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단편 문학선(1) - 오 헨리 외 ----- 차 례 ----- 1. 목사의 검은 베일 <호오돈> 2. 이산 브랜드 <호오돈> 3. 검은 고양이 <포우> 4.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포우> 5. 캘라베라스의 고명한 뛰는 개구리 <트웨인> 6. 일백만 파운드의 은행 어음 <트웨인> 7. 양심 때문에 <하아디> 8. 세 사나이 <하아디> 9. 마지막 잎새 <오 헨리> 10. 20년 후 <오 헨리> 11. 바보 이반의 이야기 <톨스토이> 12. 달걀만한 씨앗 <톨스토이> 작가 소개 * 나다니엘 호오돈(Nathaniel Hawthorne) 1804년-1864년. 미국 매사추세스 주 출생으로 단편집 <트와이스 토울드 테일즈>를 발표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50년 장편 <주홍글씨>를 출판하면서 일약 유명해졌으며, 그후 <일곱 박공의 집> <원더 북> 등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에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뛰어난 심리묘사로 파헤쳤는데, 위에서 소개한 작품 외에 작품집 <옛 목사관의 이끼> <눈인형> 등이 있다. * 에드가 알렌 포우(Edgar Allan Poe) 1809년-1849년. 미국 보스턴 출생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낸 뒤 단편 <어셔 가의 붕괴>를 시작으로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검은 고양이> <황금충> 등과 시 <갈가마귀> 등의 걸작을 발표했지만 당시 미국 문단에서는 소외당했다. 그는 근대 단편문학의 기수로 문학의 목적은 도덕, 교훈과 같은 공리성을 초월한 미의 창조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위의 작품 외에 첫창작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와 시 <종(鐘)> <아나벨 리> <유리카> 등이 있다. *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년-1910년. 미국 미주리 주 플로리다 출생으로 미국 전역과 유럽 등을 여행하면서 쓴 여행기가 인기를 끌었는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한 것은 <짐 스마일리와 뜀뛰는 개구리(캘라베라스의 고명한 뛰는 개구리)>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후 그는 <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에 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풍부한 해학과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깃든 작품과 사회 비판적인 장편 <도금(鍍金)시대>, 영국을 풍자한 <왕자와 거지> <일백만 파운드의 은행어금> 등을 발표하면서 미국 제일의 작가가 되었다. * 토마스 하아디(Thomas Hardy) 1840년-1928년. 영국 남부 도오체스터 출생으로 <푸른 숲의 그늘>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후 그는 <테스> <귀향> 등 장편 14권, <세 사나이> 등의 단편집 4권, 9백 편이 넘는 시집 8권 등 정력적이고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주된 사상은 인간과 운명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비관주의적 정명론(定命論)이라 하겠다. * 오 헨리(O. Henry) 1862년-191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출생으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 공금횡령죄로 5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02년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05년 대표작 <마지막 잎새>를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20년 후> <크리스마스 선물> <녹색의 문> 등이 있다. * 톨스토이 1828년-1910년. 러시아 야스나야 뽈랴나 출생으로 <유년시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862년 <전쟁과 평화>를 집필한 이후 5년여에 걸쳐 <안나 까레니나>를 썼으며, 종교적 영향으로 단편 <바보 이반의 이야기>, 장편 <부활>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물질 문명에 반감을 가졌던 그는 대지를 사랑하는 자연인이 되기를 주장하였으며, 구도자적인 삶을 작품 속에 투영시키려고 노력했다. 1. 목사의 검은 베일 나다니엘 호오돈(Nathaniel Hawthorne) 교회당지기는 밀포드 교회당 현관에 서서 종치는 줄을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마을의 노인들이 허리를 구부정히 굽히고 가도를 따라 걸어왔다. 아이들은 명랑한 얼굴로 부모의 옆에서 유쾌하게 잔걸음질로 뛰는가 하면 그들이 입은 훌륭한 주일날 외출복의 위신을 생각하고 정중한 보조를 흉내내기도 했다. 멋장이 독신자들은 아름다운 처녀들을 곁눈질하며 안식일 태양은 처녀들을 여느 때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 군중들이 거의 다 교회당 현관으로 흘러들어 왔을 때에 교회당지기는 후퍼 목사님댁 문을 바라보며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알리는 종소리는 이제 목사가 문가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신호로 그만 그쳐졌다. "그런데 후퍼 목사님은 얼굴이 어떻게 된 것일까?" 교회당지기는 놀라서 외쳤다. 이 말이 들리는 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즉시 머리를 돌이켜보니 후퍼 목사 비슷한 사람이 교회당을 향해서 깊은 생각에 잠긴 태도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웬 낯선 목사가 후퍼 씨 대신 설교단 의자방석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오기라도 한 때보다도 더욱 놀란 표정으로 의아해 했다. "저 이가 틀림없이 우리 목사님인가?" 그레이 씨가 교회당지기에게 물어 보았다. "틀림없이 후퍼 씨입니다." 교회당지기가 대답했다. "목사님은 웨스트베리의 슈트 목사님과 서로 바꾸어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슈트 씨는 어떤 장례식 설교가 있기 때문에 못하게 되었다는 통지를 어제 보내왔습지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놀라는 원인이라는 것이 사소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나이가 30쯤 된 점잖게 보이는 인물인 후퍼 씨는 아직도 독신이지만 알뜰한 주인이라도 있어서 깃에 풀을 먹여 주고 주일날 입는 옷에 1주일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 주기라도 한 듯이 목사답게 깨끗한 몸차림을 해왔었다. 오늘 그의 모양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뿐이었다. 후퍼 씨는 이마 전면을 싸고 숨쉴 때에 너풀거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검은 베일을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가까이에서 보면 그 베일은 2중으로 접은 크레이프로 되었음이 보였으며, 그것은 입과 뺨을 내어놓고는 얼굴 전체를 가려 버렸으나 아마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좀 검게 보이는 것 외에는 별로 그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면에 이런 차일을 달고 후퍼 씨는 방심 상태에 빠진 사람이 흔히 하는 식으로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땅을 내려다보면서도 아직까지 교회의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신도들에게 은근하게 인사를 하며 천천히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그가 하는 인사에 답례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저 크레이프 조각 뒤에 후퍼 씨의 얼굴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할 수 없구먼." 교회당지기가 말했다. "에이, 흉하기도." 어떤 노파는 절름절름 교회당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단지 얼굴을 가린 것뿐인데도 목사님은 무서운 것으로 변해 버렸어!" "우리 목사님이 아마 미치셨나봐!" 그레이 씨는 목사를 뒤따라 문턱을 넘으면서 외쳤다.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후퍼 씨보다 앞서 교회당 속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출입문 쪽으로 머리를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또 어린아이들 여럿은 좌석 위에 올라가 보고서는 무섭다고 떠들면서 다시 내려왔다. 목사의 입장에 뒤따라야 할 정숙과는 아주 딴판으로 여자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남자들의 발을 끄는 소리 등 장내는 전반적으로 소란했다. 그러나 후퍼 씨는 사람들이 떠들썩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발자국 소리도 없이 들어와서 양편 좌석들을 향해서 가볍게 머리를 숙였고, 신자 중 가장 연장자인 백발노인이 통로 중앙,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옆을 지날 때에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보냈다. 이 노인이 목사의 모양에 어떤 이상한 데가 있는 것을 그렇게 더디게 의식한다는 것은 바라보기에 매우 이상스러웠다. 그 노인은 후퍼 씨가 계단으로 올라가 설교단 위에서 검은 면사를 사이에 두고 군중들과 대면하게 될 때까지도 이 떠들썩하게 기괴한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이상한 표식은 한번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가 찬미가의 번호를 알려 줄 때에 이 면사는 그의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서 흔들렸고, 그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목사와 신성한 그 책 사이에 암영을 던졌다. 그가 기도를 드릴 동안에도 면사는 그의 위로 향해진 얼굴 위에 무겁게 놓여 있었다. 그는 자기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무서운 신으로부터 얼굴을 감추려 했던 것일까? 이 단 한 조각의 면사가 불러일으킨 반응은 매우 큰 것이어서 이 때문에 신경이 매우 약한 부인네들 중에선 교회당에서 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의 검은 베일이 회중에서 무섭게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군중들의 창백한 얼굴은 목사에게 무섭게 비쳤을 것이다. 후퍼 씨는 훌륭한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정열적인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의 신도들을 우뢰 같은 신의 말씀으로 천국에 몰아넣기보다는 부드럽게 사람을 설득하는 감화력에 의해서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힘썼다. 그가 지금 한 설교도 평소에 그가 늘 써 오던 특징적인 말씨와 태도를 취한 설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설교 그 자체의 감정에선지 혹은 듣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서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번 설교에는 청중들이 지금까지 이 목사의 입에서 들어 보던 중 가장 권위 있는 훌륭한 설교로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이 설교에는 후퍼 씨의 기질인 조용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평소보다도 오히려 더욱 짙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 연설의 내용은 감춰진 죄악과 우리들이 가장 친근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숨기려 하고 또 전지(全知)의 신이 갈파하리라는 것도 망각한 채 될 수 있으면 우리 자신의 양심에까지도 숨기려는 슬픈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미묘한 힘이 그의 말 가운데에 흡입되어 있었다. 청중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가장 천진한 소녀와 마음이 완고한 남자들까지도 이 목사가 무서운 베일을 쓰고 몰래 다가들어 자기들의 행동과 마음에 숨겨둔 죄과를 적발해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마주잡아 자기의 가슴에 얹었다. 후퍼 목사가 말한 것에는 아무것도 무서운 것은 없었고, 적어도 극렬한 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그의 우울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몸을 떨었다. 청하지도 않은 비애가 공포와 함께 병행해서 찾아들었다. 청중들은 목사에게 보통과 다른 어떤 성질이 있음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어서 그 베일을 불어젖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형체와 몸짓과 목소리는 후퍼 목사와 똑같지만 분명히 낯선 사람의 얼굴이 나타날 것이라고 거의 믿다시피 되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은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던 경이감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 또 검은 베일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에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체모도 없이 대혼란을 이루어,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둥그렇게 둘러서서 가까이 다가서서는 그 가운데에 모두 제각기 입을 열어 한꺼번에 수군대었다. 어떤 이들은 고요한 명상에 잠겨서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말하며, 일부러 크게 웃어서 안식일을 모독하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현명한 듯이 머리를 흔들어 자기들은 그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고, 또 한두 사람은 이상스러울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며, 단지 후퍼 씨의 시력이 밤중에 등불 때문에 극히 약해져서 눈을 가리우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단언했다. 얼마 안 되어서 후퍼 씨도 그의 신도들의 뒤를 따라 나왔다. 베일을 쓴 그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둘러보면서 백발 노인들에게는 그에 적당한 경의를 표하고 중년층들에게는 그들의 친구로서, 또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온화한 품위를 잃지 않고 인사를 나누었으며, 젊은 사람들에게는 권위와 애정이 섞여진 태도로 인사하고, 아이들의 머리에는 손을 얹어 축복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언제든지 안식일에 그가 하는 관습이었다. 오늘은 그의 이런 예의에 대해서 이상스럽다는 듯, 그리고 당황한 듯 보이는 얼굴들이 답례할 뿐이었다. 그 전과는 달리 아무도 목사 옆에 서서 걸어가는 영광을 바라는 사람이 없었다. 노 지주 산더스 씨는 물론 어쩌다 잊은 것이겠지만 후퍼 씨를 그의 식탁에 초대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목사는 이 교회에 취임한 이래로 거의 매주일마다 그 식탁에 초대되어서 산더스 씨의 음식을 초대하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목사관으로 돌아갔다. 목사관 문이 닫힐 때에 목사가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쪽을 둘러보는 모양이 보였다. 쓸쓸한 미소가 검은 베일 밑으로부터 희미하게 비치어 나와서 그의 입가에서 어른거리다가 그가 보이지 않게 될 때에 가물가물 사라졌다. "참 이상스럽기도 해요." 어떤 부인이 말했다. "어떤 여자든지 모자에 걸 수 있는 평범한 조각의 검은 베일이 후퍼 씨의 얼굴에 가리우면 저렇게도 무서운 물건이 된다는 것은." "암만해도 후퍼 씨의 머리에 무슨 고장이 생겼나 보군." 이 마을 의사인 그 여자의 남편이 말했다. "그러나 가장 이상스러운 점은 이 망령된 것이 나같이 마음이 침착한 사람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에요. 그 검은 베일은 단지 우리 목사님의 얼굴만 덮었는데도 불구하고 몸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목사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령처럼 만들어 버렸거든요. 당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정말 그래요." 부인은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 이하고만 단둘이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목사님도 자기 혼자만 있는 것이 무섭지 않은지 몰라!" "남자들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남편이 말했다. 오후의 예배도 같은 양상이었다. 예배가 끝났을 때에 어떤 젊은 부인의 장례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친척과 친구들은 집 안에 모였고, 먼 친지들은 출입문 가에 서서 고인의 장점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에 후퍼 씨가 여전히 검은 베일로 가리운 채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그 베일은 지금 이 장소에선 어울리는 물건이긴 했다. 목사는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관 위에 허리를 굽히고 고인이 된 그 신자에게 최후의 작별을 고했다. 그가 허리를 굽혔을 때에 베일은 그의 이마로부터 수직으로 드리워져서 그 때문에 만일 그 죽은 처녀가 영원히 눈을 감지만 않았더라도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후퍼 씨는 급히 베일을 도로 잡아 당겼는데 혹 그녀의 눈초리를 두려워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대면을 보았던 사람은 목사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비록 얼굴은 죽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분명히 수의와 모슬린 모자를 버스럭거리면서 시체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고 주저없이 단언했다. 미신적인 노파 하나밖에는 이 괴상한 광경을 증언해 줄 사람은 없었다. 후퍼 씨는 관 있는 데로부터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모여 있는 방을 통해 다시 장례식 기도를 올리기 위해 계단 윗머리로 나아갔다. 그것은 다정스럽고 마음이 녹아드는 것 같은 기도였으며, 슬픔이 넘쳐나면서도 깨끗하고 조용한 천국의 희망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손가락으로 타는 천국의 비파 소리가 목사의 애절한 말소리 중간에 섞여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목사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자기, 그리고 모든 인류는 이 젊은 처녀가 그랬듯이 자신들의 얼굴로부터 베일이 벗겨질 그 무서운 임종의 시간에 대비해서 준비해 두라는 기도를 했을 때에는 사람들은 목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면서도 벌벌 떨었다. 운관자들은 무거운 걸음으로 나아가고 문상객들은 죽은 사람을 앞세우고 또 검은 베일을 쓴 후퍼 목사를 뒤로 해서 거리 전체에 슬픈 기분을 감돌게 하면서 따라갔다. "왜 당신은 뒤를 돌아보는 거요?" 행렬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목사님과 처녀의 혼이 손을 마주잡고 걸어가는 것만 같아서요." 아내는 대답했다. "나도 바로 지금 그런 느낌이 들었는 걸." 남편이 말했다. 그날 밤에 밀포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녀 두 사람이 혼인식을 하게 되어 있었다. 후퍼 씨는 우울한 사람이라고 인정되고 있었지마는 혼인식 같은 경우에는 조용한 명랑성을 보여 주었으므로 그것이 때로는 쾌활한 웃음이라 할 수 있는 호감이 가는 미소를 자아냈다. 그의 성질 가운데서 이 이상 더 그를 사랑스럽게 하는 것은 없었다. 결혼식에 모인 사람은 그날 하루 종일 그에게 집중되었던 그 이상한 공포가 사라졌을 것으로 믿고 그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하던 결과는 의외였다. 후퍼 씨가 왔을 때 우선 첫째로 사람들의 눈에 띈 것은 낮에 지낸 장례식에 음침한 기분을 더욱 짙게 하던, 그리고 이 결혼식에서는 불길한 것밖엔 아무것도 예시할 수 없는 바로 그 무서운 검은 베일이었다. 그 영향은 즉시 손님들에게 미쳐서 마치 한 뭉치 구름이 그 검은 베일 밑으로부터 음산하게 솟아나와 촛불 빛을 어둡게 가리우는 듯했다. 신랑 신부가 목사 앞에 섰다. 그러나 신부의 싸늘한 손가락은 신랑의 떨리는 손 안에서 벌벌 떨렸으며, 신부의 얼굴은 마치 주검처럼 창백했기 때문에 몇 시간 전에 매장된 그 처녀가 결혼하려고 무덤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만일 이렇게 음침한 결혼이 또 있었다면 그것은 결혼날에 조종을 울린 저 유명한 결혼식뿐이었을 것이다. 식이 끝난 뒤에 후퍼 씨는 화로에서 비치는 유쾌한 불빛 모양으로 손님들의 얼굴을 당연히 환하게 했을 온화하고 쾌활한 어조로써 포도주 한 잔을 입 가까이에 대고 신혼부부의 행복을 빌었다. 그 순간에 거울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흘낏 보게 되었고,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압도한 그 공포 가운데로 목사 자신의 혼까지도 휩쓸어갔다. 그의 몸은 떨리고 그의 입술은 창백해지고 아직 맛도 보지 않은 포도주를 융단 위로 엎질러 흘리고는 어둠 속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대지도 역시 검은 베일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 밀포드 마을 전체의 사람들은 후퍼 목사의 검은 베일 외에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 검은 베일과 그 배후에 숨겨진 비밀이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열려진 창 너머로 잡담하는 부인네들에게 논의의 화제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주막집 주인이 손님에게 전하는 맨 처음 뉴스도 그것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도중에 이것을 화제로 재잘거렸다. 흉내내기를 즐기는 장난꾸러기 아이놈은 낡은 검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그것으로써 자기의 친구들을 몹시 놀라게 하고는 도리어 자기 역시 공포에 전염되어 자기 장난에 자기가 거의 실신할 지경에 빠졌다. 이상한 일은 이 교구에 사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당돌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도 후퍼 씨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는가고 솔직하게 물어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간섭이 조금이라도 필요해 보일 적에는 언제든지 그에게 충고를 해 주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또 목사 자신도 충고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좇아가기를 꺼려한 적이 없었다. 만일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은 가엾을 정도로 자신이 없는 것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아무리 가벼운 비난을 들었다 해도 그는 아무 관계도 없는 행동까지 죄악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러운 약점을 극히 잘 알면서도 그의 교구 내의 사람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자진해서 그 검은 베일에 대해서 호의로써 충고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는 솔직하게 고백하지도 않고, 또 조심성스럽게 숨겨 두지도 않은 어떤 공포감이 있어서 그 때문에 모두들 서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되었지만, 마침내 사람들은 후퍼 씨의 비밀이 추문이 되어 버리기 전에 미리 후퍼 씨와 교섭하기 위해서 교회의 대표 위원을 파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껏 이들 말이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형편없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목사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영접했으나 그들이 자리에 앉은 뒤에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중대한 임무를 꺼리는 전 책임을 방문자 자신들에게 맡겨 버렸다. 상상할 수 있을 것이지마는 그들의 문제라는 것은 극히 명백한 것이었다. 검은 베일은 후퍼 씨의 이마를 둘러 감겨져 있어서 그의 단아한 입 위의 모든 부분의 모습을 전부 가리우고 있었고, 때때로 그 입가에는 우울한 미소가 어른거리는 것을 그들은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위원들의 상상에는 그 크레이프 조각이 목사와 자기들의 중간에 놓인 무서운 비밀의 상징으로써 목사의 심장 앞에 드리워져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만일 그 베일이 젖혀져만 있었어도 그것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지만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모양으로 그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말없이 당황하며 후퍼 씨의 시야로부터 불안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후퍼 씨가 보이지 않는 눈초리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다고만 여겨졌다. 마침내 대표자들은 이 문제는 너무나도 중대해서 종교대회까지는 필요하지 않더라도 교회 회의에 의하는 것밖에는 취급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무안하게 그들의 선출자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마을에는 그 검은 베일에 대해 다른 모든 사람이 갖는 공포로부터 초연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대표자들이 아무 설명도 못하고, 또 설명을 들을 염도 못 내고 돌아왔을 때에 그 여자는 침착한 덕성의 힘으로 후퍼 씨의 주위에 순간순간으로 더욱 어둡게 자리잡혀가는 것 같아 보이는 그 이상스러운 구름을 쫓아버리기로 결심했다. 그 여자는 후퍼 씨의 약혼자로서 그 검은 베일에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목사가 처음 방문했을 때에 그 여자는 목사를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도 일을 더욱 수월케 만든 단순성을 가지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목사가 자리에 앉은 뒤에 여자는 베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주시했으나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도 놀라게 한 그 무서운 음영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두 겹으로 된 크레이프 조각일 뿐으로서 이마로부터 입까지에 내리드리워 숨결이 닿으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오, 내가 언제든지 기쁘게 바라보던 얼굴을 감출 뿐이지 이 크레이프 조각에는 아무것도 무서운 데가 없는 걸요." 여자는 미소 지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이것 보셔요. 구름 뒤에서 태양이 비치도록 해 주세요. 우선 검은 베일을 떼어 버리시고 다음에 그것을 달고 계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후퍼 씨에게 미소가 약간 스쳤다. "우리들이 모두 다 우리의 베일을 벗어 버릴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했다. "내가 그때까지 이 베일을 쓰고 있다고 해도 오해는 마십시오." "당신의 말씀조차도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여자가 대답했다. "말씀에서라도 베일을 떼어 버려 주세요." "엘리자베드 씨." 그는 말했다. "나의 맹세가 허락하는 한에서는 그렇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베일은 한 개의 표장이고 상징이며 나는 이것을 밝은 데서나 어두운 데서나 혼자 있을 때에나 사람들이 보는 데서나, 또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나 언제든지 쓰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 주세요.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누구든지 이것을 떼어 버린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음침한 베일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엘리자베드 씨, 당신까지도 베일의 뒤로 들어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모양으로 영원히 눈을 어둡게 가리우고 있어야 한다니 어떤 슬픈 불행이 당신에게 생긴 것입니까?" 여자는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만일 검은 베일이 애도의 표적이 되는 것이라면." 후퍼 씨는 대답했다. "나에게도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베일로써 상징할 만큼의 암담한 슬픔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이 순수한 슬픔의 표장이라는 것을 믿어 주지 않으면 어찌할 것입니까?" 엘리자베드는 다그쳐 물었다. "아무리 당신이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비밀의 죄악에 가책을 받아서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의 신성한 직책을 위해서도 이 추문에서 손을 떼세요." 벌써 마을에 퍼져 있는 소문이 어떻다는 것을 넌지시 깨우쳐 줄 때에 여자의 두 뺨은 달아올랐다. 그러나 후퍼 씨는 온화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미소짓기까지 했다- 베일 밑의 어두움 속으로부터 흘러나와 희미한 빛으로 어른거리는 것 같아 보이는 예의 그 쓸쓸한 미소였지만. "만일 내가 슬픔 때문에 얼굴을 숨긴다면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저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비밀의 죄악 때문에 얼굴을 가린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양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억압할 수 없는 완강한 태도로 그는 여자의 모든 어려운 간청에 반항했다. 마침내 엘리자베드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몇 분 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마 그 암담한 망상으로부터 자기의 애인을 다시 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새로운 수단을 써 볼까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망상은 만일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다면 정신병의 결과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사보다도 더욱 강한 성격을 가진 그녀였지만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감정이 슬픔을 대신해서 일어났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검은 베일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 비치는 황혼빛 모양으로 베일에 대한 무섬증이 그녀를 에워싸 버렸다. 그녀는 일어나 벌벌 떨면서 목사 앞에 서 있었다. "그러면 당신도 마침내 그런 느낌이 났습니까?" 목사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 몸을 돌이켜 그 방을 떠나려 했다. 목사는 뛰어나가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엘리자베드 씨, 내가 이렇더라도 참아 주세요!" 그는 열심히 외쳤다. "이 베일은 이 세상에서는 우리 둘의 사이에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나의 아내가 되어 주세요. 그리고 미래에는 나의 얼굴에서 베일이 없어질 것이고, 우리의 혼과 혼 사이의 암흑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현세에서만의 베일이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아아, 이 검은 베일 뒤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쓸쓸하고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하십니다. 이 비참한 암흑 속에 나를 영원히 버려두지 말아 주세요." "한 번만 베일을 올려 내 얼굴을 봐 주세요." 그녀는 말했다.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후퍼 씨는 대답했다. "그러면 안녕히!" 엘리자베드는 말했다. 여자는 목사가 붙잡은 팔을 빠져나와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검은 베일의 비밀을 꿰뚫는 듯싶게 오래도록 떨며 주시했다. 후퍼 씨는 베일이 암시하는 공포가 가장 다정한 애인들 사이에도, 암영을 던질 수밖에 없는 비통감 가운데서도 단지 한 개의 물질적인 표식에 불과한 것이 자기를 행복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렸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이후로는 후퍼 씨의 검은 베일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든가, 또는 직접 그에게 호소해서 베일이 숨기고 있다고 생각되는 비밀을 발견하려는 일은 없어졌다. 흔한 편견으로부터는 초월했노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사가 검은 베일을 쓰는 것은 단지 상식을 벗어난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다른 점에서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착실한 행동에 가끔 섞여서 그 행동 전부를 망상 그 자체의 미친 것 같은 빛으로 물들이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후퍼 씨는 어쩔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평정한 마음으로 거리에서 걸어다닐 수 없게 되었다. 점잖고 수줍은 사람들은 목사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목사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을 용기의 문제로 삼는다는 것을 목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의 무례 때문에 목사는 해질 무렵에 습관적으로 묘지에 가는 산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서 묘지의 문을 의지해서 서 있을 때면 언제든지 묘석 뒤에서 그의 검은 베일을 엿보고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의 이상스러운 눈초리가 목사를 묘지로부터 쫓아내었다는 헛소문이 떠돌았다. 그의 우울한 모습이 아직 멀리에서 보이기 시작하기만 해도 어린아이들이 즐겁게 놀던 것도 그만두고 그가 다가가는 것을 피해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서 그는 부드러운 마음 속 깊이깊이 슬픔을 느꼈다. 아이들의 본능적인 공포는 그로 하여금 어떤 초자연적인 공포가 이 검은 크레이프에 올올이 섞여 짜여져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굳게 느끼게 했다. 사실 이 베일에 대한 목사 자신의 증오감은 대단해서 그는 결코 거울 앞을 떠나가려 하지 않았으며, 또 고요한 수면에 비치는 자기의 그림자에 스스로 놀랄까 두려워 잔잔한 샘물에 허리를 굽혀 물을 마실려고조차 않는 정도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사실을 후퍼 씨의 양심이 전적으로 숨겨 두기에도, 그렇다고 그런 막연한 암시 이상의 어떤 수단을 쓰기에도 너무나 무서운 큰 죄악 때문에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풍설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모양으로 검은 베일의 밑으로부터 죄악인지 슬픔인지 분별할 수 없는 한 뭉치의 구름이 흘러나와서 그것이 가엾은 목사를 감싸버렸기 때문에 사랑도 동정도 그에게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유령과 악마가 베일 뒤에서 그와 함께 사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전율과 외적인 공포심을 마음속에 지니고 목사는 자신의 영혼 내부에서 암중모색을 하거나 또는 온세상을 슬프게 만든 매개물을 통해서 이상스럽게 바라보면서 항상 베일의 그늘 속에서 걸어다녔다. 함부로 부는 바람까지도 그의 무서운 비밀을 경원해서 그 베일을 불어 열리게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후퍼 씨는 지금도 여전히 자기가 옆을 지나갈 때면 창백해지는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쓸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모든 좋지 못한 영향 가운데도 검은 베일은 그것을 쓰고 있는 사람을 극히 권위있는 목사로 만드는 단 한 가지의 훌륭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베일이라는 신비한 표식의 도움으로- 왜냐하면 그밖에는 명백한 원인이 없었으니까- 목사는 죄악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무서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의 힘으로 개명당한 사람들은 주로 암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가 자기들을 천국의 광명으로 인도해 주기 전까지는 자기들도 목사와 한가지로 검은 베일을 쓰고 있었노라고 단언하면서 그들에게 독특한 공포심으로써 목사를 보고 있었다. 사실 베일의 암흑은 목사로 하여금 모든 어두운 마음들과 동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죽어가는 죄인들은 소리를 높여 후퍼 씨를 부르며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숨을 거두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든지 목사가 위안의 말을 속삭이기 위해서 허리를 굽힐 때에는 그들은 베일을 쓴 얼굴이 자기들의 얼굴에 접근된 것을 보고 오싹 소름을 끼치는 것이었다. 죽음의 신이 얼굴을 나타냈을 때조차도 검은 베일의 공포는 이러했다. 외부의 사람들이 멀리로부터 목사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마는 그의 형체라도 바라볼까 하는 막연한 목적으로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러 오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기 전에 몸을 덜덜 떨곤 했다. 한번은 벨처 지사가 집정하던 시기에 후퍼 씨는 선거 설교를 하도록 지명되었었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운 채로 그는 지사와 참사회원들과 의원들 앞에 서서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그 해의 입법안은 우리의 옛날 선조들이 통치하던 시대와 같은 모든 음울하고 경건한 특성을 띠게 되었었다. 이렇게 후퍼 씨는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에는 비난받을 점이 없으면서도 어두운 의혹 가운데 싸여서 긴 한평생을 보내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애정이 많았으며, 고독한 사람으로, 건장하고 기쁜 일에는 끼어들기를 꺼려했으나 커다란 고민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가서 그의 검은 베일 위에 노령의 백설이 내려질 무렵에 그는 뉴잉글랜드 전역의 모든 교회에 걸쳐 유명하게 되어 사람들은 그를 후퍼 교부라고 부르게끔 되었다. 그가 취임하던 당시에 장년이던 그의 교구 내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장례식을 통해 무덤에 운반되어 갔다. 그는 교회당 안에도 일군의 회중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교회묘지에는 더욱 많은 일군의 회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도 늙을 때까지 그는 일을 해왔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극히 잘했으므로 이제야말로 후퍼 목사가 휴식할 차례가 되었다. 이 늙은 목사의 임종하는 방에는 가리워진 희미한 촛불빛에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에게는 친척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제할 수 없는 환자의 마지막 고통을 덜어 주기만이라도 하려고 힘쓰는,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엄숙한 표정을 한 의사가 있었다. 또 교회의 집사와 그밖에 그의 교회에서도 특히 경건한 신자들이 있었다. 또 거기에는 나이가 젊고 정열적인 웨스트베리의 목사 클라크 씨도 있었는데 그는 임종해 가는 이 목사의 임상에서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간호원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임종 때에 고용해 들인 하녀가 아니고 장구한 세월에 걸쳐 남몰래 외로이 노령의 싸늘한 가운데에서도 임종하는 그 시간까지도 사라질 줄 모르는 고요한 애정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엘리자베드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리고 후퍼 교부의 백발머리가 임종의 베개 위에 놓여 있었는데 검은 베일은 지금도 이마에 둘러감아 얼굴 위에 내려져 있어서 미약한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괴롭게 허덕일 때마다 그것이 움직였다. 일생 동안 그 크레이프 조각은 그와 세상 사이에 내려져 있어서 그를 즐거운 동포애와 부인의 사랑으로부터 분리하여 모든 감옥 가운데서도 가장 슬픈 그 자신의 마음이라는 감옥 속에 그를 감금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베일은 마치 캄캄한 그의 방의 어둠을 짙게 해서 영원의 햇빛으로부터 그를 차단하려는 것같이 아직도 그의 얼굴에 덮여 있었다. 조금 전에는 그의 마음이 혼란되어 과거와 현재와의 사이에서 하염없이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몽롱한 미래의 세계 가운데로 서성거리며 나가기도 했다. 격렬한 충격이 일어나서 몸을 이쪽저쪽으로 뒤척이게 했는데, 이 때문에 적으나마 남아 있던 모든 기운이 아주 없어져 버린 터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각이 그 정상적인 힘을 상실하여 버린 가장 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그의 머리가 가장 심하게 광란되어 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검은 베일이 미끄러져 나갈까봐 몹시 걱정하는 빛을 보였다. 비록 그의 어지러운 정신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베개 맡에는 충실한 여인이 있어서 그녀는 눈을 딴 데로 돌린 채로 가장 아름다운 그의 장년 시대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금의 그 늙은 얼굴을 덮어 주었을 것이다. 마침내 임종에 절박한 노인은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한 무감각상태에 빠져 고요히 누워 있었는데 맥박은 느낄 수 없게 되고 호흡은 점차로 미약해졌다. 다만 길고 깊이 불규칙하게 들이마시는 숨결이 그의 혼이 날아가버릴 전주를 연주하는 듯 보일 때 외에는. 웨스트베리의 목사는 병상 가에 가까이 다가왔다. "존경하는 후퍼 교부님." 그는 말했다. "임종의 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영원을 차단하여 시간을 가두어 두는 그 장막을 거두어 올리실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후퍼 교부는 처음에는 머리를 겨우 흔들어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것을 염려함인지 무엇을 말하려고 애썼다. "네." 하고 그는 겨우 들리는 말소리로 말했다. "나의 혼은 그 장막이 거두어질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합당합니까!" 클라크 목사는 말을 계속했다. "인간의 판단으로 공언할 수 있는 한 기도에 몸을 바치고 행실과 생각이 거룩해서 이같이 결점잡을 데 없이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분으로서, 그리고 교회에서는 교부로까지 추앙받는 이로서 그 순결 청정한 일생을 어둡게 하는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죽은 후의 명성에 남겨놓는다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까? 경애하는 형제시여! 이런 일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지금 당신께서 스스로의 보답을 받기 위해서 떠나시는 때에, 당신의 승리의 모습을 나타내어 저희들이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 영원의 막이 거두어지기 전에 당신의 얼굴에서 이 검은 베일을 벗기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클라크 목사는 몸을 앞으로 굽혀 그 다년간의 비밀을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퍼 교부는 돌연히 모든 방관자들이 기가 막힐 정도의 힘을 발휘해서 이불 밑으로부터 두 손을 쑥 내밀어 만일 웨스트베리 목사가 죽어가는 자기와 다투려 한다면 어디까지라도 싸우겠다는 듯한 결심으로 검은 베일 위에 두 손을 굳세게 누르고 있었다. "안 돼요!" 베일을 가린 목사가 소리질렀다. "절대로 안 돼요!" "참 알 수 없는 노인이로구나!" 놀란 목사가 외쳤다. "당신은 당신의 혼에 어떤 무서운 죄악을 짊어지고 지금 하나님의 심판장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후퍼 교부의 숨결은 가쁘게 허덕이고 목구멍에서 가랑가랑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는 굉장한 노력으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생명을 붙잡아 돌이켜서 마침내 말을 이었다. 그]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기까지도 했다. 그리고는 죽음의 팔에 안겨 몸을 떨면서 앉아 있는 동안에도 검은 베일은 그 마지막 순간에 일생 동안의 모든 공포를 압축한 듯 무섭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자주 나타나던 그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는, 지금도 베일의 어둠 속으로부터 어른어른 비쳐 나와서 후퍼 교부의 입술 위에 맴돌고 있었다. "여러분은 왜 나만 보고 벌벌 떠십니까?" 그는 베일을 쓴 얼굴을 돌려서 주위에 둥글게 앉아 있는 얼굴빛이 핼쑥해진 방관자들을 돌아보면서 외쳤다. "여러분 자신도 서로 마주보고 벌벌 떨어 보시오! 지금까지 오직 이 베일 때문에 남자들은 나를 피하고 여자들은 아무런 동정도 보여 주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소리지르면서 도망을 갔었던 것입니까? 이 베일이 막연하게 상징하는 비밀이 아니더면 무엇이 이 헝겊 조각을 그렇게도 무섭게 했을 것입니까? 친구는 자기의 친구에게, 애인은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의 깊은 속마음을 숨김없이 열어보여 줄 때에, 그리고 인간이 자기 죄악의 비밀을 보기 싫게 감추어 두고 쓸데없이 창조주의 눈을 피하려 하지 않게 될 때에,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한평생 얼굴에 걸고 살아왔고, 또 지금 죽으려 하는 이 표징으로 해서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지금 주위를 둘러볼 때에 자, 보십시오.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검은 베일이 걸려 있음을 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놀라서 몸을 움츠려뜨리고 있는 사이에 후퍼 교부는 입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베일 쓴 시체가 되어 베개 위에 넘어졌다. 그들은 베일을 쓴 그대로 그를 관 속에 넣고 베일을 쓴 시체를 무덤에 운반해 갔다. 그 뒤로 여러 해 그 무덤 위에서는 잔디가 자라나고 시들었고, 묘석에는 이끼가 덮이고 후퍼 씨의 얼굴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얼굴이 검은 베일의 밑에서 썩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역시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끝> 2. 이산 브랜드 -유산(流産)된 로맨스 중의 일장(一章) 나다니엘 호오돈(Nathaniel Hawthorne) 몸집이 투박하고 육중해 보이는 석회구이장이인 바아트램은 어린 아이가 흩어진 대리석 조각을 가지고 집짓기를 하며 놀고 있는 동안 숯검댕이 묻어 더러운 채로 앉아서 석회 가마를 지키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 그때 저 아래 산허리로부터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유쾌한 웃음이 아니라 마치 숲속의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처럼 느릿느릿하고 엄숙하기까지 한 그런 웃음이었다. "아빠, 저게 뭐예요?" 어린애는 놀이를 중단하고 아버지의 두 무릎 사이로 파고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아마 주정꾼인 게지." 하고 석회구이장이는 대답했다. "마을의 주막에서 기분 좋게 술은 취했는데 집 안에서 웃었다간 지붕이 날아갈까 봐 참고 있던 사람인 게지. 그래서 지금 이 그레일락 산기슭으로 나와 배를 쥐고 웃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아빠." 하고 이 둔한 중년의 어릿광대 같은 석회구이장이보다는 눈치가 빠른 소년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 웃음 소리가 기쁜 웃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난 겁이 나는 걸요." "못난 소리 말아." 하고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사내다운 사람 되기는 글렀다. 네 어미를 너무 많이 닮았단 말야. 나뭇잎이 버석거리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라는 애니까. 잘 들어봐! 그 흥에 취한 사람이 이리로 오는구나.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바아트램 부자는 왕년 이산 브랜드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 뭣인가를 찾아 탐구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외롭고 명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터전인 바로 그 석회 가마를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마찬가지로 그 '착상'이 싹트기 시작한 그 불길한 밤으로부터 이젠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산허리에 있는 이 석회 가마는 여전했다. 말하자면 그가 그 어두운 생각들을 가마의 노(爐) 속에 넣어 녹여서 그를 사로잡은 집념을 만들어내던 때 이래로 아무 변화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 가마는 약 20피트 높이의 거칠고 둥근 탑같이 생긴 모양으로서 막돌로 육중하게 쌓아 올린 것인데 이 탑 둘레에는 거의 뺑 돌려 흙더미가 치쌓여져 있다. 그래서 대리석 덩어리나 조각들을 수레에 싣고 이 흙더미 위로 끌고 올라가 가마의 꼭대기로부터 부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탑 밑부분에는 오븐의 입처럼 입을 벌린 문이 있었으며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고, 여기에는 육중한 쇠문이 장치되어 있었다. 이 문틈으로부터 연기와 불길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문이 마치 산 복판으로 들어가는 문같이 보이기도 해서, 마치 '쾌락의 동산'에 사는 목동들이 순례자에게 보여 주던 지옥지대에 이르는 출입문을 닮아 보이기도 했다. 이 지방의 산들은 대체로 대리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석회 가마가 이 지방엔 많았다.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여러 해 전에 건립되었다가 방치된 지 오랜 것도 있어서 그런 가마는 천정이 터져 있고 비어 있는 내부의 바닥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돌 틈바귀에도 잡초와 야생의 꽃나무가 피어나 마치 고대의 유물같이 보이며 앞으로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이끼로 뒤덮일 여지가 있어 보였다. 아직도 석회구이장이들이 밤과 낮을 이어 계속 불을 지피고 있는 다른 가마들은 통나무나 대리석 무더기에 걸터앉아 이 고독한 사나이와 잡담을 건네기 위해서 이런 곳을 찾는 산중의 방랑객에게는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이것은 외로운 직업이며, 그 주인공이 사색적 경향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매우 사색적인 직업일 수도 있다. 이미 지난 옛날 이 가마 속에서 불이 타고 있는 동안 그처럼 이상한 뜻을 품은 생각에 골몰했던 이산 브랜드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불을 지키고 있는 사나이는 전혀 성질이 다른 사람이어서 자기 직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사색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주 무거운 쇠문을 덜컹 열어젖히고 휘황한 불길을 외면하면서 커다란 참나무 토막을 던져 넣거나 길다란 장대로 불타는 숯을 쑤셔대었다. 화덕 속에는 굽이쳐 광분하는 불길이 보이거나 이 강렬한 열에 거의 녹아내린 불타는 대리석 덩어리가 보였다. 그리고 밖에는 불길의 반사가 주위의 어두운 숲에 비쳐 아른거렸고, 전경(前景)에는 작은 오두막집과 그 문 곁의 우물, 숯검댕이에 더럽혀졌지만 체격이 좋은 석회구이장이, 그리고 반쯤 겁에 질려 부친의 그늘 뒤에 숨으려는 어린아이의 모습들이 밝고 불그스레한 한 폭의 그림으로 부각되어 보이게 했다. 그러다가 가마의 문이 닫히면 이웃한 산들의 희미한 윤곽을 가려내려고 애쓰는 반달의 부드러운 달빛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에는 아직도 분홍빛의 낙조를 반영하는 구름 조각들이 바람에 쫓기고 있었다. 이 깊은 계곡으로부터 햇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건만. 산허리를 올라오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사람의 모습이 나무 밑에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을 때에 소년은 더욱더 바싹 부친 곁으로 다가섰다. 아들의 겁먹은 행동을 난처하게 생각하면서도 반쯤 그 겁에 전염된 석회구이장이는 "이봐! 누구시오?" 하고 소리쳤다. "남자답게 썩 나서지오. 안 그러면 이 대리석 덩어리로 머리를 까버릴 테니까." "환영의 인사가 너무 거칠구료." 하고 이 미지의 사나이는 다가오면서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나 바로 내 옛날 가마 곁이면서도 나는 친절한 대접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또 원하지도 않소." 더 확실히 보기 위해서 바아트램은 가마의 화덕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내 거기로부터 무섭게 밝은 불빛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얼굴과 모습을 정면으로 비춰 주었다. 시골에서 만든 투박한 갈색 옷을 입고, 여위고 키가 큰 데다가 단장을 짚고 여행자가 신는 투박한 신을 신은 이 나그네의 모습은 주의 깊지 않은 관찰자의 눈에는 별로 유별날 것도 없어 보였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면서 나그네는 그의 시선을- 그의 눈은 유난히도 빛나는 눈이었다- 그 노(爐) 속의 환한 불빛에 고정시켰다. 마치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발견하기를 기대하기나 하는 것처럼. "안녕하시오. 이렇게 밤 늦게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하고 석회구이장이가 물었다. "탐구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이오. 드디어 끝이 났기 때문에-" 라고 나그네가 대답했다. "주정꾼이군! 아니면 미친 놈이든가!" 하고 바아트램은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 말썽깨나 일으키겠군. 빨리 보내 버릴 수 있으면 그게 상책이겠어." 어린애는 오들오들 떨면서 너무 불빛이 환하지 않도록 어서 가마의 화덕 문을 닫아 달라고 부친에게 귀엣말로 간청했다. 왜냐하면 나그네의 얼굴에는 이 소년이 보기에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눈을 뗄 수 없는 그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그 여위고 거칠면서도 생각이 깊어 보이는 얼굴, 무슨 신비스러운 동굴 속의 불처럼 빛나는 움푹 패인 눈을 가진 그 얼굴 속에 담긴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이 석회구이장이의 무디고 굼뜬 감각도 어떤 동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아트램이 화덕 문을 닫았을 때 나그네는 그를 향해서 조용조용 다정하게 말을 건넸으며, 그 어조는 바아트램으로 하여금 결국 이 나그네의 정신이 올바르고 이성적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일이 거의 끝나 가시는구료." 하고 그 나그네가 말을 꺼낸 것이다. "이 대리석은 벌써 사흘째 구워졌군. 앞으로 몇 시간만 더 있으면 이 돌이 석회로 변하겠는걸." "아니, 당신은 뉘시오? 나 못지 않게 내 생업에 관해서 알고 계신 것 같으니 말이외다." 하고 석회구이장이가 외쳤다. "의당 그래야 옳을지도 모르지요." 하고 나그네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여러 해 동안 꼭같은 일에 종사했었으니까. 그것도 바로 이 자리에서. 허나 당신은 이 고장엔 새로 온 양반이지. 이산 브랜드란 사람 이름 들어 본 일이 없소?"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 뭣인가를 찾으러 나갔다는 작자 말인가요?" 하고 바아트램은 웃으면서 말했다. "맞소이다." 하고 나그네가 조용히 말했다. "자기가 찾던 해답을 구했기 때문에 이제 되돌아온 거요." "뭐요? 그럼 당신이 바로 이산 브랜드요?" 하고 석회구이장이는 놀라움에 소리쳤다. "당신 말대로 나는 이 고장엔 처음 온 사람이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당신이 이 그레일락 산기슭을 떠난 지 십팔 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편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산 브랜드 얘기들을 가끔 하며, 이 석회 가마를 떠나게 만든 그의 이상한 용무 얘기를 아직도 한답니다. 헌데 '용서받지 못한 죄'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셨단 말이죠?" "아무렴!" 하고 나그네는 태연하게 말했다. "물어도 괜찮다면 알고 싶어 그러는 건데,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바아트램이 추궁했다. 이산 브랜드는 자기 스스로의 심장을 손가락질했다. "여기에!" 하고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얼굴에는 아무 유쾌한 표정도 없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도 가까운 곳에 두고서도 온 세상을 찾아다니고, 자기 가슴 속을 빼놓고서는 아무데에도 없는 것을 애꿎게 남의 가슴 속을 엿보고 다녔던 일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지 그는 경멸의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나그네가 다가옴을 알리던 그 웃음, 그리고 석회구이장이를 거의 질색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느리고 둔탁한 웃음이었다. 적적한 산판을 그 웃음은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웃음이란 격에 맞지 않을 때나, 시간이 맞지 않거나, 착란된 정신상태에서 우러나올 때에는 인간의 음성 중에서 가장 무서운 발성이 될 수도 있다. 잠자는 사람의 웃음, 그것이 어린아이의 웃음일지라도- 미친 사람의 웃음- 또는 배냇병신의 미친 듯이 날카로운 웃음- 이런 웃음 소리는 이따금 우리를 떨게 만들고 이런 웃음 소리는 언제나 잊고 싶게 만드는 법이다. 시인들은 악마나 귀신의 음성 치고 웃음 소리처럼 무섭게도 제격인 것을 상상해내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 괴상한 사람이 스스로의 가슴을 들여다보며 밤 속으로 울려퍼지며 산중에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웃음을 터뜨렸을 때에 이 신경이 둔한 석회구이장이조차도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우야." 하고 그는 어린애에게 말했다. "얼른 마을에 있는 주막으로 뛰어가서 거기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산 브랜드가 돌아왔으며 '용서받지 못한 죄'를 찾았댄다고 말해 줘라." 소년은 심부름차 달려갔으나 이산 브랜드는 이에 대해서 반대도 하지 않았고 눈치를 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통나무에 걸터앉아 가마의 쇠문을 꾸준히 주시하고 있었다.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발자국 소리가 먼저 가랑잎을 밟는 소리, 그리고 나중에는 돌이 많은 산길을 밟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자 석회구이장이는 아들을 떠나게 한 것이 후회가 됐다. 그는 소년의 존재가 그와 이 나그네 사이의 장벽 구실을 해주었음을 느꼈다. 이제 그는 하늘마저도 아무런 자비심을 베풀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한 사나이와 일 대 일로 접해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분명치 않은 암흑에 싸인 그 죄악이 그에게 암영을 던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석회구이장이 자신의 죄악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쳤다. 그리하여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인간성이 생각해내고 간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근원적 죄악과의 관계를 주장하며 나서는 사악한 모양의 무리가 되어 그의 기억을 산란케 했다. 그 죄악들은 모두 한집안속이었다. 그들은 그의 가슴과 이산 브랜드의 가슴을 왕래하며 넘나들었다. 그리고 암흑의 인사말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자 바아트램은 이 괴상한 사람에 관해서 전설같이 자라고 쌓인 얘기들이 생각났다. 마치 밤의 그늘이 찾아들 듯이 느닷없이 나타나 그보다는 오래오래 전에 죽어서 묻힌 지 오랜 사람이 오히려 더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만큼 오랜 동안 집을 비웠다가 이제 옛 집으로 되돌아온 그 사람 말이다. 이산 브랜드는 바로 이 가마의 휘황한 불길 속에서 마왕과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 전설은 이제까지는 우스갯소리였지만 지금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이 전설에 의할 것 같으면 이산 브랜드는 탐구여행을 떠나기 전에 밤마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관해 상의하기 위하여 이 가마의 불속으로부터 악마를 불러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과 악마는 회개도 못하고 용서도 못 받을 그런 양상의 죄란 어떤 것일까를 찾아내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짰다. 그래서 산정에 첫햇빛이 비칠 때가 되면 악마는 철문 속으로 기어들며, 무궁무진한 하늘의 자비심도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인간의 죄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일에 협력하도록 다시 부름을 받을 때까지 하루 종일 강렬한 불길의 힘을 참고 견뎠다는 것이다. 석회구이장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그 무서움과 싸우는 동안 이산 브랜드는 걸터앉았던 통나무로부터 일어서서 가마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행동은 바아트램이 생각하고 있던 바와 너무나도 공교롭게 일치하였으므로 그는 금시라도 광란하는 불길에 시뻘겋게 단 마왕이 그 속으로부터 꼭 나타날 것만 같았다. "잠깐, 잠깐 참으시오!" 하고 그는 억지로 웃으려 애쓰면서 외쳤다. 왜냐하면 그는 공포에 사로잡혔으면서도 그러한 두려움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발 빌 테니 악마를 지금 불러내지는 마오." "여보시오." 하고 이산 브랜드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악마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그를 뒤에 남겨 놓은 지 오래요. 악마란 당신 같은 얼치기 죄인들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법이오. 내가 문을 연다고 두려워 마시오. 나는 오로지 옛 습관으로 문을 연 것이고 내가 예전에 했듯이 석회구이장이답게 불길을 조절하려는 것뿐이오." 그는 이글이글한 불등걸을 쑤시고 나무를 더 던져 넣고 나서 불빛이 무섭게 그의 얼굴을 붉히는데도 불구하고 허리를 굽히고서 공허한 감옥 같은 불길의 복판을 주시했다. 그러는 그를 지켜보고 앉았던 석회구이장이는 이 객의 의도가 악마를 불러내려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불길 속으로 몸소 뛰어들어 인간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이산 브랜드는 조용히 물러서며 가마의 문을 닫았다. "저기 저 가마가 숯불로 단 것보다도 일곱 갑절이나 더 뜨겁게 죄에 찬 욕심으로 불타는 인간의 가슴을 수많이 들여다보았소."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찾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소. '용서받지 못할 죄'는 거기에 없었소!"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뭣이오?" 하고 석회구이장이가 물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워서 더 멀찌감치로 물러앉았다. "그것은 내 가슴 속에 움터 자라난 죄요." 하고 이산 브랜드는 그와 동류인 광인들 특유의 자부심을 가지고 꼿꼿이 선 채로 대답했다. "다른 아무 곳에서 자라난 죄도 아니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애와 유대감과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을 능가하고 만사를 그 주장 앞에 희생시킨 이지(理智)라는 죄악이오! 영원한 고통의 보상을 받아 마땅한 유일한 죄요! 처음부터 다시 하래도 나는 기꺼이 이 죄를 다시 범하겠소. 나는 서슴지 않고 이에 대한 응보를 받겠소!" "이 사람은 머리가 돌았군." 하고 석회구이장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 이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진 사람일 거야- 거의 확실하지. 그러나 저 이는 동시에 미친 사람이기도 해." 그러나 그는 이 호젓한 산 중턱에 이산 브랜드와 단 둘이서만 있다는 상황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졌으며 따라서 상당한 수효로 보이는 집단의 웅성대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돌부리를 차며 수풀을 헤치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윽고 늘 마을 주막에 도사리고 앉았는 게으름뱅이 떼가 나타났으며 그 중에는 이산 브랜드가 이 고장을 떠난 이래로 겨울이면 언제나 주막의 난로가에서 만취하도록 훌립 주를 마시며 여름철에는 언제나 층계 밑에서 골통대 피우기로 소일하는 사람들도 서너 명 끼어 있었다. 이제 껄껄대고 웃으면서 시시한 얘기를 왁자지껄하면서 달빛과 몇 가닥의 불빛을 받으며 석회 가마 앞의 공터에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바아트램은 다시 가마의 화덕 문을 열어젖혀 쏟아져 나오는 화염의 불빛이 비쳐 모든 사람들이 이산 브랜드를 더 잘 볼 수 있게 하고 그도 그네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했다. 안면이 있는 옛 지기들 중에 이제는 다 죽어가는 늙은이지만 왕년에는 이 지방의 어느 부촌(富村)의 호텔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던 감초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역마차 매표원이었다. 이 사람의 지금의 행색은 삐쩍 마르고 얼굴은 주름투성이이고 코끝이 빨갛고, 옷자락이 짧고 날씬하게 재단한 갈색 옷을 입고 있는데, 요새도 주막 한 구석에 책상을 차려 놓고 그 자리를 지켰으며 20년 전에 불을 붙인 바로 그것 같은 여송연을 아직도 빨아대는 사람이었다. 그는 씁쓰름한 농담을 잘 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말 자체에 어떤 해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의 몸은 물론이고 그의 생각이나 표정에까지 배어 있는 독한 술, 담배의 향기 덕분이었다. 또 하나 낯익으면서도 많이 변한 사람은 사람들이 아직도 예의상 변호사 자일스라고 불러 주는 사람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더러운 셔츠를 입고 마대 양복바지를 입은 늙은 부랑자가 그였다. 