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셔가의 몰락 - 에드가 알란 포우 그의 가슴은 거문고와 같아 스치기만 해도 금세 울리느니라. ---드 베랑제 하늘엔 음침한 구름이 끼어 있는, 어둡고도 고요한 정적이 깃든 어느 가을날, 나는 어떤 향량한 지방을 혼자서 종일토록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녁놀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야 음침한 어셔 가의 저택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 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견딜 수 없이 우울한 기분이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방금 견들수 없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황량한 것이라든가 무서운 것들이 자연 속에서 보이는 냉연한 모습에 접했을 때, 사람의 마음은 대개 무엇인가 시적인, 그리고 거의 쾌적한 정서를 느끼게 마련인 것이나, 지금의 경우 나의 우울한 감정은 그러한 정서에 의해서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관경 - 아무런 특이한 점도 없는 그 저택, 집안의 평범한 풍물, 쓸쓸한 기분이 감도는 벽, 공허한 눈을 연상케 하는 창들, 몇 개의 무성한 사초, 몇 그루의 늙고 썩은 나무들의 버석버석한 둥치들을 아주 을씨년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기분에 가장 알맞게 현실적인 비유를 한다면 아편장이의 약기운이 깰 무렵의 그 허전함,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는 그 씁쓸함, 신비로운 장막이 내리덮일 때의 스산한 감정 등일 것이다. 얼음과 같이 차고 물 속에 잠기는 것과 같은, 구역질이 나는, 아무리 상상력을 이끌어내 보아도 도저히 숭고한 기분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그런 외로운 심정이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 나는 거기 머물러 서서 생각해 보았다. - 어셔 저택을 바라볼 때 그렇게 을씨년스럽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념에 잠겨 있는 나를 엄습하는 막막한 환상과 싸울 수도 없는 나였다. 그래서 나는 만족하지는 못하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즉 그것은 몹시 단순한 자연물이 결합된 것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우리들을 괴롭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을 분석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고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눈앞의 광경을 이루고 있는 세부를, 그 풍경의 부분만을 바꾸어 놓아도 이 광경이 이렇게도 슬픈 인상을 주는 힘을 약화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생각에 이끌려서 나는 저택 옆의 잔물결도 일지 않고 조용한 빛을 내뿜으면서 괴어 있는 우중충한 늪의 깎아세운 듯한 기슭 가까이 말을 몰아서, 회색빛 사초랑 거창한 나무둥치랑 공허한 눈을 연상시키는 창 등이 수면에 거꾸로 비쳐 있는 모습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지만 아까보다 더 심한 전율이 엄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음침한 저택에 이제부터 수주일 동안 체류할 참이었다. 이 저택의 주인인 레데릭 어셔는 나의 소년시절의 친구 중의 하나였는데 서로 헤어진 후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그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온 것이다. 그것은 덮어놓고 졸라대는 성질의 편지였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편지의 칠적은 분명히 신경질적인 흥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편지의 주인은 심한 육체의 질환과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정신의 혼란을 호소하면서, 자네가 옆에 있어주면 기분도 밝아지고 나아가 자기 병도 퍽 좋아질 것이니, 자기의 제일 친한, 아니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사연의 편지였다. 이런 식으로 위의 사연과 그밖의 여러 가지 일들을 적어보낸 것인데, 그의 간청에 찬, 틀림없는 진정이 나에게 주저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약간 야릇한 호출이구나 하고 생각은 하였지만 아무튼 그의 부탁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소년시절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는 하지만 실상 나는 이 친구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우유부단한 성질은 언제나 두드러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아는 바로는 아주 오래된 가문인 그의 집안은 먼 옛날부터 특히 감수성이 풍부한 자질로서 세상에 알려졌고, 그 자질은 오랜 시대에 걸쳐서 우수한 많은 예술작품으로 나타났고, 근래에는 눈에 띄지 않는 갖가지의 자산행위에서, 그리고 또한 이 일족이 음악의 정통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그 복잡미묘한 멋에 심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셔 가의 혈통은 매우 유서가 깊기는 하였지만, 어느 시대에서나 한 번도 오래 계속되는 분가가 나타난 일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일족은 온 집안이 한 줄의 직계만으로 이어져 왔고, 아주 사소한 일시적인 예외를 빼고는 대대로 그렇게 이어져 갔다는 놀라운 사실도 아는 알고 있었다. 이 저택의 성격과 이 저택에 사는 사람들의 세상에 알려진 성격이 꼭 맞게 조화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또한 몇 백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 저택이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있지나 않나 하고 생각하면서, 이와 같이 방계의 자손이 없고 따라서 어셔 가의 가독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똑바로 내려왔다는 사실이 끝내 저택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동일시 하게끔 만든 것이고, 그 땅의 원 이름을 버리고<어서 가>라고 고풍의 혼합된 명칭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셔 가>라는 호칭은 그것을 입에 담는 소작인 들의 머리속에는 이 일족과 저택의 양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어린애 장난 같은 시도 - 늪 속을 들여다본다는 그 시도의 결과는 최초의 이상한 인상을 더욱 깊게 할 따름이었다. 틀림없이 나의 미심쩍은 생각 - 그렇게 불러서 나쁠 것이 없으리라 - 이 급속히 더해지는 것을 의식한 그 자체가 또한 나의 미심쩍은 생각을 북돋우는역할을 하였다. 