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 4대 비극집 신정옥 옮김 도서명: 세익스피어 4대 비극집 역저자: 신정옥 옮김 [ '셰익스피어 4대 비극집'을 내면서 ] 작년 봄이던가, 나는 아직 완간을 하지 못한 '셰익스피어전집' 덕분에 필자를 알아보는 여고1학년생들을 만났다. 꽃향기 그윽한 대학로 소극장에서였다. 그 여고생들은 셰익스피어에 관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 중의 한 학생이 말했다. "저는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햄릿'을 읽었는데요,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그런데 저는 낱권으로 몇 권 샀는데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4대 희극만이라도 따로 엮어 내놓으실 계획은 없으세요? 책들이 예뻐서 모두 갖고는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참고서는 사지 않고 무슨 문학작품만 사느냐고 꾸중이 대단하세요. 비극집 한 권, 희극집 한 권 사면 그런 참견 받지 않아도 되잖아요." 지난 겨울 나는 시골 중학교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국어선생님인데 독서지도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편지에서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었는데도 학생들이 대부분 가난해서 햄릿 한 권만을 선정하여 지도했는데 선생님께서 4대 비극집을 싼값에 내놓으시면 저의 이런 걱정은 사라질 것도 같습니다만."하고 독서지도 교사로서의 안타까움을 토로해 왔다. 내가 필생의 과제로 알고 작업해 온 '셰익스피어전집'(40권)이 아직 완간되지 않은 터에 '셰익스피어 4대 비극집'을 내놓은 이유는 이처럼 독자와의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 중부 지방의 에이번 강변 스트라트포드라는 마을에서 1564년 장미꽃도 화사한 4월의 품안에서 태어났다. 그날이 4월 23일이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의 52세 생일날인 19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는 위대하고 소박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희곡 37편을 남기고 운명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햄릿' '오델로' '리어왕' '맥베드'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 부르는데 이들 희곡들은 한결같이 셰익스피어의 비극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들이다. 이들 4대 비극은 고도의 문학성을 지니고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감동적인 정감으로 우리의 가슴을 적셔 준다. 그런데 분명히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이들 4대 비극에서 몇 개의 공통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4대 비극에 있어서 비극의 주인공들의 행동은 한결같이 그들의 성격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햄릿이 그렇고, 오델로와 리어왕이 그렇고, 또한 맥베드가 그렇다. 즉 '햄릿'의 비극적인 말로는 회의와 우유부단 그리고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상주의 때문이요, 오델로가 저 순결한 데스데모나를 교살하고 끝내는 처절한 자결을 하게 되는 것은 의처증의 원인이기도 한, 인정에 어둡고 사람을 지나치게 쉽게 믿는 성격 때문이요, 리어왕의 비극은 순전히 그의 우매한 관대성과 이성의 눈이 어두워 진실과 위선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맥베드가 당컨왕을 시역하고 왕관을 차지하는 범죄적 행동은 그의 야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4대 비극에서 공통된 또 한 가지 사실은 고귀한 인품을 지닌 주인공이 비극적인 현실과 충돌하여 싸우다가 끝내는 주인공이 비참한 죽음으로 결말지어지는 인간행동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처럼 주인공의 행동은 성격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4대 비극에서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개념들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삶의 향기와 순후한 꿈과 사랑을 주고 삶을 구가하는 인간적 기록이라는 점이다. 이 4대 비극들은 그 비극 속에서도 한줄기 영롱한 인간성의 빛을 담고 있다. 즉 그 비극 속에서는 고매한 슬픔과 숭엄하고 거룩한 정신이 담겨 있다.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의 최후가 아무리 처절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지막에 받는 느낌은 결코 절망과 허무감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슴에 장엄한 인간성에 대한 찬미를 잔잔하게 안겨 준다. 어찌 그뿐이랴, 용을 그린 위에 구름을 얹은 것이나 진배없이 가장 맑고 섬세한 서정과 더불어 '언어와 예술', 즉 음악적인 우아함은 셰익스피어의 시인적인 천재성과 위대한 극작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엿보게 해준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이 4대 비극을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고전으로 회자되게 하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91년 무더운 여름에 신정옥 [ 햄릿 ] (등장인물) 클로디어스: 덴마크왕 햄릿: 덴마크 왕자로서 선왕의 아들이며 현왕의 조카 폴로니어스: 재상 호레이쇼: 햄릿의 친구 레어티스: 폴로니어스의 아들 볼티먼드, 코닐리어스: 노르웨이로 파견되는 사절 로즌크랜츠, 길든스틴: 어린 시절의 햄릿의 학우들 오즈릭: 경박한 멋쟁이 궁신 신사 신부 마셀러스, 바나도, 프랜시스코: 궁전의 근위장교 레이낼도: 폴로니어스의 하인 배우들 무덤파는 일꾼 두 명 어릿광대 포틴브라스: 노르웨이의 왕자 노르웨이의 부대장 영국사절들 거트루드: 덴마크 왕비이며 햄릿의 어머니 오필리어: 폴로니어스의 딸 햄릿: 아버지의 망령 귀족, 귀부인, 군인, 선원, 시종들 (장소) 덴마크 [ 제1막 ]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한순간에 천리를 달리는 상상력보다 더, 사랑의 욕망보다 더 빨리 복수하러 날아가겠나이다. - 5장 햄릿 대사 중에서 [ 제1장 엘시노궁전 ] 성벽 위의 협소한 초소, 좌우에 포탑으로 통하는 문, 별이 빛나는 밤. 매우 춥다. 미늘창으로 무장한 프랜시스코, 왔다 갔다 하며 보초를 서고 있다. 종이 열두번 울린다. 곧 같은 무장을 한 다른 보초 바나도, 성 안쪽에서 나타난다. 그는 어둠 속에서 프랜시스코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나도: 누구냐? 프랜시스코: 넌 누구냐? 정지, 이름을 대라. 바나도: 국왕 폐하 만세! 프렌시스코: 바나도? 바나도: 그래. 프랜시스코: 제 시간에 잘 대어 왔군. 바나도: 방금 열두 점을 쳤어. 어서 가서 자게, 프랜시스코. 프랜시스코: 교대해 주어 고마우이. 어찌나 추운지 가슴 속까지 얼어붙었어 바나도: 별 이상 없었나? 프랜시스코: 쥐새끼 하나 얼씬 안했네. 바나도: 좋아 푹 쉬게, 호레이쇼와 마셀러스를 만나거든 속히 오라고 일러주게. 같이 보초를 설 동료들이니. 호레이쇼와 마셀러스 등장 프랜시스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발자국 소리다. 야, 정지. 누구냐! 호레이쇼: 이 나라의 백성. 마셀러스: 덴마크왕의 신하. 프랜시스코: 그럼 가겠네. 마셀러스: 어서 가게, 모범용사. 교대는 누가 했나? 프랜시스코: 바나도가 교대했어, 그럼 수고하게.(퇴장) 마셀러스: 여어, 바나도! 바나도: 이여, 호레이쇼도 함껜가? 호레이쇼: 그런 것 같네. 바나도: 잘왔네, 호레이쇼. 어서 오게, 마셀러스도. 호레이쇼: 그래, 오늘밤에도 그게 또 나타났나? 바나도: 아직은 못 보았네. 마셀러스: 호레이쇼는 우리가 허깨비를 보았다는 거야. 우리가 두 번이나 본 무시무시한 모습을 아무리 설명해도 도무지 믿어주질 않아. 그래서 오늘밤엔 불문곡직하고 함께 망을 보자고 청했던 걸세. 만일 그 망령이 오늘밤에도 나타난다면 우릴 믿어줄 게 아닌가. 말도 건네볼 거구. 호레이쇼: 흥, 흥, 나오긴 뭐가 나와? 바나도: 잠시 앉게나. 좌우지간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우린 이틀밤이나 이 눈으로 똑똑히 봤대두. 자네 귀에 쇠말뚝일랑 박지 말라구. 호레이쇼: 좋아, 어디 앉아서 바나도의 얘기 좀 들어볼까. 바나도: 바로 어젯밤이었어, 북극성의 서편에 있는 바로 저 별이 말야, 차츰 움직여 지금 반짝이고 있는 저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난 마셀러스와 함께 있었고 그때 종이 한 점을 치는데... 망령 나타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했다. 손에 원수장을 들고 있다. 마셀러스: 쉿 조용히 해. 저걸 봐, 또 나타났다! 바나도: 선왕의 모습 그대로야. 마셀러스: 자넨 학자잖아, 말을 건네보게, 호레이쇼. 바나도: 영락없는 선왕이잖아? 보라구, 호레이쇼. 호레이쇼: 이럴 수가, 무섭고 놀라 몸이 오그라 붙네. 바나도: 말을 걸어달라는 눈치 같애. 마셀러스: 말을 좀 해봐. 호레이쇼. 호레이쇼: 넌 누구냐! 이 야반에 무엄하게도 승하하신 덴마크 선왕께서 생전에 출전하셨을 때의 당당하신 갑옷차림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썩 말하라, 명령이다. 마셀러스: 성이 났나 보다. 바나도: 저 봐, 성큼성큼 가버리잖아. 호레이쇼: 서라, 말하라, 어서 말해! 명령이다. (망령 사라진다) 마셀러스: 사라졌다, 말대꾸도 하지 않구. 바나도: 왜 그래, 호레이쇼! 떨고 있군, 얼굴이 새파래. 이래도 허깨비라고 우겨댈 셈인가? 어째, 자네 생각은? 호레이쇼: 아닐세 전혀, 두 눈이 닳아지게 노려보지 않았다며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걸세. 마셀러스: 어때, 선왕을 닮지 않았나? 호레이쇼: 닮다마다, 그모습 그대로야. 바로 저 갑옷은 야심만만한 노르웨이왕과 결전을 했을 때 입으셨던 거야. 또 저 찌푸린 얼굴은 격렬했던 휴전담판이 결렬되자 썰매에 탄 폴란드 병사들을 빙판에 처박던 때의 표정이고. 이럴수가. 마셀러스: 전에도 이렇게 두 번 시각도 똑같은 야반에 이 초소 옆을 늠름한 걸음걸이로 나보란 듯이 지나갔어. 호레이쇼: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네만 내 짐작인데, 혹시 이 나라에 어떤 변괴라도 일어날 지조가 아닐는지? 마셀러스: 그래 좀 앉지, 내 궁금증 좀 풀어주게. 뭣 때문에 매일밤 엄중하고 철저하게 경비를 서게 해서 백성들을 들볶는가. 왜 매일같이 대포를 만들어내느라 야단이고, 또 어찌하여 외국에서 무기를 사들인다고 북새통을 치느냐 말일세. 무엇 때문에 조선공들을 징발해서 주일도 없이 혹사하느냐 이 말이지. 어떤 위기가 절박하였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시키느라 백성들에게 비지땀을 흘리고 하는 건지 그 까닭을 속시원히 말해줄 수 없겠나? 호레이쇼: 내 말해 주지. 떠도는 소문은 이렇다네. 승하하신 선왕 말야, 지금 우리 앞에 꼭 닮으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자네들도 아다시피 그 시샘 많고 자만심에 환장해 버린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왕의 도전을 받으셨댔지. 허나 용맹하신 선왕폐하께서는-그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그분을 그렇게 받들지 않았는가-포틴브라스의 목을 베어 버리셨지 뭔가. 그리고 전통적 관례에 따라 작성한 조문대로 패배한 적은 목숨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영토를 승하하신 선왕에게 고스란히 바쳤다네. 물론 선왕께서 상당한 영토를 거셨지. 만일 포틴브라스가 승리했다면 우리 선왕의 영토는 일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갈 뻔했어. 그러나 바로 그 약정서의 조문과 취지에 따라 적의 영토는 모두 선왕께 귀속됐다네. 그런데 포틴브라스에게는 같은 이름의 아들이 있었지.싸가지 없는 혈기에 날뛰는 자라, 하루 세끼 배만 채워 준다면 닥치는 대로 무법을 일삼는 불한당 패거리들을 끌어 모아 노르웨이 변방 이곳 저곳에 출몰하지 않겠나. 물론 우리도 그 속셈을 충분히 알고 있지. 제 아비의 잘못으로 잃은 영토를 우격다짐으로 되찾아 가려는 꿍꿍이를 말야. 이것이 내가 알기로는 우리가 군비에 혈안이 된 주요 동기이고 우리게 밤을 새워 망을 서는 것도, 온 나라가 불난 강변에 맨 소 날뛰듯 크게 소동을 벌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네. 바나도: 그렇겠군, 그 말이 맞아. 갑옷 차림의 해괴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을 지나치는 뜻을 알 만하이. 과연 선왕답군, 선왕이야말로 본디 전쟁의 장본인이시잖아. 호레이쇼: 티끌 하나만 있어도 눈이 아프듯 마음의 눈도 마찬가지지. 일찍이 로마가 천하를 지배하던 전성시대에 위대한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되던 전 날밤 무덤을 뛰쳐나온 수의 입은 시체들이 괴상한 소리를 외쳐 대며 로마 거리를 쏘다녔다네. 별은 뿔꼬리를 이끌고, 이슬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태양은 어루러기가 끼었고, 대양을 다스리는 달도 최후의 심판일을 맞은 듯 파리해졌다지 뭔가. 이와 꼭같은 무서운 사건이 이 나라 백성들에게 일어날 징조가 보이네. 항상 운명보다 앞서 오는 흉사의 서막으로서 말일세. 하늘과 땅이 이변이 생기는 것일 아닐까. 망령이 다시 나타난다. 쉬잇 가만히, 저걸 보게, 또 나타났어! 죽어도 좋다. 어디 부닥뜨려 보자... (호레이쇼 두 발을 벌린다) 섰거라. 허깨비야! 소릴 낼줄 안다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말을 하라. 만일 너의 한을 풀 수 있고 내게 득될 일이 있다면 말해 봐라. 이 나라 운명의 비밀을 네가 안다면 우리가 미리 알게 되면 화난을 피할 수도 있을 게 아닌가. 어서 말하라! 생전에 부정한 재물을 땅속 깊숙이 묻어두어 그 때문에 미련이 남아 저승에 간 다음에도 방황하는 망령이 있다더라. (닭이 운다) 혹시 너도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하라-서라, 말해봐-마셀러스, 막아서! 마셀러스: 창으로 이걸 찌를까? 호레이쇼: 쩔러 버려, 안 서거든. 바나도: 여기다! 호레이쇼: 이쪽이야! 마셀러스: 없어졌어!(망령 사라진다)그래도 지엄한 모습의 혼령에게 난폭하게 대들었으니 잘못했어. 허공을 치는 거나 같애. 후려친들 맞아야 말이지. 쳐봤자 부질없는 짓일세. 바나도: 입을 열 것 같았는데 그 때 닭이 울어댔어. 호레이쇼: 그러자 아주 무서운 데서 호출당한 죄인처럼 질겁을 했어. 떠도는 말로는 수탉은 새벽의 나팔수라 하지 않는가. 신바람 나게 귀청 따가운 앙칼진 울음소리로 햇님의 잠을 깨운다고 하네. 그러면 쏘다니던 온갖 혼백들은 물속, 불속, 땅속, 허공 어디 있든 나 살려라 꽁지 빠지게 제 처소로 돌아간다던데 이제 보니 실없는 소리가 아니로군. 마셀러스: 닭이 울어대기가 바쁘게 사라져 버리더군.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지만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계절이 다가오면 새벽을 알리는 새가 밤을 지새워 운다더군. 그러면 혼령들은 무서워 문밖엔 얼씬도 못한다지 뭔가. 청아한 밤이 되어, 유성들도 급살 내리는 법이 없고. 요정이 홀리구나, 마녀들이 신통력을 쓰지도 못한대. 과연 거룩하고 축복이 충만한 시기지. 호레이쇼: 나도 들은 얘기네만 그럴싸한 말이라 믿고 있네. 저길 보게, 붉은 망토를 걸친 아침이 저편 동녘 산마루의 이슬을 밟으며 건너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 보초를 그만 걷어치우세.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간밤의 일을 햄릿 왕자님께 아뢰는 게 좋을 것 같아. 필시 저 혼령이 우리에겐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왕자님껜 말문을 열지 몰라. 아뢰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요.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나? 마셀러스: 그래, 그렇게 하세. 오늘 아침 왕자님을 쉽게 뵐 수 있는 장소를 내가 알고 있으니 안내하지.(모두 퇴장) [ 제2장 궁전 안의 정전 ] 화려한 트럼펫소리. 덴마크의 국왕 클로디어스, 왕비 거트루드, 폴로니어스와 그의 아들 레어티스, 볼티먼드,코닐리어스 등 대관식에서처럼 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 햄릿 왕자는 눈을 아래로 깔고 검은 옷차림으로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 왕과 왕비는 층계를 올라 옥좌에 좌정한다. 왕: 승하하신 친형 햄릿 선왕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바 우리의 가슴엔 슬픔이 가득하며 만백성이 한결같이 애도함은 당연한 일이로되, 과인은 자연의 정을 이성으로 극복하여 돌아가신 형님을 슬피 추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왕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하였소. 그래서 과인은 지난날의 형수를 왕비로 맞아 막강한 이 나라의 지엄한 동반자로 삼았소. 말하자면 슬픔과 기쁨이 같이하여 한 눈엔 웃음을, 또한 눈엔 눈물을 담고, 장례식에는 찬가를, 결혼식에는 만가를 노래하는 심정으로 환희와 비통을 똑같이 저울질하며 왕비로 맞이한 것이오. 또한 이 문제에 관해 경들의 슬기로운 충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경들 역시 쾌히 찬동하여 주었소. 가상히 여기는 바요. 그런데 경들도 잘 알다시피 포틴브라스의 아들 말이오, 그는 과인의 힘을 얕잡아 보는 건지 아니면 선왕의 승하로 이 나라의 대들보가 흔들리고 나라가 크게 어수선하리라 짐작해서인지 이때다 하고 허망한 꿈을 안고 기회 닿는 대로 사절을 보내와 아비가 잃은 영토를 반환하라고 불같은 성화가 아니겠소. 그러나 그것은 약정한 바에 따라 과인의 용맹한 형님께 양도되었던 거요. 그건 그렇고, 과인이 경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용건은 다름아니라 노르웨이 왕에게 보낼 친서 때문이오. 노르웨이 왕은 포틴브라스 2세의 숙부이나-지금은 노쇠하여 병석에 오래 누워 있는지라, 조카의 흉계를 모르고 있을 거요-이를 즉시 알려 저지시키고자 하는 바요. 포틴브라스 2세는 현왕의 백성들로부터 자금, 병력, 모든 보급품을 징발하려는 터라 과인은 사신으로 코닐리어스와 볼티먼드를 파견코자 하니 이 친서를 노르웨이의 노왕에게 전해 주오. 노르웨이 왕과의 절충은 여기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행사할 것이며, 그 이외의 권한행사는 엄히 금하오. 곧 떠나시오. 충성을 다하기 바라오. 코닐리어스, 볼티먼드: 분부대로 어김없이 거행하겠사옵니다. 왕: 경들을 믿겠소. 무사히 다녀오오. (볼티먼드와 코닐리어스 하직 인사를 하며 퇴장) 그리고, 레어티스, 할말이 있다고 했겠다? 소청이 있거든 말하라, 뭐냐, 레어티스? 순리에 맞는 일이라면 야 과인이 안 들어줄 리 있겠느냐? 네 소청이 무어냐, 레어티스. 애걸하지 않아도 들어줄 것이다. 머리와 심장의 관계가 매우 깊고 손이 입에 음식을 나르기 위해 긴요하긴 하나 덴마크의 왕과 네 부친과의 관계를 따를 수 있겠는가. 네 소청은, 레어티스? 레어티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을 프랑스로 돌아가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곳에서 폐하의 대관식에 참례하기 위해 기꺼이 덴마크로 돌아왔으나, 그 대사도 끝나고 보니 신의 마음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어 윤허해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왕: 부친의 승낙을 받았느냐? 폴로니어스경의 의향은? 폴로니어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자식놈의 성화에 못 이겨 그만 본의 아닌 승낙을 하고 말았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소청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왕: 좋은 날을 택하여 출발하여라, 레어티스.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네 훌륭한 자질로 보아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으렷다... 그건 그렇고, 내 조카 햄릿, 이제는 내 아들.... 햄릿: (방백) 핏줄은 통한다마는 마음은 구만 리 밖이라. 왕: 얼굴에 서린 구름이 왜 걷히질 않느냐? 햄릿: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햇살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왕비: 그렇다면 햄릿, 그 어두운 상복을 벗어버리고 폐하께 좀더 정답고 부드러운 눈길로 대하거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돌아가신 아버님만 흠모할 것이 아니다. 그게 모든 인간의 운명이란다. 생자는 필사라 했으니, 누구나 한 번은 이승에서 영겁의 세계로 떠나는 법이다. 햄릿: 예, 왕비 전하. 인간의 운명입니다. 왕비: 그렇다면 어찌하여 넌 유별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느냐? 햄릿: 보이다뇨? 왕비 전하! 사실이 그렇습니다. '보이다'니 소잔 그런 것 모릅니다. 어머님, 소자의 어깨에 걸친 이 새까만 외투도, 소자가 입고 있는 의례적인 검은 상복도, 맷돌질하듯 갈아내는 무거운 한숨도, 아니 내를 이루듯 샘솟는 눈물도, 수심에 찬 풀죽은 얼굴 모습도, 그 밖의 슬픔을 나타내는 천태만태의 모양이나 표정, 그리고 온갖 겉치레도, 소자의 진정을 드러내기엔 미흡합니다. 하기야 그런 것들은 그럴듯하게 보일 테죠. 그 따위 연극쯤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슴 속에 사무친 비애는 그 따위 슬픔의 겉치레 옷 따위와는 다릅니다. 왕: 부친을 그토록 애도함은 햄릿, 네 심성이 어질고 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부친 또한 어버이를 여의셨고, 네 조부 또한 그 어버이를 잃으셨다. 살아 남은 자식은 자식된 도리로 어느 기간 상복을 입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통에 젖어 슬퍼함은 도리어 신의 뜻에 어긋나며 대장부답지 못한 일이다. 하늘에 대한 용렬한 오만이요, 마음이 허약하고 정신이 혼미한 탓이며, 이해력이 무디고 경험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죽음이란 인간상사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거늘 어찌해서 넌 하늘의 뜻을 어기고 어리석게도 가슴 속에 슬픔을 응어리지게 하느냐? 아서라, 이는 천도에 어긋나며, 고인에 대한 불충이요, 자연에 대한 역행이요, 이성에 대한 반역이니라. 부친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태초에 죽은 자로부터 오늘 죽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음만은 피할 수 없다'고 되뇌어 왔지 않느냐... 과인의 부탁이다, 그 무익한 비애는 땅에 집어던지고 과인을 친아버지로 섬겨다오. 만천하에 알리거니와 넌 과인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 친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인자함과 견주어 보아 어찌 못하다 하겠는가... 위텐버그 대학으로 되돌아가고 싶겠지만, 이는 과인의 뜻과는 매우 어긋나는 일, 그런즉 과인의 진정한 소망이니 여기 남아 과인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어다오. 과인의 중신으로, 과인의 조카로, 과인의 아들로 있어다오. 왕비: 이 어미의 청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햄릿. 부탁한다, 우리 함께 있자. 위텐버그로 가지 말구. 햄릿: 소자 애오라지 분부를 따를 뿐입니다, 왕비 전하. 왕: 오, 참으로 기쁘고 기특한 대답이로고. 과인과 함께 덴마크에서 살도록 하자. 왕비, 자, 안으로 듭시다. 햄릿이 갸륵하고 티없는 승낙을 들으니 마음이 무한히 기쁘구려. 자, 오늘은 축하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리다. 덴마크의 왕이 즐거운 축배를 한 잔 한 잔 들 때마다 하늘에 축포를 터뜨려야겠소. 그럼 과인의 축배는 하늘에 메아리치고 이 땅에 천둥으로 화답할 것이오. 자 들어갑시다. (화려한 트럼펫 소리. 햄릿만 남고 모두 퇴장) 햄릿: 아, 너무도 추하고 더러운 이 몸뚱어리, 녹고 녹아서 이슬이라도 되어 없어져 버려라. 차라리 이 땅에 자살을 죄로 몰아치는 신의 율법이 없었던들. 못 견딘다, 싫다, 세상 만사가 모두 내게는 진저리나고 고리타분하고 밋밋하고 부질없다. 에잇, 지겨워. 이 세상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정원, 더럽고 흉물스런 것들만이 우글대고 있다. 이렇게 변할 줄이야. 돌아가신 지 겨우 두 달, 아니 두 달도 채 못돼. 영특하신 선친과 현왕을 견줘 보면 태양신과 괴물과의 차이지. 아버님이 어머님을 그토록 사랑하셨건만. 바깥바람이 행여나 어머님 얼굴에 거칠게 불세라 염려하신 어른이셨는데... 하늘과 땅이여, 기억을 되씹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어머님은 또 얼마나 아버님 곁에 붙어 다녔던가, 마치 사랑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 나듯이. 그런데 한 달도 못되어, 아니 생각지 말자...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 겨우 한 달, 나이오비 여신처럼 눈물에 젖어 가엾은 아버님의 영구를 따라가던 그 신발이 미처 닳기도 전에 어머니가, 그 어머니가-알 수 없는 일, 이성의 분별이 없는 짐승일지라도 그보다는 슬픔이 오래 갔을 거다-아버님의 동생인 저 숙부와 결혼을 하다니, 형제라고는 하지만 두 분은 나와 허큘리스의 차이만큼이나 전혀 딴판인데. 한 달도 못돼서 애통해 하는 거짓 눈물의 짠 맛이 눈동자의 핏발을 채 가시게 하기도 전에 결혼하다니. 오, 얼마나 두터운 가죽을 얼굴에 둘러썼기에... 그 추악한 잠자리 속으로 그처럼 재빨리 기어들어 갔을까! 있을 수 없는 일. 절대로 잘될 리 없지. 그러나 이 가슴이 빠개진다 해도 입은 다물어야 한다. 호레이쇼, 마셀러스, 바나도 등장. 호레이쇼: 햄릿 전하, 안녕하십니까! 햄릿: 이여, 정말 오랜만일세, 호레이쇼. 그대를 잊을 뻔했군! 호레이쇼: 틀림없는 전하의 충실한 하인 호레이쇼입니다. 햄릿: 아니, 자넨 내 친구가 아닌가. 난 자네 친구고. (손을 꽉 쥔다) 그런데 어째서 위텐버그에서 왔지, 호레이쇼? 마셀러스.(손을 내민다) 마셀러스: 문안드립니다, 햄릿 전하! 햄릿: 만나서 참으로 반가우이... (바나도에게) 자네도 잘 있었나? (호레이쇼에게) 무슨 일로 위텐버그에서 돌아왔는가? (호레이쇼를 떼어놓는다) 호레이쇼: 원래 게을러서 학교를 잘 빼먹죠, 전하. 햄릿: 자네의 원수라도 그런 험담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날세. 하물며 자기 험담을 한다 해서 그런 자네 말 내가 귀담아 들을 것 같나? 자넨 게으름뱅이가 아냐. 대체 무슨 일로 엘시노에 왔나? 어물거렸다가는 술망태가 돼 갈 거야. 호레이쇼: 전하, 실은 선왕폐하 국상에 참례하러 왔습니다. 햄릿: 부탁이네, 날 놀리지 말게, 우린 학우가 아닌가. 어머님 결혼식을 구경하러 왔겠지. 호레이쇼: 하긴 전하, 일이 잇달아 있었네요. 햄릿: 절약, 절약일세, 호레이쇼. 초상 밥이 식기 전에 혼인 상에 올려야 한단 말이야.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천당에 미리 가 원수를 만나는 게 나았었지. 그렇지 않나, 호레이쇼-아버님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 호레이쇼: 어딥니까, 전하? 햄릿: 내 마음의 눈이지, 호레이쇼. 호레이쇼: 저도 뵈었습니다마는 훌륭하신 왕이셨습니다.... 햄릿: 훌륭한 분이셨어, 어느 점으로 보나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분이실 거야. 호레이쇼: 전하, 실은 그분을 뵈었습니다. 어젯밤에 말입니다. 햄릿: 뵈었다니, 누굴? 호레이쇼: 잠시 놀라움을 진정하시고 차분히 들어주십시오, 그 괴이한 일을 말씀드리죠. 이 두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는 마셀러스와 바나도를 돌아다본다) 햄릿: 어서 들려주게! 호레이쇼: 마셀러스와 바나도 두 사람이 보초를 서는데 연거푸 이틀 밤이나 산천초목도 고이 잠든 한밤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꼭 부왕의 모습을 한 형체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갑옷을 걸치고 경비를 하고 있는 이두 사람 앞을 유유히 위엄 있게 지나가는데, 손에 들고 있는 홀이 두 사람에게 닿을 정도의 사이를 두고 그것도 세 번이나 지나갔답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어찌나 놀랐던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고, 말 한마디 걸어 보지 못했답니다. 두 친구가 이런 얘길 제게만 은밀히 털어놓기에 사흘 째 밤엔 저도 두 사람과 함께 보초를 서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도 모습도 두 사람이 말한 그대로 틀림없이 망령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선왕폐하와 이 두 손인들 어찌 그렇게 꼭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햄릿: 그 장소가 어딘가? 마셀러스: 전하, 저희들이 경비 섰던 저 망대 위입니다. 햄릿: 말을 걸어 보지 않았나? 호레이쇼: 전하, 걸어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고 한 번 고개를 쳐들어 무슨 말을 할 듯할 듯 하려는 찰나 새벽을 알리는 우렁찬 수탉 소리가 나자 그 소리에 그만 자지러지게 놀라 황망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햄릿: 아니, 그럴 수가? 호레이쇼: 맹세코 사실입니다, 전하. 그래서 전하께 알려드리는 게 저희들의 도리라 사려되어 왔습니다. 햄릿: 물론이지, 이건 심상치 않은 일이군, 오늘밤도 보초를 서나? 일동: 예, 전하. 햄릿: 갑옷을 입었다구 했겠다? 일동: 예, 그러하옵니다. 햄릿: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일동: 예, 그러하옵니다. 햄릿: 그럼 얼굴은 못 보았겠군? 호레이쇼: 보았습니다, 투구의 면갑이 올려져 있어서요. 햄릿: 성난 얼굴이던가? 호레이쇼: 그보다는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햄릿: 파리하던가, 아니면 불그레한가? 호레이쇼: 아주 창백했습니다. 햄릿: 똑바로 쏘아보던가? 호레이쇼: 줄곧 쏘아보았습니다. 햄릿: 나도 함께 있었더라면. 호레이쇼: 심히 놀라셨을 겁니다. 햄릿: 그랬을 테지. 오래 머물렀나? 호레이쇼: 아마 천천히 백을 셀 동안은 될 겁니다. 마셀러스, 바나도: 좀더 깁니다, 좀더. 호레이쇼: 길지 않았습니다. 햄릿: 수염은 어땠나? 희끗희끗하던가? 호레이쇼: 생존시 뵈었을 때처럼 은빛 섞인 검은 수염이었습니다. 햄릿: 오늘밤엔 나도 망을 서겠네. 아마 또 나타날 테지. 호레이쇼: 필시 또 나타날 겁니다. 햄릿: 만약 선왕 그대로의 모습이라면 말을 걸어 보겠다. 비록 지옥이 입을 벌리고 침묵을 지키라 윽박질러도 말이다. 부탁컨데 여태껏 이 일을 숨겨둔 이상 앞으로도 침묵 속에 묻어둬야 되네. 그리고 오늘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가슴에 새겨두고 행여 입밖에 내선 안되네. 자네들의 우정, 앞으로 보답함세. 자 그럼, 가보게. 열한 시나 열두시 사이에 망대에서 우리 만나세. 일동: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햄릿: 우정이라는 편이 옳지. 잘들 가게. (햄릿만 남고 모두 절을 올리며 퇴장) 아버님의 혼령이 갑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상치가 않구나. 필시 흉계가 있나 보다. 밤이여, 빨리 와다오. 그때까진 내 혼이여, 안존히 있거라, 악행은 결국 얼굴을 내미는 법, 비록 온 누리가 사람의 눈을 가린다 해도. (퇴장) [ 제3장 폴로니어스의 저택의 한 방 ] 레어티스와 그의 누이동생 오필리어 등장. 레어티스: 짐은 배에 실어 놨다. 잘 있거라. 오필리어, 풍향이 좋고 선편이 있거든 잠만 자지 말고 소식을 보내다오. 오필리어: 그런 염려는 마세요. 레어티스: 햄릿 왕자님께서 내게 호의를 가지신 모양인데 그건 다 젊은 혈기의 바람이요, 한때의 객기라고 생각해둬.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이라 할까. 피기도 일찍 피지만 오래 안 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내 시들어 버린단다. 향기롭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오필리어: 정말 그뿐일까요? 레어티스: 그렇다. 인간이 성장할 때엔 근육과 부피만이 뻗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커지면서 그 안에 담은 마음도 정신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아마 왕자님께서 현재는 널 사랑하시겠지. 지금이야 순정을 더럽힐 흠도 없고 허위도 없을 테지. 그러나 그분의 신분이 높으시니 당신 뜻대로만 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넌 명심해야 하느니라. 신분에 꽉 묶이시어 자유가 없으시다. 일반 서민들처럼 마음대로 하실 수 없는 처지야. 그분의 결정 하나에 국기 전체의 안전과 번영이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자빈의 간택도 왕자님을 받들어 모시는 이 나라 국민의 지지와 찬성이 따라야만 되는 거다. 그러니 아무리 널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더라도 어디까지나 덴마크 전국민의 동의가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언약을 실행으로 옮길 수 없는 특별한 환경과 지위에 있으신 분이니까 너로서는 그런 언약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 왕자님의 달콤한 사랑의 노래에 솔깃해져 넋을 잃고 무턱대고 너의 그 보배로운 정조를 내주는 날엔 너의 명예는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유념하거라. 알겠느냐, 오필리어. 조심하는 거다. 오필리어, 사랑에서는 뒷전에 물러앉아 위험한 정욕의 화살이 꽂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청순한 처녀는 아름다운 살갗을 달님 앞에 보여주는 것조차 계면쩍어한다'고 하지 않느냐. '열녀라 해서 세상사람들이 중상을 모면할 길 없느니라''봄철의 새싹은 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벌레한테 먹혀 시드는 일이 너무도 허다하다. 맑은 아침 이슬은 땅 위에 내리자마자 독기가 서려들며 위협을 가해온다'고한다. 그러니 경계하라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조심하는 게 제일이다. 청춘이란 가까이서 자극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배신하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오필리어: 오라버님의 간곡한 말씀 가슴에 새겨 마음의 수문장으로 삼겠어요. 하지만 오라버님, 속이 검은 어떤 목사들처럼 남에게는 천당 가는 길이 험하고 가시밭길이라고 타일러 놓고 자기 자신은 우쭐해서 망나니 탕아처럼 환락의 꽃밭길을 누비면서 자지가 한 설교를 소 닭보듯 하진 마세요. 폴로니어스 등장. 레어티스: 쓸데없는 걱정 마라. 너무 지체했다... 아버님이 오신다. 거듭 축복을 받으면 거듭 은혜를 받는 셈. (무릎 꿇는다) 마침 잘 됐다. 다시 한번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폴로니어스: 여태 있었구나! 어서 배에 오르거라, 어서! 돛이 바람을 한껏 안고 모두 널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늑장 부렸구나. 그래... 무사하기를 빈다... (그의 손을 레어티스의 머리에 얹는다) 몇 마디 충고를 할 터이니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라.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함부로 입밖에 털어놓지 마라. 엉뚱한 생각을 언동에 옮기지 마라. 친구는 사귀되, 절대 가깝게 대하지 말아라. 일단 친구를 사귀어서 진정한 우정이 보이면 쇠사슬로 자기 마음에 꽁꽁 묶어 둬라. 그렇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풋병아리들과 악수하느라 손바닥 감각만 잃게 하는 그런 일은 말아라. 싸움판에 끼어들지 말 것이며, 만일 말려들어서 싸울 바에야 상대가 미워할 정도로 호되게 혼쭐을 내줘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되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도 성급한 판단을 삼가해라. 주머니 사정이 허용하는 한 비싼 옷을 사라. 그러나 별나게 묘한 옷은 피하라. 값지되 사치해선 안된다. 의관은 종종 인품을 나타내 준다고 하니까, 그래서 문벌과 지체 높은 프랑스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특히 의복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빚을 져서도, 주어도 안돼. 빚을 주면 돈과 친구 둘 다 잃고, 빚을 지면 절약하는 습성이 무디어지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자기자신에게 충실해라. 그렇게 되면 밤이 낮을 따르듯 기필코 너 자신도 남에게 성실해질 것이다. 잘 가거라... 아비 말을 가슴에 새겨둬라! 레어티스: 이제 떠날까 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폴로니어스: 출항시간이 됐다. 어서 가봐라. 다들 기다린다. 레어티스: (일어서면서) 잘 있어, 오필리어, 내 말을 잘 기억해 두라구. 오필리어: 이 가슴 속에 잠가놓고 그 자물쇠는 오라버님에게 맡깁니다. (그들 포옹한다) 레어티스: 잘 있어. (퇴장) 폴로니어스: 애야, 네 오라비가 무슨 말을 하더냐? 오필리어: 예, 햄릿 왕자님의 얘기예요. 폴로니어스: 음, 그랬구나. 듣자하니 근자에 왕자님께서 자주 네게 납신다던데, 너도 스스럼없이 왕자님을 맞이한다면서? 사실이 그렇다면... 그런 일은 무척이나 조심해야 한다고 나도 사람들한테 듣고 있지만... 네게 한마디 일러 둬야겠다. 넌 내 딸이다. 네 정조와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둘 사이는 어떠냐, 응? 솔직히 말해봐라. 오필리어: 왕자님께서 요사이 여러 번 제게 애정을 토로하셨어요. 폴로니어스: 뭐 애정을? 허허! 참 철딱서니 없는 애야, 피가 마르는 고비를 겪어 봐야 알지. 그래 왕자님 말씀이 진짜로 들리느냐? 오필리어: 글쎄요, 아버님. 어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폴로니어스: 오냐, 내가 가르쳐 주마... 가짜 돈과도 같은 애정을 진짜 보화로 알다니 넌 정말 젖먹이로구나. 좀더 비싸게 처신하란 말이다. 말도 너무 부려먹으면 숨이 끊어지는 법, 그러니 대강해 둔다면 이렇게 실없고 매가리 없이 처신하다간 나에게 어처구니없는 애기 하나 선사하게 될라. 오필리어: 아버님, 하지만 왕자님께선 진정으로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폴로니어스: 그야 겉으로는 그럴 거다. 그만 집어치워라. 오필리어: 아버님, 왕자님께선 티끌만치도 거짓은 없다고 하늘에 맹세하셨습니다. 폴로니어스: 뭐야? 그게 바로 바보새를 잡는 덫이란다. 글쎄 피가 달아오르면 영혼이 무슨 맹세든 못하겠니. 그런데 본시 타오르는 불꽃처럼 휘황하지만 열은 없느니라. 언죽번죽 맹세를 지껄이는 동안에 빛도 열도 사라지는 거다. 이러한 공중에 뜬 맹세를 진짜 애정이라고 믿어선 안된다. 이제부터는 혼전의 규수로서 몸가짐을 홀하게 굴지 마라. 왕자님이 만나잔다고 호락호락하게 듣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을 명령으로 듣지 말고 좀더 값비싸게 처신하라는 말이다. 햄릿 왕자께선 젊으시고 너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분이시다. 그쯤 알고 그분을 대하란 말이다. 간단히 말해 오필리어, 왕자님의 맹세는 믿을 게 못돼. 뚜쟁이 말이나 다를 바 없어. 아름다운 겉치레하고는 너무도 판이하단다. 단지 부정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스럽고 경건한 인품을 갖춘 척 그런 말솜씨로 여인을 속인단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일러둔다만, 이후로는 아주 잠시라도 함부로 왕자님과 만나서도 안되며, 말도 서로 건네서는 안된다. 알겠지, 아비의 명령이다. 자, 들어가자. 오필리어: 명심하겠어요, 아버님. (두 사람 퇴장) [ 제4장 성벽의 초소 ] 햄릿, 호레이쇼와 마셀러스 한 포탑에서 등장. 햄릿: 살을 에는 바람이구나. 동태가 되겠는 걸. 호레이쇼: 살을 도려내는 매운 날씨입니다. 햄릿: 몇 시나 됐을까? 호레이쇼: 아직 자정이 안됐습니다. 마셀러스: 아닙니다. 자정을 쳤습니다. 호레이쇼: 그래? 난 듣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망령이 나타날 시각이 다가오는구나. (화려한 트럼펫 소리, 축보 소리) 저건 뭡니까, 전하? 햄릿: 왕이 밤을 새워가며 주연을 열고 있어 코가 빠지도록 마셔라 추어라 난장판이지. 왕이 라인산 백포도 술잔을 들이킬 때마다 저렇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어제끼며 기세를 올리는 걸세. 호레이쇼: 그게 관례입니까? 햄릿: 아, 그래. 그렇지만 비록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나이지만 저런 관습을 지키기보단 차라리 깨버리는 게 훨씬 명예롭지. 저렇게 진탕 퍼마시는 술타령 때문에 동서양 전세계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받는 거지. 사람들은 우리들을 술망태니 돼지니 하고, 우리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되는 거지. 그러니 사실 말이지만 우리가 훌륭한 입적을 제아무리 애써서 번듯하게 쌓아올렸다 해도 그 명예는 쭉정이가 되고 마는 셈이라네. 이건 개인의 경우에도 흔히 있는 일이야. 말하자면 선천적으로 어떤 결점이 있다면 그건 타고난 것이니, 본인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지.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 태어날 수 없으니까 말일세.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의 결점이 자꾸만 커져 이따금 이성의 울타리를 부수고 성벽 밖으로 뛰어넘어 가거나 어떤 나쁜 습성이 활개를 쳐서 미풍양속을 해치게 되는 경우... 이런 사람들은 그것이 자연이 입혀준 옷이든 운명의 별이 준 우연이든 어쨌든 그 한 가지 결점의 흔적으로 해서 티없이 맑은 미덕을 아무리 많이 지니고 있어도 훌륭한 결점때문에 사람들한테 썩어빠졌다는 지탄을 받게 마련이지. 한 가닥 결점이 흔히 인간의 선한 품성을 무로 돌리고 결국은 불명예를 초래하게 되는 걸세. 망령 등장. 호레이쇼: 전하, 저길 보십시요. 그게 나타났습니다! 햄릿: 천사들이여, 신의 정령들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대는 거룩한 신령이냐, 지옥의 악귀냐? 천상에서 내린 정기냐, 아니면 지옥에서 솟아난 독기냐? 그대 마음 속 선악의 의도는 모르겠다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을 물어 보겠다. 그대를 햄릿, 국왕, 아버지, 덴마크왕이라 부르리라. 자 어서 대답하라! 답답해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장례의식에 따라 왕릉에 모신 유해가 왜 수의를 찢고 나타났는가? 고인이 고이 안치됨을 우리가 확인했던 무덤이여, 어찌하여 육중한 대리석 입을 열어 사자를 이 세상에 다시 토해냈는가? 유명을 달리한 시체가 어찌하여 갑옷과 투구로 완전 무장하고 하필이면 어스름 달빛 아래 다시금 나타나 이 밤을 소름끼치게 하는가? 허수아비 같은 우리를 놀라게 하여 이치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가? 대답하라, 그 연유를! 이유를! 어찌하라는 것인가? (망령, 햄릿을 손짓해 부른다) 호레이쇼: 전하에게만 조용히 하고픈 얘기가 있는 듯 왕자님만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합니다. 마셀러스: 저것 보세요, 저 정중한 손짓, 한적한 곳으로 가자는 눈치입니다. 그러나 따라가진 마십시오. 호레이쇼: 절대 안됩니다. 햄릿: 여기선 입을 열 것 같지 않다. 따라가겠다. 호레이쇼: 안됩니다. 햄릿: 왜냐,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바늘만큼도 아깝지 않은 이 목숨, 내 영혼은 말하자면 저것처럼 영원불멸인데, 내가 두려워할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오라는 손짓이다. 그래 따라가마. 호레이쇼: 만약의 경우지만 저것이 전하를 해변가나 바다로 튀어나온 깎아지른 벼랑 꼭대기로 유인해 갑작스레 무서운 괴물로 둔갑하여 전하의 이성의 힘을 빼앗아 실성하게 하면 그땐 어찌하실 겁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험한 절벽 위에 서서 저 발 아래 바다와 파도 소리만 들어도 바로 그 장소는 무서워 누구라도 넋을 잃게 마련입니다. 햄릿: 자꾸 손짓을 한다. 그래 따라가련다. 마셀러스: 가시면 아니됩니다, 전하. 햄릿: 어서 이 손을 놔라. 호레이쇼: 충언을 들으십시요. 안됩니다. 햄릿: 내 운명이 재촉한다. 니미아 산중의 사자 힘줄기처럼 이 몸의 핏줄에 힘이 솟구치고 있다. 아직도 날 부르고 있다. 손을 놔라. (그는 두 사람을 뿌리치고 칼을 뺀다) 누구나 날 막으면 단칼에 목을 벨 테다! 비켜라, 비켜! 저리가, 난 따라가겠다. (망령이 한쪽 포탑으로 사라진다. 햄릿이 뒤를 따라간다) 호레이쇼: 홀리셨어, 그래서 물불 안 가리셔. 마셀러스: 따라가야 해.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호레이쇼: 쫓아가세... 이 일이 어떻게 될까? 마셀러스: 이 덴마크라는 나라는 어딘가 썩어 있어. 호레이쇼: 하느님이 인도하시겠지. 마셀러스: 어서 따라가 보세, (두 사람 햄릿 뒤를 따라서 퇴장) [ 제5장 성벽 밑 빈터 ] 성벽의 문이 열린다. 망령이 먼저 나타나고, 햄릿이 빼든 칼자루를 십자가 삼아 들고 망령의 뒤를 따른다. 햄릿: 어디까지 끌고 가는 거냐? 말하라, 난 더 이상 못 간다. 망령: (뒤돌아다보며) 잘 듣거라. 햄릿: 듣겠다. 망령: 이글이글 불타는 연옥의 불길 속으로 이 몸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햄릿: 오 가엾은 영혼! 망령: 날 동정 말라. 내가 이제 밝히려는 얘길 귀담아 들어라. 햄릿: 말하라, 귀담아 듣겠다. 망령: 내 얘길 들은 뒤 복수할 것을 잊지 말라. 햄릿: 뭐라고? 망령: 난 네 아비의 혼령이다. 밤이면 한동안 지상에 나타나 헤매다가 낮이 되면 연옥의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이승에서 지은 여러 가지 죄를 깨끗이 불태워 버릴 때가지 참아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연옥의 비밀들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비밀을 한마디만 털어놓아도 넌 넋이 빠지고 말 것이다. 네 젊은 피는 얼어붙고 유성이 천공을 튀어나오듯 내 두 눈망울도 튀어나올 것이며, 곱슬곱슬 엉킨 네 머리칼은 그 한 올이 한 올이 성난 고슴도치의 억센 가시처럼 빳빳이 곤두서게 되리라. 하지만 저승의 비밀은 인간 귀에 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듣거라, 듣거라, 오 듣거라! 내가 진정 이 아빌 사랑했었다면... 햄릿: 오오! 망령: 이 극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 햄릿: 살인! 망령: 살인은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살인이야, 악독한 짓, 살인이야말로 가장 비열하고 끔찍하고 흉악한 짓이란다. 햄릿: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한순간에 천리를 달리는 상상력보다 더, 사랑의 욕망보다 더 빨리 복수하러 날아가겠나이다. 망령: 미더운 말이로다. 만일 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분기하지 않는다면 망각의 강변에 무성한 잡초보다도 더 쓸모 없는 미욱한 인간이리라. 햄릿, 들어봐라. 내가 정원에서 낮잠을 자다가 독사에게 물려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덴마크의 백성들은 그럴듯하게 꾸민 내 죽음의 조작극에 감쪽같이 속고 있느니라. 훌륭한 내 아들아, 들어라. 아비를 독살한 그 뱀이 지금 아비의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햄릿: 오, 내 예감이 맞았군! 내 숙부가? 망령: 그렇다. 음탕과 불륜을 일삼는 금수같은 놈. 타고난 사악한 지혜와 음흉한 간계로써, 오! 마음 속에 꽃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 계집을 홀리는 데도 능숙한 놈! 절개가 대쪽같이 보이던 왕비를 유혹해 음란의 늪으로 빠지게 했느니라. 오 햄릿, 이 얼마나 끔찍한 타락이요, 배신이 아니겠느냐? 내 사랑은 내가 혼례식 때 손과 손을 맞잡고 그녀에게 엄숙히 맹세했던 거룩한 언약을 어기지 않았건만. 나와 비교하여 그토록 천성이 비천하고 비열한 놈의 품에 안기다니. 그러나 정절은 비록 음탕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꾀인다 해도 곁눈질도 안하는 법. 탕녀는 천사와 짝이 돼도 천상의 잠자리에 권태를 느껴 썩은 살 냄새를 밝히는 법. 오오, 이제 아침 공기 내음이 퍼져오나 보다. 대충 말해주마. 내가 오후 늘 하는 버릇대로 정원에서 낮잠을 즐기는 틈을 타서 네 숙부가 독액이 든 병을 들고 내게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와서 문둥병처럼 육체를 썩게 하는 비상을 내 귀청에 부었다. 이 독약은 사람의 피와는 상극이라 신체 안에 뻗힌 혈관에 들어만 가면 수은처럼 삽시간에 온몸에 퍼져 별안간 꼬리를 치면서 마치 우유에 식초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이 맑고 정한 피를 굳어 버리게 한다. 내 피도 그렇게 됐다. 당장에 문둥이 같고 더럽고 흉측한 부스럼이 덕지덕지 생겨 내 부드러운 살결을 짓무르게 했다... 이리하여 난 낮잠을 자다가 내 친아우의 손에 내 생명, 내 왕관, 내 왕비까지 한꺼번에 빼앗기고 말았느니라. 생전의 죄를 씻지도 못한 채 난 목숨이 끊겨 성찬식도 없이 장례 때 성유도 못 바르고 고해조차도 못 하고 이 모든 허물을 뒤집어 쓴 채 신의 심판 앞에 끌려 나오게 됐다. 원통하다! 원통해! 정말 원통하다! 네게 천륜의 애정이 있다면 잊지 말라. 덴마크왕의 용상을 간음의 저주받는 잠자리로 만들지 말라. 그렇지만 네가 아무리 죄상을 캔다 해도 이성을 잃지 말고 네 어머니를 해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하늘이 어머니를 벌하게 하고 양심의 가시가 마음을 아프게 찌르도록 내버려 둬라. 이제 곧 가야 한다. 반딧불의 빛조차 희미해져서 가물가물 꺼져가는 걸 보니 새벽녘이 다가섰나 보다. 잘 있거라, 잘 있어, 잘 있거라, 이별 잊지 말라. (망령이 땅속으로 사라진다. 햄릿은 넋을 잃고 무릎을 꿇는다) 햄릿: (악을 쓴다) 오 하늘에서 반짝이는 뭇별들이여! 오 대지여! 또 무엇이 있는가? 지옥이라도 부를까? 오, 아서라! 정신을 차려라, 차려, 내 마음아. 그리고 내 근육도 시들지 말고 단단히 버티어다오... (일어선다) 그대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아 가엾은 혼백이여, 이 어지러운 머리 속에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어찌 그대를 잊겠는가? 자아, 내 기억의 수첩에서 시시하고 남아 있는 한, 어찌 그대를 잊겠는가? 자아, 내 기억의 수첩에서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기록은 싹 뭉개버리겠다. 어려서부터 익혀온 금언명구, 모든 형상, 지난날의 감명 모두 다. 그러나 당신의 명령만은 내 기억의 수첩 속에 깊이 새겨둘 것이다. 잡동사니들과 섞이지 않게 하마... 아아 하늘이여! 아아 참으로 앙칼진 여자로다! 아아 악당, 악당, 미소까지 짓는 저주받을 악당! 내 수첩에 확실히 적어두자. (무언가 적는다) 아무리 미소 짖는다 해도 악당은 악당이다. 적어도 덴마크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자, 숙부여 여기에 확실히 적었다. 이번엔 내 좌우명이다. '잘 있거라, 잘 있어, 아빌 잊지 말라'... (그는 무릎을 꿇고 칼자루에 손을 얹는다) 분명히 맹세했다. (기도를 드린다) 호레이쇼와 마셀러스 궁전에서 나와 어둠 속에서 불러낸다. 호레이쇼: (안에서) 전하, 전하! 마셀러스: (안에서) 햄릿 전하! 호레이쇼: (안에서) 무사하세요? 햄릿: 이제 됐다! (일어선다) 마셀러스: (안에서) 훠어이 훠어이 훠어이 전하! 햄릿: 훠어이 훠어이 훠어이 여기야! 새야 오너라, 이리 와. (마셀러스와 호레이쇼, 햄릿을 발견한다) 마셀러스: 어떠하셨습니까, 전하? 호레이쇼: 어찌됐습니까, 전하? 햄릿: 아, 놀랍다! 호레이쇼: 전하, 어서 말씀해 주소서. 햄릿: 안돼, 누설이 두렵다. 호레이쇼: 전하,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마셀러스: 전하, 없을 겁니다. 햄릿: 그럼 의견을 들어보세. 대체 어떻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는가? 비밀을 지킬 테지? 호레이쇼, 마셀러스: 예, 맹세하나이다, 전하. 햄릿: 이 덴마크 천지에 사는 악당 치고 극악한 악당이 아닌 자는 하나도 없다. 호레이쇼: 전하, 그런 말을 알려 주려고 망령이 무덤에서 일부러 나올 린 없지 않습니까. 햄릿: 아암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변죽만 울리는 말을 할 것 없이 우리 악수나 하고 헤어지는 게 좋지 않겠나. 자네들은 자네들 할 일과 볼 일 보러 가고, 사람들이란 저마다 할 일과 볼 일이 있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내게도 할 일이 있으니, 내 말 귀담아 듣게. 기도 드리러 가겠네. 호레이쇼: 어쩌자고 이렇게 터무니없고 허황된 말씀만 하십니까, 전하. 햄릿: 노엽게 했다면 진정으로 미안하이, 정말로 미안하다구. 호레이쇼: 화난 건 아닙니다, 전하. 햄릿: (호레이쇼에게) 아냐, 연옥의 수문장 페이트릭 성자를 걸고 맹세한다. 호레이쇼, 대단히 나쁜 일이 있었어. 아까 나타난 허깨비 말인데, 그건 진짜 망령이라는 걸 내 알려주지. 우리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적당히 참아주게. (두 사람에게)그런데 자네들은 내 친구요, 학자요, 군인이지, 내 간청을 한 가지 꼭 들어주게. 호레이쇼: 무슨 말씀이신지요, 전하? 들어드리다 뿐이겠습니까. 햄릿: 오늘밤 일은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주게. 호레이쇼, 마셀러스: 전하, 염려마십시오. 햄릿: 아냐, 맹세해. 호레이쇼: 맹세코 누설 않겠습니다. 마셀러스: 이미 맹세했습니다, 전하. 햄릿: 아냐, 이 칼에 걸고 맹세하라. 망령: (지하에서 외친다) 맹세하라. 햄릿: 허허, 이놈 봐라! 너도 이죽거릴 줄 아는구나? 착하고 늙은 망령이여! 이리 오라. 자네들, 지하에서 들려온 저자의 소릴 들었지? 어서 맹세하라. 호레이쇼: 맹세의 문구를 말씀하십시오. 햄릿: 자네들이 본 일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이 칼에 걸고 맹세하라. (그들은 손을 칼자루에 얹는다) 망령: (땅속에서) 맹세하라. 햄릿: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는구나! 그럼 우리 자리를 옮겨 보세. 이리로 옮기세, 친구들. 다시 한번 칼에 손을 대고 맹세하라. 내 칼에 걸고 들은 얘길 절대로 발설 않겠다고 맹세를 하라. 망령: (땅속에서) 맹세하라, 그 칼에 걸고. 햄릿: 잘한다, 두더지 영감! 어찌 그리도 날쌔게 땅을 뚫는가? (그들은 침묵 속에서 다시 맹세한다) 호레이쇼: 어이구, 이렇게 엄청난 변괴는 내 생전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햄릿: 그래 그러니까 낯선 객이라 생각하여 반겨주게. 하늘과 땅 사이엔 호레이쇼, 우리네 학문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해괴한 일들이 많이 있지. 그건 그렇구 이보게... 아까 했듯이 여기서 다시 맹세해 주게. 바라건대 내가 금후 아무리 이상하고 별난 행동을 한다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미친 척할는지도 모르니깐 그대들이 내 몰골을 보고 이렇게 팔짱을 낀다든가, 또는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면서 까닭있는 듯한 말투로 '그으래 그으래 우린 다 알아'라든가, 또는 '설명하자면 할 순 있지'라든가,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이라든가, '말해도 좋다는 사람들이 있다면'등등, 그 따위 애매한 말을 중얼대면서 자네들이 내 신사에 관해서 비밀을 알고 있는 척하지 말란 말일세... 맹세해, 간청하네, 절대로 그런 일 안한다고! 망령: (땅속에서) 맹세하라. 햄릿: 진정하라, 진정해, 괴로운 혼백이여! (그들은 세번째의 맹세를 한다) 친구들, 내 정성을 다해 그대들에게 보답하려네. 이 햄릿, 지금은 무력하지만 장차 신의 은총을 입어 자네들의 우정에 보답하는 날이 있을 걸세. 자,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가세. 항시 입을 봉하도록 신신당부하네. 지금은 온통 꼬이고 휘어진 어지러운 세상, 오 저주받은 운명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내가 태어나다니! 자자, 함께 어서 가자. (모두 성으로 들어간다) 수 주일이 경과한다. [ 제2막 ] 만일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 개송장에다 구더기를 뒤끓게 한다면 햇빛은 썩은 고기에 입맞추는 셈이지... - 2장 햄릿 대사 중에서 [ 제1장 폴로니어스 저택의 한 방 ] 폴로니어스와 레이낼도 등장. 폴로니어스: 이 돈과 서찰을 내 아들에게 전해다오, 레이낼도. 레이낼도: 예, 대감마님. 폴로니어스: 그곳에 가거든 방심 말고 알아서 처신해야 하느니라. 아들을 만나 보기 전에 그애 행적을 낱낱이 염탐하구. 레이낼도: 대감마님, 그럴 셈이었습죠. 폴로니어스: 암 그래야지, 썩 잘 생각했다. 먼저 알아볼 것은 파리에는 어떤 부류의 덴마크인들이 와 있으며, 어떻게 살고, 그게 누구며, 그들의 수입, 자주 가는 장소, 친구는 누구고, 돈의 씀씀이는 어떤지, 그리고 넌지시 얘기를 나누다가 대충 대화의 흐름을 듣고, 내 아들을 아는 눈치거든 미주알 고주알 캐물을 게 아니라 정통으로 바싹 달겨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내 아들을 약간은 알고 있는 척하는 거다. 이를테면 "그분의 부친도 알구요, 친구도 압니다. 당자도 약간은."하고. 내 말 알아들었느냐? 레이낼도: 예, 잘 알았습니다. 대감마님. 폴로니어스: "본인을 알긴 하지만 잘은 모릅니다." 그렇게 말해.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아주 바람둥이라는군요. 이런 이런 버릇이 있습죠." 하고. 험담을 꾸며대는 건 상관없어. 그러나 명예를 더럽히는 욕설을 해서는 안돼. 그 점은 명심해,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흔히 있기 쉬운 방탕, 난폭, 평범한 과실 정도의 탈선이라면 괜찮다만. 레이낼도: 도박 같은 것도요, 대감마님? 폴로니어스: 그래, 또는 음주, 칼부림, 쌍소리, 싸움질 ,계집질... 그 정도라면 괜찮아. 레이낼도: 대감마님, 그런 건 체면이 깎입니다요. 폴로니어스: 상관 없어, 적당히만 하면 상관 없대두. 그러나 계집질에 빠져 있다는 둥 지나친 비방을 해서는 안돼. 그건 내 본의가 아냐. 아들의 험담을 하되 요령껏 하란 말이다. 예를 들면 제멋대로 굴다가 생긴 실수라든가 격한 성미의 폭발이나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객기라든가 하는 젊은이들이면 흔히들 갖게 마련인 것 말야. 레이낼도: 그렇지만 대감마님.... 폴로니어스: 왜 그런 일을 하느냐구? 레이낼도: 예 대감마님, 그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요. 폴로니어스: 좋아, 내 생각을 바로 이렇다. 내 딴엔 멋진 안이라 생각한다. 네가 넌지시 내 아들의 험담을 해대는 거야. 어쩌다가 실언이 튀어나온 것처럼 말이다. 알겠느냐. 그럼 네가 염탐하려는 상대방이 네가 험담을 한 청년 즉 내 아들이 비행을 범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맞장구를 칠 거다. '여보게'라든가 또는 '노형'혹은 '어르신네'하고, 물론 그 사람의 신분이나 그 지방의 풍속에 따라서 부르는 것이 여러 가지로 다르겠지. 레이낼도: 그럴 겁니다요. 폴로니어스: 그러면 말이다, 그 상대방이 뭐였지? 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지? 분명히 내가 방금 뭐라고 말을 했는데. 어디서 끊겼던가? 레이낼도: 이렇게 맞장구를 칠 거다. '노형'이라든가 '어르신네'라는 말에서 끊겼습죠. 폴로니어스: 상대가 맞장구를 쳐온다면, 옳지 옳지... 상대가 이럴 테지, '그 양반이라면 아다마다요. 어제였지, 아니 그제였어, 아니지 이러이런 때였지, 그러그러하던데요. 당신 말대로 도박에 열중하던데요, 술에 곤죽이 돼갖고 테니스를 하다 싸움을 합디다.' 라든가 '수상쩍을 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고 할 거 아닌가. 가게란 유곽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거짓말을 미끼로 진실이라는 잉어를 낚자는 심사지. 말하자면 지혜롭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기둥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듯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게 하는 수라구. 그러니 알려준 대로 하면 자식놈의 행적을 캐낼 수 있어. 알겠지, 알겠느냐? 레이낼도: 예, 알겠습니다요. 폴로니어스: 그럼 잘 다녀와. 레이낼도: 예, 대감마님. 폴로니어스: 네가 직접 내 아들의 동태를 살펴야 하느니라. 레이낼도: 예, 알겠습니다. 폴로니어스: 그래 실컷 놀아나게 해두는 거다. 레이낼도: 예, 대감마님. (퇴장) 폴로니어스: 조심해서 다녀와. 오필리어 허겁지겁 등장. 웬일이냐, 오필리어, 왜 그러느냐? 오필리어: 아아 아버님, 아버님, 정말 무서운 일이! 폴로니어스: 아니 도대체 무섭다니, 뭐가? 오필리어: 아버님,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햄릿 왕자님이 윗도리를 풀어헤치고, 모자도 쓰지않고, 양말을 흙투성이에, 대님은 풀려서 발목까지 흘러내라고, 창백한 낯빛이 되어, 무릎을 덜덜 떨어대며, 어떤 무서운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듯 비통한 표정을 하시고... 나타나셨지 뭐예요, 제 앞에 느닷없이. 폴로니어스: 너 때문에 실성하셨나? 오필리어: 아버님, 모르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닌가 두렵기만 합니다. 폴로니어스: 뭐라고 하시던? 오필리어: 한 쪽 손으로 저의 손목을 꽉 잡으시며 그리고 팔의 길이 만큼 잔뜩 잡아당기시고 또 한 쪽 손으로는 이렇게 얹으시고 초상화라도 그리실 것처럼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셨답니다. 한참 동안 말예요. 마침내 제 팔을 가볍게 흔드시더니 당신 머리를 이렇게 세 번을 끄덕끄덕하시면서 땅이 푹 꺼질 듯이 내쉰 한숨이 괴로우신 나머지 온몸이 바스러지고 마치 숨이 끊어질 듯하셨어요. 그러고서는 저의 손목을 놓으시더니 왕자님께선 얼굴을 제게로 돌린 채로 등도 눈이 박혀 있는 듯이 뒷걸음질치며 보지 않아도 방향을 아시는 것처럼 나가 버렸어요. 그냥 제 얼굴에다가 시선을 꽂으시고 말예요. 폴로니어스: 얘야, 함께 가자. 폐하께 아뢰야겠다. 그것이 바로 상사병이라는 거다. 그 격한 힘이 발작하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마침내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모든 격정이 다 그러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종종 그러는 법이란다. 아무튼 가엾다... 그런데 너 요즘 왕자 전하께 섭섭한 말씀이라도 드렸느냐? 오필리어: 아아뇨 아버님, 아버님의 분부대로 왕자님께 편지를 돌려보내고 찾아오시지 마시라고 했을 뿐이에요. 폴로니어스: 그래서 실성하셨나 보다. 아비가 불민한 탓이다. 좀더 자세히 주의해서 눈여겨봐야 했는데. 왕자 전하께서 불장난으로 널 망쳐놓을 줄로만 알았지 뭐냐. 그만 이렇게 되고 보니 내 의심이 원망스럽구나. 아무래도 우리 늙은이들은 만사를 지나치게 생각해서 탈이야. 그러니 젊은이들이 지각없다고 탓할 수만도 없지. 어서 폐하게 가보자. 어쩔수 없이 이 일을 아뢰야 되겠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아뢰는 것도 민망한 일이나 덮어두면 더 큰 낭패가 될 것이다. 가자. (두 사람 퇴장) [ 제2장 궁전 안 접견실 ] 후면에는 낭하가 있고, 입구 좌우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으며, 그 안쪽에는 문이 달려 있다. 화려한 트럼펫 소리, 왕과 왕비,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제신을 거느리고 등장. 왕: 어서 오오,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그대들을 오래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거니와 긴히 부탁할 일도 있고 해서 급히 입궐하라 했네, 소문을 들어 어느 정도 알 테지만 햄릿이 영판 딴 사람이 됐다네... 글쎄. 외양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그렇단 말일세. 옛날과는 영 다르다니까. 그 원인이 뭣인지 그처럼 이성을 잃게 된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친의 죽음 이외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대들에게 긴히 부탁하는 걸세.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햄릿과 같이 자라온 터라 햄릿의 젊은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얼마 동안 이 궁중에 머물러 벗이 되어 가까이 지내면서 햄릿의 심정을 위로해 주게.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저렇듯 번뇌하는 과인이 알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면 여러 가지로 그 원인을 탐지해 주게. 원인을 알게 되면 과인이 치료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왕비: 두 분 선비에 대한 말을 햄릿이 곧잘 했다오. 누구보다도 그대들에게 기울이는 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오. 두 분께서 기꺼이 우리에 대한 친절과 호의로 잠시나마 함께 이곳에서 지내면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힘이 되어 준다면 반드시 폐하께서는 잊지 않고 응분의 보답을 할 것이오. 로즌크랜츠: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선 만승의 귀하신 옥체이시온데 황공하옵게도 신들에게 부탁이라 하심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길든스턴: 지엄하신 분부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망극하신 성덕에 보답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여 어명을 받들어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왕: 고맙소,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왕비: 고맙소, 길든스턴, 로즌크랜츠, 그럼 당장 지금이라도 몰라보게 변한 내 아들 햄릿을 만나주오. (시종들에게)이 두 분을 햄릿이 있는 곳으로 배행하도록 해라. 왕비: 아멘!(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경례를 하며 퇴장) 폴로니어스 등장. 떨어져 있는 왕에게 이야기한다. 폴로니어스: 폐하, 노르웨이에 갔던 사절들이 기쁜 소식을 갖고 귀국하였습니다. 왕: 경은 항상 기쁜 소식만을 전해 주는가 보오. 폴로니어스: 폐하, 그렇사옵니까? 아뢰옵기 황공한 말씀이오나 신이 영혼을 소중히 하듯 하나님과 성은이 망극하신 폐하를 섬기는 것이 신의 의무라 사려되옵니다. 그리고 신의 생각이옵니다만 신의 판단이 틀렸다면 이미 신의 이 두뇌는 쓸모가 없어 지금까지 해온 나라 일을 감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다름 아니오라 햄릿 왕자 전하의 실성의 원인을 알아냈사옵니다. 왕: 어서 말해 보시요, 몹시도 궁금했던 바이오. 폴로니어스: 폐하, 먼저 대사들을 접견하옵소서. 신의 이야기는 입가심이 될 것이옵니다. 왕: 경이 치하의 말을 하고 맞아들이도록 하오. (폴로니어스 퇴장) 아, 왕비, 폴로니어스가 그러는데 햄릿의 실성한 원인을 알아냈다고 하오. 왕비: 그야 선왕의 승하와 우리들의 조급한 결혼, 이밖에 무슨 원인이 있겠어요? 왕: 어디 과인이 상세히 물어 보리다. 폴로니어스가 볼티먼드와 코닐리어스를 대등하고 돌아온다. 두 사람 수고하였소! 자아 볼티먼드, 노르웨이왕 회신은 무엇이오? 볼티먼드: 폐하의 친서에 대해 매우 정중한 답례였사옵니다. (그들 예를 올린다) 노르웨이왕은 즉각 조카의 모병을 중지하도록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왕은 그 모병을 폴란드 정벌을 위한 준비로 아셨다 합니다. 그러나 신중히 조사해본 결과 폐하에 대한 적대행위가 명백해지자 노르웨이왕은 이게 다 몸이 성치 못하고 노쇠하고 무력한 탓으로 감쪽같이 기만당했다고 통탄하시며 모병을 중지시켰습니다. 포틴브라스는 즉석에서 복종하여 노르웨이왕의 꾸중을 순순히 받아들여 결국 다시는 우리나라를 함부로 침략하지 않겠다고 숙부이신 왕 어전에서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노왕께선 대단히 기뻐하시며 연금 6만 크라운을 하사하시고 기왕에 모병한 군사는 폴란드 정벌에 써도 좋다고 그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여기에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만, 그 원정을 위해 폐하의 영토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잇도록 안전의 보장과 진군의 허락을 여기 국서에 쓰인 것처럼 승인해 주십사 하옵니다.(서찰을 올린다) 왕: (서찰을 받는다) 과인의 기쁨 더할 바 없소. 이 건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 숙고한 후 회답을 하리다. 그간의 경들의 수고를 치하하오. 물러가서 쉬도록 하오. 오늘밤에는 축배를 같이 들 것이오. 수고가 많았소! (볼티먼드와 코닐리어스 인사를 하고 퇴장) 폴로니어스: 이 일은 잘 처리되었사옵니다... 폐하와 왕비 전하, 대저 왕권이란 무엇이며, 신하의 도리란 무엇이며, 어찌해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이며, 때는 때인가 등을 따짐은 그야말로 밤과 낮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옵니다. 그런즉 간결은 지혜의 혼이며, 군소리는 팔다리요, 겉치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간단히 아룁니다... 햄릿 왕자 전하는 실성하셨습니다. 실성이라 아룀은 실성한 사람을 정의하는 데 그말 이외엔 달리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하오나 그리 심려 마시옵소서. 왕비: 수다보다는 핵심을 말해 주시오. 폴로니어스: 왕비 전하, 어찌 어전에서 수다를 떨 수 있겠습니까? 왕자님의 실성은 사실이며, 사심임이 유감이며, 유감됨이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말재주는 걷어치우겠습니다. 쓸데없는 수다를 피울 생각은 없사옵니다. 실성은 그러다손치고,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원인을 찾는 일이라 사려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상태에 대한 원인이라 함이 옳을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이상상태의 결과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사옵니다. 이것이 남은 문제요, 남은 문제란 이러하옵니다. 깊이 통찰하소서. (윗도리에서 몇 장의 종이쪽지를 꺼낸다) 소신에겐 딸이 있사온대 출가 전까지는 신의 것인 바 딸애의 효심이 지극하오, 보시옵소서, 이걸 아비에게 주었습니다. 들으시고 통찰하시옵소서. (읽는다) 천사와 같은 나의 영혼의 우상이며 더없이 미화된 오필리어여... 설익은 문장이로군, 졸렬하기 짝이 없어. '미화된'이란 서툴러. 그 다음을 들어 보시옵소서. 이렇답니다. (읽는다) 당신의 새하얀 가슴 속에 이 사연을 등등... 왕비: 이 편지를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냈답니까? 폴로니어스: 왕비 전하, 잠시만 다음 글을 들어 주십시오. 사실대로 읽겠사옵니다. (읽는다) 밤하늘 별의 만남을 의심 마오. 태양의 움직임을 의심 마오. 비록 진리를 허위라 의심해도. 나의 사랑만은 의심 마오. 오 사랑하는 오필리어여, 나는 이러한 시구에는 서투오. 이 뜨거운 사모의 정을 시로 읊을 재간은 없지만, 오직 그대를 한없이 사랑하오. 이 마음 굳게 믿어 주오. 안녕히. 이 생명 죽을 때까지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대여, 이 몸도 마음도 그대 것이오. 햄릿으로부터 이 편지를 딸애가 이 아비에게 순순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햄릿 왕자님께서 어느 때, 어느 수단으로, 어디서 정담을 하셨는지도 아비에게 실토했사옵니다. 왕: 그래, 오필리어는 어떻게 햄릿의 사랑을 대했소? 폴로니어스: 신을 어이 생각하시옵니까? 왕: 명예를 존중하는 충신이오. 폴로니어스: 신 또한 그러하기를 원하옵니다. 하오나 어찌 생각하실는지요? 이처럼 열렬한 사랑이 날개를 펄럭이는 걸 신이 보았을 때에... 실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지만... 딸애가 일러주기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습니다만, 이 점을 어찌 생각하실는지요? 폐하, 왕비 전하, 만약 신이 그 사랑을 서랍에나 넣어두듯, 수첩에 적어두듯 그냥 간수해 두거나 벙어리 귀머거리에 마음의 눈도 감아 버리고 강 건너 불 보듯 바라보고만 있었다면 신을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신은 그렇게는 할 수 없사옵니다. 신은 곧바로 손을 써 딸에게 이렇게 매섭게 타일렀습니다... "햄릿 전하께서 일국의 왕자요, 너에겐 하늘의 별과도 같으신 분이시다. 이 사랑은 허가할 수 없다." 그러고선 딸애에 집에 틀어박혀 앞으로 심부름 온 사람도 들이지 말고 왕자 전하의 선물도 깨끗이 거절하라고 훈계했습니다. 딸애는 훈계를 받아들여 그대로 따랐습니다. 하오나 거절당하신 왕자님께선 대충 말씀드리자면 비탄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시고 잠도 못 주무셔 허약해지시자 허탈증에 빠지시어 결국은 쇠장해지신 끝에 실성한 지경에 이르러 헛소리를 하시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옵니다. 왕: 왕비는 어찌 생각하오? 왕비: 있을 법한 일인 것 같습니다. 폴로니어스: 신이 이건 이렇다고 확언하여서 그렇지 않았던 일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요? 왕: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소. 폴로니어스: 신의 이야기 틀린다면 이것과 이것을 떼어 주시옵소서. (머리와 어깨를 가리키며) 그저 실마리만 잡히면 일의 진상을 알아내겠사옵니다. 설령 지구의 중심에 숨겨져 있다 해도 말입니다. 이때 흩어진 옷차림을 한 햄릿이 책을 읽으면서 뒤쪽 문에서 복도로 들어선다. 실내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잠깐 멈춰 섰다가 휘장 뒤에 은신한다. 왕: 더 깊이 알아볼 수가 없겠소? 폴로니어스: 왕자 전하께선 이따금 이 복도를 몇 시간이고 서성거리곤 합니다. 왕비: 참 그렇지요. 폴로니어스: 기회를 타서 신의 딸을 풀어놓겠습니다. 폐하와 신이 휘장 두에 숨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걸 살피는 겁니다. 만약 왕자 전하께서 신의 딸애를 사랑하지 않고 실성의 원인이 아니라면 신은 국정 보필의 대임에서 물러나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을 각오이옵니다. 왕: 어디 시험해 봅시다. 햄릿, 책을 읽으면서 등장. 왕비: 저기를 보십시오. 가엾게도 슬픈 표정을 하고 책을 읽으며 오고 있습니다. 폴로니어스: 황공하오나 두 분께서는 어서 저쪽으로 피하소서. 신은 지금 당장 왕자님에게 가보겠나이다. (왕과 왕비 황망히 퇴장) (햄릿에게) 햄릿 전하, 문안 드리옵니다. 햄릿: 덕분에 잘 있소. 폴로니어스: 전하, 신을 알아보시겠습니까? 햄릿: 물론 알고말고, 여부가 있나. 흥, 생선장수가 아닌가? 폴로니어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햄릿: 아니라면 생선장수만큼 정직한 사람이라도 되어야지. 폴로니어스: 정직한 사람이라뇨, 전하? 햄릿: 그렇다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정직한 사람이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요. 폴로니어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전하. 햄릿: 만일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 개송장에다 구더기를 뒤끓게 한다면 햇빛은 썩은 고기에 입맞추는 셈이지... 그런데 딸이 있는가? 폴로니어스: 예 있습니다, 전하. 햄릿: 햇볕을 너무 쬐지 않도록 해. 지혜가 부푸는 건 좋지만 배가 부풀면 큰일이니까, 아주 조심해야 하네 친구. (다시 책을 읽는다) 폴로니어스: (방백) 도대체 무슨 뜻이지? 여전히 내 딸 타령이군. 그렇지, 처음엔 날 생판 몰라보고 생선장수라 했겠다. 돌아도 크게 돌았어, 아주 돌았어. 이 늙은이도 젊었을 때 사랑에 빠져 몸살을 앓은 일 있었지. 거의 저만큼이나... 왕자 전하에게 능청 좀 떨어볼까... 뭘 읽고 계십니까, 전하? 햄릿: 말 말 말일세. 폴로니어스: 어떤 내용입니까? 햄릿: 뭣이 어떠냐고? 폴로니어스: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의 내용 말입니다. 햄릿: (폴로니어스에게 대들 자세로 있고, 폴로니어스는 엉거주춤 물러선다) 이건 험담이야. 입이 걸은 친구가 여기에다 이렇게 썼군. 늙은이들의 수염은 잿빛이고, 그들의 얼굴은 주름바가지요, 눈에는 누리끼리 송진 같은 눈꼽이 끼고, 노망이 들었을 뿐더러, 무릎을 후들후들 떤다. 확실히 지당한 말이렷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써놓은 건 너무나 궁상맞고 점잖지 못한 걸. 경도 나와 같은 나이가 될 게 아니오. 만약 바다게처럼 뒷걸음질 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다시 책을 읽는다) 폴로니어스: (방백) 미치광이의 말이긴 하지만 조리는 서 있군. 전하, 바깥 공기는 해로우니 안으로 드시지요. 햄릿: 내 무덤 안으로? 폴로니어스: 하긴 그것도 안은 안이지. (방백) 말 속에 뼈가 들어있는 대답이군! 가끔 가다 미치광이도 기막힌 말을 내뱉거든. 이성이 있는 인간이라도 어림없는 명구들이 튀어나오잖아. 자, 이만해 두고, 내 딸년과 만나는 장면이나 궁리해 보자. 전하, 죄송하오나 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햄릿: 물러간다는데 마다하겠는가, 뭣이든 마음대로요. 이 목숨을 제외하고, 이 목숨을 제외하고, 이 목숨을. 폴로니어스: 물러갑니다, 전하. (큰절을 한다) 햄릿: 에이, 흉물단지 늙은 너구리! (다시 책을 들여다본다)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등장. 폴로니어스: 햄릿 왕자 전하를 찾고 있소? 저기 계시오. 로즌크랜츠: (폴로니어스에게) 대단히 감사합니다! (폴로니어스 퇴장) 길든스턴: 오랜만입니다, 전하! 로즌크랜츠: 정말 격조하였습니다. 전하! 햄릿: (쳐다본다) 아, 참으로 잘들 왔소! 오래간만이오, 길든스턴. (책을 덮는다) 아, 로즌크랜츠도! 잘들 왔소, 두 사람 다 별고 없었나? 로즌크랜츠: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길든스턴: 지나치게 행복한 것도 탈이니 그저 행복하다곤 할까요. 행복의 여신의 모자 깃하고는 꽤나 멀지요. 햄릿: 그렇다구 여신의 발바닥 아래도 아닐 거구? 로즌크랜츠: 그렇습니다. 햄릿: 그렇다면 그 여신의 허리깨쯤인가 아니면 소중한 곳의 가운데 쯤인가? 길든스턴: 실은 여신의 은밀한 가운데이옵니다. 햄릿: 뭐? 여신의 그 행운의 골짜기라구? 그럴 테지, 하긴 여신은 탕녀지. 그래 새 소식은? 로즌크랜츠: 별반 없습니다, 전하. 그저 세상이 제대로 돼 갑니다. 햄릿: 말세가 가까워졌다는 증거로군. 그러나 자네 얘기는 사실과 다르네. 어디 한번 심문해 볼까. 자네들은 대체 무슨 연유로 그 행운의 여신 품에서 떨려나 이런곳으로 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는고? 길든스턴: 감옥살이라뇨, 전하! 햄릿: 덴마크는 감옥이지. 로즌크랜츠: 그러하면 세계가 온통 감옥이겠군요. 햄릿: 훌륭한 감옥이지. 격리실도, 독방도, 지하감방도 다 있지만 덴마크만큼 고약한 감옥은 어디에도 없다. 로즌크랜츠: 그리 생각하진 않습니다, 전하. 햄릿: 자네들에겐 그렇지 않다 이 말이지? 하긴 원래 좋고 나쁜 건 따로 있는 게 아닐세.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니까. 내겐 감옥이란 말일세. 로즌크랜츠: 그야 전하께서 대망을 품고 계시니. 확실히 이 나라는 전하의 마음에 협소하겠죠. 햄릿: 잠꼬대 같은 소리 말게! 비록 내가 호두껍질 속에 갇혀 있어도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네. 내가 꿈으로 괴로움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길든스턴: 바로 그 꿈이 전하의 대망이시죠. 그 대망이 추구하는 실체는 꿈이 비추는 그림자이니까요. 햄릿: 꿈이야말로 그림자라구. 로즌크랜츠: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대망이라는 건 공기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라, 결국은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햄릿: 그렇다면 거지야말로 실체요, 제왕들과 거드럭대는 영웅들은 거지의 그림자에 불과한 셈이군. 우리 궁전으로 가세. 정녕 난 따지는데 소질이 없으니까.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저희들이 배행하겠나이다. 햄릿: 아냐, 괜찮으이. 자네들은 아랫사람들과는 다르잖은가.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난 지겨울 정도로 시중을 받고 있다네... 옛정을 믿고 묻네만 시원히 대답해 주게, 왜 엘시노에 돌아왔나? 로즌크랜츠: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다른 용건은 없습니다. 햄릿: 난 지금 거지 몰골이라 감사의 마음조차 바닥이 났네만 아무튼 고맙네... 아무리 고마워한들 자네들에겐 반푼어치도 값어치 없는 것이지만. 자네들 누가 보내서 온 게 아닌가? 자진해서 되돌아 왔나? 자유의사로 돌아왔나? 자, 자, 솔직히 대답하게. 어때, 자아 말해 보라구. 길든스턴: 뭐라구 아뢰야 좋겠습니까, 전하? 햄릿: 뻔하잖은가, 사실 그대로 대답하면 되네... 필경 부름을 받고 온 것이겠지, 얼굴에 나타나 있는 걸. 자네들은 둘 다 그걸 감출 만큼 남을 속이고 꼬여먹는 간교를 갖고 있지 않거든... 내 다 알고 있지, 폐하와 왕비 전하의 호출을 받고 왔겠다. 로즌크랜츠: 도대체 뭣 때문입니까, 전하? 햄릿: 그걸 내가 묻는 게 아닌가. 제발 말해 주게, 부탁일세. 우린 친구가 아닌가. 함께 사이좋게 자라온 젊은이 아닌가, 변치 않은 우정을 맹세한 사이가 아닌가. 구변이 좋은 자라면 무슨 말이라도 좀더 할 수 있으련만. 숨김없이 터놓고 내게 말해 주게, 불러서 왔는지 아닌지 말야. 로즌크랜츠 (길든 스턴에게 방백) 어떻게 하면 좋지? 햄릿: (방백) 안되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걸! (큰 소리로)... 친구지간인데 왜 이리 주저하나. 길든스턴: 전하, 실은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햄릿: 그 이유를 설명해 줄까. 자네들이 실토하기 전에 내가 알아맞힌 셈이니, 폐하나 왕비 전하께 불충을 범할 염려도 없을 테니까. 난 말일세. 요즘 무슨 까닭인지 나도 모르네만 우울증에 걸렸어. 늘 해오던 무술도 손을 떼고 말았고, 기분이 무거워져서인지 아름답고 웅장한 이 대지도 황량한 갑으로만 보이며, 이 멋진 천공, 이 하늘, 저것 보게. 머리 위에 펼쳐진 찬란한 창공, 금빛으로 빛나는 별들로 수놓아진 수려한 저 하늘도 내게는 다만 음산하고 윰흉한 독기가 서리서리 휘감고 있는 세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일세... 인간은 참으로 조화의 걸작이라,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며, 그 능력 재능은 얼마나 무한한가. 그 자태와 거동은 아무 말할 수 없이 훌륭하지 않은가. 그 행동은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지혜는 흡사 신에게도 필적하지. 온 누리의 아름다움의 극치요, 만물의 영장이라. 그러나 내겐 그 인간이 한낱 먼지로밖에 안 보인단 말일세. 내겐 인간이 역겹다구. 아냐, 여자도 마찬가지야. 자네들 웃는 눈치가 여자들은 안 그렇다 이건가? 로즌크랜츠: 저하,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햄릿: 그럼 왜 키들키들 웃었나, 내가 '인간이 역겹다'고 말할 때. 로즌크랜츠: 전하, 인간이 역겨우시다면 배우들이 전하에게 어떤 대접을 받게 될는지 뻔한지라 그 생각에 웃었답니다. 저희는 오다가 배우 일행을 만나 그들을 앞질러 왔는데, 배우들은 왕자 전하께 연극을 보여 드릴 거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햄릿: 왕의 역을 연기하는 배우라면 환영일세. 그런 배우에게는 찬사를 보내지. 용감한 기사역에는 칼과 방패를 실컷 휘두르게 하겠네. 연인역의 한숨은 헛되게 해서는 안되지. 풍자역이 무슨 말을 하든 방해 받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들 테다. 어릿광대역은 잘 웃는 사람들 허파줄을 끊게 할 거다. 귀부인역은 자유롭게 그 심중을 토로하게 하리다... 그렇지 않으면 무음시의 흐름이 끊어질 것이니까. 그런데 말일세, 대체 그들은 어떤 배우들이지? 로즌크랜츠: 전에 전하께서 좋아하시던 도시의 비극배우들입니다. 햄릿: 그렇다면 왜 지방순회공연을 나왔나? 도시에 있는 편이 평판이나 실속 면에서 훨씬 나을 텐데. 로즌크랜츠: 요즘 도시에는 연극을 금지한다는 새로운 규정이 생겨 순회공연에 나섰나 봅니다. 햄릿: 지금도 전에 내가 도시에 있을 때처럼 인기가 여전한가? 관중이 법석들이겠지? 로즌크랜츠: 아뇨, 전혀 그전 같지가 않습니다. 햄릿: 왜 그럴까? 벌써 쭉정이가 됐는가? 로즌크랜츠: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열심히 하고 있으나 요즘에 와서는 어린이 극단이 생겨서 그애들이 매새끼들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글쎄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지 뭡니까. 그게 요즘은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 대중연극을 통속극이라고 악평을 하며, 칼을 찬 수많은 신사들도 풍자가들의 악담이 두려워 극장엔 얼씬도 안합니다. 햄릿: 뭐라고? 어린이 극단이라고? 누가 운영하는 건데? 누가 재정후원을 하지? 그애들이 목소리에 변성이 오기 전까지만 배우짓을 한단 말인가? 애들이 나이들어 자신들을 지탱할 다른 직업이 없다면 대중극단의 통속배우가 될 밖에 없지 않은가. 그때 가선 자기들 장래를 망쳐놨다고 작가들을 원망할 것이 아닌가? 로즌크랜츠: 아닌게아니라 쌍방은 서로를 헐뜯고 야단인데, 사람들은 좋아라 하고 싸움에 부채질까지 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어린이 극단의 극작가와 대중극단의 배우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는 장면을 넣지 않으면 그 연극은 무대에 올려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햄릿: 그러 수가? 길든스턴: 사실이옵니다. 굉장히 험담들을 해댔답니다. 햄릿: 그래서 어린이 극단들이 승리한다는 건가? 로즌크랜츠: 예, 물론 그렇사옵니다. 전하, 대중극장은 파리를 날릴 지경이랍니다. 햄릿: 하긴 이상할 것도 없지, 내 숙부가 덴마크 국왕이 되지 아버님이 시퍼렇게 생존하실 땐 숙부를 능멸하던 사람이 이십, 사십, 오십, 백 더컷을 내겠다고 법석을 떨며 숙부의 작은 초상화를 사가는 판이니까. 한심해, 이렇게 되어가는 건 예삿일이 아니냐. 소위 그 철학이라 한들 이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무대 안에서 화려한 트럼펫 소리) 길든스턴: 배우들이 도착했나 봅니다. 햄릿: 자네들, 엘시노에 잘 와 주었네.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자 손을. 환영에는 격식에 맞는 인사가 따라야 하는 법. 이렇게 악수를 하면 예를 갖추는 게 되지 (두 사람과 악수를 한다) 내가 배우들만을 환대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난처하니까.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건데, 그들은 자네들보다 어느 정도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잘 와 주었네, 내 숙부 겸 아버지와 숙모 겸 어머니는 속고 계시단 말일세. 길든스턴: 뭣을 말입니까, 전하? 햄릿: 내가 정신이 도는 건 북북서풍 때뿐. 바람이 남쪽으로 바뀌면 나도 매와 왜가리 쯤은 구별하네. 폴로니어스 등장. 폴로니어스: 아 두 선비, 잘 오셨소! 햄릿: 여보게 길든스턴, 그리고 자네도. 두 귀로 잘 들어 두게... 저기 있는 저 큰 갓난아긴 아직도 사타구니에 기저귀를 차고 있을 걸세. 로즌크랜츠: 아마 두 번째 기저귈 겁니다. 늙은이는 다시 어린애가 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햄릿: 맞춰 볼까, 배우들이 왔다고 알리러 온 거겠지. 두고 보게나. (큰 소리로) 자네 말이 맞네. 월요일 아침이었지, 틀림없어. 폴로니어스: 전하, 알려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햄릿: 전하, 알려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옛날 로마에 희극의 명배우 로시어스가 있었는데.... 폴로니어스: 배우들이 지금 도착했습니다, 전하. 햄릿: 어떤가, 흥! 폴로니어스: 정말이옵니다.... 햄릿: 그래, '배우들이 당나귀를 타고 왔다' 이 말이지. 폴로니어스: 그들은 천하의 명배우들이어서 비극, 희극, 사극, 목가극, 목가적 희극, 역사적 목가극, 비극적 사극, 비극적 희극적 역사 극적 목가 극이든 장소의 일치를 지키는 고전극이든, 그렇지 않은 낭만시이든 척척이죠. 세네카의 비극이라 해도 너무 무겁지 않고 프러터스의 희극이라 해서 가볍지 않으며 대본 그대로 읽히든 즉흥적으로 시키든 천하의 명배우들입니다. 폴로니어스: 아, 이스라엘의 명재판관 제프타 영감, 훌륭한 보물을 갖고 있으렷다! 폴로니어스: 보물을 갖고 있다뇨, 전하? 햄릿: 그야 이렇지 않은가. 아리따운 딸 귀여운 외동딸 애지중지 사랑하였도다. 폴로니어스: (방백) 여전히 내 딸 얘기로군. 햄릿: 제프타 영감, 왜 내 말이 틀렸소? 폴로니어스: 신이 제프타라뇨, 전하? 하기야 신에게도 애지중지 사랑하는 딸이 있습니다. 햄릿: 틀렸어, 그렇게 계속되지 않아. 폴로니어스: 그럼 어떻게 계속되옵니까, 전하? 햄릿: 뭐라고? 신만이 아는 팔자소관 그리고 그 다음은 이렇지. 곧잘 그렇게 되오듯 그렇게 되었도다... 이 찬송가의 일 절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요. 저기 한가한 패거리들이 오는군. 몇 명의 배우들 등장. 다들 잘 왔네. 모두 반가우이... 기력이 썩 좋아 보이는군... 잘왔소, 친구들... 오 옛친구들! 얼굴에 턱수염이 더부룩한테 전번엔 없었지. 나를 위압하려는 배짱으로 수염을 기르고 덴마크에 온 건가?... 이건 또 누구지, 젊은 부인역이 아닌가! 키가 컸군,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무대화 뒤축 높이만큼 머리가 하늘에 가까워진 것 같아 뵈는데. 기도를 잘해 둬요, 쓸모없게 된 금화마냥 변성해 목소리가 고음을 잃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 참으로 반갑소. 프랑스의 매 사냥꾼들처럼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하나 해볼까? 대사 한 꼭지를 어서 읊어 보게나. (배우에게) 자 어서들 장기를 보여 다오. 좀 정열적인 대사로. 배우1: 어떤 대사를 할깝죠, 전하? 햄릿: 언젠가 한 번 들려 준 일이 있지, 아마 무대엔 올린 적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한 번뿐일 게다. 그 연극이 일반 관객에는 환영 못 받았지. 일반 대중에게는 돼지 말에 진주라. 그러나 그건 훌륭한 희곡이었다... 나뿐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 나보다 훨씬 권위 있는 분들도 그렇게 말했었지... 장면 구성이 잘됐고, 문구도 자제되었으면서도 교묘했었어... 누군가 한말이지만 내용의 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사에 양념을 치지 않았고, 작가의 허세부리는 것 같은 언어 사용도 없었고, 그 대신 작품이 진실하고 감미롭기도 하고 건전하기도 하고, 인위적인 허식의 미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건전한 미를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었지. 그 작품 가운데서 내가 좋아하는 한 구절이 있어. 이니어스와 다이도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었어. 특히 프라이암의 최후 장면이 좋았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만 이 대목에서 시작해 주게. 가만있자, 옳지 그렇지... 산발한 피라스 맹호처럼... 그게 아니지. 피라스로 시작은 되지만... 산발한 피라스, 검은 갑옷에 감싼 검은 마음은 불길한 목마 속에 숨어든 밤의 칠흑과도 같았다. 이제 그 검고 무서운 얼굴은 더욱 처참한 몰골이 되었도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비 어미 딸 아들들의 진홍의 피로 물들었고 타오르는 거리의 불길에 시체는 엉키고 떡이 되었는데 불빛은 지옥의 등불인 양 그들 주인의 살인을 비춰 주도다. 치솟는 분노의 화염 속에 피는 온통 엉겨붙었고 칼날같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악마 피라스는 노왕 프라이암을 찾아 나선다... 다음은 자네들이 계속해. 폴로니어스: 참으로 대사를 잘하십니다. 억양도 좋으시고 내용의 이해도 훌륭하십니다. 배우1: 이윽고 프라리암은 달려드는 그리스군을 물리치고자 녹슨 칼을 휘둘렀건만 늙은 팔의 힘은 빠져 허공을 갈랐고 칼을 땅에 떨어뜨린다. 어찌 상대가 되리오! 피라스가 프라이암을 향해 치솟는 분노와 함께 내리친 필살의 검이 빗나가 매섭게 허공을 치는데 지쳐 버린 노왕은 힘없이 기절해 버리도다. 무정한 트로이 성도 이 공격에 질렸는지 타오르는 불길 속에 하늘이 무너지듯 땅 위에 허물어져 피라스의 귀청을 때린다. 보라! 노왕 프라이암의 백발의 머리를 향하여 내리치던 칼은 허공에 얼어붙어 빛날 뿐, 피라스는 그림에 그린 폭군인 양 그 자리에 서버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도다. 폭풍이 오기 바로 전 하늘에는 고요가 깃들이고 구름은 멎어 광풍은 말이 없고 땅은 무덤처럼 고요한데, 느닷없이 천둥이 터져 허공을 때리니 망설이던 피라스의 복수심도 잠을 깨어 분발하도다. 군신 마르스의 불후의 투구를 단련하던 쌍안거인 사이클롭스의 철퇴도 이랬던가, 피라스의 붉은 피가 흐르는 칼은 인정사정 없이 프라이암의 머리를 내리치도다. 예이끼, 역겹다, 매춘부 같은 운명의 여신이여! 하늘의 제신들이여, 중지로써 여신의 힘을 빼앗아 버릴지어다. 여신이 조종하는 수레바퀴에서 살과 태를 부숴 둥근 바퀴통일랑 구천을 굴러와 지옥의 바닥으로 떨어지게 하여라. 폴로니어스: 그건 너무 긴 듯하옵니다. 햄릿: 그럼 이발소에 가서 수염을 밀어 버리지 그래. 계속해 다오... 이 노인은 웃음거리나 음담패설 따위가 아니면 잠들어 버린다네... 자 헤큐바 대목을. 배우1: '그렇지만 아 애처롭다! 얼굴을 싸맨 왕비의 모습.' 햄릿: '얼굴을 싸맨 왕비의 모습'? 폴로니어스: 그거 좋다, '얼굴을 싸맨 왕비'... 멋지구먼. 배우1: 맨발로 이리저리 허둥댄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눈물에 불꽃조차 삼켜버릴 듯하도다. 왕관으로 장식되었던 머리엔 보자기 한 조각, 치렁치렁하던 비단옷은 간데없고 자식들을 낳기에 뼈만 앙상한 허리엔 엉겁결에 걸친 떨어진 담요 한 자락... 왕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오만한 운명의 여신에게 누구라 저주의 독설을 퍼붓지 않으랴. 피라스가 잔인한 웃음을 띠며 칼을 휘둘러 남편의 사지를 저미는 만행을 보고 통곡하는 왕비의 절규를 만약 신들이 들었다면 비록 신들이 이 땅 인간사에 무관심하다 해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로 하여금 그 비통함에 젖어 슬픔의 눈물을 짜게 하리라. 폴로니어스: 저런, 안색이 창백해지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구나... 이제 그만하여라. 햄릿: 잘들 했다, 그만들 하게.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기회에 듣기로 하지. 경이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신경을 써주오. 부탁이오, 알겠소? 융숭한 대접을 해주오. 이 사람들은 이 시대의 축도요, 짧은 연대기니까. 이 세상을 뜬 후에 흉측한 묘비명이 씌어지는 건 괜찮지만 생전에 저 사람들의 구실을 듣는 건 더 괴로운 일이요. 폴로니어스: 전하, 알겠습니다. 그들의 신분에 알맞는 접대를 하겠습니다. 햄릿: 무슨 말씀이오, 더더욱 융숭히 접대해주오! 신분에 알맞게 접대를 한다면 부랑자 다루듯 매질을 하겠다는 거요? 경의 명예와 위엄에 어울리게 대접을 해주는 거요. 그들의 가치가 적을수록 경의 환대가 더욱 빛나지 않겠소... 안내를 해주오. 폴로니어스: 여보게들, 이쪽으로 오게. (문쪽으로 간다) 햄릿: 친구들, 저 영감을 따라가게. 내일 연극 구경을 하기로 하세. (배우1을 가로막는다) 부탁이 있네, 여보게. '곤자고의 암살'말일세, 그거 해낼 수 있나? 배우1: 할 수 있다마다요, 전하. 햄릿: 내일 밤 해주었으면 좋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12행이나 16행쯤 대사에 더 살을 붙일지도 모르겠어. 어때, 외워서 해줄 수 있겠나, 할 수 있겠지? 배우1: 예, 할 수 있습니다요, 전하. (폴로니어스와 배우들 퇴장) 햄릿: 고맙네. 저 사람을 따라가게, 하지만 저 사람을 놀려대선 안되네. (배우1퇴장)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에게) 나의 옛친구들, 우리 오늘밤에 다시 만나세. 하여튼 엘시노에 잘 돌아왔네. 로즌크랜츠: 물러가겠나이다, 전하.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퇴장) 햄릿: 아, 그럼 잘들 가게! 이제 나 혼자 됐구나. 아 난 이다지도 맹물 단지에다 비열한 얼치기일까! 지금 여기 있던 그 배우는 단지 꾸민 이야기로도 가공의 정열에 그 노리개가 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의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의 창백한 얼굴은 눈에 눈물을 담고, 광란하는 저 표정, 울부짖음, 일거일동을 자기가 그리려는 걸 그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다 무엇 때문인가! 헤큐바 때문에! 헤큐바와 그 배우는 아니 그와 헤큐바 사이에는 울고 엉켜야 할 무슨 이유가 있다고? 만약 나만큼의 정열을 쏟아야 할 고민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면 저 배우는 어떻게 표현할까? 그만 무대를 눈물로써 흥건히 적셔놓고 핏발 서린 대사로써 관객들의 귀청을 찢으며 죄지은 자는 가책에 미치게 하고 죄없는 자는 두려움에, 무지한 자는 놀라움에 넋을 잃고 눈과 귀를 멀게 할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나는 허벙하고 얼뜬 무지렁이, 몽유병자처럼 서성대며, 큰일에는 야멸차지 못하고 긴요한 말일라 전혀 한 마디도 뇌까릴 줄 모르니. 아, 선왕께서는 왕권과 소중한 목숨을 사악한 자에게 무참히 빼앗기지 않았느냐. 나는 겁쟁이인가? 날 악당이라 부르는 자 누구냐? 골통을 산산히 부수고 수염을 갈퀴질하듯 뽑아서 내 상판대기에 뿌리는 자 누구냐? 코를 비틀고, 내 가슴을 때리듯 날 허풍선이라고 소리치는 자는? 모두들 마음대로 하라구. 아아 제기랄, 난 욕을 먹어 싸지. 마음이 비둘기 간처럼 약해 빠졌어. 굴욕에 사생결단 할 배알이라도 있다면 벌써 솔개떼에게 그놈의 비열한 썩은 고기를 먹이로 줬을 거다. 추잡하고 썩어빠진 악당! 잔인무도하고 음탕하고 배은망덕한 놈! 아아, 복수다! 아, 나는 쓸개빠진 놈인가. 얼마나 장한 일인가, 사랑하는 아버님이 참살당한 자식 놈 복수하라고 하늘과 지옥이 다그치는 데도 창녀처럼 혀끝으로만 그저 나불대고 저주를 입으로만 웅얼거리고 있다니. 잡것이로다! 무슨 청승인가! 흥! 정신 좀 차리라구. 그래 내 들은 바 있지, 죄를 범한 사나이가 연극을 보다가 가슴에 와닿는 진실에 그만 감동되어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죄과를 눈물을 흘리며 깡그리 털어놨다지 않은가. 살인죄, 그 죄는 설령 입에 혀가 없다 해도 스스로 말문을 연다지 뭔가. 저 배우들을 시켜 아버님의 억울한 살인 장면과 비슷한 연극을 숙부 앞에서 하게 하자. 숙부의 안색을 지켜보고 급소를 찔러 살펴 보리라. 그래서 그의 시선의 초점이 흐려지면 내 어찌 미적미적하겠는가... 언젠가 내게 나타난 망령은 악마인지도 몰라. 악마는 사람의 마음 속에 파고드는 마력이 있으니까. 아냐, 어쩌면 그건 내가 허해지고 울화증이 생긴 틈을 타서 그 마수를 뻗치려는 수작인지도 모를 노릇. 자, 지옥으로 가라는 건가. 나는 망령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얻어야겠다... 그러려면 연극이다. 반드시 왕의 본심을 까발리고 말 것이다.(퇴장) 하루가 지나간다. [ 제3막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1장 햄릿 대사 중에서 [ 제1장 접견실 ] 벽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다. 중앙에는 탁자, 한쪽 구석에는 십자가가 달린 기도용 책상이 놓여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뒤따라 폴로니어스,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좀 뒤에 오필리어 등장. 왕: 그래 아무리 넌지시 캐물어 보아도 왜 햄릿이 실성한 척 고요한 나날을 휘저으며 소란하고 위험스런 광증을 부리는지 그대들은 아무런 단서도 못 잡았다 그 말이오? 로즈그랜츠: 왕자님 자신도 이상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말씀하시길 아주 꺼리십니다. 길든스턴: 게다가 남들이 캐묻는 걸 싫어하시는 눈치입니다. 저희들이 캐묻는 말에 대해서 진상을 털어놓으실 듯 하시다가도 슬그머니 실성하신 척하시고 꼬리를 빼곤 하셨습니다. 왕비: 따뜻하게 맞아 주던가? 로즈크랜츠: 정중히 대해 주셨나이다. 길든스턴: 그러나 왕자님께선 억지로 지어낸 눈치였습니다. 로즌크랜츠: 말씀하시길 꺼리셨으나 묻는 말에는 퍽 순순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왕비: 혹시 오락이라도 권해 보았소? 로즌크랜츠: 왕비 전하, 저희들이 이곳에 오던 길목에서 배우 패거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얘길 왕자님께 말씀드렸더니 퍽 기뻐하시는 기색이셨습니다. 배우들은 궁전에 와 있습니다. 아마 오늘밤에 공연을 하라는 분부를 이미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폴로니어스: 그렇습니다.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도 연극을 관람해 주시도록 신이 앙청드리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왕: 기꺼이 보고 말고. 햄릿이 연극에 흥미를 느낀다니 듣기에도 마음 흐뭇하구나. 앞으로도 그대들은 왕자의 마음이 한층 밝아지도록 힘써 주게. 로즌크랜츠: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퇴장) 왕: 미안하오만 왕비, 자리 좀 비켜 주오. 실은 비밀리에 햄릿을 이곳으로 오라고 했소. 햄릿이 여기서 우연히 오필리어를 만나게 꾸며 놓았소. 오필리어의 부친과 같이 이곳에 숨어 두 사람이 만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햄릿의 일거일동을 눈여겨 뜯어봐서 왕자가 무엇때문에 실성을 했는지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딴 이유가 있는지 직접 살펴보고자 하오. 왕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오필리어야, 햄릿의 실성이 네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오죽 다행이겠느냐. 그렇기만 하다면 네 고운 마음씨로 다시 정상을 되찾을 수 있잖겠니, 두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오필리어: 왕비 전하, 소녀 역시 그러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왕비 퇴장)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여기서 거닐고 있거라. 폐하,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신과 이쪽에 숨어 계십시다... (오필리어에게) 이 책을 읽고 있어라. (책을 기도용 책상에서 집는다) 책에 열중한 척해야 혼자있어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게 아니냐. 이건 죄받을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다. 신앙심 두터운 표정을 짓고 경건한 행동을 꾸미면서 악마의 본성에 사탕발림을 해주는 것이니라. 왕: (방백) 오, 지당한 말이다. 그 한마디가 매서운 채찍이 되어 내 양심을 채찍질하는구나. 분을 처발라 예쁘게 단장한 창녀의 얼굴이 기실 추악하기 그지없는 것이다마는 떡에 고물 치고 엿바른 듯한 말로써 분식한 나의 행실보다는 나으리라. 아, 이 엄청난 업보! 폴로니어스: 발소리가 납니다. 폐하, 저리로 숨으십시오.(왕과 폴로니어스 휘장 뒤에 숨는다. 오필리어가 기도용 책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햄릿 침통한 표정을 하고 등장.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혀도 죽은 듯 참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죽는 건 잠자는 것... 그뿐 아닌가. 잠들면 마음의 고통과 육체에 끊임없이 따라붙는 무수한 고통을 없애준다.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열렬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죽는 건 잠자는 것! 잠들면 어쩌면 꿈을 꾸겠지. 아, 그게 괴로운 일이겠지. 이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 죽음 속에 잠든 때에 어떤 악몽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대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누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을 참겠는가. 폭군의 횡포와 권력자의 오만함을, 좌절한 사랑의 고통을, 지루한 재판과 안하무인의 관리근성을 덕망 있는 사람에게 가하는 소인배들의 불손을 참을 수 있겠는가. 한 자루의 칼이면 깨끗이 끝장을 낼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죽은 뒤에 밀어닥칠 두려움과 한번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미지의 나라가 사람의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알지도 못하는 저 세상으로 뛰어드느니 차라리 익숙한 이승의 번뇌를 감내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누가 무거운 짐을 걸며 지고 괴로운 인생을 신음하며 진땀을 뺄 건가? 이래서 분별심은 우리들을 모두 겁쟁이로 만들고 만다. 그리하여 결심이 갖는 천연의 혈색 위에 사색의 창백한 병색이 그늘져 이글이글 타오르던 웅지도 잡념에 사로잡혀 길을 잘못가고, 결국 실천과는 멀어지고 마는 게 아닌가... 가만 있자, 사랑스런 오필리어로구나... 숲의 여신이여, 기도하시려거든 내 죄도 모두 빌어주오. 오필리어: (일어서며) 오랜만입니다, 전하. 전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옵니까? 햄릿: 실은 고마운 말씀이오. 잘 있소. 잘, 잘 있소. 오필리어: 전하, 저에게 보내주신 많은 선물들을 오래 전부터 돌려드리려 했습니다. 노여워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햄릿: 그건 못 받으오. 선물 보낸 일이 전혀 없으니. 오필리어: 전하, 전하께선 보내신 걸 잘 아시면서 딴전을 부리십니다. 그때 선물에다 다정스런 말씀까지 얹어 주셔서 그 때문에 선물은 더욱 빛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그 향기도 사라졌으니 이걸 도로 받으십시오, 품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비록 값진 선물이라도 보낸 사람의 진정이 변했다고 생각될 때는 볼품없는 것이 된다지요,. 어서 가져가십시오. (가슴에서 보석을 꺼내 햄릿 앞의 탁자 위에 놓는다.) 햄릿: (상대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하하! 그대는 정조가 굳은 여잔가? 오필리어: 전하! 햄릿: 그대는 얼굴이 아름다운가? 오필리어: 전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햄릿: 정조가 굳고 얼굴이 아름답다면 그대의 정조가 아름다움과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게 하오. 오필리어: 전하, 여자의 아름다움과 정조처럼 잘 어울리는 천생연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햄릿: 천만의 말씀. 정절이 아름다움을 정숙하게 만들기보다는 아름다움이 정절을 타락시켜 음란하게 만들기가 훨씬 쉬운 일이오. 전에는 그 말을 역설로 여겼지만, 요즘엔 그 말이 진리라는 실증이 있소, 난 그대를 사랑했소, 한땐. 오필리어: 네, 그건 사실이어요. 전하께서 그렇게 믿게 하셨군요. 햄릿: 그대는 내말을 믿지 않았어야 했고, 썩은 밑동에다 제아무리 숙덕의 새 가지를 접목한들 본바탕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난 사랑 따윈 하지 않았소. 오필리어: 그럼 소녀는 더더욱 속았네요. 햄릿: (기도용 책상을 손가락질하면서) 수녀원으로 가시오. 왜 그대는 죄많은 인간을 낳고 싶어하오. 내 딴엔 내가 꽤나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소만 그래도 내 어머니가 차라리 날 낳아 주지 낳았더라면 하고 한탄할 만큼 많은 죄를 저지르고 있소, 나는 오만하고 집념이 강하고 야심도 큰 사람이라 일일이 머릿속에서 생각을 다듬고 형체를, 그리고 실행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숱은 죄악들을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오, 이런 미물이 천지간을 기어다니며 도대체 할일이 무엇이 있겠소? 우리 인간이란 모두 악당이오, 아무도 믿어선 안돼... 곧장 수녀원으로 가시오... (갑자기)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오필리어: 집에 계십니다, 전하. 햄릿: 문을 걸어 잠그고 단단히 가둬 두시오, 제 집도 아닌 곳에서 공연히 엉뚱한 짓일랑 못하게, 어서 가시오. (퇴장) 오필리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아 하느님, 전하를 구해 주소서! 햄릿: (광란한 태도로 다시 돌아와서) 그대가 굳이 결혼을 하겠다면 나의 저주를 혼수감으로 보내주리다... 그대가 아무리 얼음처럼 정결하고 흰눈처럼 순결하게도 해도 구설수를 피하지 못할 거요, 어서 수녀원으로 가시오, 어서. 잘 있소.... (왔다갔다하면서) 그래도 한사코 결혼하려거든 쑥맥하고 하시오, 영리한 사람들은 아내를 얻으면 곧 이마에 뿔달린 괴물이 된다는 걸 아니까. 