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플루타르크 영웅전 저자(역자) :플루타르코스(김병철) 출 판 사 : 범무사 플루타르크 영웅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즐겨 읽으면서 군인이 나 정치가들은 용기를 얻고 큰 포부를 세웠으며, 예술가나 학자들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날카 로운 통찰력을 얻었던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플루타르크 영운전'의 연구자들은 민족이 한창 융성하기 시작할 때 대체로 이 '영운전' 이 유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영운전'이 라틴어로 처음 출판된 1470년은 레오나르도 다 빈 치가 18세가 되던 해이며, 유럽 르네상스가 바야흐로 성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노스 경(Sir Thomaas North)의 영역판이 나오던 1578년은 엘리잡베스 여왕 즉위 17년으로 영국 의 국운이 한창 떨치던 해였다. 프랑스에서 이 '영웅전'이 가장 성행한 것은 18세기 말 프랑 스 혁명 전후였다. 이 픙미진진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이에 읽는 사람의 마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웅전'을 쓴 목적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인들은 오랫동안 영웅들의 전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저술가들이 이것을 체계화하는데 힘을 쏟아왔었다. 당시에 영웅들의 전기를 쓰는 목적 형식 에는 여러 자기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일반인들이 읽기 쉽도록 아름답고 흥미 있는 문체로 전기를 쓰는 형식을 취했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전문가를 위해 사실만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책의 저자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는 아리스토텔레 스 학파의 형식을 따랐다. 그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보다 독자들이 그것을 읽 고 실천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물의 업적이나 공훈은 역사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인물의 성격과 덕성의 발전에 관한 것만 쓰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전기는 실천생활에서의 윤리를 세워나가기 위해 개인의 덕성과 인격에 관한 사례들 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영웅전'을 딱딱한 도덕교과서로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영웅전'에서 덕성의 거울로 삼고 있는 영웅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결함과 실패까지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덕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 에 대한 전기도 포함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매 력적인전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웅전'의 구성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란 우리 나라에서 붙인 제목이다. 플루타르크(Plutarch)는 플루타 르코스의 영어식 표기다. 그리스어로 '영웅(heros)'이란 단어는 신과 인물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들을 뜻하는 말이지 무예에 뛰어난 인물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그 리스 어로 '비오이 파랄렐로이(Bio Paralleloi)', 즉 '서로 비교해서 쓴 전기' 하는 뜻으로 ' 대비열전'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서로 유사한 점이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영웅들의 전기를 하나씩 싣고, 그 뒤에 그 둘의 성격과 도덕적 품성을 대비한 글을 실은 것이 22조 46명이고, 단독 전기가 4명이다. 테미스토클레스-카밀루스, 피루스-카이웃, 마리우스, 알렉산드로스-카이사르, 포키온-소카토 등 4조는 '비교'가 없다. 영웅들이 얽어내 는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는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진리와 허위, 박애와 증오, 그리고 이성간 의 사랑등 인간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 이로부터 영웅들의 훌륭한 품성은 물론 불의한 인물들의 행동에서도 역설적인 의미에서 윤리와 덕성을 가리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맨 처음 정한 '정웅전'의 순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데보스테네스-키케로'가 다섯 번째, '페 리클레스-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열번쨰, '디온-마르쿠스 부루투스'가 열두전째, '리쿠르고스 -누마 폼필리우스'가 테세우스-모물루스'보다 앞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지 금은 1509년 베네치아의 알두스 판에 실린 순서가 널리 채택되고 있는데, 이 책도 거기에 따르고 있다. '영웅전'을 쓴 시기 '영웅전'은 작가의 만년에 쓴 것이 거의 확실하다. '술라' 가운데는 B.C.85년 오르코메노 스 전쟁을 이야기한 뒤 이 전쟁터에서 '거의 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가 무기 같은 유물이 나온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A.D. 115년경에 쓴 것이 틀림없다. 또 '갈바'와 '오토'를 타키투스의 '역사'와 비교해볼 때 대체로 105-115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플루타르코스의 생애 플루타르코스 로마 그로티우스 황제 재위기간인 A.D.46년 전후에 출생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초기인 A.D. 12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하드리아누스 바로 전인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때 최대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중 부 그리스 보이어티아 서쪽 국경 부근의 작은 마을 카이로네아의 명문에서 태어났다.이 곳 은 B.C.338년 앝테네-데바이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연합군에게 패한 전쟁터로 유명한 곳이 다. 증조부 니카르코스, 조부 람프리아스, 아버지 아리스토불로스는 모두 교양을 갖추고 학 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처의 이름은 티모크세나, 자식들의 이름은 아우토플로스, 플루타르코스, 소크라로스, 카이론 등이었다. (그리스 인에게는 성이 없고 개인 이름만 불렀 음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식으로 불렀음) 교육은 아테네로 가서 받았다. 변론술, 수학, 자연학을 배웠으며 플라톤 철학도 공부했다. 스승은 암모니오스였으나 신플라톤파나 회의주의파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델포이 신탁을 변호하고 예언과 꿈해석 을 진지하게 논했다. 그리스 본토의 여러 곳과, 소아시아, 이집트, 이탈리아 여러 곳을 여행 했다. 로마에 오래 머물렀고 로마의 많은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 가운데 소시우스 세네키오에게 이 '영웅전'의 여러 편을 바쳤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아키이아주 즉 그리스의 대관이 되었으며, A.D.95년경 이훙에는 델포이의 신관으로 있었다. 그는 경건하고 온화한 생활을 했고 신탁을 신봉했으며, 신비주의에 경도된 모럴리스트였다. 그의 저작은 람프리아스의 목록에 의하면 227편에 이르 는데, 그 중에는 위작도 포람되어 있고 분실된 것도 있다. 그를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영웅전'보다 몽테뉴를 매료시킨 바 있는 도덕,자연과학,정치,문학, 역사 등의 모든 분야에 걸친 에세이를 수집한 '윤리론집(Ethica, 라틴 어로는 Moralia)'이다. 번역판에 대하여 플루타르코스가 처음에 이 '영웅전'을 쓴 것은 그리스 어였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1470년 라틴 어로 처음 번역되고 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59년 프랑스에서 쟈크 아밍요(Jacques Amyot)가 평생을 밫쳐 이 '영웅전'을 연구한 끝에 완전한 번역판을 내어 국왕 샤를 9세에 바쳤다. 아미요의 번역판은 대단한 평판을 얻게 되 었으며 이 '영웅전'이 전세계적으로 읽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로 번역된 것은 1683년 드라이든(Dryden)에 의해서였고, 1864년 클로프가 개정하여 여기에 서문을 붙인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이 책도 드라이든 역을 원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이 드라이든 판의 개정본은 시 카고 대학교에서 '세계명저총서(The Great Books)' 가운데 제 14권으로 발행되었다. '영웅전'이 끼친 영향 좋은 책과 좋은 친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다. 1900여 년을 지나 온 이 영웅전이 한결같이 인류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진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알 수 있다. 이 한권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세계에 잇는 어떠한 학원이나 스승보 다 더 많은 인재를 양성해 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조카 섹스투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잇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싸움터에서까지 이 책을 가지고 다녓으며, 변론가 아리스티데스 를 읽도록 권했고, 의사 에우나피우스는 '영웅전'을 가장 아름다운 저작이라고 불렀다. '우신 예찬'을 쓴 에라스무스는 플루타르코스를 '가장 학식이 깊은 사람'이라고 일컬었으며, '성서 를 빼고는 이처럼 신성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몽테뉴는 이미 플루타르코스를 알고 있었으나 아미요의 번역판이 나오자마자 열중했으며 그의 '수상록'도 이 영향을 받았다. 플루타르코스의 영향력은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정 신계에 더욱 강하게 미쳤다. 코르네이유는 '영웅전'에서 비극 '세르토리우스'와 '아게시라우 스'를 , 그리고 라신느는 '미트리다트'의 소재를 얻고 있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가 노스 경 의 번역본을 읽고 거기서 많은 소재를 얻은 사실은 아주 유명하다. '코리올라누스', '줄리어 스 시저', '안토니오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물론 '영웅전'의 각각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며, '아 테네의 티몬'은 안토니우스'에서 딴 것이다. 그 무렵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다. 그의 '에세이즈'는 직접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과 연결되며, '영웅전'도 그 의 문체에까지 힘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의 루소는 이 '영웅전'을 몇 번씩 되풀이 하여 읽고, '몇 권의 유익한 책' 속에 그것을 포함시켰으며, '이 소년 시대에 처음 읽은 책이 다시 노년 의 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루소는 '영웅전'뿐 아니라 '윤리론ㄴ집' 역시 애독했으며, 공화 주의자 플루타르코스와 그가 찬양했던 자유의 영웅에 정열을 불태웠다. 나폴레옹은 사관학 교 시절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뒤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베토벤은 이 책을 성서처럼 항 상 곁에 두고 읽었다. 실러는 최대의 찬미자로서 플루타르코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군 도의 인물을 묘사하고, 역사적 자료를 구하여 비극 '테미스토클레스'를 썼으며, '영웅전'의 수 법으로 '독일의 플루타르코스'를 쓰고자 했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이 아버지의 책꽂이에서 ' 영웅전'을 발견하고는 숙독하였으며, 에모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전세계의 도서관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우선 불 속에서 뛰어드렁가 '셰익스피어 전집'과ㅏ '플라톤 전 집', 그리고 '플루타크그 영웅전'을 건지는 데 내 몸을 바치겠다.' 이처럼 '플루타릌크 영웅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도 수없이 맣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 겁게 해주며, 지혜와 용기의 샘이 되고 있다. 이 번역본은 시칵고 대학에서 편찬한 '서양의 명제' 총서 제 14권'Plutarch : The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Drydenn Tr. Encyclopaedia Britanica, 1952)를 완역했다. 그리스.로마 인명과 지명의 표기는 문교부 편수 자료를 따랐으며, 거기에 없는 것은 원음 발음을 기준으로 했다. 테세우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 소시우스여, 지리학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지역을 지도의 가장자리에 몰아놓 고서, 이 경계선 밖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모래사막이며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수렁이거나 혹은 얼음으로 뒤덮인 땅과 얼어붙은 바다뿐이라고 설명을 한다네, 그렇기에 나 도 위대한 사람들의 일생을 서로 비교하는 영웅전을 쓰면서 확실한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 는 시대까지 다루고, 그보다 더 오래 된 시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 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시기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사의와 허구밖에 없다. 그 당시에는 시인과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만 살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것도, 확실한 거도 없다.' 하지만 입법자 리쿠르고스와 누마 왕에 대한 전기를 출간한 이후, 나는 이미 이 시 기까지 거슬러 올라왔으니 로물루스를 다루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그리고 아 이스킬로스의 시가 나의 마음에 떠올랐지. 이 위대한 사람과 누구를 맞서게 하랴? 누구를 시켜 대적하랴? 누가 그와 같을 수 있으리오? 이 시에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고 유명한 도시 아테네를 세운 테세우스와 비교될 수 있는 인물은 정복당할 줄 모르고 영광에 빛나는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 이외에는 없을 것일세. 그러므로 앞으로 종종 나오게 도리 신화적인 이야기를 이성의 판단에 따라 잘 걸러내고 정 확한 역사적 인물로 그려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네, 하지만 때때로 도저히 믿어지 지 않거나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올 경우에는 독자의 너그러운 마음에 기대 할 수밖에 없다네, 그런 것들은 옛날 이야기로 생가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주게나. 테세우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로물루스와 유사한 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가 확실하지 않은 채 사생아로 태어나서 신의 후예라는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또한 온 세상이 모두 인 정하듯이 두 사람은 위대한 전사였다. 게다가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정신을 두루 갖춘 인물 들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로마를 건설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테네에 사람들을 거주시 켰다. 로마와 아테네는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들이 되었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는 여인을 겁탈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가정의 불행과 친지들의 질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또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나라 사람들과 커다란 충돌을 일으켰 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적어도 우리를 진실로 인도하여 주는 시와 같은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테세우스의 혈통은 아버지의 가계로 볼 때 아티카 최초의 주민 에렐 클테우스까지 거슬러올라가고, 어머니의 가계로는 펠로프스의 후손이 된다. 펠로프스는 펠 로폰네소스의 모든 왕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가문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도 엄청났지만 자식의 수도 무척 많았다. 그리고 많은 딸들을 지방의 수령들과 결혼하도록 하 였으며, 아들들은 지방의 여러 도시의 통치자 자리에 앉도록 만들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었던 피테우스는 테세우스의 할아버지로서, 트로이젠이라는 작은 도시의 통치자였다. 피테우 스는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와 학식을 갖춘 인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마도 피테우스의 지혜는 시인 헤시오도스의 유명한 책인 '명작과 시절'처럼 온갖 심오한 진리로 가득 찬 것이었으리라. 사실 그 책 중에는 피테우스의 말이라고 알려진 구절도 있다. 약속한 보수는 친구락고 할지라도 반드시 이핼하도록 하라. 아리스토텔레스도 같은 말을 하엿다. 또한 에우리피데스가 히폴리투스를 가리키면서 '성스 러운 피테우스의 제자'하고 부른 것을 보면 피테우스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던가에 대하여 d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게우스는 자식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델포이에 신탁을 청하였다. 그러자 아테네로 돌아가기 이전에는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갖지 말라는 응답을 얻었다. 하 지만 그 신탁이 너무나 모호하여 아이게수스는 신이 무엇을 금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 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트로이젠으로 떠난 아이게우스는 피테우스와 신의응답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신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들의 우두머리여, 포도주 부대의 끈을 풀지 마라. 그대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기 이전까지는 현명한 피테우스는 신탁이 모호한 것을 이용하여 아이에우스를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피 테우스의 딸 아이트라와 동침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일이 설독에 의한 것인지 혹은 속임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잠자리를 함께 한 여인이 피테우스의 딸인 것 을 알게 된 아이게우스는 그녀에게서 아이를 얻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게우스는 길을 떠나면서 커다란 돌 밑에 칼 한 자루와 신발 한 켤레를 숨겨놓았다. 그리고 오직 아이트라 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만약 아들이 테어나서 이돌을 들 수 있을 만큼 성장하거든 돌 밑에 감추어놓은 물건들을 찾아서 비밀리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오도록 하라고 당 부하였다. 또한 아들의 여행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왜냐하 면 아이게우스는 팔란티데 가문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었기 대문이었다. 이들은 끊임없 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식이 없는 것을 이유로 아이게우스를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들로 말하자면 형제가 50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팔라스의 아들들이었다. 아이트라는 아들을 낳았 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돌밑에 남긴 증표에 의하여 그 즉시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지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이게우스가 아들을 알아본 이후에 아테네에서 이름을 얻 었다고 하기도 한다. 테세우스는 할아버지 피테우스의 밑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콘니다스라 는 가정교사이자 수행원을 두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테세우스에게 바치는 축제 가 벌어지기 전날 양을 잡아서 콘니다스에게 바친다. 이 기념행사는 테세우스의 초상화나 조상을 만들었다는 실라니오나 팔라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욱 타당한 근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는 성인이 되는 첫해에 델포이로 가서 태 어난 후 처음 깎은 머리카락을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 곳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테세아로 불리는 곳이 있다고 한다. 테세우스는 머리카락의 앞부분만을 잘라서 신에게 바쳤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아반테스 인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앞부분의 머리카락만을 자르는 것을 테세우스 방식이라고 부른다. 아반테스 인들이 처음으 로 앞부분의 머리카락만을 자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아라비아 인들 이나 미시아 인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아반테스인들은 대단히 호전적인 민족이었기 때문 에 적과 맞붙어 싸우는 일이 종종 있었고,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손으로 싸우는 일에 능숙 했던 것이다. 마치 아르킬로쿠스가 이렇게 시로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넓은 평야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투석기를 휘두르지 않았고 많은 화살이 날아다니지도 않았도다. 오직 칼만을 들고 몸과 몸이 맞붙어 싸우니 치열한 싸움은 마치 에우보이아의 신들이 창을 들고 솜씨를 연마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아반테스 인들은 적들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앞부 분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모든 장군들 에게 적에게 쉽사리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염을 깎으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이트라는 오랫동안 테세우스의 친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그 리고 피테우스는 테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라고 소문내었다. 왜냐하면 트로 이젠 사람들은 많은 신들 중에서 포세이돈을 가장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폰세이돈은 이 도시의 수호신으로, 가장 처음 열린 열매는 모두 그에게 바쳐졌다. 그리고 주화에도 포세 이돈의 삼지창을 새겨넣어서 기념하였다. 테세우스는 대단히 강인한 육체를 가졌을 뿐만 아 니라, 무척 용감하고 민첩하며 영리하였다. 앙트라는 돌이 있는 곳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아이게우스가 남기고 간 증표를 가지고 바다 를 건너서 아테네로 떠나라고 말했다. 테세우스는 손쉽게 돌을 들어서 돌밑에 숨겨진 칼과 신발을 꺼냈다. 하지만 바다로 여행을 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바다가 육지보다 더욱 편안하 고 안전한 길이었으므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애원하면서 만류했지만, 테세우스는 육지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당시에 육로를 통하여 아테네로 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길목마다 강도와 살인자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주먹이 세고 발이 빠르며 힘 도 강해서 조금도 지칠줄 모르는 뛰어난 용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자만심에 빠져서, 다른 사람보다 우세한 힘을 이용하여 잔악한 행동을 일삼고 강탈하면서 닥치는 대 로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악당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정의, 인간적인 행동들이 모 두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만큼 용기가 부족하거나 혹은 자신이 해를 입을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여러 나라들 을 돌아다니면서 강도와 살인자들의 일부를 소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발견되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간 자나 멀리 달아나서 숨어버린 자도 있고 혹은 대수롭지 않은 놈들이라고 해 서 살려둔 자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그런데 불운에 빠진 헤라클레스가 이피토스를 살해하고 리디아로 도망쳐서 오랫동안 옴팔레의 노예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살인을 저 지른 죄의 대가로 스스로를 벌하였던 것이다. 그때 리디아는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근처의 여러 나라에서는 악당들이 나타났을 때 이들을 소탕할 수 있는 사 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테네에서부터 펠로포네소스까지 육지로 여행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피테우스는 악당들과 강도 하나하나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들이 낯선 사람에게 저지르는 잔악한 행동과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테세우스를 설득하 려고 하였다. 피테우스와 아이트라는 테세우스가 배로 여행을 떠나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오래 전부터 헤라클레스의 업적을 부러워하면서 높이 존 경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다른 그 무엇 보다도 좋아하고 있었다. 특히 헤라클레스를 직접 보았던 사람이나, 그의 말이나 행동을 직 접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겼다. 그러므로 테세우스의 마음은 마치 밀티아데스의 승리 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헤라클 레스의 위대함에 대한 숭배로 가득 차서, 밤마다 테세우스의 꿈 속에는 영웅의 행위들이 나 타나는 것이었다. 또한 낮에는 끊임없는 경쟁심이 테세우스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육촌뻘로 서로 친척 관계였다. 아이트라는 피테우스의 딸이며 알크메네 (헤라클레스의 어머니)는 리시디케의 딸인데, 리시디스와 피테우스는 오누이 간이었기 때문 이다. 그 두 사람은 모두 히포다미아와 펠로프스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가 온 천 하를 돌아다니면서 바다와 육지에서 사악한 무리들을 몰아내었는데, 테세우스 자신이 앞으 로 닥칠 모험으로부터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 고 여겼다. 더구나 아버지가 증표로 남기고 간 신발과 칼뿐만 아니라, 고귀하고 가치 있는 업적을 통해 위대한 혈통의 진정한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편안하게 아버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테세우스 는 자신에게 먼저 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만 복수 할 뿐,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겟다는 결심 을 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첫 번째 싸움을 통해 에피다우로스 근처에 사는 페리페테스를 살해했다. 이 악당은 곤봉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리네테스, 즉 '곤봉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페리페테스는 테세우스가 길을 떠나지 못하도 록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페리페테스의 곤봉을 차지한 테세우스는 몹시 기뻐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그리고 마치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죽인 짐승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어깨 위에 사자의 가죽을 메고 다녔던 것처럼 테세우스는 언제나 그 곤봉을 사용하였다. 테세우스의 손에 들어온 곤봉은 천하무적의 무기가 된 것이다. 펠로폰네스의 이스트무스를 향하여 나가 면서 테세우스는 '소나무를 구부리는 자'라고 불리는 시니스를 죽였다. 특히 테세우스는 시 니스가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죽일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를 살해하였다. 테세우스는 연습 을 하거나 요령을 배우지 않고도 시니시와 같은 방식으로 나무를 굽혀 그를 살해했는데, 이 것은 어떤 기술보다도 뛰어났으며 자신의 타고난 힘을 보여준 것이었다. 시니스에게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난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페리구네였다. 페리구네 는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멀리 도망쳤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녀의 뒤를 끝까지 쫓아갔다. 페리구네는 아스파라거스와 관목이 우거진 덤불에 도착하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 로 기도하면서 자신을 숨겨달라고 나무들에게 간청했다. 그녀는 만약 달아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결코 그 나무들을 자르거나 불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페리 구네의 이름을 부르면서 명예롭게 그녀를 맞이하겠으며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 하였다. 결국 페리구네는 덤불 속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페리구네는 나중에 테세우스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멜라니포스다. 하지만 그 뒤에 페리구네는 에우리토스의 아들 데이오네스와 다시 결혼을 하였다. 테세우스의 아들 멜라니포스에게서 태어난 아이오수스는 오르니토스와 함께 카리아로 건너갔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아이오시드라고 불리는 민족 사 이에서는 절대로 아스파라거스의 덤불을 대우지 않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오히려 그 덤 불을 숭배하고 모시는 풍습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파이아라고 불리는 크롬미온의 산돼지는 몹시 사납고 엄청나게 힘이 센 짐승이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이 짐승과 싸우기 위하여 일부러 길을 벗어났다. 테세우스는 뛰어난 힘과 기술로 산돼지를 죽일 수가 있었다. 결국 테세우스가 행 한 위대한 모험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경우로 인하여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 지만 사악한 악당들은 공격을 가하는 경우에만 처치하고, 못된 짐승들은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용감한 자의 역할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떤 이들은 파이아가 여인이었다고 하기도 한 다. 잔인하고 탐욕에 가득 찬 도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여인은 크롬미온에서 살고있었는데, 산돼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녀의 행실과 생활이 돼지처럼 더럽고 추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중에 그녀는 테세우스의 손에 살해당했다. 메가라의 국경선 근처에서 테세우스는 스키론을 살해한 다음절벽 밑으로 던져버리기도 하 였다. 스키론은 악명 높은 강도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스키론은 오만불 손한 사람이며, 행인들에게 자신의 발을 내밀면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발을 씻은 명령 을 내리는 그 사람을 바다에 차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메가라 인의 기록을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시모니데스 와 같은 이는 '모든 전설에 맞서서' 오만한 산적이 아니라 오히려 산적을 소탕한 의인이 며, 어진 사람들의 친구요 친척이라고 쓰고 있다. 메가라 인들이 말하기를, 아이아쿠스는 모 든 그리스 인들 중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존경을 받앗으며, 살라미스의 키크레우스는 아테네에서 신처럼 숭배를 받는사람이었고, 펠레우스와 텔라몬의 덕행은 온 천하가 아는 일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스키론은 키크레우스의 사위로 아이아쿠스의 장인이며, 페레우스와 텔라몬의 외조부였다. 왜냐하면 펠레우스와 텔라몬은 스키론과 그의 아내 카리클로의 딸인 엔데이스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명사였던 사람이 악당과 동맹을 맺고 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메가라 인 들의 기록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스키론을 죽인 것은 처음으로 아테네로 가던 때가 아니라 나중에 엘레우시스 시를 공략하였을 때라고 한다. 이 도시는 메가라 사람들의 것이었는데.테 세우스는그 곳의 통치자로 있었던 디오클레스라는 사람과 내통하여 계책으로 도시를 빼앗고 시키론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테세우스의 모험에 있어서 이렇게 상반되는 두 이야기가 있 다. 엘레우시스에서 테세우스는 아르카디아 사람인 케르키온과 시름하여 그를 죽였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에리네오늣에서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별명을 가진 다마스테스를 죽였다. 테 세우스는 다마스테스를 침대에 눕힌 뒤, 침대 밖으로 삐져 나오는 몸을 잘라 살해했다. 다마 스테스 자신이 낯선 여행객들을 그러게 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테세우스의 행동은 헤라클 레스의 본을 받은 것이다.히ㅔ라클레스가 악인을 죽일 때 그들이 남을 죽이던 그 방법대로 똑같이 보복했던 것이다. 즉 부시리스(포세이돈의 아들)는 신단의 제물로 삼아 죽였고, 안테 우스(포세이돈의 아들)는 씨름으로 죽이고, 키크누그(마르스의 아들)는 격투기를 해서 죽이 고, 테르메루스는 머리통을 깨뜨려 죽였다. 아마도 테르메루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박치 기로 살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테세우스는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징벌할 때, 그 악당들이 다른 사람을 괴롭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였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여행을 계속 하다가 마침내 케피소스 강까지 이르렀다. 그 곳에서는 피탈리데 사람들이 나와서 테세우스 를 영접하였다. 테세우스는 도중에서 살인한 죄를 정화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 청에 따라 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신에게 바칠 적당한 제물까지 준비하여 주었다. 그리고 테세우스 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테세우스가 여행하는 중에 이렇게 친절한 대접을 받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크로니우스의 8일째 되던 날에, 테세우스는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정 치가 수많은 당파와 무리들로 갈라져 있고 혼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게우 스와 그의 집안도 똑같은 분란 속에 고통받고 있었다. 코린트에사 도망쳐 온 메데이아가 자 신의 비방으로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아이게우스와 함께 살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가 누군인지를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게우 스는 아들인 테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이게우스는 이미 질투와 의심으로 가득찬 노 인이 되어, 모든 일이 그 당시 아테네에 있었던 파당의 계략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데이아는 연회를 베풀어 테세우스를 독살하자고 아이게우스를 쉽사리 설득할 수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테세우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당장에 밝히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먼저 자기를 알아보도록 기회를 드리고 싶어 테세우스는 상위에 있는 고기를 썰려는 듯이 칼을 뽑아 왕에게 보였다. 아이게우스 왕은 곧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들 임을 알고 그릇에 담긴 독을 쏟아버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여러 가지 사연을 묻고서 테세우 스를 품에 껴안았다. 이어서 모든 시민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한 후, 테세우스가 자기의 아들 임을 공포하였다. 시민들은 테세우스의 위대함과 용감함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기뻐하며 그를 환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릇에 담았던 독이 쏟아진 자리가 지금의 텔피니움에 있는 우묵한 곳이 라고 한다. 그 자리에 아이게우스 왕의 집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전 동편에 있는 헤흐메스의 흉상도 아아게우스 왕의 집 현관에 장식되어 있던 것이고 한다. 그런데 이전부터 팔라스의 이들들은 아이게우스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신들이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테세우스가 나타나 왕위계승자로 공포되자 매우 분노하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판디온의 양자에 불과하고, 아이레크테우스 가문과는 전혀 혈 연관계가 없는 아이게우스가 왕이 된것부터 잘못이었는데, 이제 와서 지나가던 이방인인 테 세우스가 왕통을 계승하게 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팔라스의 아들들은 전쟁을 선포하였다. 글은 전력을 나누어, 한편으로는 아버지 팔 라스와 함께 스페두스로부터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나머지는 복병이 되어 가르케투스 마음에 숨어 있었다. 두 갈래로 적을 동시에 습격하려는 계획있었다. 그런데 팔라스군대의 점령으로 일하던 아그누스 출신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오 스였다. 레오스는 팔란티데의 모든 계획을 테세우스에게 밀고하였다. 테세우스는 숲 속에 숨 어 잇던 적군을 불시에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파랄스의 아들들과 동료들은 모두 픝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팔레네 마을의 사람들은 아그누스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동맹도 맺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소식을 가지고 온 전 령도, 다른 지방에서처럼 '아코우테 레오'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않고 소식을 전하게 되었 다. 레오스의 배반 때문에 레오라는 소리조차 미워하게 된 것이다. 테세우스는 모험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테트라폴리스의 주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테트라포릴스의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는 황소를 죽이 기 위하여 마라톤으로 찾아갔다. 테세우스는 황소를 죽이기 위하여 마라톤으로 찾아갔다. 테 세우스는 황소를 사로잡아서 자랑스럽게 도시의 거리를 몰고 다니다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 에게 제물로 바쳤다. 전설에 의하면 이 원정에게 헤칼레(헤칼레구의 여신)가 테세우스를 접대했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무근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지방의 사람들은 특정한 날을 잡아 헤카레시아라고 불리는 제사를 드리고는 하였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제우스 헤칼레이우스 에게 바치는 것으로, 헤칼레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헤칼레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헤칼레가 테세우스를 대접하면 서, 그가 아직 어린 젊은이였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자신의 이름을 애칭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헤칼레는 테세우스가 싸움을 하기 위하여 떠나갈 때 제우스 에게 맹세했다. 만약테세우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 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헤칼레가 베풀어준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녀를 기념하는 제사 를 지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필로코로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와 같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고 크레타 섬에서부터 세번째로 공물을 거두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테네 인들이 공물을 바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 때문이었다. 크레타의왕자 안드로게오스가 아티카에서 암살되자, 부왕인 미노스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서 아테네 인들을 엄청난 곤 란에 빠뜨렸다. 더구나 신들도 그들의 나라에 무서운 재앙을 내렸다. 심각한 기근과 가뭄이 그들을 짓눌렀던 것이다. 심지어 강물까지도 말라버렸다. 그런데 신탁이 전하기를, 만약 아 테네 인들이 미노스의 마음을 달래어 화평을 맺는다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 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테네 인들은 간절한 탄원서와 함께 전령을 파견하 였다. 마침내 9년마다 소녀와 서년 7명씩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다음, 비로소 휴전을 맺을 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러나 가장 슬픈 이야기는 이 젊은이들이 크레타에 도착하면 라비린토스라는 미궁 속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찾지 못하고 헤매거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노 타우로스는(에우리피데스의시를 비리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서로 본성이 다른, 짐승과 인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필로코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크레타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라비린토스는 평범한 감옥이었으며, 절대로 탈출할 수 없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르게 나쁜 점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노스는 안드로게오스 왕자를 기리기 위하여 경기를 벌였는데, 바로 그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감옥 속에 가두어놓았던 소년들을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최초로 우승한 사람은 타우로스였다. 그는 나라 안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자비심이나 부드러운 심성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타우로스 는 상으로 받은 아테네 인들을 거만하고 잔인하게 대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보티아이 아의 정치형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미노스에 의해서 살해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견해를 밝혔다. 단지 크레타에서 노예로 일하다가 모든 생애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크레타 인들이 오랜 옛날의 맹세에 따라 첫아들을 델포이의 신전으로 보내고는 하였다. 그 중에는 아테네에서 떠난 아이들의 후손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지방에서 살아갈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였다. 처음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야피기 아 근처에 정착을 하였다가 나중에 트라키아로 또다시 이주를 하였는데, 이들을 보티아이아 라고 불렀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어떤 제사에서, 보티아이아의 처녀들이 '아테네로 다시 돌아가세' 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노래와 웅변을 잘하기로 이름난 도시 사 람들의 미움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아테네의 연 극에서 미노스 왕은 항상 비방을 받으며, 사악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헤시오도스가 미노스를 두고서 '어질고 훌륭한 왕'이라고 부르고, 호메로스도 '제우스의 가까운 벗'이라고 썼으나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노스는 연극에 등장할 때마다 항상 잔인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비추 어졌다. 그러나 미노스는 인정을 베푼 왕이었으며, 라다만투스와 같은 훌륭한 사람을 법관으 로 두어 그가 통치하는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게 하였던 사람이다. 세 번째로 공물을 보내야 할 때가 되자, 성년의 나이가 되지 않은 아들을 둔 아버지들은 제비를 뽑아 누구의 아들을 보낼 것인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이게우스 왕에 대한 새로운 불만과 원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사람들은 아이게우스 왕이 재난을 초래한 장본인이면서도 유일하게 혼자서 징벌을 면하고 있으며, 타국에서 찾아온 사 생아를 아들로 삼아 그들의 왕국을 넘겨주려고 한다면서 불평하였다. 또한 아이게우스가 사 생아도 아닌 정당한 아들을 잃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괴로움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투 덜거렸다. 이러한 말을 듣자 테세우스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것 이 아니라 차라리 시민들과 운명을 나누기로 결심하고, 자신은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크레 타로 가겠다고 자청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모든 사람들이 테세우스의 용기와 선행을 하려는 열성에 탄복하였다. 아이게우스 왕은 아무리 달래고 빌어도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 자 어쩔수 없이 포기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홀 라니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테네 인들이 제비를 보아 소년 소녀를 보낸 것이 아니고, 크레 타 왕인 미노스가 직접 찾아와서 마음데로 선택하였고 한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먼저 고른 것은 테세우스였다는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르면 배와 어린 남녀들을 아테네 인들이 준비해 놓고 미 노스와 함께 가는 젊은이들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나 만약 이들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면 공물은 더 이상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두 번이나 공물을 바친 경우를 보면 무사히 돌아올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배도 돌이 킬 수 없는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검은 돛을 달고 출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세우 스는 반드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부왕을 위로하였다. 왕은 흰 돛을 달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의 표시로 검은 돛을 달라고 일렀다. 그러나 시모니데스에 의하면 아이게우스 왕이 내어준 것은 흰 돛이 아니었다고 한다. 떡갈나무의 꽃봉오리에 담가 물을 들인 붉은 색 아이게우스 왕은 선장에게 붉은 돛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배의 선장은 아마르시아 스의 아들 페레클루스였다고 시모니데스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필로코로스에 의하면, 사라 미스의 스키루스가 보내온 나우시토우스라는 사람이 배를 조종하였으며, 파이악스라는 사람 이수로를 보았다고 한다. 아테네의 사람들은 아직 항해술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다. 스키루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제비로 뽑힌 아이들 가운데 스키루스이 외손자인 메네스테 스도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가 스키루스의 사원 근처에 나우시토우스와 파이악스 의 사당을 지은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테세우스는 또한 그들을 기 리기 위하여 키베르네시아라고 불리는 축제를 열기도 하였다. 제비뽑기가 끝나자 테세우스는 프리타네움을 벗어나 아이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델포이 에 있는 신전으로 가서 아폴론 신에게 탄원의 표시로 제물을 드렸다. 그것은 신성한 올리브 가지를 양털로 묶은 것이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낸 테세우스는 무니키온 달의 6일째 되는 날 아침에 출항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이 날이 되면 아테네 인들은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 전에 처녀를 보내서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테세우스는 델포이의 신탁 을 통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안내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항 해의 동반자이자 인도자로 모셔오기 위하여, 테세우스는 바닷가에서 암염소를 여신에게 바 쳤다. 그런데 갑자기 암염소가 수컷으로 변했다. 이 때문에 아프로데테는 에피트라기아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시인과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에 도착했을 때 아리 아드네가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라비린토스의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로 인해 미궁을 빠져나온 테세우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와 젊은 포로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테세우스는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크레타 배의 밑창에 구멍을 뚫어서 그들이 뒤쫓아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페레키데스는 전한다. 그러나 데몬의 기록에 의하면 미노스 왕의 장군이었 던 타우로스가 항구의 어귀에서 벌어진 행상 전투에서 테세우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로코로스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미노스 왕은 해마다 경기를 개 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열린 경기에서 타우로스는 언제나 승리의 상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미노스는 네 번째의 경기를 시작하면서 타우로스에게 그런 명예를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타우로스의 성품이나 태도가 눈에 거슬렸을 뿐만 아니라, 파시파에(미노스의 아내)와 너무 가깝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미노스 왕은 테세우수가 타우로스와 경기 를 갖고 싶어하였을 때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크레타의 풍습은 여자도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아리아드네도 그 경기에 참석했었는데, 테세우스의 늠름한 모습과 모든 적수들을 물리치는 용기와 힘에 반해 버렸다고 한다. 미노스 왕 또한 테세우스가 타우로스를 땅으로 내던져서 망신을 주자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아테네의 아이들을 테세우스에게 돌려주고 앞으로 그들을 공물로 받는 일을 중지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클리데무스는 여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먼 과거의 야심적인 사건에서 시작된다. 즉 그리스의 모든 나라들이 합의한 법령이 있었다. 그 법령은 어떤 배라 하더라도 다섯 사람 이상을 태우고 출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다만 거대한 선박 아르고의 선장이었던 야손만이 예외였다. 야손은 바다를 돌아다니며 해적을 소탕하였 던 것이다. 그런데 크레타 섬을 탈출하여 다이달루스가 바다를 건너서 아테네까지 도망치자 미노스는 이 법령을 어기고 여러 척의 군선을 거느리면서 추격하였다. 그러나 미노스는 시칠리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익사하고 말았다. 미노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데우칼리온은 아테네 인들 과 싸움 벌이고 싶었다. 그는 다이달루스를 보내오지 않으면, 미노스가 지금까지 공물로 받 아두었던 젊은 아테네 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렇게 분노에 차 있는 데우칼 리온의 전갈에 대해, 데세우스는 매우 정중한 변명을 하면서 다이달루스를 보 낼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다이달루스는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으로 사촌지간이었던 것이다. 다이달루스는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으로 사촌지간이었던 것이다. 다이달루스는 어머니 메로페는 데레크 테우스의 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테세우스는 은미하게 함대를 건조하고 있었다. 왜 냐하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티모이타다이 마을 근처에서 배를 만들었 기 때문이다. 티모이타다이 마을은 휴양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트로이젠에 있는 할아버지 피 테우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함대가 모든 준비를 마치자 테세우스는 출항하였다. 다이달루스와 크레타에서 망명을 하 였던 사람들이 그와 함께 동행하면서 길을 안내하였다. 크레타의 사람들은 테세우스가 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테세우스의 함대를 보았을 때, 단지 친구들이나 크레타 의 배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자신이 직접 항로구 진입하였다. 그리고 적이 미 처 알아차리기 이전에 크노소스로 진군하였다. 마침내 미궁의 입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테세우스는 테우칼리온과 그의 병사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싸움을 통해 아리아드네를 왕위에 앉힌 테세우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또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모두 되찾았으며 아테네와 크레타 사이의 영원한 우정을 약속받았다. 테세우스 는 두 번 다시 아테네 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으면서 아리아드네를 왕위 에 앉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과 아리아드네에 관해서는 아직도 다른 여러 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전설들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로부터 버림 받고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의 배 를 타고 낙소스 섬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그녀는 디오니소스의 제사장인 오이나로 스와 결혼을 했다. 왜냐하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그 곳에 두 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독수리와 같은 상이 그의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메가라 사람이었던 헤레아스의 말에 의하면, 이 구절이 헤세오도스의 작품 속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피시스트라투스가 이 구절을 빼버렸다고 한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 하여 쓴 글에 호메로스가 아테네 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던 것처럼 말이다. 페리토오스와 테세우스는 신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테세우스와 아 리아드네 사이에는 스타필루스, 오이노피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키오스의 시인 이었던 이온이 그가 출생한 도시에 대하여 지은 시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테세우스의 아들 오이노피온이 세운 이 도시. 이 외에도 누구나 이 전설적인 이야기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투스 사 람 파이온은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테세우스는 풍랑에 밀려서 키프 로스섬에 도착하였다. 아리아드네는 임신을 하였기 때문에 배가 불러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바다에서 배의 동요가 심하자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해안 에 내려 놓고, 자신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도시 승선하였다. 그런데 갑자 기 거친 폭풍이 불어와서 테세우스가 타고 있던 배를 바다로 밀고 가버린 것이다. 이 섬의 여인들은 아리아드네를 몹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들은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 혼자 남게 된 아리아드네의 슬픔을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해산할 때가 되자 테세우스가 보낸 것처럼 꾸민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리아드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 은 모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해산을 하기 이전에 아리아드네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람 들은 엄숙하게 아리아드네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아리아드네가 죽은 직후에 다시 돌아온 테세우스는 매우 슬퍼하였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아리아드네의 제사 를 지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또한 두 개의 작은 초상까지 만들어 세웠는데 하나는 금,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리피아이우스 달의 이틀째 되는 날에 아리아드네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한 젊은이가 땅에 누워서 해산하는 여자의 고통을 흉내내며 신음한 다. 그리고 아마투스 사람들은 지금도 아리아드네의 무덤이 있는 덤불숲을 '아리아드네의 숲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과 다른 낙소스 섬의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두 명의 미노스아 두 명의 알아드네가 있다고 한다. 그중의 한 아리아드네는 낙소스 섬에서 디오니 소스와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스타필루스 형제를 낳았다. 또한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또 한 명의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끌려갔다가 버림받고 낙소스 섬으로 찾아왔다. 그 당시에 코르키네라는 유모가 따라왔다고 하며, 사람들은 아직도 그녀의 무덤이 있는 곳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어린 아리아드네도 이섬에서 죽었으며, 그녀를 기리는 제사 또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나이 많은 아리아드네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지낸다. 그녀의 제사는 대 단히 즐겁게 뛰어놀면서 흥겹게 지내지만, 나이 어린 아리아드네에게 바쳐지는 제사는 슬픔 과 우울함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크레타로부터 돌아오던 도중에 테세우스는 델로스에 들렀다. 그리고 그 섬의 신에게 제사 를 드리면서 아리아드네에게서 받은 아프로디테의 초상을 신전에 바쳤다. 테세우스는 아테 네의 젊은이들과 춤을 추며 기도하였다. 이 춤이 오늘날까지도 델로스 사람들 사이에서 테 세우스를 기리는 풍속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춤은 일정한 간격으로 굽이굽이 방향을 바 꾸어가며 추는 것으로, 꼬불꼬불한 미궁의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디케아르쿠스는 델로스 사람들이 이 춤을 '학의 춤'이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케라톤이라는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이제단은 케라톤의 왼쪽 머리에서 뽑은 뿔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 설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델로스에 시합을 창설하였으며, 이긴 사람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주 는 풍습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아티카의 해안으로 다가오면서 항해의 성공에 너무도 들뜬 나머지, 테세우슨 물론 배의 선장도 흰 돛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흰 돛은 아이게우스에게 그들의 무 사함을 알려주는 표시였던 것이다. 검은 돛의 배를 보고 절망한 아버지는 그만 절벽에서 몸 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팔레룸의 항구에 도착하자 마자, 처음 바다로 나가면서 신에게 맹세한 대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 하도록 도시에 전령을 보냈다. 도시에 들어선 전령은 많은 사람들이 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도시는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쁨에 가득 찼다. 사람 들은 전령을 환영하며 꽃다발을 받아서 전령의 상징인 단장에 매달았다. 전령이 바닷가로 돌아와 보니 테세우스의 제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령은 신성한 의식을 방해할까 두 려워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왕의 죽음을 알 렸다. 이 소식을 듣자 모두들 비탄과 울음을 터뜨리며 서둘러서 도시로 달려왔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오스코포리아 제에서 꽃다발을 전령의 머리에 얹지 않고 그의 단장에 얹는 것이 다. 또한 승리의 제사를 드릴 때는 '엘렐레우, 요우, 요우'하고 소리를 내는데, 처음에는 개선 의 노래처럼 부르다가 나중에는 슬픔에 놀란 듯이 부른다.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 피아네프시온 달의 제7일째 되는 날에, 자신의 맹 세대로 아폴론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바로 이 날 크레타로부터 살아서 무사히 돌아 온 젊은이들이 도시로 입성했기 때문이다. 이 날의 축제 때 콩을 끓이는 풍습은 여기에서 유해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살아 돌아온 젊은이들이 나은 식량을 모두 모아 커다란 하나 의 단지에 넣고 끓여서 축제를 벌이며 다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테네 사람들은 양털 로 묶은 올리브나무가지를 들고 돌아다녔다. 그것을 온갖 과일로 왕관을 두른 에이레시오네 라고 부르는데, 기근과 흉년이 끝이 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행진을 하면서는 다음과 같 은 노래를 불렀다. 에이레시오네, 우리에게 무화과를 주소서, 빵을 주소서. 우리에게 꿀과 향기로운 기름을 주소서. 그리고 강한 맛이 나는 포도주를 주소서. 모두가 즐겁게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어떤 이들은 이 행사가 헤라클레스를 기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테네 인들이 그를 모셔다가 이와 같이 대접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소개된 것이 많은 사 람들의 견해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과 함께 돌아온 배는 30명이 노를 젓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배를 데메트리우스 팔렐레우스의 시대까지 보전하며, 오 래 되어 썩은 부분은 더 튼튼한 새 재목으로 바꾸어 넣었다. 철학자들은 그 배를 변화와 성 장의 상징으로 삼았다. 어떤 이는 그 배가 원상 그대로 보전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 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스코포리아라고 불리는 축제나 혹은 올리부나무의 축제는 오늘 날까지도 아테네 사람들이 지키는 풍습으로, 테세우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테세우스가 크 레타 섬으로 갈 때, 제비를 뽑아 결정된 처녀들은 모두 데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자기와 가까운 젊은 친구들 중에서 남자답고 씩씩하지만 외모가 여자처럼 아름답게 생긴 두 사람을 골랐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따뜻한 물로 자주 목욕을 시키고, 살결이 타지 않도록 햇빛도 피하고 머리와 살결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꾸준히 가꾸었다. 또한 걸음걸이까지도 여자의 흉내를 내게 하고 목소리도 다르지 않게 보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여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였다. 테세우스는 아무도 모르게 두 사람을 크레타로 가는 처녀들 사이에 포 함시켰던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 테세우스와 이 두 사람은 엄숙한 행렬을 앞에서 인도하였 다. 오늘날 포도덩굴을 들고 가는 사람들도 그들이 입었던 복장을 한다. 이때 들고 다니는 나뭇가지는 앞서 이야기한 것돠 같은 전설에 따라,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를 기념하기 위 한 것이었다. 혹은 테세우스의 배가 돌아왔을 때가 마침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가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제사 때는 노이프노페라이라고 불리는 여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참가한다. 제비로 뽑혀 갔던 소년과 소녀들의 어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늘 음식을 갖다주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아들과 딸들에 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위험에 대비하여 용기와 위 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아직 풍습으로 남아서, 이 축제에서는 옛 전설들과 이야기 들을 나누게 된다. 이러한 자세한 이야기들은 데몬의 기록에서 얻은 것이다. 당시에 한 장소 가 선택되어 테세우스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공물로 바쳐졌던 젊은이들의 집안에 서 테세우스를 위한 신전에 세금을 내기로 약속이 되었다. 피탈리아이 가문의 사람들이 이 모든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들이 이전에 테세우스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어준 데 대한 보답 으로 명예로운 이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죽은 뒤, 테세우스는 마음 속에 엄청나고 놀라운 계획을 세웠 다. 아티카의 모든 주민을 한 곳에 모이게 하고 하나의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까지는 널리 흩어져 살았으므로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 의 의견차이로 인해 싸우는 일까지도 있었다. 테세우스는 모든 마을과 가문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그들의 동의를 얻었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사람들은 이 반가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었다. 테세우스는 마을의 지도자들에게 왕도 없는 민주주의 국가, 혹은 민중에 의해 통치되는 공산국가를 약속하였다. 그 나라에서 자신은 다만 군대의 지휘관이며 법의 수호자 의 구실을 할뿐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 한 수단을 통해 그들 중 일부는 테세우스의 제안에 넘어왔다. 나머지 사람들도 테세우스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이미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테세우스의 용기와 굳은 결심 을 알고 있었으므로 강제에 의해 굴복하느니 차라리 동의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었다. 먼저 테세우스는 사방에 흩어져 있는 정부 청사나, 의사당, 법원등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 리고 현재 윗동네가 있는 자리에 모두를 위한 청사와 회의장을 지었다. 테세우스는 통일된 나라 안에 아테네라는 이름을 선포하고 모든 시민이 다 함께 참여하는 단일 명절을 마련하 였다. 이 명절을 파나테나이아라고 불렀는데, 통일된 모든 아테네 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테 세우슨 또한 메토이시아 혹은 이민들의 축제라고 불리는 명절도 제정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까지도 헤카톰바이온 달 제 16일에 행해지고 있다. 테세우스는 약속한 대로 법적인 권력을 내놓고 공화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신의 계시도 받지 않고서 이렇게 엄청난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델포이에 신탁을 묻는 사람 을 보내어 새로운 정부와 도시의 운명을 물어보았다. 마침내 테세우는 이러한 신의 대답을 얻었다. 피테우스의 딸의 아들이여, 나의 아버지께서 그대의 도시에 많은 나라들의 운명과 앞날을 맡기셨도다.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마라. 그를 침범하는 파도 속에서도 그대는 배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먼 후세의 점술가도 아테네를 두고 같은 예언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구절이다. 부목은 물을 젖는다 해도 침몰하지 않으리라. 테세우스는 시민의 수를 더욱 많게 하려는 계획으로 모든 이방인들을 환영하여 아테네 시 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였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여, 이 곳으로 오라'는 말은 그 당시 테세우스가 모든 민족을 위한 공화국을 세웠을 때 내세운 호소였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아테네에 온갖 종류의 민족들이 몰려들어옴으로써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질서나 위계도 없는 상태가 되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는 먼저 공화국을 귀족과 평민과 직 공이라는 세 개의 뚜렷한 신분으로 나누었으며, 귀족에게는 제사, 정치, 교육, 풍속의 통솔을 맡겼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은 계급과 세력에 있어 평등하였다. 왜냐하면 귀족은 명예로 농 민은 이익으로, 그리고 직공은 그 숫자에 있어 서로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왕위를 스스로 내놓은 사람은 테세우 스가 처음이라고 한다. 호메호스도 배의 목록을 기록하면서 모든 왕국들 중에 오직 아테네 인들만을 인민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같은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테세우 스는 돈을 주조하였다. 그는 동전에 황소의 모습을 새겼다. 그것은 아마도 마라톤의 황소를 기리기 위해서나, 테세우스 자신이 패배시킨 타우로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면, 시민들의 정 신 속에 부지런함을 배우라는 뜻을 새기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물건의 가격을 '황소 열', '황소 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동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 후로 테세우스는 메가라를 아티카와 합병하고, 이스트무스에 있는 저 유명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양면에는 두 나라의 경계선이 바로 이곳에서 만남을 밝히는 두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즉 동쪽 면에는 '저기는 펠로폰네소스, 이 곳은 이오니아다'라고 새기고, 서쪽 면에는 '여기는 펠로폰네소스, 저곳은 이오니아다'라고 새겼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또한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운동경기를 개최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영웅의 약속 에 따라 제우스를 위하여 올림피아 경기를 거행하듯이, 테세우스 자신의 개최에 의해서 포 세이돈을 위한 이스트미안 경기를 거행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이전부터 지켜지던 경기는 멜리케르타를 위한 것으로 밤중에 은밀하게 행해졌다 그러므로 많은 군중들을 위한 구경거리나 대중적인 축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행사에 가까 웠다. 어떤 설에 의하면 이스트미안 경기는 스키론의 위령제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테세 우스는 이러한 제사를 통해 스키론을 죽인 죄를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스키론은 피테우 스의 딸인 헤니오카와 카네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테세우스에게는 가 까운 친척인 셈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헤니오카의 아들이 사실은 스키론이 아니라 시 니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스트미안 경기는 다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스스 로를 기념하기 위해 테세우스에 의해서 제정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테세우스는 코 린토스 사람들과의 합의를 맺었다. 아테네로부터 이스트미안 운동제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는, 경기를 관람하러 온 다른 구경꾼들보다 앞서서 자리를 주도록 한 것이다. 또한 그 자리 의 크기는 아테네 인들을 싣고 온 배를 돛을 최대한 넓게 펼쳤을 때 덮을 수 있을 넓이만큼 으로 정했다. 헬라니쿠스와 하리카르나수스의 안드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에우크시네 바다로 간 테세우스의 항해에 관하여 필로코로스와 그외의 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함께 항해를 떠났다. 그리고 아마존 여군과의 싸움 에서 헤라클레스를 도와주었다. 이 싸움에서 테세우스는 그의 용기에 대한 상으로 안티오페 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페레키데스, 헬라니쿠스, 헤로도토스 등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테세우스 는 헤라클레스보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자신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항해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존 여군을 사로잡았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더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테세우스 와 함께 출정하였던 사람들 중 다른 누가 아마존의 포로들을 생포하였는지 읽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온의 기록에 위하면 테세우스는 계략을 써서 아마존 여장부를 사로잡은 뒤 달 아났다고 한다. 천성적으로 나자를 사랑하는 아마존 여인들이었기에 테세우스를 피하여 달 아날 리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테세우스가 해안에 닿았을 때 그들은 배로 예물을 보내었 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안티오페에게 배로 올라오라고 초대하고서 즉시 출항해버리고 말았 다. 그러나 비티니아의 니카이에 대한 역사를 쓴 메네크라테스에 의하면, 테세우스는 안티오 페를 배에 싣고서 한동안 해안가를 순항하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배 안에는 테세우스를 따 라 이번 항해에 참가한 세명의 아테네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형제로 에우네오스, 토아스, 솔론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삼형제 중의 가장 막내인 솔론이 안티오페와 절망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솔론은 가장 가까운 한 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친구를 시켜서 안티오페에게 자신의 열정을 알렸다 안티오페는 매우 조심스런 태도로 솔론 이 보낸 선물을 거절하였다. 