공포라는 것을 근저에 둔 일체의 감정은 이런 모순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늪에 비치고 있는 그 영상에서 저택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나의 가슴 속에 기묘한 망상이 떠오른 것도, 오로지 이와 같은 원인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으로 기괴한 망상이어서 오로지 나에게 무겁게 덮쳐오는 이러한 감정이 얼마나 생생한 것이었나를 제시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말할 따름이다. 이 저택과 영지의 전체에는 저택과 그 부근에 특유한 어떤 부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천공의 대기와는 얼토당토 않은 분위기, 썩어 자빠진 수목이나 회색빛 벽이나 쥐죽은 듯한 늪에서 솟아오르는 독기, 희미하고 자욱히 피어오르는 독기에 찬 신비로운 안개 등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상상력을 작용시켜서 이런 것들을 실제로 믿는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악몽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런 망상을 떨쳐 버리고 나는 눈 앞의 건물의 참 모습을 좀더 면밀하게 관찰해 보았다. 첫 눈에 알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오래 된 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여러 해를 묵은 건물의 외부를 빠짐없이 뒤덮고 가늘게 엉킨 거미줄처럼 처마 끝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물이 아주 황폐해 버린 건 아니었다. 석조로 된 그 어느 부분도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각 부분이 서로 꽉 짜여져 있는 상태와 개개의 돌이 허물어져 깨질 것같이 된 상태와의 사이에는 뭔가 기괴한 부조화가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버려진 채 전혀 돌보지 않은, 어딘가의 지하 납골실에서 외기가 전혀 스며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이미 오래도록 썩어빠진 헌 나무 상자가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한 부패의 징조를 제외하고는 건물에 무엇 하나 위험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자세하게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겨우 알어차릴만큼의 금이 건물의 정면의 지붕에서 번개 모양으로 벽을 타고 내려와 그 끝이 음울한 늪의 물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들어올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저택으로 통하는 짧은 흙길로 말을 몰았다. 마중나온 하인이 말을 데리고 가자 나는 현관의 고딕 풍 아이치웨이로 들어갔다. 발소리를 죽인 조심스러운 하인이 말없이 여러 개의 어둡고 교차된 복도를 통해서 주인의 서재까지 나를 안내했다. 웬지 모르지만 그 도중에 나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내가 이미 말한 막연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내 주위의 여러 가지 것들 - 천장의 조각, 벽에 걸친 우중충한 천, 흑단처럼 검은 바닥, 내 걸음에 맞춰서 덜그덕거리는 환상적인 문장이 박힌 전리품. 이러한 것들은 나에게는 소년시절부터 낯익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더욱 이러한 평범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기괴한 망상에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계단이 있는 곳에서 나는 이 집의 주치의를 만났다. 이 사람의 얼굴에는 천한 교활함과 곤혹이 뒤섞인 표정이 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주치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버렸다. 조금 있다가 먼젓번 하인이 한쪽 문을 열고는 주인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들어간 방은 굉장히 크고 천장이 높았다. 창문은 기다랗고 매우 좁았으며, 검은 참나무 바닥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방안에서는 아무래도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붉은 빛으로 물든 약한 광선이 격자로 된 창유리를 통해서 비치어, 방안의 비교적 눈에 띄기 쉬운 물건들을 뚜렷하게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의 구석구석이라든가 둥근 천장의 저 안쪽 같은 곳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하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벽에는 우중충한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구는 많이 놓여 있었지만 고풍의 거의 낡아빠진 것들뿐이었다. 많은 책과 악기들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이 방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지는 못했다. 나는 슬픈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격하고 깊고 구원할 수 없을 만한 우울한 기운이 모든 것을 덮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어셔는 그때까지 길게 주워 있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쾌활하고 친숙한 태도로 나에게 인사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거기에 과장된 우정, 인생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세속적인 인간의 부자연스러운 노력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것같이 나에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일별한 나는 상대방이 참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들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의 짧은동안에 연민과 의구심이 뒤섞인 기분으로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이런 짧은 시일 동안에 로데릭 어셔처럼 굉장한 변모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나의 어린 시절의 천구와 동일인이라고 믿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얼굴의 특징은 어느때든지 사람의 눈을 끌었다. 