수녀원을 가시오, 지금 당장 떠나시오, 잘 가오. (후닥닥 뛰어나간다) 오필리어: 하느님, 전하께 맑은 정신이 돌아오게 해주소서! 햄릿: (다시 또 돌아와서) 난 자알 알고 있다, 너희들 여자는 덕지덕지 분을 처발라 하느님께서 주신 낯짝을 영 딴판으로 만들어 버린단 말야, 춤추며 날뛰고, 간드러진 걸음을 걷고, 알랑수를 부리며 나풀대고 신의 창조물에 별명이나 붙이고, 또 순진한 탈을 쓰고 음탕한 짓을 하지 않나, 오 안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게 날 미치게 했어. 우리 이제 결혼 같은 거 해선 안돼...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딱 한 쌍만 빼놓고선 도리없이 살려 두지만 결혼 안한 사람들은 현재대로 살아가는 게 무사할 거야. 어서 수녀원으로 가라구. (다시 퇴장) 오필리어: 오, 그렇게도 고결하시던 분이 저렇게 무너지시다니! 귀인의 수려함, 기상의 칼, 석학의 교양이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나라의 희망이며 꽃이었건만 유형의 거울이요, 예의범절의 본보기로 만인의 우상이셨던 왕자 전하이셨건만 저와 같이 끝장이 나시다니, 나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다니. 왕자님의 달콤한 사랑의 맹세를 빨아들였던 나의 귀가 저 고귀하고 반석같이 굳은 이성의 청아한 종소리가 이젠 금간 소리로 시끄러운 소음만 내는 걸 들어야 하다니, 활짝 핀 꽃다운 청춘의 수려한 용모와 자세도 이 광란의 독기를 머금고 시들어 버리다니! 아 어쩌면 좋아! 옛날을 보고 알고 있는 이 눈이 지금의 저 모습을 보아야 하다니! (기도 드린다) 왕과 폴로니어스 휘장 뒤에서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다. 왕: 사랑이라! 그의 마음이 그 쪽으로 기운 건 아니오, 내뱉는 말이 횡설수설 대중없지만 미친 사람의 소리 같진 않소, 필경 마음 속에 무엇인가 박혀 있기에 저렇게 우울한 게 분명해, 그것이 터져나오는 날에는 내게 위험이 닥치겠지, 그걸 미연에 막으려면 선수를 쳐야지. 자, 이렇게 하면 어떨까? 왕자를 즉시 영국으로 떠나 보내면, 밀린 조공도 재촉할 겸. 어쩌면 바다 건너 먼 이국에 가서 색다른 타국 풍물을 접하게 되면 왕자의 가슴 속에 꽁꽁 뭉친 괴로움이 다소라도 풀릴 게 아니겠는가. 생각에만 골똘하니 실성할 밖에. 경의 의견은 어떠하오? (오필리어가 다가온다) 폴로니어스: 참으로 묘안이십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선 왕자님께서 수심에 빠지게 된 근원과 시초는 실연 때문이 아닌가 사려되옵니다. 그렇지, 오필리어? 햄릿 왕자 전하의 말씀은 말 안해도 안다. 다 들었느니라. 폐하, 폐하의 어의대로 하소서. 괜찮으시다면 연극이 끝난 뒤에 어머님 되시는 왕비 전하께서 왕자님을 부르시어 곡절을 물어심이 어떠실는지요. 페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신이 몰래 숨어서 두 분의 말씀을 자세히 엿들어 볼까 하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알아내지 못하면 왕자님을 영국으로 보내시던가 또는 적당한 곳에 감금하시던가 하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왕: 경의 의견대로 따르리다. 귀인의 실성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일. (모두 퇴장) [ 제2장 궁전의 홀 ] 무대 양쪽에 관람석이 마련되어 있고, 후면에 막이 쳐진 연단이 있고, 막 뒤에는 내무대가 있다. 햄릿과 배우 세 사람이 막 뒤에서 등장. 햄릿: (배우1에게) 대사를 말할 땐 내가 자네들에게 해준대로 명확하게 해야 한다. 만약 여느 배우들처럼 소리나 고래고래 지르며 수선을 떨 바엔 차라리 거리의 약장사를 데려다 시키겠다. 그리고 손을 움직일 땐 이렇게 허공을 휘젓지 말고 항상 부드럽게 해다오. 감정이 휘몰아친다던가, 또는 뭐라고 할까, 정열이 회오리 바람처럼 일어날 때에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자제심이 필요하단 말이다. 참으로 화나는 일은 가발을 쓴 건장한 배우가 나와서 격정에 사로잡혀 흔히 엉터리 무언극이나 그렇지 않으면 큰 소리나 쳐야 겨우 알아듣는 삼등석 관객의 귀청이 찢어져라 목청을 돋구며 감격적인 장면을 망쳐놓고 마는 일이다. 또 이런 자는 볼기를 맞아 싸. 난폭한 회교도의 터마간트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연기하는 놈 말이다. 폭군 해로드 왕도 찜쪄 먹는 짓이라구. 배우1: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햄릿: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도 아니된다. 그러나 각자 신중히 생각하여 스스로 연구하라. 연기는 대사에, 대사는 연기에 조화시켜야 되느니라. 특히 명심해 둘 건 자연의 절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연극의 목적은 벗어나는 법,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말하자면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다. 옳은 건 옳은 대로, 그런 건 그른 대로 고스란히 비추어, 그 시대의 시대상과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이니까... 요는 만사 지나치거나 덜 됐거나하면 미숙한 관객을 웃길 수 있겠지만 식자에겐 불쾌감을 주게 돼. 그러한 소수 관객의 비난은 꽉 찬 다른 관객들의 칭찬보다 몇 배 중요한 법이니라. 암, 나도 본 일이 있는데... 남들은 칭찬을, 그것도 대단한 칭찬을 하더군... 일부터 모독하는 건 아니다만 대사도 기독교다운 말씨가 아니었고, 걸음걸이도 기독교도답기는 커녕 이교도도 아니고, 도대체 인간다운 점이란 흔적조차 없는 걸음걸이였거든. 그 무대 위에서 어찌나 거들먹거리는지 고함이나 지르고, 이건 창조의 신이 재능 없는 견습공을 시켜 엉터리로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밖에 생각 안돼. 그 패거리들의 인간 흉내란 참으로 추악했어. 배우1: 저희 극단은 그 점을 꽤나 고친 셈이올습니다, 전하. 햄릿: 아니, 철저히 고쳐야 해. 그리고 어릿광대 역도 대본 이외의 대사는 지껄이지 않도록 해줘. 얼마 안되는 우둔한 관객을 웃기려고 자기가 먼저 웃어 보이는 패들도 있는데 그자들은 웃고 있는 동안에 연극에 필요한 점을 머릿속에서 생각해 둬야 하는 데 이걸 까맣게 잊어 버리거든. 아주 못된 버릇이지. 어릿광대가 흔히 그 따위 수작을 부리지만 치사한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여. 자, 가서들 준비하게. (배우들 막 뒤로 퇴장) 폴로니어스,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등장. 어떡해 되었소, 폴로니어스경? 폐하께서 연극을 보실 건가요? 폴로니어스: 예, 왕비 전하도 함께 곧 납실 겁니다. 햄릿: 배우들보고 서두르라고 하시오. (폴로니어스 절을 하고 퇴장) 자네들도 가서 도와주게나. 로즈크랜츠: 예, 알겠나이다, 전하.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폴로니어스의 뒤를 따라 퇴장) 햄릿: 거기 있나! 호레이쇼! 호레이쇼 등장 호레이쇼: 부르셨습니까, 전하? 햄릿: 호레이쇼, 내가 사귄 사람 가운데 자네같이 마음이 곧고 성실한 사람은 없어. 호레이쇼: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전하.... 햄릿: 아니, 꿀 바른 말이 아닐세. 먹고 입고하는 밑천이라고는 아름다운 성품밖에 없는 자네에게 아첨한들 무슨 잇속이 있다고 그르겠는가. 가난뱅이에게 누가 아부하나? 아닐세, 달콤한 말만 하는 혓바닥을 가진 놈에겐 우둔한 세도가나 핥게 하고, 관절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무릎을 가진 놈은 아첨으로 이득이 생기는 데 가서 무릎을 굽실거리라지... 알아듣겠나? 내 마음이 철들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사람의 품성을 분간할 수 있게 된 뒤부터 난 자넬 진정한 마음의 벗으로 생각해 왔네. 자넨 갖은 인생의 고생을 감내하면서도 아무 고통을 받지 않는 삶인 것처럼 운명이 주는 고통이나 은총을 한결같이 고맙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네, 가정과 이성이 의좋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운명의 여신의 손끝에 놀아난 우둔한 음색을 울려 주는 패거리들하고는 본바탕부터 다르니 참으로 부럽기 한량없네. 감정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내 이 가슴 속 깊숙이 간직하고 싶단 말일세. 그런 사람이 바로 자넬세. 내가 너무 너스레를 떨었군... 그건 그렇고 어전에서 오늘밤 연극이 공연되네 그 가운데 한 장면은 언젠가 자네에게 얘기했던 선친의 살해 장면과 비슷하다네. 연극이 시작되거든 신경을 바싹 곤두세워 숙부의 일거일동을 지켜봐 주게... 숙부가 숨겨놓은 죄가 어느 대목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봤던 망령은 잡귀가 분명하고 내 상상력도 불의 신 벌컨의 대장간처럼 녹이 슬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네. 숙부의 표정을 주의 깊게 뜯어봐 주게. 나도 물론 내 이 두눈을 그 얼굴에 못박고 있을 거네만. 연극이 끝난 후에 두 사람의 의견을 모아 그의 태도를 판단해보세. 호레이쇼: 알았습니다, 전하. 연극 도중에 잠시일지라도 한눈을 파는 일이 있다면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안에서 트럼펫과 큰북소리) 햄릿: 드디어 연극 보러 나타나시는군. 미친 척해야겠다. 자네도 자리에 앉지. 왕과 왕비 등장.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그 밖의 궁신들 뒤를 이어 등장. 모두 자리에 앉는다. 왕과 왕비의 폴로니어스는 같은 쪽에 위치하고, 그 맞은 편에 오필리어, 호레이쇼. 그 밖의 사람들이 앉는다. 왕: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햄릿. 햄릿: 썩 잘 지냅니다. 카멜레온 요리 때문입니다. 거짓 약속으로 꽉 찬 공기만 마시구 있죠... 거세한 수탉인들 이렇게 기를 순 없을 테죠. 왕: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햄릿. 내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잖느냐. 햄릿: 네, 그렇다고 되담을 수도 없는 말입니다. (폴로니어스에게) 폴로니어스경은 대학 시절에 연극을 해보았다면서요? 폴로니어스: 그럼요, 햄릿 전하. 명배우라고 칭찬이 자자했었습니다. 햄릿: 무슨 역을 맡았소? 폴로니어스: 줄리어스 시이저를 했었습니다. 의사당에서 살해되는 역을. 브루터스가 신을 죽였지요. 햄릿: 그런 별볼 일없는 밥통을 죽이다니 잔인한 역을 했군. 배우들은 차비가 다 됐나? 로즌크랜츠: 예 전하, 분부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비: 햄릿, 이리 와서 어미 곁에 앉으려무나. 햄릿: 싫습니다, 어머니. 이쪽에 더 강한 지남철이 있어서. (오필리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폴로니어스: (왕에게) 자요! 지금 한 말을 들으셨사옵니까? (두 사람 햄릿을 지켜보면서 속삭인다) 햄릿: 무릎에 누워도 되겠소? 오필리어: 아니됩니다, 전하. 햄릿: 그대 무릎만 베고 눕자는 거요. 오필리어: 예, 그럼 전하. (햄릿 그녀의 발치에 눕는다) 햄릿: 내가 상스러운 짓이라도 할 줄 알았소? 오필리어: 아니옵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햄릿: 처녀 허벅지 사이에 눕난다, 참 멋진 생각인데. 오필리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전하? 햄릿: 아냐. 오필리어: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전하. 햄릿: 누가? 내가? 오필리어: 그렇습니다, 전하. 햄릿: 별수 없지. 나야 천하의 어릿광대니까. 그런 낙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담? 저것 좀 봐요, 우리 어머니의 행복한 얼굴을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두 시간도 안됐는데. (왕비가 고개를 돌리고, 왕과 폴로니어스에게 속삭인다) 오필리어: 아녜요, 두 달의 두 배가 됩니다. 햄릿: 벌써 그렇게 돼? 그럼 상복은 악마에게 입히고 난 수달피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정말 놀랍군! 두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아직 잊혀지지 않다니, 이러다가 위대한 사람의 기억이 사후 반 년은 살아 있을 희망도 충분하겠는걸. 아, 그러니 교회라도 세워둬야지. 그러지 않으면 장난감 말처럼 금세 잊혀지고 말거든. 그래, 그 말 무덤의 비명은 이렇지, '이려! 이려! 장난감 말은 잊혀졌네.'이렇지. 트럼펫 소리, 막이 좌우로 열리고 내무대가 나타난다. 내무대에서 무언극이 시작된다. 무언극 왕과 왕비 매우 정답게 나타나 서로 포옹한다. 왕비는 무릎을 꿇고 왕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동작을 보여 준다. 왕은 왕비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머리를 왕비의 목에 기대고 꽃이 만발한 둑에 눕는다. 왕비는 잠든 왕을 보고 자리를 떠난다. 곧 다른 배우가 등장하여 왕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겨들고 왕관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잠들고 있는 왕의 귀에 독약을 붓고 퇴장한다. 왕비가 돌아와서 왕이 죽은 것을 보고 극도로 상심한다. 독살자는 서너 명의 무언극 배우를 데리고 다시 등장하여 왕비와 함께 슬퍼하는 척한다. 죽은 왕의 시체가 운반되어 나간다. 독살자는 예물을 들고 왕비에게 청혼한다. 왕비는 처음엔 거절하나 결국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막이 내리고 무언극 배우 퇴장) 무언극이 진행되는 동안 햄릿은 불안스런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이며, 왕과 왕비, 폴로니어스와 계속 소근거린다. 오필리어: 이 연극은 무슨 뜻이옵니까, 전하? 햄릿: 엉큼한 장난질을 쳐보는 게지. 음모 같은 거라고 할까. 오필리어: 아마 이 무언극이 연극의 골자인 것 같사옵니다만. 막 앞에 서사역이 등장. 왕과 왕비 이 배우의 말을 경청한다 햄릿: 이 배우가 가르쳐 주겠지. 배우들이란 비밀을 숨기지 못해. 죄다 지껄여 버리거든. 오필리어: 그럼 무언극의 의미도 가르쳐 주겠군요? 햄릿: (거친 어조로) 암 그뿐이겠소, 그대가 해 보이는 무언극도 해설해 줄 거요... 그대가 창피스럽다고 생각지 않고 엉큼한 무언극을 해 보이면 저 배우들은 창피한 생각 없이 그 엉뚱한 의미를 해설해줄 거요. 오필리어: 망측한 말씀만 하시나이다. 전 연극이나 구경하겠습니다. 서사역: 저희들 극단이 무대에 올리는 비극을 끝까지 조용히 경청하여 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퇴장) 햄릿: 저게 극의 서사인가, 반지에 새긴 글귀인가? 오필리어: 정말 너무나 짧은 것 같사옵니다. 햄릿: 여인의 사랑처럼. 극중 왕과 왕비 연단에 등장. 극중 왕: 사랑이 우리들의 마음을 결합시키고 결혼의 신 하이멘이 우리들의 손을 맞잡게 하여 성스러운 혼인의 의식을 올린 날부터 태양신의 꽃수레가 해양신의 바다와 대지의 여신의 둥근 땅을 돌기를 꼬박 서른 번, 열두 번을 서른 곱해서 그 빛을 빌린 달님이 지구를 돌기를 서른 번에 열두 곱. 극중 왕비: 돌고 도는 해와 달은 끝없는 여로처럼 우리의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게 축원해 주소서! 그렇지만 신첩은 슬프옵니다. 요새 폐하께서 병환이 잦으시어 웃음도 사라진 지 오래이고 옛모습을 찾을 바 없어 신첩은 가슴이 아픕니다. 하오나 신첩이 이렇게 가슴 속에 근심을 지닌다 해서 폐하, 조금도 심려치 마옵소서. 원래 여자의 근심과 애정은 함께 하는 법이오니, 애정이 없으면 근심도 없고 애정이 크며 근심도 그만큼 크옵니다. 신첩의 사랑이 얼마만한가는 지내 보셔서 아실 터이고, 애정이 큰 만큼 근심도 크옵니다. 사랑이 커지면 사소한 염려도 근심 걱정이 되고 사소한 근심 걱정이 커지면 위대한 사랑도 커지는 법이옵니다. 극중 왕: 사랑하는 왕비여, 분명 난 얼마 안 가서 당신 곁을 떠날 것같소. 심신이 나날이 쇠잔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그 증거가 아니겠소. 당신은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남아 만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사시오. 그리고 다행히 나 못지 않은 배필을 만나게 된다면.... 극중 왕비: 창피하옵니다. 나머지 말씀은 입밖에도 내지 마소서! 그런 사랑은 제 가슴에는 오직 추악한 배반일 뿐입니다. 재혼을 하느니 차라리 저주를 받겠어요. 남편을 살해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재혼을 .... 햄릿: (방백) 쓰디쓰구나, 지금의 그 말. 극중 왕비: 재혼을 꿈꾸는 마음은 욕정이라는 천한 생각 때문이지 어찌 애정이오리까? 두번째 남편과 잠자리에서 입을 맞춘다면 고인이 된 남편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사옵니다. 극중 왕: 왕비의 말씀이 진정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으나 인간이란 때론 결심을 깨뜨릴 때가 있소. 의지는 기억의 노예일뿐. 태어날 때의 기세는 강해도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 지금은 설익은 과실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지만 익으면 흔들지 않아도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오. 스스로 걸머진 빚은 갚기를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 정열 속에 우리 스스로가 약정한 일은 정열이 식으면 그 결심도 풀어지는 법. 슬픔이든 기쁨이든 격한 생각은 그 격렬함이 사그라지면 그에 따라 생각을 실현하는 힘도 없어지고 마는 거요. 기쁨이 크게 날뛰는 자리에서 슬픔도 가장 크게 한탄하는 법. 사소한 사고만 있어도 희비는 교체하기 마련이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우리의 사랑까지도 운명과 더불어 변화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오. 과연 사랑이 운명을 이끄느냐, 아니면 운명이 사랑을 이끄느냐, 이는 아직도 해답을 얻지 못한 문제요. 정승이 몰락하면 기르는 개까지 도망간다고 하지 않소. 미천한 사람이 출세하면 적도 친구가 되는 법이거늘, 지금까지는 사랑이 운명의 종임이 확실하며, 재물을 가진 사람은 친구가 부족한 일이 없는 반면, 가난한 자는 부실한 친구를 시험하려다 도리어 금세 적이 되는 법. 자, 우리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을 맺자면 우리의 의지와 운명은 상극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는 항상 전복되는 것이 상례라서 생각은 우리의 것이지만, 결과는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법... 그러니 지금은 재혼을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첫 남편이 죽고나면 왕비의 그 생각도 따라서 죽고 말 것이오. 극중 왕비: 비록 대지가 양식을 베풀지 않고 하늘이 빛을 나리지 않고 낮의 즐거움과 밤의 평안함을 빼앗기고 믿음과 희망이 절망으로 변한다 해도, 평생을 옥살이의 고초를 당한다 할지라도, 기쁨을 앗아가는 가지가지의 재앙이 이 몸을 덮쳐 신첩의 소망을 알알이 금가게 할지라도, 영겁의 고뇌가 이승과 내세에서 내 뒤를 쫓는다 해도 폐하를 여윈 이 몸이 어찌 재혼하오리까! 햄릿: 저 맹세를 깨뜨리면 어쩐다? 극중 왕:굳은 맹세 감사하오! 사랑하는 왕비여, 날 잠시 혼자 있게 해주오. 몹시 피곤하오. 한숨 자고 지루한 한낮도 씻은 듯 개운해질 것 같소. (잠이 든다) 극중 왕비: 부디 피곤한 심기를 푸소서. 그리고 불운이 우리 둘 사이를 절대로 갈라놓지 않기를! (퇴장) 햄릿: 왕비 전하, 이 연극이 마음에 드십니까? 왕비: 왕비의 맹세가 좀 경망스럽잖니? 햄릿: 그래도 언약을 지킬 것입니다. 왕: 이 연극 줄거리를 들었겠지? 무엄한 장면을 없을 테지? 햄릿: 없습니다, 없습니다. 이건 단지 익살일 뿐, 재미로 독살을 하지요. 전혀 무엄한 장면은 없습니다. 왕: 연극의 제목은 무엇이냐? 햄릿: 쥐덫입니다. 어째서 그런 제목을 붙였느냐구요?... 그야 비유죠. 이 연극은 비엔나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겁니다. 공작의 이름은 곤자고, 공작부인은 뱁스터라고 합니다. 곧 살인 사건을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만 대단히 음흉한 내용입니다. 하오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깨끗한 양심을 가진 폐하와 저희들에겐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도둑놈들은 제 발이 저려올 것이로되, 죄없는 사람은 걱정할 것 없나이다... 루시어너스로 분장한 배우1이 등장. 검은 흉의 차림을 하고 손에 독약병을 들고 있다. 낯을 찡그리고 위협적인 동작으로 잠자고 있는 왕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선다. 저건 루시어너스라는 사나이, 극중 왕의 조카요. 오필리어: 전하께선 서사역처럼 잘 아시고 계십니다. 햄릿: 난 인형극에서 꼭두각시들이 시시덕대는 수작만 보아도 그대와 애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지. 오필리어: 너무하신 말씀이옵니다,전하. 너무하십니다. 햄릿: 성이 났나? 내것이 성이 나면 그대는 처녀성을 빼앗겨 앓는 소리를 내게 될 거요. 오필리어: 정말 너무하십니다. 햄릿: 그러나 남편을 맞이하면 모르고 지낼 순 없지... (무대를 쳐다보면서) 시작하라, 살인자여. 이 염병할 놈! 우거지상은 그만 짓고 어서 시작하라고! 자아 까마귀가 복수를 부르짖는 데서부터. 루시어너스: 검은 마음에 날렵한 손, 확실한 약효, 때는 바로 지금, 하늘이 나를 도와주었구나, 다행히 보는 자 아무도 없구나. (독약을 쳐든다) 한밤중에 약초를 캐다가 만든 너 간악하고 혐오스런 혼합물아, 마녀 헤커커티의 주문을 세 번 받아, 세 번 독기를 쐬어 만든 독약, 자연의 마력과 무서운 약효를 발휘하여 저 싱싱한 목숨을 당장에 끊어 버려다오. (독약을 왕의 귀에 붓는다) 햄릿: 저자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정원에 있는 왕을 독살하는 장면이오. 왕의 이름은 곤자고, 이 얘긴 실화로서 훌륭한 이탈리아어로 씌어졌어. 이제 곧 보게 되지만 살인자는 곤자고 왕비의 사랑도 얻게 되지. (왕이 창백해져 휘청휘청 일어선다) 오필리어: 폐하께서 자리를 뜨십니다. 햄릿: 공포 소리에 그만 놀라셨나? 왕비: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폴로니어스: 연극을 중지하라. 왕: 등불을 가져오너라... 가련다!(홀 밖으로 뛰쳐나간다) 폴로니어스: 등불, 등불, 등불을 가져오라! (햄릿과 호레이쇼만 남고 모두 퇴장) 햄릿: (노래한다) 울어라 울어라 화살 꽂힌 사슴아 놀아라 놀아라 성한 사슴아 밤을 새는 놈, 잠을 자는 놈, 세상만사 여차 여차. 어때 이렇게 한 곡조 빼고, 옷에다 깃털 장식을 붙이고, 후일 내 팔자가 기구해지면 말야, 샌들 코에다 큼직한 장미꽃 리본을 두 개쯤 달고 나서면 말일세, 나도 극단에 한몫 낄 수 있겠지? 호레이쇼: 한 사람의 반몫 급료는 받으실 수 있습니다. 햄릿: 무슨 말인가, 한 사람 몫이지.(노래한다) 그대 알렷다, 사랑하는 데이먼이여 이 나라는 주피터 신을 빼앗기고 왕으로 들어앉은 자는 여자에 미친... 공작왕 호레이쇼: 공작은 너무 과분합니다. 햄릿: 그런데 호레이쇼, 이제는 그 망령의 말이라면 천금을 걸겠네... 자네도 보았지? 호레이쇼: 예, 눈여겨보았습니다, 전하. 햄릿: 독살에 관한 대화 장면도? 호레이쇼: 똑똑히 살펴봤습니다.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이 돌아온다. 햄릿: 앗하!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자아, 풍악이다! 피리를 가져오라! (노래한다) 폐하께선 희극이 싫으시단다. 그래 어쨌다는 거지... 싫으면 확실히 싫은 거지 자, 풍악을 울려라! 길든스턴: 황공하오나 한 마디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햄릿: 천 마디를 해도 괜찮네. 길든스턴: 전하, 폐하께서... 햄릿: 그래, 폐하께서 어쨌단 말인가? 길든스턴: 연극을 보신 후 심히 언짢아하셨습니다. 햄릿: 과음하신 거겠지. 길든스턴: 아니올습니다, 전하. 아주 진노하셨나 봅니다. 햄릿: 그렇다면 전의를 불러 치료해 드리는 게 훨씬 현명한 처사지. 내가 섣불리 처방을 했다간 화가 더할는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길든스턴: 황공하오나 그렇게 엉뚱한 말씀만 하지 마시고 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햄릿: 그럼 경청해 볼까... 어서 말하게. 길든스턴: 어머님이신 왕비 전하께서 대단히 상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을 이리로 보냈습니다. 햄릿: 잘 오셨습니다. 길든스턴: 전하, 그런 정중한 말씀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황공하오나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해주신나면 어머님의 분부를 사뢰겠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신 하직하옵고 이만 물러감으로써 신의 일을 끝낼까 하옵니다. (절을 하고 돌아선다) 햄릿: 그리 할 순 없네. 로즌크랜츠: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햄릿: 이치에 맞는 대답 말일세... 머리가 돌았거든.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기꺼이 해주겠네. 자네 말대로 어머님이 원하시는 대로 말야. 긴 소리 말고 용건을 말해 보게... 어머님이 어떻다는 건가.... 로즌크랜츠: 그럼 어머님의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왕자님의 행동이 너무 당돌하시어 왕비 전하께서는 놀라셨다 하옵니다. 햄릿: 참 효자로군, 어머닐 놀라게 할 수 있다니! 글 어머님이 놀란 뒤끝에 어떻게 됐다는 얘긴 없는가? 말하게. 로즌크랜츠: 전하, 침소에 드시기 전에 왕비 전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햄릿: 열 곱절만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되신다면 정히 복종하겠네. 또 무슨 용건이 있나, 어서 말하게. 로즌크랜츠: 예전에 전하께서 신을 총애해 주셨습니다. 햄릿: 지금도 총애하지, 이 손버릇, 이 나쁜 양손에 걸고 맹세하네. 로즌크랜츠: 전하, 요새 울적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옵소서. 전하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방 속에 갇히는 것과 같사옵니다. 햄릿: 실은 야망이 좌절돼서 그러네. 로즌크랜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은 국왕 폐하께서 전하를 덴마크 왕위 계승자로 책봉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햄릿: 그야 그렇지. 하지만 '풀이 자라기 전에 말이...' 이 속담도 시금털털해. 배우들이 피리를 들고 등장. 아, 피리가 왔다, 나도 하나 주게. (피리를 하나 받아들고 길든스턴을 한 쪽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저리 좀 가세. 어쩌자고 자넨 그처럼 날 떠보려고 그러나? 날 함정에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길든스턴: 죄송합니다 전하, 신이 하는 일에 무엄한 점이 있다면 그건 다 전하에 대한 신의 충정 때문이옵니다. 햄릿: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군... 이 피리를 불어 보게. 길든스턴: 피리하곤 깜깜 절벽입니다. 햄릿: 한번 불어 보게. 길든스턴: 정말 불 줄 모릅니다. 햄릿: 제발 부탁이니 어서. 길른스턴: 용서하십시오. 손도 대 보지 않았을 걸요. 햄릿: 공연히 거짓말하는 것 같네. 이렇게 구멍을 다섯 손가락으로 막고 입을 대고 입김만 훅훅 불어 보게나, 오묘한 가락 소리가 흘러나올 테니 말야... 여기를 봐. 이것들이 구멍이야. 길든스턴: 글쎄 손이 제대로 돌아가야 조화로운 소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피리엔 재주가 없습니다. 햄릿: 예끼 이 사람아, 그렇다면 자넨 날 무엇으로 알고 있었나! 날 피리 불 작심이었지? 누르는 구멍을 잘 아는 척하고선 내 마음 속의 비밀을, 속알맹이를 빼내려고 저음에서 고음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울려 보려는 심사였군... 이 작은 악기엔 아름다운 가락과 절묘한 소리들이 들어 있지. 그런데도 피리를 볼 줄 모른다... 이 사람아, 그래 날피리보다 불기 쉬운 줄 알고 호락호락 덤벼들었나? 날 무슨 악기로 취급해도 상관 없네만 날 소리 나게는 못할 걸세. 화를 내게는 할지언정. 폴로니어스 다시 등장 아니, 어인 일이시오! 폴로니어스: 전하, 왕비 전하께선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십니다, 속히 오시랍니다. 햄릿: 저기 낙타처럼 생긴 구름이 보이시오? 폴로니어스: 그러합니다, 영락없이 낙타모양이군요. 햄릿: 모양이 족제비 같은데. 폴로니어스: 그렇군요, 등 모양이 족제비 같습니다. 햄릿: 가만, 고래 같지 않소? 폴로니어스: 옳아, 고래 같군요. 햄릿: 그럼 곧 어머님을 가 뵙는다고 그리 아뢰시오. (방백) 이것들이 사람을 조롱해도 분수가 있지... 곧 가뵙는다고 여쭈시오. 폴로니어스: 그리 아뢰겠습니다. (폴로니어스,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퇴장) 햄릿: '곧 가 뵙는다'는 말은 어렵지 않지.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햄릿을 제외한 모든 배우 등장) 지금은 오밤중, 마녀들이 활개 칠 시각, 무덤은 입을 활짝 벌리고, 지옥에서는 이 세상을 향해 독기를 내뿜고 있을 시각이다. 지금이면 나도 사람의 뜨거운 피를 능히 발 수 있고, 낮이라 사지가 떨릴 만한 무시무시한 소행도 저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우선 어머니에게 가 보자... 오 내 마음아, 천륜의 정을 잃지 마라. 폭군 네로 같은 영혼일랑 이 착한 가슴에 끌어들이지 말자. 심하게 대하더라도 모자의 정만은 잊지 말자. 혀끝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찌를지언정 칼을 잡아서는 안된다. 이 문제에 한해서 내 혀와 영혼이 서로 엇갈려 있어다오. 말로는 아무리 추상같은 책망을 할지언정 나의 영혼이여, 절대로 그 말의 실행에는 응하지 말아다오.(퇴장) [ 제3장 엘시노궁전 안의 한 방 ] 3막 1장에서처럼 기도용 책상이 놓여 있다. 복도 바깥 쪽은 접견실이다. 왕,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등장 왕: 난 햄릿의 꼴도 보기 싫다. 미친 사람을 마구 놀아나게 그냥 내버려두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길. 그러니 너희들 곧 떠날 준비를 하라. 너희들의 임명장은 곧 보낼 터인즉 왕자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거라. 어찌 종사가 태평하겠는가. 왕자의 광증이 빚어내는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그냥 옆에 둔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 길든스턴: 곧 떠날 준비를 하겠나이다. 성덕에 의지하여 생을 이어가는 만백성의 안위를 보살펴 주심은 진실로 거룩하옵고 섬세하신 성령이시옵니다. 로즌크랜츠: 사사로운 개인의 생명도 자기 생명의 위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온 정성 다바쳐 대비하여야 한다고 사려됩니다. 하물며 성체 평안함에 이 나라 백성의 생명이 달려 있는지라 더더욱 조심하심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폐하의 불행은 옥체 한 몸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용돌이 같아서 주위에 있는 것을 모두 끌어들이옵니다. 오, 그것은 마치 높은 산봉우리에 꽂힌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아서 그 굵은 바퀴살 하나 하나에 수많은 부속물이 붙어 있습니다. 그 수레바퀴가 산봉우리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면 부속물은 하나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집니다. 지존의 한숨 소리는 곧 만백성의 신음 소리이나이다. 왕: 자 그러면 어서 차비하여 속히 떠나도록 하라. 위험한 것엔 족쇄를 채워 놓아야 하는 법. 여태껏 너무나 방임해 왔구나. 로즌크랜츠: 서두르겠나이다.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퇴장) 폴로니어스 등장 폴로니어스: 폐하, 왕자 전하께서 내전으로 드시나 봅니다... 신은 휘장뒤에 숨어서 자초지종을 세밀히 살피겠습니다. 왕비 전하께서 엄히 질책하실 것은 틀림없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폐하의 말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라 사려되옵니다. 친자식간의 정이 있은즉 아드님 생각에 치우치실 수 있으니 아무래도 제삼자가 엿듣는 것이 좋을 줄 아옵니다.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폐하께서 침전에 듭시기 전까지 찾아가 뵙고 결과를 말씀드리겠나이다. 왕: 수고하오, 폴로니어스경... (폴로니어스 퇴장. 왕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아, 이 더러운 죄의 악취가 하늘 끝까지 찌르는 구나. 형을 죽이고 최초의 저주를 받은 카인의 죄를 범하고! 기도하고 싶은 심정과 기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기도 드리려 해도 헛수고로다. 죄책감이 이렇게 강하니 나의 굳은 결심도 허물어지는 구나. 토끼 두 마리를 잡으려는 사람처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주춤거리다가 둘 다 놓치고 말지. 형의 피가 엉겨 붙어 덧개비를 이룬 이 저주받은 손에 하늘이 자비로운 비를 억수같이 내리게 해서 눈처럼 희게 말끔히 씻어줄 수는 없을까? 죄인을 구제해주지 못한다면 어찌 자비라 할 수 있는가?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또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는 이중의 공덕이 없다면 기도를 드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자... 내 죄는 이미 과거의 것. 그러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한단 말인가? '욕된 살인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할까? 안될 말. 살인의 죄를 범한 결과 얻은 이득, 나의 왕관, 나의 야망, 그리고 나의 왕비를 손아귀에 넣고 아직도 흥청대고 있지 않은가? 죄를 어깨에 짊어진 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썩은 세상에선 죄로 더럽혀진 손도 황금의 뒷받침만 있으면 정의를 밀쳐낼 수 있으며 불법을 갈퀴질한 재물로 국법을 좌우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게야 안되지. 기만은 통하지 않으리라. 행위는 있는 그대로 심판을 받고 우리는 자신의 죄와 마주 대하면서 저지른 죄과를 실토해야만 되는 법. 그럼 어쩐다? 앞으로 어떻게 한다? 차라리 참회를 하자... 참회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런데 참회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찌한다? 비참하구나, 이 심정! 오, 죽음같이 어두운 이 가슴 속! 오, 덫에 걸린 영혼을 새처럼 빠져나오려고 파닥거릴수록 죄어드는구나. 천사들이여, 날 도와주오! 어디 해보자. 굳은 무릎을 꿇어 보자. 강철의 실로 버티어 놓은 심장아, 갓난아기 힘줄처럼 부드러워져다오. 만사가 원만히 되기를. (무릎을 꿇는다) 햄릿 접견실로 해서 등장. 왕을 보고 멈춰 선다. 햄릿: (복도 입구에 다가서면서) 해치우려면 지금이다. 지금 저자가 기도 드리고 있는 동안에... 단칼에 해치우자.(칼을 빼든다) 그렇게 하면 저잘 천당에 보내고 나는 원수를 갚게 되지, 잘 생각해 보자. 나의 아버님을 살해한 저 악당을 외아들인 내가 복수하여 저 악당을 천국으로 보낸다... 아뿔싸, 이건 복수가 아니라 품삯 바고 일해 주는 격이지. 저자에게 나의 아버님이 살해당하셨을 땐 아버님은 죄를 지닌 채 죄악이 5월의 봄꽃처럼 활짝 폈을 때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심문에 대해서는 신 이외는 알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중형을 면치 못할 거다. 그렇다면 저자가 기도하며 영혼을 깨끗이 씻고 승천할 차비중에 죽여 버린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했던 복수란 말인가? 안되지. (칼을 칼집에 넣는다) 칼이여, 칼집으로 들어가라, 더 끔찍스런 때에 쓰자. 왕이 취해 잠들어 있거나 노여움에 떨 때나 이불 속에서 불륜의 쾌락을 탐닉할 때나 또는 도박을 하든 폭언을 뱉든 아니면 구원조차 받지 못할 짓을 하고 있을 때에 길을 떠나 보내라. 그러면 그잔 발뒤꿈치로 천당을 차버리고 곤두박질해 검게 그을린 영혼이 되어 깜깜한 지옥으로 떨어질 게 아닌가. 어머니가 기다리시겠다. 네 목을 지금 베지 않는 건 고통을 끌게 하기 위해서다. (그냥 지나간다) 왕: (일어서면서) 말은 하늘을 날지만 마음은 지상에 남아 있다. 빈말만 뱉어내어 어찌 하늘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퇴장) [ 제4장 왕비의 침실 ] 한쪽 벽에 휘장이 늘어져 있고, 또 한쪽 벽에는 선왕과 현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의자 몇 개와 침대가 놓여 있다. 왕비와 폴로니어스 등장. 폴로니어스: 왕자 전하께서 오십니다. 왕비 전하, 따끔하게 타이르십시오. 장난이 너무 지나치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옵니다. 중간에 끼여 폐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다고 말씀하십시오. 신은 여기 숨어 듣겠습니다. 제발 모질게 말씀하십시오. 햄릿: (밖에서)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왕비: 괜찮아요, 내 염려는 마오. 숨기나 해요. 왕자가 오나봐요. (폴로니어스 휘장 뒤에 숨는다) 햄릿 등장. 햄릿: 어머님, 왜 그러십니까? 왕비: 햄릿, 너 때문에 아버님께서 진노하셨다. 햄릿: 제 아버님은 어머님 때문에 진노가 대단하시죠. 왕비: 아니, 아니, 그런 말버릇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햄릿: 왜 딱하신 말씀만 하시죠? 왕비: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햄릿? 햄릿: 왜 그러십니까? 왕비: 넌 어미도 다 잊었느냐? 햄릿: 아뇨, 십자가에 맹세하지요. 왕비 전하이시고 시동생의 아내이시죠. 그런데 아니었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 소자의 어머니시고요. 왕비: 좋아, 그렇다면 너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 앉힐 테다. (퇴장하려 한다) 햄릿: (왕비를 붙들고) 자자, 이리 앉으십시오, 움직이지 마시구요. 소자가 비춰드리는 거울을 보십시오. 어머니 마음 속을 환히 비춰 보일 테니까요. 그때까진 못 떠나세요. 왕비: 대체 어쩔 셈이지? 날 죽일 생각이냐?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폴로니어스: (휘장 뒤에서) 누구 없느냐, 앗!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햄릿: (칼을 빼며) 이건 뭐야! 쥐냐? 뒈져라, 콱 뒈져 버려라. (휘장속으로 칼을 찌른다) 폴로니어스: (쓰러지면서) 아 찔렸다! 왕비: 아이구, 이게 무슨 짓이냐? 햄릿: 글쎄요, 모르겠어요. 왕인가요? (휘장을 들고 보니 폴로니어스가 죽어 있다) 왕비: 아, 이 무슨 잔혹하고 끔찍한 짓이냐! 햄릿: 끔찍한 짓이냐구요... 어머님, 왕을 죽이고 왕의 동생과 결혼한 것과 피장파장이지요. 왕비: 왕을 죽이다니! 햄릿: 예 왕비 전하, 그렇게 말했습니다.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가리키면서) 간에 쇠가 쓴 인간, 덤벙대고 아무 데나 참견하더니, 잘 가거라! 너의 상전인 줄 알았다. 이것도 네 팔자소관, 이젠 알았을 것이다. 너무 촐랑대면 위험하다는 걸. (휘장을 놓고 왕비를 향하여) 손만 쥐어짜지 마시구 고정해 앉으시지요. 소자가 가슴을 쥐어짜 드리지요. 그 가슴이 무쇠덩어리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더러운 습관에 젖어 인간의 감정이 뚫고 들어갈 수도 없게 무감각해진 건 아니시겠죠. 왕비: 이 어미가 무엇을 했다는 거냐! 네가 감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드느냐? 햄릿: 간악한 행동으로 여인의 정숙함을 짓밟았고 정결한 부덕을 위선으로 불리게 했으며, 청순하고 아름다운 이마에서 장미꽃을 떼어버리고 대신 수치로 벌레 먹게 했고 백년해로의 서약을 백지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아, 어머님의 하신 일은 부부의 약속으로부터 그 혼을 빼 버리고 신에게 맹세한 서약을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늘도 격분해서 낯을 붉히고 이 반석같은 대지도 최후의 심판일이 온 것처럼 수심에 잠겨 떨고 있답니다. 왕비: 아니 대체 뭣이 어쨌다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야단 법석이냐? 햄릿: (벽에 걸려 있는 두 초상화 쪽으로 왕비를 데리고 가서) 자, 이 그림을 보십시오. 다음에 또 이 그림을 보시구요. 이 그림은 두 형제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이마에 서린 고귀한 기품을 보십시오. 아폴로신같이 물결치는 머리카락, 주피터신같이 넓은 이마, 주위를 위압하는 군신 마르스와 같은 눈빛, 전령의 신 머큐리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에 막 내려선 것 같은 모습, 덕망 높고 용모도 수려해 하늘의 제신들이 진짜 남자라고 세상에 내세우기 위해 인간의 본보기로 구현시켰던 분이 바로 어머님의 전 남편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이 초상화를 보실까요. 이자가 현재의 남편입니다. 건전하던 형을 병든 보리이삭처럼 말려 죽였죠. 눈이 있으시면 보실까요? 어머님이 아름다운 산의 먹이도 풍부한 숲도 버리고 이 수렁에 내려와서 눈을 붉혀 먹이를 찾으시다니, 흥! 과연 눈이 있으십니까? 사랑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어머니 연세 쯤이면 불 같은 욕정도 식고 순해지며 분별심도 있지 않습니까? 꽃 본 나비처럼 어찌 물불을 가리지 못하며 여기서 이리로 옮긴다 말입니까? 아직도 욕정이 타는 걸 보니 감각은 있는 모양이십니다. 다만 그 감각도 정녕 마비되었던 게죠. 어떤 미치광이라도 이러한 실수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감각이 아무리 광증의 노예가 된다 해도 이런 큰 차이를 구분 못할 만큼 판단력을 아주 잃진 않았을 거예요.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시다니 백주에 낮도깨비에게 홀려 눈뜬 장님이라도 되셨나요? 촉각이 없으면 눈이 있을 거고, 시각이 없으면 촉각이라도 있을 거고, 손과 눈이 없어도 귀가 있구, 다른 아무 감각이 없다면 코라도 있을 게 아닙니까, 아니 올바른 감각의 쇠잔한 부분만이라도 남아 있다면야 이렇듯 우둔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아 수치심이여, 너의 부끄러운 마음은 어디로 갔느냐? 지옥의 악마여, 늙은 여체에도 욕정의 불씨를 당긴다면 피끓는 젊은이들에게 도덕 따위는 초처럼 누그러져 자기 열로 녹아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무섭게 타오르는 젊음이 욕정의 불길 속에 뛰어들어 온 몸을 태운들 어찌 부끄럽다 할 것인가, 차가운 서리까지도 불처럼 타오르고 이성이 정욕의 뚜쟁이 노릇을 하는 판에 말이다. 왕비: 오 햄릿, 그만해라. 넌 내 눈이 내 영혼을 꿰뚫어보게 하는구나.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을 시커멓게 멍든 내 영혼의 얼룩을 말이다. 햄릿: 안돼죠, 더럽고 역겨운 땀내가 뒤범벅이 된 이불 속에 들어가 썩은 것이 뒤끓는 속에 더러운 돼지 같은 놈과 히히덕거리며 몸을 섞다니.... 왕비: 아 이제 그만, 그만 하라니까. 네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귀를 찌른다. 제발 그만 그만해, 착한 햄릿. 햄릿: 살인자, 악당, 전 남편의 발가락 티눈만큼도 값어치가 없는 놈, 왕의 탈을 쓴 어릿광대, 나라의 대권을 앗아간 낯 두꺼운 도둑놈, 무엄하게도 선반위에서 존엄한 왕관을 훔쳐다 제 주머니에 처넣다니. 왕비: 제발 그만. 햄릿: 넝마조각의 거지왕초.... 망령이 잠옷가운차림으로 나타난다. (망령을 보며) 이 몸을 지켜주오, 하늘의 나래로 감싸 주소서, 천사들이여... (망령에게)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왕비: 아이구, 왕자가 미쳐 버렸구나. 햄릿: 이 불초자식이 꾸물댄다고 꾸짖으러 오셨군요. 때를 놓치고 감정도 식어지고 당신의 장엄한 명령을 바로 시행하지 못하는 소자를요! 아, 그렇죠? 망령: 잊지 마라! 이렇게 찾아온 것은 무디어진 네 결심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다... 봐라, 네 어미가 겁먹고 떨고 있다. 아, 저 영혼의 번뇌를 속히 덜어 줘라. 몸이 허약할수록 고민은 강하게 작용하는 법. 어머니께 말을 걸어드려라, 햄릿. 햄릿: 괜찮으세요, 왕비 전하? 왕비: 어이구, 너야말로 괜찮으냐? 눈에 불을 켜고 공기와 얘길하다니? 네 눈에선 미친 듯한 마음이 엿보인다. 너의 곱게 빗은 머리칼은 잠자다 놀란 병사처럼 한올 한올 생명이 있는 것처럼 곤두서고 있다. 아 착한 아들아, 열에 들뜬 네 마음에 인내심을 되찾아다오.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아보냐? 햄릿: 저것을! 저 모습을! 보십시오,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봅니다. 저 슬픈 모습을 보고 가슴에 멍든 원통한 사연을 들으면 목석도 울 겁니다. 절 노려보지 마세요.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 저의 굳은 결의도 꺾이고 결행하려던 큰 일도 의미를 잃고 피를 보아야 할 제가 눈물을 흘릴 것만 같습니다. 왕비: 누구를 보고 중얼대는 거냐? 햄릿: 아무것도 안 보이십니까? 왕비: 아무것도 안 보인다. 뭐가 보인다고 그러느냐? 햄릿: 아무 소리도 안 들리십니까? 왕비: 우리 말소리 외에는. 햄릿: 보세요, 저기를요!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걸! 아버님께서 생전에 입으시던 꼭 그대로입니다. 저것 보세요, 가십니다. 아 벌써 문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망령 퇴장) 왕비: 그거야말로 네가 꾸며낸 머릿속의 망상이다! 실성했을 때엔 곧잘 만들어 내는 거야. 햄릿: 실성이라뇨! 소자의 이 맥박은 어머니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힘차게 뛰고 있습니다. 제 말은 미쳐서 하는 헛소리가 아니에요. 시험해 보시렵니까? 조금 한 말을 되풀이해 보이죠. 미쳤다면 못할 것이니까요. 어머니 제발 소원입니다. 양심에다 고약을 바르지 마세요. 자신의 죄를 소자의 광증 탓이라고 돌리지 마세요. 고약은 종기의 표피를 덮어줄 뿐, 그 독기는 점점 속으로 번져들어가 전신이 썩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 참회하세요. 과거를 뉘우치고 미래의 죄악을 피하세요. 죄악의 잡초에 비료를 뿌려 더 간악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런 직언을 말씀드리는 무엄을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사정하는 까닭은 요즘같이 포의 포식해서 배부른 세상에서는 정의가 부정에 용서를 빌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부정에서 바른 말을 하는 데도 머리를 숙이고 비위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죠. 왕비: 아 햄릿, 네가 내 심장을 두 쪽으로 쪼개 버리는구나. 햄릿: 아 그러시다면 나쁜 쪽의 심장을 도려내고 나머지 깨끗한 쪽만 가지고 살아가세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오나 숙부의 침실로 가진 마세요. 정절이 없어도 있는 척이라도 하세요. 습관이라고 하는 괴물은 악습에 대한 감각을 죄다 먹어 버리지만 또한 천사와 같은 일면도 있어 항상 점잖고 착한 행동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어색한 옷 같아도 어느새 쉽게 몸에 어울리게 해준답니다. 오늘 밤만 참아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내일 밤엔 참는 일이 쉽게 될 것이며 모레 밤엔 더욱 쉬워질 겁니다. 이와 같이 습관은 인간의 천성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악마를 아주 극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경이로운 힘으로써 그를 우리의 정신 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다시 인사드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회개하여 신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원하시면 소자도 와서 어머님의 용서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늙은이를 죽이다니, (폴로니어스를 가리키며) 큰 실수를 했구나. 그러나 모든 건 하늘의 뜻입니다. 신은 소자로 하여금 이 노인을 살해시킴으로써 내게 벌을 주시고, 또 날 처벌의 도구로 이용함으로써 이 노인을 처벌하셨습니다. 이 시체는 소자가 처리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죽인 책임도 지겠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소자의 말씀이 몹시도 가혹한 것 같습니다만 효심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시작이 나쁘면 끝은 더 나쁘게 될 것 같다... (나가려다 다시 돌아서서) 한마디만 더 드리겠습니다, 왕비 전하. 왕비: 나더러 어찌하라고? 햄릿: 지금 소자가 여쭌 말은 모두 잊어버리세요. 돼지같은 왕이 유혹하거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세요. 볼을 음탕하게 꼬집히며 귀여운 생쥐라고 부르게 하세요. 냄새 나는 입술을 갖다 대게 하든지 징그러운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애무 받으면서 이야기를 전부 고해 바치세요. 햄릿은 정말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척한다구 말예요. 왕에게 사실대로 말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안존하고 현명한 왕비라 하셔도 이와 같은 중대사를 상대는 마녀의 앞잡이인 두꺼비, 박쥐, 수쾡이놈인데 숨겨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죠. 아니 분별이나 비밀이 다 뭐하는 겁니까. 지붕 마루에 걸어둔 새장에서 새들을 모두 날려보내세요. 그리고 그 유명한 원숭이처럼 나도 한번 해본다고 새장 속에 기어들어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목뼈나 부러뜨리시지요. 왕비: 염려 말아라. 만일 말이 숨결에서 나오고, 숨결이 목숨에서 나온다면 네가 한 말을 입밖에 낼 목숨이 내겐 없단다. 햄릿: 소자 영국에 가게 됐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왕비: 아참, 깜빡 잊었다. 그렇게 결정됐다지. 햄릿: 친서는 이미 봉인돼 있고, 두 명의 동창 친구가 어명을 받았다지 뭡니까. 사실 동창이지만 독사처럼 간교한 놈들입니다. 이들이 길잡이가 되어 소자를 함정으로 몰고 갈 자들입니다. 어디 해보라지. 제손으로 묻은 지뢰에 산산조각이 나는 꼴을 보는 거도 재미니까. 어쨌든 소자는 그놈들이 묻는 지뢰보다 몇 자 더 밑을 파고들어 놈들을 달나라까지 날려보낼 겁니다. 아 참으로 볼만하겠죠. 어머니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 영감도 이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군요. 아주 조용한데, 아주 엄숙하고. 살아 생시에는 어리석고 수다쟁이 악당이더니... 자 오라, 너하고의 일도 이제 끝장이 났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머님. (햄릿,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끌고 퇴장. 혼자 남은 왕비,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운다) [ 제4막 ] 시신은 왕과 같이 있네. 하지만 왕은 시신과 같이 있지 않아. 왕은 시시한 물건이라... - 2장 햄릿 대사 중에서 [ 제1장 궁전의 한 방 ] 잠시 후 왕과 왕비,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을 거느리고 등장. 왕: (왕비를 안아 일으키면서) 그렇게 한숨을 쉬는 것을 보니 필시 까닭이 있는가 보오. 그 곡절을 얘기해 보시오. 과인도 알고 싶소. 당신의 아들은 어디 있소? 왕비: 두 분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퇴장) 아 어쩌면 좋아요 폐하, 오늘밤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왕: 무슨 일이오? 햄릿은 어찌됐소? 왕비: 실성을 해서 바다와 바람이 맞붙어 어느 쪽이 더 힘이 센지 겨룰 때처럼 격렬한 발작을 일으키더니 벽쪽 휘장 뒤에서 인기척을 듣자 칼을 빼들고 미친 사람처럼 "쥐새끼, 쥐새끼!"하고 외치면서 숨어 있던 선량한 노인을 찔러 죽였습니다. 왕: 아니 그럴 수가 있나! 과인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당할 뻔했군. 햄릿을 그대로 놔두었다간 큰일 나겠소. 당신은 물론이요, 과인에게도, 누구나 다 말요. 대체 이 참사를 뭐라고 변명을 한담? 책망받을 사람은 과인이오. 앞을 내다보고 이 젊은 미치광이를 미리 경계하여 감금하고 사람들 앞에 나가지 않게 했어야 옳았었는데. 그러나 햄릿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마땅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말았소. 고질병을 가진 자를 다른 사람들이 알까 봐 쉬쉬하다 도리어 자기 목숨을 단축하는 격이 됐지 뭐요. 햄릿은 어디 갔소? 왕비: 죽은 시체를 치운다고 끌고 갔습니다. 글쎄 미치긴 미쳤어도 막돌 속에도 순금이 들어 있듯이 광기 속에서도 순진한 마음이 반짝했는지-자기가 저지른 일에 눈물까지 흘리지 않겠어요. 왕: 자 왕비, 갑시다! 저 산에 먼동이 트는 대로 즉시 그애를 배에 태워 떠나 보낼거요. 이쪽에선 이 불상사를 과인의 권위와 술수로써 얼버무릴 수밖에 없겠구려. 여봐라! 길든스턴!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이 되돌아 온다. 자 두 사람은 어서 가서 몇 사람의 도움을 얻도록 하라-햄릿이 미쳐가지고 폴로니어스를 죽였다. 지금 어머니의 내실에서 시체를 끌고 어디론가 나갔다는데-햄릿을 찾아내서 잘 구슬러 시체를 성당으로 옮기도록 하라. 부탁하네, 서둘러 주게.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퇴장) 왕비, 갑시다. 중신들을 불러들여 왕자에 대해서 취할 대응책과 이 돌발사도 알려야 하겠소. 독기어린 비방의 화살은 대포알이 목표물을 맞히듯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낮은 소리를 내며 나르지만, 이렇게 미리 손을 써두면 과인의 명성에서 크게 빗나가 공허하게 하늘에 메아리 치고 말 것이오. 자 들어갑시다! 과인의 마음은 그지없이 어지럽고 암담할 뿐이오. (왕과 왕비 퇴장) [ 제2장 궁전 안의 다른 방 ] 햄릿등장 햄릿: 이만하면 됐다.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밖에서) 전하! 햄릿! 햄릿: 가만 있자, 저게 무슨 소리지? 누가 햄릿을 부르지? 호, 또 함께 행차했군!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호위병을 데리고 허겁지겁 등장. 로즌크랜츠: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하. 시신말입니다. 햄릿: 흙에 묻어 두었다네. 서로 친척뻘이 되니 말일세. 로즌크랜츠: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시신을 찾아다가 예배당에 안치해야 됩니다. 햄릿: 믿지를 말게나, 제발! 로즌크랜츠: 무엇을요? 햄릿: 내가 자네들 비밀은 지켜 주고, 내 비밀은 다 털어놓을 거라고 말야. 게다가 해면같은 족속들에게 질문을 받고 일국의 왕자인 내가 경하게 대답하다니 그게 될 말인가? 로즌크랜츠: 신을 해면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전하? 햄릿: 암, 그렇지. 왕의 총애를 빨아들이고 있지 않나. 그리고 왕이 주는 보상과 권세도 말일세. 하기야 자네들 같은 신하가 필요할테지. 마치 원숭이가 입안 한구석에 사과 한 쪽을 물고 있다가 언제든지 필요하면 삼켜 버리는 거와 같지. 자네들이 왕을 위해 모은 정보를 왕은 필요할 땐 꾹 짜기만 하면 돼. 그럼 자네들은 해면처럼 다시 바삭바삭 말라 버리지. 로즌크랜츠: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햄릿: 차라리 잘됐군... 머저리 귀엔 독설도 우이독경이라고 했겠다. 로즌크랜츠: 전하 말씀해 주십시오, 시신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함께 어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햄릿: 시신은 왕과 같이 있네. 하지만 왕은 시신과 같이 있지 않아. 왕은 시시한 물건이라.... 길든스턴: 물건이라뇨, 전하! 햄릿: 별것 아니라구. 자, 날 데려가게. 숨박꼭질이다. 술랜 나다. (햄릿은 달려 나간다. 두 사람 허위병을 데리고 햄릿의 뒤를 쫓아간다.) [ 제3장 궁전 안의 홀 ] 왕이 2, 3명의 중신들과 상단의 탁자 앞에 마주 앉아 있다. 왕: 햄릿을 찾아내서 시신을 찾아오도록 일러 놓았소. 그를 멋대로 놀아나게 풀어놓는 건 위험천만이오. 그렇다고 엄벌을 내릴 수도 없고. 그는 미욱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오. 도대체 대중이란 분별력없이 겉만 보고 좋고 옳음을 결정하고, 저지른 죄는 생각지 않고 죄인이 받는 형벌에만 동정하기 일쑤라 만사를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햄릿을 속히 해외로 떠나 보내야겠소. 이것도 신중히 고려한 결과인 것처럼 꾸며서 말이오. 요컨대 어려운 병은 어려운 치료법으로 고치는 법. 달리 길이 없지 않겠소.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 그밖의 사람들 등장. 로즌크랜츠: 폐하, 시신을 감추어 둔 장소를 물어 보아도 왕자님은 도무지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왕: 그래 왕자는 어디에 있는가? 로즌크랜츠: 밖에 계십니다. 감시인을 달려 두었습니다. 분부받고자 합니다. 왕: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로즌크랜츠: 이보게들! 전하를 모셔오게. 햄릿 병사들에게 호위되어 등장. 왕: 그래 햄릿, 폴로니어스는 어디 있느냐? 햄릿: 식사중입니다. 왕: 식사중이라니? 어디서? 햄릿: 본인이 먹는게 아니라 먹히고 있는 중입니다-구더기 같은 정치가들이 모여서 배를 두들기며 먹어대고 있죠. 구더기란 먹는 일에는 제왕이거든요. 인간은 자신이 살찌기 위해 동물을 살찌게 해서 잡아먹고, 자신을 살찌게 해서는 구더기에게 먹히죠. 살찐 왕이나 여윈 거지나 식단이 다른 두 가지 요리지만 같은 구더기 식탁에 오르죠... 그뿐입니다. 왕: 참, 한심하구나! 햄릿: 왕은 뜯어 먹은 구더기를 미끼로 물고기를 낚아서 그 구더기를 먹은 물고기를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왕: 대체 무슨 뜻이냐? 햄릿: 별 것 아닙니다. 왕이라 해도 거지의 뱃속을 행차하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이 말씀입니다. 왕: 폴로니어스는 어디 있느냐? 햄릿: 천당예요... 사람을 보내 찾아 보시지요. 거기서 찾아내지 못하거든 폐하께서 다른 곳을 찾아 보시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이 달안에 찾아내지 못하면 폐하께서 복도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실 때 그 냄새를 맡으시게 될 겁니다. 왕: (시종들에게) 가 찾아 보아라. 햄릿: 서둘지 말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시종들 퇴장) 왕: 햄릿, 이번 일에 대해 과인은 몹시 섭섭하다만 무엇보다도 네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기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 화급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어서 채비를 차려라. 배도 마련됐겠다. 바람은 순풍이요, 친구들도 대기중이다. 영국으로 떠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햄릿: 영국으로요? 왕: 그렇다, 햄릿 햄릿: 좋습니다. 왕: 과인의 뜻을 이해해 준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햄릿: 그 뜻을 아는 천사가 눈에 선합니다. 자 가자, 영국으로! (절을 하며)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님. 왕: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해, 햄릿. 햄릿: 어머님이면 돼죠... 아버님과 어머님은 소위 남편과 아내, 남편과 아내는 일심동체, 그러니까 어머님이십니다. (호위병들을 돌아다본다) 자, 영국으로 가자! (호위되어 퇴장) 왕: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에게) 바싹 뒤를 따라가 서둘러 배에 태워라. 지체하지 말고 오늘 밤 중에 출항시켜야 한다. 어서 떠나라! 그밖에 이 건에 대해서는 만반 준비가 끝났다... 신신 당부한다. 서둘러 주게. (왕 이외의 사람들 모두 퇴장) 영국왕이여, 나의 호의를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긴다면... 과인의 위력으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터. 덴마크의 창칼이 휩쓸고 간 뒷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고 붉은데, 또한 그대는 자진하여 공경하는 뜻을 표해 왔겠다... 이 임명을 소홀히 대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자세한 긴 친서에 충분히 명시되어 있거니와 그곳에 닿으면 즉각 햄릿을 살해하는 거다. 결행하라 영국왕이여, 열병처럼 내 핏속에 그자가 발악하고 있으니, 그대가 이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이 일이 성사될 때까지는 어떤 행운이 온다 해도 나는 즐거움을 모를 것이다. (퇴장) [ 제4장 덴마크 항구 부근의 어느 평원 ] 포틴브라스와 왕자를 이끌고 진군해 온다. 포틴브라스: 부대장, 어서 덴마크 왕에게 나를 대신하여 문안드려 주오. 이 포틴브라스가 이전의 협정대로 군대를 이끌고 덴마크왕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폐하의 윤허를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부대장은 만날 장소를 알고 있겠지. 만약 덴마크왕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직접 가서 배알하겠다고 그렇게 전해 주오. 부대장: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부대장 일행 작별하고 나간다) 포틴브라스: (휘하 부대에게) 서서히 진군하라. (포틴브라스와 휘하부대, 다른 쪽 길로 진군한다) 부대장은 도중에서 항구로 향하고 있는 햄릿, 로즌크랜츠, 길든스턴, 호위병들을 만난다. 햄릿: 부대장, 저들은 어느 나라 군대인가? 부대장: 노르웨이 군대입니다. 햄릿: 대체 무슨 목적으로 출정하고 있는 건가? 부대장: 폴란드의 모 지구를 공략하기 위해서입니다. 햄릿: 지휘관은 누구요? 부대장: 노르웨이 노왕의 조카 포틴브라스 공이십니다. 햄릿: 폴란드의 본토를 치는가? 아니면 어느 국경인가? 부대장: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실속도 없고 한 가닥 명예만이 걸린 쥐꼬리만한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러 가는 중입니다. 소작료 5더컷만 내라고 해도, 단돈 5더컷 말예요, 저는 돈 내고는 빌리고 싶지 않은 땅입니다. 노르웨이 왕이나 폴란드왕도 막상 사가라면 그 이상은 안 줄 겁니다. 햄릿: 흠, 그렇다면 폴란드 사람들은 구태여 그까짓 땅 지키려 하지도 않겠군. 부대장: 그렇지 않습니다. 수비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햄릿: 2천의 생령과 2만 더컷의 돈을 퍼붓는다 해도 지푸라기만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할 것이니라! 번영과 평화가 지나치면 이런 종기가 생기는 법, 밖으로는 아무 증세도 나타나지 않지만 안으로 곪아터져 사람은 죽어가고... 노고가 많소, 부대장. 부대장: 이만 실례합니다. (퇴장) 로즌크랜츠: 그만 가보실까요, 전하? 햄릿: 곧 뒤좇아갈 것이니, 먼저 가 주게나. 아, 사사건건 모든 일이 나의 무력함을 책망하며 무딘 복수심에 박차를 가하는구나! 인간의 하루하루가 단지 먹고 자는 일뿐이라고 한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짐승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미래와 과거를 살펴볼 수 있도록 이성의 크나큰 힘을 준 다는 그 능력, 신과도 같은 이성을 쓰지 않아 곰팡이 슬도록 하시려는 뜻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짐승처럼 까먹은 것일까 아니면 비겁한 망설임 때문에 일의 결과를 너무 소심하게 생각하는 탓일까... 그래 그놈의 생각이란 게 4분의 1만이 지혜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비겁함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 나도 모를 일. '이 일은 꼭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떠들어 대고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내 그 일을 실행할 만한 대의명분도 의지도 힘도 수단도 모두 다 갖추고 있지 아니한가... 대지와 같이 엄염한 실례가 날 채찍질하는구나. 보라, 저 수많은 병력과 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을 통솔하는 저 사람은 가냘픈 젊은 귀공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정신은 원대한 야망에 부풀어 예견할 수 없는 미래에 도전하며 운명과 죽음과 위험 앞에 덧없고 유한한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달걀껍질만한 땅덩리에... 참으로 위대한 것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명예가 걸린다하면 한 오라기의 지푸라기를 위해서라도 죽음을 걸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내 꼴은 뭔가? 아버님은 살해당하고, 어머님은 더럽혀지고, 복수를 위해 이성도 정열도 폭발해야 할 지경인데, 사생결단을 못 내고 죽치고만 있다니. 예이끼, 창피를 알라. 지금도 저 2만의 군사들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변덕스럽고 쓸모도 없는 명예에 이끌려 잠자리로 가듯 무덤을 찾아가고 있다. 대군의 자웅을 겨누기에도 부족하고 전사들을 묻을 묘지로도 모자랄 비좁은 땅을 위해서 싸우러 가지 않는가? 자, 지금부터는 나도 마음을 독하게 먹자. 그렇ㅈ으면 난 상등신이지! (퇴장) 수 주일이 경과한다. [ 제5장 에시노 궁전의 한 방 ] 왕비, 시녀들, 호레이쇼, 신사 한 명 등장. 왕비: 지금은 오필리어를 만나고 싶지 않아. 신사: 기어이 뵙고 싶다고 조르고 있습니다. 꼭 미쳐 버린 듯합니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몰골이옵니다. 왕비: 어떻게 해달라는 거요? 신사: 자꾸만 부친의 말을 합니다. 세상에 해괴한 일이 많다느니,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치고, 사소한 일에도 발끈 화를 내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댑니다. 말 내용이야 별거 아닙니다만 그 뼈대없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측은하게 여기면서, 제멋대로 억측을 하며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맞게 말을 이어 갑니다. 그 눈짓, 끄덕대는 고개짓, 몸짓 하나하나와 더불어 얘기하는 것을 어림해 보면 비록 말들이 분명치는 않으나 크나큰 슬픔의 사연이 있는 듯 합니다. 호레이쇼: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악한 일을 꾸미는 자들에게 억측의 씨를 뿌릴지도 모릅니다. 왕비: 그럼 들리게 하오. (신사 퇴장) (방백) 죄악의 본성이다. 그렇겠지만 병든 내 마음에는 하찮은 일들 하나하나가 재앙의 징조처럼 느껴지니. 죄지은 마음이 두려움에 질려 떨기 때문일까. 감추려고 바둥거릴수록 도리어 고개를 드는구나. 신사가 오필리어를 데리고 다시 등장. 오필리어는 실성해 있다. 손에는 루트를 들고. 머리칼은 산발하여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오필리어: 어디 계셔요, 덴마크의 아름다운 왕비 전하께선? 왕비: 웬일이냐, 오필리어 오필리어: (노래한다) 사랑하는 내 님의 참마음 어떻게 알아낼까? 모자 보고 지팡이 보고 짚신 보고 알죠. 왕비: 아 가엾은 오필리어, 그 노래는 무슨 뜻이지? 오필리어: 뭐라구요? 어쨌든 들어 보세요. (노래한다) 님은 떠나갔어요 먼 나라로 님은 가셨어요 하늘나라로 머리에는 푸른 잔디 덮여 있고 발치에는 묘비석이 서 있어요. 으흐흐! 왕비: 나 좀 봐라, 오필리어.... 오필리어: 아직 안 끝났어요.(노래한다) 수의는 산봉우리의 눈처럼 흰데... 왕 등장 왕비: 가엾어라, 저 모습을 보세요, 폐하. 오필리어: (노래한다) 예쁜 꽃 속에 파묻힌 님 사랑하는 여인은 눈물로 얼룩져 저세상 가는 길 한 맺혀 붙드네. 왕: 웬일이야, 귀여운 오필리어? 오필리어: 네, 감사합니다. 올빼미는 원래 빵집 딸이었다고 하던데요. 오늘 일은 알아도 내일 일엔 캄캄절벽인 게 인간이죠... 수라상에 신의 은총이! 왕: 죽은 아비 생각을 하는군. 오필리어: 제발 그 얘긴 그만 접어 두세요. 하지만 혹시 사람들이 까닭을 묻거든 이렇게 말하세요. (노래한다) 내일은 성 발렌타인 명절 동녘 하늘 동트면 일어나리 사랑하는 님 창가에 서서 그대 기다리리. 내 님은 일어나 새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어 주니 들어간 처녀 나올 땐 처녀의 꽃잎은 떨어졌으리. 왕: 가엾어라, 오필리어! 오필리어: 아이 참, 왜 내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까. 노래나 끝낼래요. (노래한다) 아 슬프고 억울함이 가슴을 저미네! 아무리 사내들 습성이라 말은 하지만 가시처럼 미워라 그대. 몸과 마음 다바쳐 사랑할 때는 백 년 해로를 약속했건만. 남자가 대답하네. 그렇게 꼬리치니 부부되기 다 틀렸대요 왕: 저애가 언제부터 저 꼴이 되었소? 오필리어: 모든 일이 잘 되어갈 테지요. 모두 참아야 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아빠를 차가운 땅속에 눕힌 생각을 하면 울음이 터지는 걸요. 오라버니도 아시게 되겠지. 염려해 주신 친절한 충고 감사합니다. 자 내 마차야, 가자! 안녕히 주무세요. 여러분, 안녕히. 아름다운 부인들,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퇴장) 왕: 바싹 뒤를 따라라.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라. (호레이쇼와 신사, 오필리어를 따라 퇴장) 오, 슬픔이 너무 커 저 지경이 됐구나. 이게 모두 제 아비 죽음 때문이지 뭐겠소... 저걸 보오! 오 왕비, 왕비, 슬픔이 밀어닫칠 땐 하나씩 오지 않고 무리를 짓고 와 덜미를 잡는구려. 첫째 그애 부친의 살해요. 그 다음엔 당신의 자식이 모습을 감추고, 하긴 불행의 씨는 그애라 추방도 당연해. 나라 백성들은 선량한 폴로니어스의 죽음을 둘러싸고 억측과 소문이 파다하며 옳지 못하다는 거요... 어쨌든 과인이 경솔했던 탓이오. 허둥대며 암매장해 버렸으니.... 저 오필리어는 가엾게도 실성하여 이성을 찾을 길 없고 말이 사람이지 저 몰골은 허깨비나 짐승과 다름없소. 그뿐 아니라 중요한 일은 저애 오라비가 몰래 프랑스에서 돌아왔다는데, 무엇을 의심해서 그런지 아직 모습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구려. 부친의 죽음에 대해 염병같은 소문을 귀에 속삭거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거요. 진상이 애매하면 애매할수록 과인을 비난하는 말도 이 귀에서 저 귀로 전해지는 것이 뻔하지 않소. 사랑하는 거투르드, 엽총이 날 겨누고 총탄을 퍼부어 대면 내 온몸은 벌집이 될 것 아니겠소! (밖에서 소음이 들린다) 왕비: 아니! 저게 무슨 소린가요? 왕: (큰 소리로) 여봐라! 시종 한 사람 등장. 호위병 어디 있는가? 입구를 지키라고 해라. 어찌 된 일이냐? 시종: 폐하, 자리를 피하시옵소서! 해일이 둑을 넘어 단숨에 육지를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혈기방장한 레어티스가 폭도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호위병들을 밀치고 들어오고 있나이다. 폭도들은 그자를 왕이라 부르고 마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처럼 모든 질서의 기본이자 기초인 전통도 관습도 다 제쳐놓고 폭도들은 "우리가 뽑아서 레어티스를 왕으로 모시자!"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모자를 던지고 손뼉을 치며 하늘을 찌를 듯이 "레어티스를 왕으로, 레어티스를 왕으로 모시자!"하고 소릴치고 있나이다. (소란은 더욱 커진다) 왕비: 신명나게 짖어대는군, 냄새를 잘못 맡구서! 아, 얼빠진 덴마크의 사냥개들, 어느 쪽을 보고 달려가는 거냐! 왕: 문을 부쉈구나. 레어티스 무장을 하고 난입한다. 그 뒤에 덴마크의 군중이 따라 들어온다. 레어티스: 왕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밖에서 기다려 주시오. 군중: 안돼오, 우리도 들어갑시다. 레어티스: 부탁이오, 내게 맡기시오. 군중: 예 그럽시다, 그럽시다. (군중 문 밖으로 물러간다) 레어티스: 고맙소, 문을 지켜 주시오. 오 간악한 왕, 내 아버님을 내놔라. 왕비: 진정하라, 레어티스. 레어티스: 진정할 수 있는 피가 내게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다면 난 이미 아버님의 자식이 아니오. 아버님은 화냥년의 남편이 되고, 정숙하였던 나의 어머니의 순결무구한 이마에 창녀의 악인을 찍는 꼴이 될게요. (앞으로 육박해 온다. 왕비가 그를 가로막는다) 왕: 도대체 이유가 뭐냐, 레어티스? 어째서 이같은 부당한 모반을 일으켰느냐? 손을 놓아주오, 왕비. 과인의 신상은 걱정할 것 없소. 일국의 왕에게는 신의 가호가 있어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있으니 반역자가 그 울타리를 얼핏 넘볼 수는 있어도 감히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법. 말해 봐라 레어티스, 무슨 이유로 광분하고 있느냐... 놓아 주오, 왕비... 어서 말해 봐라. 레어티스: 내 아버님은 어디 있소? 왕: 죽었다. 왕비: 그렇지만 폐하의 탓은 아니오! 왕: 뭣이든 실컷 물어 보게 하오. 레어티스: 어떻게 돌아가셨소? 결코 날 속일 수는 없소. 이제 충성은 내 알 바 아니오. 맹세 따위는 악마에게 주겠소. 양심도 의리도 지옥으로 팽개쳐 버리겠소! 저주도 두려워 하지 않으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거요. 현세나 내세 같은 것도 내겐 없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내 아버님을 위해 복수하고야 말겠소. 왕: 누가 말리겠나. 레어티스: 못 말리지, 온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가로막는다 해도 내 힘은 미약하지만 갖은 수단 방법을 써서 어떻게든 끝장을 보고 말 거요. 왕: 레어티스,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환장한 노름꾼이 지든 이기든 판돈을 움켜잡듯이 원수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치우겠다는 건가? 레어티스: 상대는 아버지의 원수뿐이오. 왕: 그 원수를 알고 싶은가? 레어티스: 아버지 편이라면 이렇게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할 거요. 자기 가슴의 피로 새끼를 기른다는 펠리컨 새처럼 내 피를 쥐어짜서라도 바치겠소. 왕: 암, 그래야지. 이제야 착한 자식으로서 대장부다운 말을 하는군. 나는 네 아버지의 죽음엔 아무런 책임도 없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애통해 하고 있다. 태양이 네 눈에 비치듯이 네게 조금만 분별이 있다면 곧 알게 될 거다. 군중: (밖에서) 안으로 들려보내라. 레어티스: 왠 소리야! 저 소동은? 오필리어 손에 꽃을 들고 다시 등장. 아 뜨거운 불이여, 나의 뇌수를 바짝 말려다오. 짜디짠 눈물이여, 내눈의 감각과 시력을 태워 주려무나! 맹세한다. 널 실성케 한 원한은 내뼈를 갉아서라도 원수를 갚으마. 아 오월의 장미, 귀여운 처녀, 다정한 내 동생, 아름다운 오필리어! 오 하늘이여, 젊은 처녀의 이성이 노인의 목숨처럼 저렇게 허망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사람을 사랑할 때 가장 순수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랑이 지극하면 존귀한 넋까지도 바치면서 사랑하는 님의 뒤를 따른단 말인가. 오필리어: (노래한다) 얼굴도 덮지 않고 관에 떠메어 갔지 헤이 나나니 나니 헤이 나니 무덤에는 눈물이 억수같이 쏟아지고... 그대여 안녕, 나의 님! 레어티스: 네가 제정신으로 복수를 조른대도 이처럼 내 가슴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오필리어: 노래 부르세요, "지하자, 지하자, 님을 찾아 지하자." 물레바퀴 장단에 잘도 맞네! 나쁜 하인이었어요. 어쩌면 주인 집 딸을 도둑질하다니. 레어티스: 허황된 그 말이 더욱 뼈에 사무치는구나. 오필리어: (레어티스에게) 이것은 만수향, 영원불망이란 뜻이에요... 나의 사랑이여, 부디 잊지 마세요... 그리고 이것은 상사꽃, 날 생각해 달라는 꽃이에요. 레어티스: 실성한 말 속에도 뼈가 있다. 제발 잊지 말라니 꼭 맞는 말이다. 오필리어: (왕에게) 당신에겐 이 회향꽃과 매발톱꽃을. (왕비에게) 당신에겐 이 참회의 꽃을 드리죠... . 아 당신이 이 꽃을 달 때는 그렇게 불러선 안돼요. 이건 실국화, 당신에게는 제비꽃을 드릴까요.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바로 시들어 버렸어요... 아버님은 편히 잠드셨대요... (노래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실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실까? 아니 아니 죽도록 기다린들 영영 가버렸으니 다시는 못 돌아올 분 백설같은 흰 수염 늘어뜨리고 서리 내린 백발 나부끼면서 말없이 가셨네 떠나시었네 뒤늦게 탄식한들 무엇하리오! 신이여 그분께 은총을 내리소서!... 여러분을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퇴장) 레어티스: 똑똑히 보았소. 저 꼴을? 왕: 레어티스, 네 슬픔을 나와 함께 나누어 보자.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기자. 누구든 좋으니. 네가 믿는 가장 똑똑한 친구 몇 명을 골라 너와 내 말을 듣고 판단을 하게 한다. 어쨌든 이번 일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광인에게 티끌만큼이라도 혐의가 있다면 이 왕국이고 왕관이고 목숨이고 아니 과인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보상으로 양도하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너의 마음을 풀고 참아야 해. 그러면 과인이 너와 합심하여 애 원한이 시원히 풀리도록 힘쓸 것이니라. 레어티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부친의 사망의 연유며, 은밀하게 치른 장례식, 또 무덤에는 위패도, 검도, 문장도 없을 뿐더러 마땅한 법이나 격식을 갖춘 의식도 치르지 못했다고 하니... 그 억울한 외침이 하늘에서 이 땅 위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기어코 진상을 규명하고야 말겠습니다. 왕: 네 뜻을 이루어 주리라. 그래서 죄 있는 곳이 정의의 도끼를 내리쳐야지. 그럼 같이 안으로 들자. (퇴장) [ 제6장 궁전의 다른 한 방 ] 호레이쇼와 그밖의 사람들 등장. 호레이쇼: 내게 할 말이 있다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인: 선원들입니다. 서찰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호레이쇼: 들라 일러라. (시종 한 사람 퇴장) (방백) 나한테 서찰이라. 이 세상 어디에도 보낼 사람이 없는데, 햄릿 왕자님이 아니고서야. 시종이 선원들 몇 사람을 안내한다. 선원1: 주님의 은총을! 호레이쇼: 너희들에게도 은총을! 선원1: 서찰을 가져왔는뎁쇼. 영국에 가시는 사신한테서 보내온 겁니다. 나리의 함자가 바로 호레이쇼님이시죠? 호레이쇼: (슬쩍 받아서 편지를 읽는다) 호레이쇼, 이 서찰을 받아 보거든 선원들을 국왕께 안내해 주게. 국왕 앞으로의 서찰을 가지고 가니... 우린 출항한지 이틀 만에 무장한 해적선의 추격을 받았다네. 우리 배의 속력이 너무 느려 미처 도피하지 못하였고, 우린 부득이 적과 싸우다가 난 적선에 타게 됐네. 내가 옮겨 타자마자 그 배는 우리편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 한 사람만이 포로가 되어 버렸지. 해적들은 의적답게 나를 대우해 주었다네. 이득을 노리고 있는 수작이었지. 나도 그들에 보답을 해야 하네 나의 글을 폐하께 꼭 전달해 주게. 그리고 나선 막 호랑이 입을 벗어난 사람만큼이나 잽싸게 이곳으로 달려와 주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데 얘기를 들었으면 자네는 놀라 말문이 막힐 걸세. 편지로는 전할 수 없는 중대란 일일세. 이 선량한 사람들이 자넬 나 있는 데로 안내해 줄 걸세. 로즌크랜츠와 길든스턴은 영국으로 항해하는 중이고... 그들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이 있네. 그럼 이만. 자네의 마음으로부터의 친구인 햄릿으로부터. 너희들이 가져온 이 서찰을 국왕께 알선해 주겠다. 그러고나선 되도록 빨리 나를 서찰 주인에게 안내해 다오. (모두 퇴장) [ 제7장 궁전의 다른 한 방 ] 왕과 레어티스 등장 왕: 이제 과인의 결백을 인정하고 과인을 진정한 네 편으로 생각해야 하느니라. 넌 총명하니 잘 알아들었겠지만 훌륭하신 선친을 살해한 자가 바로 과인의 목숨도 노리고 있느니라. 레어티스: 그러하옵니다. 하오면 어이하여 그런 사악한 행위를 처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안위를 위해서나, 폐하의 권세, 슬기, 어느 모로 보더라도 폐하야말로 그 대죄를, 사형에 처해 마땅한 그 행위를 방치해 두실 수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왕: 그건 두 가지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를 넌 하찮게 생각할 지 모르나 과인에겐 매우 중대하다. 그의 생모인 왕비는 햄릿없이는 하루도 살 보람을 못 느끼며, 과인으로 말하자면 잘 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만 왕비는 내 생명이며 내 영혼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마치 하늘의 별이 그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말이다. 왕비없이는 과인도 살 수가 없다. 또 하나 그를 처벌 못하는 큰 이유는 백성들이 그를 숭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드니 곰보도 보조개로 보이는지 마치 나무를 던지면 돌로 화하게 하는 광란처럼 족쇄를 차도 그걸 미덕의 상징으로 알고 떠받든다. 따라서 과인의 화살을 쏘아도, 거칠게 몰아치는 강풍에는 나무도 가벼운 재목이라 본래 겨냥했던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과인에게로 되돌아오는 판이다. 레어티스: 그래서 저는 훌륭한 아버님을 잃었고, 누이동생마저 비참하게 실성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칭찬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누이동생의 인품은 어느 때에도 칭찬을 받을 여성의 귀감이었습니다. 기어이 복수할 것입니다. 왕: 그렇다고 잠을 설치면서까지 골몰해선 안된다. 과인 역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보고만 있을 그런 우둔하고 쓸개빠진 위인이 아니다. 자세한 이야긴 차차 하자. 과인은 너의 선친을 소중히 대해 왔다. 과인이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듯. 이쯤 말하면 대충 짐작이 가고 남으렸다... (전령이 사찰을 가지고 온다) 웬일이냐! 무슨 소식이라도 왔느냐? 전령: 햄릿 전하의 서찰이옵니다. 이것은 국왕 폐하께, 이것은 왕비 전하께 올리는 것이옵니다. 왕: 햄릿한테서! 누가 갖고 왔는가? 전령: 선원들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소신은 그들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만 클로디오가 소신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선원들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합니다. 왕: 레어티스, 읽을 테니 들어 보아라. 너는 물러가라. (전령 퇴장) (읽는다) 지존하옵신 폐하께 삼가 아뢰나이다. 소자 맨몸으로 이 나라에 상륙했나이다. 바라옵건데 내일 배알의 영광을 얻고자 하나이다. 그때 불시 귀국한 기이한 사유를 상세히 아뢰올까 하오니 널리 통촉해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햄릿 올림.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이냐? 다른 일행도 돌아왔느냐? 아니면 무슨 속임수가 아니더냐? 레어티스: 필적은 틀림없습니까? 왕: 햄릿의 필적이다... '맨몸'이라. 추신에다가는 '단신으로'라고 했겠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레어티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폐하. 올 테면 오라죠! 신이 살아서 복수할 것을 생각하니 응어리진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맞붙어서 "네놈이 한 짓이지."하고 따질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왕: 만약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아냐, 아니라고만 할 수 없지... 과인의 지시대로 따르겠는가? 레어티스:예 폐하, 화해하라는 하교만 아니시라면. 왕: 너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놈이 항해를 중지하고 돌아와 다시 출발할 의향이 없다고 우기면 놈을 설득해서 과인이 미리부터 꾸며온 계략에 끌어들일 작심이다. 그러면 놈도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놈의 죽음에 대해 시비할 사람도 없을 것이며, 제 생모조차도 계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의에 당한 참변으로 생각할 것이다. 레어티스: 폐하,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그러한 계략을 세워 주신다면 기꺼이 앞장서겠습니다. 왕: 그렇다면 잘됐다. 네가 유학을 떠난 이후에도 너에게 어떤 출중한 재주가 있다고 해서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었다. 그 말을 햄릿도 곁에서 들었느니라. 그런데 네가 익힌 수많은 재간 중에 특히 한 가지 재주를 시샘하는 모양이더라. 과인이 보기에는 별로 가치 있는 재주라고 생각되지도 않지만. 레어티스: 어떤 재주 말씀입니까, 폐하? 왕: 젊은이의 모자를 장식하는 리본같은 거라고나 할까. 하기야 그것도 필요할 테지. 대저 젊은이들에게는 가볍고 자유분방한 옷이 어울리고, 노인들에게는 관록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검은 수달과 장옷이 어울리지. 두 달 전에 노르만디 사람이 이곳에 왔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프랑스인들을 만났고 싸워보기도 해서, 그들이 마술에 통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야말로 마술에는 도사여서 안장에 뿌리를 내렸다고나 할까. 어찌나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지 말일세, 마치 말의 본성을 반쯤 물려받은 것같이 보이더라. 실로 상상도 못할 정도로 모습이 멋지고 재주가 뛰어나 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느니라. 레어티스: 노르만디 사람이라고 하셨나이까? 왕: 그렇다. 레어티스: 그럼 라모드인가 봅니다. 왕: 바로 그 사람이다. 레어티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프랑스의 꽃이요, 보석입니다. 왕: 그런데 그 사람은 네 솜씨를 극구 칭찬하더라. 호신술의 이론과 실기에 있어선 널 당할 수 없으며 특히 검술에는 천하가 무적이어서 너와 겨눌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한 번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프랑스의 검객들도 너와 맞서면 몸의 움직임, 방어의 자세, 눈의 총기 등 무엇하나 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했느니라. 그 사람의 말을 들은 햄릿은 시기심에 불타 네가 하루 빨리 돌아와 너와 한번 정면으로 겨뤄 볼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 레어티스: 예 어떻게 말입니까, 폐하? 왕: 레어티스, 너는 부친을 진정으로 사랑했느냐? 그렇잖으면 네 슬픔이 속 다르고 겉 다른 외양뿐이었느냐? 레어티스: 어이하여 그걸 물으십니까? 왕: 네가 부친을 사랑하지 않았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사랑에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대개 때를 타는 법이다.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꽃 속에도 심지가 있어 불꽃의 힘을 약화시키게 마련이다. 무슨 일이든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일도 막바지로 치달으면 쉽게 기우는 법. 하고자 하는 일은 당장 실행해야 한다. '하겠다'는 마음도 변하는 것. 더구나 세상사람들이 입질을 하거나 그들의 방해를 받으면 실행력이 약해지고 지체가 되느니라. 따라서 이 '한다'는 생각도 심장의 피를 말리는 탄식과 같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컨대 아니라 행동으로 몸소 보여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레어티스: 설령 교회 안으로 숨는다 해도 단칼에 목을 자르겠습니다. 왕: 제아무리 성전이라도 살인죄를 보호하진 못한다. 복수에 성역은 없다. 하지만 레어티스, 복수를 하고 싶거든 집안에 꾹 틀어박혀 있거라. 햄릿이 돌아오면 너의 귀국을 알려 주리라. 과인은 사람들을 부추겨서 너의 솜씨를 칭찬케하며 그 프랑스인의 칭찬에 한술 더 떠서 너스레를 늘어놓아 결국 두 사람이 맞붙게 해서 승부를 가리게 한다니 말이다. 햄릿은 천성이 대범한 편이고, 순수하며, 술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위인이니까 칼을 조사해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손을 조금 써서 쉽게 진짜 날이 선 칼을 골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능란하게 한 번 찌르면 선친의 원수를 갚게 된다. 레어티스: 하겠습니다. 이왕 싸울 바엔 칼 끝에 독을 칠하겠습니다. 실은 도부장수한테서 독약을 사둔 게 있으니까요. 지독한 극약이라 그 독약을 조금이라도 바른 칼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왕: 그건 신중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계획이 성취할 수 있는 시기와 방법을 잘 생각해야 한다. 만약에 실패하여 우리의 계획이 탄로날 바에야 아예 손을 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획은 실패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예비적이거나 제2차적인 방책을 마련해 뒤야 하느니라. 잠깐 이렇게 하자. 과인이 쌍방의 솜씨에 공정한 내기를 건다고 하고... 그렇지! 싸우는 동안에 신열이 나고 갈증이 날테지. 그렇게 되도록 격렬하게 시합을 해줘야 한다. 햄릿이 물을 청하면 때를 맞추어 마련해 둔 잔을 준다. 어쨌든 한 모금만 마시면 비록 독을 칠한 검을 다행히 피할 수 있더라도 우리의 목적은 이루어진다... 가만, 웬 소리냐? 왕비 울면서 등장. 왕비: 불행은 자꾸만 꼬리를 물고 오는구나. 레어티스, 동생이 익사했다네. 레어티스: 익사라뇨! 오, 어디서요? 왕비: 버드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는 시냇물가에 흰 잎새가 거울같은 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네. 그곳으로 그애가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실국화, 그리고 음탕한 목동들은 상스런 이름으로 부르지만 청순한 처녀들은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라고 부르는 연자주색 난초꽃으로 만든 이상한 화관을 쓰고 와서 늘어진 버들가지에 올라가 그 화관을 걸려고 했을 때 심술궂은 가지가 갑자기 부러져서 오필리어는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빠지고 말았어. 그러자 옷자락이 활짝 펴져 인어처럼 잠시 수면에 떠있으면서 오필리어는 늘 부르던 찬송가를 부르더래. 마치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물에서 나서 물에서 자란 사람처럼 말이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마침내 옷자락에 물이 배어 무거워져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그 가엾은 것이 시냇물 진흙바닥에 휘말려 들어가 죽고 말았다네. 레어티스: 정말 물에 빠져 죽었군요. 왕비: 그래, 빠져 죽은 거야. 레어티스: 이젠 물을 보기도 지겹겠구나, 가엾은 오필리어. 그래 다시는 나도 눈물을 쏟지 않겠다. 하지만 눈물은 인정이런가.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구나. 남이야 뭐라하든... 실컷 울고 나면 연약한 내 마음도 사라지리라... 그럼 폐하, 이만 물러갑니다!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말을 내뱉고 싶지만 지금은 어리석은 눈물로 지워집니다. (퇴장) 왕: 뒤를 따릅시다, 왕비. 저애 격분을 가라앉히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시오! 불같은 성미라 또 발작할까 두렵소. 뒤를 좇아가 봅시다. (왕과 왕비, 레어티스를 좇아간다) [ 제5막 ] 이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을 한 저주받을 덴마크왕아, 이 독을 마셔 끝장내라. - 2장 햄릿 대사중에서 [ 제1장 묘지 ] 갓 파놓은 무덤속. 삼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묘지 입구가 보인다. 두명의 광대(무덤 파는 일꾼과 젊은 조수)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등장하여 파기 시작한다. 광대1: 제가 좋아서 저승길 찾아간 여잔데 이렇게 기독교식 장사를 치러 주어도 된다는 말인가? 광대2: 괜찮다는 거야. 그러니 어서 무덤이나 파. 검시관이 조사해 보고는 기독교식으로 매장하라고 했어. 광대1: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면 몰라도. 광대2: 아따 그렇다는대두. 광대1: 그렇다면 그건 정당 폭행이지. 그게 틀림없다구. 요점은 이렇다 이말씀이냐. 가령 내가 일부러 풍덩했다 치면 이건 행위라 하거든. 그런데 행위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구. 첫째는 행동하는 것, 둘째는 실천하는 것, 셋째는 성취하는 것... 그러므로 그 여자는 일부러 풍덩한 거야. 광대2: 글쎄 내 말 좀 들어봐, 이 사람아. 광대1: 그 입 좀 닥쳐. 여기 물이 있다고 생각하게... 알았지? 여기 사람이 있구... 알았지? 그 사람이 물가로 가서 말야, 풍덩했다고 치세. 그 사람이 원했건 안했건 제가 한 노릇이지, 안 그런가? 그런데 만약 물쪽에서 사람에게로 다가와서 풍덩시켰다면 그건 풍덩한 것이 나이지... 그러므로 제 죽음에 대해 죄가 없는 사람은 제 생명을 줄인 게 아니다, 이 말일세. 광대2: 그게 바로 법률인가? 광대1: 암 그렇지, 감시관의 감시법이라는 거야. 광대2: 사실을 알려 줄까? 이 여자가 양가집 규수가 아니었다면 기독교식 장례란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거야. 광대1: 야, 제법 옳은 말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딱한 이야기지. 양반들이야 우리네 상놈보다 물에 뒈지거나 목을 매거나 편리하게 돼먹은 세상인 걸... 어디 슬슬 펴볼까. 양반집안이란 게 조상을 캐보면 다 정원사, 도랑치기, 무덤파기들이지... 아담의 직업을 물려 받았으니깐 (파놓은 무덤 구멍으로 들어간다) 광대2: 아담도 양반이었나? 광대1: 그야 인류 최초의 연장을 가졌던 양반이지. 광대2: 그때는 연장이고 나발이고 없었잖아? 광대1: 왜 이래, 자넨 신사가 아니지? 성경도 읽어 보지 못했나? 성경 말씀에 아담이 땅을 팠다고 했잖아 그런데 삽도 없이 어떻게 팠겠어? 내 한마디만 더 물어 보겠는데 똑바로 대답을 못 하겠거든 참회하고 뒈져... . 광대2: 그만둬. 광대1: 누군 줄 알아. 석수쟁이나, 조선공, 목수보담도 더 튼튼한 걸 만드는 사람이? 광대2: 교수대 만드는 놈이지, 그건 천 명이 들락날락해도 끄떡없으니까. 광대1: 야 이건 제법인데, 교수대는 정말 끄떡도 안 해. 교수대는 뭣에 좋으냐? 악질들 목조르는 데 좋다 이거지. 그런데 자네는 교수대가 교회보다 더 튼튼하다 이거지, 그럼 못써... 때문에 아무래도 교수대 맛을 톡톡히 봐야겠는걸. 자 다시 대답해 봐. 광대2: 석수쟁이나 조선공, 목수보다 더 튼튼한 걸 만드는 게 누구냐구? 광대1: 그래 대답 잘 하면 쉬게 해주지. 광대2: 옳지 이제 알았네. 광대1: 뭐야? 광대2: 아니야, 역시 모르는겠는 걸. 광대1:뭐야? 광대2: 그걸 알아내겠다구 메주대가릴 행주 짜듯 할 건 없지. 아무려면 까마귀 학이 될 수 있나. 이 사람아, 이 다음에 누가 이런 걸 다시 묻거들랑 '무덤파기꾼'그러게. 그가 파놓은 지은 최후의 심판날까지 튼튼할 테니까. 어서 욘의 주막집에 가서 술이나 한 잔 받아오라구. (광대2 퇴장) 선원복 차림의 햄릿과 호세이쇼 등장. 광대1: (무덤을 파며 노래한다) 젊어서는 사랑도 하고 바람도 피웠지 이 세상 즐겁고 달콤했지만 세월이 흘러흘허 철이 들었는가 만사가 심드렁 망태로세. 햄릿: 저 작자는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게로군. 무덤 파면서 콧노랠 하다니? 호레이쇼: 늘 하는 일이라 몸에 배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햄릿: 과연 그런가 보군. 쓰지 않은 손일수록 부드럽고 민감한 법이지. 광대1: (노래한다) 백발이 슬거머니 다가와서는 모질게 아 몸 휘잡더니 이제 가는 길은 눈물의 황천길 누가 알았나 꿈엔들 알았나. (해골 바가지 한 개를 던져 올린다) 햄릿: 저 해골 속에도 한땐 혀가 있어 노래를 불렀겠지! 그런데 지금은 저 녀석이 내동댕이 치고 있어, 살인의 원조 카인이 형을 죽였을때 쓴 나귀 턱뼈다귀처럼! 어쩌면 어느 정치인의 해골인지도 모르지. 지금은 저자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귀신도 곡할 모사꾼이었는지도 몰라, 안 그런가? 호레이쇼: 네 그럴 테죠, 전하. 햄릿: 아니면 벼슬아치의 걸까. 저것이 이렇게 말했겠지, "대감마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요새 어찌 소일하시옵는지요, 대감마님."하고 알랑수를 부렸겠지. 혹은 이러저러한 대감이라고 불리운 신분으로서 아무개 대감의 말이 탐이 나서 "그 말 참 준마입니다."하고 칭찬하던 대갈통일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은가? 호레이쇼: 예 아무렴요, 전하. 햄릿: 암, 틀림없어. 이제 와선 구더기 마나님 밥이 되고 턱뼈는 없어진 채 저 무덤파기꾼의 삽으로 대가릴 얻어맞고 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볼 수만 있다면 참 오묘한 변화거든! 이들 뼈다귀도 기를 땐 무척 공이 들었을 텐데, 이제는 애들 노리개감이 되고 말다니? 그걸 생각하면 내 뼈도 지끈지끈 쑤신단 말야. 광대: (노래한다) 곡갱이와 삽 한 자루 시체에 입힐 수의 한 벌 에헤라 데헤 움집까지 파놓았구나 이 손님 모시기엔 십상 좋구나. (다른 해골 바가지 하나를 던져 올린다) 햄릿: 또 나왔군. 그래, 이번엔 변호사의 해골 바가지인지도 모르지. 궤변이나 요설은 어디 갔나? 그자의 소송은, 소유권은, 술수는? 저 무식한 녀석의 흙투성이 삽으로 저렇게 골통을 얻어맞고도 왜 꼼짝 못 하지? 어째서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한마디 말도 못할까? (해골을 치켜들며) 흠! 이 자도 생전에 토지를 매점한 녀석일는지도 모른다. 차압증서, 조건이해의 승인서, 명의변경 소송, 이중증인, 토지양도 소송 등 별의별 수를 다 썼을 테지. 그런데 이건 토지 투기에 대한 업보인가, 소송질에 대한 보답인가, 토지 때문에 가득 찼던 대갈통에 흙이 꽉 차 있는 게 아닌가. 이제 그자의 증인, 이중증인들도 지금에 와서는 그자가 사들인 토지는 할부계약서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증언할 수 밖에 없겠지? 이 골통 속에는 토지증서가 들어갈 수도 없지. (해골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더구나 그 토지의 소유자 본인조차도 가진 거라고는 이 골통 하나뿐입니다. 호레이쇼: 확실히 두 개골뿐입니다. 햄릿: 토지매도 증서는 양가죽으로 만들었을 테지? 호레이쇼: 예, 송아지 가죽으로도 만듭니다. 햄릿: 그 따위 증서를 믿는 놈들은 양이나 송아지보다 못한 멍충이들이지 뭐겠나. 내 이자하고 얘기 좀 해볼까... (앞으로 나오며) 이보게, 이건 누구의 무덤인가? 광대1: 제 무덤입죠. ... (노래한다) 흙으로 돌아가서 흙 속에 잤네 흙의 집이 그 손님께 꼭 맞지요. 햄릿: 그야 네 것이겠지. 그 속에 들어 있음이 틀림없으니까. 광대1: 나리는 바깥에 계시니 나리의 것은 아닙죠. 하지만 제 말씀은요, 소인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니까 역시 제것입죠. 햄릿: 무덤 속에 있으니까 네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테지. 그러나 무덤이란 것은 죽은 사람의 것이지, 산 사람의 것은 아니잖느냐... 그러니 네 말은 거짓말이다. 광대1: 새빨간 거짓말입죠. 자, 다음은 나리 차례올습니다요. 햄릿: 도대체 어떤 사내의 무덤을 파고 있느냐? 광대1: 사내 것이 아닙죠, 나리. 햄릿: 그럼 여자 거냐? 광대1: 그것도 아닙죠. 햄릿: 그렇다면 누굴 묻을 것이냐? 광대1: 전에는 여자였지만 나리, 지금은 혼백이니까요. 이젠 갔습죠. 햄릿: 정말 까다로운 녀석이군! 정신 차리고 얘기해야지 어정쩡하게 말했다간 말책을 잡히겠군. 사실 말이지 호레이쇼, 이 3년 동안 내가 눈여겨봤는데, 어떻게나 세상이 모질게 돼가는지 농부의 발가락이 궁인의 발뒤꿈치를 밟는 건 고사하고 목숨까지도 빼앗을 지경이지... 자넨 언제부터 무덤 파는 일을 해왔나? 광대1: 그야 선왕 햄릿 폐하께옵서 포틴브라스를 쳐부순 그날부터죠. 햄릿: 그게 몇 해전이었지? 광대1: 아니, 그것도 모르슈? 바보들도 다 아는 걸. 햄릿 왕자님이 태어나셨던 바로 그날이었는데... 왕자님은 실성하여 영국으로 쫓겨 갔습죠. 햄릿: 그래 왜 영국으로 쫓겨 갔느냐? 광대1: 그야 실성했으니까 보냅습죠. 거기 가면 정신이 돌아올 거예요. 하긴 제정신이 안 돌아와도 거기서는 상관없을 테지만. 햄릿: 왜? 광대1: 그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곳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니까. 햄릿: 왕자는 왜 실성하셨나? 광대1: 그게 참 귀신 곡할 일이었습죠. 햄릿: 어떻게 됐기에? 광대1: 그야 물론 제 정신이 아니니깐. 햄릿: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느냐? 광대1: 어디는 어디에요, 물론 덴마크죠. 이놈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쭉 30년 동안 여기서 무덤파기를 해왔습죠. 햄릿: 무덤 속에서 시체는 얼마 지나면 썩는가? 광대1: 글쎄 고얀 놈은 죽기전부터 썩습죠. 대개는 8, 9년 족히 견뎌냅죠. 가죽 장사 같으면 9년은 걸리죠. 햄릿: 가죽 장사가 어째서 오래 가느냐? 광대1: 그야 직업 덕분으로 피부가 잘 무두질이 돼 있으니까 한참 동안 물기를 빨아 들이지 못합죠. 그리고 물이란 송장을 흠뻑 썩이는데 지독한 힘이 있어 그만입죠. 여기 있다, 또 나온다. 이 해골은 땅속에 묻힌 지 스물하고도 세해나 된 거죠. 햄릿: 누구 것이냐? 광대1: 빌어먹을 미친 놈의 것입죠. 요놈의 해골이 누군줄 아십니까? 햄릿: 글쎄 난 모르겠는데. 광대1: 이 미친 날깽깽이 염병에나 걸려라! 음, 이자가 언젠가 내 머리에다 라이산 포도주를 한 병 부었습죠. 바로 이 해골은 나리, 누군고 하니 왕의 어릿광대, 요릭이옵죠. 햄릿: 이게? 광대1: 틀림없습죠. 햄릿: 어디 이리 내라. (해골을 받아든다) 아아 불쌍한 요릭! 나도 잘 알지, 호레이쇼... 재담에 첫손가락을 꼽았지, 우스갯소리도 대단했구. 그가 나를 천 번은 등에 업고 다녔을 거야, 지금 이 꼴이 되고 보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구나!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나... 이쯤 달려 있던 입술에 내 얼마나 자주 입을 맞췄는지 모른다. 이제 어디 갔느냐, 너의 익살? 너의 광대춤, 너의 노랫소리, 좌중의 모두를 배꼽이 빠지게 웃겼던 기막힌 재담은? 이렇게 이빨을 드러낸 네 몰골을 네 자신이 비웃어 보라구. 웃고 싶어도 아래턱이 빠졌단 말인가? 그래 요릭, 그 꼴로 여자들 방으로 달려가 아무리 분을 두껍게 발라 치장을 해도 결국 이 꼴처럼 될 거라고 가르쳐 줘라. 여자들을 웃겨 보라구... 여보게 호레이쇼, 물어 볼 말이 있네. 호레이쇼: 무엇입니까, 전하? 햄릿: 알렉산더 대왕도 흙속에 묻혀서는 이런 몰골이 되었을까? 호레이쇼: 그럴 테죠, 전하. 햄릿: 냄새도 이렇고, 퉤! (해골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호레이쇼: 물론이죠. 햄릿: 사람이 죽으면 무슨 천대를 받게 될지 누가 아나, 호레이쇼!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유해일지라도 한 줌 흙이 돼보면 지금쯤은 아마 술단지 마개가 됐을지도 몰라. 호레이쇼: 그렇게까지 생각하심은 지나친 상상이십니다. 햄릿: 아냐 정말 그렇지 않다네. 가볍게 생각해 보아도 거기까지는 갈 거야. 있음직한 추리지 뭔가. 말하자면 이렇다네... 알렉산더 대왕이 죽어 묻힌다. 그리고 진토로 돌아가지. 진토는 흙이거든, 흙에서 진흙이 생기고, 알렉산더 대왕이 변해서 된 진흙으로 술통 마개가 됨적도 하지 않느냐 말일세. 황제 시이저 역시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 바람이 들어가는 벽의 구멍을 막는 처지가 된다. 오, 온 천하를 뒤흔들던 저 흙덩어리, 한겨울 차디찬 눈바람 막는 벽땜이 되다니! 쉿, 쉬, 잠깐... 저기 왕이 온다. 왕비와 궁신들과 함께. 장례식 행렬이 묘지에 등장. 뚜껑 없는 관에 든 오팔리어의 유해. 이 뒤를 레어티스, 왕, 왕비, 궁신들, 법의를 입은 신부가 뒤따르고 있다. 대체 누구의 장례식인가? 이렇게 초라한 장례식이지? 저들이 따라가는 유해가 필시 자포자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표시군. 지체 높은 분인가 보이. 잠시 숨어서 살펴 보세. (호레이쇼와 함께 수송 밑에 숨는다) 레어티스: 의식은 다 끝난 겁니까? 햄릿: 저건 레어티스다, 고결한 청년이지... 보게. 레어티스: 이밖에 더 갖출게 없습니까? 신부: 매씨의 장례는 교회의 법으로도 정중히 모시는 것입니다. 사인이 미심쩍기는 하지만 어명으로 관례를 굽히지 않았다면 분명히 최후의 심판날까지 성스럽지 못한 묘지에 묻혔을 겁니다. 구원의 기도 대신 사금파리 조각, 부싯돌, 조약돌을 던졌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규수에게 어울리는 꽃장식, 조종까지 울리며 명복을 빌어 드리게 됐습니다. 레어티스: 그 이상은 할 수 없단 말이오? 신부: 더는 안됩니다. 조용히 숨을 거둔 사람의 경우처럼 진혼가를 부르며 미사를 드려 격식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장례식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레어티스: 그럼 어서 묻어라. 아름답고 순결한 애 몸에서 제비꽃이라도 피게 해다오! (관이 무덤 속에 놓여진다) 내 말을 들어라, 이 발칙한 신부, 네가 지옥에 떨어져 아우성칠 때 내 누이동생은 천국에서 천사가 되어 있을 거다. 햄릿: 뭐라고, 아름다운 오필리어가! 왕비: (꽃을 뿌리며) 예쁜 규수에게 예쁜 꽃을. 잘 가라! 널 햄릿의 아내로 삼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아름다운 처녀, 네 신방을 꾸미려던 이 꽃을 네 무덤 위에 뿌리게 될 줄이야. 레어티스: 오 저주가 있으라, 이 몇 배의 제앙이 몇 십 배가 되어 저주받은 놈의 머리 위에 내리쏟져라, 여리고 여린 너를 실성케 한 자에게! 잠깐 아직 흙을 덮지 말라. 한 번만 내 품속에 안아 보자. (무덤 속에 뛰어든다) 자 흙을 덮어라. 산사람과 죽은 사람 위에 이 평지에 산을 쌓아라. 저 펠리언 산봉우리보다 높이, 하늘을 찌를 듯한 푸른 올림퍼스 산보다 높이. 햄릿: (앞으로 나오며) 도대체 누구냐, 그렇게 요란스럽게 한탄하는 자는? 그 애통한 소리를 들으면 하늘을 떠도는 별들도 흘리어 마치 감동하여 넋을 잃은 청중처럼 발길을 멈출 거다. 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레어티스를 따라 무덤으로 뛰어 든다) 레어티스: (햄릿을 움켜지고) 귀신이 잡아 먹을 놈. 햄릿: 네 입이 무엄하다. 냉큼 내 목에서 손을 떼지 못할까. 난 성미가 급하지도 난폭하지도 않지만 내게 위험이 닥치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손을 놔라. 왕: 어서 떼어 놔라. 왕비: 햄릿, 햄릿! 일동: 자, 두 분! 호레이쇼: 전하, 고정하십시오. (시종들이 두 사람을 뜯어말린다. 두 사람은 무덤에서 나온다) 햄릿: 아니다, 내 이 일이라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저자와 싸우겠다. 왕비: 레어티스, 제발 참아 주오. 햄릿: 경칠 놈, 어떻게 할 테냐? 울래? 싸울래? 굶어 죽을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래? 식초를 마실테냐? 악어를 잡아먹을 테냐? 나라면 할 수 있다. 눈물이나 짤려구 여길 왔어? 무덤 속에 뛰어 들어 날 욕보일 건가? 그래 오필리어와 함께 나도 생매장해 주려무나. 산을 쌓으려고 한다면 온세계의 산이란 산을 모두 허물어뜨려 이곳으로 가져오라. 그 흙을 태양의 궤도에 닿을 때까지 높이 쌓아 올려라. 옷사의 산이 사마귀로 보일 정도로! 아냐, 네가 큰소리 치면 나도 너 못지 않게 고함을 쳐주마. 왕비: 이건 순전히 실성한 탓이오. 광증이 저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이내 진정할 거요. 귀여운 황금색 새끼 두 마리를 까놓은 암비둘기처럼 온순하게 입을 다물고 조용해질 거요. 햄릿: 이봐 레어티스, 왜 날 그처럼 못 잡아먹어 야단인가? 난 항상 널 좋아했다. 그러나 이젠 다 끝났다. 허큘리스가 제아무리 용을 써봤자 고양이는 여전히 고양이고, 개는 천생 개니까. (퇴장) 왕: 부탁한다 호레이쇼, 왕자를 따라가 보게... (호레이쇼 퇴장) (레어티스에게 방백) 어젯밤 과인이 한 얘기를 명심하고 참아야 한다. 과인이 계획한 그 일을 단행할 테니... 