인)를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도 여성에 의해 자기 능력이 의심받는 것 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여성이 자기의 목적을 트집이라도 잡는다면, 그 목적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이 그에게 자신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몽테를랑이 여성에게서 자 기의 우월성을 구하는 것처럼, 그는 여성에게서 평화와 휴식과 신념을 구한다. 두 사람 모 두 자기에게 없는 것을 여성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클로델에게는 자신감이 부족하지는 않다. 그가 소심하다고 해도 그것은 신의 비밀 안에 서였다. 그러므로 그의 경우, 성의 투쟁은 조금도 없다. 남성은 여성의 무게를 용감하게 짊 어진다. 여성은 유혹과 구제의 기회이다. 브르통에게 있어서 남성은 그의 내부에 깃든 신비에 의해서만 진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성은 그가 향해 나아가는 별, '마음이 없는 꽃의 마음'과 같은 그 별을 본다고 말하는 것 이 호감이 갔다. 남성의 꿈, 예감, 내연의 언어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그가 인 정하고 있는 자기의 의지나 이성의 통제를 깨고 흘러나온다. 여성은 남성의 의식적인 인격 보다는 훨씬 본질적인, 숨겨진 무엇의 감각적인 모습이다. 스탕달은 자기 자신과 평온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여성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 럼 여성을 필요로 한다. 뿔뿔이 흩어진 실존이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나 한 운명의 통일 속에 분명히 정리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존재에 이르는 것은, 다른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다른 인간이 그에게 그 의식을 빌려줘야 한다. 타인은 같은 동료인 인간에게 너무 냉담하다. 사랑하는 여성만이 애인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어 그를 거침없이 들어가게 한다. 신에게서 이상적인 증인을 발견한 클로델을 제외하고는 앞에서 고찰해본 모든 작가들은 말로의 말에 의하면, 그들만 알고 있는 자기 틀 속의 '무비의 괴물'을 여성이 사랑해 줄 것 을 기대하고 있다. 협력하든 투쟁하든,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대립상태에 있다. 몽테를랑은 다른 남성들에게는 작가이고, 로렌스는 이론가이며, 브르통은 어떤 예술 유파의 지도자이 다. 또한 스탕달은 외교관이자 문사이다. 여성은 어떤 남자에게서 호탕하고 잔인한 왕자를 발견하는가 하면 방심할 수 없는 동물적인 인간을, 또 다른 남성에게서는 신이나 태양, 또 는 '스핑크스의 발치에 쓰러진 차갑고 음울한 (<나자>에서)' 존재를, 혹은 호색한, 유혹 자, 연인 등 숨은 정체를 드러내준다. 각자에게 이상적인 여성은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보이는 '타자'를 정확히 구현하고 있는 여성이다. 고독한 정신을 지닌 몽테를랑은 여자에게서 순수한 동물성을 구한다. 남근숭배 자인 로렌스는 여성의 성을 그 일반성 속에서 요약하려고 한다. 클로델은 여성을 여동생과 같은 영혼으로 정의한다. 브르통은 자연 속에 뿌리를 내린 멜뤼진을 사랑하고, 자기의 희 망을 어린이와 같은 여성에게 건다. 스탕달은 자기 애인이 총명하고 교양있고, 정신이나 행동이 자유롭기를 바란다. 즉 자기와 대등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대등한 자에게, 어린 이와 같은 여성에게 건다. 스탕달은 자기 애인이 총명하고 교양있고, 정신이나 행동이 자 유롭기를 바란다. 즉 자기와 대등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대등한 자에게, 어린이아 같은 여성에게, 자매인 여성에게, 성인 여성에게, 짐승인 여성에게 준비되어 있는 유일한 지상의 운명은 언제나 남성이다. 여성을 통하여 자기를 구하는 에고(자아)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여성이 자기에게 용광로(시련)로서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도착할 수 없다. 어느 경우에도 여성에게는 자기망각과 사랑을 강하게 요구한다. 몽테를랑은 자기에게서 남성의 권위를 구하는 여성에게 동정을 보낸다. 로렌스는 자기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여성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클로델은 남성에게 복종함으로써 신 에게 복종하는 추종자, 하녀, 헌신하는 여자를 찬양한다. 브르통은 여성이 자식이나 애인에 게 전적으로 사랑을 바칠 수 있으므로 여성에게 인류의구제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스탕 달의 경우에도 여성 작중인물이 남성보다 감동적인 것은 여성들이 남성보다 뜨거운 정열 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프루에즈가 로드리그의 구제에 공헌하는 것처럼, 운명을 개 척하는 남성을 돕고 있다. 스탕달의 소설에서는 여성이 애인을 파멸이나 감옥, 죽음에서 구출하는 경우가 많다. 몽 테를랑이나 로렌스는 여성의 헌신을 하나의 의무로 요구한다. 클로델, 브르통, 스탕달은 이 처럼 여성의 헌신을 고귀한 선택으로 찬양한다. 그들은 자기가 거기에 합당하다고 자부하 지는 않지만 바라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작품은(놀라운 라미엘은 제외하고) 그들 이 여성에게 애타주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콩트가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한 애타주의이다. 콩트의 견해에 의하면 그 애타주의는 명백한 열등성인 동시에 애매 한 우월성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성을 정의 함으로써 작가는 각자 자기의 일반적인 윤리와 개성적인 사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그리 고 여성에 대한 생각으로, 세계에 대한 자기의 관점과 에고이스틱한 꿈과의 모순을 드러내 고 있다. 그 작품 전체에 여성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거나 보잘것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이를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다. 로렌스의 경우처럼, 이 요소가 '타자'의 양상으로 요약되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 성을 단지 타자로서 파악하고 있지만, 작가가 그 여성 개개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에도(이것은 스탕달의 경우지만) 중요성을 갖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각 개인의 문제가 제 2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는, 그런 중요성은 상실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자기초월을 위해서라도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여성은 여전히 타자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제3장 문학에서 여성의 신화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중요성 을 갖고 있는가? 그런 신화는 사회의 풍속이나 개인의 행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것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보아야 한 다. 신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여성의 신화는, 인류를 양분하는 '구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인간적인 조건의 양상을 승화시키는 정적인 신화이다. 그것은 경험 속에서 파악하 거나 개념화된 현실을 플라톤적인 하늘에 투사하는 것이다. 사실에, 가치에, 의의에, 지식 에, 경험적 법칙에 초월적인 '이념'(이데아)이 대치되어 있다. 이 이념은 주어진 현실의 피 안에 있으므로 도저히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실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 들 개개의 우연하고 다양한 실존에 대해, 신화적인 사고방식은 유일하고 확고부동한 '영원 한 여성'을 대립시키려고 한다. 여성이라고 정의한 것과 육체를 지닌 현실의 여성들의 행 동이 어긋나면 그건 여성이 나쁜 것이 된다. 이 경우, '여성'을 하나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여성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체험은 부정해도 신화에 반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어느 의미에서는 여성 자신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다른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은 욕구나 포옹이나 사랑 속에 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 는 진정한 드라마를 낳는다. 색정, 사랑, 우정, 실망, 증오, 경쟁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양자 모두 자기를 본질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투쟁이며, 서로를 확인하는 자유와 자유의 인식작용이고, 적의에서 협력으로 옮아가는 계속적인 과정이다. '여성'이라는 것을 특별히 내세우는 것은, 경험에 반하여 여성이 주체이며 남성과 동등한 자임을 거부하는 상호성이 결여된 '절대의 타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여성은,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에 관해 지어 낸 신화는 모두 여성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각기 유일한 것임을 자처한다. 그 결과 서로 모순되어 양립하기 어려운 신화가 뒤섞여, '여성'에 대한 견해가 상층되는 바람에 남성들을 어처구니없게 한다. 모두가 각각 유일한 '진리'를 내포한다고 주 장하는 수 많은 원형에 여성은 다소나마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남성들은 배우자에 대해, 인간이 동시에 금발일 수도 갈색머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애해할 수 없었던 소피스트(궤 변철학자)와 같은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절대화하기 쉬운 경향은 사회적인 표상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어린이의 정신에서는 모 든 관계가 사물의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관계는 분류로, 작용은 전형으로 정착하기 쉽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의 사회는 재산의 보존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재 산을 보유하는 인간의 옆에, 그것을 소유자에게서 빼앗으려는 남녀의 존재가 상정된다. 남 성(건달, 사기꾼, 도둑, 투기꾼 등)은 일반적으로 그 집단에서 부인된다. 여성은 그 색정적 인 매력을 이용하여, 합법성을 어기지 않고 남성을 유혹하여, 그들의 재산을 탕진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들은 그의 재산을 빼앗거나, 상속권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불길한 것으로 생각되어, 그녀들은 '고약한 여성'으로 불린다. 그런데 그런 여 성은 다른 집(그녀들의 아버지나 형제, 남편이나 애인의 집)에서는 수호의 천사처럼 생각 된다. 부유한 재산가에게서 돈을 울궈내는 창녀는, 화가나 작가에게는 예술의 후원자이다. 아스파지아나 퐁파두르 부인과 같은 애매한 인물도 구체적인 경험속에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버마재비나 마술초, 악마로 규정한다면 여성에게서 '미의 여신', ' 어머니의 여신', '베아트리체'를 발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집단적인 표상, 특히 사회적인 전형은 일반적으로 대립되는 낱말의 짝짓기에 의해 만들 어진 것이다. 상반성은 '영원한 여성'의 근본적인 특질처럼 생각된다. 성스러운 어머니는 잔인한 계모 로, 천사와 같은 딸은 타락한 처녀로 대비된다. 그래서 '삶과 같은 어머니', 혹은 '죽음과 같은 어머니'라고도 하며, 처녀를 순수한 정신이라고도 하고, 악마에게 바쳐진 육체라고도 한다. 현실은 사회나 개인에게 상반되는 두 가지 원리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지 않는 다. 사회나 개인은 시기나 상황 속에서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채택한 신화 중에, 자기가 인정하는 제도나 가치를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을 가정에 매어두고 싶 어하는 가부장제도는, 여성을 감정, 내면성, 내재로서 정의한다. 실제로 모든 실존자는 내 재인 동시에 초월이다. 실존자에게 목표도 제공하지 않고, 어떤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하도 록 방해하여 승리감을 느끼지 못하게 할 경우에 그 초월은 과거 속에, 즉 내재에 묻혀버린 다. 이것이 가부장제도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나 노예인 것이 노예의 천직이 아닌 것처럼, 이것은 결코 여자의 천직이 아니다. 이 신화는 오귀스트 콩트의 학설 에서 발전된 것이 분명하다. '의지'를 '애타정신'과 일치시키는 것은, 남성에게 여성의 헌신 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여성에게는 지상명령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 이다. 신화를 의미의 파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미는 대상에 내재적이다. 그것은 체험을 통하여 의식에 계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는 의식이 파악하려고 해도 끝까지 도망치는 초월적인 이데아이다. 미셸 레리스는 <남자의 연령> 속에 여성의 기관의 모습을 그리면 서 우리에게 의미를 명시하고 있지만, 아무 신화도 만들지 않았다. 여성의 육체를 앞에 두 고 느끼는 현혹이나 경혈에 대한 혐오는 구체적인 현실을 두려워하는 공포의 표시이다. 여 성의 육체에서 향락적인 성질을 발견하게 되는 체험 속에는 신비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성질을 꽃이나 조약돌에 비유하여 표현하려고 해도 신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 그것은 육체이다. '육체는 밤이며 죽음이다'라든가 '여자는 우주의 빛'이라 고 한다면, 그것은 지상의 진실에서 떠나 공허한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남성도 여성에게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은 단순히 육체적인 대상이 아니다. 육체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개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뿌리를 내린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종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동물성은 훨씬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에게도 남성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은 실존에 의해 책임 이 부과된다. 여성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속한다. 이것을 '자연'에 동화시키려는 것은 하나의 편견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여기서는 남성을 가리킨다)에게 유리한 신화는 없을 것이다. 그 계급이 갖고 있는 모든 특권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남용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 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생리적인 고통이나 부담을 덜어주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이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구실로 삼아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점점 확대하려고 한 다. 여성에게는 성적 쾌락을 누릴 권리를 일체 인정치 않고, 소나 말처럼 부리기 위해 그 렇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신화 중에서 남성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여성적인 '신비' 이다. 여기에는 유리한 점이 많다. 우선 이것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생각되던 것도 쉽게 설 명된다.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은 자기의 무능력을 일반적인 저항으로 대치하여 숨 기고 싶어한다.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신비'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것이 야말로 나태와 허영심을 속이는 알리바이이다. 여자에게 반했을 때도 이렇게 해서 환멸에 서 벗어나려고 한다. 사랑하는 여성의 행동에 바람기가 있어 보이거나 말이 어리석게 생각 되면 신비를 구실로 삼는다. 요컨대 신비의 덕택으로, 키에르케고르에게 현실적인 소유보 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 소극적인 관계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살아 있는 수수께끼 앞 에서 남성은 언제까지나 자기의 꿈, 희망, 사랑, 허영심을 지닌 채로 고독하다. 많은 사람 들에게 악덕에서 신비적인 황홀경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하는 이런 주관적인 유희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진정한 관계보다 더욱 매혹적인 경험이다. 이처럼 편리한 착각은 대 체 어디에 기초한 걸까? 여성은 확실히 어느 의미에서는 신비적이다. 메테를링크의 말에 의하면 '누구나 그렇듯 이 신비적'이다. 누구나 자기에 대해서 주체이며, 자기만을 내재 속에 파악할 수 있다. 이 런 관점에서 보면 타자는 언제나 신비하다. 남성들의 눈에 대한 상대방의 불투명성은 타자 인 여성에게서보다도 명백하다. 그들이 아무리 공감대를 발동해도 여성의 개성적인 체험 속에 침투하지 못한다. 여성의 에로틱한 쾌락, 월경의 불쾌감, 분만의 고통 등은 도저히 알 수 없다. 사실 이런 신비는 상호적이다 .모든 남성의 마음속에는 여성이 알 수 없는 무엇 이 있다. 남성의 색정이 무엇인지 여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찰해 온 일반적 인 원칙에 의하면, 남성이 세계를 생각하는 일정한 방식은 그들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것으 로 정해져 있다.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 성에게 신비인 여성은 그 자체로서 신비하다고 생각된다. 솔직히 말하면 여성이 살고 있는 상황이 이렇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생 리적인 운명은 대단히 복잡하다. 여성 자신도 남의 일처럼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육 체는 자기의 명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 속에 자기가 소외된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개인 에게 있어서의 생리적인 삶과 육체적인 생활, 좀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의 사실성과 그것을 떠맡고 있는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인간의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어려운 수 수께끼이다. 그러나 흔히 신비라고 불리는 것은, 의식의 주관적인 고독도 아니고 유기적인 생명의 비 밀도 아니다. 그 말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상호의 전달에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순 수한 침묵이나 밤,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잘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무엇을 의미 하고 있다. 여성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여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런데 베일에 싸여 있 는 것이다. 불확실한 외관 저편에 실재하고 있다. 여성은 누구인가? 천사인가, 악마인가, 무녀인가, 배우인가? 이런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여성에게는 본질적으로 애매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대답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은 자기 마음도 종 잡을 수 없는 스핑크스이다. 사실 여성도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물음에 반드시 대답 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숨어 있는 진실이 너무나 유동적이어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 영역에는 진실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실존자는 그가 행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본질이 실존에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순수한 주관성에서 인 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인간이 측정된다. 농부의 아내에 대하여는 일솜씨가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고 여배우에 대하여는 재능이 있다, 없다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그 내재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본다면, 그 여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런 여성의 품성은 어떻게 정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애인이나 부부의 관계 에서는 여성이 종, 즉 제2의적이며 타자의 입장에 있는 모든 관계에서는 언제나 내재적으 로 생각된다. 친구나 동료, 일의 협력자로서 조금도 신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주목 할 만하다. 남성 쪽이 종속적인 입장에 있을 경우, 예를 들어 자기보다 연상이고 부자인 남자나 여자 앞에 젊은 청년이 비본질적인 객체가 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역시 신비에 싸 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제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신비로운 하부구조를 보여주고 있 다. 감정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지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상상하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사랑하기위해서는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얼마쯤 감소시키기에 충분하다... ."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이다. 이 사회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은, 자기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명할 수 있다. 이 경우, 남성은 여성을 돌보기도 하고 원조하기도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에게 사회적인 지위를 제공한다. 여성에게 선물도 보낸다. 경제적, 사회적인 독립 이 그에게 창의나 착안을 가능하게 한다. 빌르파리지 부인과 별거하고 있는 노르푸아는 하루 걸러 한 번씩 여행을 하는 그녀를 만나러 간다.(모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대개 남성 쪽은 바쁘게 살고 부인은 한가하다. 그가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가 제공하는 것이므로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기쁨에서인가, 정열에서인가, 아니면 기분전환을 위해 서인가? 그녀는 이런 혜택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가, 이득을 위해서인가?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결혼을 존중하고 있는가? 남성이 그녀에게 제공하는 이유도 모호 하다. 이런 혜택을 사랑으로 제공하고 있는가, 연민으로 제공하는가? 그런데 여성은 흔히 남성과의 교제에서 많은 이득을 발견하지만,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과의 교제는 그가 상대 방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정도로밖에는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의 태도 전체에서 그 애정 의 정도를 어는 정도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여성에게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규명할 방법이 없다. 여성은 기분 여하에 따라서 자기 애정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취하게 되지만, 그 런 애정을 수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한, 어떤 해석도 진실성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여 성 쪽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권을 갖고 있는 특별한 경우에는 신비가 역전된다. 이 신비는 하나의 성에 부속품처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입장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많은 여성에게 초월의 길은 분명히 막혀 있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녀들은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하고 되풀이 하여 자문한다. 이것은 공허한 물음이다. 남성이 여성의 이 비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 는 것도, 결국 그런 본질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 사회를 통하여 자기를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그 비밀의 밑바닥을 부 수면 속은 텅비어 있다. 그리고 모든 피압박자처럼, 여성은 자기의 객관적인 모습을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노예, 하인, 원주민 등은 모두 지배자의 자의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므로 언제나 변함없는 미소나 수수께끼 같은 무감동으로 지배자를 대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참된 감정이나 행동을 조심스럽게 감춘다. 여성들은 대개 처녀 때부터 남성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책략을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여성은 언제나 가면으로 남성을 대한 다. 여성은 용의주도하고 위선자이며 배우이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비'는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 하나 의 현실이다. 사실 그것은 '절대적 타자'의 신화에 직접 포함되어 있다. 비본질적인 의식 또한 투명한 주체성이다. '코기토'를 작용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상호 성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타자'는 자기에게도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 주체성 자 체가 타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의식으로서는 순수한 내재적 현존 속에 소외되어 있는 이 의식이야말로 분명히 '신비'이다. 즉, 속임수가 만드는 비밀 이외에 흑인종과 황인종의 신 비가 있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비본질의 '타자'로 생각되는 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일반 유럽인을 크게 당황하게 하는 미국 시민이 조금도 신비적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라고 해서 언제나 남성을 이 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의 신비'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즉 부유한 미국인이나 남성은 '지배자' 쪽이고, '신비'는 노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비의 확실한 현실에 대하여는 기만적인 황혼 속에서 꿈꾸는 수밖에 없다. 신비를 환각처럼 포착하려고 하면 그것은 곧 사라져버린다. 문학은 '신비적인' 여성을 묘사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소설의 시초에는 그런 여성들이 신기한 수수께끼의 인물처럼 나 타나지만, 이야기가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는 한, 그녀들의 비밀은 끝내 드러나 평범한 인 물이 되고만다. 피터 치니의 작품의 주인공은 언제나 여성의 느닷없는 변덕에 놀란다. 그 녀들이 어떻게 처신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녀들은 독자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빗나가 게 한다. 그러나 일단 독자들이 그 행동의 매커니즘을 알게 되면, 그런 여성은 단순한 기계장치처 럼 보인다. 이 여자는 스파이이고, 저 여자는 도둑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 무리 교묘히 짜여져도 거기에는 언제나 열쇠가 있다. 작가가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상 상력이 풍부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다. 신비는 단지 신기루에 불과하며 잡으려고 하면 사 라져버린다. 이와 같이 신화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신화는 하나의 사치이다. 여성의 신화는 하나의 사치이다. 그 신화는 남성이 그 욕구의 격렬한 파악에서 벗어날 때에 나타나다. 관계가 구체적으로 더 많이 존속할수록 그 관계의 관념화는 적어진다. 고대 이집트의 농민, 베두인족의 농민, 중세의 직인, 현대의 노동자는 노동의 필요성과 가난 때문에, 자기의 상대가 되는 여성들과 너무나 분명한 관계 를 맺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을 미화하거나 그 반대로 만들 여유가 없다. 흑과 백의 여인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꿈꿀 여유가 생긴 시기나 계급에 있어서이다. 그러나 사 치도 효용성을 갖고 있다. 이런 몽상은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신화의 대부분은 남성이 자기의 실존과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자발적인 태도 속에 뿌 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생활경험을 '초월적 이념'으로 높인 것은 가부장제도를 정당화할 목적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 사회는 신화를 통하여 개개인에게 그 법칙과 풍습을 알기 쉬 운 형태로 강요했다. 집단의 명령은 신화의 형태로 각자의 의식에 침투했다. 종교, 전통, 언어, 이야기, 유행가, 영화 등을 매개로 하여 신화는 물질적인 현실에 엄격히 종속되어 있 는 실존자들에게까지 스며들었다. 자기의 검소한 생활경험의 숭고함을 거기서 볼 수 있었 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반에게 배반을 당하면, 그 남자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욕한다. 성불능의 강박감에 시달리는 남자는, 여자를 버마재비라고 욕한다. 자기 여자에게 만족하 고 있는 남성에게 그녀는 조화, 휴식, 풍부한 대지이다. 값싸고 영원한 취미, 포켓용 '절대' 를 선호하는 많은 남성들은 신화로 마음을 만족시킨다. 사소한 감동, 반항도 곧 시간을 초 월한 '이념'의 표시로 생각된다. 이런 착각은 쉽게 허영심과 결부된다. 신화는 상식적이고 사려 깊은 듯이 가장한 정신이 분별없이 뛰어드는 허위적인 객관성 의 함정이다. 체험이나 그것이 요구하는 자유로운 판단을 고정된 우상으로 대치하려는 것 이다. '여성'의 신화는 자주적인 실존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신기루로 바꿔놓으려고 한다. "환상이여, 환상이여!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을 안정시켜 가르치고, 보석에 대한 취미를 버리게 하여 우리의 동등한 배우자로, 친한 친구로, 이 현세의 협력자로 만들어 다른 옷을 입히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하여, 모든 것 을 말해 줘야 한다... ." 하고 라포르그는 외치고 있다. 여성을 상징으로 가장하는 것을 그 만두어도 남성이 잃는 것은 없다. 꿈이 집단적인 명령에 의해 구성되었다면, 그 꿈은 평범 하여 살아 있는 현실에 비하면 참으로 빈약하고 단조롭다. 참된 몽상가와 시인에게는 그 살아 있는 현실이야말로 낡은 불가사의보다 훨씬 풍부한 원천이다. 여성에 대해 가장 성실 하게 생각한 시대는 우아한 연애문학이 꽃피던 봉건시대도 아니고, 여성의 환심을 사던 1 9세기도 아니다. 그것은(18세기처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한 시대이다. 이때 여 성들은 참으로 로마네스크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한 관계>, <적과 흑>, <무기여 잘 있 거라> 등을 읽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라클로(프랑스의 군인, 작가, 1741 - 180 3), 스탕달, 헤밍웨이의 여주인공들은 신비가 없어도 매력이 있다. 여성 속에서 하나의 인 간적인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남성의 생활경험이 빈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주체 와 주체의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중요성이나 강인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신화를 거부하는 것이 남녀간의 모든 극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라는 현실을 통 하여 남성이 발견하는 의의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 사랑, 모험, 행복, 꿈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동이나 감정, 정열이 진리 속에 기초를 둘 것을 요구하는 것 이다. "여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성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의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이런 신비적인 슬로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미 알아보았다. 남성의 눈에(그리고 남성의 눈 을 통해 사물을 보는 일단의 여성들의 눈에) '진정한 여성'으로 비치기 위해서는 여자의 몸을 갖고, 애인이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주체는 성 본능이나 모성을 통하여 자기의 자율성을 요구할 수 있다. '진정한 여성'은 '타자'로서 자 기를 받아들이는 여성이다. 오늘날 남성의 태도에는 이중성이 있는데, 이것이 여성에게 괴로운 모순을 안겨주고 있 다. 남성들은 상당히 폭넓게 여성이 동등한 인간, 평등한 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들은 여전히 여성을 본질적인 존재라고 우긴다. 여성에게 이 두 가지 운명은 양립되기 어 렵다. 그 어느쪽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결국 여성의 불안정한 상태가 생기게 된다. 남성의 경우는 공생활과 사생활 사이에 별로 충돌이 없다. 행동이나 일에서 사회에 대한 역할을 확인할수록 그는 점점 더 남성적으로 보인다. 그의 인간적인 가치와 생명적인 가치는 하나로 융합된다. 한편 여성의 자주적인 성공은 그 여성다움과 모순된다. 세상은 '참된 여성'에게 객체가 될 것을, 즉 '타자'가 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 남성들의 감수성이나 성감 까지 변해 버릴 가능성이 많다. 이미 새로운 미학이 생겼다. 평평한 가슴과 가는 허리의 유행(20세 안팎의 여자 스타일)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과거 풍만형의 이상으로 는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의 몸이 어느 정도 풍만하길 요구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 은 소극적이다. 여성의 몸은 날씬해야 한다. 근육이 발달하고 유연하며 건강해 보이는, 초 월성의 표시가 요구된다. 온실 속의 식물처럼 창백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 고 일하는 사람처럼 햇볕에 검게 타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성복이 실용적이 되었다고 해서 성의 특징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스커트는 전보다 다리나 허벅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게 되었다. 일하는 것이 여성의 에로틱한 매력 을 잃게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 여성을 사회적 인간인 동시에 육체적인 먹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극적일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1948년 10월 출간) 페네의 소묘 시리즈에는 젊은 남성이 결혼식에 입회하려는 아름다운 여성 시장에게 매혹되어 상대인 신부를 외면하는 그림이 있었다. 여성이 '남성의 일'을 하면서도 매혹적이라는 것은 오랫동 안 다소 외설스러운 농담의 주제이기도 했었다. 세상사람들의 반감이나 야유가 둔화되어, 에로티시즘의 새로운 형식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거기서 새로운 신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조건과 여성적인 숙명을 동시에 짊어지고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성의 상실'이라고 말하는 부자연스러움과 불 편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자기를 해방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예속적인 생활을 조용히 받 아들이는 쪽이 훨씬 편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대지에 한결 적합하다. 어 쨌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또 불가능한 일이다. 바라고 싶은 것은 남 성들도 새로 창조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 래야만 여성도 모순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라포르그의 소원이 성 취될 것이다. "오, 젊은 처녀들이여, 당신들은 언제 우리들의 형제, 편견이나 저의가 없는 친한 형제가 될 수 있는가? 언제 우리는 참으로 악수할 수 있는가?" 그때에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강요 한 운명의 무게에 더이상 시달리지 않는 멜뤼진, 해방된 멜뤼진..."은 인간으로서의 바탕을 (브르통 <비법 17>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녀는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이다. " 여성의 무한한 속박이 풀리고 자기를 위해, 자기에 의해 살게 될 때 남성(지금까지 혐오스 러운 존재였던 남성)이 여성을 해방시켜서." (랭보 <드므니에의 편지>, 1872. 5. 15.) 제2부 체험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런데 여자이면서도 자기가 그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 키에르케고르 절반은 희생, 절반은 공모 모든 사람들처럼. - J.P. 사르트르 서론 오늘날 여성들은 '여성적인 것'이라는 신화를 뒤엎고, 그 독립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립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이 인간존재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에 의해 여성세계의 내부에서 성장하는 그녀들의 통상적인 운명은, 그녀들을 남성에 게 더욱 굴종하게 만드는 결혼이다. 남성의 위신은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여 전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전통적인 운명 에 대해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여성은 어떻게 그 신분의 수업을 할 것인가? 그것 을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여성은 어떤 세계에 갇혀 있는가? 여성에게 어떤 탈출 법이 허용되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런 문제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래야 고달픈 과거 를 이어받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니, '여성적'이니 하는 말은 어떤 원형도, 어 떤 확고부동한 본질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내 주장을, '현재의 교육과 풍습의 단계 에서' 이해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영원한 진리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여성이 여성 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실존의 공통된 배경을 그려보려고 한다. 제1장 유년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성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형태 는 어떤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인 숙명이 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산물을 만들고, 그것에 여성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이 끼 여들어야 비로소 '타자'로서의 개체가 성립될 수 있다.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동안에는, 어린이는 자기를 성적으로 차별된 존재로 파악하지 못한다. 여자아이의 경우나 남자아이의 경우도, 처음 얼마 동안 육체는 주체성의 발현이며 외부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구이다. 어린이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눈이나 남녀가 똑같이 전개된다. 크게 흥미를 느끼는 쾌 감도 양쪽 다 마찬가지이다. 우선 빠는 행위가 그들에게 최대의 쾌감의 원천이다. 이어 항문기에 접어들어도 남녀에게 공통된 배설작용에서 최대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성욕의 발달도 비슷하다. 그들은 같은 호기심과 같은 무관심으로 자기 몸을 더듬어, 음핵 과 페니스에서 막연한 쾌감을 끌어낸다. 그 감각은 이미 확실해진 범위에서 어머니에게로 향해져 있다. 부드럽고 매끄럽고 탄력있는 여성의 육체는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고, 성적인 욕망은 물건을 잡으려는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와 같이 공격적인 방 법으로 어머니를 껴안고, 그 몸을 만지고 애무한다. 새로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은 서로 질투하고, 그 질투를 행동으로 표시한다. 화를 내거 나 토라지거나, 배설작용에 이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은 어른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같 은 교태에 의존한다. 여자아이도 남자형제 못지않게 튼튼하며, 같은 지능을 나타낸다. 그녀 들이 형제들과 경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 만일 성인이 되기 전부 터, 때로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성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불 가해한 본능이 여자아이를 나면서부터 수동성이나 교태나 모성애에 어울리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아기의 생활에 타인이 개입하여, 강제적으로 아기가 그 인생의 직분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세계는 내재적 감각형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태내의 어둠 속에서 살던 무렵 처럼 전체의 품 안에 잠겨 있다. 모유로 기르건 분유로 기르건, 아직 모체의 온기로 싸여 있다. 그는 서서히 자기와는 다른 사물을 지각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리하여 그것들에게 자기를 구별한다. 동시에 그는 다소 무리하게 수유체에서 떨어져나간다. 이 분리에 대해 맹렬한 기세로 반항하는 경우도 있다. 이 발작이 약해질 무렵부터(생후 약 6개월경) 그는 나중에 진짜 시위행위로 바뀌는 표 정 속에서 남의 관심을 끌려는 소원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상황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생각하고 나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유아는 만물의 근원적인 비극인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한 고뇌 속에 자기의 고독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으로부터 탈출하여 전체의 품 속에 따뜻이 몸을 묻고자 한다. 여기에 인간의 우주적, 범신론적 몽상 의 원인, 즉 망각이나 수면, 무아의 경지나 죽음에 대한 욕구의 원인이 있다. 일단 분리된 자아를 말소하는 것은 절대로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즉자존재의 안정에 도달하기를, 사물에 응결해 버리기를 원한다. 인 간이 자신의 눈에 하나의 존재로 비치는 것은, 특히 그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응결되어질 때이다. 어린이의 행동에 대한 해석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육체적인 형태 안 에서 어린이는 미지의 세계에서의 유한과 고독과 피투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타 인이 그 실재와 가치를 세워주는 하나의 이미지 속에 자기의 존재를 소외시켜 이 비극을 보상하려고 한다. 어린이가 자기를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보는 시기(이 유기와 일치한다)에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는 자아가 형성된다. 거울이 하는 역 할에 차이는 있지만, 어린이는 6개월경부터 부모의 표정을 알아보고 부모의 시선 아래 하 나의 객체로서의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세계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하나의 자주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소외된 형태에서만 어린이는 자기 자신과 만 나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는 성장하면 두 가지 방법으로 선천적인 피투성을 향하여 투쟁한다. 즉, 그는 분 리를 부정하려고 한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품에 몸을 웅크린 채 어머니의 체온과 애무를 원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타인의 동의에 의해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어린이에게 어른 들은 마치 신처럼 생각된다. 어른은 그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 린이는 자기를 때로는 귀여운 천사로, 때로는 괴물로 바꿔버리는 시선에 대해 마력을 느낀 다. 이 두 가지 방어수단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관련되고 교차 된다. 유혹과 교태가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에는, 뽀뽀나 애무라는 육체적인 보증으로 정당 행위의 감정을 발견한다. 유아가 어머니의 무릎에서, 그 부드러운 시선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과 같은 행복의 수동성이다. 처음 3, 4년 동안은 여아와 남아의 태도 사이에 차별을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이유기 이전의 행복한 상태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려고 한다. 여아는 물론이고 남아에게서도 시위와 교태를 찾아보게 된다. 남아도 여아 못지않게 다른 사람들 의 호감, 미소, 칭찬을 원한다. 분열을 극복하기보다는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철저하고, 남의 의식에 의해 응결되기보다는 전체의 품 속에 묻히는 쪽에 보다 적극적이다. 육체적인 융합은 타인의 시 선 아래서 이루어지는 어떤 권리포기도 미칠 수 없는 철저한 자기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이 다. 시위나 교태는 어머니의 품 안에 단지 몸을 맡기고 있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른의 시선이 보여주는 마술은 변덕스럽다. 어린이는 자기 모습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부모는 그 어린이의 놀이에 끼여들어 손을 더 듬어 아이를 찾으며 깔깔 웃는다. 그런가 하면 "이제 그만해둬라. 너는 아주 잘 보이는걸." 어른은 아이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흉내를 내다가는 어느새 무시하는 듯이 어깨를 움츠린 다. 카프카(독일의 소설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1883 - 1924)의 세계처럼 불안정하 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한 걸음 옮겨놓을 적마다 걸려 넘어지기 일쑤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성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의 무릎 위에 앉지 못하고 부모의 침대에서 함께 잘 수도 없게 되면, 실망하고 낙담한다. 육체적인 실망을 통해, 고뇌 가 없이는 의식할 수 없는 고독을 점점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이들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시기이다. 