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개 조르주 시몬.. 제 1 편 집 없는 개 1. 항구의 괴사건.. 11월 7일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바다는 마침 밀물때였으며, 차가운 바람이 육지를 향해 불고 있었습니다. 항구로 몰려든 어선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려 서로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파도 소리도 드 높았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군. 비라도 오겠는걸." 항구의 세관 감시소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세관원이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중 얼거렸습니다, 이곳은 프랑스 서쪽의 브레타뉴 반도에 있는 항구 도시 콩가르노입니다. 작은 도 시이지만 어업과 통조림 공업이 성행했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 대는 이런 밤에는 거리는 일찍 잠들어, 집집마 다 불빛이 꺼지고 어두컴컴한 해안 거리에는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다 만 광장 모퉁이에 있는 라미랄 호텔의 창에서만 불빛이 환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 습니다. 세관 감시소에서 1백미터쯤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세관원은 호텔의 불빛을 부러운듯이 바라보았습니다. 호텔 식당에서는 간혹 술을 마시거나 트럼프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밤을 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구의 큰시계가 11시를 쳤습니다. 이때 라미랄 호텔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나왔습니다. 술에 취해 있는지 비 틀거리며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모 자가 바람에 날려 보도 위를 굴러갔으므로, 사나이는 허둥지둥 모자 뒤를 쫓았습 니다. 가까스로 모자를 주워 든 사나이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세게 불므로, 몇 번이나 성냥을 그어도 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한손으로 잡고 있어야 했으므로, 더욱더 불을 붙 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우스꽝스런 광경을 보고 세관원은 혼자 킬킬거리고 웃 었습니다. 이윽고 사나이는 눈앞에 있는 큰 집 현관쪽으로 다가갔습니다. 현관앞에는 돌계 단이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돌계단을 올라가, 집 그늘에서 바람을 피하여 불을 붙이려는 모양이었습니다. 현관 앞에서 사나이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성냥을 그었습니다. 불이 홱 켜졌는 가 싶더니 곧 꺼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이는 비틀거리며 두세 발짝 뒷걸음질 치더니, 그대로 길바닥 에 쓰러졌습니다. 그러고는 고랑에 머리를 쳐박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보같은 술주정뱅이로군." 세관원은 다시 킬킬댔습니다. 그러나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도 사나이는 일어 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데.....' 이렇게 생각했을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마리의 커다란 누렁개가 사나이의 몸 에 코를 대고 냄새 맡기 시작했습니다. 세관원은 감시소에서 나와 슬금슬금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외등의 희미한 불빛 에 비쳐 사나이의 배 있는 부근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게 보였습니다. 구멍에 서는 무엇인가 검붉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앗, 피, 피다!" 세관원은 깜짝 놀라 급히 라미랄 호텔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는 호텔로 뛰어들며, "크, 큰일났어! 여기서 나온 손님이 죽었어. 살인이야!" 하고 외쳤는데, 그 순간 세관원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습니다. 아까의 누렁개 가 그의 뒤를 따라 쑥 들어왔던 것입니다. 개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대고 있는 하 녀 곁으로 가서 그녀의 발아래 드러누웠습니다. 호텔 식당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녀 이외에 남자 손님이 두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지루한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관원의 '살인이다!'하는 소리를 듣자 세 사람은 튀어 오르듯이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앗, 이건 모스타강씨다!" "조금전까지 함께 트럼프를 치던 모스타강씨다!" 쓰러져 있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두 손님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사이에 세관원은 가까운 파출소로 뛰어갔습니다. "큰일났소,. 사건이오! 빨리 와 주십시오. 라미랄 호텔의 손님이 살해되었소." 경관과 그리고 그뒤 전화로 부른 의사가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배 한가운데를 총으로 맞았군. 총구를 갖다대다시피 해서 쏜 것 같소. 빨리 수 술 하지 않으면 목숨을 건질는지도 모르오. 구급차는 아직 멀었소?" 의사는 피해자의 상처를 조사하고 주사를 놓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근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모스타강이라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술 도매상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렁개는 사람들 다리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봐, 이 개를 아나?" "아냐, 본 적이 없는 갠데....." "아마 배에서 기른 갤 거야." 사람들은 사건보다 이 누렁개 때문에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런 털을 가진 더러운 개로서, 몹시 깡말랐는데 발이 길며 머리통이 큰 것이, 마스티프나 불독과 비슷했습니다. 아뭏든 기분 나쁜 개였습니다. 2. 메그레 경감의 등장.. 이 무렵, 파리 경찰국의 메그레 경감은 기동대를 시찰하기 위하여 콩가르노 시로 부터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현청 소재지인 캠벨시에 와 있었습니다. 콩가르노 시장으로부터 전화로 사건의 수사를 의뢰받자, 메그레 경감은 이튿날 저녁 콩가르노 시로 왔습니다. 어제부터 불어 대는 바람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데다가 차가운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물고, 르르와라는 젊은 형사를 데리 고 라미랄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호텔 식당은 바깥 날씨처럼 어쩐지 음산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손님도 별로 없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한눈에, 어느 테이블이 단골 손님의 것인지 알아차렸습니다. 왜냐 하면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던 사나이가 경감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 입니다. 사나이는 혈색좋은 얼굴에 둥근 눈을 하고 있었으며, 입가에 미소를 띄 고 있었습니다. "파리 경찰국의 메그레 경감이죠? 경감님이 오신다는 소식은 시장으로부터 들었 습니다. 시장과 나는 친구죠. 나는 경감님의 여태까지의 활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참 내 소개를 하겠습니다. 나는 쟝 세르비엘이라 합니다. 이 도시의 <등대> 신문 기자입니다. 어젯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침 이 식당에 있었죠. 그리고....." 세르비엘 기자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가리켰습니다. "이분은 폼므레씨입니다. 부모의 재산으로 편안하게 살고 있는 활량이죠. 폼므레 씨도 어젯밤 이 식당에서 나와 같이 있었습니다." 폼므레는 일어서서,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메그레 경감에게 인사했습니다. 은빛 콧수염을 기르고 승마 바지를 입었으며, 하얀 넥타이를 맨 폼이 과연 멋쟁 이 시골 신사 같았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는 또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에르네스트 미쉬씨입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지만, 개업한 일은 없습니다. 전 국회의원의 아들이며,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동산 매매업을 하고 있죠. 교외에 별장 분양지를 갖고 있으므로, 이제 경감님 에게도 땅을 팔려고 할지 모릅니다. 미쉬씨도 어젯밤 이 식당에서 함께 트럼프 를 쳤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30분쯤 전에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사건때에는 여 기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쉬도 일어서서 메그레 경감고 악수를 했습니다. 그의 손은 몹시 찼는데 긴 얼굴에 코가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아직 35살도 되지 않았다는데, 붉은 머리 털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메그레 경감은 그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사건이 일어났을때의 상황을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메그레 경감은 때때로 식당안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관찰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카운터 밑에 기분 나쁘게 생긴 누렁개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 니다. 개에서 눈을 떼자, 곧 카운터에 앉아 있는 하녀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하녀는 검은 스커트에 하얀 앞치마를 둘렀는데 몹시 피로한 듯 얼굴이 창백했습 니다. 그런데 메그레 경감이 그녀 쪽을 볼때마다, 그녀도 열띤 시선으로 노려보 듯이 되쏘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개보다 오히려 이 하녀 쪽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참 안됐어요. 모스타강씨는 모두들 좋아했던 친구였는데, 어째서 저런 끔찍한 변을 당해야 했는지... 정말 누구의 범행인지 악질적인 소행입니다." 하고 계속 지껄이고 있는 사람은 <등대> 신문의 세르비엘 기자였습니다. 여태까지 메그레 경감이 들은 사건의 줄거리를 정리해 보면 이러했습니다. 간밤에 라미랄 호텔의 식당에서 트럼프 놀이를 했던 사람은 세르비엘, 폼므레, 미쉬, 그리고 모스타강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 네 친구는 거의 밤마다 이 호텔 식당에서 모여 놀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미쉬가 볼일이 있다고 10시 반쯤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에 모스타강이, "너무 늦으면 마누라한테 잔소리를 듣게 되니, 먼저 실례...." 하며 11시에 돌아갔습니다. 세관원이 사건을 목격한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 습니다. 모스타강은 담배불을 붙이기 위해 바람을 피하려고 그 집 현관으로 다 가갔습니다. 그 집은 1년쯤 전부터 빈집이 되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빈집 현관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모스타강이 문 앞에 왔으므로, 범인은 문에 달려 있는 우편함 구멍을 통해 권총 을 쏜 것입니다. 총소리를 강한 바람 소리에 지워져 세관 감시소에 있던 세관원 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세관원의 신고로 경관이 현장으로 달려갔을때엔, 이미 범인의 모습은 사라진 뒤 였습니다. 뒤뜰로 해서 담을 뛰어넘어 바깥 골목길로 달아난 것입니다. 현장 검증 결과, 현관문 안쪽에 구두 발자국이 나 있고 담배재가 떨어져 있었습 니다. 범인은 꽤 오래동안 그곳에 숨어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에 총을 맞은 모스타강은 중상이었지만, 다행이 빨리 응급 치료를 했으므로 목 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는 계속 신이나서 지껄였습니다. "....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경감님. 모스타강이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그 빈 집 현관으로 다가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범인이 미리 알았을까요? 아무도 예 상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건 권총 강도의 소행은 아닙니다. 왜냐하 면, 범인은 총을 한방 쏘았을 뿐 아무것도 훔쳐 달아난 게 없으니까요." 말을 마치고 세르비엘 기자가 한숨을 쉬었을때, "이봐, 엠마!" 하고 콧수염을 기른 폼므레가 하녀를 불렀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친숙함이 깃들 여 있었습니다. 엠마가 테이블로 오자, 폼므레는 메그레 경감을 향하여, "이제 식사 시간이 됐으므로 경감님께서도 식전 술을 한잔 드시죠. 우린 늘 페르 노주를 마십니다. 엠마, 여러분께 페르노주를 올리렴." 하고 말했습니다. 엠마가 주문을 받고 주방 쪽으로 가자, 세르비엘 기자는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 다. "경감님, 난 <등대>신문에 이 사건의 범인을 살인마라고 쓰겠습니다. 정말이지 모스타강 같은 호인을 원망하고 있는 인간은 이 거리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런데 저 누렁개는?" 별안간 메그레 경감이 상대의 말문을 막으며 물었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는 개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처음엔 어제 들어온 어선이나 여객선의 개가 아닌가 생각했었 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저 몰골 사나운 개는 도대체 무슨 종인지도 알 수 가 없군요." "저 엠마라는 여자는 예전부터 이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나요?" "벌써 몇 년째 됩니다." "어젯밤 그녀는 호텔에서 외출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쭉 식당 카운터에 앉아 있었죠. 그녀는 우리가 빨리 트럼프 치기를 그 만두고 돌아가기를 졸리운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엠마가 뭔가 이 사건에...." 세르비엘이 기자답게 메그레 경감에게 물었을때, 바로 그 엠마가 페르노 주를 담 은 술잔 4개를 쟁반에 받쳐들고 왔습니다. "그럼 경감님의 건강과 수사의 성공을 빌며, 모두들 건배합시다." 폼므레가 술잔을 들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이봐, 잠깐만!" 여태까지 묵묵히 앉아 있던 미쉬가 외쳤습니다. 그는 아까부터 이맛살을 찌푸리 고 눈앞의 술잔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술잔에 코를 갖다대며 냄새를 맡더니 새끼 손가락 끝을 그 술에 담갔다가 조심스럽게 혀끝으로 빨아 보았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세르비엘 기자가 껄껄 웃었습니다. "이봐 미쉬, 왜 그래? 설마 모스타강 사건으로 겁이 난건 아니겠지?" "왜 그러십니까?" 메그레 경감이 진지한 표정으로 미쉬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술은 안 마시는게 좋겠습니다. 이봐, 엠마. 약국에 가서 주인더러 빨리 오라고 해. 급한 일이야!" 미쉬의 말에 모두들 흠칫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잠자코 있었습니다. 폼므레 는 초조한듯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안절부절 못 했습니다. 미쉬는 술병이 나란히 놓인 선반으로 가서 페르노주의 술병을 들고 전등불에 비 쳐 보았습니다. 그 병안에 하얀 가루가 떠 있는 것이 메그레 경감에게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3. 하마터면 모두 독살!!.. 이윽고 엠마가 약국 주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약국 주인은 마침 저녁 식사 중이 었던 모양으로,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급히 술병과 술잔의 술을 분석해 주게." 미쉬가 페르노 주 병과 술잔을 약국주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오늘밤 안으로 말입니까?" "당장~!" "대체 뭘 조사하고 싶은 겁니까?" 약국주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미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불안에 떨며 잠자코 있었습니다. 오직 엠마만이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연필심에 침을 묻혀서, 뭔가 수첩에 적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미쉬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독약이야. 스트리키닌이야." 미쉬는 약국 주인을 재촉하여 떼밀다시피 문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어째서 독약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죠?" 메그레 경감이 미쉬에게 물었습니다. "별로.... 다만 얼핏 보니 술잔의 술에 흰 가루가 떠 있었고, 냄새도 이상할 뿐 더러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난 이래봬도 의사 자격증을 갖고 있습니 다." 이렇게 대답하는 미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늘 여기서 페르노 주를 마십니까?" "예, 거의 매일 밤 식사 전에 마십니다. 엠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식사 전에는 꼭 페르노 주를 갖다 줍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칼바도스주를 마시는 습관이 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선반으로 가서 칼바도스 주의 병을 찾아냈습니다. 칼바도스 주란 사과주의 일종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그 칼바도스 주 병을 손에 들고 전등불에 비쳐 보았습니다. 술의 겉면에 흰 가루가 조금 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아무말 없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전보다도 더욱 으스 스한 공포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마 후 약국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양손에 페르노 주 병과 잔을 들고 있었습니 다. 약국 주인은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문 있는 곳에서 무엇인가 내쫓듯이 발로 찼습니다. "이 꼴보기 싫은 개새끼, 저리 꺼져!" 그 집 없는 누렁개가 어느새 약국 주인의 뒤를 따라 쑥 들어왔던 것입니다. "어땠소? 분석의 결과는?" 메그레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틀림없는 스트리키닌이었습니다. 그것도 30분쯤전에 병 속에 넣었던 것 같습니 다. 누가 마신 사람은 없겠죠?" 약국 주인은 걱정스런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약 미쉬가 독약을 눈치채지 못했 더라면, 지금쯤 모두 스트리키닌으로 독살당했을 것입니다.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고 불안한 듯 의심에 찬 눈초리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세르비엘 기자가 앓듯이 말했습니다. "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대체 무슨 일이지? 권총 다음엔 독약이라니. 범인 은 우릴 모조리 죽일 작정이었어." 에르네스트 미쉬는 한숨을 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멋장이 폼므레는 불 안에 견디지 못하고 아랫도리를 치신머리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하녀 엠마만이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카운터에서 무엇인가 수첩에 낙서를 하고 있었습니 다. 4. 불쌍한 엠마.. 이때까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르르와 형사가 메그레 경감을 향해 살짝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그 눈짓을 알아차렸는지 못 알아차렸는 지 파이프를 문 채 딴전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도 경감한테서 반응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르르와 형사는 메그레 경감 곁으로 가서 귀엣말을 했습니다. "경감님, 실레지만 지문을..... 술병과 술잔에 들어 있는 지문을 조사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음, 조사해 보아도 좋겠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걸세." 메그레 경감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경감은 머리가 낡아 과학 수사라는 걸 하찮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젊은 르르와 형사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경찰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사건 수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그레 경 감이 지문 수사에 무관심한 것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르르와 형사는 스스로 술병과 술잔을 모아서 호텔의 이층방으로 들고 올 라갔습니다. 과학 수사의 교과서데로 지문이 지워지지 않도록 주의 깊게 포장하 여 파리 경찰국으로 보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식당 한구석에는 약국주인이 호텔 주인과 귀엣말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 있는 술은 모두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 만약 독약이 들어 있으면 큰 일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장사에 큰 지장이 있을거야." 호텔 주인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식당 선반에는 여러 가지 술이 50병 가량 놓여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경감님? 모든 술을 분석해 봤으면 하는데..... 경감님의 허가가 있 으면 당장 조사해 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허가가 있었으므로 약국 주인은 당장 일에 착수했습니다. 약국 주인은 이 사건에서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기쁜지 몹시 흥분 해 있었습니다. 그는 약국에 전화를 걸어서 점원을 불러, 호텔에 있는 술병을 모 졸 실어 냈습니다.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폼므레와 세르비엘 기자도 돌아가 버리고. 미 쉬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이 때때로 강한 바람에 덜거덕거렸습니다. 호텔 주인은 텅빈 음산한 식당을 둘러보며 투덜댔습니다. "술병을 모두 가져가버렸으니 이래가지고서야.... 아예 문을 닫고 쉬는 편이 낫 겠군. 대체 언제까지 이런 골치 아픈 일이 계속된단 말인가? 경감님, 당신은 저 녁 식사를 안할 건가요? 그리고 미쉬씨 당신은?" 메그레 경감은 맥주와 요리를 시켜 혼자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밤은 이 호텔 에 묵기로 하고, 이층에 방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물로 르르와 형사도 함께 였습 니다. 메그레 경감이 맥주를 마시면서 묵묵히 식사하는 것을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미쉬가 뚫어지게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맥주나 요리에 독약이 들어 있어서 당장 이라도 경감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쓰러지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쳐다보 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식사를 마치자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불을 붙였습니다. 미쉬는 신 문을 펴 읽는 체하고 있었지만, 늘 고개를 들고는 겁에 질린 듯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단조로운 바람 소리에 뒤섞여 저 멀리서 항 구로 들어오는 배의 무적(안개가 끼었을때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마치 밤에 우 는 새의 슬픈 울음 소리같이 들려 왔습니다. "미쉬씨, 당신도 이 호텔에 묵습니까?" 문득 메그레 경감이 물었습니다. "예, 어머니가 파리에 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나는 여기서 3킬로미터 떨어 진 곳에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안계실때엔 여러가지로 불편 하므로 늘 이 호텔에 묵고 있죠." 미쉬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 경감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습니다. 잠시후, 식당의 바로 위에 있는 이 층 방에서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제 식당에 남아 있는 사람은 메그레 경감과 엠마뿐이었습니다. 엠마가 요리 접 시를 치우러 왔습니다. "잠깐 이리 앉지 그래. 나이는 몇 살이지?" 메그레 경감이 의자를 권하며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스물 넷이어요." 엠마는 눈을 내리감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잠깐 말을 걸어도 불안한 듯 쭈뼜쭈뼛 했습니다. 빈혈이 있는지 얼굴이 창백했으며, 결코 풍만한 몸매는 아니 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뭘 했었지?" "문방구점에서 점원노릇을 했었어요. 저는 고아여요. 아빠와 오빠는 선원이었지 만,조난당하여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보다 훨씬전에 돌아가셨고요." "애인은 있나?" 엠마는 아무 소리도 않고 시선을 돌렸습니다. 옆얼굴이 몹시 쓸쓸하고 외로와 보 였습니다. "호텔 손님 가운데는 아가씨를 못살게 구는 손님도 있겠지? 아까 여기 있던 세 단골 손님은 밤마다 찾아오는 모양이던데, 역시 아가씨를 못살게 구나? 특히 폼 므레씨는 활량같이 보이던데." 엠마는 모호한 미소를 살짝 띄웠을뿐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의 험담을 하 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밤같이 미쉬씨가 이 호텔에 묵을 때엔 그의 시중도 드나?" 메그레 경감이 계속 묻고 있을때 나지막하게 벨이 울렸습니다. 카운터 뒤에 있는 객실 표지판의 불이 빨갛게 켜졌다 꺼졌다 했습니다. 엠마는 그 불을 보고 일어섰습니다. "잠깐 실례합니다. 미쉬씨가 부르는군요."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윽고 바로위의 미쉬가 묵고 있는 방에서 두 사 람이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고 있을때 약국 주인이 헐떡거리며 달려왔습니다. "경감님, 겨우 끝냈습니다. 아뭏든 48병이나 분석을 했거든요. 그 결과, 페르노 주와 카바도스 주 병이외엔 독약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역시 범인은 페르노 주와 칼바도스 주를 마시는 사람을 노리고 독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5. 커다란 구둣발 자국.. 메그레 경감은 라미랄 호텔의 이층방에서 눈을 떴을때, 꽤 일찍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 밖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제부터 이슬 비가 내렸다간 그치곤 하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엠마가 식당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테이블위에는 누군가가 마신 커피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건 나하고 같이 온 젊은 형사가 마셨나?" 