시체와 같이 창백한 안색, 비길 바 없이 반짝이는 크고 젖은 눈, 약간 엷고 아주 핏기가 없으나 놀랄 만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화사한 유태 인형의, 그러나 그런 형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옆으로 퍼진 코,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 어딘지 정신력의 결여를 상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의 턱, 거미줄보다도 더 가늘고 보드라운 머리털, 이러한 특징은 관자놀이 윗부분이 유난히 퍼진 것과 겹쳐서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나에게 일으키게 한 변화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특징과, 그의 얼굴 모습이 나타내고 있는 표정이 옛날보다 훨씬 뚜렷해졌다고 하는 사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지금에는 소름이 끼칠만큼 창백해진 피부의 빛깔, 그리고 이상한 빛을 뿜는 눈, 이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였다. 게다가 또한 명주실 같은 머리털은 손질도 않고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어서 흐트러진 거미줄과 같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괴상한 표정은 도저히 사람의 그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친구의 거동에서 내가 곧 알아차린 것은 이상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 몸의 떨림 때문에, 극도의 신경 흥분을 이겨 내려고 가까스로 헛되이 몸부림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나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의 편지를 읽어보거나, 소년시절의 어떤 성벽을 회상해 보거나, 그의 특이한 성질이나 기질에서 우러나오는 결론을 생각해 보면 이런 종류의 일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거동은 금방 쾌활하다가도 금세 삐뚤어지곤 하였다. 그의 목소리였다가 일변하여 활발하고 유창한 어조로, 그 당돌하고, 묵직하고, 침착하고, 공허하게 울리는 어조로, 손을 쓸 수 없는 주정뱅이나 구할 길 없는 아편장이가 심한 흥분 끝에 보이는 그 묵직하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억양이 붙은 인후음으로 변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나에게 와달라고 한 목적이라든가, 나를 꼭 만나고 싶었다는 것, 나를 만나면 틀림없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병의 성격에 관해서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꽤 상세하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 병은 체질적인 것이고 그의 일족을 좀먹은 병이어서 그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라고 - 그러다가 그는 곧 이어, 이것은 흔히 있는 신경통이기 때문에 아마 머지 않아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병은 많은 이상감각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가 소상히 들려준 그 이상감각이라는 것의 어떤 것은 나의 흥미를 끌기도 하고 또한 무척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사용한 말이나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가 그런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병적으로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그는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아주 싱거운 음식 이외에는 어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입는 것도 특정한 천으로 된 의복에 한정되어 있었다. 꽃 냄새까지 모두가 괴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눈은 약한 빛에도 고문당하는 고통을 느꼈다. 그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는 것은 특별한 소리 - 현악기의 소리뿐이었다. 그가 어떤 이상한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죽어가고 있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비참하고 어리석음 속에서 나는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다만 이렇게 멸망할 수밖에 도리가 없단 말이네. 나는 장래에 일어날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결과를 두려워하고 있네. 설령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이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위험 그 자체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다만 그 궁극의 결과인 '공포'가 두려운 거네. 이렇게 기력이 쇠퇴해 버린, 이렇게 불쌍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나는 '공포'라는 그 무서운 망령과의 격투 속에서 생명도 이성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조만간에 닥쳐올 것 같은 생각이 드네." 그것뿐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의 어간에 가끔, 띄엄띄엄 흐릿하게 말한것으로써 그의 정신상태의 또 한 가지 묘한 특징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몇 해째나 외출할 용기도 없이 살고 있는 현재의 주거에 대해서, 어떤 미신적인 인상에 사로잡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괴이한 힘이 지니는 가공의 지배력에 관한 것을 지금 여기에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한 말로써 말하였다. 그의 집인 이 저택의 형태와 실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특이한 성질이 오랫동안 그것에 견디고 있는 동안에, 어느 샌가 자기 정신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택의 회색빛 벽과 작은 탑, 그것들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어둠침침한 늪, 이러한 것들의 형태가 끝내 자기라는 존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저하면서도 인정한 일이지만, 그를 이다지도 괴롭히고 있는 이상한 우울증의 좀더 자연스럽고 훨씬 명료한 원인은,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유일한 반려였던, 지상에 단 한 사람 살아 남은 혈육인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중하고 오랜 병 때문이었다. 아니, 분명히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누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누이가 죽고 나면,"하고 그는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이 내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불쌍한 내가 유서깊은 어셔가의 피를 받은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이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마델라인 아가씨(이것이 그의 누이의 이름이었다.)