제2의 이유는 처음처럼 잔인하지도 않고, 또 보다 서서히 어린이의 포옹에서 어머니의 육체를 떼어놓는 다. 키스나 애무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은 특히 남자아이 쪽이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응 석을 부리고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인 생활이 허용되며, 아버지는 그 아이를 무릎 위에 안 아올리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또 여자아이에게는 부드러운 옷을 입히고, 눈 물이나 변덕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며 머리 매무새에 신경을 쓰고 그 표정이나 교태도 받 아준다. 육체의 접촉과 친절한 눈길이 그 아이를 고뇌와 고독에서 지켜준다. 이와는 반대로 남자아이에게는 교태도 금하게 한다. 아양을 떨거나 감상적인 태도를 취 하면 귀찮게 여긴다. "사내녀석이 안아달라고 하다니... 남자는 거울 같은 걸 보는 게 아 냐... 남자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를 해방시켜야 어른들의 찬사를 얻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는 길이다. 많은 남자아이들은 가혹한 독립을 선고받는 것이 두려워 여자아이가 되고 싶어한다. 남 자아이에게 여자아이와 같은 옷을 입히던 시기가 지나 바지로 바꿔 입히고 길었던 머리를 깎을 때, 눈물을 흘리는 남자아이가 있다. 개중에는 여자아이의 모습 그대로 입기를 바라 는 남자아이도 있는데, 이것은 동성애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자아이가 되 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로 태어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몸을 쭈 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누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모리스 삭스(현대 프랑스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안식일>에서) 그러나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남자아이 쪽에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데에는, 직접적으로 가치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회상기>에서 모라스(현대 프랑스의 문학가, 정치 가)는 그가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는 여동생을 질투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남자야. 계집애 의 일은 내버려둬라." 남자아이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것은, 그 우월성 때문이라고 한다. 험난한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남자아이는 남성으로서의 긍지를 주입받게 마련이다. 이 추상적인 개념은 어린이에게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즉, 그것은 페니스 (남근) 속에 나타난다. 남자아이가 아무 감각도 없는 자기의 작은 성기에 대해 자랑스러움 을 느끼는 것은 자발적이 아니라 주위의 태도를 통해서이다. 어머니나 유모들은 남근과 남 성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녀들은 사랑의 은총이나 복종 속에 그 위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아의 몸에 그것이 초라하고 가엾은 형태를 취하 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그녀들에게 하나의 복수가 되기 때문인지, 아무튼 유아의 페니스 를 이상한 즐거움을 가지고 다룬다. 라블레(16세기 프랑스의 소설가)는 가르강튀아의 유모들의 못된 놀이와 이야기를 전하 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루이 13세의 유모들의 예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대담하 지 못한 여성들은 꼬마 남자아이의 페니스에 하나의 애칭을 붙여,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 할 때 마치 그 아이 자신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작은 인격인 듯이 여 기고 있다. 그녀들은 그것을, 앞에서 인용한 말을 사용하면 "보통사람보다 교활하고 똑똑 하고 교묘한 제2의 자아"(A. 발랭, '어린이의 사생활'에서)로 만들어버린다.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페니스는 이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모형의 평가를 올리는 것은, 어린이의 평가를 올리는 것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 아들이 세 살이 되도록 쭈그리고 앉아 서 소변을 본다고 한다. 주위에 자매나 사촌 자매들뿐이라 겁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아버지가 그 아이와 함께 화장실에 가서 말했다. "자, 이제부터는 남자가 오줌을 누 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그 후부터 아이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자랑스러워 "구멍으로 오줌을 누는" 여자아이를 멸시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이런 멸시는 여자아이에게 하나의 기관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는 자기처럼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페니스 자체는 남 자아이에게 우월감의 원천이 되는 직접적인 권리라기보다는 제2의 이유 때의 고난에 대한 하나의 보상(어린들에 의해 고안되어, 남자아이가 잘 받아들이는)처럼 생각된다. 그럼으로 써 남자아이는 이제 유아도 아니고 여자아이도 아니고 될 수 없다는 한탄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성기 속에 자기의 우월과 자랑스러운 주권을 구체화한다. 여자아이의 운명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어머니나 유모들은 여자아이의 생식기를 귀중하 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들은 표면만 본다. 손으로 잡을 수 없 는 이 숨은 기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의미에서는 여자아이에게는 성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부재를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는 분명히 그녀에게 하나의 완벽체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남자아이와는 다르게 세상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되었을 경우에 이런 차별이 열등감으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유명한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만큼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문 제도 많지 않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에의하면, 페니스에 대한 실망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 때까지 남성의 육체구조를 모르는 여자 아이가 많다. 어린이는 남자와 여자를 달과 태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받아들 인다. 어린이는 말에 포함된 본질을 믿는데다가 호기심은 본래 분석적이지 못하기 때문이 다. 많은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의 두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이작은 살덩이는 보잘것없 는 것, 오히려 경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머리나 옷의 변종과 같은 일종의 변 종이다. 때때로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서 페니스를 보기도 하지만, "여자아이가 아주 꼬마 일 때에는 남동생의 페니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헬렌 도이치 여사는 말하고 있다. 여사는 그 예로서 처음으로 페니스를 보았을 때에는 전혀 무관심했으나, 훨씬 나중에 자기 의 관심사와 관련을 갖게 되어, 비로소 페니스의 가치를 인정한 생후 18개월이 되는 여아 의 경우를 들고 있다. 때로는 페니스를 이상한 물건으로, 마치 혹이나 유방이나 사마귀처 럼 군살이 매달린 일종의 애매한 물체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혐오감을 주기 도 한다. 여자아이가 친구나 형제의 페니스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 렇지만 그것에 대해 성적인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녀가 이 기관의 부재로 큰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처럼, 페니스 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극히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배설작용, 특히 배뇨작용이 어린이들에게 큰 흥미를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자면서 오줌을 싸는 것은 부모의 편애에 대한 항의의 표시인 경우가 많다. 장소에 따라서는 남자들이 앉 아서 소변을 보는 나라도 있고, 여자가 서서 소변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특히 농촌 여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습관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구사회에서는 보통여자는 몸을 쭈 그리고, 남자는 서서 소변을본다. 이런 차이가 여아에게 가장 두드러진 성적 차별이다. 그 녀가 소변을 보려면 몸을 쭈그리고 엉덩이를 드러내야 하므로 자연 몸을 가려야 한다. 이 것은 불편하고 부끄러운 치욕이다. 또한 여성은 배를 움켜잡고 웃다가 무의식적으로 오줌이 나와 애를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는 치욕감이 더욱 커진다. 여자아이의 경우는, 남자아이처럼 컨트롤이 잘 되지 않 는다. 남자아이는 배뇨작용이 자유자재로운 놀이처럼,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유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페니스는 손으로조작할 수 있고, 어린이는 이 조작을 통해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은 남자아이에게 큰 흥미거리이다. 어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가 오줌누는 것을 보고 감탄한 듯이 "참 편리하겠구나!"하고 외쳤다.(A. 발랭의 인용) 오줌줄기는 어떤 방향으로나 마음대로 멀리 날릴 수 있다. 남자 아이는 이 때문에 전능감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옛 이뇨제에의 열망'에 대해 말하고, 슈테켈은 양식있게 이 공식을 논박했다. 그러나 케이런 허니가 지적한 것처럼('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거세 콤플렉스의 유래', '국제정신분석', 1923 - 1924) "특히 사디즘적 성격 을 지닌 전능의 환상은 때로 남성의 오줌방출과 결부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일부 어 른에게도 있는 이 환상은(몽테를랑의 '모충', '하지' 참조) 아이의 경우에는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여성이 살수기로 뜰에 물을 뿌릴 때에 느끼는 큰 쾌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쾌감의 근원이 반드시 살수기와 페니스의 결합게 있지 않다는 점에서(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결합이 뚜렷할 수도 있다) 나는 사르트르나 바슐라르의 주장에 동의한다. 오줌줄기를 내뿜는 것은 모든 기적과 마찬가지로, 인력에 대한하나의 도전처럼 생각된 다. 그것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은, 바로 자연법칙에 대해 작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어 쨌든 남자아이는 거기에서 그 자매들에게는 금지된 나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시골에서는 오줌줄기를 내뿜음으로써 여러 가지 사물, 즉 물, 대지, 이기, 구름 등과 많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여자아이 중에는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 반듯이 드러누워 우줌을 위 로 뿜어올리려고 하거나 서서 오줌을 누는 연습을 하는 아이도 있다. 케이런 허니에 의하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 배해 노출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데 대 해 부러워하는 것 같다. "병상에 있던 어떤 여자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소변을 보는 한 남자를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에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남자처럼 오줌을 누고 싶어.'" 케이런 허니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남 자아이는 자기의 페니스를 만질 권리가 있으므로 그것을 장난감으로 삼을 수 있는 반면에, 여자아이에게는 자기들의 성기가 금제물이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서 많은 여자아이에게 남성 성기의 소유를 원하게 한 다는 것은 심리학자들의 많은 조사나 그들이 입수한 고백이 입증한다. 헤벨로크 엘리스(그 의 '배수증' 참조)는 그가 제니아라고 부르는 환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물 이 솟구치는 소리, 특히 목이 긴 살수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어렸을 때 오빠나 그 밖의 남 자들에게서 바라본 오줌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를 상기시켜, 언제나 나를 흥분에 빠뜨린 다." 또 한 사람의 여성인 R.S. 부인은 어렸을 때 친구의 페니스를 양손으로 움켜잡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살수기를 손에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페니스를 움켜잡고 있을 때처럼, 그것을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말로 표한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페니스가 자신에게 전혀 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페니스에 대하여는 배뇨의 용도 이외에는 알지 못했다. 특히 흥 미로운 예는 헤벨로크 엘리스(그의 '성심리학 연구' 제13권)가 입수하고 후에 슈테겔이 분 석한 플로리라는 여성의 경우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대단히 총명하고 활동적이며, 예술가 타입이고, 생리적으로도 정상이며 성도착자 가 아닌 한 여성의 경우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배뇨작용이 유년시절에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그녀는 자기 형재들과 오줌을 누며, 조금도 더럽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서로 상대 방의 손을 적셨다. "남성우위에 대한 나의 최초의 생각은, 배뇨기관과 관련되어 있었어요. 그토록 편리하고 근사한 기관을 내게 주지 않은 데 대해, 나는 자연을 원망했어요. 주둥이가 없어진 도자기 병도 이처럼 비참함을 느끼지는 못했을 테지요. 아무도 내게 남성우위와 우월의 원리를 가 르칠 필요가 없었어요. 언제나 내 눈으로 그 증거를 보았으니까요." 그녀는 밖에서 오줌을 누면서 콘 쾌감을 느꼈다. 숲의 한구석에서 낙엽 위에 쏟아져내리는 물의 황홀한 소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끼면서, 그녀는 그것이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이끈 것은 물 속에 오줌을 누는 것이었다. 이것은 많 은 남자아이가 느끼는 즐거움이다. 꼬마 남자아이가 연못이나 개울에 오줌을 누는 그림을 그린 순진하고 비속한 판화류가 많다. 플로리는 드로즈(여성용 팬츠)의 형태 때문에 하고 싶은 실험을 할 수 없어 투덜대고 있다. 그녀는 시골길을 산보할 때, 되도록 오랫동안 오 줌이 마려운 것을 참고 있다가 서서 누는 경우가 많았다. "이 즐겁고 신기한 금단의 느낌 과 서 있어요 분수처럼 솟아날 수 있다는 놀라운 느낌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는 어린이옷의 형태가 여성 일반의 심리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먼저 드로즈 를 벗고, 그 앞부분을 더럽히지 않도록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것이 내게는 큰 골칫거리였 어요. 뿐만 아니라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드러내놓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게 어 째서 수치심이 전방이 아닌 후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설명도 되었어요. 내가 최초로 알 게 된 성적 구별(큰 차이)은, 남자아이는 서서 오줌을 누고 여자아이는 앉아서 오줌을 누 는 것이었어요. 나의 가장 오랜 수치심이 치골보다 둔부와 결부되어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런 인상은 모두 플로리의 경우에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왜냐 하면 그녀에게 소변을 보게 하기 위해, 아버지는 자주 그녀를 피나도록 회초리로 때렸고, 가정부조차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조히즘의 꿈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여선생에게서 매를 맞고 마지못해 오줌을 누면 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쾌감을 느끼는 상상'에 잠기기도 했다. 15세 때 급한 나머지 인적이 없는 거리에 서서 오줌을 눈 적이 있었다. "나의 감각을 분석해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서 있다는 수치심과, 나와 지면 사이에 방 사가 이루어지는 거리의 길이였어요. 옷이 가리기는 했지만, 이런 일을 중대하고도 우스꽝 스럽게 한 것은 이 거리였답니다. 보통의 자세 속에는 친밀한 요소가 있었죠. 어린이로서 는 키가 큰 편이라고는 해도, 방사가 이루어지는 거리의 길이는 뻔해요. 그러나 15세인 나 는 그 거리의 길이를 생각하니, 부끄러웠어요. 앞에서 말한 포스마스의 신식 화장실에서 질겁을 하고 도망친 부인들은 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치마를 걷어올리고 하체에서 그런 긴 방사를 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대단히 망측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그녀는 20세 때에도 한 번 이런 경험을 되풀이하고, 그후에는 자주 하게 되었다. 언제 남에게 발각될지 모르지만 도중에 중단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수치와 쾌감이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 "물(소변)은 내 몸에서 어쩔 수 없이 분출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여 분출한 것 이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어요.(특히 플로리가 강조했 다.) 그것이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 에 없었다는 기묘한 감각은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쾌감이고 미묘한 매력이에요. 자기보다 강한 의지에 의해 물의 흐름이 자기에게서 분출된다는 기분 속에 큰 매력이 깃 들어 있어요." 그 후 플로리는 배뇨편집과 혼합된 마조허즘적 색정증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병적인 사례는 유아기 경험의 여러 가지 요소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런 것이 이처럼 큰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은 확실히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정상으로 자란 여자아이에게 있어 남자아이가 지닌 배뇨의 특권은, 그것이 곧바로 여자의 열등감의 원인이 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라 페니스의 발견이라 는 것만으로도 외상성 증상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의 심리를 잘못 알고 있다. 어린이의 기분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합리적이고 명확한 범주를 설정하지도 못하며 모순을 개의치 않는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보고 "나도 전에 그런 거 갖고 있었어."하고 말하거나 " 내게도 언젠가는 그런 게 생겨." 또는 "나도 그런 게 있어."하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에 없는 단순한 반항심에서 한 말이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양립될 수 없다. 어 린이는(그 데생이 증명하는 것처럼) 현재 눈으로 보고 있는 것보다도, 일단 그렇다고 결정 한 심원한 '유형'을 훨씬 신뢰한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실물을 보지 않고 그리는 경우가 많 고, 언제나 자기의 지각 속에 자기 자신이 끌어들인 것만 보려고 한다. 소쉬르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여, 뤼케의 다음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관찰을 인용하고 있다.(정신발생학과 정신분석, '프랑스 정신분석 잡지', 1933년호) "어린이는 한번 선을 잘못 그으면 그 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대신에 새로 그은 선에 관심을 집중하여, 전에 그었던 선은 전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종 이 위에 계속하여 선이 여러 개 겹쳐져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남성의 강인한 육체구조가 여자아이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자기의 육체는 안 중에 없게 된다. 소쉬르가 따로 인용하고 있는 4세의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처럼 창살문의 문살 사이로 오줌을 누려고 하다가 '물(오줌)이 나오는 조그마한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한 다. 그 아이는 자기가 페니스를 갖고 있다고도 말하고, 동시에 갖고 있지 않다고도 말했는 데, 이것은 피아제가 어린이의 경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참여'에 대한 사고와 부합되어 있다. 여자아이는, 어린이는 모두 페니스를 달고 태어나지만, 부모가 그 중에서 몇몇 아이 의 페니스를 잘라내어 여자아이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 은 어린이의 인위주의를 만족시킨다. 어린이는 자기 부모를 신격화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아제는 말한다. 어린이가 처음부 터 거세 속에서 징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망의 성격을 띠기 위해서는, 이미 그 소녀가 어떤 이유로든 자기의 처지에 불만을 느껴야 한다. 이미 그 소녀가 어떤 이유로 든 자기의 처지에 불만을 느껴야 한다. H. 도이치가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페니스를 보았다는 외적인 일이 내면적인 전개를 추진시키지는 못한다. "남자의 성기를 보고 정신적인 외상을 입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적합한 일련의 사전경험이 선행되었다 는 조건 하에서만 말할 수 있다." 여자아이가 그 마스터베이션이나 노출의 욕구를 충족시 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부모에게서 수음과 관련하여 질책을 받았거나, 남자형제 부터 사랑이나 귀염을 덜 받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면, 그녀는 자기의 불만을 남자의 성 기에 투사하게 된다. "남자아이와의 육체적인 차이에관해 여자아이가 하게 되는 발견은, 그녀가 전부터 갖고 있던 하나의 욕구의 확인, 이를테면 그 합리화이다."(H. 도이치의 '여 성심리' 참조. H. 도이치 여사는 R. 아브라함과 J. H. 람 오핑센의 권위 있는 학설을 인용 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존중은 남자아이에게 위신을 높여주는 동 시에 여자아이의 눈에 페니스가 그 위신의 설명과 상징이 된다는 사실은 아들러가 강조하 고 있는 바와 같다. 남자형제는 뛰어나 보이고 그 형제 쪽에서도 자기가 남자인 것을 자랑 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형제를 원망하고 비관한다. 때로는 이 때문에 어머니를 원망하고 간혹 아버지를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페니스가 절단된 데 대해 자기 자 신을 탓하거나 페니스는 자기 몸 안에 숨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자위한다. 페니스의 부재는, 설사 그 여자아이가 페니스의 소유를 절실히 원치 않을 경우에도, 여 자아이의 운명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 아이가 페니스에서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 부분적이나마 거기에 자기를 반영할(소 외할)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체가 갖고 있는 신비나 위협을 남자아이는 자기의 몸 밖 으로 투사함으로써, 그것들을 자기에게서 멀리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자기의 페니스에서 위험을 느끼고, 거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자기의 '내부'에 대해 느끼는 종잡을 수 없는 불안, 때때로 여성의 일생을 통해 영속되는 불안에 비하면 그것은 그나마 극복하기 쉬운 공포이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큰 불안을 느끼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신의 눈에 훨씬 불투명하고, 생명의 불가사의한 불안 에 더욱 깊이 사여 있다. 남자아이는 자기가 그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제2의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담하 게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가 방사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지주와 초월적 권 력의 한 상징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페니스의 길이를 재고, 친구들과 오줌의 사정거리 를 경쟁하며, 나중에는 발기와 사정이 만족과 도전의 원천이 된다. 반면 여자아이는 자기 의 어떤 부분에도 자기를 육체화할 수 없다. 그 보상으로서 제2의 자아의 역할을 할 수 있 는 외부의 한 물체가 주어진다. 그것이 곧 인형이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상처를 입은 손 가락에 감은 붕대도 '인형'으로 불린다는 점이다. 옷을 입혀 고립된 손가락은 일종의 기쁨 과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는 자기를 거기에 반영하는 과정을 잠깐 실행하여 본다. 그러나 페니스라는 분신, 다시 말해서 페니스라는 자연적인 장난감의 대용을 가장 만족스 럽게 이행하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지닌 작은 형태(그것이 없으면 옥수수이삭이나 나무토 막이라도 무방하다)이다. 크게 다른 점은, 인형은 완전한 형태로 육체를 대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수 동적인 물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자기를 송두리째 반영하고, 이 반영된 자기 를 무생명의 여건으로 간주하게 된다. 남자아이가 자주적인 주체로서의 페니스 속에 자기 를 추구하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자기도 인형처럼 장식되어 귀여움을 받고 싶다고 공상하 며 인형을 장식하고 귀여워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근사한 인형이라고 생각한 다. 칭찬과 꾸중을 통하여, 또는 시각과 말을 통하여 그녀는 '아름답다'또는 '밉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윽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림처럼 아름답게'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한 폭의 그림을 닮으려고 한다. 분장 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동화 속의 공주나 선녀와 자기를 비교해 본다. 이 유아기의 교태를 보여주는 실례는 마리 바슈키르체프(19세기 러시아의 여류화가)에 의해 제공되었 다. 늦게 젖을 뗀 그녀가(그때 그녀는 3세 6개월이었다) 4, 5세 때 남에게 칭찬을 받고, 남을 위해 존재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젖을 뗀 충 격은 보통 경우보다 성숙한 여자아이에게 더욱 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머니의 품 에서 억지로 떨어지게 된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애썼을 것이다. 그녀는 일기에 이 렇게 쓰고 있다. "5세 때 나는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장식하고, 거실로 춤 추러 갔다. 나는 유명한 무용가 파티파였고 온 집안 식구의 눈이 내게 쏠려 있었다...." 이 나르시시즘은 여아의 경우에 매우 일찍부터 나타나, 여자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 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여성의 신비로운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성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이 육체적인 숙명이 아닌 것은 지금까지 고 찰해 온 바와 같다.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구별하는 차이를 여자아이도 여러가지 면으로 알게 된다. 페니스는 하나의 특권을 표시하고 있지만, 어린이가 배설작용에 흥미를 잃고 사회화할 때 그 가치는 당연히 감소된다. 만일 8, 9세가 지나도 남자아이의 눈에 여전히 페니스가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페니스가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사 나이다움의 상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교육과 주위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모 든 어린이는 젖을 떼고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는 허전함을 교태와 시위의 행동으로 메우려 고 한다. 사람들은 남자아이에 대하여는 이 단계를 극복하도록 강요한다. 그를 페니스에 고정시켜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한편 여자아이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공통된 자 기의 객체화를 더욱 견고히 한다. 인형이 이 경향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아이도 곰이나 어릿광대의 인형 속에 자기를 반영하는 경우 가 있다. 페니스나 인형 같은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생활의 총 괄적인 형태 속에서이다. '여성다운' 여성의 본질적인 특성이라 불리는 수동성도 유년시절부터 줄곧 키워진 것이 다. 이것을 생물학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상 그것은 그녀가 교육자 들이나 사회에서 강요받는 숙명이다. 남자아이의 큰 행운은, 타인에 대한 존재방식이 그에 게 자기 자신을 위해 설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기 생활의 수업을 쌓아나간다. 그는 다른 남자아이들을 상대로 강한 기상과 독립을 겨루 고 여자아이들을 경멸한다. 나무에 기어오르고, 친구와 격투를 하고, 거친 유희로 친구들과 겨루고, 자기의 육체를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 투쟁의 도구로 여긴다. 그는 자기의 성기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근육과 뼈에 자랑을 느낀다. 유희, 운동, 씨름, 도전, 시련 등을 통하여 자기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힘을 고루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동시에 그는 엄 한 인내의 교훈을 알게 된다. 그는 구타를 견디고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어렸을 때의 눈물 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기도하고 창조하고 감행한다. 물론 그도 자기를 '남을 위해'존재한다고 느끼고, 자기의 사나이다움에 의문을 느끼며, 그 결과 어른이나 친구에 대 해서도 많은 의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자기의 객관적인 형태에 대한 불안과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 기 위해 자기를 확립하려는 의지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 존재 를 형성해 나가는 것은 뭔가를 행한다(만든다)는 유일한 동작을 통해서이다. 이와는 달리 여성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주적인 존재와 '타자(존재)'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그녀는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자기를 객체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의 자주성을 단념해야 한다. 그녀는 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 취급되 어, 자유를 거부당한다. 일종의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녀가 자기를 에워싼 세계를 이해하 고 파악하고 별견하기 위해,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 적을수록 그녀는 세계 속에서 수단을 찾는 일이 적어지고, 그만큼 주체로서의 자기를 확립하려는 용기가 없어지기 때문 이다. 만약 남자아이에게서처럼 격려를 받는다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같은 약동력과 탐 구심과 진취의 기상과 대담성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자아이가 남성적인 가르 침을 받고 자랐을 경우에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여자아이는 많은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버지가 딸의 이처럼 키우고 싶어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남자의 손에서 자란 여자 는 여성의 결점을 많이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취급하 는 것은 풍습이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마을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바지를 입는 3, 4세의 여자아이 몇을 보았는데, 그 아이들은 다른 어린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쟤 네들은 여자야, 남자야?"하고 실제로 검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들은 자기들 도 여자옷을 입게 해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 여자아이가 대단히 고독하게 살아가지 않는 한, 설사 부모가 남자아이와 같은 생활방 법을 하락하더라도 그 여자아이 주변의 동성 친구들이나 선생들이 분개한다. 아버지의 영 향에 대한 해독제로서 언제나 숙모, 할머니, 사촌들이 대기하고 있다. 보통 딸에 대해 아버 지에게 할당된 역할은 별로 크지 않다. 여성에게 제공된 불운의 하나는 미슐레(19세기 프 랑스의 진보적인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유년기의 여자아이는 여성의 손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남자아이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손에 의해 양육된다. 그러나 남자아이의 남성을 존 중하여, 곧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편 어머니는 딸을 여성의 세계에 완전히 가둬두려고 한다. 어머니와 그 딸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는 좀더 나아가서 고찰하려고 한다. 딸은 어머니 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인 동시에 타인이기도 하며, 어머니는 딸을 무척 사랑하는 동시에 적의를 품기도 한다.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강요하는 것은, 자기의 여자다 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방법이기도 하며, 한편 이에 대해 복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와 동일한 과정은 남색가, 도박꾼, 마약중독자 등 자기가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을 자 랑스럽게 여기는 동시에 수치스럽게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공통되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선전하여 동조자를 얻으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자기에게 딸이 맏겨졌을 때 교만과 원한이 뒤섞인 열성을 가 지고 자기와 비슷한 여자로 만드는 데 몰두한다. 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인자한 어 머니도 딸을 '여자다운 여자'로 키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 사회가 쉽사리 받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에게는 동성친구만 주어지고, 여선생에게 맡 기며,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귀부인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현모양처 속에서 성장하도록 한다. 여성으로서의 운명을 깨우쳐주는 책이나 놀이를 택하게 되고, 여자다운 여자의 귀감이 주 입되고, 부덕을 심어주고, 요리나 재봉이나 가사와 함께 화장, 매력, 수치심 등을 가르친 다. 소중히 다뤄야 하는 불편한 고급 옷을 입히고 귀찮은 머리 매무새를 하게 하며 까다로 운 예의범절을 강요한다. "몸을 똑바로 일으켜야 해. 집오리처럼 걸어다녀서는 안 돼." 우 아해지기 위해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을 억제해야 한다. 말괄량이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 고 심한 운동도 금지되며 싸움은 금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하녀 겸우상이 되라고 강요받는다. 오늘날에는 여권신장 덕분에 여자가 학문을 하고 스포츠에 전념하도록 장려하는 것을 점점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그런 전문분야에서 성공을 거두 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의 경우처럼 야단을 치지 않는다. 세상은 여자에게는 이와 다른 종류의 완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런 전문분야에서의 성공을 더 어렵게 한다. 세상 은 적어도 그녀가 여자로서 그 여자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아이는 처음엔 별 어려움 없이 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 아이는 놀이와 공상의 무 대 위에서 활동한다. 인간의 처세방법을 모방하고 인간의 행위를 본받는다. 공상적인 행위 를 하는 동안은 행위와 존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우월성에 대한 대상을 자기의 운명속에 포함된, 자기가 이미 유희 속에서 실현하고 있는 약속 가운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자기의 유치한 세계만을 알고 있는 소녀에게는, 처음에 어머니 가 아버지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세계를 모권제도의 일종 처럼 상상한다. 그녀는 어머니를 모방하고, 어머니와 동화한다. 때로는 역할을 거꾸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커지고, 엄마가 작아지면..."하고 여자아이는 말하고 싶어한다. 인형은 그녀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기이기도 하다. 진짜 아기도 그 어머니에 게 하나의 '제2의 자아'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 두 기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 자아이가 자기 인형을 꾸짖으며 벌을 주고 이어서 토닥거려줄 때,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자기를 지키는 동시에, 어머니의 권위를 지니게 되는 셈이다. 그녀는 모녀의 두 요소를 동 시에 갖고있다. 그녀는 자기의 인형을 신뢰하고 교육하고 자기의 절대권한을 확립하는가 하면 때로는 인형의 팔을 잡아비틀고 때려주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녀는 인형을 통하여 주체성의 확립과 소외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어머니가 이 상상의 생활에 가담하는 경우가 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인 형을 상대로 아빠, 엄마놀이를 한다. 이것은 남자를 배제한 부부이다. 여기에 선천적으로 신비로운 '모성본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소녀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머니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또 주위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들은 이야기나 읽은 책, 그녀의 작은 경험은 모두 이것을 확인해 준다. 그녀는 그와 같은 미래의 흡족한 행복에 감격하도 록 유도하고, 그것이 앞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형이 주어진 다. 그녀의 사명은 명령적으로 주어진다. 아기를 기르는 것이 여자의 숙명인 것처럼 생각 하도록 가르치고 남자아이 이상으로 자기 '가정'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한다. 특히 생식의 신비에 호기심을 갖게한다. 여자아이는 아기가 양배추 밑에서 태어난다거나 황새가 데리고 온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좀처럼 믿지 않는다. 특히 어머니에게서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태어나면, 여자아이는 곧 아 기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래의 어머니는 옛날 어머니들처 럼 이것을 비밀로 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이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는 감탄하는 것이 보통이다. 해산은 그녀에게는 마치 마법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해산의 생리적인 의미를 다 알고 있지는 않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여자가 임신을 하는 것은 어떤 음식을 먹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동화의 주체이다.(동화 속의 여왕이 어떤 과일이나 생선을 먹은 후에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 이 때문에 일부 여성들은, 임신과 소화기능 사이에 어떤 관 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의문이나 발견이 모여서 여자아이의 관심의 대부분을 차 지하여, 그 상상을 키우게 한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서 융(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1875-1961)이 수집한 사례를 들고자 한다.(융의 '어린이 정신의 갈등'에서) 이것은 같 은 시절에 프로이트가 분석한 한스 소년의 예와 여러 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 다. 안나가 아기의 출처에 대해 부모에게 묻기 시작한 것은 3살쯤 되었을 무렵부터이다. 처 음에 그녀는 아기가 '어린 천사'라는 말을 듣고,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서 아기의 모습으 로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라고 상상한 모양이다. 4살 때 그녀에게 동생이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으나, 해산한 이튿날 어머니가 잠든 것을 보 고 그녀는 의아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이렇게 물었다. "엄마 는 죽으려고 한 게 아니었어?" 그녀가 며칠 할머니 집에 가 있다가 돌아왔더니, 간호사가 어머니의 시중을 들고 있었 다. 그녀는 처음엔 간호사를 싫어했으나 얼마 안 가서 간호사놀이를 하면서 놀게 되었다. 그녀는 동생을 질투하고 비웃고 혼잣말을 하고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리며 다시 할머 니에게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녀는 바른 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여러 번 투덜댔다. 그녀는 아기의 출생에 대해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아기를 갖더라도 간호사로서 갖는 것과 어머니로서 갖는 것은 차이 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그녀를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도 언젠가는 엄 마 같은 여자가 되는 거야?" 그녀는 밤중에 큰 소리로 부모를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 고 자기 주위에서 메시나의 대지진이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포의 구실로 삼 아, 이 지진에 대해 자주 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피는 어째서 나보다 나이가 적어? 프리츠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 있었어? 하늘나라에 있었어?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왜 지금 하늘나라에서 내려왔어?" 어머니는 드디어 그녀에게 동생은 마치 나무나 풀이 땅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자기 뱃속에서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안나는 그것이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물었다. "동생은 혼자 나왔어?" "그래." "그렇지만 걷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나왔어?" "기어서 나왔어." "그럼 거기 구멍이 있어?"(그녀는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입에서 나 왔어?"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동생을 데리고 온 것이 황새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오빠는 여기서 말하는 오빠는 그녀의 놀이에서 큰 역할을 했던 가공의 큰 오빠를 가리킨다) 이탈리아에 있는데 천과 유리로 된 깨지지 않는 집을 갖고 있어." 그 후부터 그녀는 지진에 대한 흥미를 잃고, 분화의 사진을 보여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 다. 인형을 상대로 아직도 황새 이야기를 꺼냈으나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곧 그 녀는 새로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아빠는 왜 자리에 누워 있어? 아빠도 뱃속에 풀이 났어?" 그녀는 어느날 꿈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노아의 방주(여러 가지 동물을 모은 장난감)의 꿈인데, "아래쪽에 뚜껑이 열리게 되어 있어서, 작은 동물은 모두 이 뚜껑 때문에 아래로 떨어졌어." 실제로 그녀의 노아의 방주는 지붕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에 그녀는 다시 악몽 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역할을 궁금하게 여긴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임산부가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온 그 이튿날에, 안나는 어머니 앞에서 스커트 밑으로 인형 을 집어넣었다가 그 인형의 머리를 슬슬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 아기가 나오고 있어. 벌써 거의 다 나왔어." 얼마가 지나 오렌지를 먹고 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삼켜서 뱃속 아래까지 쑥 내려가게 해야지. 그럼 아기가 생 길 거야." 어느날 아침, 아버지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가 아버지의 침대에 뛰어올라가 배를 깔고 두 다리를 파닥거리면서 말했다. "그렇지, 아빠는 이렇게 하는 거지?" 다섯 달 동안 그녀는 이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의혹을 표시하여 아버지가 자기를 물에 빠뜨리려 했다고 멋대로 지 껄였다. 어느날 정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땅에 씨를 뿌리면서 놀고 있던 안나가 아버지에게 물 었다. "눈은 머리에 심는 거야? 그리고 머리털도?" 아버지는 그것은 발육하기 전부터 이미 아기의 몸에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프리츠는 어떻게 엄마 속으로 들어갔어? 누가 아기를 엄마 속에 심었어? 아빠도 마찬가지야. 누가 아빠를 아빠의 엄마 속에 심은 거야? 그리고 프리츠는 어디로 나왔어?"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그녀는 자기의 생식기 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생은 여기서 나왔어?" "그래." "동생은 어떻게 엄마 속에 들어갔어? 누가 엄마 속에 씨를 뿌렸어?" 아버지는 씨를 뿌린 것은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아주 만족한 듯이 보였다. 이튿 날 안나는 어머니를 놀려주었다. "아빠에게서 들었어. 프리츠는 꼬마천사였는데 황새가 데리고 왔대." 