메그레 경감이 엠마에게 물었습니다. "예, 조금전에 역으로 커다란 짐을 부치러 가던데요." 메그레 경감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르르와 형사가 그 술병과 술잔을 포장하여 파 리 경찰국 감식과로 부친게 틀림없었습니다. "어젯밤 묵은 미쉬씨는?" "오늘 아침에 몸이 불편하다고 아침 식사도 이층 방에서 드셨어요." "그래? 그럼 나도 커피 한잔 마셔 볼까?" 엠마가 주방으로 커피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는 아무레도 메그레 경감 곁을 지나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별안간 경감의 커다란 손이 엠마의 어깨를 덥 석 잡았습니다. "엠마, 좀 물어 볼 말이 있어." 메그레 경감은 엠마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 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엠마는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꼼 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엠마는 작은 새처럼 몸을 움츠렸습니다. "우리 둘만의 이야기야. 자, 뭔가 아는게 있으면 얘기해 봐. 아가씨는 가엾고 귀 여운 처녀야. 그런 아가씨를 불행하고 난처하게 빠뜨릴 일은 결코 하지 않을 테 니. 자아, 내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고 정직하게 얘기해 봐요. 저 페르노 주 병 에 들어 있던 독약말인데, 누가 넣었지?" "저는 아니어요. 맹세해요." "아냐, 아가씨는 맹세를 안해도 돼. 그런 건 알고 있어. 물론 아가씨는 아냐. 그 러나 아가씨는 뭔가 알고 있을 거야." 갑자기 엠마의 눈에서 눈물이 죽 흘렀습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습니 다. 그리고 질문을 바꿨습니다. "간밤에 미쉬씨가 아가씨를 부른건 무슨 일 때문이었지?" "경감님과 같은 말을 묻더군요. 누가 그 술병에 독약을 넣었는지 말해 보라고 막 윽박지르듯이 묻는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난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이어 요. 믿어 주세요." 엠마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잘 알았어. 더 이상 안 물을테니 걱정하지마. 그럼 빨리 커피를 부탁해." 메그레 경감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미쉬가 이층에서 내려왔습니다.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은 채, 추운 듯 머플러를 목에 감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초췌했고, 붉은 머리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몸이 별로 좋지 않은것 같구료." 메그레 경감이 말을 걸자 미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 몸이 좋지 않군요. 콩팥이 좋지 않아요. 조금만 근심거리가 있거나 흥분하 면 당장 그 증세가 나타나죠. 간밤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쉬는 호텔 입구 쪽에만 마음이 쏠리는지 그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집에는 안 돌아가나요?" "가 봤자 아마도 없고..... 이 호텔에 있는 게 편하죠. 그런데 경감님, 오늘 아 침엔 제 친구들이 안 왔나요?" "친구라니요?" "기자인 세르비엘이나 폼므레 말입니다." "아마 아직도 자고 있겠지요. 참 그러고 보니까 그 이상한 누렁개도 전혀 눈에 안 띄는 군요. 어딜 갔을까? 이봐 엠마 그 개 못 봤니?" 엠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이때 입구의 문이 열리며 르르와 형사가 들어왔습니다. "르르와, 무슨일이 있었나?" "말씀드린 술병과 술잔을 경찰국 감식과로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 도시 의 경찰서와 시청을 들러 보았죠. 방금 누렁개 말씀을 하셨는데 그 개라면 오늘 아침 미쉬씨 댁 뜰에 있는 것을 어떤 농부가 봤다는군요." "뭐, 우리 집 뜰에?!" 미쉬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 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 뜰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신 집 현관에 누워 있어다나봐요. 농부가 가까이 다가가니 무섭게 짖어 대므로 깜짝 놀라 달아났다고 합니다." "미쉬씨, 댁까지 가 보지 않겠소?" 메그레 경감은 이렇게 말하며 미쉬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미쉬는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이 빗속을.... 나는 병자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 일주일쯤 앓아 누울 겁니다. 그 따위 개 같은 건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래봐야 집 없는 개가 어쩌겠습니까 ?" 메그레 경감은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미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 어딜 가시죠?" "뭐 별로. 잠깐 바깥 바람의 쐬며 산책이나 할까 해서. 르르와, 함께 가겠나?" 메그레 경감은 빠른 걸음으로 호텔에서 나갔습니다. 르르와 형사가 급히 뒤쫓았 습니다. "경감님, 어딜 가는 거죠?" 메그레 경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필요없는 대 답은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메그레 경감의 버릇인 것입니다. 바위같이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항구의 배를 구경하면서 해안을 거닐었습니다. 방파제 가까이오자 도 로 표지판이 있었으며, '사브로 블랑 해안까지 3 킬로미터'라고 씌어 있었습니 다. 메그레 경감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르르와 형사에게 외투자락을 펼치게 하고는, 그것으로 바람을 막으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로 표지판의 화 살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브로 블랑 해안에는 별장 같은 집이 여기저기 서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고 성같이 당당한 저택이 있었습니다. 시장의 집이었습니다. 해초로 뒤덮인 모래밭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커다란 광고판이 보였습니다. 분양 지의 겨냥도가 그려져 있고, '사브로 블랑 별장 분양지, 관리인 에르네스트 미 쉬'라 쓴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곳이 저 의사 면허증을 가진 미쉬가 팔고 있다는 분양지였습니다. 넓은 공터의 여기저기에 건축중인 별장이 미완성인채 공사를 중지하고 있었으며, 도로 공사용의 로울러가 팽개쳐져 있었습니다. 주위에는 인적이 없어, 쓸쓸했습 니다. 미쉬의 집은 분양지 끝에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수색 영장을 안 갖고 무단 침입하면 곤란한데요." 르르와 형사가 걱정했지만 메그레 경감은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대답 을 하지 않았습니다. 뜰에는 선명하게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밖에 사람의 발자국도 찍혀 있었습니다. 아주 큰 구둣발 자국이었습니다.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았으므로, 메그레 경감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습니다. 양탄자위에도 흙투성이의 커다란 구둣발 자국과 여러개 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집안은 전체적으로 꽤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터키풍의 벽걸 이, 아름다운 풍경화, 예술적인 나체화가 벽에 걸려 있었고, 유리 책장옆에 멋진 중국풍의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그 예술적 취미에 매우 감탄했지만, 메그레 경감은 그런 가구류에 는 전혀 흥미가 없는지, 계속 문을 열고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았습니다. 마지막 방의 문을 발로 차서 연 그는 비로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거긴 식당이었습니다. 식탁위에 빈 포도주병이 두개 놓여 있었고, 고기와 버섯, 콩 통조림이 열개쯤 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두껑이 열려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습 니다. 누군가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고 통조림을 따 먹은게 틀림없었습니다. 식탁 에는 먹다 남은 고기나 콩 찌꺼기로 더러워져 있었고 바닥에도 콩과 고기 부스러 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때, 저 의사 면허증을 가진 미쉬가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하게 먹었다고 생각 하나?" 메그레 경감이 르르와 형사에게 물었지만, 르르와 형사는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 했습니다. "물론 미쉬 어머니도 아냐. 이것보게. 흙투성이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게다가 개의 발자국도 있고..... 르르와, 여기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조사해 주게. 지문을 좋아하는 자네에겐 즐거운 일감이 생긴 셈이야. 그럼 나중 에 다시 만나세." 메그레 경감은 해안을 따라 라미랄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식당에 들어간 그의 눈 에 맨 먼저 띈 것은 미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슬리퍼를 신은 채, 목에는 머플러를 감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폼므레가 어제 와 같이 멋진 승마복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메그레 경감이 곁으로 다가와도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얼굴 은 몹시 창백했습니다. 이윽고 미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경감님,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세르비엘 기자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어젯밤 여기서 헤어진 뒤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군요." 메그레 경감은 갑자기 석고상처럼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방금 들은 이야기 때문 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렁개가 엠마의 발아래 누워 있었기 때문입니다. 6. 공포의 도시 콩가르노.. 폼므레가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세르비엘 부인은 걱정한 나머지 벌써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습니다. 아까 우리 집에 와서, 어떻게든 남편을 찾아 달라고 울면서 부탁했습니다." 이때 호텔 문이 열리면서 신문팔이 소년이 뛰어들어왔습니다. "<등대> 신문의 특종 기사요!" 소년이 팔에 안고 있는 신문의 표제에는 큰 활자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공포의 거리로 변한 콩가르노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또다시 괴사건! 본지 기자 쟝 세르비엘씨 행방 불명 자동차 뒷좌석에 핏자국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메그레 경감은 신문팔이 소년으로부터 신문을 사며 물었습니다. "많이 팔렸니?" "다른 날보다 열 곱은 팔렸죠. 자, <등대> 신문! 괴 사건의 특종 기사요!" 소년은 목청을 돋구며 회오리바람같이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신문을 펼쳐 읽고 있는데 엠마가 외쳤습니다. "경감님, 전화 받으세요." 전화는 시장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시장은 몹시 화난 목소리로 떠들어댔습 니다. "경감, 저 따위 바보스런 기사를 쓰게 한 건 당신이오? 나는 아무소리도 못 들었 소.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은 우선 맨 먼저 내게 알려야 할 게 아니오. 나는 이 도시의 최고 책임자이니까 말이오. 대체 그 자동차 사건은 뭐요? 그리고 큰 발 을 가진 사나이가 범인이라고 씌여 있는데..... 30분전부터 시민들로부터 그 기 사가 사실인가하고 물어오고 있단 말이오. 경감, 앞으로는....." 메그레 경감은 코방귀를 뀌며 전화를 딱 끊었습니다. 물론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경감은 식탁으로 돌아와 천천히 신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쉬와 폼므레도 옆 에서 신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본지의 쟝 세르비엘씨는 최근 콩가르노 시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재한바 있다. 최초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금요일 밤이었다. 술 도매상을 하던 모스타강씨가 라미랄 호텔을 나와 어떤 빈집 현관앞에서 담뱃불을 붙이 려는 순간, 그 집 문의 우편함에서 발사된 권총 탄환이 모스타강씨의 배에 명중했던 것이다. 이튿날인 토요일에는 파리 경찰국에서 파견된 명수사관 메그레 경감이 라미랄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 2의 사건을 막을 수는 없었다.그 날 저녁때 호텔에서 폼므레씨, 미쉬씨, 세르비엘 기자, 메그레 경감등이 식사 전에 페르노 주를 마시려 했는데, 그 술속에 다량의 스트리키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일요일 아침, 세르비엘 기자의 자동차가 생 쟈크 강변에 내버려 져 있는것이 발견되었는데, 토요일 저녁 이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자동차의 운전석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유리창도 깨어져, 사건 당시 격 투가 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3일간에 잇달아 세 사건이 터졌다! 콩가르노 시는 이제 공포의 거리로 변해, 시민들은 불안에 떨면서 다음은 누구일까 하고 수근거리고 있다. 이 사건을 더욱 괴기하게 만든것은 한 마리 누렁개의 출현이다. 이 개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으며, 임자도 없는 것 같은데, 사건이 발생할때 마 다 현장에 그 기분 나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개를 실마리로 하여, 경찰은 정체 불명의 어떤 인물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이 수수께끼의 인 물은 여기저기에 흙투성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으며,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발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과연 이 큰 발자국의 사나이는 미치광이인가? 부랑장인가? 그리고 정말 그는 이 연속 사건의 범인일까? 겁에 질린 시민들은 호신용 권총을 휴대 하고 있으며, 만일 누렁개나 발이 큰 사나이를 발견하면 지체없이 발포 할 태세다. 메그레 경감은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은 아직 흐렸지만 비는 그친것 같았 습니다. 바람은 아직도 불고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났는지 교회에서 사람들이 몰 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손에 <등대> 신문을 들고 있었고, 라미랄 호텔앞 을 지날때에는 호기심에서 식당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다시 전화 벨이 울리고 엠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글쎄,나는 잘 모르지만... 메그레 경감님을 부를까요? 여보셔요, 여보셔요, 어 머 끊겼군!" "무슨 전화지?" 메그레 경감이 짜증 섞인 소리로 물었습니다. "파리 신문사에서 왔는데 그뒤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군요. 또 방도 예약했어요. 일부러 파리에서 취재하러 오나 봐요." "엠마, 수고스럽겠지만 <등대> 신문사를 불러 줘." 전화는 곧 연결되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시오, <등대> 신문이오? 난 메그레 경감인데 편집장을 부탁하오. 아, 편집 장이오? 좀 물어보겠소. 오늘 조간은 몇 시에 인쇄했소? 9시 반이라고요? 그리 고 그 특종 기사는 누가 썼죠? 아니 봉투에 든 채 배달되었다고요? 사인도 없고 요? 그럼 당신네 신문에서는 뉴스거리만 되면 사인이 없는 투서라도 그대로 신 문에 싣소? 대단한 신문이구료. 정말.!" 수화기를 내던지듯이 전화를 끊고, 메그레 경감은 식당 뒷문으로 갔습니다. 그러 나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엠마, 왜 잠갔지?" "미쉬씨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메그레 경감은 미쉬를 돌아보았습니다. 미쉬는 신문을 읽는 체했지만, 무엇인가 두려워하고 있는게 분명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앞문으 로 나갔습니다. 그는 해안을 따라 생 쟈크 강 어귀로 향했습니다. 거리의 끝으로 갈수록 집이 드 문드문 있었고, 해군 조선소가 있었습니다. 건조 중인 배,수리 중인 배가 몇 척 인가 있었으며, 낡은 배가 갯벌에 잠겨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건너편에 작은 돌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이 생 쟈크 강 어귀였습니다. 돌다리 부근엔 한대의 소형차를 둘러싸고 구경꾼들이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구경꾼들을 헤치고 자동차로 다가가서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깨어진 창의 유리가 조각조각 떨어졌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앞좌석에 피가 묻 어 있는게 보였습니다. 피는 벌써 갈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구경꾼들이 죄어들며, 경감의 어깨너머로 자동차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세르비엘 기자의 집은 어디지?" 메그레 경감이 물으니까, 5,6명의 소년이 기꺼이 안내하러 나섰습니다. 소년들은 파리의 유명한 경감님과 친해지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습니다. 세르비엘 기자의 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저택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초인 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리며 세르비엘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경감을 안 으로 맞아들였습니다. 40살쯤되는 야무져 보이는 부인이었습니다 "경감님, 남편은 살해 되었을까요? 나는 미칠것만 같아요." "주인께선 언제 나가셨죠?" "어제 저녁 식사하러 왔다가 다시 나간 뒤부터 소식이 없어요. 뭔가 걱정스런 일 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내겐 아무 얘기도 없었습니다. 자동차는 문 앞에 새워둔 채 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나갈 일이 있을때에는 늘 그랬죠. 보통때처 럼 라미랄 호텔로 트럼프 놀이를 하러 가겠거니 하고, 나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 죠. 그런데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보니 주인이 안 돌아와 있었어요. 불길한 예 감이 들어 폼므레씨 댁으로 물어 보러 갔죠. 그러나 폼므레씨는 전혀 모른다고 했고, 어젯밤엔 트럼프도 하지 않았다는군요. 그래서 할수없이 집에 돌아왔더 니, 사람들이 저 돌다리께에 남편의 자동차가 버려져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깜 짝 놀라 자동차를 보러 갔더니, 핏자국이 있는게 아닙니까! 도대체 누가 우리 남편을 죽였을까요? 세상에 그렇게 좋은 양반도 없는데..." 세르비엘 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습니다. "부인, 아직 주인이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런데 어젯밤 주인은 돈을 많이 가지고 나갔나요?" "아뇨, 그렇게 많은 돈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3,4백프랑쯤 되겠군요. 역 시 강도일까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무엇인가 알아내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세르비엘 부인을 위로하고 나서 그 집을 나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1 백미터도 채 가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한 남자가 뛰어 왔습니다. "실례지만 경감님. 저 신문기사 말인데요. 그게 사실입니까? 만약 그 발이 큰 사 나이나 누렁개를 보면 쏴 죽여도 되나요?" 마치 사살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인내심이 강한 메그레 경감이었지만 이때만은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꽃은채 호통을 쳤습니다. "시끄러워~!" 7.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메그레 경감이 라미랄 호텔로 돌아오자, 요리사 모자를 쓴 호텔 주인이 초조한 모습으로 옆에 와서 또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경감님, 제발 제 말씀 좀 들어 보십시오. 이런 복잡한 일이 계속되면 손님이 오 지 않아 장사는 거덜납니다요." "그보다 우선 점심이나 먹도록 해주게." 메그레 경감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을 하려는 주인을 가로막으며, "나하고 같이온 젊은 형사를 못 보았나?" 하고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시장님의 부름을 받고 말입니다. 그것보다 경감님, 다시 파리 신문사에서 방을 두개 예약했습니다. 기자와 카매라멘이 취재하러 온다던 가요.... 이러다간 이제 난리가 나서 우리 장사는....." "미쉬씨는 뭘 하고 있지?" "이층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도 방에 들여놓지 말라고 하던데요." "폼므레씨는?" "방금 돌와갔습니다. 그런데 경감님, 어떻게든 빨리 사건을...." 메그레 경감은 호텔 주인의 먰두리를 무시하고,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이 식당 안 을 둘러보았습니다. 누렁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어디론가 가 버린 모양이었 습니다. 호텔 주인도 경감이 대꾸를 않자 이젠 지쳤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습 니다. "엠마, 잠깐 와 줘." 메그레 경감이 부르자, 엠마가 왔습니다. 이젠 그전 같이 겁을 먹지 않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무뚝뚝한 태도에 익숙해져 오히려 그런 경감에게 친밀감을 느낀 모양이었습니다. "엠마에게 물어 보겠는데, 미쉬씨는 어젯밤 분명히 밖에 안 나갔지?" "안 나갔을 거예요. 사람 만나는 걸 몹시 두려워 하고 있거든요. 식당 뒷문을 잠 그라고 할 정도니까요. 이번엔 자기가 죽을 차례가 아닐까 하고 겁을 먹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 누렁개는 어째서 엠마를 알고 있지? 늘 엠마 옆에 누워 있었잖아?" "글쎄요. 모르겠어요. 본 적이 없는 갠데요. 불쑥 나타났다가 불쑥 사라지죠. 누 가 먹을 걸 주는지 이상해요." "그 개는 언제쯤 나갔지?"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그러고 있는데, 르르와 형사가 몹시 흥분해서 돌아왔습니다. "시장이 몹시 화를 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수사를 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공포심만 갖게 했다는 투였습니다. 어쨌든 시민들을 안심시키 기 위해 누구라도 좋으니 수상한 놈을 하나 체포하라, 그러잖으면 면직시키겠다 고 하더군요." 메그레 경감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침착하게 성냥 끝으로 파이프에 끼어 있는 재를 파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르르와 형사는 더욱더 초조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야죠. 아니면 우린 파면입니다. 경감님, 어떻게 하죠?" "가만 있으면 돼." "하지만 시장이...." "시장 일 따윈 내버려 둬! 그보다 미쉬 집에 있는 발자국은 조사해 봤나?" "예, 모두 감식과로 보냈습니다. 빈 포도주 병과 통조림 깡통등, 지문이 묻은건 전부 보냈습니다. 사나이와 개의 발자국도 석고로 본을 떠 놓았습니다." 대답 대신, 메그레 경감은 잠자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습니다. ? 에레네스트 미쉬 아버지는 기업가이며, 국회의원을 지낸 일이 있으나, 현재는 사망. 어머니는 상 당한 사교가로서 아들과 함께 토지 분양회사를 세웠으나, 경영은 부실. 본인 에레네스트 미쉬는 의사 면허를 갖고 있으면서도 개업은 하지 않고 있음. 아내와 이혼하고 지금은 어머니와 살고 있음. 약간 변태적인 성격의 소유자임. ? 이브 르 폼므레 귀족 집안의 후손으로서, 형은 콩카르노 시 최대의 통조림 제조 회사 사장. 단, 본인은 이름난 활량으로서, 부모의 유산을 쓰며 놀고 있음. 돈이 궁해지면 때때로 형에게 돈을 요구함. ? 쟝 세르비엘 파리에서 신문 기자와 작은 극장의 지배인을 지냈는데, 그 극장의 안내양과 결혼하여 현재는 콩카르노 시에 살며, <등대> 신문의 기자로 있음. 생활은 중류. 메그레 경감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르르와, 이번엔 자네 것 좀 볼 수 있겠나?"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메모를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괜찮으니까, 부끄러워 하지 말고 내놓게." 르르와 형사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수첩을 내밀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싸구려 수첩과는 달리, 루우스리이프(페이지를 자유로 바꾸어 꽃을 수 있게 만든 책)식 의 좋은 수첩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수첩을 펼쳤습니다. ? 모스타강 사건 술 도매상을 하는 모스타강씨의 배에 박힌 권총 탄환은 분명히 다른 사람을 쏠 예정이었음. 범인은 그날 밤 모스타강씨가 빈집 현관 앞으로 접근하리라고는 미 처 몰랐기 때문임. 범인이 노리던 상대는 그 장소에서 범인과 만날 약속을 했던 자임. 모스타강씨는 엉뚱하게도 그 상대로 오인되어 총을 맞았던 것임. (문뒤에 떨어져 있던 담뱃재를 분석하지 않은것은 실수.) ? 독이 든 술 사건 라미랄 호텔의 식당은 겨울엔 손님이 거의 없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남 몰래 식당으로 숨어 들어 술병에 독을 넣었는지 모름. 독이 들어 있은 것은 2병 뿐이므로, 범인은 페르노 주와 칼바도스 주를 좋아하는 사람을 노린 셈임. (그렇다 하더라도 미쉬씨가 술에 독이 들어 있는 것을 곧 알아차린 점은 주의를 요함.) ? 누렁개 사건 이 개는 라미랄 호텔과 어떤 관계가 있음. 인간에게 길들여져 있으므로 들개는 아님. 개 임자는 대체 누굴일까? 개는 5살 정도임. ? 세르비엘 기자 사건 <등대> 신문에 저 특종 기사를 보낸 자는 누구인가? 필적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음. "정말 좋은데! 이런 식으로 잘해 보게." 메그레 경감은 웬만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만족한지 수첩 을 르르와 형사에게 돌려주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젊은 르르와 형사는 칭찬을 받고 얼굴이 붉어 졌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시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르르와 형사에게 다짐해 두었지만, 누군가 용의자를 체포했소?"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4,5 명 식당에 들어와 재미있다는 듯이 사건에 대해 이야 기하다가 메그레 경감이 노려보자 고양이앞의 쥐처럼 꽁무니를 뺐습니다. 오후 4시 반경, 미쉬가 아래층에 내려왔습니다. 여전히 슬리퍼를 신은 채 수염이 텁수룩 했습니다. 목에 감은 머플러는 땀에 젖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지 그시 파이프를 물고 있는 메그레 경감을 보고 안심한것 같았습니다. "여기 계셨군요. 경감님. 젊은 형사님은요?" "거리로 수사하러 나갔죠." "그 누렁개는?" "오늘 아침부터 통 보이질 않는군요." "그 특종 기사는 누가 썼는지 아직 모르나요?" 미쉬는 걱정스레 묻고는 문득 옆 테이블 위에 <등대> 신문이 있는 것을 보고 집 어 들었습니다. 다시 벨이 울리고 엠마가 소리쳤습니다. "경감님, 전화 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시오. 