이 불쌍한 사람은 변호사였는데 소시 적에는 매우 날카로운 법률가로 마을의 소송자들 사이에서 퍽이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훌립 주, 슬링 주, 타디 주, 칵테일 따위를 아침, 낮, 밤 가리지 않고 무시로 마시게 되면서부터 두뇌를 쓰는 일로부터 각종의 육체 노동을 하는 일로 전락했으며 급기야는 자기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비누통 속으로 전락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자일스는 지금 영세한 비누 제조업자인 것이다. 한쪽 발이 도끼에 잘려 나가고 한쪽 손 전부가 무서운 증기기관에 찍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그는 육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의 손은 없어졌지만 정신적인 손은 여전히 건재하다. 왜냐하면 손이 없는 팔의 그루터기를 내뻗으면서 자일스는 진짜 손이 절단되기 이전에 못지 않게 생생한 감각을 가진 손가락들을 느낄 수 있다고 늘상 공언하기 때문이다. 불구가 된 비참한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그의 불행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소홀히 대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남자다운 용기와 투지를 잃지 않았고, 남의 동정을 구하지도 않고, 남은 한쪽 손으로- 그것도 왼쪽 손인데- 궁핍이나 불리한 환경과 싸우는 엄숙한 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 무리 속에는 자일스 변호사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다른 점도 많은 또 하나의 인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의사였다. 그는 나이가 50여 세가 되는 사람인데 예전에 이산 브랜드가 실성했다고 말이 났을 시절에 왕진을 와준 의사로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 푸르둥둥하고, 무례하고 난폭하면서도 신사다운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언동 구석구석에는 뭣인가 난폭하고 파멸되고 필사적인 것이 풍기는 사람이었다. 브랜디 술이 무슨 악령같이 사로잡아 이 사람을 야수같이 퉁명스럽고 야만스럽게 만들었고, 망령같이 불행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뛰어난 재주가 있고, 의학이 가르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는 생득의 치유술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는 그를 붙잡고 늘어져 타락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말등에 타고 끄덕거리고 병상 곁에서 꼬부라진 혀로 지껄이면서 수마일 사방 산중의 촌락들로 환자 있는 집을 순방했고, 이따금 기적처럼 죽어가던 사람을 살려 놓기도 하고 때로는 애매하게도 제 명보다도 수년씩 앞당겨 환자들을 무덤 속에 묻어 버리기도 했다. 의사는 언제나 입에 골통대를 물고 있었고, 또 누군가가 그의 험구와 욕설의 버릇에 대해서 말했듯이 그것은 언제나 지옥의 업화로 불타고 있었다. 이 세 분의 저명인사들이 다투어 앞으로 나서서 각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산 브랜드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그에게 어떤 검은 병의 내용물을 함께 마시자고 권하면서 그 속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보다도 더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강렬하고 고독한 명상에 의하여 열띤 상태로 고양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재 이산 브랜드가 직면하는 바와 같은 저열하고 천한 생각이나 느낌과 접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과연 자기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찾아냈으며 그것도 자신 속에서 찾았던가를 회의케 했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회의였다. 그가 온 생애를, 아니 생애 이상의 것을 탕진한 그 문제 전체가 하나의 환상같이만 보이는 것이었다. "가시오." 하고 그는 원망스럽게 말했다. "짐승 같은 사람들, 술로 영혼을 망쳐 스스로를 짐승으로 만든 사람들! 난 당신네들관 상관 없소. 여러 해 전에 난 당신들 가슴 속에 파고들어 내가 뜻하는 것을 찾지 못했어. 썩 물러가시오!" "아니, 버릇없는 사기꾼 같으니라구." 하고 사납게 의사가 말했다. "그게 가장 다정한 친구들에게 대꾸하는 태도야? 그렇다면 내가 진실을 말해 주지. 넌 저기 있는 조우 소년이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뭣인지를 알아내지 못했어. 자넨 단순히 미친 사람이야- 내가 이십 년 전에 그렇다고 말했지- 자넨 미친 사람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고, 여기 있는 이 늙은 험프리와 짝이 맞는 사람이란 말야." 그는 초라한 옷차림에 긴 백발을 하고 여읜 얼굴에 시선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노인 한 명을 손가락질했다. 지난 수년 동안 이 노인은 산중을 방황하고 다니면서 여행자를 만날 때마다 자기 딸의 소식을 물었다. 딸은 서커스단과 함께 떠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따금 그녀에 관한 소식이 이 마을까지 들려와 그녀가 링 속에서 말등에 타거나 공중에서 줄을 타는 묘기를 보여 줄 때의 황홀한 모습에 관한 얘기들이 오갔다. 백발의 이 노부가 이산 브랜드에게로 다가서면서 자신없는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모두들 당신이 온 세계를 돌아다녔다고들 하는데." 하고 그는 열심히 두 손을 쥐어짜면서 말을 꺼냈다. "그럼 내 딸년도 보셨겠구료.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러 갈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니까. 헌데 이 애비에게 무슨 전할 말이 있다든가 언제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라도 있습디까?" 이산 브랜드의 시선은 노인의 시선 밑에서 움츠러졌다. 이 노인이 이렇게도 인사말 한 마디라도 듣고 싶어하는 그 딸이란 다름 아니라 이 얘기에 에스터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여자다. 이 여자는 바로 이산 브랜드가 냉정하고도 무자비한 목적으로 어떤 심리적 실험의 재료로 사용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영혼은 낭비되고 빼앗기고 아마도 멸망했을 사람이다. "네" 하고 그는 백발의 방랑객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망상이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샘터 곁, 그러니까 오두막의 문 앞 불빛이 환한 곳에서는 명랑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시절에 친숙한 각종 전설의 주인공인 이산 브랜드를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에 충동되어 마을의 젊은이들, 청춘 남녀들이 헐레벌떡 산을 기어올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하등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평범한 옷차림에 먼지투성이 신을 신고, 마치 불타는 숯덩어리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불을 주시하고 있는 햇볕에 그을은 나그네일 뿐 하등의 특이한 점도 없는 사람이니까- 이 젊은이들은 이내 구경에 진력을 내고 말았다. 때마침 여기에는 다른 오락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디오라마 상자를 등에 지고 여행하는 독일계 유태인 한 사람이 마을로 향하는 산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에 그 마을 사람들 떼가 그 길을 버리고 산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하루의 밥벌이를 할 속셈으로 그들 뒤를 따라 이 석회 가마 있는 곳으로 쫓아온 것이었다. "여보, 독일 양반." 하고 젊은이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신이 있거든 그림 구경 좀 시켜 주시구료." "네, 알겠습니다, 대위님." 하고 유태인이 대답했다. 예의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로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모든 사람을 대위님이라고 불렀다. "특급의 그림들을 보여 드리고 말고요." 그리하여 그는 그림 상자를 마땅한 자리에 세워 놓고 이 기계의 유리창문을 통해서 그림 구경을 하라고 젊은 남녀들에게 청했다. 이윽고 그는 미술 작품의 훌륭한 표본이랍시고 여지껏 떠돌이 쇼맨이 관중들에게 보여 준 중에서도 가장 엉터리의 말도 안 되는 망측스러운 그림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 그림들은 다 낡고 게다가 너덜너덜해지고 구겨진 것으로 담배 연기에 찌들어 희미한 그림들로 대체로 한심한 상태의 물건들이었다. 개중에 어떤 것은 큰 도회지와 공공건물들이나 또는 유럽의 폐허화한 성곽이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것들은 나폴레옹의 전투와 넬슨 제독의 해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이에 거대한 갈색의 털이 많이 난 손이 보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숙명의 손'으로 오인당하기 쉬운 것이었으나 사실은 이 손의 주인이 역사적 해설을 주워섬기는 동안 각종의 전투 장면을 손가락질하는 실물의 손이었던 것이다. 하도 엉터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웃으며 즐기는 사이에 쇼가 끝났을 때에 이 독일인은 어린 조우에게 그 상자 속에 머리를 들이밀어 보라고 일렀다. 확대경을 통해서 보이는 소년의 혈색 좋고 둥근 얼굴- 크게 웃는 입이라든가 이 장난에 신명이 나게 즐거운 표정이 눈을 위시한 얼굴 구석구석에 넘쳐 흐르는 그 얼굴-은 기상천외의 거대한 어린이의 얼굴로 확대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 즐거운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고 그 표정은 겁에 질렸다. 왜냐하면 겁이 많고 흥분하기 쉬운 이 소년은 이산 브랜드의 시선이 유리를 통해서 자기 얼굴에 고정되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위님 때문에 이 어린 양반이 겁에 질립니다." 하고 이 독일계 유태인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윤곽이 우람한 검은 얼굴을 쳐들면서 말했다. "허지만 다시 한 번 보세요. 어쩌면 정말로 좋은 구경을 하시도록 만들어 올릴 테니까요." 이산 브랜드는 잠시 그림 상자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음 순간 깜짝 놀라 눈길을 돌려 그 독일인을 주시했다. 그가 뭣을 보았을까?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호기심 많은 청년 한 사람이 거의 같은 순간에 그 화면에 시선을 주었지만 화면은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제 당신이 누군지 생각나오." 하고 이산 브랜드는 이 쇼맨을 향해 중얼거렸다. "아, 대위님." 하고 이 뉘른베르크의 유태인은 음흉하게 미소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상자 속의 짐, 이 '용서받지 못할 죄'가 퍽 무거운 짐이군요! 이렇게 먼 길을 산 너머까지 짊어지고 오느라고 어깨에 힘이 다 빠지는군요, 대위님." "닥치시오. 안 그러면 저기 저 노(爐) 속에 집어 처넣고 말 테니!" 하고 이산 브랜드는 엄하게 말했다. 유태인의 쇼가 끝나자마자 몹시 늙은 개 한 마리가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기로 작정한 듯했다. 이 군중들 중의 아무도 그 개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개는 주인 없는 개같이 보였다. 여태까지는 매우 조용하고 성질도 착한 개같이 행동했고 이 사람 저 사람 앞으로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만큼 친절한 사람에게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거칠은 머리를 내미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이 늙고 근엄한 네 발 짐승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물로 자기 꼬리를 물려고 뺑뺑 맴을 돌기 시작했는데 일이 더 우습게 되느라고 개의 꼬리는 보통 길이보다도 매우 짧은 것이었다.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쫓는 광경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또 마치 이 어처구니없는 짐승의 몸 한쪽 부분이 다른쪽 부분과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기나 한 것처럼 이를 갈고 으르렁대고 짖어대고 물어뜯으려는 광란이 있어 본 일도 없었다. 개는 점점 빨리 맴을 돌았다. 그리고 잡히지 않게 짧은 꼬리는 그보다도 더 빨리 도망쳤다. 그리고 개의 분노와 증오심의 부르짖음도 점점 더 크고 지독해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영영 목적도 달성 못한 채 지칠 대로 지친 개는 이 행동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중단하고 말았다. 다음 순간 그 개는 이 모임이 있는 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하고 조용하고 점잖게 처신했다. 그러리라고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개의 이런 행동을 본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더 계속하라고 법석을 피웠고, 이에 대하여 개는 비록 짧긴 하지만 그 꼬리를 흔들어 응답할 뿐 잠시 전에 그렇게도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했었던 그 행동은 도저히 재연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한편, 이산 브랜드는 다시 통나무 토막에 자리잡고 앉았으며 아마도 자기가 자기를 쫓는 이 개의 처지와 자기 자신의 처지 사이에 존재하는 한 가닥 유사성을 발견한 때문인지 무서운 웃음을 터뜨렸는데 다른 어떤 징표보다도 이 웃음은 그의 내면의 사람됨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이 시각부터 이 모임의 흥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 불길한 웃음 소리가 지평선에 메아리치고 산으로부터 다른 산으로 산울림하여 오래오래 그 무서운 소리가 연장되어 들려 오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겁에 질려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이제 밤이 늦었다느니, 달이 거의 지게 되었다느니, 8월의 야기(夜氣)가 점점 썰렁해진다느니 하는 말을 서로 속삭이면서 뿔뿔이 귀가하고 석회구이장이와 어린 조우만을 남겨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을 접대토록 한 것이다. 칠흑같이 어둡고 광막한 숲속 산 중턱의 공터는 이 세 사람의 인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적막뿐이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 너머에는 화염의 빛이 듬직한 나무의 줄기라든가 또는 참나무, 단풍나무, 포플라 나무 등 묘목의 엷은 초록과 어울린 거의 검게 보이는 소나무 숲을 비치고 있었고, 여기저기에는 흩어진 낙엽 사이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썩고 있었다. 그리고 겁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조우 소년에게는 이 말없는 숲은 무언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산 브랜드는 불 속에 장작을 더 넣고 가마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석회구이장이와 그의 아들을 향해 이젠 물러가 자라고 권고하는 투가 아니라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난 잠을 잘 수 없소." 하고 그는 말했다. "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소. 옛날에 하던 식으로 불을 내가 지키겠소." "그리고 노(爐) 속으로부터 악마를 불러내어 벗하려는 것이겠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그 검은 병과 단짝 친구가 된 바아트램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허지만 불을 지키고 싶으면 지키고, 악마를 불러내려거든 몇 놈이건 불러내시오. 난 이제 잠이나 자야겠소. 조우야, 가자!" 소년이 부친의 뒤를 따라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며 뒤돌아서 나그네를 보았을 때에 그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왜냐하면 소년의 고운 마음씨는 이 어른이 스스로 택한 고독이긴 하지만 그 고독의 황량함과 무서움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이산 브랜드는 장작의 불타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화덕 문 갈라진 틈바구니로 이따금 남실거리는 작은 화염을 구경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엔 퍽이나 몸에 배었던 이런 사소한 일들이 지금은 전혀 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는 그가 온 정력을 바쳤던 그의 탐구가 서서히 그에게 가져다 준 놀라운 변화를 회고하며 되새겼다. 단순하고 정이 많았던 그가 그 옛날에 타는 불을 보고 명상에 잠기며 지켜보았을 때 밤 이슬에 홈빡 옷이 젖던 일, 검은 숲이 그에게 속삭여 말을 걸던 일, 별들이 그를 향하여 빤짝이던 일 따위가 회상되었다. 그는 뒤에 그의 삶의 목적처럼 되어 버린 그 사상에 관해 처음 사색을 하기 시작했을 당시엔 자기가 얼마나 부드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이 얼마나 많았으며, 인간의 죄와 고뇌에 대하여 얼마나 측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 회상되었다. 그 당시에는 인간의 마음이란 원래가 신성한 것으로 보여졌었기에 제아무리 더럽혀진다 하더라도 동포들은 서로 이를 신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얼마나 외경의 눈으로 인간의 마음을 보았었던가도 생각났으며, 또 그의 탐구가 성공할까 봐 얼마나 두려워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무엇인지 영영 발견되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도 회상되었다. 그 뒤에 그의 어마어마한 지적 발전이 뒤따랐고, 그 발전은 그 과정에서 그의 두뇌와 마음 사이의 균형을 깨뜨렸던 것이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사상'은 그에게 교육의 구실을 했다. 이 사상은 그의 능력을 그 극한까지 개발시켰고, 무학의 노동자인 그로 하여금 대학의 화려한 경력으로 찬 지상의 철학자도 감히 도달하기 어려운 찬란한 경지에까지 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성에 관해서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가슴은 어찌 되었나? 사실상 그의 마음은 시들고, 위축되고, 경화하고, 병들어 죽은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우주의 맥박과 어울려 참여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그는 인류를 연결하는 자력의 사슬을 놓친 것이다. 서로의 비밀을 나눠 가질 권리를 우리에게 주는 신성한 동정심이라는 열쇠로 만인 공통의 인간성의 밀실을 여는 동포적 인간이 되기를 중단한 것이다. 이제 그는 인간을 자기 실험의 재료로 생각하고, 남녀를 꼭둑각시로 만들어 자기의 연구가 요구하는 정도의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들 수 있는 끈을 조종하는 차가운 관찰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산 브랜드는 악마가 된 것이다. 그는 그의 도덕성이 그의 두뇌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의 노력의 최고봉이고 필연적인 발전으로서- 그의 필생의 노동의 찬란하고 화려한 꽃이며 풍부하고 맛있는 과실과도 같이- 그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상 더 뭣을 찾고 뭣을 이룩할 것인가?" 하고 이산 브랜드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내 과업을 완수했고 그것도 잘 수행한 것이다!" 그는 앉았던 통나무로부터 벌떡 일어나 석회 가마의 돌벽 주위에 쌓아올린 흙더미를 민첩한 걸음걸이로 걸어 올라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 장소는 이 석회 가마를 가득 채운 대리석 파편의 윗표면이 보이는 지름 10피트 정도의 공간이었다. 거기에 있는 무수한 대리석 덩어리나 파편들은 모두 시뻘겋게 달아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고 시퍼런 화염을 뿜어내었고, 하늘 높이 치솟은 화염은 마치 마법의 원 속에서처럼 미친 듯이 그리고 계속적으로 또 분주하게 춤추다가는 사그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 외로운 사나이가 이 무서운 화염 덩어리를 구경하느라고 몸의 상체를 굽혀 기웃거렸을 때 그의 육신을 단숨에 불태워 오그라들게 만들 것이라고 여겨지는 화끈하는 열기가 그의 온몸을 엄습했다. 이산 브랜드는 꼿꼿하게 서서 그의 팔을 높이 쳐들었다. 시퍼런 불꽃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서 아른거렸으며, 그 얼굴 표정에 달리 알맞을 것이 없을 기괴하고 무서운 빛을 발했다. 그 표정은 가장 극심한 가책의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지기 직전의 악마의 표정 그것이었다. "이젠 나의 어머니도 아니고 그 품속으로 이 육신이 되돌아가지도 않을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여!" 하고 그는 외쳤다. "오, 내가 우애를 끊고 그 위대한 정리를 내 발로 짓밟은 인류여! 오, 옛날엔 내 앞길과 머리 위를 밟혀 주듯 비춰 준 하늘의 별들이여! 이젠 모두들 영영 이별이다. 오라, 필살(必殺)의 화신이여- 앞으로 다정한 친구가 될 그대! 내가 그녀를 포옹하듯 그대 나를 포옹하라!" 그날 밤, 무서운 웃음 소리가 그 석회구이장이와 그의 어린 아들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공포와 고뇌의 희미한 형상이 자꾸 꿈에 나타났고 그들이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아직도 그 오두막 속 어디엔가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얘야, 어서 일어나거라!" 하고 석회구이장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드디어 밤이 끝나 사라졌다니 고맙기도 하지. 지난 밤과 같은 밤을 다시 한 번 겪느니보다 차라리 석회 가마를 1년 동안 뜬눈으로 지키는 쪽이 낫겠다. 그 엉터리 같은 '용서받지 못할 죄' 운운하는 이산 브랜드가 내 대신 불을 봐준다고 그랬지만 크게 신세를 진 것도 아니야!" 그는 오두막으로부터 나왔다. 아버지의 손을 꽉 잡은 어린 조우도 뒤따랐다. 이른 햇살이 벌써 산마루에 황금색의 햇빛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은 아직도 그늘져 있었지만 재빨리 다가오는 맑고 밝은 날의 약속 속에 상쾌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부드럽게 굽이치며 기복하는 산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을은 마치 하나님의 위대한 손바닥의 오목한 속에서 평화롭게 휴식이나 한 듯이 보였다. 집 하나하나가 역력히 보였다. 두 개 있는 교회당의 첨탑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끝에 달린 도금한 풍향기의 닭들이 햇빛으로 물든 하늘로부터 반사된 환한 빛을 받고 있었다. 주막에도 인기척이 있어 보였고, 늙고 훈제된 고기 같은 역마차 매표원이 여송연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층계 밑에 보였다. 그레일락 산은 그 산정이 한 조각의 황금빛 구름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산들의 가슴 위에도 짙은 안개가 흩어져 있었다. 가지각색의 형상의 안개가 어떤 것은 계곡 저 아래까지 내리뻗었고 어떤 것은 높은 정상 근처에 떠 있는 것도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것들은 안개나 구름과 동일한 계열이 것이겠지만 대기권 저 위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도 보였다. 산 위에 머물러 있는 구름장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간 다음 더 높은 허공을 흘러다니는 그들의 동족인 구름으로 올라간다면 우리와 같은 인간도 하늘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같이도 보였다. 땅이 어찌나 하늘과 잘 융합되어 있는지 그것을 구경만 해도 꿈인 듯이 황홀해졌다. 이런 광경 속에 대자연이 흔히 끌어들이기 일쑤인 눈에 익고 흐뭇한 매력을 첨가하기나 하려는 듯이 역마차가 산길을 덜컹거리고 내려오는데, 마부가 호각을 불었다. 그 소리는 산울림의 메아리와 합쳐져 풍부하고 다양하고 정교한 화음을 이루었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대해서 원래의 연주자는 아무 주장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음과는 판이했다. 위대한 산들은 제각기 감미로운 선율을 서로 보태어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어린 조우의 얼굴은 이내 밝아졌다. "아빠, 아빠." 소년은 즐겁게 외발로 이리저리 뛰놀면서 외쳤다. "그 이상한 사람이 없어졌네요. 하늘도 산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옳아." 하고 석회구이장이는 욕을 하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불을 꺼트린 모양이니 오색 부셸의 석회를 망쳐 놓지 않았대도 감사할 것 없지. 그놈을 이 근방에서 다시 잡기만 하면 놈을 노(爐) 속에다 던져 넣고 싶어질 거야!" 그는 긴 장대를 들고 가마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잠시 후에 그는 아들을 불렀다. "조우야, 이리 올라와 봐!" 그래서 어린 조우가 흙더미 위로 뛰어올라 아버지 곁에 섰다. 대리석은 모두 완벽하고 눈같이 흰 석회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 표면의 원의 한복판쯤에 역시 눈같이 희고 완전히 석회로 변한 사람의 골격이 누워 있는데 그 자체는 마치 오랜 노동 끝에 오랜 휴식을 취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갈비뼈 속에 사람의 심장 모양을 한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의 심장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나?" 하고 그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바아트램이 외쳤다. "여하간에 이건 특별히 훌륭한 석회로 구워진 것 같군. 이 뼈를 모두 합치면 이 친구 덕분에 석회가 반 부셸은 실히 늘어나겠군." 하고 말하며 이 무례한 석회구이장이는 장대를 쳐들어 해골 위에 떨어뜨렸고, 이산 브랜드의 유해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끝> 3. 검은 고양이 에드가 알랜 포우(Edgar Allan Poe) 지금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몹시 황당무계하고 더구나 끔찍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믿어 주기를 바랄 마음은 없다. 나 스스로도 그것을 부인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믿어 주길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미치광이 짓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또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일 죽을 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마음 속의 무거운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 버리고 싶을 따름이다. 지금 나의 당면 목적은 한 가정에서 일어난 극히 가상적인 일련의 사건을 솔직하고 간결하게, 자질구레한 설명 같은 것은 빼버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은 나에게 공포를 주고, 번민을 주고, 나를 파멸로 인도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건은 나에게는 공포감을 주었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포감보다는 오히려 기이한 감을 줄 것이리라. 어쩌면 장차 지혜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내가 이토록 두려움을 갖고 이야기하려는 환상적인 이 이상한 사건을 실로 평범한 인과관계의 연속에 불과한 하나의 일상사로 규정짓고 나의 환상을 깨뜨리게 될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온순하고 인정이 많았다. 나의 이러한 성질의 온순함은 다른 아이들의 비웃음을 받을 지경이었다. 특히 나는 동물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를 귀여워한 부모는 여러 가지 애완동물을 나에게 사다 주었다. 이러한 동물들을 데리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것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쓰다듬어 주며 함께 노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이러한 성벽은 내가 성장함에 따라 더욱더 심해져서 어른이 되어서도 애완동물은 나의 주요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충실하고 현명한 개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애완동물들로 하여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애정은 어떤 사소한 계산도 있을 수 없는 자기 희생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변변치 못한 우정과 경박한 성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심금을 찌르는 비이기적인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일찍 결혼하였다. 다행히 나의 아내의 성질도 나와 비슷하였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것을 안 아내는 기회있을 때마다 귀여운 애완동물들을 사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갖가지 동물들을 사육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새며 금붕어, 개, 토끼, 작은 원숭이, 그리고 고양이까지 기르게 되었다. 특히 고양이는 몸집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전신이 새까맣고 놀랄 만큼 영리했다. 어떤 얘기 끝에 그 고양이가 영리하다는 말이 나오면 아내는, 내심으로 적잖이 미신을 믿는 편이었으므로, 으례껏 까만 고양이는 원래 마녀가 변장해 나온 것이래요! 하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들춰내는 것이었다. 아내가 뭐 별다르게 그 점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제 그 이야기가 선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서 하는 말이다. 플루토(저승의 신)- 이것이 고양이의 이름이었다-는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장난 친구였다. 매번 내가 먹이를 주었으며 집안 어디고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외출할 때 거리로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나와 고양이와의 우정은 몇 년이나 계속되었으나 그 동안 나의 기질이나 성격 전체가 음주벽- 고백하기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때문에 극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침울해지고 성질이 급해져 사소한 일에도 발끈하며 또 남의 기분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걸핏하면 아내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난폭한 성질은 애완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태 귀여워하던 동물들을 돌보아주지 않았을 뿐더러 학대까지 했다. 그러나 플루토에게만은 아직도 다소 애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토끼나 원숭이나 개들이 어쩌다 반가워하며 내 곁으로 오면 나는 사정없이 그것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나의 음주벽에서 비롯한 난폭한 성질은 심해져서- 아아, 알콜 중독과 같은 무서운 병이 또 있을까- 마침내는 이제는 늙어빠져 자칫하면 토라지기 잘 하는 플루토까지도 학대하게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밤, 내가 늘 잘 다니던 술집에서 잔뜩 술을 퍼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자 어쩐지 고양이가 나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양이를 붙잡았다. 나의 난폭한 행동에 놀란 플루토는 이빨로 할퀴어 손에 가벼운 상처를 냈다. 그러자 순간 나는 악마와 같은 분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만 나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원래의 나의 온순한 영혼은 순식간에 나에게서 떠나버리고 진(Gin)에 의해서 불붙은 악마보다도 더 처참한 사심이 나의 전신을 쫙 타고 내리며 후들후들 떨리게 했다. 나는 조끼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어 불쌍한 고양이의 목을 꽉 움켜잡고 소름이 끼치게도 고양이의 한쪽 눈알을 안과로부터 도려냈다. 아아, 이렇게도 그 저주스럽고 흉악한 행위를 기록하려니 나는 낯이 화끈거림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나의 몸은 달아오르고 몸서리치도록 떨린다. 아침에 잠이 깨고 이성이 되돌아왔을 때, 즉 어젯밤의 수면으로 하여 폭음의 여독이 풀어졌을 때 나는 어젯밤 내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 반은 공포를 반은 회한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도 미약하고 애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영혼까지를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후 나는 여전히 하루하루를 폭음으로 보냈고 곧 그 잔악했던 나의 행동에 대한 모든 기억을 술로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러는 동안 고양이는 점점 회복되어 갔다. 도려낸 눈은 다시 쳐다보기 싫도록 끔찍스러운 꼴이었으나 이제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전과 다름없이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내가 가까이만 가면 몹시 무서워하며 급히 도망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에게 조금은 옛날의 온순한 성격이 남아 있었는지 이전에 그토록 나를 따르던 고양이가 그렇듯 나를 보면 부리나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역시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뿐이었으며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마침내는 나를 최후의 파멸의 함정에 쓸어넣으려는 것처럼 악귀 같은 짓궂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이러한 감정에 대해 아직까지 철학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인간의 심정의 원시적인 충동의 하나, 즉 인간성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충동의 하나라고 확신한다. 해서 안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오히려 어리석게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바보스런 짓을 몇 백 번이라도 되풀이해 보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있을까? 그저 그것이 최선의 판단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올바른 판단을 배반하고 싶어지는 경향에 우리들은 늘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짓궂은 감정이 나를 사로잡아 마침내 최후의 파멸로 이끌어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고양이를 박해하도록 계속 충동질하고 결국은 고양이를 죽이게까지 한 것은 내 마음 속에 번민을 주고 나의 온순했던 본성을 유린하면서도 악을 위해 악을 범하려는 이 불가해한 욕구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냉연하게 고양이 목을 끈으로 졸라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눈물을 흘리고 마음 속에 심한 회한을 느끼면서 나는 고양이를 교살했던 것이다. 고양이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 고양이가 나에게 분노를 일으킬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고양이를 교살했던 것이다. 나의 불멸의 영혼을 더없이 자비롭게 더없이 위대한 신의 자비심까지도 미치지 못할 심연으로 추방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정도로 큰 죄악임을 알고 있으면서 그렇듯 끔찍스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참혹한 행위를 저지른 날 밤, 나는 불이야 하는 소리에 펀뜻 잠을 깼다. 침대 커튼에 불이 붙어 있었고 온 집안이 온통 불길에 싸여 있었다. 아내와 하녀 그리고 나는 가까스로 몸만 빠져나왔다. 무엇 하나 남김없이 모두 타버리고 나의 모든 재산을 송두리째 불살라 버렸다. 그후부터 나는 절망의 함정 속에 빠져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재난과 나의 광포했던 행위 사이의 어떤 인과관계의 연관성을 찾아보려 할 만큼 마음이 약한 위인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의 연관 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사소한 하나의 매듭이라도 불완전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화재가 일어난 다음 날 나는 불탄 곳에 가 보았다. 벽은 한쪽만 덩그렇게 남아 있고 모두 헐리어 있었다. 그 남아 있는 곳은 집의 중앙, 그러니까 나의 침대 머리맡의 그다지 두껍지 않은 벽이었다. 이곳만은 석회가 잘 타지 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 최근에 새로 발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 벽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부분을 자세하고도 열심히 바라보며 조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걸'이라든지 '참으로 신기한 걸!'이라든지 그밖에 그와 비슷한 말이 쉴새없이 오가고 있어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벽에 조각이나 한 것처럼 거대한 고양이의 상이 나타나 있었다. 그 인각(印刻)이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그리고 고양이의 목둘레에는 올가미 한 가닥이 감겨 있었다. 처음 이 유령-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을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과 공포는 극심했다. 그러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건물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정원수에 내가 고양이를 매달았던 일이 돌이켜 생각났다.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나를 깨울 작정으로 어쩌면 그 고양이의 시체를 누가 끌어내려 열린 창으로 던져넣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리라. 그리고 다른 쪽 벽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고양이는 최근에 새로 바른 석회벽에 틀어박혀 벽의 석회분과 화염과 고양이의 시체가 발산하는 암모니아분이 혼합되어 이와 같은 조상(彫像)이 남아 있게 됐으리라. 이와 같이 내가 자세히 추리해 본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나의 이성에 납득시키려고- 양심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했으나 역시 그것은 내 상상력에 대해선 심각한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여러 달 동안 그 고양이의 환영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 동안 마음 속에는 양심의 가책과도 같은-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막연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고양이를 없앤 것을 후회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항상 다니는 주점에서나 또 거리에서도 그 고양이와 똑같은 종류의 닮은 고양이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 허름한 하류 주점에서 얼근히 취해 정신없이 앉아 있으려니 그 주점의 중요한 가구에 해당하는 진 주(酒)나 럼 주(酒)를 넣어둔 술통 위에 쭈그리고 있는 어떤 까만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줄곧 그 술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좀더 일찍 그것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참으로 이상스런 일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 검은 물체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였다. 플루토와 아주 비슷한 크기로서 단지 한 가지만을 빼놓고는 꼭 그대로 닮은 것이었다. 플루토의 몸에는 한 군데도 흰털이 없었으나 거의 가슴 전체가 흰 백색의 반모로 덮여 있었다. 내가 손을 가져가 만져 주니까 그 고양이는 곧 일어나 목에서 골골 소리를 내고 내 손에다 몸을 비비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체해 준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이 고양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곧 주인에게 이 고양이를 사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주인은 자기네 고양이가 아니며 또 어디서 언제 온 것인지 모르고, 지금까지 본 일조차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그 술집에서 일어서려 할 때까지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니까 고양이도 따라 나설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는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몇 번이나 몸을 굽혀 고양이를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후 고양이는 이내 친해졌고 아내도 퍽 귀여워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 고양이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되는 뜻밖의 일이었다. 웬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양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염증을 느끼게 하고 화가 치밀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불쾌한 기분이 얼마 후에는 점점 격렬한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나는 고양이를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일종의 수치감과 이전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회한이 나로 하여금 고양이에 대한 학대를 막아 주었으므로 그 후 여러 주일 동안 때리지도 않고 별로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이 고양이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감을 느끼게 되고 마치 전염병 환자나 대하는 듯이 저주스러운 고양이로부터 피하게 되었다. 이 고양이가 한층 미워진 까닭은, 이 고양이를 데리고 온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더니 플루토와 꼭같이 한쪽 눈이 없는 애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인정이 많았으므로 그러한 점 때문에 더욱더 그 고양이를 측은히 생각하고 귀여워하였다. 아내의 이러한 성격이야말로 이전에 나의 특징이었던 동시에 나의 더없는 단순함과 더없는 순수한 쾌락의 원천이었던 상냥한 기분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양이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와 반대로 고양이는 더욱더 나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곤란하리만큼 고양이는 집요하게 나를 쫓아다녔다. 어디에 내가 앉든지 하면 언제 왔는지 내 의자 아래 앉아서 쳐다보거나 무릎 위에로 뛰어올라와 몸을 비벼대기도 했다. 내가 일어나 걸어가려고 하면 다리 사이에 끼어들어 나는 자칫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길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옷을 타고 가슴을 타오르기도 했다. 이럴 때면 나는 당장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전에 플루토에게 범했던 죄가 생각난 때문이기도 했으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까닭은 이 고양이가 몹시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 공포감은 정확히 말해서 몸에 어떤 위해를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지만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히 고백한다면- 실상 이렇듯 중죄수의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양이가 나에게 기름을 부은 그 공포감이라는 것은 가장 보잘것없는 망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고양이와 전에 내가 죽인 플루토 사이의 유일한 다른 점인 가슴에 있는 흰 반점에 대해서 이 흰 점이 좀 이상하지요! 하고 아내는 여러 번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반점은 크기는 했으나 본래는 아주 희미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변해 가서- 나의 이성은 오랫동안 그것을 나의 공상 탓이라고 부정하려 했다- 마침내는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났다. 그것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몸서리가 쳐지는 그런 형태였다. 그 때문에 나도 그 괴물을 미워하고 무서워하며 만약 그렇게 할 용기만 있다면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점의 형태를 지금에야 깨달았지만, 그것은 등골이 오싹하는 교수대의 형상- 아아, 그것은 바로 공포와 죄악, 고민과 죽음의 비애와 공포로 가득 찬 형구(刑具)의 형상이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보통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처참한 지경보다 더욱 처참한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못된 한 마리의 동물이- 그 동족을 내가 죽인 것도 사실을 속이면 그만인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에 맞추어 그대로 만들어진 인간인 나에게 이와 같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다니! 아아, 이미 밤이고 낮이고 나에게는 '안식의 기쁨'이라는 축복은 없어지고 말았다. 낮에는 낮대로 고양이는 한 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에는 또 밤대로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꿈 때문에 매시간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러면 얼굴에는 고양이의 뜨거운 입김이 훅훅 끼쳤으며, 또 내 가슴 위에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악마의 화신이 천근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고통에 짓눌리다 보니 나에게 남아 있던 한가닥의 선심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간악한 마음만이, 더없이 암담하고 간악한 마음만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갈수록 나의 분통은 점점 쌓여져서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인류를 증오하게 되었다. 시시각각으로 돌발하는 억제하기 곤란한 분노의 폭발에 나는 맹목적으로 내 몸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무 불평도 없이 그 고통을 꾹 참는 희생자는 불쌍하게도 언제나 내 아내였다. 우리는 가난했기 때문에 불에 타고 남은 옛집 지하실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지하실로 들어갈 때 아내가 뒤따라왔다. 그리고 고양이가 따라오다가 하마터면 나를 층계에서 넘어뜨릴 뻔하였었다. 나는 그만 화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격분에 싸여 이제까지 나를 연약하게 제지해왔던 어린아이 같은 공포심도 잊어버리고 불현듯 도끼를 들어 고양이를 내리찍으려 했다. 만약 내 마음먹은 대로 도끼가 떨어졌더라면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아내가 나를 재빨리 제지하여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간섭에 대해 순간적으로 악마와 같은 격노에 싸여 그만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그 도끼를 번쩍 쳐들어 대신 아내의 정수리를 내려 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 끔찍한 살인을 범한 후, 나는 곧 아내의 시체를 감출 방법을 깊이 궁리하였다. 낮이든 밤이든 어느 때고 이웃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시체를 집 밖으로 운반해 갈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으므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보았다. 어떤 때는 시체를 잘게 토막내어 불에 태워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어떤 때는 지하실 마루 밑에다 구멍을 파고 파묻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또 마당의 우물 속에다 던져 넣어 버릴까, 아니면 상품처럼 잘 포장하여 상자에 집어넣어 인부를 시켜 내가게 할까 하는 궁리도 해 보았지만 결국, 그보다도 문득 굉장한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즉 중세기의 승려들이 그들이 살해한 시체를 감쪽같이 벽에다 틀어박고 회칠을 다시 해버렸다고 여러 책에 전해져 있는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시체를 지하실 벽에다 틀어박고 발라 버릴 결심을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는 이 지하실이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지하실의 벽은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채 엉성했고 최근에 새로 석회를 조잡하게 발랐기 때문에 지하실 안의 습기로 아직 굳어지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쪽 벽에는 불쑥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본래는 벽난로와 연통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메워 버려 다른 벽들과 같아 보였다. 나는 이 벽이라면 틀림없이 벽돌짝을 뗀 다음 시체를 그 속에 틀어박고 누가 봐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벽을 본래대로 감쪽같이 해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다. 철정을 사용하여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벽돌을 떼어내고, 시체를 그 안에 넣어 안쪽에다 살짝 기대놓은 다음 벽돌을 본래대로 다시 쌓아 올렸다. 그 다음에는 콜타르와 모래, 털들을 사다가 신중히 석회 반죽을 만들어서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도록 벽돌과 벽돌 사이를 정성껏 발랐다. 일을 마쳤을 때 나는 이제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만족했다. 벽은 새로 손질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스러기도 하나 남김없이 낱낱이 주웠다. 나는 득의만만하여 주변을 휘돌아보며 "자, 이만하면 헛수고는 아니었지!"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다음 내가 할 일은 이와 같은 불행을 초래한 고양이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고양이를 기어이 죽여 버릴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순간에 고양이를 발견했더라면 고양이의 운명은 두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이 심술궂고 꾀많고 능글맞은 고양이는 조금 전의 나의 격렬한 분노에 공포를 느꼈던 때문인지 어디로 슬며시 사라진 채 내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징그러운 고양이가 없어져서 나는 오히려 찾던 일도 잊어버리고 흔쾌함을 느꼈다. 그 흔쾌한 기분은 이루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독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그날 밤, 고양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고양이를 데리고 온 이후의 이날 밤만은 적어도 살인죄라는 무거운 짐이 나의 영혼을 압박하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깊이 푹 잘 수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으나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다소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괴물은 무서워 영원히 도망친 것이리라. 고양이는 이 이상 더 나타날 리 없을 것이리라. 나의 행복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범한 그 가증스러운 죄의식도 거의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두세 번 심문을 받기는 했지만 나는 문제없이 대답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가택수색까지 받았으나 수상한 것이 발견될 리 없었다. 나의 장래의 행복은 이미 따놓은 당상처럼 확실하게 느껴졌다. 살인이 있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실로 뜻밖에도 한 대(隊)의 경찰들이 집으로 달려들어 또 한번 엄중히 가택수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시체를 감춘 곳이 발견될 리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경찰관들은 수색 중 나를 불러 함께 집안을 샅샅이 조사했다. 최후로 세번째인지 네번째인지 그들은 지하실로 내려갔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내 심장은 마치 천진난만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의 심장처럼 태연자약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두 팔을 가슴 위에 팔짱끼고 지하실의 이곳저곳을 유유히 활보하였다. 경찰관들은 이제 완전히 모든 의심을 풀고 떠나려 했다. 나의 가슴 속의 기쁨은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찼다. 나는 승리의 표적으로 다만 한 마디라도 말해서 나의 무죄를 그들에게 한층 더 확신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여러분." 하고 급기야 나는 경찰들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에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의심이 풀려서 무엇보다 기쁩니다. 그러면 자, 여러분의 건강을 빌며 아울러 여러분이 좀더 예의를 지킬 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집은, 이 집은 말입니다. 아주 구조가 썩 잘 되어 있답니다(무엇인지 술술 이야기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잘 지어진 집이라 할 수 있겠죠. 이 벽들은 말이죠- 자아, 여러분 이제 돌아가시렵니까? 이 벽들은 정말 견고하게 쌓여져 있답니다." 하고 여기서 일단 말을 멈추고는 괜히 으쓱한 마음에서 뻐기어 보고 싶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막대기로 아내의 시체가 들어 있는 바로 그 벽을 힘껏 후려쳤다. 그러나 하나님, 나를 악마의 손톱으로부터 구해 주옵소서! 내가 때린 그 소리의 음향이 멈추기도 전에 그 소리에 따라 그 무덤 속에서 한 마디의 대답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흐느껴 우는 어린애의 울음 소리와 같은 소리에 이어 잠시 후 갑자기 길게 소리를 끌며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높고 아주 이상하고도 잔인한 비명으로 변했다. 그것은 지옥에 떨어진 수난자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과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기뻐 날뛰는 악마들의 승리감에 충만해 있는 괴성이 합친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공포와 승리가 반반씩 섞인 슬피 울부짖는 비명이었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록한다는 것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이리라. 나는 실신한 듯 반대편 벽을 향해 비틀거렸다. 이 순간 경찰관들은 계단 위를 올라가다 말고 멈추어 공포에 떨며 소름끼치는 무서움에 혼이 나간 듯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열둘의 완강한 팔이 달려들어 그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벌써 대부분이 썩고 핏덩어리가 엉겨붙어 있는 시체가 경찰관들 눈 앞에 우뚝 나타났다. 그리고 그 시체의 머리 위에는 새빨간 입을 크게 벌리고 불꽃 같은 애꾸눈을 번뜩이는 저 무서운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를 격노시켜 살인을 저지르게 한 것도, 또 비명을 질러 사형대에 끌려 가게 한 것도 그 모두가 이 고양이의 잔악한 계교였다. 나는 이 괴물을 시체와 함께 벽 속에 넣고 발라 버렸던 것이다. <끝> 4.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에드가 알렌 포우(Edgar Allan Poe) 사이렌이 어떠한 노래를 불렀으며 또한 아킬레스가 여자들 틈에 몸을 숨겼을 때 자기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물론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토마스 브라운 경 분석적인 것으로 논의되고 있는 정신의 여러 양상이란 본래 거의 분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그 결과만을 가지고 느낄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이들 여러 양상을 과도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항상 발랄한 향락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힘센 사람이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을 즐겨, 자신의 육체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석가는 자기가 분석해내는 정신적 활동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에도 쾌락을 발견한다. 그는 수수께끼라든가 어려운 문제 및 상형문자 등을 좋아하며, 또한 이를 재치있게 풀어서는 보통 사람의 이해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못 미칠 초자연일 정도의 명석성을 보여 주었다. 방법상으로 온갖 정성을 다해서 얻어낸 그의 결과는 그야말로 직각(直覺)이 있는 것처럼 보여 주었다. 분석의 능력은 수학의 연구가 특히 최고 부문이요, 단순히 이에 역행하는 방법으로 부당하게도 해석학이라고 불리게 된 것에 의해서 아무래도 매우 활발해질 것 같다. 그러나 계산한다는 것은 본래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체스를 두는 사람은 분석을 하지 않고 대신 계산을 한다. 따라서 체스놀이가 심적성질(心的性質)에 미치는 효과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두서없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서 다소 색다른 이야기의 서문으로 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왕 내친 김에 복잡한 듯하면서도 어이가 없는 체스보다는 허식이 없는 드래프츠 쪽이 사색적인 지성의 면에서 보다 확실하고, 보다 유효한 높은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단언하고 싶다. 체스에서는 말이 따로따로 기묘한 움직임을 하며 그 가치 또한 여러 가지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저 복잡한 것을 심오한 것으로 오인하게 되는(신기한 오류도 아니지만)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주의력이 유력하게 작용한다. 그것이 잠시라도 허술해지면 착각을 하여 손실을 입거나 패한다. 말을 움직이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복잡하므로 그러한 실수의 기회가 배가된다. 그리하여 거의 틀림없이 명석한 사람보다 집중적인 사람이 승리한다. 이와는 반대로 드래프츠에서는 움직임이 다 같으며 또한 변화가 없으므로 실수를 범하는 율도 적고 단순한 주의도 그다지 필요치 않으므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명석하고 뛰어난 쪽으로 돌아간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王) 말이 4개나 되어 당연히 실수할 까닭이 없는 드래프츠의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 경우 승리가 결정되는 것은(두 경기자가 완전히 호각이라 치고) 지력을 최고로 발휘케 한 결과인 말의 오직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수단이 없으므로 분석가는 상대의 마음 속에 자신을 투입하여 자기와 상대를 똑같은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곧잘 상대를 유인하여 착각에 빠지게 하거나 몰고 가서 오산을 범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흔히 그야말로 바보스러울 정도의 간단한 일이지만)을 이내 깨닫게 된다. 휘스트는 특히 소위 계산력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주목되어 최고급의 지력을 지닌 사람들이 체스를 유치하다고 피하며 그야말로 이상할 정도로 휘스트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실히 이런 유의 게임 중 이렇듯 분석의 능력이 필요한 것도 없다. 기독교국에서 제일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저 체스의 명인이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휘스트를 잘한다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싸우는 보다 더 중대한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서 능수(能手)라고 한 말은 정당한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근원을 이해한다는 식의 어떤 기(技)에 완전히 정통했음을 의미한다. 이들 근원은 다양한 동시에 다채로우며 거의 보통 사람의 이해력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사고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의깊게 관찰한다는 것은 뚜렷하게 기억하는 일이며, 여기까지는 집중적으로 체스를 두는 사람도 휘스트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호일의 법칙(게임 자체의 단순한 메카니즘에 기초를 둔 것)도 충분히 또한 일반적으로 익힐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기억력이 좋고 '방식'대로만 해 나가는 것이 게임을 잘 하는 요령으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석가의 재치는 단순한 법칙의 한계를 넘어선 일에서 나타난다. 그는 말이 없는 가운데 많이 관찰하며 또한 추리한다. 아마 그의 동료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얻은 지식의 범위의 차이는 추리의 타당성보다도 관찰의 질에 있다. 필요한 지식이란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이러한 게임을 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안에만 파묻혀 있지를 않는다. 또한 게임이 목적이라고 해서 다른 일을 가지고 하는 추정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 편의 얼굴을 보고 난 다음 상대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조심스럽게 비교한다. 상대편의 손에 있는 카드의 순서 등을 생각하고 카드 한 장 한 장을 바라보는 당사자의 눈매로 하나하나를 셈한다. 그는 또한 게임의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얼굴의 변화에 주의한다. 그리하여 확신을 비롯해서 놀라움, 승리, 분함 등의 표정의 차이에서 사고의 자료를 모은다. 일단 내놓았던 카드를 모으는 방법을 통해서 상대방이 그 조에서 다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한다. 뭔가 허식으로 하는 행동은 테이블 위에 카드를 내던지는 모양으로 알아버린다. 우연히 또는 부주의하게 던진 한 마디와 그 밖에 카드를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뒤집는 일, 그리고는 이를 숨기려고 신경을 쓰거나 반대로 태연스러운 태도, 카드를 세는 솜씨와, 이를 배열하는 순서, 당황, 망설임, 핏대를 올리는 등- 이 모든 것이 한 번 보아서 직각(直覺)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그의 지각의 힘은 이내 그 진상을 파악해 버린다. 그리하여 게임이 두세 번 지나고 나면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모든 카드를 다 알아 버린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는 다른 친구들이 다 같이 자신들의 카드를 밖으로 내보이고 있는 것처럼 틀림없이 자기의 카드를 내놓는다. 분석력을 단순한 공복의 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분석가는 필연적으로 연구도 잘 하지만, 연구를 잘 하는 사람 중에는 각별히 분석에 서투른 사람이 흔히 있기 때문이다. 연구하는 능력은 보통 구성력 내지는 결합력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골상학자들은 이 힘을 본질적인 능력으로 생각하여 별도의 기관을 이에 할당하고(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나는 믿는다) 있지만 이 힘은 다른 점에서 거의 백치에 가까운 지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곧잘 발견된다. 그리하여, 종래의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주의를 끌었을 정도였다. 공부를 하는 힘과 분석적 능력의 사이에는 엄밀한 의미에서나 성질상으로도 닮은 데가 많다. 그러면서도 공상과 상상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실제로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항상 공상적이며, 또한 상상력에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분석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명제의 주석과 같은 것으로 보일 것 같다. 18XX년의 봄에서 여름에 걸쳐, 파리에서 살고 있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오귀스트 뒤팡이라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이 젊은 신사는 양가(良家)의- 실제로 이름 있는 집안의 출신이었는데 여러 가지로 운이 없어 가난해졌으며, 그 때문에 용기마저 잃었다. 그래서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을 하거나, 자기의 재산을 다시 만회해 보려는 의욕도 없었다. 채권자들의 호의로 부모가 물려준 재산의 나머지가 아직도 조금 있었으므로 그것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무섭게 절약을 해가며 이럭저럭 생활 필수품을 구할 뿐, 여분의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책이 그의 유일한 사치였으며 또한 파리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몽마르트 가의 이름도 없는 도서관에서였다. 우리는 우연히 극히 귀중한 희서를 똑같이 찾고 있었던 바람에 한층 더 친해졌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를 말할 때 늘 나타내는 솔직함을 가지고 그는 자기 집안의 유래를 자세히 말해 주었는데, 내게는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 나는 또한 그의 독서 범위가 상당히 넓은 데 대해 경탄했다. 