그녀는 전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정원사들이 오줌을 누는데 아버지도 함께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했다. 그녀는 5살 때 거의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동요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것이다. 소녀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이처럼 분명한 의문을 갖지 않거나, 이 점에 관해 부모가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앞 치마 밑에 방석을 집어넣고 임신 흉내를 내거나 치마주름을 이용하여 인형을 요람 속으로 떨어뜨리거나 인형에게 자기의 젖을 빨리기도 한다. 남자아이도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모 성의 신비에 감탄한다. 어린이는 모두 사물의 내부에 숨어 있는 부를 예감하는 오묘한 상 상력을 갖고 있다. 어린이는 저마다, 예컨대 보다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인형이나, 다른 상자를 포함하고 있는 상자나, 한복판에 작은 복제가 붙은 삽화처럼 '끼워넣는 경이'에 민 감하다. 어린이는 누구나 그들의 눈앞에서 싹을 까보이거나 알 속에 들어 있는 새끼를 보 이거나 화분 속에 '수중화'의 경이가 펼쳐지거나 하면 황홀해한다. 어떤 남자아이는 사탕으 로 만든 작은 알맹이가 가득찬 부활절의 알을 열자마자 "야, 엄마다!"하고 외쳤다. 자기의 뱃속으로 아기를 낳는 것은, 마치 요술처럼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는 선녀와 같 은 신비로운 힘을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많은 남자아이는 자기들에게 이와 같은 특권 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비관한다. 남자아이들이 나중에 새 둥지에서 알을 훔쳐내거나 어린 초목을 짓밟는 등 일종의 분노로 자기 주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기들에게는 생명을 꽃피울 힘이 없는 데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자아이는 언젠가 그것 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감격한다. 인형놀이에 의해 구체화되는 이 희망 이외에, 가정생활이 또한 여자아이에게 자기확립의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가사의 대부분은 아이도 할 수 있다. 남자아이는 보통 가사가 면제 되지만, 여자아이는 쓸거나 털거나 야채 껍질을 벗기거나 아기의 몸을 씻어주거나 불에 올 려놓은 수프냄비를 지켜보아도 무방할 뿐 아니라, 또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특히 장녀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곧잘 돕는다. 어머니는 편리해서인지 적의나 사디즘에서 많은 부분을 장녀의 손에 맡긴다. 그래서 장녀는 일찍부터 진실한 세계에 합류된다. 자기가 중 요하다는 의식은 자기가 여성임을 승복하기 쉽게한다. 그러나 행복한 무상성이나 어린이다운 무관심 등은 그녀에게 거부된다. 나이에 비해 일 찍 여성이 된 그녀는 이 특수화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너무 일찍 깨닫게 된다. 그녀는 벌써 어른이 되어 성년기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에게 하나의 특수성을 부여한다. 여자아이가 과중한 일을 짊어지게 되면, 일찍부터 노예가 되고 기쁨이 없는 삶 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의 힘에 알맞는 노력만 요구될 때에는, 자기가 어른처럼 유능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어른과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된 데 기뻐한다. 이 연대책 임은 어린이와 주부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다. 전문직업을 갖고 있는 성인남자는 여러 해 동안의 수업에 의해 유아단계를 벗어나게 된 다. 어버지의 역할은 남자아이에게 깊은 신비에 싸여 있다. 남자아이의 경우, 미래의 자기 모습인 어른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의 역할은 여자아이의 손이 닿는 데 있다. "아직 어려도 벌써 여자예요."하고 그녀의 부모는 말한다. 그래서 흔히 여자 아이는 남자아이보다 조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여자아이 쪽이 어른의 단계에 더욱 접근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의 여성에게는 전통적으로 이단계가 보다 유아적 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자아이는 스스로 조숙하다고 생각하고, 아기 옆 에서 '꼬마 엄마'노릇하기를 좋아한다. 어른인 체하여 어른스럽게 말하고 명령하며 어린이 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형제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어머니와 대등한 입장에서 말한 다. 이런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 히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성장함에 따라 그녀는 남자아이들에 대해 그들이 남성이라는 점 을 부러워한다. 부모나 조부모가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입밖에 낼 때가 있다. 혹은 여자아이보다도 남자아이에게 더 큰 애정을 쏟기도 한다. 남자아이에 대 해서는 더욱 진지하게 존중하는 태도로 말을 걸고, 많은 권리도 인정한다. 남자아이 쪽에 서도 여자아이를 무시한다. 여자아이를 끼워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놀고 여자아이를 바 보로 취급한다. 특히 여자아이를 '오줌싸개'라고 불러 어렸을 때의 숨겨진 굴욕감을 되살려 놓는다. 프랑스의 남녀공학 학교에서는 남자학급이 여자학급을 억압하고 박해한다. 만일 여자아이가 지지 않으려고 남자아이와 겨루기라도 하면 곧 심한 꾸중을 받게 된다. 여자아 이는 남자아이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활동을 할 때 이중적인 의미로 그것을 부러워한다. 즉 그녀들은 자기의 힘을 세계에 확립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소원을 갖는 동시에 자기들에 게 강요된 열등한 위치에 대해 항의한다. 특히 그녀들은 나무, 의자, 지붕 위에 오르는 것 이 금지된 것을 야속하게 생각한다. 아들러는 상하의 개념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많은 영웅신화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간적인 상승개념은 정신적인 우월을 의미한다. 나무나 지붕 위에 오르는 것은, 지상의 주체로서 주어진 세계의 피안에 떠오르는 것이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도전의 명분이 된다. 이런 용감한 행위가 금지되어, 나무 나 방위 밑에 앉아서 의기양양한 남자아이를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여자아이는 몸과 마음 모두 남자보다 열등한 자로 느낀다. 달리기, 높이뛰기에서 뒤에 처지거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넘어지거나 밀려나기만 해도 같은 기분이 된다. 어린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세계는 점점 확대되어 남성의 우위가 더욱 확고해진다. 어머 니에의 동화는 이미 만족스러운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자아이가 여성으 로서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하기 위 해서이다. 주부들의 사회가 그녀의 눈에 특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녀는 주부가 되기를 원 한다. 그러나 교제, 공부, 놀이, 독서가 그녀를 어머니에게서 떼어놓게 되면 세계의 지배자 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이 페니스의 발견 이상으로 자 기 자신에 대한 그녀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여자아이는 가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차츰 남녀의 계급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권력은 남발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빛나 보인다. 사실상 가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중대한 일에 대해, 어머니가 명령하거나 칭찬하거나 벌하는 것은 으레 아버지의 이 름으로 행해지고 아버지를 통해서이다. 아버지의 생활은 신비로운 위신에 싸여 있다. 아버 지가 집에 있는 시간, 아버지가 일하는 방, 아버지를 에워싼 물건들, 아버지의 일, 아버지 의 습성 등은 모두 일종의 신성함을 띠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아버지이며 가정의 책임자이고 우두머리이다. 아버지는 보통 밖에서 일하므로 가정이 외계와 연결되는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이다. 아버지는 파란만장하고 광대무변하며 힘겹고 희한한 세계의 화신이 다. 아버지는 초월이고 신이다. 여자아이가 자신을 안아올리는 아버지의 억센 팔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는 육체 속에서 육감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옛날에 이시스(이집 트신화에 나오는 다산의 여신)가 라에게, 대지가 태양에게 지위를 빼앗기는 것처럼, 어머 니는 아버지에게 지위를 빼앗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자아이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녀는 장차 자기도 전능한 어미니 같은 여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권위있는 아버지처럼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어머니와 연결시키고 있던 것은, 적극적인 경쟁심이었다. 그녀는 아버 지에게서는 소극적인 찬동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자아이 쪽은 일종의 대항의식 을 통하여 아버지의 우월성을 파악한다. 한편 여자아이는 무력한 찬탄으로 그것을 받아들 인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성적인 욕망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 서도 말한 바와 같다. 그것은 복종과 찬미 속에 자기를 객체화하는 데 동의하는 주체의 철 저한 포기이다. 아버지가 애정을 표시하면, 그 딸은 자기의 존재가 훌륭히 정당화된다고 느낀다. 그녀는 타인이 애써 손에 넣어야 하는 가치를 쉽게 차지한다. 그녀는 충족되고 신 격화된다. 그녀가 이 충족감과 평화를 그리워하여 그것을 한평생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 애정이 거절당하면 그녀는 영구히 자기는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또는 자기에 대한 칭찬을 다른 데서 찾고, 자기 아버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의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가 세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러 나 대체로 모든 남자는 남성으로서의 위엄을 다소나마 갖고 있다. 그들을 일부러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 오빠, 숙부, 친구의 아버지, 집에 오는 남자들, 선 생님, 목사, 의사 등이 여자아이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우선 남성으로서이다. 성인여자가 ' 남자'에게 보여주는 감격적인 존경은, 남자를 우상화하기에 충분하다. 모든 것이 여자아이에게 이 차이를 확신시켜주고 있다. 여자가 받는 역사적, 문학적인 교양, 여자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용되는 노래나 동화 등은 모두가, 남자를 찬양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제국, 프랑스도, 그밖의 모든 국가도 남자가 세웠으며, 지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도구를 발명한 것도 남자이고, 지구를 다스리고, 그것을 조각이나 그림, 서류로 가득 채운 것도 남자이다. 어린이의 문학은 신화도 동화도 이야기도 모두 남자의 교만과 욕구가 만들어낸 신화를 반영하고 있다. 여자아이가 세계를 개척하고, 거기에서 자 기의 숙명을 알게 되는 것은 남자의 눈을 통해서이다. 남성의 우위는 압도적이다. 여성으 로서 유일한 잔 다르크에 비해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다비데, 아킬레스, 랜스트르, 뒤게 클랭, 바이야르, 나폴레옹 등 얼마나 많은 남성이 있는가. 더욱이 잔 다르크는 배후에 대천 사 미카엘의 남성적인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유명한 여성의 전기만큼 따분한 것은 없다. 위대한 남성의 전기와 비교하면 그것은 빛바 랜 존재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떤 남자영웅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브는 그녀 자신을 위 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반려자로서 그의 옆구리에서 끄집어내어 만들어졌다. 성서 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룻(구약성서에 나오는 정숙한 여자)도 결국 남편을 발견한 것뿐이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루스 앞에 무릎을 꿇고 유태인의 용서를 받았 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드개의 수중에서 한낱 순종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유디트는 좀더 대담했지만 그녀 역시 승려에게 복종했으며, 그녀의 공적 또한 젊은 다비데의 순수하고 빛 나는 승리에는 비교도 안 된다. 신화속의 여신은 경박하여 유피테르 앞에서는 크게 위축된 다. 프로메테우스가 오만하게 천국의 불을 탈취하는 데 비해 판도라는 재앙의 상자를 몰래 연다. 물론 동화 속에도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는 마녀나 노파가 있기는 하다. 그 중에서도 안 데르센의 '천국의 뜰'에 나오는 풍모신의 모습은 원시적인 대여신을 방불케 한다. 그녀의 장승 같은 네 아들은 무서움에 떨면서 그녀에게 복종한다. 그녀는 아들의 행실이 나쁠 때 에는 때려주고 포대 속에 가둔다. 그러나 이들은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 선녀나 인어, 물의 요정이 한층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존재는 불안정하며, 개성이 뚜렷하지 않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갖지 않고 인간세계에 개입한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여 자가 된 날부터 사랑의 멍에를 알게 되며, 이에 따르는 고통이 그녀의 운명이 된다. 고대의 전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이야기에서도 남성은 특권적인 영웅이다. 세귀르 부인 (19세기 프랑스의 아동문학가)의 작품만은 신기하게도 하나의 예외이다. 그녀는 일종의 모권사회를 그려 그 속에 나오는 남편은 우스꽝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아 버지의 모습은 현실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광의 후광에 싸여 있다. '작은 아씨들'(미국의 여류작가 L.M. 올콧의 가정소설)은 부재에 의해 신성화된 아버지의 비호 아래 전개된다. 모험소설 속에서 세계일주를 하고, 수부가 되어 항해하며, 밀림속에서 빵나무 열매를 먹고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은, 으레 남자아이이다. 중대한 사건은 모두 남자가 일으킨다. 현실이 이런 소설이나 동화를 입증하고 있다. 신문을 읽어도, 어른의 대화를 들어도 옛날이나 지 금이나 여전히 세계를 좌우하고 있는 것은 남자들이다. 그녀가 숭배하는 국가원수, 장군, 탐험가, 음악가, 화가는 모두 남자이며, 그녀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결치게 하는 것도 역시 남자이다. 이 위광은 초자연적인 세백에도 반영된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여성의 생활에 미치는 영 향은 크다. 어머니에게 남자아이 이상으로 지배받는 여자아이는 종교적인 감화도 더욱 크 게 받기 쉽다. 서양의 종교에서는 아버지인 신은 남성이며, 특히 남성적인 특질, 즉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긴 금발의 수염을 기 른 살과 뼈로 된 남자이다.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천사에게는 성별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의 이름에 미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에서의 신의 사도는 교황도, 신도들을 그 반지에 입맞추게 하는 사교도, 미사를 드리고 고해실에서 신도의 무릎을 꿇게 하는 신부도 모두 남자이다. 믿음이 깊은 소녀에게 영원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가 현세의 아버지와 유지하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 그 관계가 상상의 기반 위에 전개되기 위해 그녀는 더욱 완벽한 권리포기도 경험한다. 카톨릭은 특히 소녀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성모는 무릎을 꿇고 천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주의 종입니다."하고 대답한다. 막달라 마 리아는 그리스도의 발밑에 무릎을 굻고 자신의 긴 머리칼로 그 발을 씻는다. 성녀들은 무 릎을 꿇고, 빛나는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사랑을 맹세한다. 여자아이는 무릎을 굻고 향기 에 싸여서 신과 천사의 시선, 즉 남자의 시선에 몸을 던진다. 에로틱한 언어와 여자가 사 용하는 신비로운 언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예컨대 어린 그리스도에 대해 성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시선을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입맞 춤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신의 사랑으로 참아내겠으니, 당신의 사랑으로 이 몸을 불태워 주소서.... 사랑하는 이여, 적어도 당신의 부드러운 첫 미소를 생각하는 것만은 허락해 주소서. 아, 이 불타는 열광을 안은 채 당신의 품에 이 몸을 숨게 하소서! 그대의 숭고한 시선에 매혹되었으면... 그대의 사랑의 먹이가 되었으면... 언젠가는 그것 을 바라리라. 그대는 나를 잡고 사랑의 보금자리로 이끌어가겠지요. 끝내는 나를 이 불타 는 심연에 빠뜨려 영원토록 행복한 희생자가 되게 하겠지요. 그러나 이처럼 격한 감정이 언제나 성적인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성감은 오히려 어린시절부터 남자에 대해 느끼고 있던 종교적인 감정이 스며든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여자아이는 고해승 옆에서, 심지어 쓸쓸한 제단 아래서도 그녀가 후에 애인의 품에 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자의 사랑은, 하나의 의식이 그 의식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 객체화하는 경험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깊은 여성 이 교회에서 느끼는 것도 이런 수동적인 쾌감이다. 꿇어엎드려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는 체념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무 릎을 꿇고 승천한다. 신이 팔에 몸을 맡기고 구름과 천사에 에워싸여 승천할 수 있다. 이 놀라운 경험을 그녀는 지상에서의 미래로 옮기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이밖에 여러 가지 방 법으로 이런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그녀가 남자의 품에 몽롱하게 몸을 맡겨 영광의 하늘나라로 옮겨지도록 권유한다. 여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고 신데렐라(모두 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이고 백 설공주이다. 사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참이야 한다. 유행가나 동화에서 젊은이는 여자를 찾 아 모험을 무릅쓴다. 그는 용을 단칼에 때려 눕히고, 거인을 쓰러뜨린다. 여자는 성, 궁전, 정원, 동굴 속에 갇혀 있거나 사슬에 매여 있거나 잠들어 있다. 여자는 기다리고 있다. "언 젠가는 나의 왕자가 찾아온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올 것이다. 내 애인이 될 사람은...." 유행가의 가사가 그녀에게 인내와 희망의 꿈을 갖게 한다.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 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설사 굳세고 용감한 성격을 갖고 있을지라도 모든 여주인공이 동경하는 것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에게 미모 이외의 장점은 요구되지 않는 다. 육체적인 외모에 대한 걱정이 여자에게 문자 그대로 강박관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왕이든, 양치든 처녀든 사랑과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참혹하게도 추하다는 것은 근성이 나쁜 것과 결부되어, 추녀에게 불운이 닥칠 때에는 과연 운명이 그녀의 죄를 벌했는지, 아니면 추함을 벌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흔히 빛나는 미래가 약속된 미녀가 회생자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주느비에브 드 바라방(유럽에 널리 퍼져 있는 전설의 여인. 남편 지그프리드의 의심을 받아 깊은 숲속으로 추방되어 목숨을 잃는다)이나 그리셀리디스(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생각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괴로움이 그 속에 불안을 조성한다. 여자가 가장 즐거운 승리를 거두는 것은 비참한 심연에 떨어졌을 때이다. 상대가 신이든 남자이든, 여자아이는 가장 철저한 권리포기에 동의함으로써 마조히즘을 즐긴다. 사자의 발톱에 찢겨 선혈로 물들인 성녀 블랑딘, 유리관 속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백설공주, 잠자는 미녀, 실신한 아탈라(샤토브리앙의 소설'아탈라'의 여주인공), 멍들고 상처입고 무 릎을 굻고 치욕을 당한 가엾은 여자주인공들이 그 후배들에게 학대받고 버림받고 체념한 미녀의 매혹적인 위광이 이런 것이라고 가르친다. 형제가 영웅놀이를 하는 것과는 달리 여 자아이는 순교자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이교도들이 그녀를 사자 에게 던지고, 푸른 숲속으로 추방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념하고 고민하고 죽는다. 그리고 그 이마에는 후광이 비친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도 나는 언제나 남자들의 애정을 끌어 그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들에 의해 구제되고, 그들의 팔에 안겨 죽고 싶어 했어요." 하고 노아유 부인은 쓰고 있다.(자전 '나의 생애의 서'에서) 이런 피학성 꿈의 뚜렷한 예는 마리르 아르두앵(현대 프랑스의 여류작가)의 '검은 돛'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일곱 살 때 어느 늑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최초의 남성을 만들었다. 그는 훤 칠한 키에 젊었으며 땅바닥까지 닿는 긴 소매가 달린 검은 사탱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금발은 어깨 위에 탐스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에드몽이라고 불렀 다... 이윽고 내가 그에게 두 사람의 아우를 마련해 주는 날이 왔다... 이 삼형제, 즉 에드 몽, 샤를, 세드릭은, 모두 검은 사탱옷을 입고 금발에 키가 크고 몸이 늘씬하여, 나는 묘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명주신을 신은 그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고, 그 손도 무척 부드 러워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들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가 되었다. 나는 오빠들의 횡포에 굴종하고 그들의 의사대로 움직인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했 다. 나는 큰오빠인 에드몽이 나의 생사여탈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나 에게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회 초리로 때렸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공포와 비탄으로 기가 질려 대꾸도 말도 찾 지 못한 채 빠른 말로 "네, 전하." "아뇨, 전하."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내 스스로 바보라고 느끼는 기묘한 쾌감을 맛보았다... 그가 나에게 주는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에는 나는 속으로 '고마워, 전하.'하고 중얼거렸다. 이윽고 고통으로 기절 할 지경에 이르는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고함을 지르지 않기 위해 내 입술을 그의 손으로 내리눌렀다. 그러면 어떤 충동으로 가슴이 메어질 듯하여, 나는 행복의 절정에서 죽어버리 고 싶은 상태에 이르렀다. 아직 그런 시기가 되기 전부터, 여자아이는 자기가 연애할 나이가 되었다고 공상한다. 아홉 살이나 열 살쯤부터 화장하기를 즐기고, 가슴에 물건을 넣어 부풀리고, 성인여자처럼 치장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아이를 상대로 에로틱한 경험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여 자아이가 남자아이와 함께 방구석에 숨어 '서로 보여주기'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 은 단지 성적 호기심에서이다. 사실 여자아이가 사랑을 꿈꾸는 상대는 어른이다. 완전히 공상적인 인물인 경우도 있고, 현실에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어린이는 그 남자를 멀리서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콜레트 오드리(현대 프랑스 의 여류작가)의 회상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 예는, 이런 유년기 몽상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다섯 살 때 사랑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유년시절의 유치한 성적 쾌락, 예컨대 식당의 의자 하나에 올라타거나 잠들기 전에 자기 몸을 애무하면서 느낀 만족과 그것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 감정과 앞의 쾌락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 양쪽 모두를 나는 조심스럽게 감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청년에 대한 나의 사랑은, 잠들기 전에 그를 생각하고 멋진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프리바 (파리 근처의 도시 이름)에서 나는 아버지 밑에 있는 과장들을 차례로 모두 사랑하게 되 었다... 나는 그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 은 나의 사랑의 꿈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밤에 잠자리 에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너무 어리고 겁이 많은 데 대해 복수를 했다. 그 방법은 상당히 계획적이었다. 그를, 그 젊은이를 눈앞에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나를 변형시켜 내부에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성숙한 여자 가 될 뿐 더 이상 내 자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18세의 나이에 미인이 된다. 봉봉상자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장방형의 납작한 봉봉상자에는 비둘기 무리에 에워 싸인 젊은 처녀 두 명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 갈색 고수머리에 긴 모슬린 옷을 입은 처녀였다. 우리는 109년 동안 헤어졌다가 만난 것이다. 그는 거의 옛날 그대로 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 멋진 처녀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녀 쪽에서는 그에 대한 기 억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으나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대한다. 나는 이 첫번째 만남을 위해 근사한 대화를 생각해 냈다. 어어서 오해가, 극히 곤란한 구애가, 그에게는 낙담과 질투의 참담한 시간이 되게 한다. 으윽고 그는 참을 수 없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말없이 듣다가 그가 낭패라고 생각할 때, 자기는 그를 줄곧 사랑해 왔다고 고백하고, 두 사람은 잠시 포옹한다. 장소는 보통 공 원 벤치 위에서 저녁때 이루어졌다. 나는 서로 바짝 접근한 두 그림자를 바라보고, 속삭이 는 소리를 듣고, 동시에 육체와 육체의 따뜻한 접촉을 느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완전 히 흐리멍덩해져서... 결혼까지 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이튿날 세수할 때, 나는 잠시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거울 속에 비친 거품투성이가 된 얼굴이 왜 나를 황홀하게 하고(다른 때엔 내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차게 하는지 나 는 알 수 없다. 미래의 저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좀 얼떨떨하고 흐 리멍덩한 이 얼굴 표정을 나는 몇 시간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한번 씻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난다. 어린이의 평범한 얼굴이 다시 나타나 이 제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놀이나 몽상은 여자아이를 수동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미 자기를 여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 고 자기를 손상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설사 권리포기에 매력이 있어도, 손상은 불쾌한 일이다. '남자'나 '연애'는 아직 멀리 미려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지금 여자아이는 그 형 제들과 마찬가지로 능동성과 자주성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의 무거운 짐은 어린이들에게는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다. 책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른의 비호 아래 안전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도파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 생명에 대한 자발적인 약동과 놀이와 웃음과 모험을 즐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연히 여자아이도 어머니의 세계를 따분하고 숨막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의 권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남자아이가 받고 있는 권위보다도 훨씬, 날마다 신변에서 강하게 발휘되는 권위이다. 콜레트가 애정을 다해 쓰고 있는 '시도'(콜레트의 어머니의 별명)의 경우처럼, 이러한 권 위가 포용력이 있고 신중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머니가 마치 사형집행인 처럼 어린이에 대해 자기의 지배본능과 사디즘을 만족시키는 정신이상에 가까울 경우(V. 르딕의 '질식', S. 드 테르비뉴의 '어머니의 원한', H. 바쟁의 '독사를 손에 들고' 참조)는 예외로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를 상대로 하여 지배적인 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할 것을 주장 하는 특권적인 개체이다. 이런 방법은 어린이를 반항으로 인도한다. C. 오드리는 정상인 여자아이가 정상적인 어머니에 대해 갖는 반항을 그리고 있다. 나는 설사 그것이 아무리 결백한 것이라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 앞 에서는 절대로 결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른이 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로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진정되지 않는 잔인한 상처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언제 쑤셔댈지 알 수 없었 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어머니가 지니치게 엄격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어머니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니, 아니,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탓하고 싶었던 것은, 그 권위도 아니고 또 독단적인 명령이나 금지도 아 니다. 그것은 단지 나를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그런 말을 입밖에 내기도 했다. 입밖에 내지 않을 때에도 눈과 입모습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간혹 부 인들에게 아이들은 벌을 받고 나면 훨씬 얌전해진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나의 목 에 걸려서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토해버릴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이 분노 때문에 어머니 앞에서 죄의식을 느꼈고, 내 자신에게는 굴욕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두려워하여, 과격한 말이나 불손한 태도 이외에는 복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것은 또한 나의 영광이기도 했다. 상처가 남아 있는데 다가 단지 억압, 순종, 징계, 굴욕만을 되풀이하게 하는 무언의 광포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정복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위신을 잃을 때가 많은데, 그럴 경우 이 반항은 더욱 가열된다. 어머니는 기다 리고 참고 불평하고 울부짖고 언쟁하는 여자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이처럼 손해 보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이 존경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 어머니는 희생자로서 멸시를 받고, 시끄러운 여자로서 미움을 받는다. 어머니의 숙명은 무미건조한 반복의 좋은 예로 생각된다. 어머니에게 인생은 끝없이 어리석은 반복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 어머니는 주부 의 역할 속에 갇혀 신장하려는 생명을 가로막고 장애가 되고 부정이 된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를 닮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는 여자로서의 굴종에서 벗어난 여 성을(여배우나 작가나 선생들을) 존경한다. 또한 스포츠나 공부에 열중하고, 나무에 기어 오르고, 옷을 찢고, 남자아이와 대항하려고 한다. 대개의 경우에 동성인 친구를 찾아가서 마음속을 털어놓는다. 그것은 연애처럼 배타적인 우정으로서, 성에 관한 비밀도 나눈다. 그 여자아이들은 자기들이 얻은 지식을 교환하고 비평한다. 그중의 한 아이가 친구의 오빠를 사랑하여 삼각관계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소냐는 나타샤의 친구이 며, 그 오빠인 니콜라이를 사랑하고 있다. 어느 경우에나 이런 우정은 비밀에 싸여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여자아이들은 비밀 을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밀로 한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호기심에 대립되는 은폐에 대해 반항한다. 이것은 자기에게 중요성을 부여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중요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어른들의 생활에 끼여들려고 하며, 어른을 주제로 자기가 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엉터리 소설을 창작한다. 여자 친구들과 함께 남자아이들의 경멸에 대해 경멸로 대응하는 척한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남 자아이들의 경멸에 대해 경멸로 대응하는 척한다. 자기네들끼리 무리를 지어 남자아이들을 놀리고 무시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자기네들끼리 무리를 지어 남자아이들을 놀리고 무시 한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자기들을 대등하게 대하기만 하면 크게 기뻐하며 그 아이들의 의 견을 존중한다. 자기들도 특권계층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원시 유목민의 경우, 여성을 남성의 우위에 굴복시키는 것과 같은 감정이, 철이 든 소녀 에게는 자기 운명의 거부로 나타난다. 그녀 내부의 초월성이, 철이 든 소녀에게는 자기 운 명의 거부로 나타난다. 그녀 내부의 초월성이 내재성의 사소함과 부조리를 비난한다. 그녀 는 예의범절에 억압되고 옷차림에 구속을 받고 가사에 얽매이고 모든 비약이 금지되어 있 는 데 대해 분개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조사를 하고 있으나, 거의 같은 결과로 나타난 다. 남자아이는 하나같이-옛날의 플라톤처럼-여자아이가 되는 것은 질색이라고 말한다. 여 자아이는 거의 모두 남자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하벨로크 엘리스의 통계에 의하면, 여자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아이는 100명에 한 명 정도였지만 여자아이는 75 퍼센트 이상이 성이 바뀌기를 원하고 있다. 칼 피팔의 조사(샤를 보두앵이 '유년기의 심리' 에 대한 저서에서 보고하고 있다)에 의하며, 12세에서 14세에 이르는 20명의 남자아이들 중에서 18명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여자아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명의 여자아이 중에 19명은 남자아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들은 남자가 되고 싶은 이유 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아이가 좋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여자아이에게 겁을 주어 재미도 맛볼 수 있다. 남자아이라 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남자아이는 자유롭다... 남자아이의 놀이가 더 재미있다... 남 자아이는 옷차림에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 마지막 불만은 자주 나온다. 여자아이는 거의 모두 옷이 거추장스러워 마음대로 움직 일 수 없는데다가 더러워지기 쉬운 밝은 색깔의 스커트나 옷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불평 한다. 12, 13세경이 되면 대다수의 여자아이는 문자 그대로 '선머슴애(말괄량이)', 즉 남자 아이로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다. 그녀들은 그것을 마치 박탈행위나 부정행위처럼 괴 로워할 뿐 아니라, 그녀들에게 주어진 제도는 불건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으로 생명의 충일이 저지되고, 쓸모없는 활력은 신경쇠약에 빠지게 한다. 너무 얌전한 일은, 그녀들의 넘치는 정력을 다 소모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따분하다. 이 때문에 자기가 고민하 는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침울하고 로맨틱한 공상에 빠진다. 그녀들은 이와 같은 안이한 도피취미를 몸에 익히고, 현실감각을 상실한다. 또 자기 감정에 분별없이 몸을 내맡긴다. 그녀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대신 마냥 지껄여대고,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 진지한 말을 섞 으려고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도 않아 자기도취의 감정 속에 위로를 구 한다. 그녀들은 자기를 소설의 주인공처럼 생각하여 자기를 찬미하고 동정한다. 소녀가 사 치스럽고 연극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결점은 사춘기 때 특히 강조될 것이다. 번민은 조바심이나 분노의 발작, 눈물 로 표시된다. 그녀들은 눈물에 대한 취미를-그후에도 많은 여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취미- 갖고 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자신을 희생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혹 한 운명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게 하는 방법이다. "여자아이 는 울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알기로는 이중으로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예로 울 려고 거울 앞에 간 아이도 있었다."하고 뒤팡루(프랑스의 교육자, 1802-1878)는 말하고 있다. 그녀들의 비극의 대부분은 가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녀들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으 려고 한다. 때로는 어머니에게 적의를 품고, 때로는 어머니의 보호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 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한다. 질투가 많고 민감하며 까다롭다. 그녀들 은 소설처럼 곧잘 꾸며댄다. 자기는 주워온 아이이며 아버지, 어머니는 친부모가 아니라고 공상한다. 부모의 숨은 생활을 가상하고, 부모의 관계를 추리한다. 그녀들은 아버지를 아내 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난폭하고 야 만적이라고 생각하며 그와의 육체관계를 일체 혐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공상, 연극, 유치한 비극, 가짜기쁨, 이상한 행동 등의 원인은 여자의 불가해한 영혼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를 주체로, 자주체로, 초월성으로, 절대로 느끼고 있는 개인에게, 자기 속에 기존요 소의 형태로 열등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위해 자기를 설정하고 있는 인간에게, 하등체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인생수업을 쌓아가는 도중에 스스로 여자로서 자각했을 때, 소녀에게 일어 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은 어디를 바라보나 닫혀 있고 제한되고 남자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아무리 높이 날아오르거나 아무리 멀리 나아가도 언제 나 그녀의 머리 위에는 천장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벽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남자가 받드는 신들은 하늘 위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여자아이는 인간 의 얼굴을 지닌 신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흑인들도 경험하고 있다. 그 들은 부분적으로는 하나의 문명에 용해되어 있지만, 그 문명으로부터 열등계급으로 간주되 고 있다. 빅 토머스(R. 라이트, '토인의 아들' 참조)가 그 인생의 여명기에 대단히 혐오스 러운 심정으로 경험한 것은, 이 결정적인 열등성, 그의 피부색깔 속에 스며 있는 저주스러 운 하등성이다. 그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는 흑인이기 때문에 하늘이 자기 에게 닫혀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바다나 남, 북극이 무수한 모험과 무수한 기쁨을 자기에게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불행한 상황으로 태어난 것이다. 큰 차이는, 흑인들은 반항 속에서 자기들의 숙 명을 감수하는, 즉 그 불운의 대가로 어떤 특권도 주어져 있지 않은 반면에 여자는 공범으 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주의를 환기시킨 바와 같이, 최상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 는 주체의 진정한 요구와 함께, 자기포기와 도피의 진정치 못한 욕구가 있다. 부모도 교육 자도, 책도, 신화도, 남자도 여자도, 여자아이의 눈에는 수동적인 기쁨으로 비친다. 여자아 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 기쁨을 느끼도록 가르침 받는다. 그 유혹은 점점 교묘해진다. 그리 고 여자아이는 초월하기 위한 비약이 심한 저항을 받기 때문에 점점 숙명적으로 이 권유 를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의 수동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지 는 숙명을 저항없이 참는 것에 승낙하는 것이 되어 이 숙명에 대해 늘 불안을 느끼게 마 련이다. 그러나 남자아이는 대담하건 비겁하건 열린 미래를 향해 뛰쳐나간다. 그는 마도로스도 될 수 있고 기사도 될 수 있다. 농촌에 남을 수도 있고, 도시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는 넓 은 세계도 볼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앞 에 두고 그는 자유로운 자기를 느낀다. 한편 여자아이는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 니가 될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자기 집을 꾸려나갈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에 게 한 것과 똑같이 자기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 여자는 12세에 자기 일생이 결정된다. 그 녀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고 날마다 발견해 나간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지만, 그 모든 단계는 미리 예견되어 하루하루가 억지로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일생을 상 상하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여자아이가 남자형제들보다 성의 신비에 대해 훨씬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확실히 남자아이도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에 남편이나 아버지로 서의 역할은 그다지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결혼하거나 어머니가 되 는 경우에 그 운명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그 비밀을 예감하기 시작하면, 자기의 육 체는 그녀에게 오히려 혐오스러운 위협처럼 생각된다. 어머니가 되는 마술은 사라져버린 다. 어느 정도 일찌감치 계통적으로 지식을 갖게 되었을 경우, 그녀는 아기가 어머니의 뱃 속에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또 아기는 뱃속을 지팡이로 한번 때려서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자분자답한다. 언젠가는 기생체가 자 기의 육체 내에 생식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미 어렸을 때처럼 근사한 일로 생각 되지 않고 두렵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 무서운 종기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 데 아기는 어떻게 해서 나올까? 출산 때의 비명이나 통증에 대해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그녀는 지나가는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너희는 고통 속에 자식을 낳으리 라'는 성서의 글귀를 읽기도 한다.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예감한다. 그녀는 배꼽 근처에서의 기묘한 작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설사 그녀가 태아는 항문으로부터 떠밀 려나올 것이라고 상상해도, 여전히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출산의 과정을 발견했다고 생 각했을 때, 여자아이가 신경증적 변비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설명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팽창, 열상, 출혈의 광경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상상 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런 망상에는 더욱 민감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전율없이 직시한다 는 것은, 여자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콜레트는 졸라(프랑스의 소설가, 1840-190 2)의 작품에서 해산을 묘사한 대목을 읽고 기절하여 어머니에게 발견되었을 때의 일을 말 하고 있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생생하게, 해부학적으로 자세히 세부묘사를 많이 하여, 색채, 체위, 외침소리를 즐기면서' 출산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시골소녀로서 내가 갖고 있던 지식으로 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작은 암컷으로서의 나의 숙명을 믿게 되어 몸서리 쳐지도록 겁이 났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내 눈앞에 갈기갈기 찢겨진 육체와 배설물과 더 러워진 피에 대해 묘사해 보였다... 나는 마치 밀렵꾼들이 부엌으로 운반해 오는 죽은 산토 끼처럼 축 늘어져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른들이 해주는 위로도 그녀의 불안을 제거하지 못한다. 