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 - 관련자료:없음 [2940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2 21:11 조회:310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 - ================================================================== 아르노 강화 조약 레이얄 국왕 폐하의 정부와 카르노 국왕 폐하의 정부, 신생 미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지난날의 불미스러웠던 일을 매듭짓고, 삼국간의 우호 관계를 회복 · 증진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항을 협정한다. 제 1 조 카르노는 신생왕국 미다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한다. 제 2 조 카르노는 세이노와 제노 두 지방을 미다에 할양한다. 제 3 조 카르노의 왕세자 전하를 비롯한 두 왕자 전하는 최소 5년 이상, 자피아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인 테리아에서 유학한다. 제 4 조 카르노의 왕세자 전하는 레이얄의 왕족과 성혼한다. 제 5 조 카르노의 이왕자 전하는 미다의 왕녀와 성혼한다. 제 6 조 카르노는 10억 실프를 레이얄의 군비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제 7 조 카르노는 10억 실프를 미다의 군비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위의 증거로서 레이얄 국왕 폐하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케니아스 폰 소렐과 카르노 국왕 칼리에르 3세, 미다 국왕 루크 1세는 이 조약에 서명 날인하며, 신성 테라의 신관이신 세리카님이 주신(主神) 케테르님의 이름으로 이 조약의 증인이 된다. 테라력 690년 7월 5일 아르노에서 본서를 작성한다. 케니아스 미카노르 폰 소렐 칼리에르 III 폰 카르노 루크 제피스토 폰 미다 증인 : 세리카 지 「아르노 강화 조약 전문」 제 1 장 군주의 자질에 대하여 딸랑딸랑딸랑. 왁자지껄한 주점 안으로 맑은 방울소리가 울렸다. 주점 특유의 어둑 어둑한 틈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진다. 아무도 신경쓰지않는 그 작은 사건을 민감하게 잡아낸 사람은 주점의 주인인 미레야였다. 미레야는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언제나의 그 밝은 미소와 시원시원한 목청으로 방금 들어온 두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십쇼! 아, 유트씨와 라에르씨시군요. 이번에는 꽤 오랜만입 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시큼한 주향을 들이마시며 삐걱이는 마루바닥을 가로지르던 두 청년은 두달이나 못본 자신들의 이름까지 기억하며 환 대하는 미레야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여전하시군요, 미레야씨는. 장사는 잘 되십니까?" 시원스러운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붙임성 있게 대꾸하며, 앞서서 바 로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는 유트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선이 강한 남자다운 얼굴과 결 좋은 검은머리, 서글서글한 눈매와 사람을 끌어들 이는 깊이 있는 검은 눈동자의 호남아다. 웃을 때면 장난기 가득한 소 년같아지는 생김생김이 아직 이 젊은이가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짙은 회색의 망토 속에 거친 면셔츠와 갈 색의 가죽 갑옷을 덧입고, 허리춤에 평범한 장검을 매고 있는 유트는 유쾌한 카르노의 젊은이, 그 자체로 보였다. "하하,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야 항상 할 일 없는 용병들 덕에 성황 이지요." 유트의 인사말에 미레야는 눈가에 잔잔한 주름을 잡고 사람좋은 웃 음을 웃었다. "어이어이, 설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주인장?" 바 앞에 자리잡고 앉는 유트와 라에르의 뒤쪽 테이블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걸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분히 시비조인 사내의 말에 호응하듯 그가 앉은 테이블과 주위의 테이블에서 '할 일 없는' 용병들 이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비난과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미 레야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천연덕 스럽게 대꾸했다. "그럼요, 설마 석달동안 마누라 치마폭에 싸여 시궁쥐를 세 마리씩 이나 잡은 할 일 많은 로우너씨를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아니고 말구요." 푸하하하하하------ 주점 내의 테이블들이 다시 쾅쾅쾅- 하는 소음을 내고,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로우너씨'라는 남자는 술로 붉어진 얼굴을 더욱 붉히며 뭐라고뭐라고 항변했지만, 더더욱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을 뿐이다. 자칫하면 싸움으로 번졌을지 모를 그 상황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미레야의 재치에 유트는 내심 감탄하며 혀를 내돌렸다. 그리고 반질반질하게 흑갈색 윤이 나는 바 앞으로 다가앉아 팔을 올려놓으며 술을 주문했다. "맥주 한 잔 주십시오. 라에르, 자네는?" "저도 맥주로 하겠습니다." 깍듯하게 대답하는 흑갈색 머리의 청년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미레야 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매번 유트와 함께 오는 라에르라는 젊은이로, 언제보아도 흐트러짐없는 단정한 청년이었다. 나이는 아마도 열 여덟 에서 스물 정도? 깔끔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는 외모에 키가 185리(1리 =1cm)에 육박하는 라에르는 언뜻 보기에도 타고난 무골이다. 분명 몇 년 뒤에는 대륙에서도 이름날리는 용병이 되어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 면 기사가 될 지도 모르지. 미레야는 내심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디 멀리로 갔었나 보지요? 두달이나 안보여서 설마 다 른 집으로 단골을 옮기셨나 했습니다?" 유트의 얼굴에 비치는 난처함을 미레야는 즐거운 기분으로 응시했 다. 그리고 응큼하게도 유트의 그런 표정을 못 본 척, 사람좋은 얼굴로 거품이 넘쳐나는 맥주 두잔을 밀어주었다. "…아, 그게……" "좀 멀리 갔다와서 두달동안 아르노 소식을 못들었습니다. 뭔가 흥 미있는 소식은 없습니까?" 유트는 남모르게 라에르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물론 때를 놓치지 않고 맞장구치는 것도 잊지않았다. "그렇습니다. 뭐 재미있는 일 없습니까, 미레야씨?" 미레야는 자신의 즐거움이 줄어들었음에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으 며,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오는 두 청년에게서 눈길을 비꼈 다. 마주 쳐다보기에는 어딘가 부담이 가는 눈빛들이라고 미레야는 생 각했다. "글쎄요…, 흥미로운 일이라……." 미레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컵을 닦는 손을 느리게 놀렸 다. 유트와 라에르. 몇 달 전부터 한달에 한번꼴로 방문하는 두 청년은 자신들의 말대로 '용병'이라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용병 의 옷차림이긴 하지만 새옷임이 분명한 저 구김하나 얼룩하나 없는 옷 들과, 손때라고는 묻지도 않는 장검, 그리고 무엇보다 용병이라기보다 는 기사에 어울릴 듯한 깍듯한 예절. 최근 5, 6년간, 아무리 카르노 남 자들이 용병으로 나서는 수가 늘어났다고 해도, 저 정도로 가정교육을 잘 받은 청년이 '용병'일 수 있을까? 미레야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 다. 저 두 청년은 '기사'는 될 지언정, '용병'이 될 자질은 아니다. 하지 만 그렇다면 왜 굳이 자신들을 용병이라고 속이며 주기적으로 용병의 소굴인 아르노의 뒷골목에 있는 '미레야씨네 주점'에 들리는 것일까? 처음에는 용병들의 소식을 은글슬쩍 물어대는 두 사람의 정체를 의 심했지만, 미레야는 곧 그들에게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 고는 곧 일종의 호기심이나 동경심일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쓸데없이 성안을 돌아다니며 허공에다 검을 휘둘러대는 기사들보다, 실제로 전 쟁에 참가하고, 마물을 처리하는 용병들을 동경한다는 것은 검에 뜻이 있는 청년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최근 들어 기사보다는 용병이 각광받는 것도 사실이고, 실제 수익도 용병쪽이 더 실속있으니까. 그러 고보면 저 두 청년도 꽤 귀여운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전직 용병인 미 레야에게는 자신의 전 직업을 동경하는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두 청 년이 마냥 흐뭇하게만 생각되었다. "미레야씨?" 의아한 듯한 유트의 목소리에 미레야는 자신이 혼자 헤실 웃고 있던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에, …재밌던 일이라……." 얼른 자신의 추태를 추스리고 지금까지 그 '재밌던 일'을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얼버무리면서, 이번에는 정말로 '재밌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레야는 오래지않아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용병 지망의 어린 청년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아아, 참, 얼마전에 치첼씨가 우리 주점에 들렀었지요. 용병이라면, 치첼씨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들어보셨겠지요?" 짖궂게도 '용병이라면' 과 '물론' 이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 말한 미 레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당혹감이 스치는 유트의 얼굴을 즐겁게 주시 했다. 저렇게 순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악의가 있을 일이 뭐란 말인가! "아… 무, 물론이지요." 모르는 게 분명한 유트의 대답에 미레야는 더욱 짖궂은 눈빛을 빛냈 다. 하지만 미레야의 머리속에서 구상되는 새로운 장난을 막은 것은 이번에도 저 지나치게 예의바른 라에르였다. "3년 전부터 유명해진 카르노 출신의 용병이지요. 북국(北國) 라디프 에서 마물 사냥꾼으로 이름높은 '치첼 용병대'의 대장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르노로 왔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치첼 용병대'도 전부 온 겁니까?" 미레야는 라에르 덕분에 놓쳐버린 즐거움에 대한 미련으로 쩝쩝 입 맛을 다시고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치첼 용병대'는 해산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럼, 아주 귀향한 겁니까?" 유트는 쌉싸름한 맥주의 맛을 즐기면서 라에르와 미레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에르가 '치첼'인지 뭔지하는 용병을 알고 있다는 게 놀 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한번 위기(?)에서 구해준 그가 고맙기 도 했다. '그런데 라엘이 알 정도면 꽤 유명한 용병인가?' 유트는 이어지는 미레야와 라에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향에 들르기는 한다고 했지만, 아직 정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고 하더군요. 당분간 여행하면서 일거리라도 찾아보겠다던가요?" "카르노에서 말입니까? 하긴 아스티노 산맥 북쪽에 마물이 나타났다 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왕실에서 마물 사냥에 돈을 투자하고 있지는 못할 텐데요? 각 지역 의 영주가 비용을 부담하는 겁니까?" 유트는 슬쩍 끼어들어서 의문을 표시했다. 마른 걸레로 컵을 닦던 미레야의 손길이 멈추고, 밝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미레야의 표정 변화를 유트는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미레야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유트의 옆에서 들려왔다. "카르노 왕실이야, 마물 사냥에까지 쓰실 돈이 있을까? 듣자하니 요 새는 모리노 남작부인의 드레스와 보석값을 대느라고 정신이 없다지, 아마?" 명백한 조롱과 비난의 말이었다. 이곳이 카르노의 왕실이 있는 수도 아르노이고, 왕실 근위대나 국왕 친위대, 혹은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자 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 사내는 지금 상당히 대 담한 발언을 한 것이다. 유트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갈색의 거친 머리결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마른 몸집의 사내였다. 가죽으로 된 보호구를 상의에 덧입고, 허리에는 장검을 매달 고 있었다. 매서운 눈매를 내리깔아 맥주잔을 내려다보던 그 사내는 슬쩍 고개를 틀어 유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왜, 내 말에 불만있나, 애송이?" "……." 무례한데다 도발하는듯한 말투였다. 생전 처음 듣는 욕설에 유트는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유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망설였다. 싸우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유트는 냉막하게 대 꾸했다. "흥미로운 견해로군요. 당신의 고견을 좀더 들을 수 있겠습니까?" "흥" 사내는 코웃음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목젖이 요동을 치다가 잠잠해지자, 사내는 젖은 입술을 소매로 슥 닦 고는 빈 잔을 미레야에게 밀어냈다. "한 잔 더!" 유트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안색을 굳혔다. 유트는 이런 식의 무시 나 모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불편한 기분이, 목소리에도 여실히 드러 났다. "왜, 막상 말하려니까 사람들의 눈이 두렵기라도 합니까? 하지만 왕 실모독죄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그 죄는 이미 저질러졌다고 보는데 요?" 순간 사내가 고개를 홱 돌리고 유트를 노려보았다. 물어뜯을 듯이 사나운 맹수의 눈빛이었지만, 유트는 전혀 굽히는 기색없이 마주 쏘아 보았다. 유트는 잘못한 것이 없었고, 또 잘못했더라도 당당해야 한다고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자신이 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입에 담지 마십시 오. 대책도 없이 그저 비난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일신상의 안전을 위 해서라도 입을 다무는 것이 낫습니다." "흥, 그래서?" "……?" "지금 네가 날 근위대에 고발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응? 그러고보니 곱상하니 생긴게, 왕실 끄나불이라도 되나 보군, 안그래, 애송이?" 곱상하게 생긴 것과 왕실 끄나불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무시한채, 사내는 적을 보는 듯한 눈매로 쏘아보며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유트는 싸늘하게 사내를 마주 쏘아보며,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사내는 그런 유트의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충동적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보시오들! 여기 이 애송이가 아무래도 왕시……!?" 스르릉- 들릴 듯 말 듯한 금속마찰음과 동시에 사내의 목줄기에는 냉기가 흐르는 은빛의 검날이 들이밀어졌다. 지그시 눌러지는 검 끝에 새빨간 피가 배어나왔다. 사방의 이목이 검끝으로 목이 쳐들린 사내와 검을 쥔 흑갈색 머리의 청년, 라에르에게 일제히 몰려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 밖 에 없었다. 라에르는 냉엄하게 사내를 쏘아보며 속삭였다. "죽고 싶은가?" "…뭐… 뭐냐, 넌… 비겁하게……" 사내가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검끝은 집요하게 그의 목줄기로 들러 붙었다. 라에르는 코웃음을 치며, 입술끝을 비틀어올렸다. 날카로운 눈 초리에 냉혹한 살기와 조소가 흘렀다. "흥, 비겁? 뒤에서 쥐새끼처럼 비난이나 일삼는 놈이 입에 담을 말 은 아닌 것 같은데?" "너……!" 라에르는 더 세게 사내의 목을 압박하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죽고싶지 않으면 조용히 꺼져라. 물론 미레야씨에게 폐 되지않게 술값은 지불하고 나가야겠지. 셋 센다. 하나. 둘…" 사내는 자신을 향한 라에르의 흔들림없는 눈빛을 마주하고, 정말 자 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정당한 싸움이 아니었 다. 방심한 사이에 목숨을 확보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만큼 사내는 섣불리 대항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붉게 변한 안색 으로 돈주머니를 꺼내 은화를 내던지듯 바 위에 내려놓고 거친 걸음으 로 밖으로 나갔다. 마루바닥을 울리는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주점안에 크게 울렸다. 라에르는 사내가 나갈때까지 경계를 풀지 않다가, 사내가 완전히 밖으로 사라져버리자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유트를 돌아보았 다. 절도있는 움직임이다. 유트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였다. 그는 눈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찌푸린 얼굴로 몸을 돌려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라 에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방금전 사람에게 검을 겨눈 사람답지 않 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미레야는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새삼 라에르라는 청년을 조심스레 뜯어보았다. 저 곱상한 얼굴 어디에서 저 런 배짱이 나왔을까? 방금 나간 그 사내는 미레야 자신이 알기로 10년 이상은 이 바닥에서 굴러먹던 자였다. 5년전 국치(國恥) 이전, 미노 내 전부터 주욱 카르노 왕실의 용병대원으로 있는 제법 실력있는 자다. 그런 그를 비록 기습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압했다……? 게다가 침착하게 그 사내를 협박하는 솜씨라니……. 미레야는 주점이 방금전의 일로 술렁거린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특 유의 유쾌한 말투로 냅다 소리질렀다. "다들 용병주제에 싸움구경, 처음들 하십니까? 공짜로 싸움구경까지 했으면 술이나 한잔씩 더 시켜주십쇼!" 주점의 분위기는 미레야의 능청스런 외침에 왁자하니 웃음바다로 변 했다. "미레야씨, 너무 돈을 밝히는 거 아뇨? 그냥 벌어진 싸움인데 구경 좀 했기로서니 술 한잔씩 더 사라니?" 걸직한 사내의 목소리에 미레야는 생글거리며 맞받아쳤다. "아, 이렇게 앉아서 술까지 마시며 싸움구경하기가 쉬운 줄 압니까? 그 뭐냐, 테라의 높은 한족님들이 즐긴다는 오페라도 이보다는 재미없 을걸?" "오페, 뭐? 그게 뭐요?" 유트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들여다보았다. 누르스름한 액체 속에 자 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인다. 미레야와 죽이 맞은 용병들의 재담이 이어졌지만, 유트의 신경은 온통 아까의 그 사내에게 쏠려있었다. 대담하게도 아르노에서 감히 국왕폐하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유트는 못마땅한 기분으로 미간을 좁혔다. 3년전 왕비전하께서 돌아 가신 뒤로 국왕폐하의 노골적인 여탐이 시작되었다. 자신도 그런 국왕 폐하의 모습이 보기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국왕폐하 께서 이제 제발 그것을 그만두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트는 숨을 길게 뿜어냈다. 맥주잔 속에 작은 파문이 생겨 그의 얼 굴을 더욱 왜곡시킨다. 유트는 굳게 다물려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 한 살에 단단한 이빨이 아프게 파고든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국민들에게 비난받고 조롱까지 받을 정도의 일이란 말인가!' 역대로 여색을 멀리 한 국왕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유독 현 국왕폐하에 이르러 그렇게까지 국민들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것은, 문 제가 있다. '아아, 그래. 문제가 있고 말고.' 유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그의 고 개짓에 부드럽게 흘러내려 흔들린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작게 들려온 음성은 라에르의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라에르는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했다. "어느 시대 어느 국왕의 치세든, 그런 불평분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유트는 묵묵히 맥주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 뒤에 유트의 입술에 서 흘러나온 말에는, 라에르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한점의 기운도 없었 다. "그런가?" 라에르는 자신의 위로가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들리지않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이런 뒷골목으로, 저 입이 거친 사내들 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뒤늦은 후회를 하는 라에르의 귀에 다시 나직 한, 힘이 없으면서도 위엄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간다." 유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라에르는 재빠르게 일어나 돈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내려놓고 미레야에게 말했다. "맥주, 잘 마셨습니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미레야의 시선을 받으며, 라에르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은 유트가 했 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유트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마치 그림자처럼 라에르가 따 랐다. 미레야는 라에르에 대한 풀지못한 의문에 아쉬워하며 그들의 뒷 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곧 주점 어디에선가 들려온 "주인장! 여기 맥주 두잔 더!" 소리에 까마득하게 날아가버렸다. "네네, 곧 갑니다!" 미레야의 얼굴에는 다시 밝은 미소가 들어찼다. 어느새 아르노 서쪽의 야트막한 푸노 산이 황혼녁 햇살의 여운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녁이라는 시간에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해 진다. 그런 사람들의 틈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유트는 문득 주위가 소 란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라노! 라노 지방이오! 다섯 사람만 받습니다!" "라디프로 갈 거요! 제 2의 치첼 용병대를 만들 겁니다! 아홉 사람 이 필요하오! 아홉!" "……한 마리 당 20실프요!" 호객하듯 목청을 높이는 남자들은 용병들이었다. 높은 단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자신의 조건을 소리쳐 말한다. "용병 길드입니다." 유트의 조금 뒤에서 라에르가 설명했다. 유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 신을 밀치는 용병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주위는 마치 경매라도 하는 시장바닥 같았다. 대륙에서도 큰 키와 덩치로 유명한 카르노의 장정들 이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려고 서로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가시지요. 전하께서 계실 곳이 못됩니다.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라에르의 나직한 목소리에 유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않고, 라에르가 길을 뚫는대로 뒤따랐다. 다소 한산해지자, 라에르는 다시 앞자리를 유트에게 내주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라 에르의 단정한 흑갈색 머리와 옷차림이 다소 흐트러져있었다. 라에르 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고, 망토를 한차례 털고는 유트에게 말했 다. "많이 늦었습니다. 대로로 가서 마차를 타는 게 빠르겠습니다." "그래……." 라에르는 아까부터 기운없는 유트의 태도가 신경쓰였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언제나처럼 시간에 모든 걸 맡기기로 하고, 라에르는 길을 재촉했다. 벌써 세상에는 온통 어둠이 내려앉아있 었다. 두 사람은 저마다의 상념에 빠져서, 그들을 뒤쫓는 사람이 있다 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먼저, 고 마키아벨리군께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며, [신군주론]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발없는새라고 합니다. 새라고 불러주셔도 좋구요. FANTSY를 접한지 어언... ×년이 지났습니다만, 손만 간질거렸을뿐 엄두를 못내다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맙니다. (무책임할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손가는대로 기분내키는대로 삐리리한 글만 써대다가, FANTSY, 그것도 장편을 쓰려고 마음먹다니, 간이 커져도 이만저만 커진게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이글을 준비하면서 저도 여러 가지 배운 게 많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울 수 있으면 좋겠구요. 이 글은 그다지 '도덕적'이거나 '교육적'인 글은 되지 못할 겁니다. 미리 선수쳐서 사이렌 울립니다. 마키아벨리군이 저승에서 울어요, 도덕적이라니.. --; 마키아벨리군의 [군주론]에 이어, 불행히도(!) [신군주론]의 부분모델 까지 되어버리신 고 체사레 보르지아군과, 기타 모델이 되어주신 각국의 여러 군주들께도... 꾸벅. 죄송합니다. 소개말을 글 전에 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잡담형식으로 말하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지고, 횡수가 되어버렸네요. (빈수레가 요란하다던데.. --;) 그럼 이만 첫 인사 줄이겠습니다. 올리는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지금도 되씹는 새였음다.. 2000. 8. 22.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 - 관련자료:없음 [2944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3 21:20 조회:230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 - ================================================================== 어둠속에 웅장한 암록색 거체가 잠기어가고 있었다. 카르노 왕실의 상징색이기도 한 암록색의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카르노 왕궁은 아르노시 중심에서 조금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쪽 전면에 길게 날개를 편 곳은 본궁으로 카르노 국왕의 정전(正殿)과 거실, 그리고 왕 비의 거실과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고, 뒤쪽으로 왕세자궁을 비롯한 여 러개의 별궁이 중앙의 정원을 중심으로 흩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각각 의 별궁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궁을 이루고 있어서, 국왕이라 할 지라도 각 궁의 운영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왕궁이라고해도 밤에는 조용하게 밤의 안식을 맞는 것이 일반적이지 만, 그 중에서도 유독 어둠에 묻히길 거부하고 환하게 불을 밝혀 그 존재를 주장하는 곳이 두군데 있었다. 한곳은 연일 파티와 무도회가 끊이지 않는 본궁의 연회장이었고, 또 다른 곳은 불이라도 난 듯 궁내 부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왕궁의 북쪽에 위치한 삼왕자궁 이었다. 삼왕자궁의 시종장 레모 베제르는 이층의 거실 앞 복도에서 연신 서 성이고 있었다. 빽빽한 촛불들과 그것을 반사시키는 수많은 거울들로 환한 복도에 안절부절하는 늙은 시종장의 모습이 불안스레 흔들린다. 불빛에 드러난 시종장 베제르의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는 평소와는 달 리 몇가닥 흐트러져 얼굴위로 내려와있고, 흠잡을 데 없이 몸에 맞추 어 입은 파란색 제복도 어딘가 조금씩 흐트러져있다. 쉰 남짓한 시종 장 베제르의 주름진 얼굴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떠맡은 듯 어두웠고, 탄력을 잃은 입술에서는 연신 한탄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벌써 저녁식사 시간을 넘긴지 오래인데,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이냐! 이 야심한 시각까지 돌아오시지 않았음을 혹여 국왕폐하께서 아신다면 그 얼마나 진노할 것이며……" 타다다닥--- 누군가 뛰어오는 구두소리에 얼굴을 바닥으로 늘어뜨 리고 중얼중얼거리던 시종장 베제르는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멀리서 부터 뛰어오는 사람은 수하의 궁내부원 중 한명이었다. "어찌 되었느냐? 근위대에는 알아보았느냐? 그래, 전하께서 왕궁 밖 으로 또 나가신게 사실이란 말이냐?" 숨쉴틈도 주지않고 몰아치는 시종장 베제르의 질문에 젊은 궁내부원 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머리를 저었다. "저… 저는 본궁에 갔다 왔는데요, 나으리." "본궁? 아아, 그래, 본궁에서도 전하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더냐?" 궁내부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고는 대답했다. "본궁쪽으로는 오시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어, 이를 어쩐단 말이냐!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이냐! 혹여 왕자전하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라면, 이 늙은 시종이 죽어 서 어찌 왕비전하를 뵈올 것이며……"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시종장 베제르의 한탄에 궁내부원은 머리 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시종장 나으리!" "…… 국왕폐하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 "시 종 장 나 으 리 이!" "으에에에에?" 말끝을 끌며 목청껏 지른 궁내부원의 목소리와 시종장 베제르의 괴 이한 대꾸가 길다란 삼왕자궁 복도에 웅웅하고 메아리쳤다. 화들짝 놀 라 안색까지 희게 변한 시종장 베제르의 모습에 궁내부원은 약간의 죄 책감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조금전 본궁에 갔다가, 비록 전하의 행방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더 중요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알려드리러 이렇게 허겁지 겁 달려왔습니……" 궁내부원이 미처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시종장 베제르의 노성이 다 시 삼왕자궁 복도에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네 이노오오옴! 사라진 왕자전하의 행방보다 더 중요한게 세상천지 어디에 있더란 말이냐! 내 기껏 전하를 찾아오라고 시켰더니 딴짓이나 하고 돌아와?" 궁내부원의 이마에 굵다란 땀이 맺혀졌다. "하… 하오나……" "네놈이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잔말말고 어서 이왕녀전하의 궁 으로 가서 전하의 행방을 알아보지 못할까!" "하지만 그곳은 벌써 다른 시종이 갔다왔는……" "다른 곳에 계시다 지금 그곳에 계실지 누가 안다는 말이냐! 워낙에 행적이 바람같은 분이시니 거기 나타나신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으 니……" "됐으니 그만 두게, 베제르." "아니, 되기는 뭐가 된다는 게냐! 그리고 뭐, 베제르? 이제는 네놈이 감히 나를 맞먹으려 드는 게로구나!" 억울하다는 표정의 궁내부원은 애절한 구원요청의 눈빛을 시종장 베 제르의 뒤쪽으로 던졌다.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여기 네가 아니면 누가 또 있다는 게냐! 이놈이 이제 내가 늙었다 고 희롱을 하려 드는……" 주먹까지 부르쥐며 마구마구 역정을 내는 시종장 베제르의 어깨를 누군가가 뒤에서 툭툭 두드렸다. 시종장 베제르는 귀찮은 듯이 그 팔 을 툭 쳐내고 하려던 말을 마저 쏟아부으려 했지만, 귓가에 나직이 들 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거 내가 한 말인데, 베제르." 시종장 베제르가 주춤주춤 뒤돌아보자, 낯익은 장신의 남자가 그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와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검은 눈망울을 한,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의 얼굴이었다. 시종장 베제르 의 주름진 눈가가 팽팽해질 정도로 눈이 커졌다. "저… 저… 저… 저어어언하아!" 시종장 베제르가 그토록 기다리던 삼왕자,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 르노는 시종장 베제르의 감격스런 외침에 뒤로 주춤 물러서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베제르, 나, 아직 저녁 전인데 설교는 식사 후에 들으면 안될까?" 하지만 이미 시종장 베제르의 회색 눈은 카스트로의 옷차림을 위에 서 아래까지 주우욱 훑어본 뒤였다. "저어어어어언하아아!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옷차림이란 말입니까! 저 신분 낮은 시정잡배들이나 입는 옷차림이라니! 대체 국왕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 얼마나 심려가 크실 것이며……" 벌레씹은 얼굴이 된 유트, 아니 삼왕자 카스트로의 뒤로 흑갈색 머 리의 청년이 안면근육을 실룩이면서도 끝끝내 엄격한 표정을 무너뜨리 지 않고 있었다. "베제르… 나 배고프다니까. 그리고 라에르경도 아직 저녁 못먹었다 구." "대체 무슨 망측한 짓을 하고 다니셨길래, 아직까지 저녁도 드시지 못하셨단 말입니까아! 왕비전하께서 눈을 감으시면서도 왕자전하의 뒤 를 이 못난 시종에게 부탁하셨는데, 대체 무슨 면목으로 저 세상에서 왕비전하를 뵈올지 막막……" "베제르 시 종 장 !" 발음을 딱딱 끊어 직위까지 부른 카스트로의 호명에 시종장 베제르 는 흠칫 몸을 굳히고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슬금슬금 눈동자만 위로 올리자, 정색을 한 카스트로의 얼굴이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바로 카스트로의 엄중한 음성이 뒤따랐다. "아직 저녁 전이라 했다, 시종장 베제르. 라에르경도 함께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너!" 카스트로는 시종장 베제르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궁내부원을 쳐다보았다. "네, 전하." 몸에 밴 정중함으로 허리를 숙이면서 궁내부원이 대답했다. "본궁에서 중요한 소식을 들었다고 했지? 따라와라. 안에서 듣겠다." 말을 마친 카스트로는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단호한 몸짓에 카스트 로의 등 뒤로 회색 망토가 펄럭이다 내려앉는다. 궁내부원이 후다닥 달려들어 문을 열었다. 카스트로와 라에르가 안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궁내부원이 문을 닫으며 따라들어갔다. 시종장 베제르는 문이 닫히자 마자 참았던 숨을 내쉬며, 어느샌가 이마에 송송하게 솟은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언제봐도 왕비전하를 쏙 빼닮으셨다니까……. 그나저나 아직 저녁 전이라고 하셨지? 대체 그 많은 시종들, 시녀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거 야? 에잇! 게으른 것들 같으니라고!" 부엌으로 바쁘게 휘적휘적 걸어가면서도, 자신이 삼왕자의 행방을 찾으라고 삼왕자궁에 있는 전 시종들과 시녀들을 밖으로 내몰았다고는 눈꼽만큼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종장 베제르였다. 환하게 밝혀진 촛불이 길다란 창으로 스며드는 매혹적인 만월의 달 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곳은 침실 로 들어가는 길에 거치게 되어있는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은 전체적으 로 연한 푸른색 바탕에 섬세하고 세련된 조그만 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고급스런 벽지로 감싸여있었다. 바닥에는 짙은 녹색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응접실 중앙에는 벽지와 비슷한 색의 테이블보가 씌워진 테이 블과 푹신한 쿠션이 놓인 의자가 안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훈훈한 온기를 만들어내고있는 검은 대리석의 벽난로 위로는 금으로 테두리가 치장된 왕실 일가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걸려있다. 적어도 10 여년은 더 전에 그려진 것으로, 화폭의 중앙에 서 있는 위엄있는 중년 남자는 몇 년새 더욱 늙어버린 칼리에르 3세의 10여년전 모습이었다. 그의 옆으로 아기를 안고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은 현숙하고 아름다운 미에라 왕비였고, 그녀가 안고있는 아기는 벌써 숙녀티가 나는 이왕녀 체리나이다. 그들 앞으로는 열살 내외의 왕세자와 이왕자, 그리고 조금 더 어린 일왕녀가 나란히 서 있고, 대여섯살의 삼왕자는 왕비의 옆에 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의 제 1 호위기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는 잠시 그 그림을 올려다보다가 조금 아래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주군을 응시했다. 어렸을 때의 앳되고 장난꾸러기같은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 진지 오래이고, 대신 지배자로서의 위엄과 권위가 자리잡고 있다. 열일 곱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위압감을, 카스트로는 갖고 있었다. "그래, 이제 말해 보라. 본궁에서 들은 소식이 무엇인지." 카스트로는 회색 망토를 끌러 테이블위에 내려놓고 궁내부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절로 사람을 긴장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궁내부원 은 입이 잘 움직이지 않는 듯 뻑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네, 전하. 실은 베제르 시종장의 명령으로 조금 전 본궁에 갔을 때, 그곳 궁내부원들이 이곳 못지않게 부산하게 움직이길래 무슨일인가 싶 어, 수석시종장 밑에 있는 궁내부원을 붙잡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하는 말이……" 궁내부원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내일 쯤 테라에서 사신이 온다고 합니다." 무슨 대단한 소식이길래 저리 서론이 긴가 싶어 인내심을 가지고 듣 던 카스트로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서 되물었다. "뭐?" "내일 테라에서 사신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전하."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또박또박 되풀이해 대답하는 궁내부원 을, 카스트로는 잠시동안 침묵으로 지켜보았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침묵이 길어지자 궁내부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 지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카스트로의 한숨섞인 책망이 궁내부원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렸다. "테라에서 사신이 오는 것이야 매년 수차례는 있는 일 아닌가? 그리 고 사신이야 내가 아니더라도 국왕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터.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소란인가?" 그제서야 궁내부원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말했던 것이다. 궁내부원은 허겁지겁 자신의 실수를 정정 했다. "그, 그것이 그냥 오는 사신이 아니라, 국왕폐하의 요청으로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문제를 완전히 매듭짓고자 오는 사신이라고 합니다." 궁내부원은 자신이 아는 '중요한 일'을 말했음에도 아까전과 같은 상 황, 즉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까지 들리는 정적이 되풀이되자 아 까보다 굵은 땀방울을 만들어내면서, 흘끔 눈동자만 들어 왕자전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아까전의 그 한심하다는 표정은 아니었 지만, 궁내부원은 아까전의 그 표정이 훨씬 자신의 심장에 좋다고 생 각했다. 왕자전하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되어있었던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기 바로 전의 고요함 같은 것이 응접실에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궁내부원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긴 침묵이 흐른 뒤에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리고, 지친 듯한 목소리로 왕자전하가 명령했을 뿐이다. "수고했다. 그만 나가 보도록 하라." "네, 전하." 궁내부원은 기꺼이 그 명령을 받들고, 긴장으로 숨이 막히는 응접실 을 뒷걸음질로 물러나왔다. 라에르는 묵묵히 자신의 주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르노의 뒷골목 에서 기운없어하던 카스트로에게 별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듯이, 지금 도 그가 주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밖에 없 었다. 자신의 이런 무능함이 내심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엘이라면,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도……' 활달한 성격으로 주위사람까지 밝게 해주는 동생이 새삼 부럽게 생 각되어 기분이 씁쓸해졌다. 한 형제이면서도 라에르와 시에르는 판이 하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라에르가 어른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타입이라면, 시에르는 또래의 소년들에게 인기있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까 자신과 같은 나이인 전하에게도 자신보다는 한 살 어린 밝은 성격 의 시엘이 훨씬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라에르가 자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동안, 카스트로는 느릿 하게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벽난로속에서 타고있는 장작불의 따스 한 온기를 느끼며, 초상화속의 가족들을 한명한명 찬찬히 들여다보았 다. 그러고 있자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속에 조 금씩 조금씩 차오른다. 철모르던 시절, 한 살 위의 누나를 골탕먹이고, 두 살 아래 여동생을 남몰래 쥐어박아 울리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그 행위들을 왕세자 전하에게 들키고, 무섭게 화를 내는 왕세자 전하 에게 겁먹어 울먹이던 기억도, 그러면서도 끝끝내 그가 내린 벌을 받 아야했던 서러움도……. 카스트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언뜻 슬프게도 보이 는 그 미소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상실감이 새겨져 있었다. "거의 5년만인가……." 혼잣말하듯 작게 들린 목소리에 라에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카스트로는 초상화 앞에 버티고 서서 팔장을 끼고, 여전히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카스트로의 얼굴을 따스하게 비 춘다. "햇수로는 4년……. 내가 열두살때 그 일이 있었고, 그해 그 추운 겨 울에 아베르노 전하와 지스카르 전하가 테라로 끌려가셨지. 지금 내가 열 일곱이니까……." "네에……." 대답하는 라에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무언가 대답을 바라는 듯 한 카스트로의 모습을 보며, 라에르는 그런 하나마나한 대답을 하는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변하셨을까?" "……." 라에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이미 추억 으로의 여행을 떠나버린 카스트로의 뒷모습에는 그리움의 무게가 짙게 드리워져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베르노 전하를 뵌 적이 있나?" "뵙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세자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라 들었 습니다." 카스트로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따뜻한 불빛에 비치는 카스트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까 만 눈망울에 스치는 씁쓸함을, 수년간 옆에서 지켜본 라에르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멋진 분이셨지. 왕이 될 자로서의 위엄과 재능을 고루 갖추셨었다. 어머니 다음으로 왕세자 전하를 동경했다. 그 날……." 괴로운 일을 떠올리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린 카스트로는 잠시 간격 을 두어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테라의 위선자들에게 끌려가시면서도 전하께서는 의연한 모습이셨지."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 카스트로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전하께서 그렇게 적지로 끌려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나. 벌써 4년이 지났는데도, 바로 어제일처럼 말이지." 불안해보이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라에르의 기분마저 동요시키고 있 었다. "전하……."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카스트로는 고개를 돌려 라에르를 향해 슬픈 미소를 띄웠다. 카스트 로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져 아무리 라에르라고 해도 그 속을 짐 작할 수 없었다. "그때는 어렸었지. 솔직한 마음으로 슬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카스트로는 말을 멈추고 다시 그림속의 왕세자를 쳐다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위엄있는 얼굴을 하고 앞을 쳐다보는 당당한 시선이 자신의 치졸한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다. 카스트로는 그래서 더욱 왕세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막상 아베르노 전하께서 귀국하신다니까…… 기쁨보다는, …그래,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야." 카스트로는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가, 팔짱꼈던 팔을 풀고 테이블쪽 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고급 양탄자위를 걷는 모습에는 방금전의 불 안함따위는 비치지도 않고, 그 대신 태생에서부터 우러나는 당당함과 위엄이 후광처럼 스며들어있었다. 카스트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묵직한 은잔에 물을 따라 메마른 입술 을 축였다. 갈증이 나던 입안을 시원하게 적신 물은 덥혀졌던 식도를 식히며 내려간다. "사람은 이기적이라지." 잔잔하지만, 시원스런 박력이 느껴지는 저음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 을 끌어들인다. 라에르는 버릇처럼 그런 카스트로의 말소리와 손짓 하 나하나까지 눈과 귀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던가 보다. 아니, 누구보다 이기적인지도 모르 겠다. 어린시절 동경의 대상이던 왕세자 전하께서 오신다는 말에 내 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게 뭘 것 같나?" 라에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라에르의 모습을 카스 트로는 엷은 미소로 돌아보며 말했다. "원칙대로라면 재회의 기쁨이라든가, 왕세자 전하의 부재로 불안했 던 왕실이 이제는 든든해지겠다든지……, 뭐, 그런 걸 생각했어야 옳았 다. 하지만 라엘……." 영원토록 변치않을 충성을 맹세한 자신의 제 1 호위기사이며, 또한 마음을 터놓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이름을 카스트로는 친근하게 애 칭으로 불렀다. 라에르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며 시야 가득 자신의 주군을 채워넣었다. 자기 자신을 조소하며 쓰게 웃는 주군의 모습이 아프도록, 라에르의 망막속에 각인되고 있었 다. "나는 내가 잃게 될 기득권과 지위를 생각했다." "…전하……" "알고있어." 안타까워하는 라에르의 표정을 한마디로 일축하며, 카스트로는 몸을 돌리고 그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이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또 이런 마음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도. 원래 왕세자 전하에게 돌아가야 할 권리가 그 주인을 찾아가는 것 뿐이다. 알고는 있어." "……." 카스트로는 눈빛을 흐리고, 한숨처럼 말을 이어갔다. "알면서도, 사람마음이라는게 쉽게 어떻게 되지를 않는다. 처음부터 왕세자 전하께서 든든하게 버텨주셨다면, 내가 이렇게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탐해 괴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맛보지 말아야 할 권력의 맛을 알았어. 내게 돌아오지 않아야 할 의무를 지고, 권리를 누리 고…… 그리고는 결국 이렇게, ……분수에 맞지않게, 왕세자 전하께 질 투와도 같은 감정을 가져버렸지." 카스트로는 손을 끌어올려 허리를 짚다가, 문득 뭔가가 걸리적거리 는 것을 눈치채고 내려다보았다. 용병의 물품을 사는 잡화점에서 산 특징없는 투박한 장검이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카스트로는 검을 풀어 내어 테이블에 얹어놓은 회색 망토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덜그럭거 리는 소음이 회색 망토에 뒤섞여 사라진다. 카스트로는 허리가 홀가분 해지자,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라에르를 돌아보았다. 라에르는 아 까 그 자리에 그대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오늘, 너에게 만이다, 라엘. 이후 이런 감정은 나도 떨쳐버릴 것이고, 누구에게나 '왕세자 전하를 존경하는 동생'으로 돌아갈 것이다." "……." "기분이 이상해서…… 네게 어리광부린 거야, 라엘.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할 것 없어." 카스트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밝고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라에르 는 혼란을 느꼈다. 조금전까지 침울하게 긴장되던 공기가 카스트로의 한마디 말과 가벼운 미소로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언제나처럼 편안 하게 숨쉴수 있는 분위기로의 갑작스런 변화에, 라에르는 마치 꿈이라 도 한바탕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국왕폐하께서 기뻐하시겠군. 항시라도 아베르노 전하를 그리던 분 이셨으니. 내일,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카스트로의 미소가 어쩐지 더욱 깊어진 느낌이다. "---이랴앗!" 달의 여신 실라가 환히 내려비추는 대로를 한 마리의 말이 빠르게 질러가고 있었다. 왕궁에서부터 시작된 말의 질주는 남쪽으로 난 대로 를 따라가다 꺽어지며 한 저택 앞에서 끝이 났다. 푸르르-- 거친 숨을 내뿜으며 목을 내젓는 말을 다독이고, 능숙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 선 사람은 라에르였다. 혼자서 식사하기 싫다는 카스트로의 '어리광'에 말려들어 이 늦은 시간까지 잡혀, 식사와 차까지 얻어마시고 오는 길 이었다. 졸고있던 마굿간지기에게 말을 맡겨놓고 저택으로 들어가자, 조용한 어둠이 라에르를 맞았다. 라에르는 익숙하게 어둠을 헤치고 계단을 올 라, 이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문을 열었다. 단정하게 닫혀진 셔츠의 단 추를 풀며 침대로 가던 라에르는 침대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숨소리 말고도 타인의 숨소리가, 정확히는 낮은 코골음소리가 침대위에서 들 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라에르는 망설 임없이 두손으로 시트를 잡아서 확, 소리나도록 채뜨렸다. 시트 끝에 묵직한 것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우당탕하며 발밑으로 무언가가 굴러 떨어졌다. 라에르는 슬쩍 비켜서서 자신의 발이 불청객에게 깔리는 불 상사를 피했다. "우아아악-----------! 우앗! 아야, 아야야… 우씨, 누구야?" 어둠속의 실루엣이 머리를 쥐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 다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이 방 주인. 나가라, 시엘. 잠은 네방에서나 자." "혀엉?" 한마디 대꾸도 없이 라에르는 시트를 털어 침대위에 다시 깔았다.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시에르는 입속으로 뭔가를 투덜투덜거리다가 바 닥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좀 부드럽게 깨워주면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한대? 늦게까지 형 기 다리다 잠든 동생인데……." "너보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뭐해? 안나가? 나 피곤해." 정이 뚝뚝 떨어지는 냉랭한 말투에도 시에르는 굴하지 않았다. "지금이 몇신데 이제 들어와? 형, 나 모르는 사이에 애인이라도 생 겼수?" "헛소리 그만하고 나가라니까." "하지만 형, 나 형에게 할 말 있어서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한 살 어린 동생의 어리광섞인 말투에 라에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 다. 감당하기 힘든 주군의 어리광에, 집에 돌아와서는 동생의 어리광까 지. 자신이 유모라도 된 것 같다고 투덜거리며, 라에르는 포기한 듯 말 했다. "짧게 말하고 나가." 무뚝뚝하게 대꾸하지만, 실은 자신의 어리광을 안받아준적이 드문 형이다. 시에르는 헤헤 웃으면서 침대위에 앉는 형 옆에 따라앉으며, 중차대한 사건을 선포했다. "나 오늘 천사를 만났어, 형." "……!" 어둠속이라서, 시에르는 당연하게도 라에르의 얼굴에 떠오른 기기묘 묘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시에르는 당당하게 다음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정말이야, 형. 날개만 안달았다 뿐이지, 정말 천사같았다니까. 연두 색 눈인데. 우와, 형, 엄청나게 크고 예쁘더라니까. 거기다 머리는 또 얼마나 탐스러운지. 아아, 마치 봄을 가져다주는 천사 같았다니까?" 후우-- , 김빠지는 소리가 옆에서 나고서야 시에르는 자신만의 세계 에서 빠져나왔다. "혀엉?" 시에르는 고개를 형에게 기울였다. 라에르는 자신의 머리를 짜증스 럽게 긁어대며 대답했다. "봄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어둠에 익숙해진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 것을 느낀 라에르는 흐트 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될 수 있는 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지금 잠이 절실하게 필요해, 시엘. 내일은 테라에서 사신이 오 니까 이래저래 바빠질 거야. 그러니까, 이만 가서 네 꿈에서나 그 천사 인지 뭔지를 만나거라." 끄응- 하는, 불만에 찬 신음이 들려왔지만 라에르는 가차없이 시에 르의 팔을 잡아끌어 침실 문 밖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혀엉-" "너도 잘 자라. 안녕." 라에르는 콰앙- 소리나도록 문을 닫고 돌아섰다. 문 두드리는 소리 와 의미모를 괴성이 들려왔지만 라에르는 귀를 닫아버렸다. 한달에도 네다섯번은 바뀌는 동생의 '천사'에게까지 자신의 귀중한 수면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뒤, 드디어 라에르는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숙면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어제에 이은 수다장이 새의 잡담 II (--;) [신군주론]은 6장 (혹은 5장이나 7장 ^^; : 써봐야 안다는 소리임)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1 장은, 저 한참 전에 써놓은 제목이 뭐든간에, 실제(이면)제목은 '주인공 띄워주기' '주인공 후까시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으로, ... 느끼해도 좀 참아주세요.. (느끼한 거,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 자진납세하건데, 새는 숫자에 치명적으로 약합니다. 그러므로 무슨무 슨 단위던 간에, 헷갈리지않는 방식으로(...) 명칭만 슬쩍 바꿔다놓 은것임을.. 네, 돈낼때도 큰돈내고 잔돈 받는 사람입니다. (배째!) 그리고 또하나, 꺼림칙한 것, 여러 지명이나 인명 같은 것은, 타 FNTSY 소설과 겹치는 게 있더라도, 거기서 보고 따왔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므로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인명사전이나 영어사전, 혹은 국어사전(--;)을 찾아보시길. 아니면 주위에 굴러다니는, 발음 비스름한 물건을 찾아보시던가 --; 어제 올리고나서, 바이트 나오는거 보고 꽤 놀랐습니다. 저렇게 많은 양이었던가? ^^; 라고요. 오늘은 더 나올 것 같은데.. 뭐, 때로는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거죠. 그럼 오늘 수다도 이만~ 즐거운 하루 되시길.. 사악한 새디스트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3 - 관련자료:없음 [294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4 20:00 조회:212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 - ================================================================== 신성(神聖) 테라의 사신단이 아르노에 도착한 날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라도 내린 듯 더할 데 없이 청명했다. 파란 하늘과 새하얀 솜털 구름 아래로 아르노성 밖에서부터 사신을 맞아 왕궁까지 오는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테라의 사신을 맞는 행렬은 5년전의 국치(國恥)이래, 항상 다른 나라의 사신이 올 때보다 더 길고, 더 화려했다. 환영을 위해 동원된 아르노 시민들로 시끌시끌한 남쪽의 대로를 카 스트로는 본궁의 이층 회랑에서 지켜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카스트로 의 한발자국 뒤에는 라에르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국왕 칼리에르 3세의 명을 받들어 성밖까지 나가 사신을 맞은 사람 은 재상 미카에르 대공과 외부대신 헤르트경, 두 사람이었다. 재상 미 카에르 대공은 현 국왕 칼리에르 3세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미카에 르 대공은 검은색과 은색이 뒤섞인 머리와 차가운 잿빛 눈동자의, 어 딘지 음산한 느낌이 나는 음모가 타입의 남자였다. 카스트로는 그런 대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칼리에르 3세는 자신의 동생을 상당 히 신임하는 듯 했다. 벌써 몇 년째, 국사(國事)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 는 칼리에르 3세를 대신해, 재상인 미카에르 대공이 카르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부와 행정 요직에 대공의 심복들이 하나 둘 늘어 가는 것을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것은 분명 카스트로 뿐 아니라, 카르노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조심성일 것 이다. "왕세자 전하께서 오시면, 대공도 한걸음 물러설 수 밖에 없겠지. 대 공도 지금은 억지로 웃고 있을 테지만, 내심은 심히 착찹할 것이다." 그다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이지만, 라에르가 느끼기에는 무언 가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가까워오는 행렬에서 눈을 떼 고 몸을 돌려서 회랑을 따라 걸었다. "왕세자 전하의 부재로 생긴 불균형이니까, 아베르노 전하께서 오시 면 모든 게 바로잡히겠지. 왕세자 전하께 거는 기대가 크다." 카르노의 상징색이기도 한 암록색 새틴 망토의 펄럭임을 뒤쫓으며 라에르는 내심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구보다 커다란 포부를 가 진 주군이 인륜이라는 당위성에 얽매여 자신의 날개를 스스로 접으려 하고 있었다. 전날 카스트로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지금의 카스트로는 '왕세자 전하를 존경하는 동생'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느 껴졌다. 라에르는 그런 카스트로를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몰라서, 착찹 하고 안타까웠다. 카르노 왕궁의 본궁에 있는 국왕의 정전은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있다. 그 중 가장 화려하다고 손꼽는 곳이 바로 지금 테라의 사신과 의 접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알현실이다. 연녹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알 현실은 족히 7프리(1프리=1m)는 넘을 듯한 높이와 삼백여명은 넉넉하 게 들어갈 정도의 넓이로 길다랗게 지어졌다. 아치형의 천장에는 카르 노의 수호신인 전신(戰神) 로마와 건국왕 유시아 1세의 영웅담이 강렬 한 색채로서 역동적으로 그려져있고, 알현실의 끝에는 카르노의 상징 인 암록색의 방패와 은빛 검의 문장 아래, 백금과 에메랄드로 세공된 화려한 옥좌가 놓여있다. 수백년간 영광과 권위의 상징이던 알현실이 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카르노의 군신(君臣)들은 과거의 그 우월감 대신 바닥으로 꺼지고 싶은 듯한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간신히 옥좌에 매달려있는 초췌한 모습의 칼리에르 3세와 화려한 테 라식의 옷차림으로 치장하고, 시종 웃는 얼굴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사치레를 하는 테라 사신 대표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야말로 누가 주 인이고 누가 객인지를 의심하게 했다. 힘의 역학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알현실에서의 상황을 카스트로 는 칼리에르 3세의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저 거들먹거리는 밀짚머리 중늙은이의 목을 한 검에 베는 쾌감어린 상 상을 되풀이 하면서 테라 사신의 시건방진 말들을 참아내고 있었다. "테라의 대신관이신 제이리트님 이하 한족 5가문의 수장님들께서는 카르노 국왕 폐하의 간절한 탄원을 차마 거절하실 수 없어, 열흘 밤낮 을 고심하여 의논하신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테라 사신단의 대표 마키아 폰 가스티오네는 일행 중 한명에게 눈짓 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봉인된 편지를 내밀었고, 국왕의 비서관이 나서서 그 편지를 받아 국왕에게 넘겼다. 칼리에르 3세가 그 문서를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가스티오네는 조금 간격을 두어 말을 덧붙였다. "주신 케테르님의 대리자이신 한족 신관님들의 고심이 담긴 결정이 니만큼 카르노 국왕 폐하께서도 긍정적인 쪽으로 결정을 내려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카스트로는 국왕이 들고 있는 문서가 떨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 어 칼리에르 3세의 안색을 살폈다. 색탐이 지나쳐서인지 아니면 다른 번뇌가 많아서인지 평소에도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칼리에르 3세의 용 안이 더더욱 창백하게 질려가고, 부릅떠진 눈가의 주름은 파들파들 떨 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내심 궁금해지는 카스트로였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지금은 그냥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빳빳한 종이가 와삭 구겨지는 소리가 나더 니, 칼리에르 3세의 떨리는 음성이 불길하게 울려퍼졌다. "이것은…… 이것은 짐에게서 삼왕자마저 빼앗아가려는 것이 아니 오? 분명히 5년전, 삼왕자만은 짐의 곁에 머물게 해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소? 그 대가도 충분히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삽시간에 알현실 안이 억눌린 경악과 신음으로 술렁거렸다. 카스트 로는 놀란 감정을 추스릴새도 없이 테라 사신을 돌아보았다. 커다래진 동공안으로 느물거리는 테라의 사신, 가스티오네의 오만한 얼굴이 확 대되어 들어왔다. "카르노 국왕 폐하께서는 당시의 밀약을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 당시의 밀약은 카르노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의 애절한 요 청으로 세분 왕자 전하 중 한분을 카르노 왕궁에 머물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칼리에르 3세의 침음성이 카스트로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카스 트로는 입술을 악다물고 가스티오네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가 스티오네는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계속 궤변을 늘어놓았다. "왕세자 전하는 레이얄과 미다, 양국에서 반드시 테리아로 가셔야 한다고 요구해서 제외되었고, 이왕자 전하와 삼왕자 전하 중 한분을 선택하라 했을 때, 카르노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는 나이 어리신 삼왕자 전하께서 타국에 가서 고생하실 것이 안타까우신 나머지, 삼왕 자 전하를 카르노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넓은 알현실은 낭랑하게 울리는 가스티오네의 목소리외에는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던지, 가스티오네는 더욱 얼굴 에 당당함을 띄웠다. "하지만 이제 5년이 지나, 삼왕자 전하께서도 당시 왕세자 전하만큼 장성하셨으니 테리아에서 유학하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사료됩 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소? 어째서 이미 5년이나 지난 일을 이 제와서 다시 꺼낸단 말이오? 그때 삼왕자를 카르노에 머물게 한다 하 였으면서 이제와서 다시 테리아로 보내라니! 게다가 삼왕자와 레이얄 의 혼인은 그 당시 조약에서도 없던 조항이지 않소?" 칼리에르 3세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팔걸이에 올려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가 담긴 목소리에서는 격한 울분마저 느껴졌다. 옥좌 에 눌어붙을 것 같던 잠시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였지만, 오 만한 테라의 사신에게 별다른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국왕이 말한 내용이 알현실에 늘어선 카르노의 정신(廷臣)들과 카스트로에게 또다른 놀라움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카르노 국왕 폐하께서 그 밀약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밀약은 카르노 왕궁에 세 왕자 전 하 중 한분을 머물도록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폐하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왕세자 전하의 귀국이 성사된다면, 세 분의 왕자 전하 중 두 분이 카르노 왕궁에 머물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밀약에 위배되는 것이니, 그 밀약대로 왕세자 전하 대신 삼왕자 전하 께서 테리아로 가시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혀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럽게 늘어놓는 가스티오네의 달변에, 일순 알현실의 군신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궤변이었다. 분명 궤변이었 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테라였다. 잠시 뒤, 칼리에르 3세는 힘주어 세웠던 상체를 무너뜨리고, 다시 옥 좌에 눌어붙었다.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받아왔지만, 결 국 언제나처럼 아무 소용없을 것이 분명했다. 자포자기하는 듯한 칼리 에르 3세의 얼굴에 짙게 패배감이 어렸다, 그 잠깐 사이에 십년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칼리에르 3세는 기운없이 말했다. "그럼, 삼왕자의 혼사 건은 어찌된 것이오?" 미리 준비했던 대답인 양, 가스티오네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그것은 레이얄 왕실에서 들어온 혼담입니다. 귀국의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 부부의 화목함을 익히 들으신 레이얄 국왕 폐하께서는 매우 흡족해하시며, 당신의 외손녀이자 소렐 공작각하의 금지옥엽이신 루시타니아 공녀를 카르노의 삼왕자 전하와 맺어주시길 요청해오셨습 니다. 테라의 대신관이신 제이리트님과 한족 5가문의 수장님들께서는 그 혼담이 자피아 대륙의 평화와 화목에 도움이 되시리라고 판단하여, 그 혼담을 적극 추진키로 합의하셨습니다." 길고 긴 가스티오네의 말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들은 카스트로는 눈동자를 싸늘히 빛냈다. '소렐?' 속으로 되뇌어보는 것은 비단 카스트로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소렐. 소렐 공작, 케니아스!' 언제부터인지 주먹쥐어진 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카스트 로는 5년 전, 바로 이 영광된 자리에서 있었던 그 굴욕적인 사건을 하 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는 것이 불가능했다 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카스트로는 그때 그 일을 항시라도 잊지않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가장 증오스러웠던 자들 중 한 사람, 바로 케니아스 미카노르 폰 소렐! '레이얄의 공작, 소렐!' 온몸에 흐르는 피에 분노가 타고흘러, 더욱 빠르게 전신에서 날뛰고 있었다. 새삼 그 날의 끔찍스러웠던 굴욕과 증오가 카스트로의 정신과 육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레이얄과 미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직 일년여를 더 테리아에서 유학하셔야 마땅할 왕세자 전하의 귀국을 허락하신 대신관 제이리트님 이하 한족 수장님들의 노고를 아신다면, 현명하신 카르노 국왕 폐하께 서도 이 혼담도 허락하실 줄로 압니다." 이것은 숫제 협박이었다. 이 혼담을 거절하면, 왕세자의 조기귀국도 무효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칼리에르 3세는 굴욕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테라의 대신관님과 한족분들의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깊게 숨을 들이쉬고, 어렵게 어렵게 가라앉힌 침잠된 목소리로 칼리 에르 3세는 말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당장 가부를 결정하기 어렵구료. 그 러니 며칠 숙고할 시간을 주시오." 며칠간의 유예를 청하는 국왕 칼리에르 3세의 모습은 사실상 백기를 든 패장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스티오네 역시 잘 알고 있는 듯, 콧수염 아래 흰 이를 드러내며 만족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쪼록 테라와 레이얄, 그리고 카르노 삼국이 다 만족할만한 긍정적인 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칼리에르 3세는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모처럼 멀리서 오신 테라의 사신들을 위해 오늘 저녁 연회를 열 것 이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오." 가스티오네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카르노 국왕 폐하의 성의에, 테라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접견은 끝났다. 유유히 개선장군처럼 물러가는 테라 사신단의 뒷모 습을 카스트로는 살기를 머금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경들도 물러가오. 짐은 이만 쉬고 싶소." 알현실을 메운 정신들이 하나 둘 밖으로 빠져나갔다. 카스트로는 고 개를 돌려 옥좌위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의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칼리에르 3세는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폐하……." 칼리에르 3세는 카스트로의 부름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알현실 에는 국왕 칼리에르 3세와 친위대장 피오르경, 그리고 삼왕자 카스트 로와 친위대 부대장 라에르만이 남아있었다. 사신과 신료들이 나간 공 간은 휑하니 바람이 새어들 듯 공허했다. 이윽고 칼리에르 3세의 핏기 없는 입술에서 한숨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카스트로. 너도 그만 가서 쉬거라. 너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 을테니……." 카스트로는 기력를 빼앗긴 듯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 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하루하루 늙어가는 모습이 잡히는 아버지가, 테 라 사신이 올때마다 수배는 더 늙어간다. 카스트로는 그런 아버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러면, 연회때 뵙겠습니다, 폐하." 카스트로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당당한 몸짓으로 알현실을 걸어 나갔다. 라에르는 빠른 걸음으로 카스트로를 뒤따라 나갔다. 중년의 나 이에 있는 친위대장 피오르 폰 소르미노의 눈길이 그 뒤를 쫓다가 다 시 노쇠한 국왕에게로 돌아간다. 피오르경의 흑갈색 눈동자는, 라에르 가 카스트로를 향하듯, 칼리에르 3세를 따르고 있었다. ================================================================== 이 정도 분량이면 적당(?)할까요? (꼭 맞춘 것처럼 말하는군. 자를데가 여기밖에 없었으면서..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몸상태가 영~ 꽝인 새였음다..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4 - 관련자료:없음 [2952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5 21:08 조회:208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 - ================================================================== 왕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재상의 저택에는 몇몇 사람들 이 모여 있었다. 곱슬거리는 짧은 흑은발의 한 남자도 지금 막 말을 몰아 재상 저택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윤기나는 갈색의 전투마를 능숙하게 다루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남자는 흰색과 파란 색이 잘 조화된 왕실 근위대의 예복과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채찍과 말고 삐를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굿간지기에게 던져주고 성급한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갈색바탕에 검은색의 대리석으로 테를 두른 재상의 저택, 아니 미카 에르 대공의 저택은 그 웅장함이나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왕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내부 장식만은 왕궁의 어느 곳보다 사치스럽다. 곳곳 에 보이는 촛대는 모두 레이얄 세공사의 정성스런 손길이 들어간 은으 로 만들어졌으며, 벽에 걸려있는 섬세한 태피스트리와 바닥에 깔린 부 드러운 융단들은 저 북국 라디프에서 들여온 것이며, 화려하기까지 짝 이없는 샹들리에는 비쉬의 상인들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화려함에는 별 감흥이 없는지 큰 보폭으로 한눈 한번 팔지않고 홀과 복도를 지나쳤다. 지나가던 하인과 하녀들이 그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추어서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곁눈질조차 없 이 목표지점만 향해 걸어갈 뿐이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곳은 1층에 있는 재상의 집무실 앞이었다. 마침 집무실 안에서 은쟁반을 들고 나 오던 시종이 갑자기 마주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놀란 빛을 띄우며 입 을 달싹였다. "작은……" "아버지는 안에 계시겠지?" 시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뚜벅 질문을 던진 남자는 대답 역시 들 을 필요가 없다는 듯 그대로 눈 앞의 문을 열어제꼈다. "아버지?" 갈색 벨벳 커튼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집무실 안 에는 재상 미카에르 대공을 비롯한 측근들이 대부분 모여있었다. 미카 에르 대공은 책상을 뒤로 하고 깊숙히 들어앉은 소파의 상석에서 고개 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문 닫고 들어오너라, 메스메르." 메스메르 폰 키노. 미카에르 대공의 장자이며, 왕실 근위대의 대장인 메스메르경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의식하며 문을 닫았다. 그제서 야 한명 두명, 그에게 인사를 전한다. "어서오시오, 메스메르경." "조금 늦으셨군요, 메스메르경." 메스메르경은 짧막하게 답례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왕세자의 귀국은 확정된 겁니까?" 미카에르 대공은 완고해보이는 주름진 얼굴에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머리를 저었다. 메스메르경은 곧바로 되물었다. "그럼?" 대답은 옆에 있던 측근 중 한 사람인 재무대신 리오르 폰 지노, 리 오르경이 대신했다. "테라 측에서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을 담보로 다른 조건을 제시했 습니다." "다른 조건?" 메스메르경은 검은색의 굵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리오르경을 돌아보 았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받고, 리오르경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 다. "카스트로 전하를 테리아로 유학보낼 것과 소렐의 공녀와 혼인할 것 을 요구했습니다." 순간 메스메르경의 눈이 놀라움으로 확대되고, 입술이 저절로 벌어 졌다. "소렐?" 메스메르경은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재차 확인하듯 물었 다. "그 소렐 공작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르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메스메르경은 고개를 틀어 미카에르 대공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그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대공은 한숨을 쉬고, 메스메르경에게 손짓을 했다. "우선 앉거라.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메스메르경이 비어있는 소파에 털썩 앉자, 대공이 자신의 의견을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휴우… 정말 복잡하구나. 하지만 나는 이 일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네?" 자신과 똑같은 잿빛 눈동자가 의문을 가득 담고 물어오자, 대공은 쓴 웃음을 지었다. "메스메르. 너는 우리의 적이 누구라고 보는게냐?" 눈썹을 찡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메스메르경을, 대공은 한숨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빼닮은 외모의 메스메르경에게서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과는 달리 고지식한 무인이라는 것이었 다. 단순히 국왕을 보좌하는 기사로서라면 모르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국정을 손에 쥐고 좌지우지할만한 인재는 되지 못했다. 그것이, 야심만 만한 미카에르 대공에게는 못내 아쉬웠다. "적이라면……." 미카에르 대공은 자신없는 말투로 어물거리는 메스메르경을 쏘아보 았다. "설마 테라가 어떻고 레이얄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 니겠지, 메스메르?" 엄격하기까지 한 대공의 말에 메스메르경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 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있어 제일의 적은 저 오만방자한 유타르경이고, 둘 째는 카스트로. 바로 삼왕자가 아니냐?" "아……." 미카에르 대공은 쯧쯧,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테라에서 요구하는 게, 카스트로를 테라에 인질로 달라는 것 아니냐. 우리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그동안 골머리 썩이던 적 하 나를 카르노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내 말 뜻을 알겠지?" "아, ……네."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하는 아들이 미카에르 대공은 못마땅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조금 더 기민하게 생각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면에서 대공은 아베르노와 카스트로 같은 아들을 둔 칼리에르 3세가 부러웠다. 하지만 곧 대공은 기분을 돌려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베르노가 예상보다 빨리 귀국한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 도 우리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카스트로보다는 낫겠지. 만약 아베 르노가 우리를 적대시한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아직 이 카르노에 아 무런 기반도 없다는 걸 잊지 마시오." 측근들이 머리를 주억이는 것을 확인하고, 대공은 남은 말을 마저 꺼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베르노가 우리에게 적대적이리라는 것은 최악의 가정일뿐, 어쩌면 잘 구슬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는 일이오." 모두가 자신의 말을 납득한 듯 보이자, 대공은 주름진 얼굴에 미소 를 띄웠다. "그러니까 다들 미리부터 겁먹지 말고, 이번 일이 성사되도록 국왕 폐하의 기분이나 맞춰주시오. 물론 테라 사신단의 기분도 맞춰주고." "하지만 만약 국왕폐하께서 그 조건을 거절하신다면……." 문득 의문을 제기한 것은 국왕의 수석 비서관인 페시노 백작, 라일 라르경이었다. 대공은 그런 라일라르경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답 답하다는 듯 말했다. "거절해도 우리에게는 원점일 뿐이오. 나쁠 것은 없지. 물론 좋을 것 도 없소만. 하지만……" 미카에르 대공은 눈가를 좁히며, 음모가답게 속을 알 수 없는 은밀 한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실게요. 언제나처럼 말이지." 주억거리는 측근들을 보며 미카에르 대공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몇몇 자질구레한 의문과 대답들이 오갔고, 어둑해질 무렵에 야 각자 갈 곳으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메스메르경이 나가려고 할 때, 미카에르 대공이 그를 불렀다.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는 메스메르 경을 향해, 대공은 자애로운 낯으로 말했다. "오늘밤은 되도록이면 카스트로와 마주치지 말거라. 가뜩이나 심기 가 불편해 독이 오른 녀석을 일부러 상대할 필요는 없다." 메스메르경은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거라. 연회에서 보자꾸나." "네, 아버지." 메스메르경은 대공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대공은 메스메르 경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카르노 왕궁의 귀빈관과 남동쪽의 별궁을 잇는 아케이드를 걸어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앞선 사람은 파란색 제복을 입은 카르노 왕궁 의 궁내부원이었고, 손잡이가 은과 보석으로 세공된 스틱을 짚고 느긋 하게 뒤따르는 남자는 밀짚색 머리와 콧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테라 사 신단의 대표 마키아 폰 가스티오네였다. 가스티오네는 카르노에서는 볼 수 없는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흰 린네르 셔츠와 꼼꼼하게 자수가 놓여진 미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짧은 바지 밑으로 다리선이 그대 로 드러나는 실크 스타킹과 목이 짧은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카르 노 왕궁에서는 보기 힘든, 테라의 귀족들이 즐겨입는 옷차림이었다. 마 치 제집을 걷는 듯 거만하게 걸어가는 가스티오네의 뒤에는 테라에서 부터 함께 온 시종들이 잘 포장된 상자들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고 있었다. 앞장선 궁내부원은 아케이드를 지나 별궁으로 들어섰다. 그 리고 어둑한 복도를 지나 시종 한명이 서 있는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추 어 섰다. "이곳입니다, 마키아경." 여기까지 안내해온 궁내부원이 공손하게 말하고 비켜선다. 가스티오 네는 스틱을 앞쪽으로 해서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들어 감색 실크로 감싸인 문을 바라보았다. 5프리(1프리=1m)가 넘는 높이에, 양쪽으로 활짝 열면 장정 다섯이 나란히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다. 양쪽 문이 맞물리는 중앙에는 동그란 원 안에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여들 듯한 곡 선으로 엇갈려있다. 가스티오네는 낯익은 그 문양을 들여다보며, 버릇 처럼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한눈에 봐도 이곳이라는 걸 알겠군. 지금 계신가?" 그 사이 궁내부원에게 상황설명을 듣던, 문 앞에 서있던 시종은 고 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오후 명상 중이십니다." 가스티오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시종에게 말했다. "테라에서 온 케테르님의 미천한 종이, 위대한 주신 케테르님과 자 디크님의 후손이신 한족의 세리카님을 뵙기를 청한다 전해주시게. 지 가문에서 부탁받은 물건과 편지도 함께라고 말일세." 그 시종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면담을 허락하시겠답니다. 들어가십시오."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이민 가스티오네는 어두운 예배당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주신 케테르의 백금신상이 빛나고 있고, 그 앞의 제단에는 향이 타고 있는 향로와 은촛대 위에서 노란 불꽃을 내고 있 는 굵다란 초가 있었다. 사방의 벽은 감색의 실크벽지로 둘러싸여 있 고, 바닥에는 문에서 봤던 것과 같은 문양의 융단이 깔려있었다. 원래부터 전신 로마를 섬기던 카르노 왕실에 주신이신 케테르님의 예배당을 들여놓은 것은 모두 5년전, 전쟁과 외교를 통해 얻은 쾌거였 다. 가스티오네는 자신의 고국인 테라의 위상을 이곳 화려하고 아름다 운 예배당에서 다시한번 확인하고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테라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직하지만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예배당 안에 울렸다. 가스티오네 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고 안을 휙 둘러보았지만, 어둠때문인지 쉽 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스티오네는 스틱을 옆의 시종에게 맡기고, 최대한 공손하고 경건한 태도로 손을 배앞에 모아 허리를 깊 숙이 숙였다. "테라의 가스티오네 백작 마키아라고 합니다. 카르노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 건으로, 영광스럽게도 주신 케테르님의 대리자이신 대신관 제이리트님과 한족 5가문 수장님들의 부름을 받아, 그분들의 뜻을 받 들어 이곳 낙후된 땅 카르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 가문의 수장이 신 세크리트님께서도 제가 카르노에 간다는 것을 아시고 친히 세리카 님께 안부를 전해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주신 케테르의 신상 옆쪽의 벽, 아니 벽인 줄 알았던 감색 실크가 흔들리더니, 챠랑- 하는 맑은 금속마찰음과 함께 한 사람이 모 습을 드러냈다. 카르노인보다는 한참 작지만, 한족으로서는 평균치인 175리(1리=1cm) 정도의 키에 감색의 긴 머리를 땋아내리고, 주신 케테 르님의 신관임을 뜻하는 백색 신관복을 몸에 걸친 젊은 남자였다. "위대한 케테르님의 후손이신 한족의 세리카님께, 케테르님의 미천 한 종 마키아 폰 가스티오네가 인사올립니다." 가스티오네는 다시 한번 세리카 지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전체적으로 이지적인 느낌의 세리카는 가스티오네를 무표정하게 응시 하다가, 두손을 모으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주신 케테르님의 축복이 신실한 신자인 그대와 함께 하실 것입니 다. 그만 고개를 드십시오, 마키아경." 세리카는 가스티오네가 얼굴을 들기를 기다려 천천히 물었다. "뒤에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세리카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스티오네는 서둘러 대답했다. "지 가문의 수장이신 세크리트님께서 세리카님께 전하라고 명령하신 물건들로, 최상급 테라의 차와 몇가지 필요하실 물품들입니다. 그리고 미천한 신도인 제 성의도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묵히 가스티오네의 설명을 들은 세리카는 차분하게 말했다. "경의 노고와 성의에 감사드리오. 마키아경께서는 잠시 저와 차나 한잔 하시지요."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세리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다시 사라졌다. 챠랑- 하고, 세리카의 금속 귀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카르노 국왕 앞에서는 그렇게나 오만하던 가스티오네도 그런 한족의 도도함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 스티오네는 간격을 두어 세리카의 뒤를 쫓아갔다. 가스티오네가 안내된 곳은 채광이 좋은 응접실이었다. 어둡고 신비 스러운 분위기의 예배당에서 밝은 곳으로 옮겨오자, 가스티오네는 꿈 에서 현실로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한족의 존재는 가스티오네의 기분을 다시 들뜨게 만들고 있었 다. 밝은 곳에서 다시 본 세리카는 신의 후손이라는 한족의 일원답게 범 접하기 어려운 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점 흐트러짐 없이 땋아내린 감 색의 긴 머리와 그 안에 자리잡은 눈처럼 흰 피부의 깎아놓은 듯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 가스티오네는 한족 특유의 투명한 감색 눈동자가 자신을 들여다보자, 마치 자신의 때묻은 속마음이 환히 드러나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 성결한 눈을 범인인 가스티오네는 감히 마주볼 수 없었다. 조금은 짙게 느껴지는 향수냄새가 가스티오네에게서 풍겨온다. 세리 카는 후각을 자극하는 그 독특한 향이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중 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울수 없어서 근 5년이나 못가본 테라가 그리워 졌다. 새삼스런 향수(鄕愁)를 느낀 자신에게 당혹스러워져서, 적당히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스티오네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 리카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세크리트님에게서 온 편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스티오네는 "네." 라고 대답하고는 재빨리 품에서 밀랍으로 봉인 된 편지를 꺼냈다. 세리카는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희고 가느다란 손으 로 편지를 받아 봉인을 뜯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예배당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 차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가스티오네는 아 름다운 청색의 자기 찻잔을 두손으로 들어 따끈한 차의 향을 음미했 다. 맑은 향이 찻잔을 중심으로 그윽하게 퍼져나간다. 꽤 잘 우려진 그 것은, 향과 색이 잘 어우러진 최고급 테라의 차였다. 척박한 카르노의 땅에서 맛보는 고국의 차는 왕궁에 온 이래 계속 긴장하고 있던 가스 티오네의 몸과 마음을 알게 모르게 이완시키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세리카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에 편지를 쥔채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가스티오네가 차를 다 마셨을 때에야 의혹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4년간 테리아에서의 교육이 상당히 효율적이었나 보군요. 포교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니……." 세리카의 말을 기다렸던 가스티오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콧수염을 쓰다듬으려다, 흠칫 놀라 손을 내리고서 어 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신족 나부랭이보다, 주신 케테르님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이제 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주신 케테르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 것이지요."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않고, 세리카는 가만히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궁금해하던 바를 물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조건을 단 이유는 무엇입니까? 삼왕자 정도야, …사실상 상관없지 않습니까? 왕세자만 확실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 다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잠시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가스 티오네는 저절로 콧수염을 만지려고 올라가는 손을 양손으로 꾹 마주 쥐고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세리카의 감색 눈이 가스티오네에게 향했다. 가스티오네는 세리카가 무언으로 자신의 의견 개진을 허락하자,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또 짐 작해오던 바를 털어놓았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사실, 카르노의 삼왕자를 테라로 데려가기 위 함입니다. 왕세자의 조기귀국 건은 삼왕자의 테라 소환을 위한 한 방 편에 불과합니다." 의문을 가지고 가만히 자신을 담아내는 감색 눈빛에 가스티오네는 고개를 떨구고 말을 이어갔다. "한달 전, 대신관님께서 한족의 수장님들을 갑작스럽게 소집하신 일 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확실히 공표된 바는 없지만, 들리는 말으 로는 신탁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신탁?" 놀란 듯, 어깨를 움찔한 세리카는 미묘하게 눈빛을 바꾸고 되물었다. 가스티오네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확실할 것입니다. 테라 신전의 사제로 있는 자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짐작컨데 그 신탁의 내용이 삼왕자의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흐음." 세리카는 테이블 위에서 양손을 엇갈려 깍지끼며 눈길을 내렸다. "그 일이 있은 뒤에 곧바로, 카르노의 삼왕자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 져나왔습니다. 그것도 한족 수장님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세리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삼왕자라고……." "왕세자의 귀국도 1년 이상이나 남았고, 또 카르노의 삼왕자에 대해 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느닷없이 삼왕자를 테라로 데려와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저희들은 무척이나 당황했었습니다. 하 지만 한족 수장님들께서 워낙 강경하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카르노까 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가스티오네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삼왕자를 데려오라는 명령이어서, 제가 생각하 기에도 억지인 것을, 카르노 국왕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뻔뻔스럽게 말하느라 고역이었습니다만." 세리카는 자신이 알고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스트로…….' 카르노인답게 큰 키에, 카르노인답게 어둡다 못해 까만색 머리의 아 직 열 일곱 살에 불과한 아이였다. 한족에게 부여된 물질 이상의 것을 보는 능력으로 보아도, 카스트로는 특별히 다른 사람과 구분될 만한 것은 없었다. 보통 사람의 아스트랄체를 가진 보통 사람의 오라. 카스 트로는 흠잡을데 없는 보통 사람이다. '그 아이를 왜……?' 세리카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고, 가스티오네는 잠시 끊겼던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이번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왕세자의 조기귀국으로 도 안되면 달리 또 뭐라고 핑계를 대며 삼왕자를 달라고 해야할지. 정 안되면 납치라도 해야할 판입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세리카는 자신이 정말 카스트로를 주의깊게 살펴본 적은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신탁이 내려진다는 것은 아무리 신의 후 예라는 한족에게도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상 이 삼왕자 카스트로라면, 무언가 특별한 게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세리카는 지금까지 좋은 일로 신탁 이 내려진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카스트로는 요주의 대상일 가능성이 많다. '모르고 지나친 점이 있을지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세리카는 가까운 시일내에 카스트로를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머리속 에 새겨넣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5 - 관련자료:없음 [2955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6 21:30 조회:203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 - ================================================================== 분위기를 띄우는 궁중악단의 선율이 연회장의 한 귀퉁이에 있는 무 대에서 연회장 안으로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높게 매달린 샹들리에 의 호화로운 불빛들이 홀 안 곳곳을 비추고, 궁내부원들의 손으로 샴 페인의 향이 구석구석까지 운반된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우아하게 웃는 귀부인들과 자신을 과시하듯 호탕하게 웃는 귀족 남성들의 웃음 이 교차된다. '저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카스트로는 손안에서 샴페인잔을 돌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연회에서 는 언제나 웃음이 넘쳐난다. 즐거울 일이 하나도 없는데도 웃음은 끊 이지 않는다. 5년전, 자신들의 국왕이 개국이래 없던 치욕을 당해도 그 들은 연회를 열고 웃어댔고, 3년전 그토록 현숙함을 칭송하던 왕비가 죽어도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선이 분명한 남자다운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조소했다. '저들은 내가 테라로 끌려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대겠지.' 그래서 카스트로는 용병들이 좋았다. 거칠고 무례하지만, 그들은 귀 족들처럼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짓지 않는다. 그들은 솔직하게 웃고, 화낼 줄 알았다. '비록 나를 왕실의 끄나불이라고 의심하고, 이 내 앞에서 감히 국왕 폐하를 비난하더라도 말이지.' 문득 전날 만났던 용병을 떠올리고 카스트로는 장난스런 미소를 떠 올렸다. 그 용병이 만일 자신의 정체를 알면 뭐라고 그럴까. 혼비백산 할 모습이 은근히 보고싶어졌다. 카스트로의, 아니 카르노인의 용병에 대한 애정은 타국에 비할 게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성인 남자의 40%가량이 용병인 카르 노에서는 용병들은 중요한 내부병력이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용병들 은 절대 카르노에 검을 들이밀지 않는다. 아무리 돈에 움직이는 용병 이라도 자신들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처자식이 살고있는 조국에 검을 들이미는 멍청이는 없다. 물론 카르노 출신이 아닌 용병들이야 그런 것에 구애받지는 않겠지만, 용병길드를 적으로 두지 않는 한 그럴 가 능성도 희박하다. 그래서 카르노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져 본 적이 없 다. '전신 로마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카르노'. 그 영광된 이름은 대부 분 이 강인한 용병들의 힘에 기인한 것이다. 쿵쿵쿵! 모두를 주목시키는 묵직한 마찰음이 울렸다. "대 카르노 왕국의 일왕녀 유리나 공주전하와 이왕녀 체리나 공주전 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이 큰 목소리로 연회장 안쪽에 고했다. 카스트로는 시선을 들 어 연회장 입구를 쳐다보았다. 귀족들의 찬사와 감탄성을 받으며 두 명의 소녀가 등장하고 있었다. 진주로 치장한 갈색 머리와 매끄러운 흰 피부의 일왕녀 유리나는 옅 은 노란색의 새틴에 금사로 수놓여진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고 기품있 게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리나의 옆에서 우아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분명한 밤색 머리 와 푸른 드레스의 깜찍한 소녀는 올해 열 다섯 살인 이왕녀 체리나였 다. 귀족들의 인사에 답례하며 그들과 어울리던 두 왕녀는 곧바로 행동 패턴을 달리했다. 유리나가 여전히 우아하게 귀족들과 어울리는 반면, 체리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스트로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사람들 을 헤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빠져나왔던 것이다. "오라버니……." 조급하게 다가오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카스트로의 눈에 부드러운 미 소가 어렸다. 아무리 유리나처럼 우아하고 기품있게 보이려고 점잔을 빼봐도, 결국은 '우아하다'는 말보다 '귀엽다', '깜찍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체리나는 영락없는 귀염둥이 막내였다. "이왕녀께 인사올립니다." 카스트로의 옆에 서있던 라에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급하 게 말을 하려던 체리나는 하려던 말을 놓치고, 라에르를 돌아보았다. "아, 라에르경. 경도 안녕하셨어요?" 라에르는 어떻게 보면 쌀쌀맞게도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 다. "예, 공주전하." 어려서부터 라에르의 그런 표정과 태도에 익숙한 체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 커다란 갈색 눈망울로 머리꼭대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카스트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예요? 오라버니가 테라로 가신다는게……" 연한 갈색의 동공속에 금빛 파편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카스트로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정말 너무해요. 안그래요? 테라 따위 망해버렸으면 좋겠어요." 카스트로는 가만히 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큰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다. 카스트로는 결국 체리나를 달래 기로 결정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야. 폐하께서 아직 확답하시지 않으셨으니 까." "하지만……." 칭얼대듯 대꾸하는 체리나에게 카스트로는 일부러 엄하고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아베르노 전하는 그냥 두어도, 1년만 지나면 귀국하실 분이야. 그런 데 굳이 폐하께서 그 1년을 줄이겠다고 나를 5년간이나 테라에 보내시 려 할까? 어떨 것 같아, 체리나?" 흔들리던 체리나의 갈색 눈동자가 다시 생기를 띄었다. 아무래도 체 리나는 희망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난 또 오라버니가 꼼짝없이 테라로 잡혀가야 하는 줄 알 고…… 헤헷, 죄송해요. 제가 잘 알아보지도 않고 수선을 떨어서……." 활짝 웃는 체리나의 얼굴이 한없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어려서 부터 자주 투닥거리기도 하고, 같이 못된 장난질도 하면서 커온 공범 자인 사이라 그런지, 두 사람에게는 무게잡는 다른 형제들과는 남다른 우애가 있었다. 카스트로는 싱긋 웃으면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 했다. "잘못을 알았다면, 제 정신을 빼놓으신 벌로 오늘밤 첫 춤을 저와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왕녀시여." 체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뒤로 한 발을 빼고 '우아하게' 마주 인사했 다. 그녀의 반짝이는 금빛 파편에는 장난기가 가득 차올랐다. "어쩔 수 없지요. 제게 춤을 청하실 더 멋진 기사분이 많기는 하지 만, 저도 제 잘못을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 왕자전하." 카스트로는 능숙하게 체리나를 플로어로 이끌어내며 장난스럽게 눈 썹을 치켜올렸다. "나보다 더 멋있는 남자가 있다고?" 체리나는 입가에 웃음을 함뿍 매단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이 말하는데, 이번에 기사단에 새로 들어온 사람중에 아주 멋있는 기사가 있대요." '아주' 라는 말을 길게 끌어 악센트를 넣는 체리나를 내려다보며, 카 스트로는 질투하는 척, 얼굴을 외로 돌리며 삐진 말투로 물었다. "흥, 그 기사가 누군데?" 부드러운 선율과 카스트로의 강한 리드에 몸을 맡기면서 체리나는 얼핏 들은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카…… 흐음, 아, 맞아. 카나이트경. 루시노 후작의 장자래요." "루시노 후작? 군부대신인 유타르경 말인가?" 카스트로는 곧 유타르 폰 루시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빙글빙글 웃 었다. 장난기가 묻어날 듯한 얼굴이면서도, 짐짓 생각해주는 척 진지한 투로 말했다. "글쎄, 네가 말한 그 기사가 부친을 닮지 않았길 빈다. 대머리 기사 는 좀 그렇지 않겠니?" "대머리요?" "그래, 대머리!" 놀라서 그 큰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체리나에게 단호하게 대답해주 고, 카스트로는 대머리와 춤추는 체리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저절로 비 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카스트로 전하의 뒷모습만 쳐다보시는군요. 조금만 눈을 다 른곳으로 돌려볼 생각은 없나요?" 어딘지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기분 나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라 에르의 무표정한 인상이 저절로 구겨지려고 했다. 하지만 라에르는 간 신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평소대로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 런 그의 앞으로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칼의 눈이 현란한 미녀가 그 요염 한 자태를 드러냈다. "생각보다 더 근사한 것이 옆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도발적인 느낌의 가슴이 깊게 패인 붉은 드레스와 불길한 핏빛 루비 로 몸을 과장되게 치장하고, 암내를 풍기는 짐승의 암컷처럼 짙은 향 수로 뭇 사내들을 끌어모으는 더러운 창녀! 그것이 오늘 밤, 라에르가 내린 그녀에 대한 평가였다. "저는 카스트로 전하의 호위기사입니다. 다른 곳을 볼 여유도, 다른 곳을 볼 생각도 없습니다, 모리노 남작 부인." 찬서리라도 내릴 듯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지만, 모리노 남작 부인은 그런 라에르의 기분을 모르는 것처럼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호호거리 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라에르경. 그건 그렇고 오늘 흥미로운 소리를 들었답 니다. 경의 친애하는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테라로 쫓겨가게 되셨다지 요? 경께서 서운하시겠어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셨다던데? 테라로 가시면 최소한 5년은 그곳에 계셔야 할텐데. 경도 새로 주인을 섬기려 면, 어려운 점이 많겠어요." 남자라면 당장 결투라도 신청했을 것이다. 라에르는 뿌드득 이빨을 갈아붙이고, 여자의 목을 분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힘껏 검자루를 그 러쥠으로써 억눌렀다.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카스트로 전하께서 테라 로 가시게 된다 하더라도, 전하의 호위기사인 저는 당연히 전하를 따 라갑니다. 그러니까 모리노 남작 부인께서 염려하시듯, 새로 주인을 맞 아 힘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리노 남작 부인은 과장되게 미소짓던 표정을 걷어치우고, 아연해 진 얼굴로 멍청히 라에르를 올려다보았다. "하… 하지만, 라에르경은 친위대 부대장입니다. 왕세자 전하께서 오 시면 그분을 섬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닙니까?" 라에르는 싸늘한 눈으로 남작 부인을 내려보면서 말했다. "제 지위가 문제가 된다면, 그 따위 지위는 얼마든지 반납하겠습니 다. 개인 호위기사의 자격으로라도 그분을 모시면 되겠지요. 이것이 남 작 부인의 호기심에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만 비켜주시겠 습니까?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남작 부인과 인사하고 싶어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모리노 남작 부인은 라에르의 냉담한 말로 밀쳐져서, 잠시동안 사고 의 혼란에 빠져버렸다. '따라가겠다고? 테라까지라도 따라가겠다고?' 모리노 남작 부인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리고 원 망에 찬 붉은 눈을 그대로 플로어에서 웃으며 춤추고있는 카스트로에 게 꽂았다. '왜 저따위 녀석을 위해…….' 부채를 움켜쥔 모리노 남작 부인의 장갑낀 손이, 부채를 부러뜨릴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쿵 쿵 쿵 쿵! 음악이 멎고 사위가 조용해지자, 시종장의 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 카르노 왕국의 국왕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제각기 흩어져 무리지어있던 귀족들이 연회장 입구에서 왕좌로 이어 지는 길을 따라 늘어섰다. 허리를 숙인 귀족들 사이로 피로해보이는 칼리에르 3세가 지나갔다. 칼리에르 3세가 왕좌에 자리하자, 다시 음악 이 연주되고 무리가 지어져 수근거린다. 그들 무리 중에는 테라에서 온 사신단과 카르노 내 친테라파의 무리도 섞여있었다. "저 미인이 카르노 국왕폐하의 애인이라구요? 허허, 칼리에르 폐하 의 안목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소이다?" 가스티오네는 칼리에르 3세에게 다가가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인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위험한 매력 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친테라파의 거두, 카르노의 군부대신인 루 시노 후작 유타르경은 경멸어린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면서 칼날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외모에 대한 안목이야 높아졌을지 몰라도, 품위와 고상함에 대한 안목은 형편없이 추락하셨지요. 비록 저희에게 적대적이기는 하셨으나, 3년전 타계하신 미에라 왕비 전하께서는 온 국민에게 추앙받는 현숙한 분이셨습니다." 일면 강직하게까지 들리는 유타르경의 말에, 가스티오네는 피식 웃 음지었다. 친테라파이면서도 카르노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는 이 머리 가 벗겨진 중년의 권력가는 가스티오네로서도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돈과 뇌물로 테라에 호의를 가진 사 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가스티오 네는 지나가던 궁내부원의 손에 들린 은쟁반에서 샴페인을 집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저 여인은 카르노의 국모가 아닌, 국왕폐하의 애첩일 뿐인 게 아니오? 애첩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모와 잠자리의 능력이지, 품위 나 고상함이 아니오." 유타르경은 못마땅함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달리 그 말에 반대할 생각도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가스티오네의 말은 맞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천한 암컷이 분수도 모르고, 내정에 관여하겠다니까 문제인 것이외다." 유타르경의 짜증섞인 말을 듣고, 가스티오네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 은근히 유타르경의 반응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하, 이제 카르노의 왕세자 전하께서 귀국하시면, 국왕폐하의 애첩 인 여성쯤이야 아무리 애써도 별수없지 않겠소? 카르노 국왕폐하께서 지난 5년간 끊임없이 그리워하던 왕세자 전하시니까 말이오." 그 말이 꽤나 만족스러웠던지, 유타르경의 입가에 기분좋은 미소가 맺혔다. "그렇군요. 왕세자 전하의 귀국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소." 가스티오네는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그럴 듯한 표정으로 유타르경 을 부추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르노 국왕폐하께서 결심을 서둘러주셔야 될 터 인데……. 무얼 그리 망설이시는지 모르겠소. 설마 삼왕자 전하를 왕세 자 전하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아니신지……." 유타르경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소? 삼왕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이지만, 왕세자 전하는 카르노의 기둥이고, 희망이오. 우리 카르노에 꼭 계셔야 할 분이외다. 지금의 이 불안한 정국이 다, 왕세자 전하의 부재로 생긴 일 아니오? 이렇게 미카에르 대공이 설치게 되는 것도, 저런 천한 여 자가 내정에 가타부타 하는 것도 다 왕세자 전하가 계셨으면 없었을 일이외다." "그렇군요. 저도 진심으로 왕세자 전하의 귀국이 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더없이 강경한 유타르경의 반응은 가스티오네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하지만 콧수염을 쓰다듬는 가스티오네의 입가에 맺힌 회심의 미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길 오시느라 피곤하실텐데, 즐거운 시간이 되고 계신지 모르겠습 니다, 마키아경." 가까운 데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타르경은 움찔하고 몸을 긴장시켰 다. 가스티오네는 그런 유타르경에게서 살짝 몸을 틀어, 목소리의 주인 공을 돌아보았다. 오늘 성 밖까지 마중나왔던 카르노의 재상, 미카에르 대공이 늠름한 흑은발의 청년과 함께 서 있었다. "대공전하의 관심 덕분에 더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잘생긴 청년은 누구신지?" 사교적인 미소로 무장하며, 가스티오네는 미카에르 대공과 청년을 번갈아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혈연관계에 있음이 분명한 외모의 두 사람이었지만, 호리호리하게 말라 예민하게 보이는 미카에르 대공과 늘씬하게 뻗은 몸매에 힘이 넘쳐보이는 젊은 메스메르경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미카에르 대공은 훤칠하게 큰 자신의 아들을 가스티오네에게 소개했다. "제 아들인 메스메르입니다. 왕실 근위대장직을 맡고 있지요. 메스메 르, 테라의 사신으로 오신 가스티오네 백작, 마키아경이시다." 테라의 사신에게 고개숙이고 인사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미카에 르 대공의 강제적인 명령으로 이 자리까지 따라온 메스메르경은 딱딱 한 미소를 떠올리며 인사했다. "메스메르 폰 키노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키아 폰 가스티오네라고 합니다. 대공께서도 이런 후계자를 두시 어 마음 든든하시겠습니다." 주름진 미카에르 대공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뭐라해도 아들이 칭찬들으니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제 아들을 잘 봐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겸손하시군요, 미카에르 대공전하." 인사치레가 목적이 아니었던 미카에르 대공은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 르는 사교적인 인사에서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왕세자 전하의 일에 대해서, 국왕폐하께서는 다른 언질이 없으셨습니까?" 가스티오네의 뒤에서 유타르경이 뻣뻣한 몸짓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유타르경은 미카에르 대공과 얼굴을 마주치기전에 다시 고개를 돌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유타르경의 모든 신경은 미카에르 대공의 말 한마디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 다. "예. 아직은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카르노 국왕폐하께서 생각 하실 여유를 달라고 하셨으니, 며칠 뒤에 대답을 주시겠지요. 자피아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번 혼사와 유학에 대해, 칼리에르 폐하께 서 긍적적인 쪽으로 결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떠보는 듯한 가스티오네의 말투에, 미카에르 대공은 사교적인 미소 로 일관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마음을 숨긴, 그러나 어느면에 서는 솔직한 그런 대화였다. "저도 개인적으로 마키아경의 노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간 독수리의 눈을 연상시키는 유타르경의 매서운 눈빛이 미카에르 대공에게 쏘아졌다. '마키아경의 말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다른 화제로 옮겨, 즐거운 낯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능글맞은 미카에 르 대공을 보며, 유타르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르노의 현 집권세력인 미카에르 대공이, 왕세자 전하께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기라도 한다 는 말인가? 권력의 이양을 가속화시킬 일에 찬성하겠다니, 미카에르 대공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타르경의 깊은 초록색 동공에는 짙은 의혹이 스며들어있었다. 흥청거리는 연회장을 벗어나 발코니로 걸음을 옮기는 두 청년이 있 었다. 190리(1리=1cm) 이상의 장신인 부드러운 흑발의 청년은 새하얀 린네르 셔츠 위로 손이 많이 간 자수장식의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무 릎까지 올라오는 가죽부츠와 검은색에 가까운 암녹색의 새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어둠속에 빨려들 듯한 검은색 일색이지만, 청년은 알게 모르게 존재감이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사 람들의 눈길을 피해 발코니로 나간 카스트로는 바람에 얼굴을 내맡기 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밤바람이 시원해. 아마 발코니를 처음 만든 사람도, 건물 내부의 답 답함을 어지간히 싫어했던 사람일거야." 카스트로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발코니의 대리석 난간에 손을 올려놓 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카스트로보다 4, 5리 가량 키가 작은 흑갈색 머리의 청년이 있었다. 카르노 국왕친위대의 정규복장인 흑자색 예복과 자주색 망토로 몸을 두른 그 청년은 허리에 장검을 차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양껏 청 량한 공기를 들이마신 카스트로는 몸을 돌려 난간에 등허리를 기대고, 뒤에 서 있는 라에르에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하루종일 인상 구기고 있지마, 라엘. 다들 웃고 있는데, 자 네 혼자 그러는 것도 보기 안좋아." 라에르는 묵묵히 카스트로의 시선을 견뎌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 었다. "지금 웃고 싶은 기분이 드십니까?" "기분과는 상관없이 웃을 수 있는 것이 지위높은 귀족으로서의 필수 조건이야." 조소하며 빈정거리는 카스트로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라에르는 진지하고 엄격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소귀족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런 것은 체질과 맞지 않습니다." 하하하.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고, 카스트로는 암녹색 대리석 난간 위 에 엉덩이를 걸치고 올라앉았다. "위험합니다. 내려오십시오." 정색을 하고 다가오는 라에르를 돌아보면서, 카스트로는 얄밉게 씨 익 웃었다. "아아, 뭐, 떨어질 것 같으면 자네가 잡아주겠지. 안그래, 라엘?" 라에르는 입매를 굳히고, 비난어린 눈길을 쏘아보냈지만, 카스트로는 능글맞게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밤하늘이 참 맑다. 그렇지, 라엘?" "……." 여전히 고자세인 라에르를 흘끗 보고,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 발을 난간위로 끌어올렸다. 더욱 아슬아슬해진 자세에 라에르는 신경을 더 곤두세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위험한 자세의 카스트로는 한가로이 먼 하늘로 시선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황금빛의 탐 스러운 달과 희게 빛나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카스트로의 검은 동공에 비쳐진다. 수많은 상념이 카스트로의 맑은 눈 속을 스쳐갔다. 떠오르는 것은 힘없는 아버지와 오만한 테라 사신, 그리고 카르노의 왕자라는 이유로 인질이 되어 적지 한복판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무력 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무력하다'라는 말은 카스트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다. 어려서부터 힘없는 아버지를 보아오며 그 무력함의 대가를 뼛속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무력함이라는 것을 지극 히 혐오하고 경멸했다. 그래서 쉬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그 날을 준 비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테라의 어처구니없는 변덕으로 자신이 준 비해온 모든 것들이 적어도 5년간은 손댈 수도 없게 되었다. 카스트로 는 깊게 숨을 쉬며 눈꺼풀을 내렸다. 자신이 테라로 가게 되면, 자신이 하던 일은 원래 그 일들을 해야했던 왕세자 아베르노 전하가 맡아야 될 것이다. 5년간, 그 5년간, 아직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데, 중간에 이렇게 손을 놓고 끌려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꺼림칙 하게 했다. 카스트로는 다시 숱 많은 속눈썹을 들어올리고, 맑디맑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물론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밤하늘에 맑게 울리는 카스트로의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라에 르의 눈빛을 흔들리게 한다. "내가 테라로 가고, 왕세자 전하께서 귀국하신다면……, 그렇다면 라 엘……, 내 대신 왕세자 전하를 잘 보필해주길 바란다." 라에르는 못마땅한 기분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깊은 속에서 부터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왜 다들, 자신이 카스트로를 떠나 왕세자 전하를 모시리라고 가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뭇 사람들 뿐 아니라, 카스트로 본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라에르의 신경을 더 더욱 긁어내리고 있었다. 라에르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스 트로는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힘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왕세자 전하가 하실 일을 옆에서 돕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카르노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그런 약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격한 감정이 섞인 라에르의 반응에, 카스트로는 놀란 눈을 돌려 라 에르를 돌아보았다. 라에르는 얼굴빛을 굳히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울 분에 찬 말을 쏟아냈다. "전하의 말씀대로 아직 확정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전하 께 충성을 맹세한 몸! 절대, 다른 주군을 모신다는 것은, 설사 제가 죽 는 한이 있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라… 엘……" 카스트로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라에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격한 감정이 물결치는 짙은 흑갈색의 눈동자가 카스트로에게 무언 가를 알아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눈으로 호소하는 그 격렬 한 감정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를 주군에게서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제가 죽는 것뿐입니다. 그 러니까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설령 전하께서 테라로 가게 되신 다 하더라도, 신(臣)을 떼놓으실 수는 없습니다." 카스트로의 남자다운 얼굴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굳이 자신을 주군이라 칭하고, 자기를 신이라 칭한 것은 무엇보다 충성이 우선한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묵묵히 따르던 친구이 며 신하인 자에게서 이런 확신어린 충성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보 다 마음든든한 일이었다. "내가 가는 곳이 지옥이라면?" 장난스런 말이었지만, 라에르는 망설임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옥끝까지라도 주군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만족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난간에서 바닥으로 뛰어내 렸다. 그리고 라에르의 어깨에 손을 짚고, 연회장안으로 되돌아가면서 들릴 듯 말 듯하게 속삭였다. "고맙다, 라엘." 라에르의 굳은 얼굴도 조금씩 부드러움을 되찾고 있었다. 시리도록 맑은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정말 자르기가 어중간해서.. 내용에 상관없이 팍팍 잘라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뭐, 처음이니까 괜찮겠지요.. 쩝.. 뒤늦게 찾아내는 오타.. 라기 보다, 잘못 알고 있던 단어들이 뒤통수를 치는군요. 어쨌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천둥치는 날의 새였음당.. (천둥싫어..)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6 - 관련자료:없음 [2958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7 20:42 조회:197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 - ================================================================== 챙-- 챙---- 카강--- 카르노 왕궁 내, 왕실 기사단 건물은 카르노 왕실이 지어질때 함께 지어진 암녹색의 오래된 삼층 건물이다. 은색 갑옷과 암녹색 망토로 상징되는 카르노 왕실 기사단은 용병대와 함께 카르노 건국의 양대 주 역 중 하나이다. 카르노의 건국왕 유시아 1세는 기사단의 초대 단장이 며, 또한 그들의 주인으로서, 기사단의 건물을 왕궁 안에 짓고, 꽤 넓 은 부지를 기사들의 연무장으로 내주었다. 카가가강--- 쇠가 부딪혀 긁히는 소음이 나른한 오후 햇살 가득한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듣기 괴로운 마찰음은 본의 아니게, 식곤증에 시달리는 기사단 원들의 졸음을 여지없이 날려주고 있다. "아직 멀었습니다, 전하." 카스트로의 검을 내리누르면서, 기사단장 다이크경이 즐거운 듯이 말을 건넸다. 카스트로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흠뻑 젖은 머리결을 따라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두 사람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 만, 숨을 몰아쉬는 카스트로와는 달리 다이크경은 지친 내색조차 보이 지 않는다. 카스트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떨쳐버리려 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쯤에서 항복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검에 나가떨어지시던 걸 생 각하면, 제 검을 상대로 두시간이나 버티신 것만해도 대단한 발전입니 다." 놀리는 듯, 즐거운 얼굴로 말하는 다이크경을, 카스트로는 눈썹에 힘 을 주고 노려보았다. "치사하게 열네살때 일을 자꾸 말할 겁니까? 그리고 대련 중에 상대 를 놀리는 게 기사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다이크경." 카강--- 검의 압박을 풀고 물러선 다이크경은 다른 각도로 카스트로를 공격 해들어갔다. 서른 살이 채 안된 젊은 기사단장, 다이크 폰 하우노의 역 동적인 움직임으로 짧은 적자색 머리 끝에 맺힌 땀방울이 사방으로 비 산한다. 연무장 주위의 그늘에서 쉬고있던 기사단원들은 턱을 괴고, 두 사람 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하나 둘 들어오기 시 작한 기사단원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두 사람의 대련을 평하고 있 었다. 마침 연무장으로 들어오던 스물 두 살의 젊은 신입기사, 카나이트도 연무장을 누비며 검을 부딪히는 기사단장과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고 정시켰다. 한달이 채 안된 기사단의 생활 중, 기사단장 다이크경이 직 접 검을 들고 다른 사람과 겨루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서 카나이트는 기사단장이 친히 상대해주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카나이트경의 검술 실력이 과연 어떤지, 상당히 호기심이 동하고 있었 다. "단장도 꽤 열심이란 말야. 매번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련해주 고." 어딘지 비꼬는 듯한 느낌의 말투가 들려오자, 카나이트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 기사들 중에서도 사람사귀기 좋아하기로 소문난 로카르경이, 방금 말한 기사의 옆에서 카나이트와 눈을 맞추고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있던 또 다른 기사가 베이경의 말에 반박 하고 있었다. "너라면 거절할 수 있겠냐? 그리고 저 분 실력이면, 너와 싸워도 지 지는 않으실걸?" 짧께 깎은 백금발과 맑은 초록색 눈동자의 조각처럼 매끈하게 잘생 긴 청년. 