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지은이:서머셋 몸 옮긴이:이영준 펴낸이:류원상 펴낸곳:교육문화연구회 1 찰스 스트릭랜드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그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위대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위대성이란 시운을 타고난 정치가나 공명을 이룬 군인의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위대성은 그 인물이 가지고 있다기보다, 그 인물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일단 그 자리를 물러나면 평범한 존재가 되고 만다. 자리를 물러난 수상은 한낱 웅변가에 불과하고 군을 떠난 장군은 마음씨 좋은 노인이 되고 만다. 그에 비해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은 진짜다. 비록 그의 예술은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반드시 사로잡고 만다. 그가 조소의 대상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그를 변호하고 칭찬해도 조금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의 숱한 결점은 오히려 그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필요 조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예술가로서 그의 위치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찬미자의 찬사도 비방하는 자의 혹평에 못지 않게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다만 한 가지, 그가 천재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 자신의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만 특이하고 독자적이라면 그 밖의 결점은 다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벨라스케즈의 작품은 곧 싫증이 난다. 그에 비해 엘 그레코의 작품에는 관능적인 비장감이 감돌고 마치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라도 하는 듯 내심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대체로 예술가란 화가나 시인이나 작곡가를 막론하고, 그 작품에 숭고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여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심미감은 성적 본능과 서로 통하므로 어느 정도 성적인 잔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는 또 심미감 이상의 선물로 자신이라는 큰 선물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 준다. 따라서 예술가의 마음속을 살핀다는 것은 무슨 추리 소설이라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의 비밀처럼 영원히 풀 길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품이라도 스트릭랜드가 그린 그림에는 그의 특이하고, 고민에 찬 복잡한 개성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으며 그의 생활과 성격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죽은 지 4년 뒤에야 모리스 위레가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글을 기고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던 이 무명 화가를 구하고 진가를 세상에 소개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 뒤의 몇몇 비평가들이 위레의 설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위레만큼 오랜 세월을 두고 부동의 권위를 유지해 온 비평가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대해 모르는 체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렸을지도 모르나, 그 뒤의 비평은 그의 평가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므로 찰스 스트릭랜드가 얻은 오늘날의 명성도 그 무렵 그가 설정한 방향에 따라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덕분으로 스트릭랜드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미술사상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찰스 스트릭랜드의 작품론이 아니라 그의 성격에 대해서이다. 그림에는 문외한이 보아서 좋다고 생각되면 잠자코 지갑을 열면 된다는 화가도 있는데,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 작품을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교의 산물로 보는 터무니없는 견해이다. 예술은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며 정서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언어인 것이다. 물론 나도 기교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도 없는 비평가에겐 작품의 참된 값어치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내가 그림에 대해선 눈뜬 장님이라는 사실도 서슴지 않고 인정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그런 식으로 아는 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찰스 스트릭랜드의 작품에 대해서 화가인 동시에 능숙한 비평가이기도 한 나의 친구 에드워드 레가트 씨가 그의 저서 '현대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작품에 대한 소고' 속에서 이미 충분히 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저작은 대체로 영국보다도 프랑스 쪽에서 더 연구되고 있는 아름다운 문체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모리스 위레는 그 유명한 스트릭랜드론 속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모을 수 있도록 요령 있게 찰스 스트릭랜드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그의 참된 목표는 예술지상주의적인 동기에서 극히 독창적인 한 천재에 대해 세상 지식인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있었지만, 그는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던 만큼 스트릭랜드가 지니는 인간적인 흥미를 가미하는 편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한층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아냈던 것이다. 일찍이 스트릭랜드와 교제를 하고 있던 작가들과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그를 만남 일이 있던 화가들은, 그때까지 그를 한낱 보잘것없는 그림쟁이 정도로 알았는데 실은 진짜 천재가 자기들과 친하게 지내 왔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어서 그에 대한 회상기 그의 작품에 대한 감상 비평 등의 기사가 잇달아 프랑스와 미국 잡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스트릭랜드의 평판이 한층 더 높아졌으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연히 북돋아 주게 되었다. 입에 올리기에 안성맞춤인 화제였기 때문이다. 바이트브레히트 로트홀츠와 같은 이는 그 방대한 저서 '찰스 스트릭랜드-그 생애와 예술' 속에서 상당한 수에 이르는 참고 문헌을 열거하고 있다.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 내는 소질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세상에 조금이라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의 경력 속에서 뭔가 괄목할 만한 일화나 불가사의한 사건을 열심히 찾아내어, 곧 그것을 화제로 삼아 전설을 만들어 내고는 마침내 그것을 스스로 완전히 믿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평범한 인생에 대해 로맨틱한 생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주인공이 최고의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전설 속에 나오는 일화의 덕을 보는 셈이다. 이를테면 월터 럴리 경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도 그가 미지의 나라에 영국식 지명을 남겨서가 아니라, 영국의 처녀 여왕 엘리자베드가 지나가는 발 밑에 자기 망토를 깔았기 때문이라고 세상의 냉정한 지식인은 약간 비꼬면서 말할 것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무명의 화가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 그는 친구를 만들기보다 오히려 적을 만드는 기질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해 펜을 든 사람들이 빈약한 회상에다가 멋대로의 공상을 보충했다 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또 그에 대한 일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만큼 오히려 로맨틱한 문필가가 솜씨를 발휘하기가 더 좋았으리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이상할 정도로 처참한 느낌이 드는 데가 있었으며, 그 성격에도 어딘가 모르게 잔인한 점이 있었다. 더구나 말년에 가서는 남의 눈을 끌 만한 점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같은 안성맞춤의 배경 속에서 어느덧 하나의 전설이 나오고, 현명한 역사가라면 누구나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꽉 짜인 하나의 전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찰스의 아들인 로버트 스트릭랜드 목사는 바로 그 현명한 역사가의 부류에 속하지 못했다. 그 목사는 자기 아버지의 만년에 대해 '세상에 유포되어, 현존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적잖은 폐를 끼치고 있는 각종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전제해 놓고, 찰스 스트릭랜드 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때까지 스트릭랜드 전기의 결정판으로 알려져 있던 전기 속에는 일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점이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이 전기를 읽었으나, 읽고 보니 그 내용이 너무도 무미 건조한 데 오히려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스트릭랜드 목사에 의하면, 찰스는 온후하고 근면하고 착실하여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나 더 바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현대적인 목사는 소위 해석 신학이라는 학문을 배워서인지 모르지만, 무엇이고 그럴 듯하게 말하는 데 기막힌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효자로서는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 아버지 생애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참으로 교묘한 논법으로써, 목사답게 아주 멋지게 해석했다. 그대로 나가면 틀림없이 머지않아 성직자로서 최고의 요직에 앉게 될 것이다. 그 늠름한 장딴지를 주교직 각반으로 친친 감은 그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필법으로 아버지의 전기를 썼다는 것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에 대한 전설을 세상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던 것이 스트릭랜드가 명성을 얻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즉 찰스의 작품에 미혹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성격에 대한 혐오감 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인해 마음이 끌리게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심에서 우러나온 이 아들의 노력은 오히려 전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찬미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묘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를테면 스트릭랜드 목사가 아버지의 전기를 출판하여 세상에 물의를 일으킨 직후에 아버지 걸작의 하나인 '사마리아의 여인'이 화상 크리스티 가게에서 경매에 부쳐졌는데, 그 낙찰 가격은 9개월 전에 어느 유명한 수집가가 그것을 사들였던 값보다도-이 사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그림은 다시 경매에 부쳐진 것이다-무려 2백 35파운드나 떨어졌던 일도 생각하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편리하게도 사람에겐 신화를 만들어 내는 훌륭한 소질이 있어, 모든 비범한 것을 동경하는 마음에 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찰스 스트릭랜드가 박력과 독창성을 가졌다 해도 그 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바이트브레히트 로트홀츠 박사가 그 대작을 발표하여 가까스로 세상의 예술 애호가들의 걱정을 일소해 주었다. 바이트브레히트 로트홀츠 박사는 인간성을 극악한 것으로 보는 역사가 일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독자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쓴 작품을 읽는 편이, 소설의 주인공을 가장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미소짓고 있는, 그러한 작가들이 쓴 작품을 읽는 것보다 분명히 더 재미있을 것이다. 바이트브레히트 박사가 로버트 스트릭랜드 목사가 저술한 전기를 형편없이 깎아 내려, 우리는 오히려 이 불행한 목사에게 동정심이 생길 정도였다. 성직자답게 조심성 있는 태도로 나오면 위선자의 낙인이 찍히고, 구차하게 변명을 하면 가차없이 거짓말쟁이라고 공경을 받고, 잠자코 있으면 사기꾼이라고 욕을 먹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기 작가로서는 비난을 받아도 할 수 없지만, 자식으로서는 오히려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사소한 허물 때문에 영국인 전체가 거만하다느니, 거짓말쟁이라느니, 우쭐거린다느니, 사기꾼이라느니, 교활하다느니, 심지어는 요리 솜씨마저도 형편없다고 비난해 댔다. 스트릭랜드 목사는 이미 모두가 정설로 인정하는 그의 양친간의 '반목'마저 부인하려고, 찰스 스트릭랜드가 파리에서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를 '더없이 훌륭한 여자'라 부르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내가 보기에는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바이트브레히트 로트홀츠 박사가 그 편지의 원본을 복사판으로 발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아내 이야기는 꺼내기도 싫네. 어쨌든 그녀는 더없이 훌륭한 여자지. 차라리 지옥에라도 갔으면 좋겠네' 아무리 가톨릭 교회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라 해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는 그 편지를 설마 이렇게까지 억지 해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트브레히트 로트홀츠 박사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렬한 찬미자이긴 했지만, 그를 위해 사실을 속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 뒤에는 어쩌다 비열한 동기가 숨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점을 꿰뚫어 보는 데 있어 박사의 눈은 정확했다. 박사는 미술 연구가이자 정신병리 학자였으므로, 본인도 잘 모르고 있는 내심의 비밀까지 거의 다 꿰뚫어 보았다. 예사로운 행동에서 깊은 뜻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신비가도 박사를 당해 내지는 못했다. 이 박학한 저자가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인기를 손상시킬 일화까지 모조리 뒤져내는 그 끈기에는 오히려 이상한 매력까지 느끼게 된다. 주인공의 잔학성과 비열함을 보여주는 그 어떤 사례를 찾아낼 때마다 저자는 주인공에 대해 점점 열렬한 애정을 느낀다. 어떤 일화를 증거로 하여 로버트 스트릭랜드의 아버지에 대한 찬사를 사정없이 뒤엎어 버릴 때는 마치 사교도에게 화형의 판결을 내리는 종교 재판관과도 같은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찰스 스트릭랜드 일이라면 사소한 일까지도 박사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미불된 세탁소 청구서가 한 장 남아 있어도 박사는 틀림없이 그것을 상세하게 발표했을 것이고, 반 크라운 은화 한 닢을 빌어쓰고 갚기를 꺼린 일까지도 그 전후 사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밝혔을 것이다. 2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이상, 새삼스럽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화가가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 작품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그와 알게 된 것도 아직 그가 화가가 되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때부터였다. 그뒤 그가 파리에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에도 그와 자주 만났다. 그래도 내가 세계 대전 때문에 타히티 섬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에 대한 회상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듯이 그는 이 섬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그의 일상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을 내가 만난 것도 바로 이 섬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비장한 생애 속에서, 아직까지도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늘그막의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 말대로 스트릭랜드가 참으로 위대한 화가라면 생전의 그를 잘 알던 사람의 회고담이 쓸데없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다 구실일 뿐이다.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누구인지 이름은 잊었으나 사람은 영혼의 안정을 구하기 위해 매일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두 가지씩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어쨌든 현인의 말이었으므로 나도 이 교훈을 잘 지켜 오고 있다. 내가 매일 아침에 마지못해 일어나고 저녁에는 잠자리에 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본디 나에겐 금욕주의적인 경향이 있어 매주 더욱 더 괴로운 고역을 내 몸에 가한다. 즉 매주 빼놓지 않고 '타임즈'지의 문예 부록을 읽고 있는 것이다. 계속 출판되는 셀 수 없는 저서와 그 저서에 거는 저자들의 기대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종합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건 큰 성공을 거두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또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름도 모르는 변덕스러운 독자를 위해 불과 몇 시간의 기분 전환이나 여행의 지리함을 달래는 소일거리를 제공하려고 저자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얼마나 쓰라린 경험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문예 부록 서평에 의하면 이러한 책들 속에는 고심을 거듭한 역작이나 좋은 작품이 많으며, 그 가운데에는 온 생애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까지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서 나는 언제나 하나의 교훈을 배운다. 즉 작가란 창작의 기쁨과 가슴속의 울적한 생각을 토로하는 일을 그 보수로 여길 뿐, 그밖의 일에는 무관심해서 칭찬을 받건 비난을 받건,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새로운 풍조가 생겼다. 청년층은 우리 구세대 사람들이 몰랐던 신에게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앞으로 밀고 나갈 방향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역량을 믿고, 노크도 없이 방으로 밀고 들어와 그대로 털썩 우리들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이다.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 청년들의 익살을 본떠 나이 먹은 보람도 없이 아직 젊은이에게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목청을 돋우어 악을 쓰고 있는 자도 있다. 하지만 그 소리도 다만 얼빠진 듯한 공허한 소리로 들려 올 뿐이다. 바로 바람난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고 떠들고 다니며 그것으로 자기가 젊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처지나 다름없는 일이라, 차마 옆에서 보기에도 딱한 노릇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꼴사나운 짓은 하지 않고 좀더 점잖은 태도로 처세해 간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미소 뒤에는 체념하는 듯한 비웃음이 담겨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때 지금의 젊은이들과 똑같이 마구 떠들어대고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낡은 세대를 짓밟아 온 경험이 있으며, 또 용감한 새 시대의 기수로서 시기를 만난 지금의 젊은이들도 머지않아 또 다음 세대에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달콤한 사랑의 말이 그것을 속삭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신선하게 들리더라도 사실은 액센트 하나 틀리지 않게 이미 몇백 번이고 되풀이되어 온 말인 것이다. 역사의 추는 다만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며, 인간은 같은 궤도 위를 계속 오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때로는 의외로 오래 사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자기 멋대로 자기 자리를 지니고 있던 시대로부터 전혀 상황이 다른 시대까지 살아 남는 경우가 있는데, 호기심 많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인간 희극 중에서도 가장 익살맞은 한 장면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조지 크랩을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그러나 그 당시는 꽤 유명한 시인이었고, 세간에서도 모두 천재성을 인정했다. -세상이 복잡해진 오늘날에는 좀 보기 힘든 현상이지만, 크랩은 알렉산더 포프 일파에게서 시짓는 법을 배운 시인으로 압운 대련 형식의 교훈적 서사시를 썼다. 이윽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게 되자, 젊은 시인들의 시풍은 일변했다. 그러나 크랩만은 10년을 하루같이 압운 대련 형식의 교훈적 서사시만 써 왔던 것이다. 그렇게 큰 선풍을 일으켰으니만큼 그도 그 시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시를 변변지 못한 졸작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기야 그 중에는 졸작이 꽤 많았지만 키츠와 워즈워드의 서정시, 콜리지의 한두 편의 시, 게다가 셸리의 몇 편의 시는 분명히 광대한 시심의 신천지를 개척한 것이다. 크랩은 시인으로서의 생명이 다 했어도 끝까지 압운 대련 형식의 교훈적 서사시만을 썼다. 나는 현대 청년 시인들의 작품을 한 번 훑어 본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몰라서 그렇지 어쩌면 그들 중에는 키츠 이상으로 정열적인 시인이나 셸리 이상으로 고답적인 시인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즐겨 애송할 불후의 작품이 이미 발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세련된 수법에 감탄도 하며-젊은 나이에 벌써 문제가 완벽한 경지에 도달해 있으므로 이제 새삼 유망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그 훌륭한 문체에는 경탄하는 바이지만, 그처럼 어휘가 풍부하다 해도-너무나 풍부하므로 그들은 요람 속에 있을 때부터 로젯의 '유어 사전'을 뒤적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중요한 것은 결국 그 말들이 나에게는 벙어리의 말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너무 아는 것이 많은 데다 느끼는 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 같다. 그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내 등을 탁 두드리거나, 감격스럽다는 듯 내 가슴에 몸을 내던지는 그런 태도를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들의 정열도 내 눈에는 약간 혈기가 부족하고 그 꿈 또한 다소 색이 바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혼기를 놓쳐 버린 처녀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 나는 이미 한물 간 작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전히 압운 대련 형식의 교훈적인 이야기만을 쓸 작정이지만, 그것마저 나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쓴다고 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3 나는 꽤 젊었을 때 처녀작을 발표했고 다행히 그 작품이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어 여러 방면의 사람들이 나와의 교제를 청해 왔다. 나는 부끄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처음으로 런던의 문단에 등단했는데 지금 그 무렵의 일을 이것저것 돌이켜보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이제는 아득한 옛일이 되었다. 요즈음의 문단 기질을 묘사하고 있는 갖가지 소설의 묘사가 정확한 것이라면 문단의 양상도 꽤 달라진 것 같다. 문단의 중심도 햄프스티드, 노팅힐 게이트, 컷징턴의 하이스트리트에서 첼시와 블룸즈베리 대영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당시는 40세 전이라면 다들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는데, 지금은 스물 다섯을 넘어서면 너무 늦었구만 하는 식이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의 작가들은 수줍음이 많아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조금이라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말이나 거드름을 피우는 말은 하지 못했다. 유달리 점잔을 빼던 문인 사이에 특별히 굳건한 정조 관념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내 기억으로는 이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린 그 노골적인 성의 혼란 상태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 바람을 피워도 전혀 밖으로는 나타내지 않았으며, 그것이 별로 위선적인 태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사를 반드시 과장되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도 아직 그 정당한 권리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 역 근처에 살고 있었다. 먼 길을 버스에 흔들리며 대접이 융숭한 문인들의 집에 자주 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겁을 먹고 몇 번이고 그 집앞을 왔다갔다하다가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현관의 벨을 눌렀는가 하면, 이번에는 또 불안감 속에 손님이 붐벼 환기가 잘 안 되는 방으로 안내되어 거기서 연달아 많은 명사들에게 소개된다. 그리고 그들이 내 작품을 칭찬해 주기라도 하면 나는 당황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럴 때 상대방이 뭔가 흡족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답변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공교롭게도 언제나 파티가 끝난 뒤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홍차 잔이며, 조금 서툴게 자른 버터빵을 차례차례 돌리기도 하여 그 어색한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나에게는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귀찮은 일이었다. 그 명사들을 마음놓고 관찰하고 그 재치 있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 갑옷이라도 입은 것 같은 옷차림에 상체가 뒤로 넘어간, 큰 코와 탐욕스러운 눈초리를 지닌 부인들과, 아첨하듯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서도 눈초리는 날카로운 생쥐 같은 몸집이 자그마한 노처녀들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먹을 때도 결코 장갑을 벗지 않으려는 그들의 고집에 나는 언제나 혀를 내둘렀고, 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태연하게 그 손가락을 의자에 닦고 있는 뻔뻔스러움에는 그저 놀라움이 앞설 뿐이었다. 그 의자야말로 뜻하지 않은 재난을 겪었겠지만, 아마 이 집 여주인도 나중에 친구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 집 의자에 똑같은 보복을 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행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어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작가라고 해서 일부러 보기 흉한 옷차림을 하다니 그 본심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날씬한 몸매라면 그 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조그만 발에 멋진 구두를 신었다 해서 편집자가 그 사람이 쓴 글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본 일이 없어요" 그러나 그 중에는 또 유행을 좇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어 그들은 특이하게 짠 옷감에다 야성적인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애써 문사다운 옷차림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즉 세상일에 밝은 일반인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를 가나 회사 사장쯤으로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피로해 보였다. 나는 그 전에는 작가라는 사람을 만나 적이 없었으므로 이들이 아주 색다른 사람으로 보인 것만은 당연했겠지만, 정말 내가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아주 재치 있게 들렸다. 작가 친구가 한 사람 사라지면 그들은 묘한 독설을 퍼부어 그를 형편없이 깎아 내리고는 했고, 나는 언제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예술가들은 다른 사회인들이 가지지 못한 유리한 점을 한 가지 지녔다. 그것은 그의 친구의 풍채나 인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까지도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적절한 말과 유창한 말을 자유 자재로 구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는 아직 대화가 하나의 기술로 연구되고 있었다. 즉, 그 자리에서 척척 받아넘기는 말솜씨가 아궁이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따라서 아직 경구도, 미련한 자가 재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틀에 박힌 대사로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으므로 교양인의 한담에서 톡 쏘는 겨자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그처럼 기지에 넘치는 대화를 이제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일단 이야기가 우리들의 장사-우리가 손대고 있는 예술도 이면을 보면 하나의 훌륭한 장사이다.-의 내막으로 옮겨가면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이야기했던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최근에 나온 신간 서적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오고간 뒤에는 으레껏 그것이 몇 부나 팔렸는가, 저자가 선금을 얼마나 받았는가, 또 저자가 그것으로 돈을 얼마나 벌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나면 출판사 이야기가 나와 A사는 인심이 좋은데 B사는 인색하다든가, 인세를 충분히 지불해 주는 곳과 책의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책을 잘 팔아 주는 곳 중에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상책이라든가, 어떤 회사는 광고를 잘하지만 어떤 회사는 서투르다든가, 또는 어디의 경영은 근대적인데 어디의 경영은 구식이라는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다음은 대리인의 수완이 어떻다는 것과 그들이 해주는 출판 계약 등이 화제에 오른다. 다시 바뀌어 편집자의 결점이 입에 오르내리고 그들이 어떤 소재를 환영하느냐, 원고 천 자에 대해 얼마를 지불하느냐, 지불을 잘 해주느냐 미루느냐 하는 이야기로 옮아 간다. 문단의 형편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듣는 이야기마다 다 새로워서 무슨 비밀 결사에라도 가입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흥분하곤 했던 것이다. 4 그 무렵 나에게 가장 친절했던 사람은 로즈 워터포드였다. 그녀는 남성적인 지성과 여성적인 고집을 겸비한 여류 작가로, 그녀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사람의 헛점을 찌르는 것뿐이었다. 나는 어느 날 그녀가 베푼 티 파티 석상에서 우연히 찰스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좁은 객실에는 그날 따라 많은 손님이 붐비고 있었다. 누구나가 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에 나만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어쩐지 어색했다. 미스 워터포드는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여주인이었으므로,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을 보자 곧 내 옆으로 다가왔다. "스트릭랙드 부인과 이야기를 해보면 어떻겠어요? 그분은 당신 소설을 매우 칭찬하고 있답니다" "뭘 하는 분인데요?" 나는 내가 생각해도 답답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철부지였으므로 스트릭랜드 부인이 만일 유명한 작가라면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무난할 것 같아 그렇게 물었다. 로즈 워터포드는 대답을 더 신중하게 하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분 곧잘 오찬회를 열어요. 당신도 조금만 더 큰소리를 해봐요. 당장에 초대를 받으실 거예요"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자리에 안내되어 10분 가량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원스러운 음성의 소유자라는 것 외에는 별로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인은 그 무렵 건축 중에 있던 웨스턴민스터 사원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근처에 살고 있었다. 웬일인지 서로 친근감이 느껴졌다. 육해군 백화점이 템스 강과 세인트 제임즈 공원 사이의 일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결부시키는 다리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의 주소를 물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에 과연 나는 오찬회의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받은 날 아무 스케줄이 없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너무 일찍 가는 것도 뭣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 주위를 세 번이나 돌다가 좀 늦어서야 도착해 보니 벌써 손님들이 와 있었다. 미스 워터포드와 제이 부인과 리처드 트위닝과 조지 로드가 와 있었다. 나까지 모두 작가들 뿐이었다. 이른 봄, 활짝 갠 날이었다. 다들 유쾌한 기분이었다. 화제가 끊이지 않고 이야기가 계속됐다. 미스 워터포드는 그린 빛깔의 옷에 수선화 한 송이를 꽂고 파티에 나갔다는 소녀 시절의 탐미 취미와 하이힐에 파리 식 프록코트 차림을 한 처녀 시절의 경박한 취미 사이를 지금도 왔다갔다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새 모자를 쓰고 유달리 떠들어댔으며 전례 없이 친구들을 무섭게 깎아 내리고 있었다. 제이 부인은 음담을 기지의 극치로 알고 있는지,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사람은 고사하고 눈처럼 흰 테이블보마저 붉게 물들 것 같은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 놓고 있었다. 리치드 트위닝도 익살스러운 하찮은 이야기를 하고는 혼자 우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에 반해 조지 로드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의 재치를 이제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다는 얼굴로 침묵을 지킨 채 부지런히 음식만 먹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말수는 적었지만 대화에 모든 사람들이 참가하도록 이끌어 갈 만한 재치는 있었다. 이야기가 중단되면 꼭 한 마디 교묘한 말을 하여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부인은 나이가 37세였으며 키는 약간 큰 편이고 뚱뚱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살이 알맞게 찐 여자였다. 미인이랄 것까지는 없었지만 갈색 눈에 언제나 다정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탓인지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살갗은 다소 창백한 편이고 짙은 갈색 머리를 곱게 빗어 올렸다. 세 여성 중 그녀만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청초한 인상을 풍겼다. 돌아가는 길에는 미스 워터포드와 동행했다. 날씨도 좋았고 그녀도 새 모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세인트 제임즈 공원을 걸어서 지나가기로 했다. "오늘 파티는 정말 유쾌했습니다" 나는 말을 꺼냈다. "어때요. 음식은 맛이 있었나요? 나는 늘 그녀에게 말했어요. 작가를 초대하려거든 음식을 듬뿍 대접하라구요" "아주 좋은 충고로군요. 그런데 어째서 작가를 초대하고 싶어하나요?" 미스 워터포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때문이래요. 문단의 움직임을 알고 싶은 거겠죠. 이런 말을 하면 좀 뭣하지만 사람이 좀 단순한 데가 있어요. 작가는 다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를 오찬회에 초대하는 게 즐거운가 봐요. 그래서 나도 마음이 가벼워요. 난 그녀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높은 햄프스티드 언덕 위에 사는 거물로부터 낮은 체이니 워크의 서재에 있는 무명 작가에 이르기까지 인기 작가라면 그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스트릭랜드 부인 같은 사람은 가장 순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시골에서 극히 조용한 청춘 시절을 보냈다. 뮤디 순회 문고에서 보내 오는 소설들은 그 자신의 로맨틱한 분위기와 함께 런던의 로맨틱한 생활도 전해 왔다. 그녀는 정말 독서를 좋아했다(이것은 문학 소녀에게는 드문 일이다. 문학 소녀란 대개 소설보다도 그것을 쓴 작가에게, 그림보다도 그것을 그린 화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일상 생활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작가들을 만나게 되자 그때까지 관람석 쪽에서만 바라보고 있던 무대로, 자기가 직접 용기를 내어 나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작가들을 대접하기도 하고 저마다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소굴을 찾아가기도 함으로써 그녀는 정말 자기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인생이라는 도박에 대한 법칙은 그들에게는 유효하지만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색다른 옷차림이나, 엉뚱한 의견이나, 역설에 걸맞는 그들의 궤도를 벗어난 생활 방법에 그녀가 흥미를 갖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소신을 흔들어 놓을 만한 힘은 조금도 없었다. "그분에게 남편은 있습니까?" "그야 있구말구요. 시내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나 봐요. 아마 증권 중개인일 거예요. 그런데 굉장히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부부 사이는 좋은가요?" "너무 좋아서 깨가 쏟아지죠. 만찬회에 초대받으면 만날 수 있어요. 하지만 만찬에 초대하는 일은 여간해서 없어요. 어쨌든 주인 되는 사람이 아주 말이 없는 데다 문학이나 미술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으니까요" "훌륭한 여성이 어째서 답답한 남자와 결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똑똑한 남자는 그런 여자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법이에요" 나는 이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그 부인에게 아이가 있느냐고 화제를 바꿨다. "있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지요. 둘이 다 학교에 다니고 있죠" 이것으로 그 집에 대한 화제는 바닥이 났으므로 화제는 자연히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5 그 해 여름 나는 여러 번 스트릭랜드 부인을 만났다. 그녀가 여는 오찬 모임이나 티 파티에도 나갔다. 부인과 나는 마음이 맞았다. 내가 너무 어렸으므로 문학이라는 험한 길에 첫발을 내딛는 나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부인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사소한 걱정거리라도 있을 때 찾아가면 반드시 부모된 입장에서 들어 주고 적절한 조언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선천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동정심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지만 그 반면 또 본인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남용할 우려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한 기미마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의 동정 어린 말에 귀를 기울이면 오히려 이쪽이 상대방에게 은혜라도 베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젊은 혈기 때문에 반발심이 생겨 언젠가 이 점을 로즈 워터포드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유란 맛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다 브랜디라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더 맛이 좋아지지요. 더구나 젖소 입장이 되어 보세요. 누가 젖을 짜 주었으면 하지요. 젖이 붓는다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니까요" 로즈 워터포드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는 독설가라는 것이, 이런 혹평을 가하니까 가능하지만, 그 반면 또 그녀만큼 소박한 말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에게는 또 한 가지 내가 좋아하는 점이 있었다. 그 생활 환경을 언제나 품위 있는 분위기로 꾸며 놓는 점이었다. 아파트의 방은 언제나 깨끗하게 치워 놓고, 환한 꽃으로 장식했으며 응접실 의자를 씌운 천의 무늬도 화려하지 않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고상하고도 아담한 식당에서 하는 식사도 즐거웠다. 식탁도 좋은 느낌을 주었거니와, 음식도 맛이 있었다. 누가 보나 스트릭랜드 부인은 훌륭한 주주였고 좋은 어머니였다. 응접실에는 그녀의 아들과 딸의 사진이 있었다. 아들은-아마 로버트라고 한 것 같은데-럭비 학교에 재학 중이며 16살이었다. 운동복에 크리켓 모자를 쓴 멋진 모습의 사진과, 연미복에 스탠드 칼라 차림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년은 어머니를 닮아 개방적인 느낌의 이마와 생각에 잠긴 듯한 아름다운 눈을 지니고 있었다. 단정하고 건강하고 성실한 소년 같았다. 어느 날 내가 그 사진을 보고 있는데 부인이 말했다. "머리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성품이 좋은 귀염둥이예요" 딸은 14살이며 어머니와 똑같은 탐스러운 짙은 갈색 머리가 어깨 위로 보기 좋게 늘어져 있으며, 게다가 상냥한 표정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맑은 눈매도 어머니를 빼박은 것 같았다. "둘이 다 어머니를 닮았군요" "네, 아버지보다는 나를 많이 닮았나 봐요" "왜 바깥 어른을 한 번도 소개해 주지 않습니까?" "정말 만나 보고 싶으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미소였으며, 거기다 얼굴까지 발그레하게 붉혔다. 이런 중년 부인이 이렇게 쉽게 얼굴을 붉힌다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 이런 순진한 면이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은 문학하고는 담을 쌓은 분이에요. 그야말로 맹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도 헐뜯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말에서는 자상한 애정마저 느껴졌다. 우선 남편의 가장 큰 결점을 긍정해 놓고 친구들의 비판에서 남편을 두둔하려는 것 같았다. "증권 거래소에 다녀요. 이젠 전형적인 중개인이 다 됐죠. 만나 보셔도 정말 지루하고 답답할 거예요" "부인께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함께 살 수 있겠어요? 나는 남편을 아주 좋아해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나자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생긋이 웃었다. 모르는 사이에 실토를 해버려 나에게 놀림을 받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상대방이 내가 아니라 로즈 워터포드였다면 틀림없이 그대로 듣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잠깐 주저하더니 눈에 상냥한 빛을 띠고 말했다. "꾸밈이 없는 사람이라 거래소에 나가면서도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편이에요. 하지만 아주 마음이 좋고 친절한 분이에요" "그럼 저하고 마음이 잘 맞을 것 같군요" "그럼 가까운 시일 안에 살짝 만찬에 초대할게요.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해요. 밤새도록 아무리 지루하고 답답해도, 당신이 원해서 만나게 해드리는 거니까 나를 탓하시면 안 돼요" 6 이렇게 해서 나는 겨우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게는 되었으나 첫만남은 인사만 주고받는 정도였다. 어느 날 아침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오늘밤 만찬회를 열 예정이었는데 한 사람이 못 오게 되었으니 나보고 대신 그 자리를 메워 달라는 청이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퍽 지리하고 답답하실 겁니다. 처음부터 재미없는 모임이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참석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둘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의리상으로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나를 남편에게 소개하자 그는 악간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명랑한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며 가벼운 농담을 한마디 했다. "제가 이분을 초대한 것은 저도 남편이 정말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분은 저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안 믿잖아요, 글쎄" 스트릭랜드는 무엇이 우스운지 전혀 모르면서 상대방이 웃으니까 자기도 대접상 웃어야겠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어 보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손님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는 손님 접대에 쫓기어 결국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이윽고 손님들이 다 모여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문화인이란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을 어째서 이렇게 지리한 모임을 갖고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트릭랜드 부처도 과히 마음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다만 그 사람들에게 만찬의 빛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갚는 뜻에서 초대했다는 것뿐이며, 손님 쪽에서도 초대를 했으니까 왔을 뿐이었다. 식당은 가득 차서 드나들기도 거북할 정도였다. 참석한 손님은 왕실 변호사 부부, 어느 관리 부부, 스트릭랜드 부인의 언니와 그 남편인 맥앤드루 대령, 어느 하원 의원의 부인과 나였다. 그러니까 내가 초대된 것은 이 여자의 남편이 국회를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너무 점잖기만 한 파티였다. 부인들은 지나치게 고상해서 화려한 옷차림도 할 수 없고 너무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나머지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남자들은 딱 버티고 앉아 모두 만족스러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각자가 파티를 잘 이끌어 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여느 때보다 큰소리로 지껄여 댔으므로 식당 안은 매우 시끄러웠다. 게다가 모두 이야기 할 수 있는 공통 화제는 없고, 다만 양옆 사람하고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시국 이야기, 골프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지금 상영되고 있는 연극 이야기, 왕립 미술원에 출품된 그림 이야기, 날씨, 휴가 계획 등 이야기는 쉴새없이 계속되었으며, 갈수록 점점 소란해졌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속으로 은근히 파티의 성공을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남편도 주인 구실을 제대로 하고는 있었지만 말수가 적은 탓이었는지 파티가 끝나 갈 무렵에는 양옆에 앉았던 부인들이 피곤한 듯 보였다. 둘이 다 점점 그를 다루기가 힘겨운 눈치였다. 한두 번 스트릭랜드 부인의 조금 근심스러운 듯한 눈길이 남편 쪽으로 쏠렸다. 마침내 그녀는 부인들을 식당에서 데리고 나왔다. 스트릭랜드는 아내를 내보내자 문을 닫고 식탁 맞은쪽 끝으로 가서 왕실 변호사와 관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포도주를 한 잔씩 돌린 다음 엽궐련을 권했다. 왕실 변호사가 포도주 맛을 칭찬하자 그는 그 술을 입수한 경위를 말했다. 그러자 한바탕 포도주와 엽궐련이 화제에 올랐다. 변호사는 현재 맡고 있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대령은 폴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어 되도록 흥미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두 나에게는 관심을 안 갖는 듯해서 덕분에 나는 스트릭랜드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몸집이 컸고 이목구비는 번듯했으나 그것이 다 지나치게 커서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저 평범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스트릭랜드 부인이 남편에 대해 어느 정도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나 문학의 세계에 일종의 연줄을 가져 보려는 여성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만한 남편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아도 사교성이 없는 인물이었다. 요컨대 한낱 선량하고 정직하고, 재미있지도 않고 우습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사람은 좋아 보이지만 도저히 사귀어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별 도움이 못 되는 남자였다. 아마 그는 어엿한 한 시민이며, 선량한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성실한 중개인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남자를 상대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7 사교계에도 여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다 피서 준비에 바빴다. 스트릭랜드 부인도 가족과 함께 노포크의 바닷가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이들이 해수욕을 하기에도 편리했고 남편이 골프를 치기에도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가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나는 마침 런던을 떠나려던 그날 백화점에서 나오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오는 스트릭랜드 부인을 만났다. 나처럼 런던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건을 사러 나온 것이었다. 나나 부인이나 더위에 지쳐 있었으므로, 나는 다들 공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자고 권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에게 아이들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선지 두말없이 응했다. 나는 아직 젊었으므로 아이들도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계속 여러 가지 이야기를 즐거운 듯 말해 주었다. 참으로 귀엽고 건강한 아이들이었다. 공원의 나무 그늘은 무척 시원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있다 모두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간 뒤 나는 허전한 마음으로 늘 가던 클럽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도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실은 어느 정도 부러운 마음으로 조금 전에 본 단란한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말의 화려함을 중히 여기는 입장에서 본다면 찰스 스트릭랜드는 재미없고 지리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생활은 그래도 좋았으며, 그것으로 남에게 못지 않은 성공은 물론 행복까지도 마음놓고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귀여운 아내였고 게다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는 정직하고 구김살 없는 그들의 생활, 그리고 온순하고 명랑한 아이가 둘, 그들의 만족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정통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생활은 뜻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 내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아들과 딸도 성년이 되어 제각기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한쪽은 아름다운 처녀가 되어 결국은 건강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또 한쪽은 남자답고 잘생긴 청년으로 틀림없이 군인이 될 것이다. 그럼 만년에는 부부는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고 자식과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그 어떤 의의를 지닌 행복한 생애를 보내며 오래오래 살다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틀림없이 이것이 수많은 세상 부부들이 걷는 인생 행로일 것이고, 그 생활 속에서는 소박한 아름다움마저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푸른 목장을 빠져나가 상쾌한 나무 그늘을 지난 다음, 소리도 없이 굽이쳐 흘러서 마침내는 큰 바다에 이르는 조용한 시냇물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바다란, 너무 잔잔하고 고요하며 무표정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갑자기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수가 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러한 인생 행로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부터 내 가슴속에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던 외고집의 성격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이한 인생의 기쁨 속에 오히려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이 숨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가슴속에는 오히려 위험한 길을 택하고 싶다는 야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변화와 그리고 어떤 뜻밖의 일에 부딪칠지도 모르는 암초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얕은 여울도 그다지 두렵다는 생각은 없었다. 8 이로써 스트릭랜드 집안에 대해 두루 소개를 한 셈인데, 다시 읽어 보니 작중 인물이 살아 움직이듯 뚜렷이 나타나는 개성이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나의 관찰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듯한 특징을 어떻게든지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색다른 말투라든가, 남과 다른 묘한 버릇 같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에게 개성을 심어 줄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치 색이 바랜 비단 벽걸이 속에 있는 인물처럼 인물과 배경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한낱 아름다운 색채만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변명 같지만, 그들이 나에게 준 인상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는 완전히 사회 조직 속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는 흐린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많은 법인데, 그들도 마치 그런 흐릿한 그림자였던 것 같다. 스트릭랜드 집안은 중산 계급의 본보기 같은 가정이었다. 문단의 이류 인기 작가를 좋아하는 순수한 취미를 가진 명랑하고 손님 접대를 잘하는 아내, 자비로운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현재에 만족하고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있는 약간 무뚝뚝한 남편, 잘생기고 건강한 두 아이, 참으로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들에겐 말 많은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아도, 당시 찰스 스트릭랜드에게서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을 하나쯤은 발견했음직한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나도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스트릭랜드 집안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람 보는 눈이 지금만큼 예리했다 하더라도 역시 내가 그들을 보는 눈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그 후에 겪은 경험에 의해 인간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라면 그 해 가을 초에 런던에 돌아가자마자 듣게 된 소식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온 지 하루도 되기 전에 나는 저민 로에서 우연히 로즈 워터포드를 만났다. "아주 기분이 좋은 것 같군요. 무슨 좋은 일이 있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그 눈에는 심술궂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어떤 친구의 스캔들이라도 듣고, 과연 여류 작가다운 육감을 한창 곤두세우고 있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난 일이 있죠?" 웬일인지 그녀의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에서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엾게도 그 사람이 거래소에서 제명 처분을 당했다던가 아니면 버스에라도 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너무하지 뭐예요! 그 사람이 글쎄 부인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갔어요" 미스 위터포드도 저민 로의 길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밖의 상세한 사정은 일체 모른다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길거리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그런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상대방은 막무가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쪽에서 다그쳐 묻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더니 그녀는 우습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뭐, 시내의 어느 다방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가 바로 얼마 전에 다방을 그만두었다나 봐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고 생긋 웃더니, 그녀는 치과 의사와 약속이 있다며 활기 있는 발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기보다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 무렵의 나는 직접 겪은 인생 경험이 없었으므로, 어쩌다 아는 사람이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건이라도 겪으면 몹시 흥분했다. 솔직히 지금은 아는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이런 사건에도 완전히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히 40세 내외였을 것이다. 그런 나이에 연애에 열중하다니 추태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듣고 나 개인으로서도 약간 당황했다. 왜냐하면 나는 시골에서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런던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쓰고 그 끝에다 이렇다 할 답장이 없으면 어느 어느 날짜에 찾아가겠다고 덧붙여 썼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이 마침 그 찾아가겠다는 날이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에게는 아무 회답도 없었다. 지금 그녀가 과연 나를 만날 기력이 있을까? 틀림없이 이번 소동으로 나의 편지에 대한 일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찾아가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녀는 이번 사건을 비밀에 붙여 두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뜻밖의 뉴스가 이미 내 귀에 들어왔다는 눈치를 보이는 것은 매우 분별없는 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소 안됐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가 그 괴로움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마음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모르는 체하고 찾아가기로 했다. 하녀를 통해 스트릭랜드 부인의 형편을 물어 보면, 나를 문 앞에서 돌려보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 앞에서 하녀에게 미리 생각해 뒀던 말을 막상 전하게 되자 나는 완전히 흥분하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현관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녀가 다시 나왔다. 완전히 흥분된 나의 눈에도 그 태도로 보아 하녀가 집안의 비극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블라인드를 반쯤 내려서 좀 어두운 방 안에는 스트릭랜드 부인이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형부인 맥앤드루 대령이 불이라도 쬐는 듯한 자세로 불도 없는 난로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나의 방문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부인도 편지로 거절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를 맞아들인 듯했으며, 대령은 무엇 하러 찾아왔나 하고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찾아 뵙겠다고 해서..." 하고 나는 애써 태연한 태도로 말을 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차를 가져오게 할게요" 방은 어둡게 해놓았지만, 스트릭랜드 부인의 얼굴은 울어서 부어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시죠. 저의 형부를? 여름 휴가 직전의 만찬회 때 만나셨지요" 우리는 다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몹시 당황하고 있어서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으니까, 스트릭랜드 부인이 나에게 여름 휴가에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고 물어서 나를 곤경에서 구해 주었다. 그 덕분에 차가 나올 때까지 그럭저럭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대령은 위스키 소다를 청했다. "에이미도 한 잔 들지" "괜찮아요. 저는 차로 하겠어요" 이것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케 하는 최초의 말이었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되도록 스트릭랜드 부인을 이야기에 끌어넣으려고 했다. 대령은 여전히 난로 앞에 선 채 아무말이 없었다. 나는 무례하지 않게 자리를 뜨려면 언제 일어나는 게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 부인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자리에 나를 들어오라고 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방에는 꽃도 한 송이 없었고 여름 휴가 전에 넣어 두었던 여러 가지 물건들도 아직 꺼내 놓지 않았다. 언제나 그처럼 화사한 느낌이 들었던 이 방이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고 서먹서먹하게 느껴졌다. 벽 반대쪽에 시체라도 뒹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차를 다 마셨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세요" 그렇게 말하고 부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담배 상자를 찾았으나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 없는 모양이군요" 갑자기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허둥대며 방에서 나가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언제나 그녀의 남편이 가지고 나왔던 담배가 그곳에 없어 자연히 남편 생각이 났거나, 몸에 배였던 가정 생활의 조그마한 즐거움이 이제 사라진 것을 느끼고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행복했던 생활도 이것으로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는 이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대령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격한 목소리로 대령이 외쳤다. "그 바보 같은 녀석이 처제를 버리고 도망쳤어요. 당신도 아마 그 말을 들으셨겠죠?" 나는 잠깐 대답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다. "세상이란 원래 말이 많은 곳이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집을 뛰쳐나가 웬 여자와 함께 파리로 도망쳤어요. 에이미에게는 동전 한 푼 남겨 놓지 않고" "정말 안됐군요" 이 말 외에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령은 단숨에 위스키 잔을 비웠다. "이런 곳에 제가 있으면 오히려 부인께 폐가 될 것 같군요.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고 부인께 전해 주십시오. 뭔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하는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도대체 처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두 아이까지 있는데 공기를 마시고 살 수도 없을 테고 벌써 17년이나 되었는데" "17년이라뇨?" "결혼하고 살아온 지가 말입니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자를 못마땅해했지만 그래도 동서라서 되도록 참아 왔지요. 당신도 그 사람을 신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겠죠. 그런 남자와 어울리게 된 게 큰 잘못이었어요"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습니까?" "아뇨, 이제 처제는 이혼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요. 실은 아까 당신이 들어왔을 때도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요. 곧 이혼 소송을 내라, 그렇게 하는 게 자신은 물론 아이들에 대한 의무라고 말이에요. 그 녀석 정신 좀 차려야 합니다. 이번에 나타나기만 하면 반죽음이 될 만큼 두들겨 줄 테니까"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어깨가 딱 벌어진 우람한 남자였다. 안된 말이지만, 맥앤드루 대령의 손으로는 감당키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어떻게 자리를 뜰까 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스트릭랜드 부인이 돌아왔다. 눈물을 깨끗이 닦고 콧잔등에 분까지 바르고 있었다. "울기까지 하고,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아직도 계셔 주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고, 나와 관계없는 일에 나설 마음이 없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모든 얘기를 죄다 털어놓고 싶지만 그런 기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뭐라고들 그러죠?" 그녀는 물었다. 그녀 가정의 불행에 대해서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는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만난 사람이라곤 미스 워터포드 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스트릭랜드 부인은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럼 그 여자가 뭐라는지 자세히 말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내가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자 그녀는 또 물었다. "난 특히 그 점이 알고 싶어요" "어쨌든 세상 소문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여자의 말을 그대로 곧이들을 수야 있겠어요? 뭐 바깥 어른께서 집을 나가셨다는 말은 하더군요" "그 말뿐이던가요?" 나는 로즈 워터포드가 헤어질 때에 다방 여자 이야기를 조금 비췄던 일을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아 모르는 체했다. "그 밖에 또 남편이 누구하고 같이 도망쳤다는 얘기는 않던가요?" "아뇨, 그런 얘긴 전혀..." "그래요. 그걸 물어 보고 싶었던 거예요" 좀 꺼림칙한 생각은 들었지만, 어쨌든 이쯤해서 자리를 떠도 좋으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스트릭랜드 부인과 악수를 하고 만일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쳐서는 안 된고 생각해요" 흔한 위로의 말을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몸을 돌려서 대령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대령은 내가 내민 손을 잡지도 않고 말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어요. 혹 빅토리아 쪽으로 가신다면 같이 갑시다" "그럼 모시고 가죠" 나도 말했다. 9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녜요" 밖으로 나오자 대령은 곧 입을 열었다. 그가 함께 따라나온 것은 조금전까지만 해도 처제와 몇 시간에 걸쳐 논의했던 문제를 이번에는 나를 상대로 얘기하려는 속셈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아직 그걸 몰라요. 그 바보 같은 녀석이 파리로 도망쳤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뵙기엔 두 분 사이가 퍽 좋은 것 같던데요" "좋았죠. 당신이 들어오기 바로 전만 해도 부부가 된 뒤 오늘까지 입씨름 한 번 한 일이 없다고 에이미가 말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게다가 이 세상엔 그만큼 마음씨 고운 여자도 좀처럼 없을 겁니다" 상대방이 이렇게 자진해서 속이야기를 해왔으니 나는 몇 가지 이야기를 물어 봐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설마 부인께서 지금까지 전혀 눈치를 못 챘던 것은 아니겠죠?" "아니오, 전혀 그런 눈치를 못 챘어요. 그 사람은 8월에는 처제와 아이들과 함께 노포크에서 지냈어요. 그때까지도 전혀 몰랐다는군요. 나도 집사람을 데리고 2, 3일 그곳에 가서 함께 골프를 친 일이 있어요. 9월이 되자 그 사람은 동업자에게도 휴가를 줘야 한다면서 먼저 런던으로 돌아갔고, 에이미만 계속 시골에 남아 있었죠. 6주간 계약으로 시골집을 빌어 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처제는 기한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그자에게 편지로 며칠까지 런던으로 돌아가겠다고 알렸지요. 그런데 글쎄 그 답장이 파리에서 왔지 뭡니까. 더구나 그것은 이제 이것으로 부부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였어요" "왜 그러는 건지 그 이유는 쓰여 있었습니까?" "그것이 글쎄, 이유는 한 마디도 없었어요. 나도 그 편지를 읽어 봤지만 겨우 열 줄도 안 되는 간단한 내용이더군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군요" 우리는 그때 마침 길을 건너가게 되어 교통 신호에 신경 쓰느라 이야기가 거기서 끊어졌다. 조금 전에 들은 대령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무슨 이유가 있어 대령에게 진상을 어느 정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여 17년이나 살아온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데는 반드시 남편이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아내 쪽에서도 눈치챌 만한 무슨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대령이 나를 뒤쫓아왔다. "물론 여자하고 도망쳤다는 것 외에 그 사람에게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쯤이야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 배짱인가 봐요. 그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니까요" "그래 부인께선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요?" "뭐니뭐니해도 우선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하겠죠. 그래서 나는 파리로 가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거래소의 일은 어떻게 됐지요?" "바로 그게 그 녀석의 빈틈없는 점이죠. 