성장함에 따라 여자아이는 어 른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들은 생식의 비밀에 관해 어른 들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른들이 대단히 무서운 일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알게 된다. 여자아이가 심한 육체적인 충격-편도선을 잘라 내거나 이를 뽑거나-을 느낀 적이 있을 경우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그때의 고통을 해산 에 비추어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의 육체적인 성격이 곧 부부 사이에 '어떤 육체적인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피를 나눈 형제, 순수한 피, 혼혈'이라는 표현 속에서 자주 대하게 되는 ' 피'라는 말이 어린이의 상상에 방향을 제시한다. 결혼에는 엄숙한 피의 이입 같은 것이 따 른다는 상상. 그러나 그 '육체적인 일'이 대소변의 조직과 결부되어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경 우가 가장 많다. 특히 어린이는, 남자가 여자 속에 오줌을 누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성적 행위가 더러운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더러운'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어린이에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른들은 어째서 이런 일을 자기의 생활 속에 끌어 오는 것일까? 어린이는 자기가 발견한 부조리 때문에 우선은 혐오감에서 보호된다. 그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또는 자기가 쓴 글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 에게는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카슨 매컬러스(미국의 여류작가)의 재 미있는 작품 '결혼식 하객' 속의 젊은 여주인공은 이웃의 남녀가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 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의 이상함은 오히려 그녀가 그 일을 중요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한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마를로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방의 한 부분과 세간의 몇 가지와 마를로 부인의 코르셋이 던져져 있는 침대의 다리만 보 였댜. 그런데 조용한 방에서 부인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턱으로 다가간 그녀는 그 곳에서 일어난 광경에 깜짝 노라, 대뜸 "마를로 아줌마가 돌았어!" 하고 외치면서 부엌으 로 뛰어갔다. 베레니스는 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입을 굳게 다물고 문 을 쾅 닫아버렸다... 프랑키는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 베레니스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 런데 베레니스는 단지 그 사람들에겐 그게 보통 있는 일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 른 사람을 의식해서라도 그런 일을 할 때에는 반문 정도는 닫아야지." 하고 덧붙였다. 프 랑키는 베레니스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자기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발작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베레니스는 다만 이렇게 대 답할 뿐이었다. "응, 보통 발작이야." 그 목소리의 톤으로 보아, 자기에게는 다 말하지 않 았다는 것을 알아차렷다. 나중에 그녀는 마를로 부부를 보통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 다. 어린이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이르거나 성적인 일에 대해 설명할때에는, 마치 병 자나 변태자나 광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편리한 설명법 이다.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몸이 접촉되거나, 길에서 만난 남자가 바지 앞 단추가 열린 채 걸어가는 것을 본 여자아이는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 과 마주치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간질이나 히스테리의 발작이나 심한 싸움은 어른의 세계 질서의 허점으로, 그것을 목격한 어린이는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조화된 사회에도 부랑자나 거지나 상처가 흉한 불구자가 있는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몇 있다고 해서 사회 의 밑바닥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참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부모, 친지, 선생들이 남몰래 비밀을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이다. 나는 처음으로 남녀의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 정했다. 그것은 우리 부모도 그런 짓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존경하는 부모가 그런 짓 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추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 해 왔다. 그런데 나는 얼마 뒤 부모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잘못 안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무서운 순간이었다. 나는 귀를 막고 시트 아래 머리를 처박고, 그 곳에서 몇 천 리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리프만 박사의 <청년과 성욕>에서) 정장을 한 점잖은 사람, 품위와 겸손과 이성을 운운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벌거벗은 두 마리의 동물이 맞붙은 모습으로 어떻게 돌변할 수 있는가? 어른의 우상대를 뒤흔들고, 폭 풍을 부르는 어른에 대한 의혹이 있다. 어린이는 때때로 이 혐오스러운 계시를 완강히 거 부한다. "우리 부모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하고 우긴다. 혹은 성교를 고상하게 생각하려고 한 다. "어린애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을 의사한테 가서 옷을 벗고,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눈을 가려. 의사는 아빠와 엄마를 서로 맞붙여서 일이 잘 되게 해." 그녀는 사랑의 행위를 외과수술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하면,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치과의사에 게서 치료를 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해도, 불안 과 의혹이 어린이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젖을 떼는 것 못지않은 괴로운 징후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어린이를 어머니의 몸에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의 세계가 무너져나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머리 위의 지붕이 철거되 캄캄한 미래 앞에 버려진 채, 외톨이가 된 자 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자아이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자기 위에 덮친 정체불명의 저주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통해 입수한 지식에는 통일성이 없고, 책에 따라 모순되어 있다. 과학적인 설명을 들어도 그 짙은 어둠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래서 무 수한 문제가 쌓인다. 성행위는 괴로운 것일까, 즐거운 것일까? 시간은 얼마나 걸리까? 5 분, 아니면 밤새도록 걸릴까? 때때로 어떤 여자는 한 번의 포옹으로 어머니가 되었다거나 몇 시간의 열애 후에도 임신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읽기도 한다. 어른들은 날마다 '그것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혹 하는 것일까? 어린이는 성서를 읽거나 사전을 찾거나, 친구에 게 물어 지식을 얻으려고 어둠과 혐오 속을 암중모색한다. 이 점에 관한 흥미로운 문헌은 리프만 박사에 의해 실시된 조사이다. 젊은 처녀들이 자기들의 성적 각성에 관해 박사에게 제공한 회답을 몇 가지 들어보자. 나는 혼미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품고 방황을 계속했다. 어머니도 학교선생도 그 밖의 누 구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룬 책은 하나도 없 었다. 처음에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었던 행위는 점차 위태롭고 추악한 신비의 막 으로 가려지게 되었다. 12세의 상급생들은 상스러운 농담을 하면서 그녀들과 우리 동급생 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기가 어디서 생기는가, 결혼식을 그렇게 야단스럽게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그것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얄팍한 지식을 문제삼은 대단히 막연하고 불쾌한 농담이었다. 15세 때 처음 겪은 월경은 나에게 새로운 경이였다. 마침내 이번에는 내가 그 원무속에 뛰어들 차례라고 생각했다... 성교육! 이것은 우리 부모의 집에서는 금물이었다!... 여러 가지 책을 뒤져 보았으나 방 향감각도 잡지 못하여 괴롭고 초조하기만 했다... 나는 남녀공학 학교에 다녔다. 선생님에 게는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호를람의 저서인 <남아와 여아>가 드디 어 내게 진리를 전해 주었다. 초조와 참을 수 없는 흥분상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매우 불행해졌고, 색정과 성욕만이 참된 사랑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내가 성에 눈뜬 과정. (1) 초기의 질문과 몇 가지 막연한 개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한) 3세 6개월에서 11세까지... 그후의 몇 해 사이에 내가 한 질문에는 회답이 없다. 7세가 되 었을 때 무심코 토끼에게 먹이를 줄 때, 그 밑에서 새빨간 새끼토끼가 기어나오는 것을 우 연히 보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물의 경우나 인간의 경우에도, 아기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나고 그 옆구리에서 나온다고 말 했다. 이 옆구리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나에게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다... 어떤 아이 보는 하 녀가 임신과 수태와 월경에 대해 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끝으로 내가 아버 지에게 그 진실한 역할에 대해 질문했더니, 아버지는 화분과 암술의 애매한 이야기로 대답 을 대신했다. (2) 스스로 터득하기 위한 몇 가지시도.(11세에서 13세에 거쳐서) 나는 백 과사전을 한 권, 의학서적을 한 권 구했다... 이것은 들어보지 못한 과장된 말로 된 이론적인 지식에 불과했다. (3) 이미 얻은 지식의 정리.(13세에거 20세) a. 일상생활 속에서 b. 과학적 저술 속에서. 나는 어덟 살 때 나와 동갑인 한 남자아이와 자주 놀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어머니에게 들어서, 여자의 몸 안에 많은 알이 있 고... 어머니가 아기를 몹시 갖고 싶을 적마다 그 알들 중의 하나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남자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설명을 해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넌 참 바보야! 푸줏간 아저씨와 그 아줌마는 아기를 낳고 싶으면 침대에 누워 더러운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분개했다... 그 무렵(12세 6개월경) 집에 있던 한 하 녀가 우리에게 그 더러운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나는 부끄러워 이 일에 대해 어머니 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남자의 무릎 위에 앉으면 아기가 생기느 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아기가 어디서 태어나는가를 학교에서 배웠는데 무서운 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둘이서 그 일에 대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것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겨울날 아침 학교로 가는 길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자기의 생식기를 보여주고 다가와서 "어때, 무척 귀엽지?" 하고 말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구역질 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21세가 될때까지 아기를 배꼽으로 낳는 줄로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내 곁으로 와서 속삭이며 물었다. "너 아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아니?" 결국 그녀는 결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넌 정말 바보야! 아기는 여자의 뱃속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 아기를 낳으려면 여자는 남자와 아주 더러운 짓을 해야해!" 그후에 그녀는 더욱 자세한 내용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 설명을 듣고 완 전히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을 완강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어느날 밤에, 나는 설마 하고 생각했던 짓을 하는 소리 를 들었다. 그때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다. 부모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무서운 도덕적인 고뇌를 경험했다. 나는 이런 일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몹시 타락한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합리적인 교육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와 선생이 아무리 호의를 갖고 있더 라도 에로틱한 경험을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그것을 경험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모든 분석은, 설사 그것이 대단히 진지한 것이라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일 면을 갖고 있어서, 진실을 전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꽃의 시적인 연애나 물고기의 교미 에서 출발하여, 병아리나 고양이, 염소를 거쳐 인류에게까지 올라갔을 때, 이론적으로는 생식의 신비를 잘 설명할 수 있어도, 정욕과 성애의 신비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용한 피를 지닌 여자아이에게 애무나 키스의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가족 사 이에서도 서로 키스를 하며, 때로는 입술로도 주고받는다. 그것이 왜, 어떤 경우에 황홀감 을 주는가? 그것은 소경에게 색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색정작용에 그 의미와 결합을 제 공하는 정신적인 작용과 육체적인 욕구의 직관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 여러가지 요소는 불쾌하고 괴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여자아이는, 처녀로서 봉인된 상태에서 자기를 여 자로 바꾸기 위해서는 남자의 성기가 자기 몸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심 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노출증이라는 악덕이 세상에 퍼져 있기 때문에 많은 여자아이는 발기한 페니스를 보아왔다. 어쨌든 여자아이들은 동물의 성기를 보았으며, 유감스럽게도 말의 그것이 자주 그녀들의 시선을 끈다. 그녀들이 그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 결혼한 사람을 위협하는 '발작'에 대한 두려움, 불결한 성행 위에 대한 경멸. 이런 일들이 합쳐져 때때로 여자아이에게 "나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 야."하고 단언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통과 광기와 외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방어책이 다. 그러나 때가 되면 처녀성의 상실도 아기를 낳는 일도 그다지 두렵지 않게 된다거나, 수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했는데도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헛일이다. 아이들이 외적인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어른은 그에게, 장차 너도 그런 것을 당연한 일로 받 아들이게 된다고 타이른다. 어린이은 이상하게 변해 광란에 빠진 자기의 미래를 상상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는 모충의 변신을 보면 징그럽기만 하다.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은 후에도 역시 같은 모충인가? 화려한 날개를 달고 있는 나비가 예전에 자기 모습을 알고 있을까? 나는 번데기를 보고 깜짝 놀라 깊은 생각에 잠긴 몇 명 의 처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신은 이루어진다. 여자아이는 그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 기와 세계, 그리고 자기와 자기 자신의 육체와의 관계에서 뭔가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촉각이나 미각, 후각에 대해 예민해지며 색다른 상상을 하게된다. 거울 속의 자신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를 이상하게 느끼며 사물도 '이상한' 모습으로 보인다. 리처드 휴즈(현대의 영국 소설가)가 <자메이카 의 선풍>에서 묘사한 소녀 에밀리의 모습이 그것이다. 에밀리는 몸을 식히기 위해 복부까지 물속에 담그고 앉아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몇백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쪼아대는 입술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무의미한 키스와 같았다. 요새 그녀는 사람들과 몸이 닿는 것을 싫어하게 되 었다. 그것은 징그러운 일이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물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마거릿 케네디(현대 영국의 여류작가)의 침착한 테사(소설 <영원한 처녀>의 주인공)도 역시 이런 기묘한 동요를 느끼고 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매우 불행하게 생각되었다. 그녀의 눈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하여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의해 둘로 갈라진 넓은 거실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과장된 짧은 외침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아!" 하고 그녀는 외쳤다. "세상이 귀찮아!" 그녀는 이 조용한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이 생각 되는 불길한 예감에 떨며 분노하고, 쫓기는 듯이 산 속에 숨으려고 뛰어나갔다. 산길에서 비틀거리며 그녀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그녀는 자기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을 생각은 눈꼽만 큼도 없었다. 그러나 격렬한 말이 그녀의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이 생각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카슨 매컬리스의 저서 속에는 이 불안한 시기에 대해 길게 묘사하고 있 다. 그것은 프랑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절머리와 따분함을 느낀 여름철이었다. 그녀는 자 기가 미웠다. 그녀는 부엌에서 서성거리는 뜨내기, 쓸모없고 더럽고 굶주리고 비참한 여자 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죄를 지은 여자였다. 이번 봄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이상한 계절이였다. 사물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랑키는 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4월 의 푸른 잎사귀나 꽃 속에,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 엇 때문에 슬픈지 알 수 없었으나, 이 기묘한 슬픔 때문에 자기는 도시에서 떠났어야 했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시를 떠나 멀리 갔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 해의 늦은 봄이 무료 하고 무척 지루했기 때문이다. 긴 오후는 더디 지나가고, 계절의 푸르른 따사로움이 그녀 의 가슴을 역겹게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아침 일찍 그 녀는 자주 뜰에 나가 오랫동안 새벽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문 같은 것 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늘은 이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혀 관심 밖이었던 여러 가지 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스치기 시작했다. 저녁에 산책할 때 바라보는 마을의 등불이나,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 등. 그 등불을 바라보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녀는 어떤 기대감으로 경직되는 것이었 다. 그 등불이 꺼지고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그녀의 기대와는 아랑곳없이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무서웠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무 엇이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려고 하고,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빛을 바라보고 목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혼자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는 무서워지고, 가슴은 이상하게 죄어들었다. 시내를 산책해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 리는 것이 낯설어 보여 언제까지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고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녀는 봄의 긴 저녁 한때를 줄곧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 녀의 신경은 우울한 재즈의 가락처럼 떨고, 심장은 굳어져 금세 고동을 멈출 것 같았다. 이 동요기에 일어나는 것은 유아의 신체가 한 사람의 여자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다. 주 체가 유아단계로 고정되는 선조직 발육부전의 경우를 제외하고 12,13세경부터 사춘기가 시작된다. 이 위기는 여자아이의 경우, 남자아이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어 더욱 커다란 변 화를 가져온다. 여자아이는 불안하고 불쾌한 심정으로 사춘기를 맞게 된다. 유방과 모발조 직이 발달하는 시기에 특수한 감정이 생긴다. 그것은 자존심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으나 원 래는 수치심이다. 즉, 여자아이는 갑자기 수치심을 보이고 자기 자매나 어머니 앞에서도 알몸이 되기를 싫어한다. 그녀는 두려움과 경이가 뒤섞인 심정으로 자기 몸을 살펴본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배꼽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던 유방 밑에 나타난, 약간의 통증을 수 반하는 딱딱한 심의 볼룸을 만져보고 고뇌에 빠진다. 그녀는 자기 몸의 상처받기 쉬운한 부위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이 상처는 화상이나 치통의 아픔에 비하면 경미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부상이든 병이든 아픔은 분명히 이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의 가슴에는 정체불명의 원한이 숨어 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병이 아니라, 존재의 법 칙 자체에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투쟁이며 고뇌이기도 하다. 여자아이는 분명히 출생에서 사춘기까지 성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 그날 그녀의 육체는 하나의 훌륭한 완성체로서 그녀의 눈에 비쳐왔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 자체가 그녀에게 두려움을 준다. 생명현상은 그것이 하나의 안정을 찾아 생생한 꽃이나 털에 윤기가 있는 짐승처럼 분명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자기 가슴의 새로운 돌기 속에 '살아 있 다'는 말이 갖는 애매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금도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그 내부에서 어떤 불순한 연금술이 작용하는 신기한, 변동하는, 불확실한 물질이다. 그녀는 명주실타래 같은 머리를 조용히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겨드랑이나 아랫배의 새로운 발모, 짐승이나 해초에의 변신, 이런 것은 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급격한 변화 속에 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를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것을 예감한다.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존재시기에서 떠나 한 생명의 고리 속에 던져졌다. 그녀는 자신에 게서 남자나 자식이나 무덤에 바치게 될 의존성을 예감한다. 유방은 그 자체로서는 쓸모없 이 불쑥 솟아난 이상발육처럼 생각된다. 팔도, 다리도, 피부도, 근육도, 둥근 엉덩이도 지 금까지는 모두 분명한 용모가 있었다. 배설기관으로 한정되었던 성기만이 약간 수상했으 나, 그것은 숨어 있으므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런데 유방은 스웨터나 블라우스 아 래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지금까지 혼동하고 있던 이 육체가 새롭게 그녀의 눈 에 비치게 된다. 이것은 남들이 눈여겨볼 뿐 아니라, 또 신의 눈에 뜨이는 하나의 물체이 다. "나는 2년 동안이나 가슴을 숨기기 위해 반코트를 입었어요. 그만큼 내 가슴이 부끄러웠 어요." 하고 어떤 여자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는 "나는 같은 나이에 나보다 먼저 성숙한 여자친구가 공을 잡으려고 몸을 굽혔을 때, 벌어진 옷깃 사이로 무겁게 늘어진 두 개의 유방을 보고 느낀 이상한 동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곧 나도 그애처럼 된다고 생각되자 얼굴이 붉어지더군요." "나는 열세 살 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드러내놓은 채 돌아다녔어요. 어떤 남자가 농담삼아 내 장딴지가 굵다고 말했어요.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내게 장화를 신기고 긴 치마 를 입게 했어요. 하지만 내 모습이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느낀 그 충격을 나 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여자아이는 몸이 자기에게서 도망쳐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몸은 이미 그녀의 개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에게 다른 물체가 된다. 동 시에 그녀는 타자로부터 하나의 물체로 파악된다. 외출하면 남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 고, 그녀의 몸매를 평한다. 그녀는 자기가 남의 눈에 뜨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육체가 변해 가는 것과 자기 육체를 남에게 보이기를 두려워한다. 이 혐오감은 많은 처녀들에게 여위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먹기를 싫어한 다. 억지로 먹게 하면 토해 버린다. 언제나 체중을 경계한다. 어떤 여자들은 병적으로 소심 해진다. 때로는 정신병 증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강박관념과 신경쇠 약>에서 자네가 나디아라는 이름으로 묘사한 환자의 경우이다. 나디아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매우 영리한 처녀였다. 사치스러운 예술가 타입으로, 특 히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성급한 성격을 보였다. '그녀는 남달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즉 부 모, 자매, 하녀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애정을 얻게 되면 심한 억지와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취하므로, 사람들은 곧 그녀 곁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무척 예민하여 사촌형제들이 그녀의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놀려댄 것이 그녀에게 치욕감을 주 게 되어, 그 치욕감이 그녀의 몸에 배게 되었다.' 한편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는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있고 싶게 한다. 남에게 귀염을 받 고, 어떤 무리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바라게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어른 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사춘기가 빨리 온 것은 성장의 공포에 수치의 공포 까지 뒤섞여 사태를 크게 악화시켰다. 남자는 살찐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언제나 말라깽이로 있는 것이다. 음모와 흉부의 발달에 대한 공포가 위에서 말한 공포에 더해졌다. 11세에 그녀는 벌써 자기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주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긴 스커트를 입자, 이번에는 발끝이나 엉덩이를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월경의 시작은 그녀를 반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음모가 나기 시작했을 때는 ' 이런 기형은 세상에 나뿐이야.'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야만인의 장식을 없애버리기 위해' 20세까지 탈모에 고심했다. 흉부의 발달은 이 강박관념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 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뚱뚱해지는 것은 싫지 않았지만, 자기에게는 그것이 결점으로 생 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로 예뻐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뚱뚱해지는 것은 큰 치욕으로 생각되었 다. 이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불행하게도 뚱뚱해지면, 나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살찌기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 하고, 자기의 주위를 경계하고, 자신을 맹세롤 구속했다. "만일 한 곡 속에 피아노의 같은 건반에 손가락이 네 번 닿으면, 나는 커서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드 디어 그녀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 했다. "나는 살이 찌는 것도, 키가 자라는 것도, 어 른이 되는 것도 싫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꼬마 계집아이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드디어 음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엄숙히 맹세했다. 어머니의 애원에 굴복하여 그녀는 이 맹세를 깨뜨렸으나, 그후에도 그녀는 몇 시간씩 무 릎을 꿇고 서약서를 썼다가는 찢고, 찢었다가는 다시 썼다. 그녀가 18세때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섭생을 시작했다. 즉 묽은 수프 두 접시, 달걀 노른자 하나, 식 초 큰 숟갈 하나, 9개분의 시트론 주스와 커피 한 잔. 이것이 그녀가 하루에 먹는 음식의 전부였다. "때로는 몇 시간씩 음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낸 적이 있을 정도록 배가 고팠 다." 그래도 그녀는 유혹을 참아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자기 얼굴이 부어있고 여드름투 성이라고 우겼다. 의사가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하면, 그녀는 의사는 모른다, 의 사에게는 피부와 살 사이에 있는 여드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녀 는 가족에게서 떨어져 작은 방에 틀어박혀 간호사와 의사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좀처럼 외출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도 꺼렸다. 어느날 아버지는 그녀에 게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그녀는 살찐 얼 굴이나 윤기가 흐르는 얼굴빛, 튼튼한 체격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어둠 속에서 살았다. 남의 눈에 뜨이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의 태도가, 여자아이에게 자기의 육체적인 외모에 대해 수치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여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슈테켈의 <불감의 여인>에서) 나는 집에서 자주 듣는 비평 때문에 육체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극단적인 허영심에서 언제나 나를 남의 눈에 돋보이게 하려고, 나의 결점인 축 처진 어깨 나 탄탄한 허리, 평평한 엉덩이, 튀어나온 가슴 등을 감추기 위해 양장점에 여러 가지 주 문을 잔뜩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굵은 목을 옷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나는 사춘기 동안 발이 보기 흉하여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걸음걸 이에 대해 언제나 성가시게 굴었다. 어머니의 이런 간섭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 들은 나를 몹시 불행하게 만들었다. 말괄량이였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그리고 때로는 겁 에 질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구를 만날때면, '아, 만일 발만 감출 수 있다 면'하고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수치심은 결국 여자아이에게 멍청한 행동을 취하게 하여, 언제나 얼굴을 붉히게 한 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를 더욱 겁쟁이로 만들고, 얼굴을 붉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포증 의 대상이 된다.(슈테켈의 <불감의 여인>에서) 슈테켈이 말하는 어떤 여자는 '처녀시절에 얼굴이 붉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병적으로 심하여, 1년 동안 치통을 가장하고 얼 굴 주위에 반창고를 붙인' 여자도 있다. 가끔 전사춘기라고 불리는 월경 출현 이전의 시기에 여자아이가 자기의 육체에 대한 혐 오를 경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여자가 되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흉부의 성숙 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손수건을 옷 속에 넣어 가스을 부풀리고 윗사람 앞에서 뽐낸다. 그녀는 아직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첫 월경이 그녀에게 그 의미를 밝혀주어 수치심을 갖게 된다. 그 이전에 이미 수치심을 갖고 있었을 경우에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확인되고 강 해진다. 모든 증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되어 있다. 즉 소녀가 월경에 대해 알고 있 는 경우나 모르고 있는 경우에도, 월경 자체는 그녀에게 언제나 불쾌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미리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H. 도이치가 <여성심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달리와 차드위크의 저서 참조) 어머니들로서는 딸에게 월경의 비밀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임신이나 출산, 나아가서는 성교의 비밀을 밝 히는 것이 오히려 쉽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은 자신이 이 여성의 굴욕에 대해 두려움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성의 옛 신비로운 공포를 반영하는 것으로, 어머니들이 대대 손손 전하고 있는 공포이다. 여자아이는 자기의 속옷에서 이상한 오점을 발견했을 때, 자기가 설사나 치명적인 출혈 이나 부끄러운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생각한다. 1896년에 하벨로크 엘리스가 실시한 조사 에 의하면, 미국의 어느 여학생 125명 중에 36명은 초경 때 월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39명은 막연한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즉 반수 이상이 무지였다. 헬렌 도이치에 의하면, 1946년에 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H. 엘리스는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기 때 문에 생투앙에서 센 강에 몸을 던진 처녀의 예를 들고 있다. 슈테켈은 <어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월경으로 인한 출혈 속에 자기 영혼을 더럽히고 있는 부정의 증거와 천벌을 인정하고 자살한 소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가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하다. 그 녀에게는 생명이 자기에게서 떠난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클라인과 영국의 분석학파에 의하면, 피는 그녀의 눈에 내장기관의 열상을 가리킨다. 신중히 여러 가지 충고를 한 결과 그다지 심한 고뇌를 느끼지 않는 경우에도, 그녀는 부끄러워 자기를 더럽다고 느낀다. 그 녀는 화장실에 달려가 더러워진 속옷을 빨거나 감추려고 한다. 이 경험에 대한 전형적인 이야기는 콜레트 오드리의 <추억의 눈동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흥분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잔혹한 극은 막을 내렸다. 어느날 밤에 옷을 벗었을 때 나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이튿날이면 그 병이 나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4주일 후에 병은 더욱 심하게 재발했다. 나는 팬티를 욕실 문 뒤에 있는 세탁물을 넣는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날씨가 무척 더웠으 므로 복도의 마름모꼴 마루판이 내 맨발 밑에서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돌아와서 침대에 누 으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내 방문을 열었다. 나한테 그 일에 대해 설명하러 왔던 것이다. 이때 어머니의 이야기가 내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을 때 카키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 둥글고 묘한 얼굴을 보고 발끈하여 그녀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 물러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녀는 방에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지 않았으므로 당장 가서 꾸짖어주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냉정한 태도와 모든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만족스 러워하는 모습에서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나간 후에 나는 불쾌한 어둠 속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두 개의 추억이 머리에 떠올랐다. 2,3개 월 전에 카키를 데리고 산책에서 돌아오 는길에, 어머니와 우리는 백발이 무성하고 벌목꾼처럼 건장한 늙은 의사를 만난 적이 있었 다. "아가씨가 무척 컸군요."하고 의사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때 괜히 그를 미 워했다. 그후 얼마가 지나 어머니가 파리에서 돌아와 서랍장 속에 새하얀 탈지면 한 다발을 넣 어둔 적이 있었다. "그게 뭐야?" 하고 카키가 물었다. 어머니는 사실의 대부분을 감춘 채 나머지 일부만 밝힐 때 으레 어른들이 취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태도로 "곧 콜레트가 쓰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 나는 물어볼 용기도 없어 잠자코 어머니를 미워했다. 그날 밤에 나는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알 듯했다. 어머니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튿날 나는 이미 변하여 더럽혀진 몸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나는 여동생을 원 망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 아침에 나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그 일을 경험한 적이 없으면서 그것을 알고 있는 남자들을 미워했 다. 또한 그 일을 그처럼 얌전히 참아내는 여자들을 미워했다. 만일 여자들이 내게서 일 어나고 있는 일을 알게 되면, 모두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네 차례 가 되었구나.'하고 그녀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는 여자를 보게 되면 으레 저 여자도 그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계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걷기도 거북하고 달릴 용기도 없었다. 대지도, 햇살을 듬뿍 받은 녹음도, 음식물도 이상한 냄새를 발산하는 듯이 생각되었다.... 위기가 사라지자 나는 이제 그것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몰상식하기 짝 이 없는 희망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나는 증거에 굴복하여, 이번에는 망연자실 한채 그병을 결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로 나의 기억 속에는 '이전'이 있게 되었다. 나머지 생애는 벌써 '이후'에 불과했다. 상황은 대다수의 소녀에게 마찬가지였다. 그중의 대부분은 자기의 비밀을 주위사람들에 게 털어놓기를 싫어한다. 어떤 여자친구가 내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어머니 없이 아 버지와 여자 가정교사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러워진 속옷을 계속 숨겨놓고, 월경을 한 다는 것이 발각되기까지 3개월간을 두려움과 굴욕 속에 보냈다. 자기네들의 동물 같은 생 활 속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농촌여자들도, 월경이 아직도 터부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귀찮은 것에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겨울 동안 얼어붙은 개울에서 몰래 속옷을 빨아, 젖은 채 입고 있는 한 젊은 농촌여성을 알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 놀라운 불행을 고백해도 구제될 수는 없다. "바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하고 사납게 딸의 따귀를 때렸다는 어머니는 예외겠지만,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어머니도 적지 않다. 대개는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아이는 최초의 월경의 위기가 시작되는 새로운 처지를 앞에 두고 불안에 싸여 있다. 그녀 는 미래가 자기를 위해 이밖에도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고통을 준비하고 있지 않나 하고 염려한다. 혹은 앞으로는 남자 앞에 나서거나 남자와 몸이 닿기만 해도 임신하는 것이 아 닌가 하여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설사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듣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났 을 경우에도, 마음의 평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사춘기 이전의 여자아이는 다소 억지로 아직 자기를 무성체로 생각할 수 이었다. 자기를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나 숙모가 자랑스러운 듯이 "이 애가 이제 다 자랐군요." 하고 속삭였다. 어머니들의 승리였다. 여자아이는 이것으로 그녀 들의 것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영구히 여자 편에 서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그것을 자랑스 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드디어 자기도 어른이 되어, 자기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티드 모니에(프랑스의 여류소설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 중에서 몇 사람은 여름휴가중에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그밖에 학교에서그 런 경우도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마치 여왕을 접견하는 신하처럼 그녀가 앉아 있던 화장 실에 차례로 '피를 보러'몰려갔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곧 환멸을 느낀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특권도 갖지 않으며, 인생은 여전히 변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새로운점은, 날마다 되 풀이되는 불결한 사건이다. 자기가 이런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몇 시간씩 우는 여자아이도 있다. 그녀들의 혐오감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이 부끄러운 결 점이 남자들에게까지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들은 여성의 굴욕적인 조건이 남 자들에게는 신비에 싸여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버지와 형제들과 사촌형제들, 이밖에 다 른 남자들도 알고 있어, 때로는 우스갯소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여자아이들이 자기 육 체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거나 그것이 증대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리고 최초의 놀라움이 사라져도 날마다 생기는 불쾌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처녀들은 자기 몸에서 솟아나는 김빠진 썩은 냄새(늪이나 시든 제비꽃 냄새)와, 어린시절에 피부가 벗겨져 흐르는 피처럼 빨갛지도 않은 기분 나쁜 피를 앞에 두고, 번번이 같은 혐오를 느 끼게 된다. 그녀는 밤낮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나 하고, 내의와 침대 시트에 신경을 쓰고 여러 가지 사소한, 실제적이고 불쾌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절약하는 가정에서는 위생 탈지면을 빨아서 손수건 묶음 사이의 본래 자리에 챙겨둬야 한다. 그래서 빨래하는 사람, 즉 세탁부, 가정부, 어머니, 언니의 손에 자기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맡겨야 한다. ' 동백'이나 '에델바이스'와 같은 꽃이름이 붙은 상자 속에 넣어 약국에서 팔고 있는 붕대의 종류는 사용한 후에 버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여행지나 별장생활이나 소풍의 경우에는 그것을 간수하기가 쉽지 않다. 