그녀는 이 문제를 조심스런 태도로 솔론이 보낸 선물을 거절하 였다. 그녀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고 분별 있게 대하여 테세우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론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바닷가에 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솔 론의 죽음과 죽음의 원인이 된 불행한 사랑에 대하여 알게된 테세우스는 몹시 슬퍼하였다. 이렇게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중, 언젠가 델포이에서 받은 신탁이 테세우스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아폴로의 여사제인 피티우스로부터 받은 신탁의 내용은, 낯선 땅의 어느 곳에서라 도 그가 뼈아픈 슬픔과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면 그 곳에 도시를 세우고 동료들을 통치자로 남기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테세우스는 이 곳에 도시를 세우고 아폰론의 이름을 따 서 피오폴리스라고 명명하였다. 도시의 가장자리를 흐르는 강물의 이름은 불운하게 죽은 젊 은이를 기리기 위하여 솔론이라고 하였다. 또한 솔론의 남은 형제들로 하여금 법과 정치를 돌보게 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아테네 피토폴리스에는 헤르무스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남 아 있다. 그런데 발음상의오류로 인하여 이 집은 헤르메스 신의 집으로 잘못 불리게 되었다. 결국 한 영웅을 기릭 위한 명예가 신의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아라존 인들이 아티카를 침공하게 된 시작과 원인은 바로 이와 같다. 아마존 인들은 여인 이었으나 조금도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도시 근처의 마을들을 먼저 정 복하지 않았다면 도시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무세움이라 불리던 언덕과 프닉스 근처에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존 여인들이 육지로 멀고 험난한 여행을 하고,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존 인들이 도시 안에 천막을 쳤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지명이나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무덤들이 그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양쪽의 군대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먼저 전격하기를 두려워하여 침묵과 의혹만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테세우스가 두려움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그가 받은 신 탁의 명령에 복종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이 전투는 보이드로미온 달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테네 사람들이 바로 이 날 보이드로미아 제를 지내는 것이다. 클리데무스는 매우 자세한 상황을 남기고자 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아마존의 왼쪽 진영은 오늘날 아마조니움이라고 불리는 장소로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오늘쪽 진영은 크리 사서 나와 공격하였다. 그곳에서 살행당한 자들의 무덤이 지금도 피라익이라고 불리는 성문 으로 향하는 거리에서 볼 수 있다. 이성문의 근처에는 칼코돈이라는 영웅의 사당이 있다. 여 기서 아테네 군대는 패배하여 여인들에게 길을 내주고 멀리 분노의 신의 신전까지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팔라디움과 아르네 군대는 오른쪽 진영을 공격하고 아마존 여인들의 막사까 지 적을 후퇴시켰다. 이러한 와중에 수많은 아마존의 여전사들이 살해당했다. 마침내 넉 달이 지난 후, 히폴리타의 중재로 인하여 아마존과 아테네 사이에 평화가 돌아 왔다. 하지마 다른 역사가에 의하면 안티오페는 테세우스와 나란히 서서 싸우다가 몰파디아 가 던진 창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올림피아에 있는 땅의 신의 신전 곁에 세워 있는 기 둥은 안티오페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래 전 옛날에 일어난 일이리만큼 아무리 역사라 할지라도 다소 틀리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전설도 들을 수 있다. 안티오페가 부상당한 아마존의 전사들을 몰래 칼키스로 운반하여 많은 전사들을 간호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들 은 매장을 해주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은 아마조니움이라는 곳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휴정 조약으로 끝난 것만은 분명하다. 양군이 이 조약을 지키기로 엄숙히 맹세한 자리가 지금 테 세우스의 사당과 인접해 있는 곳인데, 호르코모시움이라는 이 곳의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 이다. 또한 테세우스의 기념제에 앞서 아마존 인들의 위령제를 지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 다는 사실로부터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메가라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도시 안에 아마 존 인이 묻힌 장소를 보여준다. 그 곳은 장터에서 루스로 가는 길에 있는데, 다이아몬드 형 태의 건물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마존 전사들의 일부는 케로네아에서 전사하여 그곳을 흐 르는 작은 강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그 강의 이름이 테르모돈이었으나 지금은 헤 몬이라고 부른다. 이 강에 대한 이야기는 데모스테네스 생애 편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아마 존의 전사들이 테살리 지방을 지나올 때에도 적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스코투사와 키노스케팔라이 근처에 많은 아마존 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기 때 문이다. 아마존 인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이 정도다. 테세이드라고 불리는 서사시의 작가는 아 나존의성장과 안티오페가 어떻게 자신을 정복하고 파이드라와 결혼한 테세우스에게 복스를 하였는지, 그리고 아마존의 부하들을 이끌고 도시로 쳐들어 왔는지, 또한 헤라클레스가 아마 존의 전사들을 살해 한 것 등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꾸며 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오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와 결혼했다. 그리고 안티오페와의 사이에서는 히폴리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핀다로스의 시에는 아들의 이름이 데모폰으로 되어 있다.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와 파이드라에게 불어닥친 슬픈 운명은 여러 역사학 자와 비극시인들이 쓴 내용과 일치하므로 우리는 그들이 기록한 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것 이다. 테세우스의 결혼에 대한 또 다른 전설들도 있다. 이것들은 명예로운 사건들도 아니며 행 복한 결말도 아니어서, 오늘날 그리스 연극에서도 결코 상연되지 않는다. 테세우스는 트로이 에 살던 아낙소라는 여자를 유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시니스와 그의 아내 케르키온을 죽 이고 딸들을 강탈하였으며, 아작스의 어머니인 페리보이아와 결혼하였고 그 다음에는 페레 보이아 그리고 이피클레스의 딸인 이오페 등의 여자들과도 결혼하였다. 또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파노페우스의 딸 아이글레를 사랑하는 등의 파렴치한 행동 을 하였으며, 결국에 가서 테세우스는 헬레네를 겁탈하였고 그로 인하여 아티카 전체가 전 쟁과 피로 물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테세우스는 추방되어 타향에서 죽 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비록 그 시대에는 용감한 전사들이 행한 여러 가지 전설적인 원정이 많이 있지만, 테세우 스는 그런 일을 행한 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헤로도루스의 견해다. 다만 라피티아아 더불 어 괴물 켄타우르스와의 전쟁을 치른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여러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야손과 함께 콜키스와 멜레아거로 가서 칼리도니아의 멧돼지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 였다고 한다. 이 일로부터 '테세우스가 없이는 안 된다'라는 속담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느느 어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수많은 영광스런 원정에 나섰다. 그 렇게 때문에 '제2의 헤하클레스'라는 말이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테세우스는 또한 아트라 스토스와 협력하여 테베의 강 앞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들이기도 하였다. 하지 만 에우리피테스가 그의 비극에 적은 것처럼 무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아 온 것은 아니다.대 부분의 역사학자들이 기록한 바대로 설득과 상호 간의 동의에 의한 것이었다. 필로코로스는 이것이 시체를 찾기 위하여 이루어진 최초의 협상이라고 덧붙여 적고 있다. 하지만 '헤라클 레스 전기'를 보면, 적들에게 전사자의 시체를 가져가도록 처음으로 허락해 준 사람은 바로 헤라클레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 군병들의 무덤은 아직도 엘레우테라이라고 불리 는 마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휘관들의 무덤은 엘레우시스에 있는데, 이것은 테세우스가 아드라스토스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장소를 지정해 준 것이다. '탄원자들'이라는 에우리피데 스의 극은 '엘레우시니안즈'라는 아이스킬로스의 극과 상치되는 점이 있는데, 이 연극에서는 테세우스가 직접 여기에 적은 것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한다. 테세우스와 페리토오스 사이에 맺어진 유명한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테세우스의 힘과 용기에 대한 명성은 그리스 전체에 퍼져나갔다. 페리토오스는 그 사실을 직접 시험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한 목적으로 테세우스의 소유인 한 떼의 소들은 붙잡 아서 마라톤의 들판으로 몰아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테세우스는 손수 무기를 가지고 페리 토오스를 쫓아왔다. 페리토오스는 도망치니 않고 뒤돌아서서 정면으로 테세우스를 맞이하였 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늠름한 자태와 아름다움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싸움에 대한 모든 생각을 잊 어버렸다. 먼저 페리토오스가 테세우스에게 손을 내밀며 이번 일에 대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테세우스가 정하는 어떤 벌이라도 기꺼이 받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테세우 스는 페리토오스의 잘못을 모두 용서할 뿐만 아니라, 친구이며 형제가 되자고 제의했다. 그 리하여 두 사람은 우정을 맹세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페리토오스가 데이다미아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페리토오스는 테세우 스를 결혼식에 초대하면서, 자신의 나라에 와서 구경도 하고 라피타이 사람들과 사귀기도 하라고 청하였다. 페리토오스는 또한 켄타우르스 족을 향연에 초대하였는데, 그들이 술을 먹 고 취하여 그만 무례하고 거칠게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켄타우르스들은 심지어 여자들에게 까지 폭력을 행사하였으므로, 라피타이 사람드은 즉시 보복하여 많은 그 자리에서 켄타우르 스들을 죽이고 말았다. 싸움에서 켄타우르스들을 이긴 사람들은 그들 종족 모두를 나라 밖 으로 몰아내 버렸다. 테세우스는 이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라피타이 사람들의 편에 서서 같 이 싸웠다. 그러나 헤로도루스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테세우스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라피타이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길에서 테세우스는 처음으 로 헤라클레스를 만났다. 그는 트라키스에서 헤라클레스를 찾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헤라 클레스는 모든 방랑과 힘든 일을 마친 후에 편안히 쉬기 위하여 트라키스로 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최대한의 조경과 함께 많은 칭찬을 주고받으며 반갑게 만났다고 한 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두 사람은 이전에도 자주 만났으며, 헤라클레스가 엘레우시 스에서 종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테세우스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헤라클레스 는 입문에 앞서, 전 생애에 걸쳐 무모하게 죄를 범한 일에 대하여 속죄를 빌었다고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 사실인 듯이 생각된다. 헬라니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헬레네를 유괴한 것이 50세 때의 일이며, 그때에 헬레네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엄청난 죄를 테세우스에게 돌이고 싶지 않은 역사가들은 헬레네를 유괴한 것은 테세우스 자신이 아니라 이다스와 린케우스가 납치자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헬레네를 테세우스에게 데리고 와서 그 의 책임 아래 맡게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세우스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요구를 거 절하고 헬레네를 내어놓지 않았다. 또 다른 이들은 말하기를 헤레네의 아버지 틴다루스가 테세우스의 손에 맡기려고 헬레네를 보낸 것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히포코온의 아들 에날 포루스가 아직 나이 어린 헤레네를 강제로 데려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 만 가장 믿을 만하고 양편 모두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테세 우스와 페리토오스는 스파르타로 갔다가 다이아나 오르티아의 신전에서 춤을 추고 있는 헬 레네를 보고 납치하였다. 그러자 곧바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추격을 해왔다. 하지만 테게 아 이상은 쫓아오지 못했다. 테세우스와 페리토오스는 위험에서 벗어난 것을 알고 페로폰네 소스 지방을 유유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약속을 하였다. 두 사람이 제비를 뽑아, 뽑힌 사람이 헬레네를 아내로서 맞이하고 진 사람은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제비를 뽑은 결과 행운은 테세우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헬레네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렸 으므로 아피드나이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 중 한 사람인 아피드누스와 함께 테 세우스의 어머니인 아이트라를 보내었다. 테세우스는 그들에게 헬레네를 잘 돌보아주고, 어 느 누구도 헬레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에피루스로 가는 페리토오스의 여행에 동행하였 다. 그들은 몰로시아의 왕 아이도네우스의 딸을 몰래 훔쳐오려고 했던 것이다. 아이도네우스 혹은 플루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왕에게는 페르세르피나라고 불리는 왕비와 코라라는 공주 가 있었다. 왕의 궁전에는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개의 이름은 케르베루스였다. 왕은 딸에게 구혼하는 사람에게 누구나 이 개와 싸워 이겨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테 세우스와 페리토오스가 온 것은 딸에게 정식으로 구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납치하려는 의도 임을 알아채고, 왕은 두 사람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페리토오스를 개의 먹이로 던져 갈갈이 찢어 죽이고 말았다. 한편 테세우스는 감옥에 넣고 엄중히 감시를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메네스테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레크테우스의 후손으로 오르네우 스의 손자요 피테우스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싶어 처음으로 선동연 설을 자행한 사람이라고 한다. 메네스테우스는 오래 전부터 남몰래 테세우스에게 원한을 품 고 있던 도시의 귀족들을 충동질하여 격노하게 하였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테세우스가 그들 의 작은 왕국과 주권을 빼앗고 한 도시에 그들을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테세우스의 부하나 노예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네스테우스는 또한 평민들을 선동 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메네스테우스는 평민들이 자유에 대한 꿈에 현혹되어, 실상은 그들에 게 알맞은 종교의식과 고향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자비롭고 선량한 왕을 가지는 대신 타지에서 굴러들어온 낯선 자에게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넘겨주었 다고 하였다. 이렇게 메네스테우스가 시민들의 마음을 선동하느라고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데, 카스토르 와 폴룩스가 아테네를 향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메네스테우스가 조장하고 있던 선동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메네스테우스의 설득에 의해서 적들이 침공 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적들도 처음에 공격해왔을 때에는 횡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다 만 누이 헬레네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그러나 헬레네가 도시 안에 없을 뿐 아니라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알지 못한 다는 아테네 인들의 답변을 듣자, 적들은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바로 그때 아카데무스가 온갖 수단을 다하여서 헬레네가 있는 곳을 알아내 었다. 그리고 헬레네가 아피두나이에 비밀리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바로 이 같은 일 때문에 아카데무스는 평생 동안 카스토르와 폴룩스에게 높이 공경을 받았다. 스파 르타 군은 이후로도 자주 쳐들어왔으나 아카데무스가 살던 아카데메이아는 건드리지 않았다 고 한다. 한편 디카이아르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군대 안에는 두 명의 아르카 디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에케데무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마라투스였다. 오늘 날 아카데미아라 불리는 곳이 그 당시에 에케데무스의 이름을 따서 에케데미아라고 불렀던 곳이다. 또한 마라톤이란 마을은 마라투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마라투스는 신 탁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모든 군대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군사들은 아피드나이에 도착하자마자 전쟁을 일으켜 모든 적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마을을 침략하여 점령해버렸다. 이 전쟁에서 스키론의 아들 아리쿠스가 디오스쿠리 (카스토르와 폴룩스)편에서 서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메가라의 알리쿠스가 묻힌 장소는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헤레아스는 테세우스가 알리쿠 스를 살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증거로 알리쿠스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시구를 인용 하고 있다. 아피드나이 벌판 위에 누워 있는 알리쿠스. 아름다운 헬레네로 인해 테세우스에 의해 살해당한 자. 그러나 아테네가 점령당하고 어머니까지 포로가 된 마당에, 테세우스가 그곳에 있었으리 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아피두나이 마을이 점령당하자 아테네의 시민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메네스테우스는 성문을 열고 친절한 태도로 스파르타의 군대를 맞이하자고 사람들 을 설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해를 입힌 테세우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도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파르타 인들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며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스파르타 인들의 행동은 메네스테우스의 약속에 신뢰를 줄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의 절대적인 정복자가 되었으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아테네의 종교에서 신으로 인정받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헤라클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테네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헤라클레스도 그들과 같이 신으로 추앙되는 명예를 얻었던 것이다. 아테네 인들은 그들의 요구를 쉽게 받 아들였다.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필리우스의 양자가 되었듯이 그들도 아피드누스의 양자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신과 같은 명예를 얻으며 새로운 이름인 아나케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은 전쟁이 끝났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비록 성 안에 많은 군사를 두 었더라도 시민들에게 절대 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돌보아준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어 아나코스 에케인이라는 구절은 무언가를 돌보는 사람에게 사용되 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늘에 나타난 그들의 별자리를 보고서 그렇게 부르 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티카의 방언에서 아낙테스라는 이름은 '위'를 의미하는 단어와 매 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어머니 아이트라는 포로로 붙잡혀서 라케다이몬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다시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로 납치되어 갔다. 호메이스의 다음과 같은 시구는 아이트라가 헬레네와 동행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헬레네와 같이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피테우 스의 딸 아이트라와 커다란 눈을 가진 클리메네. 다른 사람들은 이 구절이 호메르스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마치 무니코스에 관 한 모든 전설을 부정하듯이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무니코스는 라오디케와 데모폰사이의 사 생아이며 트로이에서 아이트라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터는 '아티카의 역사'의 제13권에서 아이트라에 관한 전혀 색다른 이야기를 싣 고 있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는 테살리 지방에 있는 스페르키우스 강 근처에서 파리스 를 정복하였다. 한편 헥토르는 트로이젠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갇혀 있던 아이트라를 납치해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몰로시아를 지나가던 헤라클레스는 도중에 아이도네우스 왕의 환영을 받았다. 아이도네우 스 왕은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우연히도 테세우스와 페리토오스가 그의 나라를 여행한 이야 기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이 나라에 왔다가 결국 붙잡혀 극심한 고통 을 겪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헤라클레스는 페리토오스가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한 것을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테세우스에 대해서 는 더 이상 개탄해야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자신을 보아서라도 테세우스만은 구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마침내 아이도네우스 왕은 허락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자유의 몸이 된 테세우스는 나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에는 테세우스의 동지 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 시가 그의 몫으로 돌려준 토지를 모두 헤라클 레스의 성지로 바치고, 토지의 이름도 테세아라고 하던 것을 헤라클레아라고 바꾸었다. 그리 고 다만 네 곳만을 자신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테세우스는 돌아오는 즉시 예전처럼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어 정치를 주관하려 하였 다. 그러나 곧 심한 저항에 부딛쳤다. 오랫동안 테세우스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이제는 강력 한 세력이 되어 테세우스를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평민들의 마음도 완전히 타락하여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에 잘 달래야만 비로소 움직였다. 테세우스는 힘으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반대파들에게 졌다. 결국 아테네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 테세 우스는 자식들을 비밀리에 에우보이아로 보냈다. 그리고 칼코돈의 아들 엘레페노르에게 돌 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테세우스 자신은 가르게투스 마을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엄숙히 저주를 내리고 스키로스를 향해 출항하였다. 그리하여 이 곳에는 아직도 저주의 장소라는 뜻의 '아리케리온'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남아 있다. 스키로스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있었으며 테세우스는 섬사람들이 친절하게 맞 아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에 스키로스의 왕은 리코메데스였다. 테세우스는 왕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서 그의 땅을 돌려달라고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니 도와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리코메데스는 위대한 테세우스의 영광을 질투하였거나 혹은 메네스테우스에게 잘 보이려 고 하였던 것 같다. 그는 테세우스에게 돌려줄 토지를 구경시켜준다는 구실로 그를 가장 높 은 산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테세우스가 평소의 습관대 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산책을 하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떨어졌다고도 한다. 테세우스가 죽은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죽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관심을 두는 사 람도 없었다. 그리고 메네스테우스는 재빨리 아테네의 왕권을 차지하였다. 한편 테세우스의 아들들은 비밀리에 자라났다. 그리고 엘레페노르와 더불어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 나 메네스테우스가 원정 도중에 죽자 아테네로 돌아와서 정권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아테네 사람들이 테세우스를 숭배하며 반인반신으로 받들게 된 이유는 다 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아테네 인들이 마라톤 벌판에서 메데스 족과 전쟁을 벌이던 중에, 많은 병사들이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야만인을 향하여 앞서서 돌진하는 테세우스의 영혼을 보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른 후, 아테네의 장수 파이도와 아 테네 사람들은 델포이의 신탁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테세우스의 뼈를 모아서 정결한 장소에 이장한 다음 신성한 곳으로 잘 보전하라는 신의 명령이 나왔다. 그러나 테세우스의 무덤과 유골을 찾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섬의 주민들이 사 납고 야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몬은 그 섬을 정복하 고 테세우스가 묻힌 곳을 알아내려는 커다란 야심을 가졌다. 그런데 우연히도 독수리가 둥 그렇게 올라온 땅을 부리로 쪼며 발톱으로 파헤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키몬의 마음 속 에는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그 곳을 파헤쳐 테세우스의 뼈를 찾아내 었다. 그 곳에서는 보통 사람보다 커다란 사람의 관이 발견되었고, 그 곁에는 놋쇠로 만든 창끝 과 칼이 있었다. 키몬은 이 유골들을 그의 군선에 싣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기쁨에 넘친 시 민들은 크게 환영하며 테세우스의 유골을 행진과 제사로써 맞아들였다. 그것은 마치 테세우 스가 살아서 본국에 돌아온 것과 같았다. 테세우스는 시의 중심지에 매장되었다. 그 자리가 현재의 김나지움이 있는 곳이다. 테세우 스의 무덤은 노예들과 권력자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성스러운 피난처가 되었다. 살아 생전에 테세우스가 항상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지지자요 보호자였던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테세우스는 위험을 피해 자신에게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호소 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테세우스를 추모하여 드리는 제사 가운데 가장 성대한 행사는 피아네프시온 달 8일째 베 풀어진다. 바로 이 날이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으로 끌려갔던 젊은 사람들을 구출하고 돌아 온 날이라는 것이다. 이 날 이외에도 사람들은 매달 8일 테세우스를 위하여 제사를 올린다. 디오도로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트로이젠을 떠나 아테네로 돌아온 날이 헤카 톰바이이온 달 제8일이기 때문이다. 혹은 8이라는 숫자가 테세우스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포세이돈에 게 드리는 제사가 매달 8일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8이란 숫자는 첫 번째 짝수인 2의 첫 번 세제곱 수가 되며, 첫 두제곱 수의 배가 된다. 그러므로 '영원 불변하시는 이', 혹은 '대지의 근원이 되시는 이'라고 불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무궁한 힘을 상징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다. < 로물루스> 영원한 영광 속에 찬란히 빛나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로마 라는 이름의 기원과 시작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펠라스기아 사람들이 세계 각국을 정복하며 다니다가 이 곳에 정착하고, 자신들의 강대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트로이가 망하자 배를 타고 도망한 사람들이 풍랑 에 밀려 투스카니 해안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티베르 강 입구에 정착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 도 있다. 해안에 도착하자 그 동안 바다 위에서 숱한 고생을 한 트로이의 여자들은 배를 태워버리 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제안을 낸 여자가 바로 로마라는 이름을 지닌 혈통 높은 귀부인이었다. 여자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남자들은 대단히 노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팔라티움 산 주변에 정착하였다. 그런데 얼마간 살아보니 토지는 기름지고 원주민들은 온순 하여 기대한 것 이상으로 살기가 좋았다. 그래서 모두가 이 곳을 발견하게 해준 로마 부인 에게 크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따서 지명으로 삼기에 이른 것이다. 로마에서 여자들이 일가 친척의 남자들과 입맞춤하며 인사를 나누는 풍습은 이 일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배 를 태워버린 여자들이 일가의 남자들에게 입을 맞추며 화를 달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학자들은 이 도시의 이름이 유래한 로마라는 여인은 이탈로스와 레우 카리아 딸이었다고도 하고, 혹은 헤라클레스의 아들 텔라푸스의 딸로서 아이네아스와 결혼 을 했다고도 한다. 그 밖의 다른 설에 의하면 아이네아스 아들 아스카니오스의 딸이었다고 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율리세스와 키르케의 아들 로무누스가 로마 시의 창건자라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또는 디오메데가 트로리에서 보낸 사람인 에마티온의 아들 로무스가 창건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라틴 족의 왕이었던 로무스가 테살리아에서 출발하여 리 디아를 거쳐 이 지방에 도착하여 원주민인 티르헤니아 인을 몰아내고 세운 도시가 바로 로 마라고 한다. 이와 같은 많은 전설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것은 로물루스가 이 도시를 창건하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로마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을 따르는 사람들도 로물루스 의 출생이나 가문에 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로물루스는 아 이네아스와 텍시테아 사이의 아들로 그의 동생인 레무스와 함께 어린 시절에 이탈리아로 건 너왔다고 한다. 그때 티베르 강에 커다란 홍수가 나서 배 전체가 모조리 침몰하였다. 하지만 어린 형제가 타고 있던 부분만은 부서지지 않고 강둑의 낮은 곳에 살며시 닿았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이다. 이들로 인하여 그 곳을 로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 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앞서 말한 바 있는 트로이의 여인 로마가 텔레마코스의 아들 라티누스 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로물루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아 이네아스와 라비니아의 따라 아이밀리아가 군신 마르스로 인하여 난 것이 로물루스라고 한 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의 출생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알바왕 카르테키우스는 몹시 사악 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타르케티우스의 궁전에 이상한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화로속에서 일어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 형상은 그 곳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 의아하 게 생각한 타르케티우스는 투스카니에 있는 테티스의 신전에 신탁을 물어 보았다. 그리하여 한 처녀를 그 형상에게 바치라, 그러면 힘도 용기도 운도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아 들이 태어나게 되리라는 대답을 받았다. 왕은 이 신탁을 그의 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 고 그 형상에 가까이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딸은 그 일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시녀를 대신 보내었다. 이 사실을 들은 타르케티우스는 크게 화가 나서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둬놓고 죽이려 하였 다. 그러나 베스타 여신이 그의 꿈 속에 나타나서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왕은 두 사람 에게 쇠사슬에 묶인 채로 옷감짜는 벌을 내렸다. 옷감 짜는 일이 다 끝나면 두 사람은 혼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르케티우스는 밤마다 몰래 사람을 보내어, 두 처녀가 낮에 일해놓은 옷감을 다시 풀어놓도록 하였다. 달이 차자 하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타르케티우스는 테라티우스의 손에 아기를 맡기면서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테라티우스는 아기들을 데려다가 강가에 놓고 돌아왔 다. 그러자 한 늑대가 찾아와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주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새들이 갖가 지 음식부스러기를 물고 날아왔다. 하루는 소 치는 목동이 새와 늑대를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놀랐다. 하지만 목동은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아기들을 안고 갔다. 이렇게 살아 남은 쌍둥이들이 성 장하여 마침내 타르케티우스를 공격하고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탈리아 역사를 지은 포로마티온이 전하는 전설이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하고 또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생각하는 전설이 페파레투스의 디오클레스에 의해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파비우스 픽도르도 많은 점에서 이 책 을 따르고 있다. 이 전설에도 다양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알바 왕가는 아이네아스의 직계 후손들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누미토르 와 아물리우스라는 형제의 대까지 이르렀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에게 모든 것을 똑같은 몫으로 나누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트로이로부터 가져온 황금과 보물을 왕국의 가치와 맞 먹을 정도로 쌓아놓고 선택하도록 하였다. 누미토르는 왕국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재물을 사 용하여 누미토르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아물리우스는 아주 손쉽게 누미토르의 왕국을 빼앗았다. 그는 누미토르의 딸이 장차 아들 낳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를 베스타 여 신의 사제로 만들었따. 평생을 처녀로 살아가야만하는 처지에 묶어 놓은 것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실비아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미토르의 딸이 벌써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음이 발각되었 다. 이것은 베스타의 율법에 완전히 어긋나는 행위로서, 가장 잔인한 극형을 받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의 딸인 안토가 그녀를 위하여 아버지에게 탄원을 하였다. 누미토르의 딸은 감금되어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를 낳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때가 되어 그녀는 몸집이 크고 잘생긴 두 아들을 낳았다. 아물리우스는 더욱 두려워하여 한 신하를 시켜 아이들을 갖다버리라고 명하였다. 어떤 역 사가들은 이 신하의 이름이 파우스투루스였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아이들을 양육한 사 람이 파우스툴루스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아이들을 버리기 위해 바구니에 담아서 강으 로 내려갔다. 그러나 강이 세차고 사납게 흐르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여 아이 들을 강둑 위에 떨어뜨려놓고 돌아왔다. 강물은 점점 불어나 마침내 아이들이 담긴 바구니 를 싣고 흘러갔다. 그 바구니는 어느 아늑한 장소에 도달하였다. 그 곳은 오늘날 케르마누스 라고 불리며, 옛날에는 게르마누스라고 불렸다.이 이름은 아마도 쌍둥이 형제를 의미하는 게 르마니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이 근처에는 루미나리스라고 불리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의 이 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딴 것이 아니면, 루비네이트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 된다. 왜냐하면 한낮의 열기를 피해 소 떼들이 그 나무 그늘 밑에 모여 되새김질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늑대가 거기서 아이들에게 젖을 먹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고대 사람들은 모든 생물의 젖을 루마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주는 여신을 루밀리아라고 한다. 이 여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포도주를 올리지 않고 제단에 우 유를 따라 바친다. 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아기들이 여기에 누워 있는 동안 늑대가 와서 젖을 먹여주고, 딱따 구리도 계속해서 먹을 것을 날라다주며 아기를 돌보았다고 한다. 이 짐승들은 군신 마르스 의 현현으로 성스럽게 추앙받고 있다. 라틴 사람들은 아직도 딱따구리를 특별히 공경하고 모신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아이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군신 마르 스라고 말한 것에 신빙성을 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아물리우스가 갑옷을 입고 조카딸 앞 에 나타나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의 유모에서부터 이러한 전설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모의 이름이 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라틴 어에서 루포이라는 단어는 늑대를 일컬을 뿐 만 아니라 몸가짐이 헤픈 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쌍둥이를 기른 파우스툴루스의 아내가 바로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카 라렌티아였다. 로마 인들은 라렌티아에게 제물을 드리며, 4월이면 마르스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라렌 티아라는 제사를 지낸다. 로마 인들은 EH 다른 라렌티아의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이유는 다 음과 같다. 헤라클레스의 신전을 지키는 사람이 심심한 나머지 신에게 주사위놀이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이기면 신이 가진 값진 물건을 가질 것이고, 자신이 지게 되면 거룩한 제삿상을 차리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바치겠다고 조건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 그는 주사위를 두 번 던졌는데, 첫번째는 신을 대신해서 던진 것이며, 그 다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신전을 지키는 사람이 패배하였다. 그래서 약속한 대로 자신의 몫을 명예롭게 치르기 위하여 신을 위한 잔치를 차리고 라렌티아라는 여자를 구해 왔다. 당시에 그녀는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아름다웠다. 신전을 지 키는 사람은 미리 침상을 준비해놓은 신전안에서 라렌티아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리 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치 신이 그녀를 찾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을 잠궈버렸다. 드런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말로 신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아침 일찍 장터로 나가 누구든지 맨 처음 만나는 남자를 유혹하여 애인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라렌티아는 탈루티우스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나이도 지긋하고 상당한 부자였지만 아이 도 없이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다. 탈루티우스는 라렌티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무척 사랑했 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뒤에는 라렌티아가 그 많은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라렌티 아는 유언에 의해 그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신의 아내로서 존경과 추앙을 받게 된 라렌티아는 첫번째 라렌티아가 묻힌 장소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전해진다. 이 장소는 오늘날 벨라브룸이라고 불리는 데, 강이 종종 범람할 때마다 사람들이 페리보트를 타고 광장까지 건너갔기 때문이다. 라틴 어에서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벨라투라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이름이 벨룸, 즉 깃 발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대중극을 공연하던 사람들이 광장에서 시 르쿠스 막시무스로 향하는 길 위에 깃발을 걸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장소에서부터 시작되 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인해 두번째 라렌티아는 로마에서 추앙받고 있다. 한편 아물리우스의 돼지치기인 파우스툴루스는 아무도 몰래 쌍둥이들을 길렀다. 혹은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미토르의 비밀스런 도움을 받았디고 주장한다. 쌍 둥이들은 가비에 있는 학교로 보내졌는데, 글쓰기와 더물어 그들의 본래 신분에 어울리는 교육을 모두 받았다. 그들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젖꼭지라는 뜻을 지닌 '루마'에서 유래되었 다)라고 불렸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들은 건장한 신체와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라나면서 더욱더 불굴의 용기와 남자다운 면모를 풍겼다. 또한 위험한 모험은 모 두 시도하여 담대한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더 지략을 써서 행동했으며 정치가와 같은 지혜를 보였다. 이웃을 다루는 데 있어서나 가축을 먹이고 사냥을 하는 데 있어서나 로물루스는 다른 사람 밑에서 복종하기보다는 남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 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친구들과 후배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왕의 신하인 판사와 감독관들은 두 형제를 자신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무 시하며 얕보았다. 그리고 형제들이 하는 협박이나 명령에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쌍둥이들은 정직한 오락을 즐겼으며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게으름이나 나태, 방종 따위는 도금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차라리 사냥이나 달리기, 도적 물리치기, 도둑잡기 등 에 몰두하였고 억울하게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런한 행동으로 쌍둥이들은 유명 해져 갔다. 그런데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의 소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누미토르의 목동들이 소 떼를 몰고 달아나버리자. 분을 참지 못한 아물리우스의 목동들은 상대방을 덮 쳐 멀리 쫗아내고 많은 약탈품을 가져왔다. 이 소식을 들은 누미토르는 크게 분노하였다. 하 지만 아물리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도망친 많은 노예와 일꾼들을 모아서 무리를 만들 었다. 이 행동은 마치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시작처럼 보였다. 하루는 신성한 의식과 제의를 좋아하는 로물루스가 제사에 참석하고 있을 때, 누미토르의 양치기들은 레무스를 사로잡아 누미토르의 앞에 데리고 가서 그를 고소하였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를 두려워하여 직접 벌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아물리우스에게 가서 정당하 게 판결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의 형제였고 아물리우스의 종들 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바의 사람들은 그 일에 분개하며 불명예스 러운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로 하여금 레무스를 다시 데리고 가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벌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누미토르는 레무스를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그러나 누미토르는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레무스의 늠름한 체격과 품위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무스의 얼 굴에서는 용기와 충천하는 기상이 넘쳐흘렀다. 또한 자신이 천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동요됨 없이 꿋꿋하였다. 누미토르는 이번부터 들어온 레무스의 명성과 행한 일 들에 대한 것이 지금 눈앞에 보는 젊은이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더욱이 이번일에 관련된 것이 평범한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신성한 힘이 작용하여 그의 발걸음을 위대한 길로 인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느껴졌다. 누미토르는 부드러운 말씨와 친절한 표정으로 레무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준 다음, 그가 누구이며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물었다. 레무스는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은 아물리우스 왕보다 더욱 왕자다운 기백이 넘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벌을 주기 전에 먼저 사연을 묻고 이유 를 조사하다. 하지만 아물리우스 왕은 이유를 듣기도 전에 벌부터 내립니다. 이전에 저희 쌍둥이들은 아물리우스의 하인인 파우스툴루스와 라렌티아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략에 의해 범인으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게 되니 저희들에 관해 여러 가지 들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아마도 지금 처한 위 허믕로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희 형제의 출생은 비밀에 싸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젖을 먹고 자랄 때의 이야기는 더욱 신기합니다. 작은 강보에 싸여 강가에 놓여진 저희들을 늑대가 와서 젖을 먹여주고 딱따구리가 먹을 것을 물어다주며 길렀다고 합니다. 저희들을 담아버렸던 바구니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것을 묶었던 놋쇠띠에는 무엇이라고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저희들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될지 도 모르지만 지금 죽는다면 그것도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지요." 누미토르는 이 이야기를 듣고, 또 레무스의 나이를 대충 짐작하여 따져보니 가슴속에 떠 오르는 희망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딸을 은밀히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레무스가 누미토르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파우스툴루스는 레무스를 도와주기 위해 로물루스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그 일에 대해 작은 암시조차 받은 일이 없었으나. 이제 사려 깉은 사람이라면 적지 않은 결 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로물루스는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은 것 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 차서 바구니를 가지고 즉시 누미토르에게 달려갔다. 하지 만 성문을 지키던 왕의 보초들이 수상하게 생각하여 로물루스를 체포하고 여로 가지 심문을 하였다. 로물루스는 옷 옷에 감추고 있던 바구니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도 보초들 가운데 쌍둥이를 내다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구니를 보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글씨와 모양을 알아보았다. 마침내 모든 일을 미루어 짐작한 보초병은 지체 없이 왕에 게 이 사실을 고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파우스툴루스는 몹시도 놀랐다. 하지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증거 를 다 보여주지도 않았으며,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지도 않았다. 파우스툴루스는 아이들이 살아 있다고 자백은 하였지만은 평범한 양치기로서 알바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은 바구니를 일리아에게 가지고 가던 중이라고 했다. 일리아가 아 이들이 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기 위해서 종종 그 바구니를 바라보면서 만져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이다. 근심이나 열정으로 인해 마음과 행동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로 아물리우스 는 행동하였다. 그는 황급히 누미토르에게 전령을 보내어, 살아 있는 아이들로부터 어떤 소 식을 받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신하는 정직한 사람으로 누미토르와 가까운 사이였다. 전령은 어린 레무스가 얼마나 누미토르의 품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가 를 보고 두 사람레게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행동에 착수하라고 충고하였 다. 전령 또한 두 사람과 합세하여 도와주기로 하였다. 사실상 사태는 두 사람이 원한다 해 도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로물루스가 벌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 으며, 아물리우스를 무서워하며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많은 시민들이 달려나와 로물루스에 게 가담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물루스도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 로물루스는 그들을 100 명씩 나누고, 그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에게 나무와 짚을 끝에 동여맨 장대를 메게 하 였다. 이것을 라틴어로 마니풀리라고 불렀으며, 그로 인하여 오늘날도 로마군에서는 중대장 을 마니풀라레스라고 한다. 레무스는 성 안에 있는 시민들을 이끌어 폭동을 일으키고, 로물 루스는 성 밖에서 공격해오니, 폭군 아물리우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손을 써볼 사이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파비우스와 디오클레스에 의한 것이다. 두 사람은 로마가 창건 되던 초기 시대의 역사학자로 생각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너무나 극적이고 허구 적으로 보이므로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운명이란 얼마나 기구한 것이며, 강대한 로마가 어떠한 신성한 기원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엄청난 영광을 누리거나 이토록 위대 하고 예외적인 위치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믿지 못할 이 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아물리우스는 죽고 모든 문제들이 조용하게 처리되었다. 두 형제는 더 이상 평민으 로 알바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 왕위를 물려 받고 싶진 않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통치권을 할아버지에게 전달하고 어머니에게는 합당 한 명예를 부여한 뒤 자신들은 스스로 살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시절에 자랐던 장소에 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쌍둥이가 떠나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 처럼 보였다. 사실 도시를 세우는 일이 꼭 필요하기도 하였다. 쌍둥이 형제의 주위로 모여든 수많은 노예들과 도망자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세력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형제와 함께 다른 곳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알바의 시민들은 부녀자들을 괴롭힌 문제와 관 련되어 도망자들을 시민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난이나 희롱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노예나 범법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아내 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제로 납치해간 부녀자들에게 보통 사람들 이 상으로 예의와 존중을 다하였다. 새로운 도시의 기반을 닦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쌍둥이 형제는 모든 도망자들을 위한 피난처 성소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그 곳을 아실레우스 신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형제는 모 든 종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하며 아무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노예도 주인에 게 보내지 않았고, 채무자를 채권자에게 넘기지 않아으며 살인자도 판사의 손에 인도하지 않았다. 이 곳은 거룩한 신탁의 명령에 의해서 특권을 부여받은 장소라고 선언하는 것이었 다. 그러므로 도시는 곧 성장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처음 부터 이 도시에는 천 채가 넘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할 것 이다. 그런데 평제으 생각이 온통 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되었을 때, 장소에 관한 견해 차이 가 생겼다. 로물루스는 로마 퀴트라타 혹은 스퀘어 로마라고 불리는 장소를 골라 그 곳에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 곳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철벽요새였다. 과거에 그 곳은 레무스 는 아벤티네 산 위에 있는 평평한 땅을 정하였다. 그 곳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철벽요새였 다. 가거에 그 곳은 레무스의 이름을 따서 레모니움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리그나리움이라 고 불린다. 마침내 두 사람은 새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점을 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 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서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서 있으니, 레무스가 있는 곳으로는 여 섯 마리의 독수리가 날아오고 로물루스가 있는 쪽으로는 그보다 두 배가 많은 독수리들이 날아왔다고 한다.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레무스는 숫자를 거짓으로 꾸며내었다고 한다. 레무 스가 그에게로 다가갔을 때 비로소 열두 마리의 독수리가 보였다는 것이다. 로마 인들이 새를 보고 예언하며, 특히 독수리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헤로도루스 폰티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라클레스도 항상 어떤 모험 을 행하기 전에 독수리가 나타나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모든 새들 중 에서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짐승으로 곡식이나 과일이나 가죽들을 먹지 않고, 다만 죽은 짐승의 시체만을 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죽은 것이라 할지라도 손을 대지 않는다. 반면에 솔개나 부엉이, 매와 같은 새들은 서로 싸우며 동족을 해치는 것 들이다. 아이스킬로스도 이렇게 쓰고 있다. 같은 동족인 새를 잡아먹는 새가 어떻게 정결할 수 있으리요? 더구나 다른 모든 새들은 항상 인간들의 눈앞을 벗어나지 않으며 줄곧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독수리는 매우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독수리의 어린 새끼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독수리의 희귀성은 인간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독수리 가 어떤 다른 세상에서부터 날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점술가들이 진기한 모든 일의 원인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무스는 속임수를 알고서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리하여 로물루스가 성벽을 쌓기로 계획 한 자리에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땅을 파고 있을 때, 장난을 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방 해하였다. 그리고 레무스는 조소를 던지며 도랑 위를 뛰어넘어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로무루스가 그를 쳤다고도 하고 혹은 동료 중의 한 사람인 켈레르가 쳤다고도 한다. 마침내 레무스는 땅에 쓰러졌다. 이격투에서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형제인 플리스티누스도 살해되고 말았다. 플르스티누스는 로물루스를 키우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로마 인들은 발이 빠른 사람이 모두 켈레레스하고 부른다. 아버지의 장례식 기간 중 며칠 동안 사람들에게 투우 경기를 보여준 퀸투스 메텔루스도 단시일 내에 행사를 준비한 솜씨를 칭찬 하는 뜻으로 켈레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레무스와 두 명의 양아버지를 레모니아 산에 매장한 다음, 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투스카니에서 사람을 불러왔다. 그 사람은 로물루스에게 종교적인 제의와 준수해야 할 모든 의식에 관련한 성문화된 규칙이나 신성한 용법을 지도하여 주었 다. 첫 번재로 그들은 오늘날 코미티움 혹은 회의장이라고 불리는 곳 주위에 둥근 도랑을 파 고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의 첫 열매를 엄숙하게 던져 넣었다. 그 다음으로 모든 사람 들이 자신의 고향흙을 조금씩 가져다 함께 던져 넣었다. 이 도랑은 문두스라고 불리는데, 로 마 인들이 하늘을 부르는 말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삼아서 그들은 도시의 윤곽을 둥글게 표시하였다. 그 다음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청동으로 만든 쟁기에 암수 한 쌍의 소를 메어서, 직접 경계선을 따라서 땅을 갈았다.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갈아놓은 흙이 모두 도시의 안쪽을 향하도록 옮겨놓았다. 그리고 단 한줌의 흙이라도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 선의 성벽의 윤곽이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포모이리움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포스트무룸 즉, 성벽의 밖 혹은 옆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성벽을 만들 자리를 계획하고, 쟁기를 들어올 려 공간을 남겨 놓았다. 그 이유는 모든 성벽이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단지성문이 있 을 자리만은 예외로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성문 마저도 신성한 곳으로 정해 놓는다면, 종교 를 거역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활 필수품을 가지고 드나들 수 없게 된다. 필수 품들 중에는 정결하지 못한 물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시를 건설한 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4월 21일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로마 인드은 그 날을 도시의 탄생일로 명명하고 매년 신성하게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이 날에 어떤 살아 있는 생물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의 탄생일을 기리는 축제를 더러 운 피를 묻히지 않고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도시가 다 건설되기 전부터, 이 날에는 양치기들과 돼지치기들의 축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팔릴 리아라고 부른다. 오늘날 로마와 그리스의 달력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그 달의 30일이 분명하다고 한다. 이때 태양의 일식이 있었는데, 제6 올림피아드의 세 번째 해에 테오스의 시인 안티마코스가 보았다는 것과 일치한다. 로마 역사에 정통한 철학자 바로가 살았던 시대에 타루티우스라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의 친구로서 호기심의 정도를 넘어서서 도안이나 표를 보 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깊이 연구하였다. 바로는 타루티우스에게 로물루스가 난 날과 시간까지 알아 맞추어 보라고 하였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로부터 역으로 생일을 유추해내는 것이다. 마치 기하학자들이 분석적 방법으로 거꾸로 문제 를 푸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바로는 사람이 난 일시로써 그의 운명을 맞추는 것이나, 사람 의 일생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가 난 일시를 맞추는 것이나 같은 과학에 속하는 일이라고 주 장했다. 타루티우스는 로물루스의 일생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그의 수명 및 생사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이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로물루스가 잉태된 것은 제2올 림피아드 제1년이며 이집트 인들이 코이아크라고 부르는 달의 23일, 일몰 후 3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때에 완전한 일식이 있었다. 또한 그가 태어난 일시는 토트 달의 21일 해가 뜰 무 렵이었다. 그리고 로마 시의 주춧돌을 올려놓은 때는 파르무티 달의 9일, 2시와 3시 사이였 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운명도 사람의 운명처럼 창건할 때의 별의 위치로 알 수 있 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허무맹랑하게 들려서 읽는 이들의 화를 돋 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신기하하고 호기심을 자아내어 재미를 주기도 한다. 도시를 세운 로물루스는 모든 장정에게 무기를 주어 군대를 조직하였다. 각 부대는 3만 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군단이라고 불렀는데 모든 병사들 가운 데서 최고로 선택되고 골라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주민들로 조직된 부대는 민단이라고 불렀다. 로물루스는 가장 뛰어난 100명의 사람들을 뽑아서 정무회를 만 들었다. 또한 이들을 파트리키안, 즉 귀족으로 봉하고 그 모임을 원로원이라고 하였다. 이것 은 연장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파트리키안들이 합법적인 자식을 가진 아버지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 다고 하고,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혈통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 로마로 마구 쏟아져 들어 온 사람들 중에는 혈통 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것은 후견인이라는 뜻을 가진 파트로나제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에반데르와 함께 건너온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인 파트론에서 유래한다. 파트론은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세력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임무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과 관심으로 아 랫사람들을 돌보는 것임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파트리키안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이 가 장 타당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민들도 귀족의 명예를 받은 사람들에 대 해서 두려워하거나 반감을 품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버지로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기를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다른 모든 외국에서도 원로원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내리고는 있지만 로마처럼 명예롭고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름을 사용하는 곳은 없다. 즉 그 들을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고 불렸는데, 이후에 말을 덧붙여 파트레스콘스크리프티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위엄 있는 이름으로 로물루스는 원로와 평민을 구분하였다. 또한 귀족과 평민을 구별하여 전자는 보호자라는 뜻의 파트론이라 부르고 후자는 피보호자라는 뜻으로 크리엔트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로물루스는 두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 놀라운 사랑과 친근감을 조성하 였을 뿐만 아니라, 거래에 있어서도 위대한 정의를 이루었다. 왜냐하면 파트론은 항사 법정 에서 크리엔트의 변호인이 되었으며 모든 일에 있어 조언자와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크리엔트도 충시랗게 자신의 파트론을 섬겼다. 그들에게 모든 존경과 공경을 다했을 뿐 아니라, 가난하게 되어 딸들의 혼수가 부족하면 돕고, 빚이 있으면 갚아주기도 하였다. 어떤 법령이나 법관도 파트론이 크리엔트에 대해서 불리한 중언을 하거나, 크리엔트가 파트 론에 대해서 불리안 증언을 하도록 강요하지는 못하였다. 후대에 가서는 파트론과 크리엔트 사이의 다른 모든 의무는 변함이 없었으나, 아랫사람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천하고 불명 예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파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가 건설된 지 넉달 만에 여자들을 납치해오는 무모한 모 험이 시도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하면 로물루스가 천성적으로 전쟁을 즐겼는데 다가 로마는 전쟁을 위대해지리라는 예언을 믿고 사비니 사람들을 이유 없이 공격했다고 한 다. 많은 여자를 납치하지 않고 단지 30명의 처녀들만 납치한 것으로 보아도, 여자가 부족한 탓이라기 보다도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차라리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더 타당할 것 으로 보인다. 로물루스의 도시는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대다수가 신분이 천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로 이 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도시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로물루스는 납치해온 여자들을 잘 구슬린 후,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번 사건을 사비니와 동맹을 맺고 상호 간의 교역을 트는 기회로 삼고 자 하는 더 큰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로물루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러한 계 획을 실천에 옮겼다. 먼저 로물루스는 땅속에 숨겨져 있었던 어떤 신의 제단을 발견한 것처럼 소문을 내었다. 사람들은 그 신을 콘수스 즉 상담의 신이라고 불렀다. 또는 해마를 탄 넵투누스로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보통은 베일이 덮인 채로 시르쿠스 막시무스에 숨겨두었다가 경마대회가 있 을 때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신이 땅속에 이 제단을 숨겨 놓은 것은 비밀로 숨겨져야만 하는 신의 충고가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제단을 발견한 로물루스는 날을 지정하여 겨대한 제사를 지내기로 선포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여러 가지 경기와 볼거리를 거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 이 도시로 벌 떼처럼 모여들었다. 로물루스는 자주색 옷을 입고 귀족들 중 가장 앞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로물루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외투를 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을 신호 로 삼기로 하였다. 로물루스의 부하들은 무장을 한 채 근처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 리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오자 칼을 뽑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사비니의 처녀들을 찾아가 겁탈을 하였다. 그러나 사비니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도 하지 않고 서로 도망치기 에 바빴다. 로마 인들은 오직 30명의 처녀만 붙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쿠리아이 혹으 동 족회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우스 안타아스는 527명을 납치하였다고 전하고, 주 바는 673명을 납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아마도 로물루스가 할수 있는 최고의 변명이라면, 단 한 사람의 유부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녀만을 납치하였다는 정도일 것이다. 헤르실리아 라는 그 유부녀도 모르고 납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들은 로마인들이 욕정에 눈이 어두워 겁탈을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결합을 통해 이웃 부족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순수한 동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유부녀 헤르실리아는 로마에서 가장 지위 높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호스틸리우스와 결혼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주장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 두 자녀까지 있다는 것이다. 딸은 첫아이였던 까닭에 프리마라고 이름 지었다. 아들은 당시에 그를 위한 커다란 군중 집회에서 아올리우스라고 이름 지었다가 나중에 아빌리우스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이 야기는 트로이젠 사람 제노도투스의 기록을 따른 것인데 또 다른 이야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처녀들을 겁탈하던 사람들 주에서, 우연히도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미모와 자태가 뛰어난 처녀 한 명을 미천한 사람들이 붙잡아 데려가고 있었다. 마침 귀족 가운데 한 사람 이를 보고 여인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탈라시우스에게 데리고 가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탈라시우스는 아직 어렸지만 용감하고 명망이 높은 젊은이였다. 그러므로 사람 들은 이말을 듣고 크게 칭찬하며 박수를 보내었다. 어떤 이들은 선의와 기쁨에 차서 탈라시 우스의 이름을 외치며 거리를 다라 오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로마 사람들은 결혼식 대 탈라시우스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그 리스 사람들이 히메나이우스를 노래하는 것과 흡사하다. 탈라시우스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 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카르타고 사람인 섹스타우스 술라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도 다른 것이었다. 그는 지식이나 재능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인데, 그가 들려준 방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납치명령을 내릴 때에 신호로 이 말을 외쳤다는 것이 다. 그러자 처녀들을 납치해 가는 사람들도 '탈라시우스'라고 외쳤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늘날의 결혼식에까지 그러한 풍습이 이어져온 것이다. 