입단때부터 출신, 실력, 그리고 유난히 수려한 외모로 왕궁 시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카나이트는 선배기사들의 시기와 부러움 도 함께 받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이 카나이트가 온 것을 눈치채고 돌 아보다가, 다시 홱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카나이트 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로카르경의 옆에 자리잡고 앉아, 턱 짓으로 연무장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로카르경이 사람좋은 미소로 입을 열었지만, 그 전에 아까부터 뭔가 가 불만스러워보이는 베이경이 잽싸게 대답을 가로챘다. "저분은……" "누구긴! 기사단장을 검술놀이 상대쯤으로 착각하는 대단한 왕자 전 하시지." 다갈색의 짧은 고수머리에, 커다란 몸집이 마치 곰처럼 보이는 베이 경은 심술 난 꼬마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뭐가 못마땅한지 삐딱하게 대답하는 베이경을, 곰옆에서 짖어대는 회색 사냥개같은 느낌의 포에 르경이 나무랐다. "그만해, 베이.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할 분이 아니시다. 네 말대로 저 분은 이 나라의 왕자 전하시니까." '왕자 전하?' 카나이트는 뜻밖의 대답을 듣고, 다시 연무장에서 겨루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암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장신의 남자는 비록 상당히 고전하고 있는 듯 했지만, 흐트러짐없는 깔끔한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삼왕자?' 카나이트는 주위에서 들었던 삼왕자의 소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삼왕자를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는 탓에, 아버지의 측 근들로부터 들었던 소문들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야심많은 왕자' 라던가, '국왕의 총애를 업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 등등. "라에르경만 안됐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소문난 라에르경이 고 작 저 철부지 왕자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다니. 왕세자 전하의 호 위도 아니고, 삼왕자의 호위라니! 대체 친위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베이경은 여전히 그 두툼한 입술을 불퉁스럽게 내민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포에르경은 베이경이 멈출 것 같지 않자, 나직하게 경고했다. "베이!" "봐아! 저기, 저렇게 긴장하고 서 계신 라에르경을! 왜 저분이 저러 고 있어야하는데? 친위대장 피오르경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기사단의 차기 단장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계셨을 분이!" 포에르경은 멈출 기미가 없이, 더욱 큰소리로 말하는 베이경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카나이트는 베이경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 렸다. 연무장 한 구석에 서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흑갈색 머리의 청 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르미노 자작가의 신동!' 심장이 요동치듯 두근거린다. 카나이트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 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름과 저쪽에 서있는 사람을 매치시켜보았다. 검술을 시작한 뒤로 귀가 따갑게 듣던,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신 동의 이야기. 열다섯에 친위대장을 누른 검술의 천재. 그 실체가 바로 저기 서 있었다. 카나이트는 묘한 기분이 되어 한참동안 말없이 '소르 미노 자작가의 신동'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카나이트 는 문득 무언가 이상한 점을 떠올리고 물었다. "라에르경이라면 다이크경 이상의 검 상대가 될텐데, 왜 왕자 전하 는 굳이 다이크경을 찾아 대련하는 것입니까?" 라에르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불쾌한 소리에 반응해, 말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테라의 사신단이 온 뒤로 가뜩이나 곤두선 신경은 여지없이 불쾌한 말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라에르는 투닥거리는 기사 들을 보다가, 곧 자신에게 쏘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시력이 좋은 라에 르는 그 기사의 얼굴을 마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이름과 카스트로의 이름이 거론되는 게 불쾌하기는 하 지만, 라에르는 자신의 임무가 카스트로, 삼왕자를 호위하는 거라는 것 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요 며칠간, 테라 사신을 위한 연이은 연회와, 국왕폐하에게서 떨어질 '대답'을 기다리는 긴장은 어지간한 카스트로의 신경도 버텨내기 힘든 것 같았다. 물론 말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열두살때부터 함께 자라다 시피한 라에르는 누구보다 카스트로의 상태를 잘 느끼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결국 삼일째, 그 긴장을 못견디겠던지 '검술대련'을 핑계 로 이곳 기사단의 연무장까지 와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대련을 하는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검날이 번뜩이고 신경을 긁는 마찰음이 날 때마다, 호위기사인 라에르의 심장은 수십번씩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다. 대련 상대가 이미 카스트로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도 라에르의 심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에르는 제발 이 지 옥같은 대련시간이 되도록 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라에르경이 상대해주지 않는다더군." 질문에 대한 답은 카나이트의 옆에 있던 로카르경이 했다. 바람에 흐트러진 적갈색 머리를 쓸어올리고, 옆에서 쥐와 고양이처럼 아웅대 는 베이경과 포에르경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한 대답이었 다. "네?" 카나이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준수한 얼굴을 찌푸렸다. 포에 르경이 베이경의 입에서 손을 떼어 바지에 침을 닦아내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던 로카르경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나도 더는 몰라.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게, 카나이트.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만." 역대 기사단원 중 최고의 미모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카나이트 폰 루 시노는 풀지 못한 의문을 가진 채로, 다시 소문의 신동 라에르경의 모 습을 눈으로 쫓았다. 검술을 시작하면서, 언제나 라이벌로 정해놓았던 남자를 직접 눈으로 보는 기분은 꽤나 복잡미묘했다. 다이크경은 기사단장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이 젊은 왕자와의 대련을 언제부터인가 꽤 즐기고 있었다. 삼년전, 들기도 힘들어하던 장검을 들 고 와 맹랑하게도 기사단장인 자신에게 도전해왔던 열네살의 꼬마는, 이제 제법 근사한 실력으로 다듬어져, 왠만한 기사 한사람 몫은 충분 히 할 정도였다. 카가가-- 챙! 카앙--! 카스트로는 자기 손을 벗어나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검을 따라 시 선을 옮겼다. 순간, 카스트로의 목덜미에 햇빛을 반사하는 검날이 들이 밀어졌다. 카스트로는 눈앞에서 승리감으로 웃고있는 다이크경을 바라 보다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또 져버렸군.' 패배감에 젖은 카스트로의 귀에 다시 놀리는 듯한 다이크경의 목소 리가 날아들었다. "대련 중에 상대를 놀리는 것은 기사가 할 행위는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을 격발시키는 것은 실제 싸움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 입니다. 단지 저와 기사놀이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다음부터는 아무리 전하라 해도 대련 신청을 거절하겠습니다." 으윽, 하고 카스트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이크경은 검을 회수해 검 집에 집어넣고,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충고입니다만, 실전에 임할 때에는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카스트로는 그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수가 없어, 다이크경 을 쳐다보았다. 다이크경은 지금까지의 장난스런 표정을 지워버리고, '스승'다운 엄격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싸움은 검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기 사들의 검술과 예법에 얽매여 계십니다. 기사의 검술과 용병의 검술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카스트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기사들의 검술은 말위와 땅위에서의 모든 전투기술을, 용병들의 검 술은 주로 육탄전을 염두에 둔 것 아닙니까?" 다이크경은 건틀릿을 빼고, 푹 젖어버린 이마의 앞머리 속으로 손가 락으로 집어넣어 뒤로 쓸어넘겼다. 손에 묻어나는 땀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점심시간을 거른 두시간의 싸움은 아무리 다이크경이라도 지치는 모양이었다. 다이크경은 땀을 바닥으로 털어내면서, 골랐던 말 을 뱉어냈다. "그것은 형식적인 말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양측의 차이점은 마 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마음가짐?" 진지하게 경청하는 카스트로를 바라보며, 다이크경은 평소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들을 설명했다. "기사의 검은 명예와 예법입니다. 정도를 따르기 때문에, 깊이가 있 고 강하지만, 명예와 예법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 전에서 목숨이 위급할때에도 그것에 얽매여 망설이다가, 살 수 있음에 도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그런가?'하고 생각하며, 다이크경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용병의 검은 생존입니다. 그 실력이야 천양지차지만, 다들 생존을 위해 싸웁니다. 생존 앞에서 명예니 예법이니, 그런 것은 상관 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크경은 턱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카스트로의 검을 가리켰다. "제가 전하의 검을 날려버렸을 때, 전하께서 그대로 패배를 인정하 신 것은, 전형적인 기사의 검입니다. 물론 대련이라서 그럴수도 있겠지 만, 실전에서 실제 목숨에 위협을 느껴도 그대로 계시겠습니까?" "……!" 카스트로는 바닥에 떨어진 검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실제 목숨에 위협을 느낀다?' 그런 것은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감히 왕자인 자신에 게 검을 겨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진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다는 말인가? 하지만. 카스트로는 문득, 자신이 곧 테라에 간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적국인 테라에 가서도 그렇게 안이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말 그 대로 적들의 나라이다. 카스트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다이크경을 바라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다이크경의 말이 이어졌다. "실전이라면, 전하께서는 손을 벗어난 검을 쳐다보기보다는, 제가 다 음 동작을 취하기 전에 제게 파고들어 주먹이라도 날리셔야 했다는 말 입니다." 카스트로는 미간을 찌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내려보다가, 다시 다이크경을 돌아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뭔가 알았다는 듯 밝은 미소였 다. 다음 순간, 카스트로의 주먹이 가만히 방심하고 서있는 다이크경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크윽……이런……." 다이크경은 배를 두손으로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제법 손매가 매 워서, 다이크경은 인상을 써댔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다이크경?" 다이크경의 손이 닿는 거리 밖으로 물러나 천연덕스럽게 묻는 카스 트로를 다이크경은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런 비겁한 짓은……!" "하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한산한 연무장을 채워나갔다. "하하하, 미안하지만, 다이크경. 전 학습능력이 뛰어난 학생이라서 말입니다." 통쾌하다는 듯 웃고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결국 다이크경이 헛웃음 을 웃게 만들었다. 그 한번의 주먹질로 수년간의 패배를 설욕한 기분 까지 든 카스트로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오늘, 다이크경의 말씀, 꼭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이크경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자신의 가르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오늘도 비... 올해는 무사히 넘어가나 했는데, 역시 또 아닌가요? T.T 방에 비가 내리고.. 컴도 아프다고 빽빽대고.. 새도 머리가 아파오네요.. 비.. 정말 싫어지는군요.. 비속의 새였음다..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7 - 관련자료:없음 [2960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8 20:41 조회:196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 - ================================================================== 주신 케테르의 차자(次子) 자디크의 후예인 한족. 그 신성한 종족인 한족에게는 신의 혈통이랄까, 아니면 신의 은총이랄까, 어쨌든 보통 사 람 이상의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 중 한가지가 바로 사물의 오라를 볼 수 있는 '제3의 눈'이다. 보통 사람이 보는 사물과 한족이 보는 사 물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놓고 볼 때, 보통 사 람이 보는 것은 가시광선 내의 외모밖에 볼 수 없지만 한족에게는 그 사람이 가진 오라의 갖가지 색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색채는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감정까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리카는 기사단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종족에게 부여된 능력으로 삼왕자 카스트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저기 연무장의 구석에 서 있는 기사나, 여기저기 모여있는 기사들 중 섞여 있는 자가 훨씬 뛰어 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보통 사람보다 약간 뛰어날 뿐, 근본적으로 한족이나 대륙의 평화에 위협을 가할만한 존재는 아니 다. "신탁이라……." 세리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하고 다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역시 마키아경이 잘못 짚은 건가?" 세리카는 한참동안 살펴보느라 피곤한 눈을 감고, 살짝 머리를 흔들 었다. 챠랑- 하는 맑은 금속음이 세리카가 한 금속의 사각뿔 모양의 귀걸이에서 났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세리카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아무리 생 각해도 저 삼왕자가 대단하다는 것은 못느끼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 시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했다. 세리카는 삼왕자와 그의 호위기사가 연무장에서 나서는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짧게 신어(神語) 를 읊조렸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카르노 왕궁의 핵심은 국왕의 정전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정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은, 세 번째 방인 어 전회의실이다. 국사에 무관심한 국왕 때문에, 회의의 주재자가 국왕이 아닌 재상이 되어버린 어전회의였지만, 요 며칠간은 직접 국왕이 얼굴 을 내밀고 있었다. 한창 열기를 띄고 있는 지금 회의의 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왕세자의 조기귀국과 삼왕자의 유학 및 혼담 건이었다. "무엇을 망설이시는 겁니까? 폐하께서도 그렇게 바라시던 왕세자 전 하의 귀국이 눈앞에 있습니다. 삼왕자 전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삼 왕자 전하의 희생으로 왕세자 전하를 모셔올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정 도는 감수해야합니다." 'ㄷ' 모양으로 놓여진 오래된 참나무 테이블의 상석에는 국왕 칼리 에르 3세가 자리잡았고, 마주보게 놓여진 양 옆의 긴 테이블에는 지위 대로 정신들이 앉아있었다. 국왕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은 정신들은 서 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칼리에르 3세는 머리속이 쿵쿵 울리는 둔통을 느끼며 머리를 손가락 으로 눌렀다. 벌써 몇사람째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제는 셀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왕세자 전하께서는 그냥 두어도 일년 뒤에는 귀국하시게 되 어있습니다. 유학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그 기간을 단축하자고, 다시 국적(國賊) 소렐 공작과 혼사를 해야한다는 말입니까? 대체 존엄 한 왕실의 안주인들을 전부 적들로 채워 넣어, 앞으로 어쩌자는 겁니 까?" 법부대신 디아노 백작 비네르경이 반론했다. 친테라파에도, 대공의 파에도 속하지 않은 비네르경은 중앙에 얼마남지않은 국왕 칼리에르 3 세의 총신 중 한명이었다. "어차피 왕세자비께서도 레이얄의 공녀십니다. 이제 다시 삼왕자의 비를 레이얄의 공녀로 못받아들일 일은 또 무엇입니까? 다음대 국모가 되실 왕세자비에 비하면 비중도 거의 없는 삼왕자비입니다." 반박한 사람은 유타르경이었다. 친테라파의 우두머리인 그는 삼왕자 의 유학과 혼사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사람 중 한명이었다. 쓸모없는 삼왕자의 희생으로 왕세자를 조금이라도 빨리 귀국시킬 수 있다면, 삼 왕자쯤은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었다. 단 1년을 앞당기는 것뿐일지 라도, 눈앞에 흔들리는 미끼를 본 유타르경은 그것을 덥썩 물 수밖에 없었다. 1년만으로도 정국은 예측할 수 없이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유타르경께서는 국적 소렐과 혼사를 맺고 싶다는 겁 니까?" 다시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가 유타르경의 말을 치고 들어왔다. 칼리 에르 3세는 정신들의 논쟁을 들으면서, 몇번이고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부아를 참아넘기고 있었다. 어느쪽의 말이고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았 다. 한 나라의 국왕인 자신이 아들을 곁에 두겠다는데, 왜 이렇게 걸리 적거리는 게 많단 말인가. 맏아들을 돌려줄테니, 셋째를 달라고? 거기 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소렐 공작의 딸을 며느리로 맞으라고? 싫었다! 자신이 아끼는 삼왕자를 테라에 볼모로 보내는 것도, 소렐 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것도 싫다! 하지만……. "말씀 삼가시오, 메이르경! 카르노인치고 누가 소렐 공작과의 혼사를 반가워하겠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소! 설사 삼왕자께서 평생 테라 에 계셔야하고, 소렐이 아니라 악마의 딸과 혼인한다고 해도, 카르노에 는 왕세자 전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시는 게 더 중요하고, 급박 한 일이오." 칼리에르 3세는 속으로 신음을 내질렀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게 옳단 말인가.' 칼리에르 3세는 며칠전부터 뇌리를 떠돌던 죽은 아내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현숙한 미에라 왕비. 가녀린 몸의 여인이면서도 자신보다 더 강했던 사람. 이십여년을 함께 하면서 어려울때마다 의지가 되어주 었던, 하나뿐인 그의 아내. 지금 이순간, 칼리에르 3세는 먼저 세상을 떠난 그녀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현명한 그녀라면 무언가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도 같았다. "대체 뭐가 그리 급박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벌써 4년 이나 테라에 계신 분이, 겨우 일년 더 그곳에 계신다고 문제될 게 무 엇입니까?" "지금 정국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시오?" 유타르경이 머리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 때,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재상, 미카에르 대공이 말문을 열었다. 낮고 잔잔한, 하지 만 어딘지 경고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지금 정국이 어떻다는 것이오, 유타르경?" 유타르경의 사나운 눈빛이 맞은 편에 있는 미카에르 대공의 위압적 인 눈빛과 허공에서 맞부닥쳤다. 현 정권의 실질적인 양대 거두의 부 딪힘은 어전회의실 전체를 침묵시켰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대 신들의 몸을 휘감아돌아, 누구도 꼼짝할 수 없었다. 유타르경이 입술을 움직여 비웃음을 지었다. "미카에르 대공께서는 왕세자 전하께서 조기귀국하시는게 못마땅하 실 수도 있겠군요. 왕세자 전하께서 차지해야 마땅할 자리를 대공께서 지금 대신 꿰차고 계시니까 말이오. 왕세자 전하께서 오시면 지금 자 리가 위태로울 테니……." "말을 삼가시오!" 여기저기서 유타르경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유타르경 측의 인물 들도 가만있지는 않았고, 덕분에 어전회의실은 삽시간에 난장판이라도 된 듯 수선스러워졌다. 칼리에르 3세는 정신들이 하는 양을 분노한 눈 으로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탁자를 내리치며 버럭 소리질렀다. "다들 그만 두시오!" 서로 대치한 채로, 정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 상대를 잡아먹 을 듯 독기를 곤두세운채 멈춰버린 정신들의 모습은 칼리에르 3세에게 지독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칼리에르 3세는 손을 내저으며, 힘없는 말투로 명령했다. "오늘 어전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소. 내일 다시 논의할테니, 그리 알 고 물러들 가시오." 고개숙인 정신들을 뒤로 하고, 칼리에르 3세는 몸을 일으켰다. 오래 앉아있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인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친위 대장 피오르경이 비틀거리는 칼리에르 3세를 재빨리 부축했다. "폐하……." 곧 정신을 차린 칼리에르 3세는 친위대장의 손을 밀어내고, 휘적휘 적 회의실을 나섰다. "이것 보시오! 폐하의 건강 또한 그리 마음놓을 수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왕세자 전하를 모셔와야 하오!" 유타르경 측에서 누군가가 기회를 놓치지않고 말했다. "너무 과장하시는 것 아니오? 폐하의 건강이 나빠지신 것은 하루이 틀 일이 아닌데, 이제 와서 문제삼다니요?" "직접 보시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시오!" 정신들은 국왕의 건강문제로 다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법부대신 비네르경은 점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논의에 남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앙숙인 양 파가 어떻게 삼왕자를 보내는데 합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의 대련으로 지금까지 쌓여오던 긴장이 조금은 풀어졌는지, 카스트로는 모처럼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라에르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삼왕자궁으로 돌아가던 카스트로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며칠만에 감돌던 미소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춘다. 라 에르는 카스트로의 뒤를 따르다가 그런 변화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 다. 그리고 라에르는 카스트로가 다시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스트로 전하." 챠랑- 세리카의 귀걸이가 바람에 흔들린다. 카스트로는 적대감어린 눈빛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세리카님." 카스트로의 퉁명스런 목소리는 세리카에게 어떤 불쾌감도 주지 못한 듯, 세리카는 여전히 똑같은 태도로 말해왔다. "최근에 예배당에 오시지 않으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게 아닌 가 걱정했습니다." 말과는 달리 그 반질한 얼굴엔 어떤 걱정이나 감정도 떠올라있지않 다. 라에르의 무표정과는 달리, 마치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 인형같은 그 얼굴이 카스트로는 소름끼치게 싫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로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세리카는 투명한 감색 눈을 들어,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확실히 카스트로의 오라는 성난 적색으로 넘실대고 있다. '저 감정……. 저것이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을까?' 세리카는 곧바로 그것을 부정했다. 한족을 신봉하고 존경하는 자들 도 많지만, 한족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자들은 그 몇배에 달한다. 그 중 한명, 아무리 왕자라고는 해도, 그 정도로는 한족에게 아무런 해도 줄 수 없다. 더구나 왕세자도 아니고 아무런 실권이 없는 삼왕자임에 야. "아닙니다. 그냥 보름에 한번쯤은 예배당으로 오셔서 만물의 창조주 인 주신 케테르님께 예배드리기를 권하는 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되는대로 대답하고 빨리 지나쳐가려 했지만, 세리카는 바로 앞으로 다가온 카스트로를 다시 불러세웠다. "카스트로 전하." "……?" 속을 알수 없는 깊은 검은색의 눈을, 세리카는 가까이서 찬찬히 들 여다보았다.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번에 테라의 테리아로 유학하시게 될 거란 소문을 들었습니다." 카스트로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세리카는 흥미를 느끼고, 말 을 계속 해나갔다. "소렐 공녀와의 혼담도 오가고 있다고 하던데……."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 것처럼 검손잡이를 꽉 움켜쥔 카스트로의 손 을 라에르는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카스트로가 그렇게 경솔하지 않다 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 행히 카스트로는 검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렇다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세리카님?" 냉기가 풀풀 날리는 카스트로에게 세리카는 인형같은 미소를 선사했 다.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로 가 실테니까, 예배당으로 오셔서 테라의 문화와 예절을 미리 익히시는 것 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스트로의 손이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약올리는건가? 노골적인 희 롱으로밖에 보이지않는 말이었다. 그것도 소렐 이상으로 증오스러워하 는 자가 하는 말이다. 바득바득 이가 갈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카스트 로는 그 충동을 눌러버리는데 성공했다. "아직 결정된 일은 아니지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한 결 정이 내려지면, 세리카님의 충고를 잘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 만." 더 이상 함께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카스트로는 빠른 걸음 으로 세리카를 지나쳤다. 세리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망토를 펄럭이 며 걸어가는 카스트로가 건물 모퉁이 사이로 사라질때까지 뒷모습을 쫓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위험하다.' 비록 외면으로 보이는 어떤 특이할 점은 없지만, 그래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운명과도 같은 감! '저 왕자는 위험해!' 세리카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고민스럽게 찡그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세리카는 곧,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올해의 비는 이것으로 마감했으면 좋겠습니다. 밤새 북치듯 울려대던 천둥소리, 기어이 지붕을 뚫고 방에까지 쳐들어온 빗줄기. 밤새, 이번에도 홍수냐, 고 고민하며 원망스레 번갯불을 노려보는 것도.. 지치는군요. ... 비 피해 없으시길.... 새였음다..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8 - 관련자료:없음 [2964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29 20:50 조회:195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 - ================================================================== 불쾌했다. 연무장에서 느꼈던 조금은 즐거웠던 그 감정들이, 단 한사 람과의 만남으로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대신 자리잡은 감정은 불쾌함, 짜증스러움, 그리고 분노. 카스트로는 며칠간 느꼈던 긴장과 억압감이 방금전 세리카와의 대화로 한계까지 치달았음을 깨달았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감정들. 그것을 다시 한번 속으로 삭이기 위해, 카스트로는 방향도 잡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불편한 감정을 아는지라 아무소리 없이 묵묵히 따라가던 라에르는, 방향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전하? 어디로……" 카스트로는 절친한 친구의 의아스런 목소리를 듣고 멈칫 멈춰섰다. 감정에 휩싸여있던 이성이 조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카스트로는 허 리에 손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있는 위치를 확인한 카 스트로는 뭔가를 생각한 듯, 근처에 지나가던 궁내부원을 불러세웠다. 허리를 숙이고 명령을 기다리는 궁내부원에게 카스트로는 명령했다. "내 궁으로 가서, 나와 라에르경의 말을 서문으로 끌고오라." "네, 전하." 궁내부원이 물러가고, 카스트로는 서쪽의 푸노 산을 쳐다보았다. 라 에르는 그것만으로도 카스트로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를 깨달을 수 있 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종종 가던 곳. 그 것을 확인시키듯, 카스트로의 나직한 말이 들려왔다. "전신전(戰神殿)으로 간다." 카르노 왕국의 영토는 북국 라디프에서부터 이어지는 아스티노 산맥 과 아스티노 산맥에서 뻗어나온 루디노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 두 줄기의 큰 산맥때문에 카르노 왕국은 산이 많고, 산세도 험하다. 카 르노 왕국의 수도 아르노도 비록 평지위에 있지만, 남쪽을 제외한 세 방향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서도 서쪽에 있는 푸노 산 은 비록 야트막하지만, 카르노인들에게는 성산(聖山) 테라 이상으로 신 성시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푸노 산 중턱에 있는, 이제는 옛 영광을 반추하는 증거물이 되어버린 한 신전의 존재 때문이었다. 윤기나는 검은색 말과 어두운 갈색의 말이 각기 한 사람씩을 태운 채, 그 신전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아르노 시내에서도 보이는, 전신전 전면을 장식하는 열한개의 녹색 대리석 기둥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스 트로와 라에르는 신전 앞의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신전 입구에 말을 세웠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을 쉼없이 달려온 말 은 비록 카르노의 명마라고는 해도, 거친 숨을 내뿜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애마를 위로하듯 목을 다독여주고, 말에서 내려왔다. 신전 입구의 계단옆에는 전투마를 탄 전신 로마의 신상(神像)과 신 수(神獸) 푸른 이리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신전으로 오르는 대리석의 계단을 하나 둘 오르고 있을 때, 신전의 옆쪽 뜰에서 열 서너살로 보 이는 금발의 소년이 달려나왔다. "어서오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라에르경.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왜 그렇게 안오셨어요? 아참, 말고삐, 제게 주세요."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소년은 쇠락한 신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밝고 활기차 보였다. 헐렁한 짙은 녹색 사제복의 양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올린 손에는 아직 털지 못한 흙이 묻어있었다. 소년의 맑은 미소와 말투에 전염된 듯, 어느새인가 카스트로도 따라 웃고 있었다. 세리카를 만난 뒤부터 언짢던 기분이 눈녹듯 풀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나자르. 루아 신관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나자르는 라에르에게 다가가 말고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자신이 나왔던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예, 전하. 지금 오고 계실거예요. 저쪽 채마밭에서 일하다가 전하께 서 오시는 걸 보고 같이 오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걸어오시는 모양이 에요. 나이도 젊으신 분이 왜 그렇게 몸이 굼뜬지. 그러고도 위대한 전 신 로마님의 사제라고 으스대……" 주근깨가 잔뜩 뿌려진 코 위에 주름을 잡고 종달새처럼 종종거리던 나자르는,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큰소리를 듣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 리고 말았다. 벌레씹은 듯 얼굴을 구긴 표정이 귀엽다. "어서 오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라에르경도 오랜만입니다. 나자르, 너는 언제까지 귀한 분을 거기 세워 둘 참이냐? 당장 가서 차 준비 못 하겠니?" 나자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잔소리도 우리 할머니보다 심한 사람은 우리 사부밖에 없을거에 요." 그렇게 투덜거리고, 나자르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전하. 제가 차 맛있게 끓여들일게요. 천천히 이 야기 나누고 계세요." 나자르는 말 두마리를 끌고 신전 뒤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목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금발이 소년을 더욱 발랄하게 보이도록 한다. 카 스트로는 재밌다는 얼굴로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날이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전하. 벌써 날이 꽤 추워졌습니다.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하는데, 저 녀석은 투덜대기만 하고, 꾀만 부리니……" 나자르가 나왔던 곳에서 뒤따라 나타난 남자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카스트로에게 다가왔다. 다갈색 머리와 푸른 눈을 한 스무살 가량의 청년으로, 웃는 모습이 서글서글한 호남이었다. 나자르와 같은 녹색의 헐렁한 사제복을 입고, 걷어붙인 소매와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 는 모습이 소탈하게 보인다. 사제지간이 아니라 부자지간이 아닐까 의 심스러울 정도로, 옷차림부터 말투에 수다까지 신관 루아 시라트와 그 제자 나자르는 비슷하게 닮아있었다. 카스트로는 앞장서는 루아 신관의 뒤를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5년전, 신전에 있던 보물들을 적들에게 유린당하고, 공개적으로 종교행 사를 하지도 못하도록 금지된, 이미 영광이 떠난 곳이라고는 하지만, 신전은 여전히 웅장하고 신성했다. 긴 벽을 따라 그려진 전신 로마의 행적은 비록 군데군데 손상되었지만, 아직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 외감과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카스트로는 끝없이 이어질 듯한 벽화 중에서도 건국왕 유시아 1세가 전신 로마와 만나, 축복을 받는 장면을 좋아한다. 전신의 축복, 그리고 그 뒤로부터의 연승행진. 그로 인해 얻은 '불패의 카르노'라는 명성. 카스트로는 건국이래 얻은 그 명칭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한 자랑 스러워했다. 비록 5년전의 패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강화회담 중에 불시에 받은 기습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수치스러워해야 할 자는 카르노가 아닌 레이얄과 테라였지만, 승자의 특권으로 그런 것은 누구 도 문제삼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유시아 1세의 후손이라는 것에 긍지를 느꼈다. 전신 로마의 수호를 받는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나라를 너무나 사랑했 다. 그래서, 이대로 카르노를 패배자로서 역사에 남게 할 수는 없었다. "들어오시지요. 안이 좀 썰렁한가? 나자르에게 불을 피우라고 해야 겠군요." 루아는 앞장서서 카스트로에게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오래되어 마모되고 긁힌 곳이 그대로 보이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네 개만 있는, 검소하다기보다는 궁색함이 느껴지는 응접실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 가 오면 의례적으로 안내되던 곳이라,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 다. "앉으십시오." 카스트로와 라에르는 늘 앉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앉을 때 삐 걱거리는 의자가 불안했지만, 카스트로도 라에르도 내색하지 않았다. 루아는 카스트로의 맞은 편에 앉으면서 물었다. "요즘 통 보이지 않으시더니,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얼굴이 많이 안되어 보이시는데요?" 카스트로는 뜨끔한 기분으로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뺨을 쓰다듬으면서 되물었다. "얼굴이 안좋아보입니까?" 루아는 속눈썹을 몇번 깜빡거리더니, 유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위아 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네. 조금 까칠해지고 마르신 것 같은데.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요?" "아아… 네. 아마도……" 카스트로는 말끝을 흐리면서 애매하게 대답했다. 라에르는 그런 카 스트로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루 아는 무슨 일인지 더 물으려고 했지만, 기막힌 타이밍으로 똑똑똑똑- 울리는 노크소리에 말을 다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시간하나는 기막히게 맞춘다니까. 들어오너라, 나자르." 나직하게 투덜거리는 루아의 모습은 다시 한번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나자르는 한손으로 아슬아슬하게 쟁반을 받치 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불안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루아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차를 내려놓고, 벽난로에 불을 때거라. 장작 남은 거 있지?" 테이블 위에 차를 내려놓던 나자르는 하나의 명령을 수행하자마자 또다른 명령이 떨어지자, 입술을 쭈욱 내밀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네에." 다시 나자르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루아는 잠깐 끊어졌던 말을 꺼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카스트로는 손을 뻗어 찻잔을 손에 넣었다. 손바닥으로 찻잔의 온기 를 느끼면서, 카스트로는 뭐라고 해야할지 말을 골랐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생각하기 싫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루아에게 무언가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테라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찻잔을 쥐려던 루아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드는 것을 보고, 카스트로는 말을 이었다.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을 허락하겠다고 하더군요." 루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카스트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루 아의 입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 테라가 말입니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 제가 테라에 가야한다는 조건을 달더군요. 그리고……" 입에 담기도 싫은 듯 카스트로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씹어뱉는 듯 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제가 소렐의 딸과 결혼해야한다는 것도." 루아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해진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곧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그런 억지가!" 루아는 분노로 물든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다시 화난 목소리로 내뱉 었다. "전하의 유학 문제는, 왕궁 내에 케테르의 예배당을 들여놓는 것으 로 매듭지어진 게 아닙니까? 그리고 소렐이라니요? 오, 로마여!" 자신의 신을 부르는 루아는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르노 왕실 과 전신 로마의 신전은 건국왕 유시아 1세때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르노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전신전 과, 전쟁과 건국기념일 등 중요한 국사가 있을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 는 전신전의 관계는 쉽사리 끊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5년 전, 카르노 국왕의 굴욕적인 항복은 당연히 전신전의 위상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국왕폐하께서 확답은 하지 않으셨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그것 에 대한 답을 하셔야할 겁니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가까운 시일내에 테라로 가게 될 겁니다." 카르노 왕궁의 본궁. 국왕의 정전 윗층에 있는 복도를 흰 신관복 차 림의 남자가 걷고 있었다. 국왕의 정전 윗층에 있는 것은 국왕의 거실 이었고, 그래서 그곳의 경비는 정전 이상으로 삼엄했다. 하지만 경비를 서는 친위대원 중 누구도, 그 남자를 저지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가 걸을때마다 사각뿔 모양의 금속 귀걸이가 흔들려 소리를 내 고 있었다. 짙은 감색의 머리를 허리까지 땋아내린 남자는 카르노 왕 실 내에 머무는 것이 허락된 주신 케테르의 신관이며, 국왕의 고문관 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 한족의 지 가문 출신, 세리카였다. 세리카가 지나는 곳마다 궁내부원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리 카는 그런 그들을 지나쳐, 익숙하게 복도를 지나 국왕의 거실 앞에 도 착했다. "국왕폐하께 내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드리게." 문앞에 서 있던 궁내부원에게 명령하자, 두명의 궁내부원 중 한 명 이 고개를 숙이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리카는 문 양옆에 서 있는 친위대원들의 불편한 시선을 무심하게 넘겨버리고, 궁내부원이 돌아오 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칠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문 안에서 나온 궁내부원은 아까 들어갔던 자와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세리카는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들어오십시오. 접견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국왕의 개인적인 공간이랄 수 있는 국왕의 거실은 정전과 마찬가지 로 다섯 개의 방으로 되어있다. 위압적이고 과시적인 정전과는 달리,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거실은 국왕도 한 사람의 인간이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국왕폐하께서는 곧 들어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접견실에 혼자 남겨진 세리카는 방안을 둘러보면서 국왕을 기다렸 다. 최고급의 참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푹신한 시트의 의자 세개가 있는 접견실은 두세사람의 밀담을 위한 장소인 듯 보였다. 바닥에는 색색깔로 짜여진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에는 말을 탄 여신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왕의 거처치고는 검소한 접견실을 관심없는 눈으로 일별하고, 세리카는 조금 전에 만났던 마키아경과의 대화를 떠 올렸다. 마키아경은 그가 귀빈관으로 찾아가자, 몹시 놀란 것처럼 보였 다. '하긴, 한족이 그를 몸소 찾아가긴 처음이었겠지.' 냉소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세리카는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황송해하는 마키아경의 수선을 한마디로 자르고, 일의 경과에 대해서 물었었다. 하지만 대답은,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였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벌써 사흘이 지나지 않았는가! 사실 세리카 자신도, 자신이 왜 이렇게 이 일에 신경을 쓰는 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마키아경이 알아서 할 일이고, 또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 만……. 세리카는 격한 분노의 색으로 오라를 물들이던 삼왕자 카스트로를 떠올렸다. 분명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정도의 분노는 자신 한사람 에게조차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한다. 하지만 왜일까? 신탁이라는 말을 들어서? 아마도 그것때문일거라고 짐작하지만, 세리카는 내내 카스트로의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걸렸다. 자신을 향해 뿜어지던 그 숨막히는 분노, 그리고 살기. "국왕폐하께서 들어가십니다." ================================================================== --; 또 천둥이... - 천둥공포증에 걸리려는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9 - 관련자료:없음 [2967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30 21:28 조회:192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 - ================================================================== "국왕폐하께서 들어가십니다." 시종장이 고하는 말을 듣고, 세리카는 몸을 돌렸다. 지친 모습의 칼 리에르 3세와 친위대장 피오르경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오시오. 무슨 일로 직접 예까지 걸음하셨소, 세리카님?" 불친절하기는 부자가 똑같다고 생각하며, 세리카는 두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신 케테르님의 은총이 폐하와 함께 하시길!" "앉으시오." 칼리에르 3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의자에 앉은 칼리에르 3세의 뒤로 친위대장 피오르경이 버티고 섰다. 세리카는 느린 몸짓으로 칼리에르 3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쩐 일이시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칼리에르 3세에게, 세리카는 일부러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폐하의 고문관으로서, 몇마디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하?" 놀라는 듯 하던, 칼리에르 3세는 곧 얼굴에 비웃음을 띄웠다. "세리카님도 짐에게 아들을 테라로 보내라는 따위의 말을 하려고 예 까지 직접 찾아오셨소? 그 말이라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라서 안들어 도 될 것 같소만?" 상냥한 말따위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고 온 세리카였기에, 눈썹하 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마키아경이 제게 직접 했던 말을 폐하께 솔직히 알려드리려고 합니 다. 물론 제 말은 단지 충고일 뿐이니, 그 말을 들은 뒤에 어떻게 하실 지는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칼리에르 3세의 노골적인 경계의 눈초리를 담담하게 받아넘기고, 세 리카는 묵언의 찬동을 얻어 말을 시작했다. "마키아경이 이번에 이곳에 온 목적은 아시다시피,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과 삼왕자 전하의 유학 및 혼담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입 니다." 때마침 수석시종장이 들어와 차와 과자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말이 끊긴 그 잠깐의 시간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리카는 칼리에 르 3세를 똑바로 쳐다보며, 더욱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다. "짐작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마키아경이 카르노로 파견된 이유는 삼 왕자 전하의 문제가 우선입니다. 사실상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 문제 는, 삼왕자 전하를 테라로 모셔가기 위해 반대급부로 내놓은 것일 뿐 입니다." 칼리에르 3세의 굵은 갈색 눈썹이 뱀이 독기를 세우듯 꿈틀 치켜올 려졌다. 하지만 세리카는 칼리에르 3세의 살벌한 표정을 흐트러짐없이 냉정하게 마주하며, 더욱 강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정리해 말씀드릴까요? 마키아경은 지금 내놓은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이라는 미끼가 걸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다른 조건을 내걸 어서라도 삼왕자 전하를 테라로 모셔갈 것입니다. 물론 그 다른 조건 이, 카르노에 어떤 불이익이 될지는 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살기, 라고 느꼈다. 하지만 세리카는 칼리에르 3세에게서 뿜어져나 와, 자신을 압박하려드는 핏빛 오라를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실제로 칼리에르 3세가 자신을 죽이지도 못할뿐더러, 설사 죽이려 할지라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않는 세리카의 모습을 칼리에르 3세는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은 기분으로 노 려보았다. "불이익? 지금 짐을 협박하는 거요, 세리카님?" 투명한 감색 눈을 들어, 세리카는 칼리에르 3세를 직시했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림없는 눈길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카르노에 유리해질 일은 없습니다. 제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테라에서 불리한 조건을 내기 전에 그나마 지금 호의적으로 내보이는, 왕세자 전하의 조기귀국건만이라도 얻으시라는 말입니다." 숨쉬기도 벅찬 분노와 긴장이 접견실을 메워갔다. 하지만 그 긴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애꿎은 시종장밖에 없었다. "왜……." 목에 걸린 듯한 목소리가, 한참만에 칼리에르 3세에게서 흘러나왔다. 칼리에르 3세는 입을 다물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솟구치는 감정을 짓 누르며 말했다. "왜, 이제와서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거요? 카스트로는 ……." 말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지만, 칼리에르 3세는 다시 감정을 추스 렸다. 적어도 이것만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왕위 계승 서열 3위의 아이요. 이미 아베르노와 지스카 르, 두 아이를 데려갔으면 된 것 아니오? 카스트로는 이 나라의 국왕 이 될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 아이마저 데려가려는 거요?" 세리카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으로서도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아니 었다. 신탁때문이라고는, 확실하지도 않을뿐더러, 확실하다고 해도 한 족의 기밀에 속하는 그런 일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아들 셋을 전부, …적국에 볼모로 맡겨야 되는 아비의 심정을 아시 오? 위의 두 아이들이야, 전쟁의 패자로서 치루어야 할 대가라고 생각 하고 넘어갈 수도 있소. 하지만." 목이 메어져서, 칼리에르 3세는 다시 숨을 골랐다. 국왕으로서의 위 엄따위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고, 칼리에르 3세를 휩싸고 있는 감정은 아들을 적지에 보내는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움과 고통스러움이었다. "하지만, 벌써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하나 남은 왕자마저 데려가겠다는 것은 대체 무슨 연유요? 정 데려가야겠다면, 그 이유라 도 말해주시오." 냉담한 세리카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오만하고 위압 적인 국왕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세리카는 그런 칼리에르 3세의 말에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저로서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명하신 대신관님 과 한족 수장님들께서 추진하시는 일입니다. 케테르님의 신자로서 그 분들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둔한 자가 할 짓밖에 안 됩니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동안 세리카를 노려보던 칼리에르 3세는 무서운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지만, 짐은 케테르 따위의 신자가 아니오!" 세리카는 테이블에 손을 대고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왕세자 전하를 위해서도……" 콰앙-! 거친 문소리를 내며, 칼리에르 3세는 인사말도 없이 접견실 을 나갔다. 세리카는 다시 비어버린 접견실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가세요, 전하. 다음에 또 오세요." 팔을 높이 들어 흔드는 나자르의 힘찬 인사말을 뒤로 하고, 카스트 로와 라에르는 산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나서, 등진 서녘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커다란 나무들 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나자르는 열심히 흔들던 손을 내 리며 옆에 있던 루아를 돌아보았다. "사부. 그럼 이제 카스트로 전하는 여기 못오시는 거예요?" 방금전에 다음에 또 오라는 인사말을 한 사람답지않은 나자르의 질 문이었다. 루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내려보다가, 나자르의 머리를 아프 게 쥐어박았다. "잔말 말고 따라와! 아까 감자 캐다가 다 못했지? 오늘 내로 감자 다 캐낸다!" "하지만 사부! 카스트로 전하는……" 루아는 나자르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신전 옆의 채마밭으로 걸어갔 다. 파헤쳐진 흙 위에 드문드문 감자가 나동그라져있다. "카스트로 전하는 카스트로 전하고, 감자 캐는 건 감자 캐는 거야! 꾀부리면 오늘 저녁 없는 줄 알아!" 사부의 협박을 받은 나자르는 울상이 되어 채마밭에 엉거주춤 쪼그 리고 앉았다. 루아는 점점 어두워져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저었다. 카스트로가 전해준 말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이제와서 삼왕자 를 데려가겠다는 테라 한족들의 심보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난 수년간 은밀하게 추진해온 계획들을 뒤로 한 채, 이 계획의 중추 에 있는 삼왕자가 테라로 끌려가야 하다니. 앞으로 5년간의 공백을 어 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지만 어두워져오는 마음은 루아도 어 떻게 하기 힘들었다. "그 자존심강하신 분이 테라에서 어찌 견디실지……." 왕궁의 서문을 막 지나려던 카스트로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세웠다. 벌써 달빛이 황금색으로 물든 늦은 시간인데, 다급한 채찍질로 말과 마차를 몰아 서문으로 들어오는 정신(廷臣)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 급박한 일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급박한 일?' 기분 나쁜 예감으로 카스트로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 있을 일이라야, 자신의 일 밖에 또 다른 일이 있었던가? '하지만, 내 문제라면 그리 급한 일은 아닐텐데? 왜……. 아니면, 다 른 일이라도 생긴 건가?' "전하." 조금 뒤에 있던 라에르가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온다. 라에르도 어 딘지 불안한 표정이다. "들어가자." 카스트로는 급한 채찍질로 말을 몰았다. 라에르는 대신들의 행렬을 흘낏 바라보다가, 빠르게 카스트로의 뒤를 쫓았다. 연회 중에 받은, 카르노 국왕으로부터의 느닷없는 호출은 가스티오 네를 상당히 놀라게 했다. 하지만 가스티오네는 곧, 오후에 있었던 세 리카의 방문을 뇌리에 떠올렸다. 직접 자신과 같은 아랫사람을 방문해 온 것은, 물론 자신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기는 하지만, 세리카가 이번 일에 꽤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하문해온 말 도,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잘 되어가기는 하는지, 등이 아 니었던가. 어쩌면 세리카, 그 자신이 카르노의 국왕에게 모종의 영향력 을 행사했는지도 모른다. 가스티오네는 긴장하기는 하되 기분좋은 긴 장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칼리에르 3세가 백기를 내걸 것임을 가스티 오네는 의심하지 않았고, 그것은 곧 사실로서 드러났다. "테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다만," 알현실에 모인 정신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로 자신들의 군주를 바라 보았다. 오후까지만 해도 가타부타 의견을 밝히지 않던 국왕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테라의 협박과도 같은 요구에 불쾌감마저 내비치지 않았 던가. 너무나 뜻밖의 선언으로 정신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다만 한가지를 양보해주기 바라오, 마키아경." 가스티오네는 '양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순순히 항복해준 카르노 의 국왕에게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말씀하십시오, 카르노 국왕 폐하." 칼리에르 3세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 간신히 말소리를 내었 다. 낮게 가라앉은 기운없는 목소리가 알현실에 낮게 깔린다. "삼왕자의 유학과 혼사는, 우선 왕세자가 카르노로 돌아온 다음으로 미루어주시오." 가스티오네는 지금 들은 말들을 머리속으로 빠르고 면밀하게 검토했 다. 그리고 그것이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한 가스티오네는 콧수 염을 쓰다듬으며, 온화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은 그리 문제될 게 없습니다만……." 일부러 말끝을 어눌하게 한 가스티오네는 칼리에르 3세가 되물어오 자, 매끄럽게 대꾸했다. "왕세자 전하의 귀국 후, 한달 이내에 삼왕자 전하께서 테라로 오셔 야 할 것입니다. 그 이상 늦어진다면, 저도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습니 다." 칼리에르 3세의 낯이 불쾌감으로 뒤틀렸다. 하지만 칼리에르 3세는 결국 납득의 뜻을 비췄다. "알겠소." "뭐?!"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던 카스트로는 버럭 소리를 내질 렀다. 믿기 어려운, 아니 믿기 싫은 말을 들은 카스트로는 그 소식을 전한 자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 본궁으로부터의 소식을 전한 궁내부원 은 카스트로의 눈빛에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그것이… 조금 전에 국왕폐하께서, 모든 신료들과 테라 사신을 알 현실로 불러들여, 테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만!" 더 들을 수가 없어 궁내부원의 말을 제지시키고, 카스트로는 경직된 얼굴로 다른 것을 물었다. "지금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예? 아, 곧바로 침실로 드셨다고 합니다."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숙이는 궁내부원에게서 시선을 든 카스트로는 남자다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옆에서 옷을 갈아 입히는 시종들의 손길이 멈칫거리고 있었다. 라에르는 오히려 올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침착하게 눈빛을 가라앉히고 카스트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됐다. 폐하를 만나야겠어." 카스트로는 자신에게 들러붙은 시종들을 물리치고, 한 시종이 들고 있는 망토를 뺏어 스스로 어깨에 걸쳤다. "저어언하아! 폐하께서 이미 침실로 드셨으니 날이 밝은 뒤에 찾아 뵈십시오. 침실로 드신 뒤에 가시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옵니다. 그리고 의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으시고 어찌……" 뒤에서부터 시종장 베제르의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을 무시하고, 카 스트로는 큰 보폭으로 방을 나섰다. "저어어언하아아!" 콰아앙--! 거친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라에르는 베제르 시종 장의 걱정어린 얼굴을 일별하고,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벌써 카스트 로는 복도로 나가 저만치 앞에서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 이 터질 듯한 긴장감이 라에르를 짓눌렀다. 라에르는 어찌되었든 카스 트로를 호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0 - 관련자료:없음 [2970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8-31 19:40 조회:192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 - ================================================================== "비켜라!" 경고와도 같은 저음의 명령이었다.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음울하고 섬뜩한 음성. 자주색의 망토를 걸친 친위대원 두명은 국왕의 거실 문 앞에서 경직된 얼굴로 카스트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천둥같은 분노를 뿜어내는 삼왕자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지만, 그들 은 자신의 임무를 버릴 수 없었다.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전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국왕폐하의 명 령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경직된 목소리가 친위대원들의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지금, 친위대원들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해 줄 마음의 여유 가 없었다. "비켜서라고 했다. 끝까지 비키지 않으면 베고 가겠다!" 점점 무거워지고, 격해지는 삼왕자의 말투는 친위대원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비켜설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분노로 카스트로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 다. 어차피 이렇게 결정이 나리라고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는 해도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난 일이라서, 단지 직접 확인해보려는 것뿐이었다. 국왕폐하를 만나, 이렇게 갑작스레 결정하게 된 이유를 물 으려는 것뿐이었다. 본궁에 올때부터 기분이 무겁기는 했지만, 이성을 잃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걸음걸음마다 막아서서 돌아가라 고 요구하는 궁내부원들과 친위대원들의 태도에, 카스트로는 한계에 가깝게 분노하고 있었다. 문 앞으로 한발 다가서자, 두 친위대원이 검 을 빼들어 문 앞에 교차해서 가로막았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의 검날은, 마지막 남은 카스트로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카스트로는 손 을 뻗어, 엇갈린 채 자신을 막는 검날을 손으로 잡아 밀쳤다. 금새 카 스트로의 손에서 선홍색 피가 흘러 은빛 검날을 타고 흘렀다. "저, 전하!" "전하아!" 불안한 얼굴로 옆에 엉거주춤 서있던 궁내부원의 비명이 울렸다. 검 날을 잡힌 두명의 친위대원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면서도, 끝내 검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친위대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 라진다. 카스트로의 손이 아닌 친위대원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그 변화는 확연했다. 카스트로는 심장까지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을 무시하며, 손바닥에 깊숙이 박혀지는 검날 을 세게 밀쳤다. 점점 더 많이 흐르는 핏줄기는 검날을 충분히 적신 다음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라에르의 침착함마저 깨뜨려버렸다. 스르릉! 라에르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싸늘한 한기를 내뿜는 검날은 우측에 있는 친위대원의 검을 쥔 손목에 대어졌다. 섬뜩하게 찬 목소 리가, 라에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검을 버려라. 친위대 부대장으로서의 명령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거부하면 네 손을 베겠다." 협박받은 친위대원은 무시무시한 표정의 라에르를 올려다보았다. 친 위대원의 목에서 나는 침음성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하지만, 친위대원 은 끝끝내 검을 놓지 않았다. 눈을 감고 응대하는 친위대원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죄송합니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서걱! "……ㅅ!" 은빛의 예리한 날은 망설임없이 친위대원의 손목을 잘랐다. 억눌린 신음을 내며, 친위대원은 잘려져 뜨거운 피를 내뿜는 손목을 다른 손 으로 움켜쥐었다. 비명도 못지르는 숨막히는 시간이 잠시동안 지속되 었다. 카스트로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피가 나도록 배어물고 바닥 으로 떨어져내리는 친위대원의 검을 잡았다. 아직까지 검의 손잡이를 놓지 않는, 이제는 의지가 없는 손을 떼어내고, 그 자신이 그 검의 손 잡이를 잡았다. 카스트로의 표정은 주위를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카스트로는 몸을 웅크린 채 손목을 부여잡고있는 친위대원의 옆을 지 나, 한쪽 문에 손을 대고 열어제꼈다. 흰색의 커다란 문 위에 카스트로 의 피로 된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가지 못하십니다!" 열린 문을 몸으로 막아서는 자는 다른 쪽에 있던 친위대원이었다. 카스트로는 친위대원을 보지 않고, 냉담한 눈으로 내뱉었다. "비켜라." "차라리 저도 베고 가십시오." "비키라고 했다!" "전하아!" 카스트로는 이를 갈아붙이면서, 눈앞의 친위대원을 노려보았다. "내가 폐하를 어쩌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만나 뵙고 얘기나 듣겠다 는 거야!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는데,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막는 이유 가 뭔가?!" 분노와 울분을 품은 카스트로의 기세는 앞을 막아선 친위대원의 몸 에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친위대원은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꿋꿋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전하의 부친이기 전에, 카르노의 국왕이십니다. 폐하의 명령입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들어가시려면, 저를 베고 가십시 오." 카스트로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손안의 검날은 그의 피 를 머금어 더욱 섬뜩하게 빛난다. 친위대원은 죽음도 불사할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죽는 게 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차갑게 웃는 카스트로는 지옥에서 갓 빠져 나온 악마같았다. 반은 광기에 휩싸여 검을 내리치려했을 때, 묵직한 저음이 그것을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운가! 이곳이 폐하께서 쉬시는 곳임을 모르는가?" 거실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국왕의 친위대장 피오르경이었다. "피오르경……!" 친위대원의 죽을 듯하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카스트로는 치켜올 린 검을 내리고, 피오르경을 쳐다보았다. 피오르경은 친위대원과 카스 트로를 번갈아보다가, 아직까지 카스트로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색을 굳혔다. "전하……, 대체……" 카스트로는 냉담한 얼굴로 피오르경을 쏘아보았다. "경도 내 앞을 막을 거요?" "……." 한동안 말을 찾지 못하던 피오르경은 곧 사정을 눈치챘다. 피오르경 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큭……" 카스트로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울분에 차 있는 웃음소리가 국왕의 침실로 가는 응접실을 온통 뒤흔들어댔다. "후후훗… 정말, 대단한 충성심들이군그래? 말해보시오, 피오르경. 경은 휘하 기사들에게 '죄송합니다' 라는 말밖에 가르친 게 없소? 그래 서 친위대에는 '죄송합니다' 라는 말밖에 모르는 멍청이들로 꽉꽉 채워 진건가?" 카스트로의 말은 점차 살기마저 띄어갔다. 라에르는 흔들리는 눈빛 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친위대장 피오르경을 바라보았다. 피오르경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재차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쿡… 크하하하하하…………" 깊숙한 폐부에서부터 치솟아 나오는 웃음은 이제 완전히 광기에 차 있었다. 라에르는 휘청일 듯 앞으로 걸어가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심 장이 조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피오르경의 앞에 서서, 손에 든 피묻은 검을 들어 피오르경의 목줄기에 가져다댔다. 분 노, 울분, 답답함. 갖가지 감정이 카스트로를 감싸고 회오리쳤다. 새까 맣게 타오르는 눈을 한 카스트로는 결국 한올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듯한 냉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대를 베고 지나가겠다면? 그래도 막을 텐가?" 자신의 말을 확인시키듯, 카스트로는 검날로 피오르경의 살을 조금 베어들게했다. 검날은 금세 새로운 피로 적셔졌다. 라에르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올랐다. 라에르는 자신의 심장소리 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자신의 눈알을 빼 버리고도 싶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낳아주신 아버지였고, 또 한 사람 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었다. 그리고 라에르는 아버지의 강직 한 성격도, 주군의 단호한 성격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쯤되 니, 라에르는 이 일의 원인인 국왕폐하가 원망스러워졌다. 아마 국왕폐 하 자신은 이런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에르 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떠나 차갑게 식은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자살과도 같은 대답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용서하십시오.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검을 조금 위로 들어올렸다. 피오르경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카스트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망설임없이 내려쳐지는 검 을 본 라에르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밀쳐 내고, 카스트로의 앞에 무릎꿇었다. "전하……." 라에르의 돌발적인 행동은 카스트로의 마비된 이성을 조금 되돌려놓 았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꿇은 채 고개숙인 라에르의 흑갈 색 머리를 응시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했는지를 깨달은 카 스트로는 아연해져서, 그대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우선 미친 듯이 날뛰는 피를 가라앉혀야했다. 라에르가 얼마나 아버 지를 존경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에르가 얼마나 자신을 믿는지 도. 카스트로는 자신의 감정만 내세워 다른 한쪽을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라에르는 신하이기 이전에, 친구였다. 카스트로는 허공에 멎어있는 검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투욱- 둔탁한 소리를 내며 피에 젖은 검이 응접실의 두터운 카펫위로 나뒹굴었다. "……?" 라에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카스트로는 이미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 던 단검을 빼어든 뒤였다. 황금과 보석으로 세공된, 검이라기보다는 예 술품에 가까운 단검은 서늘한 예기를 뿜으며, 망설임없이 카스트로 자 신의 팔뚝을 그어버렸다. "전하----!" "전하아!" 거침없이 잘린 옷 사이로 시뻘건 핏줄기가 빠르게 번져나온다. 경직 되었다가 다급하게 일어서는 라에르를 피해 뒤로 물러나며, 카스트로 는 검을 가슴께에 가져갔다. "다음번에는 심장이 뛰는 가슴이다. 다시 한번 명령한다." 카스트로의 핏기없는 입술에서 메마르고 삭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분노도 울분도 없는 검은 눈은 이제 칠흑같은 공허만을 담고 있었다. 라에르는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바로 앞에 있는 주군을 응시했다. 놀란 것은 라에르 뿐만이 아니었다. 친위대원들과 궁내부원들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카스트로의 손에 들린 검끝을 질린 얼굴로 지켜보 고 있었다. 피오르경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을 때와는 비교 할 수 없 을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주위의 공기마저 숨을 죽였고, 카스트로의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있게 퍼져나갔다. "문에서 비켜서라. 폐하를 알현할 것이다. 내 앞을 막아서지 마라. 경의 목숨이 아무런 위협이 못된다면, 나는 내 목숨으로 그대를 위협 하겠다. 물러서라. 친위대장, 소르미노 자작, 피오르경." 피오르경은 그 짧은 시간동안 격렬한 번뇌로 수십번이나 안색을 달 리했다. 피오르경은 깊은 한숨을 뿜어내고 항복의 기를 들었다. "단검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폐하를 알현하십시오." 라에르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카스트로의 뒤에 가서 섰다. 카스트로는 단검을 라에르에게 맡기 고 말했다. "혼자 들어갔다 오겠다. 여기서 기다려라, …라에르경." 궁내부원들이 문을 열었다. 카스트로는 그 안의 또다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문은 이제 별다른 저항없이 열렸다. 카스트로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라에르는 떨리는 손으로 카스트로의 피가 흠뻑 배인 단검을 움켜쥐었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시 선이 단검의 흰 날을 수놓은 새빨간 피를 배회하고 있었다. ================================================================== ...태풍이라네요.. 더 무슨말을 하겠습니까.. T.T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내일 소리소문없이 글이 올라오지않거든.. 전화국이 잠기거나, 전기가 나갔거나.. 컴이 번개맞은 걸로 알아주세요.. ... 홍수나기도 전에 매스컴 타는데는, .. 여기밖에 없을 겁니다.... 쩝.. 밤부터 태풍이 더 강해진다니까.. 조금 일찍 올립니다.. 비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휴... 좋은 하루 되세요..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1 - 관련자료:없음 [2972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1 20:27 조회:190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 - ================================================================== 어둠을 간신히 몰아낼 정도의 불빛속에, 안이 보일 듯 말 듯한 붉은 색의 휘장으로 감싸여있는 커다란 침대가 있다. 카스트로는 미에라 왕 비의 사후, 처음 들어와보는 국왕의 침실 풍경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 았다. 휘장너머로 꿈틀꿈틀거리는 두 육체가, 간드러진 신음으로 채워 지는 침실의 공기가, 카스트로를 충격과 허탈함으로 떠밀어버렸다. 카 스트로 자신도, 그토록 목숨걸고 막으려 했던 친위대원들도, 피오르경 도, 라에르도 다 바보천치같이 느껴졌다. "누구냐?!"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방해받아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 낸 칼리에르 3세의 음성이 울렸다.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접니다, 아버지." "……!" 카스트로가 온 것을 예상하지 못한 칼리에르 3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잘 알았기에 피오르경에게 그토록 신신당부하지 않았던 가. 하지만 아버지라 부른 것이 뜻밖이었을까? 칼리에르 3세는 한참 뒤에야 그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피오르경은 무얼하고 있느냐?" 카스트로는 저절로 배이는 조소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소리내어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카스트로는 휘장 너머에 있을 아버지를 바라 보았다. 얼굴 근육이 웃고있는 것과는 달리, 암흑을 닮은 카스트로의 눈은 점차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피오르경은 자신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그 휘하 친위대원들도 미련 스럽게 의무를 수행했으니까, 책임따위 추궁하지 말아주십시오." "……!" "한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갑자기 결정내리신 겁니까?" 휘장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높은 웃음소리 가 카스트로를 조롱하듯 울려퍼졌다. 카스트로는 머리가 깨질 듯한 모 욕과 분노를 느꼈다. "아버지----!" 여자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의 간격을 두어, 칼리에르 3세의 짜증난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엄하구나, 카스트로! 침실에 든 짐에게 오는 것이, 아무리 너일지 라도 목이 베어져 마땅한 일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당장 물러가라!" 카스트로의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왈칵 솟구쳤다. 온몸 이 아플 정도로 격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굴욕과 배신감으로 점점더 크게 울려왔다. '결국……, 이게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의 위치인가? 친아들임에도,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인……, 정부 따위와의 정사가 아들의 일보다 더 중요한……그런……' 머리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토록 자신을 총애하던 아버지의 입 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충격을 딛고 겨우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로부터도 한참 뒤에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대답입니까?" "…피오르경을 불러 끌어내야겠느냐?" 한마디 한마디가 카스트로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혀들었다. 일순 간 무너져버린 아버지에 대한 신뢰감 위에 새로운 상처를 깊숙하게 그 어버린다. 그 충격의 와중에서도, 카스트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거부당한 아들로서의 가슴아픔은 카스트로의 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시뻘겋게 피를 흘리는 가슴속 상처를 밖으 로 드러내보이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충격만으로도 벅찬 상태 에서 어거지로 지키려는 자존심이 카스트로를 더욱 혼란스럽고 힘들게 했다. 카스트로의 꽉 쥐어진 주먹이 마디마다 창백하게 질리며, 멈추었 던 피를 다시 자아낸다. "……용서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잠시 분수를 모르고 설쳐댄 저를 용서하시길. ……폐하." 카스트로는 상관에게 하듯 절도있게 허리를 숙였다. 칼리에르 3세의 쌀쌀맞은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만은 특별히 너를 용서할 것이나, 다음부터 이럴 경우에는 아 무리 너라고 해도 엄격하게 다스릴 것이다. 물러가라." 카스트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중한 그 무언가가 죽어버리는 것 을 느꼈다. 버티고 서있기조차 힘든 상실감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결 국, 이렇게 버림받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내쳐버리고도 한마디 변명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정부와 놀아나는 아버 지의 모습은 결국 자신이 그럴 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카스트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한낱 빨강머리 정부만 도 못한 자신은, 그래서 왕세자 전하의 1년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인 모양이었다. 발밑이 그대로 꺼져버리는 것 같다. 그 동안 무엇인 가를 착각하고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맞닥뜨린 착각은 카스 트로의 가슴에 선명한 화인을 찍어버렸다. "평안한 밤 되시길." 고문이라도 당한 듯 힘겨워진 목소리로 인사하고, 카스트로는 뒤돌 아서 침실을 나갔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라에르가 다가왔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주위 사람의 존재도, 목소리도, 그 무엇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어려서부터의 버릇이 본능처럼 카스트로를 자신의 궁으로 인도했다. "폐하?" 휘장만큼이나 붉은 여인, 모리노 남작 부인, 주디나는 조심스럽게 옆 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정작 카스트로가 있을 때에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않던 칼리에르 3세가, 카스트로가 나갈 때부터 휘장 너머 문가에 시선을 박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폐하……." 주디나는 칼리에르 3세의 벗은 등을 쓰다듬으면서 애교있게 불렀다. 주디나가 그렇게 할 때면 칼리에르 3세는 항상 그녀를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안아주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은 싸늘한 목소리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물러가라." "네?" 주디나의 아름다운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디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카스트로에게 했던 말이 아닌가.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칼리에르 3세는 여지껏 그녀가 보지 못 했던 위엄과 매몰참으로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며 되풀이해 말했다. "물러가라 했다. 들리지 않는가?" 얼어붙어버린 그녀를 짜증스럽다는 눈으로 일별하고, 칼리에르 3세 는 침대 휘장을 헤치고 내려가 짙은 색의 벨벳 가운을 걸쳤다. 침대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겨 수석시종장을 부르고, 칼리에르 3세는 화난 눈초리로 주디나를 쏘아보았다. "당장 나가라고 했잖느냐! 아니면 피오르경을 불러 직접 끌어내야 나가겠느냐?!" 주디나는 모욕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갑자기 변한 국왕에 대한 두려 움이 더 컸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는 그녀의 손이 자꾸만 미끄러 졌다. 칼리에르 3세는 주디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벽난로 앞의 소파 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수석시종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칼리에르 3세는 벽난로 속의 붉은 불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장 독한 술을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폐하." 칼리에르 3세는 수석시종장과 주디나가 차례로 나가자, 눈을 감고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카스트로가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리에르 3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폐하……라고? 분수를 모르고 설쳐댄 자신을 용서하라고?' 카스트로가 묻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태도로 카스트로가 상처입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칼리에르 3세는 떨리는 손으로 자괴감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렸다. "뭐라고 말해야 했단 말이냐, 카스트로? 테라와 타협해, 아베르노만 이라도 돌려받았노라고? 하……하하……" 무력한 아버지의 웃음이 어두운 침실에서 회오리치다 힘없이 사그라 들었다. 카스트로의 심상치않은 기색은 라에르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쓰러질 듯 휘청이는 카스트로를 부축하려했지만, 매몰찰 정도로 거부 당했다. 라에르에게 허락된 일은 그저 소리없이 뒤를 따르는 것뿐이었 다. 언제나처럼, 주군에게 도움도, 위로도 안된다는 자각은 라에르를 또다른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때 막지 말았어야 했을까? 차라리 전하께서 아버지를 베도록 내 버려두었더라면, 이렇게 끔찍한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까?' 주제넘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라에르를 힘들게 했지만, 그것은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대역죄를 지은 것도 아니 고, 어리석은 국왕의 명령을 지키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자신 에게 주군의 명령이 우선이듯이 아버지에게는 국왕의 명령이 우선이었 다. 하지만……. 라에르는 문득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과 같 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아버지는 자신이 죽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을 까? 아니면 자신처럼 막아섰을까? "저어어어언하아아아아!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아아! 오, 로마 여, 굽어살피소서!" 시종장 베제르의 우렁찬 목소리에 라에르는 지금 자신이 삼왕자궁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뭐하고 있느냐! 당장 어의를 불러오지 않고! 어서 전하를 침 대로 모셔라! 대체 누가 감히 전하의 옥체에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평소라면 시종장 베제르의 호들갑을 웃으면서 대꾸하거나, 짧게 끊 어 저지시킬 카스트로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스트로는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이끄는대로 침대로 끌려가 눕혀졌다. 피곤한 듯 얌전히 눈을 감는 카스트로의 생소한 모습이 라에르의 가슴을 바윗덩어리처럼 짓눌 렀다. 창백한 안색이, 굳어버린 피로 얼룩진 두 손이, 섬뜩한 핏빛으로 물든 옷 사이로 베어진 팔뚝이, 마치 고문하듯 라에르의 심장에 박혀 들어왔다. "전하……" "……." 카스트로는 눈을 뜨지도, 입을 열어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카스트로 의 두 눈 위에 덮인 눈꺼풀이 더욱 꽈악 닫혀버렸을 뿐이다. "……처벌…해 주십시오. 제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나댄 저를, …그 것이 전하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혔다면, ……" 굳게 닫혔던 카스트로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피곤하다……라엘, …쉬게 해줘. …그리고, 네가 잘못한 것 따 위는 없다." "전하." "내가 신중하지 못했어. 폐하께서 나를 만나지 않으려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텐데……." 카스트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에 새 까만 머리가 젖어서 엉겨있다. 때때로 고통스러운 듯, 숱많은 속눈썹이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얼마지나지않아, 어의(御醫) 하이파경과 어의를 시중들 사람들이 몰 려왔다. 하이파경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옷을 벗겨 상처를 확인하고, 치 료해나갔다. 라에르는 그들에게 밀려나서, 멍하니 서있었다. 머리속이 돌처럼 굳어버린 것 같다. "자네는 괜찮은 겐가?" "……네?" 라에르는 멍한 눈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둥그 스름한 얼굴의 중년 남자는 쯧쯧 혀를 차고, 라에르의 손을 잡아 근처 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전하께서 저 지경이신데, 호위기사인 자네가 괜찮은가 해서 말일세. 어디 다친데는 없나?" "아아… 예."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의 어의 하이파경에게, 라에르는 씁쓸하게 덧 붙였다. "죄송합니다."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다. 하이파경은 가만히 라에르를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라에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죄송할 것은 없지. 자네마저 다쳤으면 나만 고생했을 게 아닌가?" 다시 일어서는 하이파경을 따라 일어서며, 라에르가 물었다. "저, 전하께선 어떠신지……" 하이파경은 약과 붕대들을 가죽가방속에 챙겨넣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으시네. 뭐, 당분간 손수 식사를 드시기는 힘드시겠지만, 시중 드는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다 나으실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낫는 걸 봐야겠지만, 길어야 열흘이니 그리 걱정할 것 없네." "네." 하이파경은 다 챙겨진 가방을 들고 일어서서, 라에르를 보면서 말했 다. "다른 주의사항은 시종장에게 말해놨네. 사실 몸보다, 마음이 힘드신 것 같네. 들리는 소문도 그렇고. 자네가 옆에서 잘 챙겨드리게." "알겠습니다." 라에르는 정중한 태도로 하이파경을 배웅하고, 카스트로가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석에 끌리는 듯한 느낌으로 라에르는 침대 의 녹색 휘장을 제치고 들어섰다. 카스트로는 깊이 잠들어있었다. 무겁 게 덮여진 눈꺼풀이 제 색을 잃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암흑처럼 까만 머리와 눈썹이 창백해진 피부색과 대조를 이루어 카스트로를 더 욱 아파보이게 했다. 라에르는 이불위로 나와있는 카스트로의 팔과 손 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얀 붕대로 두텁게 싸여있는 카스트로의 양손에 손을 대자, 꺼끌꺼끌한 무명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라에르경?" 라에르는 고개를 돌려 늙은 시종장 베제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 종장 베제르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쉬도록 하십시오. 전하보다 라에르경이 더 아픈 사람 같습니 다." "……." "아시잖습니까? 왕비전하를 가장 많이 닮으신 분이시니까, 금세 자 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는 라에르를, 시종장 베제르는 따뜻 한 얼굴로 마주보았다. "물론 전하께서만 다치시고, 전하의 호위기사인 라에르경이 긁힌 상 처하나 없이 멀쩡한 게 괘씸하기는 하지만……, 후후…… 그래도, 전하 께서 진심으로 믿으시는 분은 라에르경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일 전하께서 일어나셨을 때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라에르는 처음 보는 시종장 베제르의 진지한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조금 전, 국왕의 거실에서 있었던 상황이 뇌리를 스쳤다. 시종장 베 제르의 말대로, 전하께서는 자신을 가장 믿었는데, 자신이 했던 짓이 믿음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을까? 혈육과 주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라에르는 풀기 힘든 문제를 다시 떠올려 버리고는, 갑자기 온몸이 무너질 듯 피곤해지는 것을 느 꼈다. 시종장 베제르의 말대로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집으로 가면, 그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사람이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른다. 라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라에르는 몸을 돌려 삼왕자궁을 나섰다. 삼왕자궁 소속 친위대원들 에게 세심한 주의를 일러놓은 라에르는, 곧장 집으로 말을 몰았다. 집 에 아버지가 돌아와 있기를 바랬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 다. 일그러진 황금의 달빛이, 달리는 말을 더욱 재촉하는 라에르의 머 리위로 드리워진다. ================================================================== 전화국도, 전기도, 컴도 무사합니다.. 태풍 피해 없으신지.. 고목나무가 흉측하게 박살나고, 1미터 이상의 식물이 걸레가 되어도.. ...무사하다고 안심했는데.. 정작 태풍이 날려버린건 사람의 인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각박해진 사람의 마음이, 가장 힘들군요. ...이런 우울한 말을 잡담으로 넣어서 죄송.. -우울한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2 - 관련자료:없음 [2975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2 21:31 조회:188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 - ================================================================== 테라력 695년 11월 20일. 그날은 무척이나 험상궂은 날씨였지만, 아르노의 시민들은 어느 맑 은 날보다 훨씬 좋은 날이라고 인식했다. 카르노 왕국의 수도 아르노 는 아침부터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흥청거렸다. 아르노의 남쪽 대로에 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르노에 사 는 사람들 외에도 가깝게는 근방의 영지에서부터 멀리는 북쪽 변방에 있는 영지까지,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 덕분에 아르노의 남쪽은 발디 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들뜨고 흥분된 모습으로 웃고 떠들어대며, 연신 아르노 성의 남문을 기웃거렸다. 아르노에 있는 인심 좋은 주인을 가진 술집 몇몇은 그날 하루동안 술을 무료로 제공 했으며, 감정적인 몇몇 가게의 주인들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남쪽 대 로의 인파에 합류했다. 그 와중에도 약삭빠른 주인들은 오늘 매상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없는 탁자와 의자까지 빌려와 문밖으로 끌어내 놓 고 있었다. 아르노 남쪽 입구의 커다란 성문은 좌우로 활짝 열려져 있었으며, 문 앞은 귀한 사람을 맞기 위해 깨끗하게 쓸려져 있었다. 성벽 위에는 카르노 왕실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 그 아래 나팔수들이 팡파르를 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문에 말을 타고 길게 늘어선 근 위대원들도 파란색과 흰색이 어울린 예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긴장해 있었다. 왕궁 곳곳의 부산함에 어울려, 삼왕자궁의 궁내부원들도 바쁘게 움 직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몸을 궁내부 시종들에게 내맡긴 채 로, 앞에 있는 커다란 전신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린네르의 드레스 셔츠와 녹색 벨벳의 상하의를 입고, 커다란 에메랄드 브로치로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질반 질하게 잘 닦인 짙은 흑갈색 가죽 부츠를 신고, 허리에는 예장용 장검 을 매달았다. 분주하게 마무리 치장을 하는 시종들의 모습이 전신거울 에 비쳐 카스트로의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금색 수실로 끄트머리를 장식한, 왕실문장이 박힌 암녹색 망토가 카스트로의 어깨에 걸쳐지기 위해 한 궁내부원의 팔 위에 걸쳐져있다. 시종장 베제르는 최종 감시 를 하듯 조금 떨어져서 시종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시종들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라에르가 버티고 서있었다. "왕세자 전하는 아직인가?" 카스트로는 거울에 비친 라에르에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라 에르가 입고있는 자주색의 친위대 망토에는 언제나 붙어있던 은색의 문장이 빠져있었다. 한달 전에 있었던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지며, 친 위대 부대장의 지위에서 평대원으로 강등당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 이 뭐라고 생각하건 간에, 라에르는 오히려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카스트로를 따라 테라로 가는데 더욱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에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카스트로를 마주보 았다. "네, 전하. 소식이 오면, 지체없이 연락하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심 려치 마시고, 천천히 하십시오." 카스트로는 픽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는 잔뜩 들떠계시겠군. 4년만이 아닌가?" "……네." 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카스트로였다. 거기다 한 달 사이 몸이 많이 여위고, 그래서인지 사람이 다가서기 어려울 정도 로 인상이 날카로워졌다. 전에 자주 보이던 시원스러운 미소도, 정감 있는 따스한 눈빛도, 근래에 들어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카스트로 가 이렇게 변해버린 데에는 자신의 잘못도 크다고, 라에르는 생각날때 마다 자책하고 있었다. "이왕녀, 체리나 공주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밖에서 궁내부원 한 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카스트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셔라." "네, 전하." 궁내부원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실 문이 열렸다. 시녀들 을 대동한 이왕녀 체리나가 조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오라버니!" 진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체리나는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적 잖이 흥분한 모습이 눈에 뜨일 정도였다. 라에르의 인사를 받은 체리 나는 짧게 답례하고, 카스트로를 향해 그 커다란 금갈색 눈망울을 들 이밀었다. "아직도 다 준비하지 못하셨어요?" "음……,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체리나는 카스트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스트로의 의상실을 둘러보다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체리나는 초롱초롱 한 눈망울로 카스트로를 올려다보면서, 참을성 없는 말투로 물었다. "오라버니는 왕세자 전하의 얼굴이 기억나요? 어떻게 생기신 분이실 까요?" 시종들이 카스트로의 어깨위로 망토를 둘렀다. 숙달된 손놀림으로 망토를 옷 위에 고정시키는 시종들의 몸짓 때문에 몸을 돌릴 수 없어 서, 카스트로는 얼굴만 약간 돌려 자신의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고 한심하다는 표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체리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달 전부터 물어왔던 질문인 것 같은데, 체리나? 무얼 그 리 궁금해하는 거냐? 이제 몇시간 뒤면 싫어도 뵐 수 있을텐데." 체리나는 엷은 핑크색의 입술을 쑥 내밀며,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궁금하잖아요. 오라버니의 말로는 짐작할 수가 없다구요. 오 라버니 응접실에 있는 초상화를 봐도, 저보다 어린아이인데 제가 어떻 게 짐작할 수 있겠어요?" 카스트로는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도 열두살 때 뵌 게 마지막이야. 어떻게 변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흐음." 시종들이 카스트로의 머리 위에 모자를 씌우고 있었다. 부드럽게 느 껴지는 검은색의 머리 위로 에메랄드가 장식된 녹색모자가 살짝 올려 졌다. 황금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에메랄드로 만든 장신구들이 카스트 로의 옷 위로 드리워졌다. 모든 게 끝나자, 시종장 베제르가 조금 떨어 진 곳에서 최종적으로 카스트로의 옷맵시를 살핀다. 카스트로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차림과는 달리, 웃음기 없는 삭막한 얼굴이 어딘지 음침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있는 카스트로는 그런 자신이 역겹도록 싫었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수고했다. 다들 물러가라." 시종들을 물리고, 카스트로는 체리나와 함께 응접실로 나갔다. 체리 나는 카스트로의 옆에 바싹 붙어서 한시라도 입을 다물면 무슨 큰 일 이라도 생기는 양, 계속 무언가를 종알종알거렸다. "……하지만 오라버니와 저는 겨우 두 살 차이인데, 왜 오라버니는 기억하고, 저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라에르는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긴장해있었다. 체리나 공주가 제발 그 화제를 그만 꺼냈으면 싶었다. 그 날 이후, 카 스트로는 왕세자에 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전 에 없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카스트로였기에, 라에르도 그 심정을 얼추 짐작만 할뿐, 자세히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네 조그만 두뇌에게 물어보려무나, 체리나." "오라버니! 지금 제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시려는 거예요?" 예쁜 금갈색 눈이 금세 도끼가 되어 카스트로를 노려보았지만, 카스 트로는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냉막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체리나가 조금쯤 충격을 받고있는 그때, 마침 궁내부원이 안으 로 들어왔다. "왕세자 전하의 일행이 지금 아르노 성문밖 1하리(1하리=1km) 밖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이미 근위대장 메스메르경과 재상 미카에르 대 공께서는 남문에 도착해 계십니다." 카스트로는 심장이 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운명처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카스트로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알겠다. 곧 말을 준비시키도록 하라." "네, 전하." 그 궁내부원이 물러가기 바쁘게, 또 다른 궁내부원이 들어왔다. "본궁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전하" "안으로." 본궁에서 온 전령은 들어오다가, 카스트로와 함께 있는 체리나를 보 고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가라앉히고 국 왕에게서 온 명령을 전달했다. "곧, 연병장으로 나오라는 국왕폐하의 전언이십니다. 그리고 이왕녀 전하께도 같은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이 갔습니다만." 흥분으로 얼굴을 물들인 체리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알겠다. 오라버니와 함께 가겠어." 전령은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체리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카스트로 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정말 뵙게 되는군요." "그래." 카스트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는 것도, 눈빛이 더욱 탁하 게 흐려졌다는 것도, 흥분한 체리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뒤 에 서있던 라에르만이 걱정스럽게 카스트로의 뒤통수를 쳐다볼 뿐이었 다. 파란색과 흰색의 정규복장을 입은 근위대원들이 말에 올라탄 모습으 로 남쪽 성문 앞에 두줄로 늘어섰다. 그들의 앞에는 재상 미카에르 대 공과 근위대장 메스메르경이 나란히 서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느 때보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메마른 땅에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 가 있었다. 점점 더 윤곽을 확실히 드러내는 모습을, 두 부자는 관찰하 듯 주시하고 있었다. 선두에 길을 트며 오고있는 은색 갑옷과 암녹색 망토의 행렬은 며칠 전, 테라와 카르노의 국경지대로 호위임무를 띠고 떠났던 카르노 왕실 기사단이었다. 양쪽으로 말달리는 기사단의 중간께에는 적자색 머리의 기사단장 다이크경이 이십대초반의 청년을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다. 은빛광택이 나는 마구와 흰색의 마의를 걸친 백마 위에 타고있는 청년 은 잘 다듬어진 콧수염만 빼면, 카스트로와 무척이나 닮은 모습이었다. 호쾌한 인상의 기품있는 남자, 카스트로의 몇 년 뒤 모습이라 예상되 는 강인한 용모의 청년. 바로 카르노의 왕세자 아베르노 준 하이네르 폰 카르노였다. 아베르노와 다이크경의 뒤로 왕실문장이 박힌 암녹색과 은색의 화려 한 사륜마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고르고 골라진 흑갈색의 종마 여덟마 리가 마차 앞자리에 앉은 마부에 의해 똑같은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 뒤로 테라의 상징색인 감색의 사륜마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가까워지는 성문과 그 앞에 서 있는 파랗고 흰 복장의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한발한발, 성문과 가까워질수록 아베르노의 심장 은 흥분으로 무섭게 달음박질쳤다. 자그만치 4년, 근 5년에 가까운 세 월동안 밟아보지 못했던 고국이었다. 지독한 향수에 몇번이고 도망쳐 오고 싶었던 바로 그곳, 아르노! 아베르노의 오만한 가슴이 순수한 기 쁨으로 벅차올랐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3 - 관련자료:없음 [2980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3 21:40 조회:186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3 - ================================================================== "대 카르노의 재상, 키노 공작 미카에르, 아베르노 왕세자 전하의 귀 국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근위대장 메스메르 폰 키노, 대 카르노의 왕세자 전하께서 귀국하 심을 경하드립니다." 아베르노는 투레질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말 위에서 미카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이 인사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카스트로와 닮은, 하지만 조금 더 세련되고, 조금 더 사내다운 모습의 아베르노는 얼굴에 잔잔 한 미소를 띄웠다. 앞으로 자신의 신하가 될 자의 하례에 만족한 듯한 지배자로서의 미소였다. "그만 일어서도록 하십시오, 미카에르 숙부. 메스메르경도 일어서시 오." "네, 전하." 메스메르경은 아베르노를 앞에 두고, 본능적인 긴장을 느꼈다. 그것 은 국왕폐하나 삼왕자 카스트로를 대하는 것과는 또 틀렸다. 아베르노 는 기분좋은 얼굴로 미카에르 대공을 돌아보았다. 4년이나 지났지만, 미카에르 대공은 별로 달라진 데가 없었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미카에르 숙부. 그런데 로시에르 숙부께서는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미카에르 대공은 사교적인 미소로 대답했다. "야노 공작은 여전히 자기 영지에서 은둔하듯이 살고 있습니다. 좀 체 아르노로 오지를 않아서, 신도 야노 공작을 못 본 지 꽤 오래되었 습니다." "그렇군요." 아베르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국왕폐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네, 전하. 국왕폐하께서는 전하의 귀국소식에 기꺼워하시며 친히 삼 왕자 전하와 두 공주 전하를 대동하고, 이쪽으로 오고 계실 것입니다." 아베르노는 다시 기분좋게 웃었다. "유리나는 벌써 어엿한 숙녀가 되었겠군요. 카스트로는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철없이 체리나와 함께 말썽을 피우고 다니지는 않겠지요?" "네에.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훤칠한 장부가 되셨습니다. 유리나 전하 께서는 그 아름다움으로 젊은 귀족들의 숭배대상이 되셨고, 체리나 전 하께서는 타고나신 발랄함으로 폐하와 귀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계십니다." 아베르노는 성문으로 다가갔다. 아베르노의 좌우에는 말 위에 올라 탄 미카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이 따르고 있었다. 미카에르 대공은 흘 낏 뒤쪽의 암녹색 마차를 돌아보며 물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아베르노는 말을 걷게 하고, 느긋하게 앉아 대답했다. 아베르노의 눈 은 활짝 열려있는 성문을 향해 있었다. "왕세자비와 왕손은 국왕폐하께서 오시면, 마차에서 나올 것입니다." 너희들을 위해 마차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미카 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두 부자는 납득하고 받아들여야만했다. 아베르노는 다음대의 카르노 국왕 이 될 자이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아아아--------------------! 팡파르의 힘찬 울림소리가 사람들의 환호소리에 묻혔다. 성문을 들 어서자마자 덥쳐든 엄청난 환호성은 잠시잠깐 아베르노를 놀라서 멈춰 서게 했다. 성문에서부터 새까맣게 몰려있는 사람들은 근위대 소속 근 위병들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 만세에에에-----------!"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 "카르노! 카르노-----!" "카르노 만세! 만세에에------!" 어디서 구했는지, 이곳저곳에서 커다란 카르노 왕가의 문장이 펄럭 였다. 짙게 흐린 하늘 아래로 붉은 장미 꽃잎이 흩뿌려진다. 목청껏 지르는 사람들의 만세소리와 환호성은 아베르노에게 걷잡을 수 없는 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그가 잊고 지냈던 것이 무엇인지! 아베 르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올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왕세자 전하 만세에에에! 카르노 왕국 만세! 국왕폐하 만세에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성과 환대속에서 아베르노는 한걸음한걸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곳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가지않아 아베르노 는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 앞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아베르노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 쳤다. "어서 오너라, 아베르노." 목이 메인 듯한, 그리운 목소리. 4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주름이 늘어버린 보고싶었던 얼굴. 아베르노는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이기지못 하고, 날 듯이 말에서 내려 그 남자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카르노 국왕 칼리에르 3세는 자신에게 안겨든 아들을 힘주어 껴안았 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배어나오는 것같아서, 아베르노는 더욱 감격했다. "수고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 4년만에 있는 국왕과 왕세자, 두 부자의 감동적인 상봉에, 모여든 카 르노 국민들은 하늘을 뒤집을 듯한 환호성을 올렸다. 비냄새가 났다. 금세라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카 스트로는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다가, 라에르가 부르는 소리에 고 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해진 아베르노의 시선을 맞으며, 천천 히 몸을 굽혔다. "신(臣), 카스트로 폰 카르노, 왕세자 전하의 귀국을 경하드립니다." 카스트로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자신의 이름앞에 붙 인 칭호 그대로, 신하로서 왕세자에게 보내는 축하인사였다. 칼리에르 3세에게서 몸을 떼어낸 아베르노는 뭔가 놀랍고 또한 반갑다는 듯한 얼굴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카스트로는 그 시선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일어서라, 카스트로. 오랜만이구나. 이제 얼굴을 보여주겠느냐?"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베르노를 마주 보았다. 자신과 닮은 얼굴에 걸린 콧수염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린다. 카스트로의 불편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베르노는 친근하게 웃 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4년만에 만난 형을 이렇게 딱딱하게 맞을 셈이냐,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머뭇거리며 아베르노의 손을 맞잡았다. 순간 아플 정도 의 강한 악력으로 손이 쥐어지고, 그대로 쏠리듯이 앞으로 끌어당겨졌 다. 느닷없이 맞닿아진 가슴에서 아베르노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불규 칙적으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질식할 것 같은 짙은 향수냄새가 카스 트로의 후각을 자극했다. 카스트로는 두통이 이는 것을 무시하며, 아베 르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아베르노는 툭툭 등을 두들기며 반가움 을 표시했다. "많이 컸구나, 카스트로. 나보다 더 큰 것 같은데? 여전히 말썽을 부 려 아버지를 근심케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베르노는 카스트로의 양어깨를 잡고 바로 앞에서 바라보았다. 어 렸을 적의 자신을 대하듯 허물없이 묻는 질문에 카스트로는 난감한 표 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하하, 농담이다. 그렇게 정색하고 대답하기는." 아베르노는 열두살의 장난꾸러기 꼬마였던 동생이 불과 4년만에 자 신보다 더 커진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몇번이고 카스트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나 폰 카르노, 왕세자 전하의 귀국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체리나 폰 카르노, 왕세자 전하의 귀국을 경하드립니다." 카스트로의 옆에 있던 두 왕녀가 인사하자, 아베르노의 관심은 곧 처녀티가 나는 여동생들에게 옮아갔다. "유리나! 정말 아름답게 컸구나. 하하, 그리고 네가 체리나라고?"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아베르노는 무척이나 행 복해보였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어보았 다. 아직까지 격렬하게 뛰던 아베르노의 심장소리가 잡힐 듯 느껴진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사심없이 기뻐할 수 있는 아베르 노가 부러웠다. '나만, 이기적으로 변해버린 걸까? 전하는 그때 그대로의 모습인 데…….' 카스트로는 더욱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추하다, 카스트로. ……같잖은 질투 따위나 하고…….' 환호성과 만세소리가 갑자기 웅성거림으로 바뀐 것은 그때였다. 희 망과 기대에 찬 방금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카 스트로는 불쾌감을 만면에 띄운 칼리에르 3세의 시선을 따랐다. 어느새인가 아베르노의 뒤를 따라오던 카르노 왕실의 마차가 열리 고, 주홍색 머리의 젊은 귀족 여성과 역시 주홍색 머리의 아이를 안은 중년부인이 마차에서 나왔다. 아베르노는 몸을 돌려 그쪽을 보며 말했 다. "라에니. 레트와 함께 이쪽으로 오시오." 주홍색 머리의 여성은 화사한 드레스 자락을 잡고, 턱을 오만하게 치켜올린 채 아베르노의 옆으로 걸어왔다. 조그맣고 창백하게 흰 얼굴 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였다. 화려하다는 말밖에 어울리 지않는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각종 보석으로 옷과 몸을 장식한 그녀 는 사치와 허영의 상징으로 보였다. 아베르노와 나란히 서서 칼리에르 3세 앞에 선 그녀는 귀족적으로 생긴 오만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아버지. 제 아내인 라에니와 아들 레트입니다." 주홍색 머리의 왕세자비 라에니는 카스트로가 지금까지 본 어떤 여 성보다 우아하고 오만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라에니 나엘입니다. 카르노 국왕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때, 라에니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중년부인이 라에니의 옆에 조그 만 사내아이를 내려놓았다. 칼리에르 3세는 답례를 기다리는 왕세자비 를 무시하고는, 두세살로 보이는 주홍색 머리의 사내아이를 내려다보 았다. "레트라고 했느냐?" 라에니를 닮은 조그만 사내아이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칼리에르 3 세를 보다가, 울먹거리며 뒤에 서 있는 중년부인의 치마자락에 매달렸 다. "레트, 할아버지시다. 인사드려야지." 아베르노가 레트를 향해 달래듯이 말했지만, 레트는 더욱 움츠리며 치마자락만 파고들 뿐이었다. 아베르노는 무서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 거리며, 레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것은 레트의 울음보만 터트 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칼리에르 3세는 씁쓸한 얼굴로 그런 아베르노 를 말렸다. "놔두어라. 처음 보아서 낯을 가리는게지. 자, 왕궁으로 돌아가자꾸 나." "네, 아버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왕궁으로 향하는 국왕과 왕세자에게, 잠깐동 안 멎었던 환호성이 재차 쏟아져 내렸다. 카스트로는 말 위에 올라타 다가, 홱소리나도록 드레스를 돌려 마차에 오르는 왕세자비를 돌아보 았다. '라에니 나엘이라고 했나?' 불쾌한 이름이었다. 레이얄의 나엘. 현 레이얄 국왕 바벨 4세의 동생 인 나엘 대공의 외동딸. 카스트로는 저 오만하고 성질 사나워보이는 여자가 카르노의 국모가 될 거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 여자의 핏줄인 레트 라는 아이가 다다음대 국왕이 된다는 것은 카르노의 재앙이라고 생각 됐다. '낯을 가려? 아무리 어려도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울어버리다니! 머 저리 같으니! 장래, 불패의 카르노를 이끌어갈 자가, 저렇게 형편없이 나약한 겁쟁이라니!' 카스트로는 전신 로마의 가호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 ...고쳐도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쩌비.. ..마음에 안들어요.. 흑.. ....새였음다...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4 - 관련자료:없음 [2983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4 21:18 조회:187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4 - ================================================================== 쏴아아아아아------------! 카르노 왕궁은 대낮부터 불을 밝히고 흥청거렸다. 평소때와는 달리 뭔가 활기가 넘치는 듯한 분위기여서, 쉴새없이 고된 일을 하는 궁내 부원들도 시종 웃는 얼굴들이었다. 알현실에서의 정식 알현이 있은 직 후부터 시작된 왕세자의 귀국 축하연은 밤새도록 이어질 예정이었다. 우르르르르르 쿠와아아아앙-------------! 환하게 밝혀진 샹들리에 아래 카르노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귀족 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었다. 본궁 뿐만 아니라 각 궁의 궁내부원 들까지 총동원되어 술과 음식을 날랐다. 작은 규모의 연회는 수도 없 이 많았지만, 이런 대규모의 연회는 근 십년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계십니까?" 카스트로는 술잔을 바꿔들고, 유리창 밖을 흘낏 쳐다보았다. 가장자 리로 밀려진 짙은 자주색의 벨벳커튼 사이로, 쉴새없이 떨어지는 빗방 울이 연신 유리창위에 투명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흐렸 던 하늘은 결국, 카스트로 등이 궁으로 들어온 바로 다음부터 기다렸 다는 듯이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는 이제 굵다 란 장대비가 되어 대지와 건물을 두들기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환한 불빛은 비교도 안될만큼의 창백한 백색의 빛을 하늘에 수놓으며, 땅이 울릴 정도로 분노의 고함을 쳐댄다. "글쎄……, 바깥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이 비를 어떻게 피하고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카스트로는 언뜻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네에." 순순히 받아들이는 라에르를 돌아보며, 카스트로는 피식하고 웃어버 렸다. "사실은 질투하고 있는 중이야." 솔직하게 다시 대답하자, 라에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카스트로 는 손안에서 술잔을 돌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왕세자 전하와 별볼일 없는 삼왕자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거 든.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전하의 환심을 사려고 얼 굴을 웃음으로 도배하고 있어. 장차 국왕이 되실, 아니, 그 전에 섭정 이 되실 게 분명한 왕세자 전하께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아둥바둥."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귀족 들에게 둘러싸인 아베르노가 호탕하게 웃고있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나같이 별볼일 없는 셋째 왕 자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군. 하하, 하지만 저쪽보다는 나은걸까?" 술잔을 든 손가락을 하나 뽑아내어, 아베르노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미카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이 초조한 얼굴로 아 베르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들이었다. "뜨거운 불위에 놓인 고양이같지 않아? 예상대로 상황은 재밌어지고 있어." 카스트로는 말을 끝내고, 술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싸아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뱃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조금씩 몸이 취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더 재밌어질텐데, 채 한달도 구경하지 못하고 떠나야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 안그래, 라엘?" 라에르는 안타까운 눈으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카 스트로는 심술난 아이처럼 비뚤어져보였다. 아마도 한달전, 국왕의 침 실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부터라고 알고는 있지만, 더 이상은 알수가 없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답답해서 물어보아도 카스트로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앞에서 그 일을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명령했을 뿐 이다. "당신이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전하이십니까?" 라에르는 생소한 목소리가 카스트로를 부르는 것에 반응해 번쩍 고 개를 쳐들었다. 저절로 온몸의 신경이 긴장하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호 위기사가 된 다음부터 본능처럼 되어버린 몸의 반응이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훑어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금발에 짧은 콧수염을 기르고, 보석과 은으로 세공된 스틱을 들고있는 이십대 중·후반의 남자였다. 말쑥한 외모에 전형적인 테라식 복장을 한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카스트로를 살피 면서, 사교적인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테라의 대신관님께 카스트로 전하를 안전하게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고 온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라고 합니다." 카스트로의 담담하던 얼굴이 일순 경련을 일으켰다. 라에르는 아찔 한 기분으로, 하야로비 후작을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심기불편한 지금, 테라에서 왔다는 이 자는 불 속에 기름을 들이부으려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페냐는 두 사람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여유롭게 싱긋 웃기까지 했다. 말끔한 로페냐 의 뺨에 깊은 보조개가 패였다. "앞으로 한달 이상을 같이 보낼 사이인데, 그렇게 죽일 듯 보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웃는 낯으로 보는 것이 서로 에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카스트로의 새까만 눈이 위험스레 빛을 발하고는 어둡게 가라앉았 다. 그리고 같잖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쳐서 답례했다. "당신은 유괴범이나 납치범에게도 웃어주나보군." 쿨럭, 하고 로페냐는 갑자기 사래들린 듯 잔기침을 내뱉다가, 다음순 간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라에르는 '사교적' 이나 '외교적' 이라는 말 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카스트로의 대답에 심장이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받아야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로페 냐와 카스트로에게 호기심을 품고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이런이런, 제 추태를 용서해주시길." 로페냐는 레이스로 장식된 흰색의 비단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 을 털어내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무리 제가 미워도, 일국의 후작인데 유괴범이나 납치범 취급이라 니요?" "……흥! 원래 유괴나 납치는 귀족들이 전문 아니던가?" 로페냐는 코웃음치는 카스트로를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았 다. 반짝반짝 빛까지 발하는 로페냐의 푸른 눈이 어쩐지 무척이나 유 쾌해보였다.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시군요. 전하와의 동행이 어쩐지 즐거워질 것 같아 다행입니다." 더 이상 대꾸하지않는 카스트로에게 더 볼 일은 없었던 듯, 로페냐 는 다시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연신 보조개를 만들어내며 웃어대는 로페냐가, 자꾸만 라에르의 신경을 자극했다. 밤이 되어갈수록 빗줄기가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궁전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밖에서 몰아치는 비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날씨가 짖궂음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있었다. 