지난 1년 동안 몰래 청산을 해왔던 거예요" "그래 공동 경영자에겐 미리 그만두겠다는 말이 있었다던가요?" "말은커녕 인사 한 마디도 없었답니다" 맥앤드루 대령도 사업 일은 그저 윤곽 정도밖에 몰랐고, 나 역시 전혀 백지였으므로 스트릭랜드가 손을 뗀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을 정리해도 4, 5백 파운드의 손해를 보게 된 공동 경영자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소송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의 가재 도구가 에이미 명의로 되어 있어 그래도 다행이에요. 어쨌든 그것만은 처제의 것이 될 테니까" "아까 부인께서 무일푼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물론 사실이죠. 처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2,3백 파운드와 가재 도구뿐이니까요" "그것만으로 부인께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이신가요?" "그걸 누가 압니까?" 이야기가 깊이 들어가자 대령은 점점 화를 내고 함부로 욕설을 퍼부어서 나는 사정을 알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대령은 문득 육해군 백화점의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클럽에서 트럼프 놀이를 하기로 약속했던 일이 생각났다며 급히 가 버렸다. 나도 그제야 그에게서 벗어나서, 세인트 제임즈 공원을 빠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0 2, 3일이 지나자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오늘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잠깐 들러 달라는 내용이었다. 가보니 부인 혼자 있었다. 엄숙할 정도로 검소한 검은 드레스가 버림받은 여인의 슬픔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아직 순진했던 만큼 그녀가 마음의 슬픔을 나타내지 않고, 그녀 나름대로 품위를 잃지 않는 자기 입장에 알맞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주시겠다고 요전에 말씀하셨죠?"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네, 말씀드렸지요" "그럼 죄송하지만 파리에 가셔서 찰리를 만나 주시지 않겠어요?" "제가 말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사람하고는 꼭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나로선 부인의 의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레드는 자기가 가겠다는 거예요" 프레드란 맥앤드루 대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가면 오히려 일을 저질러 놓기만 할 거예요. 그렇다고 달리 부탁드릴 만한 분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나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가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는 주인과 꼭 한 번 만나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주인께서 저를 알아보실지 모르겠습니다. 가 보았자, 문간에서 쫓겨나기 쉬울 겁니다" "그런 일쯤이야 대수로운 일이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도대체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그 말에는 직접 대답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당신을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이는 원래 프레드를 싫어했어요. 군인 기질이 어떤 것인지 몰랐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프레드가 가 봤자, 보나마나 프레드가 화를 내어 싸움이 벌어질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신다면 그이도 그냥 쫓아 버릴 수는 없을 거예요" "부인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게다가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데 갑자기 이런 문제를 떠맡으라니 좀 곤란하군요. 저 역시 제가 나설 자리도 아닌데 뛰어들고 싶지는 않군요. 왜 부인 자신이 남편을 만날 가시지 않습니까?" "그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이렇게 말하는 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내가 찰스 스트릭랜드를 찾아가 명함을 내밀면 그가 그것을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으로 살짝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댁의 부인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아, 그래요. 하지만 당신도 좀더 나이를 먹으면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잠깐, 왼쪽을 보시오. 자, 저쪽이 나가는 문이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 체면만 손상 당하고 돌아올 뿐인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스트릭랜드 부인이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런던에 돌아오지 말 것을 하고 후회했다. 흘끔 부인을 쳐다보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나를 쳐다보고 한숨을 크게 쉬며 방긋 웃어 보였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결혼한 지 17년이나 되는 걸요. 찰리가 설마 다른 여자에게 빠질 그런 사람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오기도 했고요. 하기야 나도 그이가 모르는 취미를 꽤 많이 갖고는 있었습니다만" "그래 부인께서는..." 그 뒤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상대방이라고 할까요. 그 주인과 함께 도망간 여자가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아니, 전혀. 아무것도 짐작이 안 가는 걸요. 정말 이상해요. 보통은 남자가 교제를 하면 둘이서 식사를 한다든가 하여 함께 붙어 다니는 게 남의 눈에 띄어, 마침내 그게 부인의 친구나 아는 사람을 통해 부인의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주의를 받아 본 일이 없어요. 그래요, 그야말로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편지는 나에겐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죠. 나는 그이가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녀는 기가 막힌 듯 울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보기에 딱했다. 조금 지나자 그녀도 차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울러 봤자 남에게 웃음거리만 되겠죠"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두서없는 화제로 옮아 갔다. 금방 얼마전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일이며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이 남녀의 전반적인 생이 어느 정도 정리된 하나의 그림이 되어 나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전부터 상상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어느 인도 주재 관리의 딸로, 아버지가 은퇴하자 온 집안 식구가 다 영국의 깊은 산골로 이사를 했다. 매년 8월이 되면 가족을 다 데리고 이스트본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여기서 그녀는 20세 때 처음으로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 것이다. 그는 그때 23세였다. 두 사람은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그가 청혼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이미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런던에서 살기로 했다. 처음에는 햄프스티드에 살다가 형편이 나아지자 도심지로 옮겨졌다. 그 동안 두 아이가 생겼다. "그이는 항상 두 아이를 퍽 귀여워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내가 싫어졌다 해도 어떻게 저 아이들까지 버리고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되다니, 도저히 믿어지질 않아요. 지금도 사실 같지가 않아요" 그러나 결국 부인은 파리에서 온 편지를 보여 주었다. 하긴 나도 벌써부터 그 편지가 몹시 보고 싶었지만 차마 보여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에이미 당신이 돌아왔을 때 아파트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것이오. 당신이 이른 대로 앤에게 말해 두었으니까 돌아올 때까지는 당신과 아이들의 식사가 다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내가 집에서 당신과 아이들을 맞아들일 수는 없소. 이미 당신과는 별거할 결심으로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예정이니까. 이 편지는 파리에 도착한 뒤 내기로 하겠소.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오. 이 결의를 절대로 번복할 수는 없소. 찰스 스트릭랜드 "한 마디의 변명도 없고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런 편지치고는 꽤 간단하군요"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이를 열중하게 만든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여자 때문에 그이는 완전히 변해 버린 거예요. 틀림없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일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나요" "프레드가 알아냈어요. 남편은 언제나 1주일에 서너 번씩은 브리지를 하러 클럽에 간다고 집을 비웠어요. 그런데 프레드가 그 클럽의 회원 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찰스가 카드실에 있는 것은 한 번도 못봤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모든 게 들통이 난 거죠. 집에선 클럽에 간다고 해놓고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놀러간거죠 뭐"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문득 두 아이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번 일을 로버트 군에게 말할 때는 굉장히 괴로우셨겠군요?" "그래서 아직 아이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했어오. 돌아온 날이 아이들이 개학하기 하루 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태연한 얼굴로 아버지는 장사일로 출장을 가셨다고만 말해 줬어요" 스트릭랜드 부인은 또 울먹거렸다. "가엾게도 아이들은 장차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앞으로 살아 나갈 일도 막연해요" 그녀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몹시 애를 썼다. 너무도 애처로워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된다면 물론 파리에라도 가겠습니다만, 그러려면 우선 부인의 뜻이 어떤지를 알아야겠죠" "난 그이가 돌아오기만을 바래요" "하지만 맥앤드루 대령 말씀은 이혼하실 작정이라고 그러시던 것 같던데요" "이혼은 절대로 안 해요" 그녀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제가 그러더라고 남편에게 전해 주세요. 그런 여자하고는 절대로 결혼하게 할 수 없다고요.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오기가 있어요. 난 절대로 이혼은 안 해요. 아이들 생각도 해야 하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이혼 얘기에 그렇게 흥분한 것도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던 모양인데, 그때 나는 어머니로서 자식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극히 여자다운 질투에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럼 부인은 아직도 바깥 어른 생각을 하고 계시군요" "그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돌아오기만 바래요. 돌아오기만 하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어요. 뭐니뭐니해도 결혼한 지 17년이나 되는 걸요. 나도 그렇게 속이 좁은 여자는 아니니까요. 지금 돌아오면 어떻게든지 그럴 듯하게 수습해서 아무도 모르게 끝낼 생각이에요" 스트릭랜드 부인이 세상의 이목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니 좀 흥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남의 평판이라는 것이 여자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있는 곳은 알고 있었다. 공동 경영자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스트릭랜드의 거래 은행 앞으로 편지를 내어, 거처를 감추다니 무슨 수작이냐고 따지자 스트릭랜드는 시치미를 떼고 유머러스한 답장을 써서 공동 경영자에게 정확한 주소를 알려 왔다. 그는 호텔에 묵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호텔 이름은 난 아직 들어 본 일도 없지만 프레드는 잘 알더군요. 아주 호화로운 호텔이래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벌개졌다. 그녀는 아마 남편이 넓고 호화로운 호텔 방에 들어앉은 모습이며 근사한 레스토랑을 누비고 다니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며, 낮에는 경마, 밤에는 극장을 찾아 다니며 매일 놀아나는 모습을 그려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할 거예요. 어쨌든 그인 벌써 마흔 살 인걸요. 그 나이에, 더구나 머지않아 어른이 될 아이까지 있는데 이게 무슨 꼴사나운 일이에요. 그리고 몸인들 지탱하겠어요?" 분노와 슬픔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이에게 전해 주셔요. 온 집안 식구가 돌아오기를 원한다구요. 모든 일이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이 변해 버렸어요. 난 그이 없이는 살아 나갈 수 없어요.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지난 일이며 오랜 부부 생활에 대해 잘 말씀드려 주세요.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이가 쓰던 방은 그대로 있고, 그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내가 그에게 전할 말을 하나하나 말해 주고, 어쩌면 그쪽에서 할지도 모를 항변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일러 주었다. "어쨌든 모든 걸 잘 부탁합니다" 하고 그녀는 애원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내가 지금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가 잘 전해 주세요" 요컨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트릭랜드가 마음을 돌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각 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엉엉 울었다. 나도 가슴이 찡해지면서 스트릭랜드의 냉혹한 소행에 분개하여 그를 데리고 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다음 다음날에는 떠나서 어떻게 결정이 날 때까지 파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하였다. 벌써 밤도 꽤 깊었고 둘이 서글픈 이야기에 지쳐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11 파리로 가는 도중 나는 공연한 일을 떠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의 한탄을 직접 듣지 않게 되자, 나는 문제를 좀더 냉정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내가 납득이 안 가는 모순된 점이 있었다. 깊은 슬픔에 잠기긴 했겠지만 나의 동정을 사려고 그 슬픔을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한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울어 보일 작정이었을 것이다. 미리 손수건을 여러 개나 준비해 놓았으니 말이다. 나는 부인의 용의 주도함에 감탄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이 오히려 남까지 슬프게 만드는 눈물의 효과를 약화시킨 셈이 되었다. 그녀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남편을 사랑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세상이 수근거릴 게 두려워서인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찢어진 가슴속에도 애정을 짓밟힌 비통한 생각과 더불어 체면을 손상시킨 분함이-아직 젊은 나의 눈에는 그것이 비열해 보였지만-뒤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져 웬일인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이며 성실한 마음속에도 얼마나 많은 기만성이 있고, 고결한 정신 속에도 얼마나 많은 천박함이 숨어 있고, 또 사악한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깃들어 있는가 등을 나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꽤 모험적이라 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기운이 솟아올랐다. 연극 무대에 선 듯한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바람난 남편을 관대한 아내 곁으로 데리고 가는 믿음직스러운 친구의 역할을 하는 자신이 흡족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스트릭랜드를 만나는 것은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밤으로 정했다. 파리에 온 목적을 성공하려면 신중해야 한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투숙한 호텔에서 스트릭랜드가 묵고 있는 호텔이 어디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 호텔은 오텔 데 벨즈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배인은 그런 호텔 이름은 못 들어봤다는 것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의 이야기로는 리볼리 가 뒤쪽에 있는 호화로운 호텔이라고 했다. 지배인과 둘이서 호텔 안내서를 조사해 보니 그런 이름의 호텔은 므완 가에 있었다. 그 일대는 상류에 속하기는커녕 오히려 점잖지 못한 구역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데는 아닐텐데" 지배인도 어깨를 움츠렸다. 파리 안에서 그런 이름의 호텔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문득 아하, 그러고 보니 행방을 감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소를 공동 경영자에게 알릴 때 이미 곯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가 보기로 했다. 다음날 저녁 6시쯤 나는 택시를 타고 므완 가로 가서 길모퉁이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호텔까지 걸어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빈민 계급의 생활용품을 파는 구멍 가게들이 즐비했고, 거기에서 왼쪽으로 거리 중간쯤에 오텔 데 벨즈가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도 싸구려 호텔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에 비하면 아주 호화로운 편이었다. 삐죽하니 높기만한 다 낡은 건물로, 벌써 몇 년째 페인트 칠은 안 한 모양이었다. 더러운 창문은 다 닫혀 있었다. 명예고 의리고 다 내던지고 수수께끼의 미녀와 죄의 쾌락을 누리고 있어야 할 찰스 스트릭랜드가 설마 이런 곳에 살고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뭔가 우롱을 당한 듯한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도 안 해보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온갖 수단은 다 써보았다고 보고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가게 옆으로 쑥 들어간 곳에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접수구는 2층' 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층계 옆에 유리를 낀 사무실 같은 곳이 있었다. 바깥 쪽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아마 그 위에서 야경꾼이 답답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는 모양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벨 밑에 '웨이터'라고 쓰여 있었다. 그 벨을 누르자 조금 뒤에 웨이터가 나왔다. 눈초리가 교활하고 무뚝뚝하게 생긴 젊은이가 셔츠 차림에 비로드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태연한 태도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이 묵고 있지 않나?" "6층 32호실입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이 안 나왔다. "지금 방에 계신가?" 웨이터는 사무실 게시판을 쳐다보았다. "열쇠를 맡겨 놓지 않았으나 손님이 올라가 보세요" 나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물어 봤다. "부인이 같이 계신가?" "그분은 혼자 계세요" 계단은 어둡고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3층까지 올라가니 실내 가운을 걸치고 머리가 더부룩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내가 지나가는 것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6층까지 올라가 32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소리가 나고 문이 반쯤 열렸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서 있었다. 그는 아무말도 없었다. 틀림없이 나를 몰라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되도록 상냥한 말투로 내 이름을 댔다.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7월에 댁의 만찬회에 참석했던 사람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그는 싹싹하게 말했다. "잘 오셨소. 거기 앉으세요" 들어가 보니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 좁은 방에 프랑스에선 흔히 루이 필립 식이라고 하는 가구류가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것이 또 하나같이 추한 데다 낡은 것이었다. 맥앤드루 대령이 허풍을 떨던 사치스러움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스트릭랜드가 한쪽 의자에 놓여 있던 옷을 마룻바닥 위로 밀어 던지고서야 내가 가까스로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방이 좁아서 그런지 처음 보았을 때보다 그의 몸집이 훨씬 더 커 보였다. 마치 사냥꾼이 입는 옷처럼 생긴 밴드가 달린 풍성한 웃옷, 그것도 후줄근해 보였고, 수염도 더부룩하게 자라 있었다. 전에 만찬회에서 만났을 때는 말쑥해 보였는데 그에 비해 지금은 차림새도 단정치 못했고 머리도 더부룩했지만 마음만은 아주 편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제부터 꺼내려는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실은 댁의 부인을 대신해 찾아왔습니다" "마침 저녁 먹기 전에 지금 한잔하러 나갈까 하던 참이오. 같이 갑시다. 압상트를 드시오?" "예, 합니다" "그럼 갑시다" 그는 언제 솔질을 했는지도 모르는 운두 높은 모자를 머리 위에 올려놓으려 말했다. "같이 식사를 해도 괜찮으시겠죠? 어쨌든 나는 당신한테 저녁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으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혼자 가셔도 됩니까?" "물론 혼자죠. 솔직히 말해 벌써 사흘째나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 프랑스어 실력이 형편없어서요" 나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오며, 그 다방 여자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다. 벌써 싸우고 헤어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가 열이 식어 버린 것인가? 그러나 만일 그가 소문처럼 1년에 걸쳐 이 분별없는 모험을 하려고 사전 준비를 해왔다면 그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클리쉬 가까지 걸어가 어느 카페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12 클리쉬 가는 그 시간이 되면 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파리의 빈민가의 인파 속에는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 주는 듯한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파리는 잘 알고 계십니까?" 나는 물었다. "아뇨, 신혼 여행 때 한 번 왔을 뿐이죠" "그런데 그런 호텔을 잘도 찾아내셨군요?" "어디 싼 숙소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누가 가르쳐 주더군요" 압상트가 나와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녹아 가는 설탕 위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실은 아까 제가 찾아온 이유를 곧 말씀드릴까 했습니다만" 하고 나는 조금 허둥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도 머지않아 누가 올 줄은 알았어요. 에이미에게 편지도 자주 왔고 해서" "그럼 제가 왜 왔는지도 대강은 짐작이 가시겠군요?" "그런데 그 편지는 아직 읽어 보지도 않았어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나는 우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리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애원조의 말과 비분조의 말이 머릿속에는 있으나, 이 거리에서는 그 말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상대방이 방긋 웃었다. "당신도 쓸데없는 일을 맡아 가지고 왔군요" "아니,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지..." "그럼 빨리 말해 봐요. 그 말이 끝나면, 오늘밤엔 우리 즐겁게 마셔 봅시다" 그렇게 나오자 나도 약간 주저하게 되었다. "속 편한 말씀만 하고 계신데, 부인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아십니까?" "뭘, 그러다 면역이 될 거요" 그는 도저히 제정신이 아닌 듯한 천연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 말에는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애써 그런 기미를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려도 상관없겠죠?" 그는 빙긋이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당신한테서 이런 보복을 당해야 할 만한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없어요" "그럼 부인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없어요" "그렇다면 17년 간이나 함께 살아오셨고 더구나 부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버리고 나온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닐까요?" "너무 심한 일이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내 말을 이렇게 다 긍정하고 나오니 오히려 말한 내가 무안했다. 이렇게 되니 나의 입장은 점점 난처하게 되었다. 나는 설득하고 애원하고 권고하고 타이르고 해도 안되면 화를 내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을 할 각오까지 하고 왔는데, 죄인 쪽에서 이렇게 서슴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나오니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 없게 됐다.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버릇인 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요" 스트릭랜드가 말하기를 재촉했다. 나는 일부러 경멸하듯이 입을 일그러뜨렸다. "그야 뭐 본인이 다 인정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도 그럴 테죠"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도저히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자기 아내에게 한푼도 남겨 놓지 않고 집을 나와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째서 그게 잘못인가요?" "도대체 부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17년간이나 벌어 먹였으니 이젠 자기 손으로 벌어먹을 수도 있을 것 아니오"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한번 시켜 보는 거요"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나도 얼마든지 반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여자의 경제적 지위라든가, 남자가 결혼으로 암암리에 승인했을 아내의 부양 의무라든가, 그 밖에 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점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는 부인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조금도" 이 말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몹시 심각한 문제였지만, 어쨌든 상대방의 대답이 마치 사람을 놀려 대는 듯한 어조였으므로,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그의 몰인정한 말을 상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아이들도 생각해야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뭐 낳아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이 모든 걸 버리고 모른 체한다면 아이들은 구걸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애들도 여지껏 다른 애들보다 편한 생활을 해왔어요. 그리고 또 누군가 뒤를 돌봐 줄 거요. 정 뭣하면 맥앤드루네 집에서 학비 정도는 대줄 거요" "하지만 애들이 귀엽지 않습니까? 둘 다 정말 온순하고 착한 애들이던데요. 그럼, 정말 그 애들하고도 앞으로 인연을 끊을 작정이신가요?" "하기야 어렸을 때는 귀여웠죠. 하지만 이젠 자라서 특별히 그렇다 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인정이란 게 있잖습니까" "그야 그럴 테지요" "그러고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뭐, 별로" 나는 여기서 다른 각도로 공격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럴 테면 그러라죠"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경멸해도 괜찮단 말인가요?" "상관없소" 그의 몰인정한 대답은 남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심각한 질문을 하는 내가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자기가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유쾌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국은 그것이 뼈아프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누구라도 어느 정도 양심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 양심이 머리를 쳐들게 마련입니다. 만일 부인이 돌아가신다 해도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잠자코 앉아 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싫건 좋건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 줄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조금 약이 올라서 그렇게 말해 주었다. "법률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법률이라도 돌에서 피를 짜낼 수는 없겠지요. 나는 무일푼이오. 있어 봐야 겨우 1백 파운드 정도 될까" 나는 점점 더 당황했다. 분명히 그가 묵고 있는 숙소를 보아도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그 돈을 다 쓰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일해서 벌어야죠" 그는 아주 태연했다. 눈에서는 내 질문을 무시하는 듯한 조소의 빛이 엿보였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이번에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선수를 쳤다. "왜 에이미는 재혼을 안 하죠? 아직 나이도 젊고, 얼굴도 못생긴 편은 아닌데, 아내로서 나무랄 데 없는 여자라는 건 내가 보증합니다. 이혼할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를 내가 다 뒤집어써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싱긋 웃을 차례였다. '하하, 이 엉큼한 너구리가 이제야 실토를 했군. 뭔가 까닭이 있어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감추려고 지금까지 연막을 쳐서 여자가 있는 곳을 숨기려고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부인은 당신이 어떤 보복을 하더라도 절대로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그러시던데요. 아주 확고하게 결심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앞으로 그런 생각은 깨끗이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그 비웃음을 띤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야 뭐 나로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오. 나야 둘러치나 메어치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점이오.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수단에 넘어갈 줄 알았다간 큰 잘못입니다. 당신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소식쯤은 벌써 들었으니까요" 그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그 소리는 너무 커 주위에 앉아 있던 손님이 다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중에는 덩달아 따라 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그렇게 웃을 문제가 아닙니다" "딱하군, 에이미도" 그는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이어 그의 얼굴에 자못 씁쓰레한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여자들 생각은 어째서 그렇게 단순할까! 자나깨나 사랑밖에 모르지. 남자에게 버림을 받으면 곧 다른 여자가 생긴 줄 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여자 하나 때문에 집을 뛰쳐나올 정도의 어리석은 남자로 보인단 말이오?" "그럼, 부인을 버린 건 여자 때문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물론이죠" "당신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그때 왜 이 말이 불쑥 나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말을 한 것 같았다. "물론이오" "그럼 도대체 왜 집을 나오셨습니까?" "그림을 그리려고요" 나는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무렵의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였고, 내 눈에는 그가 중년 남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다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나이 사십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었던 거요" "전에도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화가가 되면 가난에 쪼들린다고 강제로 나를 장삿길로 들어서게 한 거요. 그래서 한 1년 전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하여 그 동안 줄곧 밤에 그림 공부를 하러 다녔죠" "그럼 부인에겐 클럽으로 브리지를 하러 간다고 하고 당신이 갔던 곳은 거기였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솔직히 말씀 안 하셨던가요?" "나만의 비밀로 해두고 싶어서지요" "그래,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 안 돼요. 그러나 이제 그려 보일 거요. 그러니까 이렇게 파리까지 찾아온 것 아니오. 런던에선 내 희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곳에선 틀림없이 희망이 이루어질 거요" "하지만 당신 같은 나이에 시작하여 과연 결실을 볼까요? 대개는 17, 8살부터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나는 18살 때보다 지금이 더 머릿속에 잘 들어와요"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길가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는데, 그렇다고 그들을 쳐다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얼마 후 그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대답을 했다.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그렇다면 마치 구름을 잡는 격이 아닙니까?"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시선에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살이오, 당신은? 스물 셋쯤 되었나?" 이것은 오히려 내가 그에게 물을 말이었다. 내가 이런 모험을 하려고 한다면 또 모르지만, 그는 이미 청춘을 넘어선 사람으로,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까지 있는 증권 중개인인 것이다. 내 나이에 화가를 지망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가 화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솔직하고 싶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화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은 만에 하나겠죠.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결국 단념해야 하는 경우가 온다면 그야말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그리지 않을 수 없소" 그는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 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걸 버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바보로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뻔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바보라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 쓸 것 아니오?" 그의 목소리에는 참된 정열이 담겨 있었으므로 나는 나도 모르게 감동되었다. 폭풍우 같은 압도적인 힘이 그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꼭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이 금방이라도 덤벼들어 그의 몸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쳐다보아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문득 사냥꾼의 옷 같은 후줄근한 웃옷을 입고 먼지투성이의 모자를 쓴 채 이곳에 앉아 있는 이 사나이가 낯선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헐렁헐렁하게 큰 바지, 꾀죄죄한 손, 면도를 하지 않아 붉은 수염이 덥수룩한 턱, 작은 눈, 보기 흉할 정도로 큰 코, 아무리 보아도 거칠고 야성적인 느낌의 얼굴, 입은 크고 입술도 두툼하고 정욕적이었다. 이런 모습으로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와 마주친다 해도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부인 곁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나는 끝으로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그렇소,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부인은 지금까지의 일은 다 없던 것으로 하고 다시 사이좋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원망하지도 않을 겁니다" "아니지요. 내가 그런 말에 넘어갈 것 같소?" "그럼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군요? 부인과 아이들이 구걸을 해도 괜찮습니까?" "전혀 상관없는 일이오" 나는 일부러 잠시 침묵을 지키다 되도록 천천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당신은 비열한 인간이군요" "이제 그만큼 했으면 당신도 가슴이 후련할 거요. 그럼 이제 슬슬 식사라도 하러 갑시다" 13 이런 뻔뻔스러운 말에는 화를 내고 거절하는 것이 도리였다고 생각한다. 당신과 같은 몰인정한 사람하고는 같은 식탁에 앉기조차 불결하다고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하고 돌아가서 보고했다면 적어도 맥앤드루 대령만은 나의 남자다움을 인정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워낙 나에게는 딱 버티고 나가는 힘이 없어 그런 얼굴을 대할 때마다 오히려 도학자다운 행동을 하기가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도 아무리 이쪽에서 떠들어 보았자, 결국 스트릭랜드와 같은 남자와는 도저히 얘기가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묘하게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다. 머지않아 틀림없이 백합꽃이 핀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아스팔트 포도 위에 물을 준다는 것은, 시인이나 성자가 아닌 이상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두 사람 몫의 술값을 치르고 함께 어느 싸구려 레스토랑으로 갔다. 손님이 붐비고 있었다. 둘이 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었다. 나에게는 젊은이의 식욕이 있고 그에게는 몰염치한 인간이 지니는 식욕이 있었다. 그리고 또 술집에 들러 커피와 리큐어를 마셨다. 파리까지 오게 된 용건은 이미 다 해버렸다. 이것으로 끝내고 돌아간다는 것은 스트릭랜드 부인을 배신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으나 나로선 그의 비정함에는 도저히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지칠 줄도 모르고 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그런 우유 부단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결정이 난 이상, 스트릭랜드의 마음속이라도 깊이 알아보는 것이 뒷날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러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스트릭랜드가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마치 말로는 자기의 생각을 10분의 1도 나타내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서툴고 답답한 말솜씨였다. 나는 상대방이 많이 쓰는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는 말, 그리고 모호한 몸짓 따위로 그의 참된 의도 속에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지함이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이었다. (신혼여행은 별도로 하고) 처음 보는 파리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아주 신기하게 보일 풍경일 텐데도 그는 그걸 보고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벌써 여러 번 파리에 왔지만, 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거리를 쏘다니면 금방이라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는 뭔가 환상 같은 것이 계속 마음을 뒤흔들고 있어서 그 이외의 것에는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날 밤 좀 뜻밖의 일이 생겼다. 술집에 작부가 몇 명 있었는데 남자와 어울려 앉아 있기도 하고 자기네끼리 앉아 있기도 했다. 나는 그 중 한 여자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는 스트릭랜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일단 밖으로 나가더니 곧 다시 돌아와서 우리 테이블로 와서는 술 좀 사 달라고 귀엽게 말했다. 여자가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려 나는 그 여자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여자는 스트릭랜드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프랑스어를 잘 모른다고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몸짓을 해 가며 몇 마디의 프랑스어를 섞어 어떻게든지 그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했다. 그 역시 몇 마디 단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자 여자는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말한 다음 그 말을 나에게 통역해 달라고 했으며, 그가 뭐라고 대답했느냐고 그 내용도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스트릭랜드는 매우 친절하게 대했고 조금은 재미있어 하는 것도 같았지만 관심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하나 물은 모양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런 말을 들어봐야, 하나도 기쁠 것 없어요" 나였다면 이때 좀더 쑥스러워 했을 것이고 당황도 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생글생글 웃는 눈과 아주 매력적인 입매를 지닌 데다 나이도 젊었다. 그 여자가 스트릭랜드의 어디에 끌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마음먹고 있는 일을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나에게 통역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따라가고 싶다는군요" "필요없어" 그는 대답했다. 이 대답에 나는 좀더 살을 붙여 듣기 좋게 대답했다. 그렇게 굴러 들어오는 떡까지 거절한다는 것은 약간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마침 가진 돈이 없어서 응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이 사람이 좋은 걸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 줘요. 돈을 바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구요" 내가 그 말을 통역하자 스트릭랜드는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썩 꺼지라고 전해 줘요" 그의 몸짓으로 보아도 대답의 뜻은 알 수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해서 몰랐지만 여자는 틀림없이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점잖지 못하시군요" 그 여자는 술집을 나갔다. 나도 약간 화가 났다. "뭐 그렇게까지 모욕을 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대방은 당신에게 꽤 호감을 갖고 있는데요" "저런 여자를 보면 구역질이 나요" 그는 거칠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그의 얼굴에는 혐오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도 역시 야성적인 호색한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가 매혹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일종의 야수성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필요하다면 런던에도 얼마든지 있잖소. 그런 여자를 찾아 이곳 파리까지 온 건 아니란 말이오" 14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부인에게 보고해야 할 점을 일단 정리해 두고 싶었다. 보고라고 해야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이지만, 첫째로 나 자신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화가가 될 생각을 했는지 그 동기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물어 보아도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답하기 싫어서인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 그의 둔한 마음에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반항 정신이 싹터 그것이 마침내 폭발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일단 해보기는 했으나,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단조로운 생활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에 어긋나는 셈이 된다. 권태를 견디다 못해 가족과 인연을 끊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화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며 또 그런 일이라면 세상에도 흔히 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세상에 흔한 그런 남가는 아닌 것 같았다. 이것저것 생각해 본 결과 나는 그의 동기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억지 해석인 것 같았지만, 아직 로맨틱한 젊은이였던 나는 그 정도 해석밖에 할 수 없었다. 그 해석은 이러했다. 원래 그의 가슴속에는 일종의 창조 본능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것이 생활 환경 때문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는데 마치 아미 인체의 조직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듯이 점차 자라 마침내 그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아 그를 꼼짝없이 행동으로 옮기게끔 채찍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뻐꾹새가 다른 새둥지에 알을 낳고 마침내 알에서 깨어나면 그 새끼는 다른 새끼들을 쫓아내고 끝내는 자기가 신세를 진 그 둥지마저 부숴 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창조 본능이 구태여 이 둔감한 한 증권 중개인에게 달라붙어 마침내는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그의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들다니 얼마나 기이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부와 권세를 마음놓고 누리고 있는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뒤흔든 다음 끝내는 그들을 정복하여 그들에게 이 세상의 환희와 여자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고 인내와 괴로움에 찬 수도원의 금욕 생활을 택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심리적인 전환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와 갖가지 경과를 거쳐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 줄기찬 격류가 바위를 단번에 부숴 버리듯 과감한 개조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람에 따라서는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전향에는 광신자의 열성적인 면과 사도의 광포함을 연상케 하는 면이 아울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과연 그만한 값어치의 작품을 그릴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나는 그가 런던에서 밤에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무렵에 같이 배우던 학생들이 그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흰 이를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장난치고 있는 줄 아는 것 같더군" "여기서도 그림을 배우러 다니고 계시오?" "다니지. 오늘 아침에도 그 잔소리꾼이-내 선생 말이오-빙 돌아보다가 내 그림을 보더니 눈썹만 찌푸리고는 그대로 가 버리더군" 그렇게 말하고 스트릭랜드는 킬킬 웃었다. 조금도 실망하지 않는 둣했으며 동료들의 의견 따위는 전혀 문제삼지도 않았다. 그와 얘기하는 동안에 내가 가장 골치를 앓았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세상에는 흔히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속하는 곳의 방침이 그런 이상, 세인의 의견에 반대되게 행동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수에 맞지 않는 자존심까지 부여받게 된다. 즉 위험을 겪을 염려 없이 나는 용기 있는 남자라는 자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욕구는 아마 문화인에게서 가장 없애기 어려운 본능이 아닐까. 소위 진보적인 여자일수록 일단 세인으로부터 풍속 괴란의 비난 공격을 받으면 재빨리 세상에 대한 체면이라는 은신처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 세상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없다고 코방귀를 뀌어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한낱 허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꼬리를 잡히지는 않을 테니까 세상이 뭐래도 겁날 것 없다는 그런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세상의 평판이나 관습을 문제시하지 않는 남자가 있는 것이다. 그는 어이가 없어 입이 닫혀지지 않을 정도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트릭랜드를 향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멋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은 엉망이 될 겁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흔할 것 같소?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또 한 번은 이렇게 빈정거려 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이런 금언을 믿고 있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대 행동할 때 그 모든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게 하여라'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말은 들어 본 일도 없지만, 쓸데없는 잠꼬대요" "하지만 이것은 칸트의 말입니다"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니 양심에 호소해 봐야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마치 산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내가 보기에 양심이란, 사회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법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파수병 같은 것이다. 즉 각자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위법 행위를 감시하고 있는 경찰이나 자아라는 성체 깊숙이 잠입해 있는 스파이 같은 것이다. 인간은 남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난받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므로 저도 모르게 적을 성문 안으로 끌어들이고 마는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사회에서 일탈해 나가려는 기미를 보이면 미연에 그 싹을 꺾어 버리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사회의 이익을 자기의 이익보다 앞세우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개인을 사회에 묶어 놓는 튼튼한 사슬인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그 자신의 이익보다 크다고 믿고 있는 사회의 이익에 봉사하고, 자진해서 가혹한 주인을 섬기는 노예와 같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양심을 옥좌에 앉히고, 왕이 채찍을 휘둘러 그 어깻죽지를 때려도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신하처럼 오히려 자기 양심의 예민함을 자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양심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자들을 비난하게 된다. 이제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는 그런 자들에 대해 자기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제멋대로의 행위에 대한 세상의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는 스트릭랜드 앞에서 나는 인면수심의 괴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꼬리를 말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쫓아다녀 봤자 헛수고요. 에이미에게 그렇게 전해 줘요. 가까운 시일 안에 호텔을 옮길 작정이니까,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도 없을 거요" "제가 보기에도 부인은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헤어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점이오. 당신이 제발 그 점을 그 사람에게 이해시켜 주시오. 하지만 여자들이란 워낙 맹꽁이라서..." 15 런던으로 돌아와 보니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온 재촉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는 대로 곧 와 달라는 편지였다. 가 보니 맥앤드루 내외가 벌써 와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의 언니 되는 이 부인은 그녀와 어느 정도 비슷했지만 그녀보다는 훨씬 늙어 보였다. 보기에는 아주 똑똑한 것 같았다. 마치 대영제국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고급 장교의 부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지위가 훨씬 위라는 우월감에서 그런 표정을 짓고 싶어하는 법이다. 동작도 활발하고 평상시의 훌륭한 훈련 탓인지 인간으로 태어나 군인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 낫다는 신념을 별로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근위연대의 사관들만은 거만하게 굴어 못마땅한 모양이었고, 여간해서 찾아오지 않는 그 부인들의 이야기는 입에 담기도 싫다는 투였다. 차림새는 돈만 많이 들였지 촌스러워 보였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옆에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는 물었다. "그분을 만나 뵙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답니다" "아니 뭐라고요?" 스트릭랜드 부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서 소리쳤다. "주인이 그 방면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눈치를 못 채셨습니까?" "그 녀석이 완전히 정신이 돌았군" 대령이 소리쳤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고 추억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기 전이었던가 곧잘 화구를 들고 돌아다니던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림 솜씨는 정말 엉망이었어요. 모두들 놀려 대곤 했죠. 그림 재주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어요" "물론 그런 말은 구실일 뿐일 거야" 맥앤드루 부인이 말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의 보고를 듣고도 그녀는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주부다운 본능이 그 당황하던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지금은 응접실도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었다. 이번 일이 있은 뒤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는 마치 오랫동안 남의 손에 맡겨 두었던 집처럼 어수선했는데, 이제는 그런 느낌도 완전히 가셨다. 파리에서 스트릭랜드를 만나 보고 온 지금 그가 이 방에 있는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 뭔가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쯤은 그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화가가 되고 싶다면 어째서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얼마 뒤에 부인이 물었다. "그렇게 훌륭한 목적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나만큼 그런 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여자도 없을 텐데" 맥앤드루 부인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예술가에게 열중해 있는 것을 전부터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언제나 '컬추어(교양)'라는 말을 일부러 '컬초'라고 빈정거리는 투로 발음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만일 그 사람에게 그런 소질이 있다면 내가 솔선해서 그 소질을 키워 줬을 거예요. 그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예요. 증권 중개인보다는 화가와 결혼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거예요. 아이들만 없다면 난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첼시의 지저분한 아틀리에에 살아도 이 집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기가 막혀라!" 맥앤드루 부인이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 해라. 너 제정신으로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진정인 것 같은데요" 나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했다. 맥앤드루 부인은 놀랐다는 표정으로 멸시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사십이나 되는 남자가 이제 와서 그림쟁이가 되기 위해 장사와 처자를 버리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틀림없이 그 뒤에는 여자가 있을 거예요. 왜 그 예술가 친구라든가 하는 그런 여자에게 걸려 들어 그 여자 때문에 그 사람의 머리가 이상해졌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트릭랜드 부인의 파리한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여자라니, 어떤 사람이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할 말이 일종의 폭탄 선언이 된다는 것을 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없어요" 맥앤드루 내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벌떡 일어났다. "정말 당신은 그 여자를 못 만났다는 말씀인가요?" "만나고 뭐고 그런 사람이 있어야지요. 주인께선 혼자서 살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맥앤드루 부인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역시 내가 가야 하는 건데 그랬어. 나 같으면 틀림없이 그 여자를 찾아냈을 텐데" "정말입니다. 당신이 가셨더라면 더 좋았을 거 그랬습니다" 나는 조금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랬으면 당신의 추측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게 됐을 테니까요. 첫째로 그분은 고급 호텔이 있지 않았습니다. 한 간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서,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집을 뛰쳐나간 것은 무슨 도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진 돈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죄를 짓고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어 사는 게 아닐까?" 이 억측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던진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구애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뭐래도 공동 경영자에게 거처를 알리는 그런 얼빠진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고 나는 쏘아붙이듯 받아넘겼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분이 여자하고 함께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연애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던걸요" 모두 한동안 말없이 앉아 내 말을 마음속으로 되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골치 아픈 건 아니겠군요" 마침내 맥앤드루 부인이 말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언니를 흘끗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 고운 이마도 우수에 가득 차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맥앤드루 부인이 말을 계속했다. "그런 일시적인 변덕이라면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릴 테지" "왜 그 사람이 있는 곳엘 가 보지 않소, 에이미?" 대령이 마음을 정했다는 듯이 말했다. "1년쯤 파리에서 함께 살아도 될 것 아니오. 아이들은 우리가 돌봐 줘도 되니까. 틀림없이 그 사람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마음을 잡고 런던으로 돌아올 거요. 뭐 그렇게 걱정할 것은 없어요" "나 같으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겠어. 그러다 보면 스스로 돌아와서 또 전처럼 마음을 잡을 거야" 맥앤드루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쌀쌀하게 동생을 돌아다보았다. "아마 너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남자들이란 참 알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여자 쪽에서 그 점을 알고 다뤄야 해" 맥앤드루 부인도 역시 보통 여자나 고분고분하면 여자에게서 달아나려고 하는 고약한 성미가 있는데, 그렇게 된 데는 여자 쪽에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다. 즉 인간은 이성 외의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세 사람의 얼굴을 죽 둘러보았다. "그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너도 아까 그 얘기 들었잖니. 그 사람은 지금까지 누가 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고 고생도 모르던 사람 아니냐. 그러니까 그렇게 고생스러운 객지 생활은 얼마 안가 싫증이 날 거다. 게다가 돈도 없다고 하지 않니. 그러니 돌아오지 말래도 돌아오게 돼 있다" "그이가 여자와 함께 도망쳤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활은 석 달만 지나면 싫증이 날 거예요. 하지만 연애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사이도 이것으로 끝장이에요" "허어 참,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하는군" 대령은 군인 기질과는 거의 인연이 없는 이런 사고 방식을 속으로 경멸하듯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처제가 생각해 봐도 알 것 아니오? 틀림없이 곧 돌아올 거요. 그리고 아까도 도로시가 말했듯이 그렇게 잠깐 집을 나갔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세를 망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 그런 사람은 안 돌아오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에이미!" 스트릭랜드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분명히 분노였다. 그 얼굴이 창백해진 것도 갑자기 그녀를 사로잡은 차가운 분노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숨이 찬 듯 헐떡이며 재빨리 말했다. "차라리 어떤 여자에게 빠져서 함께 도망친 거라면 용서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이를 나무라지는 않겠어요. 한때의 불장난으로 끝날 테니까요. 본디 남자란 뒤가 없는 법이고 여자란 파렴치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것과는 달라요. 난 정말 그이를 미워해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어요" 맥앤드루 대령은 부인과 함께 그녀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둘이 다 뜻밖이었다. 도저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고까지 말하며 그녀를 달래었다. 두 사람은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그 말에는 개의치 않고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을 아시겠죠?" "글쎄요, 그러니까 여자 때문에 부인을 버렸다면 그를 용서해 줄 수도 있지만, 그 밖에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이죠? 요컨대 상대가 여자라면 절대로 지지 않겠지만 상대가 그 밖의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스트릭랜드 부인은 밉살스럽다는 듯이 나를 흘끔 쳐다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내 말이 급소를 찔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떨면서 말을 계속했다. "난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사람을 미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그이는 결국 나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달래 왔던 거예요. 그이도 죽을 때가 되면 나를 부르러 오겠지. 그러면 달려가서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간호해 주고 임종이 다가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조금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언제고 당신을 사랑해 왔으니까요. 지난 일은 다 없었던 것으로 하겠어요. 그렇게 말해 주려고 했는데" 나는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여자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이처럼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려는 것인지 나는 그 심리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대방이 언제까지나 죽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이런 눈물겨운 장면을 전개할 기회를 주지 않는 일에 대해 오히려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마저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이것으로 끝장이에요. 남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사람이야 어찌 됐든 난 상관없는 일이에요. 차라리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 거지 신세가 되어 굶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못된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 버리면 좋겠어요. 그런 남자하고는 인연을 끊겠어요" 그래서 나는 스트릭랜드가 부탁했던 이혼 이야기를 하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분께서는 이혼을 원한다면 언제고 거기에 필요한 수속을 해주겠다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마음대로 되진 않을걸요" "그분이 뭐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게 부인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실 뿐이죠" 스트릭랜드 부인은 분한 듯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약간의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나는 지금과는 달리 사람이라는 것을 좀더 시종 일관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한 여성의 마음속에 그처럼 무서운 집념이 숨어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하나의 인격이 얼마나 잡다한 성질로 이루어졌는가를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인색한 마음과 넓은 도량,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 이렇게 서로 상반된 것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이 참기 힘든 굴욕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뭐라고 위로하면 좋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이렇게 말하여 주기로 했다. "이것 보세요, 부인. 나는 분명히 그분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심경에 쫓기고 있다고 봅니다. 도저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신들린 사람처럼 자기 마음을 본인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 같아요. 그분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아무리 퍼덕거려도 자기 힘으로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누군가 그분에게 마술을 건 것 같아요. 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한 인간의 마음속에 다른 인격이 들어와 본래 있던 인격을 쫓아낸다는 그런 말을요. 인간의 마음이란, 육체 속에 꽉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도 있더군요. 아마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했겠죠" 맥앤드루 부인은 가운의 무릎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 금팔찌가 손목 위까지 흘러내려 왔다.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지만 내가 듣기엔 당치도 않은 해석 같군요" 맥앤드루 부인이 서슴없이 말했다. "어쨌든 에이미가 남편에게 좀 소홀하게 대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도 같아요. 얘가 그렇게 자기 일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면, 남편의 달라진 점을 눈치챘을 것 아니에요. 나 같으면 알렉이 1년 가까이나 다른 곳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알아차렸을 거예요" 대령은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교활한 데라고는 전혀 없는, 이렇게 무사 태평한 얼굴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피도 눈물도 없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변하다니 알렉 같으면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화난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왜 동생을 버렸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순전히 이기심에서 나온 일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요" "하긴 그게 가장 간단한 설명일 겁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피곤하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를 붙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16 스트릭랜드 부인이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야무진 여자인가를 알 수 있었다. 