그러나 주바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갓 결혼한 여자들에게 집안일과 실 잣는 일을 장려하기 위히야 쓴 말이라고 생각한다. 탈라시아는 그리스 어로서, 그 당시에 그리스 어는 아직 이탈리아 어의 침범을 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고 그 당시으 모라 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탈라시아'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이 풍습에 대하여 더 그럴듯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인들과 전쟁을 치른 후, 사비니 사람들은 휴전조약을 맺을 대 사비니 여자들에 관한 특별한 조문을 넣었다. 실을 잣는 일 외에는 남편들을 위하여 어떤 집안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부터 결혼식에서 신부를 인도하여 신랑에게 건네주는 사람이 장난으 로 '탈라시우스'라고 말하는 풍습이 생겼다. 이것은 앞으로 신부에게 실 잣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또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풍습으로 신부가 스스로 신랑집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고 신랑 에게 안겨서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비니의 여자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 니라, 강제로 붙잡혀 들어간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풍습도 로마 인들의 결혼이 처 음에 전쟁과 폭력으로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하고 한다.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책 '의문'에서 더욱 자세하게 밝혀놓았다. 사비니 여자들을 납치한 날은 지금의 8월에 해당하는 섹스틸리스 달의 18일이었다. 이 날 에는 콘스알리아라는 기념행사가 지켜지고 있다. 사비니 사람들은 숫자가 많았고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하지만 성벽도 두르지 않은 조그마한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사비니 사람들은 담대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라케다이몬의 후예로,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이 볼모로 잡혀서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로물루스에게 사신을 보내어 공정하고 합당한 요구를 하였다. 로물루스가 납치해간 여자들을 돌려보내고 횡포한 행동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대화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서 로 평화롭게 지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여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거부하고 다만 사비니 인들에게 동맹관계를 맺자고 제안하였다. 이 대답을 듣고 다른 부족들은 주저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오랫동안 망설이 고 있었다. 하지만 기백이 넘치고 훌륭한 전사였던 케니넨시아 족의 왕 아크론은 줄곧 로물 루스의 담대한 시도에 대해서 질투심을 품어오던 차에 여자들을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나 자, 만약 이쪽에서 먼저 무기를 들고 일어나 로물루스를 응징하지 않는다면 그는 점점 모든 민족에게 강대한 존재가 되어 마침내는 정말로 손도 댈수 없는 상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 였다. 아크론은 즉시 로물루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로물루스도 마찬가지로 아크론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두 군대가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이르자 로물루스와 아크론은 일대일로 싸우기로 하였다. 또한 양편의 군대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며 서 있기로 하였다. 로물루스는 만일 자신이 승리한다면 손수 상대방의 갑옷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결투에 서 로물루스는 아크론을 죽이고 적군을 정벌하고 시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는 주민들을 해치지 않았으며, 다만 그들의 집을 허물고 자기를 따라 로마로 이주하여 다른 사람들과 평 등한 시민이 되라고 명령하였다. 사실 무엇보다도 항상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어 시민으로 동화시킨 이 정책이 로마를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로물루스는 자신의 서약을 유피테르 신이 더욱 기뻐할 만한 방식으로 이행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즉 막사 안에서 자라고 있던 커다란 떡갈나무를 베어 트로피 모양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아크론의 갑옷을 적당히 달아매었던 것이다. 로물루스 자신은 긴옷을 두르고, 머리에는 월계관을 쓰고 머리카락을 길고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이러한 차림으로 오른쪽 어깨 위에 나무로 만든 트로피를 메고서 승리의 노래 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로물루스의 모든 병사들은 그의 뒤를 쫓았으며, 로마의 모든 시민들 은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차서 로물루스를 환영하였다. 이 날의 행진이 그 뒤로 모든 승리의 행진의 기원이자 모범이 되었다. 이 날의 트로피는 유피테르에게 드리는 제물로서, 페레트리우스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페리레'라는 말에서 비 롯된 것인데 라틴 어에서 찌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로물루스가 상대방을 찌르고 넘어드 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전리품은 '오피마' 혹은 왕의 전리품이라고 불렀는데 바로에 따르면 훌륭하다는 뜻의 '오페스'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행동을 의미하는 '오푸스'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스폴리아 오피마'를 드리는 영광은 오직 자신의 손으로 적정을 죽인 장군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광을 가진 로마 장군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첫 번째로 케니넨 시아 족의 왕 아크론을 죽인 로물룻, 다음으로 투스카니 왕 톨룸니우스를 죽인 코르넬리우 스 코수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리아 왕 비리도마루스를 죽인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 다. 그런데 나중으 두 사람, 코수스와 마르켈루스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트 로피를 들고 입성하였다. 하지만 로마루루스는 마차를 탔다고 디오니시우스가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데마라토스의 아들 타르퀴니우스가 맨처음 그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혹은 푸블리콜라가 처음으로 승리의 마차를 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 볼 수 있는 트로피를 든 로물루스의 초상들은 모두가 발로 서 있는 것뿐이다. 케니넨시아 부족이 정복된 후에도 다른 사비니 부족들은 여전히 시간을 끌면서 전쟁준비 만 하고 있었다. 그 동안 피데나이, 크루스투메리움, 안템나에 사는 부족들이 힘을 합해서 로마 인들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전재에 패하였다. 그리하여 로물루 스가 차지하 모든 토지는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다만 과거에 딸을 납치당한 부모의 토지 만은 그대로 두었다. 딸을 빼앗김으로써 이미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사비니 인의 남은 부족들은 분격하여 타티우스를 장군으로 삼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그러 나 로마 시는 요새를 가지고 있어서 공략하기가 어려웠다. 그 곳이 오늘날의 카피톨인데 강 력한 방어물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타르페이우스가 로마의 장군이었다. 그런데 로 물루스를 배반한 것은 그 사람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은 그가 아니라 그의 딸 타르페이아 였다. 타르페이아는 적군이 가지고 있는 금팔찌가 탐나서 성을 사비니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배반의 대가로 사비니 사람들이 왼쪽 팔목에 끼고 있는 팔찌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타티우스와 협상을 한 타르페이아는 밤중에 성문을 열어 사비니 병사들 을 맞아들인 것이다. 지정 배반자는 좋아하지만 배반했던 사람은 증오한다고 말한 사람은 안티고노스 혼자만이 아니다. 또한 카이사르만은 트라시안의 리미탈세스를 두고 말하기를, 반역행위는 고맙지만 반역자는 미워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사나운 짐승의 독이 필요한 때가 있듯이, 사악한 사 람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던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법이다. 왜냐 하면 배반자가 쓸모 있을 동안은 고맙게 생각하나, 다 이용한 뒤에는 그 더러운 행위를 저 주하는 것이다. 타르페이아가 타티우스로부터 받은 대접도 그와 꼭 같았다. 타티우스는 모든 병사들에게 약속대로 왼팔에 낀 것을 아낌없이 주라고 명령하였다. 우선 자기의 금팔찌를 풀어 둥근 방 패에 담아 타르페이아에게 던졌다. 다른 모든 군병들도 타티우스를 따라서 던지니, 타르페이 아는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금팔찌와 무거운 방패에 맞아 죽고 말았다. 주바의 기록에 의하 면 타르페이우스도 로물루스로부터 반역죄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타르페이아에 관한 다른 전설도 있는데 별로 미덥지가 않다. 그 중 안티고노스가 전하는 것에 의하면, 타르페이아는 사비니군의 장군 타티우스의 딸로, 로물루스에 의하여 강제로 납 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지령을 받아 이와 같이 사비니 군을 도왔다는 것이 다. 또한 시인 시밀루스가 생각한 것처럼, 타르페이아가 갈리아 왕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사 비니군이 아니라 갈리아 군에게 카피톨을 넘겨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혀 허무맹랑한 것 이다 시밀리수는 이렇게 노래했다. 당시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타르페이아, 로마의 성문을 적군에게 열어주니 타르페이아는 갈리아 왕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도시의 성벽 카피톨을 배신하였다. 그리고 타르페이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켈트의 수많은 민족들이 그녀를 묻어주니 포 강의 아름다운 언덕 위가 아니라, 사나운 팔에 잡았던 방패를 던져 빛나는 선물과 함께 그 자리에 묻혀버렸다. 이후 타르페이아는 그 곳에 묻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그 산을 타르페이우스라 고 불렀다. 그러나 타르퀸 왕에 이르러 그 장소를 유피테르 신에게 드리고, 타르페이아의 유골을 이장하였기에 산의 이름도 바뀌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카피톨의 일부를 타르페 이아의 바위라고 하며, 악한 일을 한 사람은 그 바위 위에서 떨어뜨리곤 하였다. 사비니 군이 그 언덕을 점령하자 로물루스는 크게 분노하며 내려와 싸우자고 도전하였다. 타티우스는 자신만만하게 도전에 응하였다.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든든한 성 안으로 다시 후퇴를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양군이 싸움을 벌이게 될 장소는 온통 자그마한 산으로 둘러 싸인 골짜기였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필사적인 싸움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때마침 수일 전에 강이 범람 하여 평지에까지 넘어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많이 생겼다. 그 늪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피해가기도 어렵고 위험했다. 사비니 군은 앞다투어 공격해 들어오다가 행운을 만났다. 사비니 군의 용감한 병사였던 쿠르티우스가 명예를 얻을 욕심으로 혼자 앞장서서 멀리까지 달려나오다가 말이 깊은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꺼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쿠르티우스는 말 을 버리고 몸만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이곳을 쿠르티우스의 늪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위험 을 벗어난 사비니 군은 과감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날의 운세는 매우 모호해서 사비니 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전사자들 중에는 호스틸리우스도 있었다. 그는 헤르실리 아의 남편이며, 나중에 누마 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또 다른 호스틸리우스의 할아버지였 다고 한다. 이 곳에서 수십 차례의 간헐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싸움에서 큰일이 일어 나고 말았다. 로물루스가 돌로 머리를 맞아 땅에 쓰러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로마 군은 평 지에서 밀려나 팔라티움 산으로 도망하였다. 이때 약간 정신이 돌아온 로물루스는 몸을 돌 려 다시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도망하는 군병들에게 큰소리로 요기를 내어 맞서 싸우 라고 외쳤다. 그러나 숫자에서 열세가 되어버린 로마의 군병들은 감히 돌아설 용기가 없었 다. 로물루스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유피테르신께 기도하며, 달아나는 군사들을 멈추고 위험 에 빠진 로마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군병들은 왕에 대한 존경심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달아나기를 멈추었다. 도망치던 사람들의 두려움이 갑자기 자신감 으로 바뀐 것이다. 달아나던 병사들이 처음으로 멈추어 섰던 그 곳이 지금 유피테르 스타토 르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로마 군은 오늘날 레지아라고 불리는 베 스타 신의 성전까지 적을 격퇴하였다. 이 곳에서 양군은 두 번째 격전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전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앞서 납치해온 사비니의 딸들이 눈물과 한탄의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서 달려나왔던 것이다. 여인들은 마치 귀신들린 사람 처럼 정신 없이 시체가 넘어져 있는 사이를 헤치고 군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어떤 여인은 남편이나 아버지에게로 달려갔고, 어떤 여인은 가슴에 어린 아기를 안고 달려들었다. 또 어떤 여인은 귀에까지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두 한 목소리로 사비니 병사와 로마의 병사를 향하여 애처롭게 애원을 하였다. 이 광경을 본 병사들은 가슴이 뭉클 하여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두 군대 사이에는 여인들이 들어섰다. 눈물과 비탄으로 가득 찬 여인들의 모습은 양편 모두의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망과 한 탄으로 시작하여 간청과 애원으로 끝을 맺은 여인들의 눈물어린 호소는 병사들에게 큰 감동 을 주었다. 사비니의 여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왜 우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억울하게 폭력에 의해서 붙잡혀 왔어요. 또한 형제나 부로, 친척들로부터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림받아 왔지요. 그런데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얽매어 있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그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 고 두려워하고 죽는 것을 보며 울부짖어야 하나요? 우리가 처녀로 있을 때에는 구출하러 오 시지도 않더니, 지금에 와서야 아내와 어머니가 된 우리를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떼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그 옛날에 우리를 버리고 돌보시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 일이에요. 저들의 사랑과 당신들의 열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만일 다른 어떤 이유로 전쟁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보아서라도 사위와 손자가 된 사람들에게만은 손을 대지 마세요. 만약 우리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데려가세요. 하지만 우리와 함께 당 신의 사위와 손자까지도 데리고 가세요. 우리를 부모와 형제 품으로 돌려보내셔도 좋지만 우리 남편과 자식들을 빼앗아가진 마세요. 제발 애원하느니 이제 또다시 우리를 납치해 가 지는 마세요.' 헤르실리아가 이와 같이 길게 호소하자. 다른 여자들도 저마다 진심어린 애원을 하였다. 그 결과 휴전이 이루어지고 양쪽의 대표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한편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 들을 아버지와 형제에게 소개하고, 음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었다. 또한 상 처입은 사람을 저희들 집으로 데려다가 간호해주었다. 납치된 여인들의 집에 가 본 사비니 의 친척들은 그들이 집의 안주인이 되어 남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결국 다음과 같은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남편과 같이 머물러 있고 싶은 여자는 그대로 살 되, 단 실을 잣는 일 이외의 모든 집안일은 하지 말 것이다. 로마 인과 사비니 인은 시내에 함께 살되, 시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좇아 로마라 한다. 하지만 주민은 타티우스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쿠리테리고 부르고,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공동으로군민을 다스리기 로 한다. 이 협정을 맺은 곳을 오늘날까지도 코리티움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회담을 의미 하는 '코이레'라는 로마 어에서 온 것이다. 이제 시의 인구는 두 배가 되었다. 사비니 인 중에서 100명의 원로를 더 뽑았으며, 군단도 6천 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편성하였다. 또한 시민을 세 개의 부족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족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람넨세스, 두 번째 부족은 타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타 티엔세스, 그리고 또 하나의 부족은 루케레스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루크스, 즉 덤불숲이라 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숲에는 아시리움이 세워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의 피난성소를 찾아 그곳으로 도망쳐 왔다가 도시로 이주해왔다. 부족을 가리키는 '트리베'라는 단어도 이 때 부족의 수가 셋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 부족은 열 개의 큐리에로 이루어져 있었다. 쿠리에란 형제를 의미하는 말로, 납치해왔 던 사비니 여인들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많은 큐리 에가 여러 지명에서부터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당시 로마에는 여자를 존중하는 많은 법이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게 먼저 길을 양보해주어야만 하 고, 여자앞에서 점잖지 않은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여자 앞에 옷을 입지 않고 나타나면 형사 재판에 붙인다는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목에 불라라고 불리는 장식을 둘러야만 했다. 그리고 프로이텍스타라고 불리는 자줏빛 단을 두른 옷을 입도록 하였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두 왕은 서로 만나 논의를 하기 전에, 각기 자기 부족의 100명의 원 로들과 먼저 협의를 했다. 그리고 다 함께 회의를 열었다. 타티우스는 지금 유노 모네타의 성전이 있는 자리에 살았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네 산에서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내려오는 근 처에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살았다. 여기에는 신령한 산수유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가 자기 힘을 시험해보려고 산수유나무로 만든 창을 아벤티네 산에서 던졌더니 그곳에 와서 꽂혔다고 한다. 그 창은 너무나 깊이 박혀서 여러 사람이 뽑 으려고 애를 썼으나 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비옥한 땅에서 나무는 되살아나 잎이 피고큰 산수유나무가 되었다. 로물루스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이 산유수나무를 로마에서 가장 신령한 나무로 숭배하고 보전하였다. 그 주위에는 담을 쌓고, 만약 나무가 푸르게 자리지 못하거나 시들어가는 것을 발견하면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마치 어느 집에 불이 났 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한 목소리로 물을 가져오라고 외치며 사방에서부터 항아리를 들고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카이우스 카이사르의 명령에 의해서 나무 주위의 계 단을 수리하던 도중에 죽고 말았다. 인부 중의 한 사람이 너무나 나무 가까이로 땅을 팠기 때문에 뿌리가 상해서 죽어버렸다고 한다. 사비니 인은 로마 인의 달력을 채택하였다. 그밖의 여러 가지 기록할 만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누마의 전기에서 이야기 할 것이다. 한편 로물루스는 사비니 인의 긴 방패를 사용 하기로 하고, 자신의 무기와 모든 로마 인들의 무기를 바꾸었다. 이전의 로마 인들은 아르고 스 형식의 둥근 방패를 자기고 다녔다. 두 민족은 축제와 함께 참여하였다. 각 부족이 지켜오던 이전의 풍습을 버리지 않고 오히 려 몇 가지 새로운 기념 일을 더 만들었다. 그 중의 하나가 마트로날리아는 행사다. 이것은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노력한 여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와 비슷한 기념일로는 카르멘탈리아가 있다. 카르멘타는 사람의 탄생을 주재하는 운명 의 신으로 대부분 어머니들이 모셨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카르멘타는 아르카디 아인 에반데르의 아내로서 예언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카르멘타는 시를 지어서 사람들ㅇㅔ 게 신탁을 전해주었으므로, 시를 의미하는 '카르멘'이라는 어휘에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니코스트라타였다. 혹은 '카렌스 멘테'라는 로마어에세부터 유래된 이 름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 말은 '정신을 잃다'혹은 '신들리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파릴 리아는 축제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일이 있다.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제사를 드리는 시기로 미루어보아 정결하게 하려는 생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행사는 2월중 '디에스 네파스티' 즉 흉일을 택해서 엄숙히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라틴 어로 2월의 이름은 정결하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행사를 거행 하는 바로 그 날도 고대에는 2월과 같은 '페브루아타'하고 불렀다. 그런데 이 행사의 이름은 그리스 어로 늑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단히 역사가 깊은 이름으로서, 에반데르와 함께 이탈리아로 이주해온 아르카디아 지방 사람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행사 이름이 로물루스 형제를 길러준 암늑대를 의 히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인 루페르키가 로물루스가 버려졌다고 전해지는 바 로 그 장소에서부터 축제의 행렬을 시작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축제기간 동안에 행해지는 제사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 행사의 기원을 추측하기란 더욱 더 어려워진다. 제사중에는 제물로 염소를 잡고, 귀족가문 출신의 두 소년을 데려다가 염소의 피라 묻은 칼로 소년들의 이마에 자국을 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우유에 적신 양 털로 즉시 그 피를 닦는다. 이마의 피를 닸을 때, 소년들은 반드시 큰소리로 웃어야만 한다. 이 일이 끝나면 염소의 가죽을 항문까지 자르고서 소년들은 벌거벗은 채 주위를 뛰어다녔 다. 소년들은 허리 부분만 적당히 가리고서, 만나는 사람마다 염소의 가죽으로 채찍질을 했 다. 젊은 여인들도 그 매를 피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 매를 맞으면 순산과 다산을 한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에 있어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제사장인 루페르키를 위하여 개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풍속에 대해서 웅장한 시로 설명을 해놓은 한 시인의 주장에 따르면 로물 루스와 레루스가 아물리우스 왕을 정복한 다음 기쁨에 가득 차서 늑대들이 젖을 먹여 길러 준 장소까지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모방하여 두 명의 귀족출신 소년들이 풍 습이 이 축제 기간 동안에 지켜져 내려온 것이다. 모든 이들을 띠림이여, 마치 알바에서부터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쌍둥이 형제가 황급히 달려오듯이. 소년들의 이마에 피 묻은 칼을 대는 것은 그 날의 위험과 살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우유 로 피를 닦는 것은 쌍둥이를 길러 준 늑대의 먹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이우스 아킬라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로마시를 세우기 이전에, 하루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가축들이 길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두 사람은 파우누스 신에게 기도 를 드리면서 가축들을 찾아 온 사방을 뛰어다녔다. 이때 땀이 흐를 것을 염려한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다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행사중의 소년들이 벗고 달리는 이유라고 한 다. 만약 희생제사가 정결을 위한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개야말로 희생 제물로 적당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인들은 어린 개를 가져다가 '페리스킬라키스무스'라고 부르는 행 사에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물루스를 양육하고 보호한 늑대에게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개를 죽이는 것은 상당히 그럴듯히다. 개야말로 늑대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이유도 아니라면 제사장인 루페르키가 달려갈 때 방해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또한 로물루스는 불을 신성시하고 거룩한 처녀들로 하여금 성화를 지키도록 하는 법을 제 정하였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베스탈스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누마 폼필리우스에게 그 기원을 두기도 하지만, 로뭄루스가 누구보다도 신앙심이 깊고 신성하 일에 대한 기술도 능 숙하였다는 사실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러므로 로물루스는 리투우스라고 불리는 구부러진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 막대기는 예언자들이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볼 때 하늘의 구획을 나누던 것이었다. 로마인이 로마 시를 점령했을 때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가 야만인들이 물러난 이후에야 엄청난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불타버렸어도 막대기만은 불길에 그을린 자국도 없이 말짱하였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여러 법을 제정하였다. 그 중에 엄한 법으로 아내는 남편을 버릴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자식들에게 독을 먹이거나, 열쇠를 위조하거나, 간음을 할 경우에 따른 것이었다. 그 밖의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경우에는 재산의 한 몫은 아내에게 주고 다른 몫은 케레스 여신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리고 아내를 저버린 사람은 죽음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 기로 되어 있었다. 로물루스의 법 가운데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실제로 형제 살해에 대한 벌을 규정하지는 않 았지만 모든 살인죄를 형제 살해죄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살인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이지만, 형제 살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죄로 생각한 듯 싶다. 그런데 무려 600년 동안 이나 로마에서 그와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로물루스의 그러한 판단 은 옳은 것으로 보이다. 기록에 의하면 루키우스 호스티우스가 처음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한니발의 전쟁 뒤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상으로 그치기로 한다. 타티우스가 왕이 된 지 5년째 되던 해에, 그의 친구와 친척들 가운데 몇 사람이 라우렌툼 에서 로마로 오는 사절단을 만나 강도질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저항해오는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로물루스는 이런 대담무쌍한 중죄를 범한 자를 처벌해야 된다고 의견을 말하였 으나, 타티우스는 그 사실을 감추고 범인들을 도망시켰다. 두 사람의 의견이 공공연히 상치 한 것은 이때뿐이었으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잘 일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살해된 사 람들의 일가는 타티우스 때문에 원한을 풀지 못하였으므로 그와 로물루스 두 왕이 라비니움 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그를 죽이고, 로물루스는 공정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였다. 로 물루스는 타티우스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서 후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의 무덤은 아벤티네 산에 있는 아르밀루스트리움 가까이 있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이 살인죄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떤 설에 의하면 라우렌툼은 겁을 먹고 타티우스를 죽인 범인들을 보내왔지만 로물루스는 그들을 놓아주면서 피는 피로써 갚 았다는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로 인하여 로물루스는 동료가 없어진 것을 섭섭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거나 사비니 인들이 반항하지는 않았다. 로물루스 가 두려워서 그랬는지 또는 그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그랬는지 그들은 로물루스 왕을 존 경하며 즐겁게 살았다. 타국에서 온 많은 족속들도 로물루스를 존경하며 로마 시보다 더 오 랜 여러 라틴 지방에서 사절단을 보내서 우호조약들을 맺었다. 그는 로마에 가까운 피데나 이 시를 공략하였다. 어떤 설에 의하면 갑자기 기병을 보내서 성문을 부수게 하고 별안간 본인이 나타났다고 하며, 다른 설에 의하면 피데나이 사람들이 로마의 영토에 먼저 침입하 여 약탈하고 시의 인근지까지 모욕하였으므로 로물루스는 복병을 시켜 많은 적을 살해하고 그들의 시를 점령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시를 파괴하지 않고 로마의 영토로 삼은 후, 4월 15일에 2천5백 명의 로마 인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 후 로마에는 질병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고, 고식과 가축이 많이 상하였다. 거 기에다 피의 소나기까지 내려, 인민의 고초에 천벌까지 겹쳤나 하고 두려어하였다. 이와 같 은 변은 라우렌툼 시민에게도 생겼으므로 타타우스와 사절단의 살해범들을 치죄하지 않아서 신이 노여워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시에서 범인들을 잡아 형을 주니 재앙은 물러갔다. 로물루스는 시를 정하게 하려고 제사를 지냈다. 오늘날의 페렌티나에서 그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질병이 끝나기도 전에 카레리움 인들이 로마를 공격해왔다. 그들은 로마 인들이 재앙으로 시달리고 있으니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거 내습하 였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곧 나가 싸워 600명을 죽이고 그들의 시를 빼앗았다. 그 곳 주민의 반은 로마로 이주시키고 남아 있는 수효의 배나 되는 로마 인을 그 곳에 이민을 시켰으니, 로마를 세운 지 겨우 16년 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민시켰던 것이다. 전리품 주에는 네 필의 말을 메워서 쓰는 청동으로 만든 전차도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승리의 관을 쓴 자기 의 초상을 태워 불카누스의 신전에 헌납하였다. 로마가 이와 같이 왕성하게 되자 이웃의 약한 나라들은 복종하여 침해하지 않겠다는 약 속을 하였으며, 로물루스는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강한 나라들은 로물루스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시기도 하였으며, 로마가 자라는 것을 가만히 방임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먼저 나라도 넓고 도시도 컸던 베이엔테스가 선전포고하며 피데나이 시가 자기들의 것 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피데나이 사람이 난국에 처하여 홀로싸울 때는 도와주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망하는 것을 방관하였고, 남의 손에 들어간 다음에 그들의 토지아 가옥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부당할 뿐 아니라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므로 로물루스가 오만 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피데나이를 공격하고 또 하나는 로물루스와 싸웠다. 그들은 피데나이에서 로마 군을 정복하고 2천 명을 살해하였으나, 로물루스 군에게 저서 8천 명을 잃었다. 피데나이에서 또 한 번 싸웠는데 이 싸움에서 로물루스는 가장 큰 공을 세움으로 해서 그의 훌륭한 전략과 용기, 힘가 신속성을 종횡으로 발휘하였다고 대다 수의 사기는 전한다. 그러나 이때 살해당한 적군 1천 4백 명의 반 이상을 로물루스가 제손 으로 죽였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지나친 말이다. 아리스토메네스가 300명의 라케다이몬 군 을 죽이고 신에게 세 번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고 전하는 메세니아 사람의 말에 믿지 않는 과장이다. 싸움에 이기 로물루스는 패주하는 적군은 쫓지 않고 곧장 셈템파기움으로 진군하였다. 참 패를 당한 시민들은 저항하지 않고 휴전을 맺고 100년간의 동맹을 요청하며 영토의 일곱 지 구와 강가에 있는 소금공장과 명사 50명을 볼모로 주었다. 이리하여 로물루스는 10월 15일 에 많은 포로를 이끌고 개선하였다. 그 중에는 베이엔테스의 늙은 장군도 있었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어리석은 과오로 전쟁에 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도 전승기념제를 지 낼 때는 법원에서 의사당까지 늙은이를 이끌고 다니는데, 넓은 자줏빛 단을 댄 어린이옷을 입히고 목에도 아이들처럼 불라를 돌리고, '사르디니아 인을 팝니다'라고 외친다. 왜냐하면 투스칸 인은 사르디니아가 본 고향이며 베이엔테스는 그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물루스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구 뒤에 그는 여러 번 운이 터서 권세와 명성을 얻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나친 자부심과 오만에 사로잡혀 종래의 대 중적 태도를 버리고 독재자의 교만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자줏빛 옷에 자줏빛 단이 달린 겉옷을 입었고, 정사를 볼 때도 왕좌에 앉지 않고 누워서 하였다. 그리고 왕명을 신속히 행 하는 까닭에 켈레레스라고 부르는 소년들을 사환으로 두었다. 그리고 행차할 때는 지팡이를 든 사람들이 앞장서서 군중을 물리쳤고, 그의 명령만 떨어지면 누구든지 체포하려고 포승을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라틴 어로 묶는다는 말은 예전에 리가레, 지금은 알리가레라고 하는 데 그로부터 연유하여 지팡이를 들고 다닌 이들 사령을 릭토르라 하고 그들의 지팡이를 바 쿨라라고 하였다. 그들을 릭토르라고 부른 것은 리토레라는 본래의 단어에 c자가 삽입된 것 이며, 그리스 어에서 관사를 의미하는 단어 리투르기에서 파생한 것 같다. 오늘날도 그리스 사람들은 관청을 레이토스라고 하며, 인민을 라오스라고 한다. 로물루스의 외조부 누미토르가 알바에서 사망하자 로물루스가 으레 그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었으나, 그는 직접 그 곳을 다스리지 않고 그곳의 지사를 매년마다 새로 임명하였다. 이 와 같이 함으로써 그는 로마 귀족들로 하여금 인민의 자유를 더 존중하는 제도를 희구하게 하며, 그것은 왕이라 할지라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범하였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정부'라고 부르는 귀족들은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다만 그 이름의 권위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원로원에 모여 그저 로물루스의 말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모여 그저 로 물루스이 정령을 듣기만 하였으며, 평민보다 낫다는 것은 그들보다 좀더 먼저 정령을 듣는 것뿐이었다. 로물루스의 가장 큰 실정은 전쟁으로 얻은 토지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베이엔테스에 서 잡아온 볼모를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마음대로 돌려보낸 일이다. 그 때문에 그 는 일부러 원로원을 모욕한 것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까닭은 그 휘 얼마되지 않아 로물루스가 이상스럽게 행방불명되자, 이것 이 원러원이 꾸민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된 일로 증명된다. 로물루스가 행방불명된 것은 그 시대에 퀸틸리스라고 부른 7월 7일이었는데, 일자 이외에는 전혀 알려진 사실이 없 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이 까닭 모를 일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으므로 로물루스가 어떻 게 죽었는지를 모르더라도 그다지이상할 것은 없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자기집에서 저녁 먹은 뒤 까닭 모를게 죽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속병으로 죽었다. 음독 자살이다. 또는 밤중에 원수들이 목을 눌러 죽였다고들 하였다. 그의 시체를 누구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온갖 억측이 생겼으나, 로물루스는 별안간 행방불 명되었으며 시체는 물론 입던 옷조각 하나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억측하기 를 원로들이 불카누스의 신전 안에서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시체는 동강이를 내어 제각기 옷 속에 감춰가지고 갔다고 하 곳은,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행방불명된 곳은 그 신전도 아니고 원로들만 있는 데서도 아니다. 시외에 있는 염소못이라는 곳 가까이서 회의 를 하고 있었는데 하늘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며 햇빛이 꺼져 캄캄한 밤이 되고, 무서운 번 개와 바람이 터지며 심한 소나기가 사방으로 뿌리쳐 사람들은 산산히 도망쳤다. 그러나 귀 족들만은 그대로 모여 있었다. 천변이 지나가고 다시 밝아지자 사람들은 그 자리로 돌아가 서 모였으나 로물루스는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말하기를 로물루스를 찾으려고 수고하지 마라, 하늘로 올라갔으니 지금은 백성을 위하는 어진 왕이 아니라 수호신이 되어 있을 것이 므로 숭배하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그에게 기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더러는 성내며, 귀족들이 왕을 시역하고는 백성들을 농락한다고 시비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귀족이며 인망도 높은 사람으로 율리우스 프로쿨루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로물루스와 같 은 알바 출신으로 그의 친구였는데, 이 사람이 법정에 들어와서 가장 신성한 것을 두고 맹 세하고 말하기를, 자기가 길을 걸어가는데 로물루스가 생시 어느 때보다도 좋은 풍채로 갑 옷을 찬란하게 입고 나타났으므로 놀라면서 잃게 물었다고 하였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무슨 의도로 그와 같이 하셔서 저희들을 억울한 의심받게 하시고, 또 모든 시민이 이런 슬픔 속에 잠겨 있게 하셨습니까?' 로물루스는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하였다. '내가 인간세상에서 그만큼 살고 권세와 영광이 가득한 도시를 세웠으니, 다시 하늘로 돌 아감이 마땅하다는 신의 뜻이오, 안녕히 지내요. 로마 사람들에게 용기와 절제로 인간의 권 세가 극치에 이르도록 해달라고 부탁해주오, 나는 퀴리누스라는 신이 되어 영원히 여러분을 가호할 것이오.' 로마 사람들은 프로쿨루스가 말한 태도와 그의 맹세로써 이 말을 굳게 믿었다. 거기에 있 던 모든 사람은 광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 감흥에 싸여 마음 속의 모든 의심 을 버리고 로물루스가 쿠리누스 신이 되었다고 믿으며 기도하였다. 이 이야기는 아르스테아스와 쿨레오메데스에 관한 그리스의 전설과 흡사하다. 그 전설에 의하면, 아리스테아스는 세탁소에서 죽었는데 일가사람들이 시체를 찾으러 가보니 시체가 업었다. 그때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도중에서 아르스테아스를 만났는 데 크로톤으로 가더라고 하였다. 클레오메데스는 체격과 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어리석은 광인이어서 여러 가지 난행 이 있었는데 마지막에는 아이들의 학교로 가서 기둥 둘을 꺾어 무너뜨렸다. 그러자 아이들 이 깔려 죽었으므로 클레오메데스는 사람들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한 나무상자 속에서 들어 갔다. 그는 뚜껑을 닫고 안에서 잡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상자를 부수고 보니 안에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었다. 이에 놀라서 델포이로 사람을 보내 신탁을 불었더니 이런 대답을 얻었다. '모든 영웅 중에 클레오메데스가 마지막 장수다.' 알크메네의 시체가 무덤으로 가는 도중 사라지고, 그 대신 상여 위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이 밖에도 허다하여 사람의 육신이 영혼과 함께 신이 되었다는 이성으로는 해득 못 할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선행이 정신적 성질을 띠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비열한 일이다. 그러나 땅에 딸린 것을 하늘에 속하는 것과 혼동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핀다로스의 의견을 좇아 조슴스럽게 말한다면, 모든 사람의 몸은 절대적 권세를 가진 죽음을 좇아가되, 영원히 살아 있는 영혼은 남는다. 왜냐하면 영혼만이 하늘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하늘로 돌아간다. 그러나 육신과 같이 가는 것이 아니고, 육신과 완전히 갈라져 형체 없이 된 다음에 간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바 가장 정순한 영혼이며, 번개가 구름을 가르듯 영혼은 사람의 육체를 달리고, 그러므로 선한 사람의 육신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 리에 맞지 않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을 수 있다. 즉 사람의 미덕과 정기는 평범한 사람 으로부터 솟아 영웅으로 미치며 영웅으로부터 지신에 미치고, 다시 모든 지상의 더러움을 벗어나게 되면 신령한 기적에서 그 예를 보듯이 다만 원로원의 덧없는 투표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진실로 천신 속에 RL게 되어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종말에 이른다고 한다. 로물루스가 받은 퀴리누스라는 이름은 군신 마르스를 의히한다는 사람도 있다. 옛날 사람 들은 창날이나 창을 퀴리스라고 불렀고 창을 잡고 서 있는 유노 신의 초상을 유노 퀴리티스 라고 하고, 레기아 안에 있는 창을 군신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 람에게는 창을 주었으므로 로물루스를 퀴리누스라고 부른 것은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퀴리누스 산에는 그를 모신 신전이 있으며, 그가 승천하였다는 날은 사람 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날이면 모든 사람들은 염소못으로 제사드리러 나가고 거리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사드리러 나가면서 마르쿳, 루키우스, 카이우스 하며 서로 찾는 듯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로물루스가 사라진 날의 공포와 혼란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이것은 공포의 시늉이 아니라 열광의시늉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로마를 점령하였던 갈리아 군을 카밀루스의 공으로 몰아냈으나 아직도 시가 피폐하여 있 을 때, 리비우스 포스투미우스라는 사람이 지휘라는 라틴 군이 공격해왔다. 그는 군대를 시 외에 멈추고 사절을 보내서 말하기를 , 오랫동안 중단되기는 하였으나 예전에 하던 대로 두 족속이 서로 혼인을 하자고 했다. 그러니까 로마의 모든 처녀와 독신인 여자들을 내보내면 화평을 하고 의좋게 지내도록 하겠으며, 로마 사람들도 예전에 사비니 사람과 그와 같이 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로마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도 무섭고, 그렇다고 여자들을 포로나 다름없이 보낼 수는 더욱 없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름이 필로티스였다고 하 고 투톨라였다고도 하는 한 여종이 그 두가지를 다 그만두고 자기와 그외의 아름다운 여종 들을 자유의 여자처럼 옷을 입혀서 적에게 보내면 밤중에 횃불을 올릴 것인, 그것을 신호로 공격해 와서 잠들어 이쓴 적군을 섬멸시키라고 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이 말을 좇아 라틴 군과 협정을 맺었다. 적진으로 간 필로티스는 밤중에 횃불을 들고 한 무화과나무로 올라갔 다. 그 나무는 가지와 피사귀가 뒤로 뻗어 있어서 횃불이 적군에게는 보이지 않았으나 로마 군에게는 잘 보였다. 신호를 보자 롬인들은 성문으로 달려나가며 영광된 나머지 서로 이름 을 불렀다. 이와 같이 불시에 적을 공격해서 무찌르고 그 날을 기념하였다. 이 기념일을 일 명 카프로티나에라고도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무화과나무를 카프리피쿠스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 날이면 여자들은 밖으로 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즐겁게 먹고 논다. 그리고여 종들도 하메 모여 놀이를 하다가 나중에는 돌싸움을 하면서 논다. 낮에 서로 이름을 부르며 염소못으로 내려가는 행사는 먼저 이야기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위 의 두 사건이 같은 날에 있었다면 또 모른다. 로물루스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그의 나이 53세, 왕이 되어 38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로물루스와 테세우스의 비교 앞서 기로한 것이 내가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에 관해서 알 수 있는 전부다. 무엇보다도 테 세우스는 트로이젠의 왕위에 올라 편안하고 호화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사로 평생 영웅적 행동을 갈구하였다. 반면 로물루스는 자신이 처한 노예신분의 형벌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 노력했다. 그러므로 로물루스가 용감하게 된 것은 순전히 공포 때문이었다. 죽음과 고문 을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큰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로물루스가 세운 공적은 다니 알바의 군주 한 사람을 죽인 것뿐이다. 그러 나 테세우스로 말하자면 스키론, 시니스, 프로크루스테스, 코리네테스 등을 죽인 것 정도는 더 큰 일을 수행하기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테세우스는 이런 악당들을 죽임으로써 그리스를 무시무시한 압제자들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때는 그리스 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미처 알지도 못할 때였다. 또한 테세우스는 바다를 통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아테네로 건너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아물리우스가 살아 있는 동 안은 문제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테세우스가 더욱 훌륭한 것은, 자신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서 악당들과 싸웠다는 점이다. 하지만 로물루스아 레무스는 폭군 아물리우스가 자기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주지 않는 한, 다른 어떤 사람들을 괴롭히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 비니 족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아크론 왕을 죽인 것이나, 많은 적들을 정복한 것 등을 커다란 업적으로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테세우스가 켄타우르스들과 전투를 치르며 아마존 군 과 싸운 것에 비교하면 커다란 차이가 없다. 테세우스가 스스로 젊은 소년소녀들과 함께 크레타 섬으로 끌려간 것은 정말 로 대단한 모험이라고말하지 않을 수 없다. 테세우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밥으로 던져지거나 안드로게오스의 무덤에 제물로 바쳐 지거나, 혹은 적어도 혹독한 주인 밑에서 평생 종으로 지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테세우스가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과 공익을 위한 정의감, 명예와 모험에 대한 사랑 등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철학자들이 사랑을 가리켜 어린 사람들을 돌보아주기 위한 신의 섭리라고 정의한 것은 틀 린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아리아드네의 사랑은 테세우스를 구하기 위한 특별한 신의 섭 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 우리는 테세우스를 사랑한 아리아드네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테세우스에 대해 그와 같은 사랑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놀라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리아드네만이 그런 사랑을 느낀 것이라면 감히 단언하건대 그녀 야말로 진실로 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아리아드네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선량하고 고귀한 한 사람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나 로물루스 모두 타고 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정한 왕으로서 살아가지는 못했다. 테세우스는 너무 나 민주적이었고 로물루스는 폭군이 되었던 것이다. 두사람 모두 상반된 정열에 의해서 똑 같은 함정에 빠진 셈이다. 통치자의 첫 번째 목표는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합 당한 일을 행함으로써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일을 피함으로써도 얻어진다. 누구든지 지나치 게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해진다면 더 이상 왕이나 통치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통치자는 독재자나 아니면 허수아비가 되어서 백성들에게 공포나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테세우스가 지나친 관대함과 온유함을 보이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로물루스는 오만과 잔인 함을 부리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만약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전적으로 운명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 이라면,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성급하고 비이성적인 분노를 터뜨린 것이나 로물루스 가 동생에게 한 행동을 누가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행동의 동기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테세우스의 분노에 있어서 좀더 쉽게 변명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마치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은 것처럼 강력 한 원인에 의해서 느닷없이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로물루스는 공적인 문제에 있어 서 동생과 의견이 엇갈린 것이므로, 그런 일로 해서 갑작스럽게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사라 잡힌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라도 인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사랑과 질투와 부인의 모함에 이끌려서 아들에게 저주와 분노를 내린 것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경우에 이 러한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로물루스는 화가 나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을 저질렀지만, 테세우스는 단지 늙은이의 욕과 저주를 퍼부은 데 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당한 이후의 재난은 순전히 불운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테세우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편 로물루스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미천한 지위에서 시작하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 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것이다. 두 형제 모두 노예였으며 돼지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후 로물루스는 모든 라틴 족을 해방시키고 국가의 적을 무찌르고 친 구와 친족들을 보호한 자로 가장 명예로운 칭호를 획득하기에 이른 거이다 또한 한 민족의 왕으로서, 주민을 이주시킨 것에 불과한 테세우스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도시를 창건하였다. 사실 테세우스는 옛날의 왕과 영웅들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도시를 허물고 여러 도시를 병 합하여 하나의 도시를 일으켰을 뿐이다. 물론 로물루스는 나중에는 정복한 적국의 사람들로 하여금 살던 곳을 없애고 로마로 이주 하여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도시를 이전하거나 혹은 확 장 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터전을 잡음으로써 스스로 나라와 왕국과 부인들과 아이 들, 그리고 친척까지 이루어낸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로물루스는 어느 누구도 죽이거 나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집과 가정을 이루고 기꺼이 한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 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강도와 부랑자도 죽이지 않았다. 단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도시를 무너뜨렸으며, 왕족들과 통치자들을 상대로 싸워 승리하였던 것이다. 레무스에 대해서는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이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레무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에서 부터 구출하였고, 비참하고 불명예스러운 곤경에 빠져 있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아이네아스 가의 왕위까지 앉혀드렸다. 레무스는 자발적으로 많은 선행을 하였으며 고의로 해를 끼친 일은 없었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돛을 바꾸어 달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소홀히하고 잊어버린 일은 아무 리 관대하게 평하여도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아무리 변호해도 테세 우스의 이 행동을 관대하게 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심지어 아테네 인들 중 한사람은 이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즉, 테세우스의 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늙은 아이 게우스가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하여 급히 아크로폴리스로 달려가다가 미끄러져 죽었다 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나라의 왕인 아이게우스가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바닷 가까지 달려갔다는 주장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진정 테세우스에게 있어서 여자들을 납치한 일은 어떤 변명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 첫 째 이유는 테세우스가 그 같은 범죄를 자주 반복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안티오페 그리고 트로이젠 여인인 아낙소를 납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까지 헬 레네를 납치하였다. 더욱이 헬레네는 아직 결혼할 나이조차 아니었다. 헬레네는 어린아이였 고 테세우스는 이미 합법적으로 결혼을 올릴 수 있는 나이를 휠씬 지나 있었던 것이다. 당 시로서는 이러한 행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트로이젠 여인이나 라케 다이몬 혹은 아마존의 여인들도, 비록 테세우스와 약혼하지는 않았지만 에레크테우스나 케 크로프스에서 데리고 온 아테네 여인들 못지않게 그와 사이에 난 자녀들의 어머니가 될 자 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이러한 행동은 오직 바람기와 욕정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여겨진다. 반명 로물로스는 800명이 넘는 여자들을 납치하였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사람, 헤르 실리아만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모두 도시의 장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이 후에도 그는 납치해온 여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심을 보이며 정의를 베풀었다. 결국 로물루스 가 폭력을 행사한 것은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로물루스는 이러한 수단을 통해 두 민족을 하나로 융합하고 우정과 정치적인 안정 을 기반으로 삼았다. 결혼제도에 로물루스가 존엄성과 사랑과 지속성을 확립해놓았다는 사실은 세월이 증명해 주었다 그 후 230년 동안, 로마에서는 어떠한 남편과 부인도 서로를 저버린 일이 없었다. 흥 미로운 것은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최초의 부친 살해나 모친 살해를 저지른 사람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로마 인들이라면 누구나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를 알고 있다. 그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내를 저비린 첫 번째 사람이란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보아도 로물루스가 더 지혜로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로물루스의 경우, 결혼을 통해 두 나라의 왕이 왕국을 함께 나누고 두 민족이 같은 정부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저지른 강제결혼은 어떠한 국가 간의 동맹이나 상업상의교류 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이 일어나 시민들이 살육당하고 결국은 아피드나이 시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시민들은 살육당하고 결룩은 아피드나이 시를 잃고 말았던 것이 다. 그때 시민들은 적군을 마치 신처럼 대접하고 환영함으로써 적군의 환심을 얻어, 겨우 파 리스가 트로이에 초래한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어머니는 파리스의 어머니인 헤쿠바와 같은 운명을 당하여 아들에게 버림을 받고 말았다고 한다. 혹은 적군에 게 포로로 잡혀갔다는 설도 있다. 두 사람의 출생과 성자에 따른 종교적인 환경을 보아도 굉장한 차이가 있다. 로물루스는 신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게우스에게 주어지 신탁은 여자를 삼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테세우스의 출생은 신의 뜻과 어긋난 일이었다. 리쿠르고스 스파르타의 법령을 제정한 리쿠르고스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분명하게 남아 있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 역사학자들 중 한 사람이 어떤 견해를 피력하면, 언제나 다른 역사학자들에 의 해서 의문이 제시되고 반론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리쿠르고스의 출생이나, 생애, 사망에 대 한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제각기 다르다. 그뿐만 아니라 리쿠르고스가 언제 법을 제정하였으 며, 언제 공화국의 기초를 다졌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조차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결국 역사학자들은 리쿠르고스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리쿠르고스가 이피토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며, 그와 함께 올림피아 제전이 열리는 동안 전쟁을 중지하는 법령을 정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 주에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증거로 올리핌아 경기중에 사용되는 구리고리에 새겨진 글씨를 인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그 구리고리에는 리 쿠르고스의 이름이 새겨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아 아포로도로스 그리고 다른 연대기학자들은 스파르타 왕의 계보 를 통해 시대를 계산해본 결과 리쿠르고스는 올림픽 경기가 제정되기 휠씬 이전의 사람이라 는 것이다. 티마이우스는 같은 이름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름이 너무나도 유명해지는 바람에 후세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업적을 한 사람의 것으로 모두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티마이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두 사람 중에서 더 오래 전에 살았던 리쿠르고스는 호메로스 시대 바로 이후의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직접 리쿠르고스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세하게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 만 리쿠르구스는 너무나 오래 된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크세노폰의 저서에서 사실을 짐작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리쿠르고스는 헤라클리다이와 동시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실 스파르타의 마지막 왕이 헤라크리다이다. 하지만 크세노폰은 리쿠르고스가 헤라클레스의 직 계후손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혼란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쿠르고스의 역사르 구성해보려고 노력할 것 이다. 모순되는 내용이 가장 적은 기록과, 가장 믿을 만한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존하여 그의 일생을 더듬어보려 한다. 시인 시모니데스에 의하면 리쿠르고스의 아버지는 에우노모스가 아니라 프리타니스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모니데스만의 견해이며, 대부분의 다른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리쿠 르고스의계보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디에우키다스의 설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파트로 클레스로부터 6대, 헤라클레스로부터 11대가 된다. 리쿠르고스의 조상들 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소우스였다. 소우스가 통치할 때 스파르 타는 헬롯인을 정복하고 아르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소우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파르타 군은 클리토리아 군에게 포위되어 어느 성 안에 갇혔다 그 성 안은 온통 돌로 된 메마른 땅이라 마실 물이 전혀 없 었다. 소우스 왕은 마치내 적에게 다음가 같은 조건을 제시하였다. 가장 가까운 샘에서 자신 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에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면, 정복한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맹세를 하고 조약을 맺은 소우스 왕은 병사들을 소집하여 누구든지 물을 맛시지 않고 참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않고 견디는 병사는 아 무도 없었다. 결국 모든 병사들이 실컷 물을 마신 후 마지막으로 소우스 왕만이 남았다. 적군이 지켜보 는 가운데 샘물로 다가간 소우스 왕은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단지 얼굴에 물을 적시기만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애초에 맺은 조약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이 물을 마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정복한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러한 일화로 소우스는 이름 을 떨쳤다. 그러나 정작 그 가문의 이름이 유래된 것은 그의 아들 에우리폰부터였다. 왜냐하 면 에우리폰 왕은 전제적인 왕권을 완화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호감과 아니를 얻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 결과 백성들은 차츰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다. 에우리폰의 뒤를 계승한 왕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거나 혹은 나약함과 방임으로 백성들의 인기를 얻거나 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는 무질서와 혼란이 오랫동안 지속되었 다.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혼란은 리쿠르고스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리쿠르 고스의 아버지는 폭동을 진압하려고 애쓰다가 백정의 칼에 찔려 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맏 아들 폴리데크테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폴리데크테스 왕도 오래지 않아죽고 말았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리쿠르고스의 것 이었다. 실제로 리쿠르고스는 얼마 동안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왕비인 형수가 잉태중임을 알게 된 리쿠르고스는 즉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만약 태어날 아기가 남자아이라면 왕비의 소생이 왕국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자신은 오직 후견인으로서 장차 출생할 아기를 대신하여 정무를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섭정을 스파르타 인들은 프로티쿠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왕비로부터 리쿠르고스에게 비밀스런 제안이 전해졌다. 자신과 결혼하고 왕위에 오른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아기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왕 비의 사악함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거절의 뜻을 비추지 않았다. 오히 려 왕비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뜻을 전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그러나 아 기를 강제로 유산한다면 왕비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차라리 아기가 출생하는 대로 자신이 직접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교를 통하여 마침내 왕비는 아기를 분만하기에 이르렀다. 왕비가 진통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리쿠르고스는 사람을 보내어 옆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 약 여자아기를 낳거든 여인들에게 맡기고, 남자아기를 낳거든 자신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 고 있든지 상관하지 말고 즉시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일렀다. 때마침 리쿠르고스가 여러 원로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왕비가 남자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곧 식하고 있는 리쿠르고스에게 전달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아기르 받아 안고 둘레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 스파르타 인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나셨소.' 말을 마친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칼리라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만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리쿠르고스의 고귀하고올바른 성품에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리쿠르고스가 왕위에 있었던 것은 오직 여덟 달 동안이었다. 하지만 리쿠를고스는 시민들 의 존경을 받았다. 시민들은 리쿠르고스가 왕권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고 결한 덕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더욱 기꺼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리쿠르고스가 아직 젊은 나이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을 시기하고 적대시 하던 일파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비의 친척과 그 일파였다. 왕비는 리쿠르고스로부 터 모욕을 당했다고생각하였으며, 왕비의 오빠 레오니다스는 리쿠르고스와 말다툼을 한 끝 에 화가 나서, 그의 면전에 대고 머지않아 왕이 된 리쿠르고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을 확신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만약 태어난 아이가 어떤 변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마치 리쿠르 고스가 조카를 없애버리라고한 것처럼 그에게 모든 죄와 의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같은 암시를 담은 말들이 왕비와 왕비의 측근들을 통해서 나라안에 널리 퍼져나가 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으로 고통받고,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리쿠르고스는 적들의 질투를 피해서 스스로 나라를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카가 성장하여 결혼할 나이가 되고 그 다음 대를 이을 왕자를 두게 될 때까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결심으로 출항한 리쿠르고스는 가장 먼저 크레타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여러 정부의 형태를 연구하며 정계요인들과 사귀었다. 또한 그 나라의 법 가운데서 높이 평 가할 만한 것은 본국에 돌아갔을 때 채택하고, 쓸모 없는 법은 폐지해버리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그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학식과 지혜가 높기로 가장 이름나 있 는 사람은 탈레스였다. 리쿠르고스는 우정어린 마음에서 탈레스에게 함께 라케다이몬으로 가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라케다이몬에서 탈레스는 일개 떠돌이 시인에 지나지 않는 듯 행세하였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법률가의 한 사람이었다. 탈레스의 시는 형 식의 통일과 조화를 존중하며 고요한 질서를 풍기는 것이어서, 시를 듣는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순화하였으며 개인적인 욕심과 파당을 없애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덕을 흠모하는 한 마음으로 다시 새롭게 단합할 수 있 었다. 그러므로 진정 탈레스가 리쿠르고스의 개혁을 위한 길을 닦았다고 말할 수 있다. 크레타를 떠난 리쿠르고스는 소아시아로 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크레타 인들의 근엄하고 중용을 지키는 생활방식과 이오니아 인의 호탕한 생활방식을 비교하러 갔다고 한 다. 마치 의사가 성한 사람과 앓는 사람을 서로 비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리쿠르고스 는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으로 보았다. 아마도 크레오필루스의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호메로스의 시에서 가끔씩 발견할 수 있는 점들, 즉 나쁜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이나 나태한 표현 등은 국가에 대한 심각한 교훈이나 도덕적인 원리 등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리쿠르고스는 자신이 직접 시의 원본을 베끼고 순서대로 정리하 였다. 호메로스의 시가 본국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만 해도 벌써 호메로스의 시는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우연 히 개개인들의 손에 실려서 단편적으로 소개도곤 하였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처음으로 호 메로스의 시를 본격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집트 인들은 리쿨르고스가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군인과 일반 백성들을 분리한 것에 감 탄하고, 그 제도를 변형하여 스파르타에 전했다고 주장한다. 천하고 기계적이 직업에 종사하 는 노동자들과의 모든 접촉을 제거함으로써, 스파르타를 높은 품격과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 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 인도 그와 같은 기록을 남긴 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조 사한 바로는 리쿠르고스가 스페인이나 아프리카 그리고 이디아 등지로 여행했다는 것이나, 그곳에서 나체 수도사들과 만났다는 등의 이야기는 오직 히파르코스의 아들이며 스파르타 인인 아리스토크라테스의 기록에만 나타날 뿐이다. 스파르타의 많은 사람들은 리쿠르고스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종종 사람을 보내어, '지금 까지 우리가 모셨던 왕들은 왕의 치호를 가지기는 했지만 정신적인 자질에 있어서 신하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오직 그만이 왕다운 정신력 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왕들까지도 리쿠르고스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왜냐하면 그의 존재가 백성들의 무례한 태도를 막아줄 방벽이 될 것 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리쿠를고스는 그 즉시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의 전모를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몇 가지 사소한 법률이나 편파적인 대안을 세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쿠를고스는 현명한 의사처럼 단호한 처방을 내려야 만 했다. 환자가 심각한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경우, 현명한 의사라면 약의 힘에 의해 강 제로라도 환자를 쇠진시켜서 전체의 기질을 모두 바꾸고 나서, 완전히 새로운 식이요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의 계획을 세운 후, 리쿠르고스는 아폴론 신에게 신탁을 구하기 위하여 델표이로 갔다. 