레이얄의 공녀이 며, 이제는 카르노의 왕세자비가 된 라에니 나엘은 자신을 거들떠보지 도 않는 국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궂은 날씨에 대고 풀어대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안드는 것 투성이야! 이렇게 험상궂은 날씨라니! 앞으 로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게 끔찍해!" 여성휴게실로 들어가면서, 라에니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렸 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귀부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자 리를 피하고 있었다. 라에니는 그런 모습을 목격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처음 아르노에 도착해서 카르노 국왕에게 인사했을 때 국왕이 자신 을 무시한 뒤로, 왕자와 공주들도,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귀족들까지도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자신이 일부러 삼왕자와 두 공 주의 앞에 서있었는데도, 그들은 자신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같이 테 라에 살았던 이왕자조차 자신에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는데, 제깟 삼왕자와 공주들이 뭐라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인가! 레이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테라에서조차 당해보지않은 모멸감이었기 때문에, 라에 니는 어느때보다 화가 나있었다. "카르노 왕궁에는 쥐새끼들만 있나보지? 사람을 보면 피하기 바쁘 니, 어디 불결해서 사람이 살 수나 있겠어?" 노골적으로 귀부인들을 노려보며 하는 말에, 귀부인들은 사색이 되 어버렸다. 라에니는 그녀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왕비가 되면, 이 음침한 궁전을 바꿔야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로냐?" 라에니를 모시는 시녀장 로냐는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작 은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지 마십시오, 전하. 이곳은 테리온이 아니고, 레이얄은 더더욱 아닙니다. 제발 미움받을 말은 자제해주십시오." 곧바로 앙칼진 대답이 로냐에게 돌아왔다. 주홍색 눈썹을 한껏 치켜 올린 모습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성난 고양이처럼 보였다. "누가 먼저 그랬는데? 대체 저 여자들은 뭐야? 왕세자비인 나를 보 고도 뭐나 보는 것처럼 흘끗흘끗! 저게 쥐새끼가 아니면 뭐란 말야?" "제발, 제에발, 목소리를 줄여주십시오, 전하." 로냐의 애원을 라에니는 다시 코웃음으로 묵살해버렸다. 그때였다. 라에니의 주홍색머리보다 더욱 강렬한 색채의 붉은 머리 여성이 여성 휴게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굉장한 머리라는 생각이 라에니의 뇌리 를 스쳤다. "뭐야, 저 건방진 여자는?" 시녀장 로냐는 여전히 안하무인격인 라에니의 말에 신음을 내뱉으 며, 라에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은 머리의 여성이 나 타나자, 쭈뼛거리던 귀부인들이 그녀에게 인사하고 뭔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가끔가다 라에니쪽을 바라보는 폼이, 어쩐지 라에니 자신을 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교계에 영향력있는 여성일 게 분명합니다, 전 하. 그러니 저 여성과 친하게 지내보심이……" 로냐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라에니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무슨 소리야? 다음대의 왕비가 될 내가, 누군지도 모를 저 여자에 게 먼저 친한 척 해야 한다고? 저쪽에서 굽실거려도 아는 척할까 말까 한데! 나는 왕세자비야! 말도 안돼! 난 싫어!" 지나치게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라에니의 태도에, 로냐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때, 화제의 주인공이 라에니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라에니는 말 과는 달리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에 붉은 드레 스, 그리고 라에니 이상으로 화려하게 보석장신구를 단 그녀는 아직 풋내나는 라에니에 비해 성숙한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 다. 그녀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라에니는 적대감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 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도, 그녀의 자신만만한 태도도 모두 비위에 거슬렸다. 모리노 남작 부인, 주디나는 조금전 발코니에서 지시받은 일을 생각 하고 있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요?" 경계심 가득한 눈의 라에니에게 주디나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모리노 남작의 미망인인 주디나입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 카르노 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라에니는 의심어린 눈을 가늘게 뜨고 주디나를 쏘아보았다. "모리노 남작 부인이라구요? 대체 이 카르노라는 나라는 예절이라는 게 되어먹지 못한 나라로군요! 어떻게 남작 미망인 주제에, 왕세자비 인 나에게 먼저 말을 걸 수가 있지요?" 주디나는 대뜸 날라온 모욕스런 말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다시금 자신이 지시받은 일을 되새기며 불쾌감을 안으로 삭였다. 매력적으로 웃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호감을 자아내는 것은, 몇몇 사람을 빼고는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이 성 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먼저 말을 거신 것은 왕세자비 전하이십니다. 전하께서 무슨 일이 냐고 물어주셔서 제 소개를 한 것인데, 제가 잘못한 건가요?" 사근사근하게 눈웃음치며 대답하는 모습에 라에니는 입을 다물고 노 려보았다. 때를 놓치지않고, 로냐가 옆에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절로 고개숙이고 들어왔으니, 모르는 척 받아주십시오, 전하. 그 것이 윗사람의 도리이지요. 그래야 다른 귀부인들도 하나 둘, 전하를 따를 것이 아닙니까?" 라에니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자신을 쳐 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주디나에게, 라에니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어서세요, 모리노 남작 부인. 당신은 이곳 카르노 왕궁을 잘 아는 것 같군요?" 주디나는 한시름 놓은 얼굴로 더욱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 왕궁을 안내해드리는 영광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렇게 하겠습니다." 라에니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주디나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테라산 최고급 비단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호호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그럼 가까운 시일내에 부탁할까요?" 콰르르르릉------! 때맞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하지만 라에니는 더 이상 날씨 로 투덜대지 않았다. ================================================================== 어제는 쪄죽을것처럼 덥더니.. 오늘은 벌써 환절긴가요? ... 흑.. 감기 걸렸습니다.. 열이 오르고, 머리는 어지럽고... 잠도 오네요.. 휴... 혹 모르니, 내일 아무 소식없이 올라오지않거든.. 조의금으로 제 계좌에... 퍼버벅!!! o.O 죄송합니다~ 꾸벅 ...어지러운 김에 횡수하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5 - 관련자료:없음 [2986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5 20:37 조회:185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5 - ================================================================== "정말이세요?" 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까르르 웃어댔다. 아베르노는 막 내 여동생의 귀여운 모습에 흠뻑 취해있었다. 서먹서먹하게 구는 유리 나나 카스트로보다도, 나이차이가 많아 같이 있던 시간도 적었던 체리 나에게서 자신이 귀국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군요, 전하. 신도 함께 즐거워하면 안되겠습니까?" 4년간이나 떨어져 지낸 오누이간의 오붓한 시간이다. 그것을 방해하 는 불청객의 등장에 아베르노는 불쾌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불청객이 숙부인 미카에르 대공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 웃는 얼굴 로 바꾸었다. "어서 오십시오, 숙부. 지금 체리나에게 테리아에서 유학할 때 있었 던 일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테라는 어떻습니까? 생활하시기에 불편하지는 않으 셨습니까?" 아베르노는 웃는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테라에서 지냈던 날들이 뇌 리를 스쳐갔다. "처음에는 향수로 많이 고생하기도 했지만, 익숙해지니까 꽤 유쾌한 곳이더군요. 언제 미카에르 숙부께서도 한번 테라에 가보십시오. 카르 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발달된 문화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언제 한번 가봐야겠군요." 미카에르 대공은 사교적인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뜻밖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베르노의 대답은 수년간이나 테라에서 볼모로 지낸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적대감은커녕, 오히려 그곳을 동경하는 눈치 가 아닌가! 아베르노는 미카에르 대공의 옆에 서 있는 메스메르경에게도 부드럽 게 웃어보였다. "메스메르경도 한번 가보게나. 카르노는 너무 폐쇠적이야. 테라는 모 든 문화가 흘러들어와 섞여드는 용광로같은 곳이지. 상당히 개방적이 고, 그만큼 발달한 곳이니까, 정치를 할 사람이라면 가서 시야를 넓히 고 오는 게 좋지." "네, 전하." 메스메르경 역시 의아함을 억제할 수 없었지만, 순순히 대답하고 있 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베르노 왕세자는 카 스트로와는 뭔가가 틀렸다. 체리나는 한참 재미있게 듣다가 미카에르 대공이 오고 나서 이야기 가 어렵게 돌아가자, 흥미를 잃고 다른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오래 지않아 귀족 여성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체리 나는 그 무리의 중심에 있는 것이 붉은 머리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불쾌함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은 카르노에서 는 보기 드문 밝은 주홍색 머리의 여성이 아닌가! '모리노 남작 부인과 왕세자비 전하? 두 사람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 다지?' 십년은 사귄 사람들처럼 사이좋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못내 의아 스러웠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체리나는 그 무리에 끼일 생각은 조금 도 없었다. 모리나 남작 부인이든 왕세자비이든,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나 남작 부인과 왕세자비가 가까워지는 걸 불쾌해하는 사람은 체리나 뿐만이 아니었다. 얼마전까지 아베르노와 한참을 이야기하던 군부대신 유타르경은 거의 증오스러운 표정으로 모리노 남작부인을 노 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 천한 계집과 고귀하신 왕세자비 전하께서 함께 계신단 말이냐! 대체 다들 뭣들 한 게야?" 눈썹을 곤두세운 유타르경의 질타에, 근처에 있던 귀족들과 귀부인 들이 움칠하고 몸을 사렸다. 대부분 레이얄의 공녀인 것이 못마땅해서 왕세자비를 따돌리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레이얄의 공녀입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용감하게 대꾸했지만, 유타르경의 매서운 눈초리에 어깨를 다시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반들반들한 머리까지 붉게 달아 오른 모습으로 유타르경은 주위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이제 그분은 레이얄의 공녀이기 이전 에 카르노의 왕세자비일세. 다음대 왕비가 되실 분이란 말이야! 자네 들이 다음대의 왕비전하를 무시하고, 지금 그 자리에서 무사할 것 같 은가?!" "……!" 유타르경은 가슴을 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다시 나직하게 소리쳤다. "좀 똑똑하게들 굴게! 자네들이 어물쩍하는 새에, 저 천한 계집이 왕 세자비 전하의 총애를 받는다면, 앞으로 대체 어찌할 셈들인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그들에게 유타르경은 발을 굴러가며 소리질렀 다. "뭣들하는 게야? 얼른 가서 저 계집을 떼어버리란 말이야! 저 계집 이 미카에르 대공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왕세자 전하께서 대공과 가까이 지내면, 우리들은 뭐가 되겠는가? 생각들을 좀 하고 사시게나!" 그제서야 귀족들은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왕세자비에게 접근했다. 유 타르경은 흥분해서 달아오른 얼굴을 차가운 술로 식히면서, 아베르노 와 웃고 이야기하는 미카에르 대공을 노려보았다. 가증스러운 자였다. 국왕폐하께 여자들을 제공하여 신임을 얻은 자 가, 이제는 카르노의 희망인 아베르노 전하마저 달콤한 혓바닥으로 농 락하려 들고 있었다. 미카에르 대공의 수작에 말려들면, 총명하신 아베 르노 전하께서도 국왕폐하처럼 타락할 것이 뻔했다. 유타르경은 절대, 미카에르 대공에게 카르노의 마지막 희망인 아베르노 전하를 빼앗길 수 없었다. 카스트로에게 자신의 얼굴을 선보인 뒤,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는 귀 밑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진보라색 머리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매부 리코와 주름진 얼굴의, 늙었다기보다는 노련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남자는 카르노의 외부대신인 헤르트 폰 사르노였다. 헤르트경은 앞에 선 로페냐에게 미소지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 카스트로 전하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로페냐는 저절로 싱긋거려지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눈으로 보았습니다. 헤르트경." 황당해하는 헤르트경을 본 로페냐는 다시 크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 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테라에서 유행하는 농담이죠. 불쾌하셨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아닙니다, 로페냐경." 헤르트경은 이번 사신단의 대표인 이 지나치게 활달한 청년을 감당 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전에 사신으로 왔던 노련한 외교가인 가스티오 네 백작 마키아경이나, 이번 사신단의 부대표로 온 마로니아경 쪽이 훨씬 대하기 편했다. 교묘하게 꼬인 암시적인 말들을 흘리며, 상대측의 정보를 빼내는 일이야말로 외교가의 낭만이 아닌가! 하지만 눈앞의 이 청년은 외교에는 문외한인 사람 같았다. 외교가라기에는 감정이 너무 풍부하고, 또한 그 감정을 너무 잘 표현했다. 말이 좋아서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것이지, 실은 감정을 숨기는데 어설프다는 말밖에 되지 않 는다. 외교가로서는 최악의 자질인 것이다. 하지만 헤르트경은 외교를 총괄하는 외부대신으로서 이 청년에게 최선을 다해 접대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헤르트경이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져 머리를 굴리는 사이, 로페 냐는 자신의 생각에 푹 빠져서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하하, 어쨌든 상당히 뜻밖이었습니다. 아베르노 전하와는 또 다른 성격인 것 같더군요." "그렇습니까?" 로페냐는 연회장 구석에 서 있는 카스트로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 았다. 아까부터 틈만 나면 카스트로에게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로페냐 의 뺨에 깊숙한 보조개가 패여지며, 뭔가 재미있는 듯한 미소가 떠올 랐다. "저 개인적으로는 속을 알 수 없는 아베르노 전하보다, 솔직하고 시 원스런 카스트로 전하의 성격이 더 마음에 듭니다." 헤르트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로페냐와 저쪽에 몸을 돌려 나가는 카스트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뒷 모습을 보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스트로 전하의 성격이 시원해서 마음에 든다?' 노련한 헤르트경에게는 그 '솔직하고 시원스런 성격'이라는 것이, 사교적 미숙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헤르트경은 '속을 알 수 없는 아베르노 전하'에게 더욱 점수를 올려주었다. 모름지기 군주란, 그 속내를 뭇사람들이 다 알게 내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헤르트경은 이어서, 왕세자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 지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아베르노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던 헤르트경 은 히죽, 남모를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콧수염을 기르면 좀 더 친근감을 느끼실지도 모르지.' 짙은 어둠과 세찬 빗줄기 속에서 아르노의 밤은 화려하게 깊어져가 고 있었다. 늦은 시간과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흥청대는 사람들은 비단, 왕궁의 왕족과 귀족들 뿐만은 아니었다. 아르노시의 사람들이 모 여들만한 곳이면 여지없이 술과 음식냄새가 흘러나오고, 시끌벅적한 웃음과 걸직한 음성들이 푸근하게 섞여들고 있었다. 아르노 시내의 서쪽 외곽지역이 용병들의 천국이라면, 아르노의 수 원인 나르 강을 끼고있는 동부지역은 기사들의 앞마당이었다. 아르노 동부, 왕궁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라이아나의 술잔'은 특히 카 르노 왕실 기사단원들이 많이 애용하는 주점이다. 승리의 여신 라이아 나는 전신 로마의 연인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카르노에서는 가장 사랑 받는 두명의 여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라이아나의 술잔'에서도 밤새 술을 공짜로 제공하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꽉꽉 들어차있는 홀 안에, 수려한 외모로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청년이 한 무리에 섞여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짧은 백금발 의 미청년은 같은 테이블에서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선배기사들의 말을 안주삼아, 묵묵히 술을 축내고 있었다. "그래, 성깔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더라니까! 나라면 그렇게 앙칼 진 여자랑은 못살지. 아암. 차라리 아베르노 전하가 존경스러워지더라 니까!" 테라와의 국경까지 왕세자 일행을 호위해온 기사 중 한 명이 한 말 은 주위에 있던 기사들의 호응을 받아냈다. "그 호들갑스런 주홍 머리를 보니, 성격이 여간 아닐 것 같기는 하 더라만. 그래도 공녀라서 좀 다소곳할 줄 알았는데……." 함께 갔었던 기사들 중 한명인 베이경이 끼어들어서 빈정거렸다. 베 이경의 다갈색 눈동자는 노골적인 경멸을 담고 있었다. "다소곳? 야야, 다소곳한 여자가 마차가 덜렁거린다고 마부에게서 채찍을 뺏어들어 죽도록 후려치냐? 말도 마! 그 뒤부터 우리는 숨소리 도 죽이고 왔다니까." "후훗, 베이, 너도 겁먹을 때가 다 있냐?" 옆에 있던 적갈색 머리의 로카르경이 웃으면서 말하자, 베이경이 정 색을 하고 손과 머리를 동시에 내저었다. "겁먹어서라니! 그냥 큰 일 없이 아르노로 오려고 내가 참은 거지." "네네, 참 그러셨겠군요." 포에르경이 여전히 곰 옆에 붙은 사냥개처럼 곁에 앉아 투덜댔다. "그러엄! 괜히 기사단과 왕세자비가 부딪히면, 왕세자 전하만 곤란해 질게 뻔하잖아! 다 사려깊은 내가……" "됐으니까 술이나 드셔, 베이!" 포에르경이 술잔으로 베이경의 입을 막아버렸다. 베이경은 투덜거리 면서도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로카르경이 조용히 있는 카나이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나이트, 자네는 자네 아버지와 함께 연회에 갈 수도 있었을텐데 왜 이런데서 이러고 있나?" 카나이트는 사과조각을 집어먹다가 같은 테이블에 있는 기사들의 시 선을 느끼고 먹던 것을 꿀꺽 삼켰다. 듣기 좋은 저음의 음성이 매력적 인 붉은 입술에서 담담하게 쏟아져 나왔다. "귀족들의 연회보다는 이렇게 기사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합니다." "흐흥, 역시 귀족다운 말이야." 카나이트의 옆에 있던 사로트경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턱을 괴 고 중얼거렸다. 이미 술을 상당히 마셨는지, 카나이트를 보는 눈은 힘 없이 풀려있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카나이트가 되묻자, 사로트경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로트경은 불 안스레 흔들리는 손으로 술을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런 연회에 초대받고 싶어하지. 겨우겨우 기사 작위나 얻은 우리들에게, 그런 연회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출세의 지름 길이나 마찬가지야. 자네처럼 귀족 출신의 기사들이나 출세에 여유로 운 거겠지. 안그런가?" 카나이트는 대답을 하지 않고, 테이블 위만 내려다보았다. 악의라기 보다는 투정과 질투에 가까운 사로트경의 말이, 카나이트의 뇌리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어쩌면, 사로트경의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처럼 좋은 날에 맞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주위가 이상하게 침체되자, 포에르경이 분위기를 돌리려고 나섰다. "즐거운 얘기? 자네 마누라와의 뜨거운 얘기라도 해주려는 건가?" 베이경이 눈을 반짝이면서 묻자, 포에르경은 비난의 창을 들어 베이 경의 가슴에 꽂았다. "자네가 그 하로아 양과의 밀회를 얘기해주면, 나도 내 아내얘기를 해주지." "미, 밀회라닛! 난 그런 적 없어!" 다시금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것과는 상관없이, 카나이트는 사로트경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몇 잔인가의 술을 마시던 카나이트는 불쑥 아까의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했다. "출세에 여유로운게 아닙니다." "에?" 사로트경을 비롯해 막 싸우기 시작한 베이경과 포에르경, 그리고 로 카르경이 모두 카나이트를 돌아보았다. 카나이트는 짙은 초록색 눈을 들어 사로트경을 직시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사로트경을 조금 당황 스럽게 했다. "저도 남자고, 야심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출세하고 싶습니다." "……." 모두 카나이트의 말에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에게 카나이트의 대답은 매우 뜻밖이었다. 카나이트는 그런 여과없는 감정들을 읽고, 조 금 씁쓸해졌다. "하지만 편법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제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습니 다." "……." "제가 정당한 입단시험을 치르고 왔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으로 압니다." "아아, 그래. 귀족 나리들의 자제치고는 꽤 의외였지." 베이경이 순순히 동의하고 나섰다. 카나이트는 모두를 돌아보며, 진 지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염치불구하고 출세만을 원했다면, 기사단이 아닌 근위대로 갔 을 겁니다. 군부대신인 제 아버지께 부탁하면 그쯤은 일도 아닙니다."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카나이트는 각인시키듯 천천히 말을 맺었다. "제 아버지가 군부대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실력도 없이 들어온 것처럼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시끌벅적한 주점 안에서 카나이트가 있는 테이블에서만 잠시간의 침 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로카르경이었다. 씨익 웃으며, 맥주 가 출렁이는 술잔을 들어올리고 말했던 것이다. "자자, 이번에 들어온 신입은 누구처럼 힘만 좋은 바보는 아닌 것 같군. 장차 카르노 왕실 기사단의 기둥이 되길 바라네, 자, 뭣들 하 나?"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베이경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웃는 낯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신입기사 카나이트의 건투를 빌며!" "자네의 신념을 어떻게 이뤄가는지 지켜보지." "밤새도록 마시자고, 다들!" 쨍-! 술잔 다섯 개가 허공 중에 부딪히고, 누르스름한 술이 술잔에 서 사방으로 튀었다. 사로트경의 흐린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카나이트 에게 박혀들었다. 천둥과 번개, 그리고 늦가을의 시리도록 찬 빗줄기는 새벽으로 넘어가며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6 - 관련자료:없음 [2988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6 21:03 조회:185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6 - ================================================================== "……첫발을 내딛는 당신의 종에게 무한한 축복과 영광을 내려주시 기를. 당신의 뜻을 더욱 널리 알릴 당신의 종이……" 촛불만이 케테르의 백금색 신상에 빛을 던져주는 어두운 예배당에, 맑은 향을 내는 향불이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예배당 안에는 지금 백 색 신관복을 입은 신관 세리카의 주재로 새벽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었 다. 세리카의 뒤쪽에는 경건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손 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칠흑같은 검은머리와 단정하 게 손질된 콧수염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주홍색 머리칼의 여 자, 그리고 두 살 가량의 사내아이로 이루어진 이들은, 카르노의 왕세 자 아베르노 일가였다. 밤늦게까지 연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야했던 아베르노와 라에니는 두세시간 간신히 눈을 붙이고,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을 찾았다. 테라에서의 4년간 몸에 붙어버린 습관이라 아 베르노는 첫날부터 예배를 거를 수도, 그리고 또 거를 마음도 없었다. 세리카의 침착한 기도소리가 예배당에 낮게 깔리고 있었다. 비는 이 미 그쳐있었지만, 실내의 공기는 아직도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하지 만 세리카도, 아베르노 일가도 그런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기를 기원하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케테르님께 당신의 아들 자디크님과 그의 아들 한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세리카는 주신 케테르의 신상에 대고 경건하게 허리를 숙여 절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이제 케테르님께 절하고, 일어서십시오." "예, 세리카님." 아베르노 왕세자 일가가 몸을 일으켰다가, 케테르 신상을 향해 무릎 을 꿇고 머리를 숙여서 절했다. 세 번의 절을 올린 아베르노 일가가 마지막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가 일어서자, 세리카는 잔잔한 미소 로 일가를 바라보았다. "긴 여행의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테고, 밤새 이어진 연회로 더욱 피 로해지셨을텐데, 이렇게 잊지않고 찾아주셔서 무척 놀랍고 감격했습니 다. 주신이신 케테르님께서도 전하의 정성된 마음을 아시고 감동하셨 을 것입니다." 아베르노는 고개를 숙이고 엄숙한 태도로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뿐이지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젓는 세리카에게 아베르노가 즉각 물어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일이라기 보다는……, 아닙니다." 아베르노는 어정쩡한 세리카의 말에 신경이 쓰여 자꾸 캐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혼자 고민 하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세리카는 인형같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별 게 아닙니다. 단지 보름에 한번 예배당에 오셔서 케테르님께 인 사드리는 것도 버거워하시는 다른 왕족분들에 비하면, 전하께서는 상 당히 신실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다른 왕족분들께서도 매 일씩은 무리더라도 보름에 한번 하는 예배에라도 오셨으면 하고……, 아니, 제 욕심일 뿐이지요. 카르노 왕가의 분들은 케테르님을 그리 달 갑게 여기지 않으시니……." 세리카는 자신의 말에 반응해 아베르노가 뿜어내는 오라의 색을 보 면서 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전에 마키아경이 왕세자의 일에 대해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괜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군요. 별 일 아니니, 그리 개의치 마십시오." 아베르노는 눈쌀을 찌푸렸다. "별일이 아니라니요? 저는 제 가족들이 주신 케테르님의 축복을 받 았으면 합니다. 무지하게 그것을 거절하다니……,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저희 가족을 위한 일입니다." 딱잘라 말하는 아베르노의 검은 눈은 주신 케테르에 대한 믿음과 신 념으로 넘실댔고, 굳은 표정에는 어떤 강렬한 의지마저 엿보이고 있었 다. 아베르노에게 끌려 예배당으로 온 라에니와 레트는 간신히 눈만 뜨고있는 상황이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지 못 했다. "하, 하오나……." 삼왕자궁의 궁내부 책임자인 시종장 레모 베제르는 때아닌 늦가을에 땀을 흠뻑 쏟아내고 있었다. "그게 무어라고 그리 안된다는 겐가?" 고집스럽게 말하면서, 시종장 베제르를 곤란하게 만드는 청년은 짧 은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왕세자, 아베르노였다. "하오나 그것을 법도가 아니온지라, 잠시만 기다리시면 소신이 가서 전하를 기침케 할 것이오니……" 고집스레 '법도'를 강조하며 고개를 숙이는 시종장 베제르였지만, 아 베르노의 고집도 만만치않았다. 못마땅한 듯 찌푸린 아베르노의 표정 은 시종장 베제르의 심장을 심각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사람이 왜 이리 답답한가? 내가 친동생을 어떻게 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오랜만에 만난 형제를 친히 깨우겠다는게 뭐 그리 법도에 어 긋난다는 것인가?" "하, 하오나 그것은 지엄한 왕실 법도에 어긋나오니……" 이마에 솟은 땀이 줄기를 이루어 뺨으로, 턱으로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젊어서부터 왕비궁에서 엄격한 왕실법도를 익힌 시종 장 베제르는 절대로, 사소한 일 하나라도 그것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설사 국왕폐하라 할지라도 왕자전하의 침실로 들어가게 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쯧쯧. 이리 꽉막힌 사람을 보았나. 알겠네. 그러면 되도록 빨리 가 서 깨우도록 하게.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 아베르노는 결국 자신의 고집보다 완고한 시종장 베제르에게 두 손 을 들어보였다. 시종장 베제르는 심장의 압박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선뜻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곧 다과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 시오." 시종장 베제르는 인사하고 돌아서며, 남몰래 이마를 훔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명의 친위대원이 지키는 응접실과 또하나의 작은 방을 지나자, 다시 두명의 친위대원과 두명의 궁내부원이 있는 문이 나타났 다. "전하께서는 기침하셨는가?" "아직이십니다." 시종장 베제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대답한 궁내부원에게 지시 했다. "지금 밖의 응접실에 왕세자 전하께서 와 계시네. 주방에 연락해서 제일 좋은 차와 과자를 내오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는 빨리 가서 뜨끈 한 세숫물을 받아오도록 하고." "네, 나으리." "네, 시종장 나으리." 다른 궁내부원에게도 지시를 내리자, 두 사람은 차례로 꾸벅꾸벅 허 리숙여 인사하고 궁내부원들이 사용하는 작은 문으로 나갔다. 시종장 베제르는 엄중하게 지켜지는 침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귀에서 뭐가 윙윙대는 느낌이 들었다. 카스트로는 귀찮은 얼굴로 귓 가를 문지르고 돌아누웠다. 사람들을 대할 때 길이 들은 근엄한 표정 이 잠결에 사라져버리고, 열일곱의 소년다운 앳되고 어리광스러운 표 정이 카스트로의 자는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저언하아! 제에발 깨어나십시오!" 파리가 붙은 것처럼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도 계속 잠을 청하는 카스 트로의 옆에서, 시종장 베제르는 고개를 기울이고 카스트로의 귀에 대 고 애타게 불러댔다. "저어어언하아아!" 직접 흔들어깨우고 싶은 마음이 수십번도 더 들었지만, '지엄한 왕실 의 법도'를 아는 시종장 베제르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몸을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그리고 몸이 아플 때 외에는 아무리 시종장이라고 해도 사사로이 왕족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차 라리 라에르라도 빨리 와주었으면 싶었다. 왕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 이 허락되는 것은 친위대의 호위기사뿐이었으므로. "저언하, 제발 이렇게 한가롭게 주무시고 계실때가 아닙니다. 저언 하! 저언하아!" 카스트로는 자꾸만 시끄러워지는 소리가 신경쓰여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졸렸던 카스트로는 자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얼 핏 들은 정신으로 몸을 웅크린 카스트로는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하려 는 듯 포근한 이불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저언하! 제발 일어나주십시오! 저언하!" 시종장 베제르는 카스트로가 파고 든 이불을 끌어내리며, 카스트로 의 귀에 대고 계속해서 나직하게 소리질렀다. 시종장 베제르의 끈질긴 공격에 못이겨, 드디어 카스트로가 실눈을 뜨고 웅얼거렸다. "…시…끄…러워……" 시종장 베제르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성취감을 억누르며, 다시 재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전하. 밖에 왕세자 전하께서……" "으응, 나중에." 카스트로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손으로는 더듬거 리며 이불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턱을 쭈욱 내밀고, 카스트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언제 깼었냐 싶게 달게 자고있는 카 스트로의 모습은 시종장 베제르의 인내심을 상당히 자극하고 있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좀전의 부드러운 손길과는 다른 사뭇 거친 손길로 다 시 카스트로가 끌어올린 이불을 끌어내렸다. 침실 안은, 비록 밤새 장 작이 벽난로에서 타고있다고 해도 이불없이 잠을 청하기에는 조금 으 스스하게 추웠다. 얇은 실크 잠옷을 입고있는 카스트로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팔을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상당히 안스러워할 모습이 지만, 오늘아침 시종장 베제르는 묘한 배신감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고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전하!" "……으응, 응……알았어, 그러니까 이불 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중얼거리는 카스트로의 괘씸한 행태에, 시종장 베제르는 순간 이성을 잃고 꽥 소리질렀다. "당장 일어나란 말입니다! 당장!"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충격적인 성량에 카스트로는 몸을 굳히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위해 다시 몇번 인가 눈을 깜빡거리고, 얼굴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카스트로는 그 리 멀리 둘러볼 것도 없이 자신이 등돌린 방향의 침대 옆에 있는 사람 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 시종장 베제르가 얼굴을 시뻘겋게 하고, 자 신의 이불을 움켜쥔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조금 놀란 얼굴로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베제르? 지금 소리친거, 베제르가 한건 가?"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카스트로는 다시 왕자다운 근엄함을 되찾고 있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핫! 하고, 자신이 저질러버 린 일을 깨달았다. 대체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짓이란 말인가! 시종인 자신이 주인에 게 큰소리를 치다니! 시종장 베제르는 이불을 끌어안고 머리가 침대에 닿도록 고개를 숙 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소신이 분수를 모르고 이런 실수를 저지른 죄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제 죄를 물어주십시오. 당연히 왕비전하께서 도 그리하셨을……" 카스트로는 또다시 정신없이 길어지는 시종장 베제르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런 아침부터 날 깨운 이유가 뭔가?" 만약 이유가 없다면 정말로 죄를 물어 한달간 근신케 할 작정으로, 카스트로는 시종장 베제르를 쏘아보았다. 시종장 베제르는 그제서야 본 목적을 생각해내고, 얼른 용건을 말했다. "지금 응접실에 왕세자 전하께서 납셔계십니다. 전하를 뵙겠다고 하 시니, 얼른 일어나셔서 의복을……" "아베르노 전하께서? 이런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시종장 베제르는 여지없이 잘리는 자신의 말에, 속으로 뭐라고 궁시 렁거리며, 카스트로의 질문에 답했다. "그냥 아침 인사라고 하십니다." "아침…… 인사?" 카스트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묻고, 어둡게 드리워진 녹색 실크 휘장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알겠으니 빨리 준비하라." "예, 저언하!" 물러가는 시종장의 뒷모습사이로 언뜻 보이는 방문에 시선을 고정시 키고, 카스트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침 인사라고?' 풀기 힘든 수수께끼를 만난 표정이던 카스트로는 결국 '만나보면 알 겠지'라는 단순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 날밤 늦게까지 연회에 시달리느라 찌뿌둥한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7 - 관련자료:없음 [2990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7 20:35 조회:184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7 - ==================================================================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아베르노는 다 식어버린 차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스트 로를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닿는 검은색 머리가 아직까지 마르지않은 물기로 촉촉히 젖어있다. 상큼한 비누향 외에 다른 향수냄새가 나지않 는 카스트로는 테라인의 세련된 멋과는 다른, 건강한 젊음으로 빛나보 였다. 아베르노는 자기가 앉은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자애롭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우선 앉거라. 그래, 너는 별로 잘 자지 못한 얼굴이군?" "그렇게 보입니까?" 카스트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아베르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곤히 자고 있는 걸 깨웠나싶어, 미안해서 하는 소리다. 모처럼 네 자는 모습도 보고, 직접 깨워보고도 싶었는데, 네 시종장이란 사람, 어 지간히 고집불통이더구나." 카스트로는 아베르노 앞에서 꼿꼿하게 버텼을 시종장 베제르를 상상 하고는 슬쩍 웃음지었다. "전하께서 직접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신경쓰지 마십시 오." 카스트로의 웃는 얼굴을 지켜보며, 아베르노는 새삼 지난 4년간의 공백을 느꼈다. 지난날 아베르노가 알던 장난꾸러기 카스트로는 어디 로 가고, 남아있는 것은 무의미한 몸짓 하나하나에서 왕자다운 기품을 발산하는 낯설기까지한 청년 카스트로였다. "멋지게 컸구나, 카스트로. 테라에 가서도 네 여리고 장난스런 성격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구나. 내가 없는 사이, 국왕폐 하를 혼자 모시느라 수고했다." 카스트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씁쓸한 표정이 대신 자리잡는 다. 테이블보 밑단의 복잡한 문양으로 얽혀있는 레이스가 어느샌가 내 려온 시선에 들어왔다. '내가 없는 사이, 국왕폐하를 혼자 모시느라 수고했다? 하……' 그게 수고했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던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 다. 하나남은 아들로서 노쇠한 아버지의 옆을 지키는 것, 너무나 당연 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베르노의 한마디로 카스트로는 자신이 하지 않 아도 될 일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아버지와 자신이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제삼자로 내쫓긴 느낌이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는 있었지 만, 직접 듣고보니 이건 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결국 나는 자리에 없던 왕세자 전하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만 지키 던 사람이라는 소리인가?'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조소를 억누르느라, 카스트로의 얼굴 근육이 뻣뻣해졌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대답을 떠 올리고, 기계적으로 입에 담았다. "제가 한 일도 없습니다. 국왕폐하께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저로서 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이제 전하께서 옆에 계시고, 폐하께서도 마음 든든해하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베르노는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카스트로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없을 형제애를 과시하듯 부드럽고 다정 한 손길로 카스트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몇겹의 천 너머로 단단한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져온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아베르노가 모르길 바랬다. 생각해보면, 아베르노가 자신에게 잘못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귀국해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떨떠름한 기분으로 반기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다. 아베르노는 오히려 포옹까지 하며 자신을 반기 지 않았던가.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형에게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이런 감정을 아베르노에게 들 키고 싶지 않았다. 아베르노는 기운없이 내려앉는 카스트로의 어깨를 느끼며, 자신의 힘을 불어넣듯 카스트로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폐하께서도 너를 자랑스러워 하실게다. 옛날의 그 장난꾸러기가 이 만큼 남자답고 멋지게 자라줬으니까." "……." "테리아에 가게 되면……" 카스트로의 어깨가 꿈틀하며 굳는 것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아베르 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테라에서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는 카스트로 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테라로 갈 때 얼마나 불안 했었는지, 아베르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이 조금은 덜 긴장하고 덜 힘들게, 테라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기를 바랬다. "비록 타지의 생활이 힘들고 고되겠지만, 그만큼 너도 얻는 게 있을 것이다." 카스트로는 몸의 긴장을 풀면서, 아베르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5년은 금방이야. 테라에는 배울 것이 많단다. 그것들을 다 배우려면 10년이 지나도 모자를 거야." 카스트로는 자신의 심장박동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쿵쿵쿵 요 란하게 울려대는 맥박이 심장에서 온몸으로 강하게 뛰어돌고 있었다. 생각은 자신의 기분대로 나쁜 쪽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테라에 가서 10년동안 오지 말라고 말하는 건가?' 카스트로가 제멋대로 상상을 비약시키는 가운데에서도 아베르노의 말은 계속됐다. "테리온에 가거든 아무 걱정말고 학업에나 힘쓰도록 해라. 그곳에는 이미 그곳 생활에 익숙한 지스카르도 있으니까……. 그곳에서의 5년이 너를 더욱 멋지게 바꾸어줄 것이다." "……." 아베르노는 손끝으로 카스트로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드는 느낌과 머리에서 풍겨나오는 장 미향의 비누냄새가 상쾌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오면, 내 옆에서 나를 도와라, 카스트로." 아베르노는 이제 카스트로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주겠지,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고개를 돌려 아베르노를 올려보았다. 눈매마저 닮은 두 쌍의 검은 눈이 마주치고, 카스트로는 다정한 아베르노의 눈빛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카스트로는 아베르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 너무 추하다. 카스트로는 눈을 내려 시선을 피했다.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내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전하와 카 르노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후후후, 그래, 내 동생, 카스트로." 만족스런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충직한 신하를 얻은 듯한 군 주의 흡족한 표현이었다. 아베르노는 카스트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다 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너를 믿는다, 카스트로. 아, 그러고 보니 원래 여기 온 목적을 잊을 뻔했군." 카스트로는 의아한 눈으로 아베르노를 쳐다보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계시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아베르노는 앉은 자세에서 등을 뒤로 기대며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아베르노의 움직임으로 의자에 기대어놓은 무언가가 바닥으로 굴러떨 어졌다. 카스트로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금으로 손잡이가 세공 된 매끈한 스틱이었다. 테라인들이 종종 가지고 다니던, 테라인의 표식 같은 장식품. 카스트로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아베르노의 호위기사가 그것 을 집어 의자에 다시 기대어놓았다. 그때, 아베르노의 말이 카스트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케테르님의 예배당에 나오너라." 카스트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베르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눈의 카스트로에게 다시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아니, 너뿐만 아니라 조금 뒤에 유리나와 체리나에게도 말할 생각이다. 매일 새벽에 케테르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저, 전하?" 카스트로는 황당한 얼굴로 아베르노를 살펴보았다. 짖궂은 농담이라 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눈에 비친 아베르노는 엄숙하 기까지한 얼굴이었고, 농담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케테르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신들의 왕인 주신(主神)이시다. 고작 하위 신족인 전신족(戰神族)의 로마 따위를 믿으니까, 카르노는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무슨……." 카스트로는 도대체 아베르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카르노가 다시 옛 영광을 되찾는 길은, 주신 케테르님을 섬기 고, 테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길뿐이다. 이제 단순히 검으로 치고 받고 해서는, 카르노에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카스트로는 얼이 빠진 얼굴로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뭐에라도 홀 린 기분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카르노 사람이라면 생각 해서도, 생각할 수도 없는 말이었고, 그것이 다음대 국왕이 될 왕세자 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카스트로는 충격을 받았다. "국민들은 아직 무지해서 케테르님을 배격하고 있지만, 우리 왕족들 부터 케테르님을 정성껏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매한 국민들도 이내 우리 뒤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까 카스트로, 당분간은 아침에 일어나는게 조금 괴롭더라도, 참고 예배당으로 와주려무나." "……." 아베르노는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눈살을 찌 푸렸다. 하지만 곧 자신이 처음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기억해내고, 카 스트로의 복잡한 기분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물론 처음에는 내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네가 테리 온으로 가면 싫더라도 해야할 일이야. 조금 앞당겨 익숙해지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침묵으로 시간이 메워졌다. 카스트로는 한참만에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충격에서 벗어나는 대신 얻은 것은 자책으로 깊숙 히 침잠되던 기분의 활화산 같은 들끓음과 뒷덜미가 뻐근해질만큼의 끔찍한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혐오감이었다. 카스트로는 표정을 가라 앉히며,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겁니까?" 미묘하게 섞인 카스트로의 분노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베르노는 빙 긋 웃어보였다. "그것때문이기도 하고, 또 오랜만에 이곳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한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물어볼 것이란 무엇입니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느껴지는 깍듯한 말투였기에, 아베르노는 여전 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일 오후쯤 사냥을 하려고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느냐?" 카스트로는 사나워진 눈빛을 고개 숙여 감추고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네 시간을 뺏은 것 같구나. 그럼 나중에 보자 꾸나." "네, 전하." 스틱을 집어들고 밖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어가던 아베르노는 문 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되돌아보았다. "아참, 또 깜빡할 뻔했군." 빤히 쳐다보는 카스트로에게, 아베르노는 여유있는 미소로 말했다. "언제 시간나면 내 궁에 한번 들리렴. 네게 줄 선물이 있는데, 깜빡 잊고 안가져왔구나." "네, 전하." "그럼." 다시 돌아서는 아베르노의 뒷모습을, 카스트로는 입술을 깨물고 노 려보았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케테르의 예배당으로 나오라고?' 카르노는 전신 로마의 축복으로 건국되고, 성장되어 온 나라였다. 비 록 불패의 명성은 깨졌지만, 국민 대다수가 아직까지 로마의 가호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로마를 버리고, 케테르를 섬기라 고? 케테르? 케테르는 우리 카르노에 어떤 영광도 축복도 내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신을 바꾸란 말인가? 수백년간 카르노를 수 호해준 로마를 배신하고, 저 오만한 한족들의 신인 케테르를? 카르노 에 건국이래 최대의 수치를 심어준 저 한족들의 신에게? 콰앙!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주체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주먹으로 둔탁한 아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아픔을 능가하는 분노와 배신감이 카스트로를 휩싸고 있었다. "케테르? 테라? 테라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하! 우리의 적, 테라를 짓뭉개버려도 분이 안풀릴 마당에 나더러 테라의 종이 되라 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잇사이로 저주하듯이 내뱉었다. 카스트로의 눈동자가 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8 - 관련자료:없음 [2993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8 20:39 조회:186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8 - ================================================================== 뿌우우우우우우우---------------! 낮고도 힘있는 뿔피리 소리가 아르노 북쪽, 루노 산과 이어진 왕의 숲에 길게 울려퍼졌다. 사냥을 개막하는 신호에 맞춰 몰이꾼들과 사냥 개들이 숲 이곳저곳으로 파고들었다. 숲의 남쪽에는 곳곳에 천막들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귀부인들과 잘 생긴 말을 타고 사냥에 대한 기대로 몸이 달은 귀족남성들이 모여있었 다. 그들의 앞에는 왕세자 아베르노를 비롯한 왕족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장차 그들의 국왕이 될 왕세자 아베르노가 유쾌한 얼굴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리온에 있던 4년동안, 카르노가 가장 그리웠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냥터였소. 테리온에 있는 숲이라고는 성산 테라 근처밖에 없는데, 거기서 사냥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 어쨌든 이제서야 다시 카르노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드는군. 오늘 사냥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 린 자에게는 내가 특별히 포상하도록 하겠소." 귀족들 사이에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아베르노는 그런 소리를 기분 좋게 들으면서 말을 맺었다. "자아, 다들 실력을 보이시오. 해가 질 무렵, 다시 이곳에 모이기로 하지. 지금 사냥을 시작하겠소!" 아베르노의 사냥 개막을 알리는 말이 크게 울려퍼지자, 다시 뿔피리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소리에 맞춰 모여있던 남녀들이 저마다 무 리를 지어 흩어졌다. 아베르노는 한동안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가, 흘깃 옆쪽을 돌아보고 말을 움직여 카스트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카스트로는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 "오늘 새벽에 예배당에 오지 않았더구나." 카스트로는 시선을 피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건틀릿에 가까운 검 은색 가죽 장갑이 단단하게 말고삐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궁당할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표정상으로는 별다른 동 요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카스트로는 그 말 외에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아베르노가 예 배당에서 기다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가지 않았을 때부터, 추궁당할 줄 빤히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따위 일로 구차하게 변명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당당하게 싫다고 말 할 참이었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이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더이상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르노는 고집스런 카스트로 의 표정을 보고, 혀를 찼다. "그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듣기로 하지. 오늘은 사냥이 나 즐기자꾸나." "……." 아베르노는 여전히 기운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카스트로를 더욱 활달 한 목소리로 격려했다. "그럼 저녁때 보자. 네 실력을 보여주렴." 아베르노는 말을 마치고, 호위기사 세시르경과 함께 숲속으로 달려 갔다. 몇몇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그를 뒤따랐다.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눈을 들어 아베르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얼음보다 싸늘한 눈빛에 불 쾌감이 어린다. '나중에 따로 듣겠다……라…….' 카스트로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짜증스럽군.' 카스트로는 불유쾌한 감정을 털어내려는 듯, 말에 박차를 가해 숲으 로 돌진했다. 라에르는 돌발적인 카스트로의 움직임에도 준비하고 있 던 것처럼, 능숙하게 카스트로를 뒤따랐다. 전날부터 기분이 나빠보이던 카스트로는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해주 지 않았다. 시종장 베제르로부터 전날 왕세자 전하가 방문했었다는 소 식을 들었지만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들었 던 말을 생각해보면……. '예배당에 오라고 하셨던가? 예배당? 설마 케테르의 예배당?'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있을 틈은 없었다. 숲 사이사이를 파고 들며 거침없이 누비고 다니는 카스트로의 뒤를 바짝 쫓으며, 라에르는 주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나 달렸을까? 라에르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주위를 경계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서부터, 기분 나쁜 남자가 싱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의 교차점에 서있는 숲은 이미 색이 바래 있었다. 말을 모는 곳곳마다 푸르름을 잃은 무채색의 낙엽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밟 혀진다. 며칠전의 비가 아직까지 낙엽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기분좋은 나무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신을 훑어간다. 아베르노는 오랜만에 느끼 는 이 좋은 느낌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몇 년만에 속시원한 자유라 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메스메르경은 아버지의 말대로 아베르노의 곁에서 말을 몰고 있었 다. 사냥이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는 메스메르경이기에 생각같아서는 홀 홀단신으로 숲을 누비며 사냥하고 싶었지만, 간곡하기까지했던 아버지 의 당부가 계속 메스메르경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다. 아베르노의 마음을 잡으 면 우리의 앞길은 탄탄해진다. 하지만 만약 아베르노의 미움을 산다면, 우리는 변방의 영지로 되돌아가 영지만 지키고 살 수밖에 없다.' '잘들어라, 메스메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아베르노의 곁에 붙어 있거라. 근위대장이라는 지위니만큼 그런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을게 다.' '무슨일이 생겨 아베르노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그의 신뢰를 얻 는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메스메르경은 앞서가는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일부러 카 스트로에게 다가가 격려해주는 태도로 보아, 카스트로에게 각별한 관 심을 쏟는 것 같았다. 전날에도 삼왕자궁으로 직접 찾아갔었다는 이야 기를 삼왕자궁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들었다. 만약 아베르노가 카스트 로를 중용하고, 카스트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메스메르경은 머리를 휘저었다.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저기 저 앞에 뭔가가 있습니다!" 귀족 중 한명이 아베르노에게 나직이 소리쳤다. 메스메르경은 고개 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넝쿨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의 첫 사냥감인가?" 아베르노는 긴장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화살을 활에 걸었다. 일순 넝 쿨의 움직임이 멈칫하더니, 무언가가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와 도망치 기 시작했다.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이었다. 아베르노는 활시위를 당겼 다. 쐐액- 소리가 나며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와아아아아-------!" "명중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메스메르는 정확히 사슴의 목덜미를 꿰뚫은 아베르노의 솜씨에 내심 찬탄을 표하며, 축하행렬에 끼어들었다. "멋진 솜씨였습니다, 전하." "하하하, 별것도 아닌걸 갖고 칭찬을 받으니 쑥스러운걸." 아베르노의 겸손은 또 다른 칭찬을 낳았다. "겸손이십니다, 전하. 제 생애 처음보는 멋진 솜씨였습니다." "하하하하……" 숲의 청량한 공기에 활달한 아베르노의 웃음소리가 실려 널리 퍼져 갔다. 숲 이곳저곳에서 몰이꾼들이 사냥개와 함께 사냥감들을 몰고 있었 다. 사냥개들은 컹컹거리며 짐승의 냄새를 따라 움직이고, 몰이꾼들은 사냥개들이 이끄는대로 따라 달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숲속으로 들어 가는 귀족들은 그들이 몰아준 사냥감에게 화살을 날리고, 화살이 운좋 게 사냥감을 맞추면 저마다 탄성을 지르고 서로의 솜씨에 감탄을 한 다. 그리고 그 탄성과 감탄의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냥 에 함께 따라나온 화려한 옷차림의 귀부인들이었다. 그런 그녀들 사이 의 중심에 있는 것은 두 명의 귀부인이었다. 타오르는 불꽃같은 머리 색의 모리노 남작부인과 밝은 느낌의 주홍색 머리칼을 가진 라에니 왕 세자비였다. 그들은 앞열을 이루어 저만치 멀어져가는 아베르노의 뒤 를 따라 움직이며, 벌써 세마리째 사냥감을 죽음으로 몰고간 아베르노 의 활솜씨에 드높은 탄성을 울렸다. "정말 멋진 솜씨예요. 전하께서는 저렇게 멋진 왕세자 전하를 남편 으로 두셔서 무척 기쁘시겠어요."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의 칭찬을 들으며, 라에니는 한없이 우쭐해 졌다. 지금까지 아베르노가 사냥하는 것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기 때 문에 남편이 가끔가다 사냥하고 싶다고 말하고, 꽤 잘하는 편이라고 하는 말을 그냥 허풍처럼 흘려들었었다. 떠받들려만 자란 왕세자가 사 냥같은 험한 일을 잘할 리가 없었다. 그저 그런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아베르노의 솜씨는 기대이상이었다. 모두가 입이 닳도록 칭송하고, 감탄하지 않는가! 그런 남편의 모습은 라에니 에게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호호호, 카르노 사람들은 전부다 사냥을 잘한다면서요? 전하만큼 잘하는 사람이 많은가요?" 라에니의 물음에 주디나는 눈을 빛내며 재깍 대답했다. 칭찬에 약하 고 허영이 심한 왕세자비의 성격은 이미 충분히 꿰뚫고 있었다. 그저 맞춰주기만 하는 것 따위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럴리가요. 저는 왕세자 전하만큼 사냥 잘하시는 분을 뵌 적이 없 답니다." "호호호호, 그런가요?" 주디나는 더욱 더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주변에 있는 귀부인들도 너나 할것없이 라에니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있었다. 라에니는 행복 했다. 비록 자신과는 맞지않는 거친 환경의 카르노지만, 이대로라면 그 럭저럭 즐겁게 왕실에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귀국 첫날에 받 았던 홀대따위는 이미 라에니의 기억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꾸에에에엑-----! 멧돼지의 비명소리는 지켜보는 귀부인들의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 다. 하지만 남자들은 호쾌한 목소리로 멧돼지를 잡은 청년의 능력을 소리높여 칭찬하고 있었다. 군부대신 루시노 후작 유타르경은 멀리서 그 청년의 모습을 지켜보며 부러움의 한숨을 쏟아냈다. "저 청년이 경의 조카라고요?" 희끗희끗한 진보라색 머리의 헤르트경은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뿌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검보라색의 숱많은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누구 보다 뛰어난 솜씨를 선보이는 잘생긴 청년은 자식이 없는 헤르트경의 자랑이었다. "레이니트라고 합니다. 제 형의 뒤를 이어 사르노 백작이 된, 제법 영리한 아이지요. 이번에 왕세자 전하께서도 귀국하시고 해서, 전하께 얼굴이라도 보이려고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저번 연회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유타르경의 시선은 젊고 잘생긴 레이니트 폰 사르노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헤르트경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어제서야 아르노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연회때 선보이려고 했는데, 왕세자 전하께서 사냥을 하신다기에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헤르트경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유타르경을 돌아보며, 방금 생 각난 듯이 물었다. "자제분이 기사단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오늘 사냥에 함께 오지 않 았습니까?" 유타르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힘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 아들녀석도 저 청년처럼 파티며 사냥이며 따라다니면서 왕세자 전하의 신임을 얻었으면 좋으련만, 끝내 제 고집대로 하겠다고 버티고 있으니, ……애비로서 속만 탈 뿐이라오." "고집이라니요?" 헤르트경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유타르경은 깊게 한숨을 내뿜 었다. "별로 유쾌한 화제가 아니오. 갑시다. 아까보니 메스메르경이 왕세자 전하옆에서 떨어지지 않던데……" 헤르트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베르노가 갔던 길을 따라갔다. 유타 르경은 한숨을 내쉬며, 왕궁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인 자신 의 힘도 마다하고, 자신의 뜻에는 조금도 따라주지않는 아들이 섭섭했 다. 하지만 일면, 일족의 권력에만 기대는 나약한 귀족청년들과는 달리 의지있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모습이 내심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아들의 뜻이 어떻든, 유타르경은 아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할 것 임을 다시한번 다짐하고 있었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연신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활을 쏘아대는 모 습은 언뜻 보면 멋있고 늠름해 보였지만, 또 다르게 보면 어딘지 모르 게 잔인하고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피에 굶주린 야생의 짐승처럼, 날 렵하고 정확한 몸짓으로 목표물의 숨통을 끊어나간다. 우글우글 몰려들어 연신 아부의 찬탄을 내뱉는 아베르노의 무리들과 는 달리, 사냥감을 수거해가는 일꾼들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따라와서 감탄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뿐인 단출한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감 탄해주는 단 한 사람마저도, 카스트로와 라에르에게는 신경쓰이고 걸 리적거리기만 할뿐이었다. "와우, 정말 대단한 활솜씨군요? 카르노에서는 혹시 교양으로 검술 말고 궁술도 가르칩니까?" 일부러 떼어내려고 속력을 내어보아도, 직접적으로 귀찮다고 핀잔을 주어도 소용없었다. 얼굴이 두꺼운 것인지, 아니면 인내심이 대단한 것 인지, 이 남자는 두시간째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어 수다를 떨어대고 있 었다. 카스트로는 다시 화살을 쏘아 도망치는 토끼 한 마리를 죽여놓 고, 거친 동작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싱글거리고 있던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경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가오는 카스트로를 겁없이 빤히 마주 보며 더욱 환하게 미소지었다. 콧수염 옆의 하얀 피부에 조그만 볼우 물이 깊이 패인다. "오늘 사냥에서 우승을 거머쥐실 생각이십니까, 카스트로 전하." 라에르는 심상치않은 카스트로의 모습을 보고, 차라리 저 보기싫은 로페냐가 도망치기를 바랬다. 몸 전체에서 발산하는 짜증과 올올이 곤 두선 신경이 뭔가 사고라도 칠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정작 로 페냐 본인은 위험한 카스트로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피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로페냐의 옆으로 말을 교차시키면서, 로페냐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쌓이고 쌓인 울분과 짜증스러움이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 오려하고 있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서려있어, 아무 상 관없는 라에르조차 몸을 움찔할 정도였다. "사냥터에서는 사고가 많이 생기지. 어리석군, 하야로비 후작. 이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으로, 자신을 적대시하는 두 사 람에게 제 발로 다가오다니 말이야. 그것도 나 죽여달라는 듯 혼잣몸 으로 말이지." 로페냐는 자신을 향해 걸러짐없이 쏘아지는 무섭도록 차가운 눈동자 를 마주하고 찔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천성과도 같은 뻔 뻔함으로, 능글맞도록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전하께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리 고 전하께서는 제가 싫을지 모르지만, 저는 전하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도 따라오는게 아니겠습니까?" 카스트로는 인상을 찌푸리고, 로페냐를 노려보았다. 대체 이 작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따라오는지 알 수 없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자신이 좋다는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또다른 골칫거리로 지끈거린다. "좋아. 그렇다 쳐주지. 그러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해봐. 내게 원하는 게 뭔가? 테라의 한족놈들이 나를 감시라도 하라고 시키던가? 그래서 이렇게 귀찮게 따라오는 건가?" "테라의 높으신 분들께서 제게 지시하신 일은 카스트로 전하를 안전 하게 테리온까지 모셔오는 것뿐입니다. 감시라는 것은 지시받은 적이 없습니다." 로페냐는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카스트로는 사나운 몸짓으로 로페냐에게 몸을 기울여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거슬리게 따라다녀?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 으니까 따라온 거 아닌가? 우연히 오다보니 마주쳤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겠지?" 로페냐는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쥔 카스트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 쳐 잡으면서 카스트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카스트로는 시종일관 가 볍게 시시덕대던 로페냐가 새삼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눈살을 찌 푸렸다. 도저히 이 작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우연이 아닙니다. 사냥이 시작되면서부터 줄곧 당신만을 따라 왔으니까요!" 카스트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럼 그 이유는 뭐지?"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카스트로는 물론이고, 혹시나 있을 불상사에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던 라에르도 황당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서늘한 초겨울바람이 땀 으로 젖은 카스트로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로페냐는 이 어색한 침묵에 스스로도 당황해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는, 아니 저는 전하와 같은 시원스런 성격을 좋아합니 다. 처음 뵈었을 때, 비록 제게 유괴범이니 납치범이니 하고 싫어하신 것은 알았지만, 그러니까 그래도 저는 전하같은 사람과 친구가 되면 참 좋겠다고……." 그 낯짝 두꺼운 로페냐조차, 이제는 이마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 면서 횡설수설대고 있었다. 라에르는 기막힌 듯한 표정으로 로페냐와 카스트로를 쳐다보다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문 채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입술근육이 옆으로 찢어지고, 본의 아니게 웃 음이 새어나가려는 걸 막느라 입술 주위의 근육이 뻑뻑해지고 있었다. "친.구?" 카스트로가 처음 듣는 단어인 듯 한자한자 끊어서 되물었다. 로페냐 는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테리온에 가시면, 그곳 생활이 어색하실텐데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고, 또, 테리온 곳곳을 안 내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 여자도……." 카스트로는 떠밀 듯이 로페냐의 멱살을 풀고, 자신의 말고삐를 움켜 쥐었다. 로페냐는 천천히 반대편으로 말을 돌리는 카스트로에게 다시 들러붙었다.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맹세코 우정을 더럽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카스트로는 들은 척 만 척, 묵묵히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전하! 대답을 해주십시오!" 로페냐의 목소리가 길게 숲을 가로질렀다. 라에르는 로페냐를 스쳐 지나가면서, 웃음섞인 말투로 속삭였다.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로페냐경. 하지만 다음부터는 상 대의 입장도 생각해보고 고백해보시오." 로페냐는 이마에 몇겹의 주름을 잡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 다. "상대의 입장? 친구가 되자는데 뭐가 그리 복잡해?" 억울한 듯 내뱉은 로페냐의 주위에 다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뒤따라가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옆쪽의 숲이 흔들렸다. 로페냐가 흠칫 놀라 말을 세웠을 때, 숲 사이에 숨어있던 늑대 한 마리가 로페냐를 향해 뛰쳐올랐다. 갑 작스런 일이었음에도 로페냐는 손에 든 스틱으로 몸앞을 가로막았다. 반사적인 동작이었지만,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먹이감을 향해 뛰어오르 던 늑대는 무형의 방어막에 부딪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시 몸 을 추스른 늑대는 침으로 번들거리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로페냐에게 적개심을 표출했다. 로페냐는 싸늘한 눈빛으로 늑대를 노 려보며, 짧게 마법어를 중얼거렸다. 눈부신 빛이 로페냐의 스틱에 세공 된 수정에서 늑대에게 쏘아졌다. 캐캐에엑! 기괴한 소리를 내뱉으며 늑대는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뒤틀고 바닥으 로 나뒹굴었다. 털과 살이 타는 노린내가 로페냐의 우울한 기분을 더 욱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로페냐는 다시 터덜터덜 말을 몰면서 중얼거 렸다. "어떻게 해야 친구가 될 수 있지? 카르노에서는 친구가 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로페냐는 살아오는 동안 몇번 해보지도 못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19 - 관련자료:없음 [2995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09 21:25 조회:183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9 - ================================================================== 초겨울의 하늘에는 벌써 별들이 쭈삣쭈삣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못내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며, 숲에 서 나와 출발지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벌써부터 와서 천막아 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결과에 상관없 이 아베르노는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수년간 맛보지 못했던 즐거 움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냥도 사냥이지만, 자신을 존 중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속에 있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이 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아베르노에게 가슴 푸근한 안도감 을 주고있었다. 아베르노의 옆에는 왕세자비 라에니가 앉아서 쥘부채를 팔락이고 있었다. 사냥이라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는 중이다. 앞 으로 종종 이런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았다. 천막 주위에는 여기저기 불이 피워져있었다. 숲에서 나온 사람들은 쌀쌀한 추위를 피하려고 천막주위나 불가에 모여 있었다. 천막들 앞으 로는 수많은 짐승들의 사체가 무더기무더기 쌓여있었다. 그 주변에는 그 사냥감을 사냥한 주인들이 버텨 서서, 곧 있을 심사발표를 기다리 고 있었다.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아베르노의 시종장이 소리 높여 외쳤다. 주위에서 떠들어대던 사람 들이 소리를 죽이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양피지를 손에 들고, 뒤에서 비추는 불빛을 받아 그 안에 쓰여진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오늘의 사냥에서는 두분께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좋은 성적을 내 셨습니다. 그 두분께서는 호명하면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오늘의 우승 자 중 한분은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 삼왕자 전하이십니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사냥터에 울려퍼졌다. 카스트로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며칠전부터 나빴던 기분은 사냥의 우승을 거머쥐었어도 풀리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광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불쾌했다. 더군다나 왕세자 아베르노 전하의 주최로 열린 사냥 따위는!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카스트로는 사람들의 과장된 축하인사 속에서 아베르노의 앞에 섰 다. 시선이 맞닿은 아베르노가 칭찬하는 듯한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바 라보고 있었다. 다시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두번째 우승자는 레이니트 폰 사르노. 사르노 백작 레이니트경!" 다시 한번 요란한 박수와 환성이 울리고, 검보라색 머리와 눈동자의 잘생긴 청년이 앞으로 나왔다. 횃불만이 주위를 밝히는 어둠 속에서, 레이니트경의 미모는 더욱 빛이 났다. 그 모습을 본 헤르트경은 자랑 스러움에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 "축하하오, 헤르트경." 유타르경의 인사소리에 헤르트경은 우쭐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유타르경." 아베르노는 의자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밝게 타오르는 횃불이 아베르노의 미소 띈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당당한 걸음으 로 두명의 우승자에게 다가갔다. "수고했다, 카스트로. 네가 왕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구나."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전하." 아베르노는 따뜻한 손길로 카스트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그러운 군주가 자신의 신하가 세운 공적을 칭찬하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다. 카스트로는 속에서 불끈 치미는 질투를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 야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스러움도 자근자근 밟아 짓뭉 개버렸다. "그래, 모두에게 공언한 약속을 지켜야지. 말해보아라, 카스트로. 네 가 원하는 일을 한가지 들어주마." 카스트로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원하는 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가지 생각에, 카스트로는 시선을 들어 아베 르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검은 눈이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다짐을 받아내듯 되물었다. "무엇이든, 입니까?" 자신의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형은 동생의 물음에 선 선히 대꾸했다. 무방비하게 자신의 말을 장담하는 미소까지 지으며.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카스트로는 발뺌하지 못하게 아베르노의 눈길을 잡은 채로 말했다. "예배당에 오라는 말씀, 없었던 걸로 해주십시오." "……!" 대번에 안색을 굳히는 아베르노의 모습은 불쾌하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집요하게 아베르노의 시선을 잡 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해 말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테라에 가게되면 싫어도 매일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 카르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 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베르노는 카스트로의 말을 곰곰히 되새기며 동생의 얼굴색을 살폈 다. 그렇게나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카스트로였지만, 아베르노는 암 흑처럼 검은 그 눈빛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문득 안좋은 느 낌이 스쳤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애써 그런 감정을 떨쳐버렸다. 일찍 일어나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리라. 카스트로의 말대 로 테라에 가게되면 매일같이 새벽예배를 해야 될 테니, 미리부터 강 요할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결국 아베르노는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내 제안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네게는 아직 힘들겠지. 그래. 알았다." 다시 카스트로의 어깨를 두드려준 아베르노는 조금 시선을 옮겼다. 카스트로의 옆에 서있는 청년이 보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의 머 리가 곱슬거리며 어깨로 내려앉은,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 의 미남이었다. 아베르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말을 건넸다. "사르노 백작이라고 했나?" 왕세자의 시선을 받자, 긴장해있던 레이니트경은 머리를 숙이고 대 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헤르트경과는 무슨 관계인가?" 횃불빛으로 물드는 검보라색머리를 내려다보면서 아베르노는 질문을 던졌다. 레이니트경은 긴장된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며 대답했다. 다음 대 국왕이 될 왕세자가 숙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반갑고도 자랑스 러웠다.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다. "제 숙부이십니다." "아, 헤르트경의 조카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미남이고, 사냥도 잘하고, 출신도 좋고, 무엇보다 자신을 공경할 줄 아는 자였다. 아베르노는 꽤 마음에 드는 신하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조금전만해도 껄끄러웠던 기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베르노는 왕세자다운 근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도 우승을 축하하네. 자네도 원하는 것 한가지를 말해보 게." 레이니트경은 얼굴을 들었다. 빛을 받아 음영이 두드러지는 얼굴이 더욱 이목구비의 선을 뚜렷하게 만든다. 아베르노는 다시금 레이니트 경의 외모에 감탄하며 조각같은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해보고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 겠습니까?" 레이니트경은 조금전부터 준비해왔던 말을 아베르노의 앞에서 펼쳐 냈다. 우승이 확실시되었을 때부터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았던 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아베르노가 우승자에게 포상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은밀히 생각해봤던 일이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즐거운 상상을 하던 그 때, 숙부인 헤르트경이 와서 해준 말이 있었다. 숙부의 의견은 듣기에 도 이치에 맞았고, 또한 아버지 대신으로 생각하는 숙부의 말씀을 어 길 생각도 없었다. 아베르노는 비싯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는 못하네. 내가 그 약속을 잊기 전에 요구하도록 하게." 숙부가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다. 이렇게해서 자연스럽게 왕세자와 의 접촉을 다시 갖게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감사합니다, 전하." 정중하게 고개숙이는 레이니트경을 내려다보던 아베르노는 기분좋게 물러서서, 큰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저녁 만찬에는 오늘 사냥한 것들을 요리할 것이니, 왕궁으로 와서 마음껏 드시기 바라오. 모두들 수고하셨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아베르노는 마치 군왕이라도 된 듯한 얼굴로 주위의 반응을 둘러보고나서, 말을 계속했다. "또한 오늘의 우승자들을 위한 연회를 열 것이니, 우승자들은 물론 여러 귀족들께서도 참석해주기 바라오." "감사합니다, 전하." 황송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이고 왕세자를 칭송하는 모습들을 보며, 카스트로 역시 그들과 똑같이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저런 앵무새같은 무리의 하나가 되는 것 같아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알고는 있었 지만, 장래, 자신의 처지가 저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새삼 끔찍한 악몽으로 다가왔다. 왕궁에서의 연회는, 비록 국가재정이 쪼들리더라도, 평범한 귀족가에 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하다. 처음 왕궁의 연회에 참석한 레이니트 폰 사르노는 풍족하기만 한 연회장의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 할 수 없었다. 섬세한 세공의 샹들리에가 어둠을 밝히고, 넓디넓은 연 회장에는 화려한 귀족들의 모습들이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처음 왕궁에 와 본 소감이 어떠냐, 레이?" 레이니트경은 멀리 둘러보던 시선을 돌려, 곁에 있는 숙부 헤르트경 을 바라보았다.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을 돌보아주 고, 아버지 이상의 사랑을 주신 분. 긴장하고있던 레이니트경의 잘생긴 얼굴에 다정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멋진 곳입니다, 숙부. 제 상상 이상으로요." "그래. 멋진 곳이지." 헤르트경은 연회장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연회장에는 국왕과 왕세자 아베르노 내외를 제외한 왕족들이 대부분 입장해 있었다. "잘 봐두어라, 레이. 여기가 바로, 네 미래가 있는 곳이니까." 레이니트경은 호기로운 눈빛을 빛냈다. 헤르트경은 그런 조카의 모 습에 만족했다. 레이니트가 지닌 능력과 자신이 가진 권력이 합쳐진다 면, 이 왕궁의 두번째 자리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헤르트경은 미 소 띈 얼굴로 조카에게 말했다. "가자. 소개해 줄 사람이 너무 많구나." "네, 숙부." 미카에르 대공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검보라색 머리의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미청년이 었다. 오늘 있었던 사냥대회의 우승자로, 이 연회의 주인공답게 유난히 돋보이는 청년이었다. '헤르트경의 조카라고 했던가?' 미카에르 대공은 레이니트경에게서 젊은 여성들과 히히덕거리고 있 는 자신의 아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더더욱 기분이 불쾌해진다. '바보같은 녀석!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하나뿐인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미친다는 것이, 아니, 저 보잘것 없는 귀족 나부랭이의 조카보다 못하게 보인다는 것이 불쾌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들이라는 녀석은 지금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자꾸만 솟구치는 부아를, 미카에르 대공은 차가운 술로 삼켜버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들이 변변치 못한 만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밑의 동생인 로시에르처럼, 아무 힘도 없이 자기 영지에만 틀 어박혀 사는 짓은 미카에르 대공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다. 미카에르 대공은 사냥감을 찾는 매같은 눈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 다. 그리고 얼마가지않아, 자신이 찾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카 르노 왕궁에 순수한 적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으 니까.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절도있는 시종장의 목소리에, 시끄럽던 연회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카스트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발코니에서 쌀쌀해진 바 람을 쐬고 있었다. 연회장에 왕세자 부처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찾아가서 얼굴 내비치며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라에르는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별로 다 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을 고민스럽게 만든 왕세자 아베르노라면 더욱 더! "여기서 바람이나 쐬다가, 적당한 때에 얼굴이나 비추고 돌아가면 되겠지." "……." 라에르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할까도 했지만, 곧 그만두어버렸다. 수년 간 곁에서 지켜본 호위기사로서의 감같은 것이었다. 지금, 카스트로는 혼자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낫다. 하지만 상황은 라에르나 카스트로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 느새 불청객이 태연스런 얼굴로 끼어들었던 것이다.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아까부터 계속 전하를 찾아다녔습니다." 카스트로는 신음같은 소리를 흘려냈다. "로페냐경……" 테라식 복장이 아닌, 카르노식 연회복을 차려입은 로페냐는 자랑하 는 듯한 얼굴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카스트로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잘 어울립니까? 이 옷, 생각보다 편하군요." 카르노인의 평균 신장에 훨씬 못미치는 작은 키에 카르노인에게는 보기드문 밝은 금발머리를 한 로페냐는, 비록 카르노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카르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몸에 딱 맞 기는 하되 남의 옷 빌려입은 것 마냥 안어울리는 것도 카르노인답지 않은 외모가 한몫한 것 같지만, 정작 로페냐 본인은 자신이 잘 어울린 다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뿜고, 언밸런스한 로페냐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아까 이야기의 계속이라면, 피곤하니까 그만 돌아가시오. 아직 이해 를 못해 이러는 거라면 다시 확실히 말하지. 나는 경과, 아니 더 정확 히 말해, 테라인 따위와 친구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오." 카르노식 복장을 입으면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 어서 시종들을 닥달해 옷을 구했던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냉담한 말로 대번에 풀이 죽어버렸다. 조금이라도 호의를 가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 도, 어쩌면 자신의 이런 노력을 보면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주지 않 을까 했었던 낙천적인 생각도, 거품이 삭듯이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로 페냐는 좌절과 실망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다시 한번, 불굴의 의지로 승화시켜버렸다. 고집과 인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로페냐였다. "제가 단지 테라인이기 때문에, 저를 친구로 인정할 수 없으신 겁니 까?" 조심스럽게 물으며, 로페냐는 차가워보이는 카스트로의 얼굴을 올려 다보았다. 카스트로는 짜증스런 얼굴로 마주보아주었다. "테라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을 친구로 삼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그리고 로페냐경. 경은 자신을 감시하러 온 자에게 우정을 느낄 수 있겠소? 조금 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시오." 로페냐는 불편한 마음으로 계속 카스트로와 눈을 맞추었다. 카르노 가 테라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노골 적으로 '적'이라고 칭한다는 것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는 비 록 그 전쟁에 참가했지만, 다른 나라들, 즉 레이얄이나 미다에 비해, 얻은 것이 거의 없었다. 전쟁 배상금도, 영토도 마다한 테라가 아닌가! 고생만 하고, 얻은 것은 카르노의 적대감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카스트로의 비난이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이라니요? 지금 테라와 카르노는 적이 아니라 우방입니다. 전쟁 은 이미 5년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뒤에도 테라는 카르 노에 어떠한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때 의 잔재를 못버리고, 테라를 적대시하다니……."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빛을 발하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이 테라의 입장인가? 우방?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로페 냐경?"  카스트로가 분노를 품고 죽일 듯이 노려본다. 로페냐는 혀를 깨물었 다. 왠지 아차, 싶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문제를 건드린 것 같았다. "테라는 우방의 왕자들을 전부 인질로 끌고가는 법이라도 있는건가? 그것이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고? 우방의 국왕에게 무례하고, 우방의 신을 모독하고! 그게 테라가 생각하는 우방인가?" 신음을 날 것 같은 입을 닫고, 로페냐는 자기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로페냐는 달변의 외교관이 아니었다. 왜 배재해야할 국가간의 입장을 내세워서 카스트로의 신경을 긁어버렸는지. "그런 우방이라면, 차라리 확실하게 적이 되는 게 나아!" 잇사이로 내뱉는 카스트로는 당장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분위 기였다. 로페냐는 일단 사죄의 뜻을 밝혔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 말은 잊어주십시오, 전하." "……흥!" 몸을 돌리고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카스트로에게, 로페냐는 다시 진 심으로 사과했다. "제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됐소, 로페냐경. 물러가시오. 지금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돌려진 카스트로의 뒷모습은 되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 로페냐는 한숨을 내쉬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다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그럼." ================================================================== 추석연휴의 시작인가요? ^^ 올빼미과인 새에게 내일 낮에 자지말고 떡만들라고 하시네요.. ...과연.. 가능할지는.. --; ^^ 즐거운 연휴 되시길.. 떡만드는 것보다 떡먹는 걸 즐기는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0 - 관련자료:없음 [2998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0 20:49 조회:185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0 - ==================================================================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고, 그러면서도 연회장을 살피기에는 편한 그런 곳에 미카에르 대공과 함께 있었다. 주디나는 연회장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어느 한 장소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주디나는 몇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있는 미카에르 대공을 돌아보았 다. 국왕 칼리에르 3세보다 젊고, 머리도 좋고, 야심도 많은 남자였다. 미카에르 대공은 날카로운 눈매로 주디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할 수 있겠지?" 주디나는 훤히 드러난 하얀 어깨를 으쓱했다. "해 봐야 알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지요." "명심하는 게 좋아, 주디나. 아베르노와 카스트로가 뭉친다면, 나나 당신이나 좋을 일이 없소." 주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그녀의 눈빛이 더욱 빛을 발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주디나는 다시 아까 바라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코니에서 카 스트로와 라에르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가가는 방향에는 아베르노 왕세자 부처가 있었다. "지금 움직여야겠군요. 그럼."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 레이니트경은 숙부인 헤르트경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군부대 신 유타르경을 비롯한 여러 고위귀족들이 하나같이 낮의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호의섞인 칭찬을 하고 있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들의 칭찬에 대해 레이니트경은 매번 겸손하게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상상했던 그대로, 왕궁이라는 곳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카르노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라는 것은 레이니트경에게 또다른 흥분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카르노의 중대사에 대한 말을 하는 것도 그리 과분한 꿈만은 아닐 것이다. 숙부의 말대로, 숙부의 힘 과 자신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 테니까. 차분하게 하나씩 권력으로의 계단을 오르는 느낌은 세상 어떤 것보 다 달콤하고 긴장감이 있다. 자신이 꿈꾸는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느라 힘든 와중에도 생기와 활력이 샘솟는다. "아,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레이?" 숙부 헤르트경이 부르자, 레이니트경은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 하고 헤르트경에게 다가갔다. 헤르트경은 긴장한 얼굴로 레이니트경을 데리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 같구나. 저기 저 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레이니트경은 숙부의 시선을 따라갔다. 왕세자인 아베르노 전하가 몇몇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었다. "아베르노 왕세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별로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대답하자, 헤르트경은 긴장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 옆에 계신 분 말이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계신……." 무심코 아베르노의 옆을 쳐다본 레이니트경은 걸음을 멈추고 눈가를 좁혔다. 연분홍색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열 여덟이나 열 아홉의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였다.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갈지도 모 를 평범한 갈색의 머리색, 눈색이었지만, 자세히 뜯어볼수록 독특한 미 모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우아 하고 기품있는, 마치 여왕같은 미녀! "후훗. 잘 보아두거라. 저 분이 바로 카르노의 일왕녀, 유리나 공주 전하시다." 헤르트경의 설명을 듣고, 레이니트경은 놀란 얼굴을 곧 납득의 표정 으로 바꾸었다. 저 우아하고 기품있는, 나이답지않은 성숙한 몸가짐이 저절로 이해가 갔다. '유리나 공주…….' 유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이니트경의 모습에, 헤르트경은 만족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자, 가서 인사드려야지." 유능한 외교관이며, 누구 못지않은 야심을 가진 헤르트경의 뇌리에 는 레이니트경과 유리나 공주,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미소짓는 모습 이 그려지고 있었다. 헤르트경은 몇가지 주의할 점을 일러주고, 레이니 트경을 아베르노와 유리나의 앞으로 데려갔다. '네 매력을 마음껏 발휘할 때다, 레이!' 헤르트경의 응원이 레이니트경에게 전달되었는지, 레이니트경은 어 느 때보다 멋진 모습으로 유리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카르노의 왕세자비인 라에니는 자신의 앞으로 똑바로 다가오는 청년 에게 턱을 치켜들고 도전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보다 거의 25리(1리=1cm)는 더 클 듯한 장신의 청년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 는 것은 아니지만, 라에니는 애써 그런 감정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되 도록 위엄있는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마치 여왕같은 모습으로 신하를 기다리듯 버텨서고 있었다. 라에니가 이 자리까지 나와 선 것 은 옆에 있는 주디나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카스트로 전하께 문안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문안?' '그렇습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삼왕자이시고, 전하 께서는 장차 카르노의 국모가 되실 왕세자비십니다. 당연히 아랫사람 이 윗사람에게 문안을 드려야 하는 것이 왕실의 법도입니다.' '그렇지만…….' '전하께서 왕궁으로 오신지 며칠이 지났는데, 카스트로 전하께서 전 하께 문안인사를 갔다는 소문을 못들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드리는 말 씀입니다.' 장신의 왕자가 다가올수록 움츠러드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라에니는 어깨를 펴고 카스트로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사를 받고 말겠어!" 작게 뇌까리는 라에니의 모습에 주디나는 쾌재를 불렀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일은 잘 풀려나갔다. 몇마디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라에니는 쉽게 흥분하고 격동되어, 주디나의 뜻대로 움직여주고 있었 다. 아주 길이 잘 든 꼭두각시 인형처럼. "카스트로 전하께서 이번에도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가신다면, 그것 은 장차 국모가 되실 전하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세자 전하를 우습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디나는 다시한번 라에니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라에니는 작은 손 으로 쥘부채를 꽉 움켜쥐었다. 제법 의지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주디나 는 카스트로가 가까이 다가오자,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일은 라에니와 카스트로 두 사람에게 달려있었다. 카스트로는 바로 앞에서 시비라도 걸 듯 노려보고 있는 여자를 내려 다보았다. 왜 저렇게 있는대로 턱을 치켜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에 대한 감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혐오스럽고 짜증스러운 존재였고, 카르노를 위해서라면 일찌 감치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그런 여자였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리는 쪽이 나아!' 카스트로는 우연히 생각해낸 것이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다. 저 꼴보기 싫은 계집이 일찍 죽어버리면, 아베르노 전하는 아무 부 담없이 제대로 된 카르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멍청 하고 겁많은 저 계집의 자식 대신, 제대로 된 왕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왕통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텐데.' 못내 아쉬워져서, 카스트로는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왕세자비를 쏘아 보았다. 라에니는 자신을 노려보는 카스트로의 눈빛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뒤에서부터 주디나가 기운내라고 하는 응원소리를 듣고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자신이 기가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 나 라의 왕세자비이니까! "안녕하세……" 라에니는 먼저 인사말을 건네다가, 그대로 자신을 지나치는 카스트 로를 보며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곧 자신이 무시받았다는데 대한 분노와,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다시 주디나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것 보십시오, 전하.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전하를 왕세자비로서 인 정하지 않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라에니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스트로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이봐요!" 뭐냐는 듯 귀찮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라에니는 울컥 치솟은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손바닥을 치켜들어 크게 휘 둘렀다. 짜악----! 북적대던 연회장이, 카스트로와 라에니 두 사람을 중심으로 얼어붙 었다. 어느새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은 놀란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라에니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자신의 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언제 끼어 들었던 거야?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뭐, 뭐야, 넌!" 당혹과 분노가 섞인 쇳소리가 라에니의 목에서 터져나왔다. 라에니의 앞에서 카스트로를 가로막고 있던 사내는 왼쪽뺨을 빨갛게 물들인채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목례했다. "카스트로 전하의 호위기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입니다." 유혹적인 입술에 미소까지 띄우며 유유히 상황을 지켜보던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는 뜻밖의 전개에 당황해서 빳빳이 굳어버렸다. '왜 라에르경이!' 라에르의 얼굴에 새겨진 붉은 손자국이 주디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 눌렀다. '그래……. 삼왕자가 모욕을 당하는데, 라에르경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어. 바보같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내가 잘못이었어!' 양손을 꼭 쥐고, 자신이 그의 따귀를 때린 것처럼 자책하는 심정으 로 라에르를 바라본 순간, 라에니 왕세자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뭐야? 호위기사 따위가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아? 네까짓게 뭐라고 감히……" 주디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라에르경에게 화가 미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라에르경의 뺨을 때린 거야. 내가……' 아플정도로 입술을 배어물은 주디나는 곧바로 라에니에게 다가갔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호위기사가 왕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 다. 전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그 순간, 의심으로 번뜩이는 흑갈색 눈동자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주디나는 애써 라에르의 시선을 피하면서, 라에니를 설득했다. 자신이 일을 벌이고 이런 식으로 수습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에르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무리 미카 에르 대공의 부탁이라도 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얼굴로 멍하니 라에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뒤로 밀쳐졌던 카스트로는, 한참이 지난 뒤 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를, 그러니까 …저 레이얄 계집이, 감히 나를 때리려고 했던건가?' 라에르의 뺨에 확연히 새겨진 흔적이 아차하면 카스트로 자신에게 새겨질 뻔했다고 생각되자 깊고 깊은 심연에서부터 하나의 감정을 치 밀어올랐다. '감히! 감히 저 천한 레이얄 계집이! 감히 나를!' 상황이 인식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다. 뭔가가 부글 부글 끓어오르고,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오른손이 미칠듯한 살의를 담 아 허리에 매인 예장용 장검의 손잡이를 꽉 틀어쥐어가고, 광기와도 같은 분노가 폭풍처럼 전신을 휘감아오고 있었다. "……네까…" 무섭게 깔리는 목소리를 가로막고, 황급하게 카스트로를 제지한 것 은 옆으로 비켜서있던 라에르였다. 필사적으로 카스트로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카스트로의 귀에 속삭였다. "참으십시오, 전하." 나직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카스트로의 입을 닫게 할만큼 간절했다. "상대는 왕세자비 전하십니다. 참으십시오. 참아 주십시오. 제발, 부 탁드립니다, 전하." 입속으로 비릿한 피내음이 묻어났다. 어느새인가 입술을 이빨로 짓 이기고 있던 카스트로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처음이었 다. 태어나서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은 처음이었다. 부모인 국왕과 왕비 도 자신에게 그따위 모욕을 선사한 적은 없었다. 아니 왕세자 아베르 노마저도 그런 적은 없었다. 따귀라니! …따귀라니! 누구보다 귀하게 자란 카스트로였다. 왕족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내면 변명의 여지 도 없이 참살되는 것이 법인 카르노에서 자란 왕자였다. 이런 지독한 모독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일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죽일 것처럼 라에니를 쏘아보았지만, 때맞춰 다가온 왕세자 아베르노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카스트로. 이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하마. 나중에, 왕세자비로 하여금 정식으로 사죄토록 할테니까." 카스트로는 무섭게 번뜩이는 눈을 아베르노에게 돌렸다. '굳이, 저 계집을 왕세자비라고 칭하는 이유는 뭐지? 왕세자비와 삼 왕자의 다툼이니, 분수를 알고 물러나라는 말인가?' 카스트로는 굳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베르노를 마주보고, 다 시 아베르노의 뒤에 서 있는 라에니를 쏘아보았다. 저 미친 레이얄 계 집을 감싸고 도는 아베르노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 베르노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어진 것은, 거 리낌없이 싫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시 한번 실망했기 때문일까? 카스트로의 쉰 듯한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은 음성으로 울 려나왔다. "오늘의 모욕,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홱소리 나도록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서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라에니는 카스트로가 한 말을 듣고 섬 뜩해져서 몸을 떨었다. 그것은 흡사,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사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연회를 계속 진행하라!" 아베르노의 명령으로 잠시 끊겼던 음악이 다시 연회장을 채워나갔 다. 사람들은 웅성대면서 이번 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어느정도 연회장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라에니 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한 변명은 연회가 끝난 뒤에 듣도록 하지." 라에니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베르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베르노 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마치 어떤 불미스 러웠던 일이 없었던 듯이 그렇게 태연하게.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1 - 관련자료:없음 [3001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1 21:11 조회:185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1 - ================================================================== 왕세자궁으로부터 물건들이 도착한 것은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카스트로는 응접실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팔짱을 척하니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왕세자궁으로부터 운반되어온 것들을 냉담한 눈으로 내려 다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자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시는 서신입니다." 왕세자궁의 시종장이 둘둘 말린 양피지를 내밀었다. 시종장 베제르 가 나서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카스트로는 건네받은 양피지를 펼쳐, 그 위의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구구절절히 많은 사과와 달래는 말들 뒤 에, 결국 전하고 싶었던 말은 한 가지였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왕세자궁으로 와달라?'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으로 양피지를 훑어보고, 곁에 있는 시종장 베 제르에게 건네주었다. "왕세자궁으로 가겠다. 라에르경만 대동할테니, 시종장 베제르는 따 라올 것 없다. 앞장서라." 말끝에 왕세자궁의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리고 몸을 일으키는 카스트 로는 어딘지 단호한 모습이었다. "네, 전하." 왕세자궁의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보이고, 안내하듯 앞서서 걸어나갔 다. 카스트로는 조용히 시종장 베제르에게 응접실에 쌓인 물건들에 대 한 지시를 내리고, 왕세자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왕세자와 왕세자비 부 처의 '사죄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운반된 것들은 결국 개봉되기도 전에 삼왕자궁의 창고속으로 처박혔다. 라에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카스트로의 왕세자와 왕세자비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사과의 뜻으로 예물을 보내왔지만, 보지도 않고 창고에 처박아두는 카 스트로의 모습에서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좋지않은 상황에서 왕세자와 카스트로가 만난다는 것이 껄끄럽기 만하다. 예감이 나빴다. 라에르도 왕세자 부부가 탐탁한 것은 아니지 만, 왕세자의 지위를 생각하면 카스트로의 지금 태도는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문득 왕세자비의 옆에 서서 귓속말을 하던 모리나 남작 부인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남작부인이 그 일에 관련이 있다는 느 낌이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카에르 대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 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찜찜하기만 했다. 하지만 라에르야 어떤 생각을 하든, 카스트로는 의외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아베르노는 어색한 미소 로 카스트로를 맞았다. "와서 앉거라." 왕세자궁의 시종장에게 안내받은 곳은 궁 동쪽의 왕세자 전용 접견 실이었다. 수년 전에도 와봤던 곳이지만, 지금 이곳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달라져있었다. 새로이 미색으로 도배된 내부와, 접견실의 한쪽 벽을 차지한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초상화, 새로 들여놓은 듯 보이는 상아색의 장식장과 섬세한 세공품들. 모두 새로웠고, 또한 사치스러웠 다. 그리고 방안을 가득 메운 지독한 향수냄새. 카스트로는 어딘지 역 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베르노의 시선을 느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궁으로 놀러오라니까, 불러야만 오는구나, 카스트로." "죄송합니다, 전하." 표정의 변화없이, 사교적인 미소조차 배제한 메마른 표정으로 카스 트로가 대답했다. 아베르노는 냉담한 카스트로의 안색을 살피며 아직 도 화가 안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화가 풀린다는 게 오히려 이 상한 일이다. '내가 그 상황이었더라면…….' 아베르노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왕세자비의 일은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 "아녀자가 멋모르고 저지른 철부지 짓이니,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 해하렴. 네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는구나." "……." 여전히 조개처럼 입을 다문 카스트로의 모습에 아베르노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다른 누구보다 신경쓰고 있던 카스트로와의 사이에 이 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이 아베르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누구보다 친밀하게, 누구보다 사이좋게 지내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일은 엉뚱하게 왕세자비 때문에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뭔가 안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 "안색이 안좋구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오자, 카스트로는 기가 막힌 얼굴로 아베 르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아베르노의 옆모습에서 고의적으로 다른 화제로 돌리고 싶어하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난처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시키려는 아베르노의 노력이 잡히는 것 같았다. '결국 여기로 나를 부른 것은, 그저 사과를 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무언가 더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있던 카스트로는 다소 마음을 풀었 다. 비록 아베르노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여러모로 실망했다고 하더라도, 이번 잘못은 왕세자비가 제멋대로 한 짓일 뿐이었다. 왕세자 비의 행동은 결코 용서할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사과하는 아베르 노는 적어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은 아베르노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왕세자비는 왕세자비고, 왕세자는 왕세자다. "아닙니다. 그냥 얼마 뒤면 테라로 가야한다는 게 신경쓰여서 그럴 겁니다." "그랬군." 아베르노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짓을 하고, 며칠새 까칠 해보이는 동생을 위로했다. 슬쩍 미소까지 짓는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 이 완연했다. "처음에는 무척 걱정되겠지만, 내가 전에 말했듯이 꽤 좋은 곳이다. 힘들면 지스카르에게 도움도 받고. 가게 되면 테리아에서 친구도 사귈 수 있을테지." "……네." 아베르노는 마치 탈출구를 찾은 사람처럼 새로운 화제에 지나칠 정 도로 집중했다. 그것은 아베르노 자신이 가장 즐기는 화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인 기분이 되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테라 사람들, 사귀어보면 꽤 활달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주신 케테 르님을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라 네가 테리온에서 생활하는데 많은 도 움이 되어줄 것이다. 정 힘들면 테라 신전에 가서 기도를 하고, 또 그 곳의 신관님들께 도움도 요청하고." 카스트로는 억지로나마 짓던 웃음을 삽시간에 걷어치웠다. 아베르노 는 어떨지 모르지만, 카스트로에게 테라에 관련된 이야기는 짜증나고 불쾌하기만 할뿐이다. 빨리 테라로 떠나달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다. 마치 카르노에서 쓸모없다고 추방당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베르 노는 그런 카스트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더욱 흥이 나서 입을 놀렸다. "외로울 때, 힘들 때는 신앙이 참 도움이 되지. 그것이 주신 케테르 님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고." 카스트로는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았다. "전하께서도 외롭고 힘들어서, 로마를 버리고 케테르를 섬긴 겁니 까?" 아베르노는 생각해보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선선히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알면 알수록 케테르님은 위대하신 분 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케테르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조금의 후회 도 없다. 너도 케테르님을 섬기게 되면, 곧 내 기분을 알게 될 게다." 아베르노는 그야말로 신실한 신자처럼 보였다. 열에 들뜬 듯 자신의 신앙에 확신을 갖고, 다른 사람까지도 그 신앙에 끌어들여야 속이 시 원하다는 그런 표정, 그런 말투.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으로 입술을 비틀어올렸다. 아베르노가 귀국할 때부터 의무감에 아베르노를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베르노는 왕세자이니까. 모두가 인정하고 국왕폐하가 지목한 다음대 국왕이 될 자니까! 어려서부터 그렇게 알아왔으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 는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베르노를 알면 알수록 더욱 실망스러워졌 다. 더 이상 존경이니, 존중이니 같은 허울을 지속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생각이 아닌 마음에서부터 존경을 거부했다. 그래서 나오는 말 도 거리낌없이 신랄한 비난조로 바뀌어있었다. "신앙이라면 로마를 섬길 수도 있었을텐데요? 카르노의 수호신은 케 테르가 아닌 로마입니다! 한족들이 강요했다면 겉으로야 케테르를 섬 기는 척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로마를 가슴속에서마저 지워버리셨습니까?" 아베르노의 검고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제서야 카스트로의 달 라진 태도를 눈치채고, 정색을 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케테르님은 로마보다 위대한 신이다. 훨씬 상위의 주신(主神)이야. 우리가 하찮은 로마를 섬겼기 때문에, 위대한 케테르님의 후예인 한족 들의 공격에 그리 쉽게 무너진거다! 저번에도 알아듣도록 말했던 것 같은데? 아직까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거냐?" "전하께서는 카르노의 왕세자로서 가져야 될 자긍심을 잃어버리셨군 요." "뭐라고?" 아베르노는 당혹해하며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만큼 견고해진 얼굴을 하고, 카스트로는 차갑고 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뱉어냈다. "전하께서는 단 한번의 패배로 카르노의 자존심을, 카르노인의 국왕 이 될 자로서의 자긍심을 잃어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지금 카르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조차 망각하고 계십니다. 카르노인 대다수 가 검과 활을 자신들의 숙명으로 아는, …우리 카르노는 전쟁을 위해 생존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전쟁의 신 로마를 버리라고 하시 는 겁니까? 전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인 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카스트로는 몸을 앞으로 하고 티테이블의 위를 두손으로 짚었다. 테 이블 반대편에 있는 아베르노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씹 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카스트로의 검은 눈에서 강렬하고 위협적인 빛이 폭사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카르노의 수호신인 전신 로마뿐 아니라 카르노에 대한 배신을 입에 담고 계신 겁니다! 아십니까?" 아베르노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 싹였지만, 카스트로는 여유를 두지않고 몰아붙였다. "전하께서는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국 왕폐하께서 이렇듯 무능하게 여색에 파묻혀 계시는 이유를 알고 계십 니까? 