특히 분방할 정도의 격렬한 그의 상상력과 발랄한 동시에 청신한 점에 의해 나의 영혼이 불타오름을 느끼게 했다. 당시 나는 자신이 구하는 것을 파리에서 찾고 있었으므로 이런 사람과 사귀는 것이, 다시 없이 소중하다고 여긴 나머지 이런 생각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결국 내가 그 도시에 있는 동안에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나의 생활이 그보다는 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성 밖의 생 제르맹 변두리의 쓸쓸한 곳에 위치하여 금시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낡고 기괴한 집을 세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이었으며 어떤 미신인지 묻지는 않았지만, 미신이 얽혀 있는 그러한 집이었다. 또한, 가구를 비치하는 비용도 내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둘의 공통적인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공상적이요, 우울한 면에 어울리는 가구들을 마련하였다. 이곳에서의 우리의 일상 생활이 만약 세상에 알려졌다면 우리는 미친 사람이라고- 하긴 당연히 해를 끼치지 않는 광신이라고- 간주되었을 게 틀림없다. 우리의 은둔 생활은 완전했다. 방문자는 한 사람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실제로 우리가 숨어 살고 있는 곳에 대해서는 옛날 친구들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비밀로 해두었으며, 또한 뒤팡의 경우에는 파리에서 세상과 교섭을 끊은 지도 여러 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직 둘이서만 생활하였다. 밤 그 자체를 위해서 밤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게 친구의 기호(라고 하는 말 이외로 무엇이라 표현할까?)였다. 이러한 기벽에 나도 언제부터인지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다른 버릇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방종스럽게 미친 사람과 같은 그의 기분적인 행동에 합세하고 말았다. 칠흑의 밤의 여신이 항상 우리와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모조(模造)할 수가 있었다. 희미하게 날이 밝기 시작하면 우리는 낡은 건물의 육중한 모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는 강한 향을 섞은 두 개의 촛불을 켰다. 그야말로 희미하고 음산한 빛을 밝히는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 빛으로 책을 읽었으며 또한 썼고, 이야기를 하며- 몽상에 빠지는 가운데, 시계가 정말로 어둠이 온 것을 알려줄 때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어울려 거리로 나가 낮의 이야기를 계속하는가 하면 밤이 이슥할 때까지 먼 곳을 걸어다녔다. 이렇게 해서, 번화한 도회지의 이상한 빛과 그늘 사이에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무한한 정신적인 흥분을 찾았다. 이런 때 나는 뒤팡의 분석적인 특수한 능력을 인정하는가 하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봐서 사전에 기대했던 일이지만). 또한 그는 그러한 능력을 보이는 게- 반드시 자랑하고 싶어서는 아니지만- 상당히 기쁜 모양이었으며 또한 그런 일에서 생기는 유쾌함을 망설이지 않고 고백하였다. 그는 싱글거리면서 자기가 보는 인간이란 대개가 가슴의 창문을 열어놓고 있는 꼴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 후에는, 항상 나의 마음 속을 잘 알고 있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 그야말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이런 경우의 그의 태도는 냉랭했으며, 방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평소에는 성량이 풍부한 테너이던 목소리가 최고음이 되며, 만약 발음이 침착하고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한 기분 속에 있는 그를 보면 곧잘 이중 영혼이라고 하는 옛날의 철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중의 뒤팡- 창조적인 뒤팡과 분석적인 뒤팡-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흥미롭게 여긴다. 지금 한 말을 가지고 뭔가 내가 신비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뭔가 소설을 쓰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프랑스 친구에 대해서 한 말은 단순히 흥분했거나 또 다분히 병적인 지성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가 한 말의 성질에 대해서는 실제로 예를 드는 것이 가장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날의 일이었다. 우리는 팔레 르와이얄 부근의 길고 지저분한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다 같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최소한 15분 정도는 피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뒤팡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치는 너무 키가 작아. 바리에테 극장에나 어울릴 작자야, 정말이야." "정말 그래." 하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그런데 처음에는 상대가 내 마음 속에서 생각했던 것과 바로 일치시킨 이 기묘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그만큼 나는 생각에 몰두해 있었지만). 이어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매우 놀랐다. "뒤팡." 하고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데. 솔직히 고백하네만 정말 놀랐어. 자신의 감각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자네가 어떻게 알았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 하고 여기서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상대방이, 정말로 내가 생각한 사람의 일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샹티리의 일이겠지." 하고 그가 말했다. "왜 그 뒤를 계속하지 않지? 자네는 그 친구가 몸이 작아 비극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을 텐데." 정말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샹티리란 본래 생 드뉘 가의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연극에 미쳐 크레비용의 비극 크레륵세스의 역을 맡아 심한 악평을 받았던 것이다. "제발 얘기 좀 해줘." 하고 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어떠한 방법으로- 만약 방법이 있다면 말야- 내 마음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는지 그걸 말야." 실제로 나는 말보다 더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일장사지."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크세륵세스를 비롯해서 그러한 역을 맡아 하려면 그 구두 수선공으로서는 키가 모자란다는 결론을 자네로 하여금 내리게 한 게." "과일장수라고? 놀랐는데- 과일장수란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이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부딪친 그 사나이지- 한 십오 분쯤 지났을 거야." 이 말에 나도 생각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C-거리에서 이 거리로 구부러졌을 때 머리에 커다란 사과 바구니를 인 과일장수가 실수로 하마터면 나를 넘어뜨릴 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샹티리와 어떠한 관계가 되는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뒤팡의 모습에는 거짓말장이와 같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 설명을 하지." 하고 그가 말했다. "자네가 완전히 납득하도록 우선 내가 자네한테 말을 걸었을 때부터 그 과일장수와 충돌했을 때까지의 자네 생각의 경로를 거슬러올라가 보기로 하겠어. 사슬의 커다란 환은 이렇게 되는 거야- 샹티리, 오리온 성좌, 니콜즈 박사, 에피쿠로스, 절석법(截石法), 거리의 포석, 과일장수." 자기 생애의 어떤 시기에 자기 마음이, 어떤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거슬러올라가 보는 데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란 정말로 흥미가 있으며 처음 시도하는 사람으로서는,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얼핏 보아 무수한 거리가 있고 연결성이 없는 데 놀라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친구가 지금 한 말을 듣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의 놀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C-거리를 나오기 조금 전에, 만약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우린 말의 얘기를 하고 있었지.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화제였어. 이 거리로 꼬부라졌을 때 머리에 큰 바구니를 인 과일장수가 급히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다가 보도를 수선하고 있는 곳에 모아 두었던 포석 더미에 자네를 밀어붙였어. 자네는 멋대로 흩어져 있는 돌조각을 밟고 미끄러져 발목을 조금 뼜지. 그래서 화가 난 듯한 언짢은 표정으로 두어 마디 중얼거리면서 쌓여 있는 돌을 돌아본 다음 이어 잠자코 걷기 시작했던 거야. 각별히 자네를 살펴본 것이 아닐세. 그렇지만 근래에 와서는 관찰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게 습관이 돼버렸어. 자네는 한동안 땅을 굽어봤지- 무뚝뚝한 표정인 채 포석의 구멍이라든가 수레바퀴 자리를 힐끔힐끔 보면서 말야(그래서 자네가 아직도 돌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러던 중 우리는 라마르틴이라고 하는 골목까지 왔지. 그곳에는 이중으로 못을 박은 포석이 시험적으로 깔려 있었어. 여기에 오자, 자네의 얼굴이 밝아지더군. 그리곤 자네의 입술이 움직였으므로 자네가 '절석법'이란 말을 했을 게 틀림없다고 짐작한 거야. 이런 종류의 포석에 대해서 매우 점잖게 표현되는 말이니까. 그렇지 자네가 '절석법' 하고 입 속에서 말했다면 반드시 원자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 그리고 얼마 전 우리가 이 학설에 대해서 토론했을 때 내가 한 말이 있었어. 즉 이 고귀한 희랍인의 막연한 추측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대신 참으로 기묘하게도 근세의 성운 우주 개벽론에 의해서 확인되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했으므로 자네가 오리온 성좌의 대성운을 올려다볼 것으로 예상한 거야. 반드시 그러리라 믿었지.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자네가 하늘을 올려다보더군. 그래서 자네의 생각에 그때까지 제대로 쫓아갔다는 것을 확신했어. 한편 어제 '뮤제'에 나온 샹티리에 대한 신랄한 악평 중 그 평자는 구두 수선공이 비극을 연기하기 전에 이름을 바꾼 것을 비꼬면서 우리들이 늘 이야기했던 라틴어의 시구를 인용했어. 그것이 바로 옛날 말은 그 처음 음향을 잃어버렸노라. 라는 내용이지. 이것은 우리온이라고 쓴 오리온을 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 그래서 이 설명에 관련된 신랄한 점 등으로 해서 자네가 그것을 잊을 리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자네가 오리온과 샹티리라는 두 개 관념을 결부시킨다는 게 분명했어. 과연 자네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입가에 띠운 미소의 성질로써 알 수 있었던 거야. 자네는 불쌍한 구두 수선공이 호되게 당한 것을 생각한 거야. 그때까지 자네는 웅크리고 걸었는데 그때 가서 몸을 주욱 펴더군. 그래서 나는 자네가 샹티리의 작은 체구를 생각했다고 확신했지. 그래서 나는 자네의 침묵을 깨뜨리며 그 친구는- 샹티리는- 작은 사나이이기 때문에 바리에테에나 어울릴 거야, 하고 말한 것이지." 그후 얼마 동안 지났을 때 <트리뷔노>의 석간을 훑어보고 있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기괴한 살인사건- 오늘 새벽 3시경 생 로슈 구의 주민들은 레스파아네 부인과 그 딸 까미유 레스파아네 양 단둘이서 살고 있는 모르그 가의 한 집 4층에서 새어나오는 계속적인 비명 때문에 잠을 깼다. 늘 하는 방법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금 지나 쇠로 된 지렛대로 문을 부수고는 8, 9명의 이웃 사람과 2명의 순경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에는 비명소리가 멎어 있었다. 그러나, 일동이 계단을 뛰어오르자 격렬한 싸움을 하는 것 같은 거친 소리가 두어 마디 들렸다. 아무래도 집 위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계단을 두번째 꺾어 돌았을 때는 그 소리도 멈추어 온통 조용하기만 하였다. 일동은 사방으로 나누어져 방에서 방으로 옮겨가며 뒤졌다. 4층 뒤켠에 있는 커다란 방으로 갔을 때(그 방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으므로 억지로 열었지만),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전율케 하는 광경이 전개되어 있었다. 방안은 난잡하기 그지없었으며- 가구들이 파괴되어 사방으로 내던져져 있었고, 침대가 하나만 있었는데 침구가 벗겨져 마룻바닥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있었다. 의자 위에 피가 묻은 면도칼이 보였다. 난로 위 또한 피에 물든 길고도 너풀대는 회색의 사람 머리카락단이 두서너 줌 있었는데, 뽑힌 모양 같았다. 바닥에는 나폴레옹 금화 4개와 황옥의 귀걸이 1개 그리고 커다란 은수저 3개 및 알제리아 금속의 작은 수저 3개, 금화 약 4천 프랑을 넣은 2개의 주머니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위치한 옷장의 문이 열려 있었으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안에 남아 있었다. 분명히 약취당한 것 같았다. 철제의 작은 금고가 침구(침대의 것이 아닌) 밑에서 발견되었다. 열려 있었으며 열쇠가 꽂힌 채였다. 안에는 몇 통인가 낡은 편지와 별로 중요치 않은 서류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레스파아네 부인의 모습은 이 방에 없었다. 그렇지만 벽난로 속에서 상당한 그을음이 발견되었으므로, 굴뚝 안을 조사해 본 결과(말하기도 무서운 일이지만) 머리를 밑으로 한 딸의 시체를 끌어낼 수 있었다. 좁은 틈새에 그런 자세로 상당히 위까지 밀려들어가 있었다. 몸은 아직도 따스했다. 살펴보니 긁힌 상처가 있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어거지로 거칠게 밀어 넣고 또한 끌어내고 해서 생긴 것이었다. 얼굴에는 마구 할퀸 상처가 많았으며 목에도 거무스름한 상처와 깊은 손톱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피해자는 목을 졸려 죽은 것 같았다. 온통 집안을 수색해 봤으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일동은 건물 뒤쪽 돌을 깐 조그마한 마당으로 나가봤다. 그러자 그곳에 노부인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는데 목이 완전히 잘린 채였다. 막상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머리도 동체도 무섭게 찢어져 있었으며- 몸통은 거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무서운 괴사건은 현재 전연 단서가 없는 것 같다. 다음 날 신문은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 보도했다. 모르그 가의 참극.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 무서운 사건(프랑스에서는 사건이란 말을 우리처럼 가벼운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에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빛을 던질 만한 것은 아직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하 진술된 중요 증언을 다 게재키로 한다. 세탁부 포오린 뒤부울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과거 3년 동안 세탁일을 봐왔으므로 피해자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노부인과 딸의 사이는 다정했으며- 서로 깊이 사랑하였다. 세탁비는 다 지불해 주었다. 두 사람의 생활 내용이라든가 취향 등은 모른다. 부인은 점치는 것을 업으로 했던 것 같다. 돈을 모았다는 소문이었다. 세탁물을 가지러 가거나 가지고 갔을 때 그 집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분명히 하인은 한 사람도 두지 않았다. 이 건물에는 4층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도 가구가 없는 것 같았다. 담배장수 피에르 모로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때까지 4년 동안에 걸쳐 레스파아네 부인한테 소량의 궐련과 냄새 맡는 담배를 팔았다. 그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계속 그곳에서 살고 있다. 부인과 딸은 시체가 발견된 그 집에서 6년 이상이나 살고 있다. 이전에는 보석상이 살고 있었으며, 위에 있는 방들은 여러 사람한테 세를 주었다. 집은 레스파아네 부인의 소유였다. 그녀는 세든 사람이 집을 망치는 것을 꺼려 직접 그곳으로 이사해 왔으며 어떤 방도 빌려 주지 않기로 했다. 노부인은 마치 어린애와 같았다. 증인은 6년 동안에 걸쳐 딸을 대여섯 번 본 적이 있다. 둘은 그야말로 숨어 살고 있듯 했는데- 돈이 많다는 소문이었다. 이웃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부인은 점을 친다는 것 같았다. 정말 같지 않다. 노부인과 딸, 짐을 나르는 사람이 한두 번, 의사가 약 8, 9회 출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밖의 많은 이웃들의 증언도 거의 비슷했다. 이 집에 자주 출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레스파아네 부인과 딸의 친척으로 생존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바깥 창문의 덧문은 거의 열려진 적이 없었다. 안쪽 창의 덧문 역시도 4층의 커다란 뒷방을 제외하고는 항상 닫혀 있었다. 집은 좋은 집이며- 별로 낡지도 않았다. 순경 이시도르 뮈제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아침 3시에 그 집으로 불려갔으며 문 쪽에 약 2, 30명이 들어가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결국 총검으로- 쇠 지렛대가 아니라- 그 문을 간신히 열었다. 두 쪽으로 된 문은 양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으며 아래 위로 빗장이 질려 있지 않아 여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비명은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어 갑자기 그쳤다. 그것은 누군가 한 사람의(혹은 수명의) 심한 고통의 절규 같았으며- 큰 소리로 길었으며 결코 짧고 빠른 말이 아니었다. 증인이 앞장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첫번째로 꺾었을 때 언성을 높여 다투는 듯싶은 두 가지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거칠었으며 또 하나는 날카로운- 아주 묘한 소리였다. 거친 편의 목소리가 몇 마디 들렸다. 그것은 프랑스인의 말이었다. 여자의 음성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사크레(죽일 놈!)'라는 말과 '디아블(큰일인데!)'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날카로운 쪽은 외국인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것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스페인어로 믿어진다. 이 증언이 말한 방안 및 시체의 상태는 어제 본지에 게재한 그대로다. 이웃 은세공업 앙리 뒤발의 증언에 의하면 대체로 뮈제의 증언을 믿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 역시도 처음에 이 집으로 들어간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들은 집안으로 밀고 들어가자마자 밤이 이슥한 데도 불구하고 이내 몰려든 군중들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문을 닫았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대해서 이 증인은 이탈리아 사람의 목소리로 생각했다. 프랑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남자의 음성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여자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말은 모른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억양으로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부인과 그 딸을 알고 있다. 둘과 곧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날카로운 음성은 피해자 두 명의 목소리가 아닌 게 분명하다. -요정업자 오덴하이머, 이 증인은 자진해서 증언했다. 프랑스어를 말할 줄 몰랐으므로 통역을 통해서 진술했다. 암스테르담 태생이다. 비명이 들렸을 때 그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비명은 수분 정도- 아마 10분 정도- 계속되었다. 길고 높은 소리였으며 두렵고 괴로운 듯했다. 그 집안으로 들어간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한 가지만 빼놓고는 앞서의 증언을 확인했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남자의- 프랑스인의 음성임이 틀림없다. 말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가 높고 빨랐으며- 고저가 있고- 분명히 노여움과 두려움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귀에 거슬렸으며- 날카롭다기보다 귀에 거슬렸다. 날카로운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다. 거친 음성 쪽은 '사크레'와 '디아블'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했으며, 또 한 번은 '몽듀(아이구!)'라고 말했다. 드로덴 가의 미뇨 부자(父子)은행을 경영하는 쥘 미뇨, 아버지이다. 레스파아네 부인은 다소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8년 전 봄부터 그의 은행과 거래를 시작했다. 자주 소액씩 예금을 했다. 죽기 3일 전까지 조금도 찾아가는 일이 없었는데 그날은 직접 와서 4천 프랑의 금액을 찾아갔다. 이 돈은 금화로 지출되었으며 행원 한 사람이 돈을 집으로 전달했다. 미뇨 부자은행의 행원 아돌프 르 봉의 증언에 의하면 당일 정오 경 그는 4천 프랑을 두 개의 주머니에 넣어 레스파아네 부인과 함께 집으로 동행했다. 문이 열리자 딸이 나와서 그의 손에서 주머니 하나를 받아 주었으며, 또 하나는 노부인이 받았다. 그는 이어 인사를 한 다음 그곳을 떠났다. 그때 노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뒷골목이었으며-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재단사 윌리암 버어드의 증언에 의하면 그도 집안에 들어갔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영국인이며 파리에 산 지 2년이 된다. 최초로 계단을 오른 자들 중의 한 명이다.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거친 목소리는 프랑스인의 음성이었다. 몇 마디는 알아들었지만 지금은 다 생각해낼 수가 없다. '사크레'와 '몽듀'라는 말은 확실히 들었다. 그때 몇 사람인가가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은 소리- 할퀴고 붙잡고 하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소리 쪽은 무척 높아- 거친 소리보다 높았다. 영국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독일 사람의 음성 같았다. 여자의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독일 말은 모른다. 이상의 증인 중 4명은 다시 호출되었다. 그들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레스파아네 양의 시체가 발견된 방의 문은 일동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안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완전히 조용했으며- 신음하는 소리고 뭐고 들리지 않았다. 안쪽 방과 바깥쪽 방들의 창문이 다 같이 닫혀 있었고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 두 개의 방 사이의 문은 닫혀 있기는 했으나 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바깥 방에서 복도로 통하는 문은 쇠가 채워져 있었고 열쇠가 안쪽에 있었다. 4층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있는 바깥쪽의 작은 방은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이 방은 낡은 침대를 비롯해서 상자와 그밖의 물건들로 차 있었다. 이들 물건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세심하게 수색하였다.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이 빠짐없이 세밀하게 수색되었다. 굴뚝은 굴뚝 소제기로 몇 번이나 올리고 내리고 하였다. 집은 망사드르(다락방)가 있는 4층 건물이었다. 지붕에 붙은 들창은 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여러 해 동안 연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와 문을 열어젖혔을 때의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는 증인들의 진술이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은 3분밖에 안 되었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5분이 걸렸다고 했다. 문은 간신히 열 수 있었다. 청부업자 알폰조 가르시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모르그 가에 살고 있다. 스페인 태생이다. 집안으로 들어간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층으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신경질적이어서 흥분의 영향을 걱정했던 것이다.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거친 소리는 프랑스 사람이 음성이었다.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날카로운 쪽은 영국인의 목소리였다- 이것은 확실하다. 영어는 몰랐지만 소리의 억양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제과업자 알베르토 몽타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최초에 계단을 올라간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문제의 목소리를 들었다. 거친 음성은 프랑스인의 목소리였다. 몇 마디는 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음성의 말은 알 수 없었다. 빠르고 고르지 못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일동의 증언을 확증한다. 본인은 이탈리아 사람이다. 러시아 사람과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다. 호출된 수명의 증인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4층에 있는 방의 굴뚝은 좁아서 사람이 통과할 수 없다. '굴뚝소제'를 했다는 것은 굴뚝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원통형의 청소용 솔을 사용했음을 말한다. 이 솔로 집안에 있는 굴뚝이란 굴뚝은 모두 쑤셔 보았다. 일동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사이에 사람이 내려갈 만한 통로란 뒤에는 하나도 없다. 레스파아네 양의 시체는, 일행 중 4, 5명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끌어낼 수 없었을 정도로 굴뚝 안에 힘껏 처박혀 있었다. 의사 폴 뒤마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다. 그는 새벽 무렵에 시체를 검시하기 위해 불려 나왔다. 그때 시체는 두 개가 다같이 레스파아네 양이 발견되었던 방 침대의 헝겊 위에 놓여 있었다. 딸의 시체에는 심한 타박상과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 굴뚝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바람에 그러한 꼴이 된 게 분명했다. 목이 심하게 긁혀 있었다. 턱 바로 밑에 몇 개인지 할퀸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또한 손가락의 흔적이 분명한 납빛깔의 반점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얼굴은 무섭게 변색했으며 눈알이 튀어나와 있었다. 혀의 일부가 물려서 끊기어 있었다. 명치에서 무릎으로 눌려서 생긴 것 같은 커다란 타박상이 발견되었다. 뒤마 씨의 감정에 의하면 레스파아네 양은 한 사람 내지 수명에 의해서 교살당했다. 어머니 쪽의 시체는 무서울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오른쪽 다리와 팔의 뼈가 온통 으깨어져 있었고 왼쪽 경골과 왼쪽의 모든 늑골이 심하게 부러져 있었다. 온몸이 무섭도록 상처를 입어 변색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해가 어떤 식으로 가해졌는지 알 길이 없다. 목제의 무거운 곤봉 혹은 넓적한 철봉- 의자- 뭔가 크고 무겁고 또한 둔한 흉기를 만약 힘이 센 남자가 사용했다면 그러한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라면 여하간 흉기를 사용해서도 그와 같은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 증인이 보았을 때는 피해자의 머리 부분이 완전히 동체에서 떨어져, 그것도 역시 심하게 으깨져 있었다. 목은 분명히 뭔가 예리한 기구로- 아마 면도날로- 끊겨져 있었다. 외과의사 알렉산드르 에티엔느는 시체를 검시하기 위해서 뒤마 씨와 함께 불려 나왔다. 뒤마 씨의 증언 및 감정을 확인한다. 그밖에도 수명이 조사를 받았으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항은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모든 점에서 그렇듯 묘하고 그렇듯 불가해한 살인사건- 만약 정말로 살인이 있었던 것이라면-은 일찍이 파리에서 없었다. 경찰은 전연 오리무중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몰랐다- 그야말로 드물게 보는 사건이다. 게다가 단서 같은 것은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 동 신문의 석간은 생 로슈 구에 아직도 흥분이 계속되고 있으며- 범죄가 일어난 집이 재차 세밀하게 수색되었고 다시금 증인이 호출되어 증언이 청취되었으나 하등 얻은 것이 없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보도된 사실로서는 하등 유죄라고 할 만한 점이 없음에도 아돌프 르 봉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는 것이 추가로 게재되어 있었다. 뒤팡은 이 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태도로 봐서 최소한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이 사건에 대한 비평 같은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살인 사건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물은 것은 겨우 르 봉이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 나로서는 이 사건이 해결하기 어려운 괴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파리 시민 전체의 의견과 같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살인범을 탐지해 낼 수 있는 방법을 나로서는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겉치레뿐인 조사를 가지고 어떤 수단을 강구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돼." 하고 뒤팡이 말했다. "파리의 경찰이 명철하다는 칭찬을 받고 있지만 그저 얄팍하게 약을 뿐이야. 그들이 하는 짓은 임기응변의 방법 이상으로 방법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고 있어. 그들은 수단을 여러 가지로 자랑하지. 그러나 그것이 때에 따라 목적에 잘 맞지 않으므로 우리한테는 그 쟈르뎅 나리가 음악을 좀더 잘 듣기 위해서 실내복을 가져오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 그들이 도달한 결과에는 간혹 놀라운 것도 있지. 그러나 그 대부분은 그저 부지런하게 활동한 데서 얻은 것뿐야. 이러한 근면과 활동만 가지고 소용없을 때에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아. 예를 들면 비도크는 추리를 잘 하고 끈기가 있는 사나이였지. 그러나 사고방식에 교양이 없었고 또한 늘 조사에만 너무 치우친 나머지 실수를 했어. 그는 사물을 너무 가까이 가지고 봤기 때문에 시력이 나빠진 셈이지. 한두 가지 점은 아마 아주 똑똑히 봤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물을 전체로 볼 수 없었던 거야. 이런 까닭으로 해서 지나치게 깊어지는 경우가 생겨. 진리란 반드시 우물 속에만 있는 것은 아냐. 사실 중요한 지식이란 항상 겉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깊이는 우리가 진리를 찾고자 하는 계곡에 있는 것이며 그 진리가 발견되는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냐. 이런 유의 오류는 그 모양이나 원천이 천체를 응시할 때의 일로 잘 알 수 있어. 별을 흘끔 보는 것이- 망막의 바깥쪽을(그곳은 안쪽보다 약한 광선을 느끼기 쉽다) 별로 향해서 옆눈으로 보는 것이 별을 더 똑똑히 보게 되지- 별의 반짝임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거야. 그 반짝임은 눈을 별쪽 정면으로 돌림에 따라 희미해져 가는 거야. 후자의 경우는 실제로 많은 광선이 눈에 들어오니까. 그러나 앞의 경우에는 보다 완전한 감수 능력이 있는 거지. 과도하게 깊으면, 사고를 어지럽게 하고 힘을 약하게 만들어. 너무 오랫동안 한 마음으로 또는 정면에서 지켜보게 되면 금성까지라도 아마 하늘에서 점점 없어져 보이지 않게 될는지도 몰라. 이번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야, 이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다소 조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애. 조사를 하게 되면 아마 즐거운 일거리가 될 거야(즐거움이란 말을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은 좀 이상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한 르 봉은 전에 나를 위해 해준 일이 있어서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군. 나가서 우리들 자신의 눈으로 그 집을 조사해 보기로 해. 나는 경찰국장인 G씨를 잘 알고 있으니까, 필요한 허가를 얻기란 문제가 없을 거야." 허가를 얻었으므로, 우리는 즉시 모르그 가로 갔다. 그곳은 리쉐류 가와 생 로슈 구 사이에 있는 초라한 거리였다. 이 구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과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므로 오후 늦게서야 도착하였다. 집은 곧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별 목적도 없는 호기심에서 닫혀 있는 덧문을 거리의 건너편에서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파리 식의 집이었으며, 문이 있고 그 한쪽에 유리창이 달려 있는 감시소가 있는데, 창에 '감시원 숙소'라고 써붙인 미닫이 유리가 끼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그 거리를 올라가 옆길로 꼬부라져 이어 재차 꺾어들어 그 건물의 뒤로 나갔다- 그 사이 뒤팡은 그 집뿐 아니라 부근 전체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목적이었는지 나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뒤로 돌아 우리는 다시 그 집 앞으로 나가 벨을 누르고 증명서를 보여 감시인으로 하여금 우리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 레스파아네 양의 시체가 발견된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아직 두 명의 피해자가 눕혀 있는 채였다. 방안은 사건 당시와 같이 난잡한 그대로였다. 나로서는 <트리뷔노>지에 보도된 것 이상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뒤팡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사했다. 피해자의 시체도 정성들여 조사했다. 우리는 이어 다른 방들도 돌아보았고 안마당으로 나갔다. 순경 한 명이 계속 따라다녔다. 조사는 어두워질 때까지 걸렸으며, 조사가 끝나자, 우리는 그 집을 떠났다. 집으로 오는 도중 나의 친구는 어떤 신문사에 잠시 들렀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친구한테는 각종의 괴벽이 있어서 Je les menageais('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멋대로 하게 놔두었다' '마음에 걸리지 않도록 잘 처리하였다'와 같은 의미의 프랑스어-譯註)- 영어에는 이것에 딱 맞는 글구가 없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한 마디도 말이 없다가 다음 날 오정 때가 되자 갑자기 범행 현장에서 어떤 것이든 색다른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나한테 물었다. 그가 '색다른 것'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그 말씨에는 심상치 않은 그 무엇이 있는 듯해 왜 그런지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아아니, 색다른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최소한 우리가 신문에 본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그 신문이라는 것이 이 사건의 비상한 공포성을 십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애."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따위 신문의 부질없는 의견 같은 건 상대하지 않는 게 좋아. 이 괴사건이 해결이 쉽다고 보여지는 이유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하도 특징이 괴상해서- 도리어 불가해하다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더군. 경찰은 동기- 살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살인의 흉포하기 그지없는 동기-가 없는 것 같아서 당황하고 있는 거야. 또한 그들은 서로 다툰 것처럼 들렸다고 하는 소리와 4층에서 살해된 레스파아네 양 이외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고 또한 계단을 올라가는 일행한테 들키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 등 이런 것들을 설명할 길이 없어서 어찌 할는지 모르고 있는 거야. 방안이 무척 난잡해 있고, 시체의 머리를 밑으로 굴뚝에 처넣은 일, 노부인의 몸을 무섭게 난도질한 일, 이러한 사실과 앞서 말한 일들, 그리고 내가 새삼 말할 것도 없는 다른 사실 등이 파리 경찰의 자랑인 명석성이라는 것을 완전히 골탕 먹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무력할 정도로 마비시켜 놓았어. 그들은 이상한 것과 난해한 것을 혼동하는 크고 또한 흔히 있는 오류에 빠져 버렸어. 그러나 적어도 이성이 진실한 것을 찾아서 나가는 것은 상투적인 면에서 이렇듯 떨어짐으로써 가능한 거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조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일보다 '일어난 일 가운데 전에 없었던 일이 어떤 것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되지. 말하자면, 나는 이 괴사건을 결국 해결하게 되었지만, 어쩌면 이미 해결해 버린 것이나 같지만, 이것은 상당히 간단한 일이야. 마치 경찰 나리들의 눈에 해결될 수 없다고 보이는 것과 정비례하고 있을 정도지." 나는 깜짝 놀라서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나는 지금 기다리고 있어." 하고 그는 방문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지금, 아마 이 흉행의 범인은 아니겠지만 그 범행에 어느 정도 관련돼 있을 게 분명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 범죄의 마지막 끔찍한 부분하고는 아마 그가 관계가 없을 거야. 이러한 추리가 들어맞기를 바라고 있어. 왜냐하면 나는 이 수수께끼 전체를 추리에 의해서 풀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나는 여기서- 이 방에서- 그 사나이가 오기를 지금인가 지금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어쩌면 그 사나이는 오지 않을는지도 몰라, 그러나 아마 오겠지. 만약 온다면 붙잡아 두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여기 권총이 있어. 이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둘이 다 알고 있는 셈이고." 나는 권총을 손에 들었으나 자신이 할 일을 사실 의식하지 못했으며 또한 자신이 들은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뒤팡은 마치 독백하듯이 말을 계속했다. 이런 때 그의 방심한 듯한 모양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한 대로이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보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았지만 보통 때 훨씬 먼 쪽에 있는 사람한테 말하는 것 같은 억양이었다. 눈에는 하등 표정이 없고 단지 벽만을 차분히 지켜볼 뿐이었다. "계단 위에 있던 사람들이 들었다고 하는, 싸우는 목소리가." 하고 그가 말했다. "그 두 여자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은 증언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이 됐어. 따라서 어머니가 처음에 딸을 죽이고 그후 자살했는지도 모른다고 하는 식의 의심은 완전히 없어지는 거야. 나는 주로 살해 방법이라는 문제 때문에 이런 점까지 이야기하는 거야. 레스파아네 부인의 힘을 가지고서는 딸의 시체를 그런 식으로 굴뚝 안으로 밀어 올릴 수가 없는 거야. 또한 그녀 자신에게 나 있는 상처의 성질도 자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살인은 누군가 제삼자가 한 게 된 거야. 그리고 제삼자의 목소리가 싸우는 것처럼 들린 거야. 이번에는- 이 소리에 대한 증언 전체만이 아니고- 그 증언 가운데 특이한 점을 살펴봐야 하겠어. 자네는 이 점에 대해서 뭔가 특이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알 수 없군?" 나는 거친 음성에 대해서는 증인들이 다 프랑스 사람의 목소리라고 증언이 일치했지만, 날카로운 목소리, 즉 한 증인이 말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증인들의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것은 증언 그 자체일 뿐야." 하고 뒤팡이 말했다. "증언의 특이한 점을 말하는 게 아냐. 자네로서는 특수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지만 당연히 느껴야 할 일이 있었던 거야. 자네의 말처럼 거친 음성에 대해서는 증인들의 의견이 일치했어. 이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가 없었어. 그렇지만 날카로운 소리에 관해서는 그 특이한 점이- 그들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 영국인, 스페인 사람, 네덜란드 사람, 프랑스 사람들이 각각 이를 설명하면서 다 같이 외국인의 목소리라고 했단 말야. 각자가 다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거야. 다 같이 그것을- 자기가 알고 있는 나라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믿고 있어. 프랑스 사람은 그것을 스페인 사람의 말이라고 추정하여 내가 스페인어를 알았다면 몇마디쯤은 알아들었을 텐데 라는 말을 했지. 네덜란드 사람은 프랑스어였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통역을 통해 진술했다'고 기록돼 있어. 영국인 역시 독일 사람의 목소리로 생각하지만 '독일어를 모르는' 것이야. 스페인 사람 또한 영국 사람의 목소리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영어를 하나도 몰라서' 거의 음의 '억양으로 판단한' 것이지. 이탈리아 사람은 러시아인의 음성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러시아 사람과 말해본 적이 없는' 것이야. 게다가 또 한 명의 프랑스 사람은 앞의 프랑스인과는 달리 그 음성을 이탈리아 사람의 목소리로 믿고 있지만, 이탈리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음의 억양으로 확신'하고 있을 뿐이야. 자, 이러한 증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란 정말로 기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지! - 그 음성은 유럽, 오대주 사람에 의해서도 전연 들은 일이 없는 음성이었던 거야! 자네는 아시아 사람의- 아프리카 사람의 음성인지도 모른다고 하고 싶겠지. 아시아의 음성인지도 모른다고 하고 싶겠지. 아시아 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파리에 별로 없어.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추리를 부정하지는 않겠어. 단지 여기서 세 가지 점에 대해 주의를 하겠어. 그 음성을, 한 증인은 '날카롭다기보다 귀에 거슬리는'이라고 표현했어. 다른 두 명은 '빠르고 고저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증인도 말- 말과 비슷한 소리-을 알아차렸다고는 하지 않은 거야." "나는 지금까지." 하고 뒤팡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이해력에 어떠한 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증언의 이 부분- 그 거친 소리와 날카로운 음성에 대한 부분-을 중심으로 한 올바른 추리만 가지고도 이 괴사건 조사의 앞으로의 진전에 어떤 의심을 갖게 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저없이 말할 수가 있네. 지금 '올바른 추리'라고 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네. 나는 이 추정이 유일한 적당한 추정이라는 사실과 또한 오직 하나의 결과로써 당연히 일어나는 의혹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의혹인지는 지금 당장 말하지 않겠어. 단지 그것은 방안에 대한 나의 조사에 어떤 일정한 형태- 혹은 어떤 확실한 경향-를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라겠어. 지금 상상으로, 우리 둘이서 그 방에 갔다고 가정을 하지. 첫째로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겠는가? 살인범이 도망쳐 나간 방법이야. 우리 둘은 다 같이 초자연적인 일 같은 건 믿지 않아. 그리고 레스파아네 부인과 딸은 유령한테 살해된 것이 아냐. 살인을 한 자는 실체가 있으며 그 실체가 도망을 친 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도망쳤단 말인가? 다행히 이 점에 대해서는 추리할 수 있는 방법이 꼭 한 가지 있어. 그 방법이 우리를 어떤 일정한 결과로 유도해 줄 거야.- 도주할 수 있는 방법을 한두 가지 조사해 보기로 하지. 일동이 계단을 올라갔을 때 레스파아네 양이 발견된 방이라든가 최소한 그 옆방에 가해자가 있었던 것은 확실해. 그렇다면 출구를 찾아야 할 곳은 이 두 방뿐이야. 경찰은 바닥이고 천장 및 벽의 돌 등 사방팔방을 샅샅이 뒤져봤어. 어떤 비밀 출구라도 그들의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지. 그러나 나는 그들의 눈을 믿지 않고 내 자신의 눈으로 조사해 봤어. 그러자 비밀의 문 같은 것은 정말로 하나도 없었어. 방에서 복도로 나가는 문은 두 개나 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안쪽으로 잠겨 있었어. 이번에는 굴뚝을 보기로 하지. 이것은 난로 위로 팔, 구 피트쯤 되는 보통 넓이였으므로 이곳에서 앞쪽으로는 고양이라도 큰 놈은 통과할 수 없을 거야. 따라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도망칠 수 없는 게 확실하므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창문뿐이지. 바깥쪽에 위치한 방의 창문을 통해서는 그 누구라도 거리에 있는 군중들한테 들키지 않고 도주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범인은 안쪽 방 창문을 통해서 나갔을 게 틀림없는 거야. 그런데 이러한 단정은, 우리가 정확한 추리를 통해서 얻어낸 결과이므로 얼핏 보기에 불가능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리칠 수는 없지. 우리와 같이 추리를 하는 사람들로서는 취할 길이 아냐. 얼핏 보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우리한테 남아 있을 뿐이야. 그 방에는 창문이 둘 있어. 하나는 가구 등으로 가려지지 않아서 완전히 보여. 또 하나의 창은 불쑥 올라간 침대의 머리가 이곳에 딱 붙여져 있으므로 아래쪽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처음에 말한 창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어. 그것을 올리려고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보았으나 올라가지 않았어. 그리고 문틀 왼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 무척 굵직한 못이 거의 머리까지 박혀 있었어. 또 하나의 창을 조사해 보자 그곳에도 똑같은 못이 마찬가지로 박혀 있더군. 그래서 이 창문을 온 힘을 기울여 올려보려고 했지만 역시 되지가 않았어. 그 바람에 경찰에서는 이쪽으로 나갔을 리가 없다고 완전히 단정해 버린 거야. 따라서 못을 뺀 다음 문을 열어보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버린 거야. 그러나 나의 조사는 더욱 철저했어. 그것은 방금 이야기한 이유에서 철저하게 한 거지- 즉 얼핏보아 불가능하게 보이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이런 식으로- 귀납적으로- 추리해 나갔어. 범인은 이 두 개 창문 중 어느 한쪽으로 도망친 게 분명해. 그렇다면 창문을 안쪽에서 그런 식으로 다시 닫을 수는 없었을 거야.- 이것이 그야말로 분명했으므로 경찰에서는 이 방면에 대한 조사를 중단했던 거야. 그럼에도 문은 닫혀 있었어. 그렇다면 이 창문은 혼자서 닫히게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지. 이러한 단정에는 피할 길이 없는 거야. 나는 장애가 없는 쪽 창문으로 걸어가서 다소 애를 먹어가며 못을 뽑아낸 다음 창문을 올리려고 해봤어. 열심히 해봤지만 예상했던 대로 올라가지 않았어. 여기서 나는 숨겨져 있는 스프링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지. 또한 이런 식으로 내 생각이 굳어지자, 나는 못에 관련된 사정이 아무리 이상한 것 같아도 최소한 나의 전제가 정확하다는 것을 나 자신 확신하게 된 거야. 자세히 조사를 시작했더니 이내 숨겨 놓은 스프링이 발견되더군. 나는 그것을 눌러보고는 그와 같은 발견에 만족하면서 창문 올리는 것은 그만두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못을 제대로 꽂아 놓은 다음 그것을 조심해서 살펴봤어. 이 창문에서 나간 사람은 창문을 다시 닫았을는지도 몰라, 그리고 스프링도 걸렸겠지- 그러나 못만은 전처럼 박아놓을 수가 없을 거야. 이와 같은 단정은 분명했으므로 내가 다시 조사할 범위는 좁아진 거야. 가해자는 또 하나의 창문으로 도망친 게 확실했어. 그래서 양쪽 창틀에 붙어 있는 스프링이 아무래도 그렇겠지만 실제로 똑같다고 상상한다면, 양쪽 못에 혹은 적어도 못을 박아넣는 방법에 차이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침대의 침구로 올라가서 침대 머리를 가린 판자 위로 두번째 창문을 세밀히 조사해 봤지. 판자 뒤로 손을 디밀어보자 이내 스프링이 발견되었으며 눌러 보았는데 상상했던 대로 그것은 옆의 창문에 붙어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어. 이번에는 못을 봤지. 이것 또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단단했으며 보기에는 똑같이- 거의 머리 부근까지- 박혀 있었어. 자네는 내가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만약 그렇다면 자네는 귀납적 추리의 성질을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해. 사냥꾼의 말을 빌린다면 나는 한 번도 '냄새를 잘못 맡는' 일이 없었던 거야. 냄새의 흔적을 그후에도 잃지 않았던 거야. 사슬의 굴레는 하나도 끊어지지 않았단 말야. 나는 이 비밀을 궁극의 결과까지 더듬어 갈 수 있었지- 바로 그 결과가 못에 있었어. 그것은 실제로 다른 창문에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지. 그러나 이러한 사실 따위는(결정적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단서가 끝났다고 하는 사정과 비교한다면 완전히 무력할 뿐이지, '못에 뭔가 다른 점이 있겠지'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어. 그리곤 그것을 만져보았어. 그러자 머리 근처의 사분의 일인치쯤이 똑 떨어져 내 손끝에 잡히더군. 못의 나머지는 구멍에 남아 부러진 채 있었어. 옛날에 부러졌던 모양이야(이유는 끝이 온통 녹슬어 있었으니까). 망치로 박았을 때 그렇게 되었던가 봐. 쇠망치로 박을 때 못의 머리 부분이 아래의 창틀 위로 다소간 박혔던 거야. 이번에는 못의 머리 부분을 다시 구멍에다 조심스럽게 꽂아 봤지. 그러자 그야말로 완전한 못으로 보여- 부러진 곳이 보이지 않았어. 나는 스프링을 눌러 창틀을 이삼 인치 정도 살며시 올려봤지. 못의 머리가 구멍에 딱 박힌 채 함께 올라갔어. 문을 닫자 다시 완전한 한 개의 못처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여기까지의 수수께끼는 이미 풀린 거야. 가해자는 침대 앞에 있는 창문으로 도망친 거야. 그가 나가자 창문은 저절로 떨어져(혹은 굳이 닫았는지도 모르지만) 스프링에 의해 꽉 잠겨 버린 거야. 그리고 이 스프링으로 죄고 있는 것을 경찰에서는 못이 박혀서 꼼짝 안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으며- 그 이상은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이야. 다음 문제는 밑으로 내려가는 방법이야. 이 점에 대해서는 자네하고 건물 주위를 돌아봤을 때 알았어. 문제의 창문에서 오 피트 반 정도 떨어진 곳에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었어. 이 피뢰침에서 창문에 직접 손을 댄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했을 거야.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 말할 필요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그 4층의 덧문이 파리의 목수들이 페라아데라고 부르는 조금 특수한 종류의 창문이라는 걸 알아냈어- 오늘날에는 잘 사용되지 않지만, 리용이나 보르도 등에 가면 극히 낡은 집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지. 보통문(두짝 문이 아니라 외짝 문)처럼 되어 있고 다른 것은 단지 하반부만이 창살로 되어 있는 것이야- 따라서 붙잡기가 아주 편리하지. 그런데 현재의 경우 이 덧문은 폭이 충분히 삼 피트 반이나 되는 것이야- 우리가 집 뒤에서 봤을 때는 이 덧문이 두 개가 다 절반쯤 열려 있었지- 즉 벽과 직각이 되어 있었던 거야. 경찰에서도 우리들처럼 집 뒤쪽을 조사했겠지. 그렇지만 페라아데를 정면에서 보아서는(분명히 그랬을 거야) 덧문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거나 아니면 고려 속에 넣지 않았던 것이지. 이미 그쪽으로는 도망하지 않았다고 단정해 버린 바람에 자연적으로 대충대충 조사를 끝내 버리고 말았을 거야. 그러나 나의 관찰은 달랐어. 즉 침대 머리에 있는 창의 덧문을 충분히 벽쪽으로 밀어 열면 피뢰침에서 이 피트 이내로 닿을 수 있다는 게 확실했어. 또한 각별히 용기와 활동력만 가지고 있으면 피뢰침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창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게 확실했지- 이 피트 반 정도만 팔을 뻗치면(우리는 그 덧문이 완전히 열린 것으로 상상하지만) 범인은 창틀을 꽉 붙잡을 수가 있을 것이야. 이어 피뢰침을 놓고 발을 단단히 벽에 걸어 꽉 밟고는 힘껏 그것을 차게 되면 덧문은 쉽게 탁 하고 닫혀 버릴 것이야. 그리하여 그때 창문이 열렸다고 상상한다면, 방안까지 뛰어들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재주가 필요하고 어려운 곡예를 제대로 해내려면 극히 비상한 활동력이 필요하지. 이 말을 잘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첫째로 이런 식으로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걸 자네한테 알려주는 게 나의 의도야. - 그리고 두번째는 이것이 주가 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민첩한 동작은 극히 특이한- 거의 초인간적인 성질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자네가 알아주기 바라는 거야. 자네는 틀림없이 법률 용어를 빌어 '자기의 진술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에 필요한 활동력을 충분히 평가하려고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낮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겠지. 법률의 관례로서는 그럴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이론의 관습이 아니지. 나의 궁극의 목표는 진실뿐이니까. 나의 현재의 목적은 지금 말한 그렇듯 각별한 활동력과 어느 나라의 말인지 각자의 의견이 다 달라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문제의 극히 특이하고 날카로우며(혹은 귀에 거슬리는) 또한 고저가 있다는 음성을 자네가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거야." 이런 말을 듣자, 뒤팡이 말하는 의미가 희미하게 그러면서도 절반쯤 형체를 이룬 개념으로 나의 마음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알듯 하면서도 역시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사람들이 흔히 금새 생각날 듯하면서도 결국은 생각해낼 수 없었던 것처럼. 친구는 계속 말했다. "내가 문제를, 나가는 방법에서." 하고 그가 말했다. "들어가는 방법으로 옮긴 것을 자네는 알고 있겠지. 나가는 것 들어가는 것이 같은 장소이기 때문에 같은 식으로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어. 이번에는 방안으로 돌아가기로 하지. 그곳의 상황을 조사해 보잔 말야. 옷장 서랍에 많은 옷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였어. 이러한 단정은 이상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해- 극히 바보스러운 추측일 뿐야-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 그때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당초부터 서랍 안에 있었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부인과 그 딸은 거의 숨어 살다시피 하였어- 손님도 없었고- 또한 절대로 외출도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갈아입을 많은 옷도 필요치 않았던 거야. 그 안에 있는 것은 이 여자들이 가지고 있음직한 것 중에서도 제일 좋은 옷들이었어. 만약 도둑이 뭔가를 훔치러 들어갔다면 어째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왜 다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어째서 한아름의 옷가지 같은 것에는 손을 대고 사천 프랑이나 되는 금화는 놔 두고 간 것일까? 금화는 남아 있었던 말야. 은행가인 미뇨 씨가 말한 거의 전액이 주머니에 들은 채 그대로 바닥에 있었단 말야. 따라서 집의 문전에서 돈을 건네주었다고 하는 증언 때문에 경찰의 머리에 떠오른 동기에 대한 그릇된 생각 같은 건 아예 버려 줬으면 좋겠어. 이런 일(돈이 전달되고 그것을 받은 자가 그로부터 삼 일 이내에 살해되었다는 일)보다 십 배나 더 이상하게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일이 우리 생애에는 매시간마다 일어나고 있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야. 일반적으로 우연한 일치란 개연성의 이론- 인간 연구의 가장 빛나는 대상에 가장 빛나는 예증을 부여하고 있는 이론-을 조금도 모르도록 교육받은 사색가들 패거리한텐 커다란 장애물이지. 현재의 경우에서 만약 돈이 없어졌다면 삼 일 전에 이를 건네다주었다는 사실이 우연한 일치 이상의 것이 되었을지도 몰라. 동기로서의 그 생각을 확실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지금의 경우와 같은 진짜의 사정 밑에서 돈이 범행의 동기라면 우리는 그 범인을 어처구니없는 천치 바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돈과 동기를 다 같이 내던져버렸으니까 말야. 이번에는 내가 자네의 주의를 끌게 한 몇 가지 점- 그 이상한 음성과 각별히 뛰어난 민첩성, 그리고 그야말로 드물게 보는 잔인한 살인 사건에 동기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과-을 똑바로 마음에 새겨 두고 범행 그 자체를 훑어봐야 할 것 같애. 한 여자가, 완력으로 교살된 다음 머리를 밑으로 굴뚝 관에 처박혀 있다고 하세. 일반적인 살인범이라면 그와 같은 살인 방법을 택하지 않네. 특히 죽인 인간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는 않을 거야. 시체를 굴뚝 안으로 쑤셔 처박았다고 하는 수법에는 뭔가 아주 이상한 점- 비록 그렇게 한 자가 인간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였다고 상상하더라도 뭔가 인간의 행위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을 자네도 인정하겠지. 게다가 몇 사람이 힘을 모아서 간신히 끌어낼 수가 있을 정도로 그 틈새에다 그렇듯 강하게 시체를 쳐올릴 수 있었던 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등등을 생각해 보게나. 여기에 그야말로 놀라운 힘이 이용되었다는 증거가 또 하나 있는데 알아보도록 하지. 난로 위에 있었던 상당히 숱이 많은 사람의 회색 머리카락이야- 아주 숱이 많고 너풀거리는 머릿단이었어. 그런데 그것은 뿌리째 뭉텅 뽑힌 것이었지. 머리에서 이런 식으로 이삼십 개의 머리카락을 함께 뽑아내려면 대단한 힘이 든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자네나 나나 다같이 그 머리카락을 본 거야. 그 뿌리에는(소름이 끼치지만!) 머리 가죽의 살이 묻어나 붙어 있었던 거야. - 그야말로 단번에 수십 개나 되는 머리카락을 뽑아냈다니 바로 무서운 힘이 있었다는 증거야. 노부인의 목은 단순히 잘려 있었을 뿐 아니라 머리가 동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 버렸어. 도구는 한낱 면도칼이었지. 이러한 행위에 나타난 짐승과 같은 잔인성을 봐요. 부인의 몸에 나 있는 타박상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않겠어. 뒤마 씨와 그 조수인 에티엔느 씨는 그것이 뭔가 둔한 모양의 도구로 가한 것이라고 말했어. 거기까지는 이 사람들의 말이 지극히 옳아. 둔한 형태의 도구란 말할 것도 없이 안마당의 포석이었던 거야. 피해자는 침대 위에 있는 창문에서 그쪽으로 떨어진 거야. 이와 같은 생각은 지금에 와서 보면 무척 단순한 것 같지만 덧문의 폭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경찰 양반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야- 왜냐하면 못이 그런 식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창을 열었을 것이라고까지는 전연 생각하지 못한 거야. 자네는 이와 같은 모든 상황에 대하여 방안이 기묘하게 흩어져 있는 것을 정당히 생각해 봐야지.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민첩성, 초인간적인 힘, 짐승과 같은 잔인성, 동기가 없는 참살, 완전히 인간하고 거리가 먼 무섭고 기괴한 행위, 각국 사람의 귀에도 전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전연 없는 목소리 등,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관념을 결부시켜야 되는 입장에까지 온 거야.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결과가 되겠나? 자네의 상상에 어떤 인상을 가져다 주었는지 모르겠군." 뒤팡이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섬뜩했다. "광인의 소행이었군." 하고 내가 말했다. "- 누군가 근처의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광조성(狂躁性)의 미치광이가 아닐까." "어느 점에서는." 하고 그가 대답했다. "자네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냐. 그렇지만 광인의 음성은 발작한 가장 심한 때에도 계단에서 들은 그 이상한 소리와는 결코 부합되지가 않지. 비록 광인이라 하더라도 어떤 나라의 사람일 테고 따라서 그 말 역시도 비록 한마디 한마디가 끊어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어떤 단어는 될 거야. 게다가 광인의 머리카락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과 같은 이런 것일 수는 없지. 나는 이 적은 털묶음을 레스파아네 부인의 꼭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풀어낸 거지. 자네는 이것을 뭐라고 생각하나?" "뒤팡!" 하고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말했다. "이 머리털은 정말로 이상하군- 이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아니란 말야." "나 역시도 사람의 머리칼이란 말은 하지 않았네."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결정하기 전에 이 종이에 내가 그린 작은 이 모형도를 봐 주었으면 좋겠어. 이것은 증언의 어떤 부분이 되어 있는 내용이야. 즉 레스파아네 양의 목에 있는 '거무스름한 상처와 깊은 손톱의 흔적'으로 기록돼 있으며, 또한 다른 부분에 (뒤마와 에티엔느 양씨에 의해서) '분명히 손가락의 흔적인 일련의 검푸른 반점'으로 표현된 것의 모사(模寫)야." "자네도 느꼈겠지만." 하고 친구는 테이블 위에다 그 종이를 펼치면서 계속 말했다. "이 그림을 보면 꽉 붙잡았던 것을 알 수 있어. 손가락이 미끄러진 모양이 보이지 않아. 한 개 한 개의 손가락이 처음에 잡은 그대로- 아마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꽈악 붙잡은 채였을 거야. 그럼 이번에는 여기 그려 있는 하나 하나의 흔적에 자네의 손가락을 동시에 대어보게나." 나는 그대로 해봤지만 불가능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정말로 시험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 라고 그가 계속 말했다. "이 종이는 평면으로 펼쳐져 있어. 그렇지만 사람의 목은 원통형이야. 여기에 사람 목 크기만한 몽둥이가 있으니 이 그림을 이곳에 감아가지고 다시 한 번 해보도록." 나는 그의 말대로 해보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앞의 경우보다 한층 더 분명했다. "이것은 사람이 손자국이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자, 그럼 이번에는." 하고 뒤팡이 말했다. "퀴비에에게서 인용한 일절인데 읽어 보게나." 그것은 동인도 제도에 사는 황갈색의 큰 성성이를 해부학적으로 그리고 서술적으로 자세히 적어놓은 기사였다. 이 동물의 엄청난 신장이라든가 대단한 팔의 힘 및 활동력을 위시해서 흉맹한 잔인성과 모방성 등은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었다. 나는 그 살인이 처참했던 이유를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손가락에 대해 적힌 내용이." 하고 내가 읽고 난 다음에 말했다. "이 그림과 꼭 일치하는군. 맞았어, 여기 적혀 있는 종류의 성성이가 아니면 자네가 그린 것과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이 후엽색의 털 묶음도 퀴비에가 적어놓은 짐승의 것과 똑같은 성질의 것이야. 그러나 나로서는 이 무서운 괴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군. 게다가 서로 다툰 목소리가 둘이었는데 하나는 확실히 프랑스 사람의 음성이라고 했으니 말이네." "그렇지. 그리고 자네는 그 음성에 대한 증언에서 거의 일치한 말- 즉 '몽듀(아이구!)'라고 한 말을 기억하겠지. 증인의 한 사람(제과업자 몽타니)이 이것을 꾸짖는 혹은 타이르는 말이라고 했는데 그런 경우 당연한 말이야. 그래서 나는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이 두 가지 단어 위에다 주로 선정한 거야. 즉 한 사람의 프랑스 사람이 이 살인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가 범행에 전연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어. - 아마 그게 사실일 거야. 성성이는 그 사나이한테서 도망쳐 나왔는지도 몰라. 그는 그 뒤를 쫓아서 그 방까지 갔는지도 몰라. 그러나 그후의 그 소동 때문에 결국 붙잡을 수가 없었던 거야. 