가 방의 저쪽을 천천히 지나갔으나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공포가 뒤섞인 놀라움으로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 어째서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는가를 나 자신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을 때 마음이 텅 빈 것같은 기분이 나를 억눌렀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나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오빠의 얼굴 쪽으로 쏠렸는데 -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으며, 이상하게도 창백한 빛이 퍼진 그의 야윈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오는 것이 나의 눈에 비쳤다. 마델라인 아가씨의 병은 벌써 오랫동안 주치의들의 솜씨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만성화한 무지각, 점점 더해지는 육체의 쇠약, 일시적이긴 해도 빈번히 일어나는 강직증의 증세 - 이런 것들이 그 증상이었다. 여태까지의 그녀는 악착같이 병고를 견디어서 아주 드러누워 버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저택에 도착하던 그날의 석양이 가까운 무렵(그남밤 그녀의 오빠가 형용할 수없는 마음의 동요를 보이면서 이야기한 바에의하면)병마의 파괴적인 힘 앞에 굴복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전에 내가 힐끗 보았던 아가씨의 모습이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 적어도 살아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어셔도 나도 아가씨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 동안에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내 친구의 우울증을 풀어주려고 가진 애를 쓰고 있었다.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하였다. 또한 그의 감명깊은 기타의 광기 띤 즉흥곡에 꿈 속 같은 기분으로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친밀의 도는 깊어졌고, 나는 그의 마음속 깊이 멋대로 뛰어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을 밝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시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더한층 통감할 따름이었다. 그의 마음에서는 암흑이라는 것이 마치 그가 타고난 특성이라도 되는 것 같이 되어 내뿜고 있었다. 어셔 가의 주인과 이렇게 단둘이서 보낸 많은 엄숙한 시간의 추억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이끌어들인, 또는 나의 인도자가 되어주었던 연구나 일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정확하게 전할 도리는 없다. 흥분된, 매우 병적인 상상력이 모든 것의 위에다 황록색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즉흥적으로 불러주었던 긴 비가는 언제까지나 나의 귀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폰 베버가 지은 마지막 왈츠의 분방한 선율을 기묘하게 뒤틀어서 과장된 연주로 들려준 것을 나는 지금도 애닯게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그가 그 치밀한 공상력을 구사해서 그린 그림은 붓 자국마다 애매모호한 것이 되고, 그것을 보면 나는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고, 그 까닭모를 전율 때문에 더욱더 격렬하게 내 몸은 떨렸다. 이들 그림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뚜렷이 눈 속에 남아 있지만, 아무리 말로써 전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끝내 불가능하리라. 그지없이 단순하고 명확한 구도에 의해서 그는 보는 사람의 주의를 끌고 위압했다. 관념을 그림으로 그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로데릭 어셔야말로 틀림없는 그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 당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정에 있어서는 - 이 우울병 환자가 화폭 위에 그려서 보인 여러 개의 순수한 추상적 관념 속에서 격렬하고 참기 어려운 위구의 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휴절리의 불타는 듯하면서도 너무나 구상적인 환상화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을 때에도 이런 위구의 그림자를 나는 전혀 느껴본 일이 없었는데도…… 엄밀한 의미로서의 추상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하튼 어셔의 변화무쌍한 구상들 중의 한 가지만은 어렴풋이 말로써 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굉장히 긴, 장방형의 지하실이나 지하도의 내부를 그린 작은 그림으로서, 평평하고 흰, 아무런 장식도 없는 낮은 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 구도의 한 보조적인 부분인 이 동굴은 지표에서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그 거대한 공간이 어느 부분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횃불이나 기타의 인공적인 광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렬한 광선이 가득차 있었고, 모든 것은 기분 나쁜 이상한 광휘 속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모든 신경은 병적인 상태에 있었고, 현악기의 연주 소리 이외에는 모든 음악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기타를연주할 때도 한정된 범위 내의 곡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마도 그의 연주의 괴기한 성격을 생성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즉흥적인 열렬하고 탁월한 연주는 지금 말한 이유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의 광란스런 환상곡의 가사(그는 운을 엮은 즉흥적인 가사를 읊으면서 연주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는 물론이거니와 곡조도 내가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인공적 흥분이 그 극에 도달했을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그 강렬한 정신적 집중과 냉혹함에서 생겨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고, 또한 사실이 그랬다. 이러한 광상곡의 한 가지 가사를 나는 힘들이지 않고 외었다. 