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이의 사랑이야기 지은이:O.헨리 외 출판사:푸른 샘 사랑의 신과 재물의 신 로크윌 유리카 비누 회사의 전 경영주였던 앤소니 로크윌 영감은 5번가에 있는 자기집 서 재의 창문을 내다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이웃에 사는 귀족 사교클럽 회원인 G 반 스카알 라이트 서포크 존스 씨가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에까지 오더니,이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이 탈리아 르네상스식 조각을 바라보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뭇 경멸하듯이 콧날을 찌푸렸 기 때문이었다. "거만한 실업가 영감쟁이 같으니라구!" 이렇게 왕년의 비누왕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에덴 박물관(납인형 박물관)에서 저 냉정한 늙은 것을 가져다가 진열할지도 몰라. 올 여름에 이 집을 네덜란드 국기처럼 붉고,희고,푸른색깔로 칠해 버릴 테야.그럼 저 네덜란 드 영감쟁이의 콧배기도 납작해 질 테지." 그리고 나서 로크윌 영감은 서재의 문 앞까지 가서 옛날에 캔자스 벌판에서 호령하던 그 목소리로, "마이크!" 하고 소리쳤다. 그는 초인종이 있었으나 그것에 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도련님에게 밖에 나가기 전에 이리로 왔다 가라고 일러주게." 영감은 하인에게 말했다. 로크윌 2세가 서재에 들어왔다.영감은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커다란 붉은 얼굴에 부드럽고 의젓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한 손으로 흰 머리를 긁적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주머니 의 열쇠 뭉치를 짤랑거렸다. "리처드!" 하고 영감이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지 겨우 여섯 달째인 리처드는 좀 당황했다.그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물으시는 지 알 수가 없었다.마치 처음으로 사교계에 나온 애숭이처 럼 그에게는 낯선 일일 뿐이었다. "한 다스에 6달러이인 줄 압니다.아버지." "그럼 네 옷값은?" "60달러쯤 되겠지요." "됐어.넌 신사야." 하고 영감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듣건대,요즈음 젊은이들은 한 다스에 24달러짜리 비누를 쓰고,옷 한벌엔 으레 100달러가 넘는 걸 입는다고 하던데.너는 그런 녀석들 못지 않게 넉넉한데도 성실하고 검소한 모양이 구나.나는 지금도 우리 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유리카 비누를 쓰고 있다만,그건 우리 것이라서 가 아니라 실제로도 가장 좋은 비누이기 때문이란다.비누 한 개에 10센트도 못되는 것을 쓴 다는 것은,나쁜 향료와 상표를 사는 거나 다름 없느니라.그러니 네 나이에 너같은 지위와 신 분을 가진 젊은이라면,50센트짜리는 당연할 게다.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너는 이제 어엿한 신사야. 흔히 세상에서는 신사 하나를 만들려면 3대가 걸린다고 하지만,그건 괜한 말이다.비누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돈이 때를 말끔히 벗겨주는 법이란다.돈이 널 신사로 만든거야.암 그렇구 말구.우리 집 양쪽 집에 사는 늙은 네덜란드 신사들 틈새에 집을 장만하고 끼어들었다고 해 서,그들은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투덜대지만,따지고 보면 그들이나 나나 다를 것도 없 잖니?" "그렇지만 돈으로 못하는 것도 얼마든지 있어요." 아들은 약간 침울한 말투로 말했다. "얘,그런 소리 작작해라." 앤소니 영감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나하고 내기를 하자.난 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을 찾아 내기 위해 백과사전까지 찾아 보 았다.다음 주에는 백과사전 증보판까지 뒤져볼 생각이다.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돈 편에 건 다.그래,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니?" "하나는 있죠." 젊은 로크윌은 약간 계면쩍은 듯이 대답했다. "인원이 한정된 상류 사교계에는 돈 주고도 들어 갈 수 없어요." "뭐!들어갈 수 없다고?"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에 애스터가 이 나라에 올 배삯이 없었던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상류 사교계라는 것 이 어떻게 생겨났겠니." 젊은 로크윌은 한숨을 지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거야." 하고 영감은 말을 계속했다. "너를 불러들인 것도 그때문이다.너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 거냐? 벌써 두 주일이나 안절 부절하고 있으니,문제가 있으면 털어놓고 말해 보렴.난 스물네 시간 이내에 부동산 말고도 1,100만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만약 너한테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다면, 램블라 호가 석탄을 싣고 이틀 후면 바하마제도로 떠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아버지 추측이 과히 틀리신 건 아닙니다." "그래." 하고 영감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 여자의 이름은 뭐냐?" 젊은 로크윌은 서재를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다.이 무뚝뚝한 영감이 지닌 사랑과 동정은 아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왜 그여자에게 청혼을 하지 않는 거니.그 여자는 기꺼이 네 품안에 뛰어들 텐데 말야.넌 돈도 있구 인물도 좋을 뿐만 아니라 점잖으니 말이다.그리고 넌 어느 모로 보나 신 선해.유리카 비누 냄새가 아직은 풍기지 않는단 말이야.넌 대학도 나왔잖니.아마 그 여잔 이 런 걸 문제 삼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전 아직 한 번도 청혼할 기회가 없었어요." 하고 젊은 로크윌은 말했다. "기회는 만들어야 한다." 영감이 말했다. "공원을 함께 산책한다거나,차를 타고 시골로 간다거나,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래도 준 다거나 하면 되잖니.기회가 없긴 왜 없어!" "아버진 사교계라는 물레방아를 모르고 계셔요.그녀는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의 일부나 마 찬가지인 셈이에요.그 여자의 시간은 며칠전부터 빈틈없이 약속 되어 있어요.아버지,전 꼭 그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요.그렇지 못하면 이 거리는 저에게 영원히 시커먼 신갈나무로 뒤덮 힌 진창이 되어버릴 거예요.그렇다고 편지를 보낼 수도 없어요.그건 차마 못하겠어요." "딱두하다." 하고 영감은 계속 말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은 다 네 것인데 그래 그깟 계집에게서 한두 시간도 얻어내지 못한단 말이냐?" "전 너무 늑장을 부렸어요.그녀는 2년동안 머물 예정으로 내일 모레 배편으로 유럽으로 떠 나요.저는 내일 밤 겨우 몇 분동안 둘이서 만나기로 했어요.지금 리치먼드에 있는 자기 숙모 댁에 가 있어요.제가 그리로 찾아갈 수는 없잖아요.그러나 그녀가 내일 밤 8시 반 기차로 이 곳에 도착할 때 전 마차를 가지고 그녀를 마중하러 정거장에 나가겠다고 했어요.거기에서 만나서 윌랙 극장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브로드웨이 거리를 마차로 달릴 작정입니다.그녀의 어머니와 그 일행이 극장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어요.이렇게 부산을 떨어야 할 6,7 분 동안에 그 여자가 저의 고백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또 연극이 끝난 뒤에 무슨 기회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어요.아버지,이거야 말로 아버지 돈으로도 풀 수 없는 매 듭중에 하나입니다.인간은 돈으로 단 1분도 살 수 없어요.만약 살 수 있다면 부자는 모두 죽 지 않을 거예요.그녀가 배편으로 떠나기 전까지 청혼할 만한 시간은 없습니다." "얘야,걱정마라." 하고 영감은 장담하듯이 말했다. "넌 클럽에 가 있기나 해라.그렇지만 때로는 위대한 재물의 신 머주머를 위해 신전에 찾아 가 푸닥거리라도 해야해.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고 했지.그야 물론 돈으로 시간을 사서 우리 집까지 배달해 달라고 주문할 수 는 없지.그렇지만 나는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 금광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발꿈치에 꽤 큰 상처가 생긴 걸 보았다." 그날 밤에 상냥하고 감상적인 그러나 재산에 눌려 지겨워하는 엘렌 고모가 찾아왔다.그 때 앤소니 영감은 마침 석간 신문을 펴들고 읽고 있었다.두 오누이는 젊은 로크윌이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애는 나한테 자기 심정을 모두 다 털어놨어." 하고 앤소니 영감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난 은행 예금을 그 애를 위해 모두 제공하겠다고 했지.그러자 그 애는 돈에 대하여 마구 공격을 퍼붓는 거야.돈 같은건 쓸데없다는 둥,사교계의 규율은 백만장자 열 사람이 힘을 합 쳐도 1야드도 움직일 수 없다는 둥,지껄여대는 거야." "하긴 그래요!오라버니." 하고 엘렌 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는 돈을 과대평가하지 마세요.진정한 사랑에 있어서는 재물이란 아무 소용도 없 는 거예요.사랑이란 무엇보다도 강한 거니까요.그 애가 진작 얘기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그랬 어요.그 여자가 우리 리처드를 마다고야 하겠어요.그렇지만 이젠 때가 너무 늦었어요.그 애 는 그 여자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오라버니의 전재산을 갖고도 그 애의 행복은 구하 지 못할 거예요." 이튿날 저녁 8시 쯤에 엘렌 고모는 낡은 상자 속에서 골동품 같은 금가락지를 하나 꺼내 어 리처드에게 주며 말했다. "애야,너 오늘 밤에 이걸 끼고 가거라.네 어머님께서 나한테 주신 거란다. 네 어머니 말 에 의하면 이 반지가 사랑의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거야.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 너에게 전해 주라고 나한테 맡긴 거란다." 젊은 로크윌은 엄숙한 얼굴로 그 반지를 받아 자기 새끼손가락에 끼려고 애썼다.반지는 손 가락의 두 번째 마디까지 들어가서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반지를 다시 빼 가지고 남 성의 예법에 따라 조끼 주머니 속에 넣었다.그리고 그는 전화로 자기 마차를 불렀다. 그는 8시 32분에 정거장의 웅성거리는 군중들 틈에서 렌트리 양을 찾아냈다. "어머니와 그 일행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윌랙 극장까지 되도록 마차를 빨리 몰아요!" 하고 리처드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들은 브로드웨이에 이르는 42번가를 쏜살같이 지나,마치 아침 해가 솟아 오른 산등성이 를 지나가는 듯,브로드웨이의 불빛이 눈부신 큰 길을 달렸다. 리처드는 34번가에서 갑자기 차창을 열고 마부에게 멈춰서도록 일렀다. "반지를 떨어뜨렸어요."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 가락지는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것이라 잃어버려서는 안돼요.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떨어뜨린 장소는 알고 있으니." 그는 1분도 못되어 반지를 가지고 마차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 1분 사이에 전차 한 대가 바로 마차 옆에 멈춰섰다.마부는 왼쪽으로 빠져나가려 고 했다.그러자 커다란 우편 화물차가 가로막았다.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나가려고 하자,가구 를 실은 화물차가 갑자기 앞질러 나왔으므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그때 마부는 말고삐를 슬그머니 떨구며 화를 냈다. 그는 많은 차량과 말들이 서로 엉킨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 대도시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곤 했었다.그리하여 군중과 차량의 통행을 막아버 리는 큰 혼잡이 종종 빚어졌던 것이다. "왜 마차를 몰지 않으세요?" 하고 렌트리 양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늦겠는데요." 리처드는 마차 속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브로드웨이 6번가와 34번가 교차로가 대 형 짐마차,트럭,전차 등으로 꽉 차 버렸다.게다가 옆길에서 수레들이 전 속력으로 이 교차로 를 향해 달려와,붐비는 군중과 처박힌 차량들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것이었다.그리하여 그들 차량의 운전수들이 외치는 아우성으로 한층 더 혼란을 빚어냈다.맨해튼의 모든 교통기관이 여기에 뒤엉겨버린 것 같았다.길에 죽 늘어선 수천명을 헤아리는 구경꾼들은 교통이 번잡한 뉴욕에서도 이렇게 심한 교통 혼란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우리는 마치 갇힌 신세가 되어 버렸군요.이 혼잡이 한 시간 안으로는 풀릴 것 같지 않아요.이건 저의 불찰입니다.제가 그 반지만 떨어뜨리지 않았던들 우리는……." 하고 리처드는 자기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 가락지를 저한테 좀 보여 주세요." 렌트리양이 말했다. "이젠 하는 수 없군요.단념하겠어요.연극 구경은 워낙 시시한 거니까요." 그날 밤 11시 경에 로크윌의 현관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들어와요." 붉은 가운을 걸치고 해적의 모험소설을 읽고 있던 앤소니 영감이 큰 소리로 말했다. 문을 노크한 사람은 엘렌 고모였다.그녀는 마치 어떤 실수로 지상에 남게된 백발의 천사 같 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둘이는 약혼했대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우리 리처드와 결혼하겠다고 약속을 했대요.그들이 극장에 가는 도중에 길이 막혀 마차를 다시 끌고 나오는데 자그만치 두 시간이나 걸렸대요.그런데 오라버니 다시는 돈 자 랑하지 마세요.진정한 사랑의 조촐한 상징이 리처드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에요.그 애가 반지를 큰 길에 떨어뜨려 그걸 찾으려고 마차에서 내리자 교통이 차단되어 오도 가도 못했 대요. 아무튼 마차가 묶여 있는 동안에 리처드는 자기 사랑을 고백하여 그녀의 승낙을 얻게 되었 다지 뭐예요.오라버님,진정한 사랑에 비하면 돈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아무튼 그애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잘 되었다.나는 그녀석에게 말해 줬지.이 일에 대 해선 결코 돈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야,만약……." 하고 앤소니 영감은 말했다. "그렇지만 오라버니,오라버니의 돈이 이번 일에 무슨 힘이 되었나요?" "이봐!" 앤소니 영감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해적은 큰 곤경에 빠졌어.그의 배는 곧 침몰하게 되었지만,그 는 돈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지 침몰시키지는 않을 거야.재발 부탁 이니 이 대목을 끝까지 읽게 놔두게." 이튿날,벌건 손으로 푸른 바탕에 가느다란 점이 박힌 넥타이를 맨 켈리라는 사재가 앤소 니 영감 댁을 찾아왔다.그는 곧 서재로 안내되었다. "썩 잘했네,가만있자…….나는 자네에게 현금으로 5천달러나 줬지?" "그렇지만 제 돈이 3백 달러나 더 들었는 뎁쇼." 하고 켈리는 말을 계속했다. "예산이 좀 초과되었어요.우편 화물차와 마차는 5달러 들었지만,트럭과 말 두필이 끄는 큰 마차는 각각 10달러 가까이 들었어요.전차 운전수는 5달러를 요구하고,대형화물자동차의 운 전수는 5달러를 내라는 거예요.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애먹은 것은 경관이었어요…….그 두 사람에겐 50달러씩 주었어요.그런데 주인장,일은 멋드러지게 되었지요? 저는 경찰국장 윌리엄A.브레 씨가 이번 소동 때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 합나다.윌리엄 씨가 직무에 충실하다가 심장 터지는 걸 보고 싶진 않거든요.그런데 이런 일 은 다시는 못할 짓이에요.마침 그 녀석들은 1초도 틀리지 않고 제때에 들이댔거든요.무려 2 시간 동안은 뱀 새끼 한 마리도 그릴리 동상 아래를 얼씬하지 못했어요." "켈리,자!천 3백 달러 받게." 앤소니 영감은 수표 한 장을 떼면서 말을 했다. "자네 몫으로 1천 달러하고,과불된 3백 달러일세.자넨 설마 돈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아닐테 지." "제가 말입니까?" 켈리는 대답했다. "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가난을 만들어 낸 놈들을 늘씬 패주고 싶을 지경이예요." 켈리가 문까지 나갔을 때 영감은 다시 블러 세웠다. "자넨 한창 혼잡할 때 마치 벌거벗은 통통한 소년이 어느 한구석에서 활을 쏘고 있는 걸 본 일이 있나?" "전 못봤는데요." 케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주인장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제가 거기 도착히기도 전에 벌써 순경이 끌 고 갔을 걸요?" "물론 나도 그런 꼬마 불량배가 현장에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네.켈리,그럼 잘가게." 앤소니 영감은 혼자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O.헨리 (1862∼1910) 미국의 소설가.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 를 여의고 힘들게 생활하였다.은행에 근무하던 중 공금횡령 혐의로 3년간 감옥상활을 하면 서 많은 단편을 썼으며,감옷에서 나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했다.그는 다채롭고 인간미 넘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썼는데,「마지막 잎새」「20년후」「크리스마스 선물」등이 대표 작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제화공이 한 농가를 빌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이 제화공은 집도 땅도 없었으므로 구두를 만들기도 하고,고쳐주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노임은 싸도 곡식 값이 비쌌기 때문에 돈을 벌어도 먹고 살기가 빠듯했다.이 제화공은 한 벌의 모피외투를 가 지고 아내와 둘이 서로 번갈아 입었는데,그것도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다 낡아 버렸다.그 리하여 이태 전부터 양가죽을 사서 새 외투를 지으려고 별러 왔었다. 가을이 되자 구두방의 벌이도 제법 괜찮아 얼마간의 돈을 모으게 되었다. 아내의 작은 궤 짝에는 3루블의 지폐가 들어 있었고,그밖에 마을 사람에게 빌려준 돈이 5루블 20꼬베이카가 있었다.어느날 제화공은 아침 일찍 앙가죽을 사러 집을 나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아 침 식사를 마친 후 내의위에 아내의 무명 재킷을 걸치고,그위에 긴양복 저고리를 입고는 3 루블의 지폐를 주머니에 넣은 다음,나뭇가지를 꺽어 지팡이를 만들어서 손에 들고 길을 떠 났다. ‘빌려준 5루블을 받고 3루블을 보태면 모피외투를 만들 양가죽을 사게 되겠지’하고 그는 혼자 생각했다.제화공은 거리에 이르자 어느 집을 찾아들었다.그러나 주인은 집에 없었다.안 주인이 밖으로 나와 빌려간 돈을 2주일 안으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뿐이다.제화공은 또 다른 집으로 가 보았다.그 사람은 돈이 없다는 것을 하늘에 맹세하면서 겨우 20꼬베이카 주었다.제화공은 생각다 못해 양가죽을 외상으로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가죽장수는 그를 믿고 외상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돈을 갖고 오셔야지요.돈을 갖고 오면 물건을 마음대로 고르도록 해드리겠습니다.그러나 외상은 뒤가 개운치 않아서……." 제화공은 할 수 없이 헛걸음만 했을 뿐 장화 수선비로 받은 20꼬베이카와 한 집에서 낡은 펠트 신발에 가죽을 대어 깁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맥이 빠진 제화공은 20꼬베이카로 술을 마셔 버리고 모피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그때 날씨가 몹시 추웠지만 배 속에 술이 들어간 뒤로는 모피외투를 입지 않았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그는 한손에 든 지팡이로 얼어붙어 울퉁불퉁한 땅을 두드리며,다른 손에는 펠 트 구두를 들고 혼자 중얼거렸다. ‘모피외투를 입지 않아도 추위를 모르겠는걸.한 잔 마셨더니 몸이 후끈하단 말야.모피외투 따위가 무슨 소용 있담.따분하던 기분도 가셔 버렸거든. 나라는 인간도 매우 귀한 존재란 말 이야.그따위 모피외투쯤 없으면 어떻담. 모피외투를 입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단 말야. 나에게는 평생 그따위 것 아쉽지 않아.그런데 여편네가 바가지를 긁는단 말야.그게 문제거 든!그렇지만 그 사람들 말대로 좀더 기다릴 수밖에.그런데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그놈의 모 자를 벗겨 버려야지.암 그렇구 말구,그까짓 것쯤 문제가 아니지. 겨우 20꼬베이카 밖에 주지 않으면서 쳇,20꼬베이카를 무엇에 쓴담!술 한 잔 값밖에 되지 않는 돈이니 말야.네놈들은 집 도 있고 가축도 있고 그밖에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있지만,우리는 입는 옷 한 벌밖에 없는 가난뱅이가 아닌가.네놈들은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둬들이지만,나는 모든 것을 다 돈으로 사 야 해.내게는 매주 3루블의 돈이 필요하단 말야.그 돈은 빵값에만 쓰이는 돈이지.지금도 빵 이 없으면 1루블 반이라는 돈이 당장 있어야 해.당장 말이야.실정이 이러니 내 돈을 갚아 줘 야지.’ 제화공은 혼자 이렇게 증얼거리며 길 모퉁이에 있는 교회옆에까지 왔다. 그런데 교회 바로 뒤에 무엇인가 휘끄므레한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자세히 바라 보아도 그 정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허연 돌이 저기에 있을 리는 없는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축일까?도무지 가축 같지는 않고…….아무래도 목 언저리는 사람같이 보이는데,저렇게 하얀 것이 수상쩍군.그러나 사람이라면 저런 곳에 있을리가 만무하지.' 제화공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그러나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랴!그것은 분명한 사람이 었지만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그 사람은 벌거벗은 몸을 교회벽에 기댄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제화공은 등골이 오싹했다. '필경 불한당놈들이 사람을 때려 죽이고 옷을 몽땅 벗겨서 이곳에 끌어다 놓았을 거야.가까 이 갔다가는 무슨 올가미를 쓰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제화공은 그 옆을 지나쳤다.교회 모퉁이를 돌아서자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남자는 교회벽에서 떠나 움직이고 있었다.아무래도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제화공은 더욱 무서웠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다가가 볼까,지나쳐 버리는 것이 좋을까?가까이 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한다? 어느 말뼈다귀인지도 알 수 없는 놈이거든.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이런 곳에 저러고 있을지 가 만무하지.내가 다가가면 다짜고짜 덤벼들어 내 목을 조를 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끝장나 는 거지.설사 내 목을 조르지 않더라도 저놈은 가난뱅이 일꺼야.벌거벗은 놈이니 뻔하지 않 은가.결국 내가 갖고 있는것을 몽땅 줘야 할지도 몰라.에라,모르겠다.어서 돌아가자!’ 제화공은 이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지나치자 곧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 ‘야,세몬!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고 있어?’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반문했다. ‘사람이 저렇게 곤경에 처해 죽어가고 있지 않느냐.공연히 공포에 사로잡혀 외면하고 지 나쳐 버리다니!더구나 재물을 빼앗길까 염려를 하다니?야, 세몬!너는 돼먹지 않았어!’ 제화공 세몬은 남자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세몬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활력이 넘지는 젊은이로 몸에서는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추위와 공포로 말미암아 사색이 되어 있었다.그는 벽에 가 만히 기대고 앉아 세몬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개를 들 기력도 없는 듯이 보였다.그러나 세몬이 다가가자 정신이 번쩍 나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몬은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곧 호감을 갖게 되었다.제화공은 낡은 펠트구두를 집어던지고 허리띠 를 풀고 나서 긴 웃저고리를 벗었다. "무조건 이걸 입게.알겠나?" 제화공이 말했다. 그리고 세몬은 남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키려고 했다.그러자 남자는 일어섰다.그의 몸은 깨끗하며 흠집하나 없을 뿐 아니라 매우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세몬이 어깨에 긴 웃저고리를 걸쳐 주어도 젊은이는 팔을 끼우지 않았다.세몬은 소매를 끼워주고 옷깃을 여민 후에 허리띠까지 매어 주었다.그리고는 자기가 쓰고 있던 헌 모자를 벗어서 젊은이 머리에 씌워 주려고 하였다.그러나 모자를 벗은 자기의 머리가 써늘해져 왔으므로 생각이 달라졌다. ‘내 머리는 벗겨졌지만 이 젊은이의 머리는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는 모자를 다시 집어 썼다. ‘그보다도 신발을 신겨 주어야겠군!’ 제화공은 젊은이에게 펠트구두를 신겨 주었다.그리고는 그에게 옷을 입힌후 입을 열었다. "자 이제는 됐네.여보게,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겠어.그래야만 덜 추울 테니까.그런 데 걸음을 걸을 수 있겠나?" 젊은이는 일어서며 감사하다는 듯이 세몬은 바라보았다.그러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게!왜 대답이 없나?이런 곳에서 얼어죽을 작정인가?여기 내 지팡이가 있네.기운이 없 거든 이 지팡이를 짚게나!여보게 기운을 내,기운을!" 젊은이는 발을 옮겼다.그는 부지런히 뒤를 쫓아갔다. 그들이 큰길을 걸어갔다. 세몬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디서 왔나?" "저는 이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자네가 이 고장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네.그런데 어째서 그런 꼴로 교회당 곁에 서 있었나?" "그것은 말슴드릴 수 없습니다." "아마 이 고장 사람들한테 봉변을 당한 모양이로군." "아닙니다.누구에게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다만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을 뿐입니 다." "그야 당연하지.아무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그런데 아무 곳이든 가야하지 않 겠나.자네는 어디로 갈 작정인가?" "저는 아무데나 괜찮습니다." 세몬은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젊은이가 고약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그의 말씨는 매우 부 드러웠지만 되도록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몬은 그에게 무슨 곡절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그런가.그렇다면 우리 집으로 가세.불을 쪼일 만한 자리는 있으니까." 세몬은 자기 집 가까이 이르렀다.낯선 젊은이도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바람이 불어왔다.바람 이 세몬의 내의 속까지 스며들어 술 기운을 깨우자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세몬은 콧물을 훌 쩍이면서 아내에게 빌린 여자용 재킷의 깃을 여미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일이 엉뚱하게 되어버렸군!모피를 사러나선 위인이 모피는 고사하고 웃저고리를 벗어 주 었을 뿐 아니라,벌거벗은 놈팽이를 집으로 끌어들이다니! 마누라가 어지간히 바가지를 긁겠 군!’ 마누라 생각이 떠오르자 세몬은 까닭없이 서글퍼졌다.그러나 그는 젊은이를 바라보자 교회 당 그늘에서 자가와 마주친 젊은이의 눈길이 회상되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세몬의 아내는 부지런히 일을 해치웠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오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자기도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에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빵은 언제 굽는 것이 좋을까.오늘 안으로 구워 두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내일 구울까. 아직도 커다란 빵 한 덩어리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그이도 점심을 밖에서 들고 오면 저녁은 별로 안들테니까 내일 몫은 그것으로 될 거야.’ 그녀는 커다란 빵 한 덩어리를 만지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빵을 굽지 말아야지.밀가루도 얼마 남지 않았고,금요일까지는 먹어야 하니까.’ 마트료나는 빵을 치워놓고 탁자 모퉁이에 앉자 남편의 헌 내의를 깁기 시작했다.그녀는 남 편을 생각하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모피장사에게 속지나 말았으면 좋으련만.사람이 너무 착해서 어린 아이이게도 곧잘 속아 넘어가거든.8루블은 적은 돈이 아닌데,그 돈이면 좋은 외투가죽을 살 수 있을꺼란 말야.지난 겨울은 모피외투가 없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도무지 밖에를 나갈 수 없었단 말야. 오늘 밤만 해도 그렇지.그이가 있는 옷은 모두 주워 입고 나갔기 때문에 나는 걸칠것도 없 잖은가…….그런데 왜 여태 돌아오지 않는걸까.벌써 돌아올 시간은 넘었는데, 웬 일일까?또 술타령을 하고 있지나 않는걸까?" 마트료나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입구의 계단이 삐걱거리며 누군가가 집으로 들 어섰다. 마트료나는 바늘을 바늘꽂이에 꽂고 문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들어섰다.하나는 남편이고 다른 하나는 낯선 사람이었다.그는 모자도 안 쓰고 맨발에 펠트 구드를 신고 있었 다.마트료나는 남편에게서 술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짐작한 대로 술을 마셨군.’ 마트료나는 남편이 웃저고리도 없이 내의바람으로 게다가 손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은 것 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필경 가지고 간 돈은 다 마셔 버렸을 거야.어느 개뼈다귀인지도 알 수 없은 사내와 어울 려 다니다가 집에까지 끌어들이다니!’ 마트료나는 두 사람을 맞아들이고 자기도 들어갔다.그녀는 낯선 사내를 쳐다보았다.그 젊은 사람은 그들 부부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그리고 긴 웃저고리 밑에는 내복도 걸쳐지 않고 모 자도 쓰고 있지 않았다.방안에 들어선 그는 입을 열지도 않고 주위를 살피려고도 하지 않았 다.다만 장승처럼 잠자코 있었다.마트료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필경 착한 사람은 아닐 거야.그렇지 않고서야 저러고 있을 리가 없지.’ 마트료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난로가에 서서 두 사람의 거동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세몬은 모자를 벗자 제법 의기양양한 태도로 의자에 걸터 앉았다. "어이,마트료나.왜 그러고 서 있소?어서 저녁을 줘야지." 마트료나는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남편과 젊은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고개를 흔들 뿐 난 로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세몬은 아내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 나 일부러 시치미를 떼며 젊은이의 손을 잡았다. "여보게 어서 앉게." 하며 그는 말을 계속했다. "같이 식사를 해야지." 젊은이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여보,왜 그래?저녁준비가 안 됐소?" 마트료나는 울화통이 터지고야 말았다. "준비야 됐지요.그러나 옷까지 벗어서 술을 마시는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것은 아니예요.모 피를 사려고 나섰던 사람이 모피는 고사하고 웃저고리마저 벗어 주고,게다가 벌거숭이를 집 으로 끌고 오다니 내 원 기가 막혀서.난 당신같은 주정뱅이에게 음식을 드릴 수는 없어요." "그만 해요,마트료나!말같지 않은 소리는 그만 둬요.그보다도 먼저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듣기 싫어요.그보다도 돈은 어떻게 됐어요.그것부터 대답하세요." 세몬은 긴 웃저고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를 꺼내보였다. "트리포노프가 빌린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나간 돈은 도로 갖고 왔소." 마트료나는 한층 더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란 말이야.모피를 산다는 위인이 모피는 고사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웃저고리를 어느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내어 주고, 그것도 모자라 집으로 끌어들이 다니…….’ 마트료나는 탁상 위에 놓인 돈을 집어 다른 곳에 옮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녁 준비가 안됐어요.벌거벗은 주정뱅이에게 줄 음식이 어디 있어요!" "여봐요,마트료나.너무 그러지 말아요.이쪽 얘기도 들어 봐야지." "주정뱅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뇨?난 어쩌자고 당신같은 엉터리와 결혼했는지 몰라.어머 니가 주신 물건도 술값으로 내어주고,모피를 사려던 돈마저 술을 마시고 오다니요.정말 당신 같은 사람은……." 세몬은 술을 마신 것은 불과 20꼬베이카밖에 안 된다는 점과,이 젊은이를 만난 경위 등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으나 마트료나는 입을 열지도 못하게 했다. 그녀는 10년 전의 일까지도 모조리 들춰내며 마구 떠벌이기 시작했다.그래도 마트료나는 끝내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남편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마구 할퀴었다. "내 재킷을 내 놔요.하나밖에 없는 재킷을 뺏어 입다니 너무 해요.어서 내놔요.염병에라도 걸려 죽었으면 좋겠어요.당신 같은 사람은!" 세몬은 재킷을 벗으려고 팔을 들었다.그러자 아내가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옷이 찢어졌 다. 마트료나는 그것을 집어 몸에 걸치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 런데 이상하게도 노여움이 씻은 듯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걸음을 멈추었다.그와 동시에 증오감이 사라지고 차츰 남편이 데리고 온 젊은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마트료나는 제 자리에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분이 점잖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벌거벗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 분은 속옷도 안 입었잖아요? 어디서 이런 분을 데리고 왔는지 그 까닭을 말해 봐요." "설명을 할 테니 잘 들어 봐요.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사람이 교회 옆에 벌거벗고 쭈 그리고 앉아 있지 않겠소?더구나 여름도 아니고 추운 날씨에 말이야.여기엔 필경 하느님의 뜻이 있었던 거요.그때 내가 그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얼어죽었을 테니까. 나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을 데리고 왔단 말이요.그런데 화를 내서야 되겠소?마트료나,그러면 죄를 받아요.암 그렇구 말구.우리는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죽은 후를 생각해서라도……." 마트료나는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고 하다가 젊은이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 다.젊은이는 긴 의자 한 끝에 걸터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얹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그는 눈을 감은 채 마치 숨통이 막힌 것 같은 표 정을 하고 있었다.마트료나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남편인 세몬이 말했다. "여보,당신의 가슴 속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소?" 마트료나는 이 말을 듣자 새삼스럽게 젊은이를 돌아보았다.그러자 그녀의 분노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그녀는 방구석에 있는 난로가로 가서 저녁준비를 시작했다.테이블 위 찻잔에 음료수를 따라 놓고,하나 밖에 남지않은 빵을 내놓았다.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도 갖추어 놓았 다. "자,어서 드세요." 하고 그녀는 입을 열였다. 세몬은 젊은이를 테이블 곁으로 밀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좀더 가까이 다가오게." 세몬은 빵을 잘게 썰었다.그들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마트료나는 테이블 모퉁이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젊은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젊은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 다.그리고 그에 대하여 호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곧 명랑한 얼굴로 마트료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 제화공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나서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저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왜 길바닥에 그러고 있었어요?" "네,그 까닭은 말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옷을 모두 벗겼지요?" "하느님께서 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거벗고 뒹구셨어요?" "네,그렇습니다.벌거벗고 뒹굴다가 거의 얼어죽게 되었지요.그런데 마침 세몬씨가 저를 불 쌍히 보시고,입고 있던 긴 웃저고리를 벗어서 저에게 주시며 이곳까지 데려오셨습니다.그리 고 여기에 와서도 아주머니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두 분께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실 것입니다." 마트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선반 위에서 조금 전에 기워 놓은 남편의 낡은 내의를 손질하여 젊은이에게 내밀었다.그리고 바지도 찾아주었다. 젊은이는 긴 웃저고리를 벗고 내의를 입은 다음 지붕밑 다락에 가서 누웠고,마트료나는 불 을 끄고 남편 곁에 가서 누웠다.그녀는 웃저고리를 덮고 누웠으나 젊은이 생각이 떠올라 좀 체로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덩어리 밖에 남지 않은 빵을 그가 먹어 버렸기 때문에 내일 먹을 빵이 없다는 것과,내 의며 바지까지 그에게 내어주어 당장 입을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서글퍼 졌 다.