가슴속의 슬픔은 조금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이 얼마나 남의 불행에 관심 갖기를 싫어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 자를 외면하려고 하는지를 재빠르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는 어디를 가나-왜냐하면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그녀의 불행을 동정하여 계속 그녀를 초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지만-절대로 슬픈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 명랑하고 빈틈없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코 지나침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괴로운 이야기를 말하기보다 남의 괴로움에 애써 귀를 기울이려고 했다. 남편 이야기를 할 때도 절대로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왜 그녀가 남편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말만 하는지 그 실리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왜 언젠가 당신이 찰스는 혼자 있었다고 그러셨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당신이 잘못 알았을 거예요. 그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어디서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그이가 혼자서 영국을 떠난 것 같지는 않아요"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흔적을 감추는 데 보통 솜씨가 아니군요" 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얼굴을 약간 붉혔다. "어머, 그렇지 않아요. 실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 점을 문제시하여, 그이가 어떤 여자하고 달아났다는 말을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고 나서지는 마시란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소문에 의하면 찰스 스트릭랜드는 엠파이어 극장의 발레 공연에서 본 프랑스 인 무용수에게 반하여 마침내 함께 파리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문 덕분에 스트릭랜드 부인은 세상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고, 상당한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은 직업 부인으로 나서게 된 그녀에게 상당한 선전 역할을 해주었다. 맥앤드루 대령이 전에 그녀는 무일푼이라고 말한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으며 그녀는 당장 오늘부터라도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부터 알고 있던 몇몇 작가들에게서 일을 얻을 작정으로 곧 속기와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라 그녀는 보통 타이피스트보다 더 나은 점도 있었고, 부탁한 쪽에서도 매우 동정을 했다. 알고 지내는 작가들은 자기 일을 맡기겠다는 약속을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개를 해주었다. 아이도 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맥앤드루 부부가 그녀의 아이들을 맡아서 돌봐 주었으므로 스트릭랜드 부인은 자신이 먹을 것만 해결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아파트의 방을 세주고, 살림을 팔아 웨스트민스트의 작은 두 간 짜리 방을 얻어 새 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워낙 수완이 있고 부지런하니까 그녀는 틀림없이 세상의 거친 파도를 잘 헤쳐 나갈 것이다. 17 이 사건이 있은 지 그럭저럭 5년이 지난 뒤, 나는 얼마 동안 파리에 가서 살게 되었다. 런던에서 살기가 싫어졌기 때문에 옮겼던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것이 진저리가 났다. 친구들은 각자 아무 어려움도 없이 저 나름대로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 그들은 이미 나에게 아무런 자극도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나는 만나는 순간에 거의 짐작이 갔다. 우리는 이를테면 종점과 종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전차와 같았고 운행 구역이 짧은 만큼 매일 실어 나르는 손님의 수까지 알 수 있는, 그러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요컨대 판에 박은 듯한 권태롭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져 끝내는 작은 아파트 방을 비우고 얼마 안 되는 가재 도구를 팔아 다시 새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출발하기 전에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에 만나 보니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많이 늙고 여위고 주름이 늘었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변한 듯했다. 장사가 잘되어 지금은 챈서리 레인에 사무실을 차렸다. 자신은 타이프를 치는 일이 거의 없고, 고용하고 있는 네 사람의 타이피스트가 한 일을 정리만 하고 있었다. 일을 좀더 깨끗이 보기 좋게 하기 위해 파란색과 빨간색 잉크를 쓰기도 하고 인쇄물 표지로는 엷은 빛깔의 오글오글한 종이를 쓰고 있었다. 일이 깨끗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소문이 나 있었다. 돈도 좀 벌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벌어서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양가 출신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가까이 지내는 명사의 이름을 계속 들추어 자기가 사회적으로 뒤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적극성과 사업 수완을 부끄럽게 여기고, 반면에 다음날 밤 사우드 컷징턴에 사는 어느 왕실 변호사와 만찬 약속이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아들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 또 딸도 사교계에 나간 지 얼마 안 되는데 벌써 파티의 초대장이 쇄도하고 있다면서 기쁜 듯이 살짝 웃기까지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뚱딴지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머지않아 따님도 가게 일을 하게 되겠죠?" "천만에요. 그 아이한테까지 이 일을 시킬 생각은 없어요" 스트릭랜드 부인은 대답했다. "부모를 닮지 않아 얼굴이 예쁘니까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될 거예요" "아니 난 그렇게 되면 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했을 뿐입니다" "그 아이에게 배우를 시키라는 말을 가끔 들어요. 하지만 그런 일을 시킬 수도 없죠. 그야 일류 극작가는 다 알고 있는 처지라 이쪽에서 부탁하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좋은 역을 맡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아이에게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사귀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스트릭랜드 부인이 의외로 자존심만 높은 데는 나도 조금 흥이 깨졌다. "그래, 주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아뇨, 그 뒤로는 전혀. 아마 벌써 죽었는지도 모르죠" "파리에서 우연히 만날지도 모르니까 소식 듣게 되면 알려 드릴까요?" 그녀는 잠깐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만일 그이가 정말 곤란한 처지에 있다면 조금쯤은 도와줄 수도 있어요. 당신 앞으로 돈을 보내 드릴 테니 그것을 필요에 따라 그이에게 조금씩 전해 줘도 되겠죠" "그래요,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이 친절한 호의가 담긴 게 아니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고생이 사람의 성격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행복은 어쩌다 그런 작용을 하는 수도 있지만, 불행은 대개 사람을 인색하고 집념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고작이다. 18 과연 파리에 온 지 아직 2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우연히 스트릭랜드를 만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담 가의 어느 아파트 5층에 방을 정하고 2백 프랑 가량의 돈으로 고물상에서 꼭 필요한 가구를 몇 가지 사들였다. 아파트 관리인과 이야기를 해서 아침 커피를 끓여 주는 일과 방 청소 해주는 일을 타협을 보고, 친구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러 갔다. 더크 스트로브는 그 얼굴을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못보겠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싶어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타고난 희극 배우 같은 사람이었다. 직업은 화가였는데, 그 그림 솜씨가 또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로마에서였는데, 그때 그의 그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림 엽서나 될 싸구려 화제를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베르니니가 설계한 스페인 광장의 돌계단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 알량한 그림 솜씨로 버젓이 앉아 예술적 도취에 가슴을 설레며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의 아틀리에에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수염이 더부룩하고 눈이 큰 농부의 그림이며, 누더기를 걸친 장난꾸러기들의 그림이며, 고운 빛깔의 치마를 입은 여자들의 그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거기 그려 넣은 인물들도 교회의 돌계단에 앉아 있다든가, 말끔히 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이프러스 그늘 밑에서 뛰놀고 있다든가, 르네상스 풍의 우물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든가, 마차를 따라 캐파냐의 들판을 떠돌아 다닌다든가, 거의 장면이 정해져 있었다. 더구나 그 필치와 색채가 사진에 무색할 정도로 꼼꼼하고 정확했다. 빌라 메디치에 있던 한 화가는 그를 '초콜릿 상자의 화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모네나 마네나 그 밖에 인상파 화가들은 화단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나는 내가 대단한 화가라고는 생각지 않네" 그는 말했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약간의 재주는 있다네. 첫째로 내 그림은 팔리니까. 여러 지역, 여러 계층의 가정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꾸며 주고 있단 말일세. 내 그림은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까지 팔려 간다네.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무역상이나 유복한 상인들이지. 이런 나라들의 겨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어둡고 춥다네. 그래서 모두들 이탈리아를 내 그림과 같은 곳으로 알고 동경하고 있는 거지. 나도 이곳에 오기 전엔 이탈리아를 동경했으니까" 지금까지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눈을 현혹케 하여 그가 진실을 볼 수 없게 가렸던 것은 바로 이 환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의 눈은 엄격한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고 여전히 이탈리아의 로맨틱한 부분이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폐허만을 추구해 온 모양이다. 그가 그린 것은 이를테면 일종의 이상이었다. 낡아 팔리지 않는 하찮은 물건 같은 보잘것없는 것이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일종의 이상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성격에는 분명히 일종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더크 스트로브를 조롱하고 싶지는 않았다. 화가 친구들은 그의 그림을 멸시했다. 그러면서도 돈에 옹색하면 언제고 주저없이 수입이 좋은 그에게 손을 내밀곤 했다. 그들은 우는 소리만 하면 곧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그의 순진함을 이용하여 뻔뻔스럽게도 그에게서 돈을 빌어쓰고 있었다. 그는 또 비교적 인정이 많은 성격이라 아주 쉽게 감동해 그것이 상대방에겐 오히려 우습게 보였다. 그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조금도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것은 마치 아이들에게서 돈을 빼앗는 것처럼 아주 손쉬운 일이므로 뜯어내는 쪽에서 오히려 그 어리석음을 비웃어 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소매치기로 재빠른 솜씨를 자랑할 만한 거물이 되고 보면 택시 속에 보석이 잔뜩 든 핸드백을 잊어버리고 두고 내리는 얼빠진 여자들에겐 오히려 일종의 분노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세상의 웃음거리지만, 그렇다고 결코 둔감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계속 자기를 우롱하는 지나친 장난이나, 악의 없는 농담에 대해서도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자진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싫증도 모르고 언제나 그런 자들 앞에 몸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계속 괴로워하면서도 역시 사람됨이 좋아서 남을 원망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독사에게 물려도 절대 물러서는 일이 없이 상처가 나으면 곧 또 그 뱀을 가슴에 살며시 끌어안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의 일상 생활은 말하자면 엎치락뒤치락하는 희극의 형태를 빈 한 편의 비극이었다. 그러한 그를 나는 결코 놀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고마운지 나에게 평상시에 쌓였던 불평을 밑도 끝도 없이 털어 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또 딱하게도 엉뚱한 이야기라, 눈물겨운 이야기일수록 이쪽은 점점 웃음이 터져 나올 뿐이다. 그 자신은 그림 솜씨가 서툴렀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눈은 극히 예민했다. 그 때문에 그와 화랑을 찾는 일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누구의 작품이나 장점은 진심으로 예찬했고 단점은 가차없이 비평했으며, 한쪽으로 치우친 태도는 절대로 취하지 않았다. 옛 대가의 가치도 올바르게 판별했고 현재의 화가들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또 한 번 보기만 해도 재능을 발견하는 혜안을 지녀 거기에 대해 찬사를 아끼는 일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 정확한 비판의 눈을 지닌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게다가 여느 화가들보다 교육도 많이 받아 그들이 모르는, 그림과 연관성이 있는 다른 예술 부문에도 능통했다. 음악과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그림을 보는 그의 눈에 깊이와 다양성을 주었다. 나와 같은 젊은이에게는 그의 조언과 지도는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로마를 떠난 뒤에도 나는 그와 편지로 연락했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그에게서 영어로 쓴 괴상한 편지를 받았고, 나는 그때마다 침을 튀기고 손짓을 하며 열심히 얘기하는 그의 모습을 생생히 눈앞에 그려보곤 했다. 그는 내가 파리로 오기 얼마 전에 어느 영국 부인과 결혼하여 지금도 몽마르트의 아틀리에에 자리를 잡고 있다. 벌써 헤어진 지 4년이나 되었으므로 그의 부인을 만나는 것도 물론 이번이 처음이었다. 19 내가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아직 스트로브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틀리에의 벨을 누르자, 그가 직접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누군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진심으로 반갑게 대해 주니 정말 기뻤다. 부인은 스트로브 옆에서 부지런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트로브가 나를 부인에게 소개했다. "알고 있지, 당신도?"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왜 내가 늘 말했잖아"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왜 오면 온다고 알려 주지 않았나? 언제 왔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예정인가? 한 시간만 더 빨리 오지 그랬나. 그랬으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는 정신없이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나를 의자에 앉혀 놓고 마치 쿠션인 양 나의 몸을 토닥거리며 엽궐련, 케이크, 포도주 등을 계속 권했다. 잠시도 나를 그냥 둘 수 없다는 투였다. 그리고 마침 집에 위스키가 없다고 낙심을 했다가는 커피라도 끓여야겠다고 하는 등 어쨌든 나를 대접하고 싶어서 안절부절이었다. 계속 눈을 반짝이며 싱글벙글 웃어 대고 수선을 떠는 바람에 얼굴에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인데도 자네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하고 나는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익살스러운 얼굴은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다리가 짧고 몸집이 작으면서 통통했다. 아직 젊은 데도-분명히 아직 삼십 전일 것이다-벌써 이마 위가 훤하게 벗어진 대머리였다. 달덩이처럼 둥근 얼굴은 혈색이 좋았으며 흰 살결에 오로지 입술만이 새빨간 빛을 띠고 있었다. 얼굴처럼 역시 동그란 푸른 눈에는 큼직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썹은 아주 흐린 금빛이었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마치 루벤스가 그렸던 뚱뚱하게 살이 찐 명랑한 상인을 연상케 하는 그런 남자였다. 내가 한동안 파리에 있을 예정으로 아파트 방을 빌었다고 말하자, 그럼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나를 마구 나무랐다. 알려 주기만 했으면 자기가 아파트를 구하고, 가구도 빌려 주고 이사할 때도 거들어 주었을 텐데, 그것을 일부러 돈을 들여 가구까지 샀냐고 야단이었다. 자기 손을 조금도 빌러 들지 않다니, 그가 그렇게 수선을 떠는 동안 스트로브 부인은 조용히 앉아 양말을 꿰매면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남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보다시피 나는 결혼을 했네"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어떤가 이 사람이?" 그는 아내에게 환한 미소를 던지며 안경을 콧등 위로 밀어 올렸다. 땀 때문에 계속 흘러내려 왔다. "도대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참 당신도..." 스트로브 부인이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어떤가,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 이봐, 자네도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장가를 가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네. 보라구 저렇게 앉아 있는 걸 보란 말일세. 한 폭의 그림이지. 샤르댕의 초상화라고나 할까? 나도 지금까지 숱한 절세 미인을 보아 왔지만, 마담 더크 스트로브만 한 미인은 아직 뵈온 일이 없네" "그만해 두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 나가 버리겠어요" "요 귀여운 것 좀 보라구"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어조 속에 담긴 정열에 당황하여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의 편지로 아내를 매우 사랑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정말 그는 한시도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슬픈 희극 배우인 만큼, 그는 결코 여자의 연심을 불러일으킬 그런 남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를 띤 눈에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고, 또 어쩌면 그 다소곳한 태도에 깊은 애정이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워 못 견딜 정도로 그렇게 매혹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품위 있고 균형 잡힌 얼굴이었다. 키는 좀 큰 편이며 검소하게 잘 만든 회색 옷이 그녀의 곡선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렸고, 얼굴빛은 하얗고 창백했으며 이목구비는 이렇다 할 두드러진 점은 없으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눈은 부드러운 잿빛이었다. 요컨대 미인이 될 기회를 아슬아슬하게 놓쳐 미인이 되지 못한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스트로브가 그녀를 샤르댕의 그림에 비유한 것은 터무니없는 엉터리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이 거장의 걸작인 실내용 머릿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그 발랄한 주부의 초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스트로브 부인이 부엌에서 조용히 서서 일을 하며, 마치 일정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한 가지씩 부엌일을 정리해 가다 보면 저절로 그 부엌일까지 뭔가 일종의 정신적 의의를 띠게 되는 그런 장면을 연상케 되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그녀를 똑똑하다든가, 또 싹싹한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순진해 보이는 점에 뭔지 모르게 끌리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딘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없는 적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 여자가 더크 스트로브와 결혼을 했는지 나는 좀 이상했다. 영국인이라고는 했지만 어디 출신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어떤 계급 출신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또 결혼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그 점도 확실치 않았다. 통 말이 없는 여자였지만, 일단 입을 벌리면 또렷또렷하게 말을 했으며 그 태도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었다. 나는 스트로브에게 지금도 그림을 많이 그리느냐고 물었다. "그리느냐구? 전보다 솜씨가 늘었다네" 우리는 아틀리에에 있었는데, 그는 이젤에 놓여 있는 그리다 만 그림을 가리켰다. 그 그림을 보고 나는 적지않이 놀랐다. 여전히 캄파냐 풍으로 차려입은 한 떼의 가난한 농부들이 로마 교회의 돌계단에 기대어 쉬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즘 그리고 있는 건가?" 하고 나는 물었다. "응, 모델은 로마에만 있는 게 아니라 파리에도 얼마든지 있다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고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나 참, 이 사람은 내가 대가인 줄 알고 있다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쑥스러운 듯이 웃으면서도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 눈을 언제까지고 자기 작품에서 떼지 않았다. 남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처럼 정확하고 전통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의 감상안도, 일단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이렇게 달라져서, 아주 보잘것없고 속된 그림에 대해 만족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더 보여 드리면 어때요?"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그럼 그럴까?" 그처럼 친구들의 조소로 고민하면서도 스트로브는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과 어리석은 독선에서 자기 작품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 머리가 곱슬곱슬한 이탈리아 인 장난꾸러기 꼬마들 둘이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그림을 꺼내 왔다. "귀엽죠?" 하고 부인이 말했다. 이어서 그 밖의 그림도 보여 주었다. 파리에 와서도 역시 몇 년 동안 로마에서 그렸던 똑같은 수법으로 보잘것없는 그림만을 그려 왔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하나같이 헛되고 위선적이고 표면만을 꾸민 작품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더크 스트로브만큼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 모순은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말했는지 나에게도 확실치 않은 일이지만, 나는 그때 불쑥 이렇게 물어 보았다. "자네 혹시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화가를 만난 일이 없나?" "이건 놀라운 사실인데. 자네도 그 사람을 알고 있나" 하고 스트로브가 소리쳤다. "그 보기 싫은 사람 말이죠?" 부인이 말참견을 했다. 그 말을 듣자 스트로브는 웃어 댔다. "나의 소중한 사람" 그는 일부러 부인에게 다가와 두 손에 키스를 했다. "이 사람은 그를 싫어한다네. 그런데 자네가 그 사람을 알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일세" "전 버릇없는 사람은 딱 질색이에요" 하고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그래도 더크는 웃기만 하더니 마침내 나를 쳐다보고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실은 요전에 그 사람보고 우리 집에 와서 내 그림을 봐 달라고 그랬다네. 그래서 우리 집을 찾아왔기에 그 사람에게 있는 그림을 다 보여 줬지" 거기까지 말하고 스트로브는 자못 기분 나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그가 그렇게 언짢은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말을 다할 때까지 언짢은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 그림을 보아 주기는 했는데, 내 그림을 보았을 뿐 아무 말도 안 하지 뭔가. 그래서 다 볼 때까지 비평을 삼가고 있는 줄만 알고 일단 다 보이고 난 다음 이것이 전부요 하고 다짐을 했지. 그러자 그 사람은 그림 평은 않고 사실 당신한테 20프랑만 꾸고 싶어서 온 거요, 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분은 거절도 하지 않고 그 돈을 꾸어 주었답니다" 하고 부인은 옆에서 사뭇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정말 어이가 없더군.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네. 그 사람, 돈을 호주머니 속에 넣더니 고개를 끄떡하고 고맙다고 한 뒤 그 길로 그냥 돌아가 버린 거야"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더크 스트로브의 얼빠진 얼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림이 서툴다고 느꼈으면 차라리 서툴다고 솔직히 말해 주면 좋잖아? 그런데 전혀 한 마디도 안 하는 거야. 그러는 데는 나도 어이가 없더군" "당신은 무슨 좋은 말이라고 그 말만 자꾸 하세요" 부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나 역시 화를 낼 일이지만, 스트릭랜드의 분별없는 보복에 분개하기 보다 오히려 이 네덜란드 인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는 것이 더 우습고 재미있었다. "전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스트로브는 씽긋 웃고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기분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 사람은 아주 보기 드문 훌륭한 화가야" "스트릭랜드가 훌륭한 화가라고? 그럼 다른 사람인 모양이군" "붉은 수염을 기른, 몸집이 큰 사람으로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영국인일세" "내가 알고 있었을 때는 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았지만 길렀다면 역시 붉은 수염일 거야. 그러나 내가 말하는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겨우 5년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일세" "그럼 분명히 그 사람이군.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네" "그럴 리가 있나?" "여보게,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잘못 본 일이 있던가? 그 사람은 천재일세. 분명히 천재야. 앞으로 백 년 뒤에 만일 자네나 내 이름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다만 찰스 스트릭랜드를 알았다는 이유 때문일 걸세" 나는 정말 뜻밖이었으나 역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문득 전에 그를 만나 이야기하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 그 사람의 작품이 어디 나와 있나?" 나는 물었다. "어쨌든 성공한 셈이군. 그래,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나?" "천만에, 성공이 다 뭔가. 아마 아직 한 장도 팔지 못했을 걸세.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일세.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알고 있네. 그만한 그림 솜씨를 가졌으면서도 마네는 역시 남의 비웃음만 받았고 코로 역시 그림이라곤 한 장도 팔지 못했네. 지금은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르네만, 원하면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줌세. 그 사람은 매일 밤 7시만 되면, 클리시 가의 어느 카페에 나타난다네. 자네만 좋다면 내일 밤에라도 함께 갈 수 있네" "하지만 그쪽에서 나를 기분 좋게 만나 줄 지 모르겠군. 내 얼굴을 보면 잊었던 옛일이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가 보기로 하세. 그런데 그 사람 그림을 아무거라도 좋으니 좀 볼 수 없겠나?" "그 사람에게 부탁해 봐도 그건 안 될 걸세. 한 장도 보여 주지 않을 거야. 그런데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자그마한 화상이 그 사람의 그림을 몇 장 가지고 있네. 그러나 자네 혼자 갈 생각은 말게.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함께 가서 내가 설명을 해줘야 하네" "여보, 전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요"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화도 안 나는지, 그 사람의 그림을 그렇게 말하다니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앉더니 나에게 말했다. "사실은 언젠가 대여섯 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분 그림을 사러 왔어요. 그런데 이분은 자기 그림은 팔 생각도 않고 자꾸만 스트릭랜드 그림을 사라고 권하지 뭐예요. 그리고 꼭 한번 보라고 하며 손수 그 그림을 가지고 왔답니다" "그래 부인께선 그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하고 나는 웃으며 물었다. "아주 끔찍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어요" "무슨 소리야. 당신은 몰라" "하지만 그 네덜란드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 그림을 보여 줬다고 화를 냈잖아요. 틀림없이 당신이 놀리는 줄 알았을 거예요" 더크 스트로브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았다. 흥분으로 상기한 얼굴이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미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인 만큼, 그냥 지나가다 힘 안 들이고 주울 수 있는 해변가의 조약돌 같은 건 아니야. 그것은 예술가가 이 혼돈된 세계에서 고심에 고심을 해서 만들어 낸 것이야. 미를 인식하기 위해선 예술가가 맛본 괴로움을 이쪽에서도 거듭 맛봐야 하는 거야. 즉 미는 예술가가 맛본 괴로움을 이쪽에서도 거듭 맛봐야 하는 거야. 즉 미는 예술가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같은 것일세. 그러므로 이쪽에서 마음의 귀로 그것을 그대로 판별해 들으려면 이쪽에서도 그만한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게 되는 걸세" "그럼 더크, 난 어째서 당신의 그림이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난 첫눈에 보자마자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스트로브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여보, 당신은 그만 자구려! 난 이 친구하고 잠깐 산책을 하고 돌아올 테니" 20 더트 스트로브는 그 다음날 밤, 나를 찾아와 스트릭랜드가 늘 온다는 카페로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따라가 보니 그곳은 바로 내가 전에 스트릭랜드를 만나러 일부러 파리에 왔을 때 그와 함께 압상트를 마시던 그 카페였다. 그 뒤 그가 싫증도 안 느끼고 줄곧 한군데만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으른 습성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보게나, 저기 있네" 하고 카페에 닿자마자 스트로브는 말했다. 벌써 10월인데도, 그날 밤은 따뜻하여 테라스의 테이블도 손님으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카페 안을 둘러보았지만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기 저 구석을 보게나. 체스를 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사람일세" 그곳을 쳐다보니 과연 한 남자가 체스판 위에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 사이를 지나 그 사람 옆으로 갔다. "스트릭랜드" 그는 얼굴을 들었다. "여어, 뚱보, 무슨 일로 그러나?"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옛 친구를 데리고 왔소" 스트릭랜드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누군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체스판 위로 눈을 돌렸다. "거기 앉게. 그러나 귀찮게 굴면 안 되네" 그는 말했다. 그는 말을 하나 움직이더니 또다시 체스 놀이에 열중했다. 사람 좋은 스트로브는 자못 난처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는 마실 것을 시키고 그 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트릭랜드라는 남자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나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더부룩하게 자란 채 손질도 하지 않은 빨간 턱수염이 얼굴을 덮었고, 머리도 길게 자랐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얼굴과 몸이 몹시 수척해 보인 점이었다. 그래서 그 큰 코가 전보다 더 우뚝 솟아 있었으며 광대뼈도 튀어나오고 눈도 조금 커 보였다. 관자놀이도 폭 꺼져 있었으며 몸은 마치 해골 같았다. 5년 전에 입었던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는데, 더러운 데다 찢어지고 실밥이 드러나 보였으며 마치 남의 옷을 빌어 입은 것처럼 헐렁헐렁했다. 언뜻 쳐다보니 꾀죄죄한 손에 손톱은 자랄 대로 자랐고, 살이 빠져 굵은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았다. 나는 문득 보기 좋았던 예전의 그 손을 생각했다. 그가 체스 놀이에 정신이 팔려 그곳에 앉아 있는 모습은 무서운 박력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이 오히려 그 박력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이윽고 그는 한 수를 두고 나더니 몸을 뒤로 젖히고 방심한 듯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상대방은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프랑스 인으로 한동안 형세를 살펴보고 있더니, 갑자기 명랑하게 소리치며 이제는 졌다는 듯 몸을 움츠려 보이고 말을 긁어 모아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진 것이 분한 듯 스트릭랜드를 향해 몇 마디 억지 소리를 퍼붓더니 웨이터를 불러 술값을 치르고 나가 버렸다. 스트로브는 앉아 있던 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이제야 얘길 할 수 있겠군" 하고 스트로브는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심술궂은 눈으로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놀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잠자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의 옛 친구가 만나고 싶다기에 데리고 왔어요" 스트로브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스트릭랜드는 생각에 잠긴 듯 우두커니 앉아 1분 가까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전혀 본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그가 그렇게 모르는 체했는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때 그의 눈에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본 듯한 표정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몇 년 전과는 달라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부인을 만났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도 그분의 최근 소식을 듣고 싶어하실 것 같습니다만" 그는 잠깐 웃더니 눈을 반짝였다. "언젠가 둘이서 하룻저녁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요" 그는 말했다. "그게 몇 년 전의 일이더라?" "5년 전이지요" 그는 압상트를 또 한 잔 주문했다. 스트로브는 그 잘 돌아가는 혀로, 그가 나와 알게 된 동기며, 어떤 계기로 둘 다 스트릭랜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스트릭랜드는 그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두 번 반사적으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내가 보기엔 무언가 생각에 골몰하는 것 같았다. 스트로브가 지껄이는 바람에 시간을 메꿀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서로 입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약 30분 가량 그렇게 지껄이더니 이 네덜란드인은 시계를 쳐다보고 이제 그만 실례하겠다고 말했다. 나에게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단둘이 있게 되면 스트릭랜드가 혹시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어 그에게 먼저 가라고 대답했다. 스트로브가 뚱뚱한 몸을 흔들며 나가자 내가 말했다. "더크 스트로브는 당신을 위대한 화가라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게 어떻다는 말이오?" "만일 괜찮다면 당신 그림을 보여 주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에게 보여줘야 하지요?" "어쩌면 한 장쯤 사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나는 팔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생활 걱정은 없습니까?" 그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보이나요?" "금방이라도 굶어 죽을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요, 당장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소" "우리 함께 식사나 하러 갑시다" "그건 또 왜?" "뭐 자선을 베풀려는 건 아닙니다"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굶어 죽거나 말거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그의 눈에는 다시 반짝이는 빛이 떠올랐다. "그럼, 가십시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역시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싶으니까" 21 그에게 아무 데나 좋은 곳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더니 어느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에 나는 신문을 한 부 샀다. 그가 요리를 주문하자, 나는 그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식사를 했다. 가끔 그가 나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체 했다. 어쨌든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게 하려는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에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실렸소?"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 되자 그가 먼저 이렇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좀 초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저는 언제나 문예란의 연극 비평을 즐겨 읽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신문을 접어 옆에 놓았다. "정말 맛있게 먹었소" 그는 말했다. "여기서 커피까지 마실까요?" "그게 좋겠군" 둘이 다 엽궐련을 피워 물었다. 나는 잠자코 담배를 피웠다. 가끔 그가 우스운 듯 미소를 띠고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끈기 있게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지난번 만나고 난 뒤에 당신은 무슨 일을 했소?"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는 별로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동안 다만 할 일을 열심히 했고, 즐기는 가운데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기도 하고, 인간과 책에 대한 이해가 점차 깊어져 가고 있다는 것, 그런 정도였다. 나는 일부러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는 말은 비치지도 않고 당신에 대한 일은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과연 그 계략이 들어맞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진해서 자기 신상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말재주라곤 없는 사람이라 5년 동안에 겪은 체험을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나머지는 이쪽에서 상상으로 메꿀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인데, 이 정도밖에 모르다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마치 골자가 빠진 원고를 판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싸우며 살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몸서리쳐질 여러 가지 일도 그는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의 즐거움이란 것에 아주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스트릭랜드는 보통 영국인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일 년 내내 좁은 한 간 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그는 조금도 답답해하지 않았다. 방안을 아름답게 꾸밀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보았던 방의 그 그을은 벽지도 그는 한 번도 기분 나쁘게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안락 의자에 앉아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도 없고, 오히려 딱딱한 부엌 의자가 마음이 편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늘밤에는 매우 맛있게 먹었지만 요리에도 무관심했다. 그에게 음식이란 다만 굶주림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며, 그나마도 먹을 형편이 못 되면 그냥 굶고 지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6개월 동안을 매일 단 한 조각의 빵과 우유 한 병으로 목숨을 이어 왔다는 것이다. 외모는 관능적인데도 그 방면에는 전혀 무관심했다. 가난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처럼 정신적으로만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는 뭔가 모르게 깊은 감명을 주는 점이 있었다. 런던에서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쓴 뒤에도 그는 태연하게 지냈다. 그림은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아마 애써 팔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반은 농담 삼아 하는 그의 말을 빌면 어떤 때는 파리의 밤 생활을 보고 싶어하는 런던 사람들을 안내해 주고 끼니를 이어 온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냉소적인 그의 성격에는 잘 맞는 일이었던 만큼, 그럭저럭 그 일을 하다 보니 그는 도시의 점잖지 못한 방면에 꽤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어쨌든 법적으로 금지된 일을 보고 싶어하는, 그것도 한잔 얼큰하게 취한 영국인을 찾으려고 몇 시간이고 마들레느 대로를 헤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좋은 손님을 잡았을 때는 상당한 돈이 생기는 수도 있었지만, 그의 옷차림이 너무 남루해서 나중에는 결국 관광객 쪽에서 겁을 집어먹고 꺼려하게 되었으며, 그에게 안내를 맡길 만큼 호기심 많은 손님도 좀처럼 없었다. 그 뒤 영국의 의사를 상대로 널리 선전하는 특허약 광고문을 번역하는 일도 했다. 또 파업을 하는 동안 페인트공이 되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결코 화필을 놓지 않았다. 더구나 아틀리에에 다니는 일은 얼마 안 가 싫증이 나서 완전히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해왔다. 궁색하긴 했지만 캔버스와 그림 물감을 살 만한 돈은 그럭저럭 마련을 했으며, 그 이외의 탐나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는 창작에도 상당한 고심을 거듭한 모양이었다. 남에게 가르침 받기 싫어했고, 선인들이 이미 하나하나 해결해 주고 있는 기법상의 여러 가지 문제를 자기 혼자 힘으로 해결해 나가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고 있고, 나도 역시 모르는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서 도깨비에 흘린 듯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작품을 보여 주기 꺼려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도 이제 거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꿈 속에 사는 사람인 만큼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눈에 비치는 것을 잡으려고 열중하여, 그 밖의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만 그 강렬한 개성을 캔버스 위에 쏟았다. 그러고는 일단 그 일이 끝나면 거기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왜냐하면 어느 그림이나 끝까지 다 그리는 일이 여간해서 없었기 때문에-오히려 그를 불사르고 있던 정열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기 작품에 만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것은 그의 마음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꿈에 비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째서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습니까?" 나는 물었다. "당신 역시 남의 비평을 듣고 싶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오?" 이 한 마디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경멸이 담겨져 있었다. "그럼, 이름이 알려지는 게 싫다는 말입니까? 대체로 예술가들이란 그렇지 않을 텐데요" "그런 것은 풋내기들이나 하는 짓이오. 개인의 비평도 문제시하지 않는데, 그 속된 자들의 비평이 마음에 걸릴 까닭이 어디에 있겠소" "하지만 세상을 원리 원칙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거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름을 널리 알려 주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오? 비평가나 문인이나 증권 중개인이나 여자들이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람들이나 만난 일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에서 미묘하고 격렬한 감동을 받는 것을 상상하면 당신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겠지요? 힘을 동경하지 않는 자는 없으니까요.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동정심을 일게 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것만큼 훌륭한 힘의 발휘는 없겠지요" "흔해빠진 감상이지" "그럼, 왜 작품이 잘되고 못되고를 걱정하십니까?" "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요. 다만 눈에 비치는 것을 그리고 싶을 뿐이오" "이를테면 제가 무인도에 가서, 아무리 작품을 써도 아무도 읽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연 거기서 계속 살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일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에는 그의 영혼을 뒤흔들어 황홀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가끔 내 머릿속에는 절해 고도의 모습이 떠올라요. 그런 섬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 속에서 신기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을 어쩌면 발견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가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말한 것은 아니다. 적당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몸짓으로 표현했고, 말투도 더듬더듬했다. 그래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쪽에서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가 쉽게 표현한 것이다. "지나간 5년 동안의 고생을 돌이켜보고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하는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안락한 가정과 행복한 생활을 버린 셈입니다. 장사도 꽤 순조로웠는데요. 그런데 이 파리에선 비참한 생활을 하신 것 같군요.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당신은 똑같은 생활을 하실 작정인가요?" "하구말구요" "당신은 부인과 아이들 소식은 하나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전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전혀" "그렇게 매정한 대답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기 식구들을 그처럼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조금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때로는 옛일이 생각나겠지요. 처음으로 부인을 만나 부인을 사랑하고 결혼했을 때의 일 말입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부인을 가슴에 안았을 때 느꼈던 그 즐거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나는 과거를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영원한 현재일 뿐이오" 나는 잠시 이 말을 마음속으로 되씹고 있었다. 물론 확실치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말하는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아무렴"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마주보더니 이내 그 눈에 냉소적인 빛을 번뜩였다. "아무래도 내 말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군" "무슨 말씀을" 나는 선뜻 대답했다. "상대방이 이무기 같은 사람이라면 좋고 나쁘고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오히려 그런 사람이 갖는 마음의 움직임에 흥미를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흥미를 갖는 것은 다만 소설가다운 직업 의식에서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왈가왈부하는 건 당신 마음이겠지만, 당신도 참 비열한 사람이군" "그러니까 당신도 나에겐 마음이 안 놓이는 게 아닙니까" 하고 나도 받아넘겼다. 그는 냉담한 웃음을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력적인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 웃음으로 인해 늘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환해지고 순진한 짓궂음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눈 속에 떠오른 채 눈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여유 있는 미소였다. 잔인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은 육감적인 미소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티로스의 환희를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내가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도 이 미소 때문이었다. "파리에 오신 뒤 연애를 하신 일은 없습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시간이 어디 있소. 사랑과 예술, 양쪽을 다 누릴 만큼 인생은 길지 않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세상을 완전히 등진 사람으론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그러나 인간의 본능이란 골치 아픈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왜 그렇게 웃고 있소?" "당신이 하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은 머리가 둔한 편이로군" 나는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살피듯 쳐다보았다. "나를 속이면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나는 싱긋 웃었다.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대여섯 달 동안이라면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런 일과는 영원히 인연이 멀어졌다고 스스로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제 내 영혼은 내 것이 됐다고 생각하게 되겠죠. 그러나 그러다 보면 갑자기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지금까지 줄곧 자기의 두 다리가 진흙 속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번엔 오히려 그 진흙 속에 뒹굴고 싶어져서 그야말로 야비하고 천한, 말하자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란하고 파렴치한 짐승 같은 여자를 찾아내어, 이쪽에서도 야수처럼 덤벼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칠 대로 거칠어져 머릿속까지 마비되도록 취해 버리는 겁니다" 그는 꼼짝도 않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도 그를 마주 쳐다보며 극히 여유 있는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일단 이 폭풍우가 지나가면 그 뒤는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기분이 상쾌해지는 법이죠. 마치 육체에서 빠져 나온 무형의 영혼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라는 것에 곧 접촉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미풍이며 신록의 나무들이며, 무지갯빛 냇물의 흐름 같은 것과 마음이 통하는 기분이 듭니다. 마치 신에게 가까워 진 듯한 기분이 드는 거죠. 그 기분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더니 내 말이 끝나자 곧 외면을 해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인간이 고문을 당해 기절했을 때의 얼굴을 방불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들의 이야기도 이것으로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2 파리에 정착해 나는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오전 중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등 극히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루브르는 수많은 미술관 중에서도 가장 정답고 사색하기에 알맞은 장소였으므로 툭하면 그곳에 몇 시간씩 있었고, 또 조금도 살 마음이 없는 헌 책을 뒤적이며 그 강변 거리를 서성거리도 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을 외곤 했다. 밤에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스트로브네 집에도 가끔 들러 검소한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더크 스트로브는 이탈리아 요리를 잘 만든다고 자랑이 대단했는데, 솔직히 말해 그가 만드는 스파게티는 그림 솜씨보다 훨씬 좋았다. 그것은 임금님의 진수 성찬도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것이었으며, 그것을 집에서 구운 맛있는 빵과 붉은 포도주와 함께 곁들어 먹었던 것이다. 나는 블랑시 스트로브와도 차츰 친해졌다. 그녀에게는 그 말고는 알고 있는 영국인이 없었으므로 나를 만나는 일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밝아 보이는 온순한 여자였으나 늘 말이 없는 편이라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비밀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은 그녀의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 탓이며 다만 그것이 숨김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의 남편 때문에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크는 무엇이건 절대로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쪽에서 조마조마 마음이 죄어질 그런 일도 누구 앞이건 서슴없이 지껄이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부인이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꼭 한 번이지만 그런 경우에 부딪친 일이 있다. 그때 더크는 부인이 말리는 데도 듣지 않고 설사약을 먹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 것이다. 그때 겪은 난처한 장면을 너무도 진지하게 말했으므로 나는 마침내 배를 움켜쥐고 웃고 말았다. 스트로브 부인은 그것을 보고 한층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신도 참,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뭐가 그리 좋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화를 내자 그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난처한 듯이 이마를 찌푸렸다. "여보, 당신 화났소? 다시는 그런 거 안 먹을게. 다만 기분이 언짢아서 그랬어. 어쨌든 늘 앉아 있기만 하니 운동을 제대로 해야지. 그때는 사흘 동안 한 번도..." "제발 그만해 두세요" 그녀는 더 못 참겠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그는 마치 꾸중 들은 아이처럼 얼굴을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그저 우습기만 하여 배를 움켜쥐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스트로브와 함께 그곳에 가면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적어도 몇 장은 볼 수 있다던 그 화상을 찾아갔다. 가 보니 공교롭게도 스트릭랜드가 벌써 그 그림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화상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뭐 서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그 그림은 원래 스트로브 선생의 얼굴을 봐서 받았던 것이고 혹 팔리면 팔아 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고 화상은 어깨를 움츠렸다. "저도 신인들의 작품에는 관심을 꽤 갖고 있습니다만, 설마 선생님께서도 그 그림에 장래성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시겠죠" "내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재 활약하고 있는 화가 중에서 그만큼 재주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내 말 믿어요. 당신은 좋은 기회를 놓친 거요. 머지않아 그 그림은 이 가게 안에 있는 그림을 다 팔아도 받을 수 없는 좋은 값으로 팔리게 될 테니 두고 보시오. 모네도 안 그랬소. 그 무렵에는 단 백 프랑을 주고도 살 사람이 없었다오. 그 그림이 지금은 도대체 얼마 하는지 알아요?" "그야 맞는 말씀이지요. 그 즈음에도 역시 모네 못지 않은 그림 솜씨를 가졌으면서도 전혀 팔리지 않는 화가가 많이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값어치가 있는 그림도 반드시 비싼 값에 팔린다고는 할 수 없지요. 값만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그림이 과연 값어치가 있는지 여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할 문제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 그림에 값어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현재로 봐선 선생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럼, 당신은 도대체 그림이 좋고 나쁜 것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단 말이오?" 더크가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건 오직 한 가지, 잘 팔리는 것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이런 속물 같으니라구?" 더크가 소리쳤다. "하지만 옛날의 위대한 화가들을 생각해 보세요. 라파엘로도 그렇고 미켈란젤로도 그렇고 앵그르, 드라크르와, 모두 다 잘 팔리지 않았습니까?" "자, 가세" 하고 스트로브는 나에게 말했다. "그대로 있다간 이 사람을 그냥 두지는 못할 테니까" 23 나는 스트릭랜드와 꽤 자주 만나 체스를 함께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말없이 멍하니 앉은 채 누구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기분이 좋아서 그 더듬거리는 말로 띄엄띄엄 지껄이는 것이었다. 멋진 말은 못될망정 좀 심한 야유를 섞어 가며 상대방에게 감명을 주는 수도 있었고, 어쨌든 자기 의사는 항상 정확히 지껄여 대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방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전혀 아랑곳없었으며 상대방이 감정을 상하게 되면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특히 스트로브의 기분 따위는 우습게 보고 언제나 너무 심하게 면박을 주었으므로 그는, 너 같은 놈과 다시 말을 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화를 내며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라는 사나이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이 뚱뚱한 네덜란드인을 끌어들이는 강한 힘이 있었다. 스트로브는 마치 꼴사나운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되찾아 왔다. 그러나 인사 대신 핀잔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트릭랜드가 어째서 나 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우리들의 관계는 기묘한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50프랑만 빌려 달라고 말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왜, 그러면 안 되요?" "나에겐 달가운 말이 아니니까요" "난 지금 굉장히 곤란하단 말이오" "그런 걸 내가 알 게 뭡니까?" "내가 굶어 죽어도 상관없단 말이오?"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나는 되받아 말했다. 그는 마구 자란 수염을 잡아당기며 한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빙긋 웃었다. "도대체 뭐가 우습소?" 분노에 찬 눈을 번득이며 그는 물었다. "당신은 정말 단순하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의무라는 걸 일체 인정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당신에 대해서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죠" "만일 내가 방값을 못 치렀다는 이유로 아파트에서 쫓겨나 목을 맸다 해도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단 말이오?" "네, 전혀"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공연한 허세를 부리지 말아요. 만일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후회 막급일 거요" "그렇게 해보세요. 해보시면 알 게 아닙니까?" 나는 곧 대꾸해 주었다. 그의 눈에 미소가 감돌더니 그대로 말없이 압상트를 휘젓고 있었다. "체스를 한 판 두시겠습니까?" 나는 물었다. "좋지" 우리는 말을 놓았다. 다 늘어놓자 그는 기분이 좋은 듯이 체스판을 둘러보았다. 전투 준비가 다 갖추어진 부하들을 바라보는 듯한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 드릴 줄 알았습니까?" "빌려 주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까" "좀 뜻밖이군요" "왜?" "당신 속마음이 감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했어요. 당신이 내 동정심에 그토록 무턱대고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당신이 그 정도의 호소에 감동했다면 나 역시 당신을 경멸했겠지" "이번엔 잘 말씀했군요" 하고 나는 웃었다. 우리는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둘 다 열중했다. 내기가 끝났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형편이 많이 어려우면 당신의 그림을 보여 주시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살 생각이니까요" "당치도 않은 소리!"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당신은 압상트 값을 안 냈어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그 돈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고 휙 나가 버렸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느 날 내가 그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자니까 그가 불쑥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결국 목을 매지는 않았던 모양이군요" 하고 나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렇소, 일을 맡았어요. 지금 나는 2백 프랑의 계약으로 장사를 그만 둔 어느 연관공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오" "어떻게 또 그런 일을 얻게 됐습니까?" "내가 빵을 대어 놓고 사다 먹던 가겟집 아주머니가 나를 추천해 줬지요. 그 연관공이 자기 초상화를 그려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전부터 그 여자에게 했던 모양이오. 그 여자에겐 20프랑의 수고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인데요?" "그게 볼 만해요. 마치 양고기의 넓적다리 살처럼 빨갛게 생긴 커다란 얼굴이오. 게다가 오른쪽 볼에는 아주 큰 점이 있고 거기에 긴 털이 숭숭 나 있어요" 스트릭랜드는 아주 기분 좋아 했는데, 그 자리에 스트로브가 찾아와 앉자 그를 맹렬히 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말재주로, 그는 이 불행한 네덜란드인의 제일 아픈 급소를 사정없이 파헤쳤다. 스트릭랜드가 가느다란 야유의 칼이 아니라 굵은 독설의 곤봉을 휘두르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한 일인지라 스트로브는 급습을 당해 방어를 할 여지도 없었다. 마치 갈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놀란 양 같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장 미안한 일은 그런 스트릭랜드가 몹시 밉살스럽고 스트로브가 보기에 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크 스트로브는 진지한 태도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익살맞게 보이는 불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파리에서 지낸 그 해 겨울을 돌이켜보면 나의 가장 즐거웠던 추억은 이 더크 스트로브와 관계된 일이었다. 그의 아기자기한 가정에는 뭔가 묘하게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와 그의 부인은 상상만 해도 기쁘고 쉽게 잊혀질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으며, 부인에 대한 그의 애정은 아주 여유 있고 우아한 취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어리석음은 여전했지만, 그 애정이 지니는 성실함에는 남의 동정을 살 만한 애틋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한 그를 부인이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다정한 것인가를 알고 나는 기뻐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유머 감각이 있었다면 남편이 자기를 높은 자리에 모셔 놓고, 마치 우상이라도 받들 듯이 순진하게 자기를 숭배하는 것이 우스워서 못 견디었을 것이다. 그녀는 우스워 하면서도 그러한 그의 태도에 만족하고 감동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연인이었다. 그러기에 비록 그녀가 나이를 먹어 몸의 곡선미를 잃고 그 아름다운 용모가 변한다 하더라도 그의 눈에는 조금도 변함없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는 그 여자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다. 두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는 정연한 질서 속에는 어떤 기분 좋은 우아함이 있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아틀리에와 침실 하나와 좁은 부엌이 한 간 있을 뿐이었다. 스트로브 부인은 혼자서 모든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다. 더크가 서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시장을 보러 가고, 점심 준비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 하루 종일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아틀리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이때 더크 부인이 도저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는 제법 그럴 듯한 연주를 했으나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더하여 음악 속에도 정직하고 감상적이고 생기가 넘쳐흐르는 영혼을 쏟아 넣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생활은 하나의 전원시였으며, 그래서인지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었다. 더크 스트로브에 관련된 모든 일에 따라다니는 그 익살스러움이 뭔가 융화되지 않는 불협화음처럼 기묘한 맛을 거기에 첨가시키고 있었고, 또한 어딘가 모르게 근대적인 인간적 요소도 더해 주는 것이었다. 마치 엄숙한 장면에 내던져진 거친 농담처럼 아름다움이 지니는 예민함을 더 높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24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더크 스트로브는 나를 찾아와 그날을 자기와 함께 지내자고 말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그다운 감상을 지니고 있어 거기에 알맞게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둘이 다 스트릭랜드를 2, 3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나는 파리에 잠시 들른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바빴고 스트로브는 다른 때보다도 심하게 그와 싸웠기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다시는 그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철이 되자, 그의 마음은 저절로 너그러워져서 스트릭랜드가 크리스마스를 혼자서 지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처럼 화를 냈던 것이 자기가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고 우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특별한 날에 그 고독한 화가가 혼자서 쓸쓸하게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트로브는 아틀리에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는데, 장식을 한 나뭇가지에 작은 선물 꾸러미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또 익살스럽게 느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스트릭랜드를 다시 만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처럼 심한 모욕을 이렇게 쉽게 용서한다는 것이 굴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으로 결의한 스트릭랜드와의 화해의 자리에 나도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함께 클리시로 내려갔으나 늘 있던 카페에는 스트릭랜드가 보이지 않았다. 바깥 테라스에 앉기는 너무 추웠으므로 우리는 실내의 가죽을 씌운 긴 의자에 앉았다. 실내는 무덥고 답답했으며 공기는 연기 때문에 회색으로 흐려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없었으나 얼마 안 있어 가끔 그와 체스를 하는 프랑스 인 화가가 들어왔다. 나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므로 그는 우리가 앉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스트로브는 그에게 스트릭랜드를 만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앓고 있어요. 모르셨던가요?" 하고 화가는 대답했다. "심한가요?" "꽤 심한 모양이에요" 스트로브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왜 편지라도 써서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까? 나도 참 공연히 싸움을 하고! 곧 찾아가 봐야겠군. 그는 돌봐 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래 어디 살고 있죠?" "나도 전혀 모릅니다" 프랑스 인 화가는 대답했다. 세 사람이 다 그가 사는 곳을 몰랐으므로 스트로브는 점점 난처해할 뿐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어도 아무도 모르다니, 참 무서운 일이군. 이건 참을 수 없어. 당장 찾아내야겠어" 막연하게 파리 시내를 찾아 돌아다닌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나는 스트로브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우선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하긴 그래. 그러나 이러고 있는 동안에 그는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몰라. 