그가 그것을 읊는 것을 듣고 나는 강한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 노래 가사의 신비로운 흐름 속에서 자신의 고귀한 이성이 그의 왕좌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것을 어셔 자신이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내가 충분히 인식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의 궁전》이라고 제목을 붙인 그 시는 다소 부정확할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초록빛이 짙은 골짜기에 아리따운 천사가 살고 있었고 그곳에 그 옛날, 장려한 궁전이, 빛나는 궁전이 치솟아 있었다. <사색>이라는 왕의 영토 위에 거기 궁전은 서 있었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 깃발이 그 지붕위에 펄럭이고 있었다. (이 것은 모두가 먼 예날의 일이었다.) 그 즐거웠던 날에 깃털 장식이 나부끼는 흰 성벽에 불어오는 온갖 간지러운 소슬바람은 향기로운 내음을 날라 가고 있었다. 이 행복한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은 빛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보았다. 류트의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서 옥적 언저리에 뛰노는 요정들의 춤을. 그 옥좌에 얹아 있는 이 (황제 포오피로진!) 그 영예에 어울리게 당당한 위풍을 떨치고 있는 것은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였다. 화려한 궁전의 문짝에는 진주와 루비가 번쩍이고 그 문을 통해서 흐르듯이, 흘러내려 가듯이 항상 번쩍이면서 들어오는 것은 <메아리>의 무리. 왕 되는 자의 슬기와 지혜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메아리>의 즐거운 임무였다. 그러나, 슬픔의 옷을 입은 악마들이 왕의 용상을 습격하였다. (아아, 함께 슬퍼하자! 고독한 왕에게는 이젠 내일의 날이 밝을 수는 없겠기에.) 언젠가 왕의 궁전의 둘레에 빛나던 영광도 지금은 묻혀진 그 옛날의 허무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 골짜기를 찾는 자들은 빨간 불이 비치는 창 너머로 본다. 범벅이 된 음악소리에 맞춰서 미친 듯이 춤추는 거대한 것들의 괴이한 움직임을. 그리고 또한, 창백한 문으로는 거창한 홍수와도 같이 부정한 것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뛰쳐나와서 소리 높이 웃어대는데 - 그 옛날의 미소는 이미 찾아볼 수 없구 나. 노래에서 우러난 연상에 이끌려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더듬어 보니 어셔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 생각을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도(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이외에도 있었기 때문에)그가 집요하게 그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란 간단히 말해서 식물은 모두 지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미치광이 같은 망상 중에서 이 생각은 보다 더 당돌한 성격을 띠었고 어떤 조건 아래서는 그것은 무기물의 세계에까지 적용된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확신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진지하고 저돌적이었던가를 나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 신념은 (내가 전에도 약간 비친 것과 같이)전해 내려온 이 저택의 잿빛 석재와 관련이 있었다. 이 석재들이 배치된 방법, 석재 위에 퍼져 있는 많은 돌버섯들이나 저택 둘레에 서 있는 썩어빠진 나무들의 배치뿐만이 아니라 돌 그자체의 배열, 특히 이러한 배치가 오랫동안 그대로 지속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늪의 조용한 물에 비친 그 그림자, 이런 것들 속에 방금 말한 지각력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만해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 증거는, 식물이 지각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런 것을 그가 말할 때 나는 섬뜩해졌지만) 늪의 물이나 저택의 벽 근처에 독특한 분위기가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응결해 가는 사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수백 년에 걸쳐서 그 일가의 운명을 형성하고 지금 내가 보는 바와 같은 그, 현재의 그를 만들어낸 어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끈질긴, 놀랄 만한 영향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서 별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나도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들이 읽은 서적, 몇 해 동안 이 병자의 정신생활에 적지 않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던 서적은 이러한 환상과 어울리는 것들뿐이었다. 우리들이 함께 탐독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그레세의《앵무새와 수도원》,마키아벨리의 《벨페고르》, 스베에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홀베르히의 《니콜라스 클림의 지하 여행》, 로버트 플럿과 장 댕다지느와 드 라 샹브르의 《수상학》,티이크의《먼 푸른 곳에의 여행》,캄파넬라의《태양의 도시》, 특히 애독했던 것은 도미니크 파의 승려 에이메리크 드 지론느의 소형의 8절판인《종교 재판법》이었다. 폼포니우스 멜라의 저서에는 고대 아프리카의 반인반수신이나 이이지판 인에 대해서 쓴 대목이 있는데 어셔는 그것들을 탐독하며 꿈결같이 몇 시간씩을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즐거이 탐독했던 책은 4절판 고딕 글씨의 희귀본, 지금은 잊혀져 버린 어느 교회의 기도서 《마인츠 교회 성가대의 죽은 이를 위한 경야》였다. 어느날 밤 별안간 그는 나에게 마델라인 아가씨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를 (매장할 때까지)2주일 동안 이 저택 안에 수없이 많은 지하 납골실의 한 장소에다 안치해 둘 작정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들은 나는 금방 말한 희귀본 속의 괴기한 의식과 그것이 이 우울병 환자에게 준 영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묘한 조치를 취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로서 멋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런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말에 의하면)죽은 이의 병의 성질이 이상한 것이었다는 것과, 주치의들이 주제넘게도 지나친 호기심과 탐구를 하려한다는 것과, 어셔 가의 묘지가 먼 들녁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저택에 도착하던 날 계단에서 만난 의사의 그 인상 나쁜 얼굴을 상기한다면 나로서도 별반 해될 것도 없고 또한 결코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없는 이 조심스러운 조치에 대해서 이의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셔의 부탁대로 나는 이 가매장을 준비하는 일을 손수 거들었다. 