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 전2권 중 제1권 지은이: 쌩 떽쥐빼리 옮긴이: 조희수 펴낸곳: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 [ (저자 및 역자 약력) * 지은이 쌩 떽쥐베리 1900 년 6월 리용 출생.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인류문학상 가장 보기 드문 행동력의 작가이며 주로 비행가로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작품으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 수상작인 "인간의 대지",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전시 조종사" 등이 있다. * 엮은이 이상각 충남 태안의 바다가 보이는 농촌 출신. 시인, 출판 기획자. 도서출판 들녘 편집부, 월간 통일지 기자, 계몽사, 종로학원 고등부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출판기획 해오름 대표. 문예지 "창작춘추" 동인. "군기를 다시 잡아라", "밝은 내일을 위하여", "플라톤 뒤집기", "어린이 논리교실", "스크랩 상식 100가지" 등을 기획. 시집으로는 "내일의 찬가"가 있다. [ (머리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Terre des Hommes)'는 쌩떽쥐뻬리의 죽음을 건 체험과 깊은 명상과 시적 정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서사시적인 작품이다. 쌩떽쥐뻬리는 그의 직업인 비행사로서 인생을 성찰했고 생의 의미를 추구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농부는 땅을 가는 동안에 자연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내는데 이렇게 캐낸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항공로의 도구인 비행기도 사람을 모든 옛 문제들로 끌어 넣는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비행기를 연장으로 해서 인생에 참가했고, 그 체험을 통해서 '서로 맺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를 추구했으며, 마침내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확신에 도달하고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Terre des Hdmmes)'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되기 진전인 1939년 2월에 출판되어 그해 5월에 아카데미 프랑세스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바람과 모래와 별들(Wind, Sand and Stars)'이라는 표제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전세계에 절리 읽혀지고 있다. 은유가 많은 에세이이기도 한 이 작품은 쌩 떽스(에칭)의 비행사로서의 15년간의 풍부한 체험과 회상들을 작가 특유의 서정미 넘치는 문체로 펼쳐나가로 있다. 같은 동료 비행사인 앙리 기요메의 영하 40도의 안데스 산맥에서의 불시착과 쌩 떽스 자신의 4일 동안의 사하라 사막속에서의 기갈을 견디며 생을 찾은 놀라운 용기와 인내 등 어느 것이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진가가 이러한 에피소드의 흥미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쌩떽스가 이들 체험에서 성찰 해낸 구약성서의 묵시록을 방불케 하는 청순 고결한 인생관과 모럴에 있는 것이다. 생명의 희생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고자 하는 인도적 히로이즘의 탐구, 이것이 이 책의 근본 사상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진정한 히로이즘이란 헛되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책임 관념에 뿌리박힌 자기 희생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책임관념이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이룩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주고 곤란을 극복하는 노력을 하게 한다. 안데스 산맥의 눈보라 속에서 5일간 길을 잃었던 기요메를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물 한 방울 없이 사흘을 헤매던 쌩떽스를 추위와 기갈과 피로를 극복하고 삶을 되찾게 한 기적도 이러한 책임관념이 현대의 영웅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행동의 윤리를 추구하는 주제와 아울러 인간의 존엄성을 압살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도 나타나 있고, 또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를 초월한 집단적 책임 의식도 강조되고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프랑스 아카데미의 에드몽 잘루는 '보기 드문 뛰어난 사색의 서다'라고 말했고 문학평론가 앙드레 루소는 '이 책은 모든 중, 고교 및 대학에서 교양서로 읽혀져야 할 양서다'라고 격찬했다. 마지막의 9.'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Lettre a un Otage)은 1943년 2월 쌩 떽쥐뻬리가 뉴욕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이에 앞선 1940년 6월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독일에 항복했다. 당시 제33 비행 대대에 대위로 복무중이던 쌩 떽쥐뻬리는 동원 해제가 되어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지중해 연안의 아게로 돌아가 심신을 휴양하는 한편 그의 미완성의 유작이 된 성채(Citadelle)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령 하에서의 생활에 정착할 수 없었던 그는 그해 1월 리스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었다. 프랑스에 볼모처럼 남겨진 친구 레옹 베르뜨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된 이 에세이는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망명자에게 있기 쉬운 현실도피나 절망감은 전혀 없다. 미국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독일군에 점령당한 조국 프랑스에 대한 일체감과 그리움, 거기에서 볼모처럼 압박받고 있는 4천만 명의 동포들에 대한 격려와 사랑으로 넘쳐 있다. 이 작품은 또한 '미소의 찬가'이기도 하다. 전쟁 전에 쏘온느 강변에서 국적이 다른 뱃사공들과의 무언의 미소, 에스파니아 내란 당시 신문사특파원으로 취재 중 민병들에 체포당했을 때의 미소가 이룩해 준 기적 등,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어와 국적과 주의를 뛰어 넘어 인간들을 하나로 결합시켜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작가는 일깨워주고 있다. [ 인간의 대지 대지는 우리들 자신의 대해 모든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대패라든가 쟁기가 있어야 한다. 농부는 땅을 가는 동안에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알아내는데 이렇게 캐낸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같이 항공로의 도구인 비행기도 사람을 모든 옛 문제들로 끌어넣는다. 아르헨티나로 최초의 야간 비행을 하던 날 밤의 들판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불빛들이 마치 별처럼 깜빡이던 밤의 인상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이 어둠의 큰 바다 속에도 인간의 의식이라는 기적이 깃들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보금자리 속에서 사람들은 읽고, 생각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되뇌이고 있을 것이다. 딴 집에서는 공간의 계측에 애를 쓰고, 앙드로메드좌의 성운에 관한 계산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저기에서는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띠엄띠엄 그 불빛들은 저마다의 양식을 찾아 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시인의, 교원의, 목수의 불빛 같은 아주 얌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에는 또한 얼마나 많은 닫혀진 창들이, 꺼진 별들이, 잠든 사람들이 있을 것인가... 서로 맺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들판에 간간이 타오르고 있는 이 불빛들의 어느 것들과 마음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 [ 1. 항공로 1026 년의 일이다. 나는 '라떼꼬에르' 회사의 젊은 정기 항공로 조종사로 갓 들어간 때였다. 이 회사는 나중에 '에르 프랑스' 회사가 된 우편 항공회사가 전에 뚤루즈와 다까르 간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내 직업을 익히고 있었다. 나는 도료들과 마찬가지로 우편기를 조종하는 영광을 갖기에 앞서 풋나기들이 치뤄야 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 비행이며, 뚤루즈와 빼르빼냥 간의 단거리 왕복이며, 썰렁한 격납고 속에서의 쓰라린 기상학 공부 등이었다. 우리는 아직 알지도 못하는 스페인의 산들에 대한 두려움과 선배들에 대한 존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선배들을 우리는 식당에서 만나곤 했는데, 무뚝뚝하고 약간 쌀쌀한 그들은 거만스럽게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알리깡뜨나 카사블랑카에서 돌아와서 비에 젖은 가죽옷을 입은 채 뒤늦게 우리들과 합류했을 때, 우리들 중 하나가 조심조심 그의 여행에 대해서 묻기라도 하면 그의 짤막한 대답만으로도 폭풍우가 부는 날이면 덪과 함정과 느닷없이 나타나는 낭떠러지와 삼나무라도 뿌리 채 뽑아버릴 것 같은 돌풍들로 가득찬 우화적인 세계를 우리 눈 앞에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시커먼 용바람이 골짜기 어귀를 가로막고, 번개 뭉치들이 산마루를 뒤덮는 그런 광경이었다. 이 선배들은 교묘하게 우리들의 존경심을 북돋우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 중의 하나가 돌아오지를 않아 영원히 우리의 존경할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중에 꼬리비에르 산중에서 죽은 뷔리가 돌아오던 어느 날의 일이 생각난다. 그 나이 많은 조종사는 우리들 사이에 들어와 앉자 아직도 어깨가 일 때문에 짓눌려 있는 듯이 아무 말없이 무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공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늘이 썩어 문드러진 듯 장마 비를 뿌리고, 조종사에게는 옛날의 돛단 군 선의 대포들이 밧줄이 끊어져서 갑판 위를 마구 굴러다니듯이 모든 산들이 시커먼 구름 속에서 뒹굴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그런 악천후의 저녁이었다. 나는 뷔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이번 비행이 힘들었냐고 물어보았다.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머리를 접시 위에 틀어박고 있던 뷔리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덮개 없는 비행기에서 날씨가 궂을 조종사는 좀 더 앞을 잘 보시 위해서 바람막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내다보게 되는 데 그래서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오랫동안 윙윙거리기 마련이다. 마침내 뷔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리는 것 같았고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갑자기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왜냐하면 뷔리는 좀처럼 웃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짧은 웃음이 그의 피로를 밝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승리에 대해서는 그밖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둠침침한 식당 안에서 하루의 초라한 피로를 풀고 있는 하급 관리들 가운데에서 이 묵직한 어깨를 가진 동료가 내게는 이상하게도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거친 외모 속에서 용을 정복한 천사의 모습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내게도 차례도 닥쳐 지배인 실로 불려 가는 저녁이 왔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내일 출발하시오." 나는 그의 작별인사만 기다리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규정은 잘 알고 있겠지?" 그 당시의 비행기 엔진은 오늘날만큼의 안전성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엔진은 종종 접시가 깨지는 것 같은 소음 속에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우리를 내팽개치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조종사는 피신할 데라곤 거의 없는 스페인의 바위산을 향해 손을 들 도리밖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늘 말하곤 했었다. "여기서 엔진이 고장 나는 날에는 유감이지만 비행기도 이제 끝장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바꿔 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턱대고 이 바위산을 들이받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산악지대에서는 구름바다 위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위반하는 경우에는 가장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되어 있었다. 고장을 일으킨 조종사가 흰구름층 속으로 빠져들어 가다가는 보이지 않은 산꼭대기를 들이받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지배인의 느릿한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한번 복무 규정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기야 스페인에서 구름바다 위를 나침반만 가지고 비행하는 것도 재미있지. 아주 운치가 있고 하지만...." 그리고는 더욱 느리게 말했다. "... 하지만 명심해 두시오. 그 구름바다 밑은 ... 바로 저승이라는 것을." 그러자 갑자기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을 때 보게 되는 그렇게도 고요하고 편평하고 단순한 그 세계가 내게는 미지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 고요가 덫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저 내 발 아래 펼쳐져 있는 끝없는 흰 덫을 상상해 보았다. 그 밑에는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북적거림이나, 혼잡이나, 도시의 활기찬 차들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절대적인 침묵과 보다 결정적인 평화가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 흰 끈끈이가 나에게는 현실과 비현실, 기지와 미지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벌써 어떤 풍경이든 그것을 보는 사람의 문화와 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산골 사람들도 구름바다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이 우화적인 장막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지배인의 사무실을 나왔을 때 나는 어린애 같은 자랑을 느꼈다. 나도 이제 내일 새벽부터는 승객에 대한 책임, 아프리카행 우편물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다고 느꼈다. 스페인에는 피난처가 적다. 위협적인 고장을 당했을 때 구조 받을 만한 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나는 필요한 가르침도 찾지 못한 채 불모의 지도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움과 자랑스러움이 뒤얽힌 가슴을 안고 이 싸움의 전날 밤을 동료 기요메 한테 가서 지내기로 했다. 기요메는 이 항공로를 앞서 왕래한 경험자였다. 기요메는 스페인의 열쇠를 얻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나는 기요메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소식을 들었네. 기쁜가?" 그는 포르투갈산 포도주와 컵을 가지러 벽장 있는 데로 가더니 여전히 빙글거리면서 돌아왔다. "우선 축배를 드세, 염려 말게. 잘될 테니." 훗날에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과 남대서양 횡단 우편 비행의 기록을 수립하게 될 이 동료는 램프가 불빛을 발하듯이 주위에 자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보다 몇 해 앞선 이날 저녁, 그는 셔츠바람으로 램프 밑에서 팔짱을 끼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에 참 미소를 띠며 이렇게 간단히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폭풍우니 안개니 눈 따위가 이따금 자네를 괴롭히겠지만, 그럴 때 자넨 자네보다 먼저 그것을 겪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그리고 자네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르게. '남들이 해낸 일은 나도 꼭 해낼 수 있다'라고." 그러나 나는 가지고 간 지도를 펼치고 그렇더라도 나와 함께 항로를 재검토 해보자고 간청했다. 이렇게 램프 불 아래 엎드려 이 선배의 어깨에 기대고 있으려니 나는 학창시절의 평화가 되돌아옴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얼마나 이상한 지리 수업을 받았던 것일까? 기요메는 내게 스페인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는 스페인을 내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수로학에 관해서도 주민이나 가축 임대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또 구아디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다만 구아디스 근처에 들판을 둘러싸고 서 이는 세 그루의 오렌지 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것들을 조심하게. 자네 지도에다 표시해 두게...." 그래서 그 후부터는 세 그루의 오렌지 나무가 지도 위에서 시에라네 바다의 높은 산맥보다도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롤까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롤까 시 근처에 있는 하찮은 농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살아 있는 농가에 대해서, 그 농부에 대해서, 그 안주인에 대해서. 그러자 우리로부터 1천 5백 킬로 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부부가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산비탈에 자리잡은 채 마치 등대지기처럼 그들의 별아래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지리학자들도 모르고 있는 상세한 것들을 그 망각과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거리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리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큰 도시에 물을 대주는 에브르강 뿐이지, 모뜨릴 서쪽 숲 속에 숨어서 서른 포기쯤의 꽃을 가꾸어 주는 아버지인 그런 개울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개울을 조심하게. 이것 때문에 불시착에 소용이 없으니까.... 이것도 자네 지도에 적어 두게." 아! 나는 모뜨릴의 그 작은 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 가벼운 물소리로 개구리 몇 마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고작인 이 실개천 눈만 가리고 있는 격이다. 이 불시착의 낙원 속에 풀숲 밑에 길게 누워, 여기서 2천 키로 미터나 떨어진 것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첫 기회에 그놈은 나를 불꽃더미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또 조그마한 산 허리에 진을 치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서를 갖추고 있다는 그 서른 마리의 싸움 양에 대해서도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대기하는 것이었다. "자네는 이 초원에서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보게! 자네 바퀴 밑으로 서른 마리의 양들이 굴러든단 밀일세...." 이런 믿지 못할 위협에 대해 나는 다만 감탄의 미소로써 답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내 지도 속의 스페인은 램프불 아래서 차츰차츰 동화의 나라가 되어 갔다. 나는 피난처와 함정을 십자표로 표시했다. 그 농부와 서른 마리의 양과 그 개울도 표를 했다. 나는 지리학자들이 등한히 했던 그 양치기 처녀를 정확한 제자리에 놓았다. 기요메와 작별하고 나오자, 나는 이 겨울을 얼어붙은 밤을 걷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나는 외투 깃을 세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행인들 틈에 끼어 내 젊은 정열을 산책시켰다. 마음에 비밀을 간직하고 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 야만인들은 지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새벽이 되어 우편 행낭이 비행기에 실릴 때가 되면 그들은 자기의 격정과 정열을 내게다 맡길 것이다. 그들의 희망도 내 손안에 맡길 것이다. 이렇게 나는 외투에 몸을 감싸고, 그들 틈에 끼어 보호자 같은 걸음을 옮기고 있는 데도 그들은 나의 심려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내가 이 밤으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어디에선가 채비를 차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리고 내 첫 비행을 훼방 놓을지도 모를 그 눈보라가 바로 내 몸에는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별들이 하나하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산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별들의 비밀은 나 혼자만이 알 수 있었다. 전투에 앞서 적군의 배치를 내게만 알려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렇게 막중한 책임을 지워주는 이 암호를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번쩍이는 환한 쇼윈도우 옆에서 받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 밤에서 땅위의 모든 보화가 진열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단념의 자랑스러운 도취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나는 협박당한 병사였다. 그러니 밤축제를 위한 이 번쩍거리는 수정 그릇들이며, 저 램프 갓이며, 저 책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나는 안개 덮인 하늘에 잠겨 있는 것이다. 벌써 나는 정기 항공의 조종사로서 비행하는 밤들의 쓰디쓴 과육을 베어 물고 있는 건이었다. 나를 깨워 준 것은 새벽 3시 였다. 나는 덧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거리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신중하게 옷을 입었다. 30분 후 나는 빗물로 번들거리는 보도에서 작은 가방 위에 앉아 내 차례로 회사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나보다 앞서 많은 동료들이 오늘 같은 처녀 출동 날에 가슴을 약간 조이며 이와 똑같은 기다림을 맛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거리 모퉁이에서 구석 차가 고철 같은 소리를 내며 나타냈다. 이번에는 나도 다른 동료들처럼 잠이 덜 깬 세관관리와 몇몇 사무원들 틈에 끼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자리를 잡을 권리를 가졌다. 이 버스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많은 관청 냄새와 자칫 사람의 한 평생이 파묻히기 쉬운 낡은 사무실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차는 5백 미터씩 가다가는 멈춰 서기를 하나 더, 세관리를 하나 더, 주임을 하나 더 태우기 위해서. 차안에서 벌써 꾸벅거리고 있던 사람들은 새로 탄 사람의 인사말에 분명치 않게 웅얼웅얼 대답했고 새로 탄 사람들도 가까스로 자리를 비집고 앉자마자 꾸벅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뚤루즈 시의 울퉁불퉁한 길 위를 실려 가는 일종의 서글픈 짐들이었다. 이렇게 사무원들과 줄을 지어 섞어 있으면 정기 항공의 조종사도 언뜻 보면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가로등이 줄을 지어 스쳐가고 비행장이 가까워 온다. 그러면 진동이 심란 이 낡은 버스도 이제는 변모한 사람 이 빠져나올 한낱 회색빛 번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동료들 누구나가 이와 같이 한번은 오늘 아침과 비슷한 아침에 저 주임의 화풀이에 아직도 짓눌려 있는 욕받이 하급 관리에 끼어 앉아 있는 자신 속에서 스페인과 아프리카 간 우편기의 조종 책임자가 태어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3시간 후에는 오스삐딸레의 용과 번개 속에서 대결하고 4시간 후에는 그 용을 정복하고 나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완전히 혼자만의 자유 판단하에 해상으로 우회할 것인지 아니면 알꼬아 산덩이를 향해 똑바로 돌진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뇌우와, 산악과 대양과 대결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동료 누구나가 이렇게 한번을 뚤루즈의 음산한 겨울 하늘 아래 이름 모를 무리들 속에 묻혀서 오늘과 흡사한 아침에 5시간 후면 북극의 비와 눈을 뒤로 하고 겨울을 버리면서 엔진의 회전수를 줄이고 한여름인 알리깡뜨의 찬란한 태양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할 왕자가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 낡은 버스는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그 딱딱하고 불편스러웠던 것은 내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차는 우리들의 직업상 거친 기쁨을 맛보는데 필요한 준비를 잘 상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사무치게 검소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난다. 3년 뒤에 그 차 안에서 열 마디도 안되는 대화에서 조종사 레끄리벵의 죽음을 알게 됐던 일을. 그도 안개 짙은 날이나 혹은 어느 밤에 갑자기 영원한 은퇴를 한 이 항로의 1백여 명의 동료들 중의 하나였다. 그 때도 역시 새벽 3시였고, 똑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다. 어둠 속에 있어 모습이 안보이는 지배인이 감독관에게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레끄리벵이 어젯밤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하지 않았다네." "아! 그래요?" 감독관이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꿈 속에서 끌려 나온 그는 잠에서 깨려고 자신의 근무열을 보이려고 애쓰며 덧붙였다. "아! 그래요? 통과를 못했군요? 그래, 되돌아 왔나요?" 그 말에 대해 버스 안쪽에서는 다만 '아니'하는 대답뿐이었다. 우리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말도 없었다. 그리고 1초 1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아니'라는 말에는 아무런 다른 말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이 '아니'라는 말에는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 레끄리벵은 카사블랑카에만 착륙 못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어떤 곳에도 착륙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졌다. 이리하여 그날 아침 나의 첫 우편 비행을 하는 새벽에 나는 또한 이 직업에 따른 신성한 의식을 치렀고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하여 번들거리는 돌을 깐 길을 내다보며 자신을 잃어감을 느꼈다. 물구덩이 위로 스쳐 가는 바람이 종려 나뭇잎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 처녀 비행치고는 ... 정말이지... 운이 나쁜데.' 나는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죠?" 감독관은 피곤한 시선을 창쪽으로 돌리더니 이윽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뭘, 그렇지도 않은데." 그럼, 악천후는 도대체 어떤 징후로 알아낼 수 있는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기요메는 엊저녁에 단 한번의 미소로 선배들이 들려주면서 우리를 겁주곤 했던 불길한 전조들을 지워 주었지만, 그래도 그 불길한 징조가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흔히 이런 말을 했었다. "항공로를 조약돌 하나하나까지 알고 있지 못한 조종사가 만일 눈보라라도 만난다면, 가엾지...아암! 가엾고 말고...." 그들에게는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 거북스런 동정의 눈초리로 우리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천진난만함을 동정하기라도 하듯이. 하기야 이 버스가 이미 우리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피난처 노릇을 해 주었던가? 60명? 80명? 비오는 날 아침, 바로 이 과묵한 운전사에게 이끌려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은 점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담배가 제각기의 명상에 구두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늙은 월급쟁이들의 하찮은 명상들, 우리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은 마지막 호상객 노릇을 했을 것인가? 나는 또 그들이 낮은 소리로 주고받는 마음속 이야기를 귓결에 들었다. 그것은 병이니, 돈이니, 집안 걱정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갇혀 있는 우중충한 감옥의 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별안간 운명의 보습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는 늙은 샐러리맨이여, 나의 동료여, 아무도 당신들을 해방시켜 준 일이 없고 그것은 조금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저 흰개미들이 그렇듯이 광명으로 빠져나갈 모든 구멍을 한사코 시멘트로 막음으로써 당신의 평화를 건설해 왔다. 당신은 자신의 소시민적인 안전 속에 자신의 습관 속에 시골 생활의 숨막히는 관습 속에 공처럼 움츠려 들어가 바람과 조수와 별을 막기 위해 이 보잘것없는 성벽을 쌓아 올렸다. 당신은 세상의 큰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려 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의 처지를 잊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했다. 당신은 방랑하는 떠돌이 별의 주민이 결코 아니며, 대답이 없을 질문은 던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뚤루즈의 한 소시민이다. 때가 늦기 전에 당신의 어깨를 움켜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을 빚어낸 진흙이 마르고 굳어진 지금은 아무도, 어쩌면 애초에 당신 속에 깃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잠든 음악가를 시인을 또는 천문학자를 일깨워 줄 수는 절대로 없다. 나는 이제 폭풍우를 원망하지 않으련다. 직업의 마력이 또 하나의 세계를 내게 열어준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이제 2시간도 안돼서 검은 용과 푸른 전개의 머리털을 왕관처럼 쓴 산봉우리들과 대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밤이 오면 폭풍우에서 해방되어 별들 속에서 내 길을 찾아 갈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 직업상의 세례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하늘의 여행은 대개의 경우 무사했었다. 우리는 평온하게, 마치 직업적인 잠수부처럼 우리들 영토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 영토는 오늘날에 속속들이 탐사되어 있다. 이제는 조종사도, 기관사도, 무전사도 모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다. 그들은 갖가지 계기의 바늘의 유희에만 순종하지, 풍경의 변화에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는다. 밖에는 산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것들은 이미 산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력일 뿐, 그 접근만을 계산하면 된다. 무전사는 현명하게 램프 불 아래서 숫자를 기입하고 기관사는 지도에 점을 찍고 조종사는 산들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거나, 왼편으로 피해서 돌아가려던 산마루가 작전 준비 때와도 같은 침묵과 비밀 속에서 정면에 나타나거나 할 때만 진로를 수정한다. 지상의 비행장에서 야근을 하는 무전사들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똑같은 시각에 그들의 노트 위에 동료로부터 받은 통보를 슬기롭게 적어 넣는다. "0시 40분, 방향 2백 30도, 기내 이상 없음" 오늘날 승무원은 이렇게 비행한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바다 위의 밤처럼 모든 목표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엔진이 이 밝은 실내를 그 본질을 바꿔 놓는 진동으로 채우고 있다.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계기반 속에서, 무전 장치 속에서, 이 바늘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연금술이 행해지고 있다. 1초 1초마다 이 비밀스런 몸짓, 이 가만가만한 말들, 이 주의가 기적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조종사는 어김없이 바람막이 유리판에 이마를 갖다 댈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황금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기항지의 등불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들은 모두 이러한 비행도 겪어 알고 있다. 기항지에 닿기 2시간 앞두고 어떤 특수한 각도에서 비쳐오는 불빛을 보고 갑자기, 설사 인도에 가있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만큼 우리가 멀리 와 있음을 느끼게 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단념하게 된 그런 비행을. 이를테면 메르모즈가 그랬다. 처음 수상기로 남대서양을 횡단했을 때, 그는 해질 무렵에 뽀또놔르 지방에 접근했다. 그는 전방에 회오리 바람의 꼬리들이 마치 벽을 쌓아올리듯이 시시각각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이어서 밤의 장막이 이 전투 준비 위에 내려, 그것들을 숨겨 버렸다. 그리고 1시간 후에 구름떼 밑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환상적인 왕국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거기에는 바닷물 기둥들이 겹겹이 솟아올라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신전의 검은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꼭대기가 부풀어서 컴컴하고 낮은 폭풍우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천장의 틈새로는 빛의 자락들이 드리워져 있었고 만월이 기둥 사이로 바다의 싸늘한 포석 위를 비추고 있었다. 메르모즈는 이 사람없는 폐허를 가로질러 빛의 물길과 물길 사이로 비껴가며 바다가 울부짖으며 솟아 올라가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 거대한 기둥들을 피해 돌며 비행을 계속했다. 달빛의 여울을 따라 4시간을 비행한 끝에 그는 마침내 그 신전의 출구를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하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메르모즈는 뽀또놔르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또 생각이 난다. 내가 현실 세계의 변경을 넘어섰던 때의 일들의 하나가. 그날 밤은 밤새껏 사하라사막의 착륙지에서 보내주는 위치 측정의 무선 유도에 오차가 심해서 무전사 네리와 나를 완전히 궁지에 빠지게 했다. 안개가 갈라진 틈 밑으로 물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나는 급히 기수를 해안 쪽으로 돌렸다. 도대체 몇 시간 전부터 우리가 외양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해안에까지 당도할 수 있을런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가솔린도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나 해안에 가 닿는다하더라도 다시 착륙지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는 달이 질 무렵이었다. 각도 보고가 없어 이미 귀머거리가 된 우리는 점점 장님이 되어 갔다. 마침내 달은 사위어가는 숯불처럼 눈벌판 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우리 머리 위에서 역시 구름에 뒤덮여 갔고, 지금부터는 이 구름과 안개 사이를 모든 빛과 모든 물체가 텅빈 세계 속을 비행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응답해주던 여러 비행장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를 보내기를 단념했다. "위치 측정 보고 없음.... 위치 측정 보고 없음... 왜냐하면 우리들의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사방에서 들려왔으므로 결국 아무데서도 들려오지 않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가 이미 절망하고 있을 때 전방 좌측 수평선에 반짝이는 점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북받치는 기쁨을 느꼈다. 네리는 내게로 몸을 굽혔고 나는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착륙 비행 장이며 또 그 등불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하라 사막은 밤이 되면 완전히 빛을 잃고 하나의 광대한 죽음의 영토를 이루니까. 그런데 그 불빛은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우리는 사라지기 직전에 몇 분 동안 안개의 층과 구름 사이의 지평선에 보였던 별 하나를 향해 기수를 돌렸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다른 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우리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그 불빛 하나하나에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 그 불빛이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생사에 관계되는 실험을 시도했다. "불이 보임. 신호등을 껐다가 세 번 켜라. 네리는 시스네로스 비행장에 명령했다. 시스네로스 비행장에서는 신호등을 껐다가 세 번 켰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보던 그 무자비한 불빛, 지조 굳은 별은 도무지 깜박일 줄을 몰랐다. 가솔린이 점점 없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번이 금빛 낚시에 덤벼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진짜 신호등이었고, 착륙 비행장이었고, 생명이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별을 바꿔야만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백의 손이 닿지 않는 떠돌이 별 가운데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별, 우리의 별, 우리 눈에 익은 풍경과 우리들의 정다운 집들과 우리들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다가 길을 잃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만이 간직하고 있는 단 하나의 별...나는 그때 내 눈앞에 나타난 그 모습을 말해 보련다. 혹시 당신에게는 유치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람은 위험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걱정거리는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만약 우리가 시스네로스를 찾아내기만 하면 가솔린을 보충 받고 비행을 계속하여 서늘한 새벽녘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네리와 나는 함께 시내로 들어갈 것이다. 새벽녘에 일찍 문을 여는 작은 술집들이 거기 있다. 네리와 나는 안도감에 젖으며, 전날 밤의 일들을 웃으면서 뜨끈뜨끈한 끄롸상 빵과 커피 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마주앉을 것이다. 네리와 나는 이 생명의 아침 선물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꾼 할머니는 하나의 화상이나, 하나의 소박한 염주를 통해서 자기의 신과 만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말로 우리에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삶의 기쁨이 내게 있어서는 이 향기롭고 따끈한 처음 한 모금에, 이 우유와 커피와 밀가루의 혼합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평화로운 목장들과, 이국의 농장들, 수확물들과 하나가 되며,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온 대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저렇듯 많은 별 중에서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곳에 자신을 두기 위해, 새벽 식사의 이 향기로운 그릇을 차려주는 별은 단 하나, 이 지구밖에 없다. 그런데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우리의 비행기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지 사이에 겹싸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이 성좌들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한 알의 먼지 속에 깃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별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천문가 네리는 계속해서 별들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의 주먹이 내 어깨를 쿡 찔렀다. 그 주먹이 알려준 종이쪽지에서 나는 읽었다. "됐어. 멋진 통신을 받았어...." 그래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가 우리를 구해 줄 대여섯 마디의 글자를 마저 써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나는 받았다. 이 하늘의 선물을. 그것은 어젯밤 우리가 출발했던 카사블랑카에서의 신호였다. 전송이 늦어졌기 때문에 이 무전은 2천 킬로 미터나 떨어진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 사이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 온 것이다. 이 무전은 카사블랑카 비행장 주재의 항공관에서 보낸 것이었다. 나는 읽었다. "쌩 떽쥐뻬리 씨, 귀하는 카사블랑카 출발시 지나치게 격납고 근처를 선회하였기에 본관은 부득이 귀하의 징계를 파리 당국에 신청함." 내가 격납고 근처를 너무 가까이 선회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이 남자가 화를 내며 직책을 수행하는 것도 틀림이 없다. 나로서도 이 비난을 어느 비행장의 사무실에서 듣는 것이라면 공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여기, 와서는 안될 곳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이 너무나도 드문드문한 별들, 안개의 층과 위협하는 듯한 이 바다의 맛 사이에서 폭발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굳게 움켜 쥔 손 안에 자신들의 운명을, 우편물과 탑승기의 운명을 쥐고 있었고, 살기 위해서 많은 곤란을 극복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이 관리는 자기의 하찮은 불만을 우리에게 내뱉고 있다. 그러나 네리와 나는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커다란, 그리고 갑작스런 환희를 느꼈다. 여기, 하늘 밖에 있는 한 우리는 자유였다. 이 사실을 그 조그만 관리는 우리에게 발견시켜 주었다. 그 하사는 우리가 대위로 승진한 것을 우리 소매를 보고 몰랐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우리가 이렇게 북두성과 사수좌 사이를 엄숙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우리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오직 달의 배반뿐인 절박한 이때에 우리의 명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다. 절박한 의무, 저 사람이 존재를 표시하고 있는 저 지구의 유일한 의무는 천체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계산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숫자를 알려주는 일밖에 없다. 그런데 그 숫자들이 엉망이다. 그때 네리가 이렇게 써서 보여준다. "쓸데없는 짓 대신 그들은 우리를 어디로든 이끌어줘야 할 게 아닌가...." 이 '그들'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 상원과 하원, 해군, 육군, 그리고 황제들까지도 통틀어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들어 보겠다는 이 정신 나간 친구의 통신을 되읽으며 우리는 기수를 수성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로 기묘한 우연으로 살아났다. 시스네로스로 갈 생각을 단념하고 해안선을 향해 수직으로 기수를 돌려 가솔린이 다 떨어 질 때까지 방향을 바꾸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순간이 마침내 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바다 속에 잠겨버리지 않아도 될 약간의 찬스를 남겨둔 것이다. 불행하게도 눈을 속인 그 신호등들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또한 불행히도 일이 가장 잘 되어 유지에 당도했다 하더라도 한밤중에 짙은 안개 속을 사고 없이 착륙할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이 지극히 분명한 것이어서 나는 우울하게 어깨를 흠칫했다. 그때 네리가 통신을 건네 주었다. 만약 그것이 한 시간만 일렀더라도 우리를 구해주었을 통신을. "시스네로스가 우리 위치를 측정하기로 결정. 시스네로스의 지정. 확실치는 않으나 2백 60 도...." 시스네로스는 이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지 않다. 시스네로스는 저기, 우리 왼편에 감촉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거리는? 네리와 나는 잠시 대화했다. 너무나 늦었다. 우리는 같은 의견이었다. 시스네로스는 날아가다가는 도리어 해안에 도달하지 못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네리는 답전했다. "가솔린이 한 시간 뿐이므로 기수를 93도로 고정하겠음." 그러는 중에 비행장이 하나 둘 깨어났다. 우리의 대화에 아가디르, 카사브랑카, 다까르 비행장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각 도시의 무전 국들이 공항들에 급보를 보낸 것이다. 공항의 주임들은 동료들에게 급보를 보냈다. 이리하여 그들은 차례차례로 아픈 사람의 침대맡에 모여들 듯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소용없는 정열이지만, 그러나 정열임에는 틀림없다. 헛된 충고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다정스러운가? 그런데 갑자기 뚤루즈가 나타났다. 항공로의 시발점인 뚤루즈가 4천 킬로 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우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다. "귀기는 F....'등록표지는 잊었다'가 아닌가?" "그렇다." "그렇다면 가솔린은 아직 두 시간 분이 있음. 그 기의 탱크는 표준형이 아님. 시스네로스로 기수를 돌려라." 이와 같이 직업이 강요하는 필요성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뀌게 하고 또한 풍요롭게 만든다. 정기 항공로의 조종사로 옛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은 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승객들의 눈에는 싫증나고 단조로운 풍경도 승무원에게는 색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지평선을 가로막는 저 구름 떼도 승무원에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고, 승무원들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그에게 여러 문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벌써 그는 그 구름 떼를 고려하고 그것을 자질한다. 그러면 어떤 참된 언어다 되어 그들과 구름 떼를 연결시켜 준다. 여기 산봉우리가 하나 보인다. 아직은 멀리 있다. 그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달빛 아래서는 그것은 그것은 편리한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종사가 만약 사리 분별에 어두운 안목으로 비행을 할 경우, 또는 기류 때문에 수평으로 밀려 항로에서 벗어났을 때 수정이 곤란하고 자기 위치에 의심이 갈 경우에 그 경우에 그 산봉우리는 폭발물로 변하고, 밤 전체를 위험으로 가득 채우고 만다. 마치 물 속에 잠겨 해류를 따라 표류하는 단 하나의 기뢰가 온 바다를 망쳐 놓듯이. 이와 같이 해양도 변한다. 단순한 여객에게는 폭풍우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높은 곳에서 보면 파도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고, 그 물거품 덩어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엽맥과 얼룩이 보이는 커다란 흰 종려나무 잎사귀 같은 것이 서리에 얼어붙은 듯이 해면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이런 곳에는 수면에 내리는 게 금지되어 있음을 판단한다. 그러한 종려잎은 그들에게는 커다란 독있는 꽃으로 보인다. 또 비록 그날의 비행이 행복한 것이었을 경우에도 항공로의 어느 한 부분을 비행하고 있는 조종사는 그저 단순한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하늘의 저 빛깔, 해상의 저 바람의 발자국들, 황혼의 저 황금빛 구름들, 이런 것들을 그는 감탄하지 않고 그것들을 묵상한다. 자기의 논밭을 돌아보는 농부가 천 가지 징조에 의해서 봄이 다가오는 것과, 서리의 위협과, 비가 올 기운을 짐작하는 것처럼 직업 조종사도 또한 눈의 조짐과 안개의 조짐, 다행한 밤의 조짐을 읽어내는 것이다. 기계, 처음에는 그를 자연계의 큰 문제들로부터 멀리 떼어 놓을 것 같았던 기계가 오히려 보다 더 엄격히 그를 그러한 문제들에 맞서게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이 마련해 주는 광대한 법정 한가운데서 이 조종사는 혼자서 산악과 해양과 번개와 비라는 개벽 이래의 세 가지 신들을 상대로 자기의 우편 기를 사이에 두고 겨루는 것이다. [ 2. 