메그레 경감입니다만....." "르르와 입니다. 지금 구시가에 있는데 연못가에 그 누렁개가 총에 맞아 쓰러져 있습니다. 쏜 사람은 이웃 양화점 주인입니다." "죽었나?" "아뇨, 하지만 중상입니다. 허리에 총탄을 맞아 걸을 수가 없나 봅니다. 사람들 은 무서워서 도와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전화는 가까운 찻집에서 걸고 있 는데, 여기 유리창을 통해서도 잘 보입니다. 경감님, 어떻게 하죠? 차라리 죽이 는게....." 르르와 형사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침착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일 어난 사건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입니다. "알았어. 곧 가지!" 미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이번에는 누가 당했죠?"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카운터 앞에 멍청히 앉아 있는 엠마를 힐끗 쳐다본 후,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연못에 있는 다리를 건너 어두운 거리로 들어갔습니다. 이 부근은 고성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성내거리'라 불리고 있는 구역이었습니다. 시내에서도 가장 인구가 밀집해 있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메그레 경 감이 걸어가는 거리에는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었습니다. 거리의 모퉁이를 몇 개 돌아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순간, 양쪽에 즐비한 집의 창마다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길 쪽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길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사 람들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괴로와하는 신음소리가 똑똑히 들렸습니다. "이봐, 그만둬!" 메그레 경감을 발견한 사람이 돌을 던지고 있는 패들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사람들을 밀어냈습니다. 길 복판에 누렁개가 쓰러져 괴로운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 주위에는 잔인한 인간들이 던진 돌이 20여개나 있었 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개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때 한 노파가 3층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모두들 몹쓸 짓을 했죠. 경감님. 단단히 혼을 내 주셔야 해요. 모두들 달려들어 그 가엾은 개를 때려 주었거든요. 난 그렇게 하는 까닭을 이해는 해요. 모두들 그 개를 두려워해서죠." 개를 쏜 양화점 주인은 멋적었는지, 꼬리를 감춘 개처럼 자신의 가게로 슬거머니 들어갔습니다. 조금 전까지 돌을 던지던 젊은이들도 슬금슬금 도망갔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는 깜짝 놀란듯이 고개를 들었습니 다. 무엇인가 호소하려는 듯 슬픈 눈으로 메그레 경감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코끝이 메말라 뜨겁게 달아 있었습니다. 이제 기어갈 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르르와 형사가 전화를 건 찻집에서 나왔습니다. "리어카를 빌려오게." 르르와 형사는 가까운 상점에서 리어카를 빌어 왔습니다. "어디로 운반하죠, 경감님?" "호텔이야.. 개를 리어카에 실어야하니 손 좀 빌리세. 영차...." 두 사람은 개를 리어카에 싣고 돌이 깔린 길을 밀고 갔습니다. 리어카가 덜커덕 거릴 때마다 상처 입은 개는 괴로운 듯 숨을 몰아 쉬었고, 때때로 네 발을 뻗치 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8. 술잔에 손대지 말라!.. 메그레 경감들이 리어카를 밀고 라미랄 호텔에 돌아와 보니, 호텔앞에 낯선 자동 차가 서 있었습니다. 파리의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호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카메라멘이 플래시를 터뜨렸습니 다. "다시 한 장 더 찍을테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경감님 개의 목을 이쪽으로 돌려.. .... 예, 됐습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기자가 한손에 수첩을 들고 달려왔습니다. "메그레 경감님이시죠? <파리장> 신문의 기자입니다 다른 신문사 친구들도 곧 도 착할 겁니다. 그런데 경감님, 수사의 전망은...." 메그레 경감은 물론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해가 되는 기자와 카메라멘을 밀 어내듯이 하며 리어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엠마가 달려왔습니다. "어머나, 가엾게도! 이 개를 어디에다 재우죠?" "어디 마땅한 장소가 없을까?" "글쎄요. 안뜰에 빈병을 쌓아두는 헛간이 있는데요." "그럼 거기가 좋겠군. 르르와,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게." 메그레 경감과 엠마가 함께 개를 안뜰의 헛간으로 옮겼습니다. 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낡은 담요를 깔아서 개를 눕혔습니다. 개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엠마가 고깃 덩어리를 던져 주어도 전혀 먹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젠 먹을 원기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윽고 수의사가 와서 개의 허리에서 권총 탄환을 빼냈습니다. "상처는 매우 깊은데, 이런 동물은 생명력이 강해서 목숨을 잃는 걱정은 없습니 다." 수의사는 개의 허리에 붕대를 칭칭 감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식당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은 마치 전투 지휘소 같은 분위기 였 습니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카메라멘들도 도착하여,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거 나 테이블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원고는 작성이 되는대로 전화로 본사에 보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 미쉬만이 창백한 얼굴로 한쪽 테이블에 힘없이 앉 아 있었습니다. 항구의 큰 시계가 밤 9시를 알렸을 즈음, 시장이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흰 턱 수염을 기른 단정한 노신사였습니다. 시장은 전쟁터같이 왁자지껄한 식당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파리의 신문 기자들입니다." 르르와 형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러면 이 도시의 우스운 사건이 온 프랑스에 좍 퍼지겠군. 경감, 아직 단서를 못 잡았소?" "수사중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말투는 마치 '쓸데없는 입은 열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바위처럼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므로 시장은 힘없이 앉아 있는 미 쉬를 공격했습니다. "미쉬, 자넨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집에 안 돌아가나?" "예, 어머니가 파리로 가셔서 집엔 아무도 없으니까요." 미쉬는 입속으로 우물우물 대답했습니다. 시장은 미쉬의 겁장이 같은 태도가 못 마땅한듯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메그레 경감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하루도 못가서 온 거리가 공포에 떨게 되겠소! 아까부터 몇 번이 나 말하지만 적당히 알아서 아무나 좋으니 체포해 버리시오." 메그레 경감이 입을 꼭 다물고 있었으므로, 시장은 한층 더 목청을 돋구었습니 다. "내가 경감에게 명령할 입장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것만은 똑똑히 말해 두겠소. 만일 다시 사건이 일어나면 이젠 끝이라는 것을! 지금도 시민들은 저 <등대> 신문의 어리석은 기사에 겁을 먹고, 가게를 일찍 닫아 버리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단 말이오." 시장은 산고모(예장때 쓰는 운두 높은 모자)를 다시 고쳐 쓰며, 마지막으로 또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경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모두 경감의 책임이오!" 시장은 다시 경감을 노려본 뒤 돌아갔습니다. "엠마, 맥주 좀 갖다 줘." 메그레 경감은 맥주를 쭉 들이킨 다음 미쉬에게 물었습니다. "폼므레씨는 안 보이는군요. 다시 온다고 했소?" "예, 7시경에 저녁 식사하러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파리장> 신문의 기자가 다가왔습니다. "폼므레란 사람의 주소는?" 미쉬가 기자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고 있는 사이에 메그레 경감은 르르와 형사를 식당 구석으로 끌고 가서 기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 다. "<등대> 신문에 실렸던 특종 기사의 원고를 조사해 보았나?" "아까 신문사에 들러 그 원고를 받아 왔습니다. 투고한 사람은 필적을 속이기 위 해 일부러 왼손으로 썼습니다." "봉투에 우표는 붙어 있었나?" "없었습니다. 우편으로 배달된게 아니라, 신문사의 우편함에 직접 집어 넣은 거 였죠. 더구나 봉투에는 <지급>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었군. 그렇다면 그 기사를 쓴 자는 늦어도 아침 8시까지는 세르비엘 기자가 행방 불명되었단 걸 알고 있은 셈이야. 그의 자동차가 생 쟈크 강가에 버려져 있었던 것도, 그 좌석에 피가 묻어 있었던것도 알고 있은 셈이야. 그것 뿐이 아냐. 흙투성이의 큰 발자국이 미쉬의 집에서 발견된 것까지 다 알고 있은 셈이지." "정말 알 수 없군요. 대체 누가 쓴 것일까요?" 르르와 형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문득 생각난듯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경감님, 파리 경찰국으로부터 그 발자국에 관한 조사 결과를 통지해 왔 습니다. 전과자 카드에는 그 발자국에 맞는 인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보고 였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일은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누렁개를 보러 안뜰의 헛간으로 갔습니다. 개는 잠들어 있었지만, 메그레가 다가가자 눈을 뜨고, 별로 겁내는 기색도 없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부드럽게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발아래에 짚을 밀어 넣어 주었습니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을때, 마침 그곳에 <파리장> 기자가 들어왔습니다. 코트에 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비가 오나? 이렇게 밤늦게까지 어딜 갔다 오지,그로랑?" 다른 기자가 물었으나 그로랑은 곧장 자기 신문사 카메라멘에게로 가서 무엇인가 귀엣말을 하더니, 곧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시오, 파리의 <파리장> 신문사를 지급으로 부탁하오, 여보시오,<파리장> 신 문사지요? 난 그로랑 기자요. 속기 담당을 불러 주시오." 그로랑의 곁을 지나던 메그레 경감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 습니다. 이윽고 속기 기사가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여보시오, 아, 지급으로 속기해 주게. 특종감이야. 됐나? 원고를 읽겠네. 표제 는 '콩카르노 사건. 또 다시 범죄가.....' 여보시오. 그래 범죄야. 범죄. '또 한 사람 살해당하다.'라고 해도 좋겠어." 떠들썩하던 식당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미쉬는 몽유병자처럼 일어 나 전화기 쪽으로 다가 갔습니다. 특종을 잡은 그로랑 기자는 열띤 목소리로 전화를 계속했습니다. "모스타강 사건을 취재하던 세르비엘 기자의 행방 불명에 이어, 이번에는 폼므레 씨가.... 그래 폼므레야. 오늘밤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처는 없고, 근 육이 경직된 것으로 보아 독살이라고 생각됨. 잠깐만, 끝 문구는 '콩카르노 시 는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라고 해주게." 그로랑 기자는 수화기를 놓자 이마의 땀을 씻으면서 의기 양양하게 다른 기자들 을 둘러보았습니다. 또 다시 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셔요. 경감님이십니까? 15분전부터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중이어서.... 이쪽 은 폼므레씨 댁인데 속히 와 주십시오. 폼므레씨가 죽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비명같은 목소리였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전화를 끊더니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대부분의 테이블 에는 빈 컵이 놓여 있었습니다. 엠마가 긴장된 얼굴로 메그레 경감은 쳐다보았습 니다. "모두들 어떤 술잔, 어떤 술병에도 일절 손을 대지 마시오! 르르와, 자넨 여기 남아서 이 사람들을 감시하게." 메그레 경감은 이 말을 남기고 호텔에서 뛰어나갔습니다. 9. 사라진 누렁개... 폼므레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회색의 아담한 석조 건물로서 바다를 향해 있었습 니다. 시체는 이층 방에 붉은 융단위에 뉘여져 있었습니다. 이미 옆집 의사가 검 시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원인은 스트리키닌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똑똑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시체의 눈을 보십시오. 특히 시체가 경직된 모양을 보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스트리 키닌에 의한 중독사의 특징입니다. 아마 30분 이상은 괴로와 했겠죠." 방에는 의사 이외에 또 한 사람, 50살쯤 되어 보이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아 파트의 주인으로서, 조금전에 라미랄 호텔로 전화를 건 장본인 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여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은 어디 있었죠?" "아래층에 있었습니다. 이층은 모두 폼므레씨에게 세주고, 나는 아래층에 살고 있죠. 식사만은 폼므레씨도 아래층 식당에서 합니다. 폼므레씨는 온르 7시 반경 에 저녁 식사를 하러 돌아왔는데, 식욕이 없다고 하며 식사전에 마시는 술 이외 엔 거의 아뭐것도 먹지를 않았습니다. 참, 그러고보니 폼므레씨가 이상한 소리 를 한 것이 생각나는군요. 전등불이 켜져 있는 데도, '정전이라 불이 안 오는 군.'하더군요. 아마 눈이 이상했나봐요. 그리고 '다시 나가 봐야겠는데, 골치가 아프니까 아스피린이라도 먹어 두어야지.' 했어요." 메그레 경감은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의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스트리키닌을 먹었을때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 건 독약을 먹은지 얼마 뒤입니까?" "마신 양과 그 사람의 체질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30분에서 길면 2시간 쯤 걸리 죠." "그리고 죽는건?" "먼저 온 몸이 마비된 후죠. 폼므레씨는 잠시 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가, 몹시 고통을 느껴 갑자기 쓰러져 죽었을 겁니다." "음, 그는 7시가 지나 호텔에서 나왔다. 그리고 약 15분뒤에 여기 와서 식사를 하였다. 그러면 호텔이 아니면 여기 중 어느 곳에서 독약을 마셨는지 모른단 말 이 되겠군." 메그레 경감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을 조사해 보니, 씻지 않은 컵과 접시따위가 뜨거운 물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중의 몇개는 이미 깨끗이 씻겨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에 쓴 식기는 다 낭었나요?" "반쯤 씻고 있는데 이층에서 폼므레씨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죠." 여주인은 울음을 참느라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시 경찰서에서 경관이 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경관에게 말했습니다. "이 집을 감시하게.신문기자나 카메라맨이 찾아와도 절대 안에 들여놓지 말고 컵 이나 접시는 절대로 못만지게 하게." 밖에는 여전히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상점들은 문을 다 닫았으며, 거 리를 다니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거리를 가로질러 해안 가까이 오자, 어둠속에 라미랄 호텔만이 불빛이 환했습니다.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잇달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호텔에 들어가자 르르와 형사가 뒷짐을 지고, 마치 야간 학교의 시험 감독관처럼 식당 한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테이블 위에서 열심 히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테이블위에는 아까 메그레 경감이 나갔을때처럼 빈 컵과 술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엠마를 불렀습니다. "폼므레씨가 마신 술잔은 어느 것이지?" 엠마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아뭏든 신문사 사람들의 심부름으로 바빴으니까요. 그때마다 치 운 술잔도 있고요.... 그 분이 뭘 마셨는지, 미쉬씨. 잘 모르시나요?" "브랜디에 물을 타서 마셨지." 미쉬가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그럼 이 브랜디 술잔인가? 혹시 아닐지도 몰라요. 잘 모르겠어요." "르르와, 약국 주인을 불러오게." 르르와 형사가 곧 약국주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테이블위에 있는 컵과 술잔 을 모아 약국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폼므레씨의 아파트에 있는 식기도 조사해 주게." 이때 뒷문으로 호텔 주인이 뛰어들어왔습니다. "대체 그 개는 어딜 갔지? 누가 모르오?" "뭐? 그 누렁개가 없다고!" 메그레 경감은 재빨리 안뜰로 달려갔습니다. 헛간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짚과 낡은 담요는 그대로였지만, 누렁개는 없었습니 다. 그런 중상을 입고 붕대를 칭칭 감았으므로, 제 발로 걸어서 도망가지는 못할 텐데 말입니다. 미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틀림없이 뜰의 문을 통해 누군가가 데리고 나갔어요. 해안 거리의 골목으로부터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있죠. 그 문에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경 감님,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숨어든 자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컵과 식기를 검사하는데는 거의 하룻밤이 걸렸으나, 아무런 실마리도 얻을 수 없 었습니다. 호텔 식당의 것도, 폼므레의 아파트에 있던 것도 이미 반쯤 씻은 뒤였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폼므레가 어디서 독약을 먹게 되었는지 끝내 알 수가 없 었습니다. 제 2 편 발이 큰 사나이 10. 체 포 장.. 다음날 아침 8시경이었습니다. 간밤에 거의 한숨도 못 잔 메그레 경감은 목욕을 한뒤 창문 고리에 매단 거울을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창밖에서는 차가운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해안에서 어부들이 어롱(물고기 를 잡아서 담는 바구니)과 그물을 배에 싣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문득 손을 멈추었습니다. '아니 또 무슨 일이...' 여태까지 부지런히 일하던 어부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모래 사장쪽을 바라보 고 있었습니다. 그쪽으로부터 경관 두 사람이 수갑을 채운 사나이를 끌고 오는것 이 보였습니다. 굉장히 몸집이 큰 사나이였습니다. 낡은 옷을 입고 머리는 죄수처럼 짧게 깍고 있었습니다. 사나이의 몸집이 너무 크므로, 좌우에 있는 두 경관은 마치 모선에 끌려가는 두 척의 보트 같이 보였습 니다. 구경꾼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큰 사나이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별안간 사나이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수갑 채인 양손을 뒤흔들었습니다. 수갑의 사슬 끊기는 소리가 메그레 경감의 귀에도 들릴 만큼 난폭하게 양손을 흔들었습니다. 다음 순간, 두 경관의 손에는 사슬의 끊긴 조각이 달랑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나 이는 몸을 날려 인파 속으로 돌진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미 처 피하지 못한 여인이 땅에 쓸러졌습니다. 사나이는 번개같이 라미랄 호텔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골목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전번 금요일 밤에 모스타강이 권총으로 살해된 바로 그 빈집이 있는 골목이었습 니다. 경관 한 사람이 재빨리 권총을 빼들고 겨누었지만, 흩어지는 구경꾼에 가려 발사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관은 별도리없이 권총을 쥔 채 사나이를 쫓아 골목으로 뛰어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이 광경을 보고도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면도를 끝 냈습니다. 일이 이쯤 된 이상, 달아난 큰 사나이를 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그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낡은 창고와 헛간이 서 있는데다, 곳곳에 빠져 나갈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메그레 경감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신문 기자와 카메라맨이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중에는 파자마 위에 코트를 걸치고 맨발로 뛰어나가는 카메라맨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반시간쯤 지나 경관과 헌병이 부근 일대를 수색하고 있을 무렵, 다시 시장이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식탁에 앉아 한가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시장은 다짜고짜 화를 내었습니다. "경감! 방금 범인이 도망쳤다는데 어떻게 된거야? 점잖게 토스트를 먹고 있다니. ... 경감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마이 동풍인가 본데, 나는 장관에게 전보를 쳐서 당신의 방자한 태도를 보고해 버리겠어! 도대체 당신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나 알고 있나? 몸집이 큰 흉악범이 도망쳤기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단 말이야!" 메그레 경감은 벙어리처럼 천천히 예사로운 얼굴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미쉬가 유령처럼 서 있었습니다. 겁장이 아이가 아버지 옆에 서 있고 싶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시장은 더욱더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이봐. 지방 경찰의, 그것도 보잘것없는 순경이 그 큰 사나이를 체포했단 말이야 ! 그런데 파리 경찰국의 고참 경감인 자네는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한가롭 게 아침이나 먹고 있다니...." "시장님은 지금도 누군가를 체포하기를 원하십니까?" 메그레 경감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아까 도망친 그 사나이를 당신이 잡아 보겠다는 건가?" "시장님은 어제, 아무라도 좋으니 체포하라고 명령하셨죠?" 말을 마치자, 메그레 경감은 안주머니에서 체포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습 니다. "자, 어떻게 하죠?" "아니 도대체 누굴 체포하려는 거지?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나?" "이봐, 엠마. 펜과 잉크를 갖고 와!" 메그레 경감은 펜과 잉크를 받아 들자, 체포장에 굵은 글씨로 술술 써 넣었습니 다. 사브르 블랑 토지회사 지배인 에르네스트 미쉬를 체포함.... "자, 이게 체포장이오! 시장님, 당신의 원대로 미쉬씨를 체포합니다." 당사자인 미쉬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언이 벙벙해서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는 메그레 경감이 농담을 하고 있는건지 진담을 하고 있는지 몰라,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메그레 경감이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는 것은, 방금 펜과 잉크를 가 져다준 하녀 엠마였습니다. 그녀는 카운터쪽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깜짝 놀란 듯 이쪽을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순간 기쁨으로 빛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시장이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경감, 농담으로 흘릴 게 못돼.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겠지 ?" "물론 알고 있죠, 시장님." "미쉬씨는 콩카르노 시의 명사 중의 한 사람으로 훌륭한 인물이야. 게다가 내 친 구이기도 해." "어디 시설 좋은 감방이 없습니까?" "시청에 있는 경찰 보호실 이외엔 헌병대 본부가 있을 뿐이지." "그럼 거기로 합시다. 이봐, 르르와. 마침 잘 왔군. 미쉬씨를 헌병대 본부로 데 려가 줘. 단, 수갑은 채우지 말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연행해야 돼. 감방에 넣어도 불편한 일이 없도록 일러 두게." 도망친 큰 사나이를 찾다가 돌아온 르르와 형사는 메그레 경감의 갑작스런 명령 에 눌라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미쉬는 자기가 정말 체포된다는것을 알자, 당황하여 뒷걸음질쳤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 대체 무슨 증거가 있어서 나를 체 포하는 거죠? 정말 너무했어. 엉망이라구!" "글쎄요. 재수가 없다고 단념하셔야죠." 메그레 경감은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게 말했습니다. "그 큰 사나이를 찾아내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별로 반대하진 않겠습니다만. 그 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사나이는 오늘 체포되었을때 큰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큰 나이프는 대부분의 어부들이 다 가지고 있죠." 이 말을 남기고 메그레 경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와 모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럼 시장님, 나중에 만납시다. 그리고 또 하나 충고하겠습니다만, 신문 기자들 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겁니다. 이 사건은 그렇게 떠들썩할 정도의 사건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시장이 화를 내고 있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성큼성큼 호텔에서 나 갔습니다. 11. 카베르 곶의 망대.. "이리로 가나?" "예, 항구를 빙 돌아 갑니다. 걸어서 30분 이상 걸리죠."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그 몸집이 큰 사나이를 놓친 경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 다. 메그레 경감은 사나이가 붙잡힌 장소에 가 보려고 젊은 경관에게 길을 안내 하게 한 것입니다. 항구에서는 어부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메그레 경감의 물음에 경관은 마치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은 학생처럼 대답했습니 다.