왕비전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게 부탁하고, 염원하신 일 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카스트로!" 부담스러운 듯 몸을 뒤로 물리며 아베르노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 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목소리와 눈빛에 더욱 힘을 주고 몰아쳤다. "국민들이, 국왕폐하께서, 그리고 왕비전하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일은, 저 저주받을 미노의 재복속과, 레이얄과 테라에 대한 복수입니 다. 국왕폐하께서 테라 사신들에게 받은 수모와 굴욕을, 그 자리에 없 어서 못보셨다는 말로 모르는 척 하실 셈이십니까? 왕비전하의 간절한 유언을 못들으셨다는 이유로 무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아르 노의 뒷골목으로 가서 국민들의 생생한 분노를 들어보십시오!" 위압적으로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고 몰아치는 카스트로의 말은 아베르노의 안색을 몇번이고 뒤바뀌게 만들었다. 카스트로는 테이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 오만하고 차가운 눈으로 아베르 노를 노려보았다. "국왕폐하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이고, 국민들의 유일한 희망은 전하이십니다. 그런데, 테라의 신을 받아들이고, 테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르노가, 이 카르노 왕궁이 미노와 테라, 그리고 레이얄의 놈들에게 짓밟힌 게 고작 5년전입니다! 왕궁이 적들 에게 둘러싸이고, 영광스러운 전신전이 한족에게 유린당한게 10년도 아닌 바로 5년전이란 말입니다! 알현실에서 있었던 그 치욕스러운 조 약을 잊으신 겁니까? 그것이 그렇게 쉽게 잊혀졌습니까? 어머니의 목 에 검날이 들이밀어진 일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더랍니까? 당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르노의 다음대 왕이 되실 왕세자 전하이십니다! 누구보 다 가슴에 그 치욕을 깊이 새겨두어야 할 분이란 말입니다----!" "무엄하오----! 지금 누구 앞에서 이리 큰소리시오?" 갑자기 호통을 친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베르노의 호위기사였 다. 라에르가 친위대 부대장의 지위에서 물러난 때와 맞추어, 지난 4년 간 아베르노를 호위해온 기사가 부대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분노한 기색으로 카스트로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있는, 위협 적으로 커다란 덩치의 사내, 세시르 폰 스피노였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라에르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검의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으로 세시르경을 쏘아보았다. 박력과 위엄이 서린 강렬한 눈빛이 무섭게 상대를 압박해갔다. 세시르경이 움찔하는 것을 보고, 카스트로는 입술을 비틀며 별 것 아닌 투로 가볍게 물었다. "무엄하다? 일개 호위기사란 자가, 왕자간의 대화에 끼어들어 자국 의 왕자인 나에게 감히 무엄하다고 소리치는 것은 어떤 죄인가, 라에 르경?" 라에르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극상입니다. 왕족에게의 하극상은 즉결처분해도 할 말이 없는 대 죄입니다." 카스트로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한손으로 허리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카스트로는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세시르경을 응시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파랗게 질리는 덩치 큰 사내의 모습은 처참해보이기까지 했다. 갑작 스레 벌어진 사태에 당혹스러워하던 아베르노는 앉아있던 자리를 치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만둬라, 카스트로!" 아베르노는 세시르경을 보호하듯 그의 앞으로 가서 카스트로를 노려 보았다. "네 생각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카스트로! 네가 잊고 있는 게 있어!" "잊고 있는 것?" 카스트로가 바로 앞에서 뭐냐는 듯 쳐다보자, 아베르노는 우월자로 서의 여유를 갖고 대답했다. "카르노는 카스트로, 네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아베르노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판단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아직 어려서 대세를 모른다. 그래서 테라에 가서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이야." 카스트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대세라는 것이 군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국민들의 소망마저 망 각한 채, 카르노를 이렇게 몰락시킨 불구대천의 원수, 테라의 종이 되 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이제 수치심이 어떤 것인지조차 잊으셨습니 까?" 카스트로가 냉소적으로 비웃었지만, 아베르노는 한치도 굽힘없이 카 스트로를 마주했다. "너는 이 고립된 왕궁에서만 살아서, 그렇게 좁은 소견밖에 갖지 못 하는 것이다. 가서 배워! 세상은 넓고, 카르노에서 정의라고 믿었던 것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카르노의 부강? 그것은 대륙의 대세에 따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 한번의 패배로, 고 립되었던 카르노가 개방되게 해 준데 대해 테라와 레이얄에 감사하고 싶은 지경이다!" "말을 삼가하십시오!" 카스트로의 격렬한 기세에, 다시 세시르경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자신의 호위기사를 옆으로 밀어내고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 다. 자신의 신념에 한점의 의심도 없다는 듯, 흔들림없이 카스트로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고립된 채 있는다면, 카르노는 이제 그런 치욕뿐만이 아니 라 아예 자피아 대륙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나는 카르노의 국왕이 될 자고, 누구보다 카르노의 앞날을 걱정해! 너의 어리석은 소견은 필 요없다, 카스트로! 네가 할 일은 단지 내가 하는 일을 옆에서 돕는 것 뿐이야! 카르노의 앞날은 네가 아닌, 바로 나, 왕세자인 아베르노가 결 정한다!" 카스트로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부터인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 정할 수가 없었다. 죽음처럼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시간은 한시도 머뭇거림없이 조금씩 흘러간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카스트 로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강하게 카스트로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좋아. 그렇게 말한다면……' 카스트로는 온몸으로 뜨겁게 뛰어다니는 맥박을 느끼며, 쉰 듯한 목 소리로 침묵을 깼다. "전하께서도 잊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아베르노는 의심스럽게 눈가를 좁혔다. 카스트로는 도전적이고 살기 어린 미소를 띄고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카르노는 아직 전하의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아버지, 칼리에르 국 왕폐하의 것입니다." "……!" 자신과 닮은 커다래진 검은색 동공에 대고, 카스트로는 나직나직하 게 속삭였다. "굳이 테라를 끌어들이신다면, 카르노의 군주될 전하께서 자진해서 테라의 종이 되시겠다면, 전하께서는 어느 순간, 어느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으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긍심높은 카르노인은 테라의 종 이 되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지금…… 반역을 이야기하는 거냐, 카스트로?" 분노, 혹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아베르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카스트로는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베르노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직 전하께서는 카르노의 국왕이 아니십 니다. 반역은 국왕에게 검을 겨눌 때만 성립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 오!" "카스트로-----!" 질려버린 얼굴로 목청껏 소리치는 카르노의 왕세자에게, 카스트로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전하께서 카르노를 배신하지 않는다 면, 전하의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카스트로는 기세등등한 걸음으로 아베르노를 등지고 왕세자궁을 나 섰다. 라에르는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파랗게 질린 아베르노를 흘낏 보고, 현기증이 일 것 같은 기분으로 카스트로의 뒤를 쫓았다. 이것은 예상보다 더 상황이 나빴다. ================================================================== ...추석 잘 보내세요.. 카스트로처럼 하극상하지 마시고.. --;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석을.. --;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2 - 관련자료:없음 [3002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2 21:15 조회:184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2 - ================================================================== 멋들어진 카르노식 야회복을 빼입고, 며칠전 연회에서 만난 귀부인 과 함께 왕궁 정원을 산책하던 로페냐는 때마침 멀리서 망토를 펄럭이 며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스트로를 발견했다. 엄청난 속도 로 걸어가는 카스트로와 그 뒤를 따라가는 라에르의 모습은, 로페냐에 게 충동적인 결정을 촉구했다. 로페냐는 땅에 짚던 스틱을 들어올리고 귀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급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산 책을 다음으로 미루어도 될까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귀부인의 손을 잡아 입맞추고 정중하게 인 사했다. 로페냐는 은과 보석으로 세공된 스틱을 들어올리고, 빠른 걸음 으로 두 사람을 따라갔다. 혼자 휑하니 남아버린 귀부인은 발을 구르 고 얼굴을 찌푸리며 저 무정한 테라의 바람둥이 후작을 비난했지만, 로페냐는 이미 그녀에 대한 미련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뒤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 얼마가지 않아 망토자락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로페냐는 상심하지않고, 그 길대로 부지런히 뛰었다. "무슨 일로 저리 급하게 가시는지, 원! 그런데 이쪽은 왕궁 밖으로 가는 길 같은데?" 몸을 단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로페냐는 조금 뛰다가 숨을 몰 아쉬면서 몇마디 투덜거리고, 또 조금 뛰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카 스트로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전하!" 카스트로는 대답도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큰 보폭에 걸음도 빨라서 짧은 시간에 상당히 많은 거리를 걸었다. "전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라에르는 뛰다시피하면서 연신 물어대고 있었다. 심상치않은 모습이 아무래도 무슨 큰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라에르의 걱정스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스트로는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를 그대로 온몸으로 표출하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전하, 제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시고, 이성을 찾으신 뒤에 움직이 십시오. 궁 밖으로 나가실 거라면, 말이라도 가져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먹혀들었는지 카스트로는 일단 발놀림을 멈추었다. 라에르 는 갑작스럽게 우뚝 서버린 카스트로의 등에 부딪힐 뻔했지만 바로 코 앞에서 그런 불상사를 모면하고, 지금껏 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말을 가져오라고 시킬까요, 전하?" "아……." 카스트로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손을 들어 급히 걷느라 흐트러진 머 리카락을 짜증스럽게 쓸어올렸다. 다른 한쪽 손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짚고 있었다. "나가서 마차를 타지. 전에 들렸던 옷가게에 가서 옷도 갈아입 고……, 가서 마음껏 술이나 마시고 싶어." "술이라면 삼왕자궁에도 있습니다. 그것때문이라면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간곡한 만류에도, 카스트로는 더욱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술 한잔 마실 때마다 베제르가 한시간씩 설교를 늘어놓을테지. 됐 어. 그냥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속편히 술이나 마시고 싶어." "그렇다면 차라리 동문쪽으로 가시는게 어떻습니까? 용병들은 전하 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으로 거친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아니. 거기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역시 용병들 과 섞이는 게 편할 것 같아." 라에르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할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용병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주십시오. 저 혼자 전하를 호위하기 힘든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도 내 몸 정도는 지킬 줄 알아." 자존심이 상한 듯 대꾸하는 카스트로를 보며, 라에르는 지끈대는 두 통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다시 질주 비슷한 걷기가 시작되었다. 그들 뒤를 부지런히 뛰어서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고는 두 사람 모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는 몇몇 귀부인에게 둘러싸여, 왕세자비 라 에니와 함께 왕궁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왕세자로부터 꾸중을 들 었는지 며칠 내내 우울해하던 왕세자비를 위로도 할 겸, 처음 만났던 날에 약속했던 왕궁의 안내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 라이아나 정원은 미에라 왕비전하께서 생전에 정성껏 가꾸시던 정원이랍니다. 지금은 겨울이 다가와서 별 볼 것 없지만, 봄이 되면 상 당한 장관이지요." 화려함이 퇴색한 정원에는 때늦은 가을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을뿐,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원의 크기라든지, 깔끔하게 다 듬어진 정원의 형태, 잘 손질된 잔디 등이 정원사만도 수십명이 동원 되었을 듯 싶은 규모였다. 정원의 중앙에는 거장의 솜씨인 듯한 아름 다운 분수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분수대의 가운데에 위치한 승리의 검 을 높이 치켜든 새하얀 여신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분수대 가장자 리에는 청동의 조각품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분수대 중앙에 있는 여신상이 승리의 여신 라이아나로, 미에라 왕 비전하께서 가장 숭배하던 여신이라고 합니다." 라에니는 주디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순백의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무척 아름다운 여신이군요." "호호호, 다른 여신들을 물리치고 전신 로마의 연인이 된 여신이니 까요. 아마 미의 여신만이 그녀와 미모를 겨룰 수 있을 겁니다. 로마를 두고 미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이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요?" "아아, 네. 어렸을 때 들은 것 같군요." 라에니는 알지 못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아는 척을 했다. 모른다는 내색은 할 수 없었다. 왕의 첩 따위가 아는 걸 왕세자비인 자신이 모 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나중에 시녀장 로냐에게 물어볼 것을 머리속에 기억해두면서, 다른 쪽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은 뭐하는 곳이지요?" 순간 주디나의 눈에 이채를 떠올랐다. 하지만 주디나는 곧 그 눈빛 을 지우고,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저곳은 삼왕자궁이랍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지요. 본궁과 왕세자궁을 제외하고는 가장 크고 멋진 곳입니다." "호오, 그래요? 한번 가봐도 될까요?" 주디나는 솟구치는 즐거움으로 들뜬 얼굴을 쥘부채로 가리며, 매끄 럽게 대답했다. 뜻하지도 않게 일은 너무 잘 풀려가고 있었다. 두려울 정도로.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장차 국모가 되실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가 시고자 하는데, 누가 감히 말릴 수 있겠습니까?" 라에니는 주디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했다. "호호호, 그런가요? 그럼 저쪽으로 가보지요." "당신 뭐야? 저리 비켜!" "아, 죄송합니다." 툭 밀쳐져서 뒤로 물러난 로페냐는 눈이 핑핑 돌고, 머리속이 뒤죽 박죽이 되어서 앞을 바라보았다. 목속에서 가르릉하는 신음이 새어나 온다. 로페냐가 서 있는 곳은, 골목길이 굉장히 많은 길이었다. 한 건 물 지날때마다 안으로 들어가는 몇갈래의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을 들 어가면 또 몇갈래의 골목이 있다. 마치 미로처럼 엉킨 길이라는 점만 해도 가뜩이나 신경에 거슬리는데, 그 골목골목을 채우고있는 굉장히 크고, 또 덩치도 엄청난데다, 인상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장정들을 보고 있자니,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몇걸음 걸을 때마다 부 딪히는 사람들이 시비라도 걸어오면, 로페냐는 꼼짝못하고 멱살을 잡 힌채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있어야 했다. 사죄하고 있는 자신이 구차 하게 느껴졌지만, 이 사람많은 골목에서 마법이라도 써서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다. 그것도 테라에 대한 반감이 상상이상인 카르노에서 말 이다. 카스트로 전하는 대체 어떻게 이런 골목을 들어올 생각을 하신 것일 까? 자신이 즐겨 다니는 리케아 거리만 해도 이 정도로 뒤죽박죽이지 는 않았다. 왕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뒷골목을 안다는 것 자체가 적잖이 의아스런 바였지만, 한가롭게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 유는 없었다. 저쪽에 큰 키의 검은 머리가 하나 보였기 때문이다. 전 하,라고 소리쳐 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로페냐는 다시 엄청난 덩 치의 장정들 사이를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얼마가지않아, 로페냐는 툭, 하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근육으로 만든 장벽에 부딪힌 느낌에 인상을 쓰며 슬금슬금 고개를 들 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로페냐는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머리 위로도 한참을 더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키도 174리로 그다지 작은 편 이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르노가 아닌 곳에서나 해당되는 이 야기였다. 로페냐는 거인들의 나라로 온 듯한 기이한 착각을 체험하며 계속 시선을 높였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있는, 자신쯤은 거뜬히 밟아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페냐는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서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사람을 찾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뭐야, 꼬마? 이따위 옷이라니! 귀족인가? 잘도 이런 데 들어올 생 각을 했군." 꼬마! 라고 불린데서 상당히 열이 뻗쳤지만, 또다시 카스트로를 놓 치면 찾기가 쉽지않을 터였기 때문에 다시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찾아야 해서 급하게 가봐야 합니다. 좀 비켜주 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흐응, 웃기는군. 너 귀족 맞아? 귀족이 평민에게 사과를 하다니, 역 시 오래 살아남고 볼 일이군." "제발, 비켜주십시오. 저기, 저, 어? 어디갔지?" 그 사이에 또다시 사라져버린 카스트로의 뒷통수에 로페냐는 인상을 그었다. "빌어먹을! 너때문에 놓쳤잖아!"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로페냐를 내려다보았다. 그 리고 다음순간 가볍게 로페냐의 멱살을 쥐고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너 죽고 싶어? 쥐방울만한게 누구한테 욕설이야, 욕설이!" 로페냐는 가뜩이나 쌓이던 차라, 손에 쥔 스틱을 들어올려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빠악하는 기분나쁜 소음에 이어, 남자의 비명이 들려 왔다. "아욱!" 남자는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로페냐를 멀찌감치 내던졌다. 바닥 으로 나동그라진 로페냐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일어서서 사람들 사이로 섞여버렸다. 상대도 안되는 덩치와 몸싸움을 할만큼 로페냐는 어리석지 않았다. 방금 전 그 남자의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행운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잽싸게 큰 사람들 틈에 섞여버린 로페냐 는 그다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너 이 자시익! 거기 안서어!"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거칠게 사람들을 헤치고, 로페냐를 찾아나섰다. "어서오십쇼!" 미레야는 활기차게 인사하고, 이어서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 아는 척 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미레야를 본척만척하고 구석 진 자리를 찾아들었다.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미레야는 오랜 주점 주인의 경험으로, 농담보다는 가만히 주문이 나 받는 게 이로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오랜만입니다, 또 근 한달만인가요? 오늘은 뭘로 드릴까요?" 카스트로는 인사치레는 걷어치우고, 짧게 주문했다. "제일 독한 술로 한병 주십시오. 안주는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유트씨." 미레야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을 감지하고, 눈치껏 재빠르게 발을 뺐다. 지금껏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심각한 얼굴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미레야가 멀어지자, 테이블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스트로나 라에르나 모두 신경도 쓰지않았다. 라에르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미레야가 술과 안주, 그리고 술잔을 놓고 가서도, 카스트로는 입을 뗄 생각을 하지않았다. 시끌시끌한 가운데 감도는 고요라는 것은 상당히 이질적이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카스트로가 술병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라에르가 먼저 잡아서 카 스트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카스트로는 멍하니 술잔이 채워지길 기다 려, 독한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델 것처럼 화끈거리는 액체가 혀를 태 우고 목구멍으로,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내려갔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 려질 정도로 독해서 그 한잔만으로도 충분히 취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연달아 술잔을 내밀었고, 라에르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술 을 따라주었다. 카스트로의 입이 마시는 것 외의 기능을 발휘한 것은 열번째 술잔을 들이키고서였다. 처음 앞머리의 말을 놓칠 정도로 조그 맣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굉장히 낮고, 쉬어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카스트로는 조소하듯 픽 웃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그러니까 그런 말이나 하고……." "전하……." 카스트로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조금씩 흐느적거리는 몸을 버팅기 려,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주먹쥔 손에 턱을 괴었다. "답답해……." "……." "왜 이렇게 내 뜻과 어긋나버리지? 그토록 기다리던 왕세자 전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테라색에 물들어버려서, 적과 아군도 구분 못하 고 이적행위를 하려고 하고. 그리고 나에게도 그것을 강요하지." 라에르는 술만 들이켜는 카스트로가 걱정스러워 안주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안주를 무시하고는, 손수 술을 따라 입속에 들이부 었다. "그 지독한 향수냄새, 역겹지 않았어, 라엘?" 라에르는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왕세자의 궁으로 들어섰을 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강한 냄새가 다시 코 끝에 느 껴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역겨운 냄새였다. "전하는 예전의 전하가 아니시다. 변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식으로 변할 줄은 몰랐어." "네." "그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봤어? 검 대신 손에 들고 다니는 지팡이 도. 오! 로마여! 지팡이라니! 우리는 검의 민족이다. 전신 로마의 수호 를 받는, 전투를 위한 민족이라구! 그런데 그 쓸모도 없는 지팡이를 들고 뭐하자는 거야? 개라도 때려잡겠다는 건가?" 점점 커지는 성량에, 라에르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전하, 제발 목소리를 줄이십시오." "이제, 어떻게 하지? 응? 라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마저 테라의 종이 되어야 하는 건가? 그런 수업을 받으러 저 저주받을 테라 로 가야되는 건가?" 딸랑딸랑 종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빈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그 사람의 시선이 카스트로와 라에르를 무심히 스치다가, 뭐에라도 데인 듯 놀란 눈으로 다시 두 사람에게 되돌아온 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 사람은 사냥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눈빛을 번뜩였다. 카스트로의 나직한 말이 이어졌다. 턱에 닿아있는 주먹은 펴진채, 숙 여진 뜨거운 이마 위에 닿아있었다. 괴로운 얼굴로 고개숙인 카스트로 의 이마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테라는 자신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일년이나 일찍 전하를 돌려보 내준거야. 카르노의 왕세자는 이제 자신들의 적이 아닌 아군이니까. 단 4년만에, 테라는 한 나라의 왕이 될 자를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어버리 는 데 성공했어. ……그런 테라가 지독하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럽다." 남자는 위험스런 눈빛으로,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카스트로를 향 해 걸어갔다. 그런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었다. "조금 겁이나, 라엘.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나도 왕세자 전하 처럼 바뀌어버리면? 그러면…… 이제 카르노는 어떻게 되는 건가 ……." 라에르는 침묵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카스트로가 다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라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감정이 격해져서가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테라색에 물들은 국왕이 다스리는 카르노. 그것은, 과연 카르노일까? 그 때였다. 라에르는 바로 옆에 멈춰 선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 개를 들었다. 마주 친 눈이 살벌하게 웃었다. 그리고! 타악! 테이블 위에 날카롭게 날을 번뜩이는 단검이 박혀들었다. 갈 색의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의 남자는 입술을 비뚤어뜨리며 비웃듯이 말했다. "여기서 또 만나게 되는군. 왕실의 끄나불들!" ================================================================== 좋은 하루 되셨는지.. 글 올리고, 달떴나 구경해야겠네요.. ^^ 남은 연휴도 잘 보내시길..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3 - 관련자료:없음 [3003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3 21:31 조회:183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3 - ================================================================== 복도는 넓고, 높았다. 복도 끝과 길다란 복도 사이사이에 나 있는 높 고 좁은 아치형의 창문에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 고, 그 햇살은 복도 양쪽으로 주욱 늘어선 수없이 많은 거울들에 반사 되고 또 반사되기를 반복해 복도 반대편 유리창까지 가 닿는다. 자칫 어두울지도 모를 그 길다란 복도는 그렇게 빛으로 밝혀져 있었고, 라 에니는 그 장관에 지켜야 할 품위와 우아함마저도 잊어버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 아름다워요. 레이얄이나 테라에서도 이런 것은 보지 못했어! 빛의 궁전 같아." 주디나는 친절한 미소로 맞장구쳤다. "이런 곳은 왕궁에서도 이곳 한 군데 뿐이랍니다." 라에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스치는 빛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것은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동화 속 공주라도 된 느낌이랄까. 황 홀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라에니는 어쩐지 이 궁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라에니가 몇걸음인가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을때, 복도의 수많 은 문들 중 하나가 열리고 시종장의 제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라에니의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삼왕자 전하의 시종장 베제르가 왕세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라에니는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턱을 치켜올린 채 눈아래로 시종장 베제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요. 되겠지요?" 하지만 시종장 베제르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궁의 주인이신 카스트로 전하께서 부재중이십니다. 카스트 로 전하께서 안 계실 때에 다른 분을 모시는 것은 법도가 아니온지 라……." 왕세자비의 오만한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지자, 주디나가 끼어들 었다. "그냥 구경만 하겠다는 겁니다, 시종장. 왕세자비 전하께서 친히 부 탁하는 말인데, 그렇게 쉽게 거절하시면 안되지요." '왕세자비 전하'와 '친히 부탁'이라는 말에 악센트를 넣은 말투였지 만, 시종장 베제르는 여전히 고자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오나 그것은 왕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라에니의 주홍빛 눈썹이 곤두섰다. 미간에 노기가 서린 하얀 얼굴은 표독하게까지 보였다. 자신이, 왕세자비인 자신이 하겠다는데 감히 보 잘것 없는 시종장 따위가 자신을 막아선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왕세자비인 내 말을 거역하시는 건가요? 장차 국모가 될 내 명령을?" 고압적인 라에니의 태도에 시종장 베제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최근 들어 시종장 베제르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매일매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노쇠한 육신이 견디기 힘들었다. "왕세자비 전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엄한 왕실 법 도가 그러하옵니다. 다음에 카스트로 전하가 계실 때 오시면 응접실까 지는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 기회에 미리 언질을 주시고 다시 찾아주십시오." 라에니의 시녀장 로냐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긴 장하고 있었다. 라에니의 성마른 성격을 잘 아는 로냐는 이제 그만 시 종장이 물러났으면하고 바랬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늙은 시종장과 라 에니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냐는 문득, 라에니의 옆에서 주디나가 배실 배실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뭐가 좋아서 저러고 있는 거지?' 그 때, 다시 라에니의 고집스런 말이 들려왔다. 라에니는 자신이 저 하찮은 시종장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도 불쾌했다. 저 시종장 은 대체 무얼 믿고, 저런 배짱이란 말인가! "다음이라구요? 그냥 한번 훑어보고 가면 될 것을, 다음에 귀찮게 또 오라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못합니다! 당장 안내하던가, 아니면 내 스스로 볼테니까 비켜주세요." 온몸이 식은땀에 후줄근하게 젖은 모습을 하고도 시종장 베제르는 그 자리를 막아섰다. 안색이 아무리 창백해졌어도, 목소리만은 범접하 기 힘들만큼 단호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주인이 안계신 궁을 마음대로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설사 국왕폐하이실지라도 안되는 일입니다." "닥쳐욧!! 왕궁의 안주인은 이제 왕세자비인 나입니다. 이 내가, 궁 을 구경하겠다는게 뭐가 그리 법도에 어긋난단 말입니까?" 시종장 베제르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아베르노 전하도 이런 말도 안되는 고집은 부리지 않으셨다. "카르노 왕실의 안주인이 되셨으니, 왕세자비 전하께서도 이제 카르 노 왕실의 법도를 따라주십시오. 카르노의 왕궁은 각 궁마다 그 운영 이 독립적인지라, 이 궁에 관한 한 국왕폐하께서도 뭐라 하실 수 없습 니다. 이곳은 레이얄이 아닙니다. 부디 다음에 찾아주십시오, 왕세자비 전하." 짜아악----! 노쇠한 시종장의 뺨이, 라에니의 과격한 손놀림으로 유린당해 빨갛 게 달아올랐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라에니는 접은 쥘부채의 끝으로 시종장 베제르를 가리키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시종장 베제를 가리킨 쥘부채의 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제는 네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드는구나! 삼왕자는 대체 시종 장을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이 모양이야? 그래, 버릇없는 줄은 처음 봤 을 때부터 알았어! 그 주인에 그 시종이지! 네 주인이 나를 무시한다 고, 시종인 주제에 너마저 나를 무시하고 능멸하려 들어? 그래, 어디 마음껏 능멸해 보려무나! 이 기회에 내 본때를 보여주겠어! 제피르경!" "네, 전하." 앞으로 나선 사람은 얼마 전, 라에니의 호위기사로 임명된 제피르경 이었다. 190리 이상의 장신의 기사는 160리 가량의 조그만 여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 놈을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라!" 시종장 베제르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색이 되었다. 너무 갑작스런 전개에 모두들 당황스러워 할 뿐, 말릴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침착한 사람은 시녀장 로냐밖에 없었다. "전하. 이 사람은 삼왕자궁 소속의 시종장입니다. 전하께서 삼왕자 전하의 동의도 없이 사사로이 처벌하실 수는 없습니다." 시녀장 로냐가 옆에서 만류했지만, 이미 화가 날대로 난 라에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카르노에서 누구보다 지 엄한 자신이 일개 시종장에게 능멸당한 것이다! 절대 이번만큼은 용서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넘어간다면, 앞으로 그 누가 자신을 존중해주겠는가! 일개 시종장에게도 무시당하는 자신을! "뭐하는 거야? 너도 내 말을 무시할 셈이냐, 제피르!" "참수만은 그만둬주십시오, 전하." 제피르경도 부탁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라에니의 부아를 더 부추겼 을 뿐이었다. "너도 죽고 싶은 거냐, 제피르! 카르노에서는 이렇게 윗사람의 말을 우습게 아는 거야? 장차 국모가 될 사람으로서의 명령이다! 당장 저 놈을 베어버렷--!" 시종장 베제르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기막힌 일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뭐해? 이 왕궁의 안주인인 내가 이 왕실의 법도를 다시 세우겠어! 어서 끌어내!" 앙칼진 목소리가 복도에 웅웅거리며 울려퍼졌다. "전하!" "전하, 시종장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때까지 사태를 지켜보던 삼왕자궁 소속의 궁내부원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왕세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시종장 베 제르의 목숨을 구걸하는 궁내부원들의 모습이, 시종장 베제르의 눈에 더없이 굴욕적으로 비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라에니 왕세자비와 카스트로 왕자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던 시종장 베제르는, 지금 궁내 부원들의 모습이 카스트로 전하가 왕세자비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 져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 따위로, 카스트로 전하의 이름에 흠 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돌아가신 미에라 왕비전하 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그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은 비록 목숨이 걸 린 일이라도, 할 수 없었다. "일어서라!" 시종장 베제르의 입에서 노기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답지 않은 위엄에 찬 음성에, 궁내부원들은 물론이고 왕세자비 일행마저도 흠칫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비는 게냐! 당장 일 어서지 못할까!" 시종장 베제르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는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에, 라에니와 그녀를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시종장 베제르를 당혹스런 얼 굴로 쳐다보았다. 울먹이는 궁내부원들을 뒤로하며, 시종장 베제르는 덜덜 떨리는 몸을 한껏 곧추세우고 라에니를 노려보았다. "선왕비전하께서도 저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카 르노에 왔으면 카르노의 법도에 따라야 하는 것이 지당한 일! 카르노 의 법도도 모르고, 카르노의 국모 될 자라 칭하시다니요? 레이얄의 왕 실 법도는 이렇게 죄없는 사람을 잡아죽이는 것입니까, 왕세자비 전 하!"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길고 긴 복도에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라에니는 머리끝까지 분노와 수치심이 솟구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에니의 달 구어진 적갈색 눈동자 주위의 흰 자 위로 붉게 핏줄이 그어졌다. 분노 로 악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시종장 베제르를 갈갈이 찢어 죽일 듯한 살기로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감히! 너 따위가 감히 내게 그따위 망발을 해!" "망발이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라에니는 옆에 선 제피르을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죽여! 이 자리에서! 내가 보는 앞에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천한 것 을 죽여라! 더 이상 토를 달면, 내가 너를 먼저 벨 것이다, 제피르!" 제피르경은 참담한 기분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여 전히 서리가 맺힐 듯 차가운 얼굴로 굽힘없이 라에니를 노려보고 있었 다. "죽이시오. 하지만 맹세컨데, 내 죽어서도 전하를 지켜볼 것이오. 바 로 당신이 나 이상으로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억울함과 분노를 품은 시종장 베제르의 눈에서는 시퍼런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라에니는 그 눈빛에 질려, 더욱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죽여! 죽여버렷----!" 스릉-! 검이 허공을 갈랐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살아있던 사람의, 마지막 내뿜는 피는 섬뜩하게 붉었다. 선홍색의 뜨 거운 피가 햇살 가득한 삼왕자궁의 복도에 흩뿌려졌다. "왕실의 끄나불?"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한 목소리에 주점이 온통 술렁거렸다. 미레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유트와 라에르, 두 사 람과 시비가 붙었던 남자였다.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 로 두 사람을 왕실의 끄나불이라고 몰아붙였던 그 용병. "세니크씨, 저번에 그 얘기는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시비시오?" 꾸짖는 듯한 음성의 미레야를 뒤로하고, 세니크라고 불린 덥수룩한 갈색 머리의 남자는 흥, 하고 코웃음쳤다. 자못 기세등등한 모습이었 다. "그 때는 기습을 당해서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안통할 걸?" 카스트로는 술 때문인지 아니면 연속해서 생기는 골칫거리 때문인 지, 달아올라 뜨거운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면서 세니크를 옆으로 올 려다보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미레야가 말했을 때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를 왕실의 끄나불이라고 단정짓는 이 유가 있습니까?" 싸늘한 말투로 라에르가 물었다. 라에르는 벌써 몸을 일으킨 채 여 차하면 검을 뽑아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니크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이번에도 잡아뗄 줄 알았지! 하지만 이번에는 안통해! 내가 그날 너희 두 놈의 뒤를 미행했었지. 어디로 가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왕 궁으로 가더군. 왕실의 끄나불이 아니라면 거기 갈 이유가 있나?" 라에르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내가 카르노 용병대 소속이라면?" "아무리 이름뿐인 용병대라지만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를 용 병으로 받아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더 확실한 건, 내가 카르노 용병 대원이거든! 나는 거기서 너희 둘 중 누구도 본 적이 없어!" 일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라에르는 씁쓸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왕실의 끄나불이 아닌가? 네 소속이 카르노 왕실 용병대 라면 말이지." 카스트로는 이리저리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라에르를 보고 피식 웃었 다. 라에르의 말주변은 카스트로로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몰아붙이는데는 누구 못지 않지만, 거짓말이라면 최악의 바닥을 기는 라에르였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재주로 이렇게까지 뻗대는 걸 보면, 제딴에는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는 중이리라! "웃기지마! 내가 뭐 할 짓이 없어서 끄나불이 되나? 그러고 보니 말 을 돌리고 있군. 헛소리할 것 없이 네 정체를 밝혀! 순순히 자백하면, 네 팔 하나로 만족해주지!" "큭……후후후후…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느닷없이 박장대소가 터졌다. 숨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주점 안의 용병들이 모두 라에르의 뒤에서 배를 끌어안고 웃어대는 카스트 로를 쳐다보았다. 세니크는 매서운 눈으로 카스트로를 쏘아보며 윽박 질렀다. "닥쳐! 뭐가 우습다는거냐! 이 녀석을 처리하고, 네 놈의 팔도 하나 잘라줄테니 입닥치고 기다리고 있어!" 순간 라에르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망설임없이 검을 빼들려는 순간, 라에르의 어깨에 턱하니 팔이 하나 걸쳐졌다. 귀 옆으로 술냄새가 물 씬 풍기는 얼굴이 다가와 빙글빙글 웃어댔다. "카르노 용병대원이라고 했나, 당신?" 세니크는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검은 눈빛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그렇다!" "킥킥. 왕실이 썩어도 어지간히 썩은 모양이야. 하는 일없이 왕실에 욕만 퍼대는 용병에게 월급이나 주고있으니……. 정말 카르노의 앞날 은 지독하게 암담하군. 그렇지 않은가, 라엘?" 카스트로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세니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세니크는 인상을 부욱 구기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월급이나 제대로 받고 있는 줄 알아? 감봉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두 달째 월급 구경도 못해봤어! 국왕이라는 작자도 제 첩에게 보석을 사줄 줄은 알면서, 제 나라 지키는 우리에게는 1실프도 아까운 거지! 제 아들 온다니까 그 엄청난 행렬에, 매일 계속되는 연회에, 아낌없이 돈을 펑펑 써대면서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 그러면서 너희같은 쥐새끼나 풀어 불평분자를 찾아내고 있지. 안그런가? 오늘은 무슨 일 이 있어도, 너희 입으로 너희 정체를 자백하게 만들어줄테다, 왕실의 개!" 카스트로는 라에르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라에르는 등 뒤에서 훅하고 끼쳐오는 뜨거운 입김에 몸을 움칫거렸다. 어깨를 아플 정도로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그대로 전달되어온다. 카스트로 는 점차 취기를, 노기가 압도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딱히 저 눈앞의 용병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받은 불유쾌한 자극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둑터진 강물처럼 스스로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멈칫하는 세니크를, 카스트로는 앞에 있는 라에르를 옆으로 밀치고 쏘아보았다. 묵직한 저음과 권위적인 분노가 세니크를 짓눌렀다. 세니 크는 스스로도 이해못할 압박감에 짓눌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무, 무슨……." 카스트로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하고 세니크의 앞으로 다가섰다. 카스트로의 위압적인 장신을 바로 앞에서 대하자, 세니크는 저절로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거대한 장벽을 앞에 대한 암담함같은 것이었 다. 단순한 키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니크는 평소에 그 이상되는 장신과 덩치를 아무 거리낌없이 상대해왔었다. 왜 갑자기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착 각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돈을 바랬다면, 왕실 용병대 따위에 들지 말아야했다. 아직까지 배 상금으로 허덕이는 왕실 재정을 모른다고 발뺌할텐가? 돈을 벌고 싶은 거라면, 그 치첼인지 뭔지처럼 북국 라디프로 가서 마물 사냥꾼이 되 는 게 훨씬 나았어. 몰랐다고 할텐가?" 주위 사람들의 웅성임이 잦아들고 있었다. 세니크는 인상을 구기고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든 거리를 확보하고 싶었다. 바로 앞에서 이런 숨막히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허리에 양손 을 올리고 버텨서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세니크를 살벌한 눈으로 내 려보았다. 세니크는 곧 거리확보가 그다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네가 왕실 용병대에 남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하는 일 없 이 근무시간을 때우고, 술이나 퍼마시며 왕실을 비방하기 위해서인 가?" "……아, 아니야!" "그럼 뭐지? 돈으로 투덜댈 거라면, 당장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 국 왕폐하께서 돈을 낭비한다고 그랬나? 그러는 너희들은 국왕폐하가 왜 그러시는지 생각은 해보았나? 너희들이 그분의 기분을 이해하려고 노 력은 해보았어?" 주위가 술렁이고, 세니크는 파리한 입술로 떠듬거리며 말을 내뱉았 다. "저, 정말, 왕실의 끄나불이 맞군, 그래? 이해?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냐! 네 말대로 아직 배상금도 갚지 못한 왕실 재정으로 한심하게 계 집의 드레스와 보석에 돈을 펑펑 써대는 국왕을! 아들의 환영연회가 대체 며칠이 되어야 끝이 나는 거야? 그 돈이면, 우리들의 밀린 월급 을 주던지, 그게 안되면 우리의 녹슨 무기라도 바꿔주는 게 좋잖아!" 세니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주먹을 부르쥔 채 몸을 떨었 다.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했던 말은 끝에 가서 거의 절규처럼 들렸다. 카스트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니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백 번 맞는 말이었고, 유능한 국왕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그렇게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저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아버지는 카르노의 국왕이기 때문에! 어쩐지, 자신이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왜, 이런 바보같은 변명을 해야하는지……. 기운이 연기처럼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침을 삼키고, 그 바보같은 변명을 시도했다. "국왕폐하께서는……, 이빨이 뽑히고, 손발이 묶인 사자와 같다. 그 런 폐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래, 옳은 방법은 아니지 만, 폐하께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사실 수 있는 거다. 테라의 녀석들에 게 시시때때로 굴욕을 당하고, 아들들을 빼앗기고, 아내도 잃으셨다. 옳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이해해 드릴 수는 없나? 너희들이 비난하는 그 사람은,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너희들의 국왕이다." 숙연한 분위기였다. 저마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적막을 깨고 누군가 뒤쪽에서 크게 외 쳐댔다. "보통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하지만 국왕은 보통사람이 아니 야! 한 나라를, 수백만의 국민을 책임지는 자가, 무책임하게 술과 여자 에게만 빠져산다고? 그걸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냐!" 라에르의 날카로운 눈이 지금 말한 상대를 찾았다. "맞아! 국왕이시니까! 그래서는 안되지." "결국 국민들을 버린 것과 뭐가 달라!"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카스트로의 일갈이 터 져나왔다. "그래서------!" 모두의 눈이 다시 카스트로에게 쏟아졌다. '미레야씨네 주점'은 어느 새 열띤 토론의 장으로 화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카스트로가 서서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지금 그대들이, 감히 국왕폐하를 비난하고, 왕실을 비난하려는 것이 냐? 그래서? 결국에는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무겁게 모두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린 한 단어, '반란'. 그것은 모두의 머리속에 증오로 얼룩진 미노 공작을 떠올리게 했다. "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세니크가 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곧바로 카스트로가 쏘아보자 시선 을 피하며 입을 닫았다. "그럼 뭐지? 어떤 것에도 스스로 해볼 생각은 않고, 무조건 국왕폐 하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인가? 너희들, 진심으로, 카르노가 국왕 폐하 혼자만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보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은 더더 욱 불평할 이유가 없어! 국왕폐하 혼자만의 카르노라면, 그것을 내팽 개쳐버리든,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든, 너희들은 불평할 주제가 못된 다." 카스트로는 목이 타는지 가까운 테이블에 있던 술병을 집어들었다. 메말라있는 입술에 술을 들이붓고, 다시 용병들을 향해 마주섰다. 저마 다의 의견이 분분하고 분노의 소리가 높아졌지만, 카스트로는 그것들 을 짓누르고 말했다. "카르노는 국왕폐하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너희들 카르노인 의 것이기도 하다. 너희들이 카르노인이라고 칭해지는 이상 너희들 역 시 카르노에 대해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다. 지금 사태가 순전히 폐하 만의 잘못인가? 너희들은 카르노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얼 했나! 왕실이 적에게 짓밟힐 때, 너희들은 국왕폐하께 무얼 해드렸나? 왜 그 때 폐하를 지켜드리지 못했어!" 카스트로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지도 않게, 자신의 입에서 터 져나온 말들은 국민들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은 깊고 깊은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원망이었다. 용병길드가 아르노 시내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적들의 손아귀에 왕궁에 떨어질 때 누구도 왕실 탄환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카스트로는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들끓어오른 피를 식혀갔다. '이건… 어리광이야…….' 알고 있었다. 국왕폐하가 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쯤 알고 있었고, 무능하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변명 해도 구차할 뿐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 게 국민들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광에 불과하다는 것, 구걸과도 같다는 것, 잘 알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며 아파오는 자존심을 다 시한번 죽였다. 적막한 주점 안에 다시 침착해진 카스트로의 음성이 채워졌다. "폐하께서는 재기하기 힘드실 것이다. 왕세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지 만,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과 너희들이 바라는 이상이 얼마나 맞아떨어질지는 모른다. 잘 기억해둬. 카르노는 국왕뿐만이 아닌 카르 노인의 것이기도 하다. 국왕이, 왕세자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하면, 너희 들이라도 나서서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누군가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카스트로는 그 자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힘이 없다고 뒤에서 욕만 할텐가! 누구보다 호전적인 우 리 카르노인이 언제까지 이렇게 주저앉아 버러지처럼 바르작대고만 있 을텐가! 힘이 없으면 힘을 만들고, 방법이 없으면 방법을 만들어! 힘이 없다고 뒤에서 욕만 해대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다! 그만큼 무능하고 어리석은 짓도 없어!" 의견이 분분해지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수근거리는 용병들을 앞에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용병들, 국민들, 그리고 왕세 자, 국왕폐하, 테라……. 콰당! 그때, 주점 문이 들썩할 정도로 흔들렸다.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소리쳐 물었다. "여기 혹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키 큰 청년이랑, 흑갈색 머리와 눈 의 청년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라에르는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응해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 과 직선거리의 바 뒤에 있던 미레야는 놀란 눈으로 카스트로와 라에르 를 바라보았고, 밖에서 소리친 사람의 눈도 미레야의 시선을 따랐다. 라에르는 문옆으로 빼꼼이 내민 금발머리의 남자를 보고 내심 신음을 내질렀다. 순간, 무척이나 반가운 듯한 목소리가 밖에 서 있는 남자에 게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드디어 찾았군요, 카스트로 전하!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십니 까? 그리고, 어? 어랏! 우와앗!" "너 이녀석! 생쥐같이 잘도 도망치더니! 드디어 잡았군!" 너무나 뜻밖인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황당함에 커다래진 카스트로의 동공에, 덩치 큰 사내에게 뒷덜미를 잡혀 대롱거리는 로페냐의 모습이 들어왔다. 카스트로는 그 예상치 못했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폭소를 터트렸다. "큭, 큭…… 푸하하하하하-------------!"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4 - 관련자료:없음 [3005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4 21:04 조회:187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4 - ================================================================== 아르노 서쪽 뒷골목에 있는 '미레야씨네 주점'의 창 밖에는 덩치 큰 용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들은 두터운 커텐으로 가려진 틈새 로 주점 안을 훔쳐보면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맞다니까!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더니, 그 행렬에서 국왕폐하와 함 께 가시던 걸 보았던거야." "그런데 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신거지? 그것도 용병차림으로." "바보녀석! 그게 바로, 높으신 왕족분들이 가끔 하셨다는 잠행이라는 것이다! 좀 배워라, 바보야, 응?" "그런 것 몰라도 싸우는데 지장없어!" "가까이서 보니까 꽤 크다. 그치?" "삼왕자면, 그 옆에 있는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 소르미노의 신동인 가?" "그렇겠지, 아마?" "가서 대련해달라고 해볼까?" "에라, 단검에 목날리지 말고 가만있어!" 이런저런 말들이 무성한 '미레야씨네 주점' 안에는 네 사람이 테이블 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외에는 부지런히 술과 안주를 나르는 미레 야 밖에 없었다. 라에르는 신분이 노출된 즉시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 만, 카스트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난감해 하는 라에르를 위해 주점 주인 미레야는 주점 안에 있던 용병들을 죄 다 밖으로 내몰아버리는 호의를 베풀었다. 쫓겨난 용병들에게 미안하 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카스트로는 지금의 상태도 괜찮다고 생각했 다. 무엇보다 술이 넘치도록 서비스되고 있었던 것이다. 몇번이고 술을 들이켜던 카스트로는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과 이리저 리 삐죽거리는 머리의 로페냐를 보고 다시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웃지 마십시오, 전하. 이게 다 전하를 찾아다니느라 당한 수모 의 흔적이니까요." 이십대중반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는 로페냐 의 모습이 웃겼다. "나는 따라오라고 한 적 없소, 로페냐경." 로페냐는 불만스레 입을 우물거렸지만 시원스런 대답을 찾아내지 못 했다. 카스트로는 다시 시선을 옮겨 세니크를 바라보았다. 파리해진 얼 굴로 눈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왕실 끄나불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어. 이미 할 말 못할 말 다한 처지에 이제와서 겁이라도 나는가?" "……죽여주십시오." 도둑이라도 잡은 듯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아까의 설전때부터 꺾인지 오래이고, 세니크는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의 완벽한 저자세로 바뀌어있 었다. 카스트로는 뻑뻑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한손으로 문지르고 한숨 을 쉬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취해 오는 몸과는 달리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하는 걸까. "로페냐경." "네, 전하." 카스트로는 무너지려는 몸을 턱을 괴어 지탱한 채 로페냐를 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왜 경을 친구로 맞을 수 없는 지 아직도 모르겠소?" 번쩍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는 로페냐에게 카스트로는 엷은 미소 를 지어주었다. 씁쓸한 느낌이 아련하게 감도는 미소였다. "아무래도 취중에 주정하는 것 같지만……, 조금, 옛날 이야기를 하 나 할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술과 더불어 이야 기를 풀어내었다. "카르노는……, 이 자피아 대륙에서도 두세번째를 다투는 대국이었 소. …라디프야 워낙 땅덩어리가 크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지만, 레이 얄과는 정면으로 붙어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었지. 솔직히 나는 어느 라와 전쟁을 해도 지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해." "……." 과거형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자부심마저 살짝 엿보이는 어조였다. 로페냐는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채고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잡았 다. 카스트로는 비싯 힘없이 웃고 술잔을 들어 입에 들이부었다. 혀마 저 제 기능을 상실했는지, 이제는 독한 맛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달기 만 했다. "지리적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카르노와 레이얄이 앙숙인 것은 어 쩌면 당연한 일이었지. 하지만 세력이 비등비등한만큼 양국이 싸우면 소모전밖에 되지 않아. 전쟁의 이득은 광산이 많은 라디프와 타고난 장사꾼들인 비쉬에게 돌아갔고, 그래서 이래저래 지쳤던 카르노와 레 이얄은 잠정적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게 30년전의 미노 조약이 었지." 카스트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확히 16년 뒤, 레이얄과의 접경지대이자, 미노 조약이 맺 어졌던 그 미노에서 미노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누구도 카스트로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 다. 로페냐도, 라에르도, 세니크도 마치 처음 듣는 말인 양 카스트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말하는 것이, 대륙 정세를 보는 카스트로의 시각일 터였기 때문이었다. "워낙 변방이라,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왕실의 탓 도 있다. 그저 영지간의 분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몇 년이나 끄는 데다 조금씩 미노에 복속되는 영지가 늘어나자, 국왕폐하께서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으셨지. 처음에는 왕명으로 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지 만……," 후훗. 카스트로는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돌아온 것은 국왕의 특사로 갔던 자들의 수급과 정식 선전포고였 다. 그제서야 폐하는 그것이 반란이라는 것을 깨달았던거야. ……국왕 폐하께서는 그 즉시 기사단과 용병대를 보내셨지. 처음에는 예상대로 왕실의 승리였어. 그대로라면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군의 수뇌 미노 공 작은 아르노로 압송될 예정이었지. 그랬다면 오늘의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미노 공작은 그대로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레이얄을 끌어들였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어렸을 때, 기억조차 나지 않는 때에 일어난 일들이었지만, 그의 스승들로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말들 이었다. 그 천인공노할 미노 공작의 반란부터, 카르노의 내분에 외세를 끌어들인 용서할 수 없는 배반행위. "지리한 싸움이었다고 들었다. 실제로 근 5년이나 끌었으니까. 카르 노나 레이얄이나 언제나처럼 소모전에 지쳐가고 있었지. 그때쯤 강화 회담이 양국간에 오갔고, 다들 그렇게 전쟁이 종식되리라 생각했다. 하 지만 그때, 끼어들지 말아야 할 자들이 끼어든거요, 로페냐경! 그것도 가장 추잡한 방식으로!" 카스트로의 일직선적인 시선이 로페냐에게 가 닿았다. 로페냐는 비 난하는 듯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왜 경을 친구로 대할 수 없는지, 대답이 되었을까?" "하, 하지만 그것은 국가간의 일일뿐이고, 전하와 제가 친구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로페냐가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카스트로는 냉정하게 물었다. "로페냐경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 카스트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로페냐를 쏘아보며 말했다. "경은 자신을 테라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수 없소. 나는 카르노의 왕자고, 어느 한순간도 내가 카르노라는 것을 잊고 산 적은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내가 보는 로페냐경, 당신은 테라의 사신으로 온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요. 그것도 나를 테라에 볼 모로 끌고 갈 사신의 우두머리!" 로페냐는 절망을 느꼈다. 절벽끝에서 시커멓게 입벌리고 있는 밑바 닥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암담했다. 하지만 로페냐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죄다 해볼 양으로, 로페냐는 오기 부리 듯 말했다. "그렇다고해도, 그것은 5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전쟁은 끝났고, 미노 는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테라, 카르노, 레이얄 삼국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강화조약을 맺었지 않습니까?" 카스트로는 갑자기 사나워진 눈초리로 로페냐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 겼다. 테이블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잇새 로 내뱉는 말들은 한음한음에 분노와 원한이 맺혀있었다. "평화? 너라면 수도가 포위되고, 왕궁이 적들로 우글거리는 속에서! 일가를 한 방에 몰아넣고 서명하지 않으면 가족을 죽이겠다고 위협하 는 속에서! 시퍼런 검날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의 목위에서 번뜩이는 가운데 조인된 조약이, 진정 대륙의 평화를 위한 정당한 조 약이라고 생각하나?" 하얗게 질리는 로페냐를 내팽개치듯 풀어주고, 다시 앞에 앉아있는 세니크를 노려보았다. 치솟아오른 분노를 누구에게라도 풀어야할 것 같았다. "왕실이 우습게도 보이겠지. 그 치욕적인 서명으로, 미노보다 더 큰 땅덩어리 두 곳을 미노에 얹어주고, 얼토당토앉은 배상금으로 국민들 의 고혈을 짜내는 무능하기만 한 왕실! 우습지! 나도 우스워서 기가 막힐 지경이야!" 카스트로는 피식 웃고, 머리속에 스치고 간 생각을 입에 올렸다. "앞으로는 더욱 가관일 것이다. 열렬한 환영속에 귀국한 왕세자는 이미 카르노의 지배자가 아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테라의 종 이 되어 돌아왔으니까!" 아베르노의 콧수염달린 얼굴이 눈앞을 스치면서, 카스트로는 더욱 부아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카스트로는 코웃음치며 가까이 있는 테라 인, 로페냐를 쏘아보았다. "내가 왜 경을 친구로 맞을 수 없느냐고? 난 레이얄 이상으로 테라 를 증오해! 내가 잊을 수 있을 것 같나? 그 밤에 자행된 기막힌 학살 을! 내 눈앞에서 그때까지 나를 키워준 내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 어가는 것을 보면서, 열두살의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왕 궁 복도 구석구석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시종과 시녀, 기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무엄하게 나와 내 가족을 보며 히죽대는 놈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 을 것 같아, 내가! 맹세커니와, 나는 힘이 된다면, 테라에 살아남은 쥐 새끼 한 마리까지 잡아죽일거다! 내 말 알아듣나, 테라의 하야로비 후 작 로페냐경!" 소름이 끼칠 만큼 지독한 원한으로 만들어진 창에 심장이 꿰인 것처 럼 로페냐는 심장이 아파왔다. 로페냐는 테라와 한족에 광신적이지는 않았지만, 테라의 국민으로서 최근의 두드러진 성과에 은근히 기뻐했 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었던 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도, 친구라는 것은 불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해!" 로페냐는 딱 잘라 말하는 카스트로에게 다시 한번 더 깊은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페냐는 불굴의 의지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좀더 노력하겠습니다!" "……!" 다른 세사람이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로페냐를 바라보았지만, 로페 냐는 꿋꿋하게 말했다. "좋다고 하실 때까지 따라다니겠습니다. 질려서라도 허락하시게 할 겁니다." 그때, 쟁반에 안주거리를 잔뜩 들고 온 미레야가 기세좋게 외쳤다. "안주 나왔습니다. 특별한 손님을 위해 준비한 특급 사슴요리 되겠 습니다." 잠시 서늘한 침묵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카스트로가 허물어지듯 웃는 것으로 침묵의 마법은 깨어졌다. 라에르는 미레야에게 감사하며, 내밀어지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마셔댔다. 밖에는 어느새 초겨울의 쌀쌀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 에 걸쳐, '미레야씨네 주점'에 있는 술들을 모조리 뱃속으로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서리가 소리없이 내려앉은 초겨울의 아침은 그 차가움만큼 맑고 깨 끗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두터운 유리창 틈새로 들어와 사람들의 아침을 뒤흔들어 깨운다. 소르미노 자작가의 차남 시에르 폰 소르미노는 기꺼운 마음으로 새아침을 맞이했다. 오늘도 아름다운 천 사 아가씨를 만날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시에르는 하인이 떠다준 물로 후다닥 세수를 마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빵 냄새가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 "어서오렴, 시에르." "안녕히 주무셨어요, 작은 나으리." 어머니와 하녀 토라가 시에르에게 아침인사를 전했다. 시에르는 방 싯방싯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어머니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고 토라도 잘 잤어?" "예, 작은 나으리." 아직까지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간직한 소르미노 자작부 인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라에르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더구나. 네가 가서 깨워오겠 니?"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어요, 형이? 무슨 일이죠?" 자작부인은 여성스럽게 틀어올린 연갈색 머리를 살살 내저으면서 대 답했다. "새벽에 들어오긴 한 것 같은데, 아직 내려오지 않는구나." "네, 제가 올라가볼게요." 시에르는 다시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형이 아직까지 일어 나지 않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늦게 잠이 들어 도 칼처럼 시간을 맞춰 일어나던 형이 아닌가! 그 의문은 직접 물어보 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에르는 앞에 있는 방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형? 아직 안일어났어? 나 들어간다."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지독한 술냄새가 물씬 물씬 풍겨왔다.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기분에 잠깐 물러섰다가 문을 확 열고 안을 들여다 본 시에르는 방안의 희한한 풍경을 목격하 고는 그대로 석고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 로마여!" 신음처럼 내뱉은 시에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 었다. 방안은 그야말로, 황당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방 안의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는 웬 용병차림의 한 남자가 제 침대인 양 아주 편안하게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 용병의 표정으로 보아 무언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시에르는 절대 그것이 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그러면 얇은 융단 위에 몸을 웅크리고, 비참하고 안스럽게도 이불 하나없이 추위에 떨며 서로의 다리와 가슴을 끌어안고 자고있는 세 남 자에게 너무 미안한 일일 테니까. 방안에는 어디서 많이 보던 술병들 이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닭뼈다귀와 튀김 같은 것이 번들거리면서 접 시와 바닥에 흩어져있었다. 시에르는 발을 내딛기도 끔찍한 방안으로 한발을 들이밀었다. 잘못 해서 술병이나 뼈다귀를 밟지 않도록, 그리고 혹여나 실수로 자고있는 남자들을 밟을 세라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파고들었다. 라에르는 뒤엉켜있는 남자들과 침대 사이를 가로막듯이 하고 잠들어 있었다. 두 다리가 두 남자에게 깔려있었지만, 용케도 코까지 골면서 잘 자고있는 형에게 경의를 표하며, 시에르는 라에르의 옆으로 가는데 성공했다. "형! 형! 일어나, 형." 가만히 몸을 흔들자, 끄드득거리면서 몸을 돌아뉜다. 시에르는 좀 더 힘주어서 흔들며, 라에르의 귓가에 대고 소리질렀다. "일어나, 형! 왕궁에 안가? 늦었다구!" 그제서야 라에르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꽤나 무거운 모양인지 다 들어올려지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말은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왕…궁?" "그래. 빨리 가봐야하지 않아?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뭐 야?" 시에르가 손가락질하는 것을 덜 깨서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라에르 는 한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두 다리가 무참하게 깔린 라에르가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음을 내지르면서 주저앉는 라에르를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 던 시에르는, 라에르의 다리에 얹힌 머리와 다리를 치워주고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야? 형답지 않게 이렇게 취해서 정신도 못차리고. 그리고 저 술병, 아버지꺼지?" "아아……." 라에르는 추궁섞인 시에르의 말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침대를 보았 다. 이불을 덮고 불편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자리가 바뀌어 괴로운 것 같았다. 라에르는 장시간 깔려있 던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다리를 주물렀다. 숙취때문인지 머리 도 아프고, 제대로 자지 못해 몸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몸의 뭉친 근육을 풀고나서, 라에르는 이것저것 시에르에게 지시했다. "너는 저 사람들 좀 깨워. 그리고 하인에게 따뜻한 세숫물 좀 올리라 고 하고." 시에르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라에르의 눈이 고정된 곳에 있는 남 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응. 근데 저 사람 누구야? 손님주제에 떡하니 주인 침대를 혼자 차 지하고……" "말조심해라, 시엘. 내 주군이시다." 시에르의 입이 놀라서 벌어졌다. 저절로 눈이 그쪽으로 되돌아간다. "저 사람이 카스트로 전하라고?" 부친과 형이 친위대원이고, 또 자신도 왕실 근위대원이지만, 실제 왕 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전하.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 하." "……." 라에르는 카스트로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전하?"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카스트로의 어깨를 흔들던 라에르는 문득 이 상한 느낌을 받고, 카스트로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 하게 묻어났다. 라에르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시에르는 저도모르게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왜그래, 형? 어디 아프신거야?" 라에르는 머리를 젓고, 좀더 강하게 카스트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 다. "전하! 전하! 일어나십시오! 전하---!" 순간 헉! 하는 숨을 내쉬며, 카스트로의 검은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작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거친 숨이 몰아쉬어진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가위눌리신 것 같은데……, 역시 늦었더라도 왕궁으로 모실 것을……." 카스트로는 쿵쿵쿵쿵 온몸을 두들겨대는 고통스런 맥박에 얼굴을 찌 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엄습하는 두통으로 이마를 손으로 누르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물……." 라에르는 눈짓으로 시에르에게 지시하고,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안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시에르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트로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고, 얼굴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침대와 옷장 외에는 제대 로 된 가구도 없는 검소한 방이 새벽까지 술을 퍼마신 네 사내들로 난 장판이 되어있었다.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자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못 처량해 보인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쿠션 껍데기를 벗겨 빨겠다고 과감하게 벗겨, 껍데기를 고이 모셔두고 알맹이를 들고 세탁기로 다가가는.. 가공할 건망증의 주인... 새였음당.. --; (스스로 충격받았음)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5 - 관련자료:없음 [3008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5 21:17 조회:185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5 - ==================================================================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곳을 찾아 더듬거리던 로페냐는 한순간 목덜미에 굉장히 무거운 어떤 것인가가 턱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며 눈을 뜨자, 굵 직한 다리 하나가 자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로페냐는 두손으로 다리를 밀쳐내고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 정도 호흡을 진정시키고 주위를 둘러보던 로페냐는 여전히 코를 골고 자고있는 세니크를 쳐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가……어디지?" 독백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깨끗이 무시되었다. 하지만 로페냐는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전날 네명이 줄기차게 술 마시 던 일을 기억해냈다. "곧 따뜻한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전하?" 로페냐는 얼결에 따라서 발음하다가, 핫, 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카스트로 전하!" 카스트로는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페냐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잘 주무셨소, 로페냐경?" "예? 아, 예." 그다지 잘 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로페냐는 그렇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온몸이 삐그덕거린다. 일그러지는 로페냐의 얼굴을 지켜보던 카스트로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가를 바라보았다. "물 가져왔습니다." 라에르는 쟁반 위에 든 물컵을 카스트로에게 건넸다. 카스트로는 물 방울이 송송 맺힌 물컵을 받아들고, 손바닥에 묻어나는 차가운 느낌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차갑게 느껴지는 물을 쭉 들이키 고 나자, 이제 기운도 나는 것 같다. 카스트로는 얇은 커튼에 가려진 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지금 몇시쯤 됐지?" 라에르가 다시 시에르를 쳐다보자, 시에르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 다. "아홉시가 넘었습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물컵을 라에르에게 건네주며 시에르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라에르가 대답했다. "제 동생입니다. 시엘, 전하께 인사드리거라." 시에르는 술병과 세니크의 팔로 복잡한 곳에서도 용케, 몸을 굽히고 격식에 맞춰 인사를 했다. "카르노 왕실 근위대 소속, 시에르 폰 소르미노입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거의 자신만큼이나 큰 라에르에 비해 훨씬 작아보이는 시에르는 옅 은 갈색의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앳된 모습의 소년이었다. 카스트로 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다, 시에르경. 형제라지만, 라엘과는 많이 틀려보이는 군." 라에르는 방금 들어온 하인에게 물컵과 쟁반을 건네고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닮은 편이고, 시엘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전하, 세 안하실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라에르는 카스트로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면서, 한편으로 는 시에르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세니크씨를 깨워줘, 시엘. 어머니와 토라에게 3인분의 식사를 더 부 탁하고. 참, 시내 지리를 잘 알고있는 발빠른 하인을 불러줘." "발빠른 하인?" "응. 뭣좀 찾아올 게 있어서." 시에르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발밑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사내를 흔 들어 깨웠다. 로페냐는 방안을 휘휘 둘러보면서, 자신의 스틱을 찾고 있었다. 방 한쪽에서 세수를 하고, 라에르가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카스트로는 정신없는 방안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카스트로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어수선한 아침이었다. 카스트로와 라에르, 그리고 로페냐는 소르미노 자작가의 마차를 타 고 왕궁으로 향했다. 근위병들은 이른 아침에 왕궁으로 들어오는 삼왕 자의 모습에 놀란 듯 했지만, 카스트로는 다른 생각에 깊이 몰두해있 었다. 아침에 꾸었던 꿈 때문인지, 카스트로는 내내 기분이 편치 않았 다. "전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계십니까?" 라에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카스트로는 애써 아무 것 도 아닌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지금 들어가면 베제르가 몇시간이나 붙들고 설교를 할지 생 각중이야." 카스트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게 걱정되어서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것이리라. 시종장 베제르가 자신을 부르며 울어대는 모습은, 정말이지, 지독한 악몽이었다. 로페냐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라에르는 알아들었 다는 듯 피시식,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누구보다 꼬장꼬장한 잔소리꾼 인 시종장 베제르는 절대, 어제의 무단외박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이다. "아, 그렇지. 로페냐경도 나와 같이 내 궁으로 가지." "네?"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었던 까닭에 로페냐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하고, 빙글 웃었다. "이번 일은 나뿐만 아니라, 로페냐경이 따라와 일이 커져 생긴 일이 니까 공동책임을 져야하지 않겠소? 나 혼자 베제르의 설교를 듣기에는 조금 억울하니까, 경이 옆에서 같이 혼나든, 내 비호를 해주든 해달란 말이오." 로페냐는 그 짧은 시간에 수십번이나 대답할 내용을 뒤바꿨다. 카스 트로가 자신을 궁에까지 초대해준 것은 친구로 발전될 가능성이 상당 히 높아진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가자는 이유가 같이 혼나자, 라는 거라니 조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베제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삼 왕자를 혼낼 정도면 만만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싫으면 그만 두시오." 재깍 제안을 철회하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로페냐에게 즉각적인 답변 을 촉구했다. 뭔가에 떠밀리는 기분으로 로페냐는 입을 열었다. "전하의 궁까지 동행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감추고, 근엄하게 대답했다. "로페냐경만 믿겠소." 로페냐는 한없이 불안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면서부터, 아니 꿈속에서부터 이어진 불안은 삼왕자궁의 2층 복도로 가면서부터 더욱 증폭되었다. 시종장 베제르의 성격대로라면, 궁에 있는 궁내부원을 죄다 풀어 들들 볶아대며 연신 탄식을 하고 있 어야 옳았다. 밤을 새워서 지쳐 들어간건가, 라고 생각해보려고 해도, 역시 뭔가가 이상했다. 삼왕자궁으로 들어올 때부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궁내부원들도 이상하고, 그들의 표정도 뭔가 이상했다. 별 것 아 닌 것 같으면서도 기묘하게 신경을 긁어내리는 것이 있었다. 카스트로 는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을 짓누르며, 방문을 지키고 있는 궁내부원들과 친위대원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카스 트로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빨라져있었다. 응접실을 지나, 작은 방으 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카스트로를 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제 자리에 있었고, 카스트로는 그것이 더욱 불안했다. 침실로 들어선 순간, 카스트로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침실을 둘러보았다. 카스트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 면서, 몸을 돌리고 말했다. "밖에 있는 시종, 아무나 불러와." 라에르는 멀뚱히 서있는 로페냐를 흘끗 보고, 뭔가 탐탁지 않은 기 분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궁내부원 두 명을 부르 자 유령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된다. 라에르는 인상을 찌푸 리며 그들을 재차 불렀다. 그들은 마치 뒤로 물러가는 느낌으로 침실 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카스트로는 엄한 눈길로 두 사람을 향해 물 었다. "시종장 베제르는 어디 있느냐?" 누렇게 뜬 얼굴이 퍼렇게 질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 며 서로에게 대답을 미루었다. 카스트로는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을 보 고,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시종장 베제르가 어디있는지 묻고 있지않느냐!" 로페냐는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놀라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그리 고 순간적으로 왁!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두 궁내부원에게 다시 황당 한 시선을 돌렸다. "베, 베제르 시종장께선……, 흐윽, 어제 그만……" 카스트로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베제르가 어제, 뭘 어쨌다는 건가?" 방금 말한 궁내부원의 옆에 있던 궁내부원이 못 다한 말을 대신 이 었다. "어제 저녁 무렵에, 왕세자비 전하의 명령으로 처형되셨습니다." "……!" 카스트로를 향해있던 라에르의 시선이, 믿기 어렵다는 듯 앞에서 울 먹이며 떨고있는 궁내부원에게 돌려졌다. 로페냐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궁내부원들과 카스트로의 기색을 살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방비하게 커졌던 카스트로의 검 은 눈이 섬뜩한 분노를 품고 번뜩였다. 로페냐는 자신을 향한 분노가 아님에도, 숨이 막힐 듯한 압력을 받으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굳어버 렸다. "……뭐라고 했지?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무섭게 압박하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 궁내부원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며 머리를 찧어댔다. "용서해주십시오, 전하. 저희들로서는 왕세자비 전하의 진노를 막지 못하여, 그만……." 쿵! 카스트로는 바닥을 구르며, 윽박질렀다. "왕세자비가 왜 베제르를 처벌해! 우는 소리 그만하고, 자초지종을 말하라!" 궁내부원은 번갈아가며, 떠듬거리는 소리로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 기했다. 그 내용은 제삼자인 로페냐가 듣기에도 황당한 일이었고, 라에 르에게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시종장 베제르의 손 으로 커온 카스트로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베제르의 시신은 어찌했느냐?" 충격으로 떨리는 목소리는 점차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워졌다. "……전하의 말을 거역한 자는 이리 된다 하시며, 궁내부원들을 시 켜 그 시신을 소각장에다가 버리게 하셨습니다." 간헐적인 훌쩍임 속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카스트로는 부들 부들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희고 단단한 이빨이 연한 살갗을 파 고들어 새빨간 피를 자아냈다.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어찌할 수도 없 이 오한이 나고 온몸에 열이 퍼졌다. 하얀 눈자위가 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목이 메이는 아픔에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고 노력 했다. 전신을 두들기는 분노와 가슴한구석에 싸하게 퍼지는 슬픔, 그리 고 머리속 한구석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자책감이 뒤얽혀 카스트로 를 폭풍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나온 목소리는 뜨거운 심장을 얼릴 듯 차고, 섬뜩했다. "시신을 쓰레기와 함께 태웠다? 그래서 이제 시신도 남지 않았단 말 인가?" "……그러하옵니다, 저언하." 카스트로는 극심하게 아파오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찌잉- 하는 소리가 귀속에서 울렸다. 갑자기 까맣게 변하는 시야에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갔지만, 뒤를 받쳐주는 손길에 의해 서서히 정신을 되찾았다. "전하……." 라에르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카스트로는 머리를 내저어 흐려진 시야를 바로 하려했다.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은, 빛과 어둠이 점멸하는 시야속에 아침에 꾸었던 꿈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울고 울 고, 또 울어서, 대체 왜 그러냐고 윽박질렀었다. 베제르는 머리를 내젓 고, 계속 눈물만 흘려대고 있었다. 여느 때의 베제르같지 않았었다. 그 토록 말이 많은 베제르가 아무 소리도 없이 울기만 하다니, 너무 이상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는 예 상하지 못했었다.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왔지만, 그 아픔보다 더한 분 노가 카스트로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리 억울해서, …그렇게 울었었나?" "……?" 카스트로를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의 아하게 생각했다. 카스트로는 자신을 부축하는 라에르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버텨섰다. "유언은?" 두 궁내부원은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아무리 생 각해봐도 유언은 없었다. "유언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어서도 왕세자비 전 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겠노라고." 카스트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베제르의 마지막 말이 라면, 그것이 베제르의 유언이라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자신을 키워 주고 돌봐준 사람이었다. 가끔 들여다보는 국왕폐하보다, 엄격하게 교 육시키던 왕비전하보다, 기억도 나지않는 유모보다 더욱 심적으로 가 깝게 느끼는 사람이 바로 베제르였다. 도에 넘치는 응석과 짖궂은 장 난을 웃고 우는 얼굴로 받아주던 사람이 바로 베제르였다. 매일 매시 간, 자신의 걱정을 하지않은 때가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 때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없는 틈을 탄, 저 미치 광이 레이얄 계집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저 미치광이 레이얄 계집에게!' 복수는 당연한 것이다. 설사 베제르의 그런 유언이 없었더라도, 자신 이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겁도 없이 삼왕자궁까지 쳐들어와 저지 른 만행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생각을 드러내듯 카스트로의 손이 허리에 매어놓은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로페냐는 숨도 못쉬고 카스트 로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제르의 유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 계집년을 처참하게 죽여주 지." 씹듯이 내뱉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는 카스트로를, 뒤늦게 쫓아 달려나간 라에르가 가로막았다. 라에르는 애원했다.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설마 왕세자비 전하를 베러 가시려는 겁니 까? 안됩니다. 안됩니다, 전하!" "비켜라, 라에르!"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왕세자비 전하를 죽이면, 전하께서도 무사 하시지 못합니다!" "비키라고 했다!" 카스트로는 꿈쩍도 하지않는 라에르를 밀치고, 계속 문으로 향했다. "진정하십시오. 제발, 전하. 조금만이라도 이성을 찾으십시오! 왕세자 비 전하를 죽이면, 그 뒷감당은 어찌 하려 하십니까?" 라에르가 지나치는 카스트로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다시 앞을 가로 막았다. 카스트로의 얼굴이 점점 험상궂어지고 있었다. "진정? 지금 베제르가 그 레이얄 계집에게 죽었다는 말 못들었나? 그 계집이 제멋대로 내 궁에 들어온 것만도 기가 막힌데, 뭐? 감히 내 시종장을 내 궁까지 쫓아와 죽여? 죽여버리겠어! 레이얄 계집 따위가 감히 카르노에 발 붙인걸 후회하게 만들어줄테다!"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라에르를 힘껏 떠밀었지만,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라에르를 떼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라에르는 오히려 카스트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카스트로의 전진을 막고 있었다. "전하! 지금까지 잘 참으셨지 않습니까? 왕세자비 전하를 해하시면, 왕세자 전하께서 전하를 그냥 두시겠습니까? 레이얄 국왕이 가만히 보 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점에 전쟁이라도 다시 일으키실 셈입니 까? 조금만 참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녀는 카르노의 왕세자비이고, 시종 장 베제르는 일개 시종장일 뿐입니다." "그래서 베제르가 그 계집에게 죽는 게 당연하다는건가?" 거의 이성을 잃은 카스트로는 분노의 방향을 라에르에게로 바꾸었 다. 라에르는 거의 카스트로의 허리를 잡고 매달려 있는 상태로, 간절 하게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건 전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종장 베제르가 전하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이거나에 상관없이, 그는 일개 시 종장일 뿐입니다. 남들의 눈에는 왕세자비의 신분으로 시종장 하나 죽 인 거, 그리 대단치 않게 보일 겁니다. 여기서 전하께서 베제르의 복수 를 한다고 왕세자비 전하를 죽이신다면, 레이얄의 분노뿐 아니라, 전 대륙인이 전하를 비난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허리를 감은 팔의 안쪽에서 카스트로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라에르 는 자신의 어깨를 잡는 카스트로의 손길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그 레이얄 계집 을 용서할 수는 없어. 그 계집이 하루하루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이, 베제르와, 나에 대한 모욕이다." 타아악----! "……!" 로페냐는 갑자기 손을 들어 라에르의 뒷덜미를 내려치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에르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힘을 잃고 몸을 무너뜨렸다. 카스트로는 다른 손으로 라에르를 받아 바닥에 뉘었 다. 라에르를 향해 속삭이는 카스트로는 울 것처럼 슬픈 눈을 하고 있 었다. "미안. 이번에는 내 뜻대로 하겠다." 카스트로는 기절한 라에르를 뒤로하고,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거 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살을 에이는 위험스러운 살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 ...하드한 내용은 쓰는 사람의 기운도 쏙 빼놓더군요.. ...그런데 누군가의 '불행한' 멜을 받고 기운이 업되는 이유는... --; ...좋은 하루 되세요... ^^ -사악한 새디스트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6 - 관련자료:없음 [3012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6 21:26 조회:182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6 - ================================================================== 꺄아아아아아----------! 공기를 잡아찢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왕세자궁의 1층 홀에 울려퍼진 다. 홀에서 일하던 시녀들은 바깥경비를 뚫고 말과 함께 쳐들어온 불 청객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전하!" 천장이 높은 홀의 가운데에서 시커먼 말이 투레질을 하며 오만하게 서있었고, 그 위에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줄기줄기 살기를 쏟아내는 검은 눈의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주인인 왕세자 아베르노와 무척 이나 닮은 그 청년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친위대원들에게 겨누었다. "비켜라. 내 앞을 막는 자는 죽이겠다." 잠긴 듯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생생한 분노와 더해져 그 자리 에 있던 모든 친위대원과 시녀들의 뇌리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오싹한 두려움이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몸을 묶어놓는다. 카스트로는 자신을 막아섰던 자들의 피가 묻은 검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떨구어내었다. 선혈이 근처에 있던 친위대원들의 얼굴과 옷에 흩뿌려졌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은 친위대원들에게 한층 더 가중된 두려움을 선 사했다. 카스트로는 말고삐를 잡아채어, 멍하니 서 있는 친위대원들을 뚫고, 잽싸게 홀 안쪽에 있는 계단으로 말을 몰아갔다. 뒤늦게 쫓아오 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스트로가 훨씬 빨랐다. "막아! 뭣들하는 거냐!" 뒤쪽에서 들리는 고함소리를 무시하고 경사가 낮은 길다란 계단으로 말을 몰았다. 카스트로가 아끼는 준마는 별 어려움 없이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왕세자궁의 서쪽, 왕세자비의 사실로 쓰이는 4개의 방중, 응접실로 쓰이는 세 번째 방에는 왕세자비 라에니를 비롯해 모리노 남작부인 주 디나와 몇몇 귀부인들이 모여 오전 한때의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전 날 한 노인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몇몇은 기절까지 했었던 그녀들이지 만, 지금 그녀들은 그런 험한 일은 본적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차와 과자를 먹으며 최근 테라에서 유행하는 드레 스와 장신구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왕세자비의 시녀장 로냐는 라에니의 시중을 들다가 귀에 거슬리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를 들었 다. "무슨 일이냐?" 라에니가 찌푸린 얼굴로 돌아보자, 로냐는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잠시 밖에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왕세자비에게 허락을 구한 뒤 문밖으로 나선 로냐는 때마침 2층으로 올라오는 카스트로와 눈을 마주쳤다. 로냐는 그대로 짓쳐들어오는 카 스트로에게 놀라 입술을 벌렸다. "……!"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죽일 듯이 쏘아보는 무시무시한 눈이 로냐 의 비명을 동결시켰다.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꼼짝못하고 있는 로냐의 앞을 방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원들이 막아섰다. 그제서야 로냐 는 마음놓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로냐의 얼굴위로 뜨거운 액체가 퍼부어졌다. 두 손이 비명을 지를 때의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고, 로냐는 자신에게 쏟아진 붉은 피 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성큼 로냐의 앞으로 다가 온 카스트로는 무자비한 표정으로 로냐의 목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 끝을 들이밀었다. 시커먼 말 위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테라에서 말로만 듣던 악마의 모습, 그 자 체였다. 로냐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듯, 피묻은 검 끝으로 로냐의 목을 찔러들어가며 물었 다. "너, 그 레이얄 계집의 시녀장이었지? 레이얄에서 따라온 거냐?" 핏기를 찾아볼 수 없는 로냐의 얼굴이 뻣뻣하게 끄덕여졌다. 카스트 로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로냐의 목으로 검을 마저 찔러넣었다. "네가 여기 있다면, 그 계집도 여기 있다는 거겠지. 의외로 쉽게 찾 았군." 카스트로는 쓰러지는 로냐의 무게로 묵직해지는 검을 빼어내고, 검 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안장을 짚어 말 위에서 가볍게 내려왔다. 발밑에 쓰러진 친위대원 둘과 로냐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루어 질척하게 부츠를 적신다. 카스트로는 찡그린 얼굴로 방문을 가로막고 있는 로냐와 친위대원들의 시체들을 발로 밀어내었다. 발끝에 물컹한 사람의 살덩어리가 느껴지는 것이 기분 나빴다. 카스트로는 방문 앞에 서서 다소 흥분된 숨을 가라앉히고, 다음순간 거칠게 문을 열어제꼈다. 순간 놀란 모습의 귀부인들이 일제히 카스트로를 쳐다보았고, 그것은 곧 내기라도 하는 듯한 비명소리의 합창으로 이어졌다. "뭐어?" 왕세자궁의 동쪽 깊숙한 곳에 있는 왕세자의 집무실에서, 아베르노 가 방금 들은 황당한 소리에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아베르노는 고풍 스러운 책상 뒤에서 몸을 일으켜 앞에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왕세자 비의 거처인 궁의 서쪽에 배치된 친위대원 중 한명으로, 테라에서도 함께 해온 처지라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한시가 급합니다. 저희로서는 삼왕자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할 수 없어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삼왕자 전하께서는 몹시 흥 분하시어, 사람을 베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시고……." 아베르노는 책상 뒤에서 나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급한 걸음으로 궁의 서쪽을 향하면서 이 황당한 사태에 대한 자초지종을 물 었다. 친위대원은 어제 저녁부터 떠돌던 소문에 대해 들은대로 알려주 었다. 아베르노는 라에니가 시종장 베제르를 죽여버렸다는 말에 경악 하며 멈칫했지만, 곧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평소의 위엄있는 아베 르노라면 생각도 못할 욕설이 터져나왔다. "빌어먹을! 이 머저리같은 계집이 기어이 사고를 치는군!" 뒤따르던 친위대원은 그 소리에 놀라서 발을 멈추고 멍하니 아베르 노를 쳐다보았다. 그 존경하는 왕세자 전하에게서 나온 말이 맞는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그에게 친위대 부대장이며 아베르노의 호위기사인 세시르경이 어깨를 툭치며 뛰었다. "뭘 멍하니 있는건가? 빨리 오게." 친위대원은 머리를 힘차게 내저어 방금 전의 일을 부정하며, 세시르 경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감히 내게 검을 겨누는가?" 카스트로는 증오와 분노로 말을 빚어내며, 자신을 가로막은 친위대 원과 그 뒤에 있는 여자를 싸잡아서 노려보았다. 바로 몇 걸음만 가면 닿을 거리에서 그 증오스런 레이얄 계집이 숨을 쉬고 살아있었다. 카 스트로의 살기어린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라에니는 두려움에 숨이 막 혀 쓰러질 것 같았다.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라에니를 부축했다. 주디나는 이 뜻밖의 사태를 맞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왕세자비 라에니를 걱 정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라에니의 곁에 있다가는 생각지도 않게 저 피먹은 검날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미카에르 영 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라에니를 버려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 다. 도망갔을 경우에 라에니가 죽는다면 모르지만, 라에니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한다는 말인가. 이런 주디나의 꿍꿍 이를 알 리 없는 라에니는 카스트로의 한마디에 죄다 도망가버린 귀부 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디나의 팔을 생명줄인양 부여잡고 있었 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친위대원을 쏘아보았다. 자신만큼이 나 큰 키에 자신보다 훨씬 큰 덩치의 그 친위대원은 다른 자들과는 달 리, 정말로 카스트로와 일전을 치를 듯한 태세였다. 지금까지 허수아비 처럼 검을 들고 막아서던 친위대원들을 별 어려움 없이 베며 진입해 들어왔던 카스트로는, 감히 자신에게 검을 맞대려하는 이자가 더욱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정식으로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친위대원인 이 자 가 왕자인 자신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조건을 충분히 인지하고 싸운 다해도, 끔찍하게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사단원과 근위대원 중에서도 검술이 뛰어난 자를 고르고 골라서 임 명하는 것이 친위대원이다. 연줄로 임명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근위대 와는 달리, 왕족의 신변을 책임지는 친위대는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임 명된다. 그런 친위대원들 중에서도 왕세자비의 호위기사로 임명되었다 는 것은 이 자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카스트로는 바로 눈앞에 저 레이얄 계집을 두고 이렇게 저지된다는 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비켜서라! 네 놈도 카르노의 사내라면, 저 레이얄 계집을 감싸고 도 는 게 얼마나 저주받을 일인지는 잘 알텐데?" 카스트로의 말에 마음속 깊이 동감하며, 왕세자비의 호위기사 제피 르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꿈에 부풀어 기사단에서 친위대로 이적했을 때에는, 장차 자신이 레이얄인을 호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래도 카르노의 국모가 될 여자라고 자신을 위로하던 제피르경에게, 라에니의 거만하고 제멋대로인데다 잔인하기까지 한 모습은, 정말이지 자신과 자신을 이 레이얄 여자에게 붙여준 친위대장을 저주하게 만들 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왕세자비의 호위기사였고, 자신의 의무 를 망각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에게는 왕세자비 전하의 신변을 지켜야할 의무 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전하께 죄를 짓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 다." 카스트로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두려움 섞인 라에니의 외 침이 긴장된 공기를 찢어나갔다. "저 무례한 자를 죽여, 제피르! 저 자는 너도 그냥 놔두지 않을거야. 네가 그 노인을 죽였잖아! 그러니까 네가 저 자를 죽여! 뭐해? 죽이지 않고!" 카스트로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 제피르경은 차라리 허탈해졌다. 라에니의 발악적인 외침에 담긴 사실을 인식한 순간, 카스트로는 무의 식중에 검을 꽉 움켜쥐었다.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카스트로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나왔다. "네가 베제르를 죽였나?" 제피르경은 자신의 손으로 왕세자비를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을 억누 르면서,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게 겨눈 이 검이 베제르를 벤 검인가?" 재차 확인을 요구하는 카스트로에게, 제피르경은 솔직한 대답을 주 었다. "……그렇습니다." 카스트로는 한 걸음 물러서서 거리를 만들며 제피르경에게 검을 겨 누었다. 제피르경은 자신을 향한 검 끝에서 시선을 올려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가문과 이름을 대라." "제피르 폰 야노." 억양없이 대답한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이며, 카스트로는 억눌린 목 소리로 내뱉았다. "야노 가문의 제피르경. 네 목은 내가 친히 베어주겠다. 자, 와라!" 왕세자궁의 서문 앞에는 아무도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시커 먼 피웅덩이 속에 네 명이 고꾸라져 죽어있었고, 그 옆으로 기사의 생 명인 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라에르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급한 걸음으로 궁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자 거대한 홀이 보였다. 라에르가 홀 안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그 비명소리의 발원지는 홀과 통하는 또 다른 복도 구석에서였다. 시녀 두명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었다. 라에르는 아직까지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손으로 누르고, 눈을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친위대 복장의 장정들이 그곳에서 웅성 대며 모여있었다. 라에르는 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길고 긴 계단 을 다 올라가서 친위대원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누군가가 라 에르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라에르경!" "라에르경---!" 라에르가 다가가자 친위대원들이 앞길을 열어주었다. 라에르는 길을 따라 가다가 바닥이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발밑을 바라보았다. 가죽 부츠 밑으로 끈적한 피가 고여있다. 라에르는 점점 불안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고 닫혀져있는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안에서 잠겨있는 듯, 문은 열리지 않는다. 라에르는 얼굴을 찌푸리고,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허리에서 검을 빼들었다. 친위대원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라에르는 두 손으로 검 을 잡고, 힘을 두 손에 집중했다. 문틈 사이를 겨눈 라에르의 검이 한 순간 위로 치켜올려졌다가 밑으로 내리쳐졌다. 정확히 맞물린 문짝 사 이를 가른 라에르의 검은 그 안쪽에 걸린 빗장까지 베어버렸다. 검을 한손으로 옮기고,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소리없이 열리는 문틈으로 점점 크게 보여지는 방안의 풍경은 지금까지 용케 감정을 억누르고 있 던 라에르의 이성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친위대 복장의 사 내가 든 검이 카스트로의 허벅지를 베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7 - 관련자료:없음 [3014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7 21:34 조회:182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7 - ================================================================== 카스트로는 역부족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벽에 부딪혀서도 억지로 뚫고 가려는 가능성 없어 보이는 암담함, 그리고 그것을 인정 하기 싫은 자존심. 이것은 다이크경과의 대련과는 다른 것이었다. 필사 적으로 상대를 죽이려드는 자신과 슬슬 급소를 피해 검을 휘두르는 상 대의 말도 되지 않는 결투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자신의 패배였다. 하지만 패배를 알고 있다고해서 물러날 수 있는 성질의 것 이 아니었다. 패했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런 무모한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스트로는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저 자를 죽여버리겠다는 결심만 되새기고 있었다. 막히면 막힐수록 의지가 확고해진다. 챙챙 끼기긱----! 검이 맞부딪혔다가 강하게 위로 쳐들린다. 그리고 빈틈을 이용해 상 대의 검이 자신을 찔러온다. 딴에는 재빨리 피한다고 했지만, 이미 상 처입은 다리로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상대의 검날은 다시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내고 있었다. 가슴까지 찌릿해지는 예리한 통증 이 몸안을 관통한다. 처음부터 상대는 자신의 하반신을 집중해서 공격 해오고 있었다. 그것도 병신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고양이가 쥐를 가 지고 노는 꼴이었다. "멈춰라!" 연달아 공격해오던 상대의 검이 허공 중에 멈칫 세워졌다. 그 사이 다시 뒤로 물러선 카스트로는 갑자기 나타나서 상대의 검을 밀쳐내는 라에르를 당혹스런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감히 전하께 검을 들이대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카스트로의 앞을 막아선 채, 카스트로 이상으로 살기를 드러내는 라 에르를 보며 제피르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무수행중입니다." 짧은 대꾸였다. 라에르는 코웃음을 치며 맞받았다. "경의 집에는 순직했다고 전해주지!" 거리낌없이 베어들어가는 라에르의 검은 몇번인가의 금속음을 낸 뒤 에 제피르경의 오른손목을 잘라냈다. "……!" 뒤로 물러서며 썰물이 빠져나가듯 피가 빠져나가는 손목을 움켜쥐는 제피르경의 목에 냉혹한 은빛 검날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아베르노는 속으로 이 빌어먹도록 긴 계단에 욕설을 퍼부으며, 2층 으로 올랐다. 대여섯명의 친위대원들이 왕세자비의 사실 입구에 서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저절로 욕설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눌 러참고, 위엄있게 말했다. "다들 여기 서서 뭣들 하고 있는 게냐!" 몸을 굳히고 돌아보는 친위대원들의 얼굴색들이 가지각색으로 질려 있었다. 아베르노는 그들을 밀쳐내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 안쪽에서 냉 혹하게 들리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죄를 안다면 이렇게 죽는 게 억울할 것은 없겠지." 아베르노가 문안으로 들어갔을 때 본 첫 광경은, 잘려진 단면으로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붙잡고 서있는 제피르경과 그 목에 검날을 대 고있는 흑갈색 머리의 청년이었다. 아베르노의 시선이 그들의 옆에서 피투성이인 옷차림으로 서 있는 카스트로에게 향했을 때, 저쪽에서 아 베르노의 등장을 제일 먼저 발견한 여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베르노!" 아베르노는 자신에게 뛰어오는 아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라에 니의 외침소리는 방안에 있던 세 남자의 시선을 아베르노에게 모아주 었다. 라에르는 검을 거두며 아베르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제피르경도 무덤덤한 얼굴로 아베르노에게 허리를 숙였다.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그다지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매서운 눈초리로 아베르노 와 그 뒤에 숨어 이쪽을 노려보는 라에니를 쏘아보았다. 아베르노는 그런 카스트로에게서 전날과는 또 다른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래서 더욱 위엄있게 꾸짖었다. "카스트로.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카스트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말고요. 저 돼먹지 못한 레이얄 계집을 내 손 으로 찢어죽이려고 합니다. 살려두어야 우리 카르노에 화근거리밖에 안된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베르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노려보았다. "네가 어째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이미 들었다.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쳐! 고작 시종장의 죽음과 왕세자비의 목숨을 바꾸겠다는 것이 냐?" 카스트로가 발을 내딛었다. 일순 기우뚱하는 몸을 옆에서 라에르가 잡아주었지만, 카스트로는 그 손을 물리치고 아베르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아베르노에게 가는 걸음걸음마다 발밑에 핏자국이 생겼다. 아베르노의 앞에 서자, 친위대 부대장 세시르경이 조심스럽게 사이 에 끼어들 듯이 자리잡았다. 카스트로는 그런 세시르경을 불쾌한 듯이 쏘아보고, 아베르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작, 시종장이라고 하셨습니까?" "……." "전하께서는 베제르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리라고 생각했는 데, 고작, 시종장입니까?" 아베르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눈은 카스트로의 시 선을 피해 아래쪽을 헤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네게 어떤 의미이든, 그 사람은 시종장이고, 라에니는 왕 세자비다. 너는 지금 네 감정에만 몰두해서, 모든 걸 네 멋대로 생각하 고 있어! 라에니가 레이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아내 이며, 너의 형수이고, 또 장차 이 나라의 국모가 될 왕세자비이다!" 카스트로의 입속에서 이빨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아베르노 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카스트로를 달랬다. 일단 최악의 사태는 벗어나 야했다. "진정해라, 카스트로. 조용히 물러간다면, 더 이상 오늘 이곳에서 벌 어진 일을 문제삼지 않겠다. 일을 더 크게 벌려서 너에게도 좋을 일이 없어!" 카스트로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부서질 듯 움켜쥐 고, 폐부에서 나오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 계집이 어떤 인품을 가졌든지에 상관없이, 저 레이 얄 계집이 소중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런 사악한 계집이 감히 카르노 국모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베르노는 뻑뻑한 목으로 침을 억지로 넘기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 덕였다. "너도 결혼하면, 아내의 존재가 무엇인지, 또, 레이얄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카스트 로." 카스트로는 눈싸움을 하듯 끈질기게 아베르노를 추궁하며 노려보았 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아내라는 존재가 소중한 겁니까? 적국의, 진저 리쳐지는 마녀같은 여자라도?" "……." 아무 대답도 없는 아베르노를 카스트로는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 다. 저 무력한 모습. 저것이 바로 앞으로 카르노의 미래였다. 저 제멋 대로 날뛰는 레이얄 계집의 모습은 테라이며, 또한 레이얄이었다. "정말 저 계집이 소중한 겁니까? 아니면 레이얄이 두려운 겁니까? 아니면 테라가 두려운 것입니까?" "……나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 고집스럽게 대꾸하는 아베르노는, 마치 거짓말이라는 증거가 드러났 는데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어린아이같았다. 카스트로는 그런 왕 세자의 모습에 아득하고 암담해졌다. "레이얄이, 테라가 두려우신 거군요." "……카스트로!" 창백해졌다가 다시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 내는 아베르노를 한참동안, 카스트로는 아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실 망……이 아닌 더 허탈한 어떤 것이 카스트로의 투지욕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아직까지 베제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했지만, 카스트로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저 아베르노의 무력한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 서, 너무 처량맞아서인지도 모른다. 카스트로는 아직까지 뒤에 서있는 제피르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좋습니다. 그럼 저 자를 주십시오. 그러면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습 니다." 아베르노가 얼굴을 찌푸리고 망설이는 동안 뒤에 있던 라에니가 재 빠르게 대답했다. "좋아요! 이제 쓸모도 없는 자는 더 이상 필요없으니까 데려가도 좋 아요." 제피르경은 피식 웃었다. 카스트로는 살았다는 듯 재잘대는 라에니 를 다시한번 죽일 듯 노려보았고, 라에르는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아 베르노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하거라." 카스트로는 순순히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인사말은 차마 나오지않는지, 아무 소리없이 그대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라에르는 제 피르경을 돌아보았다. 제피르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카스트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기운없이 느리던 카스트로의 발걸음 이 어느 순간부터 점차 속도와 박력을 더해가고 있었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 걸음이 내포하는 의미도. 뚜벅뚜벅. 무게감있는 발소리가 울린다. 또각또각하는 굽이 얇은 구 두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왕세자의 사실로 가는 긴 복도를 지나, 호위 기사와 궁내부원들을 전부 물리친 아베르노는 뒤도 안돌아보고 침실로 들어섰다. 라에니는 심상치 않은 남편의 모습에 내심 겁을 집어먹고, 침실 문 앞에서 멈칫 멈추어섰다. 아베르노는 뒤에서 따라들어오는 기색이 없자, 몸을 돌려 방문밖으 로 나가 라에니의 팔을 잡고 거칠게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얏!" 라에니를 침실에 끌어들인 아베르노는 거칠게 라에니를 내동댕이치 고, 소리나도록 문을 닫아버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겁에 질린 얼굴로 아베르노를 올려다보는 라에니는, 전날 시종장 베제르를 죽이라고 호 령하고, 조금 전 카스트로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기백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베르노는 지레 겁먹고 몸을 떠는 라에니에게 코 웃음을 쳤다. "혼자서 잘도 일을 벌렸더군? 국왕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카스트 로를 건드리다니! 내가 그토록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라에니는 입술을 꼭 다물고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베르노는 못 마땅한 기색으로 소리질렀다. "일어나, 이 머저리같은 계집년아! 뭘 잘했다고 그렇게 나자빠져있 어?" 라에니가 주춤주춤 일어서자, 아베르노는 성큼 다가가 있는 힘껏 커 다란 손을 휘둘렀다. 손바닥과 뺨이 부딪히는 마찰음과 라에니의 비명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닥치지 못해!" 아베르노는 분이 나는대로 두번세번, 라에니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아베르노의 사정없는 손찌검에 라에니가 다시 바닥으로 나뒹굴며 울어 댔다. "아악! 때리지 말아요, 아베르노! 앗! 그만, 아아앙, 어어엉---" 흐트러진 라에니의 머리채를 손으로 움켜쥐고, 아베르노는 자신의 얼굴을 라에니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시끄러워, 이 쓸모없는 계집! 너 따위가 그나마 이 왕궁에서 목숨부 지하고 살고싶다면, 조심, 또 조심하라고 내가 말 했어, 안했어? 너 때 문에 나까지 국왕폐하의 눈밖에 나면 어떻게 책임질거야?" "그게,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당신은 왕세자잖아! 별볼일없는 삼왕 자따위 왜 그렇게 조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악에 받쳐 소리소리지르는 라에니를 아베르노 의 손이 다시 세게 후려쳤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방안을 들썩였다. 아베르노는 이를 갈면서 내뱉었다. "모르면 입닥치고 시키는 대로만 해! 어려서부터 국왕폐하와 왕비전 하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애다. 그리고 내가 못본 몇 년 사이에 그 애 는 더욱 위험해졌어. 내편으로 만들지 않으면, 내게 독이 될 아이다. 그런데 지금 네가 그애를 적으로 돌리게 만들었어! 알아?" 