동료들 (1) 메르모즈도 그 한 사람이지만, 몇 명 동료들이 귀순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을 거쳐 카사블랑카에서 다까르 사이의 프랑스 항공로를 창설했다. 당시의 엔진은 별로 저항력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고장이 메르모즈를 모르인들에게 붙잡히게 했다. 그들은 메르모즈를 학살하기를 주저하고 15일 동안 포로로 가둬두었다가 그를 되팔았다. 그래서 메르모즈는 다시 같은 영토 위를 나는 우편비행에 복귀했다. 남아메리카 항로가 개설되자, 항상 선두에 서는 메르모즈는 부에노스아이레레스와 산띠아고 구간의 항공로 조사를 위임받았다. 즉, 사하라 사막 위에 다리를 놓은 뒤를 이어 안데스 산맥 위에 다시 다리를 놓게 된 셈이다. 그에게는 상승 한도 5천 2백 미터의 비행기가 주어졌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은 7천 미터나 솟아 있었다. 그런데도 메르모즈는 통로를 찾기 위해 이륙했다. 사막을 정복한 후에 메르모즈는 산에 도전한 것이다. 산이라지만 그쪽 고봉들은 바람이 불면 눈보라의 띠를 펼쳐놓고, 폭풍에 앞서 온 천지를 창백하게 하고, 비행기를 아주 심하게 동요시키는 역류, 이런 것들을 바위의 절벽 사이에서 만나게 되면 조종사는 일종의 백병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르모즈는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러한 굴레로부터 살아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채, 싸움에 뛰어들었다. 메르모즈는 남들을 위해 '해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어느날 이렇게 '해보다'가 그는 자신이 안데스 산의 포로가 된 것을 알았다. 4천 미터 높이의 절벽에 둘러싸인 곳에 불시착한 그와 기관사는 이틀 동안이나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빠져 나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운명을 걸고 비행기를 허공으로 내몰았다. 비행기는 울퉁불퉁한 땅 위를 절벽 끝까지 튀어 올랐고, 그들은 거기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비행기는 필요한 속력을 내게 되어 다시 조종사의 말을 듣게 됐다. 메르모즈는 산봉우리를 날아 그곳에 도달했으나 밤 사이에 얼어 터진 모든 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비행 7분만에 다시 엔진이 정지됐으나 마치 약속의 땅처럼 그들의 눈 아래 칠레의 평원을 보았다. 이튿날 메르모즈는 또다시 시작했다. 안데스 산맥이 샅샅이 탐험되고, 횡단 기술이 잘 조정되자 메르모즈는 이 구간을 동료인 기요메에게 맡기고 자기는 밤의 탐험에 나섰다. 착륙 비행장에 조명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캄캄한 밤이면 착륙장에는 초라한 가솔린 등이 3개 메르모즈 앞에 켜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해내어 야간비행의 길을 열어 놓았다. 밤을 완전히 길들이고 나자 메르모즈는 대양을 시험했다. 이리하여 1931년부터 처음으로 뚤루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우편물이 나흘만에 운반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메르모즈는 남대서양 한복판의 풍랑 높은 바다 위에서 가솔린이 떨어졌다. 지나가던 기선이 그와 우편물과 승무원을 구출해 주었다. 이와 같이 메르모즈는 사막과 밤과 바다를 개척했다. 그는 몇 번이나 모래 속에, 산 속에, 밤 속에 바다 속에 빠져들어 갔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2년 동안을 근무한 후, 또다시 남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그는 '후방 우측 엔진을 끈다' 하는 짤막한 통신을 보내왔다.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이 소식은 그다지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10분 동안 계속된 뒤에는 파리에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항공로의 모든 무전 국들은 가슴 조이며 경비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10분간의 지각이란, 일상 생활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우편비행의 경우에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죽은 시간 속에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한 것이든, 또는 불행한 것이든 그것은 그 이후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판결을 내렸을 것이고, 이 판결에는 상소할 길이 없다. 어떤 무쇠 같은 손이 승무원들을 무사히 착수시켰던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다만 그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통고되지 않는다. 우리들 중의 그 누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가는 그 희망과, 치명적인 병처럼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 가는 그 침묵을. 메르모즈는 분명히 자기가 한 일 뒤에 숨어 버린 것이다. 마치 보릿단을 잘 묶고 나서 자기 밭에 드러눕는 타작군처럼. 한 사람의 동료가 이렇게 죽을 때 그의 죽음은 그래도 직무상의 질서에 따른 행동처럼 생각되어 처음에는 다른 죽음보다 덜 상심이 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마지막 전근 명령을 받고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없어진 것은 빵이 없어졌을 때만큼 우리에게 그 아쉬움이 절실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사실 서로의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리는 버릇에 젖어 있다. 항공로의 동료들은 파리에서 칠레의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에 흩어져 있어 별로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는 보초들처럼 약간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이 직무상의 대가족들이 여기 저기서 서로 만나려면 여행의 우연이 있어야 한다. 카사블랑카나, 다까르나,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어느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그들은 여러 해 동안의 침묵 뒤에, 중단되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옛 추억을 서로 잇는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한다. 대지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 황량하기도 하고 풍요롭기도 하다. 감춰져 있어서 다다르기는 힘들지만, 어느 날엔가는 우리의 직업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줄 은밀한 정원들이 지상에는 수많이 있기 때문에 풍요롭다. 생활이 우리를 떼어놓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지는 몰라도, 조용하게 잊혀진 채, 그러나 지극히 믿음직하게! 그래서 우리가 혹시 그들의 길을 마주쳐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들은 아름다운 기쁨의 불꽃을 보이며 우리의 어깨를 흔들어 주곤 한다! 물론 우리는 기다리는 습성에 젖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차츰 우리는 그 사람의 밝은 웃음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정원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닫혀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들의 진정한 초상,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은 아니지만, 약간 마음이 쓰라린 초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아무것도 죽은 동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랜 벗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아무것도 그 많은 공통된 추억, 함께 겪었던 위험한 시간들, 그 많은 불화와 화해, 마음의 설렘 등의 보물만큼 값진 것은 없다. 이러한 우정은 다시는 되살릴 수 없다. 떡갈나무를 심고, 바로 그 그늘에서 쉬려 한들 헛일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풍부하게 하고, 여러 해 동안 나무를 심어 왔다. 그러나 시간 이 작업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베어 내는 해들이 오게 된 것이다. 동료들이 하나 둘 우리에게서 그들의 그림자를 앗아간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우리들의 슬픔에 늙어감에 대한 남모르는 회환이 섞이는 것이다. 이것이 메르모즈와 그밖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어떤 작업의 위대함이란 어쩌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치란 인간 관계의 사치뿐이다. 오직 물질적인 재물만을 위해 일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옥을 쌓아 올리고 있다. 삶에 보람을 주는 아무것도 살수 없는 재물과 같은 돈을 안고 우리 자신을 고독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내 추억 속에서 오래 남을 기쁜 맛을 남겨 준 사람들을 찾아보거나 보람있는 시간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본다면 내가 되찾는 것은 어김없이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 뿐이다. 메르모즈 같은 친구의 우정이나, 함께 시련을 겪음으로써 영원히 맺어진 어느 동료의 우정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 야간비행의 밤과, 그 천만 개의 별들, 그 고즈넉함, 그 몇 시간 동안의 절대력, 이런 것들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 어려운 비행을 한 후의 세계의 새로운 모습, 저 나무들, 저 꽃들, 저 여인들, 저 미소들, 새벽녘에야 우리에게 돌아온 생명에 의해 싱싱하게 채색된 우리의 노고에 보답하는 이 하찮은 것들의 콘서트,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그리고 그 때의 추억이 지금 생각나는, 돌아올 수 없는 지대에서 겪은 그 하룻밤도 또한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해질 무렵에 리오 데 오로 해안에 불시착한 우편 항공회사 소속의 3조의 승무원들이었다. 동료 리겔이 맨 먼저 크랭크 고장으로 착륙했다. 다른 동료인 부르가가 그 승무원들을 태우려고 착륙했다가 대수롭지 않은 고장으로 그까지도 땅에 붙들리고 말았다. 끝으로 내가 착륙했었는데, 내가 참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르가의 비행기를 구해 내기로 작정하고, 완전한 수리를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년 전에, 바로 이곳에 불시착한 우리의 동료, 구르와 에라블이 불귀순민들에게 학살당했었다. 우리는 지금도 소총 3백정을 가진 모르인 도둑들이 보자도르 부근 어딘가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았을 우리들의 3번의 착륙이 그들에게 경비 태세를 취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 밤샘을 시작했다. 우리는 밤을 지샐 준비를 했다. 화물 실에서 대여섯 개의 상품 궤짝을 끌어내어 속을 비우고 둥그렇게 늘어놓고 하나하나의 궤짝 안에는 병사들이 보초막 구덩이에다 그렇듯이 바람에 가물거리는 빈약한 촛불을 켜 놓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지구의 벌거벗은 껍질 위에 천지창조 때와 같은 고독 속에 인간의 마을을 세운 것이다. 우리들 마을의 이 큰 광장 위의 빈 궤짝들이 떠는 불빛을 흘리고 있는 사막 한 조각 위에 밤새껏 모여 앉아 우리는 기다렸다. 우리를 구원해줄 새벽을, 혹은 모르인의 공격을...그런데 그 무엇이 그 밤에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흥취를 주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서로 추억을 이야기했고, 농담을 주고받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잘 차려진 축제의 한창 때와도 같은 가벼운 흥분을 맛보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한히 가난했다. 바람과, 모래와, 별들. 그것은 마치 트라피스트 수도사에게나 알맞은 엄한 생활 양식이었다. 그런데도 이 어두컴컴한 모래의 식탁보 위에서 자기들의 추억 말고는 이 세상에서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예닐곱 명의 사내들은 보이지 않는 보화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침내 만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침묵 속에 갇힌 채 오랫동안 나란히 걸어가거나 또 는 아무 감동도 옮기지 않는 말들을 교환한다. 그러나 위험에 부닥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돕는다. 그들은 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을 넓혀간다. 사람들은 큰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사람은 바다의 드넓음에 경탄하는 해방된 죄수와도 같다. (2) 기요메, 나는 자네에 관해서 몇 마디 해야겠네. 그러나 안심하게. 자네의 용기라든가, 자네의 직업상의 가치에 대하여 미련하게 강조해서 자네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자네의 그 많은 모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를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세.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미덕이 있다. 그것은 '의젓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말도 흡족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미덕은 더없이 맑은 쾌활함을 수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무토막 앞에 대등한 기분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만져 보고, 치수를 재고, 경솔하게 다루지 않고, 자기의 온 정성을 집중시키는 목수의 미덕 바로 그것이다. 기요메, 나는 언젠가 자네의 모험을 찬양한 어떤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후 나는 이 부정확한 '아마쥬'를 시정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네. 그 글 속에서 '건달패'같은 재담을 해대면서 마치 용기라는 것이 급박한 위험 속에서나 죽음의 순간에 처해서 중학생들이나 할 농담을 하는 비굴함에 있는 것 같은 자네를 볼 수 있었네. 그것은 자네를 이해하지 못한 말이네. 기요메, 자네는 적과 대결하기 전에 상대를 조롱할 필요를 느낄 남자는 아니네. 몹쓸 폭풍우에 부닥치면 자네는 판단할 걸세. '이건 몹쓸 폭풍우로군.' 자네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어 볼 걸세. 기요메, 나는 내 추억의 증인으로서 자네를 여기에 끌어 왔네.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던 중에 자네는 50시간이나 행방불명이 되었었네. 빠따고니아의 오지로부터 돌아오던 나는 멘도사에서 조종사 들레이와 합류했네. 우리 두 사람은 닷새 동안을 각기 비행기로 그 산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네. 우리 두 비행기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네. 백 개의 비행 편대가 백년 동안을 날아다닌다 해도 7천 미터에 달하는 고봉을 포함하는 이 거대한 산악 덩어리를 모두 탐색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이네.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었네. 그 나라의 밀수업자들, 평소에는 단돈 5프랑을 위해서도 범죄를 청부받는 산적들까지도 구조대에 끼어 그 산악 부벽 위에서 모험하기를 거절했네. '거기선 목숨이 위험하니까.'라고 그들은 말했네. '안데스 산은 겨울에는 사람을 돌려 보내주지 않는 걸요' 들레이와 내가 산티아고에 착륙했을 때 칠레의 장교들도 역시 수색을 중지하라고 충고했네. '지금은 겨울이오. 당신의 동료가 설령 추락할 때 살아 있었더라도 밤의 추위는 견뎌내지 못했을 거요. 저 위에선 밤이 사람을 스쳐가기만 해도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어쨌거나 내가 다시 안데스의 거대한 절벽과 기둥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사실 나는 자네를 찾는다기보다는 눈의 대성당 안에 말없이 누워 있는 자네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네. 마침내 이레째 되던 날, 비행을 마치고 다음 비행을 기다리는 사이 멘도사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네. 한 사나이가 문을 밀고 소리쳤네. 그것은 짤막한 말이었네. "기요메가.... 살아 있어!" 그러자 거기 있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았다. 10분 후, 나는 르페브르와 아브르의 두 기관사를 태우고 이륙하고 있었네. 40분 후, 나는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모르지만, 쌍 라파엘 쪽으로 어디인지 자네를 싣고 가는 자동차를 알아보고는 어느 길가에 착륙했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해후였네. 우리는 모두 울었네. 그리고 자네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네 살아 있는, 부활한, 자신의 기적을 만든 자네를 말이네. 그때 자네는 말했네. 그것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네의 첫 마디 말이었고, 또 찬탄할 만한 인간의 긍지이기도 했네. "내가 한 일은, 자네에게 맹세하네만,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어." 그후, 자네는 우리에게 조난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48시간 동안 5 미터 두께의 눈을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산허리에 퍼부었던 폭풍이 온 천지를 가로막았고, '팬 에어' 회사의 미국 조종사들은 되돌아갔다. 그런데도 자네는 하늘의 찢긴 틈을 찾아 이륙했다. 자네는 약간 남쪽에서 그 함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6천 5백 미터 내외로 고도를 유지하고, 다만 높은 봉우리들만이 솟아 올라 있는 6천 미터 높이의 구름들을 굽어보며 아르헨티나로 기수를 돌렸다. 하강기류는 가끔 조종사들에게 묘한 불쾌감을 주는 수가 있다. 엔진은 이상없이 도는데 비행기는 하강한다. 고도를 유지하려고 급상승한다. 그러면 비행기는 속력을 잃고 흐느적거린다. 기체는 자꾸만 하강을 계속한다. 이번에는 너무 급상승시켰나 싶어서 손을 늦춘다. 도약대처럼 바람을 받아줄 적당한 봉우리에 숨어보려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비행기를 표류시켜 보았으나 하강은 계속된다. 하늘 전체가 꺼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런 때 사람들은 우주의 대 이변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젠 피난할 곳도 없다. 공기가 단단하게 차 있어서 기둥처럼 기체를 받쳐 줄 지대로 되돌아가려고 뒤로 반 회전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기둥은 이미 아무 데도 없다. 모든 것이 분해되고 사람은 우주의 붕괴 속으로 뭉게뭉게 그가 있는 데까지 피어올라와 마침내 그를 삼켜 버리는 구름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나는 이미 꼼짝 못하게 되어버렸어. 그러나 난 아직 단념하지 않았네." 자네는 말했었지.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름 위에서도 하강기류를 만나는 때가 있는데, 그건 구름이 같은 높이에서 끊임없이 자꾸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말 고산 위에서는 모든 것이 이상야릇하거든...." 그리고 그 구름들이라니! "구름에 붙잡히자마자 나는 조종간을 놔 버릴 수밖에 없었네. 기체 밖으로 팽개쳐지지 않으려고 의자를 꼭 움켜잡아야만 했거든. 충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안전 벨트가 어깨에 파고 들어 당장 끊어져 나갈 것 같았네. 게다가 성에가 심하게 끼어 계기의 수평을 전혀 알아볼 수 없어서 나는 6천, 3천, 5백 미터로 모자처럼 굴러 떨어졌네." "3천 5백 미터에서 나는 수평으로 펼쳐진 어떤 검은 덩어리를 언뜻 보았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다시 수평으로 세울 수가 있었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호수였네. 나는 그것이 깔때기 모양을 한 산골짜기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깔때기 벽의 한쪽이 마이쀼 화산인데, 6천 9백 미터나 솟아 있거든. 겨우 구름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빽빽한 눈보라의 소용돌이 때문에 앞이 안보였네. 그래서 이 깔때기의 한쪽 옆구리를 들이받지 않고는 호수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호수 둘레를 30미터의 높이로 가솔린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빙빙 돌았네. 2시간 동안을 탑돌이를 한 뒤에 나는 내려앉다가 뒤집혀 버렸네. 기체에서 기어 나오자 태풍이 나를 쓰러뜨려 버렸네. 나는 다시 일어섰지. 그러나 태풍은 또다시 나를 자빠뜨렸네. 하는 수 없이 기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눈 속에 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었네. 거기서 나는 우편 행낭을 둘러 쓰고 48시간을 기다렸던 거네. 그런 후에 태풍이 가라앉자 나는 걷기 시작했네. 나는 닷새 나흘 밤을 걸었네." 그런데 기요메, 자네의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우리는 자네를 다시 찾아내기는 했지만 자네는 새까맣게 타고, 빳빳해지고, 노파처럼 오그라들어 있었는데! 그날 저녁, 나는 바로 자네를 비행기에 싣고 멘도사로 데려갔네. 그곳에서는 하얀 시트가 향유처럼 자네 위에 흘렀네. 그러나 그것들이 자네를 낫게 하지는 못했네. 자네는 그 지쳐버린 몸을 어찌할 바를 몰라 잠 속에 빠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네. 자네의 몸은 바위들도 눈들도 잊지를 못했네. 그것들이 자네 몸에 낙인을 찍어 놓았던 것이네. 나는 얻어맞고 물크러진 과일처럼 부어오른 자네의 시커먼 얼굴을 지켜 보았네. 자네 일에 쓰이는 그 훌륭한 연장의 사용을 잃어버린 자네는 몹시 추하고 비참했네. 자네 손은 마비된 채로 였고, 숨을 쉬기 위해 침대 가에 앉아 있을 때면 동상 걸린 다리가 두 개의 죽은 시계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네. 자네는 아직도 자네의 고난의 여행을 끝내지 못하고,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네. 그리고 안식을 찾아 베개 위에 몸을 누이기가 무섭게 억누르지 못한 환영의 행렬이, 무대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행렬이 자네 두 개골 밑에서 당장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네. 그 행렬은 행진을 계속했고 자네는 그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나는 적에 대항하여 스무 번이나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네. 나는 자네를 위해 다시 탕약을 따랐네. "마시게! 이 친구야."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자네도... 알겠지만...." 이기기는 했지만 심한 타격으로 멍든 권투선수같은 자네는 자네의 기이한 모험을 재현하는 것이었네. 그리고 자네는 조금씩 거기서 벗어나고 있었네. 나는 자네의 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네의 모습을 역력히 보았네. 자네가 알펜스토크(등산 지팡이)도, 로우프도, 식량도 없이 걷고 있는 모습을 4천 5백 미터의 높은 고개를 넘어, 또는 절벽을 따라 영하 40도의 혹한 속을 발과, 무릎과,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기어 걸어가는 모습을 차츰 온몸의 피를, 힘을,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자네는 개미 같은 끈기로써 전진했네. 장애물을 돌아가기 위해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고, 절벽으로 가로막힌 비탈도 올라갔네. 사실 미끄러졌을 때는 돌덩이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일어나야만 했네 추위는 시시각각으로 자네를 돌로 만들었고, 굴러 넘어진 다음 단 1분간이라도 더 쉬려다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죽은 근육을 움직이게 해야만 했네. 자네는 온갖 유혹에도 견뎌냈네. 자네는 이렇게 말했지. "눈 속에서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 모두 없어져 버리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걷기만 하니까 자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어진단 말일세. 나도 그랬어.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네." "내 아내가 만약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을 거다. 동료들도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모두들 나를 믿고 있다. 그런데 내가 걸어가지 않는다면 나는 못난 놈이다 라고 말일세." 그래서 자네는 줄곧 걸었네. 그리고 나이프 끝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구두의 운두를 잘라 내어 동상으로 부은 발이 들어가도록 했네. 자네는 또 이런 이상한 고백을 들려 주었지. "이틀째부터 내 가장 큰 일이 뭐였는지 알겠나? 자신에게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또 내 처지가 너무나 절망적이었네. 걸어갈 용기를 가지려면 이런 상태를 생각하지 말아야 했네. 그런데 곤란하게도 머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았어. 그놈은 마치 터빈처럼 돌아가는 거야. 다만 나는 대상물을 골라 줄 수는 있었네. 나는 내 머리를 전에 본 책이나 영화에 집중시켰네. 그러면 그 영화나 책이 내 머리 속을 줄달음쳐서 지나갔네. 그리고는 이내 그것이 나를 또다시 지금의 처지로 되끌고 오는 걸세, 어김없이, 그러면 나는 또 머리를 다른 추억으로 돌리곤 했네." 그런데 한 번은 미끄러져서 눈 속에 배를 깔고 엎어졌을 때. 자네는 일어나기를 단념해 버렸네. 자네는 마치 결정적인 일격을 받고 모든 정열을 상실한 권투 선수가, 아득한 세계 속에서 1초 1초가 마지막 10초째까지 떨어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과도 흡사했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희망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고통을 계속하려는 걸까?" 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으려면 자네는 눈만 감으면 되었네. 이 세상에서 바위와, 얼음 덩이와, 눈들을 지워 없애려면 말이네. 이 기적과도 같은 눈꺼풀을 감기만 하면 타격도, 전락도, 찢겨진 근육도, 타는 듯한 동상도, 황소처럼 끌고 가야 할 짐수레보다도 무거운 삶의 짐도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자네는 독약으로 바뀐 추위, 이제는 모르핀처럼 자네를 큰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추위를 맛보고 있었네. 자네의 생명은 심장 둘레로 피난하고 있었네. 달콤하고도 귀중한 그 무엇이 자네 자신의 한가운데에 도사리고 있었네. 자네의 의식이 이제까지 고통으로 가득한 짐승 같았던 자네 육체의 먼 부분을 차츰 버려갔고, 벌써 대리석과도 같은 무관심을 물려받고 있었네. 자네의 걱정마저도 가라앉았네. 이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도 자네에겐 이르지 못했고, 더 정확히 말해서 자네에겐 그것이 꿈속에서 부르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네. 자네는 행복한 기분으로 꿈 속을 걸으며 그에 응답했네. 평야를 걸어가는 즐거움을 쉽사리 자네에게 갖다 주는 편하고도 큰 걸음걸이로. 자네는 자네를 위해 그렇게도 다정해진 세계 속으로 얼마나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갔던가! 기요메, 자네는 인색하게도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었네. 뉘우침이 자네의 양심 밑바닥으로부터 왔네. 꿈 속에 갑자기 명확한 현실의 일들이 섞여 들었던 것이네. "나는 아내를 생각했네. 내 보험증서가 아내를 궁핍에서 구해 주겠지. 그러나 보험이란...." 실종인 경우, 법률상의 사망은 4년 후로 연기된다. 이 생각이 다른 영상들을 지워 없애고, 또렷하게 자네 마음 속에 나타났네. 그런데 그때 자네는 급경사진 눈 비탈에 배를 깔고 엎어져 있었네. 자네 몸뚱이는 여름이 되면 이 흙탕물에 섞여 안데스의 수많은 늪 중의 하나로 굴러 들어갈 것이다. 자네는 그것을 알았네. 그러나 자네는 또한 50미터 앞에 바위 하나가 솟아나 있다는 것도 알았네. "나는 생각했네. 내가 다시 일어만 난다면 저기까지는 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내 몸을 저 바위에 기대 두면 여름에 날 찾아 낼 수 있을 거다." 한번 일어서자 자네는 이틀 밤 사흘 낮을 걸었네. 그러자 자네는 멀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네. "나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걸 여러 가지 징조로 알았네. 그 중의 하나는 이런 거였네. 나는 대략 2시간마다 구두 운두를 더 잘라 내거나, 부어 오는 발을 눈으로 문지르거나, 또는 다만 심장을 쉬게 하기 위해 멈춰서야만 했네. 그런데 마지막 며칠이 되자 기억력이 없어지더군. 다시 걷기 시작해서 꽤 시간이 지나서야 머리 속에 퍼뜩 생각나는 걸세. 나는 번번이 무엇인가를 잊곤 했네. 첫 번은 장갑 한 짝이었는데, 그 혹한에 그건 중대한 일이었지! 나는 그것을 내 앞에 벗어 놓았다가 집지 않고 그대로 떠났던 거네. 다음은 시계였어. 다음은 나이프, 또 다음은 나침반, 쉴 때마다 나는 가난해져 갔네. 살아날 길은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뿐이었네. 또한 걸음, 언제나 같은 한 걸음을 다시 내디디는 거였네...." "내가 한 일은, 맹세하네만,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고귀한 이말, 인간을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앉히고, 그를 영예롭게 하고, 진정한 계급을 결정해 주는 이 말이 내 기억에 되살아난다. 자네는 마침내 잠들었다. 자네의 의식은 이미 없어 져 버렸지만 이 상처입고, 구겨지고, 타버린 육체로부터 잠이 깸과 더불어 되살아나서 다시금 이 육체를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이때 육체는 하나의 정교한 도구, 하나의 좋은 하인일 뿐이다. 이 정교한 도구에 대한 자랑을, 기요메, 자네는 이렇게 표현했네. "먹지도 못한 채 사흘이나 걷고 나니...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건 자네도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말일세! 깎아지른 듯한 비탈에서 허공에 매달려서 손잡이가 될 구멍을 눈 속에 파내면서 더듬어 가는 그때 심장이 뛰질 않는 걸세. 멈칫멈칫하더니 다시 뛰겠지. 고르지가 않은 거야. 1초만 더 심장이 멈칫거려도 나는 손을 놔버릴 것만 같았어. 나는 꼼짝도 않고 내 가슴 속에 귀를 기울였네. 자네, 알겠나? 나는 일찍이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도 그 몇 분 동안 내 심장에 매달리듯이 그만큼 바싹 엔진에 매달려 본 적이 없었네. 내가 자네를 밤새워 간호하던 멘도사의 그 병실에서 자네는 마침내 숨이 찬 잠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요메는 어깨를 흠칫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겸손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미덕을 훨씬 넘어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찬양 받고 그가 어깨를 흠칫한 것은 그의 총명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다. 사람이란 일단 사건 속에 휘말려 들면 더 이상 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오직 미지의 것만이 사람들을 겁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도 누구든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미지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렇게도 총명한 신중함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때는 더욱 그렇다 기요메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그의 곧은 성격의 결과인 것이다. 그의 참된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자기의 책임을 느끼는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또 기다리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는 그의 손안에 그들의 슬픔도 기쁨도 쥐고 있다. 저기 살아있는 인간들 속에 새로이 건설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 그것에 참여해야만 한다. 자기 직무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의 일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도 또한 자기의 잎사귀들로 드넓은 지평선을 뒤덮는 역할을 맡은 위인들 중에 끼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빈곤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또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으로 아는 일이다. 또 자기의 돌을 갖다 놓으면서 세계의 건설에 가담한다고 느끼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사람들을 투우사나 도박꾼들과 혼동하려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비웃는다. 그 죽음이 맡은바 책임감에 뿌리박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빈약함의 표시이거나 젊음의 과잉일 뿐이다. 나는 자살한 어떤 젊은이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의 괴로움이 그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자기 심장에 총알을 쏘아 박히게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문학적인 유혹에 빠져 그 손에 흰 장갑을 끼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게 생각나는 것은 이 애처로운 광경 앞에서 숭고하다기보다는 천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렇게도 사랑스러운 얼굴 뒤에 그 사람의 두개골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다른 소녀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한 소녀의 모습밖에는. 이 초라한 운명 앞에서 나는 인간의 참다운 죽음의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게 이렇게 말하던 한 정원사의 죽음을. "아시겠지만... 땅을 파면 때때로 땀을 흘리죠 신경통으로 다리가 땅기거나 하면, 나도 이 종살이 같은 일을 저주도 했습죠 그런데 지금은요, 땅을 파고, 또 파고 싶기만 하거든요. 땅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땅을 파고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입쇼! 또, 내가 안하면 누가 이 나무들을 손질해 주겠어요?" 그는 갈아야 할 땅을 남기고 갔다. 갈아야 할 지구를 남기고 간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써 모든 땅과 땅 위의 모든 나무들과 맺어져 있는 것이다. 그이야말로 관대한 사람이며, 멋있는 낭비자이며, 위대한 영토의 주인이었다! 그이야말로 자기의 '창조'를 위해서 죽음과 겨루어 싸웠던 때, 기요메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3. 비행기 기요메, 자네가 일하는 낮과 밤이 설사 압력계를 점검하고 자이로스코우프로 기체의 평형을 유지하고, 엔진의 숨결을 청진하고, 15톤의 금속을 어깨로 떠받치는 일로 흘러간다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에게 부과된 문제들은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네는 단번에 시골사람의 그 고귀함과 쉽사리 맺어지는 것이다. 시인과도 같이 자네는 새벽의 예고를 즐길 줄도 안다. 고난의 밤의 심연 속에서 자네는 그 몇 번이나 저 창백한 꽃다발, 캄캄한 땅을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저 광명이 나타나기를 희원했던가. 이 기적의 샘이 때로는 자네 앞에서 천천히 해빙하여 자네가 죽는 물로 체념했을 때 자네를 고쳐주곤 했다. 정교한 기계의 사용이 자네를 무미건조한 기술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급속한 기술의 발달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물질적인 재물만을 바라고 싸우는 사람은 누구나 삶에 보람이 있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쟁기와 같은 하나의 연장이다. 기계가 인간을 해친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당한 것과 그렇게 급속한 변화의 결과를 비판하는데 필요한 시간적인 거리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 역사의 20만 년에 비한다면 기계의 역사의 1백 년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겨우 이 광산이나 발전소의 풍경 속에 겨우 자리잡은 셈이다. 우리는 채 다 짓지도 못한 새집에 살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 주위에서 인간 관계도, 노동 조건도, 풍속 습관도 모두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했다. 우리들의 심리조차도 가장 밑바탕으로부터 혼란되어 버렸다. 이별이니, 부재니, 거리니, 귀환이니 하는 개념의 말은 똑같아도 이미 같은 현실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의 세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만들어졌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의 생활이 우리들의 본성에 부합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언어에 더 부합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진보의 하나하나가 간신히 우리가 체득해 가던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욱더 멀리 쫓아내버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 아직 자기의 조국을 세우지 못한 이민들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가 아직 새 장난감에 감탄하고 있는 젊은 야만인들이다. 우리들의 비행기 경주도 이것 이외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저것은 보다 높이 올라가고, 이것은 보다 빨리 날아갈 뿐이다. 왜 그것을 날게 하는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경주 그 자체가 우선은 그 목적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식민지 군에게 있어 삶의 의의는 정복에 있다. 즉, 병사는 농부를 멸시한다. 그러나 이 정복의 목적은 이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철도 부설이니, 공장 건설, 유정파기에 종사시켰다. 우리들은 이러한 건설이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리기 쉽다. 정복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의 윤리, 도덕은 군인의 윤리. 도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을 해야 한다.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새 집에 생명을 주어야 할 때다. 전자에 있어서의 진리는 집을 짓는 것이었고, 후자에 있어서는 거기 들어가 사는 데 있다. 우리들의 집은 아마도 조금씩 인간다워질 것이다. 기계조차도 완성되어 갈수록 그 역할이 주가 되고, 기계 자체는 몸을 감추게 된다. 인간의 온갖 생산적 노력, 그 모든 계산이며, 설계도 위에서의 모든 밤샘도 외면적인 현상으로는 모두가 단순화로 귀착되는 것 같다. 하나의 원주라든가, 하나의 용골, 또는 한 대의 비행기의 동체의 곡선을 차츰 풀어내어 여자의 유방이나 어깨의 곡선의 그 단순한 순수성을 갖게 하기까지에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기사들이나, 제도사들, 연구실의 계산원들의 일도 외견상으로는 그 날개가 잘 눈에 띄지 않게 될 때까지, 동체에 붙인 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될 때까지 닦고 문지르고 연결을 가볍게 하고 날개의 균형을 잡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광물을 지니고 있는 암석으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히 활짝 핀 그 형태가 신비롭게도 결합된, 그러면서도 시와 같은 훌륭한 질을 갖춘 천성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완성이란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아무것도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발달의 극치에 다다르면 기계는 몸을 숨긴다. 발명의 완성은 이와 같이 발명이 없는 것과 종이 한 겹 사이이다. 그리고 기계에 있어서도 눈에 띄는 장식은 점점 사라지고 바닷물에 닦여진 조약돌처럼 자연스러운 물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사용되면서 차츰 제 자신을 잊혀지게 된다는 것도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전에 우리는 비행기에서 복잡한 공장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엔진이 돌아간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우리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엔진도 마침내 돌아간다는 자기의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주의력을 도구에 빼앗길 필요는 없게 됐다. 도구 너머로, 도구를 거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자연, 정원사의, 항해자의, 또는 시인의 그 자연이다. 조종사는 날기 시작하자마자 물과 공기와 접촉하게 된다. 엔진이 전개되고, 기체가 벌써 바다를 가르며 단단한 파도소리를 억누르고 징처럼 울릴 때, 그는 자기의 허리의 동요로써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느낀다. 이 15톤의 물질 속에 비상을 가능케 하는 그 성숙이 준비되고 있음을. 조종사는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면 차츰 그의 손바닥 안에 이 힘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조종간의 금속성 기관은, 이 선물이 그에게 주어짐에 따라 그의 힘의 전달자가 된다. 이 힘이 무르익으면 꽃을 따기보다도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조종사는 비행기를 물에서 떼어서 대기 속에 얹어놓는 것이다. [ 4. 비행기와 지구 (1) 비행기도 틀림없이 하나의 기계지만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분석의 기구인가! 이 기구는 우리에게 땅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길이란 사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를 속여 왔다. 우리는 자기의 백성을 찾아 보고 그들이 자기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했다는 저 옛이야기 속의 여왕과 비슷하다. 그의 신하들은 여왕을 속이려고 행차하는 길에 훌륭한 장식을 세우고 사람을 사서 춤을 추게 했다. 여왕은 그 가느다란 길밖에 자기 나라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넓은 들판에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자기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오랫동안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걸어왔다. 길은 불모의 땅이나, 바위나 사막을 피해서 인간의 욕망에 따라 샘에서 샘으로 간다. 길은 농부들을 곡간에서 밀밭으로 이끌어가고, 외양간 문턱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가축을 받아다가 새벽빛 속의 개자리 밭에 풀어 놓는다. 길은 이 마을을 저 마을과 결합시킨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저기로 결혼하니까. 그리고 길 중의 하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아시스를 즐기기 위해 수십 번을 우회한다. 이렇게 달콤한 거짓말과도 같은 길의 굴곡 하나하나에 속아서 여행하는 동안 잘 관개된 많은 땅과, 과수원과, 목장들을 보아 온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감옥의 모습을 아름답게 생각해 왔다. 이 지구를 우리는 기름지고 부드러운 것으로만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시력은 예민해졌고, 우리는 무자비할 만큼 발전을 했다. 비행기로 우리는 직선을 배웠다. 이륙하자마자 우리는 물 먹이는 곳이나 외양간으로 기울어지는 길들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구부러져가는 길들을 버린다. 이때부터 정든 굴종에서 벗어나고 샘에 대한 욕망에서 욕망에서 해방되어 우리는 먼 목표를 향해 기수를 돌린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직선탄도의 높이에서 본질적인 바탕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위와 모래와 소금의 집적이며, 그곳에는 가끔 생명이 폐허의 구덩이에 돋아난 한줌의 이끼처럼 여기저기에 꽃을 피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짜기 속을 미화하고,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후의 혜택을 받는 꽃밭처럼 피어나 있는 이 문명을 조사하면서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로 바뀐다. 과학자가 실험기구를 통해 보듯이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을 관찰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읽고 있는 것이다. (2) 마젤란 해협을 향하는 조종사는 갈레고스강의 조금 남쪽에서 오래된 용암 분출구 위를 나아가게 된다. 이 잔해는 20미터 두께로 평야를 짓누르고 있다. 이어서 그는 둘째 분출구, 셋째 분출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땅이 솟아오른 곳마다, 2백 미터쯤의 젖꼭지 같은 같은 야산 하나마다 모두 옆구리에 분화구 흔적을 가지고 있다. 거만한 베스비어스 산과는 달리 이것은 들판 위에 늘어선 유탄 포의 포구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지금은 변해버린 풍경속에서, 수천 개의 화산들이 서로 호응하듯 불을 뿜으면서 지하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울려대던 당시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정적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제 사람들은 검은 빙하로 장식된, 영원히 잠잠해진 땅위를 비행한다. 그러나 더 멀리 더 오래 된 화산들은 벌써 황금빛 잔디를 입고 있다. 가끔 그 우묵하게 파인 곳에는 나무 한 그루가 낡은 화분 속의 꽃처럼 자라고 있다. 황혼빛 속에서 평야가 짧은 풀로 꾸며져 공원처럼 사치스러워지고, 이제는 그 거대한 둘레에서나 겨우 불거질 뿐이다. 산토끼 한 마리가 뛰어 가고, 새 한 마리가 날아 오른다. 이 별 위에, 좋은 흙반죽이 쌓인 새로운 지표를 마침내 생명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뿐따 아레나스 조금 못미친 곳에 마지막 분화구들이 솟아올라 있다. 편편한 잔디밭이 화산들의 기복을 따라 펼쳐져 있다. 이제는 그 화산들도 평온하기만 하다. 갈라진 곳마다 잔디의 부드러운 아마실로 꿰매져 있다. 지면은 편편하고, 경사는 완만하여 사람들은 그 화산으로서의 기원을 잊어버린다. 이 잔디밭이 구릉 옆구리의 어두운 상혼을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세계 최남단의 도시 뿐따 아레나스 원시의 용암과 남극의 빙하 사이에서 우연히 약간의 진흙에 의지해서 이 도시는 존재한다. 시커먼 분출구에서 그리도 가까운 곳이어서, 사람들은 한층 더 인간의 기적을 느끼게 된다. 얼마나 이상한 만남인가! 어떻게, 또 왜 인간이라는 길손들이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살 수 없는 이 가식의 정원을 하나의 지질학적 시대, 하고 많은 날 중에서 축복 받은 이 하루에 찾아오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저녁의 아늑함 속에 착륙했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샘물 가에 기대서서 소녀들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두어 걸음 앞에 서서 나는 인간의 신비를 더욱 느낀다. 생명이 생명과 그렇게도 쉽게 결합되고, 바람의 침대 속에서도 꽃들은 꽃들과 섞이며, 한 마리의 백조는 다른 모든 백조와 알게 되는 이 세상에서 홀로 인간들만이 그들의 고독을 쌓고 있다. 얼마나 커다란 공간이 그들 사이의 마음의 통로를 가로막는 것을,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눈을 내리뜨고 혼자 미소지으며 이미 귀여운 교태와 거짓을 품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저 소녀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알 수 있으랴? 그녀는 한 애인의 생각과, 목소리와, 침묵으로써 하나의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그 애인 말고는 모두가 야만인이었다. 나에게는 그녀가 어느 떠돌이 별에 있는 것보다도 더 자기의 비밀과, 습관과, 자기 추억의 즐거운 메아리 속에 갇혀 있는 듯이 느껴졌다. 화산에서, 잔디밭에서, 또는 바다의 소금물에서 어제 막 태어난 이 소녀가 벌써 반은 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어느 샘물 가에 기대 서 있다. 노파들이 물을 길으러 온다. 그녀들의 일생의 비극에 대해서 나는 지금 그 하녀의 몸짓밖에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사내 아이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달랠 길 없는 한 예쁜 아이로밖에는 내 기억 속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방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제국'에는 끝내 들어갈 수 없다. 얼마나 초라한 무대장치 속에서 인간의 원한과 우정과 기쁨의 거창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가? 아직도 식지 않은 용암 뒤에 위태롭게 서 있으면서, 벌써 뒤에 덮쳐올 모래와 눈사태에 위협받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 영원에 대한 동경을 어디서 찾아낸 것일까? 그들의 문명은 취약한 도금에 불과하다. 화산이, 새로운 바다가, 모래바람이 그것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뿐따 아레나스 시는 보오쓰(프랑스의 곡창 지방)의 땅처럼 속속들이 기름지게 느껴지는 진짜 땅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도 다른 곳처럼 삶이란 사치이며, 인간의 발 밑에는 깊이 있는 땅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뿐따 아레나스에서 10킬로 미터 되는 곳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늪이 있다는 것을, 왜소한 나무들과 나지막한 집들에 둘러싸인, 농가 앞마당의 웅덩이처럼 보잘것없는 그 늪은 이상스럽게도 밀물 썰물이 있다. 이 늪은 갈대와 뛰노는 아이들의 이렇듯 평화로운 현실에 감싸여 있으면서도 낮과 밤에 그 완만한 호흡을 계속하면서, 또 하나의 다른 법칙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잔잔한 수면 아래, 꼼짝 않는 얼음 밀, 단 한 척의 낡은 조각배 밑에서 달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소용돌이가 이 검은 덩어리 밑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소화작용이, 풀과 꽃의 가벼운 이불 밑에서 이 호수 주위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백 미터도 못되는 이 물웅덩이는 사람들이 인간의 대지 위에 든든히 자리잡고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이 도시 문턱에서, 어찌알랴, 바다의 맥박을 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의 떠돌이 별 위에 살고 있다. 