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입니다. 인부나 어부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 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왜냐하면 미쉬씨, 폼므레씨, 세르비 엘 기자는 그다지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은 상류 계급 사 람들임에 틀림없지만, 그걸 너무 내세운 나머지 마치 이 도시가 자기네들것이라 도 되는 것처럼 뻐기고 있었습니다." "그럼 사건에 관심을 나타내는 건 어떤 친구들인가?" "중류 이상의 사람들, 특히 라미랄 호텔에 모이는 단골입니다. 저 호텔 식당은 이 거리의 클럽처럼 되어 있어서, 시장도 가끔 얼굴을 내밀곤 하죠." 경관은 파리 경찰국의 유명한 경감이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데 감격하 여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어느덧 두 사람은 거리를 벗어나 쓸쓸한 해안으로 나왔습니다. 문을 굳게 닫은 여름 별장들이 주인을 잃은 채 외로이 숲속에 서있었습니다. 달리 인가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이 부근을 뭐라고 하지?" "카베르 곶(바다로 뽀족하게 튀어나온 땅) 이라 합니다." "자넨 왜 여길 찾아보고 싶어졌지?" "누렁개의 임자로 추측되는 큰 사나이를 수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때, 문득 이 곶에 있는 낡은 망대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저깁니다. 저기 바위가 튀어나온 곳 에 돌로 만든 4각 건물이 보이죠?" 경관은 손으로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것이 옛날의 망대로, 이 도시의 성벽이 세워진것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꽤 옛날의 일인데. 바다를 지키는 경비원이 살면서 선박의 출입을 지켜 보고, 밤에는 불을 피워 지금의 등대 같은 역할을 했었나 봅니다." 두 사람은 바위를 무너뜨려 길을 낸 비탈길을 올라가 망대에 닿았습니다. 입구으 의 문은 부서져 있었고, 안에 들어가자 바다를 향하여 총을 쏘는 작은 구멍이 뚫 려 있었습니다. 둘레의 돌벽에는 칼로 낙서가 많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휴지와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경관은 관광 안내인 같은 투로 말했습니다. "벌써 몇 년전의 일인데, 이곳에 산사람같이 생긴 사나이가 15년간이나 혼자 산 일이 있습니다. 머리가 좀 이상한 친구였죠. 추운 겨울에도 불로 지피지 않고 예사로 살고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칠때에는 총구로 바닷물이 튀어 들어 오는데, 그 모양이 장관이라, 일부러 파리에서 관광객이 찾아와서 사나이에게 동전을 주기도 하고, 그림 엽서 장수가 사나이의 사진을 찍어서 이곳 입구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쟁중에 죽어 버린 뒤 부터는 아무도 이곳에 찾 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득 그 큰 사나이가 어쩌면 여기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바위 계단을 거쳐 망대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돌로 된 탑으로, 벽이 없이 사방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 닥 쳐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으므로, 두 사람은 다시 아랫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동료 경관과 함께 이곳을 찾아와보았더니, 생각한 대로 그 큰 사나이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굉장한 소리였죠. 우리는 사나이가 잠을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서 얼른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 사나이는 반항하지 않았나?" "예, 전혀 반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신분 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해도 벙어리 나 귀머거리처럼 아무 대꾸도 안했습니다. 아뭏든 굉장히 큰 사나이인지라 만약 소동을 벌이면 우리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래서 나는 계속 권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아뭏든 그 놈의 손은 아마 내 손 의 두배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경감님의 손도 굉장히 크군요. 그 런데 그 사나이의 왼손엔 문신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떤 무늬였지?" "닻 양쪽에 S. S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나이가 자고 있던 곳에는 포도주 병과 빈 통조림 깡통, 그리고 아직 따지 않은 통조림이 20개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닥불을 피운 잿더미옆에 양고기뼈, 빵 부스러기, 생선뼈, 조개 껍질, 새우 껍질 등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경관은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요즈음 빵집이나 레스토랑, 어선 같은곳에서 음식과 생선따위 를 도둑맞았다는 신고가 많이 들어왔죠. 좀도둑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이 사나이의 짓이었군요." "먹어 치운 분량으로 봐서 아마 일주일가량 여기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누렁 개는 여기 없었나?"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이 부근에 개 발자국은 찍혀 있었지만.." "사나이는 흉기를 가지고 있었나?" "없었습니다. 내가 사나이의 포켓을 조사해 보았는데, 군밤이 4,5개, 잔돈 몇 푼, 그리고 나이프 한자루가 있었습니다. 뭐 대단하게 아니라 선원들이 빵을 베 어 먹는데 쓰는 나이프죠." "그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나?" "예, 한 마디도.... 그래서 그 전에 살던 산사나이와 마찬가지로 머리가 좀 모자 란 친구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죠." "아냐, 바보가 아냐. 구경꾼들을 이용해 도망친것을 보면 아주 영리해." "예, 그렇군요. 그때까지 도망가려고 생각했으면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었는데, 얌전히 따라오기에 우리는 그만 방심해 버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 자는 갑자기 난폭하게 손을 비틀어 수갑의 사슬을 끊어 버렸죠. 굉장한 힘이었 습니다. 나는 내 손목이 떨어져 나갔나싶었습니다. 보십시오. 아직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경관은 오른쪽 손목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손목 둘레가 불게 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감님, 체포당한 미쉬씨 말인데요...." "그가 어떻게 됐는데?" "그의 어머니가 오늘이나 내일 파리에서 돌아올 예정입니다. 국회의원의 미망인 이며, 굉장한 세력가라는군요. 게다가 시장 부인과도 사이가 좋으므로 미쉬씨를 체포한 것은 좀..." 메그레 경감은 잠자코 돌벽의 총구로 툡빛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앞바다 에서는 작은 어선 몇 척이 파도에 흔들리며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12. 죽음의 트럼프 점.. 헌병대 본부는 구시가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리에 있었습니다. 바로 누렁개가 권총에 맞은 그 근처였습니다. 오래 된 석조 문 위에 헌병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안뜰을 가로질러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르르와 형사가 헌병대장 과 무엇이라고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쉬는 뭘 하고 있나?" 메그레 경감이 르르와 형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잖아도 미쉬의 일로 대장과 교섭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대장은 미쉬 의 식사를 밖에서 가져오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군요." 그러자 대장이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경감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면 허락하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미쉬는 어디 있죠?" 하고 물었습니다. "저 오른쪽 복도를 곧장 가서 두 번째 감방입니다. 시장으로부터 아까 전화가 왔 었는데, 되도록 미쉬씨를 정중하게 다루라는 분부였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열쇠를 빌어 혼자서 그 감방을 갔습니다. 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어, 형무소 같은 어두운 분위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미쉬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메그레 경감이 들어오자 일어서서 우물쭈물 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미쉬를 아래위로 ?어보았습니다. 그는 호텔에 있었을 때와 똑같 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보통 감방에 갇힐 때에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하여 허 리띠나 멜빵, 넥타이, 머풀러 따위를 모두 압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경감님, 당신이 나를 이런 곳에 가둔 것은 다음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범인에게 살해되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죠?" "글쎄,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떻소? 그보다 미쉬씨, 당신도 의자에 앉으시오." 메그레 경감은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끌어당겨서 말 등에 타듯이 걸터앉아 의자 등에 양 팔꿈치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쉬는 선 채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경감님, 당신은 미신을 믿습니까?" 메그레 경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인간이란 누구나 미신을 얼마간 믿는다고 생각해요. 특히 자기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을 때에는 말입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점이나 예언 따윈 나도 믿지 않았지만... 그런데 벌써 5년전의 일입니다만, 나는 파리의 어느 여 배우로부터 파티에 초청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트럼프 점을 쳐 주었는데, 내게 어떤 점괘가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는 하도 어처구니 가 없어서 웃고 말았는데, 내게 나온 점괘는 이러했습니다. '자넨 비참한 죽음 을 당하게 돼. 누렁개를 조심하게.'라고요." 미쉬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잠시 기침을 하고 소수건으로 입을 막았는데, 그 눈은 가만히 메그레 경감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바위 같이 무표정했습니다. 미쉬는 말을 이었습니다. "경감님, 정말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로부터 5년간 누렁개에 대 해선 전혀 잊고 있었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내 친구인 모스타강이 권총으로 살 해 되었을때 그 자리에 불쑥 누렁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음에는 세르비엘 기자가 행방불명 되었고, 어제는 폼므레가 독살당했습니다. 더구나 사 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기분 나쁜 누렁개가 모습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나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습니다. 5년전에는 그 점괘를 우습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누렁개란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단 말입니다." 미쉬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라미랄 호텔에 있을 때에는 불안에 떨며 전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는 이야기하는 사이에 흥분하였 는지, 감방안을 빙빙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잠자코 파이프에 담배를 담아 불을 붙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겁장이 입니다. 지난 사흘 동안 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 다. 아마 내가 겁이 많은 것은 몸이 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의학 공부를 했으므로 나에 대한 것을 잘 압니다. 태어났을 때에는 미숙아로서 보육기 속에 서 길러졌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가슴을 앓았고, 신장도 한쪽을 잘라버렸 습니다. 신장이 하나 뿐이므로 일주일에 3,4일은 병자처럼 축 늘어져 버립니다. 아내와 헤어진것도 아내가 병자같은 나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경감님, 당신처럼 강한 사람이 볼때, 약한 사람은 모두 바보같이 보이겠죠? 아니 꼭 그 럴 겁니다. 당신이 라미랄 호텔에 모이는 우리 친구들을 하찮은 인간들이라고 속으로 경멸하고 있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하면 좋겠 습니까? 나는 의사 면허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몸이 약해서 개업을 할 수 없습니 다. 그래서 빌빌 놀고 있죠. 국회의원이셨던 아버지가 죽은 후로는, 어머니가 여러가지 사업에 손대었지만 모두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시에서 명사로 대우받고 있으므로, 옛날같이 시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 서 어떻게든 어머니의 사업을 도우려고 생각하여 저 별장 분양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미쉬는 이야기에 지쳐 의자에 축 늘어졌습니다만, 곧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대로 라미랄 호텔에 있었으면 나는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저 누렁개 때문에! 그러나 왜 폼므레는 독살당했을까요? 어째서 내가 당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폼 므레와 2시간 전까지 함께 술을 마셨는데 말입니다. 이번엔 내가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바른대로 말하면 경감님이 체포장에 내 이름을 쓴 것을 보 고, 난 뛸듯이 기뻤습니다. 감방에 들어가면 목숨을 지킬 수가 있다. 이로써 이 제 안심이다. 살았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가 없습 니다." 미쉬는 감방안을 둘러보고 쇠창살이 끼인 창으로 안뜰을 내다보았습니다. "이 침대는 창에서 떼어놓는게 좋겠습니다. 그렇잖으면 창으로 범인이 습격해 올 지도 모르니 위험합니다. 경감님, 나는 무섭습니다. 정말 죽는 건 싫습니다. 범 인은 이미 모스타강을 쏘았고, 폼므레를 독살했고, 세르비엘 기자를 죽였습니 다. 그런데도 범인의 정체를 모릅니다. 범인은 왜 그들을 죽여야 했을까요? 경 감님 그 까닭을 가르쳐 주십시오. 왜 나를 노리는가 말입니다." 미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로 구두 뒷창을 두드려 재를 털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의사를 부를까요?" "처, 천만예요. 의사든 누구든 절대로 이곳에 들여 보내지 마십시오! 살인마 놈 이 그 누렁개를 데리고 의사로 둔갑하여 찾아오면...." 미쉬는 이빨이 부딪칠 정도로 몸을 떨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차가운 눈으로 미 쉬를 노려보고는 성큼성큼 감방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헌병대장의 방에 돌아와 보니, 이미 르르와 형사는 가고 없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헌병 대장에게 말했습니다. "저 감방에는 대장이외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시오. 식사도 대장이 손수 갖다 주도록. 그리고 자살 도구가 될만한 것은 모두 압수하도록 하오. 넥타이 도, 바지 허리끈이나 멜빵, 머플러 따위도 모두 빼앗아 놓으시오. 특히 창이 있는 안뜰은 밤낮으로 대장이 책임지고 망을 보시오." 13. 메그레 경감은 어디로?.. 메그레 경감은 헌병대 본부를 나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를 천천히 걸었습 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제 모두 경감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길에서 놀던 아이들도, "저분이 파리 경찰국의 메그레 경감이야." 하고, 하던 놀이를 멈추고 그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구시에서 신시가로 나가는 개폐교(다리의 일부를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다 리)가 있는 곳에서 메그레 경감은 자기를 찾고 있는 르르와 형사를 만났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습니다. "르르와, 무슨 일이 생겼나? 설마 그 곰을 잡은 건 아니겠지?" "곰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그 발이 큰 사나이 말이야." "아뇨, 그게 아닙니다. 그 몸집이 큰 사나이의 행방은 아직 모릅니다. 실은 신문 기자인 세르비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까 브레스트시에서 세르비엘을 안다는 상인이 찾아왔는데, 그 상인의 말에 의하면 어제 브레스트시에서 세르비엘을 보 았다는군요. 세르비엘은 모른 체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브레스트 시라는 곳은 이 콩카르노 시의 훨씬 북쪽에 있으며, 해군 군항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별로 놀라는 얼굴이 아 니었으므로 르르와 형사는 맥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시장님은 그 상인이 잘못 본게 아니냐고 말씀하시는군요. 세르비엘같이 키가 작고 뚱뚱한 사나이는 어느 도시에든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장 님은 일부러 내게도 들릴 만한 목소리로 부시장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마 메그레 경감은 이 엉터리 같은 정보를 듣고 브레스트 시로 뛰어갈 걸세. 진범은 딴데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일세.' 정말 밉살스러운 사람이 아니고 뭡니까? 나는 하마터면 시장님에게 말대꾸를 할 뻔했죠." 이 말을 듣고도 메그레 경감은 태연했습니다. "그뒤 모스타강의 경과는?" "상당히 원기를 회복했지만, 권총 탄환은 끝내 빼내지 못했으므로, 평생 배 안에 박힌 채로 지내야 한다는군요. 그건 그렇고, 모스타강씨는 어째서 자신이 권총 으로 저격당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더군요." 라미랄 호텔 근처까지 오자, 메그레 경감은 항구 쪽을 보고 섰습니다. 앞바다에 서 어선 한 척이 돛을 내리고 노를 저으며 천천히 항구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 니다. 바다는 썰물이었습니다. 하늘은 툡빛 구름에 덮여 있었으며, 그 구름 사 이로 가끔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르르와, 자네 생각을 얘기해 보게." 메그레 경감은 항구의 경치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불쑥 질문을 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당황했지만, 곧 자기의 추리를 이야기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몸집이 큰 부랑자를 빨리 잡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누렁개가 또 없어졌으니까요. 뭔가 다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그 몸집이 큰 사나이가 미쉬의 집에 들어가 대체 뭘 했는지 그게 문제라고 생각 됩니다. 미쉬는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그의 집에는 여러가지 독약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약 참으로 세르비엘 기자가 브레스트 시에 있었다면, 어째서 피습된 것같이 조작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나는 그의 자 동차를 잘 조사해 보았는데, 분명히 좌석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피였 습니다. 그러니까 세르비엘이 자동차 안에서 피습됐다면, 왜 그는 연락을 해 오 지 않았을까요?" "음, 아주 좋은 추리인데....." 여간해선 남을 칭찬하지 않는 메그레 경감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르르와 형사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는 메그레 경감이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살짝 경감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문 채, 진지한 표정 으로 가만히 카베르 곶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살당한 폼므레의 형을 만나고 왔습니다. 훌륭한 실업가더군요. 이 도 시에서 가장 큰 통조림 공장 사장이죠. 형은 게으름뱅이 동생을 몹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돈만 쓰며, 여자들과 놀기만 하고 사냥에만 미쳐 돌아다니다고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사건에 관계있는 친구들은 모두 명사인 체 하면서도 놈팡이 같은 치들뿐이로군요." "르르와, 우리도 돌아가서 페르노 주를 마셔볼까?" 메그레 경감은 앞장서서 라미랄 호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호텔안은 떠들썩했지만, 메그레 경감이 들어가자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습니다. 마치 학생들이 떠들고 있는 교실에 무서운 선생님이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신문기자들은 메그레 경감을 에워싸고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미쉬의 체포를 기사로 써도 괜찮습니까?" "그는 어떤 자백을 했죠?" 메그레 경감은 귀찮은 듯이 기자들을 피하면서, "엠마, 페르노 주 두 잔 부탁해." 하고 엠마를 보고 손가락을 두개 펴 보였습니다. 기자들은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감님, 미쉬를 체포한건 뭔가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떤 증 거죠?" "자네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나?" 기자들은 재빨리 수첩을 꺼내고 펜을 잡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기자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진상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소. 이제 곧 알게 될지도 몰라요. 혹은 모르게 될지도 모르고....." 기자들은 실망했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상인 이야기로는 세르비엘씨가 브레스트시에...." "살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좋은 이야기 아니오? 본인에게도 기쁜일이고." "그 달아난 큰 사나이는 어떻게 된 거죠? 아무리 힘을 써도 붙잡히지 않는 모양 인데...." "그 말은 쫓는 사냥꾼보다 달아난 사냥감이 더 똑똑하단 말이 되겠죠." 메그레 경감은 농담조로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엠마가 페르노 주를 가져왔습니다. 경감은 엠마의 팔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점심 식사는 이층의 내 방으로 갖다 줘." 메그레 경감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기자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기자 양반들, 한마디만 충고하겠소.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지 말 아 달란 말이오. 특히 쓸데없는 추리는 금물이오." "대체 범인은 누구죠?" 한 기자가 질문하자 메그레 경감은 큰 어깨를 으쓱해 보였습니다. "모른다니까.." 메그레 경감은 이 말을 남기고 이층 계단 쪽으로 갔습니다. 르르와 형사가 뒤따 라 오자 메그레 경감은 손을 내저었습니다. "괜찮아. 르르와. 자넨 여기서 천천히 식사를 하게. 나는 좀 쉬고 싶을 따름이 야." 메그레 경감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10분뒤에 엠마가 요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식당에서는 각자 나름대로 사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단서가 없었으므로 이야기는 활기 가 없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혼자서 예의 바르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냅킨으로 입 가를 닦으면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몸집이 큰 사나이가 달아난 골목 입 구에 헌병 한 사람이 파수를 보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호텔안 을 기웃거렸습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기자 한 사람이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에게 시장님으로부터 전화요!" 르르와 형사가 엠마에게 말했습니다. "속히 경감님을 불러와요." 엠마는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얼마 뒤에 혼자 내려왔습니다. "경감님은 방에 안 계세요." "뭐라고!" 르르와 형사는 계단을 뛰어올라갔지만 곧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려와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보세요. 예, 그렇습니다. 시장님. 경감님은 이곳에 없습니다. 저는 전혀 간 곳을 모릅니다. 예, 식사는 이층 방에서 들었는데, 아래로 내려온 것은 보지 못 했습니다. 다시 전화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르르와 형사는 냅킨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습니다. 도대체 메그레 경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14. 지붕위의 두 사람.. 그로부터 30분쯤 지나서 르르와 형사가 이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테이블 위에 모르스 기호로 쓴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 밤 11시경 아무도 모르게 지붕으로 올라오라. 나는 지붕위에 있겠다. 소리를 내지 말것. 권총을 가지고 올것. 누가 물으면, 나는 브레드스트 시로 세르비엘 기자를 찾으러 갔다고 하라. 호텔에서 떠나지 말것. 메그레.. 르르와 형사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11시가 조금 못되어, 그는 구 두를 벗고 슬리퍼로 바꿔 신었습니다. 슬리퍼라면 발소리가 나지 않으며, 지붕에 올라가도 구두처러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밤중의 모험에 흥분하면서, 발소리를 죽여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계단은 거기까지밖에 없고 천장의 두껑 널빤지에 사닥다리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닥다리를 올라가 널빤지를 밀어 올리자 그곳은 지붕밑 방이었습니다. 문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몹시 추웠습니다. 성냥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머리위에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창문이 있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창문을 열고 지붕위로 나갔습니다. 