씨근씨근거리는 거친 숨을 내쉬던 아베르노는 손에 잡힌 라에니의 머리카락을 내팽개치고 말했다. "네가 벌인 일, 네가 책임지고 마무리지어! 가서 엎드려 빌든, 어쩌 든, 그 애의 화를 풀어놔!" 아베르노는 훌쩍이는 라에니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차갑게 덧붙였다. "차라리 죽어버릴 것이지!" 라에니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아베르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 다. 나가기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면, 그 애를 죽이던가!" 소문은 삽시간에 아르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장소에 함께 있다 가 '상관없는 자는 나가라'는 소리에 앞 뒤 가릴 것 없이 도망친 귀부 인들은 이 엄청난 소식을 그녀들의 친구와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그 남편들은 또 그들의 파에 속한 상하위 귀족에게 비밀스럽게 이야기했 다. 그들의 비밀은 시중들던 하인과 하녀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애인 과, 술집친구들에게 또 퍼져나갔고, 다음날에는 기사들의 술집이나 용 병들의 술집이나 모두 그 이야기로 술렁거렸다. 혹자는 삼왕자의 어리 석음을 욕했고, 혹자는 그런 삼왕자의 용기에 감탄하며, 혹자는 그 레 이얄 여자를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라이아나의 술잔'에 모인 기사단원들 중 일단의 무리도 이 논쟁에 동참하고 있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 그렇지, 뭐." 삼왕자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비관적인 베이경의 견해였고, 곧바로 포에르경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잖아. 왕세자비도 이제 천방지축 날뛰지는 못할 걸?" "글쎄? 원래 성격이 그런 여자니까, 고치기 힘들걸? 그리고 삼왕자 야 이제 얼마 안있으면 테라로 가는데, 뭘." 베이경과 포에르경의 주거니받거니하는 대화를 듣던 로카르경이 불 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런데 왕세자비는 레이얄에서도 그렇게 난폭하게 자랐나? 레이얄 의 왕실에서는 그런 걸 용납하나보지?" "어쨌든 왕세자 전하만 입장 난처해지셨군. 부인이냐, 동생이냐! 사 랑이냐, 우애냐!" 베이경이 술잔을 치켜들고 중얼거리는 말에, 포에르경이 머리를 후 려쳤다. "바보놈! 너라면 그런 난폭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냐? 그것도 앙 숙인 나라와의 정략결혼인데." "그런데, 왜 때려?" 투닥거리는 베이경과 포에르경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로카르경 은 묵묵히 안주만 먹고있는 카나이트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카나이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만……." "다만?" 카나이트는 안주를 집어삼키고 허리를 폈다. 그는 곧 일어날 듯한 몸짓으로 말했다. "이번 일로, 삼왕자 전하의 테라행이 서둘러질거라는 소문이 있습니 다. 며칠전에 돌아오신 선배들 대신 저희가 삼왕자의 호위를 맡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테라에서 머물러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저는 썩 내키지 않습니다." 로카르경은 의자에서 일어서는 카나이트를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 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카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나갔다. 왕실 기사단 의 암녹색 망토가 펄럭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카르경은 베이 경의 느닷없는 손바닥에 맞아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았다. "너, 저 녀석에게 반했냐? 뭘 그렇게 넋놓고 쳐다봐?" "너는 꼭 말을 해도!" 다시 시작되는 베이경과 포에르경의 싸움을 안주삼아, 로카르경은 혼자 술을 축내기 시작했다. ==================================================================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8 - 관련자료:없음 [3017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8 21:11 조회:184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8 - ================================================================== 눈에 띄게 부산한 삼왕자궁을 뒤로하고, 두 명의 청년이 말을 타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청년은 이내 왕궁을 벗어났고, 그들은 서 쪽 대로를 따라가다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카스트로는 테라행을 서둘렀 다. 덕분에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몸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돌 아다니고 있어서, 라에르는 더욱 카스트로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여 기저기서 카스트로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귀족들이란 자들의 생각이란 뻔한 것이다. 왕세자와 삼왕자의 불화가 표면화되었고, 이것을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 발판으로 삼으려하고 있다는 것쯤은 라에르도 귀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카스트로 도 그것을 알고 테라행을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하고 라에르는 조심스 럽게 추측했다. 왕궁에서도 보이는 열한개의 높다란 신전 기둥들이 점차 가까워진 다. 부지런히 뛰어나오는 금발의 소년과 느긋하게 나오는 다갈색 머리 의 신관이 보였다. 카스트로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무작정 삼왕자궁을 찾아온 로페냐는 이미 삼왕자가 나가고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병을 위해 꽃다발까지 들고 왔는데 얼굴도 못 보게 되니까 솔직히 서운했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는 질 문에 젊은 궁내부원은 머리를 내저었다. 로페냐는 꽃다발과 몇마디 말 을 남기고 다시 발길을 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며칠전 피투성이로 되돌아온 카스트로가 응접실에서 얌전히 기다리 던 자신을 보고 했던 말이, 과연 제대로 들은 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 었다. 그날은 카스트로도 자신도 뭔가에 홀린 사람들 같았으니까. '전하! 대체 이게 무슨…….' '마침 잘됐군. 일부러 부를 일이 줄었으니까 말이야.' 숨이 막힐 정도로 피비린내를 풍기며 말을 내뱉는 카스트로의 모습 은 로페냐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흡사 악마와도 같은 모습으로 오 만하게 명령하는 카스트로는, 알 수 없는 힘으로 로페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얼음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듯 냉혹한 표정으로 핏 빛 입술을 움직이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준비되는 대로 테라로 가겠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알겠나?' '전하?' '가 주겠다고 했다, 그 빌어먹을 테라에! 그래, 어떤 곳인지 똑똑히 보고 와주지. 어떤 곳이길래, 적국 왕세자의 정신을 저리 빼놓았는지 알아봐야겠어!' '…….'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면, 그만 물러가. 테라인이고 레이얄인이고 꼴 도 보기 싫으니까!' 로페냐는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로페냐 자 신은 레이얄 계 테라인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트로 가 자신을 상종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필 카스트로가 싫어하는 두 나라의 핏줄과 국적을 가질 이유가 뭐란 말인가! 며칠간을 그 충격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어쩐지 자신의 뇌리에 새겨 진 기억을 믿을 수가 없어져서 확인차 다시 찾아오는 길이었다. 하지 만 곳곳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궁내부원들을 보고 있자니 대답은 이 미 들은 것과 마찬가지다. 로페냐는 자신의 임무가 의외로 빨리 끝나 게 되었지만 그다지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로페냐는 카르노인의 테라에 대한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카르노라는 나라가 꽤 마음에 들었 다. 거칠고 시원스러운 느낌의 나라다. 그것의 대부분이 카스트로에게 서 비롯된 편견이었지만, 로페냐는 그다지 깊숙이 생각하지 않았다. 워 낙 친구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카스트로라는 사람이 가진 소 름끼치는 강렬함을 알게 된 로페냐는 마치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이래서는 마치 짝사랑하는 소년같지 않은가? 하하…….' 로페냐는 머리를 내저으며, 카르노의 초겨울 햇빛을 마주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맡아주십시오."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로 부탁하듯 말하는 카스트로를, 전신 로마의 신관 루아 시라트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이라고요?" 한참만에 되묻는 루아에게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 사람은 용병입니다. 왕실 용병대에 있는 자로 왕실에 불만이 많 은 자이지만 제법 쓸만한 자입니다. 앞으로 루아 신관께서 맡아주십시 오." 루아는 진지한 얼굴로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자는, 뛰어난 기사입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오른손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이 자에게 자객술을 가르쳐주십시오." 루아의 눈이 순간 이채를 발했다. "자객……술이라고요?" 카스트로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루아의 눈을 마주했다. "전신 로마의 신관들에게는 자객술이 은밀히 전해져오고 있다고 알 고 있습니다." 루아는 졌다는 듯 손을 들어올리고 씨익 웃었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불구인 자에게 굳이 자객술을 가르칠 필요 가 있을까요?" "여러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신도 원하는 대로, 한 사 람만을 죽이기 위한 자객술입니다." 루아는 그 사정이 궁금했지만, 카스트로가 입을 다물자 어쩔수 없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늘 밤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던 일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에르는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라고 있었다. 카스트 로는 며칠전 삼왕자궁까지 따라들어온 제피르경을 지하 밀실에 가두었 다. 시종장 베제르의 목을 벤 것이 제피르경이라는 소리를 듣고 카스 트로가 그를 죽일 것이라는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틀 뒤, 제피 르경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물론 대외적인 사실이었고, 실제 로는 카스트로와 제피르경 사이에 모종의 거래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 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한사람을 암살하기 위한 자객이라는 것 은, 결국 제피르경의 손을 빌어 왕세자비를 죽일 생각인 것일까?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전하? 오셔서 차도 제대로 한잔 안드시 고……." "아닙니다. 이제 5년 뒤에나 뵙게 되겠군요." 굳은 카스트로의 얼굴이 옅은 미소를 띄었다. 라에르는 의자에서 몸 을 일으켜 카스트로의 뒤에 섰다. "5년 뒤에는 더욱 늠름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힘든 일을 혼자에게만 맡기게 되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모시는 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지요." 루아와 인사말을 나누며 카스트로는 신전을 나섰다. 나자르가 허겁 지겁 말 두 마리를 끌고오면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전하. 그리고 라에르경도요." 카스트로는 입술 끝에 미소를 달고, 나자르의 짧은 금발머리를 쓸어 주었다. "다음에 볼때는 나만큼 커있겠구나. 잘 지내거라, 나자르." "예, 전하……. 테라에 가서도 힘내세요, 전하." 작은 손을 올려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모습이 자못 의지에 차 보 였다. 카스트로는 다시 나자르의 머리를 헤집어놓고, 말에 훌쩍 올라탔 다. 라에르도 말에 올라 떠날 준비를 마치자 루아가 축복을 해주었다. "전하께 전신 로마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 하시길."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곧 말에 박차를 가해 산을 내려 가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말이 빠르게 루아의 시야속에서 사라졌다. 카스트로는 '미레야씨네 주점'에 잠시 들러, 먼저 와 있던 제피르경 과 세니크 등과 마주앉았다. 미레야가 내어준 주점 내부의 작은 방에 서 한시간여동안 밀담을 나눈 카스트로는, 바에 있는 미레야에게도 작 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이곳도 5년간은 와보지 못할 것이다. 뭐든지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니까 기분이 찹찹해진다. 여전히 시끌벅적 한 아르노의 뒷골목에는 소리높여 웃고 떠들어대며 싸워대는 걸직한 소음들이 흘러나온다. 커다란 덩치와 묵은 땀냄새의 용병들. 이제 5년 간은 접하지 못할 풍경들이다. 우울함을 떨쳐버리듯 카스트로는 더욱 씩씩하게 왕궁으로 되돌아가 서 곧장 본궁으로 향했다. 왕세자궁에서의 소란 탓인지, 잔뜩 긴장해서 국왕폐하께 아뢰러 가는 시종장의 모습이 우습게만 여겨진다. '내가 국왕폐하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나?' 어찌되었든, 기분이라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 난 뒤, 집무실로 안내받은 카스트로는 칼리에르 3세 말고도 아베르노 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별다를 것 도 없다고 생각을 고치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너라, 카스트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에르 3세와는 달리 아베르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냐?" 카스트로는 메마른 표정으로 살짝 끄덕였다. "전하의 관심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만." 칼리에르 3세와 아베르노의 주의가 온전히 자신에게 쏠린 것을 보고 카스트로는 하려던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쯤, 테라로 떠날까 합니다." "……!" "카스트로!" 아베르노의 외침을 무시하고, 카스트로는 시선을 칼리에르 3세에게 만 향한 채 계속했다. "어차피 떠나야 되는 일입니다. 이제 왕세자 전하의 모습도 뵈었으 니까, 여기에 더 머물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폐 하."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카스트 로는 대답을 촉구하듯 몇 마디를 더 입에 올렸다. "카르노 왕실에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저 대신 왕세자 전하께서 버티고 계십니다. 폐하께서는 더 이상 심려치……" "그 레이얄 계집 때문이냐?" "폐하!" 아베르노는 자신의 아내를 그런 천박한 말로 부른 칼리에르 3세를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칼리에르 3세의 신경은 온통 카스트 로에게 향해있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정곡을 찌른 칼리에르 3세는 놀 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다 입술을 꾹 다무는 카스트로를 복잡한 심정 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그 막돼먹은 계집 때문에, 내 아들인 네가 몸을 사리고 테라 로 도망가겠다는 거냐, 카스트로!" 아베르노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고, 상대적으로 카스트로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새까만 윤기를 발하는 사나운 눈길이 겁도 없이 국 왕 칼리에르 3세에게 쏘아졌다. "도망이 아닙니다, 폐하!" "그럼? 지금 네 말을 뭐라고 설명한단 말이냐?" 카스트로는 손에 힘을 주다가 순간적으로 피식, 김빠진 얼굴로 웃어 버렸다. "……한순간……" 카스트로는 부드러운 눈길로 아버지에게 미소지었다. 칼리에르 3세 는 화낼 줄 알았던 카스트로가 슬픈 듯 웃어버리자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기분이 들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를 많이 닮아 가장 아끼는 아들이 바로 카스트로였다. 그런 카스트로가 저런 미소를 보인다는 것이, 다시금 무능한 아버지인 자신의 탓으로 느껴졌다. 카스 트로는 눈길을 발밑의 융단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았습니다." 칼리에르 3세의 갈색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약해질 때마다 저를 질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폐하의 모습에 겹 쳐보였습니다. 하지만 폐하." "……." 카스트로는 마음을 다지고, 되도록 강해보이는 미소로 얼굴을 들었 다.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네, 제가 급히 떠나려는 이유는 물 론 왕세자비 전하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녀를 피하려는 것은, 그 녀의 보복이 두렵다거나, 왕세자 전하의 추궁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다만……." 아베르노의 강한 시선을 느끼면서, 카스트로는 말을 이었다. "제가 단 며칠이라도 더 여기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하다?" 멍하니 되뇌이는 칼리에르 3세에게, 카스트로는 확인을 시키듯 대답 했다. "그렇습니다. 단지 며칠이라도 더 있겠다는 것은 무의미한 미련일 뿐입니다. 차라리 그 미련 따위 떨쳐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5년간 제가 살아야 할 곳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그곳에 적응하는 게 나을테니까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칼리에르 3세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온 마음으로 그 레 이얄 계집을 저주했다. 5년전, 테라와의 밀약에서 세 아들을 두고 망설 임없이 카스트로를 선택한 것은 칼리에르 3세였다. 가장 곁에 두고 싶 던 아들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곁 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고작 저 망나니같은 레이얄 계집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보내야한다는 게 못견디게 화가 났 다. 앞으로 5년이면 대체 얼마나 긴 세월인지. 5년전 왕세자들을 보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점점 나빠지는 건강으로 보아서는, 5년이라는 것은 영원히 작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꼭……." 칼리에르 3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비틀어 열었다. "꼭 그렇게 빨리 가야겠느냐? 미련일지라도 이 아비를 위해서……" 하지만 카스트로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폐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이 왕궁에서 는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한참동안 시간을 끌던 칼리에르 3세는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내일, 너를 위한 환송연을 베풀 것이니, 모레……떠나도 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잔잔한 미소로 감사를 표하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칼리에르 3세는 고 개돌려 외면했다. "그만…… 물러가라." 카스트로로서는 이제 5년 이내에 다시 돌아와보지 못할 카르노 왕궁 에서 열리는 마지막 연회였다. 게다가 명목상으로는 삼왕자의 테라행 을 환송하기 위한 연회다. 하지만 흉흉한 소문 때문인지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귀족들이 그날의 주인공인 카스트로를 피하려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고위 정신들이 와서 예의상 한마디씩 인사를 하고 갔지만, 듣는 카 스트로도, 말하는 그들도 별로 애석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 자기가 속 한 파끼리 무리를 지어 나누는 이야기들이란, 아베르노와 카스트로 사 이의 불화와, 왕세자비에게 내려진 근신처분, 아베르노의 섭정을 서두 르는 것과, 어떻게 하면 아베르노의 신임을 얻을까 하는 이야기들이었 다. 아베르노의 귀국 이후, 그들의 화제 대상은 항상 왕세자 아베르노 였다. 삼왕자의 환송연이라고 틀릴 것은 없었다. 그런 귀족들의 냉담함에, 오히려 로페냐가 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 카스트로는 재미있기만 했다. 로페냐라는 자는 참 여러 가지로 카스트 로를 당혹스럽게 하고 웃기게도 하는 남자였다. 카스트로는 저쪽에서 누군가와 싸우다가 제 풀에 씨근거리는 로페냐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 에서 칭얼대는 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두 살 어린 여동생, 이제 열 다 섯 살이니까 자신이 귀국할 때쯤에는 스무살의 어엿한 처녀가 되어있 을 것이다. 어쩌면 귀국했을 때, 이 왕궁에서 체리나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혼하고도 남을 나이일 테니까. "그만하고, 저들 틈에 어울려봐, 체리나. 저들 중에 호감가는 귀족은 없는 거냐?" 체리나는 입술을 삐죽이고 눈을 흘겼다. "오라버니라면 내가 저런 못생기고 성질도 못된 귀족들 중 하나와 결혼하면 좋겠어요?" 체리나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미카에르 대공과 그 측근들이 모여 무언가를 숙덕거리고 있었다. 간간이 이쪽을 흘긋거리는 것이, 아 무래도 카스트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눈길을 돌려 다른 쪽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살 많은 누나인 유리 나의 옆에 한 청년이 붙어서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사람은……" "사르노 백작, 레이니트경이에요. 얼마전부터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 니고 있죠." 체리나가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린다. 카스트로는 후훗 하고 웃으면 서, 놀리듯이 물었다. "저 사람 잘 생겼지? 사냥도 잘하고. 작위는 백작밖에 안되지만 그 숙부되는 사람이 외부대신 헤르트경이니까, 그리 배경이 빠지지도 않 지." "흥! 하지만 저 사람, 케익에 크림을 왕창 바른 것처럼 느끼하고 뺀 질거려요. 만나는 여자마다 굉장히 친절하게 하고. 언니가 왜 저 사람 을 곁에 있게 허락하는지 모르겠어요." 카스트로는 빙그레 웃었다. 연애에는 문외한인 그가 달리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체리나는 그쪽을 노려보다가, 아, 하고 잊고있 던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카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도 레이얄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하지요? 오라버니 아내도 그 여자 같다면, ……아니, 미안해요. 이런 말 하는게 아닌데." 체리나는 카스트로의 표정이 굳는 걸 보고 그대로 말을 끊었다. 그 리고 재잘재잘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맞아. 오늘 새로운 시종장이 삼왕자궁으로 갔다면서요? 어때요, 그 사람은?"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 역시 별로 대답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다. '미토 하미르라고 합니다. 오늘부로 삼왕자 전하의 시종장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성심껏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단정하게 묶여진 숱 많은 연갈색머리와 청결하고 흐트러짐 없이 말 끔한 외모의 미토 하미르는 전 시종장 베제르와는 정반대의 타입으로 보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주절주절 국왕폐하와 왕비전하를 물고늘어 지며 한탄을 하고 설교를 늘어놓던 시종장 베제르와는 달리, 미토 하 미르는 필요한 말만 끝낸 뒤에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누구보다 표정이 풍부했던 시종장 베제르와는 달리, 그는 시종일관 가면을 뒤집어쓴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50이 넘어가는 희끗희끗한 노인네였던 시종장 베제르와는 달리 이제 갓 서 른이 될까한 젊은 모습도 카스트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토 하미 르를 밖으로 내보내고 라에르가 했던 말이 카스트로의 뇌리에 떠올랐 다. '전하께서는 지금 어떤 자가 시종장으로 임명되어도, 마음에 들지 않 으실 겁니다. 그것은 시종장 하미르의 잘못이 아닙니다. 시종장 베제르 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선게 못마땅하신, 전하 자신의 마음문제입 니다. 그러니, 너무 냉대하지 마십시오. 가장 가까이서 전하의 시중을 들어드릴 전하의 시종장입니다.'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기분이 되살아나 입술 근육을 꿈틀거렸다. 뭐 라고 그래도 카스트로는 미토 하미르가 싫었다. 라에르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시종장 베제르의 자리에, 그 위치에 다른 사람이 서는 게 싫었다. 머리로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쉽게 바 뀌지 않는다. 한숨을 쉬며, 카스트로는 다시 이어지는 체리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내일이면, 1장도 끝입니다. ^^ 29회라는 어중간한 횟수에서 한 장을 끝내려니.. ...뭐, 제 어설픈 글자르기 능력을 저주할밖에요.. ^^; 그렇다고 두개를 잘라 세개를 만들기도 뭐하고.. --; 그럼 오늘도... 감기조심하시고..(제가 걸려서야 남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감기걸려 골골거리는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1 장 - 29 - 관련자료:없음 [3020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19 21:34 조회:184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29 - ================================================================== 라에르는 술을 나르던 궁내부원 한명이 귓가에 속삭이고 간 말을 되 새기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삼왕자의 일로 할 말이 있 으니까 얼마 뒤 정원의 분수대 앞으로 혼자 나오라는 전갈이었다. 라 에르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남길 사람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딱 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가야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망설였지만, 카 스트로가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은 분명히 가고야 말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라에르는 언짢은 기분으로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 다. 무슨 일인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자정이 넘어가자, 카스트로는 삼왕자궁으로 돌아갔다. 잠깐 얼굴을 보인 칼리에르 3세도 돌아갔고, 그 정도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자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카스트로는 침실에서 시종들의 시 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면서 라에르에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봐, 라엘. 내일은 떠나야되니까, 푹 쉬고. 가족들 과 작별인사도 해야지." 카스트로의 배려에, 라에르는 인사하고 물러나왔다. "좋은 꿈 꾸시길." "그래." 라에르는 삼왕자궁을 나와 정원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조금 이를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라에르는 분수대 한쪽의 청동 조각상 앞에서 멈춰섰다. 겨울의 찬 밤바람이 살을 에인다. 카스트로는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벽난로에서 타고있는 장작불을 제외하고는 촛불 하나도 켜있지 않은 어슴프레한 방. 십수년 간 살아온 이 침실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마지막……'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애상에 잠기게 만든다. 이제 날이 밝으 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낯선 적국의 수도로 가야 한다. 낯선 사람들, 낯선 환경. 그것도 자신을 감시하고 적대시할 적지 한복판으로 가야한 다는 것은 카스트로에게 적지 않는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내키지 않는 일도, 테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이라, …… 내가 소렐의 딸과 결혼한다고?' 도대체 테라의 한족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인지? 아베르노 전하를 레이얄에 묶어두고, 지스카르 전하를 미노에 묶어두 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왜 이제와서 굳이 나를……'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새삼 그들에게 자신을 견제해야 할 일 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왜? 알게 모르게 카르노의 내정에 간여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왕자인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카스트로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들을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 피 해답도 알 수 없는 의문들로 고민해서 이 왕궁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기는 싫었다. 카스트로는 의자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 벽난로 앞 으로 다가갔다. 따스한 빛이 입고있는 푸른색 벨벳 가운위로 미끄러진 다. 앞으로 5년.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을 테라에서 보내야 한다. 단지 5년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그 5년이라는 것이 아직 열입곱살의 젊은 카스트로에게는 아득할 정도로 길게만 느껴졌다. '테라에서는 그 5년간, 나를 아베르노 전하처럼 바꿀 생각인가? 내 가, ……테라의 종이 된다고?'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이미 변해버린 아 베르노를 보면 장담만 할 수도 없었다. 카스트로는 그래서 더욱 앞으 로가 두려웠다. 자신마저 그리 된다면……. '카르노는 끝장이다!' 열에 들뜬 눈으로 자신을 설득하려하던 아베르노가 눈앞에 아른거린 다. 케테르가 최고위 주신이며, 그래서 케테르를 믿어야 한다고, 로마 따위를 믿어서 그렇게 무너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자신에게 열변을 토하던 모습.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것은 라에니를 감싸던 아 베르노. 적을 두려워하는 왕세자. 그가 이끌어갈 희망없는 미래. 테라 의, 한족의 눈치나 보며 전전긍긍 살아가는 모습이 훤한 카르노의 군 신과 국민들. 암담한 절망. 굴욕적인 미래. 케테르가 주신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신 따위, 사실 어떻든지간에 상 관없었다. 문제는 그 신이라는 존재가 카르노에 미칠 영향이다. 전신 로마는 카르노의 왕실과, 카르노의 국민과 밀착해서 '축복받은 민족'이 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케테르가 카르노 왕실과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족에의 복종'이다. 교인들 모두가 케테르의 후손이라 칭해지는 한족들에게 '종'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케테르교였 다. 카스트로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자신과 카르노가 '종'으로 전 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카르노'는 이미 카르노가 아니다. 그런식으로 더럽힐 바에는 '카르노'라는 이름을 없애버리는 게 낫다. 카스트로는 '카르노'니까. 자신의 이름을 갖고있는 나라를 그렇게 내버 려 둘 수 없었다. 그것이 어떤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로마여……." 카스트로는 나직하게 카르노의 수호신을 불렀다. 로마가 자신을 지 켜주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부디 카르노를 지켜주기를! '만일……, 정말 로마가 케테르의 하위 신이라서 카르노를 지켜줄 수 없다면…….' 카스트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이라는 가정일 뿐이지만, 카스 트로는 그 가정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카스 트로는 강렬한 눈빛으로 벽난로 속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정말 로마의 힘으로 안된다면……." 달리 케테르에게 대적할 만한 자를 찾으면 된다. '카르노를 카르노로서 있게 할 수 있다면…….' 앞으로 5년. 카스트로는 새로운 각오로 마음을 다졌다. 더 이상 약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더욱 약해지게 하기는 싫었다. 이런 약해빠진 생각 으로 5년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더 강해져야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을만큼. 그래서 5년 뒤에, 스스로에게 '카르노'로서 당당할 수 있도 록. 그래서 카르노를 지켜낼 수 있도록. "얘야……." 두시간이나 지났을까? 슬슬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 누군가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분수대 반대편으로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뭐가 불만이라는 말이냐?" 조금 높은 목소리는 중년남자의 것이었다. 라에르가 조각상에 거의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반대편으로 다가온 두 사람은 라에르를 보지 못한 듯 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불러낸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을 찾는 듯한 기색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남의 비밀이야기를 듣게되는 건가 난처하게 생각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인기척을 내는 것 역시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는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 않습니까!" 언성이 높았지만, 목소리 자체는 상당히 맑고 듣기 편했다. 라에르는 그 미성의 주인공을 보기위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머리의 중년인과, 짧은 백금발의 머리를 한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라에르는 대머리 중년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조각상 뒤로 숨은 라에르는 조심스럽게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말 장난인가? 아니라면 왜 아직 안오는지…….' 그때 다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애원하듯, 호소하는 듯 한 목소리. 깐깐하고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한 군부대신 유타르경이 저 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대체 저 청년은 누구란 말인 가! "얘야. 하지만 이번만은 상관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테라에 가게되 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너도 테라로 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잖느냐!" "제가 좋아하든 말든, 그건 아버지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그 일을 거부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두번 제 일에 관여하신다면, 결국 전 아버지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밖에 더 되겠습니까!" 라에르는 테라행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듣고 몸을 긴장시켰다. 다시 그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제 의지대로 살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저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 달란 말입니다. 저는, 자신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힘이 아니더라 도, 최고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라에르는 내심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겠다? 최고가 될 자신이 있다? 하하, 대단한 자 신감이군. ……아쉽군. 테라로 가지 않았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유타르경은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결국 아들에게 다시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 사람이 멀어져가자, 라에르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도 보이지 않는 밤, 하늘에는 별무리만이 반짝이고 있었 다. 라에르는 무료해져서 부츠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정말 누가 못된 장난을 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던가……, 다른 목적…?' 번개처럼 무언가가 라에르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라에르는 다시 한번 정원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 뒤 다급한 심정으로 삼왕자궁으로 뛰어갔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보다는 카스트로와 관 련된 것일 수가 있다. 설마,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카스트로에게 무슨 일 이라도 생긴다면! 대번에 떠오르는 것은 앙칼진 왕세자비였다. 명백하게 카스트로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그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다급하게 뛰어들어가자, 궁을 지키던 친위대원들이 놀란 얼굴로 라 에르를 쳐다보았다. "라에르경?"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곳을 지키는 친위대 원들과 궁내부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가 전하를 방문하지는 않았나?" 친위대원 중 한명이 몸가짐을 바로하고 대답했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낌새는?" "없었습니다만?" 의아한 듯 쳐다보는 친위대원들을 본척 만척하고, 라에르는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바깥이 시끌시끌한 탓에 응접실까지 나와있던 시 종장 하미르가 놀란 눈으로 라에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에르경?" 라에르는 헉헉대면서 물었다. "전하께서는 잠자리에 드셨습니까?" "아, 네. 경께서 나가신 후 곧바로." "이상한 낌새는 없었습니까?" 시종장 하미르는 머리를 내저었다. "잠시 전하의 침실에 들어가겠습니다." 시종장 하미르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물론입니다." 소리없이 카스트로의 침실 문이 열렸다. 라에르는 벽난로에서 나오 는 빛에 의지해 어두운 방안에서 녹색 휘장의 침대를 구별하고 그 안 으로 들어갔다. 카스트로는 깊게 잠든 듯, 라에르가 들어와도 세상모르 고 잠들어있었다. 라에르는 카스트로의 코밑에 손을 대고 따뜻한 숨결 이 느껴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라에르는 창문이 튼튼하 게 닫혔는지, 누가 들어온 흔적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서야 다시 응접실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시종장 하미르가 물어왔지만, 라에르는 머리를 저을 뿐이었다. "오늘은 제가 전하의 침실을 지키겠습니다." 시종장 하미르는 궁금할만도 하련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정원의 가장자리, 높은 기둥들로 이루어진 주랑의 틈에서 머리를 덮 는 검은 로브를 걸친 사람이 기둥 뒤에 몸을 기대고 서있었다. 깊이 덮인 로브의 모자 사이로 화려한 붉은 머리가 엿보였다. 모리나 남작 부인 주디나는 라에르가 뛰어간 삼왕자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기둥을 따라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바보같이……." 기운없이 중얼거리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라에르를 향해서인지, 아니면 장소까지 정해서 불러놓고도 차마 용기가 없어서 그냥 보내버린 자신을 향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데……." 슬펐다. 주디나는 무릎을 모아 팔로 감싸고, 턱을 무릎 위에 괴었다. 어둠속에 붉은 눈동자가 애수를 띄고 흐려졌다. '실례합니다만, 길을 잃으셨습니까? 아까부터 이 근처에서 헤매시는 것 같던데요.' 자주색 망토를 걸친 청년이 친절한 흑갈색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 았다. 젊디젊은, 갓 소년티를 벗은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이던 젊고 늠 름하던 모습. 마음을 감싸주듯 부드럽고도 절제된 목소리, 말투. '네. 그만 일행을 어딘가에서 놓쳐버렸어요. 왕궁에는 처음이라서 어 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시던 길이셨습니까? 그 건물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그, 그래도 될까요?' 그의 단정한 얼굴이 편안한 미소로 채워졌다. 정신없이 그 얼굴을, 그 미소를 보던 그녀는 22년생애 처음으로 가슴두근거리는 달콤한 사 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의 그 친절하고 상냥했던 청년은, 다시 만났을 때, 국왕의 애인 이 된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계속, 계속, 그 경멸의 시선은 깊어져갔고, 그럴수록 그녀 자신은 더욱 애타고 슬퍼져 서……. 미카에르 대공의 말에 혹해서, 왕궁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를 만날 일도, 그로 인해 가슴아플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디나는 차가운 밤하늘에 하얀 숨결을 연신 뿜어내었다. 한숨은 무 겁게 내려앉아, 가슴속 깊은 곳에 미련으로 맺혀갔다. 테라력 695년 12월 2일. 그날 오전, 백명이 넘는 인원이 카르노 왕궁의 연병장에 서 있었다. 테라의 사신 로페냐 폰 하야로비 후작 이하 약 20명의 수행원과 카르 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폰 카르노의 수행원들. 30여명의 친위대원들과 삼왕자궁의 궁내부원들, 의사, 요리사, 마부,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위 해 동행할 기사단원들까지 모두 백오십명 남짓되는 인원이었다. 카스트로는 알현실에서 칼리에르 3세와 마주하고 있었다. 5년내로는 만나기 힘들 아버지의 모습을, 카스트로는 주름 하나하나까지 기억속 에 새겨두고 있었다. 며칠 사이 흰머리가 더 늘고, 주름이 더욱 깊어진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무사히…… 다녀오거라. 부디 몸 건강하게." 카스트로는 흔들리는 감정을 추스리고, 애써 미소띈 얼굴로 대답했 다. "폐하께서도 옥체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5년 뒤에, 뵙겠습니다." 수십명의 정신들이 보는 앞에서, 부자간의 이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칼리에르 3세는 당당한 걸음으로 알현실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에 눈 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무능한 탓이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하고, 저렇게 적지로 보내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보내는 기분은, 5년전 아베르노와 지스카르 두 왕자를 보낼 때와는 또 틀렸다. 좌절과 굴욕 속에 보낸 두 아들보다, 자책과 미련으로 보내는 막내아 들이 더욱 안스럽고 가슴아팠다. 그것은 흡사, 아내 미에르 왕비를 자 신에게서 두 번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보지 않으실 겁니까?" 옆에서 조용히 물어오는 사람은 친위대장 피오르경이었다. 칼리에르 3세는 담담한 피오르경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물었다. "경도 아들을 적지로 보낸다는 것을 잊고 있었군. ……짐은 괜찮으 니, 경은 가서 아들의 가는 모습을 보오." "……." "짐은……, 보고 싶지 않소. 아니, 볼 수가 없어. ……어떻게, 볼 수 가 있겠소?" 피오르경은 고개를 숙였다.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라도 쉬십시오." 카스트로와 로페냐가 카르노 국왕 칼리에르 3세에게 출국을 위한 작 별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아베르노를 비롯해 정신들과 귀족들이 그들 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테라로 가거든, 부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오기 바란다, 카스트로." "충고 고맙습니다, 전하." "로페냐경, 카스트로를 잘 부탁하오." "물론입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자신이 아끼는 검은색 말에 올랐다. 근위대장인 메스메 르경이 성문까지의 길을 인도하기로 되어있었다. 라에르는 카스트로의 바로 뒤에 붙어서 말을 몰았다. 왕궁을 뒤로하고, 남쪽 대로로 나섰다. 사람들이 구경하듯이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성문을 나 서서 메스메르경의 인사를 묵묵히 받고, 시선을 멀리 남쪽으로 돌렸다. 앞으로 5년간 돌아오지 못할 아르노와 왕궁은 염두에 두지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전하." 카스트로는 숨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전날 자기 전, 했던 맹세 가 선명하게 머리속에 떠올랐다. 지금부터 테라로 간다. 어찌되었든 5 년을 보내야 할 곳.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테라가 하는 수작을 두눈 으로 똑똑히 지켜볼 참이었다. 그리고 5년 뒤에, 비웃어줄 것이다. 카 르노는 절대 테라의 손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부족하다면,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카스트로는 말에 채찍질을 가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멈칫 하던 일행의 행렬이 빠르게 뒤따랐다. 라에르는 밤샘으로 피로한 기색 을 감추고, 카스트로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태양신 하야가 그들의 옆모 습을 비추고 있었다. ================================================================== [신군주론] 1장 끝났습니다. 2장은 이삼일 뒤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몸상태도 그렇고, 나름대로 2장을 점검(--;)해 봐야 하기때문에.. 빠르면 이틀 후에 뵙겠습니다. [신군주론]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추천해주신 분도, 메일 주신 분도, 쪽지 주신 분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독자가 소중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감사한다거나 하는 표현이 서툴러서.. (글쓰는 사람이 할 소리냐구요? --;) 꾸벅.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감기 걸리지 마세요.. -어질어질한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0 - 관련자료: 없음 [302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2 21:42 조회:181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0 - ================================================================== 제 2 장 :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대하여 카르노 남서부로 길게 뻗어있는 아스티노 산맥은 북국 라디프에서부 터 카르노를 거쳐 테라까지 이르는 길고 험한 산줄기이다. 라디프에서 시작되어 레이얄로 뻗어가는 시에프 산맥과 함께 자피아 대륙의 뼈대 를 이루는 산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스티노 산맥 남서쪽, 카르노 남부의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사내가 찾아들었다. 녹회색의 머리를 등뒤로 질끈 묶고, 거칠고 두터운 면셔츠 와 갈색 가죽 갑옷을 입은 전형적인 용병차림의 사내였다. 펠트로 만 든 갈색 망토를 휘감고 마을로 들어선 사내는 마을의 하나뿐인 여관을 찾아들었다. 마을의 이름을 딴 '후냐 여관'의 주인은 오십세 가량의 마음 넉넉해 보이는 남자였다. 여관 주인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녹회색 머리의 용 병에게 푸근한 미소로 인사했다. "어서오십쇼!" 녹회색 머리의 용병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묵고 가실 겁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제일 싸고 제일 좋은 방 하나 주십쇼." 여관주인은 대뜸 날아온 어이없는 주문에 항의를 했다. "제일 싸고 제일 좋은 방이 세상에 어딨소? 값만큼 좋은 거지!" 용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기까지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산골마을에 나말고 다른 손님이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 까 제일 좋은 방을 제일 싼 값에 줘도, 문제 될 건 없지 않아요?" 여관주인은 그 푸근한 얼굴로 눈을 찢어 노려보다가, 여전히 능글맞 게 웃어대는 용병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별 웃긴 사람 다 보겠구만. 까짓거, 그럽시다. 마침 제일 좋은 방을 쓰던 손님이 아침에 나갔으니 그 방을 안내해드리지." 여관주인은 어느새 말을 반쯤 낮추고 있었다. 장부에 용병의 싸인을 받은 여관주인은 카운터 뒤쪽 벽에 주욱 매달린 열쇠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용병은 싱글싱글 웃으며, 무겁게 보이는 가방을 둘러메고 여관 주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런 산골에도 손님이 오긴 오나 보군요?" 여관주인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같은 사람이 가끔씩 있더군요. 뭐, 우리집은 주업종이 술집이니 까, 묵어가는 손님은 없어도 단골 주객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꾸려나가 고 있다오." 여관주인은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이층에 있는 방문 하나를 열었다. "자, 이 방이오, 시에타씨. 열쇠는 여기있고." 여관주인이 방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타라 는 이름의 용병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위로 몸을 던졌다. 예전의 집만큼 편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이 정도면 꽤 양호한 편이다. 지난 몇 년간 싸움터에서 굴러다닌 것에 비하면, 이 곳은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츳. 나도 뭐하는 짓인지……." 용병은 한심스럽다는 말투로 알 수 없는 말을 던져놓고 눈을 감았 다. 대낮인데도, 피로가 그를 삼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나지막한 산길을 스친다. 멀리서부터 백여마리의 말 과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점차 그쪽으로부터 낙엽 깔린 바닥이 동요된다. 오래된 낙엽냄새가 상쾌하다. 카스트로는 탁한 숨을 그 차갑고도 청량한 공기로 바꿔들였다. 숨가쁜 입김이 공기중에 하얗 게 피어난다. 문득 하늘을 쳐다본 카스트로는 벌써 정오가 한참 지났 음을 깨닫고, 말고삐를 잡아챘다. "전하?" 라에르가 카스트로의 옆에 멈춰섰다. 카스트로는 주위 산세를 보면 서, 다가오는 기사단장 다이크경에게 물었다. "다이크경, 가까운 곳에 쉴만한 곳이 있습니까?" 카스트로의 옆에서 말을 세운 다이크경이 고개를 저었다. "저녁무렵에야 작은 영지가 하나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가지요." 시원스러운 얼굴로 웃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다이크경이 따라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스트로는 예전의 미소를 되찾고 있 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노에서 시작된 여정은 테라의 수도 테리온까지, 약 10여일 정도 가 걸린다. 카스트로가 선택한 길은 아르노와 테리온까지의 최단거리 로, 아스티노 산맥과 인접해있어 평지보다 산과 언덕이 더 많았다. 그 험한 길을 따라 카스트로 일행은 지금까지 별 탈없이 여행 4일째를 맞 고 있었다. 기사단장 다이크경이 점심시간임을 선포하자, 말 위에 탔던 기사들 과 친위대원들이 피곤한 몸으로 꾸물거리며 땅위로 내려섰다. 아무리 말 위의 전투에 단련된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매일 험한 길을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들은 카스트 로를 중심으로 묵묵히 자리잡고 앉아 건량을 씹고 있었고, 기사단원들 은 떠들썩하게 모여앉아 자기 몫의 식량을 꺼내들었다. "빌어먹을! 왜 또 내가 걸려서, 다시 이 고생을 해야하냐구! 저번에 도 그 성질사나운 왕세자비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여자보다 더 지독한 삼왕자라니!" 건량을 우적우적 씹어대며 툴툴거리는 베이경의 옆에서 포에르경이 대꾸했다. "그 여자보다 더 지독하다는 네 결론이 어디서 나왔는데? 그리고 너 라에르경 무지하게 존경하잖아! 이번에 가시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테라까지 동행이니 좋지, 뭘 그래?" "뭐, 라에르경이 함께 간다는 사실은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카스트 로 전하 옆에서 고생하시는 거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구!" "고생? 글쎄, 난 라에르경이 별로 고생하는 거 같지 않은데?" 불쑥 끼어든 로카르경이 턱짓으로 카스트로가 앉아있는 곳을 가리켰 다. 카스트로의 옆에, 테라 사신과 함께 앉아서 웃고있는 라에르의 모 습이 보였다. "라에르경, 잘 안웃기로 유명하잖아. 그런데 요 며칠새 보니까 카스 트로 전하와 함께 있으면 가끔 웃는 것도 보이더라." 베이경은 부리부리한 눈을 좁히며 로카르경의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너, 그런 것까지 눈여겨보고. 사실대로 말해! 너도 라에르경을 경쟁 자니 뭐니 그러더니 정말로는 좋아하는거지?" 로카르경은 먹던 건량을 입에 문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바보놈! 경쟁자니까 눈여겨보는거야!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거 몰라?" "그런 말 처음 듣는데?" 베이경은 슬쩍 주먹을 피해 앉으며 말했다. 정말 모른다는 표정에 잠자코 음식을 삼키던 포에르경이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바보가 뭘 알겠냐!" "뭐? 내가 왜 바보냐?" 다시 두 콤비의 투닥거림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로카르경은 뒤로 물러나 부지런히 빵을 먹었다. 물론 지금 먹고있는 빵이 베이경의 것 임은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 마차속에서 파리해진 얼굴로 기어나온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옆에서 반쯤 널브러졌다. 카스트로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로페냐를 쳐다보았다. "로페냐경은 귀국하는 길이 꽤 고통스러운가보군." 로페냐는 진저리를 치면서 대답했다. "말도 마십시오, 저기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이상한 겁니다. 쉴새없 이 흔들리고 찧어대고, 휴우, 좀 돌아가더라도 편한 길로 가시지 그러 셨습니까." 카스트로는 픽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는 경이 한시라도 빨리 테라로 가게 되어 기쁠 거라고 생각했는 데? 나는 이 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라엘, 자네는 어떤가?" 라에르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카르노에는 이보다 더 험한 길도 많습니다." 로페냐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카르노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걸 케테르님께 감사드려야겠군요." 시종장 하미르는 카스트로의 옆에서 식사시중을 들고 있었다. 왕자 의 식사라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빵과 음료수, 그리고 과일 몇가지가 함께 나왔을 뿐이다. "테라에는 산이 얼마 없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보군." 로페냐는 먹던 빵을 내려놓고 음료수만 연신 마셔대고 있었다. 마차 에서부터 메슥거렸던 위장이 음식을 대하자 더욱 울렁거린다. 지금 먹 는다면 마차에서 게워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빈속으로 가서 저녁에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로페냐는 음료수로만 배를 채우며 말 했다. "테라에는 성산 테라 말고는 변변한 산이 없습니다. 아스티노 산맥 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다 언덕 정도의 높이이고, 성산 테라도 그 리 높은 산은 아닙니다." "성산이라고 해서 꽤 높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언덕보다 조금 높은 정도일까요? 테라 신전이 있는 정상 까지, 테리온 시에서 2시간이면 넉넉하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푸노 산 정도일까?" "푸노 산이요?"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로페냐를 마주보며 카스트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피식 웃어버렸다. "5년전에 테라의 한족들이 끈질기게 짓밟은 산이지. 테라가 케테르 를 믿는 자들의 성산이라면, 푸노는 전신 로마의 신전이 있는, 카르노 의 성산인 셈이야." 말속에 비난하는 듯한 기색이 스며있자, 로페냐는 어색하게 몸을 뒤 채며 포도주를 집어들었다. "식욕이 없소, 로페냐경? 통 못 먹는 것 같은데?" 로페냐는 한순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써주는구나, 라고 감격했 다. 카스트로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증거였고, 그것은 친구로의 한발자국 전진임이 분명했다. 까짓 한끼쯤 굶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속이 좀 불편해서요. 전하께서는 그 음식들이 입에 맞지도 않으실 텐데, 잘 드시는군요?" 손안에 든 딱딱하게 식은 빵을 내려다보며. 카스트로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누구처럼 편하게 마차에 앉아오는게 아니라서 말이지. 하루종일 말 을 타야하니까 체력이 많이 필요하거든. 로페냐경도 바람도 쐴 겸, 마 차대신 말을 타는 게 어떻소? 멀미도 줄 것 같은데?" 로페냐는 지레 질린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 하, 생각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냥 마차로 만족하겠습 니다. 말을 타고 그런 속도로 몇시간씩 간다는 것은, 전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정말 카르노인의 체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더군요." 식은땀까지 흘리며 거절하는 로페냐를 보며, 카스트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친구로 삼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소탈하고 밝은 성격의 로페냐에게 미운 감정을 가지기도 힘들었다. 나라 사이의 미묘 한 외교문제로 온 사신이라는 것은 로페냐의 유쾌한 성격과는 너무 동 떨어져 보였다. 카스트로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손을 뒤로 뻗어 몸을 젖혔다. 높다 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시야 가득 들어온 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날씨였다. 어느 정도 옷을 껴입은 터라 살갗에 닿는 추위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첫눈이 오기 전까지일 뿐, 첫눈이 오면 본격적으로 추워질게 뻔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첫눈이 늦는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쉬고있을 때, 산새들이 푸드드드---- 거리며 일제히 저쪽에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카스트로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옆에 있던 라에르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식사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합니다." 라에르는 곧 친위대원들에게 주의시키고, 저쪽에 모여앉아 있는 기 사단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 투덜투덜거리며 일어나던 기사단원들은 곧, 시종과 시녀들, 테라 사신들을 가운데로 몰아넣고, 바깥쪽을 경계 하며 섰다. 철컥 철컥, 은색의 투구가 기사들의 얼굴을 가리고,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손에 익은 무기가 쥐어져있었다. "무슨 일이지?" 카스트로가 물었지만, 라에르로서도 확실한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 다.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엇?" 갑자기 로페냐가 나직하게 소리를 질렀다. 카스트로가 돌아보자, 로 페냐가 눈을 찌푸리며 귀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집히는 거라도 있나, 로페냐경?" 로페냐는 쉬잇! 하고 주위를 조용히 시키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피리… 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로페냐에게 의아하고 의혹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숲은 피리소리는커녕 기분나쁠 정도로 적막했다. 로페냐는 시 선의 압력에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주장했다. "분명 피리소리가……." 스스스-----! 뭔가의 움직임이 앞에 있던 기사들에게 포착되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앞을 응시했다. 한순간, 한 기사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엇! 저기! 저기! 이리닷!" 가장자리에 있던 한 기사의 외침이 있은 직후, 기사의 말을 증명이 라도 하듯 수십마리의 이리떼가 서쪽 숲에서 나타났다. 송곳니를 드러 낸 입가에 침을 흘리며, 크르르르르릉 가래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일행을 노려보는 모습이 섬뜩했다. 모두의 당황스 러움을 대표하듯 한 기사가 넋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거, 미친 것 같아!" 크르르르르르르--------- 회갈색 털을 곤두세워 부르르 떨며 몸을 낮춘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듯, 하얀 거품이 흐르는 송곳니가 마주 대한 기사들을 오싹 하게 한다. 숨막힐 듯한 긴장이 공터에 내려앉았다. "진정해라. 너희들은 누구보다 충실히 단련한 기사들이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하라!" 기사단장 다이크경의 단호한 지시와 격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 사들은 위축된 몸에서 조금씩 긴장을 풀고,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 기 시작했다. 베이경은 자신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던 이리와 대치한 채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베이경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는 그가 즐겨쓰는 커다란 검이 위협적으로 번뜩이며 들려있었다. 그 미묘한 신경전 가운데 베이 경의 옆쪽에 있는 기사에게 한 마리의 이리가 달려들었다. 베이경이 잠시 한눈 판 순간, 베이경의 앞에 있던 이리가 사나운 기세로 뛰어올 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곤두세우고 달려드는 이리를 본 베이경 은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갑옷으로 감싸인 팔에 이 리의 이빨이 긁히며 듣기 괴로운 마찰음을 내자, 옆에 있던 포에르경 이 그 이리의 허리를 힘껏 베어냈다. 푸확! 선명한 붉은색의 피를 내 뿜으며 숨막히는 피비린내와 함께 이리가 두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굴 러떨어졌다. 피범벅된 단면으로 내장이 삐져나온 것이 끔찍하다. "한눈 팔지 마, 바보녀석!" 포에르경이 찡그린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베이경은 팔에 뿌려진 뜨 끈한 피에 인상을 쓰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저쪽에 또 한 마리가 그 를 노려보고 있었다. ================================================================== [신군주론] 2 장 시작하겠습니다. T.T 대체 뭘 믿고, 이삼일만 쉬었다 가겠다고 했는지, 스스로의 배짱에 땅을 치고 통곡하고픈 새랍니다.. 감기가.. 쩝.. 그냥 지나가는 건줄 알고 쉽게 봤는데.. 아직까지 끈질기게 붙어있군요. 2장은 1장보다는 적은 분량이 될 것 같습니다. 뒷부분이 정리가 안되어서 걱정스럽지만.. (...망할 감기!! --;) 어떻게든 정리해 나가야겠지요.. ^^ 그럼, 횡수는 이것으로 마치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감기 걸리지 마세요..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1 - 관련자료:없음 [3031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3 20:53 조회:181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1 - ================================================================== 기사들의 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카스트로는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을 겁니다, 전하. 어느 정도 피해는 있겠지만, 방어망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카스트로가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한 라에르가 확신을 갖고 설명했다. 카스트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쉴새없이 공격해오는 이리떼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 지 않았다. 다만 뭔가 석연치 않은 것뿐이었다. "보통 이리떼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덤벼드나?" "네?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비하고 있 는데 공격해올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격해 왔잖아. 미쳤다고는 해도, 왜 저렇게……." "어쩌면……." 카스트로는 불쑥 끼어 든 로페냐를 쳐다보았다. 로페냐는 이리떼에 게 시선을 둔 채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저 놈들을 조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로페냐를 쳐다보던 카스트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리가 길들여지는 짐승이던가?" "길들이지 않더라도, 흥분시켜 적에게 달겨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카스트로가 그게 뭐냐는 듯 쳐다보자, 로페냐는 천천히 생각했던 것 을 말했다. "피리소리가 들렸다고 했잖습니까? 거기에 마법의 기운이 서려있었 습니다. 상당히 신경을 거슬리는 종류의." "마법?"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때, 높이 치솟던 이리 한 마리가 기사의 검에 뱃가죽을 베인 채 카스트로의 앞쪽에 있던 시녀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고 기절해버리는 시녀를 한 걸음 앞에 있던 친위대원이 잡아주었 다. "자신의 전방을 잘 감시하라!" 친위대원은 뒤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라에르를 발견하고, 팔에 들린 시녀를 다른 시녀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주 시했다. 시뻘건 피 속에 희멀건 내장이 드러난 채로 꿈틀거리는 이리의 모습 에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내장 속의 내용물들이 피와 섞이는 것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징그럽다. "시끄럽다! 닥치지 못할까! 전하의 안전에서 무슨 망령된 짓들이냐!" 시녀들을 통솔하는 시녀장 다나가 시녀들을 향해 고함쳤다. 숨소리 도 못 내고 조용해진 시녀들은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눈물이 손등위 로 범벅이 되어 흘러내린다. 그그극------! 갑옷과 이리의 이빨이 긁히는 마찰음에 시녀들은 못다지른 비명을 삼키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시녀들은 삼왕자를 따라 테라로 가는 길 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리떼가 물러가자, 다이크경은 기사단원들을 집합 시켰다. 피해상황을 보고받으며 다이크경은 안색을 굳혔다. 이동속도를 높이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지 않은 탓에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여섯 명이 크게 다쳤고, 그 중 두 명은 목과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이대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어딘가 긁히고 물린 경상을 입은 기 사는 부지기수였다. "의사는 어딨나!" 다이크경의 외침에 의사 다섯 명이 허둥지둥 시녀들을 뚫고 나와 기 사들의 상처를 살폈다. 라에르는 친위대원들을 나누어, 반은 아직 어수 선한 장내를 지키게 했고 반은 몇 명씩 조를 지어 산 속으로 정찰을 보냈다. 시종장 하미르는 수하 시종들에게 명령해 이리들의 시체를 한 군데로 치우게 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들을 보다가, 카스트로는 시 선을 숲으로 향했다. "마법이라……." 카스트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 다. 다이크경이 침통한 얼굴로 카스트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일정에 차질을 빚게되어 죄송합니다만, 가까운 영지로 가서 부상자 들에게 하루나 이틀 정도 치료를 받게 했으면 합니다, 전하." 죄라도 지은 듯한 다이크경의 모습이었다.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 으며 허락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다이크경." "감사합니다, 전하." 선발대를 뽑아 가까운 영지의 영주에게 보낸 뒤, 일행은 다친 기사 들을 마차에 태우고 천천히 움직였다. 로페냐는 자신의 마차를 다친 기사들에게 내어주고 카스트로의 옆에서 말을 몰았다. 부상자들을 염 두에 두어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라서, 로페냐는 여유있게 말을 타고 있었다. 겨울인데다 산 속이었기 때문에 날은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먼 저 보낸 선발대가 돌아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은 이미 깜깜해져 버려,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그 불안감이 카스 트로에게까지 전해질 때쯤, 일행은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 다. "선발대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 카스트로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다이크경이 옆에서 대답하고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몇몇 기사를 불 러 지시를 내리고, 곧 두 명의 기사가 일행을 앞질러 마을로 들어갔다. "가십시오, 전하." 친위대원들이 길을 텄다. 어둑어둑해지면서부터 기사들이 들고 있던 선명한 노란빛의 횃불들이 어둠 속에 길다란 두 줄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라에르의 호위를 받으며 그 길로 말을 몰았다. 닫힌 문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녹회색 머리의 뻔뻔스 러운 성격을 가진 용병, 치체르 시에타는 느린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 어나 앉아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끄럽던 소음이 점 점 가까워진다. 치체르는 입을 저억 벌리고 하품하면서 침대에서 내려 왔다. "하암, 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거야?" 뻑적지근한 몸을 쭈욱 늘여 기지개를 편 치체르는 눈에 끼인 눈꼽을 떼며 문을 열었다. 순간, 치체르는 계단에서 복도로 올라오는 기사들의 행렬을 보고 몸을 굳혔다. "무… 무슨 일이지? 전쟁이라도 났나?" 양쪽으로 다른 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연신 신음을 내뱉으며 올라오 는 부상자들의 모습은 흡사 전쟁이 난 지역의 임시병원을 연상케 했 다. 기사 십여명이 이층에 있는 객실 안으로 모두 사라지자, 치체르는 빼꼼이 열었던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 받아두었던 열쇠 로 문을 잠근 치체르는 부지런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웅성웅성웅성. 한산했던 낮과는 너무나 달라진 여관의 모습에, 치체 르는 잠시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해야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아래층의 테이블에는 저마다 한두군데씩 붕대를 감싼 기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멍해져버린 자신을 추스려 바가 있는 곳으로 가자, 입이 귀에 가서 걸린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치체르는 바 뒤에서 쉴새없이 주문 받으며 즐거워하는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여관주인은 그제서야 치체르를 돌아보며, 싱글벙글 아는 척을 했다. "아, 이제야 나오셨구료. 식사할 거라면 거기 앉으시오." 엉거주춤 의자에 걸터앉자 주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주문은?" "가장 싸고, 맛있는 걸로." 주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치체르는 바 위에 양팔을 팔짱 껴서 올려놓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죠? 전쟁이라도 났나요?" "전쟁은 아니고. 뭐라더라? 이번에 테라로 가신다는 왕자전하께서, 오늘 이 마을에서 머문답디다." 거기까지 말한 주인은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술을 달라고 외치는 기 사에게 달려갔다. 치체르는 아직 덜깼는지 멍멍한 얼굴을 손으로 비벼 댔다. '테라로 간다는 왕자?'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그런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저런 꼴들이라지?' 치체르는 옆에서 술을 퍼붓고 있는 덩치 큰 기사에게 의문을 풀어보 기로 했다. "수고하십니다, 기사 나리. 왕자 전하를 테라까지 호위해 가시나 보 지요?" 술을 입 속에 들이붓던 기사는, 옆에 있는 치체르를 흘끔 바라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치체르는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까 보니까 부상당하신 분들이 계신 것 같던데." 기사는 푸우우 깊은 숨을 내쉬고, 술내를 풀풀 풍기며 아낌없이 좀 전에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있어도 보통 일이 있던 게 아니지. 그러게 사람은 재수없는 사람이 랑 같이 있으면 같이 날벼락을 맞는 거라고. 글쎄, 오죽 재수가 없으면 미친 이리떼가 다 달려들겠나!" 베이 슈메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힌 그 곰같은 인상을 가진 기사는 사건의 전말은 물론이고, 시키지도 않은 자신의 신세타령과 삼왕자에 대한 알 수 없는 적개심까지 열렬히 토로하며 새벽까지 치체르를 붙잡 아두었다. 뭔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의외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일어났던 왕궁 에서의 세력다툼과 삼왕자와 왕세자비간의 갈등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기까지 했다. 촌장의 집이라고 해서 주위의 다른 집들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백 발이 성성한 촌장 내외와 열대여섯살의 손녀가 사는 촌장의 집은 삼왕 자궁의 응접실 하나보다도 작았다. 카스트로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집 구조였는데, 단층인데다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천장이 낮아서 움직일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왕궁에서 살아온 카스트로에게는 숨막힐 듯 작 은 집이었지만 카스트로는 그리 내색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 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워왔던 것이 몸에 배인 탓이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늙은 촌장이 도리어 미안해하며 연신 허리를 숙이자, 카스트로는 안 심시키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대가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면 이 추운 날 밖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을 거요. 폐를 끼치는 것은 오히려 나인데, 그대가 그런 말하면 내 가 불편하오." "전하……." 카스트로는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다른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혹 이 마을에서 이리떼가 인가에 피해를 주거나 한 적은 없소?" 촌장은 갸웃거리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카스트로를 바라보았 다. 카스트로가 진지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을 깨닫고, 촌장은 떠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이리떼라니요? 가끔가다 집에서 기르 는 가축이 한두마리씩 없어지는 일은 있어도……." 알겠다고 대답하고 카스트로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앞에서 촌 장이 죄지은 것 마냥 안절부절하는 것을 눈치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신을 힘들어하는 것만큼, 카스트로도 그를 대하는 게 조심스러 웠다. "그만 물러가시오. 나도 이만 쉬어야겠소." "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전하."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선 시종장 하미르를 돌아보았다. "로페냐경과 다이크경을 불러오라. 라에르경과 함께 침실에서 기다 리고 있을테니, 그리 전하라." "네, 전하." 등뒤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촌장이 느껴진다. 카스트로는 답답한 한 숨을 내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2 - 관련자료:없음 [3033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4 21:50 조회:180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2 - ================================================================== 촌장이 내어준 방은 투박한 느낌의 좁은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장 대만으로도 공간이 꽉 차 보이는 작은 방이었다. 핑크색 꽃무늬의 침 대시트와 커튼으로 보아, 아무래도 촌장 손녀의 침실인 것 같았다. 얼 떨결에 낯선 처녀의 침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그렇 다고 하나 남은 주인의 침실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카스트로 는 비좁은 침실을 한번 둘러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딱히 앉을 만한 의자가 없었다. 그런 카스트로를 바라보던 라에르가 용케 눈치채고 말 했다. "의자를 가져오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아, 그래." 라에르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카스트로는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촛불 세 개로 방안이 환해 보인다. 예전에 소르미노 자작가에서 보았 던 라에르의 작은 방조차 이 방에 비하면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라 에르가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불쑥 방금 생각한 것을 입밖에 내었다. "보통, 카르노의 평민들은 이런 작은 집에서 사나?" 라에르는 머뭇거렸다. 라에르 역시 집과 왕궁에서만 생활해왔기 때 문에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라에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찌푸린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사는 집이라던가 하 는 것은 별로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이런 집에서 살라고 하면 나라 도 불평할 수밖에 없겠어." 노크 소리가 울렸다. 시종 두 명이 의자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카 스트로는 의자 세 개를 침대에 마주하도록 놓게 했다. "전하.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경과 기사단장 다이크경께서 오셨습니 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장 하미르의 목소리에, 카스트로는 방금 전까 지 했던 생각들을 접어놓았다. "들게 하라." "네, 전하." 문이 열리고, 로페냐와 다이크경이 들어섰다. 그다지 좋은 일이 없음 에도 로페냐는 밝은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앉으시오, 로페냐경. 다이크경. 그리고 라에르경도 앉지." "네, 전하." 로페냐는 딱딱한 나무의자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 앉 아보고 했지만, 곧 포기한 얼굴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다이크경과 라에르는 긴장된 얼굴로 카스트로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었다. "경들을 부른 것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좀더 의견을 듣고싶어서입니다. 아까 이리떼의 습격을 받았을 때, 로페 냐경은 그것이 마법과 관련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더 자세히 들려 주시겠소?" 카스트로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하자, 로페냐는 뭔가 실망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카스트로로부터의 부름이라고 들었을 때 떠올랐던, '저녁식사 후, 여유롭게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며 우정을 쌓는다'는 망 상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로페냐는 곧 일그러진 표정을 집어치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지도 모른다. "네. 확실히 마법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분명 그 피리소리에 섞여서 흘러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피리소리 같은 건 듣지 못했는데? 라에르경, 자네는 들었나?" 라에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머리를 저었다.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아," 라에르와 카스트로를 번갈아보던 로페냐는 뭔가를 알겠다는 듯, 주 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쳤다. "당연한 겁니다. 전하께서는 마법을 배우신 적이 없지요?" 반짝이는 로페냐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카스트로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잖소? 나는 카르노인이니까." 다소 고집스러운 대답에, 로페냐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그 피리소리는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렸을 겁 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그 소리를 못들은 것 은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카스트로가 자신을 바라보고 말을 흐리자, 로페냐는 웃는 얼굴로 재 촉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뭐든 물어보십시오." 카스트로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로페냐의 얼굴과 몸매를 뜯어보았 다. 품평회에 내놓은 종마라도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한차례의 감정을 마친 뒤, 카스트로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마법사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경이 마법사라는 말인가?" "……!" 로페냐는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짓고 카스트로를 바라보 았다. 얼떨떨한 모습인 채로 로페냐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제가 마법사인줄 모르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저를 대체 뭐하 는 사람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꾸했다. "테라의 사신. 뭐 다른 게 붙었어야 하는 거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로페냐는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저는 전하를 테리온까지 무사히 모시고 가려고 선발된 마법사입니 다! 마법사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마법사란 말입니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 나는 마법사라면, 코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이상한 말 이나 지껄이는 녀석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로페냐는 숨까지 거칠게 씩씩 내쉬며 자신이 마법사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건 주로 레이얄의 마법대학 계통의 복장입니다. 자신들이 정통이 라고 주장하고 그 복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마법사들 도 꽤 됩니다. 주로 비주류인 그들이 테라로 많이 이주해왔고, 저 도……." 로페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끊고 카스트로의 눈치를 살폈다. 문득 카스트로가 레이얄인도 테라인도 싫어한다는 것을 떠올 렸던 것이다. 게다가 얼결에 자신이 레이얄계 테라인이라고 말해버린 게 아닌가! 최악이다! 라고 자책과 자학의 길을 착실히 걷는 로페냐였 지만, 카스트로는 별 생각없이 그런 로페냐를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 볼 뿐이었다. 로페냐는 슬금 눈치를 보다가 머리를 내저었다. 다행히 카스트로는 자신이 했던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아닙니다. 어쨌든 저는 마법사 맞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 란 말입니다!" 카스트로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낮에 우리가 이리떼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왜 가만히 있었 지? 마법사라면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난처한 모습으로 로페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제가 전하의 곁을 떠났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안되고, 또, 이리떼들과 기사들이 마구 엉켜있어서 어떻게 공격해야할지 몰라 서……." 카스트로의 얼굴에 의심이 점점 더 두껍게 덮였지만, 로페냐는 큰소 리침으로서 그 상황을 모면하려했다. "어쨌든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 이리떼를 조종한 피리의 주인이 누 구냐는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일단 로페냐에 대한 의심은 접기로 하고, 곧 원래의 화 제로 돌아가는데 동의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낮에 공격해온 마법사 문제였으니까. "그래. 누가 그랬을까? 무슨 목적으로?"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로페냐도 별다른 해답을 알고있지 못했 다. 주어진 실마리라고는 상대가 이리떼를 조종하는 '피리'를 가진 마 법사라는 것, 그리고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것뿐이다. "마법사가 아닌 자가, 그 피리를 불어 이리떼를 조종할 수 있습니 까?" 라에르가 묻자, 로페냐는 심각한 얼굴로 머리속의 지식들을 뒤적였 다. "아마, 마법사라는 게 맞을 겁니다. 아무리 마법이 깃든 물건이라도,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자가 만지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마법사거나, 마법사의 문하생이거나, 어쨌든 조금이라도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카르노인일 가능성은 희박하군. 그러면 레이얄인이나 테라인인가?" "테라인은 아닙니다!" 즉각적으로 테라인을 옹호하는 로페냐였다. 감정적으로 느껴질 만큼 바로 반응해온 대답이기에, 카스트로는 그리 신용이 가지 않는 표정으 로 대꾸했다. "무슨 근거로?" 시큰둥한 카스트로를 보며 로페냐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테라에서는 전하를 테라로 모셔오는 것을 바라고, 또 지금 그것이 성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전하를 시해……" 로페냐는 자신의 말에 놀란 듯 멈칫하다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전하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이 분명한 카스트로의 입술이 불쾌한 듯이 비틀렸다. "그러면……, 레이얄인인가?"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다이크경이 입을 열었다. 다이크경은 로페냐를 향해 말을 이었다. "로페냐경은 테라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테라에서 전하께 호감을 느 껴 불러들인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불러들인 측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그것에 불만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테라가 안전한 곳이라면 처 음부터 이 정도 규모의 친위대와 기사단이 따라갈 이유도 없습니다." 로페냐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말 대로 한족들의 의견도 하나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물며 수많은 귀족들의 의견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카르노의 왕자라는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상당수일 것이다. 절대로 테라인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미묘한 공백의 시간에 라 에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마법사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법사를 고용 한 사람이 누구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마법사를 고용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에르를 제외한 모두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라에르를 쳐다보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카스트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팔짱을 꼈 다. 카스트로는 한참을 생각한 뒤,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며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만약 그 이리떼를 습격하도록 한 마법 사의 목표가 과연 우리가 맞는가인데, 마법사가 실수로 우리를 습격하 도록 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로페냐는 잠시 생각해본 끝에 머리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 근처에 우리 일행 말고는 지나가 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사람 사는 곳조차 말을 타고 두 시간이 넘 어서야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마법사의 공격목표는 분명 우 리 일행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사가 공격목표를 잘못 설정했다 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듯 그 가능성을 강력하게 부정한다. 카 스트로는 그 대답이 못마땅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산적이 멋모르고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다던가……." "카르노의 산적이 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 다. 그리고 산적이라면 이렇게 많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을 털려 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마법사 외에 다른 산적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산적이라면 그 혼란한 틈을 탔을 겁니다." 다이크경이 대답하자, 라에르는 동의의 뜻을 비추며 고개를 끄덕였 다. "마법사의 공격목표도 잘못된 게 아니고, 우둔한 산적들의 소행도 아니라면, 그럼 누군가 전하를 노리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전하를 노리고 있는 건지?" 카스트로는 굳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앞쪽 어딘가를 쏘아보았 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가, 감히 카르노의 왕자인 자신을 노 린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특별히 원한을 산적이 있던가? '원한……, 원한이라…. 혹시, 그 레이얄 계집이?' 그럴 듯 했다. 마법사와 레이얄이라는 것은, 검사와 카르노라는 공식 만큼이나 당연한 것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자꾸만 그쪽으로 생각을 기울게 했다. 라에르는 시시각각 변하는 카스트로의 표정을 보고 심기가 불편하다 는 것을 눈치챘지만, 얼버무리기보다 빨리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레이얄인일 거라고 하셨지요, 로페냐경?" 로페냐는 느리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신이 했던 말과 다이 크경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되씹어봤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옳 은 것 같았다. "테라인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테라로 가는 길에 전하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테라가 뒤집어쓸 판입니다. 테라는 아닙니다." 라에르가 신음하듯 내뱉았다. "그렇다면, 카르노인이나 레이얄인이라는 건데……" "그만둬, 라에르!" 감정적으로 라에르의 말을 끊고,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 었다. "별로, 카르노인이 나를 죽이려한다는 걸 믿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 감정은 접어두고, 하나씩 검토해나가지. 우선……, 레이얄인 이라면, 나를 노릴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누굴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 러보고, 스스로 생각해냈던 답을 말했다. "레이얄인이라면 가장 유력한 자는 그 레이얄 계집이다. 왕세자비가 레이얄의 마법사를 데리고 왔었습니까? 다이크경?" 지명받은 다이크경은 눈가를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왕세자 전하와 함께 온 일행은 마중나간 저희 기사단원을 빼고도 50여명이 넘었습니다. 물론 지금 계신 테라의 분들도 섞여있었지만, 그 들 중 어떤 자가 마법사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마법사의 로브를 입 은 사람은 없었습니다만……." "좋습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 계집이라면 내 앞에서도 날 죽이라고 했던 계집이니, 그 이유는 충분해." 카스트로는 스스로 납득했다. "그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기는 하지만, 카르노인이라면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할까?"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 대답을 생각해보던 카스트로는 점차 안색을 흐렸다. 생각해보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적이 많은 나라가 카르노일 테니까. 미카에르 대공을 비롯해서 유타르경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 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미움받아버린 아베 르노를 포함해,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자칫 공을 세우려는 욕심으로 자신을 공격한다면……. 카스트로는 신음을 삼키며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말하기 껄끄 러워하는 표정들이 선명하다. 로페냐는 잘 모르는 일이라서인지 자신 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스로 의심 이 가는 자들을 입밖에 내었다. "아베르노 전하와 레이얄 계집이 합심해서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 겠지. 아니면 미카에르 대공이나 유타르경." "……." 방안은 조용했다. 누구도 대답할 엄두를 못낸다는 게 정확할 그런 적막이다. 그 적막을 깬 사람은 머뭇거리면서 반론을 꺼낸 다이크경이 었다. "아베르노 전하까지는……, 너무 성급하신 짐작이 아니실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이크경?" "……하지만 두 분은 친형제이시고,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무척 사이 가 좋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냉소적으로 웃으며,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때로 친형제는 누구보다 치명적인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 다이크경은 물론 라에르와 로페냐까지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카 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얘기는 그만두고,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을 정리해봅시다. 먼저 마법사가 우리 일행을 노리고 있다. 그 정확한 목표는, 아마도 나일테 고. 상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사주한 자는 그 레이얄 계집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하지만 결국 그 마법사를 잡아야 확 실히 알 것 같소. 그 마법사를 잡을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에 대해서라면 이런저런 추론을 할 수 있지만, 마법사를 잡는 방법이라면 생각나는 게 없었다. 카스트로는 시간이 지나도록 아 무도 말을 할 생각을 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고 다그쳤다. "그 마법사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소? 아니면 언제 어느 때 공격 해올지 모를 그 마법사를 기다려 얌전히 이리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 다는 건가?" 다소 격하게 말을 내뱉자, 로페냐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미리 잡을 방도는 없지만, 다시 피리소리가 들리면 그곳으로 찾아 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법사도 잡을 수 있겠지요." "단지 앉아서 그 자가 다시 공격해오길 기다리자는 건가? 정말 그것 밖에 방법이 없소?" 카스트로의 물음에 모두들 더 깊이 침묵했다. 카스트로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뿜으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다시 습격해왔을 때 그 마법사를 잡을 방법은?" 로페냐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마법사의 위치는 제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피리 소리를 들 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리떼가 습격해온 뒤에는, 저 혼자 움직이기는 무리가 있습니 다." "그러면 기사 몇 명을 붙여주면 되겠소?" 로페냐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몇 명만 붙여주시면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좋소. 기사문제에 대해서는 다이크경이 알아서 조치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카스트로는 조금쯤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팔짱 을 풀었다. "좋아. 정말 나를 노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를 죽이지 못했으니까 다시 공격해 올테지. 언제쯤 공격해 올 것 같습니까?" "적이 우리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 마을에 있을 동안 에는 공격해오지 않을 겁니다." 카스트로는 시선을 다이크경에게 향했다. "마을에서 떠날 때부터, 다이크경께서 주의해주십시오." "네, 전하."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3 - 관련자료:없음 [3035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5 22:06 조회:176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3 - ================================================================== 태양의 신 하야의 마차가 어두웠던 천공위로 빛을 뿌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후냐 마을의 하나뿐인 여관 1층에는 밤새 술을 마시다 그대로 뻗어버린 기사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마음씨 좋은 여관주인으로서도 덩치가 산만한 기사들을 전부 2층의 객실로 옮기는 것은 무리였던지라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1층 홀에서 치체르는 태연 한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얼굴도 모르는 기사 와 술마시며 이야기하던 사람같지 않게 멀쩡한 모습이었다. 상대했던 기사 베이경이 다른 기사 두 명에게 실려간 것에 비하면, 지금 치체르 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멀끔했다. "그렇게 퍼마시고 피곤하지 않소? 느즈막히 일어날 줄 알았는데?" 여관주인이 물을 따라주면서 치체르에게 물었다. 밤새 술을 퍼댄 기 사들 때문에 제대로 자지못해서인지, 여관주인의 두 눈이 반쯤 감겨져 있었다. 치체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접시 위의 고기를 잘라 입으로 가 져갔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붙어서요. 전날 몇시에 잤든, 무슨 일을 했 든, 언제나 이때쯤 일어나게 되더군요." 한입에 고기를 털어넣고 우물거리는 치체르를 보며, 여관주인은 피 실 미소지었다. "좋은 습관이오. 나는 좀체로 그게 안되더군요. 매일 마누라가 깨워 줘야나 일어나지." 치체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노총각 앞에서 너무 자랑하시는 거 아녜요? 나도 결혼하면, 아침마 다 마누라에게 깨워달라고 할겁니다!" "하하하, 그리 노총각처럼 보이지 않는데, 뭘 그러시오?" 치체르는 여관주인이 웃는 모습을 보다가, 기운없이 마주웃어버렸다. "제대로 결혼했다면, 애 두셋은 두었을 거라구요." "뭐가 걱정이오? 얼굴 못나지 않았겠다, 몸 좋고, 사내답겠다. 여자 가 줄을 서겠구만, 뭘." "그러면 주인장이 괜찮은 아가씨 하나 소개시……음?" 치체르는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작스럽게 열린 여관 문을 돌아보았다. 서른 살이나 되었음직한 기사를 선두로 세 명이 더 따라들어오고 있었 다. 은색갑옷과 암녹색 망토의 카르노 왕실 기사단의 정규복장을 입은 적자색 머리의 남자는 아침햇살을 등진 모습으로 여관을 주욱 훑어보 았다. 여관주인과 치체르를 지나친 남자의 시선이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몇몇 기사들의 모습에 이르자, 불쾌한 듯 찌푸린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어딘지 절도있는 명령이, 그 남자의 입에서 떨어졌다. "반시간내에 모두 이 곳에 집결시켜라!" "네, 다이크경." 뒤에 서있던 세 명의 기사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들은 곧장 여관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을 깨우고, 여관주인에 게 다가와 열쇠를 받아들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다이크경?' 치체르는 방금 들은 이름을 속으로 되뇌이며, 여관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이름이라면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검에 뜻을 둔 카르노의 사내라면, 다이크 폰 하우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 람이 없을 것이다. 카르노 왕실 기사단장! 한때, 치체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직함을 지금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내. 치체르의 시선을 느낀 듯, 다이크경은 치체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 선이 마주치자, 치체르는 예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 여보였다. 다이크경은 찌푸린 얼굴로 치체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우당 탕거리며 내려오는 기사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이 엉켜 바닥까지 굴러떨어지는 자, 졸 면서 뛰어오다가 앞사람을 들이받고 같이 바닥으로 나뒹구는 자. 다이 크경은 기사들의 한심스런 모습에 쯧쯧 혀를 찼다. "다 모였나?" "움직이지 못하는 기사 여섯 명만 빼고 모두 모였습니다." 함께 왔던 기사 중 한 명이 보고하자, 다이크경은 고개를 까딱하고 모여있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하루 푹 쉬라고 했더니, 다들 술이나 퍼마신 꼴들이군! 너희들이 왕 실 기사단의 기사라는 자각은 있는 거냐? 이게 무슨 꼴들인가?" 하품을 하던 기사도,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던 기사도 모두 다이크경 의 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모습들이다. 다이크경은 다시 혀를 찼다. "너희들이 여기 놀러 온 걸로 아나? 왕궁에서 나온 다음부터, 너희 들은 엄연히 임무수행중이다! 전날 습격을 받아 부상자를 치료하려고 온 와중에 술타령을 해? 부상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관에 묵도록 허락 하신 전하께서, 만약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 지 생각이나 해봤나?"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이크경." 다이크경은 숙연해진 기사들을 둘러보고는 나직이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조금 전, 이 영지의 영주인 로노 자작이 도착했다. 아마 지금쯤 전 하를 알현하고 있을 것이다. 알현이 끝난 후, 곧바로 로노 성으로 출발 할 것이니,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하고 대 기하라." 앞쪽에 있던 한 기사가 궁금한 듯 되물었다. "완전무장입니까?" "그렇다. 또다시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알겠습니다, 다이크경!" "알겠습니다." 즉각 대답하는 기사들에 섞여 불평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아직 식사도 못했는데……." 다이크경은 방금 투덜거린 베이경을 노려보았다. 그 큰 덩치가 찔끔 하는 것을 바라보며 다이크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식사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시간이 없어서 못먹는다면, 그것은 게으 른 자신들의 탓이다! 이상!" 다이크경이 여관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이기 시 작했다. 여기저기서 불평과 자책, 한숨소리,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가장 빠른 식사를 주문하는 소리가 여관 안을 가득 메웠다. 카스트로는 촌장의 집으로 막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첫눈 에 보아도 부자지간임을 알 수 있는 중년을 넘은 반백의 남자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매부리코와 갈색의 머리를 똑같이 가진 사람들이 었다. 그 두 사람은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거실에 앉아있는 카스트 로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대 카르노의 삼왕자 전하께, 로노 자작 라스파르가 인사올립니다. 전하를 이렇게 직접 뵙고, 또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 다. 성심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왕자다운 근엄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뜻하지 않게 신세를 지게 되었소. 잘 부탁드리오." "부탁이라니 당치않으십니다. 카르노의 신하된 자로서 당연히 할 도 리입니다." 카스트로는 미소를 띤 얼굴로 라스파르경의 옆에 있는 청년을 돌아 보았다. "그쪽은?" "대 카르노의 삼왕자 전하께, 레이르 폰 로노가 인사올립니다. 전하 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스트로는 인사하는 레이르경에게 웃어보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서시오." "네, 전하." 카스트로는 그들 부자에게 로페냐와 라에르를 소개했다. "이쪽은 테라사신단의 대표인 하야로비 후작이고, 이 사람은 내 호 위기사인 라에르경이오. 우리는 아직 식사 전인데, 경들도 아직이라면 함께 하지 않겠소?" 로노 자작과 그 아들은 황송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께서 친히 청해주셨는데 그런 영광된 자리를 거절할 리가 있겠 습니까?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카스트로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눈동자 속에 장난기가 한가득 반짝 이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위엄과 자비에 가득 찬 왕자다운 모 습이었다. "내게 감사할 것은 없소. 수고는 이 집 주인 내외가 했으니, 그들에 게 하던가." 두 부자가 어리둥절해있는 사이, 카스트로는 막 부엌에서 나온 촌장 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다 되었소?"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던 촌장은 얼른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에, 전하. 하지만 저희들이나 먹는 거친 음식들이 입에 맞으실 지……." 카스트로는 의자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작은 실내에 카스트로의 장신은 꽉 차서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카스트로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입에 맞는 음식을 바란 게 아니오. 내 나라 백성들이 먹는 음식이 궁금했을 뿐이라고 했지 않소? 설마 사람이 못먹는 음식을 먹는 건 아 닐테지. 자, 갑시다. 라스파르경?" "아, 예, 전하." 앞장서는 카스트로의 뒤를 따라가면서 눈을 마주친 두 부자는 똑같 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촌장의 집 앞으로 다가온 다이크경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좁은 부엌의 한가운데, 누추한 부엌과는 어울리지 않 는 고급스런 옷차림의 귀족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박한 나무식탁의 상석에는 이 자리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신분의 남자가 괴로운 표정으로 접시 위의 스프를 휘젓고 있었다. "기사단장 다이크경께서 오셨습니다." 안내를 맡은 시종이 알리자 모두들 고개를 들어 다이크경을 바라보 았다. 모두들 고문이라도 받고있는 듯한 표정들이어서, 다이크경은 영 문도 모른 채 당혹스런 감정을 느끼며 그들을 마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다이크경. 라스파르경과는 인사하셨습니까?" 카스트로는 대뜸 스푼을 내려놓고 환한 얼굴로 다이크경을 반겼다. 지나치게 반기는 것 같아 움찔했지만, 다이크경은 곧 자신이 할 말을 입밖에 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려 인사했다. "카르노 왕실 기사단장 다이크 폰 하우노입니다. 로노 자작이시지 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라스파르경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소개를 하며 답례했다. "로노 자작 라스파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장남인 레이르입 니다. 평소에 다이크경의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이렇듯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다이크경은 두 부자와 인사를 나누고 시종이 빼어주는 의자에 앉았 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이크경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스프가 놓여졌다. 다이크경이 스푼을 들어 스프에 담그자 어디선가 꿀 꺽 하는 침음성이 울렸다. 다이크경은 이 귀족적이지 못한 소리에 반 응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다이크경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손과 입 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뭐,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때까지 다이크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후다닥 자신의 스푼으로 스 프를 휘저으며 딴청을 부린다. 미간을 좁히는 다이크경을 향해, 카스트 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 "시장하실텐데, 어서 드십시오." 카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시범이라도 보이듯 자신의 스프를 한입 떠먹었다. 다이크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스푼 가득 스프를 퍼담아 입 속으로 가져갔다. 다음순간, 다이크경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리 고 곧 모든 사람들의 그 이해할 수 없던 표정들을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컥! 콜록, 콜록, 후훕! 키킥!" 다이크경은 고개를 들어 방금 전 소리를 낸 사람을 쏘아보았다. 라 에르가 고개를 돌리고, 시뻘개진 얼굴을 한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곧바로 그 옆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카스트로가 눈물까 지 흘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큭, 크흣, 푸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후후후후훗 후후후후후!" 다이크경의 불만스런 표정을 보며 다른 사람들도 참았던 웃음을 터 트렸다. 카스트로는 배가 아플 때까지 마음껏 웃어제낀 다음, 다소 미 안한 표정으로 다이크경을 바라보았다. "실례했소. 하지만, 하핫, 경의 표정이 너무 걸작이어서, 큭큭." "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다이크경. 훗, 모두들 경을 비웃는 게 아 니라, 하하핫." 로페냐도 시작한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카스트 로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두를 식사에 초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소. 괜히 내 객기 때문에 모두가 고생하는군. 하지만, 흥미로운 경험이기도 했다고 보는데? 이런 평민들의 음식을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맛볼 수 있겠소?" 그다지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카스트로는 오기로 말을 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 모두, 수백 수천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들이오. 그 대들이 맛좋은 음식을 먹을 때, 대다수 백성들은 이런 음식을 먹을 것 이오. 한번쯤 이런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봐." 납득했든 안했든, 식탁에 둘러앉은 귀족들은 숙연한 분위기였다. 다 이크경은 그제서야 불만스러웠던 표정을 풀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였습니까? 새삼, 라이스트경이 존경스러워 지는군요. 백성 을 그 정도로 생각해주는 군주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도 대부분 이 간과하고 있는 것인데요." 라이스트 폰 사피노. 카르노의 대학자로서, 이년전에 영지로 돌아간 전 재상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카스트로의 정치학 스승이었던 사람이다. 카스트로는 백발이 성성했던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떨떠 름한 미소를 지었다. 별 생각없이 했던 말에, 자신의 스승까지 칭찬을 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카스트로가 느닷없이 예정에도 없던 조찬 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평민의 집 에서 자 본 김에 평민의 식사도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이왕 이면 혼자보다 여러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단순한 변명으로 걸맞지 않은 칭찬까지 들어버린 카스트로는 괜히 불 편해져서 말을 돌렸다. "글쎄, 백성을 위하는 군주라……. 그것은 나보다 아베르노 전하께서 아셔야 할 덕목인 것 같군요. 그나저나 어서 먹고 출발해야하지 않 소?" 카스트로의 마지막 말은 모두를 다시 고문받는 표정으로 만들어버렸 다. 단순히 '평민의 음식'이라는 차원이 아닌 '안주인의 음식솜씨'에 기 인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음식'을 알지 못하는 왕자와 귀 족들이 그 문제의 요점을 파악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 형편없이 맛없는 스프를 꿋꿋하게 떠먹고 빵을 씹는 카스트로 때문 에, 모두는 불평불만을 입밖에 내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접시를 비워야 했다. 물론 맛을 보기 전에 목구멍으로 삼켜버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4 - 관련자료:없음 [3037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6 21:52 조회:177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4 - ================================================================== 조그만 산골마을인 후냐의 길목에는 생전처음 '왕자' 라는 높은 사람 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가득 메워졌다. 대여섯살 먹은 꼬마에서 부터 여든살 노인까지, 마을 사람이라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나온 것 같았다. 우연히 이 마을에 머물게 된 치체르 역시 얼결에 여관주인에 게 끌려 따라나온 상태였다. "왕족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합니까? 어차피 눈 두 개, 코 하나 입하 나 가진 다 같은 사람일뿐이던데." 옆에서 발돋움하며 목을 빼는 여관주인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치체르 는 한심스런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들은 왕자가 간밤에 머물렀다는 촌장 집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같은 산골에서 평생가야 언제 왕족을 구경해보겠소? 그것도 보 통 왕족도 아니고 왕자인데. 그러고보니 꼭 언제 왕족을 본 것처럼 말 하는데, 댁은 왕족을 본 적 있소?" 치체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해, 딱 한 번 왕족을 본 경험이 있었다. 그 왕족이 카르노 왕족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그런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글쎄라니, 무슨 말이오?"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짚고 돌아보는 여관주인에게 치체르는 어색한 미소로 무마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죠, 뭘. 아, 저기 나오는데요? 저 사람이 왕자인 가 보죠?" 여관주인이 얼른 고개를 돌린다. 촌장 집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큰 키 때문인지 머리를 숙여서 밖으로 나온 검은 머리의 남자와 그 뒤를 따라나오는 흑갈색 머리의 남자. 둘 모두 훤칠한 장신 이었다. 그 뒤를 이어 나온 사람은 짙은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콧수염을 기른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누가 왕자지?" 여관주인의 중얼거림을 듣고 치체르도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구경 하러 나온 사람들의 머리도 머리였지만 사람들의 진입을 가로막듯 두 줄로 늘어선 기사들의 덩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와아! 저 사람인가보군! 촌장은 좋겠어! 왕자가 악수까지! 아우, 나 도 여관말고, 촌장이나 할걸!" 여관주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치체르는 왠지 약이 올랐다. 처 음에는 '왕자따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여관주인의 설명 만 듣고 있자니 감질맛 나듯 호기심이 동했다. 치체르는 여관주인처럼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몸을 쭉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별 볼 것 없 는 평범한 시골노인에게 미소지으며 뭐라고 말하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왕자는 왕자신가봐! 손짓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에 기품이 배어있지 않은가!" 언제부터인지, 왕자에 대해 존칭을 하는 여관주인의 말을 들으며, 치 체르는 그 왕자라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깨에 닿을 정도의 새까만 머리와 검은색 옷으로 감싸인 늘씬한 장신, 따스함이 배어나오 는 미소어린 얼굴. 치체르의 머리속에는 전에 딱 한 번 보았던 북국 라디프의 왕제(王弟)가 떠올랐다. 비계살로 번들거리는 얼굴과 몸, 그 리고 그 퉁퉁한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몸에 휘감은 비싼 보석들. "……." 치체르는 무언가를 말할 듯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그 왕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까만 말 위에 오른 왕자는 마치 전신 로마처럼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이었다. 몸에 걸친 검은 벨벳의 옷들과 망토도, 옷과 모자를 장식하는 보석들도, 사치스럽다기보다는 제 자리 를 찾아 안착한 듯 잘 어울려보인다. 라디프의 왕제라는 비계덩어리와 비슷할 것이라 예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갑작스런 환호성소리에 치체르는 다시 발돋움을 했다. 여 관주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손을 흔들어주셨어! 조용조용! 뭐라고 하시는데?" 차츰 조용해지는 사람들의 소리에 이어, 조금씩 왕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호의에 감사한다. ……것이다. 그럼…… 있기를." 띄엄띄엄 들리는 말투에도 사람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격렬하게 환 호했다. 그리고 한두사람의 외침이 점점 커져, 모두가 호흡을 맞춰 소 리지르고 있었다. "전신 로마의 가호가 있기를!" "왕자 전하께 전신 로마의 가호가 있기를!" 왕자는 말고삐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천천히 흔들었다. 사람들을 향한 왕자의 얼굴에는 위엄있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린 듯이 '왕자다 운' 왕자의 모습이었다. 치체르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멀어지는 검은 머리 왕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느리게 치체르의 녹색 눈동자 위에 차가운 냉소가 스 쳐갔다. 치체르는 들리지 않게 코웃음을 치고 아직도 웅성대는 그 자 리를 빠져나갔다. 두두두두두두! 백여필의 말이 정렬된 형태로 땅을 구르고 있었다. 겨울의 얼어붙은 땅위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기사들은 다이크경으로 부터 지시받은대로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채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 고 있었다. 로노 성이 가까워짐에 따라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 는 자들이 늘어갔다. 가까이서 본 성문은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일행 은 로노 자작의 기사들을 선두로 거침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은빛갑 옷과 암녹색 망토를 걸치고 전투마 위에 올라 성문을 들어오는 위풍당 당한 기사들의 모습에 로노성의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푸르르! 말들의 투레질과 말을 달래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성안을 메울 듯 울 려퍼졌다. "로노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로노 자작 라스파르경의 환영인사에 카스트로는 위엄있게 미소띈 얼 굴로 대답했다. "환대해줘서 고맙소, 라스파르경. 며칠 신세를 지겠소." "신세라니 당치 않습니다. 성으로 들어가시지요. 쉬실 곳을 안내해드 리겠습니다." 카스트로는 말 위에서 평평한 돌이 깔린 바닥으로 내려섰다. 한번 둘러본 로노성은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성이었다.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진 왕궁에서 만 자란 카스트로에게 이런 작고 튼튼해보이는 성은 후냐 마을 촌장의 집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혹시 이 근방에서 이리떼의 습격을 받은 촌락이 있소?" 지나치듯 묻는 카스트로의 질문을 받고, 라스파르경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런가? 알겠소." 라스파르경을 따라가는 카스트로는 수심에 잠긴 얼굴로 나직한 한숨 을 내쉬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라에르는 한숨소리만으로도 그 심중을 눈치챌 수 있었다. 로노성으로 오는 도중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공격은 없었다. 로노성에서 온 기사들까지 합쳐져서 방어할 기사들의 수가 늘어서였을까? 마법사는 지금 이쪽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대체 어떻게……. 끝도 없이 늘어나는 의혹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라스파르경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라에르는 곧 생각을 걷어치우고,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 다. "이곳입니다." 라스파르경이 멈추어 선 곳은 커다란 방문 앞이었다. 라에르의 눈짓 에 따라 친위대원 두 명이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확인하고, 뒤따 라 카스트로와 라에르가 들어갔다. 삼왕자궁의 방처럼 크지는 않지만 촌장의 방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방이다. "무엇이든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렇게 누추한 곳으 로 모시게 되어 송구할 뿐입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젓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벌써 시종장 하미르의 명령으로 시종들과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스파르경이 물러가자 카스트로는 방 한가운데 있는 침대에 걸터앉 았다. 그대로 자버리고 싶을만큼 몸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쌀쌀한 바람이 언 피부를 스친다. 치체르는 망토자락을 더욱 끌어당 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한겨울에 노숙을 해야한다는 건 끔찍하게 싫었기에 저절로 발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치체르에게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아니 목적지는 있되, 그 목적지 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목적지 주위를 배회하는 것이 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 치체르는 그런 자신이 바보같아서 한심스런 한숨 을 내뱉았다. 뽀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중에 하얗게 피어오른다. "어떤 놈은 지금쯤 따끈따끈한 방에서……." 거기까지 말하던 치체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침에 보았던 왕 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그따위 사기를 치다 니!' 그가 알고 있는 한, 왕족은 물론 귀족들까지도 진심으로 자신의 백 성들을 위하는 자 따위는 없었다. 겉모습이 아무리 번드르르하고, 착한 척, 자비로운 척해도, 실은 모두 뒷구멍으로 제 잇속을 차리기 급급했 다. 지난 4년간의 용병생활로 얻은 것이 있다면, 목숨값으로 받은 돈을 빼고는 바로 지배자들의 더러운 심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귀족들 이 마물을 없애려고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은, 마물이 백성들을 죽이도 록 내버려두면 자신의 부 축적에 상당한 차질이 오기 때문이었다. 지 배자들에게 피지배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지위를 유 지시켜줄 도구에 불과했다. 