왕비, 당신의 아들을 단단히 단속하시오. 이 무덤에는 기념비를 세우리라. 머잖아 태평성대가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참고 일을 진행하련다. (퇴장) [ 제2장 궁전 안의 홀 ] 전면에 옥좌가 마련되어 있고, 좌우에 긴 의자와 탁자 등이 놓여 있다. 햄릿과 호레이쇼가 이야기를 하며 등장. 햄릿: 그 이야긴 이쯤 해두고 이제 다음 이야기를 해보세... 그때 사정을 상세히 기억하겠지? 호레이쇼: 기억합니다, 전하! 햄릿: 여보게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번민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네... 반란죄로 족쇄에 묶인 선원보다 더 비참한 심정으로 누워 있었어. 무모하긴 해도... 하긴 만용도 그러고 보니 칭찬 받을만 하지만... 다지고 다진 책략도 실패로 돌아가는 수가 있고, 때에 따라선 무모한 행동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단 말일세. 즉 우리 인간이 분별없이 처신한다 해도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건 모두 하늘의 뜻이오. 호레이쇼: 확실히 그런가 봅니다. 햄릿: 굳게 마음 먹고 선실을 빠져나와 선원의 외투로 몸을 감싸고서 그들을 찾아 암중모색을 하다가 내가 원하던 짐꾸러미를 발견했다네. 살그머니 그걸 빼가지고 다시 선실로 돌아왔지. 불안한 생각에 체면이고 염치고 가리지 않고 겁없이 친서를 뜯어 보았네. 거기서 뭘 보았겠나. 호레이쇼... 그건 왕의 흉계였어!... 그 친서에는 덴마크의 왕과 영국왕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등 여러가지 이유를 늘어 놓고선, 맙소사! 나와 같은 도깨비나 악귀를 살려 두었다가는 위험천만이라는 걸세. 친서를 읽으면 지체 말고 미처 도끼날을 갈 것도 없이 내 목을 치라는 엄명이었다네. 호레이쇼: 원 그럴 수가? 햄릿: 이게 그 친설세. 후에 틈을 내서 천천히 읽어 보게나. 그래, 그 후에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들려 줄까? 호레이쇼: 어서 말씀하시지요. 햄릿: 내가 이렇게 악당들의 흉계에 걸려든 셈이 되고 보니... 내 머릿속에 서막을 구성하기도 전에 바로 막이 오른 셈이지 뭔가. 우선 앉아서 친서를 한 장 위조했지, 필적도 그럴싸하게... 한때는 이 나라 정치가들처럼 글씨를 잘 쓴다는 건 자랑이 못된다고 서예를 경멸해 배우는 걸 그만두려 한 적도 있었네만 이번만은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지. 내가 뭐라고 썼는지 알고 싶은가? 호레이쇼: 네, 알고 싶습니다. 햄릿: 국왕으로부터의 정중한 청탁인 양 썼지, 영국은 덴마크의 충실한 속국이며 두나라의 우의는 종려나무처럼 번성하길 원한다느니, 평화의 여신은 밀이삭 화관을 쓰고 양국 친선의 기교가 되어야 하느니, 등등 그럴듯한 너스레를 잔뜩 늘어놓은 다음 이렇게 당부를 했지. 즉, 이 친서를 읽고 내용을 파악하신 후 지참자 두 명을 참회의 기회를 줄 것도 없이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사형에 처해 달라고 말일세. 호레이쇼: 봉인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햄릿: 참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음이라 주머니 속에 아버님의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네. 그것은 덴마크의 옥세를 본떠새긴 거였어. 서찰을 이전의 친서와 같게 접어서 서명을 하고, 봉인을 하고, 바꿔친 걸 아무도 모르게 깜쪽같이 원래의 장소에다 갖다두었지. 그리고 그 이튿날 바로 해적과 싸웠던 거라구. 그 뒤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을 테고. 호레이쇼: 그럼 길든스턴과 로즌크랜츠는 죽었겠군요. 햄릿: 그야 별수없지, 두 사람이 자청해서 나선 길이니까. 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네. 남의 일을 참견하다가 파멸을 불러들인 걸세. 되지도 못한 비천한 것들이 고래싸움에 송사리가 얼씨구 하고 끼여들다니 될 법한 일인가? 호레이쇼: 참 지독한 왕이시군요! 햄릿: 일이 이쯤 되었으니 나도 물러설 순 없지, 안 그런가... 그 자는 나의 아버님이신 선왕을 살해했고, 내 어머닐 더럽혔고 왕위까지 가로채서 내 희망을 앗아가 버렸어. 게다가 내 목숨마저 낚으려 간계를 쓰고 있지 뭔가. 이런 자를 내 손으로 처치해 버리는 데 티끌만큼도 양심에 거리낄 일이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독충을 놔두어 이 세상에 해독을 끼치게 하는 것이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악이 아닌가? 호레이쇼: 이 일의 결만이 얼마 안 있어 영국왕으로부터 국왕에게로 당도할 게 아닙니까? 햄릿: 금명간 올 테지. 그 동안의 시간은 내것일세. 사람의 목숨이란 '하나'하고 셀 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일세... 그러나 호레이쇼, 그건 그렇고 레어티스에게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어. 그만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던 탓이지. 내가 일을 당하고 보니 그의 심정도 알 만해. 화해를 청하겠어. 너무 야단스레 애통해 하는 바람에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지 뭔가. 호레이쇼: 쉿, 누가 오나 봅니다. 몸집이 작은 멋쟁이 궁신 오즈릭 등장. 양어깨에 날개가 달린 웃옷을 입고 최신식 모자를 쓰고 있다. 오즈릭: (모자를 벗고서 허리를 숙여 절을 하면서) 전하의 귀국을 충심으로 환영합니다. 햄릿: 정중한 인사 고맙소. (방백) 이 날파리를 자넨 아는가? 호레이쇼: (햄릿에게 방백) 아뇨, 모릅니다. 햄릿: (호레이쇼에게 방백) 모른다니 다행일세, 저자를 아는 것만 해고 화근이 돼. 저잔 땅을 많이 갖고 있지, 비옥한 땅을 말일세. 요새는 짐승같은 놈도 짐승들만 대량 소유하면 대감이 되는 세상이거든. 그리고 여물을 들고 가서 왕과 회식을 하는 판이니까. 저 친구는 떠버리긴 하지만 땅떵이는 이만저만 많은 게 아냐. 오즈릭: (또 절을 하며) 전하, 과히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폐하께옵서 내린 분부를 아뢰올까 합니다. 햄릿: 듣다마다, 여부가 있겠나. 어서 얘기하게. (오즈릭이 계속 절을 하면서 모자를 내흔드는 꼴을 보고) 모자를 쓸 줄도 모르느냐, 모자란 머리에 쓰는 거다. 오즈릭: 황공하옵니다, 하도 더워 그랬습니다. 햄릿: 아냐 오늘 추위는 대단한 걸, 북풍이 휘몰아쳐서. 오즈릭: 그렇군요 아닌게 나이라 덜덜 떨리옵니다, 전하. 햄릿: 그러나 내 체질 탓이라 그런지 날씨가 푹푹 찌는군, 아 덥다. 오즈릭: 과연 그러하군요, 날씨가 무척 무덥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옵니다만... 전하, 이건 폐하의 전갈이온데 햄릿 왕자 전하를 위해 이번에 굉장한 내기를 거셨다 하옵니다. 전하, 내용인즉... 햄릿: (모자를 쓰라고 손짓을 하면서) 부탁하네, 내 말을 잊지 말아주게... 오즈릭: 아니옵니다 전하, 진정으로 이게 편하옵니다. 실은 이번에 귀국하신 레어티스란 어른은... 흠이라곤 없는 신사입니다. 출중한 덕망을 갖추신 데다가 정중한 예의범절하며, 수려한 풍채하며 사실 공정하게 비유해 보면 지도요, 나침반이라 하실 분이옵니다. 신사가 지녀야 할 모든 성품을 두루 다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햄릿: 말이 유창하니 그의 장점이 손해볼 건 없겠군. 그러나 그렇게 장황히 늘어놓으면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어 골치가 지끈거리오. 어찌나 빨리 쏘아붙이는지 어디 따라갈 수가 있나. 그러나 사실대로 칭찬하자면 그는 보기드문 고상한 인품을 갖춘지라 그 귀하고도 뛰어난 천성은 솔직히 말해서 오직 거울에 비친 그 사람 자신의 그림자밖에는 있을리 없지. 그러니 사나이 중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감히 누가 있겠나?... 그 사람의 흉내를 낼 수 있는 건 그림자뿐이지. 오즈릭: 과연 전하의 말씀 구구절절 옳습니다. 햄릿: 그래 속셈은 뭐요? 왜 피차 잡스런 말로 그를 꾸겨대느냐 이 말이오? 오즈릭: 예? 호레이쇼: 보통 말로 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거요? 알아들으실 텐데. 햄릿: 어째서 그 신사의 얘기를 끄집어내는가? 오즈릭: 레어티스님 말씀인가요? 호레이쇼: (햄릿에게 방백) 이젠 말주머니가 바닥이 났나 보군요. 말밑천이 동이 났나 보죠. 햄릿: 그래, 레어티스 말이다. 오즈릭: 전하께서 모르실리 없으시겠지만... 햄릿: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 주면 다행이지. 그래 봤자 내가 별반 대단한 것도 못되지만. 그건 그렇고 본론은? 오즈릭: 레어티스님의 출중하신 재능을 모를실 리 없을 거라고... 햄릿: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순 없네. 그 사람과 우열을 가리고 싶지 않거든. 남을 알려면 나 자신부터 알아야 돼지. 오즈릭: 소신의 말씀은 그 분의 칼솜씨이옵니다. 세상 사람들 말로는 그 분의 칼솜씨야말로 천하무적이라 합니다. 햄릿: 어떤 칼을 쓰나? 오즈릭: 장검과 단검이옵니다. 햄릿: 옳아 쌍칼잡이라 그 말이군. 흠... 좋지. 오즈릭: 폐하께선 레어티스에게 바바리산의 준마 여섯 필을 거셨습니다. 레어티스는 프랑스제 장검과 단검 각각 여섯자루 및 혁대, 가죽끈, 기타 부속품 등을 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 개의 칼걸이는 실로 고상한 취미를 발휘해서 칼자루와도 잘 조화되고 매우 정교하고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옵니다. 햄릿: 대체 칼걸이란 어떤 건가? 호레이쇼: 주석없이는 모르실 겁니다. 오즈릭: 전하, 칼걸이라는 건 칼을 묶어두는 끈이옵니다. 햄릿: 그 말은 대포를 허리에 달고 다닌다면 꼭 맞을 것 같구나... 그때까진 그저 걸이개라고 해두자. 그렇지만 상관없다! 바바리산의 준마 여섯 필에 대해 프랑스제의 검 여섯자루 및 그 부속품, 게다가 세 개의 정교하며 창의적인 칼걸이... 그러니까 프랑스 대 덴마크의 내기란 말이겠다. 네가 말하는 '내기'를 왜들 걸게 되었느냐? 오즈릭: 폐하께선 전하와 레어티스님이 12번 승부를 하시는 경우 제 아무리 레어티스라 해도 전하에게 3번이 넘게 이기는 것은 어려우리라고 내기를 거셨습니다. 레어티스님은 12번 승부 가운데 9번은 이길 수 있다고 걸었습니다. 이 내기는 전하의 응답만 있으시면 곧 거행될 예정이옵니다. 햄릿: 내가 '싫다'하면 어쩔 터인가? 오즈릭: 소신의 말씀은 전하께서 시합에 응하실 의향이 있을 때의 말씀입니다. 햄릿: 그래, 폐하의 어의라 하면 내 이 홀을 거닐면서 기다리겠다. 마침 운동시간도 됐으니 검을 가져오라 일러라. 레어티스 생각이나 폐하의 의향이 그렇다면 어디 상대해서 폐하를 위해 이기도록 해야겠군. 패하더라도 별것이겠나, 망신이나 당하고 몇 대 얻어 맞을 뿐이지. 오즈릭: 전하의 말씀을 그대로 아뢰올까요? 햄릿: 내 뜻을 아뢰되... 말에 분칠을 하는 건 멋대로 하거라. 오즈릭: (절을 하면서) 전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햄릿: 내가 잘 부탁한다. (오즈릭 한 번 더 정중히 절을 하고 모자를 쓴 다음 경쾌하게 걸어나간다) 거 참, 제멋에 사는 녀석이군, 하긴 아무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호레이쇼: 저 꼴은 알을 까면 껍질을 그냥 쓴 채 도망간다는 댕기물떼새 같습니다. 햄릿: 제 어미 젖을 빨아먹을 때도 먼저 젖꼭지에 절을 했을 놈이지. 저런 자만이... 아니, 이런 타락한 시대에는 거들먹대는 같은 유의 것들이 많이도 태어났지만... 시류를 타고 겉치레뿐인 사교술을 몸에 걸치고 있다네. 천박한 학문 좀 배워가지구 가장 사려 깊고 현명한 판단을 조롱하고 있거든. 시험삼아 훅 불어 보게, 거품은 꺼져버릴 운명이라구. 귀족등장. 귀족: 전하, 조금 전에 오즈릭을 통해 이 홀에서 폐하를 기다리신다는 회답을 보내셨습니다만 폐하께선 레어티스의 시합을 지금 하실 건지 아니면 나중에 하실 건지 소신더러 알아오라는 어명이 계셨습니다. 햄릿: 내 생각에는 변함없소. 폐하의 어의를 따를 뿐이오. 폐하께서 좋으시다면 나는 언제라도 좋소. 신체의 사정만 지금과 같다면 말이오. 귀족: 폐하와 왕비 전하를 위시하여 많은 분들이 이리로 오시고 계십니다. 햄릿: 그것 잘 됐소. 귀족: 왕비 전하께서는 시합에 앞서 레어티스님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시도록 하라는 당부가 계셨습니다. 햄릿: 지당하신 분부이시오. (귀족 퇴장) 호레이쇼: 이 시합은 불리할 것 같습니다, 전하. 햄릿: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레어티스가 프랑스로 떠나가 있는 동안 난 계속 연습해 왔거든. 득점상 유리하니 내가 이길 거네. 그런데 내 마음이 왠지 편치 않군, 아마 자네는 상상 못할 걸세. 호레이쇼: 그러시면 전하... . 햄릿: 어리석은 마음이지, 아마. 그건 아녀자들이나 가질 하찮은 불안일 걸세. 호레이쇼:만일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거든 그만 두시죠. 전하께선 불편하다고 말씀드려 그분들이 오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햄릿: 그럴 필요없네, 징조 같은 건 난 무시하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지금 온다면 다음 오질 않고... 다음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올 것이 분명하다... 만약 지금 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꼭 오는 법... 요는 각오만 있으면 돼. 죽은 뒤의 일을 누가 아나, 일찍 죽은들 아쉬울 건 없네, 될 대로 되라지. 시종들이 등장하여 의자 쿠션을 갖다놓고 좌석을 마련한다. 이윽고 트럼펫 취주자들과 북치는 사람들 등장. 그 다음에 왕과 왕비, 귀족들 그리고 심판을 맡아볼 오즈릭과 귀족 한 명 등장. 이 두 심판관이 무딘 검과 단검을 벽 곁에 있는 탁자 위에 갖다 놓는다. 끝으로 시합복을 입은 레어티스 등장 왕: 자 햄릿, 어서 이리 와서 이 손을 잡아라. (왕은 레어티스의 손을 햄릿의 손에 쥐어 준다. 그리고 왕비를 데리고 자리에 앉는다) 햄릿: 용서하게 레어티스, 내가 잘못하였네. 사나이답게 내 잘못을 용서해 주게.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알 걸세. 자네도 들렀겠지만 난 정신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아왔네. 내가 한 일은 생각없이 자네의 아버지를 사모하는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명예를 더럽히고, 분노를 사게 했지만 내 분명히 말하지만 모두가 내 광증 탓이네. 레어티스를 모욕한 것이 햄릿이었던가? 그건 절대로 햄릿이 한 짓이 아니었네. 햄릿이 제정신을 잃고 제정신이 아닌 햄릿이 레어티스를 모욕했다면 그건 햄릿의 소행이 아닐 걸세. 햄릿이 그걸 부정하네. 그럼 누가 했느냐고? 그야 햄릿의 광증이었지. 그렇다면 햄릿 역시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일세. 광증은 이 가엾은 햄릿의 적이기도 하네. 자, 레어티스, 내 무례가 고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앞에서 밝히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날 용서해 주게. 지붕 너머로 쏜 화살이 자기의 형제를 맞힌 것이라고 생각해 주게. 레어티스: 그 말 들으니 마음이 풀리는 것도 인정이라 할까요. 물론 인정을 생각하면, 이 경우 격렬한 복수심을 야기시켜야 옳을 일이지만, 그러나 명예에 관한 한 전하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또한 화해할 수 없을 겁니다. 지체 높은 어른들께 여쭤 보고 이 정도라면 화해해도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보증을 주실 때까지는 타협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전하의 우정을 받아들이고 거역하지는 않겠습니다. 햄릿: 그 말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그럼 허심탄회하게 형제지간처럼 시합을 해보세. 자, 검을 다오. 레어티스: 자, 내게도 다오. 햄릿: 내 그대의 검이 되어 주지, 레어티스. 그대를 돋보이게 해주마, 미숙한 내게 비하면 자네 솜씬 어두운 밤의 샛별처럼 빛날 걸세. 레어티스: 놀리지 마십시오, 전하. 햄릿: 놀리다니, 그럴 수 있나. 왕: 검을 두 사람에게 주어라, 오즈릭. (오즈릭 무딘 단검 4, 5자루를 가지고 앞으로 나온다. 레어티스 그 중 하나를 받아들고 한두 번 찔러 본다) 햄릿, 내기 건 걸 아느냐? 햄릿: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약한 쪽에 유리한 조건을 거시겠다구요. 왕: 그렇겐 생각지 않아. 둘의 실력을 잘 아니깐. 상대가 센 것 같기에 네게 유리하게 했을 뿐이다. 레어티스: 이 검은 너무 무겁다 다른 검을 다오. (탁자로 가서 끝이 뾰족하고 독이 칠해진 검을 든다) 햄릿: (오즈릭에게 검을 받아들고) 이 검이 괜찮군. 검의 길이는 모두 같으렷다. 오즈릭: 물론이옵니다, 전하. 심판관들과 시종들 시합준비를 한다. 햄릿도 준비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포도주를 담은 병과 잔을 가지고 등장. 왕: 포도주 잔을 탁자 위에다 준비해 둬라. 햄릿이 만약 첫판이나 둘째판에서 점수를 따거나 세째판에서 져오던 것을 비기든가 하거든 성벽에서 일제히 축포를 터트리도록 해라. 햄릿의 건투를 위해 과인은 축배를 들고 술잔에 진주를 던질 것이다. 덴마크 왕가에서 4대에 걸쳐 왕의 면류관에 달았던 것보다 더 훌륭한 진주다. 술잔을 이리 다오. 북을 쳐서 나팔수에게 알리고, 나팔수는 성밖 대포수에게 알려라. 포성을 하늘에 올려 하늘은 대지에 전달케 하라. "왕이 햄릿을 위해 건배를 든다." 라고. 자 시작하라. 심판관들은 잘 지켜 보아라. 잔들을 왕 곁에 갖다 놓는다. 트럼펫 소리. 햄릿과 레어티스 각자의 위치에 선다. 햄릿: 자 덤벼라. 레어티스: 좋소. 1회전이 시작된다. 햄릿: 한 대! 레어티스: 아니오. 햄릿: 심판, 어떻소? 오즈릭: 보기에도 정통이옵니다. 양인이 떨어져 선다. 대북소리, 트럼펫 소리 그리고 대포 소리. 레어티스: 좋습니다, 그럼 2회전. 왕: 잠깐, 술을 부어라. (시종이 잔에다 술을 붓는다) 햄릿, (진주를 들어 보이면서) 이 진주는 그대의 것, 너에게 주는 축배다! (술을 마시고 그 잔 속에다 진주를 넣는 척한다) 햄릿에게 이 잔을. 햄릿: 먼저 승부부터 끝낸 뒤에 마시겠나이다. 잔은 잠시 거기에 놔두십시오. (하인이 잔을 그의 뒤에 있는 탁자 위에 갖다 놓는다) 자. 2회전이 시작된다. 햄릿: 또 한 대! 어떤가? 레어티스: 스쳤소, 분명히 스쳤소이다. (양인이 떨어져 선다) 왕: 과인의 아들이 승리할 것 같구려. 왕비: 땀에 젖어서 숨이 가빠해요. 여기 있다 햄릿, 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렴. (수건을 햄릿에게 주고 탁자로 가서 햄릿의 술잔을 든다) 너의 행운을 위해 축배를 들겠다, 햄릿. 햄릿: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왕: 왕비, 마시지 마오. 왕비: 폐하, 축배를 들게 하여 주소서. (술을 마시고 햄릿에게 잔을 준다) 왕: (방백) 저건 독이 든 술잔이다, 이미 늦었다! 햄릿: 아직 마실 수는 없습니다, 왕비 전하. 잠시 후에 들겠습니다. 왕비: 자, 어미가 네 얼굴을 닦아 주마. (햄릿 얼굴의 땀을 씻어 준다) 레어티스: (왕에게) 폐하, 이번엔 한 점 얻겠습니다. 왕: 그리 될 것 같지 않다. 레어티스: (방백) 아무래도 내 양심에 가책이 돼 참을 수 없다. 햄릿: 자 3회전이다, 레어티스. 나를 놀려대는 모양인데 덤벼라, 멋지게 실력을 발휘하라. 나를 애송이 취급하는 건 딱 질색이다. 레어티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덤벼요. 3회전이 시작된다. 오즈릭: 무득점, 양쪽 무득점. (두 사람 떨어져 선다) 레어티스: (갑자기) 자, 한 대 받아라! (옆을 보는 틈을 노려 레어티스가 햄릿을 가볍게 찌른다. 상대방의 비겁한 행동에 햄릿은 격분하여 레어티스와 격투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장검을 바꿔 쥔다) 왕: 뜯어말려라, 흥분했다. 햄릿: (공격한다) 자 다시 덤벼라. (왕비 쓰러진다) 오즈릭: 아이구, 왕비 전하를 돌봐 주십시오, 어서요! (햄릿이 레어티스를 깊이 상처를 입힌다) 호레이쇼: 두 분 다 피를 흘리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전하? (레어티스 쓰러진다) 오즈릭: (레어티스를 안아 일으키며) 웬일이십니까, 레어티스님? 레어티스: 아, 제 덫에 걸린 어리석은 도요새가 됐다, 오즈릭! 내 자신의 꾀에 내가 넘어가 죽으니 천벌이 아니겠는가. 햄릿: 왕비 전하께선 어찌되신 일입니까? 왕: 피를 보고 기절한 모양이다. 왕비: 아 아니다. 저 술이, 저 술... 오, 나의 사랑하는 햄릿... 저 술이, 저 술이! 난 독약을 마셨다! (왕비 죽는다) 햄릿: 음모다! 오 ! 문을 잠가라... 반역이다! 범인을 찾아내라. 레어티스: 범인은 여기 있습니다. 햄릿 왕자 전하. 전하, 당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해독제도 소용이 없습니다. 역모의 도구는 전하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검 끝이 날카롭고 독이 묻어 있는 검이옵니다. 이 비열한 음모가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보십시오, 전 여기 이렇게 쓰러진 채, 다시는 일어나질 못합니다... 왕비 전하께서도 독약을 마셨나이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왕이, 왕이 저지른 것입니다. 햄릿: 검 끝에까지 독을 칠하다니!... 그래 독 맛을 보아라. (왕을 찌른다) 일동: 반역이다! 반역이다! 왕: 이봐라, 날 보호하라, 난 안죽었다. 햄릿: 이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을 한 저주받을 덴마크왕아, (강제로 독주를 마시게 한다) 이 독을 마셔 끝장내라. 너의 진주가 들어 있느니라. 내 어머니 뒤를 따라라. (왕 죽는다) 레어티스: 자기가 탄 독을 스스로 마시고 죽는 것은 천벌입니다. 우리 서로 용서하십시다, 햄릿 전하. 신과 신의 부친의 죽음이 전하의 탓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또한 전하의 죽음도 신의 탓이 아니기를 비옵니다! (죽는다) 햄릿: 하늘도 그대를 용서할 것이다! 나도 그대를 따르겠네... (쓰러진다) 호레이쇼, 나도 끝장이다. 가엾은 왕비 전하, 잘 가시오! 그대들은 이 사건을 보고 파랗게 질려 있군. 연극 속의 무언배우나 관객에 불과하구나. 시간만 좀 더 있다면... 이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사정없이 날 끌고가려고 하는구나. 오,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그만둬야지. 호레이쇼, 난 가네. 자넨 살아 남아 사실대로 내 입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밝혀 주게. 호레이쇼: 그럴 순 없습니다. 전 덴마크의 핏줄이오나, 정신은 로마인이고자 합니다... 술잔에 독이 남아 있습니다. (잔을 쥔다) 햄릿: (일어서서) 그대가 대장부라면 그 잔을 이리 주게. 자 놓아, 놓으래두. 제발 이리 주래두! (호레이쇼의 손을 쳐 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쓰러진다) 오 호레이쇼, 이대로 전말을 밝히지 않고 놔둔다면 사후에 어떤 오명이 남을지 모를 것이 아닌가! 그대가 진정으로 날 생각해 준다면 잠시 죽음의 행복을 멀리 하고 이 욕된 세상에 남아 괴로움을 참고 살아가면서 내 얘기를 전해 주게... (멀리서 진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대포소리. 오즈릭 퇴장) 저 우렁찬 소리는 무엇인가? 오즈릭: (돌아서서) 포틴브라스 왕자가 폴란드로부터 개선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국 사절을 만나 예포를 발사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햄릿: 오 난 죽네, 호레이쇼. 매서운 독기운이 퍼져 정신이 마비되었어. 영국에서 온 소식도 이젠 들을 겨를이 없구나. 자, 이제 유언을 하겠네, 왕위 계승은 포틴브라스다. 그게 유언일세. 그리 전하게, 그간 일어났던 많고 적은 사정도 함께... 남은 건 침묵뿐이로다. (죽는다) 호레이쇼: 이제 거룩하신 마음도 부서지고 말았구나. 평안히 가십시오, 어지신 왕자 전하. 저 천사들의 노랫소리 들으시며 고이 잠드소서! 왠일이지? 북소리가 가까이 오니. 포틴브라스 왕자, 영국 사절들, 그밖의 사람들 등장. 포틴브라스: 참변 현장은 어디냐? 호레이쇼: 무엇을 보시려 하십니까? 이보다 비참한 광경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포틴브라스: 이 시체 더미는 무참한 학살을 외치고 있구나. 오 교만한 죽음아, 너의 영겁의 나락에서 어떤 잔치를 베풀려고 이렇듯 수많은 왕족들을 단칼에 무참히도 모조리 죽였느냐? 사절1: 처참한 광경입니다. 영국에서 방금 가져온 보고는 너무 늦었나 봅니다. 보고를 드리려 해도 들어 주실 분의 귀는 벌써 듣는 힘을 잃으셨습니다. 대명을 이행하여 로즈크랜츠와 길든스턴을 처단했다고 전하고자 왔나이다. 저희들은 치사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호레이쇼: 비록 국왕이 살아계셨더라도 치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형을 내리신 분은 국왕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참극과 때를 같이 하여 한 분은 폴란드 원정에서 또 한 분은 영국에서 오셨으니, 이 시체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은 단상에 모시도록 명령하여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이 참변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간계에 몰린 살육, 교묘한 방법과 부득이한 사유로 해서 짜여진 죽음의 덫, 그리하여 빗나간 간계가 장본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된 경위, 그밖의 모든 걸 사실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포틴브라스: 그 경위를 속히 말하시오. 중신들을 이 자리에 모아 주시오. 슬픔 속에서도 나는 행운을 받아들일 것이오. 이 왕국에 대해선 나도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바, 이 기회에 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오. 호레이쇼: 거기 대해선 저 역시 사뢸 말씀이 있습니다. 실은 햄릿 왕자 전하의 최후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찬동을 얻은 것으로 사려됩니다. 그러나 먼저 아까 부탁드린 일부터 처리하여 주십시오. 민심이 소란한 틈을 타서 행여 음모나 오해 때문에 더이상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틴브라스: 장교 네 사람이 햄릿 왕자의 시신을 단상 위에 안치하라. 기회만 얻었던들 아마 그분은 만세에 빛날 현왕이 되었을 것을. 왕자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조악과 조포를 소리높이 울리게 하여 만천하에 날리도록 하라. 시체들을 치워라... 이런 광경이 싸움터에는 어울리지만 여기서는 적합치 않다. 어서 명사들에게 조포를 쏘게 하라. 병사들이 시체를 들고 퇴장. 이 동안 장례행진곡. 이윽고 조포소리 은은히 들려온다. [ 작품해설 ] 37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거의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4대 비극의 하나로 분류되는 '햄릿'은 영국문학은 물론이거니와 세계문학 속에 항상 새로운 문제를 제공해 주며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욱 새로운 매력이 발견되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이 작품만큼 많은 비평가들이 각양각색의 주석과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여러각도로 다룸으로써 여러 가지 설을 낳은 것도 드물 것 같다. "'햄릿'에 관한 논문과 연구목록을 작성한다면 바르샤바의 전화부 두배의 두께가 될 것이다."라고 한 얀 코트의 말에서 우리는 단면을 볼 수 있다. 흔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햄릿'이 복수의 극, 또는 성격비극, 사랑의 비극, 문제비극, 정치극이라고까지는 불리고 있음을 모두가 그처럼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문학의 감동이 창작자와 독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삶의 호흡이라면 '햄릿'은 우리의 가슴에 가장 깊은 감명을 새겨놓을 수 있는 작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시적 창작 예술이야말로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신비적인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적인 느낌마저도 느끼게 된다. 그 작품에는 매우 현실적인 세계와 매우 낭만주의적이라는 서로 상반된 세계가 씨와 날이 되어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등을 맞댔던 빛의 소리와 어둠의 소리가 서로 부딪쳤다가 다시 얽히고 설켜 끝내는 새로운 빛의 소리를 터트리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빛의 소리란 셰익스피어의 휴머니즘 정신을 말한다. 비극적 리듬에 충만한 '햄릿'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휴머니즘 정신을 가장 심도있게 드러내 보인 희곡이라고 하겠다. 엘시노성의 망대에는 어둠이 죽음처럼 고였다. 찬바람이 불때마다 온 몸의 살갗이 선뜩거렸다. 차디찬 달빛이 서리만큼이나 하얗게 쏟아지는 으스스한 이 희곡의 모두에 나오는 "누구냐?"이라는 대사가 지니는 의미는'햄릿'의 문학세계를 발상에서부터 지배하는 긴요한 단서의 구실을 할 뿐 아니라 극 전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띤 주조음으로 끝까지 울려퍼져 나간다는 사실이다. 햄릿은 자기 부친의 죽음이 잔악한 모살이며, 그 모살의 범인이 현재 덴마크의 왕위에 올라 있고, 자기 모친을 왕비로 삼은 숙부 클로디어스라는 것을 망부의 망령으로부터 듣게 되며, 망령의 말은 햄릿으로 하여금 복수의 본능을 자극할 만큼 절절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햄릿의 뇌리에 이상한 섬광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망령 자체에 관한 의심이었다. 엘리자베드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망령에 대한 두 가지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 하나는 선의 망령이요, 또 하나는 악의 망령이다. 그러나 햄릿의 시선 속에는 한 번만이라고 더 보고 싶은 망령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망령이 이들 중에 어떤 것인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연 망령이 선과 악 둘 중에 어느 것이며 적어도 망령이 한 말의 진실성을 따져 보기 위하여 햄릿이 꾸민 계략이 바로 극중극이다. 빈틈없이 짜여진 햄릿의 계략은 보기 좋게 성공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극을 더이상 참고 볼 수 없어 왕은 "등불, 등불, 등불을 가져오라!" 하고 소리치면서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서 당황한 얼굴로 퇴장한다. 햄릿은 그 순간 망령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햄릿은 진상을 확신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원한에 묻힌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림을 느낀다. 그의 마음은 증오심으로 불타기 시작하고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놓쳐 버릴 수 없는 것이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머뭇거리면서 과감히 해치우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오늘까지도 가장 큰 논쟁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 점에 대하여 햄릿은 너무나 사색적일 뿐 성격의 대담성이 없었다는 성격적 무능설을 내세우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삶에 대한 비판의식이 너무나 예리해 행동이 미처 못 따랐다는 비관론을 주장하는 평론가가 있으면 혹은 도탄에 빠진 덴마크를 우선 구해내야 되겠다는 구국사명설, 햄릿은 복수를 부도덕이라고 치부하여 고민에 빠졌다는 양심설, 심지어는 숙부이지만 지금은 부왕이되는 왕에 대한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어명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설 등 다양하다. 어쨌든 '햄릿'이 우리에게 절절하리만큼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그 주인공의 성격적인 매력에 있다. 일찍이 괴테는 햄릿을 '순수하고 고귀하고, 다할 나위 없이 덕성이 강한 인물'이라고 설파했고, 콜리지는'행동과 사색 사이에 심한 불균형에 병든 사나이'라고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했으며 트루게네프는 '지적 사색적 비행동형의 전형'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햄릿의 성격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햄릿'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내성적이자 행동을 주저하는 반면에,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또 하나의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햄릿은 여러가지 상치되고 모순된 점이 그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하겠다. 원래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소재를 극장 레퍼토리의 개작 아니면 영국 국민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역사, 로맨스, 전설 등에 소재의 원천을 두어 왔고 그의 천재적이며 예술적인 감각은 그러한 평범하고 대중적인 소재에다가 화사한 도금을 입혀 영롱한 빛을 발하게 했다. '햄릿'역시 그렇다. '햄릿'의 창작년대는 1601년이다. 부왕이 독살당하여 숙부에게 왕위와 어머니를 빼앗긴 주인공이 부왕의 망령을 통해 그 참혹하고 비극적인 진상을 알게 되고 결국 복수하는 이야기는 중세이래 덴마크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왕자의 슬픈 전설을 12세기말경에 편술한 사람이 바로 '덴마크의 국민사'를 쓴 역사가이며 시인인 삭소 그라마티커스였다. 그 책 5권 중, 제 3권에 수록된 햄릿 이야기를 1570년 프랑스의 저술가 프랑스와 드 벨레포레가 프랑스어로 번안한 '비극설화'제 5권 속에 수록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스페인 비극'과 같은 유혈 복수극을 써서 엘리자베드 시대에 무대의 총아가 되었던 셰익스피어의 선배 토마스 키드의 작품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하는 '원 햄릿'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주인공 햄릿이 받는 고초는 심각하고 뼈저리다. 그의 최후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겹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최종적으로 와 닿는 것은 절망이나 허무감이 아니다. 우리가 오직 감동깊게 의탁하고 싶은 간절한 희구인 것이다. 가령 인간과 현실 세계의 비정성에 대해 무서움과 비참함을 심각하게 느끼지만 거기에서만 우리를 붙잡아 두지는 않는다. 비극을 한 걸음 넘어선 곳에 희망의 빛이 있음을 암암리에 느끼게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우리의 가슴을 장엄한 인간성의 찬미로 가득 차게도 한다. 햄릿이 마지막 대사 "남은 건 침묵뿐이로다." 하고 읊으며 숨졌을 때 고요하고 한없이 숭고한 심정에 젖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그 높은 곳을 향해 나래치기 시작한다. '햄릿'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또 한 가지는 뭐니뭐니 해도 그의 빛나는 대사이다. 흔히들 셰익스피어를 말할 때 천의 얼굴을 가진 극작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그는 천의 언어의 색깔을 가진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쓴 대사의 시어미는 음악과 이미지가 결합된 아름다움이다. 어떤 때는 불꽃의 언어로, 어떤 때는 장미꽃의 언어로, 어떤 때는 칼날의 언어로, 살아 꿈틀거리고 재치와 웃음의 언어가 숨결을 같이하여 5월의 꽃밭을 이룬다. 언어에 의한 비극정신이 그를 영원히 시인으로 만든 실증을 우리는 '햄릿'에서도 엿보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서거한 지 37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창조한 햄릿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왜냐하면 항상 '햄릿'에서 새로운 자기 자신의 어떤 문제를 찾아내게 되기 때문이다. [ 오델로 ] (등장인물) 오델로: 베니스 정부에 봉직하고 있는 무어 귀족 브러밴쇼: 원로원 의원, 데스데모나의 부친 캐시오: 오델로의 부관 이아고: 오델로의 기수 로더리고: 베니스의 신사 베니스의 공작 몬타노: 사이프러스의 총독 그레이쉬아노: 베니스의 귀족, 브러밴쇼의 아우 로도비코: 베니스의 귀족, 브러밴쇼의 친척 데스데모나: 브러밴쇼의 딸, 오델로의 아내 이밀리어: 이아고의 아내, 데스데모나 시녀 비앵커: 캐시오의 정부 원로원 의원들, 광대, 선원, 심부름꾼 전령, 관리들, 신사들, 악사들, 시종들 (장소) 제1막: 베니스 제2막-제5막: 사이프러스 [ 제1막 ] 아버지들이여, 이제부터는 딸자식의 소행을 보고 그 마음을 믿지 말지어다. - 2장 브러밴쇼 대사 중에서 [ 제1장 베니스, 거리 ] 로더리고와 이아고 등장 로더리고: 예끼 이 사람아! 듣기 싫으니. 같잖은 소리 투덜거릴거 없네. 내 속을 산적 꿰듯 아는 자네가 이제 와서 이 일을 모른다고 의뭉을 떨다니 될 법한 일인가? 이아고: 핀잔 말구 좌우지간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구! 정말 난 꿈에도 그 사실을 몰랐다니까. 로더리고: 자넨 그자 낯짝도 보기 싫다고 했겠다? 이아고: 그렇다뿐인가. 장안에서 따르르한 세도가 세 분이 그잘 찾아가서 허리를 굽실거리며 날 그자 부관으로 천거했지 뭔가. 내 그만한 자격이 없겠나? 그 직위는 내게 조금도 과분한 게 아니라구. 그런데 그 작자 제 고집을 내세울 심보로 거드럭거리며 군대용어로 유난을 떨고 큰소리만 탕탕 치다가 꽁무니를 뺐다는 거야. 종내엔 배 문지르고 등 차는 격이지. "부관은 벌써 결정됐소이다." 하고 흉물을 떨었다지 뭔가. 그 부관이라는 위인이 누군지 알겠나? 속셈알 튀기는 데는 기막히게 빠른 놈이지. 프로렌스 태생으로 마이켈 캐시오라는 작가야. 계집 잘못 얻어 수모께나 당할 놈이지. 그 작자 싸움터에서 제대로 지휘 한번 해본 일도 없거니와 실전의 용병에는 전혀 까막눈이란 말일세. 그러니 비린내 나는 계집애보다 나을 것도 없고, 그저 탁상공론뿐이라니까. 도포자락이나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벼슬아치처럼 입장고나 꽝꽝 칠 뿐이지. 그래 쥐뿔도 모르는 그런 시러베 같은 놈은 대단한 군인인 척하고, 그런데도 척척 출세하고, 로즈, 사이프러스, 기독교도가 사는 데건 이교도가 사는 데건, 도처에서 무공을 세운 이놈은 날이 샌 올빼미 신세가 됐으니 이 무슨 꼴인가? 그래, 그 약삭빠른 놈은 깡충 부관으로 올랐는데 이 이아고는 그 무어 녀석의 기수라! 이거야 배알이 뒤틀려 살겠나. 로더리고: 맹세코 나 같으면 그 녀석을 아예 물고를 내버리겠는데. 이아고: 하지만 무슨 용뺄 재간이 있어야지. 남의 수발을 들려면 별별 눈꼴 사나운 일이 다 있는 법 아닌가. 출세길이 소개장이나 정실로 확 트이는 세상이니 차례대로 승진한다는 건 다 지난날의 추억담에 지나지 않아. 어디 생각 좀 해보게. 이렇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 무어한테 충성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로더리고: 나 같으면 어림 반푼도 없지. 이아고: 누가 아니래. 나라고 속셈이 없겠나? 내가 꽁무니를 물고 따라 다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단 말씀이야. 사람이 저마다 다 주인 노릇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어디 또 아랫놈이라고 해서 다 쩔쩔 매라는 법도 없단 말일세. 하기야 세상에는 그저 굽실거리며 손발이 닳도록 충성을 다하는 헐한 놈들도 있지. 그 쑥맥들은 당나귀처럼 죽도록 주인을 위해 한평생 일만 하는데도 여물로 목구멍 타작이나 하다가 늙어빠지면 내쫓기기가 일쑤거든. 그따위 식은 죽모양 밍밍한 놈들은 늘씬하게 주리를 안기고 싶으이! 그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나리의 영이라 해도 여물로 소금섬을 끄는 체하고 속으론 의뭉스런 계산을 튕기는 자도 있다네. 그저 주인한테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면서 짜낼 대로 따내,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주인을 막본단 말씀이야. 이런 자들은 제법 심지가 깊은 것들이지.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구. 이건 자네가 로더리고인 것처럼 확실한 거라구. 그러니 만일 내가 무어놈의 입장이라면, 이아고 같은 잘 옆에 두지 않겠네. 내가 무어를 받들고 있지만 실은 나 자신을 위해설세. 절대로 사랑과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이 아니거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결국 배도 먹고 이도 닦자는 속셈인 걸 하늘은 안다구. 밖으로 나타나는 내 행위가 내 마음의 참다운 모습과 움직임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지. 그 정도라면 내 옷소매에 내 심장을 끄집어내서 갈가마귀보고 쪼아먹으라고 하겠네. 애 속은 겉과는 다르단 말씀이야. 로더리고: 뜻대로 된다면 그 입술 두꺼운 녀석 복고 많지 뭔가! 이아고: 그 여자의 아버질 당장 불러내는 거야. 그리고 오델로의 잠을 깨우는 거라구. 쫓아가서 그자가 재미를 한창 볼 때 헤살을 놔야돼. 길바닥에서 목청이 찢어져라 떠들어대야 하네. 여자의 친척들을 들쑤셔 놓고 그 녀석이 한창 기분내고 있을 때 암치 뼈다귀에 파리 꾀듯 몰려들어서 성가시게 하는 거야. 그래도 기분을 내려 하겠지만 부아를 끓게 해서 흥을 깨는 걸세. 로더리고: 이게 그 여자의 아버지 집이군. 그래, 어디 불러 볼까? 이아고: 그렇지, 상대가 겁에 질리도록 그런 어조로 말일세. 오밤중에 번화한 거리에서 불이 난 것처럼 고함을 질러 대라구. 로더리고: 이보시오 브러맨쇼! 브러맨쇼 의원님, 큰일 났어요! 이아고: 잠을 깨라! 무얼 하느냐, 브러맨쇼! 도둑이야, 도둑! 집안을 살펴보세요, 어서 따님과 돈뭉치를 찾아보라구요! 도둑이야, 도둑! 집안을 살펴보세요, 어서 따님과 돈뭉치를 찾아보라구요! 도둑야, 도둑! 브러맨쇼 이층 창문에 나타난다. 브러맨쇼: 왜 이렇게 야단들이야? 대체 무슨 일인가? 로더리고: 의원님댁의 식구들은 다 계십니까? 이아고: 문단속을 잘 하셨는지요? 브러맨쇼: 그건 왜 묻는 거냐? 이아고: 큰일 났습니다, 의원님. 밤손님이 들었어요! 왜 어물어물하세요. 어서 옷을 입으세요! 심장이 터지고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지금 바로, 지금, 바로 지금 새까만 늙은 양이 댁의 흰 양을 덮치고 있습니다. 어서 일어나 나오십시오! 종을 쳐서 토를 골며 자고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우십시오. 안 그랬다간 마귀 외손잘 보시게 됩니다. 어서 일어나시라니까요! 브러맨쇼: 뭐라구 정신이 돌았느냐? 로더리고: 존경하옵고 존경하는 의원님,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브러맨쇼: 몰라. 누군가? 로더리고: 로더리고입니다. 브러맨쇼: 듣고 보니 더 괘씸하군! 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것봐, 내 딸을 자네에게 줄 수 없다고 귀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일러줬겠다. 그런데 이 행티가 뭔가? 술에다 음식에다 잔뜩 처먹고 미친 놈처럼 북새를 떨어 단잠을 깨워놔. 로더리고: 의원님, 의원님, 의원님.... 브러맨쇼: 어디 두고 봐. 내 기백이나 지위로써 허수히 잡도리할 성싶은가? 내 심사를 건드린 만큼 혼찌검을 내줄 테다. 로더리고: 고정하십시오, 의원님. 브러맨쇼: 뭐 도둑이라구, 무슨 놈의 도둑이야? 여긴 베니스다. 내 집은 들판의 외딴집과는 달라. 로더리고: 브러맨쇼 의원님, 저는 엉뚱한 심지를 품고 온 게 아닙니다. 이아고: 젠장, 의원임께서는 신께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악마의 꼬드김이라면 내팽개칠 분이시군요. 저희들은 긴히 알려드릴 말씀이 있어 왔는데 불한당 취급을 하시니 말입니다. 바바리산 말이 따님을 손아귀에 넣었다니까요. 졸지에 힝힝 우는 손자들을 보시게 된다구요. 증손들 친척 가운데 별의별 말이 다 쏟아져 나오는 게 됩니다요. 브러맨쇼: 이런 방자한 놈 봤나? 도대체 네가 누구냐? 이아고: 저는 있습죠, 따님 하고 무어놈 하고 몸을 하나인 데다가 잔등이 둘인 짐승짓을 하고 있는 걸 귀띔해 드리려고 온 겁니다. 브러맨쇼: 이런 고약한 놈. 이아고: 나리께선 원로원 의원님이시구요. 브러맨쇼: 로더리고, 이건 자네가 책임져야 해. 난 자네를 잘 알고 있어. 로더리고: 물론 책임지고 말고요, 하지만 의원님, 그게 의원님의 의향이시고 가장 현명하신 판단의 결과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세 귀하신 따님께서 초목도 잠잘 이 야밤중에 누구에게든지 품을 파는 곤돌라의 뱃사공 한 사람만을 데리고 음탕한 무어인의 품에 함부로 안겨 있다 이 말씀입니다. 이걸 알고 계시고 의원님이 동의하신 일이라면 저희들이 소갈머리 없는 짓을 범했나 봅니다. 그러나 의원임이 모르신다면 그렇게 저희들을 딱딱 을러대실 게 아닙니다.오해하지 마십시오. 방자하게 의원임을 조롱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따님께서 승낙도 없이 출타하셨다면 그런 막심한 불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따님께선 자식된 범절과 미모 그리고 지혜와 운명을 여기저기 흘러다니는 떠돌이 외국놈한테 내맡긴 셈이죠. 당장 살펴보십시오. 만일 따님이 방안에나 집안에 계시다면 의원님께 거짓을 까발린 죄로 모진 형벌을 주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브러맨쇼: 여봐라, 불을 켜라! 촛불을 가져와! 사람들을 모조리 깨워라!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암만해도 심상치가 않은 걸. 불을 밝혀, 불을! (퇴장) 이아고: 또 만나세. 난 그만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걸세. 내 입장이 난처하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해. 내가 여기 있다가는 무어의 적수가 될 수밖에 없으니 말야. 그건 미욱한 짓이거든. 이 사건으로 그 녀석의 죄를 아무리 문책한다 해도 정부는 그의 장군자리를 쉽사리 파직시키진 않을 걸세. 그 이유인 즉 지금 사이프러스에서는 싸움이 한참 벌어지고 있는 판인데 무어가 아니고는 갈 만한 사람이 있어야지. 이런 판국에 아무래도 그 큰일을 수행할 만한 실력자는 그자 말고 더는 없을 테니까. 그런 점을 고려하여 울며 겨자 먹기지, 그 녀석 넌덜머리가 나지만 살아가려니 어쩌겠나, 좋아하는 척할 수밖에. 뭐 그저 깃발 휘저으며 충성심을 보이는 거지, 겉으로만 말야. 필시 거기 있을 걸세. 그럼 편성된 수색대를 이끌고 쌔지터리를 덮치게. 나도 그리로 가겠네. 그럼 가네. (퇴장) 실내가운을 걸친 브러맨쇼와 횃불을 든 시종들 등장. 브러맨쇼: 어이구, 이럴 수가 있나. 딸년이 없어졌다. 이젠 내 여생도 쭉정이처럼 말라 비틀어져 남은 건 슬픔밖에 없게 됐구나. 여보게 로더리고, 내 딸을 어디서 봤지?--아, 불쌍한 것!--무어하고 같이 있었다고 그랬겠다--이런 꼴을 볼 바에야 누가 애비 노릇을 하겠나?--자네는 어떻게 내 딸인 줄 알았나?--아비를 감쪽같이 속이다니?--내 딸이 자네보고 뭐라 하던가? 불을 더 밝혀라! 집안식구들을 깨워! 그 둘이 결혼을 해버린 것 같던가? 로더리고: 그러믄요. 브러맨쇼: 아이구 맙소사! 어떻게 빠져 나갔을까? 혈육이 배신하다니! 아버지들이여, 이제부터는 딸자식의 소행을 보고 그 마음을 믿지 말지어다. 이 세상에는 젊은 처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묘약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로더리고, 자네 그런 얘기를 읽은 적 있나? 로더리고: 예 의원님, 있고말고요. 브러맨쇼: 내 아우를 깨워라--아, 차라리 자네를 사위로 삼을 걸 그랬네!--자, 한 패는 이쪽으로, 다른 한 패는 저쪽으로--딸애와 무어의 덜미를 잠을 수 있는 장소를 아는가? 로더리고: 그자의 덜미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의원님이 호위병 몇 사람을 데리고 절 따라오시면 말입니다. 브러맨쇼: 부탁하네, 앞장서게. 집집마다 들러서 사람을 모으자. 모두들 내 명을 거역하진 않을 거다--무기를 가지고 와! 야경들을 깨워라--자, 가세, 로더리고.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네. (모두 퇴장) [ 제2장 쌔지터리의 외곽 다른 거리 ] 오델로, 이아고, 횃불을 든 시종들 등장. 이아고: 싸움터에서는 제가 숱하게 사람께나 죽였습니다만, 계획적인 살인은 양심의 문제라고 사려됩니다. 전 마음이 약해 빠져 항상 손해를 본답니다. 그저 그놈의 갈빗대를 푹 찔러 쑤셔 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만 꾹 참았죠. 오델로: 내버려 두길 잘했네. 이아고: 하지만 그놈이 장군님 욕을 된 소리 안된 소리 마구 내뱉지 않겠습니까! 어디 제가 성인군자니까, 부아를 삭이려고 간장깨나 썩였습죠, 그건 그렇고, 장군님은 결혼을 확실히 하셨습니까? 이렇게 확인하는 건 저 원로원 의원께선 덕망뿐 아니라 실권에 있어서도 공작님 못지 않게 그 발언권이 당당하시거든요. 아마 모르긴 해도 그분이 두분 사이를 끊어 놓거나 또는 범위 안에서 전력을 다해 농간을 부려 장군님을 못 살게 굴 것이 뻔합니다. 오델로: 해볼 테면 해 보라지. 국가에 대한 내 공로를 보아서라도 그분의 고소쯤이야 문제될 게 없네. 또 아직껏 남에게 말은 안했지만--때로는 명예를 위해서 자랑도 필요한 법--난 이래봬도 왕족의 혈통을 받은 사람이지. 이번 손에 넣은 행운쯤은 응당 요구할 권리가 있다네. 여보게 이아고, 내가 상냥한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이렇게 편하고 편한 자유로운 생활을 가정이란 우리 속에 처박겠나. 바닷속의 온갖 보물을 다 준다 해도 말일세. 저건 뭔가? 저 횃불은? 캐시오와 횃불을 든 몇 명의 관리들 등장. 이아고: 잠을 깬 아버지와 그 한패들이 몰려옵니다. 어서 숨으십시오. 오델로: 숨다니! 말이 되나. 내 인격으로 보나, 내 지위로 보나, 내 굳은 정신으로 보더라도 당당하게 부딪쳐야지. 그 패거리들인가? 이아고: 그렇지 않아 봅니다. 오델로: 공작의 하인들 아닌가? 내 부관도? 밤중에 수고들 하네. 무슨 일인가? 캐시오: 장군님, 공작께선 부르십니다. 지금 당장 들어오시라는 분부이십니다. 오델로: 무슨 일일까? 캐시오: 사이프러스에서 무슨 전갈이 온 모양입니다. 화급한 일인가 봅니다. 밤새 함대에서 전령이 십여 명이나 잇달아 왔습니다. 그래서 의원들이 거의 다 일어나 지금 공작님 댁에 모여 회의중이십니다. 빨리 모시고 오라는 분부였지만 숙소엘 가도 안 계셔서 원로원은 세 패로 사람을 내보내어 장군님을 찾고 있습니다. 오델로: 마침 잘 찾았네. 안에 들어가서 한 마디 일러들 게 있네. 그리고 함께 가지. (퇴장) 캐시오: 기수, 장군은 여기서 뭘 하고 계셨는가? 이아고: 실을 오늘 밤 유지를 달리는 한 척의 보물선을 타고 계셨답니다. 만일 그것이 합법적인 전리품이라면 장군님은 복도 많으신 분이지 뭐니까. 캐시오: 무슨 소리야? 이아고: 결혼하셨어요. 캐시오: 누구와? 오델로 등장 이아고: 실은 저--아, 장군님, 가시겠습니까? 오델로: 음, 가세. 캐시오: 또 다른 패가 장군님을 찾으러 옵니다. 브러맨쇼, 로더리고, 횃불을 든 관리들 등장. 이아고: 브러맨쇼 의원이군요. 장군님, 조심하십시오. 결판을 내러 오는 겁니다. 오델로: 이봐! 거기 섯! 로더리고: 의원님, 무어놈입니다. 브러맨쇼: 저 날강도를 때려 눕혀라! (그들 칼을 뽑는다) 이아고: 자넨가, 로더리고? 오라구, 자, 덤벼라. 오델로: 어서 그 반짝이는 칼들을 칼집에 집어넣어라. 밤이슬 맞으면 녹슨다. 의원님께선 칼을 빼지 않으셔도 그만한 연세이시니 말로 명령하셔도 될 텐데요. 브러맨쇼: 이 간악한 날도둑 같으니. 내 딸을 어디다 감추었느냐? 그 흉측한 술수로 내 딸에게 헛바람을 넣어 후려냈겠다! 사리를 판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호소할 것이다. 네놈의 간교한 요술에 발목이 잡히지 않고서야 심성이 부드럽고 아름답고 행복에 찬 애가, 그렇게도 결혼을 싫다 하며 이 나라의 유복한 귀공자들도 거들떠보지 않던 내 딸이 어찌하여 남의 웃음거리가 될 곳을 알면서 아비 슬하를 빠져나가 보기만 해도 물어 봐라, 뻔한 일이다. 네놈이 간악한 요술로 내 딸에게 마약을 쓰고 극약을 써서 연약한 처녀를 홀려 분별을 잃게 한 거다. 법정에 나가 다 밝히고야 말겠다. 틀림없어,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미풍양속을 해치고 금지된 용서받을 수 없는 요술을 행한 죄로 오라를 받아라. (관리들에게) 저 놈을 잡아라. 대들거든 사정볼 것 없다, 요절을 내라. 오델로: 물러서라, 너희들도 그 쪽도 모두. 싸울 때가 되면 내 알아서 할 것이니라. 어디로 가야 좋겠습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려면? 브러맨쇼: 감옥이다, 곧 법정이 열린다. 그리고 호출될 때까지 기다리면 돼. 오델로: 그 말씀에 복종해도 괜찮을까요? 공작께서 그것을 양해하실까요? 국가의 긴급한 사태로 이렇게 사람을 보내서 저를 들어오라는 분부이신데요. 관리: 사실입니다. 존경하는 의원님, 공작께서는 지금 회의중이십니다. 대감께서도 사람이 갔을 겁니다. 브러맨쇼: 뭐라고? 공작께서 회의를 여셨다구? 이 밤 시각에--어서 여자를 데려가라 내 문제도 예삿일이 아니다. 공작께서도, 원로원의 동료들 어느 누구도 이 화를 남의 일같이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이따위 추행을 활개치게 하느니 차라리 노예들이나 이교도들에게 이 나라를 맡겨 우리를 통치해 달라고 하지. (모두 퇴장) [ 제3장 회의실 ] 공작, 원로원 의원들과 관리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고, 시종들이 불을 들고 있다. 공작: 들어오는 정보들이 서로 어긋나니 갈피를 잡을 수 없소. 의원1: 그렇습니다. 정보마다 다릅니다. 세 보고서에는 적의 군함이 백칠 척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공작: 내 것에는 백 사십 척이라고 나와 있소. 의원2: 제 것에는 이백 척입니다. 숫자가 엇갈리는데--상황이 핍박한 나머지 어림잡아 보고한 모양이나 착오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어쨌든 분명한 것은 터키 함대가 사이프러스 섬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작: 그렇소, 그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오. 다소의 착오가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소. 그리고 적이 쳐들어왔다는 주요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걱정이 되오. 선원: (안에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것 보세요! 선원 한 사람 등장. 관리: 함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공작: 그래? 무슨 소식인가? 선원: 군비를 갖춘 터키 함대가 로즈 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안젤로 제독께서 정부에 이렇게 보고드리라고 하명하셨습니다. 공작: 이 정세의 변화를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의원1: 도무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눈을 속이려는 위장이 아닐까요? 사이프러스 섬이야말로 터키왕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전략지입니까? 그리고 또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쪽은 로즈 섬에만 요새도 없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방어시설도 단단하지 못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볼 때 터키왕이 가장 관심이 깊은 곳을 맨 뒤로 돌려서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장점을 무시하고 아무 이득이 없는 위험을 무릅쓰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작: 옳은 판단이오. 로즈 섬이 확실히 적의 목표는 아닌 것 같소. 관리: 또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전령 등장 공작: 아룁니다. 로즈 섬으로 향진하던 터키함대는 그곳에서 후속 함대와 합류했습니다. 의원1: 으음, 그럴 줄 알았다. 몇 척이나 되던가? 전령: 삼십 척 가량입니다. 지급 뱃머리를 180도 돌려 확실히 사이프러스 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망 있고 용감한 몬타노 총독께서 이상의 경과를 의원님들께 알리고 구원을 부탁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공작: 사이프러스 섬을 치려는 것이 분명하다. 마커스 루치코스는 여기 베니스에 없는가? 의원1: 프로렌스에 가 있습니다. 공작: 내 친서를 써서 황급히 전령을 보내시오. 의원1: 브러맨쇼 의원과 용감한 무어 장군이 오시는군. 브러맨쇼, 오델로, 캐시오, 이아고, 로더리고, 관리들 등장. 공작: 용감한 오델로장군, 바로 큰일을 맡아 줘야겠소. 온국민의 적 터키군의 격퇴를 부탁하오. (브러맨쇼에게) 기다렸습니다. 참 잘 오셨소. 오늘 밤 회의에서 당신의 고견과 도움을 청할 참이었소. 브러맨쇼: 저 역시 각하의 고견과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온 것을 의원으로서 중요한 사태가 일어났다고 들었기 때문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때문도 아닙니다. 저 자신의 근심이 가슴을 꽉 메우고 넘쳐 흘러 다른 사람들의 슬픔일랑 다 묻어 버리고 삼켜 버려 어찌해야 할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작: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브러맨쇼: 제 딸년이! 아아 제 딸이! 의원들: 죽었소? 브러맨쇼: 저에게는 죽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딸년은 농락당했습니다. 도둑맞았습니다. 능욕당했습니다. 돌팔이 의사한테서 산 마약과 요술로 당했어요. 심지가 깊고 영리하고 똑똑한 그것이 요술에 걸리지 않고서야 그렇게 허방에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공작: 그자가 어떤 자이건 간에 용렬한 수단으로 당신 따님을 농락하고 당신의 손에서 딸을 빼앗았다면 준엄한 법에 따라 당신이 판단하여 스스로 엄히 처벌하십시오. 설사 그 범인이 내 자식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 브러맨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이 무어입니다. 아마 지금 중대한 국사로 각하의 부름을 받고 나온 모양입니다만. 공작과 의원 일동: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 공작: (오델로에게) 장군, 뭐 할말이 없소? 브러맨쇼: 입이 열 갠들 무슨 할 말이 이겠습니까? 뻔한 사실인 걸요. 오델로: 모든 권세와 위임을 겸비하신 존경하는 원로원 의원 여러분, 가장 고귀하고 경애하는 의원 여러분께 삼가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이 노인의 따님을 데려간 것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결혼한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저지른 죄과는 그뿐이며, 그 이상은 아닙니다. 본인은 원래 말솜씨가 거칠고 평화스럽게 부드러운 언변을 구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팔에 힘이 들기 시작한 일곱 살 때부터 오늘날까지 아홉 달을 제외하고는 줄 곧 싸움터를 보금자리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전쟁 이외의 일엔 눈이 어두우며 고작 안다는 건 전쟁에 관한 일들뿐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자신을 변호할 재주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여 주신다면 저희들의 사랑의 전말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떠한 마약, 어떠한 마술, 어떠한 주문을, 그리고 어떠한 마법의 힘에 의해 제가 그러한 수단을 쓴 것으로 책망받고 있지만 의원님 따님의 마음을 얻은 경위를 밝혀 드리겠습니다. 브러맨쇼: 규중처녀란 수줍어하는 거요. 그렇듯 심덕있고 차분하고 행여 마음의 동요만 엿보여도, 얼굴을 붉히던 딸이 아니 그런 내 딸이 자연의 정을 거슬리고 연령도 인종도 체모도 모든 걸 아랑곳없이 내던져 버리고 굴뚝 막았던 덕석같이 험악한 인간을 분수없이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바보천지가 아니고서야 티끌만한 흠도 없는 자식이 인륜에 벗어난 이런 소행머리를 저질렀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악마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요사스런 변고가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니 거듭 말씀드리지만 피를 들끓게 하는 극약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효험이 있는 마약을 마시게 해서 내 딸에게 요술을 부린 게 틀림없습니다. 공작: 그러해 단언을 한다고 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일이오.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지 피상적이고 평범한 억측만 갖고는 이 사람의 죄를 물을 수 없는 노릇. 의원1: 오델로 장군, 말씀해 보시오. 불공정하고 강압적인 수단으로 이 젊은 처녀의 사랑을 사로잡고 더럽혔소? 아니면 예의범절을 지켜가며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고해서 사랑을 얻은 거요? 오델로: 청하오건대 쌔지터리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러 주십시오. 부친 면전에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나 물어봐 주십시오. 만일 본인을 비방하는 말이 한 마디라도 나온다면 의원들로부터 받아온 신임과 직위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사형선고를 내리셔도 좋습니다. 공작: 데스데모나를 데리고 오너라. 오델로: (이아고에게) 기수, 안내하게. 장소는 자네가 잘 알지. (이아고와 시종들 퇴장) 공작: 어서 말하오, 오델로 장군. 오델로: 그녀의 아버님은 이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종종 집으로 초대해서 제 반평생에 관한 얘기를 묻곤 하셨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이 사람이 겪어온 전투 얘기, 승패에 따른 운명의 교차 등의 얘기 말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일부터 말하라는 명에 따라 그때까지의 일을 빼놓지 않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참했던 모험담, 바다나 육지에서 벌어졌던 무시무시한 사건들, 성벽의 틈새를 통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얘기, 잔인한 적에게 생포되어 노예로 팔려갔다가 몸값을 치르고 겨우 자유의 몸이 됐고 그 후 여러 나라를 방랑했던 체험담을 말입니다. 그러한 저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서로 잡아먹는 식인종 앤드로포파자이족, 또 머리가 어깨 밑에 다린 인종들 이야기요. 이런 얘기에 데스데모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러나 재빠르게 해치우고 돌아와서는 넋이 빠진 듯 저의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깨닫고 어느 땐가 좋은 기회를 잡아 여자 쪽에서 제 여행담을 모두 들려 달라고 몸이 달아서 부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녀는 조금씩 듣기는 하였으나 흘려 버린 것도 꽤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승낙하고 젊었을 때 고생하던 비참한 얘기를 해줬더니 부지불식간에 눈물을 줄줄이 흘리곤 했답니다. 얘기가 끝나자 저의 수난을 동정하고 가슴이 쏟아질 듯한 한숨을 내쉬더군요. 신기하다느니, 상상도 못 할 이야기라느니, 불쌍해서 가슴이 메어진다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기까지 했답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그런 남자와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고마워하면서 만일 제 친구 가운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의 이야기를 들려 주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자기고 그 남자에게 마음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암시를 얻어 사랑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을 동정하여 저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용한 요술입니다. 그녀가 왔습니다. 직접 물어 보십시오. 데스데모나, 이아고, 시종들 등장. 공작: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내 딸이라 해도 가슴이 뭉클하였을 거요. 브러맨쇼 의원, 이왕 이렇게 된 일, 좋도록 처리함이 어떻소? 맨주먹보다는 부러진 칼이라도 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니오. 브러맨쇼: 우선 딸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만약 딸애가 좋아서 사랑을 한 것이라면 이 몸이야 어찌 되든간에 이 사람을 힐난하지 않겠습니다. 애야, 이리 오너라. 여러 귀하신 어르신네 앞에서 묻겠다만 너는 누구한테 먼저 복종해야 하느냐? 데스데모나: 아버님, 저의 임무는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아버님에게는 저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받고 있고, 낳고 기르신 은혜로 해서 아버님을 공경할 것을 배웠습니다. 아버님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소중한 분이십니다.지금까지 저는 아버님의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남편이 있습니다. 저의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외조부님보다 소중하게 여기셨듯이 저도 아내로서 남편인 오델로 님을 지성껏 섬기려 하는 것입니다. 브러맨쇼: 네 멋대로 하렴. 이젠 할 말이 없습니다. 공작 각하, 이제 국사를 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믿는 나무에 곰팡이 핀다구 자식을 낳느니 차라리 얻어다 기르는 편이 백 번 나을 뻔 했군. 이리 오게, 무어. 아직 자네 것이 안되었던들 단호히 거절하겠네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는 일! 자네에게 깨끗이 내 딸을 주겠네. 내가 무남독녀를 둔 것이 천만다행이군. 딸년이 도망가니 나도 마음이 포악해져서 아이들에게 족쇄라도 채우고픈 심정이다. 제 일은 다 끝났습니다, 공작 각하. 공작: 나도 경처럼 교훈이 될 말을 한 마디 하겠소. 내 교훈이 밑거름이 되어 쌍방이 화해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 치유책이 없다고 체념하면 슬픔도 끝나는 법. 최악의 것을 봄으로써 지금까지 기대하던 희망을 거둔 탓이오. 일단 끝장난 일에 언제까지나 미련을 가고 한탄하는 건 새로운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법. 아무리 불행한 재난을 당할 지라도 참으면 그 상처를 웃으며 극복할 수도 있소. 도둑을 맞아도 웃는 사람은 오히려 도둑한테 뭣인가 빼앗는 셈이오. 쓸데없이 슬픔에 잠긴다는 건 자기 정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오. 브러맨쇼: 그렇다면 터키군으로 하여금 사이프러스 섬을 훔치게 하시지요. 우리 쪽이 웃고만 있으면 안 뺏긴 셈이 되는 게 아닙니까. 지금 말씀하신 교훈도 그렇습니다. 위로를 받을 만한 사람에겐 마음의 위로가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슬픔에 지불한 돈을 인내에게 빌리는 사람은 격언과 슬픔 쪽에 빚을 져야 합니다. 어쨌든 교훈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아무렇게나 편리하게 쓸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어디까지나 말은 말입니다. 상처 입은 심장이 귀로 듣는 말로 해서 치유됐다는 얘기는 자고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국가의 대사를 진행하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공작: 터키군이 강대한 군비를 갖추고 사이프러스 섬으로 향하고 있소. 오델로 장군, 그 섬의 방비책은 누구보다도 장군이 자 알고 있을거요. 그곳에는 이미 가장 유능한 임시 총독을 파견하였지만 들끓는 세상 여론은 꼭 장군이 가야만 안심이 된다는 거요. 그러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신혼의 달콤한 행복을 잠시 묻어 두고 이 어렵고 살벌한 외적 토벌에 부디 나서 줘야겠소. 오델로: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원래 모진 경난에 익숙한 이 사람에게는 싸움터에서 돌과 강철이 잠자리로 삼는 것이 오히려 최고의 깃털 잠자리마냥 포근하였습니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보고만 있지 못 하는 것이 이 사람의 성미이옵니다. 기필코 터키 침략군을 무찌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를 보살펴 주실 것과 가문에 부끄럽니 앓을 정도의 거처를 마련해 부시고 재정적 지원에다 뒷바라지할 사람을 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작: 그렇다면 빙장께 맡기는 것이 어떻소. 브러맨쇼: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오델로: 이 사람도 원치 않습니다. 데스데모나: 저 역시 싫습니다. 아버님의 슬하에서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공작님, 제가 드리는 말씀을 관대하게 들어 주십시오. 비록 말솜씨가 서툴러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접어두시고 제 소청을 물리치지 마소서. 공작: 데스데모나, 무슨 청이오? 데스데모나: 제가 무어 장군을 사랑하여, 함께 사고 싶어함은 오직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운명의 사나운 물결속에 몸을 던진 행동으로 이 세상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저는 오델로 장군의 군인다운 기백에 마음 끌렸습니다. 오델로 장군의 훌륭한 모습을 그의 마음속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명예와 혁혁한 무훈에 제 혼과 운명을 서슴지 않고 바쳐 아내가 됐습니다. 그러니 여러 의원님들, 저만 뒷전에 남아 안일한 생활을 누리고 이분만 싸움터에 나가신다면 아내된 보람도 없거니와 독수공방의 무거운 기분으로 퍽 쓸쓸할 것입니다. 부디 같이 가도록 허락해 주소서. 오델로: 아내의 소청을 들어 주십시오. 하늘에 맹세합니다만 결코 정욕을 채우려고 간청드리는 게 아닙니다. 젊음의 혈기가 갖는 욕정따윈 이미 저에게는 없습니다. 남편의 도리로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아내의 소원을 들어 주고 싶어서입니다. 하느님에게 맹세하지만 설령 같이 있다고 해서 막중한 국사를 소홀히 하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날개 돋친 큐피드의 들뜬 사랑의 장난에 휘말려 그 음란한 화살에 특별 임무를 띤 투구를 아낙네들에게 주어 냄비대용으로 쓰게 하셔도 좋습니다. 온갖 수치스럽고 비천한 오명으로 제 명예를 더럽혀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공작: 남겨두건 데려가건 장군 임의대로 정하시오. 사태가 매우 긴박하오. 급히 출발하기 바라오. 의원1: 출발은 오늘밤이라도. 오델로: 알겠습니다. 공작: 그럼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다시 모이십시다. 오델로 장군, 부하 한 명을 남겨 두고 가시오. 그러면 임명장을 그 부하편에 보내겠소. 그밖의 이번 출정에 관한 중요한 관계 서류도 함께 전하리다. 오델로: 그럼 저의 기수를 남겨 두겠습니다. 충직하고 믿음직한 사나이입니다. 아내의 경호도 시구에게 맡겨 놓겠습니다. 뭣이든 필요한 것은 기수 편에 전해 주십시오. 공작: 그럼 그렇게 하시오. 여러분, 편히들 쉬시오. (브러맨쇼에게) 브러맨쇼 의원, 덕이 있으면 으레 미가 따르는 법이오. 경의 사위는 피부는 검지만 출중한 인물이 아니겠소. 의원1: 오델로 장군, 잘 다녀오시오. 부인을 잘 보살피시고. 브러맨쇼: 무어, 눈이 멀지 않는 한 내 딸을 잘 지켜보게. 아비를 속인 년이 남편인들 못 속이겠는가. (공작, 의원들, 관리들 퇴장) 오델로: 아내의 절개에는 이 목숨을 걸죠. 충직한 이아고, 내 아내를 부탁하네. 자네 부인이 시중들도록 해주게. 때를 봐서 두 사람을 데려 오게. 자아 데스데모나, 앞으로 한 시간밖에 남지 안았소. 사랑을 나누는 일도, 뒷처리하는 일, 지시하는 일도, 어쨌든 시간만은 엄수해야 하오. (오델로와 데스데모나 퇴장) 로더리고: 이아고! 이아고: 왜 그러나, 높으신 양반? 로더리고: 대관절 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아고: 어떻게 하다니? 가서 잠이나 주무시지. 로더리고: 당장 물에라도 빠져 죽고 싶네. 이아고: 그러면 자네와의 인연도 끝장나는 거지. 허, 앞뒤가 꽉 막혔군 그래. 로더리고: 사는 게 고통일 바에야 굳이 산다는 게 어리석지 뭔가. 죽는 게 고통을 잊는 약이 된다면 처방을 써 달래야지. 이아고: 뚱단지 같은 소리 작작하게! 나는 4곱하기 7의 28년간 세상이라는 걸 눈여겨봤지만 잇속과 손실에 눈을 뜬 후로는 제자신을 정말 아낄 줄 아는 놈을 본 저이 없어. 나 같으면 그까짓 씨알머리 없는 창녀 때문에 물 속에 뛰어들 바에야 차라리 인간을 하직하고 비비가 되어 버리겠네. 로더리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렇게 미련을 딱 끊지 못하고 생가슴을 앓고 있으니 말야, 정말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성격탓이지. 이아고: 성격이라구? 냉수 마시고 속차리게!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는 게 다 제 탓이라구. 사람의 몸뚱어리가, 왈 정원이라면 그 의지는 정원사이지. 쐐기풀을 심든, 상추를 심든, 우슬초를 심어서 백리향을 빼내든, 한 가지 풀만 기르든, 별의별 풀을 섞어서 다 심든--내버려 둬서 불모지를 만들든, 부지런히 거름을 주든--글쎄, 잘되든 못되든 다 우리의 의지대로 된단 말씀이야. 사람의 일생을 저울로 비유해 보세, 만일 이성의 접시와 정욕의 접시가 균형을 잃고 있다면 인간의 비열한 정욕 때문에 추한 일만 생기게 마련이자. 그러나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성이 버티고 있어서 설치는 색정이든, 부글거리는 육욕이든, 터질 듯한 정욕을 억제할 수 있거든. 자에의 애정이라는 것도 결국 이러한 욕망의 일종이나, 그 새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로더리고: 그런 건 아니지. 이아고: 피가 끓는 욕정이 의지력을 떠밀어 버렸을 뿐이야. 냉수 마시고 속차리라니까! 뭐 물에 텀벙하겠다구? 고양이나 눈먼 강아지를 대신 시키지 그래! 내 우정을 약속한 이상 자네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친구가 됐단 말씀이야. 지금이야말로 날 의지하기 좋은 때지. 지갑에 돈을 잔뜩 넣어갖고 싸움터로 같이 가세. 수염을 붙이고 변장을 하고. 돈을 두둑히 마련하라니까. 돌절구도 밑빠진 날이 있어. 데스데모나라구 언제까지나 무어를 죽자사자 하진 않을 걸세--돈 마련을 해. --그 녀석도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불이 붙어 버렸지. 쉬 더워진 냄비는 쉬 식는다구 헤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라니까--돈 마련을 해. 원래 무어 족속들이란 변덕이 죽끓듯 하거든--지갑에 돈을 넣고 있으라구. 지금은 꿀맛같이 달콤하지만 멀잖아 금계랍같이 쓰다고 뱉어 버릴 놈이야. 여자도 젊은 남자한테 꼬리를 칠 게구. 그 여자는 그 녀석의 몸뚱이에 싫증이 나면 반드시 후회하고 갈아치울 걸세. 그러니까 돈을 마련하라구.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지고 싶거든 투신자살보다야 좀더 멋있게 죽을 수 있잖나. 돈을 긁어 모으라구, 돈을. 떠돌이 야만인과 간사한 베니스 계집이 신성하지만 허망한 부부의 서역을 주고받은 건 사실이야. 그러나 내 지혜와 지옥의 악마를 총동원하면 배겨내지 못해. 그땐 자네가 그 계집을 흐물흐물해지도록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냐 말야. 그러니까 돈을 마련하라구 했잖아.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다니, 될 법한 소린가? 계집 하나 수중에 넣지 못하고 물귀신이 될 바에야 실컷 즐겨나 본 후 목을 메시게나. 로더리고: 자네 말대로 하면 그럼 내 소원을 꼭 풀 어 주겠나? 이아고: 문제없지. 자 돈이야, 돈을 준비하라구. 골백번이나 얘기했지만 난 무어놈이 밉단 말야. 내 원한은 뿌리 깊어. 자네도 마찬가지지 뭔가? 그러니 우리 손잡고 원수를 때려잡자고, 자네가 무어의 여편네만 가로챈다면 자넨 재미 많이 볼 거고, 난 속이 시원할 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뭔가. 시간의 자궁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잉태한 것은 달이 차면 나오게 마련이거든. 자, 전진이다. 어서 가서 돈이나 마련하게! 내일 아침에 또 얘기하자구. 잘 자게. 로더리고: 내일 아침엔 어디서 만날까? 이아고: 내 숙소에서. 로더리고: 일치감치 감세. 이아고: 그럼 잘 가게. 알겠지. 로더리고! 로더리고: 왜 그래? 이아고: 행여 빠져 죽진 말게나, 알았는가? 로더리고: 생각을 돌렸네. 이아고: 어서 가래두. 잘 가라구.돈을 두둑히 장만하는 걸세. 로더리고: 땅뙈기 있는 거 몽땅 팔 테다.(퇴장) 이아고: 이렇게 해서 그 바보녀석 주머니를 털어먹는 거지. 그까짓 허레비 녀석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야 없지. 제대로 즐기고 잇속을 차리지 못한다면 모처럼 터득한 내 지혜도 말짱 헛거지? 나는 무어놈을 증오한다. 그 자가 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서방질을 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겠다.사실이지 아닌지 확실친 않지만 사실로 치부하고 복수를 해서 지성을 풀어야지.그런데 그 녀석은 날 태산같이 믿고 있겠다.그러니 그것만으로도 이쪽이 골탕 먹이는 덴 누워 떡먹기지. 캐시오란 녀석 남자답긴 한데. 가만있자. 그 녀석 지위를 뺏고 나의 한을 씻는 거야. 그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지. 그런데 어떻게 한다? 어떻게? 기다려라, 좀더 시간을 두고 오델로한테 꼬아바치는 거다. 캐시오란 자가 부인하고 그렇고 그렇다고 말야. 그잔 품골도 걸출하겄다, 거기다 태도도 은근하고 의심받기엔 안성맞춤이지--여자를 농락하게 생겨먹었다니까. 무어는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질이라 겉으로만 충실한 체 해도 꼬빡 속아넘어갈 위인이라구. 당나귀 코 끌고 다니듯 조종할 수 있지. 좋았어! 그렇게 하는 거야. 이 도깨비 같은 재앙을 빛보게 하려면 지옥과 어두운 밤의 힘을 빌어야 해. (퇴장) [ 제2막 ] 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술귀신아, 너한테 아직 이름이 없다면 이제부턴 널 악마라고 부를 테다! - 3장 캐시오 대사 중에서 [ 제1장 사이프러스 섬의 항구, 부두 근처의 빈터 ] 몬타노와 신사 두 사람 등장 몬타노: 갑으로부턴 바다 위에 뭣이 보이오? 신사1: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성이 나 날뛰는 파도뿐입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배의 돛대 하나 볼 수가 없습니다. 몬타노: 육지에서도 대단한 바람이었소. 성벽이 이처럼 질풍을 받아 본적이 없었소. 바다도 그랬다면 참나무로 된 배의 서까래도 산더미 같은 파도에 박살이 났을 거요.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 궁금하오. 신사2: 필시 터키 함대는 산산이 흩어졌을 겁니다. 파도치는 모래톱에 서서 보십시오. 사나운 파도가 맹렬히 구름을 치고 바람에 뒤끓는 해면은 마치 무시무시한 갈기처럼 휘날리며 저 찬란히 빛나는 소웅성에다 물보라를 끼얹는 것 같습니다. 영원히 한자리에 못박고 있는 북극성을 지키는 저 별들을 삼켜 버릴 듯한 기세입니다. 저는 이렇게 바다가 광란하는 광경을 보는 건 정말 처음입니다 몬타노: 터키 함대도 항만으로 피난해 정박하지 않았다면 필시 물귀신이 됐을 거요. 저 폭풍에 도저히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 신사3 등장 신사3: 좋은 소식이오, 여러분! 전쟁은 끝났소. 무서운 폭풍우가 터키군을 부숴 버렸어요. 그놈들의 침략 야욕은 박살이 났어요. 베니스에서 온 우리 군함이 적함대의 잔해가 파도 위에 처참하게 흩어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답니다. 몬타노: 아니, 그게 사실이오? 신사3: 우리 군함이 입항했습니다. 베로나의 뱁니다. 용감한 무어장군 오델로의 부관 마이켈 캐시오는 벌써 상륙했답니다. 무어 장군이 탄 배는 아직 해상에 있는데 이 사이프러스 섬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 같습니다. 몬타노: 그것 잘됐군. 총독으로는 아주 적임이시지. 신사3: 그런데 캐시오는 터키함대의 전멸을 기뻐하면서도 무어 장군의 무사를 기원하는 듯 근심어린 모습이었소. 험하고 격렬한 폭풍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는군요. 몬타노: 무사했으면 좋겠소. 나도 전에 그분을 모신 적이 있지만 그분의 지휘는 참으로 훌륭한 군인다운 것이오. 자아, 바다로 가봅시다! 입항하는 배를 맞이함과 동시에 파란 바다와 푸른하늘이 맞닿는 수평선을 지켜보며 용감한 오델로 장군을 찾아봅시다. 신사3: 그럼 가시죠. 이렇고 있는 사이 어느 순간에 배가 들어올지 모릅니다. 캐시오 등장. 캐시오: 이 요새를 굳건히 잘 지켜 주신 용사께서 무어 장군을 그렇게 염려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오 하늘이여, 장군님을 이 풍파로부터 지켜 주소서. 저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에서 그만 장군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몬타노: 장군의 배는 튼튼합니까? 캐시오: 배야 튼튼한 재목을 썼을 테죠. 조타수들도 경험이 많고 노련한 자들입니다. 그래서인즉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문제없을 겁니다. 안에서 "배요, 배요, 배가 들어온다!" 하며 떠드는 소리. 전령 등장. 왜들 저리시오? 전령: 거리는 텅텅 비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로 몰려가서 "배다!" 하고 야단 법석입니다. 캐시오: 틀림없다. 총독님의 배일 거다. 예포소리 들린다. 신사2: 예포를 발사했습니다. 적어도 우린 편 배일 겁니다. 캐시오: 어서 가서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오셨는지 궁금하군요. 신사2: 알겠습니다. (퇴장) 몬타노: 부관, 장군께선 결혼하셨소? 캐시오: 행운을 타고난 분입니다. 필설로선 도저히 형용할 수 없고 어떠한 찬사의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을 맞이했습니다. 인간 자태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시인도 한숨을 질 것입니다. 신사2 다시 등장. 어찌되었소? 누가 입항했습니까? 신사2: 장군의 깃 아이고라는 사람입니다. 캐시오: 요행히 빨리 왔군. 모진 빗줄기도 거친 바다도 울부짖던 바람도 죄없는 배에도 눈독을 들여온 반역자 해저의 암초와 모래톱도 아름다움에 앞에선 맥을 못 푸는지 죽음의 본성을 내버리고 천사와 같은 데스데모나를 무사히 통과시켰구나. 몬타노: 누구 말씀이오? 캐시오: 지금 말씀드린 장군 중의 장군이신 부인이시죠. 담찬 아이고가 모시고 있는데, 우리들이 예상한 것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닿았군요. 주피터 신이요! 오델로 장군을 지켜 주소서. 큰 배가 돛에 가득 바람을 받고 위풍당당하게 항구에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면 데스데모나의 품안에서 사랑의 숨결이 파도 치게 될 것이며 저희들의 사그라져 가는 사기가 새롭게 북돋워질 것이며 사이프러스의 온 섬에 축복이 내려질 것입니다.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이아고, 로더리고 등장. 아, 보십시오! 배의 보물이 상륙합니다! 사이프러스 섬의 주민 여러분, 무릎을 꿇고 장군 부인께 인사드립시다! (무릎을 꿇으며) 부인, 환영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부인의 앞에도, 뒤에도, 사방에 두루 퍼져 부인을 감싸주시기 축원하나이다. 데스데모나: 고맙습니다, 캐시오 부관님. 주인의 소식은 들으셨어요? 캐시오: 아직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 너무 심려 마십시오. 곧 도착하실 겁니다. 데스데모나: 하지만 마음이 안 놓이는군요. 어떻게 부관님께서는 서로 떨어지게 되셨나요? 캐시오: 바다와 하늘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싸우는 등쌀에 그만 떨어지게 됐습니다. 안에서 "배다, 배야!" 하는 소리. 이어서 예포소리. 아, 저 소리. 배다! 신사2: 성채를 향해 예포를 쏘는군요. 이번에는 우리쪽 배입니다. 캐시오: 알아보고 오시오. (신사2 퇴장) 기수, 잘 왔소. (이밀리어에게) 부인도 안녕하십니까. 이아고, 크게 봐주게. 이런 인사를 하는걸. 거창하게 인사 올리는 것이 내 식 예절일세. (이밀리어에게 키스한다) 이아고: 전 아내의 혀끝에 진저리가 나 있어요. 늘 쫑알댄단 말입니다. 아마 부관께서도 제 아내의 입술을 받아 보시면 진저리가 나실 겁니다. 데스데모나: 어머나, 별로 말이 없는 부인인데요. 이아고: 진정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제가 졸려서 눈 좀 붙일까 하면 입을 들까불려 곤혹을 치르게 한답니다. 확실히 지금이야 부인 앞이라 혓바닥을 가슴속에 말아 넣고 그 속에서 종알대겠죠. 이밀리어: 어머, 사람 잡겠네. 이아고: 내숭떨지 말아요! 당신이야 바깥에선 그림처럼 얌전하지만 집안에선 악다구니를 써대기가 금간 종소리 같고, 부엌에선 살쾡이처럼 사납지. 나쁜 짓을 하고서도 요조숙녀처럼 앙큼을 떨고, 성이 났다 하면 마귀처럼 암상을 피우고, 집안 일에는 고달만 빼다가도 이불 속에선 홰를 치지. 데스데모나: 입도 걸지! 이아고: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터키 놈이나 마찬가지죠. 당신은 말이요, 자리에서 일어나면 굼뜨고, 이불 속에 들어가야 바지런한 여자야. 이밀리어: 누가 당신 칭찬 받겠대요. 이아고: 나도 싫습니다요. 데스데모나: 만일 제 칭찬을 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이아고: 어이구 부인, 그것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이 사람은 입을 벙긋했다 하면 험담이 튀어나오거든요. 데스데모나: 해보세요. 항구엔 누군가 나갔어요? 이아고: 예, 나갔습니다. 데스데모나: (방백) 마음은 심드렁하지만 재미있는 체하고 들어봐야겠어. (이아고에게) 자, 어떻게 제 칭찬을 해주겠어요? 이아고: 생각 중이지만 멋진 말이 끈끈이가 헝겊에 붙은 것같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억지로 잡아떼면 뇌속의 골이 묻어 나올 지경이죠. 자아, 뮤우즈의 영감이 태어나려고 진통을 시작했어요. 자아 낳았습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여자가 얼굴이 예쁘고 슬기가 있다면 얼굴이 예쁘니 잘 팔릴 것이며 슬기 또한 그 점을 잘 이용할 것입니다." 데스데모나: 참 멋있군요. 그럼 얼굴이 밉고 슬기가 있다면요? 이아고: 얼굴이 미워도 슬기만 있다면 미운 만큼 슬기를 짜내어 그 호상에 알맞은 사내를 얻게 되겠죠. 데스데모나: 점점 나빠지네요! 이밀리어: 그럼 얼굴이 예쁘고 우둔하다면요? 이아고: 얼굴이 흰 여자 치고 우둔한 바보는 없죠. 음탕한 짓을 하고도 자식 하나는 얻을 것이니. 데스데모나: 선술집에서 멍청한 사람이나 웃길 얘기군요. 그럼 얼굴도 밉고 우둔하다면 지독한 칭찬이 나오겠군요? 이아고: 얼굴이 밉고 거기다가 우둔하다면 예쁘고 슬기 있는 여자 못지않게 음탕한 장난에는 끗발 잡지요. 데스데모나: 모르는 소리 그만두세요. 제일 나쁜 것 제일 좋다고 칭찬하시니. 그럼, 정말 훌륭한 여자는 뭐라고 칭찬해야 되죠? 아무리 악의를 품은 사람이라도 그녀의 미덕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이아고: 예쁘지만 교만하지 않고, 구변이 좋지만 나불대지 않고, 돈이 많아도 사치하지 않고, 방종을 할 수 있어도 절제하고, 화가 나지만 복수하지 않고, 원한이 있지만 인내하며, 차분한 분별이 있어 대구 대가리를 연어 꽁지와 바꾸지 않는 분별이 있고, 심지가 깊어 아는 체하지 않고, 꽁무니 따라 다니는 남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 그런 여자가 있다면--. 데스데모나: 그런 여자는 어때요? 이아고: 머저리 자식새끼에 젖이나 빨리고 가계부나 적고 있으라면 안성맞춤이죠. 데스데모나: 원, 어처구니없는 결론이구요. 이밀리어, 아무리 내외간이라지만, 남편 말 곧이들으면 안돼요. 캐시오 부관님, 저분은 정말 저속하고 객쩍은 말만 뇌까리는 사람인가 보죠? 캐시오: 원래 입이 건 사람입니다. 학자라기보다는 싸움하는 군인이니까, 그 점을 봐주셔야죠. (그들 떨어져서 대화한다) 이아고: (방백) 오라, 저자가 부인의 손을 만진다. 저런 잘한다. 귓속말로 속삭이는군! 조그만 거미줄을 쳐서 캐시오라는 왕파리를 잡는 거다. 옳지, 눈웃음을 치며 알랑대는군! 그래 잘해 봐라. 네놈 모가지도 시간 문제다--네 말이 사실이다. 난 너와 달라!--내 계략으로 부관자리가 요절이 난다면 손가락 셋을 잡고 그렇게 자주 키스하지 말았을 걸 할 거다--신사인 체하고 놀아나는 꼬락서니라니. 옳지, 잘한다! 멋진 키스군! 훌륭한 솜씨야! 됐어, 됐다구. 또 이번에는 너의 손가락을 입술에 댔겠다! 차라리 관장기를 갖다 댈 일이지. 안에서 나팔 소리. 캐시오: 정말 그렇소. 무어 장군님이시다! 나팔 소리만 들어도 압니다. 데스데모나: 마중 나가서 뵙시다. 캐시오: 보세요. 벌써 오십니다. 오델로와 시종들 등장. 오델로: 아아, 어여쁜 나의 병사! 데스데모나: 그리운 오델로님! 오델로: 당신이 나보다 먼저 와 있는 걸 보니 놀랍고 반갑구려. 정말 기쁘오. 폭풍이 지나간 뒤 이렇게 고요함이 온다면 묻힌 송장도 털썩 놀라 깨어날 만큼 바람이 몰아쳐도 괜찮겠소. 파도에 희롱 당하는 배가 올림퍼스 산만큼 높이 치솟았다가 하늘에서 지옥까지 곤두박질해도 좋소. 나는 지금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소. 나의 혼이 말할 수 없이 흐뭇해 미지의 내 여생에 두 번 다시 이러한 기쁨은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소. 데스데모나: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신이여, 저희들의 사랑과 기쁨이 날이 거듭할수록 더욱 두터워지도록 해주소서. 오델로: 인자하신 신들이여, 그렇게 해주소서! 이 벅찬 기쁨을 어찌 다 말로 하겠소? 가슴에 꽉 차 있소. (가슴을 만진다) 너무 과분한 기쁨이오. 우리의 이것이 이것이 (그들 키스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엉켜 만들어 내는 최대의 불협화음이오. 이아고: (방백) 흥, 지금은 간드러지게 장단이 잘 맞는군. 하지만 두고봐라. 내가 그 가락을 튕겨놓고 말 테다. 내 명예를 걸어서라도 해내고 말고. 오델로: 자, 성 안으로 들어갑시다. 들어보시오, 여러분! 전쟁은 끝났소. 터키군은 침몰해 고기밥이 되었소. 이 섬 안 나의 옛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소? 여보, 당신도 사이프러스 서에선 융숭히 환대를 받을 거요. 나도 애정 넘치는 환영을 받았소. 오 여보, 이거 나 혼자만 지껄였구료. 너무 기쁜 탓이겠지. 이아고, 수고스럽지만 부두로 가서 내 나무상자를 배에서 가져다주게. 그리고 선장을 성 안으로 안내하고. 선장은 훌륭한 사람이야.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구. 자 데스데모나, 사이프러스 섬에서 다시 만나 기쁘기 한량없소. (이아고와 로더리고를 제외하고 퇴장) 이아고: (시종에게) 선창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곧 가겠다. (로더리고에게) 이리 오게. 자네한테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별볼일이 없는 사람도 연애를 하면 훨씬 용기가 생긴다던데--내 말을 잘 듣게. 부관은 오늘 밤 초소에서 야경을 하게 돼 있어. 그래서 말인데 데스데모나는 그자한테 홀딱 반했거든. 로더리고: 그자한테? 아냐, 그럴 리가 있나. 이아고: 이렇게 손가락을 대고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조용히 생각을 해보게. 여자가 무어 녀석한테 혹한 건 그 녀석의 허풍과 허황된 거짓말에 넋을 뺏기고 말았기 때문이야. 그까짓 허풍에 언제까지 반하고 있겠나? 자네 분별만 가지고도 이 정도는 알 만하겠지. 그 여자도 눈요기가 하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 그 악마의 낯짝만 밤낮으로 대하게 되니 시답지 않게 보일 테고 신물이 나게 마련이라구. 재미를 본 뒤에 정욕이 식으면 다시 불을 댕겨 새로이 욕망을 만족시켜야 하겠는데, 얼굴도 잘생기고, 연령도, 거동도, 풍채도 멋진 자가 필요하다구. 그런데 무어 녀석은 모든 게 걸맞지 않거든. 필요한 조건이 안 차다 보면 그 여자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속았다고 느끼고 무어가 메스꺼워져 보기조차 싫어질 거야. 그렇게 되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다른 남자를 구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구. 그러니 정말 그렇다면 말야--아니, 이건 틀림없는 당연한 이치지만 두 번째로 걸려들 행운아가 누구겠나? 캐시오야, 캐시오 말고 누가 있어? 그 녀석 색에 약고 꾀바른 데다가 입심 좋은 색골이라 제 음탕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겉으로 예의범절을 다해 점잔을 떨지만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야. 그러니 그자 말고 누가 있느냐 말야? 있을 리 없지! 능글맞고 간사한 놈, 기회만 노리고 있어, 좋은 기회가 안 오면 억지로라도 만들어 제 속을 차리는 망나니란 말씀이야. 악마 같은 놈. 게다가 얼굴 잘생겼겠다, 나이 젊겠다, 풋내기 계집에 들한테 사랑을 받을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거든. 빈틈없는 악당이야. 그래서 벌써 그 여자는 그 녀석한테 눈독을 들였다 이 말씀이야. 로더리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그 여자야말로 가장 청순한 요조 숙녀가 아닌가. 이아고: 청순 좋아하네! 그 여자가 마시는 포도주도 포도로 만들기 마찬가지야. 그렇게 청순한 여자가 미쳤다구 무어한테 홀딱해! 청순하다고, 웃기지말어! 그 녀석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걸 보지도 못했나? 못 봤단 말야? 로더리고: 으음, 봤지. 하지만 그야 예의상 그랬겠지. 이아고: 생각이 달라서 그랬던 거야. 맹세한다구! 그래 다 추잡하고 음탕한 연극의 시작이요, 서막이라구. 숨이 막힐 지경으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지 않았던가? 그게 다 색정이 부글거려서 그러는 거라구, 로더리고. 처음에는 그렇게 다정하다 할 정도로 시작해서 그 다음엔 본격적으로 덤벼들거든. 그러고는 한판 하는 거지. 제기랄! 어째 든 내 말대로 하게. 자넬 베니스에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내가 아닌가. 오늘밤 자네도 야경을 나가게. 내 지시대로 따라. 캐시오는 자네가 수염을 붙여서 몰라볼 거야. 내가 가까이 있을 테니. 무슨 수를 쓰든지 캐시오의 비위를 긁으란 말야. 소리를 지르든지, 욕을 하든지, 아무래도 좋으니까 경우에 따라 눈치껏 하라구. 로더리고: 그래 볼까. 이아고: 그래, 그 녀석은 성미가 급해 발끈하거든. 혹시 자넬 때릴지도 몰라. 때리게 하란 말이야. 그러면 내가 그걸 탈잡아서 사이프러스 섬에 큰 소동을 일으킨단 말일세. 캐시오를 파직시키지 않고서는 일이 수습되지 않도록 만드는 거야. 내 술책이 그렇게만 되면 자넨 곧바로 소원 성취할 거구.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애 버리는 게 돼. 그러치 않고선 우리가 아무리 용써 봤자 별볼일 없다구. 로더리고: 해보겠네. 자네가 기회만 만들어 준다면. 이아고: 걱정 말게. 이따가 서안에서 만나세. 난 오델로 장군의 짐을 가지러 선창으로 가야 해. 그럼 또. 로더리고: 이따가 만나세 (퇴장) 이아고: 캐시오는 틀림없이 그 여자한테 반했어. 그 여자도 그 놈팽이한테 사르르 녹았을 거고, 이거야 있을 법한 일이지. 무어 녀석은 내게 밉상이지만 성실하고 애정이 깊고 훌륭한 인물인 건 사실이야. 데스데모나한테는 근사한 남편감이란 말이지. 사실 나도 그 여자가 싫지 않단 말야. 뭐 그렇다고 오직 색정 때문만은 아니지. 하기야 그 생각이 아주 없는 거도 아니지만. 좌우지간 한편으로는 한을 풀기 위해서라구. 음탕한 무어놈, 암만해도 내 여편네를 건드린 모양이야. 그걸 생각하면 독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오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구나. 이렇게 된 바에야 장군 멍군이지. 계집은 계집으로 앙갚음을 않고서는 내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거다. 만약 뜻대로 안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무어 녀석의 의처증을 불러일으켜 분별심을 잃게 만드는 거다. 그러려면 베니스의 이 촉새 같은 녀석, 마음이 달아올라 분수 모르고 날뛰는 걸 막아 놨지만 그 녀석을 잘 주물러서 마이켈 캐시오 녀석의 뒷다리를 잡아가지곤 귀가 따갑도록 무어한테 놈의 험담을 퍼부어야지. 암만해도 캐시오 녀석도 내 잠자리에서 재미 본 일이 있는 것 같애. 어쨌든 무어 녀석이 고맙게 생각해서 날 아끼고 극진히 여겨 상도 줄 게다. 내가 그 작자를 바보 취급해서 마음을 들쑤셔 놓고 미칠 지경으로 만들어 준 대가 말이지. 바로 여기 명안이 도사리고 있지. (그의 머리를 친다) 아직은 혼돈 상태지만. 악마의 참모습은 일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법이니라. (퇴장) [ 제2장 거리 ] 오델로의 전령이 포고문을 들고 등장. 군중들이 뒤따른다. 전령: 고결하고 용감하신 오델로 장군의 분부를 전달한다. 지금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터키 함대는 전멸한 모양이다. 여러분, 마음껏 승전을 축하하도록. 춤을 추든, 모닥불을 피우든, 여러분 마음껏 즐기기 바란다. 오늘밤엔 승전 축하연을 겸해서 장군의 결혼 피로연도 베푸실 예정이다. 이상 장군의 말씀을 전달한다 주방은 전부 개방했으니 다섯 시부터 열한 시 종이 칠 때까지 음식을 먹고 마시고 즐기기 바란다. 우선 사이프러스 섬과 오델로 장군을 위해 하늘의 축복이 있으소서! (모두 퇴장) [ 제3장 사이프러스 섬의 성 안의 홀 ] 오델로, 데스데모나, 캐시오, 시종들 등장. 오델로: 마이켈, 오늘밤 야경을 부탁하네. 적당히 놀고 마시며 떠드는 건 좋으나 도를 넘어서는 안되네. 캐시오 이아고가 다 알아서 할 겁니다. 물론 저도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오델로: 이아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마이켈, 가겠네. 내일 아침 될수록 일찍 만나서, 할 얘기가 있으니. (데스데모나에게) 이리 와요, 나의 사랑이여. 결혼도 끝났겠다. 이젠 기쁨을 나눠 봅시다. 이제부터 우린 정말 즐거울 거요. (캐시오에게) 잘 가게. (오델로, 데스데모나, 시종들 퇴장) 이아고 등장. 캐시오: 이아고, 마침 잘 왔네. 둘이서 야경을 봐야겠네. 이아고: 부관님, 이직 시간이 이릅니다. 열 시도 안 됐는데요. 장군님께서는 데스데모나 부인이 너무나 예뻐서 사랑을 나누시려 일찌감치 들어가 버리셨군요. 그야 당연한 일이죠. 아직도 달콤하게 하룻밤도 지내본 일이 없으니까요. 주피터 신도 뇌쇄 시킬 만한 미인이시겠다. 캐시오: 정말 천하 절색이셔. 이아고: 그런데다 제법 색정이 넘쳐흐르지 뭡니까. 캐시오: 얼마나 청순하고 섬세하신가. 이아고: 그 눈은 또 어떻구요! 남자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지 않아요? 캐시오: 매력적인 눈이야. 그러면서도 정숙함이 흐르고 있어. 이아고: 또 그 목소리는 사랑을 눈뜨게 하는 종소리가 아닙니까? 캐시오: 흠잡을 데 없는 부인이야. 이아고: 부디 두 분 신방에 축복이 있으시기를! 그런데 부관님, 술을 좀 준비했습니다. 그밖에도 사이프러스 섬의 젊은이 두세 명이, 흑인 장군 오델로님을 위해 축배를 올리겠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캐시오: 오늘밤은 안돼, 이아고. 난 술에는 약해. 술만 마셨다 하면 혼이 나가버린다구. 어떻게 예절에 어긋나지 않는 다른 환대 방법이 없을까? 이아고: 하지만 저 패들은 우리 친구들이거든요. 그러니 한 잔만 드세요! 다음 잔부턴 내가 대신 마시지요. 캐시오: 오늘밤엔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도 얼떨떨해. 그나마 물을 타서 말야. 추기 오른 내 얼굴 좀 보게. (그의 머리를 툭 친다) 불행하게도 이게 나의 큰 약점이거든. 그러니 이 약점을 알고 어찌 더 마실 수가 있겠나. 이아고: 원 부관님도! 오늘밤만은 진탕 마시고 놀아야 합니다. 젊은 패들도 그걸 원하거든요. 캐시오: 어디들 있나? 이아고: 문 앞에들 있어요 들어오라구 하세요. 캐시오: 그렇게 하지, 기분은 내키지 않네만. (퇴장) 이아고: 한 잔만 더 안기면 오늘밤 이미 전작이 있겠다. 젊은 아낙들이 귀여워하는 강아지처럼 으르렁대며 대판 싸울 거다. 그건 그렇고, 상사병에 걸려 마음이 뒤집힌 머저리 로더리고는 오늘밤 데스데모나에게 축배를 올린답시고 술통이 바닥이 나도록 들이켜고. 그 녀석도 야경을 보게 돼 있지. 그리고 사이프러스 섬의 젊은 왈자패 세명, 이자들이야말로 콧대가 센 데다 명예를 중히 여기며, 이 씩씩한 섬을 상징하는 왈패들이지. 오늘밤 그 작자들한테도 한 잔씩 퍼부어야겠다. 그들도 파수를 보게 돼 있다 이 말이지! 이 주정뱅이들 사이에 캐시오를 몰아넣는다면 그 친구 반드시 섬사람들의 성미를 건드려 대판 싸움이 벌어질 거다. 이이구, 왈자패들이 온다. 캐시오, 몬타노와 신사들 다시 등장. 하인들이 술을 들고 따라 등장. 앞으로 일들이 내 계략대로만 된다면 내 배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달고 행운을 향해 달리는 거다. 캐시오: 정말 못합니다. 진탕 마셨는 걸요. 몬타노: 왜 이래요, 작은 잔인데. 정말 작은 잔이오. 군인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 거요. 이아고: 자! 술을 가져오라! (노래한다) 술잔을 들어자, 건배 건배. 술잔을 올려라, 건배. 군인도 사람이다. 일생은 일장춘몽 마셔라 마셔, 군인이여. 얘들아 술 술이다! 캐시오: 대단히 멋진 노래군! 이아고: 영국에서 배웠죠. 영국 사람은 술고래예요. 덴마크 사람, 독일 사람, 그리고 배뚱뚱이 화란 사람도 마셔요, 마셔! 영국 사람엔 못 당해요. 캐시오: 영국 사람이 그렇게 술망태인가? 이아고: 덴마크 놈쯤 이기기는 식은 죽 먹기 구요. 독일 놈들 해치우는 데도 땀 한 방울 안 흘려요. 화란 것들이 깩깩거리고 노하고 있을 때 영국 사람을 또 한 잔 거뜬히 걸치지요. 캐시오: 우리장군님을 위해 건배! 몬타노: 똑같이 건배. 다음은 부관, 당신을 위해 건배! 이아고: 아, 아름다운 영국이여! (노래한다) 스티븐왕은 귀하신 몸 입으신 바지는 1크라운 6펜스도 비싸다고 생각하시며 양복쟁일 나무랐다오. 높으신 분들도 그렇거늘 그대는 보잘것없는 위인 사치가 나라 망치나니 입던 외투로 참고 살아 보세. 자! 술을 가져오라! 캐시오: 이건 먼저 것보다 더 멋있는 노랜데. 이아고: 한 번 더 부를 까요? 캐시오: 아냐, 안돼. 그 따위로 노는 자는 옳게 볼 수 없어.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다구. 그러니 구원을 받을 자도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할 자도 있지. 이아고: 지당한 말씀 입죠, 부관님. 캐시오: 나는 말이야--장군이나 다른 높으신 분들께는 미안한 얘기지만--구원을 받을 걸. 이아고: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부관님. 캐시오: 그야 그럴 테지. 실례의 말이지만 나보다 먼저는 안될 걸. 난 부관이니까 기수보다야 먼저 구원을 받아야 될 게 아닌가. 이런 시시한 야긴 집어치우세. 자, 우리 임무에 대해 말하겠네. 하느님, 저희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여러분, 일을 합시다. 날 취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돼. 이 사람은 내 기수, 이건 내 오른손, 이건 내 왼손, 지금 난 취하지 않았어. 꼿꼿이 설 수도 있고, 혓바닥도 제대로 돌아간단 말씀이야. 일동: 어련하시겠어요! 캐시오: 암, 아무렇지도 않다구. 날 취했다고 생각하면 안되지. (퇴장) 몬타노: 여러분, 초소로 가세요, 파수 볼 시간입니다. 이아고: 방금 저쪽으로 나간 사람을 보셨습니까? 그 사람은 시이저 옆에서 지휘를 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군인이지요. 보셨겠지만 한 가지 습벽이 있어서 탈이죠. 물론 좋은 점도 있긴 하지만요. 딱 한가지 일이 문제지 뭡니까? 오델로 장군님은 저 사람을 신임하고 계실 겁니다만 고질 덩어리인 주벽이 도져서 이 섬에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몬타노: 종종 그런가? 이아고: 저렇게 술주정을 부리고는 곯아떨어지거든요. 아,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지만 않는다면 시계 바늘이 두 번 돌아가도록 야경을 봐도 끄떡 안하는 사람이죠. 몬타노: 장군한테 귀띔해 드리는 게 좋겠군. 아마 모르고 계실지도 모르지. 원래 성품이 선량하시니까 캐시오의 장점만 보시고 단점은 덮어두시는 걸 테지. 안 그렇소? 로더리고 등장. 이아고: (로더리고에게 방백) 어떻게 된 거야, 로더리고? 빨리 부관 뒤를 쫓아가라구. 어서! (로더리고 퇴장) 몬타노: 참 유감스러운 일이군, 고귀한 무어 장군이 고질적인 주사가 있는 사람한테 부관이란 직책을 맡겨 두다니. 무어 장군께 솔직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아고: 전 이 섬을 준대도 못하겠습니다! 전 캐시오님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그 버릇을 고쳐 드리고 싶은 생각뿐이죠. (안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는 소리) 아니, 저건 무슨 소린가? 캐시오가 로더리고를 쫓아 나온다. 캐시오: 에잇, 망할 자식! 이 불한당아! 몬타노: 왜 이러시오, 부관? 캐시오: 이 불한당이 날보고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 않겠소? 이놈을 술통에 거꾸로 처넣을 테다. 로더리고: 처넣는다구! 캐시오: 이놈아, 주둥아리 닥치지 못해? (로더리고를 때린다) 몬타노: 기다려요, 부관! 제발 손을 놓아요. (그를 제지한다) 캐시오: 놔요, 놓지 않으면 대갈통을 까부술 테다. 몬타노: 아니 뭐라고? 취했군! 캐시오: 취했다고? (두 사람 싸운다) 이아고: (로더리고에게 방백) 저리 가라는데두! 나가서 큰일났다고 소릴 질러! (로더리고 퇴장) 안됩니다, 부관님. 그만두세요, 두 분 다! 사람 살려요! 부관님, 몬타노님. 다들 와주세요! 야경 참 잘 본다! (종소리 울린다) 누구야, 종을 친 놈이? 작살을 낼 녀석! 온 장안이 다 깨잖아? 제발 부관님, 그만두세요. 체모에 똥칠하는 겁니다. 오델로와 시종들 다시 등장. 오델로: 왜들 이러나? 몬타노: 젠장, 여전히 피가 안 멎네. 되게 다쳤는 걸. 죽여 버릴 테다. (캐시오에게 다시 덤벼든다) 오델로: 그만두지 못할까! 목숨이 없다! 이아고: 그만두세요! 부관님. 몬타노 총독님. 두 분 다! 직책과 의무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만두세요! 장군님 말씀이 안 들리십니까? 그만두세요, 창피하지 않으십니까! 오델로: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어? 터키놈들을 닮았는가? 그리고 하늘도 터키놈들이 우리에게 칼을 대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동족끼리 칼바람을 피우느냐, 기독교도의 수치다! 홧김에 북새를 놓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움직여만 봐라. 목에 칼이 들 거다. 저 시끄러운 종소리를 멈추게 하라. 섬사람들이 놀라서 소동을 피우겠다. 어떻게들 된 건가, 두 사람 다? 정직한 이아고, 자넨 걱정으로 얼굴빛까지 파리해졌군. 말해 보게.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날 생각하거든 바른 대로 말해. 이아고: 생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막 조금 전 까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의좋은 신랑 신부처럼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별의 힘으로 간이 뒤집힌 사람들처럼 칼을 뽑아 가지고 서로 가슴을 겨누고 덤벼들어 피를 뿜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따위 싸움판에 허겁지겁 달려온 이 두 다리가 차라리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없어졌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오델로: 마이켈, 어떻게 된 건가? 자네가 이렇게 자신을 잊다니? 캐시오: 불미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뭐라 말씀드릴 면목이 없습니다. 오델로: 몬타노경, 내가 알기론 당신은 예의 범절과 법도에 바른 분이었소. 젊으신 데도 사리에 밝고 침착해 세상의 인정을 받았고,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지 않았소? 그런 분이 이렇듯 밤중에 이렇게 소동을 일으키다니 어찌된 일이오? 대답해 보시오. 몬타노: 오델로 장군, 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장군님의 부하 이아고에게 물어 보아주십시오. 자초지종을 괴로워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만, 이아고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밤 저로서는 언행에 하등 부실한 데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는 것도 가끔 악이 되며 폭력을 당했을 때 정당방위를 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오델로: 도무지 참을 수 없구나. 내 혈기가 이성을 짓누르고, 격정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활개를 치니 말이다. 내가 움짓만 해봐라, 아니 이 팔을 올리기만 해봐라. 어떤 놈이든 단칼에 요절이 나고 말 테니. 