우리가 거기에 당도해도 이미 때가 늦어 손을 쓸 수도 없게 되면 어쩌지" "여보게, 좀 진정하고 방법을 찾아 봐야 할 게 아닌가" 나는 초조해 하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주소는 오텔 데 벨즈 뿐인데 스트릭랜드가 그곳을 나온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므로 그곳에 가본들, 아무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자기 거처를 비밀로 해두는 묘한 사람이니까, 그곳을 나갈 때 가는 곳을 알리고 갔을 리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5년 전의 이야기다. 나는 그가 그곳에서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 호텔에 들었을 때부터 같은 카페를 찾는 것은 아마도 거리상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스트릭랜드는 단골로 다니던 빵집을 통해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그의 주소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전화번호부에서 빵집을 찾아보았다. 이 근처에는 빵집이 다섯 집이나 있었다. 그 집을 일일이 다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스트로브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마지못해 나를 따라 나섰다. 그는 클리시 대로로 통하는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며 스트릭랜드라는 화가가 살고 있나 집집마다 물어 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계획이 들어맞았다. 우리가 찾아간 두 번째 집에서 계산대 뒤에 있던 부인이 그를 안다고 했다. 그녀도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맞은쪽에 있는 세 집 중에 어느 한 집일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운이 좋아 첫번째로 찾아간 아파트에서 관리인이 그 집 제일 위층에 그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사람 몸이 아픈 모양이던데요" 하고 스트로브는 말했다. "그런지도 모르죠" 관리인은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보니 벌써 대엿새 동안이나 그분을 못 본 것 같군요" 스트로브는 나보다 앞질러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내가 제일 위층까지 올라가니 그는 속옷 바람의 어떤 노동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스트로브가 두드린 문을 연 사람이었다. 그 노동자는 다른 문을 가리키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화가일 거라고 말했다. 그도 그 화가의 모습을 1주일 동안이나 보지 못했다고 했다. 스트로브는 곧 그 문을 두드리려다가 난처한 듯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싸인 듯했다. "만일 죽었으면 어쩌지?" "그럴 리가..." 내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스트로브도 곧 뒤따라 들어왔다. 방 안은 캄캄했다. 가까스로 그곳은 천장이 경사진 다락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희미한 빛이 천장으로 새어 들어오긴 했으나 겨우 캄캄한 어둠을 면할 정도였다. "스트릭랜드 씨!" 하고 나는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스트로브는 덜덜 떨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불 켜기를 망설였다. 한쪽 구석에 침대가 있는 것 같았으나 만일 불을 켜면 그 위에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말 바보들이군. 성냥도 없어!" 나는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스트릭랜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스트로브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아 다행이군!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나는 성냥을 긋고 초를 찾았다. 작은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그곳은 거실 겸 아틀리에였다. 침대 하나와 벽 쪽으로 돌려 놓은 몇 장의 캔버스, 이젤, 테이블, 의자가 각각 한 개씩 밖에 없었다. 바닥에는 융단도 깔려 있지 않았고, 난로도 없었다. 그림 물감, 팔레트, 나이프 같은 것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테이블 위에 양초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초에 불을 붙였다. 스트릭랜드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침대가 너무 작아 거북해 보였다.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옷이란 옷은 죄 덮고 있었다. 첫눈에도 열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트로브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더니 감정이 복받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딱한 양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이 앓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왜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소?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줬을 텐데. 당신은 내가 그때 한 말을 꽁하게 생각했던가요? 난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했소. 화를 내다니, 내가 바보였소" "멋대로 지껄이는군"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자, 말해 봐요. 내가 어떻게든지 편하게 해줄 테니까요. 당신을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는 그 답답한 다락방 속을 어이없는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불을 다시 덮어 주려고 했다.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며 스트릭랜드는 뿌루퉁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나한테로 던졌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해주려거든 우유라도 사다 주게"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벌써 이틀 동안이나 꼼짝도 못하고 있소" 침대 옆에는 빈 우유병이 놓여 있었고, 신문지 위에는 빵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다. "그럼 그 동안 무얼 먹었어요?" 나는 물었다. "아무것도" "며칠이나요?" 하고 스트로브는 소리쳤다. "당신은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단 말이오? 이건 너무하군" "물을 마셨지"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는 큰 깡통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곧 갔다 올게요" 스트로브는 말했다. "또 그 밖에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그래서 나는 체온계와 빵과 포도를 사 오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스트로브는 자기도 도움이 되는 것이 기쁜지 계단을 쾅쾅거리며 내려갔다. "바보 같으니라구" 스트릭랜드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박이 아주 힘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두 가지를 물어 보았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되물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벽 쪽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나는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0분 가량 있으니 스트로브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내가 말한 것 말고도 그는 초 몇 자루와 고기즙과 알콜 램프도 사 왔다. 일을 빠르게 하는 스트로브는 곧 빵과 우유를 먹도록 준비했다. 스트릭랜드의 체온은 섭씨 40도나 되었다. 아무래도 중태인 것 같았다. 25 얼마 뒤에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더크는 저녁 식사를 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나는 의사를 불러다 스트릭랜드를 진찰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답답한 다락방에서 시원한 거리로 나오자 스트로브는 곧 자기 아틀리에로 가자고 말했다. 지금 자기에게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꼭 함께 가야 한다고 우겨 댔다. 나도 의사를 데리고 가 보았자 우리가 한 것보다 더 나은 치료를 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의 아틀리에로 가니, 부인 블랑시 스트로브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크는 성큼성큼 그녀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블랑시, 나를 위해 당신이 꼭 해줄 일이 한 가지 있어요" 그녀는 매력적인 그 애교 있는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은 채 남편을 쳐다보았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빨간 얼굴은 익살스러울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으나 놀란 듯한 동그란 눈에서는 진지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중병을 앓고 있어 다 죽어 간단 말이오. 더러운 다락방에 혼자 있는데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를 이리로 데려 왔으면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녀는 두 손을 재빨리 뺐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재빠른 동작을 하는 것을 아직도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볼도 빨개졌다. "안 돼요" "여보 블랑시, 제발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아요. 나는 그 사람을 저대로 내버려둘 순 없어. 그걸 생각하면 밤에 한잠도 못 잘 것 같단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을 간호해 주는 거라면 또 몰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죽을지도 몰라" "할 수 없죠, 뭐" 스트로브는 한숨을 쉬더니 얼굴을 닦았다. 그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치였으나 나로서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나는 그 사람이 싫어요" "아아, 나의 소중한 블랑시, 설마 진심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제발 부탁이니 그 사람을 데려 오게 해줘요. 여기 오면 그 사람 기분도 나아지고 병도 나을 거요. 우리가 그 사람의 목숨을 건져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을 귀찮게 굴지는 않을게. 내가 모든 걸 다할 테니까 아틀리에에 그 사람의 잠자리를 마련해 줍시다. 그 사람을 개죽음하게 내버려둘 순 없단 말이오. 그렇게 몰인정할 수야 있겠소?" "그럼 병원으로 가면 될 것 아니에요?" "병원이라니! 그 사람은 애정을 갖고 간호해야 해요. 이것저것 세밀한 점까지 신경을 써서 돌봐 줘야 해" 나는 그녀의 마음이 동요되는 모습을 보고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식탁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참 답답해요. 만일 당신이 병이 났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것 같아요?" "내 경우야 그런 일이 문제가 될 리 있소? 내겐 당신이 있는데, 그 사람 신세를 질 필요가 없지. 그리고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처지가 달라. 내겐 위대한 점이라곤 조금도 없어요" "당신에겐 똥개 만한 기개도 없군요. 땅바닥에 엎드려서 날 밟아 줍쇼, 하고 있는 격이에요" 스트로브는 가볍게 웃었다. 아내가 어째서 그렇게 나오는지 그도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아, 당신은 그 사람이 내 그림을 본다고 여기에 왔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군. 그가 내 그림을 조금도 좋게 보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오. 그런 걸 그 사람에게 보인 내가 바보였지. 사실 그 그림들은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은 것들이야" 그는 슬픈 눈길로 아틀리에 안을 둘러보았다. 화가에는 미완성의 그림이 놓여 있었는데, 그 그림은 검은 눈을 지닌 소녀의 머리 위에 있는 포도송이를 들고 빙그레 웃고 있는 이탈리아 농부를 그린 것이었다. "그 사람도 그렇죠. 비록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해도 예의쯤은 지켜야 할 것 아니에요. 당신을 그렇게 모욕할 필요야 없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당신을 여봐란 듯이 경멸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마치 강아지처럼 그 사람의 손을 핥고 있지 않았어요? 난 그런 사람은 딱 질색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은 천재야. 당신도 내가 그만한 재주를 가졌다고 자부한다고는 생각지 않겠지? 나도 천재가 됐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그러나 나는 천재를 보면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그를 존경하게 된단 말이야. 천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니까. 그러나 천재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겐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해 최대한으로 너그러움과 인내를 베풀어야 해요" 나는 이런 부부간의 말다툼이 조금 난처해서 멀찌감치 보면서, 도대체 왜 스트로브는 나를 끌고 왔을까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는 것을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데려 오고 싶다는 것은 그가 천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오. 그 사람도 인간인데 지금 병들어 누워 있으니 불쌍해서 그러는 거지" "저는 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스트로브는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앉았다. "여보게 부탁이니, 이 문제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이 사람에게 말 좀 해주게. 그 사람을 그렇게 굴 속 같은 방에 놓아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그를 이리로 데려다 간호하는 편이 훨씬 좋다는 거야 나도 알고 있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도 틀림없지. 누가 낮이나 밤이나 꼭 붙어 있어야 할 테니" "참, 자네도 그렇게 꽁무니를 빼다니 자네답지 않구먼" "만약 그 사람이 이리로 오면, 저는 나가겠어요" 하고 스트로브 부인은 격한 어조로 말했다. "참, 당신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 당신은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잖소" "제발 부탁이니 내버려두세요. 이러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요" 그러더니 마침내 울기 시작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양어깨를 들먹거렸다. 더크는 곧 그녀 옆에 무릎을 꿇더니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기도 하고 애칭을 있는 대로 다 들추어 부르기도 했다. 자연히 눈물까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녀는 몸을 빼고 눈물을 닦았다. "혼자 있게 해줘요" 이번에는 그다지 쌀쌀한 말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쳐다보더니 애써 미소를 띠려고 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스트로브는 어리둥절하여 아내를 쳐다보며 망설였다.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히고 빨간 입술은 삐죽이 내밀어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의 그는 흥분한 모르모트를 연상케 했다. "그럼 당신은 결국 안 된다는 말이군?"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도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이 아틀리에는 당신 거예요. 모든 게 다 당신 거예요. 만일 당신이 꼭 그 사람을 데려 와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제가 말리겠어요" 갑자기 그의 동그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찬성해 주는 거요? 틀림없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사랑스러운 당신!" 갑자기 그녀는 몸을 도사리고 겁을 먹은 듯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심장의 고동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여보, 내가 당신과 만난 뒤로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해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한 일은 없쟎아요?" "그야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다 해줄 수 있지" "그럼 부탁이니 제발 스트릭랜드 씨를 데려 오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도둑놈도 좋고 술주정꾼도 좋고 거리의 부랑자도 좋으니 데리고 오세요. 저는 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다고 약속하겠어요. 하지만 스트릭랜드 씨만은 데리고 오지 마세요. 이렇게 머리 숙여 부탁하겠어요" "아니 왜 또 그래?" "전 그 사람이 무서워요. 웬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에겐 뭔가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사람은 우리에게 큰 손해를 보일 거예요. 나는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만일 그 사람을 데려 오면 결국 끝에 가서는 곤란한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소!" "아니, 그렇지 않아요. 제 말이 맞을 거예요. 뭔가 무서운 일이 우리에게 닥칠 거예요" "우리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자제력을 빼앗아간 어떤 이상한 공포에 그녀가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내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여느 때의 그녀는 아주 조용했으므로 그때 그녀가 보인 동요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스트로브는 한동안 난처한 듯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 아내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오.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이라도 싫어한다면 아무도 데려 오지 않겠소"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는 기절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그렇게 신경질적인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녀에게 약간 화가 치밀었다. 스트로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묘하게도 주위의 적막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당신은 몹시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받아본 경험이 한 번도 없소?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당신도 알 거요. 당신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그 말은 참으로 당연한 말이었으나 나에겐 설교조로 들려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블랑시 스트로브에게는 그런 평범한 말이 어떤 효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든 듯 남편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왜 그가 갑자기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볼에는 엷은 빛이 떠오르더니 마침내 창백해졌다. 아니 창백해진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처럼 해쓱해졌다. 마치 그녀의 육체에서 핏기가 싹 가신 것 같았다. 손까지 파리했으며 그녀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틀리에의 침묵이 서서히 하나로 엉기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보, 스트릭랜드 씨를 이리로 데려 오세요. 제가 최선을 다 해보겠어요" "고마워" 그는 씽긋 웃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의 손을 피했다. "당신도 참, 손님 앞에서는 그러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겠어요"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녀를 보면, 그녀가 그처럼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26 다음날, 우리는 스트릭랜드를 옮겼다. 그를 설득하는 데는 굳은 의지와 그보다 더한 인내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병은 너무도 심해 스트로브의 간곡한 부탁과 나의 결의에 대해 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우리 둘이 가까스로 옷을 갈아 입히는 동안에도 그는 뭐라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일체 모른 척하고 그를 아래층으로 떼메고 내려와 마차에 태워서 스트로브의 아틀리에로 데리고 왔다. 그곳에 닿자 그도 몹시 지쳤던지 아무 군말 없이 우리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가 이렇게 6주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한때는 몇 시간을 더 살지 못할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가 병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네덜란드인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쨌든 이처럼 다루기 힘든 환자는 생전 처음 겪었다. 덮어놓고 무슨 요구를 하거나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아무런 불평도 없고 무엇 하나 요구하는 일도 없으며 전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를 돌봐 주는 일 자체가 원망스럽다는 태도였다. 기분이 좀 어떠냐고 묻거나 뭐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어도, 언제나 조롱과 경멸과 욕설로 대꾸하는 것이다. 이러는 그가 하도 밉살스러워서 나는 그가 위험한 고비를 넘어서자 곧 그 점을 서슴없이 말해 주었다. "마음대로 해" 그는 불쑥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한편 더크 스트로브는 자기 일을 다 집어치우고 온 정성을 다해 스트릭랜드를 간호했다. 그는 환자를 기분 좋게 해주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으며, 싫어하는 스트릭랜드에게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이는 것도 어디에 그런 재주가 숨어 있는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나의 예상을 뒤엎고 아주 묘한 꾀를 내어 먹이고 마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귀찮은 일이라고는 없는 듯했다. 그들 내외가 살아가기에 별로 옹색한 살림은 아니지만 낭비할 정도로 여유는 없었을 텐데, 지금은 스트릭랜드의 변덕스러운 구미를 맞추느라고 철 지난 비싼 음식을 장만하는 데 분수에 넘치는 돈을 써야만 했다.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환자에게 차근차근 알아듣도록 타이르던 그의 끈질긴 정성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무례한 말에도 한 번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상대방이 뚱하니 기분 나빠할 때는 전혀 그런 눈치를 못 챈 것처럼 모른 척했고, 반대로 상대방이 좋을 때면, 스트로브는 거기에 박차라도 가하듯 일부러 우스운 행동을 해보이곤 했다. 그리고 병자는 이렇게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말이라도 할 것처럼, 아주 행복스러운 눈길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스트로브는 정말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블랑시는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녀는 부지런히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참으로 헌신적인 간호 솜씨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앞서 스트릭랜드를 아틀리에로 데리고 오겠다는 남편의 의견에 한사코 반대했을 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병자에게 필요한 시중이라면 꼭 자기가 하겠다고 자진하고 나선 것이다. 병자를 움직이지 않고도 시트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그녀였다. 병자의 몸을 닦아 주기도 했다. 정말 감탄했다고 내가 칭찬을 하면 그녀는 그 상냥한 미소를 띠며 전에 병원에서 좀 일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처럼 스트릭랜드를 싫어했다는 눈치는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붙이는 일을 거의 없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밤새도록 누가 옆에 있어야만 했던 처음 2주일 동안 그녀는 남편과 교대로 간호를 했다. 오랫동안 그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환자를 지켜보고 앉아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섭게 여위고 자랄 대로 자란 수염이 더부룩한 채, 열 오른 벌건 눈으로-그 눈은 병으로 인해 더욱 커졌으며,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다.-물끄러미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그 사람, 밤에 부인에게 뭐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아뇨, 전혀 없어요" "지금도 역시 그 사람이 싫으신가요?" "네, 전보다 더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조용히 잿빛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너무도 조용한 표정이었으므로, 이 여자가 그때의 그토록 격한 감정의 소유자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돌봐준 데 대해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이렇게 대답하고 그녀는 생긋 웃었다. "정말 사람이 아니군요" "지긋지긋하게 싫은 사람이에요" 물론 스트로브는 그녀의 태도에 매우 기뻐했다. 원래는 그가 혼자서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인데 그 짐을 헌신적으로 함께 짊어져 주는 데 대해서는 뭐라고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은 블랑시와 스트릭랜드가 서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였다. "여보게, 내가 직접 본 일이지만, 몇 시간이고 같이 앉아 있으면서 한마디도 말을 안 하니 영문을 모르겠네" 마침 스트릭랜드도 병세가 많이 좋아져,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아틀리에에 있었다. 나는 더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스트로브 부인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그 와이셔츠는 스트릭랜드의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똑바로 누워 있었다. 또 한 번은 그의 눈길이 블랑시 스트로브 쪽으로 옮겨지더니 이상한 야유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자 블랑시도 얼굴을 돌렸다. 한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때 어떤 기묘한 당황과, 그리고 틀림없이-그러나 그것이 웬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놀라움의 빛을 띠고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다음 순간 시선을 돌려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대로 물끄러미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2, 3일이 지나자 스트릭랜드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모습은 뼈와 가죽뿐이었다. 마치 허수아비가 누더기를 걸친 것처럼 보였다. 턱수염은 보기 흉하게 자라고 머리는 더부룩하며 그렇지 않아도 큰 이목구비가 병을 앓고 난 지금은 더 크고 기이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밉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추한 모습 속에도 뭔가 기념비와 같은 불멸의 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던져 준 인상을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비록 육체라는 간막이가 거의 투명하게 보였다 하더라도 그곳에 뚜렷이 나타나 있던 것은 결코 영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궤를 벗어난 관능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능에는,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영적인 무엇이 있었다. 그의 몸 속에는 뭔가 원시적인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스 인들이 사티로스니 파우스 등의 반인반수의 괴물 속에 구체화해 놓은 자연의 불가사의한 힘을 그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을 상대로 감히 노래 시합을 했기 때문에 껍질을 벗기는 벌을 받게 되었다는 마르쉬아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트릭랜드라는 사나이는 이상한 화음과 아직 아무도 시도한 일이 없는 패턴을 마음속에 남몰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선 그가 고통과 절망의 마지막을 맞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나쁜 귀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선이나 악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원시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그림을 그릴 만한 기운은 없었다. 말없이 아틀리에에 앉아 명상에 잠기거나 책을 읽었다. 그가 읽는 책이 또한 기묘했다. 곧잘 말라르메의 시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구나 그 읽는 방법이 색달랐다. 마치 아이들이 읽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 입술로 입 모양을 만들어 가며 읽었다. 그 이해하기 힘든 운율과 애매한 글귀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감정을 끌어내고 있었을까? 또 어떤 때는 가보리오의 탐정 소설을 탐독했다. 그처럼 책을 선택하는 데도 그의 색다른 성질, 서로 모순되는 양면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사람은 그처럼 몸이 쇠약한데도 조금도 몸을 아끼려 하지 않았다. 스트로브는 편히 쉬는 것을 좋아해 아틀리에에는 안락의자 두 개와 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스트릭랜드는 결코 그런 의자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극기 정신을 내세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우연히 그가 혼자 있는 아틀리에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역시 다리가 셋 있는 둥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요컨대 그는 편히 쉴 수 있는 안락 의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곧잘 팔걸이가 달리지 않은 부엌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를 보면 때때로 나는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나는 환경에 대해 이처럼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아직 본 일이 없다. 27 2, 3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하던 일을 일단락 짓고, 하루쯤 쉬어 볼까 하고 루브르 미술관을 찾아갔다. 낯익은 그림들을 이것저것 보고 돌아다니며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공상에 잠기다 보니 어느 결에 긴 화랑으로 나왔다. 그런데 언뜻 쳐다보니 거기에 스트로브가 있었다. 아주 동글동글하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전에 없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익살스러워 보이는 표정은 마치 옷을 입은 채 물 속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남의 도움으로 살아 나왔는데 아직 가슴의 고동이 진정되지 않은 채 자기를 바보처럼 느끼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서 한동안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새파랗고 동그란 눈이 안경 너머로 번민의 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스트로브" 내가 불렀다. 그는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마침내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루브르에 와 봤네. 뭐 새로운 게 없나 하고" "아니, 이번 주 안에 그림을 한 장 그려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스트릭랜드가 내 아틀리에를 쓰고 있어서" "그래서?" "그것도 내가 그렇게 하자고 말했네. 그 사람은 아직 자기 방으로 돌아갈 만큼 완쾌되지 않은 것 같아서 실은 둘이서 함께 쓸 생각이었네. 아틀리에를 같이 쓰고 있는 사람들은 이 카르티에 라탱(라틴구)에는 많이 있으니까. 틀림없이 재미있을 줄 알았지. 일에 지쳤을 때 얘기 상대를 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을 전부터 했으니까" 그는 천천히 한 마디씩 끊어서 거북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착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눈물이 잔뜩 괴어 있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스트릭랜드는 아틀리에에서 혼자가 아니면 일을 못한대" "무슨 소리야! 자네 화실 아닌가. 그는 자기 화실을 찾으면 될 것 아냐?" 그는 힘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소리 높여서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그리고 무척 난처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자가 일을 못하게 해.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 "그럼 자넨 그런 말을 듣고도 욕 한 마디 못 했나?" "그자가 나를 쫓아내는 거야. 그 사람하고 다투고 싶지도 않고. 그자는 내 모자를 등뒤로 내던지고 방문을 잠가 버렸어" 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꼈다. 아니 오히려 더크 스트로브의 어리석음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던 나 자신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 부인은 뭐라고 하던가?" "그 사람은 마침 장에 나가고 없었어" "부인은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 "모르지 뭐" 나는 어이가 없어 스트로브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선생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학생처럼 그곳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럼 어디 내가 그자를 쫓아내 줄까?" 그는 조금 놀라는 빛을 보이더니 그 번쩍이는 얼굴을 삽시간에 붉혔다. "아냐, 자네는 그 일에 참견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도망가듯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 문제에 대해 나와 상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데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만 나로선 도무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28 그 일에 대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주일 뒤였다. 분명히 밤 10시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혼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작은 내 방으로 돌아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초인종이 울리기에 복도로 나가 문을 열었더니 스트로브가 서 있었다. "들어가도 괜찮겠나?" 하고 그가 물었다. 어두운 층계참이라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원래 그가 술을 잘 안 먹는 사람임을 몰랐다면 아마 어디서 한잔하고 온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곧 그를 거실로 안내하고 앉으라고 권했다. "자네가 있어서 다행일세" "아니 왜?" 나는 그의 전에 없이 격한 어조에 놀라서 되물었다. 거실로 들어오니 그의 모습이 잘 보였다. 몸차림이 깔끔한 사람인데 오늘밤의 그는 아주 단정치 못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마치 갑자기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틀림없이 한잔 걸치고 왔으려니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자칫하면 도대체 그 꼴이 뭐냐고 놀려 줄 뻔했다. "어디를 가야 하나 하던 참일세"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도 왔는데 자네가 없더군" "저녁을 늦게서야 먹느라고" 그제야 나는 그가 이렇게 자포 자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술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느 때는 발그레하던 얼굴이 오늘밤에는 이상하게도 얼룩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마누라가 나를 버렸어" 그는 겨우 이 말만을 하더니 동그란 볼 위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이 그가 스트릭랜드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데 대해 그녀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게다가 그 영국인의 냉소적인 태도에 못 이겨, 그를 쫓아내라고 요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무척 얌전해 보이지만 성질이 나면 무서운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스트로브가 그녀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집을 뛰쳐나가고도 남을 여자다. 그러나 이 작은 사나이가 너무도 풀이 죽어 있는 것을 보니 차마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여보게, 그렇게 너무 비관할 것까진 없네. 부인은 돌아올 거야. 여자가 화를 발끈 냈을 때는 그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아" "참, 자넨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군. 실은 아내가 스트릭랜드에게 반했다네" "뭐라구!" 그 말에는 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또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나? 설마 스트릭랜드에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부인이 그 사람을 꼴도 보기 싫어했다는 것쯤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모르는 소리야" 하고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정말 바보로군. 자네, 정신이 좀 이상해진 모양이야" 나는 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위스키 소다라도 만들어 줄까. 그럼 기운이 날걸세"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사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기 위하여 갖은 궁리를 다 꾸며 내는 법이지만-더크란 녀석, 자기 아내가 스트릭랜드를 좋아한다고 오해를 한 모양이다. 서툰 짓을 하는 데는 선수니까 그가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녀가 남편의 화를 돋우려고 일부러 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세. 우리 자네 아틀리에로 가 보세. 그리고 만일 자네가 지나친 생각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면 용감하게 부인에게 사과하는 거야. 어쨌든 자네 부인은 그 일을 언제까지나 꽁하게 가슴에 묻어 둘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내가 또 아틀리에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아나?" 그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엔 두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그곳을 비워 주고 온 거야" "그럼 부인이 자넬 버린 게 아니라 자네 자신이 부인을 버린 게 아닌가" "제발 부탁이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한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자넨 그 말을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주게" "오늘 오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스트릭랜드에게 이렇게 말했네. 이제 당신도 다 나았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야. 내가 아틀리에를 쓸 생각이었어" "상대방이 스트릭랜드가 아니었다면 그런 말을 일부러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나는 말했다. "그래 그는 뭐라던가?" "그는 잠깐 웃더군. 왜 자네도 알지 않은가.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그 비웃음 말이야. 그러고는 이제 곧 나가겠다고 하며 그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네. 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내가 죄다 그의 방에서 가져왔던 거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더니 그자는 블랑시에게 짐을 꾸리겠으니 종이하고 끈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더군" 스트로브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말을 끊었다. 나는 그가 졸도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서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집사람의 얼굴빛이 파리해지더군. 이르는 대로 종이하고 끈을 가지고 왔네. 그자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짐을 꾸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는데 우리가 있다는 것은 완전히 무시하더군. 눈에는 야유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내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어.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공연히 그런 말을 했다고 후회했네. 그리고 그자가 자기 모자를 찾고 있는데 마누라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지 않겠나. 더크, 나도 스트릭랜드 씨와 함께 나가겠어요. 이제 더 이상 당신하고 함께 살 수 없어요, 하고 말이야.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더군. 그자는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여전히 휘파람을 불고 있었네" 스트로브는 여기서 또 말을 끊고 얼굴의 땀을 닦았다. 나는 꼼짝도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앞뒤 사정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가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피하며 자기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부탁이니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간청했다.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또 지금까지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또 둘이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왔는가를 그녀에게 말했다. 자기는 그녀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녀를 나무라지도 않는다는 말도 했다. "더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를 보내 줘요" 하고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은 아직도 모르나요? 저분이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라도 따라가겠어요" "하지만 저 사람은 결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걸 당신은 잊어서는 안 되오. 당신을 위해서라도 가지 말라고 하고 싶소. 앞으로 얼마나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아직 당신은 모르고 있는 거요"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책임이에요. 저분을 이리로 데리고 오겠다고 우긴 건 당신이에요" 그는 스트릭랜드 쪽을 돌아다보았다.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오" 하고 그는 애원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자기 아내가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채 어리석게 구는 걸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요" "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나는 억지로 따라오란 말은 안 했소" "이미 결심했어요" 그녀는 활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릭랜드의 이 뻔뻔스러운 태도 앞에서 스트로브가 지금까지 가까스로 억눌러 오던 자제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맹목적인 분노가 그를 사로잡아 그는 정신없이 스트릭랜드에게 덤벼들었다. 스트릭랜드는 갑자기 덤벼드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병을 앓고 안 뒤이지만 원래 완력이 세었으므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트로브는 마룻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이상한 놈이군" 스트릭랜드가 말했다. 스트로브가 가까스로 일어나 보니 그곳에 아내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가 생각하니 한층 더 굴욕을 느꼈다. 격투 중에 안경이 벗겨져 나가 어디 있는지 곧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안경을 집더니 아무 말도 않고 그에게 주었다. 갑자기 그는 자기의 불행을 뼈저리게 깨달은 듯이 슬픔이 왈칵 솟아올라 자기의 어리석음을 한층 드러내는 일인 줄은 알았지만, 마침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은 두 사람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블랑시!" 그는 이윽고 신음하듯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다니" "어쩔 수 없어요, 더크" "나는 당신을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 왔소. 만일 내가 당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했다면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소? 그렇게 해왔으면 나도 틀림없이 고쳤을 텐데. 나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소"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얼굴빛조차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다만 그녀를 지루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을 본 그는, 드디어 가 버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그녀 앞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자존심을 다 버리고 덤벼든 것이다. "여보, 제발 부탁이니 나가지 말아요.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소. 자살할지도 몰라. 만일 뭔가 당신을 섭섭하게 한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오.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좀더 노력하겠소" "여보 일어나세요. 당신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부러 남에게 보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으나 그녀를 놓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오?" 그는 당황하며 물었다. "당신은 스트릭랜드가 살고 있는 데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소. 그런데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거요. 눈뜨고 볼 수 없는 곳이란 말이오" "내가 상관없다는데 당신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잠깐만 기다려 줘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이 정도 말은 들어 줄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런 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나는 마음을 결정했어요.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괴로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두 손을 가슴에 대었다. "나는 당신보고 마음을 고쳐먹어 달라는 게 아니오. 다만 잠깐 한 마디만 들어 달라는 거요.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제발 참아 주오" 그녀는 발을 멈추고 그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것은 아주 차가운 눈초리였다. 그녀는 아틀리에로 들어오더니 테이블에 기대어 섰다. "무슨 말인지 해보세요" 스트로브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해 줘요. 공기를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스트릭랜드는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사람이오"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와 함께 산다면 앞으로 생활에 어떤 곤란이 올지 모르지. 저 사람 병이 그렇게 오래 끈 것도 사실은 굶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오. 당신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돈은 내가 벌 거예요" "그래? 어떻게?"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어떤 무서운 생각이 문득 네덜란드인의 머릿속을 스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 돌았군. 아니 도대체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오?" 그녀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다. "이젠 가도 되겠죠?" "1초만 더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고통스러운 눈초리로 아틀리에 안을 둘러 보았다. 그녀의 존재가 이 아틀리에를 명랑하고 가정적인 분위기로 꾸며 주었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가장 사랑해 왔던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에 아로새겨 두려는 것처럼. 이윽고 그는 벌떡 일어나 모자를 집어들었다. "아니 내가 나가지" "당신이?"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더러운 다락방에서 살 생각을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소. 이곳은 내 집인 동시에 당신 집이기도 하지. 이곳이라면 당신도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거요. 적어도 비참한 생활만은 면할 수 있을 거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자기 돈을 넣어둔 서랍을 열고 거기서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이 돈의 반을 당신에게 주리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그 지폐를 책상 위에 놓았다. 스트릭랜드도 블랑시도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일을 생각해 냈다. "미안하지만 내 옷을 싸서 아파트 아주머니에게 맡겨 주오. 내일 가지러 오겠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애써 웃으려고 했다. "그럼 잘 있어요. 지금까지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 감사하오" 그는 밖으로 나오자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모자를 책상 위에 집어던지고 털썩 앉아 엽궐련을 피워 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29 나는 스트로브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되씹으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약한 성격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도 나의 불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자네도 알고 있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블랑시에게 그런 생활을 시킬 수는 없네, 도저히" "그거야 자네 마음이겠지만" "만일 자네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부인은 모든 것을 알고도 한 일이니까, 어느 정도 불편을 참아야 한다지만, 그자의 일이야 자네가 알 바 아니잖는가" "그것도 그렇지만 어쨌든 자네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알 수 없을 걸세" "그럼 자네는 아직도 부인을 사랑하고 있나?" "물론이지. 전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네. 스트릭랜드는 첫째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남자가 못되네. 그런 일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지. 나는 비록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자네는 언제든 부인을 다시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건가?" "그야 물론이지.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나를 지금까지보다도 더 필요로 할 테니까. 외톨이가 되어 비참한 처지일 때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지 뭔가" 그는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무기력함에 조금이라도 분노를 느꼈던 내가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네. 나는 어릿광대니까. 난 여자의 사랑을 받을 만한 남자가 아니야. 그 정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스트릭랜드에게 반했다 하더라도 별로 그 여자를 나무랄 생각은 없네" "정말이지 자네처럼 자부심 없는 사람은 본 일이 없네"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여자를 훨씬 더 사랑하고 있다네. 애정 속에 자부심이 개입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 이외의 여자를 사랑한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남자도 그 고비를 넘어서면 결국 부인에게로 되돌아 오는 법이지. 그리고 부인 쪽에서도 돌아온 남편을 기분 좋게 맞아들이지. 누구나 이 일을 극히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여자도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보네" "이치에 맞는 말이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는 그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자네가 하는 말은 통용될 수 없네" 그러나 사실상 나는 스트로브와 말을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 일이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스트로브가 그 일에 대해 지금까지 조금도 눈치를 못 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문득 언젠가 블랑시의 눈 속에 떠올랐던 그 어떤 이상한 표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놀라고 당황했던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넨 도대체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될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나?"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마침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필을 집어들어 무의식적으로 압지 위에 사람의 머리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묻는 말이 듣기 싫다면 거침없이 그렇다고 말해 주게" "다 말해 버리는 게 속이 후련하겠지. 아아, 내 마음속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자네가 이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연필을 마룻바닥 위에 집어던졌다. "하기야 2주일 전부터 눈치는 챘지. 그 여자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네" "그렇다면 왜 자넨 스트릭랜드를 쫓아내지 않았나?" "나는 도저히 그 일을 믿을 수 없었네. 블랑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으니까.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이것은 나의 단순한 질투려니 생각했지. 나라는 인간은 전부터 질투심이 강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다네. 블랑시와 사귀는 모든 남자에게 나는 질투를 느끼고 있었지. 자네한테도 질투를 했다네.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만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네가 알고 있었으니까. 하긴 그게 당연한 일이긴 해.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사랑을 받아 주었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지. 그래서 나는 그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기 위해 일부러 몇 시간이고 외출을 하기도 했네. 쓸데없는 의심을 품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을 채찍질해 주고 싶었기 때문일세. 그러나 돌아와 보면 나 같은 건 없는 것이 좋겠다는 눈치야. 스트릭랜드가 그렇다는 게 아닐세. 그자는 내가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니까. 오히려 블랑시가 그렇더군. 내가 키스를 하려고 다가가면 그녀는 몸서리를 치는 거야. 마침내 사실이 뚜렷이 밝혀지자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 만일 부부 싸움을 한다면 틀림없이 두 사람의 웃음거리밖에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들더군. 차라리 모른 척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모든 게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나는 공연히 싸움을 할 게 아니라 조용히 그자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했지. 그때의 내 괴로움을 자네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걸세" 그리고 그는 스트릭랜드에게 나가 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말을 또 했다. 우선 적당한 기회를 보아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명랑하고 친숙하게 말하려고 하면, 그 말 속에 질투의 원한이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설마 나가라고 해도 스트릭랜드가 그 말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 곧 짐을 꾸릴 줄은 몰랐다. 하물며 부인이 함께 나가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을 걸, 하고 후회하는 눈치가 뚜렷이 보였다. 그에게는 이별의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질투하는 괴로움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냥 그자를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뿐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리고 그는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윽고 마음속에 뭉쳐 있던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기다리고만 있었더라면 모든 일이 잘 됐을 텐데. 내가 그렇게 성질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어. 아아, 불쌍한 블랑시, 내가 그만 그 여자를 그 꼴로 만들다니!" 나는 어깨를 움츠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블랑시 스트로브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나의 의견을 솔직히 말해 보았자 불쌍한 더크를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 스트로브는 잠시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싸울 때 주고받던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되뇌이고 있었다. 또는 전에 미처 말 안 했던 일까지 생각해 내어 말을 했고, 또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렇게 말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말을 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또 자신의 맹목적인 태도를 한탄하기도 했다.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말걸 하며 자신의 실수를 탓하기도 했다. 그럭저럭하다 보니 밤도 깊었고, 마침내 나 역시 그 못지 않게 지 쳐 버렸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마침내 참다 못해 내가 물었다. "나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블랑시가 부르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잠시 여행이라도 갔다 오지 그래" "아냐, 그건 안 돼. 그녀가 부르러 올 때 내가 없으면 어떡하나" 그는 어쩔 할 바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취할 대책도 전혀 생각지 않은 것 같았다. 쨌든 이제 자는 것이 좋을 거라고 나는 권했지만, 그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으니까 밖에 나가 날이 샐 때까지 걸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어쨌든 오늘밤은 내 방에서 자라고 타이른 다음 내 침대에 눕게 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의자에서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렵에는 그도 지칠 대로 지쳐 내 말에 거역할 만한 기력도 없었다. 나는 몇 시간은 푹 잘 수 있도록 베로날을 좀 넉넉하게 주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 그러나 내가 누운 거실 의자는 그다지 편치 못했다. 나는 잠을 못 이룬 채, 불운한 네덜란드인이 겪은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블랑시 스트로브의 행동에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적 매력에 반했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내가 애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애무와 위안에 대한 여성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대부분의 여자들은 애정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나무 위에서나 성장할 수 있는 덩쿨풀처럼 어떤 대사에 대해서나 불타오를 수 있는 수동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처녀의 마음을 움직여 반드시 나중에 애정이 솟아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자기를 구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만들 경우, 세상의 지혜는 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의 안정에 대한 만족, 소유의 자랑스러움, 상대방의 요구를 받고 있다는 쾌감, 가정을 지니고 있는 충족감, 그런 것으로 인해 성립되는 감정이며, 여자가 거기에 정신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흐뭇한 허영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 솟아나는 열정을 방어할 힘을 지니지 못한 감정이다. 블랑시의 스트릭랜드에 대한 심한 혐오감 속에서 처음부터 막연한 성적 매력의 요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복잡 미묘한 성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건방진 일일 것이다. 아마 스트로브의 정열은 그녀 성격의 그러한 면을 만족시킨 게 아니라 다만 자극한 데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스트릭랜드를 미워한 것은 그녀가 구하고 있는 것을 만족시켜 줄 만한 힘을 스트릭랜드에게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그를 아틀리에로 데리고 오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반대한 것은 절대로 말로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웬일인지 그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 생각나는 일이지만 그녀는 불행이 닥쳐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기묘한 일이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느끼고 있던 공포는 아주 묘하게 그녀의 마음을 동요케 했다. 그녀가 그에 대해 느꼈던 공포가 이동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외모는 야성적이고 보기 흉했다. 그 눈은 냉정하고 그 입매는 육감적인 데가 있었다. 몸집이 크고 건장했다.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을 가진 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사람 속에서 역사의 여명기의 야생 동물 같은 기분 나쁜 요소를 느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그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면 그녀가 그를 사랑하든가, 아니면 미워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를 미워한 것이다. 그리고 병자와 매일 가까이 지냈던 일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음식을 먹일 때, 그의 머리를 들어 주었는데 그 머리가 그녀의 손에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가 다 먹고 나면 그녀는 그의 육감적인 입술과 빨간 턱수염을 닦아 주었다. 남자의 손발을 씻겨 줄 때도 있었는데, 손이나 발이 다 털북숭이였다. 손을 닦아 줄 때도 보면, 앓고 있는 사람인데도 뼈마디가 굵어 힘이 세어 보였다. 손 마디가 길쭉길쭉했으며, 예술가 특유의 손재주가 있어 보이는 손가락이었다. 그런 남자의 육체적인 특성이 그녀에게 어떤 자극을 주었던 모양인데 나로서는 다만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들었을 때는, 꼼짝도 안 해 죽은 것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으며, 오랜 추적 끝에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숲속의 야수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가 꿈 속에서 어떤 공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스의 숲속을 사티로스에게 쫓겨 도망가는 요정의 꿈이라도 꾸고 있었던 것일까? 발이 빠른 요정은 정신없이 도망치는데, 사티로스는 한발 한발 요정에게 다가가 마침내 그녀는 그의 뜨거운 입김을 볼에 느끼게 된다. 그래도 그녀는 말없이 도망치고 그는 말없이 쫓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그가 그녀를 붙잡았을 때,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공포였을까 아니면 황홀이었을까? 블랑시 스트로브는 욕망의 잔혹한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마 그녀는 스트릭랜드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굶주린 것처럼 그를 요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생활에 중심이 되던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가치를 잃고 말았다. 그녀는 친절한 동시에 성질이 급하며, 동정심이 있는 동시에 생각이 부족한 복잡한 여성의 자리를 벗어나 마이나스로 변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지나친 공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만 자기 남편에 싫증이 난 나머지 냉혹한 호기심에서 스트릭랜드에게 마음이 끌렸을 뿐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도 없이 다만 상대방이 바로 옆에 있어서였든가, 아니면 지루했기 때문에 그의 욕망에 굴하게 되었으며, 일단 그렇게 되자 자기 손으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꼼짝도 못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반듯한 이마와 그 차가운 잿빛 눈동자 뒤에 숨어 있는 상념이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알아낼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불가사의한 동물을 상대로 할 때는 무엇이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블랑시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쨌든 그럴 듯한 설명을 붙일 수는 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 봐도 이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기 친구의 신의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배신한 것, 남의 행복을 파괴하여 자기의 일시적인 기분을 만족시키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경우라면 조금도 이상한 일로 볼 수 없다. 그런 경향은 처음부터 그의 성격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맙다는 관념을 전혀 갖지 않은 인간이다. 동정심 역시 티끌만치도 없다.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감정들은 그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탓하는 것은, 사납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호랑이를 나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변덕이었다. 스트릭랜드가 블랑시 스트로브의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랑이란 부드러움을 그 중요한 부분으로 갖는 감정인데, 스트릭랜드는 자기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부드러움이란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인간이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약하다는 의식이 있고, 그것을 보호해 주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고 싶고, 기쁨을 안겨 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 것이다. 비록 이기심을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이기심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을 스트릭랜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은 놀라울 정도의 흡수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껍질 속에서 끌어낸다. 아무리 앞을 내다보는 인간이라도 마음속으로는 어렴풋이 염려하면서도 사랑에 종말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환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육체를 제공하고, 이성으로는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환각을 현실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조금은 자기 이상의 것으로 만들고, 조금은 자기 이하의 것으로도 만드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다. 즉 이미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 자신의 자아와는 거리가 먼, 어떤 목적에 대한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사랑은 감수성이 부족 되는 일은 없는 것인데, 스트릭랜드는 내가 알고 있는 인간 중에서 그런 종류의 약점을 가장 덜 지닌 사람이었다. 사랑이 앞서 말한 것같이 그렇다면 그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외부로부터의 낯선 구속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과 자신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향해 계속 그를 부추기는, 그 불가해한 갈망과의 사이에 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이건 그의 마음속에서 뿌리째 제거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비록 거기에는 심한 고뇌가 따르고, 그 뒤에 엄청난 타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능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복잡한 인상을 조금이나마 전달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큰 동시에 너무 작은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정열에 대한 개념은 그 사람 자신의 특성에 입각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와 같은 인간도 자기의 특유한 방법으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의 감정을 분석해 보려 했던 것인데 결국 허사로 끝나 버렸다. 31 다음날 나는 더 묵고 가라고 붙잡았으나 스트로브는 내 거처에서 나가 버렸다. 짐은 내가 가지고 오겠다고 했는데도 그는 굳이 자기가 가겠다고 우겨 댔다. 아마 그는 그들이 아직 그의 짐을 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다시 부인을 만나 자기한테 돌아오라고 권해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 본 그의 짐은 현관 앞 관리 사무실에 이미 나와 있었다. 블랑시는 외출했다고 관리인 아주머니가 말했다. 거기서도 으레 그는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자기 괴로움을 이러니저러니 하고 털어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는 사람에게는 무턱대고 자기 괴로움을 얘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동정을 기대해서 그렇지만 사람들의 조소를 사기가 일쑤였다. 