이 별은 이따금 비행기의 덕분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근원을 보여준다. 달과 관계 있는 웅덩이가 숨겨진 친척 관계를 드러내 보이듯이...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한 다른 징후도 알았다. 쥐비 끝 부분과 시스레로스 사이를 사하라 사막의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고 있노라면 원추대 모4양의 사고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데 그 넓이는 백 보 정도에서부터 30킬로 미터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다. 그 높이는 놀라울 만큼 한결같이 3백 미터이다. 그런데 높이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고원들은 어느 것이나 같은 색깔, 같은 흙의 결, 같은 절벽의 돌의 새김들을 보이고 있다. 모래 위에 홀로 솟아나와 있는 신전의 원주만으로도 붕괴되기 전의 식탁의 화려함을 보여주듯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이 모래 기둥들도 예전에는 하나로 되어 있었던 광대한 사구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카사블랑카와 다까르 간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던 당시에는 기재가 취약해서 고장이니, 수색이니, 구출 작업이니 해서 우리는 종종 불귀순 지구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모래란 놈은 속임꾼이다. 단단하리라고 믿었다가는 파묻혀 버린다.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보이고, 발뒤꿈치 밑에서 굳은 소리를 내는 옛 염전 광만 하더라도, 가끔 바퀴 무게로 내려앉아 버린다. 그러면 흰 소금 껍질이 갈라지고 그 밑은 시커먼 늪지의 악취를 풍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 사구의 편편한 표면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함정을 숨겨두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보장은 알이 굵고 단단한 모래의 덕택이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 작은 조개껍데기들의 어마어마한 퇴적이었다. 그것들은 사구의 표면에서는 아직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만 능선을 따라 내려감에 따라 가루가 되어 엉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산기슭의 가장 오래된 퇴적층에서는 그것들은 이미 순수한 석회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동료인 레느와 세르가 불귀순민들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있을 때, 모르인의 심부름꾼 한 사람을 내려놓기 위해 이 안전지대 하나에 착륙한 일이 있다. 나는 그를 그곳에 남겨 두고 떠나기에 앞서, 그가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나 하고 그와 함께 찾아보았다. 그런데 우리의 이 높이 쌓은 대는 어느 쪽에서나 나사 모양과 같은 주름을 지으며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착륙지를 찾아 이륙하기에 앞서 여기서 꽤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어쩌면 나는, 일찍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도 더럽힌 적이 없는 이 땅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는 어린애 같은 기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용감한 모르인의 불귀순민도 이 성과 요새를 공격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유럽사람도 일찍이 이 지역을 탐험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한의 순결한 모래를 밟고 섰다. 나는 이 조개껍데기 가루를 귀중한 황금인양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흘려보내며 반짝이게 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 정적을 깨뜨린 최초의 인간이었다. 태고 적부터 단 한 포기의 풀도 나게 한 적이 없는 이 북극의 빙산과도 같은 곳 위에서, 나는 바람에 불려 온 한 알의 씨앗처럼 생명의 최초의 증거였다. 별이 하나, 벌써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별을 골똘히 쳐다봤다. 나는 생각했다. 이 순백의 지면은 수천만 년째 오직 별들에게만 바쳐져 왔었다는 것을.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순결한 식탁보 그리고 이 식탁보 위, 내 앞에서 15내지 20미터쯤 되는 곳에 까만 조약돌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위대한 발견이라도 했을 때처럼 가슴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3백 미터 두께로 쌓인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지층 전채가 하나의 절대적인 증거인양 돌 하나라도 거기 있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의 완만한 소화작용에서 생겨난 규석들이 어쩌면 저 땅속 깊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 그들 중의 하나를 이다지도 새로운 지표 위까지 올려 놓게 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나의 발견 물을 주워 들었다. 단단하고 까맣고 주먹만하고 금속처럼 무겁고, 눈물 모양을 한 이 조약돌을. 사과나무 밑에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사과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별아래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별가루밖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어떠한 운석도, 내가 주워든 이것만큼 명백하게 자기 근원을 보여준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쳐들며 극히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하늘의 사과나무에서는 다른 사과들도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수십만년 이래 아무도 그것들을 흩뜨려 놓지 않았을 거니까. 또 그것들은 다른 물질들과 조금도 뒤섞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당장 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 내 가설은 실증되었다. 나는 대략 1헥타르에 돌 하나 꼴로 내 발견 물을 주워 모았다. 어느 것이나 응결된 용암의 그 형상, 언제나 까만 다이아몬드의 경도였다. 나는 이리하여 이 별의 우량계 위에 서서 수천만 년의 시간의 축도 속에서 이 느린 불의 소나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지구의 둥그런 등 위에, 이 자기를 띤 식탁보와 별들 사이에 한 인간의 의식이 서 있어, 이 별의 비가 거울에 비치듯이 그의 인식에 비쳐 나왔다는 그것이다. 광물의 층 위에 한 꿈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보니 꿈 하나가 생각난다... 또 한 번은, 모래가 두껍게 쌓인 지방에 불시착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빛 언덕들은 달빛에 그 밝은 쪽 경사면을 향하고 있었고, 어두운쪽 경사면은 빛의 분계선까지 솟아 올라 있었다. 그늘과 달빛의 이 적막한 선대 위에는 작업이 끝난 뒤의 평화와 함정의 침묵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밤하늘의 연못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별들의 연못을 향하여 어느 모래 산 위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 심연과 나 사이에 붙잡을 나무 뿌리 하나 없고, 지붕 하나 나뭇가지 하나 없기 때문에 나는 벌써 몸을 의지할 곳을 잃고 잠수부처럼 추락에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지는 않았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뒤꿈치까지 나는 땅에 붙들려 매어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내 몸무게를 대지에 내맡기고 있는 데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인력이 나에게는 사랑처럼 지고의 힘으로 느껴졌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 주고,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들어올리고, 나를 밤의 공간 속으로 옮겨 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때 마차에 착 달라붙게 하는 것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이 지구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깨로 떠받쳐 주는 듯한 든든함과 안전감을 맛보았으며 내 등밑에 내가 탄 이 배의 휘어진 갑판을 느꼈다. 나는 내 몸이 실려가고 있다는 의식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에 설령 힘을 내려고 안간힘 하는 물질들의 한숨이나, 항구로 돌아오는 낡은 범선들의 신음소리, 역풍에 시달리는 작은 배들의 날카롭고 긴 외침소리 등이 땅 밑에서 들려 왔다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대지 속에서는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량감은 내 어깨에 조화 있게 떠받쳐져 영원히 변함없을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죽은 조역형수의 시체가 추를 달고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듯이 분명히 이 나라에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사막 속에 홀로 떨어져 반도들의 습격에 위협받으면서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알몸으로, 내 생활의 중심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침묵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중심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모르인들이 내일이라도 나를 학살하지 않는다면, 여러 날과 주일과 달들을 허비해야 하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다만 숨을 쉰다는 흐뭇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죽어야 할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안에 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꿈들은 샘물처럼 소리도 없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처음에 나는 나를 가득 채워주는 이 흐뭇함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거리에는 목소리도 모습도 없었지만 무언가 존재한다는 느낌, 아주 가까이 있어서 벌써 반쯤은 집착되는 우정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나는 눈을 감고 내 기억의 환희에 나를 내맡겼다. 그것은 어디인지 모르는, 검은 전나무와 보리수와 우거진 넓은 정원이었고,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낡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이 여기서 멀든 가깝든, 또 그 집이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든 없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꿈의 역할을 해주고, 그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나의 하룻밤을 가득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미 모래 벌판에 추락한 불쌍한 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집 냄새의 추억이 가득 차 있는 그 현관의 서늘함이 가득 차 있는, 그 활기를 띠게 하던 목소리들이 가득 찬 이 집의 어린아이였다. 연못 속의 개구리 울음소리까지도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다. 나 자신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사막의 맛이 어떤 부재들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개구리조차 울지 않는 이 천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침묵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내게는 이런 천 가지 부호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이미 모래와 별들 사이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이 배경으로부터는 차디찬 메시지밖에는 받지 못했다. 전에 내가 이런 배경으로부터는 얻었다고 믿었던 영원에 대한 동경도, 나는 이제 그 근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의 화려하고 큰 장롱들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 장롱 문이 빠끔히 열려 있어서 눈 같이 흰 시트가 채곡채곡 개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문이 빠끔히 열리며 눈같이 찬 피륙들이 보였다. 늙은 가정부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노상 살펴보고 펼쳐 보고, 다시 개켜 놓고, 세탁한 속옷들을 다시 세어보곤 하면서 이 집의 영구성를 위협하는 어떤 불길함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아이구 하느님, 이걸 어쩌나!' 하고 소리치면서 달려가 램프 불 밑에서 눈이 벌개 가지고 그들 제단 보의 실 올을 고치고, 돛대가 3개인 범선의 돛만큼이나 근 백포를, 자기보다도 큰 사람, 하느님이나 그의 배에라도 쓰려는지 열심히 꿰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을 위해 한 페이지만 더 써야겠다. 내가 첫 번 비행에서 돌아왔을 때, 할멈이여,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났다. 비늘을 한손에 들고, 무릎까지 흰 천 더미 속에 파묻혀, 해마다 주름살이 더하고 백발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손은 우리들의 숙면을 위해서 구김살없는 시트를, 수정 그릇과 빛의 축제 같은 우리들의 만찬을 위해서 솔기 없는 식탁보를 마련하고 있는 당신을. 나는 바느질 방으로 당신을 찾아가 당신 앞에 앉아서 당신을 감격시켜 주기 위해, 세상을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당신을 놀려 주기 위해, 죽을 뻔했던 내 모험들을 들려주곤 했었다. 당신은 말했었지.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어릴 적부터 내가 곧잘 속옷에 구멍을 냈었다고... "아이구! 이걸 어쩌나! 걸핏하면 무릎을 깼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붕대를 감아달라고 했었다우. 마치 오늘밤처럼 말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지금 내가 돌아온 것은 정원 안쪽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끝에서야. 그래서 나는 고독의 쓰디쓴 냄새를, 뜨거운 모래의 회오리 바람을, 열대지방의 번쩍이는 달을 데리고 온 거야!" 그러자 당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아암, 사내애들은 뛰고 뼈를 부러뜨리고 하면서 자기가 아주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거라우."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나는 이 정원보다도 훨씬 먼 곳을 보고 왔단 말야! 그 따윈 사막이나, 화강암이나, 처녀림이나, 큰 늪 가운데 갖다 놓으면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대뜸 총부리를 겨눠대는 땅이 있다는 걸 할멈은 알아? 얼어붙은 밤에, 지붕도 없이, 침대도 없이, 이불도 없이 잠을 자는 사막이 있다는 것을 할멈, 알기나 해...." 그러자 당신은 소리쳤었지. "어휴, 야만인!" 성당의 하녀의 신앙을 움직일 수 없듯이 나는 이 할멈의 신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눈멀게 하고, 귀머거리로 만든 그의 미천한 운명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이 밤, 사하라의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벌거숭이로 내팽개쳐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속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자기를 띠고 있건만, 이 중력이 나를 땅에 잡아 매어 놓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력이 나를 나 자신에게로 데려온다. 나는 그 많은 것들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내 중력을 느낀다. 나의 꿈은 이 모래언덕보다도, 저 달보다도, 여기 있는 모든 존재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아아! 집의 소중함은 그것이 우리들을 감싸 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또 그 벽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우리들 마음 속에 그리도 많은 포근함을 축적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샘물처럼 꿈들이 태어나는 이 안보이는 덩어리를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사하라, 나의 사하라여! 너는 이제 털실을 잣는 한 할멈 덕분에 아주 황홀해져 있구나! [ 5. 오아시스 나는 사막에 대해 이미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오아시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 그 모습이 내게 떠오르는 오아시스는 사하라 오지에 숨어 있다. 그런데 비행기의 또 하나의 기적은 당신을 신비의 한가운데로 곧바로 데려다 준다는 그것이다. 당신을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의 개미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였다. 당신은 들판에 별 모양으로 벌어져서 동백처럼 논밭의 양분으로 갈리는, 길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그 도시들을 냉철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계 위에서 바늘이 한 번 떨자 저 아래에 있는 저 푸른 수풀이 하나의 우주가 되어버린다. 당신은 잠들고 있는 정원 잔디밭의 포로가 된 것이다. 먼 곳을 재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 우리네 어떤 집 정원의 담이 중국의 만리장성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둘러싸고 있을 수도 있으며, 한 소녀의 마음이 침묵에 의해서, 사하라의 오아시스가 모래의 두꺼운 켜로 숨겨지는 것보다 더 잘 감춰질 수 있다. 나는 세계 어느 곳에선가의 짧은 착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꽁꼬르디아 근처에서의 일이었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신비란 그렇게 흩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들판에 착륙했었는데, 내가 동화의 나라를 체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나를 태우고 달리는 그 낡은 포오드 차도, 나를 태워준 그 온화한 부부도 아무 별다른 것이 없었다. "오늘밤 우리 집에서 묵으시오...." 그런데 어느 길 모퉁이를 돌아가자, 달빛 아래 숲이 하나, 그리고 숲 뒤에 그 집이 나타났다. 얼마나 이상한 집이었던지! 몽톡하고, 육중한 것이 마치 성과 요새 같았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이 전설의 성은 수도원처럼 평화롭고 안전하고 듬직한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때 두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금단의 왕국 입구에 서 있는 두 재판관처럼 엄숙하게 나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쪽이 입을 뾰족 내밀더니 초록색 나무막대기로 땅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소개가 끝나자, 두 처녀는 이상하게 도전적인 태도로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고는 사라졌다. 나는 재미 있으면서도 매력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단순하고 조용하며, 마치 무슨 비밀의 첫 마디처럼 은밀했다. "이거 참!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요!" 아버지가 간단히 말했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언젠가 파라과이의 수도에서, 포장해 논 돌의 틈바귀로 코끝을 내민 짓궂은 풀잎을 보고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 풀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처녀림의 척후병으로서, 인간들이 여전히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지, 이 돌들을 약간 뒤집어 엎을 때가 되지 않았는지 보러 온 것이었다. 나는 굉장히 큰 풍요함을 나타내주는 이런 황폐의 형태를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이 집에 들어와서는 감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오랜 세월에 다소 금이 간 이끼 덮인 고목처럼, 또한 10세대 전부터 연인들이 앉곤 했던 나무 벤치처럼 아주 매력 있게 황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바닥은 닳아빠졌고, 문짝은 벌레가 파먹었고, 의자들은 건들거렸다. 그런데 여기서는 수리는 않는 대신 청소는 깔끔히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깨끗했고 밀초로 닦여져서 윤이 났다. 그래서 살롱은 주름살 많은 노파의 얼굴처럼 이상하게 강직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벽의 균열과 천장의 틈새가 모두 나를 감탄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마룻바닥에 감탄했다. 여기는 꺼져 들어갔고, 저기는 배의 타랍처럼 출렁거렸지만, 그래도 잘 닦여지고 광을 내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이상한 집은 조금도 소홀히 했다거나, 게을리 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스런 존경만을 자아내게 했다. 해마다 아마도 이 집의 매력에, 그 모습의 복잡성에, 그 친밀한 분위기의 열정에, 또 응접실에서 식당으로 건너가려면 겪어야 하는 여행의 위험에 새로운 그 무엇인가가 보태어져 왔음에 틀림없다. "조심하십쇼!" 그것은 구멍이었다. 그 집 사람은 내게 주위를 환기시켰다. 보다시피 워낙 큰 구멍이어서 내가 다리 하나 부러뜨리기는 손쉬울 것이라고 이 구멍,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한 일이다. 이 구멍에는 왕자의 품격, 온갖 변명을 아^36^예 경멸하는 위풍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집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구멍쯤 막을 수야 있죠. 우린 부자니까요. 하지만...." 또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었지만. "이 집을 시에서 30년 계약으로 빌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리는 시에서 해야 하는데, 워낙 양쪽이 고집이 세어서...." 그 집 사람들은 설명을 경멸했다. 그 대범함이 내 마음에 들었다. 고작 이런 말을 할 뿐이었다. "이런! 약간 퇴락해서요." 그것도 아주 가벼운 어조여서, 나는 이 친구들이 그것을 조금도 언짢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생각해 보시오. 미장이, 목수, 가구 수리공, 석고 세공사들의 한 패가 이런 과거 속에 그들의 모욕스런 연장들을 펼쳐 놓고 1주일도 안돼서 당신이 전혀 알지도 못할 집, 남의 집에 방문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집으로 뜯어 고쳤다면 어떻게 될가를! 그것은 아무런 신비스러움도 없고, 아늑한 구석도 없고, 발 밑에는 함정도 없는, 도시 호텔의 응접실 같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이 요술의 집에서 처녀들이 사라진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집의 처마 밑 방들은 어떨까. 응접실이 이미 다락방만치 풍성함을 보이고 있으니! 응접실의 벙싯 열린 아주 조그마한 장에서도 벌서 누렇게 바랜 편지 뭉치며, 증조할아버지 때의 문서며, 온 집안의 자물쇠 수보다도 더 많은 열쇠들, 그러니 어느 자물쇠에도 맞지 않는 열쇠 꾸러미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우리의 이성을 혼란케 하고, 지하 창고며, 거기 숨겨진 궤짝이며, 그 속의 루비 금화를 연상하게 하는 그 기막히게 쓸데없는 열쇠들. "어떠세요, 식탁으로 가실까요?"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어느 방에서나 향내처럼 감도는 오래된 서고의 냄새, 온 세상의 온갖 향료보다도 향기로운 그 냄새를 맡았다. 무엇보다도 램프 불을 옮겨놓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것은 묵직한 진짜 램프였으며, 나의 소년 시절의 가장 아득한 무렵처럼 그 집 사람은 그것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벽에다 이상한 그림자를 어른거리게 했다. 그 집 사람은 그 램프 속에 빛의 다발과 검은 종려 잎을 떠오르게 했다. 램프가 자리를 잡고 나자 빛의 해변이 펼쳐지고, 마루바닥만이 삐걱거리는 그 둘레의 널따란 밤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두 처녀가 아까 사라졌을 때와 똑같이 신비롭고 조용하게 다시 나타났다. 그녀들은 정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개와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맑은 밤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저녁바람 속에서 초목의 향기를 맡곤 했을 것이다. 지금 그녀들은 냅킨을 펴면서 곁눈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보고 있다. 자기들의 친한 동물들 속에 나를 끼워 줄까 말까 하고 생각하며, 왜냐하면 그녀들은 갈기도마뱀 한 마리와 망구스 한 마리, 여우 한 마리, 원숭이 한 마리에다 꿀벌까지 기르고 있었으니까. 이런 것들은 한곳에 어울려 살면서 서로 화목하며, 새로운 지상낙원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 처녀들은 지상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그들을 어루만지고, 먹이를 주고, 물을 먹이고, 또 망구스에서 꿀벌에 이르기까지 귀를 기울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활발한 두 처녀가 그들의 온 비판력과 예민성을 발휘하여, 마주앉은 남성에 대해서 재빠르고 은밀하며 또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의 누이들도 이와 같이 우리 집 식탁에 처음 앉은 손님들에게 점수를 메기곤 했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대화가 중단됐을 때, 침묵을 깨뜨리고 갑자기 이런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11점(프랑스의 학교에서는 대개 20점 만점의 채점법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재미는 누이들과 나밖에는 아무도 몰랐었다. 이런 장난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약간 불안했다. 그리고 내 재판관들이 몹시 영리하다는 느낌 때문에 더욱 거북했다. 그들은 속임수를 쓰는 짐승과 순진한 짐승들을 분별할 줄도 알고, 그들의 여우의 발소리로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도 아는, 속마음의 움직임에 대하여 그렇게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재판관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날카로운 눈과 그렇게 올곧은 작은 마음들을 좋아했으나, 그녀들이 이 장난을 달리 바꾸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비굴하게 '11점'에 겁이 나서 그녀들에게 소금 접시를 건네 주고, 포도주를 따라 주기도 했지만, 눈을 쳐들 때마다 그녀들은 이런 것으로는 매수할 수 없을 만큼 얌전하고 의젓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첨은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허영을 몰랐으니까. 그녀들은 허영심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부심에 의해서 내 도움 없이도 자신들에 대해 나의 아첨의 말이 나타냈을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직업의 매력 같은 것을 끌어내어 위신을 세워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지 새 새끼들이 날개가 돋았는가 살펴보거나, 아래를 지나가는 동무들에게 인사나 하기 위해 플라타너스 꼭대기까지 기어오른다는 것은 지나친 대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천사들이 말없이 내가 식사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었고, 그녀들의 훔쳐 보는 시선과 어찌나 자주 맞닥뜨리는지 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무엇인지 마루 위에서 가벼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식탁 밑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이상하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자 자기의 시험 결과에 만족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시금석을 써보려는 듯, 그 싱싱하고 야성적인 이빨로 빵을 물어뜯으면서 둘째 소녀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그것에 놀라는 야만인이라면 놀래 주려는 천진스런 속셈으로. "살무사들이에요." 그리고 그다지 바보가 아니라면 이 설명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언니가 내 첫 번 반응을 판정하려고 번갯불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둘이 다 더할 수 없이 상냥하고 순진한 얼굴을 접시 위로 숙이는 것이었다. "아! 살무사로군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내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며 내 종아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놈의 살무사가... 다행히도 나는 웃음을 지었다. 아주 예사롭게. 그녀들도 그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즐거웠고, 이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살무사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기도 해서. 언니가 나를 도와 주었다. "구멍 속에 집이 있어요, 식탁 밑에." "밤 열 시쯤이면 돌아와요." 동생이 덧붙였다. "낮에는 사냥을 나가구요." 이번에는 내가 두 처녀를 곰곰이 바라보았다. 그 평화로운 얼굴 뒤에 깃들인 그 영리함과 조용한 웃음. 나는 그녀들이 행사하는 임금님 같은 위엄에 감탄했다. 지금 나는 꿈처럼 생각해 본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아득한 옛일이다. 그 두 천사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아마 결혼을 했겠지. 그렇다면 그녀들은 달라졌을까? 처녀의 위치에서 부인의 위치로 옮겨간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다. 새 집에서 그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잡초와 뱀들과의 우정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들은 어떤 우주적인 것들과 얽혀 있었는데. 그러나 처녀 속에서 여인이 눈을 뜨는 날이 온다. 그러면 자꾸 19점을 주고 싶어진다. 19점이 마음 속의 무거운 짐이 된다. 그때에 한 바보가 나타난다. 그러면 그렇게도 날카롭던 눈이 처음으로 잘못 보고 그 바보를 아름다운 빛깔로 비춰 준다. 그 바보가 정말 시라도 한 구절 읊으면 그녀는 그를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구멍 뚫린 마루바닥을 이해하고, 망구스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식탁 밑의 제 다리 사이에서 몸을 구불거리는 살무사의 신뢰감을 그가 좋아하는 줄로 믿는다. 그래서 잘 가꾼 정원밖에는 좋아할 줄 모르는 그에게 자연 그대로의 꽃밭 같은 자기의 마음을 줘 버린다. 그러면 그 바보는 공주를 노^36^예로 데려가고 마는 것이다. [ 6. 사막에서 (1) 사하라 정기 항공로의 조종사로서 모래밭의 포로가 되어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몇 해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초소에서 저 초소로 날아다니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따사로움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막은 그와 같은 오아시스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않았다. 정원이니, 처녀들이니, 그 무슨 옛날 이야기란 말인가! 물론 우리가 근무를 끝내고 그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활할 수 있는 그 머나먼 곳에는 천도 넘는 처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는 그녀들의 망구스와 책들 틈에서 소녀들은 참을성 있게 달콤한 혼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정녕 그녀들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독을 알았다. 사막에서의 3년간이 나에게 그 맛을 잘 가르쳐 준 것이다. 거기에서는 광물 적인 풍경 속에서 낡아가는 젊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온 세상이 늙어가는 것 같았다.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고, 대지는 밀들을 돋아나게 했고, 여인들은 벌써 아름답다. 그럼에도 계절은 흘러가니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계절은 전진하고 사람은 먼 곳에 붙들려 있다. 그래서 땅 위의 재화가 사구의 가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흔히 사람들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일시적인 평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목적지에 착륙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역풍이 우리를 짓누를 때, 그것을 느끼곤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밤중에 요란스럽게 차축의 소음을 울리며 달려가는 급행 열차의 여객과도 같다. 그는 차창 밖으로 휙휙 던져지듯 지나가는 한 줌의 빛으로 그곳의 번쩍이는 들판이며, 자기 마을의 모습이며, 아름다운 풍경들을 짐작할 뿐이며,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가벼운 열기를 띤 채 조용한 착륙장에 서 있으면서도 아직 비행기 소리로 귀가 멍멍하여 비행중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바람의 중역을 뚫고 미지의 미래로 끌려가고 있음을 우리의 심장의 고동으로써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막에다 불귀순민들까지 겹쳐지나. 쥐비의 밤은 15분마다 시계 치는 소리에 의하기나 한 것처럼 토막내어져 있다. 보초들은 차례차례로 규정된 큰 소리로 경보를 전해 준다. 불귀순 지구 속에 고립돼 있는 그곳의 스페인 요새는 이렇게 하여 모습이 안보이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눈먼 배의 승객과도 같은 우리는 이 외침 소리가 차례차례로 퍼져 나가서, 우리들 위로 해조의 둥근 궤도를 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막을 사랑했었다. 사막이 언뜻 보기에 공허와 침묵뿐인 것같이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애인에게는 몸을 내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의 그 하찮은 마을조차도 자기 몸을 감춘다. 우리가 그 마을을 위해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일 그 마을의 전통이며, 풍습이며, 경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결국 그 마을이 어째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지 모르고 만다. 게다가 우리 바로 곁에 자기 수도원에 갇혀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살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티벳의 고독 속에, 어떤 비행기도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없는 외딴 곳에 솟아나 있는 셈이다. 그의 독방을 찾아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랴! 그곳은 텅 비어 있다. 인간의 왕국은 내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막도 결코 모래나, 뚜아렉족이나, 또는 소총으로 무장한 모르인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갈증을 겪어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사막이라는 우물이 넓은 공간 위에 빛나고 있음을 오늘에야 비로소 발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인도 이렇게 온 집안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 우물이란 사랑처럼 멀리 미치는 것이다. 사막은 처음에는 인적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랍인 유격대의 습격이 두려워, 그들이 몸에 두른 큰 망토의 주름들을 모래 위에서 판독해야 할 날이 온다. 이리하여 그들 역시 사막을 변모시킨다. 우리는 놀이의 규칙을 받아들였고, 그 놀이는 우리를 제 모습대로 만들어 버린다. 사하라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이다. 사막에 접근한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샘으로써 우리의 종교로 만드는 일이다. (2) 나는 첫 비행 때부터 사막의 맛을 알았다. 리겔과 기요메와 나는 누아쇼트 초소 부근에 불시착했었다. 이 모리타니아의 작은 초소는 당시 바다 한가운데 작은 외딴섬만큼이나 모든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이 먹은 중사 하나가 15명의 세네갈 병사들과 함께 거기 갇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하늘에서 온 사자인양 환영했다. "야아! 이거, 당신네들과 얘기를 하게 되다니...이 기분을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아아! 정말!" 아닌게 아니라 그는 울고 있었다. "여섯 달만에 당신네들이 처음이오 식량 보급이 여섯 달마다 한 번씩이니까. 중위님이 올 때도 있고, 대위님일 때도 있죠. 지난번은 대위였지요." 우리는 아직도 정신이 멍해 있었다. 점심 준비를 하고 있을 다까르에서 2시간 거리인데, 연간축받이가 터지니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울고 있는 늙은 중사를 위해 유령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 드십시오, 포도주를 드리는 것이 기쁩니다. 생각 좀 해보십쇼. 대위님이 왔을 땐 그분에게 드릴 포도주가 없었거든요." 나는 이것을 어느 책(남방 우편기. 역주)에 쓴 일이 있지만,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건배조차 못했단 말입니다. 나는 하도 창피해서 전출신청까지 냈었어요." '건배!' 땀에 범벅이 되어 낙타 등에서 뛰어내린 사람과 잔을 찰깍 부딪치며 하는 '건배!' 이 순간을 위해 여섯 달 동안을 살아온 것이다. 한달 전부터 이미 무기에 광을 내고, 초소를 지하실에서부터 처마 밑까지 닦아 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이 축복 받은 날이 가까워 옴을 깨닫고, 전망대 위에서 끊임없이 지평선을 살펴보며, 아따르의 이동 부대가 뒤집어쓰고 나타날 그 먼지를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어서 이 축제를 베풀 수가 없다. 건배를 할 수가 없다. 이래서 체면이 깎였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가 다시 오길 몹시 고대하고 있어요. 나는 그를 고대합니다." "그가 어디 있는데요, 중사?" 그러자 중사는 광막한 모래밭을 가리켰다. "알 순 없지만, 대위님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초소의 망대 위에서 별들 이야기를 하며 지샌 그 밤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남방 우편기. 역주) 감시할 것이라고는 별밖에 없었다. 별들은 거기에도 비행기에서 보는 것과 다름없이 가득 차 있었다. 다만 고정되어 있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별이 무척 아름다운 밤이면, 비행기에서 거의 조종을 하지 않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기체는 차츰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오른쪽 날개 아래로 마을이 하나 보여도 아직도 비행기가 수평인 줄로만 안다. 사막 속에 마을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바다의 어선 떼겠지. 그러나 사하라 한복판에 고기잡이 배가 있을 리 없다. 그러면? 그때서야 착오를 깨닫고 웃음이 난다. 천천히 비행기를 바로잡는다. 그러면 마을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는 떨어뜨렸던 성좌를 그림판에 다시 건다. 저것을 마을이라고? 그렇다. 별들의 마을이다. 그러나 초소 위에서 보면 얼어붙은 듯한 사막과 움직임이 없는 모래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잘 걸려 있는 성좌들. 그래서 중사도 우리에게 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 보십쇼! 나는 방향에는 환해요. 저 별이 있는 쪽이 바로 튀니스죠!" "튀니스에서 왔소?" "아아뇨. 내 사촌누이가 있죠" 그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중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다. "언젠가는 나도 튀니스로 가겠어요." 그럴 테지. 그러나 그것은 저 별 쪽으로 가는 게 아니 딴 길로 해서일 것이다. 원정하는 어떤 날, 우물이 말라서 그를 정신 착란의 시상에나 붙잡히기 전에는. 그렇게 되면 저 별도, 사촌누이도, 튀니스도 모두 뒤범벅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남들에게는 고통스럽게 여겨질 그 영감에 의한 행진이 시작될 것이다. "한번은 대위님에게 튀니스로 사촌누이 일로 휴가를 신청한 일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 대답이...." "그래, 그 대답이?" "그 대답은 이랬어요. '세상에는 사촌누이로 꽉 차 있다' 그래서 더 가깝다면서 다까르로 보내 주더군요" "그래, 사촌누이는 예쁘던가?" "튀니스의 누이 말이오? 물론이죠. 금발이었어요." "아니, 다까르의 누이 말이오." 중사여, 약간은 억울하고 쓸쓸한 듯한 대답을 듣고 우리는 당신을 껴안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 그건 검둥이였어요...." 중사여, 사하라는 당신에게 있어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 쪽으로 끊임없이 걸어오는 하느님이었다. 그것은 또한 5천 킬로 미터의 사막 저편에 있는 금발의 사촌누이의 다사로움이기도 했다. 사막은 우리에게 있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내부에 생겨나는 그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우는 그것이다. 우리 또한 그날 밤에 한 사촌누이와 한 대위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3) 불귀순 지역과 접경해 있는 뽀르 에띠엔은 도시가 아니다. 그곳에는 초소와, 격납고와, 우리 회사의 승무원들을 위한 바라크가 한 채 있을 뿐이다. 둘러싸고 있는 사막이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빈약한 군사 시설에도 불구하고 뽀르 에띠엔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을 공격하려면 굉장한 모래와 폭염의 넓은 띠를 돌파해야 하기 때문에 아랍인 습격대들은 기진맥진하고 물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한 옛날부터, 북쪽 그 어디엔가에서 뽀르 에띠엔을 향해 진격해 오는 습격대들이 항상 있었다. 사령관인 대위가 우리한테 차를 마시러 올 때마다 그는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습격대의 진격로를 마치 아름다운 공주의 전설을 이야기하듯 그려 보여 주곤 했었다. 그러나 그 습격대는 강물처럼 모래에 빨려 들어갔는지 결코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유령 습격대라고 불렀다. 정부가 나누어 준 수류탄과 탄약통들도 밤이면 우리 침대 밑의 상자 속에서 잠을 잔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우리의 비참함에 보호받아, 침묵이라는 적 외에는 싸울 상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장 주임인 뤼까는 낮이고 밤이고 축음기만 틀어놓고 있다. 그 축음기는 생명의 저 먼 곳으로부터 반은 잊어버린 말로 우리에게 말을 하면서 야릇하게도 갈증과 비슷한 목적 없는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초소에서 저녁 식사를 했고, 사령관 대위는 그의 정원자랑을 했다. 그는 정말 프랑스에서 보낸 진짜 흙이 들은 궤짝 셋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4천 킬로 미터를 건너온 것이다. 거기에는 파란 잎이 3개 돋아나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석처럼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대위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공원이오." 그리고 모든 것을 말려 벌리는 모래 바람이 불 때면 이 공원은 지하실로 내려간다. 우리는 초소에서 1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달빛을 이고 우리 초소로 돌아온다. 달빛을 받으면 모래는 분홍빛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빈곤만을 느끼는데, 모래는 분홍빛이다. 그러나 보초의 부르짖음이 온 세상에 감동을 되찾게 한다. 우리들의 그림자에 놀란 사하라 전체가 우리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아랍 습격대가 진격 중이니까. 보초의 부르짖음에 사막의 모든 소리가 메아리 친다. 사막은 이제 빈집이 아니다. 모르인의 대상이 밤에 자기를 띄운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가! 질병이니, 사고니, 습격대니, 이 얼마나 많은 위협들이 전진해 오고 있는가! 인간은 보이지 않는 사격수들을 위한 땅 위의 과녁이다. 그리고 세네갈 사람인 보초가 예언자처럼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프랑스인 이다!'라고 대답하고 그 검은 천사 앞을 통과한다. 그러면 숨을 들이킨다. 이런 위협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귀함을 되돌려 주었던가...오오! 그 위협은 아직 몹시도 멀리 있고, 그다지 급하지도 않고, 그 숱한 모래들에 의해 완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이미 전과 같지 않다. 이 사막은 다시 사치스러워진다. 어디에선가 전진 중이면서 결코 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할 습격대가 이렇게 해서 자기의 신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지금은 밤 11시다. 뤼까가 무전 국에서 돌아와 자정쯤에 다까르발 비행기가 도착한다고 알려 준다. 기상에는 모든 것이 이상 없다. 0시 10분이면 우편물을 내 비행기에 옮겨 싣고 나는 북쪽을 향해 이륙할 것이다. 쪽이 떨어진 거울 앞에서 나는 조심스레 면도를 한다. 이따금 수건을 목에 건 채 나는 문 앞으로 가서 발가숭이 모래밭을 바라본다. 날씨는 좋지만 바람이 잤다. 나는 거울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러 달을 불던 바람이 자면 온 하늘을 어지렵혀 놓는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장을 갖춘다. 비상 신호등을 허리띠에 매고, 고도계며, 연필을 챙긴다. 오늘 밤 내 무전사가 될 네리 한테로 간다. 그도 면도를 하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가?' 지금으로선 만사 OK이다. 이러한 예비 작업은 비행에 있어 가장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푸드득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내 램프에 잠자리 한 마리가 부딪친 것이다. 왠지 모르나 그 잠자리가 내 가슴을 죄인다. 다시 한번 밖에 나가서 바라본다. 모든 것이 맑다. 비행장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절벽이 날이 샐 때처럼 하늘에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사막 위에는 정돈된 집과 같은 깊은 침묵이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나비 한 마리와, 잠자리 두 마리가 내 램프에 와 부딪친다. 나는 또 다시 야릇한 감상에 싸인다. 그것은 어쩌면 기쁨일지도, 불안감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나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며, 아직은 막연하고, 이제 겨우 드러났을 뿐이다. 누가 아주 멀리서 내게 말한다. 이것이 본능이란 것일까? 나는 또 밖으로 나간다. 바람은 완전히 자 버렸다. 여전히 서늘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예고를 받았다. 나는 나를 기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알아차렸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 착각일까? 하늘도 모래도 아무런 징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 마리의 잠자리가 내게 말해 주었고, 또 초록나비도 그랬다. 나는 모래언덕에 올라가 동쪽을 향해 앉는다. 만약 내가 옳다면 그것은 오래지 않아 올 것이다. 오지의 오아시스에서 수백 킬로 미터나 떨어진 이곳에 잠자리가 무엇을 찾아왔단 말인가? 바닷가에 밀려 온 하찮은 표류 물들이 바다를 휩쓰는 사이클론 태풍의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곤충들도 열사의 폭풍이, 멀리 야자나무 숲에서 그 초록나비를 쫓아낸 동쪽으로부터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내게 가르쳐 준다. 그 거품이 벌써 나를 스쳤다. 그리고, 하나의 증거이기에 장엄하게, 중대한 위협이기에 장엄하게, 또한 그것이 폭풍을 머금고 있기에 장엄하게 이 동풍은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가느다란 한숨이 이제 막 내게 와 닿았을까 말까이다. 나는 그 물결이 다가와 핥는 마지막 경계석이다. 내 뒤 20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천막 하나 펄럭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뜨거운 기운은 단 한 번 죽음 같은 애무로 나를 휩쌌다.