이러한 추측- 그것이 억측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권리가 내게는 없으니까-을 나는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어. 왜냐하면 이러한 추측이 기초가 된 막연한 고찰은 내 자신의 이지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없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남의 이해력에 납득시킬 수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따라서 그것을 추측이라 이름 붙이기로 하고 또한 추측이라 이야기하기로 하겠어. 만약 그 프랑스 사람이 내가 짐작하는 것처럼 범행에 실제로 관계가 없다면 어젯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르몽드>(이것은 해운업 전문의 신문으로 수부(水夫)들이 잘 읽는다) 신문사에 의뢰했던 이 광고를 보고 그 사나이는 반드시 이 집으로 올 걸세." 그는 나에게 한 장의 신문을 넘겨 주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붙잡았음.- 보르네오 종류의 매우 큰 황갈색 성성이 한 마리. 이달 XX일 새벽(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 아침), 보로뉴 숲속에서 암갈색 보르네오 종의 큰 성성이 한 마리가 잡혔다. 소유자(말타 섬 선박의 선원으로 추정함)는 자기 소유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또한 이를 잡고 보관한 데 소요된 약간의 비용만 내면 그 동물을 찾아갈 수 있음. 성곽 밖 생 제르맹 교외 X가 XX번지 4층으로 오시오.' "어떻게 해서 그 사나이가 선원이고 말타 섬 선박의 승무원이라는 것을 알았지?" 하고 내가 물었다. "나도 잘 모르고 있어." 하고 뒤팡이 말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에 리본 조각이 있어. 그 모양이나 기름이 배 있는 점 등으로 봐서 분명히 수부들이 즐기는 긴 변발을 묶는 데 사용된 거야. 더구나 묶는 방법이 뱃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묶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말타 사람 특유의 것이야. 나는 이 리본을 피뢰침 밑에서 주웠어. 두 피해자의 것이 아님은 확실해. 그런데 이 리본을 통해서, 내가 그 프랑스 사람을 말타 섬 선박회사의 승무원이라고 했는데 그와 같은 추리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하등 상관이 없어. 즉 광고가 그렇더라도 상관이 없는 거야. 만약 틀렸다면 내가 어떤 사정으로 해서 잘못 생각한 것으로 취급할 뿐 따지고 어쩌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는다면 큰 이익이 될 수 있지. 그 프랑스 사람은 살인과 관계가 없지만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당연히 광고에 응한다는 것은- 성성이를 찾으러 온다는 것은- 주저할 거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내게는 죄가 없어. 나는 가난해. 나의 성성이는 상당한 값이지- 나와 같은 형편인 사람은 그것만이라도 훌륭한 재산이야- 위험하다 어쩌고 하는 부질없는 걱정 때문에 그것을 잃는다니 될 말인가? 그것은 지금 내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곳에 있어. 그 범행의 장소에서 훨씬 떨어진- 보로뉴에서 발견되었는데 뭘. 지혜도 없는 짐승이 그런 일을 했다고 어떻게 짐작하겠나? 경찰은 전연 알지 못하는 거야. - 전연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지. 그 짐승이 했다는 것을 설사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살인 사건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잡지는 못할 거야. 비록 안다고 하더라도 나를 유죄로 몰아넣지는 못할 거야. 더구나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거야. 광고주는 나를 그 짐승의 소유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나의 소유물인지 알고 있는데 그렇듯 값나가는 물건을 가지러 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성성이한테 혐의가 걸리기 쉽게 되겠지. 성성이거나 나나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해. 광고에 응하여 성성이를 데려와서 이 사건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 놈을 숨겨두도록 해야지' 하는 식이겠지."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권총을 준비하도록." 하고 뒤팡이 말했다. "그러나 내가 신호할 때까지는 쏘거나 총을 보여서는 안 되네." 집의 현관문은 열린 채 그대로 있었으므로 그 방문자는 벨을 누르지 않고 들어와 계단을 몇 걸음 올라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망설이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 사나이의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팡이 급히 문 쪽으로 다가섰지만 그때 재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결심한 듯한 걸음걸이로 올라와서는 우리의 방문을 탕탕 하고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하고 뒤팡이 쾌활하면서도 다정한 투로 말했다.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틀림없이 수부였다- 키가 크고 우람했으며 힘깨나 쓸 것 같은 사나이로 어딘지 저돌적인 생김새였지만, 그렇다고 전연 애교가 없는 얼굴도 아니다. 햇볕에 몹시 그을렸으며 얼굴이 절반 이상이나 콧수염과 턱수염에 파묻혀 있었다. 커다란 참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있었지만 그 밖에는 아무것도 무기를 갖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어색하게 머리를 숙인 다음 "안녕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그의 프랑스 말에는 얼마쯤 뉘샤텔의 사투리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파리 태생이라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었다. "자아, 앉으세요." 하고 뒤팡이 말했다. "당신은 성성이의 일로 찾아오신 것이겠죠. 아냐, 확실히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게 부러울 정도죠. 정말로 훌륭하며 물론 값도 비쌀 게 틀림없어요. 그건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나 됐나요?" 그 수부는 뭔가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긴 한숨을 쉰 다음 침착한 투로 대답했다. "저로서는 잘 몰라요- 그러나 고작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겠지요. 이곳에 있는지요?" "아닙니다. 이곳에는 그놈을 넣어둘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요. 바로 근처에 있는 뒤부으르 가의 세 주는 마굿간에 넣어 뒀어요. 내일 아침에 넘겨드리지요. 물론 당신은 그것이 자기 것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죠?" "네, 물론 가능하고말고요." "그것을 내드리는 게 아까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하고 뒤팡이 말했다. "댁한테 여러 가지로 수고를 끼치게 해드려서 뭔가 그만한 답례를 할 생각입니다." 하고 그 사나이가 말했다. "전혀 뜻밖이었어요. 그것을 찾아 주신 답례는- 그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셈입니다." "그래요?"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그거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 뭘 받기로 한다? 어어 그렇지! 답례는 이렇게 해줘요. 그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만큼 하나 빼놓지 말고 다 이야기해 주십시요." 뒤팡은 매우 나지막하고 아주 조용히 이 마지막 말을 했다. 또한 똑같이 조용히 도어 쪽으로 걸어가 자물쇠를 채운 다음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야말로 침착하게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수부의 얼굴은 흡사 질식상태에서 괴로워하는 것처럼 빨개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곤봉을 쥐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덜덜 떨며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얼굴빛이 되어 버렸다. 그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이 사나이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이봐!" 하고 뒤팡이 친절한 투로 말했다. "자네는 그럴 필요도 없는데 겁부터 먹고 있는 거야- 정말야. 우리가 뭐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녜요. 우리는 하등 자네한테 위해를 가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신사의 이름으로, 또한 프랑스 사람이라는 명예를 걸어 맹세하겠어. 당신이 그 모르그 가의 흉행에 대해서 죄가 없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당신은 그 일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좋지 않아. 지금 말한 것을 가지고는 내가 이 사건에 대해서 알 만한 수단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도 알겠지- 당신으로서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니까 말일세. 어떻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거야. 당신은 피신할 만한 일은 전연 저지르지 않았으며- 또한 죄가 될 만한 일은 분명히 하지 않았어. 당신은 죄가 되지 않고, 훔칠 수 있을 때에도 훔치는 죄 또한 범하지 않았던 거야.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숨길 게 없어. 숨길 이유도 없고. 그대신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을 의무가 있지. 지금 죄 없는 한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그 남자에게 지워진 죄의 하수인을 당신이 내놓을 수가 있는 거야." 뒤팡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수부는 그런 대로 침착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대담했던 태도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럼 사실을." 하고 한참 지난 다음에 그가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요-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반 정도나마 당신이 믿어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런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내가 바보죠. 그래도 나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래서 죽는 한이 있어도 좋으니 빠짐없이 고백하지요." 이 사나이가 이야기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그는 근래에 동인도 제도를 항해하고 왔다. 그와 함께 참가한 일행은 보르네오에 상륙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로 놀이차 여행을 했다. 그때 그와 친구 한 명이 성성이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죽는 바람에 이 성성이는 그의 소유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성이가 하도 사나워서 돌아오는 항해길에 많은 곤란을 당했지만 결국 파리의 자기 집까지 무사히 데려올 수가 있었다. 그는 이웃 사람들이 자기한테 불유쾌한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서 숨겨 두었다. 성성이가 배 안에서 나뭇조각 때문에 입은 발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성성이를 팔아 버리는 게 궁극의 목적이었다. 그 살인이 있었던 날 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날 새벽, 그는 뱃사람들과의 놀이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짐승이 자기 침실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중히 가두어 두었다고 생각했던 옆의 작은 방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성성이는 면도칼을 손에 들고는 얼굴에 비누 거품을 온통 칠하고 거울 앞에 앉아서 밀려 하고 있었다. 전에 주인이 하는 것을 작은 방의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봤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듯 겁나는 흉기가 그렇듯 흉맹한 성성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몰랐다. 더구나 성성이는 면도칼도 잘 다룰 줄 알 정도의 짐승이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성성이가 아무리 기가 승해서 날뛸 때라도, 회초리로 다스려 조용히 하는 데 익숙했으므로 그때에도 그렇게 해보려고 하였다. 성성이는 그 회초리를 보자, 이내 방에서 문으로 뛰쳐나가 계단을 달려 내려갔으며 이어 재수없게도 열려 있던 창문을 통해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 프랑스 사람은 절망하면서도 뒤를 쫓았다. 성성이는 여전히 면도칼을 든 채, 가끔씩 서서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거의 다 쫓아올 때까지 손으로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도망쳤다. 이런 식의 추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럭저럭 새벽 3시경이었으므로 거리는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모르그 가의 뒤쪽 작은 길을 지나가면서 레스파아네 부인의 4층 방의 열려 있는 창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불빛이 성성이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하여 그 집으로 달려가서는 피뢰침을 보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게 기어올라 덧창문을 휘잡았다. 이 덧창문은 벽 있는 데까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문을 잡고는 그 덧문으로 침대 머리맡 판자 위로 뛰어들었다. 이와 같은 동작이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덧문은 성성이가 방으로 들어갈 때 발로 걷어찼기 때문에 도로 열렸다. 한편 수부는 기쁘기도 했으며 또한 당황하기도 하였다. 성성이가 뛰어들어간 함정에는 피뢰침을 제외하고는 도주로가 거의 없었으며 피뢰침으로 내려온다면 붙잡을 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에만은 꼭 잡게 될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안고 있었다. 한편 집안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할까 하는 걱정이 다분히 있었다. 이와 같은 후자의 생각으로 그는 성성이의 뒤를 계속해서 쫓았다. 피뢰침은 문제없이 올라갈 수 있었으며 더구나 뱃사람으로서는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그가 왼쪽으로 훨씬 떨어져 있는 창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그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펴서 방안을 흘끔 기웃거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여다보자, 그는 너무나도 끔찍한 일에 직면하여, 붙잡고 있었던 손을 하마터면 놓칠 뻔하였다. 모르그 가에 사는 주민들의 꿈을 깬 그 무서운 비명이 밤의 정적을 깨고 울려퍼진 게 바로 그때였다. 잠옷바람인 부인과 딸은 방 한가운데 내놓은 앞서의 그 철상자 안의 어떤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열려 있었으며, 안의 것이 그 옆의 바닥에 놓여 있었다. 피해자들은 창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하여 성성이가 들어간 것과 비명이 들린 사이에 경과한 시간으로 생각해 보면 그 즉시는 성성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덧문의 탁탁 소리는 바람 소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수부가 들여다보았을 때, 그 거대한 동물은 레스파아네 부인의 머리카락(그것은 빗질을 했기 때문에 풀려 있었다)을 잡고 이발사의 솜씨를 흉내내어 그녀의 얼굴에 면도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딸은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노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으므로(그 사이에 머리카락이 머리에서 뽑혔는데) 성성이의 조용했던 기분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강력한 팔을 마음껏 한 번 휘두르자 그녀의 머리가 동체에서 거의 떨어져 버렸다. 피를 보자 성성이의 분노는 미친 기분으로 바뀌었다. 이를 악물고 눈에서는 불꽃을 튀기며 레스파아네 양의 몸으로 덤벼 들었다. 그리고는 그 무서운 손톱으로 목을 찔러 그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성성이의 두리번거리던 핏발선 눈이 이때 우연히 침대 머리쪽에 닿자, 그 위에 공포로 굳어버린 주인의 얼굴이 잠시 보였다. 성성이는 아직도 주인의 무서운 회초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분노가 이번에는 즉시 공포로 변했다. 벌을 받을 일을 했다고 깨달았으며 자기가 한 흉행을 숨기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짐승은 무척 안절부절하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뛰어 돌았으며 그때마다 가구를 뒤집어엎거나 파괴하곤 하였다. 침대에서 침구를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어 우선 레스파아네 양의 시체를 붙잡고는 뒤에 발견된 것처럼 굴뚝 안으로 밀어 올렸으며 이어 노부인의 시체를 잡고는 이내 창에서 거꾸로 내던졌다. 성성이가 마구 찌른 그 시체를 안고 창가로 접근했을 때 수부는 기겁을 하며 피뢰침 쪽으로 몸을 숨겨, 그 피뢰침을 타고 내렸다기보다는 오히려 미끄러져 내려, 집을 향해 도망쳤다. - 그 범행의 결과를 두려워했으며 또한 공포에 질려 성성이의 운명에 대한 일체의 걱정을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계단 위에서 사람들이 들었다는 말이 바로 성성이의 악귀와 같이 지껄여대는 소리에 섞인 프랑스인의 공포와 경악에 찬 절규였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보탤 일이 거의 없다. 성성이는 사람들이 문을 파괴하고 들어가기 직전에 피뢰침을 타고 도망쳤을 게 분명하다. 창은 성성이가 나갈 때 닫고 간 것 같다. 성성이는 그후 소유주한테 붙잡혀 식물원에 큰돈을 받고 팔았다. 르 봉 씨는 우리가 경찰서로 가서(뒤팡의 약간의 설명과 함께)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하자 즉시 석방되었다. 경찰총감은 내 친구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건의 급선회에 분함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사람은 다 자기 자신의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의 투정을 한두 마디 하고 말았다. "멋대로 지껄이라지 뭐." 별로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뒤팡이 이렇게 말했다.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그러고 나면 기분이 가라앉겠지. 나는 그 친구를 한대 먹였으니 만족이야. 그러나 저 친구가 이 괴사건을 해결하는 데 실패한 것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 아니지. 실제로 내 친구인 총감은 다소 지나치게 교활하고 심중하니까. 그런데 그의 지혜에는 수술[雄蘂]이 없는 거야. 여신 라벨라처럼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어. 아니면 고작 대구처럼 머리와 어깨뿐이지. 그렇지만 그 친구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특히 그 친구의 이따금 하는 말이 그럴 듯해서 좋아하는 거야. 그것으로 그 친구는 명철 민완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는 거야. 그 친구의 상투 수단이란 '있는 것은 부정하고 없는 것을 설명하는' 식이야." <끝> 5. 캘라베라스의 고명(高名)한 뛰는 개구리 마크 트웨인(Mark Twain) 동부로부터 편지를 보내온 어느 친구의 청에 따라 나는 마음씨 좋고 수다스러운 사이몬 위일러를 찾아가, 나의 친구의 친구가 되는 리오나이다스 W 스마일리의 안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를 아래에 적어 보겠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리오나이다스 W 스마일리란 인물은 순전한 가공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들게 된다. 즉 나의 친구가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과 안면이 있던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을 늙은 위일러에게 전하면 위일러로 하여금 그 악명 높은 짐 스마일리의 행적을 연상케 하여, 따라서 그 수다스러운 늙은이가 내게는 하등의 소용도 닿지 않을 뿐더러 길고도 지루한 짐 스마일리의 행적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 놓음으로써 나를 괴롭히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꾸며낸 수작이 아니었던가 하고 의심한다는 말이다. 만일 내 친구의 계교가 그런 것이었다면 그의 의도한 바는 적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가 이제는 폐촌이 되다시피 한 에인절 광산촌으로 사이몬 위일러를 찾아갔을 때에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어느 주막집의 난롯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뚱뚱하게 살이 찌고 대머리가 벗겨진데다가 그 조용한 얼굴에는 그지없는 부드러움과 소박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후닥닥 잠이 깬 그는 내게다 인사를 하였다. 나는 그에게 내 친구의 한 사람이, 그의 소시적의 다정한 친구였던 리오나이다스 W 스마일리라는 젊은 교직자인 목사님이 이 에인절 광산촌에 산 일이 있다 하며, 그의 안부를 묻는 일을 내게 위촉하였노라고 말했다. 나는 위일러 씨가 이 리오나이다스 W 스마일리의 근황에 관하여 무엇이든 말씀하여 주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이몬 위일러는 방 구석으로 나를 몰더니 자기의 의자로 나의 퇴로를 막다시피 하고 그 의자에 걸터앉자 다음과 같은 지루한 얘기를 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고,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 얘기를 시작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술술 풀려나오는 억양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 얘기에 제물로 신이 나서 하는 일도 한 번도 없었으며, 그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그는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지껄일 따름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얘기에 무슨 우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 중요한 일이며, 또 그의 얘기의 주인공 2명이 정말로 절세의 천재였다고 그가 경의를 표하고 있는 증좌라고 나는 느꼈다. 나는 그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두고 한 번도 그의 얘기를 가로막지 않았다. "리오나이다스 W 목사라구요? 흠, 리오나이다스라- 글쎄 그런 양반은 모르지만 짐 스마일리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이 광산촌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죠. 가만 있자, 그게 그러니까 천팔백사십구 년의 겨울이 아니면 오십 년의 봄이 틀림없습니다.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고 하면 그가 처음 이 촌에 왔을 때엔 선광용의 큰 물홈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무렵이었으니까요. 좌우간 그는 세상에도 야릇한 버릇이 있는 친구였죠. 어느 때나, 또 누구하고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돈을 걸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에든 돈을 거는 버릇이 있었단 말씀이야.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입장을 바꾸어 반대로 걸어도 좋다는 거지. 돈 걸기 내기를 하는 한 상대방만 만족하면 자기는 어느 쪽에 걸던 무방하다는 뱃심이죠. 한데 이상하지, 언제나 재수가 좋았단 말씀이야 십중팔구 이겼으니까. 누가 뭐라고 얼씬거리기만 하면 벌써 이 친구는 내기를 하자고 덤벼들고, 방금 얘기한 대로 상대방이 어느 쪽에 걸건 자기는 그 반대편에다 돈을 걸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경마가 있던 날, 경마가 끝나고 보면 그 친구는 돈이 득실득실하거나 아니면 동전 한푼 없게 된단 말야. 개 싸움이 있으면 거기에 돈을 걸고, 고양이 싸움이 있으면 고양이에 돈을 걸고, 닭 싸움이 있으면 닭에다 돈을 걸고 하는 식이란 말씀이야. 더 말할 것 없이 새 두 마리가 울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쪽 새가 먼저 날 것이라는 데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친구란 말씀이야. 또 야외에서 부흥전도회가 있을 땐 빼놓지 않고 나타나서 누가 설교를 제일 잘 하느냐에 내기를 거는데 꼭 워커 목사한테 돈을 걸었단 말씀이야. 하긴 그분이 정말로 설교를 제일 잘 하시고 또 사람도 좋은 분이었어. 심지어 쇠똥구리가 꾸물거리기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그 놈이 어디로 가는지 내기를 하자는 거지. 그래서 상대방이 내기를 응하기만 한다면 그 놈이 멕시코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어디로 가는 것인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를 보려고 그 뒤를 밟는단 말씀이야. 이 동리에 사는 친구들 가운데에 스마일리를 본 친구들이 많으니까 그 친구들한테 물어 보면 알아요. 하여간 괴상한 친구였습죠. 무엇에건 내기를 걸지 않고는 못 배기는 친구였으니까. 워커 목사님의 부인이 한번은 대단히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아마 이번엔 회춘하시기 힘들다고 생각들을 한 일이 있었죠. 한데 어느 날 아침에 목사님이 들어오시는데 스마일리가 일어나 부인의 병세가 좀 어떠냐고 묻자 목사님이 오늘은 훨씬 나아졌다고 말하고 이대로만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의 도움으로 병이 완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마치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스마일리는 자기의 말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지도 않고, '난 부인이 절대로 낫지 않는다고 이 달러 오십 센트를 걸 테니 내기합시다'라고 불쑥 말했습죠. 바로 스마일리가 말씀이야, 암놈의 말을 한 마리 갖고 있었는데- 동리의 입이 건 친구들은 한 바퀴에 십오 분 걸리는 몹쓸 말이라고 했지만 물론 그것은 농담이었죠. 왜냐하면 그 말은 그보다는 빨리 뛰는 말이었으니까요- 여하간에 그놈의 말이 언제나 해수병이 아니면, 디스템퍼에 걸려 있거나 아니면 폐병이라든가, 아니면, 이와 비슷한 다른 병에 걸려 있어, 뛰는 속도가 느렸음에도 불구하고 경마에서 주인한테 돈을 벌게 해 주는 말이었습죠. 사람들은 그 말을 이삼백 야드 가량 앞세워 놓고 경주를 시작하여도 도중에서 따라잡아 오히려 앞서곤 했습죠만. 웬일인지 그 말은 언제나 끝판에 가선 막바지 고비에 흥분하고 기를 쓰며 깡충깡충 뛰고, 다리를 사방팔방으로 내흔들었죠. 어떤 때는 도랑 쪽으로, 또 어떤 때는 하늘 쪽으로, 또 어떤 때는 울타리 쪽으로 다리를 내저으며 씩씩거리는 숨결과 콧김과 기침으로 온통 먼지와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결승점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자로 잰 듯이 목 하나의 길이만큼 앞서서 골인을 했단 말씀이거든. 한데 그 친구는 또 수캉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죠. 겉보기에는 언제나 나자빠져 지저분한 꼴을 하고 있거나 뭣을 훔쳐 먹을 궁리만 하지만, 일단 개 싸움의 돈내기만 걸리면 단연코 개의 성질이 돌변한단 말씀이야. 그놈 아래턱이 마치 기선의 앞갑판처럼 내밀고 드러낸 이빨은 보일러의 아궁이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었죠. 그래서 상대방의 개가 앤드루 잭슨, 이것이 그 강아지의 이름이었답니다- 앤드루 잭슨에게 덤벼들어 메어치고 물어뜯고 어깨 너머로 두어 서너 번 메어꽂아도 속으로는 끄덕 없지만 겉으로는 죽어가는 시늉을 하면 내기의 돈이 두 배, 세 배로 뛰어 올라 드디어 있는 돈이 몽땅 걸렸을 때 느닷없이 그놈은 상대방 개의 뒷다리의 관절을 물고 늘어진단 말씀이야. 물어뜯는 것이 아니야. 알아 들어요, 그냥 잠자코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란 말이야. 일 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스마일리는 이 개 때문에 언제나 돈을 벌었는데 단 한 번 실수한 일이 있었습죠. 제재소의 동그란 톱을 갖고 뒷다리를 잘랐기 때문에 뒷다리가 없는 개하고 맞붙었을 때입니다. 싸움에 한창 열이 올라 이젠 돈도 걸대로 걸었고 그의 장기를 발휘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만 뒷다리가 없는 것이 알려지자 당황하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만사를 체념하는 빛이 돌고, 그 이상 싸움엔 이기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만 져버리고 말았습죠. 개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스마일리를 쳐다보며 도대체 개 싸움에서 자기의 장기는 뒷다리를 물구 늘어지는 것인데, 뒷다리가 없는 개하고 싸움을 붙여준 것은 주인의 잘못이라는 듯이 원망스럽게 보더니 저만큼 비실비실 걸어가 주저앉더니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죠. 그놈은 참 좋은 개였습죠. 앤드루 잭슨 말씀입니다. 오래 살았더면 꼭 한번은 이름을 올리고 출세할 놈이었는데- 그럴 소질과 재간이 충분히 있었단 말씀이야. 도대체 그놈의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만한 싸움을 벌이는 개라면 소질 없이는 안 되는 노릇이란 말씀이야. 그 마지막 싸움과 결과를 되생각할 때마다 참 마음에 안 됐다고 지금도 난 느끼지요. 이 스마일리는 강아지랑 투계랑 고양이랑 하여튼 돈 내기 싸움을 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갖고 있었습죠. 그래서 우리가 시합을 하자고 덤벼들어 물건이 없어 시합에 응하지 못하겠다고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 집으로 갖고 가 그놈을 교육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뒷마당에 앉아 그 개구리한테 높이뛰기 공부를 배워줬더란 말씀이야. 한데 놀랍게도 성공을 했더란 말이지. 그놈의 꽁무니를 한 번 줴지르면 마치 도우넛 덩어리가 하늘로 치솟듯이 껑충 뛰어 올라 한 번 아니면 두 번 재주를 넘고 날씬하게 고양이처럼 땅 위에 내려 앉는단 말씀이야. 처음에는 파리를 잡아 먹는 것으로 높이뛰기를 시작하여 늘 훈련을 계속하다 보니 눈에 띄는 파리는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영락 없이 잡아먹게 됐거든. 보통 개구리도 교육시킬 나름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스마일리가 늘 말했는데, 나 역시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스마일리가 대늘 웹스터- 대늘 웹스터란 그 개구리의 이름이었습니다-란 놈을 여기 이 마루바닥에 놓고 '파리다, 대늘, 파리야!' 하고 소리만 치면 번개같이 곧장 뛰어 올라 저기 저 카운터에서 파리 한 마리를 잡아 먹고 철썩하고 다시 내려앉아 진흙 덩어리처럼 육중하게 자리잡고, 마치 보통 개구리가 하는 짓 이상으로 특별한 짓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드러누워, 뒷다리로 머리를 슬슬 긁는 꼴을 내 눈으로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말씀이지. 그렇게 재주가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솔직담백한 개구리는 처음 봤죠. 평지에서 뛰기 시합을 하면 그 족속 중의 어느 놈보다도 한 번에 멀리 뛰었단 말입니다. 즉 넓이뛰기가 그놈의 장기였단 말씀입니다. 알아들으세요? 그래서 넓이뛰기 시합이라면 스마일리는 귀 떨어진 동전 한푼이라도 있으면 내기를 걸었단 말씀이야. 스마일리는 되게 그 개구리를 자랑 삼았는데,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세상 각처 안 다녀 본 곳이 없는 친구들도, 그렇게 잘 뛰는 개구리는 처음 보았다고 감탄하는 판이었으니까요. 여하튼 스마일리는 이 개구리를 조그만 격자 상자에다 놓아 두고 이따금 그 상자를 거리고 들고 나와 돈내기를 하곤 했습죠. 어느 날 이 마을에는 처음 오는 낯선 친구가 상자를 들고 오는 그 친구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상자에 든 것이 뭐요?' 그러니까 스마일리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글쎄올시다. 앵무새일 수도 있고 카나리아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개구리 한 마리요' 하고 대답했습죠. 그러니까 그 친구가 상자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로 한참 동안 구경하더니 '흠, 정말 그렇군. 한데 이 개구리 장기는 뭐죠?' 하고 물었습니다. 스마일리는 아주 천연스럽게, '이놈이 장기는 꼭 한 가지 있습니다. 이놈은 캘라베라스군의 어떤 개구리보다도 높이 뛴답니다'라고 하니까, 그 친구는 다시 한 번 상자를 받아 들고 오랫동안 유심히 보고 나서 상자를 스마일리에게 돌려 주면서 '글쎄 이 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보다 잘났다는 건 난 통 이해 못하겠는데' 하고 남의 비위를 긁듯이 말했죠. 그러니까 스마일리는 '당신이 개구리를 잘 알지도 모르고, 모를지도 모르고, 경험이 있을지라도 모르고, 풋나기 아마튜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난 나대로 의견이 있으니까, 캘라베라스군의 어떤 개구리보다도 이 개구리가 더 잘 뛴다고 생각하니 사십 달러를 걸겠쉬다'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그 낯선 친구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슬픈 듯이 '난 낯선 고장에 혼자 와서 개구리 한 마리도 없는 몸이오. 하지만 개구리 한 마리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돈을 걸겠소'라고 대답했죠. 그러니까 스마일리는 '염려 마슈, 염려 마슈, 이 상자를 잠깐 들고 있으면 내가 가서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다 드리리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스마일리가 건 돈 곁에다 자기도 돈 사십 달러를 내놓고 상자를 들고 앉아, 스마일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게 됐습죠. 그래서 그 친구는 거기 앉아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드디어 개구리를 꺼내고 호주머니에서 숟갈을 꺼내 개구리의 입을 벌리고 메추리 잡는 납덩어리 산탄알을 잔뜩 쑤셔 넣어 턱까지 채워 마루 위에 내려놓았죠. 그 동안 스마일리는 늪으로 가서 진흙탕 속에서 철벅거리고 다니면서 드디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그 친구에게 주면서, '자 준비가 됐으면 그놈을 대늘 곁에 앞발을 가지런히 맞추어 놓으시오. 내가 신호를 할 테니'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둘-셋-가라!' 하고 악을 쓰니 두 사람이 각기 자기 개구리의 꽁무니를 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새로 잡아온 개구리는 신이 나서 뛰어갔지만 대늘이란 놈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양쪽 어깨를 이렇게 프랑스 사람처럼 움츠릴 뿐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는 교회당 건물처럼 육중하게 주저앉아 마치 닻을 내린 것 모양으로 꼼짝을 못했단 말씀이야. 스마일리는 놀라고 당황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물론 그 까닭을 알 도리는 없었단 말씀이지. 그 친구는 돈을 집어들고 가 버리는데 문간을 나가면서 이렇게 엄지손가락으로 대늘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글쎄, 저 개구리가 다른 개구리보다 잘났다는 건 난 통 이해 못하겠는데' 하고 남의 비위를 긁듯이 말했습죠. 스마일리는 오랫동안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늘을 내려다보고 섰다가 '도대체 웬일로 이 개구리가 그 짓을 하였을까- 뭣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웬일인지 몸이 부풀어 보이는데' 하면서 개구리의 목덜미를 잡아 올리면서 '아니 이놈의 개구리 무게가 오 파운드는 실하니, 웬일일까?' 하고 개구리를 거꾸로 잡아 흔드니까 산탄 두 줌을 토해 냈단 말씀입죠. 어찌된 영문인가를 그제서야 알고 스마일리는 펄쩍 뛰고 그 친구의 뒤를 쫓아 나갔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말았습죠. 그래서 말씀야-" 바로 이때에 밖에서 사이몬 위일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 그는 뭣 때문에 그러나 하고 일어섰다. 그는 걸어가면서 내 쪽을 돌아보고, '잠깐만 그대로 앉아 계슈. 내 금방 돌아올 테니' 하였다. 그러나 이 이상 더 기업정신이 왕성한 부랑자인 짐 스마일리의 얘기를 계속 들어 보았댔자 리오나이다스 W 스마일리 목사의 안부에 관하여 하등의 소식을 들을 것 같지 않아 나는 자리를 떴다. 문간에서 나는 이 붙임성 많은 위일러가 되돌아오는 것과 맞닥뜨렸다. 그는 나를 몰아세워 놓고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이 스마일리라는 친구가 말씀이야, 언젠가 한번은 꼬리가 없는 노란색의 애꾸눈의 암소를 한 마리 갖고 있었는데, 꼬리가 없어 그냥 바나나 같은 몽땅한 밑둥만 남은 놈이란 말씀이야-" 그러나 시간도 없으려니와 들을 기분도 나지 않은 나는 병신이 된 암소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작별을 하고 말았다. <끝> 6. 일백만 파운드의 은행 어음 마크 트웨인(Mark Twain) 나는 스물일곱 살 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어느 광업 주식 중개업 점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주식 거래의 일이라면 모든 것에 통달하고 있던 노련가였다. 천애 고아의 몸으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의 능력과 때묻지 않은 평판 말고는 달리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결국 자산을 모으는 길로 나의 발길을 들여놓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도가 유망하여 만족하고 있었다. 토요일은 오후의 회합이 끝나면, 자신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 만(灣)에서 돛배를 띄우고 지내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었다. 어느 날 큰마음 먹고 멀리 나간 끝에 앞바다까지 나가게 되었다. 마침 해가 저물어가고, 돌아갈 가망이 희박하게 되었을 때, 런던으로 가는 브리그 선의 구조를 받았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긴 항해로서 무보수로 일하게 되어 운임을 때울 수 있었다. 런던에 상륙했을 때에는 옷은 꼴 사납게 엉망으로 되어 있었고, 주머니에는 1달러밖에 있지 않았다. 이 돈으로 24시간은 배를 채우고, 비 이슬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다음 24시간은 배를 채울 것이나 비를 가릴 지붕도 없었다. 그 다음 날 아침 10시쯤, 나는 허기진 배를 안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포틀랜드 플레이스 근처를 다리를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보모 아가씨에게 손을 끌리어 지나가던 어린이가 매우 맛있어 보이는 큰 배를 겨우 한 입만 먹고 거리 도랑으로 훌쩍 던져 버렸다. 물론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더러운 귀중품으로 눈길을 꽂았다. 입에서는 군침이 돌고, 위에서는 꾸룩꾸룩 소리를 내며 그것을 먹고 싶어하고, 온몸이 그것을 탐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구부릴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이 나의 목적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나는 얼른 몸을 곧바르게 일으키고 시치미를 떼었으며, 배 따위는 전연 생각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 체했다. 같은 동작을 몇 차례나 거듭할 뿐이지, 배를 주울 수는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가 되어서 체면이고 창피고 아랑곳 없다, 집어들고 보자, 하고 마음먹은 순간, 내 뒤쪽 창문이 열리며 한 신사가 거기서 이같이 소리쳤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오." 나는 금빛이 번쩍이는 제복을 입고 있는 문지기의 안내를 받고, 호화스런 방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두 사람, 같은 나이 또래의 신사가 앉아 있었다. 하인을 물리치고 나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막 아침을 들고 난 뒤여서, 그 먹고 난 나머지는 거의 나를 압도하고 말았다. 그런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들어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괴로운 생각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조금 전에 무슨 일인가가 거기서 일어났던 것이지만, 그것을 며칠이 지나도록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노인 형제는 이틀 전에 심한 말다툼을 벌이고, 결국 그것을 내기를 걸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무슨 일이나 결정지을 때의 영국인의 버릇이다. 잉글란드 은행이 일찍이, 외국과의 공식 거래에 관한 특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두 장의 백만 파운드짜리 어음을 발행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 가운데 한 장만이 사용되고 이후 무효의 소인이 찍혔다. 또 한 장은 아직 은행 지하 창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잡담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이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즉 참으로 정직하고 총명한 외국인이 런던으로 와서, 친구는 한 사람도 없는 데다, 돈이라곤 그 백만 파운드 어음 한 장뿐으로, 게다가 그 어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경우 그 사나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형제 갑은 그 사나이는 굶어 죽을 것이라고 한다. 을은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한다. 갑의 말로는, 그 사나이는 그 어음을 은행이나 또는 그밖의 곳에서도 내놓을 수가 없다, 내놓으면 그 자리에서 체포당하고 만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입씨름을 계속하고 있다가, 마침내 을은, 그 사나이는 어떻게 하든 그 백만 파운드 어음으로 한 달은 살아간다, 게다가 교도소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에 2만 파운드를 걸고 내기를 하자, 하고 제의했다. 갑은 그 말에 따랐다. 을은 잉글란드 은행으로 가서 그 어음을 사들였다. 그야말로 영국인답다. 골수까지 배짱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는 편지를 구술하여 그것을 비서 한 사람의 거침없는 손으로 쓰게 하고, 이리하여 두 형제는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서 이것을 줄 적당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직한 얼굴을 하고는 있으나 슬기가 모자라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똑똑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정직하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었고, 모두 갖추고 있으나, 그 사람들은 충분히 가난하지가 않거나 혹은 충분히 가난하지만 외국인이 아니었다. 언제나 무엇인가 결함이 있었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들은 쌍방이 모두 내가 조건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그들은 일치하여 나를 선택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내가 어찌하여 불리어 들어갔는가 하는 까닭을 들으려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 신상에 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안 가서 나의 경력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목적에 따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부터 기쁘다고 대답하고는 용건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내게 봉투를 건네주고, 설명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열어 보려고 하자, 그건 안 된다, 숙소로 가지고 가서 주의깊게 읽고, 결코 조급히 굴거나 늑장을 부리거나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좀더 이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고 말하자, 상대방은 그렇게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무엇인가 장난에 틀림없는 일에 내가 이용되고, 게다가 그것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며, 돈 많고 힘꽤나 쓰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해서 화를 낼 수 없는 입장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을 생각하여 기분이 언짢았고, 모욕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배를 주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배는 거기에 없었다. 이 재수없는 일 때문에 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사람들에 대한 나의 마음은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 집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그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돈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정말이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편지와 돈을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 값싼 식당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많이 먹었을까!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돈을 꺼내고, 그것을 펼쳐서 들여다보자,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했다. 백만 파운드! 아니, 나는 눈을 돌리고 말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그 어음을 1분 동안이나 눈을 반짝거리면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맨처음 눈에 띈 것은 가게 주인이었다. 그의 눈은 어음으로 쏠려 있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몸과 마음을 내던져 버리고 우러러보고 있었던 것이며, 손과 발을 꼼짝도 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곧 적절한 조처를 취하여,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도리에 맞는 일을 했다. 어음을 그의 앞으로 내밀고, "거슬러 주세요!" 그러자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음을 바꿀 수가 없다고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변명을 했다. 그리하여 아무래도 어음을 그의 손에 건네줄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언제까지고 눈길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눈요기를 충분히 하듯이 바라다본 것같이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만져 보는 일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마치 비천한 신분이 만지기에는 너무나 신성하고 황송하다고 하는 듯이. 그리하여 나는 말했다. "폐를 끼치게 되어 안 됐지만, 꼭 부탁합니다. 잔돈으로 바꾸어 주세요. 달리 돈을 가진 게 없거든요."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몇 푼 안 되는 것은 요 다음번에 주어도 좋다, 라고. 나는 이 근처에는 얼마 동안 올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원할 때 들고, 계산은 언제까지 연기해도 무방하다, 고 하는 것이다. 선생은 재미있는 사람으로, 그런 옷차림으로 세상사람들을 놀려 주려고 하는 것일 테지만, 그런 것으로 선생과 같은 갑부를 신뢰하기를 주저할 리는 없다, 고 그는 말했다. 이러는 동안 다른 손님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나에게 그 큰것(어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 두는 게 어떠냐고 일러주고, 굽실굽실 절을 하면서 저만치 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후 나는 곧 그 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경찰이 나를 찾아내서 내게 손을 써 그 잘못을 바로잡게 되는 일이 없는 동안에, 그 잘못을 고치려고 한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많이 보아 왔으므로, 떠돌이에게 1만 파운드짜리 지폐라고 여기고 백만 파운드의 어음을 주어 버린 일을 뒤에 알게 되면, 그런 사람은 당연히 자기의 잘못에 거북한 사정을 늘어놓아야 하는 것임에도, 그러기는커녕 떠돌이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집에 가까워지자, 나의 흥분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집은 조용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아직 큰 실수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벨을 눌렀다. 예의 하인이 나타났다. 나는 그 신사분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출발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한패 특유의 교만하고 쌀쌀한 말투로 대답했다. "출발? 어디로 떠나셨는데요?"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어느 곳인가요?" "대륙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륙 쪽이라고?" "그렇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떤 길을 따라서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한 달쯤 걸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달? 아아, 이거 야단났군. 어떻게 연락할 방법을 가르쳐 주시죠. 아주 중대한 용건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정말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전연 모르는 걸요." "그렇다면 누구든가 가족 되시는 분이라도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족도 집에 안 계십니다. 몇 달 동안이나 외국에 나가 계시죠- 이집트와 인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봐요, 정말이지 큰 문제가 일어났어요.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겠죠. 내가 왔다는 걸 전해 주어요. 잘못이 바로잡힐 때까지 언제라도 오겠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돌아오신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돌아오시지는 않을 겁니다. 한 시간쯤 후에 당신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볼 것이지만, 잘못은 없는 것이다, 자기들은 약속한 때에 틀림없이 이리 돌아와서 당신을 만난다, 고 말해 두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나는 단념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무슨 수수께끼인가! 나는 머리가 돌 것만 같았다. 그들은 틀림없이 약속한 그때에 이리 온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아, 편지에 설명이 있겠지. 나는 지금껏 편지는 깨끗이 잊고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읽어 보았다. 내용은 이러하다. 당신은, 누구나 당신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총명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당신은 가난하고 외국인이라 여겨진다. 이 속에 얼마의 돈을 동봉하였다. 이것은 이자 없이 30일간 당신에게 빌려준 것이다. 그 기간이 끝나면 당신은 이 집으로 찾아오기 바란다. 나는 당신에게 내기를 걸고 있다. 만일 이기면, 내가 줄 수 있는 지위라면 무엇이라도 당신에게 준다- 즉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고 동시에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지위라면 어떤 지위라도. 서명과 주소와 날짜도 없다.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다! 독자 여러분은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에게는 깊고, 깜깜한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내게 난처해질 꿍꿍이속이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친절에서 나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공원으로 들어가 잔디에 앉아, 깊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가 궁리해 보았다. 한 시간 뒤에 나의 추론은 다음과 같은 판단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고 악의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결정짓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잘라낸다. 무엇인가 꿍꿍이속, 계략 또는 시험이 진행 중이다.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결정지을 방법은 없다- 이것도 잘라낸다. 나에게 내기를 걸고 있다. 무슨 내기인지 결정지을 방법이 없다- 이것도 잘라 버린다. 이것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부분은 정리되고 만다. 나머지 문제는 모양이 있고 실체가 있으므로, 확실성을 가지고 분류하고 레테르를 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잉글란드 은행에 가서 이 어음을 그 소유주의 이름으로 예금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렇게 해줄 것이다. 나는 모를지 몰라도 은행은 그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입수했는지 물어보고, 그래서 만일 내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다면 교도소로 가게 될 것이다. 만일 어디에선가 그것을 현금으로 바꾸거나, 그것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리고자 하면, 같은 결과로 될 것이다. 나는 이 막대한 무거운 짐을 그 사람들이 귀국할 때까지 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싫든 좋든 말이다. 이런 것은 나에게는 무익하다. 한 줌의 재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것을 소중히 하고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걸식을 해가면서,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줄 수도 없다. 제대로의 정신을 가진 시민이나 날강도거나 그 누구일지라도, 받지 않을 것이고, 또 말려들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형제들은 안전하다. 가령 내가 이 어음을 잃어버리거나, 태워버리더라도, 그들은 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불을 정지시킬 수가 있고, 은행은 판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쪽은 아무런 벌이나 소득도 없이 한 달 동안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어떤 내기인지는 몰라도, 그것에 이기게 되어서, 약속된 지위를 얻지 못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 지위에는 오르고 싶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에게 줄 수가 있는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지위에 관해서 여러 모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희망은 점점 증대되어 갔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급료는 많을 것이다. 그것이 한 달만 있으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문제없다. 곧 나는 기분이 흐뭇해졌다. 이때에는 나는 다시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양복점을 들여다보자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 버리고, 다시 한 번 의젓한 옷을 입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용솟음쳤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 안 된다. 백만 파운드 어음 이외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눈 딱 감고 지나쳤다. 그러나 곧 어슬렁어슬렁 되돌아왔다. 유혹이 잔인하게 나를 괴롭혔다. 이 크나큰 고투 속에서 양복점 앞을 여섯 차례나 왔다갔다했을 것이 틀림없다. 마침내 나는 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었다. 맞지 않아서 찾아가지 않은 주문복은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내가 말을 건 사나이는 다른 사나이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사나이에게 가자, 그도 또한 다른 사나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 사나이에게 가자, 그는 입을 열었다. "네, 잠깐만요." 그가 하던 일을 마칠 때까지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안쪽으로 데리고 가서 산더미처럼 쌓인 찾아가지 않은 양복을 헤치고 그중 가장 초라한 것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맞지가 않았다. 조금도 모양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품이었으므로 그냥 그것을 입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불은 이삼일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공교롭게도 잔돈이 없어서 그래요." 그 사나이는 공들여 매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가지신 게 없습니까. 가지셨으리라고는 물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선생과 같은 훌륭한 분은 큰것밖에 가지시지 않으셨으리라 압니다." 나는 발끈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 낯선 사람을 입고 있는 옷을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나 역시 이 양복 대금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어. 나는 큰것을 헐게 해달라고 당신에게 귀찮게 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야." 이같이 말하자, 그는 약간 태도가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다소 되바라진 태도로 말했다. "나는 별로 선생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요. 그렇지만 섭섭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선생께서 가지고 계신 지폐가 우리 집에서는 헐 수 없는 것이라고 미리 작정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아무렴요. 얼마든지 바꿔드리겠습니다." 나는 어음을 내놓고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내가 사과해요." 그는 웃으면서 그 어음을 받아들었다. 그 웃음이라는 것이야말로, 커다랗게 활짝 주위로 번져가고, 굵은 주름과 잔주름과 소용돌이도 감싸서, 연못에 벽돌을 던져넣은 장소와 같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어음을 얼핏 본 순간에, 그 웃음은 굳게 얼어붙고, 노란빛으로 바뀌고, 베수비오 산 허리의 작은 평원에 응결되어 있는, 저 물결 모양이고, 땅벌레와 같은 용암의 화산과 같이 보였다. 대체로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처럼 도중에 멈추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 사나이는 어음을 손에 든 채,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자 가게주인이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가와서, 기세있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무엇이 못마땅하신가요?" 나는 말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거스름돈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네, 네, 어서 거슬러드려요. 토드 군, 거스름돈을 드리라니까." 토드 군이 대꾸했다. "거슬러드리라구요! 말이야 쉽죠, 나리. 이걸 좀 보시죠." 가게주인은 어음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즈막하고, 감정이 깃들어 있는 휘파람을 불고, 찾아가지 않은 양복 더미로 뛰어가서, 이것 저것을 헤치기 시작했다. 흥분이 되어 쉴 새 없이 지껄이면서,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듯이, "굉장한 백만장자 어른께 이런 말도 안 되는 양복을 팔다니! 토드는 얼빠진 녀석이야- 타고난 얼치기지. 언제나 이런 일을 저지르거든. 백만장자를 모두 놓치고 만단 말이야. 결코 분별을 할 줄 모르니까. 아아, 여기 있습니다. 이 양복은 벗어 놓으십시오. 불에 던져 버리십시오. 이 셔츠와 양복을 입혀드리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문하신 것에 꼭 맞는 물건입니다- 수수하고도 아름답고,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공작에게 어울릴 만한 스마트함, 어느 외국 전하께서 주문하신 물건으로- 그래요, 알고 계실 겁니다, 핼리팩스 전하의 분부로 만든 것이지만, 모후께서 돌아가실 것 같아서- 사실은 돌아가시지는 않으셨습니다만, 상복을 입고 가셨기에, 이건 여기 놓아 두고 가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아니 그건 이제 문제없습니다. 저희들은 언제나 저희들 나름대로- 아니, 그건 그분의 의향에 따라서- 이것 보십시오- 바지는 잘 맞습니다. 보기좋게 딱 들어맞는 걸요, 자, 이번엔 조끼를 하아, 이것도 고만이군요! 이번에 웃도리- 아니, 이것 좀 보십시오, 하아, 완벽- 모두가 이처럼 꼭 들어맞다니 제가 처음 겪는 경험입니다." 나는 만족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잘 됐습니다. 잘 되고말굽쇼. 임시변통으로는 이걸로 잘 됐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선생님의 치수를 알려주신다면, 어떤 것을 만들어낼지, 어디 보아주십시오. 이봐 토드, 장부와 펜을, 자 준비됐지. 다리의 길이, 삼십 이......" - 하는 식으로. 이쪽에서는 한 마디도 하기 전에 내 치수를 재어놓고, 예복, 모닝 셔츠, 모든 것의 주문을 적어 넣었다. 간신히 내가 입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때, 나는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여보시오, 그 같은 많은 주문은 할 수 없어요.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겠소? 어음을 거슬러 주지 못하는 한 말이오." "언제까지라고요! 그런 말씀은 정말이지 어울리시지 않습니다. 영원히- 참으로 이 말씀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토드 군, 어서 서둘러 만들어서, 우물쭈물 말고 이 분 댁으로 배달해 드리는 거야. 다음 손님은 기다리시게 하고. 이 분의 주소를 적어놓고, 그리고-" "난 자주 주소를 바꾸고 있어요. 다음번 들렀을 때 새 주소를 알려주지." "좋습니다. 정말이지 좋습니다. 그럼 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실례합니다." 자,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이다. 나는 자연히 질질 끌어가며 무엇이나 탐나는 것을 사고, 거스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에 나는 생활에 필요한 편리한 것, 사치스런 것 일체를 호화스럽게 마련하고, 하노버 샛길에 있는 특수인 전용의 고급호텔에서 살게 되었다. 저녁은 거기서 들었으나, 아침은 너절한 해리스의 밥집을 빼놓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그 백만 파운드 어음으로 최초의 식사를 했던 것이다. 내가 해리스를 대성시켜 줬던 것이다. 백만 파운드의 어음을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외국의 기인이 이 가게의 수호신이라고 하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난하고, 하루하루를 꾸려나가기에 허덕이고 있던 하루살이 장사에서 일약 유명하게 되고, 손님들이 밀어닥쳤던 것이다. 해리스는 이 큰 은혜를 입고, 나에게 강제로 돈을 빌려 주는 것이었고, 그건 곤란하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난한 사람이면서도 쓸 수 있는 돈푼이나 가지고, 부자이고 한다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나중에는 파멸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말려들고 만 다음에야 헤엄쳐 건너가든가 빠져버리든가 어느 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절박한 재난의 요소가 있어서, 이 사태에 진지하고, 진정이고, 그렇다, 비극적인 일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 일은 순수하게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었다. 밤중에는, 어둠 속에서는, 이 비극의 부분이 표면으로 밀려나와서 언제나 경고를 하고, 언제나 위협을 하여, 그 때문에 신음을 하고 몸을 뒤척이며 마음놓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명랑한 낮이 되자 비극의 요소는 사라져 버리고 하늘을 날을 듯이 우쭐해지며, 눈이 빙빙 돌고 고주망태가 되도록 행복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나는 세계의 수도에서 명물 사나이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의 머리는 조금이 아니라 크게 돌게 되었다. 영국의 것이건, 스코틀란드의 것이건, 아일란드의 것이건 어느 신문이라도 집어들어 보면, 거기에 '조끼 주머니에 백만 파운드의 사람'이라고 나의 최근의 언행에 관해서 다소를 가릴 것 없이 기사가 실려 있지 않은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 같은 기사 가운데서 나는 인물 가십란 맨 끝에 있었다. 다음에는 나이트 작 위에 실리고, 그 다음에는 준남작 위에, 그리고 나아가 남작 위라고 하는 투로, 나의 소문이 늘어남에 따라서, 계속 올라가서, 마침내는 최고위를 차지하고, 왕실 직계 공작 이외의 공작 위, 켄터베리 대주교를 제외한 최고 승려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이것이 명성은 아니었다. 