치체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백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렇 게 해야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듣기로 그 왕자라는 녀석은 왕세자비와 싸우고 테라로 도망가는 것이라지 않는가! 차가운 바람이 다시 산길 사이로 휘몰아쳐온다. 끈으로 묶어놓은 머 리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빨갛게 얼은 뺨을 두들긴다. "춥다. 그냥 그 마을에서 며칠 더 있을 걸 그랬나?" 앙상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황량한 산길에서 흐릿한 하늘을 향해 고 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올해에는 아직 첫눈이 오지 않았다. "첫눈이 늦으면, 폭설이 내린다던데." 치체르는 머리를 내저으며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따라, 다시 발길을 내딛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침실까지 따라들어온 로페냐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 했다. 아침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했다. 카스트로는 검은색 말을 전진시키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직까지 카르노 왕실의 인기가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나보지. 자네 차례야." 로페냐는 체스판을 보고 점차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료해하는 카 스트로에게 체스를 두자고 제의했던 것은 로페냐 쪽이었다. 나름대로 자신만만했던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카스트로 역시 만만치 않은 실 력자였다. "흐음. 좀 어렵군요. 그런데 왕실의 인기라고요?" "아니면 선동자가 있었던가. 왜 있잖은가? 귀빈이나 왕족의 행차시 에 사람들 몰아 선동하는 자들." 로페냐는 자신의 말을 움직이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잘 다듬은 콧 수염 옆에 깊은 볼우물이 패였다. "그런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왕족들은 그런 거 모를 거라고 생각했 었는데요. 대부분은 우쭐거리면서 자신의 인기가 이렇게 높구나하고 스스로에게 감탄하시던데."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아." "……그렇습니까?" "음. 그건 그렇고, 그 피리부는 마법사에 대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네?" 로페냐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카스트로는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체스판에 시선을 꽂은 채로 지나치듯 말을 이었다. "누가 그랬을 것 같나? 나를 노릴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이 누구지? 왕세자비일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 로페냐는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하고 깊이 생각 하는 얼굴이 된다. "가장 유력한 것은 왕세자비 전하인 것 같지만……." 로페냐는 어렵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그 마법사를 잡아야 알 수 있겠지요." 길다란 다리를 꼬아서 의자 깊숙이 기대앉은 카스트로는 두 팔을 가 로질러 팔짱을 꼈다. 이미 체스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듯 깊이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로페냐는 문득 카스트로의 얼굴에서 고개를 더 들어 라에르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의 뒤에 선 라에르는 그 시선을 무시하 고 카스트로의 모양좋은 두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있는 곳 에는 언제나 라에르가 있었다. 카스트로나 라에르나 사생활은 어떻게 하는 지 궁금할 정도였다. 카스트로와 더욱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로 페냐로서는 항상 붙어 다니는 라에르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한참 뒤에 카스트로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로페냐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카스트로를 보았다. "로노성을 떠난 다음에 공격해올 셈이겠지?" 라에르도 로페냐도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카스트로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방법을 쓴 거지? 나를 죽이려했다면, 암살자를 고용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무, 무슨……." 로페냐가 당혹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그 말을 들은 척 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이리떼를 이용한 암살법이라니 너무 무모해. 어리석하기도 하고. 설 마 우리 일행을 전부 죽일 셈인가?" "서, 설마 그럴리가요." 카스트로는 눈을 번뜩이며 로페냐를 직시했다. "아니면, 나에 대한 암살이 목적이 아닐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테 라로 가는 내 친위대원들의 수를 줄이려는 목적일지도." 라에르는 움찔 놀라 카스트로에게서 눈을 떼어 로페냐를 쏘아보았 다. 로페냐는 얼이 빠진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격렬하게 반응했다. "무슨, …마, 말도 안됩니다! 설마 저까지 의심하시는 건……." 카스트로는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손안에 든 체스 말을 손가락으로 돌리는 장난을 하며 별 것 아닌 말투로 대꾸했다. "아니면 왜 그때 마법을 써서 기사들을 돕지 않았지?" "그건……" 로페냐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역력했지만, 뭔가가 막힌 듯 답답해하는 모습이었다. 카스트로는 손에 들고 있던 말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잘라말했다. "그건 마법사를 잡아보면 알게 되겠지." "전하!" 항의의 외침을 묵살하고, 카스트로는 흑의 나이트를 움직였다. "장군! 어쩔 참인가?" 로페냐는 괴로운 표정으로 체스판을 노려보았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5 - 관련자료:없음 [3039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7 20:47 조회:176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5 - ================================================================== 다친 기사들에게 제공된 그다지 크지 않은 방안에는 약초냄새와 피 냄새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친 기사들은 밀짚으로 만든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거나 앉아서 의사의 치료를 받거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 다. 의사들은 함께 온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매트리스를 오가며 바쁘 게 약초와 붕대를 갈고 있었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매트리스 위에 앉 아있는 포에르경의 옆에서 베이경이 투덜투덜대고 있었다.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대체 내가 어디가 어떻다고 그렇게 질 겁을 하고……." 이리떼의 습격으로 다리를 다쳐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포 에르경은 아침부터 찾아와서 같잖은 불만을 토로하는 친구에게 주먹이 라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어 심심했는지 로 노성을 어슬렁거리다가, 어디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 추근거리다 사정없이 걷어채이고 온 모양이다. "그만 좀 해, 응? 넌 지겹지도 않냐? 친구가 아프면 좀 편히 쉬게 도와줄 일이지, 어디서 바람난 수캐처럼 걷어채이고 와서, 뭐 자랑이라 고 떠들어대는 거야?" "바람난 수캐라니? 내가 왜 개야?" 포에르경은 날카로운 눈을 쭉 찢고 곰같은 베이경을 노려보았다. "그럼 바람난 곰이냐?" "이씨! 너어!" "내가 왜?" 베이경은 한마디도 지지않고 대거리를 하는 포에르경에게 억울하다 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왜 내게 신경질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으이구, 내가 못살아! 전신 로마께서 나를 저주하시려 널 보내신 걸 거야!" "내가……." "다이크경!" 베이경이 흥분한 얼굴로 뭔가를 소리치려고 할 때 포에르경의 뒤쪽 에 있던 기사들이 웅성댔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문가를 바라보았 다. 다이크경은 막 방으로 들어오다가, 자신의 이름을 소리친 쪽을 바 라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크경은 아픈 기사들에게 다가가 상 태를 물어보더니, 모두를 둘러보며 용건을 말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한다. 심하게 다쳐 동행할 수 없는 기사는 이곳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왕궁으로 돌아가도록 카스트로 전하께서 양해하셨다. 그러니까 테라까지 가기 어려울 것 같은 기사들은 내게 와서 말하도록 해라!" 다이크경은 주위의 반응을 살펴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결정하도록. 이상이다. 일어날 것 없다. 편히 쉬도록." 다이크경이 다시 문밖으로 사라지자 조용했던 방안이 시끄러워졌다. 베이경도 한몫 거들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떡할거야, 포에르?" "어떡하긴 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포에르경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판 단한 베이경은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여기서 쉬다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거냐고! 제길, 이럴 줄 알았으 면 내가 다치는건데!" 포에르경은 어이없는 얼굴로 베이경을 돌아보았다. "너 지금 그게 다친 사람 앞에 두고 할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는 베이경은 별로 죄책감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 같 았다. "테라까지 안가면 좋지, 뭘. 여차하면 그곳에 눌러있어야 할지도 모 른다며?" 포에르경은 이를 갈며 침대에 돌아누웠다. "너랑 말하는 내가 바보지." "어이, 잘거냐? 포에르. 포에르……." 포에르경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몸이 아프니 덩치 큰 곰과 싸우 는 것도 피곤하다. 다음날 아침, 로노 자작과 그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여행길에 오른 카스트로는 검은색 옷과 망토를 걸치고 일행의 앞쪽에서 말을 달 리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들은 로노 성에 남겨두어서 치료를 받게 하고, 어느 정도 나은 뒤에 아르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 부상자라는 짐이 덜어져서인지 일행의 속도는 조금 빨라진 듯했다. 싸늘한 아침 공기가 카스트로의 코끝을 스친다. 카스트로는 점 차 말에 속도를 가했다. '로페냐경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던 라에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오는 것 같 았다. '글쎄.' 애매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카스트로도 달리 뭐라고 대답해 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체스를 두다가, 문득 스쳐가는 의심을 입밖 에 낸데 불과했다. 이리떼의 습격 시, 로페냐는 분명히 방관하고 있었 고, 또 이리떼의 습격으로 과연 암살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겹쳐져서 생긴 결과물이었다. 로페냐의 반응 역시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가 없 었다. 펄쩍 뛰는 모습이 억울한 누명이라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곡을 찔리자 놀란 것처럼도 보인다. '아직은 상대의 표정만으로 허실을 구분할 수는 없는건가?' 카스트로는 어찌되었든, 의심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결론내렸 다. 이래도 저래도 로페냐는 결국 테라인인 것이다. 믿으면 안되는 자 다. 절로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전하?"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어오는 라에르에게 머리를 저어보이고, 카스 트로는 다른 말을 꺼냈다. "습격에 대한 방비는?" "기사들에게 최대한 주의를 주었습니다. 다이크경도 긴장하고 있습 니다." "알겠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찌되었든 마법사를 잡는 게 우선이다!' 다시 마차를 탄 로페냐는 빨라진 속도에 비례해 메슥거림이 심해져 서 사색이 된 채로 마차창문을 붙잡고 있었다. 애초에 로페냐가 생각 했던 여행길은 마차밖으로 스쳐가는 카르노의 겨울 풍경을 보며 카스 트로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아주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지 금으로서는 휙휙 지나는 창 밖의 풍경에 관심씩이나 가질 여유는 당연 히 없었고, 카스트로와의 대화는커녕 의심만 잔뜩 받고 있었다. 기분의 언짢음이 몸에도 영향을 미친 듯 점점더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페냐는 핑글핑글 도는 머릿속과 뒤집힐 것 같은 위장의 양동공격으로 더이상 의 고민은 엄두도 못내고, 오직 빨리 어디든 도착하기만을 주신 케테 르님께 빌 뿐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노숙이라는 것을 말로만 듣던 카스트로는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경험하게 되었지만, 주위의 라에르나 다이크 경의 염려와는 달리 별 불평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다이크경은 이미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깐깐함을 진저리쳐질 정도로 경험했기 때문 에, 변변치 않은 식사나 편치 않은 잠자리에도 아무 내색 없이 넘어가 주는 카스트로가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카스트로는 추운 날씨에 여행하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막을 치고 사방을 막아도 추운 건 추운 거였다. 공터 주위에 몇 개인가의 천막이 세워지고, 시종장 하미르가 카스트로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카스 트로는 로페냐와 다이크경을 자신의 천막 안으로 불러 몇 가지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이리떼 습격에 관한 일이었다. 탁탁 불티를 날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던 카스 트로가 입을 떼었다.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밤이 중요한 시기일 것이오. 다이크 경, 철저한 준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로페냐경도 마법사를 잡을 준비 에 만전을 기해주시길 바라오." "네, 전하." 로페냐는 모닥불 옆의 의자에 앉아있는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확 실히 자신에 대한 태도가 변해있었다. 전에는 공공연히 적이라 비난받 으면서도 이렇게 꺼림직한 기분은 없었다. 적의와 분노,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빛까지 일직선으로 와 닿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스트로와 자 신 사이에 짙은 안개가 가로막고있는 느낌이었다. '로페냐경도 마법사를 잡을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시오.' 그 말이 왜 마법사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아닌, 정말 마법사를 잡아 오는지 두고보겠다, 라는 의심과 협박의 말로 들려오는 것일까. 로페냐는 찹찹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는 왜 그런 의심을…….' 알 수 없었지만, 저절로 한가지 결심이 서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마법사인지 암살자인지, 놈을 내 손으로 잡아보 이겠다! 의심이 생겼다면 그 의심을 풀면 되는 거겠지.' "그만 물러가시오." 피곤해서인지, 안색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카스트로를 흘낏 쳐 다본 로페냐는 밤인사를 하고, 다이크경과 함께 카스트로의 천막에서 물러나왔다. "기사들의 수를 늘려주시겠습니까, 다이크경?" 다이크경은 굳은 표정의 로페냐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몇명이면 되겠습니까?" "둘, 아니 셋?" 다이크경은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기사들의 천막들로 걸음을 옮겼다. 로페냐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다이크경을 따라 걸음을 빨 리해서 걸어갔다. 주위에는 몇 개인가의 천막들이 세워져있고, 모닥불 과 횃불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다이크경은 한쪽의 천막으로 들어 서더니 긴장하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불침번이 아닌 기사는 일어서도록!"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몸을 일으켰다. 열명남짓 일어난 기사들을 훑어가던 다이크경은 곧 세 사람을 호명했다. "로카르경, 베이경, 포에르경. 앞으로 나와라!" 로페냐는 앞으로 다가오는 덩치 큰 세 기사를 바라보았다. 세 기사 의 덩치는 제각각이었지만 로페냐에게는 모두 목아프게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의 장신들이었다. 가장 작은 기사마저도 180리는 됨직해 보였 다. "이상 세 사람은 당분간 하야로비 후작의 명령을 따른다! 매우 중요 한 임무이므로, 최선을 다해 이분을 돕도록!" "네." "네, 다이크경!" 세 명의 기사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는 로페냐는 세 사람의 덩치에서오는 압박감에 긴장해있었다. 카스트로와는 다르다. 처 음부터 호의를 품은 상대의 장신은 멋지게만 생각되었지만, 아무 감정 이 없는 상대의 장신은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으로는 안심하고 있었다. 저 세 사람으로부터 호위를 받아야하는 자신 의 입장으로서는, 아무런 압박감도 없는 상대보다는 이쪽이 훨씬 믿음 직하다. 로페냐는 흘낏 카스트로의 천막을 쳐다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 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법사를 잡아야 했다. 12월의 겨울바람은 점점 그 세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 지에 붙은 낙엽은 이제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삐죽삐죽한 침엽수의 잎 만 색바래진 채 나무 끝에 붙어있다. 눈이라도 올 것처럼 흐리고 바람 이 휭휭 부는 겨울밤에 노숙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인 것 같았다. 침낭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지만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어쩔 수는 없었다. 치체르는 한참동안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 야 간신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곧 온몸에 스물 스물 피어오르는 불안감과 긴장감 때문에 저절로 몸이 깨어나고 있었 다. 지난 4년간의 용병생활 덕에 익힌 긴장감은 아직까지 치체르의 몸 에 각인되어 있었다. '뭐지?' 치체르는 일어나 앉았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침낭에서 빠져나왔다. 어차피 잠을 다시 자기는 틀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 긴 장감의 정체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 침낭을 둘둘 말아 가방에 챙 겨넣고, 몸을 덮었던 망토를 털어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곁에 두었던 검을 손에 쥐었다. 묵직하고 충실한 느낌의 검이 긴장감을 완화시켜주 고 있었다. 방패도 꺼내들까 했지만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우 선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치체르는 달빛하나 없는 어둠 속에 파묻혀 사라진 것 같았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6 - 관련자료:없음 [3041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8 21:16 조회:177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6 - ================================================================== "피리소리다!" 새벽녘에 울린 로페냐의 낮은 외침을 시작으로 다시 한번 이리떼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로페냐는 침대 위에 앉아있다가 피리소리를 확인 하자마자 배정받은 기사 여섯 명을 데리고 천막에서 뛰쳐나왔다. 다급 하게 다이크경에게 알리고, 그것은 곧 모든 기사들과 카스트로에게 알 려졌다. 잠을 자다 깬 기사들도 어느새 바싹 정신을 차리고, 그제서야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리들과 마주했다. "옵니다!" 누군가의 외침 직후, 들짐승의 크르르르릉 하는 소리가 앞쪽 여기저 기서 들려온다. 기사들은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끼며 검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응하라. 친위대원들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도 록!" 엄격한 다이크경의 목소리가 산 속 공터에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얼 마 지나지 않아 찬 겨울 공기를 가르고 살과 뼈를 베는 소리가 기합소 리와 함께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이 리떼와, 기사들의 은빛 갑옷과 검날이 횃불빛을 반사해내며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시뻘건 피가 곳곳에서 허공을 수놓는다. 로페냐는 떨 리는 턱을 악다물고 주위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나를 호위해주시오. 우리는 저 이리떼를 뚫 고, 이리떼를 조종하는 마법사를 잡아야하오. 최선을 다해 도와주시 오."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확답에 로페냐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로페냐는 한 손에 횃불을 들고 피리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급격한 음조의, 어지간히 도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였다. 이리떼가 미쳐 날뛰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로페냐는 곧 방향을 잡아냈다. "저쪽을 뚫으시오." 굳은 표정으로 스틱을 움켜쥔 로페냐는 스틱 끝으로 한쪽 방향을 가 리켰다. 다시 한번 반드시 잡아야한다는 다짐이 로페냐의 뇌리에 새겨 지고 있었다. "잡아올 수 있을까요?" 카스트로는 천막 안에서 친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모닥불을 바라보 고 있었다. 이리떼의 습격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로 카스트로는 계 속 어두운 표정이었다. 습격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정작 현 실로 나타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 는 것이다. "글쎄. 잡아오면 좋겠지." 라에르는 의자에 앉아있는 카스트로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가끔씩 턱 근육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불빛에 비쳐보인다. "꺼림칙해. 불쾌하다. 그래서 꼭 잡아왔으면 좋겠다." 카스트로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깊게 쌍꺼풀진 눈을 감 았다. 갑자기 깨워져서인지, 아니면 이리떼의 습격이 신경쓰여서인지 무척 피곤해하는 모습이었다. "밖의 상황은 어떤가?" 라에르는 근처에 있던 친위대원에게 눈짓하고 대답했다. "곧 사람을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친위대원 한 명이 천막 밖으로 나가고 카스트로는 다시 의자에 깊숙 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천막 밖에서 들리는 이리떼의 울음과 기사 들의 기합소리, 비명소리들이 악몽처럼 느껴진다. 바로 옆에서 긴박하게 피가 튀고, 살점이 튄다. 로페냐는 초조하게 스틱을 꽉 부여잡았다. 휙휘익 검날이 춤추고, 카가각하며 은색 갑옷이 이리의 발톱에 긁힌다. 쉴새없이 이리떼가 으르렁거리며 위협하고, 기 사들은 기합성과 신음성을 엇갈려 내며 이리들을 찌르고 벤다. 가끔씩 뜨거운 핏줄기가 튈 때마다 로페냐는 경기라도 일으킬 듯 몸을 움찔거 렸다. 마법으로 생명체를 죽이는 것과 피를 튀기며 검으로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느낌부터가 틀렸다. 검쪽이 훨씬 치열하고, 잔인하다. 로 페냐는 마법사와의 대결을 위해 마법사용을 억제하고 있었지만, 자신 이 직접 싸우는 이상으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 가는 마법사 근처에 가기도 전에 이리떼의 공격이 끝날지도 몰랐다. 로페냐는 횃불을 들어 어두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예닐곱마 리의 이리가 저만치서 기회를 노리고 어슬렁거린다. 로페냐는 한숨을 내쉬며 스틱을 들어올렸다. 이대로 아무 소득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카스트로는 분명 자신을 더욱 의심하게 될 테니까. 마법사와 싸울 때 마력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일단은 마법사를 만나야했다. 그러기 위해 서는 일단 이 지긋지긋한 이리들부터 처리해야했다. 맞닥드려 싸우는 이리는 어쩔 수 없어도 저기 언제라도 뛰어오를 준비를 마친 이리는 해치울 수 있었다. 로페냐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말들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다음순간, 스틱의 수정에서 새하얀 빛이 발출되었 다. 그 빛은 이리 두 마리가 나란히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케에에에에케엑! 케에에-----! 눈깜짝할 사이에 두 마리의 이리는 번개같은 빛에 휩싸여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쓰러졌다. 노린내를 풍기며 즉사해버린 이리를 보며, 다른 이리들이 성난 울음소리를 내었다. 다음순간, 다시한번 로페냐의 스틱 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지?" 치체르는 눈살을 찌푸리고 옆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 았다. 제대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숲속에서 이런 광경을 보리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소리도 나지 않는 피리를 부는 사람이라 니! 게다가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보기에도 코끝까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다. 어이없으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치체르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 입술에서 피 리를 떼고 주춤거리며 돌아섰다. 검은색 로브로 온몸을 감싼 그는 긴 장한 모습으로 치체르를 살피기 위해 눈가를 좁혔다. 어둠 속인데다 짙은색의 옷을 입고있는 치체르가 용병이라는 것을 알아보기에는 상당 한 시간이 걸렸다. "뭐하느냐고 묻잖아? 그 옷은, 마법사인가? 뭐하는 거지, 여기서?"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한 손에 든 피리를 꾹 움켜쥐었다. 내키지 않 는 듯한 목소리로 남자는 입을 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치체르는 흥, 코웃음치며 남자에게 성큼 다가섰다. 남자는 치체르보 다 목 하나가 작아서 고개를 쳐들고 올려보아야 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예의가 없군, 당신! 그런데 마법사라니, 왜 카 르노에 마법사 따위가 굴러다니지? 당신 정체가 뭐야?"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남자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나는 참을성이 많지 않아. 다시 한번만 묻겠어. 지금 이 시간에, 여 기서 대체 뭘 하고 있던거지?" 이미 흰날을 드러낸 검을 위협적으로 들어올리자, 남자는 움찔 놀라 물러섰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보아하니 용병같은데,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 "흐응. 그건 답이 아닌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꽁꽁 묶어 가까운 영지의 영주에게 넘기면 얼마나 받을까? 궁금하지 않아?" 진심인 눈빛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다시 한발 물러섰다. 치체르는 쥐 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남자가 물러선 만큼 따라붙으며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카르노에 나타난 마법사라! 당신 첩자인가? 하지만 이 산골에 첩자 가 뭐하러 온 거지? 그것도 나는 마법사다, 라고 티를 내면서 말이야! 이거 정말 의심스럽잖아?" 정말 의심스럽다는 듯 능청스럽게 희롱하는 치체르에게 남자는 다급 하게 말을 내뱉았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슨 피해를 줬습니까? 내 가 마법사든 아니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하지만 치체르는 더욱 흥미진진해진 눈빛으로 남자를 가까이서 마주 보았다. "흐응. 그러니까 누구에게 피해를 주긴 준 모양이군. 그게 누굴까? 아아, 궁금해라. 이 두메산골에 누가 숨어 있길래? 말해보시지, 형씨. 아, 물론 수상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 몸은 워낙 험하게 굴러먹 어서 마법사를 어떻게 하면 쉽게 죽이는가 따위는 줄줄이 꿰고 있으니 까." 남자는 목에 매달린 수정목걸이를 잡으려던 손을 검날로 제지당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겁니까?" 치체르의 녹색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로페냐는 숲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갑자기 멈춰섰다. 당혹스런 감정 이 얼굴위로 그려졌다. '사라졌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리던 피리소리가 느닷없이 뚝 끊겨 버린 것이다. 피리소리만을 따라가던 로페냐는 난처한 표정으로 사방 을 둘러보았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숲의 한가운데다. 아무래도 길 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런 망할!" 낭패한 얼굴로 나직이 지껄이는 욕설을 듣고 주위의 기사들도 멈춰섰 다. "무슨 일입니까?" 로카르경이었다. 로페냐의 표정을 보고있자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로카르경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졌 다. "피리소리가 끊겼소.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은데……." "……!" "무슨, 길도 모르면서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입니까?" 로페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적에게 가는 실마리를 놓쳤소. 이대로 주욱 앞으로 가면 적을 만날 지도 모르지만, 나라면 계속 그 자리에 있지 않겠소. 빌어먹을!" "그럼 어떻게 합니까? 다시 복귀합니까?" 로페냐는 다시 어깨를 들썩였다. "노숙하던 장소를 찾을 수 있겠소?"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제히 고개를 내저었 다. 암울한 침묵이 그들 위로 드리워졌다. 이리떼가 흩어졌다. 다이크경은 뒷수습을 지시하고, 카스트로의 천막 에 상황종료를 알렸다. 속속 들어오는 피해상황은 다행히 전보다 심각 하지 않았다. 다이크경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로페냐 등이 뚫고나간 쪽 을 바라보았다. 입구에 이리들의 사체들이 널려있는 그곳은, 불규칙적 으로 늘어선 나무들과 넝쿨로 제대로 된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이 었다. '이리떼가 흩어졌다는 것은, 마법사를 잡았다는 뜻일까?' 다이크경은 제발 그러기를 바랬다. 이리떼와 맞닥뜨리는 것은 두 번 다시 하고싶지 않았다. "전하께서 다이크경을 부르십니다!" 친위대원이 다가와 다이크경에게 알렸다. 다이크경은 고개를 끄덕였 다. 카스트로의 천막으로 가는 길에 천막 안으로 부축해 들어가는 기 사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들, 시종, 시녀들이 보였다. 역시 준비해 둔 싸움이라서인지 뒷처리마저 일사분란한 모습들이었다. "다이크경께서 오셨습니다."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 앞에 멈춰서자, 다이크경을 알아본 시종 이 안에다 고했다. "들어오라!" 천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선 다이크경은 어두운 표정으로 뒷짐을 지 고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카스트로를 볼 수 있었다. "피해는 어떻습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무감각한 목소리였다. 카스트로는 물끄러미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다 시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로페냐경은?" '정작 궁금한 것은 로페냐경이 데려왔으면하는 마법사쪽이지만.' 카스트로는 자신의 생각에 조소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자신이 성급하게 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마법사를 대한다는 생각이 전에 없이 카스트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정말, 로페냐가 그 마법사를 잡아올 것인지도 궁금했다. '만약 이번에도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카스트로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때는 좋든 싫든, 정말로 로페냐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카스트로는 작은 기원을 담아 속으로 뇌까렸다. '잡아와라, 로페냐경! 그 마법사를 잡아와!' ================================================================== ^^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7 - 관련자료:없음 [3044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29 21:15 조회:177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7 - ================================================================== 달빛 한점없는 어두운 하늘위로 떠올랐던 묵직한 주머니가 포물선을 그리며 치체르의 손위로 떨어져 내렸다. 치체르는 허공에서 그것을 낚 아채며 희희낙낙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기분 나쁘 다고 생각했던 것이 의외의 행운으로 이어지자, 좀 전에 느꼈던 불쾌 감따위는 말끔히 잊어버린 채였다. 치체르는 다시 한번 주머니를 열고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크고 예 쁜 수정목걸이와, 황금빛을 찬란히 내뿜는 순도 100%짜리 금화 십여 개가 뿌듯한 무게로 손바닥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하하하, 새벽부터 횡재하다니! 재수좋은걸?" 연신 입술을 찢고 웃어제끼는 치체르는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손 가락으로 귀 옆을 빙빙 돌렸을 그런 모습이었다. "쩝, 그 피리도 비싸보였는데. 그것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은으로 만들었는지 번쩍번쩍하던데." 마법사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돈을 내주고 버티다가, 피리나 수정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자 피리를 선택했었다. 필사적으로 피리를 움켜쥐고있는 남자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치체르는 못내 아 쉬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한 표정이었다. 마법사에게서 수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마법사가 수정까지 뺏기면 서도 끝내 사수하려는 피리마저 빼앗기는 어딘가 마음이 켕겼다. 어린 애 입 속에 든 사탕마저 빼앗는 느낌이랄까. 그 마법사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궁금하지 않는 바가 아니었지만, 순순히 금화와 수정까지 빼 앗기고도 고집스레 입다물고 있는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 닌 것이 확실한 이상, 그다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새벽잠을 깨우고, 귀찮게 그곳까지 찾아가게 만든 대가는 수정과 금화로도 충분했다. 어 쨌든 치체르는 지금 행복했다. 그리고 행복한 그때, 치체르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을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른 낙엽을 밟는 사람들 의 발자국소리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둡기만 한 숲속으로 환 한 횃불이 하나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킨 치체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저 마법사와 관련된 자들 같았다. "산에서 방향을 잃다니! 끝장이잖아! 방향도 모르면서 잘도 끌고들 어오더니만!" 익숙한 투덜거림. 누구보다 덩치가 크고, 누구보다 불만이 많은 기사 베이경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는 또 하나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곰같은 녀석! 네 잔소리 때문에 찾을 길도 못찾겠단 말이 다!" 여지없이 반박하는 포에르경을 보며, 로카르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 었다. 로카르경의 안스러운 눈길이, 성질을 꾹꾹 눌러참는 게 뻔히 보 이는 로페냐에게 가 닿았다. "신경쓰지 말고 길 찾는 데에만 전념해주십시오, 로페냐경. 저 두 사 람은 원래 저러니까, 어디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시고." 로카르경의 말을 들은 로페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 빨리, 베이 경의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이자식! 누가 개야, 누가?" 로카르경은 흥, 코웃음치고, '무시무시' 라는 마인드콘트롤을 시작했 다. 그런 세 사람의 하는 양을 보는 로페냐는 자신에게 이 세 사람을 붙여준 다이크경을 마음속 깊이 원망했다. 원래의 목표도 잃은 데다가 길까지 잃은 지금, 도움은커녕 서로 싸움만 하고 있다니! 저절로 머리 속에서 열이 뻗친다. 로페냐의 암담한 심정을 대변하듯, 하늘은 달빛은 커녕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뒤덮여있었다. "테라 사신단의 부대표 사이카 자작 마로니아경께서 알현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초조하게 천막 안을 서성이던 카스트로의 발길이 멈칫 멈추어졌다. 뭔가 못마땅한 듯 찌푸려진 얼굴이 느릿하게 납득의 뜻을 비췄다. "들라하라." 로페냐가 마법사를 찾아간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사신단의 우두머리가 사지로 가서 두 시간째 아무 소식도 없으니, 사신단이 동 요할만도 했다. 카스트로는 비난받을 각오쯤은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 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신단 부대표 사이카 자작 마로니아입니다. 로페냐경의 일로 전하 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마흔살쯤 되었을까. 희끗희끗한 금발머리의 마로니아경은 무언가 결 의에 찬 듯한 모습이었다. 카스트로는 본능적으로 이 자리가 생각이상 으로 불쾌해질 것이란 예감을 느꼈다. 표면으로 내세운 사신단의 대표 는 로페냐였지만, 실질적인 대표는 바로 이 남자라고 들었다. 냉정한 느낌을 주는 가느다란 눈매와 얇은 입술. 얍삽하고 노련해 보이는 외 모였다. "말씀하시오." 카스트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마로니아경에게 시선을 던졌 다. 마로니아경은 가느다란 눈으로 카스트로의 표정을 살피며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전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로페냐경께서 실종되신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종?" 듣기 언짢은 표현이었다. 카스트로는 눈썹을 치켜뜨고, 마로니아경을 쏘아보았다. "그렇습니다. 돌아오셨어도 진작에 돌아오셨어야 할 분이 두 시간이 나 소식도 없습니다. 이것이 실종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금의 동요도 없이 추궁하듯 내뱉는 말이었다. 카스트로는 '역시'라 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똑같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수색대를 파견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호한 말투였다. 반대의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린 표 정. 카스트로는 모닥불로 시선을 옮기며, 의자의 팔걸이를 우아하게 뻗 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수색대라……." 생각에 잠긴 목소리와 눈빛을 보고, 마로니아경은 한번쯤 더 강력하 게 밀어붙였다. "로페냐경께서는 저희 사신단의 대표이십니다. 만에 하나라도 로페 냐경의 신변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테라와 카르노 사이의 문제로 확대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나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이건가, 마로니아경?"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역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가로챈 카스트로는 사나운 표정으로 마로니아경을 쏘아보았다. 마로니 아경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닫는데 는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테라의 외교관에게는 협박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필수인가보군그 래? 대단해! 언제부터 테라가 그토록 오만방자한 외교술을 사용했지? 몇십년전만해도 각국 왕실들의 호의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던 자들 이, 어부지리로 땅을 얻고나자 눈에 뵈는 게 없어졌나? 한갓 너같은 조무라기가 감히 카르노의 왕실과 나를 협박할 만큼 테라가 대단해졌 나? 테라인들은 스스로가 대륙의 주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말을 삼가주십시오!" 마로니아경은 딱딱하게 굳어서 반박했다. 하지만 곧바로 카스트로의 노성이 쩌렁하고 터져나왔다. "경이야말로 말을 삼가라!" 카스트로는 새까맣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카르노가, 지금은 비록 패전의 상처로 업신여김을 받는다하나, 대륙 제일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대국이다! 카르노의 반도 안 되는 소국인 테라가 언제까지 카르노를 능멸할 수 있으리라 보나? 테라와 카르노간 의 문제로 확대되니까 조심하라?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경 을 죽인다면, 그건 양국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까? 어떻게 생각하나, 경 은?" 마로니아경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목울대를 울리는 침음성이 노성 뒤의 적막한 공백으로 더욱 크게 들려온다. '성급했다.' 카스트로의 표정과 말투는 그것이 그냥 협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 었다. 마로니아경은 천천히 안색과 숨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는 침착하 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제 발언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렸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 다. 하지만 로페냐경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양국간에 마찰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 습니까?"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초리로 마로니아경을 쏘아보았다. 마로니아경 에게는 꽤 긴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실 때쯤, 카스트로의 불쾌감 서린 목소리가 퉁명스레 들려왔다. "물러가시오. 때가 되면 알아서 수색대를 보낼 것이오." 불만족스러운 대답이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마로니 아경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천막에서 물러나왔다. 정작 하고싶던 또 하나의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였다. '열일곱살이라고 했던가? 방금 전에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박력으로 몰아붙이던 남자가 열일곱살이라고?' 마로니아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열일곱에 저 정도면, 앞으로 스물, 서른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까?' 고위 한족들의 지고하신 생각들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마로니아경 은 왜 굳이 저 왕자를 테라로 데려가야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위험해.' 저대로라면, 저대로 자란다면 너무나 위험하다. 카르노의 국왕마저도 테라 사신들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상황이다. 카르노의 왕세자도 자신들의 불리한 상황을 인식하고 눈치빠르게 테라인과 타협했다. 하 지만 저 젊은 왕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들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도 저렇게 겁없이 대응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야말로 야생 의 맹수처럼, 겁을 주려다 도리어 자신이 물어뜯길 뻔하지 않았던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니까, 라고 가볍게 넘겨버렸으면 차라리 속시 원하련만, 저 전신에서 넘치는 권력자로서의 권위와 박력이 그런 생각 마저 할 수 없게 했다. 마로니아경은 머리를 저으며 자신들의 천막으로 발을 옮겼다. 매서 운 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마로니아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저 왕자는 위험해.' 휘잉- 하는 바람소리와 천막의 펄럭임소리가 불길하게만 들린다. 수색대는 다섯명씩 두 개조로 나뉘어, 이른 아침에 파견되었다. 짙은 회색구름이 무겁게 내리깔리고,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아침이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의 울음소리가 수색대뿐 아니라 남아있는 사 람들의 기분마저 가라앉게했다. 카스트로는 기사들이 들어간 숲을 바 라보다가 험상궂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첫눈 이 올 듯 싶었다. "날이 찹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밤새 한숨도 못주무셨지 않습니까?" 라에르의 걱정스런 말을 한 귀로 들으며 카스트로는 어두운 표정으 로 머리를 저었다. "간밤에 누구 한사람 제대로 자기나 했을까. 걱정할 것 없다." "전하……." 주위에는 벌써부터 천막을 거두고 짐을 정리하느라 수선스러웠다. 다친 기사들은 거두지 않은 천막 안에서 아침식사를 하거나 의사들에 게 치료받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우울했다. 하늘을 가린 구름만큼이나 찹찹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이 필요했 다. "조금 걷지."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욱 뻗은 길로 발길을 내딛었다. 라에르는 당 혹스러운 표정으로 따라가며 카스트로를 불렀다. "전하?" 아무 대답도 없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에르는 재빠르게 근처에 있던 친위대원 네 명을 손짓으로 불렀다. 친위대원 두 명에게 앞길을 살피게 하고, 다른 두 명에게 뒤따르라고 지시하는 것 역시, 간 단한 손짓과 눈짓만으로 끝났다. 그리고 라에르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 아가 카스트로를 뒤따랐다. 음산한 바람소리, 발밑에 밟히는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채색 세상에 어울리는 을씨년스런 소리들이다. 카스트로는 자꾸만 머릿속을 채우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노리는 마법사와 그 마법사와 내통했을지도 모를 로페냐, 새벽녘에 찾아왔던 마로니아 경과 그에게 했던 말실수. 모두가 복잡하게 뒤엉켜서 문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왔다. 카스트로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무거운 구름, 축축하고 찬 공기. 카스트로는 답 답한 숨을 무거운 하늘 위로 토해냈다. 하늘을 향해 원망의 시선을 찌리릿 쏘아보내던 치체르는 결국 어깨 를 으쓱하고, 모르는 척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결정했다. 일단의 기사 들이 시끄럽게 지나가고서도 한참동안 하늘을 노려본 뒤의 결정이었 다. 발끝에 걸리적거리는 낙엽과 앙상한 가시를 드러낸 넝쿨들을 밟고 가면서도, 치체르는 좀전에 봤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들은 몰라도, 그들 중 한 명, 며칠 전 밤새도록 잔소리 받아주던 상대 의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없다. '베이경이라고 했나? 저 사람, 술에서 깨어있어도 여전히 시끄러운 사람이군.' 190리는 족히 넘어보이는 큰 키와,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와 곰발바닥 같은 손. 그 남자의 싸우는 스타일은 보나마나 그 무식한 괴력을 바탕 으로 한 것일게 틀림없었다. 그 커다란 덩치로 철퇴나 도끼를 휘두른 다면 그보다 더 위협적인 기사도 드물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어림도 없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잘난 체를 잊지 않는 치체르였다. '그나저나 이대로 모른 척 해도 되는 걸까?' 지금 치체르가 다시 하늘을 보며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였다. 베이경이라 했던 저 기사는 분명히 저 위선적인 왕자를 수행하던 기사 였다. 그런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리고 정말로 그 마법사를 찾는 게 맞다면, 그 왕자와 마법사간에 무슨 일인가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가 피리를 들고 희한한 짓을 하던 것이 어쩌면 저 왕자와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안좋은 쪽으로 연관되었을 것이다. 치체르는 하늘을 향해 인상을 그었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려니 아무래도 뭔가가 켕긴다. 마법사에게 빼앗은 돈과 수정도 그렇거니와, 저 마법사가 정말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어느 쪽으로든 마음이 불편한 건 변함이 없다. "아아, 몰라, 몰라. 나는 상관없어. 상관없고 말고." 소리내어 입밖에 낸 치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더 속도를 가 해 걸음을 옮겼다. 빨리 길로 나가서 가던 길이나 계속 가는 것이 신 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럼그럼. 그 마법사가 잡혀도 제 운이 나쁜 거고, 그 마법사에게 왕자가 무슨 일을 당해도, 그런 위선적인 놈. 흥,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럼그럼." 스스로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는 일련 의 고달픈 정신적업은, 치체르가 다시 그 마법사를 보았을 때 어이없 이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8 - 관련자료:없음 [3047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09-30 21:33 조회:174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8 - ================================================================== 새가 날고 있었다. 하늘을 가린 구름과 같은 짙은 회색의 깃털을 가 진 새는 다리에 조그만 원통을 매달고 숲속을 날고 있었다. 검은색 로 브의 마법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새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손아귀에 든 작은 천을 꽉 움켜쥐었다. 폭 3리에 길이 10리 가량의 흰 천에는 검은색 잉크로 자잘한 글씨가 쓰여있었다. "친위대원 네명과 호위기사만 대동하고 산책이라……. 흥, 팔자좋은 왕자로군." 레이얄 왕립 마법대학 출신의 데릴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재게 놀렸다. 왕자가 가는 곳까지 따라가려면, 바쁘게 움직여야했다. 하지만 돌에 걸려 비틀거리고, 로브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기고 하 는 수난에 앞으로의 전진이 수월치만은 않았다. "제기랄!"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걸까. 처음 일이 틀어질 때부터 짜증스러웠 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재수가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황당한 용병녀석! 데릴은 낮게 이를 갈았다. '어디서 그런 날강도같은 놈이 튀어나와서!' 생각같아서는 놈을 통구이로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놈은 마법사를 꼼짝못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수정부터 빼앗지 않았던가! 수정의 도움으로 비교적 적은 힘을 들여 왕자를 처치하려던 계획은 이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지금부터는 순전히 자신이 가진 마력만으 로 왕자와 친위대원들을 처리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섯 명의 떨 거지만을 데리고 나선 지금이 왕자를 처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 다. 데릴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피리를 꺼내들었다. 온갖 짐승을 부릴 수 있는 마법피리. 주인을 만난 것과 함께, 마법대학시절에 얻은 두 가지 행운 중 하나였다. 데릴은 피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수정과 피리로 불러모은 이리들의 수는 불과 사십여마리였고, 그 정 도의 수로 왕자의 호위를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음의 공격을 실패 한 뒤에 그 문제점을 깨달았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앞으로 테라까지는 약 5일의 여정이 남아있었고, 그 중에서도 테라 국경까지 는 앞으로 3일이다. 그 3일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를 죽여야했 다. 그래서 데릴은 야밤의 기습을 계획했었다. '그 망할 용병자식!' 데릴은 다시 한번 그 방해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찌되었든 기습 은 실패했고 수정도 빼앗겼다. 그나마 피리마저 빼앗기지 않은 것은 천행이랄까.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그 멍청한 왕자가 단 다 섯 명을 데리고 산책중이라는 사실. 데릴은 비릿하게 웃었다. '다섯쯤이야, 수정이 없어도 해치울 수 있어!' 왕자만 처치할 수 있다면 그까짓 수정을 빼앗긴 것쯤 무시해줄 수도 있다. 행과 불행이 겹친 오늘의 주요 이벤트는 부디 행운의 여신이 함 께 하길 빌었다. '피리소리!' 로페냐는 방향도 알 수 없이 헤매던 몸을 우뚝 세우고 신중한 태도 로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마법의 기를 찾으려 신경을 곤두 세웠다. "뭡니까, 갑자기?" 뒤따라 걷다가 몸을 부딪힐 뻔한 베이경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 다. 로페냐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잠시 뒤에 한쪽 방향으로 몸 을 틀었다. "마법사가 있는 방향을 찾았소. 서둘러야겠소. 피리소리가 다시 들린 다는 것은,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소리일 테니까." "다시 공격이 시작됐다구요?" 질린다는 표정으로 되물은 것은 로카르경이었다. 이제 이리라면 신 물이 날 정도였다. 로카르경은 진지하게 끄덕이는 로페냐를 보고는, 또 다시 투덜거릴 태세인 베이경의 손을 끌고 로페냐경이 가리킨 방향으 로 앞서 뛰었다. "갑시다, 빨리!" "그 망할 마법사! 잡히기만 하면 아작을 내줄테닷! 사람을 이렇게 골탕먹이고……" 끝내 투덜거리고야 마는 베이경의 뒤를 따라 로페냐도 지친 몸을 이 끌고 뛰었다. 지금이 마법사를 잡을 수 있는, 그리고 길을 찾을 수 있 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피리소리가 끝나기 전에 마법사를 찾아내야 했다. 가장 먼저 이상한 기운을 눈치챈 것은 라에르였다.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온몸을 압박해 들어오는 기묘한 살기. 라에르는 손바닥을 쳐서 주위에 퍼져있던 친위기사들을 불러모았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카스트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다가온 친위대원들에게 긴장 된 목소리로 말했다. "위기상황이다. 신호탄 가진 사람 있나?" "네, 라에르경." 두 명의 친위대원이 앞으로 나섰다. 라에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시 했다. "두 사람 모두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전하의 사방 1프리에서 네 방 향을 점하고 대기하라. 명심해라. 지금은 위기상황이다. 너희들의 임무 는 전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다." "네, 라에르경." 빨간색 꼬리를 단 신호탄이 기묘한 파공성과 함께 하늘위로 쏘아졌 다.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신호탄이 을씨년스런 무채색의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친위대원 네 명과 라에르는 모두 검을 빼들고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라에르는 신음을 삼켰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을까? 하필 이런 소 수의 인원만 있는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다니! "……!"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라에르는 자신의 생각을 되새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길한 예감. 하지만 숲에서부터 튀어나온 산짐승의 기습에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단 두 번의 경험으로 이리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은 그 실체를 본 순간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무 식하게 일직선으로 돌진해오는 것은 시커먼 멧돼지였다. "이번에는 멧돼지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을 내뱉은 것은 지금까지 잠자코 상황을 지켜 보고 있던 카스트로였다. "전하!" 마치 카스트로만 보이는 것처럼 똑바로 카스트로를 향해 짓쳐들어오 는 멧돼지를 보며, 라에르는 재빨리 카스트로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순간 친위대원의 검이 멧돼지의 머리를 내리쳤다. 꾸에에에에에엑-----------! 머리에 시뻘건 피를 흘리면서도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멧돼지의 최후는 라에르가 맡았다. 단숨에 목을 잘라버린 라에르는 다음순간, 당 혹스러워하는 친위대원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라, 라에르경!" "맙소사!" 카스트로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라에르도 저절로 로마의 이름을 불 렀다. 숲속에서부터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와 이쪽을 향해 이를 드러낸 짐승은 덩치 큰 표범 두 마리였다. 라에르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맺 혔다. "아무래도 온갖 산짐승을 죄다 불러모을 모양이군." 스르릉! 냉소를 듣고 뒤돌아보자, 카스트로는 이미 손안에 검을 들 고 있었다. "전하……." "짐만 될 수는 없지. 가만히 있다가 짐승의 먹이 따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한눈 팔지 마라, 라에르경." 라에르는 굳은 얼굴로 카스트로에게서 표범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마리의 표범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서 다가왔다. 라에르는 양쪽 모두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검을 세웠다. 긴장으로 땀이 맺힌다. 크르르르르-----! 크르르르르르------! 앞뒤에서 표범의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들려와 신경을 분산시킨다. 라에르는 앞쪽의 표범이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집중시켰 다. 우선은 앞의 녀석이 먼저다. 카아아악----! 느리게 탐색해오던 표범이 어느 한순간, 날카로운 발톱을 한껏 세우 고 날쌔게 공격해온다. 슬쩍 피해서 허리를 베려던 생각은, 곧바로 뒤 에 있을 카스트로를 떠올리고는 정면에서 찌르는 것으로 바꾸었다. 생 각과 동시에 행동은 이루어졌다. 크아아아아악------! 검끝부터 정확히 뛰어오른 표범의 목을 찔러들어갔다. 표범의 살기 어린 얼굴이 가까와지는만큼 검이 박혀들어가는 느낌도 깊어졌다. 라 에르는 힘껏 검을 옆으로 베어냈다.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느낌 뒤 에, 숨막히는 피비린내가 습기찬 공기중에 흩뿌려졌다. 피보라에 흐려 진 시야를 회복하기도 전에, 등뒤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아아아아아악!" 라에르는 섬뜩한 기분으로 표범을 차내고 재빨리 뒤돌아섰다. 친위 대원 한 명이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표범의 발악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따라 고개를 튼 라에르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등허리가 깊게 베어진 표범에게 덥쳐지면서 표범의 미간에 박힌 검을 더 깊이 밀어넣고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옆에 있던 친위대원의 검날이 표범의 허리를 가 른다. 표범에 떠밀려서 몸을 휘며 뒤로 쓰러져버리는 카스트로의 모습 이 아주 느리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전하!" "전하아!" 라에르는 온몸에 피비를 맞고 쓰러지는 카스트로를 가까스로 받아내 며, 아직도 꿀럭거리며 핏줄기를 쏟아내는 표범의 잘라진 상체를 밀쳐 내었다. "저… 전하?" 바닥에 쓰러져서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카스트로의 상체를 부 축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카스트로를 불렀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부 름에 답하듯, 카스트로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반쯤 벌어진 핏 기없는 입술사이로 흐르는 호흡이 거칠다. "괜…찮아. ……조금 긁혔을 뿐이야." "전하!" 고통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린 카스트로는 간격을 두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것보다, 언제 뭐가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니 까……." 라에르는 카스트로를 지탱한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이 피로 축축 하게 젖어들었다. 라에르는 점점 창백해지는 카스트로를 껴안으며 말 했다.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곧 사람들이 도착할테니, 부디 그때까지 만……." 카스트로는 시체처럼 하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건, 네게 해 줄 말인 것 같군. 친애하는 마법사께서 몸소 나타나 신 것 같은데?" "……!" 카스트로는 앞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라에르는 그 시선을 따라가 다,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에게서 멈췄다. 그 남자의 손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피리가 쥐어져있었다. "늦게나마 전하를 직접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인사말이었다. 정중하게 허리까지 굽 히며, 노골적으로 카스트로를 조롱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 으로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나를 일으켜라." "전하!" 라에르의 걱정스런 만류를 뿌리치며, 카스트로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일으켜라, 라에르경!" 라에르는 이를 악물고 카스트로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 려 그대로 주저앉는 카스트로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간신히 몸을 세웠다.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고 서는 카스트로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간다. 카스트로는 눈가를 좁히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린 마법 사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로브를 깊게 눌러쓴 모습인데다 거 리까지 멀어서, 얼굴 윤곽을 알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누구냐?" 카스트로는 피가 배어나오는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거의 라에르 에게 등을 기댄 채로 물었다. "너를 사주한 자가 누구냐?" 막상 마법사를 눈앞에 대하고 나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거라 던 예상을 뒤엎고, 오히려 어느 때보다 침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마 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설마 그 분 성함을 제 스스로 입에 올릴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전 하의 아둔함에 무척 실망할 것 같습니다만." 카스트로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네가 실망하고 말고는 관심 밖이다. 하지만, 너는 네 입으로 그자의 이름을 말해야 할 것이다." "호오!" 마법사는 조롱어린 감탄사를 내뱉고, 재밌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 전하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씀은 하지 못하실 텐데요. 아무리 나이 어리다 하나, 조금쯤은 지금 전하의 처지를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 처지는 너 따위가 생각해줄 만큼 궁색하지 않다." 고집스러운 카스트로의 자존심을 마법사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비웃 었다. "그러면 그 처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해드려야겠군요." 마법사는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 불고 있는지, 불고있지 않은 지 모를 적막 속에서 라에르는 가까이 있던 친위대원에게 명령했다. "다른 짐승을 불러들이기 전에 마법사의 피리를 빼앗아라! 목숨만 남겨두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 "네!" 친위대원 한 명이 빠르게 내달렸다. 약 30프리(30m)의 거리를 단숨 에 달려간 친위대원은 무방비하게 서서 피리를 부는 마법사를 향해 검 을 휘둘렀다. 너무 쉽다고 생각했던 것은 검이 무언가에 부딪힌 순간 오판으로 확인되었다. 쩌어엉! 친위대원의 검은 마법사의 반프리(=50m)정도 앞에서 무형의 장벽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러선 친위대원에게 마법사 는 눈만으로 웃어 보였다. 친위대원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한 웃음이 었다. 친위대원은 이를 악물고, 다시 마법사를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반발력으로 검이 튕겨진 순간 뒤쪽에 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친위대원은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 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동료와 그 주위를 둘러싼 회색 이리 네 마리 가 선명한 핏빛을 흩뿌리며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 ...휴우.. 뒤늦은 오타 발견을 할때마다 진땀이.. --; 의외로 땅파기가 취미--; 인 새라서, 그 타격이 큽니다..(자폭타입)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새디스트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39 - 관련자료:없음 [3049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1 21:09 조회:174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39 - ================================================================== 치체르는 맹세코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고 싶었다. 위선적인 왕자따 위 어떻게 되는 알 바 아니었고, 높으신 기사나리들이 저 왕자를 지키 다 죽든 말든, 그 역시 치체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길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치체르는 어느새인가 주먹 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했다. 울컥울컥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온몸의 피가 부글거리며 거꾸로 치솟는다. 눈앞에서 타국의, 아마도 레이얄의 마법사에게 자기 나라의 왕자가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치체르는 카르노 왕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증오하고 경 멸했다. 수백년동안 불패로서 자리잡은 위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패배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한 무능한 국왕! 재정난에 허덕이는 와 중에도,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해 타국으로 나가 목숨을 팔아 돈을 버 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나날이 세금을 올리고, 그 돈으로 밤마다 사치 스러운 연회와 주색잡기에 빠져버린 타락한 국왕! 뿐인가! 테라의 한 마디에는 벌벌 떨면서 자국민들에게는 여전히 고압적인 왕가! 무능하 고 타락한데다 위선적이기까지 한 왕가를 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라 면 그 누가 진심으로 경외하며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얻어먹을 게 남은 귀족들이야 여전히 아부와 아첨으로 속없는 왕가를 떠받들어주지만, 보호받기는커녕 더욱 극심해진 귀족들의 횡포에 치를 떠는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왕가를 존경하기란, 맨손으로 드래곤 잡기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체르는 타국의 마법사에게 유린당하는 왕자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젠장! 이거 뭐야! 없어져! 없어지란 말이닷!" 퉁퉁 튕겨나가면서도, 손바닥이 찢겨져 피가 흐르면서도, 자주색 망 토를 걸친 왕자의 친위기사는 계속해서 마법사의 방어막을 향해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치체르는 성큼 발을 내딛었다.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왕자는 왕자대 로, 친위기사는 친위기사대로 다른데 정신을 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숲속에서 걸어나오는 치체르를 발견하지 못했다. 치체르는 마 법사 앞으로 다가가, 처절하기까지 한 모습의 친위대원의 팔을 잡아 뒤로 밀었다. "뭐……." 당혹스러워하는 친위대원을 뒤로 한 채 치체르는 검을 빼들었다. 치 체르는 마법사가 놀란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마주보았다. 마법사는 피리 부는 것조차 잊고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더더욱 커지는 눈동자와 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감상하며, 치체르는 온몸의 기 를 손으로 집중했다. 친위대원이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사의 반프 리 앞에서 검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벽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아까처럼 튕겨져나가는 대신 찌익- 하고 두껍게 굳어버린 투명한 젤이 잘리듯 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마법사가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 섰다. 투명한 방어막은 그 한번의 충격으로 미풍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다, 당신이 왜 또 여기에……." 경악에 찬 목소리였다. 치체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내밀어 마법 사가 들고 있는 피리를 빼앗았다. 어린아이의 손에 든 것을 빼앗는 것 마냥 그것은 너무나 쉽게 치체르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싱긋 웃으며 대꾸하는 치체르는 징그럽도록 능글맞았다. "아무래도 이 피리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말이지." 치체르가 마법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고있 을 때, 친위대원의 검이 마법사의 목 위에 드리워졌다. "전하께서 너를 보고싶어하신다. 함께 가줘야겠다." 냉랭한 목소리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사람의 비명소리에 로페냐는 전신을 훑는 불 길함을 느꼈다. 일순 멈칫했던 일행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명이 들린 쪽으로 내달렸다. 얼마 달리지 않아, 그들은 마차가 지나다닐 만한 길 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은 로페냐 등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피! 피! 피! 배가 갈라져 내장이 흘러나오고, 머리와 몸통이 따로 나뒹구는 이리 와 표범 등 짐승들의 사체와 어깨와 목을 물어뜯긴 채, 고통스럽게 몸 을 경련하며 쓰러져있는 친위대원들의 모습이 뒤엉켜있었다. 한발 먼저 도착한 로카르경들은 짐승들의 잔해와 흩뿌려진 피에 인 상을 찌푸렸다. 로페냐는 숨막힐 듯 짙게 풍기는 피비린내에 주춤 물 러서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바닥이 피로 물든 그 한가운데에 피 에 절은 모습으로 카스트로가 라에르에게 기대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곳의 한복판에 카스트로와 라에르가 지옥에서 갓 빠져나온 사람들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전하? 카스트로 전하!" 로페냐가 뛰어가자 로카르경들도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카스트 로의 앞으로 도착할 때쯤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검은 로브를 입은 사 내가 카스트로의 앞에 내팽개쳐졌다. "……?"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는 짐승들의 사체와 피구덩이 속에 강제로 무 릎을 꿇려진 채 목에는 날카로운 검날을 매달고 있었다. 그 검을 따라 올라간 곳에는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용병차림의 한 남자가 구경하러나온 사람마냥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혹시 그 마법사?" 로페냐는 주저하면서 물었다. 피리소리를 따라왔고 마법사차림의 남 자를 보았으니, 자신의 가정이 틀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다. 물 어보나마나인 질문이겠지만, 로페냐는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토록 속을 썩인 마법사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 들게 했다. "늦었군, 로페냐경."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로페냐는 고개를 들어 카스트로를 바라보았 다. 창백한 얼굴에, 까만 속눈썹이 매달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 다시 올라간다. 보고있는 사람이 힘들 정도의 깜빡임 뒤에, 카스트 로는 시선을 마법사에게서 친위대원, 그리고 그 옆의 용병에게 차례로 옮겼다. "용병인가?" 치체르는 자신에게 향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렇습니다." 순한 눈이었다. 치체르가 생각했던 위선적인 눈이 아니라, 마치 아이 처럼 맑고 순수한 눈이었다. 짙은 속눈썹에 감싸인 촉촉하게 젖은 까 만 눈망울은 굴곡지지 않은 곧바른 눈이었다. 그래서 치체르는 그 시 선이 부담스러웠다. "……고맙다." "……!" 너무나 순순히 나오는 감사에 놀라서 카스트로를 쳐다본 치체르는 다시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경황중이라 느끼지 못했지만, 언제부터인지 바닥을 울리 는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요. 곧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 전하? 전하!" 다급한 라에르의 음성에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 치체르는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카스트로를 볼 수 있었다. "전하!" "전하!" 라에르는 어깨에 카스트로의 얼굴을 기대게 하고, 다리와 겨드랑이 에 손을 집어넣어 카스트로를 안아올렸다. 기운없이 젖혀진 얼굴에서 피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소름끼치도록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 다. 깊게 감겨진 눈꺼풀과 날카롭게 뻗은 콧날, 비정상적으로 하얀 입 술. "마법사를……, 로페냐경께서 책임지고 감시해주십시오. 전하께서 친 히 심문하실 것이니, 그때까지, 부탁드립니다."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 다.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보니, 카스트로는 이제 열일곱살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로페냐는 카스트로를 연하 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자존심 강하고 의지있는, 남자다운 남자라고 생각했었고, 그것은 카스트로의 나이를 망각하게 만들었었다.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의식을 잃은 모습은 로 페냐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가슴이 욱씬거리는 아픔, 연민, 동정. 이런 견디기 힘든 일의 연속을, 보통의 성인남자도 힘들 일을 이제 열 일곱살의 소년이 견뎌내고 있었다.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안스러운 모 습에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어지는 자신에게 당혹스 러워졌다. 공터에 남아있던 친위대원과 기사단원을 이끌고 다급히 말을 달려온 다이크경은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카스트로를 보며 아연해졌다. 하 늘로 쏘아진 붉은 색의 신호탄을 본지 불과 반시간만이었다. 부랴부랴 달려와보니 이미 상황은 끝나있었고, 그들이 지켜야할 유일한 존재는 끔찍한 몰골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경악을 넘어서 암담함마저 느끼는 다이크경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다이크경을 일깨운 것은 라에르였다. 침착한 목 소리로 카스트로를 옮기도록 요청하는 라에르를 보며, 다이크경은 마 치 꿈에서 깬 사람처럼 신속하게 기사들을 지휘했다. 라에르는 카스트 로를 품에 안은 채, 빠른 속도로 의사가 있는 천막으로 말을 달렸다. 하늘에서 하나 둘 하얀 입자가 휘날려 내려오고 있었지만, 라에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명의 의사들과 시종, 시녀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단장 다이크경과 로페냐는 초조한 모습으로 천막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몇번이고 덥혀진 물이 들어가고, 그것은 곧 핏물로 변해 나왔다. 다이 크경과 로페냐는 물론이고, 천막 주위를 지키는 친위대원들의 얼굴에 수심이 깊게 자리잡았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천막의 한 귀퉁이가 열리고 라에르가 밖으로 나왔다. 다이크경은 안색이 가라앉은 라에르를 잡고 카스트로의 상태 에 관해 물었다. "여기저기 많이 다치셨지만, 치명상은 없습니다. 다만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의식은?" 라에르는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헝클어진 흑갈색 머리가 이 리저리 흔들리며 핏빛의 물방울을 뿌려낸다. 축축한 머리를 쓸어올리 던 라에르는 손등위로 내려앉는 차가운 것을 느끼고 얼굴을 들어 하늘 을 쳐다보았다. 송이송이 하얀 눈꽃이 소리없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 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로 가야겠습니다. 그곳에서 얼마간 요양 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이크경께서 모든 지휘를 맡아주십시오." "……알겠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이크경은 곧 기사들에게로 걸어갔 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기만하던 로페냐가 재차 카스트로의 상태에 관 해 물었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시오?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요?" 라에르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페냐는 입 안이 말라왔고, 생각은 점점 불길한 쪽으로 치달아갔다. "괜찮으실 겁니다. 이 정도로 어찌 될 분이 아니십니다." 한참 뒤에야 돌아온 대답은 확신이라기보다는 의지에 가까웠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대신, 마법사의 감시에 더 신경써 주십시오. 전 하께서 일어나시면 곧 그자를 찾으실 겁니다." 로페냐는 불안한 얼굴로 라에르를 쳐다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 다. "전하를 위해 케테르님께 기도하겠소." 케테르따위에게 기도할 필요없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라에르 는 입 속에 든 말을 삼켜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없는 언쟁은 삼 가고 싶었다. 로페냐가 돌아가자 라에르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점 점 더 굵어지는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여유롭기까지 한 눈송이들의 소요(逍遙). '전하…….' 라에르는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 팔 안에 카스트로를 안았던 감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안아든 팔까지 뜨거운 피로 흠뻑 젖었었다. 의식 을 잃고 늘어뜨린 몸은 시체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두려웠다. 지금껏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떨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두렵고 두려워 서, 자신의 팔 안에서 자신의 주군이 죽어갈까봐 너무나 두려워서. 자 신이 손을 놓으면 카스트로가 죽어버릴 것 같은 착각에 무작정 카스트 로를 품안에 끌어안고 카르노의 수호신인 로마와 운명의 여신 카마를 끊임없이 불러댔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은 품안의 카스트로와 아직 천막에 있을 의사밖에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얼마나 신에게 빌었는지 모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 외에 치명상은 없습니다만…….' '…….' '전하께서 의식을 찾기를 기다려봅시다.' 무언가를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치명상은 없지만 뭐라는 말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솔직히 듣게 될 말이 두려웠다. 자신이 그런 겁쟁이라는 사실이 한심스러웠지만, 상황을 이 지경으 로 몰고온 자신의 안이함과 무능력에는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안전 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산책을 말리지 않았는지, 자 신이 옆에 있었는데도 전하께서 그렇게 다치도록 방치했는지. 라에르 는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워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었다. 벌써 몇달새 세 번이나 카스트로가 다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이제는 자신만만했던 자신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남들 이 신동이라고 떠받들어주는 말에 우쭐해했던 자신이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실상은 이렇듯 무능한데도, 이렇게 전하 한사람도 지키지 못하 는 멍청이인데도. "젠장!"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라에르는 눈을 떴다. 눈가가 뜨거운 것 같았 지만, 무시했다. 울 자격도 없었다. 뭘 잘했다고 운단 말인가! "라에르경……." 불안함으로 떨리는 목소리. 익히 아는 친위대원의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시겠지요, 라에르경." 라에르는 무뚝뚝한 말투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답했다. "당연한 걸 묻지마라." "네, 죄송합니다, 라에르경." 라에르는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속 에서 라에르는 길 잃은 아이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 밤낮이 완전히 바뀌어가고 있는 새의 기상시간.. 7시.. 물론, 저녁 7시입니당.. --; 퇴고하고 늦지않게 올리려다보니, 왠지 시간에 무지 쫓기는 기분이네요.. 시간은 모자르는데, 왜 그리 딴짓을 하고 싶은지.. ...쩌비.. 글써야 되는데..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시계만 원수처럼 노려보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0 - 관련자료:없음 [3052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2 21:01 조회:175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0 - ==================================================================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내려앉았고, 하 늘과 땅 사이에는 온통 흰색의 결정이 휘날리고 있다. 한두명쯤 불편 한 눈길에 투덜댈만도 하건만 말발굽소리와 마차바퀴소리 외에 사람들 의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앞뒤로 기사단원들이 위치하고 그 사이 에 친위대원들이 빈틈없이 호위하는 가운데, 암녹색의 카르노 왕실 마 차는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산길을 움직이고 있었다. 엄중히 호위되는 카스트로의 마차 뒤로 다친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 이 탄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치체르는 얼결에 다친 기사들 틈에 끼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타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약초냄새와 옅은 피 냄새가 뒤섞여 나고 있었다. 보통 마차보다 넓고 푹신한 마차에는 치 체르 말고도 세 명의 기사가 더 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리나 팔 혹은 머리에 피가 묻어나는 흰 붕대를 감고서 지친 얼굴로 마차의 시트에 기대어있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하 는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멀쩡한 몸으로 있는 치체르 자신이 왠지 미 안해지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찾으실 것이니, 당분간 동행해주십시오.' 자주색 친위대원 복장의 기사가 그에게 와서 전한 말이었다. 한낱 용병에게 정중하게 존댓말까지 하는 기사를 보기는 처음이었지만 기분 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뭔가 득의양양한 기 분이었다. 어쨌든,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왕자를 구한 것은 꽤 잘한 일 같았다. 새삼 그 왕자라는 소년의 순한 눈동자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눈이 내리는 숲속에서 노숙하는 것보다 이렇게 편하게 따라가며 숙박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왕자씩이나 되 는 인물이 자기 목숨을 구해줬는데 입닦고 맨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 을 것이다. 이 기회에 한몫 단단히 잡아볼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 도 재빠른 계산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왕자니까 어디 가서든 푸대접은 안받겠지. 나야 가만히 있다가, 만 들어주는 식사나 얻어먹고, 대충 기사들 틈에서 자면 될테니까.' 새삼 '왕자는 좋은 것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머리 뒤에 손을 깍지껴 서 받치고 등을 시트에 기대었다. 약초와 피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수 년간 용병들과 부대끼다보니 그런 것에는 무감각해졌다. 아니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향수마저 느껴진다. 치체르는 머리 뒤의 손을 내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간밤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했지 만 자꾸만 왕자의 생각이 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고맙다.' 한 나라의 왕자가 보잘것없는 용병에게 고맙다고, 순한 눈으로 진심 을 담아 그렇게 말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서일까? 라디프에서도 귀족 과 왕족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느낌이 너무나 틀렸다. 썩어빠진 권력의 중심권에 있는 왕자가 어떻게 그런 순한 눈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일까? 그러고보 니 왕자가 꽤 어린 것 같던데……. "저기,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불쑥 꺼낸 말에 마차 안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치체르를 돌아보았 다. 상처로 고통스럽기는 하되 상당히 지루하고 무료하기도 했던 그들 이었기에, 치체르가 불쑥 던진 말에의 관심은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 방 같았다. 열렬해서 부담스러운 눈빛들을 마주하면서도 치체르는 싱 긋 웃는 얼굴로 당황하는 기색하나 없이 하려던 질문을 입밖에 냈다. "지금 수행하시는 왕자전하께서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기사들은 무언으로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 중 한 명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년 3월로 18세가 되십니다." "아아, 네." 열여덟살이라고 뇌까리며 고개를 끄덕인 치체르는 내친김에 한가지 를 더 물었다. "그분에 대한 평판은 어떻습니까?" 다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기사들은 이내 제각각의 말을 앞다투어 꺼내기 시작했다. 호의적인 쪽과 비호의적인 말들이 엇갈리고, 급기야 논쟁까지 벌이는 기사들을 보며 치체르는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있었 다. 올 들어 내리는 첫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설로 판명되었다. 마차 바퀴가 눈 속에 빠져들고 말들도 전진이 힘들어졌다. 벌써 점심시간을 넘긴지도 오래되었다. 산길에서 빠져나온 지는 이미 꽤 되었지만 인가 가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말도 사람도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다이 크경은 앞서 보낸 선발대를 기다리며 기사들을 재촉했다. '망할 놈의 눈!' 다이크경은 하늘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하필 오늘같은 날 눈이 오 는지. 한시가 다급한 이때, 눈 때문에 길이 지연된다는 게 화가 났다. '만약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다이크경은 뒤로 고개를 돌려 암녹색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있을 카스트로가 걱정되어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이 소홀했었다. '라에르경도 아직 어린 것을…….' 혹시나 싶었지만 라에르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일종의 신념 과도 같은 믿음으로. 어려서부터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보다 혼자 일을 처리하는 쪽이 효율적이었던 라에르 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중과부적, 숫자로 밀릴 때에는 혼자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이 기회에 혼자서도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지 만…….' 하지만 그것도 모두 카스트로가 의식을 되찾은 뒤의 일이다. "다이크경!" 앞쪽에서 다가온 기사를 바라보자 그 기사가 길의 앞쪽을 가리킨다. "선발대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레이노성의 영주와 함께랍니다." "아아, 다행이군." 다이크경은 간신히 인상을 폈다. 기사의 말대로 휘몰아치는 눈발 속 에서 앞쪽으로 일단의 기마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노 영지는 백작령이다.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은 올해 서른살 의 젊은 영주로, 온화하면서도 유능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가끔 아 르노로 상경해서 왕실 무도회에도 참석하곤 하는 테르니크경은 친하지 는 않더라도 다이크경과도 어느정도 안면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선발대로 온 기사에게 대충 설명듣기는 했지 만, 아직도 얼떨떨해서……." 중저음의 믿음이 가는 목소리다. 레이노성에 도착한 뒤 한동안 정신 없이 휘하 기사들과 테라사신들에게 방을 배정하고, 할 일을 지시하던 다이크경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지금 다이크경은 저녁식사 전에 한잔하자는 테르니크경의 제의를 받아들여 서재에서 술 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사가 전하를 시해하려 들었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테르니크경을 보며, 다이크경은 쓴웃음을 지 었다. 밑도끝도없는 그 설명으로는 자신이라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 다. 하지만 아직 마법사를 심문하지 못한 채라서 다이크경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마법사는 잡았지만, 아직 그 배후를 캐지 못했소. 전하께서 의식을 찾으시면 그때 심문할 생각이오." 테르니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자주색의 고수머리를 어깨까 지 늘어뜨린 테르니크경은 큰키와 깔끔한 외모의 호남아였다. 검을 들 면 무인의 풍모가 돋보이고, 책을 들면 그 나름대로 어색하지 않았다. 아르노에 있을 당시에 수많은 귀족여인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테 르니크경은 3년 전에 평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사교계에 일대 물의 를 일으켰었다. 그 뒤로 신혼재미에 푹 빠져서인지, 아니면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게 싫어서인지, 삼년간 한번도 아르노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전하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의식을 못차리시는 것 같던데, 괜찮으 신건지?" 대답이전에 한숨부터 나온다. 다이크경은 애꿎은 술만 자꾸 들이켰 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여서 테르니크경은 덩달아 기분이 처졌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괜찮으실거요. …괜찮으셔야지요. ……그것보 다, ……."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테르니크경에게 다이크경은 한쪽 눈썹을 치 켜올리면서 물었다. "미인으로 소문난 백작부인은 언제쯤 보여주실거요? 결혼하신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2세는 소식이 없는거요?" 테르니크경은 느닷없는 화제전환에 멈칫하더니, 곧 얼굴 전체에 부 드러운 미소를 퍼트렸다. "조금 뒤에 선보여드리지요. 저야 아직 신혼이라 아이는 늦어도 상 관없습니다만, 다이크경이야 말로 아직 상대가 없으신 겁니까?" "하하하, 이거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군요." 다이크경은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더니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는 척만 하지말고, 아리따운 처녀를 하나 소개시켜 주시는 건 어떻소? 그쪽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소만." "진심으로 결혼하실 생각이시라면 얼마든지 소개시켜드리죠." 곧바로 맞받아치는 테르니크경은 진지한 표정이었고, 다이크경은 헛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거이거. 말 한번 다시 잘못했다가는 얼결에 결혼하겠소. 그만 둡 시다. 참, 아르노에는 한번 들려야하지 않겠소? 아베르노 전하께 안부 인사도 드릴 겸."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가볼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왕세자 전하께 서는?" 다이크경은 웃음을 지우고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글쎄요. 신하된 입장으로 뭐라고 할 수는 없군요. 테르니크경께서 직접 보시고 판단해보시오." "네에." 두 사람 모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그들은 집사가 저녁식사를 알릴 때에서야, 서로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 어보였다. "시에타씨, 테르니크경께서 함께 식사를 들자고 초대하셨습니다. 식 당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암녹색 망토의 기사가 한 말이었다. 침대 위에 느긋하게 앉아있던 치체르는 급격히 흔들리는 녹색 눈으로 그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테르…니크…… 경이라고요?" 다이크경의 배려로, 치체르는 기사들과 한 방에 몰아넣어지는 대신 작은 독방을 하나 차지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없이 희희낙낙하며 자신 의 행운에 자축하고 있던 치체르는 그제서야 자신이 밟고 있는 성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성이 아니기를 빌며 이 성의 이름을 물으려는 순간 저절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네, 이 성의 영주이신 레이노 백작이십니다." 명쾌한 대답을 들은 치체르는 눈에 뜨일 정도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신음처럼 들리는 말이 치체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레이노……, 레이노……군요. 그런데 백작께서는 어째서 저 따위를 초대하셨죠?" 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치체르의 이상한 반응에 대한 의 혹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다이크경께서 시에타씨의 무용담을 말씀하셨습니다. 테르니크경께 서는 전하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을 소홀히 대할 수 없다시며, 시에타 씨를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치체르는 친절한 다이크경과 오지랖 넓은 테르니크경의 호의에 몸이 떨릴 정도로 고마웠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조금 전만해도 왕자를 구한 것은 잘한 짓이라고 생각하던 치체르는 지금 그 생각을 180도로 뒤집어버렸다. '그따위 왕자, 죽든 말든 내버려두는건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치체르는 목뒤로 묶어놓은 녹회색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삐져나올 정 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것을 멀뚱히 보고있던 기사에게는 치체르 가 제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비쳤지만, 그것과 자신의 임무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시에타씨? 테르니크경과 다이크경께서 기다리십니다." 다시 한번 재촉을 받고서야 치체르는 대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 다. 어차피 자신은 지금 레이노성에 와 있고, 거기다가 레이노 백작의 초청까지 받았다. 바보처럼 레이노 주변을 맴돌던 생활도 이제 청산해 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될대로 되라다. "갑시다, 까짓 거!" 기사는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치체르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 았지만, 곧 자신의 임무와는 하등 상관없는 의문을 다시 접어버리기로 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기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식당 가까운 곳에 이르러 넌지시 충고를 건넸다. "귀족들과 식사한다고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귀족들도 사람 이니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치체르는 한순간 얼어붙어 있다가, 친절한 기사의 충고에 기가 막힐 정도로 감격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치체르는 심호흡을 하고, 식당쪽으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1 - 관련자료:없음 [3054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3 21:15 조회:178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1 - ================================================================== 수십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식탁은 깨끗한 흰색의 식탁보와 반짝거 리는 은식기,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진 촛불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있었다. 화사한 장미라도 놓여져있다면 더욱 완벽했겠지만, 이 한겨울에 장미를 가져다놓을 방법을 레이노 백작부인 휴레시아는 알지 못했다. 갓구운 구수한 빵냄새와 식욕을 돋구는 스프의 향, 주요리인 양고기와 향신료가 어울린 맛좋은 냄새가 식탁 위를 풍성하게 메우고 있었다. 레이노 백작가의 부를 자랑하듯,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찬이었다. "성의껏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테르니크 경으로부터 백작부인이라고 소개된 휴레시아는 화사한 연 두빛이 감도는 탐스러운 금발과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녀였다. 노란색과 연두색이 어울린 봄빛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이 추운 겨울날을 잊게 만드는 마술을 부리고 있었다. "소문대로 굉장한 미인이시군요, 백작부인. 테르니크경이 왜 삼년간 두문불출했는지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다이크 경이 장난스럽게 테르니크경을 흘기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휴레시아는 하얀 뺨에 홍조를 띄우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과분하지 않습니다, 백작부인.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제가 본 미인 중 두 번째 미인이시니까요." 휴레시아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향한 곳에 는 금발과 콧수염의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남자가 그녀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에게 두 번째라는 모욕을 안겨주고서도, 뻔뻔스럽게 자신 의 잘못을 모르는 듯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는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였다. "두번째라, 그럼, 로페냐경이 보신 첫 번째 미인은 어떤 분이신지 요?" 테르니크경의 질문이었다. 그 역시 조금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귀족 답게 자제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로페냐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페냐는 싱글 웃으며 솔직하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했다. "첫 번째 미인은 얼마 전에 뵈었던 분이시지요. 정열적이고 매혹적 인 미녀로, 현재 카르노 국왕폐하의 마음을 꽉 붙들어매신 분입니다. 모리노 남작부인이라고 하셨던가요?" 휴레시아는 물론 테르니크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근래에 아무리 영지에서만 있었더라도 모리노 남작부인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평민들도 아는 이름을 왕실의 사정에 관심을 가진 귀족이 모 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모리노 남작부인은 칼리에르 3세의 정 부였다. 실제로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권력을 휘두른다해도, 천박하 고 더러운 '정부'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여자다. 고급창부쯤으로 여겨지는 그런 여자와 백작부인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모욕적인 일이었 다. 다이크경도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지만, 정작 로페냐는 진지하게 미인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남자는 전 대륙을 통틀어도 없을 겁니다. 화려한 불꽃처럼, 사로잡은 남자마저 태워버릴 것 같은 미인이지요. 두 번째는 말씀드렸다시피 백작부인이십니다. 수줍고 고요 한 가운데서도 도발적인 붉은 눈동자가 매혹적이십니다." "흠흠, 로페냐경께서는 나름대로 확실한 미인관이 있으신 모양입니 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다이크경이 애써 말을 돌렸다. 그다지 효과적으로 방향을 틀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 화제의 중 심이 백작부인에게서 멀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다이크경은 안심하고 있 었다. "아아, 미인이란 역시 남자에게 환상같은 매력을 줄 수 있어야겠지 요. 의외로 그런 여성상이 테라나 레이얄보다는 카르노에 많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진땀을 흘리는 다이크경과는 달리 테르니크경의 얼굴에는 찬서리가 맺혔다. 로페냐가 테라 사신단의 대표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진작에 결투라도 신청했을 터였다. "테라의 여성들은 어떻습니까? 로페냐경께서는 아직 미혼이신가요?" 가시가 박힌 말투로 테르니크경이 물었다. 다이크경은 먹는 것이 체 할 것 같았다.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는 분위기를 정작 당사자는 모르 는 것인지, 로페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입니다. 마음에 든 여성은 벌써 제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 어서 말입니다. 테라의 여성들은 애교스런 성격을 이상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사근사근하고, 가녀리고……." 때맞춰 노크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들어왔다. 로페냐경은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지금 막 들어선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늦으셨소, 마로니아경. 그리고 그쪽은 전하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 맞지요?"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익숙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마로나아경과는 달리, 치 체르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식탁너머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이크경이 그를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레이노 백작이신 테르니크경이시고, 저분이 바 로 좀 전에 말씀드렸던 시에타씨입니다." 테르니크경은 자신의 아내를 무례하도록 빤히 쳐다보는 치체르를 보 며 인상을 구겼다. 방금 들었던 로페냐의 미인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내를 쳐다보는 치체르의 시선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 불쾌했다. "어서오시오, 시에타씨.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라고 합니다." 조금은 큰 목소리가 들려오자, 치체르는 고개를 돌려 방금 자신을 소개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장신의 젊은 귀족이 식탁을 한손으로 짚고 서 있었다. 치체르는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 치체르 시에타입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식사에 초대해주 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시에타씨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습니다. 큰 일을 하셨더 군요." "아닙니다." 건성으로 대답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테르니크경은 점점더 저 용병 이 건방지게 생각되었다. 아무리 예의를 모르는 용병이라고는 하나, 이 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백작인 자신이 먼저 아는척하고 인사를 했 으면,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감사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건성건 성 대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고 있었 다. 남편인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 자리에서! 테르니크경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확실하게 못박아두려고 입을 열었 다. "제 아내, 휴레시아입니다." 간단한 소개말이었지만, 숨겨진 말을 못알아들을 치체르가 아니었다. 저절로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남의 아내에게 집적대지 말라는 건가?' 치체르는 자신 이상으로 경악하고있는 휴레시아를 일별하고, 하인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찾아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치체르 는 정중하게 대꾸했다. "아름다운 부인이시군요. 테르니크경께서는 행복하시겠습니다." 미묘한 비웃음이 담긴 말이었지만, 테르니크경은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노골적인 희롱으로! "칭찬이라면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억눌린 음성으로 테르니크경은 대답했다. 로페냐도 치체르도, 둘 다 성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싶었다. 기분좋게 시작했던 만찬은 시간이 지 날수록 끔찍해지고 있었다. 테르니크경은 옆에서 식사하는 아내를 바 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스러운 모습으로 스프를 먹고 있었다. 무 례한 자들의 언행에 상처받은 게 분명한 아내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더욱더 무례한 로페냐와 치체르가 싫어졌다. 테르니크경은 식탁 아래 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떨리던 작은 손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곧 잠잠 하게 손을 맡겨왔다. "미안하오." 테르니크경은 작게 속삭였다. 휴레시아는 조심스럽게 길다란 속눈썹 을 펄럭여 눈을 들어올리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자상한, 이해 심 깊은 얼굴을 보고있자니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테르니크."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내를 테르니크경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나타냈다. 다이크경은 닭살이 돋아 팔을 긁을 듯한 모습이었고, 로페냐는 몽롱하니 부러운 표정이었다. 마로니아경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으며, 치체르는 거의 증오스러운 표정으로 휴레 시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베이경은 오늘도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다들 편하게 앉아 식사하고있을 시간인데, 우리만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문만 쳐다보고 있는다는 게 말이 되냐구!" 옆에 있던 로카르경은 이제 맞장구치거나 빈정거리기를 포기하고, 베이경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는구나. 안젤라, 날 잊지 않았겠지? 그새 딴 놈 차고 앉아있으면 돌아가서 미워해줄거야.' 베이경은 한참 화를 내다가 아무도 맞장구치는 사람이 없자 흘낏 옆 을 바라보았다. 로카르경은 천장에 뭐가 붙었는지, 풀린 눈으로 쩝쩝 입맛을 다시며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배고픈가보구나. 오죽하면 천장보고 침을 흘리겠냐! 그래, 이 해한다, 이해해. 하지만 말이야, 정말 억울하다고! 다이크경은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임무를 맡겨 가지고!" 한꺼풀 두꺼풀 벗기는 달콤하고 야한 상상을 방해하는 베이경을 못 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로카르경은, 순간 베이경의 뒤를 쳐다보며 입 술을 벌렸다. "와앗!" 검은색 하녀복을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사뿐사뿐 그들을 향해 다 가오고 있었다. 캡에 가리워진 머리는 윤기흐르는 검은 머리였고, 하녀 복에 가려진 몸매는 날씬하면서도 나올 데는 확실히 나온 성숙한 여인 의 그것이었다. 근 열흘간 금욕생활을 해오던 로카르경에게 저 아리따 운 아가씨는 천상의 미녀로 보였다. "너, 대체 왜그……, 아아아!" 베이경은 황홀해하는 로카르경의 시선을 따라간 끝에 나지막한 감탄 사를 내뱉었다. 로카르경이 놀랍다는 얼굴로 베이경을 돌아보며 '역시 너도 남자'라는 동질감을 느낄 무렵, 베이경의 상상을 초월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녁이닷! 하하하하, 역시, 다이크경은 우릴 버리지 않았어! 어이, 아가씨, 먹을 건 충분히 가져왔겠지? 나는 일인분으로는 어림도 없다 고!" 뒤에서 로카르경이 쿠당거리며 넘어졌지만, 베이경은 더 이상 로카 르경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눈앞에 식사가 도착한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아가씨의 손에서 냉큼 쟁반을 받아가던 베이경은, 방 금전 로카르경이 당한 배신감 이상의 배신감을 느껴야했다. "안에 있는 죄수의 저녁식사입니다. 직접 전달해주시겠어요?" 예쁘게 웃는 하녀를 보며 베이경은 쟁반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로카르경은 베이경이 성질나는 대로 그것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기 전에 잽싸게 쟁반을 가로챘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드리지요. 실례지만, 아가씨 성함이 어찌되시 는지요?" 하녀는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아무 남자에게나 이름 가르쳐주는 게 아니랬어요. 그럼 부 탁드려요." 뒤도 안돌아보고 멀어져가는 하녀의 뒷모습이 못내 아쉬워서, 로카 르경은 연신 입맛을 다셨다. "죄수는 포식시키면서, 우리는 굶으라고? 뭐, 이 따위가 다 있어?" 광분하는 베이경을 흘낏 보며 로카르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해라, 베이. 조금있으면 교대잖아. 그때가서 먹으면 될걸 뭘 그 렇게 투덜거려?" "화나잖아! 너는 화 안나냐? 이게 뭐야! 왜 저따위 죄수가 우리보다 더 호의호식해야 하느냐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베이. 잔말말고 문이나 열어!" 그들이 지키고있는 문을 향해서며 말하자, 베이경이 머뭇거리며 조 심스레 속닥거렸다. "우리 여기서 조금만 집어먹을까? 죄수놈이야 주는대로 먹을테고, 너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 아냐?" 로카르경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턱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문열어, 베이. 추하다, 너." "우씨! 잘났다, 너!" 있는대로 신경질을 부리던 베이경은 결국 요란하게 문을 열어제꼈 다. 조그만 독방의 침대 위에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죽은 듯 누워있었 다. "일어나! 식사다!" 꼼짝도 하지 않는 마법사를 보며, 베이경이 화풀이라도 할 양으로 마법사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죽고싶어? 엉?" "그만둬, 베이!" 로카르경은 쟁반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베이경의 손을 마법사에게서 뜯어내었다. 풀썩 주저앉는 마법사는 줄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기 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여기 두고 갈테니까, 먹어둬. 굶어봤자 너만 손해다." "……." 마법사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바닥만 쳐다보았다. 로카르경은 한숨을 쉬며 베이경을 방밖으로 밀어냈다. "야! 너는 화나지도 않아?" 베이경의 발악을 뒤로하고, 로카르경은 방문을 닫았다. 여전히 씨근 덕대는 베이경을 보며 로카르경은 위협적으로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그만 두랬지, 베이! 왜 아무한테나 시비야?" "이씨!" 베이경은 혼자 화를 삭이다가 누구에겐지 모를 욕설을 퍼부어댔다. 로카르경은 왜 포에르경이 아닌 자신이 베이경과 조를 짰는지, 조를 짜는 데 관여한 모든 신을 저주했다. ================================================================== ...요즘은 뭔가를 먹었다하면 체하네요.. 체하면 머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면 모니터만 노려보고 진도는 안나간다는.. --; ...흑.. 빨리 써야되는데... 역시 시간이 아쉽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머리아픈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2 - 관련자료:없음 [305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4 21:22 조회:177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2 - ================================================================== 촛불로 환히 밝혀진 방은 상당히 넓고, 고급스러웠다. 넓은 바닥에는 커다랗고 질좋은 양탄자가 깔려있고, 한쪽 벽에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 슴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난로에서는 마른 장작이 강한 기세로 타 올라 방안이 후끈할 정도의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가구들이 있는 방안의 한쪽에는 얇은 휘장이 쳐진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 움직이고 있었다. 라에르 는 침대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걸까. 라에르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가 쓰러진 이후 매순간순간이 끔찍스럽도록 더디게 흘러갔다. 무슨 정신으로 이곳까지 카스트로를 옮기고, 의사들이 달려들어 치료 하는 것을 지켜봤는지.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하얀 백지같기만 했다. 아 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카스트로를 위해 양탄자가 깔린 바닥을 조심 스럽게 움직이는 의사와 시종, 시녀들. 지독한 무성음의 움직임들을 보 고 있자니, 라에르는 자신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꿈이라면.' 이마위로 손을 짚어 양 관자놀이를 누르며 라에르는 다시 한번 중얼 거렸다. '차라리 꿈이라면…….' 저 사나운 맹수의 공격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주인이 다치는 일없이, 자신까지 흠뻑 젖도록 주인이 피를 흘리는 일없이, 그래서, 그래서 ……. 얼마나 무의미한 가정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시간을 되돌 리고 싶은 허망한 욕구가 라에르의 머릿속을 끈질기게 갉작대고 있었 다. 이제와서 자신의 무능함 따위에 좌절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눈만 떠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처벌을 받아도 좋았다. 카스 트로가 눈만 떠준다면……. 하지만 벌써 몇시간째인지도 모르게 의식을 찾지 못하는 카스트로를 보기만 하는 입장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괴롭고, 또 괴롭다. 왜 지켜내지 못했을까. 차라리 자신에게 달려드는 표범을 무시하고, 카스트로를 지켜낼 수도 있었을텐데.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으면서도, 온마음을 다해 카스트로를 지키리라 맹세했으면서도, 실제로는 항상 그러지 못 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입장과 혈연에 얽매여 주군을 뒤로했으며, 이 제는 자신의 몸을 돌보느라 주군을 모르는 척했다. '……최악이다.' 라에르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자괴감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허언만 남발하는 사기꾼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경. 라에르경." "……!" 흐트러진 표정을 굳히고, 얼굴에서 손을 떼어낸 라에르는 천천히 자 신을 부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연갈색머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시 종장 하미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깔 끔한 외모의 안정적인 모습. 라에르는 순간, 카스트로가 왜 이 남자를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무슨, 크흠, 무슨 일입니까, 시종장 하미르." 라에르는 목소리가 갈라져있던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했다. 시종장 하미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밤새 여기 계시는 것으로 뭐라 하지는 않을테니, 잠시 식사라도 하 고 오십시오." 교묘하게 반박을 허용치 않는 말투였다. 식사하고 오라는 말뿐이었 다면 이 상황에 무슨 식사냐고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앞의 말이 붙 어 뭐라고 화내기가 애매했다. "생각 없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 라에르경이 쓰러진다면 전하께서 뭐라고 하 실까요?" "……." 인상을 쓰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시종장 하미르는 눈썹도 까딱이지 않고 라에르를 마주보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사람.' 역시, 카스트로가 왜 이 남자를 싫어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 다. 라에르는 결국 말다툼하는 것보다 빵이라도 한조각 물고오는게 나 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라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안의 친위대원을 찾아 몇번이고 같은 당부를 되풀이했다. 라에르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시종장 하미르는 다시 카스트로가 누운 침대 로 돌아갔다. 한없이 내려앉는 육체와 부유하는 듯 떠버리는 정신의 상반된 느낌 이 카스트로를 휘감고 있었다. 몸 구석구석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열 속에서 카스트로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년의 여린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하…… 전하아…….' 아팠다. 몸 속에 번개가 치고 지나가는 듯한 고통이, 날카로운 검날 이 파고 들어간 옆구리에서부터 심장으로, 그리고 목구멍까지 틀어막 는 것 같다. 숨이 막혀왔다. '전하……, 제발……흐흑, 죽지 마십시오. 전하……, 제가…….' 보이지 않아도 울먹이며 겁에 질린 소년의 얼굴이 잡힐 듯 느껴진 다. 하지만 그뿐, 몸 속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스스로의 의식을 지탱할 수도 없었다. '비켜, 비켜라. 전하. 괜찮습니다. 괜찮으실 겁니다. 전하, 조금만 참 으십시오.'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 베제르? '지혈은 했으니, 우선 침대로 옮겨야겠습니다.' 몸이 누군가의 팔에 안겨 공중으로 떴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죽을 것처럼 아팠다. '전하……, 전하…….' 애달픈 목소리에 더욱 정신이 혼몽해진다. 의식이 더욱 흐려진 어느 순간, 카스트로는 자신이 몸으로부터 쑤욱 빠져나오는 것 같은 기이한 환상을 보았다. '어머니' 옅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카스트로는, 지금 보이는 풍경이 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 부유하며, 이 제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카스트로.' 윤기 흐르는 새까만 머리를 멋지게 틀어올린 미에라 왕비는 엄한 눈 매를 하고 눈앞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미에라 왕비는 자수가 꼼꼼히 놓인 위엄있는 금빛 드레스를 입고, 곡선이 멋진 의자에 다소곳이 앉 아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카스 트로는 뒤늦게야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소년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전만해도 거울 앞에 서면 항상 볼 수 있던 자신의 얼 굴이었지만, 자신의 기억과는 어딘지 틀린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의 오 목조목한 작은 얼굴 가득 무언가에 대한 투지로 들끓어 올라, 발그스 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타고 싶습니다. 왜 안된다는 거지요? 아베르노 전하도, 지스 카르 전하도 다 말을 타시잖아요. 저도 망아지 말고, 크고 잘생긴 말을 타고 싶습니다.' 미에라 왕비는 난감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금세 어린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소년을 설득했다. '너는 아직 어려, 카스트로. 네가 열 살이 되면 카르노에서 제일 멋 진 말을 네게 준다고 약속하마. 그러니까 그 동안 망아지로 말을 잘 타는 연습부터 하렴.' '망아지를 타는 것은 이제 싫습니다. 말을 탈만큼의 연습을 충분히 했다구요. 그러니까 말을 타게 해주십시오.' 일곱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베르노와 지스카르, 두 형이 커다 랗고 멋진 갈색 말을 탄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대책 안서 는 고집을 부려댔던 것이. 결국 어머니도 아버지도 두 손 들고 말 정 도로 고집이 세었던 꼬마의 모습에,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슴 가득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좋다라는 앞의 말만으로 정신없이 기뻐하던 소년에게, 그 다음 말은 받아들이기에 꽤나 벅찬 것이었다. '며칠 전, 아주 좋은 말이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아직 시간이 모자라 길들이지 못했다는구나. 네게 잘 길들인 말을 주고 싶지만, 아직 준비 된 말이 없구나. 그러니 네가 직접 그 말을 네 것으로 길들여보렴. 네 가 그 말을 길들일 수 있다면, 네가 그 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말을 네게 주겠다.'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고있자니 그 당시에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된다. 드디어 자신도 말을 타게 된다는 것에만 마음이 들떠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잔혹하리만치 엄격했다. 일곱 살 난 아이에게 아 이 키의 두세배는 될 듯한 말을 길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 나는 행동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분수를 알고 포기 하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그 무모함에 도전했고, 결과는 참혹했 다. 애초에 일곱 살 난 아이가 말을 타겠다고 고집부린 것부터가 잘못 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그런 자신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하면 좀더 나았을걸.' 이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음순간 그는 또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그곳은 삼왕자궁에 속한 정원이었다. '전하, 제발 그만두십시오. 조금만 참으시면 잘 조련된 말을 구해드 릴 것이온즉, 부디 저 미친 말을 타겠다고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전하, 저 말을 타시면 아니되옵니다.' 떠벌떠벌, 어린 카스트로의 옆에서 울상이 되어 숨쉴 틈도 없이 주 절거리는 남자는, 흰머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의 젊은 시종장 베 제르였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바지라도 잡고 늘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 지만, 원칙과 법도에 충실한 시종장은 카스트로의 옆에서 징징대기만 할뿐이었다. '시끄러워, 베제르. 어머니께서 내거신 조건이란 말이야. 저걸 타겠 어. 그렇지 않으면 언제 말을 타게 될 지 모르니까.' '전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건, 이건……, 저얼대 아니되옵니다.' 소년은 호승심과 고집이 뒤섞인 표정으로 시종장 베제르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에게는 이미 거칠게 콧김을 뿜어대며 투레질하 는 흑갈색의 종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도전적인 눈으로 말을 쏘아보면서 서서히 접근했다. '저어어언하아아, 아니되옵니다! 그만 두십시오. 전하.' 다시 한번 시종장 베제르가 애원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말의 옆 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커다란데다가 사납게 몸을 흔들어대는 말에게 다가가는 소년의 모습 은 보는 사람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무사하 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이런데, 그 당시 옆에서 마음 졸 이며 지켜보아야 했던 시종들과 마구간지기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 까. 