그러나 한편 젊은이의 웃음짓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귀를 귀울여 남편의 숨소리를 엿들었다.그러나 남편 역시 잠들지 못하고 긴 웃저고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여보." "응?" "아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빵을 그 사람에게 줬는데,내일 것은 준비를 못했거든요.내일 먹 을 것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마리냐 숙모에게 가서 꾸어올까 싶은데요.여보,그래도 괜찮겠 어요?" "그거 잘 생각했소. 사람이란 때에 따라 그렇게 살아갈수도 있는 것이지." 제화공의 아내는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 같은데 왜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을까요?" "말 못할 사정이 있을꺼야." "여보." "응?" "우리는 가끔 남에게 자선도 베풀지만,우리한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왜 그럴까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둡시다!" 그는 돌아누워 버렸다.그리고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에 세몬이 눈을 떴을 때 아이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아내는 빵을 구하러 밖 으로 나가고 없었다.밤에 데려온 젊은이만이 낡은 셔츠에 바지를 입고 얌전히 앉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어제보다도 훨씬 명랑해 보였다. 세몬이 입을 열었다. "여보게 젊은이,사람은 누구나 배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몸에서는 입을 것을 달라고 한단 말야.그래서 누구나 제각기 벌이를 해야 하는데,자네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저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세몬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지 배울 수 있지 않겠나?" "네,모두들 부지런히 일을 하니 저도 놀고 있을 수는 없지요."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미하일이라고 합니다." "미하일이라고?자네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데 그것은 아무래도 괜찮지만,자기 가 살아갈 것은 벌어야 하네.어때 자네,내가 시키는 일을 해 볼 텐가?그렇게 하겠다면 우리 집에 있어도 괜찮네만." "감사합니다.부지런히 일을 배우겠습니다.가르쳐 주십시오." 세몬은 구두를 꿰매기 시작했다. "별로 어려울것도 없네.잘 보고 배우게." 미하일은 한참 들여다 보고 곧 구두를 꿰매기 시작했다.세몬은 그에게 가죽 자르는 법을 가 르쳐 주었다.미하일은 곧 배웠다.주인은 다시 상모를 밀어넣은 법과 꿰매는 법을 가르쳐 주 었다.미하일은 곧 이것도 터득했다.세몬이 가르치는 것을 젊은이는 곧 손에 익혔다.그리하여 사흘만에 젊은이는 마치 전부터 구두를 지어온 사람처름 거침없이 일을 해 나갔다.그는 쉬 지도 않고 부지런히 일을 했으나 음식은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그리고 웃지도 않고 말도 없었으며 좀체로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세몬의 아내가 그를 위해 저녁 준비를 하던 첫날밤에 젊은이의 웃는 모습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그리하여 어느 덧 1년이라 세월이 흘러갔다.미하일은 세몬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부지런히 일을 했다.세몬의 집에서 젊은 직공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 다.이렇게 되자 이웃마을에서 주문이 몰려와 세몬의 주머니는 점점 더 두둑해졌다. 초겨울 어느날 세몬과 미하일이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는데,삼두 마차가 방울소 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점포앞에 와서 멈추었다.창밖을 내다보니 한 신사가 마차에서 내려 상반신을 구부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그는 키가 커서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으며 몸집 이 비대하여 현관에 꽉 찰 정도였다. 세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는데 신사를 쳐다보자 그의 위엄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때까지 이런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세몬은 메마르고 호리호리했으며,미하일 도 비교적 마른 편이었다.그리고 마트료나도 마치 마른 명태처럼 깡마른 여인이었다.그런데 이 신사는 너무나 비대하여 흡사 별천지에서 온 사내같아 보였던 것이다.검붉은 얼굴에 머 리는 황소 같고,몸은 강철로 된 것처럼 보였다. 신사는 한숨을 쉬고 나서 외투를 벗고 의자에 걸터앉은 다음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주인이요?" 세몬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네,제가 주인입니다." 신사는 큰 소리로 하인을 불렀다. "페치카,그 물건을 가져 오너라." 하인은 종종걸음으로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신사는 그것을 받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어서 풀어라!" 신사가 말하자 하인이 꾸러미를 풀었다.그것은 훌륭한 가죽이었다.신사는 그 가죽을 가리키 면서 세몬에게 물었다. "여보게,이게 보이나?" "네,보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알겠나?" 세몬은 가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좋은 가죽입니다." "그야 좋지!자네는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을 걸.독일산 가죽인데 20룰블이나 주었다네." 세몬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말했다. "정말 저희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물건입니다." "암 그럴테지.그런데 말야.이 가죽으로 내 발에 맞는 장화를 지으려고 하네.자네가 지을 수 있겠나?" "네,그야 지을 수 있습죠." 그러자 신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야 당연할테지.그런데 자넨 누구의 구두를 어떤 가죽으로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나는 한 1년쯤 신고 찌그러지거나 실이 뜯어지는 그 따위 구두는 필요 없네.그러니 자신이 있으면 맡아서 재단을 하도록 하게.그러나 자신이 없으면 애당초 맡지 않는게 좋을거야.한 마디 당부할것이 있어.만약 구두가 1년 안에 해지거나 찌그러지면 나는 자네를 감옥에 쳐넣 겠어.그 대신 1년 이상이 되어도 찌그러지거나 해지지 않으면 품삯으로 10루블을 주지,어떤 가?" 세몬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그는 힐끗 미하일을 쳐다보았다.그리고 그에 게 의논했다. "미하일,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염려 말고 일을 맡으라는 뜻이었다. 세몬은 미하일의 의사대로 신사의 주문 조건을 받아들여 1년을 신어도 해지지 않고 찌그러 지지 않는 장화를 만들기로 했다.신사는 큰 소리로 하인을 불러 왼쪽 신발을 벗기게하고 발 을 불쑥 내밀었다. "그럼 어서 치수를 재게!" 세몬은 한 자 다섯 치 정도의 종이를 오려서 붙이고 다시 그것을 부드럽게 주물러 놓고는 무릎을 꿇고 신사의 양말이 때묻지 않도록 손을 씻고는 그 종이에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세 몬은 먼저 뒤축을 재고 다음에 발바닥을 쟀다.그러나 발꿈치를 재려다가 그 종이로는 어림 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사의 발은 나무 둥치처럼 컸던 것이다. "발목이 아프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세몬은 자른 종이를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신사는 태연히 걸터 앉은 채 양말을 신은 왼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는 미하일에게 눈을 돌렸다. "저 사람은 누군가?" 신사가 물었다. "그는 저의 직공입니다.그가 나리의 신을 짓게 됩니다." "이봐!" 신사는 미하일에게 말했다. "1년 동안 끄떡없이 신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어 줘야 해.알겠나?명심해!" 세몬은 미하일을 쳐다보았다.미하일은 신사의 옆모습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미소를 지었다. "실 없는 사람 같으니!여보게,뭘 보고 그리 싱글벙글 하나?그렇게 웃지만 말고 명심해서 날 짜 안에 구두를 만들도록 하게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찾으러 오실 때에는 틀림 없이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신사는 장화를 신고 나서 모피외투를 걸치고 앞을 여민후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허리를 굽 히지 않은 까닭에 머리로 문설주를 들이 받았다.신사는 한 동안 투덜거리더니 머리를 문지 르고 나서 마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신사가 떠나자 세몬은 입을 열었다. "마치 바위 같은 사람이군.저 정도면 쇠뭉치로 쳐도 죽지 않겠는데.방금 문설주를 받으니까 문이 떨어질 것 같더군.그자는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어." 마트료나도 옆에서 덧붙여 말했다. "그런 한가한 생활을 하니 살이 안 찌겠어요?그런 사람은 아마 죽지도 않을 거예요!" 세몬을 미하일에게 말했다. "기왕 맡은 일이니 아무튼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네.가죽도 비싼 고급품이긴 하지만 그 나 리는 화를 잘 내더군.실수하면 큰일일세.아무쪼록 잘 만들어야 하네.재단은 자네한테 맡겨야 겠어.자넨 눈도 밝고 솜씨도 좋으니까.재단을 잘 해 봐.구두끈은 내가 만들기로 하지." 미하일은 주인의 말대로 테이블 위에 가죽을 펴놓고 두겹으로 접더니 가위를 들고 재단을 시작했다. 마트료나는 곁에 서서 미하일이 재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재단하는 방법이 특 이했기 때문에 그녀의 눈은 휘둥그래졌다.마트료나는 오랫동안 신을 재단하는 것을 보아왔 으므로 미하일의 재단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마트료나는 간섭을 하려다가 잠자 코 있었다. ‘아무래도 미하일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주제넘는 참견은 말아야지.’ 미하일은 한쪽 발의 재단을 마치자 곧장 구두를 짓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는 슬리퍼처럼 깁 는 것이었다. 마트료나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미하일은 열심히 손을 놀렸다. 점심 시간이 되어 세몬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앞에는 그 신사가 가 져 온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 한 컬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세몬은 깜짝 놀랐다. ‘이게 웬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미하일은 1년 이상 같이 있었지만 한 번도 실수를 한 일이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그 나리는 분명히 장화를 주문해 놓고 갔는데,이 사람은 슬리퍼를 만들어 놓고 가죽을 못쓰게 만들었으니 그 나리한테 뭐라고 변명을 한담. 그 좋은 가죽을 다 버렸놨으니!’ 세몬은 미하일에게 말했다. "여보게,미하일.자넨 큰 일을 저질렀네 그려.이건 나를 감옥에 넣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 나리는 분명히 장화를 주문했는데 자네가 만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몬이 미하일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데,문 밖에서 방울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노 크를 했다.그들이 내다보니 몇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말을 매고 있는 중이었다.문을 열 자 얼마 전에 신사와 함께 온 하인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무슨 일이시죠?" "실은 그 장화 때문에 마님의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장화가 어떻게 되었단 말씀입니까?" "네,실은 이제는 장화가 소용 없게 되었답니다.나리가 돌아가셨습니다." "네?뭐라구요?" "여기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차 속에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마차가 집에 도착하자 모두 나리를 모셔들이려고 했으나 나리는 나무 등걸처럼 마차 속에서 굴러나왔어요.숨은 끊어지 고 몸은 뻣뻣이 굳어 있었어요.그래서 간신히 집안에 옮겨 놨지요.그리고 마님의 분부를 받 고 달려은 것입니다.마님께서 저에게 수고스럽지만 그 구두방에 가서 나리가 주문한 장화는 이젠 소용 없게 되었으니,그 대신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한 켤레 빨리 만들어 달 라고 해서 다 되거든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제가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미하일은 테이블 위에서 남은 가죽을 둘둘 말았다.그리고 완성된 슬리퍼를 들어 탁탁 먼지 를 턴다음 하인에게 넘겨주었다.하인은 슬리퍼를 받아 들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또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미하일이 세몬의 집에 와서 산 지도 6년이나 되었다.그의 생활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그는 별로 외출도 하지 않고 쓸데 없는 말도 하지 않았으며,그의 웃는 모습은 6년 동안에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세몬의 집에 들어온 첫날 밤과 거구의 신사가 왔을 때였다. 세몬은 이 직공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그는 이제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그리고 애오라지 미하일이 혹시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집안에 있는 날이었다.마트료나는 무쇠냄비를 화덕 위에 올려놓고 있었으 며,아이들은 의자 위에서 뛰놀기도 하고,창 밖을 내다보기도 했다.세몬은 창가에서 구두 뒷 창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미하일 아저씨,저기 보세요.어떤 아줌마가 여자애들을 데리고 이리로 오고 있네요.여자애 하나는 절름발이군요!" 남자애가 말하자 미하일은 곧 일손을 멈추고 창가로 돌아 앉아 거리를 내다 보았다.세몬은 놀랍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했다.미하일이 창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밖을 내다보는 것이 아 닌가.세몬도 덩달아 밖을 내다보았다.정말 한 여인이 오고 있었다.아름답게 몸단장을 한 여 인이었다.모피외투를 입고 두꺼운 숄을 걸친 그녀는 두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여자애 들은 모습이 똑같았다.한 아이는 왼발에 이상이 있는지 발을 옮길 때마다 절룩거렸다. 부인은 층계로 올라와서 문 손잡이를 돌렸다.그녀는 두아이를 먼저 들여 보내고 자기도 들 어섰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십시오.자,앉으시지요." 부인은 테이블을 향해 앉았다.두 아이는 그녀의 무릎에 매달렸다.낯설기 때문이었다. "이 두 아이가 봄에 신을 구두를 지어 주세요." "네,알겠습니다.아직 이렇게 어린아이의 신발은 만든 일이 없지만 잘 알아서 짓지요.사슴가 죽이 달린 것도 만들 수 있고,안에 천을 댄 것도 만들 수 있습니다.여기 있는 미하일이란 사 람은 솜씨가 대단한 사람이라 염려 없습니다." 세몬은 이렇게 말하면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미하일은 일을 걷어치우고 두 여자애들을 유 심히 바라보았다.세몬은 평소와 다른 미하일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여자애들은 모 두 예뻤다.눈이 새까맣고 볼은 불그레하며, 입고 있는 모피외투나 숄도 값진 것이었기 때문 에 미하일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치 옛 친구를 만 나기라도 한 듯이 친근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세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 는 호기심에 사로잡혔지만, 부인과 값을 흥정하고 주문을 받은 후에 발을 재기 시작했다.부 인은 한쪽 발이 성치 않은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이 애의 발로 재어 만들어 주세요. 성치 않은 발에 신길 것이니까요.그리고 성한 오른쪽 발을 재고 똑같이 두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두 아이는 발의 크기가 같지요.쌍둥이거든 요." 세몬은 발을 다 잰 후에 발이 성치 않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아가씨가…….혹시 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닌가요?" "아녜요, 얘 엄마가 깔아 뭉갰어요." 하고 부인이 대답했다. 마트료나도 이때 끼어 들었다.부인과 아이와의 관계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나,그럼 이 아이의 어머님이 아니시군요." "네,전 친엄마가 아니에요. 친척도 아니구요.하지만 두 아이를 다 양녀로 기르고 있지요." "어머나, 자기 애도 아닌데 무척 귀여워 하시네요." "정말 귀엽답니다. 두 아이 다 제 젖을 먹고 자랐어요. 제게도 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하느 님의 뜻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요.그런데 그 죽은 아이보다 이 애들이 더 귀여워요." "그러세요? 그럼 이 애들은 누구의 딸인가요?" 부인은 두 여자애의 신상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약 6년쯤 전의 일이었어요. 한 주일 동안에 이 아이들은 모두 고아가 되어 버렸어요.아빠 의 장례식은 화요일이었고,엄마가 죽은 날은 금요일이었답니다. 이 두 아이가 태어난 것은 아빠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고, 엄마도 그후 하룻만에 죽었지요.저는 그때 남편과 둘 이서 시골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애들과는 이웃이었지요. 그들은 형제도 친척도 없는 사람으로 날마다 숲에 가서 땀을 흘리며 살았답니다.하루는 운 수가 사나와서 큰 나무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버렸지요.창자가 튀어나올 정도였 어요.모두들 법썩을 부리며 집으로 옮겨 왔지만 결국 죽고 말았어요.그런데 그 주에 애 엄마 가 쌍둥이를 낳았어요.그게 바로 이 애들이죠.그런데 애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외롭게 살아 왔기 때문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또 혼자 죽어 버렸답니다. 아이를 낳은 이튿날 내가 궁금 해서 들여다봤더니 가엾게도 부인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 있었어요. 얘들 엄마는 죽을 때 이 애 위에 덮쳤던가 봐요.이 아이가 시체 밑에 깔려 있었어요.그래서 발이 못쓰게 되었지요.마 을 사람들이 모여서 관을 짜고 장사를 지내 주었어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어요.그러 나 뒤에 남은 두 아이들에 대해서는 저마다 머리를 흔들었어요.그 많은 여인들 중에서 아 기 엄마는 저 혼자였어요.더구나 나는 젖이 많았지요. 그래서 임시로 맡는다는 조건으로 우 선 두 아이를 우리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한 결과 제게 와 서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었어요. ‘여보 마리씨,얼마 동안만 이 두 아이를 맡아 길러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어떤 대책을 마 련하지요.’ 그런데 나는 처음에 몸이 성한 아이에게만 젖을 주고 다리가 성치 못한 아이에게는 젖을 주지 않았어요.그 아이는 살 것 같지 않더군요.그렇지만 나는 다시 생각했어요. 이 천사같이 깨끗한 어린아이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들 순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이가 몹시 가엾어지더 군요.그래서 그 아이한테도 젖을 먹이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나는 내 아이 하나에 이 여자애 둘, 이렇게 모두 세 아이를 내 젖으로 키웠지만, 나는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언제나 두 아이 에게 동시에 젖을 먹이고 다른 아이에게 먹이곤 했지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오늘 날까지 키워 왔어요.그런데 내가 낳은 아이는 이듬해에 죽어 버렸답니다. 그 후에 나는 아이 를 낳지 못했어요. 덕분에 돈은 절약이 되었지요.남편은 이곳에서 지금 어느 상인의 제분소 에 다니는데,월급이 많기 때문에 살림은 넉넉해요.그래도 이 아이들이 있잖아요. 정말 이 아 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혼자서 어떻게 지내게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나는 이 아이 들이 무척 귀엽답니다!" 부인은 발이 성치 않은 아이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 었다. 마트료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옛말에‘엄마가 없어도 아이는 자라지만,하느님이 안계시면 어떻게도 안된다’는 말이 있 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군요." 그리고 나서 주인과 손님은 이야기를 계속했다.그러자 갑자기 번개라도 치듯이 미하일이 앉은 구석에서 후광이 비치고,그곳 전체가 밝아왔다.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미하 일은 단정히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하늘을 쳐다보며 은근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부인이 두 여자애를 데리고 돌아간 후에 미하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일손을 멈추고 주인 부부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당신들도 아무쪼록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 부부는 미하일의 몸에서 찬란히 빛나는 후광을 보았다. 그리하여 세몬도 자리에서 일 어나 미하일에게 공손히 절하며 말했다. "미하일,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네. 그러므로 자네를 끝까지 붙잡아 둘 수도 없고, 또 이것 저것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도 없었네.그렇지만 지금은 알고 싶은 것 이 한 가지 있다네. 내가 자네를 처음 발견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자네는 몹시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내 마누라가 저녁 준비를 하자 자네는 웃어 보였네.그리고 자네 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그 뒤 장사 같은 거구의 사내가 와서 장화를 주문했을 때, 자네는 두 번째 웃음을 지으며 더욱 명랑해하지 않았나?그리고 이번에 저 부인이 여자애들을 데리고 와서 구두를 주문했을 때 자네는 세 번째로 웃었다네. 그리고 자네 몸에 후광이 비칠 정도로 주위가 환히 밝아졌네. 미하일,내게 그 까닭을 좀 얘 기해 주게.도대체 자네 몸에서 어떻게 그런 후광이 미치는가, 그리고 왜 자네는 세 번 미소 를 지었는가 그 까닭을 말해 주게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내 몸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하느님의 천벌을 받고 있다가 이제야 용서 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그리고 미소를 지은 것은 하느님 말씀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 다.나는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그것은 바로 이 집 부인께서 저를 보살펴 주실 때였습니다.그래서 나는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몸집이 큰 부자 나리가 장화를 주문하러 왔을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때도 미소를 지었지 요.그리고 이제 두 아이를 봤을 때 나는 다시금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 째 미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세몬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무슨 까닭에 하느님의 벌을 받았는가?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나도 알고 싶네.내게도 들려주게." 미하일은 대답했다. "하느님이 내게 벌을 주신 것은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까닭입니다.나는 천국에 있 는 천사였지만,하느님의 말씀을 어겼던 것입니다.그렇습니다.나는 천사였습니다.어느 날 하느 님께서 내게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그 말씀을 듣고 세상에 내려 와 보니 그 여인은 병이 나서 누워 있다가 막 쌍둥이 여자아이들을 낳았습니다.여인 곁에는 두 아이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여인은 어린아이를 보살필 기운조차 없었습니다.그녀는 나 를 보자 하느님의 분부를 받고 온 것을 알고 안타까이 이렇게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오,천사님!저의 남편은 이 삼일 전에 땅 속에 묻혔답니다.숲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저는 부모와 형제도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그러니 두 아이가 고아가 되면 누구 한 사람 보살펴 줄 사람이 없습니다.제발 저의 영혼을 거두지 마시옵소서.이 아이 들을 키워서 저희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저마저 없으면 어린 것은 살 지 못합니다." "이렇게 애원하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나는 아이들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하느님의 곁으 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분부를 받고 세상에 내려갔으나 그 여인의 혼을 거두어 올 수 없었습니다.여인의 남편은 큰 나무에 깔려 죽고,여인은 쌍둥이 여자애를 낳았습니다.그리고 여인은 애절하게 간 청했습니다.에미마저 없으면 어린애는 살 수 없으니 혼자서라도 그 어린 것들을 기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그런 까닭에 저는 쌍둥이 아이 엄마의 혼을 거두어 올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염려 말고 그 어미의 영혼을 거둬 오너라.그러면 너는 내 말의 참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사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사람에게 부여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그리고 사람 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하는 세 가지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너는 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 세상에 내려와서 그 여인의 혼을 거두어 버렸답니다.쌍둥이 어린아이 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졌습니다.엄마의 시체가 침대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한 아이를 깔 아 뭉개게 되었고,그 아이의 가련한 발목을 다치게 한 것입니다.저는 하늘로 올라가서 그 영 혼을 하느님께 바치려고 했습니다.그러자 느닷없이 폭풍이 불어와서 저의 날개가 무참하게 떨어져 버렸습니다.그리하여 아기 엄마의 영혼은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갔지만,저는 이 세상 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세몬과 마트료나는 자기들이 동정을 베푼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자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 여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천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들판에 던져졌습니다.나는 그때까지 사람의 괴로움과 근심을 몰 랐으며,굶주림과 추위도 몰랐습니다.그런데 갑자기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그리하여 배고픔 을 느끼게 되었고 추위가 골수에 사무쳤습니다.그러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그 때 문득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교회당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나는 성큼 성큼 발을 옮겨 놓 았습니다.교회당에 들아가 벌거벗은 몸을 숨기려고 했습니다.그런데 교회당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나는 하는 수 없이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바람을 피하기로 했습니다.해가 지자 배고픔과 추위는 더욱 매서웠습니다.그 때 문득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습니다.한 남자가 장화 를 손에 들고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봤습니다.나는 그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습니다.그 때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남자는 무엇을 입고 추운 겨울을 넘길것이며,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그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나는 춥고 허기가 져 죽을 지경인데 저 남자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아내에게 입힐 모피외 투며,처자에게 먹일 빵 걱정을 하고 있구나.저 남자가 나를 구해 주지 않으려는가?’ 하고 말입니다.그 남자는 더욱 무서운 꼴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나는 실망했습니다.그러자 다시 인기척이 났습니다.남자가 되돌아 왔는데 얼굴이 종전의 남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습니다.조금 전의 남자 얼굴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 었지만,다시 되돌아 온 남 자 얼굴은 생기가 넘치고 하느님을 닮았던 것입니다.남자는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자기 옷 을 내게 입힐 뿐 아니라,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그의 집에 이르자 한 부인이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여인은 몹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부인도 남자 못지 않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그 여인의 입에서는 죽음의 입김 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나는 이 죽음의 악취에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여인은 나를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나는 여인이 나를 밖으로 몰아내면 그녀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하느님을 상기하도록 했습니다.그러자 여인의 태도는 종전과 전혀 달라졌습니다.여인은 나를 위해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그녀고 나를 자세히 바라보았지만,나도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어느 새 그녀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입니다.그녀는 활기에 넘쳐 있었으며,그런 그 녀에게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너는 알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하느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을 보여 주시기 시작했다 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그리하여 비로소 미소를 지었던 것입니다.그러나 나 는 하느님의 말씀을 모두 깨달을 수는 없었습니다.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그 리고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 가는가.이 두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이 댁에서 신세를 지며 어느 새 1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그러자 하루는 몸집이 큰 사람이 구두 가게에 나타났습니다.그는 1년 이상 신을 수 있는 장화를 지어 달라고 주문 했습니다.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습니다.동시에 그의 등뒤에서 나의 동료인 죽음의 천사를 발견했습니다.나 밖에는 아무도 이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나는 이 몸집이 큰 남자가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밤까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몸을 가지고 1년 뒤의 걱정을 하다니!’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깨닫 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그리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두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미소를 지었습니다.나는 동료 천사를 본 사실과 하느님으로부터 두 번째 말씀에 대한 계시를 받고 한없이 기뻤던 것입니다.그러 나 아직 하느님의 말씀을 다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사람은 무엇으로 살아 가는가?참 생명의 양식은 무엇인가?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그리하여 계속 이 댁에 신세를 지면서 하 느님의 말씀이 완전히 풀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그러자 6년이 되는 오늘,한 여인이 쌍둥이 여자애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나는 이 여자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나는 두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어린애 엄마가 두 아 이를 기르기 위해 살려달라고 했을 때,나는 어미가 없으면 아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여인이 젖을 먹여 아이를 훌륭히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 여인이 자기와 남 남인 두아이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여인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깨달았고 동시에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게 된 것입 니다.인간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가를 나는 알게 된 것입니다.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세 번째 질문을 깨우칠 수 있었고 아울러 그 분의 용서를 받게 되었으므로 세 번째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천사의 몸에서는 옷이 저절로 벗겨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름다운 광채 속 에 파묻혔으므로 그를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그의 말소리는 멀리서 은은하게 울려왔다. 마치 그 소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천사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습니다.나는 이제야 온전히 깨달았습니다.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살 수는 없습니 다.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에 의해서,그 사랑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야만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입니다.나는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애들을 낳고 죽은 그 아기 엄마는,두 아이가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지 못했습니다.그리고 몸집이 큰 부자에게도 그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누구에게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가려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내가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나 자신의 일에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길을 가던 사람과 그 아내의 마음 속에 사랑이 깃들 어 있어 나를 동정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고아가 살아온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염려한 때문이 아니라,아이들과 남남인 그 여인의 가슴 속에 무한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아이들을 동정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 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사람 속에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 해 나가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셨습니 다.그런데 나는 지금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입니다.하느님은 사람이 제각기 흩어져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 다.하느님은 전세계의 인류가 한 마음,한 뜻이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나는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것처름 생각하지 만,사실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나는 이제야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사 랑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며,동시에 하느님은 그 사람 속에 살아 계신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정신에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느님을 찬미했다.그러자 그 찬미 소리가 제화공의 집을 뒤흔들었다.천장이 뚫리며 한 줄기의 불기둥이 땅 위에서 하늘로 뻗쳤다.제화공 세몬과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천사의 등에는 날개가 되살아났다.그리고 날개를 너울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세몬이 정신을 되찾았을 때 집은 전과 다름없이 말짱했으며 그의 처자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레흐 톨스토이 (1828∼1910) 러시아의 작가이며 사상가.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인 문호이다.백작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다.