아직 그때까지는 명물 사나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후를 장식하는 일격- 말하자면 작위 수여 의식-이 찾아와서 한순간에 소문이라고 하는 사라져 버리기 쉬운 쇠부스러기를 명성이라고 하는 항구적인 순금으로 바꾸고 만 것이다. 즉 <펀치>지가 나를 만화로 한 것이다. 그렇다, 이리하여 나도 대성하였다. 나의 지위는 확립되었다. 나는 농담거리가 되기는 할지언정 들뜬 기분이나 무례하게가 아니라, 경건한 마음으로 그렇게 되었고, 나에게 미소를 보내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조소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젠 예전의 일로 됐다. <펀치>지는 내가 누더기옷을 걸치고 어리둥절하면서, 런던 탑으로 들어가겠다고 수위와 옥신각신하고 있는 것을 만화로 다루었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전연 거들떠보지 않던 젊은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면 그 말은 훌륭히 다루어져서 도처로 전해지고, 밖으로 나가면 '저봐요, 저기 가고 있어요,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하고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는 속삭임이 귀에 들어온다. 아침을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오페라 특등석에 나타나면 수많은 오페라글라스의 집중 포화를 한 몸에 받는다. 이렇게 되면 어떤 기분이 될지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하루 종일 영광 속에 젖어 있었다- 결국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다. 사실이지, 나는 그 낡아빠진 누더기옷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그것을 입고 나타난다. 그것은 사소한 물건을 사다가 모욕을 받고, 그러면 예의 백만 파운드의 어음을 꺼내서 냉소자를 단번에 끽 소리도 못하게 하는, 그 예전 재미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림을 넣은 신문이 이 옷차림을 세상에 널리 알렸기 때문에, 그것을 입고 외출을 하면 당장 들키게 되어 군중들이 뒤를 따라오고, 물건을 사려고 하면 가게 사람들은 내가 어음을 꺼내기도 전에, 가게 물건 모두를 가져가도 좋으니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명성을 얻게 되고 열흘째 되는 날, 주영(駐英) 미국 공사에게 경의를 나타내어 우리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려고 찾아갔다. 공사는 나의 경우에 어울릴 만한 감격으로써 나를 맞아주고, 어찌하여 의무를 좀더 일찍 이행하지 않았느냐고 크게 나무라면서, 그것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그날 밤 그가 베푸는 만찬회에 병이 나서 참석하지 못하는 초대 손님 대리를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와 나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 학교 친구였고, 뒤에 가서는 예일 대학에서 또 만나게 되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자기 집에 들러 달라고 말했다. 나는 물론 자진해서 찾아 뵙겠다고 대답했다. 자진해서 찾아 뵙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나의 본색이 드러났을 때에도 이 사람이 완전한 파멸에서 어떻게 하든 나를 구해줄지도 모른다. 어떻게 구해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어떤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을 용기는 없었다. 털어놓을 바에는 런던에서 이 엄청난 나의 생활이 시작된 애당초에 곧 해야 했을 거다. 아니, 이제 와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다. 너무나도 깊게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에게 진상을 감히 털어놓기에는 너무나도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나 자신이 보는 바로는 반드시 키가 파묻힐 정도의 깊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아무리 돈을 빌어 쓰기는 했어도 나는 분수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수를 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나의 급료 이내라는 말이다. 본래부터 급료가 얼마가 될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상의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그것은, 만일 내가 내기에 이기면, 그리고 내게 수완이 있다면- 반드시 수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부자가 주는 지위는 내 쪽에서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기에 대해서는, 나는 세세하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운이 좋았다. 그런데 내 급료의 대충 예산은 연수 6백에서 1천 파운드이다. 그렇다, 최초의 1년은 6백 파운드이고, 그로부터 해마다 승급하여, 충분히 일을 해보여서 이 최고의 액수에 도달한다. 현재로서는 나는 최초 1년의 급료분밖에 빚을 지고 있지 않다. 모두들 나에게 돈을 빌려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말을 해서 대개는 물리쳐 왔다. 그래서 빚은 빌린 돈이 3백 파운드이고, 나머지 3백 파운드는 생활비와 물건을 사는 데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이 달의 나머지도 신경을 쓰며 절약을 계속해 간다면, 2년째 급료로 어떻게든 해나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점 충분히 빈틈없이 할 작정이다. 이 약속의 한 달이 지나서 고용주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문제없이 될 것이다. 나는 곧 2년분 급료를 할당하여 채권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곧 일에 종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사의 만찬회는 14명 정도의 훌륭한 것이었다. 쇼어디치 공작 내외, 그의 레이디 언 그레이스 엘리너 셀레스트 뭔가 하는 영애와 드 보안, 뉴우케이트 백작 내외, 치이프 사이드 자작 브러더스카이트 경, 그의 부인, 몇 사람이 작위 없는 남녀, 공사와 부인과 영애, 그 영애의 방문객 친구로 22세의 영국인 포오셔 랭검이라고 하는 아가씨. 이 아가씨에게 나는 2분도 채 못되어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 눈으로 보아도 분명했다. 또 한 사람의 손님이 있었다. 미국인으로- 이것은 이야기가 좀 앞지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 응접실에서 식욕 자극용 음료를 들면서 늦어진 손님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때, 하인이 한 손님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쳤다. "로이드 헤이스팅즈 님!" 일반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헤이스팅즈는 나를 발견하고 따뜻한 손을 내밀며 곧장 내게로 왔다. 그리고 악수를 하려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실은 아는 분인 줄 알고." "한데, 저를 알고 있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저- 저-" "조끼 주머니의 기인이냐구요? 맞았어요. 염려 마시고 내 별명을 불러 주십시오, 익숙해졌습니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거 놀랐는걸. 한두 차례 자네 본명과 별명이 함께 나와 있는 것을 본 일은 있지만, 자네가 헨리 애덤즈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그런데 자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월급을 받고 브레이크 홉긴즈의 점원으로 부지런히 일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시간 외 수당을 받고 굴드 컬리 확장 계획 서류나 통계 정리를 합쳐서 내 시중을 들고 있던 것은 아직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은 게 아니나. 자네가 런던에 와서, 백만장자가 되고, 어처구니없는 명사가 되다니! 정말이지 아라비안 나이트의 현대판이구먼.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걸. 영문을 모르겠어. 어지러운 머리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게나." "사실은 말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나 역시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아니, 정말이지 굉장하잖아, 응? 꼭 석 달 전 아닌가, 둘이서 마이너어즈 요리집에 갔던 일은." "아니야, 화트 티어 가게지." "맞았어, 화트 티어였어. 새벽 두 시에 거기 가서, 그 확장 계획 서류에 여섯 시간이나 시달린 뒤 초프와 커피를 들었지. 나와 같이 런던으로 가자고 자네를 설득시키고 가게에 부탁해서 자네에게 휴가를 얻어 주었고, 자네 비용은 모두 내가 지불하고 한몫 잡는 데 성공하면, 그 위에 또 뭣이나 자네에게 주겠다고 말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성공을 할 리가 있겠느냐고 말했어. 외국으로 나가면 장사 추세를 알 수 없게 되고, 귀국한 뒤 또한 호흡이 맞을 때까지 언제까지 시간이 걸릴지 모르므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처럼 자네는 여기에 와 있구먼. 얼마나 기묘한 일이야. 어떤 계기로 여기에 온 거지? 도대체 무엇이 자네에게 이런 희한한 생각을 들게 했지?" "아니, 정말 우연한 일이야. 말하면 긴 얘기가 돼- 로맨스,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언젠가 자초지종을 말하겠지만 지금은 안돼." "언제?" "이달 말께." "이직 두 주일 이상이나 있어. 그때까지 호기심을 눌러두는 건 무리야. 한 주일 뒤로 해." "안돼. 그 까닭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장사는 잘 되나?" 그는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자네는 진짜 예언자야, 진짜 예언자란 말이야. 오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이 사실은 지껄이고 싶지 않아." "아니 꼭 말해 줘. 오늘 밤엔 내 숙소에서 자도록 해. 그리고 모든 얘길 들려줘." "좋겠어? 자네 진심인가?" 하고 말하며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럼,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정말이지 고맙네. 또다시 그와 같은 목소리, 눈, 인간적인 관심을 대하게 되다니. 내 일에 그 같은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다니 말일세- 여기서 지독한 고생을 하고 난 뒤이기 때문인지- 나는 무릎꿇고 원할 정도야." 그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런 뒤에는 아까와 같이 명랑하게 되어 만찬을 기다렸다- 그 만찬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좋지 않은 화가 치미는 영국식 방법에서는 반드시 일어나는 일로- 자리 차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찬은 생략되었다. 영국인은 언제나 만찬회에 나가기 전에 저녁을 든다. 이와 같은 위험성이 있는 것을 자기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낯선 사람에게는 이것을 경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면으로 이 함정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아무도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두 저녁을 들고 온 것이다. 헤이스팅즈 이외에는 아무도 초보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헤이스팅즈도 대사로부터 초대를 받았을 때, 영국의 습관을 지켜서 만찬은 준비해 놓지 않겠다고 미리 귀띔을 받았던 것이다. 각자는 부인의 손을 잡고 줄을 지어 식당으로 들아간다. 그런 행동은 일단 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입씨름이 벌어졌다. 쇼어디치 공작은 공사는 단지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거지 국왕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쪽이 대사 위라고 하면서 식탁 맨 상석에 앉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도 권리를 주장하여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가십란에서는 나는 왕실 직계 이외의 공작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고 이 공작보다 윗자리에 앉겠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러 가지로 토론을 해보았으나 아무리 토론을 한다고 해도 낙착이 되지를 않았다. 그는 마침내(게다가 무분별하게도) 출생과 조상을 끄집어내는 것이었으므로, 나도 이 싸움에서 그의 정복자에 대응하여 아담을 내세웠다. 즉 나의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나는 아담의 직계 자손이지만, 그는 그의 이름이 근세의 노르만계로 갈리는 바와 같이 아담의 방계라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다시 응접실로 열을 지어 돌아오고 거기 서서 가벼운 식사를 들었다- 즉 서어딘 한 접시와 딸기를 각각 마음대로 서서 먹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리나 차례 격식 따위에는 별로 열을 올리지 않는다. 최고위의 두 사람이 1실링의 은화를 던져 올려 이긴 쪽이 먼저 딸기를 들고, 진 쪽은 1실링을 가진다. 다음 두 사람이 또 그렇게 한다. 차례차례 이렇게 되풀이해 간다. 이 가벼운 식사 뒤 트럼프 테이블을 내놓고, 한 번에 6펜스로 크리베시를 했다. 영국인은 재미로 겨루기를 하지는 않는다. 얼마나 벌게 되는가 잃게 되는가- 어느 쪽이건 무방하지만- 하는 것이 아니면 겨루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틀림없이 그 중의 두 사람, 미스 랭검과 나는 즐거웠다. 나는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므로 계속 패가 이중 이상이 되어도 카드를 계산하지 못하고, 오르는 패가 되어도 깨닫지 못하며 또한 바깥쪽 줄에서 시작해서 할 때마다 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애 쪽도 같은 모양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성가시지 않았다. 나와 꼭같은 마음이었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어느 쪽이나 올라가지 않고 또한 그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즐거운 일만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며, 그밖에 다른 것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중단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렇지, 머리까지 빨갛게 물들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 그렇다면 기쁘다, 기쁜 일이다, 하고 틀림없이 말했던 것이다. 아아, 이런 즐거운 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퍽으로 점을 달 때마다 단다는 말을 했고. 그녀는 점을 달 때마다, 패를 셈하면서 나의 말을 틀림없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잭 2점'이라고 할 때조차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하고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녀도 또한 "15가 둘, 14가 넷, 15가 여섯, 둘이 8, 여덟이 16-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말하며, 참으로 귀엽게 속눈썹 밑에서 곁눈질로 이쪽을 살짝 보는 것이었다. 아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정말이지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했다. 자기에게는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백만 파운드의 어음밖에는 한 푼의 돈도 없다, 게다가 그 돈은 실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하고 말했다. 이러자 그녀가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처음부터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죽을 것같이 재미있어 하며 웃어댔다. 도대체 무엇이 그처럼 재미있는지 나는 전연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재미있어 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 30초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로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나는 그녀의 웃음이 멈추어질 때까지 1분 반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웃었다- 정말이지 그처럼 웃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 이 말의 뜻은, 남의 어려움과 조심과 공포의 이야기, 가슴 아픈 이야기가 그 같은 효과를 발휘한 것은 이제까지 본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나는 그녀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런 재미있어 할 일이 없는 데도 그처럼 재미있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형편에서는 그런 아내가 머지않아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나의 급료에 도달할 때까지, 아직 2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것은 걱정없으나, 다만 돈 쓰는 일에 부디 조심하여, 3년째의 급료를 조금이라도 축내는 일이 없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즉 우리들은 예산을 잘못 세워서, 최초의 해 급료를 실제보다 높게 책정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자신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실제적인 명안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포오셔, 내가 그 신사들과 만나는 날에 함께 가 주시지 않겠소?" 그녀는 약간 꽁무니를 빼다가 말했다. "조- 좋아요. 제가 같이 감으로써 당신에게 용기가 난다면 말씀이에요. 하지만-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을지 정말 모르겠군요." "괜찮을지 어떨지는 몰라요- 아니, 실제론 좋지 않을 것이겠죠. 그러나 그 여하에 따라서 대단한 일로......" "그럼 가겠어요. 좋든 좋지 않든." 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감동 속에서 말했다. "도움이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기뻐요." "도움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모든 걸 해주시는 겁니다. 당신은 매우 아름답고 귀엽고 애교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곁에 있어 주신다면 우리들의 월급을 잔뜩 높이 올려서, 그 노인들을 손들게 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맞싸울 용기가 없어질 겁니다." 아니 정말이지,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갑자기 오르고, 즐거운 듯한 눈이 반짝이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구변이 좋으신 지독하신 분! 말씀하시는 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따라가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보리라고 여기시고 말씀하신다면, 터무니없는 착각이라는 걸 아시게 될 거에요." 나의 의문은 벗겨졌는가? 나의 자신은 되돌아왔는가? 그것은 이 사실로 판단해 주기 바란다. 즉 나는 마음 속으로 남몰래, 그 자리에서 급료를 첫해 1천2백 파운드로 올려놓고 말았다. 이것을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간직해 두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멍청해 있었다. 헤이스팅즈는 줄곧 지껄이었으나,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와 내가 나의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가지가지 마음에 드는 사치스런 살림살이를 그가 열을 올려 칭찬하고 있는 말에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여기 좀 서서 마음껏 바라다볼 수 있게 해주게나. 이건 정말이지 궁전이야- 정말이지 궁전이고말고! 대체로 가지고 싶은 것으로 없는 게 없어. 기분좋은 석탄 난로도 있고 저녁 식사도 준비돼 있구먼. 헨리, 자네가 얼마나 부자인가를 알 수 있는 것만이 아니야, 내가 얼마나 가난뱅이인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하고, 철저하게 망한 패배자인가, 골수에 사무치게 느껴지네." 아니,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그의 말은 나를 소름끼치게 하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하여, 눈을 뜨게 해주었다. 나는 겨우 반 인치의 지각을 사이에 두고 분화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지 못했었다- 즉 요 얼마 동안은 모르는 것으로 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아, 한심스럽구나! 많은 돈을 빚지고, 한푼의 돈도 없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불행이 손아귀에 들어 있고, 내 눈앞에서 실현 안 될지도 모르는- 아니 실현 안 될 것이 틀림없는 급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아, 아아, 나는 글렀다, 절망이다. 나를 구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헨리, 자네의 매일 수입 가운데, 보잘것없는 물방울 한 방울이라도 있었으면......" "아, 매일의 수입 말인가! 자, 이 호트 스코치라고 쭈욱 들이켜게나. 그리고 사기를 돋우는 걸세. 자, 자네를 위해서! 그리고 참, 자네는 시장하지. 자리에 앉게, 그러면......" "난 조금도 생각이 없어. 이젠 글렀어. 요즘 통 먹지 못하고 있지. 하지만 술이라면 바닥이 날 때까지 같이 마시자구. 자아!" "술꾼끼리 한바탕 겨루는 거군. 좋겠어? 그럼 해보는 거야. 로이드, 내가 준비하고 있는 동안 자네 얘기나 들려 주게." "얘기하라고? 뭐야, 또 하라는 거야." "또 하라는 거냐구? 그건 무슨 뜻이지?" "또 한 번 처음부터 들어보겠느냐 말이야." "또 한 번 들어보겠느냐구? 이건 모를 일이군 그래. 잠깐, 이제 그 술은 마시지 말게. 그처럼 이상하게 됐다면 마실 필요가 없어." "아니, 이것봐,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게나. 여기 오는 도중에 이미 모든 얘길 다 해 버렸잖아." "자네가?" "그래, 내가." "금시초문인걸." "헨리, 이건 농담이 아니야. 곤란한 일인걸. 그 공사 댁에서 도대체 자넨 무얼 하고 있었나?" 이리하여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나는 사나이답게 깨끗이 고백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귀여운 아가씨를- 포로로- 얻었어." 그러자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서 손을 잡더니, 흔들고 또 흔들며, 아프도록 흔들어댔다. 우리들이 3마일이나 걷고 있는 동안에 계속되고 있던 말을 한 마디도 내가 듣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책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그야말로 참을성이 있고 친절한 사나이답게 자리에 앉더니, 모든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주었다. 요약하면 결국 이런 것이 된다. 그는 이때야말로 다시 없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굴드 컬리 사업 확장주를 '광구 인가개발자'에게 매각하는 '선택 판매' 권한을 갖고 백만 달러를 넘으면 그 이상은 모두 자기 것으로 되는 계약을 맺었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고, 아는 한의 모든 수단을 쓰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은 없다. 그리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은 대강 써버렸다. 그러나 그에게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자본주는 단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고, 이달 말에는 그의 선택 판매 기한이 끝나고 만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파산한 것이다. 그와 같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그는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헨리, 자네는 날 살려줄 수 있어! 자네라면 가능해. 그리고 가능한 건 이 세상에 자네밖에 없네. 해 주겠나? 해 주지 않겠나." "어떻게 하면 좋은데. 확실히 말해 주게나." "내게 백만 달러와 귀국할 여비를 마련해 줘. 내 '선택 판매권'을 양도하겠으니 마다고 하진 말아 주게." 나는 일종의 고민을 느꼈다. 나는 바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나 자신이 빈털털이야- 정말 한푼도 없어. 게다가 빚을 지고 있는걸.' 그러나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내 머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나는 이를 악물고 자본주와 같이 냉정하게 될 때까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장사꾼 같은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자네를 도와 주겠네." "그 한 마디로 나는 살아났네. 하나님의 은총이 자네에게 영원하기를! 만일에 가령 내가-" "하지만 끝까지 들어 주게나. 도와 주기는 하겠지만, 자네가 말한 대로는 아니야. 그래서 그거로는 자네에게는 공평하게는 되지 않지. 지독하게 고생을 하고 모험을 겪은 뒤이기 때문이지. 나는 광산 주를 살 필요는 없어. 그런 짓을 하지 않고, 런던과 같은 상업 중심지에서는 자본을 움직여 놓을 수가 있지. 그것이 내가 계속하고 있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이번에 하려고 하는 건 이래. 나는 물론 그 광산에 관해선 무엇이건 알고 있다, 그 거대한 가치를 알고 있다, 바란다면 누구에게나 맹세코 이같이 말하지. 그러면 자네는 내 이름을 자유로이 사용해서 두 주일 이내에, 현금 삼백만 달러로 팔아 버리는 걸세. 그리고 둘이서 나누어 가지도록 해." 그의 발을 들어다 잡아매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기뻐 날뛰는 통에 세간들을 닥치는 대로 들어다가 불태웠을 것이고,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기서 뒹굴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자네 이름을 써도 좋다는 거지! 자네 이름 말이야- 생각해 보게나. 그들이 우르르 모여드네, 런던의 부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 주를 사겠지. 그러면 나는 사나이가 되지. 한평생 대성공자야. 나는 죽을 때까지 자네를 잊지 않겠네." 24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런던은 떠나갈 듯한 법썩! 나는 하고 많은 날 아무 일도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앉아 있으면서, 몰려오는 손님들에게 이와 같이만 말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나한테 물어 보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그 사내는 잘 알고 있어요. 광산도 알고 있고요. 그 인물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광산은 그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매일 밤 공사의 집에서 포오셔와 같이 지냈다. 나는 광산에 관한 말은 그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숨겨두고 있었다. 우리들은 급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급료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때로는 사랑, 때로는 급료, 때로는 사랑과 급료를 함께 이야기했다. 공사 부인과 그의 영애는 우리들의 연애를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공사에게는 비밀로 하여 조금도 의심받지 않게 하도록, 그럴 듯한 배려를 끊임없이 생각해내 주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마음가짐이다. 그 달이 거의 끝나갈 때, 나는 런던 시 은행에 백만 달러의 예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헤이스팅즈도 같은 액수의 재산이 되어 있었다. 나는 최고급의 옷을 걸치고, 예의 포틀랜드 저택 앞을 마차로 가서, 주위 형편으로 보아 예의 형제들이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판단하고, 거기를 지나쳐 공사 저택으로 갔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와, 한창 급료 이야기를 나누면서 돌아왔다. 그녀는 몹시 흥분되어 애를 쓰고 있었으므로,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말했다. "당신의 그 아름다움을 보고는, 연수 삼천 파운드에서 한푼이라도 적은 봉급을 요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시다간 우린 끝장이에요." "걱정할 것 없어. 그 아름다운 눈길을 변치 말고, 나를 믿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틀림없이 잘 될 거야."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녀의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나에게 애원을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요구하면, 조금도 못 받게 될지 몰라요. 그 점을 잊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겠어요.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될 게 아니에요." 우리들은 예의 하인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거기에는 두 노신사가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나와 함께 온 멋진 여자를 보고 깜짝들 놀랐다. 나는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녀는 제 미래의 지주이고 협력자입니다." 그리고 그 신사들을 그녀에게 소개하며, 그들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을 불리어도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나에게도 인사 흥신록을 조사할 정도의 지혜는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나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색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해주려고, 쉴새없이 신경을 썼다. 그러자 나는 입을 열었다. "곧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나의 고용주인 신사가 말했다. "그 말을 하니 기쁘군. 그건 이제야말로 형 에벨과 나의 내기가 결판이 나기 때문이지. 만일 자네가 내 승리로 만들어 준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지위라면 무엇이나 자네에게 주겠어. 그 백만 파운드 어음을 가지고 있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는 그에게 그 어음을 건네주었다. "이겼다!" 하고 그는 외치고, 에벨의 등을 탁 쳤다. "자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형님!" "그는 죽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만 파운드의 손해를 입었다, 라고 해야지. 설마 했건만." "또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아주 긴 보고입니다만. 가까운 장래에 또 불러 주셔서 지난 한 달 동안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씀드리게 해주십시오. 들으실 만한 것이 된다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이걸 또 보십시오." "아니, 이십 만 파운드의 예금증서로군. 자네 건가?" "제 겁니다. 선생님들께서 빌려주신 그 돈을 삼십 일 간 현명하게 써서 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음은 보잘것없는 걸 사고, 거슬러 달라고 내놓는 일에만 썼을 뿐입니다." "이거 놀랐는걸! 어디 믿어지나." "문제 없습니다. 저는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 말에 근거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마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포오셔가 놀랄 차례였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헨리 씨, 그건 정말 당신 돈이에요? 제게 거짓말을 하셨나요?" "그래요, 실은. 하지만 용서해 주겠지, 나는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밉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용서할지 어떨지는 몰라요. 저를 그토록 속이다니 당신은 너무해요." "이해해 주겠지, 응, 이해해 주겠지. 장난삼아 그런 거니까. 그만 돌아가지." "아니 잠깐! 그 지위 말일세. 자네에게 지위를 주고 싶어." 하고 예의 신사가 말했다. "네,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게 여기지만 실은 지위는 필요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걸 주겠는데도 말인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요. 당신은 이분에게 조금도 감사해 하고 있지 않군요. 대신 제가 감사드릴까요?" "그럼 그렇게 해줘요. 그로써 더욱 잘 된다면 어서 해봐요." 그녀는 그 사나이에게 가더니, 무릎에 올라앉아 팔을 그의 목에 감고 보기좋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러자 두 노신사는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리었다. 그러나 나는 깜짝 놀라서 그만 석상과 같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포오셔가 입을 열었다. "아빠, 저 분은 아빠에게 저 분이 바라는 것 같은 지위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나도 같은 정도로 분개-" "당신의 아버지신가요?" "그래요, 양아버지시죠. 아주 좋은 아빠예요. 이젠 아시겠죠, 저 공사 댁에서 저와의 관계를 아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빠와 에벨 백부님의 꿍꿍이속으로 당신이 얼마나 괴로워 하고 걱정하고 있는지 말씀하셨을 때, 제가 태연히 웃고만 있던 그 까닭을 말이에요." 물론 나는 농담을 그만두고 분명히 말을 하여, 곧 요점으로 들어갔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을 취소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제가 바라는 지위를 비워 놓고 가지고 계십니다." "말해 보게." "따님입니다." "옳거니, 옳거니! 그러나 말일세, 만일 자네가 그런 자격으로 근무한 경험이 없다고 한다면, 그 계약 조건을 충족시킬 추천 이유 같은 것은 물론 내놓을 수 없는 셈이지, 그러면......" "저를 시험해 보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삼십 년이라도 사십 년이라도, 우선 시험해 보십시오, 그래도 만일......" "알았네, 좋아, 그만 됐네. 대단한 강요도 아닌걸. 딸을 데리고 가게." 우리들 두 사람은 행복했느냐고? 생략하지 않고 그것을 표현하기란 말 수가 모자란다. 하루인가 이틀 뒤에, 나의 그 어음의 한 달 동안의 모험, 그 결과의 전모가 런던에 알려졌을 때 런던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심심풀이가 되었느냐고? 사실 그대로이다. 포오셔의 아버지는 나를 친절하게 환대해 준 그 어음을 잉글란드 은행으로 가지고 가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은행은 그것에 소인을 찍어서 무효로 하고 그것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들의 결혼식 때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뒤 계속 그것은 우리들 집안의 가장 신성한 장소에 액자에 넣어 걸려 있다. 그것이 나에게 포오셔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런던에 머물러 있을 리도 없었고, 결코 그녀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저게 백만 파운드짜리 어음이죠. 그러나 그것은 한평생 꼭 한 번의 물건밖에 사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 한 번 때에는 겨우 그 액면의 십 분의 일 정도로 그 물건을 샀던 것이죠." <끝> 7. 양심 때문에 토마스 하아디(Thomas Hardy) 1 세상에는 저지른 죄나 과오에 대해 항상 속죄의 기회를 노리다가도 누군가로부터 그 필요성을 권고받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워 기회를 늦추어 버리거나 아예 갖지 못하는 그런 미묘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 몇 명인가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공리설을 따르는 직감설을 취하는 그 결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밀보온 씨와 프랭클린 부인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보온 씨는 오래 전부터 살아온 런던의 한 조용한 거리를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왔다갔다 했다. 그 때문에 이 거리의 청소부들에게 그 사람만큼 잘 알려진 사람도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일 게다. 그는 자기집은 아니었지만 이 거리의 11번지에 살고 있었다. 나이는 적어도 50 가까이 되어 보였으며 그의 습관을 보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 이외엔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규칙적이었다. 그는 날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거리의 맨끝까지 걸어가서 으례 바른쪽으로 돌아 본드 가로 들어섰고, 이어 그가 소속한 클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6시만 되면 그곳에서 나와 아까와 똑같은 길을 되밟아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는데 혹시 다른 곳으로 저녁식사라도 하러 갔을 경우는 좀 늦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별로 부자다운 데가 없었으나 약간의 재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토우니 부인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빌려서 혼자 살았는데, 방안의 가구는 초라한 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불한 방세로 가구를 샀다면 아마 열 배나 훌륭한 것을 마련했을 터인데도 그는 그 집의 가구를 빌려서 쓰는 것이 마음에 편한 모양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를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언행이 항상 담담하여 남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친밀감을 주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또 특별히 숨겨 둔 일도, 남에게 내놓고 알릴 만한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어쩌다가 입 밖에 낸 말을 통합해 보면 그는 웨섹스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 런던에 나와 은행원이 되어 상당한 지위에까지 올라갔으나, 그 무렵에 어떤 사업에 투자하여 성공한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재산을 물려받고 아직 그럴만한 나이가 아닌데도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몸이 약간 불편하여 누워 있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직후에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빈든 의사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페치카 앞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병은 그다지 걱정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두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빈든, 사실 난 참 외로운 사람이야. 무척 외로운......" 밀보온은 우울한 얼굴로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이야기 끝의 틈을 타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나의 이런 외로움을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거야.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 갈수록 내 자신이 불만스럽게 느껴지네그려. 오늘은 유독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여러 가지 사건 중에서 실로 그 불만의 실마리가 되는 일이 생각나서 아주 괴로워했다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이라네. 사실 나는 평소에 어느 누구와의 약속도 잘 지켜온 셈이지. 이러한 내 성미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한 번은 내가 누구하고 굳게 맹세하고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은 일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 따라 실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물론 내 편견일 테지만- 중요한 일로 떠오르지 뭔가. 자네도 그런 경험이 있을 테지만, 잠결에 문이나 창을 잠그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거나 낮에 꼭 써야 할 편지 답장을 쓰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일어나는 꺼림칙함이란 사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잖나. 이처럼 그 약속이 자주 나를 괴롭혀 왔는데 오늘은 특히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말일세."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피웠다. 밀보온은 페치카 속의 불등걸을 보고 있었으나 사실은 잉글란드 서부의 어느 고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말이야." 그는 한참만에 말을 이었다. "난 그걸 깨끗이 잊어 본 적이 없다네. 그야 바쁠 때는 일에 밀려서 그 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오늘 같은 날 그 비슷한 사건의 재판 기사를 읽고 그 일이 너무나 역력히 떠오르지 않겠나. 그런데 그게 어떤 일이었나 하면, 얘기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지. 물론 자네같이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신경과민이 아니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스물한 살 때 웨섹스의 토온버러를 떠나 이곳 런던에 왔지. 그런데 나는 그 이전에 그곳에서 나와 동갑인 젊은 여성과 사랑하는 사이였다네. 물론 나는 결혼할 것을 굳게 약속한 터였지.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나는 독신일세." "뭐 흔히 있는 일이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곳을 떠났네. 그리고 그때는 그런 관계에서 그렇게 쉽사리 빠져나온 것이 아주 잘 한 것같이 생각했지.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약속이 되살아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뭐 반드시 양심의 가책이라는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가죽을 쓴 고깃덩어리의 표본 같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네. 이를테면 내가 내년 여름에 갚기로 하고 자네한테서 오십 파운드를 빌려 쓰고 갚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 그렇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을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돈이 자네에게 몹시 필요했다면 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처녀와 분명히 약속을 했다네.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그 약속을 저버렸거든. 그렇게 하는 것이 비열한 행위이기는커녕 오히려 약은 행동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야. 그 덕분에 여자는 가련한 희생자가 되었지. 그녀는 어린애까지 낳았으니 꽤 가혹한 벌을 받은 셈이지. 약간의 금전적 보조는 받았지만 나 대신 아주 톡톡히 벌을 받은 셈이 아닌가. 이것이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일세. 자네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 뒤 몇 년이 지나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옛날이 되고 나처럼 그녀도 지금쯤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그 일이 아직도 때때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이야. 아마 자넨 납득이 안 갈 테지만 말이야." "아니, 그건 나로서도 이해가 가네. 그렇지만 그런 것은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이 달라지리라고 보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다 잊어버렸을 일이지. 이를테면 자네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졌다면 그런 생각이 들겠나?" "아마 안 했을 거야. 아니 안 했어. 그녀는 토온버러를 떠나 이름을 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그숀베리에 나타났어. 난 그 지방에 별로 가지는 않았으나 언젠가 이그숀베리를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가 이곳에서 음악교사라나 하여간 그런 직장을 얻어 자리를 잡고 산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 한 삼사 년 전인데 우연히 들은 것은 그것뿐이었어. 그 옛날 헤어진 이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으니 지금 그녀를 만난다면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걸세." "그래,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의사가 물었다. "글쎄, 요 몇 년 전만 해도 제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얘길 들었지. 그러나 지금도 꼭 살아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 귀엽게 생긴 계집애였지. 나이로 따지면 지금쯤은 그 애도 결혼을 했을지 모르겠군." "그 애 어머니는 어땠나? 물론 얌전하고 훌륭한 여자였을 테지?" "암, 상냥하고 의젓한 여자였지. 무엇보다도 이해심이 풍부했지. 보통 사람이 본다면 특별히 매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우리가 교제하고 있을 무렵의 그녀의 신분은 나하고는 좀 차이가 있었거든. 언젠가 말한 바도 있었지만 우리 아버진 변호사였네. 그때 그녀는 어느 악기점 집 딸이었지. 모두들 내가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내 신분이 떨어진다고들 했지. 아마 그래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자네한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십 년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 그런 일을 보상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하는 점일세. 그런 생각일랑 머리에서 떨쳐 버리게. 제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재난으로 생각하고 말이야. 그야 지금도 그 모녀가 다 살아 있거나 어느 한쪽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어떤 생활기반 같은 것은 마련해 줄 수도 있겠지. 물론 이것은 자네 마음이 내키고 또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글쎄, 내가 현재 그렇게 여유가 많은 처지는 아니지. 더군다나 어렵게 사는 친척도 있고. 어쩌면 그네들보다 내 처지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지. 그리고 설령 내가 부자라 하더라고 돈으로 과거를 해결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전에 그녀에게 잘 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오히려 나는 우리가 앞으로 혹시 굉장한 가난뱅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내가 약속한 것은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녀를 찾아내서 약속을 실행하지그래."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농담으로 말했다. "아니 빈든, 물론 그건 농담이겠지만, 결혼하려는 마음은 내게 전혀 없단 말이야. 나는 단지 지금의 이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네. 타고난 성품이나 본능, 습관, 기타 모든 점으로 보아 나는 독신으로 살아갈 사나이로 태어난 것 같애. 나는 지금도 그녀를 훌륭하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그녀는 조금도 비난할 데가 없으니까- 애정 같은 것은 느끼고 있지 않아. 좋게는 여기고 있지만 흥미가 나지 않는 여자가 있는 법인데,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녀가 그런 존재란 말이야. 내가 그녀를 찾아내어 곧 결혼을 청하겠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보고 싶다는 생각일 따름이지." "자네 정말 진심에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의사는 약간 놀란 듯이 다그쳤다. "실제로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해. 그것도 다만 지금도 말했듯이 명예를 존중하는 인간이라는 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일세." "일이 잘 되도록 빌겠네." 의사는 이렇게 말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오래잖아 그 의자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걸세. 곧 현실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그땐 자네가 자신의 감정을 한 번 시험해 볼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자그마치 이십 년이나 가만히 있던 뒤니까, 그만두는 게 좋을 걸세." 2 이 의사의 충고도 밀보온의 마음 속에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갖지 못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한 심정과 도덕적인 관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심정과 관념은 이제까지 몇 달 몇 년을 두고 그의 가슴 속에 서서히 쌓여 가서 때로는 매우 숭고한 종교적 감정에까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밀보온의 행동에 직접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예의 그 가벼운 병이 오래잖아 완쾌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자기의 양심과 관계가 있는 일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얘기해 버린 것이 상당히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를 충동질한 힘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남아 있어서 마침내는 더욱더 강해져 갔다. 그 결과 예의 병세 고백을 한 날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어느 따뜻한 봄날 아침, 밀보온은 패딩턴 역에서 서부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독한 자기 자신과 맞대고 있자니, 그 저버린 약속이 자꾸만 마음에 떠올라서 드디어는 이와 같은 길을 더듬게 되었던 것이다. 좀더 결정적인 동기를 말하자면 그 떠나기 이틀 전에 우편국 인명부를 뒤적거리다가 2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그녀가 아직도 이그숀베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름은 그녀가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고 1, 2년 지나, 외국에서 돌아온 젊은 미망인과 아이라고 하며 이그숀베리에 정착한 때와 똑같은 이름이었다. 그녀의 처지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고, 아직도 딸과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인명부에 의하면, '레오노라 프랭클랜드 부인, 프랜시스 양, 음악 및 무용 교사' 밀보온 씨는 그날 오후에 이그숀베리에 도착했다. 그는 역에서 수하물을 찾기 전에 우선 그 교사들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녀들의 집은 시의 중심 지대에 있었으며, 잘 닦아 놓은 놋쇠 문패에 두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는 그녀들의 동향을 좀더 알아보기 전에는 대뜸 그 집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 맞은편의 완구점 2층의 방을 얻었다. 그 방은 프랭클랜드 가의 무용 강습이 행해지는 객실인지 거실인지와 맞보이는 데 있었다. 여기에 방을 정한 그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맞은편 집 부인에 대한 일을 묻기도 하고 또 스스로 관찰도 했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프랭클랜드 부인은 외딸 프랜시스와 같이 살고 있으며, 인기도 있고 평판도 좋았으며 열심히 가르치는 덕분에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배우러 오며 딸이 그 어머니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 도시에서 꽤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무용을 가르친다는 것이 약간 속된 것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정말은 착실한 마음씨의 부인이며 생활을 하기 위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데 불과했다. 그 대신 그녀는 자선 바자에 앞장서기도 하고, 교회 음악의 연주회를 돕기도 했으며,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그런 것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기만 한 미개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구제 사업이나 자금 모집 음악회에 참가하는 등 상당한 교제와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딸은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에 교회를 장식해야 될 경우 처녀들의 선두에 서기도 하고, 어느 교회의 오르간을 켜는 일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워어커 목사가 6개월 간 대사원의 부창주의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열심히 해주었을 때 그 사례로 은으로 만든 그릇을 공로상으로 수여할 때 기부금을 낸 적도 있었다. 대체로 어머니나 그 딸은 이그숀베리의 상류 사회에서는 모범적인 착실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직업을 남에게 알리는 자연스럽고도 간단한 방법은 음악실 창문을 좀 열어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가 떠서 질 때까지는 언제나 거기서 배우는 아이들- 12세에서 14세쯤-이 고전 음악의 소곡을 연주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즐거움은 이 거리의 어디서든지 항상 자연스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소문에 의하면 부인은 세를 받고 피아노를 빌려주거나, 악기 제작상의 대리인으로 피아노를 판매하기도 해 수입의 대부분을 얻고 있다고도 했다. 밀보온은 이상과 같은 사실을 알아내고 무척 흐뭇하게 여겼다. 참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이상의 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나무랄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서 레오노라를 잠깐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 도시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의 일인데, 그녀가 입구의 돌층계에 서서 양산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아주 마른 편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몸집이 약해 보였다. 그리고 일찍이 젊었을 때 그가 매력을 느꼈던 그 얼굴은 지금도 여전히 선량해 보였으며, 나이가 과히 많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품이 있고 사려 깊은 듯이 보였다. 게다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망인이라는 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에 딸이 또 나타났는데 그녀는 몸집이 좀 통통하달 뿐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레오노라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점이 있었으며 그녀의 사뿐한 걸음걸이조차도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밀보온은 마침내 두 사람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 레오노라에게 쪽지를 보내어 방문할 의사를 전했는데 직업관계상 낮에는 분주한 것 같으니 방문시간을 저녁때쯤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답장을 쓰기도 거북할 것을 생각하고 굳이 답장을 쓰지 않아도 되게끔 문구를 잘 꾸몄다. 그녀에게서는 아무 회답도 없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약간 기세가 꺾인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이쪽에서 요구하지도 않은 회답을 자청해서 일부러 보내올 이유란 사실 조금도 없는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서도 말이다. 이윽고 그는 자기가 결정한 밤 8시에 길을 건너가 무표정한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밀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응접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가칭 프랭클랜드라고 부르는 당사자인 부인은 2층에 있는 넓은 무용 음악실에서 그를 맞았다. 이러한 장소는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나는 장소로서는 서글플 정도로 사무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음은 새삼 두말할 여지가 없겠다. 일찍이 그가 버렸던 여자는, 도시에 살고 있는 그의 눈에도 훌륭한 몸차림으로써 눈앞에 나타났다. 그에게 다가올 때의 그녀의 태도는 엄격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그를 만나도 그다지 기쁜 것 같지 않았다. 20년이나 버려 두었다가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안녕하세요, 밀보온 씨?" 그녀는 우연히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듯이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래층에는 마침 딸의 친구들이 와 있어서 여기서 뵐 수밖에 없어 안 됐습니다만." 하고 덧붙였다. "당신의 딸 말이죠? 내 딸이기도 한......" "네? 아, 그야 그렇기도 하군요." 그녀는 마치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이 금방 생각난 듯이 얼른 대꾸했다. "그렇지만 함부로 말씀하시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미망인이니까요." "알았소, 레오노라." 그는 다음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태도는 차갑고 쌀쌀했던 것이다. 눈물어린 원망의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이미 녹아 없어지고 만 듯했다. 그는 예상했던 서론은 다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겠죠, 레오노라. 내 말은 결론에 관한 것인데, 약속한 사람이나 또는......" "그럼요, 완전한 자유의 몸이죠, 밀보온 씨." 그녀는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온 이유를 밝혀야겠소. 나는 지금부터 이십 년 전에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소. 지금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요. 내가 결론을 여태까지 지체한 데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소만." 그녀는 이 말에 매우 놀랐다. 그러나 흥분하는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편이냐 하면 약간 침울해지면서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이 나이에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면 몹시 귀찮게 될 거에요. 지금 나는 수입도 상당한 편에 속해 있는 만큼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아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좀 당돌하지 않아요?" "그야 그러실 테죠." 밀보온 씨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런데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번의 경우 일시적인 충동- 연애 감정 면에서-과는 아무 관계가 없소. 레오노라,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소. 이건 간절한 내 소원이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심에 관한 문제요. 즉 약속 이행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한테 분명히 약속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나 버렸다는 것은 정말 미안했단 말이오. 나는 죽기 전에 이 불명예를 씻고 싶소. 그리고 우리는 옛날처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소."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밀보온 씨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겠어요. 나 자신이 결혼할 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생활을 바꿔야 할 이유란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물론 당신의 양심에는 위로가 되실지 모르지만요, 저도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어요. 저는 이렇게 되기까지 혼자서 무척 애를 써왔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말해서 지금의 제 생활을 결혼과 맞바꿀 수는 없다 이거예요. 딸애도 오래잖아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는 청년과 약혼할 단계에 있어요. 어느 모로 보나 그 애에게는 좋은 자리예요. 지금 그 사람이 아래층에 와 있어요." "그 애는 내게 관해서 알고 있소?" "아니, 천만에요!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보세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잘 알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문간까지 갔다가 그는 되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레오노라, 나는 일부러 먼 곳에서 당신을 찾아왔소. 큰 지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료. 단지 옛친구와 결혼하는 것뿐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소? 그 애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소."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급기야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당분간 이그숀베리에 머물러 있을 작정이오. 다시 만나러 와도 괜찮겠소?"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분명히 내키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그는 뜻밖의 장애에 부딪쳐 약간 당황했지만 처음부터 이미 식어 버린 그녀의 정열을 다시 소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녀의 냉담한 태도를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주 찾아왔는데, 딸과의 첫대면은 좀 괴로웠다. 하긴 그 자신도 처음에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은 딸에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히여 우선 따뜻한 친밀감이 우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프랜시스에게 자기 옛친구와의 내막을 털어 놓았으나 그녀는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밀보온은 오랫동안 프랭클랜드 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베푸는 친절은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결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완고함에 놀랐으나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덕상의 이유를 그가 비쳤을 때만은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움직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성실한 인간으로서 결혼을 해야만 당연한 줄로 압니다. 그것이 곧 진실이 아니겠소?" "나도 그쯤은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녀는 의외로 대뜸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론을 따진들 무얼 하겠어요. 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시겠지만 우린 적당한 시기에 결혼했어야 옳았어요. 이제 와서 과오를 바로잡아 보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두 사람은 마침 창가에 서 있었다. 턱수염이 약간 난 목사복을 입은 사나이가 뜰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레오노라는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밀보온이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프랜시스의 애인이에요. 저를 어쩌나, 오늘 그 애는 집에 없는데. 아, 누가 그 애가 간 곳을 가르쳐 준 모양이군요. 저쪽으로 가는 걸 보니...... 아무튼 이 혼담이 잘 이루어져야 할 텐데." "잘 안 될 까닭은 없지 않소?" "하지만, 사실 저 분은 아직 결혼할 단계가 아니거든요. 더욱이 지금 저 분은 이곳에 있지 않아서 프랜시스는 여간해서는 그를 만나기가 힘들어요. 전에는 이곳에서 근무했지만 지금은 기차로 오십 마일 떨어진 아이벨의 존 교회에서 부목사 일을 보고 있어요.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어 있나 봐요. 하지만 그분 친구 중에는 우리의 직업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 봐요. 물론 그분 자신은 그런 반대를 문제로 삼고 있지 않지만요." "만일 당신이 나와 결혼하게 되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혼인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될 거요."