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단편 문학선(2) - 체홉 外 ----- 차 례 ----- 작가 소개 1. 아를르의 여인 <도데> 2. 마지막 수업 <도데> 3. 비계덩어리 <모파상> 4. 목걸이 <모파상> 5. 죽은 사람들 <조이스> 6. 하숙집 <조이스> 7. 가든 파티 <맨스필드> 8. 해변에서 <맨스필드> 9. 귀여운 여인 <체홉> 10. 간이이층이 있는 집 <체홉> <작가 소개> *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년-1897년. 프랑스 니임에서 출생했으며, 경제적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낸 후 시집 <연애하는 여인들>을 출판하면서 문단에 알려졌다. 순수하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는 가난한 사람들, 우매한 사람들, 괴로움에 젖은 사람들을 시종일관 온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작품 속에 그리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를르의 여인> <별> <마지막 수업> 등이 있으며, 장편 <꼬마 씨>가 있다. *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1893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디에프에서 출생했으며, 어린시절 친구인 플로베르에게 엄격한 문학 수업을 받은 후 문단에 데뷔했다. 1880년 <비계덩어리>를 발표하면서 유명해진 그는 대표작 장편 <여자의 일생>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에밀 졸라와 함께 자연주의 작가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위의 작품 외에 장편 <벨아미>, 단편 <목걸이> 등이 있다. *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년-1941년. 아일란드 더블린 출생으로 시집 <실내악>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1914년에 발표한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젊은 예술가의 초상>로 문단에 주목을 받았으며, 장편 <율리시즈>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혁신적인 기법과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에 의한 묘사로 20세기 전반의 독보적인 문학가로 명성을 얻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위의 작품 외에 열두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여 더욱 유명해진 <피네건즈 웨이크> 등이 있다. * 캐더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1888년-1923년. 뉴질랜드 웰링턴 출생으로 단편 <독일 하숙집에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단편집 <행복> <가든 파티> <비둘기 집>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예술이란 작가가 그 주변에서 발견한 찬란히 빛나는 미를 최대한으로 전달하는 것이며 또한 추하고 부패한 것에 항거해서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예술관을 밝혔다. 유고작품으로 <일기> <서간집> 등이 있다. * 안톤 체홉 1860년-1904년. 러시아 흑해 연안의 따간로그에서 출생했으며, 단편집 <잡화점>이 출판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사할린 섬> <6호실> 등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과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의 희곡을 발표했다. 세계적인 단편 작가인 그의 작품은 그 자체가 리얼리즘의 예술인 동시에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 상징적인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귀여운 여인> <뚱뚱이와 홀쭉 사나이> <슬픔> <농민들> <3년> <까치밥나무> 등 수많은 단편들이 있다. 1. 아를르의 여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내 방앗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자면, 길가에 서 있는 팽나무가 심어져 있는 널찍한 정원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 농가의 앞을 지나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프로방스 지방의 소지주의 전형적인 집으로 붉은 기와를 이고 있으며, 갈색의 널따란 정면 벽에는 불규칙하게 창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훨씬 높이 올라간 곳에는 바람개비가, 그리고 짚더미를 싣는 활차(滑車)가 있었으며 갈색의 마른 여물 다발이 삐어져 나와 있었다...... 왜 이 집이 내 마음을 끄는 것일까? 어째서 그 닫혀진 출입문이 내 가슴을 쥐어 짜는 것일까? 그것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이 집은 나를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위가 아주 조용하기 때문이다...... 집 앞을 지나가도 개가 짖지 않고 색시닭은 우는 소리도 내지 않고서 치솟아 날곤 했다...... 집안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만약 창마다 흰 커튼이 쳐져 있지 않고, 지붕 위의 굴뚝으로부터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았다면 텅 빈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제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을 무렵, 나는 마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눈부신 햇살을 피하기 위해 팽나무 그늘 밑으로 해서 이 농가의 울타리 곁으로 바싹 다가서서 걷고 있었다...... 집 앞의 길에서는 사내들이 묵묵히 짐마차에 여물단들을 싣는 일을 끝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출입구는 열려져 있는 채로였다. 그곳을 지나면서 흘낏 눈을 주었었더니 뜰 안쪽에- 머리를 양손으로 고이고서- 돌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있는 머리가 새하얗게 센 키 큰 노인이 보였다. 짧디짧은 저고리에 낡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멈췄다.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아주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쉿! 우리 주인 영감이라오...... 아드님의 불행이 있은 뒤부터 언제나 저 지경이 되어 있다오." 그때, 상복(喪服)을 입은 한 여자와 작은 소년 하나가 책갈피를 금물로 입힌 두터운 성경책을 손에 들고 우리들이 서 있는 옆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나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미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오시는 주인 마님과 둘째 아드님이라오. 맏아드님께서 자살한 후로는 매일같이 미사에 나가신다오...... 그렇지요. 주인 어른께서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수. 우리 주인 어른께선 죽은 아드님의 옷을 걸치고 있으신 거라오. 사람들이 아무리 그 옷을 벗기려 해도 막무가내시라오. 헤이, 이랴 쩌 쩌!" 마차는 덜커덩 흔들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듣고 싶었기 때문에 마차 위에 앉은 사나이에게 부탁하여 그 여물더미를 실은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그 마차 위의 여물더미 속에 묻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게 된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장이라고 했다. 스무 살이나 된 훌륭한 농부로서 소녀처럼 예쁜 남자였다. 건장한 몸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굉장한 호남자여서 모든 여자들이 탐을 냈지만 그 사람 쪽에서는 어떤 한 여자만이 염두에 있었다. -빌로도와 레이스로 몸치장을 한 아를르의 젊은 여자로서 그는 오래 전부터 아를르의 리스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는 맨처음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여자는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나 있었고 그녀의 양친도 이 고장의 토박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여자를 맞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여자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면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추수가 끝나면 두 사람을 결혼시키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요일 저녁, 농가의 뜰에서 온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어치운 참이었다. 그것은 마치 결혼피로의 축하연과도 같았다. 약혼녀는 그 좌석에 참석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 여자를 위해 진심으로 축배를 들었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문 앞에 나타나서 떨리는 소리로 에스떼브 영감님에게, 영감님 한 분에게만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에스떼브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영감님." 하고 사내가 말했다. "영감님은 순결치 않은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그 여자는 이태 동안 나의 정부였습니다. 내 얘기를 밑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이 편지입니다!..... .여자의 부모들도 모두 다 승낙했습니다. 나에게 그년을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영감님의 아들이 그년에게 청혼을 한 뒤로부터는 그년의 부모도 또 그년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과거가 있는 계집이기 때문에 설마 다른 남자의 아내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좋아!" 하고 에스떼브 영감은 편지에 눈길을 꽂았다. "안에 들어가 인사로 포도주나 한 잔 하시구려." 사나이는 말했다. "싫습니다. 난 원통해서 술이고 뭐고간에 마실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와서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래서 식사는 무난히 끝났다...... 그날 밤, 에스떼브 영감과 그 아들은 들로 나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밖에 있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직 자지 않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지주영감은 아들을 어머니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애한테 키스나 해주구려! 딱하고 가엾은 놈이야......" 장은 이제 아를르의 여인에 대한 일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것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는 전보다도 더욱 사랑하게끔 되었다.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그를 죽게끔 한 씨앗이 된 것이다. 가엾게도!...... 때로는 방구석에서 혼자 하루종일 꼼짝도 않고 앉아 있기도 했고, 또 때로는 정신없이 밭에 나가 일에 묻혀 있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날품팔이들이 열 사람씩이나 붙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혼자서 해치웠다...... 저녁이 되면 아를르의 길거리로 나가 마을의 높고 긴 종루가 서쪽 하늘에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곧장 걷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돌아왔다. 결코 더 멀리 가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이토록 늘 슬픔에 싸여 외돌토리가 되어 지내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모두 다,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어떤 불길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때,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머니는 그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머금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래, 좋아, 장! 끝내 그 여자가 갖고 싶으면 맞아들여도 좋아." 부친은 치욕을 느껴 새빨개진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장은 고개를 흔들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말았다. 그날부터 그는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언제나 명랑한 척했다. 무도회나 술집, 그리고 소떼에게 낙인을 찍은 후 으례 갖게 되는 마을의 잔치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게끔 되었다. 퐁비에이유의 축제에서 파랑돌 무용의 음두(音頭)를 잡는 것도 그였다. 부친은 "저 녀석이 어젠 상처가 아문 모양야" 하고 말했지만 어머니로서는 변함없이 걱정스럽기만 해 전보다도 더 아들의 태도를 자세히 살폈다...... 장은 양잠실(養蠶室) 바로 곁에 있는 방에서 동생과 함께 잤었는데 그의 노모는 두 아들이 자는 바로 옆방에 자기 침대를 옮겨 놓고 잤다...... 밤중에 누에 시중으로 자기의 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소지주들의 수호신인 성 엘롸의 축일이 눈앞에 닥쳐왔다. 농가에서는 큰 즐거움에 싸이는 날이었다...... 모두에게 샤또오뇌프 주(酒)가 돌아가게 되고 포도 시럽도 마냥 먹을 수 있게 나온다. 그리고 밀타작 마당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모닥불이 기세좋게 타오르며, 팽나무에는 하나 가득 색등(色燈)들이 밝혀진다...... 성 엘롸 만세! 모두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파랑돌을 춤춘다. 동생은 새로 만든 작업복을 불에 태웠다...... 장 자신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에게도 춤을 추자고 나섰다.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밤중이 되자 모두들 잠자리로 향했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졸음이 와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만은 잠이 들지 않았다. 동생이 후에 한 얘기로는 장은 밤에 일어나 앉아 울었다는 것이다...... 아아! 정말 그는 무척이나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샐 무렵. 어머니는 누군가 자기 침실 앞을 지나가는 발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장이냐?" 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재빨리 일어났다. "장, 어딜 가는 거냐?" 그는 다락방에 있었다. 어머니가 뒤를 쫓았다. "왜 그래, 쓸데없이!" 그는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장, 우리 장아, 대답을 해라. 왜 그러는 거니?" 손을 떨면서, 늙은 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문고리를 찾았다...... 창이 열리면서 뜰에 깐 포석 위로 무엇인가 털썩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가엾게도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아! 우리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정(情)이라는 것! 아무리 상대를 경멸하려 해도 연정을 끊을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만나 수군거렸다. 엊저녁 에스떼브 영감님 집쪽에서 누가 그렇게 큰 소리로 울었었느냐고. 그것은 뜰에서, 이슬과 피에 범벅이 된 포석 앞에서 가슴을 풀어헤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양팔에 껴안고 뼈가 깎이는 슬픈 소리로 운 소리였다. <끝> 2. 마지막 수업 -어느 알사스 소년의 이야기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그날 나는 등교가 무척 늦어졌어요. 게다가 아멜 선생님이 분사법(分詞法)에 관해 질문하겠다고 하셨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책망을 들을까 봐 꽤 겁이 났어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학교를 가지 않고 벌판이나 싸다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날씨는 활짝 개여 있었어요. 숲가에서는 티티새가 떼지어 지저귀고, 제재소 뒤 리뻬르 들에서는 프러시아 군대들이 훈련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것들이 나에게는 분사법보다 더 마음에 들었지만, 나는 참고 학교로 뛰어갔어요. 면사무소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철책을 두른 게시판 앞에 모여 있는 것이 내 눈에 띄었어요. 이태 전부터 패전이니 징발이니 하는 프러시아 군사령부의 여러 가지 언짢은 뉴스들은, 다 이곳에서 나왔던 거예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나는 여전히 뛰어가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광장을 지날 때였어요. 대장간집 와슈테르 영감이 조수와 함께 게시판을 들여다보다가 말하는 것이었어요. "얘야, 그렇게 서두를 거 없다. 지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영감이 나를 놀리는 줄로만 알고 숨을 몰아쉬면서 아멜 선생네의 비좁은 마당에 뛰어들어갔어요. 평소에는 수업이 시작되면 으례, 책상 뚜껑을 여닫는 소리며 책을 잘 외우기 위해 귀를 막고 커다란 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소리, 그리고 '좀 조용히 해' 하고 책상을 마구 두들겨 대는 선생님의 회초리 소리 등이 떠들썩하게 한길까지 들려와, 나는 그 법석을 부리는 통에 살짝 내 자리로 가려고 하다가 주춤하곤 했지요. 그런데 그날은 일요일 아침처럼 조용했어요. 열린 창문을 통해, 진작 제 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그 무서운 회초리를 팔에 끼고 서성대는 아멜 선생님이 보였어요. 나는 이처럼 조용한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가 앉는 도리밖에 없었어요. 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선생님은 아무 화도 내지 않고 날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프란츠, 어서 네 자리로 가서 앉거라. 우리는 그냥 수업을 시작할 뻔했구나." 나는 얼른 의자 너머의 내 자리로 가 앉았어요. 두려운 마음이 좀 사라지자, 선생님이 푸른 프록코트 차림에, 가슴에는 주름 잡힌 장식을 달고, 수놓은 검은 비단으로 된 둥근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것은, 장학관의 시찰이 있거나 시상식 같은 것이 있는 때에만 입는 예복 차림이었어요. 그리고 교실 전체에 여느 때와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어요. 가장 놀란 것은, 평소에 비어 있던 교실 안쪽 의자에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었어요. 머리에 삼각모를 쓴 오제 영감과 전면장, 우체부,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어요. 그들은 저마다 슬픈 표정들이었어요. 오제 영감은 모서리가 다 해어진 프랑스어 초보 교재를 무릎 위에 펴놓고, 그 위에 커다란 안경을 올려 놓고 있었어요.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아멜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가더니, 나를 맞아줄 때와 다름없는 부드럽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어요. "여러분, 이것이 내 마지막 수업이에요. 베를린에서 알사스와 로렌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지시가 내렸어요. 내일 새 선생님이 오십니다. 오늘로서 프랑스어 공부는 끝입니다. 명심해 들어요." 나는 선생님의 이와 같은 몇 마디 말씀에 마음이 흔들렸어요. 아, 고약한 놈들 같으니! 면사무소에 나붙은 게시는 바로 그거였어요. 마지막 프랑스어 공부- 그런데 나는 그때 겨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이제 아주 배우지 못하게 된단 말인가! 이대로 끝맺어야 하나! 이제는 헛되이 보낸 그 시간들이- 새 둥지나 찾아다니고 자아르 강에 얼음이나 지치러 다니느라고 학교를 빠진 시간들이 한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조금 전만 해도 그처럼 지겨운 생각이 들고 두려운 생각이 앞서던 내 책들- 문법책, 성경 등이 이제 와서는 헤어지기 아쉬운 친구처럼 생각됐어요. 아멜 선생님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이었어요. 선생님이 떠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벌을 받고 회초리로 얻어맞던 생각은 씻은 듯 가셔 버렸어요. 가엾은 선생님!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옷을 잘 차려입은 것도 이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마을 영감들이 교실에 와 있는 것도 그 때문이구요. 그것은, 그들이 학교에 좀더 자주 얼굴을 내놓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있다는 뜻으로도 보였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선생님이 사십 년 동안이나 수고하신 공로에 대해 감사하고, 또 사라져가는 조국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려는 뜻도 곁들여 있는 것같이 보였어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나를 지명하셨어요. 내가 욀 차례가 된 거예요. 내가 그 분사법을 조금도 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줄줄 욀 수만 있었던들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나 나는 첫마디부터 막혀 버렸어요. 나는 안타까운 생각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만 흔들고 있었어요. 아멜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프란츠, 난 널 탓하지 않아. 넌 충분히 뉘우치고 있을 테니까. 으례 그런 거야. 누구나 이렇게 생각해 왔지. '뭐 서두를 것 없지 않나, 내일도 있는데......' 하고. 그 결과 너처럼 되는 거야. 아, 공부할 것을 날마다 내일로 미룬 게 우리 알사스의 가장 큰 불행이었어. 이제 저 프러시아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야. '뭐라고? 너희는 프랑스인이라며 너희 말도 할 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군!' 하고. 하지만 프란츠, 너만의 잘못은 아니야. 우리가 다 가책을 느껴야 해.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어. 몇 푼의 돈을 더 벌기 위해 여러분을 밭이나 공장으로 보내기를 원했지. 그럼 나 자신은 가책을 느낄 만한 짓을 하지 않았나? 공부시키는 대신 우리 집 마당에 물을 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 나는 은어를 낚으러 가고 싶을 때, 여러분을 놀린 적이 없었던가?" 아멜 선생님은 이어 프랑스어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즉,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증한 말이며, 우리가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한 겨레가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될 지라도 자기 말만 잘 간직하면, 마치 감옥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요. 다음에 선생님은 문법책을 읽어 주었어요. 나는 그것이 하도 알기 쉬워 놀랄 지경이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이 아주 쉬워 보였어요. 하긴 내가 이처럼 열심히 들은 적이 없었고, 또 선생님이 그처럼 성의있게 설명해 준 적도 없었어요. 그것은 이 가엾은 선생님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전부 우리의 머리 속에 단번에 넣어주려는 듯이 보였어요. 우리는 외기를 끝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쓰기 연습을 했어요. 아멜 선생님은 이 날을 위해 새 쓰기 책을 준비했는데, 거기에는 동그스름한 아름다운 글씨체로 '프랑스, 알사스, 프랑스, 알사스' 하고 씌어 있었어요. 그것은 마치 조그마한 깃발들이 우리 책상에 꽂혀 교실 전체에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어요. 모두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몰라요. 아무도 떠들지 않았어요. 펜촉이 노트 위를 스치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어요. 한번은 풍뎅이들이 날아들었으나 아무도 거기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어요. 그것은 무슨 프랑스어라도 되는 것처럼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작대기를 긋고 있던 꼬마들까지도 그랬어요. 나는 학교 지붕 위에서 꾸르르 우는 비둘기들의 울음 소리를 듣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 비둘기들도 멀지않아 독일어로 울게 되지 않을까?' 내가 가끔 책에서 눈을 들어 보면, 아멜 선생님은 교단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마치 이 조그마한 학교를 온통 눈 속에 넣어 가기라도 할 듯 주위의 물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똑같은 장소에서 교정을 마주보며 같은 교실에서 사십 년 동안을 지내온 거예요. 다만, 오래 쓰는 동안에 의자와 책상들이 닳아 반들거리고, 마당의 호두나무가 자라고, 선생님이 심은 홉덩굴이 지붕까지 뻗어 창문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선생님은 이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거예요. 2층에서는 선생님의 누이가 짐을 꾸리느라고 왔다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러니 선생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이튿날이면 선생님과 그 누이는 이 땅을 아주 떠나야 하거든요. 그러나 선생님은 수업을 끝까지 계속하려는 각오를 굳게 하고 있었어요. 쓰기가 끝나자, 다음은 역사 시간이었어요. 다음에 우리 꼬마들은 바, 브, 비, 보, 뷔를 합창했어요. 교실 안쪽에서는 오제 영감이 교과서를 두 손으로 든 채 안경을 쓰고 아이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띄어 읽고 있었어요. 그도 무척 열심이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감동한 나머지 떨리고 있었어요. 그의 책 읽는 소리가 하도 우스워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아, 나는 이 마지막 수업을 평생 잊을 수가 없겠지요. 성당의 괘종시계가 열두 시를 치더니 이어 앙젤뤼의 종소리가 들려 왔어요. 때마침 교실 창문 아래로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프러시아군들의 나팔소리가 들려 왔어요. 아멜 선생님은 매우 창백한 얼굴을 하고 교단에서 일어났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나는...... 나는!......" 하고 선생님은 말씀했어요. 선생님의 목줄을 무엇인가가 죄이고 있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말을 다 끝맺지 못했어요. 선생님은 흑판을 향해 돌아서더니, 백묵을 쥐고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었어요. '프랑스, 만세!' 선생님은 벽에 이마를 댄 채 한참 계시더니, 우리에게 손짓하면서 알려 주는 것이었어요. "끝났다...... 다들 돌아가거라!" <끝> 3. 비계 덩어리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며칠째 계속해서 패잔병 부대가 거리를 지나갔다. 군대라기보다는 유랑민의 무리 같았다. 먼지가 잔뜩 묻은 수염은 자랄 대로 자라고, 누더기 같은 군복을 걸치고, 깃발도 연대도 없었다. 지친 다리를 힘없이 끌면서 그저 앞을 향해서만 걸어간다. 모두 가눌 길 없이 피곤한 모양인지 뭣을 생각할 기력도 결단력도 잃은 듯하다. 그래도 발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타성 때문이요, 걸음을 멈추면 이내 피로에 사로잡혀 쓰러질 것만 같기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나이든 응소병(應召兵)이었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으로서 평상시에는 연금을 타며 한가로이 지내 왔었는데, 무거운 총을 메게 됐으니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는 유격대에 배속된 젊은 녀석들, 몸 놀림도 민첩하고 만용도 잘 부리지만 일단 유사시에는 오금이 떨려서, 진격도 빠르지만 후퇴도 그에 못지않게 빠르다는 패거리들이다. 그들과 뒤섞여서 빨간 바지도 간간이 보인다. 아마 어딘가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박살이 난 사단의 생존자일 것이다. 그처럼 잡다한 옷차림의 보병이 칙칙한 옷을 입은 포병과 함께 가고 있는가 하면, 용기병(龍騎兵)의 번쩍거리는 철모가 하나 갑자기 떠올라 보일 적도 있었다. 행군에 익숙한 보병 뒤를 쫓아가노라니 무척 힘에 겨운 모양으로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의용군 부대도 후퇴하고 있었다. '구국의 부대'라느니 '결사대'라느니 '혈맹단'이라느니 이름만은 용감하지만 보는 바에 의하면 비적 떼와 다름없다. 그 부대장이라는 것도 얼마 전까지는 포목장수였거나 씨앗장수, 기름장수, 비누장사였던 자들로서 시절을 만나 군인이 되고 장교로 임명됐지만 그것은 오직 돈푼이 있거나 수염이 길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자가 일단 긴 칼을 차고 견장을 달고 군복 차림으로 몸을 굳히게 되면,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지껄여대거나 전략을 논하거나 한다. 그리고 자기네들이야말로 패전한 프랑스의 운명을 양어깨에 짊어졌노라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부하 병사들을 겁내고 있다. 물불 가리지 않는 만용도 보이지만 부하란 자들이 하나같이 극악무도한 놈들이라, 남의 물건을 약탈하는 것쯤이야 예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 르왕의 거리에도 프러시아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방위대는 2개월 전부터 근교의 숲에서 정찰을 하는 등 부지런을 떨었는데, 때로는 아군 보초를 총으로 쏘는가 하면 잡목숲 속에서 토끼새끼 한 마리가 부스럭대기만 해도 전투 준비를 취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리 사방의 국도의 이정표를 위압하던 철모와 군복, 살인 도구도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최후의 한 명까지가 다 센강을 건넜다. 아마도 상스베르와 부르 아샤르를 거쳐서 퐁토드메르로 갈 것이 틀림없다. 그 맨 뒤를 장군이 따라가는데, 매우 절망적인 표정이다. 이처럼 지리멸렬이 된 군사로는 새삼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승리밖에 모르던 국민이 그 전설적인 용맹은 어디로 갔는지 참담한 패배 속에 일대 붕괴에 직면했으니, 장군이라도 넋을 잃을 수밖에. 그는 두 명의 부관에게 부축받으며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자 온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소리 없는 가운데도 뭔가를 기다리는 공포 분위기가 거리 전체에 떠돌고 있었다. 장사 때문에 기가 죽은 배에 군살이 찐 부자들은 적군의 진주를 불안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용 쇠꼬챙이나 날이 큰 부엌칼을 무기로 오해당하지나 않을까 하고 마음을 죄면서도. 거리의 생활은 정지된 상태였었다. 가게란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따금 나다니는 자가 보이다가도 이 깊은 정적에 겁을 먹고, 저도 모르게 길가 담 밑으로 잰걸음을 치곤 했다. 이 어쩌지도 못할 괴로움에 지쳐서 시민들은 차라리 적군이 빨리 와 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이튿날 오후, 어디선지 모르게 프러시아군 창기병(槍騎兵) 몇몇이 나타났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거리를 지나가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새까만 떼거리가 상트카트린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또한 그것과는 별도로 두 갈래로 나뉜 침략군의 물결은 다르네탈 가도와 브와기욤 가도를 메우며 밀려들었다. 이 세 군단의 전위 부대는 꼭같은 시간에 시청 앞 광장에서 합류했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한길을 뚜벅거리는 무거운 군화 소리로 진동시키면서 후속부대가 넘치듯이 도착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로 구령이 외쳐졌다. 그 소리는 인기척 없이 조용한 집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빈 집같이 여겨지던 그 집의 닫힌 덧문 뒤에서는 사람들의 눈이 이 승리자들을 엿보고 있었다. '전쟁의 법칙'에 의해서 자기들의 도시와 생명, 재산을 장악하게 된 자들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각자의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항력인 천재지변이나 만난 듯이 그저 놀라고 떨 뿐이었다. 하기야 그건 무리가 아니다. 인간이나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던 것이 별안간 극악무도한 만행에 유린되고, 질서가 무너지고 치안이 마비된다면 르왕 시민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은 정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가령 지진이나 일어나서 수많은 시민이 집더미 아래 깔려 압사하고, 홍수가 나서 마소가 죽고, 지붕에서 떨어진 들보와 함께 농부까지 물에 떠내려가고, 혹은 승리에 취한 군대가 거역하는 자는 죽이고 복종하는 자는 포로로 잡아가며 총칼의 위력으로 약탈을 자행하고, 종 대신 대포를 쏘아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면 이제까지 믿어 온 영원한 정의에 이상이 생길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배워 온 신의 섭리나 인간의 이성을 믿어 오던 것이 모두 뒤틀리게 된다. 그러자 대여섯 놈의 적병이 한 무리가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크를 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집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곧 침략에 잇따른 점령이다. 싸움에 진 자가 승리자를 기분좋게 맞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터무니없이 무서웠던 건 최초의 얼마뿐이고 잠시 후 흥분이 가시자 평온이 되돌아왔다. 그 무렵에는 이미 대개의 가정에서 프러시아 장교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적이지만 개중에는 좋은 가문에서 자란 자도 있다. 그들은 일단 예의로나마 프랑스에 동정을 표하고,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이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해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인도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언제 무슨 일로 그들의 도움을 청하게 될지 모르지 않는가. 지금 잘 대해 두면 집집마다 떠맡기는 병사의 비율을 서너 명쯤 덜어줄지도 모른다. 완전히 지배자가 된 프러시아군에게 새삼스레 반항해서 무슨 소득이 있으랴? 그런 짓은 용기라기보다는 무모한 만용- 그런 용기도 이 무렵의 르왕 시민에겐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에 '르왕의 방어'로 이 도시가 일약 유명해졌던 영웅적인 시대의 이야기이다. 마침내 그들은 프랑스적인 은근함에서 아주 합리적인 구실을 찾아냈다. 아무리 다른 나라 병정이지만 남 앞에서 친한 체하지만 않는다면 집안에서 환대하는 것쯤 무방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바깥에서는 모르는 체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자진해서 말을 걸었다. 독일인 쪽도 저녁마다 난로에 둘러앉아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르왕 시만 해도 점점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인은 아직 외출을 삼가고 있었지만 거리는 프러시아 병정들로 흥청거렸다. 우선 푸른 옷을 입은 경기병(輕騎兵) 장교만 봐도 무시무시한 살인 도구를 끌고 온 거리를 누비고 다닐 때는 무척 거만스러워 보이지만, 카페에 앉아 있으면 지난 해에 이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던 프랑스 엽기병(獵騎兵) 장교에 비해 일반 시민을 대단히 업신여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위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견딜 수 없이 이상한 분위기요, 그 일대에 퍼진 냄새 같은 것인데, 그것이 곧 침략의 냄새일지도 모른다. 그 냄새는 집안과 한길에 넘쳐서 음식맛까지 변하게 했고, 어딘가 머나먼 야만인의 고장에 여행을 온 것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정복자는 돈을 요구한다. 그것도 손쉽게 조달할 수 있는 그런 액수가 아니다. 시민들은 모아둔 것이 많으므로 요구하는 대로 지불하지만, 노르망디의 장사꾼이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놓길 싫어하기 때문에, 땡전 한 푼이라도 자기 돈이 남의 수중에 건너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못한다. 그건 그렇고, 시에서 강을 따라 2,30리쯤 내려간 곳에 있는 크르와세, 디에프달, 비사아르 근처에서는 가끔 뱃사공이나 어부가 강바닥에서 독일군의 시체를 끌어올리는 수가 있다. 군복을 입은 채 부풀어오른 시체인데, 아마 칼에 찔렸거나 돌로 머리통을 맞았거나, 발로 차서 다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인 것일 듯하다. 야만스럽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정당한 복수는 강물 밑 진흙에 파묻혀서 암장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영웅적인 행위지만, 대낮에 당당하게 겨루는 전투보다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영광스런 명예도 얻지 못하는 무언의 항쟁인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만 보면 이유도 없이 화를 내고, 신념을 위해서 죽는 것은 남자의 본분이라는 듯이 함부로 손에 무기를 드는 분별없는 용사가 있음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진주군이 이 도시를 엄격한 규율 아래 통치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이 승리의 행진을 할 때 마을과 거리에서 온갖 잔학행위를 다 했다는 것은 단순한 낭설로 보이며, 그러한 기색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시민들도 훨씬 대담해지고, 슬슬 돈벌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이 고장 장사꾼들의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가운데 몇 명은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는 르아브르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관계상 어떻게 해서든지 그 항구 도시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려면 육로로 디엡까지 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면 좋겠군, 하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사꾼들은 안면이 있는 독일군 장교를 움직여 사령부로부터 여행 허가증을 얻었다. 이 여행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합승마차가 할당되었다. 차주에게 신청을 해 온 자는 모두 열 명이었다. 가능한 한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화요일 새벽 일찍이 출발하기로 정했다. 며칠 전부터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만, 월요일 세 시경이 되자 북녘에서 커다란 먹구름이 나타났는가 싶더니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밤새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내렸다. 화요일 새벽 네 시 반에 여행자들은 노르망디 호텔 안뜰에 모였다. 마차는 여기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아직도 모두 잠에서 덜 깬 모양인데, 날씨까지 추워서 담요를 둘러쓰고도 덜덜 떨고들 있었다.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두터운 겨울옷을 잔뜩 껴입은 터라, 누구나 할 것 없이 뚱뚱한 신부가 긴 법의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알게 되면, 거기에 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난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하고 한 사람이 입을 열면, "나도 그래요." "실은 나도 그래요." 맨먼저 말문을 연 사람이 덧붙였다. "우린 르왕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입니다. 만약 르아브르까지 프러시아군이 쳐들어 온다면 영국으로 건너가겠어요." 세 사람 모두 비슷한 사정인 듯, 속에 품은 계획까지 같았다. 그러나 마차에 말을 맬 기색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부가 들고 있는지, 작은 등불이 캄캄한 이쪽 문에서 나왔다가는 곧 저쪽 문으로 사라지곤 했다. 말은 자꾸 발을 구르는데, 그 울림도 마굿간 바닥에 깔린 짚 때문에 덜 들렸다. 다만 말을 향해서 달래거나 꾸짖는 목소리가 그 건물 안쪽에서 들려왔다. 마구를 다루고 있는지, 조용히 말방울 소리만이 들렸다. 그것도 짤랑 하고 단 한 번. 그러나 곧 그 소리는 경쾌하게 떨리는 음향의 연속이 되었고, 말의 움직임에 따라 리듬을 이루어 그쳤는가 싶다가는 갑자기 심하게 짤랑거렸다. 그 소리와 더불어 편자 붙인 굽으로 바닥을 구르는 둔중한 말굽 소리도 들려오곤 했다. 입구의 문이 갑자기 닫혔다. 온갖 소리가 뚝 그쳤다. 사람들은 추워서 말조차 하질 못했다. 몸을 웅숭그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흰눈은 솜으로 된 장막처럼 반짝이면서 계속 빈틈없이 땅 위에 떨어졌다. 그 장막은 사물의 형태를 지워 버리고 얼음의 거품으로 만물을 화장시켰다. 겨울에 파묻힌 이 고요한 거리의 깊은 침묵 속에서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았다. 오직 계속해서 내려 쌓이는 눈발의 가녀리고도 은밀한, 어디선지 모르게 들려오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 같은 소리만이 울려올 뿐.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감촉에 가까웠고, 가벼운 원자가 뒤섞여서 공간을 채우고 세계를 뒤덮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까 그 사내가 등불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고삐에 매인 말을 당겼지만, 말은 쓸쓸한 모양으로 버티고 선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사나이는 버티는 말을 마차체에 붙이고 가죽으로 된 멍에를 매자, 한 바퀴 삥 돌면서 마구를 조사했다. 한 손에 등불을 들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한편의 손밖에 쓸 수가 없어서 시간이 꽤 걸렸다. 그것을 마치자, 마부는 두번째 말을 데리러가려다 말고 언뜻 이쪽을 보았다. 손님들이 눈을 하얗게 쓴 채 잠자코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 모두들 타시지요. 눈이라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제서야 손님들은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듯이 마차로 달려들었다. 조금 전의 그 세 사나이는 각기 아내를 안쪽에 자리잡아 앉히고 나서 자기들도 올라탔다. 그 뒤를 따라서 뭣을 뒤집어썼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말 한 마디 없이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차에는 짚이 깔려 있어서 발이 그 속에 파묻히도록 되어 있었다. 구석자리에 자리잡은 여자들은 구리로 된 휴대용 난로와 숯을 가지고 와서 얼른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 도구의 효능을 일일이 주워섬기고는, 벌써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을 신기하다는 듯이 되풀이하였다. 그래서 잠시 동안 도란도란 말소리가 계속되었다. 떠날 채비가 끝났다. 눈길이라 끌기 힘들 것을 고려하여 말 네 마리를 여섯 마리로 늘리고, 겨우 붙잡아매는 작업을 끝내고는 밖에서 "다 타셨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다 탔소." 안에서 대답하자 마차는 떠났다. 마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조심조심 걷는 것처럼. 바퀴는 눈속에 빠지고, 차체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지른다. 말은 미끄러져서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렸다. 어처구니없이 큰 채찍이 쉴 새 없이 윙윙 울리며 사방팔방으로 날았다. 꼭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따금 생각이 난 것처럼 둥근 엉덩이를 찰싹 갈기면, 말은 필사적으로 힘을 내는 모양인지 맞은 엉덩이가 갑자기 긴장하는 것이었다. 어느 새 밤이 훤히 밝아왔다. 이 부드럽고 가벼운 눈을 손님 중의 한 사람은 르왕 토박이답게 '솜으로 된 비'라고 비유했는데, 그 눈도 이제는 내리지 않았다. 커다란 구름 사이로 옅푸른 햇살이 새어나올 뿐, 음울한 구름이 무겁게 퍼져 있기 때문에 길가의 눈은 한층 빛나 보였다. 연도에는 한때 설화가 핀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섰는가 하면, 솜모자를 쓴 농가가 한 채 언뜻 나타나기도 했다. 이 새벽녘의 허전한 빛 속에서 마차 안의 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상대편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맨안쪽의 상등석에 마주앉은 채 졸고 있는 사람은 르와조 부부인데, 그랑똥 가의 포도주 도매상이다. 르와조의 전신은 점원이었으나, 주인이 사업에 실패한 것을 기화로 그 집의 권리를 몽땅 사서 돈을 번 사나이였다. 시골 소매상을 상대로 질이 나쁜 포도주를 싼값에 파는 수법을 썼기 때문에, 동업자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상술이 비상한 자로 알려지고 있었다. 응큼한 속셈과 명랑성을 겸비한 노르망디의 본토박이다웠다. 이 사내가 사기꾼이란 평판은 이미 확고부동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이 지방의 명사로서 우화(寓話)와 샹송 작가이며 신랄한 독설가이기도 한 투르넬 씨가 어느 날 저녁 지사의 관저에서 베풀어진 파티 석상에서, 부인들이 다소 지루해 하는 기색을 살피고는 '르와조볼'이란 말장난을 제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이 말은 '새가 난다'는 말에 '르와조는 훔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순식간에 날개가 돋친 듯 지사 관저의 살롱을 날아다녔고, 급기야는 거리의 살롱에까지 진출해서 한 달 동안 이 고장의 남녀노소들로 하여금 배꼽을 쥐도록 웃겼다. 하기야 르와조도 갖은 우스갯소리로 남을 잘 웃기기로 유명했다. 농담이라면 나쁜 것이건 좋은 것이건 다 묘리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나이의 이야기만 나오면 아무리 깎아내리다가도 나중에는, '정말 그 르와조란 사내는 새는 새라도 보통 새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게 된다. 르와조는 작달막한 키에 장구배가 튀어나오고 그 위에 희끗희끗한 코밑수염을 기른 벌건 얼굴이 얹혀 있는 그런 사내였다. 아내는 키가 크고 우람한 여장부로서, 목소리가 굵고 만사를 척척 해결하는 결단력이 있었다. 남편이 천성인 명랑한 성격으로 장사를 해나가고 있는 옆에서, 그녀는 주판을 한 손에 들고 가계를 꾸려 나가곤 했다. 이 부부 곁에서 한층 거만스레 앉아 있는 사람은 르와조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카레 라마동 씨였다. 그는 제사공장을 셋씩이나 갖고 있는 면업계의 유력자요, 레종도뇌에르 훈장 소유자이며 현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제정(帝政) 때 그는 추파를 잘 던지던 야당 수령으로서 일관했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전향할 때 상대편에게 은혜를 입겠다는 속셈에서였다. 그 자신의 말을 빈다면, 가짜 칼을 휘두른 데 지나지 않았다. 카레 라마동 부인은 남편에 비해서 엄청나게 나이가 어렸다. 르왕의 병영(兵營)에 상류계급 출신 장교가 전임해 오면 부인은 언제나 그런 젊은이들의 위안거리가 되곤 했다. 그녀는 몸피가 작은 몸을 모피에 싼 채 남편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 상그레한 모습은 너무나도 귀엽고 예뻤으며, 그 상심한 표정으로 마차 안의 멋없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는 유베르 드 브레빌 백작 내외가 앉아 있는데, 가문의 격식이나 유서가 모두 노르망디 굴지의 명문에 속한다. 백작은 풍채가 그럴 듯한 노신사인데, 날 때부터 앙리 4세를 닮은 것을 의식하고 이제는 머리 모양이나 몸치장까지 공을 들여서 가능한 한 진짜를 닮으려고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백작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영광스런 전설에 의하면 조상 중에 앙리 4세의 씨를 잉태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 일로 말미암아 그 여자의 남편은 백작으로 선임되고 주지사까지 되었다고 한다. 역시 현의회 의원인 카레 라마동 씨와는 동료 관계이며, 이 지방의 오를레앙 당(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백작이 낭트의 보잘것없는 선주의 딸과 어떻게 결혼했는지 그 내력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백작부인이 대단한 마님이어서 손님 접대도 잘 하고, 게다가 루이 필립의 아들에게 사랑을 받은 일도 있었다는 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는 귀족 사회에 군림하여 그녀의 살롱은 이 지방에서 첫째가는 사교장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마 예스런 우아한 범절이 남아 있는 점에서도, 드나들기가 좀처럼 힘들다는 점에서도 제일가는 살롱일 것이다. 브레일 가(家)의 재산은 부동산만으로 되어 있는데, 연수 50만 프랑에 달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여섯 사람이 마차 내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여섯 사람은 돈의 힘으로 평안한 생활을 누리는, 그러고도 종교나 주의를 가진 온후 독실한 사람들의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된 우연인지 여자들은 모두 같은 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특히 백작부인 곁에는 수녀가 두 사람이나 앉아서 긴 묵주를 헤아리며 '주기도문'과 '아베마리아'를 중얼거리고 있다. 한 수녀는 늙은 여자인데, 얼굴에 온통 산탄총이나 맞은 것처럼 곰보투성이였다. 또 한 수녀는 보기에 갸날프며 아름답기는 하나 병색이 깃든 용모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가슴이 결핵에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순교자로도 환각자로도 만드는 열렬한 신앙에도 걸려 있는 모양이다. 이 수녀들 맞은편에 한쌍의 남녀가 앉아서 모두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남자는 너무도 유명한 민주주의자인 코르뉴데였다. 그는 온건하고 학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20년 전부터 부지런히 민주주의적인 카페를 돌아다니며, 그 불그스름한 긴 수염을 맥주잔에 적셔 왔다. 과자 제조업을 하던 부친이 남겨 준 상당한 유산도 동지나 친구들과 함께 다 마셔 버리고, 그 후로는 오직 공화국이 실현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자기의 혁명을 위해서 뿌린 돈에 상당할 만한 자리 하나쯤은 돌아올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9월 4일(1870년 제3공화국이 설립되던 날-譯註)에는 아마 그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이겠지만, 그는 자기가 지사로 임명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청사에 가 본즉 관청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는 관리들이 그를 지사로 인정하는 걸 거절했기 때문에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그는 악의가 없는 선량한 사나이요,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길 좋아하므로 이번 전쟁 때도 도시의 방위를 굳히는 데 더없이 정열을 쏟았던 것이다. 들판에 참호를 파게 하고, 부근 숲의 어린 나무는 모조리 베어 눕히고 모든 길에는 함정을 설치했다. 그런 연후에 적군이 다가오자 부하들에게 만족해 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재빨리 거리를 향해 물러섰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자신이 르아브르로 가서 새로운 방어 진지를 만드는 쪽이 긴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옆의 여자는 소위 밤거리의 여자였다. 이 여자가 유명한 것은 나이에 맞지 않게 뚱뚱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불 드 쉬이프(비계 덩어리라는 뜻-譯註)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땅달막한 몸은 몽실몽실 비계살이 쪄서 전신이 동글동글했다. 손가락도 통통하게 살이 쪄서 마디진 곳은 짧은 소시지를 염주같이 엮은 것 같았다. 살갗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유방이 커서 옷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남자들이 계속 달라붙는 것은 그 싱싱한 피부색이 보기에 쾌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얼굴 역시 빨간 사과나 방금 핀 모란 꽃봉오리 같았다. 그 얼굴 위쪽에는 초롱초롱한 검은 눈 둘이 반짝이고, 짙고 긴 속눈썹이 눈동자에 그늘을 지우고 있었다. 얼굴 아래쪽에는 키스하기에 알맞은 촉촉히 젖은 매혹적인 작은 입술이 열려 있었는데, 희고 잔 이빨이 가지런히 숨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여자에게는 그밖에도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불 드 쉬이프임이 드러나자 정숙한 부인들 사이에서는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일어났다. '갈보'라든가 '수치'라는 말이 다소 크게 들렸던지 여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대담한 눈초리로 주위의 사람들을 쭉 둘러보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지면서 모두 눈길을 내리깔았다. 르와조만이 예외여서 자못 재미난다는 듯이 그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곧 세 부인 사이에서는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창부와 한 마차에 탔다는 사실이 갑자기 그녀들을 친구로, 친구 이상으로 친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기들은 어엿한 유부녀들이기 때문에, 이 파렴치한 갈보에 대항해서 굳게 결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외간의 사랑은 같은 사랑일지라도 돈으로 팔고 사는 사랑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남편들 역시 같았다. 코르뉴데를 보자 자연히 보수주의자의 본능으로 서로 가까워져서, 가난뱅이를 업신여기는 듯한 어조로 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축을 얼마나 도둑맞았다든가 추수할 곡식이 형편없이 되었다는 등 그 손실을 일일이 열거했는데, 결국 이와 같은 피해도 고작 1년쯤 참으면 회복될 것이라는 만석군 영주다운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카레 라마동 씨는 과연 제사업계에서 고생을 맛본 사람이라, 벌써 영국에 60만 프랑을 송금해 두었다는 신중함을 보였다. 급할 때 쓰려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하는 식이었다. 르와조로 말하면 재고품인 싸구려 포도주를 한 병도 남김없이 프랑스군 병참부에 팔아 넘기는 솜씨를 과시했다. 그러므로 국가에 막대한 빚을 지웠고, 이번에 르아브르로 가면 그 돈을 받을 셈이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세 사람은 재빨리 친근감이 깃든 시선을 주고 받았다.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돈이 맺어 준 인연으로 말미암아 친형제나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서 오전 열 시가 되었건만 아직 40리도 채 가지 못했다. 그 동안 남자들은 세 번이나 차에서 내렸다. 고개에 당도할 때마다 걸어서 넘어야 했던 것이다. 슬그머니 걱정스러워졌다. 왜냐하면 토오트에서 점심을 들 예정인데, 이렇게 가다가는 날이 저물어도 도착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는 도중에 주막이라도 없을까 하고 살피고들 있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마차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질 않고, 빠져나오는 데만도 2시간이 걸렸다. 배가 고파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밥집이나 술집 같은 건 통 나타나질 않았다. 프러시안군은 접근해 오고, 아군 병사들은 배를 곯은 채 지나가므로 장사꾼들은 모두 겁을 먹고 가게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길가의 농가를 뒤졌으나 빵 한 조각도 얻어내질 못했다. 농부들도 군인들에게 약탈당할까 보아 근심스러웠을 것이다. 굶주린 병정들이라 발견하는 즉시 강제로 빼앗아 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즉 덜컥 겁이 난 농부들은 식량을 감추었던 것이다. 오후 두 시경에 르와조는, 위 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실은 누구나 다 아까부터 그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뭣인가 먹고 싶다는 맹렬한 욕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갈 뿐이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서 입을 여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따금 누가 하품을 하면 곧 뒤따라서 다른 사람이 흉내를 낸다. 그 방법도 성격, 경험, 신분 등 사람에 따라서 달랐다. 노골적으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는 사람도 있고,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가는 황급히 손을 가져가는 갸륵한 사람도 있지만, 입 안에서 흰 입김이 나오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불 드 쉬이프는 뭣을 찾는지 자꾸만 몸을 굽혀서 치맛자락에 손을 가져갔다.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잠시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러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곤 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핼쑥해지고 뒤틀려 있었다. 르와조가 불현듯이 햄 한 조각이 1천 프랑을 내도 좋다고 단언했다. 그 말을 듣자 그의 아내는 펄쩍 뛸 듯이 반대를 표명했지만 그것도 곧 잠잠해졌다. 돈을 낭비한다는 말만 들어도 싫어하는 빛이라, 이 여자 앞에서는 금전에 관해서는 농담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백작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소. 왜 먹을 것을 가져온다는 걸 잊어버렸을까?" 그것은 백작이 아니라도 누구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코르뉴데는 럼 주(酒)를 수통에 담아갖고 온 것이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그걸 권했으나 모두들 거절하고 말았다. 르와조만이 석 잔을 받아 마셨는데, 수통을 돌려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셈인지, "역시 술은 좋군요. 첫째 몸이 따뜻해지고, 시장기가 감쪽같이 없어지거든." 하고 해롱거렸다. 주기가 돌아서 지껄이는 건 좋지만 그는 이런 제안을 했다. 옛노래에 나오는 뱃놈같이, 손님 가운데서 제일 살찐 사람을 잡아먹자는 것이었었다. 분명히 불 드 쉬이프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이 말은 점잖은 축에 드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코르뉴데만이 빙긋이 웃었다. 수녀들도 어느 새 기도를 그치고, 넓은 옷소매 속에 두 손을 찌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배고픈 설움도 하늘이 내린 명령이라면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 같았다. 마침내 세 시가 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마을 하나 안 보이는 끝없는 벌판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다. 불 드 쉬이프가 별안간 허리를 구부리는가 싶더니 의자 밑에서 커다란 바구니를 꺼냈다. 바구니에는 흰 헝겊이 씌워져 있었다. 그녀는 바구니 안에서 먼저 자그마한 사기 접시와 예쁜 은잔을 꺼냈다. 그리고 커다란 그릇을 꺼냈는데, 그 속에는 통째로 익힌 영계가 두 마리, 조린 국물에 잠겨 칼질이 된 채 들어 있었다. 바구니를 들여다본즉 그밖에도 맛난 음식들이 잔뜩 있었다. 파이, 과일, 설탕 묻힌 과자 따위. 이 정도의 음식이라면 여관 음식 신세를 지지 않고도 넉넉히 사흘은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덤으로 음식을 싼 종이 사이에서 술병의 가느다란 목도 네 개가 삐죽이 내보인다. 여자는 영계의 날갯죽지 하나만을 집어들고는 노르망디에서 '레장스'라고 부르는 작은 빵과 함께 얌전히 먹기 시작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음식 냄새가 곧 풍겨왔다. 사람들의 콧구멍은 벌름거리고, 귀밑에서 턱이 고통스러울 만큼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입 안에 군침이 가득 괴었다. 갈보 따위에게 한 방 당하다니, 하고 부인들은 화가 치밀어서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마차에서 눈밭 위로 내동댕이쳐 버릴까. 여자만으로는 뭔가 마음에 걸리므로 은잔이나 바구니는 물론, 음식까지 함께 몽땅 마차 밖의 눈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맹렬한 심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르와조만은 영계가 든 그릇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참 용의주도하군요. 감탄했습니다. 모든 일에 다 생각이 미치는 분도 계시는 법이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상대편에게 얼굴을 들고, "좀 드시겠어요, 선생님?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으면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그럼 염치없이 하나 들어 볼까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전시에는 전시답게 굴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는 일행을 삥 둘러보고 나서 덧붙였다.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이토록 각박한 때에 친절한 분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그는 바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가져온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언제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이프 끝으로 조림 국물이 엉긴 닭다리를 꿰어 들고, 이빨로 끊어서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하도 맛있게 먹기에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듯한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자 불 드 쉬이프는 수녀들에게도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권했다. 아주 겸손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녀들은 둘 다 즉석에서 응하고는 입속으로 몇 마디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고나자 고개를 숙인 채 급히 먹기 시작했다. 코르뉴데도 권함을 받자 거절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수녀들까지 끼어들어, 무릎 위에 펼친 신문은 일종의 테이블같이 되었다. 쉴 새 없이 입들이 열렸다가는 닫히고, 쑤셔넣고 씹고 삼키는 품이 사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르와조는 혼자 한구석에서 곁눈질도 하지 않고 먹고 있다. 이따금 작은 소리로 아내에게도 자기처럼 먹으라고 권한다. 그의 아내는 통 응할 듯한 기색이 없더니, 마침내 오장육부에 경련이 일어나자 굴복하고 말았다. 남편은 사근사근한 말씨로 '아름다운 동행자'를 향해서, 가능하다면 자기 마누라에게도 한 입 나눠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어머, 그러세요." 여자는 방긋 애교스럽게 웃고 나서 그릇을 내밀었다. 그런데 보르도 주(酒)의 마개를 뽑았을 때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컵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신 후 입댄 자리를 닦고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코르뉴데만은 멋을 부릴 셈인지, 여자가 입을 댄 후 아직 젖어 있는 자리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런데 브레빌 백작 내외와 카레 라마동 씨 내외는 주위에서 맛나게 먹고 있는 걸 보고는, 특히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목이 막히고 그 괴로운 심정이란 굶어 죽는 귀신이 받는 형벌도 이와 같지 않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별안간 솜장수의 젊은 아내가 신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모두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창밖의 눈보다도 흰데,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기절한 것이다. 