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에는 사하라가 숨을 돌이켜 두 번째 입김을 내뿜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는 3분도 못가서 우리 격납고의 통풍 통이 떨리기 시작할 것이다. 10분도 못가서 모래가 하늘을 뒤덮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곧 이 불길, 사막이 내뿜는 불길 속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야만적인 기쁨으로 나를 채워 주는 그 것은, 천지의 비밀의 언어를, 귀띔만으로도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이며, 모든 미래가 가벼운 웅얼거림으로 예고되는 원시인처럼, 어떤 발자국을 내가 냄새 맡아냈다는 것이며, 또 그 천지의 분노를 한 마리 잠자리의 날개가 푸덕임에서 읽어냈다는 사실이다. (4) 그곳에서 우리들은 불귀순 모르인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 우리가 비행할 때 넘어 다니는 지역 안쪽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빵이나, 설탕이나, 차를 사러 쥐비나 시스네로스 초소에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그들의 신비속으로 잠겨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가는 그들 중의 몇을 구슬려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유력한 두목일 경우에는 그들에게 넓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회사 간부의 동의를 얻어 가끔 비행기에 태워주기도 했다. 그들의 오만을 꺾는 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포로로 한 백인들을 학살하는 것은 증오에서보다는 오히려 경멸 때문이었으니까. 초소 근처에서 우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욕설조차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외면을 하면서 침을 뱉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만은 자기네들의 힘에 대한 착각에서 오는 것이다. 소총 3백 정의 군대를 전투 준비시켜 놓고는 그들 중의 얼마나 많은 자가 이런 말을 나에게 되풀이했던가. "당신들은 운이 좋소. 걸어서 백 날이나 걸릴 프랑스에 있으니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여행시켜 주었고, 그들 중의 세 사람은 그 미지의 프랑스까지 방문했다. 그들은 언젠가 나를 따라 세네갈에 갔을 때 나무들을 처음 보고는 울음을 터뜨린 패들과 같은 종족이었다. 내가 그들을 자기네 천막 속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나체의 여인들이 꽃들 가운데에서 춤추는 뮤직 홀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무도 샘물도 장미꽃도 본 적이 없었고, 그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시냇물이 흐르는 정원이 있다는 것을 '코란'에 의해서만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30년 동안의 비참한 생활 끝에 이교도의 총탄을 맞고 모래 위에서 쓰라린 죽음을 함으로써 그런 천국과, 거기 갇혀 있는 미녀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라신은 그들을 속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보화가 주어져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그 신은 갈증의 보상도, 죽음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 그 늙은 두목들이 생각에 잠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천막 주위에 인적 없이 펼쳐져 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찮은 기쁨밖에 주지 않는 사하라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신세타령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프랑스 사람들의 신이... 모르인의 신이 모르인에게 해주는 것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더 잘 해주는 것 같아!" 몇 주일 전에 그들을 사보아에 데리고 간 일이 있다. 안내인이 그들을 포효하는 원기둥을 꼬아놓은 것 같은 굉장한 폭포 앞으로 데리고 갔다. "맛을 보시오" 안내인이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물이었다. 물! 여기서는 가장 가까운 우물에 가려 해도 며칠을 걸어야 하며, 또 그것을 찾아냈다 해도 그 속에 메워진 모래를 파내어, 낙타 오줌이 섞인 흙탕물이 나오기까지 몇 시간이 걸려야 했던가! 물! 쥐비 곶이나, 시스네로스나, 뽀르 에띠인에서는 모르인 아이들이 돈을 달라지 않는다. 빈 깡통을 손에 들고 그들은 물을 구걸한다. "물 좀 줘요, 물...." "얌전하게 굴면 준다." 물 한 되가 금 한 되 값이 나가는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모래에서 풀의 초록빛 불꽃을 끌어낼 수 있는 물. 어디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사하라는 대 이동으로 활기를 띤다. 많은 부족들이 3백 킬로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돋아나올 풀을 찾아 내려간다. 그런데 그렇게도 인색하고, 뽀르 에띠엔에서는 10년 내내 한 방울도 떨어진 적이 없는 그 물이 거기에서는 바닥 없는 저 수통에서 온 세계의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울부짖어대는 것이었다. "이제 갑시다." 안내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있게 해주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엄숙히 벙어리가 되어, 이 장엄한 신비가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산의 뱃속에서 솟아나오는 그것은 생명이었고, 사람의 피 바로 그것이었다. 1초 동안에 쏟아지는 물이면, 갈증에 못이겨 소금과 신기루의 호수의 무한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은 저 많은 대상들을 소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이 여기에 나타나 있었다. 어찌 그에게 등을 돌리고 갈 수 있으랴. 신은 그의 수문을 열고 자신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의 모르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얼 더 보겠다는 거요? 갑시다." "기다려야지." "기다리다니, 무얼?" "끝을." 그들은 신이 자기의 미치광이 짓에 지쳐버릴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워낙 인색한 신이니까 이내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물은 천 년째나 흐르고 있는 걸...." 그래서 오늘밤에 그들은 폭포에 대해서는 고집부리지 않는다. 어떤 기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그보다도 그것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네 신을 의심하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의 신은, 아무래도...." 그러나 나는 나의 미개인 친구들을 잘 안다. 그들은 지금 신앙이 흔들리고, 넋이 나가 금방이라도 귀순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다. 그들은 프랑스군 보급대로부터 보리를 보급 받고, 우리 사하라 부대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귀순만 하면 물질적 이득을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셋은 뜨라르자의 추장 엘 맘문의 혈족이다.(이 이름은 틀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우리의 부하였을 적에 알았다. 그 공으로 공적인 명예가 허용되었고 총독에 의해 부자가 되었고, 여러 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그는 세상의 영화에는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어느 날 밤, 그와 사막을 동행하던 장교들을 학살하고, 낙타와 소총을 빼앗아 불귀순 부족들한테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사막에서 추방될 이 한 두목의 영웅적이고도 절망적인 이러한 불의의 반항과 도주, 오래지 않아 아따르의 이동기병대의 탄막 앞에서 봉화처럼 사라져버릴 이 잠시 동안의 영광을 사람들은 배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미치광이 짓에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 맘문의 이야기는 다른 여러 아랍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늙어갔다. 늙으면 사람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자기가 이슬람의 신을 배반했다는 것과, 또 자기에겐 치명적인 계약 조인을 기독교도의 손에 함으로써 자기 손을 더럽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보리나 평화가 그에게 무슨 소용이었던가? 낙오된 무장이 양치기가 된 것쯤인 그는 사하라에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거기는 모래의 주름마다에 감추어진 위협으로 풍요로웠고, 밤에 전방으로 이동한 야영에서 불침번이 파견되었고, 적의 동정을 알리는 정보들이 화톳불 주위에서 기슴을 뛰게 하던 일들을. 그리고 한 번 맛보기만 하면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저 큰 바다의 맛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모든 위엄을 잃어버린 평온한 모래 위를 아무 영광도 없이 헤매고 있다. 오늘이야말로 그에게 사하라는 사막이다. 그가 암살했던 장교들을 어쩌면 그는 존경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라신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안녕히 주무시오. 엘 맘문." "신이 그대를 보호하시기를!" 장교들은 담요를 둘둘 말고, 뗏목 위에서처럼 별을 향해 모래 위에 눕는다. 뭇 별들이 천천히 들고, 온 하늘이 시간을 새겨 간다. 달은 자신의 '예지'에 의해 무에로 이끌려 모래밭 위로 기울어진다. 기독교인 장교들은 이내 잠이 들 것이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별들이 반짝이게 되겠지. 그러면 타락한 부족들에게 지난 날의 영광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만이 모래를 빛나게 하는 그 추격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잠 속에 잠겨 들어간 저 기독교들의 조그만 부르짖음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제 몇 초만 더 지나면, 그 돌이킬 수 없는 일에서 하나의 세계가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잠든 훌륭한 중위들은 학살당하는 것이다. (5) 쥐비에서 오늘 케말과 그의 동생 무얀이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들의 천막에서 차를 마신다. 무얀이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는 입술 위까지 덮는 남색 베일을 벗지 않는다. 그것은 미개인의 경계의 표시다. 케말만이 나에게 말을 하며 경의를 표한다. "내 천막도, 낙타도, 아내들도, 노^36^예들도 모두 당신 것이오." 무얀은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 형에게 몸을 숙여 몇마다 하고는 다시 입을 다문다. "뭐라고 하는 거요?" "보나푸가 게이바네 낙타를 천 마리나 강탈해 갔다는군요." 아따르의 낙타부대 장교인 이 보나푸 대위를 나는 모른다. 모르인들 사이에서의 그의 전설 같은 이름은 나도 들어 알고 있다. 이 형제들은 그에 대해서 분개하며 말하자면, 마치 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의 존재가 사막에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도 그는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남쪽으로 진격중인 아랍인 습격대의 배후에 나타나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재물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가도록 만들고는 수백 마리의 낙타를 약탈해 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천사장과도 같은 이 출현으로 이따르를 점령하고는 석회암 고지에 야영하면서, 잡으러 오라는 불모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위력은 대단해서 부족이 그의 군도를 향해 전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얀이 더 거칠게 나를 바라보며 또 뭐라고 지껄인다. "뭐라고 하는 거요?" "우리도 내일 보나푸에게 진격한다. '소총 3백 자루로,'라고 하는군요." 나도 무엇인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미 사흘 전부터 뻔질나게 우물가로 끌고 가는 낙타들이며, 그 수군거림과 그 열정. 눈에 보이지 않는 범선을 채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밀고 갈 바닷바람은 벌써 일고 있다. 보나푸 때문이 남쪽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영광에 가득 찬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출발이 증오를 품은 것인지, 사랑을 내포한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암살해야 할 그렇게도 훌륭한 적을 가졌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다. 그가 모습을 나타내면, 그 근처의 부족들은 정면으로 맞닥뜨릴까봐 겁이 나 천막을 걷고 낙타들을 끌어 모아 도망치지만, 극히 먼 데 있는 부족들은 사랑과도 비슷한 현기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들은 천막의 평화에서, 여인들의 포옹에서, 달콤한 잠에서 빠져나와, 두 달 동안이나 남쪽으로 기운 빠지는 행군을 하고, 타는 듯한 갈증을 참고, 모래바람 밑에서 웅크리고 기다리고 하던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아따르의 이동 부대를 만나, 신이 허락한다면 거기서 보나푸 대위를 죽인다는, 그 일만큼 훌륭한 일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나푸는 힘이 세오." 케말이 고백한다. 이제야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겠다. 그것은 마치 한 여인을 욕망 하는 뭇 남자들이, 여인의 냉담한 산책의 발걸음을 꿈꾸면서, 그들의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히는 그 냉담한 산책에 속 태우거나 몸이 달아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듯이, 먼 곳에서의 보나푸의 발걸음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덤벼드는 습격대를 교묘히 비켜가면서, 이 모르인 차림의 기독교도는 2백 명의 모르인 역적들 선두에 서서 불귀순 지구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곳은 프랑스의 속박을 벗어난 그의 부하들이 제일 하급자조차도 벌 받지 않고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기의 신을 위해 돌상 위에 제 몸을 제물로 바칠 수 있으며, 또 거기서는 이 신의 위력만이 그들을 제지 할 수 있으며, 그의 약점조차도 그들을 떨게 한다. 그래서 오늘 밤도 모르인의 어설픈 잠 속을 멋대로 오락가락하면서 그의 발자국 소리가 사막 복판에까지 울리는 것이다. 무얀은 천막 안쪽에서 푸른 화강암에 새겨진 그림처럼 여전히 꼼짝도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오직 두 눈과, 이제는 장난감이 아닌 은제 단도만이 번쩍인다. 습격대에 가담한 뒤로 그는 얼마나 변했던가! 그는 그전과는 달리 자신이 고귀하다고 깨닫고, 그의 경멸로써 나를 압도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보나푸를 향해 진격할 것이고, 사랑과 아주 흡사한 증오에 부추김을 받아 내일 새벽에는 진격할 것이니까. 그는 다시 한번 형에게로 몸을 숙이고 나직한 소리로 말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뭐랍니까?" "요새에서 떨어진 데서 만나면 당신을 쏘겠다군요." "왜요." "당신은 비행기와 무전기와 보나푸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무얀은 조각과 같은 주름이 달린 푸른 베일 속에서 꼼짝도 않고 나를 재판한다. "당신은 염소처럼 샐러드를 먹는다. 당신은 돼지처럼 돼지를 먹는다. 당신네 여자들은 수치심 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많이 봤다'라고 말합니다.'당신은 도무지 기도를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비행기도, 무전기도, 보나푸도 무슨 소용인가? 진리도 없으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자유를 지키려는 것도 아니며(사막 안에서는 사람이 항상 자유로우니까), 눈앞의 재화를 지키려는 것도 아니며(사막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단지 남모를 왕국만을 지키고 있는 이 모르인들을 감탄한다. 모래 물결의 침묵 속에 보나푸는 늙은 해적 모양으로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 덕택으로 쥐비 곳의 이 야영지는 이제 한가로운 목자들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보나푸라는 폭풍이 그 옆구리를 위협하고, 그 때문에 밤이면 사람들은 천막들을 밀집시키고 잔다. 침묵이 남쪽에서는 얼마나 가슴을 조이게 하는가! 그것은 보나푸의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늙은 사냥꾼 무얀은 바람 속을 걸어오는 보나푸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인다. 마침내 보나푸가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그의 적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울 것이다. 마치 그의 출발이 그들의 사막에서 한쪽 끝을 빼앗아 갔거나, 그들의 생활에서 위신의 한 부분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왜 가버렸소, 당신에 보나푸는?" "글쎄요...." 그는 자기 생명을 그들의 생명에 걸고 지내 왔다. 그것도 여러 해 동안이나, 그는 그들의 규율을 자기의 규율로 삼아 왔다. 그는 그들의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끊임없는 추격 속에서 그도 또한 그들과 같이 별과 바람으로 된 바이블(코란)의 밤을 알았다. 이제 그는 떠나면서 그가 꼭 필요해서 이 도박을 해온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보여준 셈이다. 그는 시원스럽게 자리를 뜬다. 그래서 그 노름판에 혼자 남겨둔 모르인들은, 이제는 사람들을 피와 살과 함께 끌고 들어가게 했던 이 생명의 도박에 대한 신념을 잃고 만다. 그들은 아직도 그를 신뢰하고 싶어 한다. "당신네 보나푸 말이오. 꼭 돌아오겠지요?" "글쎄요." 그가 돌아올 거라고 모르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유럽의 도박만으로는 그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장교클럽에서의 브리지도, 승진도, 여인들도 잃어버린 고귀함을 잊지 못해 한 걸음 한 걸음이 사랑을 향해 가는 발걸음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사막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여기에는 다만 모험으로 살았을 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고향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일하고 진정한 보화는 이곳 사막에서만 가졌었다는 것을 그는 환멸 속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사막의 매력이며, 이 밤, 이 침묵과, 이 바람과 별들의 나라를. 그리고 어느 날 보나푸가 다시 돌아오면, 그 소식은 첫 밤부터 불귀순 지구에 퍼질 것이다. 사하라의 어딘가에 2백 명의 부하들 한가운데서 그가 자고 있다는 것을 모르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침묵 속에 낙타들을 우물가로 끌고 갈 것이고, 저장 보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총 놀이 쇠를 검사할 것이다. 그 증오 또는 그 애정에 부추김 받아서. (6) "비행기에 숨겨서 마라께시로 데려다 주시오...." 매일 저녁 쥐비에서 모르인들의 이 노^36^예는 이런 짧은 기도를 내게 올리곤 했다. 그러고는 살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했다는 듯이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내 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의사에게 내맡겼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신에게 청원했다고 생각하고 하루 동안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주전자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자기 생애의 단순한 모습들과, 마라께시의 검은 땅들과, 장미빛 집들과, 몽땅 빼앗긴 하찮은 재산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는 내 침묵도, 그에게 생명을 주기를 지체하는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며, 언젠가는 자기 운명 위에 불게 될 순풍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조종사일 뿐이고, 쥐비 곶에서 몇 달 동안 비행장 주임 일 뿐이며, 재산이라고는 스페인 요새에 기대 세운 바라크 하나와 그 안의 대야 하나, 짠물이 든 주전자 하나, 짤막한 침대 하나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나로서는 내 능력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 수 없었다. "바르끄 영감, 좀 두고 봅시다...." 노^36^예들은 모두 바르끄라고 불린다. 그래서 그도 바르끄다. 붙잡힌지 4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 체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임금이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바르끄, 자네는 마라께시에서 무얼 했나?" 그의 아내와 아이 셋이 아직 살고 있을 마라께시에서 그는 훌륭한 직업을 가졌었다. "나는 가축 몰이꾼이었읍죠. 이름은 모하메드였구요'!" 거기서는 높은 사람들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었다. "모하메드, 팔 소가 있다. 산에 가서 끌고 와라." 아니면, "들판에 양 천 마리가 있다. 그걸 더 높은 목장으로 몰고 가라." 그러면 바르끄는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들고 그들의 이주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많은 양들의 유일한 책임자로서, 새끼 가진 어미 양을 위해서 빠른 놈들의 걸음을 늦추고 게으른 놈들은 재촉하면서, 그는 모든 양들의 신뢰와 복종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어떤 약 속의 땅을 향해 그들이 올라가고 있는지를 자기만이 알고, 별들을 보고 길을 찾는 것도 자기만이 알고, 양들에게는 나누어 줄 수 없는 지식들을 무겁게 몸에 지닌 자기의 지혜로써 쉴 시간이며 샘터로 가는 시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그들의 잠 속에 홀로 서서 그 많은 무지와 연약함을 측은히 생각하면서 무릎까지 양털에 묻힌 채, 의사이며, 예언자이며, 왕이기도 한 바르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랍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가축을 찾으러 우리와 함께 남쪽에 가자." 그를 오랫동안 걸리더니 사흘 후에 산 속 깊이 불귀순 지구 경계로 접어들자, 그는 간단히 붙잡혀서 바르끄란 이름으로 팔리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노^36^예들도 알고 있었다. 나는 매일 차를 마시기 위해 천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맨발로 푹신한 양탄자 위에 누워 나는 하루가 지나갔음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 양탄자는 그들 유목민들의 사치품이며, 그들은 그 위에 그들의 잠시 동안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역력히 느껴진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짐승들도 사람들도 죽음을 향해 가는 것만치나 확실하게 저녁이라는 커다란 물구유를 향해 걸어간다. 이러한 무위함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온종일 바다로 가는 길처럼 아름답다. 나는 그 노^36^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주인이 보물상자에서 풍로니, 주전자니, 컵들을 꺼내 놓으면 천막 안으로 들어온다. 그 상자 속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물건들이 묵직하게 들어 있다. 열쇠 없는 자물통이니, 꽃 없는 꽃병이니, 서푼짜리 거울이니, 낡아빠진 무기들, 이런 것들 이 사막 한가운데 밀려 와 있어 난파선의 조각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노^36^예는 묵묵히 풍로에 마른 가지를 얹고 불씨를 붙이고 주전자를 채우고 하며, 어린 계집애면 될 일에 삼나무라도 뽑을 수 있는 근육을 움직인다. 그는 온순하다. 그는 차를 끓어내고, 낙타를 돌보고, 밥을 짓고 하는 일에 열중한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밤을 향해 걸어가고, 얼음같이 찬 벌거숭이 별들 아래에서는 찌는 듯한 태양을 그리워하면서. 4계절의 변화가 여름이면 눈의 전설을, 겨울이면 태양의 전설을 이루어주는 북쪽 나라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한증막 속에서 별다른 변함이 없는 열대지방은 불행하다. 그러나 낮과 밤이 사람들을 이 희망에서 그렇게도 간단하게 오가게 해주는 이 사하라는 역시 행복한 곳이다. 가끔가다 검둥이 노^36^예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 바람을 맛보고 있다. 이 포로의 둔중한 육체 속에는 이제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유괴되던 때의, 지금의 어둠 속으로 그를 거꾸러뜨린 사나이의 팔이며, 고함소리며, 주먹질 따위가 겨우 생각날 뿐이다. 그때 이후로 그는 소경처럼 세네갈의 느린 강물도, 남부 모로코의 흰 암석의 도시들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처럼 그리운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이상한 잠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흑인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병들었다. 어느 날 이 유랑민들의 생활 속에 굴러들어, 그들의 이동에 매이고, 그들이 사막에 그리는 궤도에 평생동안 붙들려버린 그가, 그때부터 그의 과거니, 그의 집이나, 그의 처자식이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것들과 무슨 공통된 것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위대한 사랑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것을 잃고 나면 자기의 고독하고 높은 신분에 싫증이 나는 수가 있다. 그들은 겸손하게 삶에 접근하여 평범한 사랑으로 자기들의 행복을 만든다. 그들은 체념하고 몸을 굽혀 평온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함을 깨닫는다. 노^36^예는 주인의 불씨로 자기의 자랑을 삼는다. 자아, 마셔라." 가끔 주인이 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든 피로와, 모든 심한 더위에서 놓여나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저녁의 시원함 속에 들어가고 있으므로 주인이 노^36^예에게 어질어졌을 때다. 그래서 주인은 차 한 잔을 노^36^예에게 준다. 그러면 노^36^예는 감격에 겨워, 그 차 한 잔 때문에 주인의 무릎에 입을 맞추게까지 된다. 노^36^예가 쇠사슬에 매여 있는 일은 없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렇게도 충실한데! 그는 현명하게도 박탈당한 검둥이 왕을 자기 속에서 배척한다. 그는 이제 행복한 포로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그는 해방될 것이다. 그가 먹는 식량이나 입는 옷에 알맞은 값어치가 없을 만큼 너무 늙으면 그는 분에 넘치는 자유를 허락 받는다. 사흘 동안 그는 이 천막에서 저 천막으로 다니며 헛되이 사정할 것이다. 하루하루 몸은 더 허약해진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끝날 무렵, 언제나 그렇듯이 얌전하게 모래 위에 드러누울 것이다. 나는 쥐비에서 알몸으로 죽어 가는 노^36^예들을 본 일이 있다. 모르인들은 그들의 죽을 때의 오랜 괴로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만 잔인성은 없다. 모르인의 아이들은 그 검은 표류물 옆에서 놀고 있다. 그리고 날이 새면 그것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달려가지만 늙은 종을 조롱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극히 자연적인 질서였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는 일을 잘했다. 그래서 잠들 권리가 있다. 자아, 이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누운 채 현기증과도 같은 배고픔은 느끼지만, 괴로움을 주는 바르지 못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흙에 동화되어 갔다. 태양에 말리고, 대지에 받아들여져서. 30년 동안의 노동, 그래서 얻은 잠과 대지에 대한 이 권리. 내가 처음 만난 노^36^예는 신음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기야 신음해 보일 상대도 없었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힘이 다 빠져 눈 속에 누워, 꿈과 눈에 파묻혀 들어가는 길 잃은 두멧사람과도 같은 일종의 체념을 느꼈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고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고통을 느낀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인간의 죽음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하나 죽어 가는 것인 만큼, 그의 안에서 꺼져가는 영상들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세네갈의 어떤 농원이, 남부 모로코의 어떤 백악의 도시들이 차츰차츰 망각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일까? 이 검은 덩어리 속에서, 차를 준비한다던가, 가축들을 우물가로 몰고 가는 따위의 하찮은 걱정만이 꺼져가는 것일까...즉 노^36^예의 한 영혼이 잠들어 가는 것일까, 아니면 추억의 소생으로 다시 살아난 이 인간이 그 본래의 위대함 가운데에서 죽어가는 것일까. 그 단단한 두 개골이 나에게는 오래 된 보물상자처럼 보였다. 어떠한 빛깔 고운 비단들이, 어떠한 잔치의 추억들이, 이 사막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고 아무 소용이 없는 유물들이 난파를 모면하여 거기에 들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상자는 단단히 채워진 채 무겁게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며칠의 그 커다란 잠을 자는 동안에, 세계의 어떤 부분이 이 사람 속에서 해체되어 가는 것인지, 차츰차츰 밤과 뿌리로 되돌아가는 그 의식과 육체 속에서 분해되어 가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가축 몰이꾼이었읍죠. 이름은 모하메드였구요!" 검둥이 노^36^예 바르끄는, 내가 알기로는 그의 운명에 저항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모르인들이 그의 자유를 하루아침에 빼앗고, 그를 이 땅 위에서 갓난아기보다 더한 발가숭이로 만든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수확을 삽시간에 짓밟아 버리는 신의 폭풍도 있으니까. 그러나 모르인들은 그의 재물보다도 그의 인격을 깊이 상처 입혔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다른 포로들이 1년 내내 먹을 것을 벌기 위해 일을 했던 불쌍한 가축 몰이꾼을 자기들 속에서 죽어가게 내버려 두었지만 바르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바르끄는, 남들이 기다리다 지쳐 보잘 것 없는 행복에 자리잡듯이 그렇게 노^36^예살이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선심을 노^36^예의 기쁨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없는 모하메드를 위해, 그 모하메드가 살았던 집을 자기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텅 비어 쓸쓸하긴 했지만, 다른 아무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바르끄는 오솔길의 풀과 침묵의 권태 속에서 충실하게 죽어간 그 백발의 정원지기와도 같았다.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이오.'라고 그는 말하지 않고 '나는 모하메드였었죠'라고 말했다. 그 소생만으로도 자기의 노^36^예의 모습을 쫓아내어 줄, 그 잊혀진 인물이 되살아날 날을 꿈꾸면서. 이따금 밤의 고요 속에서 그의 모든 추억들이 어렸을 적의 노래처럼 완전하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우리들의 모르인 통역이 이런 말을 했다. "밤중에, 한밤중에 그가 마라께시 얘기를 하고 울었어요" 고독 속에 있으면 누구나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기가 예고 없이 깨어나 자기 팔다리 속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여자라고는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는 이 사막에서 자기 곁에 여인을 찾는 것이다. 또 샘물이라고는 일찍이 흘러본 적이 없는 그곳에서 샘물의 노래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바르끄는 눈을 감고 하얀 집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여기, 사람들이 거친 천으로 엮은 집에 살면서 바람만을 쫓고 있는, 매일 밤 같은 별 아래 앉아 있으면서도... 신비스럽게도 생생하게 되살아난 옛 애정을 품고, 마치 그 끝이 가까이에 있기라도 한 듯이 바르끄는 나에게 왔었다. 그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의 애정도 모두 준비돼 있고, 그것을 나눠주기 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내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눈짓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바르끄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그 비결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내가 그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기나 한 것처럼. "내일이지요, 우편물이 떠나는 게...아가디르로 가는 비행기에 나를 감추고...." "불쌍한 바르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불귀순 지구이다. 어떻게 그의 탈주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내일이면 모르인들은 이 도둑질과 모욕을 무서운 학살로써 보복할 것이다. 나는 공항 기관사인 로베르그, 마르샬, 아브그랄의 도움을 받아 바르끄를 사려고도 해보았지만, 모르인들은 노^36^예를 사려는 유럽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므로 배짱만 퉁긴다. "2만 프랑 내쇼," "우리를 놀리는 건가?" "그놈의 억센 팔을 보슈." 이렇게 해서 여러 달이 지나갔다. 마침내 모르인들의 달라는 값이 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편지로 호소한 프랑스의 친구들의 도움도 얻어서 늙은 바르끄를 살 수 있을 만큼 되었다. 그것은 굉장한 흥정이었다. 그것은 여드레나 걸렸다. 열 다섯 명의 모르인과 나는 모래 위에 빙 둘러앉아 흥정을 진행했다. 소유주의 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산적 진 울드 라따리가 은근히 나를 거들었다. "팔아 버려라. 어차피 그놈은 없어진다. 그놈은 병들었어. 병이 처음엔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 있다. 언제고 갑자기 불거져 나온다. 얼른 저 프랑스 사람한테 팔아 버려라." 그는 내가 권한대로 자꾸 주인에게 말했다. 또 하나의 산적인 랏지에게는 흥정을 도와주면 커미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랏지는 주인을 구슬렸다. "그 돈으로 낙타하고 총하고 탄환을 사라. 그러면 너는 습격대를 만들어 프랑스 사람들과 싸움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따르에서 새 노^36^예를 셋이고 넷이고 끌고 올 수 있다. 이런 늙다리는 팔아 치워라." 이리하여 바르끄는 내게 팔렸다. 나는 우리 바라크 속에 그를 쳐 넣고 엿새 동안 자물쇠를 잠가 두었다. 비행기가 지나가기 전에 그가 문밖에서 어정거리다가는 모르인들이 그를 다시 잡아 먼데로 팔아버릴까 봐서였다. 어쨌든 나는 그를 노^36^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것은 또한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회교의 중이 오고, 그전 주인과, 쥐비의 추장 이브라힘도 왔다. 보루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서라면, 나를 골려 준다는 재미만으로도 서슴없이 바르끄의 목을 잘랐을 이 세 산적들이 그를 열렬히 껴안았고, 서명했다. "이제 너는 우리 아들이다." 그래서 바르끄는 그의 여러 아버지들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출발할 때가 오기까지 우리 바라크에서 유유한 포로 생활을 보냈다. 그는 하루에도 스무 번씩이나 그 쉬운 여행에 대해 설명을 시키는 것이었다. 아가디르에서 비행기를 내리면 그 비행장에서 마라께시로 가는 버스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탐험가 놀이를 하고 놀 듯이 바르끄는 이렇게 자유인 놀이를 하는 것이다. 삶으로 향하는 그 첫걸음, 그 버스며 그 군중, 그가 다시 보게 될 도시들.... 로베르그가 마르샬과 아브그랄을 대리해서 나를 찾아왔다. 바르끄가 차에서 내린 후 배를 곯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르끄를 위해서 내게 천 프랑을 주었다. 이리하여 바르끄는 일거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20프랑을 주고는 감사를 요구하는 '자선을 하시는'사회 사업체의 노부인들을 생각했다. 비행기 기관사인 로베르그와 마르샬, 아브그랄의 세 사람은 천 프랑을 주면서도 자선을 하지 않고, 더구나 감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또한 행복을 꿈꾸는 그 노부인들처럼 동정심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한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되돌려주는데 이바지했을 뿐이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바르끄가 귀향의 흥분이 일단 지나면,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할 충실한 친구는 곤궁이라는 것과, 석 달도 못가서 그가 그 근처 철로 위에서 침목을 뽑느라고 애쓰고 있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막에 있을 때보다 덜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족 사이에서 그 자신이 될 권리를 갖고 있다. "자아, 바르끄 영감, 가시오. 그리고 사람이 되시오." 출발 준비가 된 비행기는 떨고 있었다. 바르끄는 마지막으로 쥐비 곳의 끝없는 황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행기 앞에는 2백 명의 모르인들이 삶의 문턱에 선 한 노^36^예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잘 보기 위해 떼지어 모여 있었다. 비행기가 조금 가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그들은 그를 도로 빼앗아 갈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려고 약간 얼떨떨해 있는 이 쉰 살 먹은 갓난애에게 작별의 손짓을 했다. "잘 가게, 바르끄!" "아니오." "아니라니?" "아닙죠.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인 걸요." 아가디르에서 바르끄를 돌봐주라고 우리가 부탁해 둔 아랍인 아브달라로부터 그에 대한 마지막 소식을 들었다. 버스는 저녁 때에야 떠나게 되어 있었다. 바르끄는 온종일 마음대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맨 먼저 그 조그만 도시를 아무 말도 없이 오랫동안 쏘다녔다. 아브달라가 보기에는 그가 불안해하고 감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냐." 바르끄는 갑작스런 휴가의 한복판에서 아직도 자기의 부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렴풋한 행복을 느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어제의 바르끄와 오늘의 바르끄 사이에 아무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저 태양을 나누어 받을 권리도, 여기 이 아랍인 카페의 정자 밑에 앉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는 거기 앉았다. 아브달라와 자기를 위해 차를 주문했다. 그것이 양반으로서의 첫 행동이었다. 그 권력으로 하여 그의 얼굴모습조차도 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급사는 그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급사는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 차를 따름으로써 한 자유인을 예찬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 다른 데로 가보세." 바르끄가 말했다. 그들은 아가디르를 굽어보는 가스 바로 올라갔다. 베르베르족의 춤추는 소녀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이 길들여진 친절을 잔뜩 보여주었기 때문에 바르끄는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이 여겨졌다. 그녀들은 자기네들도 모르게 그를 인생 속으로 맞아들여 준 것이다. 여자들은 그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차를 권했다. 바르끄는 자기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자들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가 만족해하니까 소녀들도 그를 위해서 만족해했다. 그는 그녀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이름이 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데서 돌아오기도 하니까... 그는 아브달라를 다시 시내 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유태인의 노점 앞에서 서성거렸고,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과 자기는 자유롭다는 것을... 그런데 이 자유가 그에게는 씁쓸한 것 같이 생각되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 그가 이 세계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자유가 더욱 뚜렷하게 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지나가기에 바르끄는 그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이는 방긋 웃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첨하는 주인의 아들이 아니었다. 바르끄가 쓰다듬어준 아이는 연약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이래서 이 아이가 바르끄를 깨워 주었고, 자기에게 미소지었던 이 연약한 아이 때문에 바르끄는 자기가 이 지상에서 좀더 중요해진 것 같이 여겨진 것이었다. 그는 그제야 어떤 것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 것이다. "뭘 찾지?" 아브달라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바르끄가 대답했다.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떼와 마주치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였던 것이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유태인 노점 쪽으로 가더니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아브달라는 화를 냈다. "바보같으니, 돈을 아껴야지!" 그러나 바르끄는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점잖게 그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작은 손들이 장난감이니 팔찌니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 위로 뻗쳐졌다. 아이들은 저마다 보물을 손에 들고 버릇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아가디르의 다른 아이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바르끄는 그들에게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그러자 아가디르 근방의 다른 아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일어서서 환성을 지르며 이 검은 신을 향해 달려 올라와서, 그의 낡은 노^36^예옷에 매달리며 저의들 몫을 요구했다. 바르끄는 파산하고 말았다. 아브달라는 그가 '기뻐 미친'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르끄로서는 넘치는 기쁨을 나누어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유였기 때문에 사랑 받을 권리도, 북쪽이든 남쪽이든 마음대로 걸어갈 권리도, 자기가 일해서 빵을 벌 권리도, 이런 모든 본질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돈이 무슨 소용이랴...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심한 허기를 느끼듯이 인간들 속의 하나의 인간, 인간들과 연결된 하나의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것이다. 아가디르의 춤추는 소녀들은 늙은 바르끄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 가볍게 헤어질 수가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그가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 아랍인의 노점 상인도, 길을 오가는 통행인들도 모두 그의 속에 있는 자유인을 존경했고, 그와 함께 태양을 나누어 가졌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상 자기에게 그가 필요하다고 알려 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땅 위에 자기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에게는 서로의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인간 상호 관계의 무게가 없었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사람들이 쓰다듬기도 하고 짓찧기도 하는 모든 것, 저 눈물이며, 이별이며, 책망이며, 기쁨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켜 주고, 무게를 갖게 해주는 그 숱한 관계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르끄 위에는 벌써 아이들의 천 가지 희망이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바르끄의 왕국은 아가디르 위에 저무는 태양의 영광 속에서, 또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렸던 유일한 다정함이었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저녁의 시원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바르끄는 옛날에 양떼들에게 둘러싸였던 것처럼 어린이들의 물결 속에 파묻혀 세상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내일이면 가난한 자기 가족들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노쇠한 팔로는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의 생명들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기에서 자기의 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몸이 가벼운 천사가 속임수로 허리띠에 납덩어리를 꿰매 넣기라도 한 것처럼, 바르끄는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를 갖고 싶어 하는 그 숱한 어린이들에 의해 대지 쪽으로 이끌려 가면서 고달픈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다. (7) 사막이란 이런 것이다. 본래는 놀이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 한 권의 코란이 사막을 제국으로 바꿔 놓는다. 텅 비었을 사하라 한복판에서 인간의 결정을 뒤흔드는 은밀한 연극이 연출된다. 사막에서의 참된 삶은 목초를 찾아 옮겨가는 부족들의 이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놀이에 의해서이다. 귀순사막과 불귀순 사막과의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재의 전혀 다르게 변모해 버린 귀순 사막을 앞에 두고 나는 소년시절에 여러 가지 놀이를 하던 일들이며, 우리가 온갖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컴컴하고 금빛 도는 그 공원이며, 우리가 완전히 알아낼 수도 없었고, 전부를 뒤질 수도 없었던 1킬로 미터 평방으로 된 그 무한한 왕국 등을 회상한다. 우리는 한 발자국마다 어떤 맛을 갖고 있고, 사물들이 다른 데서는 있을 수 없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갇혀진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다른 법률 아래 살게 되었을 때, 소년시절의 음영으로 가득 찬 그 마법의 공원, 그 얼어붙은 공원, 그 폭염의 공원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지금 그 공원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느끼며 바깥쪽의 나지막한 회색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 이렇게 좁은 울타리 안에 그때는 자기에게 있어 무한한 넓이였던 하나의 세계가 갇혀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기는 그 무한한 세계 속에 다시는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들어가야 할 곳은 그 공원이 아니라, 그 놀이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불귀순 사막은 없어졌다. 쥐비 곶, 시스네로스, 쀠에르또 깡사도, 사뀌에뗄함라, 도라 스마라, 그 어디에도 이제 신비는 없다. 우리가 그리고 달려가던 수많은 지평선들도, 마치 따뜻한 손의 올가미에 걸리면 빛깔을 잃어버리는 곤충들처럼 차례차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지평선을 쫓아다녔던 사람들도 어떤 환영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달리던 우리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팔에 안기자마자 아름다운 여자 포로들이 날개의 황금빛을 잃고 하나하나 새벽 빛 속에 사라져갔다는, 저 너무나 정교한 것을 추구했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사르탕 왕도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막의 마술을 양식으로 삼았지만 다른 사람들 같으면 거기에 유정을 파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오는 것이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들어가지 못할 종려나무 숲이나 사람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조개껍데기 가루가 그 가장 귀중한 부분을 이미 우리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 한 때의 열광밖에는 주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것을 살린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사막이라고? 언젠가 나는 바로 그 심장부로 해서 그곳에 뛰어든 적이 있다. 1935 년 인도차이나로 가는 장거리 비행 도중, 나는 이집트의 리비아 접경 오지에서 끈끈이에 붙들리듯이 사막에 붙잡혀 버렸는데, 그때 나는 꼭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 전2권 중 제2권 지은이: 쌩 떽쥐빼리 옮긴이: 조희수 펴낸곳: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 [ 7. 사막 한가운데서 (1) 지중해로 들어가면서 나는 낮게 뜬 구름을 만났다. 나는 고도 20미터까지 내려갔다. 소나기가 앞 유리창을 두드렸고, 또 기선 마스트를 들이받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기관사 앙드레 쁘레보가 내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커피를 할까...." 