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우선 이 직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여기서 뜻밖에도 그녀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더욱 그 길로 돌진했다. 이 의견은 곧 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녀의 반대가 한풀 꺾인 것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밀보온은 이그숀베리의 하숙집을 떠나 런던에서 규칙적으로 왕래했는데, 드디어 그녀를 이겨냈다. 그녀는 별반 내키지 않는 가운데서도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가까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밀보온 일가는 런던에서 살기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그숀베리의 음악 및 무용 강습소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애써 온 어느 후계자에게 팔아 버렸다. 3 밀보온은 전에 살던 거리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가까운 곳의 세대주가 되었고, 부인과 딸도 이사를 했다. 프랜시스의 애인도 이 새로운 환경에 만족스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로서는 아이벨에서 1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을 망정 달리 볼일도 많이 있는 런던으로 와서 그녀를 만나는 것이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그것만으로 반대 방향으로 50마일씩이나 가는 것보다는 훨씬 편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밀보온 일가는, 작기는 하나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거리의 어느 집을 지붕밑까지 샅샅이 손질하여 살게 되었다. 최근까지 굴뚝 소제부의 얼굴빛과 흡사했던 그 집 정면은 그을음을 말끔히 떨고, 50년 가까이 그을음에 파묻혀 있었던 벽돌의 노랑색과 붉은색이 제 빛을 찾게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놀라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두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이 결혼으로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런던에 처음으로 산다는 기쁨, 세계의 중심지에 서 있다는 흥분이 일단 지나가 버리자 그녀들의 생활은 조용하던 이그숀베리에서 주민의 4분의 3과 서로 인사를 나누던 때에 비교해서 너무나 무미건조함을 느꼈다. 밀보온 씨는 그의 아내에 대하여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전에 저지른 짓과 오랜 세월이 지난 탓으로 그녀의 마음이 차갑고 완고하게 되어 버렸을 망정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었다는 생각과 자기 만족을 되찾았다는 생각이 언제나 아내 편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모든 갈등을 곧 양보해 버리는 입장을 취했다. 런던에서 살게 된 지 약 한 달쯤 지났을 무렵에, 밀보온 일가는 와이트 섬의 해수욕장에서 1주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을 동안 퍼어시벌 코우프 씨- 프랜시스의 애인-가 그들을 방문했다. 젊은 두 사람의 정식 약혼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결국엔 결혼을 하게 될 것이 기정사실화된 터였고,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절망하게 되리라는 것쯤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프랜시스는 결코 감상가가 아니었다. 실상은 오히려 제멋대로 하는 점이 있는 성격이었다. 분명히 말한다면 이 젊은 처녀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 편에서도 그녀에게 그럴 듯한 대우를 해주지 못한 과오가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계제는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딸의 행복을 기원했으며 또 애를 쓰기도 했다. 코우프는 새로운 가장에게 정식으로 소개되고, 2, 3일 동안 섬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 마지막 날, 일행은 2시간쯤 요트를 빌어 타기로 했다. 요트가 그다지 멀리 나가지도 않았는데, 부목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맞바람을 받으면서부터 갑자기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그러나 코우프가 이것을 좋아하는 눈치여서 세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꾹 참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청년도 결국은 세 사람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곧 방향을 돌리도록 일렀다. 그리고는 항구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일 없이 서로 마주보기만 했다. 이 미묘한 경우는 피로, 불안, 공포의 대상과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얼굴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그 사람의 종족 공통의 표준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을 더욱 뚜렷하게 하며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특징을 강조하여 근본적인 특성까지 강화시키고 마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때에는 뜻하지 않았던 인상이 낯익은 얼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특히 표정에는 파묻혀 잊혀졌던 조상들의 환영까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때는 눈에 익은 표정과 언동으로 말미암아 가려 있던 가족 특유의 용모가 갑자기 분명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프랜시스는 아버지 밀보온 씨의 옆자리인 코우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루한 귀로에 처음에는 자연히 동정어린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중년의 부친과 딸은 차차 얼굴이 창백해져서 프랜시스의 귀엽고 불그레한 얼굴이 푸르죽죽해지고 탐스럽던 얼굴 생김이 여느 때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잃고 본래의 윤곽으로 되돌아감에 따라 차차 코우프는 이 두 사람이 편히 쉬고 있을 때에는 무엇 하나 공통된 점이 없었는데 불쾌해지면 서로 닮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즉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밀보온 씨와 프랜시스는 놀랄 만큼 서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에 코우프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워져, 프랜시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손을 잡아 주는 일도 잊어버렸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실신한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집으로 돌아갈 때 그네들의 얼굴빛과 외모를 차츰 회복하게 되자 방금 닮았던 흔적은 하나씩 둘씩 사라져 버리고 밀보온 씨와 프랜시스는 다시 성(性)과 연령이라는 구분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요트놀이를 할 동안만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고 과거의 기묘한 무언극이 언뜻 스쳐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무심코 물었다. "저어, 프랜시스 양. 당신의 의붓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 뻘이라도 되는가요?" "아뇨." 그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전혀 관계가 없어요. 단지 어머니의 옛친구일 뿐이에요. 별안간 그건 왜 물어 보시죠?" 그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아이벨로 떠났다. 코우프는 성실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퍽 예민했다. 그는 아이벨의 성 피터 가의 조용한 자기 방에 들어앉아 요트놀이를 할 때의 발견을 생각하고 오랫동안 불쾌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거기 나타난 사실이 어느 정도 분명해지자, 그는 입장이 매우 거북함을 느꼈다. 그가 처음 프랭클랜드 일가를 만난 것은 이그숀베리의 교구민으로서였는데, 그뒤 프랜시스가 마음에 들어 마침내는 약혼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정식 약혼이 아직 지지부진 상태에 있는 것은 그가 아직 결혼할 계제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프랭클랜드 일가의 과거에는 아무래도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비밀이 있는 집안에 장가를 든다는 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고 코우프는 생각했다. 그는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는 프랜시스를 잃고 싶지 않은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력이 결코 떳떳하다고 볼 수 없는 집안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내키지 않음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정열적인 연인 사이라면 이러한 의혹을 두고 그처럼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코우프는 교회의 일을 보는 한 인간으로서 애정면에서는 누구 못지 않게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프랜시스에게는 세기말적인 퇴폐의 불순한 요소가 뒤섞여 적당히 조절되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이러한 의혹에 사로잡혀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는 역시 그녀에 대한 정열이 솟아나지 않았다. 따라서 한동안 프랜시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자연히 늦어지는 것이었다. 한편, 밀보온 일가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코우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끝에 그가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어느 모로나 사촌간이라는 혈연관계를 갖고 있지 않느냐고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고 말했다. 밀보온 부인은 놀라며 딸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보라고 일렀다. 프랜시스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이 말이 어머니에게 어떤 반응을 주는지 알아보려는 듯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이가 그런 걸 물어 보았다고 해서 엄마가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과 그이가 저한테 편지를 하지 않는 것과는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프랜시스의 질문에 밀보온 부인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기만 할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프랜시스도 이상한 의혹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 프랜시스는 우연히 양친이 거처하는 방 밖을 지나다가 안에서 격렬히 다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불화의 씨가 마침내 밀보온 일가의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이다. 방안의 광경을 말해 보면, 밀보온 부인은 화장대 앞에 서서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으며, 남편은 거기 앉은 채 땅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 생활을 두 번씩이나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양심이 어쩌니 하고 귀찮게 달라붙어서...... 귀찮아 견딜 수 없으니까 결국 응락했잖아요! 프랜시스와 나는 남부럽잖게 잘 꾸려 왔어요. 내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은 프랜시스가 그 훌륭한 청년 코우프 씨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단 말예요. 그런데 이젠 다 틀려 버렸잖아요. 당신의 그 심술궂음 때문이란 말예요. 당신은 왜 내 세계에 불쑥 나타나 간신히 쌓아 올린 내 체면을 엉망진창으로 뭉개 버리는 거죠? 남들은 상상도 못할 기나긴 세월에 걸쳐 애써 얻은 건데......"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고 밀보온은 끝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 그녀는 어머니한테 코우프 씨의 편지가 오지 않아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말 끝에 코우프 씨가 병이 났는지도 모르니 아이벨에 다녀 올 것을 간청했다. 밀보온 부인은 아이벨에 갔다가 그 날 중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걱정이 되어 수척한 얼굴로 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만사 잘 되었을까? 그러나 밀보온 부인은 일이 잘 되었다고 딸에게 기쁜 얼굴로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번 행차에서 더욱 분명히 깨달은 것은 떨어져 나가려는 사나이를 뒤쫓는 것처럼 큰 잘못도 없다는 점이었다. 프랜시스는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그녀의 애인이 떨어져 나간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밀보온 부인은 그 날 아이벨에서 코우프와 나눈 이야기의 모두를 프랜시스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밀보온 씨가 자기를 찾아내어 결국 결혼하게 된 것이 딸과 애인 사이가 멀어지게 된 근본 원인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엄마를 다시 찾게 되었고, 또 엄만 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슬픔에 잠긴 딸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윽고 그녀의 예민한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사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그녀는 차차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짐작한 바가 사실인가 어떤가를 되풀이해서 물었다. 어머니는 결국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확 붉어지더니 다음 순간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인 것 같았다. 죄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알려진 이상 코우프 씨와 같이 까다롭고 근엄한 목사가 어찌 자기와 같은 여자를 순순히 아내로 맞이할 것인가.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거북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꼭 감싸며 허리를 굽혔다. 처음에는 둘 다 밀보온 씨 앞에서 용케 괴로움을 참고 견뎠다. 그러나 차차 감정이 끓어오르는 데다가 저녁 식사 후에 그가 의자에서 졸고 있을 때 드디어 신경질은 폭발하고 말았다. 프랜시스도 약이 오른 나머지 어머니와 한패가 되어 그녀의 결혼약속을 무참히 깨어버린 결과를 몰고 온 폭풍의 사나이를 공박하기 시작했다. "어머닌 어째서 그렇게도 약했어요. 이런 적을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을 했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요. 어머니에게 귀찮은 존재임은 뻔한 사실이 아니에요. 더구나 그렇게 오랜 연후에 남편으로 삼다니! 내게 사실을 알려 주었더라면 좀더 좋은 생각을 알려드릴 수도 있었잖아요. 물론 나로선 이분을 이처럼 나쁘게 말할 권리는 없겠지만, 그러나 참을 수가 없잖아요. 이 사람은 내 일생을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거예요." "프랜시스, 나 역시 무던히 버틴 것만은 사실이야. 나한테 그처럼 지긋지긋하게 했던 사내와 마주 얘기를 주고받는 것조차도 잘못이라는 걸 내가 왜 몰랐겠니. 하지만 이 사람이 내 말을 통 들어먹질 않았단다. 자기와 내 양심을 앞세우면서 하도 고집을 부리기에 나도 종내엔 그만 머리가 돌아 버려 응낙을 했지 뭐니. 정말이지 얼마나 허튼 수작이냐 말야. 아 그땐 얼마나 좋았니. 거긴 그래도 우리 나름의 사교계가 있었잖았니. 그것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뿐이니까 이쪽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또 그들도 우리에게 무리한 것은 요구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여기는 어떠냐 말이야. 많은 것이 있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이 사람은 말했지, 런던에서의 사교는 화려하고 멋지고 별세계 같다고 말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 그러나 우리들처럼 단 둘인 고독한 여자들에게는 어떠냐. 그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뿐이지 뭐냐. 그러니 우리들이야 그들이 야단스레 떠드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이야 할 뿐이지 뭐냐. 아, 바보였어. 내가 바보였어!" 밀보온 씨는 완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여자의 저주와도 같은 비난이나 그와 비슷비슷한 갖가지 말을 다 듣고 있었다. 그는 이제 집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오노라와 결혼한 이래 별로 얼굴을 나타내지 않던 클럽에 다시금 매일같이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럽에 나간다고 하여 가정에서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머리 속에서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는 전과 같이 자기가 있는 곳에 자기 세계의 중심이 따라다닌다는 독신자의 감정에 편히 잠겨 안락의자에 파묻혀 석간을 손에 들고 있을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이제 그의 세계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형이 되어 버렸으며, 자기의 중심은 그 두 개 가운데에서도 작은 쪽에 불과했다. 아이벨의 젊은 목사는 여전히 멀찌감치 서서 프랜시스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일이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보온은 아내와 딸의 비난에 거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견뎌냈다. 그는 무슨 새로운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그들 모녀가 자기 때문에 생활을 망쳐 버렸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어느 날 그들에게 조용히 다시 시골로 돌아가자고 제의했다. 반드시 이그숀베리가 아니더라도 그들만 찬성한다면 코우프 씨가 있는 아이벨에서 1마일쯤 떨어진 조그마한 옛 저택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로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적이 놀랐다. 그리고 그를 언제나 재앙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그 제의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밀보온 부인이 말했다. "언젠가는 코우프 씨가 당신의 과거를 분명히 물어 볼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프랜시스에게 걸고 있던 모든 희망은 사라질 게 아니겠어요? 그 앤 확실히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특히 기분이 언짢았을 때의 경우를 보면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닮아 보일 수가 없어요.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죠?"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는 못할 거요." 그는 이렇게 말했고, 아내가 그렇지도 않을 거라고 우겼을 때, 그는 이미 아내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꾼과 하인들이 짐마차로 가재도구를 운반해 갔다. 그동안 밀보온 부인과 그의 딸은 호텔에 머물렀고 그는 새 집을 수리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아이벨을 두세 번 갔다왔다 했다. 일이 다 끝났을 때 그는 런던의 두 사람에게로 왔다. 집의 수리가 끝났으니, 이젠 거기 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짐을 가지고 역까지 나갔다. 이번에 함께 가지 않느냐고 밀보온 부인이 말했을 때, 그는 변호사와의 일이 있어서 잠시 런던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우리 단 둘만이 거기 산다면 얼마나 좋겠니." 기차 속에서 밀보온 부인이 말했다. "비밀을 매달고 다니는 저 쓸데없는 작자가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더욱 좋겠다." 새로 이사온 집은 느릅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아담하고 조그마했다. 이 집은 두 여자의 마음에 꼭 들었다. 새로 이사온 그들을 맨처음 찾아온 사람은 코우프였다. 그는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살게 된 것이 기쁘다고 말하고, 다시(입에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만이 이렇게 훌륭한 생활을 하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으나, 전과 같이 애인다운 태도는 억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네 아버지가 모든 걸 다 망쳐 버린 거야." 밀보온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2, 3일 뒤, 그녀는 남편이 보내온 편지를 받고 적이 놀랐다. 그 편지는 블로뉴에서 부친 것이었다. 편지는 두 사람이 출발한 이래 그가 진행했던 재산 상속에 관한 내용부터 설명되고 있었다. 그 주요 골자는 밀보온 부인이 상당한 액수의 동산을 소유하게 되고 프랜시스는 더 많은 액수의 이자를 한평생 받되, 그 원금은 그녀의 자식들에게 분배되도록 되어 있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떤 의무를 태만으로 인하여 일단 시기를 놓친 다음에 그것을 이행하더라도 완전 보상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은 단지 과거 속에만 묻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식 능력이 있는 식물처럼 퍼지고 뿌리를 내려 가지를 치거나 줄기를 잘라낸다고 하여도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찾아낸 것은 나의 잘못임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또다시 우리가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새삼스레 나를 찾을 생각은 마십시오. 또 결코 찾아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해두었습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아무 이익도 없음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F. M 결국 그날 이후 밀보온은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잘 찾아보았다면 밀보온 모녀가 아이벨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될 무렵에 한 영국인이 브뤼셀에 정착한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밀보온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밀보온 부인이 보았다면 그가 누구였는가를 당장에 알았으리라. 이듬해 여름 어느 날 오후에 이 신사는 영국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프랭클랜드 양과 코우프 목사의 결혼 광고를 우연히 발견했다. "오오, 잘 되었군." 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일시적인 만족은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전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이번에는 안티고네와 똑같은 고민을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즉 명예를 중히 여겨 형식에 의한 의무를 수행한 덕택에 도리어 주착없다는 불명예스러운 보답만을 받고 만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자기의 단골 클럽에 나가 약간 지나칠 만큼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며 술을 마시고 있을 경우에라도 좀체 지껄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끝> 8. 세 사나이 토마스 하아디(Thomas Hardy)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거의 원형에 가까운 옛 지형을 이 영국 땅에서 찾아보기란 극히 어려울 테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땅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게다. 가령 남부나 남서부의 몇몇 고을에 가 보면, 아직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대싸리가 우거진 고지와 골짜기와 풀밭이 있는데, 이러한 곳은 대개가 영국 농촌의 특색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겨우 오두막집이 하나 우뚝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그처럼 쓸쓸한 오두막집이, 그러한 초원지에 세워져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곳에 그 오두막집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진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의 거리를 따져 볼 때, 군청이 있는 읍내에서 불과 5마일이 채 못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거리가 문제일 수는 없었다. 기복이 심한 고지가 5마일이나 되고 보니, 진눈깨비, 비, 안개 따위가 내리는 고맙잖은 계절에는 타이먼이나 네부카드네자르와 같은 위인도 세상을 버리고 살기에 알맞을 터전이 못 되었고, 반대로 날씨가 활짝 갠 날에도 비교적 다루기 까다로운 족속들, 이를테면 시인이나 철학가나 예술가나 '즐거운 것을 머리에 떠오르게 해서 명상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쁘게 할 만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쓸쓸한 집을 세우는 데는 대개 토담집이나 오래된 울타리의 말라 빠진 기둥 같은 것들을 이용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오두막집은 그러한 종류의 재료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까마귀의 보금자리'로 불리는 이 오두막집은 완전히 외진 곳으로서 두 개의 오솔길이 직각으로 교차되는 지점 바로 곁에 있었다. 그 오솔길은 아마 한 5백 년 전부터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집은 울타리가 없는 관계로 사방에서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사정없이 비를 맞았다. 물론 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기도 하고 빗발이 맹렬히 쏟아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정도로 이곳의 겨울 날씨가 그처럼 매섭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리만 해도 반드시 지대가 낮은 곳보다 심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치기와 그의 가족이 이 집에 살고 있을 때에 주위 사람들은, 집이 너무 바람맞이에 있어서 꽤 추울 것이라고 동정했지만, 정작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늑한 골짜기의 시냇가에 살던 때보다도 기침이나 담이 오히려 덜 난다고 했다. 182X년 3월 28일 밤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동정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굉장한 날이었다.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비바람이 마치 센렉이나 크레시의 긴 화살같이 마구 벽을 들이치고 처마와 울타리를 때렸다. 우리가 없어 밖에서 자던 가축들은 피난할 곳을 찾지 못하고 엉덩이를 바람이 부는 쪽으로 돌린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작은 새들은 앙상한 가시덤불에 앉아, 꽁지를 부채살처럼 펴고 있었는데,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오두막집의 박공은 어느 새 비에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폭포수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양치기 가족을 동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밤에 이 양치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둘째 딸의 세례 축하 잔치를 베풀기 위해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비가 내리기 전에 이미 이 집의 방에 몰려와 앉아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날 밤 여덟 시에 이 집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면, 이처럼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에는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로 위에 윤기가 번들거리는 양치기의 갖가지 지팡이가 걸려 있어, 집주인의 직업이 어떤 것인가를 대뜸 알 수 있었다. 그 번쩍거리는 지팡이들은 모두가 구부러진 것이었지만 각각 모양이 달랐다. 낡은 성경책의 주교님 그림이 새겨진 구식 지팡이를 비롯하여 근래에 시골 양시장에서 유행한 신식 지팡이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무려 여섯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심지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보다 약간 짧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촛대는 축제일이나 국경일, 그밖의 큰 잔치에나 쓰이는 고급품이었다. 촛불은 적당한 간격으로 골고루 놓여 있었는데, 그 중의 두 개의 촛불은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지방의 풍속으로, 벽난로 선반 위에 촛불이 놓인다는 것은 곧 잔치가 있다는 표시였다. 난로 앞에는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난로 속에서는 바짝 마른 가시나무가 '바보들의 웃음'처럼 딱딱 소리를 내면서 활활 불꽃을 일구고 있었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열아홉 명이었다. 그 중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네들은 밝은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부끄럼을 타는 여자는 벽 가까이의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좀 대담한 여자는 창가의 긴의자에 보란 듯이 버티고 있었다. 울타리 목수로 일하는 차알리 제이크, 교회의 서무 일을 보는 일라이저 뉴우, 우유 장수이며 양치기의 장인인 존 피처 등은 긴의자에 자기들 편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이야기 중에 어쩌다가 결혼 말이 나오게 된 나이찬 젊은이와 처녀 한 쌍은 선반 밑에 나란히 앉아 얼굴을 붉혔고, 50이 가까운 터에 약혼 중인 한 사나이는 장차 신부가 될 약혼녀 앞을 줄곧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다 할 관습이나 규칙에 얽매이는 일 없이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행동하고 있었다. 완전히 마음을 탁 터놓은 분위기 속에서, 출세를 하고 싶다든지, 견문을 넓히고 싶다든지 하는 표정이나 몸짓이 전혀 없이, 매우 침착하고 의젓한 면모들을 보이고 있었다. 양치기인 페넬은 비교적 장가를 잘 든 편이었다. 그의 아내는 우유 장수의 딸로, 멀리 산골짜기에서 시집을 왔다. 그녀는 결혼 당시에 남몰래 50기니나 수중에 넣어 가지고 왔는데, 그 돈은 장차 아이들이 몹시 돈이 필요할 때까지 숨겨 둘 작정을 하고 있었다. 낭비를 싫어하는 이 여인은 이번 잔치를 여하히 보낼 것인가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줄곧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과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들을 언제까지나 의자에 앉혀 두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남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정없이 술을 들이켤 것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집 안의 술이란 한 방울도 남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댄스는 어떤가? 아마 적당한 운동이 자극제가 되어 맹렬한 식욕을 돋군 나머지 주방의 음식은 한 접시도 남지 않게 되리라. 그리하여 페넬의 아내는 그 중간을 택해서 이야기와 노래 사이사이에 춤을 추게 하여, 무턱대고 술이나 음식을 들지 않도록 요령 좋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춰 나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만의 비밀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녀의 남편 페넬은 마음껏 손님들을 환대하려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출 작정이었다. 일행 중에는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바이올린을 켜는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지그와 리일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손이 작고 손가락이 짧기 때문에 갑작스런 고음 부분에서는 무리한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소년은 일곱 살 때부터 교회에서 일라이저 뉴우와 함께 연주를 해왔는데, 일라이저 뉴우는 오늘의 잔치를 위해서 그가 애지중지하는 악기 서펜트를 가지고 왔다. 음악이 나오자 곧 춤이 시작되었다. 페넬 부인은 악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15분 이상 춤을 추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남몰래 당부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일라이저와 소년은 자랑스런 역할에 스스로 도취된 나머지 부인의 당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17세의 소년 올리버 자일즈는 그의 파트너인 33세의 금발 미녀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 번쩍번쩍 빛나는 크라운 은화 한 닢을 악사들에게 넌지시 찔러 주면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연주를 멈추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페넬 부인은 손님들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악사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팔꿈치를 건드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펜트의 주둥이를 막았다. 그러나 한창 흥이 난 악사들은 그녀의 제지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연주를 계속했다. 부인은 더 이상 그들을 만류했다가는 오히려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 그만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쌍쌍이 스텝을 밟으며, 앞으로 다가섰는가 하면 어느 새 뒤로 물러서고, 빙빙 도는가 하면 꼭 붙어서기도 하면서 춤은 무려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페넬의 집에서 이처럼 흥겨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어두운 밤 그의 집 밖에서는 이 잔치와 관계가 깊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댄스가 차츰 맹렬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페넬 부인이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 시각에, '까마귀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쓸쓸한 언덕 오솔길에 한 수상한 그림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어둠 속의 사나이는 맹렬한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양치기의 오두막집 옆으로 통하는, 좀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오솔길을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은 보름날이었다. 그 때문에 비록 비를 머금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미하나마 웬만한 물건은 그 형체를 충분히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길을 외로이 걸어가는 나그네는, 그 차림새로 보아 몸이 연약해 보였는데, 그의 빠른 걸음걸이를 미루어 볼 때, 한때는 동작이 무척 민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지금도 때와 장소에 따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몸을 날쌔게 움직일 수도 있어 보였다. 그는 대충 마흔을 갓넘어 보였으며, 징병 사무를 맡아 본 하사관이나 눈대중으로 키를 재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키가 5피트 8인치 내지 9인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뜸 짐작할 것이다. 발걸음은 비틀거리거나 터무니없이 더듬거리는 법은 없었으나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검은 코트나 어두운 빛깔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까닭없이 평소에 검은 옷을 입어 버릇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입은 옷은 파스치안 천이었다. 그는 징이 박힌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징이 박힌 구두를 신고 파스치안 천으로 옷을 해 입고, 수렁을 서슴없이 걸어다닐 수 있는 근처의 농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나이가 양치기의 오두막집 맞은편에 이르렀을 때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그런데 바로 집 가까이에 다가서자 바람도 다소 가라앉으면서 빗줄기의 힘이 별안간 약해지는 것 같았다. 양치기의 오두막집 부근에서 사나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울타리 없는 정원 맨 끝에 세워진 헛간이었다. 이처럼 높은 지대에서는, 집 앞 경치를 이용하여 집을 단장하려는 생각을 않는 법이어서, 아무렇게나 적당한 자리에 헛간을 지어 놓는다고 하여 큰 허물이 될 수는 없었다. 사나이의 눈에는 젖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세차게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푸른빛을 일으켜 이 작은 건물이 보였다. 그 쪽으로 다가가 보니 헛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비를 피할 양으로 추녀 밑으로 들어섰다. 가까이에 있는 안채에서 비교적 굵직한 관악기의 울림과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땅 위에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섞여 요란스럽게 나그네의 귀를 때렸다. 비바람은 뜰에 심어 놓은 양배추 잎사귀와 마당 안 길 옆에 놓인 여남은 개의 벌통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그리고 처마 밑에 줄을 늘어 뜨려 매단 주전자와 바께스, 남비 따위에는 낙수물이 떨어지고 있어서, 그 부근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까마귀의 보금자리' 역시 생활하는 데 가장 곤란한 것은 물이 부족한 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날은 으례 집 안의 그릇은 모조리 내놓고 물을 받는 데 쓰는 것이었다. 가뭄이 계속되는 여름철이면 이 고지의 사람들에게는 비눗물이나 설겆이 물의 절약법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계절이 이 무렵이 되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만으로도 충분히 쓰고 남아 돌아가는 형편이다. 이윽고 서펜트와 바이올린 소리가 멎고 온 집안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던 외로운 나그네는 새삼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헛간 추녀 밑에서 걸어나와 안채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는 집 입구에 들어서자, 우선 일렬로 죽 늘어선 물통을 바라보고, 커다란 돌 위에 무릎을 꿇고 물통 하나를 집어 들어 실컷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손을 쳐든 채 문을 두드리지는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방 안의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집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상상하고, 그들이 그가 밤중에 찾아온 이유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자기 발 밑에서부터 저쪽 어둠 속으로, 마치 달팽이 자국 같은 길이, 그 역시 희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주위의 다른 것보다는 유난히 빛나 보이는 듯했다. 곧잘 물이 말라 버리기가 일쑤인 작은 우물의 지붕과 우물 덮개 등이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산골짜기에서는 고원 지대의 초원을 흘러가는 강물이 유난히 허옇게 번쩍이고, 그 너머 몇 개의 불빛이 빗방울 속에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읍으로 가는 길목에서 인기척이 전혀 없음이 분명했다. 그제야 나그네는 결심을 굳게 한 듯 문을 두드렸다. 이제 집 안에서는 춤과 음악이 끝난 뒤 두서 없는 잡담이 한창이었다. 울타리를 만드는 목수가 일동에게 노래 부르기를 제안했으나 사람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찰나에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양치기 페넬이 소리치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빗장이 위로 퉁겨지면서 문이 열리고, 한 사나이의 모습이 어둠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양치기는 두 개의 촛불을 들고 낯선 사나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사나이의 얼굴은 거무스레하게 보였지만, 오뚝 선 콧날이나 맑은 눈이 귀염성 있게 보여, 전체적인 인상은 호감이 갔다. 사나이는 방안을 휘둘러 보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 눈초리가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바로 눈 위에까지 깊이 눌러쓴 모자를 한동안 벗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벗어 텁수룩한 머리칼을 드러내 보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비가 너무 심하게 내려서, 안에서 잠시 쉬었으면 합니다만......" "아, 네. 그럼, 들어오시지요." 양치기는 나그네가 안으로 들어서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참입니다. 이런 기쁜 일이란 일 년에 한 번쯤 겪는 게 고작이지요." 하고 쾌활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러 번 축하해야 할 일은 아니지요." 한 여자가 재빨리 말했다. "하긴 그래. 성가신 일은 빨리 끝내 버릴수록 좋으니까."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그네가 물었다. "대체 기쁜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갓난아이한테 세례를 주었지요." 양치기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그러한 일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을 했다. 양치기는 커다란 귀가 달린 술잔을 나그네에게 권하였다. 처음에는 몹시 주저하는 듯하던 나그네가 이윽고 아무 거리낌없이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이 밤중에 용케 이곳까지 오셨군요." 50대의 약혼 중인 사나이가 나그네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아주 늦어서 애를 먹었습니다. 부인, 이 벽난로 옆에 앉아도 괜찮습니까? 비를 맞았더니......" 페넬 부인은 불청객의 요구를 쾌히 허락하고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나그네는 벽난로 구석 깊숙이 몸을 디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네, 구두창이 몹시 낡았습니다." 사나이는 페넬 부인이 자기의 구두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설명을 했다. "뭐 구두뿐만이 아니죠. 보시다시피 옷도 험합니다. 요즘 제 생활이 좀 곤란해서 닥치는 대로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집에서 일하는 데는 그런대로 거추장스럽지 않게 입을 만한 옷이죠." "이 근방에 사시나요?" "아뇨. 이 근방이라고 단정하기엔 뭣합니다. 여기서 훨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네, 역시 그러셨군요. 첫눈에 이 근방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부인이 저를 잘 아실 턱은 없지 않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부인보다 나잇살이나 더 먹었으니까요." 사나이는 마치 귀찮은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둣한 위엄을 보이며 대꾸했다.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사나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어, 마침 담배가 떨어졌군요. 미안하지만 좀 얻어 피울 수 있을까요?" "파이프를 이리 주시오. 제가 담아 드릴 테니." 양치기가 담배 쌈지를 꺼내 들며 말했다. "기왕이면 파이프도 함께 빌렸으면 할 처지입니다." "아니, 담배를 피우시는 분이 파이프도 갖고 다니지 않습니까?" "길을 걷는 도중에 떨어뜨렸나 봅니다. 분명히 주머니에 있었는데......" 나그네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양치기는 새 사기 파이프에 담배를 담아 나그네에게 건네 주었다. 양치기는 담배 쌈지를 든 채 말했다. "담배 쌈지를 주시오. 담배를 말아 드릴 테니까요." 그러자 사나이는 당황하는 태도로 주머니를 뒤지는 체했다. "아니, 담배 쌈지도 빠뜨렸나요?" 양치기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종이에 조금 담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나이는 파이프에 불을 댕기자 곧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젖은 바지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한편, 손님들은 다음 무용곡에 관하여 악사들과 의논을 하느라고 불청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곡이 결정되자 사람들은 춤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벽난로 옆의 사나이는 부지깽이로 난로 속의 불덩이를 헤집고 있었다. 그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것이 그의 생애의 목적이나 되는 듯이 부지깽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양치기는 이렇게 외치면서 문을 열었다. 한 사나이가 짚으로 만든 신발닦개 위에 서 있었다. 낯선 사람이었다. 이번 사나이는 먼저 온 사나이와 전혀 다른 형이었다. 그의 얼굴은 쾌활한 빛이었고, 태도는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여,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타입이었다. 처음에 온 사나이보다 나이가 대여섯은 더 들어 보였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데다가 위로 뻗친 눈썹이며, 볼에서 뒤로 비껴 난 구레나룻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은 둥글넓적해 보였으며, 술을 좋아하는지 콧등에 빨간 주독이 올라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사나이의 다갈색 코트가 펄럭였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바지 허리띠에는 커다란 인장이 달려 있었다. 사나이는 야트막한 광택이 나는 모자를 벗어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위해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잠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구료." 양치기는 처음의 사나이를 맞이할 때에 비해 다소 못마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페넬의 성품이 까다롭거나 인색해서가 아니었다. 방이 비좁은 데다가 빈 의자도 적고 특히 아름답게 차려 입은 여자들에게 비에 젖은 사나이와 어울리게 하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는 방으로 들어가자, 외투를 벗어 마치 거기에 걸어 놓기로 되어 있거나 한 것처럼 천장 들보의 못에 모자와 함께 걸어 놓았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가 식탁 앞에 앉았다. 춤을 출 장소가 되도록 넓게 잡기 위해서 식탁은 벽난로 옆 구석 쪽으로 놓여 있었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먼저 온 사나이와 나중에 온 사나이는 거의 나란히 붙어 앉게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은 서먹서먹함을 깨기 위해 서로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는 인사를 했다. 먼저 온 사나이가 이 집 대대로 물려온 커다란 술잔을 상대편에게 권하였다. 그 술잔은 이미 수세기에 걸쳐 유명을 달리한 많은 사람들의 목을 축여 주는 동안에 마치 옛집의 문지방처럼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술잔의 불룩한 부분에는 노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가 나타나니 비로소 아주 흥겨웁도다. 나중에 들어온 사나이는 권하는 대로 사양하는 법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마셨다. 먼저 온 사나이는 마치 제것을 권하는 듯이 연방 술잔을 상대편에게 넘겨 주었다. 페넬 부인은 그들이 하는 수작을 보고 적이 놀라 우스울 만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나는 대뜸 알 수 있었지요." 술이 얼근히 취한 나중의 나그네가 매우 흡족한 듯이 주인에게 말했다. "실은 여기 들어 오기 전에 댁의 집 뜰의 벌통을 보았지요. 그래 난 생각했습니다. 벌통이 있는 곳에 꿀이 있고, 꿀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꿀벌주가 있게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훌륭한 술은 난생 처음 마셔 봅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뒤로 나자빠지지는 않을까 하고 불안하게 보일 만큼 술잔을 또 기울였다. "술맛을 알아 주니 고맙습니다." 양치기는 쾌활하게 대꾸했다. "물론 술맛이야 괜찮지요." 페넬 부인은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술맛을 칭찬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술통이 바닥이 나서야 되겠느냐고 꼬집어 주는 투였다. 그녀는 계속했다. "술을 담기란 여간 힘들지 않아요. 이젠 다시는 술을 담글 수도 없을 것 같애요. 꿀이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집 안에서 쓰려고 벌통을 씻은 물로 약간의 술을 담가 꼭 필요한 때만 쓴답니다." 하고 덧붙였다. "거, 그건 좋지 않으신 생각이군요."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들고 있던 술잔을 막 비우고 나면서 언짢은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튼 저는 이처럼 오래 묵은 술을 좋아합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가는 일이나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는 것만큼이나 좋은 일이지요." 하고 능청을 떨었다. "하, 하, 하......"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상대편 사나이의 농담이 정말 우스웠던지 아니면 일부러 우스운 체하는 것인지 높은 소리로 웃었다. 이 당시의 묵은 봉밀주는 1갈론에 4파운드씩 했는데, 1년짜리 벌꿀, 말하자면 숫처녀 같은 벌꿀로 빚은 술- 물론 거기에는 달걀의 흰자위, 육계, 생강, 정향, 육구두, 만년랑, 누룩 등을 각각 적당히 넣어 처리한 다음, 병에 담아 곳간에 저장해야 하는 순서를 거치지만-은 매우 강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강한 줄 모르고 마시게 되었다. 늦게 들어온 회색 옷 사나이는 차츰 주기가 돌자 이윽고 조끼의 단추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듯 앉아 다리를 큰대 자로 뻗쳤다. 그리고는 횡설수설 제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럼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캐스타브리지로 가야 한다구요. 암, 꼭 가야지요. 사실은 지금쯤 그곳에 도착했어야 만사가 좋게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비가 오고 보니 이렇게 당신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구요. 덕분에 좋은 술을 얻어 먹게 되어 기쁩니다만 말씀이야." "음, 그렇다면 지금은 캐스타브리지에 살고 계시지 않는군요." 집 주인이 말을 거들었다. "그렇죠. 지금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곧 그리로 옮겨 갈 생각입니다." "그럼, 장사를 하실 작정인가요?" "그렇지 않은가 봐요. 어디로 보나 이분은 부자 같고, 일 같은 건 할 분이 아니에요." 페넬 부인이 남편의 질문을 부정하는 쪽으로 말머리를 꺾어 버렸다. 회색 옷 사나이는 안 주인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다. 말을 할까 말까 생각하는 것 같더니, "부자라니요? 저는 돈이 많은 부자와는 인연이 너무 멀지요. 저는 노동자입니다. 오늘 밤에 캐스타브리지에 도착하면 내일 아침부터라도 당장 일손을 잡아야 할 처지입니다. 그렇습죠.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하여간 일을 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가엾은 분이군요.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은데 우리보다도 더 가난하다니!" 페넬 부인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건 뭐 타고난 운명이지요. 그렇다고 사정이 그렇게 딱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제 가 봐야 하겠습니다. 잘못하다간 하숙집도 못 구할지 모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사나이는 일어설 기미가 조금도 안 보였다. "일어나기 전에 우정의 술 한잔쯤은 더 마실 수 있습니다. 술독이 바닥이 나지 않았다면 한 잔만 더 할 수 없을까요?" "연한 술이라면, 조금 더 있어요. 연하다고는 해도 벌통을 처음 씻어 낸 물로 빚은 술이에요." "그만두시죠. 그걸 얻어 먹으면 처음에 배풀어 준 부인의 친절이 값없어지니까요." 사나이는 비웃는 어조로 부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물론이죠. 그런 건 드시지 마십시오. 낳아라 어쩌라 해도 일 년에 한 번뿐입니다." 페넬이 이렇게 말하면서 술통이 있는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의 부인이 뒤를 따라갔다. 단둘이 되었을 때 페넬 부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여보, 어쩌자고 그러세요? 그 사람은 단숨에 마셔 버렸잖아요. 아마, 열 사람 분은 마셨을 거예요. 게다가 연한 건 싫다 어떻다 말하는 것 좀 보세요. 보도 듣도 못한 사람한테 이처럼 친절을 베풀 까닭이 없지 않아요. 난 그 상판이 보기 싫어요." "하지만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아니요. 비도 오고 세례 잔치도 벌인 이상 그까짓 봉밀주 한 잔을 가지고 야박스럽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술이란 또 만들면 되는 거요."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에요." 그녀는 안타까운 듯이 술통을 바라보았다. "노동자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낸들 알겠소. 내 물어 보리다." 페넬 부인은 큰 술잔 대신 작은 술잔에 술을 담아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에게 건네 주었다. 양치기는 사나이가 술잔을 다 비우고 나는 것을 바라보며 사나이의 직업을 다시 물어보았다. 사나이는 입을 다문 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벽난로 귀퉁이에 있던 사나이가 불쑥 대답했다. "나는 손수레 제조업자요." "네, 이 부근에선 어울리는 직업이군요." 양치기가 아는 체를 했다. 그때, 회색 옷의 사나이가 말했다. "직업을 알아맞히기란 참 쉽죠.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요. 보시다시피 내 손은 바늘 꽂이나 다름없지요." 울타리를 만드는 사람이 자기의 손을 내밀어 보이며 참견했다. 벽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사나이는 본능적으로 어두운 곳으로 손을 감추며 파이프를 문 채 난로불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옷 사나이가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 직업은 이상하게도 손님의 손에는 자국이 남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 자국도 안 남는단 말씀이야." 사나이의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풀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막간을 이용하여 페넬 부인이 노래를 부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도록 지목을 받은 사람은 목이 쉬었다느니, 가사의 첫 귀절을 잊었다느니 하면서 어물어물 넘어가려 했다. 그러자 회색 옷의 사나이가 스타트로 자기가 노래를 부르겠다고 큰 소리로 말해 간신히 분위기를 살렸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조끼의 옆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공에서 춤을 추듯 건들건들 흔들었다. 이윽고 그는 가사가 생각난 듯 천정에 매달린 여러 개의 지팡이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장사는 희귀한 게 아니죠. 양치는 여러분- 나의 장사는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죠. 손님을 묶어 올려, 높은 곳으로 영치기 영차 머나먼 나라로 보낸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다만 벽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사나이만이 굵고 나직한 바리톤으로 "얼씨구 절씨구" 장단을 맞추다가 "재창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올리버 자일즈, 우유 장수 존 피처, 교회 서기, 그리고 약혼 중인 50대 사나이, 일렬로 벽에 몸을 기대어 서 있던 여자들은 별로 즐겁지 않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양치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방바닥만 내려다보았고, 페넬 부인은 낯선 두 사나이를 의심스러운 듯 노려보았다. 그녀가 의심스러운 것은 이 나그네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는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가사의 곡을 지어 불렀는지 하는 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치 베르샤자르의 주연에 초대된 사람처럼 그 진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노래의 가사에 의아심을 가졌다.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이 절을 부르시오, 손님!" 하고 노래를 재촉했다. 재촉을 받은 사나이는 다시 술 한 잔을 들이키고 노래를 불렀다. 나의 도구는 희귀한 게 아니죠. 양치는 여러분- 볼품없는 조그마한 밧줄과 그네 기둥, 그것이 나의 귀중한 도구. 영치기 영차 머나먼 나라로 보낸답니다. 양치기 페넬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이 사나이는 그의 질문을 노래로 대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랴. 손님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혼 중인 50대의 사나이와 그의 약혼녀는 너무나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여자는 반은 정신이 빠져 뒤로 넘어지려다 간신히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편의 동작이 재빨랐다면 아마 주저앉는 여자를 부축해 주었을 텐데- "오라, 저게 바로 그 사람이군." 뒷줄에 앉아 있던 한 사나이가 속삭이듯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형리의 이름을 대었다. "맞아, 그 때문에 왔어. 거, 왜 있잖아, 내일 캐스타브리지 감옥에서 할 일 말야. 우리도 들었지 않아, 그 불쌍한 시계 수리공 말이야. 티모시 사마즈라는 사나이였지? 쇼츠포오드에서 훤한 대낮에 큰길로 나와 양을 훔쳤다는 놈 말이야. 마누라와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 짓을 했다잖아. 그 녀석은 양 주인이며, 그의 아내며, 아들이며, 그밖에 닥치는 대로 사람을 쳤다고 하더군. 저 자는 그 일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그 무서운 직업을 가진 사나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마 자기 고향에서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없으니까 이리로 온 게 분명해. 저 자는 우리들 군의 죽은 계원의 뒷자리를 물려받은 거야. 여기서 이곳 사람들을 마구 죽일 거야. 그리고 형무소 옆의 그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겠지." 그러나 그 회색 옷의 사나이는 뒷자리의 쑤군거림에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여전히 기운차게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 자기의 유쾌한 기분을 알아 주는 사람은 역시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뿐이라고 여겼던지, 술잔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도 서슴없이 들고 있던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술잔과 술잔이 부딪쳐서 쨍 하고 소리를 냈다. 일동의 시선은 회색 옷의 사나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묵살한 채 노래의 제3절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몹시 망설이다가 두드리는 듯한 노크 소리가 약하게 들려 왔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집주인인 양치기 역시 흠칫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떠한 사람이라도 방 안으로 들이지는 말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묵살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시오!"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한 사나이가 신발닦개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이 부근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사나이였다. 이번의 사나이는 키가 작고 몸집은 작아 보였으나, 살결이 희고 검은 양복을 깨끗이 차려 입고 있었다. "저어, 길 좀 물어 봅시다." 사나이는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 모였는지 알아 보기라도 할 듯이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윽고 회색 옷의 사나이에게서 멎었다. 그러나 회색 옷의 사나이는 자기의 노래에 열중한 나머지, 방 안에 누가 들어선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방 안의 무거운 긴장을 노래로써 눌러 버렸다. 내일은 나의 일하는 날 양치는 여러분- 내일은 일을 해야 하는 날이죠. 농부의 양을 훔친 놈이 잡혔으니 영치기 영차 명복이나 빌어 줍시다. 벽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는 사나이는 노래의 장단을 맞추느라고 아무렇게나 술장을 흔드는 바람에 술이 넘쳐서 식탁에 뿌려졌다. 신명이 난 그는 사나이의 노래 끝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후렴을 붙이듯 따라 불렀다. 명복이나 빌어 줍시다. 제3의 사나이는 출입구에 선 채 더 이상 안으로는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동의 시선은 일제히 그 사나이에게로 옮아 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나이는 몹시 질린 듯 오금을 달달 떨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손에 경련이 일어난 듯 부들부들 떨어, 쥐고 있는 문의 손잡이가 덜덜덜 소리를 내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방 중앙에 앉아 신이 나서 떠드는 회색 옷의 사나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홱 돌아서서 문을 닫고 도망쳐 버렸다. "아니, 대체 어떤 작자야?" 양치기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리치듯 중얼거렸다. 방 안의 사람들은 방금 나타났다 사라진 이상한 사나이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며 서로 마주볼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회색 옷의 사나이 곁에서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 그리하여 사나이를 중심으로 빈 자리가 휑 하니 생겨났다.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사나이를 중심으로 빙 둘러선 셈이었다. 개중에는 사나이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방 안에는 무려 스물한 명이나 있었지만, 덧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창틈으로 튀어든 빗방울이 난로 위에서 튀는 소리만 날 뿐, 숨소리조차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는 사기 파이프를 끊임없이 빨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한발의 총성이 울려 왔다. 총소리는 분명히 읍내 쪽에서 들려왔다. "제기랄!" 회색 옷의 사나이가 투덜거리면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일까요?" 누군가가 회색 옷의 사나이에게 물었다. "죄수가 도망친 거야." 누군가가 말했다. 모두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아무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난로 귀퉁이에 앉은 사나이가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이 군에서는 죄수가 도망을 치면 총을 쏜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실제로 총소리를 들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인걸." "내가 처치해야 될 죄수인지도 몰라." 