양철 지붕은 얼음처럼 얼어 차 가왔습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앞쪽에 검은 물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 습니다. 그 검은 그림자쪽에서 파이프 담배의 냄새가 풍겨 왔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양철위를 슬슬 기어서, 그 검은 그림자 옆에 웅크리고 앉았습니 다. "조심해. 잘못하면 떨어진다. 신문사 친구들은 뭘 하고 있지?" 메그레 경감이 르르와 형사에게 귀엣말로 속삭였습니다. "모두들 아래 식당에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경감님을 찾으러 브레스트 시로 갔 습니다. " "엠마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 하녀에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저녁 식사뒤에 내게 커피를 갖다 주었는데...." 사방은 캄캄하여 거리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지 붕 바로 앞은 캄캄한 골짜기 같았는데 그곳은 바로 몸집 큰 사나이가 달아난 골 목이었습니다. 주위의 집들은 높은 지붕과 낮은 지붕으로 울퉁불퉁해 보였습니다. 곳곳에 불빛 이 비치는 창문이 있었고 방안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커튼에 비쳐, 마치 실루에트(그림자만으로 표현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멀리 있는 창 문에서는, 젊은 부인이 아기에게 목욕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르르와, 저 빈집쪽을 보게. 골목 입구에 있는 집말이야." 메그레 경감이 파이프로 그쪽을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집이었습니다. 높이는 이 호텔과 같은 3층 건물이었 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최초의 피해자인 모스타강이 권총에 맞은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그 빈집은 어둠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3층에는 유리창의 커튼이 열려 있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촛불 이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방바닥에 촛불 하나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앗, 저놈이다!" 르르와 형사가 소리쳤습니다. "쉿, 조용히 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그 몸집 큰 사나이가 드러누워 있는 그림자가 보였던 것입 니다. 몸은 반쯤 촛불에 비췄고, 나머지 반쯤은 어둠에 가려 있었지만, 큰 구두 한쪽과 선원용 스웨터를 입은 몸통이 보였습니다. 이 골목 입구에는 헌병 한 사람이 파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나이 는 바로 코앞에서 유유히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대담 무쌍한 놈이었습 니다. "체포할까요?" 르르와 형사가 속삭였습니다. "글쎄, 어떻게 할까? 저 사나이는 벌써 3시간이나 자고 있다네.." "저 친구, 무기를 갖고 있을까요?" "오늘 아침엔 안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여기서 3시간이나 지켜보며 대체 경감님은 뭘 기다리고 있죠?" "그건 나도 모르겠네. 저 사나이는 쫓기고 있는 중인데 자고 있으면서 왜 촛불을 켜고 있을까? 이봐, 잠깐!" 이때 빈집 벽에 정사각형의 빛이 순간적으로 번쩍 비쳤습니다. 두 사람이 웅크리 고 있는 지붕 밑 방에서 누군가가 전등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어, 그 빛이 골목 저쪽의 빈집 벽에 반사된 것입니다. "엠마가 전등을 켰군. 바로 이 아래가 그녀의 방이야." 메그레 경감이 속삭였습니다. "경감님, 저녁 식사는?" "빵과 소시지를 갖고 왔지. 춥지 않나?" "아니, 괜찮습니다." 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르르와 형사는 아까부터 온몸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습 니다. 깜빡 잊고 외투를 걸치고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등대의 서치라이트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비치고 있었습니다. "앗, 엠메가 전등을 껐습니다." 빈집의 벽에 비치고 있던 정사각형의 불빛이 홱 꺼진 것입니다. "응, 조용히 하고 있어!" 두 사람은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5분쯤 지나 아래의 어두운 골목 쪽에서 무엇인가 움직였습니다. "경감님, 아래쪽을...." "알고 있어. 잠자코 지켜봐. 눈치챌라." 골목과 빈집 경계에 있는 돌담을 검은 그림자가 기어올라가더니 뜰의 나무를 타 고 저쪽으로 훌쩍 넘어 갔습니다. "엠마가 저 몸집이 큰 사나이를 만나러 가는거군요." 르르와 형사는 아무래도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대꾸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빈집의 3층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몸집이 큰 사나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소리 를 듣고 일어난 모양입니다. 서둘러 일어나는 바람에 커다란 발로 촛불을 차 버 릴 뻔 했습니다. 사나이는 슬금슬금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문이 열리고 엠마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왔습 니다. 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었습니다. 포도주 병과 종이꾸러미였습니다. 종이꾸 러미 밖으로 통닭이 삐죽 나와있었습니다. 엠마는 사나이를 향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목소리는 전혀 들리 지 않았지만,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엠마의 손짓이나 몸짓을 보아, 그녀가 슬프게 울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별안간 어둠속에서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창 뭉을 막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나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화난 듯이 팔을 휘둘렀습니다. 참으로 곰같이 큰 몸집이었습니다. 스웨터에 감싸인 가슴과 어깨, 팔은 근육이 튀어올랐고, 머리털은 죄수같이 짧았습니다. 사나이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엠마를 위협 하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사나이가 금방이라도 엠마를 때리지 않 을까 마음을 졸였습니다. "경감님, 이대로 놔 두어선....." 하다가, 르르와 형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 창 문까지는 기껏 15미터나 20미터밖에 안 되었습니다. 만약 큰 사나이가 엠마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메그레 경감은 발포할 모양이었습니다. 큰 사나이는 그야말로 곰처럼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는데, 바닥위에 있던 종이꾸러미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화풀이라도 하듯이 그 종이 꾸러미를 찼습니 다. 엠마는 통닭이 뒹구는 것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마치 무성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촛불이 약하므로 화면이 희미한 낡은 필름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 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저 두 사람은 남매인가, 아니면 연인 사이인 가?' 르르와 형사는 오랜 시간 영화와 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 것같이 지루함을 느꼈습 니다. 여기서 보아도 촛불이 꽤 짧아져 5분쯤 타면 꺼질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몸집이 큰 사나이는 기분이 가라앉은 모양이었습니다. 사나이는 양손을 축 늘어뜨리고 엠마앞에 섰습니다. 엠마가 무슨 말을 하자, 사나이의 얼굴에 비 로소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사나이는 차버렸던 종이꾸러미를 주워들더니 촛불옆에 앉아 통닭을 먹기 시작했 습니다. 뼈까지 짓씹으며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엠마는 곁에 앉아서 사나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포도주 병의 두껑을 구두 뒤창 을 따고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사나이는 엠마에게 술을 권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안마신다고 하니까, 사 나이는 억지로 그녀의 입에 술을 흘려 넣었습니다. 그녀가 쿨룩거리자 사나이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통닭을 다 먹은 사나이는 일어서서 창문을 통해 골목을 엿보더니 촛불을 껐습니 다. 르르와 형사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나서는 모양입니다. 여차피 붙잡히고 말겠지만...." 얼마 뒤, 뜰의 어둠속에서 나뭇 가지가 흔들거리며 작은 그림자가 돌담을 넘어 골목으로 내려섰습니다. 잇따라 큰 사나이도 뛰어넘었습니다. "르르와, 두 사람의 뒤를 밟게. 절대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나중에 동정을 알려주게. 자, 어서 가 보게!" 메그레 경감의 재촉을 받고, 르르와 형사는 창문을 통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지붕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어 골목을 내려다보니 그 큰 사나이와 엠마의 머리만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그곳에 서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윽고 엠마가 사나이의 손을 이끌고 가까운 어망점의 창고 쪽으로 갔습니다. 그 창고에서 앞쪽으로 빠져 나가면 해안 거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지붕위를 뒷걸음질쳐서 창문을 통해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호텔 식당쪽이 몹시 떠들썩했습니다. 사람이 뛰어가는 소리, 전화벨이 울리는 소 리.... 그 중에는 르르와 형사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큰 소리로 전화에다 대고 소리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아래층에서 어떤 기자와 부딪쳤습니다. "이봐, 무슨 일이 있었지?" 기자는 메그레 경감의 큰 몸과 부딪쳐서 나동그라졌지만, 그보다 브레스트 시에 있어야 할 메그레 경감이 별안간 나타났으므로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습니다. "또 살인입니다. 15분전에 한 사람이 권총에 맞았습니다. 피해자는 가까운 약국 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그레 경감은 이미 호텔에서 뛰어나가고 있었습니 다. 15. 또 한사람의 희생자.. 밖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권총을 들고 달려가는 헌병을 불러세웠습니다. "이봐, 어떻게 됐나? 무슨 일이지?" "여기 있는 어망점 창고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왔습니다. 아깝게도 다 잡았다 놓 쳤습니다." 헌병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 창고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기에 권총을 겨누고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갑자 기 문이 열리고 몸집이 굉장히 큰 사나이가 튀어나와 내 얼굴을 때렸습니다. 마 치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굉장한 주먹이었죠. 하마터면 죽을뻔 했습니다. 얻어 맞는 바람에 나는 권총을 떨어뜨렸습니다. 놈이 그걸 주워 가지 않을까 걱정했 지만, 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에 있던 여자를 불렀습니다. 여자는 오금을 펴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가볍게 여자를 껴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쳤습니다." 헌병은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면서, 분해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엠마와 사나이는 아무래도 비상선을 뚫고 도망친 것 같았습니다. 이제 뒤쫓아가 보았자 소용없으므로, 메그레 경감은 헌병과 헤여져서 약국으로 갔습니다. 약국앞에는 구경꾼이 20명쯤 모여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양쪽 팔꿈치로 사 람들을 헤치고 약국으로 들어가 보니, 조제실 소파에 세관원의 제복을 입은 사나 이가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그 사나이가 낯익었습니다. 지 난 금요일 밤, 모스타강 사건을 목격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의사가 세관원의 바지 한쪽을 잘라 내고, 상처에 소독약을 발랐습니다. 소독약이 쓰라린지, 그는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약국 주인이 바닥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 습니다. 약국앞에서 구경꾼 한 사람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길래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보 지 보았지. 그랬더니 저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지 않겠어. 나는 큰소리로 이웃 사람을 불러내어 과일 가게의 수레를 빌어 가지고 여기까지 옮겨 왔지." "총소리가 난 것은 몇 시경이었소?" 메그레 경감이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약 30분 전이었죠." '30분 전이라면, 아직 엠마와 몸집 큰 사나이가 저 빈집 3층에서 만나고 있을 때 로군.' 이렇게 생각한 메그레 경감은 또 물었습니다. "자네 집은 어디지?" "항구 오른쪽에 있는 생선 시장 앞 골목입니다. 선구점을 하고 있죠. 경감님은 우리 집앞을 벌써 열번도 더 지나쳤을 겁니다." 사나이는 유명한 경감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감격한 모양이었습니다. 이때 밖에서. "메그레 경감 있나?" 하는 소리가 들리며 시장이 구경꾼을 헤치며 들어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시장을 맞았습니다. 시장은 메그레 경감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끝내 또 사건이 일어났군. 경감, 이렇게 된 건 당신 책임이야! 이번에도 그 몸 집 큰 사나이의 짓이겠지?" "아닙니다." 메그레 경감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으므로 시장은 주춤했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잘라 말할 수 있나?" "예, 범행이 일어난 시간에 나는 그 큰 사나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내 이 눈으로 말입니다." "뭐, 보고 있었다고? 그러면서도 체포하지 않았나? 일부러 못 본 체했나?" "그렇습니다." "저런, 헌병도 한 사람 얻어맞았다면서?" "그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면 끝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당신이 이 거리에 온 뒤로 사건이.... " 메그레 경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기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 다. "헌병대 본부로 연결해 주게. 여보세요. 헌병대입니까? 아, 헌병대장이군. 나는 메그레인데, 미쉬는 계속 감방에 있겠지? 설마하니 밖엔 안 내보냈겠지? 뭐, 안 뜰에도 감시를 두었다고? 됐어. 하지만 확인하기 위해 감방에 가보게. 전화를 끊 지않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그 소리를 듣고, 시장이 끼어 들었습니다. "경감, 당신은 역시 미쉬가 범인이라 믿고 있나?" "아니오, 나는 사실 이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나서, 다시 전화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세요.... 응, 그래? 미쉬는 제대로 감방에 있다고? 뭐? 지금 자고 있단 말 이지? 알았어." 메그레 경감은 전화를 끊고는 다시 조제실 쪽으로 갔습니다. 세관원은 소파에 드러누워 끙끙 앓고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습니다. 의사는 피묻은 손을 씻으면서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심문해도 상관없습니다. 권총 탄환은 장딴지를 스치고 갔을 뿐입니다. 출 혈은 심했지만, 아픔보다 충격이 심했던것 같습니다. 발을 절단해야 되는가하고 겁을 먹고 있었으니까요. 대단하 상처가 아니므로 1주일만 지나면 나을 것입니 다." 메그레 경감은 소파에 걸터 앉으며 세관원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냈습니다. "총에 맞았을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겠소? 방금 의사 선생이 하신 말 씀을 들었겠지만, 이젠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게 희미해서.... 오늘은 10시에 근무가 끝났으므로..." "근무가 끝난 뒤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구먼요?" "예, 라미랄 호텔 식당에 잠시 들러 보았죠. 그뒤 사건의 경과가 어떻게 되었나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발이 몹시 아픈데요. 의사 선생님?" 세관원은 또 앓는 소리를 했습니다. "아플 까닭이 없어요. 기분 탓이오!" 의사가 원기를 돋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픈 걸 어떻합니까?" 세관원은 불만스럽게 내뱉고는 다시 메그레 경감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아뭏든 호텔 식당에서는 신문사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큰마음 먹고 이야기를 건넬 용기도 없고 해서, 맥주를 약간 마셨을 뿐 곧 호텔을 나와 버렸습니다. 해 안 거리를 지나 집 쪽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길목으로 들어선 순간, 갑자기 발이 불에 덴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아프다고 느낀것이 먼저이고 그뒤에 권총소리 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마치 큰 돌에 발이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었죠. 나는 그자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도망가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발을 만져 보니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꼭 죽 는 줄만 알았죠. 기억하고 있는건 그것뿐입니다." "권총을 쏜 범인은 보지 못 했소?" "아무것도 못 봤죠. 어두운 골목이었죠. '앗!'하는 순간 나는 쓰러져 버렸으니까 요." "범인으로 짚히는 사람은 없소? 예를 들면,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던가.." "전혀 없습니다. 이 도시엔 2년전에 왔죠. 누구한테 원한을 산 기억은 없으며, 밀수 사건과도 아직 한번도 부딪치지 않았으니까요." "집에 돌아갈때 늘 그 길을 지나가오?" "아니오, 오늘은 라미랄 호텔에 들렀기 때문에 그리로 갔죠. 여느때엔 큰 거리를 지나 돌아오죠." "그쪽이 훨씬 가까운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이 호텔을 나와 해안 거리쪽으로 가는 것을 범인이 보았다면 지름길로 가서 숨어 당신을 기다릴 수 있었겠군요?" "예, 할 수 있죠. 하지만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죠? 나는 돈 같은 건 안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에게 노림을 당할 까닭이 없는데요." 세관원은 어째서 자신이 범인에게 저격당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불 운함을 탄식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르르와 형사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경감님 전봅니다. 방금 전화로 왔습니다. 파리 경찰국으로부터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전보를 읽어 보았습니다. 파리 경찰국으로부터 메그레 경감에게 수배중이던 신문기자 쟝 세르비엘을 오늘 월요일 오후 8시 파리 시르픽 거리의 베르뷔 호텔 15호에서 체포하였음.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브레스트 시로부터 오늘 오후 6시 기차로 파리에 도착하였다 함. 사건에 대해선 무관함을 주장 하고 있음. 행방 불명이었던 세르비엘은 역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16. 메그레 경감의 추리.. 조제실 입구에 서 있던 시장은 아까까지의 분노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메그레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어떻소 경감? 이쯤에서 서로의 고집을 죽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게 좋지 않 겠소?" 메그레 경감은 옆에 있는 약국 주인과 의사, 세관원쪽을 힐끗 보고 나서, 호주머 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습니다. "좋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자, 이야기해 보십시오." 마치 심문이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으므로, 시장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니,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침 밖에 다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았소. 나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경감은 먼저 수배를 하지 그래요." "무순 수배요?" 메그레 경감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습니다. "정말 답답하군! 오늘밤 사건이라던가 도망간 몸집 큰 부랑자를 잡는 수배라든 가, 여러가지 있을 게 아니오?" "아, 참.... 그럼 헌병들에게 다른 볼일이 없으면. 이 부근의 역이나 감시하도록 할까요? 그리고 르르와, 자넨 파리 경찰국에 전보를 쳐서 체포한 세르비엘 기자 를 이쪽으로 호송해 오도록 부탁해 주게. 그 일을 끝내면 돌아가서 자도 돼." 메그레 경감은 시장과 함께 약국을 나왔습니다. 밖에는 시장의 고급 승용차가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제복의 운전사는 미끄러지듯 차를 몰았습니다. 자동차는 해안을 따라 사브르 블랑 쪽으로 달렸습니다. 미쉬의 분양지가 있는 방 향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문 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벼랑 옆에 옛 성처럼 생긴 큰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의 저택 이었습니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현관앞에 서자 하인이 나왔습니다. 시장은 털가죽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 주고 나서 물었습니다. "집사람은 잠들었나?" "아직 안 주무십니다. 서재에서 시장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재에 들어가자 부인이 의자에서 일어섰습니다. 40살쯤 되었을까, 남편보다 훨씬 젊어 보였습니다. "어서 오셔요. 사건은 어떻게 됐나요?" 시장 부인이 메그레 경감에게 인사를 한 뒤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안심해요. 세관원이 발을 다쳤을 뿐이요. 대단한 사건은 아니오. 어떻든 지금부 터 메그레 경감과 둘이서 이 연속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오." "그럼 저는 먼저 자겠어요." 시장 부인은 긴 스커트 자락을 끌며 나갔습니다. 서재는 널찍하였으며, 사방으로 천장까지 책이 꽃혀 있었습니다. 가구는 모두 호화로운 것들이었고, 난로에는 불 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탁자에서 담배 상자를 들어 메그레 경감에게 내밀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파이프 담배밖에 피우지 않아서...." 메그레 경감은 담배를 사양하고 자기 파이프에 담배를 채웠습니다. "자, 앉으시오. 마실 것을 갖고 오게 할 테니까." 시장은 벨을 울려 하인에게 위스키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마치 귀족의 대저택에 불려간 소시민같이 어설프게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장은 위스키를 한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습니다. 그 말씨는 아까까지처럼 위압적이 아니라 아주 공손했습니다. "경감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런 악몽같은 연속 살인 사건은 빨리 해결 해 버리지 않으면 안돼요. 경감은 지난 3일간 이 도시에 있은 셈인데, 그 3일간 에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소." 메그레 경감은 시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잠자코 자기 주머니에서 싸구려 수 첩을 꺼내더니 이야기를 가로막았습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시장께서는 연속 살인 사건이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피해자는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목숨을 건졌습니다. 죽은 이는 독살을 당한 폼므레씨뿐입니다. 오늘밤의 세관원의 경우도, 범인이 꼭 죽이려고 했으면 발 같은 델 쏠 까닭이 없습니다. 범행이 있은 곳은 인적이 드문 어두운 길이었 으므로 범인은 상대편에게 들킬 염려도 없어 여유있게 권총을 겨눌 수가 있었을 겁니다. 아주 바보든가, 여태까지 한번도 권총을 쏜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 도..." 시장은 깜짝 놀라 메그레 경감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럼 경감, 당신의 추리로는....." "범인은 처음부터 발을 보고 쏜 것입니다. 즉, 세관원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입니다." "그럼 모스타강 때도 역시 범인은 발을 보고 쏘았소?" 시장도 지지 않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그같은 시장의 농담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선생님이 머리가 나쁜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 수첩을 보면서 함께 사건을 정리해 봅시다. 먼저 11월 7일 금요일의 사 건입니다. 즉, 술 도매상인 모스타강씨가 총에 맞았을때의 상황입니다. 어떤 빈 집의 현관에서 모스타강씨는 문의 우편함에서 발사된 탄환에 맞아 배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알수 있는 것은 모스타강씨가 그때 담배에 불을 붙이 기 위해 그 빈집의 현관에서 바람을 피하리라는 것을 범인이 밀 알 까닭이 없다 는 사실입니다. 모스타강씨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만약 바람이 강하게 불지 않았다면 그는 그 현관으로 가지 않았을 테고, 따 라서 권총에 맞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시장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관 뒤에는 권총을 든 범인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자는 사 전에 현관으로 누군가가 온다는 것을 알고 가만히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 니다. 여기서 범행이 벌어진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밤 11시입니다. 이미 시 민들은 잠들어 있을 시각이며, 깨어 있는 사람이라곤 라미랄 호텔에 있는 친구 들 뿐입니다. 그럼 이 경우 누가 범인일까요? 누가 범인이 될 기회가 있었을까 요? 먼저 폼므레씨와 세르비엘 기자, 엠마 세 사람은 절대로 범인이 아닙니다. 이 세사람은 범행이 일어날때 호텔 식당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사람은 30 분전에 호텔을 나간 미쉬씨, 그리고 그 발이 큰 부랑자입니다. 그밖에 우리가 아직 모르는 제 3의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도 넣읍시다, 그 정체 불명의 수수 께끼의 인물을 X라 부르기로 합시다. 시장님, 여기까진 의심날 게 없으시겠죠? 