그 곳에서 신에게 제사를 드린 리쿠르고스는 바로 그 유명한 신탁을 받게 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불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또한 리쿠르고스의 기도가 상달되었으므로 그가 만 든 법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이 될것이며, 그 법을 준수하는 공화국은 세상에 널리 이름 을 떨치게 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이 신탁에 용기를 얻은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계 획에 착수하였다. 자신의 위대한 일에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리쿠르고스는 우선 특별 히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차 다른 사람들을 포섭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모두 리쿠르고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 열성적이었다. 마침내 계획안 일을 실행할 만한 때가 무르익자,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원로격이 되는 30명의 사람들에게 완전무장하고 이른 아침에 시장으로 가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 대파들에게 위협을 주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20명의 이름을 헤르미푸 스가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들 중에서 리쿠르고스가 가장 신임하고, 법을 만드는 데 있어 서나 법령을 실행에 옮기는데 있어서 제일 커다란 도움을 준 사람은 아르트미아다스였다. 소동이 점점 커져가자 카릴라우스 왕은 자신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브라 젠하우스의 아테네 신전 안으로 듣고서 피난처를 떠나 리쿠르고스와 함께 개혁에 참여하였 다. 사실 카릴라우스 왕은 천성이 어질고 순한 사람이었다. 그의 형제였던 아르켈라우스는 카릴라우스의 선량함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카릴라우스에 대해 나쁜 말을 할 수가 있겠소? 그는 악한 자들에게조차도 너무나 공정하다오.' 리쿠르고스의 여러 가지 개혁 가운데, 첫 번째로 실시한 가장 중요한 일은 원로원을 세운 것이었다. 원로원은 나라의 중요한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왕과 동등한 권한을 지닌 기간이 었다. 플라톤의 표현대로 왕권의 전제적인 속성을 완화하고 공화국에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기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정치가 의존할 만한 확고한 기반을 가 지지 못하여 강력한 권한을 가졌을 때에는 절대군주 정치로 치우치고, 그와 반대되는 경우 는 순전한 민주정치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원로원의 성립으로 백성의 지나 친 방종을 억누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왕권의 성립을 반대하는 백성들을 지지해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리쿠르고스의 개혁에 처음부터 가담하였던 30명 중에 서 두 사람이 용기를 잃고 계획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원로원의 수가 28명이 되었다고 한 다. 그러나 스파이루스에 의하면, 원로원은 처음부터 28명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28이란 숫 자가 어떤 신비를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8은 7을 4로 곱한 수인데, 6 다음으로 완 전한 첫 번째 수다. 즉 28은 6과 마찬가지로 어느 모로 보나 평형을 이루는 수다. 그러나 나 의 견해로는 아마도 전체 원로원의 수 30명 중에 두 명의 왕도 포함되기 때문에, 나머지 원 로원이 28명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원로원을 만드는 일에 너무나 열성적이었던 리쿠르고스는 델포이로부터 이 일에 관한 신 탁을 얻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레트라 신탁을 얻었다. '제우스 헬리아니우스 신과 아테네 헬라니아 신에게 성전을 지어바친 다음, 백성들을 '필 레스'와 '오베스'로 나누도록 하라. 너는 지도자들까지 포함된 30명의 원로들로 이루어지 의 회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백성들을 바비카와 크나키온 사이에서 '아펠라제인'하되 그 곳에서 투표하게 하라. 평민들은 최후의 결정과 판결을 얻게 될 것이다.' 신탁의 내용 중에서 '필레스'와 '오베스'란 마을 백성을 나누는 단위를 의미한다. 또한 '지 도자들'이란 두 명의 왕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펠라제인'은 소집한다는 뜻으로 수호신인 하 폴론 신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바비카'와 '크나키온'은 오늘날 '오이누스'라고 부르는 것 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크나키온'은 강을 뜻하며, '바비카'는 다리를 뜻한다고 한다. 어쨌든 이 당시의 회의는 크나키온 강과 바비카 다리 사이에서 소집되었다. 왜냐하면 모 두가 모여 만날 만한 회의장이나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쿠르고스는 여러 가지 격식이 회의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각상이나 그림, 혹은 기묘하게 장식된 천장 같은 것은 원로원들의 시선을 빼앗아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다른 그리스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보통 그러한 장식으로 회의장을 치장하였다. 야외에 모인 백성들은 어떤 의견도 말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오직 왕이나 원로들이 상 정한 안건에 대해서 찬성이나 반대만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이 제 도에 여러 가지 수정을 가하여, 원로원이 하는 건의의 의미를 왜곡하고 손상시켜 버렸다. 플 리도루스와 테오폼푸스 왕이 레트라 즉 대법전에 다음과 같은 어구를 첨가하였던 것이다. '만약 백성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겨우, 왕과 원로들은 법으로써 그 결정을 취소할 수 있다. ' 즉 모든 정사에 대한 백성들의 비준을 거부하고, 백성들을 의회의 방해자요 훼방꾼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법안은 두 왕의 농간에 의하여 레트라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 지로 똑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실은 티르타이오스의 시에 나타나 있 다. 그들이 아폴론으로부터 신탁을 듣고 하나도 빠짐없이 피토에서부터 조국까지 가져왔나니 하늘이 정하신 왕들이여, 이 땅을 사랑하사 이 나라의 의회를 첫째로 세우셨으니, 그 다음의 원로이고 가장 마지막이 평민이다. 신성한 레트라를 우리 모두가 받아들이자. 리쿠르고스는 공화국의 제도 안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이와 같이 정치적 권력을 나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은 독재정치가 될 요인이 아직도 강력하고 우세하게 남아 있다고 보고, 군주의 폭력과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서 왕의 입에 재갈을 물리 기로 하였다. 그것이 리쿠르고스가 죽은지 130년 만에 세워진 에포로이 제도다. 엘라투스와 그의 동지들이 바로 이러한 권위를 지니게 된 첫 번째 에포로이들이다. 이들은 테오폼푸스 왕 때에 선출되었다. 어느 날 테오폼푸스 왕비는 왕이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합법적인 권력을 자식들에게는 더 적게 물려준다고 힐난하였다.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더 적어진 것이 아니오, 왕의 권력은 더욱 커진 것이오, 왜냐하면 이 권력이 더욱 오래갈 것이기 때문이라오.' 사실 왕의 절대적인 권력은 합리적인 수준으로 축소되었으나, 스파르타의 왕들은 적들의 시기나 그로 인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이웃 국가인 아르고스나 메세나의 왕들과 같은 재난을 결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왕들은 자신들의 왕권을 너무나 철저하게 고수하며, 대중들의 요구에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스파르타와 인접한 형제국가에서 벌어진 혼란과 잘못된 정치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 정 리쿠르고스가 선견지명이 있고 현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처음 나라가 생겨날 당 시만해도, 이웃한 세 나라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파르타와 동등하거나 혹은 메세나 인이 나 아르고스 인이 오히려 유리한 점이 더 많았다. 처음 영토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들 국 가가 스파르타보다 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들의 폭군적인 기질과 백성들을 통제 할 수 없는 무능력은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였고 마 침내 기존의 모든 제도가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일들은 스파르타 인 들이 얼마나 큰 신의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준다. 스파르타의 현명한 법 제정자는 스파르타의 정치에 균형과 중용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적당한 대목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30명의 원로들을 결정한 이후, 리쿠르고스의 다음 개혁은 토지를 새로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 개혁이야말로 리쿠르고스가 실펀에 옮긴 일들 중에서 가장 대담하고 위험 부담이 많은 일이었다. 당시 스파르타에는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 가의 경제는 가나하고 궁핍한 대다수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었던 반면 나라 안의 모든 부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나라 안에서 교만, 시기, 범죄, 사치 등 빈곤과 치부에서 생기는 모든 무서 운 병폐를 근절하려는 목적으로, 부자들로 하여금 모든 재산을 포기하도록 하고 새롭게 토 지를 분배받는 일에 동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부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와 수입으로 살며, 다만 스스로의 용기와 덕으로 명예를 얻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 에서는 죄에서 오는 불명예와 고귀한 행동에서 오는 신뢰만이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유일 한 척도가 되었다. 부자들이 이 제안에 동의하자 리쿠르고스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우선 라코니아 지방의 토지를 3만 개의 구역으로 똑같이 나우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수도에 인접한 토지는 9천 조각으로 구분하였다. 이 땅을 도시의 스파르타 인에게 나누어주고 다른 나머지 땅은 시골 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다른 역사가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시민들을 위 하여 6천 개의 구획으로 나누었을 뿐이며, 나중에 폴리도루스 왕이 3천 개의 구획을 더 추 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들은 폴리도루스 왕이 리쿠르고스가 만들어놓은 구 획을 두 배로 늘렸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다르면, 리쿠르고스가 만든 것은 오직 4천5백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가정이 받은 토지는 일년에 가장의 몫인 70부셀의 곡식과 아내의 몫인 20부셀의 곡식, 기르고 기름과 포도주가 적당히 생산될 수 있도록 배정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이 정도의 식 량이면 백성들이 신체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그 밖 의 사치품들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이와 같이 토지개혁을 한 뒤 리쿠르고 스는 시골로 여행하였다. 때마침 추수철이라 들판에는 갓 익은 곡식들이 수추되고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곡식단들이 모두 똑같은 정도로 나란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우수며 옆에 있 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라코니아의 땅이 마치 형제들끼리 똑같이 나누어 가진 한 가족의 재산과 같이 보이 는군.'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돈에 대해서도 재분배를 하기로 결심하였 다. 스파르타 안의 어떤 불평등이나 편파적인 차별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 러한 일을 공공연히 추진할 경우 상당한 위험이 뒤따를 것이라고 예상한 리쿠르고스는 우회 적인 방법을 썼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전략으로 부자들의 탐욕을 꺾어버렸다. 먼저 리쿠르고스는 모든 금화와 은화는 없애고, 철로 만든 동전만을 사용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구리곤은 무게는 무거웠지만 가치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20내지 30파운드의 돈 을 운반하려면 상당히 크고 질긴 주머니가 필요했다. 더구나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멍 에를 멘 황소 한 마리가 있어야 했다. 결국 사람들은 번거롭기만한 돈을 기피하게 되었고, 그 즉시 수많은 죄악이 라케다이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그토록 숨기기도 어렵고 가 지고 다니기도 불편하며 사실상 쓸모도 없는 돈을 얻기 위해서 부당한 방법을 쓰거나 강제 로 빼앗거나 아니면 뇌물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동전이 녹슬면 식촐에 넣어버렸다. 이렇게 망가진 동전들은 거의 사용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다음 단계로 리쿠르고스는 쓸모 없고 사치스러운 모든 예술이 불법임을 선포하였다. 그러 나 사실상 이러한 포고령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술들은 금과 은을 따라 서 저절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동전으로는 그런 사치스런 일에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 동전은 철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운반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만약 부 자들이 이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나갈 방도를 찾는다고 해도, 다른 그리스 국가에서는 통용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외국인들의 비웃음만 사게 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외국의 물건이나 작은 사치품 등을 구입할 길이 없게 되었다. 상인들도 라코니아의 항구에는 배를 보내지 않았다. 웅변을 가르치는 교사나 운명을 점쳐준다는 점술 가, 매춘부, 금은세공사, 조각가 혹은 보석상인 등도 돈이 없는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지 않 았다. 그러므로 사치는 점점 설 땅을 잃게 되고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 다. 결국 이 나라 안에서는 부자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부자들의 부와 재산이 밖으로 과시되어질 길은 전혀 없고, 오직 집안에만 갇혀서 아무런 소용도 없었 던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스파르타 인들 모두는 일상에 꼭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뛰어난 예술가가 되었다. 침상이라든가, 의자, 책상 그리고 대못 같은 물건들이 모두 가 정 안에서 멋지게 만들어졌다. 특히 스파르타 인들의 컵은 대단히 세련된 것으로, 크리티아 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병사들이 즐겨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 컵은 어쩔 수 없이 마시 기는 하지만 보기에 불쾌한 물의 색깔이 보이지 않도록 진한 색이 칠해져 있었다. 또한 진 흙이 양쪽에 발라져 있어서 물 속에 있는 이 물질을 제거시키고 오직 순수한 물만이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고안되었다. 백성들은 이 또한 그들의 법을 제정자 덕분이라고 생각했 다. 리쿠르고스는 쓸데없는 물건을 만드는 수고로부터 예술가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매일 사 용하는 필수품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로 그들의 솜씨를 드러내게 한 것이었다. 이 위대한 법률제정자가 착수한 세 번째 개혁은 사치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없애기 위한 마지막 결정타였다. 리쿠르고스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며 똑같은 빵과 똑같은 고기를 먹도록 정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그들의 건강을 음식 장사꾼이나 요리사의 손에 맡긴 채, 집에서 사치스러운 식탁에 편안히 앉아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하여 탐욕스러운 짐승들처럼 온몸 구석구석에 살이 찌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망 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탐욕과 과식으로 허약해진 몸과 마음은 늦잠과 따뜻한 목욕 과 나태를 원하게 된다. 한마디로 항상 몸이 아픈 병자처럼 수많은 주의와 돌보는 손길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 해도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위 대한 일은 테오프라스투스의 말대로, 단지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빼앗았을 뿐 부 자체의 의 미를 없애버린 것이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과 한 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으니, 재물이 있어야 쓸 길이 없고 부를 과시하거나 바라보면서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재물의 신인 하이데스가 눈이 멀었다.'는 일반적인 속담은 세계의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스파르타에서 말 그대로 현실화된 것이다. 이 나라 안에서 재물의 신 하이데스는 눈만 먼 것이 아니라, 마치 벽에 걸린 그림처럼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고 생명력도 없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집에서 음식을 먹고 나서 공동식사에 참여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가 공동의 음식을 맛있게 먹거나 마시지 않는 사람을 보면 건방지고 무례하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명령 때문에 부자들은 리쿠르고스에게 원한을 품고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부자들은 리쿠르고스를 반대하는 일당들을 모아서 욕을 하며 돌을 던졌다. 마침내 리쿠르고 스는 장터에서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신전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리쿠르고스는 쫓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앞지를 수 있었는데, 오직 한 사람 알칸데 르라는 청년만이 그의 뒤를 바싹 쫓아왔다. 이 청년은 그다지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 았지만 단지 성질이 급하고 격정적이었다. 리쿠르고스는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려고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알칸데르는 막대기로 리쿠르고스의 얼굴을 찔러 한 쪽 눈을 멀게 하였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러한 상처를 입고서도 조금도 용기를 잃거나 기죽지 않았다. 오히 려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피가 흐르는 눈과 일그러진 얼굴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광경을 본 시민들은 수치심과 뉘우침을 느끼고 알칸데르를 리쿠르고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부당한 대접을 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나타내면서 집까지 모셔다주었다. 리쿠르고스는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나 알 칸데르는 남게 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리쿠르고스는 이 청년에게 벌을 주거 나 한마디 나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집안의 모든 하인들을 내보낸 다음, 알칸데르에 게 식탁에서 시중을 들라고 명령하였다. 알칸데르도 본성은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런 불 평 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알칸데르는 리쿠르고스와 함께 그 집에 살면서 리쿠르고스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결국 알칸데르는 리쿠르로스의 친절한 성미며, 지극히 소박한 생활과 피곤함을 모르는 근 면을 보고 열광적인 추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친구나 친척들에게 리쿠르고스가 간교하고 교 만하다는 말은 전혀 당치않은 소문이었으며 그보다 친절하고 어진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다 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리쿠르고스는 거칠고 사나운 청년이던 알칸데를 겸소하고 신중한 스파르타의 시민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리쿠르고스는 아테네에게 드리는 신전을 짓고 오프틸레티스라 고 이름지었다. '오프틸루스'란 도리아 지방에서 '오프탈무스' 즉 눈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 만 디오스코리데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리쿠르고스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그 일로 인해서 눈을 잃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상처가 나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 신 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불상사로 이하여 스파르타 인들은 공적인 회의에 참석할 때 절대로 지팡이를 지니지 않는 것이 규칙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공동식사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그리스에서 이 공동식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크레타 사람은 이것을 '안드리아'라고 불렀는데, 오직 남자들만이 공동식사 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라케다이몬 인들은 이것을 '피디티아'라고 불렀다. 이 말은 사랑의 향 연을 의미하는 '칠리티아'에서 L을 D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서로 우 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극도의 절제를 의미하는 '피도'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또한 식사라는 뜻을 지닌 '에도데'의 파 생어인 '에디티아'에 첫글자만 덧붙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대개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는데, 팜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매달 한 부셀의 곡식과 8갤런의 포도주, 5파운드의 치즈, 2파운드 반의 무화과, 그리고 약간의 생선 이나 고기 살 돈을 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외에도 그들 중 한 사람이 제사를 드리게 되 면, 모두가 공동 집회장으로 헌금을 보내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들 중 어떤 사람이 사냥을 했 다면, 자신이 잡은 고기의 일부분을 공동 집회장으로 보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경우에 있 어서만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공동으로 식사하는 이 풍습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왔다. 심지어 아 테네 군과 싸워 이기고 돌아온 아기스 왕이 왕비와 함께 단둘이 식사를 하기 위해 공동식당 으로 사람을 보내어 자기 몫을 보내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할 정도였다. 이 일로 크게 화가 난 왕은 다음날 전쟁이 승리로 끝났을 경우 반드시 올려야만 하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왕에게 벌금을 물렸다고 한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아이들을 마치 예절학교에 보내듯이 이 공동식당으로 보내곤 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경험이 많은 국가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국정에 관해 배웠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적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즐겁게 대화하는 법 도 배웠다. 이러한 대화술에는 특히 라케다이몬 인들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상재 방이 그런 농담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더 이상 농담은 건네지지 않았다. 또한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이든 사람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말이든 그 문을 통해 새어나가지 못하오.' 함께 식사할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투표를 하였다고 한다.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작은 빵조각을 집어서 바닥이 깊은 그릇에 던져 넣는다. 그 그릇은 시종이 머리에 이고 돌았다. 이때 가입에 찬성하는 사람은 빵을 그냥 넣었고, 반대하 는 사람은 찌그러뜨려 넣었다. 만약 찌그러진 빵이 하나라도 있으면 가입은 허락되지 않았 다.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때 사용하 는 그릇을 '카디쿠스'라고 불렀다. 후보자를 거부하는 투표방식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여기 에서 유래되었다. 그들의 으뜸가는 진미는 '검은 국'이라는 것이었다. 노인들은 그 국을 너무나도 즐긴 나머 지, 고기는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돌리고 이 국만을 먹었다. 이 국이 너무나 유명하자, 폰투스의 왕이 라케다이몬의 요리사를 불러서 검은 국을 만들 도록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입 먹자마자, 그 맛이 너무나 고약해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 었다. 그때에 요리사가 왕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이 국의 진정한 맛을 보시려먼 먼저 에우로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셔야 합니 다.' 적당히 포도주를 마신 다음, 식사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횃불도 없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스파르타 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횃불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 면 어둠 속에서도 담대하게 걸어다닐 수 있도록 평소에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였다. 스파르 타 인들의 공동식사는 이런 식으로 행해졌다. 리쿠르고스는 어떠한 법령도 문자화하지 않으려고 했다. 레트라에는 그것을 금지하는 조 항까지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가장 중요한 사항들과 공공복리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 항들은 좋은 교육을 통하여 젊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직접 새겨 놓아야만 더욱 확실하게 남 는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행동의 원리들의 최상의 법률가인 교육에 의해서 백성들 사 이에 굳게 뿌리를 박는다면, 어떤 강제적인 수단보다도 더욱 강력한 보장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금전적인 계약과 같은 좀더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서 항상 법이 바 뀔 수 있으므로 리쿠르고스는 어떤 확실한 법률이나 침해할 수 없는 규칙을 정해놓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 관련된 관습과 방식은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서 변할 것 이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법률의 모든 목적과 목표와 실 천은 교육이 완성해야만 한다는 것이 리쿠르고스의 의도였던 것이다. 레트라에는 법을 기록해두지 말라는 것도 있었으며, 특히 사치와 낭비를 경계한 내용들도 있다. 가령 모든 집의 천장은 도끼로만 다듬고, 문은 톱으로만 만들라고 규정하는 레트라가 있다. 식사에 대한 에파미논다스의 유명한 격언이 있다. '검약한 식사와 반역은 함께 우정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리쿠를고스야말로 이 말의 참뜻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진정 레트라에 규정되어 있 는 것과 같은 집은 사치와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소박하고 초라한 집 안을 은 다리가 달린 침대나 자줏빛 융단이나 황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으로 치장을 하는 사람은 제 대로 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집에 맞는 침대를 고를 것이며 침대에 맞는 이불을 선택할 것이다. 또한 이에 맞추어 나머지 가구들이나 물건 들도 구입할 것이다. 리쿠르고스는 당연히 이 점을 생각했던 것이다. 레오티키데스 왕은 평생 노동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코린트에 손님으로 가서 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왕은 정교하게 장식된 천장과 판자 들을 보고 이 나라에서는 나무들이 저런 모양으로 자라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세 번째 레트라는 같은 나라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전쟁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적 군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지면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적을 훈련하고 가르칠 수 있 다는 것이다. 후세의 아게실라우스 왕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왕이 자주 전쟁 을 한 결과,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테베스가 라케다이몬과 세력을 겨룰 지경으로 강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아게실라우스 왕을 보고 안타르키 다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스파르타 인들은 이러한 법률들을 레트라라고 불렀다. 레트라는 성스러운 계시와 상벌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려는 목적에서 리쿠르고스는 결혼을 통제하였으며, 아이들 의 이신과 출산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아리스톹텔레스의 말은 틀린 것이 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여자들로 하여금 좀더 정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결국 여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전쟁터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동안, 집에 남아 잇는 부인들은 집안의 유일한 주인으로 행세하며 온갖 자유와 권리를 누렸기 때문이 다. 또한 부인이나 여왕의 칭호로 불리며 지나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리쿠를고스는 여자에 대해서도 가능한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리쿠르고스는 여자에 게도 다리기나 씨름, 쇠고리던지기, 창던지기 따위로 단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튼튼한 모 체에서 태어난 열매들이 더욱 든든한 뿌리를 내리며 더 잘 자라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단련 을 통해 담대한 정신을 지니게 된 여자들이 산고의 고통도 더 잘 견디어낼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리쿠르고스는 여자들의 지나친 소심함이나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 한 두려움 등, 여성답다고 여겨지는 모든 태도를 버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젊은 여자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채로 행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축제가 열릴 대는 여 자들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 동안 남자들은 둥글게 서서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구경하였다. 어떤 때는 여자들이 전쟁에서 못난 행동을 보인 남자들에게 야유 를 보내며 질책을 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용감한 행동을 보인 남자들에게는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경쟁심을 길러주었 던 것이다. 공로를 세운 남자들은 당당한 모습으로 자랑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걸어나갔으며, 처녀들에게 둘러싸여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여자들의 야유를 받은 남자들은 공식적 으로 징계를 받은 것과 다름없이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징벌 이 더한 것이었다. 도시의 다른 모든 시민들뿐만 아니라 왕들과 원로들까지 그 광경을 지켜 보았고 모든 야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처녀들은 벌거벗었으나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처녀들은 정숙했고 전 혀 바람기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여인들에게는 소박함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가르쳤 고 고귀한 행동과 영광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의 여인들이 레오니다스의 부인인 고르고처럼 생각하고 말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외국에서 온 한 부인이 고그고에게 이 세상에서 남자를 지배할 수 있는 여자는 라케다이몬의 여자들뿐인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스파르타의 남자들을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은 우리뿐이니까요.' 처녀들이 공공연히 행렬에 참여하고, 벌거벗은 채로 춤과 운동경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 은 결혼을 유발하는 동기가 되었다. 플라톤의 말대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열정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결혼을 더욱 장려하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은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법적으로 어느 정도의 제약을 가하였다. 결혼하지 않는 남자들은 젊은 남녀들이 벌거벗고 춤추는 대중행렬을 구경할 수 없었다. 또한 추운 한겨울 에 벌거벗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조롱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연장자에게 당연히 보여야 하는 존경이나 대접도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데르 킬리다스는 이름 높은 장군이었지만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지 조금도 비난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데르킬리다스 장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반박을 하였다고 한다. '당신은 자식이 없으니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줄 사람도 없을 것 아니오.' 스파르타 인들의 결혼은 신랑이 신부를 거의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 부는 너무 어린 소녀가 아니라 완전히 자라 성숙한 처녀들이었다. 신부를 강제로 데려간 후 에는 결혼을 주재하는 여인이 와서 신부의 머리를 짧게 깎는다. 그리고 남자옷을 입힌 채 어두운 침대 위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신랑이 들어온다. 그러나 평상 복을 그대로 차려입은 신랑은 마치 공동식당에서 저녁을 먹듯, 담담하고 엄숙하게 신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온다. 신랑은 신부의 정조대를 푼 다음 자신의 여자로 취한다. 얼마 동안 신부와 함께 머물렀던 신랑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자는 방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신랑은 낮과 밤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지내고,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그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한 상황이 되어서야 신부를 찾아갔다. 신부 또한 동료들이 모두 나간 틈에 신랑을 만나기 위한 적당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모든 지혜를 다 짜냈다. 신랑과 신부는 이런 식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을 지내야만 했다. 심지어는 아이를 여러 명 낳기까지 도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예사였다. 부부간의 만남이 이렇게 어려운 까닭 에 사람들은 스스로 자제심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건강과 원기에 넘치는 육체로 언제나 새 롭고 신선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쉽게 만족을 얻거나 너무 오랫동안 함께 지냄으로써 사랑에 싫증나고 물리는 일 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이와 같이 명예롭고 존엄한 것으로 만든 다음, 리쿠르고스는 헛된 질투심을 근절 시켰다. 이를 위하여 모든 음란한 무질서는 배제하였지만, 남편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남자 에게 자신의 부인을 허용해주고 자식을 얻는 것을 오히려 명예로운 일로 여기게 하였다. 그 러한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싸움을 벌이고 피를 흘리며 종래에는 전쟁까지 일으키는 사 람들은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또한 리쿠르고스는 나이가 많은 남자들도 젊은 부인을 얻어 모든 자질을 갖춘 덕망 있고 훌륭한 아버지로 하여금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이를 아들로 얻 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숙하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부인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그 남편의 양해를 구하여 부인을 보고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그 남편의 양해를 구하여 부인을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좋은 아이를 얻기 위해 비옥한 토지에 씨를 심 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좋은 아이를 얻기 위해 비옥한 토지를 씨를 심게 한 것이었다. 진정 리쿠르고스는 아이들이 부모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첫 번째 결혼한 사람들로부터만 아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혈통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낳도록 한 것이다. 리쿠르고스가 보이에 다른 민족의 법은 너무나 부 조리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이나 개를 위해서라면 좋은 혈통을 얻 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등 온갖 관심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자신의 부인은 집안에 가두 어놓고 오직 자신의 자식만을 낳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보이거나 병신이거나 질병에 걸 렸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나쁜 혈통을 타고난 아이들이 누구보다도 제일 먼 저 그들을 돌보아주고 길러준 사람에게 나쁜 성질을 부리며, 좋은 혈통을 타로난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행동과 같다. 이와 같은 규정들은 자연스럽고 사뢰적인 기반을 위해 근거한 것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여인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추잡한 방종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스파르 타의 여인들은 간통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몰랐던 것이다. 예를 들어 게라다스의 이야기 가 전해져온다. 그는 고대 스파르타 사람인데 어느 날 외국 사람으로부터 스파르타의 법에 는 간통에 대한 벌을 어떻게 정해놓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게라다스는 이렇게 대답 했다. '우리 나라에는 간음하는 사람이 없소,' '그러나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죄를 저지른 자가 배상을 치러야 하지요. 타이게토스 산에 서서 에우로타스 강 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목이 긴 소를 주어야 하오.' 외국에서 온 사람은 놀라서 물었다. '그렇게 큰 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게라다스는 대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스파르타 안에서는 간음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소.' 스파르타 인들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겠다. 스파르타의 아버지에게는 아기를 마음대로 처분할 권한이 없었다. 아버지는 먼저 레스케 라고 불리는 장소로 아기를 데리고 가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부족의 연장자들에게 판정을 얻어야만 했다. 원로들은 아이를 잘 관찰한 다음, 튼튼하다고 생각하면 기르라고 명령하고 아이의 양육을 위해서 9천 조각의 땅 중에서 한 몫을 배당해주 었다. 하지만 아이가 연약하고 몸이 성치 않을 경우에는 아포세테라고 불리는 곳으로 데려 가라고 명령한다. 이 곳은 타이게토스 산아래 있는 커다란 바위틈이었다. 허약한 아이를 기 른다는 것은 아기를 위해서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나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여자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다른 나라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물로 목욕시키지 않고 포도주로 씻겼다. 아기의 체질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간질병이나 몸이 허 약한 아기는 포도주에 놓으면 놀라고 기력이 쇠하는데 건강한 아이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강하고 활력 있는 생활습관은 강인함을 요구하였고 강철같은 기질을 가지게 해주었 다. 아기의 유모도 굉장한 주의와 기술을 요하였다. 유모들은 아기를 천으로 감아 묶는 일이 없었다. 아기들은 팔이나 다리를 조금도 구속받지 않으며 오직 자유롭게 자라났던 것이다. 또한 음식을 가리지 않았으며 어둠 속에서나 혼자 남겨져 있을 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 다. 보채거나 투정하거나 우는 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종종 다른 나라에서도 스파르타의 유 모들은 고용하여 데리고 갔다. 알키비아데스의 유모도 스파르타의 여자였다고 한다. 가정교 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플라톤의 말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교육을 조피루스라는 종에게 맡겼다고 한다. 조피루스는 그저 평범한 노예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리쿠르고스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스파르타 인들을 시장을 끌어내거나 그들의 노동력을 팔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자 식을 기르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일단 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나라에서 맡아 단 체를 조직하였다. 여기서 아이들은 같은 규율과 훈련 속에서 함께 살며, 놀고, 배웠다.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용기와 행동을 보여주는 아이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언 제나 그를 주시하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가 내리는 어떤 벌이라도 참아내었다. 그러므 로 아이들의 교육은 모든 과정에서 완벽한 순종 아래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어른들 또한 아이들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종종 싸움과 논쟁이 일어날 때면, 어 른들은 아이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알아내는 기회로 삼았다. 위험한 적수를 만났을 때 누가 용감하며, 누가 겁쟁이인지를 살펴보았다. 아이들에게는 읽기와 쓰기 교육이 행해졌다. 그러나 각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 로만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그들을 훌륭한 백성들로 만드는 일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고통을 참고 승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 라남에 따라서 교육도 점점 더 강화되었다. 아이들의 머리는 짧게 깎았으며, 맨발로 다니는 데도 익숙해졌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벌거벗고 놀았다. 아이가 열두 살이 지나면, 어떤 속옷일지라도 입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일년을 외 투 한 벌로 보내야만 했다. 스파르타 아이들은 몸이 단단하고 건조하였지만, 몸을 씻거나 약 을 바르는 일 따위는 거의 모르고 자라났다. 이와 같은 사치는 일년 중 오직 특별한 날에만 허용되었다. 아이들은 에우로타스 강가에서 자라는 등심초로 만든 침상 위에서 작은 끈으로 서로 묶고 잠을 잤다. 그러나 아이들은 칼이 없이 맨손으로도 묶인 끈을 끊어버릴 수 있었 다. 겨울이 되면 등심초에 다리코폰이라는 풀을 더 섞었다. 그렇게 하면 온기가 생긴다고 여 겼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장래가 유망한 청년으로 자신을 동료로 삼아 아껴주는 사람이 없는 젊은이는 하나도 없었다. 노인들 또한 아이들에게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힘과 지혜를 겨루 는 젊은이들을 보기 위해 운동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노인들은 마치 자신이 젊은이들의 아 버지요 선생이요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단한 관심과 진지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년들은 언제 어디서나 젊은이들의 의무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약 의무를 소홀히 하면 벌을 받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스파르타에서는 가장 훌륭하고 성실한 사람이 젊은이들을 감독하고 책임지는 일에 임명되었다. 임명된 사람은 아이들을 몇 개의 반으로 나누어, 각 반에 대장을 선출하였 다. 대장은 대원들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용기 있는 소년이 뽑혔는데 이렌이라고 불렸다. 이 렌은 보통 다른 아이들보도 두 살이 많은 스무 살 정도였다. 또한 이렌 중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젊은이를 멜이렌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이제 곧 어른이 될 정도의 나이였다. 이렌들은 싸움을 할 때나, 지휘관이 귀가하고 없을 대 대장노릇을 하였다. 그들은 대원들 중에서 큰 아이들에게 나무를 해오게 히고, 좀더 어리고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산나물을 캐오게 하 였다. 아이들은 남의 채소밭이나 어른들의 식당으로 몰래 들어가서 훔치기도 했다. 만약 도 둑질하다가 잡히면 가차없이 매를 맞았다. 서투르게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들 은 그 밖에도 손에 넣을 수 있는 한 닥치는 대로 고기를 훔쳤으며 사람들이 잠을 자거나 부 주의한 틈을 노려 항상 기회를 엿보았다. 만약 도둑질하던 아이가 잡히면 매를 때릴 뿐 아 니라 굶기기도 하고, 보통 주는 식사량보다 더 적은 양의 음식을 주었다. 이것은 스스로 어 려움을 극복하고 담력과 힘을 사용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누마 폼필리우스 로마 귀족 가문들의 족보는 누마 폼필리우스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거슬러 오라 가고 있다. 그러나 누마 왕이 이어느 시대에 살았느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상당히 정확하게 연대를 따진 서술도 있으나, 클로디우스라는 역사가는 '연대학 비판'이라는 책에서 로마의 옛날 기록은 모두 갈리아 인과의 전쟁 중에 불타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것 은 후세 사람들이 전통 있고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고 주장하고 싶은 권력자들의 비위를 밪추기 위해 조작해낸 것이므로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누마가 학자였으며 피타고라스의 친구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는 있지만 이에 반대 하는 견해들도 적지 않다. 누마가 그리스 언어나 학문을 배운 자취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 문이다. 아마도 누마는 천성적으로 학문적인 재능을 타고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피타고라스 보다 더욱 뛰어난 동방의 스승을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누마의 피타고라스는 같은 시 대에 살지도 않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누마 왕 이후 적어도 다섯 세대가 지난 후에 살 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혹은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을 지닌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스파르타 출 신으로, 누마 옹 3년의 제 16회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하여 올림픽 경주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 이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누마와 친해졌으며, 나라의 헌법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헌법에는 스파르타의 법과 풍습이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누마는 사비니 부족의 후손이었고, 사비니 부족은 스파르타의 식 민지였다. 그러므로, 누마의 연대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올림픽 게임 우승자들의 기록 에 의해서 연대를 정하는 것은 근거가 확실하지 못핟. 올림픽에 대한 기록은 후세에 엘레아 사람인 히피아스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 아무런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 창건된 지 37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로물루스는 7월 14일 에 염소의 늪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었다. 이 날은 카프로틴 논스라고 불리 는 날이었다. 원로들과 로마의 많은 시민들이 이 날의 의식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사나운 비바람이 땅을 뒤흔들었다. 평민 들은 놀라서 모두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로물루스가 사라져버렸다. 로물루스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검은 의혹이 귀족들에게 향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귀족들이 왕정에 싫증을 내고 로물루스의 거만한 태도에 화가 나서, 로물루스 의 생명을 빼앗고 나라의 권위와 정부를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는 음모를 꾸민 것처럼 되었 다. 당황한 귀족들은 이러한 의혹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로물루스를 신격화하였다. 즉 로물루스는 죽은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하늘로 들려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 쿨루스로 하여금 로물루스가 갑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이후로는 자기를 퀴리누스라 고 부르라고 명령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맹세하게 하였다. 로물루스의 죽음에 대한 의심이 가시자,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 다른 분쟁이 생겨났다. 본토박이 로마 인들과 새로운 이주민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데다가, 귀족 들 도 여러 가지 파벌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원로들마저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서로 다투었다. 그러므로 왕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를 하였지만, 어떤 사람을 어느 부족 출신에서 뽑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도무지 의견이 맞지 않았다. 로물루스와 함께 도시를 창건했으며 사비니 인들에게 자신들의 땅과 거주지를 나누어 주 었던 로마 사람들은, 사비니 인들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더니 거꾸로 지배를 하려 한다며 몹 시 화를 내었다. 또한 사비니 인들은 타티우스 왕이 사망한 이후로 로물루스가 혼자 왕으로 통치하였으니, 이제는 자기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야 할 차례라고 주장하였다. 사비니 인들 이 로마 인들보다 부족해서 합병을 한 것도 아니며, 로마를 부강하게 하는 데 있어서도 누 구 못지 않게 많은 공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비니 인들이 연합하여 숫자를 늘려 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로마가 그토록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문제로 두 부족은 서로 다투었다. 그러나 명령권자가 없고 무질서해지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한 귀족들은, 150명의 원로들이 교대로 최고 통치권자의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서로 뒤를 이어서, 밤과 낮 동안에 여섯 시간씩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긴급 한 정무를 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똑같이 나눈 것은 원로들 사이에서 경쟁심을 없게 할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질투도 방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왕의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 기간이 지나면 다시 평범한 일개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이러한 정부의 형태를 로마 인들은 '인테르레그늄'이라고 명칭하였다. 이와 같이 합당하고 원만한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렸지만, 여전히 귀족들을 향한 의심의 눈길은 떠나지를 않았다. 마치 귀족들이 자신들의 수하에 모든 통치권을 두기 위하여 정부 의 형태를 귀족정치로 바꾸고 있는 것처럼 의심받았다. 또한 왕으르 선출하는 일을 추진하 지도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두 파는 서로가 상대편 부족 내에서 왕을 선택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로마 인들은 사비니 부족 내에서 한 사람을 선출하고, 사비 니 사람들은 로마 인들 중에서 한 사람을 왕으로 지명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모 든 분열에 끝을 낼 수 잇는 최선의 처방으로 생각되었다. 선택된 왕은 한편에 대해서는 자 신을 뽑아준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이며, 다른 한편에 대해서는 자신의 동족으로서 애정을 가 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비니 사람들은 왕위 선택권을 본토박이 로마 인들에게 일임했다. 로마 인들 또한 사비 인들의 손으로 선출된 로마의 왕을 모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사비니 출신의 왕을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따라서 마침내 회의가 열리고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지명 하였다. 그는 사비니 부족의 사람으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 것으로 굉장한 명성 을 얻고 있었다. 사실 누마는 로마 시에 거주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이 이름을 듣자마자 사비니 인들은 즉시 누마를 왕으로 받아 들였으며, 누마를 선출한 로마 인들보다 오히려 더 열렬히 환영하였던 것이다. 왕이 선택된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양 부족의 대표자들은 누마 를 찾아가서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누마는 쿠레스라고 불리는 사비니 인들의 이름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이 곳은 로마 인들과 사비니 인들이 합병을 한 이래로 퀴리테스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폼필리우스는 누마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누마는 4형제 중에 막내로, 4월 21에 태어났다. 이 날은 바로 로마가 창건된 날이기도 하 다. 누마는 천성적으로 화를 잘 내지 않고 덕이 놓았다. 더욱이 타고난 천성을 교육과 엄격한 생활 그리고 철학으로 더욱 고귀하게 갈고 닦았다. 단지 저속한 감정을 쫓아버리는 데 그치 지 않고, 야만인들이나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노라든가 성급한 성질 또한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누마가 판단하기에, 진정한 용기란 이성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누마는 자신의 집에서부터 모든 사치와 편안한 생활 방식을 몰아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 이나 동족들이나 한결같이 누마를 타락하지 않은 참다운 재판관이며 상담자라고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마는 쾌락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오직 영원한 신을 경배하며, 신성 한 힘과 자연에 대해서 조용히 사색을 하였다. 이렇듯 누마가 너무나 유명하였기에, 로물루 스와 함께 왕위에 올랐던 타티우스는 누마를 사위로 선택하고 외동딸을 주었다. 그러나 왕 의 사위가 되었어도, 누마는 장인과 함께 로마에서 살겠다는 허영을 조금도 부리지 않았다. 차라리 사비니 인들과 함께 살면서, 연로한 부친을 섬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부인인 타티아 또한 결혼하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화려하고 요란한 생활보다는 남편의 조용한 삶 을 더 좋아하였다. 타티아는 결혼한 지 13년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누마는 복잡한 시내를 떠나서 자주 시골로 나가곤 하였다. 오직 혼자서만 신에게 바쳐진 들판이나 언덕 위를 거닐기도 하였다. 이렇게 생활의 대부분을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누마의 이러한 습관 때문에 심지어 여신에 대한 소문까지 생겨나기도 하였다. 누마가 우 울증이나 정신병 때문에 인간사회를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쾌락을 맛보고 있 으며, 여신 에게리아와 사랑에 빠져 천상의 결혼을 허락 받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누마는 신의 축복과 천상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들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른 오래 된 신화들과 매우 비슷하다. 프리기아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 를 받아들이고 아직도 아티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바티니아 사람들이 헤로도토스에 관해 서, 아르카디아 인들이 엔디미온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신의 사 랑과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지는 여러 사람들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신 이 말이나 새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한다면 특별히 선한 자와 함께 머물며, 현명한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전혀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신이나 혹은 악마라도 감 각적인 육체의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의 모습과 아름다움에서 열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현명한 이집트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뚜렷한 구별을 두지 않았다. 신령한 영혼 이 여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아기를 잉태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이 육체를 통하여 신성과 성교를 하거나 어떤 식으로라도 육체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한편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결합이란 상호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들이 인간에 대해 애정과 사랑을 느끼고, 인간들의 덕과 선함에 대해 기뻐하 고 돌보아주는 것을 의미하는 아야기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결국 히아킨토 스나 아드메토스가 아폴로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시키온 사람인 히폴리토스가 아폴론의 총애를 받은 나머지, 그가 시키온에서 키르하로 항해를 할 때마다 피타아 사람들은 시를 읊으며 신의 기쁨과 애정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이제 히폴라토스가 다시 돌아온다네. 그의 귀중한 생명이 돛대에 달렸네. 또한 판은 핀다로스와 그의 시를 사랑하였으며, 뮤즈는 해시오도스와 아르킬로쿠스가 죽 은 뒤에 영예를 내렸고, 심지어 소포클레스는 살아 있는 동안에 아이스쿨라피우스 신과 언 제나 동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증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소포클레 스가 사망했을 때는 다른 신이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러한 전설들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잘레우쿠스, 미노스, 조로아스테르, 누마 등 이 정치를 하고 법을 펼 때에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아 니, 신들도 중요한 섭리를 지니고서 이러한 사람들이 회의를 열거나 심각한 토론을 벌일 때 에는 도와주며, 영감을 불어넣거나 갈 길을 인도하여 준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것 이다. 아마도 더욱 기분이 좋을 때면 시인이나 음악가들을 방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다. 바킬리데스가 말했듯이 '길은 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쿠르고스나 누마 혹은 다른 유명한 법률 제정가들이 대중들의 반대와 고집을 꺾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서,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는 설 명도 전혀 부조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의 거짓말은 분명히 자신을 유리하게 하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로마로부터 찾아온 대표들이 왕이 되어 달라고 청했을 때, 누마는 마흔 살의 나이였다. 대변 인은 프로쿨루스와 벨레수스였다. 사실상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될 것이 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었다. 로마 인들은 프로쿨루스를, 사비니 사람들은 벨레수스를 새 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누마가 기뻐하며 쉽게 수락할 것으로 생각하고 긴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들의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일생을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아오던 사람을 설득하여 전쟁 속 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도시의 왕위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마는 아버지와 친척인 마르키우스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생활 방식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더욱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 부족함이 없이 모든 일에 만족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몸에 밴 생활을 버리겠습니까? 혹시 지금의 생활에 다소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어쨌든 앞날에 대한 어떤 의혹이나 불안감도 없 이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왕 권을 잡은 로물루스만 보더라도 언제나 자기와 같은 지위에 있는 타티우스를 해하지나 않을 까 의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귀족들도 로물루스를 암살하였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 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신의 아들이며 신이 보낸 유모가 길러서 기적적으로 구명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당신도 알다시피 평볌한 부모를 가졌으니, 저를 키워 주신 이가 누군지도 다 아는 바입니다. 사람들이 저의 미덕이라고 보는 저의 성품도 좋은 왕이 되기에는 부적당한 것입니다. 저는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며 소득 없는 일을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전쟁 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사람들과 사귀더라도 신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만날 뿐입니다. 그러지 않을 때는 밭이나 갈며 소나 먹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알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기에, 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군을 필요로 하는 도시에 서 저 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정말 웃음거리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신을 경배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정의를 사랑하고 폭력과 전쟁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누마가 왕위를 사양할 뜻임을 알아챈 로마 사람들은 더더욱 극진한 말로 청 을 드렸다. 그리고 제발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을 버려 두지 말라고 하면서, 만약 이 일이 실패하면 그들은 또다시 이전과 같은 혼란과 무질서를 겪게 될 것이라고 애원하였다. 양쪽 의 부족을이 모두 찬성하는 사람은 누마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누마의 아버지와 마르키우스가 누마를 설득하기 시작했 다. 두 사람은 누마에게 이토록 고귀한 선물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신 기회로 생각하라고 충고하였다. "네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여 더 이상의 부귀도 원하지 않고, 벌서 더욱 가치 있는 명 예를 얻었기에 왕이 되는 명예조차 반기지 않을지라도, 너는 백성을 다스리는 일 자체가 신에게 봉사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신은 네가 지닌 정의감과 지 혜를 사용하기 위해서 너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 썩혀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피하지만 말고 세상사를 향하여 너의 몸을 돌리거라. 세상이란 현 명한 사람에게는 실로 위대하고도 명예로운 업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벌판인 것이다. 신 에게 장엄한 예배를 올릴 수도 있고 신성한 풍습을 소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권위 있는 자 만이 오직 백성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법이다. 타티우스는 비록 이방인이었 지만 사랑을 받았고, 로물루스는 신처럼 기억되고 있다. 누가 알겠느냐? 항상 승리만 해온 이 백성들이 이제는 전쟁에 싫증나고, 지금까지 얻은 승리와 전리품만으로도 만족하게 될 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는 온 백성들을 질서와 안정으로 이끌 수 있는, 평화를 사 랑하면서도 정의감 넘치는 왕을 원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설사 로마 인들이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에 미쳐서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중용을 지 키는 사람이 왕권을 잡아 사나운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너로 인하여 너의 고향과 모든 사비니 민족들이 새롭게 자라나는 강대국 로마와 우정을 나누고 선의의 동맹을 굳게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러한 논리적인 설득뿐만이 아니라, 상서로운 징조도 동시에 나타났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 로마의 사절단들이 가지고 온 전갈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동료들이 누마에게 왕위를 받아 들이고 부디 두 민족들 간에 화목과 조화를 이루는 수단이 되어달라고 열성적으로 부탁하였 다. 마침내 누마는 청을 수락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로마로 출 발하였다. 로마로 가는 도중에 누마 일행은 원로원들과 백성들을 만났다. 이들은 누마를 한 시라도 빨리 영접하고 싶은 마음에 미리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다. 여인들도 즐거운 환성 을 지르면서 누마를 환영했다. 그리고 누마를 위하여 모든 신전마다 제사를 올렸다. 온 백 성들은 새로운 왕이 아니라 새로운 왕국을 받든 듯이 기뻐하였던 것이다. 일행이 포룸에 도 착하자, 당시 국정을 맡아보고 있었던 스푸리우스 베티우스가 투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만 장일치로 누마가 왕으로 인준되었다. 그리하여 왕권을 나타내는 옷과 모든 상징들이 누마의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누마는 왕관과 옷을 거부하면서, 먼저 신에게 물어 확답을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누마는 예언자들 과 사제들을 이끌고 카피톨 위로 올라갔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그 곳을 타르페이아 언덕 이라고 불렀다. 그 곳에서 예언자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누마의 머리에 헝겊을 씌우 고 남쪽을 향해 서게 하였다. 그리고 예언자는 누마의 뒤에 서서 오른손을 누마의 머리 위 올렸다. 이러한 자세로 예언자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눈으로는 사방을 둘러보며 어떤 상서 로운 징조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가를 살폈다. 한편 포룸에 모여 있던 대중들도 침묵을 지키며 신의 징조를 기다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 있었다. 마침내 상서로운 새가 나타나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누마는 왕의 외투를 받아들고 언덕을 내려왔다. 이 때 백성들 은 누마를 성스러운 왕이며 신의 총애를 받는 자라고 갈채와 환호로써 맞이하였다. 누마가 왕이 되어 첫 번째로 한 일은 로물루스가 늘 신변에 두고 있던 300명의 군사들을 해산시킨 것이다. 누마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으며, 또한 자신을 불신하는 백성이라면 다스리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유피테르와 마르스를 섬 기는 사제 외에, 세 번째 사제를 두어 로물루스를 섬기게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사제는 플 라멘퀴리날리스라고 부르게 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사제를 '플라미네스'라고 부르 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당시 라틴 어에는 오늘날보다 더 많은 그리스어가 섞여 있었 다. 그러므로 왕의 외투를 '로이나'라고 부르는데, 주바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의 '클로이나' 가 바로 같은 단어라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모두 살아 있으면서도 유피테르의 신전에서 신을 섬기는 소년들을 카밀루스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그리스 인들이 메르쿠리우스를 부르 는 이름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베르쿠리우스란 신들을 섬기는 사제들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누마는 백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얻었다. 이제 누마는 조금도 지체없 이 거칠고 강철과 같은 로마 인들의 기질을 보다 부드럽고 온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 에 착수하였다. 플라톤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의 로마는 그야말로 '분노로 불타오르는 도시 였다. 로마는 그 시작부터 대담하고 호전적인 기질에 의해 생겨난 도시였다. 더구나 사방에 서부터 어렵고 필사적인 도전이 계속되니, 로마는 그치지 않는 전쟁과 이웃 나라들과의 분 쟁 속에서 점점 더 강대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투쟁과 위험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힘을 얻 곤 하였다. 마치 망치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하게 땅속으로 파고드는 말뚝과도 같았다. 그러므로 누마는 로마 인들의 완고한 정신을 유순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으리 라 판단하고 로마 인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행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누마는 자주 제사 를 드리며 종교적인 행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누마는 자주 제사를 드리며 종교적인 행 렬이나 춤 등을 이용하였다. 이것을 모두 누마가 개인적으로 주관하였다. 엄숙한 종교 행사 에 세련되고 재미있는 여흥을 곁들임으로써, 로마 인들의 난폭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다스리 고자 했던 것이다. 동시에 누마는 로마 인들의 머릿속에 종교적인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이 상한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든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들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초자연적인 두려움을 통해 로마 인들의 기질을 꺾으려고 한 것이다. 누마가 사용한 이러한 방법을 살펴보면 누마가 피타고라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 도 믿을 만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누마의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의 철학에 있어 서도, 인간과 신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누마가 겉으로 드러난 복장이나 태도를 엄숙하게 한 것도 피타고라스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솔개를 훈련하여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와 앉게 하거나, 올림피아 경 기에 모여든 군중 사이를 걸어다니며 일부러 금 허벅다리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그 밖 에도 많은 이상하고 기적과 같이 보이는 재주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라시아 사 람 티몬은 이렇게 비판하였다. 교만한 요술쟁이의 재주와 엄숙한 말씨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자.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누마는 숲 속에 사는 여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숲의 여신이 누마를 사랑하여 남몰래 그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뮤즈들과 도 친근한 대화를 나눈다고 고백하였다. 누마는 자신이 하는 예언의 대부분이 뮤즈의 가르 침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특별히 로마의 수호신으로 침묵의 신 타키타를 지정하였다. 