도대체 이 간악한 싸움이 왜 일어났느냐 말이다. 누가 시작했어? 그 죄가 밝혀지면 설령 나와 피를 나눈 쌍둥이 형제라 해도 용서 못한다. 이게 무슨 수치인가? 아직도 전쟁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민심이 어수선하고 전전긍긍하는 이 판국에 한편끼리 사사로운 일로 싸움을 하다니 될 법한 소린가? 그것도 한밤에 치안을 맡아보는 야경의 초소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이아고,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나? 몬타노: 정실이나 동료애 때문에 사실대로 말을 안한다면 자넨 군인이라고 할 수 없네. 이아고: 그렇게 윽박지르지 마세요. 마이켈 캐시오 부관님께 불리한 증언을 할 바엔 차라리 이 혓바닥을 잘라 버리겠어요. 하지만 사실대로 여쭙는다 해도 부관님께 그다지 해로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장군님, 바로 이렇습니다. 몬타노님과 저하고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사람 살려 하고 소리 지르면서 뛰어온 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캐시오 부관이 칼을 빼 들고 그 사람을 쫓아와서 결단내겠다고 소동을 부렸지 뭡니까. 그래서 이분이 끼여들어 캐시오 부관을 말렸습니다. 저는 나 살려라 도망치는 녀석을 쫓아갔죠. 그자 때문에 시내가 발칵 뒤집힐까 봐서요--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만--글쎄 그자는 어찌나 재빠른지 쫓아갈 수가 있어야죠. 그런데다 칼싸움하는 소리와 캐시오 부관이 고래고래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전에야 어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돌아와 보니--잠깐 사이--두 분이 맞붙어 싸움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전 이상은 보고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신이 아닌 이상 실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캐시오 부관께서 저분께 좀 잘못은 했지만 화가 나면 자기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사람도 때리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캐시오 부관은 도망간 녀석한테서 참지 못할 모욕을 당했을 겁니다.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델로: 이아고, 내가 다 안다, 자넨 성실하고 인정이 많아서 죄를 가볍게 하려고 둘러대며 캐시오를 두둔하는 거야. 캐시오, 난 자네를 아껴왔네만 이제 자네는 끝났네. 데스데모나,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시 등장. 저것 봐라, 내 상냥한 아내까지 깨서 나오지 않았느냐. (캐시오에게) 자넬 일벌백계로 다스려야겠네. 데스데모나: 왜 그러세요? 오델로: 걱정할 것 없소, 여보. 침실로 갑시다. (몬타노에게) 당신의 상처는 내 자신이 돌봐 주리다. 저쪽으로 모셔라. (몬타노, 부축되어 퇴장) 이아고, 거리를 잘 보살펴. 이 일 때문에 마음이 들뜬 시민들을 안심시켜 주란 말야. 갑시다, 데스데모나. 군인의 생활이란 이렇소, 이따금 싸움 때문에 단잠을 깨는 법이오. (이아고와 캐시오만 남고 모두 퇴장) 이아고: 아니, 부관님도 다치셨어요? 캐시오: 치료해도 소용없게 됐네. 이아고: 설마 그럴 수가! 캐시오: 명예, 명예, 명예! 오, 난 명예를 잃어버렸어! 생명보다 소중한 명예를 잃어버렸네. 이제 여기 있는 것은 짐승이나 진배없는 잔해다. 나의 명예, 이아고, 나의 명예, 이아고, 나의 명예를 잃었다구! 이아고: 전 그만 고지식해서 정말 다친 신 줄 알았죠. 명예의 상처보다는 몸의 상처가 더 아플 겁니다. 도대체 명예가 뭐 그리 대단한 겁니까? 버젓한 공로가 없어도 손에 들어올 수 있고,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 명예가 아닙니까? 부관님은 명예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자격지심 때문에 잃었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부관님, 기운을 내시라구요. 장군님의 마음을 돌이킬 방법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역정이 나서 파직시킨 것뿐이에요--미워서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정치적 배려에서 벌을 주신 거죠--순한 개를 때려서 동물의 왕 사자를 위협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한번 간청해 보세요. 들어주실 겁니다. 캐시오: 차라리 멸시해 주십사하고 간청하고 싶네. 그런 훌륭한 장군님을 속이고, 이다지도 해망쩍은 주정뱅이가 채신머리없이 부관으로 앉아 있을 순 없어. 취해 가지고 된 소리 안된 소리 까발리고! 싸움질이나 하고! 허풍이나 떨고! 욕지거리 퍼붓고! 제 그림자보고 큰소리나 탕탕치는 이런 얼치기 놈! 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술귀신아, 너한테 아직 이름이 없다면 이제부턴 널 악마라고 부를 테다! 이아고: 부관님이 칼을 빼 들고 쫓아가던 자가 누굽니까? 그 녀석이 어떻게 했나요? 캐시오: 몰라. 이아고: 모르시다뇨? 캐시오: 어슴푸레 떠오르긴 하지만 하나도 확실치 않아. 싸움을 한 건 알겠는데 뭣 때문에 싸웠는지 모르겠단 말야. 맙소사, 원수 같은 술을 제손으로 입에 퍼 넣고 혼을 뺏긴단 말야! 혼자 좋아서 날뛰고 떠들고 노닥거리다가 제풀에 짐승이 돼 버린단 말일세! 이아고: 아따, 이젠 멀쩡하시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회복됐습니까? 캐시오: 술망태 악마가 홧귀신한테 자릴 양보했다네. 한가지 결점이 꼬리를 감추면 또 다른 결점이 꼬리를 치니 솔직히 말해서 내 자신 정나미가 떨어지네. 이아고: 원 너무 도덕 군자이셔도 탈입니다. 그야 시간으로 보나 장소로 보나 시국으로 보나 얼른 이런 사단이 일어나지 않아야죠. 일이 이렇게 된 바엔 해결책을 강구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캐시오: 복직시켜 달라고 사정을 해야겠네. 물론 장군님은 날 보고 주정뱅이라고 하실 테지. 그렇게 나오면 내가 하이드라같이 입이 여러개 있더라도 할 말이 없지. 아니 방금 까지도 사리가 밝던 인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천치 바보 같은 짐승이 돼 버리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 과음하면 저주에 걸려, 술을 악마야. 이아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좋은 술은 적당히 마시면 보약이 되는 법입니다. 술에 대한 험담은 그쯤 해 두세요. 그런데 부관님, 제가 부관님을 좋아한다는 건 아실 테죠? 캐시오: 알구말구, 술 취한 덕에. 이아고: 부관님뿐만 아니라 누구나 취할 때가 있답니다. 제 말씀대로 해보세요. 지금은 말입니다, 장군님 부인이 장군 맞잡이거든요. 이 점은 틀림없습니다. 장군님은 부인이 하도 아름답고 영특하시어 혼 나간 사람 같고, 바라보기만 하고도 넋을 잃을 형편이거든요. 그러니까 부인한테 속내를 털어놓고 복직시켜 달라고 사정을 하시란 말씀이에요. 부인은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시고, 감동하기 쉬운 고상한 성격이라서 부탁 받으면 그 이상의 것을 못 해줘서 미안해하는 분이십니다. 부관님과 장군님의 부러진 관절을 부인께서 접해 주도록 간청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저의 전 재산을 걸어도 좋습니다. 두 분 사이가 금이 갔지만 전보다도 두터워질 건 틀림없단 말씀입니다. 캐시오: 고마운 말이군 이아고: 믿어 보세요. 진심으로 부관님을 위해 충직한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캐시오: 그야 나도 믿구 말구. 내일 아침 일찍 정숙한 데스데모나 부인께 힘이 돼 달라고 애원해야겠네. 그게 틀어지면 내 운명은 끝장일세. 이아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럼 편히 쉬십쇼, 부관님. 전 야경 보러 가야겠습니다. 캐시오: 그럼 잘 가게, 충직한 이아고. (퇴장) 이아고: 이래도 날보고 악한이라고 시부렁대는 놈이 있을까? 난 진심으로 솔직하게 충고해 줬다구. 이치에 맞는 말이니 무어 녀석의 마음쯤은 거뜬히 돌이킬 수 있을 거다. 문제없지. 진심으로 사정을 하면 상냥한 데스데모나를 움직이기는 식은 죽 먹기지. 그 여자는 너그러운 대자연과 같이 은덕이 깊은 여자거든. 여자의 입을 빌어 무어 녀석을 설복시킨다--이것도 문제없지. 세례를 취소하고 속죄의 패도 다 팽개쳐라 해도 그자의 혼은 여편네한테 흠뻑 빠져 삶은 호박처럼 흐물흐물이라, 하고 안 하고간에 만사가 여자 마음 대로지. 그 여자의 욕정이 그자의 약한 사고력에 대해서 신통력을 발휘하거든. 그런데 내가 왜 악한이람, 캐시오를 위해서 다리를 놔준 내가 아닌가? 이게 바로 악마의 신학이라는 거지! 악마가 인간에게 흉악한 죄악을 씌우려고 할 때는 나처럼 우선 천사같이 나타나서 유혹을 한단 말씀이야. 저 정직한 멍청이 녀석이 데스데모나한테 다시 팔자 고치려고 코가 땅에 닿도록 사정을 하겠다. 그러면 여잔 무어놈한테 졸라댈 게 아닌가? 그럴 때 나는 무어의 귓속에다 독을 퍼 넣는단 말이다. 부인이 그자의 복직을 호소하는 건 정욕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렇게 되면 여자가 캐시오를 위해 힘을 쓰면 쓸수록 무어의 의심을 더 받게 되지. 여자의 정절에 흙칠을 할뿐만 아니라 선의를 미끼로 써서 그들을 모두 덫으로 옭아맨다 이거지. 로더리고 다시 등장. 로더리고: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내가 한 일은 먹이에 뛰어드는 사냥개 노릇은 제대로 못하고 멀리서 같이 짖어 댄 것밖에 안 되지 뭔가? 이젠 내 지갑도 텅텅 비었어.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다고 오늘밤엔 곤봉으로 흥건히 두들겨 맞았겠다. 결국 난 치도곤을 당한 만큼 경험을 얻은 셈이지. 비록 빈털터리는 됐지만 사리는 좀 텃으니 베니스로 돌아가야 할까봐. 이아고: 참으로 어이가 없구먼, 이렇게 참을 성이 없다니! 상처도 나을 때가 돼야 낫는 법. 이것 봐, 사람은 머리로 일을 하는 걸세. 악마가 하는게 아니라구, 머리를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게 아니겠나? 얼마나 잘 돼 가고 있는데 그래? 캐시오가 자네를 때렸다. 그런데 그 조그만 상처하나 입은 덕택으로 그 녀석 모가지가 달아났어. 다른 계획도 햇빛이 쨍하고 비치고 있지만, 맨 처음 꽃핀 놈부터 열매를 맺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조금만 더 참아. 그건 그렇구, 벌써 아침이다! 즐겁게 움직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단 말야. 어서 돌아가게. 숙소로 돌아가. 냉큼 가래두! 또 만나서 얘기하세. 어서 꺼지라구! (로더리고 퇴장) 두 가지 일이 남았다. 여편네를 구슬려서 캐시오가 그녀의 안주인 데스데모나를 만나도록 해야지. 그러는 동안 나는 무어 녀석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가 캐시오가 데스데모나한테 사정할 바로 그때 데리고 들어간단 말야. 됐어, 이만하면 빈틈없어! 쇠뿔도 단김에 빼렷다. (퇴장) [ 제3막 ] 밧줄이건, 단검이건, 독이건, 불이건, 용암의 흐름이건, 다 오너라. 확실한 증거가 보고 싶다! - 3장 오델로 대사 중에서 [ 제1장 사이프러스 성채 밖 ] 캐시오와 악사 서너 명 등장. 캐시오: 자 악사 여러분, 여기서 한 곡 합시다. 수고비는 톡톡히 내리다. 짧은 곡이 좋겠소. 그 곡이 끝나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장군님." 이렇게 인사를 하는 거요. (음악) 광대 등장. 광대: 악사 양반들, 여러분의 악기는 나폴리에서 바람께나 피우다 왔군,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으니! 악사1: 뭣이 어쨌다구? 광대: 공기 구멍이 달린 악기요? 악사: 아, 그래요. 광대: 그럼 뭣도 달려 있겠군. 악사: 뭣이 달려 있다니? 광대: 공기 구멍이 있으면 대개 남정네 연장이 매달려 있거든. 그건 그렇고 수고비를 드리지. 장군님께서 당신네들 음악에 홀딱 반하신 모양이야. 제발 소리 좀 내지 말라는 분부시다. 악사: 그럼 그만두지 뭐. 광대: 소리 안 나는 음악이라면 해도 좋아. 장군님께선 소리 나는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는다네. 악사: 그럼 그 퉁소를 어서 보따리에 집어넣게. 난 가야겠어. 어서 꺼져.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라구! (악사들 등장) 캐시오: 여보게 친구, 귀 좀 빌리게. 광대: 빌려 줄 귀는 없지만 들은 귀는 있소. 캐시오: 농담은 그만둬라. 얼마 안 되지만 이 돈을 주겠다. 장군 부인 시녀가 일어났거든 캐시오란 사람이 잠깐 만나고 싶단 다고 전해 주게. 수고를 해주겠나? 광대: 그 여자야 일어났죠. 이곳에 나오면 알리리다. (광대 퇴장) 이아고 등장. 캐시오: 마침 잘 왔네, 이아고. 이아고: 어젯밤에 안 주무신 게로군요? 캐시오: 못 잤어, 자네하고 헤어지기 전에 날이 새지 않았나? 그런데 실례인 줄 알면서도 지금 막 자네 부인을 만나려고 사람을 들여보냈네. 내 청이라는 것은 정숙한 데스데모나를 만나게 주선해 달라고 말야. 이아고: 곧 여편네를 이리로 나오도록 하죠. 어떻게 하든 무어 장군을 다른 데로 불러낼 테니, 마음놓고 의논하시란 말예요. 캐시오: 정말 고맙네. (이아고 퇴장) 내 고장 프로렌스에도 저렇게 인정 많고 올곧은 사람은 없어. 이밀리어 등장. 이밀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부관님. 참 이번엔 딱하시게 됐어요. 하지만 꼭 잘될 거예요. 장군님 내외분께서 줄곧 부관님 얘기를 하고 계시니까요. 부인께선 부관님을 위해 여간 힘쓰시는 게 아녜요. 무어 장군께서는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부관님이 상처를 입힌 분은 사이프러스 섬에서는 고명한 분이시고 고위층과도 연줄을 대고 있으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관님을 파직시켰다는 거예요. 그래도 부관님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적당한 기회를 봐서 누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불러들이시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캐시오: 부탁하오. 괜찮다면 아니,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장군 부인하고 단둘이 잠깐 얘기하도록 해주오. 이밀리어: 어서 들어오세요.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하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캐시오: 정말 고맙네. (모두 퇴장) [ 제2장 성채 ] 오델로, 이아고, 신사 서너 명 등장. 오델로: 이아고, 이 편지를 선장에게 전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문안드려 달라고 하게. 그게 끝내거든 성채의 포대를 거닐고 있을 테니 그리로 오게. 이아고: 예 장군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델로: 여러분, 성 안을 한 바퀴 돌아 보실까요? 신사들: 네, 좋습니다. (일동 퇴장) [ 제3장 성채 ] 데스데모나, 캐시오, 이밀리어 등장. 데스데모나: 걱정 마세요, 캐시오 부관님. 당신을 위해 힘 닿는 데까지 해보겠어요. 이밀리어: 아씨마님, 그렇게 해주세요. 제 남편도 자기 일처럼 걱정이 태산 같답니다. 데스데모나: 그래, 이밀리어의 남편은 참 착한 분이셔. 캐시오 부관님, 걱정 마세요. 우리 주인과의 사이를 전같이 만들어 드리죠. 캐시오: 감사합니다, 부인. 이 마이켈 캐시오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인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데스데모나: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부관님은 우리 주인을 흠모하시고 오랫동안 모셔온 터이니 안심하세요. 그분이 부관님을 홀대하시는 건 남의 이목이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캐시오: 그렇지만 부인, 세상 이목이라는 것도 너무 오래 살피다 보면 하찮은 먹이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다가 싹이 나고 뿌리가 내리게 되듯이 저는 옆에 없고 다른 사람이 보필하게 되는지라 장군님께서는 제 경애하는 마음과 충절을 잊으시게 될 것입니다. 데스데모나: 그런 염려는 마세요. 이 이밀리어를 증인으로 당신의 복직은 내가 책임지겠어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우정을 맹세한 이상은 끝장을 볼 테니까요. 주인께서 내 소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못 주무시게 포탈을 떨겠어요. 기왕에 벌인 춤이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작심이에요. 잠자리에 들어서도 조르고 식탁에서도 채근하며 그분이 뭘 하시든 끼여들어 꼭 부관님의 청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부관님, 기운을 내세요. 당신의 변호를 맡은 이상 내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송을 성사시키고 말 테예요. 오델로와 이아고가 떨어진 곳에 등장. 이밀리어: 아씨마님, 나리께서 이리로 오십니다. 캐시오: 그럼 전 실례하겠습니다. 데스데모나: 아니에요, 가시지 말고 내 얘기하는 걸 들어보세요. 캐시오: 아뇨, 지금은 마음이 산란해서 제 소청한 일을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데스데모나: 그럼 좋도록 하세요. (캐시오 퇴장) 이아고: 아차! 저건 또 무슨 짓이야? 오델로: 뭐라고 했나? 이아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아, 아닙니다. 오델로: 방금 내 아내하고 헤어진 사람이 캐시오가 아닌가? 이아고: 캐시오라뇨? 설마 그럴 리가? 그분이시라면 장군님이 오시는 걸 보고 죄나 진 것처럼 슬그머니 도망칠 사람은 아니지요. 오델로: 틀림없다. 데스데모나: (그들에게로 오며) 당신이군요. 지금 어떤 사람의 청을 듣고 있던 참예요. 당신의 비윗장을 흔들어 놓아 풀이 죽어서 사정을 하러 왔더군요. 오델로: 누구 말요? 데스데모나: 당신의 부관 캐시오 말이에요. 여보, 당신께서 저의 심덕을 믿어 주신다면 지금 당장 그분을 용서해 주세요. 그분이 얼마나 당신을 위한다구요! 자기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 어떤 고의가 있어서 한 건 아녜요. 고지식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부디 다시 불러들이세요. 오델로: 지금 여기서 나갔소? 데스데모나: 거의 초주검이 돼 있어요. 나까지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딱했어요. 서방님, 제 간청을 물리치지 마세요. 오델로: 지금은 안되오, 여보, 더 두고 봅시다. 데스데모나: 하지만 쉬되겠지요? 오델로: 빨리 해 봅시다. 누구 청이라구. 데스데모나: 오늘 저녁 식사 때요? 오델로: 오늘 저녁엔 안되오. 데스데모나: 그럼 내일 점심 때요? 오델로: 내일 점심은 밖에서 먹게 됐소. 성채에서 장교들과 회식이 있으니까. 데스데모나: 아 그럼 내일밤 아니면 화요일 아침요? 또는 화요일 낮이나 밤에? 아니, 수요일 아침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시간을 정하세요. 사흘이 넘으면 안돼요. 그는 정말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니까요. 그의 저지른 죄는 상식으로 생각해서--전시에는 군의 규율이 엄해서 가장 훌륭한 군인도 본보기로 처벌한다고 하지만--인연을 끊을 정도의 실수는 아니잖아요? 언제 불러 주시겠어요? 어서 말씀하세요. 당신 청을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거절한 적이 있었나요? 망설인 적이 있었나요? 마이켈 캐시오 그분은 당신이 저에게 구혼할 때 함께 온 분이에요. 제가 당신을 헐뜯을 때마다 그분은 늘 당신 편을 들었어요. 그런 분을 복직시켜 주려 하는데--이렇게 뜸을 들이시다니 좋아요. 안 들어주시면 저도--. 오델로: 그만해 둬요, 알았소, 언제고 오라고 해요. 당신 청인데 왜 안 듣겠소. 데스데모나: 어머나, 대단치 않은 은혜를 가지고 그러시네. 이 청은 말이에요. 가령 장갑을 끼시라든가 영양분 있는 식사를 하시라든가 따스한 옷을 입으시라든가, 그저 당신의 몸에 유익한 걸 바라는 그러한 소청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당신의 애정을 저울질해 보려고 한다면 더 중대하고 굉장히 까다롭고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청을 드릴 거예요. 오델로: 글쎄, 당신 청은 다 듣겠다니까! 그러니 내 부탁은 제발 잠깐 동안만 나 혼자 있게 해줘요. 데스데모나: 제가 당신의 청을 거절하겠어요? 아니죠. 이따가 뵙겠어요. 오델로: 이따가, 데스데모나. 곧 가리다.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이리 와요. (오델로에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전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따르겠어요. (데스데모나와 이밀리어 퇴장) 오델로: 귀여운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소!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온 천지에 칠흑 같은 혼돈이 올 것이다. 이아고: 장군님--. 오델로: 뭔가, 이아고? 이아고: 청혼을 하셨을 때 마이켈 캐시오가 두 분 사이를 알고 있었나요? 오델로: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지. 그건 왜 묻나? 이아고: 좀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요--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오델로: 자네 생각이라는 게 뭔가, 이아고? 이아고: 그 사람이 부인과 아는 사이였다는 건 전혀 몰랐군요. 오델로: 알고 있었고 말고,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지. 이아고: 그랬습니까? 오델로: 그랬습니까? 아아, 정말 그랬어!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 사람이 심지가 바르지 않다, 이 말인가? 이아고: 심지가 바르다구요? 오델로: 바르다 뿐인가? 이아고: 그럴지도 모르죠, 제가 아는 한엔. 오델로: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이아고: 어떻게 생각하다뇨? 오델로: 어떻게 생각하다뇨? 아니, 이 사람이 내 말 흉내만 내는군. 아마 머릿속에 어마어마한 생각이 들어 있어 섣불리 말을 꺼냈다 간 뒤탈이 생길까 봐 겁을 먹는 것 같은데.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군. 지금 막 캐시오가 내 처하고 얘기하다 헤어졌을 때 자넨 "저건 또 무슨 짓이야?" 그랬겠다. 뭣이 어떻게 됐단 말인가? 그리고 또 내가 청혼을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고 애를 많이 썼다고 말했더니 "그랬습니까?"하고 소리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눈썹을 모으지 않았나? 꼭 머릿속에 뭔가 무서운 생각을 구겨 두고 우물우물하는 것 같다. 나를 위한다면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하라구. 이아고: 장군님을 흠모하는 저의 마음을 아시는지요? 오델로: 물론이지. 자네의 경애하는 마음과 충절을 알고 있어. 입이 헤프지 않은 것도 알지. 그런데 말을 할 듯하면서 주저하니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든단 말이다. 그런 건 간교한 무리들이 흔히 쓰는 속임수이지만 마음이 곧은 사람들은 마음의 분노가 명치까지 치올라 참을 수 없을 때 그런단 말이다. 이아고: 마이켈 캐시오에 대해서는 정직한 분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오델로: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이아고: 사람을 속다르고 겉달라서는 안되죠. 그렇지 않은 자가 정직한 척 깔딱거려선 안됩니다! 오델로: 확실히 사람이란 안팎이 같아야지. 이아고: 하면 캐시오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사려됩니다. 오델로: 아무리 생각해도 자넨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부탁이니 어서 흉금을 털어놔. 천하없이 나쁜 일이라도 좋다. 아무리 험한 말을 해도 상관없단 말이다. 이아고: 장군님,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직책상의 일이라면 어찌 영을 거역하겠습니까 만 비록 노복이라 해도 의사표시의 자유는 있는 법입니다. 생각한 대로 말하라 이 말씀이죠? 제가 무슨 흉칙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십니까? 휘황찬란한 궁전이라고 더러운 것이 침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티없이 깨끗한 가슴 속에도 더러운 생각이 살그머니 스며들어 올바른 생각과 마주 앉아서 사람들을 재판질 하고 있지 말란 법은 없거든요. 오델로: 자넨 친구를 배신하고 있어, 이아고. 그 친구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알려주려고 하지 않으니. 이아고: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어쩌면 엉뚱한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을 말할 거 같으면, 이건 저의 타고난 나쁜 버릇이라 남의 흠을 캐내고, 또 때로는 질투심 때문에 엉뚱한 억측을 잘합니다--그러하오니 십분 명찰하시어 이러한 해망쩍을 억측에 신경 쓰지 마시고 멋대로 한 확실치 않은 관찰 때문에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제 생각을 말씀 올린들 괜히 불안스럽게만 해 드릴뿐이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저도 사내답지 못하고 용렬하고 주책없는 사람만 되고 마니까요. 오델로: 대체 무슨 뜻인가? 이아고: 장군님. 명예는 남녀를 불문하고 영혼의 값진 보배입니다. 지갑이야 도난 당한들 별겁니까, 큰 돈이라도 그렇죠. 내 것이 다른 놈의 수중에 들어간 것밖에 없지요. 원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명예라는 것은 도둑 맞으면 훔친 놈은 별볼일 없지만 빼앗긴 쪽은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오델로: 기필코 자네 얘기를 듣고야 말겠다! 이아고: 설령 제 마음이 장군님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해도 안됩니다. 하물며 지금은 제가 꼭 움켜쥐고 있는데 하늘보고 주먹질이십니다. 오델로: 뭐라구! 이아고: 예, 장군님. 질투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자고로 질투란 놈은 녹색 눈빛을 가니 괴물이죠, 사람의 마음을 먹이로 하여 진탕 즐기는 놈이죠.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자기의 운명으로 체념하고 아내에게 미련을 갖지 않는 남자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의심하고 --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는 정말 일 분 일초가 얼마나 저주스럽겠습니까! 오델로: 그야 비참하기 이를 데 없겠지! 이아고: 비록 가난해도 마음 편한 사람은 부자 중에서도 알부자입니다. 아무리 이름난 부자라도 가난뱅이가 될까 봐 늘 걱정만 한다면 그 마음은 삭막한 엄동설한과 같을 겁니다. 하느님, 저희들 인간의 혼이 질투만은 모르고 살게 해주사이다! 오델로: 왜? 왜 그런 말을 하나? 자네는 나의 인생이 질투에 사로잡혀 달이 기울 때마다 새로운 의심을 품을 줄 아나? 천만에! 난 한번 의심하면 단김에 그 자리에서 결판내는 성격이야. 내가 자네 말대로 야마리 없고 허황된 의혹에 사로잡혀 내 영혼이 괴로움에 시달릴 사람이라면 차라리 염소 새끼가 돼 버리고 말겠다. 내 아내가 예쁘고 잘 먹고, 사교가 좋고, 말솜씨가 있고,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잘 켜고, 춤도 잘 춘다고 해서 내가 질투할 줄 아는가. 정숙하면 부덕이 더욱 빛나는 법. 비록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긴 해도 내 아내가 바람 피우지 않을까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아. 그녀가 자기 눈으로 날 골랐기 때문이다. 알겠나, 이아고? 난 의심하기 전에 우선 잘 살피고, 일단 의심을 품게 되면 증거를 잡지. 증거가 잡히는 날엔 방법은 하나. 사랑을 버리거나 질투를 버리거나 둘 중 하나지! 이아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저도 이젠 장군님에 대한 경애심과 충성심에서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을 위한 진심으로 알고 들어주십시오. 별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부인을 눈 여겨 살피십시오. 특히 부인과 캐시오가 함께 있을 때를 주의해 보세요. 조금도 내색치 마시고 눈치채지 않게 감시를 하셔야 됩니다. 마음이 넓으시고 점잖으신 장군님께서 타고나신 착하심으로 해서 능멸을 당하신다면 저로서도 부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저는 제 고장 사람들의 성질을 잘 압니다. 베니스의 여자들은 음란한 짓을 신에게는 태연히 보여도 남편에게만은 감쪽같이 숨깁니다.그들의 양심이란 간특한 꾀주머니를 차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랍니다. 오델로: 정말 그런가? 이아고: 부인은 아버지를 속여 장군님과 결혼한 분이십니다. 장군님의 얼굴이 무서워서 떠는 것 같아 보였을 때가 장군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을 때였습니다. 오델로: 그랬었지. 이아고: 그래서 말씀입니다! 그렇게 새파랗게 젊으신 분이 사람 세워 놓고 눈 빼먹는다고 감쪽같이 부친을 속였지요. 그 때문에 빙장 어르신네께서는 그저 마술인 줄만 아셨으니 까요. 아니, 제 말씀이 지나쳤나 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것 또한 너무도 장군님을 경애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델로: 자네의 호의는 평생 잊지 않게네. 이아고: 괜히 장군님을 상심하시게 해 드렸나 봅니다. 오델로: 아니, 아니, 괜찮아. 이아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그저 제가 장군님을 경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몹시 상심하시게 한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 말을 확대하여 의심의 틀을 넘어 분명한 결론을 내리신다든가 문제를 확산시키지 않으시도록. 오델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다. 이아고: 만일 그렇게 하시면 제 말씀이 천만 뜻밖의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캐시오는 소중한 친구니까요--. 암만해도 기분이 좋지 못하신가 봅니다. 오델로: 아냐, 그 정도는 아니네. 데스데모나는 정숙한 여자야. 이아고: 언제까지나 부인은 그러셔야 하구말구요. 장군님의 마음도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를 빌 뿐입니다. 오델로: 그런데 왜 모든 걸 순리로 하지 않고--. 이아고: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털어놓고 말씀드린다면--같은 나라의 사람으로 얼굴색도 같고 문벌도 같은 남자들의 수많은 청혼을 모조리 거절하잖았습니까. 그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의 도리인데 말씀입니다. 흥! 그런 사람한테서는 더러운 욕정의 냄새가 납니다요. 여기엔 불순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고, 생각도 부자연스러운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용서하십시오, 이건 특별히 부인을 두고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차차 분별을 차리게 되면 장군님의 얼굴을 자기 나라 사람과 비교해 보고 혹시나 후회하실까봐 걱정이 됩니다. 오델로: 인제 됐어, 그만 가게. 이제부터라도 눈치채는 일이 있거든 더 알려주게. 자네 부인에게도 감시를 부탁하네. 그만 가봐, 이아고. 이아고: (가면서)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오델로: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저 충직한 녀석이 필시 더 많이 보고 있고, 알고 있어. 감추고 입밖에 내지 않는 게 더 많이 있을 거야. 이아고: (돌아오며) 장군님,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이 이상 더 캐묻지 마십시오. 시간에 맡기고 내버려두십시오. 캐시오를 복직시키는 건 좋은 일이겠죠. 그 사람은 부관의 직무를 능히 해낼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분간 그대로 놔둬 보시면 그 사람의 본색과 술계를 아시게 될 겁니다. 특히 부인께서 캐시오의 복직을 얼마나 강하고 열렬하게 재촉하시는가를 눈여겨보십시오. 그러면 또 여러 가지를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말씀드린 건 그저 노파심에서라고 생각하십시오. 저 역시 그렇지 않나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디 부인을 깨끗한 분이라고 믿어 주십시오. 오델로: 분별없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게. 이아고: 다시 한번 물러갑니다. (퇴장) 오델로: 저 사람은 정성이 지극한 데다 세상 물정에도 밝아서 남의 심정을 뚫어 본단 말야. 만일 데스데모나가 도저히 길들일 수 없는 매라면 설령 그 발에 맨 끈이 심장을 옭아맨 끈이라도 내 휘파람을 불어 해방시켜 주겠다. 멋대로 바람을 가르며 먹이를 찾을 수 있을 거다. 혹시 내 얼굴빛이 검고 한량들의 우아한 태도를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내 나이가 한고비 넘었다고 해서--아니, 그런 나이도 아닌데--그래서 그 여자가 떠나간다. 결국 난 배반당한다. 나를 구하는 길은 그 여자를 제 것이라고 입으로는 큰소리 치지만 마음 속까지 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단 말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남의 손아귀에 넣어놓고 자기는 한 귀퉁이에서 불 없는 화로에 꽂힌 인두 꼴이 된다. 차라리 두꺼비가 되어서 흙구덩이 속에서 습기나 마시고 사는 것이 낫겠다. 그렇다, 이것은 직위 높은 자들이 받는 염병이다. 차라리 하층 사회사람들이 낫지. 이것은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이 뿔 돋힌 재앙은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부터 타고나온 운명이런가. 아, 그녀가 온다. 데스데모나와 이밀리어 다시 등장. 아내가 부정을 범했다면 하늘이 자신을 속인 거나 마찬가지다! 난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데스데모나: 여보, 웬일이세요? 벌써 식사 준비가 다 됐구, 당신이 초대한 이 섬의 유지분들도 당신이 나오시는 걸 기다리고 계세요. 오델로: 내가 나빴소. 데스데모나: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으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오델로: 이마가 몹시 쑤셔요, 여기 말이오. 데스데모아: 밤잠을 못 주무셔서 그러실 거예요. 괜찮을 거예요. 내가 꽉 매드리면 한 시간도 안되어 나으실 거예요. 오델로: 당신의 손수건은 너무 작아서 안돼. (그는 매려는 손수건을 치우다 떨어뜨리게 한다) 내버려 둬. 자, 같이 들어 가자구. 데스데모나: 편찮으셔서 어떻게 하지요? (오델로와 데스데모아나 퇴장) 이밀리어: 됐다. 이게 발로 그 손수건이다. 무어 장군께서 부인한테 주신 첫 선물이다. 우리집 변덕쟁이 양반이, 이걸 훔쳐내라고 골백번 졸라댔지. 장군님이 부인에게 잘 간직해야 된다고 말씀하셔서 부인은 이 손수건을 얼마나 아끼셨다구. 손수건에다 입을 맞추시질 않나, 말을 하시지 않나. 한시인들 놓지 않으셨어. 이것과 똑같은 모양을 떠 그이한테 줘야지. 이걸로 뭘 하려는 건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요, 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도 성화니 비위를 맞춰 주는 수밖에. 이아고 다시 등장. 이아고: 아니 여보! 혼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밀리어: 윽박지르지 말아요. 당신에게 뭐 하나 드릴 게 있어요. 이아고: 그래 뭐, 하나 줄 거라니? 보나마나 너절한 것이겠지. 이밀리어: 흥! 이아고: 당신 같은 위인이 무슨 신통한 걸 주겠소? 이밀리어: 할말 다했수? 부탁한 손수건이라면 무슨 상을 주시려우? 이아고: 무슨 손수건? 이밀리어: 무슨 손수건이냐구요? 무어 장군이 부인한테 준 첫 선물 말예요. 당신이 밤낮으로 훔치라고 성화했던 그것 말이에요. 이아고: 그걸 훔쳤어, 당신이? 이밀리어: 아뇨, 아씨마님이 무심코 떨어뜨리셨어요. 마침 여기 있다 주웠을 분이에요. 봐요, 이거예요. 이아고: 잘했어. 이리 줘. 이밀리어: 이걸로 뭘 하시려는 거죠. 훔쳐내라고 불총 쏘아대듯 야단을 떠셨잖아요? 이아고: (손수건을 뺏으며) 왜 이래, 당신은 알 필요 없어. 이밀리어: 별로 목적이 없으면 돌려줘요. 아씨마님이 불쌍해요, 없어진 걸 아시면 미치실 거야. 이아고: 모르는 체하라구. 쓸데가 있어. 저리 가. (이밀리어 퇴장) 이 손수건을 캐시오 숙소에 떨어뜨려야지. 그놈이 줍겠지. 공기같이 가벼운 물건도 질투심에 불타는 놈에게는 성서만큼이나 효력이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어. 요것이 한몫 거들 수 있을 거다. 무어는 벌써부터 내가 뿜은 독약에 마음이 변하고 있어 위험한 억측은 그 자체가 독약이라구. 처음에는 쓴 맛이 안 나지만 조금이라도 혈액 속에 용해되면 온몸이 유황광산처럼 불타오르게 돼 있거든. 내가 말한 대로다. 오델로 다시 등장. 보라, 저 모습을! 아편이건, 만드라고라건, 그 밖의 이 세상의 온갖 수면제로도 어제까지는 너의 것이었던 달콤한 잠을 이젠 즐기지 못할 것이다. 오델로: 에이! 날 배신하다니! 이아고: 장군님, 왜 이러십니까? 그 일은 그만해 주세요. 오델로: 꺼져, 썩 물러가! 넌 날 고문대에 올려놓았다. 섣불리 알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고 속고 있는 편이 낫겠다. 이아고: 왜 그러세요, 장군님? 오델로: 나 몰래 아내가 밀통을 했는지 알 수 없다만 난 보지도 못했고, 의심도 안했다. 그래서 괴롭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밤도 잘 잤고, 잘 먹었다. 마음도 편했고, 유쾌했다. 아내 입술에서 캐시오의 키스 자국도 볼 수 없었다. 도둑을 맞아도 당자가 도둑 맞은 걸 모르고 있으면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 모르면 도둑 맞지 않는 거나 진배없으니까. 이아고: 그런 말씀을 들으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델로: 온 부대 안의 장병들, 심지어 인부들까지 내 아내의 아름다운 살갗을 향락했다 하더라도 모른다면 난 행복했을 거다. 아, 이젠 영원히 내 마음의 평화도 깨졌다! 가슴 뿌듯했던 만족감도 사라졌다. 모자에 깃털을 장식한 군대도, 야망조차도, 야심찬 미덕이 될 생사를 건 전쟁도 다 끝장이다! 울부짖는 군마여, 드높은 나팔 소리, 가슴을 뛰게 하는 북소리, 귀를 뚫을 듯한 나팔 소리여, 저 장엄한 군기여, 명예로운 모든것, 자랑도, 찬란함도, 장관도 다 끝장이다! 아 파멸을 부르는 대포여, 그 무서운 포성은 불사 불멸의 뇌신 주피터 신의 무시무시한 부르짖음을 흉내내지만 너와 마지막이구나! 오델로의 생애도 이미 가라앉은 먼지가 돼 버렸구나! 이아고: 도대체 어찌되신 겁니까? 오델로: 이놈아, 내 아내가 정말 음탕한 계집이라면 증거를 내놓아라! 내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증거를 보이란 말야. (이아고의 목덜미를 잡는다) 그렇지 않다면 불멸의 영혼이 맹세하나니 네놈은 내 격분으로 눈알이 쏟아지게 될 것인즉 차라리 개로 태어난 것이 좋았을 거라고 느끼도록 해주겠다! 이아고: 너무하십니다. 오델로: 증거를 내놔.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증명을 해. 한치의 의심도 품을 수 없는 증거를 보이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이 염라대왕의 외손자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아고: 장군님. 오델로: 만일 내 아내를 턱없이 모함잡으려 하고 나를 괴롭힌다면 새삼스럽게 기도를 올려도 소용없다. 후회하는 마음 따위는 내던져 버려라. 갖은 포악한 행위를 계속 쌓아올려 하늘도 가슴 치며 울고 대지도 소스라치게 놀랄 악행을 저질러라. 그래도 이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건 아닐 것이다. 이아고: 이건 너무 심하십니다! 제발 이 사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장군님도 인간이십니까? 인간의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분별이 있으십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파직시켜 주십시오. 아 가엾은 바보. 지나치게 충직하다가 그만 불한당이 되고 말다니! 해괴망측한 세상이로군! 세상 사람들이여, 정신차리시오, 정신을. 솔직하고 정직하다간 등골 빼 먹히기 십상이오. 배운 게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남에게 친절하게 안하기로 작심했습니다. 남을 위하다가는 치도곤만 당할 테니까요. 오델로: 아냐, 기다려. 자넨 역시 정직해. 이아고: 이젠 저도 약아지렵니다. 정직해 봤자 별볼일 없고, 정직한 만큼 손해만 보니까요. 오델로: 사실, 내 아내는 행실이 정숙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네 말이 옳아, 아니 틀릴지도 몰라. 지금 당장 증거를 내놓아라.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얼굴같이 해말갛던 나의 이름이 마치 내 얼굴같이 더럽혀지고 검게 되었다. 밧줄이건 , 단검이건, 독이건, 불이건, 용암의 흐름이건, 다 오너라. 이대로 라면 난 감내 할 수가 없다. 확실한 증거가 보고 싶다! 이아고: 장군님,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말씀해 드린 것이 몹시 후회가 됩니다. 증거를 보시겠단 말씀이죠? 오델로: 그렇다, 아니, 꼭 보고야 말겠다. 이아고: 보실 수야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요? 어떻게 보시겠단 말씀이에요? 허벙한 구경꾼처럼 입을 헤벌리고 보시겠단 말씀입니까? 그 녀석이 부인을 올라타고 할딱거리는 걸 말입니다. 오델로: 천하에 더럽고 저주스러운 것들! 아! 이아고: 두 사람의 그 꼴을 보여 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닌뎁쇼. 둘이 나란히 한 베개 위에 누워 있는 걸 남의 눈에 보인다는 건 큰일이죠. 그렇다면 뭐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현장을 보시겠다는 건 안될 말씀입니다. 설사 두 사람이 염소처럼 색에 강하고, 원숭이처럼 음탕하고, 암내 풍기는 늑대처럼 음란하고 수취한 등신같이 못난이라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제 말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잡아 진상을 밝히는 문으로 인도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다면 말씀드리죠. 오델로: 내 아내가 부정하다고 하는 구체적인 이유. 이아고: 저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군요. 하지만 미련스러울 정도의 정직한 마음과 충성심 때문에 이 사건에 이렇게 휘말려 들어간 이상 목숨이 구천에 떨어진다 해도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요 얼마전 일입니다. 캐시오하고 같이 자고 있는데, 이가 쑤셔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잠에 떨어지면 주책없이 비밀을 토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캐시오가 바로 그런 축에 드는 자입니다. 글세 이렇게 잠꼬대를 하지 않겠어요! "귀여운 데스데모나, 우리의 사랑을 남이 눈치 채지 않게 조심합시다!" 그리고 제 손을 잡아 꼭 쥐고는 "아 귀여운 사람!" 이러고는 제 입술이 으스러지게 힘껏 키스를 했습니다. 마치 제 입술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내듯이 말입니다. 그러고는 제 넓적다리에 다리를 얹고, 한숨을 짓고, 입을 맞추고, 또 이렇게 부르짖었지요, "아, 운명도 야속하지. 당신을 무어한테 보내다니!" 오델로: 아, 망측스럽다! 망측하다! 이아고: 왜 그러세요, 꿈결에 한 짓에 불과합니다. 오델로: 하지만 전에 해본 경험이 없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나. 비록 꿈이라도 의심하기엔 충분해. 이아고: 물론 그것은 희미하게 느끼던 의심을 짙게 하는 다른 증거를 잡는 데는 도움이 되니까. 오델로: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말 테다! 이아고: 그렇지만 신중하셔야 합니다. 아직 현장을 잡은 건 아니니까요. 부인은 결백하신 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마디 물어 보겠습니다. 부인께서 딸기 무늬 수를 놓은 손수건을 사용하시는 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오델로: 그런 거라면 내가 준 일이 있지. 내가 준 최초의 선물일세. 이아고: 그걸 전혀 몰랐군요. 실은 그 손수건을--부인 것에 틀림없는 듯합니다만--오늘 캐시오가 수염을 닦고 있는 것 보았습니다. 오델로: 만일 그 손수건이라면--. 이아고: 그 손수건이건, 이니 어떤 손수건이건 부인 것이라면 그 밖의 상황과 맞춰 볼 때 부인에게 불리해지죠. 오델로: 에잇, 천하에 더러운 놈, 목숨을 몇 만 개쯤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보잘것없는 것 하나만 가지고 복수를 하기에는 성이 차지 않는다. 인제 알겠다, 사실이다. 이것 보게, 이아고. 내 어리석은 연정은 모두 하늘로 날려보내겠네. 이제 사랑은 사라지고 말았다. 일어나라, 시커먼 복수여, 어서 그 지옥의 구덩이에서 뛰어나오라. 아 사랑이여, 너의 왕관과 마음 속의 옥좌를 저 잔인 무도한 증오심에 넘겨라! 가슴이여, 독사의 혓바닥이 토해 낸 독으로 퉁퉁 부어라. (무릎을 끓는다) 이아고: 고정하세요--. 오델로: 아 피다, 피, 피다! 이아고: 참으시래두. 마음이 변하실 지도 모르니까요. 오델로: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저 폰틱 해의 차가운 격류가 결코 뒤로 물러서는 일없이 맹렬한 임으로 프로폰틱 해에서 헬레스폰트 해협으로 곧장 들러가듯이 피에 굶주린 내 복수심도 일단 결심한 이상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비굴한 사랑으로 뒷걸음질은 안해. 시원하고 사슴 후련하게 복수가 모든 것을 삼킬 때까지는. 저 대리석과 같은 푸른 하늘에 걸고 맹세한다. (무릎을 꿇는다) 신성한 서약에 알맞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맹세하나이다. 이아고: 그대로 일어나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는다)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탄탄한 일월성신을 증인으로 하여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삼라만상을 증인으로 하여 이아고는 모든 지혜와 손 그리고 마음의 모든 정성을 배신당한 오델로 장군님을 위하여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장군님의 명령이라면 어떠한 참혹한 행동일지라도 엄숙한 의무로 생각하고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 일어난다) 오델로: 자네 충성을 진심으로 감사하네. 혀끝을 인사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말일세. 당장 자네한테 시킬 일이 있어. 사흘 안에 캐시오가 죽었다는 소식을 같고 오너라. 이아고: 제 친구는 죽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장군님의 명령이 내리셨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부인의 목숨만은--. 오델로: 나쁜 년, 음탕한 계집! 오, 지옥으로 떨어져라!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난 안으로 들어가서 저 아름다운 악마를 빨리 죽일 방책을 궁리하겠다. 지금부터는 자네가 나의 부관이다. 이아고: 저는 영원히 장군님의 종이로소이다. (모두 퇴장) [ 제4장 거리 ]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등장. 데스데모나: 이봐요, 캐시오 부관은 어디 사시지? 광대: 어디서 사기하시는지 입을 뻥긋했다간 이놈은 끝장납니다요. 데스데모나: 그건 왜? 광대: 그분은 군인이신데, 사기하신다고 했다가는 모가지가 달아나게요. 데스데모나: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어. 숙소가 어디냔 말야? 광대: 어디서 묵고 계시는지 말씀드리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거와 같습니다. 데스데모나: 무슨 소릴 그렇게 하지? 광대: 그분의 숙소는 모릅니다. 그걸 멋대로 지어내어서 여기 사신다 저기 사신다고 떠벌리면 새빨간 거짓말이 됩니다. 데스데모나: 사람들한테 물어서 그분을 찾아줘요. 광대: 이거야 온 세상을 상대로 문답을 해야겠군요. 그럼 물어본 뒤에 알게 되면 답을 드리겠나이다. 데스데모나: 찾거든 잠깐 이리로 오시라고 해. 내가 그분을 위해 장군님께 간청했으니까, 별탈이 없을 거라고 말씀드려. 광대: 그런 심부름이라면 사람의 사람의 지혜로 될 수 있겠습죠. 그러니까 당장 해보겠습니다. (퇴장)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내가 그 손수건을 어디서 잃었을까? 이밀리어: 아씨마님, 전 모르겠는데요. 데스데모나: 차라리 금화가 잔뜩 득 지갑을 잃은 편이 나았을 텐데. 장군님은 마음이 숭고한 분이시라 의처증 있는 사람의 비굴한 마음이 없으시니 천만다행이지. 그렇잖으면 얼토당토 않은 의심에 휘말리기 십상이지. 이밀리어: 그렇게 질투심이 없으신 분이세요? 데스데모나: 누가? 그 양반 말야? 그런 해로운 습기차 있는 기질은 그분 고향의 태양이 다 빨아들였는 걸. 이밀리어: 장군님이 오십니다. 오델로 등장. 데스데모나: 오늘은 캐시오 부관을 불러들인다는 말이 떨어질 때까지 엎을 떠나지 말아야지. 심기가 좀 어떠세요? 오델로: 으응, 좋아. (방백) 시치미 때는 것도 어렵군! 당신은 어떻소? 데스데모나: 좋아요, 여보. 오델로: 손을 이리 줘 봐요. 손에 윤기가 있구려. 데스데모나: 아직 나이도 먹지 않았고, 슬픔을 모르는 손이니까요. 오델로: 이건 사랑이 헤프고 마음이 너그러운 증거요. 뜨겁디뜨겁고 윤기가 흐르고 있다. 다혈다정한 이 수상을 보건대 당신은 자유를 버리고, 단식과 기도와 자신에 대한 고행과 예배에 헌신해야겠소. 이런 손에 자칫하면 젊고 다정한 악마가 깃들어서 배반을 떡먹듯이 하거든. 어쨌든 착한 손이자, 정이 많은 손이오. 데스데모나: 옳은 말씀이에요. 확실히 제 마음을 당신한테 바친 게 이 손이었잖아요. 오델로: 너그러운 손이어! 예전엔 애정이 손을 주었는데 요즘의 문장은 애정이 아니라 손이라고 하더군. 데스데모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건 그렇구 그 약속은 어떻게 됐죠? 오델로: 무슨 약속이오, 여보? 데스데모나: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라고 캐시오한테 사람을 보냈어요. 오델로: 콧물이 자꾸 나와 못 견디겠소. 당신의 손수건 좀 주구려. 데스데모나: 여기 있어요. 오델로: 왜 네가 선사한 게 있지 않소? 데스데모나: 지금 안 가졌는데요. 오델로: 안 가졌다고? 데스데모나: 네, 그래요. 오델로: 그게 될 소리요? 그 손수건은 이집트의 집시가 어머니께 드린 거요. 그녀는 마술을 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뚫어 볼 수 가 있었소. 그 여자가 어머니께 말하기를 그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귀여움을 박도,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로되, 만일 그걸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면 남편의 눈에는 혐오심이 물들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고 했소.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그걸 내게 주시고 내가 결혼할 때엔 아내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소. 그래서 당신에게 준거요. 그런 거니 조심하오. 그걸 잃어버리거나 남에게 준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을 자초하게 될 거요. 데스데모나: 어머, 그럴 수가! 오델로: 정말이오. 그 수건에는 마법이 엮어져 있소. 이 세상에서 2백년이나 태양의 운행을 셈하여 왔다는 무당이 신통력을 얻은 순간 그 수건에 수를 넣은 거요. 그 명주실을 뽑아 낸 누에도 신성한 것이었을 뿐더러 물감도 사계의 도사가 처녀 미이라의 심장에서 짜낸 거요. 데스데모나: 설마? 그게 사실에요? 오델로: 사실이구말구. 그러니까 조심해요. 데스데모나: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오델로: 흥, 그건 왜지? 데스데모나: 왜 그렇게 무섭고 격하게 말씀하세요? 오델로: 잃어버렸소? 없어졌소? 말해, 어디다 버렸소? 데스데모나: 이를 어쩌지! 오델로: 뭐라고? 데스데모나: 잃어버리진 않았어요. 하나 만일 잃었다면 어떡하죠? 오델로: 뭐? 데스데모나: 잃어버리진 않았어요. 오델로: 갖고 와서 보여 주구려! 데스데모나: 보여 드리고 말고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제 청을 안들어 주시려고 엉뚱하게 의뭉을 떠시는 거죠? 그러시지 마시고 캐시오를 복직시켜 주세요. 오델로: 손수건을 가지고 와요 !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소. 데스데모나: 또 그 말씀이시네! 그만큼 유능한 사람들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실 거예요--. 오델로: 손수건 내놔! 데스데모나: 캐시오는 당신의 애정에 의지하여 자신의 운명을 걸었고, 갖은 위험한 고비를 함께 겪어 온 사람이 아니던가요--. 오델로: 손수건! 데스데모나: 정말 너무하세요. 오델로: 저리 비켜! (퇴장) 이밀리어: 저래도 질투심이 없으신 분이라구요? 데스데모나: 이런 일은 처음이야. 아무래도 그 손수건엔 이상한 힘이 있나 봐. 잃어버렸으니 어쩌면 좋지. 이밀리어: 남자들의 마음은 한두 해 가지고는 모른답니다. 남자는 꼭 위장이나 다름없고, 윌 여자는 음식이구요. 남자들이란 허기가 지면 걸신들린 것처럼 여자들을 먹어 치우지요. 그리고 배가 부르면 뱉어 버리거든요. 저기요, 캐시오 부관하고 제 남편이. 캐시오와 이아고 등장. 이아고: 별수 없습니다. 부인께 부탁하는 수밖에. 아따, 참으로 운도 좋다! 간곡히 부탁드려 보세요. 데스데모나: 안녕하세요. 캐시오 부관님? 별일 없으세요? 캐시오: 부인, 그전부터의 부탁입니다. 정숙한 부인의 힘으로 제가 다시 살아나 충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장군님의 총애를 받는 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젠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만일 저의 조가 엄청나서 과거의 공로로나 현재의 참회로나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로도 장군님의 사랑을 돌이킬 수 없다면 부디 그렇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단념하고 달리 살아갈 길을 찾아 운명의 자비나 바랄까 합니다. 데스데모나: 아아, 착하고 착하신 캐시오 부관님, 간청해 봤지만 장군께서는 심기가 좋지 않으신가 봐요. 전과는 생판 다르셔요. 그전의 주인이 아니세요. 만일 좀전의 기분처럼 얼굴도 변해 있었다면 전 다른 분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천사요, 굽어살펴 주소서, 맹세코 부관님을 위해 제 힘껏은 했습니다만 너무 내 간청이 지나쳐서 그분 비위를 긁어 놨나 봐요. 조그만 더 인내해 주세요. 힘 자라는 데까지는 해볼 테니까요. 제 일보다도 부관님을 위해서 더욱 힘쓰겠어요. 그러니 지금은 용서해 주세요. 이아고: 장군님께서 화내시던가? 이밀리어: 여기 계시다가 방금 들어가셨어요. 여느 때하고는 달리 초조해 보이셨어요. 이아고: 장군님께서 화를 내신다? 장군의 병사들이 포탄에 맞아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눈앞에서 친동생의 팔이 날아갔을 때에도 태연하셨는데. 그분이 화를 내시다니? 이건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나 보다. 가 뵙고 오겠습니다. 장군님이 화를 내셨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데스데모나: 어서 그렇게 해요. (이아고 퇴장) 무슨 국사에 관한 통보가 베니스에서 왔거나, 이 사이프러스 섬에서 어떤 음모가 발각되어서 그것 때문에 그분의 맑은 마음이 어지러워지신 지도 몰라. 그런 경우 으레 남자들은 큰 사건에 눈을 돌려야 하는데 조그마한 일에 골 썩히기 마련이거든. 정말 그래. 손가락 하나가 아프면 다른 건강한 데까지 아픈 것같이 느껴지는 거야. 그야 남자도 신처럼 완전무결하진 않아. 신혼 때처럼 나만 애지중지해 줄 줄 알면 지나친 욕심이겠지. 이밀리어. 내가 글렀었다. 전지에 동반할 병사로서는 자격이 없나봐. 공연히 샐쭉해서 장군을 이러고저러고 함구를 하고. 그러나 이제사 경우 알게 됐어. 그이는 아무 죄도 없다는 걸. 이밀리어: 아씨마님 말씀대로 나라에 관한 일이라면 좋겠어요. 아씨마님 일로 가당치 않은 의심이나 질투를 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죠? 데스데모나: 정말 난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어. 이밀리어: 그렇지만 질투가 많은 사람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거예요. 꼬투리가 있어서 질투하는 게 아니거든요. 의처증이 있기 때문에 질투하는 거예요. 의처증이란 저절로 잉태되고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데스데모나: 제발 그런 흉측한 괴물이 오델로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밀리어: 저도 기도 드리옵니다. 데스데모나: 그이가 어디 계실까. 찾아봐야겠어, 캐시오 부관님, 여기서 기다리세요. 적당한 기회를 봐서 그 얘길 다시 말씀드리죠. 될 수 있으면 잘해 보겠어요. 캐시오: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퇴장) 비앵커 등장. 비앵커: 캐시오님 안녕하세요! 캐시오: 웬일야,이런 델 오고? 비앵커, 그래 벌고 없었어? 그르지 않아도 지금 찾아가려던 참인데. 비앵커: 저도 당신의 숙소로 가 뵈려고 했었지요. 어쩌면 일주일이나 오시질 않아요? 이레 낮, 이레 밤을? 일백예순여덟 시간이나요?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일각이 여삼추예요. 기다리다 지져 버릴 지경이에요! 캐시오: 비앵커, 참 미안해. 요새 납처럼 마음이 무거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 쉬 한번 틈을 내서 가겠어. 그 동안 못한 일을 벌충하지. 그런데 비앵커,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비앵커에게 주며) 이 무늬대로 본 떠 주지 않겠어. 비앵커: 아이구머니, 캐시오님, 이건 어디서 생긴 거죠? 새로 생긴 연인의 선물인 게로군요. 그 동안 안 오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이렇게까지 된 줄도 모르고. 알았어요, 좋다구요. 캐시오: 공연한 소리 작작해요, 이 여자야! 어떤 악마가 그따위로 넘겨짚으라고 했는지 몰라도, 그 악마 얼굴에 되퍼붓구려. 여자한테서 받을 선물인 줄 알고 강짜로군? 당치도 않아, 비앵커. 비앵커: 그럼 누구 거예요? 캐시오: 나도 몰라. 내 방에 떨어져 있었어. 수놓은 게 무척 마음에 들어. 언젠가 주인이 돌려 달라고 말할 테지, 그 전에 본을 떠 두고 싶다구. 가지고 가서 떠 줘요. 다시 만나자구. 비앵커: 날더러 가라구? 왜요? 캐시오: 여기서 장군님이 나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여자하고 있는 걸 보면 명예롭지 못해. 또 바람직한 일도 못돼. 비앵커: 그건 왜죠? 캐시오: 당신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냐. 비앵커: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죠! 알았어요, 저기까지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오늘밤 찾아와 주겠다고 말해 주세요. 캐시오: 같이 간댔자 몇 발자국도 못 가잖아.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그러나 곧 찾아가겠어. 비앵커: 좋아요. 그런 사정이라면 봐줄게요. (두 사람 퇴장) [ 제4막 ] 아내들로 남자들처럼 감정이 있다는 걸 남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요. - 3장 이밀리어 대사 중에서 [ 제1장 사이프러스 성채 앞 ] 오델로와 이아고 등장. 이아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델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이아고! 이아고: 네, 남몰래 키스를 했다는 거 말입니다. 오델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키스다 이이고: 또는 홀랑 벗고 남자와 한 시간이나 그 이상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거죠. 그러나 음란한 마음은 없이 말입니다. 오델로: 알몸뚱이로 동침했는데, 음란한 짓을 안 해? 그건 악마까지도 속이는 위선이야.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제아무리 깨끗한 마음으로 그런다 해도 악마의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늘을 시험하는 것이나 같아. 이아고: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다지 큰 죄가 안되지 않습니까. 가령 제가 아내한테 손수건을 줬다면--. 오델로: 그랬다면 어떻게 되나? 이아고: 줘 버린 다음엔 아내 것이 되는 거죠. 아내의 물건인 이상 누굴 주거나 상관없다고 사려됩니다. 오델로: 아내는 또한 정조를 지켜야 되는 법. 그런데도 그것도 남에게 줘도 괜찮단 말인가? 이아고: 여자의 정조가 어디 눈에 보입니까? 정조를 줘 부리고도 안준 척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손수건은--. 오델로: 아아, 그거야말로 잊어버리고 싶은 이야기다! 그대는 말했겠다--그 말이 내 골수에 박혀 잇다. 마치 돌림병을 앓고 있는 집 지붕 위에서 까마귀가 불길한 소리로 울어대는 것처럼--그자가 내 손수건을 가졌다고. 이아고: 그랬죠,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오델로: 그게 말이나 되느냐. 이아고: 설사 그 사람이 장군님을 배신하는 것을 제 눈으로 봤기로 서니 또 나발 불고 다니는 소릴 들었던들--어디 그런 놈들이 이 세상에 하나 둘이어야 말이죠. 추근추근하게 늘어붙어 자기 손아귀에 넣었다든가 또는 여자쪽에서 꼬리질을 하며 달라붙었다든가 해서 정복을 했느니, 만족시켜 줬느니 아무튼 입이 간지러워서 못 배기는 놈들입니다. 오델로: 놈이 뭐라고 지껄였나? 이아고: 몇 마디 까발리더군요. 그렇지만 막상 말조심을 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면 별수가 없잖습니까? 오델로: 뭐라고 했는냐구? 이아고: 저어, 이러더군요--전 잘 모르는 일입니다만요. 오델로: 뭐야? 무슨 짓을 했냐구? 이아고: 잤다구요--. 오델로: 내 아내하고? 이아고: 네, 부인하고요, 올라타고요. 별짓 다했대요. 오델로: 내 아내와 같이 자? 올라탔다구?--올라탔다는 건 날 속이고 내 머리에 올라탔다는 말이 돼--살을 섞었다! 에잇, 더러운. 손수건-자백-손수건! 먼저 자백시키고 그 죄값으로 목을 졸라 주자. 먼저 목을 조른 다음 자백시켜야 해! 치가 떨리는군.이렇게 암담한 상념에 사로잡히는 건 반드시 무슨 예감이 있어서야. 말만 듣고 이처럼 마음이 산란할 수는 없지.--흥! 코와 귀를, 귀와 귀를, 입술과 입술을 마구 비벼 댔겠다? 그럴 수가?-자백?-손수건!-아, 악마! (실신하여 쓰러진다) 이아고: 백발백중이지, 내 독약이 효력을 발휘했다! 이런 데데한 바보 얽어 넣는 건 식은 죽 먹기지. 훌륭하고 정숙한 여자들도 이렇게 죄가 없으면서 억울한 수모를 받게 되는 거다. 웬일이십니까! 장군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오델로 장군님! 캐시오 등장. 캐시오 부관님이시군요? 캐시오: 웬일인가? 이아고: 장군님께서 간질병으로 쓰러지셨어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어제도 한 번 발작이 있었습니다. 캐시오: 관자놀이를 비벼 드리게. 이아고: 아니, 이런 병을 조용히 놔둬야 됩니다. 건드리면 입으로 거품을 뿜고 당장 미친 사람처럼 난폭해지거든요. 아, 움직이신다. 잠시 물러가 계십시오. 곧 회복하실 테죠. 장군님께서 가신 다음 중대한 일로 할 얘기가 있습니다. (캐시오 퇴장) 장군님, 좀 어떠십니까? 머리를 다치지 않으셨는지요? 오델로: 나를 놀릴 셈인가? 이아고: 놀리다니오, 원 별 말씀을.장군님께서 대장부답게 운명을 참아 나가시기를 빌 뿐입니다. 오델로: 뭐 대장부? 뿔이 돋은 남자는 이미 괴물이요, 짐승이다. 이아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번화한 이 도시는 짐승과 신사연한 괴물로 꽉 차게 됩니다. 오델로: 그자가 자백했나? 이아고: 정신 차리십시오. 결혼의 명에를 짊어지고 있는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장군님과 같답니다. 수백만의 남자들이 자기 전용도 아닌 남의 침대에서 매일 밤 자기 침대로 생각하고 잠자리를 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장군님은 그만해도 나은 편이죠. 마음 탁 놓고 이불 속에서 음탕한 여자의 입술을 빨면서도 그 여잘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지옥의 저주요, 악마의 조롱감이지요. 그래서 저 같으면 알아두겠는데요. 자신의 입장을 알면 여자를 다루는 방법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오델로: 옳은 말이다. 그렇고말고. 이아고: 잠시 이곳에서 떨어져 있어 주세요. 제발 참고 기다려 보세요. 아까 너무도 상심하시어 졸도하셨을 때--보통 때의 장군님 답지 못한 비통함이었습니다만--그 사이에 캐시오가 왔었습니다. 그를 쫓아 버리며 기절하신 거에 대해서는 적당히 둘러대 놓고 나중에 할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했더니, 온다고 약속했습니다. 부디 이 부근에 잠시 숨으셔서 그자가 냉소나, 조롱이나, 경멸을 하지 않는가 그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을 처음부터 말하도록 제가 물을 테니까요. 부인을 어디서, 어떻게, 몇 번쯤, 언제부터 만났는지, 어제 또 앞으로도 만나서 재미보기로 했는지 묻는 거지요. 괜찮으세요? 그의 일거일동을 잘 보십시오. 하지만 꼭 참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대장부답지 못하게 자발성 없이 성미나 부리는 위인밖에 안됩니다. 오델로: 내 말 들어, 이아고. 내 꾹 참는 데는 도가 터 있다. 하지만--잘 들어둬--누구보다 잔인한 짓도 할 수 있어. 이아고: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서둘지 마십시오. 저리로 물러가 계십시오. (오델로, 볼 수는 있으나 들을 수 없는 곳에 숨는다) (방백) 됐어, 캐시오한테 비앵커 얘길 물어야겠다.몸을 팔아서 먹고 입고하는 창녀겠다. 그 계집이 캐시오를 좋아해 죽자사자하는 판이란 말야. 뭇남자들을 속이고 결국은 한 남자한테 속아넘어가는 게 창녀들의 팔자지. 그 계집 얘기를 들으면 놈은 싱그르 웃지 않을 수 없을 게다. 자, 녀석이 온다. 캐시오 등장. 저 녀석이 웃어대면 오델로는 미치고 환장하겠지. 쥐뿔도 모르고 질투에 눈이 뒤집혔으니 불쌍한 캐시오의 웃음이나 몸짓 그 들뜬 태도는 전부 의심쩍게 보일 수밖에. 부관님, 어떻게 됐습니까? 캐시오: 그 칭호로 부르면 더욱 서글퍼지네, 죽을 지경이라구. 이아고: 데스데모나 부인한테 부탁하면 문제 없다니까요.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비앵커의 핌으로 어떻게든지 될 수만 있다면 부관님 운수가 훤하게 필 텐데요! 캐시오: 흥, 그까짓 계집이 뭘! 오델로: (방백) 저것 봐, 벌써 웃고 있군! 이아고: 그렇게 사랑에 사족을 못 쓰는 여자는 처음 보겠던 데요. 캐시오: 그래, 쓸게 빠진 계집이지, 나한테 반한 것만은 틀림없지만. 오델로: (방백) 이번엔 마지못해 부정하면서 웃음으로 슬쩍해 버리는군. 이아고: 내 말 들어 보겠어요, 캐시오님? 오델로: (방백) 인제 그 얘길 다시 한번 꺼낼 모양이로군. 좋다, 잘한다, 잘해! 이아고: 그 여잔 부관님이 자기와 결혼한다고 요살을 떨고 다니던데요. 부관님도 그럴 작심이십니까? 캐시오: 핫 하 하! 오델로: (방백) 신명이 나는 모양이군, 저런 자갈을 물릴 놈! 저렇게 의기양양할까? 캐시오: 내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해? 그래, 창녀하고? 날 얕잡아 보지 말게. 내가 그렇게 얼치기인 줄 아나? 하 하! 오델로: (방백) 그래, 그으래. 신명이 나면 웃는 법이지. 이아고: 하지만 부관님이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캐시오: 제발 생으로 사람 잡지 말게. 이아고: 아니 그럼 난 허튼 말만 내뱉는 놈이 되네요. 오델로: (방백) 날 모욕했겠다! 좋다! 캐시오: 그건 잔나비 같은 계집이 제멋대로 퍼뜨린 소릴세. 혼자 반해서 김치국 먼저 마시는 걸세. 내가 결혼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내가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네. 오델로: (방백) 이아고가 눈짓을 하는군. 인제 그 얘길 꺼낼 모양이지. (더욱 가까이 간다.) 캐시오: 그 여잔 방금 여기 있었어. 어디를 가든지 내 꽁무니를 졸졸 좇아 다니거든. 요전에도 베니스 사람이라고 바닷가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그 못난 것이 좇아와서 끌어안질 않겠어--. 오델로: (방백) "사랑하는 캐시오님!" 이라고 조잘댔다는 거야. 저자 몸짓으로 봐서. 캐시오: 매달려서 축 늘어진 채 울잖겠어. 그러고선 날 마구 흔들면서 힘껏 끌어당기지 않겠어! 핫 하 하! 오델로: (방백) 그렇게 해서 내 아내가 저놈을 내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는 얘기로군. 오, 저놈의 코를 도려내서 개한테 던져 주고 싶다. 캐시오: 이제 그것하고는 손을 끊어야 되겠네. 이아고: 이크! 저기 오는군. 캐시오: 또 왔어, 싸구려 창녀! 그 꼴에 싸구려 향수 냄새라니. 비앵커 등장. 어쩌자고 이렇게 날 쫓아다니는 거야? 비앵커: 당신 같은 사람은 차라리 악마가 좇아 다녀야 제격일 걸! 아까 준 그 손수건을 어떻게 하라구요? 내가 참으로 바보야, 그걸 받아 가지고 갔으니. 날보고 무늬를 본뜨라구요? 뭐, 바에 떨어져 있는데 누가 떨어뜨렸는지 모른다구! 어떤 년이 준 걸 테지. 아니 그래 날보고 그걸 그대로 본뜨라구요? 자요! (손수건을 던진다) 그 화냥년한테나 주구려.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알 바 아니지만 본뜨지 못하겠어요. 캐시오: 왜 그래, 귀여운 비앵커! 글쎄 왜 그래? 오델로: (방백) 옳지, 저건 내 손수건일 게다! 비앵커: 오늘밤에 식사하러 오실 테면 오세요. 만약 오실 수 없다면 요다음에 부를 테니 그때 오시라구요. (퇴장) 이아고: 쫓아가 보세요, 어서요! 캐시오: 그래야겠네, 내버려두면 길바닥에서 왁자하게 떠들어댈 테니 말야. 이아고: 거기서 저녁 식사 하실래요? 캐시오: 그럴 생각일세. 이아고: 그럼 다시 만납시다. 긴히 말 얘기가 있으니까요. 캐시오: 꼭 와요. 이아고: 어서 가보세요. 아무 말 마시고. (캐시오 퇴장) 오델로: (앞으로 나오며) 이아고, 저놈을 어떻게 죽였으면 좋겠나? 이아고: 몹쓸 짓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웃어대는 걸 보셨지요? 오델로: 아, 이아고! 이아고: 손수건도 보셨구? 오델로: 분명히 내 손수건이던가? 이아고: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부인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보셨구요! 부인께서 주신 것을 그 창녀한테 주다니. 오델로: 몇 년을 두고두고 곯려 주고 싶다!--아, 내 아내는 훌륭한 여자였다. 예쁜 여자였다. 상냥한 여자였다! 이아고: 이젠 다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오델로: 그렇다, 그년은 오늘밤 안으로 썩어 없어져라, 문드러져라, 지옥으로 떨어져라. 절대로 살려 둘 수 없다. 내 마음은 돌이 돼 버렸다. 내 마음을 때리면 그 손이 부러질 것이다. 이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것이 또 어디 있담! 제왕 옆에 누워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있는 여자야. 이아고: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델로: 천하에 죽일 년! 난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바느질 솜씨도 좋았다. 음악에도 소질이 뛰어났었다. 아, 그녀가 노래 부르면 사나운 곰도 온순해질 거다! 지혜와 창조력도 높고 풍부하겠다--. 이아고: 그러니까 더욱 나쁘죠. 오델로: 그래 몇 천 배 더욱 나쁘다. 그리고 성품이 얼마나 얌전하다고! 이아고: 어느 남자에게나 지나치게 얌전합죠. 오델로: 옳아, 그대로야. 그러니까 더욱 원통하단 말야. 아아, 이아고, 원통하구나. 이아고: 그렇게 행실이 부정한 부인에게 미련을 두실 바에야 차라리 간통을 허락하십시오. 장군님만 아무렇지 않으시다면 아무에게도 상관 없는 일이니까요. 오델로: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간통을 하다니! 이아고: 정말 더러운 일입니다. 오델로: 더군다나 내 부하하고! 이아고: 더욱 나쁘죠. 오델로: 이아고, 독약을 구해 오너라, 오늘 밤이다. 변명은 듣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육체를 보면 내 결심이 무너질지 모른다. 오늘밤이다, 이아고! 이아고: 독약은 안됩니다. 이불 속에서 목을 조르십시오. 음란한 짓을 한 그 이불 속에서 말입니다. 오델로: 좋아, 그게 좋겠군. 죄의 업보니까. 썩 좋다. 이아고: 캐시오를 치우는 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자정까지는 반드시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오델로: 썩 마음에 들었다! (나팔소리) 저건 무슨 나팔소린가? 이아고: 필경 베니스에서 누가 오신 모양입니다. 로도비코, 데스데모나, 시종들 등장. 로도비코경이십니다. 공작님의 전갈일 겁니다. 부인께서도 함께이시군요. 로도비코: 장군, 안녕하십니까. 오델로: 잘 오셨습니다. 로도비코: 베니스의 공작 각하와 의원들께서 장군께 안부를 전하십니다. (편지를 건넨다) 오델로: 편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편지를 뜯어 읽는다) 데스데모나: 무슨 별다른 소식이라도 있으세요, 오라버님? 이아고: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대감님. 사이프러스 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도비코: 고맙네. 캐시오 부관도 잘 있는가? 이아고: 잘 있습니다만. 데스데모나: 슬픈 일이지만 장군하고 부관 사이가 나빠졌어요. 오라버님께서 잘 말씀해 주시면 화해될 수 있을 것 같애요. 오델로: (방백)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데스데모나: 여보 왜 그러세요? 오델로: (편지를 읽는다) '이 일은 어김없이 실행해 주시오--'. 로도비코: 부른 게 아니란다. 편지를 열심히 읽고 계시다. 장군하고 캐시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가? 데스데모나: 정말 불행한 일이에요. 예전처럼 두 분 사이를 화해시키는 일이면 전 뭐든지 하겠어요. 캐시오 부관은 좋은 분이세요. 오델로: 지옥의 불길에 타죽어라! 데스데모나: 여보? 오델로: 제정신이오? 데스데모나: 왜 이러세요, 화나셨어요? 로도비코: 편지 때문에 화났을 거요. 캐시오를 후임으로 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일 거요. 데스데모아: 어머, 기뻐라. 오델로: 정말이오? 데스데모아: 여보! 오델로: 나 역시 기쁘군, 당신이 미쳐 버린 걸 알게 됐으니. 데스데모나: 왜 그래요, 여보--. 오델로: 이 악마야! (아내를 친다) 데스데모나: 제가 뭘 잘못했다구 이러세요. 로도비코: 장군, 이런 일은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증언해도 베니스에서는 아무도 곧이듣지 않을 거요. 너무하셨소. 어서 위로해 드리세요. 울고 있지 않습니까? 오델로: 예이, 악마, 악마 같은 년! 대지가 계집의 눈물로 잉태한다면 저것이 흘리는 방울마다 거짓 눈물을 흘리는 악어가 될 거다. 내 눈앞에서 꺼져! 데스데모나: 화가 나신다면 나가겠어요. (나간다) 로도비코: 참으로 온순한 부인이지 않습니까. 제가 간청하겠으니, 돌아오도록 하시오. 오델로: 부인! 데스데모나: 여보. 오델로: 저 여자한테 뭐 할 말이 있소? 로도비코: 누가? 나 말요? 오델로: 그렇소이다! 당신이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소. 이 여자는 부르면 몇 번이고 돌아오지요. 아 몇 번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울기도 잘해요. 온순해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실컷 눈물을 짜봐. 이 편지로 말하면--우는 시늉도 잘한다!--이 사람보고 일단 귀국하라는 명령이군요--물러가 있어. 이따가 부를 테니--대감,명령에 따라 베니스로 돌아가겠소이다--가라니까 그래! (데스데모나 퇴장) 캐시오를 후임으로 앉히겠소. 그리고 오늘밤엔 저녁 식사를 같이하십시다. 사이프러스 섬에 잘 오셨소.--꺼져 버려, 이 음탕한 년!--(퇴장) 로도비코: 저 사람이 바로 원로원 전원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격찬했던 무어 장군인가? 저 사람이 어떠한 감정에도 동하지 않았다는 인물인가? 그가 지조가 굳고, 어떠한 재난의 탄환도, 불행의 화살도 상처를 내지 못했고, 꿰뚫지 못했다는 그 사람인가? 이아고: 장군은 몹시 변하셨답니다. 로도비코: 정신은 온전한가? 좀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닌가: 이아고: 보신 대로입니다. 저로서는 뭐라고 제 의견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그렇지 않으시다면 차라리 그렇게 돼 버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로도비코: 이 무슨 행패요, 부인을 때리다니! 이아고: 확실히 나쁘고 말고요.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만. 로도비코: 늘 그러신가? 그렇지 않으면 그 편지를 보고 화가 나서 처음으로 저지른 과실인가? 이아고: 어이구, 난처합니다! 제가 보고들은 것을 그대로 제 입으로 말씀드리는 건 부하된 도리가 아닙니다. 주의해 보시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장군의 행동만으로 아실 겁니다. 뒤를 밟으셔서 다음 거동을 잘 보십시오. 로도비코: 내가 그만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 (일동 퇴장) [ 제2장 성채 안의 한 방 ] 오델로, 이밀리어 등장. 오델로: 그래, 넌 아무것도 못 봤단 말이지? 이밀리어: 들은 적도 없고, 미심쩍게 여긴 적도 없습니다. 오델로: 캐시오가 내 아내하고 같이 자는 걸 봤을 거다. 이밀리어: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어요, 두 분께서 주고받은 얘길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지만요. 오델로: 그렇다면 귀에다 소근대지도 않았어? 이밀리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델로: 혹시 너에게 자리를 비키라고도 안 하고? 이밀리어: 전혀 없었습니다. 오델로: 부채라든가, 장갑이나. 베일, 또 뭐 다른 걸 가져오라는 핑계로 널 밖으로 보내지 않았어? 이밀리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델로: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이밀리어: 장군님, 아씨마님께서는 결백하십니다. 제 영혼을 걸어 보증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런 생각은 버리세요. 그런 의식은 자기 모독이에요. 어떤 악당이 장군님 머릿속에 그런 의심을 넣어드렸다면 그 따위 인간은 무서운 사탄의 저주로 천벌을 받아 이 세상에 행복한 남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토록 순결한 아내가 험담처럼 부정한 아내가 되고 만다면 말입니다. 오델로: 여기 오라고 해요. 어서. (이밀리어 퇴장) 그럴싸하게 앙큼을 떠는 군. 하지만 그 정도의 말은 뚜쟁이라면 머저리가 아닌 이상 하고도 남지. 어리무던하게 볼 년이 아니야. 모든 불의의 비밀에 자물쇠를 잠그고, 열쇠는 저것이 움켜쥐고 있다. 그러면서 제법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걸 이 눈으로 보았겠다.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등장. 데스데모나: 여보, 부르셨어요? 오델로: 미안하지만 이리 좀 와요. 데스데모나: 무슨 일이세요? 오델로: 어디 눈 좀 봅시다. 내 얼굴을 봐요. 데스데모나: 무슨 무서운 생각을 하고 계시오? 오델로: (이밀리어에게) 늘 하던 대로 하란 말야. 우리 두 사람만 남겨놓고 문을 닫아. 누가 오거든 기침을 하든지 "으음"하고 소리를 내든지 해. 너의 장사를 시작하는 거야, 장사를! 빨리 가봐! (이밀리어 퇴장) 데스데모나: (무릎을 꿇고) 정말 무슨 말씀이세요? 말끝마다 역정을 내시는 건 알겠는데 말뜻은 모르겠어요. 오델로: 도대체 당신은 뭐요? 데스데모나: 당신 아냅니다. 정숙하고 충실한 당신의 아내죠. 오델로: 뭐라고 맹세해도 지옥에 떨어지게 돼 있어, 그 얼굴만은 천사와 같아서, 지옥의 악마들도 겁이나 감히 널 엎치지 못할 거다. 그러니 불의를 저지른 데다 위선의 죄까지 저지른 주제에 충실한 아내라고 실컷 맹세한들 어떻겠나. 데스데모나: 하늘이 알고 계십니다. 오델로: 하늘이 잘 알고 말고, 악마처럼 부정한 당신의 행실을. 데스데모나: 누구한테 말예요, 여보? 누구하고? 내가 어째서 부정해요? 오델로: 아, 데스데몬! 나가! 나가! 나가 버려! 데스데모나: 아, 슬퍼요! 왜 우시죠? 저 때문에 우시는 거예요, 여보? 혹시 이번 소환이 저의 아버님 책략이라고 의심하셔도 절 책망하신 마세요. 당신의 제 아버님하고 손을 끊으신다면 저도 혈연을 끊겠어요. 오델로: 설령 하늘의 뜻으로 온갖 고난이 다 나에게 안겨진다 해도, 온갖 괴로움과 치욕이 이 맨머리 위에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해도 온몸이 가난 속에 처박혀 내 몸과 내 가장 큰 소망이 노예의 쇠사슬에 묶이더라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한 방울의 인내라도 남아 있을 거다. 아 비참하다, 이 내가 영원히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다니, 하지만 그 정도라면 참을 수 있다, 그 정도면. 그러나 내 마음을 당신의 가슴 속에 간직해 두지 않았던가. 내가 살고 죽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어--그런데 그 샘에서 추방을 당하다니, 그 샘을 저 더러운 두꺼비가 알을 까는 웅덩이를 만들다니--아 싱그러운 장밋빛 입술을 한 천사인 인내여! 이젠 얼굴빛을 갈려무나! 차라리 악마처럼 흉악한 얼굴이 돼 버려라! 데스데모나: 여보, 제발 저의 진정을 믿어 주세요. 오델로: 믿구말구, 도살장의 여름철 쇠파리가 알을 낳았다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야. 에이, 독초 같은 것, 귀엽고 아름답고 향긋한 냄새를 풍겨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당신은 차라리 이 세상 태어나지 않았어야 옳았어! 데스데모나: 너무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어떤 죄를 범했던 가요? 오델로: 이 순백의 종이, 이 아름다운 책은 여기다 '매음'이라고 쓰지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무슨 죄를 범했느냐고? 범했구말구! 천하의 매춘부! 네 행실을 입밖에 내기만 해도 내 뺨은 용광로의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수치심도 타 버려 재가된다. 무슨 죄를 범했느냐고? 뻔뻔스런 매춘부야! 데스데모나: 너무하십니다, 그런 억울한 말씀이 어디 있어요! 오델로: 그럼 매춘부가 아냐? 데스데모나: 전 기독교인으로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남편을 위해서 이 몸을 지키고 행여 다른 남자와 더러운 불의의 손길을 닿지 않게 하는 것이 매춘부가 아닌 증거라면 전 매춘부가 아니에요. 오델로: 뭐, 매춘부가 아니라구? 데스데모나: 아녜요, 하늘에 맹세해요! 오델로: 그럴 리가 있나? 데스데모나: 이를 어쩌면 좋담! 오델로: 그럼 당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겠군. 난 당신을 오델로와 결혼한 베니스의 간교한 창녀인 줄 알았어. (언성을 높여) 이봐라, 천국의 열쇠를 맡은 성베드로의 반대일 만 하고 있는 지옥의 문지기 아낙네야! 이밀리어 등장. 너다, 너, 그래 너다! 우리들 볼일은 끝났다. 수고비를 주지. (그녀에게 동전을 준다) 입에 자물쇠를 꼭 잠그고 우리의 일을 비밀로 해달라는 거다. (퇴장) 이밀리어: 어이구머니나, 저 어른신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저러실까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아씨마님? 웬일이세요? 데스데모나: 정말이지 꿈꾸는 것 같애. 이밀리어: 아씨마님, 주인나리께서 왜 그러실 까요? 데스데모나: 누구 말야? 이밀리어: 주인나리 말씀예요. 데스데모나: 주인나리라니? 이밀리어: 아씨마님의 바깥어른 말씀예요. 데스데모나: 내겐 그런 사람은 없어. 아무 말도 말아, 이밀리어. 울음도 안 나오지만 대답을 하려니까 그저 눈물만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오늘밤엔 혼인때 덮었던 홑이불 깔아 줘요, 잊지 말고 -- 그리고 네 남편을 좀 오시라고 해줘. 이밀리어: 정말 변하셨어! (퇴장) 데스데모나: 당연하지, 이런 꼴을 당하는 것도 당연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구 손톱만한 과오까지도 저토록 결기를 세우고 오금을 박으실까. 이아고와 이밀리어 등장 이아고: 부르셨습니까, 부인?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데스데모나: 나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린애를 가르치려면 우선 쉽고 간단한 것부터 가르치는 법이라던데. 그인 날 그런 식으로 꾸중하신 게겠죠. 그러니까 나도 어린애처럼 꾸중을 듣고 있어야죠. 이아고: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이밀리어: 아, 여보, 주인나리께선 아씨마님을 매춘부라고 능멸하시며 차마 입에 못 담을 험담을 하셨어요. 아씨마님 같으신 분이 어떻게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듣고 참으시겠어요. 데스데모나: 내가 그런 여자 같아 뵈요? 이아고: 어떤 여자 말씀입니까? 데스데모나: 방금 이밀리어 말대로 주인이 말씀하셨다는 그런 여자 말예요. 이밀리어: 매춘부라고 그러셨어요. 술취한 동냥아치라도 그런 지독한 말은 자기 정부한테도 그렇게 못할 거예요. 이아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데스데모나: 나도 몰라요. 하여간 난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이아고: 울지 마십시오, 진정하세요. 이런 변이 있나! 이밀리어: 아씨마님은 그렇게 많은 명문의 혼처도, 아버지도, 나라도, 친구들도 다 버리셨는데 매춘부란 말을 듣다니? 그러니 누군들 눈에 피눈물이 나지 않겠어요? 데스데모나: 내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가 봐. 아이고: 장군님께서도 망령이시지! 어떻게 그런 변덕스런 생각이 나셨을까요? 데스데모나: 글쎄, 그걸 누가 알아요? 이밀리어: 제 말이 틀렸다면 뼈 추렴을 당해도 좋아요. 이건 틀림없이 심술이 사나운 건달 유객이나, 비위를 잘 맞추는 알랑꾼이나 사기꾼이 한 자리를 얻으려고 꾸며낸 모함이 분명해요. 아니라면 내 목을 걸 테야. 이아고: 못난 소리 그만둬, 그런 놈이 어디 있어! 가당치도 않은 소리. 데스데모나: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여, 용서해 주소서! 이밀리어: 목을 조르는 것이 용서하는 거예요! 그 따위 불측한 놈의 뼈다귀는 지옥의 악귀들이 질겅질겅 씹어 삼키게 해야지. 아니 누구보고 매춘부래, 될 소리야? 누굴 상대했다는 거야? 어디서? 언제? 무슨 증거가 있담? 필시 장군님께선 어떤 불한당한테 속으신 거야. 천하에 비열한 악당, 간악한 놈한테 넘어가신 거야. 아아 하나님, 제발 그런 놈의 정체를 이 자리에 까밝혀 주십시오. 그리고 훌륭하신 분들에게 회초리를 주어 그 악독한 놈을 발가벗겨 섭산적이 되도록 매질해서 이 세상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질질 끌고 다니게 해주세요! 이아고: 큰소리 내지 마. 이밀리어: 물고를 낼 놈들! 당신의 분별을 흐리게 하고, 나하고 장군님 새를 의심쩍게 만든 것도 틀림없이 그런 놈일 거야. 이아고: 바보 같으니, 촐랑대지마. 데스데모나: 자, 이아고님. 어떻게 하면 그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제발 그분한테 가서 얘기 좀 해보세요. 정말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통 모르겠어요. 이렇게 무릎을 꿇고 맹세하지만, 마음 속으로나 실제 행동으로나 그분의 사랑을 배반한 적이 있었다면 나의 눈이, 나의 귀가, 나의 다른 감각이 딴 남자에게 팔린 적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설사 그이가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하셔도 지금도, 과거에도, 또 앞으로도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모든 즐거움으로부터 버림받아도 좋아요. 냉대를 받는 건 괴로워요. 이러다간 그분 비정에 나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게예요. 그렇지만 내 애정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난 '매춘부'란 말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어요. 지금 그 말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져요. 이 세상의 보물을 모두 준다 해도 난 그러한 이름으로 불려질 행동은 할 수 없어요. 이아고: 고정하세요. 장군님께서 한때 지나는 기분에서 하신 말씀일겁니다. 아마 나랏일로 기분이 언짢아서 부인께 화풀일 하신 거겠죠. 데스데모나: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아고: 그뿐입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안에서 나팔소리) 저녁식사 신호군요. 베니스에서 오신 사절들도 만찬에 참석하실 겁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울지 마시고. 만사가 잘돼 갈 겁니다. (데스데모나와 이밀리어 퇴장) 로더리고 등장 이봐 로더리고, 웬일인가? 로더리고: 아니 자넨 날 골릴 셈인가? 이아고: 골리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로더리고: 자넨 맨날 요리조리 피하고만 있잖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자넨 내 소원을 들어주기는커녕 도리어 안되게 돌팔매질이야, 이건 먹지도 못하는 제사에 절만 하는 꼴이지 뭔가. 좌우지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네. 여태까지 바보처럼 자네 하라는 대로 했지만 앞으론 어림도 없네. 이아고: 이것 봐, 로더리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로더리고: 귀에 혹이 나도록 들었네. 자넨 말 다르고, 하는 짓 다르단 말야. 이아고: 얼토당토않은 소리하지 마. 로더리고: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 난 이젠 빈털터리가 됐어. 데스데모나한테 준다고 자네가 가지고 간 보석이면 수녀처럼 절개 굳은 여자라도 손아귀에 넣고 남는 물건이야. 데스데모나가 그 보석을 받아들고 시뻐하면서 날 곧 만나 보고 싶어했다구 자네 입으로 말했지 않는가. 사람의 마음만 들뜨게 해놓구 흐지부지니 어찌된 노릇인가? 이아고: 좋아. 알았어, 됐다구. 로더리고: 됐다니? 알았다구? 알긴 뭘 알아. 도대체 뭐가 됐다는 건가? 비겁하잖은가. 자, 날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걸 이제 알았어. 이아고: 좋아 로더리고: 좋긴 뭐가 좋다는 거야. 내가 직접 데스데모나에게 부딪쳐 볼 테다. 만일 그녀가 보석을 돌려준다면 알겠나, 자네가 물어내야 돼. 이아고: 분명히 말했겠다. 로더리고: 말했구말구, 그리고 말한 것은 꼭 실천하겠어. 이아고: 음, 이제보니 자네 용기도 대단하군. 오늘 이 시각부터 자네를 다시 보겠네. 로더리고, 자, 악수하세. 자네가 결기를 긁어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이 일만은 분명히 말해야겠어. 이 일에 대해서 털끝만치도 꺼림칙한 점은 없네. 로더리고: 그렇게 보이질 않는 걸. 이아고: 하긴 그랬을 걸세, 그러니 자네가 그만한 결의와 용기, 남자다움을 갖고 있다면 그걸 오늘밤 내게 보여줄 수 없겠나? 만일 자네가 내일밤 데스데모나와 재미를 보지 못하게 된다면 의리를 배반한 죄로 날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어떤 수단을 써서 이 목숨을 요절내도 상관없네. 로더리고: 대체 그것이 뭐야? 도리가 서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이아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베니스에서 캐시오를 오델로의 후임으로 앉히라는 특명이 왔어. 로더리고: 정말인가? 그럼 오델로하고 데스데모나는 베니스로 돌아갈 게 아닌가? 이아고: 그렇지 않아. 그자는 아름다운 데스데모나를 데리고 고향인 모리테이니어로 가게 돼. 여기에 더 체재할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말일세. 그러니 못 가게 하기 위해서는 캐시오를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로더리고: 없애 버리다니, 무슨 뜻인가? 이아고: 즉 오델로의 후임 자리에 못 앉게 한단 말야. 골통을 빠개서 말일세. 로더리고: 그래, 그걸 날보고 하란 말인가? 이아고: 아무렴,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해보겠다는 용기만 있다면 말야. 그놈은 오늘밤 창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돼있어. 나도 가게 돼 있다구. 놈은 아직도 자기의 영전을 모르고 있거든. 그자의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시간은 자정에서 한 시 사이가 되도록 꾸밀 테니까 마음대로 해치우라구. 나도 옆에서 거들어 주지. 둘이서 때려잡세. 자, 그렇게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날 따라오라구. 그놈을 작살내지 않으면 안될 이유를 좀더 소상히 얘기해 주겠네. 내 얘길 들으면 납득이 갈 거야. 저녁시간이 됐는걸. 망설이다간 날이 새고 말겠어. 자, 어서 시작하세. 로더리고: 좀더 이유를 자세히 들려주게. 이아고: 가슴이 시원하도록 말해 주지. (두 사람 퇴장) [ 제3장 성채 안의 다른 방 ] 오델로, 로도비코, 데스데모나, 이밀리어, 시종들 등장. 로도비코: 장군,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오델로: 아닙니다. 좀 걷고 싶소이다. 로도비코: 동생도 그럼 안녕. 너무나 융숭한 대접 고맙다. 데스데모나: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델로: 그럼 갑시다. 참 여보--. 데스데모나: 네, 여보? 오델로: 당신은 일찌감치 자요. 금방 돌아올 거요. 시녀도 물러가게 하오. 알겠소! 데스데모나: 알겠어요. (오델로, 로도비코, 시종들 퇴장) 이밀리어: 장군님께선 좀 어떠세요? 아까보다 좀 풀리신 것 같군요. 데스데모나: 금방 돌아오신다고 하셨어. 나보고 먼저 자라고 하시더군. 이밀리어도 일찍 돌려보내라는 거야. 이밀리어: 절 돌려보내라고? 데스데모나: 그러셨어. 그러니까 이밀리어, 내 잠옷 갖다 주곤 가서 자요. 지금 비위를 거슬리면 안돼. 이밀리어: 아씨마님께서 하필이면 왜 그런 분을 만나셨을까! 데스데모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쌀쌀하게 구셔도, 야단을 지셔도, 기분 나쁜 얼굴빛을 지으셔도--이 핀 좀 빼줘--다 우아함과 매력으로 뵈거든. 이밀리어: 말씀하신 대로 그 홑이불을 깔아 놓았어요. 데스데모나: 아무래도 좋아. 참, 인간의 마음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나봐! 내가 만일 이밀리어보다 먼저 죽거든 저 홑이불로 싸 줘요! 이밀리어: 아이구 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데스데모나: 친정 어머니께서 부리시던 바아바리라는 계집애가 있었어. 그 애가 연애를 했어. 그런데 애인이 미쳐 가지고 바아바리를 버렸지 뭐야. 바아바리는 늘 '버들' 노래를 불렀지. 오래된 노래지만 바아바리의 운명을 암시한 것 같앴어. 그녀는 그 노래를 부르면 죽었거든. 오늘밤엔 웬일인지 그 노래가 생각나는군. 죽은 불쌍한 바아바리같이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 뭐야. 그럼, 어서 가서 자요. 이밀리어: 잠옷을 가져올까요? 데스데모나: 아니, 이 핀 좀 뽑아 줘. 로도비코 오라버님은 어느 모로 보나 참 훌륭한 분이셔! 이밀리어: 참 잘생기셨어요. 데스데모나: 구변도 좋으시고. 이밀리어: 베니스의 어떤 여자는 그분의 입을 맞출 수 있다면 팔레스타인까지라도 맨발로 좇아가겠다고 했어요. 데스데모나: (노래한다) 가련한 처녀는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한숨지며 푸르른 버들잎 노래 부르네. 가슴에 손을 얹고 무릎에 머리 묻고 버들잎 버들잎 노래 부르네. 시냇물도 처녀의 슬픔을 속삭이며 흐르네. 버들잎 버들잎 노래 부르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무정한 바위도 슬픔을 느껴-- 버들잎 버들잎 노래 부르네. 이걸 저리 치워요. (데스데모나, 옷을 이밀리어에게 건넨다) (또 노래한다) 버들잎 버들잎-- 어서 가봐 장군님께서 곧 오실 테니. (또 노래한다) 아 푸르고 푸른 버들잎은 나의 꽃족도리. 어찌 그를 원망하리. 죄는 내게 있다오-- 틀렸네. 이건 그 다음이 아닌 걸. 들어봐! 누가 문을 두드리잖아? 이밀리어: 바람예요. 데스데모나: (노래한다) 몰인정하다고 푸념했더니 그 님은 차가운 대답을 하네. 버들잎 버들잎 노래 부르네. 내가 딴 여잘 사랑하거든 너도 딴 남자와 자렴. 어서 가서 자요. 잘 자요. 눈이 가렵군. 눈물이 나오려나봐? 이밀리어: 그런 게 아닐 거예요. 데스데모나: 그렇다던데 뭘. 아 남자란, 남자란, 이밀리어, 정말일까? 어떻게 생각하지, 내게 말해 줘. 이밀리어. 세상엔 남편을 감쪽같이 속이는 여자들이 있다던데? 이밀리어: 그야 있을 테죠, 물론. 데스데모나: 온 세상을 다 준다면 넌 그런 짓을 하겠어? 이밀리어: 그럼 아씨마님께서는 안하겠어요? 데스데모나: 저 달님에게 맹세해. 절대로 하지 않아. 이밀리어: 저도 달님이 보는 데서는 안해요. 어두운 데서야 어때요? 데스데모나: 이 세상을 다 준다면 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밀리어: 이 세상이 얼마나 큽니까? 손톱 만한 죄를 저지르고, 그렇게 큰 대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야. 데스데모나: 그럴 리가 없어. 네가 그런 짓은 안할 거야. 이밀리어: 왜 한 해요? 배 지나간 강물인 걸요. 하고 나서 시치미를 딱 떼면 돼요. 그렇다구 쌍가락지 한 개라든지, 명주 서너 자, 저고리, 속옷, 모자, 또는 용돈 같은 것으론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온 세상을 다 준다면 야, 잠깐 다른 남자 보는 거쯤 누군들 안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내 남편을 군주로 만들 수 있거든요. 저 같으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더라도 하겠어요. 데스데모나: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난 죽어도 그런 나쁜 짓은 할 수 없어. 이밀리어: 나쁜 짓이라 해도 이 세상 안에서의 죄가 아닌 가요? 보수로 이 세상이 아씨마님 것이 된다면 그건 결국 아씨마님 세계 안의 일이 아녜요? 그러니 곧바로 죄가 안된다고 정해 버리면 그만이죠 뭐? 데스데모나: 그런 여자가 있을 라고. 이밀리어: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그뿐 인가요. 그런 짓을 해서 생긴 자식들도 이 세상을 꽉 채울 만큼 있을 겨예요. 그렇지만 아내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건 남편의 잘못이에요. 남편 구실을 태만해 하고 우리들 아내에게 주어야 할 보물을 다른 계집의 무릎에 퍼붓고, 또는 바보스런 질투에 날뛰며 우리들을 가두고, 매질이나 하고, 심술궂게 용돈을 줄이기를 떡먹듯이 하니 우리들이라고 화내지 말란 법 없지 않겠어요. 제아무리 정숙한 여자라 해도 복수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아내들도 남편들처럼 눈이 없습니까, 코가 없습니까? 단맛도 신맛도 맛볼 줄 알거든요. 뭣 때문에 남자들은 이 여자 저 여자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장난 삼아서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혹시 여색을 좋아하게 타고난 천성 때문에 그럴까요? 그렇지도 모르죠. 혹시 여색을 좋아하게 타고난 천성 때문에 그럴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한때 바람이 나는 건 의지가 나약하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들 여자들이라고 해서 바람기가 없어야 하나요? 색을 좋아할 줄도 모른단 말이에요? 약한 의지조차도 없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남자도 우리 여자들을 소중히 여겨 주던가 아니면 남정네들에게 알려 주어야 해요. 아내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남자들의 악행이 본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구요. 데스데모나: 됐어. 어서 가서 자요. (이밀리어 퇴장) 주여, 저를 인도하소서. 악을 본뜨지 말고 악으로 인해 저 자신을 교정하게 하소서. (퇴장). [ 제5막 ] 아아, 그분은 계략에 걸렸어요. 나도 이젠 파멸이군요! - 2장 데스데모나 대사 중에서 [ 제1장 사이프러스 섬. 성채 앞의 거리 ] 이아고, 로더리고 등장. 이아고: 이봐, 이 노점 뒤에 숨어 있게. 그자가 곧 온다고. 칼을 빼들고 있다가 단숨에 폭 찌르란 말야. 자, 어서! 겁낼 것 없어. 내가 옆에 있잖은가. 이것이야말로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임이 명심해.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돼. 로더리고: 내 옆에 꼭 있어 주게. 실수할지도 모르니까. 이아고: 옆에 있을 테니 용기를 내게. 칼로 찌를 채비를 해. (한쪽으로 물러선다) 로더리고: 별로 마음이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저 친구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해. 그래봤자 사람 하나 없어지는 것뿐인 걸. 자, 칼을 빼자! 넌 이제 죽었다. 이아고: (방백) 저 여드름바가지를 아프도록 마구 비벼놨더니, 성화가 나는 모양인 걸. 좌우지간 저자가 캐시오를 죽이든지, 캐시오가 저 녀석을 요절내든지, 아니면 싸우다 두 놈이 다 죽든지, 난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는 거다. 그렇지만 로더리고가 살아 남는 날엔 데스데모 나에게 준다고 울궈먹은 막대한 돈과 보석을 내놓으라고 할 테지. 안 될 소리다. 그러나 캐시오가 살아 남으면 그자의 하는 일이 훌륭하니 내 꼴이 볼품없게 될 거고. 그런데다 무어가 내가 한 말을 캐시오한테 해버린다면? 내가 결단나고 말 거야. 안돼, 살려둬선 안돼. 해치워야지. 오는 모양이군. 캐시오 등장. 로더리고: 걸음걸이가 꼭 그놈이다. 틀림없다. 이 악당아, 내 칼 받아라! (캐시오를 찌른다) 캐시오: 하마터면 단칼에 목숨이 날아갈 뻔했군. 옷의 안이 단단하니 망정이지. 어디 네 놈의 옷은 어떤가 보자. (칼을 빼가지고 로더리고 에게 상처를 입힌다) 로더리고: 아이쿠, 나 죽는다! (이때 이아고가 뒤에서 캐시오의 다리를 찌르고 도주한다) 캐시오: 다리가 찔렸다. 사람 살려! 살인이다! 살인! (쓰러진다) 오델로 등장. 오델로: 캐시오 목소리다. 아이고가 약속을 지켰구나. 로더리고: 아, 내가 죽일 놈이었어! 오델로: 암, 그렇고말고. 캐시오: 사람 살려요, 사람! 불 밝혀! 의사를 불러! 오델로: 그자다--이아고는 과연 용감하고 충직하고 의협심이 있어. 친구가 받은 치욕을 훌륭하게 갚아 주었구나! 너한테 배운 점이 크다. 매춘부야, 내년 새서방은 이렇게 죽었다. 네년의 저주받은 운명도 멀잖아 끝장이다. 매춘부, 내가 간다. 내 가슴에서 네년의 매력도 샘도, 보석같은 눈빛도 사라졌다. 정욕에 더럽힌 너의 침대를 정욕의 피로 물들여 주마. (퇴장) 로도비코, 그레이쉬아노 등장. 캐시오: 여봐라! 경비도 없나?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사람 살려! 살인이오! 그레이쉬아노: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심상치 않은 소리다. 캐시오: 사람 살려! 로도비코: 또 소리를 지르는군! 로더리고: 아, 내가 몹쓸 놈이야! 로도비코: 신음하는 소리가 두세 사람 있는 것 같다. 으스스한 밤이군. 무슨 계략이 있는 것 같아. 섣불리 가까이 갔다간 위험하겠지. 안심찮으니 몇 사람 더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로더리고: 아무도 없어? 이렇게 피가 흐르면 난 죽어. 로도비코: 저건 또 뭐야! 이아고: 횃불을 들고 등장. 그레이쉬아노: 누가 내복 바람으로 횃불을 들고 오는군, 칼도 들었는데. 이아고: 누구요? 사람 살리라고 외친 사람이? 로도비코: 우린 모르오. 이아고: 고함소릴 못 들으셨나요? 캐시오: 여기요, 여기! 제발 좀 살려줘요! 이아고: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레이쉬아노: 분명 오델로 장군의 기수가 아닌가. 로도비코: 그렇군요, 매우 용감한 친구죠. 이아고: 누가 그렇게 죽는 소릴 질러? 캐시오: 이아곤가? 아, 당했어, 괴한들한테 당했네. 나좀 도와주게. 이아고: 아니, 부관님이 아니십니까! 어떤 죽일 놈들이 이따위 짓을 했어요? 캐시오: 한 놈은 근처에 있을 거다. 미처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이아고: 아아, 괘씸한 놈들! (로도비코와 그레이쉬아노에게) 댁들은 뉘시오? 이리 와서 거들어 주시오. 로더리고: 아, 사람 살려! 캐시오: 저놈도 한패거리야, 이아고: 에이, 살인마! 죽일 놈! (로더리고를 찌른다) 로더리고: 아 날 속였어, 이아고! 이 개 같은 놈아! 이아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죽여?--그 악당들은 어디로 도망쳤어?--이 거리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 고요할까!--야! 살인이다! 살인!-- (로도비코와 그레이쉬아노에게) 당신들은 누구요? 대체 어느 편이오, 선량한 시민이오, 악당이오? 로도비코: 사람을 보고 평가하라구. 이아고: 로도비코 대감이 아니십니까? 로도비코: 그렇소. 이아고: 죄송합니다. 캐시오가 괴한한테 당했군요. 그레이쉬아노: 캐시오가? 이아고: 어때요, 상처는? 캐시오: 다리가 부러졌어. 이아고: 원 큰일이군! 두 어르신네, 횃불을 좀 들어주십시오. 제 셔츠로 동여매겠습니다. 비앵커 등장. 비앵커: 무슨 일이에요, 네? 누구예요, 소릴 지른 사람이? 이아고: 누가 소릴 질렀느냐고? 비앵커: 아이구, 나의 캐시오님이잖아요! 나의 사랑하는 캐시오님! 아아 캐시오, 캐시오! 이아고: 어이구,이름 난 창녀로군!--캐시오님, 누가 이처럼 중상을 입혔는지 짐작하시겠어요? 캐시오: 아니. 그레이쉬아노: 이런 데서 뵙게 되다니 유감천만이오. 당신을 찾아다녔소. 이아고: 양말대님 좀 빌려 줘요. 됐어. 들것 같은 게 있으면 편안히 운반할 수 있겠는데. 비앵커: 이를 어째, 기절하셨네! 오, 캐시오, 캐시오, 캐시오님! 이아고: 여러분, 암만해도 이 말괄량이가 이 상해사건에 한패인 것 같습니다. 캐시오님, 조그만 더 참으세요. 자, 자, 횃불을 가까이 대 주십시오. 이자가 누군지 얼굴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내 친구잖아? 한 고향 사람? 로더리고 같은데? 틀려--아냐, 틀림없어--분명히 로더리고다! 그레이쉬아노: 뭐,베니스의? 이아고: 바로 그렇습니다. 그를 아십니까? 그레이쉬아노: 알다 뿐인가. 이아고: 그레이쉬아노 대감이십니까?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북새통에 정신이 혼미해서 미처 알아 뵙질 못했습니다. 그레이쉬아노: 만나서 반갑군. 이아고: 캐시오님, 어떠세요? 야, 들것을, 어서 들 것을! 그레이쉬아노: 로더리고라고? 이아고: 네, 맞습니다. 그잡니다! (들것이 운반되어 온다) 됐어, 잘 됐어, 들것이 왔다. 누구든지 좋으니 조심해서 메고 가 주세요. 난 장군님의 주치의를 불러올 테니까요. (비앵커에게) 색시, 공연히 설치지 말어. (캐시오에게) 여기 죽은 사람은 제 친구인데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습니까? 캐시오: 전혀 없어. 난 모르는 사람이야. 이아고: (비앵커에게) 얼굴이 백지장 같군. 어서 집안으로 메고 가요. (캐시오와 로더리고 실려 나간다) 여러분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앵커에게) 색시 안색이 창백하군? (다른 사람들에게) 저 여자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실까요? 그렇게 쏘아봐도 소용없어. 내가 토설안하고는 못 뱃길 테니까. 저 여자를 잘 보세요. 잘 보아주세요.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악행은 혓바닥을 놀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밀리어 등장 이밀리어: 아이구, 웬일예요? 여보, 어찌된 거예요? 이아고: 캐시오님이 캄캄한 데서 칼에 맞으셨어, 로더리고하고 도망간 그자 패거리한테. 캐시오님은 중상이구, 로더리고는 죽구. 이밀리어: 가엾어라, 그 착하신 분이! 가여우셔라, 캐시오님이 다치시다니! 이아고: 그게 다 계집일 때문이지. 여보, 캐시오님이 오늘밤 어디서 식사를 했는지 알아보고 와요. (비앵커에게) 왜 그래, 왜 내 말을 듣고 떠는 거야? 비앵커: 우리 집에서 식사하셨어요.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떠는 건 아녜요. 이아고: 네 집에서? 체포할 테다, 따라오라구. 이밀리어: 더러운 화냥년, 뒈져 버려! 비앵커: 난 화냥년이 아니에요. 욕을 퍼붓는 당신처럼 나도 떳떳하게 살고 있다구요. 이밀리어: 뭐 나처럼? 흥! 뒈져 버려! 이아고: 여러분, 캐시오님이 치료받는 걸 보러 가십시다. (비앵커에게) 여봐 색시, 네가 실토할 일이 또 있다. 여보, 당신은 성채 안으로 들어가서 장군님 내외분께 이 일을 보고 드려. (이밀리어 퇴장) 어서들 가실까요. (이아고를 제외하고 모두 퇴장) (방백) 오늘밤 내 운명이 성공이냐 실패냐 결판이 나겠구나. [ 제2장 성채 안의 데스데모나의 침실 ] 데스데모나, 침대에서 자고 있다. 오델로, 촛불을 들고 등장, 문에 자물쇠를 채운다. 오델로: 그것 때문이다, 진정 그것 때문이다. 나의 넋이여. 순결한 별들아, 다시는 그것을 입밖에 내지 않게 해다오.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의 피는 흘리지 말자. 