그는 비행기 뒤쪽으로 사라졌다가 보온병을 들고 나온다. 나는 회전 속도 2천을 유지하기 위해 가끔 가스 핸들을 퉁겨 준다. 힐끗 계기반들을 훑어 본다. 내 신하들은 모두 공손하다. 바늘이 모두 제자리에 있다. 나는 바다를 한 번 내려다 본다. 바다는 빗발 아래서 끓는 커다란 대야 모양 김을 내뿜고 있다. 내가 만약 수상기를 타고 있었다면 바다가 그렇게 푹 패어있음을 애석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상기를 타고 있다. 패어 있건 말건 내려앉을 수는 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일종의 이치에 안맞는 안전감을 내게 주는 것이다. 바다는 내 것이 아닌 어떤 세계의 일부분의 이루고 있다. 여기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고, 내게 위협을 주지도 못한다. 나는 바다에 대비해서 장비는 되어 있지 않으니까. 한 시간 반을 날자 비가 수그러진다. 구름은 여전히 낮게 드리웠지만, 이미 햇빛이 크나큰 미소처럼 뚫고 비친다. 나는 이 갠 날씨의 유유한 준비에 감탄한다. 나는 머리 위에 흰 솜의 켜가 덮여 있음을 짐작한다. 나는 돌풍을 피하기 위해 사행한다. 이제 그 복판을 가로지를 필요는 업다. 마침내 첫 하늘 조각이 드러난다. 나는 그것을 보기 전에 예감했었다. 왜냐하면 내 앞 바다 위에 초원의 빛을 띤 긴 띠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나는 진초록의 오아시스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세네갈에서 3천 킬로 미터의 사막을 넘어 남부 모로코에 다다랐을 때,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던 저 보리밭 빛깔과도 흡사했다. 여기서도 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장에 접어든 느낌이 들어 가벼운 기쁨을 맛본다. 나는 쁘레뽀 쪽을 돌아본다. "됐어. 잘 돼 간다!" "네, 됐어요." 튀니스, 가솔린을 채우는 동안 나는 서류에 사인을 한다.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 다이빙할 때, 같은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울림이 없는 둔한 소리. 나는 그 순간에 전에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는 차고가 폭발했었다. 그 목쉰 기침소리로 두 사람이 죽었었다. 나는 활주로를 끼고 길 쪽을 돌아다본다. 약간의 먼지가 피어올랐는데, 두 대의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충돌했던 것이다. 갑자기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몇 사람은 우리에게로 달려온다. "전화를 해... 의사를... 머리가...." 나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운명이 고요한 저녁 햇빛 속에서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한 아름다움이, 아니면 한 지혜가, 한 생명이 짓이겨졌을 것이다. 비적들도 이렇게 사막 속을 걸어왔지만, 아무도 그 모래 위의 가벼운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주둔지 안에서 약탈하는 짧은 웅얼거림만이 들렸을 뿐이다. 그런 다음은 모든 것은 황금빛 침묵 속에 잠겨드는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 평화, 똑같은 침묵.... 내 옆에서 누군가가 두 개골이 깨어졌다는 말을 한다.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피투성이의 얼굴을 알고 싶지 않아 도로를 등지고 내 비행기 쪽으로 온다. 그러나 위협감은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조금 뒤에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시속 2백 70킬로로 시커먼 사구를 스쳐갈 때, 그와 똑같은 목쉰 소리, 약속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 운명과도 같은, '콜록!'하는 소리를. 벤가지를 향해 출발! (2) 도중.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도 2시간. 트리포리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벌써 검은 안경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모래가 금빛으로 물든다. 그런데 이 지구는 왜 이리도 적막할까? 나에게는 또다시 강물이며, 나무 그늘, 사람의 집들은 어떤 우연한 요행의 결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바위와 모래의 영토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비행의 영역에 살고 있으니까. 나는 신전에 들어앉듯이 사람들은 본질적인 관례의 비밀에 의해 구원 없는 명상 속에 갇힌다. 이 속된 세상은 이미 희미해지고 곧 사라지려 하고 있다. 눈 아래 풍경이 아직은 불그레한 빛을 머금고 있지만, 무엇인지 벌써부터 거기에서 새어나가고 있다. 나는 이 시간만큼 값진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비행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나의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차츰차츰 태양은 포기한다. 사고가 났을 때 나를 받아 줄 드넓은 황금빛 표면도 나는 포기한다. 나를 안내해 줄 표적들도 포기한다. 나를 위해서 암초를 피하게 해 줄, 하늘에 솟아난 산들의 옆모습도 포기한다. 나는 깊은 밤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비행한다. 나를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별밖에 없다. 이 세계의 죽음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그래서 빛도 조금씩 내게서 없어져 가는 것이다. 땅과 하늘이 조금씩 섞여든다. 저 대지가 솟아올라 수증기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이 보인다. 첫 별들이 푸른 물 속에서처럼 떨고 있다. 그것들이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변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어떤 밤에는 날아가는 불꽃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별들 사이로 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쁘레보가 고정 램프와 구급 램프를 시험해 본다. 우리는 빨간 종이로 전구들을 싼다. "한 겹 더 쌀까...." 그는 한 겹 더 싸고는 스위치를 넣는다. 불빛이 아직도 너무 밝다. 그 빛은 사진관에서처럼 바깥 세상의 희미한 형상들을 지워 없앨 것이다. 그것은 종종 밤에 사물들에 붙어 있는 저 가벼운 무리를 망가뜨릴 것이다. 밤은 이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진짜 밤은 아니다. 초승달이 아직 남아 있다. 쁘레보가 뒤쪽으로 기어들어가 샌드위치를 갖고 나온다. 나는 포도 한 송이를 먹는다. 배가 고프지 않다. 시장기도 갈증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전혀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이대로 10 년이라도 조종을 할 수 있은 것 같다. 달이 졌다. 벤가지가 캄캄한 밤 속에서 나타난다. 벤가지는 하도 깊은 어둠 속에 쉬고 있어서 아무런 무리로도 장식되어 있지 않다. 나는 거의 가깝게 다다라서야 도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비행장을 찾고 있으려니 붉은 표지등이 일제히 켜진다. 불빛들이 검은 장방형을 그려 놓는다. 나는 선회한다. 하늘로 향한 표지등 불빛이 화재의 분수처럼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회전하면서 땅 위에 황금빛 길을 그린다. 나는 장애물을 잘 살피기 위해 여전히 선회를 계속한다. 이 공항의 야간 시설은 훌륭하다. 나는 속도를 늦추며 검은 물속인양 다이빙을 시작한다. 내가 착륙한 것은 현지 시간 23시였다. 나는 표지등 쪽으로 굴러간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장교와 사병들이 어둠 속에서 탐조등의 단단한 빛 속으로 나타나며 차례로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사람들은 내 서류를 받고, 가솔린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의 통과 절차는 20분이면 완료 될 것이다. "한 번 선회해서 우리 위를 지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륙이 제대로 끝났는지 모르니까." "출발!" 나는 장애물 없는 통로를 향해 이 금빛 길 위를 활주한다. 시문(사막의 열풍이라는 뜻)형인 내 비행기는 활주로에 충분한 여유를 남기고 무거운 기체를 떠올린다. 탐조등이 뒤따라와서 방향 선회의 방해가 된다. 마침내 그것은 나를 놓아준다. 그것이 나를 눈부시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수직으로 반선회한다. 그때 탐조등이 다시 내 얼굴을 스친다. 그러나 닿자마자 내게서 달아나 그 긴 금빛 플롯을 딴 데로 돌린다. 이러한 조심성에서 나는 최대의 친절을 느낀다. 이제 나는 사막을 향해 다시 기수를 돌린다. 파리와 튀니지, 벤가지로부터의 기상 통보들은 시속 30--40 킬로미터의 뒷바람을 내게 알려준다. 나는 시속 3백 킬로 미터의 속도만을 믿는다.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맺는 직선의 한가운데로 기수를 돌린다. 이렇게 하면 나는 해안의 비행 금지구역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모르고 편류를 일으킬 경우에도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이들 두 도시 중 어느 하나의 등불을 만날 것이다. 바람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한 나는 3시간 20분 동안 비행할 것이다. 바람이 약해진다면 3시간 45분 동안을, 그래서 나는 1천 50킬로 미터의 사막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달도 이미 없다. 별들이 있는 데까지 부풀어 오른 시커먼 타르. 나는 불빛 하나 볼 수 없을 것이고, 목표물 하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무전도 없으므로 나일강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내 나침반과 '스뻬리' 이외에는 살펴볼 생각을 않는다. 계기의 어둠침침한 눈금판 위에서 완만한 호흡하고 있는 가는 라듐선 이외는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다. 쁘레보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가만히 중심의 변화를 수정한다. 나는 2천 미터로 상승한다. 그 높이이면 바람이 알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가끔가다가 나는 전구를 켜본다. 계기 중에서 야광 장치가 없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어둠 속에 깊이 갇혀 있다. 별들과 똑같은 광물성의 빛, 똑같이 쓸데없고 은연한 빛을 내며, 똑같은 언어로 말하는 내 작은 성좌 속에서. 나도 천문학자들처럼 하늘의 구조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나도 또한 근면하고 청순하다고 느낀다. 외계에서는 모든 것이 꺼져 버렸다. 잘 견디어내던 쁘레보는 잠 속에 빠졌고, 그래서 나는 더욱 고독을 느낀다. 엔진의 부드러운 붕붕거림이 있고, 내 앞 계기반 위에는 이 모든 조용한 별들이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명상에 잠긴다. 우리는 이제 달의 혜택도 없고, 무전 연락도 없다. 우리가 나일강의 번쩍이는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밀 때까지에는 우리를 세계와 연결 지어 줄 어떠한 가느다란 끄나풀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의 밖에 있으며, 우리의 엔진만이 타르 속에서 우리를 지탱하고 지속시켜 준다.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거대한 어둠의 골짜기, 시련의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기서는 구조란 전혀 없다. 여기서는 과오에 대한 사면도 없다. 우리는 신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다. 배전반의 접촉점에서 광선이 새어나온다. 나는 쁘레보를 깨워 그것을 끄라고 한다. 쁘레보는 어둠 속에서 곰 모양 움직이더니 재채기를 하고 앞으로 나온다. 그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손수건과 검은 종이를 결합하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를 방해하던 그 광선은 사라졌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계기 바늘의 라듐의 창백하고도 아득한 빛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어두운 밤의 유흥장의 빛이었지 별의 빛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빛은 내 눈은 부시게 하고, 다른 빛들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비행 3시간. 강렬한 것 같은 빛이 오른쪽에서 솟아 오른다.나는 지켜본다.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기다란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 같은 것이 날개 끝의 등에 걸린다. 그것은 환해졌다 꺼졌다 하는 단속적인 빛이었다. 나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 구름이 내 램프에 반사되는 것이었다. 생각했던 것들에 다가온 지금 나는 맑게 갠 하늘을 원했었는데. 날개가 무리 아래서 반짝인다. 빛은 자리를 잡고, 고정되고, 번쩍이며, 또 날개 끝 쪽에서 장미빛 꽃다발을 이룬다. 커다란 소용돌이가 나를 뒤흔든다. 나는 두께를 모를 두터운 구름 덩이 한가운데를 날고 있는 것이다. 나는 2천 5백 미터까지 올라가 본다. 그러나 구름 위로 솟아 나지 못한다. 1천 미터로 다시 내려간다. 꽃다발은 여전히 있어, 꼼짝도 않고 점점 더 번쩍인다. 그래, 좋다. 할 수 없지. 내게는 딴 생각이 있다. 빠져 나갈 때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 불길한 여인숙의 등불 같은 빛이 싫다. 나는 어림해 본다. '여기서는 야간 기체가 흔들린다. 이건 정상이다. 그런데 하늘이 맑고, 높이 날아 왔는데도 끊임없이 동요가 있었다. 바람이 조금도 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시속 3백 킬로 미터를 초과했던 셈인가.' 결국 나는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구름에서 빠져 나가면 어떻게든 위치를 알아내도록 해야겠다. 이윽고 구름에서 빠져 나왔다. 그 꽃다발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예고다. 나는 앞을 주시한다. 그러자 일순간 하늘과 다음 구름 덩이 사이로 좁은 골짜기가 보인다. 꽃다발이 어느새 되살아났다. 나는 이제 이 끈끈이에서 단 몇 초 동안밖에는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3시간 반 동안을 비행한 후에 이 끈끈이가 나를 불안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한대로 전진하고 있다면 나일강이 가까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수가 좋으면 구름의 회랑 너머로 강을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회랑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감히 더 내려 가지 못한다. 만약 내가 생각했던 만큼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고지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니까. 나는 여전히 다른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다만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침착성에 4시간 50분의 비행이라는 한계를 긋는다. 이만한 시간이 지나면 설령 무풍 속을 날았다 하더라도 (무풍이란 있을 수도 없지만) 나는 벌써 나일 계곡을 넘어섰을 것이다. 구름의 가장자리에 이르자 그 꽃다발은 점점 더 자주 명멸하는 빛을 내더니 갑자기 꺼져 버린다. 나는 밤의 악마들과 하는 이런 암호 교신이 싫다. 파란 별 하나가 내 앞에 등대처럼 빛나며 나타난다. 별일까, 등대일까? 나는 이 불가사의한 빛, 마왕의 별, 이 위험한 초대도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쁘레보가 잠이 깨어 계기반에 점화한다. 나는 그와 그의 램프를 모두 밀어 젖힌다. 나는 방금 두 구름떼 사이의 단층에 접근한 것을 이용해서 아래를 관찰하려고 애썼다. 쁘레보는 다시 잠이 든다. 그러나 관찰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4시간 5분의 비행. 쁘레보가 내곁에 와서 않는다. "카이로에 도착할 시간인데...." "누가 아니래...." "저건 별인가, 등대인가?" 나는 아까부터 엔진을 약간 죄었었는데, 그것이 아마 쁘레보를 깨운 모양이다. 그는 비행소리의 모든 변화에 민감하다. 나는 구름더미 아래로 빠져 나가기 위해 천천히 하강을 시작한다. 방금 나는 지도를 살펴 보았다. 어쨌든 나는 표고 제로에 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강하를 계속하며 정북으로 진로를 바꾼다. 그러면 비행기의 창으로 도시의 불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마 그 도시를 지나쳤을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왼쪽에 나타날 것이다. 지금 나는 적운 밑을 날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왼편으로 더 낮게 내려가고 있는 다른 구름을 스치며 날고 있다. 그 그물에 걸려 들지 않으려고 기수를 북북동으로 향한다. 이 구름은 분명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내게서 지평선을 모두 가려버린다. 이제는 감히 더 고도를 낮출 수가 없다. 나의 고도계는 4백 미터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 기압을 알 도리가 없다. 쁘레보가 몸을 구부린다. 나는 그에게 소리친다. "바다로 빠져나가 바다에 내려가 보세. 들이받지는 않게." 이미 항로를 벗어나 바다로 들어서지 않았다고 증명할 아무것도 없었다. 이 구름 밑의 어둠은 전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나는 창에 몸을 바짝 붙인다. 아래를 확인해 보려고 시도한다. 불빛이 나 표적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나는 재를 파헤치는 사람이다. 나는 아궁이 밑바닥에서 생명의 불씨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과 같다. "등대다!" 우리 둘은 동시에 이 명멸하는 함정을 보았다. 얼마나 미친 짓인가! 이 유령 등대, 이 밤의 속임 꿈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더란 말인가? 왜냐하면 쁘레보와 내가 날개 밑 3백 미터쯤에서 그것을 다시 찾아내려고 몸을 숙인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앗!" 나는 다른 아무 말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어마아마한 폭음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갓 같다. 시속 2백 70킬로 미터로 우리는 땅을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 뒤에 온 1초의 백분의 1동안 우리는 우리 둘은 한 덩어리로 뭉쳐버릴 폭발의 커다란 진홍빛 별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쁘레보도 나도 조그만 감동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엉뚱한 기다림,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그 속에서 사라져 버릴, 그 찬란한 별에 대한 기다림밖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진홍빛 별은 끝내 없었다. 있었던 것은, 유리창을 뜯어 내고, 철판을 1백 미터나 날려보내고, 그 요란한 울림으로 우리 창자 속까지 꽉 채우고 조종실을 쑥밭으로 만든 일종의 지진 같은 것이었다. 기체는 멀리서 던져 단단한 나무에 꽂힌 칼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분노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1초, 2초.... 기체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나는 비행기가 간직한 에너지가 그것을 유탄처럼 폭발시키기를 무서운 초조감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지하의 진동은 결정적인 분화에 이르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나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업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진동도, 이 분노도, 이 끝없는 유예도 알 수가 없었다.... 5초, 6초.... 그러자 갑자기 우리는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비행기 창으로 우리 담배를 내동댕이치고, 오른쪽 날개를 박살낸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어붙은 듯한 부동 외에는 아무것도, 나는 쁘레보에게 소리쳤다. "뛰어 내려, 빨리!" 동시에 그도 소리쳤다. "불이!" 순간, 우리는 이미 떨어져나간 창으로 곧두박질했었다. 우리는 20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쁘레보에게 말했다. "다친 덴 없나?" 그가 대답했다. "다친 덴 없어요!" 그러나 그는 무릎팍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에게 말했다. "만져보게. 움직여보구. 정말 다친 데가 없다고 내게 맹세해봐...."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구조 펌프가...." 나는 그가 머리에서 배꼽까지 갈라지면서 별안간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구조 펌프였어...." 나는 생각했다. 미쳤구나, 이제 춤이라도 출 거다. 그런데 그는 화재를 면한 기체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나를 보면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구조 펌프가 무릎에 걸렸을 뿐예요." (3)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나는 손에 회중 전등을 들고 땅 위의 비행기 자국을 더듬어 되올라간다. 정지 점에서 2백 50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미 우리는 비행기가 달리며 모래를 퉁겨 놓은 뒤틀어진 쇳조각이며 철판들을 발견한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어느 황막한 고원 꼭대기의 비스듬한 경사면을 거의 접선처럼 들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충돌 점에 생긴 모래 속의 구멍은 쟁기 보습으로 판 것과도 같았다. 기체는 곤두박질하지 않고 성난 길짐승이 꼬리를 휘두르듯이 배밀이를 하며 나갔던 것이다. 기체는 시속 2백 70킬로로 구르는 검은 돌들이 축받이 구슬 역할을 해주었던 덕택일 것이다. 쁘레보는 늦게나마 누전으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해 축진지의 접속을 끓어 놓았다. 나는 엔진에 기대어 생각해 본다. 고공에서 4시간 15분 동안을 시속 50 킬로 미터의 강풍을 계속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과연 진동이 있었다. 그런데 예보를 수신한 후에 변화가 있었다면 나로서는 바람의 방향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는 한 변의 길이 4백 킬로 미터의 정방형 안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쁘레보가 내 옆에 앉으면서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하군요." 나는 목표를 찾기 위해 쁘레보에게 그의 전등을 켜 놓게 하고 내 회중 전등을 들고 똑바로 걸어 나간다. 주의 깊게 땅을 들여다본다. 천천히 나가면서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여러 번 방향을 바꾼다. 마치 떨어뜨린 반지를 찾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땅을 들여다 본다. 방금 나는 이렇게 해서 생각의 불씨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전등이 비치는 흰 원반 위로 몸을 굽히며 여전히 어둠 속을 나아간다. 역시 그래, 역시 그렇군.... 나는 천천히 비행기 쪽으로 다시 올라간다. 나는 조종석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희망적인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그것을 도무지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생명이 내보이는 어떤 표시를 찾았으나, 생명은 내게 아무런 표시도 해주지 않았다. "쁘레보, 나는 풀 한 포기도 보지 못했어." 쁘레보는 잠자코 있어서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날이 밝아 장막이 걷히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나는 단지 심한 피로를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사막 한가운데 4백 킬로 미터 쯤 되는 곳!' 갑자기 나는 벌떡 일어섰다. "물!" 가솔린 탱크도 오일 탱크도 터져 있었다. 물 저장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래가 전부 마셔버렸다. 우리는 박살이 난 보온병 밑바닥에서 반 리터의 커피와, 다른 병 밑바닥에서 4분의 1리터의 백포도주를 찾아냈다. 우리는 이 액체들을 걸러서 한데 섞었다. 우리는 또 약간의 포도와 오렌지를 한 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속셈을 한다. '사막에서, 햇빛 아래서 다섯 시간만 걸으면 이건 다 없어져 버릴 걸....'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 의해 우리는 조종실 안에 자리잡는다. 나는 드러누워 잠을 청하려 한다. 나는 잠이 들면서 우리가 한 모험의 결산표를 만들어 본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도무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1리터의 음료도 없다. 만약 우리가 대략 항로의 직선 위에 놓여 있다면 1주 일 후라야 발견될 것이고, 그 이상은 바랄 수도 없고 또 그때는 이미 너무 늦다. 우리가 만일 옆으로 벗어나 있다면 여섯 달이나 걸려서야 발견될 것이다. 비행기에 의한 수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를 3천 킬로 미터나 되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테니까. "아아, 유감이다." 쁘레보가 내게 말한다. "뭐가?" "단번에 깨끗이 죽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빨리 단념할 필요는 없다. 쁘레보와 나는 생각을 덜린다. 그것이 아무리 가냘픈 것일지라도 비행기에 의한 기적적인 구원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된다. 또한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오아시스를 놓쳐서도 안된다. 날이 새면 오늘 하루 종일 걸어가보자. 그리고 다시 비행기 있는 데로 돌아오자. 그리고 출발에 앞서 우리의 예정표를 모래 위에 큰 글자로 써두고 가자. 그래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누워서 새벽까지 자야겠다. 잔다는 것이 나는 몹시 기쁘다. 피로가 수많은 영상들로 나를 에워싸준다. 나는 사막 속에서도 고독하지 않다. 나의 어렴풋한 잠 속에는 갖가지 목소리와, 추억과, 속삭여진 속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아직은 목마르지 않고 기분이 좋다. 나는 모험에 향하듯이 잠에 몸을 내맡긴다. 현실도 꿈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아아! 그런데 날이 밝았을 때 사정은 아주 딴 판이 아닌가! (4) 나는 사하라를 무척 사랑했다. 나는 여러 밤을 불귀순 지역에서 지낸 일이 있다. 나는 바람이 바다에서처럼 물 이랑을 새겨 놓은 그 황금빛 벌판에서 잠을 깬 적도 있다. 나는 사막에서 비행기 날개 밑에 자면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만한 구릉의 비탈진 면을 걸어간다. 땅은 반짝거리는 까만 조약돌이 한 켜 온통 뒤덮인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속 비늘이라고나 할까. 우리를 둘러싼 은모래의 도움(둥근 지붕)들은 갑옷처럼 번쩍인다. 우리는 광물질의 세계 속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쇠로 된 풍경 속에 갇혀 있었다. 첫 봉우리를 넘어서니, 그 앞에 또 비슷한 번쩍이는 검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우리는 나중에 되돌아올 때의 표적으로 하기 위해 발로 땅을 긁으면서 걸어간다. 우리는 태양을 향해 전진한다. 내가 이렇게 정동 쪽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모든 논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기상 통보도, 나의 비행 시간도 모두 내가 나일강을 넘어섰다고 믿게 하고 있었으니까. 하기야 아는 서쪽으로 잠깐 동안 가보았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서쪽 방향은 내일로 미루었다. 나는 또 바다로 이끌어 주기는 할 북쪽 방향도 일단 희생시켰다. 사흘 뒤, 반 실신상태가 되어 우리가 결정적으로 비행기를 포기하고, 쓰러질 때까지 줄곧 바로 걸어가기로 결심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역시 동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북동 쪽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모든 이론에도, 또 모든 희망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조된 뒤에 우리는 다른 어떤 방향도 우리를 살아 돌아오게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북쪽으로 향했더라면 너무나 지쳐서 바다에까지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각에도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 방향을 선택하게 할 아무런 표시도 없었으므로, 그때 내가 그 방향을 택한 유일한 이유는 안데스 산 속에서 내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내 친구 기요메를 구해 낸 것이 바로 그 방향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방향이 내게는 막연하나마 생명의 방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섯 시간을 걸으니까 풍경이 바뀐다. 모래의 강이 골짜기를 흐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그 골짜기를 따라 가기로 했다. 우리는 큰 걸음으로 걷는다. 가능한 한 멀리 가야하고, 만약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밤이 되기 전에 되돌아가야 한다. 갑자기 나는 멈춰 섰다. "쁘레보." "왜요?" "발자국을...." 얼마나 오랜 시간 전부터 우리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잊고 있었던가? 만약 그것을 다시 찾아 내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되돌아간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서, 우리가 꽤 멀리 오고 나서 처음 방향을 향해 직각으로 꺾여서 가면 우리가 잊기 전에 남겨 놓았던 발자국을 찾아낼 것이다. 그 금을 다시 이어놓고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더위가 더 심해지고, 그와 더불어 신기루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초기적인 신기루 일 뿐이다. 커다란 호수들이 이루어지더니 우리가 전진하면 사라진다. 우리는 모래 골짜기를 넘어서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지평선을 살펴보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이미 여섯 시간을 걸었다. 우리는 큰 걸음으로 도합 25킬로 미터는 걸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커먼 산등이 꼭대기에 이르러 말없이 주저앉는다. 우리 발 밑에 있는 모래의 골짜기는 흰 빛이 우리 눈을 태우는 듯하다. 눈이 닿은 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까마득한 지평선에는 빛의 장난으로 벌써 마음을 끄는 신기루를 만들고 있다. 요새며, 회교 사원의 첨탑이며, 직선으로 된 기하학적인 덩어리들. 나는 또 초목을 가장해 보이는 거대한 검은 반점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낮이면 흩어졌다가 밤이면 다시 생겨나는 저 구름의 마지막 한 조각에 의해 덮여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적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가봤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시도는 아무 곳에도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행기로 되돌아가야 한다. 저 빨갛고 흰 표지가 어쩌면 동료들에게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공중으로부터의 탐색에 조금도 희망을 걸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내게는 유일한 구원의 기회같이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곳에 마지막 몇 방울의 액체를 두고 왔으며, 벌써 우리는 그것을 꼭 마셔야 할 지경이다. 살기 위해서는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갈증이라는 한정된 자치권인 쇠우리에 갇힌 포로다. 그러나 생명을 향해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때 되돌아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 신기루 너머의 지평선에 진짜 도시며, 단물이 흐르는 운하들이며, 풀밭들이 꽉 들어차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발길을 돌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무서운 방향 전환을 할 때 나는 파멸로 향한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비행기 옆에 누웠다. 우리는 60 킬로 미터 이상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액체도 다 마셔버렸다. 우리는 동쪽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또 아무 동료도 이 지역 위를 비행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벌써 이렇게 목이 마른데... 우리는 박살이 난 날개의 파편을 주워 모아 커다란 분화대를 쌓아 올렸다. 가솔린과 강렬한 흰 빛을 내는 마그네슘 판자를 준비했다. 우리는 불을 붙이기 위해 밤이 아주 캄캄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불꽃이 솟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는 사막 속에 타오르는 신호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고요하게 빛나는 우리의 메시지가 밤하늘에 빛나는 것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메시지가 비장한 호소를 싣고 가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많은 애정도 싣고 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물을 마시고 싶지만 또한 서로 통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다른 불이여, 이 밤 속에 켜져라. 사람만이 불을 갖고 있다. 사람이며, 우리에게 대담하라! 내게는 아내의 눈이 보인다. 내게는 그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눈이 묻는다. 수많은 시선들은 떼를 지어 나의 침묵을 나무란다. 대답하지! 대답한단 말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대답한다. 밤하늘에 이 이상 더 빛나는 불꽃을 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거의 마시지도 않고 60킬로 미터를 걸었다. 이제 우리는 더 마실 수도 없다. 더 오래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잘못일까? 마실것만 있다면 우리는 얌전하게 물통이나 빨면서 여기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 컵의 바닥까지 들이마신 그 순간부터 하나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한 방울을 내가 빨아들인 그 순간부터 나는 내리받이 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강물처럼 나를 싣고 간다손 치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것을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쁘레보는 운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말한다. "글렀으면 글렀지, 뭘 그래...." 그가 대답한다. "내가 뭐 나 때문에 우는 줄 아나?" 그래! 정말 그렇다. 나는 이미 이 명백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견디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절반밖에 믿지 않는다. 나는 벌써부터 이런 일을 생각했었다. 나는 한번은 조종실에 갇힌 채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을 내 머리가 으깨진 줄로 생각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튼 사건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도 지금 나는 별로 번민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이 점에 대해서 더욱 이상한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큰 불을 오렸지만,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어달라는 것은 이미 단념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그래. 그렇다. 바로 이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눈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불에 덴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당장 일어나서 앞으로 곧바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저기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사람들이 난파당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주객 전도이지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해 왔었다. 다만 나는 완전한 확신을 얻기 위해 쁘레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쁘레보 역시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저 죽음을 앞둔 번민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아, 나는 기꺼이 잠들 생각이다. 그것이 하룻밤 동안이건 여러 세기 동안이건 잠들 것이다. 잠이 들면 그 차이를 전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러나 저 멀리서 사람들이 외칠 그 부르짖음, 그 절망의 크나큰 불꽃들은... 생각만 해도 나는 견딜 수 없다. 이 난파선들은 눈앞에 두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침묵의 1초 1초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학살해 간다. 격한 분노가 내 안에서 부글거린다. 어째서 이 사슬들은 침몰해 가는 사람들을 늦기 전에 구출해 내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까? 왜 우리의 화롯불은 우리의 외침을 세계의 끝까지 전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참아라! 우리가 간다! 우리가 간다! 우리가 구조대다! 마그네슘은 다 타버렸고 우리의 불은 벌개졌다. 이제 여기에는 우리가 그 위에 구부리고 몸을 쬘 한 더미의 잉걸불밖에는 없다. 우리의 빛의 커다란 메시지도 끝났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움직이기 시작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안다. 결국 그것은 귀에 들려지지 못한 하나의 기도였던 것이다. '좋다. 잠이나 자야겠다.' (5) 새벽녘에 우리는 헝겊으로 날개를 위로 훔쳐서 도료와 기름이 섞인 이슬을 컵 밑바닥에 깔린 만큼 모았다. 그것은 구역질나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마셨다. 하는 수 없이 입술이나 조금 추긴 것이다. 이 잔치가 끝나자 쁘레보가 내게 말한다. "권총이 있는 게 다행이오." 나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심술궂은 적의를 품고 구에게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센티멘털한 감정의 북받침밖에는 미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이 극히 단순하다고 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하다. 자라나는 것도 단순하다. 그리고 갈증으로 죽는다는 것도 단순하다. 나는 곁눈으로 쁘레보를 살펴본다. 그가 잠자코 있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모욕이라도 줄 작정을 하고. 그런데 쁘레보는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그는 위생 문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손을 좀 씻어야겠는데' 하는 정도로 끄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감이다. 나는 이미 가죽 주머니를 봤을 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때의 나의 생각은 비장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이었다. 비장한 것은 사회문제뿐이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함, 이것만이 비장한 것이다. 권총은 비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찾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아마 딴 곳에서 우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라비아에서, 사실 우리는 그 이튿날 우리 비행기를 버린 후 까지 비행기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또한 그때 그렇게도 멀리에서의 단 한 번의 통과도 우리에게는 무관심했을 것이다. 사막 속의 몇 천 개의 검은 점 속에 섞여 있는 검은 점에 불과한 우리를 발견해달라고 우겨댈 수는 없다. 훗날에 이런 괴로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내가 체험한 듯이 말하는 그런 생각은 하나도 정확하지 않다. 나는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않았다. 구조대들이 내게는 딴 세계에서 오가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사막에서 행방불명이 된 비행기를 찾아내려면, 3천 킬로 미터의 거리로 보고 15일 동안은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트리플리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사이에서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이 가냘픈 행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다른 행운이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작전을 바꾸어 혼자 탐험에 나서기로 작정한다. 쁘레보는 화롯불을 준비해서 누가 찾아오면 불을 붙일 것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내가 되돌아올 기운이 있을지조차 모른다. 리비아 사막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사하라에는 40퍼센트의 습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18퍼센트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수증기처럼 증발한다. 아랍 유목민이나 여행자, 식민지군의 장교들은 체험담으로 사람이 열 아홉 시간은 마시지 않고 견딘다고 말한다. 스무 시간이 지나면 눈은 빛으로 가득차고 종말이 시작된다. 갈증의 걸음은 번개같다. 그러나 우리를 속이고, 모든 예측을 어기고 우리를 이 언덕 위에 못박아 놓은 이 야릇한 북동풍이 지금은 아마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도 동이 트기까지 얼마만한 유예를 우리에게 줄 것인지? 그래서 나는 떠난다. 그러나 마치 대양 위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렇긴 하지만 새벽의 덕택으로 이러한 광경이 좀 덜 슬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우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밭 도둑처럼 걸어간다. 엊저녁에 우리는 그 근처의 어느 알 수 없는 굴 어구에 덫을 쳐 놓았었다. 지금 내 속에서는 밀렵자의 습성이 눈을 뜬다. 우선 나는 덫을 살펴보러 간다. 그것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됐다. 사실 나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었다. 나는 실망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호기심이 끌린다. 이 동물들은 사막 속에서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페네끄', 또는 모래 여우라는 토끼만 하고 귀가 큰 육식수일 것이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그중 한 마리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 발자국은 나를 좁은 모래 시내로 이끌어 간다. 그곳에는 발자국이 더욱 뚜렷이 찍혀 있다. 나는 세 발가락이 부채꼴로 된 종려 가지 모양의 예쁜 발자국을 감상한다. 나는 이 친구가 새벽녘에 사쁜사쁜 뛰어다니면서 돌 위의 이슬을 핥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여기에서 발자국이 뜸해진다. 내 페네끄가 뛰어간 것이다. 여기서는 친구 하나가 끼여들어 함께 나란히 깡충거리며 달아났다. 나는 야릇한 기쁨을 느끼며 그들의 아침 산책을 구경한다. 나는 이들 생명의 표시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목이 타는 것도 잠시 잊어버린다. 마침내 나는 여우들의 식료품 저장실에 다다랐다. 이 근방에는 1백 미터쯤의 사이를 두고 수프 접시 만한 메마른 작은 관목이 모래바닥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줄기에는 조그마한 금빛 달팽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페네끄는 새벽에 먹이를 먹으러 나온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커다란 자연의 신비에 부닥친다. 이 페네끄는 나무마다 다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달팽이가 잔뜩 붙어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무가 있다. 분명히 그가 조심해서 패해 가는 나무도 있다. 또 접근은 하지만 마구 건드리지 않는 나무도 있다. 거기에서는 두세 마리의 달팽이만 따고 다른 레스토랑으로 바꾼다. 그는 아침 산책의 즐거움을 더 오래 갖기 위해 일부러 단번에 배를 불리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장난은 필요 불가결한 전술과 너무나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만약 페네끄가 첫 번째 나무의 산물로 배를 채운다면, 두세 번의 식사로 그 나무의 산 열매를 벗겨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나무 한 나무 그는 목축 농장을 전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런데 페네끄는 파종하는 일을 망칠까봐 아주 조심하고 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그는 백도 넘는 갈색 덤불을 찾아갈 뿐만 아니라 한 가지에 나란히 붙은 두 달팽이를 따는 일은 결코 없다. 모든 일이, 마치 그가 그런 위험을 의식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가 만약 조심성 없이 먹어댔더라면 이미 달팽이는 씨가 없어졌을 것이다. 달팽이가 없으면 페네끄도 없을 것이다. 그 발자국은 나를 굴로 인도한다. 안에 있는 페네끄는 내 발소리에 놀라며, 아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건다. "나의 꼬마 여우야. 나는 아주 녹초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지경이 됐어도, 네 기질이 네 기질이 내겐 재미가 있구나." 그래서 나는 거기서 잠시 몽상에 잠긴다. 사람이란 아마도 무슨 일에고 적응할 수 있는 모양이다. 30년 후면 죽을 것이라 생각은 한 인간의 기쁨을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30년이건 사흘이건 그것은 단지 원근법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영상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나는 나의 길을 계속한다. 그런데 벌써 피로와 함께 무엇인가 나의 내부에서 변형되어 가고 있다. 신기루들이 거기 없는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어어이!"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쳐든다. 그런데 방금 몸짓을 하고 있던 그 사내는 시커먼 바위일 뿐이다. 모든 것이 벌써 사막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자고 있는 베두인(사막 지방의 아랍 유목민) 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는데 그는 검은 나무 줄기로 변했다. 나무 줄기라니?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몸을 굽혀서 본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리석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본다. 다른 검은 대리석들이 보인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삼림이 그 부러진 줄기들을 땅 위에 흩뿌려 놓고 있다. 그 삼림은 10만년 전에 창세기의 폭풍으로 대성당처럼 무너졌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세기가 이 강철처럼 닦여지고, 화석이 되고, 유리처럼 된 먹빛깔의 거대한 기둥 파편을 내가 있는 데까지 굴려보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지에 있는 마디를 알아볼 수 있으며, 생명의 비틀림을 볼 수 있고, 줄기의 연륜을 셀 수 있다. 새들과 음악이 가득 찼던 이 숲은 신의 저주에 얻어맞아 소금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광경이 적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진다. 저 모래언덕의 철갑 옷보다도 검은 이 어마어마한 표착 물들이 나를 거부하고 있다. 살아 있는 내가 여기 이 변치 않는 대리석들 가운데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덧없는 나, 그 몸이 소멸해 버릴 내가, 여기 이 영원 속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어제 이후 나는 벌써 60킬로 미터나 돌아다녔다. 나의 이 현기증은 아마 갈증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태양 때문일까. 태양은 기름으로 닦아 놓은 것 같은 이들 줄기 위에 내리쬐고 있다. 이 세계의 등껍질 위에 내리쬐고 있다. 이제 여기엔 모래도 여우도 없다. 다만 거대한 쇠모루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쇠모루 위를 걷는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태양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낀다. 아아! 저기에.... "어어이! 어어이!"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덤비지 말아. 망상이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이성에 호소해야 했으니까.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거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저기 걸어가고 있는 대상 쪽으로 달려가지 않는다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다. 저기에... 저렇게 보이는데.... "바보야, 잘 알면서도. 그걸 만들어낸 것이 바로 너라는 걸...." "그렇다면 이 세상엔 참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그렇다. 