대학에 진학 했으나 싫증을 느끼고 고향에 가서 농촌운동을 했다.대표작으로는「전쟁과 평화」「안나 카 레니나」「부활」「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바보 이반」등의 명작을 남겼다. 달빛 마르탱 신부는 키가 크고 몸집이 호리호리한 투사라고 부를 만한 분이었다.그의 신앙은 광적이었으며,마음은 믿음으로 불타 꼿꼿하기만 했다.가슴 속에는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 고 있었으므로 흔들리는 일이 없었고,자기만은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더 욱이 그는 하느님을 잘 알 뿐만 아니라,그 말과 의도까지도 능히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 다. 그런 마르탱 신부도 시골의 작은 사제관 정원을 걸어갈 때면,가끔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나 곤 했다.그는 어찌하여 하느님은 그 일을 용납하셨을까?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하느님의 입장에 서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골똘히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그 해답을 찾고야 마는 것이었다.그럴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저는 하느님의 종입니다.그러므 로 하느님의 섭리를 잘 알게 해주십시오.만약 저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추측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모두 찬양할 만한 절대자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 고 있었다.그의 머릿속에서는‘왜?’라는 의문과 동시에 ‘∼때문에’라는 대답이 저울의 양면같이 언제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 햇빛은 왜 만드셨을까?아침 잠을 깬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낮은?밀,보리가 익 으라고 만드셨다.비는?밀,보리에 물을 주기 위해 만드셨고,저녁은?사람들을 졸음으로 인도하 고 밤중에 잠이 푹 들라고 만드셨다.’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일년의 사계절은 농사 짓기에 필요한 모든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었다.그는 이 대자연의 모든 현상은 맹목적인 것이 전혀 없으며,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반드시 그 계절과,날씨와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조금도 의 심하지 않았다.그러나 신부는 여자만은 싫어했다.무의식중에 싫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여자를 멸시했다.그리하여 때때로 자신의 생각을 입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여인이여,그대와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또는‘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몸소 지 으신 이 작품만은 만족하시지 않으시는 모양이야.’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여자란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열두 번이나 죄를 지은 어린애’임 에 틀림이 없었다.인류의 시초에 사람을 유혹하고,그리고 계속하여 그 죄 많은 후손들을 유 혹해 온 것이 여자라고 생각하였다.그는 연약하지만 위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 는 존재 즉,영원히 죄에 매인 몸뚱이면서도 사랑이 가득찬 그 마음씨를 더욱 미워하는 것이 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번 자기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여자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그럴 때마다 그는 그 사랑이 자기의 견고한 마음을 범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 가슴 속에서 설레고 있는 사랑의 욕구에 대하여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그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여자를 만드신 것은 오직 남자들을 유혹하여 하나의 시련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그 러므로 여자에게 접근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방패가 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었다.아닌게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를 향해 팔을 내밀며 입술을 방긋이 벌리는 모습이 함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믿음이 두터운 여자들은 그 경건한 기도의 힘으로 남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배겨낼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이런 여자들까지도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대하기를 잊지 않았다.왜냐 하면 그들의 억눌린,말하자면 경건해진 가슴속에도 여전히 그 영원한 사랑의 불길이 남아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영원한 사랑의 불길이 신부인 자기에 게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불길이 수도자들의 믿음 가득한 눈길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며,성적 감각이 혼 동된 그 법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약동함을 느끼고 있었다.그러므로 그는 불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그것은 여자의 사랑이요,육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저주스런 사랑을 그들의 얌전한 마음 속에서도,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그들의 부드 러운 목소리 속에서도,그리고 조용히 내려 깐 눈초리속에서도,또한 자기가 퉁명스럽게 꾸짖 을 경우에 애처롭게 흘리는 눈물속에서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수녀원 문을 나설 때면 으레 옷자락을 흔들며,마치 위태로운 곳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발길을 재 촉하는 것이었다. 신부에게는 조카딸이 하나 있었다.그녀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교회 옆에 붙은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신부는 그 조카딸을 수녀로 만들려고 잔뜩 마음 먹고 있었다. 조카딸은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좀 경솔하고 남을 곧잘 조롱하는 버릇이 있었다.그녀는 신 부가 강론을 시작하면 흔히 킥킥거리며 웃어댔다.신부가 나무라면 소녀는 삼촌을 가슴으로 힘껏 껴안는 것이었다. 신부는 얼떨결에 이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곤했다.그러나 그는 어떤 사내에게 잠들어 있는 아버지 같은 느낌에 눈떠 그 포옹에서 아늑한 즐거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신부는 때때로 소녀와 함께 밭길을 걸으면서 하느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그러나 그녀는 그 이야기를 전혀 귀담아 듣질 않고,하늘을 쳐다보거나 초목과 꽃들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었다.그 두 눈 속에는 삶의 행복이 감돌고 있었다.때로는 깡충깡충 뛰어 가서 작은 날짐승을 잡아 가지고 와서는‘삼촌,이것 좀 보세요.예쁘죠?입이라도 맞추고 싶네 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비나 라일락의 열매까지도‘입을 맞추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소녀의 애욕이 신 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고 짜증나게 하였다.동시에 그는 여기서도 여자의 마음속에서 언 제나 꿈틀거리며,도저히 뿌리를 뽑아 머릴 수 없는 사랑의 불씨를 다시금 엿보게 되는 것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신부의 가사를 돌봐 주던 성당 관리인 처가 그의 조카딸에게 애 인이 생겼다는 말을 귀띔해 주었다. 신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마침 면도를 하기 위해 얼굴에 온통 비누칠을 하고 있었으므 로,질식할 것 같은 자기의 심정을 간신히 참았다. "멜라니!그렇지 않을 거요.그건 말도 안돼요." 그러나 그 농사꾼의 아내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원 신부님,제가 거짓말을 하다니요.하느님의 벌을 어떻게 받으려고요.저녁마다 아가씨는 자기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거리로 나가는 걸요.그리고 두 사람이 으레 나란히 강가를 거닐던데요.열 시부터 열두 시 사이에 강가에 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볼 수 있어요." 신부는 턱수염을 깎던 손길을 멈추고,깊은 생각에 잠길때마다 하던 버릇대로 방안을 왔다 갔다하며 걷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다시 수염을 깎기 시작했으나 코에서 귀에 걸쳐 세 군 데나 살을 베어 버렸다. 그는 종일토록 말이 없었다.분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이 범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신부로서의 분노는 물론,정신적으로나 법률상의 보호자,또는 영혼을 맡 은 자로서의 분노까지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그것은 자식에게 속고,도둑을 맞고,조롱을 받았다는 노여움이었다.자기 마음대로 남편을 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버이로서 느끼 는 배신적 질식감이었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짜증만 날뿐이었다.그 지팡이는 투박한 참나무 몽둥이로 저녁에 병자를 위로하기 위해 길을 나설 때면 으레 손에 드는 것이었다.그는 우람한 촌뜨기의 손아귀에 쥐어져 사람을 위협하는 것처럼,휘둘림을 받 는 그 두툼한 몽둥이를 바라보면서 히죽 웃었다.그는 별안간 몽둥이를 쳐들고 부드득 이를 갈면서 의자를 내리쳤다.의자는 둘로 뽀개지면서 마루 바닥에 부서져 내렸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서려다가 찬란히 빛나는 달빛을 보고 새삼 놀라며 문간에서 우뚝 멈춰 섰다.생전 처음 보는 듯한 눈부신 달빛이었다. 그는 종교인이나 다감한 시인들이 흔히 지닌 즉흥적인 천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므로,이 휘황찬란하고 정적이 감도는 은은한 달빛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갑자기 황홀경에 잠기는 것이었다. 작은 정원에 담긴 모든 것이 부드러운 달빛 속에 잠겨 있었다.죽 늘어선 과일 나무는 푸른 잎을 걸치지 않은 알몸의 가느다란 그림자를 뜰 안 길 위에 던지고,한쪽 벽위로 기어오른 무성한 넝쿨장미는 흡사 설탕을 뿌려 놓은 듯 달콤한 대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훈훈하고 환한 밤 공기 속에 무슨 요정 같은 싱싱한 향취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신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치 술꾼이 포도주를 삼키듯이,대기를 마음껏 호흡하기 시 작했다.그는 하도 황홀하고 놀라워 조카딸의 생각은 거의 잊어버리고 서서히 발길을 옮겨 놓았다. 그는 발길을 멈추고 벌판을 둘러보았다.그 애무하는 듯한 달빛에 포근히 젖어 있는 들판은 아늑한 보료에 싸여 밤의 고요 속에 흥건히 취해 있었다.개구리가 짤막한 쇳소리를 내며 이 벌판의 대기를 흔들고,멀리서 꾀꼬리의 노랫소리가 이에 호응하며 그를 꿈속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그런가 하면 그 가느다랗게 울려 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달빛의 유혹에 빠지곤 하 는 것이었다. 신부는 다시 거닐기 시작했다.그래선지 마음은 한결 진정되었다.그는 별안간 맥이 빠지면 서 전신이 노곤해졌다.그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명상에 잠기거나,하느님의 작 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구불구불한 작은 개울을 따라,버드나무가 길다랗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달빛 속에 흠 뻑 젖은 희끄므레한 가느다란 수증기가 강변을 온통 흰 빛으로 물들이고,은은한 광채를 내 며 잠자는 강뚝 아래 위에 걸려 있었다.강변을 구비쳐 흐르는 물결은 솜처럼 가볍고 투명하 게 보였다. 그러자 한 가지 의문,아니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그것은 지 금까지 때때로 떠오르던 의문의 하나였지만,지금 속에서 꿈틀거리며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었다. 하는님은 어찌하여 이런 밤을 만드셨을까?인간을 잠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일까?인간을 무의식 상태나 휴식으로 망각 속에 이끌기 위해 밤이 생겼다면,어찌하여 밤을 이처럼 낮보 다 더 매혹적으로,그리고 아침 햇살보다도 또한 저녁노을 보다도 더 아늑하고 친밀하게 만 드셨을까?그리고 태양보다도 더 시적이고 한없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저 선명한 햇빛으로 밝 힐 수 없는 물체들까지도 비춰야 할 운명을 타고 난,으젓하고 매혹적인 천체는 어찌하여 저 지옥까지도 이와 같이 밝히려는 것일까? 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은 목소리를 가진 저 꾀꼬리는 어찌하여 여느 새들처럼 쉴새 없이 그 불안한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어찌하여 어스름이 이와 같이 온 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것일까?어찌하여 가슴은 이처럼 설 레며 어찌하여 육신은 이처럼 권태로울까? 어찌하여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이처럼 견딜 수 없는 유혹을 하 는 것일까?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보내는 이 장엄한 광경,이 풍족한 시적인 풍경은 누구에게 주는 선물일까? 이에 대해 신부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였다.저쪽 목장 끝에 촉촉한 안개에 젖은 무성한 나무 아래로 나란히 서서 걸어오는 두 그림자가 보였다. 키가 한결 큰 남자가 여자의 목에 손을 얹고 때때로 그 이마에 키스하곤 했다.이 한쌍의 남녀가 나타나자 적막에 싸여 있던 이 대자연이 별안간 생기가 솟는 듯 싶었다.이 대 자연 이 마치 두 사람의 배경이 되어 하늘로부터 보내주는 화면처럼 두 사람을 에워싸는 것이었 다.그리고 그 두 그림자는 마치 한 사럼처럼 보였으며,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이 아늑한 밤 이 마련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신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그것은 흡사 하느님께서 신부가 지닌의문에 대한 대 답으로 던져주시는 생생한 해답과도 같았다. 그는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워 제자리에 잠자코 서 있었다.그것은 마치 룻과 보아스의 사랑과 같은 성서의 이야기를 보는 듯 싶었다.그것은 분명히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좋은 위대한 장식품임에 틀림 없었다.그의 머리 속에서는 찬미의 노랫소리가 뜨거운 정열의 호소로 들려왔고,육체의 애끓는 목소리가 사랑에 불타는 시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그는 혼잣말처럼‘하느님은 아마도 이러한 밤을,사랑하는 남녀를 이상적인 베일 로 감싸주기 위해 만드셨나 보다.’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서로 꼭 껴안고 앞으로 다가오는 이 한 쌍의 연인들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그것은 그의 조카딸임에 틀림이 없었다.그러나 이제 와서는 자기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하느님이 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이 밤에 펼쳐보이 는 것을 보니 사랑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치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없는 성전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 럼 당황한 나머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거기서 도망쳐 버렸다. 모파상 (1850∼1893)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기교와 정확한 필치로 10여년의 작품활동 기간에 3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그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인생을 사 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여자의 일생」「벨아미」「목걸이」「달빛」등 이 있다. 귀여운 여인 올렌카는 자기집 현관 층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녀는 퇴직한 8등관인 플레야니 코프의 딸이었다.그녀는 무더운 날씨에 파리까지도 짖궂게 덤벼들어 기울어져가는 해가 빨 리 저물기만 바라는 것이었다.비를 머금은 검은 먹구름이 때때고 습기찬 미풍을 일으키며 동쪽에서 몰려왔다. 뜰 안에는 건넌방에 세들어 있는 티볼리 야외극장 지배인 쿠킨이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었 다. "에이,빌어먹을 놈의 비!"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또 비야! 일부러 사람을 골리는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비만 쏟아지니,이건 내 모가지를 졸라매자는 건가!날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이러 다가는 파산이야,파산! 그는 올렌카에게 손을 쳐들어 보이면서 계속하여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네 생활은 언제나 이 꼴이랍니다.울어도 시원치 않아요!별의 별 고생을 다하며 죽도록 기를 쓰며 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어떻게 하면 좀더 나아질까 하고 밤잠도 설치며 온갖 궁리를 다해봤자 결국은 허사랍니다.우선 관객이 야만인이나 별반 다름없이 무지막지 하거든요.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일류가수들을 내세워 고상한 오페라나 무언극을 공연해 주 지만, 그들이 과연 그런 걸 바라고 있을까요?설사 구경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무엇을 이 해할 수 있겠어요?관객이 요구하는 것은 어릿광대 따위예요.그들은 저속한 것을 상연해야 좋아해요.게다가 왜 날씨는 이 모양입니까?거의 매일 밤 비가 쏟아지고,5월 10일부터 시작해 서 6월 내내 계속 비만 내리니 정말 진저리가 납니다.구경꾼은 얼씬도 않는데 그래도 땅세 는 물어야 하고 배우들에게는 봉급을 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튿날도 저녁 무렵이 되자 먹구름이 몰려왔다.쿠킨은 미친 사람처럼 너털웃음을 터트리 며 말하는 것이었다. "글쎄 어쩌자는 거야?마음대로 퍼부을 테면 얼마든지 퍼부어라!극장이 몽땅 물에 잠기고 나도 물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마냥 퍼부어라!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저승에 가서도 나를 못살게 하겠다는 거로군!배우들이 날 고소해도 좋다.재판도 무섭지 않다!시베리아로 유 형을 보내도 좋고,단두대에 올려놔도 겁날 것 없다!핫,핫,핫!" 다음날에도 날씨는 마찬가지였다. 올렌카는 쿠킨의 넋두리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그리하여 그녀의 눈에서는 때때로 눈물이 글썽 거리기도 했다.드디어 쿠킨의 불행은 그녀의 마음을흔들어 놓고야 말았다. 그를 사랑하기 사작한 것이다. 그는 곱슬머리에 얼굴빛이 누렇고 빼빼 말랐으며 키가 작달막한 사내였다.목소리는 가느 다란 테너였으며,이야기를 할 적마다 입을 씰룩거렸다.그리고 얼굴에는 언제나 절망의 빛이 가시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올렌카에게 순결하고도 깊은 애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던 것이 다. 올렌카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 였다.지금은 괴로운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방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계시지만,어릴적에는 그 의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그리고 2년에 한 번씩 브란스크에 다니러 오는 숙모도 사랑했었고, 여학교를 다닐때는 불어 선생님을 사랑했었다.올렌카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착하고 동정심 이 많은 여자였다.눈길은 조용하고 부드러웠으며 신체는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그녀의 통통 하고 불그레한 뺨하며,부드러운 흰 살결에 까만점이 박힌 목덜미며,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의 티없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볼때면 ‘정말 미인인걸…….’하며 사람들은 미소를 짓는 것이었고,여자 손님들은 얘기를 주고 받다가도‘어쩌면 저렇게 귀엽게 생겼을 까!’하며 그녀의 손을 한번 잡아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었다. 올렌카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도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츠이칸스카야 슬로보드카에 자 리잡고 있었다.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줄곧 살아왔으며,또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녀의 명의로 되어있는 집이었다.이 집에서 티볼리 야외극장이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저녁마 다 늦도록 음악소리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그녀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 다 자기 운명과 싸워 나가며,가장 큰 적인 무관심한 관객을 탓하는 쿠킨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고,그러면 달콤한 감동으로 벅차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을 청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새벽녘에 그가 집에 들어오면 침실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며,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살짝 내밀고 방긋이 웃어보이곤 했다. 이윽고 쿠킨은 올렌카에게 청혼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의 목덜미며 그 포동포동한 어깨를 볼 적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당신은 아름답구료." 그는 행복했다.그러나 결혼식 날에도 종일 비가 쏟아질때처럼 그의 얼굴에서 절망의 빛이 아주 가시지는 않았다. 결혼 후에 그들은 사이좋게 살아갔다.올렌카는 극장안의 여러 가지 일을 거들었다. 입장권을 팔기도 하고,계산서를 꾸미거나 월급을 지불하기도 했다.그리하여 그녀의 불그레 한 두 볼과 맑고 귀여운 눈웃음을 매표구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무대 뒤나 구내식당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느덧 자기 친지들에게 연극이야말로 인간 생활에서 가장 가치있는 중요한 것으 로,인간은 연극을 통해서만 비로소 참된 위안을 느낄 수 있고,교양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관객들이 과연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광대니까요.어제 파우스트를 개작하여 공연하였더니 관람석이 텅 비 어 있지 않겠어요?만약에 저속한 신파극을 공연했더라면 대성황을 이루었을 테지만요.내일 우리는 ‘지옥에서의 오르페우스’를 공연하기로 했으니 꼭 구경하러 오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듯 그녀는 연극이나 배우들에 관해서 쿠킨이 하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예술에 대한 관객의 냉담과 무지를 탓하는가 하면 무대연습을 할 때 배우들의 포즈를 고쳐주거나 악사들의 태도를 살피기도 했다.어쩌다 지방신문에 연극에 대한 악평이 실려 있으면,그녀는 눈물을 짜고 그 악평을 해명하기 위해 직접 신문사를 찾아 가기도 했다. 배우들도 그녀를 좋아했다.그래서 그녀를‘귀여운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그녀는 배우 들을 동정하였으므로,별로 많지도 않은 돈이면 곧잘 꾸어 주기도 했다.설사 배우들이 지불 날짜에 약속을 어기더라도 남편에게 일러바치지 않고 혼자서 눈물을 찔끔거릴 뿐이었다. 두 내외는 한 겨울에도 행복하게 지냈다.이 야외극장에서는 시내에 있는 극단들이 겨울 공연을 하지않아 텅 비어 있을 때에도 소아시아에서 흘러 들어온 소규모의 극단이나,마술사, 또는 시골 아마추어 연극 동호회 같은 데에 짧은 기간동안을 빌려 주곤 했다. 올렌카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되어 갔으므로 점점 몸이 낫기 시작하고 얼굴도 환해졌다.그러나 반대로 쿠킨은 얼굴도 노랗고 몸은 더욱더 수척해지면서,겨우내 경기가 나 쁘지 않았는데도 손해가 막심하다고 투덜대었다.그는 밤마다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올렌카는 남편에게 딸기라든가 보리수 물을 끓여 먹이기도 하고,때로는 자기의 따뜻한 숄을 씌워 주 기도 했다. "난 당신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녀는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답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쿠킨은 사순절이 가까워오자 모스크바로 극단을 부르러 떠나 갔다.올렌카는 남편이 없는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래서 들창가에 앉아서 별들만 바라보며 밤을 지새곤 했다.그 럴 때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닭장에 수탉이 없으면 괜히 불안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암탉에 견주어 보기도 했다. 쿠킨은 모스크바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편지를 보내 부활절까지는 돌아갈 터이니 극장 일은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일러주었다.그런데 부활절을 한 주일 남긴 월요일 밤늦게 불길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대문 밖에서 누가 커다란 나무통을 쿵쿵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소리 였다.잠이 덜 깬 가정부가 맨 발로 물이 질펀하게 괜 뜰을 지나 대문으로 달려갔다.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문밖에서 굵직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댁에 온 전보요!" 올렌카는 전에도 남편에게 전보를 받은 일이 있지만,이번에는 어쩐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천천히 펼쳤다.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쿠킨 돌연 사망.화요일 장례식.X X X 지시 바람 장례식 다음에 적힌 글자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발신인은 가극단의 무대 감독 이었다. "여보,이게 왠일이에요!" 올렌카는 흐느껴 울었다. "오,나의 소중한 쿠킨!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에요,왜 나는 당신과 만났을 까요.왜 나는 당신 을 사랑했을까요?이 가엾은 당신의 올렌카를 남겨두고, 이 불쌍하고 불행한 올렌카를 남겨 놓고,당신만 혼자서 어디로 가버렸단 말입니까?" 올렌카는 장례식을 화요일에 모스크바에서 치르고 이튿날 집에 돌아왔다.방에 들어서자 침 대에 몸을 던지고,큰길에 서나 이웃집에서나 들릴 정도로 통곡하는 것이었다. ‘가엾기도 해라!' 이웃 사람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서 "저 귀여운 올렌카가 저렇게 상심하다가는 몸을 망치고야 말겠어!" 하고 걱정해 주었다. 그로부터 석달이 지나고 어느 날,수심에 찬 올렌카는 상복을 입고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 에 마침 이웃에 사는 바실리 안드레비치 프스토발로프를 만났다,그도 역시 교회에서 돌아오 는 길이었다.두사람은 나란히 걷게 되었디.사내는 바카에프라는 목재상 주인이었는데,머리에 맥고 모자를 쓰고 금시계줄을 드리운 하얀 조끼를 입은 모습이 상인이라기보다는 시골 지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무두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올렌카 씨." 그는 동정 어린 목소리로 침착하게 타이르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의지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서 설사 누가 죽는다고 하 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슬픔을 참고 그 뜻에 순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대문까지 올렌카를 바래다 주고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녀의 귓전에서는 그의 침착하고 위엄있는 음성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감기만 하면 그의 까만 수염이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올렌카는 그를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그 남자도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 없었 다. 그것은,며칠 후에 안면이 있는 중년 부인이 커피를 마시러 그녀의 집에 찾아왔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그녀는 식탁 앞에 앉자마자 프스토발로프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가 매우 착 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신랑감이라면서,그 사람한테 시집을 가면 뉘집 색시라도 행복할 것이 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간 사실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후 사흘이 지나 프스토발로프 자신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는 한 십분쯤 앉아 있었을까,그 동안에도 말도 몇마디하지 않고 돌아갔다.그러나 올렌카는 벌써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어떻 게 그에게 반했던지 그날 밤은 뜬 눈으로 보내면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가 바쁘게 그 중년 부인을 불러들였다.곧 혼담이 성사되어 결혼식을 올 렸다. 결혼을 하고나서 두 내외는 사이좋게 지냈다.남편은 대체로 점심때까지만 상점을 지키다 가 그 후엔 일부러 밖으로 나가곤 하는 것이었다.그러면 올렌카가 남편을 대신하여 저녁때 까지 계산서를 꾸미기도 하고 목재를 팔기도 했다. "나무 값은 해마다 1할씩이나 오르고 있어요." 그녀는 목재를 사러오는 손님들이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에는 이 고장에서 나는 목재만 가지고도 뒤를 댈 수 있 었는데,지금은 남편이 목재를 구입하러 해마다 모길레프 지 방까지 다녀와야 합니다.그러 니 그 운임도 엄청나게 든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오래 전부터 자기가 직접 목재상을 경영해 온 것처럼 그리고 목재야말로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그리하여 대들보,서까래,판 자,각재,창재 그리고 기둥이니 톱밥이니 한는 말들이 어릴 때부터 귀에 익은 것처럼 정답게 들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두껍고 얇은 판자더미라든지, 시외로 나무를 싣고 가는 마차의 긴 행렬이나, 길이가 30척이 넘는 일곱 치 대들보용 목재 가 곤두서서 재목 저장고를 향하여 군대처럼 행군하는 꿈도 꾸고,통나무,들보 판자와 같은 마른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며 서로 맞부딪치며, 일시에 무너졌다가 다시 스스로 세워지는 꿈 도 꾸다가 자리에서 소스라쳐 깨어나곤 했다.그러면 프스토발로프가 어린애를 다루듯이 이 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지 올렌카? 어서 성호를 그어요." 남편의 생각은 곧 아내의 생각이기도 하였다.가령 남편이 방안이 너무 넓다거나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자연히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남편은 어떠한 오락도 좋아 하지 않았다.그는 공휴일에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올렌카도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집안이나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지만 말고, 더러 극장구경이라도 좀 다녀 보시 죠."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 권해보기도 했으나 그들은 번번히, "우리 그이와 나는 그런 데는 안 가기로 했어요." 하고 그녀는 위엄있는 어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것을 구경하고 다닐 여가가 없어요.극장엘 가 봐야 하나 이로울 게 있어야죠." 이들 내외는 토요일마다 저녁 기도에 참석하고,주일에는 아침 미사에 나갔다. 교회에서 돌아올 때면, 정다운 얼굴을 하고 나란히 걸었다. 그녀의 비단 옷은 사락사락 기 분좋은 소리를 냈고, 남의 눈에도 두 사람은 행복하게 보였다. 집에 돌아오면 버터빵에 여러 가지 잼을 발라서 먹고, 차를 마시고 나서 과자도 먹었다. 날마다 점심때가 되면 이 집에서 는 수프며,양고기나 오리고기 등을 볶는 냄새가 대문밖 한길에 까지 풍겨나왔고,육식을 금하 는 날에는 생선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그리하여 이집 문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군침을 삼키는 것이었다.사무실엔 언제나 따뜻한 차가 끓고 있었다. 그리하여 손님들에게는 반드시 차와 도너스 대접을 했다.이들 내외는 매주 한 번씩 목욕탕 에 갔다가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올렌카는 아는 사람을 만날 적마다 으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다. "남들도 모두 우리 내외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에게 가끔 기도 를 드리지요." 남편이 목재를 사러 모길레프 지방으로 떠나면 다녀올 때까지 그녀는 몹시 적적해 하며, 밤잠도 제대로 자질 못하고 눈물만 짜는 것이었다. 저녁이면 그녀의 집 건넛방에 세들어 있 는 젊은 군속의 수의관 스미르닌이 가끔 놀러 왔다. 그는 올렌카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려 주고 트럼프 놀이도 함께 하였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위로가 되었다. 특히 스미르닌의 가정 이야기는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었 는데, 아내의 행실이 고약해서 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아내를 원망하고 있지만, 매달 40루블씩 아들의 양육비로 보내 준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한없이 측은 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돌봐 주시도록 빌겠어요." 그녀는 층계까지 촛불을 들고 와서 바래다주면서 말했다. "심심한데 와 주셔서 참 고마웠어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건강을 허락하시고 또 성모 마 리아께서도..." 그녀의 말씨는 남편을 닮아서 침착하고 위엄이 있었다.그녀는 아래층 문을 열 고 나가려는 수의관을 세워 놓고 다시 이렇게 충고했다. "부인과 화해하셔야 합니다. 아드님을 봐서라도 부인을 용서해 주셔야지요!어린 자식의 마 음이 그늘지게 해서야 되겠어요." 남편이 돌아오자,그녀는 수의관의 불행한 가정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두 내외는 주거니 받 거니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아버지를 보고싶어 하겠느냐고 남의 일 같지 않게 동정하는 것이 었다. 어느 날 이들은 어떤 생각에선지 성상 앞에 무릎을 꿓고 자기들에게도 자식을 주십사 하고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들 내외는 서로 깊이 사랑하며 6년이라는 세월을 말 다툼 한 번 하지 않고 사이좋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날 바실리 안드레비치는 상점에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목재가 운반되는 것을 살피러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밖에 나갔다가 그만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유명한 의사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의 병세는 조금도 차도가 없더니,넉달을 누워 앓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올렌카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나를 남겨 놓고 당신만 혼자 어기로 갔단 말이요,여보!" 그녀는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통곡하는 것이었다. "당신 없이 앞으로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에요.당신은 내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이웃 사람들이 나를 보살펴 주지만,나는 이젠 고아나 다름이 없어요." 올렌카는 상장이 달린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거나 장갑를 끼는 일이 없었으며,교회나 남편의 묘지에 가는 일 이외에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마치 수도원의 수녀와 같은 생활을 하 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죽은지 6개월이 지나자,그녀는 상복을 벗어버리고 무겁게 닫혀 있던 들창 덧문을 열어 놓기 시작했다.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은 아침이면 때때로 가정부를 데리고 장보 러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집안에서 어떻게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또 어떤 일이 생겼는지,그녀에 대하여는 다만 멋대로 추측해 볼 뿐이었다.그리하여 그녀가 뜰안에서 수의관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느니,수의관이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 주는 것 을 누가 보았다느니 수근거리는 것이었다.그도 그럴것이 그녀가 우체국에서 어떤 친구를 만 나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고장에서는 가축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요.여러 가지 병이 잘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우리는 우유에서 병을 얻기도 하고,무서운 병이 말이나 소로부터 사람에게 옮겨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그러므로 사람의 건강못지않게 가축의 건강도 잘 돌봐야 해요." 그녀는 수의관의 견해를 그대로 남에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미 무 슨 일에 대해서나 수의관과 똑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다.그녀는 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단 일년이라도 배겨내지 못아는 여자임에 분명했다.그리하여 그녀는 자기 집 건넛방에서 새로 운 행복을 찾아냈던 것이다.