남편은 미친 듯이 사람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도우려는 쪽도 정신이 없었다. 나이든 수녀가 환자의 머리를 받쳐들고 불 드 쉬이프가 가진 컵을 입술에 대어 포도주 몇 방울을 흘려 넣어 주었다. 예쁜 부인은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눈을 뜨고 방긋 웃으며 이젠 괜찮아요,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수녀는 재발할 것을 염려하여 컵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서는 환자에게 강제로 마시게 하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가 고파서 그랬으니까." 그러자 불 드 쉬이프는, 네 명의 단식 팀을 돌아보고 어색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어머, 이걸 어떡하죠. 선생님들이나 부인들께 도리어 실례가 될까 봐서......"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상대방이 자기의 말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을까 근심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르와조가 그 말을 받아서, "저, 이런 때는 서로 동기간 같으니까 돕는 것이 당연하지요. 자아, 부인들께서도 사양하지 마시고 하나씩 드시는 게 어떨까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 밤 지붕 밑에서 자게 될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토오트에 도착하려면 내일 오후도 지나야 될 것 같군요." 그러나 아무도 선뜻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모두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백작이 문제를 해결했다. 백작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뚱뚱한 아가씨 쪽을 향하자, 귀족다운 정중한 태도로 말을 했다. "그렇다면 고맙게 받겠소이다." 첫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고 나자, 체면 불구하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바구니는 바닥이 나 버렸다. 그러나 닭은 없지만 아직도 간으로 만든 파이, 메추리 파이, 훈제한 소의 혓바닥, 크라사아느 종 배, 퐁레베크 산 치즈, 빵, 과자 따위가 남아 있고 식초에 절인 양파와 오이가 단지에 가득 들어 있었다.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불 드 쉬이프도 생채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대편이 천한 여자일지라도 마음껏 얻어먹으면서 말을 건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에누리를 하면서 말을 걸었지만 의외로 얌전하므로 점점 대화가 많아졌다. 브레빌 부인이나 카레 라마동 부인이나 처세에는 모두 능한 여자들이므로 지나침이 없도록 신경을 쓰면서 상냥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특히 백작부인의 태도가 일품이었다. 아무런 때도 타지 않은 귀부인다운 태도로 서민적인 애교있는 친근성을 마구 뿌리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몸도 억세고 친근성도 없고 무뚝뚝한 르와조 부인은 여전히 상을 찡그린 채 말도 잘 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화제는 자연히 전쟁에 관한 것이 되었다. 프러시아군의 잔학한 행위와 프랑스군의 용감한 활약, 화제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이같은 도망치는 패거리들이 타인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개인적인 체험담이 되었다. 불 드 쉬이프는 자기가 르왕을 탈출하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는데, 흔히 창녀들이 진심으로 감동한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 말에 열기를 띠게 되는 그런 어조로 자기의 진정을 토로했다. "그야 저도 처음에는 남아 있을 생각이었어요. 집에 저장해 둔 식량도 꽤 있기 때문에, 낯선 곳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적병 너덧 놈쯤 먹여주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 놈들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프러시아 병정들을 보니까 분해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난 하루 종일 울었답니다! 정말 그래요. 제가 남자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창문으로 내다보이지 않겠어요, 저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돼지새끼들, 살이 찐 돼지새끼들이 말예요. 저는 놈들의 등을 향해 의자라도 집어던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녀가 제 손을 꽉 붙잡더군요. 그러자 우리 집에 몰려와서 방을 빌리자는 거예요. 난 제일 먼저 들어선 놈의 모가지를 겨누고 달려들었죠. 프러시아 병정이라고 해서 목졸라 죽이는 데 특별히 어려울 건 없지 않겠어요? 물론 전 그놈을 해치울 생각이었죠. 그런데 누군가가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떼어 놓는 게 아니겠어요. 이 일 때문에 전 그놈들에게 들키면 곤란한 처지에 놓였던 거예요. 그래서 마차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이렇게 동승하게 됐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에 크게 칭찬했다. 실은 이 정도의 용감성을 보인 자가 일행 중에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도 그 여자가 갑자기 훌륭해 보인 것이었다. 코르뉴데는 상대편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사도(使徒)와도 같은 후의를 보이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신을 찬양하고 있는 신도의 말을 듣는 사제와도 같았다. 그건 그럴 수밖에, 종교가 법복을 걸친 사람의 전문 분야라면 애국심은 수염을 기른 민주주의자가 한 손에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이번에는 코르뉴데가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설교투의 어조는 매일 벽에 나붙여지는 선전 삐라와 꼭 같을 만큼 수선스러웠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끝내는 열변을 토하면서, '바당게의 방탕자(나폴레옹 3세의 별명-譯註)'를 철저히 깎아내렸다. 그러자 단박 불 드 쉬이프가 화를 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폴레옹 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앵두보다도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분개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분 대신 당신네들이 하는 걸 보고 싶군요. 아마 더 형편없었을 거예요. 아, 그랬었지! 그분을 몰락시킨 건 당신네들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당신네들 같은 게으름뱅이가 집권자가 되는 날엔 프랑스에 남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을 걸요?" 하지만 코르뉴데는 태연했다. 여전히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리고 업신여기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사한 말다툼이 금시라도 시작될 것 같은 형세를 눈치챈 백작이 가운데에 끼어들어 가까스로 화가 치솟은 여자를 진정시켰다. 그는, 무슨 일이든 진지한 의견은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일렀던 것이다. 그런데 백작부인이나 솜장수 마누라나, 이 사람들로서는 당연하지만 공화제에 대해서 이유를 불문하고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 여성의 상례로서 화려한 전제적인 정부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애정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비록 창부지만 식견도 있고 생각도 자기들과 같다는 것을 알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바구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열 사람이나 되는 인원이 먹어 치웠으니, 바구니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들 별수가 없다. 이야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지만, 먹을 것을 다 먹고 난 뒤라 약간 맥이 빠진 상태였다. 날이 저물어서 서서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추위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동안에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므로, 불 드 쉬이프는 피둥피둥 살이 쪘건만 몸이 떨려 어쩔 수가 없었다. 브레빌 부인이 아침부터 여러 차례 숯을 갈아 넣은 휴대용 난로를 제공해 주었다. 발이 얼음같이 차갑던 차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카레 라마동 부인과 르와조 부인은 각기 두 수녀에게 그것을 빌려 주었다. 마부는 벌써 램프에 불을 켜고 있었다. 불빛에 조명되어, 마차체에 묶인 말 엉덩이에서 땀이 무럭무럭 김이 오르고 있었다. 도로 양쪽의 눈도 그 강한 빛을 받고는 움직이는 반영 때문에 자꾸만 뒤로 펼쳐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차 안은 이미 아무것도 안 보일 만큼 어두웠다. 그러자 갑자기 불 드 쉬이프와 코르뉴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 기색이 느껴졌다. 르와조는 계속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당황해서 몸을 얼른 빼는 걸 본 듯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몸의 어느 부분을 상당히 강하게 쥐어박힌 모양 같았다. 앞길에 깨알 같은 불빛들이 나타났다. 토오트읍이었다. 열한 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말에게 여물을 먹이거나 숨을 돌리게 하느라고 네 번 쉰 두 시간을 합치면 모두 합해서 열네 시간이 걸린 셈이다. 마차는 읍내로 들어가서 코메르스 여관 앞에 멈췄다. 마차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귀익은 소리에 모두 깜짝 놀랐다. 긴 칼이 땅에 끌리는 소리였다. 곧 독일인 말소리가 나고 뭐라고 소리쳤다. 마차는 섰지만 아무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나가면 즉시 학살당할 걸로 생각하는 모양 같았다. 거기에 마부가 램프를 한 손에 들고 나타났다. 마차 안까지 환히 비추자, 두 줄로 늘어앉은 얼굴이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딱 벌어진 입, 놀람 때문에 눈알들이 튀어나와 있다. 마부 옆에 한 독일군 장교가 불빛을 받고 서 있었다. 금발에 몸이 가는 후리후리한 청년인데 코르셋을 입은 젊은 여자같이 군복이 몸에 꼭 맞았다. 납작한 방수용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는 품이 꼭 영국 호텔의 메센저 보이를 연상시킨다. 코밑 수염이 일품이다. 곧고 긴 털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한없이 뻗다가 단 한 가닥의 금빛 터럭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만큼 가늘다. 그 수염이 원인이 되어 양 입술 가장자리를 짓누르는지 그 때문에 볼은 당겨지고 입술을 맥없이 휘어져 있었다. 그 독일군 장교는 알사스 사투리가 섞인 프랑스말로 여객들에게 마차에서 내리라고 권고했다. 무뚝뚝한 어조다. "여러분, 내리시오." 명령을 받고 맨먼저 두 사람의 수녀가 내렸다. 성녀(聖女)들인지라 뭐든지 순종하는 데는 길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백작 내외, 뒤따라 솜장수 내외가 나타나고, 그 뒤에서 르와조가 자기 앞의 큰 여자를 떼밀면서 나왔다. 르와조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독일군 장교를 향해서 "안녕하세요" 했다. 인사라기보다는 아무래도 몸조심하려는 기분에서 나온 것인 모양 같았다. 상대편 점령군의 독일 장교는 멸시하듯 힐끗 바라봤을 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 드 쉬이프와 코르뉴데는 출입구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일 마지막에 내렸다. 두 사람 다 적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의젓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뚱뚱한 아가씨는 자제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안간힘을 썼다. 민주주의자는 불그스름한 긴 수염을 비장한 손놀림으로 훑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손이 약간 떨고 있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이 애써서 위엄을 유지하려는 것은, 이런 경우 자기들이 다소나마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두 사람 모두 동행자들의 어설픈 무기력에 반발을 느낀 모양이다. 여자는 동행한 숙녀들보다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이려 했고, 남자는 남자대로 모범을 보일 때는 바로 이때라는 듯이 도로에 함정을 파는 일부터 시작된 자신의 저항적 사명을 일거일동에 일일이 보여주려고 했다. 일행은 여관집의 식당을 겸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러자 독일군 장교는 사령관이 서명한 여행 허가증을 제시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여행자의 이름과 인상, 직업 등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것과 대조하여 한 사람씩 검열하느라고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는 "좋소" 하고 한 마디를 무미건조하게 던지고는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일행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배들이 고팠으므로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식사 준비는 반 시간쯤 걸리는 모양이라, 두 사람의 하녀가 분주히 일하는 동안에 일행은 자기들이 머물 방을 보러 갔다. 방은 모두 긴 복도에 연해 있었다. 복도 막다른 곳에 유리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글자로 '토일렛'이라 적혀 있다. 겨우 식탁에 앉으려는 참인데 여관집 주인이 나타났다. 말장수 출신인 뚱뚱한 사나이다. 해소에 걸렸는지 노상 씩씩거리고 쉰 소리를 내며,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난다. 그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은 '포랑비'였다. 그 사내가 물었다. "저, 엘리자베트 루세라는 분 계십니까?" 불 드 쉬이프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전데요." "그러세요? 프러시아 장교분이 시급히 할 말이 있답니다." "저한테요?" "네, 당신이 엘리자베트 루세라는 아가씨라면." 그녀는 당혹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딱 잘라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전 가지 않겠어요." 순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각기 모두 이 명령의 이유를 지레짐작하여 쑤군거리고 있었다. 백작이 옆으로 와서, "그것은 좋지 않아요. 당신이 거절하면 당신뿐만 아니라 동행한 모두에게 어떠한 난제를 들고 나올지도 모릅니다. 강자에겐 결코 거역해서는 안 되지요.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따라갔다고 해서 별로 위험한 일은 없지 않겠어요? 틀림없이 뭔가 수속이 하나 누락된 정도의 일일 겝니다." 일행이 모두 백작과 소리를 같이 하여 그녀를 달래거나 타이르거나 해서 겨우 그녀를 납득을 시켰다. 왜냐하면 여자가 무모한 짓을 해서 일이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다고, 모두 자기 일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심하고 말했다. "가긴 가겠지만, 이건 모두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백작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고마워요. 모두 감사하고 있어요." 여자는 나갔다. 식사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모두가 아쉬워한 것은 그녀 대신 자기가 호출되지 않은 일이었다. 사납고 성미가 급한 계집애이니 가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만일 자기 차례가 와서 불러낸다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고 쓸데없는 핑계를 마음 속에 준비해 두곤 했다. 그런데 10분쯤 지나자 그녀가 돌아왔다. 화가 났는지 숨을 몰아쉬고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내뱉고 있었다. "그 개자식! 개자식!" 모두들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백작이 무리하게 요청하자 아주 쌀쌀하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아실 일이 아니에요. 말하지 못하겠어요." 할 수 없이 일행은 속이 우묵한 수프 접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접시에서는 양배추 냄새가 풍겨왔다. 한때 깜짝 놀랐었지만 저녁식사는 떠들썩했다. 르와조 내외와 두 수녀는 사과주를 들었다. 맛도 좋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포도주를 주문하고, 코르뉴데는 맥주를 시켰다. 이 사내의 맥주 마시는 품이 특이했다. 우선 마개를 뽑아 거품이 일게 한 후 잔에 따르고, 그 잔을 기울여 바라보더니 천천히 눈 높이까지 들어올려서 램프의 불빛으로 그 빛깔을 감상한다. 그런 연후에 마실 때가 되면 그 좋아하는 맥주에 물이 들었는지 맥주빛을 한 긴 수염이 너무나 좋아서 떠는 것 같았다. 눈이 사팔뜨기처럼 언제나 곁눈질을 하는 것은 잠시도 눈을 술잔에서 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태도는 오로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그 직분을 다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맥주와 혁명, 그는 자기가 일생을 바친 이 두 개의 크나큰 정열 사이에 하나의 친화력 같은 것을 만들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이 사나이가 혁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맥주를 맛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포랑비 내외는 식탁의 한 구석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남편은 고장난 기관차처럼 쌕쌕거리는데, 가슴 속에 통풍이 너무 잘 되어 먹으면서 지껄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잠시도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프러시아군이 도착했을 때의 모양으로부터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말했는지를 밉살스러운 듯이 헐뜯었다. 그것도 첫째로는 돈이 들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두 아들이 군대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신분 높은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 좋은 모양인지, 갑자기 백작부인을 향해서 말을 걸기도 했다. 이윽고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시국에 대한 비판을 말하려 하자, 남편은 가끔 그것을 가로막으며, "여보, 적당히 해 두지 못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없이 지껄여댔다. "놀랄 일이 아니에요, 부인. 그 녀석들이 먹는 거라곤 감자와 돼지고기, 그 다음에는 돼지고기와 감자니까요. 게다가 얼마나 더러운지 말도 못해요. 부인 앞에라서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아무데나 내깔기는 겁니다. 예, 뭣보다도 그 녀석들이 하는 연습인가 뭔가, 정말 보여드리고 싶군요. 저기 저 들판에 나가서 하는데 몇 시간, 며칠 동안을 계속해서 한답니다. 앞으로 가, 뒤로 돌아, 우향 우, 좌향 좌- 정말 꼴불견들입니다요. 그들이 논밭에 나가 일을 하거나, 고향에 돌아가서 길이라도 고친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부인. 군인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성들이야말로 불쌍하죠. 이쪽은 애써서 먹여 살리고 있는데, 고작 배운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일뿐이니까! 하기야 전 배운 것도 없는 구식 여잔지 모르지만, 다 자란 남자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제자리걸음 연습 따윌 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요- 세상에는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온갖 발견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남을 해치기 위해서 죽도록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래도 좋은가요? 생각해 보세요. 상대편이 프러시아 사람이건 영국 사람이건, 폴란드 사람이건 프랑스 사람이건,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에게 해 끼친 놈에게 복수를 하면 죄가 되므로 안 된다면서, 토끼 사냥에라도 나간 기분으로 우리네 자식들을 총으로 쏘아 죽여도 괜찮다는 게 말이 되나요! 더구나 제일 많이 죽인 녀석에겐 훈장까지 줍니다. 어떻습니까, 그런 법이 있을 수 있나요? 전 이 점을 잘 모르겠어요." 코르뉴데가 목청을 뽑았다. "전쟁도 평화스런 이웃 나라를 공격하면 야만 행위이지만, 조국을 지킬 경우엔 신성한 의무입니다." 노파는 고개를 숙였다. "하기야 그렇군. 지킨다면 이야기는 다를 테죠. 그렇다면 차라리 도락으로 전쟁을 하는 임금 따위는 모조리 죽여 버리면 어떨까요?" 코르뉴데는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됐어, 그렇지 나와야지!" 하고 외쳤다. 카레 라마동 씨는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었다. 원래 이 사나이는 유명한 장군이라면 무턱대고 존경하는 편인데, 지금 이 시골 노파의 논리 정연한 말을 들은즉 과연 그렇다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대로 이처럼 많은 사람을 놀리고 먹이는 것은 헛된 일일 뿐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다, 막대한 생산력의 낭비다, 만약 이것을 이용해서 완성까지 몇 백 년을 요하는 공업 방면의 대사업에 투입한다면 나라가 얼마나 번영할 것인가. 그는 속으로 계산했다. 그런데 이때 르와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집 주인 옆으로 가더니, 뭔가 낮은 소리로 말을 했다. 뚱뚱한 주인은 상대방의 농담이 재미있는지 웃다가 쿨룩거리다가 침을 뱉곤 하면서 커다란 배를 들썩거렸다. 결국 봄이 오면 프러시아군도 물러갈 테니까, 그때 보르도 주를 여섯 통 사기로 약속했다. 저녁을 마치자 모두 극도로 피곤하기 때문에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도 르와조는 뭔가 생각나는 점이 있는지, 아내를 재우고 나서는 열쇠 구멍에 귀와 눈을 번갈아 갖다댔다. 그가 말하는 소위 '복도의 비밀'을 탐지하려는 것이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옷자락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들여다본즉 불 드 쉬이프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레이스 장식이 달린 푸른 캐시미어 잠옷만 입었기 때문에 낮보다 더 뚱뚱해 보였다.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변소엘 가려는 모양 같았다. 그때 옆방 문이 반쯤 가만히 열렸다. 몇 분 후에 그녀가 돌아오는 걸 보니 코르뉴데가 멜빵만 걸친 모습으로 뒤따라 오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소곤소곤 주고받더니 우뚝 멈춰섰다. 불 드 쉬이프가 완강히 자기 방의 방문을 방어하고 있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르와조에겐 두 사람으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나, 점점 언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조금은 엿들을 수가 있었다. 코르뉴데가 열심히 졸라대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잖아." 여자는 화가 났는지 코먹은 소리로 대답했다. "안 된다니까요. 그런 짓도 할 때가 따로 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이런 데서 그런 짓을 한다면 창피하잖아요." 하지만 사나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여자는 발끈 신경질을 내면서 더 큰 소리로 쏘아붙였다. "왜라뇨? 정말 깡통이시군. 한지붕 밑에 프러시아 군인이 있잖아요? 더구나 옆방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사나이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갈보이지만,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서 적이 있는 곳에서는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갸륵한 자존심이 다 허물어져 가던 남자의 위신을 회복시킨 모양이다. 코르뉴데는 키스만 하고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갔다. 르와조는 굉장히 흥분했다. 열쇠 구멍에서 물러서자 방 한가운데서 깡충 뛰더니 나이트캡을 쓰고 잠들어 있는 마누라를 깨웠다. 이불을 들치고 해골이 다 된 마누라에게 키스하며 작은 소리로, "여보, 한 번 어때?" 집안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에 어디선가, 지하실에선지 다락에선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결같이 규칙바른 굉장한 신음 소린데, 둔하고 여운이 긴 소리에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나는 것 같은 진동이 따랐다. 여관집 주인 포랑비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인 것이다. 다음 날은 8시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각이 되자 일행은 식당 겸용의 홀에 모였다. 그런데 포장 위에 눈이 쌓인 마차만이 마당 한가운데에 외톨이로 서 있을 뿐, 말도 매여 있지 않았고 마부의 모습도 보이지를 않았다. 마굿간과 여물 곳간, 차고 등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마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남자들이 총동원되어 그 주변을 수색하기로 하고 여관을 나섰다. 일행은 맞은편의 교회가 있는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 양쪽에 늘어선 야트막한 집에는 프러시아 병정들이 들어 있었다. 맨처음 눈에 띈 병사는 감자를 벗기고 있었고, 좀더 가니 두번째 병사가 이발소의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눈가장자리까지 수염이 난 병사가 우는 갓난애에게 뺨을 비비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달래며 어떻게든 울음을 그치게 하려 하고 있었다. 남편을 소집당한 뚱뚱한 농부의 아낙네들이 제 집에 유숙하는 병사들에게 손짓으로 일일이 일거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승리한 병사들은 온순히 장작을 패거나, 수프를 만들거나 커피를 빻는 일을 한다. 다 늙은 노파의 집에 있기 때문에 오물 처리까지 해주는 자도 있었다. 백작도 이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때마침 목사관에서 머슴이 나오기에 물어 보았다. 늙은 머슴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만에, 의외로 온순한 사람들이죠. 아마 프러시아인이 아니라죠. 저도 어딘지는 모르지만, 무척 먼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모두 고향에 처자식을 남겨 두고 온 자들뿐이라니, 전쟁이 재미있을 턱이 없지요. 틀림없이 고향에 남은 사람들도 울고 있을 겝니다. 전쟁 때문에 불행을 겪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들도 마찬가지니까요. 이 고장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불평만 할 게 아니죠. 저 자들은 못 된 짓도 안 하고, 저렇게 자기 집에서 하듯이 일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나리, 가난뱅이끼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요?...... 전쟁이야 높은 양반들이나 하고 싶어하지요." 코르뉴데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차라리 여관방에 처박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르와조는 농담 비슷이 "서방 자리를 메우고 있군" 했다. 그러자 카레 라마동 씨는 거드름을 피우며 "아니, 속죄를 하고 있는 거요" 하고 나무랐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찾아도 마부가 통 보이질 않았다. 겨우 읍내의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을 붙잡았는데, 보아하니 그 장교의 연락병과 기분좋게 한 잔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백작이 따졌다. "여덟 시에 떠날 수 있도록 일러 두었을 텐데?"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 후에 다른 지시를 받았습니다요." "무슨 지신가?" "떠날 수 없다굽쇼." "누가 그런 말을 했나?" "프러시아군 지휘관입죠." "어째서?" "그건 저도 모릅니다요. 알고 싶으시면 가서 물어 보시지요. 저야 떠나지 말라니까 떠나지 않을 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지휘관 자신이 그렇게 말하던가?" "아닙니다요, 나리. 여관집 주인이 그런 지시를 받았다면서 전달하더군요." "언제?" "간밤에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습죠." 근심스러워진 세 사람은 서둘러 되돌아왔다. 급히 포랑비 영감을 만나려 했지만 하녀가 말하기를, 주인은 천식 때문에 열 시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이라도 나면 모를까, 그 이전에 깨우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장교를 만나야 하는데, 이것은 한지붕 밑에 있으면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포랑비 영감만이 민간인의 용건으로 장교에게 말할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각기 제 방에 틀어박혀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코르뉴데는 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는 홀의 커다란 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작은 탁자 하나를 가져오게 하고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그런 연후에 천천히 파이프를 꺼냈다. 코르뉴데에게 봉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보이는 이 파이프는 민주주의자들 사이에 본인 못지않게 존경을 모으는 물건이었다. 반들반들 길이 든 멧숑 파이프는 주인의 이빨처럼 거무스름했다. 냄새나 윤기, 구부러진 모양이 더할 나위 없이 일품이고, 손에 익어서 주인의 인품에 없어서는 안 될 빛을 더하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난로 앞에 앉아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는가 하면, 맥주잔 위에 덮인 거품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이윽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자못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살이 없는 길다란 손가락을 기름때가 묻은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고는 거품 묻은 수염을 빠는 것이었다. 르와조는 발이 저린 걸 풀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실은 그 주변의 소매상들에게 포도주를 팔러 갔다. 백작과 솜장수는 정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 다 프랑스의 미래를 점치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오를레앙 가(家)의 천하가 다가올 것이라고 주장하면, 한 사람은 미지의 구세주의 출현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홀연히 영웅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즉 뒤 게크랭이라든가 잔다르크, 나폴레옹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 황태자가 그렇게 어리지만 않았었던들! 코르뉴데는 옆에서 그 말을 들으며, 운명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듯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온 방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10시를 치자 포랑비 영감이 나타났다. 재빨리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이 사나이는 똑같은 말을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장교가 말하더군요. '포랑비 씨, 내일 이 여객들의 마차에 말을 매지 못하게 하시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떠나면 안 됩니다. 알겠죠? 좋소!'라구요." 그래서 장교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 백작의 명함에다 카레 라마동 씨까지 자기의 이름과 직함을 써서 가져가게 했다. 프러시아군 장교는 식사를 마친 후에, 즉 1시경이라면 두 사람과 만나 주겠노라고 회답해 왔다. 여자들도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들 여간 근심되는 게 아니었지만 음식만은 조금씩 먹었다. 불 드 쉬이프는 몸이 불편한지 대단히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났을 무렵에 연락병이 부르러 왔다. 르와조도 두 사람과 함께 가기로 했다. 이 교섭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코르뉴데까지 끌고 가려 했으나, 그는 독일놈과는 절대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맥주 한 병을 더 시키더니 난로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2층으로 올라간 세 사람은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장교는 두 다리를 난로 위에 얹고, 걸상에 몸을 젖힌 채 길다란 사기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빛깔이 혼란한 실내복을 걸치고 있는데, 아마도 저속한 취미를 가진 시골 신사가 입다가 벗어놓은 것을 텅 빈 그 집에서 훔쳐온 것임에 틀림없다. 장교는 일어나려고도 인사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뒤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군인은 승리하면 반드시 오만해지는데, 이 장교 따위가 가장 적합한 표본일 것이다. 잠시 기다리게 하고 나서 겨우 장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죠?" 백작이 입을 열고, "저희들은 여행을 계속하고 싶습니다만." "안 돼요." "그 이유를 알 수 없을까요?" "내가 출발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죄송하지만 저희들은 당신네 군사령관으로부터 디엡까지 가는 여행 허가증을 교부받았습니다. 이토록 엄중한 취급을 받아야 할 잘못은 없는 줄 압니다만." "내가 출발시키고 싶지 않다...... 그것뿐이오!...... 그만들 돌아가시오." 세 사람은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암담한 오후였다. 독일놈의 그 고집을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으나 머리만 어지러울 뿐이었다. 일행은 부엌에 딸린 홀에 모여 앉아 이렇거니 저렇거니 의논을 했으나, 결국 어처구니없는 데에까지 상상이 펼쳐지기 때문에 끝이 없었다. 어쩌면 인질로 잡아 둘 셈인지도 모른다- 하나 그건 뭣 때문에?- 혹은 포로로서 데려갈 작정인가? 아냐, 그것보다는 막대한 몸값을 요구할 속셈인지도 모르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다. 부자일수록 놀람이 커서, 벌써 저 뻔뻔스런 독일 군인 앞에 목숨 대신에 금화가 잔뜩 든 부대를 산더미같이 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뭣보다도 먼저 재산을 감추고 자기들을 가난뱅이, 그것도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털리로 보이게 하려면 어떡하면 좋을지 그럴 듯한 거짓말을 찾아내고자 각기 머리를 짰다. 르와조는 시곗줄을 풀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날이 저물수록 근심은 늘어갈 뿐이었다. 램프에 불은 켜졌지만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으므로 르와조의 아내가 트럼프 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좋았어!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아 모두 찬성했다. 코르뉴데까지 순순히 파이프의 담뱃불을 끄고 내기에 끼어들었다. 백작이 카드를 돌렸다. 불 드 쉬이프가 단번에 으뜸패를 잡고 말았다. 점점 승부에 열중할수록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근심이 엷어졌다. 그런데 르와조 내외가 짜고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을 코르뉴데가 발견했다. 식탁에 앉으려고 하는데 포랑비 영감이 다시 나타나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프러시아 장교가, 엘리자베트 루세 양의 생각이 달라졌는지 어떤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불 드 쉬이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 새파란 얼굴이 별안간 새빨개지는가 싶더니, 분통이 치밀어 숨이 차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요란한 소리가 폭발했다. "가서 이렇게 말해 주세요. 그 더럽고 치사한 바람둥이에게, 구더기 같은 놈에게, 개도 안 물어갈 놈에게 난 절대로 싫다고, 누가 뭐래도 싫다고 말해 주세요. 그래요, 절대로 그렇구 말구요!" 뚱뚱보 주인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모두 불 드 쉬이프를 둘러싸고, 전날 밤 장교에게 불려 간 이유를 알기 위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으나 결국 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 놈이 뭘 요구했느냐구요? 그 놈의 요구는 저보고 자라는 거예요!" 노골적인 말이었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일행의 분노는 치열했던 것이다. 코르뉴데는 맥주잔을 힘껏 테이블에 놓다가 산산조각으로 깨뜨리고 말았다. 이 무례한 군인에 대해 비난의 아우성이 일어났고, 그것은 분노의 폭풍이 되어 일치단결해서 끝까지 저항하려는 기세가 되었다. 마치 그녀에게 요구된 것이 자기들에게까지 요구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작은 입맛이 쓴 듯 독일놈들이 하는 짓은 예전의 야만족과 하등 다름이 없다고 극언했다. 특히 여자들은 불 드 쉬이프에게 뜨거운 동정을 표시했다. 식사 때만 나타나는 수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가 가시자 일행은 식탁 앞에 앉았으나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자들은 일찍이 물러가고, 남자들만이 담배를 피우면서 트럼프 놀이를 했다. 거기에 포랑비 영감까지 한몫 끼게 했는데,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장교가 제안한 난제를 철회시킬 방법을 요령껏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트럼프에만 정신이 팔려서 남의 말은 듣지도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되풀이해서 "자, 자, 모두 노름이나 합시다" 하고 대단한 열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가래를 뱉는 것도 잊고 있어서, 이따금 가슴 속에서 풍금 소리 같은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숨이 턱에 찬 폐는 천식이 발하는 온갖 음계를 다 연주한다. 장중한 음색에서 어린 수탉이 지르는 목쉰 소리에 이르기까지. 마누라가 졸려서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데리러 왔지만 영감은 2층으로 갈 것을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마누라는 혼자 자러 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마누라는 언제나 아침 일찍이 해님과 함께 일어나는 아침패였지만, 영감은 상대만 있으면 매일 밤이라도 꼬박 새우는 밤패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누라의 등뒤에서 "여보, 내 밀크 셰이커를 불에 올려 놨소?" 하고 외치고 나서 다시 노름에 덤벼들었다. 이 사나이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음을 알자, 사람들은 밤이 깊은 것을 핑계삼아 각기 잠자리로 물러갔다. 그 다음 날도 꽤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뭔가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런 싸구려 여관에 하루라도 더 묵는다는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겨웠다.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마굿간에 매여 있었고, 마부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실망한 사람들은 할 일 없이 마차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침 식사도 처량했다. 거기에는 불 드 쉬이프에 대한 일종의 냉정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그런지, 모두의 생각도 약간씩 달라진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는 이 아가씨를 원망하고 있는 편이었다. 왜 프러시아 장교의 방에 아무도 모르게 가 주지 않는 것일까?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닌가? 첫째 누가 그것을 안단 말인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행에게 의외로 희소식을 가져다주면 얼마나 좋은가? 함께 가는 사람들이 딱해서 왔노라고 장교에게 말한다면 자기의 체면도 깎이지 않을 게 아닌가? 더구나 그런 일을 마다할 만큼 어엿한 인품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답답할 정도로 지루해서 모두 백작의 제안으로 근처를 걷기로 했다. 제각기 옷들을 두툼하게 껴입고 그들은 한떼를 이루어 밖으로 나갔다. 코르뉴데만은 불 옆에 있는 편이 좋다고 해서 남았고, 수녀들은 교회나 신부를 방문하겠다고 해서 끼어들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서 코와 귀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발도 시려서 걷기에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들판이 보였으나, 끝없이 전개되는 눈 경치가 소름이 끼칠 만큼 황량해서 일행은 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그래서 쫓기듯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여자 넷이 앞장을 서고 남자 셋이 조금 떨어져서 뒤따랐다. 르와조는 일행의 속셈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그 '계집년'이 언제까지 우리를 이런 구렁텅이에 잡아매 둘 셈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백작은 과연, 이같이 뼈아픈 희생은 여자가 자청해서 나서지 않는 한 옆에서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카레 라마동 씨는, 만일 프랑스군이 소문대로 디엡에서 반격을 감행한다면 양군이 충돌할 곳은 아무래도 토오트일 거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두 사람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걸어서 도망칠 수 있을까요?" 하고 르와조가 물으니 백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설마 이 눈 속에 여자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소? 곧 추격당해 십 분도 못 가서 잡힐 거요. 결국 포로가 되어 독일군의 희롱거리가 되는 게 고작이지요." 정말 그랬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의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웬지 서먹해서 잘 풀리지를 않았다. 한길 저편에 불쑥 그 장교가 나타났다. 온통 흰눈을 배경으로 해서 그의 날씬한 몸매가 뚜렷이 떠올라 보였다. 갓 닦은 구두를 더럽히지 않으려면 그렇게 되는지, 군인 특유의 팔자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여자들을 향해서는 인사를 했지만, 남자들에게는 오만한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했다. 이편에서도 기가 죽지 않으려고 모자조차 벗지 않았으나, 르와조만이 약간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불 드 쉬이프는 귀까지 빨갛게 붉혔다. 세 마님들은 장교가 노리개감으로 여기는 여자와 함께 걷고 있는 걸 들켜선지,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화제는 자연히 장교의 풍채며 용모가 되었다. 많은 장교를 알고 있고 감식안도 있는 카레 라마동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리 흔한 인품이 아니라는 것, 다만 프랑스 사람이 아닌 것이 유감일 뿐이며, 만일 그가 프랑스 사람이라면 미남 경기병 장교로서 여자들한테 귀염을 받을 게 틀림없다고 장담했다. 여관으로 돌아왔으나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찮은 일에도 험악한 말들이 오고갔다. 저녁 식사는 침묵 속에 이내 끝이 났다. 각기 제 방으로 올라갔는데, 잠이라도 자서 시간을 보낼 생각에서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무척 피로한 표정이고, 기분도 울적해 보였다. 여자들은 불 드 쉬이프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세례식이 있는 모양이다. 이 뚱뚱한 창부에게도 아이 하나가 있는데, 이보트의 농가에 맡겨 두었다. 1년에 한 번쯤이나 만날까, 평소에는 생각하는 일도 없었지만, 지금 누구네 집 아이가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의식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불 드 쉬이프가 밖으로 나가자 남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각기 의자를 끌어당겨 머리를 맞대었다. 이 정도에서 무슨 결말이든지 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르와조의 머리에 묘안이 떠올랐다. 즉 장교를 만나서, 불 드 쉬이프만 뒤에 남겨 두고 다른 사람들은 출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번에도 포랑비 영감이 심부름꾼으로 나섰지만 간 지 얼마 안 되어 곧 돌아왔다. 이 독일 장교는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전혀 상대를 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한 전원을 잡아 두겠노라고 주장하더란다. 때마침 르와조 부인의 천한 근성이 폭발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데서 늙어 죽을 수야 없잖아요. 어느 남자하고나 그 짓을 하는 건 갈보년의 직업이 아녜요. 새삼스레 가릴 게 뭐람.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부인. 르왕에서는 아무하고나 붙었답니다. 마부든 뭐든! 정말예요, 부인. 현청에 다니는 마부인 걸요! 난 다 알고 있어요. 상대한 남자가 우리 집에 술을 사러 오는 녀석인데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곤경에 처한 이 마당에 얌전만 빼고 있잖아요! 흥, 똥갈보 같은 년이...... 그래도 난 그 장교가 꽤 점잖다고 생각해요. 아마 오랫동안 굶주렸을 테죠. 그러던 터에 우리 세 사람이 좍 나타났거든요. 그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알고 있을 테지만 그 점만은 확실히 구별을 짓고, 소문난 계집으로 만족하겠다니까 말이에요. 말하자면 유부녀에겐 실례되는 짓을 않겠다 그 말이죠.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하겠다'면 그 말 한 마디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신분이거든요. 자기 부하들을 시켜서 우리를 겁탈할 수도 있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여자는 몸서리가 쳐졌다. 아름다운 카레 라마동 부인의 눈은 반짝 빛났는데, 안색이 좀 파리한 것은 당장 그 장교한테 겁탈이라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옆에서 의논을 하고 있던 남자들도 바싹 다가왔다. 흥분한 르와조는, 당장에라도 그 갈보년의 손발을 묶어서 적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했고, 그래도 백작은 3대나 계속 대사(大使)를 배출한 가문의 출신이라 외교관답게 어디까지나 기교적인 솜씨를 보여 이렇게 말했다. "자기 스스로 그럴 마음이 들도록 작용을 해야지요." 그래서 모두 음모를 꾸몄다. 여자들은 이마를 맞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가운데 남녀가 각기 서로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경박한 말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었다. 특히 부인들은 더없이 외설스런 극단적인 말을 해야 할 때도 말씨에 신경을 써서 품위있고 부드러운 표현을 골라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서 얼띤 소리라고는 않기 때문에, 딴 사람이 들으면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류 부인들이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수치심이란 베일은 표면뿐인 얇은 것에 불과하다. 한 꺼풀 벗기면 이상야릇한 정사에 흥분과 흥미를 느끼는 심정이 여실히 보인다. 익숙하게 남의 비밀을 입길에 올리는 품이란 심통 사나운 요리사가 타인의 음식을 만들면서 코를 푸는 것과 별다름이 없으리라. 아무래도 흥미있는 이야기라선지 자리는 저절로 명랑해졌다. 백작이 좀 노골적인 농담을 했지만, 표현이 그럴 듯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때는 왔다는 듯이 이번에는 르와조가 좀더 음탕한 이야기를 했으나 이 말에도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르와조의 아내가 아까 표명한 저 상스런 사고 방식, '이것이 저 여자의 직업이고 보면 이 남자는 좋고 저 남자는 싫다고 가릴 게 뭐람' 하는 생각이 모두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귀여운 카레 라마동 부인은, 자기라면 차라리 저 장교로 만족하겠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마치 요새나 공략하듯, 꼼꼼히 포위 공격 준비를 했다. 각자 모두 자기가 해야 할 역할과 의거할 논법, 실행해야 할 수단을 정했다. 이 산 육체의 아성을 강제로 문을 열게 하여 그 안에 적이 쳐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공격과 기습, 속임수의 차례를 정했다. 그러나 코르뉴데만은 시종일관 모르는 체하며 관여하지 않았다. 음모에 열중하다 보니 불 드 쉬이프가 돌아온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백작이 낮은 소리로 쉬! 해서 얼굴을 드니 눈앞에 그녀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물을 뿌린 것처럼 조용해졌다. 어색해서 잠시는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누구보다도 사교적인 외교에 능숙한 백작부인이 가면적인 말로 물었다. "세례식 재미있던가요?" 뚱뚱한 아가씨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교회에서 본 것과 들은 것을 남김 없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용모, 태도에서부터 교회의 모양까지. 그리고 덧붙여서, "가끔 교회에 가는 것도 좋은 일이군요!" 했다. 어쨌든 점심때까지는 부인들도 참아가면서 이 여자를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녀가 자기들의 충고를 신뢰하고 순순히 말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점심 식탁에 앉자마자 파상 공격이 시작됐다. 먼저 희생 정신에 관한 요령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과거의 예를 인용해서 쥬디트와 호로페르네스의 이야기도 나오고, 뭣을 생각했는지 쿠르리이스와 섹스투스에게로 옮겼는가 싶더니 다음번엔 클레오파트라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적의 장군들을 차례로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전부 노예처럼 길을 들이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계기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백만장자가 생각해 낸 황당무계한 역사가 튀어나왔다. 로마의 여성들이 카푸아로 몰려가서 정복자인 한니발과 부하 장병들을 어떻게 농락했는가. 제 몸뚱이를 싸움터로 삼고 무기와 전략으로 삼아서 쳐들어오는 적병을 막아낸 여인들, 조국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남자든 싫은 남자든 눈을 딱 감고 안아들여서 적의 목을 베었다는 여자들, 복수와 충의를 위해서 제 정조를 희생시킨 여자들, 그들이 열거한 것들 모두가 이런 여걸들의 이야기뿐이었다. 그뿐인가. 영국 명문 출신의 여자가 보나파르트(나폴레옹)에게 옮겨 줄 작정으로 제 몸에 무서운 전염병을 접종시켰으나, 잠자리에 든 순간 보나파르트가 갑자기 임포텐스가 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따위 등의 애매한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 말투는 어디까지나 점잖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이야기였으나, 듣는 사람을 북돋기 위해서 군데군데에 적당한 대목이 끼여 있었다. 이 이야기에 귀기울이면 이 세상에서 여자의 유일한 의무는 끊임없이 제 몸을 희생하는 일이요, 군인의 요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 줘야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두 수녀는 뭔가 깊은 명상에 잠겨 있어서 이런 이야기 따위는 전혀 듣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불 드 쉬이프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오후에는 내내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다만 지금은 그녀를 '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마드모아젤'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 이 여자가 지금까지 앉아 있던 존대받는 위치가 너무 높았으므로 다시 끌어내려서 본래의 비천한 위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때마침 수프가 나왔다. 포랑비 영감이 나타나서 전날 하던 말을 되풀이하였다. "프러시아 장교님이 엘리자베트 루세 양에게 생각이 달라졌는지 어쩐지 물어 오라고 합니다." 불 드 쉬이프는 딱 잘라 대답했다. "전 싫어요." 그런데 식사 때가 되자 사람들의 단결력에 이상이 생겼다. 르와조까지 세 번이나 실언을 했다. 각기 뭔가 그럴 듯한 예가 없을까 하고 머리를 짰으나 통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백작부인이 나이든 수녀를 잡고 옛 성자(聖者)가 행한 위대한 행적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제 딴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종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성자 중에 세속인의 눈에는 죄로밖에 비치지 않는 행위를 범한 자가 꽤 많았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것이 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행한 일이라는 구실로 그와 같은 커다란 죄를 마구 용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은 정말 유력한 논거이므로, 백작부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어쩌면 이것은 이심전심이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법의를 걸친 성직자가 곧잘 저지르는 친절한 마음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마음이 무심하게 물어 보았다가 이런 수확을 얻었는지 모르나, 여하튼 이 늙은 수녀가 이 음모에 강력한 뒷받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이 약한 수줍은 수녀라고 생각했었는데 수다스럽고 분별없는 억센 여자였던 것이다. 적어도 신학적인 어려운 이론에 천착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교리는 철석 같았고 신앙은 삐끗도 하지 않았으며, 양심에는 추호의 불안도 없었다. 신의 명령이라면 아버지든 어머니든 대번에 죽였을 테니까, 아브라함의 희생쯤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만 훌륭하다면 신의 뜻을 배반할 우려는 없다고 독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작부인은 뜻밖에도 자기의 동조자를 얻었으므로 그 신성한 권위를 재빨리 이용해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격언을 납득이 갈 만큼 부연시켰던 것이다. 백작부인은 수녀에게 일부러 물었다. "그럼 수녀님, 동기만 훌륭하다면 하느님은 어떤 수단이나 행위도 용서해 주신다, 그 말씀인가요?" "그야 물론이죠, 부인. 본래는 악한 행위일지라도 행하는 마음에 따라서 훌륭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두 여자는 이런 투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신의 의지를 멋대로 탐색하거나 신의 심판을 추측했다. 급기야는 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일에까지 신을 결부시켰다. 만사는 교묘하게 푹신한 너울이 씌워졌다. 그럼에도 이 두건을 쓴 성녀(聖女)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창녀의 노골적인 저항에 구멍을 뚫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말이 약간 빗나가서, 묵주를 늘어뜨린 수녀는 자기가 속한 종파의 수녀원의 일이나 수녀원장에 관한 일, 자신에 관한 일, 심지어는 귀여운 동료 수녀인 상 니세포르의 일까지 이야기했다. 자기네 두 사람이 르와브르로 가는 것도 천연두에 걸린 수백 명의 병사들을 병원에서 간호하기 위해 불려 간다고 말했다. 그 불쌍한 병사들의 모습을 눈에 보이듯 그려 보이고, 증세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처럼 저 프러시아 장교의 고집 때문에 발이 묶였으니, 구제할 수도 있는 프랑스 병사들을 그런 줄 알면서도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래 병사를 간호하는 것은 그녀의 전문이었다. 크리미아에도 이탈리아에도 오스트리아에도 종군한 일이 있으며, 일단 전쟁 이야기만 나오면 단박 저 용감무쌍한 종군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싸움터를 쫓아다니며 비오듯 퍼붓는 포탄 속에서 부상병을 구조하거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거친 고참병을 말 한 마디로 억누르는 데는 이골이 난 종군 수녀인 것이다. 상처와 구멍투성이인 얼굴까지 전쟁의 참화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모든 일은 제대로 되어 갔다. 수녀가 말한 다음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감명깊었다. 식사를 마치자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급히 제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에는 꽤 늦은 연후에야 내려왔다. 점심 식사는 조용히 마치었다. 전날 밤에 뿌린 씨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백작부인은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백작은 각본대로 불 드 쉬이프의 팔을 잡고 두 사람만 뒤에 처져서 걸었다. 백작은 그녀를 향해서 아버지와도 같은 다정한, 그러나 어느 구석엔가 멸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신사가 그런 종류의 여자를 상대해서 말할 때 쓰는 그런 말투였다. 그녀를 '나의 귀여운 딸'이라고 부르면서도 자기의 확고한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백작은 문제의 핵심을 말했다. "그럼 당신은 우리를 이곳에 묶어 두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건가? 프러시아군이 후퇴할 땐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도 욕을 볼 게 틀림없는데, 그래도 아직 당신이 그 사내를 잠시 기쁘게 해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건가? 이제까지 당신이 그런 일을 이따금 해 온 일인데두." 불 드 쉬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은 그녀에게 온정을 표시하고, 도리를 다해서 감정을 피력하며 채근했다. 백작은 필요에 따라서는 은근한 어조로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말도 사양하지 않았지만, 최후의 선만은 유지하여 '백작 각하'임을 잊지 않았다. 백작은 그녀를 치켜세우고 이 시점에서 자기들을 위해 힘써 주면 얼마나 고마우냐고 말했는가 하면, 갑자기 천한 말투로 내려서 "아가씨, 생각 좀 해 봐요. 녀석도 당신과 같은 미인을 맛보면 고국에 돌아갔을 때 자랑거리가 될 걸. 미안하게도 녀석들 나라엔 당신 같은 미인이 흔치 않을 테니까." 그러나 불 드 쉬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일행을 뒤따라 갔다. 여관에 돌아오자 그녀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는데, 그리고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떻게 할 예정인지, 사람들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더 이상 그녀가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모두 멍청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포랑비 영감이 들어와서, 루세 양은 몸이 불편하니까 먼저 식사를 들라고 말했다. 모두 귀가 솔깃했다. 백작은 주인 곁으로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잘 돼 가오?" "그런 것 같습니다." 말로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백작은 일행을 향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모든 가슴에서 새어나오고, 얼굴에는 기뻐하는 빛이 나타났다. 르와조는 자기도 모르게 "됐어. 이 집에 샴페인 있으면 내가 한턱 내지" 하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여관 주인이 주문받은 술을 네 병이나 들고 나타났으므로 르와조 부인은 얼굴이 파래졌다. 모두가 갑자기 의기 투합해서 수다스러워졌다.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카레 라마동 부인이 미인인 것을 백작은 처음으로 알아차린 모양 같았다. 솜장수는 솜장수대로 계속 백작부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이야기는 활기를 띠었고, 서툰 재담과 독설로 범벅이 되었다. 별안간 르와조가 불안하게 상을 찡그리더니 두 손을 들고 "쉬!" 하고 외쳤다. 좌중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놀란 것보다도 말만 듣고도 겁에 질린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르와조는 손짓으로 "조용히! 조용히!" 했다. 귀를 모으고 눈을 천정으로 향한 채 재차 엿듣는가 싶더니, 평상시의 목소리로 돌아가서 "안심하세요. 만사가 잘 돼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모두 알 수 없다는 듯이 애매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으나 곧 히죽히죽 웃었다. 15분쯤 지나자 르와조는 또 똑같은 익살을 떨었는데, 하룻밤 동안에 이것을 몇 번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2층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시늉을 하고, 그 시대의 행상인 근성을 드러내어 천한 재담을 섞어 가며 충고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런가 하면 가끔 매우 슬픈 표정이 되어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불쌍한 건 그 계집애죠" 하기도 하고, 노기등등하여 이를 악물고 "거지 같은 프러시아놈, 두고 보자!" 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댔다. 모두가 잊을 만할 때가 되면 갑자기 "그만 해! 그만!" 잘 울리는 목소리로 이 말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 이번에는 혼잣말하듯 "별수가 없지. 그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지. 그 놈이 죽이지만 않는다면 말야." 어느 것이나 악취미의 농담뿐이었으나 그래도 모두 떠들면서 좋아했다. 화내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생각컨대 분개한다는 것도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때와 장소에 따르는 모양이다. 게다가 어느 사이에 좌중에 떠도는 분위기가 짙은 음란한 기분이 된 탓도 있을 것이다. 디저트가 나올 무렵이 되자 여자들까지 품위와 재치가 있는 말로 2층에서 벌어지는 일을 암시했다. 모두 눈에 광채를 띠고 술도 상당히 마셨다. 백작은 탈선이 정도를 지나쳤을 때에도 평소의 점잖은 태도를 잃는 일 없이, 현재의 자기들의 기쁨을 북극에서 난파하고 겨울에 갇혔던 선원들이 겨우 남쪽에 가는 항로가 열린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에 비유했다. 그 말은 갈채를 받았다. 르와조는 꽤 취한 모양으로 샴페인 잔을 한손에 들고 일어서더니 "우리들의 해방을 축하해서 건배!" 했다. 전원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수녀들까지 부인들의 권유에 못 이겨 거품 이는 술에 입술을 댔지만, 두 사람 다 난생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라무네와 비슷하지만 술 쪽이 훨씬 맛있는 것 같다고 했다. 