카스트로는 시선을 돌려 시종장 베제르를 바라보았다. 사십 남짓 된 나이의 시종장 베제르는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었다. '몹쓸 짓을 했구나.' 카스트로는 이제 와서 그렇게 후회했다. 이미 고인이 된 시종장 베 제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왜 그가 살았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걸까. 그렇게 어이없게 가버릴 줄 알았다면, 그가 원 하는 대로 조금은 사려깊게 처신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와아앗! 저어어언하아아!' 갑자기 외치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긴장시키는 시종장 베제 르의 모습을 보고, 카스트로는 다시 10년전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소년 은 용케도 말 위에 올라가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흩뿌리며 자랑하듯 주 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하하하! 이것 봐! 걱정할 것 없다고! 이제 어머니께 가서, 어, 어, 우 아아앗!' 몸을 비틀다가 갑작스레 앞발을 치켜드는 말 때문에, 소년은 손써볼 틈도 없이 잔디밭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저어어어어언하아아아아!' '비키시오, 함부로 건드리지마시오!' '어의! 어의를 불러와라!'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소년의 주위를 둘러싸고 갖가지 비명과 울음, 그리고 외침이 터져나왔다. 카스트로는 갑자기 자신이 쓰러져있는 소 년에게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저지하고, 반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카스트로는 속수무책으로 소년과 동화되어갔다. 욱씬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한다. 소년은, 아니 카스트로는 쓰러진 채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순간 시종장 베제르의 등뒤에서 날뛰던 흑갈색 말이 얼룩덜룩한 점이 박힌 표범으로 변했다. 표범은 사납게 날뛰고 으르렁대더니, 새하얗고 단단한 이빨을 드러내며 시종장 베제 르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질렀다.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지만, 어느새 시종장 베제 르를 머리부터 아그작거리고 먹어대던 표범의 눈빛이 카스트로에게 와 닿고 있었다. '오, 오지마! 오지마! 저리 가란 말야! 저리가아아아!' ================================================================== ...저런 데서 자르는 이유는? ...새디스트인 새의 악취미.. 퍼억! T_T (여기서 망가지는구나..) ^^ 좋은 하루 되세요.. -사악한 새디스트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3 - 관련자료:없음 [3061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5 21:24 조회:174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3 - ================================================================== '오, 오지마! 오지마! 저리 가란 말야! 저리가아아아!' 울며 소리질렀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시종들도 보이지 않고, 항상 곁에 있던 라에르도 없었다. 카스트로는 혼자 울면서 두려 움에 떨고 있었다. 표범은 그런 카스트로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비죽 웃었다. 그리고 느긋하리만치 천천히 카스트로에게 다가왔다. 피 가 끈적한 침과 섞여 뚝뚝 떨어지는 입가를 긴 혀로 핥으면서, 고양이 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송곳니가 드러난 입술을 히죽거리고 있었다. '죽고 싶은가?' 웅웅하고 울리는 소리였다. 카스트로는 시선을 표범에게서 떼지 않 으며 머리를 저었다.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앉은뱅이처럼 주춤주춤 뒤 로 뺐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서 힘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 았지만, 카스트로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죽고 싶은가?' '시, 싫어!' 표범은 재밌다는 듯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카스트로를 비웃고 있었 다. '왜, 살려고 하지? 사람들은 전부 네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카스트로는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거짓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 너는 죽는 게 나아. 그것이 모두 를 위해 좋다.' 진지한 눈빛으로 다가온 표범은 축축하고 뜨거운 혀로 카스트로의 얼굴을 핥아올렸다. 맛있는 것을 핥듯이 몇 번이고 얼굴을 훑는 느낌 에 카스트로는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거친 바닥을 움켜쥔 손 과 다친 몸이 죽을 것처럼 아파왔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네 어머니와 베제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떤 가?' '싫어!' '흐흥. 어리석군, 너는. 왜 굳이 살려고 하지? 지금이라면 편하게 죽 을 수 있어.' '싫다고 했잖아!' 어디서 힘이 났는지 모르지만, 카스트로는 힘껏 표범의 얼굴을 밀어 냈다. 표범과 맞닿은 손바닥에 다시 축축하고 후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표범의 혓바닥이 카스트로의 손바닥을 찹찹 감칠맛나는 소리마저 내면 서 핥고 있었다. 움찔하며 손을 뒤로 물리자, 표범이 느긋한 표정으로 카스트로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재미있군. 왜 살려고 하는 거지? 네가 죽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나? 너의 어머니도, 베제르도 네가 어서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믿지 않아.' 카스트로는 전신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움켜쥔 손바 닥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잡혀왔다. '설사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보고 죽으라고 해도 난 살 거야! 내가 살고싶으니까, 난 살 거야! 너 따위가 아무리 그래봐도 소용없어! 난, 살 거다! 내 의지로, 내가 살 거야! 나 는……' '재미있어. 큭큭.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지? 너는 너무 맛있게 생겨서, 놓아주고 싶지 않은걸. 자, 어디부터 먹어줄까? 네 얼굴? 네 심장? 아 니 네 배를 찢고 창자부터 먹어줄까?' 자기가 한 말에 확인을 해주듯, 표범은 카스트로의 앞으로 다가와 앞발로 카스트로를 밀쳤다. 힘없이 뒤로 넘어진 카스트로의 가슴에 앞 발을 대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어 콱하고 카스트로의 뱃살 을 물어뜯었다. '아아아아아악-------!' 찌익하는 살이 찢기는 소리가 온몸으로 들려왔다. 쩝쩝, 입맛을 다시 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싫어.' '흐흥. 네 말 따윈 소용없어.' 새빨간 피와 살점이 묻은 입이 비죽하고 올라갔다. 비웃듯이 올라간 입꼬리가, 카스트로는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싫어! 싫어! 싫다고 했잖아! 너따위에게 죽지 않아! 내게, 내게 감히 그 더러운 이빨을 들이대지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스트로는 손에 든 검으로 힘껏 표범의 이마를 찍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 손등위로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변했다. 그리고 한 방울 두 방울 뜨거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숨막힐 정도로 빨간 색의 피비가 카스트로의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언제부터 들고있 었는지 모를 검도, 검 끝에 이마를 꿰뚫린 표범도 피비 속에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카스트로 자신의 몸도 뜨거운 통증과 함께 녹아 가고 있었다. 몸뚱어리가 통째로 용광로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열 기를 동반한 고통이 밀려왔다. 전신을 들끓는 숨막히는 열기, 그리고 온몸에 쇳덩이를 매달아놓은 듯 꼼짝도 할 수 없는 답답함! '아파! 아파! 아파……, 아파요, 어머니…….' 카스트로의 부름에 답하듯, 그리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고집불통같으니! 왜 이렇게 어미 속을 썩이는지…….' 꿈결처럼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어머니의 한숨, 어머니의 손길. 이마위로 시원한 손이 느껴졌다.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한없이 안온한 그 느낌에 취해, 카스트로는 자신이 정말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전하……, 전하……. 제발…… 죽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으니 까……' 라에르의 목소리. 애달픈 흐느낌. '라에르를 처벌한다구요?' 아버지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라도 왕자의 몸에 상해를 입힌 것은 용서하지 못한다. 법도가 그렇거니와, 그보다 짐이 먼저 그 아이를 용서하지 못하겠다.' '폐하!' 부정의 뜻을 담고 소리쳤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뜻을 굳히고 있었다. '그 아이 재주가 아깝다는 것은 짐도 알고 있다. 피오르경의 장자라 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왕자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은 용 서받지 못한다. 용서할 수 없어!' 카스트로는 몸 위에 걸쳐진 시트를 꾹 부여잡았다. 고집스러운 얼굴 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 '그럼, 제가 처벌하게 해주십시오.' '카스트로?' 놀란 듯한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라에르의 목숨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라에르가 상해를 입힌 것은 제 몸입니다. 저 때문에 죽을 목숨이라면, 그 목숨, 제게 주십시오. 라에르 를 제게 주십시오.' 흔들리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카스트로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깊게 고개숙이는 아들을, 아버지는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리고 언제나 그렇듯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락했다. '전하……, 전하……' 가볍게 몸이 흔들린다. 의식이 깨어나려고 한다. 카스트로는 갑자기 온몸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숨이 막혀온다. "하악--!" "전하! 전하?" "잠깐 비키시오." "아아아악-----!" 카스트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하아, 하아, 하학……" 숨이 거칠고 온몸에서 맥박이 뛰놀았다.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며, 전 신에 이는 아픔이 현실로 느껴졌다. 카스트로는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 을 찌푸렸다. 전신이 땀으로 축축하다. 힘겹게 깜빡여서 시야를 회복한 눈 속으로 아는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전하!" 시종장 하미르였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에는 흰 수건을 접어서 들 고 있었다. 젖은 수건으로 카스트로의 이마를 닦아내는 냉담할 정도로 무표정하고 단정하기만 한 얼굴이, 일순 어머니와도, 시종장 베제르와 도 닮아보였다. '이건, 재앙이야!' 섬세한 물결무늬로 조각된 화장대의 거울 속에 연두빛 나는 화사한 금발의 미녀가 비춰졌다. 그림처럼 앉아 수를 놓아야할 것 같은 모습 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지금 그럴 정도의 여유를 찾기 어려웠다. 정성들여 다듬은 손톱을 깨물어대는 휴레시아는 평소와는 달리 초조한 얼굴을 하고, 가끔씩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러대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 그가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휴레시아는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어 쩔 수 없이 떨리는 몸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불안해 보였다. 휴레시 아는 고개를 홱 돌리고 초조한 걸음으로 방안을 서성였다. 식사 전에 남편에게 들었던 말이 계속 그녀의 뇌리를 자극했다. '전하께서는 몸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며칠간 더 이곳에 머무실 거요. 전하와 다이크경, 로페냐경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도록 해보 시오. 이것은 기회요, 휴레시아.' 남편이 이번 기회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잘 알고 있는 휴레시아로서 는 더더욱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치첼! 이제 와서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치체르만 없었다면, 휴레시아도 왕자전하를 모시게 된 것을 진심으 로 기뻐했을 것이다. 테르니크경은 야심있는 남자이고, 휴레시아는 그 런 남편이 좋았다. 남편이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남편의 말대로 이것은 기회였다. 삼왕자 전하는 비록 테라 로 가게 되었지만 왕실에서 영향력있는 왕자였고, 다이크경은 카르노 의 기둥인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리고 테라의 사신인 로페냐경 은 테라의 후작이라는 위치이니만치 사귀어 두어 나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치첼, 당신이 왜 거기 끼어있는거지? 왜!' 휴레시아는 치체르를 붙잡고 소리쳐 따져묻고 싶었다. 그리고 조용 히 떠나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치체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옛 정혼자 따위가 지금의 남편과 어울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그녀는, 혹시, 하 며 미간을 접었다.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복수? 복수라니! 내가 치첼의 집안을 망 하게 한 게 아니잖아? 나는 그저 빈털털이와 결혼하기 싫었던 것뿐이 라고! 그게 왜 복수의 대상이 되어야하지?' 누가 그렇다고 대답한 게 아니었지만, 휴레시아는 자신의 생각이 절 대적으로 옳다고 믿었다. '그 때문이 아니라면, 치첼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겠지. 하지만 안돼, 치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당신이 내 행복을 무너뜨리게 하 지는 않아. 그렇게 두지 않아.' 의지로 가득했던 휴레시아의 얼굴이 다시금 불안스레 흔들렸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 어떻게……, 그 래. 그래. 이번에도 유모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생각을 마친 휴레시아는 거칠게 문을 열고, 복도와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비어버린 침실에서는 문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침대위로 몸을 내팽개치며, 치체르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짜증스러웠다. 화가 났다. '정말 왕자따위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분수 가 있는 거지!' 가련한 척,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도 못드는 그녀가 가증스러웠 다. 그런 그녀에게 홀딱 넘어가, 정신 못차리는 병신같은 백작이 증오 스러웠다. "대륙 제일의 병신은 나지, 빌어먹을!" 몸을 뒹굴 굴려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바닥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이마를 시트에 대고 비비적거리던 치체르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다시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돌겠군, 빌어먹을!" 왜 이렇게 일이 이렇게 풀리는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레이노 영 지를 어슬렁거리는 게 아니었다.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단 말인가! "머저리 치첼! 병신같은 놈!" 여자에게서 당할 수 있는 수모란 수모는 죄다 받아본 주제에 아직도 뭐가 부족해서 그녀를 잊지 못하는지 모를 일이다. 가문의 몰락과 부모의 죽음에 뒤이어 들려온 파혼소식. 그 파혼소식 을 믿을 수 없다며 찾아갔던 정혼녀에게서 '거지와 결혼할 바에는 차 라리 죽어버리겠어.'라고 들었다. '성의 경비병을 불렀어. 빚더미에 앉았다지? 당신을 찾는 사람이 많 다고 들었어.' 몇달전만해도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인 입으로, 그녀는 그렇게 차 갑게 그를 내몰았다. 경비병들에게 포위되어 간신히 도망쳐 나가는 그 에게 남은 것은 검 한자루과 '거지와 결혼할 수는 없어'라는 정혼녀의 냉담한 말뿐이었다. 더 이상 살 의욕이 나지 않았다. 부모를 뿌린 강변 에서 검을 앞에 두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용병이 된 것은 결국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가진 거라고는 평생 익 혀온 검술과 단련된 몸밖에 없는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용병 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키워온 꿈은 기사였지만, 기사는 돈을 쉬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다달이 나오는 기사의 월급은 능력있는 용병의 일당보다 못한 법이니까. 처음부터 자신이 이렇게 오래 버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안되면 죽기밖에 더하겠냐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던 기분이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일만 골라서 맡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 쌓아온 훈련과 용병이 되어 실전에 투입되는 것과는 상당한 갭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치체르는 4년간이나 목숨을 이어왔고 적어도 북국 라디프에서는 귀족들과 왕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 키는데 성공했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았던 것이라고는 해도. 치첼 용병대의 동료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하나같이 출중한 실 력과 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치체 르는 그들에게서 살려는 의지를 배웠다. '너를 배신한 여자 때문에, 네가 죽어주겠다는 거냐? 미친놈! 네 목 숨이 그렇게 하찮은거냐?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나에게 맡겨. 네놈 죽을 때까지 실컷 써먹어줄테니까.' 우락부락한 덩치에도 꽤 날렵한 움직임을 가진 바우트가 떠올라, 치 체르는 피식 웃어버렸다. 치첼 용병대를 해산하겠다는 발표에 가장 광 분하던 녀석이기도 했다. '그 녀석, 어디서 잘 지내나 몰라. 보나마나 계집 치마폭에 싸여있겠 지.' 치체르는 다시 피실피실 웃고 있었다. '계집은 장신구다' 라는 나름 대로 확실한 여성관을 지닌 녀석이었다. 있으면 두고 보고 쓰다듬어볼 수 있어 좋지만, 그것이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너는 목걸이하나 없어졌다고 자살할 셈이냐?' 라고 비웃었던 녀석. '어쩌면' 치체르는 한숨과 웃음을 섞어 흘려냈다. 머리 뒤에 깍지낀 손을 받 치고 천장을 보며 누웠다. "녀석의 말이 옳을지도." 바보처럼 아직까지 미련을 못버리고 이 근처를 어슬렁거린 것은 값 비싼 보석을 잃어버려서 아쉬웠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알고 보니, 거들 먹거리는 귀족녀석이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고 있더라. 솔직히 빈털털이였던 자신에게 온 것보다 지금 그 귀족에게 간 그녀 는 더욱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가. 그러면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다. 여 전히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이제는 정말 잊어버려야지. 이제는 잊어버릴 거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새 삶을 살아가는 거다.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중얼거리던 치체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 었다. 내일 또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몰라도, 지금은 다소 마음이 편해 져있었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4 - 관련자료:없음 [3064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6 21:13 조회:173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4 - ================================================================== "전하……, 전하……."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카스트로는 당혹스런 기분으 로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있는 라에르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촉촉해진 눈을 하고서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 부르고 또 부르 고, 마치 부르지 않으면 안될 어떤 필사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불러 대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니까, 라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부족해서, 제가……."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카스트로는 기운없는 손에 힘을 넣어 라에르 에게 잡힌 손을 마주 쥐었다. "라엘이 잘못한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괜찮아, 라 엘." "전하……." 무엇이 그렇게 라에르를 감상적으로 만든 것일까?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평소의 라에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울먹이는 아 이를 라에르와 동일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카스트 로는 문득 꿈에서 보았던 라에르를 떠올리며, '여전하군'이라고 생각하 는 중이다. "쉬고 싶다, 라엘. 내일 이야기하면 안될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편히 쉬십시오." 그제서야 손을 놓아주는 라에르의 얼굴에는 여전히 못 다한 말이 가 득 남아있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통증을 진정시 키는 약을 먹었는데도 옆구리와 팔이 화끈거린다. 조금 전 갈아입은 잠옷이 금세 축축해졌다. 열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럽다. 하 지만 그 와중에서도 생시에 본 것처럼 생생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 에 아른거린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카스트로의 이상형인 여 성이었다. 일곱 살 때, 자신을 떨구었던 말은 자신이 병상에서 일어나기도 전 에 목이 베어졌다. 자신의 첫 말이 될지도 몰랐던 그 말은 자신의 성 급했던 실수로 그렇게 죽어버렸다. 아무리 길들여지지 않았다지만 주 인을 떨군 말을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법도였다. 짐승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통용되는, 지엄한 왕실의 법도였다. 그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은 열세살의 가을이었다. 두 형이 테라로 가고나서 의기소침해있던 카스트로를 위해 칼리에르 3세는 말동무로 삼으라며 한 소년을 소개시켜주었다. 햇살을 받으면 밝은 갈색으로 변하는 예쁜 흑갈색의 머리와 맑은 눈동자를 가진 동갑 내기의 소년은 '말동무'로는 그다지 소질있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혼자 떠들어대다가 듣는 대답이라고는 고작해야 '예'나 '아니오' 뿐이었 고, 카스트로는 그런 무뚝뚝한 소년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일부 러 못살게 굴어도 소년은 싫다는 소리한번 하지 않았고, 함께 장난을 치자고 꼬드겨도 시큰둥해 보였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소년 을 제멋대로인 카스트로가 싫어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 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카스트로는 누군가에게 소년이 '검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카스트로는 이 마음에 안드는 말동무에게 호승심을 불태 웠다.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소년이 검을 쓰면 얼마나 잘 쓰겠 나 싶어서였고, 자신보다 키가 작은 소년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 동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이 건방진 소년을 찍소리 못하 게 눌러버리고, 이후 자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본때를 보일 생 각이기도 했다. 몇 번이나 거절하는 소년을 꼬드겨 진검으로 대련을 요구했다. 싫다는 소년의 손에 자신의 검을 쥐어주면서까지 강행한 대 련은 카스트로가 옆구리에 검을 찔려 쓰러지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아 무리 '신동'이라고는 해도 고작 열 세 살의 꼬마였다. 겁 모르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동갑의 소년을 다치지 않게 하고, 자신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요령까지는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년은 맥없이 쓰러지는 자신을 끌어안고 사람들을 소리쳐 불렀다. 다친 자신보다 더욱 떨리는 몸으로 자신을 껴안고 울면서 사죄하는 라 에르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아니, 지금도 라에 르의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입안이 썼다. 분명히 자신의 잘못이었는데도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라에르 가 죄인이라고 했었다. 그것이 법도라 했다. 라에르는 이번에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똑똑. 치체르는 잠결에 노크소리를 들었다. 똑똑똑똑. 말없이 문을 열라고 협박하는 듯한 느낌으로, 노크소리는 그 소리와 세기를 더해간다. 결국 침대 위에서 뒹굴대던 치체르도 다섯 번째의 노크에서는 두 손을 들었다. "네에. 나갑니다." 어기적거리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고는, 자느라고 풀러놓은 녹회 색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긁어올렸다. 새벽에 깨는 자신의 습관에도 이렇게 졸린 것을 보면, 지금이 아직 새벽조차 되지 않은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이 한밤중에 자는 사람을 깨운단 말인가! 다소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이 살 랑이는 촛대를 손에 들고 서서 치체르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년의 여자 는 치체르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타씨……, 정말 오셨군요." 갸름한 얼굴과 자그마한 눈을 한 작은 몸집의 여자였다. 가냘픈 촛 불에 비친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치체르는 뜻밖의 얼굴을 마주하고, 잠깐 망설인 끝에 억지로나마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오랜만입니다, 코데르 부인. 이곳에서 뵙게 되는군요. 어쨌든 들어 오십시오." 치체르는 문가에서 비켜주었다. 그 사이로 들어온 코데르 부인은 초 를 침대 옆 테이블에 두고, 치체르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색의 면직 드 레스 위에 숄을 두르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단정하고 정숙한 느낌이었 다. 코데르 부인은 어려서부터 휴레시아를 길러준 유모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죠?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서 걱정했었는데." 묵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별로 즐겁지 않다. 치체르는 머뭇거리다 가 간단히 대꾸했다. "용병이 되었습니다." "아아, 네, 그렇군요." 코데르 부인은 두어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다지 밝지 못한 표정 과 마주잡은 자그마한 손을 연신 바꿔쥐는 그녀를 보며, 치체르는 마 음속으로 휴레시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얼결에 휴레시아와 자신 사 이에 끼어 고생하는 모습이 안되어 보였다. 치체르는 친절하게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결정했다. "휴레시아가 뭐라고 그럽니까?" "예, 예?"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마치 전혀 그런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처럼 보였다. 남에게 심한 말을 못하는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애써 말 돌릴 것 없어요, 코데르 부인. 당신도 나도 이 자리를 휴레 시아가 마련하게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해봐요. 내가 해줄 수 있 는 대답이면 다 해줄 테니까." 코데르 부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 고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한참만에야 입을 떼었다. "아씨는……, 시에타씨가 왜 이곳을 왔는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혹시 나……. 혹시……." "백작나리께 내가 휴레시아의 옛 정혼자였다는 걸 말할 거라고 걱정 하던가요?"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거들어주자, 그녀는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 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술 더 떠 휴레시아를 위해 사정 하기 시작했다. "지금 아씨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답니다. 테르니크경께서는 아씨를 무척 사랑하시고, 아씨도 그분을 무척 사랑하고 존경하시지요." 코데르 부인이 말하려는 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렵게 말 을 하는 것을 보며, 치체르는 간신히 진정시켰던 옛 감정들이 울컥울 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훼방놓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달라? 그런 말이겠죠?" "아아……, 꼭 그렇다기보다는, ……." 십년이 넘도록 정혼녀로 있었으면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성격을 모를 수가 있을까? 고향에서 휴레시아의 결혼소식을 접한 뒤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산다는 레이노를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한번도, 전신 로마께 맹 세코 치체르는 단 한번도 그녀의 결혼생활을 방해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정말 행복하게 사는지. 아니면 못된 귀족을 만나 불행한 건 아닌지. 비록 다 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가 괘씸하고 얄밉기는 했으되, 진심으로 그 녀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걱정할 것 없다고, 그렇게 전해줘요, 코데르 부인. 내가 오고 싶어 서 여기 온 게 아니오. 한번쯤 휴레시아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휴레시 아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요. ……빌어먹을, 왕자따위 그냥 죽게 내 버려뒀어야 했어!" 코데르 부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치체르를 바라보았다. 치체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요. 나는 왕자를 만나면 곧바로 여기를 뜰 겁니다. 백작인지 뭔지하는 놈에게 옛날 일을 주절거릴 생각은 없어요. 휴레시아에게 안 심해도 좋다고 말해요. 휴레시아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코데르 부인은 천천히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 녀의 눈동자는 치체르의 얼굴에서 조금도 비켜가지 않고 있었다. 주의 깊은 관찰의 눈이었지만, 치체르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새벽을 찢는 비명소리가 레이노성을 뒤흔들어 깨운다. 피로에 지친 몸으로 곤히 잠을 자던 사람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 다. 부랴부랴 옷을 걸치면서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곧 비명소리가 울린 곳을 찾아내었다. 그곳은 레이노 내성의 바로 바깥 벽 근처였다. "비켜, 비켜보시오. 좀 안으로 들어갑시다." 벌써 몇겹인가로 둘러싸인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사십대 초반의 남자는 레이노성의 집사인 마르였다. 그 역시 허겁지겁 달려왔 는지, 갈색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걸치고 있는 상의의 단 추가 듬성듬성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마르는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빙 둘러선 사람들의 앞쪽에 도착했다. "웃!" 마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 있는 것은 하녀복을 입은 여자의 시체였다. 밤새 쌓인 하얀 눈을 검붉게 물들인 곳에, 머리가 깨어져 뇌수가 흘러나온 검은 하녀 복 차림의 하녀 한 명이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틀어진 채 죽어있었다. 공포와 경악이 얼굴에 남아있는 하녀의 모습이 빨려들 듯 마르의 망막 으로 들어왔다. "……사로나?" 피에 젖은 검은머리와 여성스럽게 굴곡진 몸매의 하녀는 마르도 익 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 로마여! 대체, 대체 이게 무슨……." 마르는 때때로 밤을 함께 보내던 여자의 시체를 망연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테르니크경이 그 불미스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 지 않아서였다. 뭐에라도 홀린 듯 정신이 없어 보이는 집사에게서 보 고를 받으며, 테르니크경은 입술을 악다물었다. "그래서, 사인(死因)은?" 집사인 마르는 경비병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성위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성에서?" 테르니크경은 눈가를 좁혔다. "하녀가 죽은 성위쪽으로는 누구의 방이 있지?" "그, 그것은 잘……, 곧 알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테르니크경은 더듬거리는 집사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평소에 는 그래도 꼼꼼한 성격이었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경황이 없는가보았 다. "나가는 김에, 어젯밤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나, 목격한 사람이 있는 지 수소문해봐. 참, 그 시체는 어떻게 했나?" "아직 치우지 못하고,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곧 치우도록 조 처하겠습니다." 테르니크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이크경에게 좀 뵙자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나으리." 집사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테르니크경은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을 찌푸리고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어제 왕자의 일행이 성으로 들어오고부터 계속 나쁜 일들만 연속으 로 일어나고 있었다. 뻔뻔스런 테라의 사신과 예의도 모르는 용병. 거 기에다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살인범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의 일은 비록 하녀 라고는 하지만, 살인이다. 테르니크경은 살인범이 왕자의 일행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레이노성안에서 살인이 일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또 성안의 사람이 하필이면 이때를 맞추어 살인했다는 공교로운 우연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분명히 멍청한 기사놈들 중 하나일테지! 아니면 재수없는 테라놈들 이거나!' 로페냐 하나만을 놓고 테라인들이 전부 재수없다는 성급한 편견을 가져버린 테르니크경은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려냈다. '아니면 여자에게 눈이 벌건 그 용병녀석일지도.' 테르니크경의 입꼬리가 못마땅한 듯이 비틀렸다. ================================================================== ^^ 공짜로 A4용지를 이만큼(?)이나 얻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사러가야되나, 라고.. 모처럼의 은둔(--; 네가 북의 김모씨냐?)에서 벗어나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당분간 더 은둔하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호홋..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대머리가 걱정되는 새(대머리독수리? --;)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5 - 관련자료:없음 [3066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7 21:10 조회:171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5 - ================================================================== 로카르경과 베이경은 부족한 잠에도 불구하고, 다시 임무교대를 위 해 어기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밤을 새운 포에르경과 그 파트너인 마시르경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다들 편하게 쉴 시간에 자기들만 고 생한다는 게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불평불만에 대한 일가 견이 있는 베이경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로카르 경은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둔하기 짝이 없 는 베이경은 모를지 몰라도, 나름대로 예민한 신경을 가졌다고 자부하 는 로카르경은 지금 성안 분위기가 묘하게 긴장되어있다는 것을 깨닫 고 있었다. '대체 뭐야?'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다들 쉬쉬거리며 피하는 눈치였다. 기사들의 숙소가 있던 복도를 지나, 성의 본관 홀을 지날 때였다. 널찍한 홀의 바깥출입구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한 로카르경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베이경을 잡아끌며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레이노성의 하녀들은 로카르경들을 보자 조금씩 몸을 피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밖으로 나온 로카르경은 경비병 두 명이 들것을 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사람들을 막고있는 경비병에게 묻자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살인입니다. 하녀 한 명이 죽었습니다." "살인?" 놀란 얼굴로 되묻는 말에 경비병은 얼굴을 굳히고, 턱짓으로 가리켰 다. "성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누가 떨어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퉁퉁거리는 말투였다. 로카르경은 경비병들이 성밖 한쪽구석 으로 가서 시체를 들것으로 옮기는 걸 쳐다보았다. 검은색 하녀복과 치렁거리는 검은머리, 하얗다못해 파랗게 변한 얼굴. "어?" 로카르경은 시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비병 이 막고있는 곳을 뚫고 나가려고 하자, 곧바로 제지되었다. "뭡니까?"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경비병이 눈을 부릅뜨고 로카르경을 노려보았다. 로카르경은 여전히 시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확인해볼게 있소. 어디서 본 여자같은데……." "이 성의 하녀입니다. 어제 오신 기사나리께서 어떻게 저 여자를 안 다는 말입니까?" "아……." 로카르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저 얼굴, 저 머리, 저 하녀복, 저 몸매……. 눈웃음치던 아리따운 아가씨! 맞아! "베이! 너 저 여자 기억나?" 베이경에게 확언을 들으려고 했지만, 베이경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 었다. "몰라. 너 또 그새 하녀를 꼬셨냐? 재주도 좋아!" "이 바보녀석! 어제 저 여자가 식사를 가져왔었잖아! 분명히 우리가 지키던 포로의…… 식사……!" 순간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뭐야, 로카르?" 다음순간, 로카르경은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그들이 원래 가고있던 임무지, 포로가 있던 방이었다. "야아! 너 왜 그래?"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는 베이경도 얼결에 따라서 뛰고있었다. 옆에 있던 경비병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와앗!" 와장창! 챙그랑! 챙챙챙챙! 계단에서 부딪힌 하녀가 들고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렸지만, 로카르경 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이 계속 달렸다. 하녀는 얼굴을 찡그 리고 로카르경의 뒷모습을 쫓았다. "뭐야? 저 나쁜 놈!" 주섬주섬 떨어뜨린 쟁반과 물주전자를 다시 주워드는 순간, 하녀는 다시 한번 거대한 덩치와 부딪히고 주저앉아버렸다. 챙그랑! 챙챙! "너, 앞 좀 잘 보고 다녀! 젠장! 이봐, 좀 기다려!" 어마어마한 덩치와 부딪힌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전도된 욕설까지 얻어먹은 하녀는 기가 막혀서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가는 덩치를 바라 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수습 한 하녀는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댔다. "나쁜 놈들! 가다가 다리나 부러져라!" 하녀는 다시 떨어진 쟁반과 주전자를 주워들었다. 비싸디비싼 은주 전자의 몸통부분이 찌그러진 것을 본 하녀는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저주를 잊지 않았다. "넘어져서 코도 깨져버려, 나쁜놈들아!" 밤을 새워 방문을 지킨 포에르경과 마시르경은, 교대하기 위해 온 로카르경의 몰골을 보고 황당해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노고를 생각해 서 조금이라도 빨리 교대하기 위해 뛰어왔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 이 무너져도 그럴 로카르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궁 금증이 더해가고 있었다. "왜 그래, 너?" "헉, 헉, 허헉, 헉, 허억……" 로카르경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굵직한 땀방울을 뚝뚝 떨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서 무릎을 손으로 짚고, 금 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한 모습이면서도 로카르경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계속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뭐야, 로카르? 숨 좀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해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로카르경은 숨이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꾸만 한쪽 손을 들어 방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는 왜?"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포에르경과 마시르경은 복도가 쿵쾅 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듣고 일제히 계단과 복도가 이어지는 곳을 바라 보았다. 로카르경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숨을 몰아쉬는 베이경 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너희들! 말을 해봐! 대체 뭐냐니까?" 답답함에 못이겨 베이경에게 소리친 말이었지만, 베이경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베이경을 보며 포에르경과 마시르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을 때, 겨우겨우 숨이 트인 로카르 경이 간신히 말소리를 냈다. "문, 문을 열어, 열어봐." "뭐?" 어이없다는 표정의 두 사람을 무시하며, 로카르경은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빨리 문 좀 열어봐!" "너, 왜 그래? 함부로 열면 안 되는 거 몰라?" 포에르경이 따지고 들었지만, 로카르경은 그런 것으로 말씨름할 여 유가 없었다. "잠깐만 열어보란 말이야! 안에 있는 녀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뭐?" 로카르경은 전혀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포에르경들을 밀치고, 막무가내로 문을 열어제꼈다. 자신을 붙잡고 막으려는 손길은 지금 한 가지밖에 보이지 않는 로카르경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끼이익! 문이 열렸다. 긴장한 채로 조금씩 넓어지는 방안의 풍경에 시선을 둔 로카르경은 침대 옆에 쓰러져있는 마법사를 보며 신음을 내 뱉었다. "뭐, 뭐야? 왜……." "이 손 놔! 확인해봐야겠어!" 순순히 몸에서 떨어지는 손길에서 벗어나, 로카르경은 다급하게 바 닥에 쓰러진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칠흑처럼 검은 로브 채로 엎어져있 는 마법사를 들치자 묵직하고 차가운 무게가 느껴졌다. 휑뎅그레 떠진 눈에 흰자만이 자리잡은 마법사의 일그러진 얼굴은 조금 전 보았던 하 녀의 시체만큼이나 창백했다. "오, 로마여!" "맙소사!" 로카르경은 혹시나 싶어 마법사의 코밑에 손을 가져가고, 경동맥의 맥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느낌은 차가웠고, 그것은 결국 하나만으로 결론지어질 뿐이었다. "빌어먹을!" 로카르경은 허탈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주, 죽었나?" "……." 로카르경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포에르경이 로카르경 의 어깨를 잡았지만, 로카르경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로 카르경의 입에서 절망적인 말이 쏟아져 나왔다. "죽었다. 사인은 아마도, 독살. ……다이크경에게, 아니, 로페냐경에 게도……보고하도록……." "……그래서, 지금 우리측에 범인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요, 테르니 크경?" 레이노성의 집사로부터 급하게 '보자'는 전갈을 받은 다이크경은 연 신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눈을 불안하게 굴리는 집사의 모습에서 무언 가 나쁜 일이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것이 이런 종류의 불쾌한 의 심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여러분들이 오고 나서 생긴 일입니다. 거친 기사들이 저희 성의 하 녀를 희롱하다가 그리 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하아, 여보시오, 테르니크경! 우리 기사들을 대체 무엇으로 보고 하 시는 말씀이오? 누구보다 철저하게 훈련된 카르노 왕실 기사단원들이 오! 전쟁 중의 미친 병사들처럼 취급하지 마시오!" 테르니크경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기사단원이 그렇게 했다고는 말하지 않았 습니다. 어제 오신 분들 중의 누구일 거라고만 했지요. 이를테면 그 무 례한 용병이나 친위대원, 아니면 테라인일 수도 있겠지요." 다이크경은 무게 실린 싸늘한 눈으로 테르니크경을 쏘아보았다. "테라인은 모르지만 친위대원과 전하의 은인인 그 용병을 의심하시 는 건, 전하에 대한 모욕이오. 왕실모독이 어떤 죄라는 것을 모르시지 는 않을텐데, 경솔하시구려, 테르니크경." 왕실모독이라는 말에 테르니크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잠깐 저 '손님들'의 우두머리가 누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새삼 왕자 라는 지위가 테르니크경에게 숨막히는 무게로 다가왔다. 확실한 물증 을 가지고 범인을 찾아내기 전에 저 '손님들'을 의심하는 것은 결국 테 르니크경 자신에게 위험만 될 뿐이다. 억눌린 채 분노를 발산할 수 없는 테르니크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리 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연신 쥐어졌다 펴지는 주먹을 보며 다이크 경은 나직이 혀를 찼다. 테르니크경이 화가 났다는 것은 알겠지만, 경 솔하게 자신을 추궁하며 밀어붙이는 게 불쾌했다. 다이크경은 다시 한 번 충고를 하려고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급하게 들려온 노 크소리에 가로막혀버렸다. "무슨 일이냐!" 테르니크경은 풀리지 않는 화를 방금 노크한 자에게 들이붓듯 내쏘 았다. 비죽이 열리는 문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집사인 마르였다. "별일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은가!" 마르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주인을 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 었다. 머뭇거리던 마르는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하지만, 기사분들이 다이크경을 급히 뵙자고 하셔서……." 다이크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테르니크경과 이야기를 마친 뒤에 만날테니 대기하라고 하라." "네, 알겠…아, 아니!" 다시금 고개를 숙이던 마르는 뒤이어 들어온 덩치 큰 기사에게 밀려 비틀거렸다. 다이크경은 방금 들어온 베이경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기다리라고 했지 않나!" 주인의 말에 대번에 풀이 죽은 마르와는 달리, 베이경은 눈 하나 깜 빡이지 않고 말했다. "급한 일이어서 그랬습니다, 다이크경."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이크경은 뒤따라 들어온 로카르경을 보고 말꼬리를 흐렸다. 무대 포인 베이경과는 달리, 약삭빠른 로카르경까지 예의를 무시하고 들어 온 것은 무언가 일이 생겨도 크게 생겼다는 뜻이었다. "포로가, 암살당했습니다." "……뭐?" 다이크경은 그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한참만에 되물었다. 로 카르경은 초조한 얼굴로 다이크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어제 잡은 마법사가, 독살당했습니다." "……!"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들은 다이크경은 너무 경악한 나머지 입만 벌 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로카르경은 그대로 상황설명을 이어갔다. "어제 포로의 저녁식사에 독극물이 들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이크 경?" "어,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너희들은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야?" 벼락치듯 노성을 질러대는 다이크경은 무시무시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소름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로카르경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 을 이었다. "아실 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시체로 발견된 하녀가 있습니다. 그녀 가 어제저녁 포로의 식사를 가져왔던 하녀입니다. 오늘아침에 그 시체 를 보고, 느낌이 이상해서 확인해보았습니다만, 역시 독살당해 죽어있 었습니다. 다이크경?" 어떻게 할지를 묻는 듯한 로카르경의 부름에, 다이크경은 옆에 있던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빌어먹을! 어제 식사를 담당한 자를 데려와! 아아, 그리고 로페냐경 도 모셔와라. 그리고 전하께는……, 빌어먹을, 우선 라에르경을 만나야 겠다. 빨리빨리 움직여!" "네, 다이크경." 서둘러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자, 다이크경은 노기등등한 눈으로 테 르니크경을 쏘아보았다. "그 하녀가 전하를 노린 암살자를 독살했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테 르니크경!"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다이크경은 싸늘한 분노의 눈으로 테르니크경을 쏘아보며 잇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테르니크경이 방금 전까지 내비치던 분노 이상 의 것이었다. "경이 전하를 노린 암살자와 내통했을 수도 있단 말이지! 경고하건 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테르니크경. 이 일은 단순히 하녀 하 나가 죽은 것과는 차원이 틀리니까. 나중에 봅시다." 다이크경은 제 할말만 마치고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남겨진 테르 니크경은 뜻밖의 상황전개에 할말을 잃고, 멍하니 큰소리 내며 닫히는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의 암살범과 내통?' 테르니크경은 인상을 쓰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정말 최악의 날이다. ================================================================== 왠지 피곤하군요... --; 왠지가 아니라, 글이 안써져서 모소설 읽다가 날밤깠다는.. ^^; 오늘은 글써야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사악한 새디스트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6 - 관련자료:없음 [3068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8 21:03 조회:171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6 - ================================================================== 라에르는 일어나자마자 카스트로가 있는 침실로 와 있었다. 아직 주 무시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카스트로의 곁에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조용하게 들리는 규칙적인 느린 숨소리를 듣고 있 는 것만으로도 라에르는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되뇌이며, 몇번이고 숨을 쉬고있는 카스트로의 모습 에 감사했다. 그 엄청난 실책에도 불구하고, 살아주어서 감사하다고. 다섯 명의 의사가 모두 동원되었던 전날과는 달리 지금은 의사 두 명이 침실을 지키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시종들과 시녀들도 모두 나가고, 침실에 남아있는 것은 시종장 하미르와 두 명의 시종, 시녀장 다나와 두 명의 시녀, 그리고 라에르뿐이었다. 시종장 하미르는 온밤내 카스트로의 시중과 간호를 도맡아했으면서도,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쯤 쉬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 것은 역시 시종장 하미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었다. 침실 안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밖에서의 작은 소란도 안에서는 꽤 크게 들려왔다. '전하께서 계시는 침실 앞에서 소란이라니.' 라에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문을 열 고 밖으로 나간 라에르는 재빨리 문을 닫고, 소란의 원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다이크경과 로페냐가 친위대원들에게 가로막힌 채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어떠신가, 상태는?" 두서없이 묻는 다이크경은 무슨 일인지 초조해하고 있었다. 라에르 는 속으로 의문스럽게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의식은 찾으셨습니다만,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입 니까?" 로페냐를 일별하고, 다시 다이크경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사람 의 얼굴에 모두 무슨 큰 일이 생겼다는 걸 써붙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라에르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휴우,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난감하군." 다이크경은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라에르에게 눈짓을 했다. "조금 자리를 옮길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라에르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카스트로가 묵 은 방의 바로 옆방에서 걸음을 멈춘 라에르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당분간 제가 쓰도록 양해를 얻은 방입니다. 이제 말씀해주시겠습니 까?" 의자도 권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물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을 트 집잡을 여유는 없는 것 같았다. 다이크경은 버텨서고있는 라에르를 보 며 어려운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불어냈다. "마법사가 독살되었네." "……네?" 한 박자를 놓치고 되물어오는 말에, 다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어제저녁, 마법사의 식사에 누군가가 독을 탔어. 식사를 가져왔던 이 성의 하녀는 오늘아침 성 위에서 떨어진 시체로 발견되었네. 일단 어제 식사를 담당한 요리사를 감금해놓기는 했지만, ……솔직히 범인 이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일세." "……." 라에르는 입술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감정을 삭이려는 것인지, 생각 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법사를 죽일 이유를 가진 자, 그것은 마법사가 입을 열지 않길 바 라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행 중에 있다면, 분명 마법사와 내 통한 자 일 것이다. 라에르의 드러난 목줄기에 힘줄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다이크경 과 로페냐는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았다. "……최대한, ……할 수 있는 한 빨리 범인을 잡아내십시오. 그 자가 암살자와 내통하고 있던 자일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내야 합니다. 그 자가 끼어있는 한, 전하께서는 언제라도 위험에 노출되어있 다고 생각하십시오." 눈을 뜨고 말을 시작한 라에르는 강렬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 았다. 다이크경은 긴 한숨을 뱉어냈다. "……휴우, 최선을 다해보지. 전하께는…… 어떻게 말할 셈인가?" 라에르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안됩니다. 조금 더 안정이 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 진전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라에르는 두 사람을 내보내고, 잠시동안 방안에 혼자 남았다. 한동안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방안에서 이가 갈리는 듯한 말소리가 새어나왔 다. "어떤 놈이냐! 어느 놈이 감히 전하를……." 나날이 추위를 더해 가는 겨울날씨에도 레이노 백작과 백작부인의 침실은 화사한 초여름을 연상시킨다. 연한 연두빛 커튼이 겨울을 비추 는 유리창을 가리고, 은은한 장미향이 감도는 방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다. 두 건의 살인사건으로 웅성대는 바깥과는 다른 세상인 듯 평화스럽기까지 하다. 화사한 침실의 한쪽에 놓인 화장대의 의자에는 휴레시아가 머리손질 을 하다 멈춘 채로 거울을 보며 앉아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곳에는 테 르니크경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걱정할 것 없소. 전하께서 깨어나 보셔야 알겠지만, 설마 피해자에 가까운 우리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소." 테르니크경은 아내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와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에 시선을 멈추고, 위로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혹시 모르니까 레트로경에게 당신을 호위하라 고 지시하겠소." 휴레시아는 빗을 움켜쥐면서,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남편의 자상한 배려는 충분히 고맙지만, 호위라는 것은 결국 감시와도 상통한 다. 특히나 치체르가 이 성안에서 머물고 있는 지금은 절대 피하고 싶 은 일이었다. 휴레시아는 되도록 달콤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말을 꺼냈다. "저는 괜찮아요. 레트로경이 저를 호위하면 제가 더 불편해요. 되도 록 손님들이 머무는 곳으로는 가지 않을 거고, 항상 세나와 함께 움직 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테르니크." 테르니크경은 몸을 일으켜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의 가녀린 어깨 를 두 손으로 감싸는 테르니크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알겠소, 휴레시아. 하지만 정말 약속해주시오. 어디를 가든 혼자 움 직이지 않겠다고." 휴레시아는 빗을 화장대에 내려놓고, 어깨에 놓인 남편의 손을 자신 의 손으로 덮었다.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당신과 결혼하게 된 게 제게는 최고의 행운 이에요." 테르니크경은 뒤에서부터 아내를 껴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향긋한 장미향과 섞인 체향이 은은하게 후각을 자극한다. 테르 니크경은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맞추며 속삭였다. "나 역시, 당신을 만난 것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소. 사랑하오, 휴 레시아." "사랑해요. …테르니크." 휴레시아는 긴 속눈썹을 펄럭이며 내려깔았다. 테르니크경은 결혼 3 년째인 아름다운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들에게 아쉬운 것은 아직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과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아직은 이런 신혼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휴 레시아는 남편의 포옹을 받아들이면서도,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 쩔 수 없었다. 이번의 일로 치체르가 이 성에 머무는 날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휴레시아는 초조함을 감추려 애써 미소지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범인을 찾는 일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아무 것 도 없었기 때문에 진전될 리가 없었다. 죽은 하녀 사로나가 떨어진 성 의 위쪽으로는 서재와 복도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는 누구를 딱히 집어 의심할 수도 없었다. 설사 그 위쪽에 있는 것이 누군가가 머무는 침실 이라 할지라도, 공범조차 죽여 입을 막아버릴 정도로 주도면밀한 범인 이 제 방에서 하녀를 밀어버릴 리도 없었다. 마법사가 먹은 독약은 최 고수준의 의술을 가진 왕궁의사 다섯 명으로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 레이노성의 사람들은 이방인들 중에 살인범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해 다녔고, 카스트로의 일행들은 언제 카스트로 가 이 사실을 알려고 들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독살. 그것이 카스트로에게 가져올 반응과, 그에 따른 파장 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사건이 터진 날 알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것은 사람들의 피 를 말리고 있었다. 시간은 초조하게 흘러만 가고, 살얼음을 걷는 분위 기인 채로 레이노성에서의 세 번째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명료한 의식을 되찾았다. 얼마 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는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의식을 잃 었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렇게나 혼란스러워하던 라에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물론 그뿐이 라면 그다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겠지만, 같은 무표정일지라도 느 껴지는 분위기가 틀렸다. 어째서인지 자신을 기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랄까? 카스트로는 침대에 푹신한 베개와 쿠션을 받치고 앉아서 노골적으로 라에르를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어 색해하는 모습이 어딘가 수상했다. 카스트로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다 가, 자신의 입가를 톡톡 두드리기도 하며, 눈가를 좁혔다. 언제 저 라 에르가 자신의 눈을 피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이상해.' 카스트로는 레이노 백작을 만나본 뒤에 추궁해봐야겠다고 결정했다. "전하.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 내외가 밖에 도착해 계십니다." "들라하라." 집요하게 살펴보던 라에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카스트로는 문가를 쳐 다보았다. 열리는 문 사이로 두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커다란 키의 자주색 머리를 한 남자와 연두색이 섞인 금발머리의 미녀는 무척 잘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였다. 카스트로는 근엄하면서도 엄격하지 않은 미소로 두 사람을 맞았다. "백작부인께선 상당히 미인이시군요." 휴레시아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이 의례적인 인사말에 불 과할지라도 휴레시아는 무척 기뻤다. 자신의 미모에 대한 확신이 있었 던 데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아닌 카르노의 왕자였기 때문이었다. 휴레시아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최대한 고상하게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백작부인." "감사합니다." 레이노성에 온지 며칠이 흘렀지만 오늘에서야 겨우 볼 수 있었던 왕 자는 병색이 남아있는 초췌한 얼굴이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웃을 때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입매가 무척이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었다. 왕족이라고 해서 오만하고 위압적인 사람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 했지만, 지금 보이는 왕자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 근사근하면서도 위엄있는 말투와 잔잔하게 미소짓는 고귀한 얼굴이 테 르니크경과는 다른 의미로 매력적이었다. "앉으시오. 아직 몸이 여의치 않아, 이런 몰골로 그대들을 접견하게 되었소.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이나, 경과 부인께서 이해해주시오." "저희는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 휴레시아는 시종들이 가져다놓은 의자에 앉았다. 침대를 두고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테르니크경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휴레시아의 옆 에 앉아있었다. "전하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무척 걱정했습니다." "아, ……내가 변변치 못해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소. 경의 염려덕분에 이만큼 나아졌소. 그리 걱정할 것은 못되오." "다행입니다, 전하." 카스트로와 테르니크경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휴 레시아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휴레시아도 몇번인가 와 본 방으로, 레이노성에서 주인부부의 침실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침실이 었다. 하지만 침실 안에 들어선 사람들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만으 로도, 이곳은 레이노성에서 따로 떨어져나간 곳인 것 같았다. 마치 왕 궁의 한 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 왕궁은 어떤 곳일까?' 휴레시아는 어느새인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잘생긴 남편과 함 께 왕궁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평민의 딸인 자신이 이만한 귀족의 부인이 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었다. 이 생활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만, 그래도 멀리서만 보던 그 아름다운 왕궁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 다. 물론 그것은 이제와서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저 들어가 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뿐이라면. 하지만 휴레시아는 자신도, 남편도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테르니크경은 카르노에서 유력한 권력자가 되기를 바랬다. 휴레시아도 언제든 테르 니크경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휴레시아는 남편이 팔을 잡아오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의자에서 몸 을 일으킨 휴레시아는 정중하게 인사하는 남편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이 성에 머무시는 내내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조심스럽게 침실에서 물러 나오자 테르니크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테르니크경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내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잘했소." 휴레시아도 마주 웃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테르니크경은 나직 하게 속삭였다. "다행이오. 그다지 어려운 분이 아니라서. 실은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오." "네, 정말 멋진 분이세요. 왕세자 전하께서는 어떤……, 테르니크?" 휴레시아는 우뚝 멈춰 서서 인상을 쓰고 있는 테르니크경을 올려다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테르니크경의 시선을 따라가던 휴레시아는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치첼?' 그들이 온 첫날, 식당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휴레시아는 숨이 막 힐 듯한 기분으로 치체르에게서 테르니크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째서?' 휴레시아는 당혹스런 감정을 맛보았다. 테르니크경이 자신과 치체르 의 과거를 알 리가 없는데, 어째서 저렇게 치체르를 노기어린 눈으로 의식하고 있는지. 왜 그토록 그를 싫어하는 것이 눈에 띄는지. 혹시하는 불안이 언뜻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의심스런 시선으로 치체르를 쏘아보자, 치체르는 조소어린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왕자전하를 뵙고 오시나보군요. 저도 전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 인데, 길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테르니크경이 욱하는 모습을 보고 휴레시아는 테르니크경의 팔을 잡 았다. 돌아보는 얼굴에 대고, 휴레시아는 간절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냥 가요, 테르니크." "……." 테르니크경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휴레시아를 바라보았다. 휴레시아 는 자신이 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면서 덧붙였다. "일일이 다 상대할 필요없잖아요? 상대는 일개 용병이라구요." "옳으신 말씀이군요. 현명하신 부인을 두셨군요, 백작나리." 빈정거리던 치체르는 테르니크경이 자신을 홱 쏘아보자, 곧 정중한 표정으로 바꿔 말했다. "전하께서 절 기다리시는데요?" "……." 눈엣가시를 두고보는 심정으로 치체르를 노려보던 테르니크경은 자 신의 아내를 데리고 치체르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겨우 두 번째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 용병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슬린다. 귀족을 존경하 는 마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예의와 소양이 되어있지 않 은 자였다. 테르니크경은 언제고 저 버르장머리를 꼭 고쳐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 ...사람 하나(?) 죽이기 참 어렵군요.. (누가 들으면 킬러인줄 알겠다.. --;) 며칠째 한사람 죽이려고 아둥바둥.. 왜 진도가 안나가는지.. (새는 착해서? --;) 쩝.. 걍 푸념입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사악한 새디스트 킬러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7 - 관련자료:없음 [3071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09 21:03 조회:172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7 - ================================================================== 오늘도 빈둥대야하나? 라는 어떻게 보면 편안하고, 어떻게 보면 지 루한 생각을 할 즈음, 왕자의 시종이라는 사람이 치체르를 찾아왔다. "전하께서 시에타씨를 부르십니다." 앞뒷말을 다 자르고 용건만을 툭 내던지는 시종을 보면서, 치체르는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며칠동안 왕자가 부르 기만을 기다렸다지만 막상 불려지니까 시원섭섭했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강한 느낌이랄까? 이제서야 레이노성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갖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꽤 됨직한 보상금을 받아서 숨쉬기 도 불편한 레이노성을 떠난다니 즐거워야했다. 더 이상 휴레시아와 마 주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해야했다. 치체르의 이성은 그래 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휴레시아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 이 저려왔다. 잊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것은 생각뿐이었던 듯, 치체 르의 가슴언저리는 아직까지 묵직한 무게로 아려오는 것이다. 치체르는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소하며 시종을 따라 왕자가 머문다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그 녀를 맞닥뜨렸다. "왕자전하를 뵙고 오시나보군요. 저도 전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 인데, 길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백작이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치체르는 그냥 지나 치지 못했다. 자신의 성격이 비뚤어지고 못됐다고 자각했지만, 상관없 었다. 초조해하는 휴레시아의 모습이, 무례한 평민을 치죄하고 싶어 견 딜 수 없는 듯한 백작의 거만한 모습이 치체르를 더욱 자극했다. 괴롭 혀주고 싶었다. "일일이 다 상대할 필요없잖아요? 상대는 일개 용병이라구요." 다른 남자에게 매달리는 정혼녀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치체르 는 자제할 틈도 없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옳으신 말씀이군요. 현명하신 부인을 두셨군요, 백작나리." 무섭게 노려보는 테르니크경을 보며 치체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런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다 잊기로 했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테르니크경이 싫어도,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쁜 것은 저 독살스럽게 노려보는 휴레시 아다. 그녀가 나쁜 것이다. 정혼자를 배신하고, 거리낌없이 다른 남자 와 결혼한 여자. 타락한 여자! 추악한 여자! "전하께서 절 기다리시는데요?"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백작. 비켜주세요. 치체르는 마음속으로 중 얼거렸다. 테르니크경이 보호하듯 휴레시아를 끌어안고 사라지자, 치체 르는 기다리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종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 고 다시 길을 안내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흑자색의 상하의와 자주색의 망토를 걸친 친위대원들이 지키는 커다 란 방문 앞에서 시종이 그렇게 말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치체르는 한 걸음 물러서서 친위대원들과 그 옆에 서있는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들이다. 치체르는 그들이 뿜어내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정말 왕자를 만나는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시에타씨."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몸을 덥쳐왔다. 한겨울에 이 정도의 열기를 내려면 어느 정도의 장작이 필요한 것일까. 치체르는 쓸데없는 물음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전하께 인사올리시오." 딱딱하고 엄숙한 말투로 말한 사람은 침대 옆에 서있던 삼십대 남자 였다. 연갈색의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겨 묶은 남자는 단정하고 차 가운 얼굴에 치체르를 탓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치체르는 별 잘못 한 일도 없이 죄지은 느낌을 받으며,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남자를 확인 하고 즉시 무릎을 꿇었다. "카르노의 백성 치체르 시에타입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다지 영광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입에서는 술 술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일어서라. 가까이 오겠나?" "……네, 전하." 치체르는 무릎을 펴고,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침대근처로 다가갔다. 몇 번 되지 않는 왕족과의 대면 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왕족들은 다 른 자가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성 들이 고개를 깊이 숙일수록, 왕족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는 모양이 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치체르는 자신의 깨달음에 예외를 적용시켜야 만했다. "쿡……, 아무리 방바닥을 쳐다봐도 황금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니면 나를 바로 보지 못할 정도의 어떤 죄를 지은 건가?" "네?" 치체르의 두뇌가 상상 외의 말을 접하고는,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자신의 말에 명확한 의미 를 해석해주어서 치체르의 두뇌활동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렸다. "나를 똑바로 보라는 말이다, 시에타." "……!" 놀란 표정 그대로 들어올린 치체르의 얼굴을 향해 카스트로는 재밌 다는 듯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좀 낫군. 이름이 치체르 시에타라고 했나?" "아, 네." 치체르는 아직까지 얼떨떨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카 스트로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치체르를 바라보다가, 슬쩍 옆으로 고개 를 돌려 흑갈색 머리의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지 않나, 라에르경?"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더라도, 라에르에게는 그것을 생각해낼 마음의 여유가 없었 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법사에 대한 생각이 라에르의 모든 정 신을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카스트로는 초조해하는 라에르를 주의깊게 살펴보다가, 다시 치체르 를 돌아보았다. "용병이라고 했나? 소속이 있나?" "……그냥 떠돌이일 뿐입니다." 카스트로는 흐음하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치체르를 훑어보았다. 아 무렇게나 동여맨 녹회색의 머리와 185리 정도로 카르노 장정의 표준 키. 전형적인 카르노인 용병의 모습이었다. '용병. 용병이라…….' 무언가가 생각 날 듯도 한데, 꼬리가 잡히지 않는다. "주로 어디서 활동했나? 최근 용병들은 북국(北國 라디프)을 선호한 다지?" "……네에." 저도 모르게 말끝을 길게 끌면서, 치체르는 다시 카스트로를 뜯어보 고 있었다. 어차피 마주볼 거라면, 멀뚱거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그 사람을 살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카스트로는 전형적인 미남이라기보다는 선이 뚜렷한,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찌푸려진 눈썹 아래서 검은 눈동 자가 아련하다. 열일곱살이라고 했던가? 평범한 열일곱살의 꼬마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전신에서 묻어나는 위엄이 어색하다. 치체 르는 저 얼굴이 얼마 전 보았던 그 순수한 소년의 얼굴이라는 것을 납 득하기 힘들었다. 저것은 어른의 얼굴이다. 제멋대로 한 사람의 외모에 대해 판단해버리고, 치체르는 이제 의문점들을 떠올렸다. 라디프의 귀족과 왕족이 용병들의 동향을 아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 지 않다. 워낙 마물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고, 그만큼 용병이 많이 필요 한 지역이니까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곳 카르노는 라디프 와는 사정이 다르다. 미노 내전의 종결 이후, 암묵적으로 군사활동이 억압된 카르노에서 용병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적어도 국가적인 군사활동이라면 근 5년간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카르노에서, 왕자씩이 나 되는 사람이 용병들의 동향을 꿰고 있다? 아니면 그저 어디선가 들 어본 말을 읊어본 것뿐인가?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한 용병대의 이름을 들었는데. 아마 이름 이 치첼 용병대였던가? 맞나, 라에르경?" 카스트로는 계속된 연상작용을 입밖에 내며, 치체르의 표정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물론 그냥 한번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이건가 싶어 찍 어본데 지나지 않았지만, 치체르로써는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에 대해 펄쩍 뛸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아아, 치체르, 치첼…… 혹시……." 그제서야 라에르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새삼스럽게 치체르 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90%의 확신을 담아 치체르에 게 물어보았다. "자네가 그 치첼인가?" "아……." 치체르의 표정만으로도 답을 얻어낸 카스트로는 뜻밖의 인연에 흥미 를 가지고 치체르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미레야씨에게 자네가 카르노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 게 만나 자네에게 목숨을 구함 받을 줄은 몰랐는걸? 정말 만나서 반갑 네." "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치체르를 보며, 카스트로는 서글서글한 말투 로 그를 불렀다. "좀더 가까이 오겠나? 보다시피 내가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예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카스트로에게 다가간 치체르는 불쑥 손을 잡아 오는 카스트로에게 놀라 몸을 움칫거렸다. "불편해하지 마라. 참, 하미르. 시에타에게 의자를 가져다주도록." 치체르는 손을 뺏긴 채, 당혹스럽게 카스트로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미레야라고? 미레 야라면, 그 미레야? 치체르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 다. 어떻게 왕자라는 사람이 카르노에서 활동하는 것도 아닌 용병단의 이름을 알고, 아르노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술집의 주인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단번에 자신의 이름과 용병단의 이름을 연관시킨 추리 력도 놀라웠다. 미지의 생물처럼 보이는 왕자는 지금 천진한 아이같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보고 그것 의 용도를 확인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주물주물 만지고, 자기 손바닥과 마주 대보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정말 마물을 부러진 검으로 죽인 적도 있나? 이 손으로 말이지? 내 손보다 작은 것 같은데, 나보다 딱딱해." 보다못한 라에르가 옆에서 헛기침을 하고, 몇번이고 부를 때까지 카 스트로는 치체르의 손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흠, 흠. 전하! 전하. 시에타씨가 난처해하지 않습니까?" 라에르가 넌지시 하는 말에 카스트로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그제 서야 정신이 들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던 카스트로는 어 리둥절해하는 치체르와 시선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 "난처한가?" "네? 아, 아니, 꼭 그렇다고는……." 순진한 소년처럼 미소짓는 카스트로를 보며 치체르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버렸다. 두근두근 심장의 박동이 조금 빨라진 듯도 싶었다. "검사를 아는 방법은 그 손을 보는 게 가장 빠르다 들었다. 얼마나 훈련이 된 손인지, 부지런하게 훈련하는 손인지 말이다. 자네 손을 보 니까, 별 볼 것 없는 실력으로 우쭐대던 내가 한심스러워. 이 손이 자 네를 최고의 용병으로 만들어주었을 테지. 아닌가?" "……!" 카스트로는 다시 한번 치체르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나도 네 손처럼 멋진 손을 가지고 싶다. 스스로의 몸도 지키지 못 하는 무력한 왕자 따위, 어디를 가나 짐밖에 되지 않겠지." "전하……." 라에르가 불러왔지만 카스트로는 여전히 치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의 검은 생존이라 들었다. 그리고 자네는 마물과의 수많은 전 투에서 살아 나왔겠지. 어떤가? 당분간 내 곁에서 용병의 검을 가르쳐 주지 않겠나?" 꿀꺽. 치체르는 소리날 정도로 침을 삼켰다. 처음부터 자신의 상식과 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왕자, 천진한 아이 같다가도 한순간 너무나 어른스런 말을 하고있는 왕자. 대체 이 왕자의 본모습은 뭔지 궁금해 졌다. "……전하께는 저보다 훨씬 실력 좋은 검술스승이 계실 거라고 생각 합니다. 저 따위의 하찮은 실력으로 전하께 무얼 가르칠 수 있겠습니 까?" "……단순한 겸손인가, 아니면 거절인가?" 예리한 눈으로 쳐다보아져서, 치체르는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친위대원이 어쩌지 못한 마법사를, 자네는 손쉽게 잡을 수 있었네. 그것은 검술실력인가, 아니면 경험인가?" "……." "그 마법사를 다룰 사람도 필요해. 자네가 도와주지 않겠나?" 치체르는 점점 고개를 숙이다가, 움칫하더니 똑바로 카스트로를 쳐 다보았다. 며칠부터 성안에 떠도는 암살사건과 지금 왕자가 하는 말에 는 뭔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마법사……라면, ……그 죽은 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또 다른……." "죽은 마법사?" 카스트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무슨 소리냐는 듯 치체르를 쳐다보자, 치체르는 그 시선을 맞받지 못하고, 곁에 서있던 라에르를 올려다보았 다. 일그러진 라에르의 표정을 보아, 치체르는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마법사라니? 마법사가 또 있었던가? 라에르경?" 카스트로의 눈이 의심스럽게 라에르를 바라보았다. 라에르답지않게 곤란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마음속에 불길한 느낌이 점점 넓게 퍼져간다. "라에르경! 설명하라고 하지 않았나!" 위험스럽게 빛을 발하는 검은 눈을 보며 치체르는 놀란 입을 꾹 다 물었다. 여러 번 당혹스럽게 하는 왕자였다. "죄송합니다. 그 동안 전하의 옥체를 염려하여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이 성으로 온 다음날 아침, 마법사가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공범으로 보이는 이 성의 하녀도 그날 아침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건 발생 후 지금까지 범인을 찾으려 해봤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 고 있습니다." 치체르는 시트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 고 남자다운 골격을 가진 손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치체르는 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되는지 회의가 들었지만 이제와 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입조심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아무 주의를 받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자신 스스로가 지 금 상황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 어떻게……." "……." 부들부들 떨리는 카스트로의 목소리에 치체르는 날벼락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 마법사를 지키던 기사들은 다 허수아비인가? 다 잡은 포로하나 지키지 못하고, 뭣들 하고 있었던 거야?" 불같이 화를 내는 카스트로에게, 라에르는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 다. 누가 되었든 이 일의 책임은 분명히 관리를 소홀히 한 자신들의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인가? 그 자가 유일한 실마리임을 모른다는 말인가? 마법사를 지키던 책임자가 누구……ㅅ!" 버럭 소리를 질러대던 카스트로의 안색이 찰나간에 시체처럼 창백해 졌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칠흑같은 머릿결이 휘장처럼 얼굴을 가린다. "전하! 전하아! 다들 뭐하나! 의사는 어디 갔어?"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카스트로를 감싸안으며 라에르가 다급하게 고 함을 질러댔다. 치체르는 얼결에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곧바 로 의사인 듯한 사람 두 사람이 라에르를 밀치고 카스트로를 침대에 눕혔다. 다급한 손길로 젖혀지는 셔츠 사이의 동여매진 흰색 붕대 위 로 빠르게 번지는 핏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처가 터졌다. 따뜻한 물을 가져와!" 정적으로 느껴지던 침실이 바쁜 외침과 움직임으로 뒤바뀌었다. 멍 하니 서있던 치체르는 팔을 잡는 손길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서른 남 짓한 시종 복장의 남자, 시종장 하미르였다. "지금은 알현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청할 것이니, 지 금은 물러가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하던 치체르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바라보 고 다시 시종장 하미르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실까요?" 시종장 하미르는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전하께서는 보기보다 강하십니다." 치체르는 알겠다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자신이 왜 왕자의 건강 따 위를 물었는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자신에게 그만큼의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니까, 그 정도의 관심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라고 조금은 거만 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며칠 더 있어야 되는 건가? ……휴레시아가 기겁하겠군.' 피실 웃으며, 복도와 계단을 더듬어가는 치체르였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8 - 관련자료:없음 [3074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0 22:05 조회:174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8 - ================================================================== 레이노성안에 또 한차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니, 어쩌면 폭풍전 의 고요인 상태라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삼왕자가 다른 사람들의 알현을 받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기가 무섭게, 마법사의 암살소식 을 듣고 무섭게 화를 내다가 실신했다는 새로운 소식은 직접적인 관련 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다지 상관없는 일개 레이노성의 하녀들마저 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긴장감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마법사 의 신변을 책임지고 있던 로페냐와 다이크경, 그리고 카스트로의 옆을 지키고 있는 라에르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여섯 명의 기사가 있었다. 황량할 정도로 커다랬던 방은, 이십 명 남짓한 기사들이 들어차자 비좁게까지 느껴진다. 노숙에 익숙해졌던 기사들은 평평한 바닥에 융 단이 깔린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각자의 침낭을 깔고 드러누웠다. 방안 구석구석에 피워놓은 화롯불과 벽가에 붙은 벽난로가 방안을 그 럭저럭 훈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건 아예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거라고!" 베이경이 거칠게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곁에 있던 포에르경이 벌떡 일어서는 베이경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눌러 앉혔다. "그만둬, 베이! 네가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전하를 뵙기도 전에 친위대원들에게 걸레가 되도록 두들겨 맞을 거라고!" "그래, 베이. 좀 가만히 앉아있어라. 아니면 너는 꼭 사서라도 처벌 을 받고 싶냐?"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의 기사는 로카르경이었다. 눈썹까지 내려오는 적갈색의 고수머리를 쓸어올리며, 로카르경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한 베이경을 비틀어 올려본다. 마법사의 죽음에 가장 커다란 책임이 있는 여섯 명의 기사들 중 세 명은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지만, 베 이경 등의 세 명은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입을 놀려대고 있었다. 자신 들의 실수와 앞으로 내려질 처벌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가벼운 말다툼 은 쉽게 언성을 높이는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면 너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처벌을 기다리고만 있겠다는 거 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처벌받고 마는 게 나아! 이거는 이제나 저제나 처벌이 내려질 때를 기다리느라고 지레 지쳐 죽겠어!" "그래서? 전하께서 얼마나 다쳤는지 봤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어제 마법산지 포론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홧병으로 쓰러지 셨다는 소식 못들었어? 겨우 진정해서 주무신다는 전하를 찾아 두들겨 깨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하! 전하 근처는커녕, 네 존경하는 라에르경의 얼굴이라도 보면 다행이겠군." "너어! 너!" 전에 없이 날카롭게 맞받아 치는 로카르경을 노려보며, 베이경을 화 르륵 불타올랐다. 하지만 언제나 로카르경을 상대로 말발이 딸리는 베 이경이다. 흥분한 상태에서는 말도 제대로 나와주지 않았다. "괜한 일 벌여서, 더 부풀리지는 말란 말이다, 이 멍청아! 네가 그러 지 않아도 지금 우리는 충분히 큰 잘못을 저질렀어! 지금까지 목이 제 자리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전하께 감사드려야 할 판이다! 너도 사람 이라면 조금은 머리를 굴려봐, 이 곰같은 자식아!" 능글능글맞게 빈정거리고 비웃기만 하던 로카르경이 정말 화난 듯 정색을 하며 베이경을 윽박질렀다. 가차없는 반박에 베이경은 붉으락 푸르락하는 얼굴로 로카르경을 노려보다가, 제 성질을 못이기고 로카 르경의 침낭을 발로 뻐억 걷어찼다. 로카르경이 눈썹을 치켜뜨고 흘겨 보자 마주 노려보며 팽팽한 눈싸움을 벌이던 베이경은 결국 먼저 고개 를 홱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포에르경은 불안한 기분으로 베이경을 따라나갔다. 로카르경은 두 사람이 나가자, 잔뜩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해있는 몸을 침낭 위에 축 늘어뜨렸다. 이런 식의 긴장은 어지간한 로카르경 도 견디기 힘들었다. 베이경이 화내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고, 또 공감할 수도 있었다. 넘치도록 충분히. 하지만 베이경의 생각없는 행동에는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쩌면,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긴장감이 베이경에게 분노로 표출되는 지도 몰랐다. 로카르경은 솔직하지 못하 게 다른 곳에다 화풀이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 녀석 정말 화내면 무서운 거 몰라? 난 그 녀석이 정말로 한판 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끝난 거, 다행으로 알아." 베이경은 졸졸 따라오면서 끝까지 잔소리를 퍼붓는 포에르경의 말에 연신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이거, 위로 맞아?'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차분하게 해주는 말 이니 충고나 위로 쪽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비난인 것처럼 느 껴지는 것은, 착각이겠지? 베이경은 잠시동안 사고의 혼란을 느꼈지만, 언제나 그렇듯 제 좋을 대로 판단해버렸다. "흥! 로카르놈! 제깟 놈이 화내 봤자지! 힘으로나 뭐로나 자기가 나 를 이길 것 같아?" 포에르경은 지금까지 입이 닳도록 해준 충고가 말짱 헛수고가 되었 다는 사실을 알고 허무해졌다. '대체 어떤 두뇌를 가져야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 이 곰탱아!' 슬쩍 눈꼬리를 치켜올려서 쏘아봤지만, 베이경은 여전히 자기감정 속에 파묻혀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떠 는 모습이, 정말 쫓아가서 한판 하자고 시비 걸 폼새다.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 베이 슈메르의 무서움을 알게 해줄 테 다!" 하마터면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다시 가서 한판 하지 그래?' 라고 생 각나는 대로 비아냥거릴 뻔한 포에르경은 혀를 깨물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 "뭐야? 왜……." 베이경은 호오 하고 입술을 오므려 감탄사를 내뱉는 포에르경을 보 다가, 포에르경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갈색망토를 걸친 푸 르스름한 머리의 남자가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 그 때 그 용병 맞지?" 포에르경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전혀 못알아들을 말을 지껄였지 만, 베이경은 순순히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헤에. 재주 좋네. 하여튼 여자 속은 알 수가 없다니까? 저런 용병 놈, 뭐가 좋다고 대낮부터 그짓거리야? 지위로 보나 몸으로 보나 내가 훨씬 낫지." 포에르경은 일그러진 얼굴로 베이경을 돌아보았다. "지위? 몸?" "그래. 지위, 몸!" 하아, 하고 입술을 벌린 포에르경이 재차 입을 놀리기도 전에, 뒤에 서부터 날벼락같은 호통소리가 두 사람을 덥쳐왔다. "포에르경, 베이경!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건가? 근신하라는 말 못들었 나?" 베이경의 부리부리한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포에르경 은 구겨진 인상을 억지로 펴면서 주춤 뒤로 돌았다. 그들이 내려온 계 단 끝에 두 남자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다, 다이크경." 기세등등하게 노려보고있는 다이크경을 보며, 두 기사는 몸이 움츠 러들었다. "당장 돌아가게! 전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처벌을 각오하는 게 좋 을 거야!" "네, …다이크경." 베이경과 포에르경은 고개를 숙여보이고, 그들이 내려왔던 계단으로 다시 올라갔다. 몇 계단인가를 올라갔을 때, 다이크경의 옆에 서있던 테르니크경이 말하는 게 들려왔다. "저 두 사람은?" "……테르니크경이 신경쓰실 일이 아니오. 하던 얘기나 계속 합시 다." 한번 와봤던 길을 다이크경은 익숙한 듯이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미 간을 접고 다이크경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테르니크경은 천천히 다이 크경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삼왕자가 다시 부를 때까지 계속 레이노성에 머 물게된 치체르는 내성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이 많이 녹아있어서 외성을 돌아다니는데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성안 사람들의 보수성을 익히 하는 치체르는 굳이 외성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차 라리 슬금거리며 눈치보고 피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내성 곳곳을 구 경하고 다니는 것이 나았다. 바람이 휭휭 불어대는 바깥보다는 두터운 돌벽에 둘러싸인 내성이 구경하기에도 편했다. 솔직히 말해서, 휴레시 아가 사는 성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싶다라는 생각이 다른 모든 이유 를 압도했지만, 치체르는 일부러 그 생각을 다른 이유들의 저편으로 밀쳐버렸다. 레이노성은 3, 400년은 된 고성이었다. 몇번이고 새로 보수되고 증축 되었지만, 돌벽 하나하나에 세월의 깊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카 르노 건국의 두 주역 가운데 하나인 카르노 왕실 기사단. 기사단의 일 원이었던 레이노는 건국 이후 카르노 왕실 기사단장이 되었고, 그 후 손들은 카르노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귀족의 후손인 테르니크 폰 레이노가 어떻게 보잘것없는 평민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는지, 치체르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나마나 만만치 않았을 게 뻔한 가문의 반대를 물리치고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정도로 휴레시아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 치체르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레이노 는 어떤 면으로 보나 휴레시아에게 넘치는 상대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낭만적인 귀족이라면 몰라도, 가문이 몰락했다고 정혼자를 거지취급하 며 내쳐버린 그녀가 순수하게 레이노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고는 생각하 지 않는다. 다만 그 넘치는 조건들이 휴레시아를 반하게 만들었을 것 이다. 치체르는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비웃음 을 흘렸다. 휴레시아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 때문에 죽고싶다는 망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아직까지 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욱씬거린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섰을 때, 치체르는 눈앞에 서서 놀란 눈으 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휴레시아와 마주쳤다. 그것은 분명 우연이었 다. 두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렇게 두 사람만이 만나기는 처음이었 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만은 아니었지만, 치체르에게 휴레시 아 뒤에 서 있는 하녀는 보이지도 않았다. 왜 하필 그녀가 이 순간, 이 자리에 자신의 앞에 서있는지는 궁금하 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이 머릿속이 텅 비어졌다. 그녀의 남편이 곁에 있지 않아서, 그리고 워낙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 버려서 긴장감이 풀렸었는지도 모른다. 치체르가 미처 감정을 수습하 기도 전에, 휴레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얘기 좀 해요." "……!" 휴레시아는 붉은 눈을 들어, 어리벙벙해하는 치체르를 쏘아보았다. "따라와요!" 뒤도 안보고 앞장서서 걷는 휴레시아를 보면서, 치체르는 미간에 주 름을 잡았다. 따라가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낯 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에타씨? 아씨께서 기다리시는데요." 치체르는 얼떨떨한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하녀에게 떠밀리다시 피 휴레시아의 뒤를 따랐다. 한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휴레시아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뭘 그렇게 꾸물거리죠? 빨리 와요." 휴레시아는 말을 끝내고 문안으로 들어섰다. 치체르는 방문 앞에서 다시 망설였지만, 하녀의 팔에 잡힌 채 안으로 들어서야했다. 오래된 책냄새가 치체르의 후각을 덥쳐왔다.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어두운 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수백수천권은 될 듯한 비싼 책들이 벽과 기둥을 따라 장서되어 있었다. "앉아요." 서재로 들어온 직후, 세나라고 불린 하녀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책냄 새로 숨이 막히는 공간에는 이제 치체르와 휴레시아, 두 사람밖에 없 었다. 서재 한쪽 벽의 벽난로 앞으로 어두운 색의 소파가 놓여져 있다. 휴 레시아는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소파 한쪽에 앉아있었다. 탐스러운 금발머리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핀으로 치장되었고, 목이 깊게 파인 복 숭아색 드레스는 꼼꼼하게 자수가 놓여있었다. 조그맣고 얇은 귓불에 는 진주가 아담하게 박혀있다. 원래 아름다웠던 휴레시아의 모습에 부 가 더해진 모습은 솔직히 상상이상이었다. "이렇게 대낮에 만나도 되는 사이인줄은 몰랐습니다, 백작부인." 치체르의 비아냥거림에도 휴레시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대응할 뿐이 었다. "앉아요, 치첼." "하아, ……당신 남편에게도 이러나? 고압적인 태도에 치체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휴레시아 는 굳은 얼굴을 하고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키고 있었다. 치체르는 큰 보폭으로 걸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껏 비틀린 시선으 로 휴레시아를 노려보았다. "할 말이 뭐야, 백작부인?" "알고 있을 텐데요." 길다란 속눈썹을 치켜올리고 핏빛 눈동자로 앙칼지게 쏘아보는 모습 이 묘하게 자극적이다. 치체르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로 어이없어하 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자신에게 기가 막혔다. "내가 잘하는 건 검술이지, 독심술이 아냐. 미천한 내가 어떻게 고귀 하신 백작부인의 속내를 알겠나?" 앙다무는 새빨간 입술이 가슴 뛰도록 매력적이다.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쳐다보던 치체르는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된 책더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용건이나 말해.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누구에게도 들켜서 좋을 건 없겠지." 한동안 치체르의 기색을 살피던 휴레시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말을 꺼냈다. 일이 이렇게 풀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우연이라 도 만난 이상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여기서 떠나줘요. 당신이 이 성에 있는 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어 요! 당신이 오고 나서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어!" "그래서?" 치체르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여전히 얼굴은 책더미를 향한 채, 슬 쩍 턱만 틀어 옆으로 꼬아보는 모습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한 팔을 걸 치고 모로 앉아서, 불량스러운 태도로 입꼬리를 비틀고 그녀를 비웃었 다. "내가 왜 당신 말대로 해야되지?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소름끼칠 정도로 이기적이야. 말해봐. 설득해봐. 내가 왜 당신 말대로 여기를 떠 나야하는지. 납득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떠나주지." ================================================================== 모처럼 친구와 수다를 떠는 바람에.. --; 좀 늦었네요..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사악한 새디스트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49 - 관련자료:없음 [3076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1 21:16 조회:175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49 - ================================================================== "……." 한번에 알겠다는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니컬하게 되받 아치는 치체르의 태도에 휴레시아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런 모습의 치체르는 낯설었다. 물론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를 버린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왔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한 것과, 실제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말하는 치체르를 직접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자상하고 재치있던 남자는 4년 만에 비뚤어지고 심술궂은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휴레시아는 그런 치 체르의 모습에 충격받았고, 또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입었다. "알다시피 나는 왕자를 구했어. 보상금은 물론이고, 왕자에게 검술스 승이 되어주지 않겠느냐는 제의까지 받았지. 탄탄대로인 앞날을 팽개 치고, 죄지은 놈 마냥 슬그머니 사라지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 지?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면, 당신은 내게 무얼 줄 수 있지? 설마 공 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휴레시아?" 치체르는 이제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껍데기에 넘 어가, 치체르의 속에서 불타고 있는 분노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휴 레시아는 둔감하지 않았다. "돈은 얼마나 있나? 왕자전하의 목숨값을 만만히 보는 건 아닐 테 지? 그리고 왕자의 검술스승이 되는 값과 보장된 미래를 차버리는 값! 당신이 감당할 수 있나? 만? 십만? 아니아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 지. 뭐해? 흥정해야하지 않아, 백작부인? 돈문제라면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휴레시아는 붉은 입술을 악다물었다. 드레스 자락을 부여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치체르의 냉정한 시선에 그녀의 손가락에 끼 워져 있는 결혼반지가 걸렸다. 묵직하게 가슴이 아려온다. "결국 당신은 그 정도밖에 안되는 저질이었군요, 치첼! 여기 온 거, 솔직히 말해 내게 돈푼이나 얻어가려는 속셈이었겠지?" 뜻밖의 대답에 치체르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벌리고, 헛웃 음을 웃었다. "웃지마! 내게서 일실프라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이 저질! 돼 지!" "너야말로 웃기지마, 휴레시아!" 흥분하던 휴레시아는 무섭게 윽박지르는 치체르의 기세에 눌려 가느 다란 몸을 움찔거렸다. "백작부인이라는 감투를 얻어쓰니까, 악덕상인의 피가 고상해지는 줄 아나보군. 착각하지마, 휴레시아! 너, 나에게 돈도 없는 거지와 결 혼할 수 없다고 했던 여자야. 거지정혼자가 싫어 성의 경비병까지 불 러들인 여자라고. 돈이라면 물불 못가리는 썩어빠진 계집이, 뭐? 이제 와서 나보고 돈이나 밝히는 저질에 돼지라고? 하! 아무리 내가 발버둥 쳐봐도, 너 정도의 저질에게는 발끝에도 못미치지. 너에게 그런 말 듣 게 되다니, 너무 뜻밖이라서 기절하시겠어." 씹어뱉듯 내던지는 말은 처음의 격한 기세와는 달리 점차 누그러지 고, 나중에는 경멸과 혐오가 뚝뚝 떨어지는 냉랭한 말투가 되어있었다. 휴레시아는 질려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고, 치체르는 잔인한 미소로 그녀를 계속 깔아뭉갰다. "자, 흥정을 계속하지. 많이 봐줘서, 50만 실프! 당장 주겠다면 조용 히 물러가지. 줄 거야, 말 거야?" "다, 당신이 내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휴레시아는 간신히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전혀 위협이 되지않는 목 소리였고, 치체르는 간단히 비웃어줬다. "당신 남편에게 나를 일러바치기라도 할텐가? 당신 남편이 나에게 따지러 온다면, 나야 더할 수 없이 기쁘지. 당신 남편에게 당신이란 여 자에 대해 친히 충고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어." "당신!" "줄거야, 말거야? 줄 수 없다면, 더 이상 당신하고 할 얘기는 없어." 치체르는 더 볼 거 없다는 듯이 짜증스레 내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다려요!" 성큼성큼 걸어가 문 앞까지 다가가자, 휴레시아가 달려가 치체르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어요." "50만 실프. 흥정은 예, 아니오, 두 가지 선택 뿐이야. 그 정도의 능 력이 되나, 휴레시아?" 비웃음을 머금고 내려다보는 녹색의 눈동자 아래에서 휴레시아는 이 를 갈았다.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에 드리겠어요. 그러니까 우선……." 치체르는 더러운 것을 떼어내듯 팔에 붙은 휴레시아의 손을 툭 쳐냈 다.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치체르의 얼굴에 쓰여진 혐오를 보면서 휴레 시아는 무겁게 내려앉는 심장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선불이야, 휴레시아." "억지쓰지 말아요, 치첼!" 휴레시아가 성질에 못이겨 소리쳤지만, 치체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방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억지쓰는 건 당신이야! 돈이 없으면 흥정은 끝이야." "치첼! 대체 왜 이래요? 나를 곤란하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야? 나에게 복수하려는 거예요?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이제와서 나 에게 이러는 당신, 너무 유치하고 치사해. 비열하고 파렴치하다구. 최 저야. 알아듣겠어?" 손잡이를 당기던 치체르의 손이 멈췄다. 마음속 어딘가에 단단하게 쳐두었던 막 하나가 한순간 돌팔매질에 맞아 유리창이 깨지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4년간 죽음을 찾아 쫓아다녔던 싸움터에서의 길고 긴 고통스런 삶들. 그래도 그녀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그 저 한번쯤 보고싶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련들. 그런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배려를, 그녀는 유치하고 치사한, 그리고 비열하고 파렴치한 것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 상 그녀의 행복 따위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희생할 이유는 없었다. 그 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녀의 바램대로 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 리라. 더없이 치사하게! 더 내려갈 곳 없이 비열하게! "한가지……." 치체르는 불쑥 말을 꺼냈다. 놀라서 쳐다보는 휴레시아의 붉은 눈동 자를 향해 거리낌없이 비웃어주었다. "흥정을 더 해볼까?" "……?" 치체르의 손가락이 문가에서 떨어져 나와 휴레시아의 얼굴선을 따라 선을 그렸다. 흠칫 놀라서 물러서는 휴레시아의 허리를 다른 팔로 잡 아채며, 그녀를 자신의 팔 안에 가두어버렸다. 휘둥그레진 핏빛 눈동자 가 치체르의 가학적인 충동을 더욱 부채질했다. "백작부인의 몸값은 얼마나 될까? 가치가 올라갔으니 더 쳐줘야 할 까, 아니면 처녀가 아니니 값을 내려야 할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휴레시아는 두 팔을 뻗어 점점 다가오는 치체르의 몸을 밀치면서 떨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에 둘러진 팔은 단단했고, 아무리 밀쳐봐도 치체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휴레시아는 빈정거리는 듯한 치체르의 얼굴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 오자 머리를 뒤로 뺐다. 떨리고있는 손길을, 잘게 흔들리는 나긋나긋한 허리의 감촉을 느끼며, 치체르는 휴레시아의 턱을 고정시키고 입술을 밀어붙였다. "치체……ㅅ!" 부드러웠다. 치체르는 독설만 골라서 내뱉는 잔인한 입술이 예전과 다름없이 부드럽다는게 화가 났다. 치체르는 그녀를 끌어 문으로 밀치 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만…… 그만둬!" 치체르의 거친 손길이 휴레시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를 밀치던 손은 이제 손톱을 세우고 치체르의 뺨을 할퀴려들고 있었다. 치체르는 휴레시아의 양손을 잡아 문 위로 잡아눌렀다. "처녀인척 굴지마. 이래봬도 너를 50만 실프에 사려는 사람이니까, 얌전하게 굴라고." "이, 이, 비열한!" 치체르는 붉은 눈에 불을 켜고 소리질러대는 휴레시아에게 할 수 있 는 한 가장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아는군. 나는 비열해. 하지만 너 같은 창녀보다는 낫지. 안그 래?" 치체르는 몸을 굽혀, 휴레시아의 드레스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만둬! 소리지를 거야!" "얼마든지. 이왕이면 당신남편이 듣도록 크게 질러봐!" 막 뭐라고 소리치려고 할 때, 휴레시아는 자신의 몸이 뒤로 넘어가 는 것을 느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있을 때, 단단 한 팔이 휴레시아의 뒤를 받쳤다. "……!" 치체르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열 린 문 사이에서 무섭게 굳은 얼굴로 휴레시아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장신의 남자.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이었다. "테, 테…테, 테르니크?" 꽉 막힌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휴레시아를 바로 세워준 테르니크경은 그녀를 자신의 뒤로 돌리고 치체르와 마주섰다. 치체르의 시야에 유령 을 본 것처럼 질린 휴레시아의 얼굴이 비쳤다. 석상처럼 굳은 채 자신 을 죽일 듯 노려보는 테르니크경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휴레시 아를 한눈에 바라보며, 치체르는 비싯 미소를 지었다. 재밌었다. 너무 재밌어서 미칠 것 같다. "정의의 기사께서 나타나셨군요. 짠 것처럼 제시간에 맞춰 나타나시 다니, 아름다운 백작부인의 몸을 느끼지 못해 아쉽기만 합니다." 테르니크경은 능글거리며 웃는 치체르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치체르는 멱살까지 잡아오는 손을 쳐내고, 슬쩍 몸을 빼서 여유롭게 주먹을 피해내고는 싱글싱글 웃어댔다. "창녀를 위해 주먹을 쓰시다니, 백작의 체면이 말이 아니시군요?" "더러운 자식! 감히 귀족을 희롱하고 네 놈이 살 것 같으냐?"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요? 앞으로도 잘 살 겁니다." 광분해서 치체르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테르니크경을 옆에 서 있던 다이크경이 잡아말렸다. "그만두게, 테르니크경!" "이거 놓으십시오! 보시고서도 절 말리십니까?" 이성을 잃고 소리지르는 테르니크경은 분노로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 었다. 다이크경은 혀를 찼다. 테르니크경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감 정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저 사람은 전하의 생명을 구한 사람일세! 자네 임의로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역시 조금이라도 나이드신 기사단장께서는 다르시군요." 치체르가 빈정거리자, 다이크경은 준엄한 눈으로 치체르에게 경고했 다. "자네가 한 일을 두둔하는 게 아닐세! 자네에 대한 처분은 전하께서 하실 것이네." 치체르는 비웃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시겠죠. 그럼 이만 미천한 용병은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부르실테니, 대기하고 있게." "벌써 지겹도록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치체르는 스치듯 테르니크경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치며 서재 를 나섰다. 테르니크경과 다이크경의 뒤에서 파랗게 질려있는 하녀 세 나의 모습이 보였다. 치체르는 뒤통수로 들러붙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 며, 느릿하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저들에게 바쁘게 도망치는 따위 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묵직한 걸음으로 테르니크경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소 리없이 걸어오는 휴레시아의 발걸음이 테르니크경의 날선 신경을 건드 린다. 테르니크경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뒤돌아서 휴레시아를 바라보 았다. 자신이 그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휴레시아는 숨을 멈추고 고 개를 숙인다. 마치 죄인처럼. 그것이 테르니크경은 더욱 못마땅했다. "들어오시오, 휴레시아." 머뭇거리던 휴레시아는 소리없이 테르니크경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 갔다. 테르니크경은 조용히 문을 닫고, 휴레시아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무자비하게 아내를 강간하려던 무뢰한과 어쩐 일인지 그 자에게 꼼 짝하지 못하는 아내.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자 가 성으로 오고 나서 약 4, 5일. 그 짧은 시간동안 아내와 무뢰한 사이 에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낯선 남자에게 드레스가 들쳐져서 자신의 품안으로 들어온 휴레시아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날카로운 질투심이 테르니크경의 심장을 찢고 지나간다. "왜……, 그 자가 왜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 거요, 휴레시아? 그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여서, 휴레시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테르니크경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추궁할 줄 알았던 남편은, 자신에게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테…르니크……." "말해보시오, 휴레시아. 어째서 그자와 단 둘이 그런 곳에 있었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소?" 휴레시아는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착각을 느꼈다. 심장이 찌릿 찌릿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왜 말을 못하시오, 휴레시아? 왜 그자가 당신을 그리 함부로 대하 지? 대체 그자가 뭐길래!" 휴레시아는 한발한발 다가오는 테르니크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 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댈 때도, 휴레시아는 마치 인형처럼 흔들리고만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휴레시아는 알지 못했다. 사실대로, 치체르가 자신의 정혼자였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시에타 가문의 몰락 후, 일방적으로 정혼을 깬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휴레시아! 말해주시오. 왜 그랬지? 왜 그런 자와 그런 곳에 단 둘이 있었던 거요? 그자가, 그 무뢰한이 당신을 강제로 끌고 들어갔나? 그 런 거지?" "아, 아니예요." 테르니크경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휴레시아의 어깨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아얏! 아파요, 테르니크!" 그 소리에 손을 아래로 내리며, 테르니크경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당신 자의로 그자와 단 둘이 된 거요?" "치첼은, 아, 아니, 그 사람은 전에 본 적이 있어요. 나에게 좋지 않 은 감정을 가진 사람인데, 나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해서……, 잠시 말 을 해보려는 것뿐이었어요. 믿어줘요, 테르니크. 나는 단지 그 사람에 게 여기를 떠나달라고 말하려던 것뿐이었어요." 테르니크경은 한참동안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치첼'이라고 했다. 낯 선 남자의 이름을 무의식중에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가깝게 여기는 남 자를, 아내는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만 하고 있었다. 앞뒤가 맞 지 않고 허둥지둥 변명하는 아내를 보고 있는 가슴은 묵직한 돌덩이를 매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테르니크경이 고개를 돌리고 말 했다. "쉬시오." 거짓말을 하도록 아내를 몰아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알아내서 좋 을 것이 없다는 걸, 테르니크경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테르니크 경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휴레시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의 여운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바 닥에 주저앉으며, 휴레시아는 모든 일의 원흉인 치체르를 저주했다. ================================================================== 다음이 50회네요.. ^^ 원래 계획은 2장 끝까지 50회였는데.. ...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착한(?)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0 - 관련자료:없음 [3078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2 22:35 조회:173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0 - ================================================================== 의사들로부터 절대안정이라는 선고를 받고, 카스트로는 줄곧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었다. 뭔가 뒤숭숭한 꿈을 꾼 것도 같은데 눈을 뜬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죽은 마법사에 대한 일만으로도 충분 히 신경에 날이 섰던 카스트로는, 조금 전 다이크경으로부터 또 다른 사건을 전해듣고 기가 막혀서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귀족희롱죄라……, 후후……." "전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보다못한 라에르가 한마디했지만, 카스트로는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 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작은 움직임 때문에 단단히 동여맨 상처가 욱 씬거려서 곧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래서, 테르니크경은 기필코 시에타를 처벌해야겠다고 합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이크경이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그 불분명한 대답에 눈살을 찌푸 렸다. "시에타는 뭐라고 합니까?" "네?"