그의 태도는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는 부인이 몇 시쯤 장을 보러 나가는지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견디다 못해 그는 길거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말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만일 자기가 그녀를 화나게 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지 화가 풀릴 때까지 사과하겠다고 부지런히 떠들어댔다. 헌신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니 제발 자기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도 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않고 외면을 한 채 부지런히 걸어 갔다. 그가 통통하고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 그녀를 쫓아가는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급하게 쫓아왔으므로 조금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그녀에게 말했다. 제발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했다. 만일 자기를 용서해 주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어디든 여행을 데리고 가겠다고도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머지않아 그녀에게 싫증을 낼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때의 비열한 광경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화가 치밀어 폭발할 것 같았다. 그에게서는 분별과 위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경멸을 받을 만한 짓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해보인 것이다. 아마 여자의 잔인성 중에서, 자기는 사랑 받고 있지만 자기 쪽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 대한 잔인성만큼 심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여자에게 부드러움이나 관용은 전혀 없으며 다만 미칠 듯한 초조가 있을 뿐이다. 블랑시 스트로브는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힘껏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가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 그녀는 도망쳐서 아틀리에의 계단을 뛰어올라가 버렸다. 그때까지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할 때, 그는 아직도 그녀에게 얻어맞은 뺨이 아프기라도 한 듯 한쪽 손을 뺨에 대고, 눈에는 가슴을 에어 내는 듯한 고통의 빛과 익살스럽다고밖에 볼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지나치게 자란 국민 학교 아이 같았다. 나는 정말 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후로는 그는 그녀가 가게에 가려면 꼭 지나다니는 골목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가 지나가면 반대쪽 길모퉁이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도 다시는 그녀에게 말을 붙일 용기는 없었지만 자신의 동그란 눈에 띤 애절한 빛으로 그녀에게 호소하려고 했다. 이렇게 비참한 그의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그녀도 마음이 동요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장을 보러 가는 시간을 바꾸지도 않았고, 다른 길로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마음엔 어떤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그녀는 그에게 고문의 괴로움을 주면서 어떤 기쁨마저 느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렇게도 그를 미워하고 있었을까? 나는 스트로브에게 좀더 똑똑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했다. 정말 화가 치밀 정도로 그는 기백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몽둥이로 그녀의 머리라도 한 대 후려쳤어야 했어. 그렇게 했으면 그 여자도 지금처럼 자네를 경멸하진 않았을 거야" 잠시 고향에 돌아가 있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 보았다. 그는 전에도 곧잘 부모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 북부의 어느 조용한 고장을 나에게 말해 주곤 했다. 부모는 가난했다.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물이 괴어 있는 운하 옆에 세워진 아담하고 정갈한 붉은 벽돌집에 살고 있었다. 거리는 넓고 조용했다. 그 거리는 과거 2백 년 동안 내리막길을 더듬어 왔으나, 그곳 집들은 소박하면서도 한창때의 품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머나먼 인도 제도로 물건을 보내던 부유한 상인들은 그런 집에서 조용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며, 장사가 점점 쇠퇴해도 훌륭했던 과거의 향기만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이윽고 여기저기에 풍차가 보이는 널따란 푸른 들판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얼룩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나는 스트로브가 소년 시절의 여러 가지 추억이 깃든 그런 환경으로 돌아가면 현재의 불행을 잊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해" 하고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만일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옆에 없어 보게. 그야말로 큰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하고 나는 물었다. "모르지. 그러나 걱정일세"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그의 모습은 여전히 익살스럽게 보였다. 만일 그가 수척하게 여위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의 동정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전처럼 살찐 채였으며 동글동글한 빨간 뺨은 익은 사과처럼 반들반들했다. 옷차림이 아주 깔끔했고, 단정한 검은 웃옷과 늘 작은 듯한 중절모를 멋지게 쓰고 다녔다. 배도 점점 튀어 나와 슬픔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시세가 좋은 외교관 같은 티가 났다. 때로는 사람의 외모가 내면의 영혼과는 이렇게도 판이하게 다를 때가 있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 더크 스트로브는 토비 벨취 경의 육체 속에서 로미오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천성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항상 실수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참된 감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솜씨는 범속한 것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의 감각은 묘하게 섬세했지만 태도는 천했다. 남의 문제는 발벗고 나서서 잘 돌봐 주었지만 자기 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수많은 모순된 요소를 한 사람의 인간 속에 한꺼번에 긁어모아 그 사람을 냉혹한 우주 앞에 내세우다니 자연의 여신도 참으로 잔인한 장난을 친 셈이다. 32 나는 몇 주일 동안 스트릭랜드를 만나지 않았다. 그에게 너무나 질려, 만일 기회가 있으면,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어 뭉쳤던 가슴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그러기 위해 그를 일부러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럴 듯한 도덕적 분노 따위를 가장해 보이는 것이 조금 쑥스럽기도 했다. 그런 일에는 일종의 자기 만족 같은 요소가 있어, 조금이라도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웃음거리로 보이는 일에 대해 철면피가 되려면, 상당히 심한 분노가 일어나야만 한다. 스트릭랜드라는 남자에게는 냉소적인 성실함이 있으므로 허세를 연상케 하는 언동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스트릭랜드가 자주 드나드는-그래서 내가 요즈음 피하고 있는-클리시 가의 카페 앞을 지나가다 그와 맞닥뜨렸다. 그는 블랑시 스트로브와 함께 있었으며, 마침 두 사람은 그가 좋아하는 구석 자리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아니, 오래간만이군요? 난 또 어디로 가 버린 줄 알았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정중한 태도는, 내가 그와 말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증거였다. 그는 무의미하게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별로 간 데도 없어요" "그럼 왜 여기도 나오지 않았소?" "파리에는 시간을 보낼 카페가 여기 한 군데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때야 블랑시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늘 입고 있던 그 잘 어울리는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아틀리에에서 집안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보아 오던 그 반듯한 이마와 침착한 눈길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우리 체스나 한 판 둘까?" 스트릭랜드가 말했다. 그때 왜 내가 거절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스트릭랜드가 늘 앉곤 하는 테이블로 갔다. 그는 곧 체스판과 말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둘이 다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자리에 앉았으므로, 나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트로브 부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체스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그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말이 없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를 알아보려고 했다. 뭔가 비밀을 말하려는 눈치나, 낙담이나 비통의 암시라도 없나 하고 그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또 마음의 침착성을 나타내는 내색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고 그 이마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자체가 가면인 양 아무런 비밀도 나타내지 않았다. 두 손은 조용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 온 대로라면 그녀는 분명 격한 감정을 가졌다.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있던 더크의 따귀를 갈긴 일은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내면 얼마든지 무서운 잔인성을 보일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보호라는 안전한 은신처와 아무 것도 부러울 것 없는 가정 생활을 버리고, 아무리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모험에 대한 호기심과 그날 그날의 생활을 임기응변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녀가 가정을 소중히 하던 일이며, 집안 살림을 잘 꾸려 나가는 일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 여자일 것이고, 그런 격함과 침착한 외모를 대조해 보면 뭔가 극적인 것이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것에 대해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게임에 주의력을 집중하려고 했지만 나의 공상은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스트릭랜드와 내기를 할 때는 언제나 그를 이기려고 전력을 다했다. 그는 자기에게 진 상대방을 깔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승리를 좋아하면 진 편이 더욱 괴로운 법이다. 이에 반해 만일 그가 지게 되면 더없이 좋은 기분으로 싱글벙글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았다. 내기를 할 때만큼 사람이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경우에 상당히 머리를 써 추리를 해야만 할 것이다. 내기가 끝나자 나는 웨이트를 불러 돈을 치르고 그들과 헤어졌다.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생각할 만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므로 내가 어떤 추측을 해보았자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만큼 나의 호기심은 더 쌓인 셈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요정이 되어 아틀리에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 표정을 몰래 엿보거나 둘이서 하는 말을 엿듣거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금 나에게는 상상력의 실마리가 되는 약간의 암시밖에 없는 것이다. 33 그로부터 2, 3일이 지나자 더크 스트로브가 나를 찾아왔다. "블랑시와 만났다면서?" 하고 그는 말했다. "도대체 그건 어떻게 알았나?" "자네가 그들과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이 말해 줬지.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나?" "자네를 괴롭힐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괴로워도 상관없네. 그녀에 대해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듣고 싶단 말일세. 내 맘은 자네도 잘 알 텐데, 왜..." 나는 그가 물어 올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녀의 모양은 어떻던가?" "전혀 변하지 않았어" "행복해 보이던가?"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나? 우리는 카페에서 체스를 했네. 그러니까 그 여자에겐 말할 기회가 없었어" "하지만 얼굴 표정으로 알 수 없던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그 여자가 말로나, 아니면 몸짓으로나 자기 마음을 나타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자제력이 얼마나 강한가는 나보다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듯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아아, 나는 두려워서 못 견디겠네. 틀림없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러나 나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네"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그건 나도 몰라"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듯 말했다. "다만 어떤 무서운 파국이 닥쳐올 것만 같아" 스트로브는 잘 흥분하는 남자였지만, 이때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블랑시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와의 생활을 끝까지 견뎌 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었다. 속담에도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 경험에 의하면 인간이란 반드시 불행을 초래하는 원인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어떤 우연한 일로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의 결과를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블랑시는 스트릭랜드와 싸우면 그와 헤어져 버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남편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에 대해서 특별히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자넨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야" 하고 스트로브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 여자가 불행하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단 말일세.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아주 자리를 잡고 가정적인 부부로 생활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스트로브는 그 슬픈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런 게 자네한테야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내겐 아주 중대하고도 심각한 문제일세" 만약 내가 한 말이 너무 성급했거나 불성실하게 들렸다면 미안하게 됐다고 나는 사과를 했다. "자네, 나를 좀 도와 주지 않겠나?" 스트로브가 말했다.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하겠네" "나를 대신해 블랑시에게 편지를 좀 써 주게" "왜 자네가 직접 못 쓰나?" "실은 지금까지 여러 번 편지를 썼지. 물론 답장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편지는 어머 읽어 보지도 않았을 거야" "자넨 여자의 호기심을 무시하는군. 그런 호기심을 그녀가 견뎌 낼 것 같은가?" "견뎌 내겠지. 특히 내 편지에 한해서는" 나는 재빨리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의 그 대답이 나에게는 묘하게 굴욕적으로 들렸다. 그녀가 그의 필적을 보아도 전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을 만큼 무관심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넨 그 여자가 자네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건가?" 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야, 다만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면 나에게 부탁하라는 걸 그 여자에게 알려 주면 되네.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도 바로 그 말을 전해 달라는 걸세" 나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말해 보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스트로브 부인 더크가 부인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고 부인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는 부인을 도와 줄 기회를 갖는 것에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앞서 일어난 일로 당신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의 애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고 다음 주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34 스트릭랜드와 블랑시의 관계가 불행한 결말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나도 스트로브에 못지 않게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그처럼 비극적이리라고는 나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밤에도 서늘한 바람이라곤 전혀 불지 않았다. 햇볕에 달아오른 거리는 한낮의 폭염을 한꺼번에 내뱉고 있는 것 같았고, 길가는 사람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고 있었다. 나는 벌써 몇 주일 동안이나 스트릭랜드를 만나지 않았다. 다른 일에 빠져 그나 그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더크는 더크 대로 언제나 한탄이나 늘어놓아 나는 싫증이 나 그를 피하고 있었다. 이런 한심한 문제에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옷 차림으로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어수선하여, 햇볕이 내리쬐는 브르타뉴 해변가며, 해변가의 신선한 공기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옆에는 관리인 아주머니가 갖다 준 빈 카페오레 찻잔과 식욕이 없어 먹다 남긴 크르와상이 반 조각 남아 있었다. 옆방에서는 아주머니가 내가 목욕한 물을 퍼내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벨 소리가 났으나 나는 관리인 아주머니가 열어 주겠지 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곧 내가 방에 있느냐고 묻는 스트로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큰 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는 곧 들어오더니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으로 왔다. "그 여자가 자살했어"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는 말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전혀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말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바보처럼 알 수 없는 말을 빨리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렸으며, 웬일인지 나도 모르게 벌컥 화가 치밀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구, 무슨 말인지 제대로 해보게나?" 그는 두 손으로 절망적인 시늉을 해보였으나 그래도 제대로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의 양어깨를 잡고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지금 그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바보짓을 한 일에 화가 난다. 아마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죽 계속되어 나의 신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쇠약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좀 앉아야겠네" 마침내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나는 생갈미에를 한 잔 그에게 권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나는 잔을 그의 입에 갖다 대어 주었다. 그는 한 모금 꿀꺽 삼키다가 와이셔츠 앞가슴에 몇 방울을 흘렸다. "누가 자살을 했단 말인가?"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지난밤에 둘이서 싸움을 했어. 그리고 그자는 집을 나가 버린 거야" "그 여자는 죽었나?" "아니,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 "그럼 도대체 자넨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그럼 왜 자살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화내지 말게. 자네가 그러면 난 뭐라고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가에 미소를 띠려고 애를 썼다. "미안하이. 천천히 말해 주게. 제발 부탁이니 덤벙거리지 말라구"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파란 눈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안경의 볼록렌즈 때문에 그의 눈이 일그러져 보였다. "오늘 아침 관리인 아주머니가 편지를 전하려고 올라갔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더라는 거야. 그래 귀를 기울이니 신음 소리가 들리더래. 마침 문이 열려 있기에 아주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블랑시가 침대 위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더라는 거야.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수산병이 놓여 있고" 스트로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의식은 있던가?" "있었어.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자넨 모를 거야. 난 도저히 못 견디겠어, 도저히" 그의 목소리는 비명으로 변했다. "자네가 못 견딜 게 뭔가?" 나는 초조해서 소리를 질렀다. "못 견딜 사람은 그 여자야" "어쩌면 자네는 그렇게 잔인한가?" "하지만 자네가 잘못한 일이 뭐냔 말이야?" "아파트 사람이 의사와 나를 부르러 오고 경찰에도 알렸네. 난 전에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20프랑을 주고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해 놓았거든" 그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에게 해야 할 말이 그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나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달려갔지만 그녀는 나에게 일체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더군.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맹세를 했는데도, 그녀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네. 그녀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려고 했어. 의사는 나보고 곁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거야. 그 여자는 저 사람을 쫓아내요, 하고 계속 소리를 지르지 뭔가. 나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나와 아틀리에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구급차가 와서 그 여자를 들것에 실을 때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알면 안 된다고 나는 부엌으로 쫓겨났단 말일세" 내가 옷을 갈아입자 스트로브는 곧 병원에 동행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면서 그는 부인이 적어도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공동 병실만은 면할 수 있도록 독방을 쓰게끔 주선을 하고 왔노라고 말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는 그녀가 그를 만나기는 거절해도 나는 만나 줄 것이라며 그가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달라고 나에게 애원을 했다. 그는 무슨 일이고 그녀를 나무랄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녀를 도와 주고 싶어했다. 그녀에 대하여는 아무런 요구 조건도 없으며 회복한 뒤에도 자기에게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도 그녀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병원은 아주 쓸쓸해 보이는 건물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끌려다니는가 하면, 한없이 계속되는 계단을 올라가기도 하고, 아무 꾸밈도 없는 긴 복도를 지나 가까스로 담당 의사를 만나긴 했지만, 환자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그날을 면회를 시킬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그 의사라는 자는 턱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사나이로 흰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아주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요, 옆에서 애를 태우는 가족들은 단호한 태도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해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사건은 그에게 아주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신경질적인 부인이 정부와 싸움을 하고 음독을 했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더크를 이 불행의 원인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내가 그는 그 여자의 남편이며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너그럽게 처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자 의사는 갑자기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조롱하는 빛을 본 것 같았다. 과연 스트로브는 마누라에게 속아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다 할 위험은 없습니다" 의사는 우리가 묻는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다만 얼마만큼 마셨는지를 알 수 없어서요. 여자들이란 언제나 애정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않도록 조심하지요. 대체적으로 보아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에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하나의 시위죠"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말투에는 싸늘한 경멸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그에게 있어 블랑시 스트로브는, 그 해 파리 시의 자살 미수자 리스트에 오르는 하나의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바쁜 몸이라, 그 이상의 시간을 우리 때문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만일 내일 어느 시각에 블랑시가 차도를 보이면 남편만은 면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35 나는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스트로브가 도저히 혼자 있지 못하겠다고 해서 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 주느라고 온힘을 기울였다. 우선 그를 루브르 미술관으로 대리고 갔으나 그는 그림을 보는 체했을 뿐 사실상 아내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먹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점심을 먹여 침대에 눕혔으나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 동안 나와 함께 지내자고 말했더니 그는 기꺼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책을 읽으라고 몇 권 주었으나 겨우 한 페이지 읽더니 밑에 내려놓고 서글픈 얼굴로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에는 피켓 놀이를 여러 번 되풀이했지만 그는 내가 너무나 자기에게 신경 쓰니까,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그냥 재미있는 체하고 있을 뿐이었다. 끝으로 술을 한 잔 마시게 했더니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가서 간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블랑시의 병세가 좀 나아졌다고 하며, 병실로 들어가 블랑시에게 남편을 만나겠느냐고 물었다. 병실 안에서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간호사가 나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호사에게 만일 그녀가 더크가 만나기 싫다면 나를 만나 주지 않겠느냐고 물어 봐 달라고 했다. 그러나 블랑시는 나도 거절했다. 더크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강요할 수는 없어요" 하고 간호사는 말했다. "상태가 나빠요, 아마 기분이 좀 달라질지도 몰라요" "혹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답니까?" 하고 더크는 물었다. 그 소리가 너무 작아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분은 자기를 가만히 있게 해달라는군요" 더크는 두 손을 묘하게 움직였는데, 마치 그 손은 그의 몸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만, 만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데려다 주겠다고 물어 봐 주십시오. 저는 환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을 뿐입니다"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차분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은 이 세상의 모든 전율과 고통을 보아 왔지만 죄 없는 세계의 환상에 차 있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좀더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렇게 전해 드리죠" 더크는 블랑시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자기 의향을 곧 전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 말을 들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제발 지금 곧 물어 봐 주십시오" 간호사는 딱하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나의 귀에는 우선 간호사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고 다음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안 돼요! 안 돼요!" 간호사는 다시 나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목소리는 환자 목소리였나요? 아주 달라진 목소리던데요?" 나는 물었다. "산 때문에 성대가 탔나 봐요" 더크는 나직하게 비탄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간호사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먼저 나가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냐고 묻지도 않고 잠자코 나가 버렸다. 그는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말을 잘 듣는 아이 같았다. "그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당신에게 말했습니까?"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뇨,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입을 다문 채 반듯이 누워서 몇 시간이고 꼼짝도 안 합니다. 계속 울고만 있어요. 베개가 폭 젖어 있어요. 너무 힘이 빠져 손수건도 쓸 수 없는 모양이에요.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스트릭랜드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간호사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더크는 현관 앞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내가 그의 팔을 만질 때까지 내가 옆에 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불쌍한 여자가 그처럼 무서운 짓을 저질렀는지 상상하며 걸었다. 틀림없이 스트릭랜드도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경찰에서 누가 그를 찾아갔을 것이고 그는 경찰 심문에 진술했을 것이다.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전에 아틀리에로 쓰고 있던 그 비참한 다락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그가 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부르러 가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 이상, 틀림없이 그녀도 어떤 무서운 잔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36 그 다음 주는 참으로 악몽 같은 일주일이었다. 스트로브는 하루에 두 번씩이나 병원을 찾아갔지만, 부인은 여전히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도 처음에는 차차 회복돼 간다는 말만으로 안심하고 밝은 마음으로 돌아왔으나, 마침내 하루는 절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어코 의사가 염려하던 병발증이 생겨 회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는 비탄에 빠진 그를 동정했으나 위안이 될 말은 할 수 없었다. 불쌍하게도 그 여자는 입을 꽉 다문 채, 마치 다가오는 죽음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한 군데만 쳐다보며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제 오늘 내일 하는 위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스트로브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음을 알았다. 그는 아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렇게 한 마디 없이 다만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새삼 애도의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만일 내가 무엇을 읽거나 하면 인정 없는 놈이라고 생각할까 봐 나는 창가에 앉아 파이프를 피워 물고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한텐 정말 신세가 많았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을 친절히 잘 도와 줬어" "무슨 소린가, 쓸데없이" 나는 좀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가니까 병원에선 좀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 의자를 내주기에 나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그 여자가 혼수 상태에 빠졌으니까 들어와도 괜찮다고 하는 거야. 그녀의 입이며 턱이 온통 산으로 타 버렸지 뭔가, 그 곱던 살결이 아주 몰라보게 변해 버렸어. 정말 볼 수가 없더군. 너무 조용히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간호사가 말해 줄 때까지 나는 죽은 줄도 몰랐어" 그는 너무 지쳐서 울 힘도 없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버린 듯, 벌렁 누워 있더니, 잠시 뒤에 잠이 들었다. 이것이 일주일만에 처음 이루는 자연스러운 잠이었다.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도 때로는 자비를 베푸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나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불을 껐다. 아침이 되어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는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어젯밤에 누운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금테 안경도 여전히 코 위에 얹혀 있었다. 37 블랑시 스트로브의 죽음은 사정이 사정인 만큼 지겨울 정도로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했으며, 그런 절차를 끝낸 후에야 겨우 매장 허가가 나왔다. 더크와 나 두 사람만이 영구차를 따라 묘지까지 갔다. 마차는 갈 때는 천천히 갔으나 돌아올 때는 빨리 달렸다. 영구차의 마부가 마구 채찍을 흔들어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이 나는 이상하게도 무섭게 느껴졌다. 마치 죽음의 신을 털어 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앞서 가는 영구차가 멀어지면 이쪽 마부도 뒤떨어질세라 자기 말을 빨리 모는 것이었다. 이번 일을 모두 털어 버리고 싶은 나 자신의 기분도 그와 다름이 없었다. 사실상 나는 나와는 무관한 이 비극에 휘말린 것에 대해 지겨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스트로브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잠시 여행이라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제 파리에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잖은가?"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가차없이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계획은 서 있나?" "아니"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새 출발을 해야 하네. 왜 이탈리아에라도 가서 일을 시작하지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잠깐 말의 걸음을 늦추며 마부가 뭐라고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어디서 내리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나는 마부에게 말했다. "함께 점심이라도 먹세" 나는 더크에게 말했다. "피갈 광장에서 내려 달라고 했네" "아냐, 안 가겠어. 난 아틀리에에 가 봐야겠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함께 가 줄까?" "아니, 혼자 가 보고 싶어" "그래" 나는 가야 할 방향을 마부에게 말했다. 이리하여 또 침묵 속에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블랑시를 병원에 입원시킨 그 불행한 아침 이후 더크는 한 번도 아틀리에에 가지 않았다.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 나는 한시름 놓았다. 문 앞에서 그와 헤어지자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한 기분으로 걷기 시작했다. 파리의 거리에서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나는 미소를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맑게 갠 화창한 날이었다. 나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쁨이 온몸에 넘치는 것을 느꼈다. 그 기분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더크 스트로브의 일도, 그의 슬픔도 다 잊어버리고 나는 다만 나의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38 그로부터 일주일 가량이나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7시가 좀 지났을 무렵, 그가 불쑥 나타나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까만 상복을 입고 실크 모자에도 넓은 검은 리본을 두르고 있었다. 손수건에까지 검은 테를 둘렀다. 마치 이 세상 친척이란 친척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된 차림새였다. 몸은 뚱뚱하고 볼은 여전히 혈색이 좋아 그 상복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불행한 상황에서도 익살스러운 점을 지니고 있어야 하다니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가 가기로 한 곳은 내가 권한 이탈리아가 아니라 네덜란드라고 했다. "내일 떠날 예정일세. 자넬 만나는 것도 이게 마지막 일걸세" 나는 내 나름의 대답을 했으나 그는 힘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나 됐어. 이제 모든 걸 다 잊어버린 것 같네.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가 이제 새삼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은 없네만, 그러나 지금 내가 갈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단 말일세" 쓰라린 상처로 지쳐 버린 그의 마음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몇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세상의 조소가 이제야 그에게도 부담스러워진 것 같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블랑시의 배신으로 받은 타격은 그때까지 그 조소를 명랑하게 받아넘겨 온 마음의 탄력을 잃어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그를 보고 웃던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혈혈 단신 외로운 몸이 된 것이다. 그는 깨끗한 벽돌집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일이며 어머니의 병적인 결벽성 등을 말해 주었다. 부엌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이 닦여 있고, 물건들은 하나하나 제자리에 정돈되어 한 점의 티끌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녀의 결벽성은 병적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과처럼 붉은 볼을 지닌 깔끔한 노모가 오랜 세월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을 치우고 닦고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여윈 노인으로, 마디 굵은 손은 평생 일해 온 그의 삶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말수가 적은 정직한 사람이며, 밤이면 소리를 내어 신문을 읽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 옆에서는 부인과 딸(지금은 소형 어선의 선장에게 출가했다)이 시간을 아끼어, 바늘 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문명의 진보에서 뒤쳐진 이 작은 고장에서는 모든 것이 평온하게 되풀이되어 간다. 한 해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간 뒤에 죽음이 오로지 일만을 해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려고 친구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목수가 되기를 바라셨지. 우리 집안은 5대 째나 그 직업을 이어오고 있거든. 아마 그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것인가 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말야. 어렸을 때, 나는 이웃집에 사는 마구장이 딸에게 장가를 가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땋아 늘인 착한 소녀였어. 그 아이와 결혼했더라면 우리 집 살림을 잘해 줬을 테고 뒤를 이을 자식도 벌써 낳았을 거야" 스트로브는 한숨을 쉬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생각은 자기가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갖가지 정경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거절해 버린 안정된 생활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삶이란 외롭고 냉혹한 것이야. 왜 왔는지도 모르게 이 세상에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가 버리는 거야. 인간은 겸허해야 해. 그리고 조용함을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야 해. 운명의 신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일생을 수수하게 보내야 한단 말일세. 그리고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사랑의 찾아야겠어. 그런 사람들의 무지는 우리가 지닌 어떤 지식보다도 존귀한 거야. 우리도 잠자코 자신의 행운에 만족하고 그들처럼 조용하고 온화하게 살아야 하네. 그것이 인생의 지혜라는 거야" 나에게 이런 말은 그의 지친 영혼이 지껄이고 있는 말로 들렸다. 그의 이런 체념에 나는 반발을 느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왜 화가가 될 생각을 했나?"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에 그림에 솜씨가 있어 학교에서 늘 상을 탔지. 어머니는 내 그림 재주가 대견해서 그림 물감을 선물로 사주셨어. 그리고 내가 그린 스케치를 목사며 의사며 판사 같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돌아다니셨네. 그래서 그들이 권하는 대로 나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장학생 시험을 치렀지. 그 시험에 합격을 했어. 그러자 어머니는 우쭐해져서 나를 떠나 보내는 것이 가슴 아프셨을 텐데도 웃는 얼굴로 보내 주시더군. 아들이 예술가가 되는 게 기뻤던 거야. 모두 절약에 절약을 하여 나만은 돈에 옹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어. 내 그림이 처음으로 전람회에 전시되었을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까지 총출동하여 암스테르담까지 보러 왔지. 어머니는 내 그림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네" 그의 부드러운 눈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그 낡은 집의 벽이란 벽에는 모두 아름다운 금테 액자에 넣은 내 그림이 걸려 있다네" 그는 행복과 자랑스러움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나는 농부들과 사이프러스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있는 그의 차디찬 그림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런 그림들이 화려한 금테 액자에 넣어져 시골집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은 정말 기묘할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이 훌륭한 사람이 된 걸로 아시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 의견대로 정직한 목수가 되었더라면 차라리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예술이 주는 한없는 기쁨을 안 자네가, 이제 새삼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까지 예술이 안겨 주던 기쁨, 그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예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거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주저하고 있는 것 같더니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만나러 간 일을 알고 있나?" "자네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만 해도 욕이 튀어 나올 텐데. 스트로브는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젠 알고 있겠지만, 나에겐 엄밀하게 말해 자존심 따윈 없어졌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러자 그는 기묘한 이야기를 한 가지 해주었다. 39 블랑시의 슬픈 매장을 끝마치고 나와 헤어지자, 스트로브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기 집을 찾아 들어갔다.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그를 아틀리에로 끌어 들였다. 막연한 자학적 욕망에 쫓기면서도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민을 생각하면 역시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다. 그는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를 옮겨 딛기도 무거웠다. 문 앞에서 방 안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려고 한동안 주저했다.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당장이라도 계단을 뛰어내려가 나를 불러 함께 들어가자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군가 아틀리에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단을 뛰어올라 와서는 이 층계참에 서서 가쁜 숨을 돌리던 일이 있었는데, 모처럼 가라앉힌 마음도 블랑시를 만나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금방 허물어져 버렸던 그 어리석음이 생각났다. 그녀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신선한 기쁨이었다. 불가 한 시간 남짓 집을 비웠을 뿐인데, 마치 한 달이나 헤어져 있던 것처럼 재회의 기대에 가슴이 설레곤 했던 것이다. 문득 그는 아내가 죽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은 하나의 꿈, 무서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면 그곳에는 아내가, 늘 그가 그토록 칭찬하던 샤르뎅의 '식전의 기도'에 나오는 여인처럼 다소곳한 자세로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비워 두었던 방 같지 않았다. 아내의 깔끔한 성격은 그를 기쁘게 해준 것 중의 하나였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자기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두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흐뭇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침실은 그녀가 나간 뒤와 같았다. 화장대 위에는 빗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브러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아틀리에에서 마지막 밤을 지낸 침대는 누군가 깨끗이 치워 놓았으며, 나이트 가운도 작은 상자에 넣어 머리맡에 놓아 두었다. 그녀가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그곳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선반 위에는 스트릭랜드와 싸움을 한 날 저녁 식사 때 쓴 접시가 놓여 있었다. 깨끗이 씻어져 있었다. 나이프와 포크는 서랍에 들어 있고 덮개 밑에는 치즈가 한 쪽 남아 있고, 깡통 속에는 먹다 남은 굳은 빵이 한 조각 들어 있었다. 그날 필요한 물건을 꼭 하루치만 마련하여 다음날까지 남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스트릭랜드는 저녁을 마친 다음 곧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여느 때처럼 빨래를 한 것을 알자 그는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이러한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보아 그 자살이 일시적인 흥분에서 온 일이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 끝에 취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침착성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갑자기 무서운 고뇌가 치솟아 올랐다. 두 무릎의 힘이 빠져 자칫하다가는 넘어질 뻔했다. 그는 침실로 돌아가 침대에 쓰러지며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블랑시! 블랑시!" 그녀의 괴로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부엌에-부엌이라야 그릇 선반이 있을 정도의 작은 부엌이지만-그녀가 서서 접시며, 컵, 포크, 숟가락 등을 씻고, 칼은 숫돌에 재빠르게 간 다음, 찬장 속에 넣고 개수대를 깨끗이 닦고 나서 행주는 줄에 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헌 회색 천으로 된 그 행주는 지금도 그곳에 걸려 있었다. 그 일이 끝나면 그녀는 빠뜨리고 씻지 않은 것은 없나, 잊어버리고 치우지 않은 곳은 없나 하고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앞치마를 벗는다. 그 앞치마는 문 안쪽 못에 걸려 있다. 그리고 수산병을 집어들고 침실로 들어간다. 그 고뇌를 생각하니 그는 견딜 수 없어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 방을 나온 다음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그곳은 커튼을 쳐놓아서 어두컴컴했다. 그는 얼른 커텐을 젖혔다. 환해진 방을 재빨리 둘러보자 저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목메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곳은 그가 행복한 날을 지냈던 장소다. 게다가 변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다. 스트릭랜드는 주위 환경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남의 아틀리에에 살고 있어도 배치를 바꾸지는 않았다. 이곳은 예술적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써 꾸며 놓은 아틀리에로, 스트로브가 생각하는, 예술가에게 적합한 환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벽 둘레에는 수놓은 비단 조각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피아노에는 광택을 없앤 아름다운 비단 커버를 씌워 놓았다. 방 한구석에는 밀로의 비너스, 또 다른 구석에는 메디치의 비너스의 모제 사품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델프 식으로 구운 도기가 놓인 이탈리아제 장식장이며, 입체식으로 판 조각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또 벨라스케즈의 '이노컷티우스 10세 상'을 훌륭한 금테 액자에 넣어 장식해 놓았다. 이것은 스트로브가 으로마에 있을 때 모사한 것이다. 그 밖에 스트로브 자신의 그림이 여러 장, 장식 효과를 최고로 높이려는 듯, 훌륭한 액자에 넣어져 있다. 스트로브는 항상 자기 취미를 자랑했고, 어떤 경우에나 아틀리에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지금은 그것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기의 비장품인 루이 15세 왕조 식의 테이블 위치를 조금 바꿔 놓았다. 그때 문득 벽에 세워 놓은 한 장의 캔버스가 눈에 띄었다. 그가 늘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어째서 저런 곳에 두었을까 하고, 그는 그 앞으로 다가가 그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앞쪽으로 돌려 놓았다. 나체화였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가 왈칵 치밀어 캔버스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순간 그림은 화면이 아래를 향한 채 마루 위로 쓰러져 버렸다. 비록 누구의 것이건, 그는 그림을 그런 먼지 속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캔버스를 들어올렸다. 그때 호기심이 일었다. 잘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뿌리칠 수 없어 그는 그 그림을 이젤 위에 놓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 섰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한 여자가 소파에 누워 있는 그림이다. 한쪽 팔은 베개 삼아 베고 또 한쪽 팔은 몸 위로 뻗고 있었다. 한쪽 무릎은 구부리고 한쪽 다리는 곧바로 뻗고 있었다. 고전적인 포즈다.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블랑시였다. 슬픔과 질투와 분노가 왈칵 솟아올랐다. 그는 쉰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위협이라도 하듯 휘둘렀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꼭 미친 것만 같았다. 그로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연장이라도 없나 하고 눈이 뒤집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그림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자. 그러나 공교롭게도 칼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 도구를 들추어 보았으나 웬일인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광란 상태였다. 가까스로 큰 그림 긁기 주걱을 찾아냈다. 그는 환성을 지르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단검이라도 뽑아 든 것처럼 그림을 향해 돌진해 갔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트로브는 그 일이 있을 때나 다름없이 흥분해 있었다. 그는 우리 둘이 마주 앉아 있는 식탁 위의 칼을 움켜쥐자 마구 휘둘러 댔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팔을 치켜들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펴고 칼을 마룻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그는 경련하는 듯이 웃고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길 계속해" 나는 말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나도 몰라. 당장에 그 그림을 뻥 뚫어 주려고 했어.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어. 그때 나는 본 거야. 본 것처럼 생각했던 거야" "봤다니, 뭘?" "그 그림을. 그것은 예술품이었어. 나는 손을 댈 수가 없었어. 무서워진 거야" 스트로브는 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 동그란 푸른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그림은 굉장히 훌륭한 그림이었네. 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자칫하다간 무서운 죄를 저지를 뻔했네. 좀더 자세히 보려고 조금 움직이는 순간 아까 그 주걱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서늘해지더군" 스트로브를 사로잡았던 감동이 나에게도 어느 정도 전달된 것 같았다. 이상한 감동이다. 갑자기 전혀 가치가 다른 세계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에 찾아온 낯선 사람처럼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서 있었다. 스트로브는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뒤죽박죽 되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내가 눈치껏 알아차려야만 했다. 스트릭랜드는 지금까지 자기를 묶어 놓았던 인연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는 발견했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힘을 지닌 새로운 영혼을 발견한 것이다. 아주 풍부하고 아주 기묘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묘선의 대담한 단순화만은 아니었다. 그 육체는 기적적인 무엇인가를 내포한 정열적인 관능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법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육체의 무게를 이상하게 느끼게 하는 충실감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어떤 영적인 것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이끌며, 영원한 별빛만을 받고 있는 어두컴컴한 텅 빈 공간을, 알몸의 영혼이 새로운 신비를 발견하는 일에 두려워하며 발을 딛는 공간을 보여 주었다. 내가 하는 말이 수사적이라면 그것은 당사자인 스트로브가 수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동했을 경우에는 자연과 자기 자신을 소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스트로브는 지금까지 경험한 일이 없는 감정을 표현해 보려고 했으나, 평범한 말로는 아무래도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억지로 말로 나타내려는 신비가 같았다. 그러나 꼭 한 가지 그가 나에게 분명히 해준 게 있었다. 사람들은 미에 대해 지나치게 가볍게 말한다는 사실이다. 말에 대해 무신경하기 때문에 미라는 말을 너무 경솔하게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이 말은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참된 미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하찮은 무수한 사물과 섞어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위엄을 잃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옷이건, 개이건, 설교이건, 무턱대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막상 참된 미를 발견했을 때는 그것을 모른다.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생각을 꾸미려고 과장된 단어를 사용하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다가 경험하는 영감을 가지고 남을 속이는 사기꾼처럼 너무 함부로 쓴 결과, 사람은 이 말의 힘을 스스로 없애고 만 것이다. 그러나 스트로브는 어쩔 수 없는 완고한 어릿광대이긴 하지만, 미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한 그의 영혼에 못지 않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랑과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미는 신자에게 있어서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눈앞에 보자 그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래, 스트릭랜드를 만났을 때 자넨 뭐라고 했나?" "함께 네덜란드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지"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못 하고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스트로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둘이 다 블랑시를 사랑했으니까. 어머니한테 가도 그 사람을 있게 할 만한 이유는 있을 테고, 게다가 가난하고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도 무척 좋은 일일 것이네. 그 사람은 그들로부터 큰 도움이 될 것을 배우게 될지도 몰라" "그래 그는 뭐라고 하던가?" "히죽히죽 웃고 있더군. 나를 굉장히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야" 스트릭랜드도 거절하려면 좀더 듣기 좋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랑시의 그림을 나에게 주더군" 어째서 스트릭랜드가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자네가 쓰던 물건들은 어떻게 할 건가?" 나는 이렇게 물었다. "고물상을 불렀더니 꽤 좋은 값으로 쳐서 목돈을 주더군. 내 그림은 집으로 가지고 갈 작정이야. 그 밖에는 못을 넣은 상자 하나와 책이 몇 권 있을 뿐이야. 지금 나에겐 그게 전 재산일세"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정말 잘 생각한 일일세" 나는 그가 새 출발을 하면 과거를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느꼈다. 지금은 견디기 고통스러운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고, 마침내는 자비로운 망각이 다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일어설 힘이 그에게 안겨 줄 것이다. 그는 아직 젊다. 몇 년이 지나면,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모든 불행을 뭔가 일종의 기쁨을 수반한 슬픔으로 상기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곳에 사는 네덜란드 아가씨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서툰 그림을 열심히 그려 낼 것이고, 그 그림도 상당수에 이르려니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다음날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그를 전송했다. 40 그 뒤 한 달 동안, 나는 내 일에 쫓겨 이 비극적인 사건에 관계되었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내 마음도 어느 결에 그 일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볼일이 있어 길을 걷고 있는데, 찰스 스트릭랜드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잊을 수만 있다면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진저리나는 사건이 다시 되살아나, 그 장본인에게 혐오감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렇다고 모르는 체하는 것도 점잖지 못할 것 같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대로 빨리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어깨에 그의 손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꽤 바쁜 모양이군요" 그는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상대방이 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상냥한 태도로 나오는 것이 스트릭랜드의 성품이었다. 나의 인사가 냉담 하자 이쪽 기분을 확실히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과 함께 가야겠군" "왜요?" "당신과 함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4분의 1마일 가량 걸었을까, 나는 웬일인지 멋적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문방구점 앞에 왔을 때 종이라도 사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따돌릴 구실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여기 좀 들러 가야겠어요. 그럼 실례합니다" 나는 말했다. "볼일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 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리곤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스 종이는 질이 나쁘다는 생각이 났고, 내 계획이 틀린 바에야 구태여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서 짐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물건의 이름을 물어 보고는 곧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물건은 샀소?" "아뇨" 우리는 또 말없이 걸었다. 이윽고 길이 여럿으로 갈리는 교차점으로 나왔다. 나는 길 옆 돌 위에 서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거요?" "당신이 가는 쪽으로" 스트릭랜드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럼 같이 가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기로 할까" "이쪽에서 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야 그럴 가망이 있다면야 기다리지" "저 정면에 있는 흰 벽이 보입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다마다" "그럼 내가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내 얼굴에 씌어 있는 말도 보일 텐데요" "솔직히 말해 짐작을 하고 있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내 성격의 결점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정말 정 떨어지는 사람이군요. 당신처럼 이렇게 짐승 같은 사람은 본 일이 없어요. 왜 당신은 하필이면 당신을 이처럼 싫어하고 경멸하는 사람과 대면하려고 하지요?" "이것 봐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내가 그런 일에 아랑곳할 사람으로 보이오?" "제기랄!" 원래 이쪽 동기가 그다지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난폭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과 친구로 지내기 싫어요" "함께 있으면 나쁜 물이라도 들까 봐요?"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가 비웃어 가며 곁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돈이 다 떨어진 모양이죠?" 나는 거만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한테서 돈을 빌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소" "당신도 아첨을 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끝장을 보게 될 거요" 그는 히죽 웃었다. "당신은 내가 가끔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 진심으로 나를 싫어하지는 못할 거요" 나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있어야 했다. 화가 치미는 일이지만 그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내 성격의 결점이지만, 나를 맞상대해 주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기꺼이 사귀게 되니 정말 난처한 일이다. 스트릭랜드를 증오하는 마음도 이쪽에서 단단히 무장하고 덤벼들지 않으면 소리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자신의 도덕적인 약점을 알아차렸지만, 그의 비난 속에는 이미 일종의 허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도 내가 느낄 정도이니까, 스트릭랜드의 날카로운 본능이라면 벌써 옛날에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속으로는 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마지막으로 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1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닿았다. 나는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내 뒤를 따라 올라와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에 처음 왔으면서도 그는 내가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고심한 방의 모습은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담배통이 있는 것을 보자 그는 곧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담았다. 그리고 하고많은 의자 중에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팔걸이 없는 의자를 골라 앉더니 의자 뒷다리에 무게를 싣고 뒤를 넘어갈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편히 앉으려면 안락 의자에 앉지 그래요" "내가 편하게 앉건 말건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잖소"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고 나도 받아넘겼다. "다만 내가 보기에 거북해서 그럴 뿐이오. 남이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불안해지거든요" 그는 킬킬 웃더니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나에겐 시선을 던지는 일도 없이 잠자코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아마 계속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째서 여길 따라왔을까? 작가에겐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은 이상, 특이한 인간성에 대해 강한 흥미를 느끼는 본능이 숨겨져 있는데, 그 본능은 도의심 따위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다. 악의 응시에 예술적 만족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를 비난받을 때는 그 행위의 동기에 대해 느끼는 호기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작가의 거짓 없는 심정이다. 논리적이고 완성되어 있는 악인의 성격은, 법이나 질서로 보아선 증오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을 창조하는 작가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셰익스피어도 공상 속에서 달빛을 짜내듯, 데스데모나를 묘사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깊은 즐거움을 안고, 악인 이아고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것은 문명 사회의 예외나 습관에 의해 잠재의식이라는 신비 속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본능인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인물에 피와 살을 붙여 줌으로써, 작가는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자신 속의 그런 부분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만족감은 즉 해방감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는 판가름하는 일보다 알아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법이다. 동시에 이 사람의 동기를 살피고자 하는 냉정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들의 생활에, 자기가 원인이 되어 야기된 그 비극에 대하여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속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대담하게 메스를 대어 보았다. "스트로브 말로는 당신 작품 중에서도 그의 부인을 그린 것이 가장 걸작이라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듣자 스트릭랜드는 파이프를 입에서 빼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그림을 그릴 때는 아주 즐거웠지" "왜 그 그림을 그 사람에게 주었지요?" "다 그렸기 때문이오. 