화장실의 세면기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 신분석 일기>의 소녀 주인공은, 위생탈지면에 대한 공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월경이 있을 때 그녀는 자기 자매 앞에서도 어둠 속이 아니면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거 북하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심한 운동을 할 때 벗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거리의 한 복판에서 팬티를 벗기는 것보다 더욱 심한 굴욕이다. 이 두려운 대상은 때때로 신경쇠약증 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연의 악의에 의해서인지 처음에는 불안이나 고통을 못 느끼다가 나중에 나타나는 경 우가 많다. 그리고 처녀에게는 월경불순이 많다. 그녀들은 산책하는 도중, 거리나 친구의 집에서 그것이 갑자기 나올 우려가 있다. 그녀들은 셰브뢰즈 부인처럼 옷이나 좌석을 더럽 힐 우려가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언제나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는 여성도 있다. 소녀는 이런 여성의 결함에 대해 혐오를 느낄수록, 우연히 또는 남모르게 무서운 굴욕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하 면서 거기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청년의 성생활에 관한 조사중에서 리프만 박사(W. 리프만의 <청년과 성욕> 참조)가 이 문제에 대해 얻은 일련의 회답을 다음에 열거한다. 나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나는 어느날 아침 그것을 알고 몹시 두려 워했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이 언젠가는 내 몸에서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큰 치욕으로 느껴져서 반나절이나 자리에 누워 무슨말을 들어도 일어날 수 없 다고만 대답했다. 아직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란 나 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간단히 이것은 달마다 있는 일이라고만 가르쳐주었는데도 나는 그것이 대단히 더러운 일로 생각되고, 또 그것이 남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아머니는 비로소 나에게 가르쳐주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월경에 대해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되었을 때, 기쁜 얼굴을 하고 아 직 자고 있는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엄마, 그게 나왔어!" 하고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어머니는 "그 때문에 일부러 나를 깨웠니?"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나는 두번째로 실 망했다. 아무튼 나는 이 일을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첫 월경에서 몇 분이 지나도 출혈이 멎지 않았을 때, 나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럼에세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에 관해 누구에게도,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열다섯 살이었다. 통증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다만 한 차례 심한 통증을 느끼고 실신하여, 세 시 간 가까이 내 방 침대에 쓰러져 이 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런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나는 전부터 친구들과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으므로, 도리어 내 차례가 되어 어른들 축에 끼게 된 것을 무척 대견하게 여겼다. 나는 으스대듯 체조선생에게 오늘은 기분이 언짢아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알렸다. 어머니는 내게 이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월경이 있었 는데, 속옷을 더럽혔기 때문에 야단을 맞을까봐 두려워 속옷을 밭에 묻으러 갔다고만 말했 다. 열여덟 살때 처음으로 월경이 있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날 밤에 나는 심한 복통과 함께 많은 출혈을 하여, 잠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날이 밝아오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머니에게 달려가 흐 느껴 울면서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은 다음과 같은 꾸짖음이었다. "좀더 일 찍 알아차려서 이렇게 이불과 침대를 더럽히지 말아야잖아." 어머니는 설명 대신에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며 무서운 고뇌를 느끼게 되었 다. 나는 이미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렇게 되면 어머니는 아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무척 기뻐했다. "이제 너도 아기를 낳을 수 있어. 너도 한 사람의 어엿한 여자야."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 다. 이런 위험은 여자가 아직 어렸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아이는 15,16세가 되어야 겨 우 청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것은 13세에서 14세 사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차이는 소녀의 경 우에 무서운 빛을 내는 생리적인 현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가 양성에게 상반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그녀들에게 동일한 미래를 예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도 사춘기에는 자기의 육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유년시절부 터 자기의 남성을 자랑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다워지기 위해 자랑스럽게 자기형성의 시기를 넘긴다. 그들은 자기의 다리에 난털을 자랑스럽게 서로 보여준다. 그들의 성기는 전보다 더 비교와 도전의 대상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자에게 걱정스러운 변신이 다. 책임이 많은 자유를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불안한 고뇌 빠진다. 그러나 결 국은 남성의 위신을 갖게 되는 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와 반대로 소녀는 어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한계에 묶 여 있어야 한다. 소년은 돋아나기 시작한 털에서 무한한 약속이 주어진 것을 찬양한다. 소 녀는 자기의 운명을 가로막는 '잔인하고 닫혀진 비극'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페니스가 사회 적인 관계에서 그 특권의 가치를 끌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월경을 일종의 불운으로 만드 는 것도 총괄적인 사회적 관계이다. 전자는 남성을, 후자는 여성를 상징한다. 월경을 혐오 하는 것은 여자의 타락성과 열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녀의 생활은 그녀에게 이런 알 수 없는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페니스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이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붉을 피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그 본질이다. 만일 그녀가 자기의 조건을 이미 인정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제 너는 어엿한 여자가 됐어." 만일 그녀가 그것을 계속 거부해 왔다면 피어린 선고는 그녀를 크게 실망시킨다. 가장 많이 볼수 있는 것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이다. 그 리하여 다달의 오염은 그녀의 마음을 혐오와 공포 쪽으로 몰아간다. "여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었구나!" 지금까지 막연히 외부로부터 그녀에게 짐이 되어온 숙명은, 그녀의 뱃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도망칠 길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쫓기고 있는 느낌이다. 만 일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라면 그녀는 월경을 성인의 생활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남녀를 막론하고 이보다 더 불쾌한 수치감을 많이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 은 그런 것에는 훨씬 태연한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구나 갖고 있어 결점으 로 생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경이 소녀에게 걱정이 되는 것은, 그것이 그녀를 열등한 불 구자의 범주로 던져넣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면, 피를 흘리 는 자기의 육체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만일(인간으로서)자 부심을 갖게 되면, 자기 육체에 대해 굴욕을 느끼는 것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스포츠, 사회, 학문, 종교 등의 분야에서 초월의 길을 열어나가는 젊은 여성은 여자라는 자기의 종별화 속에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쉽사리 극복한다. 이런 시기에 젊은 여 성이 정신병의 증상을 나타내기 쉬운 것은, 상상을 초월한 시련을 강요하는 위험한 숙명 앞에 자기가 무방비 상태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기가 여자라는 것은 그녀에게 병이 나 고통이나 죽음을 의미하고, 그녀는 이 숙명에 마침내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고 뇌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는 H. 도이치가 몰리라는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는 환자의 경우이 다. 몰리가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녀는 5남매 중 네째아이였 다.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하여 식사 때마다 딸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어미는 불행하여 부 모가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형제 중 하나가 가출했다. 몰리는 재능이 뛰어나고 탭댄스를 잘 추었으나, 소심하여 가정 분위기에 곤민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를 두 려워했다. 그녀의 언니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결혼을 했다. 그 언니가 임신을 하자 몰리는 큰 호기심을 느꼇다. 난산이라 분만용 집게를 사용해야만 했다. 몰리는 그 장면을 자세히 알고, 산고로 죽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 았다. 그녀는 두 달 동안 아기를 돌봐주었다. 언니가 집을 나갔을 때에는 큰 언쟁이 벌어져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몰리도 함께 실신했다. 그녀는 같은 반 친구가 교실에서 기절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죽음과 기 절의 관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경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쑥스러운 듯이 "나 그게 나왔어." 하고, 언니를 따라 취생탈지면을 사러 갔었다. 도중에 남자를 만나면 그녀는 고개 를 숙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표시했다. 월경을 할 때 그녀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것을 어머니에게 숨기려고 했 다. 한번은 이불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어머니가 그녀에게 몸이 깨끗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사실인데도 아니라고 부정했다. 어느날 그녀는 언니에게 "이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게 됐어. 나는 아기도 낳을 수 있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는 "그러면 남자와 같이 살아야 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나는 두 사람의 남자와 같이 살고 있잖아. 아빠하고 형 부 말이야." 아버지는 딸들이 밤에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괴한에게 폭행 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리에게 남자는 무섭다는 생각을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임신하여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월경을 하는 순간부터 더욱 크게 느 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나중에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억지로 외출을 시키려고 하면 큰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떠나야 할 경우에는 발작이 일어나 기절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동차, 택시 를 무서워하고,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밤중에 강도가 집에 몰려들어올 것처럼 생각되어 울부짖기도 했다. 그녀는 때로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닥치는 대 로 포식했다. 또 자기가 감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녀는 학 교에 가지도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월경의 위기와는 관계없으나, 소녀가 자기의 체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 표명된 점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낭시에게서도 볼 수 있다.(H. 도이치의 <여성심리>에서) 그소녀는 얼세 살 때 언니와 유난히 다정한 사이가 되어, 언니가 몰래 약혼을 하고 드디 어 결혼했을 때 언니에게서 그 내막을 듣고 마음이 흡족했다. 어른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어른의 세계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언니의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언니 가 곧 아기 하나를 '사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낭시는 형부와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해 질투를 느꼈다. 또다시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자기에게 숨긴 채 둘 러대는 것을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장에 이상을 느껴 맹장수술을 하고 싶어했 다. 수술을 잘 되었으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낭시는 무서운 흥분 속에서 지냈다. 그녀는 몹시 싫어하는 간호사와 언쟁을 벌였다. 의사를 유혹하기 위해 단둘이 만나기를 원 하여,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고 신경발작을 일으켜 의사가 자기를 여자로 대해 주기를 요구 했다. 그녀는 몇 해 전에 동생이 죽은 것이 자기의 책임인 것처럼 말하여 자책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의사가 자기 맹장을 잘라내지 않았을 뿐더러 위 속에 메스를 넣어둔 채 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전 한 개를 삼켰다는 구실로 엑스레이 촬영을 부탁했 다. 이 수술에의 욕구(특히 맹장절개의 욕구)는 이 나이에 가끔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처 녀들은 폭행, 임신, 출산 등의 공포를 표명한다. 뱃속에 뭔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 위협을 느끼고, 자기들을 노리고 있는 이 미지의 위험에서 외과의사가 자기들을 구해 주기를 원하 는 것이다. 소녀에게 여자로서의 숙명을 알려주는 것은 월경의 시작만이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 지 괴상한 현상들이 그녀에게 일어난다. 지금까지 그녀의 색정감각은 음경에 있었다. 자위 행위(수음)가 소녀의 경우에 소년처럼 널리 퍼져 있는지 그 여부를 알기는 어렵다. 여자아 이는 최초의 2년 동안에, 아마도 태어난 지 아직 몇 달이 되지 않은 무렵부터 그 행위를 하고 두 살경에 일단 포기했다가 훨씬 나중까지도 그것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으로 생 각된다. 해부학적인 구조로 보더라도, 남성의 육체에 심어진 줄기가 숨어있는 점막보다 더 욱 접촉을 원한다. 그러나 여자아이가 밧줄타기, 나무오르기, 자전거타기 등의 마찰, 옷에 스치거나 놀이에 서의 신체접촉, 혹은 친구나 연장자나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이런 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어쨌든 쾌감은 그것이 느껴졌을 때에는 자주적인 감각 이다. 그것은 어린의 모든 놀이에 수반되는 대범함과 순진함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이 은밀한 즐거움과 여자로서의 자기 숙명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설사 지금까지 남자아이와 성적 관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호기 심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기분을 뒤흔드는 흥분에 온몸이 휩 싸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감대의 감수성이 발달된다. 이 성감대는 여성의 경우에 참으 로 많다. 그 육체 전부를 성감대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족의 애무가, 순진한 키스 가, 양장점, 의사, 미용사의 무심한 접촉이, 머리나 목에 얹은 부드러운 손이 그녀에게 이 것을 가르친다. 그녀는 친구들과 장난을 하는 동안에 더욱 깊은 동요를 경험하고, 때때로 자진하여 그것을 추구한다. 질베르트가샹젤리제에서 프루스트와 다툰 것은 그런 예의 하나 이다. 춤추는 상대의 춤에서, 어머니의 순박한 시선에서 그녀는 이상하게 나른함을 느끼게 된다. 집에 가둬서 기른 처녀는 이보다 더욱 명료한 경험에 직면하게 된다. 상류사회에서 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런 한심스러운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의 애무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아는 남자나 숙부나 사촌오빠들의 애무 속에는, 어 머니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해로운 것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선생이나 목사 나 의사가 파렴치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담은 비올레트 르딧(현대 프랑스의 여류소설 가)의 <질식>이나 S. 드테르바뉴(현대 프랑스의 소설가)의 <어머니의 원한>이나, 야쉬 고클레르의 <파란 오렌지>에 찾아볼 수 있다. 슈테겔로 특히 할아버지가 대단히 위험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 장례식 전날, 할아버지가 집에 자러 왔다. 이튿날 어머니가 일어 난 후에, 할아버지는 나의 침대 속에서 함께 놀아도 좋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남자가 무서워졌다. (<불감증의 여인>에서) 또 한 여자는 8, 9세 때에 친척 할아버지인 70세 노인이 생식기를 만져 큰 충격을 받은 것을 기억하도 있다. 그는 그 여자아이를 무릎위에 앉히고, 그녀의 질속에 슬며시 손가락 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그 여자아이는 심한 아픔을 느꼈으나, 누구에게도 이 말을 말하지 않았다. 그후로 그녀는 성적인 것은 모두 무척 두려워하게 되었다.(<불감증의 여인>에서) 이런 일은 여자아이가 부끄러워하여 잠자코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만일 그녀가 이런 일 을 부모에게 알린다면, 부모의 반응은 그녀를 책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냐... 너는 생각부터가 나빠." 그녀는 낯선 남자들의 괴상한 행동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어떤 처녀가 리프만 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리프만, <청년과 성욕>에서) 우리는 구둣방 지하에 방 하나를 세들어 살고 있었다. 집 주인은 내가 혼자 있을 때 찾 아와서 나를 안고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키스하는 것이었다. 그 키스는 형식적 인 것이 아니라 혀를 내 입속에 밀어넣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무척 싫어했다. 그러 나 너무 무서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담하거나 얌전치 못한 여자친구들말고도, 영화관에서 여자아이의 무릎을 짓누르는 무 릎이나, 야간열차에서 그녀의 다리를 만지는 손이나, 그녀가 지나갈 때 야우하는 젊은 남 자들이나, 거리에서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남자들, 그리고 은밀한 포옹이나 접촉이 있다. 여자아이는 이런 일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15세경의 머릿속에서는 때때로 이상한 혼란이 일어난다. 이론적인 지식과 구체적인 경험이 융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녀는 열띤 동요와 욕망을 이미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프랑시스 잠(프랑스 시인) 이 창조한 클라라 데레버즈(중편집 <토끼의 이야기> 속에 수록됨)처럼-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키스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소녀는 생식의 생리 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춤추는 상대의 품에 안겼을 때 자기가 느낀 감동 을 편두통으로 착각한다. 확실히 오늘날의 처녀들은 성에 대해 옛날보다 많은 지식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몇몇 정 신과 의사들의 주장에 의하여, 아직 생식기에 배뇨 이외의 용도가 있는 것을 모르는 소녀 도 적지 않다.(H. 도이치의 <여성심리> 참조)그녀들은 자기의 성적 충동과 생식기의 존 재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남성 생식기의 발기처럼 명확한 표시 가 없어 이 관련을 그녀들에게 가르쳐주는 일이 없기 떄문이다. 남성이나 연애에 대한 그 녀들의 낭만적인 꿈과 그녀들에게 밝혀진 몇 가지 생생한 사실 사이에 깊은 갭이 가로놓 여, 그녀들은 그 사이에 어떤 결합도 생각해 내지 못한다. 티드모니에(<자아> 참조)는 그 녀가 몇 사람의 여자친구들을 상대로, 남자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보고 와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로 약속 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일부러 노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소매 속 의 굴대 닮았어요. 즉 두루마리 같은데 그 끝에 둥근 것이 하나 달려있어요." 그녀는 입으 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같은 그림을 석 장이나 그렸다. 그리고 가자 그 그림을 품속에 감춰두고 가끔 꺼내보며 웃을을 터뜨렸다. 그후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연애가 존경, 소심, 한숨, 손에의 키스로 되어 있어, 거세되기까지 숭고화되어 있는 감상 적인 노래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 이 물체와 나 사이의 관련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비범한 것들을 우리와 같은 순진한 처녀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 대화, 목격, 얼핏 엿들은 말 등을 통하여, 소녀는 자기의 육체 적 동요에 한나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녀는 자기가 하소연이고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열정, 전율, 습기, 영문 모를 불쾌 속에 그녀의 육체는 하난의 새로운, 불안한 세계가 된다. 젊은 남자가 정욕의 불길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가 남자임을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성적 욕망은 일종의 공격이며, 파악적이다. 그는 거기서 자기의 주체성과 초월성이 확립되 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친구에게 그 정욕을 자랑한다. 그의 성기는 그에게 여전히 자랑거 리이다. 그것을 여성에게 던지는 충동은, 그것을 세계로 향해 내던지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속에 자기를 분명히 인정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소녀의 성적 생활을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져 왔다. 소녀의 색정이 변형되 어 육체 전체를 침범할 때, 그 비밀은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녀는 그 동요를 마 치 부끄러운 병처럼 느껴 괴로움에 시달린다. 그 동요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 나의 상태로, 상상 속에서도 그녀는 어떤 자주적인 결단으로도 거기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녀는 붙잡고, 억지를 부리고, 유린하는 공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다리고 부름 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의존물로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의 자주 성이 없는 육체 속에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막연한 희망과 행복한 수동적 꿈은, 그 녀의 육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운명지어진 물체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녀는 성적 경험을 그 내재성 속에서만 알고 싶어한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손, 입술, 또 하나의 츅체의 접촉이지 자기의 것과 다른 손, 입술, 육체는 아니다. 그녀는 상대의 이미지를 그늘 속에 놓아두거나 또는 그것을 이상의 안개 속에 가둬둔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의 존재가 자기를 따라다녀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남 자에 대한 그녀의 어린애 같은 공포나 반발은 전보다 훨씬 애매하고 또 그 때문에 한결 괴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전에는 유아의 구조와 성인의 미래 사이의 뚜렷한 차 이에서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소녀가 그 육체 속에 경험하는 복잡성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소유에 바쳐지고 있는 것은, 자기가 그겻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욕망에 대해 반항한다. 그녀는 동의하에 먹이가 되 는 수치스러운 피동의 자세를 스스로 희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한다. 남자 앞에 서 알몸이 될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지만, 한편 그렇게 되면 영구히 남자 의 시선에 맡겨진다는 것도 느낀다. 붙잡거나 만지는 손은 눈보다 웧씬 위압적인 존재가 된다. 결국, 손이 더 큰 위협이 된다. 그러나 육체적 소유의 가장 분명하고 혐오스러운 상징은 자기 몸이 남성의 성기가 관통 하는 것이다. 그녀가 자기와 혼동하고 있는 이육체를 남자가 마치 가죽에 구멍일도 뚫는 듯이 관통하고, 옷감이라도 찢는 듯이 찢어버릴 수 있는 것을 증오한다. 그러나 여기에 따 르는 상처나 고통보다도 더 싫어나는 것은, 그 상처나 고통이 자기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이 다. "내몸이 남자에게 관통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기만 해요". 하고 언제가 한 여자 가 내게 말했다. 남근에 대한 두려움이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것은 그 확증이며 상징이다. 소녀의 불안은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환각이 되어 나타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지 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강간의 관념이 강박관념이 되는 것은 소녀가 잠재적인 쾌감을 느 끼기 때문이다. 그 관념은 명백한 상징을 통하여 꿈이나 행위 속에 나타난다. 소녀는 잠자 리에 들기 전에 추잡한 생각을 품은 까까중이 숨어 있지 않나 하여, 자기 방을 살펴본다. 그녀는 집 안에 도둑이 든 것처럼 생각한다. 침입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손에 든 단 도로 그녀를 찌른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녀는 남자가 두렵다. 그녀는 자 기 아버지에게 일종의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담배냄새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가 방금 나온 욕실에 들어 가기도 싫어한다. 그녀가 비록 아버지를 계속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 육체적인 혐오감은 자주 일어나 과장된 형태를 취한다. 마치 막내딸 의 경우에 흔히 볼 수있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이미 적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젊은 여자환자에게 흔히 듣게 되는 꿈이야기가 있다. 그녀들은 나이 많은 한 여자 앞에서 그녀의 동의하에, 자기가 어떤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꿈을 꾼다. 그녀 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상징적으로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긴다는 승낙을 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들에게 가장 혐오스럽게 덮치고 있는 속박 중에 위선의 속박이 있 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기 속에서, 그리고 자기 주위에서 생명과 성의 신비로운 동요를 발 견한 순간에, 순결과 청정에 바쳐지고 만다. 사람들은 그녀가 담비의 털가죽처럼 순백하고 수정처럼 투명하기를 요구하며, 비칠 정도로 엷고 가벼운 모슬린 옷을 입히고, 그 방은 순 백으 벽지로 장식한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목소리를 낮추고 외설스러운 책을 읽지 못 하게 한다. 그런데 혐오스러운 이미지나 욕망을 마음속에 품지 않은 마리아의 딸은 한 삶도 없다. 그녀는 그런 이미지와 욕망을 자기 친구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감추려고 노력한다. 그 녀는 이제 억제만을 목표로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은 그녀에게 음험하고 불행하 고 병적인 상태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억압을 극복하는 그것이 그녀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 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처럼 억압하고 있어도,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과오의 중압감만 느 끼게 된다. 그녀는 여자에의 변신을 치욕스러운 심정으로 참을 뿐만 아니라, 후회하는 마 음으로 받아들인다. 이 불쾌한 연령이 소녀에게 괴로운 혼란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그냥 여자아 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의 세계는 그녀에게 두렵고 따분한 것으 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는 생각했으나, 어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 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콜레드 오드리는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내 마음속에는 어른으로서의 조건(부모, 주부, 가정부인, 가장 등의 책임)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으 멍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보호 속에 안주하 고자 하는 욕구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양심 위에 얹혀 있는 과실이나 고독한 행 위, 언짢은 교제, 나쁜 독서 등이 그녀에게 이 피난처를 필요로 하게 한 것이다. 15세의 소녀가 여자친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H.도이치가 인용한 것)가 그 전형적인 사례 이다. 엄마는 가의 대무도회에 갈 때면 내게 긴 옷을 입히려고 해. 나로서는 긴 옷을 입는 것이 생전처음이야. 내가 입고 싶어하지 않자 엄마는 놀라는 거야. 나는 엄마에게 이게 마 지막이라고 말하며 앞으로는 핑그색 옷을 입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나는 무척 두려워. 만 일 내가 긴 옷을 입으면 엄마는 멀리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참 바보지? 엄마는 때때로 마치 내가 어린애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거야. 아, 만일 엄 마가 안다면 엄마는 내 양손 침대에 묶어놓고 나를 멸시할 거야! 슈테켈의 저서 <불감증의 여인> 속에서 여성의 유년기에 대한 하나의 주목할 만한 자 료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21세 무렵의 고백을 상세히 기록한 비엔나의 어느 깜찍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 고백은 내가 개별적으로 고찰해 온 모든 시기를 구첵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나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 하나를 골랐다. 리하르트라는 6,7세가 된 남자아이 였다. 나는 전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귓볼이나 코로 구분한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뭔가 감추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 설명으로 만족 하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갑자기 오줌을 누고 싶어했다... 나는 내 변기를 빌려주었다. 그 의 페니스를 보는 순간(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놀라운 무엇이었다) 나는 감격하여 외쳤다. "어머, 너 그게 뭐니? 예쁘구나! 아, 나도 갖고 싶어!" 나는 동시에 대담하게도 손으로 그 것을 만져보았다. 두 아이는 그 현장을 숙모에게 들켜 그후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다. 아홉 살 때 나는 여덟 살과 열 살 난 다른 두 소년과 결혼놀이나 의사놀이를 했는데 그 애들은 나의 성기를 만졌다. 그리고 어느날 한 소년이 자기의 성기를 나에게 갖다대며 그 녀의 부모도 결혼했을 때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몹시 화를 냈다. "오, 그런 추 잡한 짓을 했을 리가 없어." 나는 이런 놀이를 오랫동안 계속하여 이 두 남자아이와 연애 적인 성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어느날 숙모가 알고 크게 야단을 치면서 나를 감화원에 넣 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무척 좋아하는 아르투르를 만날 수 없게 되어 몹시 고민했다. 공부 를 게을리했고 글씨가 비뚤어졌으며 눈까지 사팔뜨기가 되었다. 나는 발테르와 프랑크라는 남자아이를 새로 사귀게 되었다. "발테르는 나의 생각과 관능의 모두를 점령했어요. 나는 그의 앞에 서거나 앉아서 쓰기 연습을 하면서 그에게 스커트 밑으로 내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어요... 어머니가 문을 열 자 그는 재빨리 손을 빼고, 나는 쓰기에 몰두했어요. 나중에 우리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 계를 갖게 되었으나,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어요. 그가 내 질 속으로 들 어왔다고 생각되면, 나는 누가 왔다고 말하여 몸을 뺐어요..... 나는 그것이 나쁜 짓이라고 는 생각지 않았어요." 남자아이와의 교제는 끝나고 다음은 여자아이들과의 우정만 남았다. 나는 집안이 좋고 교양이 있는 에미라는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열두 살 되던 크리스마스날에 우리는 작은 하트 모양의 메달 안쪽에 두 살람의 이름을 새겨 교환했다. 우리는 이것을 약혼으로 알고, '영원한 정절'을 맹세했다. 나는 에미 덕분에 여러가지 것을 배웠다. 그녀는 성에 대 하여도 내게 가르쳐주었다. 2학년 때 나는 황새가 아기를 운반해 준다는 이야기를 의심하 가기 시작했다. 아기는 사람의 배에서 나오므로, 아기가 나오려면 배를 갈라야 한다고 믿 고 있었다. 에미는 특히 마스테베이션에 대해 말하여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복음서의 몇 구절이 성문제에 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했다. 예컨대 성모 마리아가 성녀 에리자베스를 만나러 왔을 때, '뱃속의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다'는 구절을 비롯하여 성서의 신기한 대목 이 그러했다. 우리는 그런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생활기록부의 점수가 나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또 실러가 <군도>에 쓰고 있는 '9개월의 기억'이라는 문구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에미의 아버지가 전근하게 되어,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고안해 낸 암호문구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쓸쓸하여 애들이라는 유태인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은 애들과 함께 학교에서 나오는 것을 에미가 발견했다. 에미는 질투하여 내게 덤벼들 었다. 나는 상업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애들과 무척 친해져서 언젠가는 시누이, 올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오빠인 대학생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당황하여 엉뚱한 대답빢에 하지 못했다. 저녁때 애를과 나는 작은 소파에 붙어 앚아, 오빠가 치는 피아노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나는 웬일 인지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애들과 친해지기 전에 나는 몇 주일 동안 엘라라는 가난한 집 딸과 자주 어울렸다. 그녀 는 침대에서 나는 소리에 잠이 깨어 부모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녀 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아빠가 엄마의 위에서 자면 엄마는 심하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러 면 아빠는 '빨리 깨끗이 씻고 와.' 하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 아빠의 행위가 마음에 걸려서 거리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도 피했고 그녀의 엄마에게 깊은 동정을 느겼다. (그렇 게 소리를 지른 것은 굉장히 괴로웠기 때문일 거야.) 나는 한 여자친구와 페니스의 길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12센티에서 15 센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사시간에 우리는 자를 대고, 문제의 그곳에서 스커트 위 로 복부를 따라 재어보았다. 적어도 배꼽까지는 닿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면 문자 그 대로 말뚝이 박힌다는 생가에 위협을 느꼈다. 나는 수캐와 암캐가 교미를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거리에서 말이 오줌을 누는 것을 보면, 나는 거기서 눈을 땔 수 없었다. 페니 스의 길이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나는 파리도 관찰하고 시골에서는 짐승들을 눈여겨보았다. "12세 때 나는 심한 인후염에 걸려 아는 의사에게 보였어요. 그는 내 침대 옆에 앉아서 갑자기 손을 담요 밑에 집어넣고 거기를 만졌어요. 나는 '망측한 사람!' 하고 외치면서 벌 떡 일어났어요. 엄마가 달려오자 의사는 몹시 난처한 얼굴을 했어요. 그는 나를 무례하다 고 하며 자기는 단지 나의 장딴지를 만져보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어요. 나는 억지로 그에게 사과해야 했어요. 드디어 나는 월경이 시작되어, 아버지가 피묻은 월경대를 발견했 을 때에는 야단이 났어요. '왜 깨끗한 남자인 아버지가 부정한 여자들 틈에서 살아야 하나 ?" 마치 몸의 커디션이 나쁜 것도 내책임인 것만 같았어요." 15세 때 나는 또 다른 여자친구가 생겨, 서로의 가족들이 그 편지내용을 읽지 못하도록 속기법으로 교신했다. "우리는 서로의 발견에 대해 쓸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어요. 그녀는 화장실 벽에서 발견 한 많은 노래를 내게 써보냈어요. 나는 그중의 하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대단히 고상한 것으로 생각했던 연애를 더러운 것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에요. '사 랑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막대기로 이어지는 두 개의 엉덩이.' 나는 절대로 거기까 지 이르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젊은 처녀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상대방에게 이런 일을 요구 할 리가 없어요. 내가 15세 6개월이 되었을 때 남동생이 태어났어요. 나는 몹시 질투가 났 어요. 왜냐하면 나는 줄곧 외동 딸이었거든요. 내 여자친구들은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달라고 졸라댔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녀들이 바라고 있는 정보를 줄 수 없었어요. 이 시기에 다른 여자친구가 내게 결혼식날 방의 일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자 나 는 호기심에서 결혼하고 싶었어요. 다만 그녀의 이야기 가운데 '말처럼 헐떡이는 입김'만은 나의 미적 감각을 해쳤어요... 사랑하는 남편에게 옷을 벗기게 하고 그에게 이끌려 침대로 간다면, 누구나 결혼을 원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그건 무척 근사한 일이니까요..." 이마도 사람들은(여기서는 정상적이며 병적인 경우가 아니지만)이 야자는 특이한 '변태 자'라고 말할것이다. 사실은 단지 그녀에 대한 감독이 다른소녀들보다 부족했던 것이다. 상 류사회 소녀들의 호기심이나 욕망이 비록 행동으로 나타지 않더라도 환상이나 유희의 형 태로 존재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전에 신앙심이 깊고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처녀를 알고 있었다. 이 처녀는 결혼 한 후에 훌륭한 현모가 되고 미망인이 되었으나, 어느날 밤 그녀는 몹시 흥분하여 연상의 여자에게 고백했다. "남자의 눈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당신을 남편 이라고 가정하고 말이야...." 하고 감동으로 몸을 떨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떤 교육을 하더라도 처녀가 자기의 육체를 의식하고, 자기의 운명을 꿈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고 작해야 그녀에게 엄격한 억제를 가할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억제는 그후에 그녀의 모든 성 생활에 무거운 짐이 될것이다. 그보다 바람직한 것은, 그녀에게 자기도취가 되거나 수치스 럽게 생각지 말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처녀가 어떤 비극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대략 알 수 있으리라 고 생각한다. 그녀는 전부터 잘기의 성에 의해 불완전한, 무력한 생활을 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깨끗지 못한 병과 감춰진 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열등성은 처음에는 있어야 할 것이 부족하다는 의식에 불과했다. 페니스의 결여는 이제 오염과 결점으로 바뀌어졌다. 그녀는 상처를 입고 치욕을 느끼며 불안과 죄의 식을 간직한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제2장 젊은 처녀 소녀는 어릴 때 언제나 구박과 학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자신을 자주적인 개체로 알고 있었다. 부모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공부나 유의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를 하 나의 초월자로 인식해 왔다. 다만 미래의 수용적인 여자의 생활을 어렴풋이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그 미래는 한결 가까이 다가올 뿐아니라 육체 속에 들어와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 그 미래는 여성이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숙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청년이 성년기를 향해 활발히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젊은 처녀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는 것을 불안한 마음으로 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린이였 던 과거에서 이미 이탈한 처녀에게 현재는 과도기로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분명한 가치가 있는 목적도 찾아내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그 청춘의 외관은 얼마간 가 장된 채 기다림 속에 소비된다.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청년도 물론 여자를 꿈꾸고 정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언제나 여성은 생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즉 여성이 그의 운명 전체를 좌우하지 않는다. 소녀는 유년시절 이후 여성으로서 자기를 실현하길 원하든, 혹은 여성으로서의 한계에서 탈출하려는 야심을 갖든 간에 그 실현과 탈출을 남성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남성은 페르세우스(그리스신 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나 성 그레고리우스의(사람을 황홀하게 하는)얼굴을가진 해방 자이며, 돈과 권력도 갖고 있다. 그는 행복의 열쇠를 갖고 있는 멋진 왕자이다. 처녀는 그 의 애무를 받아,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있던 때처럼, '인생'의 큰 흐름에 휩쓸리게 될 자신 을 예감하고 있다. 그의 부드러운 지배에 몸을 맡기면, 아버지의 팔에 안겨 있을 때와 같 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옹과 부드러운 시선의 마력은, 그녀를 다시 우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남성의 우위에 대해 설명을 들어왔다. 이 남성의 위력은 유치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인 기반을 갖고 있으며, 남자들은 분명 이 세계의 주인이다. 모든 것이 처녀에게,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한다. 부모는 그런 방향으 로 그녀를 유도한다. 아버지는 딸이 거둔 성공을 자랑하며, 어머니는 딸의 미래에 번영이 약속된 것을 내다본다. 그리고 여자친구들은 그녀들 중에서 남자에게 인기가 제일 좋은 친 구를 질투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학에세는, 여학생의 평가기준은 그녀 의 데이트 횟수에 있다. 결혼이란 명예로운 경력이며, 다른 여러 가지 일처럼 고되지 않을 뿐더러, 결혼만이 여 성에게 완전한 사회적인 권위를 갖게 하고, 성적으로 애인, 어머니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의 주위사람들이 그녀의 미래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녀 자신이 자기 미래를 설 계하게 되는 것은, 이 결혼이라는 형태를 통해서이다. 남편을-어떤 경우에는 보호자를-얻 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남성에게 '타자'는 그녀 속에 육체화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타자'는 남성 속에 육체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 ' 타자'는 본질적인 형태로 그녀 앞에 나타나며, 그녀는 타자 앞에서 자기를 비본질로 파악 하게 된다. 처녀는 그 부모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면, 능동적인 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주인의 손에서 수동적이고 순종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열어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처녀가 이처럼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그녀들이 육체적으로나 정 신적으로 청년들보다 열등하여, 그들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헛된 경쟁을 포기하고, 그녀의 행복에 대한 보상을 한 남성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자기비하는 선천적인 열등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비하야말로 그녀의 모 든 결점의 근원이다. 