유해를 관에 넣고 우리는 둘이서 그것을 안치소까지 운반했다. 관을 안치한 지하 납골실(오랫동안 닫아둔 채로 여서 우리들이 가지고 간 횃불도 답답한 실내의 공기 때문에 꺼질 듯하여서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도 없었다.)은 비좁고 축축하며 외부의 광선이 들어올 만한 곳은 전혀 없었다. 저택 안에서도 이곳은 나의 침실 바로 밑 아주 깊숙한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장소는 그 옛날 봉건시대에 지하감옥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 같고 그 다음 시대에는 화약이나 어떤 가연성 물질의 저장소로써 사용된 것 같았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그 곳으로 갈 때에 통과한 복도는 모두 구리판으로 정밀하게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육중한 쇠문짝에도 동판이 씌워져 있었다. 굉장한 무게 때문인지 이 문짝이 돌쪄귀에 받쳐서 돌아갈 때는 특이하게 예리한 소리를 내면서 삐걱거렸다. 이 무시무시한 장소에서 관 받침 위에 슬픈 시체를 얹어놓고 우리들은 아직 나사도 박지 않은 관 뚜껑을 조금 옆으로 밀치고 안에 놓인 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빠와 누이의 꼭 닮은 얼굴이 우선 나의 주의를 끌었다. 어셔는 아마 나의 생각을 짐작했던지 무언가 몇 마디 중얼거렸는데, 그 말 속에서 나는 죽은 누이와 그와는 실은 쌍둥이였고 둘의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하기 어려운 공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선은 언제까지나 죽은 이 위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포감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아가씨의 목숨을 앗아간 이 병은 강직증 환자의 경우에 언제나 볼 수 있는 붉은 기운이 가슴과 얼굴 근처에 남아 있었고 입술에는 꺼질락말락하는 미소 같은 것을 띠고 있었는데 이러한 미소를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보는 것은 소름이 끼칠 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우리들은 관 뚜껑을 도로 덮어 나사를 박고 철로 된 문짝을 꽉 닫은 다음,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위층의 방으로 돌아왔으나 거기도 지하 납골실 못지 않게 음침하였다. 이렇게 해서 깊은 슬픔의 며칠이 지난 다음에, 어셔의 산란한 마음 속에는 어떤 현저한 변화가 나타났다. 평소의 그의 태도는 사라졌다. 여느때의 일들은 내버려두거나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지향도 없이 이방 저방 돌아다니곤 하였다. 창백한 얼굴은(이럴 수가 있을 수 있다면)더욱 창백한 빛을 더했는데, 그 눈의 빛깔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에 그가 이야기할 때 가끔 듣던 쉰 듯한 가락은 없어지고 무엇엔가 굉장히 위협을 받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말씨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자기의 음을 압박하는 비밀과 투쟁하면서, 이 비밀을 누설하기 위한 용기를 얻으려고 초조해 하는 듯이 보였다. 또한 어느때는, 무언가 가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같이 정녕 주의 깊은 태도로 몇 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이런 짓들은 모두가 미치광이의 불가해한 변덕에 지나지 않다고 단정하고 싶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상태는 나를 위협하고 틀림없이 나를 감염시키고 있었다. 기괴한, 그러면서도 인상적인 그의 미신이 강한 감화력을 가지고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나는 느꼈다. 특히 마델라인 아가씨를 지하 납골실에 안치하고 나서 이레짼가 여드레째 되던 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방금 말한 것과 같은 감정을 절실히 몸소 느꼈다. 여간해서 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인가 무료하게 지나갔다. 나는 나를 사로잡고 있는 신경의 흥분을 이성으로써 쫓아 버리려고 무한히 애를 썼다. 나는 자신의 감정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대부분이 이 방의 음침한 가구 - 불기 시작한 폭풍의 입김에 불려 웅성거리고, 벽 위에서 제멋대로 흔들거리며, 침대 곁에서 불안하게 웅성대고 있는 검고 낡아빠진 벽걸이 따위의 무시무시한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마음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허사였다. 참을 수 없는 전율이 차차 나의 전신에 퍼지고 종래는 나의 심장 바로 위에 말할 수 없는 공포의 악마가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나는 헐떡거리고 몸부림치면서 그것을 떨쳐 버리려 했다. 나는 베개 위로 몸을 일으키고는 방안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눈을 돌린 채 귀를 기울였다. 왜 그랬는지, 본능적인 기분에 이끌려서 그랬다고 밖에 할 수 없으리라. 폭풍이 멈췄을 때 긴 간격을 두고 어디선지 모르게 들려오는 낮고 흐릿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리고 견딜 수 없이 소름끼치는 공포감에 압도되어서, 나는 급히 옷을 걸치고 (오늘밤은 이젠 잘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방안을 빠른 걸음으로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자신이 빠져들어간 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 보았다. 이렇게 겨우 서너 번 방을 돌았을까 말까 할 때 복도 가까운 계단을 올라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나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이내 그것이 어셔의 발걸음인 것을 알았다. 금세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램프를 손에 든 어셔가 들어왔다. 얼굴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시체처럼 창백하였다. 그뿐 아니라 눈에는 광기를 띤 기쁨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고, 그 거동 전체에서 분명히 병적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나를 움찔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때까지 오랫동안 견디어온 불안스런 외로움에 비하면 그래도 고마왔다. 그래서 나는 내방에 나타난 그를 구세주와도 같이 반가이 맞이 했다. "그럼 자네는 그걸 보지 못했던 게로군?" 그는 한참 동안 잠자코 주위를 살펴본 다음 다시 불쑥 말했다. "정말 자네는 그걸 보지 못했던 게로군? 가만 있자. 그럼 지금 보여주겠네." 