르와조가 이 장소의 들뜬 분위기를 대변해서 말했다. "피아노가 없어서 유감이군, 카드리유를 출 수 있을 텐데." 코르뉴데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더 길게 기를 생각으로 있는 긴 수염을 자포자기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겨우 12시가 되어 이제부터 흥이 나려는 참인데, 취해서 비틀거리는 르와조가 갑자기 코르뉴데의 배를 툭 치면서 빠른 말로, "어떻게 된 셈이야, 선생. 오늘 저녁은 영 기분이 좋지 않으시군. 끽소리도 하지 않으니" 했다. 그러자 코르뉴데는 머리를 번쩍 들고 무서운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더니 내뱉았다. "한 마디 해 두거니와 당신들이 한 짓은 정말 치사한 일이야!" 말을 마친 그는 문을 향해 가다가 다시 한 번 "정말 치사한 일이라구!" 되풀이하고 나서 사라져버렸다. 순간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했다. 르와조는 깜짝 놀라서 잠시 멍했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 별안간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뒤틀면서 소리쳤다. "여봐, 질투하지 말라구, 선생. 위층에 있는 치들은 젊은 연놈들이니 당신이 참아야지!" 아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르와조는 그 '복도의 비밀'을 폭로했다. 좌중에서는 왈칵 웃음이 터져나왔다. 부인들도 흥겨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백작도, 카레 라마동 씨도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흘렸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복받쳤다. "대체 그게 정말입니까, 그 양반이 그랬다는 게?" "이 눈으로 봤다니까요." "여자가 왜 마다했죠?" "프러시아놈이 옆에 있는 데선 싫다는 거예요." "설마?" "설마라뇨, 내가 보증합니다." 백작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솜장수는 두 손으로 뱃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르와조는 계속했다. "그러니까 선생은 오늘 밤의 일이 재미있기는커녕 죽을 맛이지요." 세 사람은 다시 웃었다. 이제는 숨이 턱이 차서 괴롭기까지 했다. 이 정도에서 막판이 되었다. 르와조의 마누라는 원래 심통 사나운 여자라, 잠자리에 들 참이 되어 남편을 붙잡고 카레 라마동 부인의 욕을 했다. 그 '건방진 여자'가 오늘 저녁 웃긴 웃었지만 아무래도 속에 뭔가 있는 그런 웃음을 웃더란 이야기였다. "여보, 여자란 군인에게 한번 반하면 프랑스 사람이건 프러시아 놈이건 아무래도 좋은가 봐요, 기가 막혀!" 이날 밤은 복도의 어둠이 밤새도록 수런거렸다. 숨소리 같기도 하고, 맨발로 걷는 소리 같기도 하고, 나직이 삐걱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소리였다. 모두 밤이 이슥토록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문지방 밑으로 늦게까지 불빛이 새어나왔던 것이다. 샴페인 탓인지도 모른다. 샴페인을 마시면 잠이 안 온다니까. 날이 새자 겨울날의 밝은 햇살이 비쳐서 하얀 눈이 눈부실 정도로 빛났다. 밖을 내다보니 마차에 말이 매여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비둘기떼가 장미빛 눈에 까만 동공을 보이며, 두터운 깃털에 싸인 가슴을 편 채 천천히 여섯 필의 말 다리 사이를 아장대고 있었다. 실은 그 근처에 흩어진 김이 오르는 말똥 속에서 자기 먹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마부는 양털을 두른 채 마부석에 올라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여객들도 얼굴을 빛내면서 각자 도시락을 분주히 챙기고 있었다. 이제는 불 드 쉬이프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그녀가 나타났다. 창피한지 좀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일행을 향해서 걸어왔지만 이쪽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했다. 백작은 거드름을 피우며 아내의 팔을 잡자, 그녀를 엄호하듯 하며 이 더러운 창부로부터 떼어 놓았다. 불 드 쉬이프는 놀라서 우뚝 섰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솜장수 아내 옆으로 다가서며 얌전하게 작은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그러나 상대편은 터무니없는 사람에게 인사를 받았다는 표정을 짓고 귀찮다는 듯이 고개만 까닥해 보였다. 모두들 분주한 체하며, 마치 그녀가 치마 속에 병균이라도 넣어 온 것으로 생각하는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 우르르 마차를 향해서 달려갔으므로, 그녀도 혼자 뒤따라가 전에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말없이 앉았다. 모두들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르와조의 아내는 저만큼 떨어져서 밉살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남편을 향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저 여자 옆에 앉지 않게 되어 다행이군요." 육중한 바퀴가 움직이자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불 드 쉬이프는 눈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뿐 아니다. 이 사람들의 말수단에 넘어가서 저 프러시아 장교의 팔에 안겨 키스로 몸을 더럽혔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작부인이 카레 라마동 부인 쪽을 향해 겨우 이 답답한 침묵을 깨뜨리게 되었다. "저 데토레르 부인을 알고 계시죠?" "네, 제 친구인 걸요." "정말 예쁜 분이세요." "부러울 정도예요! 본래 재능이 있는 데다 수양을 많이 쌓았거든요. 철저한 예술가라면 그분을 가리키는 말일 거예요. 노래도 잘 부르고 그림 솜씨도 아마튜어의 경지를 넘거든요." 솜장수는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유리창이 덜컹댈 때마다 이따금 단어만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이자- 지불 날짜- 프레미엄- 기한부." 여관집 테이블 위에 뒹굴던 때묻은 트럼프장을 훔쳐온 르와조는 아내와 베자그 놀이를 했다. 수녀들은 허리에 늘인 긴 묵주의 십자가를 들고 성호를 긋더니 대번에 입술이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속도를 더하여 두 사람 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것은 기도드리는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가끔 성패(聖牌)에 입을 맞추고 또 한 번 성호를 긋고는 계속해서 빠른 말로 한없이 중얼댔다. 코르뉴데는 꼼짝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겼다. 3시간쯤 달렸으리라고 생각될 무렵에 르와조가 트럼프를 치우며 말했다. "아, 배고파." 그러자 마누라가 끈으로 묶은 꾸러미를 풀고 그 안에서 쇠고기 냉육을 꺼냈다. 그것을 솜씨있게 얇게 썰어 둘이 함께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먹읍시다." 백작부인이 말하자 모두 그 말에 찬성했다. 부인은 4인분이나 준비해 온 도시락을 열었다. 모양이 작은 그릇인데, 뚜껑의 손잡이가 사기로 만든 토끼이므로 안에 든 것이 토끼고기 파이임을 알겠다. 그 다갈색 고기에는 하얀 기름이 종횡으로 흘러 있고, 그밖에도 다른 고기들을 가늘게 다져서 곁들인, 보기에도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었다. 치즈는 그루이엘의 네모진 맛있어 보이는 것이었는데, 포장한 신문지의 활자가 찍혀서 그 끈적거리는 표면에 '잡보(雜報)'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수녀들이 둥글게 말은 소시지를 펴자, 부추 냄새가 확 끼쳤다. 코르뉴데는 커다란 외투의 큰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렀다 빼더니 오른손에 삶은 달걀 네 개, 왼손에 빵 한 조각을 움켜 냈다. 껍질을 벗겨 발 밑의 짚 위에 내던지곤 그대로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달걀 노른자가 부스러져서 텁수룩한 수염에 걸린 모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았다. 불 드 쉬이프는 황급히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 같은 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태연히 먹고 있는 걸 보니 무턱대고 화가 치밀었다. 욕지거리가 저절로 입술까지 나왔다. 나오는 대로 내뱉고, 그들이 저지른 비열한 행위를 큰 소리로 외칠 작정을 하고 입술을 열었으나,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일을 생각해 주는 건 고사하고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점잔을 가장한 파렴치한 인간들에게 농락당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를 희생물로 바치고서도 용무가 끝나자 소용 없는 오물처럼 버리다니, 너무나도 사람을 업신여기는 게 아닌가. 문득 그녀는 자기의 커다란 바구니가 생각났다. 자기가 애써서 맛난 음식을 잔뜩 담아 온 바구니를. 이 자들은 그것을 굶주린 이리 떼처럼 달려들어 먹어치우지 않았던가. 조린 국물이 발려 번들거리던 영계 두 마리와 파이, 배, 거기에 포도주 네 병까지 곁들여져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팽팽한 끈이 끊어지는 것처럼 외곬으로 생각하던 기분이 갑자기 풀어지면서 울음이 복받쳤다. 울면 안 된다고 이를 악물고 어린아이처럼 흐느낌을 삼켰으나 눈물은 솟아나오기만 했다. 눈시울이 번쩍였는가 싶더니 두 줄기의 눈물이 천천히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눈물은 계속해서 더욱 많이 솟아나와 불룩한 젖가슴의 곬으로 스며들었다. 남에게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꼿꼿이 앉아서 앞만 바라보았지만 표정이 굳어지고 창백했다. 그러나 백작부인이 그걸 알아채고 가만히 남편에게 알렸다.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는 의미다. 르와조는 그봐란 듯이 무언의 미소를 흘리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댔다. "자업자득이야." 두 사람의 수녀는 먹다 남은 소시지를 종이에 뚤뚤 말아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이때 달걀을 다 먹은 코르뉴데는 소화를 촉진시키려는지 긴 다리를 앞에 놓인 의자 밑으로 뻗고, 몸을 뒤로 젖혀서 팔짱을 끼고 빙긋이 웃었다. 재미나는 장난이라도 생각났을 때 웃는 그런 웃음이라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라마르세예에즈'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다들 얼굴에 험악한 빛을 띠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 혁명가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 턱이 없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초조해졌다. 아코디언 소리를 들은 개처럼 당장이라도 짖을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코르뉴데는 멈추기는커녕 이따금 노래의 가사까지 흥얼거렸다. 조국을 사랑하는 깨끗한 마음 이끌고 떠받들라, 복수의 팔을. 자유여! 그리운 자유여! 그대를 지키는 자와 함께 싸워라. 눈이 점점 굳어짐에 따라 마차의 스피드도 늘어났지만, 갈 길은 멀고 차는 덜컹대서 기분은 우울해질 뿐이었다. 더구나 해가 저물건 마차 안이 캄캄해지건 이 사내는 노래를 그치려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복수의 휘파람을 악착스럽게 안하무인으로 불어젖히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자포자기에 지쳐 빠진 사람들은 싫지만 마음 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의 멜로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까지도 연상되는 형편인데, 이것이 목적지인 디엡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불 드 쉬이프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가끔 억누를 길 없는 흐느낌이 노랫가락 사이사이로 들려와서는 어둠 속에 사라지곤 했다. <끝> 4. 목걸이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그 여자는 운명의 과오로 해서 월급장이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예쁘고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그 여자는 지참금도 없었고 희망도 없었으며, 돈이 많은 남자의 눈에 띄어 이해를 받고 사랑을 받고 결혼할 길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되는 대로 문교부의 하급 공무원과 결혼을 해버렸다. 그 여자는 몸치장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차리고 있었으나 넋을 잃은 여자처럼 불행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란 계급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고, 그 여자들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우아함이라든가 그리고 매력 같은 것이 태생이나 문벌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의 천성적인 날씬함이나 우아하고자 하는 본능이나 기지의 부드러움이 그 여자들의 유일한 계급이며, 그런 것이 서민의 딸들을 가장 고귀한 부인들과 평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모든 고상함과 모든 사치를 할 팔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곧 고민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주택의 초라함, 더러운 벽, 의자가 헐은 것, 천이 추잡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 여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딴 여자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그런 모든 일이 그 여자를 괴롭혔고, 그 여자의 비위를 건드렸다. 자기 집의 초라한 살림살이를 돌보는 브레타뉴 태생의 어린 식모를 보면 그 여자의 마음 속에서는 절망적인 후회와, 잃어버린 꿈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동양적인 도배지를 바른 청동의 높은 촛대로 밝혀진 조용한 응접실이며, 짧은 바지를 입은 덩치가 큰 하인들이 난로의 무더운 온기 속에서 졸음이 와서 안락의자에서 잠들고 있는 그런 장면을 꿈꾸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옛 비단을 바른 커다란 살롱이며, 비할 바 없이 훌륭한 골동품이 놓인 고운 가구며, 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그들의 주의를 끄는 것을 부러워하고 또 바라고 있는 그러한 친구들과, 오후 다섯 시의 잡담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귀여운 향기가 도는 작은 살롱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 사흘이나 연거푸 쓴 식탁보가 덮인 저녁 밥상 앞에서 "아! 맛있는 수프로군! 이것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어"라고 기쁘게 말하면서 수프 그릇의 뚜껑을 여는 남편과 마주앉을 때면 그 여자는 고상한 만찬 요리며, 빛나는 은식기들이며 선경(仙境)과 같은 숲 한가운데 옛 사람들이나 이상한 새들의 벽화를 그린 도배 같은 것을 꿈꾸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옷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란 그것뿐이었다. 그 여자는 그것 때문에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 여자는 남의 마음에 들고, 선망의 대상이 되고, 매혹적이 되고, 남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 여자에게는 잘 사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수도원 시절의 친구였는데, 이제는 만나러 가기도 싫어졌다. 그만큼 돌아올 때 그 여자는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으례 며칠을 두고, 종일토록 슬픔과 후회와 절망과 비애로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손에 커다란 봉투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봐, 이것 당신 거야"라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는 재빨리 봉투를 찢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인쇄된 카드를 꺼냈다. '문교장관 조르쥬 랑포노 부처(夫妻)는 1월 18일 월요일, 공관에서 열리는 야회에 르와젤 부처를 초대하오니 부디 왕림하여 주시압.' 남편이 기대했듯이 기뻐서 날뛰기는커녕 그 여자는 초청장을 약이 오른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다가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이걸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아니 여보, 난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당신은 변변히 외출도 못하는데, 좋은 기회야. 아주 좋은 기회지. 그것을 얻느라고 애도 무척 썼다우. 모두들 얻으려고 하지 않겠어?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 같은 직원들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거라우. 당신 거기만 가면 공식 초대를 받은 사람들을 다 보게 될 거야." 아내는 초라한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외쳤다. "거기에 무엇을 입고 가란 말이에요?" 그 생각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극장에 입고 갔던 옷 있지 않우. 참 잘 어울리던데, 나 보기에는......" 그는 아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고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두 방울 두 눈 끝에서 양쪽 입 언저리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그러우? 응 왜 그러우?" 그러나 그 여자는 괴로움을 억제하고, 젖은 두 볼을 씻으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다만 옷이 없어서 거기에 못 가요. 친구 중에 여편네가 나보다 좀 낫게 옷을 걸칠 수 있는 사람한테나 초청장을 주세요." 그는 실망해서 다시 말했다. "여보, 마틸드. 딴 기회에도 입을 수 있는, 적당한 옷을 하려면 얼마나 드우? 아주 수수한 것으로 말이야." 그 여자는 잠시 생각했다. 속으로 계산을 하고, 즉시 거절의 말이나, 검소한 월급장이의 놀란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가격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아내는 멈칫거리면서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사백 프랑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안색이 좀 변했다. 왜냐하면 그는 오는 여름에 엽총을 사가지고, 일요일이면 사냥을 다니곤 하는 친구들과 낭테에르 벌판으로 사냥을 가려고, 꼭 그 정도의 돈을 저축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말했다. "좋아. 사백 프랑 줄 테니. 하지만 되도록 좋은 것으로 해요." 파티 날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르와젤 부인은 슬프고 불안하고 근심이 있는 듯이 보였다. 옷이 준비되었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저녁 때, 남편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왜 그러우, 여보? 사흘 전부터 당신 참 이상해." 그랬더니 여자가 대답했다. "장신구가 없어서 걱정이에요. 보석 하나 없고 몸에 지닐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참, 내가 초라해 보일 거예요. 야회에 안 가는 편이 더 낫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생화를 달고 가구료. 요새 같은 계절에는 참 볼품이 있어. 십 프랑이면 훌륭한 장미꽃을 두서너 개 살 수 있어." 그 여자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녜요...... 돈 많은 여자들 틈에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창피한 일이 또 어디 있어요." 그러자 남편이 외쳤다. "참 당신 바보요! 포레스티에라는 당신 친구를 찾아가서, 보석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우. 그런 부탁을 할 만큼은 친한 처지 아니우?" 그 여자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군요. 그런 생각은 조금도 못했어요." 그 이튿날 그 여자는 친구 집에 가서 자기의 괴로움을 말했다. 포레스티에 부인은 거울이 달린 의장으로 가서 큰 보석 상자를 꺼내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열고 르와젤 부인에게 말했다. "골라라, 얘야." 그 여자는 먼저 반지를 보았다. 다음에는 진주 목걸이며, 금과 보석으로 공을 들여서 만든 베네치아 십자가를 보았다. 그 여자는 거울 앞에서 그 장신구들을 한 번씩 달아보고 멈칫거렸으나 그것들을 그만 돌려 줄 결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물어 보기만 했다. "또 딴 것 없니?" "있구 말구, 찾아봐. 어떤 것이 네 맘이 들는지 모르겠구나." 문득 그 여자는, 검은 아뗑으로 만든 상자 속에서 훌륭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발견했다. 그 여자의 마음이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그 여자는 윈피스를 입은 데다가 그냥 그것을 목에 걸어 보았다.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 앞에 황홀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는 주저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물었다. "이것, 이것만 빌려 줄 수 있니?" "그럼, 물론이야." 그 여자는 친구의 목에 매달려서, 감격해서 키스를 하고, 그 보배를 가지고 도망치듯이 돌아왔다. 파티 날이 왔다. 르와젤 부인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우아하고 상냥했으며, 미소를 띠고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남자들이 그 여자를 보고 이름을 묻고, 소개를 받고 싶어했다. 내각(內閣)의 모든 관리들이 모두들 그 여자와 왈츠를 추고 싶어했다. 장관도 그 여자를 주의해서 보았다. 그 여자는 황홀해서 도취한 듯이 춤추는 것이었다. 기쁨으로 몽롱해지고, 자기의 아름다움의 승리, 그 성공의 영광, 온갖 존경과 찬미가 깨어난 모든 욕망과 여자의 마음에 그렇게도 상쾌하고 그렇게도 달콤한 승리, 그런 일종의 구름 속에서, 그 여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새벽 네 시쯤에 그 여자는 물러나왔다. 남편은 자정부터, 아내들이 마음껏 즐기고 있는 동안 딴 세 남자와 잠들어 버렸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에다 돌아갈 때를 위해서 가지고 왔던 옷을 걸쳐 주었다. 검소한 평상복이었는데, 그 초라함이 무도회의 고상함과는 조화가 되지 않았었다. 그 여자는 그것을 느끼고, 호화로운 털옷에 휘감긴 딴 부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달아나려고 했다. 르와젤이 불렀다. "기다려. 밖에 나가면 감기 들겠수. 내, 마차를 불러 올 테니." 그러나 그 여자는 남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빨리 층계로 내려갔다. 그들이 거리에 나왔을 때 마차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멀리 지나가는 마차의 마부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느 강 쪽으로 내려갔다. 실망과 추위에 떨면서. 마침내 그들은 강가에서 밤에 돌아다니는 낡은 쿠페를 잡았다. 그런 마차들은 파리에서는 밤이 아니면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낮에는 그 초라한 모습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이다. 그 마차는 그들을 마르티이르 가의 집 앞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글픈 심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남편이 열 시까지는 직장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영광에 싸인 자기 자신을 보려고 어깨에 둘렀던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러나 돌연 그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목에 둘렀던 목걸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벌써 반쯤 옷을 벗은 남편이 물었다. "왜 그러우?" 그 여자는 미친 듯이 남편을 돌아다보았다. "저어...... 저어...... 포레스티에 부인의 목걸이가 없어요."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구?...... 왜...... 그럴 수가 있나!" 그들은 옷 주름 속을, 호주머니 속을 남김 없이 찾았으나 아무 데도 없었다. 그가 물었다. "무도회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있었수?" "네, 공관의 복도에서 그것을 만져 보았는 걸요." "그러나 거리에서 떨어뜨렸다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아마 마차 속에 있을 거야." "네, 그럴 거예요. 그 넘버를 보았어요?" "아니, 당신은? 당신도 못 보았어?" "못 봤어요." 그들은 기가 막혀서 얼굴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르와젤이 도로 옷을 입었다. "혹 떨어졌나 보게 우리가 온 길을 다시 다녀오겠어." 그는 나갔다. 그 여자는 야회복을 입은 채로 누울 기력도 없어 의자 위에 쓰러져서, 불기도 없는 방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남편은 일곱 시경에 돌아왔다. 그는 아무것도 찾지를 못했다. 그는 경시청과 신문사에 가서 현상금을 걸고 왔다. 소형 마차 조합에도 가보았다. 결국 희망이 있을 만한 곳에는 전부 가보았다. 그 여자는 그 무서운 재난 앞에서, 여전히 질겁을 한 상태로 온종일 기다렸다. 저녁때, 르와젤은 두 볼이 쑥 들어가서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당신 친구한테 편지를 써요. 목걸이의 고리가 망가져서, 고치러 보냈다고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좀 숨을 돌릴 시간이 있을 테니." 남편이 부르는 대로 그 여자는 편지를 썼다. 1주일째에는 그들은 온갖 희망을 잃었다. 5년이나 감수(減壽)한 르와젤이 선언했다. "딴 보석을 대치할 생각을 해야겠어." 그 이튿날, 그들은 목걸이가 들었던 상자를 가지고, 상자 속에 상호가 적혀 있는 보석상으로 갔다. 보석상 주인은 장부를 조사했다. "그 목걸이는 우리가 팔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상자만을 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보석상에서 저 보석상으로 다니면서, 그것과 같은 목걸이를 기억을 더듬어가며 구하러 다녔다. 슬픔과 근심으로 그들은 병자와도 같았다. 그들은 팔레 르와이알의 어떤 상점에서, 자기네들이 찾고 있는 것과 똑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찾았다. 3만 6천 프랑이면 팔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석상에게 3일만 남에게 팔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만약 2월 말까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면 3만 4천 프랑으로 물러 준다는 조건을 붙였다. 르와젤은 자기 아버지가 남겨 준 1만 8천 프랑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어디서 빌려야만 했었다. 그는 돈을 꾸었다. 한 사람에게서 천 프랑, 딴 사람에게서 5백 프랑, 여기서 5루이, 저기서 3루이, 이렇게 돈을 꾸었다. 그는 차용증을 썼고, 파멸하기 알맞은 계약을 하고, 고리대금 업자와 모든 돈 빌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자기의 노후의 생활을 위태롭게 하고, 지불할 수 있을지 어떨는지도 모르면서 대담하게 사인을 했다. 그리고 장래의 괴로움이라든가 이제부터 무릅써야 할 까마득한 가난한 살림살이, 온갖 물질적 곤란이나 정신적 고민의 전망, 그런 것을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혔으면서도, 새 목걸이를 가지러 가서 3만 6천 프랑을 보석상 카운터에 늘어놓았다. 르와젤 부인이 포레스티에 부인에게 그 목걸이를 가지고 갔을 때, 포레스티에 부인은 좀 냉정하게 이렇게 말했다. "좀 일찍이 돌려주어야지. 내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않아." 그 여자는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것은 그 여자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이다. 만약 바꿔쳤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뭐라고 말했을까, 자기를 도둑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르와젤 부인은 가난뱅이의 무시무시한 생활을 맛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 여자는 영웅적으로 결심을 했다. 그 무서운 빚을 갚아야만 했다. 아마 갚고야 말 것이다. 식모도 내보내고 주택도 옮겼다. 지붕 밑의 골방을 하나 빌렸다. 그 여자는 살림살이의 막일이며, 끔찍한 부엌일을 맛보았다. 기름 낀 그릇이며 남비 바닥을 닦느라고 분홍빛 손톱을 다쳐 가며, 접시 같은 것을 씻었다. 그 여자는 더러운 속옷이며, 셔츠며, 행주를 빨고, 그것을 빨랫줄에 널어서 말렸다. 또 매일 아침 한길에 쓰레기를 가져다가 버리고 매 층마다 숨을 돌리기 위해서 쉬어 가며 물을 길어 올렸다. 그리고 빈민의 마누라장이처럼 옷을 입고, 바구니를 팔에 걸치고, 과일 가게에도 가고, 반찬 가게에도 가고, 푸줏간에도 가서, 값을 깎고 욕을 먹어 가면서 그 눈물나는 돈을 한 푼씩 한 푼씩 절약했다. 매달 증서의 돈을 지불하고, 딴 증서로 갱신하고, 기일을 연기해 받아야만 했다. 남편은 저녁 때, 장사꾼의 장부를 정서(淨書)하는 일을 했고, 밤에는 가끔 한 페이지에 5수우씩 하는 대서를 했다. 그러한 생활이 10년간 계속되었다. 10년 만에, 그들은 모든 빚을 갚았다. 고리(高利)와 함께 밀렸던 이자도 다 갚았다. 이제는 르와젤 부인도 늙어 보였다. 그 여자는 억세고, 무뚝뚝하고, 거친 마누라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머리도 제대로 안 빗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시뻘건 손으로 찬물을 가지고 마룻바닥을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남편이 사무실에 가고 없을 때면, 그 여자는 창문 앞에 앉아서 옛날의 그 야회, 자기가 그렇게 아름다웠고 그렇게도 축하를 받았던 그 무도회 생각을 꿈꾸는 것이었다. 그 목걸이를 잃지 않았던들,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아나? 누가 알아? 인생이란 그 얼마나 이상야릇한 것이고, 무상한 일이냐! 사소한 일로 파멸하거나, 살아나는 것이 예사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한 주일 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그 여자가 샹제리제를 한 바퀴 돌러 갔을 때, 문득 어린이를 거닐게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포레스티에 부인이었는데, 여전히 젊고,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르와젤 부인은 감개무량했다. 그 여자에게 말을 걸까? 물론이지. 이제 빚을 다 갚고난 지금, 모든 이야기를 그 여자에게 하리라. 말해서 안 될 것은 없지 않나? 그 여자는 가까이 갔다. "잘 있었니, 잔느?" 상대방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마누라가 자기를 그처럼 정답게 부르는 데에 놀랐다. 그래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데...... 부인! 저는 댁을 잘...... 아마 잘못 보신 게죠?" "아냐, 난 마틸드 르와젤이야." 그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오!...... 가엾게두, 마틸드. 너 참 변했구나!......" "그래, 아주 고생을 했단다. 너하구 헤어지구나서 말이야. 엄청난 불행이었어...... 이 모든 것도 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 그건 또 왜?" "내가 장관 초대에 가려 할 때 네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 준 것 생각나지?" "그래. 그런데?"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지 뭐냐." "뭐! 너 나한테 돌려 주었잖아." "아주 꼭같은 것을 돌려 준 거야. 그래서 여태껏 십 년 동안 우리는 그 빚을 갚아 왔어. 너도 알지만 아무것도 없는 우리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 하여간 다 끝났어. 나는 참 기쁘단다." 포레스티에 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너 내 것 대신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샀다는 거지?" "그래, 너는 몰랐지, 그렇지? 참 똑같은 것이었거든." 그리고 그 여자는 떳떳하고, 순진한 기쁨에서 웃고 있었다. 포레스티에 부인은 몹시 감동해서 그 여자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오! 가엾은 마틸드! 내 것은 가짜였단다. 그건 기껏해야 오백 프랑밖에는 안 되는 거였는데!......" <끝> 5. 죽은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문지기의 딸 릴리는 발이 닳도록 바빴다. 아래층 사무실 뒤에 있는 작은 부엌으로 한 손님을 안내해 그의 외투를 벗겨 주자, 현관의 초인종 소리가 또 울렸다. 곧바로 현관으로 달려가 다른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여자 손님까지 맞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케이트와 줄리아가 미리 짐작, 2층에 있는 목욕탕을 여자들의 탈의실로 마련했다. 해마다 갖는 이 자매의 무도회는 항상 큰 행사였다. 일가 친척과 옛친구들, 줄리아의 합창단원, 케이트의 제자들 중에서 나이가 좀 든 사람들과 심지어는 메리 제인에게 교육을 받는 학생들까지- 그들이 아는 사람은 모두 초대되었다. 한 번도 변변찮게 치른 적이 없었으며 예전부터 이 무도회는 항상 성황을 이루었다. 케이트와 줄리아, 두 자매는 오빠인 팻트가 사망한 뒤 하나밖에 없는 조카 메리 제인을 데리고 스토니 배터의 집을 떠났다. 그래서 아더 아일란드에 있는 이 침침하고 초라한 집으로 와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30년 전, 그들은 이 집 아래층에서 곡물 도매상을 경영하는 풀함 씨에게서 2층을 전세로 얻은 것이다. 짤막한 옷을 입은 어린아이였던 메리 제인이 이제는 살림의 기둥이었다. 그녀는 헬링턴 가의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왕립 음악학교를 나와 해마다 에인센트 음악당의 2층에서 제자들의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제자들은 거의가 킹스타운과 돌키 사이의 철도 연변에 살고 있는 상류가정의 자식들이었다. 늙은 편이지만 두 여인은 제 몫의 일을 잘해 주었다. 줄리아는 백발이긴 했으나 '아담 하와'회의 제일 소프라노였으며, 케이트는 힘이 들어 나다니지는 않았으나 뒷방의 낡은 피아노로 초보를 가르쳤다. 문지기 딸인 릴리가 가정부일을 했다. 검소한 사람들이었으나 음식만은 좋은 것을 먹었다.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으로, 즉 아주 연한 쇠고기, 3실링짜리 차, 일급품인 스타이트 술 등을 주로 썼다. 이런 가운데 릴리는 마나님이 시키는 일들을 실수하지 않고 잘 해냈으므로 안주인을 셋이나 무난히 모시었다. 잔소리는 더러 없지 않았으나 모시기에는 큰 곤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안주인들은 말대꾸하는 데는 참지 못하는 성미들이었다. 물론 이날 밤과 같이 바쁠 때는 잔소리도 있을 만했다. 10시가 이미 지났는데도 아직 가브리엘 내외는 감감소식이었다. 또 프레디 베린즈가 술에 취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메리 제인의 학생들 앞에서 술주정을 부린다면 큰일이었다. 그가 술에 취할 경우 여간 다루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늦게 오곤 했지만 가브리엘 내외가 아직 오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두 자매는 번갈아 계단머리에 나와 밖을 내려다보며 가브리엘이나 프레디 베린즈가 오지 않는가 하고 릴리에게 물어보곤 했다. "어머나, 콘로이 선생님!" 가브리엘을 맞아들이며 릴리가 말했다. "케이트, 줄리아 아주머니가 무척이나 기다리십니다. 어서오세요." "그러시겠지, 그런데 저 사람이 차리고 나서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리는 걸 아마 잊으셨나봐." 하며 가브리엘은 덧신에 묻은 눈을 털었다. 릴리는 계단 밑에까지 그의 부인을 안내하며 2층을 향해서, "케이트 아주머니, 콘로이 선생님 부인께서 오셨어요." 라고 소리질렀다. 케이트와 줄리아는 어두운 층계를 굴러내려오듯 급히 내려와 콘로이 씨 부인에게 키스하며 상당히 춥지, 가브리엘도 같이 왔어? 하고 물었다. "네, 같이 왔습니다, 이모님, 먼저 올라 가세요, 곧 따라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가브리엘은 뒤에서 여전히 신발에 묻은 눈을 닦으면서 말했다. 세 부인은 웃으면서 부인 휴게실로 올라갔다. 외투 어깨에는 스카프를 두른 듯, 하얗게 눈이 얹혀 있었으며 신발 콧등에도 눈이 묻어 있었다. 외투 단추가 눈에 얼어 붙어 털옷이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벗겨지자 싸늘한 바깥 기온이 풍겨났다. "또 눈이 옵니까, 선생님?" 릴리가 물었다. 릴리는 가브리엘의 외투를 벗겨주기 위해 앞서서 부엌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자신을 부르는 릴리의 음성에 싱긋 웃어 보이며 돌아보았다. 릴리는 호리호리한 키에 한참 성장하는 처녀였다. 파리한 얼굴, 노란 머리칼 등이 가스등 불빛에 한층 더 핏기 없어 보였다. 릴리가 계단 밑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브리엘이 알고 있던 처녀다. "응, 릴리, 아마 밤새 내릴 것 같아." 라고 대답하며 위층에서 춤추어 흔들리는 천정을 쳐다봤다. 피아노 소리에 잠시 귀를 귀울이더니 릴리에게 시선을 모은다. 릴리는 그의 외투를 차근차근 접어서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릴리, 너 아직 학교에 다니니?" 하고 친밀하게 말을 건넸다. "아니요, 졸업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는 걸요." "아, 그러면......" 가브리엘은 즐거운 듯, "오래잖아 새 신랑을 맞아 식을 올리게 되겠네." 릴리는 돌아보며 아주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요즈음 남자들은 대체로 입만 까져서 사람을 곯리려고만 하는 걸요, 뭐." 가브리엘은 큰 실수라도 저지른 듯이 얼굴이 붉어져 이 처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덧신을 벗어 던지고 목수건으로 에나멜 구두를 열심히 닦았다. 그는 키가 크고 듬직한 젊은이였다. 두 볼에 불그스레한 빛이 이마까지 퍼져올라와 희미하게 반점을 남기며 사라졌다. 수염이 없는 얼굴,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눈에 쓴 안경이 번쩍이는 렌즈와 도금한 안경테가 마치 이 청년을 침착성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번쩍이는 머리는 가운데로 가르마를 하고, 귀 뒤에까지 빗질을 해 마치 물결치는 것 같았다. 또 모자를 썼던 자리 밑에는 가볍게 컬을 이루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구두를 닦아 윤기가 나게 하고 일어서서 조끼를 밑으로 당겨 판판하게 입고 뚱뚱한 몸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재빠르게 돈을 하나 꺼내 릴리의 손에 내밀었다. "자, 릴리, 크리스마스 기간이니까...... 아주...... 아주 적지만." 하는 말을 남기고 급히 문 쪽으로 나갔다. "아, 안 됩니다......" 릴리가 따라나서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안 됩니다." 가브리엘은, "크리스마스 때야! 크리스마스 때라니까!" 하며 뛰어가듯 층계 쪽으로 가면서 손을 저었다. 층계 쪽으로 다가간 가브리엘을 보고, "그럼, 감사합니다." 라고 뒤에서 큰소리로 감사했다. 그는 응접실 문밖에서 선 채로 왈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문에 스치는 스커트 소리, 발을 끌어대며 어정대는 소리를 듣고 서 있었다. 그는 릴리가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커프스와 보타이를 바로 매만지며 마음 속에 낀 구름을 떨어버리기라도 하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다. 연설을 위해 준비한 요점만 적은 것인데 로버트 브라우닝의 싯구를 인용한 것이 마음에 좀 걸렸다. 이 집에 모인 사람들의 수준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보다는 셰익스피어나 아일란드 서정시집(토마스 무어의 시집)에서, 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것을 인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 안에서부터 점잖지 못하게 비꺽비꺽 구두 소리를 내며 춤추는 소리를 들으니 자기와는 교양의 차이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알지도 못할 시를 인용해 웃음이나 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아마 자기 지식이나 자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마치 부엌에서 릴리에게 말을 걸었다가 실패한 것처럼 또 실패할 것만 같았다. 전혀 방향을 잘못 잡았다.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로 돌아가리라 생각되었다. 그럴 즈음 두 이모와 아내가 부인 휴게실에서 나왔다. 이모들은 이미 늙은 할머니들이다. 수수한 옷차림에 작은 키다. 줄리아 이모는 케이트 이모보다 한두 인치쯤 키가 더 크고, 귀까지 내려진 머리는 잿빛이었다. 검고 군데군데 그늘이 지긴 했으나 그녀의 얼굴도 잿빛에 가까웠다. 몸집은 튼튼해 보였고 허리는 굽지 않았다. 처진 눈, 멍하니 벌린 입을 보면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할머니 같았다. 케이트 이모는 좀더 생기를 띠고 있었다. 얼굴도 언니보다는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마치 시들은 사과처럼 쭈글쭈글했으며, 옛날처럼 땋은 머리는 여문 밤 같은 것이 그의 언니와 마찬가지였다. 두 할머니는 반가워 가브리엘에게 키스해 주었다. 그는 그들의 사랑하는 조카다. 그녀들의 언니 엘렌이 항무국에 근무하던 J. J. 콘로이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였다. "그레타한테 들으니 오늘 밤은 몽크스 타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가브리엘?" 하고 케이트 이모가 물었다. "네, 안 갑니다. 작년에 그리로 갔다가 혼이 났어요. 여보, 그렇지 않아?" 하고 가브리엘은 자기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래서 이 사람이 아주 심한 감기에 걸렸던 일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이모님? 마차 유리창이 그냥 덜거덕거리고 또 메리온을 지난 다음부터는 동풍이 세차게 몰아쳐 대단했어요. 덕택에 그레타는 심한 감기를 앓았지요." 케이트 이모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한 마디 한 마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그렇게 해야지, 조심해서 실패볼라구." 하고 말했다. "그러나 저 그레타는 버려둔다면 혼자 걸어서라도 돌아갈 겁니다." 그의 아내는 미소를 띠며 말한다. "이모님, 이 양반 말씀은 듣지도 마세요. 아주 억지장이랍니다. 톰에게는 시력이 나빠진다고 밤에 푸른 전기갓을 씌워 주고 싫다는 아령을 시킨답니다. 또 이비에게는 죽만 먹인다고요. 글쎄 이비가 가엾지 뭐예요. 죽은 보기만 해도 싫다는 앤데. 그리고 또 저에겐 어떤 것을 신겨 주는지 아세요?" 구르듯이 웃으며 바라보는 아내를 가브리엘은 귀여운 듯, 행복한 듯한 눈으로 찬찬히 훑어본다. 두 이모님들도 한참 웃었다. 가브리엘의 지나친 걱정은 언제나 이처럼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오버슈즈랍니다." 콘로이 부인은 말했다. "요사이는 그것이지요. 땅이 젖어 있을 때는 꼭 그걸 신어야 해요. 오늘 밤까지도 그걸 신으라고 하지 않겠어요. 제가 안 신었지요. 다음 번엔 아마 수영복쯤 사다 줄 거예요." 가브리엘은 어색한 듯이 웃으면서 넥타이를 매만졌다. 케이트 이모님은 허리가 땅에 닿도록 웃어댔다. 줄리아 이모님도 잠시 동안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조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그게 뭐니, 가브리엘." 하고 물었다. "오버슈즈에요, 언니." 동생이 일러주었다. "뭔지 모르겠어요, 언니? 신발 위에 덧신는 덧신이요. 그렇지 그레타?" "네, 고무로 만든 거지요. 우리는 다 한 켤레씩 갖고 있어요. 저 양반 말씀이 대륙에서는 누구나 다 신는대요." 하고 콘로이 부인이 말한다. "오, 대륙에서." 하고 줄리아 이모님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약간 화가 난 듯 말했다. "이상한 물건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레타는 우습게 여기며 악단의 검둥이 생각이 난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가브리엘, 방은 보아 두었겠지? 그레타는......" 케이트 이모님은 눈치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네, 잘 데는 걱정없습니다. 그레샴 호텔에 예약해 두었어요." 라고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그래, 잘했다. 한데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되지 않을까?" "하룻밤쯤이야. 더구나 베시가 잘 돌봐 줄 테니까." 하고 콘로이 부인이 대답했다. "그래야지. 그런 믿음직한 애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지. 우리 저 릴리는 요새 웬일인지 전과 같지 않아서 탈이야." 가브리엘은 그것에 관해 한 마디 물어보려 했으나 이모께서 문득 말을 중단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그녀는 목을 난간 너머로 기웃거리며 언니를 보고, "아니, 그런데 어디를 가세요? 언니! 언니!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하고 날카롭게 물었다. 층계를 반쯤 내려간 줄리아는 돌아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프레디가 왔군." 그와 동시에 박수치는 소리와 피아니스트가 치는 마지막 음이 왈츠가 끝난 것을 알려 주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손님 몇 사람이 나왔다. 케이트 이모님은 서둘러 가브리엘을 딴 곳으로 끌고 가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살그머니 내려가 심하지 않나 보아라. 취했으면 올려보내지 말아. 틀림없이 취했을 거야, 취하구말구." 가브리엘은 층계 난간에 기대어 선 채 귀를 기울이고 엿들었다. 그때 프레디 베린즈가 웃는 소리가 났다. 소란스럽게 층계를 내려갔다. "가브리엘이 왔으니 참 다행이야. 저 사람이 오면 늘 마음이 안심돼." 라고 케이트 이모님은 콘로이 부인에게 말하며, "언니, 데일리 씨와 파우어 씨에게 무엇 좀 드리구료, 아름다운 왈츠를 추어 주셔서 고마워요, 데일리 씨. 덕분에 흥겨웠습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에 주름이 잡힌 희끗희끗한 수염의 거무스름한 남자가 그의 파트너와 같이 지나가다가, "저희도 뭐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모칸 씨." 하고 말했다. "언니, 여기 계신 브라운 씨와 파롱 양도 함께 안내하세요." 하고 케이트 이모님은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데일 씨와 파우어 씨도......" "부인들이 저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브라운 씨는 고슴도치 모양으로 입을 오므리고 웃으면서, "모칸 씨, 부인들이 저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하고 말하다가 케이트 이모님이 저쪽으로 가버리자, 말끝을 맺지 못하고 세 사람의 젊은 여자들을 뒷방으로 안내했다. 방 한가운데 네모난 식탁 두 개를 맞붙여 놓고 줄리아 이모님과 문지기가 커다란 식탁보를 펴고 있었다. 찬장에는 그릇, 잔, 나이프, 포크, 스푼 따위가 진열되어 있고 뚜껑 닫힌 피아노 위에도 음식과 과자들이 차려져 있었다. 한편 구석의 작은 찬장 앞에서 마주친 청년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브라운 씨는 부인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가서, 이 술은 따끔하고 센 술이며 달콤한 부인용이니 좀 마시지요 라고 농담을 섞어 말했다. 부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사양하자, 그는 레모네이드 세 병을 따서 주고, 자기는 청년 한 사람을 비켜 서서 위스키 한 병을 집어 자기 잔에 가득 부어 마셨다. 찬장 앞에 섰던 두 청년들이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의사의 지시라서......" 하며 브라운 씨는 절인 오이 같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세 여성들도 음악적인 웃음을 터뜨려 대굴대굴 굴리더니 그중 대담한 한 여성이, "아이, 선생님두, 설마 의사가 그런 처방을 내리셨을까!" 라고 말했다. 브라운 씨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몸을 휘저으며, "저는 그 유명한 캐시디 부인과 같단 말이에요.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자, 메리 그라임즈, 내가 마시지 않거든 마시도록 권해라. 마시고 싶으니까 말이야.'" 하며 그는 화끈해진 얼굴을 다정한 듯 너무 가까이 내밀며 더블린의 천민들이 쓰는 말투로 말했다. 부인들은 하나처럼 가만히 있었다. 메리 제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미스 파롱은 미스 데일리를 향해, 아까 연주한 왈츠의 곡명이 무엇인지 매우 아름다운 곡이더라고 말했다. 브라운 씨는 자기를 도외시하는 것을 눈치채자, 곧 두 청년에게 돌아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보랏빛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다홍치마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소란스럽게 손뼉을 치며 들어오면서, "카드리유! 카드리유를 춥시다!" 라고 외쳤다. 케이트 이모님이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남자 두 분에 여자 넷인데, 메리 제인." 하고 말한다. "오, 여기 버긴 씨와 케리간 씨가 계시는군! 케리간 씨, 파우어 씨와 같이 추시지요. 또 파롱 양의 파트너는 버긴 씨, 자, 그러면 꼭 됐어요." 하고 메리 제인이 말했다. "아직도 여자가 셋인데 그래, 메리 제인."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두 젊은이가 여자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동안 메리 제인은 미스 데일리를 돌아보며, "미스 데일리, 두 곡이나 피아노 반주를 해줬는데 또 부탁하기 어렵지만...... 오늘 밤은 여자 손님이 적어서요." "공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파트너가 계십니다, 바델다시 씨라고 테너 가수지요. 나중에 노래를 부탁드리겠어요. 더블린에서 대단한 인기지요." "정말 목소리가 좋으십니다."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초청된 손님들을 모시고 메리 제인이 방에서 나갔을 때는 이미 피아노가 처음 선무곡의 서곡을 두 번이나 친 다음이었다. 이들이 방에서 나오자 줄리아 이모님이 뒤를 힐끔 바라보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왜 그러세요? 언니, 누구 말이에요?" 케이트 이모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냅킨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던 줄리아는 동생을 돌아다보며 뜻밖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프레디 때문이야. 가브리엘이 같이 있어." 과연 가브리엘이 프레디 베린즈를 이끌고 층계를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프레디는 40세 가량의 장년으로 키도 크고 체격도 가브리엘만 했다. 어깨가 둥글넙적했다. 얼굴엔 살이 올라 희멀겋고 두툼한 귓볼과 넓은 콧등에만 혈색이 보였다. 우뚝 솟은 코, 툭 튀어나온 짱구이마, 투툼한 입술, 어디 하나 제대로 생긴 데가 없었다. 침침해 보이는 눈꺼풀과 헝클어진 숱이 적은 머리칼로 마치 졸린 듯이 보였다. 그는 층계를 올라오며 가브리엘에게 하던 얘기 끝에 너털웃음을 웃으며 왼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프레디!" 줄리아 이모님이 말했다. 프레디 베린즈는 모칸 자매에게 인사를 하였으나 그의 음성이 안 좋은 탓인지 반가운 기색은 안 보였다. 그때 찬장 앞에 마주선 브라운 씨가 자기를 보고 웃는 것을 보고 비틀거리며 건너가 조금 전 가브리엘에게 한 이야기를 다시 수군거렸다. "그다지 심하진 않은가 본데?" 케이트 이모님이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가브리엘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다시 펴보이면서, "네, 잘 알리지 않습니다."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니야. 저의 어머니가 섣달 그믐날 밤에 다짐을 받았다더니...... 참 가브리엘, 응접실로 오너라." 그러나 케이트 이모님은 가브리엘과 함께 방을 나가면서 브라운 씨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인지손가락을 흔들어 사인을 보냈다. 브라운 씨도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했다. 그는 할머니가 나간 다음 프레디 베린즈에게 말했다. "자, 그럼, 레모네이드를 한 잔 따라 줄 테니까 마시고 기운을 좀 내게, 이 사람아!" 이야기의 절정에 도달한 프레디 베린즈는 귀찮은 듯 손을 저었다. 그러나 브라운 씨는 헝클어진 옷을 고치도록 일러준 다음 레모네이드를 넘치도록 따라 주었다. 프레디 베린즈는 기계적으로 왼손에 술잔을 잡고 오른손으로 옷매무새를 고쳤다. 브라운 씨는 또한번 절인 오이처럼 웃으며 자기의 위스키잔을 채웠다. 프레디 베린즈는 얘기가 아직 본론에 도달하지 않은 듯, 마치 기관지염에 걸린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입에 대지도 않은 술잔의 술이 철철 넘쳐 흘렀다. 그는 술잔을 옮기더니 그 손등으로 왼쪽 눈을 비빈다. 금방 한 말을 다시 하며 연신 웃음만 터뜨리고 있었다. 물을 뿌린 듯 조용한 응접실, 메리 제인은 템포가 빠르고 어려운, 학교에서 가르치던 곡을 쳤으나 가브리엘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었으나 멜로디를 파악할 수 없었다. 메리 제인에게 무얼 좀 쳐 줄 것을 청했던 사람들도 과연 알아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 식당에서 나와 문간에 선 채 듣던 네 젊은이들도 잠깐 듣고는 조용히 가버렸다. 이 피아노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은 메리 제인 자신뿐이었으며, 그녀가 건반 위에 달리던 두 손을 쉼표가 있는 데서 번쩍 쳐드는 양은 마치 이교도의 신을 섬기는 여자가 손을 들고 기도드리는 것 같았다. 케이트 이모님이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고 있었다. 큼직한 샹들리에 빛을 받아 밀로 닦은 홀에 눈이 부신 가브리엘은 얼굴을 피아노보다 높이 벽으로 향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이 있고, 옆에는 런던탑에서 살해된 두 왕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것은 줄리아 이모님이 예전 처녀 때 수놓은 것들이다. 이모님들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그런 것도 가르쳤나 보다. 가브리엘은 언젠가 어머님이 생일 선물로 지어준 자줏빛 터비넷의 조끼가 생각났다. 그 조끼에도 여우 머리를 수놓아 흙색 새틴으로 안을 댄 다음 뽕열매인 오디빛 붉은색 단추를 달았었다. 케이트 이모님의 말을 들으면 가브리엘의 어머니는 형제 중 가장 머리가 좋았다고 하는데 음악적 소질이 전연 없는 것은 이상했다. 케이트와 줄리아 두 이모님은 다같이 착실하고 집안살림도 잘했다는 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언니의 사진이 화장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사진은 무릎에 책을 펴 놓고 세루복을 입고 발 아래 누워 있는 콘스탄타인에게 책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집안의 체면에 관해 신경을 많이 썼다. 어머니 덕분으로 콘스탄타인은 현재 발부리간에서 상석 부사제로 있다. 또한 가브리엘 자신도 왕립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자신이 결혼할 때 어머님이 노해서 반대하시던 일이 생각나자 얼굴에 그늘이 지는 듯했다. 어머니가 경멸의 말로 대하던 것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그레타를 가리켜 '시골 맵시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전혀 당치도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몽크스타운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병에 걸렸을 때 오랜 동안 간호해 준 것은 바로 그레타였다. 가브리엘은 메리 제인이 치는 곡이 거의 끝난 것을 알았다. 각 소절의 음계를 다시 빨리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마음 속에 일던 화가 가라앉았다. 높은 옥타브를 몇 번 친 다음 낮은 옥타브를 우렁차게 치면서 끝맺었다. 우뢰 같은 박수 소리가 났다. 메리 제인은 얼굴을 붉히며 상기된 얼굴을 하고 악보를 말아쥔 채 방에서 나갔다. 박수를 가장 열렬하게 쳐준 사람들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다음 곧바로 당으로 갔다가 피아노가 끝날 무렵에야 문간에 와 섰던 네 명의 젊은이들이었다. 랜서어스 준비가 끝났다. 가브리엘은 이바즈 양과 추게 되었다. 그녀는 솔직하고 수다스러운 젊은 여자로 얼굴엔 주근깨가 많고 갈색눈이 불거졌는데 앞가슴을 별로 내놓지 않은 옷을 입었다. 목뼈 아래 드리운 커다란 부로우치는 아일란드식 디자인에다 아일란드식의 모토가 새겨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무도의 대열에 끼어들자마자 여자는 다짜고짜 불쑥, "좀 따져볼 것이 있어요!" 라고 말했다. "나하고?" 여자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데요?" "G C가 누구지요?" 이바즈 양은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가브리엘은 얼굴색이 변했다. 이맛살을 찡그리는데 여자가 다시 뾰로통하게 말했다. "아니, 천연덕스러우시군요! 바로 선생님이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글을 쓰시더군요. 어쩌면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부끄럽긴, 왜?" 가브리엘은 눈만 껌벅이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고 했다. "그래요, 제가 부끄러울 정도인데, 선생님은 왜 그런 신문에다 글을 쓰세요? 전 친영파(親英派)이신 줄은 몰랐어요." 이바즈 양은 깍듯이 말했다. 가브리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그는 매수요일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문예평론을 써내고 15실링의 원고료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영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몇 푼 안 되는 수표보다는 평을 써 달라고 보내오는 책들을 받는 것이 더욱 기뻤다. 새책의 표지와 새로 인쇄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무척 좋았던 것이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끝나면 거의 매일처럼 부두 가까이에 있는 헌 책방, 즉 베처라 가의 힉키 서점, 에스튼 로의 웹서 서점, 메시 서점이나 뒷골목에 있는 오크로힛시의 서점으로 슬금슬금 나다니며 책을 팔아치웠다. 가브리엘은 이 여자의 공격을 어떻게 막았으면 좋을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학은 정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여자와는 오랜 동안 친구로 지냈으며 대학에 다닐 때나 학교에 있는 지금이나 경력이 서로 같은 처지였다. 그러므로 문자로 대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눈만 껌벅거리면서 애써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서평을 쓰는 것은 정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중얼대고 있었다. 파트너를 바꿔야 할 차례가 되어도 가브리엘은 그냥 어리둥절한 채 마음을 어디다 둘 지 몰랐다. 이바즈 양은 재빨리 그의 손을 차분히 붙잡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물론, 농담이었어요. 자, 바꿉시다." 라고 말했다. 다시 파트너가 되었을 때 이 여자는 대학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으므로 가브리엘은 마음이 놓였다. 브라우닝의 시를 평하신 것을 친구가 보여 주길래 그 비밀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아주 훌륭한 논문이었어요, 라고 말하며 갑자기 화제를 또 바꿨다. "오, 콘로이 선생님. 이번 여름에는 아란 도(島)로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아주 한 달쯤 있을 작정이에요. 클랜시 씨도 가시고 킬케리 씨, 캐더린 키아니 양도 같이 가요. 같이 가신다면 그레타 씨에게도 아주 좋을 거예요. 그레타 씨의 고향은 코낙트지요." "네, 본가는 그곳이지요." 가브리엘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럼, 선생님은 오시는 거지요?" 이바즈 양은 따뜻한 손으로 가브리엘의 팔을 잡으며 졸라댔다. "사실, 가기로 약속한 곳이 따로 있는데......" "어딘데요?" "여름마다 몇몇 친구들 하고 자전거 여행을 가는데......" "어디로요?" "글쎄, 대개 프랑스나 벨지움이 아니면 도이치인데......" 라고 가브리엘이 애매한 말꼬리를 남겼다. "왜, 우리 조국은 돌보지 않고 프랑스나 벨지움으로 가세요?" "그 나라의 말을 익히려는 이유도 있고 기분을 전환시키려는 뜻도 있지요." "선생님은 자신의 나라말을 더 익혀야 할 필요성은 없으세요? 아일란드말을." "글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일란드말은 나의 국어가 아닙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이 두 사람이 서로 따져 묻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돌아보며, 이 시련 속에서 억지로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의 얼굴은 이마까지 불그레했다. "나라땅을 살펴보실 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전혀 모르는 자기 백성과 자기 나라를요?" 가브리엘은 별안간, "사실 나는 내 나라에 싫증을 느꼈어요, 싫증이 났어요." 라고 쏘아붙였다. "아니, 왜요?"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요?" 이바즈 양은 다그쳐 물었다. 같이 놀러 가야겠는데 영 대답이 없으므로 이바즈 양은 정다웁게, "여보세요, 대답이 없으시네요." 라고 말했다. 가브리엘은 억지로 춤을 추면서 치미는 울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여자의 눈을 피해 딴 곳을 보았다. 여자의 표정이 뜨거웠던 것이다. 그때 모두가 한 줄로 줄을 지어 서로 손 잡을 때 그 여자가 자기 손을 꼭 잡아주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눈을 치켜뜬 채 잠시 올려다보았으므로 그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줄이 다시 흐트러질 때 그 여자는 발돋움을 하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친영파!" 라고 속삭였다. 랜서어스가 끝나자 가브리엘은 프레디 베린즈의 어머니가 앉아 있는 저쪽 구석으로 갔다. 믿음직스러우나 힘이 빠진 듯이 보이는 그 할머니의 머리는 흰눈 같았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들처럼 좀 이상스런 데다가 말을 약간 더듬었다. 아들 프레디가 왔는데 그는 많이 취해 있지는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가브리엘은 바다를 무사히 건너오셨느냐고 안부의 말을 드렸다. 할머니는 글래스고우에 있는 딸네 집에 살면서, 1년에 한 번씩 더블린으로 건너왔다. 바다는 아주 잔잔하고, 선장이 매우 친절히 살펴주어 편했다고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글래스고우의 딸네 집은 아름답고 친한 사람들도 많다는 얘기를 했다. 할머니가 중얼중얼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가브리엘은 이바즈 양과의 불쾌한 일을 모두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물론 저 처녀, 아니 저 부인, 아니 무엇인지 모를 저 여자는 아일란드 광(狂)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 그런 생각도 사라질 때가 있겠지, 이렇게 대답할 걸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남들이 있는 데서 '친영파'라고 부를 권리는 없지 않은가. 설마 농담으로라도 말이다. 나에게 마구 따지고 들며 토끼눈을 해가지고 노려보면서 사람을 놀림감으로 취급하려는 심사는 무엇인가. 왈츠를 추는 사람들 속을 헤치고 아내가 이리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와서 말했다. "여보, 케이트 이모님이 여느 때처럼 당신이 거위를 나누어 주었으면 하셔요. 데일리 씨가 햄을 나누고 저는 푸딩을 맡겠어요." "그러지." "이 왈츠가 끝나는 대로 젊은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신대요. 나중에 우리끼리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말이지요." "당신도 춤 좀 추었소?" 가브리엘이 물었다. "그럼요, 못 보셨어요? 몰리 이바즈 양하고는 무슨 싸움이었어요?" "싸움은 무슨 싸움, 왜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던가?" "그런 듯이 말하더군요. 제가 저 다시 씨를 노래시킬 거예요. 자부심이 강한 사람 같아요." 가브리엘은 우울한 말씨로, "싸움은 없었소. 아일란드 서부 지방으로 놀러 가자는 걸 거절한 것뿐이오." 라고 말했다. 아내는 기쁜 듯이 두 손을 맞잡고 깡충 뛰면서, "오, 갑시다. 골웨이로 다시 가봤으면 좋겠어요." "가고 싶으면 가구료." 가브리엘은 냉정하게 말했다. 아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베린즈 할머니를 돌아보며, "이런 주인 양반 좀 보세요, 할머니." 하고 일러바친다. 왈츠를 추는 사람들 속으로 아내가 다시 빠져 저쪽으로 갔다. 베린즈 할머니는 중단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가브리엘에게 계속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경치도 대단하다고 말했다. 또 사위는 가족을 동반해 호수 지방으로 가 낚시질을 즐기는데 어느 핸가는 아주 크고 예쁜 고기를 잡아 호텔에 가 요리를 시켜 저녁에 먹었었다는 얘기도 늘어놨다. 해마다 한번씩 그곳으로 놀러 갔다고 말했다. 가브리엘은 이 이야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인삿말과 인용하려는 싯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프레디 베린즈가 어머니를 뵈려고 방안으로 걸어오는 것을 본 가브리엘은 의자를 내주고 자기는 창가로 물러섰다. 방은 벌써 비어 있었다. 뒷방에서는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응접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춤에 지친 듯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뜨거워진 손가락을 떨리는 듯 차가운 유리창에 두들겨 본다. 