나는 다 그린 그림은 필요 없으니까" "스트로브가 하마터면 그것을 찢어 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역시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그는 그대로 잠자코 있더니 마침내 또 파이프를 입에서 빼고 씽긋 웃었다. "그자가 나를 찾아왔던 걸 알고 있소?" "당신도 그 사람의 말에는 뭔가 느끼는 게 있었겠죠?" "천만에, 그건 어리석은 감상이라고 생각했소" "당신이 그 사람의 일생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수염이 난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자는 아주 엉터리 화가요" "그러나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기는 요리 솜씨는 알아줘야겠더군" 스트릭랜드는 비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다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호기심에서 물어 보는 말이긴 하지만, 도대체 당신은 블랑시 스트로브의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지요? 그 점을 알고 싶습니다" 얼굴빛이 좀 변하나 하고 그의 얼굴을 봤다.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는 되물었다. "사실 그대로를 얘기합시다. 당신은 그때 죽어 가고 있었어요. 그것을 더크 스트로브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정성스럽게 간호해 준 것입니다. 그는 당신 때문에 시간과 돈과 그리고 생활의 즐거움까지도 다 희생했어요. 그렇게 해서 당신을 죽음의 신에게서 빼앗아 온 겁니다" "그자는 얼빠진 작자요, 남을 위해 일해 주는 게 그자의 취미이자, 바로 그자의 생활이란 말이오" "스트로브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면,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왜 그 사람에게서 부인까지 빼앗았지요? 당신이 나타나기 전엔 그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단 말입니다. 왜 두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느냐 말입니다" "두 사람이 행복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건 분명합니다" "당신도 꽤 똑똑한 척하는데, 그자가 한 일이 그 여자가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오?" "스트로브가 그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모른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여자는 원래 로마의 어느 공작네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그 집 아들에게 속아넘어간 거지. 그 여자는 결혼해 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난 거요. 아이까지 가진 몸이라 자살이라도 할 작정이었는데 스트로브를 만나 그가 결혼해 준 거요" "정말 그 사람다운 짓이군요. 그처럼 동정심이 많은 사람을 난 일찍이 만난 일이 없어요" 나는 그전부터 어떻게 그처럼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결혼을 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더크가 부인을 대하는 마음에 어딘가 보통 정열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알아차리긴 했다. 그리고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느꼈던 일도 생각났다. 이제 사정을 알고 보니 거기에는 부끄러운 비밀을 감추고자 하는 노력 이상의 것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침착함은 마치 태풍이 지나간 뒤 섬에 밀려드는 음산한 조용함과 비슷했다. 그 쾌활함은 절망적인 쾌활함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스트릭랜드의 목소리가 나의 명상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는 야유 섞인 말이었다. "여자란 남자에게서 받는 상처는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자기를 위해 베풀어 주는 희생만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는 거요" 하고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귀는 여자에게서 원한을 살 위험은 전혀 없으니까 그 점은 안심할 수 있겠군요?" 그의 입술에 웃음이 번졌다. "당신은 재치 있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라면 언제고 주의 주장 따위는 버릴 작정이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럼 아기는 어떻게 됐나요?" "사산이었지. 결혼한 지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다음으로 나는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블랑시 스트로브에게 관심을 가졌죠?" 오래도록 대답이 없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되풀이하려고 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는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그 여자는 나를 보는 것조차 싫어했소. 그게 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거요" "알겠소" 갑자기 그는 화를 벌컥 냈다. "젠장, 호기심은 무슨 호기심이야. 나는 그 여자가 탐이 났던 거야" 그러나 그는 곧 기분을 돌려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겁을 냈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나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었소. 그쪽에선 다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소. 몹시 겁을 먹고 있었지만 결국 내 것이 된 거요" 이 이야기를 하는 그의 말투에 왜 그처럼 무서울 정도로 격한 욕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는지 나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아주 무서운 것이었다. 그의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육체적인 일에서 동떨어져 있었으나 그 때문에 때로는 육체가 오히려 정신에 무서운 복수를 가하는 것 같았다. 그라는 인간 속에 숨어 있던 반수신이 갑자기 그를 사로잡아, 그는 원시적인 자연의 힘처럼 격한 본능의 포로가 되어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정신을 빼앗긴 상태로 변해 그의 영혼 속에는 분별이나 감사의 마음이 들어앉을 여지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틀리에를 나올 때 어떻게 여자를 함께 데리고 갈 마음이 들었던가요?"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럴 작정은 아니었소"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함께 따라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스트로브나 다름없이 깜짝 놀랐소. 그래서 내가 싫어지면 당신을 쫓아낼 거라고 말해 줬지. 그러자 그 여자는 그런 각오는 다 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 "훌륭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소. 나는 나체화를 그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니까 그 그림이 완성됐을 때는 이미 그 여자에게 흥미가 없어진 거요" "그래도 블랑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소"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좁은 방 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애 따위는 질색이오. 나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요. 그런 건 인간의 약점이오. 그야 나도 남자니까 때로는 여자가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일단 욕정을 채우고 나면 다른 일로 마음이 쏠리고 말아요. 나도 욕망을 이겨 낼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미워하고 있소. 욕망이란 것은 내 영혼을 꼼짝 못 하게 사로잡기 때문이오.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내 일에 몰두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나는 기다리고 있는 거요. 여자들이란 연애밖에 할 줄 모르니까 그걸 너무 중요시한단 말이오. 남자들에게까지 그게 인생의 전부라고 설득하려 드는 거요. 연애란 인생에 있어선 보잘것없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 육욕이라면 또 몰라도. 그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니까. 그러나 사랑이란 건 병이오. 여자는 내 쾌락의 도구에 불과해요. 그런 여자들이 협력자니 친구니 반려자니 하고 날뛰니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단 말이오" 스트릭랜드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주 분개한 듯한 어조였다. 특히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늘 그렇지만, 이것이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그의 어휘는 빈약하고 거기다 문장을 가다듬는 재능은 전혀 없다. 그의 감탄사나 표정이나 몸짓이나 진부한 어구 등을 이쪽에서 연결 지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종합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은 여자는 노예고 남자가 노예를 부리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나는 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오" 정색을 하고 이 말을 하는 데는 나도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리 속의 야수처럼 방을 왔다갔다하며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든지 자기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앞뒤가 맞는 설명을 하기가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여자들이란 한번 남자가 좋아지면 그의 영혼까지 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오. 여자는 약하니까 어떻게든지 지배권을 잡으려는 거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는 거요. 여자들은 마음이 좁기 때문에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은 싫어하지. 물리적인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이상에 대해서는 시기심을 품게 마련이오. 남자의 영혼은 우주 끝까지 헤매고 다녀도 싫증을 모르는데,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가계부라는 틀 속에 가두려는 거요. 당신도 우리 마누라를 알고 있잖소? 블랑시도 역시 여러 가지 계교를 조금씩 부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알았지. 참으로 끈질기게 올가미를 씌워 나를 묶어 놓을 작정이었소. 자기 손으로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던 거요. 나의 존재는 조금도 인정치 않고 다만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을 뿐이오. 나를 위해 무슨 일이고 기꺼이 해줬지" 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 여자를 버렸을 때, 그 여자가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했습니까?" "스트로브한테로 돌아갔더라면 좋았을걸" 그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그 녀석은 그 여자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인간이 아니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타고난 장님에게 색깔 이야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일 테니" 그는 내 앞에 와서 서더니 나를 멸시하는 듯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 블랑시 스트로브가 죽었건 살았건 당신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둘 거요" 나는 그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나의 영혼에 대해서는 거짓 없는 대답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죽은 것이 나에게 대수롭게 여겨지기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나에게 동정심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그 사람에게는 아직도 인생의 큰 미래가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진심으로 걱정을 하지 않으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당신한테는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갈 용기가 없군요. 그런 인생은 가치가 없어요. 블랑시 스트로브는 내가 버렸기 때문에 자살한 게 아니라 어리석고 마음의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거요. 그러나 그 여자의 이야기는 이제 진저리가 나오. 정말 하찮은 여자였소. 그보다도 내 그림이라도 보러 가지 않겠소?" 그는 마치 아이들을 어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화가 났지만, 그것은 그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난 것이다. 나는 그 몽마르트르의 기분 좋은 아틀리에에서 지내고 있던 스트로브와 그 부인과의 행복한 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소박하고 친절하고 진심으로 대해 주던 두 사람이었다. 그것이 무정한 운명의 손에 의해 그처럼 무참히 짓밟혀 버리다니 정말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잔인한 것은 그 때문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이다.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세상 사람들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다, 더크 역시 감정의 깊이보다 밖에 나타나는 감정의 반응이 더 큰 사람이니까 머지않아 그 일을 잊어버릴 것이다. 블랑시의 일생이 얼마나 빛나는 꿈과 희망을 지니고 시작되었는지는 알 도리도 없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녀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무익하고 공허한 것처럼 보였다. 스트릭랜드는 모자를 집어들더니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같이 가겠소?" "왜 나하고 가까워지려고 그러지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고 경멸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스트릭랜드는 기분이 좋은 듯 킬킬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멋대로 화를 내는 이유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내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데 있을 뿐이오" 나는 갑자기 볼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런 무신경한 독선자가 얼마나 상대방의 기분을 뒤흔들어 놓는가를 이 사람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걸치고 있는 철저한 무관심이라는 벽을 어떻게든지 허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또한 그의 말에도 진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마 무의식적이겠지만 타인이 자기의 의견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그 인간에 대한 나의 지배력을 지키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 같은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인간에 대해 미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처럼 지독하게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화난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남의 일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것은 그에게 말한다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당신 역시 살기 위해선 하나에서 열까지 다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겁니다. 완전히 남의 떠나 자기 혼자 힘으로 사는 건 불가능하죠. 언제고 병이 드는 수도 있고 쇠약해져 늙어 버리기도 하겠죠. 그렇게 되면 역시 먼저 알고 지내던 동료에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당신의 마음에도 위로와 동정을 바랄 때가 분명히 올 텐데, 그럴 때 당신은 부끄럽지 않을까요? 당신은 되지도 않을 일을 하려는 거예요. 머지않아 당신 속에 있는 인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인정을 동경할 때가 찾아올 겁니다" "어쨌든 내 그림을 보러 갑시다" "당신은 죽음이라는 걸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데"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눈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이 육체에 묶여 있어 잡을 수 없는 그 어떤 위대한 것을 구하는, 불꽃처럼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을 한순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을 구하는 한결같은 영혼을 한순간 엿본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초라한 옷을 입고 큰 코와 번쩍이는 눈과 붉은 턱수염과 더부룩한 머리를 지닌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며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육체를 벗어난 영혼인 듯한 일종의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그럼 당신의 그림이나 보러 갑시다" 42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보여 주겠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작품이란 항상 그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교적인 접촉으로 사람은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겉모습 밖에는 나타내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중에 보이는 사소한 행동이나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짓는 표정 같은 데서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또 때로는 그런 겉모습만의 가면을 너무도 그럴 듯하게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느 결에 바로 그 외양만의 가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도 글이나 그림 속에서는 거짓 없는 자신을 드러낸다. 겉모습은 다만 그 사람의 공허를 폭로할 뿐이다.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바보 같은 정신을 숨길 수는 없다. 날카로운 감식안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작품이라도 작자의 영혼 속에 간직된 비밀을 폭로 당하고 마는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계단을 올라가며 솔직히 말해 나는 어느 정도 흥분하고 있었다. 어쩐지 놀라운 모험에 발을 들여놓는 기분이었다. 나는 방 안을 신기한 듯이 둘러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작고 텅 비어 있었다. 넓은 아틀리에가 아니면 안된다느니, 모든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일을 못 한다느니 하고 투덜거리고 있는 화가 친구들에게 이곳을 보이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서 있는 게 좋을 거요" 아마 지금부터 보여 주는 그림을 보기에 가장 알맞은 위치라고 생각되는지 한군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평을 듣고 싶진 않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이지. 입은 꼭 다물고 봐요" 그는 한 장의 그림을 그림틀에 올려놓고 1, 2분 동안 보여 주더니 그 그림을 내려놓고 다른 그림을 올려놓았다. 이리하여 30점 가량의 캔버스를 보여 준 것 같다. 그것은 그가 그림을 그려 온 6년 간의 성과였다. 한 장도 팔지는 않았다. 캔버스의 크기는 각기 달랐으며, 작은 것은 정물, 제일 큰 것은 풍경이었다. 초상화가 대여섯 점 가량 있었다. "이것이 다요"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 곧 그 그림이 지니는 미와 위대한 독창성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상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그 가운데 대부분의 것을 뒤에 다시 보았고, 그 밖의 것도 복제로 보아 눈에 익었으니까 그렇지, 그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크게 실망했던 나 자신의 어이가 없을 뿐이다. 예술만이 줄 수 있는 특이한 감동을 그 무렵의 나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은, 다만 어리둥절한 것뿐이었다.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지금은 그 태반이 박물관에 들어가 있고 그 나머지 것도 돈 많은 애호가의 소장품이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의 변명을 해두어야겠다. 우선 내 취미는 그다지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독창성이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게다가 그림에 대해서는 극히 빈약한 지식밖에 없으며 다만 남이 개척해 주는 길을 가까스로 쫓아가는 데 불과하다. 그 무렵의 나는 인상파 화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시슬리나 드가의 작품을 탐내고 있었고, 특히 마네는 숭배하고 있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근대 회화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며 '풀 위에서의 점심'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작품이야말로 회화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그때 본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런 설명은 보나마나 지루하기 마련이고, 게다가 미술에 흥미라 있는 사람이라면 그 그림은 이미 낯익은 그림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그림이 근대 회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지금, 그리고 그가 최초의 한 개척자로서 발을 들여놓은 이 신천지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샅샅이 탐구된 지금,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비록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감상할 만한 마음의 준비는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그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 기교의 치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 거장들의 그림을 익혀 보아 앵그르를 근대 최고의 기교가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스트릭랜드의 그림 솜씨는 아무리 보아도 졸렬해 보였다. 그가 노린 단순화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접시에 오렌지를 담은 정물화인데, 그 접시는 둥글지 않았고 오렌지는 다 찌그러진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초상화는 대개 실물보다도 좀 크게 그렸는데 그것이 인물을 더 흉하게 보이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나에겐 그 얼굴이 희화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풍경화는 나를 더 당황하게 했다. 풍텐블뢰의 숲을 그린 그림 두세 장과 파리의 거리를 그린 그림이 대여섯 장 있었는데, 보는 순간 이건 술 취한 역마차의 마부가 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또 빛깔은 빛깔대로 흉측했다. 어쩌면 이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한 막의 희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릭랜드의 예민한 통찰력에는 갈수록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예술의 혁명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내다본 것이다. 이제야 온 세계가 인정하게 된 풍조를 그는 그때 이미 뚜렷이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가 없고 뭐가 뭔지 몰랐다고 해서 그 그림에서 내가 아무런 인상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거기에는 표현을 하려고 괴로워하고 있는 참된 힘이 있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 나는 흥분했고 흥미를 느꼈다. 그 그림은 분명히 나에게 호소해 오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알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을 지닌 듯이 느껴졌다. 보기 흉하기는 해도 거기에는 대단히 깊은 뜻을 지닌 신비가 흐리게나마 암시되어 있었다. 웬일인지 묘하게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어쨌든 나에겐 분석하기 힘든 하나의 감동을 주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물질적인 사물 속에서 어렴풋이 뭔가 정신적인 의의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다만 어설픈 상징으로 암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치 우주의 혼돈 속에 새로운 양식을 발견하여, 심한 영혼의 고민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묘사하고, 아주 서툰 솜씨로 모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표현의 해방을 찾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하나의 영혼을 발견했다. 나는 그가 있는 쪽을 돌아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표현의 수단을 잘못 택한 게 아닌가요?" "그게 무슨 뜻이오?" "당신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군요. 그게 무엇인지 나로선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회화라는 수단으로 그것을 표현하려는 게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불가해한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알 수 있기는 커녕 그에게서 받는 놀라움만 더 커졌다. 나는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쫓겨 들어가고 말았다. 다만 이것만은 나도 확실히 알 것 같았다.-그것 역시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그는 자기를 묶어 놓은 힘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힘인지, 또 그 해방이 어떤 방향을 취하는 것인지 그 점은 역시 막연해서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가 다 이 세상에서는 외톨이다. 황동탑 속에 갇혀서 동료들과는 부호로 의사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부호 역시 공통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고,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떻게든 자기 마음에 간직한 소중한 것을 남에게 전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나 상대방에겐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힘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동료들을 알 수 없으며, 또 그들도 나를 알지 못한 채, 맞닿는 법이 없는 평행선상을 오로지 혼자서 쓸쓸히 걸어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음속으로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과 신비로운 것을 생각하면서도 말을 잘 모르는 이국에 살기 때문에 결국 회화책에 있는 틀에 박힌 진부한 말밖에 못 하는 불쌍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용솟음치고 있는데도 '정원사네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정도의 말밖에 못 하는 사람과 같다. 내가 받은 마지막 인상은 어떤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려고 하는 피나는 노력이었다. 여기서 바로 그처럼 나를 몹시 곤혹하게 했던 점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에겐 색채나 형태가 독자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지 전달해야만 했던 그는 다만 그 의도만으로 그 색채와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기가 구하고 있는 미지의 것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단순화나 왜곡도 주저 없이 행한 것이다. 서로 관계없는 사실이 모인 곳에서 그는 자기만의 의의를 지닌 그 무엇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꼭 그것을 표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과도 같았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곤혹을 느끼기도 했지만, 거기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정열에는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웬일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결코 스트릭랜드에게서 느끼리라고 짐작도 못했던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압도적인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당신이 왜 블랑시 스트로브에 대한 감정에 지고 말았는지 이제서야 겨우 알 듯하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당신의 용기가 좌절된 거요. 당신 육체의 나약함이 당신 영혼까지 옮아 간 거요. 어떤 끝없는 동경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동경 때문에 당신은 자기를 나무라고 있는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목적지를 구하여 위험하고 고독한 길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아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전을 찾아 방랑을 계속하는 영원한 순례자와 같을 거예요. 당신이 찾는 것이 어떤 불가사의한 열반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 자신은 알고 있겠죠? 아마 당신이 구하고 있는 것은 '진리와 자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사랑'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때도 있겠죠. 당신의 지친 영혼은 여자의 팔에서 휴식을 구했죠.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자 당신은 그 여자가 미워진 거요. 여자에 대해 가엾다는 생각은 전혀 느끼지 않았어요. 자기 자신도 가엾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두려운 나머지 그 여자를 죽여 버렸지요. 당신은 가까스로 모면했던 그 위험에 대해 아직도 떨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메마른 미소를 띤 채 턱수염을 문지르며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대단한 감상주의자로군" 그 뒤 1주일 가량 지나 나는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이유로 떠난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43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여기까지 써 온 이야기는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써 온 셈이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모든 것이 모호하게 끝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상한 일, 즉 스트릭랜드가 어째서 갑자기 화가를 지망했는지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일종의 변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그의 생활 환경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나는 상세한 일은 전혀 모른다. 그 자신이 한 얘기로는 그럴 듯한 이유를 조금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만일 어떤 기묘한 인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을 충실하게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는 것이라면, 나도 그 갑작스런 변심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년 시절에 이미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으로 그 재능을 발휘 못 하게 되었다든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희생을 강요받았다든가, 또는 현실 생활의 구속에 못 이겨 그렇게 되었다고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씀으로써 예술에 대한 정열과 현실 생활의 의무 사이에 끼어 고민하는 그에 대해 독자의 동정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연한 인물로 만들어 제2의 프로메테우스로서의 면모를 그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아마 거기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몸을 지옥의 업고 속에 던질 수도 있다는 영웅의 현대판을 만들어 낼 기회까지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는 세대에나 변하지 않는 감동적인 주제이다. 또 결혼 생활에서 동기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즉 가끔 부인이 만나는 화가나 작가들과의 교제가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숨어 있던 재질이 갑자기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가정 불화가 그의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연애 문제가 원인이 되어 지금까지 그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격한 예술의 불꽃이 갑자기 불붙었다고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연히 스트릭랜드 부인이라는 여성을 완전히 다르게 묘사했을 것이다. 즉 사실을 일절 무시하고 그녀를 아주 극성맞은 여자로 등장시키든가 아니면 인간의 정신적인 요구에는 손톱만큼의 동정도 없는 무지한 여자로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스트릭랜드의 결혼 생활은, 다만 도피처일 뿐, 어떻게 손을 쓸 수 업는 고뇌의 연속이 되었을 것이고 나로서는 오히려 이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에 대한 그의 끈기와 또한 그를 압박하고 있던 부부의 인연을 본의 아니게 끊어야만 했던 그의 고민을 강조해서 그에 대한 동정을 사려고 했을 것이다. 적어도 아이들의 존재만은 어떻게든지 제외해야 했을 것이다. 또 그가 우연히 어느 노화가와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살아 나가기 위해서든가,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서였든가, 젊은 날의 재질을 헛되이 묻어 버린 그 노화가가 우연히 스트릭랜드 속에서 자기 자신이 헛되게 낭비해 버린 재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스트릭랜드는 그 노화가의 감화를 받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오로지 예술의 신성한 포학에 몸을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얘기를 써 나갔다면 돈 많고 명예도 있는 인생의 성공자인 그 노인이 자기 현재 생활보다도 좋은 것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해보지 못한 동경하는 생활을 타인에게서 구하고 있는 그 모습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맛을 담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평범한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학교를 마치자 곧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증권 중개인의 가게에 들어갔다. 결혼 전의 생활도 거래소에서 조심스럽게 도박을 한다든가, 또는 더비 경마나 옥스퍼드 대 케임브리지의 보트 경기에도 기껏해야 1파운드나 2파운드를 거는 정도였다. 다른 동료들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극히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하는 틈틈이 권투도 조금 한 모양이다. 벽난로 위에는 랭트리 부인이며 메어리 앤더슨의 사진이 놓여 있었고, '펀치'나 '스포팅 타임즈' 등을 읽고 있었다. 때로는 햄프스티드로 춤을 추러 가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가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남자인 것이다. 그림 수업을 하느라고 엄청난 고생을 하던 그 몇 년 동안에도 그의 생활은 참으로 단조로운 것이었으며, 어떻게든지 연명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했던 생활 수단에 대해서도 특별히 말할 것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 것을 자세히 쓴다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있는 평범한 일을 나열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그의 인격에 무슨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히 그도 현대 파리의 악당 소설의 재료를 제공할 정도의 경험은 충분히 쌓았으련만 어쨌든 그는 초연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이야기로 판단하건데 그 동안 특별한 인상을 줄 만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파리로 갔을 때의 그는 새삼 그 환경에 현혹될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사실 그 사람은 언제나 실제적일 뿐 아니라 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이 시절에 그의 생활은 틀림없이 낭만적이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 자신은 일절 낭만 같은 것은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인생에서 낭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느 정도 배우적인 소질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자기 바깥 쪽에 설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발 거리를 둔 흥미와의 양쪽 방면에서 스트릭랜드만큼 단순한 인간은 없었다. 그 사람만큼 자의식이 없는 인간은 아직까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그처럼 훌륭한 기법을 어떤 노력을 통해 습득했는지에 대해 한 마디도 쓸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여기에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용기를 갖고 또 예술가의 최대의 적인 자기 회의도 꿋꿋이 이겨 낸 그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면-내가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이 묘하게 매력이 없어 보이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동정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소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나 이외의 사람이 보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모든 노고를 감추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아틀리에에서 '신의 천사'와 필사적인 격투를 벌였다 해도 그는 그 고뇌를 절대로 남에게는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블랑시 스트로브와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가 알고 있는 일이 너무도 단편적이라 화가 날 뿐이다. 만약 이 이야기에 일관성을 갖게 하려면, 그들의 비극적인 결합의 진행 과정을 말해야 하겠지만 사실상 그들이 동거 생활을 한 3개월 동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것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는지조차 모른다. 결국 하루는 24시간이나 되며, 감정이 고조되는 정점이 간혹 온다면 그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나로서는 상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외광이 있고 블랑시의 체력이 견디는 한 아마 스트릭랜드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일에만 몰두하는 그에게 틀림없이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그럴 때의 그녀는 그에게 이미 정부가 아니라 다만 모델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말없이 마주 앉아 지내기도 했을 것이다. 블랑시가 그에게 굴복한 것은 더크 스트로브에 대한 그녀의 승리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스트릭랜드가 비쳤을 때-왜냐하면 더크는 그녀가 가장 곤란했을 때 그녀를 구해 주었으니까-이 말에서는 여러 가지 어두운 억측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나는 아무래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마음에서 다만 단정한 정서와 정상적인 감정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니 그것을 알 까닭이 없을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욕정이 폭발하는 순간의 그 정열에도 불구하고, 다른 때는 언제나 초연하기만 한 그를 보고 블랑시는 다만 낙담으로 가슴이 답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격정이 용솟음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기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쾌락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고 추측한다. 여전히 낯선 타인일 뿐인 이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꽉 잡아매려고, 그녀는 비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을 것이다. 생활의 안락을 주어 그의 마음을 잡아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그것에 그가 전혀 무관심하다는 사실만 더 깊이 알게 될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에 고심했으나, 그것은 그가 음식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남자라는 사실에 애써 눈을 감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녀는 그를 혼자 있게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해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그의 정열이 잠들어 있을 때는 그 잠을 깨우려고 애썼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를 꽉 쥐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유리 창문을 보면 사람들이 벽돌 조각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그녀가 만든 포박의 사슬도 오히려 그의 파괴 본능을 북돋아 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는 것쯤은 총명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녀는 머리로는 파멸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으로 그런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불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목적인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자기가 진실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상대방에게서도 그와 같은 정도의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 스트릭랜드의 성격 연구도 실은 많은 사실에 대한 나의 무지 이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그의 여성 관계가 명백하고 눈에 띈다는 점을 말해 왔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처럼 비극적인 여성 관계가 다른 면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지만, 그의 생활 중심은 꿈과 놀라울 정도의 열성을 기울인 그림 그리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설이라는 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보통 남자의 경우 애정이란 하루 일과 중에서 잠깐 얼굴을 내미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 애정에 특별히 중점을 두는 것은 현실 생활에는 맞지 않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불과하다. 인생에서 애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세상에서 극히 드물며, 만일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인간은 그다지 흥미 있는 존재가 못된다. 애정이란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일지라도 그런 남자는 경멸하는 법이다. 그들도 그런 남자들에게서 귀여움을 받고 관심을 모으는 일은 있겠지만 역시 그런 남자들은 한심스럽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남자들이란 연애를 하는 짧은 시간에도 다른 일에 마음을 쏟기 마련이다. 생활을 위한 장삿일에 정신을 빼앗기는 수도 있고, 스포츠에 열중하는 수도 있으며, 또는 예술에 흥미를 느끼는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여러 가지 부문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늘 계속하고 있으며, 한동안은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 자리에서, 즉시 마음을 빼앗긴 한 가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그들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일에 다른 일이 침입해 오면 그들은 초조해지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남녀가 다른 점은, 여자는 하루 종일 사랑을 계속할 수도 있지만 남자는 어쩌다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 계속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 성욕은 생활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중요한 일이기는커녕, 오히려 귀찮은 일이었다. 그의 영혼은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그는 욕정이 강한 편이라 때로는 욕정이 그의 육체를 사로잡으면 그 자리에서 포로가 되어 버렸지만, 자제력을 빼앗아 가는 그러한 본능을 그는 증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자제력을 되찾고 보면, 방금 자기 욕정을 만족시켜 준 그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몸서리쳤다. 그때는 이미 그의 마음은 하늘 위를 조용히 거닐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그 고운 나비가 금방 자기가 빠져 나온 보기 흉한 번데기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끔찍한 전율인 것이다. 원래 예술이란 것은 성적 본능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스러운 여자를 대하거나, 달빛 아래 빛나는 나폴리 만을 보거나, 티티안의 '매장'이란 제목의 그림을 보거나 할 때, 우리 마음속에 이는 감동은 다 같은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성욕의 정상적인 발산을 증오한 것도 아마 그것이 예술적 창조에서 얻은 만족감에 비하여 너무도 동물적이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잔혹하고 이기적이고, 동물적이고, 육욕적인 한 인간을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위대한 이상가라고 말하는 것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나 분명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노동자들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더구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인간이 인생을 즐겁게 하거나 아름답게 하기 위해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돈에도 무관심했고 명성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굴복하고 말 세상과의 타협에 대해서 그가 그 유혹을 뿌리쳤다고 그를 칭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그런 유혹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남자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타협이라는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파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는 테베의 사막에 사는 은둔자보다도 고독한 생활을 했다. 그가 동료에게 요구한 것도 다만 자기를 혼자 있게 내버려둬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만 한 가지 목적에 매달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뿐만 아니라-그 정도라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만-남까지도 희생을 시키고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의 환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은 분명히 호감을 가질 수 없는 별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위대한 점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44 회화 예술에 대한 견해는 어느 정도 들어둘 만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가 스트릭랜드에 대해서 가진 견해를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히 내세울 만한 좋은 의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릭랜드는 말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즉 듣는 이에게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는 명문구를 나열하여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말재주는 전혀 없었다. 임기응변의 재치도 물론 없었다. 그 유머라는 것도, 만일 내가 지금까지 다소나마 그의 말투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미 알았겠지만 남을 비꼬아 대는 것뿐이었다. 그의 응수 역시 대단히 난폭한 것이었다. 때로는 진실을 말해 사람들을 웃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종류의 유머는 어쩌다 사용해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무 데나 쓰이면 무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또 아무리 좋게 말해 준다 해도 뛰어난 지식인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론은 평범한 영역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 자신의 그림과 비슷한 데가 있는 세잔느라든가 반 고호와 같은 화가들에 대해 그가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그가 과연 그 사람들의 그림을 보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인상파 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들의 기교에는 감탄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가 평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언젠가 스트로브가 모네를 마구 추켜세웠을 때도 그는 단 한 마디, "나는 빈테르할테르가 더 좋더군" 하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분명히 스트로브의 비위를 건드리려고 한 말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의 거장들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도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의 성격에는 이상한 면이 다분히 있었다. 그 의견도 터무니없는 편이 오히려 스트릭랜드의 인간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그의 선배들에 대한 색다른 설을 억지로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게끔 하고도 싶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의 의견은 보통 사람과 비슷했다. 벨라스케스에 대해서는 다소 못마땅한 점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었다. 샤르뎅은 좋아했고 렘브란트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말해 줬지만 그때 그가 사용한 음란한 말을 여기서 되풀이할 수는 없다. 그가 흥미를 느낀 유일한 화가는 브뤼겔 부자 중 아버지 쪽이었는데, 이것은 뜻밖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이 화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스트릭랜드 역시 그 자신의 기분을 충분히 설명해 줄 능력이 없었다. 그때 그가 비평한 말이 너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서 나는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 녀석은 훌륭해" 하고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틀림없이 그에겐 그림을 그린다는 게 지옥의 괴로움이었을 거요" 그 뒤 빈에서 나는 이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몇 장 보고 나서야 그 그림이 왜 스트릭랜드의 마음을 끌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자기만의 특이한 세계의 환상을 마음속에 그렸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에 대해 뭔가 써 볼 작정으로 꽤 많은 분량의 메모를 해두었던 것이 다 없어지고 지금은 다만 그때 느꼈던 감명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주위에 있는 인간을 그로테스크하게 바라보았고, 더구나 그들이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울분을 느꼈던 것이었다. 인생이란 어리석고 비열한 사건의 혼돈이며 참으로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웃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 내가 브뤼겔에게서 받은 인상은, 다른 표현 형식을 써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을, 그것과는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려고 바둥거리고 있는 인간이라고 할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스트릭랜드가 그에게 공감을 가졌다는 것도 아마 그가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다 문학으로 표현해야 더 적합할 관념을 오로지 그림으로만 표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스트릭랜드는 이때 이미 마흔 일곱을 바라보는 나이였을 것이다. 45 앞서도 한 말이지만 만약 내가 우연히 타히티 섬을 찾지 않았다면, 물론 이 책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정착한 곳이 이 섬이며, 또 그 명성을 확립한 많은 걸작을 그린 것도 이 고장에서였다. 자기 마음에 간직한 꿈을 완전히 실현하는 예술가는 아마 없겠지만, 특히 기교 문제로 계속 괴로워하던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의 마음의 눈이 바라본 환상을 표현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히티의 모든 환경은 그에게 편리했다. 그의 영감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이 그의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만년의 작품은,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육체를 떠나 안식처를 찾아 헤매던 그의 정신이, 이 머나먼 이역에서 다시 그 육체를 찾았다고나 할까. 고루한 말로 하면 그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연히 이 먼 섬을 찾아온 내가 즉시 스트릭랜드에 대한 흥미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일에 바빠 다른 일은 일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이 섬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이곳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서였다. 어쨌든 그와 헤어진 지 15년이나 되었고, 그가 죽은 지도 벌써 9년이 지나 있었다. 타히티에 도착하면, 나에게 중요한 그 어느 문체보다도 그를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 실은 1주일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아마 도착한 다음날은 꽤 일찍 일어났던 것 같다. 곧 호텔 테라스에 나가 보니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엌 쪽으로 돌아가 보았으나 그곳도 잠겨 있었고 바깥 벤치에는 토인 웨이터가 한 명 자고 있었다. 좀처럼 아침 식사가 준비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어슬렁어슬렁 해안 쪽으로 걸어갔다. 중국인들은 벌써 가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벽 어둠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초호에는 유령 같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10마일 밖에는 무레아 섬이 마치 성배를 지키는 높은 요새처럼 그 신비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웰링턴을 떠난 뒤 며칠 동안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웰링턴이란 곳은 깨끗하고 아담한 영국식 고장으로 어딘가 모르게 영국 남해안의 항구 도시를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그 뒤 사흘 동안은 파도가 몹시 일었다. 회색 구름이 꼬리를 물고 뒤쫓아오듯 밀려왔다. 그러더니 마침내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다시 조용해졌다. 태평양이란 다른 어느 바다보다도 황량하고, 끝없이 넓어 보여 대수롭지 않은 항해도 무슨 모험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들이마시는 공기마저도 뭔가 생각지도 않은 기대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약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또 배가 타히티 섬에 다가설 때처럼, 그 공상의 황금 낙토에 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없을 것이다. 우선 자매섬인 무레아 섬의 당당한 암초가 마치 마술 지팡이에 의해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그 황량한 바다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솟아오른다. 그 울퉁불퉁한 윤곽은 꼭 태평양의 몽세라 섬과 같은 느낌을 주며, 마치 폴리네시아의 기사들이 이상한 의식에 의해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는 신비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배가 점점 다가감에 따라, 베일이 하나씩 벗겨져 그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면 섬의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활짝 드러낸다. 그러나 배가 바로 옆을 지나갈 때도 이 섬은 마치 그 범할 수 없는 요염한 아름다움을 깊숙이 간직한 듯, 일종의 신성감마저 띠고 굳게 몸을 지키고 있는 것만 같다. 만일 산호초의 입구를 찾아온 배가 갑자기 입구를 잃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만, 일망 무제의 푸른 태평양의 외로움만이 눈앞에 전개된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타히티는 짙푸른 산의 계곡이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고, 그 그늘은 조용한 골짜기를 상상하게 하는 높게 치솟은 푸른 섬이다. 차가운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그 어두컴컴한 골짜기에는 뭔가 깊은 신비가 깃들고, 이러한 산 그늘에 자리한 부락에는 사람들의 기억이 미칠 수 없는 먼 태고적 생활이 옛날 모습 그대로 영위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여기에도 슬픔과 공포가 있겠지만, 그런 인상은 순간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 뒤에 찾아 드는 환희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명랑한 관객이 만담가의 재담에 폭소를 터뜨리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일말의 쓸쓸함과 같은 것이다. 그가 웃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독을 느끼기 때문에 그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그 익살은 더 즐거운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소와 다정함에 찬 이 타히티는 마치 매력과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뿌리는 사랑스러운 여자 같다. 배가 파피티 항구로 들어갈 때만큼 마음이 온화하게 가라앉을 때는 없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스쿠너는 아주 아담하고 깨끗해 보이고, 바닷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도시는 말쑥하고 세련되어 보이며 붉은 꽃은 마치 정열의 외침인 양 푸른 하늘에 빨간빛이 한층 선명해 보인다. 그것은 수치를 모르는 격렬한 욕정으로 상대방을 숨막히게 할 만큼 관능적이다. 배가 부두에 닿으면 벌써 부둣가에는 쾌활한 사람들이 잔뜩 떼를 지어 모여든다. 시끌시끌 떠들어대고, 명랑하게 손짓 발짓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의 홍수다. 그것은 갈색 얼굴의 바다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더욱 높이 올라가는 듯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하나의 색채의 흐름이라는 느낌이다. 수하물을 부리는 일부터 세관의 검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부산함 속에서 전개되고 누구나가 자기를 보고 미소짓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타들어 가는 듯한 더위 속의 화려한 색채는 눈이 부실 지경이다. 46 내가 니콜스 선장을 만난 것은 타히티 섬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어느 날 아침 내가 호텔 테라스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가 찾아와서 자기를 소개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물었던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곳 타히티에 사는 주민들도 영국의 시골 사람들처럼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놀랍게도 내가 스트릭랜드의 그림에 대해 몇 마디 물어 보았더니 그 말이 사방에 퍼져 버린 모양이다. 나는 이 낯선 방문객에게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럼요. 저는 일찌감치 커피를 마시죠. 하지만 위스키라면 한 잔쯤 상관없겠습니다" 나는 중국인 웨이터를 불렀다. "하지만 술 마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요?" 하고 선장이 말했다. "그건 당신과 당신의 간장이 결정할 문제죠" "사실은 이래도 금주하는 편입니다" 그는 캐나디안 클럽을 큰 겁에 반이 넘게 따르며 말했다. 웃을 때마다 그 입에서는 누런 이가 보였다. 키는 중키였으나 몹시 여위었고 반백의 머리는 짧게 깎아 올렸으며 코밑에는 짧고 억센 회색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아마 요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깊은 주름살이 잡힌 얼굴은 구릿빛으로 탔으며 작고 푸른 눈을 유난히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 두 개의 눈동자는 나의 사소한 동작에도 재빠르게 따라 움직였다. 마치 다루기 어려운 건달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아주 친절한 호인과 같이 보이기도 했다. 낡아빠진 카키복을 입고 있었으며, 손은 씻고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더러웠다. "제가 스트릭랜드를 잘 알고 있습지요"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내가 권한 엽궐련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가 이 섬에 오게 된 것도 실은 제가 이끌어서였죠"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까?" "바르세이유였지요" "거기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계셨지요?" 그는 나의 환심을 사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말하자면 부두에서 어정거리는 건달이었죠" 그의 모습으로 봐서 그는 지금도 그때나 다름없이 궁색한 처지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사귀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둣가의 건달패들이란 사귀면 좀 부담이 되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 반면에 다루기에 따라서는 언제나 많은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들은 가까이 대하기 쉽고, 이야기 상대로서도 상냥하다. 여간해서 잘난 체하는 일이 없고 단 한잔의 술로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는 별로 골치 아픈 단계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만 하면,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마워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인생 최대의 기쁨인 것이다. 그런 점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문화인인가를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하고 게다가 경험과 상상력도 풍부해서 기분 좋게 어울릴 수 있다. 전혀 악의가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법의 힘이 뒷받침하고 있는 한은 법에 대해 상당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들을 상대로 포커를 즐기는 일은 모험일지도 모르지만, 그 솜씨는 또 각별하여 세계 최고의 게임에 어떤 절묘한 흥분을 더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타히티를 떠날 때까지 니콜스 선장과는 절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나는 꽤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내 부담으로 그가 소비한 엽궐련이나 위스키, 그리고 마치 나를 생각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손을 빌어 내 주머니에서 그의 주머니 속으로 옮아간 몇 달러의 돈이 있긴 하지만, 그가 나에게 베풀어 준 즐거움에 비하면 별로 손해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이쯤 해서 곧 주제로 들어가겠지만 그런 곡절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몇 줄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기에는 양심상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니콜스 선장이 왜 처음에 영국을 떠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 자신도 아무 말을 안 했으며 또 그와 같은 사람에게 그런 것을 맞대 놓고 묻는 것도 그다지 분별 있는 짓은 아니다. 다만 자기가 억울하게 불행을 짊어지게 된 사람이라는 것만은 그도 비친 일이 있다. 자기를 사회 부정의 희생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사기나 폭력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가 고국의 관리들은 되지 못하게 형식만 내세우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도 그 의견에는 동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자기 본국에서 받은 불쾌한 취급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주 열렬한 애국심을 간직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기뻤다. 그는 곧잘 영국이 세계 제일의 훌륭한 나라라고 단언했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뚜렷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행복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늘 소화 불량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곧잘 펩신 정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는 거의 식욕이 없었다. 그것도 단순히 그 병뿐이라면 그렇게까지 기운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실은 그보다 더 큰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약 8년 전에 그는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결혼을 했다. 세상에는 자비로운 신의 섭리에 의해 분명히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도록 정해진 남자들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의에서든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든 그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결혼했으면서도 독신자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만큼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 니콜스 선장이 바로 그랬다. 그의 아내를 나도 만나 본 일이 있다. 이 여자는 분명히 스물 여덟 살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하기는 이런 유형의 영성이란 나이를 먹어도 그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녀는 스무 살 때에도 지금이나 별다름 없었을 것이고 사십이 되어도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또 매우 빈틈없는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얄팍한 입술에 별로 잘생기지 못한 얼굴도 빈틈이 없어 보였고, 피부도 빈틈없이 뼈 위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웃는 모습도 그렇고, 머리 모습도 그렇고, 입는 옷도 그렇고 모든 것이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 흰 능직 옷도 그녀가 입고 있으면 검은 상복처럼 보였다. 니콜스 선장이 왜 이 여자와 결혼을 했는지, 또 결혼은 했더라도 왜 헤어지지 않았는지 그 사정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헤어져서 도망친 일도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언제나 실패했기 때문에 아마 오늘날과 같은 힘든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먼 곳까지 도망치거나 아무리 은밀한 장소에 숨어도, 그 니콜스 부인은 운명처럼 가혹하고 양심처럼 가차없는 여자였으므로 틀림없이 그를 찾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마치 원인이 결과를 피할 수 없듯이 그는 절대로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건달도 예술가나 소위 신사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속하는 계급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부랑자의 몰염치에도 놀라지 않고 또 귀인의 예의 범절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니콜스 부인은, 요즘에 와서 급속히 발언권을 얻은 훌륭한 계급, 소위 중산 계급에 속해 있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그녀가 과연 어떤 이유로 선장을 붙잡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애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지만 아마 단둘이 있을 때는 말이 청산 유수일 것이다. 어쨌든 니콜스 선장은 죽도록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호텔 테라스에 나와 함께 앉아 있다가도 그녀가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그녀는 별로 그에게 말을 붙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한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게 왔다갔다할 뿐이다. 그런데 선장은 그것을 보면 갑자기 불안감에 사로잡히는지 으레 손목시계를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는 것이다. "전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소용없고 위스키도 그를 잡아 놓을 수 없었다. 이 사람도 전에는 아무리 심한 태풍이라도 굴하는 일없이 맞서 왔고, 일단 유사시에는 상대방이 흉기만 가지고 있지 않으면 흑인 십여 명쯤은 권총 한 자루만 가지고 능히 대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끔 니콜스 부인은 얼굴빛이 창백하고 뾰로통한 표정의 일곱 살 난 딸을 호텔로 보내는 일이 있었다. "엄마가 오시래요" 그 말은 반은 울음 섞인 소리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응, 곧 갈게" 그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벌떡 일어나 딸을 데리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신력이 물질을 이긴다는 좋은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는 점으로도 나의 탈선의 의의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7 나는 니콜스 선장이 기회 있을 때마다 스트릭랜드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 준 여러 가지 일들을 서로 연결시켜 되도록 순서 있게 써 볼까 한다. 그들은 내가 파리에서 스트릭랜드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해 겨울 끝 무렵에 서로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 몇 달을 스트릭랜드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니콜스 선장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이 무료 숙박소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지독한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겻만은 확실하다. 마침 그 무렵 마르세이유에서는 파업이 일어나,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 버린 그로서는 연명할 만한 약간의 돈을 버는 일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무료 숙박소란 큰 돌집으로, 확실한 신원 증명서를 가지고 있고, 노동자라는 것을 수도사들이 인정만 해주면 어떤 빈곤한 사람이나 부랑자라도 1주일 동안 재워 주는 장소이다. 