이것도 피타고라스의 침 묵을 본받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상에 대한 누마의 견해도 피타고라스의 철학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존재에 대한 첫 번째 원리로서 초월적인 감각과 감성을 내세웠으며,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고 다만 추상적인 학문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마는 로마 인들이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을 신으로 숭배하 는 것을 금지하였다. 혹은 그림으로 그리거나 나무에 새긴 신의 모습도 전혀 허용하지 않았 다. 그러므로 무려 170년 동안이나 로마의 신전과 사원에는 어떤 우상도 세워지지 않은 채 순수하고 자유롭게 보전되었다. 누마는 그렇게 천한 사물을 최고의 존재인 신고 비슷한 것 으로 여기고 존중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오직 수수한 정신적 행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누마가 드리는 제사 또한 피타고라스의 의식과 대단히 비슷하다. 두 사람 다 피로써 제사 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와 포도주 그리고 별로 비싸지 않은 생산물을 바쳤던 것이다. 누마와 피타고라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증거들이 있다. 고대 희극작 가였으며 피타고라스의 학생 중 하나였던 에피카르무스가 안테노르에게 바친 책에 보면, 피 타고라스는 로마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누마 왕은 네 명의 아들 중에 하 나를 피타고라스 아들의 이름을 따서 마메르쿠스라고 불렀다. 이 아들은 나중에 아이밀리라 는 귀족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이 이름은 마메르쿠스가 우아한 태도로 웅변을 잘하는 것을 보고, 누마가 장난으로 아이밀리우스라고 별명을 붙여준 것에서부터 유래한다. 나는 또한 로마에 갔을 때, 많은 로마 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신탁이 내려오기를, 두 개의 동상을 세우도록 하는데 하나는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 의 것으로, 다른 하나는 가장 포악한 사람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신탁에 따라서 사람 들은 두 개의 청동상을 세웠는데, 하나는 알키비아데스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피타 고라스의 동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냥 지나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근거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의 시간을 지체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폰티피케스'라고 불리는 제사장 제 도를 시작한 것도 누마라고 한다. 그리고 누마 왕 자신이 첫 번째 제사장이었다. 제사장들이 '폰티피케스'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권능 있다는 뜻을 지닌 '포텐스'라는 말에서부터 유래가 외었다. 제사장들이 신을 섬기고 봉사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권위 와 명령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이 명칭은 불가능한 경우에 따른 예외를 나타내는 단어라고 한다.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임무를 다 수행해야 하지만, 만약 제사장 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비난할 수 없다는 것 이다. 이외에도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또 다른 설이 있는데 가장 엉터리라고 할 수 있 다. 제사장들의 명칭이 '폰스'라는 단어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리 만드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다리 위에서 행하는 제사가 모든 제사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다른 공적이고 신성한 업무들과 마찬가지로, 다리 를 고치고 보존하는 일은 제사장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나무다리를 쓰러뜨리는 일은 단지 불법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 시대의 다리는 신탁에 복종하여, 못이나 쇠붙이를 전혀 쓰지 않고 전적으로 나무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돌다리 가 세워진 것은 아주 오랜 뒤의 일이라고 전해진다. 아이밀리우스가 재정관으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나무다리 또한 누마 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것은 아니고, 앙쿠스 마르키우스가 왕으로 있을 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키우 스는 누마 왕의 외손자이다. 폰티팩스 막시무스, 즉 대제사장의 직분은 신의 법을 공포하고 해석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신성한 의식을 주관하였다. 대제사장은 공적인 의식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할 뿐만 아니 라 개인의 제사를 감독하기도 한다.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너무 많이 어긋나지 않도록 지도 할 뿐만 아니라, 예배나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 었다. 베스타 여신의 신녀들을 관할하는 것도 제사장의 임무였다. 신을 섬길 처녀들을 추려 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를 지키게 한 제도는 누마 왕이 창시한 일이라고 한다. 아마도 누마는 순수하고 변질되진 않는 불은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처녀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불은 타면서도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산을 하지 않은 처녀들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어느 도시나 할 것 없이, 영원한 성화를 간직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여자들은 처녀가 아니라, 결혼할 나이가 다 지난 과부들이었다. 이것은 델포이나 아테 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우연히 성화가 꺼지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테네가 폭군 아리스티온의 압제하에 있었을 때 성화는 타오르지 않았 다. 또한 페르시아 군이 성전을 불태우자 델포이의 성화가 꺼져버렸다. 그밖에도 로마의 내전이 일어났을 대에는 성화만이 꺼진 것이 아니라 그 제단까지 쓰러져 버렸다고 한다. 성 화가 꺼진 뒤에 다시 불을 붙일 때에는, 평범한 불씨로 불을 붙이는 것을 불경하게 생각하 였다. 대신 태양으로부터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빛을 얻어 불을 붙였다. 빛을 모으기 위해 서 우선 직각이등변삼각형의 사면을 파서 오목거울을 만들었다. 이 거울을 일광에 비추어 분산되어 오는 광선을 한 점에 모아, 그 초점에 가볍고 메마른 물질을 놓았다. 그러면 빛의 힘에 의해서 물질은 즉시 불이 붙었다. 이렇게 하여 불이 지닌 본질적인 힘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스타의 신녀들이 성화를 보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도 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신녀들이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성 스러운 비밀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카밀루스 전기'에서 적당한 정도까지 모두 기술한 바가 있다. 누마 왕이 성스러운 임무를 맡긴 첫 번재 처져는 게가니 아와 베레니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카눌레이아와 타르페이아가 뒤를 이었다. 후에 세르비우스가 두 사람을 더 추가하여, 신녀의 숫자는 모두 4명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누마가 신녀들에게 정해준 규율은 다음과 같았다. 신녀들은 30년 동안 독신 서약을 했다. 처음 10년은 맡은 일을 배우고, 다음 10년은 임무를 수행하고, 마지막 10년은 다른 처녀들에 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할 수도 있었고 신전을 떠 나 다른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결혼한 여자는 매우 적었다고 한다. 또한 결혼 을 할 경우에도 별로 행복하지 못하고 여생을 후회와 설움으로 보냈다. 그러한 까닭에 많은 처녀들이 종교적인 두려움과 순종 속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처녀로 지냈다. 제약된 생활에 대한 보상으로 누마는 신녀들에게 커다란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신녀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유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또한 보호자나 후견인 없이도 자 신의 일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통 이러한 특권은 자식을 세 명 이상 가진 부인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다. 신년들이 멀리 나갈 때에는, 페시즈라고 하는 권위의 펴지를 앞세우고 다녔다. 만약 우연히 거리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가 신녀를 만나고,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 우연이었다는 맹세를 하면 죄수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신녀들이 타 고 가는 가마를 밀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만약 신녀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오직 대제사장만이 벌을 내릴 수가 있었다. 대제사장은 잘못을 저지른 신녀를 채찍질하였다. 어떤 때에는 어두운 곳에서 장막을 치고 옷을 전부 벗긴 채로 매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녀가 동정을 지킨다는 서약을 깨뜨렸 을 경우에는 콜리나라고 불리는 성문 곁에서 산 채로 땅에 묻혔다. 그 곳에는 작은 둔덕이 있었다. 이 둔덕 아래에 작은 지하실을 만들고 계단을 내어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하였 다. 그리고 그 속에 침대와 등잔 그리고 빵이나 물, 우유 기름 같은 약간의 식량을 넣어 두 었다. 그리하여 가장 신성한 종교 의식에 바쳐지고 헌신하였던 몸이 굶주려서 죽었다는 비 참한 소리를 듣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죄인은 스스로 가마에 올라갔다. 사람들은 그 의에 덮개를 씌우고 끈으로 묶였다. 죄인이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마를 포룸까지 가져갔다. 가 마가 지나갈 때면, 무거운 침묵에 싸여 슬슬 길을 피하거나 혹은 깊은 슬픔에 잠겨 말없이 따라오는 사람도 있었다. 진정 이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없었으며 로마가 이보다 더 커다란 슬픔과 우울함으로 뒤덮인 날은 없었다. 마침내 처형 장소에 이르면 하인들이 묶인 끈을 풀 었다. 대제사장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고 기도를 드린 다음, 얼굴을 가린 여자를 가마에서 끌어 내어 지하실로 들어가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게 한다. 내려간 뒤에는 사다리를 올린 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지하실 입구를 흙으로 덮어 다른 곳과 구별해 낼 수 없도록 만 든다. 동정을 잃은 신녀는 이와 같이 생매장되었던 것이다. 성화를 모셔둔 베스타 신전을 지은 것은 누마였다고 한다. 신전의 모양이 둥글게 생긴 것 은 지구의 형상을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우주를 나타내는 모양이며,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불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을 베스타 혹은 만물의 단위라고 이름지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들은 지구가 고정되어 있으며 하늘의 중심을 이룬다 는 생각을 부정하였다. 지구는 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움직이며 더구나 모든 천체 가운데 첫 번째 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플라톤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지구는 이차적인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에는 좀더 고귀한 무언가가 놓여 있다고 보았다. 대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장례 의식을 지도해주기도 하였다. 누마는 백성들에게 매장 의식 이 단지 시체를 썩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지하의 신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우리 중에 더 좋은 부분이 바로 지하의 신의 손으로 옮겨져 간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리 비티나 여신을 숭배하였다. 리비티나 여신은 장례식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식을 주관하는 여 신이었다. 리비티나 여신이 프로세르피나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학식 있는 로마 인들이 생각하듯이 베누스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시작과 끝을 모두 하나의 신,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마는 또한 죽은 자의 나 이에 따라 상을 입는 기간도 정하였다. 세 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위해서는 상을 입지 않으 며, 열 살 미만인 경우는 그 나이와 같은 수효의 달 동안 상을 입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 람을 위해서라도 열 달 이상은 상을 할 수 없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과부도 재혼할 수 있 었다. 그러나 그 전에 개가하고자 하는 여자는 누마의 법에 의하여 새끼 밴 암소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 밖에도 누마는 여러 가지 제사장 제도를 설립하였다. 그 중에서 살리와 페키알레스의 제도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것은 누마의 헌신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증거다. 페키알레스 혹은 평화의 수호자들은 바로 그들이 맡은 직무에서 명칭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대화와 중재로써 모든 분쟁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페키알레스들이 도저히 타협을 할 만한 희망이 전혀 없다고 선언할 때까지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이 허락되지 않 았다. 우리는 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분쟁이 해결될 때 그것을 진정한 평화 라고 부른다. 로마 인들은 보통 잘못을 저지른 나라에는 먼저 페키알레스를 보낸다. 만일 자 신들의 청이 거절당하면 신에게 모든 일에 증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로마가 정의롭지 않게 행동한다면 자기들과 조국에게 큰 재난을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페키알레스의 듯을 거역해서 혹을 페키알레스가 페키알 레스의 승인도 없이, 왕이든 군인이든 무기를 잡는다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전쟁은 페키알레 스만이 시작하였다. 페키알레스가 일단 지휘관에게 정당한 싸움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 면, 그 다음 일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로마 인들이 갈리아 인들로부터 당한 살육과 파괴도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격식을 무시한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고 믿어진다. 이 야만인들이 클루시니안을 포위하였을 때, 파비우스 암 부스투스가 저들과 평화협상을 하고자 적직으로 자견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인들의 무례한 거절의 대답을 듣고, 파비우스는 사절단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는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 단히 화가 난 파비우스는 크루시니안의 편에 서서, 적군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와 단독으로 맞서 싸우겠다고 도전을 하였다. 파비우스는 운 좋게도 적을 죽이고 그의 갑옷을 차지하였 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갈리아 인들이 로마로 사람을 보내서 파비우스를 비난하였다. 전쟁 이 선포되지도 않았는데, 파비우스는 부족들의 법을 어기고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마침 내 월로원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토의가 벌어졌다. 페키알레스들은 파비우스를 갈리아 인들 의 손에 넘겨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비우스는 원로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백성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백성들의 보호와 지지 속에 파비우스는 징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빌밀 하여 갈리아 인들은 로마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의사들을 차지하고 모든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카밀루스 전기에 실려 있 다. 살리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누마가 왕이 된 지 8년째 되던 해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온 이탈리아를 휩쓸며 로마 시에서도 극성을 떨었다. 모든 시민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청동으로 만든 방패가 하늘에서 떨어져 누마의 손에 들어왔다. 누마가 백성들에게 이 일에 대해서 놀라운 설명을 하였다. 메게리아와 뮤즈가 전하기를, 이 방패는 로마 시를 치료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늘이 보내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패를 안전하게 보 존하기 위해서 모양에서나 크기에서나 똑같은 열한 개의 방패를 만들어, 어떤 도둑도 진짜 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마는 또한 방패가 떨어진 장소와 근처 의 들판을 뮤즈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주로 그 곳에서 여신들과 누마는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들판을 흐르는 샘물은 베스타의 처녀들을 위해서 바쳐졌다. 신녀들은 이 곳의 성수를 가져다가 성전의 감추어진 내부를 씻고 깨끗이 하였다. 과연 곧이어 질병이 그침으로써, 누마 왕의 모든 말이 진실로 증명되었다. 누마는 장인들에게 방패를 보여주며 똑같은 방패를 만들어내라고 명령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 들이 실패를 하여 낙담 중에 있었는데, 다행히도 뛰어난 장인인 마르무리우스 베투리우스가 똑같은 위조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너무나 똑같이 만들어져서 누마 왕조 차도 진짜를 구별해 내지 못 할 정도였다. 이 방패를 지키는 일은 '살리'라고 불리는 제사장들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살리라는 명칭 은 누군가 주장하듯이 살리우스라는 춤꾼의 이름에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었다. 살리우스 는 사모트라케 혹은 만티네아 출생으로 무기를 들고 춤을 추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실 이 이름은 살리들이 직접 추는 춤에서 유래된 것이다. 3월이 되면 살리들은 신성한 방패를 들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행렬할 때에는 자주색의 짧은 외투를 입고서 놋쇠로 장식을 한 넓 은 허리띠를 두르고 손에는 짧은 단검을 들었다. 이 단검을 가지고 이따금 신성한 방패를 두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행사의 핵심은 바로 춤이었다. 사리들은 대단히 우아한 자세 로 바른 박자에 맞추어 다양하고 정교한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사리들의 유연함과 강인한 힘을 보여주는 춤이었다. 방패는 그 모양새 때문에 앙킬리아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보통 방패들처럼 완전히 둥글게 만들어져 있지 않고, 파도 모양으로 둘레가 깎여 있었으며 가장 두꺼운 부분에서 안으로 굽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양을 곡선장식 양식이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어로는 '앙킬론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혹은 팔꿈치를 의미하는 '앙콘'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방패를 팔꿈치에 걸고 다녔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어에서 유래를 찾는 일에 열 성이었던 주바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진다면, '위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아네카덴'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고, 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지닌 '아케시 스'로부터 왔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우크몬 리시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방패로 인하여 가뭄이 끝이 났기 때문이다. 재앙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을 지닌 '아나스 케시스'라는 말이 기원일 수도 있다. 이 말은 또한 카스토르와 폴룩스에게 붙여진 '아나케스 '라는 아테네식 이름의 기원이기도 하다. 마무리우스의 정교한 솜씨를 칭찬하는 뜻에서 살리가 부르는 노래 속에는 마무리우스에 대한 칭찬과 찬양이 나왔다. 이 노래는 사리들이 방패를 들고 도시를 춤추며 돌아다닐 때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살리들이 부른 것은 '베투리움 마무리움'이 아니라, 오래 된 기억을 뜻하는 '베테렘 메모리암'이라는 말이었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제사장 제도를 설립한 누마는 베스타 신전 근처에 레기아라는 왕궁을 지었다. 여기서 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종교상의 여러 가지 일도 처리하고, 사제들에게 지 시도 하며 또 다른 신의 말씀이 있기를 기다렸다. 누마에게는 퀴리누스 산 위에 또 하나의 궁이 있었다. 그 궁전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까지도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종교 행렬이 시내를 돌 때마다, 전령이 앞장을 서서 모든 시민들에게 행사에 참가하라고 알려 주었다. 피타고라스파에서는 사람들이 건성으로 신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집에서 곧장 달려나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임무를 다하라 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마는 그의 시민들이 할 일 없이 구경하는 태도로 종교 행사를 바라보거나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중요한 일은 모두 미루어 놓더 라도, 오직 종교에만 전심으로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식을 거행 할 때는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고함 소리나 무엇을 만드는 시끄러운 소리를 일절 금하였다. 이러한 풍습의 자취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집정관이 신의 제사를 살피거나 제사를 드 릴 때에 '호크 아게'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 집중하라'라는 뜻으 로, 이 소리를 듣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리를 정돈하며 조용히 하였다. 누마의 다른 많은 생각들도 피타고라스 학파와 비슷하였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1펙 이상의 술을 먹지 마라. 칼로 불을 휘젓지 마라. 여행을 나설 때에는 뒤돌아보지 마라. 천상의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는 홀수로 드려라. 하지만 땅의 신 에게 드릴 때에는 짝수로 드려라" 등등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각각의 규율이 가지는 깊은 의미는 쉽게 알 수가 없다. "말리지 않은 포도로 만든 술을 술의 신에게 바치지 마라. 곡식 이 들어 있지 않은 제사는 드리지 마라. 신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돌아섰다가 기도가 끝 나면 자리에 앉으라"고 한 것 따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처음의 두 가지 규율은, 땅을 갈아 열매를 얻는 일을 종교의식의 일부로 삼은 것처럼 보 인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돌아서라고 한 규율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 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신전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므로, 경배를 드리기 위 해 신전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언제나 태양을 향해 등을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겨난 규 율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므로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신전의 신이 있는 쪽으로는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바퀴 몸을 돌리는 행동으로 태양에게나 신전의 신 에게나 모두 기도를 드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세를 바꾸는 것이 마 치 이집트의 바퀴처럼 신비스런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운명이 항상 일정하지 않으며, 신이 조정하는 방향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과 처지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해야만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기도를 마친 다음 앉는 것은 그들의 애원이 받아들여졌다는 표시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축복을 확신한다는 자세였다. 한편으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함으로써, 기도의 여러 가지 절차를 구분할 수 있다. 기도자들은 할 일을 다 마친 후에 자리에 앉아 신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다음에 시작될 예배를 기다릴 수 있었다. 또한 이 규정은 우리가 앞서 말했던 법률과도 잘 부합이 외었다. 법률 제정가는 경배를 드릴 때에는 다른 일을 하다 말고 서둘 러서 하거나 건성으로 하지 말고, 시간과 정성을 들이라고 명령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훈련과 순화를 통해 마침내 로마는 순종적인 기질로 바뀌었다. 그리하 여 누마 왕에 대해 너무나 깊은 정의심과 존경심을 품은 나머지, 누마 왕이 하는 말이면 아 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누마 왕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관한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한번은 누마 왕이 많은 시민을 연회에 초대하 고 초라한 그릇에 변변치 못한 음식을 내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누마 왕은 여신이 강림하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돌연 식탁에는 금잔과 금그릇이 놓 이고 산해진미가 풍성히 쌓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기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누마와 우미테르 신 사이에 오고갔다는 대화에 대한 전설이다. 아직 도시의 성벽이 아벤티네 산까지 나 있지 않 을 때였다. 아쿠스와 마우누스라는 두 신이 그 곳의 숲 속과 샘물 속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 도 이들은 사티르나 판과 비슷한 존재였을 것이다. 단지 약초나 마술에 대한 기술을 이용하 여 장난을 치며 이탈리아를 돌아다닌다는 점만이 달랐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인들이 이다 산에 산다는 닥탈리에 대해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누마는 어느 날 이들이 항상 물을 마시 는 샘물에 술과 꿀을 섞어 놓음으로써 반신들을 사로잡았다. 덫에 사로잡힌 것을 알게 된 반신들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온갖 괴상하고 무서운 괴물로 변해 보였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혀서 전혀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반신들은 누마에게 많 은 비밀과 미래의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이 주문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데, 양파와 머 리털, 송사리를 가지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누마에게 그 주문을 가르쳐준 것은 반신들이 아니라, 반신들의 요술을 통 해서 하늘로부터 불러낸 유피테르였다고 한다. 불려나온 유피테르는 화가 나서 누마의 질문 에 대답했다. 만약 천둥과 번개에 주문을 걸고 싶다면 머리로 하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의아 하게 생각한 누마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양파의 머리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다." 유피테르는 대답하였다. "사람의 머리다." 누마는 이 대답 속에 감추어진 잔인한 처방을 교묘히 피해보려고 다시 물어보았다. "당신의 말씀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의미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다." 유피테르는 다시 대답하였다. "살아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받아 누마는 얼른 이렇게 해석하였다. "송사리 말씀이지요." 누마는 에게리아 여신이 가르쳐준 대로 대답한 것이었다. 마침내 노여움이 풀린 유미테르 는 자비를 베풀며 하늘로 돌아갔다. 그 후로 이 문답이 있던 장소는 누마를 기억하는 의미 에서 일리키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번개를 막는 주문은 누마가 말한 방식대로 효력을 가 지게 되었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전설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지녔었는지 알 수 있다. 누마의 생각은 온통 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한번은 "적군이 쳐들어옵니 다" 라는 소식이 전달되자,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중이다"라고 대답 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다. 파이트와 테르미누스의 신전을 세운 것도 바로 누마 왕이라고 한다. 또한 파이트 신의 이름은 가장 엄숙한 맹세를 할 때 부르는 것이라고 로마 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경계의 신인 테르미누스에 대해서는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모두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나라와 개인의 영토가 나뉘는 경계선 위에서 행해졌다. 오늘날에는 살아 있는 제물을 드리 고 있으나, 예전에는 피를 흘리지 않고서 제물을 바쳤다. 경계의 신은 평화를 사랑하며 공의 를 증거하므로, 살생은 즐기지 않는다고 누마가 가르쳤기 때문이다. 사실 땅의 경계선을 정 한 것은 누마 왕이 처음이었다. 로물루스는 자신의 땅에 경계선을 정함으로써, 남의 땅을 얼 마나 빼앗았는지 나타내기를 싫어하였다. 왜냐하면 경계선이라는 것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 는 자에게는 방어의 수단이 되지만, 경계선을 어기고 땅을 빼앗으려고 자에게는 자신의 부 당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로마가 시작될 당시의 영토는 매우 좁았다. 영토가 넓어진 것은 로물루스가 전쟁을 통해 확장한 때문이었다. 누마는 이 토 지를 모두 어려운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강요하는 비참 한 가난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함으로써 밭을 더욱 많이 경작함에 따 라 그들의 마음도 함께 개발되었다. 땅을 경작하고 농부의 삶을 사는 것만큼 평화를 사랑하게 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싸울 용기를 불어넣었으며, 동시에 이웃 사람의 농토를 불의로써 유린하려는 생각을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마 는 농사가 로마 인들의 마음속에 평화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는 일종의 주문이 되기를 바라 는 마음에서,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도덕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땅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 이 구역에는 '파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각 구역마다 감독관을 임명하 였다. 누마는 때때로 몸소 이 땅을 둘러보는 것을 커다란 낙으로 삼았다. 그리고 결과에 따 모든 사람들의 평소 행실을 판단하기도 하였다. 좋은 수확을 거둔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을 내리고 농사를 짓는 일에 게으로고 소홀히 했던 사람에게는 비난과 질책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마의 정책 가운데 가장 칭송을 받은 것은 사람들을 책임에 따라 길드와 조합으 로 나눈 것이다. 이미 말한 바같이 로마 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니 로마는 차라리 둘로 나누어져 있는 셈이었다. 두 부족간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모든 로마 인들의 단합은 불가능했다. 또한 끊임없는 싸움과 피 흘리는 사태를 가져왔다. 누 마는 딱딱한 물질이 커다란 덩어리로 나누어져 있을 때에는 서로 혼합하기가 어렵지만 가루 로 부서지면 쉽게 결합된다는 점을 생각하고서, 로마의 전 시민을 작은 단위로 나누었다. 그 리하여 보다 작은 단위의 분열 속에 커다란 부족간의 분열을 없애버리려는 의도였다. 그러 므로 누마는 시민들을 작업별로 나누어 음악가, 금은공, 목수, 염색공, 구두장수, 검문, 놋그 릇장수, 독장수 등의 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밖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조합으로 만들었다. 조합에는 거기 소속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은 특권을 주고, 조합 단 위로 일정한 때에 모여 직업별 수호신을 섬기게 하였다. 이 방법으로써 시민들이 우리는 사 비니 인이요, 로마 인이요, 우리는 타티우스 인이요, 우리는 로물루스파라고 하던 폐단을 없 앴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눈 결과 시민은 완전히 융화되어 일체가 되었다. 그리고 누마가 커다란 칭찬을 받은 또 하나의 정책은 부모가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던 종래의 법을 개정한 것이다. 누마는 결혼한 아들인 경우는 노예로 팔 수 없게 법을 고쳤다. 단 그 결혼이 부모의 동의와 승낙 하에 이루어진 것이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남자가 자유인 이라고 생각하고 시집을 온 여자가 나중에 자신이 노예의 아내임을 알게 된다면 정말로 억 울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누마는 또한 달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완전히 정확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의 과학적 인 지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로물루스 시대에는 일정한 기준 없이 제멋대로 달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어떤 달은 20일, 어떤 달은 35일, 어떤 달은 그보다도 많은 수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달의 움직임과 해의 움직임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일년 이 360일로 이루어져 있다는 한 가지 원칙만을 지켰기 때문이다. 달은 354일 만에 1년을 채우는데 태양은 365일에 채우므로, 누마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차 를 11일로 산출하였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2년마다 2월달 다음에 22일을 가진 한 달 을 더 두었다. 그리고 이 달을 메르케디누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개정은 또 다른 개 정을 필요로 하였다. 누마는 또한 달의 순서도 개정하였다. 마르크가 연초이던 것을 세 번째 달로 옮겼다. 그리 고 열한 번째 달이었던 아누아리우스를 첫 번째 달로 바꾸었다. 또한 제일 마지막인 열두째 달이었던 페브루아리우스를 두 번째 달로 놓았다. 처음에는 1년에 열 달밖에 없었던 것을 야누아리우스와 페브루아리우스를 더하여 열두 달로 만든 것도 누아 왕이었다고 한다. 사실 1년에 오직 석 달밖에 없는 미개한 나라도 있다. 그리스의 아르카디아에서는 1년을 넉 달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은 비록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신생국에서 살지 만, 다른 어떤 고대 국가들보다 더 오래 된 나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 인들의 연 대기를 보면 연수를 달로 헤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 로마 인들이 1년을 열두 달이 아니라 열 달로 헤아렸다는 사실은 마지막 달의 이 름으로 알 수 잇다. '데켐베르'라는 마지막 달의 이름은 열번째 달을 의미한다. 마찬가지 로 '마치'가 첫 번째 달이었다는 사실도 달의 이름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치 다음에 있는 다섯 번째 달은 '퀸틸리스'라고 불렀으며, 여섯 번째 달은 '섹스틸리스' 등등의 순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만약 아누아리우스와 페브루아리우스를 마치의 앞에 놓았 다면, 퀸틸리스는 이름상으로는 다섯 번째이지만 사실상은 일곱 번째 달이 되는 것이다. 군신 마르스의 달인 마치를 로물루스가 제일 첫 번째 달로 삼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베누스 혹은 아프로디테의 이름에서 유래된 아프릴은 두 번째 달로 정했 다. 베누스에게 바쳐진 이 달의 초하룻날에 여자들은 목욕을 했다.그리고 머리에는 화환을 둘렀다. 하지만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아프릴의 'p'가 'ph'가 아닌 까닭에 이 달의 이름 이 아프로디테에서 나왔다는 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아프릴은 '아페리오'라는 라틴 어에서 온 이름이며, 꽃봉오리가 열리고 피어나는 봄철의 달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아프릴 다 음 달의 이름은 '아이아'에서 비롯된 메이다. 마이아는 메르쿠리우스의 어머니로 오월은 그 녀에게 바쳐진 달이다. 그 다음 달은 유노에서 이름을 따온 준이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 따 르면, 두 달의 이름은 젊음과 늙음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연장자를 의미하는 '마요레스'라는 단어에서 메이가 비롯되었고 젊은이를 의미하는 '유니오레스' 라는 단어에서 준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달에 대해서는 순수에 따라서 이름을 붙 였다. 그리하여 다섯 번째 달부터 퀸틸리스, 섹스틸리스, 그리고 셉템베르와 옥토베르, 노벰 베르 그리고 데켐베르다. 후에 퀸틸리스는 율리우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폼페이 를 패배시킨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섹스틸리스도 마찬가지로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는 제 2의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도 미티아누스도 두 사람의 흉내를 내어서, 다음의 두 달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도미티아누스 와 게르마니쿠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된 이후에 이 달들은 다시 고대 의 이름이 셉템베르와 옥토 베르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마지막 두 달만이 처음부터 끝까 지 아무런 변화 없이 이름을 간직하였다. 누마가 추가한 두 달 중에 페브루아리우스는 '페부루아'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정 화의 달이라는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달에는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수확한 산물을 바치며 루페르칼리아라고 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화의식과 유사하였 다. 야누아리우스는 야누스 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누마에 의해서 마르스의 이름을 따 마치보다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누마는 예술과 평화로운 학문 이 전쟁보다 더 선호할 만한 것임을 보일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야누스가 아주 오랜 옛날에 반신이었는지 혹은 왕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질서와 사회적인 화합을 대단히 사랑하여 야만적이고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교화하였 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야누스의 얼굴을 둘로 그린다. 양면을 가진 이 얼굴이 당시 인류가 처해 있던 짐승 같은 삶과 야누스가 가져다준 생활 방식이라는 두 가지 상태와 상황을 모두 나타내주는 것이다. 로마에 있는 야누스의 신전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로마 사람들은 문을 전생의 문이라고 부른다. 전쟁시에는 열어두고 평화시에는 닫아두기 때문이 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이 강대해지고 점점 커지면서, 이 웃의 민족들과 적들이 끊임없이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평화로운 때가 결코 없었기 때문이 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를 정복한 다음에 한 번 성문이 닫혔다. 또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와 티투스 만리우스 두 사람이 집정관으로 있을 때에 잠시 닫혔으나, 오래지 않 아 또다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곧 다시 열렸다. 그러나 누마가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은, 그 문은 단 하루도 열린 적이 없이 43년 동안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그토록 모든 전쟁이 멈추어졌던 것이다. 누마 왕의 어질고 의로운 성품으로 인해 단지 로마 인들의 마음만이 온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웃 부족들도 마치 로마로부터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이 마음이 변화됨을 경험하고 평화와 질서를 갈망하 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용히 밭을 갈고 자식을 기르며 신을 섬기는 생활을 좋아하게 되 었다. 그리하여 즐거운 명절과 축제가 각지에 벌어져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방 문하고 우정을 나누는 일이 모든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다. 이것은 선과 정의에 대한 사랑이 누마 왕이라는 지혜의 샘에서부터 넘쳐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누마 왕이 지닌 온유한 영혼 이 마치 평화의 기운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아무리 과장된 말로 이 시대를 표현한다고 해도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방패에는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날카롭던 창검과 날선 칼은 녹이 슬고, 사나운 나팔 소리 더 이상 들리지 않으니 사람마다 편히 자고 깨노라. 누마 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전쟁이나 혁명 또는 정치적 동요도 생기지 않았으 며, 왕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여 왕위를 빼앗으려고 한 사람도 없었다. 왕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신이 두려워서였는지 그의 덕을 앙모하여서였는지, 또는 순결한 사람을 보호하는 성스러운 은총 때문인지, 누마 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플라톤의 말에 대한 살아 있는 예이며 증거가 되었다. 후세의 플라톤은 인간의 사악함을 치료하고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연 히도 한 사람이 왕의 권세와 철학자의 지혜를 모두 갖추고서 덕을 함양하며 악을 다스릴 때 에만 가능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그 자신도 복된 사람이지만 현명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 또한 복된 사람이다. 아마도 누마와 같은 왕의 백성들은 어떤 위협이나 강요 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덕으로 빛나는 왕의 어진 생활을 보기만 하여도 백성들은 저절로 덕을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와 겸양으로 뒷받침된 상호간의 조화와 선의 속 에서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복지가 아닐 수 없다. 누마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였다. 어떤 사람도 누마만큼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누마의 부인이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여러 명의 역사학자들이 다양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누마가 타티아 이이의 다른 어떤 부인도 맞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 도 폼필리아라는 딸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누마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는데 폼포, 피누스, 칼푸스, 마메르쿠스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각각의 아들로부터 폼 포니, 피나리 칼푸르니, 마메르키 등의 고귀하고 이름난 가문이 생겨났다고 한다. 왕의 후예 라는 이유 때문에 네 가문들은 모두 렉스 혹은 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무리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족보가 단지 세력 있는 가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아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거짓으로 누마 왕의 혈통을 이은 것처럼 족보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고 폼필이아는 타티아의 딸이 아니라 루크레티아의 딸 이라고 한다. 루크레티아는 누마가 왕이 된 이후에 또다시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이다. 하지 만 폼필리아가 마르키우스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는 데에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견해를 같 이하고 있다. 마르카우스는 누마가 왕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마를 따라 로마로 와서 원로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누마가 죽은 뒤에는 왕권을 놓고서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와 경쟁까지 하였으나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마르키우스는 이 일에 절 망하여 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마르키우스는 폼필리아와 결혼하여 계속 로마 에 머물렀다. 그리고 앙쿠스 마르키우스를 아들로 두었는데, 그는 성장하여 툴루스 호스틸 리우스의 뒤를 이어 왕국을 이어받았다. 앙쿠스 마르키우스는 누마가 사망하였을 대, 겨우 다섯 살이었다고 한다. 누마가 8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피소의 기록에 따르면 급작스런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이가 들어 점차 점차 노쇠해 갔을 뿐이라고 한다. 누마의 장례식은 평생에 누린 모든 영광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로마와 동맹을 맺고 친선 관계 에 있는 모든 이웃 나라들이 화환과 예물을 가지고 의식에 예를 표하기 위해 왔을 뿐 아니 라, 원로원들이 직접 누마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운반하였다. 또한 제사장들이 뒤를 따르 고 그 뒤에는 엄숙한 장례행렬이 줄을 이었다.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참여한 일반 대중들 은 늙은 왕이 죽은 것이 아니라, 마치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꽃다운 나이에 죽기라도 한 것 처럼 곡을 하며 소리내어 울었다. 누마의 시신은 그이 특별한 명령에 따라서 화장을 하지 않고 두 개의 돌 관에 넣어 야니 쿨룸 산에 매장하였다. 관 하나에는 누마의 시신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그가 저술한 신앙에 관한 책들이 들어 있었다. 누마는 마치 그리스의 입법자들처럼 직접 그 책을 썼다. 그러나 생전에 그 책들의 내용과 의의와 정신을 사제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완전히 새겨 주 었다. 그러므로 사후에는 시체와 함께 묻으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교리 는 소리 없는 글로 적어둘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의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그들의 금언을 글로 적어두지 않고 그와 같이 귀중한 말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게 하였다. 또한 기하학에 관한 깊은 이치를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알려주면 하늘이 큰 재난을 보내서 사악함과 신성모독을 벌 준다고 생각하였다.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 누마와 피타고라스의 생애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보인다. 그러므로 누마와 피타고라스 사이에 친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보고자 애쓰는 학자들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가 가는 바다. 안티움의 발레리우스의 말에 의하면 12권의 종교서적과 12권의 그리스 철학서적을 관속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400년이 지나서 무브리우스 코르넬리우스와 마르쿠스 바이비우스가 집 정관으로 있을 때 큰 홍수가 났다. 그리하여 거센 물살이 땅을 휩쓸고 지나가자 돌관이 노 출되고 뚜껑이 열려졌다. 그런데 관 하나는 시체가 있었던 흔적도 없이 텅 비어 있었고, 다 른 또 하나의 관속에는 책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읽고 깊이 생각한 페틸리우스는 책의 내 용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원로원에 보고하여 코마티움으로 가져다 태워 버 렸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모두 사후에 칭송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이들을 시기하여 사악한 사람들이 지어낸 비방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 신에 대한 비방이 먼저 사라지는 것을 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누마의 경우에는 뒤를 이은 왕들이 불행한 정치로 인하여 그의 명성만이 더욱 커졌다. 누마 다음으로 다섯 명의 왕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왕은 타국으로 쫓겨나 사망하였고, 세명은 반역 음모에 휘말 려 살해당했다. 특히 누마의 바로 다음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누마 왕의 덕을 비웃고, 특히 종교에 대한 헌신을 남자답지 못한 겁쟁이의 것이었다고 조롱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창 기염을 토하다가 무서운 병에 걸려 오히려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누마 왕의 신앙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마침내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똑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리쿠르고스와 누마의 비교 지금까지 누마와 리쿠르고스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비록 쉬운 일은 아닐지라 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르고 비슷한 점을 대강 찾아보기로 한다. 사실 누마와 리쿠르고스는 공통된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자제심 혹은 인내력, 신앙심 그리고 정치와 교화의 능력이 위대하였다. 그러나 누마의 영광은 왕위에 오름으로써 얻은 것이나, 리쿠르고스의 영광은 왕 위에서 물러남으로 얻었다는 사실이 서로 반대되는 점이다. 누마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리쿠르고스는 왕위를 얻었으나 스스로 포기하였다. 누마는 한 개인에 불과 하였고 로마인도 아니었지만 로마 인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으며, 리쿠르고스는 왕자의 신분 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일개의 평민이 되었다. 정의로써 왕이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왕위를 버리고 정의를 택함도 또한 명예로운 일이다. 누마는 덕이 커서 왕으로 추대 되었으며, 리쿠르고스는 덕이 커서 왕의 자리를 내 놓았다. 마지막으로 악기의 현을 조율하 는 사람들처럼 리쿠르고스는 긴장이 풀려 방자해진 스파르타를 굳게 결속하였고, 누마는 너 무나 긴장되고 호전적인 로마를 적절히 풀어 주었다. 사실 리쿠르고스가 더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을 설득하여 갑옷을 벗고 칼을 풀어놓게 하는 것보다 금과 은을 던져버리고 값비싼 가구와 사치스런 식탁을 버리게 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를 치워버리고 축제를 즐기며 제사를 드 리는 일은 반드시 백성들에게 설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향연과 축 배를 모두 포기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스파르타 인들은 밭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열심히 시 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므로 누마는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나라를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심한 비난을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쉽사리 성공 을 이루지 못했다. 인자하고 온유한 누마의 인품은 열화같이 무모한 로마 인들을 부드럽게 하고, 평화와 법 을 존중하는 시민으로 만들었다. 반면 헤일로테스, 즉 농노들에 대한 가혹하고 잔인한 대접 을 리쿠르고스가 법적으로 정해놓은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누마가 훨씬 더 인간적이고 문명 화된 그리스의 왕다운 면모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누마는 노예들도 추수가 끝난 뒤 사투른 명절에는 주인가 함께 앉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노예들은 또한 약간의 자유를 맛 보며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추수를 마친 다음 잔치를 하는 풍속은 누마가 시작한 것이라 고 하는데, 곡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그 해에 거둔 곡식과 땅의 소산을 마음껏 즐길 수 잇는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또 어떤 설에 따르면 사투른 신이 다스리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한 명절이라고도 한다. 그 시대에는 주인이니 종이니 하 는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며 형제처럼 평등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백성들에게 중용과 검약 정신을 가져다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리쿠르고 스는 용기를, 누마는 정의를 가장 사랑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방식이 이렇게 달랐던 것은 두 나라 백서의 기질과 관습이 매우 달랐던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마가 평화를 사랑한 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불의는 행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리쿠르고스가 전 쟁을 장려한 것을 타국을 침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해를 받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습관을 길러주면서 지나친 것은 억제하고 허약한 것은 강화 한 것이다. 그리고 옳고 행복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개혁을 단행해야만 했다. 누마 가 정부의 틀을 바꾼 것은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것이었다. 누마는 사람을 금은 세공, 음악 가, 구두장수 등 여러 가지 작업으로 구분하여 다양한 색깔을 지닌 공화국을 탄생시켰던 것 이다. 반면 리쿠르고스의 제도는 매우 귀족적이며 엄격한 것이었다. 모든 천하고 힘든 일은 노예와 타국인에게 시키고, 시민들은 마치 전쟁이 직업인 듯이 오로지 무기만 다루며, 사관 의 명령에 복종하며 적을 정복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자유 인은 어떤 식으로라도 돈 버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백성들을 완전히 구속하고 모든 생활에서 규율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돈벌이와 관련이 있는 일은 심지어 밥하고 식탁 을 차리는 일까지 종이나 헤일로테스들에게 맡겨버렸던 것이다. 누마는 이런 식의 법은 펴지 않았다. 전쟁으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하기는 하였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버는 일은 자유롭게 허용해 주었다. 또한 부에 있어서 불평등한 점을 없애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부자들이 지나치게 돈을 모아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빈 곤이 계속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아직 사람들의 재산이 어느 정도 평등하고 생활 수준도 비슷했을 때, 즉 이주 국가의 초기 단계 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리쿠르고스처럼 치부의 길에 통제를 가하여 심한 빈부간의 격차로부터 오는 무서운 폐해를 억제해야만 할 것이다. 토지 재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 을 단행한 리쿠르고스나 그렇지 않은 누마나 모두 잘못한 점이 없다고 생각된다. 토지 배분 배로 이룩된 평등은 스파르타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서는 토지의 분배가 있은 지 얼 마 되지 않았으므로 최초의 제도를 어지럽히거나 새로운 분배를 시도할 필요가 없었던 것 이다. 부인과 자식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삶 모두 질투를 근절하기 위한 건전한 정책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다. 로마에서는 자식을 넉넉히 둔 사 람의 경우에 자식 없는 이웃이 찾아와서 아내를 요구하면 일정 기간 동안 그에게 아내를 내 어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한편 스파르타의 남편들은 부인을 통해 자식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허락을 해주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한집에 살면서 최초의 결혼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남편들이 좋은 자식을 낳을 듯이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자진하여 아내와 사귀게 하였다. 두 풍습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파르타의 제도는 부인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을 보 이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한 분노와 질투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제도는 법적 수속으로 점잖게 베일을 쓰기는 하였으나, 은연중에 아내를 남에게 빌 려주는 것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인가를 보여주는 듯싶다. 젊은 여자들에 관한 누마의 법은 훨씬 더 여성을 존중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리 쿠르고스의 법은 완고하고 여성에게 맞지 않는 것이어서 많은 시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 다. 시인 아비쿠스는 스파르타의 여자를 가리켜 포이토메리데스, 즉 '벌거벗은 허벅다리'라 고 하였으며, 에우리피데스는 남자들의 뒤를 쫓아 생활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스파르타의 여인들은 젊은 남자들과 집 밖으로 나와, 허벅다리를 다 드러내놓고 옷을 휘날리며 돌아다녔다. 사실 처녀들이 입는 외투자락은 옆구리의 끝까지 바느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걸을 때는 바 람에 날려서 허벅다리까지 다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시인 소포클레스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녀, 젊은 아가씨 따로 걸친 웃옷도 없이 치맛자락은 뒤로 젖혀지고, 벌거벗은 허벅다리를 자유로이 내보이는 스파르타 아가씨 헤르미오네. 그러므로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지나치게 남자 같고 괄괄해서 남편에게도 성미를 부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집안의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좌우하더니, 나중에는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도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누마가 다스리는 로마에서는 부인들이 남편들로부터 온갖 존경과 우대를 다 받았다. 이것은 로물루스 시대부터 여자들을 강제로 납치해온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매우 정숙하였다. 남편을 공대하고 존중하며 겸손, 정숙, 침묵 등의 부덕 을 함양하였던 것이다. 여자들은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으며,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번은 어떤 여자가 법정에서 자기 변명을 하자, 원로원은 나라에 무 슨 변이 생기려는 징조가 아닌가 하여 신탁을 묻게 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로마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순종을 잘하고 겸손하였다는 사실은, 잘못된 행실을 한 여자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들은 내란에서 처음으로 칼을 빼든 사람이나 혹은 형제를 죽이거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살해한 자의 이름을 기록한 다. 그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가들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가 아내와 이혼을 하였는 데 이것은 로마 창건 이래 2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식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 다. 또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재위하던 시절에, 피나리우스의 아내 탈라이아는 게가 니아라는 시어머니하고 다투었는데 이것도 역시 처음 있는 일이라고 기록도 있다. 그만큼 결혼 관계에 있어서 질서를 지키고 행실을 삼가도록 하는 법률이 성공적으로 지켜지고 있었 던 것이다. 처녀의 교육과 결혼에 관한 법률은 서로 비슷하다. 리쿠르고스는 여자들이 완전히 성숙하 여 결혼을 원할 만한 나이가 되면 비로소 혼인할 수 있게 하였다. 리쿠르고스는 자연이 정 해 놓은 순리대로 부부관계를 가진다면 사랑과 애정이 생기지만, 성숙하지 않은 소녀가 강 제로 관계를 가진다면 두려움과 싫증만을 느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성숙한 여 인일수록 리쿠르고스가 결혼의 목적이라고 본 해산의 고통도 더욱 잘 감당할 수 있다고 판 단한 것이다. 반면 로마 인들은 열두 살을 갓 넘은 어린 딸을 출가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몸도 마음 도 순결한 상태에서 장래의 남편에게 맡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쿠르고스의 방식은 아이를 낳는다는 면에서 보면 더 순리에 맞는 것이며, 로마 인의 방식은 평생을 부부가 함께 보낸 다는 점에서 더욱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리쿠르고스가 이이들을 모아서 부대를 편성하고 , 훈련도 식사도 공동으로 하게 한 점은 누마의 방법보다 더 훌륭한 것이었다. 누 마는 일반적인 입법자들처럼 젊은이의 교육 문제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소망과 필요에 따르 도록 방임하였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아들을 목수든, 놋그릇공이든, 악사든 임의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똑같은 목적을 향하여 젊은이들을 맨 처음부터 훈련하고 가르 치는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식이었다. 혹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해서 우연히 같은 배 를 탄 사람들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뿐, 다른 경우에는 모두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다른 평범한 입법자라면 역량과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마처럼 현명한 사람이 새로 탄생된 유순한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아이들의 교육에 곤한 일만큼 중요시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을까? 젊은 사람들을 훈련하여 고집이나 불순종 하는 성격을 지니지 못하게 하고, 요람에서부터 덕을 기르고 성격을 형성하게 하는 일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 리쿠르고스의 법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바로 이 교육의 덕이다. 왜 냐하면 리쿠르고스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법의 정신을 철저히 침투시키고 나라에 대한 사 랑을 그와 같이 깊이 심지 않았다면, 그 법이 500년 이상이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 이다. 사실 모든 스파르타 인들의 생활은 리쿠르고스의 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평과 우호를 지키며 지내자던 누마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의 사망과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누마가 살아 있을 때에는 마치 전쟁을 가두어 두기라 도 한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전쟁의 문은 활짝 열리고 이탈리아 전역에 살육이 범람하였던 것이다. 누마의 훌륭하고 의로운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누마의 정책을 이어받고 계승하도록 백성들이 교육받지 못했으니 오래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가 전쟁을 통해 더욱 발전되고 잘살게 되었는가? 이것은 간단히 대답할 수 없 는 질문이다. 재물과 사치와 권세를 누리는 일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족하며 평화롭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로 여기는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이 되어야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로마가 누마의 정책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부강한 나라가 되고, 스파르타는 리크르고 스의 규율을 버림으로써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강대하던 위치에서 떨어져 경멸의 대상이 되 고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리쿠르고스의 정책이 더 훌륭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누마의 배경에 있어서 너무나 독특하고 거의 신기하게까지 느껴지는 점은 일개 이방 인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더욱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나라의 모든 틀을 바꾸어 놓으 면서도 오직 설득과 타협으로만 개혁을 실행하였다. 또한 한번도 화합을 이루어 보지 못한 도시를,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지혜와 정의의 힘으로만 다스려 마침내 화합 과 조화를 이루어 놓았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솔론 언어학자 디디무스는 솔론의 법전에 관련된 아스클레피아레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필 로클레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인용된 구절에는 솔론이 에우포리온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이것은 솔론에 관한 다른 모든 기록들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솔론은 엑 세케스티데스의 아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엑세케스티데스는 그저 평범한 정도의 재산과 권세를 지니고 있었으나,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의 후손으로 매우 귀한 가문의 태생 이었다. 폰티쿠스 사람 세라크레이데스의 말에 의하면 솔론의 모친은 피시스트라투스의 모 친과 사촌 사이였다고 한다. 두 소년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로 자라났다. 서로 가까운 친척인 탓도 있었지만 피시스트라투스가 지닌 고귀한 품성과 아름다움 때문에 솔론은 피시 스트라투스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에 두 사람이 정치에 관한 견해 차이로 사이가 갈라졌을 때에도, 절대로 화를 내거나 상대방에게 심한 적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음 속에 어린 시절의 우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이 몸 속에는 뜨거운 불길이 살아 있어 두 사람의 사랑과 소중한 우정도 이 시와 마찬가지였다. 솔론은 아름다움을 시기하지 않 았으며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견딜 만한 용기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둥근 원을 그리듯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는 솔론의 시와 법률을 살펴볼 때, 그가 자유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솔론의 법에는 노예에게는 금지된 몇 가지 사항들이 나온다. 한편 아카데미에 사랑의 초상을 헌납한 사람이 바로 피시스트라투스라고 하는데, 성화 경주에 나가는 사람들은 이 곳에 있는 불로 횃불을 붙이곤 하였다. 헤르미푸스에 의하면, 솔론은 부친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재산을 나누어 주다 가 마침내 가산을 탕진하자 젊은 시절부터 장사에 나섰다고 한다. 물론 기꺼이 그에게 도움 을 줄 만한 친구들은 많았지만, 솔론은 다른 사람들의 짐이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솔론은 다른 사람들로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친절을 베푸는 쪽에 더 익숙한 그런 가풍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론이 돈을 벌려는 목적에서보다는 경험과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각지를 여행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솔론이 학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이가 들었을 대 솔론은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하였다. 하루하루 늙어갈수록, 배움은 더욱 새로워라. 그러나 부를 좇는 사람은 아니었다. 솔론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면 많은 재물을 가진 부 자나 다름없다고 보았다. 손에 쥘 정도의 금과 은, 말과 노새 몇 마리, 몇 에이커의 밀밭, 그리고 모든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 옷 한 가지의 밭에 맞는 신발 한 켤레, 젊은 아내와 아이들. 다른 시에는 이렇게 읊었다. 재물을 원하지만 불의로 얻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결국에는 정당하게 얻는 것만이 확실하기에. 선량한 사람이나 바른 정치인이라도 사치를 너무 탐하지만 않는다면, 필요한 정도의 재산 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헤시오도스가 말한 대로, 솔론의 시대에 있어서 '노동은 전혀 수치가 아니었다.' 또한 장 사를 한다고 해서 천한 일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각지를 여행하며 무역을 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로 꼽혔다. 이 일을 통해 야만인들이 즐기는 좋은 물건들을 본국으로 가져다줄 수 있으며, 외국의 왕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많은 경험 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떤 상인은 커다란 도시를 세우기도 하였다. 예를 들 어 마시릴아 시를 창건한 프로티스가 있다. 프로티스는 특히 론네 강 근처에 사는 갈리아 인들이 좋아한 상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철학자 탈레스와 수학자 피포크라테스도 각지를 돌 아다닌 상인이었다고 하며, 플라톤은 이집트에서 기름을 팔아 여비로 썼다고 한다. 솔론의 생활이 사치스럽고 화려했던 것이나, 철학적 견지에서보다는 세속적인 견지에서 쾌락을 표현한 시를 많이 쓴 것 등은 아마도 상인으로서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 다. 상인들은 수천 가지의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쾌락이나 즐거움 속 에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론은 스스로를 부자라기보다는 가난 한 사람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나타난다. 어떤 사악한 이는 잘살고, 어떤 선한 이는 가난하게 살지만 우리는 우리의 덕과 부자들의 창고를 바꾸지 않으리라. 덕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으나 재물은 온종일 주인을 바꾸는도다. 솔론은 처음에 심각한 의도 없이 단지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장난 삼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이나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시에서 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솔론이 그 시를 기록한 것은 역사가로서 후세에 남기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자신 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어떤 때는 아테네 인들을 꾸짖고 결려하여 고귀한 행동을 하도록 교화하려는 의도에서 글을 쓰기도 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솔론은 자신이 만든 법을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려고 하 였다는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의 법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권능하신 제우스 신이여, 명예와 영광을 더불어 내려주시옵소서. 철학에 있어서, 솔론은 당시의 많은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정치적인 측면을 제일로 보았다. 반면 과학에 대해서는 매우 평범하고 낡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시에 서는 과학에 대한 솔론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 눈과 우박은 구름에서 내리고, 벼락이 치면 틀림없이 천둥도 온다. 바람이 불면 파도 또한 세며, 바람이 없으면 늘 잔잔하다. 사실 그 당시에 일상 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과학을 끌어올린 철학자는 탈레스뿐이었다. 다른 철학자들은 모두 정치적 관심을 통해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한번은 철학자들이 페리안데르 왕의 주선으로 델포이와 코린토스에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왕은 철학자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였다. 이때 왕이 세 발 달린 솥을 철학 자들에게 차례로 주었더니, 모두 겸손하게 거절하며 서로 양보하였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 일로 크게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세 발 달린 솥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안스의 한 어부가 그물을 던져 놓았는데, 밀레시아에서 온 이방인이 시험삼아 그물을 올 리기도 전에 안에 걸린 것을 미리 샀다. 그런데 그물을 올리고 보니 금으로 만든 세 발 솥 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헬레네가 배를 타고 트로이에서 떠나올 때에 오래된 예언을 기억하 고 그 곳에 던진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이방인과 어부들 사이에서 세 발 솥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마침내 온 도시가 싸움에 끼여들어 전쟁이 벌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폴론은 세 발 솥을 가장 현명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 분쟁을 끝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먼 저 밀레투스 사람인 탈레스에게 보냈다. 