하더니 손에 든 램프를 주의 깊게 덮고는 한쪽 창으로 급히 가서는 폭풍을 향하여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휘몰아쳐 불어닥치는 열풍이 우리들을 불어날린 지경이었다. 실로 광폭한, 그리고 엄격한 아름다움을 지닌 밤, 미칠 듯이 요사한 공포와 아름다움에 넘치는 밤이었다. 회오리 바람은 아마도 저택 부근에 그 힘을 집중한 것 같았다. 바람의 방향은 몇 번이나 심하게 변했다. 구름이 사방에서 빽빽하게(저택의 탑 지붕을 누를 만치 얕게 떠서)모여들어, 멀리 떠나가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볼수 있었다. 구름이 굉장히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도 잘 보였다. 그러나 달이나 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번개도 번쩍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의 모든 지상의 물체뿐 아니라 웅성거리고 있는 안개의 거대한 덩어리의 하부까지도 저택 둘레에 드리워져서 저택을 감싸고 있는, 미광을 빛내면서 뚜렷하게 보이는 가스 같은 안개가 기분나쁜 빛깔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되네. 이런 것을 봐서는!"나는 그를 약간 거칠게 창가에서 의자 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런 광경에 자네는 놀라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신기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전기현상에 지나지 않는 걸세. 이 굉장한 광경의 원인이라 저 늪의 악취를 뿜는 독기 때문인지도 모르네. 자아, 이 창을 닫세 - 찬 공기는 자네 몸에 해롭네. 자네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한 권 여기 있네. 내가 읽을 테니 듣게나. 그렇게 해서 이 무서운 밤을 함께 새도록 하세." 내가 꺼낸 오래된 책이란 라안스러트 캐닝 경의 《광란의 상봉》이었는데 내가 그것을 그의 애독서라 부른 것은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질없는 장난기로 한 짓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실은 이 책의 조잡하고 상상력이 희박한 완만한 내용에는 어셔의 높은 기품과 정신적인 이상주의적 경향에 감동을 줄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책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우울병 환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흥분이 내가 지금부터 읽으려고 하는 우열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에서 무언가 위안을 찾아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정신이상에 관한 문헌에는 이와 같은 이례적인 사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의 한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니면, 기울이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그의 이상하게 긴장되고 활기에 찬 모습으로 판단해 본다면 나는 나의 의도가 적중되었다고 반가와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소설 가운데의 저 유명한 부분 -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덜레드가 은둔자의 초옥으로 들어가려 아무리 요청을 해도 허용되지 않기에 완력으로 들이밀려고 하는 그 대목까지 읽어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소설의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은 어귀로 씌어 있다. "원래 용맹한 자인 데다가 마음껏 마신 술의 효험으로 한층 힘을 더한 에덜레드는 참으로 완미하고도 부정한 은자와의 담판을 기다리다가 때마침 그의 어깨에 내리치는 비를 느끼고 폭풍우가 올 것이 두려워 당장에 그의 작두를 휘들러서 몇 번인가 타격을 가해 순식간에 문에다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었다. 그리하여 그 구멍에 손을 걸고 힘껏잡아당기니 문은 갈라지고 산산이 부서져 허공에 울리는 마른 나무의 째지는 소리가 숲속 가득히 메아리쳤다." 이 문장의 끝 대목까지 읽은 나는 섬뜩하여 이내 말을 멈췄다. 그 까닭은 (자신의 흥분된 망상에 스스로 현혹된 것이라고 이내 단정을 했지만) 저택 안 어디에선가 먼 것에서 그 음질이 라안스러트 경이 소상히 기술한 그 문이 쪼개지는 소리와 유사한(틀림없이 억누르는 듯한 둔한 소리기는 하지만) 소리가 내 귓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주위를 끈 것은 우연의 일치라는 사실뿐이었다. 창틀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나 아직도 불어닥치는 푹풍우의 폭음 속에서는, 그 음향이 음향만으로는 내 흥미를 끌고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설을 다시 읽어내려 갔다. "그리하여 뛰어난 전사 에덜레드는 문안으로 쳐들어갔는데 간악한 은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기에 매우 화가 났고 또 놀랐다. 그 대신에 거기 있는 것은 비늘로 싸이고 불길 같은 혓바닥을 내민 거대한 몸집의 용으로서 바닥을 은으로 깐 황금의 궁전 앞에 쭈그린 채 지키고 있었다. 벽에는 번쩍이는 놋쇠의 방패가 걸려 있고 다음과 같은 명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 들어온 자는 승리자이니라. 용을 쓰러뜨리는 자는 이 방패를 얻을 지니라. 그래서 에덜레드가 작두로 머리를 내리치니 용은 그의 앞에 쓰러져 단말마의 독기를 뿜으며 소름끼치는 무서운 고함을 질렀는데, 그 귀청을 찢는 듯한 음향엔 에덜레드일지라도 두 손으로 귀를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이러한 무서운 고함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직 없었으리라." 여기에서 다시 나는 읽어내려가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단한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낮은, 아무래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귀에 거슬리고 길게 잡아끄는 이상한 외침 소리같은,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 - 이 소설의 작자가 말하고 있는 그 용의 기분나쁜 고함소리가 이런 것일 테지 하고 내가 상상으로 그리고 있던 것과 똑같은 소리를 나는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만한 우연의 일치가 이렇게 두 번씩이나 일어나자 나는 확실히 여러 가지 착잡한 감정 때문에 놀라움과 공포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입밖에 내서 내 친구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만큼은 마음의 평정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소리를 알아차렸는지 어떤지는 나는 전혀 몰랐다. 하긴 그 몇 분 동안에 그의 거동에는 기묘한 변화가 이러나고 있었다. 