만약 다른 여자라면 남들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았을 터이지만,올 렌카에 대해서만은 아무도 나쁘게 해석하려고 들지 않았다.그것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 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그녀와 수의관은 자기들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 으려고 노력했지만,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렌카는 비밀을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연대에 함께 근무하는 수의관의 친구들이 간혹 놀러 오면,그녀는 차를 대접하기도 하고,때로는 밤참을 차려내기도 했다.그런 자리에서 그녀 는 페스트와 결핵과 같은 가축의 질병이나,도시의 도살장 문제에 대하여 곧잘 이야기를 꺼 냈기 때문에,수의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그리하여 손님들이 돌아가면 수의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우리 수의사끼리 이야 기를 할 때는 제발 말 참견을 하지 말아요.내꼴이 어떻게 되겠소!" 올렌카는 힌편 놀랍고 한편으로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그를 쳐다보며 이렇게 반문하는 것 이었다. "그럼 난 무슨 말을 해야 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수의관을 껴안으며 화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연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던 것이다. 시베리아 와 같은 그런 먼 곳은 아니지만, 아무튼 상당히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그녀의 곁을 떠나 가 버린 것이다.그리하여 올렌카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이제 그녀는 그야말로 외톨이가 된것이다.아저씨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그가 앉아 있던 의자는 다리가 부러진 채,먼 지만 가득 뒤집어 쓰고 지붕밑 창고 속에 들어가 있었다.이제는 복스럽던 그녀의 얼굴도 상 당히 여위어 귀여움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전과 같이 그녀 에게 반색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그리 고 이젠 행복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울적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해질 무렵이 되면 그녀는 현관 층계에 나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야외극장에서 음악소리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옛 날이나 다름없이 들려왔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욕망도 없이 텅 빈 정원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면 잠자리에 드러누워 페 허나 다름 없는 자기집 정원을 꿈속에서 다시 보는 것이었다. 음식도 먹는둥 마는둥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가장 큰 불행은 무슨 일에 대해서나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었 다.물론 주위에 있는 사물이 그녀의 눈에 띄었으며, 또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지 만,그러한 일에 대하여 아무런 견해도 가질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 몰랐다.이와 같이 자기의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 는지 모른다.예컨대 병이 놓여 있거나, 비가 오거나, 농부가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을 보더 라도,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병이고, 무엇 때문에 오는 비며, 또 무엇하러 가는 농부인지 그녀로서는 화제에 올릴 수도 없었다. 아마 그녀에게 천 루블을 줄 터이니 말해보라고 해도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쿠킨이나 프스토발로프 그리고 수의관과 함께 지 낼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에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럴싸한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있 었다.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릿속이나 가슴속은 자기집 정원처럼 공허하기만 했다.그것은 소 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괴로운 일이었다. 시가지는 점점 사방으로 뻗어나가,츠이칸스카야 슬로보드카도 이제는 큰 거리가 되었다.티 볼리 극장과 목재상이 있던 자리에는 큰 집들이 죽 늘어서고,골목길이 이리저리 뚫려 있었 다.빠른 것은 세월이었다. 올렌카의 집은 연기에 그을리고 지붕은 녹이 슬었으며,창고는 한쪽이 기울어지고,정원에는 잡초와 가시나무가 무성했다.올렌카의 얼굴에도 주름이 많이 늘어갔다.그녀는 여름이면 허전 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층계에 나와 멍하니 앉아 있었고,겨울이면 들창가에 앉아 눈이 내 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교회의 종소리가 훈훈한 봄바람을 타고 들려오면,그녀 는 별안간 지난 날의 추억이 일시에 되살아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리하여 어느 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눈물 자국 을 메우기 때문이었다.브리스카라는 검정고양이가 때때로 그녀의 곁에 와서 야옹거리며 재 롱을 부렸으나,결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그녀에게 고양이의 재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다.즉 자기의 모든 존재,자기 이성과 영혼을 독점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활의 의미를 제시해 주며,식어가는 피를 다시금 끓어오르 게해 주는 사랑이 있어야 했다.그녀는 옷깃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떠밀며 짜증을 냈다. "저리 가!귀찮아!" 그녀는 날마다 아무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아무런 주견도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있었 다.살림은 가정부에게 맡겨 버렸다. 무더운 6월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교외로 나간 가축들이 집안을 온통 먼지로 뒤집어 씌우며 지나갈 무렵에,뜻밖에도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나가서 문을 열고 밖 을 내다보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문밖에는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의관이 평복차림 을 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그러자 그녀에게는 잊어버린 모든 지난 날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녀는 어쩔줄을 몰랐다.그리하여 한 마디 말도 입밖에 내지 못하고,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 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그녀는 너무나 흥분하여 두 사람이 어떻게 집안에 들어오고 또 어떻 게 차를 마시러 식탁에 마주 앉았는지 알수도 없었다. "오,당신이 오셨군요!" 그녀는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디 가 계시다가 이렇게 찾아오셨어요?" "이젠 아주 이 고장에 와서 살기로 했어요." 수의관이 말했다. "군대에서 나왔으니 이젠 내 능력껏 일을 해서 생활의 토대를 잡아야겠소.아들놈도 학교에 입학시킬 때가 되었구요.이젠 그 녀석도 꽤 자랐어요.그리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와 화해를 했어요." "그럼 부인은 어디 계셔요?" 하고 올렌카가 물었다. "아이와 함께 여관에 있어요.지금 셋방을 구하러 다니는 길이지요." "셋방이라니,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우리집에 와 함께 계시면 되잖아요.왜 마음에 안 드세 요?" 올렌카는 다시 흥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 방을 쓰도록 하세요.내가 건넌방을 쓸테니까요.그렇게 하세요.네?" 이튿날,지붕에는 페인트를 칠하고 벽도 희게 새로 칠했다.올렌카는 가슴을 펴고 두 손을 허 리에 얹고서,집안을 돌아다니며 일을 감독했다.얼굴에는 전과 같은 미소가 다시금 피어오르 고,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온몸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수의관의 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밉게 생긴 얼굴에 머리를 짧게 자른 성미가 까다로울 것 같은 여윈 몸집의 여자였다.아들 샤샤는 열 살난 아이치고는 키가 작고 통통한 편이며,파란 눈동자에 오목 파인 보조개를 달고 있었다.아이는 뜰안에 들어서자 고양이를 쫓 아가더니,곧 명랑한 웃음섞인 말로 물었다. "이거 아주머니네 고양이지요?새끼 낳으면 우리 한 마리 주세요.네?엄마는 쥐를 제일 싫어 하니까요." 올렌카는 샤샤에게 차를 따라 주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가슴이 훈훈해져 왔다.그리하여 아이가 친 자식처럼 귀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저녁에 샤샤가 책상에 마주앉아 공부를 하고 있으면,그녀는 기분이 흐뭇하여 그윽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귀엽기도 하지…….어쩌면 어린 것이 저렇게 영리하고 얌전하담!" 샤샤는‘섬은 바다로 사면이 둘러싸인 육지의 한 부분이고……’하고 큰 소리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그러자‘섬은 바다로 사면이 둘러싸인……’하고 올렌카도 받아 읽는 것이었다. 이것이,그녀가 과거 여러 해 동안 자기 주견이라고는 통 모르고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입밖 에 낸 말이었다.이제 비로소 그녀는 자기의 의견을 갖게 된 것이다.그녀는 밤참을 들 때,샤 샤의 부모들과 이야기 끝에 중학교 과목은 아이들에게 어렵기는 하지만 기초적인 고전들을 가르치므로 실업교육을 받게 하는 것보다는 장래를 위해 더 낫다고 말했다.다시 말하면 중 학을 마치면 의사나 기사,그밖에 자기 뜻대로 앞길을 개척할 수 있는 길이 트인다는 것이었 다. 샤샤는 중학교에 입학했다.그의 어머니는 하리코프의 언니네 집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 았으며,아버지는 날마다 가축을 검사하러 출장을 떠나 때로는 2,3일씩 묵고 오기도 했다.그 렇게 되고 보니 샤샤는 자기집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림을 받은거나 다름이 없었 다.올렌카는 이러다가는 샤샤가 굶게 되지나 않을까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그리하여 그녀는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가 거처하는 건넌방에 붙은 조그마한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샤샤가 올렌카에게 와서 얹혀 산지도 벌써 반년이 더 되었다.그녀는 아침마다 아이 방에 들 어가 보았다.샤샤는 한쪽 뺨 밑에 손바닥을 받치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아이를 깨우 는 것이 가엾어서 언제나 망설였다. "얘,샤샤야!"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다!" 샤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서,차 석 잔과 커다란 도너 스 두 개와 버터를 바른 빵을 조반으로 먹었다.잠이 미처 깨지 않아,흔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침을 먹기가 일쑤였다. "샤샤야,너 학교에서 배운 그 우화를 잘 외우지 못하는구나!" 그녀는 마치 아이를 어느 먼 곳으로 떠나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타일렀다. "나는 언제나 네 공부가 걱정된단다.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어야 해.알겠지?" "그 실없는 소리 그만하세요!" 샤샤는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이가 자기 머리보다 더 큰 모자를 쓰고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 쪽으로 향하면, 그녀도 뒤를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샤샤야!" 그녀는 뒤에서 아이를 불러세워 놓고는 대추나 캬라멜 같은 것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학교가 가까이 보이는 골목길로 접어들게 되면,샤샤는 커다란 여자가 뒤쫓아오는 것이 창피 하여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젠 돌아가요,아줌마.나 혼자도 갈 수 있어요." 그럴때도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아이가 학교 문에 들어설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소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끔찍했다.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전에 사랑 한 어느 사람에게도 그처럼 깊은 사랑을 쏟은 적이 없었다.모성애는 날이 갈수록 뜨겁게 불 타올라 헌신적이고 순결하며 자기에게 희열을 안겨 주는 동시에,자기 영혼을 완전히 독점해 버리는 것이었다.자기와는 어떤 핏줄 관계도 없는 이 소년,볼의 오목한 보조개와 커다란 학 생모자를 쓴 이 소년에게, 그녀는 눈물과 기쁨으로써 자기 평생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그녀는 샤샤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나서, 흐뭇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집으로 돌아 왔다.그녀는 이 반년 동안에 한결 젊어보였다. 그리고 얼굴에서는 밝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 다.그리하여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옛날과 같은 친밀감을 느끼며, 다시 말을 걸 어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올렌카씨!요새는 어떻게 지내세요?" "요즈음 중학교 교과서가 꽤 어려워졌더군요?" 그녀는 시장에서 이렇게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었다. "아 글쎄, 어제는 1학년 아이들에게 우화 암송과 라틴어 번역, 그리고 수학 문제 까지 숙제를 내주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이렇게 작은 애들에게 너무 부담이 되 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교사들과 학과 그리고 교과내용에 대해서 까지도 샤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그녀는 세 시에 점심을 먹고,저녁마다 샤샤와 함께 예습을 하기에 진땀을 뺐다.샤샤가 잠자리에 들면 그녀는 몇번이나 성호를 긋고 입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그런 연후에야 그녀도 잠자리에 누워 샤샤가 대학을 마치고,의사나 기사가 되어 마구간과 마차까지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살며,또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이렇게 먼 미래에 대한 환상을 꿈꾸는 것이었다.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런 공상을 하고 있 노라면,뺨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겨드랑이 밑에서 고양이가 쿨쿨 자고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별안간 누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엉겁결에 벌떡 자리에서 일 어났다.숨이 콱 막히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한참 있다가 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하리코프에서 전보가 온 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생각했 다.‘샤샤의 어머니가 이 아이를 하리코프로 보내달라고 전보 쳤나봐.오호,이일을 어쩌면 좋 아!’ 그녀는 크게 실망하여 머리와 손발이 얼음처럼 굳어져 옴을 느꼈다.그리고 세상에서 자기 보다 더 불행한 여자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의사가 클럽에서 돌아온 것이다. "아이 고마워라!"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가슴속에 엉겼던 무거운 쇠뭉치 같은 것이 차차 녹기 시작하 면서 다시 후련해졌다.그녀는 옆방에서 깊이 잠든 샤샤를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누웠다.가끔 아이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싫어!그만 저리가.날 때리지 마!" 안톤 체호프 (1860∼1904) 러시아의 극작가이며 소설가.남러시아의 타간로그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의과대학 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그는 사회의관습과 무지 등으로부터 오는 우수에 찬 어두운 사회 분위기를 섬세하게 그려 냈으며,20여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통해 천 여편의 소설과 10여편의 희곡을 남겼다.대표작으로는「귀여운 여인」「결투」「갈매기」등 이 있다. 어머니 나는 아파트의 뜰안에서 몇몇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와 귀를 기울였다. "새로 세든 사람이 짐꾼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어요." 어떤 여자가 말했다. 그곳은 세빌에서도 가장 난잡한 구역인 라 마카레나 뒷골목에 있는 스페인식 정원 주위에 지어 놓은 이층 임대 아파트였다.그 셋방에는 스페인의 남아도는 노동자와 하급 공무원,우체 부,순경,전차 운전사들이 세를 들고 있어,아이들로 온통 법석대고 있었다. 세대 수는 이십 가구쯤 되었는데,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도 곧잘 싸움도 하고,또 쉽게 화해도 하곤 했다.그리고 끼리끼리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그런데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성품이 상냥하여 서로 의좋게 지냈으며,서로 기꺼이 도와 주 는 것이었다. 한동안 방 하나가 오래 비어 있었는데,그날 아침에 어떤 여자가 세를 들었다.그녀는 한 시 간쯤 뒤에 잡동사니 짐보따리들을 손수 들고,나머지는 짐꾼 한 사람에게 지워 가지고 이사 를 왔다. 말다툼은 더욱 커져 갔다.윗층에 있는 두 여자는 싸움 소리를 엿듣기 위해 발코니에 기대 어 섰다.그들은 새로 이사온 여자가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와,간간이 짐꾼이 대꾸하는 퉁명스로운 소리를 듣고 서로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며 웃었다. "돈을 다 줄 때까진 못 가겠소." 짐꾼이 말했다. "아니,다 줬는데 왜 그래요?댁에서 3리라에 날라 준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천만에요,4리라를 주기로 하고선 딴 소릴 해요?" 그들은 2펜스 반도 못되는 것을 가지고 깎아야 하느니,깎을 수 없느니 하고 다투고 있었다. "그래 요까짓걸 나르는데 4리라나 달라는 거요?이 양반이 돌았구먼!" 그녀는 짐꾼을 떼밀려고 했다. "다 줘야 가겠소." 그는 다시 버티었다. "정그렇다면 1페니만 더 받으시오." "안돼요." 언쟁은 더욱 심해갔다.그녀는 짐꾼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면서 마구 삿대질을 했다.그 러자 짐꾼은 참다 못해 말대꾸했다. "그럼 좋소.1페니만 더 내요.나는 가 봐야겠소.세상에 당신같은 얌체 여편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소." 그녀는 짐꾼에게 돈을 주었다.그러자 그는 침대 메트리스를 내동댕이치고 가버렸다. 그녀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녀가 이삿짐 보따리들을 나를 때 발코니에 서 있던 두 여인은,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쑤군거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흉칙하게 생겼을까.마귀 할멈 같잖아." 그때 여자애 하나가 이층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로잘리아,너 저 여자 봤니?" "짐꾼한테 물었더니 트리아나에서 짐을 싣고 왔대요.4리라 주겠다고 말해 놓고 딴 소릴 했 다지 뭐예요." "이름이 뭐라든?" "잘은 모르지만 트리아나에서는 모두들 라카치라 라고 부르더래요." 그 깍쟁이 여자는 보따리를 운반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그녀는 발코니에서 자기를 바라 보는 여자들을 쳐다보았다.로잘리아는 몸서리를 쳤다. "저는 저 여자가 왜 그렇게 무서워요?" 라카치라는 올해 갓 마흔이었다.여윌대로 여위어 손은 뼈마디가 까칠하고,손가락은 마치 독 수리의 발톱처럼 보였다.볼은 움푹 들어가고 살갗은 쭈굴쭈굴하니 누렇게 떠 있었다.창백하 고 두터운 입술로 입을 벌리면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검은 머리칼의 매 듭은 거칠게 어깨 위로 쳐져 있었으며,밋밋한 머릿단은 양쪽 귀밋까지 드리워져 있었다.눈꺼 풀 속에 깊이 박힌 크고 검은 눈동자는 사납게 번쩍거려,아무도 감히 말을 건넬 엄두도 못 낼 만큼 표독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았으므로 이웃 사람들의 의심은 더욱 높아갔다.그들은 그녀 의 초라한 옷차림에서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는 날마다 아침 여섯시에 밖 으로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그러나 무슨 일을 해서 살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웃 사람들은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 순경더러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여자가 공공질서를 방해하지 않는 이상 무엇 때문에 야단들이오." 하고 순경이 말했다. 그러나 이곳 세빌에서는 남에 대한 험담이 금새 퍼지는터라 며칠 후에 이층에 살고 있는 석 공이 트리아나에 사는 자기 친구가 그녀의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그의 말에 의하면, 라카치라는 살인죄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한 달 전에 풀려 나왔다는 것이다.그녀는 트리아나에서 살고 있었는데,동네 아이들이 그일을 안 후에는 마구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 부었으므로,그녀는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쥐어박으며 한바탕 소동를 일으킨 끝에 주인에게 쫓겨났다는 것이다.그러자 그녀는 어느 날 아침에 집 주인과 자기를 쫓아낸 모든 사람들에 게 악담을 퍼붓고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누구를 죽였어요?" 로잘리아가 물었다. "그 여자의 애인이란다." 석공이 대답했다. "어머,그런 여자에게도 애인이 있었나요?" 로잘리아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성모 마리아여!" 로잘리아의 어머니 필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해치지 않게 해 주소서!내가 뭐라고 하더냐,꼭 살인범같이 생겼다고 했지?" 로잘리아는 몸을 떨면서 성호를 그었다.그때 라카치라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 쑤근거리던 사람들은 섬짓하며 한데 뭉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두려운 얼굴로 그녀의 험상 궂은 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들이 잠자코 있었으나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지 의아스 러운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순경이 안녕하시냐고 말을 걸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고선 그들 앞을 재빨리 지나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 아버렸다.그리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흉칙하고 사나운 눈으로 사방을 두리 번 거렸다.사람들은 무슨 불길한 주문에 홀리기나한 것처럼 나지막한 소리로 수근거렸다. "저 여자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들어 있나봐." 로잘리아가 말했다. "마뉴엘,당신이 마침 곁에 있어서 우리를 지켜 줄테니 다행이군요." 로잘리아의 어머니가 순경에게 그렇게 거들었다. 그러나 라카치라는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녀는 아무에게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 일만 해나갔으며,남과 가까워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자기의 비밀을,이웃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의 주름살은 더욱 거칠어지고 깊숙이 박힌 눈망울은 한층 냉혹하게 보였다. 그러나 차츰 그녀에 대한 이웃 사람들의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다.수다스러운 필라도 때때 로 뜰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말없이 지나가는 이 사나운 여인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을 다시 쑥덕공론으로 몰아넣은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아파트의 정문에 어떤 젊은 남자가 나타나 안토니아 산체스라는 사람을 찾았다.뜰안에서 스커트를 꿰매고 있 던 필라는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움츠리고 말했다. "여기 그런 분은 살지 않는데요." "여기 살고 있을 텐데요." 하고 청년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참,그여자를 라카치라고도 부릅니다." "아 그러세요.저 방이에요." 로잘리아가 대문을 열고 방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청년은 로잘리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혈색이 좋고 큰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였다.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는 붉은 카네이션이 꽂혀 있고,풍만한 가슴에는 젖꼭지가 블 라우스 위로 불룩 솟아나 있었다. "당신을 낳은 당신 어머니께 축복을 드립니다.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방문을 두드렸다.모녀는 청년의 뒤를 유심히 바라 보았다 "누굴까?그녀를 찾는 사람은 통 볼 수 없었는데……." 필라가 말했다.방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라카치라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하고 그가 말했다.문이 삐걱거리더니 활짝 열렸다. "큐리토!" 그녀는 청년의 목을 껴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그리고 사랑에 넘치는 제스처로 아들 을 쓰다듬고 얼굴을 받쳐 들었다.이 광경을 바라보던 모녀는 그녀에게 그런 나긋나긋한 데 가 있는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그녀는 너무나 반가워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들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 여자의 아들이군요." 로잘리아가 놀라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누가 저런 근사한 아들이 있는 줄 상상이나 하겠어요." 큐리토는 약간 마른 얼굴에 희고 고른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머리를 짧게 깎고 관자놀이 위를 면도질한 것으로 보아,안달루시아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그는 어른다운 수염 자국이 갈색 피부에 푸르죽죽하게 보이는 멋쟁이였다.아닌게 아니라 그의 멋진 옷매무새는 사람들 의 호감을 살만했다.몸에 꼭 끼는 바지에 짧은 조끼며,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셔츠는 최신 식이었으며,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라카치라의 방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아들의 팔을 끼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주일에 또 오겠지?" 그녀가 물었다. "네,별일이 없으면 오지요." 청년은 로잘리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자기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로잘리아에게도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하는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그녀가 말했다. 로잘리아는 그에게 눈웃음을 쳐보였다.그녀의 검은 눈은 아름답게 빛났다.라카치라는 이 광 경을 훔쳐보고 얼굴에 넘치던 기쁨도 사라져 버린 듯 실쭉해지더니,다시 갑자기 먹구름처럼 어두워지는 것이었다.그녀는 무섭게 얼굴을 찌푸리고 그 아름다운 소녀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당신 아들이에요?" 청년이 저만치 사라지자 필라가 물었다. "그래요.내 아들이요." 라카치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고 자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녀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누그러지게 할 수 없었다.그녀는 행복할 때에도 남들이 가까이 지내려는 것을 물리치곤했다. ‘참 멋쟁이야!’로잘리아는 혼자서 중얼거렸다.그녀는 그후 며칠 동안 그 청년 생각을 했 다. 라카치라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끔찍했다.아들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전부였다. 그리하여 질투에 가득찬 불같은 열정으로 아들을 사랑했다.그것은 아무리 극진한 효도로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그녀는 자기가 아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 다.아들의 직장관계로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떨어져 있는 동안에 아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그녀는 아들이 어떤 처녀에게 청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이곳 세빌에서는 귀가 솔깃한 처녀에게 총각이 달콤한 말을 소곤거리며 밤중까지 창가에 앉아 있거나,또는 쇠울타리나 대문간에 서서 한 쌍의 남녀가 소근거리는 광경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라카치라는 멋진 청년은 뭇여성들의 미소를 한몸에 받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아들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그러면 아들은 으 레 저녁이면 일에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그녀는 아들이 거짓말을 하 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부정을하면 마냥 기뻤던 것이다. 그녀는 로잘리아의 자극적인 시선에 미소로 대답하는 아들을 보자 분통이 치밀었다.그녀는 전부터 이웃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었다.그들은 행복하지만 자기는 비참한데다가,그 무서운 비밀까지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녀는 모두들 한 패거리가 되어 아들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미칠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더욱 그들을 미워했다. 그녀는 다음 일요일 오후에 자기 방에서 나와 뜰안을 가로질러 대문간에 서 있었다.이웃 사람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저 여자가 왜 저기 서 있는 지 아세요?귀한 아들이 이제 곧 오실텐데,우리에게 그 아들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거예요." "흥,우리가 자기 아들을 잡아 먹나?" 이윽고 아들이 도착했다.그러자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아들을 재빨리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아들에 관한 것이면 애인처럼 질투하는군." 필라가 말했다. 로잘리아는 다시 깔깔대면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반짝이는 눈에는 짖궂은 생각으 로 가득차 있었다.큐리토와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어 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라카치라가 노발대발할 것을 생각하니 아 주 우스웠다.그녀는 그들 모자가 외출을 하려면 자기를 지나쳐가지 않을 수 없도록 대문간에 나가 서 있었다.그때 라카치라는 로잘리아를 보자 아들과 시선을 나눌 수 없도록 아들을 가로막는 것이었다.로잘리아는 어깨를 으쓱 치 켜올렸다. "흥,나를 그렇게 쉽게 물리치지는 못할걸!"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일요일 라카치라가 대문간에 나와서 기다릴 때,로잘리아는 멀찌감치나가 그 청년이 오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서성거렸다.이윽고 큐리토가 나타났다.그러나 그녀는 못본체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놓았다. "안녕하세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네었다. "어머,전 또 누구시라구!당신은 저에게 말을 통 건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두려울테니까 요." "저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는 으시대며 말했다. "당신의 어머님은 빼놓고 말이죠?" 그녀는 마치 그가 자기 곁에서 떠나 주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마지못해 걸어갔다.그러나 그 가 결코 자기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큐리토,당신이 그걸 알아서 무엇하겠어요?빨리 어머니한테나 가 보세요.도련님!그렇지 않 으면 매를 맞을 테니까요.당신은 어머님하고 함께 있을 때는 무서워서 내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면서 뭘 그러세요." "원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잘가요.저는 볼일이 있어서 그만 가야겠어요." 로잘리아는 점잖게 돌아가는 그를 뒤돌아 보고 혼자서 깔깔 웃었다. 젊은이가 어머니와 함께 외출할 때 로잘리아는 전과 같이 또 뜰안에 있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발을 멈추고서 인사를 했다.라카치라는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큐리토,이리 와!" 그녀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거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거냐?" 그는 발길을 돌렸다.로잘리아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고 잠깐 멈칫하다가 자제하고 그냥 어 둠컴컴하고 고요한 자기방으로 되돌아갔다. 며칠 후에 이곳 세빌의 수호성인 이시돌의 축제가 있었다.석공과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이 휴일을 경축하기 위해 아파트 뜰에 초롱불을 한 줄로 죽 달아 놓았다.그 초롱불은 맑게 개인 여름 밤을 찬란히 밝히고 있었다.하늘은 반짝이는 별들을 반가이 맞아 주는 것 같았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뜰 한복판의 의자에 모여 앉아 있었다. 부인네들은 어린 것에 젖을 빨리고 부채질을 하면서 수다을 떨다가는,좀 나이가 찬 애가 보채기라도 하면 마구 윽박지르는 것이었다.그날 저녁 한 때의 시원한 공기는 숨막힐 듯한 한낮의 더위에 비하면 매우 상쾌했다.투우 구경을 하고 돌아온 이들은 떠들어대면서 유명한 투우사 벨몬테의 재주를 그대로 재연하는 것이었다.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다채롭게 변해 갔 다.그들은 생생한 상상력을 더듬어 가면서 일찍이 이곳 세빌 역사상 유래가 없는 매우 훌륭 한 연기를 했다고 지껄여댔다.뜰안에는 라카치라만 빼놓고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촛불만이 외롭게 깜빡거렸다. "그런데 그 여자의 아들은 어디 갔어요?" "방에 있어요." 필라가 말했다. 한 시간 전에 이리로 지나갔어요." "아마 재미를 보고 있을 테지요." 로잘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로잘리아!라카치라의 걱정은 그만하고 춤이나 한번 추어보지 그래." 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자, "그래,그래.아가씨가 한번 춰보지." 하고 모두를 입을 모아 말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춤추기를 좋아하지만,남이 춤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옛날부터 스페인 여자치고 춤추기위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모두들 재빨 리 빙 둘러앉았다.석공과 전차 차장이 기타를 가지고 나왔다.로잘리아는 케스터네츠를 손에 쥐고,자기 또래의 소녀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큐리토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비좁은 방안에서 귀를 기울였다. ‘춤들을 추는군.’그는 혼자 중얼거렸다.그는 금새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커튼 사이로 초롱불이 환히 비치는 가운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내다보았다.두 소녀 가 춤을 추고 있었다.로잘리아는 나들이 옷에 이곳 풍속대로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그리 고 그녀의 머리에 꽂힌 한 송이 아름다운 카네이션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그는 가슴이 마 구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는 사랑이 급속도로 움트고 자랐다.그는 처음 로잘리에게 말을 걸던 날부터 줄 곧 이 아름다운 아가씨 생각만 해 왔었다.그는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너 거기서 뭘하고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춤추는 걸 구경하고 있어요.어머니는 제가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로잘리아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어머니는 가로막으려고 했다.그러자 아들은 어머니를 밀치고 밖에 나가 춤 구경을 했다.어 머니는 한두 발짝 따라가다가 그만두고,어둠컴컴한 곳에서 화가 잔뜩나 애를 태우고 있었다. 로잘리아는 그를 보았다. "저를 보고 놀라셨지요?"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가면서 말했다.춤은 그녀의 마음을 미치게 했으므로 라카치라는 전 혀 두렵지 않았다.한차례의 춤이 끝나자,그녀의 파트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는 서 슴치 않고 큐리토에게 가서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쑥 내밀며 다가섰다. "당신은 물론 못 추지요?" 그녀가 말했다. "천만에요,출 줄 압니다." "그럼 오세요." 그녀는 애교있게 눈웃음을 쳐 보였으나,그는 망설이고 있었다.어깨너머로 어머니를 뒤돌아 본 것은 아니었으나 어둠 속에서 혼자 갇혀 계신 어머니의심정을 헤아려 보았던 것이다.로 잘리아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두려우세요?" "두려울 게 뭐 있어요?" 그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은 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기타를 치는 사람들의 솜씨가 서툴렀 으므로 구경꾼들은 때때로 ‘헤잇,해잇’하고 소리를 질러 박자를 맞춰가면서 손뼉을 쳤다. 