니콜스 선장은 그곳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 속에서 독특한 풍채와 유달리 몸집이 큰 스트릭랜드를 발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왔다갔다 걸어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벽에 기대어 서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랑 속에 발을 딛고 길가에 놓여 있는 돌에 걸터앉아 모두들 지리한 듯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사무실 안으로 우루루 들어왔을 때, 니콜스 선장은 수도사가 스트릭랜드의 신원 증명서를 읽고 그에게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와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가 집회실로 들어갔을 때는 벌써 수도사가 성서를 들고 들어와 그 방구석에 있는 제단에 올라가 예배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예배만은 비참한 부랑자들도 숙박 장소를 제공받는 대가로 참아야 했다. 그와 스트릭랜드는 각각 다른 방에 들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5시가 되자 늠름해 보이는 수도사가 찾아와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고 갔다. 선장이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를 했을 때는 이미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니콜스 선장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한 시간이나 거리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는 수부들의 집합장인 빅토르 젤뤼 광장에서 어느 동상의 대석에 기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트릭랜드를 발견했다. 그는 스트릭랜드를 깨우기 위해 슬쩍 걷어차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 같이 아침 먹으러 가자구" "마음대로 해" 하고 스트릭랜드는 대답했다. 나의 친구가 늘 쓰던 말이었으므로 니콜스 선장이 하는 말을 곧 믿을 수 있었다. "한 푼도 없나?" 하고 말하는 선장, "쓸데없는 걱정 마" 하고 말하는 스트릭랜드. "그럼 같이 가자구. 아침은 내가 어떻게 먹도록 해볼게" 잠시 망설이다가 스트릭랜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빵 접대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굶주린 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며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수프 접대소로 갔다. 여기서는 1주일 동안 11시와 4시에 멀건 소금 수프를 먹게 해준다. 이 두 건물은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말 굶주린 자가 아니면 이 두 곳을 동시에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때부터 찰스 스트릭랜드와 니콜스 선장의 색다른 교우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마르세이유에서 그럭저럭 4개월 가량을 함께 살았던 모양이다. 그날그날 겨우 하룻밤의 잠자리와 굶주림을 면할 만한 빵을 마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만약 모험이라는 말을 뜻하지 않은 스릴에 찬 사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아마 그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나는 니콜스 선장이 그 생생한 화술로 내 상상력에 호소해 온 그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묘사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항구 도시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 발견한 갖가지 일들은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는 한 권의 책이 되었을 것이고, 또 그들이 만난 갖가지 일들에 대해 말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부랑자 사전을 만들어 낼 만큼의 자료를 연구자에게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구절의 소개만으로 그쳐야 할 것 같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강렬하고 잔인하고 야만스럽고 다채롭고 발랄한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마르세이유 사람들의 몸짓 손짓마저 화사하고 명랑하며, 부유한 사람들이 모이는 쾌적한 호텔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그곳은 무기력하고 평범한 거리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니콜스 선장이 이야기해 준 것 같은 광경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을 나는 부럽게 생각했다. 무료 숙박소의 기한도 끝나자 스트릭랜드와 선장은 타프 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타프 빌은 선원 숙박소의 주인으로 튼튼한 뼈대에 유달리 몸집이 큰 혼혈아였다. 그 숙박소로 가면 실직한 선원들에게도 다시 탈 배를 구할 때까지 식사와 잠자리만은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거기서 한 달 가량을 스웨덴 사람, 흑인, 브라질 사람 등, 열두 명과 함께 잠자리로 제공된 텅 빈 두 개의 방에서 기거했다. 그들은 매일 선원을 찾으러 오는 선장들이 모이는 빅토르 젤뤼 광장으로 주인과 함께 나갔다. 숙박소 여주인은 미국 사람인데 뚱뚱하고 아주 칠칠치 못한 여자였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숙박인들은 매일 번갈아 가며 그녀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 스트릭랜드 만은 타프 빌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 아래 그 일을 안 했는데 니콜스 선장은 잘한 일이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타프 빌은 스트릭랜드에게 캔버스값, 그림 물감값, 화필값 등을 지불해 줬을 뿐만 아니라 밀수입한 담배까지 한 파운드 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분명히 이 그림은 지금도 졸리에트 부두 근처에 있는 어느 황폐한 작은 집 객실에 걸려 있을 텐데 지금 팔면 아마 1천 5백 파운드 가량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어쨌든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로 가는 배를 타고 그곳에서 다시 사모아 섬이나 타히티 섬으로 가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어째서 남해로 가고 싶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벌써 오래 전부터 그 짙푸른 바다-그것은 북위권에서 볼 수 있는 바다보다도 훨씬 푸르다-에 둘러싸인 온통 초록으로 덮인 섬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가 니콜스 선장과 가까이 지낸 이유도 니콜스가 이 방면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타히티 섬이 살기 좋다고 그를 설득한 것도 실은 니콜스 선장이었다. "타히티는 프랑스 영토가 아닙니까. 프랑스 인들은 그렇게 형식만 따지는 친구들이 아니니까요"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뜻은 나도 알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는 물론 선원 증명서를 가졌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 돈벌이 되는 일만 있다면 그런 것쯤 구애받는 타프 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선원을 소개해 주면 그 대가로 첫달 월급을 자기가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 신세를 지다가 죽어 버린 어느 영국인 화부의 서류를 스트릭랜드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니콜스 선장과 스트릭랜드는 함께 동쪽으로 가려 했는데 계약할 수 있는 배는 다 서쪽으로 가는 배였다. 스트릭랜드는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을 두 번, 뉴카슬로 가는 석탄배를 한 번, 합해서 세 번이나 거절해 버렸다. 타프 빌은 자기가 손해를 보게 되는 이런 고집스러운 행동을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끝내는 스트릭랜드와 니콜스 선장을 쫓아내 버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떠돌이 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타프 빌네 집에서 주는 식사는 너무 인색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도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을 때나 다름없는 공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난 뒤 며칠 동안은 그 집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했다. 굶주림의 괴로움이 뼈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수프 접대소나 무료 숙박소에도 신세를 지지 못하게 된 현재로는 그들의 굶주림을 달래 주는 것이라곤 다만 빵 접대소에서 베풀어 주는 한 조각의 빵뿐이었다. 두 사람은 닥치는 대로 아무 데서나 잤다. 어떤 때는 역 근처 대피선에 있는 달구지 안에서도 잤다. 그러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한두 시간만 자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일어나 거리를 쏘다녀야 했다. 가장 못 견디게 괴로웠던 일은 담배를 못피는 것이었다. 니콜스 선장은 담배 없이는 한시도 못 참았다. 마침내 그는 밤길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버리고 간 담배 꽁초나, 피다 남은 엽궐련 동강이를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했다. "사실 그렇게 여러 가지를 파이프에 담아 피운 적은 없을 겁니다" 그는 내가 권한 엽궐련을 두 개나 꺼내어 하나는 입에 물고 또 하나는 주머니 속에 넣더니,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태도로 어깨를 들썩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다 잔돈푼이 좀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이따금 우편선이 들어올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니콜스 선장이 잽싸게 하역 감독과 가까이하여 두 사람 몫의 일을 얻어 왔기 때문이다. 그 배가 영국 배일 때는 그들은 재빨리 선원 방으로 기어 들어가 선원들에게 아침을 실컷 얻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런 때 배의 고급 선원과 마주치면 장화 신은 발에 걷어 채이며 허둥지둥 트랩을 뛰어내려 오는 위험을 겪을 때도 있었다. "그야 배만 부르면 엉덩이 채이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나 개인이라면 그런 일은 조금도 나쁘지 않아요. 배 안의 책임자이고 보면 배의 규율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 좁은 트랩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일등 항해사의 발에 채이며 구르듯 도망가는 니콜스 선장의 모습, 그래도 영국인이라고 소위 상선 정신에 감탄하고 있는 그의 꼴이 내 눈앞에 선했다. 어시장에 가면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번은 부두에 내려놓은 오렌지 상자를 화차에 실어 주고 둘이서 각각1프랑씩 받은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제법 재수 좋은 일도 있었다. 희망봉을 경유하여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화물선의 페인트 칠 계약을 어느 하숙집 주인이 맡아 준 것이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온종일 뱃전에 묶어 놓은 판자 위에 매달려서 녹슨 선체에 페인트 칠을 했다. 이것은 그 비꼬기 좋아하는 스트릭랜드의 구미에 딱 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괴로운 생활을 그가 도대체 어떻게 견디어 왔느냐고 나는 니콜스 선장에게 물어 보았다. "불평은 손톱만큼도 없었는걸요. 하기야 때로는 기분 나빠 할 때도 있긴했습니다만, 아침부터 빵 한 조각 입에 넣지 못해도, 뿐만 아니라 그 '되놈 하숙집'에 낼 돈 한푼 없어도 기운은 여전히 펄펄했어요" 나는 이 말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는 보통 사람 같으면 썩어 버릴 것 같은 환경에서도 태연하게 배겨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과연 정신의 평정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반항적인 성질에서 오는 것인지는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되놈 하숙집'이란 애꾸눈 중국인이 경영하는, 부트리 가의 보잘것없는 여인숙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이름은 부랑자들이 붙인 것으로 거기 가서 6수만 내면 간이 침대에서 잘 수 있고, 3수만 내면 마룻바닥에서 잘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주머니가 텅 비고 바깥 날이 추운 밤에는 낮에 한푼이라도 번 친구들에게서 지붕 밑에서 잘 만한 돈을 꾸는 것이었다. 이 부랑자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두말 않고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 썼다. 그들의 국적은 다양했지만 그게 서로의 우정에 지장이 되는 일은 없었다. 즉 그들은 자기네들 전체를 포용하는 위대한 코카인 왕국에 속하는 자유 시민이라고 서로가 자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한번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고 니콜스 선장은 그때를 회상하듯 말했다. "언젠가 광장에서 타프 빌과 딱 마주쳤을 땐데요. 그 녀석이 찰리에게 전에 주었던 선원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했지요. 그러자 찰리 말이 그렇게 필요하면 언제라도 좋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한 거예요. 타프 빌은 아무래도 찰리의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시비를 걸었지요. 나오는 대로 욕을 마구 퍼붓고 굉장했어요. 찰리도 한동안은 참고 듣고만 있더니 마침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서는 이렇게 퍼붓더군요. 이 돼지 같은 놈, 썩 꺼지지 못해! 이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타프 빌은 얼굴이 파래져 아무 말도 못 하고, 마치 누구와 만날 약속이 생각나기라도 한 것처럼 슬금슬금 도망치고 말았어요" 니콜스 선장의 말대로라면 그때 스트릭랜드가 쓴 말은 지금 내가 쓴 것과 똑같은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 책이 가정에서 읽힐 것을 감안해서 다소 진실과는 다르더라도, 우리가 보통 가정에서 쓰는 말을 한 것처럼 기록했을 뿐이다. 타프 빌은 물론 한낱 선원에 불과한 자에게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집에 묵고 있던 선원들이 그들을 찾아와 타프 빌이 언젠가는 반드시 스트릭랜드에게 분풀이를 해주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주었다. 어느 날 밤 니콜스 선장과 스트릭랜드는 부트리 가의 어느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부트리 가라면 각기 방이 하나씩밖에 없는 단층집들이 들어선 좁은 골목이다. 그런 집들은 마치 붐비는 시장 거리의 구멍 가게나 서커스에서 쓰는 짐승 우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 앞에는 여자들이 하나씩 서 있었다. 어떤 여자는 울적한 듯 기둥에 기대어 서서 콧노래를 부르거나 귀에 거슬리는 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여자는 들뜬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일본 사람, 흑인 등 정말 여러 인종의 여자들이 있었다. 뚱뚱한 여자도 있고 여윈 여자도 있었다. 그들의 짙은 화장과 시커멓게 그린 눈썹과 새빨갛게 칠한 입술 밑으로는 나이를 숨길 수 없는 주름과 방탕한 생활의 흔적이 엿보였다. 어떤 여자는 검은 속옷에 살색 긴 양말을 신었고, 또 어떤 여자는 오글오글 지진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이고 소녀처럼 짧은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는 붉은 타일을 박은 바닥과 큰 나무 침대, 주전자와 세수 대야가 놓여 있는 전나무 테이블 등이 보였다. 거리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군중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반도 동양 기선 회사의 배를 내린 인도 선원, 스웨덴 범선으로 찾아온 금발의 북부인, 군함에 타고 있던 일본인, 영국인 선원, 스페인 사람, 프랑스 순양함에서 내린 쾌활해 보이는 수병들, 미국 화물선에서 내린 흑인 수부도 있었다. 낮에는 다만 더럽기만 한 이 거리도 밤이 되면 이런 작은 집들의 불빛을 받아 일종의 사악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공기 속에 온통 차 있는 무서운 욕정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 광경 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신비로운 것이 있었다. 계속 반발을 느끼게 하면서도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그 알 수 없는 원시적인 힘이랄까! 여기서는 문명의 가면이 벗겨지고 사람들은 암담한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곳에는 강렬하고도 비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트릭랜드와 니콜스가 들어간 술집에서는 자동 피아노가 댄스 음악을 요란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벽을 따라 늘어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선원들과 군인들이 술을 마시며 뭐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서는 한 쌍씩 짝을 진 남녀들이 혼잡 속에 춤을 추고 있었다. 갈색으로 탄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선원들은 그 우악스러운 큰 손으로 상대방을 꽉 끌어안고 춤추고 있었다. 여자들은 죄다 시미즈 바람이다. 가끔 선원이 두 사람씩 일어나서는 한 쌍이 되어 춤을 추기도 했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떠들어댔다. 모두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했다. 한 남자가 자기 무릎 위에 끌어안고 있던 여자에게 오랫동안 키스를 하자 영국인 선원들의 야유 소리가 한층 더 장내를 소란케 했다. 방 안의 공기는 남자들의 큰 장화가 풀썩이는 먼지로 혼탁했으며 담배 연기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계산대 뒤에서는 한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앉아 있었다. 주근깨 투성이의 넓적한 얼굴을 한, 몸집이 작은 웨이터는 맥주 컵을 가득 얹어 놓은 쟁반을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잠시 후, 타프 빌이 몸집이 우람한 두 사람의 흑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가 거나하게 술에 취했다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시비를 걸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세 명의 군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비틀거리며 기대어 서더니 맥주 컵 하나를 엎질러 버렸다. 미친 듯이 말다툼이 시작되고 술집 주인이 나서서 타프 빌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주인은 힘이 장사였다. 비록 상대방이 손님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짓을 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성질이 아니었다. 타프 빌은 한순간 주저했다. 경찰도 있었고, 이 주인은 그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홱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문득 그의 눈에 스트릭랜드가 보였다. 그는 잠자코 성큼성큼 그 화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스트릭랜드의 얼굴을 향해 침을 탁 뱉았다. 스트릭랜드는 마시고 있던 컵을 집더니 타프를 향해 힘껏 던졌다. 춤이 일제히 멎고 한순간 장내는 조용해졌다. 다음 순간 타프 빌이 몸을 날려 스트릭랜드에게 덤벼드는 것을 보자 싸움의 불길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러자 치고 받는 난투극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테이블이 뒤집히고 컵은 박살이 나 마룻바닥에 흩어졌다. 험악한 싸움판이 되고 만 것이다. 여자들은 문 밖이나 계산대 뒤로 뿔뿔이 흩어지고 한길을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 자기네 나라말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때리는 소리와 악을 쓰는 소리, 방 한가운데에서는 십여 명의 남자들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경찰이 뛰어들어와 모두 허둥지둥 문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제야 겨우 술집이 조용해져 자세히 살펴보니 타프 빌은 머리를 많이 다쳐서 실신한 채 마룻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니콜스 선장은 팔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스트릭랜드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선장 자신도 코를 맞아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보라구, 타프 빌 녀석이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자네는 일찌감치 마르세이유로 떠나는 게 좋을걸" 두 사람이 되놈 하숙집으로 돌아가 몸을 씻을 때 니콜스가 스트릭랜드에게 말했다. "이거 닭싸움은 유가 아닌데" 하고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비웃음을 띠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니콜스 선장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는 타프 빌의 끈질긴 집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때 타프 빌을 두 번이나 메어쳤는데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서둘지 않고 때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밤에 스트릭랜드가 등에 칼을 맞을 것이고, 하루 이틀 지나면 신원 불명의 부랑자 시체가 항구의 더러운 물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니콜스는 다음날 저녁 타프 빌의 집에 가서 눈치를 살펴보았다. 그는 아직 병원에 있었으나, 병원에서 돌아온 부인이 자기 남편은 병원을 나오는 대로 스트릭랜드를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났다. "내가 늘 하는 말인데요" 하고 니콜스 선장은 회상하듯이 말을 이었다. "이왕 손을 대려거든 끝장을 내버리라고요. 그 뒤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 법이니까" 사실 스트릭랜드는 운이 좋았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배가 지브롤터 근해에서 일시적 정신 착란의 발작으로 투신 자살을 한 남자 대신 화부를 한 사람 구한다고 선원 숙박소에 부탁을 해왔다. "빨리 부두로 가 보라구" 선장은 스트릭랜드에게 말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거야. 증명서는 가지고 있으니까" 스트릭랜드는 곧 떠났다. 그것이 스트릭랜드와의 마지막 작별이 된 것이다. 그 배는 단 여섯 시간밖에 항구에 정박하지 않았다. 니콜스 선장은 그날 저녁, 동쪽으로 겨울 바다를 헤치고 떠나는 배에서 뿜는 연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되도록 충실하게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적었다고 생각한다. 애슐리 가든에서 살며 증권이나 주식 일로 여념이 없었던 무렵의 스트릭랜드의 생활보다도 이런 몇몇 에피소드가 더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콜스 선장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도 다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그가 스트릭랜드를 만난 일이 한 번도 없으며, 마르세이유에 대한 그의 지식도 어느 잡지책에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48 사실, 나는 이쯤에서 이 책을 끝낼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타히티 섬에서 보낸 스트릭랜드의 만년의 생활부터 시작하여 그 비참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다음, 거기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내가 아는 대로 초년의 그를 그려볼 작정이었다. 물론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스트릭랜드가 그 고독한 영혼 속에 어떤 신비한 미지의 섬에 대한 공상의 불꽃을 태우며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붓을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안정된 생활의 궤도에 올라 있을 47세라는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찾아 출발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사랑했던 것이다. 싸늘한 북서풍에 흰 파도가 춤추는 회색 바다로 나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프랑스 해안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인간의 불굴의 정신이 강조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그 이야기가 순조롭게 나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몇 번 되풀이해 보았다가 결국 단념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보통 방법으로 써나갔다. 써나가는 동안에 스트릭랜드의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순서대로 이야기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은 단편적인 것뿐이다. 나는 오직 하나의 뼈조각만을 앞에 놓고, 사멸한 동물의 형태는 물론, 그 습성까지 재현해 보여야 하는 생물학자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에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이렇다 할 특별한 인상도 주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는 그들에게 늘 돈에 쪼들리는 부둣가의 부랑자로 비쳤을 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점인데, 그 그림도 그들의 눈에는 참 어이없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가 죽은 뒤 몇 년이 지나 파리나 베를린의 화상 대리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온통 혈안이 되어 섬 안을 찾아 나섰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네들 틈에 그렇게 위대한 인간이 살고 있었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막대한 값이 나가는 그림들이지만 그 무렵에는 아주 헐값에 살 수 있었을 텐데, 참 아까운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했다. 그곳에 코인이라는 유대계 상인이 있었는데, 그는 묘한 인연으로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한 장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길과 상냥한 미소를 띤 조그마한 늙은 프랑스 인으로 무역상과 선원을 겸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커터를 한 척 가지고 있어, 포모투 군도와 마르케이사스 군도 사이를 대담하게 타고 다니며 여러 가지 상품을 팔았으며 그 대신 코프라, 조개, 진주 같은 것을 가져왔다. 나는 어느 날 그가 큰 흑진주를 싸게 팔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액수였으므로 나는 갔던 김에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그 사람은 스트릭랜드를 잘 알고 있었다. "아아, 그 사람은 화가였죠. 그래서 나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죠" 하고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근처 섬에는 화가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 사람은 아주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 나는 딱하게 생각했어요. 제일 먼저 그 사람에게 일을 시킨 것이 바로 나였지요. 사실은 반도 쪽에 농장이 하나 있어서 마침 백인 감독관을 구하려던 참이었거든요. 어쨌든 백인 감독관이라도 두지 않고선 토인들에게 일을 잘 시킬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그곳에 가면 그림을 그릴 시간은 얼마든지 있고 돈도 좀 생길 테니...' 하고 말을 꺼내 보았죠. 그 사람은 당장 끼니가 곤란한 형편이었으니 급료는 얼마를 주어도 상관없었겠지만, 꽤 많이 줬어요" "그 주제에 감독관 노릇을 할 수 있었다니 대견한 일이군요"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야 내가 여러 모로 편의를 봐준 거죠. 나는 언제나 예술가에겐 관대한 편이니까요. 역시 우리네 피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런데 그는 겨우 두어 달 있다가 그만두었어요. 그림 물감이며 캔버스를 살 돈이 좀 생기니까 그냥 떠나 버린 거죠. 이 근처 경치가 그 사람의 마음을 끌어 그냥 숲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 거예요.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그를 만났죠. 그는 2, 3개월 마다 파피티로 나와서는 한동안 머물곤 했죠. 그리고 어디서든 돈을 구하면 또 모습을 감춰 버렸어요. 그런 식으로 마침 그 고장에 나타났을 때 그는 불쑥 나를 찾아왔어요. 2백 프랑만 빌려 달라는 거예요. 1주일은 굶은 것 같은 비참한 모습이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 돈을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1년쯤 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거예요. 그림을 한 장 가지고 왔더군요. 전에 빌려간 돈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느닷없이, 이것은 댁의 농장을 그린 그림인데 아저씨께 드리려고 그렸다더군요. 그 그림을 보았는데, 형편없었어요. 그러나 물론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그림을 받았죠. 그리고 그가 간 다음 집사람에게도 보여 주었어요" "어떤 그림이었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그건 묻지 마세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림이라서요. 그런 그림을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집사람과 의논을 했죠. 그랬더니 집사람은 방에 걸어 두면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며 다락방에 처박아 두더군요. 무엇이건 버리지 않고 모아 두는 성격이니까요. 그게 집사람의 고질적인 병이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입니다. 파리에 계신 형님이 편지를 보냈어요.-너는 타히티에 살고 있던 영국인을 알고 있냐? 아무래도 그 사람이 천재인 모양이다. 그 사람의 작품은 값이 굉장히 나가니, 아무거나 있으면 나한테로 보내라. 상당한 돈벌이가 될 테니.-대강 이런 내용의 편지였어요. 그래서 곧 집사람에게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그 그림은 어떻게 했느냐, 아직도 그대로 다락방에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물론이죠, 무엇이고 버리지 못하는 게 내 병이 아니냐고 그러잖겠어요. 그래서 곧 다락방에 올라가 보니 과연 이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 30년 동안 모인 여러 가지 잡동사니 속에 문제의 그림이 나왔어요.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그림을 잘 보았죠. 그리고 집사람을 보고 '여보, 전에 2백 프랑을 빌려 준 일이 있는 농장 감독관이었던 그 사람이 천재라니 누가 꿈에라도 생각한 일이겠소? 이 그림을 알아보겠소?' 하고 물어 보았죠. 그러자 집사람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그 농장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고, 게다가 푸른 잎을 가진 코코야자수가 어디 있어요. 하지만 파리에선 지금 그 사람의 그림으로 떠들썩하다니까, 보내 드리면 아마 빌려 준 2백 프랑의 돈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그 그림을 꾸려서 형님한테로 보내 드렸죠. 얼마 안 있다가 기다리던 편지가 왔어요. 거기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아세요? '그 그림은 잘 받았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네가 장난을 친 줄 알았다. 만일 그렇다면 송료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해준 신사에게 그 그림을 보여 줄 것이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웬걸, 이것은 걸작이다. 3만 프랑에 사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놀라움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아마 그는 좀더 비싸게 살 생각도 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머리가 좀 이상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승낙해 버렸다'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코인 씨는 끝으로 근사한 말을 한 마디 했다. "가엾게도, 스트릭랜드가 그때 살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당신 그림값이오 하고 2만 9천 8백 프랑을 내주면 그 사람은 뭐라고 했을까요?" 49 나는 오텔 드 라 플뢰르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 여주인인 존슨 부인도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고 후회했다. 스트릭랜드가 죽은 뒤 그의 가재 도구 중 일부가 파피티 시장에서 공매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속에 전부터 갖고 싶어하던 미국식 난로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일부러 시장까지 찾아가 그것을 27프랑에 샀다는 것이다. "그림도 분명히 십여 장 가량이나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액자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라 사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 가운데는 10프랑에 팔린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5, 6프랑씩 했어요. 만일 내가 그때 그 그림을 사 놓았더라면 그야말로 지금쯤은 큰 부자가 됐을 거예요" 그러나 티아레 존슨 부인은 어떤 환경이었더라도 도저히 부자가 될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돈을 모아 두지를 못했다. 토인 여자와 타히티에 눌러 살게 된 영국인 선장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하는데, 내가 이 여자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는 50세가 되어 간다고 했지만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굉장히 뚱뚱했으며, 만일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친근감 있는 부드러운 표정이 아니었다면 아마 누구나 그녀에게서 상당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팔은 마치 양의 넓적다리 같았고, 가슴은 큰 양배추를 두 개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살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그 커다란 얼굴은 너무 많이 노출되어 보기 흉한 인상을 주었으며 큰 턱은 여러 겹을 이루어 산더미같이 그 널따란 가슴팍으로 이어져 있었다. 보통 때는 느슨한 마더 하버드 가운을 입고 하루 종일 큰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끔 자랑삼아 그 곱슬곱슬한 머리를 늘어뜨리면 길고 검은 머리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눈은 아직도 생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웃음소리는 천하 일품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처럼 매력적인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다. 우선 목 속에서 낮게 울려 나오기 시작하여 점점 크게 퍼지다가 이윽고 산더미 같은 그녀의 온몸이 떨리도록 울리는 것이다. 농담과 포도주와 잘생긴 남자, 그녀는 이 세 가지를 더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분명히 영광이었다. 그녀는 이 섬에서 으뜸가는 요리사였고, 또한 맛있는 음식 예찬가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 있는 높다란 의자에 앉아 한 중국인 요리사와 토인 계집애 두서넛을 거느리고 지시를 하기도 하고 아무하고나 상냥스럽게 지껄이기도 하고 또 그녀가 생각해 낸 맛있는 요리 맛을 보기도 했다. 친구를 초대할 때는, 그녀가 늘 직접 요리를 했다.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그녀에겐 하나의 낙이었다. 그러므로 이 오텔 드 라 플뢰르에 먹을 것이 있는 한, 호텔에 가서 한 끼 대접을 받지 않고 가는 사람은 이 섬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식사대를 내지 않아도 결코 손님을 내쫓지 않았다. 낼 때가 되면 언제고 내겠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도 완전히 망해 버린 남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남자를 몇 달 동안이나 먹이고 재워 주었다. 중국인 세탁소에서 돈을 안 내면 빨아 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 그녀는 자기 것과 함께 보내어 그 사람의 옷을 빨게 해주었다. 아무리 궁색하더라도 남자가 더러운 셔츠를 입는 것을 놔둘 수 없다는 거였다. 또 그가 남자인 이상 담배를 안 피울 수는 없다며 담뱃값으로 하루에 1프랑씩 주었다. 더구나 그녀는 1주일에 한 번씩 어김없이 계산을 해주는 손님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 사람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나이로 보나 또 지나치게 뚱뚱한 점으로 보나 남녀간의 정사를 운운할 처지는 아니지만 젊은이들의 정사에는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정사라 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심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그녀 자신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교훈과 실례를 기꺼이 남에게 말해 주곤 했다. "나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아챈 것은 아직 내가 열 다섯도 되기 전이었어요. 그 사람은 '열대조'라는 배의 삼등 항해사였죠.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들이란 흔히 첫사랑의 남자를 잊지 못한다지만 그녀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분별 있는 분이었죠" "어떻게 하셨기에?" "나를 그야말로 죽도록 두들겨 준 다음, 존슨 선장과 결혼시켰어요. 난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요. 물론 나이는 꽤 많았지만 역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이 티아레는 스트릭랜드를 잘 알고 있었다. '티아레'란 원래 섬에 피는 냄새 좋은 흰 꽃 이름인데, 그 꽃냄새를 한번 맡은 사람은 아무리 먼 곳까지 가서 헤매고 있다가도 마침내는 반드시 그 냄새에 이끌려 타히티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꽃 이름을 딸에게 붙인 것이다. "그이는 이곳에도 가끔 왔고 파피티 근처를 돌아다니는 걸 자주 보았어요. 정말 보기 딱했어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말랐고 돈을 가지고 있는 일도 없었지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늘 웨이터를 보내어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죠. 일자리도 한두 번 구해 준 일이 있지만 어디고 한 군데 오래 있지를 못해요. 얼마 안 있으면 또 숲속으로 가고 싶어서 소리도 없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버리는 거예요" 스트릭랜드는 마르세이유를 떠난 지 약 반 년 후에 타히티 섬에 닿았다. 오클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타고 그 안에서 일을 하여 뱃삯을 치러 가며 찾아온 것이다. 도착했을 때 가지고 있던 것은 그림 도구가 든 상자 하나와 이젤 하나, 그리고 캔버스 한 다스 가량이었다. 그밖에 시드니에서 번 2,3파운드의 돈이 전부였다. 변두리에 있는 토인 집에 작은 방 하나를 빌어 들었다. 그는 타히티에 도착하는 순간 적이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 언젠가 티아레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갑판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야아, 저거다!'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얼굴을 들어 보니까 이 섬의 윤곽이 보입디다. 나는 곧 저곳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줄곧 찾아 헤매던 곳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가와 보니 아무래도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장소 같았어요. 가끔 이 섬을 산책하노라면 눈에 띄는 것이 다 낯익은 것으로 보여요. 분명히 전에 이곳에서 산 일이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단 말예요" "아무래도 이 섬은 가끔 그렇게 느끼게 하는 점이 있는 모양이에요" 하고 티아레는 말했다. "배에 짐을 싣는 두어 시간 동안 이 섬에 올라왔다가 다시는 배로 돌아 가지 않고 여기 눌러앉은 사람이 꽤 있어요. 그런가 하면 또 회사에서 전근이 되어 1년 가량 이곳에 와 있는 동안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불평을 하고 떠날 때는 이런 데 다시 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간 사람이 반 년 뒤에는 이 섬에 다시 돌아와 다른 곳에선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듯이 눌러 살고 있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어요" 50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고향이 정해져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기회에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이는 일이 있다 해도 그들은 계속 미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태어난 고장에선 오히려 나그네 같고, 어렸을 때부터 익히 보아온 푸른 오솔길이며 장난치고 뛰놀던 번잡한 시가지도 그들에게는 나그네의 주막에 불과하다. 육친간에도 일생을 남처럼 냉정한 마음으로 지낼지 모르며, 또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풍경에 대해서도 끝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뭔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것을 구하여 먼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있는데, 그것도 아마 그 고독한 불안이 시키는 것일 것이다. 아니면 마음속 깊이 뿌리박은 격세지감이라는 것이 나그네의 발길을 먼 역사의 여명 시대 속에 그들의 선조들이 버리고 간 고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때 문득 막연히 느끼고 있던 신비의 고향을 찾아가는 수가 있다. 거기야말로 찾고 있던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처음 보는 낯선 광경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장소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성 토마스 병원에서 알게 된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티아레에게 말해 주었다. 에이브러햄이라는 유대인으로 금발의 꽤 건강한 청년이었는데, 내성적이고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그 병원에도 장학금을 받고 의학생으로 들어왔으며, 5년의 수업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이란 상은 혼자서 다 받을 만큼 뛰어난 수재였다. 병원에서는 내과의와 외과의를 겸임했다.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는 일이 없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마침내 그는 그 병원의 간부 요원으로 선출되고 그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 세상의 앞일을 내다볼 수 있다면 분명히 그는 의사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앞날에 많은 부와 영예가 약속되어 있었다. 새로운 지위에 앉기 전에 그는 휴가를 가겠다고 말했다. 별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과의 자격으로 어느 부정기 항로의 배를 타고 레반트로 떠났다. 전에는 선의가 없는 배였는데, 병원의 선배 외과의 한 사람이 그 항로의 중역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브러햄은 특별히 그 배의 선의로 채용된 것이다. 몇 주일 후 병원 당국은 누구나가 노리는 간부 요원의 자리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사표를 받았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으레 그의 동료들은 극단적으로 나쁜 일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에이브러햄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곧 들어앉았다. 그리고 에이브러햄에 대한 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소식은 딱 끊어지고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아마 10년쯤 지났을까, 내가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려니까, 배 안에서 위생 검사가 있다고 하여 나는 다른 선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렸다. 검사의는 낡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였다. 모자를 벗으니 그는 완전히 대머리였다. 나는 아무래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에이브러햄!" 하고 나는 불렀다. 나를 돌아다본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손을 덥석 잡았다. 서로가 뜻밖의 상봉에 몹시 놀랐으나, 내가 오늘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물 예정이라고 말하자, 그럼 영국인 클럽에서 저녁이라도 함께 하자고 그가 말했다. 클럽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런 데서 자네를 만나다니 정말 뜻밖이라고 말했다. 그의 직업은 정말 하찮은 것으로 생활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휴가를 얻어 지중해로 떠날 때는 분명히 런던으로 돌아가 성 토마스 병원에서 새로운 자리에 취임할 셈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하여 갑판에서 아침 해에 번쩍이는 시가지와 부두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러운 캐버딘 옷을 입은 토인, 수단에서 찾아 온 흑인들, 와글와글 몰려드는 그리스 인, 터키 모를 쓴 침통한 얼굴의 터키인, 그리고 아침 해와 파랗게 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청천 벽력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 계시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고 그는 말했다.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그의 마음을 꽉 죄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격렬한 기쁨을 느꼈는데, 그것은 맘껏 소리지르고 싶어지는 해방감이었다. 양쪽 날개를 쫙 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당장 알렉산드리아에 영주하기로 결심했다. 선의 직을 그만두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 24시간 뒤에 그는 짐을 꾸려 부두로 내려갔다. "선장은 틀림없이 자네가 정신이 나간 줄 알았겠군"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남이야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어. 내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더 강력한 것이 발동한 거야. 사방을 둘러보다 아담한 그리스인의 호텔로 가기로 했지. 그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만 같더군. 글쎄 이상하게도 나는 그곳까지 곧장 걸어 갔다네. 그리고 호텔이 눈에 띄자 곧 아아, 저 집이로구나 하고 알아 보겠더라니까" "알렉산드리아엔 전에 와 본 적이 있었나?" "아니, 태어나서 영국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었지" 얼마 안 가 그는 그곳 정부 기관에 취직했고 그 뒤로 줄곧 그곳에서 살아온 것이다. "후회해 본 적은 없나?" "물론이지. 단 한 번도. 살아갈 만한 수입은 되고, 아무 걱정도 없네. 죽는 날까지 이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야. 이곳 생활은 아주 멋있다네" 그 다음날 나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났고, 그 후 에이브러햄에 관해서는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역시 의사인 옛 친구 알렉 카마이클이 휴가로 영국에 있을 때 둘이서 식사를 한 일이 있다. 나는 그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전쟁 중에 세운 공로로 그가 나이트 작위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말을 했다. 하룻저녁 만나 그 동안에 쌓였던 회포라도 풀자는 얘기가 나와 내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되 그와 단둘이만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다른 사람은 아무도 부르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의 집은 퀸 앤 가에 있는 유서 깊은 훌륭한 저택이었다. 취미가 고상한 사람이었으므로 여러 가지 감탄할 만한 그림을 갖고 있었다. 식당 벽에는 훌륭한 벨로토의 그림이 걸려 있고 또, 정말 탐나는 조파니의 그림이 두 장이나 걸려 있었다. 능금빛 실로 짠 옷을 입은 키가 늘씬한 미인인 그의 부인이 자리를 떴을 때, 나는 옛날 의학생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환경이 너무나 달라졌는데 하고 말하며 웃었다. 참으로 그 무렵에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로에서 이탈리아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일조차도 대단한 사치였다. 지금, 알렉 카마이클은 대여섯 군데나 되는 병원 간부 직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입도 1년에 만 파운드는 족히 됨직 했으며, 이번에 받은 나이트 작위도, 앞으로 그에게 주어질 수많은 영예로 본다면 한낱 시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꽤 노력은 했다고 보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묘한 얘기 같네만, 이 성공도 사실상 작은 행운에서 시작된 것일세"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자네 에이브러햄이란 친구를 기억하고 있나? 아주 앞날이 유망한 친구였지. 학생 시절에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네. 내가 노리고 있던 상이나 장학금은 그 녀석이 모두 다 차지해 버렸으니까. 나는 언제나 그 녀석의 꽁무니만 쫓다가 말았지. 그 녀석이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지금 내가 차지한 지위는 그 녀석의 것이 됐을 거야. 그 친구는 외과 의술에 있어선 천재적이었으니까. 그를 쫓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어. 그 녀석이 성 토마스 병원의 간사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그곳 직원이 될 가망은 없어지고 만 거야. 개업의가 돼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자네도 아다시피 개업의의 장래야 뻔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에이브러햄이 갑자기 모든 걸 버리는 바람에 내가 그 자리를 얻게 된 거지. 그게 모든 것의 실마리가 된 걸세"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지. 아무래도 에이브러햄에겐 좀 기이한 점이 있었나봐. 정말 딱한 친구지. 완전히 밑바닥으로 처지고 말았으니. 그 녀석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말이 의사지 아주 형편없는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뭐 검역관이라던가. 들리는 말엔 늙고 볼품없는 그리스 여자와 같이 살며 선병질의 아이들까지 대여섯이나 된다는군. 정말이지 사람은 머리만 좋아도 소용없어. 문제는 인격이야. 에이브러햄에겐 그게 없었어" 인격이라고? 아무리 다른 생활에서 사는 보람을 느꼈다고 30분 남짓의 생각으로 자기의 보장된 인생을 포기한다는 점에 있어선 역시 상당한 인격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뒤에 가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 강한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지? 그러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알렉 카마이클은 감회 깊은 듯 말을 이었다. "물론 에이브러햄이 취한 행동이 내가 아쉬워하는 표정이라도 짓는다면 그건 위선이겠지. 결국 나는 그로 인해 덕을 본 셈이니까" 그는 피우고 있던 코로나 담배 연기를 기분 좋게 뿜어 냈다. "그러나 나 개인의 입장을 떠나 생각하면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다니 안된 일이지. 그 친구처럼 일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야" 과연 에이브러햄이 일생을 망친 것일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행하고 자기에게 꼭 맞는 환경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일생을 망친 것일까? 연수입 만 파운드의 유명한 의사가 되어 미인 마누라를 얻어 사는 것이 과연 성공일까? 요컨대 그것은 자기가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로 결정되는 일이며, 사회가 자기에 대한 요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또는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관련된 문제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쨌든 상대방은 나이트니까, 나 같은 사람이 왈가왈부할 형편은 아닌 것이다. 51 티아레는 내가 해준 이 이야기를 듣자 나의 분별 있는 태도를 칭찬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엌일에 조금도 눈을 떼는 일없이 신경을 쓰고 있는 그녀의 눈에 중국인 요리사의 못마땅한 행동이 띄었는지 얼굴이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요리사 쪽으로 돌린 그녀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욕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중국인도 질세라 맞대꾸를 하여 당장에 시끄러운 말다툼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토인말로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 고장 말을 얼마 몰랐지만 어쨌든 세상을 끝장이라도 낼 것처럼, 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화해를 하고, 티아레는 요리사에게 담배를 권했다. 두 사람은 자못 기분 좋은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부인을 얻어 준 게 바로 나라는 걸 손님은 모르시지요?" 하고 티아레는 그 큰 얼굴에 웃음을 띠며 물었다. "요리사에게 말인가요?" "아니, 스트릭랜드 씨 말예요" "하지만 그 사람에겐 부인이 있었는데요" "그분도 그러더군요. 하지만 그건 영국 얘기고, 영국은 지구 반대쪽에 있지 않느냐구, 나는 그분에게 말했죠" "하긴 그렇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분은 두어 달만에 한 번씩, 그림 물감이나 돈이 필요하면 파피티로 나왔어요. 그때 보면 그분은 마치 집 잃은 개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어요. 불쌍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 무렵, 방 청소 같은 것을 시키던 아타라는 계집애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나하고 먼 친척이 되는 아인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죽어 우리 집에 와 있었지요. 스트릭랜드 씨는 가끔 나타나서는 실컷 먹기도 하고 웨이터와 체스를 두기도 했어요. 그 사람이 왔을 때 그애의 눈초리가 이상한 것을 알아 차린 나는 그 사람이 좋으냐고 그애에게 물었지요. 그랬더니 굉장히 좋다고 하지 뭐예요. 이 근처의 계집애들이 어떤지 손님도 아시죠. 백인과 어울리는 걸 무척 좋아하니까요" "그 여자아이는 토인이었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네, 백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 아이와 얘기를 마친 다음 스트릭랜드 씨를 부르러 보냈죠.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제 당신도 자리를 잡을 때가 됐어요. 당신 나이에 부둣가의 여자들하고 시시덕거린 데서야 되겠어요. 그런 여자들하고 어울려 봤자 고생하기 알맞죠. 당신은 돈도 없고 게다가 일자리가 생겨도 몇 주일을 견디지 못하잖아요. 이젠 당신 같은 사람들 써줄 데는 없단 말예요. 그야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아무 때고 숲속에 들어가서 토인 여자와 같이 살면 된다고. 당신이 백인이니까 토인 여자들이야 좋아하겠죠. 그렇지만 그것은 백인으로서 그다지 잘하는 짓이 아니예요.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봐요' 하고 말예요" 티아레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가며 말했다. 그녀는 어느 쪽이고 다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말투는 꼭 노래하는 듯했는데 절대로 듣기 싫지는 않았다. 새가 영어를 지껄일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러니 아타와 결혼하면 어때요? 그 아이는 마음씨도 착하고 아직 열 일곱 살밖에 안 됐어요. 이 근처 여자들처럼 아무하고나 어울릴 아이가 아니에요. 그야 선장이나 일등 항해사 정도라면 모르지만, 토인에게는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아이지요. 그러니까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거죠. 오아후 호의 사무장도 얼마 전에 기항했을 때 이 일대 섬에서 저만한 처녀는 본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됐고 게다가 선장이나 일등 항해사 같은 사람들에게도 좀 변화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겠고. 그래 우리 집에선 한 여자아이를 오래 두지 않기로 했어요. 그 아이는 타라바오 근처에 땅도 좀 가지고 있어요. 지금 코프라 시세라면 둘이서 편히 살 수 있을 거예요. 집도 있고 그림은 얼마든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릴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내가 이렇게 말했죠" 티아레는 숨을 돌렸다. "그분이 영국에 있는 부인 얘기를 한 것은 바로 그때였죠. '참 한심한 분이군' 하고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해 줬어요. '마누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일부러 이런 섬에 오는 게 아니겠어요. 아타는 영리한 아이니까 시장 앞에서 식을 올릴 생각도 안 할 거예요. 그 아이는 신교도니까 가톨릭 신자처럼 이런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자 그분이 '하지만 아타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야죠' 하더군요. '당신이 마음에 드나 봐요' 하고 나는 대답했죠. '그 아이는 당신만 마음에 있다면 좋다는 거예요. 뭣하면 이리로 부를까요?' 하고 말하자 그 사람은 아주 묘한 웃음을 짓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불렀죠. 그 아이는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 알고 있었어요.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내가 얘기하면서 곁눈질을 해보니 그 아이는 내가 빨아 놓으라던 블라우스를 빨아서 다리미질을 하는 체하며 이쪽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 뭡니까. 당장에 오더군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좀 부끄러운 눈치였어요. 스트릭랜드 씨는 잠자코 그 아이를 보고 있었지요" "그 아가씨는 미인이었나요?" "그다지 밉진 않았어요. 손님도 아마 그 아이를 그린 그림을 여러 장 보았을 걸요. 그분은 그 아이를 모델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파레오를 걸치고 있은 것도 있고, 전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도 있었어요. 그래요, 꽤 예뻤어요. 게다가 요리도 곧잘 했고, 스트릭랜드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죠. '이 아이에겐 후한 월급을 주고 있었는데 그것을 다 저금했어요. 게다가 낯익은 선장이나 일등 항해사들도 이따금 돈을 주는 것 같았으니까 몇백 프랑은 될 거예요' 하고 말예요. 그 사람은 그 붉은 수염을 잡아당기며 빙긋 웃더군요" "'그래, 아타' 하고 그 사람이 물었어요. '너는 나를 남편으로 삼고 싶으냐?' 그러자 그 아이는 아무 말도 않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요. '참 스트릭랜드 씨도 답답하군요. 이 아이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내가 얘기 했잖아요' 하고 내가 말했죠. 그러자 그분은 '나는 너를 두들겨 줄지도 모른다' 하고 그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텐데요'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지 뭐예요" 티아레는 거기서 말을 일단 끊고, 감회 어린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의 첫 남편 존슨 선장은 나를 곧잘 때렸어요. 남자다운 사람이었죠. 그런데 술만 취하면 말릴 장사가 없어요. 그래서 내 몸은 검푸른 멍이 며칠씩 안 없어지곤 했죠. 그이가 죽었을 때는 나도 엉엉 울었죠. 정말 그 슬픔이란 참을 수 없더군요. 하지만 조지 레이니와 재혼하고서야 비로소 정말 그이가 좋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남자들이란 함께 살아보지 않고는 그 속을 알 수 없더군요. 조지 레이니 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기야 키가 늘씬한 멋진 남자로 존슨 선장에 못지 않게 아주 건장하게 생겼죠. 그러나 겉보기뿐이었어요. 술도 안 마시고 나에게 손 한 번 대는 법이 없었어요. 선교사라도 되는 게 좋았을 거예요. 나는 섬에 배가 닿을 때마다 고급 선원과 좋아지냈는데도 조지 레이니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채는 거예요. 끝내는 그 사람에게 울화통이 터져 내가 헤어져 버렸어요. 그런 남편이 어디가 좋다는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딱하게도 이 세상엔 여자를 다룰 줄 모르는 남자도 있어요" 나는, 정말 혼이 났었군요 하고 티아레를 위로해 주고, 조용한 어조로 남자들이란 언제나 여자를 속이기 일쑤라고 말한 다음 스트릭랜드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하고 나는 그분에게 말했어요. '뭐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천천히 시간 여유를 갖고 잘 생각해 봐요. 아타에겐 별채에 아주 좋은 방을 주었어요. 한 달만이라도 함께 살아 보고 좋아질 수 있나 미리 알아보도록 해요. 식사는 여기 와서 하면 되고요. 그리고 한 달 뒤에 결혼해도 괜찮겠다 싶거든 곧 나가서 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집에서 살면 되는 거예요' 그분도 좋다고 대답하더군요. 아타는 전이나 다름없이 빨래며 청소 일을 봐주고 나는 약속대로 식사를 그냥 제공해 줬어요. 내 경험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분이 좋아한다고 생각되는 요리를 만드는 법을 아타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분도 그림도 별로 그리지 않고, 산 속을 이리저리 헤매 다니기도 하고, 냇가에 가서 목욕을 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바닷가에 주저앉아 초호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해가 지면 아래로 내려가 무레아 섬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어요. 그 사람은 또 산호초로 고기잡이를 간 일도 있어요. 항구 근처를 왔다갔다하며 토인들과 얘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정말 말이 없는 좋은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매일 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아타를 데리고 별채로 가 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눈치기에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그 사람에게 물었지요. 그러자 아타만 좋다면 자기도 기꺼이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결혼 축하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죠. 내 솜씨로 말이에요. 완두 스프에 포르투갈식 요리, 그리고 카레와 코코야자 샐러드. 손님에겐 아직 내 자랑거리인 코코야자 샐러드를 대접한 일이 없었죠? 떠나시기 전에 꼭 만들어 드리겠어요.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곁들였어요. 샴페인을 충분히 준비했고 나중에는 리큐르도 나왔어요. 정말 나는 조금도 손색 없이 하려고 굉장히 신경을 썼지요. 그리고 응접실에서 댄스를 했어요. 그 무렵엔 이렇게 뚱뚱하지도 않았고, 또 워낙 춤을 좋아했으니까요" 오텔 드 라 플뢰르의 응접실은 아담한 방으로 작은 피아노가 놓여 있고 눌러 찍은 무늬의 비로드를 씌운 마호가니 가구 세트가 벽 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앨범이 놓여 있고 벽에는 티아레와 그녀의 첫 남편 존슨 선장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걸어 놓았다. 티아레도 이제는 나이 먹고 몸도 뚱뚱했지만, 가끔씩 바닥에 깐 브류셀 융단을 둘둘 말아 밀어 놓고 하녀며 티아레의 친구를 몇 명 불러다 춤을 추곤 했다. 특히 그때는 천식 환자의 숨소리 같이 직직 소리를 내는 낡은 축음기 음악을 반주로 틀었다. 베란다에는 티아레꽃의 짙은 향기가 감돌고, 활짝 갠 하늘에는 남십자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티아레는 추억 속에 사라진 먼 옛날의 화려한 생활을 머릿속에 드리며 활짝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춤을 추었고 자러 갔을 때는 꽤 취해 있었어요. 나는 두 사람에게 내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라고 그랬죠. 그러고 나서도 걸어가는 거리가 꽤 되니까요. 아타의 땅은 아주 먼 산골짜기에 있었어요. 두 사람은 날이 훤히 밝아 떠났는데 내가 딸려 보낸 웨이터는 다음날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요, 이렇게 해서 스트릭랜드는 색시를 얻게 된 거예요" 52 그로부터 3년 간은 스트릭랜드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타의 집은 섬을 에워싸고 있는 도로에서 8킬로미터나 들어간 외진 곳에 있었다. 열대 식물이 우거진 사이로 꼬불꼬불하게 난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아타네 집이 나타난다. 그 집은 통나무로 만든 방갈로식 집인데 아담한 방이 두 개 있고 바깥쪽으로는 작은 오두막이 붙어 있어 그것이 부엌으로 되어 있었다. 가구라고 해보았자 침대 대신 사용하는 돗자리와 흔들 의자가 하나 베란다에 놓여 있을 뿐이다. 집 바로 옆에는 바나나나무가 마치 비운을 한탄하는 여왕의 낡은 예복처럼 찢어진 큰 잎을 펴고 서 있었다. 바로 뒤에는 열매가 달린 아보카도가 한 그루 있었다. 둘레에는 코코야자수 숲이 있으며, 그것이 그 땅의 재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타의 아버지가 그 집 주위에 파두나무를 심어 놓아서 그 꽃의 눈부실 정도로 타오르는 찬란한 빛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망고가 한 그루 집 앞에 서 있고 개간한 땅 가장자리에는 쌍생수인 플램보이언트가 우거져 있어 야자 열매의 노란색이 마치 도전이라도 하듯 새빨간 꽃을 피우며 서 있었다. 여기서 스트릭랜드는 살았고, 그곳에서 나는 것을 먹었으며, 여간해서 파피티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좀 떨어진 곳에 냇물이 있어 그는 거기서 목욕도 했다. 어쩌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그곳에 몰려오는 수가 있었다. 그런 때면 토인들은 작살을 들고 모여들어 바다를 향해 허겁지겁 도망쳐 내려가는 물고기를 소리지르며 작살을 던져 잡았다. 가끔 스트릭랜드는 산호초까지 내려갔다. 아름다운 색을 지닌 작은 물고기며, 왕새우를 종다래끼에 가득 잡아 오는 수도 있었다. 아타는 그것을 야자 기름에 튀겨 요리를 만들었다. 때로는 아타 자신이 발 밑으로 달아나는 큰 게를 잡아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도 했다. 산에는 야생 오렌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아타는 가끔 마을에서 온 몇몇 여자들과 어울려 산으로 올라가 녹색의 달고도 향기 있는 열매를 많이 따오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코코야자 열매가 먹기 좋게 익어 가면 그녀의 사촌들 (모든 토인이 그렇듯이 그녀도 일가붙이가 많았다) 이 떼지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잘 익은 큰 야자 열매를 따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들은 딴 열매를 쪼개어 햇볕에 말렸다. 그리고 코프라를 도려 내어 자루에 넣은 다음 그것을 여자들이 초호 옆 마을에 있는 상인 집까지 가져 갔다. 그러면 상인은 코프라 대신 쌀, 비누, 통조림 그리고 현금도 조금 주곤 했다. 때로는 근처에서 술 잔치가 벌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때는 돼지를 잡기도 했다. 그러면 모두 그곳에 모여 실컷 먹고 춤을 추고 찬미가를 부르곤 했다. 아타네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타히티 섬의 주민은 거의 모두 게으름뱅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잡담도 즐기지만 걷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몇 주일이고 계속 스트릭랜드와 아타는 두 사람만의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둘이 함께 베란다에 나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아타는 아기를 낳게 되었고 산파로 왔던 노파는 그대로 눌러 있게 되었다. 얼마 안 있다 그 노파의 손녀딸이 와서 살게 되었고, 그리고 청년 하나가 나타나-그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친척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하는 일없이 그대로 눌러앉아 다함께 살게 되었다. 53 "저분이 카피텐 브뤼노예요" 어느 날 티아레가 말했다. 그 무렵 나는 그녀가 스트릭랜드에 관해 해준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분은 스트릭랜드 씨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가 사는 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고요" 쳐다보니 과연 그곳에는 중년의 프랑스 인이 서 있었다. 희끗희끗한 턱수염, 볕에 탄 얼굴, 게다가 반짝이는 큰 눈을 지녔으며, 산뜻한 즈크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도 점심때 이 사람을 보았다. 중국인 웨이터 아린의 말에 의하면 포모투 군도에서 온 그날 입항한 배를 타고 온 모양이다. 티아레는 나를 그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명함을 내놓았는데 큼직한 명함에 르네 브뤼노라고 적혀 있고 그 밑에 '롱 쿠르 호 선장'이라고 찍혀 있었다. 우리는 부엌 바깥쪽 작은 베란다에 앉아 있었는데, 티아레는 자기 집 심부름하는 계집아이에게 입힐 드레스를 재단하고 있었다. 선장도 우리와 함께 그곳에 앉았다. "나는 스트릭랜드를 잘 알고 있었어요" 하고 그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체스를 워낙 좋아해서요. 게다가 그 사람도 한판 둡시다, 하면 언제나 대환영이었죠. 일 관계로 이 타히티에는 1년에 서너 번씩 오는데, 그 사람도 파피티에 있으면 꼭 이곳엘 찾아와서 함께 체스를 두었죠. 그가 결혼했을 때..." 여기까지 말한 브뤼노 선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결국 그 사람이 티아레가 소개한 아이와 함께 살게 됐을 때, 나더러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그러지 뭡니까, 그 피로연에는 나도 초대받았거든요" 그가 티아레 쪽을 쳐다보고 웃자 티아레도 덩달아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 뒤로 그 사람은 파피티에는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고, 그럭저럭 1년이나 지났을 무렵 나는 무슨 볼일인지는 잊어버렸습니다만 어쨌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쪽으로 갈 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볼일을 마치고 나니 여기까지 왔으면서 스트릭랜드를 만나지 않고 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몇 사람의 토인에게 그의 소식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니, 마침 내가 있는 곳에서 5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됐어요. 그래서 나는 찾아갔죠. 그때 받은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환초 위 낮은 섬입니다만, 초호를 둘러싸고 있는 기다란 땅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면 훌륭한 바다와 하늘, 다채로운 초호, 우아한 코코야자나무의 모습 정도죠. 그런데 스트릭랜드가 살던 곳의 아름다움은 에덴 동산을 방불케 했습니다. 정말이지 몸과 마음을 다 빼앗길 것 같은 그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완전히 외계와는 격리된 장소였죠.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이 펴져 있고 울창한 수목들이 짙푸르게 우거져, 색채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뭐라 말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고 싱그러움이 가득 차 있었어요. 그 낙원의 아름다움이란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그런 장소에서 그는 이 세상 일을 잊고 또 세상도 그를 잊은 채 살고 있었어요. 하기야 유럽 인이라면 눈살을 찌푸리고 불결하다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 집은 낡을 대로 낡아 결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어요. 가까이 가 보니 서너 명의 토인이 베란다에 누워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토인은 툭하면 모여들기를 좋아하니까요. 젊은 남자가 한 명 쭉 뻗고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그 사람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파레오 하나뿐이었어요" 파레오란 기다란 무명천으로 빛깔은 빨갛거나 파랬으며 거기에 흰 무늬가 찍혀 있다. 허리에 걸치고 그 자락은 무릎까지 내려온다. "열 다섯 살 가량의 계집애가 판다나스 잎으로 모자를 엮고 있었고, 한 노파가 웅크리고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그리고 아타가 보였어요. 그녀는 낳은지 얼마 안 되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고, 그 발치에는 발가벗은 또 하나의 어린애가 놀고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보자 스트릭랜드를 부르더군요. 그가 문 밖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도 파레오만 걸쳤어요. 그 붉은 수염과 더부룩한 머리와 털이 수북하게 난 가슴, 정말 괴상한 모습이었어요. 발은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히고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늘 맨발로 다닌 모양이더군요. 토인이 다 된 모습이었어요. 나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며 저녁때 닭을 한 마리 잡으라고 아타에게 말했어요. 그는 나를 집 안으로 불러들여 마침 그리고 있던 그림을 보여 주었어요. 방 한구석에 침대가 놓여 있고 한가운데에는 캔버스를 올려놓은 이젤이 놓여 있었어요. 전에 나는 불쌍히 생각해서 그 사람의 그림을 두 장 가량 싼 값으로 산 일이 있거든요. 