이 사건에선 피해자인 모스타강씨는 죽지 않았고, 반달이면 원기 있게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장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제 2의 사건입니다만.... 이튿날인 토요일, 나는 르르와 형사와 함께 라미랄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그 식당에서 우리가 미쉬, 폼므레, 세르비엘 세 사람과 식전에 먹는 술인 페르노 주를 마시려고 했을때, 미쉬씨가 술잔안에 하얀 가루가 떠 있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조사해 보았더 니 독약인 스트리키닌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술병에 독약을 넣을 수 있었던 사람은 미쉬, 폼므레, 세르비엘, 그리고 엠마 모두입니다. 거기에 발 이 큰 사나이도 몰래 호텔로 숨어 들어 술에 독약을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 다. 또 한 사람, 아까 말한 정체 불명의 X도 덧붙여 넣읍시다." 시장은 메그레 경감의 날카로운 추리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제 3의 사건인데.... 다음 일요일 아침, 세르비엘 기자가 행방불명 되었 습니다 그의 자동차가 자택 근처에 내버려져 있었고, 그 좌석에 피가 묻어 있었 습니다. 더우기 그 자동차가 발견되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적은 투서가 <등대> 신문사에 날아들었습니다. 그뒤 세르비엘 기자는 브레스트 시에 나타났 다가 다시 파리와 와서 호텔에 묵고 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사건을 날조하여 행방을 감추었으므로, 이 경우의 범인은 세르비엘 본인입니다. 피해자라 생각되었던 사람이 실은 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 4의 사건 입니다. 같은 일요일 저녁, 폼므레씨는 미쉬씨와 함께 호텔의 식당에서 술을 마 신 다음, 집에 돌아갔다가 곧 죽었습니다. 스트리키닌에 의한 독살입니다. 이것 이 단 하나의 살인 사건입니다. 폼므레씨가 만약 호텔에서 독약을 마시게 되었 다면, 범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호텔에 있었던 미쉬씨와 엠마, 그리고 정체 불명 인 X입니다. 그 커다란 발을 가진 사나이는 이번 경우엔 제외해도 괜찮을 것입 니다. 왜냐하면, 그 사나이의 이야기는 이미 온 거리에 알려져 있으므로, 아무 에게도 들키지 않고 호텔로 숨어 들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독이 들었 던 것은 술병이 아니라 폼므레씨가 마시던 술잔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폼므레씨가 집에 돌아간 뒤에 독을 마시게 되었다면 이 경우의 범인은 일층에 사는 여자 집주인과 발이 큰 사나이, 그리고 정체 불명의 X입니다." "음..." 시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제 5의 사건 곧 오늘밤의 사건입니다. 오늘밤 세관원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발에 총을 맞았습니다. 미쉬씨는 헌병대 본부의 감방에 갇혀 있 었으므로 범인이 아닙니다. 폼므레씨는 이미 죽었고, 세르비엘 기자는 파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엠마와 몸집이 큰 남자는 범행이 있었을 때 내 눈앞에서 통닭 을 먹고 있었으므로, 이 자도 범인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오직 하나,정체 불명의 X입니다. 이 X란 대체 어떤 자일까요? 그러나 아무도 모릅니 다. 다섯 사건 전부의 범인일지도 모르고, 혹은 마지막 제 5의 사건만의 범인지 도 모릅니다. 오직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이 X는 오늘밤 어떤 목적이 있어 서 이 제 5의 사건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꽤 중 요한 목적입니다. 왜나하면, 세관원을 쏜 자는 도둑이나 권총 강도가 아니기 때 문입니다. 자, 이상과 같은 것을 종합해 볼때, 시장님, 당신이 말하듯 간단히 ' 빨리 범인을 체포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이 거리에 있는 자라면 누 구라도, 특히 라미랄 호텔의 식당에 자주 출입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X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시장님, 당신이 어쩌면 수수께끼의 범인 X일지도 모르 죠!" 17.어둠속의 불빛.. 메그레 경감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난로 쪽으로 발을 뻗쳤 습니다. "경감, 그건 아까 내가 한 농담의 앙갚음이요? 설마 진정으로 나를 범인이라 의 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메그레 경감은 난롯불에 파이프의 재를 턴 다음 서재안은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 다. "시장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번과 같은 사건은 단지 의자에 앉아 전화로 지휘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을 시장님 에게 말하고 싶었을뿐입니다. 특히 나는 내가 책임을 지고 수사하고 있을 경우, 남한테서 쓸데없는 간섭을 받기 싫어하죠!" 메그레 경감은 솔직하고 대담하게 말해 버렸습니다. 벌써 며칠 전부터 계속된 시장의 지나친 간섭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위시키를 쭉 들이키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문쪽으로 걸어갔습니 다. 시장은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서 손에 든 담배를 잠시 바라보다가, "잠깐만, 경감. 내 말을 들어보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여태까지 종종 경감에게 소리친 건 잘못했소.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성급해진 단 말이오." 메그레 경감은 시장이 화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부드럽게 나왔으므로 시장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시장은 화내기는 커녕 미소까지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나는 이제야 경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은 불과 5,6분의 설명으로 복 잡한 사건의 수수께끼를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정리해 주었소. 멋진 추리였 소. 지금이니까 털어놓겠는데, 실은 당신이 그 몸집이 큰 부랑자를 전혀 잡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불만이었던 거요." 시장은 메그레 경감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경감,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지 마시오. 시장이라는 자리도 꽤 책임이 무겁단 말 이오." 메그레 경감은 잠자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얼 굴 표정으로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눈은 창 밖의 어두운 바다 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메그레 경감이 시장을 불렀습니다. "저 건너편에 보이는 불빛은 무엇입니까?" "아, 저건 등대요." "아니, 오른쪽에 외롭게 비치는 저 작은 불빛 말입니다." "그건 미쉬의 집이오." "미쉬의 집? 하지만 그는 감방에 갇혀 있어서 아무도 없을텐데요." "오늘 오후, 그의 모친인 미쉬 부인이 파리에서 돌아왔어요." "그럼 시장님도 미쉬 부인을 만났나요?" "미쉬 부인은 아들이 집에 없음을 알고 우리 집에 까닭을 물으러 왔더군요. 나는 미쉬씨가 체포되었다고 말해주었소. 물론 체포라 해도, 그의 몸을 안전하게 지 키기 위한 거라고 설명해 주었소. 그러자 미쉬 부인은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더군요. 그래서 나는 즉시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소. 그러나 그르와 형사는 당신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 책임으로 면회를 허락했지 요. 잘못됐소, 경감?" "아니오, 별로...." "그뒤 다시 미쉬 부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마침 저녁 식사때였으므로 함께 식사를 했소. 미쉬 부인은 아들과 면회하고 와서 몹시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 으므로, 나는 되도록 그녀를 위로해 주었소. 미쉬는 어릴때부터 몸이 약해서 미쉬 부인은 그를 기르는데 몹시 고생했지요." 메그레 경감은 다시 생각에 잠겨 서재 안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미쉬 부인은 독살당한 폼므레씨나 세르비엘 기자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없었나 요?" "부인은 옛날부터 폼므레씨를 싫어했소. 자기 아들이 게으름벵이가 된것도 폼므 레가 자기 아들에게 나쁜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세르비엘 기자에 대해선?" "세르비엘과는 그다지 교제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상류 사회의 인사가 아니 라 신문 기자였으니까 말이오." "저녁 식사뒤, 미쉬 부인은 몇 시경에 집에 돌아갔죠?" "10시경이었소. 내 아내가 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 주었소." 어째서 그런것을 자세히 물을까 하고 시장은 이상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메 그레 경감은 여전히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저 창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미쉬 부인은 자지 않고 있는가 보죠 ?" "늘 그렇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잠이 적어진다오. 나도 곧잘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서류를 조사하는 일이 있소." "요즈음 미쉬 모자의 별장지 분양 사업은 잘되는가요?" "아직 잘 팔리지 않나 보오. 하지만 미쉬 부인은 대단한 사교가니까. 곧 파리의 부자들에게 팔아 넘길 거요. 이번에 파리에 간 것도 그 일 때문이었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그 분양지는 그전엔 누구의 토지였 죠?" "내 땅이었소. 이 저택과 같이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것으로, 잡초만 우거져 아무 소용이 없는 공터였지요. 그것을 미쉬 모자가 자기들에게 팔라고 하기에 넘겨 주었소." 이때 멀리 어둠속에 외로이 비치던 불이 꺼졌습니다. 미쉬 부인이 잠을 자기 위 해 끈 모양입니다. 시장은 자기 잔에 위스키를 따랐습니다. "경감, 위스키 한잔 더 들겠소? 갈 땐 자동차로 바래다 줄테니." "괜찮습니다. 나는 걷기를 좋아하니까요. 특히 생각할 일이 있으면 걷는게 좋습 니다." "참, 그 누렁개 말인데, 경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그 개가 몹시 마음에 걸리는데..."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이미 서재의 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넓은 저택안은 쥐죽 은듯이 조용하여, 벼랑 밑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습 니다. "정말 자동차가 없어도 괜찮소, 경감?" "예, 괜찮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현관에서 시장과 작별의 악수를 했습니다. 시장은 아직도 여러가 지 묻고 싶은 일이 있는지 아쉬운 듯 메그레 경감의 큰 손을 쥐었습니다. "사건이 해결되기까진 얼마나 더 걸리겠소?" "오늘밤안으로 아마 끝날 것입니다. 내일은 모든 걸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잘라서 말하자 시장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아까 이야기로는 도저히 해결할 가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 던데, 그렇다면 경감, 당신은 파리에서 체포된 세르비엘 기자가 뭔가 자백하리 라 생각하오? 그렇잖으면...." 시장이 이렇게 물었지만, 벌써 때는 늦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빠른 걸음으로 현관의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돌계단위에 우두커니 서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메그레 경감의 뒷모습 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8. 세르비엘 부인.. 벌써 새벽 1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군데군데 뭉쳐 있 어, 때때로 창백한 달을 가리곤 했습니다. 앞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해초 내음이 났습니다. 모래 사장의 여기저기에 해초를 쌓아 놓은 더미가 시커멓게 보 였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물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찌른채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는 세관원이 권총에 맞은 길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 폈습니다. 외등이 외로이 비치고 있을 뿐, 거리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광장으로 나와보니, 라미랄 호텔의 식당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그 눈부신 불빛은 마치 고요한 밤의 평화를 휘젓는 것 같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호텔 문을 밀고 들어갔을때, 한 신문기자가 전화로 기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젠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서로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어쩌면 이자가 살인범일지도 몰라, 아니면 저자일까 하는 식으로 서로 의심하고 있다." 호텔 주인은 우울한 얼굴로 카운터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테이블마다 신문과 빈 컵이 놓여진 채였고, 카메라맨이 벽난로 옆에서 현상한 필름을 말리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모습을 보고 르르와 형사가 다가왔습니다. "경감님, 저기에 세르비엘 기자 부인이 와 계십니다." 르르와 형사는 한쪽 테이블에 힘없이 앉아 있는 부인을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세르비엘 부인이 이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울었는지 눈이 붉게 부어 있었습니다. "경감님, 정말입니까? 우리 집 양반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게... 하지만 그럴리가 없어요. 제 남편이 아내인 저를 혼자 남겨 두고 도망가다니요. 저는 머리가 혼 란해져 미칠 것만 같습니다. 도대체 제 남편은 왜 파리에 갔을까요? 나를 남겨 두고...." 세르비엘 부인은 어느새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 녀는 코를 흘쩍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주위에 있는 신문 기자를 흘 끗 쳐다보았습니다. "저 기자들이 우리 집 양반이 일부러 자기 손으로 자동차 좌석에 피를 묻혔다는 군요. 그리고 자기가 살해된 것같이 꾸며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는군요. 그런 바 보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죠? 우리 집 양반이 파리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무슨 나쁜짓을 했죠? 나쁜 일을 할 까닭이 없잖아요. 우린 행복하게 살았으니까요.. 그런 걸 폼므레씨나 미쉬씨, 게다가 시장님까지 합세하여 우리 집 양반을 나쁜 놀음 친구와 사귀게 하여..." 메그레 경감은 한숨을 쉬었다. "실례합니다. 부인. 나는 이제 잠을 자야겠습니다." "잠깜만, 경감님. 당신도 우리 집 양반이 뭔가 죄를 범했다고 믿고 계신가요?"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주의죠. 그러므로 부인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내일이라는 날도 있으니까요.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메그레 경감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아까부터 전화로 기사를 보내고 있던 기자는 당장 메그레 경감이 마지막으로 한 말까지 기사로 작성했습니다. "가장 새로운 정보에 따르면 메그레 경감은 마침내 내일 이 수수께끼에 싸인 연 속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단언하였다." 제 3 편 엠마 호의 비밀.. 19. 수수께끼의 편지.. 다음날 아침, 메그레 경감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 니, 하늘은 파랗게 개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거리도 어제까지의 무거운 불 안과 공포의 분위기와는 달리 한결 밝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래층 식당에서는 신문기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지난 3일간 여기저기로 취재하러 다녔으므로, 모두 지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 동안 메그레 경감은 르르와 형사를 데리고 3층에 있는 엠마의 방을 조사했습 니다. 그곳은 지붕 밑 방으로, 낮은 천장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방의 절반은 머리가 닿아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골목으로 향한 작은 창을 통하여, 건너편 집에서 빨래를 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처럼의 밝은 날씨에 사람들의 마 음이 들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메그레 경감이 무엇을 조사하는지 모르므로, 철제 침대에 걸터앉 아 물끄러미 경감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제야 저도 경감님의 수사 방법을 알 듯합니다."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르르와 형사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눈은 어린 아 들이 성장하는 것을 대견한 듯 지켜보는 아버지의 눈과 같았습니다. "이제야 알겠단 말이지? 그런데 르르와,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해 두겠는데, 자 네가 빨리 출세하려거든 내 수사 방법을 본받아선 안돼. 내 방법은 좀 엉뚱하니 까 본이 될 수가 없지. 난 교과서대로의 수사방법이 아니고 그때그때 자유 자재 로 하거든." "하지만 옆에서 볼때, 역시 경감님도 물적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찾 고 계신 것 같았는데요." "맞았어.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이야. 즉 이번 경우엔 나는 보통의 수사 방 법과는 전혀 반대로 했지. 이 다음엔 또 다른 방법을 택할지도 몰라. 그건 그 사건의 특징이라던가 사건에 관계있는 사람들의 생김새라든가, 그런 것으로 결 정되지. 나는 처음 이 호텔로 왔을때 어떤 얼굴을 만난 뒤 그 얼굴이 맘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어. 그뒤로 나는 계속 그 얼굴을 쫓아왔었지." 그러나 메그레 경감은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지 나 토요일 저녁 처음 라미랄 호텔의 식당에 들어갔을때, 가만히 자기 쪽을 쳐다 보고 있던 엠마의 얼굴을 메그레 경감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엠마의 경대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대의 서랍을 열고 안을 뒤적여 반짝이는 조개 껍질이 박힌 상자를 꺼냈습니다. 해수욕장의 선물 가게에 서 팔고 있는 평범한 상자였으나, 꽤 오래 된 것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상자를 열고 안에 든 것을 하나하나 꺼내어 조사했습니다. 푸른 유리 목걸이, 빈 향수병, 붉은 장미의 조화, 작은 십자가, 그림 엽서도 몇장 있 었고, 거기에 섞여 사진이 한장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사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습니다.그것은 축제일에 사격장에서 총 알이 표적에 맞으면 상품대신 찍어 주는 스냅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는 사격 자 세를 취하고 있는 사나이가 찍혀 있었습니다. 개머리판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눈을 감고 표적을 겨누는 포즈였습니다. 사나이의 어깨는 몹시 넓었으며 머리에는 선원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사나이 옆 에는 엠마가 웃으면서 서 있었습니다. 몹시 행복한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의 어둡고 불안에 떠는 얼굴의 엠마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즐거운 웃 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사진 뒷면에는 '켐벨 시에서' 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켐벨 시라면 이곳에서 북쪽 으로 30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큰 항구 도시 입니다. 사진 밑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나왔습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은 모양으로 종이가 구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엠마에게 마침내 나는 내 배를 갖게 되었어. 이미 계약도 끝냈지. 배 이름은 엠마의 이름 을 따서 '아름다운 엠마 호'라 붙일 예정이야. 이곳 켐벨 시의 신부님께 내주에 있을 명명식을 부탁해 놓았어. 사람들을 불러 크고 성대한 축하회를 벌일 셈이 야. 배의 대금을 치르려면 처음 한동안은 상당히 고생이 될 것 같아. 아뭏든 한 해에 1만 프랑이나 은행에 갚아야 하니까. 그러나 10노트나 속력을 낼 수 있는 범선이므로, 영국으로 야채와 과일을 운반하면 돈벌이가 잘되어. 배의 대금쯤은 곧 갚을 수 있겠지. 그러면 엠마와 결혼할 수 있겠고... 레 온 메그레 경감은 편지를 포켓에 넣고 조개 껍질이 박힌 상자를 본래대로 경대 서랍 에 넣었습니다. "미쉬가 묵고 있던 이층 방에 지금 누가 묵고 있나? 르르와?" "아닙니다. 비어 있을 겁니다. 신문 기자들은 모두 3층방에 묵고 있으니까요." "됐어. 그럼 다음에는 그의 방을 조사해 보자." 메그레 경감과 르르와 형사는 계단을 통해 이층 3호실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 방은 발코니에서 바다를 한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 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입구에 서서 메그레 경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경감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메그레 경감은 기분이 좋은듯 가볍게 휘파람까지 불며 방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창가의 작은 탁자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탁자위에는 호텔의 이름이 인쇄된 편 지지와 봉투가 있었고, 그 옆에 커다란 압지가 두 장 있었습니다. 한 장은 이미 몇 번이나 사용해서 시커멓게 잉크가 묻어 있었지만, 다른 한 장은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때의 글씨가 희미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압지에 찍힌 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르르와, 거울을 좀 갖다 주게." 하고 말했습니다. "큰 거울 말인가요?" "아냐,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이 탁자 위에 놓을 수 있을 만큼의 거울이면 돼." 르르와 형사가 거울을 가져오자, 메그레 경감은 그것을 탁자 위에 세워 압지를 비쳐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압지의 글씨가 본래의 모양으로 거울에 비치는 것 입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글씨는 몹시 흐려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더우기 군 데군데 글씨가 빠져 있어 읽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르르와 형사는 거울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그랬었군요! 경감님, 이제야 저도 경감님이 뭘 찾고 계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좋았어. 그렇다면 호텔 주인에게 부탁하여 엠마가 적고 있던 매상장을 빌려 오 게. 매상장이 없으면 엠마의 글씨로 쓰여진 것이면 아무거나 돼." "필적을 비교해 보시려는 거군요." 르르와 형사는 다시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거울에 비친 글씨를 하나하나 읽으며 편지지에다 연필로 베꼈습니 다. .......... 만나고....... 시......빈집에.... 꼭................... 르르와 형사가 돌아왔을때, 메그레 경감은 빠져 있는 글자를 메워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꼭 만나고 싶습니다. 내일 밤 11시에 라미랄 호텔 앞에 있는 빈집으로 와 주셔요. 꼭 와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현관문을 노크 하면 곧 열겠어요. "경감님, 장부를 가져왔습니다. 엠마가 매일 적고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르르와 형사가 장부를 내밀자 메그레 경감은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이젠 필요없어. 필적을 조사하지 않아도 돼. 편지끝에 엠마라는 서명이 있으니 까, 여길 잘 봐. '엠마'라고 적혀 있는 것은 곧 엠마를 가리키는 거야." "그럼 엠마는 이 방에서 편지를 쓴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그녀는 미쉬와 공모하 여 누군가를 그 빈집으로 불러 낼...." "르르와, 침착하게. 결론을 서둘면 안돼. 특히 엉뚱한 추리를 해선 안돼. 그건 그렇고, 세르비엘 기자를 파리에서 호송해 오는 기차는 몇시에 도착하나?" "11시 32분입니다." "좋아. 그럼 다음 일을 해 주게. 먼저 호송해 오는 형사에게 세르비엘을 헌병대 본부로 데리고 오도록하게. 그러면 정오쯤에 본부에 도착하게 되겠군. 그리고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역시 정오쯤에 헌병대 본부까지 나와 주십사고 전하는 거 야. 또 있어. 미쉬 부인에게도 똑같이 전해 주게. 그리고 아마 그때쯤이면 경찰 이나 헌병이 엠마와 그 몸집이 큰 사나이를 잡아 올 거야. 이 두사람도 헌병대 본부로 데리고 와 주게.. 그리고...." 메그레 경감은 그밖에 빠뜨린 말은 없을까 잠깐 생각한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습 니다. "됐어. 그런데 엠마를 붙잡아도 내가 없는 곳에서 신문을 해선 안돼. 그녀가 스 스로 이야기하려 해도 절대로 말하게 해선 안돼."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리에 총을 맞은 세관원은 어떻하죠?" "그 사람은 괜찮아." "배를 맞은 모스타강씨는?" "그도 괜찮을거야." 르르와 형사가 나간뒤, 메그레 경감도 천천히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러고는 포도주를 한 잔 마신 뒤 신문기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해결의 순간이 가까와졌소. 오늘밤 안으로 여러분은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20. 겁을 먹은 미쉬.. 헌병대 본부에는 3색의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어, 찬란한 태양이 대지를 녹일 듯 열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현관으로 들어섰을때, 나이 든 헌병 하나가 양지쪽에서 한가롭게 신문을 읽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대장 있나?" "모두 그 몸집 큰 사나이를 잡으러 갔습니다. 이번엔 꼭 붙잡을 겁니다." "미쉬는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았겠지?" "걱정마십시오. 쭉 저 속에 있으니까요." 헌병은 감방의 쇠창살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감방은 수도원의 정원같이 조용했습니다. "감방의 열쇠를 빌려주게." 메그레 경감은 자물쇠를 열고 감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녕하셨소, 미쉬씨? 간밤엔 잘 주무셨소?" 메그레 경감은 인사말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아영 침대에 누운 미쉬는 담요 밑에서 겁에 질린 쥐처럼 얼굴만 내밀고 있었습니 다. 그의 얼굴은 병자처럼 파리한데다 눈은 쑥 들어가 있었으며, 수염이 자란 뺨 은 바짝 야위었습니다. 