이 자기비하는 소녀의 과거 속에, 그녀를 에워싼 사회 속에, 그리고 그녀 앞에 제시되어 잇는 미래 속에 그 원인을 갖고 있다. 사춘기는 확실히 젊은 처녀의 육체를 변화시킨다. 그녀의 육체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 지고, 성기는 상처받기 쉬우며 그 기능은 미묘해지고, 거추장스러운 유방은 무거운 짐이 되어 심한 운동을 할 때에는 흔들리고 아프기까지도 하여 그 존재를 환기시킨다. 이제부터 여성의 근력, 인내력, 민첩성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뒤떨어지게 된다. 호르몬 분비으 불균 형이 신경과 혈관운동의 불안정으 가져온다. 월경이 시작되면 고통이 따른다. 두통, 피로, 복통은 평소의 행동을 힘들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 이 불쾌에 때때로 심리적인 이변이 가세한다. 그리하여 신경질이 되고 민감해져서 달마다 정신착란에 가까운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경계통과 교감신경계통의 신경중추에 대한 제동이 불확실하여, 일종 의 자가중독인 순환불순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여성과 세계 사이에 놓인 장벽이 되어 그녀 를 짓누르고 질식시키고 떼어놓는, 타는 듯한 안개가 된다. 이 가엾은 수동적인 육체에게 전 세계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억압되어 침몰한 그녀는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 도니다. 종합 이 분해되고, 시간이 연결되지 않으며, 타인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한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 처럼 사고력이나 논리가 분명하더라도, 그것은 기능의 혼란 속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정 열을 표시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성이 이 사실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것을 의식하는 방식에 의해서이다. 소녀들이 실제로 폭력을 모방하여 공격성과 권력욕과 결투심을 표시하는 것은 13세경이 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거친 장난을 그만두는 시기이다. 스포츠는 여자도 할 수 있다. 그 러나 인위적인 규칙에 따라야 하는 특수한 스포츠는 자연스럽고 습관적인 체력사용의 대 체물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생활권의 주변에 있으며 주먹질이나 나무오르기처럼 세계난 자기 자신에 대해 내면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포츠를 하는 여자는, 친구의 양쪽 어 깨를 짓누른(레슬링의 규칙, 양쪽 어개가 지면에 동시에 닿은 쪽이 패함) 소년의 자랑스러 운 승리감은 결코 맛보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나라의 소녀의 대다수가 스포츠 훈련을 받 지 못하고 있다. 그녀들에게는 싸움이나 나무오르기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그 육체를 따를 뿐이다. 그녀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를 초월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녀들에게는 가능성의 한계를 개척하거나 감행하거나 후퇴하는 것이 금지되 어 있다. 특히 청년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도저적인 태도는 그녀들에게는 거의 생소한 것이 다. 여성도 물론 서로 비교는 하지만, 도전은 이런 소극적인 대결과는 다르다. 서로 경계선 을 넘으려고 하는 세력을 이 지상에 갖고 있는 한, 두 자유는 서로 싸우게 마련이다. 상대 보다 높이 뛰어오르거나 상대의 팔을 꺾는 것은, 지상에 자기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정복은 소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으며 특히 폭력은 금물이다. 성인의 세계에도 평상 시에는, 폭력이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인의 세계는 폭력이 떠나지 않고 있다. 남성적인 행동은 가능한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어느 뒷골목에서나 싸움이벌어질 듯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 싸움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의 주권이 확립되어 있다고 의식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신을 그 주먹 속에 느끼는 것 으로 충분하다. 남성은 모든 모욕에 대해, 그리고 그를 물건으로 취급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남에게 초월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주체성 속에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폭력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 자기의 정열과 의지에 집착하고 있는 진정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모든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주관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근육을 관통하지 않는 분노나 반항은 상상에 그 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지구의 표면에 새길 수 없는 것은 무서운 실망이다. 미국 남부에세는 흑인이 백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신비로운 '검 은 영혼'의 열쇠는 바로 이 금지령이다. 흑인이 백인세계에서 보여주는 태도, 그가 거기서 조화시키려는 행동, 그가 요구하는 보상, 그의 느낌이나 행동 일체는그냐 강요당하고 있는 수동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독일군의 점령기간중에 점령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고 결의한 프랑스인은(그것이 이기적인 신중성에 의한 것이든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 든)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진 것을 느꼈다. 그들이 객 체(물품)로 변하는 여부는 타인의 자의에 의해 결정되며, 이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단 을 갖지 못한 그들의 주체성은, 제2의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우쭐대며 자기를 나타낼 수 있도록 허용된 청년을 대하는 것과 즉각 적인 효력이 박탈당한 감정을 갖고 있는 소녀에게 대하는 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 난다. 한쪽은 언제나 세계에 의문을 품고 주어진 조건에 반항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 들일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인상을 갖는다. 그런데 다른쪽은 거기에 순종할 뿐이 며, 세계는 여자 없이도 규정되고 부동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이 육체적인 무력은 대개의 경우 여자의 소심에 의해 표출된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 속에 경험하지 못한 힘을 믿지 않 으며, 순종하고 포기하여 사외에서 기존의 위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그녀는 사물의 질서 를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여성이 나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젊었을 때 그녀는 자기의 육체적인 약점을 완강 히 부인하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지적이나 정치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 를 지도할 경우에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의도와 용기를 잃게 한다는 것이었다. 남자아이처럼 자라서 남자와 마찬가지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씩씩한 처녀를 나는 알고 있었다. 대단히 아름다운 처녀로 달마다 괴로운 월경을 하면서도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고 활기에 넘쳐 소년과 같은 실천력을 갖고 있으며, 소 년처럼 대담했다. 만일 여자나 어린이가 구박을 받는 것을 보면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두 가지 불행한 경험을 통해 그녀 역시 완력은 남성의 것 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연햑함을 알게 되자 그 확신의 대부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를 여자답 게 하여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예속을 받아들이는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자기의 육체에 신 뢰를 갖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의 신뢰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체가 그의 육 체를 그의 객관적인 표현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청년들이 그들의 육체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성을 보면 된다. 젊은 남자의 성적 충동은 그가 자기의 육체에서 갖게 된 자존심을 더욱 확신할 뿐 아니 라. 자기의 초월과 능력의 표시를 발견하게 된다. 젊은 처녀도 성적인 욕망을 가질 수 있 지만, 대개 부끄러운 성질을 갖고 있다. 그녀의 육체는 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생각된다. 어린시절 그녀가 자기의 '내부'에 대해 느낀 의혹은, 월경이 시작되자 혐오스럽고 지겨운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월경이라는 속박이 핸디캡이 되는 것은, 그녀의 심리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일정 기간 젊은 처녀를 짓누르는 그 위협은 몹시 참기 어렵게 생각되므로 그녀 는 자기의 불쾌감을 남에게 알리기를 꺼려하여 여행이나 오락을 그만들 정도이다.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육체 전체에 영향을 주어, 병이나 고통으로 발전한다. 여성 생리의 특색 중 하나는 내분비와 신경조절과의 밀접한 관계로, 그것들은 상호작용 을 한다. 여성의, 특히 젊은 처녀의 육체는 정신생활과 그 생리적인 현실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히스테리성'의 육체이다. 소녀가 사춘기의 여러 가지 고민을 발견하여 일어나는 놀라움은, 그 고민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녀는 자기 육체가 의심스러워 불안한 심정으로 그것을 탐색하기 때문에 자기 몸이 언제나 병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병이다. 육체는 확실히 연약하다. 그리고 그녀의 육체에는 기능적인 혼란이 생긴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즉 그들의 환자 중 10분의 9는 상상 에 의한 환자로, 그녀들의 병은 생리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거나 기능장해 자체가 심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여성 으로서의 고뇌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생물학적인 입장이 그녀에게 핸디캡이 외어 있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 여성이 위치한 장래의 전망 때문이다. 신경쇠약이나 혈액순환 중추의 불안정 정도는 그것 이 병리학적인 것이 되지 않을 경우, 여성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남성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성질이 있다. 한 달에 하루이틀쯤 대수롭지 않은 병에 시달리 더라도 이것은 별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거기에 순응해 있으며, 특히 달마다의 '저주'가 더욱 지장이 된다고 생각되는 운동선수·여행가·중노동을 하는 여성들 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개의 직업은 여성이 제공할 수 있는 힘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포츠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육체적 능력에서의 독립된 성공이 아니라, 각 육체조 직에 있는 고유한 장점의 완성이다. 페더급 선수는 헤비급 선수와 동일한 가치가 있으며, 여자 스키선수는 보다 빠른 종목의 남자선수에게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각 서로 다른 두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독특한 완성을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남성에 대해 핸디캡을 느끼는 경우가 적은 것은 바로 여성 운동선수들이다. 육체적인 열세로 인해 여성에게 폭력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지만, 만일 여성이 그 육체에 자신을 갖고 다른 방법으로 세계 속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 하다면 그 결점은 간단히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헤엄을 치거나, 등산을 하거나,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원소와 겨루거나, 모험을 무릅쓰거나, 그녀의 세계 앞에서 내가 앞에서 말한 소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어렸을 때부터 싹 튼 열등 콤플렉스를 확고히 하여 의미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것은, 여성에게 조금도 힘의 배출구를 열어주지 않는 그 상황(여자라는 것) 때문이다. 여성의 지적 완성을 어렵게 하는 것도 이 콤플렉스이다. 소녀는 사춘기 이후 지적·예술 적인 영역에서 퇴보한다는 지적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춘기의 소녀는 그 형제들이 주위에서 받는 격려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욕을 위축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 역시 한 사 람의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결국 그녀는 직업적인 책임과 그녀가 여성인 데서 오는 책임 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느 실업학교의 여교장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소녀는 갑자기 일을 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이제 가족과 더이상 만나고 싶 지 않다는 새로운 욕구를 갖는다. 그녀가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녀는 밤에, 몹시 지쳐서 낮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한 머리를 식히지도 못하고 집으 로 돌아간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어머니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 오자마자 심부름을 시킨다. 그리고 흩어진 가사를 정리해야 하고 자기 옷가지도 손질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녀는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자형제의 입장과 자기의 입장을 비교하고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항심을 일으킨다(리프만의 <청년과 성욕>에서) 어머니가 여학생이나 직장에 다니는 딸에게 서슴지 않고 시키는 가사나 잡무는 그녀들 을 피로에 지치게 한다. 나는 전쟁중에 세브르에서 가르친 여학생들이 학업 이외로 맡겨진 가사노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중의 한 여학생은 결핵성 추골 염에 걸리고, 다른 여학생은 뇌막염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차차 알겠지만) 자기 딸의 해방에 대하여 은근히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딸을 고의로 구박하려고 했다. 그 러나 남자가 되기 위한 청년의 노력은 존중되어 이미 많은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소녀 는 집에 눌러 있기를 바라고, 외출은 감시를 받고, 오락이나 쾌락은 전혀 누릴 수 없다. 긴 여행이나 도보여행, 또는 자전거여행을 혼자 계획하거나 당구나 공글리기에 열중하는 여성 은 보기 힘들다. 여성의 교육에서 보는 자발성의 부족 이외에도 사회의 풍습이 그녀들의 자유를 어렵게 하고 있다. 만일 여자가 거리를 거닐기라도 하면, 남자들이 추파를 던지면 서 접근해 온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처녀들은 내항성 기질이 전혀 아니데 파리 시내를 산책해도 전효 즐겁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남자들이 언제나 귀찮게 굴어 그것을 경계하느라고 즐거 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즐겁게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 면 구경거리가 된다. 성큼성큼 걸어가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지껄이거나, 깔깔 대며 웃거나, 사과를 씹어먹거나 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발로 간주되어 모욕을 당하거나 미행을 받거나 트집을 잡히기도 한다. 조심성이 없는 것은 곧 행실이 나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복종과 '양가집 처녀'의 제2의 천성이 된 이 자기제어는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말살 해 버린다. 젊은 처녀가 활달하면 언제나 억압을 받게 된다. 여기서 긴장과 권태가 생기고, 이 권태는 감염된다. 그녀들은 곧 권태를 느끼고, 감옥 같은 구속을 싫어한다. 그녀들이 남 자친구를 필요로 하는 이유의 하나가 이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무능은 조심을 낳고, 그것이 그녀들의 모든 생활에 널리 퍼져 공 부에도 나타난다. 빛나는 승리는 남성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너무 높은 목표에는 감히 도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14세의 소녀들은 자기들을 소년과 비교하여 "사 내아이 쪽이 월등해." 하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런 단정은 의기소침해지는 원인이 되며, 나 태와 평범을 조장한다. 어떤 소녀가 - 그녀는 남성에 대해 별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 어떤 남자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네가 더 비겁한 여자라고 말했다. 여자는 "어머, 그렇지만 여자가 어디 남자와 같은가요?" 하고 애교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패배주의의 원인은 처녀가 자기의 미래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행각하지 않는데 있다. 그녀는 자기 미래에 애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자기 운명은 어차피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설사 자기가 어떤 의욕을 갖더라 도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남성에게 헌신하는 것은 남자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남자에게 바쳐진 몸이므로 열등감을 받아들여 그것을 조장하 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눈으로 볼 때 여성이 가치를 높이는 것은. 그 인간적인 가치를 증대시켜서가 아 니라 남자의 이상에 맞도록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서 이루어진다. 여자가 경험이 없으면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청년들과 같은 공격정신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어설픈 권위로 콧대를 높이고 승리를 거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대부분 그녀를 실패로 몰아넣는다. 가장 비천한 여자에서 가장 존귀한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저마 다 남자의 마음에 들려면 양보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어머니들은 딸에게 "사내 아이를 절대로 동등한 친구로 대하지 말고, 나서지도 말고, 수동적인 역할을 감수해야 해." 하고 엄명을 내린다. 만일 그녀들이 남자친구와 사귀려고 하거나 남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 면 자기 쪽에서 적극성을 때는 듯이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너무 대담하거나 너무 교양 이 있거나 너무 똑똑하거나 개성이 너무 뚜렸한 여자는 남자들을 두렵게 한다. G. 엘이엇 (영국의 여류작가, 1819~1889)이 지적한 것처럼,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별로 똑똑하지 못한 금발의 여주인공이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갈색머리 여자를 이긴다. <플로스 강의 물 레방앗간>에서 마기는 역할을 뒤집어놓으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결 국 스테판과 결혼하는 것은 금발의 루시이다. <모히칸족의 최후>(페니모어 쿠퍼의 탐험 소설)에서도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용감한 클라라가 아니라, 유순한 앨리스이다. <작은 아씨들>에서도 로라에 대해서 동정적인 주는 유년시절의 친구에 불과하며, 지저분 하며 멋없는 곱슬머리 에이미에게 사랑을 바친다. 여자라고 하는 것은 무능하고 쓸모없고 수동적이고 유순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처녀는 화장을 하고 몸을 단장할 뿐 아니 라, 자기의 자발성을 억제하는 대신에 우아하고 세련된 매력을 보여야 한다. 일체의 자기 확인은 그녀에게 여자다움과 유혹의 기회를 줄이는 일이다. 청년이 인생에의 출발을 비교 적 쉽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천직과 남성이라는 천직이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독립과 자유의 주인공으로 완성되면서 사회적인 가치와 함께 남자의 위신을 획 득한다. 그는 라스타냑(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젊은 야심가)처럼 야심을 갖고, 돈과 명예 와 여자를 한꺼번에 얻으려고 한다. 그를 격려하는 평범한 전형의 하나는 여자들이 아양을 부리는 강하고 유명한 남자의 야심이다. 이와는 달리 처녀의 경우는 인간이라는 조건과 여 성이라는 천직 사이에 거리가 있다. 청년기는 여성에게 대단히 어렵고 또 결정적인 시기이 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주적인 개체였으나, 이제는 주권을 버려야 한다. 그녀는 형제들처 럼, 아니 더욱 심하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될 뿐만 아니라, 주체이고 능동체이며 자 유를 누리려고 하는 그녀의 선천적인 욕구와 그녀에게 수동적인 객체이기를 요구하는 색 정적인 경향 및 사회적인 요망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본질로서 파악한다. 그런데 어떻게 비본질이 될 결심을 했을까? '타자'로서만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고 하더라도, 어떻게 나의 '자아'를 버릴 수 있겠는가? 젊은 여성은 이런 괴로운 딜레마에 빠져 몸부림을 친다. 욕정에서 혐오로, 희망에서 공포로 동요하며, 스스로 불러세운 것을 거부하면서 그녀는 어린이로서 독립했을 시기와 여성으로서 복종해야 하는 시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 불확실성이, 미숙한 나이를 벗어나려는 처녀에게 설익은 과일의 시큼한 맛을 보여준다. 젊은 처녀는 자기의 상황에 대하여 지금까지 취해 온 선택의 방법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반응한다. 미숙한 주부인 '작은 아내'는 그 변신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작은 어머니'로서의 조건 중에서 지배욕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것이 남성의 속 박에 대해 용감하게 반향하도록 유도한다. 그녀는 성욕의 대싱어 되는 것과 하녀로 취급되 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권제를 확립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아주 어려서부터 무거운 책임을 젊어진 맏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말괄량이'는 자기가 여자라는 것올 발견하 고, 때로는 심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동성애로 빠지기도 한다.그러나 그녀가 독립과 폭력 사이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은, 세계의 소유였다.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여성으로서의 능력 이나 모성의 경험이나, 여자로서의 운명의 일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젊은 처녀는 어떤 저항을 거쳐서 자기가 여성이리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미 어린애같이 아양을 떨던 시기에 아버지와 마주 대할 때 그리고 색정적인 몽상 속에 그녀 는 여자다운 수동성의 매력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동성의 위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윽고 자기 육체에서 느끼게 되는 수치에 허영심이 섞이게 된다.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 게 했던 그손, 그녀를 당황하게 했던 그 시선, 그것은 애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가 신기한 마력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보물이고 무기이다. 그녀는 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주적이었던 유년기 이후로 사라졌던 그녀의 교태가 부활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기 시작한다. 양쪽 유방을 감추는 대신에,그것을 크게 만들 기 위해 주무르는 한편, 거울을 보며 웃는 방법도 연구한다. 당황과 교태의 연결이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당사자의 색정적인 감수성이 눈떠 있지 않는 한, 그녀가 남자의 마음에 들려는 간절한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눈치채기 어렵다. 실험을 통해, 갑상선 발육부전으로 무감각하고 우울하여 괴로워하는 병자에게 갑상선 추 출물의 주사를 놓아 증상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들 은 얼굴에 웃음을 띄고 명랑해져서 교태를 부리게 된다. 유물론적 형이상에 젖어 있는 심 리학자들은 여자의 교태를 갑상선에 의해 분비된 '본능'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막연 한 설명은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없다. 임파체질이나 빈혈증과 같은 기능적인 결 함은 언제나, 육체는 과중한 짐처럼 무거워지고 악의를 품게 되어 아무 희망도 약속도 갖 지 않는다. 몸이 일단 안정과 생기를 회복하면, 당사자는 육체를 자기 것으로 확언하고, 그 육체를 통하여 남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젊은 처녀가 색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미끼 로 삼는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객체가 되고, 객체로서 자각한다. 즉 자기 존재의 새로운 양상을 놀라운 눈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이중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된 다. 그녀는 자기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고, '외부'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로저먼드 레이먼(영국의 현대 여류소설가)의〈왈츠에의 초대〉에서 올리비아가 거울에서 미지의 얼 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그 얼굴은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나타난 객체화 된 그녀이다. 이때에 받은 그녀의 감동은 곧 사라졌지만,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조금 전부터 자기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라보는 순간에 특이한 감동이 밀려왔다.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의 눈앞에 낯선 여자, 즉 새로운 존재가 나타 났던 것이다. 그것은 두세 번 되풀이하여 일어났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보고 관찰했다. 그 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두우면서 도 밝은 신비로운 얼굴, 약동하며 힘이 넘치는,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머리칼. 그녀 의 몸은 옷 때문이었는지 알맞게 긴장되어 보였다. 야무지고, 꽃처럼 피어나며, 탄력이 있 으면서도 침착한, 한마디로 생기발랄 했다. 그녀 앞에는 초상화처럼 장미와 같은 처녀가 있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방의 모든 것이 그녀를 감싸고 "이게 너야."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그 속에서 자기의 어린애같은 꿈을 인정하 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도 한 그 모습에서 읽었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다. 그러 나 젊은 처녀는 마치 다른 소녀의 육체처럼 자기를 감탄시키는 자신의 몸을 육체적인 존 재 속에서 사랑했다. 그녀는 자기를 애무한다. 둥근 어깨와 팔을 어루만진다.그리고 가슴과 다리를 유심히 바라본다. 고독한 쾌락에서 몽상이 생기고, 그녀는 애정을 다하여 자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청년의 경우에는 자기애와 소유하려는 대상 쪽으로 그를 밀어 보내는 색정적인 충동 사이에 하나의 대립이 있다. 즉 그의 나르시시즘은 대개 성적 성숙기에 소멸된다. 한 편 여자는 그 애인에 대해, 자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처음부 터 불투명한 면이 있다. 여자는 다소 복잡한 감정 속에 자기 육체를 바칠 남성으로부터의 찬사를 통하여 자기 육체가 찬미되기를 바라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매혹시키기 위해 아름 다워지기를 바란다거나, 자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 매혹시키려고 한다는 견해는 너 무 단순하다. 여자는 자기 방에 혼자 있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살롱에 있거나 남성에 대한 욕구와 자기애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혼동은 마리 바슈키르 체프의 경우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늦게 젖을 땐 것은 그녀에게 누 구보다도 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한 요인이 되었다. 그녀는 5세 때부터 사춘기가 끝날 무 렵까지, 자기 모습에 사랑의 전부를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이나 얼굴의 아름다움 을 미칠 듯이 감탄해 왔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이다..." 하고 그녀는 쓰고 있다. 그녀는 현 혹된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답례하기 위해 가수가 되기 를 원했다. 그러나 이 '자기애'는 비현실적인 꿈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12세 때, 이미 연애를 했다.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하고 상대방에게 불어넣으려는 열정 속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사랑의 확증을 얻으려고 했다. 그녀는 한마디 말 도 건네지 않고 사랑하는 H 공작이 자기 발 밑에 엎드려 "그대는 나의 화려함에 이끌려 나를 사랑하게 될 거요... 그대는 진정 내가 바라던 훌륭한 여자요." 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전쟁과 평 화>에 나오는 나타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반성이다. 엄마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영리할까. "나타샤, 그녀는 정말 귀여 워." 하고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훌륭 한 남자가 자기를 찬란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하 고 말을 이었다. "영리하고 귀엽고 대단한 미인이야. 또한 수영도 잘 하고 승마솜씨도 훌 륭해. 그리고 또 목소리는 어떤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음정이다." 그날 아침에 그녀 는 다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나타샤는 얼마나 아름다운 처녀인 가!" 그리고 또다시 남성의 입을 빌려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인이고, 목소리도 아름답고, 젊고,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니 그 처녀를 조용히 놔주세요." 캐서린 맨스필드(현대 영국의 여류소설가)도 베릴이라는 작중인물을 통하여 나르시시즘 과 여자의 숙명에 대한 로마네스크한 욕망이 밀착되어 있는 경우를 묘사하고 있다. 식당에서는 베릴이 장작 불빛을 받으면서 방석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를 위해 그 기타를 치며 작은 소리로 노래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로의 불빛은 그녀의 구두와 기타의 빨간 몸통과 그녀의 흰 손가락을 비추고 있었다... '만일 내가 밖에서 창문을 들여다보고 이런 나를 보게 되면 무척 감동할 테지.' 하고 그 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기타를 치면서 노래는 부르지 않은 채 기타음만 듣고 있었 다. "내가 처음으로 그대를 보았을 때, 오! 그대는 혼자 있으려고 했는데, 그대는 그 작은 발 을 방석 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어. 나는 그런 그대를 있을 수 없어." 베 릴은 고개를 들고 노래부르기 시작한다. 달도 지쳤네... 그런데 누가 요란하게 문올 두드렸다. 하녀의 상기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멍 청한 하녀를 쳐다보기도 싫다. 그녀는 어두운 객실에 달려가 서성거렸다. 그녀는 흥분하여 가슴이 설레었다. 벽난로 위에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거울 에 비친 창백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아무도 보는 사 람이 없다. 아무도... 베릴은 생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그녀는 다시 웃었다. (서곡〉에서) 젊은 처녀에게 이런 자기숭배가 나타나는 것은, 단지 자기의 육체만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다.그녀는 그 자아 전체를 소유하고 예찬하기를 원한다. 그녀가 그 속에서 기꺼이 자 기 마음을 털어놓는 일기가 추구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다. 유명한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일 기는 그 전형이다. 젊은 처녀는 지금까지 인형에게 말을 건넨 것처럼, 자기 수첩에 말을 건넨다. 그것은 남자친구이고, 고백의 상대이다. 마치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거기에는 부모나 친구나 선생들에게 보여 주지 않는 어떤 진실이 쓰여 있으 며, 혼자서 거기에 도취된다. 어떤 12세의 소녀는 20세까지 일기를 계속 썼는데, 일기장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작은 일기장 얌전하고 예쁘고 신중한 당신의 비밀은 뭐든지 말해 줘 나는 작은 일기장 (드베스의〈사춘기 특이성의 위기〉에서) 거기에는'내가 죽은 후가 아니면 읽지 말라'또는'내가 죽으면 태워버리라'하고 쓰여 있 다. 사춘기 이전의 소녀에게 발달하는 비밀의식이 점점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녀는 남들 과 어울리기가 싫어 고독 속에 파묻혀, 숨겨진 자기를 주위사람들에게 알리기를 거절한다. 그 자기를 그녀는 참된 자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공의 인물이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나타샤처럼 무용수가, 마리 르네뤼(프랑스의 현대 여류극작가)가 그랬던 것 처럼 성녀(聖女)가, 또는 자기 자신이 특별히 멋진 여자가 된 것으로 자부하기도 한다. 이 여주인공과 그녀의 부모나 친구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용모 사이에는,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와 그 녀 자신과의 관계는 더욱 정열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고독에 도취하여, 자기를 남 들보다 우월한, 예외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는 평범한 현재의 생활을 보상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녀는 꿈에 의해 이 비좁고 고달프고 초라한 생활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언제나 꿈꾸기를 좋아하며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녀는 평범한 시구(詩句)아래 자기를 위협하는 세계를 감춰 둔다. 달빛이나 장밋빛 구 름이나 비로드 같은 밤으로 남성에게 후광을 두른다. 자기의 육체를 대리석과 벽옥(碧玉) 과 나전(繹細)의 전당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리석은 동화를 자기 자신에게 들려준다. 그녀 가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 는 행동할 때 사물을 분명히 관찰해야 하는데 안개 속에서 기다리곤 한다. 청년도 꿈을 꾼다. 특히 자기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모험을 자주 꿈꾼다. 그러나 젊은 처녀는 모험보다는 기적을 꿈꾸며, 사물이나 인간에게 불투명한 마법의 빛을 던진다. 마법 의 관념은 수동적인 힘의 관념이다. 젊은 처녀는 주로 수동적이며 그러면서도 힘을 찾기를 원하기 때문에 마법을 믿게 된다. 남자들을 자기의 지배하에 예속시키는 육체의 마법이나,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운명의 마술을 믿어야 한다. 그 녀는 중요한 현실세계는 잊으려고 한다. "나는 가끔 학교에서 배운 문제에서 어떻게든지 벗어나 꿈의 나라로 날아간다." 하고 어 떤 소녀는 쓰고 있다. (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그러면 나는 즐거운 공상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겨 현실감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의자에 우두커니 앉 아 있다가 정신이 틀었을 때에는 방 안에 있는 나에게 스스로 깜짝 놀란다." '나는 시를 쓰기보다는 두서없는 공상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고 또 한 소녀가 쓰 고 있다. "머릿속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하거나, 별빛을 받은 산들 을 바라보면서 전설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훨씬 더 재미있다. 그것은 막연하 여 편안하고 상쾌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몽상은 어떤 병적인 형태를 취하여,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생활 전체에 침투하기도 한 다. (보렐과 로뱅의 공저<병적인 몽상> 참조. 민코프스키의<조발성 치매증>에서) 지적이고 공상적인 소녀 마리 B는 14세 무렵에 맞게 된 사춘기 때, 과대망상과 정신착 란의 발작이 일어났다. 그녀는 갑자기 부모에게 자기는 스페인 여왕이라고 말하고, 위엄있 는 태도를 취하며 장막 안에서 옷을 갈이 입었다. 그녀는 웃고, 노래 부르고, 지휘하고, 명 령을 내렸다. 이런 상태는 2년 동안 월경중에 항상 계속되었다. 그 후 8년 동안은 정상적 인 생활을 했으나, 그녀는 공상을 많이 하고 사치를 좋아하고 종종 야속한 듯이 "나는 고 용인의 딸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21세 경에 무감각상태가 되어 주위사람들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 야심을 표명했 다.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성 안나병원에 입원하여 8개월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3년 동안 병석에 누워 까다롭고, 짓궃고, 사납고, 변덕스러워 주위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결국 성 안나병원에 다시 입원하여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병상에서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월경을 하는 듯한 일정한 기간에는 이불 속에서 옷을 입고, 과장된 태도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고, 의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야유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의 표현이 며, 교만한 태도는 과대망상의 표시였다. 그녀는 점점 몽상에 깊이 빠져, 몽상하는 동안은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이제 화장은 전혀 하지 않고 침대를 더럽히기도 했 다. '그녀는 기묘한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속옷도 입지 않고 종종 시트조차 없 이 알몸을 드러내 보이거나 그러지 않을 때는 이불로 몸을 감쌌다. 머리는 은종이로 장식 하고, 팔·손목·어깨·복사뼈는 끈이나 리본으로 감쌌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반지로 손 가락을 장식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자기의 처지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전에 일어 났던 발작이 생각나요.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인형을 갖고 놀았어요. 그 인형이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잘 알면서도 살아 있다고 믿고 싶 어하는 어린애와 같았어요... 나는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차츰 나답지 않게 거기에 매혹 되었어요. 나의 생활은 꿈과 같았어요... 나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여배우와 같았어요. 나는 가공의 세계에 살고 있었어요. 나는 여러 개의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그 어느 삶에 서나 나는 주역 이었어요... 아, 나는 그렇게 많은 삶을 원해요. 한번은 금테 안경을 낀 미 남의 미국인과 결혼했어요... 우리는 저택을 갖고 있었어요. 각자 자기 방을 따로 갖고 있 었어요. 나는 성대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어요... 나는 동굴인 시대를 살아 본 적이 있어 요... 나는 벌써 옛날에 결혼했어요. 나와 동침한 남자들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어요. 여기서는 사람들의 성장이 뒤졌나 봐요. 내가 넓적다리에 금팔찌를 끼고 알몸으로 있는 것 을 알아보지 못해요. 옛날에 나는 무척 좋아하는 남자친구들을 몇 사람 갖고 있었어요. 우 리 집에서는 자주 연회를 베풀었는데, 꽃과 향수와 담비의 모피도 눈에 띄었어요. 친구들 은 미술품이나 조각이나 자동차를 내게 주었어요... 시트 위에서 알몸이 되면 옛날생활이 생각나요.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몹시 사랑했어요. 나는 예술가로서 내가 바라는 모든 것 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리석은 짓도 했어요. 나는 모르핀과 코카인 중독자였어요. 여러 사람의 애인이 있었어요... 그들은 밤에 나한테 찾아왔어요. 그들은 둘이서 왔고, 이 발사를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우편엽서를 보고 있었어요." 그녀는 한 의사를 사랑하여, 자기가 그의 애인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 면 그녀에게는 세 살 된 딸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또 여섯 살 된 딸이 있는데, 아주 행 복하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아버지는 아주 멋쟁이였다. 이 밖에 비슷한 이야기가 두 가지 정도 더 있으나, 모두 그녀가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다. 이 병적인 몽상은 본질적으로는, 현실생활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생활 의 실상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젊은 처녀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 리 B는 많은 처녀들에게 흔히 있는 보상의 과정을 극단적으로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젊은 처녀도 고독한 자기숭배에 빠져 있는 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자기완성 을 위해서는 타인의 의식 속에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녀는 자주 자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더욱 젊었을 때에는 마음의 벗이 어머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를 특 히 성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도와주었다. 이제 그녀는 자아의식의 제한에서 처녀를 박탈하는 객체인 동시에, 자아를 자기에게 돌 려주는 증인이다. 어떤 소녀들은 서로 알몸을 보기도 하고, 가슴 견주어 보기도 한다. 기숙 사에 들어가 있는 여학생의 이런 대담한 유희를 묘사한 <제복의 처녀>의 한 장면을 독자 들은 기억할 것이다. 처녀들은 막연한 혹은 분명한 애무를 교환한다. 콜레트가 <학창시절 의 클로딘>에서, 또 그다지 솔직하지는 않지만 로저먼드 레이먼이 <먼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젊은 처녀에게는 동성애적인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나르시시즘적인 쾌락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어떤 처녀는 자기 살결의 부 드러움이나 자기 몸의 아름다운 곡선을 상대방 처녀에게서 정욕적으로 구한다. 이런 처녀 들이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열애에는, 일반적으로 '여성다움'의 존중도 포함되어 있다. 성 적으로는 남자가 주체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보통 자기들을 이성에게로 쏠리게 하는 욕 망 의해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여자는 절대적인 대상이다. 그래서 중학교나 그 밖의 각급 학교·기숙사·여자의 직장 등에는 그처럼 '특수한 우정'이 꽃핀다.그중의 일부는 순전히 정신적이지만, 다른 것은 대단히 육체적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마음 을 털어놓고 서로의 비밀을 주고받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가장 열렬한 신뢰의 증거는 자 기의 일기를 친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성적 포옹 대신에 친구끼리 깊은 애정의 표시를 교환하고, 종종 간접적으로 자기 심정의 육체적 증거를 주고받는다. 예컨대 나타샤는 소냐 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빨강게 달궈진 자로 자기 팔에 화상을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녀들은 서로 무수한 애칭으로 부르고, 열렬한 편지를 교환한다. 여기에 뉴잉글랜드의 청 교도인 에밀리 디킨슨(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있 다. 오늘 하루종일 당신을 생각했어요. 간밤에는 줄곧 당신의 꿈들 꾸었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했죠. 당신은 내가 장미를 꺾는 것을 도와주었으나, 내 바구니 는 언제까지나 차지 않았어요.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당신과 산책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밤 이 다가오면 나는 즐거워요. 나와 어둠과 꿈과 언제까지나 차지 않는 바구니 사이에 걸쳐 있는 시간을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있답니다... 망두스는〈처녀의 마음〉이라는 저술에서 이와 비슷한 많은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운 수잔... 나는 여기에 <아가>의 몇 구절을 적고 싶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나의 친구여! 신의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당신은 샤론(이스라엘의 평원이름)의 장미나 계곡 의 백합을 닮았어요. 그리고 그대는 신의 약혼녀처럼, 내게는 여느 처녀들과는 다른 특별 한 사람이에요. 그대는 상징, 아름답고 고귀한 수많은 것의 상징이었어요... 백옥 같은 수 잔, 나는 그대에게 얼마쯤은 종교적인, 순수하고 무구한 사랑을 바치고 싶어요. 다른 한 사람의 일기는 이처럼 고귀하지는 않지만,자기의 감동적인 심정을 고백하고 있 다. 나는 그 작은 흰팔에 허리를 바싹 안긴 채, 그 사람의 둥근 어깨에 손을 얹고, 팔을 그 사람의 따스한 팔에 대고, 그 부드러운 가슴에 몸을 밀착시켰다. 내 눈앞에는 그 사람의 작은 이가 반쯤 보이는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몸이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 꼈다.