눈보다 희고, 대리석보다 매끄러운 아내 살결에 상처는 낼 수 없다. 하지만 살려둘 수는 없는 일. 살려두면 또 다른 남자들을 배신할 터인즉, 우선 이 불을 끄고 다음에 생명의 불을 끄자. 타오르는 촛불아, 너는 껐다가도 뉘우치면 다시 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빛, 정교한 대자연이 창조한 아름다운 빛이여, 너는 한번 꺼지면 다시 불을 켤 수 있다는 저 프로미디어스의 불을 찾아 어디를 헤매야 한단 말인가. (촛불을 놓는다) 장미는 한번 꺾이면 영영 살아 날 길이 없다. 시들어 버리고 만다.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 향기를 맡아보자. (키스한다) 아, 향기로운 입김, 정의의 신도 이 냄새를 맡는 다면 칼을 부러뜨리고 싶을 거다. 또 한 번, 한 번만 더 입을 맞추자! 죽은 다음에도 이대로 있어다오. 널 죽일지언정 내 사랑이 변치 않게 말이다. 또 한번만, 이게 마지막이다.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이처럼 죄 많은 여자가 또 있을까. 아, 눈물을 참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이 눈물은 잔인한 눈물, 하늘의 슬픔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벌을 주는 신의 채찍이다. 눈을 뜨는군. 데스데모나: 누구예요? 당신? 오델로: 그렇소,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어서 주무세요, 여보. 오델로: 밤기도는 올렸소, 데스데몬? 데스데모나: 네, 여보. 오델로: 아직도 신의 용서를 받지 않은 죄가 있으면 잘 생각해서 지금 곧 용서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오. 데스데모나: 왜 그러세요, 여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델로: 자, 빨리 끝내요. 잠시 거닐고 있을 테니. 마음의 준비가 안된 당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소. 절대로 그럴 순 없어. 당신의 영혼마저 죽이고 싶지는 않소. 데스데모나: 죽이신다구요? 오델로: 그렇소 데스데모나: 아, 하나님, 은총을 베푸소서! 오델로: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빌겠소. 데스데모나: 그러시다면 설마 절 죽이지는 않겠죠. 오델로: 흠! 데스데모나: 그렇지만 전 겁이 나요. 눈을 그렇게 굴리실 때는 으레 무서운 결심을 하시니까요. 왜 두려운 걸까?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쁜 짓은 안했는데 어쩐지 두려워요. 오델로: 당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라구. 데스데모나: 제게 죄가 있다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뿐이에요. 오델로: 그래, 그 때문에 넌 죽어야 해. 데스데모나: 너무하세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니오? 아아, 왜 그렇게 아랫입술을 깨무세요? 온몸을 부르르 떨고 계신 걸 보니, 무슨 무서운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런 예감이 들어요. 하지만 설마 한들 절 죽이지는 않으실 테죠? 오델로: 에이, 같잖은 소리 닥쳐! 데스데모나: 네, 그러지요. 왜 그러세요? 오델로: 내가 소중히 여기던 손수건을 당신에게 주었소. 그걸 당신은 캐시오에게 줬겠다? 데스데모나: 절대로 주지 않았어요. 맹세해요! 그 사람을 불러다 물어 보세요. 오델로: 요 깜찍한 것아, 잘 생각해 봐.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돼 넌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거야. 데스데모나: 그래요, 그러나 아직 죽을 수 없어요. 오델로: 곧 죽게 된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죄를 털어놔. 하나하나 맹세를 하고 방패막이한들 소용없다구. 내가 이렇게 생가슴을 뜯으면서 괴로워하는 확실한 꼬투리를 뭉개 버리거나 취소할 순 없어, 넌 죽는 거야. 데스데모나: 아, 신이여, 이 몸을 굽어살펴 주소서! 오델로: 나도 그렇게 기도한다. 데스데모나: 그럼 당신도 절 지켜주십시오. 전 한번도 당신을 배신한 적이 없어요. 캐시오를 사랑하다니 될 법한 소린가요? 단지 보통 생각으로 그분에게 호의를 느꼈을 뿐이예요. 선물 같은 건 준 일도 없어요. 오델로: 그자가 내 손수건을 가진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암큼떨지마! 넌 내 마을을 돌로 만들 셈이야. 재물을 바치려는 나를 단순한 살인자를 만들 셈이냐. 난 그 손수건을 봤어. 데스데모나: 그럼 그 사람이 어디서 주웠겠죠. 전 절대로 준 일이 없어요. 그 사람을 이리로 오라고 하세요. 사실 얘기를 들어보세요. 오델로: 벌써 자백했어. 데스데모나: 뭐라고요? 오델로: 널 손아귀에 넣었다고. 데스데모나: 어떻게요? 간통을 했단 말예요? 오델로: 그래. 데스데모나: 그렇게 말할 리가 없어요. 오델로: 천만에. 그자의 입은 이미 굳어져 버렸어. 충실한 이아고가 처치해 버렸거든. 데스데모나: 아, 무서운 예감이 떠올라. 역시 그 사람 살해됐군요? 오델로: 그놈의 머리칼 하나하나마다 목숨이 붙어 있어 그걸 다 죽인다 해도 이 사무친 원한을 풀기에는 너무나 모자란다. 데스데모나: 아아, 구분은 계략에 걸렸어요. 나도 이젠 파멸이군요! 오델로: 입 닥쳐, 매춘부야! 내 앞에서 그놈 때문에 눈물을 흘려? 데스데모나: 절 쫓아내도 좋아요. 죽이는 것만은 마세요! 오델로: 그만둬, 이 매춘부야! 데스데모나: 죽이는 건 내일로 하고, 오늘밤만은 살려 주세요! 오델로: 꼴도 보기 싫다. 악을 써도 소용없어--. 데스데모나: 반시간만이라도! 오델로: 이렇게 된 이상엔 기다릴 수 없어! 데스데모나: 한마디 기도 올릴 동안만이라도요! 오델로: 이미 늦었어. (데스데모나의 목을 조른다) 이밀리어: (문 밖에서) 나리, 나리! 열어 주세요, 네? 나리, 나리! 오델로: 저건 무슨 소리지? 아직 죽지 않았는가?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가? 비록 잔인한 짓은 했을망정 자비심마저 없지는 않다. 오래 괴롭히고 싶지 않다. 이것으로 됐지, 됐지. 이밀리어: (문 밖에서) 절 좀 보세요! 나리, 나리! 오델로: 누구야? 이밀리어: (문 밖에서) 아이구, 장군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요. 오델로: 음, 이밀리언가--곧 열어 주마- 이젠 죽었겠지--캐시오가 죽었다는 통보를 하러 왔을 게다. 아까는 그 여자 목소리가 컸었구나. 음!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무덤처럼 고요하다--저 여자, 들어오라고 할까? 괜찮을까요? 또 움직인 것 같다. 아냐--어쩌면 좋을까요? 저 여자가 들어오면 내 아내한테 말을 걸겠지. 내 아내! 내 아내라니! 무슨 놈의 아내냐? 나한테 아내는 없어. 아아, 아아, 못 견디겠구나!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지금 당장에라도 굉장한 월식과 일식이 일어나 이 지구가 천지이변에 소스라치게 놀라--입을 벌리며 쪼개질 것 같구나! 이밀리어: (문 밖에서) 꼭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나리! 오델로: 깜빡 잊었군. 그래 들어와. 이밀리어. 잠깐 기다려, 지금 열어줄 테니, 휘장을 쳐 놔야지. (침대의 휘장을 친다. 문을 연다) 어디 있나? 이밀리어 등장. 이렇게 늦게 무슨 일야? 이밀리어: 나리, 저기서 무시무시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오델로: 아니, 지금? 이밀리어: 지금 금방요. 오델로: 달이 궤도를 헛디뎠을 거다. 달이 여느 때보다 지구와 가까워지면 사람을 실성하게 만든다더군. 이밀리어: 캐시님이 로더리고라는 베니스 청년을 죽였대요. 오델로: 로더리고가 죽었어? 그리고 캐시오도 죽었구? 이밀리어: 아뇨, 캐시오님은 죽지 않았어요. 오델로: 캐시오는 안 죽었다고! 아뿔싸, 살인이 빗나갔구나. 달콤한 복수가 나무아미타불이 됐군. 데스데모나: 아아, 억울해, 억울하게 살해됐어! 이밀리어: 나리! 저 소린? 오델로: 뭐? 저 소리라니? 이밀리어: 이를 어쩌지, 틀림없이 아씨마님 목소리예요! 누가 좀 와줘요! 사람 살려요, 네! 사람 살려요! (침대 휘장를 제낀다) 어이구 아씨마님, 한 번만 더 말씀하세요! 데스데모나님! 아씨마님, 말씀 좀 하세요! 데스데모나: 난 죄가 없는데도 죽어. 이밀리어: 아이구머니, 누가 이런 짓을 했어요? 데스데모나: 아무도 아니야--내 자신이 한 짓이야. 잘 있어요. 친절한 서방님께 잘 말씀드려요. 아아, 잘 있어! (죽는다) 오델로: 이봐, 그 여자가 어떻게 살해됐다고 하는 거야? 이밀리어: 아아, 그걸 누가 알겠어요? 오델로: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그랬지? 이밀리어: 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대로 보고하겠어요. 오델로: 그 여잔 거짓말쟁이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지옥으로 떨어졌을 거다! 그 여자를 죽인 건 나다. 이밀리어: 오, 그렇다면 더욱 더 아씨마님은 천사시고 나리는 사악한 악마예요! 오델로: 그 여잔 어리석은 짓을 했어, 매춘부였어. 이밀리어: 아씨마님을 그렇게 모욕하시다니, 나리는 악마예요. 오델로: 물거품처럼 들뜬 바람둥이 계집이었어. 이밀리어: 나리는 불처럼 분별이 없군요. 아씨마님이 바람둥이라고요? 오, 천사 같으신 정숙한 부인이셨는데! 오델로: 캐시오하고 정을 통했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네 서방에게 물어 봐. 무턱대고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른 거라면 내가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져도 좋다. 네 남편이 잘 알고 있다. 이밀리어: 제 남편이! 오델로: 네 남편 말이다. 이밀리어: 아씨마님이 바람둥이라고요? 오델로: 그래, 캐시오하고. 만일 그 여자가 정숙한 아내였다면 설령 하늘이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보석으로 된 별개의 세계를 나를 위해 만들어 준다 해도 난 아내와 바꾸지 않았을 거다. 이밀리어: 제 남편이? 오델로: 그렇다, 최초에 내게 귀띔해 준 건 네 서방이었다. 충신한 사람이니까, 부정한 행위에 따라붙은 욕스러움을 참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밀리어: 제 남편이? 오델로: 여러 말 마라. 이 여편네야, 네 서방이라고 했다. 이밀리어: 아 아씨마님, 흉악한 계략이 사랑을 희롱한 거예요! 제 남편이 아씨마님을 바람둥이라고요? 오델로: 그 사람이다. 이 여편네야. 네 남편이 그랬어. 그 뜻을 이제 알겠느냐? 내 친구요, 네 서방인 충직하고 충직한 이아고 말이다. 이밀리어: 그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 간악한 영혼은 속속들이 썩어 문드러져라! 그 따위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담! 아씨마님은 이 몹쓸 더러운 남자를 뭣 때문에 살뜰히 사라하셨을까! 오델로: 뭐야? 이밀리어: 직성이 풀리시도록 실컷 패악질을 해 봐야. 분에 넘치는 부인을 이렇게 해꼬지한 나리는 천당 가기는 다 틀렸어요. 오델로: 입 닥치지 못해, 재미없어! 이밀리어: 해지려면 해보세요. 이 이상 가슴이 아플 수는 없으니. 아아, 천치! 아아, 얼뜨기! 개차반! 이게 무슨 짓이야--(오델로 칼을 만진다) 그 따위 칼을 무서워할 줄 알아? 당신이 한 짓을 온 천하에 떠들어 댈 거다. 죽이고 싶거든 어서 죽여봐. 사람 살려! 어이구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무어가 아씨마님을 죽였어요! 살인이오! 살인이오! 몬타노, 그레이쉬아노, 이아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 등장. 몬타노: 무슨 일이야? 장군, 무슨 일입니까? 이밀리어: 여보, 잘 왔수. 참 장하시구려. 당신도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됐으니. 그레이쉬아노: 무슨 일이냐? 이밀리어: 여보, 당신도 사내 대장부라면 이 악한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 좀 해봐요. 글쎄, 아씨마님이 간통했다는 걸 당신한테 들었다지 뭐유. 당신이 그럴 리 없죠? 당신은 그런 악당은 아닐 거야. 어서 말해봐요, 답답해 죽겠어요. 이아고: 난 생각한 대로 말했을 뿐이야. 그 내용은 장군님도 그대로 시인하셨다구. 그것뿐야. 이밀리어: 하지만 아씨마님께서 행실이 부정하다고 말한 건 아니겠죠? 이아고: 했지. 이밀리어: 거짓말을 했군, 어째서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했어요! 내 맹세해요, 그건 거짓말예요! 터무니없는 거짓말예요! 아씨마님이 캐시오하고 간통했다고요? 캐시오라고 했죠? 이아고: 그래, 캐시오하고. 이 여편네야,그만 조잘대. 이밀리어: 그럴 수 없어요. 떠들어댈 테야. 아씨마님은 이 침상(침상)에서 살해당했어요. 일동: 뭐라고? 이밀리어: 당신이 그 따위 말을 했기 때문에 살해당한 거예요. 오델로: 아냐, 다들 그렇게 놀랄 거 없소이다. 전적으로 사실이니까. 그레이쉬아노: 이런 해괴한 변이 있나. 몬타노: 아, 끔찍한 일이로군! 이밀리어: 악독한 계략이야. 그래, 악독한 계략! 이제 생각이 나는군--어쩐지 예감이 이상했어!--아, 어쩌면 그렇게 악독할 수 있담! 그때도 미심쩍긴 했어.--슬퍼 죽겠네--아, 악독해, 너무해! 이아고: 아니, 이게 미쳤나? 당장 집으로 가지 못해! 이밀리어: 여러분,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 남편 말을 좇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못하겠어요. 이것 봐요, 난 다시는 집으로 안 가요. 오델로: 아아! 아아! 아아! (침대 위에 쓰러진다) 이밀리어: 그래요, 그렇게 쓰러져서 실컷 으르렁대 봐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분을 죽였어. 오델로: 아니, 저것은 간통을 했어! (일어선다, 그레이쉬아노에게) 몰라 뵈었습니다. 숙부님! 저기 당신의 질녀가 쓰러져 있습니다. 지금 막 제 손으로 숨을 끊어 놓았지요. 물론 끔찍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레이쉬아노: 가엾은 데스데몬!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신 게 천만다행이다. 네 결혼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아 종시 비탄한 나머지 목숨을 끊으셨다. 만일 더 사시어 이런 꼴을 보셨다면 무슨 일을 하셨을지 모를 일. 필시 곁에 있는 천사들마저 저주하며 떠밀어 버리시고 지옥에 떨어지셨는지도 모르지. 오델로: 어쨌든 불쌍한 일입니다만 이 여잔 캐시오하고 추잡한 짓을 수없이 해온 것을 이아고가 잘 알고 있습니다. 캐시오가 자백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나의 사랑의 표시인 첫선물로 준 물건을 애욕의 대가로 간부놈에게 준 것입니다. 그놈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봤으니까요. 그것은 비록 한 장의 손수건이나, 나의 아버님이 어머님께 주신 유품이었습니다. 이밀리어: 아, 하느님, 이를 어쩌면 좋아! 이아고: 바보, 아가리 닥치지 못해! 이밀리어: 말하고 말테다. 신이건, 사람이건, 악마건 모두 몰려와서 입을 다물라고 호통 쳐도 말할 테다. 이아고: 나불대지 말고 순순히 집으로 가. 이밀리어: 난 안 가. (이아고 칼로 이밀리어를 찌르려고 한다) 그레이쉬아노: 이게 무슨 짓이야! 여자한테 칼을 쓰다니? 이밀리어: 이 무지렁이 바보 무어야, 네가 말한 손수건은 내가 우연히 주워서 남편에게 줬어. 그런 하찮은 물건을 갖고 하도 추근추근하게 졸라대서 이상은 했지만 나에게 그걸 훔쳐 달라고 했던 거야. 이아고: 저 육시랄 년이! 이밀리어: 칼을 물고 엎어지지 거짓말은 안 한다. 여러분, 거짓말이 아닙니다. (오델로에게) 이런 천치 살인마! 이런 지지리 못난 인간한테 저런 훌륭한 부인을 어쩌면 그럴 수가! 오델로: 하늘에 사람머리를 박살내 줄 벼락 말고 돌은 없는가! 이 간악한 놈! (무어, 이아고에게 달려들지만 몬타노에게 칼을 뺏긴다. 혼란스런 와중에 이아고가 뒤에서 이밀리어를 죽인다) 그레이쉬아노: 이아고 부인이 넘어졌다. 그놈이 제 아내를 찔렀다. 이밀리어: 아아, 그래요. 절 아씨마님 옆에 눕혀 주세요. (이아고 퇴장) 그레이쉬아노: 뺑소니쳤어. 아내를 죽이고. 몬타노: 극안무도한 악당이다. 이 칼을 받아 주시오. 무어한테서 뺏은 겁니다. 문 밖에서 잘 지켜 주시오. 무어를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덤벼들면 차라리 죽여 버리시오. 난 저 악당을 쫓아갈 테니까. 천하에 죽일 놈. (오델로와 이밀리어를 제외하고 무도 퇴장) 오델로: 난 용기마저 잃어버렸구나. 풋내기가 내 손에서 칼을 빼앗아가다니. 아, 인간이 지녀야 할 명예마저 없어진 내가 무용을 자랑한들 무엇하리. 이젠 아무 미련도 없다. 이밀리어: 아씨마님, 그 노래는 무슨 전조였나 봐요. 들어 보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전 백조처럼 노래를 부르다 죽겠어요. (노래한다) 버들잎 버들잎 무어장군님, 아시마님께선 결백하셨습니다. 당신을 목숨으로 사랑했어요, 잔인한 무어님, 전 참말만 했으니, 제 영혼은 천당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먹은 것을 이야기하며, 아아, 전 죽어요. (죽는다) 오델로: 이 방엔 칼이 또 하나 있을 거다. 스페인 보검 말이다. 얼음처럼 찬 시냇물로 두들겨 만든 칼이지. 오, 여기 있다--숙부님,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레이쉬아노: (문 밖에서) 그 따위 짓을 하면 죽을 줄 알라. 넌 무기도 안 가졌어. 국으로 틀어박혀 있어. 오델로: 그럼 이리로 들어 오셔서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맨주먹으로라도 대들 겁니다. 그레이쉬아노: 다시 등장. 그레이쉬아노: 왜 그러나? 오델로: 자 보십시오, 저도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보검은 지금까지 어떤 군인도 허리에 차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한때는 보잘것없으니 이 팔뚝과 이 멋진 칼로 단신 같은 사람의 몇십 배나 강한 장애도 한칼에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이젠 쓸데없는 호언장담이지! 누가 운명의 힘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젠 다 글렀소. 제 손에 칼이 쥐어졌다고 두려워 마십시오. 이제 제 인생의 여로도 끝났습니다. 여기가 저의 목적지, 저의 최후의 항해의 진짜 목적지입니다. 왜 무서워서 뒷걸음질치는 겁니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오델로의 가슴에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자아, 당신의 얼굴을 봅시다. 아, 불운하게 태어난 여인, 속옷처럼 창백한 얼굴! 최후의 심판날, 당신을 만나게 되면 당신의 얼굴빛을 보기만 해도 내 영혼은 하늘에서 내팽개쳐져서 지옥의 악귀들이 덤벼들어 걸신스럽게 뜯어먹을 거요. 아, 싸늘하다 못해 차디찬 당신! 당신의 정조와도 같구려. 아, 저주받은 천하에 잔인무도한 이 몸! 악마들이여, 이 천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 채찍질하여 쫓아다오! 저 모진 바람 속에 날 휘몰아 내다오! 유황불 속에 나를 지글지글 태워다오! 타오르는 지옥의 불바다 속에 깊숙이 담궈다오! 아 데스데몬! 죽어 버렸구려! 당신은 갔구려! 아! 아! 로도비코, 몬타노, 단가에 실린 캐시오, 그 뒤에 관리들이 이아고를 체포하여 등장. 로도비코: 이런 경솔한 짓을 하다니, 그 불행한 사람은 어디 있소? 오델로: 예전엔 오델로라고 불리었던 자, 여기 있습니다. 로도비코: 그 독사 같은 놈은 어디 있소? 이리 끌어내시오. 오델로: 악마는 발끝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는데--그건 만들어 낸 얘긴가? 네놈이 악마라면 이 칼이 들어가지 않을 거다. (이아고를 찌른다) 로도비코: 저 칼을 뺏으라. (오델로 칼을 빼앗긴다) 이아고: 피는 나지만 죽지는 않는다. 오델로: 나는 서운할 것 없다. 너를 살려 두고 싶다. 죽는 것이 오히려 편안할 것 같으니 말이다. 로도비코: 오델로 장군, 그렇게 훌륭하신 당신이 이런 간악한 자의 간계에 발목이 잡히시다니, 뭐라고 할말이 없소이다. 오델로: 뭐라고 해도 상관없소. 명예로운 살인자라고나 해주시오. 난 증오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 오직 명예를 위해서였소. 로도비코: 이놈은 죄상의 일부를 실토했소. 당신은 이놈과 공모하여 캐시오를 죽이려고 하였소? 오델로: 그렇소이다. 캐시오: 장군님, 전 미움을 받을 이유라고는 없습니다. 오델로: 나도 다 알고 있네, 용서하게, 이 악마 같은 놈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내 영혼과 육체를 구렁 속에 틀어박았는지 물어 봐 주겠소? 이아고: 물어볼 것 없소. 그만큼 알았으면 되지 않소이까? 지금부터는 입을 열지 않겠소. 로도비코: 뭐야, 기도도 안 할 테야? 그레이쉬아노: 고문을 해서라도 입을 열게 할 테다. 오델로: (이아고에게) 그렇지, 입을 닥치는 게 상책이겠지. 로도비코: 장군, 일어난 일을 알려드리지요. 아직은 모르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여기 살해당한 로더리고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편지가 있소. 여기 또 한통이 있고. 그 한 편지 속에 로더리고의 필적으로 캐시오를 암살할 계획이 적혀 있소이다. 오델로: 죽일 놈! 캐시오: 천인공노할 놈! 로도비코: 여기 또 하나 불평을 늘어놓은 편지가 있소. 이것도 로더리고의 주머니 속에 있었소이다. 필시 로더리고는 이것을 저 염병할 악당에게 보내려고 쓴 것 같소. 그런데 아마 보내기 전에 이아고가 왔고 그의 발림수에 넘어간 모양이오. 오델로: (이아고에게) 천하에 못된 놈! 캐시오, 자넨 어떻게 내 아내의 것이었던 손수건을 손에 넣었나? 캐시오: 제 방에서 주웠습니다. 지금 막 이아고가 자백하는 걸 들어 보면 일부러 제 방에 떨어뜨려 놓았더니 제대로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오델로: 아, 난 바보였어! 바보! 바보! 캐시오: 그만이 아닙니다, 로더리고의 편지 속에 이아고를 원망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실은 야경보던 날, 저에게 싸움을 건 것도 이아고가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전 파면된 거구. 아까 죽은 줄 알았던 로더리고가 숨을 겨우 돌리더니--자길 찌른 것도 이아고구--사주한 것도 그자라고 얘기했어요. 로도비코: 장군은 이 방에서 나가 우리와 동행하셔야겠소. 당신의 권한, 당신의 지휘권도 모조리 박탈됐소. 캐시오 부관이 대신 사이프러스의 통치를 맡게 됐소. 이 악당은 될수록 고통이 크고, 될수록 오래 오래 살아서 그 고통을 맛볼 수 있는 형벌에 처할 작정이오. 당신은 베니스 정부에 죄상이 상달될 때까지는 감금되어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될 것이오. 자, 데리고 가라. 오델로: 잠깐만, 떠나기 전에 한 말씀 드리고 싶소이다. 이 몸이 국가를 위해 어느 정도 공적을 올렸고, 그것은 정부도 인정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사건을 상주하실 때, 이 사람을 사실 그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조금도 두둔하시지 마시고 고의로 헐뜯지도 마시고, 우직스럽기는 했지만 아내를 너무나 깊이 사랑한 사나이였고, 쉽사리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지는 사람은 아니나, 속임수에 휘말려들어 두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됐다구요. 비천한 인도 사람처럼 온겨레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진주를 제 손으로 팽개쳐 버린 사나이입니다. 눈물 한 방울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이번만은 슬픔에 못 이겨 아리비아의 고무나무가 수액을 흘리듯이 눈물을 한없이 흘리더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알레포 항구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두건을 쓴 못된 터키놈이 베니스 사람을 때리고, 이 나라를 비방했을 때 나는 그 개 같은 놈의 멱살을 틀어잡고 찔렀지요--이렇게. (자기 몸을 찌른다) 로도비코: 아아, 처참한 최후로다! 그레이쉬아노: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군. 오델로: 난 당신을 죽이기 전에 당신께 키스를 했소. 지금 내겐 이 길밖에 없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당신 입술을 내 입술을 포개면서 죽겠소. (데스데모나 위로 쓰러져 죽는다) 캐시오: 이런 일이 있을까봐 염려했습니다만 칼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좌우지간 고결한 분이셨습니다. 로도비코: (이아고에게) 이 스파르타의 개 같은 놈, 고통, 굶주림, 거치른 바다보다도 잔인한 놈, 이 침상 위의 처참한 광경을 봐라. 모두가 네놈의 짓이다. 이걸 보면 눈도 찌부러질 것이다. 휘장을 칩니다. (침대 휘장이 쳐진다) 그레이쉬아노 대감, 집을 관리하여 주십시오. 무어의 재산을 몰수하여 주십시오. 당신이 상속 받으실 거니까요. 그리고 총독, 당신은 이 악랄한 놈을 처형하시오. 시간, 장소 고문의 방법은 당신께 일임하리다! 나는 곧 배게 올라 이 슬픈 사건을 애통한 마음으로 본국 정부에 보고해야겠소이다. (모두 퇴장) [ 작품해설 ]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도 '오델로'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용솟음치게 한다.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하여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유를 몇 가지 지적하면 이렇다. 첫째로 주제와 사상이 극히 일상적인 차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가까운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부딪칠 수 있는 가정이란 울타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급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델로'에서 '햄릿'과 같은 심오한 철학적인 신념이라든가 '맥베드'와 같이 소름을 돋게 하는 전율적인 생사극 같은 것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심각하고도 감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를 벅차게 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둘째로는 플롯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라는 사실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에 줄거리는 본 줄거리만으로 이루어져 극적 전개를 펼쳐 나갈 뿐,부 줄거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작품 속에 휘말리게 되어 끝내는 엄청난 감동에 휩싸이게 된다. 세번째로는 대사가 '햄릿'처럼 복잡하고 난해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대사들은 거의가 시각에 호소하는 말들이다.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는 듯, 그의 대사는 회화성과 조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손쉽게 극의 내용을 파악하게 한다. 이상과 같이 열거한 몇 가지 점이 '오델로'를 접하는 우리의 가슴을 친근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될 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이해를 도와 주기도 하는 것이다. 17세기경 영국의 비평가 토마스 라이머가 '오델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확실히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첫째로는 양가의 규수들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흑인하고 사랑의 도주를 하는 것이 끝내는 어떻게 되는가를 경고해 주고 있다. 둘째로는 모든 유부녀에게 손수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일깨우고 있다. 셋째로는 남편들은 비극을 빚어내는 질투심을 품기 전에 과학적인 증거를 잡으라고 일러주고 있다." 위에 인용한 토마스 라이머의 평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오델로'도 '햄릿'처럼 소위 복수극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햄릿'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비극세계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아내의 절개를 의심한 나머지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이고 결국자기도 파멸을 자초하고마는 '오델로'를 흔히 비평가들은 '사랑이 비극'이라고 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티눈만큼도 빈틈 없는 완전무결한 사랑이 오래된 탑처럼 허물어져 가는 실상이 이 작품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오델로'를 쓴 연대는 1604년이며, 그해 11월1일 왕실극단에 의해 궁전에서 막을 올렸다고 궁전 축전행사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의 소재는 1566년 이탈리아인인 제랄디 친디오가 쓴 '백 개의 이야기' 제3권 제7화에 나오는 '베니스의 무어인'에서 얻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쳐버릴 수 없는 것은 원작인 친디오의 '베니스의 무어인'과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어인 오델로와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지수가 공모하여 모래가 가득들어 있는 부대로 데스데모나를 암살하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데스데모나의 비극적 운명을 전연 새롭고 심도있게 그리고 강렬하게 다룬 점에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공통된 한 가지 사실은 고귀한 인물이 어떤 성격적인 결함 또는 악습 때문에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서 별안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깎는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처절한 죽음을 당한다는 사살이다. '오델로'에서도 우리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공통된 특성을 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델로'에 있어서의 내적 갈등은 무엇일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오델로 자신의 내면적 투쟁을 의미한다. 오델로가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이지만, 그녀는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화신 이아고도 그렇다. 이아고는 사탄 같은 간악한 지혜로 오델로의 충복으로 위장하고 그의 머릿 속에 파고 들어가 악의 독소를 퍼뜨리지만 오델로는 모든 끔찍한 음모가 청천백일하게 탄로되는 순간까지도 그를 충직한 부하로 신뢰하기 때문에 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델로의 내적 투쟁이 가장 리얼하고 격동적으로 묘사된 대목이 5막2장에서 데스데모나를 죽이려고 촛불을 들고 그녀의 침대에 발소리를 죽여가며 가까이 다가섰을 때이다. 오델로가 고이 잠든, 연연한 꽃잎같은 데스데모나의 얼굴을 내려다 보는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는 무서운 질투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데스데모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질투심으로 말미암아 그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서로 부딪쳐서 쟁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면적 싸움에서, 사랑이 끝내는 살육 당함으로써 무고한 데스데모나는 오델로의 손아귀에서 죽고 만다. 오델로는 진심으로 데스데모나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서 데스데모나는 오직 삶의 보람이었고 등불이었다. 오델로 자신의 말처럼 데스데모나는 온백성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와 다름없었다. 오델로가 그처럼 소중한 아내를 죽이게 된 것은 남의 간계에 넘어가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동요되어 정신의 균형을 잃고 자제력을 잃은 무지한 야만인으로 곤두박질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불꽃 같은 질투심을 자주 불태우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역전의 용사답게 단순하고, 용감하고, 낭만적이며, 고결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무엘 존슨이 "오델로는 놀랄 정도로 솔직하고, 관대하고, 타인의 말을 믿기를 잘하고, 지나치게 남을 신뢰한다. 그 애정은 열렬하지만 일단 결심을 하면 그 결심은 확고하여 움직일 줄 모르고 완강하고, 복수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하여 오델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 바 있다. 고결한 심성을 지닌 사람은 타인도 자기와 같으리라고 믿고,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데스데모나의 사랑도 모름지기 이 고결한 심성에 움트고 자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꽃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랴. "오델로는 햄릿처럼 이지적인 사람은 아니다. 정감의 사람, 즉 감정적인 사람이다. 오델로는 낭만적인 사나이다. 그는 햄릿과 같은 명상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좀더 엄밀한 의미에 있어 오델로는 햄릿 이상으로 시적이다." 라는 브래들리의 평을 우리는 그대로 덮어둘 수가 없다. 오델로의 유명한 대사에는 한결같이 시적 미가 절절이 맺혀 있을 뿐 아니라 낭만성이 출렁대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가 시인적 기질을 간직하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오델로가 순결한 데스데모나를 잔혹하게 교살한 것이 단순히 질투심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그는 인정에 우직할 만큼 어두웠다. 사람을 쉬 믿어 버리는 그의 성품은 간교하고 표독한 이아고의 술책에 휘말리어 눈꼽만큼도 의구심을 품지 않고 아내의 부정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보아 왔듯이 이아고의 독사 같은 중상과 모략에 빠져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자기도 자결하기 직전의 마지막 대사에서 우리는 몸이 오싹하는 전율보다는 한 가닥 인간적인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된다. 물론 죄없는 아내를 죽인 그런 잔혹한 범죄적 행위를 도덕적인 눈길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다지 증오감이 끊어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오델로의 영혼을 어둡게 했던 절망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비로소 구제된다. 그가 데스데모나의 시체 위에 쓰러져 통곡하며 이아고의 흉계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데스데모나가 목숨을 끊어질 때까지 오직 자기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각성했을 때, 자기의 과오를 뼈져리게 느끼고 여지없이 패배했음에 눈을 떴을 때 오델로는 사랑의 살인자인 이아고에게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를 사로잡았던 질투의 올가미를 벗어나 인간적인 가치와 애정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증오심과 불쾌감을 떠나 우리 앞에 찬연한 모습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아고는 왜 그와 같은 무서운 음모를 획책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그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한마디로 말해 이아고는 악의 지략과 악의 의지를 가진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슴 깊이 숨겨둔다. 그리고 심성이 차디찬 그에게는 눈물이 있을 리 없다. 남달리 화술이 뛰어난 그는 사람의 마음을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 권력욕과 물욕에 눈이 어두운 그의 최고의 즐거움은 선을 악의 도구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이아고는 악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타인의 고통을 받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악을 행한다."고 평한 콜리지의 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뜯어보면 마음이 휘어지고 왜곡된 이아고야말로 희대의 허언가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독백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잇다. 원래 인물의 속마음을 관객에게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이 소위 독백이다. 그러나 이아고는 햄릿이나 맥베드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아고는 흉계를 꾸미고 그것을 독백하지만 좀더 자세히 뜯어 보면 그 독백은 본심이 아니다. 자기 양심을 내뱉는 흰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아고가 저지른 악행의 동기에 관해서는 각인각색의 다양한 비평이 있지만 독사는 태어났을 때부터 독을 품었고, 그가 남을 물고 독을 주는 것이 타고난 성질인 것처럼 이아고가 악행을 하게끔 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라는 설을 믿고 싶다. 그래서 '오델로'가 단순히 음모비극이 아니라 성격비극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겠다. [ 맥베드 ] (등장인물) 당컨: 스코틀랜드 왕 맬컴, 도날베인: 왕자 맥베드: 장군, 후에 스코틀랜드 왕 뱅코우: 장군 맥다프, 레녹스, 로스, 멘티이드, 앵거스, 케이드네스: 스코틀랜드의 귀족 플리언스: 뱅코우의 아들 시워드: 노덤벌랜드 백작, 영국군의 장군 젊은 시워드: 시워드의 아들 시이튼: 맥베드의 휘하 장교 아들: 맥다프의 아들 부대장 문지기 노인 영국 왕실의 전의 스코틀랜드 왕실의 전의 자객 3인 맥베드 부인 맥다프 부인 맥베드 부인의 시녀 세 마녀 헤커티: 마술을 주관하는 지옥의 여신 환영 기타: 귀족들, 신하들, 장교들, 병사들, 시종들, 사자들 (장소) 스코틀랜드 및 영국 [ 제1막 ] 별들아, 빛을 감추어라! 빛이여, 나의 검고 깊은 야망을 비추지 말라. 눈이여, 손이 하는 일을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라. - 4장 맥베드의 방백 중에서 [ 제1장 황야 ] 천둥과 번개. 세 마녀 등장. 마녀1: 우리 셋이 또 언제 만나지? 천둥 울릴 때, 번개칠 때, 아니면 비가 퍼부을 때? 마녀2: 북새통이 끝날 때지, 승패가 결판날 때 말야. 마녀3: 그야 해지기 전에 결판이 날 텐데 뭐. 마녀1: 그나저나 어디서 만나지? 마녀2: 저 황야로 해. 마녀3: 그래, 거기서 맥베드를 기다리자. 이때 여기저기서 마녀들이 부리는 요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녀1: 곧 갈게, 회색 고양이야! 마녀2: 두꺼비냐? 마녀3: 곧 간다! 세 마녀 손잡고, 춤추면서 노래한다. 세 마녀: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와 더불어 더러운 공기 속으로 날아가자.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 제2장 포레스 부근의 진영 ] 안에서 비상신호소리(대북 소리 또는 트럼펫의 취주). 스코틀랜드의 당컨왕, 제1 왕자 맬컴, 제2 왕자 도나베인, 귀족 레녹스 및 시종들 등장. 다른 쪽에서 부상하여 피가 낭자한 부대장 등장. 당컨: 누군고, 피가 낭자한 저 사람이? 저 모습을 보아하니 대역무도한 역도들의 근황을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맬컴: 소자가 포로가 될 뻔했을 때 용감하게 역도들을 무찔러 목숨을 구해준 부대장이옵니다... 잘 왔소, 용감한 친구! 싸움터를 떠났을 때의 전황을 폐하꼐 소상히 아뢰오. 부대장: 승패는 실로 가늠하기 어려운 판국이었습니다. 마치 두 사람이 헤엄치다 기진맥진해지면 허우적거리다가 서로를 붙잡고 늘어져 함께 익사하려는 듯하였습니다... 저 잔인무도한 맥돈월드는 (인간의 온갖 악덕을 한몸에 지닌 지옥의 야차 같은 역도인지라) 서쪽의 여러 섬에서 보병과 기병 등 군사들을 조발했고, 그 때문에 운명의 여신도 한때는 그의 간살맞은 계책에 미소를 던지고 마치 반역도의 창녀가 된 듯 생각되었사옵니다. 하오나 반역배의 운수가 끝내 펴질 수는 없는 것, 용감한 맥베드 장군은 (그 명장 이름에 걸맞게) 운명을 무시하고 칼을 휘두를 때마다 피연기를 뿜으면서 진군하였습니다. 군신의 총아답게 적진을 깊이 뚫고 들어가 마침내 그 역적과 맞붙었습니다만, 악수고 고별의 인사고 할 틈도 없이 단칼에 적장의 배꼽에서 턱까지 두 쪽으로 내고 그자의 목을 베어 우리측 성벽에 효수해 놓았사옵니다. 당컨: 오 용감한 사촌! 과연 훌륭한 인물이로다! 부대장: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에서 배를 태질하는 사나운 비바람과 무서운 천둥이 치듯이 행운이 솟구치는 듯한 잼에서 액운이 솟아올랐습니다. 진정하시옵소서, 폐하! 용기로 무장한 정의의 병사들이 혼쭐이 빠져 패주하는 졸개들을 쫓고 있을 때 기회를 엿보고 있던 노르웨이 왕의 신예의 무기와 새로 보강한 병력을 가지고 공격해 왔사옵니다. 당컨: 그것을 보고 맥베드와 뱅코우 두 장군이 겁내지 않던가? 부대장: 예, 참새가 독수리를, 또는 토끼가 사자를 만난 듯한 처지였습죠. 그러하오나 정직하게 사뢰옵자면 두 장군은 마치 탄약을 두 배나 잰 대포와도 같이 두 배의 강한 기세로 적군에게 뛰어들었사옵니다. 상처에서 쏟아지는 피로 목욕을 하려는 작심인지 아니면 또 해골의 언덕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판세였습니다. 아,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상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당컨: 그대의 보고는 상처 못지않게 훌륭하다. 용감한 명예의 향기를 내뿜고 있도다. (시종에게) 어서 전의를 불러 주어라. (부대장, 부축을 받아 퇴장) (돌아다보며) 저 사람들은 누군고? 로스와 앵거스 등장. 맬컴: 로스 영주이옵니다. 레녹스: 저 눈빛을 보아하니 조급증을 삭이지 못한 기색이옵니다! 무슨 심상치 않은 말씀을 아뢰옵고자 하는 것 같사옵니다. 로스: 폐하의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당컨: 로스 영주, 어디서 오는 길이오? 로스: 폐하, 파이프에서 오는 길이옵니다. 그곳에는 노르웨이 군의 깃발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 아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왕은 불충한 역신 코오더 영주의 원군을 얻어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맹렬한 공세를 가해 왔지만 군신 베로나 여신의 신랑이라 할 맥베드 장군은 갑옷을 몸에 두르고 맹장다운 용기를 발휘하여 칼에는 칼, 격투에는 격투로 엎어진 놈 뒤꼭지 밟듯 적장을 작살내어 마침내 승리는 아군에게 돌아왔사옵니다. 당컨: 오, 크게 기쁜 일이로다! 로스: 그렇게 되고 보니 노르웨이 왕 스웨노는 강화를 간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군측은 적이 당장 성 코옴섬에서 일반 달러를 헌납하지 않는 한 적군의 시체를 매장하는 것조차 엄히 금하고 있사옵니다. 당컨: 다시는 코오더 영주가 과인에게 역심을 품지 못하게 할 것이니라. 당장 그자를 참형에 처하라. 그자의 작위를 맥베드에게 수여하고, 어서 장군을 영접하라. 로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당컨: 코오더가 잃은 것을 훌륭한 맥베드가 차지하였느니라. (모두 퇴장) [ 제3장 황량한 황야 ] 천둥. 세 마녀 등장. 마녀1: 언니,어디를 갔었우? 마녀2: 돼지를 때려 잡으러. 마녀3: 언닌 어딜 갔었구? 마녀1: 선장의 계집이 행주치마에 밤톨을 싸가지고 아그작아그작 먹고 있지 않겠어. "나에게도 줘." 했더니 "꺼져버려 이 마녀야!" 하고 뱃구레가 불룩한 빌어먹을 년이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뭐니. 그년의 서방이 타이거 호의 선장인데 알레포에 가 있다구. 두고 보라지, 난 쳇바퀴 타고 날아가 꼬리 없는 쥐로 둔갑해서 진탕 골려줄 테다, 골려주고 말구, 어디 골탕 줌 먹어 봐. 마녀2: 그럼 내가 타고 갈 바람을 줄까. 마녀1: 친절도 하셔라. 마녀3: 나도 바람을 줄게. 마녀1: 그 나머지 바람은 다 내 수중에 있으니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뱃사람의 해도에 실려 있는 어느 항구든, 아니 어느 곳이든 내 마음대로 몰고 갈 수 있어. 난 그년의 서방놈을 마른 풀같이 바싹바싹 소리가 나도록 말라 비틀어지게 할 테야. 밤이건 낮이건 그놈의 눈꺼풀 위에 잠이 깃들지 못하게 할 것이구. 그자가 저주를 받아 일곱 낮 일곱 밤을, 구구 팔십일로 곱해서 시달려 보라지, 아마 육신이 오그라들고 마르고 시들어 버릴 거다. 배를 가라앉힐 수 없지만 폭풍우를 계속 불게 할 테야.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보겠어? 마녀2: 보여 줘, 보여 달라구. 마녀1: 이건 귀국하는 도중에 파선 당해 죽은 뱃길잡이의 엄지손가락이야. (안에서 북소리) 마녀3: 북소리다, 북소리! 맥베드가 온다. 세 마녀 손을 맞잡고 원형이 되어 춤을 추며 노래한다. 점점 빨리 돈다. 세 마녀: 운명을 다스리는 우리 세 자매 바다가 천리든 물이 천리든 손에 손잡고 빙빙 돌아라 너도 세 번 나도 세 번 한번 더 세 번이면 아홉 쉿! 이제 주문이 걸렸다. (세 마녀 갑자기 멈춘다. 안개가 이들의 모습을 가린다) 맥베드와 뱅코우 등장. 맥베드: 이렇게 침침하면서도 아름다운 날은 처음 보는군. 뱅코우: 얼마나 남았을까요, 포레스까지는?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그리고 뱅코우, 세 마녀를 발견한다) 아니 저것들이 뭐지, 저렇게 시들어빠진 것들이 해괴한 옷차림을 하고 아무리 뜯어 보아도 땅 위에 살고 있을 화상들이 아닌데 저기 서 있지 않은가? 너희들은 살아 있는 것들이냐? 인간의 말이 통하는 것들이냐?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가부다, 거칠게 튼 손가락을 시들어 버린 입술에 갖다 대는 것을 보니. 여자들 같은데 수염이 있으니 이거 참 알고도 모를 일이구나. 맥베드: 말해 봐라, 말할 수 있거든. 무엇들이냐? 마녀1: 맥베드 만세! 글래미스 영주 만세! 마녀2: 맥베드 만세! 코오더 영주 만세! 마녀3: 맥베드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맥베드! (맥베드 경악한다) 뱅코우: 장군, 외 그렇게 놀라시오? 귀에 거슬리는 말도 아닌데 두려워하는 기샐이지 않소? 대체 너희들은 허깨비냐, 아니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이냐? 나의 귀한 친구는 너희들로부터 현재의 직위로 인사받고, 또 장차 영전의 축하와 앞으로 보위에까지 오를 거라는 예언을 받아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는단 말이냐? 만일 너희들이 시간의 씨앗을 판별할수 있어서 어떤 씨앗이 자랄 것이며, 어떤 씨앗이 자라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나에게도 말을 하라. 나는 너희들의 은혜를 바라지도 않거니와 너희들의 증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녀1: 만세! 마녀2: 만세! 마녀3: 만세! 마녀1: 맥베드만은 못하나 더 위대하도다. 마녀2: 맥베드보다는 운이 좋지 못하나 더 큰 행운을 누릴 분. 마녀3: 국왕이 되지는 못하나 대대로 자손이 왕이 되실 분. 그러니 영광 있으라, 맥베드 그리고 뱅코우! 마녀1: 뱅코우와 맥베드 만세! (안개가 짙어진다. 세 마녀 사라지려고 한다) 맥베드: 거기 섰거라, 너희들은 아리숭한 말만을 지껄이는구나, 확실히 말하라. 나의 선친 사이널의 서거로 내가 글래미스 영주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코오더 영주라니 무슨 얼토당토 않은 말이냐? 코오더 영주는 눈이 시퍼렇게 살아계시는 권세가이시다. 더군다나 내가 보위에 오르게 된다니 코오더 영주가 된다는 말보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은 어디서 그와 같은 해괴한 풍문을 들었는지 말을 하라. 대관절 무슨 꿍수로 이 적막한 황야에서 우리들의 길을 가로막고 그런 예언을 하며 간살을 떠느냐? 어서 말하라, 명령이다. (세 마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뱅코우: 땅에도 물거품이 있단 말인가, 저것들이 바로 그러한 요물단지로군. 어디로 꺼졌지? 맥베드: 공기 속으로. 형체가 있는 것같이 보였는데 입김이 바람 속으로 녹아들듯 깜쪽같이 사라지고 말았군. 좀더 붙잡아두고 싶었는데! 뱅코우: 우리와 이야기하고 있던 그것들이 정말로 이곳에 있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미치광이 나무뿌리라도 먹은 게 아닐까요? 맥베드: 장군의 자손은 왕이 된다? 뱅코우: 장군은 앞으로 왕이 되신다? 맥베드: 코오더 영주가 된다고도 입방아를 찧었겠다. 그랬지 않았소? 뱅코우: 확실히 그렇게 말했지요. 저건 또 누구지? 로스와 앵거스(당컨왕의 사자로서) 등장. 로스: 맥베드 장군, 폐하께옵서는 장군의 승전 소식을 들으시고 몹시 기뻐하시었소. 그리고 장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반란군을 상대로 용전하신 보고서를 읽으시고 혁혁한 전공에 감동하시어 칭찬의 말문조차 막히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그 뒤 전황을 묵묵히 읽어내려 가시는데 이번에는 장군께서 막강한 노르웨이 군의 진중에 뛰어들어 두려움의 기색이 전혀 없이 무서운 시체의 산더미를 쌓아올리는 활약상도 읽으셨습니다. 빗발같이 잇달아 들어오는 전령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나라의 명운을 구하신 장군에 대해 찬사를 폐하께 아뢸 뿐이었습니다. 앵거스: 저희들은 다만 폐하의 치하의 말씀을 장군께 전하고, 장군을 어전까지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은상은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실 것입니다. 로스: 그 밖에 더 큰 영예의 은전은 폐하께서 장군을 코오더 영주로 부르시라는 하명이 있으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축하 올립니다. 코오더 영주! 그 칭호는 장군의 것입니다. 뱅코우: 으음, 마녀들의 말이 이처럼 맞아떨어질 수가... 맥베드: 코오더 영주는 생존해 있지 않소. 어째서 나에게 남의 옷을 입히려 하십니까? 앵거스: 장군 말씀대로 살아 있긴 하지만 중한 형을 받게 되어 그 목숨이 경각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과연 노르웨이 군과 통정했는지 또는 은밀히 모반을 원조했는지 또는 그 두 가지를 다 범하여 종묘사직을 망칠 역모를 꾀하였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오나 대역의 죄를 이미 자백하였고, 입증도 되어서 그의 파멸은 기정사실입니다. 맥베드: (방백) 글래미스, 그리고 코오더의 영주라. 그러나 제일 큰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로스와 앵거스에게 큰 소리로) 수고들 하셨소이다. (뱅코우에게 방백) 장군의 자손들이 왕이 된다는 것도 믿을 만하게 됐지 않았소? 나에게 코오더 영주를 예언한 것들이 당신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였으니 말입니다. 뱅코우: (맥베드에게 방백) 그 말을 고지식하게 듣다간 황새 논두렁 넘보듯 코오더 영주뿐 아니라 왕관을 넘보게 됩니다. 어쨌든 이상한 일이로군. 지옥의 앞잡이들은 우리들을 함정에 처넣으려고 하찮은 일에 진실을 말해주며 사람을 유혹하고는 마지막 가장 중요한 찰나에 함정으로 빠트리려고 하지요. 두 분, 저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이렇게 말하자 로스와 앵거스는 뱅코우 쪽으로 가까이 간다) 맥베드: (방백) 두 가지는 맞아떨어졌다. 왕위를 주제로 한 웅대한 연극의 서막은 행운이 깃들었구나.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수고들 하셨습니다. (방백) 이 괴이한 징조는 나에게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으렸다. 만일 그것이 나쁜 일이라면 외 먼저 진실을 예언해 주어 나에게 성공의 확신을 안겨 주었는가. 이미 나는 코오더 영주가 되지 않았는가. 좋은 일이라면 왜 이런 엄청난 유혹으로 가슴 섬뜩한 그 환영이 눈앞에 어리고 나의 머리털을 이처럼 빳빳이 서게 하는가? 평온했던 나의 심장은 왜 자연의 순리에 맞지 않게 숨가쁘게 나의 갈빗대를 방망이질한단 말인가? 현재의 두려움은 상상되는 미래의 공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지금은 시역을 상상하고 있다 뿐인데 그 때문에 나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여러 가지 억측으로 질식되어 공허한 환영만이 눈에 보이는구나. 뱅코우: (로스와 앵거스에게) 저것 좀 보시오. 내 전우가 넋빠진 듯 생각에 잠겨 있소. 맥베드: (방백) 만일 내가 왕이 될 운명이라면 내가 손쓸 것도 없이 운명은 내 머리 위에 왕관을 씌오 줄 게 아닌가? 뱅코우: (로스와 앵거스에게) 새로 얻은 영예는 입어본 적 없는 옷을 걸친 것 같아 한참 입고 나야지, 몸에 쉽사리 잘 맞지 않는 법. 맥베드: (방백) 될 대로 되라, 비바람이 몰아쳐도 시간은 간다. 뱅코우: 맥베드 장군, 자 가십시다. 맥베드: 미안합니다. 잊었던 일을 생각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두 분의 수고는 마음 속에 새겨 매일같이 되새기도록 하겠소... 자, 폐하를 배알하러 가십시다. (뱅코우에게) 오늘 일은 저버리지 마시고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다. 아무튼 후일 숙고하여 서로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뱅커우: 그럽시다. 맥베드: 오늘은 이만하고... 자, 다들 갑시다. (모두 퇴장) [ 제4장 포레스 왕궁의 한 방 ]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당컨왕, 맬킴, 도날베인, 레녹스, 시종들 등장. 당컨: 코오더의 사형은 집행되었는가? 집행관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느냐? 맬컴: 폐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하오나 코오더의 임종을 목격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대역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깊이 참회하며 폐하의 대사를 애원하였다 합니다. 그의 최후야말로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늠름했다고 합니다. 마치 죽음을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장 귀한 목숨을 초개처럼 의연히 버리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당컨: 열 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두 치 가슴 속은 알 수 없는 법. 과인은 그자를 절대적으로 신임했었다만. 맥베드, 뱅코우, 로스, 앵거스 등장. 오 공훈이 큰 사촌! 지금도 과인은 장군에 대한 망은의 죄, 가슴 무겁게 느끼고 있는 바요. 장군의 무훈이 너무나 앞질러 가기 때문에 아무리 빠른 은상의 날개라도 따를 길이 없소. 차라리 장군이 무훈을 덜 세우기만 했더라도 감사와 보상을 상응되게 하기가 쉬웠을 터이오! 어쨌든 과인이 어떠한 은상을 내려도 장군의 무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맥베드: 신은 오로지 충절을 다할 뿐이옵니다. 또한 충절을 다할 수 있다면 그로써 이미 신은 보상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나이다. 폐하께서는 신들의 의무를 받아들이시기만 하시면 되옵니다. 신들은 왕실의 자손이자 국가의 충복으로서 폐하에 대한 공경과 충절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나이다. 당컨: 잘 왔소. 과인이 이 손으로 나무를 키우듯 장군이 잘 커 나가도록 힘쓰겠소. (뱅코우에게) 뱅코우 장군, 장군의 공적도 맥베드 장군 못지않소. 그 못하지 않음을 세상이 다 알아야 할 것이오. 자, 이 가슴에 꽉 그대를 포옹하게 하오. 뱅코우: 폐하의 품안에서 신이 결실을 맺는다면 그 수확은 폐하 것이옵니다. 당컨: 과인의 기쁨이 너무나 벅차 슬픔의 눈물 속으로 자취를 감추려고 하는구려... 두 왕자, 근친들, 영주들, 그리고 과인과 친근한 모든 이들이여, 차제에 과인은 맏아들 맬컴을 세자로 책봉하고 금후 그를 캄벌랜드 공이라 부르도록 할 것이오. 이 영예가 어찌 왕자에게만 그칠 것인가. 모든 공신의 머리 위에도 영예의 표시가 샛별처럼 빛나게 하리라. (맥베드 등에게) 이제부터 인버네스 성으로 갈 것인즉 장군의 수고를 끼쳐야겠소. 맥베드: 폐하를 위하는 소용이 되지 못하면 휴식이 도리어 고통이 됩니다. 신이 선발대가 되어서 폐하의 행차를 신의 처에게 알리어 기쁘게 하겠나이다. 그럼 먼저 물러가나이다. 당컨: 훌륭한 코오더여! 맥베드: (방백) 캄벌랜드 공이라! 이 단계가 내가 고꾸라지느냐 아니면 잘 뛰어넘느냐의 갈림길이구나, 나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으니 말이다. 별들아, 빛을 감추어라! 빛이여, 나의 검고 깊은 야망을 비추지 말라. 눈이여, 손이 하는 일을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라.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일단 내가 저지른 일을 눈이 보게 된다면 질겁을 해 혼절을 할 것이다.(퇴장) 당컨: (뱅코우에게) 뱅코우 장군, 사실이오. 맥베드 장군이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용장이여. 그에 대한 칭송을 들으면 들을수록 과인은 마치 진수성찬을 받은 것처럼 기쁘기 한량없소. 그를 따라갑시다. 그는 과인을 환영하기 위한 심려로 먼저 달려갔나 보오. 근친 중에서도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인물이오.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모두 퇴장) [ 제5장 인버네스. 맥베드의 성 한 방 ] 맥베드 부인, 편지지를 읽으면서 등장. 맥베드 부인: (읽는다)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은 개선하는 날이었소. 그 후에 확신을 갖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 이상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나는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마음 불길 같았으나 그들은 홀연히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겠소.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어서 멍청히 서 있는데 폐하의 사신들이 와서 날 "코오더 영주!"라고 부르면서 축하를 하지 않겠소? 앞서 그 괴기한 마녀들이 이 칭호를 가지고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또 그들은 나의 장래를 축하하며 "장차 왕이 되실 분 만세!"하고 예언하였소. 약속받은 영광을 함께 나누어야 할 당신이 그 기쁨을 알지 못하여 당신이 혹시나 그 기쁨을 잃는 일일랑 나는 나의 생의 반려자인 당신에게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소. 그런즉 이 일은 당신 가슴 깊이 간직해 두시오. 이만 줄이오. 당신은 벌써 글래미스 영주, 또한 코오더 영주가 되었으니까 예언대로 왕위에도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성품이 염려됩니다. 당신은 지름길을 취하기에는 너무나 인정이 많으십니다. 대망도 있고 야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것을 성취하는 데 꼭 있어야 하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무한한 욕망이 있으면서도 고상한 수단으로 성취하려 하시지요. 부정한 짓을 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부정한 것을 얻으려고 해요. 글래미스 영주님, 당신이 수중에 갖고 싶어하는 것은 "이것을 갖고 싶거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실행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없는 거예요. 자 어서 빨리 돌아오세요. 저의 강한 정신을 당신 귓속에 퍼부어 드리겠어요. 그리하여 운명과 초자연의 힘이 당신에게 씌워 주려는 황금의 왕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저의 혀의 힘으로 쫓아 버리겠어요. 사자 한 사람 등장. 무슨 전갈이냐? 사자: 오늘밤 폐하께서 이곳에 거동하시옵니다. 맥베드 부인: 무슨 얼나간 소리냐! 너의 주인은 폐하와 함께 계시지 않더냐? 그렇다면 준비를 하라고 미리 알렸을 것이다. 사자 황송하옵니다만 사실이옵니다. 영주님께서도 이곳으로 돌아오고 계십니다. 동료 중 한 사람이 앞질러 달려와서 숨이 턱에 닿아가지고 겨우 이 전갈을 알려 줬습니다. 맥베드 부인: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어라. 굉장한 소식을 가져왔다. (사자 퇴장) 까마귀까지도 당컨이 사자밥을 짊어지고 이 성에 와서 죽으려 든다고 목쉰 소리로 알리고 있다... 무서운 음모에 끼여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끊어. 그래서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이 동하여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또한 살인과 잔인한 결심이 서로 손을 맞잡아 이 일을 뭉개버리지 않게 해다오! 자, 살인의 앞잡이들아, 이 여자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내 달콤한 젖을 쓰디쓴 담즙으로 바꾸어 다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형체로 어디서나 인간의 흉사를 거들어 주고 있지 않느냐! 어두운 밤아, 깃을 펼쳐 지옥의 시커먼 연기로 널 뒤덮어라, 나의 날카로운 단도가 찌르는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늘이 암흑의 장막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면서 "안된다! 안된다!"하고 외치지 않도록 하여라. 맥베드 등장. 위대하신 글래미스님! 훌륭하신 코오더님! 미래의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그 두 가지보다 훨씬 존귀한 몸이 되실 분! 당신의 편지를 읽고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현실을 떠나, 이 순간 황홀한 미래를 호흡하고 있습니다. 맥베드: 사랑하는 부인, 오늘밤 당컨왕이 이 성에 납실 것이오. 맥베드 부인: 그리고 언제 떠나시구요? 맥베드: 내일이오, 예정대로라면. 맥베드 부인: 오, 태양은 눈이 멀어 결코 내일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영주님, 당신의 표정은 수상한 것이 적혀진 책만 같아요. 세상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라면 그 사람들과 같은 표정을 지으셔야 됩니다. 따스한 눈길로 손을 맞잡으며 환영의 말을 늘어놓아 반가운 내색을 하세요. 겉으로는 순진한 꽃처럼 보이게 하시고 그 속에 또아리 튼 뱀이 들어 있게 하세요. 오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오늘밤의 큰 일은 만사 제게 맡겨 주세요. 우리들이 남은 긴긴 세월에 지존의 대권을 얻느냐의 결판을 내는 일인 걸요. 맥베드: 이따 더 의논합시다. 맥베드 부인: 그저 밝은 표정을 지으세요. 곤혹한 안색을 보이는 것은 두려움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사는 제게 맡겨 두세요. (두 사람 퇴장) [ 제6장 포레스. 맥베드의 성 앞 ] 오보에 소리. 당컨, 맬컴, 도날베인, 뱅코우 레녹스, 맥다프, 로스, 앵거스 및 시종들 등장. 당컨: 이 성은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잡았으며, 공기가 맑고 부드러우니 과인의 기분도 상쾌하도다. 뱅코우: 여름의 길손인 제비가 사원을 들락거리며 부지런히 집을 짓는 것만 보아도 이 부근의 공기가 향기롭다는 것을 알 수가 있사옵니다. 추녀 끝, 서까래 옆 벽받침, 그 밖에 편리한 구석구석에 제비들이 잠자리를 달아매고 새끼를 기르는 요람을 만들지 않는 곳이 없사옵니다. 저 새들이 새끼를 잘 치고 많이 드나드는 곳은 공기가 좋은 곳인가 하옵니다. 맥베드 부인 등장. 당컨: 보아라, 봐! 안주인이 나타났다! (맥베드 부인에게) 호의도 귀찮게 뒤따르면 때로는 오히려 성가신 법. 그러나 호의란 항상 기쁘기 마련이오. 이렇게 들이닥쳐 부인께 수고를 끼치게 되지만 그건 과인의 행운을 축원하고저 하는 것이니, 수고도 기쁘게 받아 주기 바라오. 맥베드 부인: 저희 내외의 봉사는 두 곱을 하고 또 두 곱을 한다 하여도 폐하께서 저희 집에 내려 주신 깊고 넓으신 광영에 비하면 극히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종전의 작위에다 이번에 또 작위를 제수하시니 그 은혜 망극하옵니다. 다만 폐하의 만수무강하심을 축원할 따름이옵니다. 당컨: 코오더 영주는 어디 있소? 과인이 즉시 뒤쫓아 온 것은 장군보다 앞질러 와서 그를 맞이할 심산이었는데 워낙 장군이 승마에 능한데다가 충성심이 박차를 가하여 과인보다 앞서 오게 되었소. 부인, 오늘밤 댁에서 폐를 끼쳐야겠소. 맥베드 부인: 폐하의 충복인 저희들은 항상 저희들 가문, 저희들 자신, 그리고 저희의 재산 모든 것이 다 폐하로부터 빌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의 분부가 계시는 대로 언제나 반환할 것이옵니다. 당컨: 자, 손을 이리 주오. 과인을 주인께 안동하오. 과인은 장군을 극진히 총애하고 있소.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오. 부인, 그러면 부탁하오. (당컨왕이 맥베드 부인의 손을 잡고 나란히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퇴장) [ 제7장 맥베드의 성 안의 안뜰 ] 노천. 좌우에 두 개의 문. 좌측 즉 남쪽 문이 성 밖으로 통하는 출입구. 우측 문은 성안의 방으로 통하고 있다. 이 두개의 문 사이 복도에 커튼이 쳐진 후미진 곳이 있고 제3의 문으로 통하고 있다. 커튼을 열면 그 사이로 2층으로 오르는 층계가 보인다. 측면의 벽에 벤치와 탁자. 오보에 소리. 횃불. 하인 반장이 몇 사람의 하인들을 데치고 등장. 안뜰을 가로질러 식기류 등을 나른다. 이들이 우측 문으로 해서 나올 때 연회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윽고 같은 문으로 맥베드 등장. 맥베드: (방백) 단번에 해치워 끝장을 볼 수 있다면 당장 해치우는 것이 좋다. 왕의 암살이 모든 것을 그물을 거두어들이듯 아퀴를 지을 수 있다면 이 일격이 요체가 되어 그것이 이승에서의 기슭과 시간의 여울의 끝장이 된다면 저승을 생각해서 뭣하랴. 그러나 이런 일이라는 것은 항상 이 현세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법--. 누구에게든 악행을 가르치면 그 인과는 반드시 가르친 자에게 응보하게 된다. 정의의 여신은 독주의 잔을 그것을 따른 자의 입술에 같은 독주를 퍼붓는다. 왕은 날 이중으로 믿고 이곳에 온 것이다. 첫째로 나는 왕의 근친이며 신하인지라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모살을 꾀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둘째로는 내가 이 집 주인이므로 자객의 침입을 막아 지켜줄 것으로 믿을 거다. 하물며 나 자신이 칼을 든다는 것은 꿈엔들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저 당컨은 온후한 군덕을 가진 국왕으로서 그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그러니 그를 시해하는 대역을 행한다면 그의 인덕은 천사가 부는 나팔처럼 대역무도한 악행을 만천하에 호소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세상의 동정은 광풍을 탄 벌거숭이 갓난애기 또는 눈에 띄지 않는 하늘의 준마를 탄 동자처럼 무서운 악행을 만인의 눈 속에 불어넣어 폭풍마저 누그러뜨릴 눈물을 억수로 쏟게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하고 있는 이 계획을 자극할 박차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다만 날뛰는 야심이 지나치게 뛰어 오르다가 엉뚱한 쪽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맥베드 부인 등장. 웬일이오,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맥베드 부인: 폐하께서 수라를 곧 물리실 거예요. 왜 당신은 먼저 나오셨어요? 맥베드: 날 부릅디까? 맥베드 부인: 그것도 모르세요? 맥베드: 그 일은 더 이상 진행하지 맙시다. 폐하께서 바로 얼마 전에 나에게 새로운 영예를 베풀어 주셨소. 어디 그뿐이오,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이 나를 존경하고 있지 않소. 겨우 새로 얻은 금박이 옷을 몸에 걸치지도 않고 벗어던질 순 없소. 맥베드 부인: 그럼 당신 몸에 지녔던 그 야망은 곤드레만드레가 돼 버렸단 말인가요? 깊은 잠에 폭 빠졌나요? 이제 잠에서 깨어보니 그전에는 천연스럽게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을 파랗게 질린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말씀인가요? 오늘부터 당신의 애정을 그런 것으로 간주하겠어요. 왜 당신은 열렬히 희망하면서도 그 일을 용감히 실행할 수 없는 거죠. 일생의 귀중한 장식품이 될 것을 가져보겠다고 소망하면서도 스스로를 겁쟁이라 단정짓고 '다리는 적시지도 않고 물고기는 먹고 싶다'는 고양이의 심보처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나는 안돼'하고 녹녹해진단 말입니까? 맥베드: 제발 조용히 해요. 나는 사나이가 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오. 그렇지만 도가 지나치면 사람이 아니오. 맥베드 부인: 그러면 아까 이일을 털어놓았을 때엔 당신은 당신이 아니고 무슨 짐승이었나요? 당신이 대담하게 털어놓았을 때에는 당신은 훌륭한 남자였어요,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함으로써 당신은 더욱 남자답게 되는 거예요. 그때는 당신은 때와 장소가 다 허술했어도 달군쇠도 삼킬 듯한 결의를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 누운 소 타기인데도 의기를 죽이시느냔 말예요. 저는 애기에게 젖을 먹인 일이 있어서 젖을 빠는 애기가 얼마나 귀여운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당신처럼 맹세를 하였다면 어린 것이 제 얼굴을 쳐다보고 방글방글 웃을지라도 전 말랑말랑한 잇몸에서 강제로 젖꼭지를 잡아 빼고 태질을 쳐서 머리통을 부셔 버릴 수 있다구요. 맥베드: 만일 실패한다면? 맥베드 부인: 실패라뇨? 용기를 있는 대로 내 보세요. 그러면 실패란 있을 수 없어요. 당컨이 곤히 잠들면--오늘의 고된 여행길은 잠을 잘 자게 할 거예요.--저는 호위병에게 포도주를 퍼먹이며 축배를 거듭하게 하지요. 그러면 두뇌의 문지기, 기억력은 연기처럼 몽롱하게 되고, 이성의 그릇도 증류관같이 되어 버린다구요. 그것들은 술에 곯아 떨어져 돼지같이 잠이 들테죠.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은 호위없는 당컨에게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요? 이 대역의 죄는 술에 곯아떨어진 호위병들에게 덮어씌울 수 있지 않겠어요? 맥베드: 당신이란 여잔 남자만 낳으라구! 그 담대한 기질로는 남자밖에 낳지 못할 거요. 옳지, 이러면 어떨까,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에게 피를 칠해 주고 그리고 단도도 그자들이 사용한 걸로 해 두면 그것들의 소행으로 보일 게 아니겠소? 맥베드 부인: 감히 그것 의심할 리 있겠어요? 우리들이 소리 높여 왕의 변사를 통곡하고 떠들어댄다면? 맥베드: 내 결심했소. 혼신의 힘을 짜내어 이 무서운 일을 해내고야 말겠소. 자 저리로, 우리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속입시다. 속으로 컴컴한 칼을 갈고 있을 때에는 가면으로 감추어야 되느니. (두 사람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간다.) [ 제2막 ] 도대체 밤의 기세가 등등해서인지 아니면 낮이 수줍어해서인지 밝은 햇빛이 이 땅을 비춰야 할 시각에 이처럼 어둠이 깔려 있으니 웬일입니까? - 4장 로스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맥베드 성의 안뜰 ] 무대 후면으로부터 뱅코우와 횃불을 들고 앞에 선 플리언스 등장. 문을 열어둔 채 무대 전면으로 나온다. 뱅코우: 얘야, 밤이 깊었는데 몇 시쯤 됐느냐? 플리언스: (하늘을 쳐다보며) 달은 졌습니다만 시계 치는 소린 못 들었습니다. 뱅코우: 달은 자정에 진다. 플리언스: 자정은 지난 것 같습니다. 뱅코우: 얘, 내 검을 좀 갖고 있어라... 하늘도 참 인색하시지, 별빛 하나 볼 수가 없구나... (단검을 찬 허리띠를 푼다) 이것도 좀 갖고 있어. 졸음이 납덩이같이 내 눈을 짓누르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자비로운 천사들이여, 꿈 속에 뛰어드는 사악한 망상을 운신 못하게 해다오! (무언가에 놀란다) 검을 다오. 맥베드 횃불을 든 시종 한 사람을 데리고 우측 문으로 등장. 누구냐? 맥베드: 친구요. 뱅코우: 아이구, 장군께서 아직도 안 주무셨군요? 폐하께서는 침상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매우 흡족하신 모양이시며, 장군 댁 종복들에게 많은 선물을 하사하셨습니다. 또 극진한 대우를 받은 감사의 표시로 이 다이아몬드를 장군 부인께 하사하셨소이다. 폐하께서는 오늘 하루를 매우 흔쾌히 지내셨습니다. 맥베드: 불시의 일이라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부족한 것뿐이어서 황공할 뿐이오. 그렇지 않았으면 마음껏 환대를 해 드렸을 것입니다만. 뱅코우: 그 무슨 말씀이오, 다 잘 되었소. 간밤에 난 요상한 세 마녀의 꿈을 꾸었지요. 그것들이 장군께 한 말은 얼추 맞아떨어졌군요. 맥베드: 아, 깜빡 잊었군요. 한 시간쯤 말미를 날 수 있다면 그 일을 조용히 의논하고 싶소. 장군 형편은 어떻소? 뱅코우: 언제든지 좋소이다. 맥베드: 기회가 왔을 때 날 지지해 주시면 장군께도 기필코 영예가 돌아가리다. 뱅코우: 영예를 탐하려다가 쓰다 버린 지팡이 신세가 된다면 곤란하지만 마음에 거리낌없이 충성심을 지킬 수 있다면 언제라도 상의에 응하리다. 맥베드: 그럼 편히 쉬시오! 뱅코우: 고맙소, 장군께서도! (뱅코우와 플리언스 그들의 방으로 물러간다) 맥베드: 마님께 가서 밤술이 준비되면 종을 울리시라고 여쭈어라. 그리고 너도 가서 자라. (하인 퇴장. 맥베드 탁자 앞에 앉는다. 그때 허공에 단검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눈앞에 보이는 저것이 단검이 아닌가, 칼자루가 내쪽을 향해 있지 않은가? 자 잡아보자! 잡히지 않는구나, 그런데도 눈에는 보이고. 오 불길한 환영아, 눈에는 보여도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니? 너는 단지 마음이 보여 주는 단검이란 말이냐, 아니, 너는 열 받은 머리가 빚어낸 환각에 지나지 않느냐? 또 보인다, (칼집에서 자기의 단검을 뽑는다) 지금 내가 잡아뽑은 이 단검과 흡사하구나. 넌 내가 가려던 방향으로 날 인도하려는 것이냐, 그렇다, 내가 쓰려는 무기가 바로 너다! (일어선다) 내 눈이 다른 감각들로 해서 탈이 생겼단 말인가, 아니면 눈만이 온전하다는 거냐? 또 다시 보인다. 어찌된 일인가, 칼날과 칼자루에 전에 보이지 않던 피가 엉겨붙어 있으니. 그럴 리가 없다. 피비린내나는 흉계가 내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어 내 눈에 그렇게 어른거렸나 부다... 지금 이 세상의 반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커튼 속에 든 잠은 악몽에 부대껴 신음하고 있다. 마녀들은 창백한 헤커티에게 제물을 바치고 초췌한 자객은 파수꾼인 늑대의 울음소리에 일깨워져, 타이퀸이 루크리스를 겁탈하러 가던 걸음걸이로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눈독들인 먹이를 향해 유령과 같이 다가간다. 그대 요지부동한 대지여, 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든 그 소리를 듣지 말라, 발부리의 조약돌도 내가 가는 곳을 지껄여 행여 현재의 장면에 어울리는 이 몸서리치는 적막을 깨뜨려서는 아니 된다. 내가 혀끝으로 위협한다고 당컨이 죽을 리 없다. 말은 실행의 열기에다가 냉랭한 입김을 불어넣어 줄 뿐이다. (안에서 종이 울린다) 가자, 내가 가면 끝장이 난다. 종소리가 날 부른다. 듣지 말라, 당컨이여, 저것은 그대를 천당에, 아니면 지옥으로 꼬드기는 임종의 종소리다. (열려 있는 후면 문으로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들어가서 한발 한발 층계를 올라간다) [ 제2장 맥베드 성의 안뜰 ] 맥베드 부인: 우측 문에서 등장. 손에 잔을 들고 있다. 맥베드 부인: 그것들을 취하게 만든 이 술이 날 대담하게 하였다. 술은 그자들을 잠들게 했고 내겐 불을 붙여 주었다. (사이) 무슨 소리지! 가만. 부엉이 우는 소리 같다. 너는 이악스럽게도 마지막 작별을 알리는 불길한 야경이더냐. 지금 그이는 그 일을 단행하고 계실 걷다. 문은 열어 놨고 만취한 호위병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조롱하듯 코를 골고 있다. 내가 밤술에 약을 타지 않았는가. 삶과 죽음이 놈들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 하고 밀고 당기고 다투고 있을 것이다. 맥베드: (안에서) 누구냐? 뭣이냐? 맥베드 부인: 어쩐담! 저것들이 깨어난 게 아닐까, 결판을 내기 전에. 시작해 놓고 매듭을 짓지 못하면 우린 영영 파멸이다. 저 소린! 난 그자들의 얼굴이 내 아버질 닮지 않았던들 내가 해치웠을 거다. 맥베드 부인 돌아서서 층계로 올라가려 할 때 2층 입구에 나타난 맥베드를 본다. 그의 양팔은 피범벅이 되어 있고 왼손에 두 자루의 단검을 쥐고 있다. 그는 휘청거리며 걸어온다. 여보! 맥베드: (낮은 소리로) 해치웠소... 소리 듣지 못했소? 맥베드 부인: 부엉이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밖에 못 들었어요. 무어라고 말씀 안 하셨어요? 맥베드: 언제? 맥베드 부인: 방금. 맥베드: 내려올 때 말이오? 맥베드 부인: 예. 맥베드: 들어봐! (두 사람 귀를 기울인다) 옆방에서 자는 자가 누구요? 맥베드 부인: 도날베인이에요. 맥베드: 이 무슨 비참한 꼴인가. (피묻은 손을 들여다본다) 맥베드 부인: 그 무슨 소리에요, 비참하시다니. 맥베드: 한 놈은 자면서 웃고 있었고, 또 한 놈은 "살인이야!" 하고 외쳤소. 그러고선 두 놈이 눈을 뜨더군. 난 그 자리에 못박혀 서서 듣고 있었더니, 두 사람은 기도를 올리고선 다시 잠들고 말았소. 맥베드 부인: 거기에 두 사람이 같이 자고 있었을 텐데. 맥베드: 한 놈이 "하느님 우리에게 자비를!" 하고 기도하자 또 한 놈은 "아멘." 이라고 하더군. 놈들이 이 자객의 손을 보았던 게지. 그런데 "하느님 우리에게 자비를."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난 "아멘." 이라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맥베드 부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맥베드: 왜 난 "아멘." 소리를 하지 못했을까? 나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했는데. "아멘."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질 않다니. 맥베드 부인: 이런 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다간 미치게 됩니다. 맥베드: 어디에서인지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소. "더 이상 잠을 못 잔다! 맥베드는 잠을 죽였다." 고--. 저 맑고 깨끗한 잠, 엉클어진 심로의 실타래를 풀어 주는 잠, 그날 그날의 생명의 죽음, 노고를 풀어 주는 목욕,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영약, 대자연이 베풀어 주는 제2의 생명, 생명의 향연에 중요한 자양물인 잠을--. 맥베드 부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맥베드: 온 집안을 향해 외치고 있었소, 더 이상 잠잘 수 없다! 글래미스는 잠을 죽였다. 그러니까 코오더는 더 이상 잠잘 수 없다. 맥베드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 맥베드 부인: 누가 그 따위 소릴 했어요? 이것 보세요, 여보, 기왕 저지른 일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생각하시면 당신의 훌륭한 담력을 잃게 돼요. 어서 물로 더러운 손의 핏자국을 씻어 증거를 지워 버리세요. 왜 이 단도들을 가지고 오셨어요? 거기 놔두지 않구. 어서 도로 가지고 가서 잠자는 호위병들에게 피를 뭉개 놓으세요. 맥베드: 난 더는 못 가오. 내가 저지른 일은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오. 난 두번 다시 볼 순 없소, 진저리가 나오. 맥베드 부인: 원, 그렇게 속내가 약해서야! 단도를 이리 주세요. 잠자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은 화상과 매한가지예요. 어린애나 그림에 그린 악귀를 보고 무서워하는 거죠.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으면 경호원들 얼굴에 피범벅을 해주겠어요.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게요. (퇴장. 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맥베드: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린가? 웬일일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무슨 소리가 나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지 않는가? 이 손이 무슨 꼴이람? 아!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구나! 바다의 신 넵튠이 다스리는 망망대해의 바닷물인들 이 손에 묻는 피를 씻어 버릴 수 있을까? 못한다, 오히려 넓고 한없는 바닷물을 빨갛게 하여 푸른 대양을 붉게 물들게 할 것이다. 맥베드 부인: 돌아온다. 내실 문을 닫는다. 맥베드 부인: 제 손도 같은 빛이 됐어요. 그러나 저의 심장은 당신처럼 파리하게 질려 있진 않아요. (문 두드리는 소리) 남쪽 문을 두드리는 소리예요. 어서 우리방으로 돌아가십시다. 물만 조금 있으면 핏자국도 그 일로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쉽지 뭐예요! 용기를 잃고 주눅이 드셨군요. (문 두드리는 소리) 아, 저소리! 또 두들겨요. 어서 가운으로 갈아입으세요, 혹시 우리가 불려나갈 경우 깨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서는 안 돼요.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계시지 마세요. 맥베드: 저지른 일을 생각하니 차라리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다. (문 두드리는 소리) 저 소리가 당컨을 깨워 주려무나! 제발 그렇게 해다오! (두 사람 퇴장) [ 제3장 맥베드 성의 안뜰 ]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격해진다. 문지기가 안뜰에 등장. 술에 취해 있다. 문지기: 젠장, 작살나게 두드리는군! 지옥의 문지기라면 열쇠 돌리기에 꽤나 바쁘겠다. (문 두드리는 소리) 탕 탕 탕! 염라대왕의 이름으로 묻는다, 도대체 누구냐? 풍년 들어 쌀값이 곤두박질한다고 목을 맨 농분가 보군. 그래 얼씨구 잘 왔다. 수건이나 넉넉히 준비해 둬라, 비지땀깨나 빼야 할 테니. (또 문 두드리는 소리) 탕 탕! 자 이번엔 염라대왕 사촌의 이름으로 묻겠는데 대관절 거 누구요? 옳거니, 간에 붙고 염통에 빌붙으며 야살을 떠는 사기꾼이로구나.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찬밥 먹듯 까발리는 썩은 놈 같으니! 어차피 천국 가긴 틀린 놈이겠다. 자, 들어오시오, 사기꾼 양반. (문 두드리는 소리) 탕 탕 탕! 옳지. 영국 재단사가 왔구나, 프랑스 바지 옷감에서 자투리를 잘도 처먹었겠다. 들어오슈 재단사 나리, 여긴 자네 다리미를 달구기에 안성맞춤일세. (또 문 두드리는 소리) 또 탕 탕! 이거야 귀가 따가워 살겠나! 누구요? 여긴 아무래도 지옥치고는 너무 춥군. 지옥 문지기는 오늘로 하직이다. 이승에서 향락의 수렁에 빠졌다가 영겁의 불더미 속으로 뛰어든 자는 생업을 가리지 않고 몇 놈쯤 통과시켜 줄 셈이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예, 갑니다, 갑니다요! 제발 이 문지기에게 인정돈을 잊지 말아 줍쇼. (문을 연다) 맥다프와 레녹스 등장. 맥다프: 간밤엔 늦게 잠든 모양이군? 이렇게 늦게야 깨어나는 걸 보니. 문지기: 예 그렇습니다요, 닭이 홰를 두 번 칠 때까지 술추렴을 했습죠. 그런데 술이란 놈은 세 가지 자극을 주거든요. 맥다프: 특히 술이 준다는 세 가지 자극이란 무엇인가? 문지기: 예, 뺑코를 만들게 하고, 잠이 잘 오고, 오줌이 술술 나온다 그 말씀입죠. 색이란 놈은요, 그놈이 불을 질러 놓기도 하고 모른 척하고 고개를 꼬기도 합죠. 색정은 일으키지만 어디 제대로 일을 치르게 하나요. 그러니까 과음은 색에 관한 한 혓바닥이 둘인 사기꾼이라 이 말씀이옵죠. 술이란 놈, 색정을 보란 듯이 주었다가 더운 물에 데친 풋나물처럼 죽여 놓고 말지 뭡니까요. 자극을 시켰다가도 슬그머니 물러서고 용기를 주었다가 오갈이 들게 하고, 달뜨게 해놓고는 줄행랑을 치니, 결국은 술꾼을 잠들게 하고 사기치고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이 말씀입니다요. 맥다프: 자넨 간밤에 술에 넘어간 술꾼이 된 모양이군. 문지기: 예 그렇습죠, 물귀신한테 발목 잡힌 듯이 목덜미를 붙잡혀 넘어갔습죠. 그러나 소인도 앙갚음을 하고야 말았죠. 저도 그놈에겐 어지간히 대가 세니까요. 결국 놈을 말끔히 토해 태질을 쳐버렸습죠. 한땐 그놈이 내 다리를 잡고선 휘청거리게도 했습죠만. 맥다프: 주인나리께선 일어나셨나? 맥베드 가운을 입은 채로 등장. 우리가 문을 두드려서 잠을 깨셨나부다. 저기 오시는군. 레녹스: 밤새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맥베드: 안녕히 주무셨소, 두 분께서도. 맥다프: 영주님, 폐하께서는 기침하셨는지요? 맥베드: 아직도 주무시오. 맥다프: 폐하께서 아침 일찍 깨우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습니다. 맥베드: 침소로 안내해 드리리다. (모두 안쪽 문으로 다가선다) 맥다프: 이번 일은 기쁜 수고이신 줄로 압니다만 그래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맥베드: 즐겨서 하는 일이니 수고랄 것도 없습니다. 여기가 침소입니다. (그는 가리킨다) 맥다프: 무엄하지만 저의 임무이니 들어가 뵙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레녹스: 폐하께서는 오늘 이곳을 떠나십니까? 맥베드: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계셨습니다. 레녹스: 간밤은 어수선한 밤이었습니다. 우리 숙소의 굴뚝이 바람에 쓰러졌어요. 소문으로는 공중에서 곡성이 들리고 죽음을 알리는 울부짖음이 괴이하게 밤하늘을 가르더라지 뭡니까. 그리고 말세가 온 듯 괴이한 앙화와 무서운 변고가 들이닥칠 징조를 예언하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고 합니다. 또 부엉이가 밤새도록 불길하게 울었다고 합니다. 대지가 벌벌 떨 듯이 진동을 했다고 합니다. 맥베드: 사나운 밤이었군. 레녹스: 비록 젊습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한 그처럼 괴이하고 음산한 밤은 처음입니다. 맥다프 당황하여 다시 나타난다. 맥다프: 아 끔찍한 일이다! 끔찍한 일! 끔찍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소름이 끼쳐 말이 안 나온다! 맥베드: 무슨 일이오? 레녹스: 무슨 일이오? 맥다프: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소! 대역무도한 시역이 신전을 때려부수고 목숨을 앗아가 버렸소. 맥베드: 뭐요? 목숨을? 레녹스: 폐하 말입니까? 맥다프: 침소에 들어가 보시오, 괴녀 고르곤을 다시 보듯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소. 나에게 묻지 마시고 직접 가서 보시고 스스로 평하시오. (맥베드와 레녹스 화급하게 퇴장) 일어나시오! 일어들 나시오! 경종을 울려라! 시역이다, 역모다! 뱅코우 장군! 도날베인 전하! 맬컴 전하! 일어나십시오! 죽음의 가면인 솜털같이 포근한 잠을 털어 버리고 진짜 죽음을 눈을 밝히고 보십시오! 일어나세요, 대심판의 날의 현장을 보시오! 맬컴 전하! 뱅코우 장군! 처참한 공포에 어울리도록 무덤을 깨고 나온 유령처럼 걸어들 오시오. 경종을 울려라. (비상종이 울린다) 맥베드 부인 가운 차림으로 등장. 맥베드 부인: 웬일이십니까? 요란스럽게 종을 울려 온 집안 사람들을 깨우니 말예요. 말씀을 하세요. 어서요! 맥다프: 오 이럴 수가, 부인! 제가 어찌 그 참혹한 말씀을 여쭐 수 있겠습니까? 부인이 들으시면 안 됩니다. 부인께서 들으시면 당장 기절을 하고 생명을 잃으실 겁니다. 옷을 대충 걸친 뱅코우 등장. 오 뱅코우! 뱅코우 장군! 폐하께서 시역을 당하셨소! 맥베드 부인: 아이구머니나,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아니, 이 성 안에서? 뱅코우: 그것이 어느 곳이든, 어쨌든 너무나 잔혹한 일이오. 맥다프, 제발 지금 한 말은 헛소리라고 말씀해 주시오. 맥베드와 레녹스 다시 등장. 맥베드: 이 변이 일어나기 한 시간 전에만 내가 죽였던들 내 일생은 행복한 것이었을 거다. 이젠 내 인생에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검부더기에 불과할 뿐, 영예도 덕도 다 죽어 버렸다. 생명의 술은 바닥이 나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술찌꺼기뿐이 아닌가. 맬컴과 도날베인 우측의 문에서 황황히 등장. 도날베인: 무슨 사단입니까? 맥베드: 왕자님, 폐하의 신상에 변이 생긴 것을 모르고 계셨군요. 폐하의 혈통의 샘이, 그 원천이, 그 샘줄기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 근원이 막혔습니다. 맥다프: 부왕께서 시역을 당하셨습니다. 맬컴: 아니, 누구한테? 레녹스: 침소의 호위병들의 소행 같습니다. 그자들의 손과 얼굴엔 피가 낭자하고, 그자들의 단검 역시 피가 묻은 채 베개맡에 놓여 있었습니다. 두 놈 다 사색이 되어 실성한 사람 같았습니다. 폐일언하고 그자들에게 사람의 생명을 맡겼다는 것이 도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맥베드: 너무나 치가 떨려 한 일이오만 그자들을 단칼에 베어 버린 것이 후회가 되오. 맥다프: 아니, 왜 죽였소? 맥베드: 한 어깨에 두 지게를 질 수는 없는 법. 놀라면서 잘 분별하고, 격분해서도 절도를 지킬 수 있고, 충성하면서 냉담할 수가 있겠소? 나의 불타는 충절심은 들뜬 나머지 길을 막고 울을 치는 이성을 뛰어 넘어 버렸소. 이쪽에 당컨왕 폐하가 쓰러져 계셨소, 은빛 같은 살결에는 금빛 핏발이 무늬졌고, 입을 벌린 상처는 무참한 파괴의 손길이 휘잡고 들어간 균열 같았소. 그리고 저쪽에는 자객들이 시역의 증거로 핏빛으로 물들어 있고, 단검은 피로 응혈져 있었소. 그러니 어찌 참을 수 있겠소, 군왕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있었다면? 맥베드 부인: (기절하려고 한다) 오, 날 데리고 나가 주세요! 맥다프: 아, 부인을 돌봐 드리시오. 맬컴: (도날베인에게 방백) 왜 우린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지? 우리야말로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을 텐데? 도날베인: (맬컴에게 방백) 지금 무슨 말을 하겠어, 어떤 액운이 구멍 같은 작은 틈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우릴 덮치고 해꼬지할지 모르는데. 자 이 자리를 피해야지. 눈물도 나오지 않는군. 맬컴: (도날베인에게 방백) 우리의 슬픔이 너무 깊어 미처 슬픔을 느낄 새도 없군. 시녀들 등장 뱅코우: 부인을 돌봐 드려라... ... (시녀들 맥베드 부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우린 변변히 옷도 걸치지 않아 찬 밤공기에 좋지 않을 거요. 옷을 입은 후에 다시 모여서 이 잔인무도한 시역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합시다. 지금은 공포와 의혹이 우리를 몸서리치게 할 뿐이오. 나로서는 모든 것을 위대한 신의 손에 맡겨 어떠한 비밀의 음흉한 악의가 있다 해도 그것과 싸우겠소. 맥다프: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동: 다들 그럽시다. 맥베드: 어서 지체 말고 옷을 갈아입고 대청으로 모입시다. 일동: 그렇게 합시다. (맬컴과 도날베인만 남고 모두 퇴장.) 맬컴: 넌 어떻게 하겠니? 저 사람들하고 행동을 같이 해서는 아니된다. 마음에도 없는 슬픔을 보이는 것은 위선자들의 간악한 술수이다. 난 영국으로 가겠다. 도날베인: 난 아일랜드로 가겠어. 우린 따로따로 헤어져 있는 것이 서로 안전할 거야. 이곳은 사람들의 웃음 속에 칼날이 들어 있어. 핏줄기가 가까울수록 더 잔인하거든. 맬컴: 살인의 화살은 이제 시위를 떠났을 뿐이다. 우리가 안전하려면 과녁에서 피해야만 돼, 어서 말을 타자. 작별 인사를 이리저리 할 때가 아니다. 빨리 도망치자. 생명이 위험할 때에 자기의 목숨을 훔쳐 온전하게 챙기는 것은 죄가 안 된다. (두 사람 퇴장) [ 제4장 맥베드의 성 앞. 몹시 음산한 날 ] 로스와 노인 등장. 노인: 이 늙은이는 칠십 평생 부대낀 일은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무서운 시절도, 이상한 일도 다 보아왔습니다만 간밤의 처절함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스: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길, 노인 양반, 저 하늘을 보세요. 하늘도 인간의 소행에 마음이 아팠는지 피비린내나는 이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군요. 시각은 대낮인데도 캄캄한 어둠이 태양의 목줄기를 조이고 있지 뭡니까. 도대체 밤의 기세가 등등해서인지 아니면 낮이 수줍어해서인지 밝은 햇빛이 이 땅을 비춰야 할 시각에 이처럼 어둠이 깔려 있으니 웬일입니까? 노인: 참으로 괴이한 일이오, 간밤의 사건도 그렇거니와. 지난 화요일에 말씀예요, 글쎄 하늘 높이 유유히 맴돌던 매가 쥐나 겨우 잡는 부엉이한테 채여서 꼴깍 했다지 뭡니까. 로스: 노인장 얘길 듣고 보니 당컨왕의 말들 일이 생각나는군요. --아주 괴상한 일입니다,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빼어난 준마여서 그 종자 중에서도 귀여움을 받던 것이었는데 말들이 별안간 사나워져서 마구간을 짓부수고 뛰쳐나와 마치 사람과 결투라도 하려는 듯이 반항하고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노인: 서로 물어뜯었다고도 하던데요! 로스: 이 사람도 보고 놀랐습니다만, 사실 그랬습니다. 맥다프, 성에서 나온다. 저기 맥다프 경이 오시는군.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맥다프: (하늘을 가리키며) 저걸 아직 모르시오? 로스: 대역 무도한 시역자는 판명되었습니까? 맥다프: 그 두 사람일 테죠, 맥베드가 베어 버린. 로스: 어이구 맙소사! 어째서 그런 짓을 하였을까요? 맥다프: 사주당한 거죠. 맬컴과 도날베인 두 왕자께서 비밀리에 탈주를 했어요. 그래서 혐의는 전적으로 두 왕자가 받고 있어요. 로스: 갈수록 해괴한 일이로다! 쓰잘데없는 야심이군. 딱하기도 하지, 자기 목숨의 탯줄을 자기 이빨로 끊다니! 그럼 보위는 필시 맥베드 장군께로 돌아가겠군요. 맥다프: 벌써 지명도 끝나 대관식을 하시러 스쿤으로 떠나셨습니다. 로스: 당컨왕의 유해는 어디로 모셨습니까? 맥다프: 역대 왕의 유해를 모시는 코옴 킬 묘사로 모시게 됐지요. 로스: 장군께서도 스쿤으로 가시겠군요? 맥다프: 안 갑니다, 저는 파이프로 돌아갈 작정입니다. 로스: 그렇습니까? 전 스쿤으로 가 보겠습니다. 맥다프: 그럼 거기 일이 모두 잘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만납시다! 새옷보다 낡은 옷이 입기 편하다는 풍문이 돌지나 않았으면! 로스: 노인장, 이만 실례합니다. 노인: 하느님의 축복이 두 분께 있길 빕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고치고, 원수를 친구되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의 축복이 있기를! (세 사람 퇴장) 수주일이 경과한다. [ 제3막 ] 마음에 간직한 사랑의 술잔에 증오의 독주를 채운 것도 그자들 때문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내 불멸의 보배를 인류의 적인 악마에게 내준 것도 모두가 그자들을 왕이 되게 함이었던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운명이여 당당히 승부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리라. - 1장 맥베드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포레스 왕궁의 접견실 ] 뱅코우 등장. 뱅코우: 너는 그 요괴한 여자들의 예언대로 왕도 코오더도 글래미스도 다 손아귀에 거머 쥐었구나. 그래, 너는 가장 사악한 수단으로 이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말하기를 왕위는 너의 후손에까지 계승될 수 없다고 했다. 바로 내가 미래의 제왕의 근원이 되며 조상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들의 예언이 사실이라면--맥베드, 그것들의 예언이 너의 경우엔 잘 맞아 들었다--. 그렇다, 너에게 실현된 것을 볼 것 같으면 내가 받은 예언도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쉬, 이만해 두자.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왕으로서의 맥베드, 왕비로서의 맥베드 부인, 레녹스,로스, 귀족들과 귀부인 및 시종들 등장. 맥베드: (뱅코우를 발견하고 부인에게) 바로 주빈이 여기 계셨군. 맥베드 부인: 저 분이 참석 안 하셨다면--모처럼의 축하연이 크게 허전할 뻔했습니다. 모든 일이 꼴사납게 되는 거죠. 맥베드: (뱅코우에게) 오늘밤 과인이 정식 만찬회를 베풀 터이니 장군도 부디 참석하기 바라오. 뱅코우: 부디 하명만 하소서, 폐하의 분부를 따름이 영원히 굳게 맺어진 신들의 의무로 알고 있나이다. 맥베드: 오늘 오후에 말을 타고 어디 간다던데? 뱅코우: 폐하, 그러하옵니다. 맥베드: 그렇지 않다면 오후의 회의에 참석하여 장군의 사려깊고 유익한 의견을 들으려 하였는데. 그럼 내일 듣기로 하리다. 먼 데를 가오? 뱅코우: 폐하, 지금 떠나면 만찬회까진 돌아올 수 있사옵니다. 만일 말이 잘 달려 주지 않으면 한두 시간 늦어 밤에 당도할지도 모르옵니다. 맥베드: 연회에 늦지 않도록 하오. 뱅코우: 그렇게 하겠나이다, 폐하. 맥베드: 듣자하니 과인의 잔인한 친척인 두 왕자가 영국과 아일랜드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잔악한 부왕 살해죄를 자백하기는커녕 도리어 괴이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 하오. 이 일도 내일로 미루리라. 그 외에도 둘이서 협의해야 할 다른 정사도 있소. 어서 말을 타시오. 잘 다녀오오. 밤에 다시 만납시다. 플리언스도 동행하는지? 뱅코우: 예, 함께 갑니다. 폐하, 시간이 되었으니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맥베드: 말이 든든한 다리로 빨리 달려 주길 바라오. 어서 말을 타오. 잘들 다녀오오. (뱅코우 퇴장) 밤 일곱 시까지는 각자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오. 오늘 만찬회를 한층 즐기기 위해 과인도 그때까지 혼자 있겠소. 그럼 그 사이 편히들 쉬오! (맥베드와 시종 한 사람만 남고 모두 퇴장) 여봐라,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대기하고 있느냐? 시종: 예 폐하, 궁전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나이다. 맥베드: 불러들여라. (시종 퇴장) 이렇게 그럭저럭 지나간다는 게 뭐란 말인가? 이 몸의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가슴엔 뱅코우에 대한 공포심이 응어리져 있지 않은가. 그자의 왕자다운 기품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잔 대담한 데다 용기를 슬기롭게 발휘하여 무슨 일이든 딱 부러지게 해내는 저력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두려워하는 자는 뱅코우뿐이다. 그자와 같이 있으면 난 오금을 못 편단 말이야, 마크 엔토니의 수호신이 시이저를 두려워했다고 전해 오듯이. 그 여자들이 처음으로 날 왕이라고 불렀을 때에 그자는 그것들을 야멸차게 꾸짖고 자기에게도 한마디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었지. 그렇지, 그것들은 예언자인양 그잘 제왕의 조상이라고 축복하였어. 그것들은 내 머리에는 실속없는 왕관을 씌워 주고 내 핏줄이 왕위를 잇지 못하고 남의 자손이 대권을 계승하도록 점지된 허망한 왕홀을 내 손에 쥐어준 셈이구나. 그래, 그렇다면 뱅코우의 자손을 위해 이 손을 더럽힌 게 아닌가? 그들 때문에 인자한 당컨왕을 살해했단 말인가? 마음에 간직한 사랑의 술잔에 증오의 독주를 채운 것도 그자들 때문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내 불멸의 보배를 인류의 적인 악마에게 내준 것도 모두가 그자들을 왕으로 하기 위해, 즉 뱅코우의 자손들을 왕이 되게 함이었던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운명이여, 당당히 승부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리라. 거기 누구냐? 시종 두 자객을 대리고 다시 등장. (시종에게) 넌 부를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라. (시종 퇴장) (자객들에게) 너희들과 만나서 이야기한 것이 어제였겠다? 자객1: 그러하옵니다, 폐하. 맥베드: 그렇다면 과인의 말을 잘 생각해 보았는가? 지금까지 너희들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은 무고한 나인 줄로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실은 바로 그자였다. 이 문제는 어젯밤 얘기로 충분히 납득이 갔으렷다. 너희들이 어떻게 꼬임에 빠졌고, 배신을 당했으며, 앞잡이는 누구며, 조종자는 누구였는지 아무리 머저리고 실성한 사람일지라도 '그것이 다 뱅코우의 짓이다' 라고 납득할 정도로 내가 증명했을 터인데. 자객1: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맥베드: 암 그래야지. 실은 오늘 너희들한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부른 것이다. 그래 너희들은 그것을 그대로 눈감아 버릴 셈이냐? 그렇게 참을성이 강하더냐? 그리고 그 알뜰한 양반과 그 자손을 위해 기도를 드릴 심정인가? 그렇게 신앙심이 두터운가? 그 악독한 놈 때문에 목숨이 거덜날 지경으로 고초가 심했고 가족들은 비럭질을 하게 되었는데도? 자객1: 저희들도 남자이옵니다, 폐하. 맥베드: 그렇겠지, 그야 남자니까 명부상에는 인간측에 들겠지. 사냥개도, 그레이하운드도, 잡종개도, 또 발발이, 들개, 똥개, 물개, 반늑대의 개도 다 개라고 부르지. 그러나 가격표에는 빠른 놈, 느린 놈, 약은 놈, 집 지키는 놈, 사냥하는 놈, 이와같이 풍부한 대자연에서 받은 그 천성에 따라서 구별이 되고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게 되느니라. 일반적으로 씌어져 있는 명부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 너희들도 인간 가격표에 올라 있고 잡살뱅이의 값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하라. 그렇다면 내가 비밀히 부탁할 일이 있다. 그 일만 잘 해내면 너희들은 원수를 처치할 수 있고 내 신임을 얻고 총애를 받게 될 것이다. 그자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병자와 같으니라, 그자가 죽어야만 심신이 편안하겠다. 자객2: 폐하, 소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혹하게 밟히고 채여 분통이 터질 지경이라 세상에 대한 분풀이라면 여물로 소금섬을 끌래도 끌겠습니다. 자객1: 소인도 넌덜머리가 나도록 재난에 시달리고 액운에 부대껴 와서 더운밥 쉰밥 가릴 처지가 아니오라, 화약을 지고 불더미 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맥베드: 너희들의 원수는 뱅코우다, 다 알았겠지? 두 자객: 예, 아다뿐이겠습니까, 페하. 맥베드: 그잔 과인에게도 원수이다. 그자와 나는 서로 겨누고 있는 터라, 그자가 살아있는 한 언제 나의 급소를 찌를지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다. 물론 나는 왕권으로 그자를 버젓이 내 눈앞에서 없애 버릴수도 있다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 그자에게도 나에게도 친구인 자들이 있으니, 그자들의 우정에 금이 갈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잘 요절을 내더라도 나는 애통해하는 듯 보여야 한단 말이다. 너희들의 조력을 빌리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어 그러니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렸다. 자객2: 기필코 어명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자객1: 비록 소인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맥베드: 너희들의 본심을 알았느니라. 늦어도 한 시간 이내에 잠복할 곳을 일러주겠다. 그리고 정확한 결행 시간도 알려 주겠다. 오늘밤 궁전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해치워야 하느니라. 내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여라. 그리고 그와 함께--뒤탈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그와 동행하는 아들 플리언스도, 그의 자식이 없어지는 것도 그의 부친 못지않게 나에겐 중요하니까 그 녀석도 같은 암흑의 시간의 운명을 안겨 줘라. 그럼 물러가 있거라. 두 자객: 폐하, 소인들은 이미 배짱이 정해져 있습니다. 맥베드: 곧 부르겠다. 안에서 기다려라. (자객들 퇴장) 이것으로 결정이났다. 뱅코우여, 네 혼이 천당에 갈 수 있는거라면 바로 오늘밤에 가야 하느니라. (다른쪽 문으로 퇴장) [ 제2장 포레스 왕궁의 접견실 ] 맥베드 부인과 시종 한 사람 등장. 맥베드 부인: 뱅코우 장군께서 궁전을 떠났느냐? 시종: 예 왕비전하, 하지만 오늘밤에 돌아오신답니다. 맥베드 부인: 폐하께 아뢰어라,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시종: 예, 왕비전하. (퇴장) 맥베드 부인: 아무것도 아니야, 왜 이리도 허망할까? 야망은 이루어 졌건만 만족을 얻지 못하니. 살인을 하고도 불안이 진드기처럼 따라붙는다면 차라리 살해당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리라. 맥베드 사념에 잠겨 등장. 웬일이세요, 폐하? 왜 늘 하찮은 공상에 매달려 홀로 계십니까? 그런 생각은 깨끗이 떨쳐 버리셔야 합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란이 아닙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건 죽은 아이 나이 세기와 같습니다. 이왕지사 저지른 일은 이미 과거지사입니다. 맥베드: 우린 독사를 난도질했을 뿐, 죽이진 못했소. 그 상처가 아물면 어설픈 살상을 한 우린 언제 독사의 이빨에 물릴지 모르오. 지금처럼 불안감에 떨며 하루 세 끼 겨우 식사하고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잠을 잘 바엔 차라리 이 세상이 산산조각이 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면 좋겠소. 양심이 고문을 당하듯 하루 한 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니 차라리 그 망자와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것이오. 그자를 안식의 세계로 보낸 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당컨은 지금 무덤 속에 있소. 열병 같은 인생을 끝마치고 편안히 잠들고 있단 말요. 역모의 피바람도 지나가 버렸소. 이젠 칼도 독약도 내란도 외구의 침입도 그를 괴롭힐 수 없지 않소. 맥베드 부인: 당치도 않는 말씀 그만 하세요. 폐하, 험악한 표정을 짓지 마시고 오늘밤엔 명랑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손님들을 대하소서. 맥베드: 그러리다, 당신도 그렇게 해주오. 뱅코우에겐 특별히 마음을 쓰시오, 눈길에도 말투에도 극진히 경의를 표하도록 하시오. 우린 아직도 호랑이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형편이니 국왕의 존엄성을 아부의 물결에 담그고 얼굴에 거짓 허울을 씌워 본심을 감추어야 하오. 맥베드 부인: 이제 그만하세요. 맥베드: 내 마음 속을 독충들이 휘젓고 있소! 당신도 아다시피 뱅코우와 그 아들 플리언스가 살아 있잖소. 맥베드 부인: 하지만 그들 부자의 생명도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맥베드: 그 말을 들으니 다소 위안이 되오. 그자들의 목숨이라고 창 끝이 못 뚫을 리 없잖소? 그러니 당신도 쾌활히 하오. 박쥐가 수도원 안을 날아다니고 잡충이 암흑의 마녀 헤커티의 부름을 받고 그 딱딱한 나래를 치며 밤의 하품을 재촉하는 종소릴 내기 전에 반드시 가공할 변이 터질 것이오. 맥베드 부인: 어떤 변인데요? 맥베드: 왕비, 당신은 모르고 있는 게 좋소. 성사가 되거든 칭찬이나 해주오... ... 자 어서 오너라, 눈을 가리는 밤의 어둠이여, 연민의 정이 고인 낮의 부드러운 눈을 가려다오. 그리하여.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나에게 겁주고 있는 저자의 목숨의 증거를 갈기갈기 찢어 버려다오! 어둠발이 내리는구나, 까마귀는 서둘러 숲속 보금자리로 가고 있다. 낮의 세계의 선량한 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졸기 시작하고 밤의 사악한 앞잡이들은 먹이를 찾아 눈을 붉힌다. 아마 내 말을 무슨 흰소리로 여기나 보구려. 염려 놓으시오. 악으로 시작한 것은 악으로 다져야 하오. 자, 들어갑시다. (두 사람 퇴장) [ 제3장 궁전 바깥, 숲의 언덕길 ] 세 자객이 북면을 하고 등장. 그 중 두 사람은 맥베드와 응대한 전력이 있지만, 다른 한 사나이는 이들이 처음 대면하는 인물이다. 자객1: (자객3에게) 대관절 누가 자네더러 우리한테 가담하라고 했나? 자객3: 맥베드. 자객2: (자객1에게) 의심할 것 없네. 그의 하는 말이 우리가 할 일, 우리가 하명받은 것과 딱 맞아. 자객1: 그럼 우리와 손을 잡읍시다.서쪽 하늘에는 아직도 석양빛이 가물거리고 있군. 