열이 있는지 눈이 기분 나쁘게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몸이 편찮으시오?" "예, 신장병이 재발한 모양입니다." 미쉬는 한숨을 내쉬며, 괴로운 듯 침대위에 일어나 앉았습니다. 양복을 입은 채 누워 있었으므로 옷이 몹시 구겨져 있었습니다. "뭔가 불편한 건 없어요?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드리고 있죠?" "예, 친절히 해줍니다." 미쉬는 입속으로 나지막하게 대답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의자에 걸터앉아 의자등에 양쪽 팔꿈치를 기대었습니다. 미쉬의 병자같은 약한 모습에 비하여 메그레 경감쪽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경감은 침대 아래에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고급 포도주를 주문한 모양이군요." "어제 어머니가 갖다 주셨죠. 어머니에겐 이런 꼴을 보여 드리기 싫습니다. 이런 비참한 꼴을 보게 되면 어머니는 병이 나실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경감님, 또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젯밤 사건은 이미 헌병에게 들었겠죠?" "아니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이번엔 누가 당했습니까?" 미쉬는 마치 자신이 습격당한 것같이 벽에 몸을 갖다대었습니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오. 행인 한 사람이 발에 권총을 맞았을 뿐이오." "그래 그 범인은 잡혔습니까? 경감님, 이젠 도저히 견딜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미칠지도 모릅니다. 권총을 맞은 사람은 틀림없이 또 라밀라 호텔의 손님 이죠? 역시 범인은 나를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대체 뭣 때문이죠? 처음 이 모스타강, 그리고 폼므레, 세르비엘 기자... 그리고 우릴 모두 죽이려던 독 약! 이제 틀림없이 나는 죽을 겁니다!" 미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거의 납빛에 가까왔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겁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경감님, 여기 있어도 나는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 창문을 보십시오. 쇠창 살이 끼어져 있지만, 그 사이로 총을 쏠 수 있거든요. 게다가 감시하는 헌병은 늘 졸기만 하니까요. 이래서야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죠. 간밤에도 잠 이 오지 않아 이 포도주 한병을 전부 마셔 버렸습니다. 술에 취하면 잠들 것이 라 생각하고... 하지만 안 되더군요. 한잠도 못 잤어요. 정말이지 그 부랑자와 누렁개를 쏘아 죽여 버리면... 참. 그 누렁개는 그뒤 어떻게 됐나요? 여전히 호 텔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나요? 왜 빨리 쏘아 죽이지 않습니까?" "그 몸집이 큰 사나이는 간밤에 이 도시를 떠났소. 개도 사라졌고요." 이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미쉬는 멍하니 있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양 이었습니다. "아니 정말입니까? 그럼 어젯밤의 범행 뒤 곧 도망갔나요?" "아니오, 범행 전이오." "하지만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럼 경감님, 대체 범인은...." "범인은 다른 사람이오. 어젯밤에도 그 일로 시장과 얘길 나누었지만 다시 정리 해 볼까요? 먼저 가장 알리바이가 뚜렷한건 당신이오. 당신은 이 감방에 있었으 므로, 어젯밤 세관원을 쏠 수가 없었소. 다음에 폼므레씨도 물론 할 수가 없소. 그는 이미 독살당하여 내일 장례식이 있으니까요. 세르비엘 기자도 어제는 파리 에 있었으므로 제외해도 되지요. 게다가 그 누렁개를 데리고 다니던 부랑자도 어젯밤 사건이 일어났을땐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범인이 아니오. 그렇다면 그밖에 우리가 모르는 정체불명의 인물 X가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범행이 X의 단독범행일지도 몰라요.단..." "단 무엇입니까?" 미쉬는 메그레 경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단, 지금까지의 사건이 연관된 범행이 아니었다면, 즉 각기 다른 범인에 의한 범행이었다면...." "그런 어리석은 일이!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죠? 만약 범 인이 각 사건마다 다르다면 나는 내 몸을 지킬 방법이 없잖습니까?" 미쉬는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좁은 감방을 초조하게 돌아다 녔습니다. 몹시 여윈 것으로 보아, 지난 2,3일 사이에 10킬로그램쯤 체중이 줄어 든 것 같았습니다. "경감님,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 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세르비엘이 파 리에 있다니! 파리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할 작정이었을까요? 뭣때문에 자동차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그런 짓을 꾸몄을까요?" "그건 곧 밝혀 지겠죠. 그는 곧 여기 도착할 예정이니까요." "그럼 체포한 건가요? 그래 세르비엘은 무슨 말을 하고 있죠?" "아무 소리도 못 들었소. 아직 신문을 하지 않았으니까." 미쉬는 그 대답이 몹시 못마땅한지 메그레 경감의 눈치를 살폈습니다.창백한 뺨 은 흥분하여 붉어졌고 쑥 들어간 눈은 열기를 품어 반짝거렸습니다. "체포하고도 신문을 하지 않았다니 무슨 뜻이죠? 경감님, 당신은 아까부터 여러 가지 말씀을 하였지만, 실제로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게 아닙니까? 나는 금방이 라도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할 것 같습니다. 난 죽기 싫습니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내겐 총이 필요합니다. 총을 주십시오. 그게 허용이 안된다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형무소에 처넣으십시오. 폼므레씨를 죽인 범인을, 페르노주에 독약을 넣은 자를... 나는 병자입니다. 살기 위해 병과 싸우는 일만 으로도 벅찹니다." 미쉬는 벽에 기대어 괴로운 듯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들부 들 떨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파이프에 불을 붙였습 니다. 그 바위 같은 모습은 공포에 떨고 있는 미쉬의 비참한 모습과는 아주 대조 적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미쉬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있소. 곧 모두들 이리로 올 것이오. 사건을 저지른 범인도 말이오." 21. 아름다운 엠마 호.. 제일 먼저 감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장이었습니다. "경감, 날 이리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는데, 무슨일이오?" 이때 안뜰쪽에서 르르와 형사와 동료 형사가 세르비엘 기자를 연행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는 모자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맨이 사진 찍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여보게, 이쪽일세!" 메그레 경감이 밖에다 대고 외쳤습니다. 이윽고 르르와 형사와 세르비엘 기자가 감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르르와 형사, 수고한 김에 사무실에서 의자를 갖다주게. 곧 미쉬 부인이 도착할 테니까." 메그레 경감의 말대로 잇달아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어디있죠? 당장 경감을 만나게 해줘요! 그리고 당신을 당장 파면 시키겠어요. 형사 양반, 내 말을 알아들었어요? 꼭 파면시키고 말겠어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고함을 치며 들어선 사람은 미쉬 부인이었습니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야단스럽게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짙 게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쉬 부인은 시장이 있는 것을 알자 금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상냥해졌습니다. "어머나, 시장님!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시장님, 글쎄 이런 무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젊은 형사 양반은 내게 옷 갈아입을 시간도 화장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억지로 연행해 왔다니까요. 마치 죄인 다루듯이 말이어요. 우리 남편 은 국회원원이었고, 어쩌면 수상도 될 뻔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형사 나부랑이 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다니!"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화를 내는 바람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야영 침대 구석에 아들인 에르네스트 미쉬가 두손으로 머리를 싸메고 앉아 있는게 보인 것입니다. 그 곁에는 세르비엘 기자가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습니다. 미쉬 부인은 깜짝 놀라 메그레 경감을 돌아보았습니다. "경감님,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시작되죠?" 이때 정문을 통해 한대의 자동차가 안뜰로 들어왔습니다. 정문 밖에는 구경꾼들 이 모여들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맨 먼저 끌려 나온 사람은 그 몸집이 큰 사나이였습니다. 양손에 수갑을 찼을 뿐만 아니라, 양쪽 발목도 굵은 밧줄로 묶여 있었습니다. 걸을 수가 없었으 므로, 헌병들이 마치 무거운 짐을 나르듯이 들고 감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뒤 를 따라 엠마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수갑을 차고 있지는 않았지만 몽유병 자처럼 멍청한 얼굴로 걸어왔습니다. 헌병들은 사나이를 잡은 흥분으로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제복은 구 겨지고 찢어졌으며, 단추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습니다. 사나이의 얼굴은 온통 피 투성이였으며, 터진 입술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사나이를 잡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격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미쉬 부인은 피투성이의 사나이를 보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무서운 짐승이 라도 만난 듯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습니다. "발의 줄을 풀어 주게!" 메그레 경감이 헌병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밧줄이 풀리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천천히 감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날카로운 눈이었습니다. "얌전히 굴어야해, 레온!" 메그레 경감이 사나이를 노려보았습니다. 사나이는 제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 경감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세르비엘 기자는 아까부터 미쉬 부인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에르네스트 미쉬는 여전히 두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앉아 주시죠. 시장님도 앉아 주십시오." 사람들이 제각기 의자나 침대 끝에 앉기를 기다려, 메그레 경감은 입구에 서 있 는 르르와 형사를 향해 명령을 내렸습니다. "르르와, 켐벨 시 해운국에 전화를 걸어서, 지금부터 4,5년전 아니 좀더 예전일 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엠마 호'란 이름의 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 봐 주게." "예." 르르와 형사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시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습니다. "그 일이라면 내가 얘기할 수 있소. 경감. 이 고장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 니까." "그럼 얘기해 주십시오." 그러자 레온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사나운 개처럼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 다. 엠마는 사나이로부터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엠마 호'라는 배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배의 임자는 그르 렉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이였소. 그르렉은 선원으로서는 훌륭한 솜씨를 갖고 있 엇지만, 성급해서 곧잘 싸우는 것이 결점이라는 소문이었소. '아름다운 엠마 호'는 주로 야채와 과일을 영국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지요. 이 근처 연안 항로 의 배들은 대게 그렇지요." 시장은 잠시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운 엠마 호'의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그리고 2개 월쯤 지났을 무렵. 그 배가 미국 뉴욕 근처의 작은 항구로 마약을 싣고 가다가 해안 경비대에 발각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졌소. 물론 선원들은 모두 체포되고 배 도 몰수되었다고 했소. 그 무렵 미국은 금주법이란게 있어서 마약은 물론 술이 나 알콜류까지 일절 금지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유럽에서 몰래 술을 실어 나르 는 밀수선이 꽤 많았소." 시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메그레 경감이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레온, 앉은 채라도 좋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해 주게. 단, 내가 묻는 말에만 대 답하고 그 이상의 필요없는 말은 하지 말게. 알겠나? 우선 오늘은 어디서 붙잡 혔지?" 레온은 턱에 묻은 피를 손으로 문질러 닦고 목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켐벨 시로 가는 도중에 있는 작은 역입니다. 밤이 되면 어디로 가는 열 차든 숨어 탈 생각으로 역의 창고에 숨어 있다가 들켰지요."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었나?" 레온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헌병대장이 대답했습니다. "겨우 11프랑과 잔돈 조금이었습니다." 레온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엠마가 그의 곁으로 다가앉아 소리없이 흐느꼈습니 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레온 그르렉, 자네가 그 '아름다운 엠마 호'의 임자였군. 그럼 어째서 마약 밀 수를 하게 됐는지, 그 까닭을 이야기해 주겠나?" 레온은 고개를 홱 들었습니다. 그의 눈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갑을 찬 두 손을 꼭 쥐며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어 내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잘되었는데, 어느 해 과일과 야채의 값이 엄청나게 올랐으므로 영국에서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은행빛을 갚아야 하고, 또 빨리 돈을 모아서 엠마와 결혼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때 얼굴을 아는 신문기자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곧잘 항구로 기사감을 얻으러 오던 기자인데, 좋은 돈벌이가 될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던 미쉬가 저고리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어 무엇인가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뜻밖에도 침착했습니 다. 메그레 경감은 미쉬의 행동을 곁눈질해 보면서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그 기자란 자가 <등대>의 세르비엘 이었군. 그럼 그가 마약 밀수를 제의해 왔나 ?" "아니오, 마약에 대해선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좋은 돈벌이 가 있는데 한몫 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그날 브레스트시 에 있는 술집에 가보니, 세르비엘 기자 이외에 남자 둘이 와 있었습니다." "그게 에르네스트 미쉬와 폼므레였군?"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미쉬만은 여전히 수첩에 무엇 인가 적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두려워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오히려 거기 에 있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듯한 엷은 미소마저 짓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세 사람 중 누가 마약 밀수 이야기를 꺼냈지?" 메그레 경감이 레온에게 물었습니다. "세 사람 다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두 달 만에 굉장한 돈 을 벌 수가 있다는 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서 미국인 한 사람 이 찾아왔습니다. 그자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바다와 배에 관해선 잘 아는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감에 알콜 밀수를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알콜 밀수라면 그 당시 배마다 하고 있었고, 정기선의 고급 선원들도 용돈 벌이 로 하고 있었기에, 나도 그다지 나쁜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레온은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동안에 흥분했는지 수갑 찬 손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 1주일쯤 지나, 기술자가 와서 '아름다운 엠마 호'에 보조 엔진을 달았 고, 나는 나대로 영어로 씌어진 대서양의 해도와 천기도를 받았습니다. 대서양 을 횡단하는건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신중을 기해 선원은 두 사람밖에 쓰지 않았 죠. 물론 일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엠마에게만 알 콜 밀수인것 같다고 귀뜸해 주었죠. 마침내 출항하는 날, 엠마는 켐벨 항구까지 나와 전송해 주었습니다. 그 세 사나이들도 와서, 헤드라이트를 끈 자동차 곁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출항할 순간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밀수가 걱정이 되었 던 게 아닙니다. 그보다 이런 작은 범선으로 과연 대서양을 잘 헤쳐 나갈 수 있 을까 그것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잘되면 은행 빚도 단번에 갚 을 수 있고, 그러고도 2만 프랑쯤은 남을 계산 이었습니다. 그러면 엠마와 결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배를 출발시켰습니다. 이윽고 자동차 와 세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엠마의 모습만이 방파제 끝에 실루엣처럼 검게 또렷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아름다운 엠마 호'는 그로부터 두 달 동안 대서양을 달렸습니다." 22. 계획된 배반... 미쉬는 열심히 무엇인가 적고 있더니, 레온 쪽을 보는 것이 두려운지 수첩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레온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엠마 호'가 2개월이나 대서양을 달려 마침내 무사히 뉴욕에 가까운 항 구에 도착했을 무렵이었습니다. ".....미리 알려준 장소에 배를 대려고 하자, 별안간 기관총을 단 해안 경비정 세척이 나타나 배를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총을 든 경관들이 우르르 배로 올라 오더니 영어로 떠들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물 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우린 강제로 상륙당하고 트럭에 실렸습니다. 아뭏든 순간 적으로 일어난 일로, 1시간 뒤에는 형무소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죠. 형무 소에서는 정말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프랑스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죄수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때론 혼이 났죠. 다음날 나는 법정에 끌려 나갔으나, 무슨 소리 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재판이 끝났고, 그뒤 변호사가 프랑스어로 판결의 내용을 알려 주었는데, '자넨 징역 2년에 벌금이 10만 달러야. 그리고 배는 몰수한다.' 는 거였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10만 달러나 되는 큰돈을 치를 수 없었 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신신 형무소에 갇혔습니다. 내가 고용한 두 선원 은 다른 형무소에 보내졌는지 그뒤 한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형 무소에선 머리를 빡빡 깍이고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정말 지독한 중노동이었지 요." 그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년쯤 지난 어느날 나는 브레스트시의 술집에서 만난 미국인과 우 연히 마주쳤습니다. 그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다른 죄수를 찾아왔는데, 내 가 말을 걸자 그는 금방 생각해 내지 못했으나, 이윽고 기억이 나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면회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자기 신분에 관한 모든걸 털어놓 았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관리로서, 알콜 밀수를 다스리는 수사관이었습니 다. 영국, 프랑스 등지의 항구를 조사하여 밀수선이 미국을 향해 출발하는 것을 냄새맡으면 그 배의 특징을 미국 해안 경비대에 알리는 것이 그의 임무 였습니 다. 내가 깜짝 놀라 멍청하게 있으니까 그는 히죽거리며 이렇게 말했죠. '때로 는 내 돈벌이도 하지. 즉 밀수선에 분배금을 받는거야. 일부러 못 본 척해 주는 대신에 분배금을 받는 거야. 또 밀수품을 도중에서 몰수하여 빼돌릴 수도 있지. 예컨데 자네가 '아름다운 엠마 호'로 싣고 온 마약도 그런 경우였지.' 나는 또 한번 놀랐습니다. 아뭏든 그때까지 나는 마약같은건 손톱만큼도 몰랐으니까 말 입니다. 그 미국인과 미쉬, 폼므레, 세르비엘 네 사람은 나를 속여 마약을 빼돌 린 뒤 수백만 프랑을 벌어 나눠 갖기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그램이 몇 프랑 하는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엠마 호'에는 10톤이나 되는 마약을 쌓아 놓았다고 하니까요." 레온은 미쉬와 세르비엘을 노려본 다음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경감님, 조금만 더 내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니 까요. 놈들의 계획에 따라 내가 '아름다운 엠마 호'의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그 미국인은 본국으로부터 '밀수 단속 책임자가 바뀌었다.'는 통지를 받았 습니다. 그때문에 전보다 단속이 심해져서 미국쪽의 매입자가 겁을 먹고 물건을 사지 않을것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마약을 운반해도 살 사람 을 찾지 못하게 되는 셈이죠. 그리고 정부에서는 밀수꾼을 단속하는 데 협력한 자에겐 그 물건값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상금을 준다는 새로운 법률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출항하기 전에 미쉬, 폼므레, 세르비엘 세 사람은 그 미 국인을 만나 의논을 했나 봅니다. '되든 안되는 일단 부딪쳐 보자.'모두들 그런 의견이었던것 같았습니다." 레온은 미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미쉬만은 '당장 미국 경찰에 밀고하는 게 좋아. 그러면 아 뭏든 본전의 3분의 1은 확실히 되찾을 수 있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 잖아.'라고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끝내 나를 미국 경찰에 넘기기로 결정했습니 다. 만약 잘되면, 그 미국인이 동료 관리와 이야기해서 압수한 마약을 빼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정말 음흉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는 나는 ' 아름다운 엠마 호'를 타고 항구를 떠났습니다. 엠마는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면 전송해 주었지요.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 4,5개월만 있으면 반드시 돌아와서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똑같이 전송하러 왔지만, 내가 미국에 도착하면 당장 체포되리 란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미쉬란 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 니다. '레온은 성급해서 싸움을 잘 하기 때문에, 경관에게 저항하다 틀림없이 총에 맞아 죽을거야. 그렇게 되는 편이 차라리 뒷맛이 깨끗해서 좋아.'라고요." 레온은 흥분하여 주먹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은 갱이나 밀수단 때문에 매일 총격전이 일어나고 잇었으니까 말 입니다. 놈들은 내 배가 몰수될 것도, 배의 빚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내가 엠마와 결혼하게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 죠. 그러면서도 태연히 내 배가 항구에서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 다. 이것이 형무소에서 그 미국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말을 마친 뒤 그 는 무릎을 치며 웃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뭏든 그 세 놈은 대단한 악당이 야!'" 23. 복수의 화신.. 레온의 이야기가 끝나자, 감방안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습니다. 모두들 상상할수도 없었던 지난날의 무서운 비밀에 몸서리를 칠 뿐이었습니다. 수첩을 넘기며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던 미쉬의 펜소리만이 간간히 들렸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레온의 팔에 S. S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뜻을 알아챘습니다. 그 형무소의 이름인 '신신'의 머릿글자였 던 것입니다. "나는 형무소 안에서 짐승같은 죄수들과 섞여 살면서 나도 짐승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무소에서는 조금이라도 규칙을 위반하면 곤봉으로 얻어맞았는데, 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레온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 미국인은 종종 형무소로 찾아와서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아마 그 세놈의 음흉한 짓에 혐오감을 느껴 내게 동정을 베푼 모양이었습니다. 그밖 에 내 친구라곤 개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배에서 기르고 있던 누렁개였 죠. 그 개는 전에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을뻔 했을 때 살려 준 적이 있었습니다. 형무소에선 규칙이 꽤 까다로왔는데 웬일인지 개만은 기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 다. 