(망두스의 <처녀의 마음>에서) 에바르 부인도 <사춘기의 여성>이라는 저서에서 이런 애정의 표현을 많이 수록하고 있 다. 나의 사랑하는 요정, 그리운 사람아, 나의 아름다운 요정.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말해 줘요. 나는 슬퍼요, 그토록 당신을 사 랑해요. 나의 L... 나의 이 심정을 말로는 충분히 전할 수없어요. 나의 사랑을 표현할 만한 말이 없어요. 우상 숭배 같은 것은, 내가 느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녜요. 때때로 심 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너무 황홀해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아, 그리운 나의 사람, 앞으로도 줄곧 사랑해 줄 거죠? 이런 흥분한 애정이 청춘기의 죄 많은 사랑으로 빠지는 것은 매우 간단한일이다. 때로는 두 사람의 연인 중에서 한 사람이 상대방을 지배하여 사디즘이 섞인 권력을 휘두르는 경 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굴욕도 싸움도 없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다. 주고받는 쾌락은 각자가 아직 두 사람으로 갈라지지 않고 홀로 자기를 사랑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순결하다. 그러나 이순수성은 무의미하다. 처녀가 발을 들여놓고, 타자에게 접근하기를 원할 때, 그 녀는 자기를 위해 아버지의 시선의 미술을 소생시키려고 한다. 그녀는 어떤 신성의 감정과 애무를 원한다. 그녀는 남성처럼 낯설지도 않고 또 두렵지도 않은, 그러나 남성적인 매력 을 지닌 여성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직업을 갖고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 는 여성이 남성만큼 매력적인 것은 당연하다.여학생의 마음에 여교사나 사감에 대해 어떤 정염의 불꽃이 피어오르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여성 부대>에서 클레망스 단은 불 타는 정열이 순결한 형태를 취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젊은 처녀는 그 마음의 벗에게 뜨 거운 정열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정열을 나눠 갖고, 보다 생생 하게 그것을 느끼려고 서로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여학생은 자기가 택한 친 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었어요. 나는 X양간 생각하고 있어요. 이처럼 애인(동 성애인)을 사랑해 본 적은 없었어요. 나는 1학년 때부터 당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나는 당신보다 정열적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을 포 옹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제정신이 아녀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러 학교에 가는 것 이 무척 기뻐요. (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가장 많은 예는 처녀가 자기의 우상에게 자기의 심정을 대담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운 당신, 나는 당신을 마주 대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돼요... 당신 을 만나지 못할 때에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만나고 싶어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 하고 있어요. 당신의 모습을 보면 나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서 숨어 버리고 싶어요. 당신 곁에서 나는 움츠러들고, 아무 것도 모르게 돼요. 당신이 말을 걸어오면 나는 당황하여 가 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요정의 부드러운 목소리나 사랑이 넘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나는 당신의 사소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켜봐요. 내가 하 는 말은 이제 대화가 아니라, 무엇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릴 뿐이에요. 당신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겠지요.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요. 그것은 내가 당신을 진심으 로 사랑하고있다는 거예요.(마르그리트 에바르의〈사춘기의 여성〉에서) 어느 실업학교의 여교장은 말한다.(리프만의〈청년과 성욕〉에서) 나는 청춘시절에, 젊은 선생 중의 한 사람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 종이를 서로 가지려 고 다투다가 결국 내가 그 종잇조각을 20페니나 주고 샀던 일을 상기해요. 다 쓴 그의 지 하철 승치권도 우리는 수집했어요. 동성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은 남성의 역할을 해야 하므로, 그녀는 결혼하지 않는 것 이 바람직하다. 결혼이 젊은 애인을 반드시 실망 시킨다고 볼 수는 없으나 장애가 되는 것 은 사실이다.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나 연인의 권력에 복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열은 비밀리에, 적어도 순전히 플라토닉하게 발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에 분명한 에로티시즘으로의 이행은, 사랑하는 대상이 남성일 경우보다 훨씬 쉽다. 그녀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경우에도 상대가 여성의 육 체일 경우, 젊은 처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매나 어머니를 통해 애정의 육 감이 섬세하게 뒤섞인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을 때에도, 역시 눈에 뜨이지 않게 애정 은 육감적인 쾌락으로 쉽사리 옮아간다.〈제복의 처녀〉(여학생을 다룬 독일 영화)에서 도 로시 비크가 혜르타 틸의 입술에 키스 했을때, 그 키스는 모성적인 동시에 성적이었다. 여 성과 여성 사이에는 수치심을 깨끗이 제거하는 공범성이 있다. 한 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에 일으키는 흥분은 대개 거칠지 않다. 동성애의 애무는 처녀를 잃는 일도 없고, 남근의 삽입 도 없다. 그녀들은 유소년기의 음핵 에로티시즘을 불안한 변신 없이 만족시킨다. 젊은 처 녀는 육체를 깊은 혼란에 빠뜨렸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수동적인 대상으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르네 비비앙(프랑스의 현대 여류시인)은 다음과 같이 시로 표 현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주받은 여자(동성연애를 하는 여자)'와 그녀의 애인들과의 관계 가 묘사되어 있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몸은 그들의 몸과 같다. 우리의 반달 같은 입맞춤에는 창백한 부드러움이 있고, 우리의 손가락은 뺨에 돋아난 솜털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리띠가 풀릴 때 우리들은 동시에 애인이기도 하고 또 형제기도 하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우리는 우아하고 섬세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재 것으로 만들어도 당신의 유방을 해치지 않으니까... 내 입술이 당신의 입술을 모질게 깨물 리도 없으니까(<발자국>에서) '유방'이니 '입술'이니 하는 부적절한 시어를 통해 그녀가 여자친구에게 분명히 약속하고 있는 것은 폭력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녀가 때때로 연상의 여성에게 첫사랑을 바 치는 것은, 폭력과 폭행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성적인 여성은 그 처녀에게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아버지의 권위와 초월성을 갖고, 가치의 원천이며 척도이고,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돋보이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디까 지나 여성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애무에서 너무 일찍 떠나거나 반대로 너무 오래 귀염 을 받은 적령기의 처녀는 남자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따스한 유방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 하여 자기의 육체와 가까운 이 여성의 육체 속에, 젖을 떼었을 때 잃어버린 생명과의 직접 적인 융합을 꾀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에워싼 타인의 시선에 의해 고독했던 분리를 극복한 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는 투쟁이 있고 모든 사랑에는 질투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남 성과의 첫사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은 배제된다. 동성연애의 경험이 진정한 연애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젊은 처녀에게 대 단히 행복한 안정감을 주어 지속되기를 원하며, 거기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 다. 그것은 한결 에로틱한 동성연애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제4장 참조) 그 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 것은 처녀시절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너무 쉬운 것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젊은 처녀는 연상의 여자에게 바치는 사랑 속에 서 자기의 미래를 갈망한다. 그녀는 상대를 우상화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특출하게 뛰어나지 않는 한, 우상화는 불가능하다. 사랑을 바친 연상의 여자가 뽐내기 시작하면, 젊 은 여자는 비판하고 비교한다. 가가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기 때문에 택한 이 '타자'는 언제까지나 권위를 유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타자'가 아니다. 남성의 신들은 먼 하늘에 있기 때문에 더욱 건재하다. 그리하여 호기심과 정욕이 젊은 처녀로 하여금 더욱 강렬한 포옹을 원하게 한다. 대개의 경우, 처녀는 처음부터 동성애를 과도기적인 성적 입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꿈꾸고는 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거나 또는 경험할 기회가 없 었던 연애를 별 위험 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다소나마 자인하면서 사랑·질투·분노 ·교만·환희·고통 등의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남자에게 바쳐지게 되어 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완전한 여자의 운명을 받아들인 다. 남자는 그녀를 현혹시키지만, 역시 두렵다. 남자에 대해 갖고 있는 모순된 두 가지 감정 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녀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웅성과, 그녀가 경건하게 숭배하는 우상을 분리한다. 그녀는 남자친구들에게는 쌀쌀맞게 몸을 사리면서, 매력적인 먼 나라의 왕자를 우상화한다. 그녀가 침대머리에 붙여놓는 사진은 영화배우가 아니면 이 세상에 없거나 또는 있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영웅, 그리고 우연히 만났으나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낯선 남자이다. 이와 같은 연애에서는 문제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연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 적 또는 시적은 명성이 있지만 그 육체가 불안을 주지 않는 남자, 예컨대 좀 익살스러운 늙은 교수이다. 이런 노인은 처녀가 유폐되어 있는 세계의 피안에 있으므로, 은밀히 사모 하여 신에게 몸을 바치는 것처럼 헌신할 수 있다. 이런 헌신은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다. 육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허용된다. 비현실적으로 연애하는 여자는 자기가 택한 남자가 볼품이 없고, 못생기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남자라도 무방하다 .이런 상대라면 더욱 안전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그에게서 떼어놓는 여러 가지 장애를 한 탄하는 체하지만, 사실은 그녀와 그 사이에 어떤 현실적인 관계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남자를 택했던 것이다. 젊은 처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의 순결을 해치지 않는 추 상적인 연애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상대방 남자가 없을 때에는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는 두려움 ·아쉬움·희망·원망·열광 등을 느끼지만 자기 몸은 결백하며, 그녀 자신은 완전히 행동 에서 떠나 있다. 우상이 멀면 멀수록 훌륭한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다. 날마다 만나는 피아노 교사는 익살스럽고 못생긴 남자가 바람직하다. 그런데 대단히 먼 곳에서 죽어가는 외국인에게 반할 경우에는, 굉장한 미님이고 남성적인 상대를 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성의 문제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뇌적인 연애는 처녀의 내재성 속에 '타자' 의 현실적인 존재가 없이 색정이 일어나는 나르시시즘적인 태도를 연장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때때로 처녀가 비정상적으로 공상적인 생활을 열심히 영위하는 것은, 역으로 실제의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알리바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쪽을 택한다. 여러 가지 실례 중에서 특히 H.도이치는 뜻깊은 예를 보고하고 있다.(〈여성심리〉에서) 그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젊은 처녀의 경우이다. 그녀는 쉽사리 남자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남자와의 교제를 일체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1 3세 때 이미 17세 소년을 사모했다. 그 소년은 못생겼으며, 그녀에게 말 한마디도 건넨 적 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사진을 구하여 손수 헌사를 적어넣고, 3년 동안 날마다 가공의 경험에 대해 일기를 썼다. 두 사람은 키스하고 정열적으로 포옹했다.때로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싸우기도 한다. 그러면 그녀는 눈알이 붉게 상기되고 눈두덩이 부어 있었으며, 다시 화해하고 꽃다발을 주고받는다. 이사하여 그와 멀어지자 그녀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결코 그에게 보내지는 않았으며 답장도 자기가 썼다. 이것은 분명히 그녀가 두려워하는 실 제 경험에 대한 방어수단이다. 이것은 병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것을 확대 하면 극히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예의 해설에 불과하다.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경우도, 공 상적 감정생활의 분명한 실례이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H공작은 그녀가 한 번도 말을 건넨 적이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아찬미이다. 그러나 여자이므로 특히 그 시대나 그녀가 속하는 계급에서는 자립하여 성공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8세 때 그녀는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C에게 남자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나는 자기가 어떤 가치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치마를 걸치고 어디로 나가란 말인가. 결혼은 여성의 유 일한 직업이다. 남자에게는 서른 여섯 번의 기회가 있지만, 여자에게는 오직 한 번 밖에 기회가 없다. 은행(트럼프놀이의 일종)에서의 제로(zero)와 같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남자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최고의 양심이어야 한다. "나의 위치보다 아래에 있는 남자는 절대로 좋아할 수 없다."고 그녀는 쓰고 있다. "부자이고 독립된 남자에게는 자존심과 더불어 어딘 가 모르게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나는 H 공작의 변 덕스럽고 교만하고 잔인한 태도를 좋아한다. 그에게는 네로 황제와 같은 면이 있다."그리 고 또"사랑하는 남자의 우월성에 여자가 완전히 패하는 것은, 억척스러운 여자가 느낄 수 있는 자기애의 기장 큰 기쁨이다." 이와 같은 나르시시즘은 마조히즘으로 향하게 한다. 이런 관계는 푸른수염의 사나이'(페 로의 동화에 나오는 인물)나〈그리젤리디스〉(페로의 동화)나 순교자를 꿈꾸는 어린이에 게서 찾아볼 수 있다. 자아는 타자를 위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타자가 강할수록 그만 큼 자아는 풍부해지고 강해진다. 자아는 그 지배자를 포로로 하여, 지배자가 횡령한 모든 힘을 자기 속에 거둬들인다. 네로의 사랑을 받는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네로가 될 것이다. 타인 앞에서 자기를 무로 돌리는 것은, 자기 속에, 그리고 동시에 자기를 위해 '타자' 를 실현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무'가 되려는 꿈은 존재하려는 교만한 의지이다. 사실 마 리 바슈키르체프는, 그 남자를 통하여 자기를 매장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뛰어난 남성을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만든, 멀리 있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과, 현실 속의 남성에게 폼 을 맡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젊은 처녀들은 오랫동안 현실세계에서 자기의 꿈을 추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녀들 은 그 지위나 자질·지성 동에서 다른 모든 남성을 능가하는 남자를 구한다. 상대방 남자 가 자기들보다 연상이어서 이미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와 명성을 고 있기를 바란 다. 산과 명성이 그녀들을 매혹시킨다. 선택된 남자는 그녀들에게 광휘와 필연성을 전해 주는 절대적인 '주체'이다. 그의 우월성은 젊은 처녀가 그에게 쏟는 사랑을 이상화한다. 그녀가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그가 한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인을 필요로 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남자뿐"이라고 최근에 어떤 여자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고차원의 요구를 구실로 하여 젊은 처녀는 지극히 일상적인 구혼자를 경멸하고, 성본능의 문제를 회피한다. 그녀는 또한 꿈 속에서 아무 위험 없이 매혹적인 이미지의 자기모습을 소중히 이끼고 있다. 그렇다고 자기가 그 모습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마리 르 아 르두앵(〈검은 쫓〉참조)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정말 억세고 고집스러운 처녀였는데,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남자에게 완전히 헌신적인 희생자로서의 자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일종의 수치심 때문에, 꿈에서 체험한 천성의 숨은 경향을 현실에서는 도저히 표현 할 수 없었다.내가 나를 알게 된 바로는 사실 방자하고 거칠고 콧대가센 여자였다. 언제나 겸허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매우 훌륭한 여자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의무에 의해서만 살아가면서 거의 바보처럼 어떤 남자에게 반하여 그의 비 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진저리나는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일에 시달려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의 옷을 깁느라고 저무는 창가에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연기가 가득 찬 좁은 부엌에서 비참할 정도로 초라한 음식을 만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들의 아이는 병으로 줄곧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내 입가에는 괴 롭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언제나 내 눈에는 현실에서 혐오감 없이는 견딜 수 없 었던 묵묵한 용기의 처절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이 나르시시즘의 만족 이외에 지도자나 선생의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부모의 압력에서 벗어날 때 그녀들은 익숙지 못한 자유에 당혹한다. 그녀들은 그런 자유에 대해 부정적인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에 변덕을 부리거나 무절제한 행동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 들은 또다시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싶어한다. 변덕스럽고 교만하고 콧대가 높고 뻔뻔스 러운 처녀가 지각있는 남자에게 길들여져 귀엽고 상냥해지는 이야기는 삼류소설이나 영화 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남녀를 동시에 기쁘게 하는 상투적인 스토리이다. 이 것은 특히 세귀르 부인(19세기 프랑스의 아동문학가)이〈참으로 귀여운 아이〉에서 한 이 야기이다. 지젤은 어렸을 때 지나치게 너그러운 아버지에게 실망하여, 엄격한 큰어머니를 좋아하게 된다. 처녀가 되어서는 잔소리가 많은 쥘리앙이라는 청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는 진실 이라면 사정없이 타이르고 면박을 주어서라도 그녀의 버릇을 고치려고 한다. 그녀는 무골 호인이며 부자인 공작과 결혼하지만 그와의 생활에서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 가 드디어 기쁨과 정숙을 발견한 것은, 미망인이 되어 자기의 인도자의 까다로운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였다. 루이제 올콧의〈선량한 아내들〉에서 독립심이 강한 조는 미래의 남편이 그녀가 저지른 실수를 호되게 책망하자 그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도 잔소리가 많다 .그러 면 그녀는 열심히 변명하고 그에게 다소곳이 순종한다. 할리우드의 영화는 애인이나 남편의 건전한 폭력에 의해 길들여지는 사나운 처녀를 수 없이 보여주고 있다. 뺨과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오히려 유혹의 확실한 수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관념적인 사랑에서 성적 사랑으로 옮아가는 것이 결코 단순치 않다. 많 은 여성들은 어느 정도 환멸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조심스럽게 자기들의 정열을 피한다. 만 일 영웅이나 거인·반신이 처녀의 마음에 싹튼 사량에 응하여 이 사랑을 현실적인 경험으 로 바꿔 놓으려고 하면, 젊은 처녀는 두려운 나머지 그녀의 우상을 구역질 나는 하나의 수 컷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친다.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는 요염한 처녀도 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너무 과격한 반응을 보이면 그녀들은 화 를 낸다. 이것은 모순된 태도이다.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접근하기 어렵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애인이 되면 그는 평범해 보인다. 결국 다른 '남자와 같잖아' 하 고 환멸을 느껴 그를 원망한다. 그녀는 처녀의 감수성을 위협하는 육체적인 접촉을 거부하 기 위해 그런 구실을 내세운다. 그녀가 그'이상'에 얌전히 굴복할 때에도, 그녀는 그의 품에서 무감각하다. 슈테젤은 이 렇게 말한다.(〈불감중의 여인〉에서) "흥분한 어떤 젊은 처녀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자 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이 '사나운 동물'의 모습오로 본성을 드러내므로, 상상했던 사랑 의 구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가끔 젊은 처녀는 어떤 남자가 그녀의 친구를 좋아하게 되 면,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 또는 기혼남자를 애인으로 택하는데, 이는 불가능에의 취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진하여 돈 환(바람둥이 남자)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리하여 어 떤 여자에게도 매이지 않는 이 유혹자에게 복종과 애착을 꿈꾼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돌 이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신이 시도해도 실패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것 이야말로 그녀가 그를 선택한 이유의 하나이다. 어떤 젊은 처녀들은 현실적이며 완전한 연 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한평생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할 것이다. 즉 젊은 처녀의 나르시시즘과 그녀의 성본능이 원하는 경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그 녀는 자기포기 속에서 본질을 발견한다는 조건에서만 자기가 비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기가 대상이 되면, 거기서 그녀는 우상이 되어 자랑스러운 자기를 발견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으로 복귀시키는 엄격한 변증법을 거부한다. 여자는 단지 매력적인 보물이 되기를 원하며,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마술적이고 신비한 숭배물이 되기를 원한다. 보여지고 만져지고 상처받는 육체로 생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남성은 자기의 먹이가 되는 여자는 사랑하지만 마녀인 데메테르(율리 시즈 전설에 동장하는 여자로 그녀의 지팡이는 남자를 짐승으로 바꾼다)에게서는 도망친 다. 남자의 흥미를 끌고 감탄하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젊은 여성이 싫어하는 것은 자기가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사춘기와 함께 그녀는 수치를 배웠다. 그리고 이 수치는 그녀의 교태와 허영심에 섞여 있다. 남성의 눈은 그녀를 기쁘게 하는 동시에 그녀 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녀는 자기가 보이고 싶은 한계 안에서만 남이 보아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지나치게 날카롭다. 남자를 곤란하게 하는 모순이 여기서 생기게 된 다. 그녀는 자기 목덜미나 어깨를 드러내고 다리를 노출시키면서도, 남들에게 보이면 얼굴 을 붉히고 화를 낸다.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 재미있지만, 상대방에게 욕망을 일으키게 한 것을 알아차리면 혐오감으로 몸을 사린다. 자기에 대한 남자의 욕망은 찬사인 동시에 모욕 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매력에 책임을 느끼고 그 매력을 자유롭게 발산한다고 생각 하는 동안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러나 자기의 용모·태도·육체가 님에게 알려져 인정을 받게 되면, 그녀는 그런 것을 욕정으로 탐내는 타인의 무례한 자유로부터 감추려고 한다. 여기에 선천적인 수치심의 심원한 의미가 있다. 이 수치심은 대담한 교태에도 따르 기 때문에 난처해진다. 젊은 처녀는 자기의 적극성을 수동성 속에서는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놀라운 대담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대담성을 의 식하게 되면 곧 불쾌하여 화를 낸다. 시선처럼 애매한 것은 없다.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거리 때문에 점잖게 보인다. 그러나 시선은 흘끔 바라본 모습을 음험하게 포착하고 있다. 세상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여성은 이 함정에서 몸부림친다. 그녀는 상대방에게 홀딱 빠지지만, 곧 진저리를 내고 자 기 내부의 욕망을 죽여 버린다. 아직도 불확실한 그녀의 육체에서 애무는 때로는 연연한 쾌락으로서, 때로는 달갑지 않은 간지러움으로 느껴진다. 키스도 우선은 그녀에게 강한 감 동을 주지만 나중에는 느닷없이 그녀를 웃긴다. 그녀는 달콤한 만족감에 하나하나 반감을 느낀다. 다소곳이 키스를 받아들이지만, 일부러 입을 닦는다. 생긋 미소를 지어 친밀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갑자기 비꼬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여러 가지 약속을 하고 일부러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 마틸드 드 라 몰르(〈적과 흑〉의 등장인물)가 바로 그런 여자이 다. 그녀는 윌리앙의 미모와 희귀한 자질에 매혹되어, 사랑을 통하여 기이한 운명에 이르 기를 바라지만, 자기 관능의 지배와 남의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녀 는 순종에서 교만으로, 애원에서 멸시로 변한다.자기가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 든지 곧 자기에게 갚도록 한다. 마르젤 아를량(현대 프랑스 소설가)이 그 초상을 그린'모 니크'도 또한 그러하다. 그녀는 마음의 동요와 죄를 혼동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수치스러운 자기포기이다. 그녀의 피는 끓고 있지만 이 정열을 몹시 싫어하여, 언제나 먼저 반항한 후 에야 굴복한다. '풋과일'이 남자에 대하여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유치하고 삐뚤어진 나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젊은 처녀는 흔히 반쯤 거칠고 반쯤 지혜로운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 다. 그 중에서도 콜레트는〈학창시절의 클로딘〉이나〈푸른 보리〉에서, 이런 젊은 처녀를 매혹적인 뱅카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녀는 자기 눈앞의 세계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 고, 거기에 여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능적이고 로 마네스크한 욕망을 갖고 있다. 뱅카는 가시에 찔리고, 새우를 잡고, 나무에 기어오르지만, 남자친구인 필이 손을 만지면 오싹 놀란다. 그녀의 몸뚱이는 비로소 육신이 되며, 또 여자 로서 최초의 자각인 가슴의 설렘을 의식한다. 그녀는 이것을 계기로 마음이 들떠 예뻐지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자주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하고, 은은히 비치는 모슬린 옷을 입고, 교태를 부리고, 유혹하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단지 남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고 싶기 때문에 다른 때에는 지 저분한 헌 옷에 맞지도 않는 바지를 입는다. 교태를 비난하고, 그것을 자기 권리의 포기처 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손가락에 잉크를 묻히고, 머리를 풀어 산발 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반항심 때문에 어색해지고 매우 못마땅하 게 여긴다. 그래서 초조해 하고, 얼굴을 붉히고, 서투른 짓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유혹의 시도를 몹시 후회한다. 그녀는 어린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어른이 되는 것 도 거부한다. 그녀는 자기의 유치한 태도와 여성으로서의 체념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그 녀는 언제나 거부하려고만 한다. 이것은 젊은 여성의 특징이므로, 그 행위의 대부분을 해명하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그녀 는 자연과 사회가 강요하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 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너무 분열되어 세계와의 투쟁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녀 는 단지 현실을 도피하거나, 상징적으로 현실에 반대하는 데 그친다. 그녀의 욕망의 하나 하나는 고뇌로 밑받침되어 있다. 그녀는 자기 뜻대로 미래를 만들기를 갈망하지만, 과거와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 남자를 갖고 싶지만, 그의 먹이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녀 의 공포 뒤에는 언제나 욕망이 숨어 있다. 폭행은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지만, 수동적이 되는 것은 즐겁다. 그러므로 그녀는 언제나 마지못해 응하는 것처럼 자못 교활하다. .그녀 는 모든 부정적인 집념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욕망과 불안의 이율배반적인 표현이 다. 사춘기 소녀에게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반항형식의 하나는 냉소이다. 여학생이나 여점원들은 감상적이거나 추잡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에로틱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남자 들과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을 바라보면 폭소를 터뜨린다. 나는 뤽상 부르 공원에서 애인들이 모여드는 오솔길을 일부러 장난삼아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본 적 이 있다. 또 어떤 여학생은 터키탕에 가서 배가 나오고 젖가슴이 늘어진 뚱뚱한 부인들을 놀려 주기도 한다. 그녀들은 여자의 육체를 비웃고,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연애를 비웃는다. 이것은 성본능을 부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웃음 속에는 어른에 대한 도전과 함께 멋쩍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성이 지니고 있는 위험한 마술을 죽이기 위해 이미지나 언어로 희롱하는 것이다. 나는 4학년(여고 1학년)학생이 라틴어 교과서에서 대 퇴골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고 폭소를 터뜨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소녀는 자기에게 키스를 하거나 자기 몸을 주무르기라도 하면 그 상대방이 친구라도 면전에서 비웃어 보복 하기도 한다. 어느 날 밤에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의 젊은 처녀가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이 기뻐하는 셀러리맨에게 번갈아 달콤한 말로 희롱당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녀들은 이야기를 주 고받으면서 틈틈이 성본능과 수치심이 어울린 가운데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히스테리컬하 게 웃고 있었다. 그 처녀들은 폭소와 말에서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그 중 한 여자의 입에 서는 남자의 얼굴을 뜨겁게 할 만큼 추잡한 말도 새어 나왔다. 아마도 그녀들이 사용하는 말은 무지로 말미암아 분명한 의미를 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말을 사용하는 목적은 분명한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이미지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그녀들의 음담패설은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성본능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들은 성본능을 기 계적인, 얼마쯤은 외과적인 수술처럼 우스광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웃음과 마찬가지로 음담을 하는 것은 단순히 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모독이며, 일부러 타락하려는 행위이다. 젊은 처녀는 자연과 사회를 거부하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방법으로 그것 들을 도발하고 멸시한다. 그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식벽은 자주 지적되었다. 연필심·풀·나무토막·생새우를 먹고, 아스피린 정제를 열 알씩 삼킨다 .심지어 파리나 거미까지도 먹는다. 나는 그런 것을 먹는 똑똑한 처녀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커피와 백포도주를 혼합하여 억지로 마셨다. 또 어느 때는 식초에 사탕을 찍어 먹기도 했다. 또 다른 처녀는 샐러드에서 구더기를 발견하고도 악착같이 먹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린이는 모두 눈이나 손으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입이나 위로 세계를 실험하기를 좋아 한다. 그러나 개구쟁이 시절의 소녀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이나 징그러운 것으로 세계 를 탐지하고 싶어한다. 흔히 징그러운 것이 그녀의 시선을 끈다. 어느 소녀는 철없던 시기 에 예쁘고 깨끗하고 얌전한 편이었는데, 자기가 '더럽다'고 여기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곤충을 만지작거리고, 더러워진 속옷을 눈여겨보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 기도 했다. 불결한 것을 가지고 노는 것은 분명히 혐오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감정은 사춘기 때 큰 중요성을 갖는다. 소녀는 너무나 육체적인 자기 몸에 대하여, 경혈에 대하여, 어른의 성행위에 대하여, 자기가 헌신하고 있는 남성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는 혐오스럽게 생각되는 모든 것에 친숙해져서 그 혐오를 해소시키려고 한다. "나는 다달이 출혈해야 하거든요. 상처의 피를 마셔서,내 몸에서 나오는 피가 두렵지 않 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몸서리치는 경험에 굴복해야 하는데, 어째서 구더기 를 먹어서는 안 돼요?" 이런 태도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 나이에 많이 볼 수 있는 자 기상해의 경우이다. 젊은 처녀는 면도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자르고, 자기 몸을 담뱃불로 지지고, 허물을 벗기기도 한다. 젊었을 때 나의 여자친구는 지루한 야유회에 가고 싶지 않아, 도끼로 자기 발을 찍었다. 그래서 6주 동안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사디즘적인 마조히즘의 행위는 성 적 경험에 선행하는 행위인 동시에, 이에 대한 반역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을 견디어 장차 있을 경험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고, 결혼 첫날밤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경험을 대수롭 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처녀가 자기 가슴에 괄태충을 올려놓을 때나, 아스피린 수십 정을 심킬 때, 그녀는 미래의 애인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내몸에 가한 것보다 더 심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은 성적 모험에 대한 병적이며 자존심에 찬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수동의 먹이로 바쳐질 그녀는 고통과 혐오를 한몸에 지닐 때까지, 자기의 자유를 요 구한다. 그녀가 자기 몸을 칼로 긋고 숯불로 화상을 입힐 때, 그것은 자기의 처녀성을 빼 앗는 돌입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런 항의로 처녀성의 박탈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자진하여 고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조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녀는 또한 사 디스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주적인 주체로서 의존적인 육체, 굴복될 운명에 놓인 이 육 체를 채찍질하고 우롱하고, 괴롭히고, 혐오하면서도 그 육체에서 자기를 구별하려고는 하 지 않는다.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의 숙명을 분명히 거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 이다. 사디즘적 마조히즘의 이상한 버릇에는 근본적인 속임수가 포함되어 있다.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녀가 거기에 빠진다면,거부를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미래를 수력하는 것이다. 처음 에 그녀가 육체로서의 자기를 분명히 알았던들, 자기 몸을 증오하여 상처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폭력의 폭발까지도 체념의 기초 위에서 일어난다. 소년이 자기 아버지와 세계에 대해 반항할 때 그는 벌써 효과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 싸움 을 걸어 구타하고 주체로서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를 주장한다. 그는 세계에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세계를 초월한다. 그런데 사춘기의 소녀에게는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의견을 내 세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마음에 그토록 반항심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그녀는 세계를 개조하려고도 하지 않고 ,거기서 상승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가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적어도 그렇게 믿고있다. 아마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능한 것은 파괴뿐이다. 그녀의 짜증 속에는 절망이 있 고,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는 빔에는 컵을 깨고, 유리창을 부수고, 꽃병을 망가뜨린다. 그러 나 이것은 운명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항의에 불과하다. 젊은 처녀가 미래 의 복종에 반항하는 것은, 현재의 무기력을 통해서이다. 그녀의 헛된 폭발은 그녀를 속박 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더욱 옥죌 뿐이다. 자기나 자기를 에워싼 세계에 대한 폭력은 언제나 부정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효과적이기보다 전시적인 것에 불과 하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친구와 싸우는 소년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상처, 혹은 적극적인 활동 에서 비롯된 사소한 결과로 생각한다. 그런 것을 자진하여 요구하지도 않고, 또 고통스럽 다고 해서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는다.(자기를 여자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에 놓는 병적 열 등감의 경우를 제외하고) 젊은 처녀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을 스스로 바라본다. 즉 그녀 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폭력이나 반역에의 애호를 구하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녀의 퇴폐는 어린이의 세계에 닻을 내리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벗어나려 고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새장 속에서 나오려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 다. 그녀의 태도는 부정적이고 반성적이며 상징적이다. 그 퇴폐는 불온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상당히 많은 젊은 처녀에게 절도벽이 있다. 도벽은 매우 애매한 성질의 '성 적 승화' 이다. 법률을 어기고 터부를 범하려는 의지, 금지된 위험한 행위에 눈이 어두워 현혹되는 것 동은 확실히 도벽이 있는 여성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아무 권리도 없이 남의 물건을 절취하는 것은 오만하게 자기의 자주성을 주장히는 것이며, 도둑질을 벌하는 사회에 대해 주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질서를 거부하고, 그 질서의 파수꾼에게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도전은 또한 마조히즘적인 면을 갖는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여자는 모험에, 만일 붙잡히면 떨 어지게 될 심연에 매혹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는 행위에 그처럼 매력을 주는 것은, 붙잡힌다는 위험이다. 붙잡히게 되면 비난을 퍼붓는 눈초리 아래서, 어깨에 얹혀진 손 아래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객체 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기를 실현시킬 수있을 것이다. 남자의 먹이가 된다는 고뇌 속에, 붙잡히지 않고 도둑질을 하는 일에는, 사춘기 여성의 성본능의 위태로운 장난이 숨어 있 다. 젊은 여성의 여러 가지 부도덕한 위법행위는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소 녀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다른 소녀는 자기주위의 사람들에게 질이 나쁜 장난을 하고 재미있어 한다. 어떤 14세의 소녀는 어느 집에 유령이 나온다는 것을 온 마을 사람들에게 믿게 했다. 그녀들은 자기의 능력을 몰래 시험하고 불복종, 사회 에 대한 불신, 그리고 가면이 벗겨질 위험 등을 동시에 즐기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진하여 가면을 벗고 나쁜 짓을 했다고 자백하는 것도 쾌락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여긴다. 심지 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과실이나 범죄를 실제로 감행한 것처럼 자책을 느끼기도 한다. 객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객체가 되게 한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 이 못 된다. 그것은 모든 부정적인 외고집에 공통된 과정이다. 히스테릭한 마비증에 걸린 병자는 마비를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며 실현한다. 병에 대한 생각을 버리 지 않으면 병은 낫지 않는다. 신경쇠약의 싱습환자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처녀를 외고집· 기벽·음모·도덕의 결여 동의 신경성 환자 타입으로 접근시키는 것은, 그 기만의 깊이이 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욕망과 불안의 상반성 때문에 신경병적인 징후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실종'은 흔히 있는 일이다. 무턱대고 집을 나가 멀리 가서 헤매다가 2,3일 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 이 경우,진심으로 가출하거나 가족과 인연을 끊으려는 실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단지 하나의 탈출극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일 결정적으로 그녀를 주위사림들로부터 완전히 떼어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말하면 무척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 욕망도 없으면서 다만 주위사람들로부터 멀어지 고 싶은 것이다. 이 일시적인 실종은 때로는 매음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젊은 처녀는 자기 가 매춘부 노릇을 하는 꿈을 꾼다. 그녀는 그 역할을 하는 것을 다소 겁낸다. 화려한 화장 을 하고, 창가에 기대어 행인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때로는 실제로 집을 나가 연극을 지나 치게 하여 연극과 현실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의 이런 행위도 가끔 성욕에의 혐오, 죄의식의 표시인 경우가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욕망을 갖고 있으므로, 매춘부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나는 매춘부의 한 사람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때때로 그녀는 그런 생각을 버리려고 한다. '결말을 내자, 철저하자.'