저 언덕 위, 내게서 20킬로 미터 앞에 있는 저 십자가 말고는 참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저 십자가, 아니면 저 등대... 그런데 저것은 바다 쪽이 아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다. 어젯밤에 나는 밤새껏 지도 공부를 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위치를 알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의 존재를 표시해주는 온갖 기호들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지도의 한 부분에서 십자가 비슷한 것이 그 위에 솟아 있는 조그만 동그라미를 발견했다. 나는 범례를 참조했는데 거기에는 '종교 시설'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십자가 옆에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 다시 범례를 참조했다. 그리고 보았다.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나는 가슴에 큰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되풀이해 읽었었다. "마르지 않는 우물.... 마르지 않는 우물.... 마르지 않는 우물!" 알리바바와 그의 모든 보물인들 마르지 않는 우물 하나와 견줄 수 있겠는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는 흰 동그라미 두 개를 보았다. 범례를 보고 읽었다. '마르는 우물' 이것은 벌써 덜 아름답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종교 시설이 바로 저것이다! 난파 자들을 부르기 위해 수도승들이 언덕 위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 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저 십자가 쪽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저 도미니끄회 성직자들 쪽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리비아에는 꼽트파의 수도원밖에 없을 텐데." "...저 부지런한 도미니끄 성직자들 쪽으로 그들은 빨간 벽돌이 깔린 시원하고 아름다운 부엌을 가지고 있고, 안마당에는 녹이 슨 근사한 펌프도 있다. 그 녹슨 펌프 밑, 그 녹슨 펌프 밑에는, 벌써 짐작이 가셨겠지.... 그 녹슨 펌프 밑에는 바로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아아! 내가 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내가 그 큰 종을 치면, 거기선 야단법석이 일어날 거다!" "바보야. 전 지금 프로방스의 어떤 집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 무슨 종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큰 종을 치면! 문지기가 두 팔을 쳐들고 소리칠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사자십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도승들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달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불쌍한 아이처럼 환영해 줄 거다. 나를 부엌 쪽으로 떠밀고 갈 거다. 그리고는 말할 거다. "잠깐만, 잠깐만, 내 아들아, 마르지 않는 우물에 달려갔다 올 테니까...." 그러면 나는 행복감으로 온 몸이 떨릴 거다. 아니다. 결코. 나는 울고 싶지 않다. 저 언덕 위의 십자가가 없어졌다는 그까짓 이유로는... 서쪽이 주는 약속은 모두 거짓말뿐이다. 나는 정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북쪽은 적어도 바다의 노래로 가득 차 있다. 아아! 이 등성이만 넘으면 지평선이 펼쳐진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넌 알고 있잖니, 저게 신기루라는 걸...." 저게 신기루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무도 나를 속이지 못한다, 이 나를! 다만 내가 신기루 쪽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어진다면? 만약 내가 그것을 바란다면? 내가 저 햇볕으로 장식된 총안이 있는 도시를 사랑하고 싶어진다면? 날렵한 발걸음으로 곧장 걸어가고 싶어진다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이젠 피로도 느끼지 않고 또 행복하니까.... 쁘레보와 그 권총이라고? 웃기는구나! 나는 이 도취를 좋아한다. 나는 취해 있다. 나는 목이 말라 죽어간다! 황혼이 취기를 깨워 주었다. 너무나 멀리 온 것에 놀라 갑자기 멈춰섰다. 해질녘에는 신기루가 죽는다. 지평선은 그 펌프니, 궁전이니, 승복이 나를 벗어버렸다. 그것은 사막의 지평선이다. "너는 너무 멀리 왔어! 밤이 너를 잡으려고 한다. 넌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하고, 내일이면 네 발자국은 지워진다. 그러면 넌 아무 곳에도 있지 않게 될 거다." "그러니 다시 네 앞을 곧바로 걸어가야 해. 되돌아서봤자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내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려는 이때, 아니 이미 벌리고 있을지도 모를 이때 방해받고 싶진 않다." "어디서 바다를 봤단 말인가? 또 절대로 거기까지 가 닿지 못할 것이다. 아마 3백 킬로 미터는 될 거다. 그리고 쁘레보는 '시문기'곁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가 어느 대상에게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선 사람이나 불러보자. "어어이!" 제기랄, 이 지구에는 주가 살고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어이! 인간들아!" 나는 목이 쉰다. 이제는 목소리도 나질 않는다. 이렇게 소리지르는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다. 한번 더 던져본다. "인간들아!" 그것은 과장되고, 귀 거슬리는 소리로 되울려 온다. 그래서 나는 되돌아선다. 2시간을 걷고 난 후 나는 쁘레보의 불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잃은 줄로만 알고 겁을 먹은 쁘레보가 하늘로 올린 불이었다. 아아! 나는 또 그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걷기를 1시간.... 아직도 5백 미터... 아직도 1백 미터. 아직도 5십 미터... "아!" 나는 깜짝 놀라서 우뚝 섰다. 기쁨이 내 가슴에 넘쳐나려 해서 나는 그 격렬함을 간신히 억누른다. 화롯불에 비쳐진 쁘레보가 엔진에 등을 기대 선 두 아랍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아랍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 기쁨에만 마음이 쏠려 있다. 아아! 만일 내가 그처럼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나는 벌써 해방됐을 게 아닌가! 나는 반갑게 소리친다. "어어이!" 두 유목인이 소스라쳐 나를 쳐다본다. 쁘레보가 그들을 떠나 혼자서 내게로 달려온다. 나는 팔을 벌린다. 쁘레보가 내 팔꿈치를 부축한다. 그럼 내가 쓰러지려 했던가?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젠 됐군" "뭐가요?" "아, 아랍인들이!" "무슨 아랍인들이?" "저기 아랍인들 말야. 자네하고 같이 있던...." 쁘레보가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는 수 없이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랍인은 없어요." 정말이지, 이번엔 내가 우는 모양이다. (6) 물 없이 여기서 열 아홉 시간은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엊저녁 이후 무엇을 마셨던가? 새벽에 이슬 몇 방울 뿐! 하기는 북동풍이 여전히 불어 우리의 증발을 약간 늦추어 준다. 이 바람막은 또한 구름의 높다란 건축물들을 하늘에 마련해 준다. 아아! 저 구름이 우리 있는 데까지 떠내려 올 수 있다면, 비가 올 수만 있다면! 그러나 사막에는 절대로 비가 오지 않는다. "쁘레보, 낙하산을 삼각형으로 자르세. 그 덫을 돌멩이로 땅바닥에 매어놓자. 새벽에 바람만 바꾸지 않는다면 헝겊을 짜서 가솔린 탱크에 이슬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별 아래에다 여섯 개의 흰 덫을 늘어놓았다. 쁘레보는 탱크 하나를 뜯어냈다. 이제 우리는 날이 새기만 기다릴 뿐이다. 쁘레보가 파편들 속에서 기적적인 오렌지 한 개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을 분배한다. 나는 기뻐서 가슴이 막힐 것 같다. 그러나 20리터의 물이 필요한 판에 이것은 너무나 조금이다. 우리의 밤뿐. 옆에 드러누워 나는 이 빛나는 과일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한다. "사람들은 한 개의 오렌지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나는 또 말한다. "우리는 사형을 선고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확실한 사실이 내 기쁨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내 손에 쥔 이 반쪽의 오랜지가 내 일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하나를 가져다준다." 나는 반듯이 누워서 내 과일을 빤다. 나는 별똥별을 센다 잠시 동안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그래서 또 혼잣말을 한다. "우리가 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란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속에 갇혀 보지 않고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형수의 한 잔의 럼주와 한 대의 담배의 뜻을 이해한다. 나는 왜 그가 그런 하찮은 것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숱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가 만약 미소라도 지으면 사람들은 그를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럼주를 마신다는 것에 미소짓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원근법을 바꾸어, 그 마지막 시간을 가지고 인간의 일생을 삼았다는 것을.... 우리는 굉장한 양의 물을 받았다. 아마 2리터는 될 것이다. 갈증은 끝났다! 우리는 살아났다. 자아 마시자! 나는 주석 컵으로 탱크 속에서 물을 푼다. 그런데 이 물이란 게 고운 연두 빛이었는데, 첫 모금부터 지독한 맛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갈증에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첫 모금을 다 마시기 전에 일단 숨을 돌이켜 쉬어야만 했다. 흙탕물이라도 마실 것 같은데도, 이 독 섞인 금속의 맛만은 내 갈증보다 더 지독하다. 쁘레보 쪽을 보니, 그는 무엇을 열심히 찾기라도 하듯이 땅바닥에 눈길을 박은 채 빙빙 맴을 돌고 있다. 갑자기 엎어지더니 여전히 맴돌면서 토한다. 30초 후, 이번엔 내 차례다. 나는 너무나도 경련이 심해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모래 속에 찔렀다. 우리는 말도 없이 15분 동안 이렇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이제는 약간의 담즙밖엔 토해내지 못하면서... 겨우 끝났다. 이제는 은근한 구역질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나는 이 실패가 낙하산의 도료 때문인지, 아니면 탱크에 끼인 탄소염화물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다른 그릇이나 다른 천을 썼어야 했다. 자아, 그러면 서두르자! 곧 날이 샌다. 출발하자! 우리는 이 저주받은 언덕을 떠나 큰 걸음으로 똑바로 쓰러질 때까지 걸어갈 작정이다. 안데스 산맥 속에서의 기요메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다. 어제부터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리라 단념하고, 비행기 잔해 곁에 있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나는 어긴다. 다시 한번 우리가 난파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난파자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침묵에 위협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무서운 과실로 인해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기요메도 안데스의 조난에서 돌아와서 내게 말했었다. 그가 난파 자들 쪽으로 달려온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의 세계적 진리이다. "내가 만약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그냥 누워버렸을 거네." "쁘레보가 내게 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북동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만약 우리가 나일강을 넘어서 있다면, 우리는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숙히 아라비아 사막 안쪽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하루에 대해서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은 서둘렀다는 것뿐이다. 온갖 것에 대한 서두름, 내가 쓰러지는데 대한 서두름. 신기루에 진저리가 나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걷던 것도 생각난다. 때때로 우리는 나침반으로 우리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또 가끔 숨을 돌리기 위해 드러누웠다. 나는 또 밤에 대비해서 간직하고 있던 레인코우트를 어딘가에서 내버렸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 기억은 서늘한 저녁이 와서야 다시 이어진다. 나는 또한 모래와 같이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해가 지자 우리는 야영을 하기로 한다. 더 걸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물 없이 이 밤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낙하산 천의 덫을 가지고 왔다. 그 독이 도료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물을 마실 수가 있다. 한 번 더 별 아래에 이슬 잡는 덫을 펴놓아 보자. 그런데 북쪽 하늘에 오늘밤엔 구름이 없다. 게다가 바람의 맛이 달라 졌다.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 벌써 사막의 뜨거운 입김이 우리 몸을 스친다. 이것은 맹수의 깨어남이다! 그것은 우리 손과 얼굴을 핥는 것을 나는 느낀다. 나는 더 이상 걷는댔자 10킬로 미터도 못갈 것이다. 사흘 전부터 마시지도 않고 80킬로 이상을 걸어왔으니... 그런데 막 멈춰 서려는 순간이었다. "저건 틀림없는 호수요!" 쁘레보가 말한다. "자네 돌았군!" "이 시간에, 이 황혼에도 신기루가 있단 말이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눈을 믿기를 단념해 왔다. 저게 신기루가 아니라면 우리의 광기가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쁘레보는 아직 그런 걸 믿는단 말인가? 쁘레보가 고집을 부린다. "20분이면 돼요. 내가 가보겠어." 그 고집에 나는 화가 치민다. "가보게나. 바람이나 쐬고 오게.... 건강에 좋을 거니까. 만일 자네의 호수가 있다 하더라도 짠물일 걸세. 그거나 알아두게. 짜든 안짜든 아주 먼 데 있을 걸. 그리고 도대체 그런 있을 수 없네." 쁘레모는 눈을 한 곳에 박고 벌써 멀어져 간다. 이런 지상의 유혹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하긴 기관차 밑으로 곧바로 뛰어드는 몽유병자도 있긴 하지.' 쁘레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공허한 현기증에 사로잡혀 다시는 되돌아설 수가 없으리라. 그래서 조금 더 먼 곳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가 얼마나 하찮은 일들인가! 나는 내게 생긴 이러한 무관심을 아주 좋지 않은 징조라고 느꼈다. 전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도 나는 똑같은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이 조용한 기분을 이용해서 돌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유서를 쓰기로 했다. 내 글은 퍽 아름답다. 아주 품위가 있다. 나는 그 글에 지혜로운 충고들을 잔뜩 써넣는다. 나는 그것을 다시 읽어 보며, 막연한 자만의 기쁨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훌륭한 유서다.! 이런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나는 또 내가 어느 지경에 다다랐는지 알고 싶다. 나는 입 속에 침을 모아보려고 애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나는 침을 뱉지 않았던가? 이미 침은 없다. 입을 다문 채 있노라면 끈적끈적한 것이 입술을 봉한다. 그것은 말라붙어 입밖에 단단한 덩어리를 만든다. 그러나 아직은 삼키려는 시도에 성공한다. 그리고 아직은 눈이 조금도 부시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눈부시게 되면 내 목숨은 두 시간뿐이다. 밤이 되었다. 어젯밤보다 달이 커졌다. 쁘레보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드러누워 이 명백한 사실들을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속에서 어떤 오래된 인상을 발견해 낸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밝혀 보려고 애쓴다. 나는 그때... 나는 그때... 나는 그때 배를 타고 있었다! 나는 남아메리카로 가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상갑판 위에 누워 있었다. 마스트 끝이 별들 가운데에서 느리게 가로 세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마스트는 없지만, 나는 역시 배를 타고 가고 있다.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는 배를, 노^36^예 상인들이 나를 묶어서 배 위에 던졌던 것이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쁘레보 생각을 한다. 나는 그가 단 한 번도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쁘레보는 남자다. 아니! 내게서 5백 미터쯤 되는 곳에서 그가 등불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자기의 발자국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응답할 등불이 없다. 나는 일어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는 듣지 못한 것 같다. 두 번째 등불이 거기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켜진다. 그리고 세 번째 등불이, 아아니, 이건 수색꾼이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리 지른다. "어어이!" 그러나 못들은 모양이다. 3개의 등불은 자꾸 부르는 신호를 한다. 나는 돌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기분도 좋다. 마음도 평온하다. 나는 주의 깊게 바라본다. 역시 등불이 3개, 5백 미터 거리에 있다. "어어이!" 그러나 여전히 듣지 못한 모양이다. 이때 나는 잠시 공포에 사로잡힌다. 내가 경험한 유일한 공포, 아! 나는 아직도 뛸 수가 있다. '기다려라...기다려....' 아, 그들이 돌아가려고 한다! 멀어져 간다, 딴 데를 찾으러. 나는 쓰러질 것 같다! 생명의 문턱에서 쓰러지려 한다. 나를 받아들여 줄 팔들이 바로 저기까지 와 있었는데! "어어이! 어어이!" "어어이!" 내 소리에 응답했다. 나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히는데도 나는 여전히 달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린다. "어어이!" 쁘레보를 보자 나는 쓰러지고 만다. "아아! 그 등불들을 봤을 땐!" "무슨 등불을?" 그렇다, 그는 혼자다. 이번에는 아무런 절망도 느끼지 않았으나, 희미한 분노가 인다. "그래 자네 호수는?" "내가 가면 갈수록 멀어져 갔어요. 나는 30분 동안을 그쪽으로 걸어 갔지만, 더 멀어졌어요. 되돌아왔어요. 그러나 지금도 그것이 호수였다는 건 확실해요." "자네 돌았군. 완전히 돌았어. 아! 왜 그런 짓을 했지. 왜?" 그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나는 분해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분해하는지 나는 모른다. 쁘레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설명한다. "하도 마시고 싶어서...당신 입술도 이렇게 희잖아요.!" 아아! 내 분노가 사그라진다. 나는 잠에서 깬 것처럼 내 이마를 문지른다. 그리고 나는 슬퍼진다. 그래서 나는 조용 조용히 이야기한다. "나는 보았네. 자네를 본 것처럼, 분명히 난 봤어. 틀림없이 등불 셋을...쁘레보, 난 그걸 봤었네!" 쁘레보는 우선 잠자코 있다가 마침내 이렇게 자백한다. "그래요, 일은 더 안돼 가는 모양이오." 수증기 없는 대기 아래서는 땅은 빨리 열을 발산한다. 벌써 몹시 춥다. 나는 일어서서 걷는다. 그러나 이내 참을 수없이 몸이 떨려온다. 수분이 빠진 내 피는 순환이 나빠져서 얼음 같은 추위가 뼈에까지 파고든다. 이것은 밤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턱이 딱딱 마주치고, 온몸이 경련하듯 흔들린다. 손이 하도 떨려서 이젠 회중 전등을 쓸 수가 없다. 추위를 타지 않던 내가 얼어 죽을 것 같으니, 갈증의 결과란 참으로 이상하구나! 나는 더웠을 때 걸치고 있기가 귀찮아서 레인코트를 어딘가에 버리고 왔다. 그런데 바람이 점점 더 험악해진다. 사막에서는 전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막은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하다. 낮에는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고, 밤에는 사람을 발가벗겨 바람에 내맡긴다. 몸을 의지할 나무 한 그루, 담장 하나, 돌멩이 하나도 없다. 바람은 광활한 벌판에서 기병대가 돌진하듯 나를 몰아친다. 그것을 피하느라고 뱅뱅 맴을 돈다. 나는 누웠다간 다시 일어난다. 누워 있든 일어나든 나는 얼음의 채찍에 휘감긴다. 나는 달릴 수도 없고, 기력도 지쳐 이 암살 자로부터 도망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두 손으로 감싼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얼마 뒤에야 나는 일어나서 여전히 떨면서 앞으로 곧장 걸어가고 있는 나를 의식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 방금 떠났는데. 쁘레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부르는 목소리가 나를 깨웠던 것이다. 나는 그가 있는 데로 돌아온다. 온몸이 떨리고 딸국질이 나서 여전히 몸을 비틀거리면서. 그리고 혼잣말을 한다. "이건 추위가 아니다. 다른 것이다. 이젠 끝장이다." 나는 이미 수분을 너무 잃어버렸다. 그저께 하고 어제, 혼자 갔을 때 나는 너무 많이 걸었다. 추위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다. 그 전에 마음속에 간직했던 신기루가 더 좋다. 그 십자가며, 아랍인이며, 등불들이. 언제부터인지 이런 것들이 더 관심거리가 되기 시작한다. 나는 노^36^예처럼 채찍질을 당하기는 싫다. 나는 또다시 무릎을 끓는다. 우리는 약간의 약품을 가져 왔었다. 순수 에테르 1백 그램과 90도 알코올 1백 그램, 그리고 옥도정기 한 병. 나는 순수 에테르를 두어 방울 마셔 본다. 마치 칼을 삼키는 것 같다. 다음엔 90도 알코올을 조금, 이건 목을 막히게 한다. 나는 모래에 구멍을 파고 거기 눕는다. 그리고 다시 모래를 덮는다. 얼굴만이 나와 있다. 쁘레보가 잔가지를 찾아내어 불을 붙었지만 금방 사위여 버린다. 쁘레보는 모래 속에 묻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발을 움직이는 편을 택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내 목구멍은 그냥 막혀 있다. 이것은 나쁜 징조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좀 낫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모든 희망을 넘어선 마음의 평정이다. 나는 별빛 아래, 노^36^예 상인의 갑판 위에 묶여서 원치 않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몹시 불행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근육만 움직이지 않으면 추위를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모래 속에 잠든 내 육체를 잊는다. 나는 이제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면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니까. 하기는 사람은 그리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고통 뒤에는 피로와 망상이 교향악처럼 짜여져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림책으로, 약간 잔인한 동화로 바뀐다. 조금 전에는 바람이 나를 몰아쳤고, 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짐승처럼 맴을 돌았었다. 이어서 호흡이 곤란해졌다. 마치 무릎팍이 가슴을 찍어누르는 것 같았다. 어떤 무릎팍이. 나는 이 천사의 무게와 싸웠다. 사막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 지금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믿지 못해 내 자신 속에 파묻혀 두 눈을 감고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수많은 영상의 강물이 나를 고요한 꿈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을 느낀다. 강물은 바다의 깊은 속에서는 고요해지는 법이다. 잘 있어라. 내가 사랑하던 그대들이여. 인간의 몸이 마시지 않고 사흘을 견뎌내지 못했다해서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도 샘물의 포로인 줄은 몰랐었다. 나는 이렇게 자치밖에 허락되지 않는 줄은 생가도 못했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 앞을 곧장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을 우물에 붙들어 맨 밧줄, 탯줄처럼 인간을 대지의 배에 붙들어 맨 밧줄을 보지 못한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그는 죽는다. 당신들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나에겐 아무 후회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만일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시작 할 것이다. 나는 살 필요를 느낀다. 도시에는 이미 인간의 생활이 없다. 여기서는 비행이 문제가 아니다. 비행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사람이 생명을 거는 것은 비행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농부가 땅을 가는 것이 쟁기를 위해서가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비행기에 의해서 사람들은 도시와 그들의 회계원들을 떠나서 농부의 진리를 재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인간의 일을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고뇌를 알게 된다. 사람은 바람과, 별들과, 밤과, 모래와, 바다와 접촉한다. 사람은 자연의 힘에 대항해서 꾀를 쓴다. 정원사가 봄을 기다리듯이 사람은 새벽을 기다린다. 사람은 약속의 땅인 양 착륙지를 기다리고, 별 속에서 자기의 진리를 찾는다. 나는 불평하지 않겠다. 나는 사흘 전부터 걸었었고, 목말랐었고, 모래 위에 발자취를 쫓았었고, 이슬로 내 희망을 삼았었다. 나는 땅 위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내 동료들과 만나려고 애써 찾았었다.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걱정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오늘 밤에 뮤직 홀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저 교외 열차를 탄 주민들, 자기들을 인간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어떤 압력에 의해서, 마치 개미처럼 그 용도에 맞게 퇴화되어 버린 그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한가로울 때, 무엇으로 그들의 무의미하고 하찮은 일요일을 채우는 것일까? 한 번은 러시아에서, 어느 공장에서 모짜르트를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썼었다. 나는 2백 통의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나는 싸구려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다른 노래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건 싸구려 카페의 경영자들이다. 나는 인간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나는 내 직업 속에서 행복하다. 나는 나 자신을 착륙 지의 농부라고 생각한다. 교외 열차 안에서 나는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고통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여기는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나는 아무 후회도 없다. 나는 걸었었고, 잃어버렸다. 이것은 내 직업의 당연한 질서다. 어쨌거나 나는 상쾌한 바다 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한 번 이것을 맛본 사람은 이 양식을 잊지 못한다. 안그런가, 동료들이여? 문제는 결코 위험하게 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공식은 과장된 것이다. 투우사들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하늘이 희끔해지는 것 같다. 나는 모래 속에서 한 쪽 팔을 빼낸다. 손닿는 데 있는 헝겊 덫 하나를 더듬어 본다. 그러나 마른 그대로이다. 기다려 보자. 이슬은 새벽에 고이니까. 그러나 새벽은 우리 헝겊을 적셔주지 않고 밝아 온다. 그래서 내 생각은 약간 뒤얽힌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을 듣는다. '여기 있는 것은 메마른 마음... 메마른 마음... 눈물도 통 지을 줄 모르는 메마른 마음!' "떠나자, 쁘레보! 우리 목구멍이 아직은 막히지 않았다. 걸어야 한다." (7) 사람을 열 아홉 시간이면 말려버리는 서풍이 분다. 내 식도는 아직 막혀버리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고 아프다. 거기서 무엇이 긁어대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사람들이 말해주기도 했고, 기다리고 있기도 한 그 기침이 시작될 것이다. 혀가 걸치적거린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벌써 눈에 어른거리는 반점들이다. 그것이 불꽃으로 변하게 되면 나는 드러누울 것이다. 우리는 급히 걷는다. 우리는 새벽의 시원함을 이용한다. 별이 내리쬐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더는 걷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대낮이 되면.... 땀을 흘릴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기다릴 권리도 없다. 이 시원함은 습도 18퍼센트에 의한 시원함일 뿐이다. 이 부는 바람도 사막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거짓된 부드러운 애무 아래서 우리의 피는 증발돼 간다. 우리는 첫날에 포도를 몇 알 먹었다. 그리고는 사흘째 오렌지 반쪽과 스펀지 케이크 반 쪽뿐, 설령 먹을 것이 있다한들 무슨 침이 있어 씹겠는가? 그런데 전혀 배고프지가 않다. 그저 목이 마를 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갈증 자체보다도 갈증에서 오는 결과를 더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굳어버린 목구멍. 석고와도 같은 혀. 이 깎아내는 것 같은 기분과 지독히도 쓴 맛. 이러한 감각들은 내게는 새로운 것이다. 아마도 물이 이것들을 고쳐 주겠지만, 이 물이라는 약을 이러한 감각과 결부시켜 줄만한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갈증은 점점 더 욕망 이상으로 하나의 병이 되어 간다. 샘물과 과실들도 이미 내게는 그다지 애절한 영상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오렌지의 그 광채를 잊었다. 마치 내가 다정스러운 것들을 잊어버리고 만 느낌이 들 듯이, 어쩌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있다. 그러나 다시 떠나야 한다. 우리는 단숨에 먼 길을 걷기를 포기했다. 5백 미터를 걷고 나면 우리는 피로로 주저앉는다. 그리고 드러눕는데 크나큰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다시 떠나야만 한다. 풍경이 바뀐다. 돌들이 점점 드물어진다. 지금 우리는 모래 위를 걷고 있다. 우리 앞 2킬로 미터쯤 되는 곳에 사구들이 있다. 그 사구들 뒤에 짤막한 식물의 얼룩점들이 있다 강철의 갑옷보다는 나는 모래가 좋다. 이것은 황금빛 사막이다. 이것은 사하라다. 나는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다. 이제는 2백 미터에서 기진맥진한다. "어쨌든 걸어야 해. 적어도 저 소관목 있는 데까지는...." 그것은 엄청난 한계였다. 여드레 후에 우리가 '시문호'를 찾기 위해 자동차로 우리의 발자국을 되밟아 갔을 때 확인한 일인데, 이 마지막 시도가 80킬로 미터나 됐다. 그러니까 이때 나는 2백 킬로 미터를 걸어갔던 셈이다. 어떻게 그 이상 걸을 수 있겠는가? 어제 나는 희망도 없이 걸었었다. 오늘은 그런 말조차 그 뜻을 잃어 버렸다. 오늘 우리는 걸으니까 걷고 있다. 아마 소들이 밭을 갈 때도 이럴 테지. 어제 나는 오렌지 숲의 낙원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게 이미 낙원은 없다. 나는 이제 오렌지가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마음이 굉장히 말라 빠졌다는 느낌밖에는 내게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나는 당장 쓰러질 것 같고, 절망조차 모르겠다. 괴로움도 없다. 나는 그것이 유감이다. 고통이 내게는 물처럼 다정하게 여겨질 텐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연민하고, 또 친구처럼 자신을 동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세상에 친구가 없다. 사람들이 두 눈이 바싹 타버린 나를 발견하면 아마 내가 굉장히 소리쳐 부르고, 몹시 고통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발버둥도, 후회도, 애증의 고통도 아직은 재화이다. 그런데 내게는 이미 그런 재화도 없다. 순결한 소녀들은 첫사랑의 저녁에 괴로움을 알고 눈물짓는다. 이 괴로움은 생명의 떨림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내게는 이제 괴로움도 없다. 사막, 그것은 바로 나다. 나는 이제 침도 나오지 않지만, 또한 내가 그것을 향해 울부짖었을 그리운 영상들도 그려낼 수가 없다 태양이 내 속에서 눈물의 샘을 말려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희망의 숨결이 바다 위의 돌풍처럼 내 위를 지나갔다. 내 의식을 두드리기 전에 이제 막 내 본능에 알려준 이 신호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모래의 식탁보며, 이 언덕들, 그리고 저 아련한 초록의 널빤지는 이미 풍경이 아니고 무대를 이룩한다. 아직은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무대, 나는 쁘레보를 쳐다본다. 그도 나와 똑같은 놀라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정녕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 게 틀림없다. 사막이 생기를 띠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 이 부채, 이 고요가 갑자기 광장의 소란함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살아났다. 모래에 발자국들이 있지 않은가! 아아! 우리는 인류의 발자국을 잃어버리고, 부족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세계의 움직임으로부터도 잊혀져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나, 이제야 우리는 모래에 찍혀진 인간의 기적적인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쁘레보. 두 사람이 갈라져 갔어." "여기선 낙타가 꿇어앉아 있었구...." "여기선...." 그런데 아직은 우리가 구조된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몇 시간만 지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낼 수 없게 된다. 한 번 기침이 시작되기만 하면 갈증의 진행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다. 그런데 우리의 목구멍이 더욱.... 그러나 나는 이 대상을 믿는다. 사막의 어디쯤에서 어정대고 있을 이 대상을....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기요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 판에 나는 안데스 산맥 속에서 수탉 울음 소리를 들었어. 또 기차 소리도...." 닭이 운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혼잣말을 한다. "처음에 내 눈이 나를 속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갈증 탓일 거다. 귀가 더 버티어 온 셈이지...." 그런데 쁘레보가 내 팔을 붙든다. "들었어요?" "뭘?" "수탉 말이요!" "그래 그렇다면...." 그렇다면 틀림없다. 이 바보야, 이젠 살았어... 나는 마지막 환각에 사로잡혔다. 서로 쫓고 쫓기는 3마리의 개를. 쁘레보도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랍인 쪽으로 팔을 내민 것은 둘이 함께였다. 그쪽을 향해 모든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도 우리 둘이였다. 이 기쁨에 웃고 있는 것도 우리 둘이였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30미터도 채 못간다. 우리의 성대는 이미 말라붙었다. 우리는 서로 꺼져가는 소리로 말했고, 또 그것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언덕 뒤에서 막 모습을 드러낸 저 아랍인과 낙타가 지금 천천히 멀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는 혼자인지도 모른다. 잔인한 악마가 그의 모습만 보여주고 다시 끌고 가는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아랍인의 옆 얼굴이 그 사구 위에 나타난다.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러나 너무나 낮은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팔을 휘저었는데, 온 하늘이 거대한 신호들도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아랍인은 여전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몸을 45도 가량 돌리기 시작한다. 그가 앞 얼굴을 보일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끝마쳐질 것이다. 그가 우리 쪽을 바라볼 그 순간에 그는 이미 우리에게서 목마름과, 죽음과, 온갖 환영을 지워 줄 것이다. 그는 45도를 돌기 시작했고, 그것은 벌써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그의 상반신의 움직임 하나, 그의 시선의 움직임 하나로 그는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신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건 기적이다. 그는 바다 위를 걷는 신처럼 모래 위를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아랍인은 그저 우리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두 손으로 우리 어깨를 눌렀다. 그래서 우리는 복종했다. 우리는 누웠다. 여기에는 이미 종족도, 언어도, 차별도 없다. 우리 어깨에 천사장의 손을 얹은 이 초라한 유목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마를 모래 속에 박고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은 배를 깔고 엎드려 송아지처럼 냄비 속에 머리를 처박고 마시고 있다. 아랍인은 겁이 나서 번번이 우리를 중지시키려 든다. 그러나 그가 늦춰주기가 무섭게 우리는 다시 얼굴을 물 속에 처박는 것이었다. '아아, 물!' 물이여, 너는 맛도, 색깔도, 향기도 없어 너를 정의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너를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마신다.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그 자체다. 너는 감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준다. 너와 함께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힘이 되 돌아온다. 너의 은총으로 우리 가슴 속의 말라붙었던 모든 샘물이 다시 솟는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며, 또 가장 섬세하여 대지의 뱃속에서 그렇게도 순결하다. 산화마그네슘이 섞인 샘물 위에서는 사람이 죽는 수가 있다. 짠 호수 바로 옆에서 죽는 수도 있다. 약간의 분리 염분을 함유한 2리터의 이슬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가 있다. 너는 어떠한 혼합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떠한 변질도 용납하지 않는 꽤 까다로운 여신이다. 그러나 너는 무한히 단순한 행복을 우리들에게 부어 준다. 우리를 구해준 그대 리비아의 유목민이여,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져 버릴 것이다. 그 얼굴도 영영 생각나지 않게 되리라. 당신은 '인간'이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내게 나타난다. 당신은 우리를 눈 여겨 바라본 적도 없었지만 벌써 우리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가장 사랑하는 형제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모든 사람들 속에서 당신을 알아볼 것이다. 당신은 숭고함과 친절에 싸여 있어, 내게는 물을 줄 권능을 가진 왕자로 보였다. 내 모든 친구와, 내 모든 적들이 당신을 통해서 내게로 걸어온다. 그러기에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적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 8. 인간들의 모순 (1) 나는 또 한번 하나의 진리에 접근했으면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모든 것이 파멸되어 절망의 밑바닥에 닿은 것으로 믿었는데, 일단 단념을 하고 나자 평화를 알게 됐다. 그런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 어떤 본질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충만감보다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건대 바람을 쫓아 가느라고 자신을 망가뜨렸던 보나프는 이런 고요한 편안함을 알았으리라. 기요메도 또한 눈 속에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모래 속에 목까지 파묻히고, 서서히 갈증으로 목이 졸리면서, 그 별들의 외투 아래서 마음이 그다지도 포근했던 때의 일을. 우리 마음 속의 이러한 일종의 해방감을 어떻게 하면 복돋아줄 수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껏 창작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면 그는 잠들고 만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연약해지고, 인심 좋은 사람도 부자가 되면 수전노가 되고 만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상의 주의라는 것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우선 알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 누가 태어나려는가? 우리는 살만 찌우면 되는 가축이 아니며, 가난한 한 사람의 파스칼의 출현이 어느 이름 없는 부호의 출현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제각기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흐뭇한 기쁨들을 맛보았다. 이러한 기쁨들이 우리에게 그다지도 사무치는 노스탤지어를 남겨 주었기에 우리의 비참함까지도 그리워하게 된다. 동료들과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가 쓰라린 추억들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를 윤택하게 해주는 미지의 조건이 있다는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인간의 진실은 어디에 깃들이고 있는가? 진리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 땅에서만 오렌지 나무들이 튼튼한 뿌리를 뻗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 이 땅이 바로 오렌지 나무의 진리이다.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이 종교가, 이 문화가, 이 가치의 기준이, 이 활동 형태가, 인간 속에 이러한 충만감을 주고, 그의 마음속에 알지 못하던 하나의 왕자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가치 기준, 그 문화, 그 활동 형태가 바로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는? 논리가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고생을 겪어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내내 어떤 지상의 천성에 따라,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이 수도원 택하듯이 사막이나 항공로를 택한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이 사람들을 찬양해야 할 것은 그들의 바탕이 되어 준 대지이다. 천품도 물론 어떤 작용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가게 안에 틀어박혀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방향을 향해 감연히 그들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운명을 설명해 줄 힘의 싹을 발견한다. 그런데 사후에 읽혀지는 역사는 눈을 석이는 법이다. 이러한 힘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난파나 화재가 일어난 밤에 그들 자신 이상의 위대한 활동을 보인 상인들을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발휘한 푸진 힘의 특질에 대해 과대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화재는 그들의 생애에서 예외적인 하룻밤일 테니까. 다만 새로운 기화나, 알맞은 대지나, 또는 엄격한 종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간직한 위대함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잠이 들고 만다. 분명히 천성은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들을 도와준다. 그러나 그러한 천성을 해방시키는 일도 똑같이 필요하다. 하늘에서의 밤들이며, 서막에서의 밤들... 이런 것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드문 기회이다. 그러나 사태가 그들을 부추길 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내게 많은 교훈을 준 스페인에서의 하룻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눈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통신원으로서 방문했던 마드리드 전선에서의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하 대피소 안에서 한 젊은 대위의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2) 전화 벨이 울렸을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긴 대화가 시작됐다. 사령부에 명령한 국지 공격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 교외의 노동자 거리에 있는 콩크리이트 요새로 바뀐 몇 채의 건물을 점거하라는, 터무니없고 절망적인 공격 명령이었다. 대위는 어깨를 흠칫하고는 우리 있는 데로 돌아온다. "우리 중에서 먼저 나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기 함께 있던 한 상자와 내게 꼬냑잔을 2개 내민다. "자네 나하고 제1차 출발일세. 마시고 가서 자게." 상사에게 말한다 상사는 자러 갔다. 이 식탁에 둘러 앉은 우리 여남은 명은 불침번이다. 완전히 빛을 차단시켜서 어떠한 빛도 새지 않는 이 방에서 불빛이 너무 부셔 나는 눈을 깜박인다. 5분 전에 나는 총구로 밖을 내다보았다. 창구를 가린 헝겊을 제자리에 가렸을 때, 그것이 기름이 흐르듯이 달빛을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내 눈에는 암록색 요새의 영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병사들은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줍게 침묵을 지킨다. 이 돌격은 명령이다. 인간의 저장 속에서 퍼내는 것이다. 곡물 창고에서 퍼내는 것이다. 씨뿌리기 위해서 한줌의 낟알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꼬냑을 마신다. 내 오른쪽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 왼쪽에서는 농담들을 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반쯤 취한 한 남자가 들어온다.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정다운 시선을 굴린다. 그의 시선이 꼬냑 위로 미끄러졌다가는 돌리고서 다시 꼬냑으로 되돌아 와서 애원하듯 대위 위로 돌린다. 대위는 나지막하게 웃는다. 희망을 얻은 그 사나이도 웃는다. 가벼운 웃음이 구경꾼들 사이에 번진다. 대위가 술병을 슬며시 끌어당기자 사나이의 시선이 절망의 빛을 띠고, 이래서 어린애 같은 장난이 시작된다. 이 일종의 말없는 발레가 몽롱한 담배 연기와, 철야의 피로와, 임박한 공격 등과 어울려 마치 꿈속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같은 폭발음이 심해져 가는데도 우리는 우리 배의 훈훈한 선창 속에 갇혀서 장난을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제 곧 그들의 땀과, 알코올과 기다림에 찌든 때들을 전투의 밤의 왕수 속에서 씻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이 정화될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정꾼과 술병의 발레를 출 수 있는 데까지는 아직도 추고 있다. 그들은 이 장기를 둘 수 있는 데까지는 두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될 수 있는 데까지 끌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반 위에 버티고 있는 자명종을 맞추어 놓았다. 그러니 그 종이 오래지 않아 울릴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혁대를 졸라맬 것이다. 그러면 대위는 걸린 권총을 벗길 것이다. 그땐 주정꾼도 술이 깰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달빛으로 푸른 장방형을 이룬 입구까지 비스듬히 경사진 복도를 서두르지 않고 않고 올라 갈 것이다. 그들은 이런 하찮은 말들을 하리라. '빌어먹을 놈의 공격....'이라든지, '어유, 춥다!'느니 하는. 그리고 그들을 뛰어 들어갈 것이다. 시간이 되어 나는 상사가 잠을 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뒤죽박죽이 된 지하실에서 쇠침대 위에 뻗어 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불안하기는커녕 몹시도 행복스러운 그 잠의 맛을 나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자고 있는 모습이 리비아에서 첫날의 생각을 나게 했다. 그날 쁘레보와 나는 물도 없이 조난 당해 죽음의 선고를 받고서도 아주 심한 갈증을 겪기 전에 한 번, 꼭 한 번 2시간 동안을 잘 수 있었다. 그때 자면서 나는 현실 세계를 거부하는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맛보았었다. 그때, 아직은 평화로울 수 있는 몸의 소유자였던 나는, 얼굴을 팔에 파묻고 나니 그 밤을 행복한 밤과 구별지을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상사는 공처럼 뭉쳐서 사람 같지 않은 모양으로 잠자고 있었다. 깨우러 온 병사들이 촛불을 켜서 병에 꽂았을 때, 그 두루뭉수리의 덩어리에서 내가 처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군화밖에 없었다. 징을 박고 편저를 낀 엄청나게 큰 군화, 날품팔이나 부두노동자들이 신는 군화였다. 이 사내는 자기의 작업 도구를 신고 있었고, 그의 몸에 있는 것은 연장이 아닌 것이 없었다. 탄약 함도, 권총도, 가죽 멜빵도, 혁대도. 