어떻든 미국의 감옥은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즐거운 음악을 들 려주는가하면 조그만 일로도 죽을 만큼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형기가 늘어났죠. 아뭏든 지독한 곳이었습니다. 나는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단식을 하면, 억지로 입을 벌려 수프를 흘 려 넣었습니다. 감옥에선 죄수들이 서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자살할 수도 없 습니다. 생지옥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밤새 울며 지샌 적도 몇 백 번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아침 형무소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 개머리판으로 허리를 쿡쿡 찔리며 형무소 밖으로 내던져 졌을때, 나는 힘이 한 꺼번에 빠져 그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형무소는 나왔지만 이미 살아 보겠 다는 희망도 꿈도 없었습니다. 한가지 있다면 다만 복수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 습니다." 레온의 찢긴 입술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피를 닦으려고 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미쉬 부인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손수건에서는 속이 메스꺼워 질 정도로 향수내가 풍겼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문 채, 계속 메모를 하고 있는 미쉬를 노려보았습니다. 레온은 열띤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내 일생을 망쳐 놓은 놈들에게 나와 똑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해주겠다! 놈들을 그냥 죽이진 않겠어. 죽음보다 더 괴로운 맛을 보여 주겠어. 놈들에게 지옥과 같은 형무소 생활을 맘껏 맛보게 해야지!' 나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프 랑스로 돌아오는 배삵을 벌기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 니다. 물론 누렁개도 함께 였죠. 엠마에 관해서는 그뒤론 아무 소식도 듣지 못 했습니다.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켐벨 시로는 가지 않기 로 했습니다.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어도, 자칫하면 옛 동료들에게 들 킬지 모르니까요. 만약 눈치 채게 되면 모처럼의 복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콩카르노 시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엠마가 라미랄 호텔의 하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엠마는 벌써 누 구하고 결혼했겠지 생각하고, 나는 그녀를 만나는 걸 피하고 누렁개와 함께 저 카베르 곶의 옛 망대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방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복수 계획의 첫번째 일은 미쉬에게 일부러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짐승같이 비참한 부랑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놈은 공포에 떨다가 끝내는 나를 권 총으로 쏠 것이다. 나는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어도 그 대신 이번 엔 놈이 형무소로 갈 것이다! 지옥과 같은 감옥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 것입 니다. 그래서 나는 미쉬의 집 부근을 일부러 배회하기도 했고, 놈이 지나가는 길에 숨어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3,4일 지나자 놈은 내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 습니다. 그전처럼 집 밖으로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 놈은 라 미랄 호텔에 모여 트럼프도 치고 술도 마셨습니다. 나는 카베르 곶의 망대에 살 면서,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 다렸습니다." 이때 별안간 누군가가 입을 열었습니다. "잠깐 물어보겠는데요, 경감님. 판사가 없는 이 신문은 법률적으로 유효한가요?" 모두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다름아닌 미쉬였습니다. 얼굴은 몹시 창백했지만,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이 매우 뻔뻔스럽게 보였습니다. 레온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맹수처럼 미쉬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분노가 폭발했던 것입니다. "앉게! 레온, 앉으라니까, 침착해!" 메그레 경감이 레온의 팔을 꽉 붙잡았습니다. 레온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의 재를 떨고 나서 입을 열었습니다. "자, 다음은 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24. 누렁개의 무덤.. 메그레 경감은 레온의 거센 말투와는 달리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 했습니다. "먼저 엠마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엠마는 약혼자인 레온이 미국에서 체포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그녀는 그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라미랄 호텔의 하녀가 되었습니다. 일가 친척도 없는 가엾은 그 녀는, 사랑하는 레온을 잃고 살아갈 의욕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 위로가 되는게 있었다면, 레온과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과 그의 편지뿐이었습니 다. 틈만 있으면 그녀는 조개껍질이 박힌 상자에서 그것을 꺼내보고 즐거웠던 옛날을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레온이 미국에서 돌아온것도 몰랐습니다. 누렁개 가 나타나 자기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 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 개는 '아름다운 엠마 호'가 항구를 떠날때는 낳은지 4 개월밖에 안되는 강아지였으니까요." 메그레 경감은 허공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느 날 호텔에 묵고 있던 미쉬는 엠마를 자기방으로 불러 누구에 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불러 주는 대로 적도록 그녀에게 명령 했습니다. 그것은 밤 11경에 광장 옆 빈집까지 와달라는 편지였습니다. 아무것 도 모르는 엠마는 불러주는 대로 적었는데, 설마하니 이것이 사랑하는 레온을 불러내 쏘아 죽이기 위한 편지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젠 알겠지만, 레온의 복수 계획은 반쯤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쉬는 자기가 레온에게 살해되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당 하기 전에 레온을 죽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쉬는 체격이 큰 레온 과 맞서서 싸울 배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끝에 레온의 약혼녀였던 엠마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했던 것입니다. 미쉬는 그 편지를 호텔에 나타나는 누렁개 의 목에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 개가 레온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미쉬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밤 10시 반에 그는 그 빈집에 숨어 들어 권총을 겨누고 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레온이 편지를 읽고 빈집으로 와서 현관문을 노크하면 미쉬는 우편함 구멍으로 권총을 쏘고 재빨리 뒷문으로 달아날 작정이 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의 범행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사건은 미궁에 빠지 게 될 테니까요." 사람들은 레온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레온은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광장 근처까지 왔지만, 잠시 주위의 동 정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우연히도 모스타강씨가 호텔에서 나왔습니 다. 그리고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빈집 현관앞에 섰는데,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비틀거리다가 몸이 문에 부딪쳤습니다. 그 순간, 미쉬는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 당겼습니다. 총탄은 모스타강씨의 배에 명중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사건의 진 상입니다. 미쉬는 보기좋게 실패했습니다. 기자인 세르비엘과 폼므레 두 사람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쉬에게서 레온이 돌아왔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 니다. 두 사람은 미쉬가 실패한 사실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한편, 엠마도 자 기가 미쉬의 꾐에 빠져 그 편지를 쓰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어디 선가 레온의 모습을 보았거나, 혹은 누렁개의 정체를 알아 버렸는지도 모르지 요."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의 담뱃재를 떤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르르와 형사를 데리고 라미랄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에서 미쉬 와 폼므레, 세르비엘 세 사람을 만났는데, 만나 순간 나는 이 세사람이 몹시 겁 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의혹을 느꼈습니다. 마치 세 사람은 다음 사건이 반 드시 일어날 것을 알고 있는 것같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예 감이 틀림없는지 확인해 볼 필요를 느껴 일부러 술병에 독약을 넣었습니다. 즉, 술병에 스트리키닌을 넣은 범인은 다름아닌 나였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멋모르 고 그 술을 마시려고 하면 당장 말릴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내 예감이 들어맞았 습니다. 미쉬가 재빨리 알아차리더군요. 그만큼 그는 겁을 먹고 사소한 일에까 지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엠마는 얼어 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않고 뚫어지게 메그레 경감을 쳐다보고 있었 습니다. 미쉬는 수첩에서 눈을 떼고 잠시 메그레 경감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더 니, 다시 열심히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재판받을 때를 대비하여 메모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시장에게 말했습니다. "시장님, 이상이 두번째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전보다 더욱 겁 을 먹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맨 먼저 도망친 것이 세르비엘이었습니다. 그는 이 독약이 든 술 사건으로 당장 자신이 살해되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었죠. 게다 가 내가 진상을 파악했다는것을 신문 기자의 육감으로 알아차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재빨리 도망쳐 자취를 감추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면 의심을 사지 않도 록 잘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 그 자동차에 한 잔재주였 죠. 자기가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 것 같이 꾸몄던 것입니 다. 그러기전에 그는 미쉬의 집에 동정을 살피러 간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레 온을 찾아 화해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미쉬의 집에 가보니, 레온이 돌아다닌 큰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세르비엘은 그 발자국을 보고 순간적으로 멋 진 생각을 해냈죠. 신문 기자가 아니면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천재적인 계 교였습니다. 그건 바로 <등대> 신문에 실렸던 특종 기사였습니다." 세르비엘은 두손으로 머리를 감쌌습니다. "세르비엘은 자기의 필적을 속이기 위해 왼손으로 써서 신문사의 우편함에 넣었 습니다. 거기에는 누렁개와 발이 큰 부랑자에 관해 씌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 부러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기 위해 미리 계산하여 쓴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 를 읽으면 온 도시가 공포에 싸여, 사람들은 몸집이 큰 부랑자를 보면 그자리에 서 쏘아 죽일게 틀림없다 그러면 나는 살아날 수 있어.' 세르비엘 기자는 이렇 게 생각한게 틀림없습니다. 그 계교는 하마터면 성공할 뻔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구두 가게 주인이 누렁개를 권총을 쏘았으니까 말입니다. 이대로 가면 부 랑자 레온이 총에 맞아 죽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 같았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메그레 경감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일요일이 되자, 미쉬는 병자인 체하고 한 발짝도 호텔 밖으로 나가 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폼므레와 둘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때, 두 사 람이 무슨 의논을 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마 폼므레가 약한 마음에 '이대로 언제까지나 불안에 떨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경찰에 자수하여 도움을 구하는게 어떨까?'하고 말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폼므레는 그다지 무거운 죄를 저지르 지 않았죠. 밀수사건도 이미 몇년전의 일로서, 레온이 미국에서 체포되었으므로 이곳 경찰에 자수해도 기껏 가벼운 벌금 정도로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미쉬는 그렇지가 않았죠. 이미 모스타강씨를 권총으로 쏘았으므로, 지금 폼므레 가 자수하게 되면 자신은 살인 미수죄로 형무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미 쉬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폼므레의 술에 독약을 넣어 죽였습니다. 이것이 폼 므레 독살 사건의 진상입니다. 겁장이인 미쉬는 공포심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른 것입니다. 이 공포심이야 말로 지금까지의 연속 살인을 불러 일으킨 근본 원인 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한편, 레온은 아직 단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복수하게 될 때까진 이 도시에서 떠난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직 이 도시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 하여 나는 권총에 맞은 개를 호텔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레온이 어디 에 숨어 있다면 반드시 개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러자 역시 레 온은 찾아와 개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뒤로는 아무도 그 누렁개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레온, 그 개는 죽었나?" 레온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가엾게도...." "무덤에 묻어 주었나?" "예, 카베르 곶 부근에 묻어 주었습니다. 전나무 가지로 작은 십자가를 만들어 무덤을 만들어 주었죠." 25. 또 한 사람의 범인.. 메그레 경감의 이야기는 점점 결말에 가까와 지고 있었습니다. 경감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레온이 곶의 망대에 숨어 있는 것을 경관들이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레온은 틈을 노려 도망쳤습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쉬가 자기를 쏘도록 하는 것이었 기 때문입니다. 즉 미쉬에게 살인죄를 짓게 하여 형무소에 처넣고 싶었던 겁니 다. 메그레 경감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미쉬를 체포했습니다. 본 인에게는 그의 신변을 범인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고 안심시켰는데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경감은 더 이상 그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쉬는 자포 자기하여 또다시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메그레 경감앞에서 거짓 연극을 연출했습니다. 자기가 누렁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5년전 트럼프점을 쳤을 때, 불길한 예언을 들은 탓이라고 꾸 며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감방에 갇혀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사이 에, 미쉬는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어쩌면 난 정말 범인으로 체포된 게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감방에 갇혀 있는 사이에 또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절대적으로 확 실한 알리바이가 성립되므로 혐의를 벋게 된다. 그렇다면 의심은 다시 그 부랑 자 레온에게 돌아갈 게 틀림없어.' 그러고 있는데, 마침 어머니인 미쉬 부인이 면회하려 왔으므로, 그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의 진상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미쉬 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어떻게든 자기 아들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쉬 부인은 시장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자동차로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의 모든 불을 다 켜놓고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불을 켜 놓은 것은 자기가 집에 있는 것같이 꾸미기 위해서입니다. 미쉬 부인은 어두운 길 모퉁이에 숨어서 라미랄 호텔에서 누군가 나오길 기다렸 습니다. 호텔에서 나오는 사람이면 아무라도 좋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세관원 이 재수없게 총에 맞은 셈이었습니다. 미쉬 부인은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일부러 발을 쏘았습니다. 발을 쏘면 상대가 슛아 올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범행은 부랑자 레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미쉬의 계획대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레온에게 알리바이가 없었다면 완전히 성공했을 겁니다. 그러 나 레온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세관원이 총에 맞았을때, 그는 메그레 경 감의 눈앞에서 엠마와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살려 보려고 한 미쉬 부 인의 범행은 헛수고로 끝난 셈입니다. 레온은 경찰에 쫓기면서도, 복수심때문에 미쉬가 묵고 있는 호텔 부근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빈집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메그레 경감이 보았을때, 그는 빈집 3층 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엠마의 방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엠마는 레온이 온 것을 알고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결코 그 악당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 그 편지도 미쉬에게 속아 서 썼다는 것을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레온은 처음엔 몹시 화를 내며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엠마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점점 그녀를 이해하게 되어 옛날의 사랑이 되살아났습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던 레온은 옛날과 조금도 변함없는 엠마의 애정에 감동되었습니 다. 그는 이제 비참한 부랑자가 아니었습니다. 약혼녀였던 엠마와 다시 한번 인 생을 시작해 보겠다는 희망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돈이 조금밖에 없었지만 밤의 어둠을 타고 이 도시에서 빠져 나가기로 했습니다. 미쉬에대한 것도, 복수에 대한 것도 이젠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어디 든지 좋으니까 멀리 가서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인생을 시작할 계획이었던 것입니 다. 메그레 경감은 이야기를 마치자, 천천히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며 사람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시장에게 말했습니다. "시장님, 내가 수사 경과를 일일이 자세하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을 사과합니다. 내가 이 도시에 왔을때 사건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건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찾기 위해선 아무래도 다음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 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불행히도 폼므레가 자기 동료에게 독살당 하고 말았죠.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하더라도 끝내 체포당할 것을 알고 틀림없 이 자살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세관원은 발에 총을 맞았지만 일주이면 완치된다고 합니다. 그 대신 나는 에르네스트 미쉬를 모스타강 살해 미수와 폼 므레 독살의 두가지 죄로 체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인 미 쉬 부인은 세관원을 총으로 쏘아 다치게 했으므로 상해죄가 성립됩니다. 세르비 엘 기자는 다만 자기 자동차에 피를 묻혀 경찰의 눈을 속인 것 뿐이므로 기껏해 야 공무 집행 방해죄가 성립되겠죠." 그 순간, 세르비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생각보다 가벼운 죄로 끝났으므 로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미쉬 부인은 얼굴이 창백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아들 미쉬 쪽이 더 침착해 보였습니 다. "에르네스트 미쉬, 할 말이 있나?" 메그레 경감이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말할 건 모두 법정에서 하겠습니다." 미쉬는 뻔뻔스럽게 대답하고 열심히 메모해 놓은 수첩을 소중히 포켓에 넣었습니 다. "경감, 레온과 엠마는 어떻게 되지요?" 시장이 두 사람을 턱으로 가리키며 메그레 경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르르와 형사가. "레온에게는 부랑죄와 음식을 훔쳐먹은 죄가....." 하고 말하다가 메그레 경감의 매서운 눈초리와 시선이 마주쳐 입을 다물고 말았 습니다. 메그레 경감이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레온은 다만 미쉬가 자기를 쏘게 만들기 위 해 자기 모습을 보인 것뿐이니까요. 남에게 모습을 보인 일만으로 처벌받는 법 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26. 인정 많은 메그레 경감.. 헌병대 본부의 문이 열리고 시장의 검은색 승용차가 나왔습니다. 정문 밖에 몰려 있던 구경꾼이 일제히 차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의 뒷좌석에는 레온과 엠마, 그리고 메그레 경감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시장이 자동차를 빌려 준 것입니다. 레온은 큰 몸을 불편한 듯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레온이 메그레 경감에게 물었습니다. "경감님, 아까는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하셨죠?" "무슨 말?" "술병에 독약을 넣은 게 경감님이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엠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가느다란 몸이 바르르 떨렸습니 다. "그저 생각이 떠올랐지." 메그레 경감은 파이프를 문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습니다. 엠마가 갑자기 울먹거렸습니다. "경감님, 그땐 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미쉬에게 속아 그런 편지를 쓰고..... 그러다가 그 누렁개가 레온의 개라는걸 알았죠. 토요일 아침 레온이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보고서야 모든 사정을 깨달았어요. 저느 레온의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세 남자가 레온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낮에 미쉬의 집에 가서 독약을 훔쳐 왔습니 다. 그리고 페르노 주와 칼바도스주 병 속에 그것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경감님 이 마시려 했다면 꼭 말렸을 겁니다." 엠마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레온이 크고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 어 주었습니다. 엠마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경감님, 저를 감싸 주기 위해 그런 거지말을 하시다니, 참으로 이 은혜를 어떻 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어쩔 셈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이곳을 떠나 멀리 가겠습니다. 생각하기 싫은 과거 를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 두 사람이 살아갈 정도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작정 입니다. 뉴욕 부두에서 여러 가지일을 배웠으니까요." "빼앗긴 11프랑은 받았나?" 레온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자동차는 역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메그레 경감은 운전사에게 차를 멈추 게 했습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1백 프랑짜리 지폐 두장을 꺼내더니 그것을 레온의 큰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자, 이걸로 기차를 타고 가게. 가져라가구! 이건 수사비에 달아 놓을 테니까." 그러면서 메그레 경감은 자동차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밀어내듯이 내리게 했습니 다. 두 사람이 미처 감사의 말도 못 마쳤는데 메그레 경감은 문을 '꽝.'하고 닫 았습니다. "운전사, 헌병대 본부로 돌아가게." 다시 자동차가 달리자 메그레 경감은 커다란 어깨를 오므렸습니다. 어울리지 않 는 자신의 인정이 쑥스러웠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