로잘리아가 큐리토에게 캐스터네츠를 주었다.그리고 두 남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그들의 귀에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독사처럼‘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이제 로잘리아는 춤에 도취되어 앞뒤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그녀는 씩씩대며 어둠 속에 희미하게나마 나타난 무섭도록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라카치라는 춤추는 동작하며 좌우로 흔들어대는 몸집과 뒤얽힌 발걸음새를 잠자코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아들이 캐스터네츠를 치며 로잘리아를 껴안았을 때,그녀가 요염하게 교태를 부리며 몸을 뒤로 젖히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것이 눈에 띄었다.그러자 그녀의 두 눈은 불타는 석탄처럼 이글거려 눈동자 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그녀는 격분한 나머지 신음소리를 질렀다.춤이 끝나자 주위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했다.로잘리아는 이에 응답하면서 생글생글 웃으며 큐리토에게 그가 그처럼 춤을 잘 추는 줄은 미쳐 몰랐다고 말 했다. 라카치라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아들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지만 못 들은체 했다. "그럼 가보겠어요." 하고 아들은 말했다. 어머니의 가슴은 괴로움으로 인해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녀에 게는 아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전부였으며,이 세상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전부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이 미웠다.그녀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빼앗아 가려 한다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일하러 가지 않고 로잘 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로잘리아는 어젯밤의 그 황홀한 춤으로 인하여 약간 구겨진 옷차림 을 하고 나타났다.라카치라가 별안간 소녀의 앞을 가로막아섰다.소녀는 질겁을 했다. "내 아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슨 말씀이세요?" 로잘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카치라는 격분한 나머지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그러더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깨물었다. "야,내 말을 뻔히 알아들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구나.너는 내 아들을 나한테서 빼앗아 가려 는 거야?" "내가 당신의 아들을 원하는 줄 아세요?제발 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그런데 내 가 가는 곳마다 뒤따라오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거짓말 말아!" "그럼 아드님에게 물어 보세오." 로잘리아의 목소리가 하도 앙칼졌으므로 라카치라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저를 만나기 위해 거리에서 한 시간씩이나 기다리고 있어요.왜 당신은 아들을 붙잡아 두 지 못하나요?" "거짓말 말아!네가 그러면서 뭘 그래!" "제가 원한다면 애인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제가 왜 하필 살인범의 아들을 원하겠 어요." 라카치라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피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눈앞이 캄캄했다.그녀는 그만 로잘 리아에게 덤벼들어 머리칼을 와락 잡아 흔들었다.소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피하려고 애 썼다.마침 지나가던 남자가 달려들어 그들을 떼어 놓았다. "큐리토에게서 손을 떼지 않으면 죽여버릴테다." 라카치라는 외쳤다. "그럼 누가 겁낼 줄 알아요?떼어놓을 수 있으면 떼어 놓아 봐요.당신 아들은 나를 자기 눈 동자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요." "이제 그만 돌아가요." 하고 말리던 남자가 말했다. "로잘리아,말대꾸를 하지 마!" 라카치라는 격분한 나머지 마치 먹이를 빼앗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거리로 뛰쳐나갔 다. 그날 밤의 춤은 큐리토를 미치게 하였다.그는 로잘리아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이튿 날 그는 종일 그녀의 붉은 입술만 생각했다.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마음 속에서 빛났으며 그 를 황홀케 했다.그는 열렬히 그녀를 원했다.저녁이면 마카레나 방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로잘리아의 집앞에 가 닿는 것이었다.그러면 그녀가 뜰안에 나타날 때까지 그는 어두운 현관앞에서 기다리곤 했다.맞은편 끝에 있는 그의 어머 니 방에서는 불길이 외롭게 비치고 있었다. ‘로잘이아!’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돌아 보았다. "오늘은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러자 그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어요." "왜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오늘 아침에는 당신의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고 한 걸 아세요?" 그녀는 안달루시아인의 특유의 과장된 말씨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다만 그의 어머니 를 크게 격분시킨 자기의 마지막 모욕적인 언사만은 빼놓았다. "어머니는 악마의 성격을 갖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그는 허세를 부리며 말을 계속했다. "제가 어머니께 말씀드리지요.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퍽이나 좋아하실 걸요?" 하고 로잘리아는 비꼬았다. "우리 아파트 문앞까지 와 주겠어요?" "글쎄요." 큐리토는 킬킬거리며 웃었다.왜냐하면 그녀의 말투로 보아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 다.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전에 없이 신이났다. 이튿날 그가 와 보니 그녀가 먼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세빌 지방의 전통적인 연애방식에 따라서 철문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소근거렸다.그래도 큐리토에게는 그 철문 이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를 사랑해 주시겠어요?” 하고 그가 로잘리아에게 물었을 때,그녀는 대답 대신에 요염한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그들은 서로의 눈속에세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불꽃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밤마다 그녀를 찾아갔다.그녀를 찾아가는 것을 어머니가 알까 두려워,다음 일요일에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불쌍한 어머니는 아들이 오기를 가슴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 다.그녀는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아들에게 용서를 빌 생각이었다.그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 았다.그녀는 아들이 미웠다.차라리 발로 밟아 죽이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아들을 만나볼 희망 조차 없이 또 한 주일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막했다. 아들은 두 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외롭고 괴로웠다.그녀는 어떤 애인도 따르지 못할만큼 아들을 사랑했다.그녀는 아들이 오지 않는 것이 필경 로잘리아 탓이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중얼거렸다.그녀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 었다. 드디어 큐리토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찾아보러 갔다.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 있었다.사 랑이 식어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키스를 하려는 아들을 떠밀었다. “그 동안 왜 안왔니?” “어머니는 제가 못들어가게 문을 잠가 놓으셨더군요.그래서 저를 싫어하 시는줄 알았어 요.” “그 뿐이야,다른 이유 없어?” “무척 바빴어요.” 그는 어깨를 움추리며 말했다. “뭐 바빴다고?너 같은 게으름뱅이가 그 동안 뭘하고 있었던 거야?로잘리아를 만나러 갈 때는 바쁜일이 없었을 테지.” “어머니는 왜 그 여자를 때렸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그녀를 만났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성큼 다가갔다.그녀의 두 눈에선 불길이 번쩍였다. “그년이 날보고 살인범이라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냐구?” 그녀는 뜰안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내가 살인을 한것도 다 너 때문이다.내가 페티 산티를 죽인 것도 그 자가 너를 심하게 때렸기 떄문이다.그래서 나는 7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그것도 다 너를 위해서였다.7년 이라는 세월은…… 참으로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넌 그년이 널 사랑하고 있는 줄 아는구나. 그년은 밤마다 대문에 서서 세월을 보낸다 ” “다 알고 있어요.” 아들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머니는 화가 치밀었다.분해서 미치겠다는 시선으로 아들을 쏘아보았다.그리고는 모든 것 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고통과 분노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괴로움이 극에 달해 가슴이 미어 지는 것 같았다. “그래 밤마다 대문까지 오면서 나에게는 안들리다니.그렇게 야속할 데가 어디 있느냐.나는 이날 이때까지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사양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페티 산티를 사랑한 줄 아니?난 너에게 빵을 얻어 먹이기 위해 그 자의 주먹질도 참 아 온거야.그 자가 너를 때릴 때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자를 죽여버린 거다.하느님 맙소 사!나는 너를 위해 살았을 뿐이다.네가 아니었던들 나는 그처럼 오랜 세월 감옥살이를 하느 니 차라리 죽어버렸을 거다.” “어머니,이성을 되찾으세요. 저는 스무살이에요.글세 어머니께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거 예요?로잘리아가 아니더라도 저는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거예요.” “에잇, 짐승만도 못한 놈! 보기 싫다.저리 썩 나가!” 그녀는 아들을 문 쪽으로 난폭하게 떠밀었다.아들은 어깨를 움추렸다. “내가 여기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세요?” 아들은 뜰안을 성큼성큼 지나 철문을 꽝 소리나게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라카치라는 비좁은 방을 왔다갔다 했다.시간이 무척 지루했다.그녀는 오랫동안 들창가에 서서 마치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로 가슴 찢어질 둣한 분노를 억제 하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누가 밖에 있다는 신호로 손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숨을 헐떡이면 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밖을 응시했다.그것은 석공이었다.그녀는 좀더 기다려 보았다.이번에 는 로잘리아의 어머니 필라가 나타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라 카치라는 숨이 막히는 것을 참고 여전히 기다렸다.가끔 사지가 떨려왔다.잠시후에 ‘누구세 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카치라는 로잘라아의 목소리임을 확인하자 일종의 만족감으로 인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 었다. 위로 문이 열리더니 로잘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그녀의 거동 속 에는 삶의 환희가 넘쳐 흘렀다.그녀가 막 층계에 발을 올려 놓으라고 할 때였다.라카치라는 쏜살같이 뛰어나가 그녀를 가로막고 팔을 꽉 잡았다.그녀는 뿌리치려고 하였으나 몸을 뺄 수 없었다. “어쩔 셈이에요? 어서 놔요!” 하고 로잘리아는 말했다. “ 그 동안 내 아들과 어떻게 지내왔니?” “이거 놓지 못해요.소리를 지를 거예요” “너희들이 대문에서 밤마다 만난다는게 사실이야? ” “ 엄마,사람 살려요!안토니오!” 로잘리아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봐!” “정 알고 싶으면 말하겠어요.당신의 아드님은 나와 결혼 하려고 해요.나를 사랑하고 있어 요……그리고 나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요.” 그녀는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라카치라에게 대들었다. “당신이 우리 사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무서워 하는 줄 아세요?나보고 당신을 미워 한다고 했어요.그리고 당신이 감옥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 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애가 너 한테 그렇게 말하던?” 라카치라가 한 발짝 물러서자 로잘리아는 계속 퍼부어 댔다. “그래요,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그리고 또 있어요.당신이 페티 산티를 죽이고 7년 징역살 이를 했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로잘리아는 이 비참한 여자가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추리는 것을 보고,깔 깔대며 표독스럽게 꾸짖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살인자의 아들과 결혼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 각해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라카차라를 떠다밀고 나서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그러자 라카 치라는 모욕에 눈이 뒤집혔다.그녀는 참을수 없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짐승 같은 괴성을 지 르면서 로잘리아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층계 아래로 끌어내렸다.로잘리아는 홱 돌아서 며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라카치라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저주에 찬 말을 한 마디 지르고 로잘리아 의 목에 꽂았다.로잘리아가 비명을 지렀다. “엄마!나 죽네…….” 하며 그녀는 층계 아래로 떨어져 돌바닥 위에 쓰러졌다.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이 절망적인 비명소리에 놀라 대여섯 개의 방문이 일제히 화다닥 열렸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라카차라를 잡으려고 하였다.그녀는 벽쪽으로 뒷걸음을 치며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들을 노려 보았다.그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때 필라가 비명을 지르며 발코니 사이에서 뛰어 나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로 쏠렸다.라카차라는 이틈을 타서 도망쳐버렸다.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마당은 삽시간에 사람들로 득실거렸다.필라는 대성통곡을 하며 딸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의사를 부르러 가고 어떤 사람은 경찰을 데리러 갔다.거리에서 구경꾼들이 몰 려와 방문을 둘러쌌다. 의사가 검정 가방을 들고 급히 들어왔다.이어서 경찰이 달려오자,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 이 흥분된 말투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라카치라의 방문을 가리켰다. 경찰관들은 그녀의 방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격투 끝에 경찰관들이 그녀에게 수갑을 채워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그들을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경찰들은 그녀를 에 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칼집으로 마구 휘둘러서 흩어지게 하였다.그러나 사람들은 주먹을 휘 두르면서 라카치라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은 만족감으로 빛났다.경찰들은 그녀를 끌고 뜰안을 거쳐 죽은 로잘리아의 곁을 지나갔다. “죽었어요?” 하고 라카치라가 물었다. “그렇소.” 의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느님,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모옴(1874∼1965)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면서 의학 공 부를 했으 나,1897년에 첫소설「램버스 라이자」를 써서 주목을 끌면서 작가가 되었다.날카로운 필 체와 기지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그의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소설에「인간의 굴 레」「달과 6펜스」「면도날」,희곡으로「훌륭한 사람 들」「눈호스」등이 있다. 오월은 결혼의 달 만약 시인이 5월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거든 그놈의 눈알을 후벼버리게.5월은 재앙과 광 증을 일으키는 악마가 날뛰는 달이니까.잎사귀가 피어나는 숲속에서는 작은 악마와 재잘거 리는 계집애들이 함께 다니고,도시나 시골에서는 그 심술쟁이 악마가 꼬마들을 거느리고 싸 질러 다니는 걸세. 5월이 되면 우리에게 자연이 손가락질 하면서‘너희들은 신이 아니야.아무리 뽐내어도 다 내 족속에 불과해’라고 말한다네.그것은 잡채 요리에 쓸 조개나 당나귀와 형제요,오랑채꽃 이나 침팬지의 직계후손이요,구구 우는 비둘기며,꽥꽥거리는 오리새끼,가정부 계집애나 공원 을 순찰하는 순경과 사촌간이라고 하네. 큐피드가 5월에 화살을 날리면 백만장자가 여자 속기사와 결혼을 하고,현명한 교수님께서 싸구려 요리집 카운터에서 흰 에이프런을 두르고 껌을 씹는 아가씨에게 매혹되며,학교의 여 선생은 방과 후에 짓궂게 구는 덩치 큰 남학생을 혼자 남아있게 한다네.사내들이 잔디밭에 나가면 줄리엣 아가씨가 망원경을 눈에 대고 창가에 기대 서 있으며,젊은이들이 짝을 지어 산책을 나서기만 하면 으레 돌아올 때에는 부부가 되어 있다네.그리고 늙은이들도 한껏 빼 입고 여학교 주위를 서성거리곤 하지.그러나 그 뿐인가.버젓이 결혼한 놈들까지 주책없이 마 음이 들떠 마누라 등을 두드리며‘요새 기분이 어때,여보……’하며 낑낑거리지 않나. 이같은 오월에 여신이 다 뭐야,다만 요부에 지나지 않지.5월은 사교계에서 흥청대는 여름을 위해 마련한 무도회에까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우리를 골탕먹인다네. 늙은 카울슨씨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환자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그는 한쪽 발에 심한 풍증을 앓고 있는 환자로,그래머 시 공원 근처에 집 한 채와 백만장자의 절 반쯤 되는 돈과 말 한 마리를 갖고 있었다.집안 일은 한 사람의 가정부 위덥 부인이 하고 있었다. 5월이 카울슨씨의 육체를 쑤셔댈 때,그는 산비둘기의 오라비가 되었다.그가 앉아 있는 곳에 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창가에는 노란 수선화,히야신스,제라늄,오랑캐꽃 그리고 이런 꽃을 심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수런대는 바람이 그 향기를 방안에 실어 보내곤 했다.꽃향기와 풍증에 바르는 고약의 악취사이에서 큰 게임이 벌어졌고,고약이 쉽게 이겼다.그러나 그때는 이미 꽃향기가 늙은 카울슨씨의 코에다 한 대 먹인 뒤였다.인간을 영낙없이 매혹시키는 요 부와같은 5월이,그 짓궂은 장난을 이미 저지른 것이다. 지하철위에 서 있는 큰 도시의 냄새와,마치 특허권이라도 갖고 있는 듯한 봄 냄새가,공원을 거쳐 카울슨씨의 코에 닿았다.뜨거운 아스팔트의 냄새,지하실의 냄새,가솔린 박하 귤껍질 하 수도의 냄새,뉴욕제 그램 기계,이집트제 궐련,몰타르 그리고 새로 나온 신문의 잉크 냄새가 방안에 풍겨 왔다.불어오는 바람결은 달콤하고 부드러웠다.문밖에서는 참새들이 짹짹 울고 있었다. 카울슨씨는 흰수염 끝을 한 번 꼬아보고,아픈 발에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 달린 벨을 눌렀다. 위덥 부인이 들어왔다.귀엽고 예쁘장하게 생긴 그녀는 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나이 는 마흔이지만,생김새는 여우 같았다. "하긴스는 밖에 나가고 없습니다." 그녀는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고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편지를 부치러 갔어요.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그 약을 먹을 시간이 되었어." 하고 카울슨씨는 말했다. "좀 타줘요.약병이 저기 있으니까.세 방울만 물에 타요.망할 놈의 히긴스 녀석 같으니!간병 을 제대로 못해서 내가 당장 이 의자 속에서 숨을 거둬도 이놈의 집에서는 걱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위덥 부인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슬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열 세 방울이라 하셨죠?" "세 방울이라니까!" 하고 늙은 카울슨씨는 말했다.그는 약을 마시고 나서 갑자기 위덥 부인의 손을 꽉 잡았다.그 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위덥 부인!" 카울슨씨는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주위는 봄이 한창이요." "그러믄요." 하고 위덥 부인은 말했다. "바람이 한결 따뜻해졌어요.거리의 모퉁이마다 맥주 광고가 나붙구요.공원은 온통 꽃으로 울긋불긋 하구요.그리고 제 다리며 몸에서는 새 싹이라도 움트려는지 온통 들쑤시는군요." ‘봄에는…….’하고 카울슨씨는 자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읊조렸다. ‘봄에는 인간의 꿈이 사랑을 향해 쏠리고…….’ "저런,보세요!" 하고 위덥 부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공기도 말씀예요!" 카울슨씨는 계속했다. ‘봄에는 활짝 피어난 꽃들이 윤기가 흐르는 비둘기 위에 빛나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매우 활달해요." 위덥 부인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덥 부인!" 중풍이 든 발에 경련이 일어났다.카울슨씨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이 없다면 이 집이 얼마나 쓸쓸할까!나는 이미 늙어버렸지만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소. 오십 만 달러에 해당되는 정부의 공채와,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애정이,설사 청춘의 정열로 불타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타오를 수 있다면 참된……." 바로 옆방 문에 쳐 놓은 휘장 옆에 있던 의자가 뒤집혀지는 요란한 소리가,이 5월의 희생 자 말을 가로 막았다. 메마르고,꼿꼿하고,키가 크고,코도 높고,무표정하고,당당한 서른 다섯 살 난 그래미 시 공원 의 이웃 사람다운 밴미커 콘스탄시아 카울슨 양이 방안으로 활개를 치며 들어왔다.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위덥 부인은 재빨리 허리를 굽혀 카울슨씨의 병든 발에 감긴 붕대를 살 펴 보았다. "전 히긴스가 와 있는 줄 알았어요." 하고 카울슨 양이 말했다. "히긴스는 밖으로 나갔다." 하고 아버지가 설명했다. "벨을 울렸더니 위덥 부인이 와 주었다.위덥 부인!좀 나은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뭐 별로 더 시킬 일은 없습니다." 가정부는 심문이라도 하는 듯한 카울슨 양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 어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봄날 치고도 유난히 맑게 개였나보지?" 늙은이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렇군요." 하고 카울슨 양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참 위덥 부인은 언제부터 휴가예요?" "오늘부터 1주일 동안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카울슨 양은 들창 가에 서서 앞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을 바라보았다.오후의 무르익은 햇살 이 이글거렸다.그녀는 흉칙한 5월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꽃들을,마치 식물학자라도 된듯이 바라보았다.콜론 지방에서 온 처녀다운 차디찬 피가 따뜻한 자연의 공세를 받아 싸 우고 있었다.그리하여 따뜻한 햇살도 냉랭한 그녀의 가슴을 에워싼 싸느러한 갑옷에 부딪치 면 서리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꽃향기도 그녀의 잠자는 마음 속 깊은 미지의 골짜 기에 부드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참새들의 웃음소리도 괴롭게 들렸다.그녀는 5 월을 싫어했다. 그녀는 이 계절에서 아무런 침해도 받지 않고 있지만,이 봄이 지닌 힘만은 분명히 알고 있 었다.그리고 늙은이들과 이미 허리통이 굵어진 여자들이,마치 훈련을 받은 벼룩처럼 오월의 행렬 속에 뛰어드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만큼 오월은 짓궂은 달이었다.그녀는 일찍이 가 정부와 결혼한 어수룩한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감정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튿날 아침 여덟 시쯤해서 얼음 장수가 왔을 때,요리사는 카울슨 양이 지하실에서 그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그래 그곳이 올콧 앤드 데큐 회사가 아니냐고?정확한 이름을 불러야지,그런데가 어디 있 어?" 얼음 장수는 약간 뻐기며 요리사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못이기는 체 가며 걷어올린 셔츠 소매를 내리고,얼음 집는 갈구리를 걸어 놓 고는 지하실로 들어갔다.그는 카울슨 양이 인사를 하자 곧장 모자를 벗었다. "이 지하실은 뒷문이 있어요." 하고 카울슨 양이 말했다. "옆집에 있는 공터를 통하여 출입할 수 있는 뒷문 말이에요.새 집을 짓기 위해 땅을 닦고 있으니까요.두 시간 안으로 얼음 천 파운드를 그 길로 날라다 주세요.운반하는 데 한두 사람 더 써도 좋아요.놓아 둘 장소는 내가 가르쳐 드리지요.그리고 사흘 동안 계속 그 길로 얼음 을 천 파운드씩 갖다 주세요.당신 회사에서는 우리집 계산서에 액수를 적어 넣었다가 청구 하면 될 거예요.이건 당신에게 드리는 특별 서비스예요." 카울슨 양은 십 달러 짜리 지폐를 한 장 얼음 장수 앞에 내밀었다.그는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뒤로 돌려 모자를 잡고 있었다. "아가씨,지금 곧 해드립죠.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어요." 가련한 5월.카울슨씨는 정오 때쯤 되어 탁자에서 유리 컵 두 개를 내동댕이치고,벨의 스프 링이 끊어지자 큰 소리로 히긴스를 불렀다. "도끼를 가져와!" 카울슨씨는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청상가리를 몇 병 사오든지 순경을 불러다가 나를 쏘아 달라고 해.얼어 죽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거야."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것 같은뎁쇼." 하고 히긴스가 말했다. "전에는 이렇게 춥진 않았는데요.창문을 닫아 드릴까요?" "그래,닫아!" 카울슨씨는 말을 계속했다. "이게 봄날씨란 말이야?이런 날씨가 오래 계속된다면 사암 바닷가로 다시 가야겠다.이건 집이 아니야.시체실이란 말이야!" 이윽고 카울슨 양이 의례적으로 아버지 방에 들어와 좀 어떠냐고 물었다. "얘야!" 하고 노인이 말했다. "날씨가 좀 어떠냐?" "맑게 개였어요." 하고 카울슨 양이 대답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꽤 싸늘해요." "나한테는 겨울 같구나." 하고 카울슨씨는 말했다. "잠시 동안……." 그녀는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며 말했다. "잠시 동안 겨울이 봄의 무릎 위에서 머뭇거리나 보죠.제 비유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말 이에요." 그녀는 얼마 후에 공원 옆을 지나 브로드웨이로 물건을 사러 갔다. 그녀가 나가자 얼마 후에 위덥 부인이 병실에 나타났다. "부르셨어요?" 그녀는 보조개를 지으면서 물었다. "히긴스를 약방에 보냈어요.벨이 울린 것 같아서……." "난 안 눌렀는데." "어제 주인 어른께서 무엇인가 말씀하려고 하셨을 때,혹시 제가 훼방을 놓지않았는지 모르 겠어요." "위덥 부인!대체 어떻게 된 거요?" 하고 카울슨 영감은 엄하게 물었다. "집안이 이렇게 추우니 말이요." "추우시다구요?" 가정부는 이렇게 반문했다. "이 방이 춥다고 하셨어요?바깥은 6월이나 다름없이 따뜻하고 맑은데요.이런 날씨에는 셔 츠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아요.담쟁이는 잎이 무성하여 집 한 모퉁이 벽을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손풍금 소리가 들려오고,한길에서는 아이들이 춤을 추구요.마음속에 감춰 두 었던 말을 입밖에 꺼내기에 알맞는 때에요.어제 말씀하시기를……." "이봐요!" 카울슨씨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벽창호로구려.이 집을 살펴봐 달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니겠소?나는 방 구석에서 얼어 죽을 지경인데 당신은 담쟁이가 어떻구,손풍금이 어떻구 하며 헛소리만 지껄 이는구료.어서 외투나 갖다 줘요.그리고 아래층 문과 창들이 다 닫혀 있나 봐요.당신처럼 피 둥피둥 살이나찌고 무책임한 여자들이나 이 추운 한겨울에,봄이니 꽃이니 하고 지껄이는 거 요.히긴스가 돌아오면 따뜻한 럼주가 섞인 펀치를 가져오게 해요.이젠 당신은 그만 나가요!" 그러나 대체 누가 환한 5월의 미소를 모욕할 수 있겠는가.설사 5월이 건강한 사람들의 마 음의 평화를 교란하는 악동이라고 하더라도,약은 처녀의 잔꾀나 얼음창고 따위로는 5월의 따뜻한 속삭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다.히긴스는 아침에 카울슨 영감이 앉아 있는 의자를 들창가로 옮겼다.그러자 방안의 추위는 사라지고 훈훈한 향기와 부드러운 온기가 방안에 가득찼다. 위덥 부인이 재빨리 들어와 의자 옆에 서 있었다.카울슨씨는 자기의 메마른 손으로 그녀의 통통한 손을 꽉 잡았다. "위덥 부인!" 하고 말했다. "당신이 없다면 이 집은 집 구실을 못할 거요.나는 돈을 오십 만 달러나 갖고 있소.돈과 마 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이 있소.비록 젊지는 않으나,추위가 아직……." "날씨가 왜 추웠졌는지 알게 되었어요." 위덥 부인은 의자에 기대면서 말했다. "온통 얼음이었어요.몇 톤짜리 얼음 말이에요.지하실,난방실 할 것 없이 온통 얼음으로 가 득 차 있어요.가엾은 카울슨씨,당신 방으로 올라오는 통풍조절관을 닫아버렸어요.그래서 이 제 다시 5월이 되었지요." "내 진정이오……." 카울슨씨는 놀라운 표정으로 말했다. "봄이 다시 소생시킨 내 마음은……그런데 위덥 부인,딸애가 뭐라고 말할까?" "걱정 마세요." 하고 위덥 부인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카울슨 양은 어젯밤에 얼음장수와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으니까요." O.헨리 (1862∼1910) 미국의소설가.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힘들게 생활했다.은행에 근무하던 중 공금횡령 혐의로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많 은 단편을 썼으며,감옥에서 나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그는 다채롭고 인간미 넘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썼는데,「마지막 잎새」「20년 후」「그리스마스 선물」등이 그 대표작이다. 경기병 쓸쓸한 고원 지대에 바람이 선 듯 분다.푸른 잡초가 무성한 이 곳은 세상이 어지럽던 옛 날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쟁기 날 닿지 않은 잔디만 해도 그렇다.옛날에 그토록 무성하게 자라던 잔디는 오늘도 그때 그대로이다.이곳에 야영지가 있었다.여기에 기병대의 말들을 위해 세운 큰 마굿간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고,퇴비 더미가 쌓여 있던 지점을 지 금도 찾아볼 수가 있다.밤이 깊어 이 쓸쓸한 곳을 지나면,풀밭과 엉겅퀴 위를 쓰다듬고 지아 가는 바람결에,옛날의 나팔소리와 말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오는 것만 같고,유령처럼 늘 어선 천막과 군대의 물품들이 눈 앞에 선하다. 천막에서는 거친 이국말과 몇 마디 군가 토막이 귀에 쟁쟁하다.당시에 이 근처의 천막에 야영을 했던 부대는 주로 독일군 친위 부대들이었다.그러니까 지금부터 거의 90년 전의 일 이다.그 당시에 영국 군복 차림새로 말하면,넓다란 견장과 기묘한 삼각 군모에 승마용 바지 와 각반,묵직한 탄약통,조임쇠가 달린 군화 등,지금 보면 괴상하고 미련하게 보일만한 그런 복장이었다.그러나 그 후에 군대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고,장비도 여러 가지로 개량되었 다. 당시에는 군대라면 대단한 존재였다.그들은 임금을 수호하는 자들이었고 전쟁은 영광스러 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이 언덕 사이의 깊은 골짜기나 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원이 나 저택 그리고 촌락도 더러 있었으나,이곳은 왕이 해마다 수 마일 떨어져 있는 남쪽 해수 욕장으로 휴양하러 올 때까지는 낯선 사람은 거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이런 왕의 행차 때문에 군대는 이 넓은 지역에 구름처럼 몰려들게 마련이었다.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 키는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특이한 이야기가 아직도 이 고장에 단편적으로나마 전해져 왔는데,사려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그런 이야기들 대부분은 잊어 버렸지만 단 한 가지만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그것은 휠리스가 나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그녀는 일흔 다섯의 할머니였으며,나는 열 다섯 살 난 소년이 었다.그때 그 할머니는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이 이야기를 자기가 죽어서 땅 속에 묻힐 때 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었다.그녀는 그 이야기를 마친 후에 12년이라 는 세월을 더 살았으나,이제는 죽은 지도 근 20년이나 된다. 그녀는 겸손한 마음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기를 바라고 있었지만,비행을 저질렀다 는 오점이 사람들 기억에 남게 되어 생전의 그 소원은 일부 밖에는 이루지 못한 셈이다.그 당시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단편적인 그 이야기는 그녀에겐 특히 불리했다. 이 이야기의 실마리는 앞에서 이미 말한 외국 연대의 하나인 요크 경기병이 도착하면서부 터 비롯된다.그 전에는 그녀의 집 근처엔 몇 주일이 되도록 사람의 그림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누군가 집을 찾아온 듯 문간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해서 살펴 보면,바람이 나뭇잎을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였으며,마차가 대문 가까이 오는가 싶어서 내다 보면,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단풍나무로 에워 싸인 울타리를 손질하려고 뜰에서 숫돌에 낫 을 가는 소리였다. 이 전지 작업은 그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일이었다.마차에서 짐을 내 던지는 서리가 들리 는 듯하지만,그것은 먼 바다에서 들려 오는 포성이며,날이 저물 무렵에 문간에 웬 큰 남자가 서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훌쭉하니 사지들이 잘린 소양목 그림자였다.그러나 지금은 이런 시골도 그 당시 처럼 적막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쓸쓸한 당시에도 국왕 조지의 신하들은 이곳에서 5마일도 안 떨어진 바닷가의 아름 다운 피서지에 머물고 있었다.딸이 세상과 동떨어져 외롭게 살아다는 것도 딱한 일이지만,딸 보다 더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딸의 친구가 황혼이라면 아버지의 친구 는 밤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딸의 황혼은 괴롭기 짝이 없었으나,아버지는 그 밤을 그런 대로 즐기고 있었다. 그로브 씨는 본래 의사였지만,그에게는 철학적인 문제로 혼자서 사색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 때문에 병원은 적자 운영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환자가 줄어들었다.그리하여 그는 병 원 문을 닫고 이처럼 멀리 떨어진 산골에 와서 명색뿐인 집세를 내고,농장이 딸린 낡아빠진 조그마한 집을 빌려서 도시에서라면 입에 풀칠도 못할 적은 수입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 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뜰에 나가 있었다.그런데 그는 차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기가 환상을 좇아 헤매느라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는 사실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점점 초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친구와 만나는 일도 더욱 뜸해졌다. 한편 휠리스는 어디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낯선 청년을 만나거나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수줍어서 괜히 아랫도리가 비틀거리고 귀 밑까지 빨갛게 상기되는 것이었다.그런 어느 날 이런 두메산골에서도 휠리스를 알아낸 구혼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때 왕은 이웃 마을에 행차하여 그루스터관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그리하여 많은 시 골 사람들이 자연히 그리로 모여 들게 되었다.이런 한가한 사람들 가운데 궁정과 어떤 연고 가 있다고 말하는 험프리 굴드라는 미혼 남자가 있었다.그는 그렇게 젊지는 않았으나 과히 늙은 편도 아닌 남자였는데,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생기지도 않았다.멋장이라고 하기에는 그랬으나 착실한 데가 있는 꽤 점잖은 사람이었다.이 서른 살의 노총각이 이곳 고 원지대 마을에 와서 휠리스를 보고는,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먼저 그녀의 아버지와 사귀게 되었다.그러고는 그녀를 열렬히 사모하여 매일같이 찾아오더니 결국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지방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일가 중에는 지방에서 유지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 었다.