하고 그녀는 생각한 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몸을 맡겨 성욕이란 별것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딸이 어머니의 지나치게 엄격한 정조관념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거나 어머니 의 품행이 불량하다고 추측하거나, 아무튼 어머니에게 적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는 자기에게 너무나 냉담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표시인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강박 관념에는-이미 말한 적이 있고 또 가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임신 망상증에서처럼-반항심 과 신경병적 어지러움의 특색인 공범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여러 가지 행위에서 젊은 처녀가 자연이나 사회의 질서를 깨려고 하지 않고, 가능성의 한계를 확대시키거나 가치의 변혁을 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녀는 그 경계나 법률이 그대로 유 지되고 있는 기성사회 속에서 자기의 반항을 표명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흔히 ' 악마적'이라고 말하는 젊은 여성의 태도이다. 선은 우롱당하기 위해 인정되고, 규칙은 깨기 위해 제정되고, 신성한 일은 모독하기위해 존경된다는 근본적인 기만을 포함한 태도이다. 젊은 처녀의 태도는, 불신의 고뇌에 찬 암흑 속에서 세계와 자기의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거절한다는 사실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입장을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녀는 그 불충한 것을 보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래가 그녀를 위협한다면, 현재 역 시 그녀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여자가 되기를 주저하면서 아직 어린이를 벗어나지 못한 데 대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이미 과거에서 떠났으나 새로운 생활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 발버둥을 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다. 그녀는 그야말로 무이다. 그녀는 이 공허를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연극과 기만에 의해서이다. 그녀는 음험 한 거짓말쟁이로'이야기를 꾸며서'한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이것은 그녀가 비밀과 허위 에 자신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있다. 여성은 16세에 이미 사춘기·월경·성의 자각·최초의 불안·욕망·공포·혐오·음란한 경험 동으로 괴로운 시련을 겪고 있다. 그 녀는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조용히 비밀을 지키는 것도 배웠다. 월경대를 감추 고, 월경을 숨겨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허위로 유인되었다. C.A.포터(현대 미국의 여류작가)가〈인류〉라는 작품에서, 1900년 경의 남부 아메리카 의 처녀들은, 무도회에 갈 때에는 월경을 막기 위해 소금과 시트론으로 만든 물약을 마시 고 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년들이 퍼렇게 변한 자기들의 눈자위를 보거나 손 을 만져보거나 혹은 냄새로 자기들의 생리를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어, 그녀들 을 당황하게한다. 다리 사이에 피가 묻은 천을 느낄 때,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여 육체라는 선천적인 슬픔을 알 때, 그녀들이 우상이나 요정, 먼 나라의 공주 등의 역할을 하기는 어 려운 일이다. 육신으로 인정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수치심은 기만과 인접해 있다. 그러나 특히 사춘기 처녀가 비난받는 거짓은, 자기가 불안정하고 흐트러진 결함을 가진 존 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객체(대상물), 그것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객체로서 가장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퍼머넌트·코르셋, 그리고 '스펀지를 넣은' 브래지어 따위는 모 두 거짓이며, 또 얼굴 자체도 가면이 된다. 기교에 의해 얼굴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수동성을 교묘히 드러낸다. 여성적인 기능을 한창 발휘하 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평소의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때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 다. 그녀의 초월성은 부정되고, 내재성을 모방한다.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반영할 뿐이 다. 육체는 이미 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동작이나 미소는 호소가 된다. 무장을 완전히 해제당하고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 처녀는 내맡겨진 꽃이며, 곧 따게 될 과실에 불과하다. 유혹당하기를 갈망하고, 또 여자에게 이런 유혹을 충동하는 것은 남자이다. 얼마가 지나면 남자는 화를 내고, 여자를 탓한다. 책략이 전혀 없는 소녀에게 남자는 더 욱 냉담하고 반감까지 느끼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여자에게만 유혹된다. 미끼를 노리는 것은 산 제물로 바쳐진 그녀 쪽이므로, 그녀의 수동적인 자세가 계략에 곧 잘 이용된다. 그녀는 자기의 약점을 힘의 도구로 삼는다. 그녀에게는 정정당당하게 공격하 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부득이 술책과 계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녀로 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짜로 바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불성실하고 교활하다는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배하기를 요구하 므로 그녀로서는 굴복의 신화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 가장 본질적 인 요구를 말살시키라고 그녀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남자에게 환심을 시려는 여자의 마 음은, 처음부터 타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지 계획된 술책에 의해 속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단지있는(존재하는)것만이 요구되며 저주가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져 있다.그녀는 어렸을 때 무회나 성녀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 그런데 성장해서는 자기 자신의 흉내를 낸다.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녀가 갇혀 있는 영역 안에서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진실, 그것은 베일이 벗겨진 현실 이며, 베일을 벗기는 것은 행동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그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 기에 대해 자기에게 말하는-때때로 타인에게도 말하지만-가공의 이야기는, 그녀에게는 자 기가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기록보다 훨씬 잘 표현하는 듯이 생각된다. 그녀는 자기의 값어치를 결정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연극을 하여 스스로 위로 한다. 어떤 인물을 자처하여, 거기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하고 엉뚱한 행동으로 자기를 특이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현실 속에서는 여자가 개성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 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책임을 갖지 않은 무의미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을 지어내서 하는' 일 이외에 그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없는 것 이다. 지로두(현대 프랑스 소설가 겸 극작가)의 엘렉트라(소포클레 스의 희극에서 테마를 택한 극. 그녀는 오빠인 오레스테스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자이다. 진짜 칼을 가지고 실제로 살인을 하는 것은 오레스테스의 역 할이기 때문이다. 젊은 처녀는 아이들처럼 싸움이나 분노에 지쳐서 병들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는데, 이 것은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남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도 주위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있지도 않은 비밀을 만들어 내고, 배반하고, 중상한다. 자기의 생활 속에서 구원을 찾지 못하므로, 사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에 비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녀가 변덕스러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여러 가지 환상이나,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여러 가지 이미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단지 행동이 시간의 다양성을 통일한다. 젊은 처녀는 진실한 의지가 아닌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두서없 이 한 욕망에서 다른 욕망으로 옮겨간다. 이런 부분별한 행동이 위험에 빠지는 것은, 그녀 가 꿈 속에서만 하고 있는 행동이 현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비타협적이고 대단히 어려운 입장에 놓아두고 싶어하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좋아한다. 미래를 마 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단번에 도달하려고 한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거야.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원해.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내 인생을 훌륭하게 선택해야 해." 하고 마리 르네뤼는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말에 호응하 는 듯이 아누이(프랑스 현대 극작가)의 앙티곤은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원해. 지금 당 장 말이야." 이런 어린애같은 제국주의는, 자기의 운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꿈은 시간과 장애물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은 빈약한 현실을 보충하 기 위해 끝까지 강렬해질 필요가 있다. 참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한계를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에게 실제로 그 정도의 능력 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젊은 처녀는 자기 것이 전혀 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 다. 그리하여 어른에게, 특히 남성에게 그녀는 '무서운 아이'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녀는 현실세계에 자기를 투입할 때 개인에게 강요되는 제한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제한을 단번에 뛰어넘기 위해 현실세계를 경시한다. 그리하여 힐다 (입센의 건축가 솔네 참조) 는 솔네스가 그녀에게 왕국을 세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왕국을 손아귀에 넣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역없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높은 탑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또 그에게 '그가 세운 탑의 높이까지 올라가라' 고 요구한다. 남자는 기어오르기를 망설이고, 현기증이 일어날 것을 두 려워한다. 지상에서 쳐다보고 있는 그녀는 사고나 인간의 약점을 부정한다. 그녀의 위대성 에 현실이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은 그녀 에게, 어른은 언제나 째째하고 소심해 보인다. 꿈속에서 매우 이상한 대담성을 발휘할 수 있는 그녀는 현실속에서 어른과 동등한 일을 해보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시 련을 겪은 적이 없으므로, 실패의 수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으로 경탄할 만한 미덕으로 자기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제의 결여에서도 불안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자기를 무한한 것으로 꿈꾼다. 그러나 남에게 칭찬받을 만한 인물을 빌려서 그 속에 자기를 거짓으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동일시하고, 수동적으로 그 존재에 종속되어 있는 이 분신 속에서 그 녀는 어떤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불안해지기 쉽고, 허영심이 강하다. 사소한 비판이나 야유에도 흔들린다.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때그때 변덕스러운 타인 의 의견에서 자기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개성있는 활동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평판이라는 세상의 목소리가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 한 듯이 보인다. 너무 흔하면 상품의 가치는 감소되게 마련이다. 젊은 처녀는 다른 어떤 여자가 아닐때에만 진귀하고 예외적이고 주목할 만한고 비범하다. 친구들은 경쟁상대이고 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들을 헐뜯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샘이 많고 고약 하다. 사춘기의 여성이 비난을 받는 모든 결점은, 그녀가 처해있는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희 망에 부풀고 야심에 찬 시기,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이 시기에 자기는 수동적이고 의존적 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여성이 어떤 정복도 자기에게는 허용되 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미래는 남성의 마음대로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정복욕에 가득한 이 시기이다. 성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도 어떤 새로운 갈망이 그녀를 눈뜨게 하면, 그것은 동시에 숙명적으로 불만을 품고 상아야 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뿐이다. 생명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약동은 그 즉시 제 지되어버린다. 그녀가 균형을 되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들뜬 심 정,눈물,신경질적인 발작등은 생리적으로 허약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에서 소외 되어 있는 심각한 부적응의 표시이다. 젊은 처녀는 이런 입장에서 온당치 못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정당하 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녀는 그 결점 때문에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만, 때로는 특이 한 재능으로 사람을 놀라게도 하는데, 그 어느 것도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 세계의 거부, 불안한 기대, 허무등을 도약대로 삼아 자기의 고독과 자유 속에서 부상하는 것이다. 젊은 여성은 의로운 투쟁에 부대끼고,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복잡성은 그녀 를 풍요롭게 한다. 그녀의 내면생활은 소년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발전한다. 뉘앙스가 풍부 해지고 한결 복잡해진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더욱 유의하며 또 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쓰는 소년들보다 심리적인 감각이 풍부하다. 그녀는 자기를 세계와 대립시키는 이 런 반항에 무게를 더할 수도 있다. 그녀는 진실성과 타협주의의 함정을 피한다. 주위사람 들의 한결같은 허위도 그녀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 간과된다. 그녀는 날마다 자기 입장이 애매한 것을 느끼고 효과없는 항의를 되풀이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관 주의, 구태의연한 가치, 위선적인 온건주의의 도덕 등을 의심해 보는 용기를 갖게 된다. ' 플로스 강의 물레방앗간'에 나오는 마기의 감동적인 사례가 그러하다. 조지 엘리엇은 이 여성에게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에 대한 사춘기의 회의와 용감한 반항을 구체화하고 있다. 남성 등장인물들 '특히 마기의 오빠인 톰'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을 강조하여 도덕 을 형식적인 규칙에 고정화시키지만, 마기는 그것에 생생한 입김을 불어넣기 위해 그것을 부정한다. 그녀는 고독의 끝까지 이르러, 남성들의 경직된 세계의 피안에 순수한 자유인으 로 떠오른다. 이 자유를 사춘기의 처녀는 극히 소극적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그 자유 를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서 귀중한 감수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애정이 깊은 여성이 되기도 한다. 로저먼드 레이먼이 그린 여주인공들의 특 색은 이런 순종적인 너그러움이다. '왈츠에의 초대'에서 올리비아가 아직 수줍고 어색하고 거의 교태도 부리지 않은 채 강한 호기심으로 내일 들어갈 그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자기를 찾아오는 댄서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비위에 맞도 록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메아리가 되어 진동하여,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인 다. '반지'의 여자주인공 쥐디도 같은 매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어린시절의 기쁨을 버리지 않았다. 밤중에 숲이 우거진 개천에서 알몸으로 목욕하기를 즐기고, 자연과 책과 미와 생 명을 사랑했다. 그녀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거짓말도 하지 못 하고 이기심도 없는 그녀는 남성을 통한 자기찬미도 원치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오직 주 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제니퍼든 로디든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녀는 자기를 망치지 많고 자기를 준다. 그녀는 독립적인 여학생의 생활 을 거쳐 자기의 세계, 자기의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남자와 구별하는 것은, 그 무엇을 기다리는 태도와 부드러운 순종이다. 그녀는 매우 미묘한 방법으로'타자'에게 자기를 제공한다. 이 경우에'타자'는 그녀에게 대전해 보며, 주위의 모든 청년이나 그들의 집, 자매, 세계를 사랑하게 된다. 제니퍼가 그 녀를 매혹시키는 것은 친구로서가 아니라'타자'로서이다. 그리고 그녀는 로라와 그 사촌들 을 매우 유연하게 상대방의 욕구에 적응시켜 매혹한다. 그녀는 인내요, 온유요, 수락이요, 말없는 고뇌이다. 마거릿 케너디의 '영원한 처녀'의 테사는 그녀와는 다르지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장신구, 화장, 변장, 위선, 신중성, 복종 등을 몹시 싫어했 다. 그녀는 타인으로 부터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랑을 받기를 원하며, 루이스의 비위를 맞춘 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비굴하지 않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감동한다. 이들 두 사람이 언쟁을 할 경우에, 그녀를 승복하게 하는 것이 애무가 아님을 루이스는 알고 있다. 버릇이 없고 허영심이 강한 플로렌스가 키스에 의해 정복되는 반면에 놀랍게도 케사는 사랑 속에 자유를 누리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녀로 하여금 적의나 자존심을 느끼지 않고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녀의 소박함은 기교가 갖는 모든 매력을 지 니고 있다. 사랑을 받기 위해 그녀는 결코 자기를 꾸미지 낳고 또 비굴해지지도 않고, 객 체가 되어버리지도 않는다. 생활을 음악적인 창조에 바치는 예술가들에게 에워싸여 있어 도, 그녀는 탐욕스러운 악마를 마음속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그들을 힘껏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는다. 그러나 무리하지 않고 상냥하게 자연스러운 호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타인에 대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잊을 때에도, 완전히 자주적 이다. 이런 순수한 진정의 덕택으로 그녀는 사춘기의 까다로운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세상의 비정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분열되지 않으며 태평스러운 소녀, 현명한 부인처럼 조화를 이룬다. 대담하고 너그럽고 다정하고 적극적인 젊은 처녀는 정열적인 애인이 될 수 있다.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시를 만나기도 한다. 그녀는 행동하지 않으므로, 바라보고 느끼 고 기록한다. 어떤 색체, 어떤 미소는 그녀의 마음에 큰 반응을 일으킨다. 그녀의 외부에는 이미 세워진 도시나 인간의 얼굴등에 그녀의 운명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처럼 어떤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맛본다. 인간사회에 합류 하거나 적응하기 어렵지만, 어린이처럼 그 세계를 바라볼 수는 있다. 사물에 대해 흥미를 갖는 대신에, 그 사물이 갖는 의미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물의 특수한 모습이나 뜻하지 않은 변형을 포착한다. 그녀가 창조적인 충격을 느끼는 일도 드물고 자기 심정을 표현하는 재능이 결여되어 있 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화, 편지, 수필, 소묘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감수성을 보이는 경 우가 있다. 그녀는 무슨 일에나 정열적으로 몰두한다. 그녀는 아직 자기의 초월성이 손상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 각하는 것이 그녀의 활동을 점점 정열적으로 몰고간다. 공허하고 한정되지 않은 그녀가 자 기의 허무 속에서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한 성취이다. 그래서 그녀는'자연'에 특수 한 사랑을 쏟거나 청년 이상으로 자연을 숭배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장 명료하게 요 약하는 것은 억압받지 않는, 비인간적인'자연'이다. 사춘기의 소녀는 아직 세계의 어떤 작 은 부문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 무소유 덕분에 세계 전체는 어떤 작은 부문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 무소유 덕분에 세계 전체는 그녀의 왕국이다. 그녀가 세계를 소유할 때, 자 랑스럽게 자기를 소유하게 된다. 콜레트는 이런 청춘의 향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벌써 새벽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것을 나에게 허용해 주셨 다. 어머니에게 3시 반에 깨워주기를 부탁하고, 양팔에 빈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개천이 흐르는 좁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채소밭으로 딸기며 까치나무 열매를 따러 갔다. 3시 반에는 만물이 습하고 희미한 푸른빛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길을 내려가면, 그 무게 때문에 낮게 깔린 안개가 먼저 내 자리를, 이어서 잘생긴 내 몸을 적시고, 다음에 입술, 귀, 그리고 내 몸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코에 이르렀다... 이 시각에, 이 길에서 나 는 나의 가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그리고 처음 불어오는 미풍을, 처음 날아오 는 새를 의식하고 이지러진 달걀 모양의 태양과 함께 나의 공모를 의식했다... 나는 최초의 미사를 알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갔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숲속을 혼자 사냥개처럼 한 바 퀴 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들이 모르는, 두 샘의 물을 맛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았 다. 메리 웨브(현대 영국의 여류소설가)도'그늘의 무게'에서 젊은 처녀가 낯익은 풍경에 대 해 친밀감을 느끼는 열렬한 환희를 묘사하고 있다.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앰버의 끊길 듯이 긴장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언덕을 지나 숲으로 갔다. 그녀에게는 도머의 사람들이 법률의 압제를 받아가면서 살고 있는 데 비해, 숲은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의 미에 눈뜬 그녀는 미의 특수한 지각 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유사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우 연히 쌓여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화이며, 엄격하고 고귀한 한 편의 시였다. 여기서 는 미가 지배하고 있었다. 꽃의 빛도 아니고 별빛도 아닌 어떤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상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가벼운 진동이 빛처럼 숲속을 달리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앰 버가 이 초록의 세계로 외출한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만물이 고요 속에 잠긴 어느날 아침에, 그녀는 새들의 동산으로 올라갔다. 싱겁고 초조 한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는 흔히 그렇게 하곤 했다... 그녀는 새의 세계의 부조리한 모순속에서, 어떤 위로를 느꼈다... 그녀는 드디어'숲의 정상'까지 가서, 금세 그 아름다움 에 도취되었다. 자연과의 대화에는 어떤 싸움과 같은 것, 즉 '네가 나를 축복해 줄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야생 사과나무에 기대어 있을 때, 갑자기 그녀는 일종의 내면의 청각에 의해 수액이 나 무로 흐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매우 생기에 넘쳐 밀물처럼 그 소리의 현실에, 나뭇 잎의 신기한 목소리를 느꼈다... 꽃잎이나 나뭇잎마다 자기가 생겨난 깊은 땅속을 상기하면 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언덕 위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나 뭇가지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일정한 형태를 갖고, 또한 그 형태가 죽을 운명을 알고 있는 것이 그곳을 지나가는, 형태가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숲은 이제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성좌처럼 빛나는 통일체였다... 그녀는 연 속적인 부동의 존재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의 정기가 통하는 이 장 소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호기심에 사로잡힌 앰버의 마음을 이끈 것은 이것이었다. 이것이 야말로 그녀를 기묘한 황홀감 속에서 더 이상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 에밀리 브론테 (19세기 영욱의 여류소설가)와 안나 드 노이유, 이처럼 다른 두여성이 청춘시절에 -이어서 생애를 통하여 그것은 연장되지만-비슷한 정열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인용한 문장은 적령기의 여성이 들이나 숲에서 어떤 구원을 발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어머니, 규칙, 습관, 관례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녀는 이 런 과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제 최고의 주체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 회적으로는 아내가 되어야만 어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그녀는 자기의 해방을 기 권으로 지불한다. 한편 그녀는 식물이나 동물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가정과 남성에게서 동시 에 해방되어 주체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숲의 비밀 속에서 자기 영혼의 고독한 환영을 발견하고, 넓은 평원의 지평선에서는 자기의 초월성에 대한 실감있는 형태를 발견하게 된 다. 그녀 자신이 무한한 광야이며 하늘에 치솟은 높은 산이다. 그녀는 미지의 미래로 향하 는 이런 길을 더듬어 갈 수 있고 또 더듬어 갈 것이다. 그녀는 언덕 위에 앉아서 발아래 펼쳐진 세계의 모든 부를 지배한다. 출렁거리는 물결과 반짝이는 빛을 통하여, 자기가 아 직 알지 못하는 환희, 눈물, 황홀을 예감한다. 연못의 잔물결, 태양의 반점이 그녀에게 막 연히 약속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모험이다. 향기나 색깔은 신비로운 말을 속삭이지만 그 중에서 어떤 한마디 말이 분명히 부각된다. 그것은'삶'이라는 말이다. 인생이란 호적에 기 록되는 추상적인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며, 육체적인 부이다. 육체를 갖는 것은, 이제 수치스러운 약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춘기의 처녀는 어머니의 시선 아래서 거부하는 저 욕망의 나무 속에서 오르는 수액을 인식한다, 그녀는 이제 저주 받은 존재가 아니며, 자랑스럽게 나뭇잎과 꽃의 관계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화관을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의 빈손에도 싱싱한 먹이가 쥐어질 것을 알게 된다. 육체는 이제 더러운 것이 아니라 환희이며 미이다. 하늘과 광야와 융합된 젊은 처녀는, 세계에 생 기를 주어 열광케 한다. 그녀는 정체불명의 영기이며, 또한 히스의 새싹 하나하나이다. 흙 에 뿌리를 내린 인간, 무한의 의식인 그녀는 정신이요. 또한 생명이다. 그녀의 존재도 대지 자체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큰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녀는 때때로 '자연'의 저쪽에서 더욱 먼, 더욱 현혹적인 현실을 찾아 신비적인 황홀감 에 자기를 잊고 싶어한다. 믿음이 두터웠던 시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자기들의 공허감을 신 에 의해 충족시키려고 했다. 시에나의 카타리아(14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녀, 선여) 나 아빌라의 테레사(16세기 스페인의 수녀) 의 천직은 어린 소녀시절에 분명히 드러났다. (여성의 신비적인 경향의 특이한 성격에 대해서는 후에 서술하겠다.) 잔 다르크는 묘령의 젊은 처녀였다. 그밖의 시대에 최고의 목적이 된 것은 인류이다. 당시에는 신비적인 약동은 구체적인 기 획 속에 합류한다. 그러나 절대에의 생생한 욕구는 롤랑부인(프랑스혁명 때 처형된 여걸) 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의 급진적인 여성 사회주의자)의 마음속에 생명을 기른 불꽃 을 낳게 한 것이다. 젊은 처녀는 그 굴종이나 가난 속에서, 거부의 밑바닥에서 극단적인 대담성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녀는 시를 만나고, 영웅주의도 만난다. 그녀가 사회에 제대 로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방법의 하나는 제한된 지평선을 뛰어넘는 것 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능력과 행복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몇 사람의 여성들은, 어른이 된 뒤 에도 처녀시절의 정열적인 계획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이다. 조지 엘리엇이 마기 툴리버를, 마거릿 케네디가 테사를 죽게 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브론테 자 매만 해도 괴로운 숙명을 경험했다. 젊은 처녀는 감동하기 쉽다.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외 롭게 세계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는 너무나 강력하여 그녀가 이것을 완강 히 거부하면 자멸하고 만다. 신랄한 지성과 독특한 기지로 유럽을 현혹시킨 미녀 주일렌 (샤리에르의 부인)은, 그녀의 모든 구혼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녀는 일체의 양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아야 했으며, 이 독신생활은 그녀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녀는'쳐녀와 희생자'라는 표현은 중복어법이라고까지 공언한 여성이었다. 이런 옹고집은 보기 드물다. 대개의 경우, 젊은 처녀는 싸움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하여 결 국은 양보하게 된다. 디드로는'당신들은 모두 열다섯 살에 죽어요.'하고 소피볼랑에게 편지를 썼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싸움이 상징적인 반항에 불과했을 때 패배는 확실하다. 몽상에서는 요구가 강하고 큰 희망에 가득차 있더라도, 본래 수동적인 젊은 처녀는 어른에게 단념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헤어졌을 때에는 반항심이 강하고 심술궂은 처녀라 하더라도 2년쯤 지나면 얌전해져서 여자의 생활에 동의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것은 콜레트가 벵카에게 예언한 운 명이다. 모리악의 초기소설의 여자의 생활에 동의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것은 콜레트가 뱅카에게 예언한 운명이다. 모리악의 초기소설의 여자주인공도 이런 식으로 쓰여 있다. 처 녀시절의 위기는 의사 라가슈가'상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일'이다. 잚은 처녀 는 조금씩 그녀의 어린 시절을 매장한다. 자주적이고 당당했던 그때의 자기를 버리고 이제 는 얌전히 어른의 생활로 들어간다. 물론 나이만으로 분명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한평생 어린이 같은 여성도 있고, 이미 언급한 여러 가지 행위는 꽤 나이를 먹도록 연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 반적으로, 15세의 풋내기와 노처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현실에 적응하고 있 다. 그녀는 이제 상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전과 같이 자기분열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18세경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청춘의 만년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거기에 무관심하게 된다. 지금 나를 초조하게 하 는 것은 거의없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이렌 르웰리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에 들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남자는 당신을 배제하여, 고독이 당신의 운명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고독은 질색이 다. 나는 군중이 나의 주위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현재에 살 것, 그리고 앞으로는 기대하고, 꿈꾸고, 입을 다물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일체를 자기 마음속에서 말 하는 짓은 하지 말 것.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너무 귀여움을 받아서 야심이 대단했다. 그것은 15세때의 감동으로 떨던 그런 행 복이 아니다. 인생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은 차고 매서운 일종의 도취이다. 나는 교태를 부리고 사랑하는 체한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나는 지성이나 냉정 혹은 평소의 분별에 있어서는 진보한다. 그러나 마음은 잃어가고 있다. 금이 간 것이다... 두 달 동안에 나는 소녀시절과 작별했다. 19세 된 젊은 쳐녀의 고백도 거의 같은 어조이다. (드레스의 사춘기 특이성의 위기에 서) 옛날에는, 아!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정신상태와 이 시대의 호소 사 이의 치열한 투쟁! 지금에 와서야 나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새롭고 중요한 사상의 하나하나는, 내 속에 들어올 적마다 괴로운 분열과 파괴와 끊임없는 재건을 되풀이하는 대 신에. 이미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에 적합하다... 지금 나는 무의식중에 이론적인 사상에 서 일상생활로 중단없이 옮아가고 있다. 젊은 처녀는 특별히 못생기지 않은 한 결국은'여성다움'을 받아들이게된다. 그리고 여성 의 숙명 속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전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승리를 부담없이 즐 기며 행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무도 강요받지 않고 책임도 없이 조용히 기다리 고 있는 그녀에게는 현재가 하나의 중간단계에 불과하므로, 공허나 환멸로 보이지 않는다. 그 무렵의 처녀의 화장이나 교태에는 아직 유희의 순진성이 있고,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은 그 공허함을 그녀에게 숨기고 있다. 이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영궁의 현대 여류 소설 가)가, 어느 파티에 참석한 젊고 사치스러운 처녀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전신이 빛나는 것을 느낀다. 비단 같은 나의 두 다리를 살짝 마주 비 볐다. 목걸이의 싸늘한 보석은 가슴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름답게 차려입어 준비가 되어 있다... 머리칼은 보기좋게 늘어뜨려졌고 입술은 알맞게 붉다. 나는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들이나 저 여자들과 어울릴 준비를 마쳤다. 저들이 나의 동료이다. 나는 그들의 앞을 지나간다. 그들이 나의 시선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이 향기와 빛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그라든 잎사귀를 펼치는 고사리처럼 활짝 피어 난다. 마음속에 무수한 가능성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나는 차례로 말괄량이였다가 쾌활해 졌다가 축 늘어졌다가 우울해진다. 깊은 뿌리 위에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몸 을 기울이고 온몸에 빛을 발하면서 그 청년에세 말한다. '어서 와요...' 그가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가장 흥분된 순간이다. 나는 몸이 떨리고 흔들린다...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얼마나 매혹적일까. 나는 사탱을 입고 나는 검정과 흰색으로 조 화된 옷차림이다. 나의 동료들은 이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좋다. 나는 남자든 여자 든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나 는 당신들의 시선에 보답하려고 한다. 나는 당신들의 것이다. 나는 이곳 나의 세계에 있 다... 문이 열린다.'오, 어서 와요.'하고 내가 말하면 그는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젊은 처녀가 성숙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권위가 그녀를 더욱 억압한다. 그녀는 집에서도 집안일을 거드는 정도에 불과한 것에 불만을 느낀다. 그려는 자기 일, 자기 가정, 자기 자식에게 자기를 마치고 싶어한다. 여기서 엄마와의 경쟁이 심해진다. 특히 큰딸은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태어나면 화를 낸다. 그녀는, 어머니는 이제 역할을 마쳤으므로 이제 는 자기가 아기를 낳고 지배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집 밖에서 일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가 단지 가족의 일원으로만 취급되고, 자주적인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옛날처럼 로맨틱하지 못한 그녀는 연애보다도 결혼에 대해 훨씬 많이 생각하기 시작한 다. 그녀는 이제 미래의 남편을 마법과 같은 후광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그녀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지위를 얻어 아내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골의 부 잣집 처녀들의 상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곧 꿀벌들이 인동덩굴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뜨거운 한낮이 되면 나의 애인이 돌아올 것 이다. 그는 한마디 말 밖에 하지 않고, 나도 한마디 답만 할 뿐이다. 내 속에서 성장한 모 든 것을 그 사람에게 주리라. 아기를 낳고, 앞치마를 두른 하녀나 행주를 손에 든 하녀를 고용하리라. 나의 부엌에는, 양고기를 다시 데우기 위에 바구니 속에 넣어두고, 햄은 들보 에 걸려 있고, 양파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나는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 조용히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찬장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상은 가엾은 프루 사안에게서도 떠나지 않는다. 나는 한평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처녀들은 누구나 결혼을 한다. 그녀는 가정을 이루고, 아마도 저녁때 남편이 집에 돌아올 시각에 등 불을 밝힐 것이다. 촛불만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것을 창가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편은 생각한다.'아내는 저기 있어. 촛불을 켰군.'그리고 어느날 베 길디 부인은 그녀에게 갈대의 요람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날 그 요람에서 예 쁘고 귀여운 아기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세례식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이웃사람들은 꿀벌 이 여왕벌의 주위에 모여들듯, 어머니 주위에 모여들 것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괜찮아. 프루 사안!'언젠가 너는 자기 밀방 속에서 여왕이 될 거야.' 나이가 찬 대부분의 처녀들은 부지런히 살든, 경박하게 살든, 혹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 든, 아니면 거기서 탈출을 하든, 어쨌거나 남편(엄밀히 말하면 성실한 애인)을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이에 대한 걱정은 여성간의 우정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마음 의 벗'은 그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젊은 처녀는 자기 친구를 공범자라기보다 오 히려 경쟁자로 본다. 이런 처녀 중에 총명하고 재능있는, 그러나 자기를'먼 나라의 공주'라고 생각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처녀는 시나 수필 속에 자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자기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추하고 어리석은 친구는 달 갑지 않고, 예쁜 친구는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책략과 술책과 굴욕적인 기분이 흔히 따 르게 마련이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초조감은 젊은 처녀의 앞날에 장애가 된다. 그녀는 이 기적이고 냉혹하다. 그리고'매력있는 왕자'의 출현이 늦어지면, 혐오와 불케감이 생기게 된 다. 젊은 처녀의 성격과 행위를 보면 그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일 상황이 변하면, 그 녀의 모습도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처녀도 자기의 운명을 고스란히 남성에게 맡기는 대신에, 자기 손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 스포츠, 직업적 훈련, 사 회정치적인 활동 등에 전념하면, 그녀는 남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적, 성적 분규에 시달리는 경우가 훨씬 줄어든다. 그러나 자주적 개체로서 완성하기는 아직 청년보 다 훨씬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설사 그녀가 독립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그녀의 인생 에서 남자와 사랑이 차지하는 자리는 비워둔다. 만일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자기 운명을 버 리는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몰두하면, 가끔 걱정이 된다. 이런 감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 았지만, 엄연히 존재하여 집중된 의지를 헝클어뜨리며,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쨌든 근 로여성은 그녀의 직업적인 성공을 순수한 여성으로서의 성공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많은 시간을 여자답게 하는 몸치장이나 미용에 사용할 수 있게 할애 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방법으로는 생명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양분되 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시간 사이에 학생은 자유로운 사색의 유희를 즐기며 거기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성의 몽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육체적인 용모나 남성,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학문이나 직업 에는 필요 이상의 노력을 아낀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는 과잉이란 없다. 여성의 지능적인 허약이나 주의집중의 부족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잘 타협되지 않는 여러 가지 관심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악순환 논법이 여기서 생기게 된다. 여자가 남편을 얻게 되면, 곧 음악, 학문, 직장 등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여성이 자기의 계획(일)에 자기 일부만 참가시켜, 오나성에 큰 이득을 보지 못하 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개인적인 야심을 억누르려고 한다. 한편 거대 한 사회적인 압박은, 결혼에 의해 하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발견하여 자기를 정당화하도록 유인한다. 이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를 스스로 쌍아올리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설사 노력한 다고 하더라도 소극적인 것은 당연하다. 남녀의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 실현되어, 아내나 애인인 여성에게 일부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특권을 이용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한, 여 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성공할 꿈만 계속 꾸게 되고, 그녀의 자기완성은 억제될 것이다. 적령기의 처녀가 어떤 방식으로 어른의 생활에 접근하든 그 연습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 았다. 그녀는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성적 입문을 거쳐야한다. 그것을 싫어하는 젊은 여성 도 더러 있다. 소녀시절에 불쾌한 성적 경험을 했거나, 서투른 성교육이 성본능에 공포심 을 심어주었을 경우에, 그녀들은 남성에 대한 사춘기 소녀시절의 혐오를 잃지 않고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사정이 일부 여성들에게, 그 의지와는 반대로 처녀을 끝까지 보유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 처녀는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그 성적 운명을 성 취한다. 그 방법은 분명히 그녀의 과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쳐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험이 있는데, 이에 대해 그녀는 자유로운 반응을 보인 다. 앞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새로운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