솥을 두고 밀레시아의 모든 사람과 싸움을 벌였던 코안스 사람들도 탈레스에게 주자는 데는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하지만 탈레스는 비아스가 더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비아스에게 솥을 보냈다. 그랬더니 비아스 또한 자기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로 보냈다. 그리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탈레스에게로 왔다. 결국 황금솥은 밀레투스에서 테베로 보내 져 아폴론 신에게 바쳐졌다. 그런데 테오프라스토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처음으로 선물 받은 사람은 프리에네 에 있는 비아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밀레투스의 탈레스에게로 갔다가 같은 경 로를 통해 다시 비아스에게로 돌아왔으므로 델포이로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것이 일반적으 로 더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단지 선물로 받은 것이 세 발 솥이 아니라, 크로이소스가 보낸 잔이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바티클레스라는 사람이 남긴 그릇이었다고 한다. 아나카르시스와 솔론, 그리고 탈레스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들이 나눈 대화의 일부 를 기록한 사람이 있다. 한번은 아나카르시스가 아테네로 찾아와서 솔론의 집 문을 두드렸 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신은 이방인이지만 솔론과 우정을 서로나누기 위해 손님으로 찾아왔 다고 했다. 그러나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친구를 사귀려면 고향에서나 사귈 일이오." 아나카르시스는 다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집에 계신 당신께서 저와 사귀시면 되겠군요." 이토록 재치 있는 대답에 감탄한 솔론은 아나카르시스를 친절히 맞아들이고 얼마간을 함 께 지냈다. 솔론은 벌써 정치에 관여하며 법을 편찬하고 있었다. 아나카르시스는 이 사실을 알고서, 씌어져 있는 법으로 사람들의 죄와 탐욕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솔론을 비웃 었다. 법이란 마치 거미줄과 같아서, 사소한 범죄나 힘없는 사람은 걸려들지만 권세 있는 부 자들은 오히려 그 그물을 찢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협정을 깨뜨려서 양쪽 모두 얻는 바가 없을 때에 는 협정을 지키는 것이 더 이롭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솔론이 뜻한 대로 되지 않고 아나카르시스가 생각한 대로 되었다. 한번은 아나카르시스가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그리스에서는 현명한 사람들이 정치를 논하지만 결정은 무식한 사람이 내린다며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솔론이 탈레스를 찾아 밀레투스로 간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솔론은 탈레스가 결 혼하여 가정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탈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후에 한 이방인을 시켜서 열흘 전에 아테네를 떠나온 것처 럼 일을 꾸며놓았다. 솔론이 이방인에게 아테네의 소식을 붇자, 그 사람은 탈레스가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만, 어떤 젊은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그 장례식에 참석했지요. 대단히 이름 높은 분의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젊은이의 아 버지는 오랫동안 여행중이라 집에 없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군요. 그런데 이름은 모르시오?" 솔론이 물었다. "들었는데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단지 대단히 현명하고 의로운 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을 들을수록 솔론은 점점 더 불안해져갔다. 그래서 마침내 대단히 근심스 런 표정으로 그 젊은이가 솔론의 아들이 아니더냐고 물었다. 이방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솔론은 머리를 치며 슬픔에 찬 탄식을 했다. 그러나 탈레스는 웃으며 솔론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솔론, 바로 이런 일 때문에 나는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가지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 세. 자네같이 강한 사람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불행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러나 저 말에 근심하지 말게나. 모두 거짓말일세." 이 이야기는 자신이 이솝의 영혼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파타이쿠스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헤르미푸스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잃어버릴 일을 염려해서 일상 생활의 편리를 멀리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 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재산도 명예도 지식도 장차 잃을 것을 염려해서 가 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재산 중에서도 가장 크고 귀하다고 하는 덕까지도 병이나 나 쁜 악으로 잃게 되는 수가 있다. 탈레스가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친척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한 여전히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탈레스도 누 이의 아들 키비스투스를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사람의 영혼이란 그 자체에 사랑에 대한 원리가 심어져 있어서 단지 보고 생각하고 기억 할 뿐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쏟으며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법이다. 어 떤 사람이 사랑할 사람을 전혀 가지지 못한 경우에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나 혹은 금지된 대상에서라도 사랑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적당한 상속자가 없는 재산과도 같다. 사랑과 더불어 근심과 걱정도 찾아오는 법이다. 결혼을 하여 자식을 가지는 일에 대해서 가 장 강한 어조로 비난하던 사람도, 종이 낳은 자식이나 정부가 낳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 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개나 말을 잃고 부끄러울 만큼 지나친 슬픔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그 반면에 요란한 눈물이나 과장된 슬픔을 보이는 일이 없이 훌륭한 아들의 죽음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낸다. 사실 끝없는 슬픔과 공포를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지닌 허약함이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합리적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미래의 헤어짐으로 인해 고통받을 것을 항상 염려해서 현재의 기쁨 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재산을 잃을까 염려하여 가난을 택하지 말 것이며, 사랑 하는 사람을 잃을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 것이다. 또한 자 식이 죽을까 염려하여 자식 가지기를 두려워하지도 말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 으니 이만 그치기로 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살라미스 섬을 두고 메가라 사람들과 오랫동안 벌여왔던 힘들고 지루한 전쟁에 끝내 싫증이 났다. 그리하여 법을 만들어 앞으로 누구든지 살라미스 섬을 다시 되찾 아야 한다는 주장을 글로나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솔론은 이와 같 은 불명예스런 처사를 개탄하는 한편, 많은 젊은이들이 몹시 싸우고 싶어하면서도 법을 두 려워하여 감히 입도 못 여는 것을 보고 스스로 미친 사람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가 족들을 시켜 솔론이 미쳤다는 소문을 온 도시에 퍼뜨렸다. 그러고 나서 솔론은 남몰래 시를 지어 기억을 해두었다. 머리에 괴상한 모자를 쓴 솔론은 시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사람 들이 솔론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솔론은 전령들이 올라서는 발판 위에 서서 그 시를 높이 외웠다.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아름다운 살라미스에서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그 소식을 시로써 전하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살라미스였으며 100행의 아름다운 말로 되어있었다. 솔론이 이 시를 노래 하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피시스트라투스는 연설을 통해 시민들의 호응을 일 으켰다. 결국 아테네 인들은 그 법을 고치고 솔론의 지휘 아래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피시스트라투스와 함께 솔론은 배를 타고 콜리아스로 갔다. 마침 그 곳에서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테메테르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여자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솔론은 자기의 심복을 살라미스로 보내어, 자기 는 탈주병인데 아테네 명문가의 여자들을 모두 잡고 싶으면 자기를 따라 콜리아스로 가자고 메가라 인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메가라 인들은 이 말에 속아서 군대를 배에 태워 보냈다. 메가라 인들의 배가 저 편 섬을 떠나오는 것을 보자, 솔론은 여자들은 모두 피신하게 하였 다. 대신에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여자 옷과 머릿수건과 신을 신게 산 다음 가슴에는 단도를 품게 하였다. 그리고 적이 육지에 상륙해서 배를 확실히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바닷가에서 춤을 추며 놀라고 명령하였다. 메가라 군은 이들이 여자인 줄로만 생각 하고 서로 앞ㅇㄹ 다투어 붙잡으려고 덤벼들었다가 결국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아테네 군 은 그 길로 살라미스 섬으로 가서 점령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살라미스 섬은 이런 식으로 점령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맨 처 음 솔론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소미아의 아름다운 언덕 위에서 안식을 취하는 영웅들, 서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린 채 땅에 묻힌 자들에게 가서 가장 좋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라. 그리하여 솔론은 밤중에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그리고 메가라 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페리페무스와 키클레우스 두 영웅을 위한 위령제를 드린 다음, 500명의 아테네 지원병을 모 집하였다. 솔론은 이들을 많은 어선에 나누어 태우고 서른 개의 노를 쓰는 군선을 중심으로 선단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리고 니케아 방면으로 뻗은 산 근처에 닻을 내렸다. 섬에 사는 메가라인들은 즉시 무장을 갖추고 한편으로 배를 내보내서 상황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배가 솔론의 선단에 가까이 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솔론은 이 배에 가장 유능한 병사 들을 골라 태운 다음, 정체를 감춘 채 살라미스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솔론은 남 은 군대를 거느리고 메가라 인들을 향해 육지로 진격하였다. 이들이 육지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배에 숨어 있던 병사들은 도시를 차지하였다. 살라미스를 공략한 기념으로 거행하는 생사를 보면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행 사 중에는 아테네의 배 한 척이 살라미스 섬으로 가는 순서가 있는데, 처음에는 소리 없이 가다가 해안에 가까워지면 비로소 전쟁의 고함 소리를 지른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무장한 사람이 함성을 지르며 배에서 내려 스키라디움 산 꼭대기까지 달려 올라간다. 그 곳에서 육 로로 올라온 병사들과 만나는 것이다. 이 곳에서 솔론이 군신 아레스에게 바친 신전이 있다. 솔론이 메가라 군을 정복하고 살아 남은 자들에게 휴전의 깃발을 주어 돌려보낸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메가라 인들은 전쟁을 걸어와서 양편 모두 손해가 컸다. 그들은 스파르타 인들을 중재자로 삼아 판결을 받기로 하였다. 여러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에 솔론은 호 메로스의 권위에 상당한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 문제가 한창 논의되고 있을 때, 선박의 목 록 속에 호메로스의 시 한 구절을 집어넣기도 하였다. 솔론은 다음과 같은 시구 2행을 인용 하였다고 한다. 용감한 아약스는 살라미스에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와서 아테네 군이 싸우고 있는 곳에 부하들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솔론이 재판관들에게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아약스의 두 아들 필라이우스와 에우리사케스는 아테 네 시민이 되면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살라미스 섬을 주었다. 그리고 한 삶은 아티카에 있는 브라우론에서 살고 다른 한 사람은 델리테에서 거주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필라이다 이 마을을 이루었는데 바로 피시스트라투스도 그 가문의 후예라고 했다. 솔론은 메가라 인 들에게 더욱 불리한 증거로써 그 섬의 무덤은 메가라 식이 아니라 아테네 식으로 놓여 있음 을 말하였다. 메가라 인은 무덤이 동쪽을 향하도록 쓰는 반면, 아테네 인들은 서쪽을 향하도 록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라의 헤레아스는 이것을 부인하고 메가라 인들도 무덤을 서 쪽으로 향하여 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인은 관 하나에 한 사람씩 매장하나, 메가 라 인은 관 하나에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을 함게 매장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사라미스를 이오니아에 딸린 것이라고 표현한 델포이의 신탁이 솔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중재를 맡 았던 스파르타 인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크리톨라이다스, 아몸파레투스, 히프세키다스, 아낙실라스, 클레오메네스였다. 이 일로 인하여 솔론의 명성과 권위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리스 전체에 솔론의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델포이 신탁을 옹호한 연설이었다. 솔론은 그 연설을 통해 키르헤아 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행동을 더 이상 참지 말고 신의 명예를 위해 단결하자고 호소하였다. 그의 웅변에 감동되어 암픽티온 동맹국들은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 사실은 아리스토텔레 스의 저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암피티온은 솔론을 자문 위원으로 삼았다. 그러나 헤르미푸스 가 에반테스의 말을 인용한 바와 같이 이번 원정의 장군은 솔론이 아니었다. 웅변가 아이 스키네스도 솔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델포이의 기록에 의하면 솔론이 아니라 일크아이온이 당시 아테네의 장군으로 되어 있다. 당시 아테네는 킬로니인의 저주로 오랫동안 괴로움을 당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집정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메가클레스가 킬론은 비롯한 반역자들을 설득한 이후로부터 계속된 일 이었다. 그때 반역자의 무리들은 아테네 신전에 몸을 피해 있었는데, 메가클레스의 설득을 믿고 공평한 재판을 받기 위해 신전에서 나왔다. 신의 가호를 바라는 반역자들은 여신의 상 에 실을 매어 한쪽 끝을 잡고서 재판정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반역자들이 복수의 신전 옆에 서 돌로 쳐죽이고, 성소로 도망친 사람들까지 제단 앞에서 살해했다. 다만 집정관의 아내들 에게로 가서 살려달라고 애걸한 사람들만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 이 있은 뒤로 집정관들은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킬론 일파 중에 생존자들은 다시 세력이 커졌다. 그리고 메가클레스의 가문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정치적 분열은 극도로 심해서 아테네 시는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미 명성이 높았던 솔론은 아테네의 최고 원로들과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 간청과 충고로 써 저주받았다는 자들을 설득하여 명문 출신인 300명의 시민으로부터 재판을 받게 하였다. 필리아의 이론이 검사가 되었다. 메가클레스 사람들은 유죄로 판결을 받고 국외로 추방되었 다. 이미 죽은 자들은 시체를 파내서 도시의 경계선 밖으로 내던졌다. 이러한 혼란중에 있을 때에, 메가란 인이 다시 공격을 해왔다. 그리하여 나사이와 땅과 살 라미스 섬을 빼앗겼다. 아테네 시는 미신적 공포에 휩싸이고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예언자들은 범죄자들과 그들로 인해 더럽혀진 자라를 속죄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낼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므로 크레타에 사는 에피메니데스를 모시러 사람을 보냈다. 메리안데 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에피메니데스를 그리스의 일곱 명의 현자 중 하나라고 칭송할 만큼 이름이 높았다. 또한 천신으니 각별한 은총을 입어 신성한 이적이나 계시를 알아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에피메니데스를 발트라고 불리는 님프 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크레타 섬의 크레테가 부활했다고도 하였다. 에피메니데스는 아테네로 와서 솔론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솔론이 법을 만드는 데 많 은 조력을 하였다. 종교 의식을 개정하였으며 장례식 후에는 일정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 을 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었다. 또한 미망인들이 당하던 야만적이고 잔인한 의식을 폐 지하였다. 더욱이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고 새로운 신전도 지어 매우 경건하게 신을 받들었 다. 마침내 사람들은 법에 잘 순종하며 단결하고 화합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니키아 산을 한참 동안 유심히 바라보던 에피메 니데스가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란 앞날의 일을 이토록 모르는군요. 만약 아테네 사람들이 뒷날 이 산이 도시에 가져올 불행을 예견할 수 있다면,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이빨로 갉아먹기라도 할 것이오." 이와 같은 예언은 탈레스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밀레투스에 있는 어떤 우묵하고 초라한 곳에 묻어 달라고 하면서, 앞으로 그 지방에 도시가 들어서고 바로 그 자리가 광장이 되리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에피케니데스는 아테네 인들로부터 커 다란 존경을 받았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돈과 특권을 주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단지 신령한 올리브 나무 가지 하나를 청하여 그것을 받아 표연히 돌아갔다. 이제 킬론으니 문제가 종말을 짓고 저주받은 자들도 국외로 몰아내자, 아테네 인들은 옛 날부터 끌어오던 정치에 대한 문제로 다시 분쟁을 일으켰다. 각 지방마다 파벌이 있어 그 수만큼의 정당이 생겨나는 지경이었다. 산에 사는 디아크리 족은 민주주의를, 평야에 사는 부족들은 과두정치를 주장하였고, 해안 지방에 사는 파랄리 족은 두 가지 형태의 중간을 주 장하였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여 어느 정부 형태도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빈부의 차가 극심해서 마침내 나라는 혁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혼란을 해결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절대적 전제정치를 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처럼 보였다. 당시 아테네는 모든 국민들이 소수의 부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부 자들의 땅을 경작하여 주고 수입의 6분의 1을 이자로 갚아야만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헥테 모리이 혹은 네네스라고 불렀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저당 잡혔다가 빚을 같지 못해 채권자 의 노예가 되거나 타국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까지 팔았고, 혹은 빚쟁이 들의 횡포에 못 이겨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그러나 드디어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단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여 저주받을 채권자들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토지를 다시 분배하고 정부의 형태를 바 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당시 아테네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솔론만이 중립을 지키고 있 음을 알았다. 솔론은 부자들의 횡포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극악한 빈곤에 빠지지 않을 정 도의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론에게 와서 분쟁을 종결짓고 공화국을 구해달라 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레스비안의 파니아스의 말에 의하면, 솔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양쪽을 다 속였다고 한다. 빈민들에게는 토지를 재분배해줄 것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빌 려준 돈에 대한 보장을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론 자신은 부자들의 오만함과 가난 한 자들의 탐욕이 두려워서 처음에는 탐탁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국정을 맡았다고 말 하고 있다. 솔론은 핌롬브로투스의 뒤를 이어 아르콘, 즉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즉 시 중재에 자서 새로운 법을 펴도록 위촉받았다. 부자들은 솔론이 부유함을 보고 자기들의 편이라고 신용하였으며, 빈민들은 그가 정의감이 있고 선한 사람이라고 신임하였다. 선거가 있기 전에 솔론이 한 말이 유행되었다. 그것은 "모든 일이 공평할 때에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양편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부자들은 공평 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와 공로에 따라서 합당한 몫을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했으 며, 빈민은 전적으로 똑같이 나누는 것이 공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양편 모두 큰 희망을 걸고, 솔론에게 어서 절대적 권한을 장악하라고 간청하였 다. 일단 자리를 잡아 솔론의 뜻에 따라서 자유롭게 모든 일을 처리하라고 하였다. 많은 평 민들은 법과 이성으로 변화를 일으키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하고, 현명하고 정의로운 한 사람에게 기꺼이 모든 일을 위임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솔론이 아폴론으로부터 이러낳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키를 잡아 조종하라, 아테네의 많은 사람들은 그대의 편이다. 가까운 친구들은 단지 그 이름 때문에 군주제를 꺼리는 솔론을 꾸짖었다. 그리고 다시리 는 사람의 덕을 통해서 군주제도 합법적인 정치형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에 우보이아 인들은 티논다스를 선택하여 똑같은 시도를 해보았으며, 미틸레네 인들은 피타쿠 스를 왕으로 추대했던 사실들을 들려주면서 권유하였다. 그러나 솔론의 결심은 요지부동이 었다. 솔론은 친구들에게 전제 군주란 과연 좋은 자리지만 한 번 앉으면 물러날 길이 없다 고 대답하였다. 포쿠스에게 대답으로 준 솔론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의 손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나의 소중한 이름 위에 온갖 불명예와 오점을 남기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으리. 이것이 나의 최고의 명예가 되리라고 나는 믿기에. 이 시로 보아 솔론은 아테네에 법을 펴기 전에 이미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권력을 거부하는 솔론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조소를 던졌다. 솔론은 분명히 단순한 마음을 지닌 몽상가였소. 신이 그에게 행운을 던져주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부하였소. 그물이 물고기로 가득 찼을 땐,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고 용기와 재주가 부족한 탓에 끌어올리기를 거부하였고. 만약 내가 단 하루라도 왕이 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면 나는 나의 껍질이라도 내어주고 나의 집이라도 무너뜨리리라. 이렇게 솔론은 천한 대종들이 그에 대해 떠들어대도록 내버려두었다. 비록 이렇게 왕위는 거절하였지만 솔론은 모든 일에 우유부단하지는 않았다. 솔론은 권세 있는 자들 앞에서 자 신을 낮추거나 복종하지 않았으며, 뽑아준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는 법을 만들지도 않았다. 이전의 법이라도 좋은 것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나라를 혼란케 하고 뒤흔들었다' 가 다시 새로운 체계를 잡을 만한 힘이 없을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정책을 실천함에 있어서 때로는 설득을, 대로는 강권을 사용하였다. 솔론 자신도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권력과 정의를 겸하여 썼다. 그러므로 후에 누군가가 아테네 인들을 위해 최선의 법을 남겼느냐고 물어왔을 때, 솔론 은 아테네 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법이라고 대답하였다. 현대인들이 말하기를 아 테네 인들이 나쁜 말들을 부드럽게 완화하여 사용하는 것은 솔론에 의해서 처음 고안된 일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창녀를 아가씨로, 공물을 세금으로, 유격병을 보호명으로, 감옥을 방 등으로 바꾸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솔론은 부채를 삭감하는 일은 '세이사크테아' 즉 '짐을 덜어주다'라는 말로 불렀다고 한다. 솔론이 처음으로 실행한 일은 다음과 같았다. 남아 있는 모든 부채를 모두 탕감하여 주고 앞으로는 어떤 사람도 담보로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게 금하였다. 그러나 안드로티온 같은 사람의 주장에 따르자면, 부채를 완전히 없애준 것이 아니라 단지 잭성들이 만족할 만한 정 도까지 이자를 낮추어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특혜를 두고'세이사크테 아'라고 불렀다. 이와 함께 단위를 넓히고 돈의 가치를 높였다. 이전에는 73드라크마로 통용 되던 1파운드를 100드라크마로 바꿈으로써, 지불하는 돈의 액수는 같은 것이지만 그 가치는 적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빚을 짊어진 사람은 이익을 보았으나 채권자에게도 손 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세이사크테아'란 모든 빚을 탕감하는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 하고 있다. 이것은 솔론의 시로도 확증이 된다. 이 땅을 덮고 있던 저당권을 나의 손으로 없애버리니, 노예로 얽매였던 나라가 자유를 찾았다. 솔론은 이렇게 노래하며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간 아테네 시 민들을 다시 본국으로 찾아올 생각을 하면서 이와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고국의 말도 잊어버리고 멀리 이역에서 헤매는 이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를 원하면서 이와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여기 수치스러운 노예의 운명에 얽매인 이들 솔론이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 그의 평생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솔론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기로 결심을 하고 그 법을 시작하는데 어떤 문장과 형 식이 적당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인 코논, 클리니아스, 히포니쿠스 등과 상의를 하였다. 솔론은 이 친구들을 너무나 신임한 나머지 토지의 사유에 대해서는 간 섭할 의도가 없으나 모든 빚은 일소해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 친구들은 부자들로 부터 많은 돈을 사용하여 넓은 토지를 사버렸다. 곧 이어서 법령이 시행되니, 이들은 토지는 그대로 차지하면서 빌린 돈은 갚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서 솔론은 크게 신임을 잃고 많은 미움을 받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솔론이 친구들과 공모한 것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러나 솔론은 자기가 꾸어준 5탈렌트의 돈을 받지 않음으로써 곧 오해를 풀었다. 로디안의 폴리젤루스의 말에 의하면 그 액수는 15탈렌트였다고 한다. 그러나 솔론의 친구들은 그 이 후로 '크레오코피다이(즉 사기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조치로써 솔론은 어느 면도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부자들은 돈을 잃은 것에 대해 화 를 내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토지가 분배되지 않았으며 리쿠르고스가 모든 공화국에 내렸던 명령처럼 절대적인 평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더욱 불만을 느꼈다. 사실 리쿠르고스는 헤라클렛으 11대손으로, 여러 해 동안 스파르타를 통치하였기에 이미 큰 명성고과 많은 친구들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쿠르고스는 개혁을 실천하는 데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설득보다는 강권을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그 목적을 강행하다가 한쪽 눈까지 잃은 일이 있었으나, 나라의 안전과 단결을 위한 귀중한 정 책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가 되거나 빈민이 되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솔론은 평민에 지나지 않고 또 온건한 사람이었으므로 권 세가 그 정도까지 미치지는 못 하였다. 오로지 백성들의 신임과 호의에 의지하여 할 수 있 는 일을 다할 뿐이었다. 시민들이 솔론의 법에 다른 결과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것은 그 자 신의 시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전에는 헛되니 나를 자랑하며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지금은 나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다. 마치 친구가 아니라 적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솔론은 말하기를 만일 다른 사람이 똑같은 권력을 잡았다면, 힘든 일을 견디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도 않고 오직 우유의 가장 기름진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리.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은 솔론이 한 일에서 좋은 점을 알아차리고, 개인적 인 불평일랑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공적인 제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이사크테아'라 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솔론을 새로운 개혁자로 선출하고 공화국을 위한 법을 만들게 하 였다. 또한 솔론에게 모든 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행정원, 공민대회, 원로원, 법원 등의 모든 일을 일임하였다. 솔론의 뜻에 따라서 이들 기관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의 정 도와 현재의 규정 중에서 무엇을 없애 버리고 무엇을 계속 남겨둘 것인가 하는 사항 등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일 먼저 취한 조처는 드라코가 제정한 법을 살인죄에 관한 것만 남기고 모두 폐지한 것이었다. 법이 너무 엄격하고 형벌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 법은 거의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하여 사형을 과하였다. 게으른 죄에 대해서도 사형을 내리고, 화분에 심은 꽃 이나 과실을 훔친 자도 강도나 살인범과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그러므로 체마데스는 드라 코의 법을 조롱하여, 잉크로 쓰지 않고 피로 쓴 법이라고 하였다. 드라코 자신은 왜 모든 범 행에 사형을 가하였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사형은 작은 죄에 알맞지만 그보다 더 큰 형 벌이 없으니 커다란 죄도 사형으로 그쳤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으로 솔론은 모든 행정 업무를 종래에 담당해온 사람들 즉 부유층에게 그대로 맡 겨두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다른 부문에 있어서는 참여를 시키기 위하여 시민들의 재산 정 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 결과 1년에, 말린 것이나 젖은 과일의 500메림니에 해당하는 수입 을 가진 사람을 1급으로 삼고, '펜타코시오메딤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말 한 필과 300메림 니의 수입을 가진 사람을 2급으로 분류하고 '히파다 테룬테스'라고 불렀다. 200메림니의 수 입을 가진 사람을 3급으로 분류하고 '세우기타이'라고 불렀다. 4급의 사람에게는 어떤 공작 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단지 공민대회에 참가할 자격과 법정에서 배심원이 될 수 있는 자격 만을 주었다. 이 자격은 처음에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굉장한 특권이 되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분쟁에 대한 배심원이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사가 결정을 지은 일에 대해서도 솔론은 법정에 호소할 수 있게끔 허락을 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솔론은 고의로 법조문을 애매하게 만들어 실제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배심원의 권한을 더 크게 하려는 뜻이었다. 법조문만을 보고 분 쟁ㅇ르 해결 짓지 못하는 경우에는 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배심원에게 호소하였다. 다음 시에서도 솔론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나는 백성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권세를 주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특권을 빼앗지 않았으며, 새로운 특권을 아낌없이 주었다. 커다란 부와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도 마찬가지로 나의 법률은 보호를 해주었으니 양편 모두의 앞을 나는 방패로 막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힘이 없으니 더욱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솔론은 피해를 입은 사람을 위 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맞거나 상해를 입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제소할 수 있었다. 솔론은 이런 법률을 통해서, 시민 들 전체가 마치 한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서 함께 느끼고 분노하도 록 만들자는 의도였다. 이러한 법 정신과 잘 부합되는 솔론의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어 떤 것이 가장 잘 다스려지고 있는 도시냐고 물었을 때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입은 사람과 협심하여 가해자를 벌하는 도시다." 솔론은 아르콘을 지낸 일이 없었으므로 그 일원이 되었다. 부채를 갚은 대중들이 차츰 불 안정하고 사납게 되어감에 따라 솔론은 따로 하원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네 부족으로부 터 각각 100명씩 선출된 400명의 대표로 구성하여 모든 안건을 일차로 여기서 심의하게 하 였다. 이 곳을 경유하지 않은 것은 전체 회의에 상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상원은 전면적인 정무감사와 법령의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다. 솔론은 이 양원을 닻으로 삼으면 나라는 안정 되게 조종될 것이며, 백성들은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솔론이 아레오파고스라는 상원을 설치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 한 것처럼 보인다. 드라코는 아레오파고스에 대해 언급한 적인 전혀 없었고 모든 살인사건 에 있어서 에페타이라는 말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론의 법 제13면 제8조는 다음 과 같은 말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솔론이 집정하기 전에 권리가 박탈된 모든 시민은 그 권리를 회복한다. 단 아레오파고스 또는 에페타이, 또는 왕에 의한 프리타네움에서 살인죄 또는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한 죄로 벌을 받은 자와 본법 제정시에 국외에 있었던 자는 예외로 한다." 이 조문은 아레오파고스라는 상원 제도가 솔론 이전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아레오파고스 라는 상원에게 형사 심리권을 처음으로 부여한 사람이 솔론이었다면, 솔론의 시대 이전에 상원에 의하여 벌을 받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물론 몇몇 어구가 누락되었거나 조문을 분명히 쓰지 않아 그 뜻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아레오파고스나 에페타이 혹은 프리타네 웅에 의하여 벌을 받은 자는 본법의 시행으로 다른 범죄자들이 권리를 회복하더라도 박탈된 권리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솔론의 법 중에서 가장 이상스러운 것은 정변이 일어났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은 그 권리를 박탈한 법이다. 솔론은 나라 안의 어떤 사람도 공적인 문제 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일신의 안전과 영광만을 꾀하 며, 나라의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없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 지만 또한 위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어느 편이 우세한가를 지켜보지만 말고, 옳은 편에 가담하여 그들을 도와 함께 모험을 감행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솔론의 법 중에서 부조리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은, 상속권을 가진 여자가 결혼하였 다가 남편이 성적 불구자임이 판명되었을 경우에는 남편의 근친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결혼할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돈을 탐내서 재산을 가진 여자하고 결혼함으로써 법으로 자연을 꺾으려는 자들에게 아주 합당한 벌이라고 보는 사람 도 있다. 이제 아내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위하여 남편을 버릴 수 있으므로, 남편은 결혼 관계를 끊거나 그렇지 않으면 항상 수치 가운데 살며 부인의 부정으로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누구하고나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남편의 친척 중에서 그 상대자를 구하게 한 것은 그 자손 역시 같은 집안의 씨가 되게 한 것이니 역시 합당하다고 할 것이 다. 솔론의 법에 따르면 신부와 신랑을 같은 방에 가두어 놓고 팥배나무 열매를 나눠먹게 하였다. 또한 재산 상속녀의 남편은 매달 3회 이상 아내에게로 가게 되어 있었다. 비록 자식은 낳 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다. 정숙하고 덕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주어야만 하는 당연한 애 정이요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사소한 싸움을 방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결혼에 있어서 솔론은 혼수를 제한하였다. 신부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옷 세 벌 과 비싸지 않은 약간의 살림살이가 전부였다. 결혼이 금전상의 계약이나 이득을 노리는 수 단으로 타락하지 않고, 순수한 사랑과 행복과 자녀를 기르는 일만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 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시라쿠스의 폭군이었던 디오니시우스는 그의 모친이 젊은 사람과 재혼하고자 했을 때 말하기를, 나라의 법을 어기고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자연의 법칙 을 무시하고 그런 망측한 결혼을 용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결혼은 어느 나라에서도 허락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사랑이 없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결혼 도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진정한 열매나 목효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 다ㅏ. 어떤 집정관이나 법률 제정가라도 소녀와 결혼하는 늙은이를 본다면 소포클레스가 그의 비극에서 필로크테테스에게 한 말을 인용할 것이다. 진실로, 당신이 결혼하기에 알맞은 나이였다면! 그리고 젊은 남자가 돈 많은 노파와 살면서 암탉처럼 살쩌가는 것을 본다면, 나이가 찬 젊은 처녀들 곁에는 근접도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 치겠다. 이 밖에도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해 비난을 하는 것을 금한 솔론의 법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공정한 일에 불과하지만 고인이 된 사람을 신성하게 보는 것은 선한 일미며, 또한 미움을 영원히 간직하지 않는 것도 좋은 일 이다. 솔론은 또한 성전 안에서나 법원과 같은 공공건물 안에서, 또는 경기중에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악평을 하는 것도 금지하여 벌금을 부가하였다. 그리하여 비난의 대상이 된 사 람에게는 3드라크마, 나라에는 2드라크마를 지불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 이유는, 때와 장 소와 따라서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화를 참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만약 법을 만든 사람이 의도가 아무런 목적도 없 이 많은 사람들을 벌주려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을 징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계몽 하려는 것이라면, 법은 당연히 많은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솔론은 유서에 대한 내용의 법으로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보다 이전에는 유서를 남 겨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남겨 줄 수가 없었으며, 죽은 사람의 재산은 모두 그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솔론은 자신의 자식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재 산을 남겨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재산 처분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부여하였던 것이 다. 그리고 친척 관계라는 혈연보다 우정을 더욱 존중하였다. 그러나 솔론이 유산 처분에 대 하여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유서를 남긴 사람이 질병을 앓다가 약을 써서 죽었거나 또는 감금이나 폭력, 아내의 요청에 의하여 유서가 작성된 경우에는 무효로 처리하였다. 아내의 요청을 폭력과 마찬가지로 취급한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일이 다. 솔론은 사람의 이성이 폭력이나 간계, 고통, 쾌락에 의하여 왜곡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다. 솔론은 여자가 여행을 하거나 상을 당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도 법을 세웠다. 여자는 옷을 세 벌 이상 가지고 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1오볼 가치 이상의 음식을 가지거나 길이가 1큐빗 이상이 되는 바구니를 들고 여행을 떠나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밤에는 등잔을 설치한 마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르면서 여자가 옷을 풀어헤치고 조카를 부르거나,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서 상주를 대신하여 울도록 하는 따위의 풍속을 과감하게 철폐하였다. 장례식 음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황소를 잡아 손님을 접대하거나, 세 벌 이상의 옷을 시체와 함께 매장하거 나 다른 사람의 무덤으로 가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의 법률에서 도 대부분의 경우에 금지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법을 어기게 되면 체통을 지키 지 못하고 설움에 치우친 죄로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 당시에는 아티카를 찾아 여러 나라에서 피신을 하였던 사람들이 도시에 넘칠 지경이었 다. 토지의 거의 대부분이 메말라서 수확량이 줄어들었으며, 무엇이든지 싣고 돌아갈 것이 없는 나라라고 해서 다른 나라의 배들까지 왕래가 없었다. 솔론은 이러한 것을 보고 상공업 을 장려하였다. 솔론은 법을 만들어서 자식에게 무엇이든지 한 가지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 아버지는, 노후에 자식이 부양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리쿠르고스에 따르면 스 파르타 시에는 타국인들이 전혀 없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한다면 토지는 몹시 비 옥하여 인구의 배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경작은 농노에게 맡기면서 그들의 기백을 꺾기 위하여 심한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공예를 천시하고 군사에만 주력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론은 법을 제정하였으면서도 국민의 생활을 완전히 고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국민의 생활 방식은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진 것이었다. 솔 론은 현실의 사정에 맞추어서 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며, 토지가 메말라서 그 수확량으로 는 농민이나 겨우 살아갈 수 있을 뿐, 일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까지 부양하지는 못한다 는 사실을 알고, 상공업을 장려하면서 상원으로 하여금 각 사람의 수입에 대한 근원을 조사 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주도록 하였다. 이보다 더욱 심한 조처는 폰피쿠스의 헤라클 레이데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생아는 아버지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고 결정한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식으로 결혼하기를 기피함으로써, 어떤 여자하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을 취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남자에게는 마땅한 법이다. 그런 사람은 자식이 자 신을 부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식의 출생을 수치로 만들지 않았던 가? 여자에 관한 솔론의 법에는 이상한 것들이 많다. 간음하는 자를 그 현장에서 잡았을 경우 에는 누구든지 정부를 죽여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었던 여자를 납치해서 강제로 범행한 자에게는 100드라크마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여자의 승락을 얻고 범행한 경 우에는 20드라크마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돈을 받고 간음한 여자 즉 창녀의 경우에 는 벌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주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팔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딸을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정한 행동 이 있었을 경우에는 팔아도 무방하였다. 그런데 동일한 행동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엄중히 처벌하고, 어떤 때에는 가볍게 다스려 서 소액의 벌금을 부과한 것은 조리에 어긋난다. 그 시대에 돈이 귀해서 벌금액의 가치가 지금보다 컸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사실 그 시대에 제물의 가격을 따진 것을 보 면, 1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 또는 밀 1메디므니의 가치가 있었다. 이스트무스 운동제에 나가 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100드라크마, 올림피아 운동제에 참가해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500드 라크마의 상을 주었다. 그리고 늑대 한 마리를 죽이면 5드라크마, 늑대 새끼 한 마리를 죽이 면 1드라크마를 주었다. 그런데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의하면, 5드라크마는 황소 한 마리, 1 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솔론의 법령 16번째에 규정된 재물용 짐승 은 보통의 것보다 가격이 더욱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비하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늑대를 부지런히 죽였던 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일이다. 아테 네는 농업보다 목축에 더욱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설에 의하면 아테네 인은 부족의 이름을 이온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딴 것이 아니라 직업별로 결정하는 것이며 군인은 호플리 테스, 상공업자는 에르가데스, 농부는 게데온테스, 목축업자는 아이기코레스라고 하였다고 한다. 물에 대하여 말하자면 아테네에는 하천이나 연못이 적고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으므로 법 을 만들어 1퍼얼롱에 해당하는 거리에 한 개의 공동 우물을 파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보다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적정한 장소에 우물을 파서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만약 자기 소유의 땅을 60피드 깊이로 파도 물을 얻지 못한 사람은 이웃 사람의 우물에 가서 4갤런의 항아리로 두 번 정도 길어와도 좋다고 규정하였다.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도 도 움을 주지만, 게으름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솔론은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해서도 법을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땅에서부터 5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는 절대로 나무를 심지 못하도록 하였다. 올리브와 무화과나무의 경우에는 9피 트 정도 떨어진 곳에 나무를 심을 수 없도록 규제하였다. 왜냐하면 이 나무들은 다른 나무 들보다 더욱 멀리 뿌리를 뻗어서 양분을 취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와 무화과나무는 다른 것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랑이나 홈도 그 깊이에 따라 다른 사람 의 땅으로부터 먼 거리를 두고 파도록 하였으며, 벌꿀집도 다른 사람이 이미 설치해 놓은 것에서부터 300피트 이내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수출품으로는 기름만 허락하고 다른 것은 일체 금지하였다. 법을 위반하는 자는 100드라 크마의 벌금을 지불하거나 집정관으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았다. 이 법은 솔론의 법령집 제 1면에 기재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화과의 수출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밀수 자를 밀고한 사람을 앞잡이라고 불렀다는 옛날의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짐승의 해를 입은 경우에 대한 법도 만들어서, 사람을 물었던 개는 길이 3큐빗의 작대기 에 매달아 물린 사람에게 주도록 하였다. 짐승의 피해에 대한 안전보장으로는 영리한 방법 이다. 솔론의 이민법에 있어 출생지였던 도시에서 종신 추방이 되었거나. 모든 가족을 데리고 아테네로 들어와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만을 완전한 시민으로 삼았던 것이 색다르다. 그 목적은 다른 종류의 사람은 이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살아 가는 사람을 받으려는 것이었으며, 그런 사람의 경우에만 선량하고 성실한 시민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기의 나라에서 완전히 쫓겨났으며, 후자는 그의 자유 의 사로서 완전히 떠나왔기 때문이다. 솔론의 법 가운데 또 하나 색다른 것은 프리타네움에서 식사를 하는 규정이다.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자주 찾아와서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반면 에 여기에 와서 식사하라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주었다. 전자는 탐욕스럽 고 후자는 경멸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솔론은 이 모든 법령을 100년 동안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악소네스'라고 불리는 목판 에 써서 기록하였다. 또한 목판은 축에 매달아 돌릴 수 있었다. 그 일부가 오늘날까지 프라 타네움에 보존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을 '키르베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자시인 크라티노스의 시에 이런 부분이 있다. 솔론의 법으로 할까나, 드라코의 법으로 할까나. 누구의 키르베스를 가지고 오늘 밤 우리의 콩요리를 만들 불쏘시개를 할지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키르베스'라고 말한 것은 합당하다고 한다. 제사와 종교적 인 의식에 대한 법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원은 솔론의 법을 그대로 시행하길 결의 선서하고, 각기 광장에 세운 제단에서 서약을 하였다. 만약 그 중의 어느 조항이라도 범하면 자기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황금 초상을 델포이에 있는 신전에 헌납하기로 하였다. 달의 길이가 불규칙하고 또한 달의 운행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맞지 않고, 흔히 낮에 달 이 해를 가리면서 지나가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날은 '묵은 날이자 새 날'이 라고 이름짓고, 달이 해를 가리면서 지나가기 이전까지는 묵은 달, 그 후에는 새 달로 계산 하였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사실을 시로 쓰면서 설명하였다. 묵은 날이 끝나고, 새 날이 시작하였다 솔론은 초승달부터 날짜를 세었으며, 20일이 지난 다음부터 30일까지는 거꾸로 세었다. 달 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법을 제정하고 난 휑 날마다 사람들이 솔론을 찾아왔다. 솔론의 법을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법을 추가 또는 삭제해달라는 사람 그리고 질문하러 오는 사람, 자세한 것을 밝히러 오는 사람, 이 법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 는 사람 등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솔론은 이러한 모든 일을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 명히 오해를 할 것이다. 솔론은 사람들의 방문과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상업적인 목적을 위 한다는 구실로 10년 동안 출국허가를 얻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라면, 그 동안에 사람들이 자신의 법에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론 자신의 글에도 남아 있는 것처럼 '큰일을 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나일 강의 주변에 있는 카노푸스 언덕에서. 솔론은 자신의 시에 밝힌 바와 같이, 우선 이집트로 가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솔 론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성직자들이었던 헬리오폴리스의 프세노피스, 사이트의 손키스 와 같이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의논하였다. 그러다가 아틀란티스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본국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로 옮겼다. 그런 다음에 솔론은 키프로스 섬으로 찾아가서 필로키프로스의 따스한 환영을 받았다. 그 는 테세우스의 아들이었던 데모폰이 세운 작은 도시의 왕이었다. 클라리우스 강을 끼고 있 던 도시는 높은 장소에 위치하여 수비를 하기에는 좋은 점이 있었지만, 그 대신에 교통은 몹시 불편하였다. 하구에 아름다운 평야가 깔려 있는 것을보고, 솔론은 왕을 설득하여 그 곳 으로 수도를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새로운 도시의 창건을 감독하여, 살기에 편하면서 전략적으로도 안정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새로 이주해 오는 사람이 아 주 많았으며, 이웃 나라 왕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솔론을 기념하기 위하여 필로키 프로스 왕은 새로운 도시를 솔리라고 이름 지었다. 도시의 이름은 아이페아였다. 솔론은 다 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필로키프로스에게 주었다. 그대여, 솔리의 왕좌에서 오랫동안 영광을 누리시라. 이 섬은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의 가호를 받고 있구나. 내가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할 때, 새로운 도시를 하느님이 도우시고 사랑하는 고국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역사가들 가운데에는 연대기를 따지면서 솔론이 크로이소스와 만났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 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견을 말할 것 같으면, 많은 기록에 실려 있는 이러한 유명한 이야기를, 더욱이 솔론의 넓은 마음과 지혜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다만 연대기가 틀리다는 이유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따지고 있 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전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솔론은 크로이소스의 초대에 응하여 사르디스를 방문 하였다. 그 당시에 솔론의 처지는 산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처음으로 바다를 구경하게 되면, 강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바다인가 하면서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솔론은 호화로운 궁중으 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모두 값진 옷을 입고 시종과 호위병을 거느 리고 으스대면서 배회를 하고 있었다. 솔론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모두 왕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드디어 솔론은 정중한 안내를 받으면서 왕을 만나게 되었다. 보석과 값진 채 색의 옷, 금, 패물 등으로 치장을 한 모양이 실로 황홀하였다. 그러나 솔론은 왕을 만나면서 도 아무런 느낌을 나타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그 광경에 대해서도 솔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솔론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드시 크게 놀랄 것이라고 짐작하였던 왕은 몹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솔론은 이러한 속된 허식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자 왕은 궁중의 모든 보물들을 솔론에게 구경시켜 주라고 명령하였다. 솔론은 왕의 모습을 보면서 왕이 어떤 위인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궁중의 진귀한 보물은 솔론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보물을 보여준 다음에 왕은 다시 솔론을 불렀다. 솔론이 들어왔들 때 크로이소 스 왕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큼이나 행복한 살마을 보았던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솔론 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크로이소스 왕보다 아테네에서 살고 있는 텔루 스라는 사람이 더욱 행복하게 보인다. 텔루스는 어진 사람으로 좋은 아들들을 남겼으며 나 라를 위하여 영광스럽게 전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의 말을 들 으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행복을 금과 은으로 측정하지 않고 한낱 사사로운 사람의 생 애와 죽음을 자기의 커다란 권세와 왕국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보니, 솔론은 마음이 이상하 게 비틀린 사람이구나.' 그러나 크로이소스 왕은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텔루스를 제외한다면 자기보다 더욱 행 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솔론은 두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이렇 게 설명하였다. 그렇다. 클레오비스와 비톤이 있다. 그들은 형제로서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 였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대단하였다. 어머니가 타고 있던 수레를 끄는 소들이 너무 느 리게 걸었으므로, 클레오비스와 비톤은 직접 멍에를 메고 끌어서 어머니를 헤라 신전으로 모셨다. 모든 시민들이 칭송을 하면서 그들을 자랑으로 사모 제물을 바치면서 축배를 들었 다. 그들은 이러한 영광을 누리면서 오래도록 살다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였 다. 크로이소스 왕은 화를 내면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 가운데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침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왕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던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대왕님, 그리스 사람들은 하늘의 은총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 각하는 바도 자고 웅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중용을 지키면서 운명의 변천이 기구함을 보고, 현재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행운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미리 알 수 없는 앞날은 많은 괴상한 일을 감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 리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살아 있어 서 신의 계시와 운명의 장난을 모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행복을 축하하는 것은, 경주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선수의 머리에 승리의 관을 얹어주고 승리자라고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 니다. 우리의 운명은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언제 뒤집어질지 모릅니 다." 솔론은 이러한 말을 남기면서 그 곳을 떠났다. 솔론의 좋은 충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크로이소스 왕은 몹시 대로하였다. 유명한 우화 작가였던 이솝도 크로이소스 왕의 초대를 받아서 사르디스로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이솝은 사르디스에서 머무는 동안 크로이소스 왕의 은총을 받았다. 이솝은 솔론이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이렇게 조언하였다. "솔론, 크로이소스 왕을 대할 때에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거나, 왕이 듣고자 하는 말만 하 도록 하십시오." 솔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하지 않거나 이로운 말만 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을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 왕이 키루스에게 패전하여 수도를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마침내 페르시아 군대와 키루스가 입석한 자리에서 크로이소스 왕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크로이소스는 세 번이나 소리를 높여서 솔론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키루스는 그 일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 하였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과연 솔론이 어떤 사람이기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궁지에 몰린 사람이 간절하게 부르느냐고 물어보았다. 크로이소스 왕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였다. "솔론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나는 솔론을 일부러 초대해서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솔 론의 현명한 말을 듣고 내가 모르는 바를 배우기 위하여 초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재산을 보여 주면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재산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동안의 행복보다는 잃어버렸을 때의 불행이 더욱 큽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면, 재산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내가 즐긴 것이라고는 실속 없는 소문뿐이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잃어버린 나는 이러한 고생과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저 후회스러울 따 름입니다. 그런데 솔론은 나의 이러한 운명을 미리 알고, 올바로 살아가라고 가르치면서 일 시의 부귀로 오만하지 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었던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보다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솔론의 말이 그 대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이소스 왕은 어쩌면 자신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 왕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일생 동안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므로 솔 론은 한 마디의 현명한 말로 크로이소스 왕의 생명을 구해주고, 키루스 왕에게는 커다란 교 훈을 안겨주었다. 솔론이 외국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아테네에는 다시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은 리쿠 르고스파 알크마이온의 아들 메가클레스가 영도하는 파와 부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도움 을 얻었던 파랄리파 등으로 갈라져서 치열하게 싸웠다. 아직까지도 솔론의 법을 지키고 있 었으나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파벌들은 혁명을 통하여 자기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을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적이었 던 반대파를 꺾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을 때 솔론이 아테네로 돌아왔다. 솔론은 모든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은 이미 연로하여 이전과 같이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는 없었다, 각 파벌의 지도자를 사적으로 만나면서 화해를 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피시스트라투스는 어느 누 구보다도 솔론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행동과 화술이 뛰어났으며, 가난한 사람을 옹호하면서 싸울 때에도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 에게 없는 장점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치밀하게 행동하면서 법을 잘 존중하 여 공정성을 기울이고 있지만, 혁명적 방법은 꺼리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솔론은 그의 솔 직한 본심을 통찰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계략을 간파하였다. 솔론은 그의 의도를 돌리기 위하여 좋은 말로 타일렀다. 만약 제일인자가 되어서 아테네를 지배하고자 하는 뜻 을 버린다면, 그보다 더욱 훌륭하고 덕이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절에 테스피스가 그을 지어서 상연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이 신기하여 많은 사 람들이 구경을 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식 연극 경연대회가 있기 정 의 일이다.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보면서 자신의 지식을 넓히기를 즐기던 솔론은, 노년에 한가롭게 친구와 사귀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솔론은 극을 구경하기 위하여 찾아갔다. 테스피 스는 자기가 지은 극에 자신이 직접 출연하였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테스피스가 그와 같은 일을 장난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은 전혀 해로운 일이 아니라 고 말했을 때, 솔론은 성을 내고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만약 이와 같은 짓이 장난이라고 해서 용인하고 칭찬한다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람들은 정사에 관해서도 이런 장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피시스트라투스는 시민을 선동하기 위한 의도로, 스스로 부상을 입고 마차에 실려서 광장 으로 나왔다. 그는 법을 옹호하려고 하다가 반대파로부터 이와 같은 봉변을 당했다고 말하 면서, 많은 군중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솔론은 피시스트라투스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아들이 되는 사람, 그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흉내내고 있다. 하지만 아주 부끄럽게 흉내를 내고 있다. 그대는 자기 나라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이러 한 일을 하고 있지만, 오디세우스는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피시스트라투스를 위해 싸우려고 프닉스에 집결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 리스톤이 피시스트라투스의 호위병으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람 50명을 임명하자고 제의하 였다. 솔론은 그것에 반대하면서 다음의 시에 있는 것과 같은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은 간사한 사람의 말에 농락 당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우같이 영리하지만 이렇게 모이게 되면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빈민층의 사람들은 피시스트라투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부 유층의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부유층의 시민들은 두려워하면 서 주저하고 있었다. 솔론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갔다. 솔론이 나주 에 말하기를, 다른 파벌보다 더욱 영리하고 용감하였다는 평을 내렸다.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은, 그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보다 는 영리하였고,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독재를 막으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보다 는 용감하였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즉이 아리스톤의 제안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피시스트라투스의 호위병의 숫 자에 관해서는 50명 정도로 무엇을 마음대로 숫자를 정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안이 행동 으로 옮겨지자 아테네는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알크마이온의 자손들은 이미 도망을 치고 없었다. 솔론은 연로하고 지지하는 사람도 없었으나, 광장으로 나와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면 서 그들의 경거망동을 비난하고, 자유를 보존하려면 정신을 차리라고 호소하였다. 과거에 전 제주의가 싹트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제주의가 완전히 자라난 지금에 와서, 그것을 잘라버리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명언을 토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솔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솔론은 집으로 돌 아가서 무장을 갖추고 거리에 나와 버티고 서서, 자신은 나라와 법을 위하여 자기의 할 바 를 다 하였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다가와서 아테네로부터 피신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솔론은 듣지 않고 다음의 시를 지어서 시민들을 훈계하였다. 그대들이 어리석어서 이 지경을 당했으니, 모든 것을 자기의 탓을 돌리고 운명을 원망하지 마라. 폭군에게 권세를 준 것이 바로 그대들이었으니, 자유를 잃은 것은 마땅한 일이로다. 친구들이 다가와서 솔론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인데 무엇을 믿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였느냐고 하였다. 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의 나이를 믿었소." 하지만 피시스트라투스는 왕으로 즉위한 다음, 솔론을 각별히 대우하면서 여러 가지 상의 도 하고 몇 가지 경우에는 미리 승인도 구했다. 그리고 솔론의 법을 그대로 시행하면서 스 스로 잘 준수하여 모범을 보였다. 한때는 살인죄로 고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상원에 출정하 면서 준법정신을 보여주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원고가 스스로 기각하였다. 피시스트라투스는 자신이 직접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쟁으로 불구자 가 된 사람은 정부가 생활을 보장해준 것이다. 헤라클레이데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솔론 이 일찍이 테르시푸스의 경우에 제출하였던 일이 있는 동일한 법안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 다. 그러나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에 의하면, 나태한 자에 대한 법을 만들어서 아테네의 질서 를 더욱 안정시키고, 지방을 개발한 것은 솔론이 아니라 피시스트라투스라고 한다. 솔론은 이집트의 연대기 작가들로부터 들었던 '아틀란티스'라는 시를 지으려고 하였지 만 끝을 맺지 못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의 말에 의하면 여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너무나 연로하여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이것은 다 음과 같은 솔론의 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늙어가고 있지만, 항상 배우노라. 