회색 옷의 사나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휙 훑어보았다. "혹시 아까 그 놈이 아닐까요?" "아, 그럴지도 몰라. 틀림없이......" 양치기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말했다. "우리 눈으로 분명히 보았어, 그놈은 당신의 노래를 듣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기어이 도망을 쳤단 말이오." "그래, 사실 그랬소. 그놈은 턱을 덜덜 떨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았소." 우유 장수가 덧붙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모양이드만." 올리버 자일즈도 말했다. "한 대 맞은 것처럼 도망치더군." 울타리 만드는 사람이 말이었다. "틀림없어. 턱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 한 대 맞은 것처럼 도망치더군." 벽난로 귀퉁이의 사나이가 차근차근 말을 종합했다. "나는 전혀 몰랐지." 회색 옷의 사나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자가 별안간 도망을 치길래 우리도 얼떨떨했다오." 벽에 기대 서 있던 한 여자가 말했다. 비상 경보 총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은은하게 계속 들려왔다. 이제 그들의 의혹은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경관이 없나, 여긴?" 회색 옷의 정체 불명의 사나이가 말했다. 그의 탁한 목소리는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보조 경찰이라도 좋아. 있으면 앞으로 나와 주시오!" 약혼 중인 50대 사나이가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나섰다. 이 모양을 본 그의 약혼녀가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보조 경찰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곧 범인을 추적하게! 부하들을 데리고 가게, 아직 멀리는 도망치지 못했을 테니까, 체포하면 이리로 데려 오게." "알겠습니다. 한데 지금 경찰봉이 없습니다. 집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경찰봉! 그까짓 것 없어도 괜찮아. 그동안에 범인은 더 멀리 도망칠 게 아냐!" "하지만 경찰봉이 없어서야 말이 안 되죠. 그렇지 않아, 제이크? 정말입니다, 경찰봉에는 금빛 왕관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자와 물소 뿔이 새겨져 있습죠. 그걸로 범인을 잡아야 합법적입니다. 그걸 갖지 않고 범인을 잡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 경찰봉 때문에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니겠어요? 그걸 갖지 않으면 죄수를 잡는다기보다 오히려 제가 붙잡힐 겁니다." "이봐, 경관! 나는 어엿한 관이야. 내 직권으로써 너희들에게 법률적 권한을 부여한다. 모두 나서!" 회색 옷의 사나이는 위엄 있게 호통쳤다. "그럼, 여러분! 모두 준비를 갖춥시다." 경찰관이 외쳤다. "등불을 준비해!" 회색 옷의 사나이가 명령했다. "등불? 그렇지. 그게 없으면 곤란하지." 경찰관이 말했다. "신체 건강한 자는 모두 나서시오. 여기 남아 있을 필요는 없소." "신체 건강한 자는 모두 나서시오. 여기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소- 야." 경찰관은 회색 옷의 사나이가 말하는 대로 되풀이 말했다. "단단한 지팡이나 갈퀴를 준비하시오." "단단한 지팡이나 갈퀴를 준비하시오- 법률의 명령이란 말이야. 자, 모두 하나씩 준비하여 나서라구! 우리는 관리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이렇게 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나이들은 추격 준비를 갖추었다. 증거는 사실 간접적으로 추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심증이 굳어진 이상, 만약 그들이 세번째 사나이를 뒤쫓지 않는다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것이 되기 때문에, 더욱이 지형이 고르지 못해 불과 5백 야드도 채 못 갔을 사나이를 수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양치기의 집에는 다행히 등불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등불을 밝혀 들고, 양 우리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읍과는 반대 방향의 길로 전진해 나갔는데 마침 빗줄기는 한결 잔잔해 있었다. 떠들썩해서 눈을 떴는지, 혹은 세례의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었는지, 오늘 세례를 갓받은 아기가 3층 방에서 울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앉아 있던 여자들은 아기 울음 소리를 듣고 구원이라도 받은 듯, 모두들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불과 30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여자들은 사실 질릴 대로 질려 있었던 터였다. 2, 3분 사이에 방 안은 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에 지나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간 일행 중에서 집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한 사나이가 몰래 되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왔다. 문간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여유만만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바로 벽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의 바로 뒤, 선반에 얹혀 있는 과자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그는 밖으로 나갈 때, 여러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어 갖고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선 채로 술을 반 잔쯤 따라 성급히 들이마셨다. 그가 입안에 든 술을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또 다른 한 사나이가 방 안으로 슬쩍 들어섰다. 회색 옷의 사나이였다. "아니, 여기 계셨군요?" 회색 옷의 사나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일행을 뒤따라간 줄 알았지요." 그러면서 그의 눈은 봉밀주 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상대편 사나이는 입 속의 과자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대꾸했다.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가다가 생각해 보니 나 같은 건 없어도 무방하겠기에 돌아서 버린 거죠." "그렇구 말구. 나도 당신과 같애. 내가 안 가도 사람 수가 부족한 것은 아니거든." "게다가 밤도 이렇게 깊었잖소. 험한 길을 뛰어다니다가 다치면 나만 손해란 말씀이야. 죄수를 잡는 일이야 정부에서 할 일이지 나 같은 개인이 할 일은 아니거든." "옳은 말씀이야. 양치기들이야 이 부근 지리에 밝으니까 다칠 염려도 없을 테고 말이야." "미련한 놈들이지. 약간만 윽박질러 놓으면 뭐든지 해낼 놈들이지. 양치기들이란 다 그렇고 그런, 단순한 놈들이거든. 모든 일을 순간적인 기분으로 해 치운단 말씀이야." "나도 동감이야. 나 하나쯤 없이도 그들은 충분히 해치우고 말 거야. 이제 곧 잡아 오겠지. 우리들은, 수고를 조금도 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서 구경만 하면 된다구." "높은 자리에서 구경만 한다? 거 참 재미있군. 그건 그런데, 나는 캐스타브리지까지 가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 야단났는걸. 당신도 그쪽 방향?......" "아뇨. 나는 저쪽편 집으로 가는 길이지요." 그는 막연히 턱짓으로 바른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사나이는 다시, "나도 다리가 아플 때까지 한참 걸어야 하지요." 하고 말했다. 회색 옷의 사나이는 마침내 봉밀주 통을 깨끗이 비어 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정답게 악수를 나누고, 잘 가라는 인사를 한 다음, 새로 자기의 갈길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죄수를 추격하러 나선 일행은 그 근처의 초원지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끝까지 와 있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게다가 주모자 관리가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행동 방침이 더욱 모호해졌다. 그들은 갈팡질팡 산비탈을 내려갔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이 부근의 지리에 밝지도 않고, 약 12야드 간격으로 이루어진 급경사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에 있을 법한 일이었다. 조심성 없는 친구들은 앗 하는 사이에 이미 저만큼 나가 떨어져 괴상한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그때마다 들고 있던 등불은 제멋대로 굴러가거나 꺼져 버렸다. 흩어졌던 일행이 겨우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이 근방에서는 비교적 가장 지리에 밝은 양치기가 앞장서서 다시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불은 수색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상대편이 몸을 사리기에 알맞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두 꺼버린 뒤, 적당히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편편한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곳은 풀이 우거져 있고, 여기저기 가시덤불이 나 있었으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수 있는 길까지 나 있어, 죄수가 도망치기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일행은 그곳을 지나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제각기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정황을 종합하였다. 두번째로 그들이 모인 장소는 아마 50년 전쯤에 날아가던 새가 씨를 떨어뜨려 자라났을 법한, 목초지인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커다란 물푸레나무 옆이었다. 그런데 그 나무등걸 한쪽에 마치 가지처럼 딱 붙어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그들은 발견했다. 사나이는 흐릿한 하늘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그 윤곽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일행은 가까이 다가가 발을 멈추었다. 분명히 그들이 찾고 있던 사나이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돈을 내라!" 보조 경찰관이 사나이를 위협했다. 그러자 존 피처가 황급히, "아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냐. 그건 우리가 할 말이라기보다 저 놈이 해야 알맞을 말이잖아. 우린 어디까지나 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말야." 하고 말했다. "알았네 알았어. 그렇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게 아닌가. 나같이 책임감이 강하고 보면 이와 같은 때 자네 역시 엉뚱한 말이 나오고야 말걸세. 피고석의 범인, 어서 나와서 포승을 받아라. 하늘에 계신- 아니 국왕의 명령이시다." 경찰관은 초조하게 사나이를 향해 말했다. 나무 그늘의 사나이는 그때 처음으로 일행을 알아본 듯, 그들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자진하여 일행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몸집이 자그마한 제3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의외로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어, 여러분. 방금 저한테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리 나와서 포승을 받으라고 말했다. 내일 아침에 얌전히 교수형을 받아야 하거늘 캐스타브리지 형무소에서 기다리지 않았기에 체포하는 거다. 자, 여러분, 이 순간을 더욱 조심해서 저 놈을 붙잡읍시다." 죄목을 듣고 난 사나이는 사정을 짐작했다는 뜻인지 아주 순순히 수색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일행은 몽둥이로 위협을 해 가면서 양치기의 오두막집으로 사나이를 데리고 왔다. 일행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11시였다. 열린 문을 통하여 불빛이 뜰로 흘러나왔고, 그 방 안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행이 없는 동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누구나 대뜸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캐스타브리지 형무소의 관리 두 사람과 부근의 별장에서 사는 유명한 치안 판사가 와 있었다. "여기 죄수를 체포해 왔습니다. 모험, 그렇지요.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임무와 책임을 다하여, 무사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범인은 여기 훌륭한 체격의 사나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자, 여러분, 범인을 이리 끌어 내시오." 제3의 사나이가 빙 둘러선 일행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사람은 누구야?" 형무관이 물었다. "범인입니다." 경찰관이 대답했다. "당치도 않는......" 형무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사나이와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경찰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노래 부르던 관리를 보고 그처럼 벌벌 떨었느냐 말예요." 경찰관은 사형 집행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제3의 사나이가 방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하던 행동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럴 듯한 말이기는 한데, 아무튼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니야. 범인은 이 사람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단 말이야. 그놈은 얼굴이 좀 검어 보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미남형에 속한다구. 목소리는 바리톤으로 듣는 사람 편에서 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구." 형무관은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벽난로 옆에 앉아 있던 그 사나이야." "벽난로 옆에 앉아 있던 사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치안 판사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양치기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럼, 그놈은 어떻게 됐나?" "죄송합니다, 각하. 그놈이 바로 각하께서 찾고 계시는 범인이기는 합니다만, 동시에 놈은 또 우리가 찾고 있던 죄수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즉 우리가 수색 목적으로 삼은 사나이가 결코 아니었단 얘긴데, 각하, 저의 이 변변찮은 구변 가지고는 설명이 잘 안 될 줄 압니다만, 찾고 계시는 사나이는 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사나이였습니다. 하여간 그놈은 우리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어디론가 잽싸게, 그렇죠, 잽싸게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군. 하여간 그놈을 수색하도록 하게." 치안 판사는 퉁명스럽게, 그러나 위엄있게 명령을 내렸다. "저어, 선생님." 붙잡혀 온 사나이가 그때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사나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처럼 수고를 끼쳐 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사정을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기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 자신은 조금도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굳이 죄가 있다면 찾고 계시는 범인이 바로 제 형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제3의 사나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반쯤 벌어져 다물 줄을 몰랐다. "저는 오늘 점심때에 쇼츠포드의 집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형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캐스타브리지 형무소로 가는 길이었지요. 오는 도중에 비를 맞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날이 저물었지요. 이 집에 들어선 것은 길도 묻고 뭣하면 좀 쉬어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캐스타브리지 형무소에 있어야 할 형님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이 벽난로 옆에 앉아 있었습죠. 처음에 저는 어리둥절해서 제 눈을 의심하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죠. 그러나 때마침 한 사나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죠. 형의 목숨을 빼앗을 사형 집행인이 말입니다. 형이 도망칠 수 없었던 건 아마 그 사람이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형은 시치미를 떼느라고 그 사람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더군요. 형 역시 저를 보는 순간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형의 눈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는 체하지 말아라. 잘못 입을 열었다간 만사가 도로아미타불이다- 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놀란 저는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길을 돌려 도망쳐 버린 거죠." 말하는 사람의 태도나 얘기가 거짓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네. 한데, 자네는 자네 형이 지금쯤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겠지." 치안 판사가 물었다. "그건 모릅니다. 이 문을 나간 뒤론 형을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놈은 내내 우리들과 함께 있다가 도망쳤으니까요." 양치기가 제3의 사나이를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어쨌든 좋아, 그런데 형의 직업은 뭐지?" "시계 수리공입니다." "뭐야? 손수레 제조업자라고 하던데- 못된 악당이군." 경찰관이 말했다. "수레나 시계나 마찬가지지 뭐. 기둥시계나 회중시계의 톱니바퀴도 바퀴니까." 양치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다시, "손수레 목수치고는 어쩐지 손이 너무 희다 했더니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 대신 이 사람을 체포할 수는 없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그놈이나 붙잡을 준비나 해." 치안 판사가 마침내 사태의 단안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몸집이 자그마한 제3의 사나이는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문제보다도 달아난 형의 앞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로 근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에 그는 힘없이 제 갈길로 갔다.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수색은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예정대로 양 도둑을 찾는 수색 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은 죄보다 처벌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 지방 사람들은 은연중에 탈옥수를 동정하는 편으로 기울어졌다. 게다가 양치기의 집에서 열린 잔치 자리에 들어와서, 두려움 없이 사형 집행인과 마주 앉아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침착하고 용감한 사나이인가를 알게 되어 농부들은 누구나 그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숲과 들의 산길을 바삐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자기네 집의 마굿간이나 헛간을 찾게 되었을 때, 과연 얼마나 철저하게 수색했는지에 관해서는 심히 의심할 바가 많다 하겠다.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웬만해서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풀이 무성한 오솔길에서 정체 불명의 그림자가 보였다는 소문도 가끔 있었지만, 정작 수색 작전을 펼쳐 보면 오히려 거기 숨어 있던 사람이 사태를 짐작하고 재빨리 도망치기에 알맞았다. 이렇게 하여 며칠이 지나고 몇 주일이 지났다. 요컨대 이 신비스런 사나이- 탈옥수는 끝내 잡히지 않고 엉뚱한 낭설만 떠돌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바다를 건너 멀리 도망쳐 버렸다는 말을 했고, 또 어떤 이는 그가 바다를 건너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은 도시에 파묻혀 버렸다고도 했다. 어떻든간에 그 회색 옷의 사나이는 캐스타브리지에서 예정했던 아침일을 하지 못했고, 또 '까마귀의 보금자리'에서 한 시간쯤 단둘이 웃고 떠들고 악수까지 나눈 사나이를 직업상의 문제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양치기 페넬과 그의 아내의 무덤에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뿌리를 내린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날 밤의 잔치 자리에 모여 이상한 공포감과 수색에의 수고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도 거의 다 유명을 달리한 지가 오래였다. 그때 세례를 받았던 아기는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까마귀의 보금자리'에서 있었던 그날 밤의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이 지방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끝> 9. 마지막 잎새 오 헨리(O. Henry) 워싱턴 광장 서쪽 좁은 구역에는 여러 갈래의 골목길이 난잡하게 뻗어 있으며, 플레이스라 부르는 조그만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플레이스는 모두 기묘한 모퉁이나 곡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의 길이 나아가다가, 그 자신과 한두 번 교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에 어떤 그림장이가 이 거리에서 하나의 귀중한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가령 물감이나 종이나 캔버스 대금을 받으러 온 사람이 이 길에 들어서면 아직 한푼도 받아내기 전에,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란 것이다! 그래서 얼마 후, 이 이상스럽고 낡은 그리니지 마을에 잡다한 예술가들이 찾아와서 북쪽으로 향한 창과, 18세기식 박풍과 네덜란드식 지붕 밑 다락방과 세가 헐한 방을 구하여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6번가에서 백랍으로 만든 컵이나 간편한 풍로 따위를 두세 개 사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이곳에 예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수우와 죤시는 뭉툭한 3층 벽돌 건물 꼭대기에 화실을 가지고 있었다. 죤시란 죠안나의 애칭이다. 수우는 메인 주 출신이고 죤시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이다. 두 사람은 8번가에 있는 델모니코 정식 식당에서 만났으며, 예술과 샐러드와 신부(神父) 두루마기 같은 소매가 달린 복장에 대해서 취미가 일치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공동의 아틀리에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5월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가 폐렴이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냉혹한 외래자가 마을을 휩쓸어 그 얼음 같은 손으로 여기저기 쓰다듬고 다녔다. 사나운 파괴자는 빈민가를 대담하게 활보하여 많은 희생자를 다발로 묶어서 쓰러뜨리더니, 이 비좁고 이끼 낀 플레이스의 미로를 걸음걸이도 조용하게 침범하였다. 폐렴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도를 아는 노신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부드러운 바람 속에 자란 연약한 여성은, 피투성이의 주먹을 쳐들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달려오는 늙은 병마(病魔)에게 맡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병마는 죤시를 습격했다. 죤시는 페인트를 칠한 철제 침대에 누워서 거의 꼼짝도 하지 않고 조그만 네덜란드식 유리창 밖으로 이웃 벽돌집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왕진을 다니기가 바쁜 의사는, 흰털이 섞인 굵은 눈썹으로 신호를 해서 수우를 복도로 불러냈다. "가능성은- 열에 하나입니다." 하고 체온계의 수은을 흔들어 내리면서 말했다. "가능성이란 우선 살아야겠다는 정신력이죠. 장의사를 부르는 쪽으로 마음이 끌려서는 아무리 좋은 처방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낫지 않을 것으로 단념을 하고 있어요. 뭘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없습니까?" "죤시는- 언젠가는 나폴리만(灣)을 그리고 싶다고 늘 말하고 있었어요." 하고 수우가 대답했다. "그림을 그린다구?- 그건 소용없어! 뭔지 곰곰이 생각할만한 가치를 지닌 건 없을까? -이를 테면 어느 한 남성이라든가?" "남자?" 입에 뭐가 걸린 것 같은 목소리로 수우는 말했다. "없습니다- 선생님, 그런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흠, 바로 그런 면이 부족하군." 하고 의사가 말했다.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노력해 봅시다. 하지만, 환자가 자기 장례식 행렬에 차가 몇 대나 따라올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의약(醫藥)의 효력은 절반 줄어든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 겨울 외투에는 어떤 소매가 유행하는지,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희망이 열에 하나가 아니라 다섯에 하나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수우는 화실에 가서 일본제 종이 냅킨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화판을 겨드랑이에 끼고 휘파람을 불면서 활발하게 죤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죤시는 창으로 향하여, 이불에 주름이 하나도 접히지 않을 만큼 조용히 누워 있었다. 잠이 들어 있나 해서 수우는 휘파람을 그쳤다. 화판을 반듯하게 놓고 어느 잡지 소설의 삽화- 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는 젊은 작가가 문학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쓰는 잡지 소설의 삽화를 그려서, 예술의 길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다호의 카우보이였다. 마필공진회(馬匹共進會)의 화려한 승마복과 모노클(외눈안경)을 그리고 있으려니까, 낮은 소리로 자꾸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우는 얼른 일어나서 침대로 다가갔다. 죤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수를 거꾸로 세고 있는 것이었다. "열둘." 하고는 좀 있다가 "열하나." 다음에는 "열." "아홉." 이어서 거의 동시에 "여덟." "일곱......" 수우는 이상스러워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뭘 세고 있는 것일까? 창에서 보이는 것은 인기척 없는 쓸쓸한 안마당과 20피트쯤 떨어진 이웃 벽돌집의 벽뿐이었다. 밑줄기가 울퉁불퉁한 해묵은 담쟁이덩굴이 벽 중턱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잎새를 떨어뜨려 해골 같은 줄기가 거의 벌거숭이가 된 채 낡은 벽돌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 뭘 세고 있니?" 하고 수우가 물었다. "여섯." 하고 속삭이는 듯 낮은 목소리로 죤시가 말했다. "점점 더 빨리 떨어지네. 사흘 전에는 백 개쯤 있었는데. 다 세자니까 머리가 아팠어. 하지만 이제는 쉬워요. 아, 또 하나 떨어지는구나. 다섯 남았다." "뭐가 다섯이란 말이니? 나한테도 가르쳐줘." "잎새 말야. 저 담쟁이 덩굴에 붙은 잎새.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때에는 나도 가게 되는 거야. 삼 일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의사도 그렇게 말했겠지?" "그런 바보 같은 얘기가 어디 있니." 수우는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강경하게 부인했다. "철 지난 담쟁이 잎새하고 네가 병이 낫는 것과 상관이 있을 게 뭐야. 너는 저 담쟁이에 홀딱 반한 모양이구나. 어떻든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마.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그러더군- 병이 나아질 가능성은- 뭐라더라, 그렇지 그렇지- 하나에 열이라는 거야. 그런 가능성이라면 뉴욕에서 살고 있는 한, 전차를 타고 다니거나 공사 도중의 건물 옆으로 지나가거나 위험한 일이 얼마든지 있지 뭐. 자, 수프라도 조금 먹어봐. 그리고 나한테 그림을 그리게 해줘. 빨리 그려다 주고 돈을 받아서 환자를 위해서는 포트 와인을, 식욕 왕성한 나를 위해서는 포크찹을 사와야겠으니까." "이젠 포도주는 안 사와도 괜찮아." 하고 죤시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또 하나 떨어졌네. 아니, 수프도 먹고 싶은 생각 없어. 앞으로 겨우 네 개. 어둡기 전에 마지막 하나까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가는 거야." "죤시." 하고 수우는 침대 위에 몸을 구부리고서 말했다. "내가 일을 끝낼 때까지, 눈을 감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않겠니? 그림을 내일까지 갖다줘야 해. 그림이 아니면 차양을 내리고 싶다마는......" "저쪽 방에서 그리면 안 될까?" 죤시는 냉정하게 물었다. "네 옆에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하고 수우는 말했다. "그리고 저 하찮은 담쟁이 잎새는 안 쳐다봤으면 좋겠어." "그림이 다 되거든 말해 줘." 일단 눈을 감고 쓰러진 조상(彫像)처럼 창백하게 누운 채 죤시는 말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으니까. 그걸 기다리는 것도 힘이 드네. 내가 매달려 있는 것에서 손을 떼고 어딘지 모르지만 뚝 떨어져 가고 싶구나. 저 가엾은 철 지난 잎새처럼." "잠이 드는 게 좋아." 하고 수우는 말했다. "난 베어맨 할아버지한테 늙은 광부 모델이 돼 달라고 부탁을 해야 돼. 갔다가 바로 돌아오겠지만, 내가 올 때까지는 움직이지 마." 베어맨 노인은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그림장이었다. 이미 60이 넘었으며, 반수신(半獸神) 같은 머리에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 새긴 모세 같은 수염이 도깨비 같은 몸뚱아리에 흩어져 내리어 있었다. 그는 예술의 낙오자였다. 과거 40년간 계속해서 손에 화필을 잡고 살아왔으나, 아직도 예술의 여신(女神)의 치맛자락도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늘 걸작을 그린다 그린다 하면서 손을 대지도 않았다. 최근 몇 해 동안은 상업용이나 광고그림밖에는 아무것도 그린 게 없었다. 그는 직업적인 모델을 쓸 만한 재력이 없는 이 예술인촌 젊은 화가들을 위해 모델노릇을 하여 근소한 수입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진(술)을 자꾸 들이켜면서 미래의 걸작을 주장했다. 그림을 제외하고 보면 몸집은 작으나 기백이 있는 노인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유약하냐고 비웃었다. 그리고 3층 화실에 있는 두 젊은 예술가에 대한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수우는 아래층에 내려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노간주 열매(진의 원료) 냄새를 풍기고 있는 베어맨 노인을 찾아냈다. 방구석 화가(畵架)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걸작이 되는 최초의 일필(一筆)을 25년간이나 기다려 온 캔버스였다. 수우는 베어맨 노인에게 죤시가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정말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 빠져서 저 가벼운 담쟁이 잎새처럼 허공으로 날아가는 게 아닌지 겁이 난다고 말했다. 베어맨 노인의 불그레하게 취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커다란 소리로 죤시의 어리석은 공상을 비난했다. "뭐라구!"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구,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 그런 얘기는 듣지도 못했다. 나더러 폐인이 된 늙은 광부의 모델이 되라구, 왜 하필이면 그런 게 되라는 거야, 딱 질색인 걸. 그건 그렇구 죤시가 그런 생각을 해서야 되나?" "아주 낙담하고 있어요." 하고 수우는 말했다. "열이 높으니까 기분이 들떠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나 봐요. 괜찮아요, 베어맨 할아버지, 모델이 되기가 싫으면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기분이 오락가락해서 믿을 수가 없군요." "여자라는 건 모두 어쩔 수가 없구나!" 베어맨 노인은 더욱 소리를 높여 절규했다. "내가 언제 모델이 안 된다고 했나? 먼저 올라가요, 나도 갈 테니까. 난 반 시간 전부터 모델이 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어. 정말! 여기는 죤시 같은 착한 아가씨가 병이 나서 누워 있을 곳이 못돼. 이제 곧 걸작을 그려야지. 그러면 다 같이 여기서 나갑시다. 정말이야! 정말이구말구." 두 사람이 3층에 올라가니까 죤시는 잠이 들어 있었다. 수우는 차양을 밑으로 내리고, 베어맨 노인에게 손짓으로 옆방으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착잡한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담쟁이 덩굴- 정말 잎새가 몇 개 안 남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느덧 눈이 섞인 차가운 비가 쉴새없이 내리고 있었다. 베어맨 노인은 낡아빠진 파란 셔츠를 입고 바위 삼아 남비를 뒤집어놓은 위에 걸터앉아 늙은 광부 포즈를 취했다. 이튿날 아침, 수우가 한 시간쯤 자고서 눈을 뜨니까, 죤시가 생기없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려진 초록색 차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튼을 올려줘. 보고 싶어!"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수우는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 주었다. 한데 이게 웬일일까. 밤새 쉬지 않고 사나운 비바람이 휘몰아쳤는데도, 그 벽돌 벽 위에는 담쟁이 덩굴 잎새 하나가 여전히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덩굴에 달린 마지막 한 잎새였다. 잎새 아래쪽은 거무스름한 초록색이고 가장자리는 노랗게 물들어 있다. 그 마지막 한 잎새는 땅에서 20피트쯤 올라간 줄기에 용감하게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한 잎일세." 하고 죤시가 말했다. "밤 사이에 꼭 떨어질 줄 알았더니, 바람이 쉬지 않았어. 오늘은 떨어지겠지, 그리고, 나도 같이 죽어가겠지." "그게 무슨 소리니!" 수우는 피곤한 얼굴을 베개에 기대며 말했다. "자기 생각을 하기 싫거든, 내 생각 좀 해다구. 난 어떻게 하란 말야." 그러나 죤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고 먼 신비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외로운 것은 없다. 그녀를 이 지상에 연결시키고 있던 모든 인연이 하나하나 풀어짐에 따라 공상(空想)이 더욱더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양이었다. 그날 하루는 이럭저럭 지나갔다. 황혼이 다가왔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그 담쟁이 잎새는 여전히 벽에 의지한 덩굴줄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황혼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윽고 어둠이 덮쳐오면서 다시 또 북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해서 창을 두드렸다. 빗방울이 낮은 네덜란드식 처마에서 흘러 떨어졌다. 날이 새자, 죤시는 또 차양을 올려 달라고 졸랐다. 담쟁이 잎새는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죤시는 누운 채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스 난로 위에 닭고기 수프를 휘젓고 있는 수우를 불렀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가 봐, 수우디." 하고 죤시는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저기에다 마지막 잎새 하나를 남겨 둬서, 내 생각이 잘못이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하는 모양이지. 이젠 알겠어. 죽기를 원한다는 건 일종의 죄악이야. 자 수프를 조금 줘요. 밀크에 포도주를 탄 것도. 우선- 손거울 잠깐 집어 줘. 그리고 베개를 두세 개 등에 받치고 일어나 앉아서 네가 아침 차리는 걸 보고 싶어." 한 시간쯤 지나서 죤시가 말했다. "수우디, 언젠가는 나폴리만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애." 오후가 되자 의사가 왔다. 의사가 돌아갈 때 수우는 구실을 만들어 복도에 나왔다. "이젠 희망이 반반이라고 할까." 가냘프게 떨리는 수우의 손을 잡고 의사는 말했다. "간호만 잘하면 당신이 이길 거야. 난 또 아래층에 가서 새로 발병한 환자를 봐야 돼. 베어맨이라는 사람인데- 그림장이라던가. 그 역시 폐렴이야.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해. 갑자기 병이 난 모양인데 글쎄, 어려울 것 같애. 그러나 좀 편하게 누워 있도록 오늘 입원을 시킬 작정이야." 그날 오후, 죤시는 침대에 누운 채 파란 털실로 별로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그때 마침 수우가 와서 한쪽 팔로 베개고 이불이고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게 할 얘기가 있단다." 하고 수우는 말했다. "베어맨 할아버지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어. 겨우 이틀 앓다가. 병이 나던 날 아침, 관리인이 아래층 할아버지 방에 가보니까 벌써 신음을 하고 있더래. 구두를 신은 채 누워 있는데, 옷이 모두 젖어서 온몸이 얼음처럼 차갑더래. 그렇게 비바람이 사나웠던 밤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나. 그런데 아직도 불이 켜 있는 랜턴, 헛간에서 끌어온 사닥다리, 화필이 두세 자루, 그리고 초록색과 노랑색 물감을 녹인 팔레트가 방안에 흩어져 있더라는 거야- 창밖을 보렴. 저기 벽에 붙은 담쟁이의 마지막 한 잎새를. 바람이 부는데도 꼼짝도 안 하잖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니? 죤시! 저게 바로 베어맨 할아버지의 걸작이었던 거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그날 밤, 그 사람이 벽에다 그렸던 거야." <끝> 10. 20년 후 오 헨리(O. Henry) 순찰 경관이 의젓하게 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약간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의 습관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시간은 이제 겨우 밤 10시가 될까말까하는 무렵이지만 습한 찬바람이 사납게 불어서 한길을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끊어져 있었다. 곤봉을 빙빙 솜씨 있게 돌리면서 이따금 조심스러운 눈으로 거리며 집들을 살핀다. 몸이 완강하고 걸음걸이가 의젓한 이 경관은 시민의 치안을 보호하는 경찰관의 훌륭한 표본이었다. 이 근방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리이며, 곳에 따라서는 담배가게나 밤새도록 열고 있는 노점 식당의 등불이 보이기도 했으나 대개는 오피스(회사나 관청)이며 그 입구는 일찌감치 닫혀 있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경관은 갑자기 걸음을 늦추었다. 캄캄한 철물상 점포 앞에 한 사나이가 불이 붙지 않은 잎담배를 물고 벽에 의지해서 서 있었다. 경관이 다가가니까 그 사나이가 먼저 얼른 말을 걸었다. "염려마십시오." 하고 경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뭐, 그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십 년 전에 약속한, 좀 이상하지요? 그럼 사정을 얘기할까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약 이십 년 전 바로 이 자리에 한 음식점이 있었죠- '빅 조우'란 별명이 붙었던 브레디가 경영했던 음식점 말입니다." "오 년 전까지 있었죠." 경관이 말했다. "오 년 전에 뜯어버렸습니다." 서 있던 사나이는 성냥을 켜서 잎담배에 불을 댕겼다. 그 불빛에, 눈이 날카롭고, 턱이 네모진 창백한 얼굴과, 오른편 눈썹 옆에 찍힌 조그만 상처자국이 떠올랐다. 넥타이핀은 묘한 방식으로 끼운 큼직한 다이아몬드였다. "이십 년 전 오늘밤." 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빅 조우' 브레디의 음식점에서 지미 웰즈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나의 가장 다정한 친구,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친구였지요. 그 친구도 나도 이 뉴욕에서 자랐습니다. 형제와 다름없이. 그때, 나는 열여덟이었고, 지미는 스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이튿날, 한 재산 잡기 위해 서부로 떠나기로 돼 있었어요. 지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뉴욕을 떠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뉴욕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날 밤. 이 시간에서 꼭 이십 년이 지난 뒤에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어떤 신분이 돼 있더라도, 얼마나 먼 곳에서라도 반드시 여기 와서 만나자고. 이십 년 후에는 피차 운이 열려서 한 재산 만들게 되겠지- 어떤 길로 나아가든지- 하고 마음의 결심을 했던 겁니다." "그거 참 재미있군요." 경관이 말했다. "하지만 재회까지 이십 년이라는 세월은 좀 긴 것 같군요. 그래, 일단 헤어진 후 그 친구한테서 무슨 소식은 없었소?" "있었어요. 얼마 동안은 서로 편지 왕래가 있었습니다." 하고 사나이는 말했다. "그러다가 일이 년이 지나자 피차 소식을 모르게 됐어요. 아시겠지요마는, 서부라는 곳은 대단히 활발합니다. 일거리가 많아요. 나는 부지런히 돈벌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미는 반드시 나를 만나러 여기 올 겁니다. 죽지 않은 한은. 지미는 정말 고지식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약속을 잊어버릴 리가 없습니다. 나는 일천 마일이나 먼 여행을 해서 왔어요. 오늘 이 자리에 서기 위해. 옛날 다정했던 친구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일천 마일을 달려온 값어치는 있습니다." 옛친구를 기다리는 사나이는 훌륭한 시계를 꺼냈다. 뚜껑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열 시 삼 분 전." 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꼭 열 시 정각이었어요. 우리가 이 음식점 문 앞에서 작별을 한 것은......" "서부에 가서 한 밑천 잡았겠지요?" 경관이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지미도 나의 절반쯤은 성공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쪽인가 하면 아무래도 좀 느린 편이었습니다. 성품은 썩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서부에서 남의 돈을 빼앗으려고 하는 약삭빠른 놈들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하는 일이 모두 그날그날 판에 찍은 것처럼 뻔합니다마는, 서부에서는 잠시도 안심을 못합니다." 경관은 곤봉을 빙빙 돌리면서 두세 걸음 내디뎠다. "나는 가겠소. 당신 친구가 틀림없이 오기를 바라오. 시간은 일분도 유예를 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기다리구말구요!" 하고 사나이는 말하였다. "글쎄, 한 삼십 분 정도는 기다려야겠지. 이승에 살아 있다면 지미는 그때까지는 반드시 올 겁니다. 잘 가십시오, 경관나리." "그럼-" 하고 경관은 그가 담당한 구역을 살펴보면서 걸어갔다. 이때는 차가운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간간이 불던 바람이 끊임없이 불기 시작했다. 극히 드문드문한 행인들은 입을 다물고 옷깃을 여미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서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다. 먼 옛날, 젊은 시절의 친구하고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천 마일의 길을 달려온 사나이는 철물상 앞에서 잎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약 20분쯤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기다란 외투를 입고 외투 깃을 귀밑까지 세운 키 큰 사나이가 길 저쪽에서 급히 건너오더니 곧장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너, 보브냐?" 하고 그 사나이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넌 지미 웰즈냐?" 철물상 앞에 서서 기다리던 사나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거 참!" 하고 지금 온 사나이는 상대의 두 팔을 붙잡았다. "틀림없는 보브구나.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여기서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저러나!...... 이십 년이라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옛날 식당은 없어졌어, 보브. 그래도 있었더라면 좋았는데. 여기서 또 같이 저녁을 먹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래 서부는 경기가 어떻든가?" "그야 대단하지.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다 있어. 너도 변했구나 지미. 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두세 치 더 크구나." "스물이 넘어서 키가 컸어." "너 뉴욕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니, 지미?" "그런대로 잘 있었지. 지금은 시청에 근무하고 있네. 자 가세, 보브. 내가 잘 아는 집에 가서 천천히 옛날얘기나 하자꾸나."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성공이 자랑스러워서 출세한 경로를 한바탕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는 외투깃에 가려진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을 띠고 듣기만 했다. 길모퉁이에 환하게 전등을 켠 약국이 있었다. 그 밝은 등불 밑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풀었다. "넌 지미 웰즈가 아냐." 하고 물어뜯을 것처럼 외쳤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아무리 길다해도 매부리코가 납짝하게 주저앉을 만큼 길지는 않아." "하지만 이십 년 동안에 착한 사람이 악한(惡漢)이 되는 예는 있겠지." 하고 키 큰 사나이가 말했다. "넌 지금 끌려가고 있는 거야, 보브. 아마 이쪽으로 올 것 같다고 시카고에서 전보연락이 있었어. 순순히 따라 오겠나? 그렇다면 다행이지. 서에 가기 전에 여기 부탁받은 편지가 있으니 이 창 밑에서 읽어 보게나. 외근하는 웰즈 군이 쓴 편지일세."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조그만 쪽지를 받아 손에 펼쳤다. 읽기 시작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손이 미처 다 읽기 전에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비교적 짧았다. 보브 나는 그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갔었네. 자네가 성냥을 켜서 잎담배에 불을 댕길 때 시카고에서 지명수배가 되어 있는 사나이의 얼굴을 나는 본 것일세.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자네를 체포할 수가 없었네. 그래서 한바퀴 돌고 와서 다른 형사에게 부탁을 한 것이네. * 지미로부터 <끝> 11. 바보 이반의 이야기 톨스토이 바보 이반, 그의 두 형인 무관(武官) 세묜과 배불뚝이 따라스, 그리고 벙어리 누이 말라니야와 큰 도깨비, 작은 세 도깨비의 이야기 1 옛날옛날 그 옛날, 어느 나라의 어느 마을에 부유한 농부가 있었다. 이 부유한 농부에게는 세 아들, 즉 무관인 세묜, 배불뚝이 따라스, 바보 이반과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딸 말라니야가 있었다. 무관인 세묜은 임금님을 섬기러 전쟁에 나갔고, 배불뚝이 따라스는 문안의 장사치한테 장사 기술을 배우러 갔으며, 바보 이반은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 땀 흘려 일하고 있었다. 무관인 세묜은 높은 벼슬과 사전(私田)을 얻고 어느 귀족의 딸한테 장가들었다. 그런데 녹이 많은 데다 전답도 많았는데도 매양 수지가 들어맞지 않았다. 남편이 긁어들이기가 바쁘게 귀족 행세를 하는 여편네가 물쓰듯 써버려 언제나 돈이 붙어 있을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무관인 세묜은 도조를 받으려고 농장으로 갔다. 그러나 마름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도조는 드릴 수가 없습죠. 저희들에겐 가축이고 농구고 말이고 소고 쟁기고간에 하나도 없으니 말이에요. 먼저 이것들을 갖추어야 합죠. 그래야만 비로소 수익이라는 것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무관인 세묜은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 아버지는 부자이면서도 저에게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땅을 삼분의 일만 나눠 주십쇼. 제 땅으로 이전하겠습니다." "너는 뭐 집에다 보태준 것이 하나도 있냐. 뭣 때문에 너에게 땅을 삼분의 일이나 준단 말이냐? 그러는 날엔 이반과 네 누이가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러자 세묜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 애는 바보 아녜요. 그리고 누이란 애도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이고 말이에요. 그런 것들한테 뭐가 필요하겠어요." 이 말에 대해서 영감은 "이반이 뭐라고 말하나 어디 그 애한테 한번 물어보자"고 말했다. 그런데 이반은 "뭘요, 드리죠" 하고 말했다. 무관인 세묜은 집에서 삼분의 일의 땅을 얻어 그 땅을 제것으로 이전하고 나서 다시 임금님을 섬기러 떠났다. 배불뚝이 따라스도 돈을 많이 모아 장사치의 딸한테 장가들었다. 그래도 그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찾아와 "제게도 제 몫을 나눠 주십쇼" 하고 말했지만, 영감은 따라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너는 우리에게 보태준 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집에 있는 것은 모두 이반이 번 것뿐이다. 나는 그 애하고 딸년을 섭섭하게 할 수는 없다." "저런 녀석에게 뭐가 필요합니까. 저 녀석은 바보 아니에요. 저 녀석은 장가도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습니다. 벙어리인 누이도 그렇죠, 역시 필요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죠. 그렇잖아, 이반. 나한테 곡식을 절반만 다오. 그리고 난 연장따윈 갖지 않을 테니까 가축 중에서 저 잿빛 수말이나 한 마리 갖겠다. 저건 너에게 밭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 테고."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뭘요" 하더니 "가지세요. 난 또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따라스도 제 몫을 탔다. 따라스는 곡식을 저자에 실어내고 수말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반은 예나 다름없이 늙어빠진 암말 한 마리로 농사를 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봉양하게 됐다. 2 큰 도깨비에게는 이 형제들이 재산을 분배함에 있어, 말다툼을 하지 않고 의좋게 헤어진 것이 뇌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작은 도깨비 셋을 큰소리로 불렀다. "자, 봐." 그는 말했다. "저 세상의 저기 세 형제가 살고 있지. 세묜이란 무관과 따라스란 배불뚝이, 그리고 이반이란 바보 녀석이 말이야. 나는 말이야, 저 녀석들에게 꼭 싸움을 붙여야겠는데, 아 저 녀석들이 의좋게 살고 있지 않겠나. 서로서로가 너 먹어라, 하고 지내고 있거든. 저 이반이란 바보 녀석이 아주 그냥 내 일을 깡그리 망가뜨려 놓았지 뭐야. 이제부터 너희 셋이서 모두 나가 저 녀석들에게 눌어붙어 서로 싸움을 하도록 의를 끊어 놓아라. 어때, 그것을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다마다요." 하고 그들은 말했다. "너희들 어떻게 그 짓을 할 작정이냐?" "그건 이렇게 할 작정이죠. 먼저 저 녀석들을 먹을 게 하나도 없도록 홀랑 발가벗긴 다음 세 녀석을 한곳에다 모으죠. 그러면 저 녀석들도 필시 서로 치고받고 하게 될 겁니다." 큰 도깨비가 말했다. "너희는 제 할 일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가거라. 그리고 말이다, 저 세 녀석들의 사이를 떼놓기 전에는 나에게 돌아와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세 놈의 가죽을 몽땅 벗기고 말 테니까, 그리 알아라." 작은 도깨비들은 어느 늪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일에 착수할 것인지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조금이라도 더 수월한 일을 맡으려고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겨우 심지를 뽑아서 누가 누구를 맡을 것인지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른 자들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을 마친 자는 다른 자를 도우러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도깨비들은 제비를 뽑고 나서 언제 다시 이 늪에 모일 것인지 날짜를 정하고 그날 누구의 일이 끝나고 누구를 도우러 가야 할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작은 도깨비들은 저마다 제 제비대로 행동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드디어 그 날이 닥치자 작은 도깨비들은 약속대로 늪에 모였다. 그리고 각기 자기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묜이란 무관한테서 돌아온 첫번째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내 일은 말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잘 돼 나가고 있어. 내가 맡은 그 세묜은 내일 틀림없이 아버지한테 갈 거야." 그의 동료들이 묻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하고 그들은 입을 모아, "어떻게 했지?" 하고 물었다. "나는 말이야." 그는 말했다. "나는 우선 먼저 세묜에게 잔뜩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제 임금님에게 온 세계를 정복해 보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겠나. 그러자 임금님은 세묜을 대장으로 만들어서 말이야, 인디아 임금을 치러 보낸 거야. 모두들 치러 가려고 모였어. 그런데 나는 바로 그날 밤 세묜 군사들의 화약을 모조리 적셔 놓고는 또 인디아 임금에게로 가서 짚으로 군사들을 무수히 만들어 놓았지. 세묜의 군사는 자기네 쪽으로 사방 팔방으로 지푸라기 군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잔뜩 오갈 든 거야. 세묜은 '쏘앗' 하고 명령을 내렸지만 대포고 총이고간에 나가야 말이지. 세묜의 군사들은 사색이 다 되어 줄행랑을 놓을밖에. 마치 양떼처럼 말이야. 그러자 인디아의 임금은 그들을 쳐부쉈지. 세묜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사전을 몽땅 몰수당한 데다 내일은 사형을 집행하려는 참이야. 나에게는 이제 꼭 하루 일감이 있을 따름이야. 말하자면 집으로 내빼도록 그 녀석을 옥에서 내놓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란 말이야. 내일이면 완전히 끝장이 나니까 너희 둘 중에 누가 내 도움이 필요한지 자, 말해 봐." 따라스에게서 돌아온 다른 작은 도깨비도 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도움 따윈 필요없어. 내 일도 잘 돼 나가고 있으니까. 따라스란 녀석도 이제 일주일 이상을 부지하지 못할 거야. 나는 말이야, 우선 먼저 그 녀석 배를 잔뜩 불려 욕심꾸러기가 되게 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남의 재산을 턱없이 탐내어, 보지도 못한 것까지 모두 사고 싶어졌지 뭐야. 돈을 있는 대로 탈탈 털어 무진장으로 사 버렸지. 그래도 모자라서 여전히 또 사고 있는 거야. 지금에 와선 빚까지 져 가면서 사들이고 있는 형편이야. 이제는 너무 긁어 모으다 보니까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일주일 뒤에는 이것저것 갚고 해야 할 기한이 닥치는데, 그 안에 나는 그 녀석의 물건들을 깡그리 거름으로 만들어 놓고 말 작정이지. 그러면 그 녀석은 필시 갚지 못하고 이내 제 애비한테 달려가게 될 거야." 그러고는 그들은 이반에게서 돌아온 셋째 도깨비에게 "네 일은 어떻게 됐지?" 하고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실은 그, 내 일은 어쩐지 잘 돼 나가질 않아. 우선 먼저 배탈을 나게 할 양으로 말이야, 그 녀석의 끄바스를 담는 병 속에다 침을 잔뜩 뱉어 놓고는 그 녀석 밭으로 가서 땅바닥을 돌처럼 굳혀 놓았지. 그 녀석이 꼼짝 못하게 말이야. 그리고는 이쯤 되면 녀석도 절대 갈진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딜, 아 그 바보 녀석은 말없이 쟁기를 가지고 와서는 갈아젖히지 않겠나. 배가 아파 끙끙 앓으면서도 계속해서 갈아대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녀석의 쟁기를 부숴 놓았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집으로 돌아가 딴 보습으로 갈아 끼우고는 새 성에를 몇 갠가 대고 또다시 갈기 시작하지 뭐야. 그래서 나는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보습을 붙들어 보려고 했는데, 어딜, 도무지 붙잡아져야 말이지. 그 녀석이 쟁기를 누르는 데다 보습은 날카롭고 해서 내 손은 마구 베이고 말았어. 그래 그 녀석은 거의 다 갈아버리고 이제는 겨우 한 두둑밖에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여보게들, 와서 좀 도와 주게나. 우리가 그 녀석 하나를 때려 잡지 못하는 날엔 우리들의 일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 테니 말이야. 만약 그 바보가 남아 농사를 짓게 되면 그들은 별로 곤란을 받지 않게 될 거거든. 그 녀석이 두 형을 부양하게 될 테니 말이야." 무관인 세묜을 맡고 있는 작은 도깨비가 내일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작은 도깨비들은 그것으로 일단 헤어졌다. 3 이반은 묵혀 두었던 밭을 다 갈고, 이제는 그 전 한 두둑만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그는 마저 다 갈아 버리려고 말을 타고 왔다.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으나 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고삐의 줄을 톡 치며 쟁기를 돌려 갈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되짚어 오려고 하는데, 마치 나무뿌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쩐 일인지 쟁기가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도깨비가 두 발로 쟁깃술에 매달려 꽉 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이반은 생각했다. '아까만 해도 나무뿌리 같은 건 없었는데. 그래도 역시 나무뿌린지 모른다.' 이반은 두둑 속에다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뭉클 손에 닿았다. 그는 그것을 움켜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나무뿌리 같은 새까만 것이었는데 그 위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자세히 보니까 살아 있는 작은 도깨비가 아닌가. "아니, 이게! 뭐 이 따위 빌어먹을 게 다 있어!" 이반은 작은 도깨비를 번쩍 치켜들고 한마루에다 내리쳐 박살을 내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작은 도깨비가 소리를 지르면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쇼. 그 대신 무엇이건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냐?" "그저 무얼 원하시는지 말씀만 해주십쇼." 이반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나는 배가 아픈데 말이야, 낫게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고말고요" 하고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어디, 그럼 낫게 해 보렴." 작은 도깨비는 두둑 위에 몸을 구부리고 여기저기 손톱으로 뒤져 가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이윽고 가지가 셋인 조그만 뿌리를 쑥 뽑아 그것을 이반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이 뿌리를 한 뿌리만 삼키시면 천하에 없는 아픔도 이내 가셔집니다." 이반은 뿌리를 받아 찢어서는 한 가지 삼켰다. 그러자 금방 복통이 가셨다. 작은 도깨비는 다시 사정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놓아 주십쇼. 나는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으렵니다." 그러자 이반이 말했다. "자, 그럼 잘 가거라!" 그런데 이반이 말을 시작하기가 바쁘게 작은 도깨비는 물속에 던진 돌처럼 땅 속으로 금방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엔 구멍만이 하나 남았을 뿐이었다. 이반은 나머지 두 가지의 뿌리를 모자 속에다 쑤셔 넣고 그대로 마저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랑을 다 갈고 나자, 쟁기를 뒤집어 엎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을 풀어 놓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맏형인 무관 세묜이 아내와 함께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전답을 몰수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옥에서 도망쳐 나와 아버지한테서 살 양으로 여기에 달려온 것이었다. 세묜은 이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난 너한테서 살려고 왔다. 나하고 집사람을 먹여 다오, 새 일자리가 나설 때까지." "아, 그럭하시죠. 염려 말고 여기서 사세요." 이반은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이반이 막 걸상에 걸터앉았는데 이반에게서 나는 흙냄새가 귀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난 정말 못 견디겠어요. 고약한 냄새가 나는 흙투성이와 밥상을 함께 하는 게 말이에요." 그러자 무관인 세묜은 말했다. "마나님이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싫다고 말씀하시니까 너는 문간에서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 그럭하죠."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렇잖아도 난 바로 밤 순찰을 나갈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말에게도 먹이를 줘야 하고." 이반은 빵과 윗옷을 집어들고 밤 순찰을 하러 나갔다. 4 무관인 세묜을 맡은 작은 도깨비는 그날 밤 안에 일을 마치고 약속대로 바보를 곯려 주려고 이반을 맡은 작은 도깨비를 찾아왔다. 밭으로 와서 여기저기 한참 동료를 찾아 헤맸으나 어디에도 없고, 그저 구멍이 하나 쾡하니 뚫려 있는 것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동료 신상에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일어난 모양이다. 그 녀석을 대신할밖에 없지. 밭은 이제 다 갈아 놨으니까 이번에는 풀밭에서 어디 한번 그 바보를 곯려 줘야지.' 작은 도깨비는 목장으로 가 이반네 풀밭에 큰 물이 들게 했다. 풀밭은 온통 진흙바닥이 되었다. 이반은 샐녘에 가축의 밤 순찰에서 돌아와 큰 낫을 들고 풀밭으로 풀을 베러 나갔다. 이반은 도착하자 이내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이나 두 번 내두르기만 했는데도 낫의 날이 무뎌져 들지 않게 되어 갈아야 했다. 이반은 여러 가지로 해보았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안 되겠다. 집에 가서 숫돌을 가져와야겠다. 그 김에 빵도 가져와야지. 비록 일주일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 베기 전에는 여기에서 떠나지 않겠다." 작은 도깨비는 이 소리를 듣고 좀 생각을 하더니, "제기랄, 이 녀석은 바보로군. 이 녀석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무슨 딴 수를 쓰든지 해야지" 하고 말했다. 이반은 돌아와서 낫을 갈더니 베기 시작했다. 작은 도깨비는 풀 속에 몰래 기어들어가 낫공치를 붙잡고 그 날을 흙 속에다 처박기 시작했다. 이반은 힘이 들었으나 가까스로 일을 끝냈다. 이제 늪의 한 다랑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작은 도깨비는 늪 속으로 기어들어가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는 비록 손가락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베지 못하게 해주어야지.' 이반은 늪으로 왔다. 보기에는 풀이 그렇게 칙칙하지도 않은데 어쩐지 낫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반은 바짝 약이 올라 힘껏 낫을 내두르기 시작했다. 작은 도깨비는 배겨 내지 못하게 됐다. 뒤로 뛰어서 물러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일이 틀린 것으로 보고 작은 도깨비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반은 큰 낫을 마구 휘둘러 덤불을 치면서 작은 도깨비의 꼬리를 절반 잘라 버렸다. 이반은 풀을 다 베고 나서 누이에게 그것을 긁어모으라고 일러 놓고 이번에는 호밀을 베러 갔다. 갈고랑낫을 가지고 갔을 때는 꼬리가 잘린 작은 도깨비가 어느 틈에 그곳에 와서 호밀을 마구 흩어 놓았기 때문에, 갈고랑낫으로는 베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반은 집으로 되돌아가 다시 보통 낫을 가지고 와 베기 시작하여 곧 다 베어 버렸다. "자, 이번에는 귀리를 베어야지." 꼬리를 잘린 작은 도깨비는 이 말을 듣자, 이번에야말로 저 녀석을 곯려 주어야지, 어디 내일 아침까지만 두고 봐라 하고 생각했다. 그 이튿날 아침, 작은 도깨비가 귀리밭에 달려가 보았더니 귀리는 벌써 다 베어져 있었다. 밤 사이에 귀리의 낱알이 보다 적게 떨어지게 할 양으로 이반이 그것을 말끔히 베어 놓았던 것이다. 작은 도깨비는 약이 바짝 올라 중얼거렸다. "그 바보 녀석은 내 꼬리를 잘라 놓은 데다 또 나를 괴롭히고 있다. 전쟁에서도 이처럼 경을 치는 일은 없다. 그 빌어먹을 놈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으니, 도무지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밀가리 속으로 들어가 모조리 썩혀 버리고 말겠다." 