그러므로 휠리스가 그와 약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옹색한 형편에 있는 처녀로서는 큰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휠리스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조건이 걸맞지 않는 결혼 이란 지금 같으면 단지 종래의 인습을 깨뜨리는 일쯤으로 알겠지만,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 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해수욕장의 서민층에 속하는 휠리스가 그런 신사의 눈에 들어 약혼하게 되었다는 것은,마치 지상에서 천국에 오른 것과 같았다.그 러나 굴드라는 남자도 역시 가난 했으므로 피차에 엇비슷한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같은 경제적인 형편이 그들의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구실이 되었다.그런데 겨 울이 점점 가까워져 왕이 한 여름을 보내고 떠나 버리자,험프리 굴드 씨도 2,3주 안으로 휠 리스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바스로 떠나 버렸다.그러나 겨울이 되고 약속한 날짜가 지 났으나 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지금 머물고 있는 도시에는 친척도 없어 아버지를 혼자 남 겨 두고 훌쩍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그가 온다는 날짜는 자꾸 뒤로 미루어졌다. 휠리스는 무척 외로웠으나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신랑감이었으며,아버지도 이 사람의 청 혼을 퍽 기뻐하였다.그러나 이처럼 딸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아버지로서 마음 아픈 일 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내게 말했지만,그가 교양있고 유서 깊은 것 을 좋아해서 은근히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그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와 궁정 생활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가 한결 우러러 보였던 것이다.그녀 는 그가 좀더 욕심을 부려 조건이 좋은 상대를 택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골라 준 것에 대 해 고맙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오지 않은 채 봄이 돌아왔다.그는 형식적인 것이긴 하였으나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왔다.그런데 이런 불안정한 처지에다 험프리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그다지 불타 오르지 않아,그녀의 마음에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적막감이 움트기 시작했다. 봄은 금방 여름이 되었다.여름이 되자 다시 왕이 행차했으나 험프리 굴드는 나타나지 않았 다.그 동안에 적어도 서신상으로는 약혼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무렵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사건이 생겨 젊은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호기심을 일으켰다.요크 경기병들이 주둔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그것은 친위 독일군단 중의 한 연대로 그들의 화려한 복장이나 훌륭한 군마,특히 그들의 외국인다운 당당한 풍채와 수염(당시에는 별로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은 어디서나 남녀를 막론하고 부러워했다.이들은 마침 왕이 이웃 마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다 른 부대와 함께 이 일대의 고원지대와 목장 등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이 지대는 높아서 바람이 잘 통하고 눈 앞이 확 틔어 앞쪽으로는 포틀랜드 섬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며,동쪽은 세인트 알드텔름 곶까지 바라보이고 서쪽은 거의 스타트까지도 보이는 것이었다. 휠리스는 이 마을 아가씨는 아니었으나 역시 다른 마을의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놀러 왔다.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 담 위에 기어 올라가 걸터 앉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 고장에서는 담벼락에 백회를 바르지 않고 돌로 쌓아 올렸으르로,발을 붙일 수 있는 틈 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그 담벼락에 올라 앉아서 눈 앞의 목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행길을 걸어오고 있는 이들 군인들에 대해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의 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져서 골짜기를 끼고 올라가 제일 높은 지대에 있었으므로,저지대에 있는 교회 탑 꼭대기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담벼락 밖에는 풀밭이 길게 뻗어 있었고,그 풀밭을 가로 질러 그 담벼락의 근처까지 와 있는 한 사 람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독일 경기병으로 땅만 쳐다보면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오는 듯한 걸음걸이 였다.빳빳한 칼라가 받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머리칼까지도 눈과 마찬가지로 아래로숙 이고 있었을 것이다.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은 깊은 수심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 가 그곳에 있는 것도 모른 채 담벼락 바로 아래까지 이르렀다. 휠리스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멋진 군인이 수심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군 인에 대한 그녀의 생각,특히 요크 경비병에 대한 생각은,하긴 세상에 태어난후로 아직 한 번 도 군인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으므로 오로지 풍문으로 들어서 품게 된 생각이기는 하 지만,그들의 마음도 그 복장과 마찬가지로 무척 명랑하리라는 것이었다.그때 경기병이 갑자 기 고개를 들어 높은 담벼락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녀는 짧은 가운을 걸치고 있 었으므로 살이 드러나 보이는 어깨며 목덜미를 덮은 흰 모슬린 수건에다 전체적으로 흰 옷 을 입고 있었는데,그것이 한 여름의 밝은 햇살에 한결 돋보였던 것이다. 그는 그녀와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약간 붉히며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지않고 지나 가 버렸다. 그날 휠리스의 눈 앞에는 종일토록 그 외국 병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그의 외모는 상당히 인상적이고 멋져 보였으며,무척 푸르고 수심에 가득 찬 그의 눈은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 그녀는 그 후로 날마다 같은 시각에 담벼락을 내다보면서 그가 혹시 지나가지나 않나 살펴 보곤 하였다. 그는 이번에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반가운 표정으로 공 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그의 태도는 그녀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한 듯했다. 그들은 이렇게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그녀는 무엇을 읽고 있었느냐고 그에게 물었으 며,그는 독일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 준 편지를 읽고 있었다고 대답했다.편지를 오랫동안 받 지 못해서 묵은 편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는다는 것이었다.그때 주고 받은 이야기는 이 것이 전부였지만,그 후로는 몇 번 만나서 짤막한 대화도 나누었다. 휠리스는 그 남자가 영어를 잘 하지는 못했으나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사귀는 데 지장을 주는 일은 없었다고 되풀이하여 내게 말했다.가끔 미 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그가 말하는 영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을 때는 눈과 입술로 그의 마음을 나타내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교제는 날로 진전되어 갔다.그의 이름은 마테우스 티나라고 했으며, 고향인 자르부르크엔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다고 했다.나이는 스물 두 살이고 군대에 들어온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벌써 하사로 승진해 있었다. 휠리스는 영국 사람으로 편성된 연대에,그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군인 중에서 그처럼 훌륭 하게 훈련된 병사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외국인 중에서는 장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늠름 한 모습과 풍채를 하고 있었다고 언제나 내게 말했었다. 그녀는 이 외국 친구로부터 차츰 자신과 그의 전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그 내 용은 휠리스가 요크 경기병에게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었다.화려한 군복으로 치장된 이 연대에는 무서운 우울증과 만성적인 향수병이 퍼지고 있었 으며,많은 군인들이 평소의 훈련도 받기가 힘에 겨울 만큼 마음이 병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은 영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군인들이었다.그들 은 영국과 영국에서의 생활을 증오하고 있었으며,국왕이나 그의 섬나라에 대해 조금도 흥미 가 없었다.오직 이곳에서 빠져 나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기만 바란다는 것이었다.그들의 몸은 비록 이곳에 머물러 있지만,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멀리 떨어진 그리운 조국땅에 가 있 었다.그들이 조국에 대해 말할 때는,여러 가지 면에서 당당하고 대범한 그들도 눈물을 글썽 이기 일쑤였다. 마테우스 티나는 자기 모국어로 발음하여 들려 준 이 고향 생각으로 누구보다도 상심하고 있었다.그는 본래 공상적인 생각에 곧잘 잠기는 성격인 데다가,위로해 줄 사람도 없고 어머 니를 혼자 남겨 두고 이국에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그의 군대생활은 더욱 우울해졌다. 휠리스는 그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의 내력에 흥미를 느껴 그 군인 친구가 싫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몸이었으므로 이 젊은이가 우정의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하 지는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이끌리고 있었다.돌담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특별한 우정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휠리스 아버지 친구로부터 냉정하고 근성있는 약혼자 험프리 굴드 씨에 대한 소식이 이 마을에 전해졌다.그는 바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휠리스 그로브 양에게 결혼을 청혼하여 절반쯤 양해가 된 단계에 있는 줄로 생각하 며,불구인 아버지 때문에 언제나 집을 못 떠나고 있으므로,분명한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은 것이 피차에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그리고 자기가 다른 여자에게 눈이 쏠리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므로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 이었다.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휠리스는 그것이 사실일 것이러고 생각했다.그리하여 앞으로 는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이 모든 소문은 조작된 것임에 틀림 없다는 것이었 다.자기는 굴드 씨의 가정을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으며,만약 결혼에 있어서 이 가문 사람 들은 가장 잘 표현하는 속담이 있다면 그것은‘조금씩 사랑하되 오래 사랑하라’는 것이라 고 했다.험프리는 훌륭한 남자이므로 자기의 약혼을 그렇게 경솔하게 처리하지는 않을 것이 라는 것이었다. "참고 기다려야 해." 하고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휠리스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굴드 씨와 아버지가 자기 모르게 편지 왕래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아버지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험프리 굴드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다.오히려 그녀는 자기 약혼이 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이 독신자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더럽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문 제에 대해 직접 편지로 따지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너는 그 외국 군인들이 너에게 부질없이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어떤 구실을 찾을 테지." 아버지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그는 요즘들어 딸에게 매우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이었 다. "넌 내가 잠자코 있으니까 모르는 줄 알고 있지?다음부터는 내 허락 없이 담 밖으로 나가 서는 안 된다.야영지 구경을 하고 싶으면 내가 휴일 오후에 데리고 가마." 휠리스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자기 감정에는 충실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그 경기병이 영국 남자를 두고 생각할 때 처럼 진정 한 의미에서 애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못 되었으나,그래도 그에 대한 연정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이 젊은 경비병은 그녀에게 거의 가공적인 존재였다.이를 테면 황홀한 꿈 속에 나타 나서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는 사람,그 이상은 아니었다.그들은 저녁 무렵에 해가 진 후 마지막 집합나팔이 귀대를 알릴 때까지,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자주 만나곤 했다.최근 들어 여자의 태도는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남자의 태도도 분명히 더욱 그러했다.그는 점점 더 친절하고 다정해졌다.그들의 짧은 만남이 끝나갈 때면 그녀가 담 위에서 뻗은 손을 그는 꼭 쥐어 주곤 했다.어느 날 저녁에는 그가 하도 그녀의 손을 오래 쥐고 놓지 않았으므로, "들에 있는 사람들이 벽에 비친 당신의 그림자를 보겠어요!벽이 희니까요." 하고 걱정한 적도 있었다. 그는 그날 밤에 자꾸만 머뭇거려 시간이 늦었기에 들판을 가로질러서 간신히 귀대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다음 날 여느 때와 마친가지로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평소처럼 정 해진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그는 크게 실망하여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 곳만 멍하니 바라 보고 서 있었다.이윽고 귀대 나팔과 북소리가 울려 왔다.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늦었던 것이다.그녀가 오기는 했으나,귀대 시간을 알리는 나 팔소리를 들었으므로 그에게 바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괜찮아요." 하고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가지 않을래요.당신은 오자마자 돌아가라니.종일 당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늦어지면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까짓 게 무슨 상관 있어요?만약 당신과 자르부르크에 있는 어머니만 안계셨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을 거요.그깟 승진보다는 몇분 동안이라도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아요." 그는 돌아가지 않고 그녀와 이야기를 계속했다.고국의 재미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며,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그러자 나중에는 그가 돌아가지 않고 무모하게 남아 있는데 대해 그녀가 조바심을 냈다.그가 연대로 간신히 돌아간 것은 그녀가 작별을 하고 그 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의 군복 소매를 장식하고 있던 수장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그날 밤 에 늦게 귀대했기 때문에 계급이 졸병으로 강등되어 있었다.그녀는 자기가 그로 하여금 그 런 불명예를 안겨준 장본인임을 생각하고 무척 가슴 아파했다.그러나 도리어 그가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너무 염려 말아요."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내게는 방도가 있으니까요.그런데 설혹 내가 그 수장을 도로 찾는 다고 하더라도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나같은 요크 경기병 하사관과 결혼시키려고 하시겠어 요?"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이 사람과의 교제에서 그런 현실적인 단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아버진 허락하시지 않으실 거예요.그건 틀림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분명히 대답했다. "그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에요!그러니 저를 잊어 주세요.제가 괜히 당신의 앞길을 망쳐놓는 것만 같아요." "천만에……." 그는 말을 계속했다. "이 나라에는 그래도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살맛이 납니다.이곳이 만약 내 나라이 고,어머니도 여기 당신과 함께 있다면,나는 분명히 행복할 겁니다.내 얘기를 좀 들어 보세요. 나는 당신을 우리 나라로 데려가 결혼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싶어요.당신이 알다 시피 나는 하노버 사람은 아니오.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고향은 자르 근방이오.지금은 프랑스 와 사이가 좋으니까 일단 그리로 가기만 하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거기까지 가요?" 휠리스는 그의 계획을 듣고 감동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현재 그녀는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이 무미건조하고 괴롭기짝이 없었다.아버지는 딸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린 듯 했다.그리고 그녀는 명랑한 이웃 소녀들처럼 이 마을 태생도 아니었다.그리하여 마테우스 티 나에게서 어머니와 집을 무척 그리워하는 말을 듣고는 그녀의 마음도 어느새 동화되었던 것 이다.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가요?" 하고 그녀가 물었으나 그는 잠자코 있었다.그녀가 다시 물었다. "돈을 들여서 제대하시려고 해요?" "아니오.요새는 그럴 수 없어요.나는 이곳에 강제로 끌려 왔으므로 도망칠 수도 있어요.지 금이 제일 좋은 기회요.곧 야영을 거두게 될 텐데,그렇게 되면 당신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요.나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계획을 세웠어요.날짜는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다음 주 바람 없는 날 밤에 여기서 1마일쯤 떨어진 국도에서 나와 만나요.조금도 쑥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창피하게 여길 건 없어요.내가 당신하고 단 둘이서 도망가는 건 아니니까요.난 크리스토프라 는 믿을 만한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그 친구는 알사스 출신인데 입대한 지 얼마 안 되 지만 내 계획을 적극 돕겠다고 했어요.우리는 저쪽 항구에서 올 거요.거기서 우리가 타고 갈 배를 한 척 구해 오겠소.크리스토프는 이 해협의 항해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 항구 에 가서 밤중에 닻을 잘라 버리고 노를 저어가면 들키지 않을 겁니다.이튿날 아침이면 프랑 스 해안인 쉘브르 근처에 닿게 될 거요.그 다음은 간단해요.육지 여행에 필요한 돈은 모아 두었고,갈아 입을 옷도 준비했어요.어머니께 편지를 보내 도중에 만나면 됩니다." 그녀가 묻는 말에 그는 이보다 더 상세한 설명도 해 주었다.그녀는 결코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너무 어마어마한 계획이라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후에,아버지가 가장 의미심장한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지 않았던들 이처럼 무모한 모험 속에 뛰어 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요크 경기병은 요새 어떻게 지내냐?" 아버지가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야영을 그냥 계속하고 있어요.그러나 아마 곧 이곳을 떠날 테지요." "네 행동을 이 애비에게 숨기려고만 하지 마라.그 군인들 중에서 한 놈하고 만나고 있었 지?네가 그 놈하고 함께 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어.프랑스 놈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외국인 녀석하고.나는 마음을 작정했다.그 놈들이 이 고장에 있는 동안은 널 집에 두지 않기 로 했다.너는 앞으로 고모한테 가 있어라." 그녀는 군인은 고사하고 아버지 이외에는 어떤 남자하고도 함께 산책을 한 적이 없노라고 항변했으나 아버지는 믿지 않았다.ㅣ 휠리스에게 고모네 집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아버지가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보따리를 싸라고 일렀을 때 그녀는 맥이 탁 풀리고 암담하기만 했다. 그녀는 망설이던 끝에 애인과 그의 친구의 계획에 가담하여,그가 자기 머리 속에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놓은 그 나라로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녀에게 어디까지나 고상하고 친절하게 대했다.그녀가 지금까지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랑과 존경을 그에게서 받았다.그리하여 그녀는 오직 그 남자만 믿고 바다를 건너는 모험 을 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들이 일을 감행한 것은,그 다음 주 어느 습기찬 캄캄한 밤이었다.그들은 국도외 마을에 이르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크리스토프는 그들보다 먼저 배가 매어 있는 항구로 가서,노를 저어 조망대를 돌아 그곶 맞은 편에서 그들을 태울 계획이 짜 여 있었으며,그들은 걸어서 선창다리를 건너 조망대 언덕을 넘어 빠져 나가기로 했다. 휠리스는 아버지가 이층으로 올라가자 곧 보따리를 옆에 끼고 집을 나와 재빨리 행길로 뛰 어 갔다.그 시각에는 마을에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므로 그녀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국도와 한길이 갈라진 곳까지 이르러 사럼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담모퉁이에 몸을 숨겼다.그리하여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자기 쪽에서는 국도로 걸어오는 사람 이면 누구든지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애인을 기다리고 있은지 일분도 채 못되어 기다리는 발걸음 소리 대신에 언덕을 내려오는 역마차의 바퀴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행길에 사람의 그림자 가 없어질 때까지는 마테우스도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초조한 마음 으로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마차는 그녀가 숨어 있는 모퉁이까지 다가와 속력을 서서히 늦추더니 그녀가 있는 데서 2,3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그러자 마차에서 어떤 손님이 내리면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험프리 굴드의 목소리였다. 그는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손에는 커다란 짐꾸러미를 들고 있었다.그는 풀밭 위에 그 짐 을 내려 놓고 친구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마차를 갖고 온다던 그 젊은이는 어디 있지?" 그녀의 옛 구혼자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정각 아홉시 반이라고 일러 두었거든." "그녀에게 주려는 선물은 잘 간수했나?" "휠리스에게 줄 것 말인가?그건 트렁크 속에 들어 있네 마음에 들어 할는지 모르겠군." "그야 흡족해 할 테지.그렇게 훌륭한 화해의 선물을 받고도 기뻐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 겠나?" "하긴 이 정도의 선물은 받을 만도 하지.내가 그동안 그녀에게 너무 무심했거든.그러나 요 며칠 동안은 그녀 생각이 자꾸 나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네.사람들이 하는 말은 분명히 꾸며낸 걸꺼야.그녀는 영리해서 하노버의 군인 따위에게 걸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테니까.그런 소문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 아닌가……."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가끔 들려왔다.이 말은 그녀 에게 갑자기 머리에 강한 전기 조명이라도 비친 것처럼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그들의 대화는 끊어졌다.기다리는 남자가 마차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그들은 마차에 짐을 싣 고 올라 타더니 그녀가 방금 걸어온 길을 향해 떠났다.휠리스는 자기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들을 쫓아가려고 하였다.그러나 그녀가 막상 그를 만나면 무척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마 테우스를 만나서 자기 마음이 변했다는 얘기만 이라도,솔직히 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험프리 굴드가 마음이 변했다는 소문을 믿었던 자신을 책망했다.방금 그들이 말했 듯이 그는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그가 사라진 자기의 앞날은 적막하기만 할 것 같았다.그렇지 만 그의 제의를 성큼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두려웠다.그것은 너무나 무모하고 막연하여 또 위태로운 일이었다.그녀는 이미 험프리 굴드와 약혼한 사이였다.그리고 그녀가 약혼을 무시 해 버린 것은 그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가 선물까지 마련해 가지 고 돌아오자 그녀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마테우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저렸 지만,그녀는 집에 남아서 굴드와 결혼하여 그럭저럭 살아가기로 결심했다.휠리스가 이렇게 마음을 바로 잡고 있을 때,농장 정문 쪽에 마테우스 티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가 앞으로 나가자 그는 쉽사리 그 문을 넘어 왔다.그는 피할 사이도 없이 그녀를 와락 가슴에 껴안았 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남자의 팔에 안겨서 이렇게 생각했다.휠리스는 그날 밤에 있었던 그 시련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분명히 기억하지 못했다.그녀는 내게 마테우스야 말로 훌륭한 남자였다고 말 했다.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 마음이 변했으며, 그와 함께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크게 실망했지만,그렇다고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았다.그가 함께 가자 고 강하게 매달렸다면 그녀는 그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부당하게 억지로 그녀 를 유혹하지는 않았다.그녀도 그의 신변이 걱정되어 가지말고 그냥 눌러 있으라고 간곡히 타일러 보았다.그러자 그는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서 말했다. "나는 친구와의 신의를 깨뜨릴 수는 없어요." 그가 혼자서 계획한 일이라면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배와 나침반과 지 도를 마련해 놓고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곧 조류가 바뀌게 될 것이다.어머니께도 이미 간다고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 꼭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그들이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머 뭇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귀중한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휠리스는 마음이 쓰라리고 아팠 으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드디어 그들은 서로 작별을 했다.그는 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서 내려 갔다.그녀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의 뒷모습이라도 한 번 더 보기 위해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몰래 뒤쫓아 갔다.그리고는 멀리 사라지는 그의 모 습을 슬프게 바라보았다.순간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뛰어가 자기 운명을 그에게 맡겨 버리 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이 다급한 순간에 클레오파트라도 내지 못할 용기를 그녀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검은 그림자 하나가 국도에서 그와 만나 는 광경이 보였다.그것은 그의 친구 크리스토프였다.그녀의 눈에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4마일밖에 있는 항구의 거리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그녀는 힘없이 집으 로 발길을 옮겼다.병영에서는 귀대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그 소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후의 앗시리아인의 병영처럼 없어져 버린 것이 다.그녀는 말없이 집에 돌아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처음에는 잠을 이룰 수 없던 슬픔이었으나 결국은 잠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계단 아래서 딸을 만났다. "굴드 씨가 왔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험프리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그녀를 찾아왔던 것이다.그가 그녀에게 가져온 선물은 은으로 만든 케이스에 든 예쁜 거울이었다.그는 한 시 간쯤 후에 다시 돌아와서 휠리스와 산책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그런 예쁜 거울은 그 당시에,특히 시골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 이었다.그녀는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눈이 충혈되어 몹시 부석부석했다.그녀는 좀더 상냥한 눈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험프리는 자기 나름대로 꺼림칙한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약 속을 지켰다.따라서 그녀도 그래야 했다.그 동안에 있었던 사소한 실수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가 정한 시간에 집에 찾아왔을 때 그녀는 모자를 쓰고 어깨에 숄을 걸치고 나서 문간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 휠리스는 험프리에게 예쁜 선물을 준 데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그러나 둘이서 걷는 동안 에는 험프리 혼자서 이야기를 했다.그는 최근의 유행에 대해서 말했다.이런 화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섞지 않아도 되므로 그녀는 기꺼이 맞장구를 쳤다.그리고 그의 조심스러운 말씨가 그녀의 복잡한 마음과 머리를 가라앉히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너무도 큰 슬픔이 그녀 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모습을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그가 화제를 돌렸다. "변변치 못한 선물이지만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실은 당신의 마음을 풀어줄 겸,내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좀 도와달라는 부탁 도 할겸 해서 그것을 갖고 왔지요." 휠리스는 이처럼 당당한 남자에게,한편으로는 존경심마저 느끼는 이 사람에게,무슨 어려운 일이 있나 해서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우선 내 비밀을 먼저 고백하려고 해요.당신과 상의하기 전에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큰 비밀이 있어요.실은 나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오.비밀리에 어느 아름다운 아가씨 와 결혼식을 올렸소.당신도 그 사람을 만나보고 그녀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 그녀를 칭찬해 줄 거요.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에 꼭 드는 여자는 못돼요.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 하고 있는지 당신이 나 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거요.그래서 나는 아직 결혼을 비밀에 부치 고 있어요.정녕 한바탕 큰 야단이 날 테니까요.그러나 당신이 힘이 되어 주시면 어떻게 수습 이 될 것 같군요.만일 당신이 다소간의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면 문제는 매우 순조롭게 수습 이 될 것 같아요.즉 우리 아버지께 도저히 나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 결혼에 찬성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어요.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요." 휠리스는 자기가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그의 고백을 듣고 나 서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 자신도 현재의 괴로운 심정을 그에게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만일 험프리가 여자였다면 자기의 비밀 을 다 털어 놓았을 것이다.그러나 그에게 고백하려고 하니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그리고 아 직은 침묵을 지킬 단계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애인과 그의 친구가 위험 지대를 벗어날 때까 지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조용히 방 구석에 틀어 박혀 자기가 애인과 함께 도망치지 않 은 것을 후회하고,마테우스 티나와 만났던 순간순간을 멍하니 회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그 는 고국에 돌아가 자기 나라 여인들과 어울리며 나 같은 건 이내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녀는 전신이 노곤하여 며칠 동안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어느 날 안개가 자욱히 내 린 밤이 지나고 저편에 푸릇푸릇한 새벽 하늘이 내다 보였다.그리고 천막의 윤곽이며 줄줄 이 매어 둔 말들도 눈에 띄었다.취사장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국 땅에서 그녀가 관심있는우일한 장소는 마테우스와 만나기 위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 던 정원 한 구석이었다.그리하여 그녀는 불쾌한 안개가 자욱히 끼어 있었지만,뜰로 내려가 낯익은 그 정원 구석으로 발길을 옮겼다. 풀 잎사귀마다 조그마한 이슬 방울이 매달려 있고,애벌레와 달팽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병 영에서 수건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그녀의 귀에 들려오고,맞은편에서는 시내를 향해 바삐 걸어가는 농부들의 발걸음 소리도 들려 왔다.마침 그날은 장날이었다. 그녀가 이 구석으로 자주 찾아와 그를 만나곤 했으므로 담모퉁이 근처의 풀밭은 발에 밟 혀 뭉개지고,자기가 담벼락을 기어 오를 때 돌을 밟았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밀회의 자취가 이렇게 남아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아버지에게 들키게 된 것도 아마 이 때 문일 것이다.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서 있으려니 병영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좀 요란한 것 같았다.그녀는 이제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하지 않았다.그래도 그녀는 담벼락 돌에 발끝을 걸치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처음에 눈에 띈 광경은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곧 전신이 얼어붙어,손가락으로 갈쿠리 모양으로 담벼락을 움켜쥐 었다.두 눈이 튀어나올 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눈 앞에 바라다 보이는 넓은 풀밭에는,병영의 모든 연대원들이 죽 늘어서 있고 그대열 중 간쯤 되는 땅 위에 빈 관이 놓여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는 앞으 로 전진하는 행렬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 행렬은 요크 경기병 군악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두 명의 병사가 장의차에 실린 채 뒤따르고 있었다.양쪽에 호위병이 지키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부가 뒤쫒고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이 광경을 보려고 마을 사람이들이 떼를 지어 따라 왔다.이 끔찍한 행렬은 대열 앞을 지나서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더니 나중에 관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여기 사형선고를 받은 두 병사는 눈가림을 당한 채 관 위에 꿇어 앉았다.이윽고 두 사람은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스물 네명의 사격대가 총을 겨누고 앞에 늘어서 있었다.지휘관이 칼을 빼들고 몇 번 휘두 르다가 아래로 내려치자 사격대는 일제히 총을 쏘았다.두 희생자는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한 사람은 관 위에 얼굴을 묻고 쓰러지고 한 사람은 뒤로 나뒹굴었다. 