그리고 이런 시도 있다. 내가 항상 즐기던 모든 것은 아름다운 여인과 술과 예술이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계획을 인수하여 마치 아직까지도 궁궐을 짓지 않은 왕성의 터 를 물려받은 듯한 열성으로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시의 첫머리에 다른 어떤 전설이나 시 에도 보지 못할 정도의 찬란한 정문과 현문을 지었으나, 너무 늦게 시작하였으므로 끝을 맺 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플라톤이 지은 부분을 읽고 있으면, 미처 끝을 맺지 못한 부분이 너 무나도 애석하게 느껴진다. 아테네의 여러 신전 가운에 제우스의 신전이 그러하듯이 <아틀 란티스>라는 시는 플라톤의 여러 거룩한 작품 가운데 미완으로 남아 있는 유일하고 으뜸가 는 것이다. 헤라클레이데스의 말에 의하면, 솔론은 피시스트라투스의 시대에도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 다. 하지만 에페수스 사람파니아스의 말에 의하면, 만 2년을 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시스트라투스는 코미아스가 집정관으로 있을 당시에 정권을 장악하 였으며, 솔론은 코미아스 다음의 집정관이었던 헤게스트라투스 시대에 사망하였다. 솔론을 화장한 재를 살라미스섬 주위의 바다에 뿌렸다는 이야기는 전설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 각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많은 믿을 만한 사람들의 기록에 남아 있다. 포플리콜라 솔론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솔론과 비견될 만한 인물로 포플리콜라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본명이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였는데, 로마 시민들이 포플리콜라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 준 것이다. 포플리콜라의 조상 가운데 발레리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초기 로마 사회의 시민이었던 발레리우스는 로마 인과 사비니 인을 화해시키면서 이름이 알려지 게 되었다. 발레리우스는 두 나라의 왕이 평화협정을 맺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 였다. 그러한 내력을 가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는 군주정치 아래에서도 뛰어난 웅변술과 재력 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서 대담하게 연설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공화정이 들어서기만 한다면 우두 머리가 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러던 차에 타르퀴니우스 스페르부스가 부당하고 간악한 방법으로 왕관을 쓰고, 왕의 도리를 무시한 채 포악무도한 정치를 펼치자 백성들은 그를 미 워하게 되었고, 타르퀴니우스에게 폭행을 당한 루크레티아가 자살하는 일까지 벌이지자 사람들은 왕을 몰아낼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혁명을 꾀하던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가장 먼저 발레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발레리우스의 열렬한 도움에 힘입어 왕을 폐위시키 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 발레리우스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왕을 대신하여 장군에게 정사를 맡길 것처럼 보였으며, 그렇다면 혁명을 이끌었던 브루투스가 지 도자가 되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사람의 통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권력을 나누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발레리우스는 자신이 브루투스와 함께 선출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국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브루투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우스 대신에 루크레티아의 남 편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선출된 것이다. 그는 발레리우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당사에 쫓겨난 왕족들이 국내외의 여러 세력들을 끌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귀족들은 왕의 재집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족들에게 끓어오르는 증 오심을 품고 있으며, 그들에게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을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발레리우스는 자신이 거만한 폭군 타르퀴니우스에게 개인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 유만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마저 의심받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발레리우스 는 결국 원로원 의원직을 비롯해서 모든 공직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발레리우스가 화가 난 나머지 왕의 편에 가담해서 아직까지도 든든하지 못한 로마의 정권을 쓰러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몇몇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정식 으로 제사를 올림으로써 원로원 의원들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발레리우스는 정해진 날짜에 포룸으로 나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선서를 한 다음, 타르퀴니우스에게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원로원은 발레리우 스의 말에 무척 흡족한 분위기였으며 집정관도 커다란 힘을 얻었다. 그의 이러한 약속은 얼 마 후에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얼마 뒤 타르퀴니우스로부터 사신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겉보기에 그럴싸한 제안을 내놓 았으므로 사람들은 타르퀴니우스가 과거의 모든 오만을 버리고 오직 자기의 정당한 권리만 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집정관은 타르퀴니우스의 제안을 모든 시민들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발레리우스는 그것에 반대하였다. 힘이 없고 약한 백성들 은 폭군보다 전쟁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만약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쉽사리 유 혹에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에도 왕은 다른 사신들을 보냈는데, 왕위를 포기 하고 전쟁도 하지 않겠으니 다만 그 자신과 친척, 친구들이 각자의 재산을 되돌려 받아서 추방된 자로서의 생활이나마 해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집정관 콜라티누스 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은 들어줄 용의를 보였다. 그러자 완강하고 성급한 브루투스 가 포룸으로 달려와서 동료 집정관인 콜라티누스를 반역자라고 부르며, 폐위된 폭군에게 전 쟁을 계속하고 왕위를 되찾을 수 있는 수단들 제공하려는 술책이라고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주는 것도 아까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콜라티 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민회의를 열었다. 그 당시에 한낱 평민에 지나지 않았 던 카이우스 미누키우스가 처음으로 연설을 했는데, 그는 브루투스를 지지하면서 로마 인들 에게 돈이 있거든 그 돈으로 폭군에게 대항해야지 무엇 때문에 폭군을 도우려고 하느냐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전쟁의 목적이 달성되어서 귀중한 자유를 얻 었는데, 이제 와서 돈 때문에 평화를 깰 수는 없다고 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던져버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타르퀴니우스는 재산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단지 민심을 탐지하여 동조자 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신들은 귀국을 미루면서 겉으로는 재산의 일부는 팔기도 하고 일부는 이송하기도 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의 사신들 은 로마에서 이름난 두 집안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하나는 아킬레우스 집안인데, 이 집 안에는 세 명의 원로원 의원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비텔리우스 집안으로, 이 집안에는 두 명의 원로원 의원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외가 쪽으로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조카뻘이 되었다. 브루투스는 비텔리우스 집안의 딸과 혼인을 하여 두 집안은 각별한 사이였는데, 비 텔리우스 집안의 아들들은 같은 또래의 고종 사촌인 브루투스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잔인 함과 어리석음을 본받지 않으려면, 머지않아 왕위를 되찾게 될 타르퀴니우스 왕가와 결탁해 야 한다고 충동질했다. 그들이 말했던 잔인함은 브루투스가 반대파에게 가혹했음을 가리키 는 것이었고, 어리석음이란 크루투스가 폭군으로부터 자기의 본성을 감추기 위하여 일부러 쓴 탈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종 사촌들을 설득한 다음 아킬레우스 가문과도 내통하게 되자, 이 젊은이들 은 모든 공모자들이 한 곳으로 모여서 엄숙하고 무시무시한 맹세를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맹세는 재물로 죽인 사람의 피를 함께 맛보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그 창자 를 만지는 일이었다. 이러한 의식을 올리기 위하여 그들은 아킬레우스의 저택에서 만났다. 그들이 모임을 위해 선택한 건물은 당연하게도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는데, 빈디 키우스라는 시종 한 명이 우연히 그 장소에 숨어 있었다. 무슨 의도가 있었거나 미리 낌새 를 차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연히 그 곳으로 들어가 있다가 일행이 황급하게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서 급한 김에 상자 뒤에 숨어버렸던 것이다. 빈디키우스는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두 집정관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타르퀴니우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아킬레우스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사신들에게 전달하였다. 일행이 뿔뿔이 흩어진 다음 빈디 키우스는 몰래 그 집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운명이 자기 앞에 던져준 정보를 어떻 게 이용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무서운 정보를 브루투스에게 전하 자니 그의 아들들이 관련되어 있었고, 콜라티누스에게 전하자니 그의 조카들이 관련되어 있 었던 것이다. 사실 두 가지 모두 곤란한 일이었고 또한 그런 중대한 정보를 평범한 시민에 게 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발레리우스에게 가서 털어 놓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발레리우스는 상냥하고 친절 하여,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환영하였으며, 면회를 사절하거나 사정이 딱한 사람의 청을 뿌리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빈디키우스는 발레 리우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발레리우스는 부인과 동생 마루쿠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빈디키우스는 자기가 보았던 것을 발레리우스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발레리우스는 빈 디키우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경실색하였다. 그는 빈디키우스를 방에 가두어 놓은 다음 부인에게 문앞에서 지키라고 하고, 동생을 시켜서 왕가를 포위하고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 들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많은 친구와 동료, 하인들을 이끌고 아킬레 우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킬레우스 집안의 사람들은 때마침 외출중이었다. 발레리우스 일 행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 타르퀴니우스의 사신들 방에 버젓이 놓여 있던 편지를 손에 집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아킬레우스 집안의 사람들은 문간에서 발레리우스 일 행과 치고받고 싸우며 그 편지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싸운 끝에 발레리 우스 일행은 아킬레우스 집안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서 포룸으로 향했다. 왕가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으며, 마르쿠스는 결국 바구니 속에 숨겨 나가려던 편지 몇 통을 손에 넣었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왕의 무리들을 잡아가지고 포룸으로 끌고 왔다. 두 집정고나이 소란을 가라앉힌 다음, 발레리우스의 명령으로 빈디키우스가 끌려 나와서 고소 내용을 반복하고 편지 내용이 밝혀지자, 피의자들은 변명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모 두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몇 명이 브루투스를 편하게 해 줄 요량으로 국외 추방 을 언급했고 콜라티누스가 눈물을 흘리고 발레리우스가 침묵을 지키자 자비가 베풀어질 것 만 같았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두 아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말했다. "그래, 티투스, 그래, 티베리우스,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는 이렇게 세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형리를 돌아보며 소리 쳤다. "내 직분은 끝났으니 너희들의 몫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형리들은 곧장 두 청년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후 몽둥이로 닥치는 대 로 때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으나, 브루투스는 고개를 돌 리기는커녕 불쌍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은 채 엄격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형리 들이 아들들을 땅에 쓰러뜨린 다음 도끼로 목을 잘랐다. 브루투스는 다른 죄인들에 대한 문 제는 동료 집정관인 콜라티누스더러 처리하라고 일임하고서 포룸을 나왔다. 우리는 이 행동을 높이 칭송할 수도 있고 강력히 비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위대 한 성품이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도록 한 것일 수도 있으나, 설움이 너무 커서 마음이 목석 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간에 그것은 사람의 행동이라 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의 행동이 아니면 짐승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와 같 이 위대한 사람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그의 덕을 섣불리 비난하는 것보다 좋은 일이다. 로마 인들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것보다 브루투스가 이와 같이 법을 공고히 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브루투스가 포룸에서 나갈 때, 모든 사람은 그의 행동에 몸서리치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 형제는 콜라티주스의 성격이 부드럽고 우유부단한 것에 희망을 걸고 자 신들을 변호할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 말했다. 또한 빈디키우스는 자기 집의 종이니 고소 자들 편에 두지 말고 자기들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콜라티누스는 이 요청을 허락할 용의를 보이면서 모임을 해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레리우스는 빈디키우스를 에워싸고 있 던 자기측 사람들에게 절대로 빈디키우스를 내어주지 말라고 하고, 또한 군중을 향해서 반 역자들이 처벌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발레리우스는 아킬레우 스 형제에게 폭렬을 행사하면서 브루투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콜라티누스의 부당 한 행위를 비난하였다. 브루투스는 인간의 천성을 거역하면서까지 반역에 가담한 자식을 사 형에 처하였다. 그런데 콜라티누스는 반역자이자 공공의 적인 이들을 살려주어서 몇 명의 여자들만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콜라티누스는 이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내면서 형리들에게 빈디키우스를 잡아오라고 명령 했다. 형리들은 군중을 헤치고 가서 빈디키우스를 붙잡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무조건 후려쳤 다. 발레리우스의 친구들이 달려와서 그 앞을 막아서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브루투스를 불 렀다. 브루투스가 다시 포룸으로 돌아왔다. 브루투스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아버지로서 아들 들을 사형에 처할 충분한 권한이 있었으나, 다른 범인들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자유로운 투 표에 의하여 결정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누가 나서서 연설을 할 필요도 없이 피고 인들은 만장일치로 사형에 처해졌다. 콜라티누스는 전부터도 의심을 받아왔었다. 왜냐하면 그는 왕가와 친척 관계에 있었으며, 그의 성이 또한 타르퀴니우스여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타르퀴니우스라는 소리조차 듣기 싫었던 것이다. 콜라티누스는 자신이 이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민심을 잃었 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집정관직을 내놓은 다음 로마를 떠났다. 발레리우스의 방에서 선거가 치러졌으며, 발레리우스는 그의 열성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서 영예롭게 집정관직 에 올랐다. 발레리우스는 빈디키우스의 공이 컸다고 생각하여 그를 첫 번째의 해방 노예로, 로마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마음에 드는 한 부족을 선택해서 그 일원이 된 후 투표권 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다른 해방 노예들이 아피우스로부터 투표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인데 아피우스는 그런 식으로까지 인기를 끌 려고 했다. 완전한 노예 해방은 오늘날까지도 빈딕타라고 불리는데, 이는 바로 빈디키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왕의 재산을 약탈해가도 막는 사람이 없었으며 궁전은 폐가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마르스 평원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땅은 군 신 마르스에게 바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수확기여서 갓 베어낸 곡식단이 아직 도 들판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이 땅이 이미 신에게 바쳐졌으니 거기 놓인 곡식을 거두 어들이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여 이 곡식단을 모두 강물에 던져 넣었다. 또 한 그 곳의 나무도 모두 베어내서 강에다 던져버렸다. 땅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리하여 그 곳의 맨흙만이 마르스 신에게 바쳐졌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강물에 던져 넣자 결국 한데 뭉쳐서 멀리 떠내려가지 못했다. 무거운 것이 우선 강바닥에 가라앉자 나머지도 더 멀리 가지 못하고 뒤엉킨 채 그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거기다가 강물에 실려온 토사가 끼고 쓰레기가 덮여서 점점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갔고 나중에는 거친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 을 만큼 굳고 견고해졌다. 강물에 떠밀려온 것들이 계속해서 그 위에 쌓였으며 결국 상류로 부터 내려온 것들 중 대부분이 이 곳에 쌓여 결국 하나의 섬이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 것이 신성한 섬이라고 여기며 도시 근처에 위치한 이 섬에 아름다운 신전을 세우고 큰 길을 내고서는 라틴 어로 '인테르 두오스 폰테스(두 다리의 섬)'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주장 하 기를 이 섬은 그때 생긴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뒤에 타르퀴니아가 그 근처의 땅을 공유지 로 쓰라고 내놓았을 때에 생겼다고 한다. 타르퀴니아는 불의 여신을 섬기는 여자 사제였는 데 이 일로 인해 매우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녀는 또한 결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니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타르퀴니우스는 반란으로 왕위를 되찾았으려던 시도가 죄절된 후에 투스카 인의 원조를 받아 그들의 대군을 이끌고 로마를 향한다. 로마의 두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아 르시아 숲고 아이수비아 불밭에 포진하였는데 두 군데 다 신령한 장소였다고 한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와 로마의 집정관 브루투스가 결투를 벌이게 되었 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증오와 분노로써 서로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서 로 '너는 폭군이요 로마 인의 원수다, 너는 나를 추방한 놈이다.'라고 치를 떨면서, 감히 상 상도 할 수 없을만한 기세로 말에 박차를 가하더니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시작된 전투 는 역시 무시무시하게 끝이 났다. 양쪽은 똑같이 피해를 주고받았으며 태풍이 불어닥쳐서야 갈라졌다. 발레리우스는 그 날 전투의 결과를 파악할 수 없어서 무척 염려스러웠는데 군사들은 아군 의 시체를 보고 용기를 잃었다가도 적군의 시체를 보고 다시 용기를 냈다. 양측의 사상자 수는 똑같이 보였다. 하지만 양쪽 다 상대편의 손해를 가늠해본 후 자기편이 이겼다고 생각 하기보다는, 가까이 널려 있는 아군의 시체를 보고 자신들이 졌다고 확신하게끔 되었던 것 이다. 밤이 찾아왔다. 종일토록 그와 같이 싸웠으니 그 날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병사들이 모두 자리에 누웠을 때 숲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어떤 목소리가 들 려왔다. 투스카측 병사가 한 사람 더 많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신령한 음성이었 다. 로마 군이 기뻐서 큰소리로 고함을 쳐대는 동안, 투스카 군은 두려움과 놀라움에 진지를 버리고 흩어져 달아났다. 로마 군은 적진을 습격하여 남아 있는 자들을 모두 포로로 잡고 보니 그 수가 5천에 가까웠으며, 또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투스카측 사망자를 세어보니 1만 1천 3백 명으로, 로마측 사망자보다 딱 한 사람 더 많았다. 2월 마지막 날이었다. 발레리우스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하였다. 집정관이 이런 식으로 개선하 기는 처음이었다. 너무도 찬란한 광경이라 모두들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은 그 광경 을 보고 시기하거나 불쾌히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나 심히 의심스럽다. 만일 그런 사람 들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행사가 확고부동한 관행으로 살아 남아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경쟁적으로 행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발레리우스가 동료 집정관이었던 브루투스의 장 례식을 매우 성대하게 치러준 데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발레리우스는 그 자 리에 참석하여 스스로 영결사도 하였는데 로마 인들은 이것 또한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 하여, 그 호로 위대한 인물이 죽고 나면 그 시대의 명사가 영결사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 다. 그러므로 이 풍속은 그리스에서보다 로마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 의 설에 따르면 그리스의 솔론이 그보다 먼저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발레리우스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자유 를 가져다준 브루투스는 자기 혼자 집정관이 되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한 동료가 없어지 고 나면 곧 다른 사람을 두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발레리우스는 모든 권력을 독 점하였으니, 브루투스의 뒤를 이은 폭군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역시 타르퀴니우스 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허물어뜨린 왕궁보다 더 큰 집에 살면서 의정대 행렬을 거느린 채 포룸으로 내려오곤 하면서, 입으로만 브루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았 다. 사람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벨리아 산에 자리잡고 있는 발레리우스의 거처는 포룸을 내 려다보고 있었는데, 실로 으리으리했으며 그 곳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가 위용을 갖 추고 당당하게 산을 내려오는 모습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발레리우스는, 권력을 쥐고 큰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아첨을 물리치고 바른말을 듣 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었다. 친구들이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하 는지 이야기해주자 그는 변명하거나 분해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꾼을 불러오게 하더니 집을 완전히 다 허물어뜨려 흔적조차 남겨두지 않 았다. 다음 날 아침 로마 인들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으며 끼리끼리 모여서 그의 큰 도량을 칭찬하였고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집이 허무맹랑한 시기심 때문에 헛되이 사라져버린 것을, 마치 사람이 죽었을 때처럼 애도할 정도였다. 살 곳이 없어진 집정관 발레 리우스는 친구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것을 본 백성들이 그에게 집을 지어주었는데 먼 젓번 집보다는 작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비카포타 신전이 서 있다. 발레리우스는 한 가지 결심한 바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백성들이 자기 자신과 집정관이 라는 직분을 두려워하는 대신 친숙함을 느끼고 호감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는 장대 끝의 도끼를 없앴고, 발레리우스 자신이 모인 자리에 나아갈 때는 이 장대의 끝을 숙이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이 바로 공화국의 근본임을 명백히 했다. 집정관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관습을 준수하고 있다. 하지만 발레리우스는 이와 같이 온건한 행동을 통해 로마 인들이 생각한 대로 자기를 낮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자신에 대한 모든 반감을 없애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형식적 원위를 포기하 는 대신 더 많은 실권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를 섬겨 복종하였으며 그에게 포플리콜라란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이'란 뜻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아주 본명을 대 신해서 쓰이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그를 포플리콜라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집정관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해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 집정 관을 선출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 자신의 직권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큰 개혁을 해나갔다. 왜냐하면 앞으로 누가 동료 집정관에 선출될지 알 수 없었으며, 그 사람이 식견의 부족으로 또는 악의로 개혁에 협조하지 않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선 타르퀴니우스에게 살해되었 거나 최근의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로 인해 원로원에 공석이 생겼는데 그는 그 빈 자리를 채웠다. 그 수가 164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여러 법령을 제정하여 국민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 첫째, 집정관의 판결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국민들에게 상소할 수 있게 했고, 둘째, 국민의 동의 없이 공직을 강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했고 셋째, 빈 궁한 자들의 세금을 감면하여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상시에 집정 관에게 불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에 대한 법령도 만들었는데, 이 법령은 귀족보다는 일반 국민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이 경우 벌금은 소 10마리와 양 2마리로 정하였다. 소 1마리에 100오볼이었고 양 1마리에 10오볼이었다. 벌금 액수를 가축으로 정한 것은 당시 로마 인들이 돈을 잘 사용하지 않는 대신,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흔히들 그런 식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로마 인들은 오늘 날까지도 계산을 페쿨리아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가축을 뜻하는 단어 페쿠스에서 온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화폐를 만들면서 거기에 소, 양, 돼지 등이, 포르키아 등으로 지었는 데, 그것도 염소를 카프로이, 돼지를 포르키라고 한 것 들에서 유래한 것이다. 발레리우스는 이와 같이 일반 국민을 매우 우대하는 법을 정하는 한편으로 극악한 범죄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을 부과하도록 했다. 폭군이 되고자 일을 도모한 자라면 누구든지 재판 없이도 살해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살해자는 나중에 죽은 사람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 고 있었다는 증거만 보여주면 무죄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커다란 음모를 꾸미는 사람 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이 발각된 후에 마냥 재판만 기다리 고 있다가는 음모자들이 선수를 쳐서 결국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일이 끝나버리는 수가 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군이 되려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것이었다. 왕이 된 뒤에는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발레리우스는 재정에 대한 법률로 매우 칭찬을 받았다. 전쟁을 하려면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 세입금의 사용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공금을 한 개인의 집에 맡기기를 꺼려서 사투르누스 신의 신전을 국고로 지정하였는데 이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국고로 쓰인다. 한편 발레리우스는 국민들 스스로 젊은 시민 두 사 람을 선택하여 재정관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재정관에 임명된 사람은 푸블리우스 베투리우스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였다. 또한 고아와 과부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었으나 13만 명에게서 거들어들인 돈이 거액에 달하였다. 이 모든 일을 마무리한 다음, 그는 루크레티아의 부친 루크레티우스를 그의 동료 집정관 으로 지명하고, 그가 연장자였으므로 그에게 집정관의 표지인 파세스를 주었다. 두 집정관 중에 연장자가 파세스를 사용하는 관례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런데 루크 레티우스가 며칠을 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리자 다시 선거를 치르게 되고 결국 마르쿠스 호라티우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집정관으로 근무하였다. 타르퀴니우스가 투스카 인의 힘을 빌려 다시 한 번 로마에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매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아직 왕으로 있을 때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기 시작했었는데,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무슨 예언에 따라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자기 생각에 좋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베이이에 사는 투스카 일꾼들을 시켜서 흙으로 전차 모형 을 만들어 그 성전 꼭대기에 얹어놓으라고 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왕위에서 쫓겨 났고, 진흙으로 만든 그 전차는 아궁이에 던져졌다. 그러한 경우 흙은 불 속에서 말라 졸아 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전차는 어찌 된 영문인지 더욱 커지고 굳어져서 아궁이를 허물고 나 서야 간신히 꺼낼 수가 있었다. 예언자들은 이 물건을 가진 사람은 대운이 트일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에이이 인들은 그것이 타르퀴니우스의 것이며, 그를 추방한 사람들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로마 인들로부터 빼앗아 갔다. 며칠 후에 베이이 시에서 경마대회가 열 렸다. 모든 일이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나 우승한 사람이 머리에 화환을 쓰고 천천히 말 들을 몰면서 대운동장을 나서려는데 별안간 말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겁을 집어먹더니, 신 의 계시였는지 또는 우연한 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인을 태운 채 로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 사람이 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소리를 질러대도 말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유 피테르 신전 앞에 다다르자 말들은 그 사람을 라투메나 문 곁에다 내동댕이쳤다. 베이이 인 들은 이 사건이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흙으로 만든 전차를 로마 인들에게 넘겨주 었다. 데마라투스의 아들인 타르퀴니우스는 아비니 인들과의 전쟁 중에 유피테르 신전을 짓겠다 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그 신전을 짓기 시작한 것은 그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확실치 않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그러나 이 왕도 준공을 보기 전에 상술한 바와 같이 폐위되 었다. 이윽고 신전이 완성되었고 치장을 마치자 포플리콜라는 그 자신이 그것을 헌납할 욕 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포플리콜라가 그러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을 시 기했는데 사실 포플리콜라가 장군으로서, 입법자로서 이루어놓은 공적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건 당연히 포플리콜라가 군사상 피치 못할 사정으로 로마를 떠났을 때 이 일을 투표에 부 쳐 호라티우스로 하여금 유피테르 신전을 헌납하게 하였다. 포플리콜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 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두 집정곤이 제비를 뽑아본 결과 포플리콜라가 wu서 싫어도 하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하였고, 호라티우스가 신전을 헌납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헌납식 때의 정황으로 미루어 판단을 내리기로 하자. 로마력 9월 13일, 우리 식으로 따지면 보름날, 모든 사람들이 유피테르 신전에 운집한 가운데 장내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헌납식을 거행하였는데, 호라티우스는 관례에 따라 신전의 문을 붙잡고 헌납 기도를 드리려 고 할 때 포플리콜라의 동생 마르쿠스가 미리부터 문 곁에 서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소리 쳤다. "집정관님, 아드님이 방금 전사하였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슬퍼하였다. 그러나 호리티우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 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 애의 시체는 아무데나 내던지시오. 나는 지금 슬퍼할 여유가 없고." 그러고 나서 그는 헌납식을 끝마쳤다. 마르쿠스는 호라티우스를 방해하기 위해서 그런 거 짓말을 꾸며낸 것이었다. 호라티우스가 그러한 계략을 꿰뚫어 본 것인지, 또는 그 이야기를 믿으면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이든지 간에, 사람이란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좋 은 본보기이다. 두 번째 신전을 헌납할 때도 사정은 그와 같았다. 처음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타르퀴니 우스가 세우고 호라티우스가 헌납하였으나 내란 때에 소실되었다. 두 번째 신전은 술라가 세웠으나 헌납의 영광은 카룰루스에게 돌아갔다. 술리는 신전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이 신전은 비텔리아 인들의 반란으로 소멸되었고 베스파시안이 세 번째 신전을 지었다. 베 스타시안은 평생 행운이 따랐던 사람인지라 그것의 완성을 보았으며 살아 생전에 신전이 파 괴되는 일도 없었다. 이 신전은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괴되었으니, 신전을 채 헌납 하기도 전에 죽은 술라에 비한다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베스파시안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신전은 불에 타버린 것이다. 네 번째로 지은 신전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인데 도미티안이 세워서 헌납한 것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신전의 기초 공사에만 4만 파운드의 은을 썼다고 하지만, 오늘날 로마에 는 그 신전을 금으로 덧칠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 비용이 1만 2천 탈렌트도 넘기 때문이다. 이 신전의 기둥은 펜텔리칸 산 대리석을 균형 있게 잘 맞춰 다듬은 것인데, 지금도 아테네 에 가면 그런 기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로마로 운반해온 다음에 다시 깎고 다듬은 결과 광채는 조금 더 났지만 너무 가늘어져서 조화를 잃어버렸다. 이 신전에 막대한 비용이 든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도미티인 저택의 현관이든 복도든 화장실이든 첩의 방이든 어느 하나만 보아도 에피카르무스가 방탕한 사람을 두고 지은 시를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천성이 너그러워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을 내던지는 병이 깊어 그러니, 이러한 건물은 깊은 신앙심이나 훌륭한 정신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단지 건물을 짓겠다는 병과 미다스 왕처럼 모든 것을 금이나 보석으로 만들겠다는 욕망으로 지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친다. 타르퀴니우스는 아들이 브루투스와 싸우다 죽은 굉장한 전투 이후 클루시움으로 달아나서 라르스 포르센나에게 도움을 호소했는데, 그는 당 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 중 한 사람으로 훌륭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포르센 나는 타르퀴니우스에게 도움을 약속한 후 곧장 로마에 사람을 보내서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왕으로 맞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로마 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전쟁을 선언하고 언제 어디를 공격하겠다고 알린 후 대군을 이끌고 왔다. 로마에서는 포플리콜라가 부재중이었으나 그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였고, 또 한 사람 의 집정관으로 티투스 르크레티우스를 선출하였다. 포플리콜라는 로마로 돌아와 자신이 포 르센나에게 위압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이 가까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새로 시 글리우라 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성벽으로 시의 테두리를 넓게 둘러치고, 700명을 이 곳 에 이주시켜 마치 전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였다. 그러나 포르센나가 매 섭게 공격을 가해오자 수비대는 어쩔 수 없이 로마로 후퇴했다. 수비대는 한 번 제대로 싸 워보지도 못한 채 성을 내주고 만 것이다. 오로지 포플리콜라만이 성문 하나를 기운차게 열 고 나가 그들을 막아내려고 하였으며 티베르 강가에서 물밀 듯이 몰려오는 적의 대군과 싸 우다가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다른 집정관 루크레티우스도 부상을 입고 싸움터에서 물러나게 되자 로마 군은 싸울 기력 을 잃고 앞을 다투어 시내로 몰려 들어왔다. 적군도 또한 티베로 강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 너 몰려 들어오려고 하였으니, 로마 시의 운명은 바람 앞에 선 촛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로 마에서 헤르미니우스, 라르티우스 다음 가는 장수 호라티우스 고클레스가 그 다리 앞에 버 티고 있었다. 호라티우스가 코클레스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가 전쟁에서 한 쪽 눈을 잃었 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코가 낮아서 좌우의 눈과 눈썹이 한데 붙은 것 같아서 외눈박 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간에 키클로프스라고 짓는다는 것이 발음을 잘못해서 코클레스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코클레스가 다리 저편 끝에서 적군 을 막고 있는 동안 로마 군이 그 반대쪽에서 다리를 끊었다. 그는 적의 창을 맞아 허벅다리 에 상처를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채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왔다. 그의 용기에 탄복한 포플리콜라는 정령을 내려 모든 로마 인들로 하여금 그에게 하루치씩의 식량을 선물하게 하 고, 또 그가 하룻동안에 쟁기질을 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주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그의 조 상을 만들어 불카누스의 신전에 세우게 했다. 허벅다리의 상처로 코클레스가 한 쪽 다리를 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르센나가 포위를 풀지 않았으므로 로마 인들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투스카 군의 다른 부대가 또 그들의 영토에 침공해왔다. 이제 제3차로 집정관에 당선된 포플리콜라는 로마 군으로 하여금 성내에 머물면서 수세를 견지하도록 지시해 놓고 자신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새로 침공해온 투스카 군대를 맞아 적군 5천을 베니 그들은 물 러가고 말았다. 무키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대로 적 어보겠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걸출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전쟁에서 그 용맹심이 두드러지 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왕 포르센나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투스카 인처럼 차려입고 그들의 말을 쓰며 적진에 숨어들었다. 왕이 앉아 있는 높은 단에 이르러 보니 여러 귀족들 사이에 누가 왕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왕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자기 생 각에 왕이다 싶은 사람을 골라 찔러 죽인 후 붙잡혀서 심문을 당하였다. 앙은 무키우스를 재물로 바칠 생각으로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를 가져오게 했다. 무키우스는 오른손을 불쑥 내밀어서 화롯불 속에 집어넣더니 손이 타서 오그라들도록 포르센나 왕을 당당히 마주 보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포르센나 왕은 마침내 탄복하여 그를 풀어주게 하고 빼앗았던 칼을 자신이 직접 돌려주려고 무키우스에게 내밀었더니, 그는 왼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스카이볼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왼손잡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 다. "나는 포르센나 왕이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대함에 압도되어 고문으로 짜내지 못할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300명의 로마 인이 이 진중 에 잠입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비를 뽑은 결과 제가 운이 좋아서 처음으로 시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실패 결과 제가 운이 좋아서 처음으로 시도하였습니다. 이 처럼 실패는 하였을 망정 유감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용감하고 훌륭하 여 로마 인의 적이 아니라 벗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포르센나는 이 말을 사실로 여겼고 휴전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견을 말한다면 300명의 암 살대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로마인의 기개에 탄복해서였을 것이다. 다른 모든 기록에도 이 사람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라고 남아 있다. 그러나 산돈의 아들 아텐도루스가 카이사르 의 누이 옥타비아에게 바친 책에도 유독 포스투무스라고 되어 있다. 포플리콜라는 포르센나를 적대하면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를 벗으로 삼는 다면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로마와 타르퀴니우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아달 라고 부탁하게 된다. 동시에 타르퀴니우스가 정말 악한이며 왕위에서 추방된 것이 당연하다 는 사실들 거듭 밝혔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거만하게도 '그 누구의 중재도 원치 않는다. 포르센나의 중재는 더욱 싫다. 그는 일시적으로 자기를 두둔해주더니 지금은 저버리려고 한 다'고 말할 뿐이었다. 포르센나는 이 말에 화가 나서 자신이 중립을 지킨다는 게 아무짝에 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데다가 그의 아들 아룬스가 또한 로마측의 주장을 따르자고 하였으므로 결국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양측은 평화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로마가 점령 한 투스카 영토를 반환하고 포로를 상호 석방하기로 했다. 로마 인들은 그 평화협정을 이 하겠다는 뜻으로 로마 명문 집안의 아들 10명과 포클리콜라의 딸 발레리아를 포함한 10명 의 처녀를 볼모로 보냈다. 포르센나는 이에 모든 적대 행위를 멈추었다. 볼모로 간 로마 처녀들이 하루는 강에 나와 목욕을 하였는데 마침 그 곳은 강이 반월형으로 구부러져 물살이 잔잔한 곳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파수병도 행인도 없었으므로 처녀들은 용기를 내어 강을 헤엄쳐 건너기로 했다. 다른 설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클로일리아라는 한 처녀가 말을 타고 앞장을 서며 친 구들이 헤엄쳐서 따라오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무사히 건너오자 그들은 곧 포 플리콜라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칭찬하는 대신, 이렇게 되면 자기가 포르센나를 속이기 위해 미리 짜고 한 일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 처녀들의 대담한 행동으로 인해 로마 인들이 변절자라고 욕먹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며 처녀들을 포르센나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타르퀴니우스 일당은 매복해 있다가 처녀들을 호송해 오던 병사들을 덮쳤다. 서로 난투극을 벌이는 동안 포플리콜라의 딸 발레리아는 시녀 셋의 도움 으로 병사들 틈을 뚫고 달아났다. 다른 처녀들은 가엽게도 싸움판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 는데 이때 포르센나의 아들아룬스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달려와 적들을 쫓아버리고 로마 인들을 구해냈다. 처녀들이 돌아오자 포르센나는 이 일의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그것이 클로일리아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흡족스런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말 중 한 필을 호화롭게 장식해서 끌고 나오도록 하더니 그것을 클로일리아에게 선물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클로일리아만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말 을 타고 강을 건넜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개가 씩씩했기 때문에 상으로 말을 준 것뿐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말 탄 사람의 조상이 팔라티움으로 올라가는 신령한 길가에 서 있는데, 그 조상이 클로일리아의 모습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발레리아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포르센나는 로마와 휴전한 다음 여러 가지 너그러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군대에 명 령하기를 오로지 무기만 가지고 후퇴하고, 참호 속에 가득한 식량과 그 밖의 물품은 로마 인들에게 선물로 남겨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도 물품을 공매에 부칠 때에는 ' 포르센나에게는 양보합니다'라고 선언한다. 로마 인들은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친절을 내내 기억할 것이다. 예전에는 청동으로 만든 그의 조상이 원로원 옆에 서 있었다. 단순하고도 고 풍스럽게 만든 작품이었다. 다음으로 사비니인들이 침략해왔다. 포플리콜라의 동생 마르쿠스 발레리우스와 포스투미 우스 투베르투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마르쿠스는 포플리콜라의 의견을 쫓아 일을 처 리함으로써 두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두 번째 전투에서 로마 군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적 을 1만 3천 명이나 죽였다. 그는 로마로 개선하였으며 국민들은 돈을 모아 팔라티움 위에 그의 집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집의 문은 안으로 열리는데 그 집의 문만은 밖으 로 열리도록 지었다. 이와 같이 언제나 그에게 길을 양보함으로써 모두들 그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문들은 옛날에 모두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고 하 며 그 증거로 연극에서 보면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기 전에 우선 노크를 하는 것을 들 수 있 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문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해에 포플리콜라는 4차로 집정관이 되었는데 라틴 인과 사비니 인의 연합군이 쳐들 어올 기세가 엿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부인네들이 유산을 하지 않으면 온통 조산을 하는 바 람에 신들이 노한 것이 아닌가 하여 모두들 두려워했다. 포플리콜라는 시빌 경전들에 나타 난 충고에 따라 지하계의 신 플루톤의 노여움을 풀고, 아폴로 신탁에 따라 여러 운동 경기 를 다시 거행하여 시민의 마음을 좀더 평화롭게 하고 강대한 적군을 막아낼 준비를 하였다. 연합군측에서는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사비니 인들 중에 아피우 스 클라리우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굉장한 재산가인데다가 힘도 장사였을 뿐 아니라 덕망이 높고 웅변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모든 큰 인물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그 역시 주위에 시기 하는 자가 많았다. 정적들은 그가 전쟁을 중지시켰다고 비난하며, 그가 은근히 로마 편에 서 는 것은 결국 스스로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ㄷ. 대중들이 이런 이야 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믿어버리는 것과, 자신이 군부와 전쟁을 주장하는 일당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법정에 서기가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도 와줄 상당한 숫자의 친구와 동지들을 따로 모아 당파를 결성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전쟁은 지연되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포플리콜라는 클리우수스를 돕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 사신을 보내어 다 음과 같이 말하도록 시켰다. "귀공은 명예와 정의를 존중하시는 분이므로, 부당하고 수치스런 대접을 받더라도 귀공의 백성에게 복수하지는 않으시리라고 포플리콜라는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귀공을 미워하는 백 성을 떠나셔서 안전을 도모하기를 원하시면, 우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여 귀공의 높으신 인격과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해드릴 것이며 그것을 로마의 영광으 로 생각하겠습니다." 클리우수스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러한 상황에서는 달리 어쩔 도리 없다는 결론을 내 리고 여러 동지를 모았다. 이들 또한 다른 많은 사람을 움직여 시비니에서 가장 온화하고 착실한 품성의 가족 5천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해왔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포 플리콜라는 온갖 예읠를 다 갖추어 영접하였다. 그들을 즉각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고 한 사람당 아니오 강가의 땅 2에이커씩을 나누어 주었다. 클라리우수스는 이후에 로마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은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한 가문을 이 루었다. 이들이 이주해옴으로써 사비니 국내 분쟁은 해결된 셈이었으나, 사비니의 우두머리들은 이주자들이 평화롭게 정착하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또한 클라우수 스 일당이 나라를 버리고 로마로 가버림으로써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화를 냈다. 블라우수스가 본국에 있는 동안 전쟁을 반대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한층 더했다. 그들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피데나이에 포진하고, 2천 명의 복병을 로마 교외의 숲 속에 숨겨놓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소수의 기병만을 내보내 주민을 약탈한 후 곧바로 돌아 오게 하여 로마 군을 유인해낼 전략이었다. 하지만 포플리콜라는 적의 이탈병들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하고 각 부대에 임무를 배당했 다. 그는 사위 포스투미우스 발부스에게 군사 3천을 주면서 저녁 어둠을 이용하여 언덕 위 로 올라가서 바로 그 언덕 아래에 숨어 있는 복병들의 동태를 잘 살피라고 하였다. 그의 동 료 집정관 루크레티우스는 가장 재빠르고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사비니 기마대를 맡 기로 했다. 포플리콜라 자신은 남은 군을 이끌고 적을 포위할 작전을 세웠다. 날이 샐 무렵 때마침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자 포스투미우스는 산꼭대기로부터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 내려와 적의 복병들을 습격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적의 기마대를 공격하고 포플리콜라 는 적의 본진을 공략했다. 사비니 군 진영이 곳곳에서 무너져버렸고 병사들은 달아나며 로 마 군 손에 죽었다. 사비니 군은 알량한 희망 때문에 완패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부대는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쉽게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는데 본진영은 복병대 쪽으로, 복병대는 본진영쪽으로 패주하다가 양측은 도중에서 만나 이제 원군을 청할 곳이 없음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피데나이 시가 사비니 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해준 덕택에 더러 목숨 을 건졌다. 특히 본진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 남았다. 피데나이까지 가지 못한 자는 벌판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로마 인들은 보통 이러한 승리를 신의 가호라고 생각하는 데 이먼만은 한 장군의 공로로 돌렸다. 병정들은 말하기를 포플리콜라가 적군의 눈을 가리 고 다리를 묶은 다음 자기들에게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백성들은 전리품을 얻 고 포로를 노예로 삼아 더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포플리콜라는 개선의 영예를 누린 후 차대의 두 집정관에게 정사를 넘기더니 숨을 거두었 다. 포플리콜라는 인간사의 모든 우여곡절을 겪은 자로서 누구보다 훌륭하였으며 만인의 존 경을 받아 마땅했다. 백성들은 그의 생전에 아무런 보답도 드리지 못하여 이제 커다란 빚을 지게 된 듯이 생각하였으므로,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면서 모든 시민이 1콰드란의 조의금을 내기로 결정하였다. 그 외에도 여인들은 그를 기리는 뜻으로 일년 동안 상복을 입기로 결의 하였다. 그는 시민들의 뜻에 따라 로마 시내에 있는 벨리아라는 곳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 에게도 이 곳에 묻힐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다른 사람이 그곳에 매장된 경우는 없다. 다만 그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영구를 그 곳에 가져다가 내려놓고 한 사람이 횃 불을 관 밑에 가져다 댄 후 곧 치워버린다. 이때 횃불은 그 사람에게 내려진 특권을 상징하 며 그것을 곧 치워버리는 것은 그가 그 영예로부터 물러남을 가리킨다. 그러고 나면 영구를 밖으로 내어갔다. 포플리콜라와 솔론의 비교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을 놓고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포플리콜라 와 솔론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모방했 다는 점이다. 솔론은 크로이소르에게 텔루스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긴 문장 을 지어준 일이 있는데 그것은 텔루스보다 포플리콜라에게 더 잘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텔 루스는 살아 생전에 덕을 베풀고 온당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일컬어 지지만, 솔론은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읊지는 않았으며 그의 자식들이나 그의 관직에 대해 서도 언급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자식들이나 그의 관직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 나 포플리콜라는 그의 미덕과 권세로 로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누렸고, 사후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포플리콜레, 메살레, 발레리이 등 로마에서 가장 이름난 가문들조차도 그 조상이 포플리콜라임을 자랑으로 삼는다. 텔루스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용사답게 싸워 전쟁터에서 절명하였으나, 포플리콜라는 많은 적을 죽이고 그의 명령하에 조국이 승리를 거 두니 더 많은 복을 타고난 것이다. 그는 승리와 영예를 품에 안고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으 니 이것은 바로 솔론이 간절히 소망한 바였다. 그리고 불멸에 대해 묻는 밈네르무스에게 솔 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이 세상 내 떠나가는 날, 친구들의 함숨과 설움을 받기가 나의 소원이니, 포플리콜라는 이러한 행복을 누린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은 뒤 친구나 친척들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전 로마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버지나 아들을 잃은 듯 탄식했다. 솔론은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물을 소원하되 불의로 얻은 것은 싫도다." 그것은 결국 응징을 받게 되기 때문이리라. 포플리콜라는 재물을 가졌으되 모 두 명예롭게 얻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썼다. 그러므로 솔론이 가 장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포플리콜라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솔론이 가장 크고도 완벽한 복이라고 생각하며 소원한 것을 포플리콜라는 평생토록 가지고 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솔론이 포플리콜라의 명예에 기여할 것처럼, 포플리콜ㄹ라 역시 솔론의 명예에 기여한 바가 있다. 포플리콜라는 공화정을 확립함에 있어서 솔론을 제일 가는 모범으로 삼 아서 집정관의 지나친 권세와 위엄을 줄여나갔다. 그는 실제로 솔론의 여러 법을 로마법으 로 채택하여 국민에게 관리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피고가 법원의 판결에 불복 할 때는 국민들 앞에 상소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솔론의 배심원 제도를 모방한 것이 다. 그는 솔론과 같이 양원제를 채택하지는 않았으나 원로원 의원의 수를 거의 배로 늘렸다. 그가 재정관을 임명한 것도 비슷한 연원을 갖는다. 집정관이 청렴한 사람인 경우에는 그보 다 더 중요한 일을 보도록 배려한 것이지만, 부정한 사람이 정치와 재정을 동시에 손에 쥐 게 되는 경우에는 부당한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폭군에 대한 반감에 있어서는 포플리콜라가 솔론보다 더 강하였다. 왜냐하면 솔론은 왕이 되고자 시도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위반하는 자는 법으로 처단하였는데, 포플리콜라는 왕과 같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쥐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에 호감을 갖도록 만들었 고,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으니 솔론에 뒤질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 실 소론이 포플리콜라보다 앞서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나친 자유도 지나친 억압도 주지 않을 때 백성들은 위정자를 가장 잘 따른다. 채무자의 짐을 덜어준 것은 솔론만이 한 일로, 이로써 서민들의 자유를 공고히 하였다. 평 등을 누릴 수 있는 법령이 있다 한들 가난한 사람들이 빚에 얽매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해 야 한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등의 원칙이 한층 더 잘 지켜져야 할 법정 이나 공직 사회나 공적 토론의 장소가 주바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 론은 이 조치로 보기드문 성공을 거두었는데 보통 채무를 무효화시키면 내란이 일어나곤 하 지만, 솔론의 이 조처는 사용하기 겁나지만 그래도 효력이 센 약처럼 오히려 지속되어온 내 란의 조짐조차 제거하였다. 변화가 수반하게 마련인 불신을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솔론의 성실성과 명성이 대단했던 것이다. 사실 솔론은 포플리콜라보다 더 큰 영광을 가지고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 는 역사에 같이 남을 선구자로서 아무런 본보기도 없었고 뜻을 나눈 동지도 없었지만 가장 중대한 개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포플리콜라가 솔론보다 더 행복새G다. 왜 냐하면 솔론은 그가 세운 공화국이 와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포플리콜라의 공화정은 그가 죽고 나서도 내란의 시대가 오기까지 지속되었다. 솔론은 자신이 만든 법을 나무 위에 기록해둔 채 아테네를 떠나 버렸으니 그 법은 옹호해줄 사람도 없이 무방비 상태 로 남은 것이다. 반면에 포플리콜라는 수 차례 집정관을 지내며, 새 정부의 기반을 다져나가 는 데 힘을 쏟았다. 더욱이 솔론은 피시스트라투스의 의도를 간파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제지 하지 못하여 걸음마 단계에 있던 공화제의 정착을 위해 경계의 눈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솔론과 같았으나 행운과 권세가 그를 따랐으므로 비로소 뜻한 바를 이루어낼 수 있 었다. 군사적 성공에 있어서 플라타이아의 다이마쿠스 같은 이는 상술한 바 솔론이 메가라 인가 싸웠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플리콜라는 중요한 전쟁 때마다 군 통솔자이면 서 동시에 일개 군인으로써 싸워 이겼다. 국내 정치에 있어서 솔론은 미친 사람 시늉을 함 으로써 살라미스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포플리콜라는 처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자 기 정체를 드러냈으며 무력으로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낸 후 모반을 꾸미는 자들을 색출해내 서 주범들을 처형했다. 타르퀴니우스를 로마에서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당이 로마에 돌아올 모든 희망을 버리게씀 했다. 용기와 끈기와 박력을 요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과감 하게 행동했으며 평화적인 협상과 설들과 양보가 필요한 경우에도 역시 능숙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무시무시하고 다루기 힘든 적이었던 포르센나 왕과 화해하여 우의를 맺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즉, 솔론은 잃어버렸던 땅 살라미스를 탈환하여 아테네 인들에게 돌려준 반면, 포플리콜라는 로마 인들이 정복하고 있었던 땅마저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때의 사정을 참작 해 보아야만 한다. 현명한 정치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현 상태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취한 다. 그래서 종종 한 부분을 버림으로써 전체를 구해내고 작은 일에 양보함으로써 더 큰 이 득을 취하는 것이니, 그때에 포플리콜라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점령지에서 철수함 으로써 자기 나라를 보전하고, 로마 시만 지켜내도 좋겠다고 생각하던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안겨주었다. 상대편으로 하여금 논의의 결론을 내리도록 양보해줌으로써 결국 승리를 얻었 을 뿐 아니라 또 하나 얻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포르 센나는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진영의 군용품들을 남겨둔 채 철수해 갔는데 이는 로마 집정관 의 고결한 성품에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 테미스토클레스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다. 부친 네오클레 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 아니라 프레아리 촌의 레온티스 부족 사람이었다. 다음 시에 나 타나 있듯이 그의 모계도 근본이 미천하였다. 내 조상은 고귀한 그리스 인은 아니었노라 나느 불쌍한 아브로토논, 트라케 사람이니 그리스 아낙네들이여, 날 비웃어라 하지만 난 테미스토클레스의 어미인 것을. 파니아스의 설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의 모친은 트라케 사람이 아니라 카리아 사람이었 으며, 이름도 아브로토논이 아니라 에우테르페였다고 한다. 또한 네안테스의 설에 의하면 카 리아에 있는 할리카르나소스가 그녀의 고향이라고 한다. 이처럼 한쪽 부모만이 아테네 시민 이거나 서자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연무장에 나가야만 했다. 연무장은 성 밖 에 있는 레슬링 연습장으로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못이었다. 헤라클레스 역시 어머니가 인 간이었으므로 온전한 신 축에 끼지 못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여러 귀족 청년들을 연무장으 로 데리고 가서 함께 몸에 기름을 바르고 운동을 하자고 했다. 출생이 다른 데서 오는 차별 을 없애려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리코메다이 집안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왜 냐하면 시모니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리코메다이 집안 소유로 되어 있던 플리아 성당이 페르 시아 인들 손에 불타버렸을 때, 그가 재건에 나섰으며 그림과 다른 장식품들로 그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노력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절어서부터 성격이 열성적이고 성급하였으며 사물을 재빨리 파악해냈고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이나 정치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휴일이나 여유가 있을 때는 다른 아이들 과 어울려 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 없이 늘 무슨 일에 대한 연설문 같은 것을 지어 읽곤 했다. 연설내용은 언제나 동료들 가운데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의 선생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작은 인물로 그치지는 않겠다. 좋은 인물이 되건 나쁜 인물이 되건 간에 크게 이름 을 날리겠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그는 예의 범절이나 고상한 소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경시하고 자신의 지혜나 처세술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얻기에 힘썼다. 또한 그의 나이로는 해독하기 어 려운 것이라도 천부의 소질로 통달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교양이나 고상한 취미만을 화제로 삼으면서 스스로 굉장한 학식을 갖춘 듯 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그는 오히려 뻐기듯이 응수했다. 즉 자신은 아무 악기도 다를 줄 모르지만, 만약 작고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것을 크고 영광 스럽게 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대꾸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스테실브로투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였으며 멜리수스 밑에서 자연 과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대로 보아 틀리는 이 야기다. 멜리수스는 페리클레스에게 포위된 사모스를 지휘하던 장군이었는데 페리클레스는 테니스토클레스보다 훨씬 연하였으며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테미스토 클레스는 프레아리 사람 므네시필루스의 숭배자였다는 설이 더 믿을 만하다. 므네시필루스 는 웅면가도 과학자도 아니었으며 당시에 지략이라고 불리던 것에 조예가 깊었다. 지략이란 정치적 술수와 실용적인 지혜같은 것을 말하는데, 솔론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철학 의 일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후세 사람들은 지략을 고소장이나 법룰문서의 문 장들과 혼동하여 사용하고, 지략의 실용적인 부분을 토론술이나 화술로 변형시켜버리고 말 았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틀어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에 몸담고 나서 야 므네시필루스의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에 써놓은 글들을 보면 그는 여전히 혼돈된 상태에 있었다. 그는 타고난 성격이 이끄는 대로 살아갔다. 그리하여 그의 행동에서는 이성이나 절제를 찾아볼 수 없었 고, 급작스럽고도 느닷없는 일을 저지르기 일쑤였으며, 어찌된 셈인지 잘 나가다가 일을 망 치는 겨우도 종종 있었다. 후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말하기를 가장 몹쓸 망아지라도 적절히 훈련시키고 단속하면 가장 쓸만한 말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을 근 거로 해서 꾸며낸 이야기들이 있다. 즉 그가 부친으로부터 재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던지, 모친이 아들의 행실을 부끄러워하다가 죽고 말았다는 것들로서, 이것은 모두 중상모략에 불 과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부친은 그가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제지할 생각 으로 바닷가에 버려진 낡은 군용선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천박한 백성들은 더 이상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청치인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쨋거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어릴 때부터 정치에 지대한 관심ㅇ르 가졌다는 것은 틀림없 는 사실이며 그는 또한 처음부터 정계의 거목이 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일찍이 최고 권좌 에 오를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아테네 시에서 가장 권세 높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미움 을 사게 되는 일도 불사하였으며, 특히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티데스와는 항상 의견충돌 이 있었다. 둘 사이의 적대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 것이다. 철학자들 사이의 적대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 것이다. 철학자 아리스톤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동시에 스테실 라우스라는 미소년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 반대편에 서서 대립 하였으며 두고두고 정치적 라이벌이 되었다. 두 사람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이렇듯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읻. 아리스티데스는 성격 이 온화하고 명예를 존중했으며 정치인으로서 소신에 따라 행동할 뿐 인기에 영합하는 일 없이 언제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착실하고 공정하게 처신하였다. 반면에 테메스토 클레스는 온갖 종류의 신정책을 내놓고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면서 국민들을 들쑤시고 자신 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행동ㅇ르 제지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무모할 정도로 야심이 컸고 큰 사건을 획책하는 데 거의 열관적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페르시아 군과 마라톤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사령관 밀티아데스의 능숙한 지도력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를 본 그는 시무룩하니 홀로 생각에 빠져들더니 밤잠 을 이루지 못하고 주변사람들의 초대도 모두 거절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를 이상히 여겨 이 유를 물으니 그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밀티아데스의 영광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소." 다른 사람들은 마라톤에서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보았으며 시민들을 훈련시키는 등 끊임없는 대비를 해나갔다. 