그는 길마니, 목띠니 하는 밭갈이 말의 마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지하실 속에서 눈먼 말이 끄는 연자매를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흔들리고 불그스레한 촛불 속에서, 연자매를 끌리기 위해서 역시 눈먼 말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봐, 상자!" 그는 아직 잠에 취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꾸물거렸다. 그리고는 잠을 깰 생각은 통 하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포근한 엄마 뱃속인양, 깊은 잠 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며, 깊은 물 속에서처럼 오므렸다 폈다 하는 두 주먹으로 무언지 모를 시커먼 해초를 붙잡곤 하면서 그의 손가락들을 펴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 사람이 그의 목 밑으로 팔을 살며시 넣고, 웃으면서 그 무거운 머리를 쳐들었다. 그것은 마치 훈훈한 외양간에서 서로 목을 비벼대는 말들의 다정함 같았다. "이봐, 친구!" 나는 평생에 이보다 더 다정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상사는 행복한 잠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피로와, 얼어붙은 밤으로 된 우리의 세계를 거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밖에서 오는 그 어떤 것이 그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요일에 학교의 종도 이와 같이 벌받은 아이를 슬며시 깨운다. 아이는 책상도, 칠판도 벌로 낸 숙제도 잊고 있었다. 그는 벌판에서 놀이하는 꿈은 꾸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종은 줄곧 울려 인간들의 부정 속으로 악착같이 그 아이를 다시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아이를 닮아 이 상사도 피로에 지쳐빠진 이 육체도, 그도 원치 않는 이 육체를 차츰차츰 의식하는 것이었다. 잠이 깰 때의 추위 속에서 이내 저 뼈 마디마디의 쓰라린 아픔을, 또 마구의 무게를, 또 저 무거운 달음박질을, 그리고는 죽음 알게 될 그 육체를. 죽음 자체보다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담그는 저 피의 끈끈이와, 그 힘든 호흡과, 그를 둘러싼 빙판, 죽음 자체보다도 죽어갈 때의 그 불편함. 그래서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줄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잠이 깨었을 때의 허전함과, 엄습해 오던 갈증과, 태양과, 사막과, 사람이 어쩌지 못할 꿈인 생명의 엄습 등을 생각하며. 그런데 상사는 일어나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본다. "벌써 시간인가?" 역서 인간이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이 논리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사는 웃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유혹은 무엇인가? 메르모즈와 내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축배를 들던 파리에서의 어느 밤이 생각난다. 무슨 기념일 이었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너무 많이 지껄이고, 너무 많이 마시고, 공연히 피로해진 데 진저리가 나서 새벽녘에 어느 바의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벌써 희끔해져 있어, 갑자기 메르모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것도 그의 손톱이 느껴질 정도로 억세게. "이봐, 지금쯤 다까르에서는...." 그것은 정비공들이 눈들을 비비며 프로펠러의 커버를 벗기는 시각이며, 조종사가 기상 통보를 알아보러 갈 시각이며, 땅 위의 온통 동료들만으로 가득 찰 시각이었다. 벌써 하늘은 붉게 물들고, 벌써 사람들은 잔치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고, 벌써 우리는 참석하지 못 할 연회의 식탁보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얼마나 불결한가...." 메르보즈가 말을 맺는다. 그런데 자네, 상사여, 자네는 죽음에 값할만한 어떤 연회에 초대를 받았던 말인가? 나는 이미 자네의 속내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자네는 내게 신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네는 바르셀로나 어느 곳의 보잘 것 없는 경리사원으로서 전에는 숫자를 늘어놓고 있었다. 자네 나라가 갈라져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이, 그런데 한 동료가 지원 입대했다. 이어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리하여 자네는 어리둥절해서 어떤 야릇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자네의 하는 일이 점점 시시하게 여겨졌다. 자네의 기쁨들도, 걱정들도, 하찮은 일상의 안락함도 모두가 예 시대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마침내 자네 동료의 한 사람이 말라가 근처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자네가 그 복수를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그 친구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란 것도 일찍이 자네의 마음을 어지럽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죽음 소식이 바다의 돌풍처럼 자네 위를, 자네의 좁다란 운명 위를 스쳐 갔다. 그날 아침 한 동료가 자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갈까?" "가자." 그래서 자네들은 '갔던' 것이다. 자네가 말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그 명백한 사실을 자네를 지배했던 그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주기에 기러기가 날아갈 때, 그들이 굽어보는 지역 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집오리들이 그 거창한 삼각형의 날개에 끌리듯이 서투른 날개짓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성의 부름 소리가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인지 모를 어떤 야성의 흔적을 잠깨운 것이다. 즉, 농가의 오리들이 잠시 철새로 바뀐 것이다. 웅덩이니, 벌레니, 오리집이니 하는 하찮은 영상만이 내왕하던 그 작은 무긴 머리 속에, 대륙의 드넓음과, 큰 바닷바람의 맛과, 해양의 진리가 전개된 것이다. 이 짐은 제 골이 이렇듯 놀라운 것들을 간직할 수 있을 만큼 넓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 날개를 치고, 낟알과 벌레들을 깔보며, 오직 기러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내 영양들이다. 나는 쥐비에 있을 때 영양들을 길렀었다. 거기서는 모두들 영양을 길렀다. 우리는 그것들을 창살 달린 우리 속에 가두어 한데다 두었다. 영양에게는 유동하는 공기가 필요하고, 또 그들만큼 허약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붙잡혀서라도 자라고, 시림 손에서 풀을 먹게 된다.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그 촉촉한 콧잔등을 손바닥에 파묻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놈들이 길이 든 줄로 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영양의 씨를 없애고, 살그머니 그들을 죽이는 알지 못할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조그만 뿔로 사막 쪽을 향해 울타리를 떠받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그놈들은 자석에 이끌린 것이다. 그놈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도 모른다. 조금 전에도 당신이 갖다준 우유를 막 먹고 난 참이다. 그것들은 아직도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콧잔등을 손바닥에 더 다정스레 파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놓아주기가 무섭게 기뻐서 껑충거리는 듯이 보이다가는 다시 창살 있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간섭하지 않으면, 그냥 거기 서서 울타리와 싸워볼 생각은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뿔로 죽어라 하고 울타리를 떠받는 것이다. 발정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숨이 차도록 뛰놀고 싶은 단순한 욕구 때문일까? 그놈들은 그것을 모른다. 사람들이 붙잡아 왔을 때는 아직 눈도 뜨지 않았었다. 그놈들은 수컷의 냄새를 모르듯이 사막에서의 자유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 양들보다 더 영리하다. 그놈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대들은 안다. 그것은 그놈들의 소원을 채워 줄 넓은 들판이다. 그놈들은 영양이 되어 저희들의 불꽃을 피하려는 듯이 갑작스런 도약을 섞어 가며, 시속 1백 30킬로 미터의 줄달음질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두려움을 맛보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이고, 그 두려움만이 그들에게 제 힘 이상을 해내게 하고, 가장 높은 재주를 끌어내게 하는 것이라면, 샤깔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폭양 밑에서 맹수의 발톱에 찢겨 죽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라면, 사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들은 그들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놈들이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고 향수, 그것은 알지 못할 그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이다. 동경의 대상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말들이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엇이 그립단 말인가? 상사여, 자네는 여기서 자네의 운명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할만한 그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은 자네의 잠든 머리를 쳐들어준 그 우애로운 팔이거나, 또는 동정은 아니나, 나누어주는 그 정다운 미소가 아닐까? '이봐, 친구!' 동정한다는 것은 아직도 둘로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갈라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사도 연민도 똑같이 의미를 잃게 되는 인간 관계의 높이가 있다. 사람이 해방된 포로처럼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2대의 비행편대로 아직 귀순하지 않은 리오 데 오로 지방을 날아 넘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결합을 맛보았었다. 나는 조난자가 구조자에게 감사하는 말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흔히 우리는 이 비행기에서 저 비행기로 우편 행낭을 옮겨 싣느라고 애를 쓰는 동안에도 서로 욕지거리를 하곤 했었다. "망할 자식! 내가 고장이 난 건 네 탓이야. 미쳤다고 그 역풍 속을 고도 2천으로 날아! 좀더 낮게 날 따라 왔더라면 우린 벌써 뽀르 에띠엔에 가있을 게 아냐!" 그러면 목숨을 내맡기고 따라 왔던 상대편은 망할 자식이 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하기야 무엇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구해준 자네가 자랑스러웠다! 상사여, 죽음을 위해 자네에게 준비를 시켜주던 그 병사가 왜 자네를 동정했겠는가? 자네들은 서로를 위해 이 위험을 택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이미 언어가 필요치 않은 일치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자네의 출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네가 바르셀로나에서 가난했고, 일이 끝난 후에는 외로웠고, 자네 몸을 편히 쉴 곳조차 없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자네 자신이 완성되는 느낌을 맛보게 되었고, 또 우주적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따돌림받던 자네가 사랑으로써 맞아 들여졌던 것이다. 어쩌면 자네를 충동질했을지도 모르는 저 정치가들의 호언장담이 진정했고 안했고, 또 이치에 맞지 않고를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씨앗들이 싹을 틔우듯이 그 말들이 자네를 붙들었다면, 그것은 그 말들이 자네의 욕구와 합치됐기 때문이다. 자네만이 심판관이다. 밀을 알아 볼 줄 아는 것은 대지이다. (3) 우리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쉬는 것이며,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이 같이 도달할 같은 봉우리를 향해 같은 로프에 묶여져 있지 않으면 동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바로 이 안락한 세계에, 왜 사막 한가운데서 마지막 식량을 나누는 것에 그렇게도 넘치는 기쁨을 느끼겠는가?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억측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의 그 구조작업의 큰 기쁨을 맛본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기쁨들이란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우리 주위에서 와지끈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에게 이러한 충만감을 약속해 주는 종교에 열광한다. 모순된 말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똑같은 정열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제각기 이성의 열매인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다르지 않다. 목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미지의 것을 짐작조차 못했던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나키스트들의 지하실에서 희생이니, 상호 원조니, 정의의 준엄한 영상이니 하는 것에 감동되어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제 하나의 진리, 아나키스트의 진리밖에는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또 스페인의 수녀원에서 겁을 먹고 꿇어앉아 있는 어린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번 보초를 선 사람은 끝내 그 교회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가슴에 승리감을 안고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비탈을 향해 빠져 들어가는 메르모즈더러 잘못이라고, 상인의 편지 한 장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고 당신이 반대했다면, 메르모즈는 당신을 비웃었을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었을 때 그의 속에서 태어나던 인간, 그것이 바로 그의 진리인 것이다. 전쟁을 불사하는 사람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납득시키려거든 그를 야만인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도록 힘써라. 리프 전쟁 당시, 두 불귀순 고지 사이의 쐐기 모양으로 설치된 전초 진지를 지휘하던 남방지구의 그 장교를 생각해 보라. 그는 어느 날 저녁, 서쪽 산악에서 내려온 군사들을 맞았다. 격식대로 함께 차를 들고 있는데 총격이 벌어졌다. 동쪽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이 초소를 공격해 온 것이다. 전투를 위해 물러갈 것을 요구하는 대위에게 적의 군사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 우리는 귀관의 손님이오. 신은 귀관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은 허락지 않소...." 그래서 그들은 대위의 군대와 합세해서 그 진지를 구해주고는 그들의 독수리 집으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이 진지를 습격할 준비를 하는 전 날, 그들은 대위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저번 밤에 우리는 귀관을 도왔다." "그랬소." "우리는 귀관을 위해 소총탄 3백을 쏘았다." "그랬소."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 줘야 옳지 않소?" 기품 있는 대위는 그네들의 고귀함에서 얻어낼 수 있었을 이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들을 향해 쓰여질 소총탄을 돌려 주었다. 인간의 진리란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와 적군과의 이러한 관계의 어엿함, 승부에 있어서의 성실함, 목숨을 건 상호간의 경의의 주고 받음을 이해한 그 대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이 고귀함을, 같은 아랍인에게 어깨를 툭 치며 자기의 우애를 보이고, 그들에게 아첨도 하나 동시에 창피하게도 하는 저 선동 정치가들의 비열한 친절과 비교할 때, 만일 당신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늘어 놓는다면, 대위는 당신에 대하여 약간 멸시 섞인 연민밖에는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은 바로 그다. 그러나 당신들이 전쟁을 증오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인간과 그 갖가지 욕망을 이해하고, 그가 가진 본질적인 것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당신들의 진리의 명백한 사실을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 당신들은 옳다. 당신들은 모두 옳다. 논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세계의 불행을 꼽추에게 전가시키는 자에게도 일리는 있다. 만약 우리가 꼽추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면, 우리는 이내 흥분할 이유를 찾아 낼 것이다. 우리는 꼽추들의 죄악에 보복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물론 꼽추들도 죄악을 범한다. 이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어 보려면, 잠시 이들의 차이를 잊어야만 한다. 차이란 한 번 인정받게 되면 온통 코란 한 권만큼의 요지부동의 진리와,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광신까지도 끌어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을 좌익과 우익, 꼽추와 꼽추 아닌 사람,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고, 또 이러한 구분은 비난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이지 혼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보편성을 끌어내는 언어이다. 뉴턴은 결코 퀴즈 풀이처럼 오랫동안 숨어 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뉴턴은 하나의 창조적인 실험을 행한 것이다. 그는 풀밭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창조했던 것이다. 진리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르기를 논쟁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또한 반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구원을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 주위 어디서고 똑같은 요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해방되고 싶어하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그 곡괭이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형량을 선고 받은 사람을 모욕하는 수형자의 곡괭이질은 탐험가를 위대하게 하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 추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형장은 의미를 갖지 않은 곡괭이가 박힌 곳, 그 사람을 인간의 공동체와 맺어 주지 않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형장을 탈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현재 유럽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2억의 인간이 있다. 공업이 그들을 농민으로서의 전통에서 끌어내어 시커먼 열차들로 혼잡한 역과도 같은 거대한 게토(유태인 지정 거주 지역) 속에 가두어 버렸다. 노동자 도시의 밑창에서 그들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척자의 기쁨도, 종교적인 기쁨도, 학자로서의 기쁨도 금지된 온갖 직업의 톱니바퀴 틈에 끼어 들어가 있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고, 그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츰 차츰 자기 속에 꾸르뜰린 같은 소시민이나, 촌뜨기 정치가, 내면 생활에 관심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잘 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을 북돋주어줄 생각은 이미 없다. 문화에 대해서도 정말 보잘것 없는 의견을 갖게 되어, 그것이 단지 공식의 암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전문학교의 열등생이라도 자연이나 그 법칙에 관해서는 데카르트나 파스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정신에 있어서도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할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막연히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힘으로써 활기를 줄 수는 있다. 그러면 그들은 군가를 부르고 전우들과 더불어 빵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기들이 찾는 보편적인 것의 맛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빵으로 인해 그들은 죽어 가는 것이다. 땅 속에서 나무 우상을 파내어 그럭저럭 무엇을 증거 세운 신화를 부활시킬 수도 있고, 또 범게르만주의나 로마제국의 신비론자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 사람이며, 베에토벤과 동국인이라는 도취감에 취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부두 노동자까지 만취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부두 노동자로부터 하나의 베에토벤을 끌어내기보다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들은 사람 잡아먹는 우상들이다. 지식의 진보나 질병의 치유를 위해 죽는 사람은, 그가 죽는 것과 동시에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죽는 것도 갸륵한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전쟁은 그것이 조장시켜 준다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를 살리기 위해 약간의 피를 희생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안된다. 전쟁이 비행기와 이페리트가스를 쓰게 된 이래로 그것은 이제 피투성이 외과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방공호에 의지하고, 서로가 밤마다 비행 편대를 보내어 상대편의 오장육부를 폭격하여 그 치명적인 중심부를 파괴하고, 그 생산과 교역을 마비시킨다. 승리는 맨 나중에 썩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두 적수들은 대개 같이 썩어 가는 것이다. 무인지경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동료들을 찾느라고 목이 탔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빵 맛은 우리에게 전쟁의 가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옆 사람들 어깨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 전쟁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전쟁은 우리를 속인다. 증오가 달음박질의 흥분에 보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우리는 증오하는가? 우리는 같은 떠돌이 별을 타고 있는 한 배의 선원으로서 연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을 북돋우기 위해 문명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우리 서로를 맺어주는 하나의 목표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니 만큼, 우리 모두를 결합시켜 주는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일이다. 진찰하는 의사는 그 환자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는 보편적인 언어를 말한다. 원자와 성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신과도 같은 방정식을 생각해낼 때의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순박한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 왜냐하면 별 아래서 몇 마리의 양들을 조심성 있게 지키고 있는 그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한다면, 자기가 한낱 종이 아님을 깨달을 테니까. 그는 보초인 것이다. 그리고 보초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양치기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하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참호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의 조그마한 돌담 뒤에 자리잡은 학교를 찾아가본 일이 있다. 한 사람의 하사가 거기서 식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 끝으로 개양귀비 꽃의 연약한 기관을 분해해 가면서 그는 수염 난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들은 둘러싸여 있는 진창을 빠져 나와 포탄을 무릅쓰고 그가 있는 곳으로 순례하러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하사를 둘러싸고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들은 수업에 대해서는 대단한 것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런 말은 알아들었다. "당신들은 짐승이다. 당신들은 이제 겨우 동굴에서 기어나왔다. 인간성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때라야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자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지극히 다사로운 것이다. 가령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가 자기 대의 끝에 임박해서, 자기 몫의 염소와 올리브 나무들을 아들에게 물려 주고, 그 아들들도 차례로 그 아들들에게 물려 줄 수 있게 하려는 그런 때 그러한 것이다. 농부의 가계에서는 사람은 반밖에 죽지 않는다. 각기의 생명은 자기 차례가 오면 깍지처럼 터져 씨앗을 넘겨 주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임종의 자리에 임한 세 사람의 농부를 곁에서 본 일이 있다. 물론 그것은 비통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탯줄이 끊어진 셈이다. 두 번째로 매듭이, 한 대와 다음 대를 잇는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이 세 아들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고, 명절날 모여, 앉을 단란한 식탁도 없어지고, 의지해야 할 중심을 잃어버린 외로운 자신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와 함께 이런 것도 발견했다. 이 끊어짐 속에서 또한 생명이 두 번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아들들도 역시 차례가 되면 줄의 선두가 되고, 집합 점이 되고, 가장이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차례가 와서, 지금 안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 한 배의 자식들에게 지휘권을 넘겨 줄 그때까지. 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평화롭고도 굳은 얼굴에 입술을 꽉 다문 늙은 농사꾼 아낙네, 돌의 가면으로 바뀐 그 얼굴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들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 가면은 그들의 얼굴을 찍어내는데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 몸은 그들의 몸, 그 아름다운 인간의 원형들을 찍어내는데 소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어머니는 찌그러져서, 열매를 꺼낸 깍지처럼 쉬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들도 그들의 차례가 오면 자기들의 몸으로 작은 인간들을 찍어낼 것이다. 농가에서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만세! 비통하기는 하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순박한가. 백발의 아름다운 껍질을 가는 길에 하나하나 버리면서, 자기의 변신을 통해서 알지 못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 혈통의 모습은... 그러기에 그날 저녁, 그 시골 작은 마을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절망이 아닌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기쁨을 실은 것처럼 내 귀에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장례와 세례를 한 목소리로 엄숙한 그 종소리는 또다시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옮아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엾은 한 노파와 대지와의 약혼식 노래를 들으면서 크나큰 평화밖에는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처럼 유유한 걸음으로 전해져 가는 것은 생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의식이기도 하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올라감인가! 녹아 흐르는 용암에서, 별의 반죽에서 기적적으로 싹튼 생명 있는 세포에서 태어난 우리는, 차츰차츰 칸타타 노래를 쓰고, 은하수를 계측하는 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 어머니는 결코 생명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차츰차츰 쌓여진 짐짝을, 자기가 맡아 왔던 정신적인 유산인, 뉴턴과 세익스피어를 동굴 속의 짐승들과 구별지어주는 전통과 개념과 신화 등의 조그만 몫을 그들에게 맡겨준 것이다. 우리가 배고플 때 느끼는 것, 저 스페인의 병사들을 포격을 무릅쓰고 식물학 수업으로 이끌어 가고, 메르모즈를 남대서양 쪽으로 몰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시로 본 그 굶주림에서 깨닫는 것은 천지의 생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자각해야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타랍을 걸쳐 놓아야 한다. 자신들을 이기적인 것이라고 믿는 무관심으로써 자기들의 지혜로 삼는 자들만이 굶주림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러한 지혜와는 모순된다! 동료들, 나의 동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래, 어떤 때에 우리는 행복을 느꼈던가? (4) 이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생각나는 것은, 조종사로서 지명된 행운을 얻어, 우리가 인간으로 탈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그 첫 우편 비행을 떠나던 새벽에 우리를 배웅해 주던 늙은 사무원들이다.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기는 하나, 자기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잠자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몇 해 전에 기 기차 여행 도중에, 나는 사흘 동안이나 그 바닷물에 굴리는 조약돌 같은 소리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던 기차의 이 진행중인 고장이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었다. 새벽 1시경이었는데, 나는 열차 전부를 종단해서 걸어갔다. 침대 차는 비어 있었다. 1등 찻간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3등 차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백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타넘으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나는 둘러보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서, 나는 이 병영이나 유치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공동 숙사 비슷한 칸막이 없는 객차 안에서, 열차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는 혼잡한 군중을 보았다. 그것은 악몽 속에 파묻혀 그들의 비참함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군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빡빡 깍은 카다란 머리들이 나무 걸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의 망각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이 모든 소음과 동요에 시달리듯이 좌우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단잠의 후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 경제의 조류에 밀려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쫓겨다니고, 내가 전에 폴란드 광부들의 창가에서 본 적이 있는 제라늄 화분 3개와 손바닥만한 마당이 달린 그 노르 지방(프랑스 북부지방)의 작은 집에서도 떨려 난 이 사람들은 인간의 자격도 태반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 탈장처럼 터진 봇짐 속에는 부엌 세간과, 담요와, 커튼밖에는 챙겨 넣지 못했다. 그들이 쓰다듬고 귀여워하던 모든 것, 프랑스에서 지낸 4~5년 동안에 길들였던 모든 것들, 고양이며, 개며, 제라늄 따위는 단념해야만 했고, 이 부엌 세간만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기 하나가, 하도 지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이 여행의 부조리와 무질서 속에서 생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돌덩이처럼 무겁고 까까중인 머리통, 작업복 속에 갇혀 불편한 잠 속에 빠져 오그린 울퉁불퉁한 육체, 그는 마치 진흙덩어리 같았다. 밤이면 이와 닮은 이미 형체도 없는 표류물들이 시장의 벤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이 비참함 속에, 이 불결함 속에 이 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긴 커녕 바로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어느 날 서로 알게 되어, 아마도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미소를 던졌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하루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꽃도 가져다 주었겠지. 수줍고 서투른 그는 어쩌면 업신여김 당할까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고난 아양과 매력에 자신을 가지고 그를 골려주며 즐거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곡괭이질이나 망치질을 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된 이 남자는 마음 속에 달콤한 번민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지금 그들이 진흙 덩어리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지독한 거푸집을 거쳐 나왔기에 이처럼 판박이 기계에 눌린 것처럼 이렇게 찍혀졌단 말인가? 늙은 짐승도 아직 제 매력을 간직하는 법이다. 어째서 이 아름다운 인간의 진흙은 망가진 것일까? 나는 잠자리가 사창굴처럼 어지러운 군중들 사이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거친 코고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한탄과, 어느 한편이 견딜 수 없어 다른 쪽으로 뒤채는 사람들이 바닥을 긁는 헌 구두 소리 등이 뒤범벅이 된 야릇한 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에 뒹구는 조약돌 소리 같은 그칠 줄 모르는 반주가 여전히 나지막이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 부부 맞은편에 앉는다.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린 아이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잠들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면서 돌아 눕는 바람에 그 얼굴이 희미한 등불 밑에 드러났다. 오오! 얼마나 사랑스러운 얼굴인가! 이 부부에게서 일종의 황금 과실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둔중한 암수 남, 녀에게서 이 아름답고 매력 있는 걸작이 생겨나온 것이다. 나는 그 반듯한 이마, 그 귀엽게 내민 입술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악가의 얼굴, 어린 모짜르트,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다라고 전설 속의 어린 왕자인들이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보호받고, 귀염받고, 교양 받는다면 이 아이도 무엇인들 못될 것인가! 정원에 돌연변이로 새로운 장미꽃이 피어나면 정원사들은 모두 법석을 떤다. 그 꽃을 따로 옮겨 심고, 가꾸고 우대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정원사는 없다. 어린 모짜르트도 다른 아이들처럼 판박이 기계에 찍히게 될 것이다. 모짜르트는 카바레의 악취 속에서 썩어빠진 음악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모처럼의 모짜르트도 마지막이다. 나는 내 찻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자비심이 아니다. 영원히 터지기를 계속하는 상처를 연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개인이 아니고 인류라고나 할 그 무엇이다. 나는 연민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정원사의 관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이 비참함이 아니다. 비참함 속에서라면 인간은 나태 속에서 그렇듯이 그 속에 안주해 버릴 수도 있다. 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신분이 낮은 천함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묽은 수프(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무료 급식)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함도 누추함도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인간들 하나 하나 속에서 학살당한 모짜르트인 것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 9.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1) 1940년 12월, 내가 미국에 가려고 포르투갈을 횡단했을 때, 리스본은 내게 마치 밝고도 쓸쓸한 일종의 낙원처럼 보였다. 그때 거기서는 침공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는데, 포르투칼은 자기의 행복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전시장을 꾸며 놓은 리스본은 약간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에 나간 아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도 '내가 웃고 있는 이상 내 아들은 살아 있어'라는 확신으로써 아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그런 어머니들의 미소와도 같았다. '보세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스러우며 구김살 없이 밝은가를....'하고 리스본은 말하고 있었다. 대륙 전체가 사나운 족속들로 그득한 원시적인 산악처럼 포르투칼을 짓누르고 있는데, 화려하게 장식한 리스본은 유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내가 숨으려고 전혀 애쓰지 않는데 누가 나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데.' 하고... 내 조국의 도시들은 밤이 오면 잿빛으로 변한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불빛에 대한 습관을 잃었었다. 그래서 이 휘황한 도시는 내게 막연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위의 변두리 거리가 어두우면 너무나 휘황한 진열장의 다이아몬드들은 부랑자들을 유인한다. 지금 그들이 돌아다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멀리서 이 보물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폭격기들의 무리로 가득 찬 유럽의 밤이 리스본을 짓누르는 것 같이 내겐 생각된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이 괴물의 욕망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불길한 조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을 숭배하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그는 경탄할 만한 모든 예술품들을 끄집어냈다. 이처럼 놀라운 예술품 속에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포르투칼은 그들의 수많은 위인들을 내보였다. 군대가 없고,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는 시인, 탐험가, 모험가, 등의 석상으로 된 보초들을 침략자의 쇳덩이 앞에 세워 놓았다. 군대와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과거를 내세워 길을 막아섰다. 이렇게 웅장한 과거의 유산을 지니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이리하여 나는 매일 저녁, 지극히 고상한 취미로써 가다듬어진 이 훌륭한 전시품들 사이를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거기에서는 너무도 사려 깊고 솜씨 있게 골라진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음악은 정원 위를 부드럽게, 마치 샘물의 소박한 속삭임처럼 격렬한 음을 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절도 있는 놀라운 취미를 누가 파괴하겠단 말인가?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리스본이 내 조국의 불꺼진 도시들보다 더 침울하게 생각되었다. 아마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죽은 사람의 자리를 그들의 식탁에 그대로 남겨 넣는 좀 이상한 집안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이 위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역을 맡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죽음의 역할에서 하나의 다른 존재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죽은 이들의 귀환을 중단시키고 있다. 그 가족들은 죽은 이를 영원한 부재자, 영원히 지각하는 손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별의 슬픔을 내용 없는 기다림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집안들의 슬픔과는 다른 끊임없이 숨막히는 어떤 불안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잃은 마지막 친구, 항공 우편 업무 공사 중에 순직한 조종사 기요메,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기요메는 더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우리 앞에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영영 부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올가미인 그의 식기들을 내 식탁에서 치워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를 정말로 죽은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그의 식기와 램프와 음악을 남겨둠으로써 행복을 믿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신이 행복을 믿도록 하기 위해 모두들 행복을 가장하고 있었다. 리스본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떤 피난만들이 와있는 탓이기도 했다. 나는 피난처를 찾아온 추방당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기들의 노력으로써 비옥하게 만들 땅을 찾으러 온 이주민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들의 재산을 안전한 곳에 갖다 두기 위해 동족들의 비참함을 멀리하고 망명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시내에 거처를 정할 수 없어서 에스또릴의 도박장 근처에서 기거했다. 나는 치열한 전쟁에서 빠져 나온 참이었다. 아홉 달 동안 독일 상공 비행을 중단한 적이 없었던 우리 비행대대는 독일군의 단 한번의 공격에 승무원의 4분의 3을 잃었었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노^36^예 상태와 같은 음울한 분위기와 기아의 위협을 체험했다. 나는 내 나라 도시들에 내린 그 답답한 밤들을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 내 숙소에서 두어 걸음밖에 안되는 에스또릴의 카지노에는 밤마다 유령들로 들끓고 있었다. 어딘 가로 달려가는 것같이 보이는 소리 없는 캐딜락 승용차가 현관 입구에 깔린 보드라운 가는 모래 위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만찬회 때의 정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슴 장식과 진주 목걸이들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화제도 없는 겉치레 식사를 하기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재산 정도에 따라 '루울렛'이나 '바카라(트럼프의 일종)' 놀림을 한다. 나는 가끔 그들은 구경하러 갔었다. 나는 분개하거나 빈정거릴 감정은 들지 않았으나 어떤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것은 동물원에서 멸종되어 가는 종족 중의 남아 있는 동물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가슴 답답한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놀음탁자 주위에 자리잡는다. 그들은 무뚝뚝한 도박대 감시인에게 바싹 다가앉아, 희망과 실망과 두려움과 선망과 환희를 맛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생존자처럼, 그들은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모든 의미를 상실했을지도 모를 재산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무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을 받고 이미 파괴되어 가고 있는 공장들의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리우스좌를 지불 인으로 하고 어음을 끊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몇 달 전부터 시상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고거에 매달려 오직 그들의 흥분의 정당성과, 수표의 예치금과, 약속의 불변성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인형들의 발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광경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버리고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나 이 에스또릴의 바다, 물의 도시의 바다, 길들여진 바다도 놀음에 한몫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부드럽고 단조로운 물결을 철 지난 긴 옷자락처럼만 속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항구 안의 여객선에서도 그 피난민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여객선도 역시 가벼운 불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배는 뿌리 없는 식물들을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실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여행자는 되고 싶지만, 이주민이 되고 싶진 않구나. 나는 내 조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소용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저 이주민들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주소록과 신분증 등등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 체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 있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시겠소? 나는 이런 사람이오. 이러이러한 도시 출신이오. 아무개의 친구요.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을 아시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친구 이야기나, 어떤 책임 이야기나, 어떤 실패 이야기나, 록은 그들을 아무것 하고라도 관련지어줄 수 있을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등지고 떠나온 만큼 이미 그런 과거는 아무것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마치 사랑의 추억이 처음에는 그렇듯이, 그것은 아직도 아주 따뜻하고 아주 신선하고 아주 생생했다. 그들은 연애 편지들을 모아 놓는다. 거기에는 어떤 추억들이 깃들이어 있다. 그것들을 모두 소중하게 묶어 놓는다. 그러면 이 유물들은 처음에는 우수에 찬 매력을 풍긴다. 그러다가 파란 눈의 금발머리 아가씨라도 지나가면 그 유물들은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친구도, 책임도, 고향읍내도, 자기 집의 추억도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면 퇴색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리스본이 행복을 가장하고 있듯이 그들도 머지않아 돌아갈 줄 믿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탕아가 집을 나간 것은 얼마나 아늑한 느낌인가! 그의 뒤에는 고향 집이 있는 만큼 그것은 외양만의 부재다. 