바깥은 얼마나 추울까! 밖에 나가 혼자 걸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눈은 나뭇가지에 조용히 내려 앉고 웰링턴 기념비 꼭대기에 흰 모자를 씌우고 있겠지, 식탁에 마주 앉아 있기보다는 그곳이 얼마나 더 시원할까. 자기가 해야 할 인삿말의 줄거리를 다시 생각했다. 아일란드 사람들의 친절함, 서글픈 과거의 기억, 세 여신과 브라우닝의 시를 인용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또 자기가 신문평으로 썼던 이 시인에 대한 말 중에 '생각의 주릿대에 비틀리어 나오는 노래를 듣는 느낌'이라는 말을 되살려냈다. 이바즈 양이 그 대목을 칭찬했었는데 과연 진심이었을까? 아일란드를 사랑한다는 것을 저렇게 내세우는 것으로 보아 그 뒤에 자신의 생활이 있을까? 서로 기분이 상해 보기는 오늘 밤이 처음이었는데...... 자기가 연설하는 것을 식탁에 앉아 들으며 아니꼬운 눈초리로 따져 보려는 듯이 바라볼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설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 여자는 서운하게 생각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가브리엘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용기가 생겼다. 케이트와 줄리아 두 이모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분, 우리들과 함께 계시나 이젠 스러져가는 세대, 그 세대도 약간의 결점이야 있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친절한 손님대접, 유머, 온정 등 여러 가지 아름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아주 심각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새 새대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이렇게 이바즈 양을 쏘아 주자. 이모님들은 무식한 할머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될 것도 같았지만 아랑곳없다. 방안이 술렁이기에 정신을 차려보았더니 브라운 씨가 줄리아 이모님을 모시고 들어오신다. 이모는 그의 팔에 기대어 살짝 웃어 보이며 머리를 숙였다. 엉거주춤한 박수 소리가 그들을 따라 피아노에까지 번졌다. 메리 제인이 피아노와 마주앉았다. 미소를 거둔 줄리아 이모님이 방안에 소리가 잘 들리도록 반쯤 돌아서자 박수 소리도 줄어들었다. 가브리엘은 전주곡을 듣고, 줄리아 이모님이 잘 부르던 '신부로 단장하고'란 옛노래임을 금방 알았다. 힘차고 똑똑하게, 할머니의 음성은 피아노의 빠른 장식음보다 높이 노래를 빨리 불렀다. 그러면서도 작은 장식음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고 소리만 듣고 있으면 그런 대로 무난히 넘어가는 가락을 느끼며 흥에 젖을 수가 있었다. 노래가 그치자 다른 사람과 같이 가브리엘도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저편 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 소리가 너무도 진지하게 울려 노래책을 악보대에 올려 놓으며 허리를 굽히는 줄리아 이모님의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죽 표지로 된 노래책엔 그녀의 이름이 약자로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노래를 엄숙히 듣고 있던 프레디 베린즈는 다른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박수를 치며 신이 나서 얘기를 그치지 않았고, 듣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언제까지나 박수만 치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별안간 프레디 베린즈는 일어나 줄리아 이모님에게 달려와 손을 맞잡고, 말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변변치 못한 음성이 나오지 않았던지 흔들어대기만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저의 어머님께도 말했습니다만,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는 건 처음 듣습니다. 오늘 밤같이 음성이 좋아 보이기는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어디 정말인 것 같지 않습니다만, 이건 사실입니다...... 절대로 사실입니다. 음성이 그렇게 젖고...... 그렇게...... 그렇게 똑똑하시고 젊어 보이기는 처음입니다." 줄리아 이모님은 살짝 웃어 보이며 무어라고 사양의 말을 하면서 잡힌 손을 끌어당겼다. 브라운 씨는 손을 펴 할머니에게 내밀면서 굉장한 구경거리를 소개하려는 곡예사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줄리아 모칸 양, 새로 발견한 가수입니다." 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때 프레디 베린즈가 돌아서서 말했다. "여보세요, 브라운 씨. 그러다간 나중에 무슨 발견을 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저는 다만 노부인께서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시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지요." "저도 동감이에요. 음성이 매우 좋아지신 것 같군요." 줄리아 이모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음성이요? 삼십 년 전에도 내 음성은 나쁘지 않았어요." 케이트 이모님도 어조를 높여, "항상 언니한테 하는 얘기지만, 그 성가대에 그냥 묻혀버렸던 분이랍니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면서 마치 고집장이 아이를 달랠 길이 없다는 듯이 사람들을 돌아다봤다. 그러나 줄리아 이모님은 추억을 되살려내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앞을 내다보았다. "정말-" 케이트 이모님은 말을 계속했다. "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성미였어요. 밤낮, 밤낮이 없지요. 그 성가대에서 갖은 애를 다 썼지요. 크리스마스날 새벽에는 여섯 시부터!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 "그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지요, 케이트 이모님." 메리 제인은 피아노 의자에서 돌아앉으며 생긋 웃었다. 케이트 이모님은 조카를 갑자기 돌아다보며 말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메리 제인. 그러나 한평생 섬겨온 여자들을 성가대에서 몰아내시고 노래라곤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남자 따위들을 올려 앉히신 교황님으로선 의젓한 일이 못돼. 교황님께서 하신 일이니, 성당을 위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공정하지 않아. 메리 제인, 공정하진 않단 말이야!" 그녀는 이 일을 항상 언짢게 생각하는 터였으므로 아마 언니를 위한 말에 더 열중했으리라. 그러나 메리 제인은 춤추던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모두 돌아온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모님, 브라운 씨한테 실례되겠어요. 달리 생각하시는 분인데......" 자기의 신앙에 관해 이야기가 났으므로 미소를 짓고 있는 브라운 씨를 돌아보며 케이트 이모님은 곧 이렇게 받았다. "아니, 교황님이 옳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나야 어리석은 노파에 자나지 않는데 그런 말을 생각할 법도 아니지요. 하나, 그냥 살아가는 동안에 예정이다, 감사다 하는 것이 있잖아요. 제가 만약 줄리아의 경우처럼 되었다면 해리 신부님한테 직접 대고 말하겠어요." "이모님!" 메리 제인이 말했다. "모두 시장하실 겁니다. 시장기를 느낄 땐 언쟁이 나기 십상이지요." "그뿐인가요, 목이 컬컬할 때에도 언쟁이 나는 것이 예사지요." 라고 브라운 씨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식사를 하시고 말씀들은 뒤로 미룹시다." 하고 메리 제인이 말했다. 가브리엘은 응접실 밖 층계 저쪽에서 자기 아내와 메리 제인이 이바즈 양에게 식사나 하고 가시라고 붙드는 모습을 보았다. 모자를 쓰고 외투 단추를 채우면서 이바즈 양은 이 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사양하면서 시장기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벌써 지나칠 정도로 지체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십분 간이라도 계세요, 그 정도야 뭐 상관없겠지요." 하고 콘로이 부인이 말했다. "춤도 추셨는데 뭐 조금 드시지요." 메리 제인도 말한다. "정말 안 되겠어요." 이바즈 양이 사양했다. 메리 제인에게서, "조금도 재미가 없으셨나 봐요." 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이제 정말 빨리 가야겠어요." "어떻게 가시려고 그러세요?" 콘로이 부인이 물었다. "강가로 두어 발자국만 올라가면 되는 걸요, 뭐." 가브리엘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바즈 양, 정말 가셔야 한다면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그러나 이바즈 양은 이 말을 뿌리치듯 층계를 내려가면서, "싫어요, 어서들 들어가셔서 식사하세요. 제 걱정은 마시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몰리." 콘로이 부인은 멋대로 말했다. "빈낙트 리비(아일란드 말로 '안녕히'란 뜻-譯註)." 하는 인삿말을 크게 남기고 웃으면서 이바즈 양은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메리 제인은 침울한 표정으로 가는 사람의 그 이유를 몰라 다만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콘로이 부인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는 것이 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웃으며 가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층계를 얼빠진 사람 모양 내려다보았다. 그때 케이트 이모님이 식당에서 뛰어나와 난처한 듯 두 손을 마주잡고 불렀다. "이 사람이, 가브리엘이 어디 갔나? 아니 가브리엘이 어디 있을까? 모두 앉아서 기다리는데...... 준비가 다 됐는데 거위를 잘라 나눠줄 사람이 온데 간데 없으니!" "여기 있습니다, 케이트 이모님!" 가브리엘은 갑자기 명랑한 말투로 말했다. "거위쯤은 몇 십 마리라도 잘라 드리지요!" 누렇게 구운 살찐 거위가 식탁 한쪽 끝에 놓여 있고 저쪽에는 파슬리를 깐 종이 위에 껍질을 벗기고 빵가루를 뿌린 햄이 놓여 있었다. 정강이 주위엔 종이로 예쁘게 장식을 했다. 그 옆에 양념으로 버무린 쇠고기 덩어리가 쌓여 있었으며 양쪽으로 갈라놓은 이 두 개의 큰 요리 사이에는 두 줄로 작은 요리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성당 모양을 만든 두 개의 젤리, 브랑망쥬와 붉은 잼덩어리를 담은 얕은 접시 하나, 큰 잎사귀 모양을 한 접시에 줄기 모양으로 자루가 달린 것에는 자줏빛 포도송이와 아몬드를 까놓았다. 그리고 이것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스미르나 무화과를 네모나게 쌓아올린 접시, 나르멕을 갈아서 부은 카스타드 접시, 금종이 은종이에 싼 초콜렛과 과자를 가득 담은 작은 그릇, 길다란 셀러리 줄기를 꽂은 유리병, 식탁 한가운데 오렌지와 미국 사과들이 피라밋을 이룬 과일 쟁반, 그것을 지키는 보초병처럼 두 개의 납작한 옛날식의 유리 술병, 그 하나에는 포트와인이 들었고, 다른 하나엔 짙은 색 셰리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닫아 놓은 피아노 위에는 굉장히 큰 누런 접시에 담은 푸딩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스타우트, 에일, 탄산수 병들이 군복의 색깔에 맞추듯 세 분대로 정렬해 있었다. 처음 두 분대는 갈색과 붉은색의 딱지를 붙였고, 세째번의 제일 작은 분대는 흰색에 초록빛 견장을 달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망설일 것도 없이 윗자리에 앉아 고기를 써는 칼날을 슬쩍 보고는 포크로 거위를 푹 찔렀다. 이제 마음이 아주 태연해진 듯했다. 그는 고기를 썰어대는 일이라면 아주 능숙했다. 잘 준비해 놓은 식탁 윗자리에 앉는 것도 다른 어떤 일보다 즐거워하는 것이다. "파롱 씨, 무엇으로 드릴까요?" 그는 물었다. "날개가 좋으신가요, 가슴이 좋으신가요?" "가슴살로 조금만 주세요." "히긴스 씨는?" "저는 무엇이든 좋아요." 가브리엘과 데일리 양이 거위 접시와 햄, 그리고 쇠고기 접시를 각각 바꾸어 놓는 동안, 릴리는 이 손님 저 손님에게 돌아다니며 흰 냅킨에 싼 뜨겁고 솜이 많은 감자 접시를 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메리 제인의 생각이었다. 그는 또 거위에 애플소스를 쓰도록 권했으나, 케이트 이모님은 소스를 쓰지 않고 그냥 구운 거위가 좋더라고 말하며, 달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메리 제인은 자기 제자들을 돌보며 맛좋은 살점들을 집어 주었다. 케이트 이모님과 줄리아 이모님은 남자들을 위해 스타우트와 에일병을, 그리고 여자 손님들에겐 탄산수 병을 피아노 위에서 날라다 주고 있었다. 혼란 속에 웃음 소리와 그릇 부딪는 소리가 소란했다- 무엇을 보내달라는 손님의 큰 소리, 나이프와 포크 소리, 코르크 마개, 유리 마개를 따는 소리. 가브리엘은 한 번 쭉 돌린 다음 자기 몫을 가질 생각도 않고 다시 고기를 썰어 돌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모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가브리엘은 스타우트를 크게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타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메리 제인은 조용히 앉아 식사를 했으나 케이트와 줄리아 두 이모님들은 아직 식탁 주위를 달리고 쫓으며 혹은 서로 부딪치고 서로 시키고 서로 스쳐가곤 했다. 브라운 씨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고 식사나 하시라고 권했고, 가브리엘도 그랬으나 이들은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며 여전히 바삐 뛰어다녔다. 그럴 때 프레디 베린즈가 벌떡 일어나 케이트 이모님을 붙잡자 일동은 실내가 떠나갈 듯 웃어댔다. 자리에 모시자, 가브리엘은 충분히 나누어 주었다는 듯, "자, 어느 분이든 막말로 속이란 것을 원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이젠 식사를 하도록 권했다. 릴리는 남겨 두었던 감자 세 개를 가져다 주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재치 있게 말했다. "여러분 잠시 동안만 저는 없는 것으로 여겨 주십시오." 식사를 시작하여 릴리가 한쪽으로 그릇을 치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모두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으나 그는 끼지 않았다. 화제는 바로 왕립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가극단의 이야기. 멋진 콧수염에 얼굴색이 검은 청년인 테너가수 바델 다시는 콘트랄토를 제일 칭찬했다. 그러나 미스 파롱은 그 가수의 연기에서는 기품을 찾아볼 수 없더라고 말했다. 프레디 베린즈는 게이어 극장에서 공연 중인 판토마임의 제2부에서 노래하는 흑인 가수가 일찍이 자기가 듣던 테너가수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것 같다고 말했다. "들어 보셨어요?" 하고 그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바델 다시 씨에게 물었다. "아니요." 다시 씨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그 사람의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대단히 훌륭한 음성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프레디 베린즈가 말했다. "사람의 진가를 알아 주는 건 프레디뿐이에요." 하고 브라운 씨가 친절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람이라고 음성이 좋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검둥이라고 해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프레디 베린즈는 날카롭게 말했다.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 제인은 다시 화제를 처음의 가극 얘기로 돌려 어느 제자가 초대권을 주어 <미뇽>을 구경했는데 이는 물론 훌륭했었다, 듣고 있는 동안 사망한 조지나 번즈 생각이 나더라고 말했다. 브라운 씨는 더 오래 전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오래 전 더블린에 왔던 이탈리아 가극단- 티엣지엔스, 일마 데 믈즈카, 캄파니니, 위대한 트레벨리, 규글러니, 라벨리, 아람부로 등의 이야기를 하며 더블린에서 노래 같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왕립극장의 맨 위층에까지 대만원을 이루었으며, 언젠가 이탈리아의 한 테너 가수는 '군사답게 죽으련다'를 다섯 번이나 앙콜을 받았으며, 앙콜을 받을 때마다 높은 C조로 불렀다는 이야기, 또 어느 땐가는 구경왔던 사람들이 너무 열광한 나머지 유명했던 프리 마돈나가 타고 온 마차에서 말을 풀어내고 자기들이 호텔까지 이끌고 간 얘기도 했다. "왜 근래에는 옛날처럼 유명한 오페라 르끄레치아 볼지아 같은 것은 상연하지 않을까요? 아마 노래할 만한 성량을 가진 가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라고 말을 끝냈다. "아니지요, 요사이도 과거에 비해 못지 않은 가수들이 있답니다." 하고 바델 다시 씨가 말했다. "어디에요?" "런던, 파리, 밀라노." 바델 다시 씨는 열을 올렸다. "카루소 같은 사람도 지금 말한 사람들에게 빠지지 않습니다. 더 훌륭하단 말을 하기가 어렵다면요."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적이 의심스럽군요." 하고 브라운 씨가 말한다. "아, 저는 카루소의 노래를 한 번 들어봤으면 하는 게 소원인데요." 메리 제인이 말을 받는다. 고기 뼈를 뜯고 있던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나에게 좋은 테너가수는 단 한 사람뿐이었지요. 내 듣기에 그렇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을 아시는 이는 아, 여기에는 없을 거예요." "누구신데요, 모칸 씨?" 바델 다시 씨가 겸손하게 물어본다. "파킨슨이란 사람이었지요. 내가 들었을 때는 그분의 한창때였지요.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테너 음성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한데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바델 다시 씨가 말했다. "네, 네, 모칸 씨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파킨슨의 노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너무 어릴 때입니다." 브라운 씨가 말했다. "아름답고 순수하며 부드러운 영국의 테너가수였습니다." 케이트 이모님은 열성적으로 말했다. 가브리엘도 식사가 끝나자 그 큰 푸딩을 식탁에 옮겨 놓았다. 다시 포크와 스푼이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브리엘의 아내가 푸딩을 한 숟가락씩 접시에 떠서 내려보내면 식탁 가운데 앉았던 메리 제인이 딸기 젤리, 오렌지 젤리 그리고 브랑망쥬와 잼을 더 담아 돌렸다. 이 푸딩은 줄리아 이모님이 만든 것이었는데 누구나 칭찬이 대단했다. 그렇지만 직접 만든 본인은 색깔이 좀더 누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칸 씨, 저만큼 누르면 되겠지요? 제 이름이 누르니까요." 브라운 씨가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가브리엘만 제외하고 줄리아 이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푸딩을 먹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당질의 음식은 먹지 않았으므로 그를 위해 셀러리를 좀 남겨 두었었다. 프레디 베린즈도 셀러리를 하나 집어 푸딩과 같이 들었다. 그는 셀러리가 매우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며, 때마침 의사에게 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식사 중 계속 아무 말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열흘쯤 안에 메라레 산으로 휴양하러 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메라레 산 이야기를 했다. 그 산의 공기는 아주 신선하며 수도원의 수도승들도 매우 친절해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브라운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다면. 거기 가서 여관에라도 든 것처럼 여장을 풀고, 산해진미를 먹고, 한푼도 내지 않고 와도 된다는 말인가요?" 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도원에 갈 때는 희사를 하지요." 메리 제인이 말했다. "우리 성당에서도 그런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브라운 씨가 솔직히 말했다. 수도사들은 말을 하지 않으며, 새벽 두 시에 일어나고 잘 때는 관 속에 들어가 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놀라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그 수도원의 규칙이지요." 케이트 이모님이 예사로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할까?" 브라운 씨는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다. 케이트 이모님은 그것이 규정이기 때문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브라운 씨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레디 베린즈는 자기가 아는 한 친절히 설명해 주며, 속세의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속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설명을 들어도 석연치 않아서 브라운 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주 좋은 일이군요. 그러나 관이 아니고 스프링이 든 편한 침대에서 자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관이라는 것은 인간의 종말을 항상 생각하게 하지요." 메리 제인이 말했다. 우울한 이 이야기 때문에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침묵 속에 잠겼다. 그동안 베린즈 할머니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분명치 않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좋은 사람들이에요. 신앙심이 매우 독실합니다." 포도, 아몬드, 무화과, 사과, 오렌지, 초콜렛, 과자 등이 돌려졌다. 줄리아 이모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포트와인이나 셰리를 권했다. 바델 다시 씨는 처음에는 둘다 안 마신다고 하다가, 옆에 앉은 사람 하나가 툭 치면서 무엇이라고 속삭이자 잔을 받기 시작했다. 첫잔을 돌아가며 따를 때 이야기는 점점 그치고 술 따르는 소리와 걸상을 바로잡는 소리만 들렸다. 모칸 여사도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한두 번 기침 소리를 냈다. 몇몇 남자들이 좀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조용해졌다. 가브리엘은 걸상을 밀치며 일어섰다. 그와 함께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높아지다가 뚝 그쳤다. 가브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식탁보를 짚고 서서 엉성한 미소를 짓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얼굴들이 자기를 쳐다보느라고 줄이 지어선 것을 보고는 시선을 돌려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저쪽에서는 피아노의 왈츠 소리와 응접실에서 문에 스치는 스커트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에서도, 눈이 내린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불이 켜진 유리창을 바라보면 왈츠 소리가 들릴까? 거기선 공기가 차갑겠지. 저 멀리 깔린 공원 나무에는 눈이 소복이 내렸겠지. 웰링턴 기념비는 흰눈으로 모자를 쓰고, 15에이커에 달하는 눈 내린 밤에 서서 서쪽으로 빛을 비추고 있겠지. 가브리엘은 시작했다. "여러분, 예에 의해 오늘 밤에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저에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눌변으로써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연한 말씀을!" 브라운 씨의 말이다. "그러나 여하튼 제 의중을 촌탁하시고 지금의 소감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지붕 밑에서 이 풍성한 식탁에 우리가 둘러앉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이 댁의 귀하신 부인들의 후하신 대접을 받는 손님이 되기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습니까?" 그는 팔을 한 번 둥글게 젓고 말을 멈추었다. 모든 사람은 케이트 이모님과 줄리아 이모님 및 메리 제인을 보면서 웃거나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의 여주인은 기쁨에 넘쳐 얼굴이 붉어졌다. 가브리엘은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계속했다. "해마다 더욱 굳어지는 느낌은,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영광을 돌리며 또 귀중히 보존하여야 할 전통은 손님을 후히 대하는 바로 그런 전통인 것입니다. 제가 알기에는(많은 다른 나라에 다녀왔지만), 이것은 현대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결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이런 결점은 고귀한 것이며, 우리가 오래도록 길러 나가야 할 결점입니다. 이제 한 가지 믿어도 좋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하나의 지붕 아래 어진 세 부인이 계시는 동안은- 오래오래 장수하시길 빕니다- 진정하고도 간곡한 온정이 깃든 아일란드식 후한 대접은 우리 선조가 계승시켜 주었고 우리가 또한 계승해야 할 이 후대의 전통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좌중은 과연 그렇다는 듯이 수군수군했다. 가브리엘은 이바즈 양이 여기 없으며 실례를 무릅쓰고 가버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가운데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세대야말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각'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 열광, 뜻하는 것은 그릇되지만 대체로 말해 진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회의의 시대며 다른 곳에서 사용한 말을 써도 좋다면, 생각에 여념이 없는 세대입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과거의 우리 것이었던 온정, 손님에 대한 후대, 또는 온화한 유머 같은 것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지난날의 이름있던 가수의 이름들을 들으며 오늘 밤 제가 느낀 것은 우리는 더 씁쓸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은 과연 화려한 시대였다고 말씀드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다시 재현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같은 모임에 있어서는 그 시대를 자랑과 사랑으로 회고하며, 우리가 쉽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고인이 된 위대했던 이름들에 대한 추억을 마음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해야겠습니다." "경청! 경청!" 브라운 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음성을 약간 낮추어 말했다. "이와 같이 모여서 늘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서글픈 생각이 있습니다. 지나간 날, 젊었을 때 달라진 일, 그리고 오늘 저녁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는 얼굴들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주변에는 이같이 서글픈 일이 많이 밀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헤치고 나갈 힘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산 사람으로서의 직책과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마땅히 줄기찬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나간 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침울해지는 회고로 오늘 밤 이 모임에 어둠을 던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망했던 일상생활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친구로서 마주앉아 있으며 동인 동료로서 어떤 면에서 말씀드린다면 참된 동지적인 정신으로 모여 있으며 또한 더블린 음악계의 세 여신의 손님으로 모여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에 이르자 좌중은 박수를 크게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줄리아 이모님은 좌우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브리엘이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얻지 못했다. "우리가 세 여신이래요." 메리 제인이 일러준다. 줄리아 이모님는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빙그레 웃으며 같은 어조로 말을 계속하고 있는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저는 옛날 파리스가 한 역할을 오늘 저녁 재현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세 분 중 어느 분이 더 어떻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치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제 능력으로는 부치는 일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세 분을 차례로 보니까 마음씨가 어질어서 그분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속담처럼 되어버린 첫째 주인, 연년히 더 젊어지시는 듯하며 오늘 저녁에 부르신 노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놀라움과 계시가 되신 그분의 언니, 그리고 또 재능이 풍부하시고 가장 모범적인 조카인 젊은 부인...... 여러분, 정말 어느 분이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없이 훌륭한 분들입니다." 가브리엘은 이모님들을 내려다보았다. 줄리아 이모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며, 케이트 이모님은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자, 곧 결말을 맺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잔을 번쩍 치켜 들고 다른 사람들도 잔을 잡은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때에 힘차게 말을 했다. "우리 다같이 이 세 분을 위해 잔을 듭시다. 세 분의 건강과 행복과 장수와 번영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빕니다. 그래서 이 세 분이 각자가 정당한 자격으로 차지한 자랑스런 위치와 우리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존경과 사랑의 위치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잔을 들고 일어서서 앉아 있는 세 사람의 부인을 향해 브라운 씨의 선창으로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아니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네. 케이트 이모님은 체면도 아랑곳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줄리아 이모님도 감개무량한 듯한 표정이었다. 프레디 베린즈는 푸딩 포크로 박자를 맞추고 모두 마주선 채 노래해, 마치 노래의 원탁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야 아니라고 하겠지만 하고 후렴을 소리높이 부르고 다시 주인네들을 향해,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모두 즐겁고 명랑한 친구들 아니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네. 이어서 환호의 소리가 터져나오자, 다른 방에 있던 손님들도 호응하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 왔다. 프레디 베린즈가 포크를 높이 쳐들고 휘두르며 지휘하는 가운데...... 앙상한 새벽바람이 손님들이 내려선 현관으로 들어왔다. "누가 문 좀 닫으시지요. 베린즈 할머니 감기 드시겠네요." 하고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브라운 씨가 나가 계세요, 이모님." 메리 제인이 대답해 준다. "안 가는 데가 없는 양반이야." 케이트 이모님은 나직히 말했다. 메리 제인은 그 말투가 우습자, "정말 대단히 친절하신 분이에요." 하고 농담조로 말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계속 와 계셨기 때문에 아주 도움이 됐어." 케이트 이모님도 같은 어투로 말하고 이번엔 자신도 활짝 웃으며, "어쨌든 들어오시고 문을 닫으시라지. 내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다행이겠지만." 라고 덧붙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밖에 나갔던 브라운 씨가 들어오며 가슴이 터질 듯 크게 웃었다. 가짜 아스트라한 커프스와 동정이 달린 길다란 초록색 외투를 입고 머리엔 둥근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눈에 뒤덮인 강가를 가리켰다. 그쪽에서 누가 날카롭게 휘파람 소리를 길게 내는 것이 들려왔다. "프레디는 시내의 마차를 죄다 불러낼 셈인가봐요." 하고 그는 말했다. 가브리엘은 사무실 뒤에 있는 작은 부엌에서 외투를 입으며 나와 현관을 살펴보고, "그레타는 아직 안 내려왔나요?" "옷을 입고 있던데."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누가 이층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나?" 가브리엘이 물었다. "아무도 없어. 다들 간 걸." "아니에요. 바델 다시 씨하고 오캐래간 양이 아직 나가지 않았어요." 메리 제인의 말이다. "어쨌든 누군가 피아노를 갖고 장난하고 있군요." 가브리엘이 말한다. 메리 제인은 가브리엘과 브라운 씨를 힐끗 바라보더니 몸을 흔들어대며, "두 분이 그렇게 든든하게 차리고 나선 것을 보니 정말 추워지네요. 저는 이런 시간엔 집에 가기 위해 나설 용기가 없어요." "나는 이럴 때-" 브라운 씨가 기분좋게 말한다. "시원한 시골길을 걷거나 혹은 잘 달리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 것이 무엇보다 통쾌하겠는데요." "우리도 예전엔 집에 좋은 말과 마차가 있었지요." 줄리아 이모님이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잊을 수 없는 조니여!" 하고 메리 제인이 웃으며 말한다. 케이트 이모님과 가브리엘도 같이 웃었다. "그 조니란 말이 어디가 그리 대단했나요?" 브라운 씨가 물었다. "세상을 떠난 패트릭 모칸 씨, 즉 저의 외조부님의 말씀입니다. 만년에는 노신사란 별명이 붙을 만큼 유명한 분이었지요. 아교를 제조하는 분이셨지요." 가브리엘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또, 가브리엘." 케이트 이모님이 웃으며 말했다. "풀공장이었지." "좌우간 풀이든 아교든간에." 하며 가브리엘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노신사분이 조니란 말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조니는 노신사의 공장에서 일했지요. 방아를 메고 돌고 도는 그런 일이었어요. 그러나 조니의 슬픈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어느 날 노신사가 지방 유지들과 같이 공원으로 열병식 구경을 가기로 했습니다." "좋은 곳에 가 계시면 좋으련만." 케이트 이모님은 가엾다는 어조였다. "아멘!" 가브리엘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 노신사는 조니에게 마차를 메우고 실크모자에 제일 좋은 칼라를 달아 입고, 베크 거리 근처에 있는 선조 대대의 대궐로부터 의젓한 풍채로 나섰지요." 가브리엘은 말을 계속한다. "선조 대대의 대궐에서 조니를 몰고 나선 것이에요. 윌리암 왕의 동상이 있는 근처까지 손쉽게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왔을 때 윌리엄 왕이 타신 말하고 연애라도 할 셈이었는지 또는 방앗간으로 돌아온 줄로 착각을 했던지 조니는 그 동상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얘기를 계속하며 덧신을 신은 채 현관을 빙빙 돌아 모든 사람들을 웃기며,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가브리엘은 말했다. "그래서 대단히 의젓한 분인 노신사는 대노하여, '가자, 이 양반이 왜 이럴까? 조니! 조니! 이상하게 노네,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군!'" 가브리엘의 흉내로 터져나오던 웃음소리가 갑자기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뚝 그쳤다. 메리 제인이 달려가 현관문을 열고 프레디 베린즈를 들어오게 했다. 모자를 뒤로 밀어쓰고 추워서 등을 굽힌 채 프레디는 분주하게 서둘러댔다. "마차는 하나밖에 못 얻었어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강가를 따라가다가 하나 집어 타지요, 뭐."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래, 베린즈 씨를 더 지체시키지 않는 게 좋겠어요." 케이트 이모님도 말했다. 베린즈 할머니가 아들과 브라운 씨에게 부축을 받으며 층계를 내려서서 한참 만에 마차 안에 올라탔다. 프레디 베린즈는 따라 올라가서 브라운 씨의 지시를 받으러 한참 만에 자리잡고 편히 앉혀 드렸다. 할머니를 편히 앉혀 드린 다음 프레디 베린즈는 브라운 씨도 타라고 말했다. 타요, 안 탑니다, 하며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브라운 씨도 올라탔다. 마부는 담요를 무릎에 덮고 나서, 어디로 갈 것이냐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프레디 베린즈와 브라운 씨가 서로 가자는 곳이 달라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다. 문제는 도중에 브라운 씨가 어디서 내릴 것이냐였다. 케이트 이모님과 줄리아 이모님, 그리고 메리 제인까지도 층계 위에 서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해 한바탕 웃었다. 프레디 베린즈는 웃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마차 문으로 연신 머리를 내밀었다, 들여밀었다 하여서 모자가 벗겨질 뻔했다. 그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어머니한테 속속 일러 바쳤다. 마침내 브라운 씨는 어리둥절해 있는 마부에게 모두들 웃고 떠들썩한 소리보다 더 높여, "트리니티 대학을 아시오?" 하고 외쳤다. "네!" 대답과 동시에 채찍을 내리쳤다. 마차는 웃음 소리와 인사하는 잡음 속에 강가를 따라 덜커덩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딴사람들처럼 현관 앞에까지 나가지 않고 층계를 바라보며 현관의 어두컴컴한 가운데 서 있었다. 층계 맨 위쪽에 웬 여자가 서 있었다. 역시 어둠 속에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붉은 흙색과 연분홍 스커트 자락의 장식에 그늘이 지어 검고 희게만 보였다. 자기 아내였다. 난간에 기대 서서 무슨 소린가를 듣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내가 저렇게 조용히 서 있는 것에 놀라 자기도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현관 앞 섬돌 위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피아노 소리가 한두 번, 그리고 어떤 남자의 노랫소리만 약간 들려왔다. 그는 현관의 어둠 속에 조용히 서서 아내를 쳐다보며 노래의 가사를 들으려 했다. 아내의 모습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치 무엇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층계의 어둠 속에 서서 멀리의 음악을 듣고 있는 여자가 상징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자신이 화가라면 아내를 지금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 푸른 벨트의 모자는 노랑머리가 어둠의 바탕으로 살아나게 그릴 것이며, 스커트 자락의 장식 중에 빛깔이 짙은 연한 것이 더 잘 살아나게 할 것 같았다. 화가라면 그 그림의 이름을 '먼 음악'이라고 짓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현관문이 닫히며 케이트 이모님, 줄리아 이모님 그리고 메리 제인이 아직도 웃고 있었다. "프레디는 대단하지요? 정말 굉장한 분이에요." 메리 제인이 말했다. 가브리엘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아내가 서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현관문이 닫히니까 피아노 소리와 음성이 더 잘 들려왔다. 가브리엘은 조용하라고 손을 쳐들었다. 들려오는 노래는 아일란드의 오래된 가요 같았는데, 노래하는 사람은 가사에도 자신이 없고 자기 목소리에도 자신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노랫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노래하는 사람의 목이 쉰 까닭으로 곡조의 오르내림을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가사의 내용은 서글픈 것이었다. 아, 내 머리에 비가 내리고 살은 이슬에 젖었는데 내 사랑 싸늘히 누워 있네 "아!" 메리 제인이 말했다. "바데 다시 씨가 노래를 부르는군요. 밤새 안 부르던 분이...... 가시기 전에 한 곡 시켜야지." "참, 그래라."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메리 제인은 다른 사람들 앞을 지나 층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다 가기도 전에 이미 노랫소리는 끝나고, 피아노 뚜껑이 후닥닥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 들켰군, 내려 오시지요, 그분이 그레타?" 위를 향해 물어본다. 가브리엘은 아내가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이어 아내가 층계를 내려왔다. 몇 발자국 뒤에 바델 다시 씨하고 오캐래간 양이 따라 내려왔다. 메리 제인이 외쳤다. "아니, 다시 씨는 모두가 황홀하게 듣고 있는데 그렇게 그치는 것은 너무나 야속합니다." "저도 저녁 내 졸랐어요." 오캐래간 양이 말했다. "그리고 콘로이 부인께서도 그러셨지 뭐예요. 감기가 심하셔서 노래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군요." "다시 씨도 거짓말이 보통이 아니시군."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제 목소리가 까마귀 소리같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바델 다시 씨는 아주 무뚝뚝하게 말하며, 급히 부엌으로 가서 외투를 입었다. 예의 없는 소리에 그만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 케이트 이모님은 이마를 찡그리고 그 이야기는 더 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다시 씨는 목을 잘 싸감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날씨 때문이시군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줄리아 이모님이 말했다. "감기에 안 든 사람이 없어요." 케이트 이모님도 말했다. "삼십 년 내의 큰눈이랍니다. 이 눈이 전 아일란드 어디에서나 내리고 있다고 오늘 아침 신문에 났어요." 메리 제인이 말했다. "나는 눈이 내린 경치를 좋아해요." 줄리아 이모님이 슬픈 어조로 말했다. "저도 좋아해요." 오캐래간 양이 말했다. "지상에 눈이 없으면 크리스마스 같은 기분이 나지 않지요." "그런데 다시 씨는 어쩌면 눈을 싫어하실까?" 케이트 이모님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씨는 든든히 싸고 단추도 꿰고 부엌에서 나오면서 실수를 뉘우치는 듯한 말투로 감기가 든 내력을 이야기했다. 사람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일러 주고 또 어떤 사람은 안 됐다고 위로도 하며 특히 밤바람에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가브리엘은 이 대화에 끼지 않는 아내를 보고 있었다. 아내는 먼지 낀 채광 유리문 아래 서 있었다. 가스 불빛을 받은 풍성한 노란 머리를 며칠 전에 난롯불에 쬐이며 그 머리를 말리던 생각이 났다. 아내는 그 당시와 같은 자세로 서서 옆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마침내 이쪽을 보고 돌아섰다. 두 뺨이 불그레해졌고 눈에선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가브리엘은 별안간 뛸 듯이 기쁨을 느꼈다. "다시 씨, 지금 그 노래 곡명이 뭐지요?" 아내가 물어본다. "'아그림의 처녀'란 노랩니다. 그러나 잊어서 잘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 울고 계십니까? 그 노래를 아시나 보지요?" "'아그림의 처녀', 잘 생각나지 않네요." "참 좋은 노래이지요. 오늘 밤 목소리가 잘 나지 않은 것이 애석하네요." 하고 메리 제인이 말했다. "또, 저래, 메리 제인." 케이트 이모님이 말했다. "다시 씨를 괴롭히지 말라니까." 모두 갈 준비를 마치고 있는 것을 보고 가브리엘이 앞장서서 현관으로 가 작별인사를 하면서 "안녕히 계세요, 케이트 이모님. 잘 놀고 갑니다." "안녕, 가브리엘! 안녕, 그레타!" "안녕히 계세요, 케이트 이모님,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줄리아 이모님." "아, 그레타 안녕히, 내가 그만 몰랐군." "안녕히 가세요, 다시 씨, 안녕히 가세요, 오캐래간 양." "안녕히 계십시오, 모칸 씨." "부디 안녕히들 계십시오." "안녕히들 가세요, 조심해 가세요." "안녕! 안녕!" 새벽은 아직도 어두웠다. 누르스름한 빛이 집과 강 위에 걸려 마치 하늘이 내려앉은 듯했다. 땅은 질척거렸고 지붕과 강가의 울타리와 지하실로 들어가는 길에 둘러린 울타리 같은 것에나 눈이 남아 있었다. 가로등은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벌겋게 켜져 있었다. 강 건너편에는 법원 건물이 위압하는 듯 무거운 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레타는 바델 다시 씨하고 나란히 앞에 서서 걸었다. 구두는 흙색 보자기에 싸 한쪽 팔에 끼고, 두 손으로는 치맛자락이 젖지 않게 걷어올렸다. 얼마 전처럼 아름다운 맵시는 없었으나 가브리엘의 눈빛은 아직도 기쁨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혈관에 피가 약동하며 흐르고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자랑스럽게 즐겁게, 그리고 정다움이 힘차게 물결쳐 왔다. 아내는 아주 경쾌하게 곧바로 걷고 있었다. 소리없이 달려가서 어깨를 붙잡고 귀에 대고 어떤 어리석고 정다운 말을 속삭여 주고 싶었다. 얼마나 연약해 보이는지 이유없이 보호해 주고 싶고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두 사람만의 남모르는 생활의 여러 순간이 기억 속에 별처럼 흩어졌다. 헤리오트로핀 색의 봉투가 아침 식사 후 마시는 커피 잔 옆에 놓여 있고, 그것을 매만지는 모습, 새들이 담쟁이 넝쿨 속에서 재재거리고, 거미줄은 커튼이 반짝이며 마루에까지 비춰 주어 그는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 들어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혼잡한 포옴의 사람들 틈에서 장갑을 낀 아내의 따뜻한 손바닥에 기차표를 꼭 쥐어주는 모습, 아내와 같이 추운 데 서서 살창이 있는 유리창 안에서 소리치며 불붙는 아궁이에서 유리를 만들어내는 일꾼을 바라보는 모습. 그 날은 매우 추웠었다. 찬바람에 향기를 풍기는 아내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아궁이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물었다. "그 불이 뜨겁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아궁이에서 불타는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엉뚱한 대답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보다 더 정다운 기쁨의 파동이 그의 가슴에서 나와 뜨거운 물결처럼 동맥 속에 굽이치는 것 같았다. 정다운 별빛처럼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생활이 그의 기억에 생생하게 발산되었다. 이런 순간을 아내에게 상기시켜 그동안 무미하게 보낸 기간을 잊어버리고 다만 도취의 순간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세월은 자기나 아내의 감정을 메마르게 한 것 같지 않았다. 어린애들, 글쓰는 일, 아내의 살림걱정도 그들 마음 속의 사랑의 불길을 꺼버린 것 같지 않았다. 그 시절에 그가 아내에게 보낸 어떤 편지 속에는, '이런 말이 이렇게 싱겁고, 차갑게 생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당신의 이름되기에 적절한 만큼 정다운 말이 없기 때문인가요?' 라고 씌어 있었다. 여러 해 전, 자기가 쓴 이 말은 먼 음악처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내와 둘만 있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헤어져 가고 단둘이 호텔방에 들어가면 그때는 우리끼리만의 시간일 것이다. 나는 부드럽게, '그레타!' 하고 부르자. 아마 저 사람은 처음엔 알아듣지도 못할 거야. 옷을 벗을 테니까. 그러다가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나를 돌아보겠지...... 와인테번 거리 한모퉁이에서 마차를 만나 탈 수 있었다. 그 덜컹거리는 소리가 고마웠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아내는 피곤해 보였다. 다른 두 사람은 집이나 거리들을 손짓해 가리키며 몇 마디씩 얘기를 주고받는다. 말은 어두컴컴한 새벽 거리를 피로한 듯 달려간다. 덜컹대는 낡아빠진 상자를 이끌고 가브리엘은 다시 아내하고 같이 마차로 배 타러 가는 신혼여행길에 오르던 기분을 느낀다. 마차가 오코넬 다리를 건널 때 오캐래간 양이 말했다. "오코넬 다리를 건널 땐 언제나 흰 말이 보인다는 얘기가 있지요." "이번에는 흰 사람이 보이는군요." 가브리엘이 말했다. "어디요?" 바델 다시 씨가 내다본다. 가브리엘은 눈이 하얗게 얹힌 동상을 가리키며 다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저었다. "안녕하시오, 댄!" 명랑한 투로 인삿말을 동상에게 보냈다. 마차가 호텔 앞에 닿자 가브리엘은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델 다시 씨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마차삯을 치르고 1실링을 더 주었다. 마부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했다. "댁도!" 가브리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아내는 그의 팔에 기대 마차에서 내려 인도 한끝에 선 채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내는 몇 시간 전에 춤을 출 때처럼 그의 팔에 가볍게 기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행복하고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이 여자가 자기 아내란 점에서 행복을 느꼈고, 그 모습이 아름답고 아내다운 데가 있어 자랑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 많은 추억들을 상기시키고 비로소 아내의 몸에 맞닿으니 선정적인 이상한 냄새가 풍겨 강한 욕정이 전파처럼 온몸을 스쳤다. 가브리엘은 아내가 가만 서 있는 틈을 이용, 그녀의 팔을 끌어다가 자기 허리에 바싹 끌어 감아 주고, 호텔 앞에 서 있으니까 마치 생활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집과 아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된 것 같았다. 열광하고 찬란한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도망쳐 온 기분이었다. 한 늙은이가 현관 안에서 칸막이가 된 큰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가 두 사람을 보더니 얼른 일어서서 사무실에서 촛불을 켰다. 그리고 앞서서 층계를 올라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두꺼운 카펫의 층계를 가볍게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따라 올라갔다. 아내는 문지기를 따라 올라가며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이라도 진 듯, 허리를 굽히고 스커트는 몸에 꼭 달라붙었다. 그는 아내의 허리를 자기 팔로 꼭 껴안고 싶었다. 두 손이 안아 주고 싶은 욕정에 떨리었다. 손톱을 손바닥에 꼭 감싸쥐고 세찬 욕정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문지기는 층계를 오르다가 멈추어 선 채 녹아내리는 촛대를 바로잡았다. 두 사람도 멈추어섰다. 가브리엘은 침묵 속에서 촛농이 쟁반에 떨어지는 소리와 자기의 심장이 갈비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지기는 복도를 앞장서 가서 한 문 앞에 서서 열었다. 흔들흔들 하는 촛대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면서 아침 몇 시에 깨워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여덟 시." 가브리엘이 대답했다. 문지기는 전기 스위치의 위치를 가르쳐 주고, 뭐라고 중얼대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불은 필요없습니다. 거리에서 들어오는 불빛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 시원치 않은 것도 가져 가세요." 하고 촛불을 가리켰다. 문지기는 다시 촛대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무엇인가 이상한 생각에 잠겼다.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삿말을 중얼대며 나갔다. 가브리엘은 즉시 문을 잠갔다. 길거리에서 비쳐오는 희미한 한 줄기 불빛이 유리창에서 이쪽 복도의 출입문까지 길게 비췄다. 가브리엘은 외투와 모자를 소파 위에 던지고 유리창으로 갔다. 격정을 진정시키려는 듯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서서 빛을 등지고 옷장에 기대섰다. 아내는 모자를 벗고 걸려 있는 큰 거울 앞에 서서 허리의 끈을 풀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내를 유심히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하다가, "그레타!" 하였다. 아내는 거울에서 살며시 돌아서서 빛을 향해 그에게로 왔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심각해 보이고 지쳐 보였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고단하우?" "네, 약간." "아프거나 이상한 데는 없소?" "아니요, 그저 조금 피로해요." 아내도 창가로 와서 내려다본다. 가브리엘은 다시 기다리다가 이러다간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레타?" "왜 그러세요?" "그 베린즈라는 사람, 당신도 알지요?" 하고 묻는다. "네, 그이가 어쨌나요?" "그래뵈도 좋은 사람이요." 가브리엘은 허튼 소리를 계속했다. "내가 빌려줬던 일 파운드를 돌려주더군요, 받을 생각도 않은 걸. 그 브라운이란 사람과 떨어지지 못하는 게 탈이지만, 속은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거든." 이제는 절박해져서 몸이 떨리었다. 왜 아내는 딴 생각만 하고 있을까? 어떻게 시작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내도 무슨 일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한가? 저 혼자 돌아서서 나한테 와 주었으면! 이러고 서 있는 사람을 모른다는 것은 무정한 사람이지! 아니, 어서 저 사람의 눈에 약간의 정열이라도 떠오르는 것이 보여야지. 그는 아내의 심정을 알아내고 싶었다. "언제 빌려 주셨는데요?" 잠시 사이를 두고 있다가 아내가 물었다. 가브리엘은 그 주정뱅이 베린즈와 일 파운드에 대한 저주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내에게 진심을 얘기하고 그녀의 몸을 힘차게 안아 꺾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말은 이런 식으로 나왔다. "크리스마스 때, 그 사람이 헨리 거리에다 작은 카드 가게를 냈을 때요." 그는 격정과 욕정으로 가득차 아내가 창가에서 걸어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내는 어느덧 그의 앞에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그녀는 발돋움을 하고 그의 두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키스를 한다. "당신은 정말 너그러운 분이에요,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이 뜻밖의 키스와 말을 듣고 이상할 정도였으나, 그는 곧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머리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깨끗이 씻은 머리가 부드럽고 광채가 났다. 가브리엘의 마음은 행복감에 넘쳤다. 바로 내가 원할 때 아내는 저절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아마 아내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았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세찬 욕망을 역시 느끼다가 더 참지 못하게 된 것일까? 이제 아내가 제 발로 찾아드니, 왜 자기가 그렇게 어색해 했던가 싶었다. 아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한쪽 손으로 재빨리 안아 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레타, 여보, 무슨 생각을 해요?" 아내는 대답도 않고 또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응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말 좀 해 봐요, 그레타. 나도 아는 일일 텐데, 그렇지?" 아내는 곧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아 바로 그 노래를 생각했어요. '아그림의 처녀'." 아내는 그를 뿌리치고 침대로 달려가 두 팔을 침대 테에 걸치고 얼굴을 가렸다. 가브리엘은 잠시 아연실색하는 표정이더니, 아내를 따라 침대가로 갔다. 거울 앞을 지나다가 거기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넓고 듬직한 앞가슴, 거울을 볼 때마다 자기 자신도 이상스러워 보이는 얼굴 표정, 그리고 번쩍이는 도금한 안경테. 아내 곁에 서서 물었다. "그 노래가 어떻게 됐소? 왜 울어요?" 아내는 팔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애기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왜 그러냐니깐, 그레타?" 가브리엘의 음성은 생각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옛날 저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생각나서요." "옛날의 그 사람이 누군데?" 싱긋이 웃으며 물어 보았다. "제가 할머니와 살 때 골웨이에서 알게 된 사람이에요." 가브리엘의 웃음은 사라졌다. 마음 저 구석에서 무거운 분노가 모이기 시작했다. 정욕의 불길은 핏줄에 훨훨 타올랐다. "사랑하던 사람인가요?" 비꼬는 듯이 물었다. "같이 놀던 소년이었어요. 이름은 마이클 퓨리. 그가 '아그림의 처녀'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어요. 아주 몸이 약한 소년이었어요." 가브리엘은 가만 있었다. 몸이 약했었다는 소년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잠시 후 아내는 말을 잇는다. "아, 그 커다란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눈에 담은 표정! 그 표정!" "그러면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했었군?" 가브리엘이 물었다. "같이 소풍을 다녔지요. 골웨이에 왔을 때." 가브리엘의 마음을 스치는 게 있었다. "그래서 이바즈란 여자와 함께 골웨이로 가고 싶었나요?" 차갑게 물었다. 아내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하러?" 그녀의 시선에 부딪치자 가브리엘은 당황해졌다. 어깨를 움츠리며, "글쎄, 아마 그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가요?" 하고 말했다. 그레타는 그를 외면한 채 불빛이 들어오는 유리창 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죽었어요. 열일곱 살 때 죽었지요. 그렇게 젊어서 죽었다는 건 애석한 일이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뭘하는 아이였소?" 아직도 가브리엘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유리 공장에 다녔어요." 가브리엘은 비꼬아 준 것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고 저승에 간 유리 공장 직공 소년의 모습을 불러낸 것이 부끄럽게 생각됐다. 내가 남이 모르는 우리 생활의 추억에 잠겨 사랑과 기쁨과 정욕에 싸여 있을 때, 아내는 마음 속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치밀었다. 이모님의 심부름이나 하는 웃음거리의 인물, 속된 사람들에게 웅변을 토하며 저열한 욕정을 아름답게 이상화시키려는 신경질적인 센티멘털리스트. 거울 속에서 얼핏 본 얼빠진 녀석을 스스로 생각해 보면서 그는 의식적으로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자기 이마에 타오르는 수치심을 아내가 볼까 두려웠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냉정한 투로 말하려 했으나, "당신은 마이클 퓨리 하고 연애하던 사이었나 보구려, 그레타." 하는 말소리는 이미 한풀 꺾이고 어정쩡했다. "그땐 무척 좋아했어요." 아내가 대답했다. 그 음성은 감정을 가리고 있어 슬퍼 보였다. 가브리엘은 자기가 마음먹었던 방향으로 돌리기에는 전혀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손 하나를 잡아 쓰다듬어 주며 슬픈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찍 죽었소, 그 아이가? 폐병이라도 걸렸는가?" "저 때문에 죽었을 거에요." 그레타는 대답했다. 이 대답에 그는 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자기의 승리를 기대한 순간 어떤 형체 없는 앙심 깊은 것이 덤벼들며 어둑어둑한 저 세상에서 싸울 힘을 모으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성으로 이런 생각을 뿌리치고 계속 아내의 손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더 묻지 않았다.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내의 손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그 손을 쓰다듬고 있었으나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쓰다듬었다. 마치 그 봄날 아침, 그레타에게서 온 첫편지를 쓰다듬던 때처럼. 그레타는 말했다. "제가 할머니 집을 떠나 이곳 수도원에 올라온 것은 겨울, 초겨울이었어요. 그때 그 아이는 골웨이의 한 하숙집에서 앓았지요. 외출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제가 우타라드에 있는 그 애의 친척집에 편지로 알려 주었지요. 병세가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 무슨 병이었는지는 잘 몰랐어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가엾게도, 저를 무척 좋아하던 어린아이였는데, 우린 자주 들로 놀러 갔지요. 시골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아이는 몸이 좋으니까 노래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목소리가 아주 고왔는데, 마이클 퓨리, 참 가엾어요." "그래서?" "그래 제가 골웨이를 떠나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병세가 더 악화되어, 면회도 금지되었지요. 그래 저는 편지를 보냈어요. 더블린으로 가는데 여름에 돌아오니까 그때까지는 낫기를 빈다라고요." 그레타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계속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난즈 아일란드의 할머니댁에서 짐을 싸고 있는데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소리가 났어요. 유리가 젖어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뒤뜰로 나갔더니 그 애가 저편에서 덜덜 떨고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소?" 가브리엘이 물었다. "곧 집으로 가라고 애원하며, 그러다간 비를 맞고 죽게 된다고 했으나 그 애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때의 그 눈이 보이는 것 같아요! 담 밑에 나무 있는 거기에 서 있었어요." "그래 그 아이는 돌아갔나요?" "네, 돌아갔지요. 제가 수도원에 와서 일 주일만에 죽어, 그의 고향인 우타라드에 묻혔지요.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그레타는 말을 그치고 흐느껴 울며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침대에 묻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가브리엘은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더 잡고 있다가 남의 설움에 참견하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아내는 곤히 잠들었다. 가브리엘은 팔을 베고 누워 아내의 헝클어진 머리와, 반쯤 열린 입을 바라보며 깊은 숨소리를 들었다. 그래, 일생에 그런 로맨스가 있었구먼!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다. 남편인 내가 이 사람의 생애에 대해 얼마나 변변치 못한 구실을 하고 있나를 생각하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든 아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아내와 부부답게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은 아내의 얼굴과 머리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어려서 피어나던 아리따운 처녀 시절의 아내를 생각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이상하고 정답고 가엾은 생각이 마음 속에 스몄다. 그는 자기 아내의 얼굴이 이제는 아름답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이클 퓨리가 죽음도 사양치 않고 찾아왔을 때의 그 얼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옷을 벗어 걸친 의자로 시선이 옮겨졌다. 속치마 끈이 마루에 내려져 있었다. 구두 한 짝은 곧게 서 있었고 다른 한 짝은 가로 누워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복받쳐 오르던 자기의 격정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어디서 온 것일까? 이모님 댁에서의 식사, 자기의 어리석었던 연설, 술과 춤, 현관에서 작별할 때의 소란과 눈이 내린 강가를 따라걷던 즐거움, 가엾은 줄리아 이모님! 그녀도 또한 멀지않아 패트릭 모칸과 그의 말의 그림자와 같은 그림자로 사라지고 말겠지. '신부로 단장하고'를 노래할 때의 이모님의 얼굴은 약간 수척해 보였다. 아마 곧 나는 아까 그 응접실에 앉아 검은 상복을 입고 새크 모자를 무릎에 놓고 있으리라. 커튼은 내려 있고, 케이트 이모님은 내 곁에 앉아 울며불며 줄리아 이모님이 세상을 떠난 경위를 이야기하겠지. 나는 마음 속으로 위로의 말을 생각하며 그저 어색하고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겠지. 