일제 사격의 총소리가 울릴 때,그로브 의사의 정원 담장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누군 가가 담 안쪽으로 나가 떨어졌다.그러나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것을 몰 랐다. 총살당한 두 경기병은 마테우스 티나와 그의 친구인 크리스토프였다.호위병은 시체를 재빨 리 관속에 넣어 버렸다.그러나 연대의 영국인 대령이 달려와서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끌어 내라!사병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해." 관을 뒤집자 죽은 독일인 병사는 풀밭에 얼굴을 묻고 굴러 떨어졌다.이어서 연대원들이 분 대별로 일제히 방향을 돌려 그 지점을 향해 서서히 행진했다.구경을 끝내고 시체를 다시 관 속에 넣어서 치워 버렸다. 닥터 그로브는 총소리에 놀라 정원에 뛰어 나갔다.거기에 자기딸이 담벼락에 기댄채 기절 해 있었다.그는 곧 딸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 왔으나 의식을 되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 렸다.그녀는 수 주일이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나중에 새어 나온 이야기지만 이 운 수가 나쁜 두 탈주병들은 계획대로 가까운 항구에서 배의 닻을 끊고,대령의 학대에 분개한 다른 두 동료와 함께 무사히 해협을 건너 갔다.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저지 섬을 프랑스 해안인 줄로 오인하고 그리로 노를 저어 나갔다.이곳에서 그들은 발각되어 당국으로 인도되 었다. 군사 재판정에서 마테우스와 크리스토퍼는 다른 두 사람의 동료들은 오직 자기네의 꼬임에 빠져 따라 나선 것 뿐이라고 변명해주었기 때문에,그들에게는 단지 태형이 선고 되었을 뿐 주동자들만 사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지왕이 즐겨 찾던 이 유명한 옛 해수욕장은 이제 찾는 이가 없고,언덕 아래에 있는 이웃 마을에 가서 매장대장을 조사해 보면,다음과 같은 사유가 기재된 두 사람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테우스 티나(하사) 요크 경기병 근위 연대 근무.탈주로 인해 총살당함. 1801년 6월 30일 매장.23세.독일 자르부르크 출생. 크리스토프 브레스 요크 경기병 근위 연대 근무.탈주로 인해 총살당함. 1801년 6월 30일 매장.22세.알사스 로타르겐 출생. 그들의 묘지는 조그만 교회의 뒤뜰 담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그곳에는 표적이 될 만 한 비석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휠리스가 나에게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엔 이 묘지를 언제나 깨끗이 손질해 주었으나,지금은 쐐기풀이 무성 하고 묘도 거의 평평해졌다.그러나 부모에게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들은 그 병사들이 누워 있는 곳을 기억하고 있다. 휠리스도 그 근처에 묻혔다. 토머스 하디 (1840∼1928) 영국의 소설가.시인.도싯주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인 웨스트 석세스 지방을 무대로 영국사회의 인습을 묘사.비판한 소설을 많이 썼다.그는 비관주의적인 운명론을 신봉한 작가 로,그의 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 역시 숙명적인 비극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주요 작품으로 「귀향」「주드」「테스」등이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1달러 87센트,이것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그 중에서 60센트는 잔돈이었다.이 잔돈으로 말하면,물건 값을 하도 깍아서 깍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식료품가게 주인이나 푸성귀 장 수나 푸줏간 주인과 얼굴 붉히며 다퉈서 그때마다 한 잎 두 잎 모은 것이었다. 델라는 이 돈을 세 번씩이나 세어 보았다.번번히 1달러 87센트임에 틀림이 없었다.그런데 하루가 지나면 크리스마스였다. 허술한 작은 침대에 파묻혀 신세타령이라도 하는 수 밖에 없었다.실제로 델라는 침대에 드러누워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인생은 울음과 웃음 그리고 콧노래로 점철되어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무엇보다도 인생은 콧노래가 제일이라고 그는 여겼다. 이방 여주인은 넋두리에서 차츰 콧노래로 옮아가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가구까지 딸린 아 파트의 집세는 한 주일에 8달러였다.아주 초라한 방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거지떼들이 모여 들성 싶었다. 현관에는 언제나 텅빈 우편함이 하나 걸려 있었고,누가 눌러도 소리나지 않는 벨이 붙어 있었다.그리고‘제임스 딜링햄 영’이라고 쓴 명함이 달려 있었다. 딜링햄이라는 이름은 옛날 살림이 괜찮던 시절에는 산들 바람에 나부껴 광채까지 띠고 있 었다.그 무렵에는 이 방 주인의 수입이 매주 30달러였다.그것이 20달러로 줄어든 오늘에 와 서는 딜링햄이라는 이름은 아주 흐릿하게 보였다.마치 글자 자체가 멋적다는듯 줄어든 양상 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딜링햄 영 씨는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이층으로 올라가면,부인이 언제나 그를 짐이라고 부르며 힘껏 껴안는 것이었다.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델라는 울음을 멈추고 분첩으로 뺨을 두들겼다.그리고는 창가에 서서 뒷뜰의 잿빛 담장 위를 걸어가는 고양이를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짐의 선물을 살 돈 은 겨우 1달러 87센트밖에 없었다.그나마 몇 달을 두고 한 푼 두 푼 모아온 것이다.한 주일 에 20달러 봉급으로서는 도리가 없었다.언제나 지출이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초과되었다.선 물 살 돈은 겨우 1달러 87센트!그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짐에게 줄 선물비였다.그녀는 남편 을 위해 무엇을 사주면 좋을까?하고 궁리하면서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다.멋지고 귀하 고 진짜 짐이 갖고 있으면 좋아할 그런 가치있는 것이라야 한다. 방안의 창문과 창문 사이에는 겨울이 걸려 있었다.집세 8달러짜리 아파트의 거울이었다.몸 집이 메마르고 날씬한 사람은 세로로 가느다랗게 거울에 비친 모습을 얼핏 보고도 자기 모 습을 꽤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거울이었다.델라는 여윈 편이므로 이것을 잘 알고 있었디.그녀는 별안간 창가에서 물러나 거울 앞에 멈춰 섰다.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으나 20 분도 채못되어 얼굴은 굳어졌다.그녀는 머리채를 황급히 풀어젖히고 길게 늘어뜨렸다. 그런데 제임스 딜링햄 부부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자랑거리가 있었다.하나는 짐이 할아버 지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금시계이고,또 하나는 델라의 머리칼이었다.만일 솔로몬 왕의 시바 왕비가 바람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 살고 있었다면,언제나 델라는 창문 밖으로 자 기의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왕비의 보석과 미모를 완전히 무색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만약 보 물을 지하실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솔로몬 왕이 이 집의 관리인이라면,짐은 그가 옆을 지 나갈 때마다 시계를 꺼내 보여,부러움에 자주 수염을 쓰다듬는 왕의 모습을 즐겼을지도 모 른다. 그처럼 아름다운 델라의 머리채는 지금 멋지게 늘어져 마치 황금폭포가 물결치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그 머리채는 무릎 아래까지 닿아 그녀의 옷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녀는 날쌔게 자기의 머리채를 다시 손질하여 재빨리 치켜올렸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조용히 서있는데,낡아빠진 붉은 융단 위로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졌다.그녀는 다 낡은 밤색 재킷을 주워 입고 낡은 밤색 모자를 썼다.그리고는 눈물 맺힌 눈으로 치마바람을 내며 총총 히 방문을 나와 층계를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상점 간판은‘마담 소프로니 상점,각종 미용 이발용 품 취급’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녀는 상점으로 단숨에 뛰어오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마담은 소프 로니라는 이름과는 딴판으로 몸집이 크고,살결이 유난히 희며 쌀쌀하게 생긴 아낙네였다. "제 머리칼을 사시겠어요? 하고 델라는 말했다. "사지요." 마담이 말했다. "모자를 벗고 어디 보여 주세요." 황금색 폭포수가 스르르 흘러내렸다.마담은 익숙한 솜씨로 머리채를 감아올리면서 20달러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어서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 후 두 시간은 아주 행복했다.그녀는 짐의 선물을 사러 여러 상점을 드나든 끝에 드디 어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냈다.그것은 바로 짐을 위한 선물로 안성맞춤이었다.다른 상점에서 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그녀는 상점마다 샅샅이 뒤졌던 것이다.그것은 백금으로 된 시계줄이었는데 장식이 단순하나 말쑥했다.보면 볼수록 속되지 않고 실용적이며 상당한 가치를 지닌 듯이 보였다.좋은 선물임에 틀림이 없었다.남편의 시계에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 다.무게있고 값지고 이것은 사랑하는 짐의 품위에도 어울리는 물건이었다.그녀는 무려 21달 러나 지불하고 나머지 87센트를 가지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이 시계줄을 시계에 채운다면 그이가 어느 자리에서건 내놓고 시간을 보는데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그는 낡은 가죽 끈을 시계줄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는 훌륭했지만 몰래 꺼내보는 수가 많았다. 델라는 집에 돌아오자 그 황홀하던 기분에서 어느 정도 분별력과 이성을 되찾았다.그녀는 고데를 꺼내어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사랑이 빚은 쓸쓸한 머리였다.그녀로서는 머리를 손질하는 것만도 언제나 거창한 일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짤막하게 손질한 머리칼로 뒤덮여 마치 개구쟁이 학생처 럼 보였다.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오랫동안 뜯어 보았다. "짐이 나를 못살게 굴지만 않는다면……."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이는 나를 보자마자 코니 아일랜드 합장단의 소녀같다고 할거야.그렇기만 낸들 어떻게 한단 말인가.아니 1달러 87센트로 무엇을 산단 말이야?" 그녀는 일곱 시에 커피를 끓이고,난로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요리 준비를 했다. 짐은 늦게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델라는 시계줄을 두 겹으로 접어 손에 들고 짐이 항 상 들어오는 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그러자 아래 층계를 올라오는 발 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그녀는 별안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녀는 사소한 일에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는 버릇이 있었다.지금도 그녀는‘하느님!아무쪼록 저이에게 아직도 제가 예쁘 게 보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며 짐이 들어섰다.그리고 이내 문이 닫혔다.그는 얼골이 수척하고 몹시 굳은 표 정을 하고 있었다.스물 두 살 한창 나이에,가엾게도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기도 힘에 겨웠 다.그의 외투는 새로 사야 할만큼 낡았고 장갑도 없었다. 짐은 문안에 들어서자 마치 메추라기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우뚝 멈춰섰다.그의 시선이 델라에게 멎었다.그의 시선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그녀는 깜짝 놀랐다.그것은 노여움도 아니고 놀라움도 아니며,불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그건 그녀가 미 리 짐작한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독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델라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갔다. "여보!"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불렀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제 머리칼을 팔았어요.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드리려 구요.머리는 다시 자랄테니까 괜찮아요.그렇죠?전 그렇게 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어요.제 머리는 무척 빨리 자라요.여보!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고 어서 말씀해 주세요.그리고 기분을 바꿔요.당신으로서는 미처 상상도 못한 예쁘고 멋진 선물을 사왔어요." "뭐?머리칼을 잘랐어?" 그는 자기도 생각해 봤지만,아직도 이 뚜렷한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괴로은 심정으 로 물었다. "네.잘라서 팔았어요." 하고 델라는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저를 좋아하시겠죠?머리칼이 없어져도 저는 저예요.그렇잖아요?" 짐은 이상하다는 듯이 방안을 휘휘 둘러 보았다. "그래,당신 머리칼이 없어졌단 말이요?"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찾아볼 것도 없어요……." 하고 델라는 말했다. "팔아버렸어요……팔아버렸다니까요.오늘은 크리스마스예요.부드럽게 대해 주세요.그 머리 칼은 당신을 위해 판거예요.저의 머리칼은 하나하나 셀 수 있을지도 몰라요.그렇지만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아무도 헤아릴 수 없어요." 하고 그녀는 별안간 애정이 담뿍 깃든 말투로 말했다. "짐!이제 저녁을 먹을까요?" 얼빠져 있던 짐은 문득 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그는 델라를 껴안았다. 짐은 외투 주머니에서 어떤 포장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델라,나를 오해하지 말아요!" 하고 말했다. "당신이 머리칼을 깎아버렸건,면도를 했건 그것이 당신에 대한 애정을 식게 할 수는 없어 요.그렇지만 그 포장지를 펴보면 왜 내가 아까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는지 알 수 있을거요."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끈과 포장지를 재빨리 풀어 헤쳤다.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슴 이 벅차옴을 느꼈다.그리고선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녀에게 짐은 머리빗이 놓여 있었다.양쪽에 이가 달린 이 빗은 오래 전부터 델라가 브로드웨이의 진열장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갖고 싶어 했던 것이다.예쁜 진짜 거북껍질로 만들고 가장자리에 보석이 박힌 진귀한 빗이었다.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에 꽂으면 잘 어울 릴 그런 빛깔이었다.그녀는 그것이 매우 값진 머리빗임을 알고 있었다.그리하여 그녀는 감히 가져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바로 그 머리 빗이 이제 자기소유가 되었으나,정작 그토록 탐나던 장식물을 빛나게 해주어야 할 머리칼이 없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머리빗을 가슴에 꼭 품었다.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영롱한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짐,제 머리칼은 무척 빨리 자라요?" 그녀는 마치 털을 세운 고양이 새끼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한편 짐은 아직도 자기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선물을 손바닥 위에 반듯 하게 올려놓고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새하얀 귀금속은 그녀의 맑고 뜨거운 정신을 받아 더 욱 빛나는 것 같았다. "어때요, 짐! 멋지죠? 글쎄 이걸 구하느라고 거리를 온통 쏘다녔지 뭐예요.앞으로 이런 물 건을 다시 구하려면 시간이 백갑절은 걸려야 할 거예요. 당신 시계 이리 주세요. 시계줄에 채우면 얼마나 멋진가 한 번 보게요." 짐은 아내의 말대로 시계를 건네주질 않고 긴 의자에 드러누워 깍지낀 손을 뒤통수에 고이 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델라!"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잠시 보류하기로 합시다.선물로 쓰기에는 너무나 훌륭해.나는 당 신의 머리빗을 사느라고 시계를 팔아버렸어요.자,크리스마스나 축하합시다." O.헨리 (1862∼1910) 미국의 소설가.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다.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 를 여의고 힘들게 생활했다.은행에 근무하던 중 공금횡령 혐의로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많은 단편을 썼으며,감옥에서 나온 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그는 다채롭고 인간 미 넘치는 수백 편의 작품을 썼는데,「마지막 잎새」「20년 후」「크리스마스 선물」등이 그 대표작이다. 회한 슈발 씨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망트에서는 그를 슈발 아저씨라고 불렀다. 비가 내리고 있어 더욱 쓸쓸한 가을날이었다.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빗발에 섞여 나뭇 잎은 마치 좀 더 굵고 느린 또 하나의 빗방울처럼 떨어졌다.슈발 씨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난로 앞에서 창 옆으로 갔다가,창 옆에서 다시 난로 앞으로 되올아오곤 하였 다.우울한 나날이 계속되는 인생이었다.이제 예순 두 살인 그에게는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는 외톨배기 노총각이라 주위에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이대로 고독하게 단 한 번의 온전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는 그와 같이 가난하고 공허한 자기 인생을 새삼스럽게 뒤돌아 보았다.옛 어린 시절의 고향집을 회상하고,부모가 다 생존하시던 그 집을 머리 속에 그려 보는 것이었다.그리고 자 신의 학창시절과 즐거운 여행을 생각하고,파리에서 법률공부를 하던 때와 그리고 아버지의 병환과 죽음 등을 회상해 보았다. 그 후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었다.젊은 사내와 늙은 어머니 이렇게 단 둘이서 아무 런 욕심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왔었다.그리고 이젠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서글픈 인생에서 그는 이제 세상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그리하여 이번에는 머지않아 그가 죽을 차례가 된 것이다.그러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폴 슈발이라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 완 전히 없어져 버린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을 즐기고 나는 영 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죽음이라는 영원한 진실 앞에서 웃고 즐기고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그래도 그 죽음이라는 것이 단지 하나의 가능성만 지니고 있 다면 요행수라도 바랄 수 있지만,그것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마치 낮이 지나가면 밤이 되는 것처럼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생이 충실하기만 해도 좀 나으련만.그리하여 이렇다 할 두드러진 일을 했다든 가,무슨 낭만을 즐겼다든가,커다란 기쁨을 맛보았다든가,몇 가지의 성공을 거두었다든가,어떤 만족감을 느꼈다든가,했더라면 그나마 얼마나 줗을까!그는 전혀 그렇지 못했으므로 아무 것 도 한 일이 없었다.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 먹고 자고 그랬을 뿐이다.이렇게 해서 예순 두 살이라는 나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결혼도 하지 않았다.왜 그랬을까?재산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 생각 만 있었다면 결혼했을 것이다.그렇다면 결혼할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까?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런 기회란 저마다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그러므로 결국 그는 결혼에 대하 여 무관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아닌게 아니라,이 무관심이야말로 그의 커다란 해독이요,결 함이요,또한 악덕이었다. 사실 이 무관심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그런 성격을 타고난 사람에게는,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일찍이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그의 가슴팍 에서 잠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여성은 한 사람도 없었다.그러므로 그는 그토록 달콤하고 안 타까운 심정으로 기다리거나,손과 손을 꼭 마주 쥘때의 짜릿한 전율이나,정열의 황홀경 같은 것을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고,두 팔로 뜨겁게 부둥켜 안고 한 마음 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뿌듯이 채워 주는 그 행복감은,천국에서나 처음으로 맛볼 수 있을 것 이다. 슈발씨는 실내복을 몸에 걸친 채 난로가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그의 인생은 분명히 실패작이었다.그것도 완전한 실패작이었다.그런 그에게도 자기 자신이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은밀하고 반신반의의 미온적인 사랑이었다.그의 모든 일이 그 모양이었다. 그는 옛 친구인 상드르의 아내를 사랑했다.만약 그녀가 결혼하기 이전에 알게 되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그는 벌써 결혼한 부인이었던 것이다.그녀만은 확실히 결혼을 할만한 상대자였다.아무튼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부터 변함없이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항상 느끼던 그 정열과,헤어질 때의 그 서글픔과 그녀 생각으로 인해 잠못 이루던 그 수많은 밤을 회상해 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으레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날 밤보다 한결 더해지는 것이었다. ‘아,그녀는 지난 날에 얼마나 아름답고 귀여운 여자였던가.금발 머리는 언제나 물결치고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했었지.그러고 보니 상드르라는 친구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여자였다. 올해 그녀는 쉰 여덟이다.그리고 매우 행복해 보였다.그녀가 지난 날에 나를 사랑했더라면! 나는 그녀를 진정 사랑했는데,어찌하여 그녀는 이 슈발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녀가 그런 기미라도 알아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그녀는 정말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을까?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을까?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까?그 당시에 그녀는 나 를 어떻게 생각하고 었었을까?만약 내가 사랑을 고백했더라면 그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 까?’ 슈발은 그 밖에도 백 가지 천 가지의 일을 자문해 보았다.그는 다시금 자기 생애를 회상하 며 사소한 일까지도 낱낱이 따져보고 캐보는 것이었다. 그는 상드르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온,그 기나긴 여러 날 저녁을 회상했다.그녀가 아직 도 젊고 아름답던 지난날을,그녀가 자기에게 말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그 무렵에 여러 가지 의사를 표시하던 무언의 눈웃음을 회상해 보았다. 또한 그는 군청에 근무하는 상드르가 쉬게 되는 일요일에 셋이서 함께 세느강을 따라 산책 하던 일이며,풀밭에 앉아먹던 점심식사를 회상했다.그러자 문득 강변의 조그마한 숲속에서 그녀와 단 둘이서 보낸 한나절의 추억이 다시금 뚜렷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날 아침에 세 사람이 음식을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났었다.그는 무르익은 봄철 화창한 날씨에 취할 것만 같았다.온 세상이 향기로웠고,모두가 행복하게 보였다.새들은 더욱 즐겁게 노래하고 힘차게 날개를 퍼득거리는 것이었다.바로 강가의 버드나무 아래 잔디밭 위 에서 그들은 식사를 했다.강물은 햇볕에 조는 듯했다. 대기는 훈훈하고 짙은 향기로 가득차 있었다.모두들 그 달콤한 대기를 마음껏 취했었다.그 날은 참으로 좋은 날씨였다. 상드르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이렇게 달콤하게 자보기는 처음이야." 그는 잠을 깨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슈발은 상드르 부인과 단 둘이서 그 강줄기를 따라 거닐기 시작했다.부인은 그의 팔을 붙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대고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저도 이젠 꽤 늙었지요?웬 일인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가슴이 떨리고 얼골이 창백해지는 것이었다.그리하여 자기 마음이 크게 흔들리거나 자기 손이 떨려서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이 탄로나지 않을까 하여 그는 덜 컥 겁이 났었다. 그녀는 커다란 풀잎사귀와 수선화로 왕관을 하나 만들고,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처럼 저를 사랑하세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선 그는 대답 대신에 무릎을 꿇었다.그러자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그것은 불만을 나타 내는 웃음이었다.여전히 웃으면서 그의 얼굴에 마주대고 말했다. "선생님은 바보시네요.글쎄,적어도 뭐라고 한 마디 말씀이 있어야 할 게 아녜요!"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다.그는 다만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에 와서는 모든 일들이 그날의 모습대로 확연히 다시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그 녀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선생님은 바보시네요.글쎄,적어도 뭐라고 한 마디 말씀이 있어야 할 게 아녜요’라니? 그는 당시에 그녀가 정답게 자기에게 몸을 기대던 일이 생각났다.머리를 덮은 우거진 나뭇 가지 아래로 지나가는 동안에 그는 여자의 귀가 자기 뺨에 와서 닫는 것을 느꼈다.그러자 그는 주춤하여 얼른 물러섰다.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여자가 원치 않는 일이 아닐까 하여 두 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이젠 그만 돌아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요?" 그러자 그녀는 이상한 눈초리를 그에게 던지는 것이었다.분명히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었다.그러나 당시에는 그런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 서야 그때 생각이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머, 선생님은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으세요?만일 피곤하시다면 돌아가시지요."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제가 피곤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쯤 상드르가 잠에서 깨어났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선생님께서 저의 남편이 잠에서 깨었을까 걱정이 되신다면,그건 별문제겠지요.그럼 돌아가시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팔에 몸을 기대지도 않았다.왜 그랬을 까? 이‘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풀리지 않았다.다만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어떤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혹시나……?" 슈발 씨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그와 동시에 사십년 전으로 돌아가,상드르 부인이‘나 는 당신을 사랑해요!’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나 한 것처럼,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 쩔 줄을 몰랐다.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방금 그의 머릿속에 뚫고 들어온 그같은 의문이 그의 마음 을 무척 괴롭히는 것이었다.그가 과연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짐작도 못했다는 것이 있 을 수 있는 일일까? ‘아아,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그 행복을 붙잡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낸 것이라면!’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이 의문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는 없다.알아내야 하지 않 겠는가? 그는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나는 지금 예순 두 살,그리고 그녀는 쉰 여덟 살이다.그러니 지금 청혼을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는 집을 나섰다.상드리네 집은 거리 저쪽에,거의 자기 집과 마주보는 곳에 있었다.그는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어린 하녀가 쫒아나와 문을 열었다.하녀는 그가 이렇게 일찍 찾아온데 대하여 적잖게 놀라며 물었다. "슈발 선생님,웬 일이세요?이렇게 일찍 오시게요.무슨 사고라도 생겼나요?" 슈발씨는 대답했다. "뭐 별 사고가 생긴건 아니야.아무튼 마님께 가서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좀 뵙자고 여 쭈어라." "마님은 지금 겨울에 잡수실 배 잼을 만들고 계시는 걸요.뜨거운 부엌에 들어가 계시기 때 문에 옷도 제대로 입고 계시지 않아요." "그래?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일로 찾아왔다고 여쭤어라." 어린 하녀는 안으로 들어가고 슈발 씨는 응접실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안절부절 못했다.그러나 조금도 당황해 하지는 않았 다. 아,이제서라도 그 일에 대하여 물어 보리라.마치 요리법을 묻는 사람처럼 분명한 대답을 들 어야겠다.이제는 예순 두 살이나 되었으니까. 방문이 열리자 부인이 나타났다.이제는 뚱뚱하고 둥글둥글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둥그스럼 한 턱을 하고 웃을 적에는 크게 소리를 냈다.그녀는 손을 휘저어며 안으로 들어왔다.소매를 걷어올려 살이 드러난 팔에는 설탕국물 자국이나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니지요?"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암요,부인.그런게 아니고요,제가 꼭 묻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어요.저한테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저는 그 일로 몹시 마음이 괴로워요.저에게 솔직히 대답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 말씀해 보세요.나는 언제나 솔직하니까요." "다름이 아니라,저는 맨처음에 부인을 뵙던 날부터 부인을 사랑해 왔어요.부인은 그런줄 전 혀 모르셨어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옛날과 거의 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아니,선생님두.그러고보니 큰 바보시네요!난 그 첫날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슈발씨는 전신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그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부인도 알고 계셨다고요?그러시다면……." 그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 물었다. "그러시다면……뭐예요?" 그는 대답했다. "만약 그러시다면……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어요?뭐라고……대답해 주실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더욱 크게 웃었다.그녀의 손끝에서 설탕 국물 방울이 흘러내려 마룻바닥에 떨어졌 다. "제가요?……어쨌든 선생님께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잖아요?그렇다고 제가 그런 고백 을 먼저 할 수 있나요?" 남자는 그녀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분명히 말씀해 주세요……부인도 그날을 기억하고 계시지요?상드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풀밭에 드려누워 잠들고……우리는 둘이서 강 구비까지 가서……거 기서……." 그는 말을 끊고 대답을 기다렸다.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남자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다가 말했다. "암요,생각이 나구 말구요." 남자는 덜덜 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날에……만일……제가 모험을 했다면 부인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녀는 다시금 생글생글 애교있게 웃기 시작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기쁨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이윽고 그녀는 바늘끝 같은 아이러니를 품은 맑은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 잠자코 따라갔겠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파이를 만들던 부엌으로 돌아가 버렸다. 슈발 씨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그는 무슨 커다란 재난이라도 겪고 난 사람처럼 절망에 빠 져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강변을 향해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었다.둑에 이르자 그는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물줄기를 따라갔다.그는 마치 무슨 힘에 쫓 기는 사람처럼 한없이 걷기만 했다.옷에서는 빗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형태가 없어져 거렁 뱅이처럼 흐물흐물해진 모자에서는 마치 지붕에서 처럼 물망울이 떨어져 내렸다.그러나 그 는 여전히 발을 옮겨 놓았다.앞으로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드디어 그들이 옛날에 점심을 먹던 그 자리에 이르렀다.추억이 가슴을 도려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점심을 먹던 그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모파상 (1850∼1893)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때부터 작은 아버지의 친구인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그의 작픔은 뛰어난 기교와 정확한 필치로 10여년간의 작품활동 기간에 3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그는,자연주의적 수법으로 인생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여자의 일생」「목걸이」 「달빛」등이 있다. 행복에의 의지 늙은 호프만은 남아메리카에서 농장의 소유자로서 돈을 좀 벌었다.그는 그곳에서 가문이 좋은 본토박이 여인과 결혼한 후 아내를 데리고 자기 고향인 북부 독일로 돌아왔다.그들은 내가 태어난 거리에서 자리를 잡았는데,그곳에는 그의 다른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파울로는 이 거리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의 부모에 관해서 더이상 자세히는 모른다.그러나 어쨌든 파울로는 자기 어머니와 꼭 닮았었다.내가 파울로를 처음 만난 것은 우리가 아버지에게 이끌려 처음 학교에 들어갔 을 때였는데,파울로는 얼굴이 누런 마른 소년이었다.나는 지금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당시 그의 검은 머리는 길고 곱슬곱슬했는데,세일러 깃 위에 마구 늘어져서 그의 여윈 얼굴을 에워싸고 있었다.파울로나 나나 집에 있을 때에는 어리광 속에서 자랐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힘들게 적응해야만 했다.살풍경한 교실이나,특히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 코 ABC를 가르치고야 말겠다고 덤비는 빨간 수염 대머리인 인간과는 아무래도 사귈 수가 없었다.아버지가 내 곁을 떠나려고 했을 때 나는 울면서 아버지의 윗도리에 와락 매달렸다. 한편 파울로는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그는 벽에 기댄 채 꼼작도 않고 작은 입술을 악물고는 눈물을 글썽이며,희망에 부푼 다른 소년들이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웃고 떠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너무나도 이질적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우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이끌리는 것을 느겼으며,빨간 수염의 선생이 우리를 바로 옆 자리에 앉게 해 주었을 때는 광장히 기뻤다.우리는 그 후에도 함께 있으면서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 주고, 매일같이 버터가 발린 빵을 나누곤 했다.내 기억에 의하면,파울로는 그 무렵 이미 병들어 있 었다.그는 이따금 오랫동안 학교를 쉬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다시금 학교로 돌아왔 을 때에는 약하디 약한 살갗이,거무스레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수 없는 창백한 혈관이 관 자놀이며 뺨에,여느 때보다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그는 언제나 그러했다.우리가 뮌헨에서 재회했을 때도,그 뒤 로마에서 만났을 때도 내가 처음 느낀 것은 그 창백한 혈관 이었다. 우리의 우정은 학창시절에 거의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이러한 우정이 생긴 원인은 동창 생 대부분에 대한 소원한 열정 때문이었다.이것은 열 다섯 살에 남몰래 하이네를 탐독하고,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세계나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판단하던 공통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열 여섯 살쯤 되었을 때 교과목 중에 무용시간이 있었다.