길 저문 나그네가 제 시간에 여인숙에 들려고 말을 재촉할 무렵이오. 우리가 기다리는 자도 곧 나타날 거요. 자객3: 쉿! 말굽소리. 뱅코우: (멀리서) 얘야, 횃불을 이리 다오! 자객2: 그래, 저자다. 초대를 받은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궁전에 들어가 있을 테니 말야. 자객2: 말이 저리 돌아서 가는 모양이군. 자객3: 일 마일쯤 저쪽으로 도는가 보오. 그자는 보통(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여기서 궁전 입구까지 걸어서 가오. 이때 뱅코우와 횃불을 든 플리언스가 오솔길을 오고 있다. 자객2: 횃불이 보인다,횃불이! 자객3: 그자다. 자객1: 준비하라. 뱅코우: (플리언스에게) 오늘밤은 비가 내릴 것 같다. 자객1: 내리쳐라. (자객1이 횃불을 쳐서 꺼버린다. 다른 두 사람은 뱅코우에게 달려든다) 뱅코우: 아이쿠, 살인이다! 플리언스 달아나라 달아나, 빨리 달아나! 이 원수를 갚아다오. 이 고얀 놈! (죽는다.플리언스 도망친다) 자객3: 횃불을 끈 자가 누구요? 자객1: 잘못했나? 자객3: 한 놈밖에는 못 해치웠어. 아들놈은 도망쳤어. 자객2: 제기랄. 알짜뱅이를 놓쳤다. 자객1: 자, 가서 한 대로 말씀 올리자. (세 자객 퇴장) [ 제4장 궁전 안의 대청 ] 안쪽에 단이 있고, 그 좌우에 입구가 있다. 단 위에는 옥좌가 있고, 앞에는 식탁이 있다. 이 식탁과 직각으로 맞대서 긴 식탁이 무대 중앙에 놓여 있다. 만찬석이 준비되어 있다. 맥베드, 맥베드 부인, 로스, 레녹스, 귀족들, 시종들 등장 맥베드: 여러분, 자리는 아실 테니 착석하여 주십시오. 모두 잘들 오셨소. 귀족들: 폐하,항공하옵니다. 맥베드, 맥베드 부인을 옥좌로 안내한다. 귀족들은 긴 식탁 양쪽에 각자 착석한다.맥베드의 옥좌는 비어있었다. 맥베드: 과인도 함께 끼여 주인 노릇을 해야겠소. (맥베드 부인 옥좌에 앉는다) 안주인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곧 환영 인사를 할 것이오. 맥베드 부인: 부디 저를 대신하여 폐하께서 여러분께 인사를 해주십시오. 저는 이미 마음 속 깊이 환영하고 있으니까요. 맥베드 좌측 입구를 지나갈 때에 자객1이 문에 나타난다. 귀족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맥베드 부인에게 예를 올린다. 맥베드: 자 보시오, 조정 중신들이 왕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소. 양쪽 좌석 수가 같으니 과인은 여기 한복판에 앉겠소. (빈 의자를 가리키며) 자 마음껏 즐기시오. 자, 돌아가며 축배를 마십시다. (문으로 가까이 가서, 낮은 소리로) 얼굴에 피가 묻었다. 자객1: (낮은 소리로) 그러하다 하시니 그건 뱅코우의 피올습니다. 맥베드: (낮은 소리로) 그 피가 그자의 체내에 있는 것보다 네 낯짝에 묻어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 처치해 버렸느냐? 자객1: (낮은 소리로) 폐하, 그자의 목을 찔렀습니다! 소인이 했습니다. 맥베드: (낮은 소리로) 넌 멱따는 명수군! 플리언스를 죽인 자도 훌륭한 자다. 그놈도 네가 해치웠다면 넌 명수 중의 명수가 틀림없으렷다. 자객1: (낮은 소리로) 폐하, 황송하오나 플리언스는 달아나 버렸나이다. 맥베드: (이맛살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그렇다면 또 불안이 날 덮치게 됐구나. 불안만 없애줬다면 난 대리석처럼 탄탄하고 너럭바위처럼 단단했을 것을. 또 만물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처럼 자유스럽고 활달한 기분이 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이제 난 비좁은 감옥에 갇혀 족쇄를 채운 몸으로 마음졸이게 하는 의혹과 공포에 얽매이게 되었구나. 뱅코우만은 틀림없느냐? 자객1: (낮은 소리로) 예, 폐하. 머리에 스무 군데나 깊은 상처를 입고 시궁창에 꼬꾸라졌습니다.가장 작은 상처 하나라도 치명상이옵니다. 맥베드: 수고ㅎ다. 애비뱀은 죽었다. 달아난 새끼뱀은 독사가 되겠지만 당장은 독을 뿜을 이빨이 없으렸다. 그만 물러가라. 내일 다시 듣기로 하자. (자객1 퇴장) 맥베드 부인: 폐하, 대접이 소홀하십니다. 연회석에서는 향응하는 동안 자주 환대의 말씀이 없으시면 음식점에서는 먹는 음식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먹기만 한다면야 자기 집이 제일이지요. 초청 받은 향연에서는 필히 환대라는 양념이 있어야 되잖아요? 환대가 없는 연회석은 불씨 없는 화로와 진배 없답니다. 맥베드: 왕비, 말씀 잘해 주셨소! 자 자, 많이 드시고 잘 소화시켜 더욱 건강하시오! 레녹스: 폐하께서도 좌정하시옵소서. (이때 뱅코우의 망령이 피묻은 모습으로 들어와 맥베드가 않으려 하는 의자에 않는다. 맥베드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망령은 맥베드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맥베드: 뱅코우 장군만 참석했다면 오늘밤은 만조백관이 전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 것을. 그러나 과인은 뱅코우 장군의 무성의를 책하는 것이 낫지 혹시 무슨 재앙이라도 있었을까 심히 염려가 되오! 로스: 그의 불참은 폐하의 분부를 어긴 무엄함이 큰 줄로 아옵니다. 황송하오나 폐하, 어서 좌정하여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맥베드: 좌석이 다 차 있는데. 레녹스: 여기 좌석이 있사옵니다, 폐하. 맥베드: 어디? 레녹스: 여기 좌석이 있사옵니다. 폐하... ... 왜 그렇게 놀라시옵니까? 맥베드: 누가 이런 짓을 했소? 귀족들: 무엇 말씀이옵니까, 폐하? 맥베드: (망령에게) 과인의 소행이란 말인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털을 내게 흔들지 말라. (맥베드 부인, 자리에서 일어선다) 로스: 여러분 일어납시다. 폐하께선 심기가 편치 않으십니다. 맥베드 부인: (걸어 내려오면서) 여러분 앉으십시오. 폐하께서는 이런 증세가 가끔 계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있는 일입니다. 어서 착석하여 주십시오. 발작은 일시적입니다. 곧 회복하실 겁니다. 폐하를 그렇게 쳐다보시면 기분이 상하셔서 증세가 더 돋칩니다. 쳐다보지 마시고 어서들 음식을 드세요. (맥베드의 옆으로 다가가서 낮은 소리로) 아니, 당신도 남잔가요? 맥베드: 그렇소, 용감한 사나이요. 그것도 악마라고 질겁을 할 저걸 노려보고 있는 남자요. 맥베드 부인: (낮은 소리로, 비꼬며) 참, 체통이 말이 아니군요! 당신의 공포심 때문에 생긴 환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공중에 떠서 당컨에게로 인도하겠다던 단검의 환영과 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걸 가지고 왜 이렇게 흥분하고 놀라세요? 겨울날 화롯가에서 늙은 할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를 듣고 화들짝 놀라는 아녀자처럼 말입니다. 부끄러우신 줄을 아세요! 왜 그런 얼굴을 하시죠? 쏘아보신들 텅빈 의자밖에 더 있어요? 맥베드: 자, 저걸 보오! 저걸! 저것 보시오! 자, 어떻소? 그래 뭣이든 상관없다. 머리를 끄덕일 수 있거든 말도 해 보아라. 만일 납골당이나 무덤이 매장했던 것을 토해낸다면 앞으로는 솔개미의 배창자를 무덤으로 써먹어야겠다. (망령 사라진다) 맥베드 부인: 그만하세요! 대장부답지 않게 환영을 보고 놀라시다니. 맥베드: 여기 서 있는 게 확실하다면 그잘 본 것도 확실하오. 맥베드 부인: 그만두세요, 창피스럽게! 맥베드: (이리저리로 걸어다니며) 유혈의 참극은 이전에도 있었소. 인도적인 계율이 생겨 사회를 개화시키기 전의 태고적에도 아니 이후에도 귀에 담기조차 끔찍한 살육이 있었지. 그러나 예전에는 골이 터져 나오면 인간은 죽고 그래서 일이 끝장났던 것인데, 지금은 골통에 스무 군데나 치명상을 입고도 다시 일어나 과인을 의자에서 밀어내다니... ... 살인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더욱 괴이하단 말요. 맥베드 부인: (맥베드의 팔을 잡으며) 폐하, 귀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맥베드: 아, 그렇지... 과인을 이상하게 생각들 마오. 과인에겐 이상한 지병이 있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별거 아니지만. 자, 경들의 우정과 건강을 비오. 과인도 앉겠소. 자, 술을 따르오, 철철 넘치도록. (맥베드 잔을 들어 올리자, 망령이 나타나 맥베드 등 뒤의 좌석에 않는다) 만장한 경들을 위해 또 여기 보이지 않는 친우 뱅코우 장군을 위해 건배를 하리라. 장군이 참석하였더러면 좋았을 것을! 경들을 위해, 그를 위해 건배합시다. 자, 우리 모두를 위해! 귀족들: (건배한다) 신들의 충절을 바쳐 삼가 건배하나이다. 망령 다시 등장. 맥베드 사색이 된다. 맥베드: (망령에게) 물러가라!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땅 속으로 꺼져! (잔을 떨어뜨린다) 너의 뼈에는 골수가 없고 너의 피는 얼음처럼 차다. 네가 아무리 뚫어지게 본다 해도 네 눈동자에는 사물을 보는 힘이 없을 것이다. (귀족들 경악하여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맥베드 부인: (사람들을 제지하며) 여러분, 이것은 늘 있는 습관이라 생각하여 주십시오. 별것이 아닙니다. 그만 모처럼의 흥이 깨져 미안합니다. 맥베드: (망령에게)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몰골 사나운 러시아 곰이건 뿔돋힌 코뿔소이건 하이케니어의 호랑이건 무슨 탈을 쓰고 와도 좋다. 원래의 제 모습만 아니라면 내 오장육부는 얼어붙지 않는다. 어디 네놈이 다시 살아나서 황야에서 칼을 들고 덤벼 봐라. 내가 겁먹거든 날 애송이라고 불러도 좋다. 물러가라, 소림끼치는 그림자야! 있지도 않는 환영아, 꺼져라! (망령 사라진다) 아아, 사라졌다. 그놈만 사라지면 난 다시 인간이다. (귀족들에게) 경들이여, 그냥 앉으시오. 맥베드 부인: 그렇게 실성맞게 구시니 흥이 깨지고 좋은 회합이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맥베드: 어찌 놀라지 않겠소? 그자가 갑자기 나타나 여름 구름처럼 과인을 덮치는데 말이오. 여러분의 안색을 보니 나 자신을 모르게 되오. 여러분도 그 광경을 보았을 텐데 과인이 공포에 질려 파랗게 질렸는데 반해 경들은 안색 하나 변치않고, 볼에는 생생한 혈색을 그냥 띠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이오? 로스: 폐하, 뭣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옵니까? 맥베드 부인: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십시오. 흥분하시면 덧나게 됩니다. 물음을 받으면 흥분하십니다. 속히 이만 물러들 가십시오. 퇴석의 순서는 괘념치 마시고 어서 떠나 주십시오. 레녹스: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께서 속히 쾌유하시옵기를 기원하나이다. 맥베드 부인: 여러분, 모두 안녕히 가십시오! (맥베드와 맥베드 부인만 남고 모두 퇴장) 맥베드: 정녕 피를 보고야 말려는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고 하지 않는가. 묘석이 움직이고 나무가 고자질을 했다는 실례도 있다지 않은가. 점술과 이미 알려진 상관관계의 이치가 까치나, 까마귀, 당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숨은 암살자의 비밀을 알아내게 했다지 않은가? ... ... 밤은 얼마나 깊었소? 맥베드 부인: 글쎄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맥베드: 맥다프가 이리로 오라는 왕명을 무시했겠다?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맥베드 부인: 사자를 보내 보셨나요? 맥베드: 우연히 들었소. 언제고 사자를 보낼 것이오. 웬만한 집 쳐놓고 내가 매수한 하인이 없는 집은 없소... 내일 아침 일찍 그 요괴스런 여자들한테 가 보리다. 말을 더 들어봐야 겠소. 이렇게 바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점괘가 나올지언정 꼭 미리 알아야겠소. 나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어차피 내친 걸음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피비린내나는 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결판을 지으리다.이데 물러서는 것은 앞으로 나가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오. 내 머리에 홰를 치고 있는 괴이한 생각이 이 손을 근질거리게 하오. 생각은 나중이고, 당장 해치워 버려야겠소. 맥베드 부인: 폐하께서는 주무셔야 됩니다. 심신이 메마르셨어요. 맥베드: 자, 가서 쉬도록 합시다. 묘한 환영에 현혹되는 것은 수련을 쌓지 못한 풋내기의 불안 탓이오. 우린 아직도 이런 일엔 익숙치 못한게 아니겠소? (두 사람 퇴장) [ 제5장 황야 ] 천둥. 세 마녀 등장하여 헤커티를 만난다. 마녀1: 어머, 웬일이에요, 헤커티님! 화가 나셨구먼요. 헤커티: 왜 화가 안 나겠어? 이 방자하고 심성 사나운 쭈구렁 할망구들아! 그래 너희들 멋대로 생사의 수수께끼를 걸고 맥베드와 거래를 하다니 그게 될 법한 소리냐구? 그리고 너희들은 마술의 지배자요, 온갖 재앙을 뿌릴 셈으로 있는 나를 제껴놓고 내가 현란한 마술의 위력을 과시 못하게 패악을 저질렀겠다 괘씸한 것들. 더구나 고약한 것은 심술궂고 성 잘내기로 소문난 고집쟁이 놈을 위한 짓거리란 거다. 다른 놈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이라면 털도 안 뽑고 먹는 놈이야. 너희들을 돌볼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어. 자 이젠 맘보 바로 써라.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지옥의 아케론의 동굴에서 새벽녘에 만나자. 그자가 자기 운명을 점치러 올 것이야. 그러니 도구와 마약과 주문등 그밖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가져가라. 난 공중으로 날아간다. 오늘밤엔 처절하고 무서운 일이 저질러진다. 큰 일은 정오가 되기 전에 해치워야 하는 거야. 저 달 한구석에 고여 있는 증기 방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것을 받아서 마법으로 증류시키면 불가사의한 환영들을 나타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환영들의 힘으로 그자를 현혹해서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할 거다. 운명을 능멸하며 죽음을 비웃고 지혜도 은총도 공포도 무시하고 그놈은 허망된 야욕에만 불탈 것이다. 너희들도 아다시피 방심은 가장 무서운 적이니라. 안에서 음악과 노래. '오너라 오너라, 헤커티' 등의 노래. 구름이 내리덮는다. 들어라, 날 부르지? 보라, 나의 작은 정령들이 안개 구름 위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다.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린다) 마녀1: 자, 서두르자. 헤커티님이 곧 돌아오실 거다. (세 마녀 사라진다) [ 제6장 스코틀랜드의 어느 성 ] 레녹스와 귀족 한 사람 등장. 레녹스: 제가 한 말은 경의 생각과도 일치합니다만 좀더 깊이 생각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째든 모든 일이 요지경 속이군요. 인자하신 당컨왕은 맥베드의 애도를 받고, 하기야 불쌍하게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리고 늦은 밤 길 걷던 용장 뱅코우 장군--글쎄 플리언스가 죽였다고 칩시다. 플리언스가 도망갔으니 말입니다. 밤엔 행여 늦게 다닐 일이 못됩니다. 누군들 해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있겠어요? 맬컴과 도날베인 두 왕자가 인자하신 부왕을 살해했다고 하니 정말 소름이 오싹 끼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천벌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맥베드가 얼마나 개탄하겠습니까! 그러니, 통분을 참지 못해 두 역적을 단칼로 베어 버린 심정도 알 만합니다.술의 노예가 되고, 잠의 종이 된 그자들을 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처사가 아니, 현명한 일이었지요. 그자들이 자기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방패막이 하는 것을 듣고서야 사람인 이상 속에서 불이 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말씀입니다만 맥베드는 안사를 꾀바르게 처리했지 뭡니까. 생각컨대 두 왕자가 그의 손에 잡히게 되는 날이면 --하늘이 절대로 그렇겐 안 하겠지만--친아버지를 살애한 벌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게 되겠죠. 플리언스 역시 그럴 테죠. 쉿! 그만해둡시다! 맥다프 장군은 입바른 말을 잘하고 폭군의 연회석에 참석치 않았다구 해서 몹시 곤란한 처지에 있나보죠? 그분이 어디 은신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귀족: 이 폭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당컨왕의 맬컴 왕자 말입니다, 영국 왕실에서 그를 받아들였고, 저 성인 같은 에드워드왕의 후대를 받고 있다지 뭡니까. 역경에 있긴 하지만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맥다프도 이미 그곳으로 갔으며 성왕에게 간청하여 노벌랜드 백작과 그의 용감한 아들 시워드를 궐기시켜 구원을 얻으려는 모양입니다.--하늘이 도와주신다면--우린 다시 마음놓고 밥상을 받을 수 있고 밤잠을 달게 자게 될 것입니다. 축제와 향연에서 살육의 칼부림도 없게 되며 우린 마음 속으로부터의 충절을 바치고 공정한 영예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보를 들은 맥베드왕은 크게 노하여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지 뭡니까. 레녹스: 맥다프에게 사신을 보냈던가요? 귀족: 그랬죠. 그런데 맥다프는 "돌아가지 않겠소." 하고 단호히 거절했답니다. 그 말에 심기가 뒤틀린 사신은 홱 돌아서서 "이런 대답을 가지고 가게 한 걸 나중에 째지게 후회할 거다." 하고 중얼거렸다는데요. 레녹스: 그러면 맥다프는 지혜껏 멀리 몸을 피해야 할 겁니다. 어떤 하늘의 천사이시든 맥다프보다 앞질러 영국 궁전으로 달려가서 그의 사명을 알려 주시오.--저주받은 폭군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는 이 나라에 하늘의 축복이 속히 돌아오도록 하소서! 귀족: 나도 기도하리라. (두 사람 퇴장) [ 제4막 ] 아, 눈으로는 여자같이 퉁퉁 붓도록 질탕하게 웃고, 혀로는 허풍쟁이처럼 거드럭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자비로운 신들이여!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시고 하루 속히 이 스코틀랜드의 악마를 나와 맞붙게 해 주소서. 나의 칼 닿는 곳에 그자를 있게 해 주십시오.-3장 맥다프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동굴 ] 중앙에는 화염을 뿜는 구멍이 있고, 이 위에 끊는 가마솥이 걸려 있다. 천둥과 더불어 세 마녀가 한 명씩 나타난다. 마녀1: 얼룩 고양이가 세 번 울었다. 마녀2: 고슴도치가 세 번하고 한번 더 울었구. 마녀3: 하피어 (역사주: 괴녀, 반은 여자 반은 새)가 부르고 있어--"어서, 어서." 하고. 마녀1: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가마솥 주의를 방방 돌아라. 썩은 내장을 집어넣어라. 차디찬 돌 밑에 깔려 서른하루의 낮과 밤을 자면서 독의 땀을 빚어내는 옴두꺼비를 마술의 가마솥에 먼저 끊여라! 세 마녀: (가마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고통도 고민도 커지고 또 커져라. 불길아 타올라라 가마솥아 끊어라. (가마솥을 젓는다) 마녀2: (역시 같은 노래조로) 늪에서 자란 독사의 살점아 끊어라 익어라 가마솥 속에서.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깃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갈라진 혀와 맹사의 독침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의 날개 이 주문으로 무서운 재앙을 일으켜 지옥의 국물처럼 펄펄 끊어라. 세 마녀: (도 돌고 돌면서) 고통도 고민도 커지고 또 커져라. 불길아 타올라라 가마솥아 끊어라. 마녀3: (역시 같은 박자로) 용의 비늘 늑대의 이빨 마녀의 미라 탐욕스런 상어의 위와 창자 밤에 캐낸 독초의 뿌리 신을 모독히는 유태인의 간장 산양의 쓸개와 월식의 밤에 꺾은 주목의 가지들 터키인의 코, 타르타르 인의 입술 창녀가 낳아서 목을 졸라 죽여 시궁창에 버린 갓난애의 손가락 죄다 집어넣어 진국으로 끊어라. 호랑이 내장을 더 넣어서 가마솥 국을 진하게 끊어라 세 마녀: (또 돌고 돌며) 고통과 고난도 커지고 또 커져라. 불길아 타올라라 가마솥아 끓어라. (가마솥을 휘젓는다) 마녀2: 원숭이 피를 부으면 주문이 잘 듣는다. 헤커티 다른 세 마녀를 대동하고 등장. 헤커티: 오, 잘 끊였다! 수고들 했다. 수확은 모두에게 나누어 주마. 자, 가마솥 주위를 돌면서 노래 불러라, 꼬마 요정들처럼 원을 그리며 어서 빨리 가마솥 국물에다 주문을 걸자. 음악과 노래. '검은 정령... '으로 노래가 시작된다. 헤커티 퇴장. 마녀2: 엄지 손가락이 쑤시는 걸 보니 이리로 악인이 오나 부다. 열려라 자물쇠야. 누구든 문을 두드리면! 문이 열리자 맥베드의 모습이 나타난다. 맥베드: (안으로 들어오며) 야, 심야에 은밀히 흉악한 짓을 꾀하는 마녀들아! 뭣을 하고 있느냐? 세 마녀: 우리가 하는 일에 무슨 이름이 있겠소. 맥베드: 부탁이다, 너희들은 어떻게 해서 예언의 마력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신통력을 갖고 있을진대 내 말에 대답해다오. 너희들이 바람을 휘몰아쳐 교회를 넘어뜨리든, 거품 이는 파도가 배를 부셔 삼켜 버리는 바람에 덜 여문 곡식을 쓰러뜨리든, 또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든, 성벽이 파수병머리 위에 무너져 떨어지든, 궁전과 탑이 땅에 기울어지든, 대자연의 귀중한 종자가 마구 뒤섞여 뭉개져 파괴란 놈이 그 자신도 신물이 날 지경이 되든 말든 상관 없으니 내기 묻는 말에 대답하라. 마녀1: 말하라. 마녀2: 물어보라. 마녀3: 대답해 주지. 마녀1: 우리한테서 듣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인님한테서 듣겠느냐. 어느 쪽인가? 맥베드: 당장 불러다오, 곧 만나봐야겠다! 마녀1: 제 새끼 아홉 마리를 잡아먹은 암퇘지의 피를 쏟아 부어라. 그리고 불길 속 교수대에서 흘러내린 그 살인자의 지방을 넣어라. 세 마녀: 지옥의 어중이 떠중이 마녀들아, 어서 모습을 나타내어 어디 신명떨음 한판 해보자. 천둥. 가마솥에서 환영1이 나타난다. 맥베드와 같은 헬멧을 쓰고 있다. 맥베드: 내게 말을 하라. 네가 어떤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나--. 마녀1: 그쪽에선 그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듣기만 하라, 아무 말 말라. 환영1: 맥베드! 맥베드! 맥베드여! 맥다프를 경계하라, 파이프의 영주를 조심하라. 이만 가겠다. 할말은 다 했다. (가마솥 속으로 사라진다) 맥베드: 네가 뭔지 모르나 좋은 충고를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넌 내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을 알아맞혔다. 하지만 한 마디만 더--. 마녀1: 부탁한들 소용없다. 또 하나가 나타났다. 아까 것 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다. 천둥, 환영2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등장. 환영2: 맥베드! 맥베드! 맥베드여! 맥베드: 귀가 세 개 있다면 네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 환영2: 잔인하게 대담하게 용감하게 행하라. 인간의 힘은 일소에 붙여라. 여자가 낳은 자로 맥베드를 해칠 자는 없다. (가마솥 속으로 사라진다) 맥베드: 그럼 맥다프야, 살아 있거라. 내 널 무서워할 것도 없다. 하지만 뒤탈이 없게 하기 위해 운명한테서 증서 하나를 받아 두어야겠다. 너의 숨통을 끊는 거다. 그래야 난 겁쟁이 근성일랑 뽑아 버리고 천둥 속에서도 느긋이 자게 될 것이다. 천둥. 왕관을 쓴 어린이 환영3이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등장. 이건 또 무엇이냐? 그 작은 이마에 주권자의 표시인 금테를 두르고 왕의 자손 같은 모습을 하고 떠올랐으니. 세 마녀: 들어라, 말을 해선 안 된다. 환영3: 사자의 기개를 간직하고 오만을 떨라. 누가 성깔을 부리든, 누가 능멸을 하든, 어디서 역적이 나타나든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 비어남의 무성한 숲이 단시네인의 높은 언덕까지 공격해 오지 않는 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 (가마솥 속으로 사라진다) 맥베드: 그럴 리 없다. 누가 숲을 징발할 수 있겠는가, 나무에게 땅속 깊이 박은 뿌리를 뽑고 나오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유쾌한 예언이다! 좋다. 비어남의 숲이 활개를 쳐 일어나기 전에는 역적의 시신은 고개를 들지 못하리라. 이 나라 국왕인 맥베드는 천수를 누릴 것이며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안락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증이 내 가슴을 조인다. 만일 너희들의 신통력으로 알 수 있다면 어서 말을 하라, 뱅코우의 자손이 앞으로 왕권을 잡을 것이냐? 세 마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 맥베드: 꼭 알아야겠다. 싫다고 하면 너희들은 영겁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알려다오... ... 가마솥이 땅 속으로 꺼지면서 오보에의 소리가 들려온다. 왜 저 가마솥이 가라앉느냐? 이 소린 무엇이냐? 마녀1: 보여줘라! 마녀2: 보여줘라! 마녀3: 보여줘라! 세 마녀: 그자의 눈이 보게 하여 슬프게 하여 주자. 그림자같이 나타나서 그림자같이 나타나서 그림자같이 사라져라. 여덟 사람의 왕의 환영이 일렬로 나타나서 한 사람씩 동굴 안쪽으로 가로질러 간다. 이때 맥베드는 대사를 말한다. 최후의 왕이 손에 거울을 들고 있다. 뱅코우의 망령이 그 뒤에 따라나선다. 맥베드: 너는 뱅코우의 유령과 꼭 닮았구나. 물러가라! 너의 왕관을 보니 나의 눈알을 단근질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똑같이 금관을 쓰고 오는 자의 머리털도 처음 놈과 같구나. 셋째 놈도 그렇고. 이 못된 마귀할멈들아! 왜 이런 걸 내게 보이느냐?--넷째 놈도야? 눈알아, 툭 튀어 나오너라! 젠장, 이 행렬은 최후 심판일의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계속될 셈이냐? 또 한놈이 온다! 일곱째! 더 이상 보기 싫다. 여덟 째가 나타난다, 그놈은 거울을 들고 있구나. 숱한 것을 내게 보여줄 속셈이더냐? 어떤 놈은 두개의 옥구슬과 왕홀을 세 개 들고 있다. 무서운 광경이다!... ... 이제 보니 사실이구나,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뱅코우가 날 보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놈들을 자기 자손이라고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말하라, 정말로 이렇게 되는 거냐? 마녀1: 그래 다 사실이다. 그런데 왜 맥베드는 놀라서 서 있기만 하지? 자, 우리 이 사람에게 용기를 돋우어 주자.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를 보여 주자. 난 공기에게 주문을 걸어 좋은 음악을 들려줄 테니 너희들은 윤무를 자지러지게 추어라. 이 위대하신 국왕폐하께서 우릴 보고 대접을 잘해 주어서 고맙다는 치사를 하실 거다. 음악. 마녀들 춤을 춘다. 홀연히 사라진다. 맥베드: 어디로 갔지? 사라졌나? 이 불길한 시간아, 달력에 영원히 저주 받는 날로 남아 있거라. 밖에 누가 있느냐, 이리 들라! 레녹스 등장. 레녹스: 무슨 분부시옵니까? 맥베드: 경은 마녀들을 보았소? 레녹스: 페하,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나이다. 맥베드: 그것들이 타고 다니는 바람은 썩어 문드러져라, 그것들을 믿는 자들은 지옥에 떨어져라! 말발굽 소리가 들렸는데, 누가 왔소? 레녹스: 몇 전령이 맥다프가 영국으로 탈주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나이다. 맥베드: 영국으로 탈주! 레녹스: 그러하옵니다, 폐하! 맥베드: (방백) 시간이여, 너는 나의 무서운 계략을 먼저 알아차려 내 뒤통수를 쳤구나. 재빠른 계획도 실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뭍에 오른 물고기지. 이 순간부턴 마음 속에 움트는 생각은 곧바로 이 손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자. 지금부터라도 사상에 실행이 동반하기 위해 생각하기가 무섭게 실천에 옮기자. 맥다프의 성을 불시에 습격하여 파이프를 삼켜 버리자. 그의 처자와 불행한 혈연들을 다 요절내자. 무지랭이가 언죽번죽 내뱉는 장담은 아니다. 계획이 식기 전에 실행하는 거다. 환영은 보기도 싫다! 그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자, 그리로 안내하라. (두 사람 퇴장) [ 제2장 파이프. 맥다프의 성 ] 맥나프부인, 그녀의 아들, 그리고 로스 등장. 맥다프 부인: 그이가 무슨 일을 하였기에 탈주했나요? 로스: 부인, 참으십시오. 맥다프 부인: 참을성이 없는 건 그이예요. 탈주하다니 정신이 돌았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서 지레 겁을 먹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리는 겁니다. 로스: 그분이 분별이 있어 그랬는지 무서워서 그랬는지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맥다프 부인: 분별이라구요! 아내도 자식들도 집도 모든 지위도 다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두려워서 혼자 달아난 것이 분별인가요? 남편은 처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요.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에요. 새 중 제일 작은 하찮은 굴뚝새도 둥지에 있는 새끼새를 위해선 올빼미하고도 사생결단을 하지 않습니까? 모두 겁 때문이에요. 그인 애정이라곤 조금도 없어요. 분별이 무슨 얼어죽을 분별입니까? 전혀 이유도 없이 도망부터 쳤으니 말예요. 로스: 부인, 진정하십시오. 주인께서는 고귀하고 현명하고, 사려 깊으십니다. 시국의 변동에도 밝으신 분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요즈막 시국은 갈치가 갈치 꼬리 물 듯 고약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의 누명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가 뜬소문에 귀를 밝히는 건 누구나 두려움에 질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뭐가 두려운지 모르고 있죠. 다만 거칠고 사나운 파도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일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경난도 고비가 있습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재앙도 풀리어 예전처럼 좋아질 것입니다. 귀여운 아가야,잘 있거라! 맥다프부인: 이애는 아버지가 버젓이 있으면서도 아비 없는 자식이 됐습니다. 로스: 이 이상 더 지체한다는 건 미욱한 일입니다. 저 자신의 봉욕은 고사하고 부인까지 난처하게 만들까 염려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황황히 퇴장) 맥다프: 부인 얘, 너의 아빠는 돌아가셨단다. 너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니? 어떻게 살아갈래? 아들: 새같이 살지 뭐, 엄마. 맥다프: 부인 그럼 벌레나 파리를 잡아먹고? 아들: 뭐든지 잡히는 대로 잡아먹지, 새처럼. 맥다프 부인: 아이구 가엾어라! 너는 그물도 끈끈이도 함정도 새덫도 무섭지 않니? 아들: 무섭긴 뭐가 무서워, 엄마? 불쌍한 새한테는 해꼬지 안 해요. 엄마가 뭐라고 해도 아빤 돌아가시지 않았어. 맥다프 부인: 아냐, 돌아가셨단다. 아빠가 안 계셔서 어떻게 할 테냐? 아들: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할 거야, 남편이 없으면? 맥다프 부인: 시장에 가면 남편쯤은 수두룩 있단다. 아들: 그럼 샀다가 팔 건가? 맥다프 부인: 넌 참 영특하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아들: 아빤 역적이에요, 엄마? 맥다프 부인: 으응, 그래. 아들: 역적이 무언데? 맥다프 부인: 그래, 굳은 약속을 하고도 그걸 깨뜨리는 사람이란다. 아들: 그런 사람은 다 역적인가? 맥다프 부인: 으응, 그런 짓 하는 사람은 모두 역적이고 그래서 목매 죽인단다. 아들: 그럼 약속을 하고 깨뜨린 사람은 다 목을 매 죽이나? 맥다프 부인: 응, 누구나 다. 아들: 누가 죽이는데? 맥다프 부인: 그야 정직한 사람들이지. 아들: 그럼 거짓말을 하거나 맹세를 하는 사람들은 다 멍충이야.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훨씬 많은데 정직한 사람들을 때려주고 목을 매면 되잖아? 맥다프 부인: 원 요런 녀석을 봤나, 가엾은 내 새끼! 그런데 넌 아빠가 안 계셔서 어떻게 할래? 아들: 아빠가 정말 돌아가셨다면 엄만 울게 아냐? 울지 않으니 금세 새아빠가 생기나부다. 맥다프 부인: 요 조잘쟁이야, 원 못하는 말이 없구나! 사자 한 사람 등장. 사자: 안녕하십니까, 마님! 처음 뵙지만 소인은 마님의 높으신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님 신변에 위험이 닥치고 있습니다. 미천한 사람의 충언이오나 귀담아 들으시고 이 자리를 뜨십시오, 애기씨들도 데리고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이렇게 놀리게 해 드려 잔인한 일인 줄 압니다만 위험이 신변에 절박했는데도 말씀 안 드리면 더욱 잔인한 일이 될까 염려되옵니다.하늘의 보살핌이 있으시기를! 소인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급히 퇴장) 맥다프 부인: 어디로 피신하지? 난 남을 해꼬지 한 일이 없는데, 그렇지만 난 속세에 살고 있고 속세에서는 악한 일이 흔히 칭찬받게 되고, 선한 일을 위험하고 미욱한 짓으로 여기게 되니 말이야. 아, 그렇다면 내 악한 일을 한 일이 없다고 떠들고 짓까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객들 등장 아니, 저 얼굴들은? 자객: 남편은 어디 있느냐? 맥다프 부인: 너희들 같은 것들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런 더러운 곳에는 게시지 않는다. 자객: 그잔 역적이다. 아들: 거짓말 말어, 털보, 불한당 자객: 어쩌구 어째, 요 새끼 봐라! (칼로 찌른다) 반역자의 새끼놈! 아들: 엄마, 저사람이 날 죽여. 어서 달아나! (죽는다) (맥다프 부인은 "살인이야."하고 외치면서 급히 달아난다. 자객들이 그녀를 쫓아간다) [ 제3장 영국. 에드워드 왕의 궁전 앞 ] 맬컴과 맥다프 등장. 맬컴: 어디 인기척 없는 그늘진 곳을 찾아가서 슬픔 맺힌 가슴이 시원하게 풀리도록 울어나 봅시다. 맥다프: 그것보다 응징의 칼을 잡고 용사답게 쓰러진 조국을 구합시다. 아침마다 새 과부들이 통곡을 하고 새 고아들이 아우성치고 한 맺힌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하늘도 스코틀랜드의 비운을 동정하듯 비통한 소릴 질러대고 있습니다. 맬컴: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어찌 통곡인들 안 하겠소. 사태를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내 어찌 믿지 않겠소. 구제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은 시기를 택해 구제하리다.그야 경이 하신 말씀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이름만 입에 올려도 혀가 부르틀 것 같은 그 폭군도 전에는 충성된 인간이라 생각되던 자요. 경도 그잘 경애하였구. 그잔 아직 경에게 마수를 뻗지 않고 있소. 난 나이 어린 사람이지만 날 꾀바르게 이용한다면 그자의 환심을 살 수 있잖겠소? 신의 무서운 진노를 풀게 하려면 나약하고 불쌍한 죄없는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거요. 맥다프: 전 역적이 아닙니다. 맬컴: 하지만 맥베드는 역모하고 말았소. 까마귀가 오디 싫어하지 않듯 선량하고 유덕한 성품도 왕권에 눈이 어두워지면 무너지게 마련이오. 용서하시오. 경의 본심이 변할 리 없다는 건 나도 잘 아오. 비록 가장 빛나는 천사가 타락하여 지옥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천사는 여전히 빛나는 것이오. 더러운 것들이 미덕의 탈을 썼다 할지라도 미덕이 아닌 것이 미덕으로 모일 순 없는 것이오. 맥다프: 저는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맬컴: 내가 경을 의심하게 된 건 경이 모든 희망을 잃었다는 바로 그 점이오. 어째서 경은 처자식을 불더미 속에다 내팽개치고 혼자만 왔단 말이오. 삶의 소중한 원천이며 사랑의 탯줄인 처자식에게 작별의 인사 한마디 없이 왔단 말이오? 나의 의심을 모욕으로만 생각지는 마시오. 내 안전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하긴 경이 한 일이 옳았는지도 모르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맥다프: 피를, 피를 흘려라, 불행한 조국이여! 무서운 폭정이여, 대지에 뿌리를 뻗고 싶거든 뻗어라, 어떤 선의도 너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네 마음대로 악을 행하라, 너의 권리는 이미 확인된 바다! 전하, 저는 물러가겠나이다. 전하가 생각하는 그러한 악당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찬탈자가 가지고 있는 전 국토를 소신에게 주고 그 위에 풍요한 동방의 나라를 덧붙여 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맬컴: 노하지 마시오. 절대로 경을 못미더워하는 말이 아니오. 나는 우리나라가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것을 아오. 조국은 울고 있소, 피를 흘리고 있소. 날이 갈수록 조국의 상처는 후벼지고 할퀴어져 무섭게 짓물러 가고 있소. 날 위해 궐기할 사람들도 있으리라 아오. 그리고 인자하신 영국 왕께서는 수천 명의 용감한 원병을 내주신다고 하오. 그러나 내가 폭군의 머리를 발로 짓뭉개고 칼끝에 꿰어 매달게 되는 경우 나의 불쌍한 조국은 이전보다 더 많은 병폐가 발생할 것이며 그 뒤를 잇는 군주의 발톱에 할퀴어 전보다 더 도탄의 구렁 속에 빠지게 될 것이오. 맥다프: 그 군주란 누구십니까? 맬컴: 바로 나요. 이 몸에는 온갖 악이란 악이 들끊고 있소. 그것들이 고개를 드는 날에는 속이 시꺼먼 맥베드도 흰눈처럼 순백하게 보일 것이오. 가련한 국가는 나의 해악이 한이 없는 것과 비교하여 그자를 양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오. 맥다프: 무서운 지옥이 아수라들 중에서도 맥베드를 뺨칠 만큼 잔인무도한 악마는 없을 것입니다. 맬컴: 사실 그자는 잔인하고, 음탕하고, 이악스런 욕심쟁이에다, 거짓말엔 이력이 났고, 속여 꼬여먹기 잘하며, 성미가 불 같고, 해악이 지극하고, 온갖 죄악의 뭉치요. 그러나 나의 음탕은 밑바닥이 없소. 유부녀건, 규수건, 아녀자건, 처녀건, 아무리 많아도 내 음욕의 독을 채울 순 없을 거요. 명치끝까지 차오른 내 정욕은 어떤 장애물도 부셔 버릴 것이오. 이러한 인간이 나라를 다스리느니 차라리 맥베드가 나을 것이오. 맥다프: 한없이 방탕한 심성도 포학에 틀림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영광된 왕위를 하루 아침에 찬탈 당하기도 하였고, 허다한 군주들이 몰락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는데 두려워하실 것이 뭐가 있습니까. 눈에 안 띄게 많은 재미를 보시되 시치미를 떼고 세상의 눈을 속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꺼이 몸을 바칠 여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뜻을 헤아려 몸을 허락할 여자가 부지기수일지니 아무리 색욕에 걸근거리셔도 그 여자들은 모두 탐식할 순 없을 겁니다. 맬컴: 실은 그뿐이 아니오. 내 나쁜 심성 속에는 한없는 물욕이 도사리고 있소. 내가 왕이 되면 영토를 탐하여 귀족들의 목을 벨 것이오. 저 사람의 보석과 이 사람의 저택을 탐할 것이오. 내 탐욕은 많이 가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려 선량하고 충성된 사람들의 재물을 탐내 공정치 못한 싸움을 걸어 그들 파멸시킬 것이오. 맥다프: 그 탐욕은 여름철의 짧은 색욕에 비하면 더 뿌리가 깊고 강한 독이 묻어 있습니다. 오늘까지 많은 국왕들이 탐욕으로 모살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스코틀랜드에는 전하가 소유한 것만 갖고도 전하의 욕망을 넉넉히 채울 수 있는 만큼 자원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그런 흠쯤은 다른 미덕을 가지셨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맬컴: 내겐 미덕은 하나도 없소. 왕자다운 미덕이라 할 공정, 진실, 자제, 인정, 끈기, 자비, 겸손, 신심, 인내, 용기, 불굴의 의지 따위를 떨끝만큼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난 가지각색의 죄악을 다 뭉뚱그려 갖고 있으며 그것들이 여러 가지로 행동하고 있단 말이오. 만일 내가 대권을 잡게 되면 달콤한 평화는 지옥의 불길 속에 쏟아 버리고 세계의 안녕을 교란시켜 지상의 모든 통일을 파괴할 것이오. 맥다프: 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여! 맬컴: 이러한 인간인데 나라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이 사람은 그러한 위인이오. 맥다프: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자격이 있냐구요! 참 기절초풍할 일이군요. 생존하실 자격조차 없습니다. 오 가련한 백성들이여! 피묻은 왕홀을 든 찬탈자의 압제를 벗어나 너는 언제 다시 평화스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냐? 왕실의 진정한 후계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죄명을 붙이고 왕통을 모욕하고 있지 않은가? 부왕께서는 성인과 같은 어른이셨습니다. 그리고 전하를 낳으신 왕비전하께서는 서서 계실 때보다 꿇어앉아 계실 때가 더 많으셨으며 매일 살아계신 몸으로 죽는 고행을 하시는 모후이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전하께서 악덕을 가지셨다고 되풀이 자인하시니 소신은 이제 스코틀랜드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오 나의 가슴이여, 너의 희망은 여기서 끊어졌도다. 맬컴: 맥다프 경, 경의 성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고결한 고뇌는 내 마음 속에 앙금이 되었던 컴컴한 의혹을 삭여 주었소. 이젠 경의 진심과 충절을 굳게 믿겠소. 실은 저 악마 같은 맥베드는 각종 모계를 써서 날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오. 그래서 사람을 경솔히 믿다가는 허방에 빠질까봐 경계를 해온 것이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이 우리 둘 사이를 마음으로 묶어 주셨소! 이젠 경의 지시에 따르리다. 나 자신을 비방한 것은 다 취소하겠소. 내가 자신에게 가한 오욕과 비난은 내 심성하고는 전혀 무관하오. 난 아직도 여자와 관계한 일이 없소, 위증한 적도 없소. 내것마저도 별로 욕심을 가져본 일이 없소. 한번도 신의를 저버린 적도 없구, 비록 상대가 악마라 할지라도 배반하진 않겠소. 생명보다도 진실을 더 소중히 여겨 왔소.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오. 나의 진심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겨 불행한 조국에 바치리다. 실은 경이 오시가 전에 시워드 장군이 일만 명의 용맹한 병사를 이끌고 이미 본국으로 출정하였소. 자, 우리 함께 의논합시다. 우리에겐 대의명분이 있으니 기필코 승리를 거둘 것이오! 왜 아무말도 없소? 맥다프: 이렇게 반가운 일과 반갑지 않은 일이 한꺼번에 닥치니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전의가 궁전에서 나온다. 맬컴: 그럼후에 또. 폐하께서 오시오? 의사: 그렇습니다, 전하. 폐하의 치료를 받으려고 불쌍한 사람들아 많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의 병은 아무리 고명한 의술이라도 효험이 없습니다. 하오나 그게 폐하의 손길이 한번 가기만 하면, 그런 신통력을 하늘로부터 받으셨으리라 사려되자만 곧 치유됩니다. 맬컴: 전의, 고맙소. (전의 퇴장) 맥다프: 무슨 병 말씀입니까? 맬컴: 소위 '왕의 병'이라는 거요. 내가 영국에 온 후로 자주 목격한 것이지만, 인자하신 폐하께서 보여 주신 참으로 놀랄 만한 기적이오. 어떻게 해서 그런 신통력을 가지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그 비법은 국왕만이 알고 있소. 괴이한 병에 걸려 앓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끔찍하게 전신이 부어오르고 곪아서 진물이 흘러 의사도 손을 댈 수 없는 상처를 폐하께서 환자의 목에 금화 한닢을 걸고 경건히 기도를 올리시면 깜쪽같이 치유가 되오. 듣자 하니 페하께선 이 신비한 요법을 그 자손에게 물리신다 하오. 페하께선 이러한 신통력뿐만 아니라 예언의 신통력도 가지셨다 하오. 여러 가지 천복이 옥좌를 둘러싸고 있음은 페하의 덕이 넘쳐 흐르고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가 아니겠소. 로스 등장. 맥다프: 저쪽에 누가 오고 있습니다. 맬컴: 동포인 듯한데 누굴까? 맥다프: 오, 나의 친척이 아니오? 잘 오셨소이다. 맬컴: 이제야 알겠소. 자비로운 신이여, 동포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어 주소서! 로스: 그렇게 기도드리나이다. 맥다프: 지금 스코틀랜드의 형편은 어떻소? 로스: 비참한 조국이여, 조국의 모습을 알게 되면 소름이 끼칠 겁니다. 모국은 바로 무덤입니다. 천치 아니고서는 웃는 낯을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탄식과 신음과 악다구니 끊는 소리가 하늘을 찢어도 누구 하나 눈 깜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슴을 치는 비통도 예사로운 일로밖에 안 보입니다. 장례식 종소리가 울려도 누가 죽었는지 묻는 사람조차 없지요. 선량한 사람들의 생명은 모자에 꽂은 꽃보다도 속히 시들고 사람들은 병도 들기 전에 맥없이 쓰러져 죽어 갑니다. 맥다프: 오, 너무나 정확하고 너무나 진실한 말씀이오! 맬컴: 최근의 비통한 사건은요? 로스: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하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일각마다 새로운 비통한 일이 일어나거든요. 맥다프: 제 처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로스: 네, 무사합니다. 맥다프: 어린것들은? 로스: 잘들 있지요. 맥다프: 폭군도 거기까진 칼을 들이대지 못했군. 로스: 그래요, 내가 떠날 때까진 별일 없었습니다. 맥다프: 말씀을 시원히 해 주오.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요? 로스: 내가 슬픈 소식을 가지고 여기 오려고 했을 때 마침 우국지사들이 들고일어났다는 풍문을 들었죠. 폭군의 군대가 출동하는 것을 제가 목격했으니까 뜬소문은 아니란 말요. 드디어 때는 왔습니다, 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왕자 전하께서 스코틀랜드에 나타나시기만 하면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 싸울 것입니다. 아녀자들도 무서운 고통을 면하기 위해 창칼을 잡을 것입니다. 맬컴: 동포들은 안심해도 되오. 우린 이미 조국을 향하여 출진하고 있소. 인자하신 영국 왕은 나에게 시워드 장군과 일만 명의 원군을 빌려 주었소. 장군은 아무리 기독교 국가를 둘러봐도 둘도 없는 용맹스런 장군이오. 로스: 이 기쁜 소식에 맞장구칠 기쁜 소식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가지고 온 소식은 아무도 듣지 않는 황야에서 허공을 향해 짖어대야 마땅한 것입니다. 맥다프: 대관절 무슨 소식이오? 여러 사람들에 관한 거요?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의 가슴아픈 소식이오? 로스: 인정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소식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맥다프 경, 당신에 관한 일입니다. 맥다프: 나에 관한 얘기라면 숨기지 말고 빨리 말해 주오. 로스: 나에게 말을 듣는 경의 귀가 내 혀를 영원히 원망하진 마십시오. 생전 처음 들으시는 비통한 소식입니다. 맥다프: 으흠! 짐작하겠소. 로스: 경의 성은 급습을 당했고, 부인과 어린애들이 모두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은 살해된 죄 없는 사슴의 시체더미에 경의 시체를 하나 더 쌓아 놓는 격이 될 겁니다. 맬컴: 오, 하느님 맙소사! 이것 보시오! 모자로 얼굴을 가릴 것 없소. 슬플 때는 실컷 울어야 되는 법. 슬픔을 억누르면 그만 가슴이 메어지고 마오. 맥다프: 어린것들도? 로스: 부인도, 애들도, 하인도, 있었단 사람들은 모두. 맥다프: 그런데 나만 이처럼 멀리 떠나와 있다니! 아내도 살해 당하였고? 로스: 네, 그렇습니다. 맬컴: 너무 슬퍼 마시오. 이 크나큰 비통함을 치유하기 위해 대복수라는 극약을 사용합시다. 맥다프: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내 귀여운 얘들도 모두? 전부라구? 오, 지옥의 독수리! 몽땅? 아니, 내 귀여운 병아리들과 어미닭을 한꺼번에 채 갔단 말이오? 맬컴: 사내 대장부답게 감내해 주시오. 맥다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오나 슬픔을 감읍하는 것도 사나이의 도리입니다. 신에게 가장 귀중한 피붙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 하느님은 보고만 계시고 도와주진 않으셨습니다. 죄많은 맥다프, 너 때문에 그들은 다 살해당했다. 나는 얼마나 쓰잘데없는 인간인가, 그들은 아무 죄없이 나 때문에 참변을 당했다. 신이여! 그들을 고이 잠들게 하소서! 맬컴: 이 뼈아픈 슬픔을 칼을 가는 숫돌로 삼으십시다. 슬픔을 분노로 터트리시오. 마음을 모질게 먹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시오. 맥다프: 아, 눈으로는 여자같이 퉁퉁 붓도록 질탕하게 울고, 혀로는 허풍쟁이처럼 거드럭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자비로운 신들이여! 모든 장애물을 없애주시고 하루 속히 이 스코틀랜드의 악마를 나와 맞붙게 해주소서. 나의 칼 닿는 곳에 그자를 있게 해 주십시오. 만약 그자가 나의 칼끝을 피할 수 있다면 하늘이여, 그를 용서해 주소서! 맬컴: 대장부다운 말이오. 자, 왕폐하께로 갑시다. 출진의 준비는 다되었소. 남은 것은 하직인사뿐이오. 맥베드는 이젠 흔들면 떨어질 무르익은 과실과 같소. 천사들도 우리들을 격려해 주고 있소. 자, 밝은 마음으로 기운을 냅시다. 아무리 긴 밤이라도 날은 밝아오게 마련이오. (모두 퇴장) [ 제5막 ]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 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에 불과해. - 5장 맥베드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단시네인 성 안의 한 방 ] 전의와 시녀 등장. 전의: 이틀밤이나 철야를 하며 함께 지켜보았으나 댁이 말한 사실은 볼 수 없었소. 왕비 전하께서 최근에 걸어다니신 것이 언제였죠? 시녀: 폐하께서 출전하신 후 줄곧 목격해 왔는 걸요. 침상에서 일어나셔서 가운을 걸치시고는 벽장의 자물쇠를 열고 종이 쪽지를 꺼내시고 그것을 접으신 후 몇 자 끄적거리시고는 중얼중얼 읽으신 후 그것을 봉해 버리시고 곧장 침상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동안 깊은 잠에 빠져 계셨거든요. 전의: 아무래도 심한 정신착란증이 틀림없어요. 깊은 잠에 빠지시고도 깨어 계신 때처럼 행동하다니! 그렇게 몽유상태로 걸어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실 때 무슨 말씀은 듣지 못했소? 시녀: 죄송합니다만 그것만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전의: 이 사람에겐 괜찮아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시녀: 누구한테도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제 말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는 걸요. 맥베드 부인 촛불을 들고 등장. 저걸 보세요, 나오십니다! 늘 저 모양이에요, 깊은 잠에 빠져 계시다니 까요. 여기 숨어서 눈여겨보세요. 전의: 저 촛불은 어떻게 얻으셨을까? 시녀: 머리맡에 있는 촛불이에요. 늘 머리맡에 켜 두라는 분부였어요. 전의: 저것 보오. 눈을 뜨고 계시군. 시녀: 예, 그렇지만 눈감으신 거나 다름없어요. 전의: 아니, 무얼 하시고 계시는 건가? 왜 저렇게 손을 비비시지? 시녀: 늘 저러시는 걸요, 저렇게 손을 씻으시는 시늉을 하세요. 어떤 때는 15분 동안이나 계속하세요. 맥베드 부인: 아직도 흔적이 있다. 전의: 들어 봐요, 말씀을 하시는군! 적어 둬야겠소. 잊어먹지 않게끔. 맥베드 부인: 없어져라, 이 흉칙한 흔적! 없어지래두! 하나. 둘. 아, 지금이 해치울 시간이다. 왜 이렇게 지옥은 깜깜할까! 폐하, 이게 무슨 작태이옵니까! 장군답지 않게 무서워하시다니? 누가 알까봐 염려할게 뭐 있어요? 우리의 권력을 시비할 자는 이 천하에 없어요. 하지만 그 늙은이가 그렇게 피가 많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어요. 전의: 저 말을 들었소? 맥베드 부인: 파이프 영주에게는 부인이 있는데 지금은 어디 있을까? 어쩌지, 이 손은 영영 깨끗해질 수 없단 말인가? 그만해요, 제발 그만하시래두요. 그렇게 겁먹고 부들부들 떠시면 모든일이 헛일이 되고 말아요 전의: 어이구, 저런 들어선 안될 말을 듣고 말았군 시녀: 하여간 왕비 전하께서 하셔서는 안될 말씀까지 하셨어요. 세상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말을 하신거죠. 맥베드 부인: 아직도 피비린내가 난다. 아라비아의 온갖 향료로서도 이 작은 손의 악취를 없앨 수가 없단 말인가. 아! 아! 아! 전의: 저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으시니! 마음이 심히 무거우신가 보군. 시녀: 이 몸이 아무리 고귀하게 되더라도 저렇게 가슴을 저미는 탄식만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전의: 글쎄, 글쎄요--. 시녀: 빨리 쾌유하시면 좋겠어요. 전의: 이병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몽유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 편안히 운명한 분들도 없지 않소만. 맥베드 부인: 손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으세요. 그렇게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하지 마시구요. 재삼 말씀드리지만 뱅코우는 이미 땅 속에 파묻힌 사람이에요. 무덤에서 살아나올린 없잖아요. 전의: 음, 그렇군. 맥베드 부인: 어서 침상으로 가세요, 침상으로. 누가 문을 두드립니다. 자 자 자 자, 손을 이리 주세요. 해치운 일은 이미 끝낸 일입니다. 침상으로 가세요, 침상으로, 침상으로요. (퇴장) 전의: 이제 침실로 가시는 건가요? 시녀: 예, 곧바로요. 전의: 불미스런 소문이 낭자해요. 심상치 않은 악행은 심상치 않은 고민을 낳는 법. 독에 전염된 마음은 그 비밀의 고통을 귀가 없는 베개에다 말하는 법입니다. 왕비 전하에게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니라 신부입니다. 신이여, 신이여,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왕비 전하의 병수발을 잘해 드리시오. 위험한 물건들을 치우고 항상 눈여겨 지켜봐야 합니다. 그럼 안녕히. 정신이 혼미해져 눈앞이 어지럽군. 생각은 있어도 섣불리 입을 놀릴 순 없지. 시녀: 안녕히 주무세요. (두 사람 퇴장) [ 제2장 단시네인 부근의 지방 ] 대북과 군기를 든 사람들 등장. 멘티이드, 케이드네스, 앵거스, 레녹스, 그리고 병사들 등장 멘티이드: 영국군이 눈앞에까지 다가왔소, 맬컴 전하와 전하의 숙부 시워드, 그리고 맥다프가 진두지휘하는 것 같소. 복수심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소. 그들의 뼈저린 포원을 안다면 시신이라도 분에 못 이겨 창칼을 들고 이 싸움에 뛰어들 것이오. 앵거스: 아마 버어남 숲 근방에서 합세하게 될 것 같소, 저 길로 진격해 오니. 케이드네스: 도날베인 왕자님도 그 형님 전하와 같이 오실까요? 레녹스: 함께 계시지 않은 게 틀림없소. 나는 귀족분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어요. 그 중에는 시워드의 아들과 이제 막 성년이 되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들이 수없이 참전하고 있소. 멘티이드: 한데 폭군은 어떻게 하고 있소? 케이드네스: 단시네인 성을 엄중히 방비하고 있다 하오. 그를 실성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별로 그를 증오하지 않는 사람들은 용감한 분노라고도 평합니다. 그러나저러나 그 광기를 자제심의 혁대로 죄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오. 앵거스: 그 사람도 이젠 느낄 겁니다, 은밀히 저지른 시역과 살상의 핏자국이 손에 엉겨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번지고 있는 반란의 불길이 그자의 반역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자 휘하에 있는 사람들도 충성심에서가 아니고, 할 수 없이 명령에 따를 뿐이죠. 그자도 지금쯤의 왕의 칭호가 난쟁이 도둑놈이 거인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맞지 않음을 느꼈을 겁니다. 멘티이드: 하기야 그자의 역심이 겁을 먹고 어깻죽지를 움츠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그의 마음 자체가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판이니. 케이드네스: 자 진군하여 의당 충성해야 하는 곳에 복종을 서약합시다. 병든 조국을 고쳐줄 명의를 만나러 갑시다. 그분과 함께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들의 피를 최후의 한방울까지 바칩시다. 레녹스: 군주의 꽃에 이슬이 맺히고, 잡초는 시들어 죽게 할 만큼의 피를 바칩시다. 자 버어남으로 진군합시다. (진군하면서 모두 퇴장) [ 제3장 단시네인 성의 안뜰 ] 맥베드, 전의, 시종들 등장 맥베드: 보고 따위는 이 이상 더 듣기 싫다. 도망갈 놈은 다 가라고 해. 버어남 숲이 단시네인으로 움직여 오지 않는 한 외눈도 깜짝 않는다. 애숭이 맬컴이 다 뭐야? 그놈이라고 여자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인간의 모든 운명을 알고 잇는 정령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 말라 맥베드여, 여자 뱃속에서 태어난 자의 힘으로는 당신을 이기지 못하리라."고 좋다, 가거라. 두 마음의 귀족들아, 어서 영국의 날탕패들과 한통속이 되어라. 나를 지배하는 이 정신, 이 용기는 불안으로 쇠잔해지거나 공포로 흔들리진 않는다. 시종 한 사람 등장. 차라리 악마한테 꺼멓게 그을려라, 얼굴이 새파란 시러베 같은 놈! 어디서 얼빠진 거위 같은 낯짝을 하고 왔느냐? 시종: 실은 일만의--. 맥베드: 뭐 거위라도 쳐들어왔나? 얼뱅이야! 시종: 아니옵니다, 병사들이 쳐들어 왔나이다. 맥베드: 너의 그 낯짝을 할퀴어 겁먹은 낯짝을 붉은 피로 가리고 오너라, 소심한 애숭야. 뭐 병사들이라고! 허수아비처럼 허벙한 놈! 뒈져 버려라! 네놈의 하얗게 질린 낯판대기를 보면 성한 사람까지도 겁쟁이가 되겠다. 무슨 병사들이란 말이냐? 파랗게 질린 겁보야! 시종: 황공하오나 영국 병사들이옵니다. 맥베드: 낯짝도 보기 싫다. 꺼져. (시종 퇴장) 시이튼! 저런 낯짝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시으튼, 없느냐!--이번 일전에서 나는 영원히 영화를 누리느냐 아니면 몰락하느냐의 결판이 날 것이다. 나도 이만하면 장수했다. 내 생애도 이미 누런 잎이요, 조락한 가을이 아닌가. 더구나 노년에 따라야 하는 명예와 애정과 순종과 많은 친구들과는 인연이 없다. 아니, 그 대신으로 소리는 낮으나 뿌리 깊은 저주, 입만 번지르르한 존경, 속빈 아부 따위가 둘러싸고 있다. 물리치고 싶으나 내 마음이 연약해 뿌리치지 못하는구나. 시이튼! 시이튼 등장 시이튼: 무슨 분부이시옵니까? 맥베드: 또 무슨 소식이 없느냐? 시이튼: 지금까지의 보고가 모두 사실임이 판명되었습니다. 맥베드: 내 뼈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싸울 것이다. 갑옷을 가져오너라. 시이튼: 아직 그러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맥베드: 아니, 입겠다. 기병을 더 보내서 전국을 순찰시켜라. 공포심을 퍼뜨리는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라. 갑옷을 다오... (시이튼 갑옷을 가지러 나간다. 전의에게) 전의, 환자는 어떠하오? 전의: 병환이시라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환상 때문에 고통을 겪으시어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가 봅니다. 맥베드: 고쳐주오. 전의는 병들어 있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단 말이오? 뿌리깊은 근심을 기억에서 뽑아내고 뇌리 속에 찍혀진 고통을 지워 버릴 순 없단 말이오? 사람을 망각의 달콤한 영약을 써서 마음 가득히 짓누르는 위험한 생각을 제거시켜 가슴을 시원하게 해줄 수는 없단 말이오? 시이튼 갑옷을 들고 돌아온다. 갑옷담당도 함께 등장하여 곧 맥베드에게 갑옷을 입히기 시작한다. 전의: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써야 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맥베드: 그렇다면 그놈의 의술 따위는 개에게나 줘라. 과인에겐 필요 없다. (시이튼에게) 어서 갑옷을 입혀라. 지휘장을 다오. 시이튼, 정찰병을 더 내보내. (전의에게) 전의, 영주들이 속속 탈출하고 있소. (시이튼에게) 자 어서 빨리 하라.--전의, 이 나라의 소변을 진찰하여 병증을 끄집어내서 독을 깨끗이 없애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회생시킬 수만 있다면 과인은 그대를 칭송하리라. 그리고 그 칭송의 메아리가 다시 그대에게 울려퍼지도록 하리라--(시이튼에게) 그것은 필요 없어.--(전의에게) 원컨대 대황이나 센나나 또는 다른 설사약으로 무엄하게 이 땅을 넘보는 영국놈들을 모조리 쓸어낼 순 없소? 그자들의 소문을 들었는가? 전의: 예, 폐하, 폐하의 전투준비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맥베드: (시이튼에게) 나머지 장구를 갖고 나를 따르라. 버어남 숲이 단시네인까지 진군해 오지 않는 한 죽음도 파멸도 무섭지 않다.(맥베드 퇴장. 시이튼 갑옷담당과 함께 뒤따라 퇴장) 전의: (방백) 단시네인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이득이 있다해도 두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 (퇴장) [ 제4장 버어남 부근의 시골 ] 대북과 군기. 맬컴, 노 시워드, 그의 아들 시워드, 맥다프, 멘티이드, 케이드네스, 앵기스, 레녹스, 로스 그리고 병사들 진군하면서 등장. 맬컴: 여러분, 이젠 집에서 편안히 있을 날도 머지 않소이다. 멘타이드: 그러하옵니다. 시워드: 저 숲은? 맬컴: 병사들로 하여금 나무를 한 가지씩 잘라서 머리에 꽂고 행진토록 하여라. 그러면 아군의 군병 수를 은폐할 수 있고 적군의 정탐을 속일 수도 있다. 병사: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시워드: 보아하니 저 폭군은 자신만만한 모양인지 단시네인 성에 죽치고서 아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맬컴: 그것만이 그자가 취할 수 있는 길입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하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자들도 역시 마음은 떠난 상태입니다. 맥다프: 그 추측이 맞는지 여부는 싸움의 승패가 증명할 것인즉 지금은 우리 모두 군인의 본분을 다해 분투하십니다. 시워드: 때는 다가왔소. 곧 우리의 성패가 결판날 것이오. 그러면 우리의 것과 적의 것을 가리는 대차관계도 정해질 것이고, 예측은 부질없는 희망을 주지만 확실한 결과는 공격만이 결정해 줄 것입니다. 자, 진군합시다. (모두 진군하면서 퇴장) [ 제5장 단시네인 성의 안뜰 ] 맥베드, 시이튼, 그리고 병사들, 대북과 군기를 들고 등장 맥베드: 외벽에 군기를 매달아라. "적이 온다."고 아우성치고 있구나. 우리의 성은 철벽처럼 견고하니 아무리 공격해도 끄떡없다. 언제까지라도 진치고 있을 테면 있으라지. 굶주림과 병으로 한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군의 배반자들이 놈들에게 가세만 안했더라면 성문을 열고 나가서 얼굴이 맞닿을 때까지 접전하여 놈들을 제나라로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을. (안에서 여자들의 곡성) 저건 무슨 소리냐? 시이튼: 여자들의 우는 소립니다, 폐하. (퇴장) 맥베드: 이전 공포의 맛도 거의 잊어버렸다. 예전에는 밤의 어둠을 찢는 비명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털썩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끔찍한 얘기를 들으면 머리칼이 꼿꼿이 일어서 살아있듯이 움직인 적도 있었다. 공포를 맛볼 대로 맛본 나다. 살인에 이골이 난 내 마음은 공포 따위엔 끄떡도 않는다. 시이튼 다시 등장 왜들 우느냐? 시이튼: 폐하, 왕비 전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맥베드: 왕비도 언젠가는 죽어야겠지. 그러한 소식은 한번은 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일이 오고, 내일이 지나가고, 또 내일이 와서 또 지나가고 시간은 하루하루를 한발 한발 거닐면서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도한다.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우매한 인간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준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 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 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에 불과해. 떠들썩하고 분노가 대단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소리야. 사자 등장. 너는 혓바닥을 놀리러 왔겠지. 어서 말하라. 사자: 폐하, 황송하오나 소인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아뢰야 하겠습니다. 하오나 어떻게 아뢰어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맥베드: 어서 말하래두. 사자: 소인이 언덕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바 우연히 버어남 쪽을 바라본 즉 느닷없이 그 숲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맥베드: 거짓말 마라, 고얀 놈! 사자: 만일 사실이 아니오면 어떠한 진노든지 달게 받겠나이다. 여기서 3마일 거리 안에서 확실히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숲이 움직이면서 말입니다. 맥베드: 만약에 거짓말이라면 네놈을 근처에 있는 나무에 산 채로 매달아 굶겨 죽일 테다. 그러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과인을 그렇게 해도 좋다. 내 결심이 왜 흔들리는가. 의심이 일기 시작한다, 마녀들이 진짜처럼 말을 꾸미어 알랑수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버어남 숲이 단시네인으로 오지 않는 한 두려울 건 없다."고 했겠다. 그런데 지금 그 숲이 단시네인으로 다가오고 있다지 않은가. 무기다, 무기를 들라, 공격이다! 이 사자가 증언한 대로의 일이 일어났다면 움츠릴 수도 뛸 수도 없는일. 이제 태양을 보는 것도 역겹다. 이 세계의 질서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려라. 비상종을 울리도록 해라!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 적어도 갑옷은 몸에 걸치고 죽자. (모두 황황히 퇴장) [ 제6장 단시네인 성문 앞 ] 대북과 군기, 맬컴, 시워드, 맥다프, 그들의 휘하 군대, 나뭇가지를 앞에 들고 등장 맬컴: 이젠 다 왔소. 위장했던 나뭇가지들을 내던지고 모습을 드러내라. 숙부님은 제 종제가 되는 아드님과 함께 선봉을 맡아 주십시오. 나머지 모든 일은 맥다프경과 함께 작전대로 하겠습니다. 시워드: 무운을 빕니다. 오늘밤 폭군의 군대와 맞닥뜨리면 생명을 걸고 끝까지 싸웁시다. 맥다프: 나팔을 불어라. 힘차게 불어라, 유혈과 죽음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라. 모두 나팔을 불며 진군 [ 제7장 단시네인 성문 앞 ] 맥베드 성문에서 나온다. 맥베드: 놈들이 날 말뚝에다 묶어 놓았으니 달아날 수도 없지만 곰이 날뛰듯 끝까지 싸워야만 한다. 대관절 여자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가 어느 누구냐? 그자 말고 무서운 놈은 없다. 젊은 시워드 등장. 젊은 시워드: 누구냐? 이름을 대라. 맥베드: 내 이름을 들으면 넌 겁에 질려 떨 것이다. 젊은 시워드: 누구냐. 지옥의 악마보다 무서운 이름을 대도 겁날 것이 없다. 맥베드: 내 이름은 맥베드다. 젊은 시워드: 악마보다도 내게는 더 가증스럽게 들린다. 맥베드: 그렇다 뿐인가, 내 이름보다 더 무서운 이름도 없으렷다. 젊은 시워드: 거짓말 마라, 포악한 찬탈자. 이 칼로 네 놈의 거짓을 증명해 주겠다. (둘이 싸운다. 젊은 시워드 살해된다) 맥베드: 네놈도 별수 없구나, 여자가 낳은 놈이군. 어떤 검도, 여자가 낳은 놈이 휘두르는 것이라면 어떤 무기를 휘둘러도 보잘것없다. 맥베드 퇴장. 그 방향에서 더욱 격렬한 전투의 소리가 들려온다. 반대 방향에서 맥다프 등장 맥다프: 저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폭군아, 낯짝을 드러내라! 네놈은 죽어도 내 칼에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처자의 망령들이 네놈을 따라다니며 물고를 낼 것이다. 돈에 팔려 창을 들게 된 불쌍한 민병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맥베드, 너와 싸우든가, 아니면 칼날을 고이 칼집에 도로 집어넣으련다. 거기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 저 요란한 소리는 큰놈이 있다는 증거다. 운명이여! 그놈을 만나게 해 다오!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퇴장) 맬컴과 시워드 등장. 시워드: 이쪽입니다, 왕자 전하. 성은 손쉽게 함락했습니다. 폭군의 부하들은 두 파로 갈라져 싸우고 영주들도 용감히 싸우고 있습니다. 승리는 거의 왕자 전하의 것입니다. 이젠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맬컴: 적군이면서 아군 측이 되어 싸우는 것을 나도 보았소. 시워드: 자, 입성을 하십시오. (두 사람 성문으로 들어간다. 요란한 북소리와 트럼펫 소리) [ 제8장 단시네인 성문 앞 ] 맥베드 등장 맥베드: 내가 뭣 때문에 로마의 머저리들 흉내를 내서 내 칼로 자살을 해? 살아있는 놈을 눈에 띄는 대로 베어 버리겠다. 맥다프 뒤를 쫓아 등장. 맥다프: 야, 지옥의 사냥개야, 돌아서라, 돌아서! 맥베드: 네놈만은 봐줄려고 일부러 피했는데. 돌아가라, 내 심장은 벌써 네놈 가족들의 피로 가득 차 터질 지경이다. 맥다프: 네놈과 말대꾸할 필요도 없다. 이 칼이 내 말을 대신할 거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역적아! (두 사람 싸운다. 경종소리) 맥베드: 헛수고는 마라. 네놈의 칼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공기에 칼자국을 낼 수 없듯이 내 몸에서 피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칼이 행세할 수 있는 상대나 노리는 게 어때? 내 목숨엔 악마가 붙어 있다. 여자가 낳은 자에겐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 맥다프: 검불 같은 그런 마력은 단념해라. 네놈이 신주처럼 믿는 마녀한테 물어 봐라. 맥다프는 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왔다. 맥베드: (경악하며) 그런 말을 나풀대는 네놈의 혓바닥은 저주를 받을 거다. 그 말이 장부다운 내 용기를 분질러 놓고 말았다! 마녀들은 속임수를 썼다, 이젠 믿을 수 없다. 양다리 걸친 아리송한 말로 사람을 흘려대고선 약속을 지키는 척하더니 막판에 가서는 희망을 깨뜨려 주는구나. (맥다프에게) 너하고 싸우지 않겠다. 맥다프: 그렇다면 항복을 해라, 이 비겁한 놈아. 살려 줄 테니 세상의 웃음 거리가 되어라. 괴물처럼 네놈의 화상을 막대기 끝에다 걸어놓고 그 아래에도 '폭군을 보라' 이렇게 방을 써서 붙이겠다. 맥베드: 항복 같은 건 안한다. 애송이 맬컴의 발 밑에 부복하여 땅바닥을 핥고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 비록 버어남 숲이 단시네인까지 다가왔고 여자가 낳지 않은 네놈과 맞선다 해도 난 끝까지 싸우겠다. 자, 여기에 이렇게 방패를 버린다. 덤벼라, 맥다프, "졌다!"하고 먼저 외치는 놈이 지옥의 불더미 속에 떨어질 것이다. (두 사람 성벽 아래에서 격전. 마침내 맥베드가 살해된다.) [ 제9장 단시네인 성 안 ] 전투중지의 트럼펫 소리. 대북과 군기와 더불어 맬컴, 시워드, 로스, 기타 영주들과 병사들 등장 맬컴: 여기 보이지 않는 아군의 전우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소. 시워드: 약간의 출혈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아하니 극히 적은 희생으로 대승리를 얻은 줄 압니다. 맥컴: 맥다프가 보이지 않소, 그리고 경의 아들도. 로스: 아드님은 군인답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인 못지않게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싸워 장부다움을 증명하고 최후를 마쳤습니다. 시워드: 그럼 그애가 전사하였소? 로스: 그렇습니다, 유해는 싸움터에서 운구해 왔습니다.훌륭한 아드님을 잃으셨기에 애통함도 말할 수 없이 크실 줄 압니다. 슬픔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시워드: 상처는 앞쪽에 있었소? 로스: 네, 그렇습니다. 시워드: 그렇다면 신의 용사가 되었소! 내 아들이 머리털같이 많을 지라도 그 이상 훌륭한 죽음을 바라지 않소. 이것으로 내 아들의 애도를 마치리다. 맬컴: 아니오, 이것으로 슬픔을 끝낼 순 없습니다. 애도를 제가 더 해드리겠습니다. 시워드: 됐습니다. 그에는 훌륭한 죽음을 하였습니다. 군인의 의무를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의 품안에 있기를 빌 뿐입니다! 저기서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맥다프, 맥베드의 머리를 장대에 꿰어들고 등장. 맥다프: 국왕폐하 만세! 이젠 왕이 되셨습니다, 여기 찬탈자의 저주받은 머리가 있습니다. 이젠 만천하가 태평성대로 돌아왔습니다. 폐하를 둘러싼 쟁쟁한 인걸들이 마음 속에 신과 같은 축하의 뜻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 다같이 소리높여 외칩시다. 스코틀랜드 국왕 만세! 일동: 스코틀랜드 국왕 만세!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맬컴: 불원간 경들의 충성에 대해선 응분한 보답을 하겠소. 영주들 그리고 근친들에게는 이후 백작을 봉할 터인 즉,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수여되는 영예스런 작위일 것이오.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이때에 우선 해야 할 일은 폭군의 경계망을 뚫고 외국에 나가 유랑하고 있는 동포들을 불러들이는 일, 그리고 죽어 버린 살인마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떠도는 악마 같은 왕비의 앞잡이가 됐던 잔혹한 무리들을 색출해 내는 일이오. 그 밖의 필요한 모든 일은 자비로우신 신의 가호 아래 방법과 시간과 장소를 가려 시행하리다. 그럼 여러분 한분 한분께 깊이 감사하는 바이오. 여러분 모두 스쿤에서 거행할 대관식에 참석해 주기 바라오.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모두 행진하며 퇴장) [ 작품해설 ]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맥베드"는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지고 극작술이 원숙해졌으며 현실을 인식하는 자세라든가 역사투시의 태도, 더 나아가 인간통찰이 심오해진 무렵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집필연대는 1606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맥베드"는 "햄릿", "오델로", 그리고 "리어왕"등 대작들을 이미 발표한 후에 쓴 것으로 짐작되며, 4대 비극 가운데 맨 마지막 작품이 아닌가 우겨진다. "맥베드"역시 셰익스피어의 많은 역사극과 "리어왕"의 자로가 된 홀린셰드의 "연대기"의 스코틀랜드 편에 있는 "맥베드의 전기" 즉 맥베드가 당컨왕을 시역하여 보위를 찬탈하는 1040년에서 1057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전왕의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국면과 돈월드와 그의 아내가 공모하는 "다프왕 살해"에서 소재를 얻어 이 비극을 완성하였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와 홀린셰드의 "연대기"에 있는 "맥베드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속에 적지않은 동질성과 이질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비약적인 대비고찰이긴 하지만 맥베드가 개선하고 돌아오는 귀로에서 세 마녀를 만나는 것, 그가 국왕을 시역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는 것, 맥베드가 보위에 오르자 뱅코우를 살해하는 것, 뱅코우의 아들 프리언스가 피비린내나는 난을 피하는 것, 뱅코우의 망령의 등장과 맥다프의 처와 자식들과 가솔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것 등은 같지만, "연대기"의 맥베드는 뱅코우를 위시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당컨왕을 살해하는 반면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서는 뱅코우는 살해에 가담하지 않는다. 홀린셰드가 묘사하는 당컨왕은 젊고 성인이 아니라 권모술수가라 함이 더 옳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서는 왕은 후덕하며 노왕이기에 맥베드가 당컨왕과 친척간이고 신하이며 자기 집을 방문한 군왕을 주인으로서 살해했기에 더욱 잔인함을 부각시킨 것 등이 인용된 원전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다. "맥베드"의 최초의 상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간에 알려져 있는 설에 따르면 1606년 7월17일 제임스 왕비의 오라버니에 해당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언 4세가 런던을 친방하였을 때, 궁정에서 상연되었다는 추정이 유력하다. 그리고 최초의 인쇄판은 1623년에 2절판으로 출판되었는데 어떤 학자는 극장대본의 사본에 의해 인쇄되었다고 보는가 하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또 어떤 학자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그대로가 아니고 삭제되고 첨가된 것이라는 견해가 전해 내려오고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맥베드"를 올바르고 심도있게 평가하자면 우리는 줄거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막별로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1) 스코틀랜드의 맹장인 맥베드는 개선하여 돌아오는 길에 마녀 셋을 만나게 된다. 마녀들은 그가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르게 됨을 예언한다. 그 예언은 그와 그의 아내의 가슴에 야심의 불꽃을 지펴준다. 그들은 당컨왕을 시역할 흉책을 지니게 된다. (2) 당컨왕은 맥베드 성에 행차하여 그날 밤에 깊이 잠든 사이에 피살되고 만다. 두 왕자는 위기를 벗어나 국외로 도피한다. 맥베드는 두왕자에게 죄를 덮어씌운다. 이윽고 맥베드는 야망인 보위에 오르게 된다. (3) 맥베드는 뱅코우를 자객들을 시켜 암살한다. 이는 장군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뱅코우의 망령이 맥베드가 베푼 잔치 석상에 나타난다. (4) 맥베드는 마녀들을 찾아가서 다시 예언을 듣고 자기가 마법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맬컴 왕자를 지지하는 반항군이 공격해 오지만 맥베드는 싸움에서 승리한다고 마음 먹는다. (5) 그러나 맥다프와의 싸움에서 맥베드는 적장의 칼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맥베드"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 가장 짧다는 점이다. 2082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햄릿"에 비해서 2분의 1정도밖에 안된다. 셰익스피어 전 작품 중에서 이것보다 짧은 것은 "실수연발"과 "태풍"뿐이다. 그것도 두 작품 모두 희극이다. 이 이야기는 살인에서 시작하여 살인으로 끝나며 피가 피를 부르고 무대 한쪽이 피바다를 이룬다. 양 코트는 "맥베드를 실제로 상연해서 세계가 피의 바다로 되어 있는 느낌이 없다면 이 상연은 실패작."이라 했고 A. C. 브라들리도 "마치 시인은 이 이야기의 전편을 피로 물든 안개를 통해 조망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나는 이만하면 장수했다. 내 생애도 이미 누런 잎이요, 조락한 가을이 아닌가. 더구나 노년에 따라야 하는 명예와 애정과 순종과 많은 친구들과는 인연이 없다."고 절규하며 맥베드는 스스로 암흑과 피와 저주와 밤과 불면과 광기와 고독의 지옥을 택한 것에서 그런 분위기를 쉽게 읽게 된다. "맥베드"는 비록 짧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기교 즉 희곡적 구성의 긴밀성과 매우 신속한 진행이 기축이 되었다고 해도 그리 빗나간 말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맥베드"는 거의 같은 암흑 속에서 극이 펼쳐져 나간다는 점이다. 은가루를 뿌리는 듯한 달빛은 볼 수 없다. 음험하고 공포와 절망이 소용돌이치는 흉측스럽고 간교한 어둠이 죽음처럼 괸 것이 "맥베드"의 작품세계이며 색조가 아니겠는가. 그 암흑 속에서 신의 음성이 아니라 악의 목소리가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암흑은 보다 더 단적으로 말해서 극적 배경의 구실을 한다기보다는 극적 분위기의 구실을 한다고 봄이 옳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악이 패하여 줄달음을 치고 선이 얼굴을 내밀 무렵에서야 비로소 암흑은 사라지고 희뿌옇게 동이 터오게 된다. 흔히 극평가들은 "맥베드"가 그리스적이라는 지적을 같이 하고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응보의 극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간이 자기 분수에 넘쳐 야망을 채우려고 할 때, 신의 벌을 받게 됨을 볼 수 있다. 또 야심뿐만 아니라 격정도 벌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응보의 계율이 어느 작품보다도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의 작품들과 공통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햄릿"은 어머니의 재혼과 부왕의 망령의 증언으로서 일어난 비극이며, "오델로"는 이아고의 간언으로 빚어진 비극이며, "리어왕"은 딸들의 배신으로 야기된 비극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지렛대처럼 자기를 바쳐 주었던 가치관이라든가, 인간관이라든가, 자기관이 일시에 붕괴됨으로써 내적 혼돈의 심연으로,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빠졌지만 여기서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항은 그의 내적 혼돈의 충격은 어디까지나 외적 도화선에 지나지 않으며, 발화체 그 자체는 그의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잠자고 있는 왕위의 불기둥 같은 야심을 들깨워 스스로 내적인 혼돈에 뛰어들어갔다. 그는 외적인 어둠보다 내적인 어둠 속으로 전락되어 갔다. 당컨왕을 살해한 후, 잔악한 죄업의 길로 접어들면서부터 그는 자신을 파멸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저지른다. 뱅코우에 대해 살의를 품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종말에는 악행을 거듭하는 폭군이 되어 구원될 길이 없는 나락에 떨어지고 만다. 그는 최후까지 자기의 피곤한 혼을 쉬게 하는 무덤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혼의 위한은 오직 싸우는 것에 의해 지탱하는 자기말살의 의식의 순수한 지속이었다. 야심에 불타는 맥베드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고귀한 정신이 메말라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맥베드"를 양심의 비극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맥베드는 극중 어디에서나 자기의 악행에 대하여 뼈저리게 회개하는 빛을 좀처럼 대하기 어렵다. 두려워하고 있을 망정 양심에 비춰 참회하는 않는 바로 그것이 그의 특징적인 성격의 하나이다. 피와 폭력으로써 찬탈한 왕이 칭호에는 고귀한 왕자의 혈맥이 베어 있지 않으며, 햄릿처럼 맥베드는 숙명적인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맥베드"가 성격극이 되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는 사건도 있다. 플롯도 유난히 눈에 띌 정도로 깔려 있다. 어디 그뿐이랴. 시도 있고 정서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맥베드에게 높이 세울만한 개성의 진실성이 희박함을 쉽게 읽게 된다. 이 밖에도 "맥베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햄릿"과 마녀들이 주문을 외우면서 어지럽게 춤을 추며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맥베드"는 공통점도 있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을 만나게 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햄릿"과 "맥베드"의 성격은 현저하게 대조적이지만, 그 주인공들의 극적 행위의 도화선은 뭐니뭐니 해도 초자연의 힘, 즉 망령과 마녀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 공통적이다. 그런데 두 작품세계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다른 점은 첫째로 햄릿은 숙부로 말미암아 간접적으로 왕위를 찬탈당한 왕자인데 반해 맥베드는 피를 뿌려 정통의 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찬탈자이다. 둘째로 "햄릿"에 있어서는 주인공인 햄릿이 어디까지나 극세계의 주축이 되고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많은 동심원을 이루고 있지만 맥베드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맥베드는 자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기실 맥베드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햄릿과 같은 의미로서의 주인공은 못된다. 햄릿의 세계는 늘상 외부를 향해 열려 있지만 맥베드의 세계는 시종일관 자기폐쇄적이다. 셰익스피어가 두 주인공의 대비를 투철하게 의식해서 창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햄릿의 전형을 창조한 후에 성격이 전혀 다른 주인공인 맥베드를 그린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오델로"와도 대조적인 면이 적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오델로"에서 신혼부부 사이에 일어난 살인범을 극명하게 다루었지만 "맥베드"에서는 중년부부가 왕관에 불타는 야심의 포로가 되어 끝내는 공모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를 리얼하게 묘사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전자는 연애의 파탄이며 후자는 살인을 주제로 삼았다고 하겠다. 일생을 자기 숙명과 싸워나간 것이 아니라 다만 운명과 흥정하는 일로 세월을 죽인 맥베드는 극의 전반부에서는 위대한 사군자, 용감무쌍한 전사, 그리고 시인의 상상력을 지닌 자상하고 깊은 애정을 지닌 남편이기도 하다. 그러다 왕위에 오르자 그는 냉혹하고 잔악한 일종의 위선자가 되고 만다. 그의 가슴은 오로지 악의 지배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햄릿이 지성의 과잉으로 실행력을 상실한 것과 같이 맥베드는 격정적인 야심과 환상의 과잉 때문에 실행력이 걸림돌이 부닥쳐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맥베드와 상치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그의 부인이다. 그녀는 의지의 실천력의 화신이다. 맥베드로 하여금 국왕살인의 대죄를 범하게 한 것도 그의 부인이다. 그녀의 실행력과 과단성이 그의 살인을 부른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녀에게는 맥베드와 같은 시인적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바로 그런 사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국왕 시역에만 급급했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멸망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헤아리지는 못한다.맥베드가 미래의 불안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번민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지난날의 악행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어 끝내는 몽유병자가 되어 비참한 생의 종말을 맞게 된다. 죄악에 대한 형벌의 기록과 같은 이 작품의 흥미의 최대 초점은 맥베드의 성격창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셰익스피어는 잔인한 죄과를 계속 저지르는 맥베드를 흉악한 살인귀로 그려내지 않았다. 작품 밑바닥에 인간적인 취약점이라든가, 온화한 휴머니즘이라든가, 고고한 성품 등을 은밀하게 깔아놓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왜 그랬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지적한다면 어디까지나 주인공 맥베드에 대한 독자나 관객들의 혐오감을 억누르게 하여 극적 공감을 얻도록 하려는 그의 극작술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 인해서 "맥베드"가 우리에게 한가닥 빛을 던져주며 의미를 부여해 주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지만. [ 리어왕 ] (등장인물) 리어왕: 영국 왕 프랑스 왕 버어건디 공작 코온월 공작: 리어건의 남편 올버니 공작: 거너릴의 남편 켄트 백작 그로스터 백작 에드거: 글로스터의 아들 에드먼드: 글로스터의 서자 큐란: 궁신 오즈월드: 거너릴의 집사 노인: 글로스터의 하인 전의 광대 거너릴, 리이건, 코오딜리어: 리어왕의 딸 기타: 신사, 전령, 부대장들, 리어왕 휘하의 기사들, 사자들, 장병들, 시종들, 하인들 (장소) 영국 [ 제1막 ] 소녀는 딸된 도리로서 저는 아버님 은혜에 보답하고자 아버님께 복종하고 아버님을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도 아버님을 공경합니다. 언니들이 아버님만을 사랑한다면 왜 시집을 갔을까요? 저는 아버님만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언니들같이 결혼을 안할 것입니다. - 1장 코오딜리어(리어왕의 막내딸) 대사 중에서 [ 제1장 리어왕 궁전의 알현실 ] 켄트, 글로스터, 에드먼드 등장. 캔트: 국왕께서는 코온월 공보다 올버니 공을 더 총애하시는 것 같은데요. 글로스터: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왕국을 분배하시는걸 보니 어느 공작을 더 아끼시는 건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울에 달 듯이 꼭 같게 분배되어 있어서 아무리 자세히 따져 보아도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짚을 수가 없을 정도랍니다. 켄트: 저 사람이 공의 자제분입니까? 글로스터: 확실히 내가 길러왔습니다만 내 아들이라고 할 때마다 정말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이제는 철면피가 돼버렸습니다만. 켄트: 무슨 말씀인지 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글로스터: 이애 에미는 나의 맥을 잘 잡았던 거죠. 그래서 그만 배가 불렀지 뭡니까. 결국 이애 어미는 잠자리에 맞이할 남편과 혼인도 하기 전에 요람에 아들부터 맞이한 거죠. 사실 말이지 구린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지요? 켄트: 그러한 구린 행실의 결과로 저렇게 훌륭한 아들이 생겼으니 오히려 잘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로스터: 그러나 나에게는 정실 부인한테서 난 아들이 있어요. 이 애보다 한 살 위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귀엽지도 않습니다. 이놈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주제넘게 이 세상에 생겨났지만, 이놈의 어미는 예뻤습니다. 그야 아이를 만드느라고 재미야 좀 봤죠. 그 일을 생각하면 비록 사생아이지만 내 자식으로 인정 안할 수가 없어요. 에드먼드야, 너 이 어른을 아느야? 에드먼드: 모르겠어요, 아버님. 글로스터: 켄트 백작이시다. 내가 존경하는 친구분이시니 앞으로 잘 모셔라. 에드먼드: 백작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켄트: 자네가 내 마음에 꼭 드는군. 앞으로 가까이 지내세. 에드먼드: 힘써 백작님의 의향에 맞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로스터: 저 애는 아홉 해나 외국에 나가 있었지요. 또 가게 될 것이구요. (트럼펫의 취주) 폐하께서 납십니다. 왕관을 들고 오는 사람을 선두로 리어왕, 코온월, 올버니, 거너릴, 리이건, 코오딜리어, 시종들 등장. 리어왕: 글로스터 공, 공은 프랑스 왕과 버어건디 공을 모시고 오오. 글로스터: 폐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퇴장. 에드먼드 뒤따른다.) 리어: 이제 과인이 그 동안 가슴 속에 은밀히 품고 있던 계획을 말하겠다. 저기 있는 지도를 가져오라. 알다시피 과인은 국토를 삼 등분해 놓았다. 늙은 이 몸에서 모든 근심과 번거로운 국사를 다 털어 버리고 젊고 기운찬 사람들에게 넘겨서 과인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구천에 이를 때까지의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사위 코온월 공과 또 이에 못지 않게 사랑하는 올버니 공에게 말하겠는데 과인은 지금 두 딸이 각각 차지할 몫을 발표하려고 한다. 이는 오로지 후일에 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프랑스 왕과 버어건디 공작은 서로 내 막내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이 궁중에 머물렀는데 두 사람이 다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게 될 것이오. 이제부터 과인은 통치권과 영토의 소유권과 모든 국사에서 손을 뗄 작심인데 딸들아, 너희들 가운데 누가 제일 이 아비를 사랑하는가 말해 봐라. 효성이 지극한 딸에게 제일 큰 재산을 물려주겠다. 맏딸인 거너릴이 먼저 말해 봐라. 거너릴: 아버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물을 보는 이 눈, 무한한 공간, 끝없는 자유보다도 아버님은 소중한 분이십니다. 값지고 회귀한 어느 것보다도 귀중한 분이십니다. 축복과 건강과 아름다움과 명예를 갖춘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분이십니다. 자식으로서 부친에게 바치는 최고의 사랑으로서, 또 부친이 자식에게서 받는 최고의 효심으로서 효도하겠습니다. 저의 하찮은 숨결이나 말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뭣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애정을 가지고 아버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코오딜리어: (방백) 코오딜리어는 무어라고 말하지?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잠자코 있어야지. 리어: (지도를 펴 보이며) 이 경계선에서 이 선까지의 울창한 숲과 기름진 들판, 고기떼가 많은 강들, 광활한 목장, 이 영토는 모두 너에게 주겠다. 영원히 너와 올버니의 자손의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과인의 둘째 딸, 코온월의 아내, 귀여운 리이건은 무어라고 말하려는고? 리이건: 아버님, 제 마음도 언니 마음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니 언니의 사랑과 같은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니는 제 가슴 속에 있다가 나온 듯 저의 효심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어요. 다만 언니가 못다한 말을 보충한다면 이 세상에 가장 고상하고 완벽한 사람만이 누리는 즐거움일지라도 그것이 효성이 아니라면 모두가 원수입니다. 저는 오직 아버님에 대한 효도에서만 행복을 느낍니다. 코오딜리어: (방백) 아, 다음은 가엾은 코오딜리어의 차례야! 아냐, 내 사랑이 결코 빈약한 건 아냐. 아버님께 대한 나의 사랑은 내 혓바닥이 놀릴 수 있는 말보다도 더 풍부해. 리어: 이 기름진 국토의 삼 분의 일을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영토로 주겠다. 광대함으로나, 가치로나, 기쁨을 주는 일에 있어서나, 거너릴에게 준 것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자 이번에는 네 차례다. 비록 가장 어린 막내이긴 하지만 언니들 못지 않게 과인에게 기쁨을 주는 아가야, 포도로 유명한 프랑스의 왕과 광활한 목장을 가진 버어건디 공작이 너의 사랑을 얻으려고 서로 머리악을 쓰고 있다마는 너의 언니들에게 준 것보다 더 기름진 국토의 삼 분의 일을 얻기 위해서 너는 무엇이라고 말하려느냐? 자, 말해봐라. 코오딜리어: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리어: 아무 할 말이 없어? 코오딜리어: 네, 그렇습니다. 리어: 아무 말이 없으면 아무 소득도 없지. 다시 말해 보아라. 코오딜리어: 불행하게도 소녀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입에 올릴 줄을 모릅니다. 소녀는 폐하를 자식된 도리로서 사랑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리어: 무엇이 어쩌구 어째,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러다간 너의 행운을 놓치게 될지 모르니 다시 말해 봐라. 코오딜리어: 폐하, 아버님께서는 소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또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딸된 도리로서 저는 아버님 은혜에 보답코자 아버님께 복종하고 아버님을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도 아버님을 공경합니다. 언니들이 아버님만을 사랑한다면 왜 시집을 갔을까요? 만약 소녀가 결혼한다면 아마 저의 사랑의 맹세를 받을 남편은 저의 사랑, 저의 심로, 저의 의무의 절반을 가져갈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만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절대로 언니들같이 결혼을 안할 것입니다. 리어: 그게 네 본심이냐? 코오딜리어: 네 그렇습니다. 폐하. 리어: 그리도 젊은 게 어쩌면 그리도 매정하단 말이냐? 코오딜리어: 폐하. 나이는 어리나 마음은 진정이옵니다. 리어: 좋다. 네멋대로 해라. 그렇다면 너의 그 진정을 지참금으로 삼아라! 태양의 성스러운 광명을 걸고, 지옥의 마녀 헤커티의 비법과 밤의 암흑을 걸고 맹세한다. 과인은 아비로서의 애정은 물론, 부녀의 인연도 핏줄도 다 끊는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남남으로 너를 생각할 것이다. 시디어의 야만인들은 제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제 육친도 마다 않고 잡아먹는다는데 널 딸자식으로 여기느니 차라리 그런 놈을 품어 주고 아껴 주고 돌보다 주는 게 나을 것이로다. 켄트: 황공하옵니다. 폐하--. 리어: 켄트 백작은 아무 말 마라! 용왕의 진노를 가로막지 말지어다. 과인은 저 딸애를 애지중지해 왔다. 실은 나의 여생을 저 딸애의 친절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내려고 했다. (코오딜리어에게) 썩 물러가, 내 눈앞에 얼씬 마라!--저 애와 아비로서의 애정을 끊어 버렸으니 이제는 무덤만이 나의 안식처가 되겠구나. 프랑스 왕을 불러라! 아무도 부르러 안 가느냐? 버어건디 공을 불러라! (한 궁신이 황급히 퇴장) 코온월과 올버니는 내 두 딸에게 준 지참금 이외에 셋째 딸의 몫을 둘이서 분배하라. 코오딜리어는 자만심을 밑천으로 결혼하려무나. 나는 나의 권위, 권한 그 밖에 왕위에 따르는 모든 영예를 그대들에게 넘겨주겠다. 과인은 그대들이 부담해 줄 백 명의 기사를 내 호위병으로 데리고 한 달씩 번갈아 그대들의 집에 머무르려고 한다. 과인은 다만 국왕의 명칭과 명예만을 그대로 지니고 통치권이나 국고의 수입, 그 밖의 모든 대권행사는 사랑하는 사위들,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그 증거로 이 왕관을 주노니 두 사람이 나누도록 하라. 리어, 왕관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려고 한다. 켄트, 참을 수 없어 간한다. 켄트: 폐하, 신은 항상 국왕폐하께 충절을 바쳐 왔으며 부친을 모시듯 효심을 다하였고 웃어른으로서 모시며 기도할 때마다 위대한 보호자이시다라고 잊지 않고 그 이름을 떠올려 왔습니다. 하오나--! 리어: 활은 이미 당겨졌다. 활의 과녁이 되지 않게 하라. 켄트: 차라리 신을 쏘십시오. 살촉이 신의 심장에 박혀도 좋습니다. 폐하의 심기가 혼미하신데 이 켄트가 무엄하게 군들 어떻습니까. (리어, 칼에다 손을 댄다.) 노인 어른, 도대체 어쩔려구 그러십니까? 국왕이 알랑수에 무릎을 꿇는데 중신이 두려워서 진언을 못할 줄 아십니까? 왕이 우매함에 빠졌을때 간언이야말로 신하로서 다할 의무입니다. 폐하의 권한을 그대로 보존하십시오. 그리고 매사에 심사숙고하시어 경솔하고 해괴한 처사를 원컨대 거두십시오. 신의 목숨을 걸고 의견을 말씀드립니다만 막내 따님의 효심은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비록 낮은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를 울리지 않더라도 진심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올습니다. 리어: 켄트, 목숨이 아깝거든 같잖은 소리하지 마라! 켄트: 신이 목숨이야 이미 폐하의 적에게 내준 볼모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초개와 같이 버리겠습니다. 만승의 귀하신 몸을 위해서 버린다면 어찌 이 목숨을 아까워하겠습니까. 리어: 썩 물러가라, 보기 싫다! 켄트: 똑똑히 보십시오. 폐하. 신은 항상 폐하의 눈동자 복판에 박혀 있기를 소원합니다. 리어: 진정 아폴로 신에 두고 맹세합니다만--. 켄트: 진정 아폴로 신에 두고 맹세합니다만 폐하께선 여러 신들에게 허망한 맹세를 하고 계실 뿐입니다. 리어: 이놈! 이 불충한 놈! (칼에 또 손을 댄다.) 올버니, 코온월: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켄트: 어서 충직한 의사를 죽이십시오. 염병에다 사례하십시오. 폐하의 결정을 거두시지 않으면 신의 목에서 소리가 나는 한 폐하의 잘못된 처사를 계속 외쳐대겠습니다. 리어: 불충한 놈. 듣거라, 충성심이 있거든 왕명을 듣거라! 과인은 오늘까지 맹세를 깨뜨리게 하려고 흉물을 떨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오만불손하게도 과인이 결정한 바 그 집행을 훼방 놓았으니-과인의 천성으로나 지위로 보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국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5일간 말미를 주겠으니 세파의 고초를 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엿새째 되는 날에는 노의 가증스런 등을 돌려 과인의 국토에서 떠나라. 만약 열흘 후에 추방된 몸을 과인의 영토 안에서 발견하게 되면 즉각 사형에 처한다. 자, 가라! 주피터 신께 맹세하거니와 이 명령은 절대로 취소하지 않겠다. 켄트: 폐하께서 정 그러신다면 안녕히 계십시오. 자유는 타국에나 있고 이 땅이야말로 유배지입니다. (코오딜리어에게)공주님께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공주님의 생각은 훌륭하고 말씀은 지당하였습니다. (거너릴과 리이건에게) 그리고 두 공주님의 거창한 말씀이 그대로 실행되고 사랑에 찬 그 말에서 좋은 결실이 있기를 빕니다. 고귀하신 여러분, 켄트는 이제 여러분께 하직인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나라에서 신의 낡은 습성을 그대로 지켜 나가겠습니다. (퇴장)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글로스터 백작이 프랑스 왕과 버어건디 공자을 대동하고 등장. 시종들이 따르고 있다. 글로스터: 프랑스 왕과 버어건디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폐하. 리어: 버어건디 공작, 공작에게 먼저 묻겠소. 공작은 과인의 막내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프랑스 왕과 경쟁을 하였소. 공작은 지참금조로 최소한 얼마나 요구하려고 하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구혼을 포기하겠소? 버어건디: 황공하오나 폐하, 폐하께서 하사한다고 하신 것 이상으로는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그보다 적게 주시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리어: 버어건디 공작, 과인의 막내딸이 사랑스러웠을 때는 그만한 저기 서 있소만, 저 애의 작은 몸매 어느 구석에도, 아니 그 애의 몸과 마음 통틀어 과인의 진노 이외에 딸린 것이라고는 없소. 그래도 마음에 드신다면 저기 저애는 그대의 것이오. 버어건디: 뭐라고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리어: 저애는 결점투성이오. 편들어 주는 사람도 없고, 과인의 미움을 사고 있고, 지참금으로는 과인의 저주밖에 없고. 저 애와는 남이 되려고 맹세까지 했는데 그래도 저 애를 데려가겠소, 그만두겠소? 버어건디: 용소하소서, 폐하. 그러한 조건으로서는 도저히 연분을 맺을 수 없습니다. 리어: 그렇다면 그만두오. 이 몸을 만드신 신에 두고 맹세하겠소만 저 애의 재산은 그것이 전부요. (프랑스 왕에게) 이번에는 프랑스 왕의 차례인데, 왕께서 과인에게 베푼 우의를 생각하면 과인이 미워하는 딸과 감히 결혼하라고 권하지 못하겠소. 그러니까 친딸자식이라고 입밖에 내기조차 부끄러운 저애보다는 더 훌륭한 규수를 사랑하기를 간청하오. 프랑스 왕: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그렇게도 소중하다고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늘그막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하시며 애지중지하시던 공주님이 무슨 불미스런 죄를 범했기에 순식간에 겹겹이 입어 온 은총을 잃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아마도 그 죄가 범연치 않은가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말씀하시던 폐하의 지극한 애정이 허물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공주께서 그런 불측한 죄를 범했으리라고는 기적이 아니고서는 저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코오딜리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 간청드리나이다--. 마음에 없는 것을 입에 바른 소리로 개어 올리지는 못합니다. 소녀의 흠일지는 모릅니다만 일단 마음먹은 것은 말하기에 앞서 실행부터 합니다--. 소녀가 폐하의 은총과 사랑을 잃게 된 것은 불미스런 결점이나, 살인 또는 책잡힐 흠절 때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행동, 불명예스런 행실 때문이 아니라, 남의 안색을 살피는 눈치나 알랑수를 부리는 언변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님의 총애를 잃었습니다마는 눈치나 살피고 입에 침바른 소리나 하는 그런 소견머리는 오히려 없는 편이 인간으로서 더욱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어: 아비의 부아를 끓게 하는 건 고사하고 너 같은 건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어. 프랑스 왕: 단지 이유는 그것뿐입니까?- 실천하려는 것을 넉살 부리지 않는 과묵한 천성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버어건디 공, 공작께선 이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이 그 본질을 떠나 계산알을 튕기게 된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공주와 결혼하시렵니까? 공주의 지참금은 오직 훌륭한 품성뿐입니다. 버어건디: 국왕폐하, 폐하께서 하사하시겠다는 영토만이라도 주십시오. 그러면 이 자리에서 곧 코오딜리어 공주님의 손을 잡고 버어건디 공작부인으로 삼겠습니다. 리어: 아무것도 못 주겠소. 과인의 맹세는 요지부동이오. 버어건디: (코오딜리어에게) 그렇다면 유감이오나 공주께서는 부왕을 잃으신 탓에 남편까지도 잃게 되었습니다. 코오딜리어: (방백) 버어건디 공작님, 심려 마세요! 재산에 눈을 밝혀 사랑을 하는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프랑스 왕: (코오딜리어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코오딜리어 공주, 당신은 고린전 한닢 없어도 가장 부유하고, 버림을 받았기에 더욱 소중하고, 멸시를 당했기에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고매한 부덕을 나는 이 자리에서 내 손에 넣겠습니다. (하고 손을 잡는다.) 