그래, 그래, 곧 그렇게 될 거야. 방안이 추워 어깨가 으쓱했다.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아내 곁에 누웠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림자가 되어 사라진다. 늙고 시들어 쓸쓸하게 사라지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정열의 광채를 뿜으며 저승으로 힘차게 가는 게 좋겠다.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애인의 눈을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 속에 새겨 간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가브리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느낌이 사랑이란 걸 알았다. 눈물이 더욱 글썽여지고 어두컴컴한 방에 비에 젖은 나무 아래 선 소년의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다른 형상들도 보였다. 그의 영혼은 많은 다른 죽은 사람들이 사는 그 세상에 가까이 온 느낌이다. 그들이 헤매며 명멸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의식할 수는 있었다. 자신도 같이 형체 없는 회색의 세상으로 사라져가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의 현실 세계가 허물어지고 사라져갔다. 사각사각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에 창가를 바라본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은빛과 검은 빛깔의 눈송이가 가로등 불빛에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서쪽으로 길을 떠나야 할 시기가 왔다! 그래, 신문이 맞았어. 눈은 아일란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검은 중부평야의 모든 곳과 나무 없는 산들에 눈이 내린다. 애런 호수와 그 서쪽에 있는 검고 거친 사뇬 강물결에도 내린다. 또한 마이클 퓨리가 땅 속에 누워 있는 산, 쓸쓸한 묘지의 모든 구석에도 내린다. 꾸부러진 십자가와 비석들 위에도, 묘지 입구의 작은 대문에 달린 작은 창끝에도, 쓸쓸한 쑥덩쿨에도 수북히 쌓이리라. 온 세상에 희미하게 내리며, 그와 그레타의 종말인 것처럼, 모든 산 것과 죽은 것 위에 내려 덮는 눈소리를 들으며 그의 의식은 살며시 이지러졌다. <끝> 6. 하숙집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무우니 부인은 푸줏집 딸이었다. 그녀는 일을 혼자서 척척 할 수 있는 여자로, 말하자면 결단성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부리는 큰 머슴과 결혼하여 스프링 공원 근처에 푸줏집을 냈다. 그런데 무우니는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놀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술꾼이 되었고 돈궤에서 돈을 훔쳐 내며 분별 없이 마구 빚을 졌다. 그에게는 금주(禁酒)의 맹세를 시켜도 소용이 없었다. 이삼 일 후에는 이 맹세가 틀림없이 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손님들 앞에서 아내와 싸우기도 하고, 나쁜 고기를 사들이고 해서 장사를 망쳐 놓았다. 어느 날 밤에는 그가 식칼을 들고 아내에게 달려들어서 그녀는 이웃집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그들은 헤어졌다. 그녀는 신부를 찾아가서 별거의 허락을 얻었고, 아이들은 자기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에게 돈이나 음식이나 거처할 곳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우니는 할 수 없이 군수(郡守)의 하인이 되었다. 그는 등이 굽고 체구가 작은 보잘것없는 술주정꾼이었다. 그는 얼굴이 희었고 콧수염도 희었으며, 붉은 핏줄이 선 불그죽죽한 눈 위에 연필로 그린 듯한 눈썹도 희었다. 그는 온종일 집달리실(執達吏室)에 앉아서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우니 부인은 고기 장사에서 남은 돈을 챙겨 가지고 하아드윅 가에서 하숙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몸집이 크고 위풍이 당당한 여자였다. 이 하숙집에 주로 드나드는 손님들은 리버풀 시나 맨 섬에서 오는 관광객들이며, 때로는 뮤직홀의 연예인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 생활하고 있는 하숙인들은 더블린 시에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무원들이었다. 그녀는 약삭빠르고 착실하게 하숙을 경영했으며, 외상을 줄 경우와 엄격히 따질 경우, 적당히 봐 줄 경우 등을 잘 분간하고 있었다. 하숙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그녀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무우니 부인 집의 젊은이들은 식비와 숙박비로 한 주일에 십오 실링을 지불했다(저녁 식사 때의 맥주나 흑맥주는 별도로 하고). 그들은 취미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서로 대단히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은 경마에서 인기가 있는 말과 인기가 없는 말의 승산을 서로 따지곤 하였다. 마담의 아들 잭 무우니는 플리트 가에 있는 어느 중간 도매상의 점원이었는데, 잡놈이라는 평판이었다. 그는 군인들이 입에 담는 음탕한 말을 즐겨 사용하고, 보통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근사한 음담을 즐겨 말하였고, 또 근사한 일에- 즉, 승산이 있는 말이라든가 유명한 연예인이라든가, 그러한 일에 정통하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또한 권투를 잘하고, 코믹 송도 잘 불렀다. 일요일 밤이면 무우니 부인의 현관 응접실에서 가끔 친목회가 있곤 하였는데, 뮤직홀의 연예인들도 참례하곤 했다. 쉐리던은 왈츠와 폴카를 연주하고 즉석 반주도 했다. 마담의 딸 폴리 무우니도 역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녀는 이런 노래를 곧잘 불렀다. 난...... 바람둥이 계집애예요. 당신은 시치미를 떼지 말아요. 당신은 알고 있죠, 내가 그런 줄. 폴리는 열아홉 살의 날씬한 소녀였다. 그녀는 밝은 빛깔의 부드러운 머리와 조그마하고 봉긋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녹색을 엷게 띤 잿빛 눈동자는 누구와 말할 때는 위쪽으로 흘기는 버릇이 있어서, 이것은 그녀를 고집 센 귀여운 마돈나로 보이게 했다. 무우니 부인은 처음에 자기 딸을 곡물 대리상 사무소에 타이피스트로 보냈지만, 평판이 나쁜 집행관의 하인이 하루 건너큼 사무소로 찾아와서 자기 딸에게 말 한 마디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자, 그녀는 딸을 다시 집으로 끌어들여 집안 일을 보게 하였다. 폴리는 대단히 쾌활한 성격이었으므로 무우니 부인은 그녀를 젊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놀게 해 주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젊은 여자가 있다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폴리는 물론 젊은 사람들과 시시덕거렸다. 그러나 영리한 판단가인 무우니 부인은 젊은 사람들이 다만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한 사람도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다가 무우니 부인은 폴리와 젊은이 중의 한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그녀를 다시 타이피스트로 보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감시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고 있었다. 폴리는 자기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변함 없는 침묵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녀 사이에 공공연한 공모 관계나 공공연한 양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 있는 사람들이 이 연애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해도 무우니 부인은 여전히 참견하지 않았다. 폴리의 거동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청년의 마음이 몹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무우니 부인은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참견을 하려고 나섰다. 그녀는 도덕적인 문제를 마치 식칼로 고기를 자르듯이 처리했다.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어느 맑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제부터 더워질 것 같았지만 상쾌한 미풍이 불고 있었다. 하숙집의 모든 창문이 열리고, 올린 창틀 밑에서 레이스 커튼이 거리를 향하여 풍선처럼 부드럽게 부풀었다. 조지 교회의 종루에서 그칠 새 없이 종소리가 울려나오고, 예배자들은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교회 앞의 조그마한 원형광장을 건너는데, 그들의 장갑 낀 손에는 조그마한 책도 쥐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묵묵한 태도로 보아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하숙집에서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식당의 식탁에는 베이컨의 비계나 껍질 부스러기와 함께 달걀의 노란 줄이 붙어 있는 접시가 가득 흩어져 있었다. 무우니 부인은 밀짚 안락의자에 앉아서 식모 메리가 아침을 치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요일의 브레드 푸딩을 만드는 데 보태 쓰려고 메리에게 흩어진 빵 껍질과 부스러기를 모으게 했다. 식탁을 치우고, 흩어진 빵을 주워 모으고, 설탕과 버터를 자물쇠를 채워 안전히 간수하고 나서 그녀는 전날 밤 폴리와 가졌던 대담을 다시 되뇌어 보기 시작했다. 일은 그녀가 짐작한 대로였다. 그녀는 터놓고 물어 보고 폴리도 숨김없이 대답했었다. 물론 둘이 다 좀 어색하기는 했다. 그녀를 어색하게 한 것은 그 소식을 너무 태연한 태도로 받아들이거나, 지금까지 보고도 못 본 체해 온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폴리를 어색하게 한 것은 단순히 이런 종류의 말이 그녀를 어색하게 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관대한 마음 속에 숨은 의향을 영리한 순진성으로 자기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무우니 부인은 생각에 잠겼다가 조지 교회의 종소리가 끝난 것을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맨틀피이스 위에 놓인 조그마한 도금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열한 시 십칠 분이었다. 도오런 씨와 그 문제를 해결해 버리고 나서 열두 시 전까지 모르버러 가에 갈 시간은 충분하다. 그녀는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첫째 사회적인 여론이 모두 그녀 편으로 기울어질 것이 뻔했다. 그녀는 학대를 당한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그가 체면을 아끼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한 지붕 밑에서 살게 한 것이었는데, 그는 다만 그녀의 친절한 대접을 악용한 셈이다. 그는 서른넷이 아니면 서른다섯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그의 변명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어느 정도는 세상을 아는 사람이니까, 몰랐다는 것도 그의 변명이 될 수가 없다. 그는 오직 폴리의 어리고 경험이 없음을 이용해서 유혹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문제는 그가 어떠한 보상을 하느냐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어야 한다. 남녀 교제에 있어 남자에게는 하나도 밑질 것이 없다. 남자는 한때 재미를 보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비난의 화살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어머니들은 그러한 일에 대해서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얼마간의 돈을 받고 만족해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예를 수없이 보고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딸의 손상된 체면에 대한 보상이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즉 결혼이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전하도록 메리를 도오런 씨의 방으로 올려 보내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자기의 모든 계획을 따져 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틀림없이 이길 것 같았다. 그는 본시 독실한 젊은이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방탕하지도 않거니와 떠들어대지도 않았다. 만일 이것이 쉐리던 씨나 미이드 씨나 밴텀 라이언즈 씨였더라면 일은 훨씬 더 곤란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그가 태연히 방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집의 모든 숙박인들은 그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자세한 점에 이르기까지도 꾸며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큰 카톨릭 신자의 주류상(酒類商) 사무실에서 13년을 근무해 오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아마 그에게 있어서는 직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동의를 한다면 만사는 순조로울 것이다. 한 가지 이유로는 그가 상당한 급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며, 또 그에게 얼마간의 저축이 있다는 것도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30분이 지났다. 그녀는 일어서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크고 혈색 좋은 얼굴에 떠오른 단호한 표정에 그녀는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아는 어머니들 중에서 딸을 시집보내지 못한 몇몇 어머니들을 머리속에 떠올려 보았다. 도오런 씨로 말하면 그도 이 일요일 아침에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면도를 하려고 해 보았지만 손이 몹시 떨려서 중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자란 불그레한 턱수염이 턱 가장자리에 소복이 나 있었다. 그리고 2, 3분 만에 안경에 물기가 끼기 때문에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날 밤의 자기의 참회에 대한 회상은 그에게 격렬한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그에게서 참회를 받은 신부는 이번 사건의 망측스러운 세세한 점까지 들추어 이야기하도록 해 놓고서는, 결국에 가서 그의 죄를 어떻게나 과장해서 말하였던지, 보상이라는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해 준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죄는 이미 저질러 놓았다. 이제는 그녀와 결혼을 하거나 도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언제까지나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사건은 틀림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주인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더블린은 조그마한 도시다. 그러므로 누구나 남의 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레너드 영감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도오런 씨를 이리로 보내 주게' 하고 부르는 소리를 흥분된 상상 속에서 들었을 때, 목구멍이 화끈 달도록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의 근무가 모두 허사가 된다. 근면하고 부지런했던 것도 모두 헛수고가 된다. 물론 그도 젊었을 때는 방탕도 했다. 그는 자기의 자유사상을 자랑하고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신의 존재를 부정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일이고, 거의 끝이 났다. 그는 아직도 매주 <레이놀즈> 신문을 사 보기는 하지만 종교적 의무에는 열성이 있었고, 일 년 중의 십중 팔구는 규율 있는 생활을 했다. 그에게 집을 지니고 생활할 만한 돈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가족들은 그녀를 멸시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평판이 나쁜 그녀의 아버지가 있고, 다음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하숙집에도 어떤 풍문이 돌기 시작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조소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확실히 폴리는 교양이 없었다. 이따금 폴리는 '내가 봤어요' 또는 '내가 봤더라면' 하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면 말씨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폴리가 한 일에 대해서 그녀를 좋아해야 할지, 멸시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기도 함께 그 일을 저질렀다. 그의 본능은 결혼을 하지 말고 자유로운 몸 그대로 있으라고 자꾸 타일렀다. 한 번 결혼하면 그만이야, 하고 본능은 말했다. 그가 셔츠와 바지 바람으로 침대 한편에 맥없이 앉아 있을 때, 폴리가 가볍게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어머니한테 그 일을 터놓고 말했다는 것과 자기 어머니가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에게 모두 일러주었다. 그녀는 울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말했다. "아, 보브! 보브! 난 어쩌면 좋아요? 도대체 난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울지 말라고 타이르며 아무 일도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맥없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셔츠 위로 그녀의 젖가슴이 벌럭이는 것을 느꼈다.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이 센, 끈기있는 독신자의 기억으로 그녀의 의복과 숨결과 애무하던 손가락의 촉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늦게 그가 자려고 옷을 벗고 있을 때, 그녀가 주저주저하며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자기의 촛불이 갑자기 부는 바람에 꺼졌으니 이 방의 촛불에서 불을 붙여가고 싶다고 했다. 그날 밤은 그녀가 목욕한 밤이었다. 그녀는 무늬 박힌 플란넬의 펑퍼짐한, 가슴팍이 파인 화장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발등이 털 슬리퍼 틈에서 빛나고 향기를 풍기는 살결 밑에서 피가 따뜻하게 끓고 있었다. 촛불을 켜서 촛대에 꽂고 있을 때 그녀의 손과 팔목에서도 역시 가냘픈 향기가 풍겨왔다. 그가 매우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그의 저녁을 따끈하게 데워 주는 사람은 폴리였다. 밤중에 모두들 잠이 든 집안에서 그녀가 자기 곁에 홀로 있음을 느낄 때 그는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도 거의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정 어린 마음씨! 날씨가 차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밤이면 반드시 한 잔의 펀치가 그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 그들이 한 쌍을 이루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초를 들고 살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가서 세째번 층계참에 이르면 서로가 마지못해 하면서 안녕히 주무세요, 라는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그들은 늘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의 눈과 그녀 손의 감촉과, 자기의 황홀했던 느낌...... 등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것을 적용하면서, "나는 어쩌면 좋아?" 하고 그녀가 하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독신자의 본능은 결혼은 그만두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죄가 있었다. 그의 도의감까지도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에게 타일렀다. 그가 침대 한쪽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메리가 문에 와서 아줌마가 응접실에서 그를 만나고자 한다고 전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맥없이 일어서서 윗옷과 조끼를 입었다. 옷을 입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염려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울며 "아이구 죽겠네!" 하고 나직이 신음하는 그녀를 남겨 두고 나갔다. 층계를 내려가면서 그는 안경이 몹시 습기로 흐려지는 까닭에 그것을 벗어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지붕을 뚫고 올라가서, 다시는 이 괴로운 일에 대한 말을 듣지 않을 딴 나라로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어떠한 힘이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아래층으로 끌어내렸다. 그의 고용주와 마담의 냉혹한 얼굴들이 그의 낭패한 꼴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그는 배스 맥주 두 병을 안고 찬방에서 올라오는 잭 무우니와 마주쳤다. 그들은 냉담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연애 중에 있는 이 남자의 눈은 잠깐 불독과 같이 두터운 얼굴과 굵고 짤막한 두 팔에 머물렀다. 그가 층계의 최하부에 이르렀을 때 힐끗 쳐다보니 잭이 옆방 문에서 그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뮤직홀의 연예인의 한 사람인, 몸체가 작은 런던 사람이 폴리에게 좀 함부로 말을 건네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의 친목회는 잭의 포학한 행위 때문에 거의 깨어져 버렸었다. 모두들 그를 달래려고 했었다. 뮤직홀의 연예인은 보통 때보다도 좀 창백한 얼굴로 연방 미소를 지으며 악의가 있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잭은 어떤 놈이고 자기 누이에게 그 따위 수작을 건다면 그 놈의 모가지를 꽉 물어뜯어 놓겠다고 그에게 연방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는 아마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다. 폴리는 잠시 동안 침대 한편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눈물을 닦고 거울이 있는 데로 갔다. 그녀는 수건 끝을 물주전자에 담그고 시원한 물로 눈을 씻었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비춰 보고 귀 위에 있는 머리핀을 고쳐 꽂았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아래쪽에 앉았다. 오랫동안 베개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 속의 남 모르는 정다운 여러 가지 회상이 떠올랐다. 그녀는 차가운 쇠침대의 가름대에 목덜미를 대고 몽상에 잠겼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거의 유쾌한 마음으로 걱정도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회상은 미래의 희망과 환상에 점차로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희망과 환상이 하도 얽혀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벌써 자기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하얀 베개도 보이지 않았고, 자기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난간의 손잡이가 있는 데로 뛰어갔다. "폴리! 폴리!" "뭐예요, 어머니?" "얘야, 이리 내려 오너라. 도오런 씨가 네게 이야기가 있단다." 그때 폴리는 자기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끝> 7. 가든 파티 캐더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주문을 하더라도 이 이상 가든 파티에 알맞은 날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바람도 없고 따뜻한데,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다만 푸른 하늘에는 초여름에 때때로 볼 수 있는 얇은 금빛 안개가 끼여 있을 뿐이었다. 뜰을 손질하는 사나이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일하면서 잔디를 깎고 쓸고 하였기 때문에 잔디와 전에 데이지가 있던 곳의 검고 편평한 장미무늬를 새긴 돌이 빛나는 듯이 보였다. 장미꽃으로 말하면 그것이 가든 파티 사람들의 눈요기를 시킬 유일한 꽃으로서, 누구라도 틀림없이 알고 있는 유일한 꽃이라는 것을 장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몇 백이라는 실지로 문자 그대로 몇 백 송이나 되는 꽃이 단 하룻밤 사이에 핀 것이다. 녹색의 나무는 마치 천사의 방문을 받은 것처럼 몸을 굽히고 있다. 아침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남자들이 커다란 천막을 치러 왔다. "어디다 천막을 쳤으면 좋을까요, 어머니?" "이봐요, 나한테 물어봐야 소용없어요. 올해는 너희들에게 완전히 일임하도록 결정했으니까. 내가 어머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특별한 손님 정도로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나 메그가 남자들을 지시하러 가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식사 전에 머리를 막 감았으므로 녹색의 터번을 하고 밤색의 젖은 머리카락이 두 볼에 찰싹 붙어 있는 그대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멋장이 조우즈는 언제나 실크의 페티코트에 기다란 웃저고리를 걸치고 식사하러 내려왔다. "네가 가 봐, 로라. 넌 굉장한 예술가니까 말이야." 로라는 버터빵을 손에 든 채 뛰어갔다. 집 밖에서 무엇을 먹을 핑계가 생겼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그녀는 사물을 이것저것 결정하기를 좋아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일은 매우 잘 한다고 언제나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셔츠바람의 남자 넷이 정원의 작은 길에 모여 서 있었다. 그들은 막대기에 천막을 뚤뚤 감은 것을 들고 있었으며, 각자가 커다란 연장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압도되는 것 같기도 했다. 로라는 이 버터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으나 그것을 둘 데도 없고, 던져 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게다가 조금 근시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셨어요?" 그녀는 어머니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도 꾸며대는 목소리같이 들렸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워져서 어린애처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또...... 당신네들 저...... 천막 때문에 그러세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키가 제일 큰 남자가 말했는데, 그는 후리후리하게 크고 주근깨가 있는 남자로서 연장주머니를 조금 움직거리더니, 밀짚모자를 뒤로 젖히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남자의 미소가 매우 상냥하고 친밀감이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로라는 자신을 되찾았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눈을 가지고 있구나. 작지만 검은 빛이 도는 푸른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는데 그들도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운을 내십시오. 우리들은 물어뜯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꾼들은 모두 정말 좋은 사람들이군! 게다가 기분좋은 아침이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사무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돼. 천막 이야기를 해야지. "그러면 저 백합이 있는 곳의 잔디밭이 어떨까요? 그곳이 괜찮겠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버터빵을 들지 않은 손으로 백합의 잔디밭 쪽을 가리켰다. 남자들은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뚱뚱하고 작달막한 남자가 아랫입술을 내밀고 키 큰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안 좋은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눈에 확 띄지 않는군요. 실은 큰 천막과 같은 것은......" 그는 마음이 느긋해진 모양으로 로라 쪽을 돌아다보았다- "어디든 눈에 확 들어오는 곳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응석받이로 자라난 로라는 일꾼이 자기에게 눈에 확 들어온다는 따위로 말하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뜻은 잘 알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 구석은 어떨까요?" 그녀는 말해 보았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악대가 자리잡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요." "흐음, 악대가 옵니까?" 딴 일꾼이 말했다.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였다. 거무스름한 눈으로 테니스 코트를 살펴보는 모습이 정말 초조해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주 작은 악대예요." 로라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 악대가 작다든가 하는 것은 이 남자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키 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가씨. 저기가 좋군요. 저 나무 앞 말입니다. 저쪽입니다. 저기라면 안성맞춤인데." 카라카나무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카라카나무가 뵈지 않게 되고 만다. 폭이 넓고 반짝거리는 잎사귀를 가진, 노란 열매가 총총히 달려 있는, 저렇게 아름다운 나무인데, 황량한 외딴 섬에 혼자서 의연한 모습으로, 그 잎과 열매를 햇빛에 드러내는, 이른바 현란한 고요 속에 서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였다. 어떻게 하든, 천막으로 보이지 않게 할 수는 없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남자들은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키 큰 남자가 혼자 뒤에 남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라벤더의 잔가지를 집어서 뭉개가지고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로라는 그가 하는 짓을 보고 그런 것에 마음을 쏟는- 라벤더의 냄새에 마음을 쏟는 남자에게 감복하여 카라카나무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치고 몇 사람이나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인가. 아아, 일꾼이라는 것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같이 춤추기도 하고, 일요일 밤에 식사를 하러 오는 저 멍청한 남자친구들보다는 일꾼을 친구로 삼는 편이 낫겠다. 이런 사람들하고라면 훨씬 더 사이좋게 지낼 수가 있겠다. 모두가 다, 이 돼먹지 못한 계급식 차별 탓이야, 하고 그녀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 키 큰 남자는 봉투 뒷면에 무언가 둥글게 매듭을 지어놓든가, 그대로 늘어뜨려 놓든가 할 것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러한 계급적 차별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런 눈치는 조금도 없다. 눈곱만큼도 없다...... 그때 나무망치의 쿵쿵 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고 어떤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쪽은 괜찮은가, 형제?" 형제라니! 얼마나 친밀한 말인가! 뭐랄까...... 뭐랄까......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여 주기를, 얼마나 흉허물 없는 기분을 품고 있는가를, 얼마나 인습의 하찮음을 경멸하고 있는가를 키 큰 남자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로라는 그 작은 봉투에 그려진 것을 바라보면서 버터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는 일하는 여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라, 로라, 어디 있지? 전화야, 로라!" 집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가겠어." 그녀는 경쾌하게 뛰어서 잔디를 넘고, 계단을 올라, 베란다를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의 홀에서는 아버지와 로리가 회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솔로 모자를 털고 있었다. "이봐, 로라." 하고 로리는 매우 빠른 말씨로 말을 했다. "오후까지 내 옷을 좀 봐 주지 않겠어? 다림질을 해야 할지 어떨지 좀 봐 줘." "좋아." 그녀는 말했다. 갑자기 그녀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로리에게 달려들자 재빨리 그를 끌어안았다. "난 파티가 정말 좋아, 안 그래, 오빠?" 로라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좋구말구!" 로리가 따뜻하고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그도 또한 동생을 꽉 껴안고 나서 살짝 밀어 놓았다. "빨리 전화나 받아." 전화였지, 참. "네, 네, 그래요. 키티니, 안녕, 점심식사 때에 오겠어? 그래, 와요. 물론 기쁘잖고. 뭐 이것저것 긁어모은 식사야. 샌드위치 부스러기며 메링과자 조각 따위가 남아 있어요. 정말 좋은 날씨야. 넌 화장하니? 오, 난 꼭 그렇게 할 거야. 잠깐만 기다려- 끊지 말고. 어머니께서 부르고 계셔." 그렇게 말하자, 로라는 앉은 채 몸을 뒤로 젖혔다. "뭐예요, 어머니, 안 들려요!" 셰리단 부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흘러왔다. "요전 일요일에 썼던 그 멋진 모자를 쓰고 오라고 일러요." "어머니께서 말야, 요전 일요일에 썼던 그 멋진 모자를 쓰라고 하셨어. 좋아, 그럼 한 시에 또." 로라는 수화기를 놓고, 머리 위에 두 팔을 올리어 숨을 깊이 쉬면서 뻗었다가 힘없이 내렸다. 아아 하고 한숨을 쉬고, 한숨을 쉬자마자 재빨리 고쳐 앉았다.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온 집의 문이라는 문은 다 열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집안은 바삐 돌아가는 나직한 발소리와 끊임없는 말소리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조리실로 통하는 초록색 니스를 바른 도어가 힘차게 열리더니 둔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번에는 키득키득 웃는 듯한 길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한 바퀴가 달린 무거운 피아노를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아유, 이 공기 좀 봐! 가만히 주의해서 보자니까, 공기란 언제나 이런가 몰라.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의 바람이 숨박꼭질을 하면서 창문 위쪽에서 들어와 문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햇빛을 받은 작은 점이 두 개, 하나는 잉크빛, 또 하나는 은빛 사진액자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장난치듯 하고 있다. 귀여운 두 점, 잉크병 위에 있는 것은 유달리 귀엽다. 따뜻한 느낌이 든다. 따뜻하고 귀여운 은빛 별이다. 그녀는 그것에다 키스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현관의 벨이 울리고 세이디의 날염한 스커트가 계단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말하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도 났다. 세이디의 대답하는 무관심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기다려요. 셰리단 마나님께 물어보고 올 테니까." "뭐야, 세이디?" 로라는 현관의 홀로 갔다. "꽃장수예요, 아가씨." 사실 그대로였다. 현관 바로 들머리에 넓고 얕은 쟁반에 핑크빛 백합 화분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꽃은 없다. 백합뿐- 칸나백합뿐인데 커다란 핑크빛 꽃은 완전히 피어서 빛나는 듯했으며 새빨간 줄기 위에서 놀라울 정도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오, 세이디!" 하고 로라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신음 소리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 백합의 빨간 불꽃에 몸을 쬐이기라도 한듯이 움츠렸는데, 손가락 속에, 입술에, 가슴 속에 그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겠지."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렇게 많이 부탁한 사람은 없을 거야. 세이디, 가서 어머니를 찾아봐요." 그러자 마침 그때, 셰리단 부인이 그들에게로 왔다. "잘못된 게 아니야."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부탁한 거야. 예쁘지?" 그녀는 로라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어제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진열창에 있는 것을 보았단다. 그리고 한번 칸나백합을 듬뿍 사보겠다고 우연히 생각했지. 가든 파티가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지."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는 참견하지 않으실 작정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하고 로라가 말했다. 세이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꽃집 남자는 아직 바깥의 수레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 목에 팔을 감고 부드럽게 그리고 가만히 어머니의 귀를 물었다. "그렇지만 얘야, 융통성이 없는 엄마는 싫어 하겠지. 그런 짓은 하지 말아라. 꽃집 남자가 들어오지 않니." 그는 다시 백합을 춤이 낮은 쟁반에 가득 담아 들고 왔다. "현관 들머리의 통로 양쪽에 한 줄로 나란히 놓아 주세요." 하고 셰리단 부인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됐지, 로라?" "네, 좋아요. 어머니." 객실에서는 메그와 조우즈, 그리고 착한 꼬마 한스가 드디어 제대로 피아노를 막 옮겨 놓은 참이었다. "이번에는 이 커다란 소파를 벽 쪽으로 붙이고 의자 이외의 것은 모두 방 밖으로 내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군요." "한스, 이 테이블을 모두 끽연실로 날라다 주어요. 그리고 소제기를 가지고 와서 융단에 난 테이블 자국을 지워 없애요- 아, 가만, 한스-" 조우즈는 하인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도 기꺼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녀는 언제나 하인들에게 무언가 연극배우의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데가 있었다. "어머니와 로라한테 빨리 와 달라고 일러줘." "네, 네, 조우즈 아가씨." 그녀는 메그 쪽을 돌아보았다. "피아노 소리가 어떤지 알고 싶구나, 오늘은 노래하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말야. '이 세상은 지겨워'를 한번 해볼까." 퐁! 타타타 타타! 피아노가 갑자기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하자 조우즈의 얼굴 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팔짱을 꼈다.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어머니와 로라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은 지겨워, 눈물- 한숨. 사랑은 덧없이, 이 세상은 지겨워, 눈물- 한숨. 사랑은 덧없이, 이제는 굿바이. 그러나 그 '굿바이'라고 하는 데서 피아노는 한층 더 절망적인 소리로 울렸으나,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활짝 개여서 노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는 좋지요, 어머니?"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이 세상은 지겨워, 희망은 사라지고, 꿈인가- 현실인가. 이때 세이디가 들어왔다. "무어야, 세이디?" "저, 마나님, 요리사가 샌드위치에 꽂을 기(旗)가 있느냐고 묻는데요." "샌드위치에 꽂을 깃발 말이야, 세이디?" 셰리단 부인은 꿈꾸듯 그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 얼굴 표정에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아차렸다. "잠깐 기다려." 그리고는 그녀는 명백하게 세이디에게 말했다. "십 분만 있으면 가지고 가겠다고 요리사에게 일러줘." 세이디가 나갔다. "자, 로라." 어머니는 빠르게 말했다. "같이 끽연실로 가자. 봉투 뒤엔가 어디에 이름이 씌어 있을 거야. 그것을 좀 써 줘. 메그야, 빨리 이층에 가서 그 젖은 것을 머리에서 벗어 놓아라. 조우즈는 빨리 가서 옷을 갈아입어. 내 말이 들려? 오늘 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일러바쳐도 괜찮아? 그리고는...... 그리고는 조우즈야, 조리실에 가거든 요리사를 구슬러 줘. 오늘 아침은 그녀가 무서워지는구나." 봉투는 식당 시계 뒤에서 가까스로 발견되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곳에 끼어들었는지 셰리단 부인으로서는 통 알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너희들 중의 누군가가 내 핸드백에서 훔쳐냈을 거야. 나는 집어넣은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거든...... 크림 치즈에 레모네이드, 이건 다 만들었니?" "네." "달걀과......" 셰리단 부인은 봉투를 떼어들고 바라보았다. "쥐라는 글자 같구나. 쥐일 턱은 없는데 말이야." "올리브예요." 로라가 어머니 어깨 너머로 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올리브라는 글자군. 정말 괴상하게 짜여질 뻔했구나. 달걀과 올리브." 겨우 끝나서 로라는 그것을 조리실로 가져갔다. 가 보니까 조우즈가 계속 요리사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는데, 요리사는 조금도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샌드위치는 구경조차 한 일이 없어." 조우즈가 매우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몇 종류 있다고 했지? 열다섯?" "열다섯입니다. 아가씨." "정말 훌륭해요." 요리사는 기다란 샌드위치 나이프로 빵부스러기를 밀어젖히면서 활짝 웃었다. "고드 버에서 왔습니다." 세이디가 대기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창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슈크림이 도착된 것이다. 고드 버는 슈크림으로 알려진 가게였다. 아무도 집에서 만들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날라다가 테이블 위에 놓아 줘." 요리사가 지시했다. 세이디는 날라다 놓고 문께로 돌아갔다. 물론 로라도 조우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정신을 팔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슈크림이 굉장히 맛나겠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맛나겠다. 요리사가 덤으로 붙어 있는 설탕을 털어내면서 나란히 놓기 시작했다. "이런 걸 보니까, 이때까지 있었던 온갖 파티가 생각나는구나." 하고 로라가 말했다. "그래."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 따위를 싫어하는 현실주의자인 조우즈가 말했다. "가볍고 부풀어 있는 느낌이 들어 정말 훌륭하구나." "하나씩 먹어 보세요." 요리사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어머, 정말 먹을 수 없어. 아침식사를 막 끝냈는데 슈크림을 먹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해. 그러나, 이 분 뒤에 조우즈와 로라는, 거품이 알맞게 인 크림을 맛볼 때에만 볼 수 있는, 방금 먹은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은 눈을 하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뒤꼍을 돌아서 뜰로 나가 보자, 얘." 하고 로라가 말을 꺼냈다. "저 사람들이 천막을 어느 정도나 쳤는지 보고 싶구나. 정말 멋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나 뒤꼍에는 요리사, 세이디, 고드 버의 점원, 게다가 한스까지 어울려 있었다.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엇, 저, 저, 저......" 요리사는 놀란 암탉 같은 소리를 질렀다. 세이디는 이빨이라도 아픈지 두 손을 양 볼에 대고 서 있었다. 한스의 얼굴은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하여 찌푸린 표정이 되어 있었다. 고드 버의 점원만이 재미있어 하는 듯이 보였는데, 그가 끄집어낸 이야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답니다." 하고 요리사가 말했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죽었다고? 어디서, 왜, 언제?" 그러나 고드 버의 점원은 자기가 꺼낸 이야기를 눈앞에서 날치기당하는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요 아래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아십니까, 아가씨?" "알고 있느냐고?"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름이 스코트라고 하는 젊은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짐수레꾼이었어요. 오늘 아침 호우크 거리 모퉁이에서 이 남자의 말이 견인차에 놀라서 뛰는 바람에, 그 남자는 내동댕이쳐져서 뒤통수를 받쳤어요. 그래서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요?" 로라는 고드 버의 점원 얼굴을 뚫어질 듯 빤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그를 붙들어 일으켰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점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여기 올 때에 마침 시체를 집으로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요리사를 보고 말했다. "마누라와 어린것을 다섯이나 남겨두고 갔어요." "조우즈, 이리 와요." 로라는 언니의 소매를 붙들자 조리실을 빠져 나와 녹색의 니스를 바른 도어 저쪽까지 그녀를 끌고 갔다. 거기서 멈추어 서자 도어에 기댔다. "조우즈." 하고 그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죄다 그만둘 수 있을까?" "죄다 그만둔다고, 로라?" 조우즈는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뜻이지?" "물론 가든 파티를 그만두는 거야. 조우즈는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러나 조우즈는 점점 더 놀랐다. "가든 파티를 그만둔다고? 이봐 로라,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물론 그런 짓은 할 수도 없지. 아무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어. 엉뚱한 소리를 하면 못써." "그렇지만 바로 대문 앞에 사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가든 파티 따위를 할 수는 없지 않아?" 사실 그것은 엉뚱한 일이었는데, 그 작은 오두막집은 이 저택으로 통하는 가파른 고갯길 아래쪽의 골목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사이에 널따란 길거리가 있었다. 과연 너무 가까웠다. 그 오두막집들은 정말 눈 위의 혹으로서 이 근처에 있어야 할 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연두 초콜렛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작고 엉성한 집이었다. 좁은 뜰에는 양배추의 밑둥, 병든 닭, 토마토의 빈 깡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마저 매우 가난하게 보였다. 누더기를 연상시키는 가냘픈 연기는 셰리단가의 굴뚝에서 푹푹 솟아나는 커다란 은빛의 깃털 같은 연기와는 전혀 닮지도 않았다. 그 골목에 빨래하는 여자가 살고 있었다. 굴뚝장이, 구두 수선공, 그리고는 집 정면의 벽 가득히 작은 새장을 걸어 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럿이었다. 셰리단가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에 말씨가 상스럽고 게다가 무슨 병이 전염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그곳에 드나드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라고 나서, 로라와 로리는 몰래 걸어가면서 이따금 그곳을 지나갔다. 불쾌하고 더러운 곳이었다. 그들은 몸서리를 치면서 나왔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어디든지 가보지 않으면 안 되었고, 무엇이든지 보아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갔다. "게다가 악대 소리가 들린다면, 그 가엾은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생각해 봐요." 라고 로라가 말했다. "오오, 로라!" 조우즈는 정색을 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누구든 사람이 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악대의 연주를 그만둔다면 정말 견디지 못할 평생을 보내게 돼요. 나도 역시 너처럼 가엾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정하고 있어." 그녀의 눈은 험악해졌다. 그녀가 동생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그들이 어린애였을 무렵 자주 싸우던 때 그대로였다. "감상적이 된다고 해서 주정뱅이 일꾼은 되살아나지 않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주정뱅이라고! 누가 주정뱅이라고 말했어?" 로라는 화를 내며 조우즈한테 대들었다. 그녀는 그들이 옛날 이런 경우에 자주 입에 담았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엄마한테 가서 일러바치고 말 테야." "제발." 조우즈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도 좋아요?......" 로라는 커다란 유리 도어의 손잡이를 돌렸다. "좋아요.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얼굴빛이 변해가지고." 그렇게 말하고는 셰리단 부인은 몸을 획 돌려서 화장대를 등졌다. 그녀는 새 모자를 써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지금 막 사람이 죽었어요." 로라는 말을 끄집어냈다. "설마 뜰에서는 아니겠지?" 하고 어머니가 말을 막았다. "그렇지는 않아요." "얜,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구나." 셰리단 부인은 안도의 숨을 쉬고 나자 커다란 모자를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들어보세요, 어머니." 하고 로라는 말했다. 숨가빠하면서 목이 반쯤 메이면서, 그녀는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파티 따위는 할 수 없겠죠!" 그녀는 호소하듯이 말했다. "악대도, 많은 사람들도 오지요. 틀림없이 들릴 거예요, 어머니. 이웃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까운 걸요." 로라는 어머니가 조우즈와 똑같은 태도를 짓는 것에 놀랐다. 어머니가 재미있어 했기 때문에 한층 더 견딜 수 없었다. 로라의 말을 조금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우리들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전혀 우연이야. 만일 거기서 누군가가 제 명으로 곱게 죽었다고 한다면- 저런 답답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파티는 역시 하게 되지 않겠니?" 로라는 그 말에는 '네' 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소파에 앉아서 쿠션의 술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정말 우리는 심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어머, 얘는." 셰리단 부인은 일어서자 모자를 손에 든 채 그녀가 있는 데까지 왔다. 로라가 막을 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그것을 불쑥 씌웠다. "어때?"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 모자는 네 거야. 너한테 잘 어울리는구나. 내게는 너무 야해, 이렇게 예쁜 네 모습을 본 적은 없어. 한번 봐."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손거울을 들고 비춰 주었다. "그렇지만 어머니." 로라는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기의 모습 따위는 보기도 싫었다. 그녀는 외면을 했다. 이번에는 셰리단 부인도 조우즈와 마찬가지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로라."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저런 사람들은 우리가 희생이 된다는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아. 지금의 너처럼 모두의 즐거움을 짓밟으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야." "저는 모르겠어요." 하고 로라는 말했다. 그리고는 훌쩍 방을 나와서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정말 우연히, 그녀의 눈에 먼저 띈 것은 거울에 비친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검은 모자는 황금빛의 데이지와 길고 검은 빌로드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자기가 이런 모습으로 보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젠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되었다. 내 생각은 엉뚱한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한순간, 그녀는 다시 저 가엾은 여자랑 어린애들이며 시체가 집으로 운반되어 가는 광경을 언뜻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해져 현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신문에 나와 있는 사건처럼 생각되었다.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점심식사는 한 시 반에는 이미 끝났다. 두 시 반에는 파티 준비가 모두 다 되어 있었다. 녹색의 옷을 입은 악대가 도착하여 테니스 코트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얘, 키티!" 하고 메이틀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어쩐지 정말 개구리 같지 않니? 연못 주위에 나란히 세우고 지휘자는 한복판의 잎사귀 위에 올라앉도록 했으면 좋았을걸." 로리가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도중에 그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로라는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해냈다. 그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만일 로리도 다른 사람과 같은 생각이라면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것이 옳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뒤를 따라서 현관 홀로 들어갔다. "로리." "응!" 그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돌아보고 로리 모습을 발견하자 갑자기 그는 볼을 부풀게 하고 눈알을 휘둥그렇게 해 보였다. "놀랐어, 로라. 정말 굉장한데." 하고 로리는 말했다. "정말 멋진 모자구나." 로라도 "그래?" 하고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미소를 지어 로리를 올려다보았을 뿐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뒤 이윽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악대가 갑자기 연주를 시작하고, 임시로 고용한 급사들이 집에서 큰 천막 쪽으로 뛰어갔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짝을 지은 사람들이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허리를 굽혀 꽃을 바라보기도 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하며, 잔디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선명한 빛깔의 새가 오는 저녁 나절만 셰리단네 정원에 내려와 앉은 것 같았는데, 지금부터 그 새는 어디로 날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행복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손을 잡기도 하고, 볼을 가까이 대기도 하며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머, 로라, 정말 건강하게 보이는구나." "모자가 참 잘 어울리는데." "로라, 스페인 여자 같구나. 이처럼 아름다운 네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러면 로라는 완전히 들떠서 상냥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차는 드셨어요? 아이스크림을 드시겠어요? 시계풀 열매로 만든 얼음과자는 정말로 별미랍니다." 그녀는 아버지한테 뛰어가서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버지, 악사들한테도 뭐 마실 것을 좀 갖다 주어도 좋죠?" 그리고 그 신바람나는 오후는 서서히 무르익어서 서서히 퇴색하고 천천히 입을 오므렸다. "이렇게 즐거운 가든 파티는 처음예요......" "정말 성대한 잔치였어요......" "정말 참......" 로라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둘은 완전히 마칠 때까지 포오치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제 끝났다. 죄다 끝났어, 휴." 하고 셰리단 부인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요. 로라, 새 커피라도 마시러 가자꾸나. 아이 피곤해. 정말 대성공이야, 그렇지만 사실 파티는 질색이야. 뭣 때문에 너희들은 파티 같은 걸 열자고 하는지 모르겠어." 모두 휑한 천막 안에 앉았다. "샌드위치 드시겠어요, 아버지? 기는 제가 그린 거예요." "고마워." 셰리단 부인이 하나 집어들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는 또 하나를 먹었다. "오늘 언짢은 일이 일어난 걸 듣지는 않았겠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게 말예요." 하고 셰리단 부인은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알고 있어요. 가든 파티가 중지될 뻔했어요. 로라가 연기하자고 고집을 부렸거든요." "어머, 어머니." 로라는 그 일로 놀림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끔찍한 일이야." 하고 셰리단 부인은 말했다. "게다가 그 남자는 혼잣몸이 아니야, 바로 아래 골목에 살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이가 대여섯이나 있다는 이야기야." 조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셰리단 부인은 불안한 손짓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버지는 언짢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눈앞의 테이블에 샌드위치, 과자, 슈크림 등 손도 안 댄 것들이 있었다. 그대로 두면 버리게 되고 만다. 그녀는 희한한 생각을 했다. "좋은 일이 있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바구니를 가져와. 그 가엾은 사람에게 이 훌륭한 음식을 갖다 주도록 하자. 어쨌든 아이들은 매우 좋아할 거야. 안 그래요? 틀림없이 이웃사람들이 들르기도 하겠지요. 그런 때에 음식 준비가 되어 있다면 더 이상 안성맞춤일 수 없지, 로라!"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계단 밑 선반에서 큰 바구니를 가지고 와요." "그렇지만 어머니,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로라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묘한 일이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인간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티의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가다니, 저 가엾은 사람은 그런 것을 고마워할까. "물론이야. 오늘은 네가 어떻게 된 것 같구나. 한두 시간 전에는 동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좋아요." 로라는 바구니를 가지러 뛰어갔다. 바구니는 가득찼다. 어머니 손에 의하여 산더미처럼 채워졌다. "네가 가지고 가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대로 빨리 갔다 와요. 아, 잠깐 기다려. 이 칸나백합꽃도 가져다 줘라. 저런 계층의 사람들은 칸나백합꽃을 매우 좋아한단다." "줄기 때문에 레이스 옷을 더럽혀요." 하고 현실주의자인 조우즈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알맞은 때 말해 주었다. "그럼 바구니만 가져 가. 그리고 로라!" 어머니는 그녀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왔다. "이봐, 절대로......" "뭐예요, 어머니?" "아니, 이 아이의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을 불어넣지 않는 게 좋겠어.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갔다 와." 로라가 정원의 문을 닫았을 때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커다란 개가 그림자처럼 뛰어갔다. 길은 희뿌옇게 빛나고 아래쪽 우묵한 곳에 작고 엉성한 집들이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후의 파티 다음에는 정말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부터 언덕을 내려가서 어딘가 죽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녀는 잠깐 발을 멈추었다. 저 키스 소리, 사람들의 떠들어대는 소리, 스푼이 딸그락거리는 소리, 웃음 소리, 짓이겨진 풀냄새가 어쩐지 그녀의 몸에 가득차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밖의 것은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녀는 점점 맑아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정말 멋진 파티였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벌써 큰길을 가로질렀다. 어두침침한 샛길이 시작되었다. 숄을 걸친 여인과 테가 없는 모자를 쓴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남자들이 울타리에 기대 섰고, 어린이들이 문 밖에서 놀고 있었다. 낮게 웅성대는 소리가 초라한 작은 집안에서 들려왔다. 몇몇 집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마치 게처럼 창가에 어른거렸다. 로라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코트를 입고 왔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의 옷이 얼마나 멋지게 보일 것인가. 거기에 빌로드로 만든 리본이 달린 큰 모자- 그것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걸, 이 사람들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아아 보고 있을 것이다. 온 것이 잘못이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 때는 이미 늦었다. 이 집이 그 집인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사람들이 검게 한데 모여 밖에 서 있었다. 문 옆에 나이많은 노파가 소나무 지팡이를 짚고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발을 신문지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로라가 가까이 가자, 말소리가 그쳤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로라는 마음이 몹시 조마조마했다. 빌로드 리본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면서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이 집이 스코트 씨 댁인가요?"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그래요" 하고 말했다. 아아,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그녀는 문에서부터 나 있는 뜰안 길을 걸어가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고 입 밖에 내어 말했다. 이상스럽게 훑어보는 이 눈초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어디에건, 이 여인들의 숄 아래라도 좋으니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바구니만 놓고 돌아가야지 하고 그녀는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바구니를 열어볼 때까지 기다리지도 말아야지. 그때 문이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몸집이 작은 여자가 어두침침한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로라는, "스코트 씨예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자는,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고 말했고, 그러자 그녀는 좁은 낭하에 갇히고 말았다. "괜찮아요. 