그 결과 우리는 첫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그가 마음을 불태운 소녀는 금발머리를 한 쾌활한 아이였는데,그는 그 소녀를 줄기찬 열정으로 사랑했다.그것은 그같은 남자애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한 열정이 어서,나는 가끔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나는 특히 어느 무도회를 생각해 내지 않을 수가 없다.그 소녀는 계속해서 어떤 다른 남자 애와 두 번이나 춤을 추면서도 그와는 한 번도 추질 않았다.나는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 금해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그는 벽에 기댄 채 자기의 고무구두 위로 눈길을 떨어뜨 리고 있더니, 갑자기 실신해서 쓰러졌다.그는 집으로 옮겨졌고 9일간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 다.그때 나는 그의 심장이 결코 튼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무렵부터 그는 그림 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는 그림 방면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다.나는 한 장의 그 림을 가지고 있는데,그것은 그 소녀의 얼굴을 목탄으로 휘갈겨 그린 것으로 마치 소녀가 살 아있는 듯 생생했다.그림 밑에는 이런 사인이 있었다. ―당신은 꽃처럼 아름답소!파울로 호 프만 그림 언제였는지 분명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늙은 호프만과 여러 가지 관계가 깊던 칼스루에 로 이주하고자 그의 부모가 이 고장을 떠난 것은, 우리가 상급생일 무렵이었다.파울로는 학 교를 바꾸지 않고, 어느 늙은 교사의 집에서 기숙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상태는 오래 지속 되지 않았다.그도 어느 날 부모의 뒤를 따라 칼스루에로 떠났다.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지는 않았을 테지만,어쨌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가 없었다.어느 날 종교 시간에 그 시간 강의를 맡고 있던 일그러진 눈의 종교감이 갑자기 그에게로 걸어가더니 그의 앞에 놓여 있던 구약성서 밑에서 한 장의 종이를 끄집어 냈다.거 기에는 왼쪽 허벅지만 아직 그려져 있지 않은 관능적인 여자의 모습이 아무런 수치심도 없 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어쨌든 파울로는 칼루스에로 갔다.그리고 우리는 서로 엽서를 나누 며 연락을 계속하고 있었는데,그것도 어느덧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우리가 헤어진 후 다시금 뮌헨에서 만났을 때는 거의 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었 다.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아마리엔 가의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아카데미 입구의 계단을 내려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그 남자는 멀리에서 보니 마치 이탈리아인 모델 같은 멋진 인상 을 주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갔을 때,그는 틀림 없는 파울로였다. 보통 키에 마르고 풍성한 검은 머리에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파란 혈관이 드러나 보이는 창백한 안색에,조끼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어 어딘지 꾸밈 없는 옷차림을 한 남자가,몸을 뒤흔드는 것 같은 나른한 걸음걸이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알아차리고 기쁨에 겨워 얼싸 안았다.우리가 카페 미네르바 앞 에서 서로 지난 날의 일을 물었을 때,그는 극도로 긴장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그의 눈동자는 빛났고,제스처가 세련되었다.그러면서도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는 환자 같았다.그 의 창백한 모습이 너무도 완연히 드러나 보였으므로 나는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허어,아직도 그렇게 보이나?" 그는 반문했다. "나는 벌써부터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데.하긴 전에는 몹시 나빴었지.특히 여기가 말일세." 그는 왼손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심장이야.옛날부터 여기가 좋지 않았지.그렇지만 요즘은 제법 좋아진 것 같아.완전히 튼튼 해진 것 같단 말야.이젠 아주 건강하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지.하긴 아직 스물셋이니까.이 나이에 그렇게 몸이 약해서야 불쌍하지 않은가……." 그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그는 헤어진 이후의 일들을 기분좋게 이야기했다. 그는 그때부터 부모를 설득하여 화가가 되는 허락을 얻었다.약 9개월쯤 전에 미술 아카데 미를 마치고 잠시 여행을 떠나 파리에 머물다가 약 넉 달 전부터 이 뮌헨에 자리를 잡은 것 이었다. "아마 여기 오래 있게 될지 모르겠네.그야 알 수는 없지만,영원히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 지." "허어,그래?" "이 거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정말 꼭 마음에 든단 말야.게다가 가장 좋은 점이라면 화가 의 사회적인 지위일세.무명의 화가라 할지라도 사회적인 지위가 좋다는 점이지.아무튼 어디 를 가나 이 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걸세……." "그래,자네는 좋은 친구라도 생겼나?" 조금은.정말 좋은 친구들이야,자네한테 꼭 소개하고 싶은 가족이 있다네.사육제 때 알게 되 었지만 말야…….사육제는여기선 기막힌 축제지.그 가족이란 슈타인이라고 하는데 남작이라 네." "대체 어떤 귀족인가?" "돈으로 귀족 지위를 샀다는 소문이 있네만.남작은 상당한 재력가인데 전엔 빈에서 기막힌 역할을 했었다네.그때 공자들이나 그 밖의 쟁쟁한 인물들과 교제했었는데……그런데 갑자기 실각해 버렸다네.소문에 의하면 백만 마르크 가까운 돈을 수중에 넣었다는군.사업에서 손을 떼고 여기와서 살고 있는 거야.사치스럽지는 않지만 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 "유태인인가?" "남작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부인은 그럴지도 모르겠네.어쨌든 매우 유쾌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 그래,아이는 있나?" "아이들은 없어.그렇긴 하지만 열 아홉 살 먹은 딸이 하나 있긴 있지.부모는 정말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자네를 그 사람들한테 소개하고 싶어.어떤가 승낙해 주겠나?" "아,물론이지.정말 고맙군.그 열 아홉 살 짜리 아가씨와 가까워지기만 해도 말일세." 그는 옆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세.그런데 당장 실행하는 게 어떤가.자네 형편이 괜찮다면 내가 내 일 한 시나 한 시 반 쯤에 자네를 데리러 가겠네.그 사람들은 테레젠 가 25번지의 1층에 살 고 있어.내 학교 친구를 그 사람들한테 소개하다니 정말 기쁘군.그럼 이 일은 그렇게 결정했 네." 우리는 이튿날 정오 테레젠 가의 훌륭한 저택 1층에서 초인종을 눌렀다.초인종 곁에는 크 고 검은 글씨로‘남작 슈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울로는 이곳에 오는 도중 줄곧 흥분하고 있었다.그리고 기막힐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그 런데 막상 우리가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변화를 발 견했다.그가 내 곁에 서 있는 동안 그의 모습은 완전히 차분해져 있었다.다만 눈꺼풀이 신경 질적으로 움직이는 것 이외에는 힘이 있는긴장된 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목을 약간 앞으 로 내밀고 이마의 피부는 굳어져 있었다.그는 어쩐지 귀를 세우고,모든 근육을 긴장시키면서 무엇인가를 엿보고 있는 짐승 같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의 명함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남작 부인은 곧 나오실 것이니 잠 시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그리고는 문을 열어 우리를 알맞게 넓고,어두운 장식으로 꾸민 방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갈 때 길에서 보이는 창 너머로 밝은 봄화장을 한 젊은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문득 친구를 곁눈질로 보면서 ‘그 열 아홉살 처녀로군.’ 하고 생각했다. "남작의 딸 아다야!" 그는 나의 귓가에다 속삭였다.그녀는 화사한 모습이었으며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몸매였다. 매우 약하디 약한 그리고 거의 나른한 듯한 몸짓은 열 아홉 살 또래의 젊은 처녀라는 인상 을 주지는 않았다.관자놀이를 덮고 두 가닥 곱슬머리가 이마에 늘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칼 은 빛나리 만큼 검었으며,피곤한 것 같은 하얀 얼굴빛과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얼굴의 둥그스름한 윤기나는 입술이나,살집이 좋은 코 그리고 검게 빛나는 눈동자와 그 위에 초승달처럼 그려진 어둡고 가늘게 보이는 눈썹은,적어도 그녀가 유태인의 피를 이 어받고 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그러나 그 얼굴은 보기드물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머……손님?" 그녀는 몇 걸음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면서 이렇게 물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뒤끝이 흐려졌 다.그녀는 좀더 확인하려는 듯이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또 한 손을 벾에 붙어 있는 피아노 위에 얹었다. "손님 중에서도 정말 기쁜 손님이네요." 그 때 비로소 나의 친구임을 확인한 것 같은 말투로 이렇게 덧붙이고 다시 내게 눈길을 던 졌다. 파울로는 그녀에게로 걸어가서 누구나 다시 없는 기쁨에 몸을 맡길 때에 하는 것 같은,느 릿느릿한 동작으로 내민 손 위에 허리를 굽혔다.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실례입니다마는 제 친구를 소개합니다.저의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보드라운 손을 내게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어렴풋한 떨림이 느껴지는 젖은 눈동자를 내게로 쏟았다. "부모님도 틀림 없이 기뻐하실 거예요.벌써 부모님께는 연락 주신 모양이지요?" 그녀는 터키식 긴 의자에 앉았고,우리는 그녀와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그녀의 가냘프고 힘 없는 두 손은 말하고 있는 동안 무릎 위에 얹혀져 있었다.통 넓은 소매는 간신히 팔꿈치 를 가릴 정도였다.손목이 가냘프게 튀어나온 것이 나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옆방 문이 열리고 부모가 들어왔다.남작은 머리가 벗겨지고 잿빛의 뾰족한 수염을 기른 멋진 옷차림의 뚱뚱한 신사였다.그가 굵은 황금팔찌를 커프스 안으로 쑤셔넣는 모습은 좀체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남작의 지위를 얻기 위해 원래 이름의 철자를 두어개 희생시켰는지 어떤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남작부인은 작달막한 유태인 여자로 평범한 잿빛옷을 입고 있었다.그녀의 귀 에는 큰 다이아몬드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기분 좋은 태도로 맞아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등 몇 가지 물음을 주고 받은 후 화제는 전람 회에 대한 것으로 옮겨져 갔다.그 전람회에 파울로는 모델을 써서 그린 여인의 그림을 출품 하고 있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더군요!" 남작이 말했다. "나는 얼마 전에 반 시간이나 그 그림 앞에서 서 있었소이다.빨간 융단 위의 살색의 조화 는 특히 효과가 있더군요.아니,정말 감탄했소이다.호프만씨!"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파울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과로는 금물이외다.젊은 양반,절대로 안돼요.몸을 소중히 하는 것이 당신에겐 무엇 보다도 필요하단 말씀이야.그래 건강은 어떤가요?" 내가 이 집 주인에게 자신의 건강에 대해 필요한 설명을 하고 있는 사이에,파울로는 바로 마주앉아 있는 남작의 딸과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주고 받고 있었다.이 집 대문 앞에서부터 느껴지던 이상하게 긴장된 평정함이 조금도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어떤 점이 그렇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그는 덤벼들려고 몸을 가누고 있는 표범 같은 인상을 주었다.까만 두 눈이 누렇고 비쩍 마른 그의 얼굴 안에서 병색이 역력했던 그가,남작의 물음에 자신에 찬 말투로 입을 열었을 때는 그 눈빛이 거의 으시시하게 느껴졌다. "건강은 아주 좋은 편입니다.정말 고맙습니다.몸 상태는 매우 좋습니다." 대략 십오 분쯤 이야기를 나눈후에 우리가 일어서자,남작 부인은 애 친구를 향해 오는 목 요일에 언제나 처럼 다섯 시에 열리는 티파티를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부인은 내게 도 그 날 꼭 와 달라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파울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매우 기분 좋은 사람들이더군." 나는 서둘러 대꾸했다. "게다가 그 열 아홉 살 처녀에겐 완전히 반했어." "반했다구?" 그는 짤막하게 웃고는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자네는 웃고 있군.그런데 그곳에서 남모를 동경이 자네의 눈을 흐리고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들던데 어때,내가 잘못 생각한건가?" 그는 잠시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는 서서히 머리를 흔들었다. "도무지 나로선 알 수가 없군.자네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렇지만 화내지 말게.내가 보기에는 남작의 따님인 아다도 어쩐지 자네가 마음에 있는 것 같길래……." 그는 다시금 말없이 앞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그리고는 낮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나는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네." 나는 속으로 의문을 누를 수 없었으나 진심으로 악수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이삼 주가 흘러갔다.그 사이에 나는 때때로 파울로와 함께 남작의 티파티에 초대되었다.궁 정에 속해 있는 젊은 여배우,의사,장교 등인 그들을 나는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언제나 붐비지 않으면서도 매우 유쾌한 모임이었다. 파울로의 태도에는 이렇다 할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대개의 경우 근심스러운 모습에도 불 구하고 들뜨고 기뻐했었다.그리고 남작 딸 곁에 있을 때는 반드시 내가 처음에 그에 대해 느낀 침착함이 드러났다.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나는 루드비히 가리에서 슈타인 남작을 만났다.그는 말을 타고 있었는데 멈추고선 안장에서 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여어,마침 잘 만났소.어때요,내일 오후 우리 집으로 오시지 않겠소?" "괜찮으시다면 꼭 찾아 뵙겠습니다,남작님.친구인 호프만이 여느 목요일처럼 저를 찾아올지 분명치는 않지만……." "호프만?그럼 당신은 모르시는군.호프만은 여행을 떠났어요.나는 당신한테 그것을 알렸으리 라 생각하고 있었소." "아니오,전혀 몰랐습니다!" "저런……소위 예술가 기질이라는 것이라고나 할까요.그럼 내일 오후에……." 그렇게 말하고선 깜작 놀란 나를 남겨 두고 남작은 말을 몰아 사라졌다.나는 파울로의 집 으로 급히 가 보았다.그는 자기의 주소도 남겨 놓지 않았다.남작은 예술가 기질 이상의 사실 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전부터 그러리라고 상상하고 있었던 사실을 처녀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나 는 남작 가족과 함께 이시르 계곡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우리 일행은 즐거운 나들이를 끝 내고 오후 늦게서야 귀가길에 올랐다.그때 남작의 딸과 나는 그들의 뒤쪽에서 천천히 따라 갔다. 파울로가 모습을 감춘 뒤에도 그녀에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차 분했으며,부모는 파울로의 갑작스런 여행을 안타까워하는 말을 하고 있었으나,그녀는 나의 친구 파울로에 대해서는 이때까지 한 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뮌헨 근교의 다시 없이 아름다운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달빛은 나뭇잎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고,나는 잠시 침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그 이야기는 거품을 내며 흐르고 있는 물소리처럼 단조로웠다. 갑자기 그녀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파울로에 대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 분하고 친구이신가요?" 그녀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네." "당신은 그 분의 비밀을 아시나요?" "그 친구의 깊은 비밀까지도 저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 당신을 믿어도 괜찮을까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아가씨."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어요." 그녀는 결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분은 제게 청혼을 하셨어요.그런데 부모님께서 거절하셨답니다.그 분의 건강이 나쁘다 는 것이 이유지요.하지만 저는 그 분을 사랑하고 있는 걸요.저……."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결연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그 분이 어디 묵고 계신지 저는 몰라요.하지만 그 분을 만나시거든 그 분께 제 말을 전해 주셨으면 해서요.아니면 그 분의 거처를 알게 되면 즉시 그렇게 적어 보내 주세요.저는 절대 로 다른 사람과 결혼 할 생각이 없다구요.그것을 멀지 않아 반드시 알게 될 거예요!" 이 마지막 외침에는 확신에 찬 결의와 함께 안타까운 고통이 담겨져 있었다.나는 나도 모르 게 그녀의 손을 잡아 말없이 꼭 쥐었다. 나는 호프만의 부모님께 부디 아드님의 주소를 알려 달라는 편지를 보내 남부 티롤의 주소 를 받았다.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편지를 보냈다.그러나 그곳으로 보낸 내 편지에는 ‘수취인 은 여행의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이미 그 고장을 떠났음.’이라는 쪽지가 붙어서 되돌아 왔 다.그는 어디선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서 피해 간 것이었다. 분명히 죽기 위해서였다.이 희망없는 아픈 몸의 친구가 활화산 같은 관능적인 열정과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흥분에 비길 만한 열정으로,그 젊은 여자를 사랑한 것 은 분명한 일이었다.그의 이기적인 본능이 건강한 육체와 결합하겠다는 희망으로 불탔었는 데,그 열정은 채워지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생명력을 서둘러서 파먹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이렇게 5년의 세월이 흘러 갔다.그 사이에 나느 그가 살아 있다는 연락을한번 도 받지 못했다.또한 그가 죽었다는 연락도 접하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해 나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로마 근교에 묵고 있었다.나는 한여름을 산간에서 보내고,거기로 돌아온 것은 9 월 말이었다.그리고 어느 따뜻한 초저녁 나는 카페에 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펼치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밝은 불빛이 넘쳐 흐르고 있는 실내의 생생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손님은 새로 들어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했으며,급사는 바쁘게 여기 저기로 뛰어다녔고,이따금 신문팔이의 길게 끄는 외침 소리가 열어젖힌 문 사이로 들려 왔 다.나는 갑자기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한 신사가 천천히 테이블 사이를 지나 바깥쪽으로 나가 는 것을 보았다.그 걸음걸이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그리고 그 신사쪽에서도 내게 얼굴을 돌리는가 싶더니 눈썹을 추켜세우고, "아아!" 하고놀라움과 기쁨에 넘치는 환성을 지르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자네를 이런 데서!" 두 사람은 마치 한 입에서 동시에 외쳤다.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역시 자네는 아직도 살아 있었구먼!" 그는 5년이 지났건만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다만 그의 얼굴이 전보다도 더 길어지고,눈 은 더욱 움푹 들어가 보였다.그는 이따금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자네는 진작부터 로마에 와 있었나?" 그가 물었다. "시내에 오래 있진 않았네.나는2,3개월 시골에 가 있었어.그래 자네는?" "나는 일주일 전까지 바다에 가 있었지.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니까.나 는 자네와 헤어진 뒤에 제법 여러 고장을 돌아다녔다네." 그는 내 곁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지나간 나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었다.그는 티롤의 산지를 편력했고,이탈리아 전체를 천천히 돌아 시칠리 섬에서 아프리카로 건너 갔다.그는 튀니지를 지나 이집트의 이야기도 했다. "결국은 잠시 독일로 돌아왔었지." "칼스루에로 말야.부모님이 굳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시니 말일세.그 분들은 항상 걱정하 고 계셨으니까.나는 삼 개월 전부터 다시 이탈리아로 와 있었네.이 나라에 있으면 어쩐지 집 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로마는 정말 내 마음에 들어……." 나는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런 여러 가지 점에서 판단하건데,자네의 건강은 매우 좋아진 모양이군 그래?" 그는 잠시 허전한 눈짓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제법 신나게 여러곳을 돌아다녔으니까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 지.나는 자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내게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직 여행 뿐이었 네.술과 담배와 연애는 내겐 금지되어 있어.그러니까 내겐 어떤 마취제가 필요한 거야." 내가 잠자코 있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5년 내내 그게 매우 필요했지." 우리는 지금껏 피하고 있던 문제를 꺼낸 것이었다.그리고 이어진 침묵은 우리가 서로 어쩔 는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그는 빌로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샹들리에 를 올려다 보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겠지, 응?" "물론이지." "자네는 뮌헨에서의 일을 모조리 알고 있을 테지?" 그는 거의 굳어진 말투로 계속했다. "대부분은 알고 있네.게다가 나는 줄곧 어떤 여자분이 자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간직 하고 있다네,자네는 알고 있나?" 그의 나른한 눈빛이 잠시 빛났다.그러더니 그는 전과 마찬가지의 마르고 거친 말투로 말했 다. "뭐 새로운 소식이라면 들려 주게나." "과히 새로운 것은 아닐세.다만 자네가 그 처녀한테 직접 들을 것을 내가 대신하는 것 뿐 이지만 말야." 그리고 옆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 나는 그날 밤 남작집 아가씨가 내게 한 말을 되풀이해서 들려 주었다.그는 천천히 이마 위를 만지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그 리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착잡한 심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한 시점을 뛰어넘어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단 말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여자와 자네,두 사람이 보낸 기나긴 5년의 세월이 여러 가지 감정이나 생각에 영항을 미쳤을 지도……." 나는 말을 끊었다.왜냐하면 그가 자리를 고쳐앉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묻어 두겠네!" 그 목소리에는 내가 방금 전까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열정이 다시금 떨면서 움직이 고 있었다. 이 순간 내가 처음으로 남작의 딸을 소개 받았을 때 그에게서 나타났던,그같은 모습이 다 시금 그의 얼굴이나 태도의 구석구석까지 나타나 있음을 보았다.먹이를 앞에 둔 맹수가 덤 벼들기 직전에 드러내는 것 같은 힘차면서도 경련이 일듯한 긴장감과 평정함이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우리는 또다시 그의 여행담이며,그가 여행을 하면서 그린 습작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그런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약간 냉담하게 내 말에 대꾸를 했다. 거의 한밤중에 되서야 그는 일어섰다. "나는 이제 잠자리에 들거나 아니면 혼자 있고 싶어졌네.내일 오전에 카페 에트리아에서 만나세.나는 사라체니의 모사를 하고 있네.음악을 연주하는 천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어쨌든 기분나빠하지 말고 와 주게나.자네가 이 거리에 있다니 난 정말 기쁘네.그럼 잘 있 게." 차분 하고 졸리운 둣한 몸짓으로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 뒤 한 달 동안을 나는 그와 함께 이 거리를 돌아다녔다.모든 예술을 모아 놓은 둣한 풍성한 박물관들이며,남국에 있는 시끄럽고 정열적인 대도시 로마,게다가 따뜻한 바람이 동 양의 우울한 나른함을 실어오는 거리였다. 파울로의 태도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그는 진지하고 조용하고 때로는 기력이 없어 피 로에 빠질때에도 곧 기운을 차리고는 열심히 차분한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가 몇마디 말한 지난날의 일을 적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 말은 이제서야 비로소 내 가 올바른 뜻을 알 수있게 된 것이다. 어느 일요일이었다.우리는 다시는 없으리 만큼 맑게 갠 늦여름의 아침을 이용해서 뷔아 아 피아로 산책을 떠났다.그리고 고대의 거리를 이곳저곳 찾아다닌 후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작 은 언덕 위에서 쉬고 있었다.그곳에서는 부드러운 안개에 싸인 아르바네르 산의 황홀한 경 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파울로는 몸을 반쯤 눕히고 손으로 뺨을 괸채 나른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기분 좋은 공기!이 부드러운 공기를 느껴봐." 그는 다시금 조용해지더니 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자네는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나!"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잠자코 있었다.그는 다시금 생각게 잠긴 둣한 모양으로 먼 곳 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는 매일 진심으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네.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자네는 정말 알고 있나?어떤 프랑스인 의사는 내게 말했지.‘자네가 아직도 여러 곳을 여행하고 돌아다닐 수 있다니 기이하기 짝이 없구먼.자네에게 충고하거니와 집으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있도록 하 세.’그 의사는 우리가 매일 밤 같이 도미노를 할 때면 번번이 그런다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직 살아았어.나는 거의 매일같이 관속에 발을 내딛고 있는 거야.나는 밤이 되면 어둠 속에 눕는 다네.오른 쪽으로 말야 알겠나?그러면 심장의 고동이 목줄기까지 올라 오네.현기증이 나고 진땀이 스며나오지.그리고는 갑자기 죽음이 나를 만지는 것 같아.잠시 내 몸안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 처럼 심장의 고동이 멈추고,숨이 막히는 거야.나는 후다닥 일어나 불을 켜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것을 눈으로 끌어 당기 듯이 응시 하지.그리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모로 눕네.언제나 오른쪽으로 말이야.그 리고 천천히 잠드는 거야.나는 매우 깊이,이주 오랫동안 잠자는 거야.그도 그럴것이 나는 언 제나 죽을만큼 지쳐 있으니까.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간단히 누워 죽을 수도 있다네. 정말이야. 나는 최근 몇 년동안 이미 몇번이나 죽음과 만났는지 모른다네.내가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나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같아.나는 벌떡 일어나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네.나 는 스무번이나 되풀이한 한 가지 일에 끈질기게 집착하지.그 사이에 내 눈은 주위에 있는 모든 빛이나 생명을 마구 빨아당기는 거야.자넨,이런 내 심정을 짐작할 수나 있겠나?"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거의 내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그때 내가 그에 게 어떤 대꾸를 했는지 이미 기억도 없다.그러나 그의 말이 나에게 준 인상은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잿빛으로 흐렸지만 기분 나쁠정도로 무더운 날씨가 축축한 마음 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그리고 습기찬 바람이 아프리카에서 이 거리로 온통 불어와 서,저녁나절에는 하늘 전체가 끊임 없는 번개로 요동치고 있었다. 아침에 나는 그를 산책길에 불러내려고 파울로의 집을 찾았다.그의 커다란 고리짝은 방 가 운데 던져져 있고,벽장이나 장롱 은 열려져 있었다.다만 그리스나 터키 지방을 스케치한 수 채화며,바티칸에 있는 주피터 머리의 석고상만은 아직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자신은 창가에 우뚝 서서 내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멈춰 섯을 때에도,꼼짝 않고 밖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읽어 보게!" 나는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그 검고 열기 띤 눈과 여위고 누렇게 병든 얼굴 위에 나타 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만이 가져올 수 있는 모습 뿐이었으나,너무도 진지했으므로 나는 받 아 든 편지 위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하는 호프만 씨 저의 부탁으로 당신의 부모님이 친절하게도 당신의 주소를 알려 주셨습니다.제가 주소를 문의한 것을 부디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존경하는 호프만 씨.나는 지난 5년 동안 변함 없는 우정으로 당신의 일을 생각해 왔습니다. 당신과 저에게 있어 그 고통스럽던 날에 당신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신 것이 저나 저희 가족 에 대한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저의 슬픔은 당신이 내 딸에게 구혼을 하셨을 때 제가 느낀 깊은 놀라움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또한 그때는 제가 한 남자로서 남자인 당신에게 말씀드린 것이며,제가 모든 점에서 진심으 로 존경하고 있는 분에게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어째서 딸에 대한 구혼을 거 절했는가 하는 이유를 기탄없이 진지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때 가혹하다고 생각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말씀드렸던 것은,단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언제까지나 변함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로서 당신에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그러나 그때 쌍방의 마음에서 싹터나온 소망을 만일 이루어 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그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짓은 안 했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호프만 씨,오늘은 그 같은 일에 대해 친구로서,또한 딸 아이의 애비로서 말씀드립 니다.당신이 여행을 떠난 지 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그리고 당신이 딸에게 쏟은 애정 이 딸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지, 나는 지금까지 충분히 알지 못하며 지내왔 습니다.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 일에 대해 충분히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 니다.딸은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까닭에,내가 아버지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권한 사람 과의 혼담을 딱 잘라 물리치고 말았습니다.이 사실을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비밀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딸의 감정이나 소망에 대해서는 세월조차 힘을 미치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그래 서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습니다.당신의 사정이 원래 그대로시라면,내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 부모로서는 앞으로 절대로 딸의 행복을 방해하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어떤 내용의 회답이건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이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아무 말씀도 안 드리겠습니다마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남작 오스카 폰 슈타인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린 채 창쪽으로 돌아서는 것이었다.나는 다만 이렇게 물었다. "떠날 작정인가?" 내쪽을 보지도 않고 그가 대꾸했다. "내일 아침 일찍까지는 짐을 치워 버려야 하네." 그날은 용달차를 부르고 고리짝을 묶는 일로 지나고 말았다.나는 그가 짐꾸리는 것을 거들 었다.그리고 저녁 때가 되어 우리는 이 거리의 마지막 산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저녁 때라고 하지만 아직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더웠다.하늘은 쉴새 없이 번쩍이는 날카로 운 인광 속에 떨고 있었다.파울로는 조용하고 지쳐 보였다.그러나 그 한숨은 깊고 묵직했다. 침묵에 잠긴 채,아니면 두서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한 시간쯤 돌아다닌 후에 우리는 트레비 분수 앞에 멈춰섰다.그것은 질주하는 바다의 신을 나타낸 유명한 분수였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이 기막히도록 힘찬 군상을 쳐다 보았다.그 주위를 빛나는 파 란 빛이 끊임없이 뛰어 다니는 까닭에 어쩐지 마법의 나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야말로 베르니니라면 그의 제자의 작품들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나는 그를 비난하는 놈들의 기분을 모르겠네.최후의 심판이 그림보다도 조각에 가깝다고 한다면 베르니니의 작 품은 전체로 보아 조각보다는 그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조각 가가 있을까?" 나는 물었다. "이 분수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는지 자넨 알고 있나?로마와 헤어질 때 여기서 물을 마시 는 자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어.자아,여기에 내 여행용 컵이 있네." 나는 빛 같은 한 가닥의 물을 컵에 받았다. "자네는 자네의 로마와 또다시 만나게 될 걸세!" 그는 컵을 들어 입술에 댔다.그 순간 온통 하늘이 눈이 부실 만큼 오랫동안 꺼지지 않을 듯한 섬광으로 빛났다.그리고 얇은 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수대 모서리에 부딪치더니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파울로는 손수건으로 옷에 튕긴 물을 닦았다. "나는 아무래도 신경질적이고 서툴러." 그가 말했다. "자,저쪽으로 가세.그컵은 그다지 비싼 물건은 아니었을 테지?" 이튿날 하늘은 맑게 개였다.우리가 정류장으로 나갔을 때는 파란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이별은 짧았다.파울로는 말없이 나의 손을 쥐었고,나는 그의 끝 없는 행복을 빌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그는 넓은 창가에 우뚝 서 있었다.그 눈 에는 깊고 진지한 승리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이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으랴?그는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에 죽었다.아니,거의 결혼 식날 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행복에의 의지,오직 그것만을 품고 그는 오랫 동안 죽음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이 행복에 대한 의지가 채워졌을 때 그는 죽지 않 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는 그 이상 살아갈 구 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연결시켜 준 것이 그녀를 불행에 빠뜨리게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내 자신 에게 물어보았다.그러나 내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그 녀의 얼굴에서도 내가 이미 파울로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표정을 보았던 것이다.그 엄숙 하도록 강한 승리의 진지함을……. 토머스 만 (1875∼1955) 독일의 소설가이며 평론가.항구 도시인 뤼베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고,뮌헨 대학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애썼고,평론가로서 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그는 특히 자연주의 기법으로 작품을 썼는데,풍자와 비유로 사소한 사건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192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주요 작품으로는「마의 산」 「선택받은 사람」「토니오 크뢰거」,평론집「정신의 고뇌」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