아아, 신들이여! 사람들이 냉대하는 코오딜리어에게 이상하게도 나의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국왕폐하, 지참금도 없이 뜻밖에 내게 내던져진 공주는 나의 아내요, 나의 국민과 아름다운 프랑스의 왕비입니다. 비록 중요한 영토를 가졌다고 하나, 버어건디의 공작들이 아무리 떼지어 밀려와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코오딜리어 공주를 나한테서 사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코오딜리어 공주, 저들이 비록 매정스럽기는 하는 작별인사는 드리시오. 공주는 이곳의 모든 것을 잃게 되었으나 더 좋은 곳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리어: 프랑스 왕이여, 저 애는 그대의 것이오. 과인에게는 그러한 딸이 없소이다. 또 그 얼굴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소. 냉큼 떠나라. 은혜도 사랑도 축복도 못 주겠다. 자 갑시다. 버어건디 공.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리어, 버어건디, 코온월, 올버니, 글로스터, 시종들 퇴장. 프랑스 왕: 언니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시오. 코오딜리어: 아버님의 보석인 두 언니들, 코오딜리어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겠어요. 언니들의 본심을 잘 알지만 동생으로서 언니들의 결점을 입에 떠올리기는 싫어요. 아버님을 잘 모시도록 하세요. 언니들이 말씀한 효심을 믿고 아버님을 언니들에게 맡겨요. 그러나 아아, 내가 아버님의 사랑을 잃지만 안았어도 아버님을 좀더 좋은 곳에 모실 수 있었는데. 그러면 언니들 안녕히 계세요. 리이건: 남의 일에 참견할 것 없다. 거너릴: 네 남편이나 지성껏 모시도록 해라. 적선하는 셈치고 널 구제한 분이니까. 넌 복종을 소홀히 했어. 그러니 네가 당하는 고통은 자업자득이야. 코오딜리어: 때가 되면 위선은 폭로되고, 허물은 감추어도 끝내 창피를 당하게 될 거예요.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프랑스 왕: 자 갑시다. 코오딜리어 공주. (프랑스 왕과 코오딜리어 퇴장) 거너릴: 이봐, 할 얘기가 있어. 우리 둘에게 직접 관계되는 일이야. 아버님께서는 오늘밤이라도 여길 떠나실 것 같다. 리이건: 확실히 그래요. 언니한테 가실 거야. 그리고 다음 달에는 내게로 오실 거구. 거너릴: 너도 보다시피 아버님께서는 늙은 탓인지 노망기가 심하셔. 우리가 본 것만도 한둘이 아닌 걸. 늘 막내동생을 제일 사랑하셨는데. 그애를 그렇게 박차 버리다니 너무하시지 뭐니. 리이건: 노망 때문일 거야. 원래 자신에 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이잖아. 거너릴: 마음이 가장 온전했을 때도 성질이 불 같으셨는데, 이젠 겹치고 덮쳐 나이 드시고 오랜 세월에 고질이 된 성미에 노망까지 부리시니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거야.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몰라. 리이건: 우리도 켄트 공을 추방할 때처럼 언제 그런 어처구니없는 날벼락을 맞을지 몰라요. 거너릴: 프랑스 왕과 아버님의 작별인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야. 우리 서로 마음을 합치자. 만약 아버님께서 아까와 같은 그런 망령기로 위세를 부리신다면 유산으로 주신 영토나 권한도 우리에게는 골치가 아플 뿐이야. 리이건: 앞으로 신중히 생각해 보기로 해요. 거너릴: 당장 무슨 수를 써야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잖아. (두 사람 퇴장) [ 제2장 글로스터 백작의 성의 한 방 ] 에드먼드 편지를 가지고 등장. 에드먼드: 대자연이여, 그대는 나의 숭배하는 여신, 나는 그대의 법칙에 순종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가증스러운 관습에 희생되고 세상의 괴팍스런 잔소리에 구속되어 형보다 그저 일 년 남짓 늦게 태어나고 해서 자신의 상속권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왜, 내가 서자라서? 천한 출신이어서? 나에게도 준수한 품골이, 멋들어지게 균형잡힌 육체와 고상한 심성이 있지 않은가, 큰마누라가 낳은 자식보다 뒤질 게 뭐가 있는가? 그런데 왜 세상사람들은 우리에게 낙인을 찍지? 못나서? 천해서? 사생아라서? 서출, 서출하고 말야. 자연의 본능이 남의 눈을 속여가며 야성적인 욕정에 못 이겨 생겨난 우리가 재미없고 김빠진 피곤에 절은 잠자리에서 비몽사몽지간에 생긴 바보들의 무리보다 종자도 좋고 양기도 더 세찰 것이 아니겠는가? 자, 그럼 적자이신 에드거 형님나리, 난 너의 토지를 차지해야만 되겠다. 아버지의 사랑은 적자에 못지 않게 서자 에드먼드에게도 있다. '적자'라, 참 멋진 말이군! 그런데 적자 형님, 이 편지가 성공하고 내 계획이 잘만 되면 서자 에드먼드는 적자형을 짓누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난 가지를 뻗어나갈 것이고 꽃도 피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신들이여, 서자들 편을 들어주소서! (미리 준비해 둔 위필의 편지를 읽고 있는 척하며, 아버지 글로스터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때 매우 놀란 모습으로 글로스터 등장. 글로스터: 켄트가 그렇게 추방당했구! 그리고 프랑스 왕도 진노해서 떠났구! 국왕폐하께서는 오늘밤에 가 버리시고! 왕권을 양위, 일정한 생활비만 받게 되시고! 이 모든 일이 졸지에 일어났으니!--에드먼드가 아니냐? 웬일이냐? 무슨 소식이라도 있느냐? 에드먼드: (일부러 당황해 하며 편지를 감추며) 아녜요, 별것 아닙니다. 글로스터: 왜 기겁을 해 편지를 감추느냐? 에드먼드: 소자 아무 일도 모릅니다. 아버님. 글로스터: 무슨 편지를 읽고 있었지? 에드먼드: 아무것도 아녜요, 아버님. 글로스터: 아무것도 아니라? 그렇다면 왜 허겁지겁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느냐? 네 말대로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감출 필요가 없잖어. 어디보자. 자, 아무것도 아니라면 안경을 쓸 필요도 없을 거다. 에드먼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 이 편진 형님한테서 온 것인데 아직 다 읽지도 못했습니다. 읽어 본 곳까지로 봐서 아버님께서 보시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글로스터: 그 편지를 어서 이리 다오. 에드먼드: (중얼거리는 듯) 안 보여드려도 그렇고, 보여드려도 그렇고 역정을 내실 겁니다. 제가 대충 읽어보았는데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글로스터: 어서 이리 다오, 어서. 에드먼드: 형을 두둔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형은 제 마음을 떠보려고 이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글로스터: (읽는다.) 노인을 존경하는 세상의 인습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은 인생의 꽃이라 할 청춘시대가 얼마나 고달프단 말이냐. 재산은 있으되 지금은 바라보지도 못하고 늙어 쇠진해서 받은들 이미 인생을 즐겁게 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노인들의 포학에 굴복하는 것은 어리석게도 부당한 속박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노인들이 지배하는 것은 그들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이 일에 관하여 더 의논하고자 하니 내게로 와다오. 만약 아버님께서 깨워드릴 때까지 주무시게만 된다면 너는 아버지의 수입의 반을 영원히 차지할 수 있으며 너는 나의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편안히 살게 될 것이다. 형 에드거로부터. 으음! 음모로구나? " 깨워드릴 때까지 주무시게만 된다면 너는 아버지의 수입의 반을 영원히 차지할 수가 있다." 내 자식놈 에드거가! 그놈이 제 손으로 이것을 썼어? 이런 일을 꾸밀 심장과 두뇌가 있었을까? 이 편지가 언제 왔느냐? 누가 가져왔지? 에드먼드: 누가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 그게 회한한데요, 제 방 창문 안으로 던져져 있지 않겠습니까. 글로스터: 네 형의 필적이 틀림없으렷다? 에드먼드: 편지 내용이 좋다면 형의 필적이라고 단언하겠습니다만, 이 내용으로 보건대 형의 필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로스터: 그 녀석의 글씨다. 에드먼드: 형의 필적이긴 하지만 형의 본심은 그럴 리 만무합니다. 글로스터: 전에도 이런 문제로 네 마음을 떠본 일이 있었느냐? 에드먼드: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성년이 되고 부친이 노쇠하면 아버지는 아들의 보호를 받고,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말은 종종 듣긴 들었습니다. 글로스터: 이 나쁜 놈, 재갈을 물릴 놈 같으니! 이 편지 내용이 꼭 그렇다! 흉악한 놈! 발칙하고 간살맞은 짐승 같은 놈! 아니, 짐승보다도 고약한 놈이지! 얘야, 어서 그놈을 찾아오너라. 그놈을 잡아야겠다. 주리를 안길 놈! 그놈이 어디 있지? 에드먼드: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우선 분노를 삭이시어 형의 진의가 어떤 건지 확실한 증거를 잡으실 때까지 형의 마음을 살피시는 게 상책인 듯 싶습니다. 만약에 형의 뜻을 오해하시고 과격한 처치를 하신다면 아버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형의 효심은 산산이 깨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형을 위해서 제 이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만 형은 저의 효심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지, 다른 위험한 속셈이 있어서 쓴 것은 아닙니다. 글로스터: 넌 그리 생각하느냐? 에드먼드: 아버님만 괜찮으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저희 형제가 의논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는 곳에 모시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들으시고 확인하십시오. 지체할 것도 없이 당장 오늘밤에요. 글로스터: (독백하듯이) 그놈이 그런 흉악한 놈은 아닐 텐데! 에드먼드: 확실히 그럴 리가 없습니다. 글로스터: 이렇게 진심으로 절 사랑하는 이 아빈데 말이다! 어디 이럴 수가 있나! 에드먼드, 당장에 그놈을 찾아서 네 요령껏 놈의 배알을 뽑아 내게 알려다오. 네 지혜껏 술책을 써서 말이다. 내 신분, 체통 따윈 상관없다. 이 일만은 확실한 걸 알아야겠다. 에드먼드: 불원천리하고 찾아보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속내를 캐내, 아버님이 아시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글로스터: (중얼거리듯) 근자에 잇달아 나타난 일식 월식은 우리에게도 불길한 징조다. 자연계의 이치를 갖고 이러한 변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계는 확실히 그 결과로 재앙을 당하고 있다. 애정은 식고, 우정은 깨어지고, 형제는 등을 돌리고 있다. 도시에는 폭동이, 지방에는 반란이, 궁중에는 역모가 일어나고, 부자간의 연분이 끊어지고 있다. 내 못된 자식놈에게도 그 전조가 확실히 들어맞는 거야. 아비에게 역심을 품고 있는 자식놈이 그 예지. 왕은 천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아비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가. 어쨌든 좋은 세상은 이미 지나갔다. 음모, 경박, 배신 그 밖의 모든 망조가 기승을 부리는 혼란이 죽을 때까지 우리들 꽁무니를 짓궂게 쫓아다닐 것이다. 에드먼드야, 그 고얀놈을 찾아내는 거다. 너한테는 손해될 게 없을 거다. 신중히 행하라. 그건 그렇고 고결하고 충직한 켄트 백작이 추방을 당하다니. 충직이 죄라! 요지경 속이군. (퇴장) 에드먼드: 세상 참 어수룩하단 말야. 불운이 덮치는 건 자업자득인 수가 대부분인데 햇님, 달님, 또는 별님 탓으로 돌린단 말야. 마치 우리가 악한이 되는 것도 필연적이고, 머저리가 되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불한당 도둑놈 역적이 되는 것도 태어날 때별이 점지한 것이고, 주정꾼 사기꾼 간부가 되는 것도 어떤 혹성의 영향력에 순종한 탓이라 이거지. 그리고 모든 잘못된 일은 그것이 모두 하늘의 섭리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단 말야. 여색에 호가 난 인간이 자기의 음탕한 성질을 별 때문이라고 하니 참 희한한 면책방법인 걸!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하고 용가리 꼬리 밑에서 좋아했고, 나는 큰곰자리 밑에서 태어났겠다. 그러니 내 성깔이 사납고 음탕한 건 당연지사지, 흥! 그러나 이 서자나리께서 태어나실 때 천상의 가장 순결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해도 나야 요 모양 요 꼴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에드거다--. 에드거 등장. 꼭 맞게 오는군! 옛 희극의 끝장대로 내 역할은 미친 거지 베들레햄의 톰같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면서 속검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 일이다--. (아버지 글로스터의 흉내를 내며) 오, 요새 일어난 일식 월식이 과연 불화의 징조였구나. (슬프게 부른다.) 파 솔 라 미. 에드거: 에드먼드 웬일이냐?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에드먼드: 형님, 일전에 읽은 점성술의 예언인데, 일식 월식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하고 있어요. 에드거: 그런 일에 흥미를 가졌니? 에드먼드: 거기에 씌어 있는 일이 불행히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걸요. 이를테면 부자지간의 불화, 죽음, 기근, 오랜 우정의 파괴, 나라 안의 분열, 왕과 귀족에 대한 위협과 저주, 근거없는 의심, 친구의 추방, 군대 안의 반란, 부부관계의 파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예가 있다구요. 에드거: 언제부터 네가 점성술에 빠졌지? 에드먼드: 형님, 언제 아버님을 뵈었어요? 에드거: 어젯밤이지. 에드먼드: 아버님과 이야기 나누셨나요? 에드거: 으응, 두 시간이나. 에드먼드: 기분 좋게 작별하셨나요? 아버님 말투로나 안색으로 보아 역정나신 것같지 않았어요? 에드거: 전혀. 에드먼드: 혹시 아버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았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진정으로 형님을 위해서 부탁하는 건데 아버님의 노여움이 수그러질 때까지 당분간 아버님을 만나지 마세요. 지금은 아버님의 진노가 대단하십니다. 형님 몸에 위해가 있을지도 몰라요. 좀처럼 화가 수그러질 것 같지 않아요. 에드거: 어떤 죽일 놈이 날 헐뜯었구나. 에드먼드: 저도 그게 염려가 됩니다. 제발 아버님의 화가 수그러질 때까지 꾹 참고 아버님을 멀리하세요. 우선 제 방에 가 계시지요. 기회를 봐서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실 수 있는 곳에 안내해 드릴 테니까요. 자, 갑시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참 그리고 외출하실 때는 무기를 가지고 나가세요. 에드거: 무기를 갖고 다니라고! 에드먼드: 형님, 진정으로 형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형님을 해치려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제가 거짓말쟁이죠. 제가 보고들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얼추 변죽만 울렸을 뿐이지 무서운 진상은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자, 가시지요! 에드거: 곧 사정을 알려 주겠니? 에드먼드: 글쎄, 이 일은 제게 맡기시라니까요. (에드거 퇴장) 어수룩한 아버지에 착하기만 한 형이라. 형은 남을 해칠 줄도 모르고 남을 의심하지도 않거든. 그러나 저러나 형의 우직함을 이용하면 내 계책은 순풍에 돛단 배지! 일은 다 된 셈이다. 혈통으로 재산을 못 갖게 될 바에야 꾀를 써서 땅덩이를 거머쥐어야 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릴 것 없다. (퇴장) [ 제3장 올버니 공작의 궁궐의 한 방 ] 거너릴과 그의 집사 오즈월즈 등장. 거너릴: 아버님의 어릿광대를 꾸짖었다고 해서 그래 아버님께서 우리 기사들에게 손찌검을 하셨단 말이냐? 오즈월드: 그렇습니다, 마님. 거너릴: 밤낮으로 날 들볶는군.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연달아 심성 사나운 일만 저질러 집안이 온통 난장판이야. 더 이상 참을 순 없어. 아버님 기사들은 점점 난폭해지고, 아버님께서도 하찮은 일을 갖고 노상 우리를 나무라신단 말야. 아버님이 사냥에서 돌아오셔도 난 인사를 안 드리겠다. 내가 않는다고 해라. 너도 이제부터는 홀대해도 상관없어. 잘못돼도 그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안에서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오즈월드: 폐하께서 돌아오십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거너릴: 진력이 나서 짜증난 것처럼 대하라구, 너뿐이 아니고 모두 다 말이다. 비위를 건드려 뭐라 하시면 난 그걸 빌미로 하는 거야, 아버님더러 못마땅하시면 동생한테 가시라고. 하지만-동생도 내 마음이나 진배없으니까 눌려지내지는 않을 거야. 노인이 노망을 부려도 분수가 있지, 그래 우리에게 권력을 줬으면 그만이지 언제까지나 권력을 그대로 휘두르겠다는 배포람! 정말 망령들 린 늙은이는 갓난애가 된다니까. 비위를 맞춰 줘도 안되면 호되게 나무라야 해. 내 말을 잊지마라. 오즈윌드: 잘 알았습니다, 마님. 거너릴: 그리고 아버님이 데리고 있는 기사들한테도 쌀쌀하게 굴라구. 그래서 뒤탈이 생겨도 상관없으니까. 네 동료들한테도 그렇게 일러라. 이것을 트집잡아 내가 마음먹은 것을 털어놀 기회를 잡고 싶으니까. 내 동생한테도 곧 편지를 써서 나와 같이하라고 이를 테다. 저녁 준비를 해라. (두 사람 퇴장) [ 제4장 올버니 공작의 궁궐의 큰 방 ] 변장을 한 켄트 등장. 켄트: 딴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내 말투까지 감출 수만 있다면 이렇게 내 본색을 감추어 가며 이루려는 내 목적을 충분히 이룩할 수 있을 거다. 추방된 켄트여, 널 추방한 폐하를 모실 수 있게만 된다면 네가 경애하는 주인이 너의 충성된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 줄 날이 올 것이다.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리어왕이 사냥에서 돌아온다. 기사와 시종들이 뒤따르고 있다. 리어: 허기가 져 조금도 기다릴 수가 없다. 어서 저녁준비를 시켜라. (시종 한 사람 퇴장) 아니, 이건 뭐지, 넌 누구냐? 켄트: 그저 한 사나이입니다. 리어: 뭘 하는 자냐? 과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느냐? 켄트: 보시는 바와 같은 사람이옵니다. 믿어 주시는 분껜 멸사봉공하고, 올곧은 분을 경애하며, 현명하고 과묵한 분하고 친교하며, 하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만 싸우는 신앙심 깊은 영국인이옵니다. 리어: 도대체 넌 누구냐? 켄트: 정직한 사나이이며 왕폐하와 같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리어: 왕이 왕으로써 구차하듯이 네가 신하로서 구차하다면 넌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겠다. 그래, 네 소원은 무엇이냐? 켄트: 봉공하고 싶사옵니다. 리어: 누구에게? 켄트: 어른신네요. 리어: 이 사람아, 나를 아는가? 켄트: 모르옵니다. 그러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제가 주인으로 모시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다. 리어: 그것이 무엇이냐? 켄트: 위엄입니다. 리어: 그래,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켄트: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며, 말도 타고, 달음질로 심부름도 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는 뒤범벅으로 알아듣지만, 알기 쉬운 전갈은 분명하게 전할 줄 압니다. 보통사람들이 하는 일은 뭣이든지 합니다. 저의 최대 장점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리어: 몇 살인가. 켄트: 여자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반할 만큼 철부지도 아니며 자발없이 여자에게 혼을 뺏길 만큼 늙지도 않았습니다. 마흔여덟이 됐습니다. 리어: 날 따라오너라. 어디 써 보마, 저녁식사 후에도 내 마음에 든다면 내 옆에 있게 하지. 저녁식사를 가지고 오너라! 식사 말이다! 내 시종은 어디로 갔나? 내 어릿광대는 어디 갔고? 너 가서 광대를 이리로 불러오너라. (시종 한 사람 퇴장) 이때 오즈월드 왕 앞을 일부러 모르는 체하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나치려고 한다. 여봐라! 너 이놈! 내 딸은 어디 갔지? 오즈월드: (멈춰 서지 않고 대청을 가로질러 가며) 황송하옵니다마는--. (하며 오즈월드 능청을 부리며 퇴장한다.) 리어: 저 녀석이 뭐라고 주절대지? 저 팔삭동이를 이리 불러라! (기사 한 사람 퇴장) 내 어릿광대는 어디 있지? 이봐라! 세계가 온통 잠에 빠진 것 같구나. (기사 한 사람 돌아온다.) 그 들개 같은 놈은 어디 갔어? 기사: 그자 말이 공작부인께서는 편치 않으시다고 합니다. 리어: 누가 불렀는데 감히 오지 않는 거냐? 기사: 심사 꼬인 말투로 오기 싫다고 합니다. 리어: 오기 싫다? 기사: 폐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폐하를 모시는 예도가 예전과는 달리 무엄하고 불손한 듯합니다. 공작부부는 물론 모든 가솔들까지도 매우 냉담하게 보입니다. 리어: 아아니! 무엇이 어째? 기사: 폐하, 소신의 불민한 탓으로 잘못 생각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폐하께서 불손한 예우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입을 닫는다는 것이 어찌 신하로서의 도리겠습니까? 리어: 네 말을 들어보니 아 역시 짚이는 데가 있다. 나도 요즈막엔 거북하게 내게 대하는 것을 느끼긴 했다. 그러나 저들이 설 마한들 딴 의도가 있거나 고의로 불손하게 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내 자신이 노무 옹졸하게 의심을 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오히려 자신을 책망해 왔단 말이다. 앞으로 더 살펴보자. 그러나저러나 어릿광대는 어디 갔느냐? 이틀 동안이나 보이지 않으니. 기사: 막내공주님께서 프랑스로 떠나신 후론 광대가 맥이 빠져 있습니다. 리어: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해 둬. 나도 잘 아니까. 가서 내 딸보고 할 말이 있다고 그래라. (시종 한 사람 퇴장) 너는 가서 어릿광대를 불러오너라. (다른 시종 퇴장) 오즈월드 다시 등장. 옳지, 너 잘 왔다. 넌 나를 누군 줄 아느냐? 오즈월드: 주인 마님의 아버님이십니다. 리어: (쏘아본다) "주인 마님의 아버지라구?" 에잇, 주인의 종놈아! 이 잡종개야, 고얀 놈, 들개 같은 놈아! 오지월드: (되쏘아본다.) 저는 그런 자는 아니옵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리어: 오만방자하게 나를 노려봐? 이 날깡패야! (오즈월드를 때린다.) 오즈월드: 그냥 맞고 있지는 않겠습니다요. 켄트: 그래 딴죽을 걸어도 안 넘어갈 테냐? 이 축구쟁이 놈아. (그의 다리를 걸어 오즈월드를 넘어뜨린다.) 리어: 잘했다. 날 도와준 거다. 내 바로 그런 걸 좋아하느니라. 켄트: 어서 일어나! 꺼져버렷! 상하의 구별을 가르쳐 주마. 썩 꺼져! 네놈이 다시 땅에 패대기 당하고 싶거든 죽치고 있거라. 그렇잖으면 꺼지라구! 자아, 네놈도 앞뒤 짐작조차 못하는 놈은 아니겠지? (오즈월드 퇴장) 그렇지. 리어: 자넨 정말 친절해, 고맙다. 자, 봉공에 대한 작은 사례이니라. (켄트에게 돈을 준다.) 광대 등장. 광대: 나도 저 사람을 부려야지. 그 대신 내 광대모자(닭볏 모양의 붉은 모자--역자주)를 줄게. (켄트에게 모자를 준다.) 리어: (광대에게) 그래, 이 귀여운 놈아! 어떻게 된 거냐? 광대: (켄트에게) 이것 봐, 내 광대모자를 쓰는 것이 더 좋겠다. 켄트: 왜냐, 광대야? 광대: 왜냐구? 인기 떨어진 사람의 편을 드니까 그렇지. 아니 바람 부는 대로 웃어대지 않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일 걸. 자 이 광대모자를 받아! 저분은 딸을 둘이나 쫓아내고 셋째 딸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축복을 주었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네가 이 사람을 쫓아다니려면 반드시 내 광대모자를 써야 돼. (리어에게) 안 그래, 아저씨? 그런데 광대모자 둘에다, 딸도 둘만 있었으면 좋겠다. 리어: 왜냐, 이 녀석아? 광대: 딸들에게 재산을 다 줘도 내 광대모자만은 내가 가질 수 있으니 말이지. 이건 내거야. 당신도 갖고 싶으면 딸들한테 졸라 보시라구요. 리어: 말조심해라, 이놈아--매맞는 거 일지? 광대: 진실은 들개인가 부죠, 매맞고 들판으로 쫓겨나고. 그런데 알랑수 암캐 마님께선 난롯불 옆에 서서 냄새만 풍기고 있다 이 말씀이에요. 리어: 저 어릿광대 말이 이 가슴을 찌르는구나! 광대: (켄트에게) 이봐, 희한한 글귀를 하나 가르쳐 줄게. 리어: 말해 봐라. 광대: 잘 들어보시라구요. 아저씨! (음송한다.) 가진 것을 다 보이지 말라. 알고 있어도 다 말하지 말라. 가진 것을 다 꾸어 주지 말라. 걷기보다는 말을 타라. 믿기 전에 더 알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내기에는 많은 것을 걸지 말라. 주색을 가까이하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 있어라. 그러면 열이 둘인 스물 되고 더 많은 것이 모이리아. 켄트: 객쩍은 소리 작작해라, 이 광대야. 광대: 그러니까 무료 변호사의 변론 같은 거지 뭐--. 내게 아무것도 준 게 없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안 생기나, 아저씨? 리어: 없구 말구, 이놈아.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안 생겨. 광대: (켄트에게) 제발 저 사람에게 말해 줘요, 저분 영토의 소작료가 그 꼴이 되었다고요. 저분이 광대 말을 도무지 믿지 않으니까. 리어: 매운 말 지껄이는 쓴 광대로다! 광대: 그대 아는가, 쓴 광대와 단 광대의 차이를? 리어: 모른다. 가르쳐 다오. 광대: (음송한다.) 영토를 주어 버리라고 충동질한 자가 있다면 내 곁에 대령시켜라-- 없으면 그대가 그 대역을 할지어다. 단 광대와 쓴 광대가 당장에 나타나리라. 얼룩옷 입은 단 광대는 이쪽이요 (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쓴 광대는--저쪽이로세! (하며 리어를 가리킨다.) 리어: 이놈아, 날 광대라고 빗대느냐? 광대: 다른 칭호는 다 주어 버렸으면서. 가진 것이라고는 광대의 천성뿐인걸. 켄트: 폐하, 이놈은 바보광대라고만 단언할 순 없습니다. 광대: 옳은 말씀이로다, 영주나 훌륭한 양반들이 어디 나 혼자 광대 노릇을 하게 내버려 둬야지. 나 혼자 광대의 전문가가 되려는데, 그 양반들도 한몫 끼겠다고 법석을 떨지 뭐요. 부인네들도 그렇구. 나 혼자 광대 노릇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말씀이오. 달려들어 날 이리 찢고 저리 찢어 간단 말요. 아저씨, 달걀 하나만 줘요, 그러면 광 두 개를 줄게. 리어: 무슨 관이 두 개란 말이냐? 광대: 그야 달걀 가운데를 잘라서 노란 자위를 먹어 버리면 관이 두 개가 된단 말요. 당신은 관을 두 토막내어 둘 다 남을 주고는 제가 탈 당나귀를 등에 짊어지고 진창길을 걸어간다 이 말씀이여. 그러니까 금관을 남에게 줘버린 것은 대머리 골통 속에 지혜가 없어서지. 내가 시러베 같은 말을 한다고 맨 처음 알아챈 놈이야말로 무릿매로 다스려야 한다구. (노래한다.) 올해는 멍청이가 실속 없는 해 현자가 멍청이가 되어 지혜가 메말라 하는 짓이 쑥맥 같구나 리어: 언제부터 그렇게 많은 노래를 부르게 됐지? 광대: 아저씨, 당신이 딸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시켰을 때부터 노래를 배웠거든--. 그때 당신은 딸들에게 회초리를 주고 때려달라고 바지를 내렸으니까. (노래한다.) 그때 별안간 그들은 기뻐서 울었고 그러나 나는 슬퍼서 노래했네 임금님은 술래잡기하며 멍청이 패거리 틈에 끼었어라 아저씨, 당신의 광대에게 거짓말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하나 붙여 줘요. 난 거짓말을 배우고 싶어 죽을 지경이로소이다. 리어: 거짓말을 하면 매질하겠다. 광대: 당신하고 당신 딸들은 정말 피붙인가요? 딸들은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매질하려 대들고.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하면 매질한다고 으름장을 놓거든요. 그런가 하면 말을 안하면 안한다고 매맞을 테지? 그러니 이젠 무슨 짓을 해먹든 광대바보는 면해야겠어. 그렇다고 아저씨, 당신 꼴이 되기는 싫어요. 아저씨는 지혜의 양쪽 끝을 저며 버려 가운데는 텅 비었거든. 저기 저민 부스럭지가 오네. 거너릴 등장. 리어: 어인 일인가, 내 딸아! 왜 그렇게 이맛살을 찌푸리지? 요새 늘 얼굴을 찡그리는 것 같다. 광대: 딸이 얼굴을 찡그려도 신경을 쓰지 않을 때는 당신이 참 멋진 사람이었는데. 이젠 숫자 없는 영점이 됐구먼. 지금은 당신보다 내 팔자가 상팔자요. 나는 고아대지만 당신은 빈털터린 걸. (거너릴에게)예, 입을 봉하고 있죠, 말씀은 아니 하셔도 얼굴빛으로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음송한다.) 쉿 쉿 세상만사가 싫다고 빵껍질 빵부스러기 다 버린 사람도 배고프면 먹어야 해 (리어를 가리키며) 저 양반은 알맹이 뺀 콩깍지야. 거너릴: 어버님,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이 광대뿐만 아니라 아버님께서 데리고 계신 오만불손한 시종들도 걸핏하면 트집잡고 싸우고 야단법석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이 작태에 대해 말씀을 드려서 차제에 뿌리뽑을 방법을 세워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는데 요즘 아버님의 언행을 보면 그러한 행동을 감쌀 뿐 아니라, 오히려 선동하시는 것 같아 실려가 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버님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또한 저희들로서도 눈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는데 그렇게 하면 아버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겠지요. 그러나 다른 경우 같으면 저에게 욕이 될런지 모르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세상사람들도 저희들의 처사를 인정해줄 것입니다. 광대: (음송한다.) 알고 계시니깐 하는 말인데 아저씨. 그렇게 오랫동안 바위종다리가 뻐꾸기를 먹여 주었더니 그 새끼는 바위종다리의 목을 잘라 버렸대요. 이리하여 촛불은 꺼지고 우리에게 남은 건 암흑뿐이로다. 리어: 넌 나의 딸이더냐? 거너릴: 아버님께서는 원래 지혜로우시잖아요, 그러니 그걸 잘 활용하세요. 요즘처럼 본래의 아버님답지 않은 망령기를 제발 버리세요. 광대: 수레가 말을 끄는데 왜 당나귀인들 이상하다고 안 여기겠소? 아, 아줌마! 난 반했다구. 리어: 여봐라, 누가 날 알아보겠는가? 난 리어가 아니다. 리어가 이렇게 걷더냐? 이렇게 말을 하더냐? 리어의 눈은 어디 있지? 정신이 혼미해졌거나 분별이 잠자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흥! 이것이 생시냐? 아니, 꿈이겠지.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사람은 없느냐? 광대: 리어의 그림자외다! 리어: 난 그걸 알고 싶다. 왕의 권위, 그 지식, 그 이성으로 판단하건대 나에게 딸들이 있었던 것 같다만 잘못 생각했단 말인가? 광대: 그 딸들이 고분고분한 아버지로 만들자 이거요. 리어: 아름다운 귀부인,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거너릴: 그렇게 딴청을 부리시는 것도 요새 자주 하시는 아버님의 짓궂은 장난과 같은 유의 것이에요. 제발 저의 의도를 옳게 이해해 주세요. 아버님께서도 존경받을 연세이신 만큼 분별을 지니셔야 됩니다. 아버님은 백 명의 기사들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어쩌나 난폭하고 음탕하고 방종한지 이 궁궐은 그들이 농탕치는 바람에 불한당들의 여인숙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색으로 밤낮 북새판을 이루니, 이 훌륭한 궁궐이 술집이나 유곽꼴이 되고 말았어요. 이런 치욕스러운 일은 당장 고쳐야 해요. 그러하오니 제발 시종들을 줄여 주셔야겠습니다. 저희 요청을 물리치시면 저희 마음대로 아퀴를 짓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종들도 아버님 노령에 알맞고 자신들과 어버님 처지를 잘 아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리어: (격분하여) 망할 놈의 악귀들아! 말에 안장을 달라. 시종들을 모두 불러라! 후레자식 같으니, 더 이상 신세를 지지 않을 테다. 내겐 딸이 또 하나가 있어. 거너릴: 아버님은 저의 가솔들을 손찌검하시고, 그걸 본받아 저 왈짜패들은 상전들을 머슴 취급하고 있습니다. 올버니 등장. 리어: 내 지금 와서 늦게 후회한들 소용없지--! (올버니에게) 오 공작, 왔소? 그래 이건 공의 뜻인가? 공작, 말해 보오--! 말을 준비하라. 배은망덕이라는 돌같이 차가운 마음을 가진 악마야, 네가 딸자식의 탈을 쓰고 있으니 바다의 괴물보다도 더 흉악하구나! 올버니: 폐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리어: (거너릴을 노려보며) 이 흉칙한 솔개, 거짓말 마라! 내 시종들이야말로 엄격히 골라 뽑은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본분이 무엇인지 세세한 점까지 잘 알고 있고, 자기들의 명예를 지극히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오 어쩌다 티끌만한 코오딜리어의 허물이 그리도 흉악하게만 보였을까. 그 하찮은 허물은 나의 타고난 심성을 주리틀어 내 마음에서 애정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증오심만 늘게 하였다. 오리어, 리어, 리어! 미욱한 생각을 불러들이고 (자기 머리를 친다.) 소중한 판단력을 쫓아낸 이 문을 때려 부숴라! (안을 향해) 자 다들 가자. (기사들과 켄트 퇴장) 올버니: 폐하, 전 죄가 없습니다. 왜 진노하시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리어: 그럴는지도 모르지. 그럼 내 말을 들으라, 자연의 여신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자연의 여신이여. 들으라! 만약 이년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할 뜻을 가졌다면 그 뜻을 바꾸어라. 제발 이년을 석녀로 만들어라. 저년 몸 속에 있는 생식의 기능을 말리고 저년의 타락한 육체에서 어미의 명예가 될 아이를 낳지 않게 하라! 만약 부득이 애를 낳게 될 경우에는 미움으로 뭉쳐진 아이를 낳게 하여 그 자식이 자라서 저년에게 한평생 심통 사나운 불효의 고통을 주게 하라! 그 자식으로 해서 젊은 이마에 주름살이 잡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두 뺨에 고랑이 패게 하고 어미로서의 모든 노고와 자애는 조소와 멸시로 보답받게 하라. 그리하여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긴 독사의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걸 깨닫게 하라! 자, 가자, 가자! (황황히 퇴장) 올버니: 아니, 어떻게 된 영문이오? 거너릴: 원인을 아시려고 애쓸 것도 없어요. 아버님의 망령기가 도진 모양이니 멋대로 하시게 내버려 둬요. 리어, 광란의 상태로 다시 등장. 리어: 왜 이래, 두 주일도 안됐는데, 내 시종들을 단번에 50명이나 목을 잘라? 올버니: 도대체 무슨 일이시옵니까? 리어: 그래, 이야기해 주지. (거너릴에게) 빌어먹을 것! 망측한 일이다. 명색이 사내 대장부가 너 같은 망종 때문에 이 꼴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다니. 너 같은 년은 염병이나 걸려 뒈져라! 아비의 저주가 네년 몸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영영 고칠 수 없는 상처가 되거라! 노망한 눈아, 이런 일 때문에 네가 또다시 눈물을 쏟는다면 눈동자를 후벼내어 흘리는 눈물과 함께 땅에 패대기칠 테니 땅이나 적시렸다. 아 내게 왜 이런 망신살이 끼었을까? 아아! 상관없다. 내게는 딸이 또 하나 있어. 그애는 어지니까 날 알뜰히 보살펴 줄 것이다. 너의 패륜을 그 애가 들으면 그녀는 손톱으로 너의 이리 같은 얼굴의 껍데기를 할퀴어 벗길 게다. 넌 내가 영원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예전 같은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퇴장) 거너릴: 잘 보셨지요? 올버니: 거너릴, 내 당신을 깊이 사랑하곤 있소만 그렇다고 당신 편만을 들 수는 없소--. 거너릴: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이것 보아요. 오즈월드, 이리 와요! (광대에게) 어서 주인을 따라가라, 넌 광대가 아니고 악당이야. 광대: 리어 아저씨, 리어 아저씨! 기다려요. 광대를 데리고 가야죠. (음송한다.) 잡고 보니 여우가 아닌가 여운 줄 알았더니 딸이 아닌가 냉큼 숨통을 막아 줘야 하는데 내 모자 팔아도 밧줄을 살 수 있어야지 그래서 난 뒤따라 뺑소니라오. (부산하게 사라진다.) 거너릴: 아버님한테는 좋은 충고를 드렸어요! 기사를 백 명이나 두다니? 그야 무장한 기사를 백 명씩이나 거느린다는 것은 아주 영특하고 안전한 방책이죠. 그래요, 엉뚱한 꿈을 꾸거나, 부질없는 소문을 듣고 망상이라도 하게 되고, 또 불평 불만을 품게 되면 그때마다 아버님은 당신의 망령기를 저들의 힘을 빌려다가 뒷받침하고 우리들의 목숨을 손아귀에 꽉 쥘 수 있단 말예요. 오즈월드, 날 좀 봐요! 올버니: 당신의 근심 걱정은 너무 지나쳐요. 거너릴: 과신하는 것보다는 안전하져. 위해를 입을까봐 늘 두려워하느니 애당초 화근 덩어리는 뿌리뽑아 버리는게 상책이에요. 아버님의 속셈은 제가 알아요. 아버님이 말씀한 것을 동생에게 편지로 썼어요. 내가 그 부당한 점을 말해 줬는데도 만일 동생이 아버님의 편을 들고 백 명의 기사를 부양한다면--. 오즈월드 다시 등장. 어떻게 되었지, 오즈월드? 동생에게 보낼 편지는? 오즈월드: 예, 썼습니다. 거너릴: 배행할 몇 사람을 데리고 곧 말을 타고 떠나요! 내가 특별히 근심하는 점을 내 동생에게 충분히 이야기해요. 이야기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도 좋아요. 어서 떠나요. 갔다가 빨리 돌아와요. (오즈월드 퇴장) 안돼요, 안돼요, 당신의 미지근하고 점잖기만 한 태도를 별로 책하고 싶진 않아요. 미안한 말씀이지만 당신은 위해를 받아도 부드러운 성품 때문이라는 칭찬을 받기는커녕,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난받기 꼭 알맞아요. 올버니: 난 당신의 통찰력이 어디까지 꿰뚫어보는지 모르겠소. 더 잘하려고 하다가 일을 망치는 수가 종종 있으니까. 거너릴: 안 그렇습니다요, 그렇다면--. 올버니: 좋소, 좋아요. 어디 두고 봅시다. (두 사람 퇴장) [ 제5장 올버니 공작의 궁궐 안뜰 ] 리어, 켄트, 광대 등장. 리어: (켄트에게) 너는 나보다 먼저 이 편지를 가지고 코온월 공작한테로 가거라. 내 딸이 이 편지 내용에 대해서 묻거든 그것만 대답을 하지, 그 이상 입을 놀려서는 아니된다. 부지런히 가지 않으면 내가 먼저 도착할지도 모른다. 켄트: 서찰을 전할 때까지는 한잠도 자지 않겠습니다. (퇴장) 광대: 사람의 두뇌가 발뒤꿈치에 있다면 두뇌도 틀 우려는 없을까? 리어: 그럴 수 있지. 광대: 그러면 제발 걱정 놔요. 당신 정도의 지혜라면 튼다고 해서 실내화를 신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리어: 그럴 수 있지. 광대: 그러면 제발 걱정 놔요. 당신 정도의 지혜라면 튼다고 해서 실내화를 신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리어: 핫하하! 광대: 인제 보시라구요. 당신의 다른 딸도 애정있게 당신을 대접할 테니 말예요. 능금하고 사과가 같듯이 두 분 자매는 닮았거든요. 이래봬도 알 것은 알고 있다구요. 리어: 그래, 뭘 안다는 거야, 이 작자야? 광대: 능금 맛이 다 같듯이 두 따님은 초록은 동색이죠. 왜 사람의 코가 얼굴 한가운데에 있는지 알아요? 리어: 몰라. 광대: 코 양쪽에 눈을 붙여두기 위해서예요. 코로 냄새를 못 맡을 때는 눈으로 알아볼 수 있거든요. 리어: (코오딜리어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의 경거망동을 후회하는 듯 번민한다.) 그 애한테는 잘못했어. 광대: 굴은 어떻게 껍데기를 만드는지 알아요? 리어: 몰라. 광대: 저도 몰라요. 그러나 달팽이가 왜 집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죠. 리어: 왜지? 광대: 그야 제 머리를 감추려고 그러는 거죠. 딸들에게 집을 내주면 제 뿔을 감출 껍데기가 없어지는 걸요. 리어: (또 번민하여) 아비로서의 본성을 잊어버리자. 그처럼 딸을 생각한 아비였건만! 말 준비는 됐느냐? 광대: 얼뜨기 하인들이 준비하러 갔어요. 일곱 개 별은 왜 일곱 개밖에 없느냐 하는 이유는 아주 재미있거든요. 리어: 그야 여덟 개가 아니니까 그렇지. 광대: 옳아, 맞아요. 당신도 훌륭한 광대가 될 수 있겠네. 리어: (또 번민하며) 강제로라도 도로 찾아야 해! 배은망덕한 도깨비 같으니! 광대: 아저씨, 당신이 내 광대였다면 미리 늙어 버린 죄로 당신을 때려 주었을 걸. 리어: 그건 또 왜지? 광대: 똑똑해지기 전에 늙어 버리면 안되니까. 리어: (또 번민하며) 오! 자비로운 하늘이여, 나를 미치게 하지 말라, 미치게 하지 말라! 정신을 잃고 싶지 않다. 미치고 싶지 않다. 시종 한 사람 등장. 어떻게 되었어! 말은 준비됐나? 신사: 예,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리어: 자 가자. 광대: (관객에게) 우리의 서글픈 출발을 히히덕대며 웃고 있는 머저리 처녀들, 뭇사내의 사타구니가 모두 펑퍼짐해지면 모를까 처녀성 결단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거다. (왕을 선두로, 모두 퇴장) [ 제2막 ] 아비가 누더기를 몸에 걸치면 자식들이 본척 만척 하지만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모두 효자 된다오. 운명의 여신은 영락없는 매춘부라 구차한 사람에겐 빗장을 건다네. - 4장 광대의 음송 중에서 [ 제1장 글로스터 백작의 성 안의 뜰 ] 에드먼드와 큐란 양쪽 끝에서 나와 만난다. 에드먼드: 안녕하세요, 큐란님. 큐란: 안녕하시오? 지금 춘부장을 뵙고 코온월 공작과 리이건 공작 마님께서 오늘밤에 이곳으로 오신다는 전갈을 알려 드렸죠. 에드먼드: 어인 일이신가요? 큐란: 글쎄, 나도 모르겠소. 세상의 풍문 좀 들었어요? 숙덕거리는 소문 말이요, 소문이래야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정도의 뜬소문입니다만. 에드먼드: 못 들었는데요. 대관절 어떤 소문인데요? 큐란: 차차 듣게 될 것이요. 안녕히. (퇴장) 에드먼드: 공작이 오늘밤에 이곳에 온다? 잘 돼서! 일이 제대로 맞아들어가는군! 이것을 내 꿍심에 합친다면 구름이 바람 만난 격이지. 아버님은 형을 잡으려고 파수를 세웠겠다. 그런데 내가 해치워야 할 골치 아픈 일이 아직 한가지 남아 있지. 그걸 빨리 실행해야 돼. 해운이여, 속히 날 도와다오! 형님, 할 말이 있어요! 빨리 내려오세요! 형님, 할 말이 있어요! 발리 내려오세요! 형님, 어서요! 에드거 등장. 아버님이 감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형님, 급히 달아나세요, 어서요! 형님이 여기 숨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지금이면 밤의 어둠을 이용할 수 있잖아요. 형님 혹시 코온월 공작의 험담을 하신 일은 없나요? 오늘밤에 급히 공작께서 리이건 부인과 함께 오신대요. 혹시 그분의 험담을 한 일은 없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에드거: 전혀 말 한마디도 한 일 없다. 에드먼드: 아버님이 오시나 봐요. 용서하세요, 술책이니까 칼을 뽑아 형님을 치는 척할 테니 형님도 칼을 빼서 방비하시는 척하세요. 자아, 당당히 싸우는 겁니다. (두 사람 칼을 뽑아, 싸우는 흉내를 낸다. 에드먼드 큰 소리로)--항복해! 아버님 앞에 썩 나와라. 횃불을 가져와, 어서! 여기다!(작은 소리로) 달아나요, 형님--(큰 소리로) 횃불, 횃불을!(에드거 퇴장. 작은 소리로) 어서 잘 가세요. 피가 좀 나야 격렬하게 싸운 것 같이 보일 겁니다.(잠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에 상처를 낸다) 주정꾼들은 장난으로 이것보다 더 심한 짓을 한다던데--(큰 소리로) 아버님, 아버님! 서라, 도망가지 마! 날 도와 줄 사람은 없느냐? 글로스터와 횃불을 든 하인들 등장. 글로스터: 이런, 에드먼드, 그놈 악당은 어디 있느냐? 에드먼드: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빼고 방금 여기 컴컴한 데 서 있었습니다. 해괴한 주문을 주절대면서 달을 보고 행운을 달라고 애걸하더군요. 글로스터: 그놈이 어디 있지? 에드먼드: 보십시오 아버님, 이 피를. 글로스터: 그 악당놈이 어디 있어, 에드먼드야? 에드먼드: 이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글로스터: 뒤쫓아가라, 어서! 놓치지 말라.(몇 명의 하인들 퇴장) '하다하다 안되다니'가 무슨 뜻이나? 에드먼드: 아버님을 살해하자고 소자를 꼬드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소자는 아버님을 살해하면 복수의 신들이 불벼락을 칠 것이라고 했고 부자간의 핏줄이 얼마나 두터운 것이며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형의 무엄한 역심에 제가 호락호락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본 형은 미리 준비했던 칼로 아무 방비도 아니한 저에게 맹렬히 달려들어 제 팔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업고서 사생결단을 내려는 저의 기세에 꺾였는지, 아니면 제가 지른 소리에 질겁을 했는지 형은 꽁무니에 불이 당겨진 사람처럼 줄행랑을 쳤습니다. 글로스터: 제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이 나라에 있는 이상 꼭 잡고야 말테다. 잡히는 날이면--그놈 요절을 내겠다. 나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나의 소중한 은인이신 공작께서 오늘밤에 이곳으로 오신다. 그분의 권위를 빌려 포고령을 내리겠다. 용렬한 그 살인마를 찾아내어 형장에 끌고 오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숨겨주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말이다. 에드먼드: 형한테 그런 간악한 계획을 중지하라고 달래고 눙쳐 봤습니다만, 막무가내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도 화가 나서 형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흉계를 모두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그랬더니 "상속도 못 받을 서자놈아, 내가 널 몰아세우기로 한다면 네가 아무리 신용이 있고 덕행이 바르고 유능한 인재기로서니 세상사람들이 네 말을 믿을 줄 아느냐?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렇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날엔--물론 이것만은 한사코 부정하겠지만--설령 네가 내 필적을 증거로 내놓는다 하더라도--이 모든 것은 너의 교사로 꾸민 간계라고 뒤집어 씌울 테다. 내가 죽으면 너한테 막대한 이익이 돌아오는데 네가 날 죽이려는 명확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모를 줄 아느냐? 세상을 너무 얕보지 말라."라고 하지 않겠어요? 글로스터: 오, 천하에 둘도 없을 고얀 악당놈 같으니! 그래, 그 편지까지 부정을 해 그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안에서 우렁찬 트럼펫의 행진곡이 들려온다) 저 소린 공작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다! 왜 오시는지 모르겠다. 항구란 항구를 모두 폐쇄해 버릴 테다. 그놈은 독안에 든 쥐야. 공작께서도 승인하여 주실 거다. 그리고 그놈의 사진을 방방곡곡에서 보내서 모든 고을에서 그의 인상을 잘 알게 해 놓겠다. 내 영토는 충직하고 효심이 지극한 네가 상속하도록 해 놓겠다. 코온월 공작과 공작부인 리이건 및 기타 시종들 등장. 코온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백작? 이곳에 막 오니, 좀전에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리이건: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떤 복수를 한다 해도 죄인에게는 충분치 않을 거예요. 안녕하세요, 백작님? 글로스터: 아아 공작부인, 이 늙은이의 가슴이 터지고 또 더질 지경입니다. 글로스터: 모르겠습니다, 부인. 어쨌든 너무나 악독합니다, 악독하죠! 에드먼드: (리이건에게) 예, 형님은 그들과 한해였습니다. 리이건: 그렇다고 하면 흉악할 수밖에, 필경 그 패거리들이에요. (코온웰에게) 그것들이 에드거를 충동해서 부친을 죽인 후, 재산을 가로채서 흥청거릴 꿍셈이었겠지. 실은 바로 오늘 저녁에 그들에 대한 자세한 소식이 언니한테서 왔어요. 만일에 그것들이 저의 집에 와 묵겠다고 하면 차라리 집을 비우고 딴 데 가 있으라고 타일러 줄 거예요. 코온월: 나도 집에 있지 않겠소, 부인. 에드먼드, 이번 자네의 부친에 대한 효성을 들었네. 에드먼드: 그저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공작님. 글로스터: 이 아이가 그놈의 흉계를 알아냈습니다. 그놈을 잡으려다가 저렇게 상처도 입었고요. 코온월: 추적은 하고 있는가요, 백작? 글로스터: 예 그러하옵니다. 공작님. 코온월: 그놈이 잡히기만 하면 두 번 다시 행악을 못 부리게 처치해야겠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내 권한을 이용하셔도 좋소이다. 에드먼드, 너의 선행과 효성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너를 내 부하로 삼겠다. 내겐 너처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해. 너야말로 내가 찾던 인물 중에서 맨 첫 번째다. 에드먼드: 미거한 점이 많으오나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글로스터: 아들놈을 가상히 여겨 주시니 기쁨이 이에 더할 바가 없습니다. 코온월: 우리가 백작을 찾아온 연유를 모르시겠죠? 리이건: 글로스터 백자, 이렇게 뜻하지 않게 어둔 밤길을 바늘귀 꿰듯이 더듬어 온 것은 긴요한 용건이 있어서예요! 그래서 아무래도 백작의 조언을 꼭 듣고자 합니다. 아버님과 언니께서는 서로 불화가 생긴 이유를 두분 다 서찰로 보내왔습니다만 그 답신은 집을 떠나서 쓰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두 곳으로 각각 보낼 사자를 여기서 보내려고 대기시켜 놨습니다. 백작의 심기가 편치 않으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를 위해서 조언을 해 주세요. 그 조언을 당장에 실행해야 되겠으니 말입니다. 글로스터: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공작부인. 두 분께서 왕림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환영하나이다.(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모두 퇴장) [ 제2장 글로스터 백작의 성 앞 ] 켄트와 오즈월드 좌우에서 나와 만난다. 아직은 새벽이라 켄트를 코온월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오즈월드가 말한다. 오즈월드: 안녕하슈? 좋은 아침이오! 당신 이 집에 사오? 켄트: 그으래. 오즈월드: 말은 어디다 맬까? 켄트: 진흙 속에다. 오즈월드: 제발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게, 부탁이니. 켄트: 싫다. 오즈월드: 그럼 내 멋대로 할 테다. 켄트: 내 너를 립스버리 외양간에 처넣어 두면 그 따위 소리 쑥 들어갈 거다 오즈월드: 뭣 때문에 그렇게 잡아먹으려 하는 거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켄트: 이것 봐, 난 널 알고 있어. 오즈월드: 어떻게 날 안다는 건가? 켄트: 악한에다 불한당에다 찌꺼기 고기나 처먹는 거렁뱅이지 뭐야. 천하고 건방지고 싸가지도 없고 거지근성에 일 년에 옷은 겨우 세 번 갈아입고 한 해 벌이라야 고작 백 파운드, 더러운 털양말 따위나 신고 다니는 놈이지. 비열하고 얻어터져도 대거리 한 번 못하고, 소송에나 매달리는 겁쟁이, 후레자식, 밤낮 거울이나 들여다보는 건달, 주제넘는 놈, 옷타박이나 하는 자질구레한 놈, 재산이라고는 가방 하나밖에 없는 종놈, 주인을 위한답시고 뚜쟁이와 잡종 암캐의 새끼놈까지 모두 범벅이 된 더러운 놈이다. 지금 내가 주어넘긴 많은 네 이름을 하나라도 아니라고 부정만 해봐라. 깽깽거리도록 패주고 말 테다. 오즈월드: 얼씨고 지랄하고 있네, 서로 상판대기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갖은 주접 다 떠는군! 켄트: 에잇끼, 쇠가죽을 뒤집어 쓴 놈아, 그래 날 모른다고 생판으로 잡아떼? 국왕폐하 앞에서 네놈을 딴죽 걸어 고꾸라 박은 것이 채 이틀밖에 안돼, 칼을 빼라, 이 발칙한 놈아. 밤이지만 달이 밝으니 안성 맞춤이다. 네놈의 피로 명월탕을 끓여 먹겠다. (칼을 빼면서) 이 천하고 용렬한 건달패야, 칼을 빼! 오즈월드: 저리 비켜라! 저리 비키라니까. 나는 너하고 아무 상관없어. 켄트: 칼을 빼라, 이 불한당아! 너는 국왕을 욕되게 하는 서찰을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국왕께 불충하는 자만에 빠지 꼭두각시의 편을 든 놈이다. 칼을 빼, 이 악당아. 칼을 안 빼면 네 정강이의 살점을 저며 낼 테다! 이놈아, 칼을 빼! 어서 덤벼라! 오즈월드: 사람 살려요, 사람요! 살인이다! 사람 살려! 켄트: 덤벼라, 염병한 놀! 꼼짝마라, 불한당아! 섰거나, 능갈맞을 놈아! 덤벼라!(오즈월드를 쳐 댄다) 오즈월드: 사람 살려, 사람! 살인이다! 살인이오! 에드먼즈 장도를 빼어들고 등장. 에드먼드: 웬일인가? 웬 싸움이아? 떨여져! 켄트: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야, 소원이라면 내 상대해 주지! 자 덤벼라, 피맛을 보여줄 테다. 자 찔러 봐, 풋내기야! 코온월, 리이건, 글로스터, 하인들 등장. 글로스터: 무기를! 칼을 빼들고! 대체 무슨 분란이냐? 코온월: 목숨이 아깝거든 가만들 있어! 다시 싸우는 놈은 사형이다. 무슨 일이냐? 리이건: 언니가 보낸 사자와 부왕으로부터의 사자군요! 코온월: 왜 싸움질이냐? 말해 봐. 오즈월드: 숨도 쉴 수가 없나이다, 공작님. 켄트: 그야 당연하지, 있는 용기를 다 휘둘러댔으니까. 이 비겁한 불한당아, 대자연도 너 같은 놈은 만들지 않았다고 발을 뺄 거다. 네놈은 양복재단사가 만들었어. 코온월: 괴이한 말을 하는 자로군. 재단사가 사람을 만들다니? 켄트: 예, 재단사가 만듭니다. 석공이나 화가가 2년만 수업을 쌓았어도 저렇게 지지리 못난 녀석은 안 만들었을 겁니다. 코온월: 말하라. 대관절 왜 싸웠느나? 오즈월드: 저 늙은 난폭자의 흐끗한 수염이 불쌍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지만요--. 켄트: 반죽 떨지 말라, 있으나마나한 망종아!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이 방자한 놈을 난장박살을 내고 석회를 만들어서 그놈의 몸뚱어리로 변소의 벽을 이겨 바르겠습니다. 뭐, 내 흰 수염이 불쌍해서 살려줬다고? 이 뱁새 같은 더러운 놈아! 코온월: 입 닥쳐! 이 짐승 같은 것아,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켄트: 압니다. 그러나 화가 날 때는 도리가 없습니다. 코온월: 왜 화가 났지? 켄트: 정직함을 날탕으로 삼키는 저런 시러베 같은 놈이 꼴같잖게 칼을 차고 있으니 부아가 끓어 참을 수가 있어야죠. 새들새들 웃는 악당들은 쥐새끼 같아 흔히 끊을 수 없는 골육의 핏줄까지도 갉아먹어 두 갈래로 끊습니다. 저런 놈은 자기 주인 가슴 속에 부글거리는 부당한 감정에 간릉을 떨고 알랑수를 부립니다. 불에는 기름을 붓고, 냉정한 마음에는 눈을 뿌리고, 아니라고 했다가 그렇다고 하고 주인의 마음따라 바람따라 물총새 모양으로 주둥아리를 놀려가며 알랑거리고 개 모양으로 그저 수굿이 따라 다니는 것밖에는 모르는 위인입니다. 간질환자 같은 얼굴은 집어치워라! 이놈이 내 발을 비웃어? 내가 광대라더냐? 이 거위 같은 놈아, 만약 새럼 벌판에서 널 만났다면 깩깩거리고 우는 네놈을 카멜로트까지 쫓았을 게다. 코온월: 아니, 이 늙은 놈이 실성을 했나? 글로스터: 왜 싸움을 하게 되었지? 그걸 말하게. 켄트: 아무리 앙숙이라도 나와 저 앙숙만큼의 앙숙은 없을 겁니다. 코온월: 왜 저 사람을 악한이라고 하느냐?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켄트: 저놈의 상판대기가 제 마음에 안 듭니다. 코온월: 그렇다면 내 얼굴도, 저 사람의 얼굴도 내 집 사람의 얼굴도 네 마음에 안 들겠군 그래. 켄트: 공작각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제 직책입니다. 그래서 여쭙니다마는 예전에 잘난 얼굴을 본 일이 있죠. 그러니 이 순간 제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얼굴도 마음둘 까닭이 없죠. 고온월: 이런 녀석이 있나? 솔직하다고 칭찬을 해주면 금세 말하는 푼수며 소행머리가 불손해지고 제 천성에 맞지 않게 어거지로 행짜를 하는 놈. 제깐에 정직하고 솔직해 아첨을 못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긴다! 세상사람들이 받아주거나 말거나 곧이곧대로 말한다 이런 말이지. 이따위 악한은 나도 잘 안다. 솔직함을 코에 내걸고 뱃속에는 음흉한 계책을 꾸겨담고 있거든. 상전에게 굽실대며 오직 자기 직무에만 충실한 패거리가 20명 한꺼번에 덤벼도 어림도 없는 놈이지. 켄트: (일부러 정중하게) 공작각하,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다해 아룁니다. 빛나는 태양신의 이마 위에 출렁대는 찬란한 광채의 꽃다발 같은 세력을 가지신 존엄하신 공작님의 허락만 있으시다면--. 코온월: 이건 또 왜 이러는 거지? 켄트: 공작님의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 그저 제 말투를 바꿔보았을 뿐입니다. 아다시피 저는 아첨을 할 줄 모릅니다. 솔직을 가장한 말투로 공작님을 속이는 놈은 그야말로 진짜 악한입니다. 저는 그런 놈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역정을 내시건 공작님께서 애원을 하시건 말입니다. 코온월: (오즈월드에게) 한데 저놈을 무엇 때문에 건드려 놨지? 오즈월드: 제 잘못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저놈이 모시고 있는 국왕께서 오해로 소인을 때리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저자가 페하의 진노에 비위를 맞추려고 뒤에서 소인에게 딴죽을 걸었습니다. 소인이 나가자빠지자 신바람이 나서 소인에게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자기가 무슨 영웅이나 된 듯 우쭐해서 거들먹거리더군요. 폐하께서는 소인을 보기좋게 때려 눕혔다고 저자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장항 공명에 신명이 나서 다시 칼을 빼들고 제게 달려들지 뭡니까. 켄트: 비열한 놈, 이런 놈에게 비하면 에이잭스의 자랑도 무색할 지경이다. 코온월: 족쇄를 가져오너라! 이 고집쟁이 늙은 악한, 나잇살이나 처먹은 왈패를 버릇 좀 가르쳐 줘야겠다! 겐트: 이젠 너무 늙어서 배울 수도 없으니 족쇄는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국왕을 모시고 있는 시종입니다. 어명을 받고 여기 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족쇄를 채운다면 무엄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폐하의 맑고 크신 인덕을 땅에 떨어뜨리는 처사로 불손한 악의를 보이시는 것이 됩니다. 코온월: 족쇄를 갖고 오너라! 무슨 일이 있든지 내 목숨과 명예를 걸고 정오까지 저놈에게 족쇄를 채워 놓으리라. 리이건: 정오까지라뇨? 밤까지 그래야 해요, 아니 밤새도록요. 켄트: 마님, 제가 설령 국왕의 개라도 그런 학대는 못하십니다. 리이건: 아버님이 데리고 있는 악한이니까 더욱 그래야지. 코온월: 이놈은 처형께서 말한 패거리가 틀림없다. 어서 족쇄를 가져와라.(시종들이 족쇄를 가져온다. 코온월의 지시대로 켄트에게 족쇄를 채우려고 할 때 글로스터는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제지한다) 글로스터: 공작각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자가 큰 잘못을 범했음은 사실이나 그 죄는 저놈이 모시고 있는 국왕께서 징벌하실 것입니다. 각하께서 주시려는 처벌은 좀도둑질 등의 흔해 빠진 범죄를 저지른 비천한 집안들을 처벌할 때 쓰는 형벌입니다. 폐하께서 사자가 그토록 냉대를 당하고 족쇄에 채인 것을 아시는 날엔 필시 진노하실 것입니다. 코온월: 그 책임은 내가 지리다. 리이건: 그 보다 더 언니 일로 온 시종이 모욕과 치도곤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언니야말로 몹시 심사가 꼬일 거예요. 저놈의 다리를 끼워!(켄트에게 족쇄를 채운다. 코온월에게) 자, 가십시다.(글로스터와 켄트만 남고 모두 퇴장) 글로스터: 참 안됐소이다. 세상사람들이 다 잘 아는 일이외다만 공작께서 누가 간섭하든가 막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성품이랍니다. 내 한 번 청을 해 보리다. 켄트: 염려마십시오. 밤새 뜬눈으로 먼길을 걸어 왔으니 노곤해서 잠이나 좀 자야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휘파람이나 불고 있기로 하죠. 달도 차면 기운다지만 착한 사람의 운명도 기울 때가 있나 봅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글로스터: 이것은 공작님의 잘못이냐. 누구나 잘 했다고 안할 것이다. (퇴장) 켄트: 폐하께서는 그 격언을 몸소 체험하시게 됐구나, 하늘의 축복을 벗어나면 따가운 햇볕을 맞아야 하느니라! 이 세상을 비추는 아침햇살이여, 아서 가까이 오라. 포근한 네 빛으로 이 편지를 일고 싶다. 뼈를 깎는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기적을 볼 수 없는 법. 이것은 틀림없는 코오딜리어 공주님 편지다. 다행히도 내가 변장한 것을 알고 계시나 보지...... 언젠가는 이 난세에서 나라를 구하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해주실 거다. 아 피곤한데다 잠 못 자서 무거운 눈이여, 차라리 잘 됐다. 눈을 감으면 이 치욕의 잠자리를 보지 않게 되니. 행운의 여신이여, 잘 있거라. 수레바퀴를 돌려선 너의 미소를 다시 보여다오.(켄트, 족쇄를 찬 채로 잠든다) [ 제3장 들판 ] 에드거 등장. 에드거: 나는 죄인으로 체포령이 내렸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나무굴 속에 숨어서 잡히는 건 면했구나. 항구란 항구는 다 폐쇄되었고, 어느 곳이든 파수병이 물샐 틈 없이 경계망을 치고 나를 잡겠다고 눈을 밝히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 어쨌든 도망치는 데까지 도망쳐 목숨을 부지해야 돼. 그럴려면 구질구질한 거렁뱅이 몰골로 지내야 한다. 가난은 사람을 능멸해서 짐승같이 해놓는다던데, 내 모습이야말로 천하고 구차한 행색이어야 해. 얼굴엔 숯검정을 바르고, 허리에는 누더기를 두르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비바람이나 추위에도 알몸뚱이로 견뎌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베들레햄에 있는 미친 거지들이 좋은 시범이 될 것인즉 그들을 본따자. 이 거렁뱅이들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마비되어 무감각해진 팔뚝에다가 바늘이나 나무의 가시 또는 못이나 로즈매리의 뾰족한 가시를 꽂는다지. 그런 무서운 꼴로 구차한 농가나, 가난한 작은 촌락 양우리, 물방앗간을 찾아다니면서 미친놈같이 저주도 했다가 또는 기도도 외면서 적선을 하라고 떠들어댄다 이말이지. "불쌍한 거지 털리곳이오, 불쌍한 각설이 톰이오!" 이렇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단 말이다! 이전의 에드거는 없어지는 거야. (퇴장) [ 제4장 글로스터 백작의 성 앞 ] 켄트 족쇄를 찬 채로 잠들어 있다. 리어, 광대, 신사 등장. 리어: 이상하군, 이렇게 별안간 집을 비우고 내 사자도 돌려보내지 않으니. 신사: 제가 알기로는 어젯밤까지도 떠나실 의향이 없었다고들 합니다. (켄트, 잠에서 깨어나 족쇄에 채워진 채로 리어에게 인사를 올린다) 켄트: 안녕하시옵니까, 폐하! 리어: 에잇! 이런 목욕을 당하면서도 재미로 아느냐? 켄트: 폐하, 당찮은 말씀입니다. 광대: 핫 핫! 지독한 각반을 차고 있구나. 말은 머리를 잡아매고, 개와 곰은 모가지를 잡아매고, 원숭이는 허리를 잡아매고, 사람은 다리를 잡아매고. 다리를 함부로 놀리면 졸라 대는 놈은 나무양말 신세를 지게 마련이지. 리어: 네 신분을 몰라 보고 족쇄를 채운 놈은 대체 어떤 놈이야? 켄트: 내외분입니다, 따님과 사위. 리어: 그럴 리가 없어. 켄트: 사실이옵니다. 리어: 그럴 리 없대두. 켄트: 사실 그렇사옵니다. 리어: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켄트: 사실이옵니다. 리어: 주피터 신께 맹세하지만 그럴 리 없어! 켄트: 주노 신께 맹세합니다만 사실 그렇사옵니다! 리어: 그들이 감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가 없고 또 그럴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국왕의 사자에게 그런 난폭한 짓을 한다는 것은 살인보다도 더 악랄한 짓이다. 빨리 자세한 내용을 말하라. 어째서 네가 이러한 처벌을 받아야 되며 왜 그들은 이러한 처벌을 가해야 했는지 말이다. 켄트: 폐하, 제가 이 저택에 도착해서 폐하의 친서를 바치려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데 채 일어나기도 전에 땀에 흠뻑 젖어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숨이 턱에 찬 또 한 사자가 뛰어들었습니다. 그자는 절 제쳐놓고 자기 주인이 되는 거느릴 마님의 서찰을 전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 서찰을 읽으시더니 별안간 가솔들을 모두 불러 모으시고는 곧 말을 타고 떠나가셨습니다. 절보고는 뒤를 따라오라, 틈나는 대로 답장을 할 테니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절 차디찬 눈초리로 쏘아보시더군요. 그러자 여기서 그놈의 사자를 만난 겁니다. 그놈 때문에 전 홀대를 받게 돼 그만 부아가 끓어 올랐죠--. 그놈은 지난번에 폐하께 오만불손하게 굴던 놈이었습니다--. 저는 분별심보다도 결기가 먼저 앞서는 놈이라 칼을 뺐지요. 그놈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면서 온 집안 사람들을 깨었습니다. 공작 내외분께서는 저의 죄가 이 정도의 창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광대: 기러기가 저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니 겨울은 아직도 안 갔구나. (음송한다) 아비가 누더기를 몸에 걸치면 자식들이 본척만척하지만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모두 효자된다오 운명의 여신은 영락없는 매춘부라 구차한 사람에겐 빗장을 건다네 하지만 당신은 따님들 덕택에 일 년 내내 흡족하리만큼 근심바가지를 얻게 될 것이요. 리어: (번뇌하며) 아, 이 가슴 속에 울화가 치미는 구나! 울화덩어리야! 꺼져라. 치밀어 오르는 슬픔아, 네 있을 곳은 밑바닥이다. 내 딸은 어디 있느냐? 켄트: 글로스터 백작과 함께 저택 안에 계십니다. 리어: 너는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거라. (퇴장) 신사: 지금 말씀하신 것 이외에 더 잘못한 것은 없는지요? 켄트: 없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시종들을 적게 거느리고 오셨사옵니까? 광대: 그 따위 것을 묻고 있으니 족쇄를 차도 싸다 싸. 켄트: 뭐라고, 이 광대바보야? 광대: 개미한테 보내서 겨울에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해야겠다. 코가 향한 쪽으로 곧장 가는 자들은 소경이 아닌 다음에야 눈으로 보고 가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소경이라도 썩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거든. 큰 수레바퀴가 언덕을 구를 때 붙잡고 있다간 모가지 부러지기 십상이지. 그렇지만 큰 수레바퀴가 언덕을 올라갈 때는 수레 뒤에서 끌려가야만 돼. 어떤 현명한 사람이 이보다 더 좋은 충고를 하거든 내가 지금 한 말은 도로 돌려보내줘야 한다. 광대의 충고니까 내 생각에는 악당들이나 그대로 따라줬으면 좋겠다. (음송한다) 잇속에만 이골이 나서 겉으로만 따르는 놈은 폭풍우 속을 헤치고 달아난다오 나는 남으리. 바보니까 남는 거지 영특한 놈은 뺑소니 치려무나 달아나는 소인배는 바보가 되지만 광대는 절대 나쁜 놈이 아닐세 켄트: 광대야,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냐? 광대: 바보야, 족쇄 차고 배운 게 아니다. 리어, 글로스터와 함께 다시 등장. 리어: 날 만나지 않겠다고? 둘 다 병이 났다. 피곤하다, 밤새 먼길을 왔다. 그런 말이냐? 순전히 구실이다. 아비를 배반하고 아비를 버리려는 심보야. 좀더 좋은 기회를 받아 가지고 와. 글로스터: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시는 바와 같이 공작의 성깔이 불과 같아서 일단 결정하면 그 쇠고집이 요지부동이올습니다. 리어: 두 사람에게 말씀을 드렸다구! 자네 내 말을 알아 듣는가? 글로스터: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리어: 왕이 코온월 고작과 할 애기가 있어 그래. 아버지가 딸하고 할 말이 있어서 그런다. 와서 응분의 봉사를 하라고 명령하는 거야. 이 말을 전했느냐? 내 숨이 막히고 피가 끓는다! 불 같다구? 불 같은 공작이라구? 불 같은 공작에게 이렇게 전갈해라--. 아니, 그만둬, 사실 몸이 불편한지도 모르지. 건강할 땐 자진해서 하던 일도 병이 나면 소홀히 하게 되지. 병고에 시달리게 되면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통을 받게 되어 제정신이 아닐 수 있지. 내가 참아야 돼. 내 성질이 너무 성급해 탈이거든. 몸이 불편한 병자의 발작을 건강한 사람처럼 생각하다니.(켄트를 보며) 내 권세도 이젠 땅에 떨어졌구나. 무엇 대문에 저 사람에게 족쇄를 채워두는거지? 이걸 보면 공작부부가 나 만나기를 꺼려하는 것도 필시 흉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하인을 풀어 놓아라. 그리고 공작내외한테 가서 내가 할 말이 있다고 그래. 당장 가라. 나와서 내 말을 들으라고 해. 안 나오면 침실 입구에서 요란하게 북을 쳐서 잠을 못 자게 할 테다. 글로스터: 부디 화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퇴장) 리어: 아, 내 가슴아! 부글대는 내 가슴아! 제발 진정해라! 광대: 아저씨, 그렇게 호통을 치시라구요. 한 시원찮은 여편네가 만두 속에다 산 채로 뱀장어를 넣었대요. 뜨거우니까 기어 나오려고 바둥대는 뱀장어의 머리통을 작대기로 때리면서 "요놈아, 들어가. 버르장머리없는 것아, 들어가라니까!" 했듯이 말예요. 그런데 그 여편네 오라비 역시 물건이라, 글쎄 말이 귀엽다고 사료인 건초에다 버터를 발라 줬다지 뭡니까. 글로스터가 안내하여 코온월, 리이건 및 하인들 등장. 리어: (겨우 기분을 전환시켜) 다 잘들 있었는가? 코온월: 폐하게 인사 올립니다! (시종을 시켜 켄트의 족쇄를 풀어놓게 한다) 리이건: 폐하를 뵈오니 기쁘옵니다. 리어: 그렇겠지, 리이건.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 네가 기쁘지 않다면 내가 죽어서라도 네 어머니 무덤 곁에 묻힐 순 없다. 네 어머니야말로 정조에 헤픈 탕녀가 분명하니 말이다. (켄트를 보고) 오, 풀려났느냐? 그 문제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자--. 사랑하는 리이건아, 너의 언니는 못돼 먹었다. 리이건, 너의 언니는 독수리같이 예리한 불효의 이빨로 여길 풀어뜯었다.(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입이 열이라도 이루 다 말할 수 없구나. 얼마나 사악한지 넌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다--. 오 리이건아! (리어, 리이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리이건: (냉담하게) 제발 고정하세요, 아버님. 제 생각에는 언니의 착한 심성을 오해하신 것 같아요. 언니가 효성을 저버릴 리는 없어요. 리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리이건: 언니가 효도를 소홀히 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만약인데요, 혹시 언니가 아버님이 데리고 계시는 시종들의 난폭한 행패를 못하게 다스렸다면 언니로서 그만한 이유와 정당한 목적이 있었을 거예요. 언니를 책망할 순 없는 일예요. 리어: 그년은 내 저주를 받아야돼! 리이건: 이제 아버님은 늙으셨어요. 아버님의 천수도 바로 저승의 문턱에 턱을 걸고 계십니다. 그러니 아버님보다도 사정을 잘 아는 분별있는 사람들에게 여생을 맡기시고 지도에 따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니한테로 돌아가셔서 잘못했다고 말씀을 하세요. 리어: 뭐, 그년에게 용서를 빌라구? 그것이 왕가의 법도더냐! "사랑하는 내 딸아, 정말 난 늙었다. (하며 리어는 무릎을 꿇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거너릴에게 사죄하는 흉내를 낸다) 늙은이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구나.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제발 옷과 잠자리와 먹을 것을 좀 다오!" 이렇게 빌란 말이지? 리이건: 그만두세요. 그게 무슨 형태예요. 제발 언니한테로 돌아가세요. 리어: (일어서며) 절대로 안 간다! 그년은 내 시종들을 반으로 줄인데다가 눈을 부릅뜨고 독사의 독설로 내 가슴을 물어뜯은 년이다. 하늘에 모아둔 복수라는 복수는 모조리 배은망덕한 그년의 머리 위에 떨어져라. 대기에 가득 찬 독기여, 젊은 그년의 뼈다구니를 분질러 절름발이를 만들어다오! 코온월: 이럴수가. 아버님, 망측합니다! 리어: 하늘 나는 번개여, 눈을 멀게 하는 너의 불꽃으로 아비를 능멸하는 그년의 눈깔을 찔러라! 강렬한 햇빛에 빨려, 서리서리 피어오르는 늪의 독기여, 그년의 뻔뻔한 얼굴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라! 리이건: 오 끔찍해라! 저 때문에 화가 나시면 제게도 그렇게 저주를 하시겠죠--. 리어: 그럴 리 없다. 리이건, 넌 아비의 저주를 받을 리가 없다. 넌 착한 심덕을 가지고 있어, 매정하지 않아. 그년의 눈은 표독하지만 네 눈은 얼마나 상냥하냐, 독기로 이글거리지도 않고. 너는 이 아비의 즐거움에 오금도 박지 않고 시종들을 줄이거나 암팡지게 말대거리를 하거나 그리고 내 생활비를 깎거나 무엇보다 더 날 들어오지 못하게 빗장을 지르는 일은 너의 타고난 성질로는 못할 것이다. 너는 인간의 본분이나, 자식된 도리, 예의범절, 은혜의 보답을 남보다 저 잘 알고 있어. 너는 내가 이 왕국의 반을 너에게 준 것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리이건: 아버님, 용건을 말씀하세요. 리어: 누가 내 시종에게 족쇄를 채웠느냐? (안에서 트럼펫 소리) 코온월: 무슨 나팔 소리지? 리이건: 틀림없어--, 언니가 오는 걸 거예요. 언니는 편지에 곧 이리로 오겠다고 했어요. 오즈월드 등장. 주인마님께서 오셨어요? 리어: (오즈월드를 노려보며) 이놈은 자기가 모시는 변덕쟁이 안주인의 총애를 믿고 거들먹거리는 종놈이다. 냉큼 물러가라. 이 종놈아. 꼴도 보기 싫다! 로온월: 페하, 왜 그러십니까? 리어: 내 시종에게 족쇄를 채운 놈이 누구냐? 리이건, 설마 넌 아닐테지. 거너릴 등장. 저기 오는 건 누구냐? 오 하늘에 계신 신들이여, 이 늙은이를 어여삐 여기신다면, 이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는 그대의 손길이 효심을 가상히 여기신다면, 또 신들께서도 연만하시다면, 이 늙은이의 억울함을 당신 전신 자신의 일로 여기시고 천사를 내려보내시어 절 도와주소서! (거널리에게) 너의 이 아비의 수염을 보기가 부끄럽지 않느냐? (리이건은 거너릴을 맞이하여 악수한다. 리어. 이 광경을 보고) 오 리이건! 네가 저년하고 악수를 해? 거너릴: 왜 손을 잡으면 안되나요? 제가 죽을 죄라도 저질렀나요? 망령이 든 분이 무례하다고 말한다고 서 그게 무례일 수는 없다구요. 리어: 아 가슴아, 너는 너무나 모질고 단단하다! 용케 터지질 않는구나! 어째서 내 사자에게 족쇄를 채웠지? 코온월: (오만불손하게) 제가 채웠습니다. 저놈의 행패를 생각하면 그 형벌은 약과입니다. 리어: 자네가? 자네가 그랬어? 리이건: 아버님, 아버님은 연로하십니다. 연로하신 분답게 체통을 지켜셔야죠. 언니한테로 돌아가셔서 시종들을 반으로 줄이시고 이달 말까지 계시다가 저에게로 오세요. 저는 지금 집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버님을 모시고 뒷바라지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리어: 그년한테로 돌아가라? 시종 오십 명을 내보내라고? 어림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집을 버리고 들판에 나가 비바람과 싸우면서 이리와 올빼미를 벗삼아 지내겠다--. 빈곤의 쓰라린 괴로움을 맛보는 것이 백 번 났지! 그년한테로 돌아가라? 그년한테 갈 바에야 성미 급한 프랑스 왕이 지참금 하나 없이 내 막내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의 시종모양 그의 옥좌 앞에 무릎 꿇고 생활비를 구걸해서 이 구차한 여생을 보내겠다. 그년한테로 돌아가라구? (오즈월드를 가리키며) 차라리 이 사악한 놈의 노예나 말이 되라고 해라. 거너릴: 그럼 좋을 대로 하세요. 리어: (거너릴에게) 애야, 제발 날 미치게 하지 말아라. 앞으로는 네 신세를 이 이상지지 않겠다. 잘 있거라. 다시는 만나지 않으마, 서로 얼굴을 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내 살과 피를 나눈 내 딸이 틀림없다--. 아니, 내 살 속에 박힌 병균일 게다. 그것 역시 내 것이겠지만. 아니, 너는 내 썩은 피가 문드러진 종기요, 부스럼이요, 염증이다. 그러나 나는 널 책망하지는 않겠다. 언젠가는 너도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부르지는 않겠다. 천둥벼락에게 널 박살내라고 부탁도 않으마, 숭고한 심판자 주피터 신에게 널 고해 바치지도 않겠다. 될 수 있거든 마음을 고치고, 기회 있는 대로 좋은 사람이 되어라. 나는 꾹 참겠다. 리이건 집에 가서 살겠다. 백 명의 내 기사를 데리고. 리이건: 그럴 순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오시리라고는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맞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니 말씀을 잘 들으세요.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버님께서 격해서 하시는 말씀을 연로하시니까 그러려니 하고 눌러 버릴 겁니다--. 언니는 자기의 할 일을 알고 있습니다. 리어: 그게 진담이냐? 리이건: 진담이고 말고요. 아아니, 시종이 오십 명이라구요? 그만하면 족하지 않으세요? 그 이상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정말 그것도 많지요. 비용도 엄청나게 들 뿐 아니라 언제 또 행패를 부릴지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에요. 한 집안에 두 주인이 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티격태격 없이 지낼 수 있겠어요? 어려워요, 불가능해요. 거너릴: 동생이나 제 하인이 뒷바라지 해드리면 되지 않아요? 리이건: 왜 안되나요? 만약 하인들이 아버님을 모시는 데 소홀하면 저희들이 호되게 다스리겠어요. 저의 집에 오신다면요--그런 위험성이 보이니까 하는 말인데요--제발 시종들을 스물다섯 명만 데리고 오세요. 그 이상은 있을 데도 없고 뒷바라지도 할 수 없어요. 리어: 너한테 모든 것을 주었는데도--. 리이건: 적당한 시기에 잘 주셨지요. 리어: 난 너희들을 후견인으로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그 대신 시종을 백 명 두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뭐가 어쩌구 어째? 스물다섯 명만 데리고 오라구? 리이건, 진정이냐? 리이건: 네, 거듭 말씀 올립니다만 그 이상은 안됩니다. 리어: 흉악한 것 옆에 더 흉악한 것이 있으면 그것도 좋게 보이는 법. 최악의 것은 아니니, 아직 다소는 칭찬받을 만하구나. (거너릴에게) 너한테로 가겠다. 네가 말한 오십 명은 스물다섯 명의 갑절이니까. 너의 효심은 저년의 갑절이 된다. 거너릴: 아버님, 제 말씀을 들으세요. 시종이 스물다섯 명이건,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집에서는 그 갑절이나 되는 하인들이 아버님 시중을 들어 드릴 텐데요. 리이건: 한 사람도 필요 없잖아요. 리어: 필요를 따지지 말라!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한 거렁뱅이라도 비록 하찮은 물건이나마 뭔가를 갖고 잇다. 인간이 삶에 직접 필요한 것 말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면 개, 돼지나 다를 바 없다. 너는 귀부인이지. 만약 따뜻한 옷도 사치라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따뜻하지도 않은 그 사치스런 옷이 인간에게 왜 필요하단 말이냐? 그러나 인간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 하늘에 계신 여러 신들이여, 내게 인내를 주십시오--. 내겐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 차고,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서 가련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 딸년들이 아비를 배반하도록 당신이 충동질하셨다 해도 이 사단을 그대로 죽치고 참는 바보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마소서. 이 가슴에 의분을 불질러 주십시오. 여자의 무기인 눈물로 나의 두 볼을 얼룩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리어, 소리내어 운다) 두고 봐라, 이 짐승 같은 것들아.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 반드시 복수를 할 테다. 온 세상이 다--이왕 할 바에야--어떤 복수를 할지 아직은 모른다마는 온 세상이 자지러지게 놀랄 그런 복수를 할 테다! 내가 울 줄 알지? 절대로 울지 않는다. 울어도 시원치 않지만 이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기 전에는 눈물 한방울도 비치지 않겠다. (광대의 어깨에 기대며) 오 광대야, 난 미칠 것만 같다! (글로스터, 켄트, 광대 등이 리어를 위로한다.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코온월: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소. 리이건: 이 집은 비좁아서 노인과 시종들을 머무르게 할 수가 없어요. 거너릴: 다 자업자득이지. 들어오는 복을 발로 차버린 걸, 어리석은 소행에 따르는 뒷맛을 꼭 보여야 돼. 리이건: 아버님 한 분이시라면 기쁘게 환영해 드리겠지만 시종은 한 사람도 안되겠어요. 거너릴: 나도 그래. 글로스터 백작은 어디 계실까? 코온월: 노인을 쫓아갔어. 아, 저기 돌아왔군. 글로스터 다시 등장. 글로스터: 폐하께서는 크게 노하셨습니다. 코온월: 어디로 가시는 걸까? 글로스터: 말을 찾고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코온월: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오. 당신 고집대로 하실 테니까. 거너릴: 백작, 제발 만류하지 마세요. (밤의 어둠이 깔린다. 번개, 천둥, 바람이 거칠어진다) 글로스터: 하지만 어둠살이 끼어오고 사나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근처 수 마일에는 숲 하나 없습니다. 리이건: 쇠고집쟁이들에게는 자초한 고통이 스승이 돼요. 문을 닫아 버리세요. 아버님은 난폭한 시종들을 거느리고 있어요. 귀가 엷어 그것들이 충동질하면 무슨 행악을 하게 할지 몰라요. 조심해야 해요. 코온월: (글로스터에게) 문을 닫으시오, 백작, 날씨가 사나운 밤이오. 리이건의 생각이 옳소. 폭풍우를 피합시다. (모두 퇴장. 폭풍우, 천둥) [ 제3막 ]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모질게 불어라! 불어라! 장대 같은 폭우여 폭포처럼 쏟아져라, 물기둥을 일으켜 치솟은 탑과 그 위에 세운 바람개비를 물 속에 잠기게 하라!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재빠르게 유황의 불이여, 참나무를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인 번개여, 내 흰 머리를 태워라! - 2장 리어왕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황야 ] 천중, 번개, 폭풍우. 켄트와 한 신사가 좌우에서 등장하여 만난다. 켄트: 누구요, 이 험한 날씨에? 신사: 이 날씨처럼 아음이 어수선하고 불안한 사람이오. 켄트: 이제 보니 알 만한 사람이군 그래. 국왕은 어디 계시오? 신사: 사나운 비바람과 싸우고 계십니다. 국왕께서는 바람더러 이 대지를 바닷속으로 처박든지, 아니면 종말을 가져오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 백발을 쥐어뜯고 계십니다. 그러나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그 백발을 움켜쥐고서 무엄하게도 희롱을 하고 있습니다. 국왕께서는 인간이라는 작은 세계의 힘을 가지고 사나운 비바람과 당차게 싸우고 계십니다. 오늘 같은 밤에는 새끼에게 젖을 빨려서 허기진 곰도 굴 속에 숨어 있고, 사자나 굶주린 이리도 털가죽에다 비를 맞히려고 하지 않을 텐데 왕께서는 모자도 안 쓰시고 밖으로 뛰쳐 나가셔서 될 대로되라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계십니다. 켄트: 하지만 누군가 페하를 모시고 있겠죠? 신사: 광대뿐이죠. 왕의 가슴 아픈 고통을 익살로 사그러뜨리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켄트: 나는 당신의 심덕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래서 믿고 한가지 중대한 일을 감히 부탁할까 하오. 서로 간교하게 은폐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무탈한 듯 하지만 올버니 공작과 코온월 공작 사이는 불화가 심하오. 그런데 이 두 사람 가신들 가운데--운수가 좋아서 왕위를 차지하거나, 벼락출세를 한 자들에게 언제나 있는 일이오만--겉으론 충복인 체하면서 프랑스의 첩자가 되어 우리나라의 기밀을 정탐하여 프랑스에 정보를 보내는 자가 있소. 그래서 눈에 띄는 것은 모두다, 두 공작의 불화와 음모, 도는 두 사람의 인자하신 노왕에 대한 학대, 그뿐만 아니라 범사의 속에 파묻힌 중대한 비밀까지도 프랑스에 통신하고 있는 것 같소...... 어쨌든 간에 프랑스 군이 분열된 이 나라를 공격해 올 것만은 확실하오. 그들은 우리의 방심한 틈을 타서 벌써 우리의 중요한 항구에다 비밀리에 군대를 배치해 놓고는 지금 당장에 라도 깃발을 높이 들고 진격해 올 태세를 갖추고 있소. 그래서 부탁인데, 당신이 내 말을 믿으시고 급히 도우버까지 가 주면 반드시 당신의 노고에 보답할 분을 만나게 될 것이오. 그분께 국왕께서 딸들에게 혹독한 학대를 받고 슬픔으로 미치실 지경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전해 주기 바라오. 나는 가문으로나 교육의 배경으로나 어엿한 신사입니다. 난 당신의 인품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충분히 확인하고 나서 이 일을 부탁하는 겁니다. 신사: 좀더 이 일에 대해서 얘길 나누고 싶군요. 겐트: 아니 그럴 것 없소. 내가 몰골과는 다르다는 증거로 이 돈주머니를 드리리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돈을 마음대로 써도 좋아요. 만약 당신이 코오딜리어 공주를 뵙거든--틀림없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만 공주에게 이 반지를 보이시오. 그러면 여태껏 알지 못한 나의 정체를 말씀해 주실 거요. 젠장, 웬놈의 폭풍우가 이렇게 심해! 나는 폐하를 찾으러 가겠소. 신사: 자, 악수를 합시다.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켄트: 한마디 더 있소. 아주 중요한 말이오--. 폐하를 찾거든--수고스럽지만 당신은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가서 찾읍시다--만난 사람이 소리를 질러 부르기로 합시다. (따로따로 퇴장) [ 제2장 황야의 다른 쪽 ] 계속 천둥, 폭풍우. 광란의 리어 불호령쳐대며 등장. 광대만이 따르고 있다. 리어: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모질게 불어라! 불어라! 장대 같은 폭우여 폭포처럼 쏟아져라, 물기둥을 일으켜 치솟은 탑과 그 위에 세운 바람개비를 물 속에 잠기게 하라!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재빠르게 유황의 불이여, 참나무를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인 번개여, 내 흰 머리를 태워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천둥이여, 두껍고 둥그런 이 지구를 때리고 짓이겨 납작하게 만들라, 대자연이 인간을 창조하는 그 모태를 부숴라, 배은망덕하는 놈을 태어나게 하는 모든 씨앗을 당장에 쓸어 없애 버려라! 광대: 오 아저씨, 비 안 맞는 집안에서 아첨하고 있는 것이 문밖에서 비맞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러니 아저씨, 돌아가서 따님들의 신세나 지도록 합시다요! 이런 밤은 똑똑한 사람이건 바보건 간에 아랑곳 해주지 않는다구요. 리어: 마음껏 으르렁대라! 번갯불아, 불기둥을 뿜어라! 비야, The아져라! 비도 바람도 천둥도 번개도 내 딸이 아니다. 비바람이여, 너희들을 불친절하다고 책망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에게 영토도 주지 않았고, 너희들을 자식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너희들은 나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네멋대로 행패를 부려라. 나는 너희들의 노예가 되어 여기 이렇게 서 잇다. 불쌍하고 무력하고 허약하고 멸시받는 늙은이다. 너희들이야말로 비굴한 앞잡이다. 악독한 두 딸년의 편이 되어 이 늙은이의 백발을 향해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오다니. 아! 정말 너무나 매정하구나! (폭풍우 계속 격렬히 불어대고 있다) 광대: 머리를 넣어둘 집을 가지려면 먼저 그만한 머리를 가져야지(음송한다) 머리를 처박은 집도 없이 불알 넣을 바지만 있다면 머리나 불알에 이가 득실댄다오 거렁뱅이들은 그렇게 장가들죠 마음 속에 단단히 간직해야 할 것을 발가락에 달고 다니면 아픈 티눈되어 잠 못 이루고 뜬 눈으로 긴긴 밤을 지새워야죠 아무리 천하일색의 미인이라도 거울 앞에서는 입을 실룩거린다니까. 리어: 안된다, 난 인내의 귀감이 되어야겠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계속 뇌우) 켄트 등장. 켄트: 누구냐? 광대: 우두머리 어른과 불알 주머니 찬 아랫사람이다. 똑똑한 사람과 (리어를 지칭하며) 광대 바보란 말이다. 켄트: 아 폐하, 여기 계셨군요? 아무리 밤을 좋아하시는 자라도 이런 밤은 질색일 겁니다. 이렇게 험한 날씨엔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던 짐승들조차도 무서워소 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굉장한 번갯불, 이렇게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 이렇게 울부짖는 비바람 소리는 머리에 털난 이래로 처음 당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몸으로는 이러한 고통이나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격렬한 천둥) 리어: 우리들 머리 위에서 이 무서운 혼란을 일으키는 위대한 신들로 하여금 이제는 진짜 원수를 가려내게 하자. 두려움에 떨라, 비밀의 죄악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아직도 정의의 채찍을 받지 않은 악독한 자들아. 숨어라, 사람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여, 위증한 자여, 간음을 범하고도 근엄한 척하는 자여, 겁에 질려라. 은밀히 남의 눈을 속여 사람을 모살하려던 간악한 놈아, 가슴 속에 깊이깊이 감춰 둔 죄악이여, 널 감추고 있는 가슴을 쪼개 열고 이 무서운 심판자들의 자비를 빌어라. 나는 죄지은 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켄트: 아아, 맨 머리신 채로? 폐하, 바로 이 근처에 오두막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폭풍우를 피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쉬고 계십시오. 그 동안에 소인은 그 인정머리 없는 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돌집인데 돌보다 더 차고 매정한 집이죠. 조금 전에도 폐하를 찾으려고 그 집을 찾아 갔습니다만 저를 들어오지도 못하게 문전박대 하더군요. 그렇더래도 그 집으로 다시 가서 억지를 써 보겠습니다. 리어: 내게 실성기가 드나부다. 이리 오너라, 애야. 왜 그러니? 추우냐? 나도 춥다. 이보게, 자네가 말한 짚자리는 어디 있는가 곤궁은 신기한 마술을 가졌나부다. 천한 것도 귀중한 것으로 만드니 말야. 자, 움막으로 가자. 불쌍한 광대야,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 너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광대: (노래한다) 미욱하고 투미한 놈아-- 헤이호 바람이 부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모두가 팔자소관이니라 그러니 너에게 비는 날마다 쏟아질 수밖에 리어: 정말 그렇다. 애야. 자 오두막으로 안내하라. (리어와 켄트 퇴장) 광대: 오늘밤이야말로 음란한 여인의 불 같은 정욕을 식히기에 안성 맞춤이로구나! 가기 전에 예언이나 한마디 뱉어 놓자. (음송한다) 신부가 행동보다 말이 능하고 술장수가 누룩에 물을 섞어 술이 안되고 귀족이 재봉사에게 유행을 가르치고 이교도는 죽이지 않고 개성서방만 화형에 처하고 재판하는 사건마다 옳게 판결되고 시종들은 빚이 없고 구차한 기사도 없고 중상모략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사람들이 꼬여도 소매치기가 끼지 않고 고리대금업자가 사람들 앞에서 돈을 세고 포주와 창녀들이 교회를 세우는 그런 세상이 되면 이 알비온 (영국의 옛이름--역자주)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서 보면 사람들이 제발로 걸을 겁니다요 이런 예상은 아더 왕의 예언자 머어린이 해야 되는 건데. 나는 그보다 한 시대 앞서 산 사람이니까. (퇴장) [ 제3장 글로스터의 성 안의 한 방 ] 글로스터와 에드먼드 횃불을 들고 등장. 글로스터: 어이구 어이구 에드먼드야, 나는 그렇게 의리도 인정도 없는 소행머린 비위에 안 맞는다. 국왕을 불쌍히 여겨 도와 드리려고 탄원했더니 공작부부께서 내 집을 취탈하고 말았다. 국왕의 얘기를 입에 담든가 탄원을 하든가 또는 무슨 방식으로든지 왕의 뒷바라지를 하는 날이면 자기네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고 나에게 경고했다. 에드먼드: 거 무슨 몰인정하고 무모한 짓이람! 글로스터: 그건 그렇고, 너는 아무 말 말아라. 두 공작은 서로 앙숙이란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오늘 밤에 난 밀서를 받았다--이걸 입밖에 내면 큰 변을 당하겠지만--그래서 그 밀서를 궤 속에 넣고 잠가 버렸다. 현재 국왕께서 겪으시는 학대에 대해서는 기필코 철저한 보복이 있을 것이다. 군대 일부가 벌써 상륙했어. 우린 국왕 편을 들어야 하느니라. 나는 폐하를 찾아서 비밀리에 구조해 드릴 테니 너는 가서 공작과 이야기를 하고 잇거라. 국왕에 대한 나의 호의가 공작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말이다. 만약 공작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몸이 불편해서 자리에 누워 있다고 하렴. 이 일로 생명의 위협이 없지 않지만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를 꼭 구원해 드려야겠다. 에드먼드야, 각별히 조심해라. (퇴장) 에드먼드: 아버지가 금지된 짓을 하니 이 일을 공작에게 고해 바쳐야지. 그 밀서건도 말이지. 이건 큰 공이 될 것 같다. 아버지가 잃게 되는 재산이--고스란히 내 차지가 될 거다.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 사람이 일어나는 법이지. (퇴장) [ 제4장 황야. 오두막집 앞 ] 폭풍우가 계속되고 있다. 켄트가 리어를 안내하고 등장. 광대가 뒤따라 등장. 켄트: 바로 여기입니다. 폐하, 들어가소서. 캄캄한 밤에 벌판에서 폭풍우를 만난다는 건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리어: 날 내버려 두어. 켄트: 폐하, 어서 들어가십시오. 리어: 내 가슴을 찢어놀 작심이냐? 켄트: 차라리 신의 가슴을 찢어놓고 싶사옵니다. 폐하, 제발 들어가소서. 리어: 이렇게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흥건히 젖는 것을 너는 심상치 않게 생각하는구나. 네겐 그럴 거다. 그러나 중병에 걸려 있을 때엔 자질구레한 병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법. 곰을 보면 누구나 줄달음치지만 만약 눈앞에 성난 바닷가 가로막고 있다면 돌아서서 곰과 사생결단을 낼 수밖에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을 때는 육체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법. 내 마음 속엔 폭풍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때문에 내 마음에는 고통만 남고, 모든 감각은 사라져 버렸다--. 불효자식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 손을 물어뜯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어디 보자, 철저하게 앙갚음할 테다! 아니, 이제는 눈물도 흘리지 않겠다. 이런 밤에 나를 내쫓다니! 비야 퍼부어라, 나는 참을 것이다. 이런 밤에! 오, 리이건, 거너릴! 아낌없이 모든 것을 준 이 늙은 인자한 아비를! 오,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구나. 생각을 말자! 그런 생각은 그만두자. 켄트: 폐하, 이리로 들어가십시오. 리어: 너나 들어가서 편히 쉬어라. 이 폭풍우 덕분에 가슴을 저미는 고통을 되씹지 않아도 된다. 어디 들어가 볼까. (광대에게) 얘야, 어 먼저 들어가거라. 집도 없는 가난뱅이야--안으로 들어가라니까. 나는 기도를 하고 나서 눈을 붙이겠다--. (광대 들어간다) 입을 것 하나 없는 불쌍한 헌털뱅이들아, 지금 너희들이 어디 있든 간에 이 매정한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겠지. 머리를 둘 집도 없고, 허기진 뱃구레를 움켜잡고 구멍이 숭숭 뚫린 누더기를 걸친 채 어떻게 이런 험한 날씨를 견딘다는 거냐? 오, 나는 여태껏 이런 일에 너무나 눈이 어두웠다!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여, 이걸 약으로 삼으라. 비바람에 시달리고 가난한 자의 비통한 고초를 깨달아라. 남는 것일랑 그들에게 나눠주어 하늘의 공평함을 보여 주어라. 에드거: (오두막집 안에서, 쉰목소리로) 한 길 반이야, 한 길 반 물속이야! 불쌍한 톰! (광대가 당황하여 오두막집에서 뛰쳐 나온다. 안절 부절 못하고 있다) 광대: 들어가지 말아요. 아저씨, 귀신이 있어. 사람 살려야, 사람 살려요! 켄트: 내 손을 잡아라. (오두막집을 향해) 거기 있는 건 누구나? 광대: 귀신이야, 귀신! 불쌍한 톰이래. 켄트: 짚자리에 귀신이 앓는 소리로 웅얼대는 자는 누구냐? 이리 나와라! (계속 폭풍우) 광인으로 가장한 에드거, 허리에만 담요를 걸치고 거의 나신으로 막대기를 들고 등장. 에드거: 꺼져버려! 요놈의 악마가 날 뒤쫓는다! 가시 돋힌 산사나무 덤불 속으로 찬바람이 분다. 흥! 잠자리에 들어가서 몸둥이나 녹여라. 리어: (에드거를 찬찬히 뜯어보며) 자네도 두 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나? 그래서 요 지경이 되었군? 에드거: 이 불쌍한 톰에게 자선 좀 하세요. 지옥의 야차가 날 마구 끌고 다녀요. 불 속으로, 불기둥을 지나고, 개울을 지나고, 여울을 건너서, 늪 속으로, 수령 속으로 마구 끌고 다녀요. 베개 밑에는 비수를 넣어두고, 걸상에는 목매달아 죽을 밧줄을 걸어놓고, 죽사발 옆에는 쥐약을 갖다놓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고는 비틀대는 다갈색 말을 타고 5인치밖에 안되는 다리를 건너가게 하고 제 그림자를 반역자라고 쫓아가게 했어요. (계속 폭풍우) 당신의 오감이 멀쩡하셨으면 해요! 톰은 추워요. 오 덜덜덜 덜덜덜. 신의 가호로 당신은 회오리바람도 별의 저주도 받지 않고 귀신에게 흔들림을 당하지도 마세요! 흉악한 악마에게 뒷덜미 잡힌 불쌍한 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번엔 꼭 악마를 요절내야지--여기--여기다--여기! (막대기를 들고 여기저기 두들기며 돌아다닌다. 계속 폭풍우) 리어: 오냐, 저자도 딸들 때문에 저 지경이 되었구나! 그래,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딸년들에게 고스란히 주었나? 광대: 천만에, 담요는 한 장 남겼죠, 그것마저 주었더라면 우린 벌거숭이 꼴을 창피해서 못 볼 뻔했네. 리어: 공중에 떠도는 모든 재앙이여, 인간의 죄업에 떨어질 운명이라면 너의 딸년들 머리 위에 떨어져라! 켄트: 저 사람은 딸이 없습니다. 리어: 그 무슨 불충한 대거린가! 불효한 딸들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어찌 저렇게 비참한 몰골이 될 수가 있단 말이냐. (에드거가 자기 팔을 바늘과 나뭇가지로 마구 찌르는 것을 보고) 버림 받은 아비들이 저렇게 자신의 육체를 무자비하게 학대하는 것이 요즘 세상의 유행인가? 당연한 형벌이다! 어버이의 생피를 빨아먹는 페리칸 같은 딸들을 낳은 것은 이 몸뚱이니까. 에드거: 필리콕이 필리콕 언덕에 앉아 있네. 얏호! 얏호 얏호! 광대: 이렇게 추운 밤에는 우리 모두 바보가 되거나, 머리가 확 돌아버리거나 할 거야. 에드거: 악마를 조심해요. 부모에게 복종해요. 약속을 반드시 지켜요, 섣불리 맹세하지 말아요, 유부녀를 간음하지 말아요, 좋은 옷에 열을 올리지 말아요. 톰은 추워요. 리어: 너는 전에 무엇을 했느냐? 에드거: 즐거운 마음으로 자랑스럽게 봉사할 머슴이었죠! 머리카락을 지지고, 모자에는 사랑의 표시인 장갑을 붙이고, 주인마님의 욕정을 채워 주느라고 엉큼한 짓도 곧잘 했죠. 입에 발린 맹세를 하고는 하느님 앞에서 버젓이 깨뜨리기도 했답니다. 잘 때는 여자를 나꿔챌 궁리를 하고, 깨어나서는 그것을 실행했습죠. 술에는 밑빠진 독이요, 노름에는 끗발날렸죠. 여색에는 터어키 왕을 날로 회쳐 먹을 정도구요. 허풍쟁이에다가 귀는 여리고 손은 잔인하고, 게으르기는 돼지요, 교활하긴 여우요, 욕심 많긴 이리요, 미치면 개요, 사납기로는 사자였지요. 여자의 삐걱대는 구도소리와 하늘거리는 비단옷 소리에 넋을 빼면 신세 족치죠. 갈보집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말고, 속옷 자락을 들쳐 손을 넣지 말고, 빚쟁이 장부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지 말구요, 그리고 악마에게 져서는 안돼죠. 산사나무 덤불 속으로 찬바람이 부고 있어요, 쏴아 쏴아, 해이 노니 노니. 돌고래야, 이 녀석아!--좋다! 통과시켜 줘라. (폭풍우가 계속된다) 리어: 알몸으로 이 사나운 비바람에 부딪히느니 차라리 무덤속에 들어가 있는 게 낫겠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밖에 안되는가? 저잘 눈 여겨보아라. 너야말로 누에한테서 비단도, 짐승한테서 가죽도, 양한테서 털도, 고양이한테서 사향도 얻지 못한 놈이로구나. 야!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겉치레를 하느라고 옷을 입고 있는데, 너는 태어날 때 몰골 그대로구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너같이 알몸둥이에 두 발 가진 불쌍한 짐승에 지나지 않아. 이 빌어 입은 옷들을 벗어 버리자, 벗자! 이 단추를 풀어다오! (리어가 옷을 찢으며 벗으려고 하는 것을 광대가 제지하다) 광대: 아저씨, 제발 좀 참으세요. 오늘밤처럼 험상궂은 날씨에 헤엄칠려구요? (멀리서 글로스터가 횃불을 들고 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스산한 벌판에 작은 불이 있어 봤자 음탕한 늙은이의 심장과 같아--그곳만 반짝 타오르고 나머지 몸뚱아리는 찬서리 맞은 듯 차디 차거든. 저것 봐라, 불이 이리로 걸어오네. 에드거: 저건 흉악한 악마 플리버티지벳트로구나. 저놈은 인경칠 때 나타나선 첫닭이 홰를 칠 때까지 싸다니거든. 우리들 눈에 삼이 서게 하고, 사팔뜨기가 되게 하고, 언챙이가 되게 하는 것이 저놈의 짓인걸, 하얗게 익은 밀에 곰팡이를 슬게 하고 당 속의 버러지들을 못살게 구는 것도 다 그놈의 행패야. (음송한다) 마귀 쫓는 성자가 들판을 세 바퀴 돌다가 아홉 마리 부하 가진 가위귀신 만났다오 성자는 귀신보고 타일렀죠 못된 짓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라-- 그리고 마귀야 꺼져라 없어져라! 켄트: (리어에게) 폐하, 어떠하십니까? 글로스터 횃불을 들고 등장. 리어: 저놈은 누구나? 켄트: 거 누구요? 누구를 찾소? 글로스터: 너희들이야말로 누구냐? 이름을 대라! 글로스터가 횃불을 내밀자 에드거는 얼굴이 행여 노출될까봐 급히 얼굴을 돌러 댄다. 에드거: 불쌍한 톰입니다, 물 속의 청개구리, 두꺼비, 올챙이, 도마뱀, 도룡뇽을 먹고 그놈들이 살고 있는 곳의 물을 마시고 사는 놈이죠. 마귀가 지랄을 하면 울화통이 터져 푸성귀 대신 쇠똥을 먹고 늙은 쥐나 시궁창에 태기친 죽은 개도 막 삼킵니다. 궂은 물 괸 연못의 파란 이끼도 꿀꺽 마시죠. 이놈은 난장을 맞으며 이 마을 저 마을로 쫓겨 다니면서 발에는 족쇄가 채워지고 감옥에 갇히는 놈인데, 그래도 저고리 세 벌, 속옷 여섯 벌은 가졌었죠. (음송한다) 말도 타고 칼도 차고 다녔지만 지나간 일곱 해 동안은 생쥐나 쥐 같은 작은 짐승이 톰이 먹고 사는 음식이었다네 나를 쫓아다니는 놈을 조심해요. 입 닥쳐, 악마 스멀킨아, 잠자코 있어. 이 악마야! 글로스터: 폐하, 아니 이런 화상들만 거느리고 계십니까? 에드거: 염라대왕은 군자죠! 이름은 모오도인데 마후라고도 해요. 글로스터: 폐하, 살과 피를 나눈 자식들까지도 악독해져서 저를 낳은 어버이를 미워하는 세상입니다. 에드거: (얼굴을 돌리며) 불쌍한 톰은 추워요. 글로스터: 자, 신이 안내하겠습니다.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어찌 따님들의 혹독한 명령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성문을 닫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고초를 겪도록 모른척 하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만 신은, 폐하를 찾아 뵙고 불과 음식이 준비된 곳으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리어: 우선 이 철학자와 얘길 나누고 싶다. (에드거에게) 도대체 천둥은 왜 생기는가? 켄트: 폐하, 저분 말씀대로 하십시오. 그 집으로 가십시다. 리어: 이 테베의 석학과 얘길 하고 싶다. 넌 뭘 연구하는가? 에드거: 어떻게 하면 악마를 피하고 이를 잡아 죽이느냐, 이걸 연구하죠. 리어: 너한테 은밀히 한마디 물어볼 말이 있다. 켄트: (글로스터에게) 한 번만 더 권해 보십시오, 대감. 폐하께서 정신이 이상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글로스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어찌 폐하를 비난할 수 있겠소? (폭풍우가 계속된다) 폐하의 딸들이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아 그 훌륭한 켄트 백작! 가엾게도 추방이 된 그분이 이렇게 되리라고 이미 경고하셨어요! (켄트에게) 당신은 왕폐하께서 실성기가 보인다고 했는데 나야말로 미칠 지경이오. 내겐 자식이 한 놈 있었소. 지금은 혈연을 끊었지만 그놈이 날 죽이려 하지 않았겠소. 최근에 아주 최근에 말예요. 그런데 그놈을 난 세상의 어떤 아비보다도 극진히 사랑했어요. 사실 그 슬픔 때문에 난 정말 미칠 것만 같소. (폭풍우가 여전히 계속된다) 웬놈의 날이 이럴까! (리어에게로 접근하며) 황공하오나 폐하--. 리어: 아, 용서하오. (에드거에게) 철학자 선생, 같이 갑시다. 레드거: (얼굴을 돌리며) 톰은 추워요. 글로스터: (에드거에게) 이봐, 넌 오두막 속으로 들어가거라. 그 속에서 몸을 녹이라구 켄트: 이쪽입니다, 페하, 리어: 저 사람하고 같이 갈 테다! 철학자 선생하고 같이 있고 싶다. 켄트: (글로스터에게) 대감, 폐하의 말씀대로 하십시오. 저 사람을 데려가도록 하세요. 글로스터: 데리고 갑시다. 켄트: (에드거에게) 이봐, 따라와, 같이 가자. 리어: 자 아테네의 철학자 선생, 갑시다. 글로스터: (모두에게) 조용히 조용히 해요. 쉿! 에드거: (음송한다) 로우랜드 기사가 컴컴한 탑에 다다르다 그의 입주정은 여전히 "흥 헝 흥. 영국사람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모두 퇴장) [ 제5장 글로스터의 성 안의 한 방 ] 코온월과 에드먼드 등장. 에드먼드는 그의 부친을 배신하여, 밀서를 코온월에게 건네주려 하고 있다. 코온월: 이 집을 떠나기 전에 기필코 앙갚음을 하고 말 테다. 에드먼드: 비통해 하는 듯) 부자간의 천륜을 어기고까지 각하께 충성을 다했다는 소문이 낭자해질 텐데, 생각만 해도 식은 땀이 납니다. 코온월: 이제야 자초지종을 알겠다. 네 형이 아비의 목숨을 노린 것도 네 형의 흉악한 마음 때문만이 아니었어. 아비에게도 비난 받을 만한 결점이 있어서 살의를 품게 된 거다. 에드먼드: (반독백조로) 옳은 일을 하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되니, 내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가! (밀서를 코온월에게 건네면서) 이것이 아버님께서 말씀하시던 밀서입니다. 이 밀서를 보니, 아버지는 프랑스군을 위해서 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오, 하느님이시여! 이러한 역모가 없었고-- 또 내가 밀고자가 아니되었더라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코온월: 나와 함께 내자한테 가자. 에드먼드: 이 밀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각하께서는 중대한 일이 당도해 있습니다. 코온월: 사실 여부는 고사하고 이 사건으로 넌 글로스터 백작이 되었다. 부친을 곧 포박할 수 있도록 한시도 지체말고 찾아내라. 에드먼드: (방백) 국왕을 돕고 있는 현장이 발각되면 아버지의 협의는 더욱 굳어질 거다. (코온월에게) 충성과 효도의 틈바구니에 낀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저는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코온월: 너만 믿겠다. 부친 이상으로 널 사랑할 것이다. (두 사람 퇴장) [ 제6장 글로스터의 성에 인접한 농가의 한 방 ] 글로스터와 켄트 등장. 글로스터: 이래도 들판보다는 여기가 나으니 감사하게 생각해 줘요. 국왕을 안락하게 모시기 위해 분골쇄신할 작심이오. 곧 돌아오리다. 켄트: 폐하께서는 그만 울화통이 터져 분별력을 잃으셨습니다. 대감의 친절에 하느님께서도 축복을 보내실 겁니다! (글로스터 황황히 퇴장) 리어, 에드거, 광대 등장. 에드거: (바닥에 귀를 붙이고 뭔가를 듣는 척하며) 악마 프라테레토가 날 부른다. 