안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어요. 바구니만 맡겨두고 가면 되요. 어머니가 보내셔서......" 어두침침한 낭하에 서 있는 몸집이 작은 여인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그녀가 친절하게 말하므로, 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희미한 등불에 비쳐진 지저분하고 천정이 낮고 좁은 부엌에 들어와 있었다. 난로 앞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엠마." 그녀를 안내한 작은 몸집의 여인이 말했다. "엠마! 아가씨가 왔어요." 그녀는 로라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뜻있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 애의 언니 되는 사람입니다. 저 애의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고 로라는 말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는...... 저는 단지 이것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때 난로 앞의 여인이 몸을 휙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벌겋게 퉁퉁 부어 눈이나 입술 등이 보기에도 무서웠다. 그녀는 로라가 어째서 그곳에 왔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슨 까닭일까. 어째서 이 낯선 여자가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 와 있는 것일까. 그녀의 가련한 얼굴은 또다시 일그러졌다. "괜찮아요."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말했다. "제가 아가씨에게 감사를 드리죠."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녀가 말했다. "제발 저 애의 실례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부석부석 부어 있는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로라는 그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죽은 남자가 눕혀져 있었다. "좀 보시지 않겠습니까?" 엠마의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로라의 옆을 빠져나가 침대 가까이 갔다. "무섭지 않아요." 여인의 음성이 부드럽게, 어쩐지 장난기가 섞인 듯이 들렸는데, 그녀는 하얀 천을 들쳤다. "아주 착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표정도 없구요. 이리 가까이 와 보세요." 로라는 가까이 다가갔다. 젊은 남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너무도 평화롭게 잠들고 있어서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아, 이렇게 멀리 떨어져 평화롭게 잠들고 있다. 꿈을 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두번 다시 그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그의 머리는 베개에 파묻혀 있고 눈은 감겨져 있다. 눈은 감겨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꿈의 세계를 거닐고 있다. 가든 파티나 바구니나 레이스 달린 옷들이 지금의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들로부터 아주 먼 세계에 가 있는 것이다. 아주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들이 껄껄대며 웃고 있는 동안에,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에, 이런 놀라운 일이 골목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는 행복해...... 만사가 뜻대로, 하고 그 잠들어 있는 얼굴이 말하고 있다. 나는 벌써부터 이렇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울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걸지 않고는 방을 나올 수 없었다. 로라는 어린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모자를 쓰고 와서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엠마의 언니를 기다리지 않았다. 혼자서 겨우 그 집을 빠져나와 골목을 지나고 검은 사람의 그림자를 지나쳤다. 골목 모퉁이에서 그녀는 로리를 만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왔다. "로라냐?" "응." "어머니께서 걱정하고 계셨어. 아무 일도 없었니?" "응 괜찮아, 아, 로리!" 그녀는 그의 팔을 붙들고 그에게 온몸을 기대었다. "아니, 울고 있잖아?"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로리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울 거야 없지 않니?" 그는 정겹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웠어?" "응." 로라는 흐느꼈다. "정말 멋있었어. 그렇지만 로리......" 그녀는 말을 끊고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인생이란......" 그녀는 더듬거렸다. "인생이란......"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 그녀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겠지." 하고 로리는 말했다. <끝> 8. 해변에서 캐더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1 이른 아침,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초승달' 해변은 온통 하얀 바다안개로 덮여 있다. 풀이 무성한 후미진 만의 커다란 언덕도 잔뜩 안개에 싸여 있다. 언덕이 어디서 끝나고 단지와 방갈로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갈길도 그 저쪽의 단지와 방갈로도 사라지고, 거기에서 더 저쪽에 있는 불그스름한 풀이 덮힌 하얀 모래언덕은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물가가 어디쯤이고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눈짐작이 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이슬이 내려 풀은 새파랗다. 물방울이 풀잎에 매달려 떨어지지도 않고 은빛 깃털을 단 줄기가 긴 토이토이풀이 축 늘어져서 시들고, 방갈로의 정원에는 마리골드와 석죽이 흠뻑 물기를 머금은 채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싸늘한 푸크샤가 흠뻑 젖고, 납작한 금련화 잎사귀에 진주알 같은 이슬이 맺혀 있다. 어둠 속에서 바다가 철썩철썩 밀려들어, 하나의 커다란 파도가 덮어 씌우고 난 다음 같다. 쏴아쏴아 하고- 어디까지나? 한밤중에 눈뜬 사람에겐 크나큰 물고기가 창문으로 뛰어들었다가 나가는 것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 아, 하고 졸린 듯이 바다가 하품을 했다. 풀숲에서 시냇물소리가 들려왔다. 미끄러운 돌멩이 사이를 졸졸 누비면서 빠르게, 고사리풀이 난 웅덩이에 괴었다가 다시금 흘러내려 간다. 커다란 나뭇잎에 팔짝 물방울이 튄다. 그런데 뭣인가 그외에도- 뭣일까- 미세한 것이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진다. 누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 '초승달' 해변의 끝을 돌아간 곳, 깨진 바위들이 덧쌓인 틈서리로 한 무리의 양떼가 나타났다. 작지만 움직이는 푹신한 양떼였다. 냉랭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막대 같은 가느다란 다리로 재빨리 달려간다. 그 뒤를 늙은 목양견이 물에 젖은 다리에 모래를 묻히고, 코로 땅냄새를 맡으면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기나 한 듯이 무뚝뚝한 얼굴로 달려왔다. 바위 틈에 난 그 길에 목자가 나타났다. 여위고 허리가 꼿꼿한 노인인데, 작은 물방울이 줄무늬에 튄 프라이즈 외투를 입고 무릎 밑을 끈으로 묶은 빌로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접은 청색 손수건을 챙에 감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손은 혁대에 찌르고, 다른 한 손은 반들반들 길이 든 그럴 듯한 황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표표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슬프고 다정하게 들려왔다. 늙은 개는 예전 버릇으로 한두 번 껑충 뛰었는데, 그 경솔함을 뉘우치기나 한 것처럼 별안간 멎어서서 주인 곁을 두세 번 점잔을 빼며 걸었다. 양이 토닥토닥 잰발로 달리며 울음 소릴 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바다 밑에서 환상의 양떼가 그 소리에 응답했다. '음매 음매.' 잠시 모두 같은 곳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방에는 얕은 물웅덩이가 있는 자갈길이 펼쳐졌다. 똑같은 젖은 풀숲이 양쪽으로 보이고, 똑같은 그림자 비슷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러자 뭔가 무서운 커다란 물체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팔을 벌리고 머리칼이 산산이 흩어진 거인이다. 그것은 스태브즈 부인의 가게 밖에 서 있는 커다란 고무나무였다. 양떼가 그곳을 지나갈 때 유칼리의 강한 냄새가 풍겨왔다. 목자는 불던 휘파람을 그쳤다. 붉은 코와 젖은 수염을 소매로 문지르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막 해가 떠오르려는 참이었다. 놀랄 만한 속도로 안개가 걷혔다. 산산이 흩어져서 평탄한 들판부터 개기 시작하여 풀숲 위로 말려서 올라가자, 갑자기 도망이라도 치듯이 꺼지고 말았다. 은빛 광선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서 크게 뒤엉키어 소용돌이치는 줄무늬가 밀고 밀리며 흘러갔다. 저 멀리 활짝 갠 푸른 하늘이 물웅덩이에 비쳐서 전신주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이면서 물결치는 바다는 이미 그쪽을 보면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목자는 윗주머니에서 대통이 달린 파이프를 꺼내더니 얼룩무늬가 든 담배 덩어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얇게 두세 장 벗겨 들고는 파이프에 담았다. 풍체가 중후한 잘 생긴 노인이다. 그가 담배에 불을 댕겨 푸른 연기가 머리 위에서 맴돌자, 개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주인이 늘 짓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매 음매." 양들은 부채꼴로 퍼졌다. 그리하여 겨우 피서객들의 집을 떠났을 무렵, 맨처음 잠든 사람이 몸을 뒤척이면서 졸린 듯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양 울음소리가 작은 아이의 꿈속에서까지 울리자...... 아이는 팔을 들어 올려서 잠이 든 채 폭신폭신한 귀여운 작은 양을 끌어 당겨 껴안았다. 그리고 나서 최초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넬 가의 고양이 플로리였다. 문기둥에 앉아서, 여느 때처럼 아직 이르지만 우유 배달하는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목양견을 보자 재빨리 뛰어올라가서 등을 둥글게 오므리고 얼룩진 머리를 빼며 좀 결벽스럽게 진저리를 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징그러워. 왜 이렇게 덜렁대는 느낌이 드는 못된 사람일까?" 하고 플로리는 말했다. 그러나 목양견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리를 옆으로 흔들면서 느릿느릿 지나갔다. 하나 고양이를 바보 같은 계집애라고 생각한 증거로 한쪽 귀를 씰룩거렸다. 아침 산들바람이 풀숲에서 일어나 나뭇잎과 축축한 흙냄새가 바다의 예리한 냄새에 뒤섞였다. 무수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검은방울새 한 마리가 목자의 머리 위를 날다가 작은 가지끝에 앉더니 해가 있는 쪽을 향해서 가슴의 깃털을 곤두세웠다. 그때 양떼는 어부의 오두막집을 지나서 우유 배달하는 소녀 리라가 늙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작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보이는 '집' 앞을 지나갔다. 양들이 누런 습지에 잘못 들어가서 목양견 왓구가 질퍽거리며 뒤쫓아 무리를 휘몰아 앞장서서는 '초승달' 해변으로부터 '날씨' 포구 쪽으로 통하는 좀더 가파롭고 좁은 암도(岩道)로 나아갔다. "음매 음매." 마른 길을 양떼가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동안에 갸날픈 울음소리가 났다. 목자는 파이프를 작은 대통만 밖에 내밀고 윗주머니에 꽂았다. 곧 이어서 표표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왓구는 냄새 나는 것을 찾아 바위 위로 달려가더니 시무룩해서 돌아왔다. 양떼는 깡총깡총 뛰거나 서로 받고 재촉하면서 해변 모퉁이를 돌아갔다. 목자도 그 뒤를 따라 보이지 않게 되었다. 2 잠시 후, 한 방갈로의 뒷문이 열리더니 거친 무늬가 든 해수욕복을 입은 사나이가 단지를 가로질러서 달려왔다. 그는 울타리를 뛰어넘고 수북한 억새풀을 헤치고 달려 움푹 파인 데서 모래언덕 쪽으로 기어올라가더니, 열심히 뛰어서 구멍투성이인 커다란 돌을 넘고 차디차게 젖은 작은 돌을 넘어 기름처럼 빛나는 굳은 모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팔짝팔짝 스탠리 바넬이 열심히 물가에서 달려나오자 발목에서 물이 거품을 일으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첫째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을 이겼다. 그는 몸을 급히 굽혀서 머리와 목을 물에 적셨다. "겨레여, 잘 왔노라. 그대 씩씩한 자여." 유창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바다 저쪽에서 울려왔다. 이거 안 되겠는걸, 썅. 얼굴을 쳐드니 스탠리의 눈에 멀리 수면에 떠오른 검은 머리통과 들어 올려진 팔이 보였다. 죠나단 트라우트다- 저 녀석 한 발 앞서서 바다에 먼저 들어갔군. "찬란한 아침이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응, 좋은 아침이야." 스탠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저 녀석은 자기 가까운 바다에 가만히 있지 않고 이곳이 어디라고 여기까지 침입하는 것일까. 스탠리는 물을 차고 내닫자 손으로 끌어당기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죠나단도 지지 않고 그에게로 접근해 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서 빛났다. 짧은 머리가 빛나고 있었다. "간밤에 어처구니없는 꿈을 꿨거든." 하고 그는 소리쳤다. 이 사내는 대체 어찌된 셈일까. 그 집요한 입담에 스탠리는 신경이 곤두섰다. 더구나 노상 같은 이야기다- 언제나 자기가 꾼 시답잖은 꿈이야기거나 엉뚱한 발상, 책에서 읽은 실없는 소리 따위를 늘어 놓는다. 스탠리는 벌렁 누워서 두 발로 물을 찼다. 인간 소용돌이 꼴이다. 하나 그래도...... "굉장히 높은 벼랑에 매달려 밑에서 누가 소리치는 꿈을 꿨다구." 그럴 테지, 하고 스탠리는 생각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수영을 멈추고 "어이 트라우트" 하고 불렀다. "오늘 아침에는 바쁘단 말이야." "오늘 아침엔 뭐라구?" 죠나단은 정말 놀랐다- 어쩌면 놀라는 척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더니 숨을 토해 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야." 하고 스탠리는 말했다. "시간이 없어- 꾸물댈 여유가 없단 말이야. 이젠 서서히 끝내지 않으면 안돼. 급하다구. 오늘 아침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알겠나?" 스탠리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죠나단은 몸을 뺐다. "잘 있거라, 벗이여." 하고 온건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잔물결도 일으키지 않고 물 속으로 헤엄쳐서 떠나갔다...... 괘씸한 녀석이군. 덕분에 스탠리의 물놀이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저 놈은 손댈 수도 없는 바보일까. 스탠리는 바다 한가운데로 향해 갔다가 급히 헤엄쳐서 되돌아오자 물가로 달려 나왔다.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죠나단은 아직도 물 속에 있었다. 두 손을 지느러미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서 키 크고 깡마른 몸이 파도에 흔들리는 대로 뜨고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온갖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리 바넬이 좋았다. 분명히 가끔 스탠리를 놀려서 우롱해 주고픈 악마 같은 소망을 품는 일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사를 성실하게 하려는 스탠리의 결의에는 뭔가 슬픔을 유발하는 데가 있었다. 언젠가는 '아웃'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나 그렇게 되면 그는 무슨 큰 실패를 저지를 것이다. 그 순간 커다란 파도가 죠나단을 들어올려서 치더니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물가에 부딪쳤다. 깨끗하다.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온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분별없이 무턱대고 힘이 다할 때까지. 물 밑에 발을 대자 그는 자국이 난 굳은 모래에 발가락을 누르면서 기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거나 유연하게 버티며 인생의 물결의 간만에 역행하지 말고 되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일- 이것이 긴요한 안목이다. 살아가는 일- 살아가는 일. 쏟아지는 빛을 쐬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미소짓는 듯한 이 신선하고 깨끗한, 더 말할 수 없는 아침이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정말' 하고. 그러나 물에서 나오자 죠나단은 추워서 파래졌다. 온몸이 아렸다. 누군가에게 피를 빨아먹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몸부림치며 근육을 완전히 굳힌 채 터덜터덜 물가로 올라오면서 그도 또한 오늘 아침의 물놀이가 좋지 않았다고 느꼈다. 바다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이다. 3 감색 사지 양복 저고리를 입고 빳빳한 칼라에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맨 스탠리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거실에는 베릴 혼자만이 있었다. 그는 기분 나쁠 만큼 옷에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날 하루 거리에 나가는 참이었다. 의자에 앉자 그는 시계를 꺼내어 자기 접시 옆에 놓았다. "겨우 이십오 분뿐이 시간이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죽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어쩐지 보아 주지 않을래, 베릴." "어머니가 보러 가셨어요." 하고 베릴은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마워." 스탠리는 한모금 마시더니 "아, 참" 하고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탕을 잊어버렸군." "어머, 죄송해요." 하지만 그래도 베릴은 설탕을 넣으려 하지 않았다. 설탕 항아리를 밀어냈다. 어찌된 셈일까. 자신이 설탕을 넣으면서 스탠리는 푸른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재빨리 누이동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고 칼라를 만지작거리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베릴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접시를 뒤집어엎었다. "네" 가볍게 대답하고, 스탠리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어찌할 수 없잖아요." "하기야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뭔가 너......" 마침 그때 문이 열리며 어린 소녀 셋이 모습을 나타냈다. 똑같은 푸른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갈색 다리는 맨발이고 각기 머리를 땋아서 흔히 말하는 '말꼬리' 모양으로 해서 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쟁반을 손에 든 페아필드 부인이 따라왔다. "조심해, 모두." 하고 부인은 주의시켰다. 과연 세 소녀는 모두 대단히 조심을 했다. 물건을 나르게 한 것이 기뻤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했나요?" "네, 아줌마." 일동은 스탠리와 베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잘 잤니, 스탠리?" 노(老) 페아필드 부인이 그에게 접시를 건네주었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우리 아드님은 뭘하고 있죠?" "어른이 다 됐어. 어젯밤에는 한 번밖에 깨질 않았지. 기분 좋은 아침이야." 노부인은 그 자리에 서서 한 손을 빵에 얹고 열린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바다가 울렸다. 열어제친 창문으로 니스 칠을 한 노란색 벽과 카펫을 깔지 않은 마룻바닥에 햇살이 비쳤다. 테이블 위의 것이 모두 반짝반짝 빛났다. 그 한가운데에 노랑과 빨강의 금련화를 꽂은 지 오래된 샐러드용 접시가 놓여 있었다. 부인은 미소지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이 그 눈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빵조각을 하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스탠리가 말했다. "합승이 오기까지는 십이 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누가 내 구두를 하녀에게 내 주었지요?" "벌써 닦아 놓았어." 페아필드 부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케자이아, 어째서 그런 몹쓸 짓을 하는 거지?" 하고 베릴이 난처해하며 외쳤다. "나요?" 케자이아는 숙모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일까? 다만 죽(粥) 한가운데에 도랑을 파고 물을 흘려보내서 양 기슭을 먹고 있을 뿐인데. 더구나 그것은 매일 아침 하고 있는 일이라서 이제까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일인데. "왜 이자벨이나 로티처럼 제대로 음식을 못 먹는 거니?" 어른들은 무리한 말만 하거든. "하지만 로티는 언제나 부도(浮島)만 만드는 걸요. 그렇지, 로티?" "난 만들지 않아요." 하고 이자벨은 딱 잘라서 말했다. "나는 설탕을 치고 우유를 넣어서 곧 먹어요. 먹는 것을 장난감으로 하는 것은 갓난애뿐이에요." 스탠리는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 일어났다. "구두를 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그리고 베릴, 식사를 마쳤으면 급히 문간으로 가서 합승을 세워 주시지 않겠소? 이자벨, 어머니 계신 데로 달려가서 아버지 모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물어다오. 아 잠깐- 너희들 아버지의 스틱을 갖고 놀지 않았니?" "아뇨." "한데 여기 놔뒀단 말이야." 스탠리는 소리쳤다. "이 구석에 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누가 가지고 있지? 얼른 내놔라. 시간이 없어. 스틱이 없으면 안돼." 하녀 앨리스도 스틱을 찾는 데 동원되었다. "어쩌면 부엌에서 불을 때는 데 사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스탠리는 린다가 자고 있는 침실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돼먹지 않았어. 내 물건은 하나도 옆에 제대로 붙어 있지를 않아. 이번에는 스틱을 가져가 버린 녀석이 있거든." "스틱? 무슨 스틱이요?" 이런 말을 할 때의 린다의 애매한 태도는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스탠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게 동정하지 않는군, "합승이에요, 스탠리." 문간에서 베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탠리는 린다에게 팔을 내저었다. "다녀옵니다. 할 틈도 없다" 했는데, 이것도 그녀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그는 실크햇을 움켜쥐고 문을 뛰쳐나가서는 정원의 오솔길을 걸었다. 과연 합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릴은 열린 문에 기대서 풀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들의 박정함, 그들은 스틱이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주지도 않은 주제에, 내가 자기들을 위해서 억척스럽게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켈리가 회초리로 말 등을 후려쳤다. "다녀오세요, 스탠리." 기분좋고 명랑하게 베릴이 외쳤다. '다녀오세요'라고만 한다면 아무 내용도 없는 이야기다. 멍하니 서서 한 손으로 눈을 가려 햇살을 막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입장이 곤란한 것은 체제상 그도 똑같이 '다녀옵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베릴이 돌아서서 깡총 뛰더니 집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는 나를 쫓아내서 기뻐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 베릴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거실에 달려들어서, "떠났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베릴, 스탠리는 떠났니?" 작은 플란넬 저고리를 입은 아기를 안고 노(老) 페어필드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떠났어?" "떠났어요." 아아, 가슴이 놓인다. 남자가 집에 없으면 전혀 다르다. 서로 부르는 목소리까지 변한다. 비밀을 서로 나눠 주고 받기나 하듯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울린다. 베릴은 테이블 있는 데로 갔다. "차 한 잔 더 하시면 어때요, 어머니. 아직 뜨거워요." 어쨌든 이것으로써 이제는 자기들 좋을 대로 해도 좋다는 사실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방해하는 남자는 없어졌다. 하루 진종일 완전히 자기들 마음대로다. "아냐, 괜찮다." 노 페어필드 부인은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인이 갓난애를 흔들어 올리면서 "바바바- 바아"라고 하는 모습에서 그녀도 똑같은 기분임을 알았다. 새장에서 나온 어린 새처럼 소녀들은 단지로 달려갔다. 하녀 앨리스조차 부엌에서 접시를 닦으며 그 기분에 물들어 물통의 귀중한 물을 함부로 써서 없앴다. "사내가 뭐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차 끓이는 주전자를 개숫물통에 넣고 거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물 속에서 누르고 있었다. 그 주전자가 남자이고 익사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고 말하는 듯이. 4 "기다려, 이자벨. 케자이아, 기다리라니까." 불쌍하게도 아직 로티가 뒤에 남았다. 울타리의 층계를 혼자서 넘는 것이 무섭고 힘들기 때문이다. 첫단을 올라서자 벌써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한쪽 발을 내디뎌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데 어느 발부터? 도저히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쾅 하고 한 다리를 내딛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몸이 아직 반은 단지 안에 있는데 반은 억새풀더미에 내딛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기둥에 매달려서 크게 소리쳤다. "기다려." "기다리면 안돼, 케자이아." 하고 이자벨이 말했다. "저 아이는 바보라구, 언제나 떠들어대기만 하니까. 자, 가자." 케자이아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함께 오면 내 바께쓰를 쓰도록 해 주겠어." 다정하게 말했다. "네 것보다 커요." 하나 케자이아는 로티를 혼자 놔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뛰어서 돌아왔다. 로티는 얼굴이 벌개져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 또 한 발을 드는 거야." 하고 케자이아는 말했다. "어디로?" 로티는 산꼭대기에서처럼 케자이아를 내려다보았다. "자, 내 손 있는 대로야." 케자이아는 그 장소를 두드렸다. "어머, 거기라구." 로티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또 한쪽의 발을 들었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서 앉으며 미끄러지는 거야." 하고 케자이아는 말했다. "하지만 앉을 자리가 없잖아. 케자이아." 그러나 마침내 어떻게 되었다. 그렇게 하고 나자 로티는 몸서리치고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난 울타리를 넘는 것이 점점 숙달되는 모양이지, 케자이아." 로티는 희망에 찬 성질이었다. 연분홍과 푸른색 챙 넓은 모자가 이자벨의 밝은 붉은색 모자 뒤에서 그 미끄러운 언덕을 올라왔다. 정상에서 일동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고, 누가 선착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멈춰 섰다. 뒤에서 보니, 지평선을 지고 서서 힘겨운 듯 삽을 휘두르고 있는 일동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인원의 탐험대 같았다. 새뮤얼 죠세프스 집안의 아이들이 모두 벌써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 거드는 여자와 함께였다. 접었다 펴는 의자에 앉아서 목에 매단 호각과 행동을 지휘하는 작은 막대로 혼란을 막고 있다. 이 아이들은 결코 제멋대로 놀지 않고 자기들만으로 게임을 하지도 못했다. 자칫하면 틀림없이 사내아이가 계집아이 목에 물을 끼얹거나, 계집아이가 사내아이의 포켓에 작고 검은 게를 넣으려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에스 제이 부인과 불쌍한 여자 조수는 아이들을 '즐겁게 놀고 장난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전부가 경쟁이나 뜀박질, 차례돌리기 내기였다, 만사가 귀청을 울리는 여자 조수의 호각소리로 시작되고 그 소리로 끝났다. 상품까지 붙어 있다- 여자 조수가 떫은 미소를 지으면서 불룩한 삼노끈 광주리에서 끄집어낸 커다란, 지저분한 종이꾸러미였다. 아이들은 상품에 욕기가 나서 맹렬하게 싸우고 서로 속이고 팔을 꼬집었다- 꼬집는 일에는 모두 숙달되어 있다. 바넬 가의 아이들이 꼭 한 번 함께 놀았을 때 케자이아가 상품을 탄 일이 있다. 종이를 석 장쯤 풀자 작은 녹이 슨 옷걸이가 나왔다. 모두 왜 그렇게 법석을 떠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 이제 케자이아들은 새뮤얼 죠세프스 집안의 아이들과는 놀지 않았고, 그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죠세프스 집안은 언제나 이 해변에서 아이들의 모임을 열었는데 언제나 똑같은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세숫대야에 담은 프루츠 샐러드와 넷으로 자른 케이크빵, 그리고 물그릇에 담은, 깨끗한 여자의 말을 빌자면 '리무나데야'와. 저녁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프록의 가장자리 장식이 반쯤 찢어지고, 실로 짠 앞치마에 뭔가가 철떡 묻어 있다. 그리고 뒤에 남은 그 집의 아이들은 잔디에서 야만인같이 뛰어다니고 있다. 엉망진창인 것이다. 해안 반대쪽 물가에서 작은 사내아이 둘이 반바지를 걷어 올리고 거미처럼 뛰어다니고 있다. 하나는 모래를 파고, 다른 하나가 작은 바께쓰에 물을 퍼서는 수면에서 파닥파닥 들락거린다. 트라우트 집안의 형제인 피프와 래그즈다. 그런데 피프는 모래를 파고, 래그즈는 거드는 데 열중해 있었으므로, 사촌 자매들이 바로 옆에 왔는데도 그들을 알아 보지 못했다. "봐요." 하고 피프가 말했다. "이런 것이 발견됐어요." 그리고 모두에게 우그러져 못쓰게 된 헌 구두를 보였다. 세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걸 어디에 쓸 셈이지?" 하고 케자이아가 물었다. "간수해 두는 거야." 피프는 경멸하는 얼굴로 "찾아낸 물건이 아닌가- 안 보여?" 확실히 케자이아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물건이 모래에 묻혀 있어" 하고 피프는 설명했다. "난파선에서 버리거든. 보물이지. 여러 가지가 발견돼...... 그야-" "한데 왜 래그즈가 그렇게 물을 끼얹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하고 로티가 물었다. "적시는 거야." 하고 피프가 말했다. "조금 다루기가 쉬워지지. 더욱더 끼얹으라구. 래그즈." 마음이 착한 래그즈는 뛰어다니면서 물을 끼얹었다. 물은 코코아 같은 다갈색이 되었다. "이봐, 어제 발견한 것을 보여 줄까?" 수수께끼 같은 말투로 말하자, 피프는 모래에 삽을 꽂았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모두 약속했다. "하나님 맹세하겠습니다, 라고 말해." 소녀들은 그렇게 말했다. 피프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자 셔츠의 가슴에 오랫동안 그것을 문지르고, 다시 한 번 입김을 불어서 또 문질렀다. "자, 한바퀴 도는 거야." 일동은 한바퀴를 돌았다. "모두 같은 쪽을 보라구. 가만히, 자아." 그는 손바닥을 펴서 뭔가 빛나는 것을 햇빛에 들어 보였다. 정말 예쁜 초록색 돌이다. "에머랄드다." 피프는 엄숙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피프?" 이자벨조차 감동했다. 그 예쁜 초록색 돌은 피프의 손가락끝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베릴 아줌마 반지에는 에머랄드가 붙어 있다. 한데 대단히 작다. 이것은 별만큼 크고 훨씬 더 아름답다. 5 아침나절이 지나자 사람들이 모두 모래언덕을 넘어서 나타나 멱을 감으러 물가로 내려왔다. 열한 시에는 피서객인 여자와 아이들이 바다를 차지하기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 맨먼저 여자들이 옷을 벗고 해수욕복을 입은 후 스폰지로 만든 야릇한 모자로 머리를 가렸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단추를 따주었다. 물가에 옷가지와 신이 작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지질러 놓은 커다란 여름모자가 거대한 조개껍질처럼 보인다. 이상한 것은 뛰고 웃는 사람들이 모두 물 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나면 바닷소리조차 변하고 만다. 라일락빛 무명 옷을 입고 모자를 턱 밑에서 잡아맨 페어필드 노부인은 어린 손자들을 모아놓고 준비를 시켰다. 트라우트 집안의 소년들은 별안간 머리 위로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다섯이서 일제히 달려나갔다. 할머니는 앉아서 한 손을 편물가방에 넣어, 손자들이 무사히 바다로 뛰어들고 나면 털실뭉치를 꺼내려고 했다. 몸이 단단한 소녀들이 실은 약하게 보이는 어린 소년의 반도 용감하질 않았다. 피프와 래그즈는 몸을 떨면서도 구부리더니 피샥피샥 수면을 치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 열두 번 물을 긁을 만큼 헤엄칠 수 있는 이자벨도 여덟 번쯤 헤엄치는 케자이아도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확실한 양해가 없으면 뒤따르질 않았다. 로티는 여러 아이들의 뒤를 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다만 물가에 앉아서 다리를 뻗고 무릎을 가지런히 붙이고, 그래도 바다에 떠오를 셈인 것처럼 애매하게 팔을 휘젓기만 했다. 그러나 보통 이상으로 큰 수염투성이 어른 파도가 와락 달려들면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일어서서 다시 물가를 달려 올라왔다. "엄마, 이것 좀 갖고 계세요." 반지 둘과 가느다란 금사슬이 페어필드 부인의 무릎에 떨어졌다. "아, 그러렴. 한데 너 여기서 멱 안 감을 거냐?" "네에." 베릴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애매한 대답이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옷을 벗겠어요. 켄바 씨네 아줌마와 함께 수영을 할래요." "그래." 페어필드 부인은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하리 켄바 부인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베릴은 그것을 알고 있다. 불쌍하게도 어머니는, 하고 미소지으면서 그녀는 돌멩이 위를 달려갔다. 불쌍하게도 어머니는 늙으셨어. 늙은이야, 아아, 젊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돌멩이 위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두 팔로 무릎을 안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날이군요." 하자 베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렇군." 하리 켄바 부인의 목소리는 글쎄, 하는 것처럼 울렸다. 한데 부인의 목소리는 어떤 사람의 생각에도 글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키가 크고 풍채가 기묘한 부인으로 가늘고 긴 손발을 가진 여자였다. 얼굴도 또한 갸름하게 길며,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굽슬거리는 금발은 불에 타서 시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노상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궐련을 물고 이야기를 해서 재가 당장에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위태로울 만큼 길게 되면 그제서야 입술에서 뗀다. 브리지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그녀는 매일 싫증도 안 내고 브리지를 한다- 반짝이는 햇살을 온몸에 쐬면서 드러누워 있는다. 아무리 쐬어도 끄떡없다. 십 분 정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짝 말라서 시들어 차디차며, 물에 떠내려 온 유목처럼 부인은 돌멩이 위에 길게 누워 있다. 해변의 여자들은 부인의 처신이 대단히 방탕하다고 믿고 있었다. 겉치레하지 않는 천한 말씨를 쓴다. 자기가 남자나 되듯 남자들과 상대하여 어울린다. 집에 대해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않으며, 하녀인 글라디스를 '건달'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모두가 꼴불견인 이야기였다. 베란다 층계에 서서 켄바 부인은 태연한 지친 어조로 곧잘 이런 말을 했다. '건달아, 손수건을 한 장 던져다오.' 그러면 모자도 안 쓰고 빨간 나비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흰 구두를 신은 '건달'이 얌전치 못한 웃음을 웃으면서 달려온다. 저러니 세상 사람들이 가만 있지 못하지. 그야 아이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남편이...... 거기까지 말하고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목소리가 커지고 열을 띤다. 어째서 켄바 씨는 저런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물론 돈이 목적이었을 테죠.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켄바 부인의 남편은 그녀보다 적어도 십 년은 젊었다. 대단한 미남자로서 살아 있는 남자라기보다 마치 인형이나 미국 소설의 가장 완전한 삽화 같았다. 검은 머리, 짙은 푸른색의 눈, 붉은 입술에 여유스런 졸린 듯한 미소, 테니스의 명수이자 나무랄 데 없는 댄스 파트너요, 게다가 신비스러웠다. 하리 켄바는 몽유병자 그대로였다. 남자들은 그가 참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든 한마디도 속마음을 실토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인이 그를 무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역시 아내를 무시하고 있었다.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물론 까닭은 있다. 하나 그 까닭이라니 말로 할 것이 못 된다.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가 본 일이 있는 여자나 발견한 장소...... 그 무엇 한 가지 확실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았다. 해변의 여인들 중에는 그가 언젠가는 살인을 할 것이라고 몰래 생각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렇지, 여자들이 켄바 부인에게 말을 걸고 그녀가 입은 무섭게 야한 옷차림을 보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눈에는 부인이 물가에서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냉정하고 처절하게 입가에 담배를 문 채였다. 켄바 부인은 일어나서 하품을 하자 벨트를 끌르고 브라우스 끈을 잡아당겼다. 베릴은 스커트를 내려서 발을 뽑고, 속옷을 벗어 짧고 흰 페티코트와 맨 리본을 어깨에 걸친 캐미솔만 입은 모습이 되었다. "어머."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귀여운 여인이야, 당신은." "싫어요." 하고 베릴은 온건하게 말했다. 하지만 한 짝씩 양말을 벗고 나니 귀여운 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잖아." 하리 켄바 부인은 자기 페티코트를 밟으면서 말했다. 정말 그 속옷이라니. 푸른 무명의 아랫도리와 뭔가 베갯잇을 연상시키는 린넬의 보디스...... "당신 코르셋을 하지 않았군." 부인은 베릴의 허리에 손을 댔다. 베릴은 짐짓 일부러 비명을 지르면서 펄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똑떨어진 어조로 말했다. "행복한 사람이야." 켄바 부인은 한숨을 쉬며 제 코르셋을 풀었다. 베릴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옷을 벗는 것과 동시에 해수욕복을 입으려는 사람이 곧잘 하는 예의 정교한 동작을 시작했다. "내겐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은 말했다. "왜 부끄러워하죠? 당신을 잡아먹진 않아. 저런 멍텅구리처럼 놀라진 않을 거니까." 그리고 말이 우는 듯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는 상을 찡그려 보았다. 하나 베릴은 부끄러웠다. 남 앞에서 옷 벗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일까. 하리 켄바 부인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면 뭔가 창피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왜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시미즈를 벗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뚝 서서 새 담배에 불을 붙인 부인 쪽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그러자 재빠르고도 엉뚱한 언짢은 감정이 일어났다. 자포자기한 웃음을 웃으면서, 말라서 축 늘어진, 모래가 손에 만져지는 해수욕복을 입자 비틀린 단추를 잠갔다. "그러는 편이 좋아." 하리 켄바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물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당신이 옷을 입고 있는 건 죄악이야. 언젠가는 누가 그렇게 말해 줄 사람이 생겨야 하는데." 바닷물은 정말 따뜻했다. 저 불가사의한 투명한 청색이고, 군데군데 은빛이 내비친다. 물 밑의 모래는 금색으로 빛났다. 발가락으로 차니 뭉클뭉클 사금이 솟아올랐다. 파도가 가슴까지 치밀었다. 베릴은 두 팔을 뻗고 일어나서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뛰어올랐다. 파도가 조용히 제 몸을 들어올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예쁜 아가씨는 즐겨야지." 하고 하리 켄바 부인은 말했다. "즐기지 않으면 거짓말이야. 놓치면 안 돼요. 마음껏 즐기세요." 그리고 갑자기 재주 한 바퀴를 넘더니 모습을 감추고 헤엄쳐 갔다. 얼마나 빠른지 쥐와 같았다. 그리고는 홱 방향을 바꾸자 헤엄쳐 돌아오기 시작했다. 뭔가 좀더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베릴은 이 차디찬 여자의 독기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얼마나 묘하고 소름 끼치는 말일까. 하리 켄바 부인이 가까이 왔을 때 검은 방수 해수욕 모자를 쓰고 턱 있는 데까지 졸린 듯한 얼굴을 내민 그 모습은 그녀 남편의 처참한 캐리커처처럼 보였다. 6 앞마당 풀숲 한가운데 서 있는 마누카나무 밑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린다 바넬은 꿈꾸는 기분으로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컴컴하게 우거진 마누카의 잎과 그 사이 사이의 파란 틈들을 쳐다보았다. 가끔 작은 황색의 꽃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예쁜- 그렇다, 그 꽃을 하나 손바닥에 올려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멋지고 작은 구경거리다. 하나하나 담황색 꽃잎이 애정 깊은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어진 것처럼 빛난다. 중심에 조금만 혀가 있어서 그 때문에 종모양으로 보인다. 바깥쪽은 짙은 청동색이다. 하나 꽃이 피면 금새 떨어져서 흩어진다. 누구든 이야기하며 프록에서 털어낸다. 기분 나쁜 그 작은 꽃이 머리칼에 달라붙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피는 것일까.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수고를- 아니, 기쁨일지도 모르지만- 누가 맡아 하는 것일까. 모두 한순간에 허사가 되고 마는데...... 묘한 이야기다. 옆의 풀 위에서, 두 베개 사이에 사내아이가 잠들어 있다. 머리를 어머니로부터 돌려대고 곤히 잠자고 있다. 그 가늘고 검은 머리칼은 진짜 머리칼이라기보다 그림자처럼 보였다. 하나 귀는 밝고 짙은 산호빛이다. 린다는 두 손을 머리 위에서 마주잡고 발을 포갰다. 방갈로가 모두 텅 비고, 모두가 물가로 내려가 있어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 자기가 정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외톨이다. 눈부실 만큼 하얗게 피코티가 빛난다. 금의 눈을 가진 마리골드가 번뜩인다. 금련화가 베란다 기둥에 녹금의 불길처럼 엉켜붙어 있다. 이들 꽃을 충분히 오래 바라볼 시간이, 진기한 느낌이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그것들을 잘 알게 될 시간이 내게 있다면, 한데 그 자리에 멈춰서서 꽃잎을 헤치고 잎 뒤쪽을 발견하자마자 '인생'이란 것이 닥쳐와서 그것에 밀려 흘러가 버리고 만다. 등 의자에 누워 자면서 린다는 제 몸이 가붓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뭇잎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바람처럼 '인생'이 와서 그녀는 붙잡히고 흔들려진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언제까지나 그럴 것인가. 도망칠 길은 없는 것일까. ...... 그녀는 타스마니아의 집 베란다에 앉아서 아버지의 무릎에 기대고 있다. 아버지가 약속하신다. '리니, 너나 나나 늙으면 급히 어디론가 가자. 도망치자. 젊은이끼리 가듯 함께 가자. 중국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린다에게는 그 강이 보인다. 폭이 대단히 넓고 작은 뗏목이나 배가 잔뜩 있다. 사공의 노란 모자가 보인다. 그들이 외치는 높고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네, 아빠.' 그런데 그때, 머리칼이 밝은 적색인 어깨가 딱 벌어진 한 청년이 천천히 집 앞을 지나간다. 천천히, 아니 진정인 체하며 모자를 벗는다. 린다의 아버지가 곧잘 하는 버릇으로, 비웃는 표정으로 그녀의 귀를 잡아당긴다. '리니의 애인이군.' 하고 속삭인다. '싫어요, 아빠. 스탠리 바넬과 꼭 결혼해야 할 건 없잖아요.' 하지만 린다는 그와 결혼했다. 더구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의 눈에도 띄는 스탠리가 아니고, 일상의 그는 아니었다. 겁 많고 민감하고 순진한, 매일 밤 무릎 꿇고 기도하는. 남에게 친절해 하고 싶어하는 스탠리였다. 스탠리는 단순했다. 남을 신용하면- 가령 그는 린다를 신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실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불신한 처사를 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못한다. 누구든- 린다가- 자기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른다. '이런 속임수는 난 몰라' 하고 그는 내뱉듯이 말하는데, 그 개방적인 몸부림과 당혹한 표정은 함정에 빠진 야수와도 같았다. 그런데 곤란한 일은- 여기서 린다는 웃음이 나오려 했던 것이다. 결코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가 린다 자신의 스탠리가 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평온할 때가 가끔가다 숨쉴 시간 정도는 있었다. 하나 그 외에는 언젠나 불붙는 버릇이 있는 집이든가, 매일 난파하는 배 위에서 지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언제나 위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은 스탠리였다. 린다의 시간은 그를 구출해내고 원상으로 회복시켜서, 기분을 진정케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일로 다 소비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린다는 얼굴을 찡그렸다. 급히 의자에 고쳐 앉아서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참다운 불만이다. 까닭모를 일이다. 몇 번이나 묻고 귀를 기울였으나 대답이 없던 의문인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공통된 숙명이란 말은 멋대로 하는 말들이다. 그것은 정말이 아니다. 그런 것은 틀렸다. 뭣하면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자기는 아이를 낳고 건강을 해쳐 쇠약해서 용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이중으로 참을 수 없는 이유는, 자기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적당히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그런 힘이 있더라도 자신은 작은 딸애를 안아 주거나 함께 놀아 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저 무서운 여행을 나설 때마다 차디찬 입김을 쐬어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딸들에게 나눠 줄 온기란 남아 있지도 않다. 아들은- 고맙게도 어머니가 맡아 주셨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아니 베릴의, 아니 누구든지 그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의 것이다. 전혀 이 팔에 안아 본 적이 없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지금 바로 여기에 누워 있어도...... 린다는 그쪽을 굽어보았다. 갓난애는 몸을 뒤챘다. 눈을 감은 채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젠 잠이 깼다. 짙은 푸른색의 아기다운 눈을 반짝 떴다. 엄마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별안간 그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그것이 점점 퍼지더니 이 없는 입이 웃었다. 말할 수 없이 기분좋은 웃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어요' 하고 그 행복한 미소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왜 날 안 좋아하죠?' 그 미소에는 뭔가 기묘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여운이 있었다. 린다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하고 아이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아기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 '아기를 좋아하지 않다니?' 아이는 엄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를 안 좋아해?' 어리석게도 엄마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린다는 의자 곁을 떠나 풀 위에 앉았다. "왜 그처럼 웃는 거지?" 엄격한 말투로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면 웃을 일이 아닐텐데." 그러나 아기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베개 위에서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다 알고 있어." 하고 미소지었다. 린다는 이 어린것의 자신에 어이에 없어서...... 아니, 속이면 안돼. 그런 기분이 아냐. 좀더 다르고 정말 새로운, 정말......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춤을 추었다. 린다는 나직한 소리로 갓난애에게 속삭였다. "어머, 이상한 도련님이시군." 그러나 벌써 아기는 모친을 잊어버렸다. 진지했다. 복숭아빛의, 말랑해 보이는 것이 뭔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그는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 다시 한 번 그가 반듯이 드러눕자 또 하나 아까와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것을 잡으려고 결심했다. 무섭게 안간힘써서 벌렁 뒤집었다. 7 조수가 빠져서 물가에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따뜻한 파도가 뒤치락거리며 부딪고 있었다. 햇살이 곧장 내리비쳤다. 뜨겁게 타오르며 보드라운 모래에 직사하여 회색이나 파랑, 검정, 하얀 줄무늬가 있는 돌멩이를 달구었다. 굽은 조개껍질 속에 괸 물을 빨아올리고, 모래언덕 여기저기 조그만 모래벼룩 외에는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것이라곤 없었다. 팔딱, 팔딱, 팔딱. 모래벼룩은 잠시도 가만히 있을 때가 없다. 저쪽에서는 썰물 때 물 마시러 물가로 내려오는 털이 잔뜩 난 짐승처럼 보이는 해초가 엉겨붙은 바위 위에서 작은 물웅덩이에 하나씩 빠진 은화같이 햇빛이 반짝이며 뒹굴고 있었다. 웅덩이는 춤추고 떨고, 잔물결이 구멍이 뻥뻥 뚫린 기슭을 씻었다. 몸을 굽혀서 본즉, 물웅덩이는 모두 기슭에 푸르거나 연분홍색 집들이 늘어선 호수 같았다. 그리고 그 집들 뒤에는 광대한 산지- 계곡, 고갯길, 위험한 개울이나 물가로 통하는 가파른 오솔길. 밑에는 바다의 숲이 흔들리고 있다- 복사빛 실 같은 나무, 미끌대는 말미잘, 오렌지색 알맹이들이 달라붙은 해초. 문득 바닥의 돌이 하나 움직이는가 싶더니 뾰족한 검은 촉각이 보인다. 실 같은 생물이 흔들거리다가 사라진다. 복사빛으로 흔들리던 나무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순식간에 싸늘한 달빛 같은 푸른색으로 변한다. 그러자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퐁'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낸 것은 누구지? 바닥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더라도 뜨거운 햇볕을 쐬면 해초는 얼마나 강하고 습기찬 냄새를 발하는 것일까...... 피서객의 방갈로에는 초록색 차일이 드리워 있다. 베란다 위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보이는 해수욕복과 겁에 질린 줄무늬 타올리 단지 쪽을 향해 쏠리듯 울타리에 걸려 있었다. 창문 뒤에는 어디에나 문지방에 즈크구두가 놓여 있고, 돌덩이나 바께쓰나 주워 모은 전복 껍질들이 있었다. 열기를 받아서 풀숲이 흔들렸다. 자갈길에는 오직 그 한가운데에 길게 누운 트라우트 가의 개 스우카가 있을 뿐이었다. 푸른 눈을 위로 향하고 다리를 쭉 뻗친 채 가끔 자포자기해서 숨을 토했다.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둘 결심을 하고 친절한 짐마차든가 뭐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뭘 보고 계셔요, 할머니. 왜 가만히 그렇게 벽을 노려보고 있죠?" 케자이아와 할머니가 함께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짧은 즈로오즈와 짧은 내의만을 입고 팔과 다리를 드러낸 채 할머니 침대의 바람 넣은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화장옷차림의 노부인은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무릎에 기다란 복사빛 편물을 놓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이 방은 방갈로의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빛이 엷은 니스칠을 한 목조인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지 않았다. 가구는 몹시 낡고 간단했다. 예컨대 화장대는 나뭇가지 무늬의 모슬린 치마를 입힌 짐궤짝이고, 그 위의 거울 또한 이상야릇한 물건이다. 두 갈래진 작은 번개가 속에 갇힌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패랭이꽃을 꽂은 병이 놓여 있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꽂은 그 꽃은 빌로드의 핑크 쿠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케자이아가 할머니에게 드린 핀을 넣는 특별한 조개껍질과 시계가 동그마니 옆에 있기에 대단히 좋은 장소가 되리라고 케자이아는 생각했다. 하기야 좀더 특별한 조개껍질이 또 하나 있었다. "으응, 할머니."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검지손가락에 두 번 털실을 감고 뼈바늘을 움직였다. 짜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아저씨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란다."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윌리엄 아저씨?" 하고 케자이아는 물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응, 물론이지." "내가 만난 일이 없는 사람 말예요?" "그렇단다." "어머, 그래요.그 아저씨가 어찌 됐나요?" 케자이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광산엘 갔지. 거기서 일사병에 걸려 죽었단다." 케자이아는 눈을 깜박이고 그 광경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작은 남자가 양철로 만든 병정처럼 크고 캄캄한 구멍 옆에 쓰러져 있다. "아저씨를 생각하면 할머니는 슬퍼지나요?" 케자이아는 할머니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 싫었다. 그럼 이번에는 노부인이 생각할 차례가 된다. 슬퍼질까, 회상하면?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으면, 케자이아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나간 세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슬퍼질까? 여자답게, 그 세월이 보이지 않게 된 훨씬 뒤까지 그것을 찾아서 구하면 슬퍼지는 것일까? 아냐,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거야. "아아니, 케자이아." "하지만 왜?" 하고 케자이아는 물었다. 맨살을 드러낸 한 팔을 쳐들어 허공에 그림을 그리면서 "왜 윌리엄 아저씨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죠? 노인은 아니었을 테죠?" 페어필드 부인은 그물코를 셋씩 세기 시작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란다." 하고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누구든 죽지 않으면 안 되나요?" 케자이아가 물었다. "응, 누구든지." "나는요?" 케자이아의 목소리는 무섭게 의심스러운 듯이 울렸다. "언젠가는." "하지만 할머니." 케자이아는 왼다리를 흔들면서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모래로 깔끄러웠다. "내가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실뭉치에서 긴 실을 뽑아냈다. "그런 사정은 들어주지 않아요." 하고 슬프게 말했다.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모두 그렇게 되는 거란다." 케자이아는 모로 누운 채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여기서 나가야 하고 어디서든 나가야 하며, 영원히 나가야 한다- 할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돌아누웠다. "할머니." 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렀다. "뭐냐?" "할머니는 죽지 않죠?" 케자이아는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머, 케자이아." - 할머니는 눈을 들어 미소짓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꾸나." "하지만, 죽지 않으시죠. 나를 뒤에 남겨두고 가진 않으실 테죠? 할머니가 안 계시다니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무섭다.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할머니." 하고 케자이아는 졸라댔다. 노부인은 계속 뜨기만 했다. "약속해 줘요. 그렇겐 안 하겠다구." 그러나 할머니는 침묵만을 지켰다. 케자이아는 침대에서 굴러 나왔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무릎에 냉큼 올라앉더니 노부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턱 밑을, 귀 뒤를, 그리고 목에 숨결을 내뿜으면서, "안 하겠다고 말해 줘요...... 안 하겠다고...... 안 하겠다구요-" 키스하는 간간이 할딱거리면서 그리고 가만히, 가볍게 할머니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케자이아." 노부인은 편물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흔들의자에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녀는 케자이아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안 하겠다고 말해요, 안 하겠다고 말해요, 안 하겠다고 말해요." 하고 서로 껴안고 웃으면서 두 사람이 나둥그러지자 케자이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아, 그만, 그만해, 이 장난꾸러기야." 하고 노(老) 페어필드 부인은 말하고, 곧바로 모자를 고쳐 썼다. "편물을 주워다오." 두 사람 모두 "안 한다"는 것이 뭣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8 바넬 가의 뒷문이 쾅 닫히면서 대단히 화려한 모습이 오솔길을 따라 문까지 걸어나왔을 때 해는 아직 반짝반짝 정원에 쏟아지고 있었다. 오후의 외출을 위해서 의상을 갖춘 하녀 앨리스였다. 크고 붉은 물방울 무늬가 잔뜩 붙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오싹하는 하얀 무명옷을 입고, 백구두를 신고, 걷어올라간 챙 밑에 양귀비꽃을 단 타스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물론 장갑을 끼었다. 하얀 장갑인데, 단추가 달린 곳이 녹이 슬어 있었다. 한쪽 손에는 자기(페리샬)라고 평상시 그녀가 부르고 있는 몹시 상처가 난 양상을 들었다. 베릴은 창가에 앉아 금새 감은 머리를 말리면서, 저런 꼴불견은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서기 전에 불 태운 코르크로 얼굴에 검정칠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만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장소에서 저런 계집애가 어디로 가는 걸까. 하트형 피치 부채가 그 풍성하게 늘어진 깨끗한 밝은 머리칼을 업신여기듯이 두드렸다. 앨리스는 아마 누군가 몹시 형편없는 젊은 녀석과 친해져서 틀림없이 함께 풀숲 속으로 숨어 버릴 테지, 하고 그녀는 상상했다. 한데 저렇게 남의 눈에 띄는 모양을 부렸으니 별수 없지. 저런 옷차림의 앨리스를 데리고 숨는 것도 큰일일걸.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베릴의 생각은 좀 심했다. 앨리스는 스태브즈 부인이 있는 곳에 차손님으로 불려 가는 것이다. 심부름 온 꼬마가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 왔던 것이다. 모기약을 사러 처음 그 가게에 간 이래 앨리스는 쭉 스태브즈 부인의 단골이었던 것이다. "어머, 참." 스태브즈 부인은 제 옆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잡아먹힌 사람은 처음 봤어요. 식인종에게 습격당한 것 같지 않겠어요." 그렇더라도 길에 다소 사람이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하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뒤에 아무도 사람이 없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다. 등골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긴 하나 뒤돌아보는 것은 어리석다. 이쪽의 속셈을 꿰뚫어 볼 위험이 있다. 그녀는 장갑을 잡아 끌어올리고 혼자 노래를 읊조리며 멀리 있는 고무나무에게 말했다. "곧 가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을 상대하는 것만 못하다. 스태브즈 부인의 가게는 길을 조금 벗어난 언덕 위에 있었다. 그 커다란 두 개의 창문은 눈이고, 넓은 베란다는 모자이며, '스태브즈 상점'이라고 갈겨서 쓴 지붕의 간판은 모자의 돌출부에 보기좋게 꽂힌 작은 명함 같았다. 베란다에는 바다에 들어가는 걸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그 속에서 구출된 경우처럼 축 늘어진 해수욕복들이 길게 늘어져서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마치 범벅처럼 뒤섞인 즈크화가 한 무더기 걸려 있었다. 한 켤레를 사려면 적어도 오십 켤레는 휘저어서 억지로 골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도 짝을 찾을 수만 있다면 대성공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고르다 못해 한 짝은 발에 맞고 다른 한 짝은 발보다 약간 큰 것을 사서는 돌아간다...... 스태브즈 부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조금씩 구색 맞춰 놓은 것이 자랑이다. 두 개의 창 옆에 위태로운 피라밋형으로 수북이 물건이 쌓여 있는데, 그것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끄덕없는 재주는 마술사밖에 모른다, 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 창문 왼편 구석에 네 개의 마름모꼴 아교로 이런 광고가 유리에 붙어 있었다- 유사 이래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실, 극히 아름다운 금브로우치 순금임 바닷가나 그 부근에서 사례금 드림' 앨리스는 문을 밀었다. 벨이 울리고, 빨간 사지의 커튼이 열리면서 스태브즈 부인이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면서 한 손에 길다란 베이콘 나이프를 든 부인은 우의적인 산적(山賊)이요, 하고 말하는 듯한 꼴이었다. 앨리스는 대환영을 받았다. '예의범절'에 맞게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기야 그 '예의범절'이란 요컨대 노상 잔기침을 하거나, 장갑을 잡아당기거나, 스커트를 손끝으로 잡고 눈앞에 늘어놓여진 것을 잘 모른다, 혹은 상대편의 말을 잘 모른다는 척을 해 보이는 일이었다. 응접실 테이블에 음식 준비가 돼 있었다- 햄, 사아진, 버터가 통째로 한 파운드, 그리고 누군가의 이스트 광고처럼 커다란 과자빵. 그건 그렇고, 프리머드 스토브가 웅웅 울어서 그 이상 큰 소리로 말하려는 것은 헛수고였다. 앨리스가 등의자 끝에 앉자 스태브즈 부인은 더욱 스토브의 석유를 길어 올렸다. 갑자기 스태브즈 부인이 의자에서 쿠션을 밀어젖히더니 커다란 포장지로 싼 물건을 보였다. "이번에 또 사진을 찍었는데 말예요." 하고 명랑하게 앨리스를 부르면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려 주세요." 얌전하게 새초롬하면서 앨리스는 손가락에 침칠을 하고, 맨 위의 사진부터 엷은 종이를 벗겼다. 