그는 내 정면의 위치에서 자기 의자를 서서히 돌려 방 입구 쪽으로 향해서 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얼굴의 한 쪽밖에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무슨 알지 못할 말을 중얼대는 것같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가슴에 파묻을 듯이 숙이고 있기는 하였지만, 내가 힐끗 그의 옆 얼굴을 보았을 때 눈을 크게 뜨고 있었기 때문에 자지 않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이 일은 분명하였다. 조용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같은 모습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이 일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나는 라안스러트 경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제야 용의 무서운 노여움에서 벗어난 전사는 그 놋쇠방패에 생각이 미쳐서 그 위에 걸린 주문을 풀기 위해 용의 시체를 밀쳐내고 은을 깐 성내의 마루 위를 벽에 걸린 방패를 향해서 위풍당당히 걸어갔는데 방패는 그가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의 발 밑에 떨어졌으며, 무섭고 굉장한 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마자. 마치 놋쇠방패가 정말로 은의 마룻바닥 위에 큰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나 한 것같이 뚜렷하면서도 공허한, 금속성의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울리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무겁게 누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주 얼이 빠져서 뛰는 듯이 일어섰는데, 어셔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의자 곁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은 가만히 앞 만을 바라보고 있고 얼굴 전체엔 돌과 같이 굳은 표정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심한 전율이 그의 전신을 엄습하며 병적인 미소가 그의 입술 언저리에서 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가 곁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낮고 빠른 말씨로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였다.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듯이 가까이 가서야 겨우 그거 웅얼거리고 있는 말의 무서운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저게 들리지 않나? 나에겐 들린단 말일세. 그럼, 똑똑히 들리고 말고. 훨씬…… 훨씬…… 훨씬 더 먼저부터‥‥몇 분 동안이나, 몇 시간동안이나, 며칠 동안이나, 나는 듣고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나에겐 용기가 없었지……아아, 불쌍하게 여겨 주게. 나는 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용기가……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었단 말일세!. 우리들은 그녀를 산 채로 무덤에 묻어 버렸단 말일세! 나의 감각이 예민하다는 건 이미 말했지 않나?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나의 누이가 저 허무한 관 속에서 최초로 약간 몸짓을 하는 소리를 들었단 말일세. 난 들었단 말일세‥‥ 며칠이나 며칠이나 전에‥‥ 그러나 용기가‥‥ 말할 용기가 없었단 말일세! 그런데 지금‥‥ 오늘밤‥‥에덜레드가‥‥ 하하‥‥‥ 은둔자 집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 용의 단말마의 외침, 그리고 방패가 떨어져 울리는 소리! 알겠나, 이렇게 말하는게 좋을 걸세. 누이가 들어 있는 관이 쪼개지고, 누이가 갇혀 있는 지하감옥의 돌쪄귀가 삐걱거리고, 지하 납골실의 구리를 깐 복도에서 누이가 몸부림치고 있는 소리가 들린단 말일세! 아아,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 된단 말인가! 누이가 곧 이곳으로 오지 않겠나! 나의 성급한 처사를 꾸짖기위해 누이가 빨리 오지 않겠나?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나? 누이의 심장의 그 괴롭고 무서운 고동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것 같군! 이 미친 녀석 같으니!"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맹렬한 기세로 일어섰다. 그러고는 금방 외친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를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미친 녀석 같으니! 누이는 벌써 문 밖에 서 있지 않느냔 말이야!" 어셔의 이 초인적인 힘을 준 절규 속에 마력이라도 숨겨져 있었던 것같이, 그가 가리킨 거대하고 낡은 거울판을 박은 문이 별안간 그 묵직한 흑단의 입을 서서히 뒤쪽으로 연 것이다. 그것은 불어닥친 억센 바람 때문이었지만, 틀림없이 이때 문 밖에는 마델라인 아가씨의 키가 큰, 수의를 입은 모습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 옷에는 피가 배어 있었고 그 여윈 몸 전체에 무참하게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문지방 근처에서 일순간 부들부들 떨면서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낮은 신음소리를 지르면서 방안에 있던 오빠의 몸 위로 풀썩 쓰러지더니 격렬하게, 이제야말로 최후의 단말마의 괴로움 속에서 오빠를 마룻바닥 위에 밀어 쓰러뜨렸다. 그 오빠도 이제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가 예기한 대로 격렬한 공포의 희생이 되어 쓰러진 것이다. 그 방에서, 그리고 그 저택에서 나는 공포로 마음을 떨면서 도망쳐 나왔다. 그 오래 된 진흙 길을 달려갈 때도 폭풍은 더욱 광란을 부리고 있었다. 돌연히 내가 달리고 있는 길을 따라서 이상한 빛이 비쳤다. 나는 이 심상치 않은 빛이 어디서 비치는 것인가를 알아 보기 위해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뒤에 있는 것은 커다란 저택과 그 그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빛은 이제 막 넘어가는 피와 같이 붉은 만월의 빛이었다. 건물의 지붕에서 번개꼴을 그리면서 토대까지 뻗치고 있다고 내가 전에 말한 그 보일락 말락하던 균열을 통해서 달은 지금 교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이 균열은 급속히 커지고, 일진의 회오리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고, 달의 모습 전체가 갑작스레 내 눈 앞에 확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택의 거대한 벽이 딱 갈라지면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몇천 개의 대홍수에 밀려내려가는 소리와도 같이 요란스럽고, 울부짖는 것 같은 음향이 길게 울려퍼지고, 내 발 밑의 깊고 음침한 늪은 <어셔 가>의 잔해를 천천히 소리도 없이 삼켜 버리고 말았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