그리고 네로왕이 지옥의 호수에서 낚시질을 한다고 한다. (광대에게) 기도라도 해서 흉악한 악마가 붙지 못하도록 하라. 광대: (리어에게) 아저씨, 미친 사람이 선빈가요 아니면 시골 농사꾼인가요, 제발 가르쳐 줘요. 리어: 왕이다, 왕이야! 광대: 아냐 농사꾼이야, 농사꾼 아들이 선비가 된 거지. 제 아들이 저보다 먼저 선비가 되게 한 걸 보니 미치광이 농사꾼이지. 리어: (격분하여) 천의 악마들이 새빨갛게 단 쇠꼬챙이를 꼬나들고 쉿 쉿 소리를 지르면서 딸년들한테 덤벼들고! 에드거: 악마가 내 등줄기를 깨문다. 광대: 이리가 순하다고 믿고, 말이 건강하다고 믿고, 풋내기들의 사랑이 오래간다고 믿고, 갈보의 맹세를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미친 놈이지. 리어: 그렇게 하고야 말 테다. 그년들을 법정에서 심문하리라. (이대 리어 좌우를 둘러보고, 그곳에 두 개의 낡은 책상이 잇는 것을 보더니 환각작용으로 그것들이 거너릴과 리이건이 법정에 호출되어 온 것으로 착각한다. 에드거에게) 영특한 너는 이리로 앉고, 그리고 요 암여우들아--. 에드거: 저기 악마가 버티고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요! 부인, 재판을 한데 방청인이 필요하겠죠? (노래한다) 내를 건너 벳시야 네 게로 오라 광대: (노래한다) 그녀의 배는 물이 새네 그대에게 못 가는 이유를 그녀는 말 못하네. 에드거: 흉악한 악마가 꾀꼬리 소리를 내면서 불쌍한 톰을 쫓아다녀요. 악마 홉단스는 싱싱한 청어를 두 마리만 달라고 뱃속에서 성화예요. 이 시커먼 악마야, 찡얼대지 마라. 너 줄 음식은 없다. 켄트: (리어에게)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넋빼고 계시지 마시고 자리에 누워서 쉬시지요. 리어: 먼저 그년들의 재판을 해야 돼. 증인들을 불러 들여라. (에드거에게) 법관복을 입은 재판관님, 자리에 앉으세요. (광대에게) 넌 배석 재판관이니 그 옆에 앉고. (켄트에게) 넌 특명 재판관이니 거기 앉아라. 에드거: 공정한 재판을 합시다. (노래한다) 즐거운 양치기야 자느냐 깨어 있느냐? 너의 양떼가 밭을 망친다 구성지게 피리 한 번 불어 주려마 양떼에겐 해로울 것 없지 야옹! 마귀 고양이는 회색빛이야. 리어: 저년을 먼저 심문하라. 거너릴 말이다. 존경하는 여러분 앞에서 엄숙히 선서합니다. 바로 저년이 자기 부친인 불쌍한 국왕을 발길질했습니다. 광대: 부인, 이리 나와요. 이름이 거너릴이지? 리어: 새침은 못 뗄 거다 광대: 원, 이런 실수가 있담, 그만 당신을 걸상으로 알았구료. 리어: 여기 또 한 사람 있소. 그년의 찌그러진 면상을 보면 맘보가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알 수 있을 거요. 그년을 붙잡아! 무기 무기를, 칼, 불을! 이 법정은 부패했다! 부정한 재판관이여, 왜 저 계집을 달아나게 했소? 에드거: 정신 차리세요! 켄트: 오 맙소사! (리어에게) 폐하, 그렇게 입버릇처럼 자랑하시던 그 자제력은 어디로 갔습니까? 에드거: (방백) 이렇게 동정의 눈물을 흘리다간 내 연극이 탄로나겠군. 리어: 트레이, 블란치, 스위트허트, 이놈의 강아지들까지 날 보고 짓는구나.)리어 개들에게 에워싸여 있다는 환각을 일으켜, 겁에 질려 이리 저리로 도망다닌다) 에드거: (차마 리어의 몰골을 바라볼 수가 없어) 톰의 벙거지를 던져서 강아지들을 쫓겠소. 저리로 가, 이 개새끼들아! 네 입에 희든 검든 물면 독이 나온다 집개 사냥개 흉한 똥개 엽견 발바리 암캐 염탐개 꼬리 짧은 삽살개 꼬리 감은 복슬개 톰 때문에 개새기들은 짖어대고 야단이다 이렇게 벙거지를 집어던지면 개들은 뛰쳐나가 달아난다오 (에드거 개떼들을 좇는 흉내를 내면서 벙거지를 저만치로 패대기친다) 덜 덜 덜 덜, 아이구 추워! 자 밤놀이 잔치에 가자, 한마당 잔치에 가자, 장거리로 가자, 불쌍한 톰아, 네 동냥 바가지는 텅텅 비었다. 리어: 그럼 리이건을 해부해 주시오. 그년의 심장에 무엇이 돋아 있나 보고 싶소이다. 그런 잔인한 마음을 만들 때에는 필경 조물주에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게 아니오? (에드거에게) 이것 보아, 널 내 백인의 시종 속에 끼워 줄 테다. 다만 너의 옷차림이 내 마음에 안 들어. 페르샤식이라고 하겠지만 어째든 갈아 입어야 돼. 켄트: 폐하, 여기 누우셔서 잠시 쉬십시오. 리어: 떠들지 마라, 조용히 해. 휘장을 쳐라. 그래 그래, 저녁 식사는 아침에 들겠다. 광대 그러면 난 대낮에 자러 가야겠네. 글로스터 급히 등장. 글로스터: (켄트에게) 이봐요, 이리 와요. 국왕께서는 어디 계시오? 케트: 여기 계십니다. 그리나 건드리지 마십시오. 제정신이 아니시비다. 글로스터: 여보게, 어서 안아 일으키시오. 암살 음모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들 것을 준비해 놓았으니 거기 태워서 도우버까지 급히 모시고 가시오. 그곳에 가면 환영과 보호를 받을 것이오. 어서 국왕을 안아 일으키시오. 반 시간만 지체했다간 왕은 물론 당신의 목숨도 왕을 보호하려는 모든 사람의 목숨까지도 위험하오. 빨리 안아 일으켜요, 한시가 급하오, 날 따라와요, 여장을 준비한 곳으로 안내하겠소. 켄트: (잠자고 있는 리어를 보면) 몹시 지쳐서 잠드셨습니다. 이렇게 푹 쉬시면 당신의 광기가 지정될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치유되시기는 어렵습니다. (광대에게) 자 도와다오, 폐하를 안아 일으키자. 너도 따라와야 돼. 글로스터: 자, 자 갑시다! (켄트, 글로스터 두 사람이 리어를 안아 일으켜 돌보며 퇴장. 광대로 딸라 들어간다. 에드거만 홀로 남아 있다) 에드거: 지체 높으신 분들도 우리들처럼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의 불행을 원망만 할 수도 없다. 즐겁고 안락한 생활을 멀리하고 자기 혼자만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나 슬픔에도 벗어 있고, 고통에도 동료가 있다면 우리의 마음의 아픔은 쉽게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등을 펴지 못하게 하는 고통이 국왕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내 고통은 한결 가벼워지고 견디기가 수월해지는 것 같다. 국왕은 딸들 대문에, 난 아버지 때문에 이 고통을 받는구나! 톰아 어서 가거라! 항상 고위층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하느니라. 그러다가 네 명예를 망쳐 놓은 증상과 오해가 말끔히 씻겨지고 너의 정당함이 입증되는 날 원래의 신분으로 복귀되고 부자간의 화해도 될 것인즉, 그때 정체를 세상에 밝혀라. 오늘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국왕폐하께서 무사히 피신을 하셨으면 좋겠다! 숨자 숨어. (퇴장) [ 제7장 글로스터의 성 안의 한 방 ] 코온월, 리이건, 거너릴, 에드먼드, 기타 하인들 들장. 코온월: (거너릴에게) 급히 올버니 공작께 돌아가셔서 이 서찰을 보이십시오. 프랑스 군이 벌써 상륙했답니다. (시종에게) 반역배 글로스터를 찾아오라. (하인 몇 사람 퇴장) 리이건: 당장 교수형에 처하세요. 거너릴: 그자의 눈깔을 도려내요. 코온월: 그자의 처치는 내게 맡기세요. 에드먼드, 처형을 모시고 가요. 모반자인 그대의 부친에게 우리가 하는 복수를 자식으로서 차마 눈뜨고 볼 수는 없는 일. 올버니 공작한테 가거든 시급히 전쟁 준비를 하시라고 그래요. 우리도 곧 준비할 것인즉. 또 우리 사이의 정보 교환은 서로 신속히 해야만 될 것이고. (거너릴에게) 잘 가십시오, 처형. 글로스터 백작도 잘 가요. 오즈월드 등장. 어떻게 되었나? 국왕은 어디 계시지? 오즈월드: 글로스터 백작이 모시고 가 버렸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왕을 찾고 있던 서른 대여섯 명이나 되는 왕의 기사들이 성문에서 왕을 만나자 글로스터 백작의 시종들과 한패가 되어 왕을 모시고 도우버 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곳에는 자기편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 뭡니까. 코온월: 공작부인이 타실 말을 준비하라. 거너릴: (코온월에게) 안녕히 계세요, 공작님. 그리고 동생도 잘 있거라. 코온월: 에드먼드 잘 가오. (거너릴, 에드먼드, 오즈월드 퇴장, 시종에게) 반역배 글로스터를 잡아 오너라. 도둑놈같이 오라로 묶어 내 앞에 끌고 오는 거다. (다른 하인들 퇴장) 정식 재판 없이 그놈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참을 수 없어 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니 비난은 할는지 몰라도 막지는 못할 거다. 하인들, 죄수 글로스터를 끌고 당시 등장. 누구냐? 모반자냐? 리이건: 배은망덕한 여우! 바로 그자이군 그래. 코온월: 그놈의 말라빠진 두 팔을 꽁꽁 묶어라. 글로스터: 무슨 일이십니까? 두 분께서는 내집 손님이십니다.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코온월: 그 놈을 묶으라니까! (하인들 글로스터를 결박한다) 리이건: 단단히 단단히 묶어라. 이 더러운 반역자! 글로스터: 인정머리 없는 부인이시군요. 이 사람은 반역자가 아니외다. 코온월: 이 의자에다 묶어라.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하인 여러 명이 글로스터를 의자에 묶는다. 이때 리이건이 일어서더니 글로스터의 수염을 뽑는다) 글로스터: 하느님 맙소사, 수염을 잡아뽑다니 이런 무도한 일이 어디 있담. 리이건: 그래, 이렇게 흰 수염을 갖고서 배반을 해? 글로스터: 부인, 너무나도 악랄합니다. 당신이 내 턱에서 뽑은 수염이 한올 한올 다시 살아나서 당신을 고발할 것이오. 난 당신들을 환대한 이 집 주인이 아니오. 그런데 날도둑놈처럼 날 욕보이려 하오? 어쩌자고 이러시오? 코온월: 자, 요즘 프랑스에서 어떤 편지를 받았느냐? 리이건: 정직하게 대답하라, 진상을 다 알고 있으니까. 코온월: 요즘 우리나라에 상륙한 반역자들과 어떤 음모를 했느냐? 리이건: 미친 왕을 누구 손에다 넘겼어?... 말해. 글로스터: 어림 짐작으로 씌어진 서찰을 받았지만 어느 쪽을 편드는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적으로부터 온 서찰은 아니오. 코온월: 교활한 것 같으니. 리이건: 거짓말이야. 코온월: 왕을 어디다 보냈는가? 글로스터: 도우버에. 리이건: 왜 도우버로 보냈지? 어디 그 이유나 들어보자. 글로스터: 곰같이 이렇게 말뚝에 결박을 당했으니 개떼의 습격을 받을 수밖에 없겠군. 리이건: 왜 도우버에 보냈어? 글로스터: 왜냐구? 내가 그 잔인한 손톱으로 불쌍한 노왕의 두 눈을 빼버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도 악독한 네 언니의 산돼지 같은 송곳 이빨로 성유를 바르신 국왕페하의 옥체를 물어뜯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지옥같이 컴컴한 밤에 폐하께서는 모자도 안 쓰시고 그 거친 폭풍우를 고스란히 맞으시며 고초를 당하셨다. 그 폭풍우는 바다라도 휘감고 공중으로 치솟아 별의 광채를 꺼버릴 만한 것이었어. 그러나 가엾으시게도 페하께서는 당신의 눈물로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퍼붓도록 도우셨다. 그렇게 무서운 밤이라면 설령 늑대가 네 집 문 앞에 와서 으르렁대더라도 "문지기야, 문을 열어줘라."고 말하는 것이 인정이 아닌가. 맹수도 연민을 안다고 하는데,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날개 달린 복수의 신이 고얀 딸들에게 천벌을 내리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거다. 코온월: 오냐, 못 보게 해주마. (하인들에게) 의자를 꽉 잡고 있어. (하인들이 달려들어 글로스터를 의자에 밀어붙인다. 코온월이 다가온다) 네놈의 그 두 눈을 발로 짓이겨 주겠다. 글로스터: 제 명까지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날 도와다오...... 아, 잔인하다! 아 신들이여! 리이건: 한쪽 눈만 빼면 다른쪽 눈이 웃을 테니 마저 빼버리세요. 코온월: 천벌을 보겠다고 했겠다--. (코온월이 다시 글로스터에게로 달려든다. 시종 한 사람이 옆에서 끼여들며 말린다) 하인1: 공작님, 참으십시오! 소인배는 어려서부터 공작님을 모셔왔습니다만 지금 공작님을 말리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충절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이건: 무엇이 어쩌구 어째, 이 개 같은 것아! 하인1: (리이건을 노려보며) 마님 턱에 수염이 있다면 그 수염을 잡아 흔들어서 싸움을 청하겠소이다. (코온월 칼을 뽑는다) 왜 그러십니까? 코온월: 이 종놈아! 하인1: (칼을 뽑으며) 그럼 할 수 없군요, 나도 화가 치밀었으니 어디 붙어 봅시다. (모두 놀라 떠들어낸다. 그러는 와중에 코온월이 손에 부상을 당한다. 리이건 애를 태운다) 리이건: (다른 하인에게) 칼을 다오. 이 농사꾼 쌍놈아, 발칙하다! (칼을 받아들고 뒤로 가서 하인1을 찌른다) 하인1: 아이쿠! 죽었다! (글로스터에게) 백작님, 눈 하나가 남았으니 원수놈의 상처를 보십시오! 아이구! (죽는다) 코온월: 까막눈이 되게 한쪽 눈도 마저 뽑아 주마. (글로스터에게 달려들어 또 한족 눈을 뽑아 땅에 패대기친다) 에잇 더러운 풀떡같은 것! 자 이래도 빛이 보이느냐? 글로스터: 아 모든 것이 컴컴하고 위안이라고는 없구나! 내 아들 에드먼드는 어디 있느냐? 에드먼드야, 효성의 불길을 모질게 일으켜서 이 악독한 행태의 복수를 해 다오 리이건: 입 닥쳐라, 이 반역자야! 네놈이 찾는 아들은 네놈을 증오하고 있다. 네놈 역모를 우리에게 폭로한 장본인이 바로 네놈의 아들이다. 에드먼드는 마음이 선량하니 너 같은 놈을 동정하지 않아. 글로스터: 오, 내가 어리석었구나! 에드거가 모함을 당했어! 인자하신 신들이여, 저를 용서해 주시고, 에드거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리이건: 저놈을 성문 밖으로 내쫓아라, 도우버까지 냄새를 맡으면서 가라고 해. (하인 한 사람 글로스터와 같이 퇴장) (코온월에게) 왜 그러세요? 왜 얼굴빛이 그래요? 코온월: 상처를 입어서 그렇소. 자 나를 따라오오. (시종에게) 저 눈깔 없는 악한을 쫓아내. 그리고 이 종놈은 쓰레기더미에 갖다 버려라. 여보 리이건, 출혈이 심하오. 하필 중요한 때에 상처를 입다니. 나를 좀 부축해 주오. (리이건에 의지하며 퇴장) 하인2: 이따위 인간이 잘 될 바에야 나도 서슴지 않고 흉악한 짓을 하겠다. 하인3: 저런 년이 오래 살아서 제 명에 죽는다면 여자들은 다 괴물이 되고 말 게다. 하인2: 글로스터 백작님을 쫓아가서 그 미친 거지놈더러 어디든지 백작님이 가시고 싶은 대로 모시고 가라고 하세. 미친 떠돌이 거지니까 무슨 짓을 해도 의심 안 받고 어디든 모셔다 줄 거야. 하인3: 자넨 그렇게 하게. 나는 배와 달걀 흰자위를 얻어 가지고 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발라 드리겠네. 하느님, 그 어른을 도와주소서! (하인들 제각각 퇴장) [ 제4막 ] 저것들은 허리 위는 여자지만, 허리 아래는 반인 반수의 괴물이다. 허리띠 매는 데까지는 신들의 것이지만, 그 아래는 악마의 것이야. 그곳은 지옥이다. 암흑이다. 유황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구렁텅이다. - 6장 리어왕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황야 ] 미친 거렁뱅이로 가장한 채로 에드거 등장. 에드거: 이처럼 늘 멸시를 당해도 겉으로 아첨하면서 속으로 비웃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인간이 운수 불길하여 가장 혹독한 역경에 빠져 있다면 다음은 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는 것이니 더 두려울 것도 없지. 슬퍼할 것은 행운의 절정에서 몰락하는 경우다. 역경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하고 나면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되는 법.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아, 불어라, 나는 너를 기꺼이 내 품안에 껴안으마. 비록 너로 말미암아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몸이지만 이젠 네가 아무리 불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누가 오나 부다! 한 노인에게 끌려서 글로스터 등장. 아버님이시다. 스산한 옷차림의 노인에게 이끌려서! 아 세상, 세상이여, 이 세상이여! 사람들은 기구하게 변하는 운수놀음에 넌덜머리가 나서 빨리 늙어 죽고 싶은 거다. 노인: 오 백작님, 소인은 팔십 평생을 백작님의 선친 때부터 종노릇을 해온 사람입니다. 글로스터: 물러가라, 가도 좋다! 가보래두. 자네의 친절이 내겐 아무 도움이 안돼. 오히려 자네마저 화를 입을지 몰라. 노인: 그러하지만 나리께서는 앞을 못 보시잖아요. 글로스터: 갈 길도 없는 난데, 눈이 있어 뭘 해. 눈으로 볼 적에는 오히려 돌뿌리에 채이곤 했다. 사람이란 의지할 것이 있으면 방심하기 쉽지만 아무것도 없으면 오히려 조심하게 되는 법이지. 아 사랑하는 아들 에드거, 너는 속아 넘어간 네 아비의 노여움의 제물이 되었다! 내 살아 생전에 너를 한번 만져볼 수 있다면 나는 눈을 다시 찾은 거나 진배 없겠다. 노인: (에드거에게) 누구요? 거기 있는 사람은? 에드거: (방백) 오, 신이여! 누가 "나는 지금이 가장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나는 가장 비참했던 그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구나. 노인: (에드거에게) 이놈아, 어디를 가느냐? 글로스터: 거진가? 노인: 미친 데다가 거렁뱅이입니다. 글로스터: 완전히 미치진 않은 모양이군, 구걸을 할 수 있다면. 어젯밤 폭풍우 속에서 그런 놈을 만났다. 그놈의 꼬락서니를 보니까 사람이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때 내 자식놈 생각이 떠올랐지, 그때만 하더라도 아들놈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진상을 알게 된 건 그 후야. 개구쟁이들이 파리를 다루듯이 신은 우리 인간을 다룬단 말이다. 신들은 우리 인간을 장난삼아 죽이고 있어. 에드거: (방백) 어쩌다 저렇게 되셨지?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을 상대로 광대바보 노릇을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자신에게도 그렇고 상대에게도 심화를 도지게 하는 건데.--안녕하십니까, 나리! 글로스터: 벌거숭이 거진가? 노인: 예, 그렇습니다. 글로스터: 그럼 자넨 돌아가 주게. 만약 날 생각해서 도우버로 가는 길을 한두 마일쯤 따라올 작심이라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떠나 주고, 그 대신 이 벌거숭이에게 입힐 옷이나 갖다 주게. 이 녀석에게 길 인도를 부탁하겠으니. 노인: 당치도 않습니다요, 저 녀석은 미친 놈인 걸요! 글로스터: 미친 놈이 소경의 길잡이를 하는 것도 말세의 한 작태일게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싫으면 마음대로 하고. 어서 돌아가 줘. 노인: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퇴장) 글로스터: 이봐라, 벌거숭이야! 에드거: 불쌍한 톰은 추워요. (방백) 이 이상은 더 속일 수 없구나. 글로스터: 이리로 오너라. 에드거: (방백) 그렇지만 벌려 놓은 씨름판이니 계속 속일 수밖에, (글로스터에게) 아이고 맙소사, 저 눈 좀 봐, 눈에서 피가 흐르네요! 글로스터: 자네는 도우버로 가는 길을 아는가? 에드거: 층계로 해서 가는 길, 대문으로 해서 가는 길, 또 말타고 가는 길, 걸어가는 길 두루 다 압니다요. 톰은 악마에게 혼찌검을 당해 제정신을 잃어 버렸어요. 당신은 대갓집 자제분이니, 악마에게 덜미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요! 이 불쌍한 톰에게는 한꺼번에 악마가 다섯마리나 달라 붙었어요. 음란한 오비디컷트, 그 다음은 벙어리의 마왕 홉비디던스, 도둑놈 근성의 마후, 살인마 모오도, 걸레 씹은 상통의 프리버티지베트, 그런데 이 맨 끝의 악마놈은 나인과 시녀들에게 달라붙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나리, 십분 조심하셔야 해요! 글로스터: 자, 이 돈주머니를 받아라, 너는 하늘이 내린 재난을 달갑게 받고 어떠한 불행도 감내하는구나. 내 처지가 비참하다 보니 네가 행복하게 보인다. 하느님이시여, 늘 이렇게 처리해 주십시요! 지나치게 남아돌아 호의호식하는 자들, 하늘의 뜻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 자기 스스로 겪지 않았다 해서 남의 가난의 괴로움을 돌보지 않는 자에게 한시라도 속히 하느님의 위력을 느끼도록 하여 주소서. 그래서 많이 가진 자의 것을 거두어 너나 할것 없이 풍족하게 갖도록 하소서. (에드게에게) 너, 도우버를 아느냐? 에드거: 아다마다요, 영감님. 글로스터: 그곳에 절벽이 하나 있는데, 깎아지른 듯 솟은 절벽의 꼭대기는 둘러싼 바다를 무섭게 굽어보고 있다. 그 절벽까지만 날 데려다 다오. 그러면 내 몸에 지닌 값진 보화를 네게 줄 테다, 네 궁색한 형편이 풀릴 거다. 그 후로는 안내해 주지 않아도 돼. 에드거: 제 손을 잡으세요. 이 불쌍한 톰이 안내해 드리죠. (두 사람 퇴장) [ 제2장 올버니 공작의 궁궐 앞 ] 거너릴과 지금은 글로스터 백작으로 되어 있는 에드먼드 등장. 거너릴: 이제 다 왔습니다, 글로스터 백작님. 그런데 웬일일까, 샌님같은 우리집 양반이 마중도 안 나왔으니. 오즈월드 등장. (오즈월드에게)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오즈월드: 안에 계십니다만 딴 사람처럼 변해 버리셨는 걸요. 적군이 상륙했다고 말씀드렸더니 힐쭉 웃으시기만 하고 마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여쭈어도 "잘못 됐어."라고만 하시지 뭡니까. 늙은 글로스터 백작의 역모와 그 아드님의 충성을 말씀드렸더니 글쎄 절 머저리라고 하시구 모든 걸 거꾸로만 이야기한다면서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가장 싫어하셔야 할 것을 오히려 좋아하시고 제일 좋아하셔야 할 것을 싫어하시지 뭡니까. 거너릴: (에드먼드에게) 그럼 당신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분은 당차고 모진 구석이 없어요, 딱 부러지게 일을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모욕을 당해도 앙갚음할 줄 모르고 모르는 체하는 사람인 걸요. (목소리를 낮추며) 여기 오는 도중에 얘기한 일은 우리들 소망대로 될 거예요. 에드먼드님, 시동생한테로 돌아가세요. 군대를 빨리 소집해서 지휘하세요. 나와 남편은 할일을 맞바꾸어 난 칼을 차고 그 사람에겐 길쌈할 실패가 쥐어질 테니까요. 그리고 이 심복 하인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연통하도록 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입신양명을 위해서 대답하게 일할 용기만 있다면 머잖아 한 부인한테서 어떤 명령을 들을 거예요. 이걸 몸에 지니세요. (사랑의 선물을 준다) 아무 말 마시고. 고개를 좀 수그리세요. (키스하며) 이 키스가 말을 한다면 당신은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실 거예요. 이 키스의 뜻을 잘 새기세요. 그럼 잘 가세요. 에드먼드: (무릎을 꿇은 채로)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거너릴: 아, 나의 사랑하는 글로스터! (에드먼드 퇴장) 오 같은 남자라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당신이야말로 여자의 사랑을 받을 만해요. 우리집 샌님은 내 몸만 차지하고 있을 뿐야. 오즈월드: 마님, 공작님께서 오십니다. (황황히 퇴장) 올버니 등장. 거너릴: 전에는 휘파람을 불면서 날 환영해 주셨는데. 올버니: 오 거너릴, 당신은 거친 바람이 당신 얼굴에 휘갈기는 먼지만도 못한 여자요! 난 당신의 그 심성이 걱정이오. 자기를 낳아 준 어버이도 업신여겨서야 어찌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소? 자기를 길러 준 줄기에서 그 가지인 제 몸을 도려내는 그러한 여자는 반드시 마르고 시들어서 결국 불쏘시개가 되고 말 거요. 거너릴: 듣기 싫어요! 그 따위 어리석은 수작은 집어치워요. 올버니: 악한 여자에게는 지혜롭고 선한 가르침도 악하게만 들리기 마련이오. 더러운 것들은 더러운 맛밖에는 모르는 법. 도대체 당신이 한 짓이 뭐요? 호랑이나 할 짓이지 그게 딸이 할 짓이요? 어찌 그럴 수가 있소? 당신은 아버지를 미치게 했소, 목을 매어 끌려다니는 곰까지도 손을 핥으려고 할 그 인자하신 노인을 말이오. 이보다 더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짓이 또 어디있소. 코온월 공작이 그런 짓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단 말이요? 국왕의 큰 은혜를 입고 왕족이 된 그 사람이 말이오!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신령을 빨리 내려 보내시어 이 따위 흉악한 짓을 짓눌러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깊은 바다의 괴물들처럼 서로 잡아먹게 되고야 말 것이오. 거너릴: 소갈머리 없는 맹꽁이 같으니라구! 당신이야말로 뺨은 맞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고, 머리는 모욕을 당하기 위해서 달고 있는 거라구요. 버젓이 이마에 눈이 있어도 명예와 치욕을 분간 못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악한이 벌받는 것을 보고 아직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안됐다고 측은히 여기는 것은 쑥맥뿐이에요. 당신 북은 어디 있죠? 프랑스 왕은 군기를 휘날리고 깃털을 꽂은 투구를 쓰고 이 평화로운 나라를 쳐들어 오는데, 그래 당신은 죽치고 앉아서 "아, 왜 저러는 거지?" 하고 헛소리나 하고 있겠단 말이에요? 올버니: 이 악마야, 너의 낯짝을 보라구! 악마는 본래 흉악한 낯짝을 하고 있지만 계집의 탈을 쓰니 더 무섭구나. 거너릴: 이 겁쟁이 바보! 올버니: 여자로 둔갑해서 악마의 본성을 숨기고 있는 이 악마야,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거든 더 이상 내 낯짝을 악마의 모습으로 만들지 말라! 부화통이 터져 멋대로 손을 움직이는 날엔 너의 살과 뼈는 박살이난다. 그러나 아무리 악마라 해도 계집의 탈을 쓰고 있으니까 살려 두는 거다. 거너릴: 흥, 정말 용기 대단하시구려! 사자 등장. 올버니: 무슨 일이냐? 사자: 오 공작님, 코온월 공작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글로스터 백작의 한쪽 눈을 마저 빼려고 하시다가 하인에게 찔려서요. 올버니: 뭣이, 글로스터의 눈을! 사자: 오랜 동안 봉사해 온 하인입니다만 자기의 주인이 글로스터 백작의 눈을 빼려는 것을 보고 동정끝에 그걸 막으려고 하다가 칼을 빼서 공작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는 노발대발하시어 그자에게로 달려들어 내외분이 그의 목숨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때 공작님께서도 상처를 받으셨는데 그 때문에 결국 세상을 뜨셨습니다. 올버니: 이거야말로 정의의 신이 하늘에 건재하시다는 증거다. 이 속세의 죄악에 그렇게 빨리 천벌을 내리시다니! 그러나 아 가엾은 글로스터 백작! 그래, 한쪽 눈까지 마저 잃었는가? 사자: 두 눈 다 잃었습니다, 공작님. (거너릴에게) 이 서찰은 마님의 동생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시급히 답장을 주십쇼. 거너릴: (방백)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되었지. 그러나 동생은 과부가 되었는데 나의 글로스터가 동생과 같이 있으니 겨우 만들어 놓은 나의 공중누각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나에게 남는 것은 따분한 생활뿐일 텐데.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소식은 그리 나쁜 소식도 아니야.--(사자에게) 읽은 후에 답장을 보내겠다. (퇴장) 올버니: 그들이 글로스터의 눈을 뺄 때 에드먼드는 어디 있었나? 사자: 이 댁 마님을 모시고 이리로 오고 있었습니다. 올버니: 여기엔 안 왔는데. 사자: 예, 그럴 것입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제가 뵈었으니까요. 올버니: 그 사람은 이 잔인한 소행을 아는가? 사자: 예 알다마다요, 공작님. 자기 부친을 고발한 사람이 바로 그 분인 걸요. 자기 부친을 마음대로 처치하라고 일부러 그곳을 피했습니다. 올버니: (독백하듯) 글로스터 백작이여,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가 국왕께 바친 충성을 감사히 생각하고 당신 눈에 대한 복수를 꼭 하리다. (사자에게) 이봐라, 이리로 와서 자네가 아는 것이 있거든 좀더 소상히 말해 다오. (두 사람 퇴장) [ 제3장 도우버 부근의 프랑스군 진영 ] 켄트와 신사 등장. 켄트: 프랑스 왕이 왜 그렇게 조급히 귀국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오? 신사: 본국에 남겨 둔 미진한 문제가 이곳으로 출전하신 후 생각이 나서 귀국하셨습니다. 그 일을 내버려 두면 프랑스의 안전에 크게 위해가 될 우려가 있어 부득이 귀국하셨지요. 켄트: 누구를 총사령관으로 남겨 두었소? 신사: 라 파아 원수입니다. 켄트: 왕비께서 그 서찰을 보시고 슬퍼하십디까? 신사: 네. 왕비께서는 그 서찰을 받으시고 제 앞에서 읽으셨습니다. 이따금 하염없는 눈물이 왕비의 아름다운 뺨을 흘러내렸습니다. 왕비께선 왕비로서의 체통을 지켜 슬픔이 억제하려고 애쓰셨지만 그 슬픔은 마치 반역자가 왕이 되어 왕비를 지배하려는 듯하였습니다. 켄트: 그럼 그 서찰을 보시고 마음의 동요가 크셨군요? 신사: 그렇다고 체모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제력과 슬픔이 누가 왕비의 참마음을 옳게 표현하는가 서로 다투는 듯했습니다. 햇볕이 내리쬐면서 비가 오는 일이 있죠. 미소와 눈물이 교차하는 왕비의 무르녹는 듯한 입술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미소가 왕비의 눈에 어떤 손님이 와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고 그리고 그 손님이 눈에서 떠나는 모습은 다이아몬드에서 진주가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슬픔으로 해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면 슬픔이야말로 사랑스럽고 귀중한 것이겠죠. 켄트: 왕비께서 무슨 말씀은 없으셨나요? 신사: 실은 한두 번 있었습니다. 비통하게 "아버님!"하고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나오듯이 숨가쁜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언니들, 언니들! 여자의 수치예요! 언니들! 켄트 백작! 아버님! 언니들! 아, 폭풍우 속을? 한밤중에? 이 세상엔 자비심도 없단 말인가!" 하시며 별 같은 눈에서 성자의 샘물 같은 맑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혼자 슬픔을 달래시려고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켄트: 우리 인간의 심성을 결정 짓는 것은 저 별들, 저 하늘의 별들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부부 사이에서 그렇게 틀린 자녀가 생겨날 수가 없지. 그후론 왕비와 말씀해보지 못했습니까? 신사: 못했습니다. 켄트: 이번 일은 프랑스 왕이 귀국하시기 전의 일인가요? 신사: 그후의 일이었습니다. 켄트: 불쌍하고 비참한 리어왕께선 지금 이 고을을 계십니다. 이따금 심기가 좋으실 때에는 우리가 여기 왜 와 있는지 아시지만 그러나 한사코 코오딜리어 왕비를 만나시려고 하지 않아요. 신사: 왜죠? 켄트: 폐하께서는 크나큰 부끄러움으로 가슴을 찧고 계십니다. 당신의 불민함을 요, 왕비에게 드릴 은혜를 박탈했을 뿐 아니라 이국 땅에 추방한 후 왕비께서 당연히 차지하실 그 권리를 심보가 개만도 못한 다른 딸들에게 준 가책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거죠 ---. 그러한 생각이 독사같이 왕이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불타오르는 듯한 부끄러운 마음에 코오딜리어 왕비를 차마 못만나시는 겁니다. 신사: 아, 불쌍한 분이시군요! 켄트: 올버니 공작과 코온월 공작의 군사 소식은 못들었소? 신사: 벌써 출전했답니다. 켄트: 자 그러면 당신을 리어왕께 안동하겠습니다. 폐하를 모셔 주세요. 나는 말못할 사연이 있어서 잠시 동안 신분을 감춰야 합니다. 내 신분이 밝혀지게 되면 나하고 알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나하고 같이 갑시다. (두 사람 퇴장) [ 제4장 도우버 부근의 프랑스군 진영, 막사내 ] 고수, 기수들을 거느린 코오딜리어, 저의, 병사들 등장. 코오딜리어: 아아, 필경 그분이 아버님이셔! 방금 만났다는 사람의 얘기론 성난 바다처럼 미친 듯 큰 소리로 노래하고 머리에는 자랄 대로 자란 현호색 꽃, 밭이랑 새에 나는 잡초, 우엉, 독당근, 쐐기풀, 황새냉이꽃, 독보리, 그 밖에 우리가 먹는 곡식 사이에 나는 갖은 잡초로 만든 왕관을 쓰고 계셨대요. 곧 백인의 수색대를 풀어서 잡초가 무성한 들판도 샅샅이 뒤져서 내 앞으로 모셔와요. (한 장교 퇴장) 인간의 지혜로 폐하의 실성을 치유할 수는 없을까? 폐하의 심병을 고쳐주는 사람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내리리다. 전의: 방법은 있습니다, 왕비 전하. 사람의 생명을 길러주는 것은 안면이옵니다. 폐하께서는 그 안면이 부족하십니다. 안면을 취하시게 할 수 있는 영험있는 약초가 많이 있습니다. 그 약초의 신통력만 빌리면 고민하는 마음에도 단잠이 올 것입니다. 코오딜리어: (독백하듯) 이 땅위의 모든 고귀한 비약들, 아직도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령스러운 모든 약초가 내 눈물을 먹고 자라나거라! 그리하여 착한 분의 고뇌를 치유해 다오! 찾아와요, 아버님을 어서 찾아와요, 겉잡을 수 없는 광기 때문에 이성을 잃고 목숨을 버리실지도 모르니까. 사자 등장. 사자: 왕비전하께 아뢰옵니다! 영국 군대가 이리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코오딜리어: 이미 알고 있다. 우리 군대도 대적할 준비가 다 되었다 (독백하듯) 아 아버님, 이 전쟁은 오로지 아버님을 위해서입니다! 아버님 때문에 프랑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는 저를 동정해 주셨어요. 공명심에 불타서 전쟁을 일으킨 건 아닙니다. 사랑, 소중한 사랑 때문예요, 늙으신 아버님의 권리 때문예요. 한시바삐 아버님을 뵙고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모두 퇴장) [ 제5장 글로스터의 성 ] 리이건, 오즈월드 등장. 오즈월드는 거너릴로부터 에드먼드에게 보내는 서찰을 지참하고 있다. 리이건: 형부의 군대는 출진했소? 오즈월드: 예, 출진했습니다. 리이건: 공작께서 직접요? 오즈월드: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출진하셨습니다. 공작부인께서 더 용맹하시더군요. 리이건: 에드먼드 백작과 올버니 공작이 집에서 무슨 의논을 하지 않았어요? 오즈월드: 안했습니다. 리이건: 그분한테 보낸 언니의 편지는 내용이 뭐죠? 오즈월드: 모르겠습니다. 리이건: 사실 그분은 중대한 용무로 급하게 떠나셨어요. 글로스터의 눈을 빼놓고서 목숨을 살려 두다니 큰 실수였어. 그자는 가는 곳마다 동정을 불러일으켜, 우리에게 창칼을 겨누게 해요. 아마 에드먼드가 떠난 것은 자기 아버지의 비참한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의 눈먼 생명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일 거예요. 또 적의 군세도 염탐할 겸. 오즈월드: 공작부인, 그럼 이 서찰을 가지고 에드먼드님의 뒤를 쫓아가야겠습니다. 리이건: 우리 군대도 내일은 출진해요. 가는 길이 위험할 테니 우리 집에 있구려. 오즈월드: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공작부인의 엄명을 받았으니까요. 리이건: 왜 언니가 에드먼드한테 편지를 할까? 당신을 통해서 말로 전해도 될 텐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나 봐. (목소리를 낮추어) 내 후사할 테니--그 편지를 좀 뜯어 봐요. 오즈월드: 마님, 그것만은--. 리이건: 언니는 형부를 사랑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래요. 일전에 여기 왔을 때도 언니는 에드먼드님에게 야릇한 눈길을 주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당신은 언니의 심복이잖아요? 오즈월드: 제가요? 리이건: 난 잘 알고 있어요. 확실히 당신은 심복이에요. 그래선데, 당신께 할 말이 있으니 내 말을 귀담아들어야 돼요. 내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에드먼드님하고는 언약이 되어 있어요. 그이에겐 언니보다는 나하고 결혼하는 것이 더 편리해요. 이쯤 말하면 잡히는 것이 있겠죠. 그러니 에드먼드님을 만나거든 이것을 전해줘요. 또 우리언니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고 언니더러 현명한 판단을 내려 단념하라고 그래요. 자 잘 가요. 그 눈먼 반역자가 있는 곳을 알아서 목을 베기만 하면 누구든지 출세를 하게 될 거예요. 오즈월드: 마님, 그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누구편인가를 보여 드릴 수 있으니까요. 리이건: 잘 가오. (두 사람 퇴장) [ 제6장 도우버 부근의 시골 ] 글로스터와 농부 복색을 한 에드거 등장. 글로스터 자살을 결심하고 있다. 글로스터: 언제쯤 그 언덕 꼭대기에 닿지? 에드거: 그 언덕으로 지금 올라가고 있어요. 자요, 이렇게 힘이 들잖아요. 글로스터: 평지 같은데 그래. 에드거: 무섭게 험한 비탈길인 걸요. 저 바다 소리가 들려요? 글로스터: 아니, 조금도 안 들리는 걸. 에드거: 그렇다면 눈이 아프시다보니 모든 감각이 둔해졌나 보군요. 글로스터: 그렇지도 몰라. 그런데 네 목소리도 달라지고 예전보다 퍽 점잖고 조리있게 말을 하는구나. 에드거: 크게 잘못 아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입고 있는 옷밖에는 없으니까요. 글로스터: 네 말씨도 좀 나아진 것 같아. 에드거: 자아 자아, 여깁니다. 가만히 서 계십쇼.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주 무섭고 어찔어찔합니다! 절벽 중간쯤에 나르고 있는 보통 까마귀와 다리가 붉은 큰 까마귀가 딱정벌레쯤밖에는 안돼 보이는데요. 그리고 절벽 중턱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회향풀을 따고 있는 사람이 있네요--. 거 참 위험한 직업도 있군! 그 사람이 제 머리통밖에는 안돼 보여요. 바닷가에서 걷고 있는 어부들도 생쥐같이 작고요. 저기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는 나룻배처럼 작게 보이고, 나룻배는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부표같네요. 바닷가에 깔려 있는 조약돌에 부딪치는 성난 파도 소리도 너무 높다 보니 들리지 않는군요. 이제 그만 내려다봐야지. 머리가 핑 돌고 눈이 어찔한 게 거꾸로 곤두박질할 것만 같네요. 글로스터: 네가 서 있는 곳에 날 세워다오. 에드거: 손을 주십쇼. 인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천길 벼랑입니다. 달빛 어리는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여기선 못 뛰어내리겠어요. 글로스터: 내 손을 놔라. 자 여기 돈주머니가 하나 또 있다. 이 속에는 가난뱅이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보석이 들어 있다. 요정과 제신들이 이것을 늘려 너에게 더 큰 행운을 주기 바란다! 잘 가거라. 나에게도 작별인사하고, 네가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게 해 다오. 에드거: 그럼 어르신네, 안녕히 계십쇼. 글로스터: (방백) 절망에 빠지신 아버님을 이렇게 우롱하는 것은 그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드리기 위해서다. 글로스터: (무릎을 꿇고) 오, 전능하신 신들이여! 지금 저는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인생의 큰 고통을 덜어버리려고 합니다. 제가 이 고통을 더 참아낼 수 있고, 또 거역할 수 없는 당신의 위대한 뜻을 순응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제 육체의 보기 싫은 잔해는 타다 남은 초같이 제물에 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에드거가 만약에 살아 있다면, 오, 그를 축복하여 주소서! 자, 그럼 잘 가거라. 에드거: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글로스터, 절벽에 뛰어내린 셈으로 넘어진다. 기절한다. 에드거는 불안에 싸인다) (방백) 사람이 스스로 제 생명을 잃고 싶을 때에는 착각으로 귀중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법. 생각하시던 곳에 가 계신 셈이라면 지금쯤은 생각하실 힘이 없어졌을 것이다. 살아계신 건가? 돌아가신 건가? (가까이 가서 다른 목소리로) 이봐요, 여보시오! 내 말 들려요? 말 좀 해봐요! (방백)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는지 모르겠구나. 아 살아계시다. (큰 소리로) 당신은 누구시오? 글로스터: 저리 가라, 날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에드거: 도대체 당신은 거미줄이오, 새털이요, 공기요? 수십 길 벼랑에 떨어졌으면 달걀같이 박살이 났을 텐데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니. 상처 하나 없고, 피도 안 흘리고, 말도 하고, 온몸이 멀쩡해요. 돛대 열 개를 이어도 당신이 몸을 던진 저 높이가 안돼요.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기적이에요. 자 말 좀 해보세요. 글로스터: 도대체 내가 떨어진 건가? 안 떨어진 건가? 에드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절벽 꼭대기에서 떨어졌어요. 위를 쳐다보세요. 아주 먼 데서 날카로운 소리로 지저귀는 종달새 모습도 보이지 않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좀 쳐다보세요. 글로스터: 으흐흐, 보고 싶어도 눈이 없어. 이 불행한 놈은 죽음으로써 불행을 끝장낼 은전조차 빼앗겼단 말인가? 비참한 사람은 자살로써 폭군의 분노를 피하고 그의 오만한 뜻을 꺾을 수 있어서 그나마도 위안이 되었건만. 에드거: 팔을 이리 주세요. 일어서세요. 어떠시죠? 다리는 어떠시고요? 서시는군요. 글로스터: 설 수 있어, 운나쁘게도 다시 설 수 있단 말야. 에드거: 이건 참 기적이에요. 절벽 꼭대기에서 당신하고 함께 있다가 간 사람은 누구죠? 글로스터: 불쌍한 거렁뱅이였어. 에드거: 이 밑에서 쳐다보니까 그놈의 눈망울이 두 개의 보름달 같았고, 코는 천 개나 되고, 뿔은 성난 바다같이 뒤틀리고 꼬불꼬불한데 그것도 여러 개가 달려 있는 것 같던데요. 틀림없이 무슨 악마일 거예요. 노인께서는 운이 좋았어요. 공정하신 신들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서 존경을 받습니다만, 그 신들이 당신을 구해 주신 거예요. 글로스터: 이제 알 것 같군. 지금부터는 고통이 "그만하면 됐다, 그만하면 됐다."하고 소리지르며 스스로 지쳐 떨어질 때까지 꾹 참을 테다. 당신이 말한 악마를 난 사람으로 알았구려. 그러고 보니 여러번 "악마가, 악마가."하고 조잘댑니다--. 그놈이 날 저곳까지 데려다 주었다오. 에드거: 너무 걱정 마시오, 진정하세요. 저기 오는 게누구지? (여러가지 꽃으로 기괴하게 몸장식을 한 리어 등장) 정신이 바로 박혔다면 저런 꼴을 하고 있진 않을 텐데. 리어: (환영을 상대로 하여) 그렇다. 내가 돈을 위조했다고 하더라도 내게 손을 대지 못할 거다. 난 왕이란 말이다. 에드거: 아, 저 모습을 뵈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리어: (환영을 상대로 하여) 왕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찌 보통 사람과 같을쏘냐. 자, 네 삯을 받아라. 저놈은 허수아비처럼 활을 쏘는구나. 화살을 힘껏 당겨 쏘라니까. 이크, 생쥐다! 쉬잇, 쉬. 불에 구운 이 치즈 조각이면 사로잡을 수 있다. 자 장갑을 던졌으니 결투를 하자. 거인하고라도 싸울 테다. 갈색의 창을 가진 무사들을 내세워라. 아, 잘도 날아간다, 매보다도 빠르군. 과녁에, 과녁에 맞았다.휴! 암호를 대라! 에드거: 향기로운 마요라나 꽃. 리어: 통과. 글로스터: 저 목소리는 귀에익은 건데. 리어: (글로스터를 발견하여) 야! 거너릴이 휜 수염이 났구나? 그것들은 개처럼 나한테 알랑수를 부리면서 검은 털도 나기 전에 내 수염에 휜 털이 생겼다고 입에 발린 소릴 했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예, 그렇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예."건 "아닙니다."건 종교적 양심에서 우러난 소린 아니었단 말야. 언젠가 비를 흠뻑 맞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온몸이 덜덜 떨렸을 때 천둥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해도 내 말을 안 들었어, 그때 그것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지, 표리부동한 것을 알았어! 그러니 그것들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담. 그것들은 내가 만능이라고 너설을 떨었지만 그 말도 생판 거짓말이라구 --. 나 역시 학질엔 꼼짝 못한다니까. 글로스터: 저 말투를 난 잘 알고 있어. 국왕폐하가 아니십니까? 리어: (왕관에 손을 대며) 그렇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디를 뜯어보나 국왕이다! 내가 노려보면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너의 목숨을 살려주마. 네 죄목은 뭐냐? 간통죄? 죽이진 않겠다. 간통 좀 했다고 죽이다니? 안될 말이지! 굴뚝새도, 그리고 작은 금피리도 내 눈앞에서 실컷 음란한 짓을 하잖은가. 재미보고 싶거든 봐라. 결국 글로스터의 서자가 정실 부인에게 태어난 내 딸들보다도 효성이 지극했다. 자 모두 실컷 흘레를 하거라! 난 병사가 필요하단 말이다. 저기 선웃음을 치는 부인을 보아라, 그 얼굴을 봐선 가랭이 사이까지 눈같이 깨끗하다는 표정으로 정숙한 척 시치미를 떼고 음탕한 이야기는 말만 들어도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지만 기실 색사에는 암내 풍기는 족제비나, 뱃구레가 터지도록 꼴을 처먹은 말보다도 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음탕하게 해악질을 한단 말이다. 저것들은 허리 위는 여자지만, 허리 아래는 반인반수의 괴물이다. 허리띠 매는 데까지는 신들의 것이지만, 그 아래는 악마의 것이다. 그곳은 지옥이다, 암흑이다, 유황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구렁텅이다.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썩어 문드러지고 있어. 에이, 더러워, 더럽다, 퉤, 퉤! 약제사야, 사향 한 온스만 다오. 내 머리를 향긋하게 하련다. 자 돈 받아라. 글로스터: 오, 그 손에 입맞추게 해 주십시오! 리어: 우선 손을 닦아야겠다. 송장 냄새가 나니까. 글로스터: (무릎 꿇고, 리어의 손에 입맞추며) 오 대자연의 걸작이 이처럼 무참히 부서지다니! 이 거대한 세계도 저렇게 무로 돌아갈 거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리어: 나는 네 눈을 잘 기억하고 있다. 사람을 홀리는 눈길로 날 흘겨보는 구나? 안될 말이지, 눈먼 큐피드야, 네가 아무리 계교를 쓰더라도 나는 여자에게 녹록하게 홀리지는 않아. 이 결투장을 읽어 봐. 그 문장을 좀 봐. 글로스터: 글자 한자 한자가 태양같이 빛나더라도 신은 보지를 못합니다. 에드거: (방백) 딴 사람을 통해 들었더라면 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만,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구나. 리어: 읽으라. 글로스터: 읽어오? 눈꺼풀밖에 없는 눈으로요? 리어: 으핫하, 정말 그렇단 말이지? 머리에는 눈이 없고, 돈주머니는 동지섣달이란 말이군? 그럼 네 눈은 구멍을 뚫렸고, 돈주머니는 밑이 빠졌다는 말이렸다. 그러나 이 세상 돌아가는 낌새는 알 수 있단 말이지. 글로스터: 그야 육감으로 압니다. 리어: 야! 그렇다면 미쳤군? 눈이 없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쯤 알 수 있다. 귀를 보란 말이다. 거기 있는 재판관이 미천한 도둑놈을 호통치는 것을 보아라. 잘 들거라. 두 사람이 자리를 바꿨다. 어느 쪽이 재판관이고 어느 쪽이 도둑놈인지 맞춰 보아라. 농군의 개가 거지보고 짖어대는 것을 본 일이 있으렷다. 글로스터: 네, 보았습니다. 리어: 그런데 거지는 개를 보고 달아났지? 거기에 관권의 위대함을 볼 수 있는 거다--. 개라도 권한만 갖고 있으면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어. 이 썩어빠진 포리놈, 그 잔인한 손을 멈춰라! 왜 그 갈보에게 매질을 하느냐? 네놈의 잔등이나 후려치지 않고, 너의 매음했다고 저 계집을 때리고 있지만 네놈이 저 계집이 탐이 나서 사타구니에 열을 올리고 있잖느냐. 고리대금업자가 재판관이 되어 사기꾼을 교수형에 처하고 잇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 크나큰 악덕이 옷 틈새로 보이지만 법복이나 털가죽 외투를 입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감춰져. 죄악이 황금의 투구를 입히면 날카로운 법률의 창도 상처를 못 내고 부러지기 마련이다. 죄악을 누더기로 싸놓으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도 그것을 꿰뚫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죄지은 사람은 없어, 한 사함도 없어, 없는 거야. 내가 보증할 테다. 친구여, 내 말을 믿어. 난 고소인의 입을 틀어막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 (글로스터에게) 유리눈이라도 해 박지 그래, 그래서 천박한 모사꾼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체해봐. 자, 자, 자, 자! 장화를 좀 벗겨다오. 좀더 세게, 좀더 세게! 그렇지. 에드거: (방백) 아, 이치에 맞는 말과 맞지 않는 말이 뒤엉켜 있군! 광기 속에도 이성이 살아있어! (에드거도, 글로스터도 견디다 못해 흐느낀다) 리어: 나의 불행을 그대가 울어 준다면 내 눈을 주겠다. 난 그대를 잘 알고 있다. 이름이 글로스터지. 어쨌든 참아야 돼. 우린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어. 그대도 아다시피 우리가 이 세상 공기를 처음 들이마실 때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대에게 일러두니, 잘 들어두게나! 글로스터: 아아, 어쩌먼 이럴 수가! 리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바보들만 있는 큰 무대에 나온 것이 슬퍼서 우는 거야. (들꽃의 화관을 벗으며) 희한한 모자다! 헝겊으로 군마의 발을 싸매는 것을 교묘한 전술이겠는 걸. 어디 시험해 봐야지. 사위놈들을 살금살금 습격하는 거다,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라! 한 신사, 코오딜리어의 시종들과 같이 등장. 리어를 영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신사: 오, 여기 계시다. 꼭 붙잡아요. 폐하, 사랑하는 따님께서 --. 리어: 날 구해 줄 사람은 없느냐? 뭐 포로가 됐어? 난 운명의 장난감이 되게 태어났구나. 날 홀대하지 말라. 보상금을 줄 테다. 외과의사를 불러다오.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다. 신사: 무엇이든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리어: 날 돕는 자는 없는가? 난 외토린가? (눈물을 흘리며) 사내 대장부를 울보로 만드는 군. 내 눈을 뜰에 물뿌리는 물단지로 삼으려는 심보군, 가을 꽃밭의 먼지를 잠재우게 말이야. 나는 멋지게 죽고 싶다. 새신랑같이 용감하게 죽을 테다. 그렇다! 유쾌하게 말이다. 이것 봐, 나는 왕이다. 다들 아느냐? 신사: 예, 왕이십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리어: 그렇다면 아직도 희망이 있구나. 자, 날 잡고 싶거든 재빨리 뛰어와야 되느니라. 자 자 자. (리어 달려간다. 시종들이 쫓아간다) 신사: (방백) 하잘것없는 사람도 저렇게 되면 가련하기 짝이 없는데, 국왕의 처지로 저렇게 되시니 말문이 막히는 구나! 그러나 폐하, 또 한 분 따님이 계십니다. 다른 두 따님들 때문에 천륜은 모든 사람의 저주를 받았습니다만 이 따님만은 그 불명예를 씻으실 분이십니다. 에드거 등장. 에드거: 이보십쇼, 안녕하십니까? 신사: 안녕하시오, 무슨 일이죠? 에드거: 혹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신사: 그건 틀림없어요.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귀머거리가 아니면 누구나 다 그 소문을 들었을 거요. 에드거: 그건 그렇고 미안하오만 저편 군대는 어디까지 진군해 왔습니까? 신사: 가까이 와 있소,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고 있으니 머잖아 주력부대가 눈에 띄게 될 것이오. 에드거: 고맙습니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신사: 왕비전하께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여기 계시지만 그 군대는 진군중이오. 에드거: 고맙습니다. (신사퇴장. 글로스터 무릎 꿇고 기도 드린다) 글로스터: 자비로우신 신들이여, 이 목숨을 당신이 원하실 때 거두소서. 다시는 당신이 허락하시기 전에 죽을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여주옵소서! 에드거: 아버님, 훌륭한 기도이십니다. 글로스터: 한데 젊은이,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에드거: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불행하게도 모진 풍파를 겪어 온 탓으로 남의 슬픔을 보면 동정이 갑니다. 손을 주십쇼. 쉬실 곳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글로스터: 진정으로 감사하오.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 그대에게 내리기를 바라오! 오즈월드 등장. 오즈월드: 현상붙은 수배자구나! 운이 터졌구나! 눈알이 없는 네 대갈통은 날 출세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칼을 뽑는다) 불행한 늙은 반역자야, 이제 각오해라. 칼을 뺐다. 네 목숨을 날리고 말 것이다. 글로스터: 고마운 분이시군. 자, 그 손으로 힘껏 찌르시오. (에드거 끼어들며 글로스터를 비호하고 가로막는다) 오즈월드: (격분하여) 무례한 촌뜨기야, 무엇 때문에 반역자로 공포된 놈을 감싸느냐? 비켜, 비키지 않으면 너도 두 동강 낼 테다. 그 놈의 팔을 놓아. 에드거: 그 정도의 이유로는 못 놓겠다. 오즈월드: 놓아, 이놈아.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에드거: 여보쇼, 가던 길이나 그냥 가지 그래, 이 불쌍한 사람은 보내구. 내가 그따위 협박 공갈에 넘어갈 놈이라면 2주 전에 벌써 저승길에 올랐을 게다. 안된다, 이 노인 곁에 얼씬 해선 안돼. 비키라구, 안 비킨다면 네놈의 대갈통이 단단한가, 이 몽둥이가 단단한가 어디 한번 겨누어 보자. 난 한다면 하고야 만다. 오즈월드: 뭐라구, 이 똥 같은 놈아! (두 사람 싸운다) 에드거: 네 앞니를 몽땅 뽑아놓겠다. 자 덤벼라, 찌르겠으면 찔러봐. (오즈월드 쓰러진다) 오즈월드: 이놈, 네놈 손에 내가 죽는구나. 야, 내 돈주머니를 받아라. 편안히 살려거든 내 시신을 묻어다오. 그리고 내 몸에 지니고 있는 편지를 글로스터 백작 에드먼드님에게 전해다오. 영국군 진영에 가서 찾으면 안다. 아아, 때아닌 죽음을 당하는 구나! 이렇게 죽을 줄이야! (숨이 끊어진다) 에드거: 난 널 잘 안다--. 못된 안주인에 충성을 바쳐 악한 일에 단단히 한몫을 한 놈이렸다. 글로스터: 아니, 그자가 죽었나? 에드거: 앉으세요. 아버님, 안심하세요. 저놈의 주머니를 뒤져 보죠. 저자가 말하는 그 편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니까요. 죽었군. 망나니 손에 죽게 못한 것이 억울하다. 봉함이여, 용서하여 다오. 예의범절이여, 우리를 흉보지 마라. 적의 속셈을 알려면 적의 심장이라도 쪼개야 할 판에, 편지쯤 뜯어보기로서니 어쨌단 말이냐? (편지를 읽는다) 우리가 서로 굳게 맹세한 언약을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그 사람을 해치우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신의 결심만 확고하다면 시간과 장소는 손쉽게 마련될 거예요. 만약 그 사람이 개선하여 돌아온다면 만사가 끝장입니다. 저는 죄수가 되고, 그의 잠자리는 저의 감옥이 될 것입니다. 몸서리나는 그 잠자리에서 저를 구해 주세요. 수고하신 보답으로 그 잠자리를 당신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당신의 아내라 불리고 싶은 사랑하는 종 거너릴 올림. 오, 여자의 욕정은 한이 없구나! 심덕있는 남편의 목숨을 빼앗고, 그 대신 내 동생을 남편으로 삼으려는 흉계구나! 여기 모래 속에다 널 파묻어 주마, 남의 목숨을 노리는 색정꾼들의 더러운 심부름꾼아. 적당한 때가 오면 이 추악한 편지를 모살을 당할 뻔했던 공작에게 보여 깜짝 놀라게 하겠다. 너의 최후의 꼬락서니와 너의 더러운 임무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글로스터: 폐하께선 실성하셨는데 내 하찮은 목숨은 얼마나 모질기에 이렇게 엄청나게 큰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버티고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나도 미치는 게 낫겠다. 그렇게 되면 슬픔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고, 헝클어진 마음에 불행도 모를 것이 아닌가. (먼 데서 북소리) 에드거: 손을 이리 주세요. 먼 데서 북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친절한 사람에게 맡겨 드릴 테니, 아버님, 이리로 오세요. (두 사람 퇴장) [ 제7장 프랑스 군진영의 막사 ] 리어, 침상에서 자고 있다. 조용한 음악소리. 한 신사와 다른 사람들이 시중들고 있다. 코오딜리어, 켄트, 전의 등장. 코오딜리어: 오 켄트 백작님, 얼마나 오래 살아 애를 쓰면 백작님의 충정에 보은할 수가 있을까요? 그 신세를 갚기엔 제 수명이 너무나 짧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켄트: 왕비전하,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과분합니다. 지금 아뢰온 보고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살을 붙이지도 깎지도 않았습니다. 코오딜리어: 옷을 갈아 입으시죠. 그 옷은 지난날의 일을 되새겨 줍니다. 어서 벗어 버리세요. 켄트: 왕비전하, 용서하십시오. 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여태껏 해온 저의 계획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저를 아는 척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오딜리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의에게) 폐하의 용태는 어떠하시오? 전의: 왕비전하, 아직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코오딜리어: 오 자비로운 신들이시여, 학대 받은 마음의 큰 상처를 고쳐 주소서! 자식들의 불효로 해서 망가지고 뒤엉클어진 아버님의 심금을 다시 바로잡아 주소서! 전의: 폐하를 깨워 드릴까요? 충분히 주무셨을 줄 압니다. 코오딜리어: 전의 판단에 맡깁니다, 생각대로 하세요. 의관은 갈아입으셨나요? 신사: 예, 바꾸어 입으셨습니다, 왕비전하. 깊이 잠드신 사이에 새옷을 입혀 드렸습니다. 전의: 왕비전하, 폐하를 깨워 드릴 때 옆에 계셔 주십시오. 틀림없이 정신이 안정되셨을 겁니다. 코오딜리어: 좋아요. 국왕의 의관을 입은 리어, 침상에서 잠든 채로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온다. 조용한 음악. 전의: 더 가까이 오십시오. (안을 향해) 음악소리를 높여라! 코오딜리어: (리어의 침상 가까이로 가서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오 아버님, 저의 입술에 아버님을 회복시켜 드릴 영약이 묻어 있어 이 키스로 두 언니가 아버님께 입힌 엄청난 상처를 낫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켄트: 심성이 어지시고 효성이 지극하신 왕비님이로다! 코오딜리어: 설사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저 흰머리를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텐데! 어찌 이 얼굴이 그 사나운 비바람을 맞으셔야 했나요? 천지를 진동하는 그 무서운 천둥과 벌판에서 마주쳐야 했나요? 번개가 처절하게 하늘을 가르는 오밤중에 말예요? 밤에 잠도 못 주무시고--목숨을 걸고 선 파수병처럼요? 이렇게 희고 엷은 맨머리를! 자기를 물어뜯은 원수네 집 개라도 그런 밤에는 난로곁에서 불을 쬐게 내버려 두었을 거예요. 그런데 불쌍한 아버님은 돼지나 거렁뱅이와 함께 오두막집 곰팡내 나는 지푸라기 속에서 주무셨다니 아, 끔찍해라! 그래도 목숨과 정신을 잃지 않으신 것이 기적입니다. 잠이 깨셨나봐요. 말씀해 보시지요. 전의: 왕비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코오딜리어: 폐하, 어떠하시옵니까? 폐하, 기분은 어떠시옵니까? 리어: 날 무덤에서 깨우다니 무엄하다. 너는 천당에 사는 영혼이구나. 그러나 난 지옥의 불바퀴에 결박되어 있다. 눈물을 흘리면 녹은 납처럼 화상을 입는단 말야. 코오딜리어: 폐하, 잘 알아보시겠습니까? 리어: 당신은 혼령이군. 언제 죽었소? 코오딜리어: 정신을 회복하시려면 아직도 아직도 멀었어! 전의: (위로하며) 아직도 잠이 덜 깨셨습니다. 잠시 동안 이대로 계시도록 하십시오. 리어: (사방을 휘둘러보며) 내가 어디 있었지? 지금은 어디 있고? 이게 햇빛인가? 난 어이없이 속았다. 남이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을 본다면 난 불쌍해서 죽고 싶을 거다.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것이 내 손인가? 장담할 수가 없구나. 어디 보자. 바늘로 찌르면 아프고.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구나! 코오딜리어: 아 절 좀 보세요, 아버님. 손을 제 위에다 얹으시고 절 축복해 주세요. (코오딜리어 무릎을 굽히자, 리어도 굽히려 한다. 그녀 이를 제지한다) 아니에요, 무릎 꿇지 마세요. 리어: 제발 날 조롱하지 마오. 난 매우 못나고 어리석은 늙은이오. 여든 살이 넘었소, 한 시간이라도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소. 솔직히 말해서 난 제정신이 아닌가 보오. 당신이나 이분도 알 것 같은데 아리송해요. 도대체 여기가 어디오? 통 생각이 안 나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누구 옷인지 모르겠소. 어젯밤은 어디서 잤는지 알 수가 없소. 날 비웃지 마오, 확실히 이 부인은 내 딸 코오딜리어같이 생각되는구려. 코오딜리어: 그래요, 코오딜리어예요. 코오딜리어라구요! (코오딜리어 침상에 매달리며 흐느껴 운다) 리어: 눈물을 흘리고 있니? 정말 그렇군. 제발 울지 마라. 날 보고 독약을 마시라면 마시마. 넌 이 아비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네 언니들은 날 학대했어. 넌 날 미워해도 할 말이 없다만 그년들은 그럴 수 없는데도 말이다. 코오딜리어: 아니에요, 그럴 이유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리어: 지금 난 프랑스에 있느냐? 켄트: 폐하의 영토 안에 계시옵니다. 리어: 날 숙일 셈인가. (코오딜리어 절망하여 탄식한다) 전의: (위로하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왕비전하. 보다시피 큰 어려움은 이제 걷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되새기시게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시지오. 좀더 안정되실 때까지 조용히 계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코오딜리어: 폐하, 안으로 들어가시죠. 리어: 내 잘못을 참아다오. 제발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용서해 다오. 난 늙고 어리석어. (켄트와 신사만 남고 모두 퇴장) 신사: 코온월 공작이 피살되었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켄트: 그건 확실하오. 신사: 그 군대의 지휘자는 누구죠? 켄트: 클로스터의 서자랍니다. 신사: 소문에는 추방당한 아들 에드거가 켄트 백작과 같이 독일에 있다고 합니다만. 켄트: 소문을 믿을 수가 없어요. 조심할 때가 왔어요. 적군이 가까이까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신사: 이 싸움은 혈전이 될 것 같소이다. 안녕히 계십시오. (퇴장) 켄트: 오늘의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내 필생의 계획도 그 성패가 판가름날 것이다. (퇴장) [ 제5막 ] 네가 축복을 해달라면 난 무릎을 꿇고 너의 용서를 빌련다. 그렇게 살자꾸나,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 이야기를 하고, 금빛 나비를 보고 웃고, 그 가엾은 자들이 와서 궁중 소식을 조잘대는 것을 들으며 말이다. - 3장 리어왕의 대사 중에서 [ 제1장 도우버 근처의 영국군 진영 ] 고수, 기수를 거느리고 에드먼드, 리이건, 장교들, 병졸들 등장. 에드먼드: (장교에게) 공작한테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계획대로 실시하실 작정인지 아니며 다른 사정 때문에 방침을 변경하셨는지. 공작께서는 변덕이 심하시고 자기가 한 일을 잘 뉘우치시니 확실한 결심을 알고 와야 한다. (명령을 받아 장교 퇴장) 리이건: 언니의 가솔이 틀림없이 변을 당했나 봐요. 에드먼더: 그런지도 모릅니다. 공작부인. 리이건: 그런데 에드먼드님, 내가 당신께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시지요? 말씀해 보세요--사실대로--솔직히 말씀해주세요--언니를 사랑하시죠? 에드먼드: 그저 경애하는 마음입니다. 리이건: 그래도 형부만이 드나들 수 있는 금단의 침소에 드신 적은 없어요? 에드먼드: 그건 지나친 억측입니다. 리이건: 그래도 걱정이 돼요, 언니와 하도 가까우시니. 언니의 마음도 몸도 가슴에 품으신 게 아니에요? 에드먼드: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만 공작부인,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리이건: 언니를 가만두지 않을 테야, 부탁이에요, 언니하고 가까이 하지 마세요. 에드먼드: 걱정 마십쇼. 공작과 부인께서 오십니다! 고수, 기수를 앞세우고 올버니, 거너릴, 병졸들 등장. 거너릴: (두 사람의 모습을 모고 금세 알아차리고 방백) 동생 때문에 그이와 내가 방해 받느니 차라리 이번 전쟁에 지는 게 낫겠다. 올버니: 사랑하는 처제를 만나게 되어 반갑소. (에드먼드에게) 듣자하니 리어왕은 막내딸한테 갔다 하오. 우리나라의 학정을 원망하는 도당들도 따라갔다는 소식이오. 난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힘써 싸울 수 없는 사람이오. 이번 일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소. 프랑스 왕은 국왕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이오. 리어왕과 그 일당을 상대로 싸운다는 건 또 다른 문제요, 그들은 그럴 만한 명분을 갖고 우리와 싸우려는 것이니까. 에드먼드: (냉소하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리이건: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씀을 들먹이십니까? 거너릴: 힘을 합해서 적을 무찌릅시다. 이제 와서 사사로운 일로 티격태격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올버니: 그런 전쟁에 경험 많은 장교들과 작전을 짭시다. 에드먼드: 공작님 막사로 곧 가겠습니다. 리이건: 언니, 나와 같이 가요. 거너릴: 난 싫다. 리이건: 같이 가야 돼요. 어서요. 거너릴: (방백) 흥, 그 꿍꿍이 속을 모를까봐! 그래 가겠다. 그들이 나가려 할 때 변장을 한 에드거 등장. 에드거: (가장 늦게 퇴장하려는 올버니에게) 공작님께서, 이렇게 천한 사람이지만, 들어 주신다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올버니: 곧 따라가겠소. (올버니와 에드거만 남고 모두 퇴장) 말을 해봐라. 에드거: 전쟁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 서찰을 보십시오. 만약 공작님께서 승리를 하시거든 나팔을 불어서 서찰을 가져온 이 사람을 불러 주십시오. 비록 이 사람이 비천하게 보일 것입니다만, 이 서찰의 사연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어떤 상대하고라도 이 칼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만약 싸움에 지시면 공작님의 운수도 끝장이 나고, 따라서 음모도 끝날 것입니다.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올버니: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에드거: 그럴 순 없습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전령을 통해 불러 주십시오,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올버니: 그러면 잘 가거라. 네 편지는 읽어볼 테다. (에드거 퇴장) 에드먼드 다시 등장. 에드먼드: 적군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단단히 대비하십시오. 여기 착실한 척후병이 정찰한 적의 병력과 군비에 관한 보고서가 있습니다. (서류를 건넨다)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올버니: 즉시 출전하리라. (퇴장) 에드먼드: (냉소적인 웃음을 띄우며) 난 두 자매에게 다 사랑을 맹세했다. 둘이서 서로 시샘하는 꼴이 독사에 물린 사람이 독사를 보는 눈초리와 같구나. 둘 중에 어느 쪽을 골라 잡을까? 둘다? 아니, 한쪽만? 둘다 집어치울까? 둘다 살아 있게 되면 꿩잃고 매잃은 셈이 될 거야. 과부를 내것으로 만들면 언니되는 거널리는 붙통이 터져 미칠 테지. 그렇지만 그녀의 남편이 살아 있는 한 내 목적을 성공시키긴 어렵단 말이다. 그녀는 지금은 전쟁을 위해서 그 남편의 힘을 이용해야만 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남편을 없애고 싶어하는 그 여자더러 곧바로 해치울 간계를 꾸미라고 그래야지. 공작은 리어와 코오딜리어에 자비를 베풀려고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그들이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해라! 용서가 어디 있어! 지금 내 입장으로선 시비나 따지고 있을 게 아니라, 내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퇴장) [ 제2장 영국과 프랑스 진영 사이의 평야 ] 안에서 경종소리, 고수, 기수와 함께 리어, 코오딜리어, 병졸들을 등장했다가 무대를 지나 퇴장. 에드거와 글로스터 등장. 에드거: 아버님, 여기 이 나무 그늘에서 좀 쉬세요. 정의의 쪽이 승리하도록 기도하시고요.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되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글로스터: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에드거 퇴장) 안에서 경종소리와 프랑스군이 퇴각하는 소리. 에드거 다시 등장. 에드거: 달아나야 돼요, 아버님. 손을 주세요, 저리로 가요! 리어왕께서 패하시고, 따님과 함께 포로가 됐어요. 절 붙잡으세요. 자, 오세요. 글로스터: 이 이상 더 못 가.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소. 에드거: 아니, 또 자결하시려고 하십니까? 사람이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나 이 세상을 하직할 때나 다 마음대로 안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참아야 해요.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자 가십시다. 글로스터: 하긴 그래. (두 사람 퇴장) [ 제3장 도우버 근처의 영국군 진영 ] 에드먼드 승자가 되어 고수와 기수를 대동하고 등장. 뒤따라 리어와 코오딜리어는 포로가 되어 등장. 기타 병졸들, 부대장 등장. 에드먼드: 장교들 몇이서 이 포로들을 저리 데리고 가라. 저 포로들을 재판할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엄중히 감시해야 한다. 코오딜리어: 최선의 뜻을 가지고서도 최악의 운명을 맞이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닙니다. 갖은 학대를 당하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입니다. 저 혼자라면 허망한 운명의 여신의 찌푸린 얼굴을 무섭게 노려보며 대들 수도 있습니다만, 아버님의 딸들, 제 언니들을 만나 보시지 않겠습니까? 리어: 아냐, 아냐, 아냐, 아니다! 자 감옥으로 가자. 거기서 우리 둘이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노래 부르며 지내자. 네가 축복을 해달라면 난 무릎을 꿇고 너의 용서를 빌련다. 그렇게 살자꾸나.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 이야기를 하고, 금빛 나비를 보고 웃고, 그 가엾은 자들이 와서 궁중 소식을 조잘대는 것을 들으며 말이다. 그리고 그들 얘기에 끼여들어--누군 총애를 얻고 누군 잃고, 누군 득세하고, 누군 몰락했는지 얘기해 보자--우리가 신의 밀사이기나 한 것처럼 인생의 신비를 아는 체 해보자. 비록 우리가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옥에 있더라도 달의 조화인 밀물과 썰물과 같이 무상한 고관들의 흥망성쇠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살자꾸나. 에드먼드: 포로들을 데리고 나가라. 리어: 코오딜리어야, 너 같은 희생의 제물에 신들께서 향을 피워 주실 거다. 내가 너를 꼭 붙잡고 있는 거지? 우리 두 사람은 떼어 놓으려거든 하늘에서 횃불을 훔쳐가지고 와서 굴에서 여우를 내몰 듯이 불을 지펴 우릴 쫓아야 한다. 눈물을 닦아라. 그것들이 우릴 울리기 전에 그것들은 염병에 걸려 살과 피부가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것들이 굶어죽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다. 자, 가자. (감시병이 리어와 코오딜리어를 데리고 퇴장) 에드먼드: 부대장, 자 이리 와서 내 말을 듣거라. (쪽지를 주며) 이 쪽지를 가지고, 저 두 사람을 쫓아서 감옥으로 가라. 널 한 계급 승진시키기로 했다. 이 쪽지에 지시된 대로 네가 한다면 넌 행운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사람은 시류를 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칼을 찬 군인에게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어. 이번에 네가 맡길 중대한 임무에 대해서 캐물을 필요는 없다. 명령대로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딴 방법으로 노력해서 출세할 것이냐, 둘 중의 하나만 답하라. 부대장: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에드먼드: 그럼 당장 실행하라. 그리고 일이 끝나면 행복이 널 기다릴 거다. 알아듣겠느냐?--곧 착수하라. 내 지시대로 하렸다. 부대장: 전 짐수레나 끌고 말린 귀리나 먹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뭣이든지 하겠습니다. (퇴장) 트럼펫의 화려한 취주. 올버니, 거너릴, 리이건, 장병들 등장. 올버니: (에드먼드에게) 백작은 오늘 공의 혈통의 용맹함을 보여 주었소, 무운도 그대 편을 들었고. 오늘 전투에서 우리의 적편에선 두 사람을 포로로 했으니 말이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백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 그들의 처지와 우리의 안전을 다같이 생각해서 공평한 처리를 해 달라는 것이오. 에드먼드: 저는 비참하게 된 저 늙은 왕을 적당한 처소에 유폐하여 감시인을 붙여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은 고려이어서 민심을 끌기에 알맞고 왕이라는 칭호까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민중의 동정이 그편으로 쏠릴 뿐 아니라 우리가 징집하여 명령하고 있는 병사들까지도 우리에게 창끝을 돌릴 염려조차 있습니다. 왕과 같이 프랑스 왕비도 감금했습니다. 이유는 같습니다. 내일이나 또는 그 이후에 공작님께서 재판을 하신다면 언제든지 출두하게끔 조치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친구를 잃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정당한 전쟁일지라도 전투가 치열하고 부상이 심하다보면 전쟁을 저주하기 마련이죠. 코오딜리어와 그 부친의 문제는 다른 장소에서 논함이 옳을 줄 압니다. 올버니: 미안하지만 나는 이번 전쟁에 있어 백작을 나의 부하로 생각하고 있소, 형제 지휘관으로는 생각지 않아요. 리이건: 그 자격은 제가 백작에게 드리겠어요. 형부는 그런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제 의향을 물어보셔야 하잖아요? 그분은 나의 군대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날 대신하는 지위와 신분을 위임받은 분입니다. 나와는 이토록 가까운 사이라 형제라 불러도 무관하리라 생각되어요. 거너릴: 그렇게 흥분하지 마라! 백작은 네가 자격을 주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의 천성으로 그만한 높으신 자격을 가지신 분이야. 리이건: 내가 준 권리로 해서 최고의 권력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잇는 거예요. 올버니: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남편이라도 삼는다면. 리이건: 농담이 진담이 도리지 누가 알아요. 거너릴: 이것 봐, 잘못 봤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눈은 사팔뜨긴가 보다. 리이건: 언니, 난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결기를 긁어 대거리했을 거예요. (에드먼드에게) 장군, 난 당신에게 내 병사들, 포로들, 그리고 전재산을 다 바치겠어요. 당신 마음대로 처분하세요. 그리고 이 몸도요. 성도 당신 것이에요. 난 이 자리에서 당신을 나의 군주로, 나의 남편으로 삼을 것을 온 세사에 공표하겠어요. 거너릴: 그이하고 재미보겠다 이 말이지? 올버니: 당신 마음대로 막을 수는 없는 링이오. 에드먼드: 공작님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올버니: 뭐라고? 사생아가, 내가 왜 못해. 리이건: (에드먼드에게) 어서 북을 올리세요. 내 전권이 당신의 것이 됐다는 것을 밝히세요. 올버니: 잠깐 기다려라. 할 얘기가 있다. 에드먼드, 대역죄로 널 체포한다. 동시에 (거너릴을 가리키며) 이 금박이 한 뱀도. (리이건에게) 처제, 그대의 요구에 대해서는 내 아내를 위하여 반대하겠소. 내 아내는 이자와 재혼할 언약이 돼 있소. 그녀의 현재의 남편으로서 그대의 구혼을 어찌 묵인할 수 잇겠소. 재혼을 하고 싶거든 나한테 청혼을 하오. 내 아내는 벌써 약속이 된 몸이니까. 거너릴: 얼빠진 소리 그만둬요! 올버니: 글로스터, 넌 무장을 하고 있지. 나팔을 불게 하라. 네가 범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악하고 명백한 갖은 반역죄를 증명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너의 결투 상대가 되겠다! (장갑을 땅에 던지다) 이 칼로 네놈의 심장을 찔러 방금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네가 악한 놈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입에 안 댈 것이다. (이 이전부터 리이건은 복통을 일으킨 것처럼 보였으며 이때 고통이 심해진 상태다) 리이건: 아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파! 거너릴: (방백) 그렇지 않다면 약인들 믿을 수 있겠어? 에드먼드: 자, 내 대답은 이거다! (장갑을 땅에 던진다) 날 역모자라고 입정을 놀린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놈이야말로 욕설을 떠는 거짓말쟁이다. 나팔을 불어서 그놈을 불러내라. 나한테 달겨드는 자가 당신이건--어떤 놈이건--싸워서 내 진실과 명예를 지켜 보이겠다. 올버니: 여봐라, 전령! 에드먼드: 전령, 야, 전령! 올버니: 네 자신의 용기만을 믿어라. 네 군사들은 전부 내 이름으르 소집했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다 해산시켰다. 리이건: 아 아퍼라, 아 가슴이. 올버니: 몹시 아픈가 보다. 내 군막으로 데려가라. (사람들에 이끌려 리이건 퇴장) 전령 등장. 전령, 이리오라--나팔을 불게 하라--이것을 크게 읽어. (트럼펫 소리) 전령: (읽는다) 우리 군에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글로스터의 백작이라고 칭하는 에드먼드에 대하여 대역죄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자는 세 번째 나팔소리가 날 때까지 출두하라. 에드먼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전에 응하기로 하였노라. (제1의 트럼펫 소리) 한 번 더! (제2의 트럼펫 소리) 또 한 번! (제3의 트럼펫 소리) 안에서 응답하는 트럼펫 소리. 나팔수를 앞세운 에드거 무장하고 등장. 올버니: (전령에게) 나팔소리를 듣고 왜 나왔는가를 물어 보아라. 전령: 당신은 누구요? 이름은? 신분은? 왜 나팔소리를 듣고 나왔소? 에드거: 반역의 이빨에 물어뜯기고 벌레가 파먹어서 내 이름은 없어졌소이다. 그러나 내가 싸우려는 자 못지않게 나도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오. 올버니: 그 상대자란 누군가? 에드거: 글로스터 백작 에드먼드란 자가 누구냐? 에드먼드: 바로 나다. 할 말이 뭐냐? 에드거: 칼을 배라, 내 말이 너의 비위를 건드렸다면 어디 그 칼로 너의 정의를 증명하라. (칼을 빼어, 높이 쳐든다) 자, 칼을 빼겠다, 보아라, 나의 명예와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기사의 특권으로 너에게 도전한다. 네가 아무리 힘이 세고, 지위가 높고, 젊고,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또 네가 승승장구 승리의 칼을 찼고, 새로운 행운의 손에 거머쥐었고 또 용기와 담력이 있다 할지라도 넌 모반자다. 네놈의 신과 형제와 부친을 배반했고, 여기 계신 고명하신 공작님의 목숨을 노렸다. 머리끝에서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얼룩 점박이 두꺼비같이 더러운 반역자다. 만약 네가 그헐지 않다고 방패막이를 한다면 이 칼, 이 팔, 그리고 나의 용기가 네놈의 심장에 바람구멍을 내고 거기다 대고 거짓말쟁이라고 소리치겠다. 에드먼드: 도리를 따지자면 응당 네놈의 이름을 물어야 할 것이다만 네놈의 풍모가 준수하고 용감해 보여 또한 말투가 천한 집에서 자란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기사도에 의하면 네놈의 정체를 모르니 당연히 이 결투를 거절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싸우기로 작심했다. 반역자의 오명을 네놈 머리에다 쏟아붓겠다. 지옥같이 가증한 거짓말을 네놈의 가슴에 올려놓고 짓뭉개 버리겠다. 그러니 거짓말은 네놈의 가슴을 스쳐가기만 하고 상처 하나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칼로 네 심장을 찔러 오명을 그곳에 영원히 새겨두겠다. 나팔을 불어라! (경종소리. 두 사람 싸운다. 에드먼드 쓰러진다) 올버니: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 거너릴: 글로스터 백작님, 이건 음모예요. 기사도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자와 결투할 의무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지신 것이 아니에요. 계략에 걸려 속은 거예요. 올버니: 입을 닥쳐, 이 여자야, 그렇지 않으면 이 편지로 그 입을 틀어막겠다.--(호주머니에서 이전에 받아둔 밀서를 꺼낸다. 에드거 쓰러진 에드먼드를 또 베려고 한다. 올버니가 이를 제지한다) 잠깐 기다려 주오--. (거너릴에게) 그 죄 이를 바 없는 악한 여자야, 네 죄악을 읽어 봐라. (거너릴의 코 앞으로 밀서를 갖다 댄다. 그걸 거너릴 나꿔채 찢으려 하다) 안돼, 찢다니, 이 여자야! 그 편지를 알긴 아는 모양이구나. (에드먼드에게 밀서를 건넨다) 거너릴: 그래요, 설사 그러면 어때요--내가 이 나라의 국법이지, 당신이 아니잖아요? 누가 감히 날 탄핵해요? 올버니: 참 요망한 계집이로군! 이 밀서를 알고 있느냐? 거너릴: 알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퇴장) 올버니: 뒤따라가봐, 반미쳤나 보다. 진정시켜라. (장교 퇴장) 에드먼드: 당신이 힐책한 죄의 조목조목 내가 다 저질렀소. 그 외에도 많은 죄를 범했소. 언젠가는 밝혀질 날이 오겠지. 흐르는 세월과 함께 나도 사라져 버릴 몸. 그러나 운수 좋게 날 때려 눕힌 사람은 대관절 누구요? 만약 당신이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용서하리다. 에드거: 자 이제 서로 화해하자. 에드먼드, 내 혈통은 너만 못지 않다. 만약 내 혈통이 너보다 우월하다면 너는 내게 막중한 죄악을 저지른 셈이다. 내 이름은 에드거, 네 아버지의 아들이다. 신의 공평하시다. 우리의 의롭지 못한 쾌락은 신이 우릴 벌하시는 도구다. 어둡고 음란한 침실에서 너를 만든 벌로 아버지는 두 눈을 잃으셨다. 에드먼드: 형님 말씀이 옳아요, 그대로예요. 인과응보의 수레 바퀴는 한 바퀴 돌아서 내가 이 지경이 되었어요. 올버니: (에드거의 손을 잡으며) 자네의 몸가짐만 보고서도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제임을 알았네. 자네를 이 가슴에 껴안고 싶네. 만약 자네나 자네 부친을 조금이라도 미워했다면 내 가슴은 후회로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걸세. 에드거: 공작님, 잘 알고 있습니다. 올버니: 그런데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나? 어떻게 자네 부친의 불행을 알았지? 에드거: 제가 그 불행을 돌봐 드렸습니다. 때문에 간단히 말씀 여쭙겠습니다. 그리고 얘기가 다 끝날 때, 아 이 심장이 차라리 터졌으면 합니다! 절 체포하라는 잔인한 포고문 때문에 포졸들이 제 뒤를 추격해 왔습니다--이, 생의 애착은 끈질긴가 봅니다!--그래서 생각해 낸 것에 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누더기를 입고 미친 거지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꼴로 아버님을 만났을 때 그분은 보석 같은 눈알을 잃고 그 눈구멍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더군요. 그후부터 길벗이 되어 부친의 손을 이끌고 거지노릇도 하면서 절망에서 그분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갑옷을 입게 된 약 반시간 전까지는 제 정체를 아버님에게 밝히지 않았습니다--참 그런 생각이 어리석었지요! 그런데 이번 결투에 웬일인지 자신이 서지 않아 아버님의 축복을 빌고저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의 허약한 심장은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 속에서--무서운 충격에 견디기 어려우셨던지--웃음 띄운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에드먼드: 형님의 얘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젠 저도 참다운 인간이 되렵니다. 얘기를 더 계속해 줘요. 얘기가 더 있을 것 같군요. 올버니: 얘기가 더 있다면 더 슬픈 얘기겠지, 이제 그만하게. 들은 얘기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져 못 견디겠으니. 에드거: 슬픔을 못 참는 사람들에게는 얘기가 여기서 끝난 것 같이 생각될 겁니다. 그러나 얘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시면 지금까지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의 별세를 슬퍼하고 울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저의 비참한 몰골을 보고 처음엔 저를 피하려고 했지만 몹시 슬퍼하는 절 알아보고 그 억센 두 팔로 제 목을 감고선 하늘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우시더니 제 아버님의 유해를 얼싸안고 리어왕과 자기 자신에 관한 슬픈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슬픈얘기는 또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나 슬픔에 겨워 숨이 넘어가는 듯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두 번째 나팔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까무러친 그분을 거기다 둔 채 이리로 왔습니다. 올버니: 그 사람은 누구였나? 에드거: 켄트 백작, 추방된 켄트 백작입니다. 변장을 하고 원수같이 생각해야 할 왕을 쫓아다니면서 노예도 못할 여러 가지 힘든 시중을 들어왔습니다. 피묻은 칼을 들고 한 신사 등장. 신사: 큰일, 큰일났습니다! 오, 큰일났습니다! 에드거: 무슨 일이냐? 올버니: 어서 말하라! 에드거: 그 피묻은 칼은 웬일인가? 신사: 아직도 따뜻해서 모락모락 김이 납니다. 지금 막 가슴에서 뺀 칼인데--어이구, 돌아가셨습니다. 올버니: 누가 죽었어? 어서 말해! 신사: 부인이옵니다, 공작부인께서요. 또 공작부인께서는 자기 여동생을 독살했다고 자백하셨습니다. 에드먼드: 난 두 자매와 부부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세 사람이 같은 순간에 결혼을 해야 되겠구나. 에드거: 켄트 백작이 오십니다. 켄트 등장. 올버니: 죽었든 살았든 두 사람을 이리 운반해 오너라. 하늘이 내리신 이 천벌에 우리는 두려워 떨기는 하지만 불쌍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켄트를 알아본다) 오, 이분이 바로 그분이신가? 결례가 되는 줄 압니다만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인사말씀은 생략하겠소이다. 켄트: 국왕이시며 주인되시는 분께 영원한 하직인사를 여쭈러 왔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으신가요? 올버니: 중대한 일을 잊고 있었구나! 에드먼드, 국왕께서 어디 계시냐? 그리고 코오딜리어 왕비는? (이때 시종들이 거너릴과 리이건의 시체를 가져온다) 켄트 백작, 저것이 보이오? 켄트: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에드먼드: 어쨌든 이 에드먼드는 여자의 사랑을 받았소. 나 때문에 언니는 동생을 독살하고 자살한 것이요. 올버니: 사실이오. 시체의 얼굴을 덮어라. 에드먼드: 숨이차다. 나의 천성은 악하지만 한 가지 쯤은 선행을 하고 죽고 싶소. (올버니에게) 어서 사람을 보내시오--급히요--성으로 사람을 보내요. 리어왕과 코오딜리어를 죽이라는 명령을 벌써 보냈소. 제발 늦지 않게 속히 사람을 보내시오! 올버니: 뛰어가라, 뛰어가, 발리 뛰어가라! 에드거: 고작님,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에드먼드에게) 누가 명령을 받았지? 집행중지 명령의 증거를 다오. 에드먼드: 잘 생각하셨소. 내 칼을 가지고 가서 부대장에게 주시오. 올버니: 서둘러서 빨리 가라. (에드거 퇴장) 에드먼드: 공작의 부인과 내가 코오딜리어를 감옥에서 목매 죽이고, 절망 끝에 자살한 것 같이 보이게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올버니: 신들이여, 코오딜리어를 보호해 주소서! 저자를 잠시 데리고 나가라. (에드먼드 운반되어 퇴장) 이때 리이거 반광란의 상태로 코오딜리어의 시체를 양손으로 안고 비틀거리며 나타난다. 에드거, 장교, 그 밖의 사람들 등장. 리어, 시체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무릎 꿇는다. 리어: 울어라 울어라 울어라! 오 너희들은 돌이냐! 내가 너희들의 혀와 눈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하늘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내 딸은 영원히 갔다. 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다. 내 딸은 죽어서 흙같이 돼버렸어. 거울을 다오. 만약 입김으로 그 거울이 흐려지거나 더러워지면 그러면 내 딸은 살아 있는 거다. 켄트: 이것이 예언된 바 이 세상의 종말인가? 에드거: 그렇지 않으면 그 무서운 종말의 환상인가? 올버니: 하늘이여, 무너져라. 땅이여, 꺼져라! (이때 리어는 새털을 코오딜리어의 시신의 입술에 갖다대며 숨쉬고 있는지 아닌지 검사하려고 한다. 리어: 이 깃털이 움직인다--내 딸은 살아 있다! 그렇다면 내가 여태껏 겪은 모든 불행은 보상되느니라. 켄트: (무릎을 꿇으며) 오, 국왕폐하! 리어: 레이, 저리 가라! 에드거: 저분은 폐하의 충신인 켄트 백작이십니다. 리어: 천벌을 받아라, 너희들은 모두 살인자다, 역적들이다! 난 이 딸을 살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영원히 눈을 감았구나! 코오딜리어야, 코오딜리어야, 조금만 기다려라!--뭐! 지금 너 뭐라고 그랬니!--코오딜리어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조용했어. 그것이야말로 여자의 아름다운 특징이 아니겠느냐--. 널 목졸라 죽인 그놈은 내가 죽여 버렸다. 장교: 사실입니다, 공작각하, 그리하셨습니다. 리어: 그렇다,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 나도 한때는 큰 칼을 휘둘러 놈들을 이리 뛰고 저리 뛰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젠 늙었다. 온갖 고생으로 아무짝에도 못쓰게 되었다. (켄트를 보고) 너는 누구냐? 눈이 나빠서 잘 보이지 않는구나. 하지만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켄트: 만약 운명의 여신이 사랑하고 미워한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그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리어: 눈이 침침하군. 자네는 켄트가 아닌가? 켄트: 그렇습니다. 폐하의 신하 켄트올습니다. 폐하의 시종 카이어스는 어디 있습니까? 리어: 그놈은 좋은 놈이었어, 정말이야, 칼 솜씨도 빠르고 날쌨어. 그런데 그 사람은 갔어, 이미 썩어 버렸어. 켄트: 아닙니다, 폐하. 신이 바로 그 카이어스입니다. 리어: 곧 내가 분별할 수 있을 거다. 켄트: 페하의 운명이 바뀌어 불우하게 되신 그 시초부터 폐하의 슬픈 발자국을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리어: 잘 와 줬다. 켄트: 바로 저올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즐거움은 없어졌습니다. 암흑과 죽음만이 있습니다. 폐하의 두 따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목숨을 끊었습니다. 리어: 그랬을 거다. 올버니: 폐하께서는 스스로 하시는 말씀도 잘 모르시는 모양이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이름을 말씀드려도 소용 없겠소이다. 에드거: 그렇습니다, 소용 없겠습니다. 한 장교 등장. 장교: 에드먼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올버니: 그런 건 이런 때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귀족 여러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여, 나의 의도를 알아 주오. 엄청난 불행으로 큰 상처를 입으신 페하를 힘자라는 데까지 위로해 드릴 결심이오. 나는 당장 사임하고 나의 전권을 노왕께 넘겨드려 생존하시는 동안 다시 나라일을 맡으시도록 하겠소. (에드거와 켄트에게) 두 분께서는 모든 권리를 되찾게 될 것이며 또 이번 공로를 가상히 여겨 많은 은전을 베풀겠소. 우리 편을 든 자는 그 공로에 대해서 상을 받을 것이며 모든 적의 편을 든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맛보게 할 것이오. 자, 저길 보시오, 저기를! 리어: 아, 내 불쌍한 아가는 목졸려 죽었다! 이제는 생명이 없어 없어 없어! 개도 말도 쥐도 생명이 있는데, 왜 너는 숨을 안 쉰단 말이냐?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겠지,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말이다! 제발 이 단추 좀 끌러다오. 고맙다. 이것이 보이느냐? 저애 얼굴을 봐라! 보라--입술을 ! 저기를 봐, 저길 봐? 에드거: 기절하셨습니다! 폐하, 폐하! 켄트: 가슴아, 터져라. 가슴아, 제발 더져라. 에드거: 폐하, 기운을 내십시오. (에드거, 왕을 안아 일으키려 한다) 켄트: 고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마시오. 아, 평안히 운명하시도록 합시다. 폐하께서는 괴로운 이 세상의 형틀 위에 일각이라도 머무르게 하는 사람을 증오하실 거요. (리어 죽는다) 에드거: 정말 운명하셨습니다. 켄트: 그렇게 오래 견디신 것이 신기한 일이오. 천수 이상으로 사셨지요. 올버니: 유해를 운구하시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온 국민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이오. (켄트와 에드거에게) 나의 영혼의 친구인 두 분은 이 나라를 통치하고 이 난국을 바로 잡아 주시오. 켄트: 저는 곧 여행길에 올라야 합니다. 저의 군주께서 부르시니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에드거: 우리는 불행한 시대의 큰 슬픔을 겸허하게 감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만 할 말은 삼가고, 우리가 느끼는 것만 말합니다. 제일 연로하신 분이 제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젊은 우리는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견뎌낼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오래 살아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유해가 운구되어 나가며 장송곡에 맞춰서 모두 그 뒤를 따른다) [ 작품해설 ] 만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가운데 단 판 편만 남겨놓고 다른 것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면 어느 작품을 선택할까. 그럴 경우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서슴지 않고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하나인 '리어왕'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여러 가지 의미에서 최상급의 작품이며, 위대한 작품이자 또한 가장 통렬하며 가장 비통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리어왕'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의 비평가와 작가 그리고 시민들은 저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에 대해 그들은 한결같이 '본래 무대에서 상연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찰스 램)으로서 '연민의 비극' (얀 코트)으로 평하고 있으며, 아놀드 케톨은 특히 "리어왕이야말로 혼의 족적을 담고 있다."고 극찬하기도 했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 '리어왕'만큼 웅대하고 비참한 작품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18세기 영국 문단을 주름잡던 비평가 사무엘 존슨이 "'리어왕'의 결말은 두번 다시 읽을 용기가 없다."고까지 말한 것을 보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처절한 비극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리어가 받는 고통은 너무도 균형이 잡혀 있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대도 있었다. 1681년 네이함 테이트는 세익스피어에게는 '균형과 개연성'이 없다 하여, 리어도 글로스터도 생존하며 코오딜리어는 에드거와 맺어지는 것으로 끝난다는 개정판을 만들었는데, 그 대본은 이후 150년에 걸쳐 극장을 지배했었다. 찰스 램은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어를 무대에서 행연할 수 없다."고 평했으며, A. C. 브래들리는 "'리어왕' 무대에 올리기에는 너무 거대하다."고 상연불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리어왕'을 책으로 읽거나 또는 직접 무대를 통해 그 세계에 몰입하여 보면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리어왕'은 또 처절한 현실감을 유발케 한다. 리어왕이 세 딸에게 영토를 나눠 주려고 했을 때, 말솜씨가 능란하고 간계한 두 딸의 말만을 믿고 그만 판단력을 잃게 되어 솔직하고 심성이 고운 막내딸인 코오딜리어의 심지깊은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녀를 추방했고, 리어왕 자신도 딸들의 사악한 계략에 걸려 끝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는 고대 영국의 전설이지만 문화권이 다른 우리들에게도 '문화적 현실성'을 지닌다고 보여진다. 이 작품에 언제 씌어졌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1605년을 작품연대로 꼽고 있다. 1605년이라면 셰익스피어의 극적 기교와 인생관조가 심화될 대로 심화되고, 원숙할 대로 원숙한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야말로 셰익스피어의 극작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4대 비극은 물론이거니와 '줄리어스 시이저' '엔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주옥 같은 작품이 잇달아 쏟아져 나온 시기와 맞물린다. '리어왕'은 흘린셰드의 '영국연대사'와 셰익스피어 이전에 이야기를 극화한 작자 미상인 '리어왕과 그의 세 딸들의 실록', 그리고 스펜서의 '요정의 여왕' 등에서 적지 않은 암시를 받았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원전 '리어왕'과 셰익스피어가 개작한 '리어왕'에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원전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경사스러운 이야기로 끝나는데 개작 '리어왕'은 비장한 파국으로 끝난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아득한 옛날 브리튼의 삭막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배신과 망은의 비극이 벌어지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앵글로색슨 인의 영국땅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 켈트 민족의 브리튼 인이 영국을 차지하고 이었던 시대이다. 전편에 걸쳐 악 내지 비극의 개념으로 지배되어 있어 셰익스피어의 대작 중에서도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리어왕'은 '앤토니와 글레오파트라'에서 볼 수 있는 사실에 충실한 현란함이라든가, '맥배드'에서 대하게 되는 소위 낭만적인 괴기성이라든가, '오델로'에서처럼 우리의 가슴에 고여드는 데스데모나의 여자다운 정감도 없다. 어디 그뿐이랴. 인물과 인물과의 대립이라든가,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 단역의 활약으로 암울한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우리의 주의를 벗어나게 할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리어왕의 성격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그로부터 모든 사건이 어쩔 수 없이 분출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도 본줄거리와 부줄거리를 교착시켜 나가면서 중심사상인 아버지와 자식간의 애정과 신뢰에 관한 문제를 다원적으로 전개시켰다.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띤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몇몇의 특징적인 인간형을 대하게 된다. 켄트 백작은 시종일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보기드문 충신의 귀감이며, 성격이 유약한 글로스터 백작은 서자 에드먼드 때문에 두 눈을 뽑히고 맹인이 됐으나, 끝내는 자기의 과오를 각성하고 국왕을 지성껏 보필하려 한 선의의 인간이다. 리어왕의 큰딸 거너릴과 둘째딸 리이건은 입에 발린 말을 곧잘 하지만 속을 까고 보면 사악하고 간특하다. 막내딸 코오딜리어는 마음 속에 없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올곧고 심지가 깊고 마음씨가 고운 여인인가 하면, 에드먼드는 선천적으로 악을 품고 태어난 듯한 자로서 모략과 간계로 성공하는 서자다. 리어왕은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큰딸과 둘째딸의 아첨을 곧이곧대로 귀담아 듣고 그들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사심을 눈치채지 못한다. 글로스터 백자 그 역시 그렇다. 서자 에드먼드의 위선에 눈이 흐려 그의 소름 돋치는 무서운 야욕을 좀처럼 꿰뚫어 보지 못한다. 리어왕의 처절한 비극은 한마디로 말해서 명철함의 결여 때문에 일어났다고 본다. 더구나 한 나라의 국왕에게는 특별히 지혜와 명철함이 요구되는데 외양과 내심, 가식과 진실을, 즉 밝고 어두움을, 옥과 돌을 정확하게 헤아리는 명철함이 없었다. 여기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옹고집에다가 오만한 리어왕은 자기가 가진 모든 권위를 하나하나 잃어가게 된다. 국왕으로서의 권위도, 아버지로서의 권위도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도 깡그리 상실하고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노망기까지 들어 하늘에서 시궁창으로 떨어진 뒤틀리고 기막힌 신세가 된다. 정신이 으깨지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리어왕의 비극은 명철함의 결핍에만 있지는 않다. 프랑스 군을 이끌고 온 소위 코오딜리어의 선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간악한 에드먼드의 군세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데도 있다. 결국 리어왕은 광증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는 처절한 고난에 부닥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황야에서 헤매는 그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참담하다. 그가 황야에서 보고 듣는 것은 천둥소리와 번갯불이며 비바람과 무한히 펼쳐진 어둠과 하늘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학과 더불어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의 인간인식의 부싯돌은 빛을 발하게 된다. 일종의 깨달음인 것이다. 허식에 눈이 속임 당해 인간실존에 눈이 어두웠던 그는 비로소 명철함을 얻게 되고, 신의 섭리까지지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리어왕이 광증에 빠졌을 때 인생을 가장 올바르게 관조하게 되었듯이 글로스터 역시 두 눈을 뽑히고 맹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적자 에드거의 효심을 마음의 눈으로 깨닫게 된다. 외양에 눈이 흐려져 진실을 모르다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만한 밝은 통찰력을 갖게 된다. 리어왕과 글로스터는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진실에 눈이 뜨인 새로운 인간으로서 다시 탄생되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지만 어찌된 셈인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줄리어스 시이저'로 접어들면서부터 괄목할 만큼 서서히 어둠의 빛이 끼기 시작하여 밝고 명랑한 생기가 번뜩거렸던 희극시대를 벗어나 '햄릿'에 이르러서는 인간불신과 회의의 시각으로 세계를 응시하게 되었고, '리어왕'에서는 인간의 지평에서 잔악스럽게 이빨을 내민 위선과 악을 철저히 들추어 내려는 셰익스피어의 날카로운 시선에 부닥치게 된다. 여하튼 셰익스피어가 보는 세계는 비정의 세계인 듯도 싶다. 이 작품에서는 선만이 비참히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악도 끝내는 처절하게 멸망되고 만다. 거너릴의 자살, 리이건의 독살, 에드먼드의 죽음 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터득할 수 없는 이 세상의 현실 그 신비적인 실존성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선과 악의 투쟁에서 희생되는 코오딜리어의 죽음은 비극을 더욱 가중시키고 슬픔을 배가시킨다.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그녀가 '햄릿'의 오필리어나 '베니스의 상인'의 포오셔처럼 부덕의 화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녀의 주검을 부둥켜안고서 울부짖는 리어왕의 피맺힌 통곡은 이 극을 정점으로 치닫게 한다.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지만 셰익스피어의 극작가로서의 원숙하고 다양한 기교는 그 당시의 런던 관객들의 취향과 밀착되어 감동의 진폭을 넓혀 주는 새로운 여인상을 계속 창출해 냈다. 우리는 '리어왕'의 코오딜리어에서도 또 하나의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게 되어 주목을 환기시킨다. 세익스피어가 전통과 관습에서 많은 여성을 얻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녀들에게 인간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었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진지한 태도로 그녀들을 통하여 그의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 보였고, 그리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의 독특한 인간성과 인간 이해의 입장에서 풍자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코오딜리어는 단순한 틀에 틀어박힌 분위기를 지닌 상징적인 형으로 창조되었다. 그녀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인내이며 시련임을 쉽사리 놓쳐 버려서는 안된다. 코오딜리어는 이 극중에서 불과 네 장면에 등장하고 그녀의 대사는 100행을 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개성을 갖는 여인이다. 그리고 가장 다변가인 햄릿처럼, 말수가 적은 코오딜리어는 역시 또하나의 미스테리이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강한 면이 있다. 그녀는 천상계의 사람처럼 순백과 진리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참으로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은 가혹한 고난과 시련을 겪은 끝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셰익스피어는 리어왕과 코오딜리어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