어머, 어쩜 이렇게 많을까. 서른 장 이상이나 있네. 그녀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불에 비쳐 보았다. 스태브즈 부인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잔뜩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참인데, 그 커다란 얼굴은 좀 어이없다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팔걸이 의자는 카펫에 얹어져 있는데 그 왼쪽에, 기적적으로 카펫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힘차게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리스식 기둥이 서고 양쪽에는 거대한 삼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눈이 쌓인 울퉁불퉁한 산이 솟아 있는 배경이었다. "경치 좋죠." 하고 스태브즈 부인은 외쳤다. 그리고 앨리스가 흔연한 목소리로 "매우" 하고 대답했을 때, 프리머드 스토브의 소리가 작아지더니 쉬이- 하고 멎었다. 기분 나쁜 조용한 속에서 "아름답군요" 하고 앨리스는 말했다. "의자를 바짝 대세요"라고 말한 후 스태브즈 부인은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 하고 차를 건네주면서 한참 생각한 말투로 "하지만 그 형이 내게는 마음에 안 들어요. 확대를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크리스마스 카드로 한다면 그야 괜찮지만 작은 사진은 마음에 미흡하거든요. 재미없어요. 실은 그것을 보고 실망했어요, 저는." 앨리스는 부인이 하는 말을 잘 알았다. "대형이다"라고 스태브즈 부인은 말했다. "나는 대형이다, 하는 것은 죽은 영감의 말버릇이었죠. 아무튼 작은 것은 좋아를 안 했으니까요. 작은 것은 소름이 쭉 끼친다나요. 하기야 묘한 이야기 같지만." - 여기서 스태브즈 부인은 의자를 삐걱거리고 추억에 잠긴 나머지 몸을 부풀렸다- "결국 그이가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은 수종이었죠. 병원에서 몇 번이나 듬뿍 뽑아냈지만...... 천벌이란 거예요." 그에게서 뽑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앨리스는 알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그래서 물었다. "그거, 물 아니에요?" 스태브즈 부인은 앨리스의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액체였어요." '액체'라니. 앨리스는 고양이같이 그 말에서 물러섰다가 다시 돌아오자, 조심스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것이 영감이었어요." 스태브즈 부인은 우람한 남자의 등신대의 머리통과 어깨를 연극적인 몸짓으로 보여 주었다. 웃저고리 단추구멍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싸늘한 양고기 지방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백장미가 꽂혀 있다. 사진 밑에는 빨간 종이에 은색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 "훌륭한 얼굴이군요." 하고 앨리스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스태브즈 부인의 곱슬거리는 금발 위에 맸던 담청색 나비형 리본이 흔들거렸다. 부인은 살찐 목덜미를 활 모양으로 폈다. 굉장한 목덜미다. 밑둥은 밝은 복사빛이고 다음에는 불그스름한 귤빛, 그리고 자색 같은 난황색으로 바뀌다가 짙은 크림색으로 옮겨간다. "하나 뭐니뭐니해도." 부인은 깜짝 놀라게 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건 없죠." 그 나직하고 둔한 웃음은 고양이가 목을 울리는 소리와 흡사했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건 없어요." 하고 스태브즈 부인은 거듭 말했다. '제멋대로?' 앨리스는 키들키들 바보처럼 웃었다. 불안한 기분이었다. '부엌'으로 달려 돌아왔다. 왠지 이상하다. 앨리스는 부엌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9 간식을 먹고 나자 바넬 가의 빨래터에는 이상한 패거리들이 모였다. 테이블 주위에는 암소와 수탉과, 자기가 당나귀임을 노상 잊고 있는 당나귀와 양과 벌이 앉아 있었다. 빨래터는 그 같은 모임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모두 떠들 만큼 떠들어도 아무도 방해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갈로에서 떨어진 곳에 세운 작은 양철지붕 집이었다. 깊숙한 물통이 벽에 붙여서 놓여 있고, 구석에는 세탁용 집개가 든 광주리가 얹힌 솥이 있었다. 거미줄이 걸린 작은 창문에는 먼지가 자욱한 문지방에는 양초동가리와 쥐덫이 있었다. 머리 위로는 말린 그물이 교차하고, 굉장히 큰, 그렇다, 어처구니없이 큰 녹슨 편자가 벽 못에 걸려 있다. 한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그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벌은 될 수가 없단다, 케자이아. 벌은 동물이 아니니까. 그건 곤충이지." "하지만 난 벌이 되고 싶은 걸." 케자이아는 소리내어 울었다...... 작은 벌, 노란 털이 잔뜩 나고 무늬가 든 다리를 갖고 있다. 그녀는 허리 밑으로 다리를 잡아당기고 테이블에 기댔다. 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곤충도 동물일 거야, 틀림없이." 하고 완강히 버텼다. "제대로 소리를 내잖아. 물고기 따위와는 달라." "나는 소다, 소." 하고 피프가 외쳤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울음소릴 질렀다-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로티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양이야." 래그즈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양이 상당히 많이 지나갔다구." "어떻게 그것을 알지?" "아빠가 울음소리를 들었대, 음매." 무리 뒤에서 잰걸음으로 따라와 안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끼양과 같은 울음소리였다. "꼬꼬댁 꼬꼬-" 이자벨이 닭울음소리를 질렀다. 붉은 뺨과 희번덕거리는 눈을 한 그녀는 수탉과 방불했다. "나는 뭐가 되면 좋지?" 하고 로티가 여러 사람에게 묻고, 앉아서 웃으며 모두가 결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순한 것이 아니면 안돼." "당나귀가 좋을 거야, 로티." 하고 케자이아가 권했다. "히힝. 잊지 않을 거야." "히힝." 로티는 정색을 하고 소리쳤다. "언제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내가 설명해 줄께." 암소가 말했다. 카드를 쥐고 있는 것은 그다. 머리 위에서 카드를 휘둘렀다. "모두 조용히 해. 모두들 들으라구." 일동이 조용해지길 기다려서 "이것을 봐, 로티" 하고 카드를 한 장 뒤집고는 "점이 두 개가 있지- 알겠나? 만일 네가 그 카드를 한가운데 댔을 때, 누군가 또 두 점짜리를 대는 자가 있으면 '히힝' 하는 거야. 그러면 그 카드는 네 것이다." "내 것?" 로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져도 돼?" "아아니, 바보로구나. 그렇게 해서 노는 거야. 하고 있는 동안만이야." 하면서 암소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어머, 로티는 정말 바보로구나." 거만한 수탉이 말했다. 로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떨렸다. "난 그만두겠어."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일동은 공모자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다. 로티는 나가서 앞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한구석에서 벽에 기대어, 아니, 어쩌면 의자 뒤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두지 않아도 돼, 로티. 아주 쉬우니까." 하고 케자이아가 말했다. 후회한 이자벨은 어른스럽게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을 주의해 보면 곧 알게 될 거다, 로티." "훌쩍거리지 마, 로티." 하고 피프가 말했다. "자아, 제대로 해보자. 그럼 시작한다. 내 거야, 정말은. 하지만 너에게 준다. 자." 그리고 로티 앞에 카드 한 장을 놓았다. 그러자 로티는 힘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른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손수건이 없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 당장 필요해, 난." "그럼 내 것을 써라." 래그즈가 자기 세라셔츠에 손을 넣어 구깃구깃한 손수건을 꺼냈다.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조심해." 하고 주의하면서 "그 한귀퉁이만을 사용하는 거야. 풀면 안돼. 그 속에 불가사리가 들어 있으니까. 길을 들일 셈이야." "자아, 여러분." 하고 암소가 말했다. "알겠죠- 자기 카드를 보면 안돼요. 내가 '시작'할 때까지 손을 테이블 밑에 두는 거예요." 짝 짝 하고 카드가 차례대로 테이블에 놓였다. 모두 전력을 다해서 보려고 하지만 피프가 얼마나 빠른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빨래터에 앉아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피프가 패를 나눌 때까지, 일동은 겨우 동물원의 소(小) 코러스를 폭발시키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다. "자아, 로티부터 시작한다." 로티는 조심조심 한 손을 뻗어 자기 손에 든 제일 위의 패를 잡아서 유심히 보더니- 틀림없이 점수를 헤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밑으로 내려놓았다. "아냐 로티, 그렇게 하면 안돼. 자기가 맨먼저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반대쪽으로 향하게 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모두 나와 같은 때에 보게 되잖아." 하고 로티가 말했다. 게임은 진전되었다. 음머, 암소는 대단했다. 테이블에 돌진해서 카드를 다 먹어치울 기세였다. 붕 붕, 벌이 울었다. 꼬꼬댁 꼬꼬. 이자벨은 흥분하여 일어서서 날개처럼 팔을 움직였다. 음매. 꼬마 래그즈는 다이아몬드의 킹을 내고 로티는 모두가 말하는 '스페인의 킹'을 냈다. 이제는 거의 카드도 가진 것이 없었다. "왜 안 울지, 로티?" "내가 뭔지 잊어버렸어." 하고 당나귀는 슬픈 듯이 말했다. "그럼 바꿔. 개가 좋아. 멍멍." "응, 좋았어. 그쪽이 훨씬 쉬우니까." 로티는 싱글벙글거렸다. 한데 그녀와 케자이아가 양쪽 다 '1'을 냈을 때, 케자이아는 일부러 기다려 주었다. 다른 사람이 로티에게 신호해서 가리켰다. 로티는 새빨개졌다. 난처한 얼굴을 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히힝, 케자이아." "쉬, 잠깐." 게임 도중에 암소가 한 손을 들어서 일동을 제지했다. "저게 뭐지? 무슨 소리지?" "소리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수탉이 물었다. "쉬, 떠들지 마, 저거." 모두 조용해졌다. "지금 뭔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하고 암소가 말했다. "무슨 소리지?" 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벌이 몸서리쳤다. "도대체 왜 문 같은 걸 닫으라고 말했을까?"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 아, 왜, 왜 문을 닫았을까.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날이 저물었다. 호화스런 놀이 비치더니 지금은 그것도 사라지고, 바다 위에, 모래언덕 위에 어둠이 잰걸음으로 스며들어서는 단지 위로 올라왔다. 빨래터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할머니가 등불을 켜고 있다. 덧문이 닫히고, 부엌의 불이 맨틀피스의 주석 그릇에 비쳐서 간들거린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하고 암소가 말했다. "거미가 천정에서 테이블에 떨어지기만 해도 무서울 거야." "천정에서 거미가 떨어지진 않을 거라구." "떨어질걸. 우리 집 민이 말하는데, 크기가 작은 접시만 하고 구즈베리처럼 길다란 털이 난 거미를 본 적이 있대." 작은 머리통들이 모두 갑자기 위를 쳐다보았다. 작은 몸뚱이들이 서로서로 모여서 꽉 하나로 달라붙었다. "왜 아무도 부르러 안 오지?" 하고 수탉이 외쳤다. 아아, 어른들은 지금 기분좋게 웃으면서 등불을 켜고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겠지. 우리들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만 거다. 아니, 정말 잊어버린 게 아냐. 저 빈정대는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에 내던져 두기로 결정을 한 거다. 별안간 로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은 모두 의자에서 펄쩍 뛰며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얼굴- 얼굴이 들여다보고 있다." 하고 로티가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다, 그대로다. 창에 찰싹 붙은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 눈과 검은 수염. "할머니, 엄마, 누가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문을 향해 달려가기 전에 문이 열리더니 죠나단 아저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이다. 10 죠나단은 좀더 일찍 올 생각이었는데 앞마당에서 린다를 만났다. 그녀는 풀 위를 여기저기 걷다가는 서서 말라 죽은 석죽을 뽑거나, 머리가 무거운 카네이션에게 나무를 받쳐 주거나, 무슨 꽃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여느 때처럼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프록 위에 중국인 가게에서 산 복사빛 단이 달린 노란색 숄을 걸치고 있다. "안녕하세요, 죠나단." 하고 린다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죠나단은 얼른 그 초라한 파나마모를 벗어서 가슴에 대고, 한쪽 무릎을 구부려 린다의 손에 키스를 했다. "오, 아름다운 그대. 하늘나라의 복사꽃이여." 부드럽게 베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여자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베릴은 브리지놀이를 하러 갔고 어머니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계셔요...... 뭘 빌리러 오셨나요?" 트라우트 가에서는 늘 물건을 떨어뜨리고, 곤경에 처하면 바넬 가로 가지러 보내곤 한다. 하나 죠나단은 오직 이렇게 대답했다.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우의를." 그리고 린다와 나란히 걸었다. 린다는 마누카나무에 걸린 베릴의 해먹으로 미끌어 들어가고, 죠나단은 옆의 풀 위에 누워서 긴 풀줄기를 뽑아서는 씹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옆마당에서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어부의 가벼운 짐차가 자갈길을 덜거덕대며 지나가고,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부대에 쑤셔박고 지르는 듯한 코먹은 소리였다. 귀를 기울이니 돌멩이에 밀려드는 만조의 나직한 물소리가 들린다. 해는 가라앉으려 하고 있다. "그럼 월요일에는 사무실로 돌아가겠군, 죠나단." 하고 린다가 물었다. "월요일에는 감방 문이 열리고 찰깍 잠기면 또다시 십일 개월과 일주일 동안 이 희생을 가둬 두겠죠." 하고 죠나단은 대답했다. 린다는 천천히 해먹을 흔들며 "지겨워" 하고 말했다. "나보고 웃으라고, 아름다운 그대. 나보고 울라고?" 린다는 죠나단의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조금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틀림없이" 하고 희미하게 말했다. "길이 들겠죠. 뭐든지 길들게 마련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흥." 그 '흥'은 땅 밑에서 울렸는가 생각될 만큼 낮았다. '어떻게 하면 길이 들지' 생각하고 나서 '난 아무래도 안돼.' 벌렁 누운 죠나단의 모습을 보면서 린다는 또 그가 얼마나 인상이 좋은 남자인가를 생각했다. 그가 평사원에 불과하고, 스탠리가 그보다 배나 돈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죠나단은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야심이 없는 거다. 그것이 안 되는 거다, 라고 린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있고 비범하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에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남은 돈을 모조리 책을 사는 데 쓴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 계획, 안(案)에 넘쳐 있다. 한데 그것이 하나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새로운 불이 죠나단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다. 그가 새로운 문제를 설명하고 묘사하고 부연할 때, 그 불이 나직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다. 그러나 잠시 후 불길은 무너져서 타고 남은 찌꺼기밖에 안 남고, 죠나단은 그 검은 눈에 굶주린 표정을 띠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한 과장법으로 말했다. 그가 교회에서 노래부르면- 합창대의 리더이다- 엄청난 연극적인 톤으로 힘주어 부르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찬송가라도 일종의 세속적인 광휘에 휩싸인다. "월요일에는 다시 사무실에 나가야 하다니 정말 어리석고 화가 치민단 말이야." 하고 죠나단은 말했다. "지금까지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테지.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 의자에 꼬박 앉아 타인의 원장에 시시한 글이나 쓰고 인생의 가장 좋은 세월을 낭비하다니.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생의 사용법으로선 분하지 않은가. 아니면 나는 바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는 풀 위에서 돌아누우며 린다를 쳐다보았다. "이봐요, 나의 생활과 일반적인 죄수의 생활과는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내가 아는 유일한 차이는, 내가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야. 내 입장은 죄수의 입장보다도 더 참을 수가 없어. 만일 내가- 강제로- 발버둥치고 있는데- 처넣어졌다고 하면, 그럴 경우에는 한번 문에 자물쇠가 잠기고 나면, 아냐, 어쨌든 오륙 년 지난 후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파리가 날아가는 것이나 간수가 통로를 지나갈 때 그 발소리가 어디서 어떻게 바뀌는지 특별히 주의해서 그것을 세는 일 따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겠지. 그런데 실제로 나는 자진해서 방으로 뛰어든 곤충과 같거든. 벽에 부딪고 창에 부딪히며 천정에서 파닥거리고, 그렇지, 이 세상에서 가능한 일체의 짓을 하는 거야. 다만 다시 한 번 날아갈 수만은 없어. 그래서 그동안 그 나방이처럼, 아니 나비처럼, 아니 뭐든지 좋아, '인생의 짧음, 인생의 짧음'을 하고 생각하고 있지. 하나 실은 그것은 오직 하룻밤이나 하루이며, 이 광대한 위험한 정원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탐험되지 않은 나라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만일 정말 그런 기분이 든다면 왜-" 하고 린다는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아" 하고 죠나단은 외쳤다. 그 '아아'는 어딘가 환희에 넘쳐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왜? 정말 왜 그럴까? 그것은 미칠 것 같은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왜 나는 다시 한 번 뛰쳐나가지 않는가? 창문이든 어디든 좋아, 들어올 입구가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을 만큼 꽉 닫혀 있지는 않다- 그렇지. 왜 그곳을 찾아서 나가려 하지 않는가? 대답하라, 나의 누이여." 하나 그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그 곤충을 닮아간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한마디 할 때마다 말을 끊고- "잠시도 파닥대거나 붕붕거리며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걸 멈추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금지되어 있다. 곤충의 법칙에 위배된다. 왜 나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가? 예컨대 당장 그만둘 경우, 방해가 되는 것이 뭘까를 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가? 어처구니없이 묶여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이를 둘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사내아이다. 지금이라도 바다로 나가도 되고 오지에서 일을 찾아도 된다. 그럼-" 갑자기 그는 린다에게 미소짓더니 비밀을 털어놓듯 말투를 바꾸고 "마음이 약해...... 약한 거야. 끈기가 없어. 무게가 없지. 지도 원리가 없다고나 말해 둘까." 하나 곧 음울하지만 거침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알려진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느뇨...... 그대는." 그리고 두 사람은 침묵해 버렸다. 해는 넘어갔다. 서녘하늘에 짓눌린 장미빛 구름의 커다란 덩어리가 걸려 있다. 구름 사이에서도 그 저편에서도 하늘 가득히 퍼질 만큼 햇살이 넓은 줄무늬가 되어 빛나고 있다. 머리 위에서는 푸른 하늘이 엷은 금빛으로 바뀌고, 그것을 배경으로 뚜렷이 떠오른 숲이 금속처럼 검게 윤택한 빛을 던졌다. 그와 같은 광선이 공중에 나타나면 가끔 인간은 두려움에 무릎을 꿇는다. 하늘 위에 전능하시고 투기하시는 신 여호와가 계시어, 그 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고 항상 지켜보며 결코 싫증내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난다. 그 내림에 즈음하여 대지는 모두 진동하고 하나의 썩은 무덤이 된다. 싸늘하게 빛나는 천사가 사람들을 여기저기로 휘몰아친다.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을 설명해 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 은빛 광선에 더없이 기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있는 듯 린다에겐 생각되었다. 바다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저 기쁘고 온화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들이마시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다는 부드럽게 숨쉬고 있었다. "틀려먹었어, 틀려먹었다구." 죠나단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정경은, 그런 무대 장치는 아무래도...... 의자가 세 개, 책상이 세 개, 잉크병이 세 개에 쇠그물로 눈을 가리려 하거든." 그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린다는 알고 있기에 말했다. "이젠 너무 늦지 않았겠어요?" "나는 늙은이야- 늙은이." 죠나단은 가락을 붙여가며 말했다.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머리에 손을 갖다댔다. "보세요." 그의 검은 머리에는 완전히 은빛이 뒤섞여 있었다. 빛깔이 검은 닭의 가슴의 깃털 같았다. 린다는 놀랐다. 그가 희끗희끗 센 머리를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옆에 서서 한숨을 내쉬던 죠나단이, 그때 처음으로 결의가 모자라고 은근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이미 늙은 기색을 띤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깔린 풀 위에선 그는 대단히 키가 커 보였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스쳤다. '잡초와 같은 사람이야.' 죠나단은 몸을 굽혀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여인이여, 아름다운 그대의 마음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하고 그는 속삭였다. "나의 명성과 재산을 이어받을 그 아들을 찾아가리로다. 이 몸은......"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11 방갈로 창문에 불이 켜졌다. 네모난 금빛 광선이 두 개의 석죽과 마리골드 위에 떨어졌다. 고양이 플로리가 베란다에 나와서 제일 윗단에 앉았다. 하얀 발을 단정히 모으고 꼬리를 말아올렸다. 만족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 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고마워, 날이 새네' 하고 플로리는 말했다. '고마워, 기나긴 하루가 끝났어.' 살구 같은 눈을 떴다. 이윽고 합승의 덜걱덜걱대는 소리가 나자 케리의 채찍이 울렸다. 점점 가까워 오더니, 거리에서 돌아온 사내들이 큰소리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합승은 바넬 가의 문 옆에서 섰다. 린다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스탠리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반쯤 걸어갔다. "여어, 당신이군." "네, 스탠리." 그는 꽃밭을 뛰어넘어서 두 팔로 그녀를 잡았다. 린다는 그의 힘차고도 친밀한 포옹에 휩싸였다. "용서해 줘, 용서." 스탠리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턱 밑으로 한 손을 돌려 얼굴을 밀어올리더니,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용서라뇨?" 린다는 미소지었다. "대체 뭘 말이죠?" "농담이겠지, 잊을 턱이 없을 텐데." 하고 스탠리 바넬은 외쳤다. "나는 하루 진종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어. 정말 힘든 하루였어. 뛰쳐나와서 전보를 칠까 생각했지만, 내가 돌아가기 전에 배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었지. 지옥 같은 괴로움이었다구, 린다." "하지만 ." 라고 린다는 말했다. "뭔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 "린다." - 스탠리는 기분이 언짢았다- "몰라?- 아니, 알고 있을 텐데- 오늘 아침에 나는 '다녀오겠소'란 말도 하지 않고 뛰쳐나가지 않았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지만, 물론 예의 그 울화통 탓이야. 하지만- 뭐, 좋아." - 그리고 한숨을 쉬자 그는 또 그녀를 껴안았다- "오늘은 덕분에 혼이 났으니까."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죠?" 하고 린다는 물었다. "새 장갑? 보여 주세요." "아냐, 세무 가죽으로 된 싸구려야." 스탠리는 소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오늘 아침 마차에서 벨이 끼고 있는 것을 보고,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들어가서 내 것을 샀던 거야. 뭘 웃고 있어.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예요!" 하고 린다는 말했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그녀는 그 커다란 장갑을 한 짝만 제 손에 끼고는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스탠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사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생각만 했다오.' 그것은 정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것을 말로는 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그는 말했다. 12 밤이 되면 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것일까. 여느 것이 다 잠들어 있을 때 눈을 뜨면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댈까. 새벽녘- 새벽녘이다. 하나 일각, 일각 차츰 눈이 떠지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숨을 쉴 때마다 새롭고 놀랄 만한, 한낮의 빛 속에서 본 것보다도 더욱 오싹오싹 두근두근거리는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음모에라도 가담한 듯한 이 기묘한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몰래 사뿐히 방안을 거닐어 본다. 화장대에서 뭔가 집어들었다가는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다시 놓는다. 그러면 온갖 것이, 침대의 기둥조차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반응하며, 비밀에 참여한다...... 낮엔 자기 방이라도 그리 좋아할 수가 없다. 방에 관한 일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찻장이 삐걱거리거나 한다. 침대 모서리에 앉는다. 신을 바꿔 신고 달려 간다. 휙 허리를 구부려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에 핀 두 개를 꽂고 코끝에 분을 바르고 나간다. 한데 지금은- 갑자기 이 방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조그맣고 우스꽝스런 방, 자기 것이다. 아아, 뭐든 제 것으로 만든다는 건 즐겁다. 나의- 것. "영원히 나의 것." "그래요."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진다. 아니, 물론 그러한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모두 시시한 잠꼬대다. 하나 무의식중에 베릴은 분명히 제 방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눈에 그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는 그녀를 껴안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나의 귀여운 미인." 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뒤로 물러서 창으로 달려가 창턱에 팔꿈치를 얹고, 창가에 놓인 의자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 밤은 정원과 나무 숲의 나뭇잎 한 장까지, 하얀 울타리와 별조차 그 음모의 가담자였다. 달은 휘영청 빛나고, 꽃이 대낮과 같이 빛나고 있다. 멋진 백합 모양의 잎사귀와 활짝 핀 꽃을 단 금련화의 그림자가 은빛 베란다에 떨어지고 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휘어진 마누카나무는 한 다리로 서서 날개를 편 새와 같았다. 그러나 베릴이 풀숲에 눈길을 주자 풀숲은 슬퍼 보였다. '우리는 말없는 나무입니다. 밤하늘에 가지를 뻗어,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슬픔에 잠긴 풀숲은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외톨이가 되어 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인생은 슬프다. 저 흥분이 갑자기 사라지고, 정적 속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제 이름을 처음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베릴." "네, 여기 있어요. 나 베릴이에요. 날 부르는 이가 누구죠?" "베릴." "곧 가요." 혼자서 사는 것은 쓸쓸하다. 물론 친척이나 친구는 많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베릴을 발견해 줄 사람, 언제든지 그 베릴대로 있으라고 말해 줄 사람이 아쉽다. 그녀는 연인이 갖고 싶은 거다. '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먼 곳으로 가십시다. 우리들의 인생을, 전혀 새롭고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는 인생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둘이서 불을 사릅시다. 함께 앉아 먹도록 합시다. 밤이면 긴 이야기를 주고받읍시다.' 그 생각은 거의 '날 구해 주세요, 어서 구해 줘요' 하는 말과 같았다. ......'어머, 어리석기는. 얌전빼는 짓은 그만둬요. 젊을 때 즐기는 거야. 난 그렇게 충고해요.' 그러자 하리 켄바 부인의 커다란 무관심한, 말울음 같은 웃음소리에 높고 어리석은 웃음소리가 껄껄대며 뒤섞였다. 그러나 아무도 상대가 없으면 그것은 무섭고 힘들다. 여러 가지 사정에 좌우되기가 쉽다. 무뚝뚝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해변의 다른 멍텅구리들처럼 세상모르고 점잔을 뺄 근심을 언제까지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사람을 움직일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건 멋지다. 그렇다, 정말 멋지다...... 아아, 왜, 왜 '그'가 얼른 오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이대로 산다면, 하고 베릴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나, 누가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하고 마음속의 작은 소리가 비웃었다. 그러나 베릴은 그것을 지워버렸다. 남겨둬서는 안 된다. 타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자기는 안 된다. 그 예쁘고 멋진 베릴 페어필드가 결혼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베릴 페어필드를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뇨, 그럼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어느 여름, 해변에서였습니다. 물가에 서 있었는데 파아란'- 아니 핑크색의- '모슬린 프록을 입고 커다란 크림색의'- 아니, 검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걸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어요. 아니, 이전보다 더 예쁠 정도예요.' 베릴은 미소짓고 입술을 깨물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누군지 모르는 사나이가 한길을 벗어나서 바넬 가의 울타리를 따라 단지를 걷더니, 곧장 접근해 오는 것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굴까? 대체 누구일까? 도둑일 리는 없었다. 분명히 도둑은 아니다. 담배를 피우며 경쾌한 걸음걸이이니까. 베릴의 심장이 껑충 뛰었다. 한바퀴 뒤집어져서 그대로 멎었는가 생각될 정도였다. 누구인지를 알았다. "안녕하세요, 베릴 아가씨."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잠깐 산책하러 나오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점잖게 나왔다. 산책을 나오라구- 이 한밤중에? "갈 수 없어요. 벌써 모두 잠자리에 든 걸요. 다 자고 있어요." "그런가요." 경쾌한 목소리가 말했다. 향긋한 담배연기가 풍겨왔다. "모두들 어떻게 됐다구요? 오세요, 정말 좋은 밤이로군. 사람 하나 없어요." 베릴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나 벌써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무섭습니까" 하고 비웃는 투로. "처녀니까." "천만에."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몸속의 그 나약한 생물은 도사리던 것을 풀고 갑자기 이상할 만큼 우람해졌다. 베릴은 나가고 싶었다. 그러자 어느 새 상대방이 알아차렸는지 목소리가 말했다. 다정하고 온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오세요." 베릴은 낮은 창틀을 넘어 베란다를 가로질러서 잔디 깔린 정원을 지나 문까지 달려나갔다. 그가 먼저 와서 말했다. "결국 나오셨군요." 하고 놀리는 어조로 "무섭지 않죠, 네. 무섭지 않죠?" 하지만 무서웠다. 여기까지 나오긴 했지만 베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모든 것이 일변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달빛은 그녀를 지켜보며 반짝이고, 주위의 그림자는 쇠로 만든 빗장 같았다. 손을 잡혔다. "조금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무서워해야 할 까닭이 없잖아요." 천천히 베릴은 손을 잡아끌렸다. 상대가 힘을 주면 그녀는 꽁무니를 뺐다. "아니, 더 이상 멀리 가진 않겠어요."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 하리 켄바는 신용하지 않았다. "자, 저 푸크샤 숲까지 가 봅시다, 자아." 푸크샤 숲은 키가 컸다. 울타리 위에 쓰러지듯 기대어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그 밑이 어둑한 작은 움푹 파인 곳처럼 되어 있다. "아니, 정말 더는 안 가겠어요." 하고 베릴은 말했다. 순간, 하리 켄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옆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향해 미소짓자 빠른 말로 지껄였다. "바보 같은 짓 하는 게 아니에요, 바보 같은 짓." 그 미소는 그녀가 이제까지 본 일이 없을 만큼 이상한 것이었다. 술취해 있는 걸까? 그 밝고도 맹목적인 무서운 미소가 그녀를 소름끼치게 했다. 넌 뭘하고 있는 거냐, 왜 이런 데로 나왔느냐, 하고 문이 열리자, 고양이처럼 재빨리 하리 켄바가 문을 지나서 그녀를 끌어당겼을 때, 엄숙한 표정이 정원에게 물었다. "이 싸늘한 악마놈이, 싸늘한 악마놈이." 하고 그 화가 치민 목소리는 말했다. 그러나 베릴은 꺾이지 않았다. 팔을 뽑고 몸을 굽혀서 밀어냈다. "어머, 징그러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대체 왜 나왔어." 하리 켄바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는 자라곤 없었다. 작은 한가스런 구름이 한 조각, 달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자 그 어둠의 순간에 바다도 나직한 근심하는 소리를 질렀다. 구름이 지나가자 바닷소리는 희미하게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음울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조용했다. <끝> 9. 귀여운 여인 안톤 체홉 퇴직한 팔등관 쁠레얀니꼬프의 딸 올렌까는 자기 집 뜰로 내려서는 작은 계단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파리마저 귀찮게 굴었으므로, 곧 저녁이 되리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좀 후련해진다. 동쪽으로부터는 검은 비구름이 몰려들어 거기에서 습기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뜰 한가운데서는 이 집 건넌방을 빌려 쓰고 있는 꾸우낀이란 사나이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야외극장 '찌볼리'의 경영자이자 연출자였다. "또로군!" 꾸우낀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또 비야! 매일같이 비, 비, 마치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것 같군! 그렇다면 사형선고가 아닌가! 파멸이 아닌가! 매일같이 늘어만 가는 엄청난 이 손해, 정말 어떻게 하란 말인가!" 꾸우낀은 올렌까 쪽을 향해 두 손을 쳐들어 보이며 불평을 계속했다. "올리가 세묘노브나, 이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란 거요. 정말 울고 싶어! 밤잠도 자지 않고 일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살려고 애쓴 보람이 이게 뭐란 말입니까. 동료나 관객들은 교양이 없고 야만적이지. 나는 최고의 오페라타나 환상극, 일류 풍자 탤런트를 내보내고 있으나 과연 그것이 관객들에게 필요한지, 어떤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광대예요! 게다가 날씨조차 이 모양이니. 거의 매일 밤 비가 아닙니까. 오월 십일에 시작해서 오월, 유월 줄곧 이렇게 계속되지 않아요? 정말이지 이런 일이 또 어디 있담! 관객이 모여들지 않아도 나는 텃세를 물어야 해요. 배우들에게 급료도 지불해야 하지 않아요?" 이튿날도 저녁때가 되자 비구름이 몰려왔다. 꾸우낀은 히스테릭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재미있는데, 어서 또 퍼부어라. 야외극장이 물에 잠겨 내가 빠져 죽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어차피 이승에서나 저승에서 잘 살긴 글러먹었으니 말이야! 배우들이 고소하겠다면 하라지! 재판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시베리아로 유형이라도 갔으면 속시원하겠다! 단두대에라도 올랐으면! 핫, 핫, 핫!" 그 다음 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렌까는 아무 말도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꾸우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가끔 눈물이 방울지는 것이었다. 결국 올렌까는 꾸우낀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여 이 사나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꾸우낀은 작은 키에 마르고 누런 얼굴을 한 사람으로서 고수머리를 곱게 기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가는 테너로서 말을 할 때마다 입을 실룩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언제나 긴장의 빛이 돌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 사나이는 처녀의 마음에 깊은 참사랑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올렌까는 항상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여자였다. 전에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했었는데, 그 아버지는 지금 병중이어서 어두운 방안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젠가는 숙모를 사랑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브란스끄에서 1년에 두 번 정도 찾아올 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인 단기여학교 시절에는 프랑스어 선생을 사랑하기도 했다. 올렌까는 점잖고 기품이 있으며 정이 많은 여자로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졌고 몸은 아주 건강했다. 그 통통한 장미빛 뺨이나 검은 점이 하나 있는 부드러운 목덜미,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그 얼굴에 떠오르는 티없는 미소를 보게 되면 사내들은, "응, 거 괜찮게 생겼는걸!" 이런 생각을 하며 웃음을 띠게 되고, 여자들은 참을 수 없어 이야기 도중에 올렌까의 손을 잡고 흡족한 나머지 저절로 입을 벌리는 것이었다. "귀여운 아이야!" 하고. 올렌까가 태어나면서부터 살고 있는 이 집은 아버지의 유언장에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의 집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집시촌에 있었고 거기에서 찌볼리 야외극장도 멀지 않았다. 저녁때부터 밤중까지 야외극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소리와 펑펑 터지는 불꽃 소리가 언제나 들려왔다. 올렌까에게는 그것이 꾸우낀이 자기 운명과 싸워 최대의 적- 즉 무관심한 관객에게 돌격해 들어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올렌까의 마음은 달콤한 고민으로 가득찼다. 졸음은 어느덧 달아나고 날이 밝아 꾸우낀이 돌아오게 되면 침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내밀며 상냥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꾸우낀의 청혼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올렌까의 목덜미나 살이 통통하고 건강한 어깨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 꾸우낀은 손뼉을 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귀여운 여자야!" 꾸우낀은 행복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그날 밤에도 비가 내렸기 때문에 그 얼굴에서는 절망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즐겁게 살았다. 올렌까는 입장권을 팔거나 야외극장 전체를 보살피기도 하며 장부를 기입하고 급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녀의 장미빛 뺨과 사랑스럽고 티없는, 마치 후광과도 같은 미소는 매표구의 창이나 무대 뒤, 매점 등 여러 곳에서 보이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올렌까는 어느덧 친구와 친지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연극이고, 참된 즐거움을 맛보고 교양이나 휴머니즘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선 연극을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것을 이해할지 모르겠어." 하고 올렌까는 말했다.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광대야, 어제 우리가 개작(改作) <파우스트>를 공연했더니 관람석이 거의 비었어. 그러나 바니치까와 내가 어떤 저속한 것을 공연했더라면 틀림없이 초만원이었을 거야. 내일 바니치까와 나는 <지옥에서의 오르페우스>를 공연하겠어. 꼭 보러 와요." 그리고 꾸우낀이 연극이나 배우에 대해 하는 말을 올렌까는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관객이 예술에 무관심하고 교양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경멸했다. 무대 연습에 끼어들어 배우의 연기를 고쳐주고 악사들의 행동을 감독했으며, 지방신문에 연극의 악평이 실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해 했으며 신문사에 직접 해명하러도 다녔다. 배우들은 올렌까를 좋아하여, '바니치까와나'라거나 '귀여운 여신'이라 불렀다. 올렌까도 배우들을 좋아하여 약간이라면 돈도 빌려주고, 때로는 속기도 했으나 몰래 눈물만 흘릴 뿐 남편에게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 겨울도 즐거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겨울 동안 마을의 극장을 빌려 그것을 잠깐 동안씩 우끄라이나의 극단이나 마술단, 그곳 아마튜어 극단에 제공했다. 올렌까는 점점 몸이 나기 시작하고 만족한 생활에 얼굴이 환해져 갔으나 꾸우낀은 마르고 핏기가 없어졌다. 겨울 동안에도 사업은 잘 되어 갔으나 그는 대단한 손해를 보았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기침을 하기 때문에 올렌까는 나무딸기나 보리수 꽃을 달여 먹이거나 오드콜로뉴을 발라주기도 하고 자기의 따뜻한 숄로 덮어주기도 했다. "정말 당신은 훌륭한 분이셔요!" 하고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올렌까는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주 좋은 분이셔요." 사순제의 꾸우낀은 극단 출연 교섭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올렌까는 남편이 떠난 뒤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창가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리고 자신을 암탉에 견주어 보는 것이었다. 닭장에 수탉이 없으면 암탉들이 불안을 느껴 밤에 잠도 못 자는 것이 아닌가. 꾸우낀의 모스크바 체재는 의외로 길어졌다. 부활제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한 편지에는 찌볼리 극장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지시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부활제 1주일 전인 월요일 밤늦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나무로 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그것도 나무통으로 두드리는지 텅텅텅 하고 울리는 것이다. 잠이 덜 깬 식모인 마브라가 맨발로 물이 질퍽하게 괸 뜰을 거쳐 문을 열러 달려갔다. "문 좀 열어주세요!" 하고 누군가가 문밖에서 굵직하고 거친 목소리로 불렀다. "전보예요!" 올렌까는 전에도 몇 번 남편의 전보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웬일인지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아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반 뻬뜨로비치 오늘 급사, 지시 바람, 화요일 장례.' 서명은 오페레타 연출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여보!" 하며 올렌까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엾은 바니치까, 그리운 사람! 왜 나는 당신과 만나게 되었나요. 어째서 당신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인가요! 당신은 먼저 보내고 이젠 누구를 의지하란 말입니까. 올렌까는 너무나 비참해요. 불행해요......" 꾸우낀은 화요일에 모스크바의 바가니고보 묘지에 묻혔다. 올렌까는 이튿날 돌아와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이웃과 통행인이 들을 정도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저 불쌍한 사람이!" 하고 이웃 사는 여자들은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불쌍한 올렌까가 저렇게 비탄에 젖어 있군요!"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올렌까는 아직도 상복을 입은 채 낮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함께 걷게 된 것은 역시 교회에서 돌아오는 중이던 바실리 안드레이치 뿌스또발로프라는 이웃 사람이었다. 이 사나이는 바바카예프라는 목재상의 주인이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흰 조끼에 금시계줄을 드리운 그 모습은 상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골 지주에 가까웠다. "세상 일은 다 미리 정해진 것입니다. 올리가 세묘노브나!" 하며 심각하고 동정어린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가족의 어느 누가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의 섭리일 것이니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순종하고 참으며 살아야 합니다." 올렌까를 문께까지 바래다 준 다음 그는 작별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는 후 올렌까에게는 그 사나이의 진실어린 목소리가 들렸고 눈을 감으면 그의 검은 수염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사나이가 그녀의 마음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올렌까도 분명히 그 사나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며칠이 지난 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중년 여인이 커피를 마시러 와서는, 테이블에 앉기가 무섭게 뿌스또발로프에 관한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분은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둥, 그 사람에게라면 어떤 여자라도 기꺼이 시집을 갈 것이라는 둥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사흘 뒤 이번에는 뿌스또발로프 자신이 찾아왔다. 그는 잠시 동안, 10분 가량 앉아 있었을 뿐 별로 말도 하지 않았으나 올렌까는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얼마나 그에게 반했는지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몸을 뒤척이다가 아침이 되자 그는 중년 부인에게 사람을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약혼이 성립되고, 그리고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한 뿌스또발로프와 올렌까는 사이좋게 지냈다. 남편은 대개 점심때까지 재목 하치장에 있다가 일을 보러 외출하는 것이었는데, 그 뒤는 올렌까가 맡아 저녁때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계산서를 떼거나 물건을 발송하거나 했다. "재목 값이 해마다 이십 퍼센트씩이나 오르고 있어요." 올렌까는 사러 오는 사람이나 친지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태까지 이 지방 목재만 가지고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바시치까가 해마다 모길레프 현까지 재목을 구입하러 가곤 해요. 그 운임이 어찌나 비싼지!" 하며 무섭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거듭 말했다. "운임이 아주 엄청나요!" 올렌까는 벌써 오래 전부터 목재상을 경영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재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각재, 통나무, 판자, 기둥, 톱밥...... 등의 말을 들으면 어쩐지 다정스럽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밤마다 꿈 속에서는 산더미같이 쌓인 판자나 나무토막, 어딘가 마을 저쪽으로 재목을 운반하는 짐마차의 행렬이 나타나곤 했다. 또는 직경 25센티, 길이 8미터나 되는 통나무의 연대가 당당하게 재목 하치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나, 통나무의 각재와 판자가 서로 부딪쳐 투명하고 마른 나뭇소리를 내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서로 쌓이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올렌까가 놀라 소리를 지르고 깨어나면 뿌스또발로프가 다정하게 말을 했다. "올렌까, 왜 그래 여보? 어서 성호를 그어요!" 남편이 생각하는 것은 곧 올렌까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이 방은 덥다거나, 이 무렵엔 장사가 한가해졌다고 하면 올렌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은 도시 오락이란 것을 싫어하며 축제일에도 외출을 하지 않았는데, 올렌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집이 아니면 사무실에서 일만 하는군." 하고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것이었다. "가끔 연극이나 서커스 구경이라도 다녀오지." "바시치까와 저는 연극 구경을 갈 틈이 없어요." 하고 올렌까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일이 바빠서 여가를 가질 여유가 없어요. 그런 연극이 어디가 좋다는 것인가요." 토요일마다 뿌스또발로프와 올렌까는 저녁 기도에 나갔고, 축제일에는 아침 미사에 나갔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사이좋게 감동의 빛을 띠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향기로운 마음을 발산하고, 올렌까의 명주옷은 살랑살랑 상쾌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버터 바른 빵이나 여러 종류의 잼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다시 피일로그를 먹었다. 점심식사 때가 되면 보르시치나 양, 또는 오리 고기를 굽는 냄새가 뜰과 문앞에까지 풍겼으며, 사순제에는 그것이 생선 요리 냄새로 바뀌어 군침을 삼키지 않고는 그 집 앞을 지나지 못할 정도였다. 사무실에서도 언제나 사모바아르가 끓고, 손님들은 차와 둥근 빵을 대접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이 부부는 목욕탕에 갔다가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불그스레 상기되어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저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하고 올렌까는 친지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모두 바시치까와 저같이 지낸다면 세상은 평화스러울 것이에요." 뿌스또발로프가 모길레프 현으로 재목을 구입하러 가게 되면, 올렌까는 몹시 적적해서 밤잠도 자지 않고 울고만 있는 것이었다. 가끔 저녁에는 이 집 건넌방에 세들어 있는 군수의(軍獸醫) 스미르닌이란 젊은 사내가 놀러오곤 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고 트럼프 상대도 해주어 올렌까도 기분전환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이 군수의의 가정사정이었다. 스미르닌은 이미 결혼을 하여 자식이 하나 있었으나 부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혼을 하였다. 지금은 그 부인을 미워하면서도 매달 40루블리의 돈을 자식 양육비로 보내준다고 하였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올렌까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며 가엾어했다. "그럼, 조심하세요." 올렌까는 촛불을 켜들고 수의를 층계까지 바래다 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대단히 고마워요, 지리하셨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을 가호하시기를......" 남편의 말투를 닮아 올렌까는 최근 침착하고 분별있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의의 모습이 아래층 문에서 사라지려는 순간, 일부러 다시 불러 이렇게 말했다. "블라지미르 쁠라또니치, 부인과 화해하세요. 아드님을 위해서라도 부인을 용서해야 해요! 아드님도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거예요." 뿌스또발로프가 돌아오자 올렌까는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의와 그 가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면서, 그 어린애는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겠느냐고 남의 일 같지 않게 동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상한 일이 연상되어 부부는 성상(聖像)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도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뿌스또발로프 내외는 아기자기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이좋게 6년간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바실리 안드레이치는 사무실에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재목이 발송되는 것을 살피러 모자도 쓰지 않고 나갔다가 그만 감기가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훌륭한 의사들로부터 진찰을 받았지만, 병은 좀처럼 낫지 않고 넉달이나 신음하다가 결국 뿌스또발로프는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올렌까는 또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그리운 당신을 먼저 보내고, 나는 누구를 믿고 살란 말이에요." 하며 남편의 장례를 끝내고 나서 그녀는 통곡을 했다. "당신이 없으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너무나 슬프고 불행해요. 친절한 여러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의지할 데라곤 아무도 없는 저를......" 모자나 장갑과는 인연을 끊고, 올렌까는 언제나 검은 상복에 흰 상장을 달고 있었다. 교회나 남편의 묘지를 찾아가는 외엔 거의 집을 나가지 않고 수녀와 같은 생활을 했다. 6개월이 지나자 겨우 상장을 떼고 덧문을 열어 놓게 되었다. 낮에는 가끔 식모를 데리고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올렌까의 요즈음 생활이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추측을 할 뿐이었다. 그녀가 뜰안에 앉아서 수의관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느니, 수의관이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느니, 또 우체국에서 어떤 친구를 만난 올렌까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이 그 추측의 재료가 되었다. '이 고장에서는 가축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질병이 많은 것이에요. 우유를 마시고 속이 언짢아졌다거나, 말이나 소에게 병을 옮았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지 않아요? 원래 가축의 건강도 인간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해야 해요.' 올렌까는 수의의 이야기를 되풀이했고, 이제와서는 어떤 일에나 수의와 의견이 같았다. 애정 없이는 1년도 살지 못하는 올렌까가 자기집 건넌방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른 여자라면 세상의 비난을 받을 것이 틀림없지만, 올렌까의 경우엔 누구 하나 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었었다. 올렌까와 수의는 자기들 사이에 생긴 변화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려 했으나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올렌까는 원래 비밀을 가질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군대 동료들이 수의를 찾아오면 올렌까는 차와 저녁을 대접하면서, 가축의 홍역이라거나 결핵이라거나 시장의 도살장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입이 딱 벌어진 수의는 손님이 돌아가자 올렌까의 손을 붙잡고 화를 내며 불평을 말하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그런 소릴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소! 우리 수의사끼리 말할 때는 제발 입을 열지 말아요. 지리할 뿐이니까!" 올렌까는 놀라고 불안스런 눈초리를 하며 되묻는 것이었다. "볼로치까, 그럼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요?"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나이를 껴안으며 화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군대가 시베리아와 같은 먼 곳은 아니지만 꽤 먼 어느 벽촌으로 이동하게 되어 수의도 이 군대와 함께 영원히 떠나버린 것이다. 올렌까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올렌까는 완전한 외돌토리였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 안락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 먼지투성이가 되어 다락방에 틀어박혔다. 올렌까는 조금 야위고 볼품도 없어져,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전과 같이 좋아하거나 미소를 던지거나 하지 않았다. 분명히 인생의 황금시절은 지나고, 어떤 알지 못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저녁이 되면 뜰로 내려가는 층계에 앉아, 그녀는 찌볼리 야외극장의 음악이나 불꽃 소리를 듣곤 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했다. 낮에는 아무 생각도, 아무 희망도 없이 뜰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밤이 깊으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으나, 꿈 속에서도 텅빈 뜰을 바라보았다. 먹고 마시는 것조차 싫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불행은 자기 의견이란 것이 전혀 없어진 것이었다. 눈으로는 주위의 여러 가지 대상을 바라보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정리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의견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령 병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을, 또는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그리고 농부가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을 분명히 보고는 있으면서도, 그 병이나 비나 농부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비록 1천 루블리를 준다 해도 말을 못하는 것이다. 꾸우낀이나 뿌스또발로프가 살아 있을 때라면, 혹은 수의와 함께 있을 때라면 올렌까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 속도 마음도 자기 집뜰과 같이 텅 비어 있다. 쑥이라도 먹은 것같이 쓰고 기분 나쁜 것이었다. 시가지는 점점 사방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집시 마을은 이미 집시 가로 이름이 바뀌고, 찌볼리 야외극장과 재목 하치장이 있던 장소에는 건물이 즐비하고 많은 사잇길도 생겼다. 시간의 흐름이란 얼마나 빠른 것인가! 올렌까의 집은 이미 낡아 지붕은 녹슬고 창고는 기울어졌으며, 뜰에는 잡초와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올렌까 자신도 늙고 추하게 되었다. 여름에는 뜰로 내려가는 층계에 앉아, 그리고 겨울에는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은 역시 공허하고 적적했다. 그럴 때 문득 봄의 기척을 느낀다거나 바람이 교회의 종을 건드려 소리가 나게 하면 불현듯 과거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뿌듯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일로서, 그것이 지나면 다시 공허가 깃들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검은 고양이 브리스까지 다가와서 야웅거리고 재롱을 부렸으나 그런 고양이의 재롱쯤은 올렌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올렌까에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일까! 아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전 존재를, 마음과 이성의 모든 것을 붙들고, 자기의 사상과 생활에 방향을 찾아주고 식어가는 피를 덥혀 줄 하나의 애정인 것이다. 그녀는 옷깃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쫓아버리며 싫은 소리를 했다. "저리 가, 저리로...... 귀찮아." 이렇게 해서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되었으나 아무런 기쁨도 없고 아무 의견도 없다. 생활은 식모인 마브라가 하는 대로 맡겨 버렸다.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시외로 나갔던 가축들이 집안에 온통 먼지를 씌우며 지나갈 저녁 무렵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올렌까는 자신이 문을 열어 주러 나가 상대를 보는 순간 기절을 할 뻔했다.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이미 머리가 희끗한 평복을 입은 수의인 스미르닌이었다. 순간 그녀는 잊어버렸던 모든 과거를 되찾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집안에 들어오고, 어떻게 차를 마시러 식탁에 마주앉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당신이군요!" 기쁨에 떨면서 올렌까가 속삭였다. "블라지미르 쁠라또니치!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예요?" "여기 정착하려고." 하며 수의가 말했다. "군대를 그만두고 왔죠. 자유의 몸이 되어 정착된 생활을 하면서 내 운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자식놈도 이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이고. 다 자랐어요. 실은 나는 마누라와 다시 결합했어요." "그럼, 부인은 어디에?" 하고 올렌까가 물었다. "아들과 함께 호텔에 있지요. 