그는 라우디움에 있는 은광에서 나오는 수입을 분배하던 것을 중지하고 그것으로 아이기 나 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배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아이기나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성한 도시국가로 많은 배를 소유하여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안으로 그는 아주 쉽게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아득한 곳에 있어서 침공해 올 것 깉지도 않은 다리우스아 그의 페르시아 군을 막으려고 하였아면 사람들은 해괴하게 생각하 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 인들은 아이기나 인에 대해서 은근히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 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것을 적절히 자극함으로써 국민들의 찬성릉 얻어낸 것이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그는 100척의 군선을 만들어 나중에 크세르크세스와 까울 때 사용했다. 이때부너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생각을 차츰 바다로 돌렸다. 왜냐하면 아테네의 지상군은 이웃 나라와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수군만 있으면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고 그리스 전체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었다. 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땅 위의 고정된 군인들을 바다 위의 흔들리는 수군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아테네 군인들에게서 창과 방패를 빼앗고 그 대신 노와 배를 떠 맡겼다고 한다. 스테심브로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밀티아데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정부의 순수성과 균 형을 깨뜨렸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이 논의할 바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리스의 안전을 지켜준 것은 수군이었다. 위기에 처한 아테네 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에 따라 만들어 놓은 군선이었음은 누구보다 크세르크세스 자신 이 증명한다. 그의 지상군은 땅에서는 건재하였으나 해전에서 패하자 더 이상 그리스 군을 대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도주해버렸다. 그가 마르도니우스 부대를 남겨두고 간 것은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한 희망에서 비록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추격을 염려해서 남겨둔 것 이었다는 생각이 나의 사견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테미스토클레스는 물욕이 매우 강했는데, 그것은 그가 사치를 일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그는 수시로 값진 제물을 바쳤으며 외국인들을 융숭하게 접 대하였다. 그것은 모두 돈이 드는 일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궁상맞고 천박한 사람이 라 선물로 받은 식료품까지 내다 팔았다고 욕한다. 또한 말사육사 디필리데스에게 말을 달 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그 집안을 목마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 집안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켜서 서로 소송을 걸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아직 젊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하프의 명수였던 헤르미오네 사람 에피스클 레스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연습시킴으로써 많은 아테네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또한 올림픽 경기에 갈 때는 호화로운 마구와 천막, 기물 등을 준비하여 키몬을 앞지르려고 함으로써 그 리스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훌륭한 집안의 젊은이인 키몬이 그와 같이 하는 것은 당연하지 만 아직 이름도 없고 지출을 감당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그와 같은 사치를 하는 것은 건방 진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 연극 경연대회에서 그가 제반경비를 부담한 연극이 우 승하자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서판을 한 장 꺼내와서 다음과 같이 새기도 록 하였다. 프레아라의 테미스토클레스가 경비를 부담하고, 프리니코스가 각본을 쓰고, 아디만토스가 연출하였노라. 그는 시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그는 모든 시민들의 이름을 외워서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또한 민사상의 중재를 맡으면 언제나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한번 은 케오스의 시인 시모니데스가 자기에게 이롭도록 사정을 봐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다. 당 시 장군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락에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면 시모니데스 당신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법을 굽히고 누구의 사정을 봐준다면 나 역시 좋은 관리일 수 없을 것이오." 또한 시모니데스가 코린트 인들은 도시미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며 비난하였을 때 테 미스토클레스는 시모니데스를 비웃으며 말하였다. 즉 시모니데스 자신은 무엇 때문에 못생 긴 자신의 초상화를 수도 없이 그리도록 하느냐고 반박한 것이다. 그는 시모니데스를 생각 이 짧아도 아주 짧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데 절치부심한 결과 마침내 정적 아리스티데스를 제압하고 패각투표를 거쳐 그를 마침내 정적 아리스티데스를 제압하고 패각투표를 거쳐 그 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페르시아 군이 다시 그리스를 향해 침공하려 한다는 기별이 있 었을 때 아테네 인들은 누구를 장군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장군 되기를 마다하였다. 그러나 에우페미데스의 아들 에피키데스만은 자기가 임명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비겁한고 뇌물을 좋아하였는데, 선동적인 연설을 잘하는 사 람이라 투표에서 이길 것이 확실했다. 테미스토클레슨느 그에게 큰일을 맡겼다가는 그 결과 가 좋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에피키데스에게 뇌물을 주어 야심을 버리고 장군자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 왕은 아테네로 사신과 통역관을 보내어 굴복의 표시로 흙과 물을 보낼 것을 요 구하였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통역관을 처형하였다. 그의 죄명은 야만인의 명령을 그리스 말로 옮겨 그대로 전달한 죄였다. 이 일로 그는 많은 칭송을 받았 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젤레아 사람 아르트미우스는 페르시아 왕에게서 금을 받아다가 그 리스 인들에게 나누어주며 매수하다가 발각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죄인은 물론 그의 후 손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 다. 그가 세운 공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페르시아 전쟁을 앞두고 그리 스 내전을 종식시킨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시국가 상호간의 적대감을 잠시 뒷전으로 밀쳐둘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아르카디아의 킬 레우스였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장군으로 임명되자마자 시민들을 설득하여 군선에 태우고 그 리스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서 적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전략에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테네 군과 스파르타 군을 이끌고 템페로 진군해가서 테살리를 방어하려고 했다. 그런데 테살리는 아직 페르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철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테살리뿐 아니라 크세르크세스부터 보이오티아까지 이르는 국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제서야 아테네 인들은 해전을 하지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일단의 군선을 이끌고 아르테미시움 해협을 지키러 떠나게 되었다. 각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서 논의한 겨로가 라케다이몬 사람 에우리비아데스가 그리스측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테네 인들은 다른 나라에 지휘관으로 추대되어싿. 그러나 아테네 인들은 다른 나라에 지위권을 양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배는 다른 모든 나라의 것을 합한 수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위급하니만큼 테미스토클레스 는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지휘권을 양보하였다. 그는 아테네 인들을 다독거리며, 전쟁에서 용 맹을 떨치기만 한다면 그리스이 모든 나라들이 결국 아테네의 우세함을 인정하게 된지 않겠 느냐고 말하였다. 이렇게 온건한 자세를 취한 결과 그는 위기에 처한 그리스를 구했으며, 아테네 사람에게 용기로 적을 누르고 지혜로 우군을 누르도록 설득함으로써 큰 영광을 안겨 주었다. 페르시아 군선들이 아페타이에 나타나자 에우리비아데스는 그 수효가 엄청난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어둑이 200척의 적선이 더 있어서, 스키아투스 섬을 돌아 아군의 후미를 포위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는 후퇴하여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지상군과 수군의 지 원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전으로는 도저히 페르시아 군대를 이겨낼 길이 없다고 본 것 이다. 에우보이아 인들은 그리스 인들이 떠나고 나면 결국 자신들이 적군으 수중에서 놀아 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펠라곤에게 많은 돈을 주며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가서 사정해보라고 하였다. 헤로도토스의 사기에 의하면 그는 이 돈을 받아서 에우리비아데스 일 파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에 있어서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가장 거세게 반대한 사람은 신령한 배의 선장인 아르 키텔레스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불한 봉급이 부족하여 아테네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부하들의 노여움을 부추겨서 아르키델레스에게 달려들레 하였고, 그의 저 녁식사마저 빼앗게 하혔다. 아르키텔레스는 몹시 놀랐고 불같이 화를 냈다. 테미스토클레스 는 곧 빵과 고기를 담은 바구니 밑에 1탈렌트짜리 은화와 편지를 넣어 그에게 보내었다. 편 지에는 '우선 저녁을 먹고 내일 병정들에게 급료를 주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으로 부 터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 한 것은 레스비스 사람 파니아스이다. 아르테미시움 해협에서 페르시아 군과 그리스 군이 벌인 전투는 어느 편이 우세했는지 알 수 없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얻은 경험은 그리스 군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진정 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온몸을 내던져 싸우기로 결심한 사람에게는 많은 숫자의 배도, 요란 스런 장비도, 기운찬 고함 소리들을 모두 무시한 채 진정한 위기 위기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육박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핀다로스는 아르테미시움 해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으니, 당시의 사정을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아테네의 아들들이 자유의 대근본을 세웠노라. 누가 뭐라 해도 승리의 근본은 불굴의 용기다. 에우보이아섬의 아르테미시움이란 히스티 아이아 시 너머에 있는 북쪽 해변의 이름인데, 그 맞은편으로 필로크테테스의 영토인 올리 존 시가 있다. 그 곳에는 아르테미스를 모시는 작은 사원이 있는데 이는 동톀의 성전이라고 불린다. 이 곳의 주위에는 나무가 있고 그 바깥은 흰 대리석 기둥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기 둥을 손으로 비비면 손에 사프란 꽃물이 들고 그 향기가 밴다. 그 기둥 중 어느 하나에 다 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저 바다 위에서 아테네의 아들들이 아시아로부터 온 숱한 족속들과 싸웠나니 오늘은 또 메디아 인들을 잠재우고 이 기둥을 세워, 아르테미스 여신께 우리의 승리를 비치노라. 오늘날까지도 그 곳 사람들은 해변가 모래언덕 가운데 검은 잿더미가 묻혀 있는 것을 기 리키며 적의 부서진 배들과 시체를 태워 묻은 자리라고 일러준다. 테르모필라이에서는 지상군이 패배하고 레오니다스 왕이 전사하였다. 더욱이 크세르크세 스의 군대가 그리스로 들어오는 길목의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 아르테미시움에 있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전해졌다. 이에 그들은 후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아테네 군 이 후미를 맡았는데, 이는 위험하지만 자랑할 만한 위치였으니 병사들은 그 동안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우쭐해져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동안 항구나 적운의 배가 와서 멎을 만한 곳이 눈 에 띄면 바위에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두었다. "이오니아 인들은 가능하면 메이아 인을 버리고 그리스 편에 가담하라.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선조로서, 지금 그들의 자유를위 해 휘험을 불사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페르시아 군을 혼란에 빠뜨려라." 그의 의도는 이오니아 인들이 이 글을 읽고 그리스 군에 가담하거 나, 그렇지 않더라도 페르시아 군의 의혹을 유발시키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크세르크세스 군대는 도리스를 지나 포키스로 들어와서 그 지방의 도시를 불사르고 파괴를 일삼았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아테네 인들은 그리스 사령부에 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즉 '페르시아 군이 아티카로 밀고 들어오기 전에 미리 보이오 티 아에서 막아주시오. 우리는 그리스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아르테미시움 해전에 참여하지 않 았는가!' 하는 호소문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군 사령부 측은 이를 묵살 한 채 펠 로폰네소스를 지키기에만 골몰하였다. 사령부는 모든 군대를 이스트무스로 결집시킨 후 그 지협을 가로질러 담을 쌓기로 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 연합군으로부터 버림받는 처지에 놓 이자 아테네 사람들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테네 군만으로 크세르크세스와 같 은 큰 적을 대항하여 싸울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오로지 남은 길이라고는 아테네 시를 버리고 배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오히려 승리할 확 률이 적다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더욱이 여러 신전들을 등지고 조상의 무덤과 문화 유산을 성난 적의 손에 내맡긴 채 바다로 나가는 일에 대해서 무척 꺼려했다. 난처한 지경에 빠진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치만 가지고는 도저히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 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흔히 연극에서 신령한 힘을 끌어들이듯 이적이나 신탁이니 하는 방법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 즈음 아테네 신전 깊은 곳에 나타나곤 하던 구렁이가 통 보 이질 않았다. 음식을 가져다 놓아도 먹은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입김을 받은 여신이아테네를 떠나 미리 바다로 도망쳐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사제는 자신이 가끔 나무로 만든 성에 모든 걸 맡기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전하면서, 여기서 나무로 만든 성이라 함은 다름아닌 배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이 신탁에 의하면 살라미스 섬은 비 참하고 불운한 곳이 아니라 거룩한 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젠가 이 섬으로 인해서 그리 스 인의 대운이 트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는 포고령을 내렸다. 아테네 시는 '아테니의 여왕' 아테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군선을 타 고 출정하며 각자 자기 집안의 아이들과 부녀자와 노예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고 한 것이다. 이 포고령을 전해들은 아테네 인들은 노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을 대부분 트로이젠으 로 보냈다. 트로이젠 사람들은 그들을 친절히 맞아들이고 법령을 제정해서 한 사람당 매일 2오볼씩 국고에 지급하였으며 아이들은 누구의 것이든 나무에 열린 과실이면 마음대로 따먹 게 하고 학비도 지불하였다. 이 법을 w안한 사람은 니카고라스였다. 이때 아테네는 군자금이 없어싿.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평의원 아레오파구스 가 각 전사에게 8드라크마씩 지급하여 그들이 출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반면 에 클리데무스에 의하면 이 돈을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략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테네 인들이 배를 타기 위해서 피라이우스 항구로 향해 갈 때 갑자기 메두사의 머리가 아로새겨 진 방패가 없어졌다는 소란이 일어났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것을 찾는다는 구실로 모든 사 람들의 소지품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람들이 짐 속에 숨겨두었던 많은 돈은 압수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한 만큼의 군량을 사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테네 시민들이 도시를 비워둔 채 배를 타고 떠나는 광경은 처량하면서도 칭찬할 만했 다. 노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울부짖는 걸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예방하기 우해서 사전 에 미리 가족을을 타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서 아테네에 남겨 진 많은 늙은이들의 신세는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조차도 바닷가까지 달려자와 주인을 따라가고 싶어하며 짖어대었는데 그 모습 역시 애처로웠다. 페리클레스의 부친 크산티포스가 기르던 개는 도저히 주인과 떨어질 수 없었던지 바다에 뛰어들어 주인이 탄 배를 따라 헤엄쳐서 살라미스 섬까지 도착한 순간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지 금도 '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테미스토클레스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아 리스티데스를 다시 불러온 것은 가히 칭찬할 만하다. 아리스티데스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 자신이 주동이 되어 추방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더욱이 그가 복수할 생각으로 그리스를 저버리고 페르시아 군과 결탁하지나 않을는지 열려되었다. 그리하여 테미스토클레스는 추방된 후 어 느 정도 시간이 경고한 사람을 모두 불러들여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힘과 지혜를 모으도록 하자는 포고령르 제안했다. 에우리비아데스는 그의 본국 스파르타의 위신에 힘입어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위험이 닥치면 지레 겁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상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스트무 스로 후퇴하기를 원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제안에 반대하였다. 그가 다음과 같은 유명 한 말을 남긴 것은 바로 이때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출발하는 사람은 채찍질을 당합니다." 에우리비아데스가 위와 같은 말을 하였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어물거리는 사람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지도 않더군요." 에우리비아데스가 지위봉을 치켜들고 내려칠 기세를 보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금도 당 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때리시오. 그러나 이 말만은 들어주시오." 에우리비아데스는 그의 온유한 성격에 놀라며 한 번 말해보라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 는 더욱 간곡히 그를 설득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잃어버릴 집도 고향도 헚는 사람이 무 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더러 고향을 버리라고 하느냐고 말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사람 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답답한 사람아,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집도 성도 모두 버렸고. 생명도 영혼도 없는 한 갓 재산을 지키려다 노예가 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리스에 있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훌륭하오. 그것은 우리의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 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배는 당신 나라를 지켜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전과 같이 우리를 배반하고 줄행랑을 놓는다면 그리스 사람들 중 오로지 아테네 사람들만이 소중한 영 토와 자유가 넘치는 도시를 차지할 수 있을 뿐, 당신네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 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와 같이 말하자 에우리비아데스는 자신들이 후퇴하고 나면 아테네 군 이 그리스 연합군과 손을 끊어 버릴 것 같아 염려가 되었다. 한편 에레트리아 사람이 나서서 그를 나무라려고 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전쟁에 대해 말하겠다고요? 당신들의 칼을 차고는 있지만 오징어를 닮 았으니 어디 담이 있어야지요." 어떤 기록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문제로 선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함대 의 오른쪽으로부터 올빼미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 배의 돛대 위에 가서 앉았다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길조였다. 그리스 인들은 용기백배하여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곧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 함대가 팔레룸 항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새까맣게 뒤 덮고, 또 왕이 스스로 지상군 전체를 통솔하여 해변까지 이끌고 와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을 보고 그리스 병사들은 어느새 테미스토클레스의 말 따위는 잊어버렸다. 그들은 이스트무스 쪽을 바라보며 후퇴하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그들은 밤 사이에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키잡이들에게 어느 물길을 탈 것인지가지 이미 지시된 상태였 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후퇴해버리면 좁은 해협과 수로의 이점을 빼앗긴 채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분통이 터졌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여 좋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그는 시킨누스를 불러들였다. 시킨누스는 페르시아 인이었는데, 포로가 되어 테미스 토클레스의 아이들을 맡아보면서 그를 흠모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람을 크세르크세 스에게 밀사로 보내어 '아테네 군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뜻한 바가 있어서 페르시아 왕 에게 다음가 같은 사실을 비밀히 알려주노라'고 이르게 했다. 즉 '그리슨 군은 곧 후퇴하고 자 한다. 충고하건대 그것을 막는 것이 놓으리라. 그들이 지상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우 앙좌왕하고 있을 때 해전을 통해 전멸시키도록 하라'는 밀서를 전한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전갈을 자기에게 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각 함대 사령관에게 명하여 천천히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그 동안 따로 200척을 출동시켜 섬 전체를 포위하여 그리스 배가 한 척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락 지시했다. 이러한 움직 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은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티데스였다. 그는 테미스토클 레스가 자기를 추방한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막사로 찾아가서 함대가 적에 의해 완전 히 포위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찍부터 아리스티데스가 도량이 넓은 사람 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찾아온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 신이 시킨누스와 꾸민 일을 솔직히 털어놓은 후, 그리스 연합함대는 당신의 말이라면 믿을 것이니 이 해협에서 싸우도록 권유해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 클레스의 작전을 칭찬하고 이배 저배로 장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여기서 싸우자고 하였다. 그 러나 그들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파나이티우스가 테노스 섬으로부터 한척의 군선 을 타고 와서 모든 수로가 완전히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며 일대결전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함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에 자리를 잡고 준비되어가는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파노데무스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헤라클레스 신전 위쪽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곳은 살라미스 섬과 아티카 해안 사이로 바다가 가장 좁은 곳이다. 하지만 아케스토도루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는 메가라와의 접 경지대에 있는 뿔봉우리라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는 황금으로 만든 왕좌에 앉 아 있었으며, 곁에 있던 사관들은 전투에서 발생하는 낱낱의 사실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사령관선에 타기 전에 바닷가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때 세 사람의 포로 가 끌려나왔다. 그들은 단정한 용모에 값진 옷을 입고 금은보화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 의 부모는 아르타이크테스와 산다우테이며 그들의 외삼촌은 크세르크세스라고 했다. 예언자 에우프란티데스가 그들 단에 서자 제단에 드린 제물에서 커다란 불길이 찬란히 솟아올랐다. 바로 그때 오른편에서 누가 재채기를 했는데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에우프란티데스는 테미 스토클레스의 손을 잡더니 세 젊은이를 디오니소스 신에게 제물로 드리며 승리를 빌라고 하 였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을 제물로 받는 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그리스 인들을 위험 에서 구하고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렇듯 기이하고 무시무시 한 예언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평범한 방법으로써 가 아니라 기이하거나 엉뚱한 방법으로 구원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디오니소스를 외쳐불렀고, 포로들을 제단으로 이끌고 가서 예언자가 명령한 대로 제의를 진행하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레스비아 사람 파니아스가 전하는 바인데, 그는 학 식도 풍부하고 역사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적선의 수효에 관해서는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마치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비극 <페르시아 사람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날 크세르크세스는 1천 척의 배를 출동시키고, 또 가장 빠른 배 270척을 더 내었다. 바로 그러하였다. 아테네 군의 배는 180척이었다. 배 한 척에 18명씩 탔는데 그 중의 넷을 활쏘는 병사들이 었고 나머지는 중무장한 전사들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투장소를 신중하게 잘 택했던 것처럼 전투시간도 잘 정하였다. 그는 아침이면 늘 그렇듯이 바람이 일어 해협에 풍랑이 사나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배를 전 열로 세웠다. 파도는 중심이 낮게 만들어진 그리스 배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후미가 올라가고 갑판이 높아 균형을 잃기 쉬운 페르시아 군의 배들에게는 심한 타격을 주 었다. 페르시아 배들이 측면을 자주 보였으므로 그리스 군선은 떼를 지어 공격했다. 그리스 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일거일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싸우는 것은 그들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크세르크세스 함대의 총사령관이며, 적군 중에서 가장 용감 하고, 왕의 동생들 중 으뜸가는 아리아메네스가 거대한 배를 타고 위로부터 테미스토클레스 의 배를 향하여 창과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데켈레아 사람 아미 니아스와 페디아 사람 소시클레스가 함께 배를 몰고 가서 아리아메네스의 배에 정면으로 충 돌했다. 두 배는 서로 상대편 배에 갈고리를 던져 걸어서 잡아당겼다. 두 배가 서로 바짝 붙 게 된 후, 아리아메네스가 자신들의 배로 넘어오려고 하자 두 사람은 그를 창으로 찔러 바 다에 빠뜨렸다. 아르테미시아는 그의 시체가 부서진 배들 사이로 떠 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것을 크세르크세스에게 가져가도록 했다. 싸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엘레우시스 하늘 위로 커다란 불길이 치솟더니 바다에 인 접한 트리아시아 평원을 진동하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신령한 이아쿠스를 모시고 대군이 행렬을 지어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부터 안개가 일어 바다를 뒤덮고 밀려오더니 마침내 함대를 둘러쌌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기나 섬으로부터 갑 옷을 입은 무사들이 밀려오더니 그리스 군을 향해 손을 내밀더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들이 전투에 임하기 전에 도움을 청하며 기도를 드린 아이아키다이의 영웅들이라고들 생각 하였다. 처음으로 적의 배를 빼앗은 사람은 아테네 군의 선장 리케메데스였는데, 그는 그 배 의 표지를 떼내어서 월계관을 쓴 아폴론에게 바쳤다. 페르시아 군은 해협이 좁아서 그 대함 대의 일부밖에는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배들은 서로 자기편끼리 방해가 되었 으므로 이를 이용하여 그리스 군은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저녁까지 싸 워 적을 계속 밀어붙인 결과, 시모니데스가 한 말처럼 영광스럽게 길이 빛날 승리를 거두니 해전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얻은 것이었다. 이것을 실로 군인들이 용감히 싸운 것과 테 미스토클레스의 교묘한 전략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이 해전이 끝난 후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불행에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흙더미와 돌덩 이로 해협을 막아서 지상군을 살라미스 섬으로 이끌고 들어올 작정을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의 마음을 떠보려고, 함대를 헬레스콘트로 이동시켜 페르 시아 군이 거기에 만든 부교를 끊어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하여 유럽에 와 있는 아 시아 군의 퇴로가 막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리스티데스는 그 작전이 썩 내키 지 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전쟁을 값비싼 여가선용 정도로 생각하는 페르시아 왕과 싸웠고. 그 러나 만일 그를 그리스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면, 그는 곧 황금 양산 밑에서 뛰쳐나와 지략을 다하여 몸소 작전을 지휘할 것이오. 그는 단호한 자세로 자신 의 과오를 수정해나갈 것이며 모든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오. 테미스토클레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고.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 놓은 우리에게 조금도 이로 울 것이 없고.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 놓은 다리를 끊을 것이 아니라 되도록 그와 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 그들이 가능한 한 빨리 유럽에 빠져나가도록 해야 하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가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면 우리는 힘과 지혜를 합하여 그들을 그리스에서 몰 아내도록 합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위하여 포로들 중에서 페르시아 왕의 신하인 아르나케스를 찾아내 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그리스 군은 해전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헬레스폰트로 배를 몰고 가서 거기 있는 부교를 끊어버릴 계획이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대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알려드 리는 바이니 대왕께서는 속히 그 다리를 건너 대왕의 영토로 돌아가시라고 하오. 그 동안 이 사람은 그리스 군 연합함대가 지체하도록 시간을 벌어드리겠소." 이 말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놀라서 황급히 후퇴하고 말았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아 리스티데스가 현명하였다는 것은 뒤에 플라타이아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장수 마르도니무스는 아주 적은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리스 군은 간신히 승 리를 거두었다. 헤로도토스의 사기에 의하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 중에서 아이기나가 무훈상을 받았으 며 장군들 중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무훈상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시기하며 못 마땅해 했다. 그리하여 모든 군대가 펠로폰네소스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각국 장군들은 제 단 앞에 투표함을 설치하고 누가 가장 큰 공을 세웠는지 결정하기로 했다. 모두들 자기 자 신이 제일 공이 크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는 누구나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명했다. 라케다이몬 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사파르타로 데리고 가서 자기 나라 장군인 에우리비아데스에게는 용맹상을 주고, 그에게는 지략에 대한 상으로 올리브 관을 씌워주고 가장 좋은 전차를 내주 었으며 300명의 장정을 국경까지 딸려보냈다. 다음 올림픽 대회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경주 코스에 나타나자 모든 관람객들은 경기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종일토록 그를 바라 보며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바로 테 미스토클레스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는 너무도 기뻐하며 한 친구에게 털어놓기를, 그리스를 위해 바친 모든 노력의 열매를 바로 이 날 하루에 다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칭찬받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 사실은 그에 관한 일화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테네 인들이 그를 해군사령간으로 임명하자 그는 공사를 막론하고 아무리 사 소한 일이라도 출항하는 날까지 그 처리를 모두 미루어놓았다.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 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몰려들에 함으로써 자신을 대단히 권세 있는 인물로 보이려는 의 도에서였다. 바다에 던져진 시체들이 금목걸이며 금팔찌를 한 채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 는 자기를 따라 걸어오던 친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물건을 가지게나. 자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니니까 괜찮을 걸세." 안티파테스라는 미남청년은 처음에는 그를 꺼려하다가 그의 명성이 높은 걸 보고서 마침 내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에 한마디 평하였다. "젊으니, 시가니 우리 두 사람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주었구먼." 그는 말하기를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그저 쥐방울나무 취 급을 한 뿐이라, 날씨가 사나울 때는 그 그늘 밑에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곧 잎을 따고 가지를 쳐버린다고 하였다. 헤리포스에서 온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그의 영광은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아테네의 덕을 본 바가 많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당신 말이 옳고, 내가 만일 세리포스 사람이었다면 큰 인물은 되지 못했을 것이오. 마찬가 지로 당신이 아테네 사람이었다고 해도 결코 큰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오." 동료장군 중 한 사람이 자기도 아테네를 위해 상당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공 과 테미스토클레스의 공을 서로 비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잔치 다음날이 잔칫날을 헐뜯으며 이렇게 말했다오. '잔칫날에는 모든 사람이 준 비하느라 바쁘고 고단하지만, 내가 나타나면 누구나 다 한가로이 모여앉아 이미 차려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그러자 잔칫날은 대답하기를, '과연 옳은 말일게. 그렇지만 내가 없었 다면 당신도 있을 수 없고'라고 하였다오. 그와 마찬가지로 테미스토클세스가 없었더라면 당 신이 있기나 하였겠고?"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무척 귀여워하였으며, 그 또한 부인의 듯에 따라 아들을 몹시 아꼈다. 하루는 그가 아들을 바라벼며 껄걸 웃더니 이 아이가 그리 스에서 가장 세도 높은 어른이라고 말했다. "아테네 인들이 그리스 전체를 호령하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아테네 인을 지배하고, 네 어머니가 나를 지배하고, 네가 결국 네 어머니를 지배하지 않느냐." 모든 일에 있어 색다르기를 원한 그는 자기 땅 중 일부를 팔 때면 장사꾼에게 그 땅 이웃 에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선전하도록 하였다. 두 청년이 동시에 그의 딸에게 구혼을 해오자 그는 둘 중에서 돈이 많은 사람보다 됨됨이가 좋은 사람을 권하면서, 사람 없는 돈 보다 돈 없는 사람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말로써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테네 시를 재건하고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테오폼푸스의 설에 의 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일을 방해하지 말라며 스파르타의 장관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기록에 보면 그가 선수를 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사절의 자격으로 스파 르타를 방문하자 라케다이몬 인들은 아테네에서 새로 성을 쌓는 걸 비난하였다. 폴리아르쿠 스도 아이기나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이를 공식적으로 항의하였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였다. 그리고 의심스러우면 아테네로 사람을 보내어 직 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어서 진지를 쌓을 셈이었으며, 조사단이 오면 볼모로 삼을 생각이었다. 결국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화를 참으 며 그를 돌려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그는 피라이우스의 입지조건이 좋은 것을 보고 그 곳에 항구를 건설하 기로 하고 아테네 인들의 관심을 바다로 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정책은 고대 아테네의 왕들이 쓴 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되도록 바다를 멀 리하고 토지를 경작하는 데 재미를 붙이게 하려고 힘썼다. 이를 위하여 아테네와 포세이돈 이 누가 아테네 땅을 차지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내기를 하였는데, 아테네가 올리브나무를 지어냈기 때문에 이겼다는 신화까지 인용하였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풍자시인 아리스 토파네스의 말처럼 아테네 시와 피라이우스 항을 하나로 묶어놓은 정도가 아니라, 아테네 시가 피라이우스 항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평민들은 실권을 쥐게 되어 자신감을 얻었으며 결국 귀족들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배 타는 사람 들이 권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30인의 폭군들은 바다를 향해서 세운 공회당을 허물 어뜨리고 내륙을 바라보도록 새로 지었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싹트 기 쉬우며 농사짓는 백성들은 소수독재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물러간 다음 그리스의 군선들은 결우 동안 파가사이 해안에 모아두기로 했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테네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생각해둔 바가 있으나 그 성격상 공공연히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아테네 인들은 그것을 아리스티데스에게만 말하고 그가 찬성하면 실천에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 는 아리스티데스에게 자기 속셈을 널어놓으며 파가사이에 모여 있는 그리스 군선에 불을 지 르자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시민들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그보다 더 빈 틈없는 방법도 또한 그보다 더 저열한 방법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테네 인들은 그런 방법이라면 그만두라고 하였다. 암픽티온 동맹회의에서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제안하기를,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 거나 연합군에 원조를 보내지 않은 나라는 그 동맹에서 제명하자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 는 만일 테살리아, 아르고스, 테베스 등 여러 나라가 그 동맹에서 그 동맹에서 제명된다면 스파르타 인들이 어떤 안이든지 그들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있게 될 것을 염려하여 각 나라 에 사절단을 보내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한 나라는 31개국뿐이고 그나마 대부분이 작은 나 라들인데,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이 이 동맹에서 제외된다면 앞으로는 두세 개의 강대국에 의해 동맹회의가 좌우될 것이니 결코 이 제안에 동의해선 안 된다고 설득했다. 라케다이몬 인들은 이렇나 그의 행동을 보고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키몬이란 자를 각별히 후원하여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동맹국들 역시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였는데, 그가 배를 타고 다니면서 여러 섬나라로부터 금품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사기에 의하면, 그는 안드로스 사람들을 찾아 가 금품을 내라고 하면서, 설득과 권력이라는 두 여신을 모시고 왔다고 하였다. 이에 주민들 은 대답하기를, 자기들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강한 두 여신을 섬기고 있으니 바로 가난과 불 가능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 신들의 명령에 의해서 금품을 낼 수 없다고 하였다. 로디아스 섬의 시인 티모크레온은 그의 시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다소 심하게 꾸짖어, 추방된 사람들 로부터는 뇌물을 받고 본국에 돌아오도록 허락해주었으며, 손님이자 친구인 티모크레온 자 신에게서는 등을 돌려버렸다고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파우사니아스나 프산티포스를, 또는 레우티카다스를 칭송할지라도 내 오직 찬양하는 삶은 아리스티데스. 거룩한 아테네가 낳은 가장 선한 이로다. 테니스토클레스는 배신과 반역과 속임수로 라토나의 미움을 샀으며 더러운 대가를 치뤘노라. 로디안의 고향 바닷가로 돌아가기 원하는 친구 티모크레온을 저버리고 더러운 뇌물, 은화 3탈렌트만을 먹었으니, 어떤 자는 본국에 다시 부르고 어떤 자는 고국산천에서 내몰며, 또는 사영헤 처하기를 거듭하면서 언제나 자기 배만 채웠도다. 이스트무스 운동제를 베풀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찬 고기를 먹으며 그를 조롱했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내년에는 다른 사람이 이 잔치를 베풀게 하소서. 테미스토클레스에게서 추방형을 선고방은 티모크레온은 앞위 재볼 것도 없이 더욱 심하게 그르 비난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뮤즈여, 모든 그리스 인들에게 저의 이 노래를 널리 전해주소서. 그와 같이 하심이 진시로 합당하나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전쟁중에 페르시아 군과 내통한 티모크레온을 추방할 것인지에 대 한 논의가 벌어졌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티모크레온에게 불리한 쪽으로 투료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테미스토클레스가 메디아 인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았을 때 티모크 레온은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메이다 인의 동지는 티모크레온 한 사람이 아님을 이제 알았으니, 악당이 몇몇은 더 있으며, 제 이름 팔아 먹은 자도 나 하나만은 아니지만 어쩌다 나만 꼬리가 밟혔네. 아테네 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나쁘게 평하는 사람들의 말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게 되 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는 수 없이 자기의 전공을 자꾸 들추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 럴수록 사람들은 더 염증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자기 이야기에 시무룩해진 사람들을 보고, 늘 같은 사람의 신세를 지게 되어 싫증이 나는 것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는 또한 아르테 미스 신전을 지어놓고 아르테미스를 가장 좋은 조언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치 그 자신이 아테네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가장 좋은 조언자인 양 행세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멀멜리테에 있는 자기의 사택 가까 이에 세웠는데, 오늘날에는 사형수들의 시체와 자살한 사람들의 옷이나 목을 졸라매었던 밧 줄을 버리는 곳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신전 안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은 조각 상이 서 있었다. 그는 마음이 고결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외모도 영웅으로서의 풍채를 띠 고 있었다. 아테네 인들은 결국 패각투표를 통해 그를 추방함으로써 그의 명성과 위신을 꺾어버렸다. 그들은 한 사람의 세도가 너무 강대하거나 인품이 너무 위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다고 여겨질 수 없으며 동시에 민주적 생활을 누릴 수 없다고 여겨질 때는 이 방법을 통하여 추 방시켰던 것이다. 패각투표는 형벌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들끓는 시기심을 가 라 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시기심 많은 사람들은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의 콧대를 꺾는 데서 즐거움을 맛보며 그들이 불명예스럽게 추방되는 것을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아테네에서 추방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고스로 가서 머물렀는데 때마침 파우사니아스 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의 정적에게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그라울레 태생에 알크마이온의 아들인 레오보테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으며 스파르 타 인들도 이에 동조하여 그를 비난하였다. 파우시니아스는 테미스토클레스와 매우 친하였으나 처음에는 자기의 의도를 테미스토클레 스에게 숨겼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가 국민에 의해 쫓겨난 후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보 고, 과감히 가기 뜻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 여주면서 그리스 인들은 간악하고 배은망덕 하다며 그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하지만 테미스 토크레스는 단번에 파우사니아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거사에 참여할 것도 완강히 거부하였 다. 그리고 이 모반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파우사니아스 본인이 그런 생각 을 스스로 단념하거나, 허술한 방법으로 터무니없는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가 사형된 다음에 이 일과 관련된 편지와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테미스토클레스도 의심받을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스파르타 인들은 소리 높여 그를 공격하였으며 아테네의 정적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편지를 여러 통 써서 아테네로 보냈다. 악의에 찬 정적들이 사실을 날조해대는 것을 보며 그는 아테네 시민 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 보냈다. "나는 언제나 지배하는 일엠ㄴ 골몰한 사람으로 지배를 받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볼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어찌 나와 내 나라를 매개하고 호전적인 라케다이몬 인들의 노 예로 팔아 넘기겠는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압력을 행사하여, 병사들을 불러다가 그를 체포하여 그리스 법정에 세우라고 하였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코르키라 섬으로 몸을 피했 다. 이 나라는 과거에 그의 은혜를 입은 나라였다. 코르키라와 코린트 분쟁의 중재자로 임명 되었을 때 그는 코린트 인들에게 20탈렌트를 지불할 것을 지시하고 레우카스 시내와 섬을 공도의 이민지로 삼아 동등한 권한을 가지도록 해준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코르키라에서 다시 에리루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아테네 인들과 스파르타 인들이 거 기까지 추격해오자 그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그는 몰로시아의 왕 아드메투스에게 찾아갔다. 한번은 아드메투스가 아테네에 어떤 일을 요구한 적이 있엇는데 그 당시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오만불손 하게 거절해버렸다. 그리하여 아드메투스는 기회가 오면 반드시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복수하 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처지가 되고 보니, 테미스토클레스는 지난날의 일 때문 에 아드메투스 왕이 품고 있는 원한보다 본국 사람들의 들끓는 분노가 더 무섭게 생각되어, 아드메투스에게 부탁해보기로 하였다. 이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신기하고도 이상했다. 그는 아드메투스의 아기와자를 팔에 안고 벽난로 앞에 엎으렷다. 몰로시아 인들은 이와 같이 호 소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왕비 프티아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이 방법을 가르쳐주고 벽난로 앞에 아기 왕자를 갖다 주었다 는 설도 있고, 테미스토클레스를 추격자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한 종교적 이유를 얻기 위 하여 아드메투스 왕 자신이 이와 같은 연극을 꾸몄다는 설도 있다. 그 후 아카라나이 사람 에피크라테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가족을 아테네로부터 데려다주 어 서로 만나게 하였다. 스테심브로투스의 기록에 으하면 에피크라테스는 이 일로 나중에 키몬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후에 그의 가족에 관한 일은 스테심크로투스가 잊은 것인 지 또 는 테미스토클레스 본인이 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나중에 시칠리아로 가서 시라쿠세의 폭군 히에로 왕에게 딸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 히에로 왕이 그리스 전체 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히에로 왕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그 곳을 떠난 아시아로 갔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의심스럽다. 테오프라투스의 <군주열전>에 의하면 히에로 왕이 올림픽 경기에 경주마를 보내고 호화 로운 천막을 치고 있을 때, 테마스토클레스는 거시 모인 그리스 인들에게 폭군의 천막을 허 물어뜨리고 그의 말들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선동한 일이 있었다. 투키디데스에 의하 면 그는 걸어서 에게 해까지 가서 테르메 만의 피드나에서 배를 탔는데 동승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마침 바람이 좋지 않아 배가 나소스 근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곳은 당시 아테네 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겁이 나서 선장에세 자기 정체를 밝히 고 애원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만약 해변에 배를 댄다면 아테네 병사들에게 그들이 처음 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고 배를 태워줬다고 말하겠다고 한 것이 다. 그러나 선원들은 배를 돌려서 아시아 쪽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재산을 감추어두었다가 소아시아에 있는 그에게로 보내주었 다. 테오폼푸스에 의하면 그의 재산 중에서 발각되어 몰수된 것만 해도 100탈렌트, 테오프라 스투스에 의하면 이것은 80탈렌트였다는데, 테미스토클레스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가지 고 있던 재산은 3탈렌트도 되지 않았다. 티메에 도착해 보니 이오니아 해안지방의 주민들이 그를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 다. 그 중에도 에르고텔레스와 피토도루스는 특히 더 심하였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 이것은 실로 놓은 기회였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이 그 를 잡아온 사람에게 200탈렌트의 현상금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올리아에 있는 작 은 도시 에게로 피신해 갔다. 이 곳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아이올리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 며 소아시아의 세도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니코게네스뿐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사람의 집에 숨어 지내던 중 하루는 제사를 드리고 저녁식사를 하던 참이었는데 이 집 아이들의 선생으로 있던 올비우스가 이상스런 영감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은 시를 큰 소리로 읊어대었다. 밤이 말하여 그대를 이끌 것이며, 밤의 목소리가 그대에게 지혜를 주리라. 그 날 밤 테미스토클레스는 꿈을 꾸었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그의 배를 친친 감으며 차츰 목을 향해 기어올라왔다. 구렁이는 그의 얼굴에 와닿자 곧 독수리로 변해서 날개를 펼치더 니 그를 채어들고 먼 곳으로 날아갔다. 저멀리 금으로 만든 전령의 지팡이가 나타나자 독수 리는 어느새 테미스토클레스를 그 위에 고이 내려 놓았다. 그는 몸이 거뜬해지는 것을 느꼈 고 모든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니코게네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써서 그가 길을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대부분의 야만인들, 특히 페르시아 인들은 질투가 심하고 잔인하며 의심이 많아서 여자를 엄하게 다 루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정실의 아내뿐만 아니라, 돈으로 산 여종이나 철까지도 바깥사 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며, 집 안에 있을 때에도 여자들이 있는 방은 열쇠를 채웠다. 피 치 못할 일로 출타할 때는 여자들을 장막으로 가린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녔다. 니코게네스 는 이와 같은 수레를 준비하여 레미스토클레스를 그 속에 태워보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들에게는 이오니아에서 온 그리스 여인을 페르시아 궁정에 있는 귀족에게로 데려간다고 말 했다. 람프사쿠스 사람인 카론과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의하면, 크세르크세르는 사망한 뒤였으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아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에포로스, 디논, 클리타르쿠스, 헤라클 리데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테미스트클레스는 크세르크세스를 만나 러 간 것이었다고 한다. 연대기상으로는 투기디데스의 기록이 더 그럴듯하나 어느 쪽이 옳 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절대절명의 상황에 놓인 테미스토클레스가 처음 만난 사람은 아르타바누스 대장 이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그리스 인인데 대단히 중대한 일 로 왕을 만나뵙기 원하며, 그 일에 대해서는 왕께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였 다. 이에 대해서 아르타바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타국에서 오신이여, 나라가 다르면 풍속오 서로 다릅니다. 옳고 그른 것의 표준이 나라마 다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 족속의 풍속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바입니 다. 듣건대 그리스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다는데, 우리는 임금님을 지성 으로 모시며 이 우주를 보호하시는 한 법이라고 생가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손님께서도 우리 풍속을 따르시어 우리 임금님 앞에 무릎꿇고 경배를 드릴 생각으로 오셨사오면 임금님 을 뵙고 말씀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아니시라면 저 아 닌 다른 사람을 통하시어 뵙기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왕 앞에 무릎꿇고 머 리 조아리지 않고서는 왕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말을 듣고 대답하였다. "아르타바누스 장군, 저는 대왕의 영광과 권세를 더해드리려고 왔으므로 장군 나라의 풍 속을 따르렵니다. 페르시아 인에게 영광을 내린 신께서 제가 그와 같이 할 것을 원하시니 대왕님 앞에 경배를 드리는 사람의 수효가 더욱 많아짐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대왕 님을 뵈올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아르타바누스가 물었다. "당신을 누구시라고 전해야 합니까? 말씀을 듣자하니 범상한 분 같지는 않군요." 테미스토클레스가 말했다. "오, 아르타바누스 님. 대왕님보다 먼저 다른 분께 성명을 밝히지는 못하겠사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러한 이야기는 파니아스가 전하는 바에 의한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그의 <부귀론> 에서 말하기를,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타바누스의 집에서 일하던 에레트리아 여인의 소개로 아르타바누스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왕 앞으로 안내되자 그는 엎드려 예를 드리고 말없이 서 있었다. 왕이 통역자를 시켜 누 구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 대왕이시여. 저는 아테네 사람 테미스토클레스로 그리스에서 쫓겨난 몸입니다. 페 르시아에 많은 해를 끼쳤사오나, 실은 저로 인해 이익을 본 바가 더 많을 것이옵니다. 그리 스군이 대왕의 군대를 제때 추격하지 못하오록 힘썼사오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왕께 섬 김이 될 만한 일을 다소 하였사옵니다. 지금 이 역경에 처하고 보니 제 마음은 비참하기 이 를 데 없사오나, 대왕께서는 제게 호의를 베푸실 수도 노여움을 던지실 수도 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어 노여움을 풀어 주소서. 저희 나라 사람들이 저토록 제게 원한을 품고 잇는 것으로 미루시어 제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들인 공이 얼마나 크은지 촌탁하실 수 있을 것 으로 아옵니다. 그러므로 대왕의 노여움에 따라 행동하지 마시옵고, 이 기회에 대왕의 인자 함을 널리 떨쳐 보이소서. 이와 같이 간구하옵는 저를 구원하시어 그리스의 적이 된 몸을 멸망케 하지 마옵시기 바랍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또한 니코게네스의 집에서 꾼 꿈 이야기와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의 신 전에서 받은 예언 '성신의 이름을 가진 자에게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왕을 찾 아온 것은 성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제우스와 크세르크세스 두 사람은 무두 위대한 인물 로 왕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왕은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는 내심 테미스토클레스의 품성과 용기에 감복하였으나 짐짓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측근들에게 이것은 천신이 도운 것이라며 흡족해 하였고, 아리마니우스 신에게 기도하기를 다른 적국들도 그리 스 인들처럼 자기 나라에 가장 용감한 인물을 학대하여 추방시키기 바란다고 하였다. 왕은 여러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아서 밤 중에 자다말고 세 번이나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아테네 사람 테미스토클레스를 얻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왕은 테미스토클레스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과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초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였으며, 더욱이 대장 복사네스가, 테미스토클레스가 자기 앞을 지나 왕에게 나아갈 때 "뱀같이 간사 한 그리스 놈아, 우리 대왕님을 보호하시는 신령이 너를 이리로 이끌고 왔더냐"라고 신음 소리처럼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그가 왕 앞에 나아가 다시 한번 엎드려 절을 올 리자 그에게 아침인사를 하더니,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200탈렌트를 주어야 되겠다고 말 했다. 누구건 그를 잡아오면 200탈렌트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그 돈을 본인이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은 또한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하사하 겠다고 약속하며 그에게 그리스의 사정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한 번 이야기해보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테미스토클레스는 대답하기를,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화려한 페르 시아 양탄자와 같아서 넓게 펼치면 아름다운 무늬가 모두 나타나지만, 접어버리면 그 무늬 가 감춰지게 되므로 결국 자신에게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왕이 이 비유를 대 단히 마음에 들어하면서 원하는 만큼 넉넉한 시간을 가지도록 일렀다. 그는 일 년이 필요하 다고 하였다. 그는 일 년 동안 페르시아 말을 충분히 익혀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백성들은 그가 왕에게 그리스 사정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엄청난 변동이 생기고 그 동안 왕의 신임을 받던 자가 쫓겨나는 일까지 일어나자, 귀족들은 테미스 토클레스가 뻔뻔스럽게도 왕에게 자기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경 계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전례없는 대접을 받고 있었다. 왕은 틈만 나면 그 를 불러들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사냥을 나가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는 왕의 모친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어 종종 담소를 나누었다. 왕의 특명으로 그는 마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 었다. 라케다이몬 사람 데마라투스는 왕이 은총을 내릴 것이니 무엇이건 청해보라는 말을 들었 을 때, 왕과 같은 모자를쓰고 말을 타고 사르디스의 거리를 돌아다녀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 때 왕의 사촌 미트로피우스테스가 데마라투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 머리는 그것을 쓸 것이 못 되네. 제우스 신이 자네 손에 천둥과 번개를 쥐어준들, 자네가 제우스 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왕 역시 그에게 몹시 화를 내며 누가 뭐래도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테 미스토클레스가 왕을 달래어 그를 용서하게 했다. 후세의 페르시아 왕들은 정치적으로 그리스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리스의 유력 인살ㄹ 자기 나라로 데려오면 테미스토클레스처럼 대우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부귀영 화를 누리며 많은 사람의 앙모를 받게 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고 한다. "얘들아, 우리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러 사기가 일치해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은 마그네시아, 람프사쿠스 미우스의 세 도 시를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주었고 빵, 술 고기를 마음껏 가져다 먹도록 하였다. 키지쿠스 사 람 네안테스와 파니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외에도 페르코테와 팔라이스케프시스의 두 도 시를 더 주어 각각 침구 및 가구와 의복을 공급케 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테미스토클레스가 그리스의 동향을 살피러 해안지방으로 나가볼 계획을 세우고 있 었다. 그런데 당시 프리기아 지사였던 페르시아 사람 에피픽시에스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피시디아 사람 여럿을 훈련시켜두고 있었다. 테마스토클레스가 사자의 머리라 고 불리는 작은 도시에서 밤을 지내기를 기다려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하루는 그가 낮잠 을 자는데, 신들의 어머니 딘디메네가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테마스토클레스, 사자의 머리를 경계라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사자에게 먹힌다. 이 경고 를 해주는 대가로 너의 딸 프네시프톨레마를 내 시녀로 만들어라." 테미스토클레스는 매우 놀라 곧 딘디메네에게 기도를 드리고, 큰길을 벗어나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감으로써 그 곳을 피하였다. 밤이 되자 그는 들판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낮에 그의 텐트를 실은 말 한 마리가 강을 건너다 넘어져서 값진 담 요가 젖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리하여 하인은 담요를 말리기 위해서 넓게 펴서 널어두었 다. 그때 피시디아 사람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암살하기 위해서 칼을 뽑아들고 다가오고 있 었다. 그들은 달빛이 희미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말리려고 내걸은 담요를 테미스 토클레스가 잠들어 있는 천막으로 잘못 알게 되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서 담요를 들치 니 그 곳에서 파수보고 있던 테미스토텔레스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덮쳤다. 이와 같 이 해서 커다란 위기를 모면하게 되자 그는 마그네시아에 신전을 지어 여신 중의 여신인 딘 디메네를 모시고, 자기 딸 크네스프톨레마를 여사제로 두어 여신을 섬기게 하였다. 그는 사르디스로 와서 여러 신전을 돌아벼며 건물과 장식품 등 그 곳에 바쳐진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딘디메네 신의 신전에서 '물 긷는 모습'이라고 불리는, 청동으로 만든 높이 2큐 빗 가량의 처녀조각상을 보았다. 이것은 그가 아테네 수리관으로 있을 때 공공용수를 불법 으로 사용한 자들로부터 받아낸 벌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조각상이 타국에서 포로신세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가여운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페르시아에 와서 얼마나 큰 권세를 얻었는지 아테네 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라이다 지사에게 그것을 아테네로 돌려보내라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지사는 몹시 화내며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겁이 나서 지사의 아내와 첩들에게 뇌물을 써서 겨우 무마시켰다. 그는 페르시아 인들의 시기심이 두려워져서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테오폼푸스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의 다른 지방을 여행하려던 생각을 바 꾸고 마그네시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값진 예물을 받는 등 페르시아의 대귀족들과 같은 영광을 누리며 오래도록 잘 지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왕은 나라 안의 정사에만 마음을 두 고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생각은 접어둔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이집트가 아테네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고, 키몬을 장수로 한 그리스 수군이 키프로스와 시칠리아까지 진격해왔다. 사태가 이와 같이 되자 왕은 그리스 군의 기 세를 꺾어 버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군을 이동시키며 장수들을 임명하였다. 왕은 마그네시아 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여러 차례사람을 보내어 그리스 군을 공격하고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였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인들에게 적개심을 품을 수 없었고, 이 전쟁에 나섬으로 써 얻게 될 대장으로서의 영예나 권세도 더 이상 탐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 군에게 키 몬을 비롯한 명장이 많았으므로 승산이 없는 판단을 내린 듯도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과거에 쌓아올린 승리와 영광을 더럽히고 치욕스런 이름을 얻게 될 것이 두려워 그쯤에서 인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친구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일일이 악수를 나눈 다음 소의 피를 마셨다. 그것은 흔히 자살에 사 용하던 방법이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더 효과가 빠른 독약을 마셨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테 마스토클레스는 일생 동안 정치인으로서 또한 군인으로 많은 활동을 한 뒤, 65세에 마그네 시아에서 절명하였다. 페르시아 왕은 그가 죽은 이유와 그 방법을 전해 듣고 어느 때보다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유가족과 그의 친구들에게 변함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부인 아르키페는 알로페케 사람 리산데르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는 아들이 세 명 있었는데 아르케프톨릿, 폴레우크투스, 클레오판투스였다. 철학자 플라톤에 의하면 이 가운데 클레오판투스는 말타기의 명수였으나 별다른 재주는 없는 사람이었다. 이 들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로 디오클레스와 네오클레스가 있었는데, 네오클레스는 어렸을 때 말에게 물려 죽였다. 디오클레스는 외조부 리산데르가 데려다가 길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딸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 am네스프톨레마는 둘째부인 소생이며 그의 이복동생인 아르케프 톨리스와 결혼하였고, 다른 딸 이탈리아는 키오스 섬 사람 판토이데스와 결혼하였으며, 시바 리스는 아테네 사람 니코메데스와 결혼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자살한 뒤 그의 조카인 프 라시클레스가 마그네시아로 와서 다른 아들들의 동의를 얻어 그의 딸 니코마케와 결혼하고, 막내딸 아시아를 맡아 길렀다. 마그네시아 인들은 장터에 있는 굉장한 무덤을 가리키며 테미스토클레스의 무덤이라고 한 다. 안도키데스는 자기 친구에게 아테네 인들이 그의 무덤을 파해쳐서 유골을 곳곳에 던져 두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평민들이 귀족들의 분 노를 사도록 하기 위해서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필라르쿠스는 자신의 사기에 연극적 인 요소를 많이 섞어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테미스 토클레스의 아들로 네오클레스와 데모폴리스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마치 비극에서처럼 동정 을 불러 일으키려고 했다. 지리학자 디오도루스는 <무덤기>라는 책에서, 피라이우스 항에서 배를 타고, 알키무스 산이 팔굽처럼 뻗어내릴 곳으로 들어가보면 바다가 움푹하게 땅에 에 워싸여서 제단 모양을 한 테미스토클레스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 추측에 가깝다. 극작가 플라토가 다음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 역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대의 고결한 무덤은 높은 곳에서 변함없이 상인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그들이 오고가는 걸 말없이 지켜보는구나. 전쟁으로 달려가는 저 함대는 그대의 눈 아래 승리를 거두리. 마그네시아에 살던 테미스토클레스 일족들은 숱한 영예와 특전을 누렸는데 그것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철학자 암모니우스의 사학에서 공부할 때 나는 테마스토클레스라는 이름의 아테네 사람과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역시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