누가 옆방에 가있다든가, 지구 반대편에 가있다든가 하는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보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의 존재가 어떤 눈앞의 실재보다도 더욱 가깝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도에 의한 현존이다. 나는 사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내 집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16세기의 브르따뉴 뱃사람들은 호른 곶(남아메리카의 남단. 칠레령 호른 섬에 있다)을 돌아가며 역풍의 장벽과 대항하면서 늙어갔지만 그들보다 약혼녀와 더 가까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돛을 감아 올리면서 그 투박한 손으로 귀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브르따뉴 항구에서 약혼녀의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호른 곶을 거쳐 지나간다. 그런데 저 피난민들이 내게는 약혼녀를 빼앗긴 브르따뉴의 뱃사람처럼 생각된다. 이미 그들을 위해 그 창가에 가물거리는 램프를 밝히는 브르따뉴의 약혼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탕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탕아들이다. 그래서 진짜 여행은 자기 자신 밖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 속에 묵직한 추억의 실타래를 다시 감을 수 있을까? 이 유령선은 고성소(구약시대에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의인들의 영혼이 머물던 곳)처럼, 태어날 영혼을 싣고 있었다. 배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직무로써 자신을 향상시키면서 쟁반을 나르고 놋그릇을 닦고 구두에 약칠을 하는 이들이, 은연중에 경멸감으로 죽은 이들의 시중을 드는 이 사람들이 실로 현실적으로 보였으며,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싶으리 만치 현실적이었다. 피난민들이 그런 가벼운 모멸을 받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비중이다. 그들은 이미 어떤 일정한 짐과 어떤 친구와 어떤 책임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역할을 하는 체했지만, 그것에는 이미 진실성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호소하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대들을 떠밀어 일어나게 해서 역으로 달려가게 하는 그 전보, '빨리 오라! 네가 필요하다'라는 전보는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를 이내 알아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움 받기를 처하는 자들은 천천히 얻게 된다. 물론 내 눈앞의 저 유령들을 아무도 증오하지 않았고, 아무도 시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환영 칵테일 파티나 위로 만찬회에 휩쓸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들의 문을 흔들며 '문 좀 열게! 날세!' 하며 들여주기를 요구하겠는가? 아이가 무엇을 요구하기까지에는 오랫동안의 사귐이 필요하다. 낡은 성관을 사랑할 줄 알려면 여러 세대 동안 수리비를 탕진해야 한다. (2)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왔다는 것을 어딘가에 남기는 일이다. 관습이 그렇고, 집안의 잔치가 그렇고, 추억이 깃들인 집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오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향하고 있는 그 먼 목표가 덧없는 것이기에 나는 내 본질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진짜 사막을 체험하는데 위험을 무릅썼고, 그리하여 오랫동안 내 호기심을 끌었던 어떤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 동안 사하라에서 살아왔다. 아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사막의 마력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외견상 고독하고 헐벗어 있지만, 사하라의 생활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의 몇 해를 자신이 살아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듯 그리워한다. '사막에의 향수, 고독에의 향수, 공간에의 향수'라는 말들을 문학적인 관용어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선객들이 빼곡이 들어차 우글대는 뱃전에서 나는 비로소 사막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사하라 사막은 끝없이 단조로운 모래밭,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에는 모래 언덕이 드물기 때문에 끝없는 자갈 투성이의 모래밭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는 항상 권태감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 사막에 갖가지 방향과 경사와 표지의 그물을, 은밀하고 살아있는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단조로움은 없어지고, 모든 것은 위치가 잡혀져 있다. 거기서는 침묵조차도 다른 침묵과 같지 않다. 부족들이 화해하고, 저녁이 서늘함을 몰고 오고, 사람들이 조용한 항구에서 돛을 내리고 휴식을 취할 때는 평화의 침묵이 감돈다. 태양이 사고와 움직임을 중단시킬 때는 정오의 침묵이 흐른다. 북풍이 수그러지고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꽃가루처럼 쫓겨난 곤충들이 나타나 모래가 불어오는 동쪽의 폭풍을 예고할 때는 그것을 거짓 침묵이다. 멀리서 어떤 부족이 술렁거리고 있음을 알게 될 때는 그것은 음모의 침묵이다. 아랍인들 사이에서 알지 못할 집회가 시작되면 그것은 신비의 침묵이다. 전령의 귀환이 늦어질 때는 간정된 침묵이 흐른다. 밤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숨을 죽일 때면 예민한 침묵이 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회상할 때는 우수의 침묵이 있다. 모든 것은 자극을 가지고 있고, 별들은 저마다 진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별들은 모두 동방박사의 별들이다. 별들은 모두 자신의 신을 섬긴다. 이 별은 도달하기 힘든 먼 곳에 있는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당신과 그 우물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은 성벽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저 별은 물이 마른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그 별조차도 메말라 보인다. 그리고 당신과 그 마른 우물 사이에 놓인 공간에는 아무 경사도 없다. 또다른 별은 유목민들이 당신에게 찬양한, 그러나 불귀순민들이 그 길을 막아선 미지의 오아시스를 가리켜 주는 안내자이다. 그리고 당신과 오아시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사막은 동화 속의 잔디밭과도 같다. 또다른 별은 입 안에 든 과일처럼 풍미로운 남쪽의 하얀 도시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도 저 별은 바다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마침내 거의 비현실적인 것 같은 목표물들이 아주 멀리에서 이 사막에 자기를 띠게 한다. 추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집이라든지, 그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렇게 당신을 끌어당기거나 떠다밀거나 하고, 또 당신에게 간청하거나 항거하거나 하는 자께의 힘에 의해서 당신은 긴장되고 생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당신은 이제 동서남북 한가운데 단단한 기초를 잡고 정확히 방향을 정하고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떠한 재물도 주지 않고, 사막에는 보거나 들을 것도 없으므로, 거기서는 내적 생활이 마비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작용에 오히려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지배받는다. 사막에서 내가 숭상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저 구슬픈 여객선 뱃전에서 아직도 많은 목표가 있음을 느낀 것은, 내가 아직도 생기에 넘치는 한 유성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뒤에서 프랑스의 밤 속에 사라진, 그리고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 시작한 몇몇 친구들 덕분이다. 프랑스는 확실히 내게 있어서 추상적인 여신도 아니고, 역사학자의 개념도 아니며,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하나의 육체이며, 나를 지배하는 인연의 그물이며, 내 마음 속의 경사를 만드는 목표의 총체이다. 나는 나 자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그들이 나 자신보다 더 튼튼하고 더 영속적인 존재라고 느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어디로 돌아와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서. 내 조국 전체가 그들 속에 깃들이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바다를 향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륙이란 이렇게 몇 개의 등대의 단순한 광채로 요약된다. 등대란 원근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불빛은 그저 단순히 눈 속에 비쳐질 뿐이다. 그리하여 대륙의 모든 경이로움은 그 별 속에 들어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는 전면적인 점령으로 인해 마치 등불이 모두 꺼져 침묵 속에 송두리째 빠져들어가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운명은 내 몸 속에 깃들은 질병보다도 더 아프게 나를 괴롭힌다. 그들의 덧없는 운명으로 해서 내 본질이 위협 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밤,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쉰 살이다(앞에 나온 기요메와 함께 생떽쥐뻬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레옹 베뜨르를 말함).그는 병이 들었다. 그리고 유태인이다. 어떻게 그가 독일 의 공포 치하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의 마을 농부의 아름다운 침묵의 성채 속에 숨어서 침략자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아직 그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아득히 먼 그의 우정의 나라, 국경이 없는 그 나라를 거닐면서 내가 망명자가 아니라 여행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막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하라는 어떤 수도보다도 더 활기에 차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끓는 도시라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자력을 상실하면 텅 빈 것이 된다. (3)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자력선들을 이룩해 놓는가? 그 친구의 집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러한 존재를 내가 필요로 하는 목표의 하나로 만든 중요한 순간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은밀한 사건들로 해서 개개인의 애정이 생기며, 또 그 애정을 통해서 조국에의 사랑이 생기는 것일까? 진정한 기적들은 그렇게 떠들썩한 것인가! 중요한 사건들은 그렇게도 단순한 것인가! 내가 이야기하려 하는 이 순간에 대해서도 하도 내세울만한 말이 없어서 나는 꿈속에 살아 있는 그 친구를 되살려서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전쟁 전의 어느 날, 쏘온느 강변에 있는 뚜르뉘 도시 쪽에서의 일이었지. 우리는 점심을 먹 위해 널빤지로 만든 발코니가 강 위로 튀어나온 어느 식당을 찾아들었네. 손님들이 칼자국을 낸 아주 소박한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우리는 '뻬르노'술 두 잔을 주문했네. 자네의 주치의는 술을 금했지만, 자네는 특별한 경우에 슬쩍 하곤 했네. 바로 그때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였네. 이유는 잘 몰랐지만 어쨌거나 그런 경우였네.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은 그 불빛의 질보다도 더 느껴지지 않는 그럼 것이었네. 그래서 자네는 그 특별한 경우에 그 '뻬르노'를 마시기로 결심했던 거네. 그리고 마침 우리 근처에서 두 사람의 사공이 거룻배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초청했네. 우리는 발코니 위에서 소리쳐 불렀었지. 그러자 그들은 왔네. 그들은 아무 꺼리낌없이 왔네. 우리가 그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됐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 속의 그 보이지 않는 축제 기분 때문이었을 거네. 그들이 부르는 신호에 응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네. 그래서 우리는 축배를 들었던 것이네! 햇빛은 좋았네. 따뜻하고 달콤한 햇살이 건너편 강둑의 포플러들과 지평선까지 펼쳐진 평야를 비추고 있었지. 우리는 여전히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점점 더 유쾌해졌네. 태양이 밝게 비치고, 강물이 흐르고, 식사가 준비되고, 사공들이 부름에 응했고, 하녀가 마치 영원한 축제를 주관하듯이 즐거운 친절로써 시중 드는 것이 모두 우리를 마음 놓이게 했네. 우리는 한껏 평화로움을 느꼈고, 혼란에서 벗어나서 최후의 문명 속에 들어가 있었네. 우리는 일체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더이상 아무것도 부탁할 것이 없는 것같은 일조의 완벽한 상태를 맛보고 있었네. 우리는 자신이 순수하고 올바르고 총명하며, 관대한 것같이 느껴졌네. 그 명증 속에 어떤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났는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으리라. 드러나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틀림없이 확실성 그것이었네. 거의 오만스러울 정도의 확실성이었네. 이와 같이해서 우주는 우리를 통해서 그의 선의를 증명했다. 성운의 응결, 유성의 굳어짐, 첫 아메바들의 형성, 아메바를 인간으로까지 이끌어온 생명의 거대한 작업, 이 모든 것이 희한하게도 한곳으로 모여 우리를 통해 그 독특한 즐거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은 성공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무언의 일치와 거의 종교적이랄 수 있는 이 의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성직자와도 같이 오가는 하녀들의 걸음걸이에 진정되어, 사공과 우리들은 꼭 어떤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같은 교회의 신자들처럼 건배를 했다. 사공 중의 한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 사람이었다. 이 독일사람은 고향에서 공산당인지 트로츠키파인지 카톨릭인지 유대인인지 그런 걸로 몰렸기 때문에 오래 전에 나치즘을 피해 왔다는 것이었다(그가 어떤 명목으로 추방당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그 사공에게는 명목 이상의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인간적인 됨됨이였다.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친구였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들로서 마음이 맞았다. 자네도 동감이었고 나도 그랬다. 사공들과 하녀도 동감이었다. 무엇에 대해 동감이었단 말인가? '뻬르노'에 대해서였던가? 생의 의미에 대해서였던가? 그 하루의 즐거움에 대해서였던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감은 너무나 완벽한 것이었고, 깊숙이 단단히 뿌리박은 것이었고,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너무나 분명한 일종의 성서에 의거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실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정자에 방벽을 치고 거기에서 공격을 방어하고, 기관총 뒤에서 죽을 것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실체란 말인가? 이 점이 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반영만을 포착할 위험성이 있다. 불충분한 말은 진실을 놓치게 한다. 뱃사공의 미소와, 자네와 나의 미소, 그 하녀의 미소의 그 어떤 성질을 구하기 위해서, 또 수천만 년 전부터 그토록 애써 왔고, 마침내 우리를 통해서 꽤 성공했던 미소의 성질에까지 도달한 그 태양의 어떤 기적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흔쾌히 투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대개 조금도 무게가 없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이란 겉보기에는 어떤 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미소는 흔히 본질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미소로써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미소로써 보상을 받기도 한다. 미소로써 생기가 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어떤 특성을 지닌 미소는 사람을 죽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특성이 현시대의 고민에서 우리들을 그렇게도 잘 구출해 주었고, 우리에게 확신과 평화를 주었으나, 나는 지금 내 생각을 좀더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미소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4) 그것은 에스파니아의 내란에 관한 현지 탐방을 하던 중의 일이었다. 나는 무모하게도 새벽 3시경에 어떤 화물 역에서 비밀 물자를 싣고 있는 광경을 몰래 구경했었다. 인부들의 소란스러움과 어둠이 내 무분별한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인 민병들에게 내가 사상한 자로 보였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들이 유연하고도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손가락을 오므리듯이 벌써 나를 조용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카빈 총대는 가볍게 내 배에 들이대어졌고, 그 침묵은 내게 아주 엄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손을 쳐들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 넥타이를 (무정부주의자들 지구의 유행은 이 예술품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 몸이 굳어졌다. 나는 발포를 기다렸다. 그때는 즉결 재판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발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역 작업반들이 딴 세상에서 환상의 발레를 추고 있는 것 같은 절대적 고적감에 싸인 몇 초가 흐른 뒤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가벼운 머리 짓으로 내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입환선을 가로질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체포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또 놀랄 정도로 절제된 동작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바다 밑 동물들이 노는 것처럼. 마침내 나는 감시 초소로 바뀌어진 어느 지하실에 처넣어졌다. 싸구려 석유 램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다른 민병들이 카빈총을 다리 사이에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한 순찰병들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내 몸을 수색했다. 나는 에스파니아 말을 할 줄 알지만 카탈로니아 말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신분증을 내보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깜박 잊고 신분증을 호텔에 두고 나왔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말이 어떻게 전달 될는지 모르면서 '호텔 ... 신문 기자....'라고 대답했다. 민병들은 내 카메라를 무슨 증거물이나 되는 것처럼 모두들 돌려가며 보았다. 건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자들 중의 몇 명이 권태롭게 일어나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자리의 지배적인 인상은 권태롭다는 느낌이었다. 권태롭고 졸립다는 인상, 그 사람들의 주의력은 바닥이 나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인간적인 접촉이라면 적의의 표시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분노의 표시도, 어떤 비난의 표시조차도 내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에스파니야 말로 항의를 해보았다. 내 항의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마치 어항 속의 중국 물고기라도 바라보듯이 아무 반응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가 돌아오기를? 새벽이 오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배가 고파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자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다! 그건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불안감보다도 더 절실한 부조리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몸이 녹으면, 움직이고 싶어지면 총을 쏠 것이다.!' 내가 정말 위험에 처해 있는 걸까, 아닐까? 그들은 여전히 내가 태업자나 밀정이 아니고 신문기자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내 신분증이 호텔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들은 판정을 내린 걸까? 그건 어떤 판정일까? 나는 그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느낌이 없이 사람을 총살한다는 것 외에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혁명 전위대들이란 그들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그들은 사람을 그 실체로써 평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전조를 사냥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반대되는 사실을 전염병처럼 여긴다. 의심스러운 조짐만 보여도 그들은 전염병 환자를 격리수용소로 보낸다. 공동묘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짧은 말로 내게 던지는 그 신문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분별없는 룰렛 놀음이 내 생명을 걸고 있다. 그런 때문에 나는 또 내 진정한 운명에 내 의견을 개입시키고, 내 실재의 무게를 측정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리지르고 싶은 야릇한 욕망을 느꼈다. 이를테면 나이 같은 것! 사람의 나이란 깊은 인상을 주는 법이다! 그 인간의 전 생애가 그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 사람의 원숙함이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애물을 겨뤄 이기고, 수많은 중병을 치르고, 많은 고통을 가라앉히고, 많은 절망을 극복하고,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했던 많은 위험을 겪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욕망과 희망과 후회와 망각과 사랑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나이란 수많은 경험과 추억의 훌륭한 축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많은 함정과 곡절과 진창에 박히긴 했지만 성능 좋은 덤프차처럼 간신히 이긴 해도 전진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다행한 호운의 집요한 집중 덕분으로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서른 일곱 살이다. 그리고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 이 덤프차는 그 추억의 짐짝들을 아직 더 멀리 싣고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내가 이르렀다. 나는 서른 일곱 살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이런 고백으로써 내 재판관들을 무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신문하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 그것은 아주 하찮은 기적이었다. 나는 담배가 없었다. 내 감시자 중의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나는 몸짓으로 한 개비 달라고 청하면서 애매한 미소를 싱긋해 보였다. 그는 우선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내 넥타이가 아니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매우 놀랍게도 그 역시 빙그레 미소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기적은 비극을 결말지어준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지우듯이 그 비극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이제는 어떤 비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싸구려 석유 램프도, 어수선하게 서류가 흩어진 테이블도, 벽에 기대선 사람들도, 물건들의 빛깔도 냄새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본질 자체가 변화되었다. 그 미소가 나를 구원해준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에 일어날 결과에 있어서 결정적이고도 명백하며 다시 역진 할 수 없는 표시였다. 그것은 어수선한 서류들이 널린 테이블이 살아났다. 석유 램프가 살아났다. 벽들도 살아났다. 이 지하실의 음울한 물건들에서 스며 나오고 있던 권태감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피가 다시 순환을 시작하여 같은 육체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면서 그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것과 같았다. 민병들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순간 전에는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어느 종족만큼이나 멀리 내게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그들이 지금은 나와 아주 가까운 생명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운 실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실재의 느낌!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같은 혈족임을 느꼈다.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 젊은이, 한 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떤 한 역할, 한 도구, 일종의 흉측한 벌레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약간 어색해하며 거의 신기하리 만치 수줍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테러리스트가 다른 패들보다 덜 거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난 한 인간이 그의 연약한 부분을 그렇게 잘 드러내어 준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잘난 체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은밀히 주저와 회의와 슬픔을 느끼고 있다. 아직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것은 해결되어 있었다. 그 민병이 내게 담배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일단 그 얼음이 녹자 다른 민병들도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고, 나는 자유로운 새 나라로 들어가듯이 그들 모두의 미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에 사하라에서 우리 구조대원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료들은 여러 날 동안의 수색 끝에 우리를 발견하고는 가능한 멀지 않은 곳에 착륙하여 가죽 물주머니를 높이 쳐들어 잘 보이도록 흔들면서 성큼성큼 우리에게로 걸어왔었다. 내가 조난했을 때의 구조대원들의 웃음을, 내가 구조대원이었을 때의 조난자의 웃음을 나는 내가 그토록 행복하게 느꼈던 고향을 기억하듯이 지금 기억한다. 진정한 기쁨이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기쁨이다. 구조는 이러한 기쁨을 맛보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은 우선 인간의 선의의 선물이 아니고서는 결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병자를 돌봐주는 간호나, 추방당한 자에게 베푸는 환대나 용서조차도 그 잔치를 밝혀주는 웃음이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와 계급과 당파를 초월하여 웃음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관습이 있고, 내게는 나의 관습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채로 같은 '교회'의 신자들이다. (5) 이러한 성질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문명이 낳아준 가장 귀중한 결실이 아닐까? 절대적인 전제군주제라도 물질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장의 가축이 아니다. 어떠한 번영과 안락함도 우리를 만족시키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찬양하게끔 길러진 우리에게는 극히 단순한 만남이 소중히 여겨지고, 그것은 때때로 신기한 축제로 변한다. 인간의 존엄성! 그렇다. 인간의 존엄성! 여기에 시금석이 있다! 나치주의자가 오로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만 존중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반대를 거부하고, 상승하는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고, 인간 대신 개미집에 사는 로봇을 천년 동안 세워 놓는다. 질서를 위한 질서는 인간으로부터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을 앗아간다. 인생이 질서를 창조하지, 질서가 인생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승이 완성되지 못했고, 내일의 진리는 어제의 오류를 양식으로 하고, 극복해야 할 반대들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부식토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도 동족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기묘한 동일성인가! 이 동일성은 과거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근거를 둔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길을 거쳐서 같은 회합 장소로 가기 위해 고행을 계속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승 조건인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빠져 있다. 현대 세계의 붕괴가 우리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문제는 조리에 맞지 않고 해결책을 서로 모순되어 있다. 어제의 진리는 죽었고, 내일의 진리는 아직 건설하고 있는 단계다.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종합책은 아직 조금도 내다보이지 않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분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을 위협할 만한 명증이 없으므로 정치적 교의는 폭력에 호소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방법을 달리함으로써 우리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어떤 별에 인도 받아 산을 넘고 있는 길손이 올라가는 데에만 너무 정신이 빠지면 어떤 별을 따라가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만약 그가 행동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그는 아무 데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대성당의 의자를 관리하는 여인이 의자를 빌려주는 데에만 너무 탐욕하게 골몰하면 자기가 신을 섬기고 있음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도 내가 어떤 당파적인 정열에 빠져들면 정치가 어떤 정신적 확증을 위해서만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 기적이 일어나던 시간에 인간 관계의 어떤 특질을 맛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곳에 진리가 있었다. 아무리 다급하게 행동할 때에도 그 행동을 주관하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명이야말로 행동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은 아무 보람도 없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같은 진영 안에서 서로 증오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의 누구도 순수한 뜻의 특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이성의 발걸음을 비관할 수도 있다. 이성의 발걸음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같은 별을 향해 어려운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면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만약 인간의 존엄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이 존엄성을 확립할만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문명이란 우선 본질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어떤 정열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으로서 인간 속에 자리잡는다. 그런 다음 인간은 오류를 거듭하면서 등불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6) 벗이여, 그러기에 나는 아마 자네의 우정이 이토록 필요한가 보다. 나는 이성의 논쟁을 초월하여 내 마음 속의 그 등불을 찾아가는 순례자를 존중해줄 길동무를 갈망하고 있다. 나는 가끔 그 약속 받은 정열을 미리 맛볼 필요성을 느끼며, 얼마쯤은 나 자신을 벗어나 언젠가는 우리의 것이 될 그 약속 장소에서 쉬고 싶어진다. 나는 논쟁과 배타주의와, 광신주의에는 너무나 진저리가 난다! 나는 자네의 집에라면 군복도 입지 않고, 코란 구절을 외워야 할 구속을 받지 않고, 내 마음의 고향을 아무것도 단념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다. 자네 곁에서라면 자기 변명을 할 필요도 없고, 항변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뚜르뉘에서처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서투른 말을 하더라도,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추론을 하더라도 자네는 그런 것을 넘어서 내 안에서 오직 '인간'만을 발견할 것이다. 자네는 내 마음 속에서 신념과 습관과 개인적인 사랑의 전달자를 존중해 줄 것이다. 내가 자네와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네를 해치기는커녕 자네를 향상시킬 것이다. 자네는 사람들이 길손에게 물어보듯이 내게 물어본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자네 안에서는 순수함을 느끼고 자네에게로 간다. 나를 순수하게 만들어줄 그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나는 느낀다.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자네에게 알려준 것은 나의 상투적인 말투와 행동이 아니다. 내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에 자네는 필요에 따라 내 말투와 태도에 대해 관대하게 보아준다. 나는 자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비판하는 친구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어떤 친구를 내 식탁에 맞아들였을 때, 그가 다리를 절룩거린다면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지, 춤을 추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나의 벗이여, 나는 숨을 흠뻑 쉴 수 있는 산마루처럼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쏘온느 강가에서 갈라진 널빤지로 만든 작은 주막의 식탁에 자네 곁에 팔을 괴고 앉아, 두 사공을 초대하여 태양과도 같은 미소의 평화 속에서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내가 아직도 투쟁을 한다면, 자네를 위해서도 조금은 투쟁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 미소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믿기 위해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자네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렇게도 나약하고 위협받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다시 하루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어떤 초라한 식료품점 앞길을 다 헤진 외투차림으로 추위를 막지 못해 벌벌 떨면서, 쉰 살의 몸을 이끌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네는 진정한 프랑스 사람이면서도 이중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이면서 또한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을 더 이상 허용치 않는 어떤 공동체의 가치를 더욱 통감한다. 우리는 모두 한 나무에서 생겨난 것처럼 나도 자네의 진리를 위해서 힘쓸 것이다. 우리들, 국외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눈으로 얼어붙은 씨앗 무더기를 다시 녹여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국에 남아 있는 당신들을 구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당신들이 뿌리를 뻗어 내릴 근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그 대지에서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문제이다. 당신들은 4천만 염의 볼모들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진리가 준비되는 곳은 압박 받는 지하실 속이다. 4첨만 명의 볼모들이 지금 고국에서 그들의 새로운 진리를 물상하고 있다. 우리는 미리부터 그 진리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야말로 우리들을 가르쳐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신적인 불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초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켜 그 불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쓴 책을 아마도 당신들은 읽기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연설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아마 우리의 사상을 배척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프랑스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 봉사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던지 조금도 감시 받을 권리가 없다. 자유로운 곳에서 투쟁하는 것과 암흑 속에서 압박 받는 것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군인 신분과 불모의 처지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당신은 성자들이다. [ (해설) 쌩 떽쥐뻬리의 인간과 문학 "수업시절" 앙뜨완느 드 쌩 떽쥐뻬리(Antoine do Saint-Exupery)는 1900 년 6월 29일 리용에서 귀족의 후^36^예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의 성관에서 어머니의 애정에 싸여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09 년 르망으로 이사하여 그곳 제수이트 회파에서 경영하는 쌩뜨끄루와 학교를 거쳐, 스위스 후리이브르그 대학에서 고전학을 수학했다. 그의 성격 중 특출한 그 명상적인 경향과, 음악과 시에 대한 깊은 애착도 이 고전적 교양에서 우러난 것으로 보여진다. 처음에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시험에 낙제하여 미술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921년에 군에 응소, 스뜨라스부르의 항공대에 입대하여 조종사로서의 훈련을 받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세계의 소설사에 처음 하늘을 다룬 항공작가의 탄생 씨앗이 이때 뿌려졌기 때문이다. 1924년 제대 후, 그는 자동차 공장을 비롯하여 판매원 등 여러 가지 직업에 전전하면서 소설의 습작을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필을 가리는 신분에 대하여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만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누이의 말에 의하면 소년시절에 한밤중에 가족들을 깨우고,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해서 들려 주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조종사 생활" 이 무렵에 잡지를 주재하고 있는 장 쁘레보와 알게 되어 1926년에 단편 소설 '비행사'를 그 잡지에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라떼꼬에르 항공회사에 취직, 1927 년에 뚤루즈와 카사블랑카 간의 정기 항공로 조종사가 됐다. 이듬해에는 아프리카의 쥐비에서 비행장의 주임이 되고, 다시 개편된 동사의 남아메리카 항공로 개설과 동시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전임하여 1931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이 동안 1928 년에 모르인의 반란으로부터 동료 비행사를 구출했으며, 그 2 년간의 체험에 의해 '남방 우편기'를 28년에 집필 발표했다. "남방 우편기" 이 소설은 위험한 정기 항공로의 일에 종사하면서, 세계와 사물의 미지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꿈을 채우려는 한 비행사의 내면을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그러나 유부녀와 불행한 사랑이라는 약간 통속적인 취향이 가미된 면도 있어, 쌩 떽쥐뻬리 특유의 고결한 분위기는 아직 완전히 표현되어 있지 않다. "야간 비행" 1929년에는 남아메리카 항로의 개발에 종사하였고, 이때의 체험이 마침내 '야간 비행(1931년)'로 결정을 보게 된다. 1930년 6월에 그의 동료 기요메가 스물 두 번째의 안데스 산맥을 횡단 비행 도중에 폭풍설에 갇히어 불시착, 쌩 떽쥐뻬리와 동료가 5일간 수색 활동을 벌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기요메는 자기 힘으로 닷새 동안을 걸어 살아나온 기적 같은 사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대지' 제2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193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서 전해부터 알게 된 꽁스엘로 슨신과 결혼했으며, '야간 비행'을 앙드레 지드의 감동적인 서문을 붙여 출판했다. 이 작품은 이해 '페미나'문학상을 획득했으며, 새로운 차원을 연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작품에는 비행장에서 부하들의 탑승기의 귀착을 초조히 기다리는 항공회사의 지배인을 중심으로 하여, 힘들 야간비행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묘사되어 있다.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면서, 자기 극복의 의지로 갖가지 장애와 싸우는 조종사들, 조그마한 개임 생활에의 집착을 끊어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증하는 고매한 용기에 찬 행동 등, 즉, 이 소설의 주재는 행동의 윤리 추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에 불시착" 이러한 작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행사의 직업을 버리지 않고 하늘에서 대지와 인간을 관찰하는 한편, 파스칼, 스피노자, 바르작, 네르봘 등의 저작들을 애독하여 사색을 심화시켰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한 독자적인 모럴을 구축해 갔다. 1935 년에는 '파리 스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베를린, 스페인 내란 등을 현지 취재하여 르포르타주를 썼다. 또 이해 12월 29일에 파리와 사이공 간의 비행 시간의 신기록 수립을 목표로 '시문'기로 쁘레보와 함께 출발했으나, 리비아 사막에서 불시착하여 사흘 밤낮을 헤매던 끝에 대상에 의해 구출되었다. 쌩 떽쥐뻬리는 이런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1937년에는 카사블랑카와 똠뷰드 간을 '시문'기로 연결시키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해 9월에는 자기의 "시문"기로 뉴욕과 때르 드푀(남아메리카 남단의 섬) 간 장거리 비행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가, 1938 년 2월 15일 출발하여 과테말라에 도착, 이륙하려다가 속력이 떨어져 추락하여 중상를 입었다. 3월에 뉴욕으로 건너가서 정양하면서 그간 써놓았던 원고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가 1939 년 2월에 출판한 것이 그의 대표작 "인간의 대지" 이다. "인간의 대지" 이 작품은 같은 해 6월에 "바람과 모래와 별들" 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39년도 아카데미 프랑세스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존엄성의 모럴을 추구한 에세이와 단편 소설로 되어 있는데, 죽음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일생을 바친 쌩 떽쥐뻬리의 사상의 본질을 이루는 성찰이 모두 이 책 안게 제시되어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동원 소집되어 뚤루즈에서 대위 계급으로 비행 교관으로 있다가 후에 2의 33대 정찰 비행단에 전속됐다. 1940년 8월에는 동원이 해제되어 마르세이유로 돌아가 "성채" 의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전시 조종사" 1941년에 파리가 독일 군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체재하면서 외과 수술을 받고 "전시 조종사"를 썼다 1942년 2월에 "전시 조종사" 영문 판인 "아라스 지구 비행(Fight to Arras)"을 출판했으며,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도 출판됐으나 독일 점령군에 의해 발매금지가 됐다. 이 "전시 조종사" 는 수기 체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1940년에 프랑스 군이 패주 중에 보고할 곳도 없고, 호위 전투기도 없이 정찰 비행을 하는 프랑스 비행사의 무익한 사명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어린 왕자" 1943년 2월에 역시 뉴욕에서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을 출판하고, 4월에는 유명한 동화 체의 작품 "어린 왕자"를 내놓았다.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은 쌩 떽쥐뻬리가 한 유태인 친구에게 미국에서 써 보낸 메시지로 이루어진 소책자이다. 또 "어린 왕자"는 어린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서정미 넘치는 동화이지만, 한편 철학적인 깊이와 고도의 시의 영역에까지 높여진 서정 산문이기도 하다. 이해 6월에 북아프리카로 가서 본토 해방 전선에 참가, 수많은 정찰비행을 하여 연합군의 시칠리아 섬 진격에 공헌했고, 6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7월에 프랑스 상공을 비행하다가 가벼운 사고를 두 번 일으켜, 그를 위험에서 멀리하려는 미국 당국의 배려로 8월에 고령을 이유로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알제로 돌아가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제트기의 원리를 연구하는 한편 그전부터 구상했던 "성채"를 계속해서 집필했다. "마지막 비행" 1944년에 샷생 대령이 지휘하는 31중폭격기 중대에 배속 받고, 이어 전에 있던 2의 33대 정찰 비행단에 복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지중해지구 공군 총사령관인 이커 장군에게 건의, 마침내 5회만 출격한다는 조건하에 대정찰 비행단 복귀를 승인 받았다. 그해 7월에 동 비행단은 코르시카 기지로 이동했고, 그간 쌩 떽쥐뻬리는 5회보다 더 많은 8회 출격을 허락을 받아 정찰 비행에 출격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미국으로 건너 간 이후의 불행한 정신 상태에 의해 자살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코르시카의 바스띠아 북쪽에서 독일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채(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미완의 대작인 '성채'는 참된 자유를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베르베르왕을 통해서 그가 희구하는 이상 사회를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짧은 생애와 함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48년에 발견됐다. "생의 찬가" 지구를 떠나기 수천 피트 높이에서 국한된 좁은 공간에 혼자 앉아 끊임없이 죽음에 직면했기에 그는 죽음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을 최대 극한 점까지 응시할 수 있었다. 유한한 개인의 생을 통해 그는 인간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강한 의지로 일관되어 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을 연상케 하는 '야간 비행'에서 출발하여, 톨스토이적 휴머니즘이 풍기는 '인가의 대지'를 거쳐, 후기의 '전시 조종사',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어린 왕자', '성채' 등 종교적인 정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는 인간 찬가에의 고행에 찬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리 많지 않은 작품들은 어느 것이나 각각의 단계에서 이 작가의 현대 사회에 대한 냉엄한 경고와 아울러 인간성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사랑의 표명을 독자들에게 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