나는 집을 빌리러다니는 중이고요." "어머, 그렇다면 이 집에서 사세요! 여기가 마음에 안 드세요? 그렇게 하세요. 집세 같은 건 한푼도 필요 없으니까요." 올렌까는 흥분하여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세요. 나는 저 건넌방 하나로도 충분해요. 아아, 정말 기뻐요!" 이튿날 지붕에는 페인트 칠이 시작되고 벽에는 회를 바르기 시작했다. 올렌까는 손을 허리에 얹고 뜰을 거닐며 이를 지켜 보았다. 그 얼굴에는 전처럼 미소가 되살아나고 전신에는 활기가 넘쳤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수의의 아내는 마르고 못생긴 여자로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어딘지 모르게 고집이 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께 온 사샤라는 사내아이는 나이에 비해서는 작았으나(벌써 열 살이다) 살이 찌고 서늘한 푸른 눈을 가졌으며 볼에는 보조개가 패였다. 소년은 뜰안에 들어서자마자 고양이를 쫓아 무섭게 달려가더니 곧 이어서 기쁨에 넘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이거 아줌마네 고양이예요?" 하고 소년은 올렌까에게 물었다. "이게 새끼를 낳으면 우리에게도 한 마리 주세요. 우리 엄마는 쥐를 제일 싫어하거든요." 올렌까는 잠시 소년과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게 됐는데, 마치 그 소년이 자기 자식인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뭉클 하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소년이 식당에 앉아 복습하는 것을 올렌까는 감동과 사랑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귀엽고 상냥한 아이인가...... 어쩜 저렇게도 영리하고 잘 생겼을까!" "섬이란." 하며 소년은 읽어 갔다. "육지의 일부로서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것을 말한다." "섬이란 육지의 일부로서......" 하고 올렌까는 반복했다. 그것은 침묵과 공허로 그 많은 세월을 보낸 뒤, 처음으로 확신을 갖고 말하는 의견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의견을 가진 올렌까는 저녁을 먹으면서 사샤의 부모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즉, 최근의 아이들은 중학교 공부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전교육이 실업교육보다는 좋다. 왜냐하면 중학 졸업생은 앞길이 창창하여 희망에 따라 기술자도 되고 의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샤는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의 모친은 하르꼬프에 있는 자기 언니네 집에 가서 거기 눌러앉아 있었다. 부친은 매일같이 어디론가 가축검사를 하러 가는데 어떤 때는 2, 3일씩 묵는 수도 있었다. 올렌까는 사샤가 자기 가정에서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굶어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소년을 데려다 건넌방에 붙은 작은 방 하나를 비워주었다. 이렇게 사샤가 올렌까에게 와서 살게 된 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났다. 올렌까는 매일 아침 소년의 방에 갔다. 소년은 한 손을 얼굴에 대고 숨소리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 올렌까는 깨우기가 가엾었다. "얘, 사센까." 하고 올렌까은 애처로운 듯이 아이를 불렀다. "착한 아이지, 일어나요! 학교갈 시간이 됐어!" 소년은 일어나 옷을 입고 기도를 하고 나서 테이블에 앉았다. 큰 컵으로 석 잔이나 차를 마시고 둥근 도우넛 두 개와 버터가 발린 빵 절반을 먹었다. 아직 잠이 덜 깨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사샤, 아직 우화를 암송하지 못했지?" 하고 올렌까는 말하면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듯 소년을 살펴보았다. "정말 걱정이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내버려 두세요. 제발." 하고 사샤는 말했다. 그리고는 작은 몸에 큰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메고는 한길에 나가 학교로 걸어갔다. 그 뒤를 올렌까가 가만히 따라갔다. "사센까야!" 하며 올렌까가 불러 세웠다. 소년이 돌아보면 올렌까는 대추나 캐러멜을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학교가 보이는 골목길까지 접어들면, 소년은 자기 뒤에서 키가 크고 뚱뚱한 여자가 따라오는 것이 부끄러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돌아가세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올렌까는 멈추어 서서 소년이 학교 정문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아, 얼마나 이 소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이토록 깊은 사랑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기 마음 속에서 모성적인 감정이 점점 더 강하게 불타고 있는 지금처럼 타산이 없고 욕심도 없고, 더구나 이처럼 기쁘고 마음이 뿌듯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핏줄은 닿지 않지만, 이 소년을 위해서라면, 그 볼의 보조개와 제모를 위해서라면, 올렌까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버릴 것이다. 웬일일까. 이 이유를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사샤를 학교에 바래다 주고 나면 올렌까는 흡족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가슴 가득히 애정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반 년 동안에 젊어진 얼굴은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올렌까를 보고 친밀감을 느끼며 말을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올리가 세묘노브나! 요즘 어떠세요?" "요즘은 중학교 공부도 어려워졌어요." 하며 올렌까는 시장에서 이런 말을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어제 일 학년 숙제를 보았더니 우화 암송과 라틴어 번역, 그리고 문제가 또하나...... 사실이지, 어린 학생에게 너무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선생 이야기나 수업에 대한 이야기, 교과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사샤가 말하는 그대로. 두 시가 넘어서야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고 밤에는 함께 예습을 하며 같이 울기도 했다. 소년을 잠재우고 나서 올렌까는 오래도록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자기도 침실에 들어가 먼 미래를 꿈꾸었다. 사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나 기술자가 되어 자기의 큰 저택을 갖고 자가용 마차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지...... 올렌까는 눈을 감고 언제까지나 그런 생각만 했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은 고양이는 올렌까 곁에서 야옹거리고 있었다. "똑...... 똑...... 똑......" 갑자기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올렌까는 눈을 뜨고 겁에 질려 숨을 죽였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30초 가량 지나서 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르꼬프에서 전보가 왔구나!' 올렌까는 이렇게 생각하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샤의 어머니가 사샤를 하르꼬프로 부른다...... 아아, 어쩔 것인가!' 올렌까는 절망을 느꼈다. 머리와 수족이 싸늘해졌다. 나처럼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분 가량 지나자 목소리가 들렸다. 수의가 클럽에서 돌아온 것이다. '아아, 잘됐어!' 올렌까는 이렇게 생각했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가라앉으면서 기분이 다시 가벼워졌다. 올렌까는 다시 드러누워 사샤의 일을 생각했다. 사샤는 옆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가끔 잠꼬대가 들려왔다. "이 자식, 저리 가! 해볼 테냐!" <끝> 10. 간이이층이 있는 집 -어느 화가의 이야기 안톤 체홉 1 육칠 년 전 나는 T현에 있는 어떤 군(郡)의 벨로끄로프라는 젊은 지주의 영지에서 살고 있었다. 이 지주는 새벽잠이 없어 대단히 일찍 일어나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서성거렸는데 저녁마다 맥주를 마시면서, 자기는 그 지방의 어느 누구와도 의기가 투합하지 않는다고 내게 투덜대곤 하는 것이었다. 이 사내는 뜰 저쪽 바깥채에 살고, 나는 원기둥들이 있는 낡은 안채의 넓은 방에 살고 있었다. 이 넓은 방에는 내가 침대 대신 사용하던 폭넓은 긴의자와 트럼프 점을 치는 데 사용하던 테이블 외에는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는 언제나 날씨가 좋은 때라도 낡은 아모스식 난로 속에서 웅웅 소리가 났고 비가 오거나 번개가 칠 적이면 집 전체가 진동하여 금시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특히 밤늦게 열 개라도 넘는 커다란 창문들이 번갯불을 받을 때면 약간 무서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매일매일을 하릴없이 지내는 것이 운명처럼 되어 있는 나에게는 하는 일이 없었다. 몇 시간이나 창 너머 하늘이나 새, 나무가 늘어선 것을 바라보든가 우편물을 구석구석까지 읽거나 하는 외에는 잠을 잘 뿐이었다. 때로는 집을 나와 밤늦게까지 산책을 했다. 어느 날 나는 산책에서 돌아오다가 그만 누군가의 낯선 집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꽃 핀 호밀밭 위로는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뻗히고 있었다. 정성들여 심은 키 큰 왜전나무 노목이 흡사 두 개의 벽과도 같이 줄을 지어 서서 어둑어둑한 가로수길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나는 어렵잖게 울타리를 타고넘어 땅에 4, 5센티가 깔려 있는 왜전나무 침엽에 발을 미끌어뜨리면서, 그 가로수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둑어둑하고 조용했다. 다만 높은 나뭇가지 저쪽에서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비쳐 거미집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침엽수가 숨막힐 정도로 강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보리수가 늘어선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는 손길이 가지 않아 어질러져 있었다. 지난해의 낙엽이 발 밑에서 슬픈 소리를 냈고, 저쪽 나무 사이에는 갖가지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오른쪽 옛 과수원에서는 꾀꼬리가 애처로운 듯 가냘프게 울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역시 늙은 새이리라. 마침내 보리수의 가로수길이 끝났다. 테라스와 간이이층이 있는 흰 집 앞을 지나노라니 문득 그 집의 가운데뜰과 큼직한 연못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못에는 수영장으로 꾸민 울타리가 있었고, 녹색 버드나무가 보였으며 그 저쪽 언덕은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에는 가느다란 종루가 솟아 있었는데 그 꼭대기의 십자가가 저무는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어릴 적에 이와 똑같은 광경을 본 일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추억으로 황홀해졌다. 가운데뜰에서 들로 나가는 곳에 돌로 된 흰 문이 있었고, 사자를 조각한 옛스럽고 탄탄한 그 문 곁에는 두 처녀가 서 있었다. 약간 연상인 듯한 처녀는 흰 살갗을 가진 호리호리한 미인으로서 풍성한 밤색 머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입은 의지에 넘쳤고 얼굴 표정은 근엄하여 내게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다른 한 처녀는 그야말로 어린 소녀로서- 열일곱이나 여덟은 넘지 않으리라- 역시 호리호리한 몸매에 흰 살결을 하고 있었으나 눈과 입이 모두 컸다. 그녀는 내가 곁으로 지나가자 깜짝 놀란 듯이 이쪽을 쳐다보며 영어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두 처녀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또한 내게는 낯익은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즐거운 꿈이라도 꾼 기분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점심때, 나와 벨로끄로프가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전에 본 그 쳐녀 중 하나를 태운 마차가 풀을 헤치며 뜰로 달려왔다. 그것은 연상의 처녀였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주 근엄하고 또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샤노보 마을에서 몇 채의 집이 불탔고, 몇 사람의 남녀와 아이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도 현재 그 위원의 한 사람인 피해자 구호위원회는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서명을 시키고는 그 장부를 집어넣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저희들 일을 완전히 잊으셨군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하고 그녀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시 놀러 오세요. 뮤슈......도(하며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의 재능을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면 꼭 오세요. 어머니나 저는 대환영이에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녀가 돌아가자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처녀는 명문 출신으로 이름은 리쟈 보르챠니노바라 했다. 어머니와 동생, 이렇게 세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영지는 연못 저쪽의 마을 이름과 같은 세르꼬쁘까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옛날 모스크바의 고관으로서 죽을 때 계급은 삼등관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재산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 마을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고, 리쟈는 세르꼬쁘까 마을의 국민학교 여교사를 지내며 월 25루블리의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용돈을 제것만으로 쓰며 자기 수입으로 생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집안이야." 벨로끄로프가 말했다, "언젠가 가보세. 자네가 가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어느 제일(祭日) 낮, 우리는 보르챠니노바네의 일을 생각하고 세르꼬쁘까 마을로 갔다. 어머니와 두 딸이 모두 집에 있었다. 어머니 에까체리나 빠브로브나는 옛날엔 미인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나이가 든 것도 아닌데 살이 찌고 천식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어둡고 방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림 이야기에 화제를 집중시키려 하고 있었다. 딸에게 내가 세르꼬쁘까에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스크바의 전람회에서 본 두세 점의 내 풍경화 생각을 급히 한 모양인지, 그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었다. 리쟈- 이 집에서 부르는 대로 하면 리이다-는 나보다는 오히려 벨로끄로프와 더 말을 많이 했다. 그녀는 웃는 낯을 보이지 않고 심각해져서 왜 군회(郡會)에 나오지 않는가, 어째서 한 번도 군회의 집회에 출석하지 않느냐고 그에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좋지 않아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하며 그녀는 나무라듯 말했다. "나쁜 일이에요, 부끄러운 일이에요."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며 모친이 맞장구쳤다. "나쁜 일이야." "우리 군은 완전히 바라긴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어요." 하고 리이다는 내게 말했다. "바라긴은 자기가 참사회 의장이 되어 군의 요직을 모두 자기 조카나 사위에게 맡기고는 차차 몹쓸 짓을 하고 있어요. 싸울 필요가 있어요. 젊은이들은 스스로 강력한 그룹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보시다시피 이 군의 젊은이들이란 모두 이렇지 않아요? 부끄러운 일이에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동생인 제냐는 군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처녀는 심각한 이야기에는 말참견을 하지 않았고, 이 집에서는 아직 어른 취급을 못받아 어린애처럼 미슈스라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 자기 가정교사를 미스라 부르지 못해 미슈스라 부른 데서 연유한 별명이라고 한다. 그녀는 시종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앨범을 뒤적이자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이것은 숙부님...... 이것은......' 하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린애처럼 어깨를 기대어 오는 것인데, 그 때문에 아직 발육이 덜댄 연약한 가슴이나 살이 붙지 않은 어깨며 솜털이 가시지 않은 머리, 벨트로 꼭맨 가냘픈 육체가 몸 가까이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크로케나 로온테니스를 하며 놀다가 뜰을 거닐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느라고 긴 시간을 소비했다. 원기둥이 있는, 그저 넓기만 하고 텅 빈 방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집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는 벽에 착색판화도 걸려 있지 않았고 하인에게도 '여보세요'라고 불렀으며, 아마도 리이다와 미슈스가 있는 탓이겠지만 어딘가 젊은 느낌이 들고 깨끗하고 고상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리이다는 다시금 벨로끄로프를 상대로 군회나 바라긴이나 학교 도서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리이다는 생기가 있고 성실하며 신념에 찬 처녀로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으나, 어딘지 말이 많고 목소리라 큰 것이 흠이었는데 이것은 아마 학교에서 떠들던 버릇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어떤 이야기든간에 논쟁으로 이끄는 학생 시절의 버릇이 아직 남아 있어서, 지루하고 생기없는 긴 이야기를 하기 일쑤고, 더구나 자기를 머리 좋은 진보적인 인간으로 보이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크게 제스처를 쓰는 것이 그만 옷소매로 소스병을 건드려 테이블 클로드에 큰 얼룩을 지게 했는데, 나 말고는 누구도 그것을 아는 체하려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어두웠고 주위는 고요했다. "예의 있다는 것은 소스를 테이블 클로드에 엎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하더라도 모르는 체하는 것일세." 벨로끄로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훌륭한 인텔리 집안이야. 저처럼 훌륭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뒤떨어져 있어. 대단히 뒤떨어졌어! 언제나 일, 일이니까! 일!" 벨로끄로프는 모범적인 농장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 게으른 자여! 하고 생각했었다. 이 사나이는 무엇이든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긴장하여 '에에-' 하고 말을 끄는 버릇이 있는데, 일하는 것도 말하는 것과 같이 느려서 언제나 기한을 넘기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우체국에 부쳐 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이 친구는 몇 주일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나는 이 사나이의 사무 능력을 거의 믿지 않고 있었다. "제일 고통스러운 일은."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리 일을 해도 어느 누구와도 의기가 투합되지 않는다는 거야. 전혀 마음이 통하지 않아!" 2 나는 보르챠니노바네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가서는 대개 테라스 밑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곤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에 가득차 있는 나는 이렇게도 빠르고 또 잿빛으로 흘러가는 자신의 생활이 애처롭기 그지없었고, 특히 최근에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심장을 가슴에서 떼어버리면 얼마나 속시원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테라스에서는 이야기 소리와 옷이 스치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리이다는 낮에는 환자를 진찰하고 팜플렛을 돌리며 또는 모자도 쓰지 않고 양산만 들고 마을에 나가는 일도 간혹 있었고 밤에는 큰소리로 군회나 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제 이런 것에 익숙해졌다. 그 날씬하고 아름답고 항상 근엄한 이 처녀는 품위있는 입술을 가졌지만, 실무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언제나 무뚝뚝하게 나더러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얘긴 당신에겐 재미가 없을 거예요." 나는 이 처녀의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풍경화가로서 민중의 고통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 자신이 깊이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내가 전혀 무관심하게 여긴다는 것 때문이었다. 언젠가 바이칼 호 부근을 여행하다가 푸른 면직 셔츠와 바지로 단장하고 말을 타는 불가리아 인의 젊은 처녀를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 처녀가 갖고 있는 파이프를 사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나의 유럽적인 모습과 모자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일분도 되지 않아 나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 버렸다. 리이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이색분자를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리이다는 내게 대한 혐오감을 표면에는 나타내지 않았으나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라스 밑 계단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딘지 조급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사도 아닌 것이 농부들을 치료하다니 이것 돌팔이가 아닌가라거나 2천 정보나 땅을 가지고 있으면 자선가가 되기도 쉬운 것이라는 둥 악담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한편 동생인 미슈스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무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처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곧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테라스에 가서, 그 작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팔걸이 의자에 깊숙이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는 책을 들고 보리수의 가로수길을 걷는다거나 들로 나가거나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하루종일 책을 탐독하는 것이었는데 때때로 아주 피로한 듯이 멍한 표정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것으로 그 독서가 그녀의 두뇌를 몹시 혼란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그녀는 나를 보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책을 놓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생생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예컨대 하인방에서 연기가 났다거나 하인이 연못에서 커다란 고기를 낚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평소에 그녀는 언제나 밝은 색 블라우스와 짙은 곤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우리는 둘이서 산보를 하고 잼을 만들기 위한 버찌를 따거나 보트를 젓거나 하는 것이었는데, 버찌를 따려고 손을 쳐들거나 노를 저을 때 그녀의 폭넓은 옷소매를 통해 가느다란 팔이 보이는 것이었다. 또 때로는 내가 스케치를 하고 그녀는 곁에 서서 감탄의 눈으로 이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7월 말의 어느 일요일, 나는 보르챠니노바네 집에 아침 아홉 시 경에 도착했다. 집에서 되도록 멀리 정원을 돌면서, 그해 여름엔 유달리 많았던 흰 버섯을 찾아놓고서는 뒤에 제냐와 함께 찾으러 올 때를 위해 표적을 해 놓았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제냐와 그 모친이 모두 밝은 색 옷을 입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냐는 바람에 날릴까봐 모자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윽고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기척이 났다. 나처럼 아무 잔걱정없이 매일 같은 무위의 생활에서 구실을 찾는 인간에게는 이 장원에서의 여름 휴일 아침은 더없이 매력적인 것이다. 아직 이슬에 젖어 있는 녹색 정원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을 때, 또 물푸레나무나 협죽도의 향기가 집주위에 가득차고 교회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이 뜰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또는 누군가가 아름답게 치장하고 건강에 넘친 미인들과 긴 하루를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뜰을 거닐며, 이처럼 일도 목적도 없이 하루 종일, 한 여름내 걸어다니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제냐가 광주리를 들고 왔다. 나와 뜰에서 만난다는 것을 예감했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버섯을 따면서 이야기했다. 제냐는 무엇을 말할 때 내 앞으로 돌아와 내 얼굴을 쳐다보곤 하는 것이었다. "어제 우리 마을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절름발이 뻬라게이야는 벌써 1년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해 어느 의사나 약으로도 고치지 못했는데, 어제 어느 노파가 잠시 주문을 ㅇ더니 씻은 듯이 낫지 뭐예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니지." 하며 내가 말했다. "기적이란 것은 환자나 노파의 주위에서만 찾아서는 안돼. 건강이란 것도 역시 기적이 아닐까. 인생 그 자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것이 기적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니었어요?" "글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는 대담하게 접근하여 결코 그것에 굴복하거나 하진 않아. 그러한 현상보다 내가 상위에 있는 것이니까. 인간은 자기가 사자나 범이나 별보다 상위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것보다도 상위에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기적처럼 보이는 것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 무엇이나 무서워하는 쥐와 마찬가지니까." 제냐는 내가 예술가로서 대단히 박식하고, 알지 못하는 것도 정확히 추측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원이라거나 아름다움이라는 영역으로, 즉 나라면 알 듯한 그 고상한 세계에 인도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만날 때는 열심히 신이나 영원한 생명이나 기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상상력이 죽음과 동시에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렇지, 인간은 불멸이야'라거나 '그렇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야'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냐는 귀를 기울여 이를 솔직히 믿었고, 증거를 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그녀는 멈춰 서서 말했다. "리이다 언니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언니가 참 좋아요. 언니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째서." 하고는 내 옷소매에 손을 갖다대었다. "어째서 당신은 언제나 언니와 논쟁을 하시는 거예요? 어째서 항상 노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건 언니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제냐는 부정하듯이 고개를 저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모를 일뿐이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때 리이다는 외출했다가 마악 돌아오는 길이어서, 말채찍을 손에 들고 현관에 서서 그 균형잡힌 아름다운 몸에 햇빛을 받으며 하인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바쁜 듯이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두세 사람의 환자를 진찰하고 이것이 끝나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벽장 문을 열어보고는 간이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점심때가 되어 모두들 오랫동안 리이다를 찾거나 기다리거나 했으나 그녀가 식탁에 나타난 것은 우리가 수프를 끝낼 무렵이었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을, 왜 그런지 나는 낱낱이 기억하고 또 그것을 추억하고 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런지 그날의 일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점심이 끝나자 제냐는 깊숙한 팔걸이 의자에 파묻혀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테라스 밑의 층계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덮이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바람도 그쳐 찌는 듯이 더운데, 이러한 날씨가 하루 종일 계속될 것 같았다. 졸린 듯한 얼굴을 한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가 부채를 들고 우리가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아아, 엄마." 제냐는 어머니 손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낮잠은 몸에 해로워요." 이 모녀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뜰에 나가면 다른 한 사람은 곧 테라스에 나와 정원수를 바라보면서 "제냐!"라거나 "엄마, 어디 계세요?"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둘은 언제나 함께 기도하고 같은 신을 섬기며 가만히 있을 적에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꼭같았다.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도 곧 나와 친숙해져서, 내가 2, 3일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내가 그린 스케치를 보고 감탄하는 방법도 딸과 같아서, 미슈스와 마찬가지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가정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자기 큰딸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리이다는 결코 어머니에게 아양을 떨지 않고 언제나 진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큰딸은 자기만의 독특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모친이나 작은 딸에게는 신성하고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마치 언제나 자기 선실에 틀어박혀 있는 해군 제독이 수병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과도 같았다. "우리 리이다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리이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애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겁먹은 듯이 주위를 살피며, 마치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목소리를 죽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애는 북을 치며 찾을래야 찾지 못할 사람이지만 사실은 걱정이 없지도 않아요. 학교나 구급상자나 팜플렛도 중요하지만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겠어요? 그 애도 벌써 스물넷이니 지금쯤은 자기 일도 생각해야 될 처지인데, 팜플렛이나 구급상자에 열을 올리고 있으면 나이 먹은 것을 잊기 쉽지요...... 역시 시집을 가야 할 텐데." 독서에 열중하여 머리가 흩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진 제냐가 문득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고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엄마,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리고는 다시 독서에 열중했다. 벨로끄로프가 소매 없는 외투에 수놓은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우리들은 크로케와 로온테니스를 즐긴 후 어두워져서야 오랫동안에 걸쳐 저녁식사를 하였다. 리이다는 학교나 군 전체를 농락하고 있다는 바라긴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날 저녁 보르챠니노바네 집을 떠나면서 나는 길고 무위한 하루라는 인상을 마음에 품으면서, 또한 얼마나 길던지 이 세상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슬프게도 의식하고 있었다. 제냐가 우리를 문께까지 바래다 주었으나, 이 처녀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냈던 탓인지 막상 헤어지자니 어딘지 모르게 적적한 것 같아, 이 사랑스러운 집안이 나에게는 아주 가까운 존재가 된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여름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게, 한 가지 묻겠는데 어째서 자네는 그토록 지리하고 정기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고 나는 돌아오면서 벨로끄로프에게 물었다. "그야 내 생활도 지리하고 뜻없고 단조하지만, 그건 내가 환장이이기 때문이야. 나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질투나 자기 불만, 또는 자기 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어서 언제나 가난하고 부랑자같이 보이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은가. 자네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인 동시에 지주이며 귀족이 아닌가. 그러한 자네가 어째서 이같이 쓸모없는 생활을 하고 있나. 어째서 인생의 희열을 맛보려고 하지 않나. 가령 말일세. 어째서 지금껏 리이다나 제냐 같은 처녀에게 연정을 느끼지 않는 것인가?"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가 잊고 있는 탓이지." 하고 벨로끄로프가 대답했다. 그것은 별채에서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 류보삐이 이바노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먹이를 잘 먹어 살찐 거위처럼 볼품없이 생긴 그 부인이 비이즈를 배합한 러시아 옷을 입고 언제나 양산을 받고 들을 산보하는 모습이나, 하녀가 늘상 식사요, 차요, 하고 이 부인을 부르고 있는 꼬락서니를 나는 매일같이 보고 있었다. 서너 해 전 별채의 한 방을 별장으로 빌린 이후 이 부인은 그대로 벨로끄로프네 집에 영원히 눌러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십 년이나 손위인 부인에게 잔뜩 덜미를 잡히고 있었기 때문에 벨로끄로프는 외출하는 데도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때로 이 부인은 남자와 같은 음성으로 울어대곤 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 나는 곧 사람을 보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으면 내가 이 집을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이렇게 하면 그녀는 곧 울기를 그치는 것이었다. 집에 올라오자 벨로끄로프는 소파에 걸터앉아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는데, 반대로 나는 마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가벼운 흥분을 느끼면서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보르챠비노바네 집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못견디었기 때문이다. "리이다가 좋아할 사람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병원이나 학교에 열중하고 있는 군회원뿐이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저런, 저런 여자를 위해서라면 군회의원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쇠신발을 신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미슈스는? 너무나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 미슈스가 말일세!" 벨로끄로프는 '에-' 소리를 섞어가며 길게 이 시대의 병폐- 즉 페시니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나와 논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확신 있는 말투였다. 몇 천리나 계속되는 황량하고 단조로운 벌판도 이처럼 언제까지나 돌아갈 줄 모르고 지껄여대는 우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페시미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옵티미즘도 아닐세." 하고 나는 앙탈이 나서 말했다.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 사람이 바보라는 것이 문제일세." 벨로끄로프는 자기를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닫고 화가 나서 나가 버렸다. 3 "말로죠모비 마을에 공작님이 손님으로 오셔서 어머니께 문안드리더군요." 어디 갔다 돌아온 리이다가 장갑을 벗으면서 어머니께 말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말로죠모비에 진료소를 세우는 일을 한 번 더 현회에 제안하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다지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리고는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리이다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끄집어내서. 당신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실 테죠." 나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왜 재미가 없겠어요." 이렇게 되물으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의견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겠지만, 분명히 말해선 나는 그 문제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지요." "정말 그런가요?" "정말이지요. 내 생각으로는 말로죠모비에 진료소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내 저의가 전해졌는지, 리이다는 눈을 가늘게 떠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요. 풍경화일까요?" "풍경화도 필요 없소. 거기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리이다는 장갑을 다 벗더니 금방 배달된 신문을 펼쳤다. 조금 있다가 분명히 자기 감정을 억제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지난 주 안나가 난산을 해서 죽었는데 만일 근처에 진료소가 있었더라면 살았을 거예요. 풍경 화가 여러분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어떤 신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명확한 신념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자 리이다는 듣기도 싫다는 듯이 신문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보기엔 진료소나 학교나 도서관, 또 구급상자 같은 것은 현재의 체제 밑에서는 인간의 노예화에 도움을 줄 뿐이지요. 민중은 커다란 쇠사슬로 꼭 묶여 있는데, 당신은 그 쇠사슬을 끊으려고는 않고 새로운 쇠사슬의 고리를 끼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생각이오." 리이다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조롱하듯 미소지었으나, 나는 내 생각의 요점을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중요한 것은 안나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나라거나 마아브라라거나 뻬라게이야라거나 하는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과로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병든 자기 자식을 평생 생각하고, 죽음과 질병에 떨면서, 시들고 늙고 불결과 악취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도 어른이 되면 그와 꼭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해서 몇 백 년이 지나도 몇 억의 인구가 단 한 조각의 빵을 위해 끊임없이 공포를 느껴가며 동물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 가장 무서운 것은 뭔지 압니까? 영혼에 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 자기가 신의 모습과 같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와 동물적인 공포, 끝없는 노동이 마치 눈사태처럼 정신활동에의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고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길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병원이나 학교를 세워 그들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러한 방법으론 그들을 구속에서 해방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더욱 노예화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에 새로운 편견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의 필요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죠. 그들은 고약이나 팜플렛의 대금을 군에 납부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더욱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당신과 논쟁할 기분이 나지 않아요." 신문을 내려놓으며 리이다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일이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팔짱을 끼고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구할 수는 없어요. 물론 잘못이 많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이 옳아요. 교양 있는 인간에게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일은 이웃에 봉사하는 일이므로 우리도 가능한 한 봉사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것이 당신에게는 못마땅한 일이겠지만 모든 인간에게 마음에 들 일은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정말 그래, 리이다. 정말이야."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리이다 앞에서 이 부인은 언제나 어려워하고, 이야기할 적에도 무언가 잘못된 말을 하지 않았나 하고 걱정스럽게 딸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딸의 의견에 거역하지 않고 언제나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농부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되지 못한 교훈이나 격언을 쓴 팜플렛이나 진료소 같은 것은 무지나 사망률을 낮추지 못합니다. 이 집의 창문에서 흘러나가는 빛이 넓은 정원 전체를 비추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죠."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하나도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들의 생활을 간섭함으로써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노동의 필요성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원 저런! 하지만 무언가 일을 할 필요는 있잖아요?" 하고 리이다는 앙탈이 나서 말했다. 그 어투에서 그녀가 내 생각을 저속한 것으로 보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고통스러운 육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인간이 한평생 부뚜막이나 외양간이나 밭에서 지내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영혼이나 신에 관해 생각할 만한 시간을 갖도록, 그리고 각자의 정신적 능력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발휘시킬 수 있도록, 인간의 짐을 가볍게 하고 숨쉬게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사명을 정신활동에- 생활의 진실과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잡스런 동물적 노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해보세요. 그러면 팜플렛이나 구급상자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자신의 참된 사명을 자각한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종교나 과학이나 예술뿐이지, 그같이 구접스러운 것은 아니에요."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요!" 하며 리이다는 크게 웃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네." "가능합니다. 그들의 노동을 몇 분의 일이건 맡으면 됩니다. 만약 도시나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인류 전체가 육체적 노동을 하기 위해 소비하는 노동을 서로 균등히 분배한다고 하면, 아마 우리는 하루에 많아야 두세 시간 일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자나 가난뱅이가 모두 하루에 단 세 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나아가서 우리가 될수록 자기 육체에 의존하는 일을 줄이고 노동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동을 대신할 기계를 발명하고 우리의 필요물을 최소한 줄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굶주림이나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자식들을 단련시키면, 그때는 이미 안나나 마아브라나 뺄라게이야와 같은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겠어요. 우리가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고 약방이나 담배공장이나 주정 공장을 갖지 않을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결국 얼마나 많은 자유 시간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그 여가를 과학이나 예술에 바치게 되지 않겠어요? 농부들이 가끔 공동으로 도로 수리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힘을 합쳐 생활의 의미와 진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확신합니다마는- 곧 진실이 발견되어 인간은 끝없이 마음을 괴롭히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아니 죽음 그 자체로부터도 도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어요." 하고 리이다가 말했다. "과학, 과학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글 가르치는 것을 부정하고 계시는군요." "술집의 간판이나 하찮은 팜플렛을 읽을 가능성밖에 없는 그런 가르침 말입니까.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우리 나라에선 저 류리크 때부터 있었고, 고골리의 뻬뜨르쉬까조차 글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농촌은 류리크 시대 그대로인 걸요. 필요한 것은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국민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또 의학도 부정하셨지요?" "그렇소. 의학이란 것은 자연현상으로서의 질병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질병의 치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치료하려면 질병을 치료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고쳐야 합니다. 근본원인인 육체노동을 제거해 보세요, 질병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치료를 위한 과학 같은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흥분하여 계속 떠들었다. "과학이나 예술이 참된 것이 되려면 일시적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일반적인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생활의 진실이나 의미를 탐구하고 신이나 영혼을 탐구해야 할 과학과 예술이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약방이나 도서관에 처박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인생을 복잡하게 하고 번뇌를 가중시켜 줄 뿐이지요. 우리 나라에는 의사나 약제사나 법률가가 많이 있고, 글을 아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지만, 생물학자나 수학자나 철학자나 시인은 전혀 없어요. 지성의 모든 게, 정신적 에너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인 순간적인 필요를 위해 허비되고 만다...... 학자나 작가나 예술가는 일에 바쁘고, 그들 덕으로 생활은 날마다 편해지고 육체적인 요구가 증대되는 한편 진실에의 길은 여전히 멀고, 인간은 여전히 잔인하고 불결한 동물의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인류의 대다수는 퇴화하여 영원히 생활능력을 상실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술가의 생활이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재능이 있으면 있을수록 예술가가 하는 역할은 기묘한 것, 불가사의한 것이 되고 말지요. 잘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예술가는 현재의 체제를 지지하면서 잔인하고 불결한 동물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이따위 세상은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미슈스야, 저쪽에 가 있어." 하고 리이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내 이야기가 젊은 처녀에겐 해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제냐는 슬픈 듯이 어머니와 언니를 바라보면서 나가버렸다. "그처럼 훌륭한 말씀을 하는 경우는 대개 자기 무관심에 대해 변명할 경우예요." 하고 리이다가 말했다. "병원이나 학교를 부정하기란 치료하거나 가르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예요."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며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일을 하지 않겠다고 강조하시는 걸 보면." 하면서 리이다는 계속했다. "아마 자기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자아 그 이상 논쟁을 그만두기로 해요. 언제까지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할 테니까요.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그토록 저주하고 있는 도서관이나 약국 가운데서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세계의 어느 풍경화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전혀 다른 어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공작님은 아주 마르셨어요. 집에 오셨을 적과는 전혀 달라지셨어요. 이번에 비시로 가신다더군요." 어머니에게 공작 이야기를 한 것은 나와 말다툼을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이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 흥분을 감추려고 그녀는 마치 근시라도 되는 듯이 테이블에 이마를 바짝 갖다 대고 신문을 읽는 척했다. 내 존재가 불쾌한 것이다.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4 밖은 고요했다. 연못 저쪽 마을은 모두 잠들어 등불 하나 보이지 않고 다만 연못 위에 푸르스름한 별빛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사자를 조각한 문 곁에 제냐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나를 전송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나보군,"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면서 말했다. 나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는 슬픈 듯한 눈이 보였다. "술집 아저씨도 말도둑도 모두 잠자고 있는데, 우리들처럼 기품 있는 인간은 서로 상대를 노하게 하거나 논쟁이나 하고 있으니." 쓸쓸한 8월의 밤이었다. 그것은 이미 가을을 느끼게 하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었다. 달은 검붉은 구름에 싸인 채 떠오르기 시작하여, 길과 길 양쪽에 심은 가을 채소밭을 비추고 있었다. 유성이 한없이 흐르고 있었다. 제냐는 나와 함께 걸으면서 애써 하늘을 보지 않으려 했다. 어쩐지 유성이 무섭게 여겨져 그것을 보기 싫다고 했다. "당신의 말씀이 옳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는 습기찬 밤공기로 인해 몸을 떨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힘을 합쳐 정신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이지. 우리는 최고의 동물이니까. 만일 참으로 인간이 가진 모든 재능의 힘을 의식하여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는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인간은 퇴화되어 재능이란 것은 흔적도 없이 될 테지." 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제냐는 멈춰서서 가만히 악수를 청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녀는 떨면서 말했다. 어깨를 덮고 있는 것은 블라우스 한 장뿐으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내일도 또 오세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모두 만족은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답답한 기분으로 혼자 남아 있자니 나 자신도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유성을 보지 않으려 했다. "좀더 함께 있었으면." 하고 나는 말했다. "제발 부탁이야." 나는 제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바래다 주었고 귀여운 눈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멋있는 것일까. 그녀의 창백한 얼굴, 가느다란 목덜미, 가는 팔, 그 연약함, 무위의 나날, 그리고 탐독하는 책! 그렇다면 지성은? 이 쳐녀에게는 보통이 아닌 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남몰래 생각하며 그 넓은 시야에 감탄하곤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를 싫어하는 근엄하고 아름다운 리이다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화가로서 제냐의 호감을 받고 있으며 또 내 재능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처녀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겠다고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처녀가 내 작은 여왕이 되어 나와 함께 이들 수목이나 들이나 안개나 저녁놀을, 이 기적같이 매력있는 자연 그 자체를 지배하는 모습을 공상하는 것이었다. 이 자연 속에서 이때까지 나는 절망적으로 고독한 국외자로서만 자기를 느낄 뿐이었는데. "조금만 더 함께 있어줘." 하고 나는 부탁했다. "제발 소원이니......" 나는 외투를 벗어 그녀의 싸늘한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외투를 입어 우습게 보일까봐 웃으면서 이것을 벗어 버렸다. 그때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과 어깨와 손에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내일 다시 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며 밤의 고요를 깨뜨리기가 무섭다는 듯이 가만히 나를 포옹했다. "우리 집에서는 서로 비밀이 없으니 곧 어머니와 언니께 이야기해야 해요...... 그런데 무서워요. 엄마는 괜찮아요. 엄마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리이다 언니는!" 그녀는 문으로 달려갔다. "안녕!" 둘은 한꺼번에 소리쳤다. 그로부터 2분 가량 그녀가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집에 돌아갈 기분이 나지 않았고 또 급히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다시 한 번 보려고 몰래 되돌아섰다. 소박하고 고풍한 이 옛집이 간이이층의 창을 눈처럼 빛내어 나를 쳐다보며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테라스 앞을 지나 테니스 코트 곁의 어둑한 데에 있는 느릅나무 그늘에 앉아, 거기서 집을 바라다보았다. 미슈스의 방이 있는 간이이층의 창에 밝은 불빛이 켜지더니 그것이 부드러운 녹색으로 변했다. 램프에 갓을 씌운 것이리라. 그림자가 움직였다...... 내 마음은 부드러움과 안락과 만족감에 가득찼다. 나도 사랑을 느끼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 같은 이 시간에 나에게서 몇 십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 집의 한 방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을지조차 모르는 리이다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거기 앉아서 제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간이이층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가량 지났다. 녹색 불빛도 꺼지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서 잠든 뜰과 오솔길을 비추고 있었다. 집 앞 화단에 핀 다알리아나 장미가 모두 같은 빛으로 보였다. 제법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뜰을 나와 길에 떨어져 있던 외투를 주워입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점심을 마치고 보르챠니노바네 집에 가보니 뜰에 면한 유리문이 열려 있었다. 금시라도 화단 저쪽의 테니스 코트라거나 가로수길 어딘가에서 제냐가 모습을 나타내지나 않을까, 아니면 어느 방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리면서 나는 잠시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객실과 식당에 가보았다. 어디에나 사람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는 식당에서 긴 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가 보았다. 복도에는 몇 개의 도어가 있었는데 그 하나에서 리이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하면서 리이다는 큰소리로 천천히 낭독하고 있었다. 아마도 필기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치즈를 한 조각...... 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누구세요?" 하고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소리질렀다. "접니다." "아아, 미안해요. 지금 나갈 수 없어요. 다샤의 공부를 지도하고 있는 중이어서."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는 뜰에 있습니까?" "아뇨. 오늘 아침 동생을 데리고 ㅃ자 현에 있는 백모네 집에 갔어요. 겨울에는 아마 외국에 갈 것이라 여겨집니다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리이다는 다시 낭독을 계속했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치즈를 한 조각 주었습니다...... 다 썼나요?" 나는 현관으로 나와 거기에 선 채 아무 생각도 없이 연못과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이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치즈를 한 조각......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길을 거꾸로 더듬으면서 나는 이 집을 뒤로 하였다. 앞뜰에서 정원으로, 다시 집 앞을 거쳐 보리수의 가로수길을...... 그때 한 소년이 나를 뒤쫓아와서 편지를 내밀었다. '모든 것을 언니에게 말했더니 어떻게 해서라도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어요'라고 그 편지에는 씌어 있었다. '제멋대로 놀아나 언니를 슬프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발 행복하게 살아 주세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나서 어두운 느릅나무의 가로수길, 무너진 담...... 그 무렵 호밀 꽃이 피고 메추라기가 울고 있던 들에는, 지금 소와 발이 묶인 말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언덕 여기저기에는 가을에 파종한 보리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취했다. 깨어난 것 같은 인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보르챠니노바네 집에서 떠들어댄 것이 부끄러워지고 산다는 것이 그전처럼 지리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짐을 꾸리고 그날 밤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그 이후 보르챠니노바네 집 사람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최근 크리미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벨로끄로프와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여전히 소매 없는 외투에 수놓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재미 좋습니까' 하고 묻고는 내가 안부를 묻자 '덕택으로' 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했다. 벨로끄로프는 자기 영지를 팔아 좀 작은 땅을 류보삐이 이바노브나의 명의로 샀다고 했다. 보르챠니노바네 집 소식은 단편적이었다. 벨로끄로프의 말에 따르면 리이다는 여전히 세르꼬쁘까 마을에 살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공명하는 사람들로 서서히 서클을 만들어 드디어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는, 최근 군회선거에서 그때까지 군 전체를 주름잡고 있던 바라긴을 내몰았다고 한다. 제냐에 대해서 벨로끄로프가 가르쳐준 것은, 집에는 없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나는 간이이층이 있는 집에 관해 거의 잊고 있으나 가끔 그림을 그릴 때나 책을 읽을 때 갑자기 그 집 창에 비친 녹색 등불이나 연심(戀心)을 품고, 추위에 손을 비비면서 밤늦게 들판을 걸어 집에 돌아올 때의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을 문득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드문 일이지만 고독에 빠져 적적함을 참지 못할 때 멍하니 추억에 잠겨 있노라면, 어쩐지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며, 이윽고 우리는 다시 재회하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이다...... 미슈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