또 프랑스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몇 장인가 보내 준 일도 있구요. 처음에는 동정심에서 샀지만 방에 걸어 놓고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 들어 버렸어요. 사실 그 그림에는 이상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모두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들 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이 근처 섬에선 내가 제일 먼저 그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니까요" 그는 짓궂은 눈초리로 티아레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스트릭랜드의 유품이 경매에 붙여졌을 때 그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미제 난로만을 27프랑에 샀던 이야기를 다시 하며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그 그림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럼요.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될 때까지 갖고 있을 작정이에요. 시집을 갈 때 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지참금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는 스트릭랜드를 찾아갔을 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 밤 일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처음엔 한 시간 가량 있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그가 자고 가라고 하도 붙잡아서요. 나는 주저했어요. 사실 말이지 거기서 자라고 그 사람이 내놓은 돗자리를 보니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구요. 하지만 결국 자겠다고 승낙하고 말았죠. 포모투에 집을 지었을 때 집 밖에 있는 딱딱한 침대에서 몇 주일이고 잔 일이 있어요. 울창한 관목을 지붕 삼아서요. 독벌레 걱정은 없었죠. 어쨌든 내 피부는 단단해서 벌레 따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아타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냇가에 나가 목욕을 하고 왔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 모두 베란다에 나가 앉았죠. 거기서 담배도 피우고 이야기도 했어요. 그 젊은 남자는 손풍금을 가지고 나와 10여 년 전에 뮤직홀에서 유행했던 곡을 들려 줬어요. 문명에서 몇천 마일이나 떨어진 열대 지방에서 듣는 그 곡은 이상한 여운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어요. 이렇게 외진 곳에 살면서 권태를 느끼지 않느냐고 스트릭랜드에게 물어 봤지요. 그는 머리를 저으며 자기 그림의 모델이 가까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다가 토인들은 하품을 하며 자러 갔고, 스트릭랜드와 나만 남게 되었어요. 그날 밤 가슴속으로 밀려오던 그 적막함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포모투 군도에선 그곳과 같은 적막함은 밤이 되어도 도저히 맛볼 수 없죠. 바닷가에선 무수한 동물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요. 마치 작은 조개류가 다 나와 바스락거리며 기어다니는 것 같은 소리예요. 게다가 게가 분주히 돌아 다니는 소리도 들리고 초호에선 간혹 물고기가 뛰는 소리며 또는 갈색 상어가 놀라 도망치는 작은 물고기들을 쫓아갈 때의 물 튀기는 소리도 들려요. 게다가 시간의 흐름처럼 계속 산호초로 밀려오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도 들려 오고요. 그런데 그곳에서는 전혀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아요. 공기는 밤의 흰 꽃과 같은 향기를 품고 있었어요. 그 밤의 아름다움은 마치 자기 영혼이 육체의 질곡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요. 끝없이 퍼진 하늘로 떠올라 가는 듯한... 그리고 죽음마저도 그리운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티아레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아, 나도 한 번만 다시 열 다섯 살 소녀로 돌아갔으면!" 그때 그녀는 부엌 식탁 위 접시에 놓여 있던 보리새우를 노리고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녀는 재빠른 솜씨로 도망치는 고양이 꼬리를 향해 책을 집어던지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아타 하고 사는 게 행복하오?' 하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아타는 그를 혼자 가만히 놓아 둔다며, 아타는 그에게 밥을 지어 주고 아이들도 잘 거둔다는 거예요. 그가 하라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그가 여자에게 구하는 것은 다 제공해 준다면서 적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유럽에 미련이 없소? 파리나 런던의 가로등 불빛이라든가 친구나 동료들과의 교제라든가, 또 극장이나 신문, 그 밖에 자갈을 깐 포도 위를 달리는 합승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 그런 것이 그리워질 때가 없소?' 하고 물어 봤어요.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요' 하고 말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루하거나 쓸쓸해지는 일은 없소?' 하고 또 물었죠. 그는 그 말에 킬킬 웃었어요. 그리고 '여보시오, 당신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요. 예술가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하고 말하지 않겠소" 브뤼노 선장은 나를 쳐다보고 조용히 웃었다. 그의 부드러운 검은 눈에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그 사람이 나를 잘못 본 거지요. 나도 자기 나름대로 꿈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답니다. 나도 꿈은 있어요. 나도 역시 내 나름대로는 예술가니까요" 우리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티아레가 커다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웅큼 꺼내어 한 개씩 나누어 주었고 우리 세 사람은 담배 연기를 뿜어 대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스트릭랜드 씨에 대한 일을 알고 싶어하니까, 어때요, 쿠트라 선생에게 안내해 드리면? 거기 가면 그 사람이 병든 일이며 죽었을 때의 일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예요" "아아 그거야 문제없죠" 하고 선장은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6시가 지났군요. 지금 가면 집에 있을 겁니다"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박사네 집으로 향했다. 박사는 교외에 살고 있었다. 오텔 드 라 플뢰르는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곧 시골길로 나왔다. 그 넓은 길은 후추나무로 그늘져 있었고 양쪽으로 코코야자와 바닐라 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해적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우거진 종려나무 잎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얕은 내에 놓인 돌다리가 있는 곳까지 와서 잠시 발을 멈추고 토인 아이들이 미역감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소리를 꽥꽥 지르고 신나게 웃어 대며 서로 뒤를 쫓고 있었다. 젖은 갈색 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54 다시 걸으면서 나는 최근 스트릭랜드에 대해 들은 이야기에서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머나먼 섬에 와서는 고국에서 받던 그 혐오의 눈초리는커녕 오히려 동정을 받고 있었다. 그의 괴상한 행동에 대해서도, 섬 사람들은 관대했다. 토인이거나 유럽 인이거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한 사람의 괴짜로 봤을 뿐 별로 이상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필연적으로 결정할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그는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구멍의 형태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서 못이 맞지 않는 경우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곳에 와서 고분고분해진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면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잔인성이 적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에게 환경이 좋아졌을 뿐이다. 그도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처음부터 살았더라면 특별히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여기서 그는 고국에서는 생각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것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동정이었다. 나는 내가 느끼게 된 그 놀라움을 조금이라도 브뤼노 선장에게 전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대답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결국 내가 그 사람을 동정했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죠" 하고 그는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양쪽이 다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두 사람은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신과 스트릭랜드처럼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웃으며 물었다. "아름다움이지요" "그건 너무 거창한 말씀인데요" 하고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 밖의 것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노예선의 좌석에 사슬로 묶인 노예들처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스트릭랜드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열도 그런 사랑에 빠진 마음이나 다름없이 폭군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하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받았다. "실은 나도 오래 전이지만 그를 도깨비에 홀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았던 정열은 미를 창조하려는 정열이었어요. 그 정열은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독촉하여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신성한 향수에 사로잡혀 영원한 순례자가 된 거지요. 그의 몸 안에 자리잡은 악귀는 무자비함, 바로 그거였어요. 세상에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자기가 서 있는 토대마저도 못 쓰게 만들어 놓고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트릭랜드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죠. 다만 그의 경우에는 진리 대신 미를 추구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죠. 정말이지, 그 사람에겐 진심으로 동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아니 그 또한 재미있는 얘기군요. 실은 그 사람에게 꽤나 골탕을 먹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역시 자기는 그를 몹시 동정한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에겐 오랫동안 도저히 납득이 안 가던 한 인간의 성격에 대한 것을 당신은 거기서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나요?" 그는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 말했잖습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는 예술가라고. 나도 그 사람이 정열을 불태웠던 것과 같은 욕구를 마음속에서 뚜렷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매체가 그의 경우에는 그림 물감이었지만 나에게는 생활이었을 뿐이죠" 그런 다음 브뤼노 선장은 나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그것은 다만 대조가 되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스트릭랜드가 나에게 주는 인상에 약간의 도움이 될 것 같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이 기회에 되풀이해 말하고자 한다. 브뤼노 선장은 프랑스 해군에 근무한 일이 있었다. 결혼하자 해군 생활을 그만두고 킴퍼 근처에 있는 한 마을에 정착했다. 거기서 여생을 조용히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느 변호사의 실수로 그는 하루아침에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여러 사람이 알아줄 만한 생활을 해오던 고장에서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나 부인에게나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해군 시절에 남해 방면을 순항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그곳을 찾아가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파피티에 여러 달 살며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프랑스의 어떤 친구에게서 꾼 돈으로 포모투 군도에 있는 작은 섬 하나를 샀다. 그곳은 깊은 초호로 둘러싸인 환상의 무인도로, 잡목과 야생 물레나무만이 우거져 있는 섬이었다. 원래 겁이 없는 아내와 몇 명의 토인을 데리고 그는 그 섬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코코야자 숲을 만들 작정으로 잡목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며, 그때는 불모지였던 그 섬이 지금은 하나의 정원으로 바뀌었다. "처음으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지만 나와 집사람은 피땀 흘려 가며 일했죠. 매일 날이 새기가 무섭게 일어나 숲을 갈아 엎고 코코야자를 심고, 집을 짓기에 열을 냈습니다. 해가 져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우면 그대로 날이 샐 때까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잤어요. 집사람도 나 못지 않게 열심히 일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지요. 첫번째가 남자아이고 두 번째가 여자아이였어요. 우리 부부가 선생이 되어 알고 있는 것은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프랑스에서 피아노를 한 대 구해다 집사람이 두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영어 회화도 가르쳤어요. 나는 라틴어와 수학을 담당하고, 그리고 역사를 함께 공부했죠. 아이들은 돛을 다룰 줄도 알았고 수영도 토인이나 다름없이 잘했어요. 섬의 일이라면 그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죠. 우리가 심은 나무는 무럭무럭 자랐고 산호초에는 조개류도 있어요. 이번에 타히티에 나온 것은 스쿠너 선을 한 척 사려고 온 겁니다. 조개류도 타산이 맞고 혹시 진주를 따게 될지도 모르는 거죠. 아무것도 없던 곳에 나는 이만한 것을 이룩해 놓은 겁니다. 그리고 또 아름다움도 가꾼 셈이죠. 아아, 그 높다랗게 자란 싱싱한 숲을 바라보며 더구나 그 하나 하나를 내 손으로 심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아마 모를 거예요" "그럼 당신이 스트릭랜드에게 하셨다는 질문을 이번에는 제가 당신에게 하겠습니다. 당신은 프랑스며 브르타뉴의 옛집 생각이 전혀 나지 않습니까?" "언젠가 딸이 시집을 가고 아들이 장가를 들어 이 섬을 나 대신 돌볼 사람이 생기면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내가 태어난 옛집에서 여생을 보낼 겁니다" "그럼 그때는 즐거웠던 이곳 생활이 생각나시겠군요" "그야 물론이죠. 우리 섬에는 자극이라고는 없죠. 바깥 세계와는 너무나 떨어져 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타히티에 오는 데도 나흘이나 걸리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섬에서 충분히 즐거운 생활을 보내지요. 한가지 일에 마음을 쏟아 그것을 완성하는 기쁨이란 그렇게 흔히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 생활은 검소하고 순수합니다. 지나친 야심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자랑이라면 우리 손으로 완성했다는 것이지요. 남의 악의에 고민하는 일도 없고, 남을 시기할 일도 없어요. 정말이지 흔히 사람들이 입에 담는 노동의 기쁨이란 것도 실은 무의미한 말이에요. 그러나 나는 그 절실한 의미를 아주 잘 안답니다. 나는 복받은 사람이에요" "당연히 그럴 만도 하겠군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과연 내가 훌륭한 친구였고 협력자였으며, 또 완전한 주부이자 완전한 어머니였던 집사람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었다고요" 이렇게 말하는 선장의 말을 통해서 상상할 수 있는 생활에 대해 나는 잠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생활을 보내고 그것이 지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결실을 보게 되려면 분명히 더 강인한 의지와 굳센 성격을 가져야 했겠죠"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요소가 있었어요. 그것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 했을 겁니다" "그게 뭡니까?" 그는 조금 극적인 자세로 발을 멈추고 한쪽 팔을 뻗었다. "신앙심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 말입니다. 신앙이 없었더라면 우리도 도중에서 좌절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때 우리는 쿠트라 박사네 현관 앞에 와 있었다. 55 쿠트라 박사는 키가 매우 크고 뚱뚱한 프랑스 노인이었다. 그의 몸은 마치 거대한 오리알 같았다. 인품이 좋아 보이는 날카로운 푸른 눈으로 가끔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자기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빛은 불그레했고 머리는 백발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당장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리를 맞아들인 방은 프랑스의 시골집에 있는 방 같았다. 장식된 폴리네시아 인의 한두 개의 민예품이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참으로 큰 손이었다-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날카로움이 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는 브뤼노 선장과 악수를 나누며 부인과 아이들도 잘 있느냐고 공손한 말로 물었다. 한동안 안부를 묻는 말, 섬 이야기, 코프라와 바닐라의 수확고 예상 이야기 등이 오고간 뒤 나는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나는 쿠트라 박사의 이야기를 나 자신의 말로 바꿔서 전할 작정이다. 도저히 박사의 그 생기 넘치는 말투를 정확히 전하기가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 박사의 목소리는 그 거대한 체구처럼 굵직하고 낮았으며 울렸다. 게다가 극적 효과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흔히 말하듯 마치 연극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시원치 못한 연극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어느 날 쿠트라 박사는 병이 든 늙은 여추장을 진찰하기 위해 타라바오까지 왕진을 갔던 모양이다. 거창한 침대 위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숱한 흑인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뚱뚱한 늙은 여추장의 모습을 말하는 박사의 이야기는 눈앞에 보듯 생생했다. 그 늙은 추장을 진찰한 박사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식사 대접을 받았다. 생선회와 튀긴 바나나, 거기다 병아리 요리 등이었다.-이것이 토인들의 대표적인 음식이에요.-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박사의 눈에 문 밖으로 쫓겨 나가며 울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별로 마음에 두지도 않았는데 돌아갈 무렵에 마차를 타려고 하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 아직도 그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슬픔에 지친 듯한 얼굴로 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양쪽 볼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토인에게 저 여자아이가 왜 저러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어떤 백인이 병이 들어 박사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이곳 사람들이 선생님은 바빠서 안된다고 거절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박사는 직접 그 아이를 불러서 무슨 용건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이 자기는 전에 오텔 드 라 플뢰르 호텔에 있었던 아타의 심부름으로 왔다며, '붉은 수염 아저씨'가 아프다는 말을 했다. 아이는 박사의 손에 꼬기꼬기 구겨진 신문지를 쥐어 주었다. 박사가 그 신문지를 펴 보니 안에서 백 프랑 짜리 지폐가 한 장 나왔다. "붉은 수염 아저씨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요" 하고 옆에 있던 토인에게 물어 보았다. 토인의 말에 의하면 영국인 화가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고, 거기서 7킬로미터 가량 들어간 산 속에서 아타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였다. 이야기 내용으로 보아 그것이 스트릭랜드라는 것을 알았는데, 거기까지 마차가 들어갈 수 없고, 박사는 도저히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인들은 그 여자아이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래요" 하고 박사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주저했어요. 걷기 힘든 산길을 왕복 14킬로미터나 걸어야 하다니 달가운 일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일단 가면 그날 밤으로 파피티에 돌아올 가망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스트릭랜드라는 사람에게 나는 호감을 갖지 않았지요. 그 사람은 게으른 데다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으로 우리들처럼 생활을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토인 여자와 함께 사는 그런 작자였으니까요. 정말이지 그 사람의 천재성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날이 오게 되다니, 나 같은 게 신이 아닌 이상 어찌 알 도리가 있었겠소. 나는 그 아이에게 그 아저씨는 내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없을 정도로 아프냐고 물어 보았죠. 그러나 아니는 대답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고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사실 그때는 화도 났어요. 그 아이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더니 와락 울음을 터뜨렸어요. 참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나는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하기야 가서 진찰하는 게 의사의 의무일지도 모르죠. 그렇게 생각하고 그럼 길을 안내하라고 그 아이에게 말했죠" 그곳에 도착했을 때도 박사의 기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목은 바싹 탔다. 아타가 박사를 기다리다 못해 도중까지 마중을 나왔다. "환자를 보기 전에 마실 것 좀 주시오.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소" 하고 박사는 큰 소리로 말했다. "코코야자 열매라도 좀 따와요" 아타가 악을 써서 부르니 남자아이가 하나 뛰어나왔다.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익은 열매를 하나 따서 내려 보냈다. 아타가 그 열매에 구멍을 뚫어 박사에게 주자 박사는 아주 맛있게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손수 말아 피우니 그제야 박사는 좀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붉은 수염 아저씨'는 어디 있소?" 하고 박사가 물었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 사람한텐 알리지도 않고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안에 들어가셔서 봐 주세요" "아니 도대체 어디가 아프단 말이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라면 타라바오까지 내려올 수도 있을 것 아니오, 나를 이 먼 곳까지 오게 하지 말고, 나도 그 사람 못지 않게 바쁜 사람이란 말이오" 아타는 아무 말도 않고 소년과 함께 박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를 안내해 온 여자아이는 그때 베란다에 앉아 있었고, 그곳에는 또 한 사람의 노파가 벽에 등을 대고 누워 토인 담배를 말고 있었다. 아타는 문을 가리켰다. 박사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이상한 것에 불안을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스트릭랜드가 팔레트를 닦고 있었다. 이젤에는 그림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허리에 파레오를 걸쳤을 뿐, 반은 벗은 모습으로 문을 등지고 서 있다가 구두 소리가 나자 휙 돌아서서 화난 표정으로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예상치도 않던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박사는 소름이 끼쳤다. "노크도 없이 들어왔군요"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무슨 용건이오?" 박사는 마음을 진정시켰으나 목에 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까까지 끓어오르던 화는 사라지고 박사는 솟아오르는 동정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사 쿠트라요. 마침 여추장을 진찰하러 타라바오까지 왔던 참인데 당신을 진찰해 달라고 아타가 사람을 보내서 왔소" "공연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니, 바보 같으니라구. 요즈음 여기저기가 아프고 쑤시며 열도 좀 있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으니 곧 나을 거요. 누가 파피티에 나가는 길이 있으면 키니네나 좀 사오라고 그럴 작정이었는데" "거울로 그 몰골을 좀 봐요" 스트릭랜드는 박사를 흘끗 쳐다보고 히죽 웃더니 벽에 걸려 있는 나무테를 두른 거울 앞까지 갔다. "어떻다는 거요?" "얼굴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있는 걸 모르겠소?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소. 의사들은 '사자의 얼굴'이라고 부르고 있소만, 그걸 모르겠소? 당신이 무서운 병에 걸려 있다는 걸 내 입으로 말해야 되겠소?" "아니 내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면 전형적인 나병 환자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아니오?" "놀리고 있군요, 당신은" 하고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그럼 내가 문둥병에 걸렸단 말이오?" "안된 노릇이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소" 쿠트라 박사는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죽음 선고를 내려 왔던가. 그런 때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박사는 어쩔 수 없었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환자가 정상적이고 건강하고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의사와 자신의 몸을 비교해 보고는 틀림없이 심한 증오를 느낄 거라고 박사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박사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저주스러운 병으로 이미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움직임도 볼 수 없었다. "모두들 알고 있나요?" 하고 가까스로 입을 연 그는, 그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침묵 속에 베란다에 앉아 있는 토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이 병을 잘 알고 있어요" 하고 박사는 대답했다. "다만 그것을 당신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오" 스트릭랜드는 문 앞으로 걸어가 거기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소름이 끼칠 만한 징후를 보았음인지 토인들은 갑자기 기성을 지르더니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들은 더욱더 목놓아 울었다. 스트릭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더니 방 안으로 돌아왔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것 같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소. 때로는 20년이나 계속되는 일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증세가 빨리 진행된다면 차라리 다행이오" 스트릭랜드는 이젤 앞으로 가더니 생각에 잠겨 거기 놓여 있는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먼 길을 찾아와 주었소. 중대한 일을 알리러 온 사람에게는 사례를 하는 게 당연하죠. 이 그림을 가지시오. 당장에는 필요 없는 그림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가지고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쿠트라 박사는 왕진비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백 프랑 짜리 지폐도 이미 아타에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꼭 그림을 가지고 가라고 고집했다. 그런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베란다로 나갔다. 토인들은 하늘이라도 내려앉은 듯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봐 조용히 해. 눈물을 닦으라고" 스트릭랜드는 아타를 보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나는 곧 떠날 테니까. "혼자 간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그녀의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때만 해도 섬에서는 격리가 엄격하지 않아 나병 환자도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나는 산으로 갈 거야" 스트릭랜드는 말했다. 그러자 아타는 벌떡 일어서서 스트릭랜드 앞으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은 다 가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만은 안 돼요. 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당신은 제 남편이고 저는 당신 아내입니다. 당신이 저와 헤어진다면 저는 뒤뜰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 버리겠어요.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강한 힘이 있었다. 이미 그녀는 온순하고 부드러운 토인 여자가 아니라 단호한 여자였다.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왜 나하고 같이 있겠다는 거야? 파피티로 돌아가면 또 다른 백인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애들은 저 할머니가 돌봐 줄 테고, 네가 돌아가면 티아레도 반가워할 거야" "당신은 저의 것이고,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고 따라가겠어요" 한순간 스트릭랜드의 굳은 결심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두 눈에 눈물이 괴더니 조용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란 참 묘한 동물이오" 하고 그는 쿠트라 박사에게 말했다. "개 취급을 받고, 이쪽이 팔이 아플 정도로 두들겨 주어도 역시 사랑은 변하지 않는가 봐요"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말할 것도 없지만 여자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 낸, 참으로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한 거요" "선생님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지요?" 하고 아타는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설마 당신, 집을 나가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난 여기 있겠어" 그러자 아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두 팔로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스트릭랜드는 빙긋 웃으며 쿠트라 박사를 쳐다보았다. "결국 여자가 이긴 셈이군요. 일단 잡히면 어쩔 수 없는 거요. 살갗이 희건 검건 여자는 다 같아요" 쿠트라 박사는 그런 무서운 병에 걸린 환자에게 이제 새삼 안됐느니 하는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부질없을 것 같아 그대로 자리를 떴다. 스트릭랜드는 소년 타네에게 박사를 마을까지 안내해 드리라고 일렀다. 쿠트라 박사는 여기서 말을 잠시 끊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원래 호감 가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천천히 타라바오까지 내려오며 생각하니, 인간이 받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그 병고를 꾹 참고 있는 그 용기에는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타네와 헤어질 때 약을 보내 줄 텐데, 그 약을 먹으면 효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줬죠. 하기야 스트릭랜드가 그 약을 먹을지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만일 먹는다 해도 신경이 안정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거든요. 나는 또 부르러 오면 언제고 가겠다고 하더라고 아타에게 이르게 했죠. 인생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고, 자연은 때로 자기의 어린 인간들을 괴롭히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일이 있으니까요. 나는 파피티의 우리 집에 돌아와서 쉬면서도 마음은 무겁기만 하더군요" 오랫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타는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어요" 이윽고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쪽으로 갈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스트릭랜드의 소식을 알 수 없었죠. 한두 번 아타가 그림 재료를 사러 파피티까지 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여자를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2년이 훨씬 지나서 나는 다시 타라바오에 갈 일이 생겼어요. 그때도 그 늙은 추장을 진찰하러 갔죠. 그 무렵엔 스트릭랜드가 나병에 걸린 사실은 모두 알았죠. 난 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없는지 물어 봤죠. 처음에는 그 소년 타네가 집을 나갔고 뒤이어 노파와 손녀딸이 나갔다고 하더군요. 아타와 아이들만이 스트릭랜드와 함께 있었던 거죠. 이제는 아무도 그 농장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토인들도 그 병에는 상당한 공포를 품고 있었으니까요. 옛날에는 나병 환자를 발견하면 죽였어요. 그러나 때로 마을 아이들이 산에서 놀다가 그 붉은 수염의 백인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대요. 이따금 아타가 밤중에 마을에 내려와 상인을 깨워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을 사는 일은 있었다는 거예요. 그녀는, 토인들이 스트릭랜드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까지도 무서워하며 피하는 걸 알았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어떤 때는 몇몇 여자들이 용기를 내어 농장에 가까이 갔는데 그녀가 냇물에서 빨래하는 걸 보고는 아타에게 돌을 던졌다나 봐요. 그런 뒤 여자들은 그 여자가 다시 시냇물에서 빨래를 했다가는 남자들을 시켜 그 여자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말을 상인에게 전하라고 일러 뒀다는 거예요" "무지한 인간들이군"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죠. 사람이란 다 그런 거예요. 공포심이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거죠. 나는 스트릭랜드를 만날 결심을 했어요. 여추장의 진찰을 마치자 그곳의 한 소년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혼자서 길을 찾아가야만 했어요" 농장에 도착한 쿠트라 박사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산길을 걸어 온몸에 열이 났는데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뭔가 모르게 살벌한 공기가 박사의 발을 멈추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박사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코코야자 열매를 따러 오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근처에는 썩어 가는 열매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어디를 보나 황폐했다. 잡목이 자랄 대로 자라고 그렇게 애써 개척한 땅이 다시 울창한 원시림으로 되돌아갈 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 같았다. 마치 고뇌의 소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박사는 몸서리를 쳤다. 그 집에 가까이 가 보니 무서운 침묵이 주위를 휩싸고 있었다. 처음에 박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줄 알았다. 곧 아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부글부글 끓는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 곁에서는 작은 남자아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놀고 있었다. 박사의 모습을 보아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를 만나러 왔네" 박사는 말했다. "그렇게 전하죠" 그녀는 베란다로 연결되는 낮은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도 그녀를 뒤따르려고 했으나 그녀가 손으로 말리는 바람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병 환자에게서 나는 메스껍게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타의 말소리가 들리고 스트릭랜드의 대답이 들려 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쉰 목소리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병마가 이미 그의 성대까지 침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타가 돌아왔다. "만나지 않겠대요. 그냥 돌아가세요" 쿠트라 박사는 꼭 만나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그녀는 박사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쿠트라 박사는 어깨를 움츠리고 잠깐 생각한 다음 발길을 돌렸다. 그녀도 함께 따라나왔다. 박사는 그녀 역시 자기가 가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하고 박사는 물어 보았다. "그이에게 그림 물감을 보내 주세요" 그녀는 말했다. "그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에요" "아직도 그림을 그릴 수는 있나?" "지금은 집 벽에 그리고 있어요" "가엾게도 자네 고생이 많겠군" 그러자 비로소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초인적인 사랑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쿠트라 박사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려운 생각이 들어 말이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이는 제 남편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린애 하나는 어디 있지? 요전에 왔을 때는 둘인 것 같았는데" "네, 하나는 죽었어요. 망고나무 밑에 묻어 줬죠" 아타는 박사를 한동안 따라오더니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너무 멀리 내려갔다가는 마을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박사는 알아차렸다. 박사는 만약 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라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56 그로부터 또 2년이 지났다. 아니 어쩌면 3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타히티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해 두기란 쉽지 않다. 마침내 스트릭랜드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아타가 파피티로 우편물을 싣고 가는 마차를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곧 박사에게 그 말을 전해 달라고 마부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기별이 왔을 때, 공교롭게도 박사는 외출 중이어서 그것을 안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밤늦게 떠날 수도 없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타라바오에 도착하여, 아타네 집까지 7킬로미터나 되는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오솔길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고 지난 몇 년 동안은 거의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었다. 길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냇가를 따라 걸어가기도 하고 사방에 우거진 가시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또 머리 위 나무에 매달린 호박벌 집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몇 번이고 바위 위를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사방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가까스로 페인트 칠 하나 하지 않은 그 작은 집을 찾아냈을 때는 그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집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이집 역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남자아이가 양지 쪽에서 놀고 있다가 그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 도망쳐 버렸다. 그 아이는 나무 그늘에 숨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두드려 봤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리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러 그는 심한 구토를 일으켰다. 손수건을 코에 대고 꾹 참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짝이는 햇빛을 받고 있다가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마법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느꼈다. 울창한 원시림과 그 나무 사이를 나체로 배회하고 있는 인간의 무리가 흐릿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박사는 그것이 벽 전체에 그려진 벽화라는 것을 알았다. "더위 때문에 내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 무엇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아타가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아타!" 하고 그는 불렀다. "아타!"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숨을 쉴 수 없는 악취에, 그는 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아 허둥지둥 엽궐련에 불을 붙였다. 눈이 어둠에 차츰 익숙해져 감에 따라 벽화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는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림에는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그였으나, 그 그림에는 어딘가 모르게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벽 전체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구도로 그려져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어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다. 천지 창조를 바로 눈앞에서 본 사람이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과 환희를 맛본 것이다. 그 그림에는 관능적인 정열이 넘쳐 있었는데, 또한 그 밑바닥에는 몸서리쳐지게 하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대자연 속으로 파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갖가지 비밀을 알게 된 인간의 작품이었다. 즉 그것은 인간으로서 알기를 허용치 않는 여러 가지 신성한 비밀을 찾아낸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거기에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전에 들은 일이 있는 악마의 비법이라는 말을 막연하게 연상하고 있었다. 아주 음탕한 아름다움이 가득 찬 그림이었다. "아아, 이거야말로 천재로구나!" 그 말은 무의식중에 그의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윽고 그는 방구석에 깔려 있는 돗자리 위로 시선을 돌리고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전에 보던 스트릭랜드와는 전혀 딴판인, 즉 사지가 다 뭉그러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무서운 물체였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쿠트라 박사는 단단히 맘먹고 그 뭉그러진 무서운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으나, 다음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다.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등뒤에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타였다. 그는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옆에 서서 역시 그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내 신경도 어떻게 된 모양이군" 하고 그는 말했다.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 뻔했소" 다시 그는 전에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한낱 추악한 살덩이에 지나지 않은 그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곧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는 눈이 멀었군!" "예, 그이는 벌써 1년 전부터 앞을 볼 수 없었어요" 57 마침 그때 외출을 했다가 쿠트라 부인이 돌아와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그녀는 마치 돛에 바람을 안은 배처럼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살집이 좋은 몸을 찹쌀자루처럼 코르셋으로 꽉 졸라 맨 비만형의 키가 큰 여자였다. 살이 많은 매부리코와 세 겹으로 겹쳐진 턱을 가진 우람한 체구를 뒤로 꼿꼿이 젖히고 있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열대의 마력에 굴하기는커녕 온대에 사는 사람이 설마 하고 생각할 정도로 활동적이고 세상일에 능숙하고 민첩했다. 지독한 수다쟁이인 듯 들어오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세상 이야기며 그 내막까지를 들추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까 우리가 했던 이야기는 마치 별세계의 꿈 이야기 같았다. 이윽고 쿠트라 박사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준 그림을 아직도 진찰실에 걸어 놓고 있습니다. 어디 한 번 보시겠습니까?" "네, 보여 주십시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앞장서서 집을 둘러싸고 있는 베란다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발을 멈추고 뜰에 가득 피어 있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았다. "스트릭랜드가 그 집 벽 전체에 그린 그 비범한 그림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아로새겨져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하고 박사가 감회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나도 아까부터 그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림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묵묵히 화필을 움직이며 그는 인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예상했던 모든 것을 그렸을 것이다. 아마 그는 그 그림 속에서 처음으로 영혼의 안식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악마가 드디어 추방되고, 그 일생이 모두 그것을 위한 괴로운 준비에 지나지 않았던 역작이 완성되자, 영원한 잠이 그의 고고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영혼 위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여느 때 지녔던 뜻을 이루고 조용히 잠들었을 것이다. "그래 그 그림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환상적인 작품이었어요. 태초의 세계, 즉 아담과 이브가 있던 에덴 동산의 모습을 그린 모양이에요. 말하자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이며, 웅대하고 비정하고 감미롭고 냉혹한 대자연에 대한 찬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어요. 그 사람은 그 그림 안에 흔히 볼 수 있는 코코야자, 벤골보리수, 플램보이언트, 아보카드 같은 식물을 그려 넣었는데, 그 그림을 본 뒤로는 그런 것을 보는 내 눈이 아주 달라졌어요. 웬일인지 그런 식물 속에 정체 모를 요정 같은 것이 숨어 있어 그것이 곧 내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언제까지고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 빛깔도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색이었는데도, 어딘가 달랐어요. 모두가 각각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예요. 남녀의 나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상에 있는 인간이었지만 역시 어딘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흙덩이로 이루어진 인간의 체취를 다분히 지니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신과 흡사한 점을 지니고 있었어요. 원시적인 본능을 남김없이 노출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소름이 끼친 것은 나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보았기 때문이지요" 쿠트라 박사는 어깨를 움츠리고 조용히 웃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웃으실 거예요. 어쨌든 나는 유물론자인 데다 보다시피 이렇게 뚱뚱하게 살이 쪘으니까요. 마치 세익스피어의 '원저의 명랑한 부인들'에 등장하는 펄스타프 같죠? 서정적인 사고 방식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지만, 그처럼 내가 깊은 감명을 받은 그림은 처음입니다. 하기야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갔을 때 마치 이와 비슷한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어요. 거기서도 나는 그 천장에 그림을 그린 인간의 위대함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뛰어난 천재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웬일인지 내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보는 쪽에서 미리 그는 위대하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거지요. 어쨌든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타라바오의 깊숙한 산골짜기에 있는 토인 집에서 그것을 보게 된 거예요. 게다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온당하고 건전해요. 그의 그 걸작 속에는 숭고한 조용함이 감돌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의 그림 속에는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은 안 갑니다만, 어쨌든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어떤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이를테면 방에 앉아 있을 때 옆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쩐지 누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는 일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럴 리가 있나 하고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하고 마음 탓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역시... 웬일인지 무서워서 보이지 않는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 하게 되는 그런 상태였어요. 그래서 나는 그 이상한 걸작이 타 버렸다는 말을 들었어도 그다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타 버렸다구요?"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습니다. 아직 모르셨던가요?"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 작품에 대해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어떤 개인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어쨌든 스트릭랜드의 그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작품 목록도 만들어져 있지 않는 형편이니까요" "실명한 뒤로는 그 두 방의 벽화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 완성된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는군요. 아마 실명하기 전보다 모든 것이 더 뚜렷이 보였는지도 모르죠. 아타는 그가 한번도 자기의 비극적인 운명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한 때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끝까지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이성을 잃는 일도 전혀 없었대요. 그는 아타에게 이런 약속을 하게 한 거예요. 즉 자기를 파묻고 나거든-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내 손으로 그 사람의 무덤을 팠어요. 토인들은 병균이 우글거리는 그 오두막이 무서워 아무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아타와 나 둘이서 파레오를 세 개 가량 이어 꿰매어 그것으로 시체를 싼 다음 망고나무 밑에 묻어 줬소. 그 약속이란, 매장이 끝나는 대로 그 오두막에 불을 질러 나무 조각 하나 남김없이 다 타 버릴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깊은 감회에 잠겨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스트릭랜드는 마지막까지 정신이 말짱했군요" "내 심정을 알아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물론 나는 그때 벽화를 태우지 말라고 아타에게 충고했죠. 그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좀전엔 그다지 아깝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그건 그래요. 나도 그것이 바로 천재의 작품이라는 것쯤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걸작을 이 세상에서 말살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아타는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약속을 한 이상 어길 수 없다는 거죠. 나는 그런 야만스러운 행위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돌아오고 말았죠. 그러니까 그 뒤의 소식은 나중에 들었을 뿐이죠. 잘 마른 마룻바닥과 판다나스 돗자리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나 봐요. 그러자 삽시간에 오두막은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그 위대한 걸작도 자취를 감추고 만 거죠" "그럼 당사자인 스트릭랜드도 그것이 걸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그 사람은 자신이 갈구하던 것을 달성하고 그의 일생을 마친 셈입니다. 즉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여 이제 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결국 자랑과 모멸이 섞인 기분으로 그것을 태우라고 한 거겠죠" "얘기는 이쯤 해두고 그림을 보러 갈까요" 쿠트라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발을 옮겼다. "그래 아타와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 모자는 마르케이사스 군도로 갔어요. 그곳에 친척이 있다나 봐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들은 카메론의 범선에서 일을 한다는군요. 자기 아버지를 쏙 빼 닮았대요" 베란다에서 진찰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박사는 잠깐 멈추어 서더니 히죽 웃었다. "실은 과일 그림인데요. 환자를 진찰하는 방에 걸어 둔다는 것은 좀 걸맞지 않지만 집사람이 응접실에 걸기를 싫어해서요. 한 마디로 외설적인 느낌이 들어 쳐다볼 수 없다는 거예요" "아니 과일 그림이 그렇다는 겁니까?" 나는 놀라 소리쳤다. 진찰실에 들어가니 그 그림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망고, 바나나, 오렌지, 그 밖에 내가 모르는 과일을 담아 놓은 그림이었다.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그림이었다. 어쩌면 후기 인상파의 전람회 같은 데서 가작이긴 해도 별로 볼 만한 작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그 그림이 머리에 떠오르면 나 자신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깨끗이 지울 수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색채도 아주 기묘해서 보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했다. 흐릿한 푸른 빛은 마치 정교한 조각을 한 청금석의 그릇 같은 은근한 빛을 띠고, 더구나 신비로운 생명의 고동을 연상시키는 것같이 은은한 광택을 띤 채 떨리고 있었다. 자줏빛은 날고기와 같은 기분 나쁜 빛깔이었으나 그러면서도 옛 로마 제국을 연상시키는 듯한 정열에 빛나고 있다. 빨간색은 서양 감탕나무의 열매처럼 선명하고 영국의 크리스마스나 눈, 그리고 잔치며 아이들의 기쁨을 연상케 하는데, 그것이 또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색조가 점점 엷어져 마치 비둘기의 가슴털 빛처럼 사라지는 듯한 색상으로 끝나고 있었다. 짙은 노란색은 언뜻 변태적인 욕정을 생각케 하면서도, 그것이 슬그머니 녹색으로 변해 버린 곳은 봄의 새잎처럼 향기롭고, 반짝이는 시냇물처럼 깨끗했다. 도대체 어떤 영혼의 고통 속에서 이런 과일을 그려 냈을까? 그것은 말하자면 남태평양의 헤스페리데스 자매들이 지킨 과수원의 산물이었다. 그려진 과일 속에는 야릇한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만물이 지금처럼 정돈되지 않았던 지구의 암담한 혼동기에 창조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탐스럽게 익었다는 느낌이며 열대의 향기가 짙게 풍기는 것 같았다. 과일 특유의 정열을 그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마술의 과일이며, 만일 그것을 맛볼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영혼의 비밀과 신비로운 상상의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과일은 뜻하지 않은 위기를 간직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맛 하나로,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모든 것, 인간의 행복과 관계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단순한 사람들의 단순한 기쁨, 그 모두가 완전히 화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무섭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마치 선악과처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든 가능성을 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그림에서 눈을 떼었다. 스트릭랜드는 그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채, 마침내 무덤으로 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보" 하고 부르는 쿠트라 부인의 크고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부터 당신 무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페리티프가 나왔어요. 손님에게 여쭤 보셔요. 캥키나 뒤보네를 한 잔 드시지 않겠느냐고요" "네, 고맙습니다, 부인" 나는 베란다로 나가며 대답했다. 갑자기 내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58 내가 타히티를 떠날 때가 왔다. 이 섬의 아름다운 관습대로 나도 우연히 알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코코야자 잎으로 만든 바구니며 판다나스의 돗자리며 부채 등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다. 특히 티아레는 작은 진주 세 알과 그 투실투실한 손으로 만들어 준 물레나물 젤리를 세 병이나 선물로 주었다. 웰링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24시간을 머무는 우편선이 승선 고동을 울리자, 그녀는 나를 그 큰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나는 마치 큰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빨간 입술을 나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호를 천천히 미끄러져 나온 기선이 조심조심 산호초 사이를 빠져 나와 확 트인 대양으로 진로를 돌리자,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 왔다. 산들바람은 아직도 섬의 산뜻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타히티란 이 세상 끝에 있는 섬이라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것으로 나의 생애의 한 장이 끝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길로 한 발 더 다가간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나는 런던 땅을 밟았다. 우서 급한 볼일부터 마치자,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편지를 냈다. 그녀도 남편의 만년에 대해 궁금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부인하고는 만난 일이 없어 주소를 찾는 데도 전화부를 뒤져야 하는 형편이었다. 부인이 만날 날짜와 시간을 지정해 왔으므로 나는 캠든 힐에 있는 아담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이미 육십에 가까운 나이지만 나이에 비해 늙지 않았다. 누가 보나 오십 이상으로는 볼 것 같지 않았다. 주름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갸름한 얼굴로 사실은 그다지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는데도, 젊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품위 있는 얼굴로 나이를 먹음에 따라 곱게 늙어 타입의 얼굴이었다. 아직 흰 머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머리를 아주 어울리게 잘 빗었으며 검은 가운도 유행에 맞는 차림이었다. 언니 맥앤드루 부인이 남편을 잃고 3년도 되기 전에 세상을 뜨자 그 유산이 스트릭랜드 부인 앞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는 형편이라든가, 안내하러 나온 하녀의 깨끗한 몸차림으로 보아 그 유산이 미망인의 조촐한 생활을 이끌어 나갈 만한 금액임을 알 수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가니 손님이 한 사람 와 있었다. 나중에 그 손님의 신분을 알고 보니 일부러 나를 그 시간에 오게 한 것 같았다. 손님은 밴 부시 테일러라는 미국 사람이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애교 있는 웃음을 손님에게 웃어 보이며 나에게 상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영국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예의가 없어요. 갑자기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그냥 소개해 드리겠어요" 상대방에게 그렇게 말을 해놓고 그녀는 나를 보았다. "밴 부시 테일러 씨는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세요. 이분의 저서를 읽지 않았다면 문명인의 수치일 거예요.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곧 읽어 보세요. 오늘은 찰리에 대한 것을 쓰시려고 저의 도움을 바라고 오신 거예요" 밴 부시 테일러 씨는 큰 키와 몹시 여윈 몸에 빤질빤질한 대머리의 소유자였다. 크고 둥근 지붕과 같은 머리 때문에 주름이 깊이 잡힌 노란 얼굴이 더 작게 보였다. 말끝마다 굽신굽신 지나치게 공손하게 구는 인물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사용했고, 그 태도에도 어딘가 모르게 냉혈동물 같은 차가움이 엿보였다. 어째서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까부터 스트릭랜드 부인은 남편 이름을 말할 때마다 간이 녹을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소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말을 나누고 있는 동안에 나는 방 안의 가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시대에 따라 취미가 달라졌다. 그 모리스 스타일의 벽지도 안 보였고, 점잖은 빛깔의 크레톤 천을 씌운 의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전에 애슐리 가든의 응접실 벽을 장식했던 안들 사라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것 대신에 방 안이 이상한 색채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유행을 따라 한 것이겠지만, 이같은 색채의 변화 그 자체가 남해의 작은 섬에서 비참한 생애를 마친 한 화가의 꿈에서 나왔다는 걸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의 다음 말로 나는 그녀가 그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건 아주 훌륭한 쿠션이군요" 밴 부시 테일러 씨가 말했다. "어머, 마음에 드세요?" 하고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박스트의 작품이에요" 벽에는 베를린의 모 출판사 기획으로 나온 원색판 스트릭랜드 걸작집 중에서 몇 장을 골라 걸어 놓았다. "저 그림을 보고 계시죠?" 그녀는 내 시선의 방향을 보고 말했다. "물론 원화는 구할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우선은 즐길 수 있어요. 출판사에서 보내 준 거지요. 저는 이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에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고 밴 부시 테일러 씨가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또 워낙 장식적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일면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테일러 씨가 맞장구를 쳤다. "뛰어난 예술은 항상 장식적이니까요" 두 사람은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나체 여인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그 모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꽃 한 송이를 내밀고, 뼈와 가죽만 남은 쪼글쪼글한 마귀 할멈 같은 노파가 그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이것은 스트릭랜드가 그린 '성가족'인 것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된 것은 그 타라바오 산속에 살고 있던 그 집 식구들일 것이다. 어머니와 어린애는 아타와 스트릭랜드의 장남일 것이다. 하지만 스트릭랜드 부인은 과연 그 사실을 꿈엔들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상대방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듣기 좋은 말만 눈치껏 하는 밴 부시 테일러 씨의 빈틈없는 태도와, 한편 거짓말은 안 했지만 특히 부부 사이가 언제나 원만했던 것처럼 말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천연스러운 말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밴 부시 테일러 씨는 돌아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주인과 악수를 나누며 아주 겸손하고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굉장히 지루했죠?" 그녀는 손님을 보내고 난 뒤 나에게 말했다. "하기야 나도 어떤 때는 막 짜증이 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찰리를 되도록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인 것 같아요. 천재의 아내였으니까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20여 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그 부드럽고 애교 있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롱 당하는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하시던 일은 이제 안 하시겠죠?" "네, 그만두었어요" 하고 그녀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심심풀이로 했을 뿐인 걸요, 뭐. 그나마 아이들이 그만두라는 거예요. 몸에 무리가 간다고요"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이 과거에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했던 그런 수치스러운 사실마저도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여자란 자기가 벌어서 먹으면 창피한 일이고, 남의 돈으로 먹고 살아야 정말 여자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상류 계급 여성들의 본능을 그대로 갖춘 여자였다. "마침 아이들도 집에 와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도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로버트를 기억하고 계시죠? 덕분에 이번에 전공 십자 훈장을 받게 됐어요" 그녀는 방문 앞에 가서 아이들을 불렀다. 성복처럼 스탠드 칼라가 달린 군복 차림의 키 큰 청년이 들어왔다. 다소 어두워 보이는 면도 있었지만,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 솔직한 눈초리는 내 기억에 있던 어렸을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오빠 뒤를 따라 여동생도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스트릭랜드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부인과 같은 나이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를 꼭 닮은 얼굴이었다. 그녀 역시 어렸을 때는 더 예뻤으리라는 착각을 갖게끔 하는 여자였다. "이 두 아이를 전혀 기억 못 하시겠죠" 스트릭랜드 부인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딸아이도 지금은 로날드슨 부인이에요. 남편은 포병 소령이죠" "그이는 앞으로 진짜 군인이 될 작정이에요. 아직 소령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고 로날드슨 부인이 명랑하게 말했다. 나는 옛날에 웬일인지 그녀가 장차 군인의 아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역시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군인의 아내로서 모든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온순하고 싹싹했으며, 그러면서도 보통 여자와는 좀 다르다는 점을 내세우는 면도 있었다. 로버트는 아주 쾌활한 청년이었다. "오랜만에 선생님이 찾아오셨는데, 마침 제가 런던에 있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말했다. "휴가가 사흘밖에 안 됩니다" "이 애는 일선으로 돌아가고 싶어 못 견디겠나 봐요"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일선에 있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친한 친구도 많고요. 가 보면 최고 생활입니다. 물론 전쟁은 싫지만 인간의 가장 좋은 면이 나타나는 것도 역시 전쟁입니다. 이 점은 부정치 못할 거예요" 그러고서 나는 타히티에서 들은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전부 말해 주었다. 다만 아타와 그 어린애에 대한 사실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에 꺼내지 않았고, 나머지 일은 되도록 상세하게 말했다. 스트릭랜드의 비극적인 죽음을 끝으로 말을 맺었다. 모두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로버트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느님의 절구 찧는 솜씨는 느리다 해도 매우 곱게 찧느니라' 하는 말과 같군요" 하고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스트릭랜드 부인과 로날드슨 부인은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 두 사람은 아마 이 구절이 성서에서 인용된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어면 로버트도 그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웬일인지 나는 그때 아타가 낳은 스트릭랜드의 아들을 생각했다. 듣기로는 명랑하고 마음이 착한 젊은이라는 것이다. 무명바지 하나만 입고 범선 갑판 위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둠이 깔리면 배는 산들바람을 안고 미끄러지듯 바다 위를 달린다. 선원들은 갑판에 모이고, 선장과 화물 감독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갑판 의자 위에 누워 있다. 그런 때 아타의 아들은 색색거리는 손풍금 소리에 맞추어 다른 젊은이들과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올려다보면 별이 총총한 하늘이 보이고, 주위는 망망 대해 태평양이다. 성서의 한 구절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참았다. 성직자들은 원래 그들의 금렵구에 속인들이 들어오면 마치 그것을 신을 모독하는 행위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스터블에서 27년 간이나 교구 목사 노릇을 했던 나의 백부 헨리는, 그런 경우에는 곧잘 악마라도 성서의 구절은 마음대로 인용할 수 있으니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런 때 백부의 머릿속에는 단 1실링으로 훌륭한 그 고장의 굴을 열세 개나 살 수 있었던 옛 시절의 일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