작은 도깨비는 호밀가리가 있는 데로 가자 그 다발 사이로 기어들어가 썩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밀단을 띄우고 있는 사이에 저도 따뜻해져 그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편 이반은 암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누이와 함께 호밀단을 나르러 왔다. 호밀가리 옆으로 다가와 호밀단을 짐수레에 싣기 시작하였다. 두어 단 가량 던져 올려 놓는데 똑바로 작은 도깨비의 등짝을 밀어대게 되었다. 그래 치켜 들어 보았더니 갈큇발 끝에 꼬리가 짧은 작은 도깨비가 걸려 버둥거리고 움츠리고 하면서 한창 도망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말했다. "아니, 요놈 보게, 뭐가 이렇게 못 된 게 있어! 너 또 나온 게로구나?"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아닙니다요. 앞서 것은 내 형제였어요. 나는 당신의 형님이신 세묜한테 있었던 놈입니다." "네가 어떤 놈이든지 똑같이 혼을 내야겠다." 이반은 말했다. 이반이 밭두둑에다 내리쳐 박살을 내려고 하는데 작은 도깨비가 이렇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한번만 놓아 주세요.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겠습니다. 놓아주시기만 하면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뭣을 할 수 있다는 거냐?" 하고 이반이 묻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나는 원하신다면 무엇으로라도 군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어디에나 쓰입죠. 그들은 내 생각대로 무슨 짓이건 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단 말이지?" "그렇고말고요." "어디 한번 만들어 보렴." 이반은 말했다. "이 호밀단을 한 단 들어 땅바닥에다 반듯이 세우고 흔들면서 그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 종이 이르는 말이노라, 다발이 아니라 보리짚 수만큼의 군사라 되어라!'" 이반은 호밀단을 들고 그것을 땅바닥에다 세우고 흔들면서 작은 도깨비가 일러준 대로 했다. 그러자 호밀단이 산산이 흩어져 많은 군사가 되고, 고수와 나팔수가 선두에서 둥당거리는 것이었다.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네놈은 여간한 솜씨가 아니구나! 이걸 계집애들이 보면 정말 기뻐하겠는 걸." "그럼 이제 놓아주세요." "아니야." 하고 이반은 말했다. "낱알도 떨지 않은 호밀단으로 군사를 만들면 낱알을 버리게 되잖아. 그러니 어떻게 해야 다시 호밀단으로 되돌려 놓는지를 가르쳐 주어야지. 그 낱알을 떨어야 할 게 아니야."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시면 됩니다. '군사의 수만큼 보릿짚이 되어라, 또 다발이 되어라, 내 종이 이르는 말이노라.'" 이반이 그대로 말하자 다시 다발이 되었다. 작은 도깨비는 또다시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놓아 주세요." "그래, 그러마." 이반은 작은 도깨비를 밭두둑에다 걸쳐놓고 한쪽 손으로 누르면서 그를 갈퀴에서 빼주었다. "잘 가거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시작하기가 바쁘게 작은 도깨비는 물 속에 던진 돌처럼 금방 땅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저 쾡하니 구멍이 하나 남을 뿐이었다. 이반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둘째 형인 따라스가 아내와 함께 와서 한창 저녁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배불뚝이 따라스는 돈을 치르지 못하고 빚 때문에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는 이반을 보자 "얘, 이반" 하고 말했다. "내가 다시 장사를 할 때까지 집사람과 나를 좀 먹여 살려 주어야겠다." "아, 그럭하세요. 계세요" 하고 이반은 말했다. 이반은 윗옷을 벗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장사치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바보 따위와 같이 밥먹을 수 없어요! 땀 냄새가 고약하게 나서 말이에요." 그러자 따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반,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지 않다. 저기 저 문간에 가서 먹어라." "그럼 그럭하죠"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고 제 몫의 빵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밤 순찰을 나갈 시간이에요. 말에게도 먹이를 주어야 하고 하니까." 5 세번째의 작은 도깨비는 그날 밤 일이 끝나자 약속대로 동료를 거들러, 그러니까 바보 이반을 곯려주려고 따라스한테서 왔다. 밭으로 와서 여기저기 동료들을 찾아 헤맸으나 아무도 없고 그저 구멍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풀밭으로 가 보았더니 그곳의 늪에서 잘린 꼬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호밀을 베어낸 밭에서도 또하나의 구멍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거 동료들의 신상에 무엇인가 화가 미친 모양이다. 내가 그들을 대신해서 그 바보 녀석을 혼구멍을 내줘야겠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작은 도깨비는 이반을 찾으러 타작 마당으로 갔다. 그랬더니 이반은 벌써 들일을 마치고 숲속에서 나무를 치고 있었다. 두 형들은 모두 같이 사는 것이 옹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기네가 살 집을 지을 나무를 베어 새 집을 지어달라고 바보인 이반에게 이른 것이었다. 작은 도깨비는 숲으로 달려가자 나뭇가지로 기어올라가, 이반이 나무를 베어 눕히는 것을 훼방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쓰러뜨리기 좋게 나무 밑둥을 쳐놓고 방해를 받지 않을 데로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했으나, 나무는 이상하게 굽으면서 쓰러져서는 안 될 데로 쓰러져 거기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버렸다. 이반은 지렛대를 하나 만들어 여기저기로 그 방향을 틀어가면서 겨우 나무를 쓰러뜨렸다. 이반은 다른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이반은 갖은 애를 쓴 나머지 가까스로 쓰러뜨렸다. 세번째 나무에 달려들었다. 그것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반은 쉰 그루를 베어 눕힐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열 그루도 채 베어 눕히기 전에 벌써 해가 뉘엿뉘엿했다. 그리고 이반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그의 몸뚱이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 마치 안개처럼 숲속에 끼었는데도 그는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 한 그루 베어 눕혔다. 그랬더니 등짝이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하여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래서 도끼를 나무에다 처박아 놓고 조금 쉴 양으로 앉았다. 작은 도깨비는 이반이 잠잠해진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녹초가 되어 내동댕이친 거로군. 어디 그럼 나도 좀 쉬어볼까.' 작은 도깨비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타고 앉아 속으로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반은 다시 벌떡 일어나 도끼를 쳐들고 그것을 반대쪽에서 냅다 내리쳤으므로 나무는 별안간 뿌지직 빠개지면서 쓰러졌다. 작은 도깨비는 워낙 갑작스런 일을 당하여 미처 발을 비킬 겨를도 없이 우지끈하고 가지가 꺾이는 바람에 그 사이에 손이 끼고 말았다. 이반은 깜짝 놀랐다. "아니, 요 망할 게 너 이놈! 또 나왔구나?"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내가 아닙니다. 당신의 형님이신 따라스한테 있었던 놈이에요." "아니, 네가 어떤 놈이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반은 도끼를 번쩍 치켜들어 도끼 등으로 내리쳐 죽이려고 했다. 작은 도깨비는 정신없이 싹싹 빌어대며 말했다. "제발 치지만 마십쇼.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거나 해드릴 테니." "그래 도대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길래?"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의 돈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이반은 말했다. "어디 한번 만들어 보렴." 작은 도깨비는 이반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이 떡갈나무 잎을 들고 두 손으로 비비세요. 그러면 금화가 땅바닥에 떨어질 테니." 이반은 나뭇잎을 들고 비벼 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누런 금화가 우수수 쏟아졌다. "거 좋겠는걸, 어린애들이 가지고 놀기엔." "자, 그럼 놔 주세요!"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그래, 그럭하지!" 이반은 지렛대를 들고 작은 도깨비를 빼내 주었다. 그리고 "잘 가거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작은 도깨비는 물 속에 돌을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금방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리고, 그저 구멍만이 하나 쾡하니 남을 뿐이었다. 6 형제들은 집을 지어 따로따로 살기 시작했다. 이반은 들일을 마치고는 맥주를 담가 두 형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그러나 형들은 이반에게 손님 노릇을 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들은 농부들투성이의 잔치란 건 본 일이 없어." 하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었다. 이반은 농부며 아낙네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저도 마셨다. 그리고 취기가 올라오자 춤놀이가 벌어진 한길로 걸어나갔다. 이반은 춤놀이판으로 다가가 아낙네들에게 자기를 칭찬해 달라고 일렀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아직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것을 줄 테니까." 이 말을 들은 아낙네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그를 칭찬해댔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자 그럼 주어요." "금방 가져올께." 하고 이반은 말하고 나서 씨앗상자를 안고 숲속으로 뛰어갔다. 아낙네들은 "어머, 저 바보 좀 보게!" 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그냥 그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보니까 이반이 되돌아 달려오는데, 무엇인가를 가득 채워 넣은 씨앗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어때 나누어 줄까?" "어디 나누어 봐요." 이반은 금화를 한 주먹 쥐어 아낙네들에게 싹 던졌다. 그러자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아낙네들은 그것을 주우려고 냅다 몰려들었다. 농부들도 달려왔다. 서로 금화를 잡아챘다. 어떤 한 노파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반은 껄껄 웃어댔다. "그렇지만 서로들 밀치지는 말아요." 하고 그는 말했다. "여러분들에게 더 줄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잇따라 떼지어 왔다. 이반은 상자에 있는 대로 전부 뿌려 버렸다. 그런데도 군중은 더 달라고 졸라댔다. 그래서 이반은 이렇게 말했다. "이젠 다 털어 버렸어. 이 다음번에 또 주지. 자, 이젠 춤을 추어 볼까, 좋은 노래를 불러봐." 아낙네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미없는데, 당신네 노래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럼 어떤 노래가 좋지?" 아낙네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금방 당신에게 보여 주지." 그리고는 헛간으로 가 보릿단을 한 움큼 뽑아내어 낱알을 떨어내고는 그것을 반듯이 세워 놓더니 툭 치며 말했다. "자, 내 종이 이르는 말이노라. 다발로 있을 게 아니라 보릿짚의 수만큼 군사가 되어라." 그러자 보릿단은 산산이 흩어져 군사가 되더니 북과 나팔을 쿵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반은 군사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이르고 그들과 함께 한길로 나갔다. 군중은 깜짝 놀랐다. 군사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이반은 아무도 뒤따라와서는 안 된다고 일러놓고 그들을 도로 헛간으로 데리고 가, 다시 본시대로 다발을 지어 밑자리가 되어 있는 마른 풀더미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마굿간에 들어가서 자 버렸다. 7 이튿날 아침 맏형인 무관 세묜이 이 일을 알고 이반한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너 나한테 죄다 말하렴. 도대체 너는 그 군사를 어디서 데려왔다 어디로 데려갔지?" "그걸 물어 뭘 하시려구요?" "뭘하려느냐구? 군사만 있으면 뭐나 다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라를 얻을 수도 있어." 이반은 깜짝 놀랐다. "그럼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죠?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마침 누이와 둘이 보릿단을 잔뜩 장만해 놨으니까." 이반은 형을 헛간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군사를 만들어 드릴 테니 말씀이에요. 그대신 꼭 데리고 가셔야 해요. 그렇지 않고 만일 먹여 살려야 하는 날엔 그야말로 하루에 온 동네를 몽땅 털어 먹게 될 테니까요." 무관인 세묜이 군사를 데리고 가겠노라고 약속하여 이반은 군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보릿단으로 타작마당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1개 중대의 군사가 되었다. 또 한 번 내리치면 또 1개 중대의 군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온 들판을 가득 메울 만큼의 무수한 군사를 만들어냈다. "어떻습니까, 이제 그만 됐어요?" "이제 그만 됐어, 고맙다, 이반." 세묜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뭘요, 만일 더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오세요.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테니. 요새는 보릿짚이 잔뜩 있으니까요." 무관인 세묜은 곧 군대를 지휘하여 바르게 대오를 갖추게 하고 싸움을 하러 나갔다. 무관인 세묜이 떠나자, 이번에는 배불뚝이 따라스가 끄덕끄덕 찾아왔다. 그도 또한 어제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우에게 이렇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숨기지 말고 말해 보렴. 그래 너는 어디서 금화를 얻었지? 만일 나한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돈이 있다면 나는 그 돈으로 온 세계의 돈을 긁어모아 볼 텐데 말이야." 이반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래요! 아, 그렇다면 그렇다고 진작 말씀하실 일이지. 형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리죠." 형은 크게 기뻐했다. "나는 씨앗장사로 세 상자만 있으면 된다." "그럼 그럭하세요. 숲속으로 갑시다. 한데 말을 챙겨가지고 가셔야죠, 날라오기가 힘들 테니까." 둘이서 숲속으로 말을 타고 갔다. 그리하여 이반은 떡갈나무에서 잎을 훑어 비비기 시작했다. 금화가 쏟아져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때요, 이만하면?" 따라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당장은 이만큼 있으면 충분하다. 고맙다, 이반." "뭘요, 더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오세요. 더 만들어 드릴 테니까.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어요. 잎사귀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에요." 배불뚝이 따라스는 달구지에다 금화를 가득 싣고 장사를 하러 떠났다. 이리하여 두 형들은 제각기 떠났다. 세묜은 전쟁을 시작하고 따라스는 장사를 시작했다. 무관인 세묜은 두 나라를 정복하고 배불뚝이 따라스는 큰돈을 벌었다. 어느 날 세묜과 따라스는 한자리에서 만나 서로 숨김없는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세묜은 군대를 얻은 경위에 대해서 그리고 따라스는 돈을 모으게 된 경위에 대해서였다. 무관인 세묜은 아우에게 "나는 말이야. 나라를 정복해 잘 지내고 있기는 한데 그저 돈만 넉넉지 못할 뿐이야. 군대를 먹여 살려야 할 돈이 말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따라스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말이에요, 돈을 어지간히 모았는데 그저 한 가지 그것을 지키게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골칫거리에요." 그때 무관인 세묜이 말했다. "이반에게 찾아가 보자꾸나. 나는 그 녀석에게 군대를 더 만들게 하여 네 돈을 지키게 할 테니까, 너는 그 군대를 먹여 살릴 만큼의 돈을 만들어 주도록 그 녀석에게 말하란 말이야." 이리하여 둘은 이반한테도 찾아왔다. 이반의 집에 오자 세묜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봐, 이반. 내겐 아무래도 군사가 좀 모자라. 그러니까 군사를 좀더 만들어다오. 비록 한 두어 짚가리만이라도 좋으니 말이야." 이반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안 돼요." 하고 그는 말했다. "형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군사를 만들어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반, 왜 그러지. 그전에 너는 약속했었잖아?" "그야 약속하기는 했었죠. 그러나 이제 더는 만들지 않겠습니다." "아니, 어째서 만들지 않겠다는 거야, 이 바보 녀석아!" "왜냐하면 형님의 군사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에요. 이즈막의 일인데 말이에요. 내가 길가의 밭을 갈고 있다가 본 것인데, 한 아낙네가 그 길로 널을 지고 가면서 엉엉 통곡하고 있잖겠어요. 그래서 나는 물어봤죠. '누가 돌아가셨어요' 하고. 그러자 그 아낙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묜의 군사가 전쟁에서 내 남편을 죽였다오' 하고 말이에요. 군대란 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람을 죽였다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이제 더는 군사를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이렇게 우겨대고 이반은 이제 더는 군사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배불뚝이 따라스도 이반에게 금화를 더 만들어 달라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안 돼요. 이제 더는 금화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한데 어째서 그러지? 너는 그럭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야 약속은 했었죠.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지 않겠어요." "어째서 만들지 않겠다는 거냐, 이 바보 녀석아!" "어째서야 아니라 형님의 금화가 미하일로브나에게서 암소를 빼앗아 갔기 때문입죠." "어째서 빼앗겼다든?" "그 얘기를 자세히 할까요? 미하일로브나한테 암소가 한 마리 있어서 어린애들이 우유를 마시고 있었대요. 그런데 이즈막에 그 어린애들이 나한테 찾아와서 우유를 달라고 졸라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어린애들한테 물어봤죠. '너희 집 암소는 어디 있지?' 하고. 그랬더니 끌려가 버렸다는 거예요. '어떤 놈이 끌고 갔는데?' 했더니 '배불뚝이 따라스네 마름이 찾아와 엄마에게 금화를 세 닢 주니까 엄마가 그 사람에게 암소를 주어 버렸어요. 우리들은 이제 마실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나는 형님이 금화를 노리개를 삼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린애들한테서 암소를 빼앗아 가버렸어요. 나는 이제 형님에게는 금화 따윈 만들어 드리지 않겠습니다." 바보 이반은 고집을 세워 더 이상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두 형제들은 허탕을 친 채 떠났다. 두 형들은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그 도중에 어떠한 수단으로 그 곤경을 서로 도와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세묜이 말했다. "그럼 이럭하자꾸나. 그러니가 네가 나에게 군대를 기를 돈을 주고 내가 너에게 군대를 절반 준다. 네 돈을 지키도록 말이지." 따라스는 동의했다. 두 형제는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둘이 다 임금이 되었으며 둘이 다 부자가 되었다. 8 그러나 이반은 내내 집에서 살고 있었고 부모를 봉양하면서 벙어리인 누이와 함께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반네 집의 늙은 개가 병이 나고, 옴이 생겨 죽게 됐다. 이반은 그것을 가엾게 여기고 벙어리인 누이에게서 빵을 얻어 모자 속에 넣어 개에게로 가지고 가서 던져 주었다. 그런데 모자에 구멍이 뚫려 있어 빵과 함께 작은 도깨비가 준 조그만 뿌리가 한 가지 굴러 떨어졌다. 늙은 개는 빵과 함께 그것을 주워 먹었다. 그런데 뿌리를 먹자마자 개는 갑자기 생기가 올라 뛰어오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짖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기도 하게 됐다. 병이 말끔히 나은 것이었다. 부모들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뭣으로 개를 낫게 했지?" 그러자 이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병이든 낫는 풀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하나를 이 개가 먹은 거예요." 마침 이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을 앓고 있었다. 임금은 방방곡곡의 도시와 촌락에 방을 써붙이게 하여, 누구라도 좋으니 공주의 병을 낫게 해준 자에게는 크게 포상을 할 것이며, 만일 그가 독신이라면 공주를 아내로 맞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반네 마을에도 물론 이 방문(枋文)이 나붙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반을 불러 놓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임금님의 방문이 어떤 것이라는 걸 들었겠지. 너는 만병통치의 풀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얘긴데, 한번 가서 공주님의 병을 낫게 해 보렴. 그러면 너는 한평생 행복을 누리게 될 게 아니냐." "그럼 그렇게 하죠"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고 곧 떠날 채비를 했다. 부모님이 나들이 옷으로 차려 입혀 주었다. 이반은 문간으로 나가다가 손이 굽은 여자 거지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듣자니까 당신은 무슨 병이든 다 낫게 한다면서요? 어디 내 손도 좀 낫게 해 주시구료. 이대로는 내 손으로 신발도 신을 수 없다오." 그 여자 거지가 말했다. "그렇게 해 주지."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고 풀뿌리를 꺼내어 여자 거지에게 주고 그는 그것을 삼키라고 일렀다. 여자 거지는 그것을 삼켰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 거지의 병이 나아 그 자리에서 손을 내두르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반을 임금에게 데리고 가려고 나왔다가 이반이 한 가닥밖에 남지 않은 풀뿌리를 여자 거지에게 주어 버려, 공주를 낫게 할 방도가 없게 되었음을 알고 입을 모아 욕하기 시작했다. "그래, 거지 따윈 가엾게 여기면서도 공주는 가엾지 않다, 그 말이렷다, 네 놈은!" 그러자 이반은 곧 공주도 가엾어졌다. 그는 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는 부랴부랴 짚을 쌓고 그 위에 앉아 떠나려고 했다. "그래 도대체 너는 어디로 가려는 거냐, 이 바보 녀석아?" "공주님을 낫게 해 드리려고 가는 겁니다." "하지만 네겐 낫게 해 드릴 게 아무것도 없잖아." "뭐, 일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말을 몰았다. 이반이 궁궐에 닿아 막 궐문에 내려서자마자 어느 틈에 공주의 병은 씻은 듯 나아버렸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신하에게 이반을 자기에게로 불러들이라고 이르고 그에게 훌륭한 옷을 차려 입혔다. 그리고 이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짐의 부마로다." "황공합니다."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공주와 결혼했다. 임금은 오래지 않아 죽었다. 그래서 이반은 임금이 되었다. 이리하여 세 형제가 모두 임금이 되었다. 9 세 형제는 건재하여 저마다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맏형인 무관 세묜은 참으로 잘 살고 있었다. 그는 짚으로 만든 군사를 바탕삼아 진짜 군사를 모집했다. 그는 온 나라에다 열 호마다 한 명씩 군사를 두되, 그 군사는 키가 크고 살갗이 희며 얼굴이 깨끗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런 군사를 잔뜩 모집하여 모두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내 군사를 풀어 그의 뜻대로 어떠한 짓도 감행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의 생활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 그의 눈에 띄는 것은 그 당장 모두 그의 것이 되었다. 군대만 풀어 놓으면 그 군대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건 빼앗아 날라오기도 하고 데려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배불뚝이 따라스의 생활도 호화로웠다. 그는 이반에게서 얻은 돈을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밑천삼아 거액의 돈을 모았다. 그도 제 나라에서 그럴싸한 제도를 펴놓았다. 그는 제 돈은 제 돈궤 속에 딱 집어넣어 두고 백성에게서 돈을 우려냈다. 그는 인두세, 통행세, 거마세, 짚신세, 감발세, 옷끈세로 돈을 짜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없었다. 누구나가 돈이 달렸기 때문에 모두들 돈이 아쉬워 무엇이나 그에게 날라왔고, 일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바보 이반의 생활도 또한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장인의 장례를 치르기가 바쁘게 그는 임금의 의대를 다 벗어던지고 그것을 왕비의 옷장에 집어넣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다시 삼베 속옷에 잠방이를 걸친 데다 짚신을 신고 일에 매달렸다. "나는 도무지 답답해 못 견디겠어. 배만 자꾸 커지는 데다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으니 말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모와 벙어리인 누이를 불러와 또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아니, 일없어. 임금도 먹어야 하니까." 그는 대답했다. 대신이 들어와 "녹봉을 치를 국고금이 없사옵니다" 하고 진언했다. "뭐, 일없어. 없거든 치르지 않으면 되지." "그럼 그들은 근무를 하지 않게 될 것이옵니다." "그럼 그럭하라지. 내버려 둬, 근무하지 않아도 좋아. 오히려 자유롭게 일들을 하게 될 테니까. 모두들 거름이나 내게 해. 그들은 거름을 많이 만들어 놓았을 테니까." 사람들이 이반에게로 재판을 받으려고 왔다. 한 사람이 "저 자가 소인의 돈을 훔쳤사옵니다" 하고 말하자 이반은 "아, 좋아, 좋아! 그러니까 저 자는 돈이 필요했다 그 말이지!" 하고 말했다. 이에 모든 사람은 이반이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비가 그에게 말했다. "모두들 임금님을 바보라 말하고 있다 하옵니다." "아, 일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이반의 아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도 또한 바보였다. "제가 어찌 감히 남편을 거스를 수 있겠나이까? 실은 바늘 가는 데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어늘." 이렇게 말하고 그녀도 왕비의 옷을 벗어 옷장 속에 집어넣고 벙어리 처녀에게로 농사일을 배우러 갔다. 그리하여 일을 익히고 나서 남편을 거들기 시작했다. 똑똑한 사람은 모두 이반의 나라를 떠나 버리고 남은 것은 그저 바보뿐이었다. 돈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모두 일을 하여 자기 스스로 살아감과 동시에 착한 사람들을 도와 주면서 살아나갔다. 10 큰 도깨비는 작은 도깨비들이 세 형제를 어떻게 파멸시켰는가 하는 것에 대한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사정을 살펴볼 양으로 자기가 직접 나서서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녔지만 찾아낸 것이라곤 그저 세 구멍뿐이었다. '아무래도 진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직접 손을 쓸 수밖에 도리가 없지.' 그는 형제들을 찾으러 갔으나 그들은 이미 살던 곳에는 없었다. 그는 형제들을 각각 다른 나라에서 발견했다. 셋이 다 건재하고 있는 데다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가 손수 나서야겠다." 그는 먼저 무관인 세묜의 나라로 갔다. 그리고 제 모습을 감추고 장수로 둔갑하여 세묜 왕에게 찾아갔다. "듣자온즉 세묜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위대한 무인이신 듯하옵니다. 그러나 신도 그 일에 있어서는 확고히 익히고 있는 바가 있사와 전하를 섬기고자 하옵니다만." 하고 그는 말했다. 세묜 왕은 그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나서 그가 현명한 사람임을 알고 기용하기로 했다. 새로 기용된 장수는 강력한 군대를 모으는 방법을 세묜 왕에게 진언했다. "우선 첫째로 더 많은 군사를 모아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는 집안일을 일삼는 백성이 너무 많아지게 되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징집하셔야 하옵니다. 둘째로 신식 소총과 대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옵니다. 신이 흡사 콩이라도 흩뿌리듯이 단번에 백 발의 총알이 나가는 소총을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그리고 또 대포도 어떠한 것이든 불로 태워 버리게 할 무서운 성능의 것을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이것은 사람이고 말이고 성벽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 없애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세묜 왕은 새로 기용된 장수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모조리 군대에 징집할 것을 명령하고 또 새로운 공장을 지어 신식 소총과 대포를 만들어내자 이내 이웃 나라의 임금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리하여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세묜 왕은 자기의 군사들에게 적군에게 총포를 마구 퍼부으라고 명령하여 단숨에 쳐부수고 그 절반을 불태워 버렸다. 이웃 나라의 임금은 질겁을 하여 곧 항복하고 자기 나라를 바쳤다. 세묜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번에는 인디아 왕도 정복하고 말아야지" 하고 말했다. 그런데 인디아 왕은 세묜 왕의 소문을 듣고 그의 전략을 완전히 가로챈 데다 그것에 제 생각을 덧붙였다. 인디아 왕은 그저 젊은이들을 군대에 징집할 뿐만 아니라 독신의 여자들까지도 모조리 군사로 뽑았다. 그리하여 그의 군대는 세묜의 그것보다도 더 많아졌다. 게다가 또 그는 소총이며 대포를 만드는 법을 세묜 왕에게서 배운데다, 공중을 날아 머리 위에서 포탄을 던지는 것까지 생각해냈다. 세묜 왕은 인디아 왕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의 생각으론 지난번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일거에 칠 것 같았지만, 그러나 날카로운 낫도 언제까지나 잘 드는 것은 아니다. 인디아 왕은 세묜의 군대를 착탄거리까지 들어오게 하지 않고 여자 군사들을 공중으로 보내어 적군의 머리 위에다 포탄을 던지기로 했다. 여자 군사들은 공중에서 마치 진딧물 위에다 붕사를 뿌리듯 세묜의 군대에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묜의 군대는 모두 혼비백산하여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달아나고 세묜 왕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인디아 왕은 세묜의 나라를 몰수하고 무관인 세묜은 발 가는 대로 정처없이 도망쳐 다녔다. 큰 도깨비는 이 맏형을 결딴내놓고 이번에는 따라스의 왕에게로 갔다. 그는 장사꾼으로 둔갑하여 따라스의 나라에 자리를 잡자 선심을 베풀기도 하고, 돈을 마구 쏟기도 했다. 이 장사치는 온갖 물건에 많은 값의 돈을 치러주었으므로 백성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이 장사치에게 몰려들었다. 이리하여 백성의 호주머니가 아주 두둑해졌으므로 체납금은 모두 말끔히 내게 되고 어떤 세금이건 기한 안에 딱딱 바치게 되었다. 따라스 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 장사치는 참으로 고맙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꾸자꾸 더 많은 돈이 생겼고 살기가 더욱 더 나아져 갔다. 그리하여 따라스 왕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새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재목이나 돌을 날라라, 일을 하러 나오라고 그는 백성들에게 영을 내린 뒤 모든 일에 비싼 품삯을 매겼다. 따라스 왕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돈을 노리고 백성들이 자기에게 일을 하려고 몰려오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재목이며 돌은 모두 그 장사치에게로 실려가고 있는 데다 일꾼도 모두 그리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스 왕은 품삯을 올렸다. 그러나 장사치는 더 많은 돈을 내던졌다. 따라스 왕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사치는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계속 장사치는 임금의 품삯을 누르고 매겼다. 궁전은 착공된 채 좀처럼 준공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스 왕은 정원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가을이 닥쳤으므로 따라스 왕은 정원을 만들러 오라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사람은 없고 모두 장사치네 못을 파러 가버렸다. 겨울이 닥쳤다. 따라스는 새 털외투를 짓기 위해 검은 담비의 가죽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하를 보냈더니, 그 자가 돌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장사치가 모조리 사들였기 때문에 검정 담비는 없사옵니다. 그 자는 한결 비싼 값을 주었고 그 가죽으로는 방석까지 만들었다 하옵니다." 따라스 왕은 종마를 사들여야 했다. 그래서 그것을 사러 내보냈더니 모두 돌아와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좋은 종마는 모두 그 장사치의 손에 들어가 장사치의 못을 채울 물을 나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임금의 일이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도 장사치를 위해서는 어떤 일에도 나갔고, 장사치에게서 번 돈을 그에게로 가지고 와서 조세로 내밀 뿐이었다. 이리하여 임금에게는 돈이 너무 남아 돌아 그것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지만 생활은 차츰 나빠졌다. 임금도 이제는 온갖 계획을 세우기를 그만두고 어떻게든지 살아나갈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나 이윽고 그마저도 위태로워졌다. 모든 것이 옹색해졌다. 여자도 사제들도 모두 그에게서 장사치 쪽으로 빠져가기 시작했다. 벌써 식료품까지 모자라기 시작했다.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 가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장사치가 모두 몰아서 사들여 버렸기 때문이며, 그는 다만 조세로 돈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따라스 왕은 잔뜩 화가 나 장사치를 국외로 내쫓았다. 그러나 장사치는 국경에 도사리고 앉아 역시 똑같은 짓을 했다. 여전히 장사치의 돈을 보고 모두 임금에게서 장사치에게로 몰려갔다. 임금의 사정은 완전히 악화되고 말았다. 며칠씩 꼬박 굶는 적이 있는가 하면, 장사치는 임금에게서 왕비까지도 사려 한다는 풍문까지 들려왔다. 따라서 왕은 이제 주눅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어느 날 무관인 세묜이 그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좀 도와 줘. 나는 인디아 왕에게 패망했어." 그러나 배불뚝이 따라스 자신도 지금은 뱃가죽이 등뼈까지 붙어 있는 지경이었다. "나 자신이 벌써 꼬박 이틀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단 말이에요." 11 큰 도깨비는 두 형제를 거덜나게 하고 이반에게 갔다. 큰 도깨비는 장수로 둔갑하고 이반에게로 찾아가 군대를 만들 것을 그에게 권했다. "상감께서 군대가 없이 지내신다는 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어명을 내리시기만 한다면 신은 상감의 백성 가운데서 군사를 모아 훌륭한 군대를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이반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그것도 좋은 말이오. 그럼 어디 만들어 보오. 그리고 그들이 노래를 잘 부르도록 가르치오. 나는 그것을 좋아하니까" 하고 말했다. 큰 도깨비는 이반의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군사를 지원하는 자는 누구나 보드카 한 병과 빨간 모자를 얻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바보들은 코웃음을 쳤다. "술 따윈 우리들에겐 얼마든지 있단 말이야. 우리들은 우리들이 제 손으로 빚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모자도 아낙네들이 어떤 것이건 갖고 싶은 걸 만들어 준단 말이야. 얼룩덜룩한 것이나 술이 너슬너슬 달린 것까지도." 이래서 어느 누구 한 사람 군대를 지원하는 자라곤 없었다. 큰 도깨비는 이반에게 찾아왔다. "상감, 나라의 바보들은 자진해서 군사가 되려고는 하지 않사옵니다. 그러하온즉 그들은 권력으로써 몰아대야 할 줄로 아뢰오." "응, 그것도 좋겠는걸. 그럼 권력으로써 몰아대 보오." 큰 도깨비는 "백성들은 모두 군사가 돼야 하며, 만일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이반 왕께서 참형을 내릴 것이니라" 하고 포고했다. 바보들은 장수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만일 군사가 되지 않으면 임금님께서 참형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군대가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군대에 나가면 목숨을 잃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지,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 말을 듣고 바보들은 옹고집이 되었다. "그럼 우리들은 나가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집에서 죽게 해 주시는 게 더 낫지 뭡니까. 어차피 죽어야 하는 거라면." "너희들은 바보로군. 바보들아! 군사가 됐다고 해서 꼭 죽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군사가 되지 않으면 그건 뭐 영락없이 이반 왕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바보들은 곰곰 생각하다가 임금인 바보 이반에게 물어보러 갔다. "장수께서 나오셔서 모두 군사가 되라고 소신들에게 명령하고 계시옵니다. 군대에 나가면 죽음을 당할는지 당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가지 않으면 소신들에게 꼭 참형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정말이옵니까, 그건?" 이반은 껄껄 웃었다. "그래, 어떻게 짐이 혼자서 그대들을 모두 참형할 수 있으리오? 짐이 바보가 아니었던들 그대들에게 잘 알아듣도록 설명했으련만, 짐 자신도 뭐가 뭔지 통 모르겠으니 말이오." "그러하오시다면 소신들은 군대에 나가지 않겠사옵니다." "거 그렇게들 하지. 나가지 않아도 좋아." 바보들은 장수에게로 가서 군사가 되기를 거절했다. 큰 도깨비는 이 일이 잘 되어 나가지 않음을 보고 따라깐 왕에게 가서 알랑알랑 비위를 맞추면서 부추겼다. "싸움을 걸어서 한번 이반 왕의 나라를 치십시다. 그 나라에는 비록 돈은 없을지라도 곡식이며 가축이며 그밖의 온갖 것이 풍부히 있으니까요." 따라깐 왕은 싸움을 걸기로 했다. 먼저 대군을 모으고 총이며 대포를 갖추자 국경으로 나가 이반의 나라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반에게로 달려와 이렇게 아뢰었다. "따라깐 왕이 우리들에게 싸움을 걸어왔사옵니다." "뭐 어떨라구. 싸움을 걸어오겠다면 걸어오라지." 따라깐 왕은 국경을 넘자, 척후병을 보내어 이반 군대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는 여저기저 찾아다녔지만 군대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선지 나타날는지 모른다고 오래오래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군대에 대해서는 뜬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 누구와 싸울래야 싸울 상대가 없었다. 따라깐 왕은 군사들에게 마을을 점령하게 했다. 군사들이 한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러자 남녀 바보들이 뛰어나와 군사들을 바라보더니, 미심쩍어 하며 놀란 눈치였다. 군사들은 바보들에게서 곡식이며 가축을 약탈했다. 바보들은 무엇이건 선선히 내주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지키려 하기는커녕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군사들은 딴 마을로 가 보았으나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사들은 그날도 그 이튿날도 여기저기 진종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르는 곳마다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있는 대로 다 탈탈 털다시피 하여 내주었고, 어느 한 사람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이것 보세요. 당신네 나라에서 살기가 어려우시거든 모두 우리 나라에 와서 사세요." 군사들은 사방팔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알아보았으나 아무 데도 군대 같은 건 없었고 백성은 모두 일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한편으로는 서로 도와주고 있었는데 꼭 제 한몸만을 지키려고 버둥대기는커녕 오히려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따름이었다. 군사들은 지루해졌다. 그리하여 따라깐 왕에게 돌아갔다. "소신들은 전쟁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소신들을 다른 나라로 보내주시옵소서. 전쟁이 있으면 좀 좋겠지만 이건 무엇이옵니까. 흡사 유약한 사람을 참살하는 것 같아 이 나라에서는 이제 이 이상 더 싸울 수 없사옵니다." 따라깐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리하여 온 나라를 돌아다녀 마을을 어질러놓고 집과 곡식을 불사르며 가축을 죽여버리라고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만일 어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누구나 모두 가차없이 처벌하리라." 군사들은 깜짝 놀라 임금의 명령대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이며 곡식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바보들은 모두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고, 그저 울 뿐이었다. "어쩌자고 너희들은 우리들을 괴롭히는 거냐. 너희들은 어째서 우리 재산을 결딴내 놓는 거냐. 필요하거든 차라리 가져가는 게 더 나을 것 아니냐." 군사들은 어쩐지 침울해졌다. 그래서 그 이상 돌아다니기를 그만두었다. 이윽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2 이리하여 큰 도깨비는 떠나버렸다. 군대의 힘으론 이반을 곯리지 못했던 것이다. 큰 도깨비는 다시 말쑥한 신사로 둔갑하여 이반의 나라로 살러 왔다. 배불뚝이 따라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돈으로 곯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훌륭한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당신네들에게 착한 일을 해보고자 합니다. 나는 먼저 당신네 나라에서 집을 짓고 그리고 장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거 좋은 일이요. 그러시다면 여기서 사시죠." 한 벼슬아치가 신사에게 숙사를 빌려주었다. 이윽고 이 신사는 잠자리에 들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난 이튿날 아침 그는 금화가 들어 있는 커다란 자루와 종잇조각을 가지고 공청 마당으로 나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는 모두 마치 돼지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네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먼저 이 도면처럼 집을 지어 주시오. 당신들은 일을 하고, 지시는 내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답례로 이 금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금화를 보였다. 바보들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그들의 관습에는 돈이라는 것이 없고, 그대신 서로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품앗이를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금화에 놀랐다. "거 노리갯감으로 썩 좋은데" 하고 그들은 말했다. 큰 도깨비는, 따라스의 나라에서 했듯이 싯누런 금화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금화와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온갖 일을 하여 금화를 품삯으로 얻으려고 그에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큰 도깨비는 속으로 고소해 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 이쯤 되고 보면 일이 순조로이 돼 나가는 것이렷다. 이번에야말로 그 바보 녀석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주어야지.' 그런데 바보들은 금화를 손에 넣자마자 목걸이용으로 아낙네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처자들의 댕기에 달아주기도 했다. 이제는 어린애들까지도 한길에서 금화를 노리갯감으로 가지고 놀게 됐다.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금화가 생기게 되자, 이제는 더 얻으려고 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 말쑥한 신사 쪽은 대궐 같은 집이 아직 절반도 돼 있지 않는 데다, 곡식이며 가축도 아직 한 해 치도 비축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신사는 이렇게 알렸다. 나한테로 일들을 하러 오라, 곡식이며 가축을 가지고 오라, 어떤 물건이 됐건 어떤 일이 됐건 그 값으로 많은 금화를 주겠다, 하고.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 일하러 가는 자도 없는가 하면, 무엇 하나 들고 가는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사내애며 계집애가 뛰어나서 달걀과 금화를 바꾸거나 혹은 금화를 받고 물건을 날라다 주는 정도가 고작일 뿐, 달리는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말쑥한 신사에게서 차츰 먹을 것이 달리게 되었다. 시장기가 들어 뭣이나 먹을 것을 사 보려고 마을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그는 어느 한 집에 쑥 들어가 암탉을 사려고 금화를 내밀었다. 그랬더니 안주인이 그걸 받지 않으며 "우리 집엔 숱하게 있어요, 그런 건" 하고 말했다. 이번에는 어느 날품팔이꾼 집에 들러 비웃을 살 양으로 금화를 내밀자 "우리 집엔 그런 건 필요없어요. 어린애들이 없어서 아무도 가지고 놀 사람이 없습죠. 게다가 하도 귀물이어서 나도 세 닢 가져다 놨습죠" 하고 말했다. 큰 도깨비는 다음엔 빵을 사려고 어느 농사꾼 집에 들렀다. 그러나 이 농사꾼도 돈을 받지 않으며 "우리 집에선 필요없어요. 적선을 하는 거라면 그건 또 몰라도. 그럼 좀 기다리시구료. 금방 여편네보고 빵을 썰어 올리라고 이를 테니까" 하고 말했다. 도깨비는 침을 뱉고 냅다 농사꾼 집에서 줄행랑을 놓았다. 적선을 위해서 받고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로서는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칼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이다. 이래서 빵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금화를 충분히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큰 도깨비가 어디를 가나 어느 누구 한 사람 돈을 보고는 어떠한 것도 주려고 하지 않고 모두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딴 것을 가지고 오거나 일을 하러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선을 바라고 동냥을 하러 오거나 하구료." 그러나 도깨비는 돈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곤 없었다. 일을 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적선을 바라고 동냥을 할 수도 없었다. 큰 도깨비는 잔뜩 화가 났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네는 금화가 더 필요할 텐데 말이야. 언제 당신네들에게 돈을 주어야 하나?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사고 어떤 일꾼이든지 들여 놓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바보들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니죠, 그런 건 필요없습죠. 여기선 지불이라든가 세금이라든가 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까짓 돈 따위는 가져도 쓸 데가 없어요." 큰 도깨비는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일이 바로 이반의 귀에 들어갔다. 백성들이 그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소신들은 어찌해야 하오리까? 소신들한테 말쑥한 샌님이 나타났사옵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술만을 좋아하고 깨끗한 옷이나 입기 좋아하면서 일은 숫제 하려고 들지도 않는가 하면 동냥을 하지도 않고 그저 금화라는 것만 내밀 뿐이니 말이옵니다. 전에 금화가 모이기 전에는 모두들 그 샌님에게 무엇이나 다 주었었는데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주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이 샌님을 어떻게 해야 하오리까? 굶어 죽지나 않아야 할 텐데 말이옵니다." 이반은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먹여 살려야 하느니라. 목자(牧者)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게 하라." 할 수 없이 큰 도깨비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게 됐다. 그렇게 하는 동안 이반의 궁궐로 차례가 돌아왔다. 큰 도깨비가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 이반네서는 벙어리 여동생이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주 게으름뱅이에 속아왔다. 게으름뱅이는 일을 하지도 않는 주제에 꼭 맨먼저 밥을 먹으러 와서는 장만해 놓은 음식을 싹싹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 결과 벙어리 처녀는 사람의 손만 보고도 게으름뱅이를 곧잘 분간했다. 손에 못이 박힌 사람은 식탁에 앉히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주고 있었다. 큰 도깨비가 식탁 머리에 앉자 벙어리 처녀는 얼른 그 손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못이 박히지 않았다. 손은 깨끗하고 매끈하며 손톱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벙어리 처녀는 무엇이라고 외쳐대더니 도깨비를 식탁에서 끌어냈다. 그러자 이반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시누이는 손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을 식탁에 앉히지 않기로 하고 있으니까요. 자, 잠깐 기다리세요. 곧 다들 자실 테니까, 그 다음에 남은 것을 잡수세요." 임금의 궁궐에서는, 나에게 돼지와 똑같은 것을 먹이려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자 큰 도깨비는 은근히 화가 났다. 이리하여 이반에게 말했다. "임금님 나라에는 모든 사람에게 손으로 일을 하도록 하는 어리석은 법률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궁리가 생긴 것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영리한 사람은 무엇으로 일을 하는지 아시나이까?" "바보인 우리가 어찌 그런 걸 다 알겠는가. 우리들은 무엇이나 대체로 손과 등으로 하고 있지." "그것은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바보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럼, 소신이 어떻게 머리로 일을 하는 것인지 그 요령을 가르쳐 드릴까 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알게 될 것이옵니다. 손보다 머리로 일을 하는 편이 쉽다는 것을." 이반은 놀랐다. "음 그러고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바보로 불리는 소위렷다!" 그러자 큰 도깨비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코 수월하지는 않사옵니다. 머리로 일을 한다는 것도, 소신의 손에 못이 박히지 않았다고 하여 지금만 해도 여러분들은 소신에게 먹을 것을 주시지 않사오나 그것은 말이옵니다. 그것은 말하옵자면 이런 것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즉 머리로 일을 하는 것이 백 갑절이나 더 어렵다는 것을...... 음, 때로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이반은 생각에 잠겼다. "한데 어찌 그대는 그렇게 제 자신을 괴롭히는 거지?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다니 과연 수월한 일은 아니로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손과 등을 써서 더 수월한 일을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러자 도깨비가 말했다. "소신이 소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바보인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소신이 소신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영구히 바보가 되고 말 것이옵니다. 그러나 소신은 머리로 일을 해왔사온즉 이제부터 여러분들께도 가르쳐 드릴까 하옵니다." "어디 가르쳐 주게. 손이 지쳤을 때 머리로 대신할 수 있다는 그 방법을." 도깨비는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반은 온 나라에 방문을 붙였다. '훌륭한 신사가 나타나 여러분들에게 머리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머리로는 손보다도 훨씬 더 많은 벌이를 할 수 있다. 모두들 배우러 나오라' 하고. 이반의 나라에는 높은 망대가 세워지고 거기에 반듯한 사닥다리가 걸쳐지고 그 위에 단이 마련되었다. 이반은 신사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그곳으로 안내했다. 신사는 망대 위에 서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바보 백성들은 구경을 하러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바보들은 손을 쓰지 않고 머리로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사가 실지로 보여 주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큰 도깨비는 단지 그저 말로만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바보들에게 가르칠 뿐이었다. 바보들에게는 뭐가 뭔지 통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저마다 제 일들을 하러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큰 도깨비는 진종일 망대 위에 서 있었다. 다음 날도 내내 서 있었다. 그리하여 줄곧 지껄여댔다. 그는 무엇이라도 좀 먹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바보들은, 만일 저 사람이 손보다 머리로 훨씬 더 잘 일을 할 수 있다면 머리로 제 빵쯤 실컷 만들려니 생각하고 망대 위의 그에게 빵을 가져다 주어야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숫제 하지도 않았다. 큰 도깨비는 그 이튿날도 단 위에 올라서서 줄곧 지껄여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또 이리저리 흩어져 갈 뿐이었다. 이반은 이따금 물었다. "그래 어떤가, 그 신사는 머리로 일을 하기 시작했나?" "아니옵니다. 아직도 여전히 지껄여대고 있기만 하올 뿐이옵니다." 큰 도깨비는 또 진종일 단 위에 서 있었고 이제는 차츰 쇠약해지기 시작하여 비틀거리게 됐다. 한 차례 비틀거리다가 그만 기둥에 머리를 부딪쳤다. 한 바보가 이것을 보고 이반의 아내에게 알리자, 이반의 아내는 들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로 달려갔다. "자, 가시죠. 구경을 하시러. 신사가 드디어 머리로 일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옵니다." "그게 정말이오?" 이렇게 말하고 이반은 말을 돌려 망대로 갔다. 망대에 다 오자 도깨비는 굶주리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비틀거리면서 머리를 기둥에 박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반이 도착한 그 순간 도깨비는 쿡 거꾸러지더니 우당탕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내렸다. 한 층 한 층 발판을 세기라도 하듯이. 이반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다고 언젠가 훌륭한 신사가 말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인 걸. 이건 정말 못이 문제가 아니다. 저렇게 일을 하다가는 머리가 부지를 못할 게 아닌가." 큰 도깨비는 사닥다리 밑으로 굴러 떨어지자 땅 속에 대가리를 처박고 말았다. 신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볼 양으로 이반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데 별안간 땅바닥이 쫙 갈라지더니 큰 도깨비는 땅 사이로 떨어져 들어가고 나중에는 그저 구멍이 하나 남을 뿐이었다. 이반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아, 요게 이런 빌어먹을 게 다 있나! 아니 또 그놈이었단 말인가! 그놈들의 애비가 틀림없으렷다. 별별 지독한 놈도 다 있구나!" 이반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고 온갖 인종이 그의 나라로 몰려오고 있다. 두 형들도 그에게 찾아와 그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우리들을 좀 먹여 살려 주시구료" 하고 말하면 "그럭하지. 와서 살게나. 여기엔 없는 것 없이 얼마든지 있으니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꼭 하나의 습관이 있다. 손에 못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게 되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자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끝> 12. 달걀만한 씨앗 톨스토이 어느 날 골짜기에서 어린애들이 가운데에 줄이 든 씨앗 같은 달걀만한 한 물건을 발견했다.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어린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고 5꼬뻬이까에 사서 문안으로 가지고 와 귀물로 황제에게 팔았다. 황제는 현인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즉 달걀인지 씨앗인지 알아보라고 일렀다. 현인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물건은 창문 위에 놓여 있었는데 한 마리의 암탉이 날아들어와 쪼기 시작하여 구멍을 내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이 씨앗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인들은 예궐하여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것은 라이보리 씨앗인 줄 아뢰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현인들에게 이 씨앗이 어디서 언제 생겼는지를 알아보라고 어명을 내렸다. 현인들은 요모조모 생각을 거듭하고 온갖 책을 뒤져 찾고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어전에 나와 아뢰었다. "대답을 드릴 수 없사옵니다. 소신들의 책에는 이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하온즉 농부들에게 한번 물어봐야 할 줄로 아옵니다. 늙은이들 가운데서 누가, 언제, 어디에, 이런 씨앗이 뿌려졌는지 듣지 않았느냐고." 그리하여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늙은 농부를 한 사람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나이 많은 늙은이가 찾아내어져 황제에게로 불려왔다. 그 농부는 벌써 이도 다 빠지고, 얼굴도 푸르죽죽하게 쪼그라진 늙은이였다. 그는 지팡이 둘을 짚고 간신히 들어섰다. 황제는 그에게 씨앗을 보였다. 그러나 늙은이에게는 벌써 시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절반은 살펴보고 나머지 절반은 손으로 더듬었다. 황제는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영감,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대는 모르겠느냐? 그대 밭에 이런 곡식을 심지 않았었는고? 혹은 농사를 짓던 시절에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적이 없는고?" 늙은이는 귀가 멀어 간신히 알아듣고 겨우겨우 이해했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네, 소인은 밭에다 이런 곡식을 심은 일도 없고, 거두어들인 일도 없고, 산 일도 없사옵니다. 소인네가 곡식을 사던 시절에도 이런 씨앗은 모두 낱알이 더 잘았었습죠. 지금도 그렇지만 말씀입니다요. 그런데 저어...... 소인의 아버지에게 한번 어쭈어 보아야겠습니다. 어쩌면 그 어른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지 들었을는지도 모르니까요." 황제는 이 영감의 아버지한테로 사람을 보내어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늙은이의 아버지도 찾아내어져 어전으로 데려와졌다. 이 늙어 찌들어빠진 늙은이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왔다. 그에게 황제는 씨앗을 보이기 시작했다. 늙은이에게는 아직 시력이 있었으므로 잘 알아보았다. 황제는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늙은이,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고? 그대 밭에 이런 곡식을 심은 적이 없는고? 혹은 또 그대가 농사를 짓던 시절에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적이 없는고?" 늙은이는 귀가 다소 멀기는 했지만 아들보다는 잘 알아들었다. "네" 하고 그는 말했다. "소인은 밭에다 이런 씨앗을 뿌린 일도 없고 거두어들인 일도 없사옵니다. 또 산 일도 없사옵구요. 왜냐하면 소인들의 시절에는 아직 돈이라는 게 만들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사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곡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자랄 적에는 서로 나누어 가졌사옵니다. 소인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겨졌는지 모르옵니다. 소인네 시절의 씨앗은 요새 것보다야 더 굵고 더 소출이 많고 하긴 했습지요. 그러나 이런 것은 본 일이 없사옵니다. 이건 소인이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옵니다만, 소인의 아버지 시절에는 소인네 시절 것에 대면 더 나은 곡식이 산출되었는데, 소출도 더 많고 한결 더 굵기도 했었다는 것이옵니다. 소인의 아버지에게 하문하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다시 이 늙은이의 아버지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다. 맨처음의 늙은이의 할아버지인 그 노인도 찾아내어졌다. 그리고 황제의 편전으로 데려와졌다. 노인은 지팡이도 짚지 않고 어전으로 나갔다.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눈도 밝고 귀도 잘 들리며 말도 또렷했다. 황제는 이 노인에게 다시 그 씨앗을 보여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이리저리 되작이며 이렇게 뜯어보고 저렇게 뜯어보았다. "오랫동안, 소인은 이렇게 옛날 곡식을 보지 못해서......" 노인은 씨앗을 물어뜯어 자근자근 깨물었다. "이게, 그것이옵니다." 그는 말했다. "그럼 노인, 어디 한번 말해 보라.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고? 그대는 이런 곡식을 그대 밭에 심은 일이 없는고? 혹은 또 그대 시절의 어디 사람들한테서 산 일은 없는고?"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이런 곡식은 소인 시절에는 어디서나 생산되고 있었사옵니다. 이런 곡식으로 소인은 평생 살아 왔고 또 사람들도 먹여 살려 왔사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다시 물었다. "그럼 노인, 어디 말해 보라. 그대는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일이 있는고? 혹은 또 그대 자신이 그대 밭에 뿌린 일이 없는고?" 노인이 히죽 웃었다. "소인 적에는, 곡식을 팔고사고 하는 그런 죄악을 궁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또 돈이라는 것도 몰랐구요. 곡식은 누구에게나 얼마라도 있었습지요. 소인은 이런 곡식을 소인이 직접 심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타작하기도 했었습니다." 황제는 거듭 물었다. "어디 그럼 말해 보라. 노인, 그대는 어디다 이런 곡식을 심었고 또 그대 밭은 어디 있었는고?" 노인이 말했다. "소인의 밭은 신의 땅이었었습지요. 쟁기질을 한 거기가 밭이었사옵니다. 땅은 자유였사옵니다. 제 땅이란 건 몰랐었사옵니다. 제것으로 불렸던 건 제 노동뿐이었사옵니다." "그럼, 두 가지만 더 말해 보라. 한 가지는 어째서 옛날에는 이런 씨앗이 생겼는데 지금은 생기지 않나 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그대의 손자는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또 그대의 아들도 한 개의 지팡이를 짚고 왔는데 그대만이 그처럼 가뿐히 혼자 걷는가 하면 눈도 밝은데다 이도 실하고 말도 또렷하고 상냥함은 어찌 된 영문인가 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고? 노인, 말해 보라, 이 두 가지 까닭은 무엇인고?" 그러자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문하옵신 두 가지 까닭이란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품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됐기 때문이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를 않았사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뜻에 좇아 살고 있었사옵니다. 제 것을 가질 뿐이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