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눈으로 다이크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잘한 설명은 접어둔 채, 왕자 다운 권위를 내비치며 명령했다. "시에타를 부르십시오. 테르니크경도 함께." "알겠습니다, 전하." 다이크경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카스트로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긴 한숨을 천장으로 뽑아냈다. 치체르는 파란 제복을 입은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전에 한번 왔던 길을 따라가서 왕자가 머무는 방안으로 들어가자, 추운 날씨와는 반대 로 후끈해서 땀이 배어날 정도의 온기가 치체르를 감싸왔다. 치체르는 그 온기 속에 섞인 약냄새를 맡으며 방안을 둘러보다가, 친위대원들과 시종들, 그리고 의사들 사이에 앉아있는 삼왕자 카스트로와 눈을 마주 쳤다. "미천한 백성 치체르 시에타,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치체르는 눈을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인사를 해버렸다. 곧바로 젊 고, 근엄한 목소리가 따라온다. "일어나라." 명령에 따라 몸을 일으켰을 때, 막 들어온 시종 한 명이 카스트로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께서 오셨습니다." "들라하라." 가볍게 고갯짓을 하고있는 카스트로의 안색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 다. 치체르는 당혹스런 감정으로 열리는 문을 쳐다보았다. 막 들어서던 테르니크경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다가, 치체 르를 발견하고는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먼저 와 있던 다이크경이 헛기 침을 몇차례 하고서야 테르니크경은 정신을 수습하고 예를 갖추어 인 사를 올렸다. "신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 카스트로 삼왕자 전하께 인사올립니다." "어서오시오, 테르니크경. 시에타. 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서로 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카스트로는 침대 위에 베개를 받치고 앉아, 경직된 두 사람의 얼굴 을 흥미로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같은 자리에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도 테르니크경의 적의에 가득 찬 표정과 난감해하다가 포기한 듯 입술 을 비끌어 올리며 웃는 치체르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먼저 시에타에게 묻겠다. 레이노 백작부인을 강간하려 했다고 하던 데, 그것이 사실인가? 변명을 할 기회를 주겠다. 얼마든지 말해보라."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치체르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고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눈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묻고 있었다. 치체르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눈을 찡그렸 다. '이것은 목숨을 구해준 자에 대한 호의인가?' 귀족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한 자신이었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겉으 로 드러나보이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런 괘씸한 죄를 지은 평민 따위 에게 이유나 변명을 말하게 하는 귀족은 지금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순간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썹을 휘고 자신을 흔들림 없이 마주보는 올곧은 시 선은, 그것이 놀림 따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대체 이 왕자는 사람을 몇 번이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시에타?" 재촉을 받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솔직하 게 휴레시아가 자신의 정혼녀였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 걸까? 분명히 조금 전만 해도 휴레시아의 행복 따위 알 바 아니라고 다짐하고 있었 지만, 이제와서 다시 사실을 밝히는 게 망설여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 지. 치체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미련함에 저주를 퍼부으며. "사실입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명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다라는 건가?" 치체르는 다시 카스트로를 쳐다보다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 개를 숙였다. 카스트로는 움찔거리는 치체르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 다가, 치체르의 옆에 있는 테르니크경에게 시선을 던졌다. "테르니크경은 시에타를 처벌해야만 하겠다고?" 테르니크경의 고개가 강하게 끄덕여졌다. 카스트로는 강렬한 의지를 전달하는 테르니크경의 시선을 맞받으며 조금 전에 떠오른 생각을 정 리했다. 테르니크경은 완고하게 말했다. "이것은 제 아내뿐만 아니라, 저와 제 가문에 대한 모욕이며, 또한 귀족에 대한 도전입니다.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입맛이 썼다. 레이노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시에타를 처 벌하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역시 아까 생각했던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시에타가 그대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그리고 시에타 의 죄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지. 어떤가? 나는 그대들에게 결투를 제의하는 바이다." "결투……!" 다이크경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테르니크경과 치체르는 거의 동시에 경악스런 얼굴로 카스트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스트로는 태연한 표 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입회할 것이고, 전신 로마와 카르노의 명예와 권위를 걸 고 그 결과를 지켜볼 것이다. 어떤가, 테르니크경? 결투에 응할 것인 가?" 테르니크경은 굳은 표정으로 치체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세게 어 금니를 악물었다. 눈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저 건방진 자식!' 치체르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응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시에타는?" 치체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시는 대로 상대해 드려야죠." 카스트로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 정오에, 레이노성의 연무장에서 결투를 열겠다. 그만 물러 들 가라." "그럼."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다이크경이 꾸욱 참고있던 말을 입밖 에 냈다. "결투……라니요, 전하! 귀족과 평민이 결투라니! 그런 법은 없습니 다." 귀족과 귀족 사이에 명예를 두고 다투는 방식인 결투. 그것은 귀족 만의 고유한 관습이자, 특권이기도 했다. 귀족의 명예를 해친 평민 따 위는 그대로 즉결처분하는 것이 통례였다. 시에타의 경우에는 그것이 여의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귀족과 평민이 결투라니! 언어도단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다이크경."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카스트로를 보 며, 다이크경은 할말을 잃었다. "자, 하나는 처리했으니, 이제 마법사의 문제를 처리해볼까요?" 다이크경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목끝까지 올라온 말을 집어삼켰다. 카스트로는 악동같은 미소로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런 식의 화제 전환은 절대, 내키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했지만, 레이노성은 온통 결투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물론 그 결투의 이유인 레이노 백작 부인과 치체르 시에타라는 용병 사이의 밀회에 대한 이야기도. "쳇! 계집들이란 그 머릿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자기 남편이 백작 에, 영지에, 거기다 그만한 용모까지 갖췄는데, 뭐가 부족해서 저런 용 병 나부랭이와 바람까지 피워대는지!" "킥킥! 누가 알아? 백작 나리의 침실 매너가 영 아니었는지. 자고로 남자는 밤일을 잘해야 집안이 평안한 법이라고." "그럼 저 자식은 밤일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가보지?" "푸하하하하하……." 게다가 그 상상의 비약이란 것의 역겨움이란, 귀가 썩어 버릴 듯한 것들이었다. "대체 손님 주제에, 주인의 여자를 강간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 래서 정신이 썩어빠진 용병들이란 어쩔 수가 없다구!" "제대로 된 녀석이라면 명예와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기사가 되지, 돈에 환장한 용병이 되겠나?" "흥! 정말 속물이로군. 백작 부인을 꼬시면 돈이 나올 줄 알았나보 지?" 며칠간에 걸친 불의의 사고와 부상, 그리고 공포와 긴장 속에서 시 간을 보냈던 기사들은 희생양을 찾은 듯 온갖 악의와 폭력적인 언어유 희를 일삼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로카르경은 그런 동료들의 추 태에 경멸을 보내고 있었다. 저들의 입담에 비하면 항상 투덜거리는 베이경의 수다는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 와중에도 늘어지 게 낮잠을 자는 베이경이 이뻐보일 리는 만무했다. 로카르경은 눈을 치켜뜨며 애꿎은 베이경의 침낭을 한번 차고, 몸을 일으켰다. 저쪽 구 석에서 몇 명이 수근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카르경은 어슬렁거리 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10실프!" "쪼잔하다, 노와르. 좀 더 써라!" "나 돈 없어, 임마! 그냥 해!" "쳇, 좋아. 다른 사람은?" 로카르경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용병에게 50실프!" "헤에? 역시, 도박꾼 로카르가 빠질 리 없겠지. 그런데 용병이라고?" "그래. 용병에 50이다." 다 찢어진 양피지에다 부지런히 이름과 금액을 적던 기사는 조심스 럽게 로카르경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용병이 이길까?" 로카르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도박이잖아. 100%의 확률은 어차피 없어!" "헹. 뭐, 좋아. 나도 용병이다. 네가 거기 거니까 틀릴 확률보다 낫겠 지." "마음대로. 그럼 나중에 보자." 포에르경은 그 와중에 유유히 내기판에 돈을 걸고 오는 로카르경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여유만만이구나, 로카르?" 로카르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기다리기에 지루하잖아. 왜 너도 걸래?" "관둬, 임마!" 삐져서 고개를 돌리는 포에르경을 보고 피식피식거리던 로카르경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침낭 위에 주저앉았다. 처벌이건 뭐건 기다리는 것은 진저리쳐지게 지루하다. 휴레시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 는 테르니크경을 볼 수 없었다. 이제는 테르니크경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닌지, 자신을 헤픈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망상 이 그녀를 괴롭혔다. 결혼 후 한번도 다른 침실을 쓴 적이 없었기 때 문에, 테르니크경이 다른 침실을 쓴다는 것이 더욱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결투는 벌써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결혼 전부 터 열렬한 구애를 받고, 평민과 귀족이라는 신분차이마저 극복하고서 어렵게 한 결혼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거머쥔 행복이 한 남자 때문에 눈앞에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결투에서 남편이 이긴다면 모르겠거 니와, 만약 남편이 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휴레시아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치체르의 검술 솜씨는 문외한인 그녀가 보더라도, 왠만한 기사들보 다 훨씬 나았다. 돈 잘 벌던 시에타 가문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기사로,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긁어모아 좀 더 좋은 검술 선생을 구하려고 했던 것을 그녀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치체르가 결코 부모의 바램을 헛되게 하지 않을만한 실력자였다는 것도. 만약 중간에 집안이 망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치체르는 뛰어난 검술 실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기사가 되고, 또 그에 따르는 기사 작위를 받 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이라면, 십 년 안에 기사단장까지도 가능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파산했고, 치체르는 기사가 아닌 용병이 되었다. 귀족의 길에서는 멀어졌지만 검술 실력은 여전할 것이 고, 어쩌면 다년간의 용병생활로 그는 더욱 강해졌을지 모른다. 그런 그를, 아무리 기사출신의 가문이라지만 그저 교양으로만 검술 을 배운 테르니크경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레시아는 거기까 지 생각이 이르자 무섭게 입술을 악다물었다. '테르니크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절대로,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아!' 휴레시아의 붉은 눈이 더욱 붉게 타올라, 표독스러운 얼굴이 된다. "그래, 유모를 만나야겠어. 유모라면 뭔가를 할 수 있을 거야." 휴레시아는 급하게 자신의 몸종인 세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치체 르와 헤어질 때에도, 테르니크경을 만나 그를 유혹할 때에도 많은 도 움을 주었던 유모였다. 휴레시아는 지금도 유모의 뛰어난 지혜를 믿어 마지 않았다. ================================================================== 네.. 50회입니당~ ^^ 그럼에도 늦은 이유는? 모릅니다. (청문회의 정치인 버젼) (절대 깨어보니 9시를 넘어 기겁했다는 말, 입이 찢어져도 못함) --; 흠.. 먼저 50회까지 읽어주신분들께 감사드리구요.. 이 기회를 빌어 연중을 선언... 퍼어어억! T.T 흑..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다구요.. 왜 연중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확언드리지만, 연중은 할 계획없습니다. (누군 연중을 계획해서 하냐? 퍼억) 이 글을 연재하기 전의 청사진에는, 한 장을 쓰는 동안은 매일 끊이지 않게.. 장과 장 사이에는 며칠간 다음장을 정리하는 기간.. 연재기간에는 연재분퇴고와 앞선진도를 함께.. 라고 예정해 두었습니다. 새는 장단위로 쓰고 정리합니다. 그날 써서 그날 올리는거, 자신없습니다. 쓰다보면 계획과 틀어지는게 다반사라, 앞부분을 떡하니 그대로 공개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 뒷감당을 어찌하라고.. --; 지금도 충분히 실수로 골치아픈데요.. 그러니까 한장이 끝나고 며칠동안 정리기를 갖는 것은 몰라도 연중은 계획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읽어주세요.. ^^ (이러다 뒷통수치는 기분은 참 짜릿할거야.. 퍼어어억!) 흠, 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소리소문없이 연재가 빠진다면.. 십중팔구 컴과 모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해주세요.. 전에 한달에 두번이나 천둥에 맞은 모뎀 경력을 생각한다면.. (비와 천둥을 저주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 50회라 수다가 끝없이 늘어지는군요. 연중 걱정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구요.. - 어케 뒷통수치나 궁리하는(?) 사악한 새디스트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1 - 관련자료:없음 [3079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3 21:23 조회:173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1 - ==================================================================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테르니크경의 확신없는 말투에, 지금까지 함께 대련하던 푸른 머리 의 기사 레트로경이 검을 내려뜨리고 안색을 흐렸다. "주군……." "결투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런 것 생각도 하지 않았네. 어쩌면 당연 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출신도 모를 용병 하나 못이기 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다음날 정오가 되면, 목숨을 건 결투가 벌어질 넓고 둥근 연무장은 지금 이순간,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메아리쳐 들릴 만 큼 적막했다. "하지만 막상 내일로 다가오니까, ……자신이 없어지는군. 용병이 라……. 훗, 평민과 결투한 귀족도 내가 처음일 테지만, 용병과 결투라 니……." "주군께서는 이십여년간 훌륭하신 스승께 검술을 배워오셨습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주군께서는 이기십니다." 테르니크경은 입술 끝을 끌어올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하 지만 며칠새 홀쭉해진 뺨과 어두운 눈빛 때문에 웃는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일그러져 보일 뿐이다. "그래. 이겨야지. 이겨야겠지. 나의 명예와, 나의 아내를 위해서도. 이겨야겠지. 하지만……." 불안스레 흔들리는 자색의 동공이 기사를 향했다. 흑자색의 숱많은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이 무겁게 동공을 덮었다가 천천히 올라갔 다. "만약의 경우에, 내 가족들에게서 내 아내를 지켜줄 수 있겠나?" 레트로경은 입술을 악물고 한참동안 테르니크경을 쳐다보았다. 흔들 리고 있는 주군의 모습이, 보좌하는 가신의 입장으로서는 불안하기만 했다. 결혼을 강행할 때, 그 보수적이고 완고하던 가문과 맞서면서도 이만큼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만약의 경우란 없습니다. 주군께서 잘못되실 일은 없습니다. 좀 더 자신을 믿으십시오. 체계도 잡히지 않은 마구잡이 검술실력으로 감히 결투를 받아들인 용병의 처리나 걱정하십시오." 후우. 테르니크경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벌써 밤이 늦었다. 연무장 의 벽에 걸린 횃불들이 불안스레 춤을 춘다. "고맙네. 이만 가지." 장신에 걸맞는 장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테르니크경은 연무장을 나 섰다. 발길은 저도 모르게, 며칠째 보지 못한 아내의 침실로 향하고 있 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치체르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야 할 게 산더미 같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생각없이 쉬고싶었다. 다음날 결투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찾아 수없이 사선을 넘 나들었던 치체르였지만 이런 식의 일대 일 결투는, 그것도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입회한다는 정식의 결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못 긴장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계속해서 뇌리를 짓누르는 것은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에 대한 회의였다. '휴레시아, 휴레시아.' 사랑하지 않는다. 미련도 이제 끝갈 데까지 가버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을 베어버리는데는 아직 까지 한 조각의 거리낌이 남아있다. 레이노 백작을 죽여도 개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손으 로 휴레시아를 미망인으로 만든다면, 자신은 분명 두고두고 후회할 것 이다. 얼마 전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미망인이 되면 어떤 은밀한 바램을 갖 게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휴레시아와 더 이상 관계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휴레시아의 말대로 진작 그렇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 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선택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레이노 백작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휴레시아를 미망인으로 만드는 것. 문득 치체르는 자신의 검술실력을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하고 쓴 웃음을 웃었다. 상대의 실력조차 모르고, 무조건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자만을 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낙천가인지도 모른다. '낙천가라……후훗. 내가 말이야?' 치체르는 이마에 팔뚝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자신은 낙천가가 아니 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비뚤어지게 보고, 냉소적인 말을 내뱉게 되었 다. 옛날에야 어땠든, 지금 치체르는 절대 낙천가가 될 수 없었다. 치체르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깨고, 계속해서 생각 했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던 장신의 테르니크경과 그의 뒤에서 떨 고있던 휴레시아. 귀족다운 자만심이 넘쳐보이던 다이크경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삼왕자 카스트로. 그 사람은 어떻게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결투를 생각해낼 수 있었을 까. 한때 기사를 꿈꾸었던 치체르는 결투를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수식어를 갖다 바쳐도, 그것은 귀족들끼리 의 공인된 살인에 다름없는 것이다. 살인.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사람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용병 에게 살인이 특별할 리가 없다. 용병이 되고 나서 첫 살인을 했을 때 는 며칠동안 술독에 빠져 지낼 정도로 괴로웠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살인을 계속해나갈 때마다 괴로움 같은 것은 둔감해져갔다. 용병이 되고나서 처음 1년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귀 족에게 반항하는 농노를 베고, 영지간의 싸움에 끼어들어 다른 쪽의 영주를 베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치첼 용병대의 대원들을 만 났다. 우락부락한 바우트, 돈에 관한 한 치체르보다 야무진 헤인, 바람 둥이 수미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움이 밀려든다. 당시에는 힘들다고 느껴지던 시간들이, 하나하나 추억이 되어 그리움으로 남는다. '다시 만나야지.' 입가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만나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일 있을 결투에서, 반드시 이겨야한다. '바우트녀석, 귀족과 결투했다고 부러워하겠지.' 이길 것이다. 휴레시아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고 설핏 잠에서 깨 어났다. 머리를, 눈썹을, 콧날을, 그리고 입술을 쓰다듬는 손길은 너무 나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장님이 타인의 얼굴을 확인하듯 하나하나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스했다. 휴레 시아는 눈을 감은 채로 남편의 존재를 느꼈다. "사랑해……, 휴레시아……." 입술에 와 닿는 감촉이 까칠하다. 휴레시아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남 편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 는지를 그 입술에서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뜨고 남편을 붙잡으려고 했 을 때, 이미 남편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테르니크……." 테르니크경의 늠름한 등이 멈칫 멈춰섰다. 휴레시아는 이불을 들치 고 일어나 남편에게 나는 듯이 달려갔다. "휴레시아……." 돌아서서 휴레시아를 바라보는 테르니크경의 안색에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묻어있었다. 휴레시아는 테르니크경의 팔을 잡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테르니크……, 테르니크……." 자신의 이름만 불러대는 아내를 보며 테르니크경은 입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휴레시아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은 테르니크경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내가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겠소?" "당신은 지지 않아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아. 사랑해요." 어리광피우듯 매달리는 휴레시아는 안타까운 눈을 하고있었다. 테르 니크경은 아내와 그 무례한 용병에 대한 의문들을 접고, 이 순간 그녀 의 사랑스러움에 도취했다. 지지 않는다고 믿어주었다. 자신을 신뢰한 다는 소리였다. 아무 근거도 없이, 아내의 신뢰만으로도 그 용병을 이 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사랑과 비례해 사기도 충천 해진다. 테르니크경은 아내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리라고 결 심했다. "고맙소, 휴레시아. 당신 말대로, 나는 지지 않을 거요." "네. 당신은 지지 않아요. 그렇게 될 거예요." 휴레시아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테르니크경은 사랑스러운 아 내의 눈가에 입술을 맞추었다. 결투가 끝나면, 그녀가 동경하는 아르노 의 왕궁으로 가야겠다. 수많은 귀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쭐대 는 휴레시아를 보고 싶었다. "사랑하오, 휴레시아." 더 이상, 귀족들의 배타적인 눈길을 피할 필요는 없다. 레이노라는 이름이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테르니크경은 그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져서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길게만 느껴지던 밤이 지나갔다. 달팽이처럼 느리던 시간은 정작 당 일 아침이 되자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레이노성의 하인들은 정오 에 있을 결투를 위해 연무장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삼왕자의 시종들은 지시받은대로 연무장 한 구석에 카스트로가 앉을 의자와 쿠션을 가져 다놓았고, 친위대원들은 미리 연무장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는 중이었다. 이 며칠새 카스트로는 식사하는 것부터 옷 입는 것까지 시시콜콜 간섭하 는 의사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고 있었다. 전날 귀찮다고 물리치려다가 라에르의 집중적인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을 포기한 채 였다. "전하,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경과 기사단장 다이크경께서 알현을 청 하십니다." 북국 라디프 산의 두꺼운 모피코트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 시종이 알 려왔다. "들라 하라." "네, 전하." 시종이 나가고, 잠시 뒤에 로페냐와 다이크경이 들어왔다. 카스트로 는 두 사람의 안부인사를 받으면서, 남은 옷을 입었다. 한참동안이나 벽난로가에서 불을 쬐어 따뜻하고 폭신폭신한 모피코트를 입은 카스트 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몰려든 따스함에 부드럽게 풀렸다. 카스트로 는 장갑과 모자까지 쓴 뒤에야 시종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며칠동안이나 침대 위에서 지내며, 카스트로는 자신이 왕궁에서보다 더욱 과보호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시종장 베제르가 하던 잔소리는 이제 라에르의 몫이 되어버린 듯, 라에르의 잔소리로 귀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반면 할말만 하고 사는 시종장 하미르는 그 무표 정한 얼굴을 하고서 은근히 까다롭게 굴고 있었다. 괜찮다는 데도 불 구하고, 기어이 모피코트와 장갑까지 끼워준 사람이 바로 시종장 하미 르였다. 어쨌든 카스트로는 싫은 얼굴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말에 순 순히 따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다이크경과 로페냐를 마주하고 앉았지만, 딱히 집중된 화제거리가 없었다. 조금 뒤에 있을 결투든, 죽은 마법사에 관한 일이 든 차를 마시며 쉽게 화제거리로 올릴 만한 것은 못됐다. 그 와중에서 도 다이크경은 앞으로의 여행일정에 대한 수정사항을 말했지만, 카스 트로는 가볍게 흘려듣고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야 카스트로는 라에르의 부축을 받으며 그들과 함께 결투장소로 향했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한기를 발하는 검날은 이 하나 나간 것 없이 매끈하게 손질되어 있 었다. 명검이라 불릴만큼 잘 만들어진 검이다. 수년간 마물들과 사람들 의 피를 먹은 치체르의 검은 가문이 몰락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치체르는 부드러운 천으로 검을 닦으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려고 검을 닦고 있지만, 휴레시아가 관련된 싸움이라서인지 자꾸만 옛 생각이 들쑤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수십년간 레이노와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시에타가는 카르노 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상의 가문이었다. 부족한 것 없이 풍요 로운 어린 시절과 어려서부터의 정혼녀와 사랑을 속삭이며 장차의 기 사단장을 꿈꾸던 십대 후반을 보낸 치체르는 세상이 참 만만해 보였었 다. 그런 꿈같은 풍요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은 5년 전이었다. 레이얄과 테라, 그리고 미노 공작의 연합군에게 카르노 왕실이 무너 져버리자, 레이얄과의 무역을 주로 하던 시에타가는 모든 상권을 레이 얄의 상인들에게 빼앗겼다. 한번 몰락을 시작한 시에타가를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레이얄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카르노의 상인들까지도 마치 먹이를 두고 싸우는 이리떼들처럼 들러붙어서 뜯어 먹더니 결국 뼈다귀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치체르는 국가라는 보호막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었다. 그때까지 이룬 모든 부는 전부다 그의 조상과 그의 가문이 대 단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어렵게 이룬 부를 아무 해주는 일없이 뜯어가는 국가 따위는 해충이다, 라고까지 했던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자란 치체르는 카르노 왕가를 그리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왕가가 무너진 순간, 치체르는 사라진 국가의 보호막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증오했다. 전에 못마땅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버텨내지 못 한 무능한 왕가, 무능한 국왕을 저주했다. 그들이 무능했기에 치체르의 가문이 몰락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자살했다. 치체르는 그래서 카르노 왕가가 싫었다. 기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버지의 꿈이었다. 힘없는 상인보다는 권 력의 중추에 서는 기사단장이 되기를, 그의 아버지는 희망했다. 치체르 는 다만 기사가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권력에 번번이 이용되는 자신들의 처지를 싫어했던 아버지는 스스로 권력을 잡기를 바랬다. 그 것을 위해 아버지는 전국의 유명한 검술가를 초청해서 그를 가르치게 했고, 치체르는 그런 아버지의 바램에 어긋나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가 고 있었다. 왕실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치체르는 예정 대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하고, 실력있는 기사 가 되어 장차 기사단장의 지위에 오르는, 카르노 사내라면 누구라도 꿈꾸어볼 그런 근사한 삶을. 치체르는 쓸쓸하게 웃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 죽도록 배웠던 검술로 이제는 아내가 될 뻔한 여자의 남편을 베어야 했다. 치체르는 한숨을 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다 되어간다. 망토를 집으려 침 대에서 일어나던 치체르는 순간, 뱃속을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에 얼굴 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고이고 얼굴에서 핏 기가 사라진다.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한참을 끙끙거리던 치체르는 어느 순간 통증이 완화되는 것을 느끼며,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하필 이런 날에 체하기라도 한 걸까? 치체르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 등으로 훑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치체르 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왠지, 예감이 나쁘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2 - 관련자료:없음 [3082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4 22:45 조회:176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2 - ================================================================== 레이노성에는 두 개의 연무장이 있었다. 하나는 실외에 있는 것으로 말을 타고 연습할 수 있는 넓은 곳이고, 또 한 곳은 실내에 있는 것으 로 날씨가 궂어 실외에서 연습할 수 없을 때를 위한 것이다. 결투가 벌어질 장소는 성안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차가운 돌벽이 크고 둥근 연무장을 감싸고, 바닥은 손바닥만한 타일들이 꼼꼼하게 박혀있다. 연 무장의 높은 창에는 레이노 백작가의 문장이 짜넣어진 태피스트리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녹색과 붉은 색이 반반인 방패 안에 은색 사 자가 위엄있게 수놓아진 레이노의 문장과 마주한 곳에는 붉은 색의 두 터운 융단 위에 푹신한 의자와 쿠션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 결투의 입회자인 삼왕자 카스트로를 위한 자리였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화로 가 있어 연무장의 찬 기운을 조금이나마 쫓아내고 있었다. 테르니크경은 친위대원들로 엄중히 지켜지고 있는 연무장의 가운데 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있었다. 두터운 튜닉 위에 체인메일을 걸친 모습으로 장검을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제법 기사다운 멋이 났 다. 그런 그의 모습을 뒤쪽에서 레트로경이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삼왕자 전하께서 듭십니다." 삼왕자의 시종이 고하자, 테르니크경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위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카스트 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르니크경은 허리를 숙였다. 카스트로의 발이 테르니크경의 앞에서 멈추었다. "준비는 다 되었소, 테르니크경?" "네, 전하. 상대만 오면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테르니크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까딱하고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걸어갔 다. 단단히 동여맨 옆구리의 상처가 욱씬거렸지만 일부러 아픈 티를 낼 정도는 아니었다. 붉은 융단 위를 지나 푹신한 의자에 앉자, 라에르 와 다이크경, 그리고 로페냐 등이 옆으로 늘어섰다. 카스트로는 천천히 결투장을 둘러보았다. 조금 쌀쌀한 공기가 코끝 으로 느껴졌지만 워낙 든든하게 입고 온 터라 추위는 그다지 심각하게 와닿지 않았다. 연무장에는 자신이 앉은 곳 말고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연무장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테르니크경의 곁에 서 있는 기 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친위대원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내부의 암살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도, 그리고 테르 니크경과 치체르가 치를 결투의 공정성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고, 카스트로는 생각했다. 정오가 되자, 시간을 맞춘 듯이 치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거친 면셔츠 위로 갈색 가죽갑옷을 입고, 그 위에 갈색 망토를 걸친 모습이었다. 치체르가 결투장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 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치체르는 그 중에서도 결투장 가운데에서 유독 강렬하게 쏘아지는 시선을 잡아 마주보았다. 테르니크경은 자신 을 보는 치체르에게 살짝 고갯짓을 하고 카스트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결투자가 카스트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스트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두 사람 모두 긴장해있었고, 그 중 치체르는 더 심하게 긴장한 듯 안색까지 창백하게 보였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카스트로로서는 딱히 누구를 편들고 싶지는 않 았다. 귀족이라고 해서 테르니크경을 편들지도, 평민이라고 해서 치체 르가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카스트 로에게는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누구를 응원한다는 것 역시 맞지 않 는 일이라 여겼다.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과 치체르 시에타. 두사람의 결투를 시작하 겠습니다. 이 결투의 증인은 대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 전하이십니다." 다이크경의 울림있는 목소리가 결투장에 메아리친다. 돌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웅웅거림이 엄숙함을 더해주었다. 카스트로는 그의 앞에 무릎꿇은 두 사람을 보며 근엄하게 말했다. "전신 로마와 대 카르노의 명예를 걸고, 공명정대한 결투를 치르기 바란다." "네, 전하."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려 다이크경에게 눈짓하자, 다시 다이크경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일어서십시오. 두 분께 전신 로마의 축복이 함께 하길!" 테르니크경과 치체르는 결투장의 가운데에서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스르응----! 두 사람 모두 손에 익은 장검을 빼들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세를 잡으며 눈으로는 상대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결투 당사자들은 물론 친위대원들과 증인들까지 숨을 죽인다. 폭풍전야같은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느리게 두 번이나 서로의 자리를 바꿀 때쯤에 테르니크경이 먼저 그 지리한 탐색전에 종말을 고했다. 테르니크경은 상대보다 큰 체구와 힘 으로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카가아앙------! 두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괴롭히며 웅웅거린다. 치체르는 상대의 검을 밀어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사이 다시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검의 기교보다는 힘과 빠르기로 밀어붙여오는 단순 한 공격법이었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내고, 흘리면서, 치체르는 반격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방적인 대결이었다. 더군다나 치체르의 안색은 한 번 한 번 공격을 맞받을 때마다, 배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왜?'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치체르는 유명한 용병대의 대장이었다. 미레야가 극찬하고, 라에르가 그 이름을 알 정도의 실력자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더구나 카 스트로의 안목으로 보아도 테르니크경의 검술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문은 결투를 지켜보는 사람 모두에게 드는 것이었고, 결투 당사자인 테르니크경마저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너무 쉬웠다. 상대 는 실전을 겪은 용병, 그리고 삼왕자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다. 이렇게 쉽게 풀려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봐주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테르니크경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건 결투다. 봐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럼 뭐지? 단지 운이었던가? 전하를 구했던 것은…….' 테르니크경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찌되었든 자신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상대가 약한 만큼 자신이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므로. 카아앙! 귀를 찢을 듯한 금속음이 결투장의 돌벽에 메아리쳐 돌아와 사람들 의 고막을 자극했다. "크윽!" 비틀거리며 멀찌감치 뒤로 물러선 치체르는 소매로 입술을 닦아냈 다. 소매로는 다 받아내지 못할 만큼의 피가, 시커멓게 죽은 색으로 치 체르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결투 시작 전부터 속이 울렁거렸었다. 거기에 이어진 테르니크경의 공격에 격발된 듯이 뱃속 깊은 곳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연달아 이어 졌다. 속에서부터의 고통과 밖에서부터 몰아치는 공격으로 치체르는 정신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치체르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힘껏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 다. 테르니크경의 공격을 물리치는 사이 문득문득 들었던 생각이 점점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테르니크경은 유령처럼 창백한 치체르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기회를 잡아 승리를 굳히지 않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어서였 다. 저 정상이 아닌 듯한 토혈은 뭐란 말인가. 치체르의 입술에서 울컥 울컥 쏟아지는 시커먼 피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 "뭐지?" 음산한 목소리가 치체르의 목구멍에서부터 살기를 띠고 흘러나왔다. 치체르는 숙였던 고개를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언제부터인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물어뜯을 듯이 테르니크경에게 쏘 아졌다. 움찔거리는 테르니크경을 보며 치체르는 나직하게 으르렁거렸 다. "내게 뭘 먹인거지? 당신 짓인가?" "……?!" 무슨 뜻인지 몰라 황망히 쳐다보기만 하는 테르니크경에게 치체르는 이를 갈면서 쏘아붙였다. "더러운 자식! 이렇게 하면, 좋다구나하고 순순히 나 혼자 죽어 줄 줄 알았나? 천만에! 잘못 알았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체르는 검과 함께 상대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두 손으로 잡은 검은 필살의 힘과 속도를 갖추고 테르니크경의 몸 위 로 내리쳐졌다. 카아앙! 테르니크경이 두 손으로 막아낸 순간,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통증과 팔뚝이 얼얼한 정도의 마비가 왔다. 테르니크경이 그 충격에서 벗어나 지 못하는 동안에도, 치체르의 검은 연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허억!" 테르니크경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쇄도해오는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랐다. 치체르는 자신의 검이 사람의 살을 깊숙이 꿰뚫 는 것을 느꼈다. 여세를 몰아 검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려던 치체르는 순간, 옆에서 달려드는 누군가를 느끼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멈춰라-----!" 위엄있는 목소리가 결투장을 뒤흔들었다. 치체르는 다시 울컥 올라 오는 피를 뱉어내면서, 연신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의사는 두 사람의 상세를 살피도록 하라!" "네, 전하." 치체르는 흐려지는 시선으로 비틀거리다가, 옆에 와 닿는 사람을 느 끼고 힘껏 뿌리쳤다. 그 반동으로 치체르는 다시 피를 토해내며 고꾸 라지듯 무너져내렸다. 카스트로는 노기등등한 얼굴로 테르니크경을 노려보았다. 왼쪽 심장 밑에 깊숙한 상처를 입은 테르니크경은 핏기없는 얼굴로 카스트로 앞 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침묵으로 감싸인 공간 속으로 치체르를 살피 던 의사가 다가왔다. "상세는 어떤가?" 서리가 맺힐 듯 한기가 도는 목소리가 카스트로의 입술에서 주위를 얼리며 흘러나왔다. "일단은 급한 대로 처방을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해독약을 먹이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카스트로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독인가?" "그렇습니다. 로이츠라는 독으로, 장미꽃의 일종입니다. 흑적색의 꽃 인데 그 꽃잎이 독이고, 그 줄기는 해독약입니다……, 이 겨울에 그 꽃 이 피었을 리는 없고, 아마 해독약은 독약을 가진 당사자가 가지고 있 을 겁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돌려 테르니크경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소, 테르니크경? 이만하면 됐으니, 해독약을 내놓으시오." 독이라는 소리에 누구 못지않게 놀라고 있던 테르니크경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단정짓는 듯한 카스트로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좋아! 끝까지 발뺌한다면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 다이크경!" 카스트로의 노기어린 눈은 계속 테르니크경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네, 전하." "성안을 이잡듯이 뒤져서라도 해독약을 찾아오라. 의사를 데려가는 게 좋겠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시급한 일이다. 되도록 빨리 찾아내라. 기사들이나 친위대원들을 동원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전하." 다이크경이 빠져나가자 결투장안은 다시 숨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 카스트로는 냉랭한 눈길을 테르니크경의 뒤에 있는 기사 레트로경에게 던졌다. "그 주인에 그 기사로군! 전신 로마와 카르노의 이름을 걸고 내가 증인이 된 결투에서 감히 독으로 암수를 쓰고, 질 것 같으니까 결투 중에 가신이 끼어든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은 변명하고 싶은 자신을 꾹 억눌렀다. 어차피 모든 상황 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이미 자신을 범인이라고 단정 해버린 이상 변명은 무의미했다. 스스로가 구차해질 뿐이다. 그리고 레 트로경의 일은 자신으로서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멋대로 끼어들은 레 트로경이 원망스러웠지만, 또한 그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 은 죽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레트로경에게 원망만 할 수도 없었 다. 몸에 꽂혔던 검이 방향을 틀어 몸을 반으로 가르려고 했었다. 그 섬뜩한 느낌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져서 테르니크경은 진저리를 쳤 다. 그 감각 때문에라도 테르니크경은 자신을 살려준 레트로경에게 어 떤 원망의 말도 비출 수 없었다. "저의 주인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느닷없이 들려온 레트로경의 말에 테르니크경은 움찔 놀라 몸을 굳 혔다. 카스트로는 차디찬 얼굴에 한가닥 흥미를 띄워올렸다.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럼 누구에게 이 일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레트로경은 무례를 무릅쓰고 얼굴을 들어올려 카스트로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자못 비장한 모습이다. "제 독단으로 끼어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잘못도, 책임도 제게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의자에 등을 기대앉으면서 느긋하고 서늘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시에타에 대한 독살건도 네가 독단으로 꾸민 일인가?" 레트로경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흘깃 앞에서 무릎꿇고있는 테르니크 경을 바라보던 레트로경은 이를 악물고, 이내 결의어린 목소리로 대답 했다. "……그렇습니다. 다 제가 꾸민 일이고 주인께서는 모르고 계신 일 이니까, 부디 제게만 책임을 물어주십시오." 카스트로는 그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레트로 경과 테르니크경을 번갈아보며 주의깊게 살폈다. 당황하며 레트로경을 쳐다보는 테르니크경과, 마치 죽음이라도 결심한 듯 자신만을 뚫어지 게 응시하는 레트로경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카스트로는 입술을 끌 어올리고 웃었다. "충성이 지나친 기사를 수하로 두었군, 테르니크경. 어떤가? 이대로 바보처럼 충성스런 기사 한 명을 희생양으로 내버릴 참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자기 죄를 시인하고, 카르노의 귀족답게 자기가 한 일에 대 한 책임을 질텐가?" 테르니크경은 두고볼 것도 없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단정짓는 카스트 로에게 무의식적으로 터져나오려는 반발을 억눌렀다. "레트로경의 일이라면, 제가 주인으로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독살이라는 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결백을 주장하듯 거리낌없이 맞부닥치는 테르니크경의 눈빛이 카스 트로의 확신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억울하다는 표정, 고집스러운 자존 심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자주빛 눈동자.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투 당사자인 테르니크경이 꾸민 일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런 짓 을 한다는 말인가! ================================================================== 잠시 설에 갔다왔습니다.. ^^ 엄마에게는 비밀이지만, 만화책도 사고.. 친구에게 빌붙어 맛있는 점심도.. 호홋.. 좀 전에 들어와서 부지런히 퇴고해 올립니다. --; 친구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꼬드기는 것을.. 안돼, 연재해야돼.. 라고.. (얼마전에 그런 망언(?)을 하지 않았다면 하루쯤 제끼고 놀러갔을지도) --; 뭐, 제 무덤 제가 팠으니 별 수 없죠.. 시간이 많이 늦어서 죄송한김에 횡수를..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스스로 느끼기에 엄청) 착한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3 - 관련자료:없음 [3083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5 21:55 조회:182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3 - ================================================================== 다이크경은 기사들의 숙소에서, 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을 긁어모 아 영주의 침실과 집무실로 들여보냈다. 백작의 기사들이 앞을 막아섰 지만 그들의 주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말해주자 마뜩치 않은 표정 으로 물러섰다. 다이크경은 그쪽을 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섯 명의 기사들과 함께 백작 부인의 침실로 향했다. 귀부인의 침실을 뒤져봐야 한다는 데 거부감이 들었지만, 다른 기사들에 의해 엉망으로 뒤져지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지휘해서 찾는 게 나으리라 여겼다. 처음부터 이 결투가 마땅치 않기는 했지만, 그런 식의 결과가 나오 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결투. 평민출신이 많은 기 사단의 단장으로 지내오며 제법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다이크경이지만, 그래도 귀족과 평민 사이에 결투 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결투를 한다면 같은 귀족인 테르니크경이 멋지게 건방진 평민을 눌러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대체 이 참담한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이크경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테르니크경이 진 것 따위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평민과의 결투에서 암수를 쓴 것. 즉, 귀족의 명예를 쓰레기더미로 내던져 버린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다이크경?" 어느새 백작부인의 침실 앞에 멈춰선 기사들이 머뭇거리며 다이크경 을 불렀다. 아무래도 귀부인의 은밀한 공간을 침범한다는 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이크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명령했다. "열어라!" 타앙! 다소 거친 손길에 좌우로 활짝 열린 문이 벽과 부딪혀 큰 소 리를 냈다. 은은한 장미향이 나는 침실로 저벅저벅 들어서자, 하녀복을 입은 하녀가 비명처럼 새된 소리를 질렀다. "뭐, 뭐예요." 다이크경은 하녀를 무심하게 일별하고, 화장대의 의자에 앉아있는 백작부인의 놀란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잠시 이 방을 검사하겠습니다. 백작부인께서는 자리를 비켜주십시 오." 백작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다이크경은 그녀의 모습 에 동정심이 일었지만, 그것과 자신의 임무는 별개였다. "무, 무슨 일이죠? 무얼 검사하겠다는 거죠?" 휴레시아는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녀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이었다. 난데없이 덩 치 큰 기사 다섯이 쳐들어왔으니 저 여린 귀부인도 어지간히 놀랐을 것이다. 다이크경은 옆에 선 기사에게 눈짓하며 대답했다. "테르니크경께서는 결투 상대자에게 독을 먹여, 결투에서의 유리한 상황을 유도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모르니, 독과 해독약이 이곳에 있는 지를 확인해봐야 합니다. 라노경은 백작부인을 안전하게 모시고, 나머 지는 방안 곳곳을 샅샅이 뒤져라!" "네, 다이크경!" 휴레시아는 기사들에게 감시받으며 침실 한쪽에 서있었다. 덜그럭덜 그럭, 쿵쿵 소리를 내며, 침실은 눈깜짝할 사이에 난장판이 되어버렸 다. 서랍이라는 서랍은 전부 열려있고, 그 내용물도 전부 밖으로 끄집 어져 나와있었다. 무자비한 기사들의 손과 발에 짓밟히는 자신의 침실 을 보며, 휴레시아는 끓어오르는 불안을 억눌렀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야나가 제대로 일을 처리한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무 슨 난리란 말인가! '야나! 야나!' 지옥같은 시간들 뒤에,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기사들은 다이 크경의 사과인사와 함께 물러나갔다. 긴장으로 경직되어있던 휴레시아 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씨!" 세나가 놀라서 부축했지만, 넋이 나간 듯한 휴레시아를 어떻게 하지 는 못했다. "야나를 만나야겠어. 아니아니, 그것보다 테르니크는 어떻게 됐는 지……, 세나, 가서 테르니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 알겠니?" "네, 아씨. 하지만 아씨는?" 휴레시아는 세나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망연한 표정으로 정 신없이 지껄였다. "야나를 만나야지. 대책을 마련해야지. 가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봐, 알겠지?" "네, 아씨." 세나가 방문까지 다가갔을 때, 휴레시아가 급작스럽게 불러세웠다. "세나!" "네?" 뒤돌아선 세나의 시야에 턱을 굳히고있는 휴레시아가 들어왔다. 싸 늘하게 빛나는 붉은 눈빛이 어딘지 범접하지 못할 무서운 느낌이 들었 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그런 섬뜩한 기분이다. "가서, 치첼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 죽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살 았는지!" "네……." 세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제서야 세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좁고 어두운 방안은 숨막히는 음모의 냄새로 음침하다. 휴레시아는 초조한 눈으로 유모 야나 코데르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코데르 부 인은 벌써 한 시간째 그 좁은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야나……." 매달리는 듯한 휴레시아의 목소리에 코데르 부인은 눈을 찡그렸다. 어려서부터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다. 항상 사고를 치고나서 자신에게 그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젊었을 때 사고로 딸을 잃고 휴레시아를 자 신의 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키워왔다. 제멋대로이 고 이기적인 휴레시아지만, 코데르 부인은 한번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거절할 수 없었다. "휴우,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전에 시에타씨를 베었다면 좋았으련만. 왕자전하까지 그 사실을 눈치채게 하다니요!" "하지만 야나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야나가 어떻게 해줘." 코데르 부인은 고민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문제는 나으리께서 그 죄를 뒤집어 쓰셨다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뒤집으려면 그럴듯한 범인을 만들어 왕자에게 보여줘야 하겠죠. 하지 만 그럴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야나아……." 옷자락을 붙잡고 부탁해오는 휴레시아를 보면서 코데르 부인은 깊게 한숨을 내뿜었다. "세나를 불러주세요. 일단 그 아이가 독을 탔으니, 그 애가 무슨 말 이라도 한다면 큰일이에요." 휴레시아는 굳은 얼굴로 멈칫 코데르 부인을 응시했다. "지, 지금 테르니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오라고 보냈는데." "나으리께서는 지금 어디에? 설마 왕자전하와 함께 계시는건……" "……." 휴레시아의 표정만으로도 답을 알아낸 코데르 부인은 인상을 쓰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 애부터 찾으세요. 별다른 일이 없어야할텐데……." 휴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황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잘 생각지도 않고 세나를 보낸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누구냐?" 세나는 자신의 앞에 검을 들이민 기사를 보고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 질쳤다. 하녀들에게 수소문해서 테르니크경이 있는 곳을 알아내자마자 연무장으로 달려와,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왜 여기를 기웃거리지? 너는 누구냐?" 당당한 몸집의 기사는 엄격한 표정으로 세나를 살피는 중이었다. 어 디로 보나 하녀에 불과한 그녀를 보며,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은 위 압스럽게 추궁했다. "저, 저, 저는……." 더듬거리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 세나를 보며 친위대원은 눈 살을 찌푸렸다. 삼왕자를 호위하는 친위대원으로서 의심스러운 자를 견제하는 것이 버릇이 된 그는 여자라고 봐주는 것 없이 세나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수상하군. 전하께 가자." 더더욱 파랗게 질리는 세나의 등을 검끝으로 쿡쿡 찌르며 걸음을 재 촉한다. 세나는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질질 끌어 간신히 앞으로 걸어갔 다. "그 하녀는 뭔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라에르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친위대 원은 세나의 등을 밀어 카스트로의 앞까지 몰아가서야 걸음을 멈추었 다. "이 주변을 기웃거리기에 수상해서 데려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옆에 앉아있는 테르 니크경을 내려다보았다. 의사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테르니크경은 피투 성이의 몸으로 레트로경에게 기대어 앉아있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 는 모습이 상당한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이름은?" 세나는 느리게 눈을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테르니크경의 눈동자가 놀란 듯 확대되는 것을 보다가, 방금 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을 돌아보았다. 살벌하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따스해 보이는 모 피코트를 입고 혼자 앉아있는 젊은 남자가 세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칠 것 없는 검은 눈동자가 그 사람이 상당한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 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면……. "무엄하다! 무릎을 꿇고, 전하의 질문에 답하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더 이상 사고의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 다. 뒤에 있던 친위대원이 뻣뻣이 굳은 세나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무 릎이 꺾여 주저앉는 세나를 눈으로 쫓으며, 카스트로는 미미하게 눈살 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이름을 묻지 않느냐!" 뒤에 서 있던 친위대원이 세나를 윽박질렀다. 세나는 덜덜거리는 손 을 꽉 마주잡고, 입술을 떼었다. "세세세나나이입이니다." 카스트로의 검은 눈썹이 못마땅한 듯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대답하라!" "예예엣! 저저는 세세난니입니다." 대답하고 나서, 세나는 울상이 되었다. 이빨이 딱딱 마주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그런 세나를 유심히 바 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 이제 여기를 염탐한 이유를 말하라." 아무생각도 나지 않는 세나는 아른거리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연신 손을 잡아 비틀고 있었다. "못알아들었나? 왜 여기서 기웃거렸는지 그 이유를 말하란 말이다!" 짜증스럽게 되풀이해 묻는 카스트로를 보며, 세나는 더욱 얼어붙었 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뇌리 속을 파고들어오는 질문의 뜻을 알아들 은 세나는 생각나는 대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아아앗씨게서 주주주주인나아아이리가 어어떠신지 아라보라라고 하 서셔서, 그르래서……." "아씨가 주인이 어떤지 알아보라고 그랬다고?" 신기할 정도로 세나의 말을 알아맞춘 카스트로에게 세나는 고개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끄덕끄덕거렸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알아맞춘 말 을 다시 조합해보았다. '주인이라는 것은 테르니크경이겠고, 아씨라는 것은…… 백작부인인 가?' 부인이 남편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했다는 것은 별 의심할 거리가 못 된다. 카스트로는 가볍게 고개짓을 했다. "해독약과 범인을 잡을 때까지 테르니크경을 감금할 것이다. 물론 테르니크경이 자백하고 해독약을 내준다면, 백작부인과 더 빨리 조우 할 수 있겠지. 알겠으면, 백작부인에게 그리 전하라!" 세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으로 카스트로에게서 테르니크경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전신이 북처럼 둥둥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보내주어라." "네, 전하." 세나를 데려왔던 친위대원은 굳어있는 세나의 팔을 잡고 끌어올렸 다. 친위대원은 아프다는 듯 신음을 내뱉는 세나의 반응을 무시하고, 반강제로 연무장 밖으로 끌어내었다. 카스트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걱정거리가 많은 이때, 또다시 터진 문제에 골치가 아파왔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 용했다. "다이크경은 아직인가?" 눈을 뜨며 물었지만, 아직이라는 대답만 들려올 뿐이었다. 카스트로 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시종장 하미르! 시종들을 이끌고 다이크경과 합세하라! 하인들과 하녀들의 숙소까지 빠짐없이 샅샅이 찾아! 성밖으로 나가는 자가 없도 록 경비하라!" "네, 전하!" 허리를 굽히는 시종장 하미르를 바라보던 카스트로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덧붙였다. "우리 일행의 숙소도 놓치지 마라. 물론 테라 사신들의 숙소도." "네!" 시종장 하미르가 두 명의 시종들만 남기고 대여섯명의 시종들과 함 께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눈빛을 빛내며 중얼거 렸다. "이 기회에 마법사를 죽인 범인도 찾아내면 좋겠지." 곁에 있던 로페냐가 움찔거리며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마법사를 자신이 잡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카스트로가 깊은 상처를 입고서야 잡 았다. 그것만으로도 얼굴을 들 수 없었는데 라에르가 자신에게 맡긴 마법사가 암살당한 뒤로는 카스트로의 얼굴을 보기도 민망했다. 더욱 이 범인을 찾을 길마저 막막해서 말도 못하게 기가 죽었었다. 그런데 카스트로는 지금 두 명의 독살범을 함께 잡겠다고 하고 있다. 다소 우 악스러운 방법이기는 하되, 그보다 더 정확한 방법도 없으리라. 이 와 중에 그런 계산까지 하는 카스트로가 감탄스러웠지만, 테라 사신까지 검사하겠다는 것은 기분이 나빴다. 무엇보다 정말 테라 사신에게서 독 살범이 나온다면……. 절대적인 확신도 없는 지금, 로페냐는 손에 땀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테라 사신 중에 암살범이 있다면, 이것은 외교적인 문 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로페냐는 누구보다도 긴장한 채로,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어제 외출의 피로가 아직까지 심각..하네요.. --; 하루종일 어기적어기적, 뒹굴뒹굴, 사온 만화책읽고, 자고.. 좀 전에 깨서야 두다다.. 퇴고해서 올립니다.. ^^ 요즘 새의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오려나 봅니다. 우쭐하니 떠벌대며 제대로 글도 제대로 안쓰는 자신을 보면, 뭔가 처방전이 필요할 듯.. (주사는 질색입니다.. 병원 싫어요..) - 늦잠꾸러기(?)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4 - 관련자료:없음 [3084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6 21:31 조회:182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4 - ================================================================== 레이노의 내성은 기사들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고립된 채로, 기사 들의 수색을 받고 있었다. 경비병부터 하인, 하녀, 그리고 카스트로의 일행인 기사들 자신과 테라 사신들까지, 누구하나 검사의 대상에서 제 외되지 않았다. 휴레시아는 유령을 본 듯한 얼굴로 돌아온 세나에게서 삼왕자의 전언을 듣고, 코데르 부인과 함께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있 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휴레시아는 침대에 엎드려 울고, 코데르 부인 은 신경질적으로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야나! 야나! 흑흑, 이제 어떡해요?" 자애스러웠던 코데르 부인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온 성을 이잡듯이 뒤진다는 소식을 듣고, 독약과 해독약 등 증거가 될만 한 것들은 전부 이곳으로 들고 와있는 중이다. 성밖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 실감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성의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뒤졌지만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 말에 안도했던 것도 잠시, 다시 지하부터 샅샅이 뒤진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코데르 부인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 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범인을 내놓아야만 이 지옥같은 시간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범인이 되어줄 사람은……. 코데르 부인의 눈길이 침대 위에 엎드려 우는 휴레시아에게 꽂혔다. 한동안 뚫어지게 응시하던 코데르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 금까지 키워온 친딸같은 휴레시아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코데르 부인 은 다시 얼이 빠져있는 세나를 쳐다보았다. '세나?' 하지만 저 하녀는 치첼을 죽일 이유가 부족했다. 어떤 이유를 붙일 수 있을까? 치체르를 싫어해서? 말도 안된다. 그러면 주인이 죽는 것 을 지켜볼 수가 없어서? 흐음. 왜? 주인을 사모했다면……. 코데르 부인의 눈가가 자그맣게 좁혀졌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주인아씨의 남편을 사모해서 그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 서 남몰래 치첼의 음식에 독을 타고. 하지만 주인아씨가 가만히 있는 데, 하녀주제에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지만 그 이상 가는 대책도 없을 것 같았다. 코데르 부인은 되든 안되든 일단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대로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는 것 보다 나을테니까. "세나." "네, 네." 화들짝 놀라 쳐다보는 세나를 향해 코데르 부인은 최대한 상냥한 미 소를 지어 보였다. "배고픈데, 먹을 것 좀 가져오겠니?" "아아,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너도 먹어야지. 함께 식사하자꾸나. 부엌에 가서 음식을 많이 얻어 오너라." "네에, 코데르 부인." 어수선한 몰골로 세나가 침실을 나가자, 코데르 부인은 주머니에서 독약을 꺼내들었다. 음험한 눈빛이 교활하게 반짝인다. 다음날 새벽, 횃불을 밝힌 기사들은 층마다 통로를 가로막은 채, 하 녀들의 숙소를 수색하고 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은 기사들은 거침없 이 하녀들의 좁은 방안으로 난입해, 방안의 거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엎었다. 성 전체가 그런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고, 성안 대부분의 사 람들은 지은 죄도 없이 그 기사들의 기세에 눌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 다. 라노경은 동료기사 한 명과 함께 하녀들의 방을 뒤지고 있었다. 기 사들도 자신들을 마물처럼 보며 얼어붙어 있는 하녀들을 보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다이크경이 직접 나설 정도 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소홀히 할 수 없 었다. 막 하나의 방문을 닫고 나와 옆방을 뒤지러 들어갈 때였다. 라노경 은 가볍게 노크를 하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겁 에 질린 하녀가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라노경은 예상치 못한 방안 풍경 에 잠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동료기사도 라노경의 반응과 다를 것은 없었다. "……흐억……억……커헉……!" 이 방의 주인인 듯한 하녀 한 명이 찬 마루바닥에 시커멓게 죽은 얼 굴을 하고 배를 끌어안은 채 뒹굴고 있었다. 산발이 되다시피한 갈색 머리가 마루바닥에 흩어져있고, 그 주위에 하녀용 모자가 떨어져 있다. 눈을 뒤집고 컥컥거리는 하녀의 옆에는 뚜껑이 열린 조그만 자기병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찾아낸 것 같군. 다이크경과 의사를 불러오겠나?" 라노경이 하녀에게서 눈을 떼지않은 채 말하자, 동료기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갔다. 라노경은 하녀에게 걸음을 옮기며 인상을 찌 푸렸다. "이봐! 이봐, 정신 차려!" 라노경은 하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쳤다. 하지만 하녀는 더욱 경련을 일으키며, 급기야 시커멓게 죽은 피를 입에서 토해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라노경은 찡그린 얼굴을 뒤로 물린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하녀들의 방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방이다. 벽지도 제대로 발 라지지 않은 낡은 벽에 한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침대, 서랍 이 달린 조그만 사이드테이블과 벽가에 붙은 붙박이장이 하나 있었다. 라노경은 잠시 하녀와 서랍을 번갈아 보다가, 몸을 일으켜 사이드테이 블로 다가갔다. 서랍을 열어제끼고, 그 내용물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확인했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많이 나왔지만 이렇다할 수확은 보이 지 않는다. 다시 붙박이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 때, 사람들의 발소리와 함께 다이크경이 안으로 들어섰다. "다이크경!" 라노경이 돌아서자, 다이크경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곁의 의사에게 눈짓했다. 의사는 곁에 횃불을 든 기사와 함께 하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떻소? 그 하녀의 상태는?" 이리저리 하녀를 만져보던 의사는 근처의 도자기병을 들어올려 코끝 으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로이츠가 맞습니다. 이 근처에 해독약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선 해독약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다이크경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곁에 있던 기사 두 명을 들여보냈다. "샅샅이 뒤져라. 침대 속과 메트리스까지 찾아봐." "네, 다이크경." 한동안 그 좁은 방안은 덩치좋은 기사 세 명으로 북적거렸다. 크지 도 않은 방안을 완벽하게 뒤집어놓은 그들은 붙박이장에서 드디어 원 하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이크경! 혹시 이거 아닙니까?" 독약병과 마찬가지로 조그만 도자기병이 붙박이장에 걸려있던 옷 속 에서 나왔다. 기사가 의사에게 맡기자, 의사는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한 명 밖에 살릴 수 없습니다." 하녀곁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의사를 마주보며, 다이크경은 입술 을 깨물었다. "……하녀에게 먹이면 살릴 수 있소?" "힘듭니다. 이 지경까지 갔으면, ……치사량을 마셨기 때문에 소용없 을 겁니다." 다이크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늦기 전에 시에타씨를 구하십시오. 이쪽은 저희가 알아서 처 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사가 부지런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다이크경은 엉망이 된 방안과 죽어가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저 하녀가 범인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녀 따위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는 말 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법사를 암살하는데 일조를 한 것도 하녀였 다. 어쩌면 이 하녀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모른다. 일단 그런 판 단이 서자, 다이크경은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하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라. 하녀들을 탐문해봐!" "네, 다이크경." "오오오, 로마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세나! 흐흐흑." 아침이 밝기 전, 곱게 나이든 중년여인이 이미 죽어버린 하녀의 시 체를 안고 오열을 터트렸다. 다이크경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 중년여 인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뚝뚝 눈물을 떨구며 우는 모습에는 거짓이 없어보였다. 가장 친했던 딸같은 아이를 잃은 슬픔이 무뚝뚝한 기사들 의 심금까지 울려버린 것이다. "흐흐흑, 네가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이다니! 세나, 세나야! 흐흐흑." 다이크경은 한동안 지켜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하녀와의 관계를 물 었다. "당신은 누구지? 하녀같지는 않은데, 이 하녀와는 어떤 관계요?"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어내는 중년여인은 울먹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저…저는……, 야나 코데르라고 합니다. 흑흑, 이 세나와는 함께 백 작부인을 모시지요." "백작부인?" 코데르 부인은 의심으로 눈을 가늘게 뜨는 다이크경을 눈물젖은 얼 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아이는 백작부인의 몸종인데, 바보같이 오르지도 못할 나무 를 바라보고, 흐흐흑." "……무슨 소리지?" 코데르 부인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세나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침통하 게 말했다. "이 아이는 주제도 모르고 주인나리를 사모했지요. 가끔씩 제게 그 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결투가 결정되고나서 며칠째 안달복달 하더니만, 기어이…… 흐흐흑……." 애처롭게 우는 코데르 부인을 보며 다이크경은 혼란스러워졌다. 과 연 이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백작부인의 몸종이 백작을 사모해, 백작의 결투상대에게 독을 탔다? 그럴 듯 하면 서도, 선뜻 그렇구나라고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 기사들에 게 붙들려 온 하녀를 보며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떠는 하녀는 파리한 얼굴로 죽은 하 녀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다이크경의 질문에, 기사 한 명이 대답했다. "아침에 시에타의 식사를 가져다 준 하녀랍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길에 저 세나라는 하녀와 잠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인가?" 엄격한 다이크경의 눈빛에 질려, 하녀는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 크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하녀와, 죽은 하녀, 그리고 코데르 부인을 번 갈아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일어나자마자 그 소식을 접했다. 다이크경이 수색을 중 단하고 사건의 전말을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하녀가 먹은 독이, 시에타가 먹은 독과 동일했습니다. 그 하녀의 방을 수색한 결과 해독약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카스트로는 인상을 험악하게 찌 푸렸다. "그래서 그 하녀가 시에타를 죽이려 했다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다이크경은 아침에 세나의 시신을 붙잡고 울던 중년여인이 했던 말 을 떠올렸다. "그 하녀는 전부터 테르니크경을 남몰래 사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테르니크경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했다고……." 카스트로는 황당한 얼굴로 다이크경을 올려다보았다. 카스트로는 한 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을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그 하녀와 친하게 지내던 백작부인의 유모에게서……." "……백작부인의 유모?" 카스트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사실인지 되묻는 눈으로 다이크경을 바라보았다. 다이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에타의 어제 식사를 책임졌던 하녀의 말에 따르면, 시에 타에게 식사를 가져가는 동안 그 죽은 하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 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그 하녀가 범인인 것 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는 코웃음을 쳤다. 기가 막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도 없었다. 백작을 짝사랑하던 하녀가 백작의 결투상 대자를 독살까지 한다? 카스트로는 한참동안 팔짱을 끼고, 턱을 쓰다 듬으며, 안색을 수십번이나 달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알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베푼 호의도 있으니, 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짓기로 하죠. 하지만……." 검은 눈동자에 기광을 번뜩이며, 카스트로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 다. "테르니크경과 레트로경, 이라고 했던가? 그 멍청한 기사." "네, 전하." 다이크경은 충직했던 테르니크경의 기사를 떠올렸다. "테르니크경에게는 왕실모독에 대한 경고로 벌금 100만실프를, 그리 고 레트로경에게는 왕실의 지엄함을 몸소 느끼도록 평생동안 내 시중 을 들도록 전하십시오." 다이크경은 멍하니 카스트로를 쳐다보다가, 카스트로가 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자 즉시 허리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다른 암살범은 찾지 못했습니까?"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이크경을 보며, 카스트로는 혀를 찼 다. "테라 사신 중에 의심스러운 자는 없었느냐는 말입니다. 마법사의 독살범!" "……! 그, 그것은 특별히 짚이는 것이……." 당혹스러워하는 다이크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고 손을 내저었다. "과욕이었는지도. 물러가십시오." 물론 그 하녀가 범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그런 어설픈 이유 따위는 믿지 않았다. '백작부인의 하녀라…….' 테르니크경이 머리가 좋거나, 백작부인이 머리가 좋은 것이리라. 게 다가 하루동안 감금되었던 테르니크경이 그 조작을 책임졌을 리는 없 으니, 그 암살의 중심에는 백작부인이 있을 것이다. 결투상대에게 독을 먹이는 백작과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어설프게 하녀를 죽인 백작부인. 그야말로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가 아닌가! 카스트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어차피 레이노 정도의 귀족 에게 중벌을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 벌금형 정도라면, 기세등 등한 귀족들에게도 경종이 될 것이다. 레이노는 귀족 사이에서도 꽤나 명망있는 가문이니까. 거기에다 뜻밖의 자금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마법사의 독살범까지 잡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와서는 다시 수색할 핑계거리도 없었다. 테라의 사 신들은 한번은 몰라도 두 번 참을 리는 없었다. ================================================================== 으실으실 춥네요. 머리도 아프고.. 아직까지는 감기 초기 증상.. 더 발전되지는 않기를 바라지만.. T.T 1장 끝무렵에도 감기걸리더니, 혹시 이번에도? (징크스 만드는게 취미?인 새 --;) ^^ 네, 다음회가 2장 끝입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추위가 싫은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2 장 - 55 - 관련자료:없음 [3086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17 21:20 조회:200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5 - ================================================================== 다음날 아침, 카스트로 일행은 파란만장했던 레이노성에서의 일정을 접고 다시 테라로의 길을 재촉했다. 하룻밤새 더욱 초췌해진 테르니크 경은 다친 몸을 하고서 휴레시아의 부축을 받아 카스트로를 배웅했다. "비록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경이 내게 요양할 장소를 제공해 준 데는 감사하고 있소. 빠른 쾌유를 바라오."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카스트로는 개의치 않았다. "백작부인께서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도 뛰어나시더군요. 그 출중한 재능을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살리시기를 바랍니다." 휴레시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테르니크경은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은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서 있 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것 같은 테르니크경의 뇌리에 그 뜻이 제대로 파악될 리가 없었다. 카스트로는 혼란스러워하는 테르니크경을 위해 친절하게도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주었다. "경이 감금되어있는 동안 백작부인께서 상당히 많이 염려하셨소. 무 척 바쁘셨지. 앞으로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시길 바라오." 테르니크경의 의혹에 찬 시선을 받으며, 휴레시아는 몸둘 바를 모르 고 당황해했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굳은 표정으로 테르니크경은 카 스트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테라까지 편안한 여행길이 되십시오." "고맙소. 그럼 이만 헤어져야겠군. 잘 있으시오."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의 부축을 받으며 내성 앞에 세워져있는 암녹색의 사륜마차에 올랐다. 그 뒤로 라에르와 시종장 하미르가 따라 올랐다. "이랴아-----!" 마부가 고삐를 쥐고 여덟마리의 말을 능숙하게 몰아간다. 빽빽하게 박힌 돌로 된 보도블록을 따라 기사들이 탄 말의 말발굽소리와 매끄럽 게 굴러가는 마차바퀴의 마찰음이 울렸다. 며칠전의 폭설도 이제는 자 취를 찾아볼 수 없었고, 태양신 하야는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점차 속도를 높여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카스트로 일행을 바라보던 테 르니크경은,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자 엄격한 눈으로 아내를 돌아 보았다. "무슨 말이오?" "테르니크……?"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휴레시아를 보며 테르니크경은 눈썹을 찌 푸렸다. "전하께서 하신 말이 무슨 말이오? 혹시, 당신이 그 자의 음식에 독 을 탔소?" 하얗게 탈색되는 휴레시아의 얼굴을 보며 테르니크경의 의심은 더욱 확신을 얻어갔다. 테르니크경은 사람들로 가득한 주위를 흘끗 둘러보 고, 아내를 향해 거친 말투로 속삭였다. "침실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내게 아무 것도 숨기지 마시오, 알겠 소, 휴레시아?" 무서운 박력으로 노려보는 테르니크경의 모습에 휴레시아는 속수무 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 안돌아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테르니 크경을 따라가며, 휴레시아는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야나……, 어떡해, 야나…….' 이틀 뒤, 카스트로는 국경을 넘었다. 레이노성에서 나온 이후 다시 습격이나 암살기도가 있을까봐 우려했던 카스트로 일행은 그 동안 아 무 일도 없이 지나가자 조금씩 긴장을 풀고 있었다. 높게 이어지던 산 들은 국경을 넘자 언덕정도로 낮아져서 길은 편했다. 카스트로는 마차 안에서 로페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산 테라와 테리온, 그리고 앞으로 카스트로가 유학할 테리아 등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소홀히 했던 것들에 대해 들어두고 있었다. 로페냐는 자신의 나라에 들어서자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카스트로 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간간이 우스개소리를 하면 함께 웃어주는 카스트로가, 로페냐는 그렇 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잊고 이렇게 한걸음씩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카스트로가 타고있는 마차 뒤로, 시종들이 타고 가는 마차가 지나가 고 있었다. 시종장 하미르의 명령으로, 시종들은 새로운 시종 레트로를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었다. 이제 기사작위를 박탈당해 평민일 뿐이기 는 했지만, 기사였던 레트로에게 시종이라는 것은 지독한 치욕이었다. 하지만 자신뿐 아니라 테르니크경에게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말에는 어 쩔 도리가 없었다. 그 며칠간 시종들은 말단인 레트로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전직 기사답게 힘이 좋은 레트로에 게는 주로 힘이 많이 드는 일들이 맡겨졌다. 아직까지 구겨진 레트로 의 얼굴이 펴진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시종들은 그것까지 간섭하지는 않았다. 말단이라고는 하지만 기사였던 자에게 함부로 시비 걸만큼 대 담한 시종은 없었다. 일행의 후미에서 말을 모는 베이경과 포에르경, 그리고 로카르경은 아마도 삼왕자가 자신들의 일을 잊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며칠 사이에 앓아눕고, 결투와 살인 등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높으신 왕자 전하가 미천한 자신들의 일까지 기 억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극히 낙천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로카르경은 며칠 전 결투의 내기에서 이긴 것을 행운의 징표로 여겼다. 심지어 로 카르경은 지금 내기에서 딴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지 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테라에는 예쁜 여자가 많다고 들었던 것을 몇번이고 되새기고 있었다. 목적지인 테라의 수도 테리온을 하루 남짓 거리로 남겨둔 날의 오후 였다. 테라의 국경을 넘은 지 이틀째가 되기도 하는 날, 카스트로가 탄 마차가 갑자기 멈추어섰다. 이상하게 여긴 카스트로가 따로 알아보기 도 전에 다이크경이 달려와 마차 밖에서 창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커튼을 열자, 딱딱하게 굳은 다이크경의 얼굴이 보인다. 카스트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앞에, 테라의 한족이 탄 마차가 마주오다가, 그쪽에서 저희더러 길 을 내라고 하는 바람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전하, ……지시를……." 카스트로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다이크경은 그런 카스트 로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길을…… 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카스트로는 매서운 눈길로 방금 말한 로페냐를 쏘아보았다. 로페냐 는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한번 자신의 말을 되풀이했다. "전하께서 느끼시는 감정은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전하, 이곳은 테라. 한족이 곧 법인 나라입니다. 길을 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며칠간 국경을 넘고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카스트로의 심장을 무겁게 옭아매었다. 지금 자신은 카르노가 아닌, 적국 테라에 있다. 앞 으로 5년간을 살아야 할……. "전하……." 다이크경마저도 재촉하듯 자신을 부르자 카스트로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돌렸다. 냉랭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길을 내주어라." 마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무엇이 죄송한지. 카스트로는 울컥하는 감정으로 조소했다. 다이크경 이 앞으로 말을 몰고 가자, 라에르가 창문의 커튼을 닫으려했다. 카스 트로는 차갑고 불쾌감 어린 목소리로 저지했다. "내버려둬! 그 잘난 한족의 면상이라도 보게." 라에르는 움찔했지만, 결국 한숨을 쉬고 손을 내렸다. 마차가 길 한 쪽으로 움직여갔다. 백여명의 사람과 말이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기묘 한 정적 속으로 마치 혼자만이 살아있음을 과시하듯 마차 한 대가 움 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금세 마차 한 대가 카스트로가 탄 마차를 스치 듯 지나갔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상대편 마차에 탄 감색 머리의 남자 를 볼 수 있었다. 난쟁이 광대를 구경하는 것처럼 입가를 비뚤어뜨리 고 비웃으면서 카스트로를 쳐다보는 한족 남자의 얼굴. 그리고 희디흰 살결을 내보이며 그 남자에게 안겨, 역시 신기한 듯한 눈으로 쳐다보 는 한 여자의 얼굴. 상대의 마차는 카스트로의 마차에 이르러 일부러 인 듯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지나갔다. "저것이 바로 카르노의 막내왕자란다." "왕자요?" "왜, 흥미있느냐? 하지만 빈털털이 왕국의 왕자라, 그다지 쓸모는 없 어." "어머, 그래도 왕자잖아요! 호호호……" 마차 안에서 두 남녀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으라는 듯, 카스트로가 탄 마차까지 들리도록 크다. 카스트로의 목에 푸른 힘줄이 솟았다. 창 백해진 얼굴은 무섭게 굳어있었다. 천천히 마차가 다시 움직여갔다. 백여명이, 수십 마리의 말과 마차가 움직이면서도, 좀전과 같은 침묵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꽈 악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주먹에 와 닿은 이마가 열병이라도 앓는 듯 뜨겁다. 짧은 순간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카스트로의 뇌리에 수치와 분노로 각인되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날 밤, 치체르는 카스트로에게 안내되었다. 결투가 있던 날 이후, 두 사람이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카스트로는 지쳐서 무표정해진 얼굴 로 치체르를 쳐다보았다.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카스트로가 먼저 입 을 열었다. "오늘, 꼭 나를 만나야겠다고 했다던데. 무슨 용무인가? 아직 몸도 성치 않은 것 같은데." 치체르는 아직까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창백한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분에 넘치는 왕 실의사에게 치료받으며, 며칠동안이나 끊임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 다. 자신을 독살하려던 사람이 그 세나라는 하녀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백작이거나, 아니면 휴레시아일 것이다. 흐지부지 넘어간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왕자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죽어가던 자신의 목숨 을 살려준 것 또한 왕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카스트로를 대하고 나서 느낀 감정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미안함, 고마움, 서운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동질감. 낮에 테라의 한족이 했던 말을 치체르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전에 왕자가 마법사에 게 죽임을 당할 뻔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불합리한 감정과도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다른 나라에서 용병일로 벌어먹고 살아도 자신이 카르 노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무게로 자신 은 저 왕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감정이 느껴지지만, 치체르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했다. "이만 떠날까 합니다. 그 동안 전하께서 제게 베풀어준 호의와 배려 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짐만 되어버려서, 정 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하는 치체르르의 녹회색 머리를 보며, 카스트 로는 씁쓸한 미소로 대답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가?" 치체르는 잠시 생각해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용병이니까, 일거리를 찾아야겠지요." "내가 했던 제안은?" "……죄송합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붙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 기에는 지금 자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를 돌 아보았다. "시에타에게 준비해둔 것을 주도록." "네, 전하." 시종장 하미르가 시종에게 지시하는 동안, 카스트로는 다시 치체르 를 돌아보았다. "내가 카르노로 돌아가면 한번 내게 와 주겠나?" 잠시 침묵한 채 카스트로를 쳐다보는 치체르를 마주보며, 카스트로 는 입가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미레야씨네 주점에서 자네 이름을 처음 들었네. 라에르경도 자네 이름을 알고 있어서 내심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지. 어쨌든 한번 만 나고 싶었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다." "저도, 전하를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나에게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해. 그러니까 내가 카르노로 돌아가면, 한번 와주기를 바란다." 치체르는 숨을 들이키고, 눈웃음치면서 장난스레 대답했다.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가서 필요없다고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카스트로는 픽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전신 로마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전하께서도 로마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치체르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힘없이 늘어진 녹회 색 머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이제 더 이상 휴레시아에 미련 두지 않을 것이다. 4년간, 아니 십수년간 묵혀두었던 감정을 내버리자니, 시원하 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아마 앞으로도 여자를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자는 장신구가 아니던가! 치 체르는 유쾌했던 동료의 명언을 되뇌이며 싱긋 미소지었다. 앞으로 할 일은 먼저 동료들을 찾는 것이었다. 뒤따라온 시종에게서 묵직한 주머 니를 받아 챙겨넣으며, 치체르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날들을 낭비해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밤이라고 다시 지체할 생각 은 없었다. 치체르가 천막 밖으로 나가고, 한참동안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있던 카스트로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입밖에 냈다. "그 동안 워낙 많은 일이 일어나서 잊고 있었는데, ……암살된 마법 사를 지키던 기사들의 처벌을 아직까지 미룬 것 같은데……." 라에르는 잊고 있었던 듯, 아차하는 표정으로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페냐경을 추궁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큰 실수를 저지른 기사들까지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왕실의 위엄과 기사 들의 기강을 위해서도 말이다. "지금 처벌하시겠습니까?" 카스트로는 픽 웃었다. "생각난 김에 하지. 가서 그 기사들을 불러오도록!" "네, 전하." 라에르가 천막 밖으로 나가 지시하는 동안, 카스트로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반짝였다. 처벌받기 좋아하는 자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은, 의 외로 재미있는 것이었다. ================================================================== [신군주론] 2장 끝났습니다. ^^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과분한 칭찬을 들으며, 새는 둥둥 떠서 날라다녔다는.. ^^; 3장은 일주일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저번에 시일을 촉박하게 잡아 피본(?) 것도 있고.. 2장 수정볼때는 2장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았는데.. 3장을 볼라니까, 3장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 3장은 이래저래 망설임이 많아지는 장입니다. 연재초에 못박고 넘어갔듯이, 이제부터 비도덕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니까요. (언제는 도덕적이었냐고 물으신다면.. --;) 과연 18금의 장면을 어떻게 은근슬쩍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안면에 철판 두르고 무삭제로.. --; 나갈 것인가. 그 외의 문제도 있고.. 참, 심정 복잡하게 만드는 장이라는... 고민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몇가지 횡수를 덧붙입니다. 먼저, [신군주론]의 장 이름에 대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군주론]의 소제목들은 주로 '...에 대하여' 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목을 [신군주론]이라고 정하는 김에, 걍 장 이름도 재미로(--;) '...에 대하여'라고 붙였다는. 그 앞에 붙는 말들은 전부 제맘대로.. 지어냈습니다. ^^; 그리고 며칠전 올라온 감상 두편을 읽고, 무지 찔끔했다는.. 순정만화..라.. 쩌비.. 새는 만화가지망생이었습니다. (그림 못그립니다, 절대! 제 성에 차지가 않아요. T.T) 인조와 소현세자, 그리고 효종에 얽힌 야사는 새도 좋아하는 이야기중 하나입니다. (특히 인조가 소현세자를 암살하고, 그 일가를 몰락시키는 --;) 쓰면서 그네들의 일화가 문득문득 떠오르기는 했지만, 특별히 그들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닙니다. ^^ [신군주론]의 모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작위로 차출(--;)해 썼습니다. 멋대로 군주님네를 능욕(?)하는 새를 용서하시길..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구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18금의 기로에 서있는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56 - 관련자료:없음 [309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4 21:25 조회:179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6 - ================================================================== 제 3 장 적지에서의 생존방법에 대하여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을씨년스러운 12월의 창공을 회색 깃털을 가 진 새 한 마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특색없이 무채색으로 둘러싸인 볼 품없는 새였지만, 잘만 길들이면 화려한 깃털의 아름다운 새들보다 더 욱 유용하다는 것은 이 새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 였다. 발목에 조그만 통을 매달고 멀리 남동쪽에서부터 날아온 새가 내려앉으려 하는 곳은 레이얄의 최남단, 소렐 공작령의 중심지였다. "꺄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소렐성은 주위를 물들인 눈만큼이나 하얗다. 밤사이 내린 눈을 머리 에 인 상록수들과 앙상한 가지 위에 눈꽃을 피워올린 나무들을 병풍처 럼 두른 새하얀 성은 마치 눈의 궁전인양 고고하고 우아하다. 하늘을 향해 자존심을 세우듯 빳빳이 고개 세운 성의 탑 끝에는 짙푸른색 바 탕에 금색의 원과 육각형의 별이 그려진 무늬의 깃발이 꽂혀있다. 탑 옆으로 뻗은 연한 녹색의 지붕아래 수백 개의 방을 가진 소렐성은 하 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아한 곡선의 철제 난간을 세운 2층 발코니에 두 명의 남자가 나와 있었다. 발코니의 난간에는 방금 전까지 하늘을 날던 회색깃털의 새가 앉아서 고개를 돌리고 부리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이 외투도 없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몰아쳤지만, 누구도 그것에 신 경쓰고 있지 않았다. 정원 앞의 얼음이 얼고 눈이 군데군데 쌓인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 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이 성의 주인 소렐 공작이었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소렐 공작은 남자다운 느낌이 드는 각진 얼굴과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조용한 사색가 타입 의 이 남자가 사실상 레이얄 왕국의 제일가는 세력가라는 사실을 모르 는 사람은 이 레이얄 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대륙의 각국 귀 족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케니아스 미카노르 폰 소렐. 일찍이 레이얄 국왕 바벨 4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바벨 4세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 아나엘라를 아내로 맞 은 행운의 사나이. 후작령이던 소렐은 왕녀가 결혼 지참금과 함께 가 져온 영지들을 통합해 공작령으로 승격되었고, 소렐 공작은 왕녀의 내 조와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금기시 되던 타국의 내전에 간섭한 것도 그다지 큰 장애없이 치를 수 있을 정 도의 권력을 말이다. "글쎄……." 케니아스는 말끝을 흐리며, 눈 덮인 정원을 뛰어 다니는 소녀를 내 려다보았다. 정성스레 치장했던 곱슬거리는 금발머리가 몇 번 눈 위에 뒹굴어버리자 제멋대로 헝클어져 바람부는 대로 휘날리고 있었다. 초 대받은 클렌 백작의 딸과 어울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는 소녀 는 한 점 티없이 웃고 있었다. '루시타니아…….' 애잔한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열 여섯인 무남독녀를 거칠고 사나운 카르노인의 왕자에게 시집보내야 한다. '그렇게 막아보려고 했건만…….' 케니아스는 눈을 감고, 5년 전에 보았었을 카르노의 삼왕자를 떠올 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역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 은 오직 핏줄 선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며 굴복하던 카르노의 국왕, 칼리에르 3세와 그 와중에도 담담하고 당당하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지켜보던 검은머리의 미에라 왕비였다. 미에라 왕비에 대해서라면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대단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기를 머금 은 검날이 목에 들이밀어져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던 강인한 여성이었 다. 그녀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쉬웠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소렐 공 작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다시…… 사람을 보낼까요?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 다." 케니아스는 머리를 저었다. 가느다란 금발머리가 몇 가닥 바람에 말 려 허공에서 춤을 춘다. 케니아스는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를 쓸어넘 기고,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만 두지. 어차피 데릴을 보낸 것은 도박이었어. 내 욕심이 그 젊 은이를 죽인 게야. 더 이상 애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네." 케니아스는 얼마전 시종이 가져다놓은 술병을 들고 술잔에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조르륵 소리를 내며 투명한 크리스탈 잔 속에 채워진 다. "자네도 한 잔 하겠나?" 발코니로 향하는 유리문을 닫고 들어오는 청년에게 케니아스는 돌아 보지도 않고 물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잔에 술을 따른 케니아스는 술잔 하나를 집어 다가오는 청 년에게 건네주었다. 서른 남짓 되어보이는 갈색머리의 청년은 목례를 하고 잔을 받았다. 에리스 리츠. 케니아스의 비서인 청년이다. "더 이상 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와줄 리도 없고, 테리온 에 거의 다 와간다니 지금쯤 도착했을지도. 그러면 어차피 그 자로서 도 우리를 도와주지 못해."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마 이대로……." 말끝을 조심스럽게 흐리는 에리스를 일별하고, 케니아스는 술잔을 든 채 어깨를 들썩했다. 술잔을 입술에 대고 목을 축인 뒤, 힘빠진 목 소리로 대답했다. "일단은 우리도 머잖아 테리온으로 출발해야겠지. 최악의 경우, 정말 로 결혼하게 되더라도……. 폐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케니아스는 힘없이 가까운 곳의 소파에 주저앉았다. 사파이어와 다 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각각 중지와 검지에 낀, 길쭉하고 강인한 느 낌의 손이 술이 든 크리스탈 잔을 들고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지만, 그래도 집무실 안은 어둡게만 느껴진다. "테라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그것이 이제와서……, 나를 이렇 게 궁지로 몰게 될 줄은 몰랐네." "각하……." 케니아스는 잔 안에 든 술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이 아릿할 정도의 술기운에 눈살을 찌푸리고, 답답한 듯 숨을 길게 뿜어냈다. 주 향이 짙게 배어난다. "후우, 내가 카르노 왕자의 장인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나. 테 라로 가야겠어. 가서 대체 그 음흉한 한족놈들 속셈이 뭔지도 알아보 고," 불쾌감으로 비틀리는 입술로 심술궂게 덧붙였다. "그래, 장차 내 사위 될 녀석도 봐야겠지. 대체 뭣 때문에 한족놈들 이 협박까지 해대며, 내 딸과 결혼시키려하는지!" 에리스는 침착하지만 가라앉은 눈으로 케니아스를 지켜보았다. 그가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는 그가 딸을 대하는 모습을 한번만 보아도 충 분히 알 수 있었다. 몸이 약한 아나엘라 왕녀는 난산 끝에 루시타니아 공녀를 낳은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후계자를 원하는 소렐 공작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결국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가문과 재능, 인품을 고루 갖춘 사윗감 을 찾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에리스는 알고 있었다. 그 오랜 바램을 알기 때문에, 에리스는 지금 소렐 공작의 참담한 심정 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서둘러 준비시키도록 하게. 최고급 재단사를 불러 대륙 제일의 멋진 웨딩드레스를 만들라고 해! 레이얄 최고의 세공사를 불러 들이게. 두 달 내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테라로 갈 수 있도록. 알겠 나?" "네, 각하." 에리스는 몸을 긴장시키고, 고개를 숙였다. 두 달 내로 모든 것을 준 비하려면,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테라력 695년 12월 26일. 아르노에서 테리온까지 20여일의 길고 험난한 여정을 거친 카르노의 삼왕자 일행은 칼날같은 바람을 맞으며 테라의 수도 테리온 성밖에 도 착했다.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자그마한 산, 성산(聖山)이라고 불리는 테라를 목전에 둔 일행의 발길은 또다시 불유쾌한 장애를 만나 잠시 멈추어져있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친위기사들의 수만 해도 저희 측에서는 많이 양보한 것입니다." 몇 달 전 카르노에 사신으로 와서 안면이 있던 마키아 폰 가스티오 네는 성문 앞에 서서 난처한 모습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난처한 모습 이라고는 하지만, 밀짚색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 기 측의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전에 느꼈던 그 밉살스런 감정이 새삼 카스트로의 심장에서 꿈틀하고 되살아난다. "이런 것쯤은 진작에 설명하셨어야지요, 로페냐경." 게다가 이런 일을 미리 설명하지 않은 로페냐의 탓이라는 듯, 정말 로 곤혹스러워하는 로페냐를 나무라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 먼길을 호위하며 와준 기사들을 이대로 성문 밖에서 내 쫓아버리겠다는 거요, 마키아경? 그것이 테라가 손님을 맞는 예법인 가?" 카스트로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가스티오네를 쏘아보았다. 그 큰 키 와 위압적인 분위기를 정면으로 대하면서도, 가스티오네는 교묘한 언 변으로 카스트로를 구슬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테리온 성안으로 무장병력이 30명 이상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수백 년전부터의 전통입니다. 그 전통이 깨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전 하께만 부당하게 이러는 것이 아니라, 테라에 오셨으니 테라의 법도를 따라주십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짢아하는 카스트로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보다못한 다 이크경이 카스트로에게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무사히 테리온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저희의 소임은 끝났습니다. 저희가 테리온에 들어가나 안들어가나 그것은 상관없습니 다. 앞으로의 호위는 친위대의 소임인즉, 저희 기사단은 이만 카르노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묵묵히 다이크경을 바라보던 카스트로는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가스 티오네를 노려보았다. 정오가 훨씬 넘어가는 시간이지만, 태양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벌써 몇시간째 이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 지 모른다. "좋소. 내가 양보하지.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 하시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가스티오네를 보며, 카스 트로는 악의마저 어린 악동같은 미소를 그렸다. "아직 점심식사를 하지 못한 내 나라 기사들에게 테라의 진수성찬을 맛보게 하고 싶소. 원래는 오늘밤 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먼길을 온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테라의 이국적인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시 게 해주려고 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점심이나 배부르게 먹 여주고 싶소. 물론……." 말끝을 일부러 끌며 카스트로는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가스티오 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정도의 손. 님. 대. 접. 은 해주시겠지지요, 마키아경? 만약 그런 약조를 해주시지 않는다면, 차마 저 지친 기사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 질 것 같지가 않소." 손님대접이라는 단어를 교묘하게 강조한 말의 뜻을 새기며 가스티오 네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막았다. 입매가 웃으려는 듯 올라가 있지만, 완벽하게 웃는 얼굴을 연기하는 것을 실패해서 기묘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카스트로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기사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고 들어가려고 하오만, 몇시간째 이 러고 있으니 대신관님께서 너무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오." 짐짓 대신관을 걱정해주는 척까지 하는 카스트로의 능청스러움에 라 에르는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느라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고, 로페냐 는 기어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난처한 표정의 다이크경이야 어 찌되었든, 뒤에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기사들 사이에서는 환호성 마저 터져나왔다. 카스트로가 하는 말의 뜻은 간단했다. 30명 이상 되 는 기사들에게 맛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도록 빠른 시간 내에 가져올 것. 그리고 그 비용은 손님대접을 위해 테라측에서 부담할 것. 하지만 카스트로의 말대로 대신관이 몇시간씩이나 기다리는 중이라 테라 정부 에 보고하고 말고 할 시간이 없으니, 사실상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가 스티오네가 그 식비를 부담해야 할 것이다. 물론 테라 정부의 손님접 대라는 명목으로. 가스티오네는 먹성좋아 보이는 산만한 덩치들의 기 사들을 훑어보며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저들이 얼마나 먹어댈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바쁘지 않소, 마키아경?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성안으로 바삐 들어갈 이유 같은 건 없소.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지. 그럼 생각이 정 리되면 말씀해주시오." 카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미련없이 몸을 돌려 마차 안으로 들어갔 다. "자, 잠깐만 기다려……." 가스티오네는 반사적으로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라에르에 의해 냉혹하게 밀쳐졌다. "전하의 옥체에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당신이 테라에서 어떤 지 위에 있더라도,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댄다면 나는 가차없이 당신을 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테라정부에서도 뭐라 추궁하지 못할 테지요." 왠지 섬뜩해져서, 가스티오네는 손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라에 르는 싸늘한 눈으로 가스티오네를 일별하고, 곧장 카스트로의 뒤를 따 랐다. "하하하하……, 역시 멋있단 말이야. 과연 내가 첫눈에 반할만 하지 않은가!" 화풀이할 곳을 찾던 가스티오네의 사나운 눈초리가 배를 끌어안고 웃어대는 로페냐의 얼굴에 가서 살벌하게 꽂혔다. "뭐가 그렇게 웃기시오, 로페냐경! 경이 처음부터 잘 설명했다면 이 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로페냐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피싯거리는 얼굴로 가스티오 네를 쳐다보았다. "뭐, 내가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의 사태는 경의 탓인 것 같습니다만. 괜히 애꿎은 사람 탓하지 마시오. 그러면 나도 잠 깐 실례하겠소. 그나저나 제이리트님께서 오찬을 준비하셨다면, 꽤나 언짢아하시겠는걸?"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덧붙이며 로페냐는 카스트로가 들어가 있는 마차에 올랐다. 가스티오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스 틱을 들어 옆에 서 있던 비서의 배를 푹푹 찔렀다. "뭐하는가! 당장 가서 30인분, 아니 50인분 정도의 식사를 준비해오 게!" "하지만 돈은……." 가스티오네는, 스틱에 찔려 몸을 엉거주춤하게 움츠리고 얼굴을 찌 푸리면서도 여전히 미련하게 구는 비서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며 빼액 소리질렀다. "내 이름을 대고 나중에 준다고 그래! 빨리 움직이지 못해!" "네, 알겠습니다, 마키아경." 허둥지둥 달려가는 비서를 보며 가스티오네는 이를 북북 갈았다. 이 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허무하게 당하는 것은, 외교관 생활 20여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참동안 애꿎은 이만 갈아대던 가스티오네 는 한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음침한 미 소를 띄우며 곁에 있던 부하를 스틱으로 툭 쳤다. "신전으로 가서 지스카르 전하를 모셔오게. 제 형이 달래면 좀 달라 지겠지. 후후훗." "알겠습니다." 말을 타고 신전으로 가는 부하를 뒤로하고, 가스티오네는 앞으로 스 틱을 짚으며 턱을 치켜올리고 마차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기세가 드 세다면 기세를 꺾으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5년간, 아니 어쩌면 그 이 상의 길고 긴 시간동안 저 건방진 왕자는 겸손과 양보라는 미덕을 배 워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위의 두 형들처럼! ================================================================== [신군주론] 3장 시작합니다. 일주일간 3장을 수정보고 정리하면서, 결론이 뻔한 고민을 하느라고 수많은 머리카락을 희생해버렸다는.. --; .. T.T 과연 이런 내용도 괜찮은 건지.. 왜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적어도 소설 안에서는 교묘하게도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지. (바람둥이도 순결을 유지하더라. --;) 결혼을 해도 맨마지막에 엔딩으로 결혼식만 나오거나.. 맨 처음에 첫날밤도 지내지 못하고 깨져야 하는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결국은 이제와서 내용을 바꿀수도, 바꿀 마음도 없지만.. (엄두를 못냄 --;) 어제 수정을 마치고, 하루 쉬는 동안 얼마나 사람을 들볶는지. 결국 새는, 그 유명한 '배째'정신으로 무장.. --; 막가파의 계보를 잇기로.. (T.T) 18금의 장면은 없습니다. (수정하면서 잘라냈습니다. --;)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제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어서, 괜한 걱정은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냥 안이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비도덕적인 글이라고 못박아 두기도 했고.. --; 그래서 그냥 무작정 갑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많아서 수다가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감상과 추천해 주신분들께 감사를.. "나 요즘 기분이 너무 둥둥 뜨는 것 같아." 랬더니, 친구 왈, "걱정마, 내가 자근자근 밟아줄게." --; 친구 맞아?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걱정으로 날린 머리카락을 추모하는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57 - 관련자료:없음 [3099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5 21:23 조회:170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7 - ================================================================== 마차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식이 도착했나 싶었지 만, 카스트로는 곧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하." 다이크경의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조금 들뜨고, 조금 당 황하는 듯한. 카스트로가 눈짓하자, 라에르가 마차의 커튼을 조금 열었 다. "밖에 지스카르 전하께서 찾아와 계십니다." "……! …지스카르 형이?" 한 박자를 놓치고 반문한 말은 반가움에 환호한다기보다는, 뭔가 이 게 아닌데 하고 떨떠름해하는 말투였다. 카스트로는 미간을 접고 심각 하게 마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근 5년만에 만나는 형이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동생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려고 처음부터 마중 을 나온 것도 아니고, 가스티오네와 그런 마찰이 있은 뒤에야 온 것이 께름직한 것이다. "전하, 지스카르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이크경의 재촉을 받고 카스트로는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물론 아베르노의 달라진 모습에 질려버렸던 터라, 지스카르가 자신이 알던 예전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는 순진한 착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 만 어쨌든 만나보아야 하고, 또 반가워해야 하는 형이 아닌가. 어찌 되 었든 형은 형이니까.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모 피로 만든 폭신폭신한 모자와 코트사이로 어김없이 찬바람이 몰아친 다. 나지막한 성벽 주위로 경비병들과 가스티오네의 일행들이 늘어서 있었다. 카스트로는 그들을 스쳐보다가 가스티오네의 옆에 있는 남자 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낯이 익은 그 남자도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그가 바로 지스카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삼왕자궁에 걸려있던 초상화 속의 아버지, 칼리에르 3 세의 모습과 대단히 닮아있었으므로. 물론 초상화 속 아버지보다는 훨 씬 젊지만, 그것은 알아보는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조금 전까 지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사실은 조금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단번에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형!" 외쳐 부르자, 지스카르가 알아듣고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지스카르가 먼저 앞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카스트로!" 앞으로 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앞에 두고 보는 것은 감정상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아르노에서 아베르노 를 맞았을 때와는 달리, 낯선 적지 한가운데서 가까운 혈육을 만난다 는 것은 사뭇 느낌이 틀렸다. 뭉클하는, 그립고도 아린 감정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다소 급한 걸음으로 지스카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카스트로……." 지난 4, 5년간 바뀐 모습을 살피고 할 겨를도 없이 카스트로는 감정 에 떠밀리듯 형을 덥썩 껴안았다.   "형……!" 등을 마주 안아오는 팔이, 달래듯이 토닥거려주는 손길이, 자신을 받 아주는 형의 품이 눈물이 날 정도로 포근했다. 더욱 힘주어 매달려오 는 동생을 안아주며, 지스카르도 가슴이 뭉클해오는 것을 느꼈다. 여전 히 어리광부리는 모습이 옛날과 다를 게 없었다. 못말리는 장난꾸러기 에 고집쟁이 카스트로. 이제는 무덤덤해진 무료한 적지에서의 나날 중 에 이렇듯 감정적이 된 날도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정말 오랜만이다.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 른다. 이제 얼굴 좀 보여주지 않겠니?" 부드럽게 사근사근 말하는 톤이 어린애를 달래는 어른 같았다. 카스 트로는 그제서야 자신의 감정적인 행동을 깨닫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작 20여일 동안의 여행기간동안 형편없이 여려진 자신이 느껴진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숙이고 지스카르에게서 조금 몸을 떼어냈다. "음……,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색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카스트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스 카르는 순간 킥!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카스트로는 또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게 있나 싶어 더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전하구나.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은 4년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조금 걱정했었거든." 고개를 든 카스트로의 시야에 환하게 웃는 지스카르의 모습이 들어 왔다. 왠지 편안하게 웃는 것 같아, 카스트로는 자신의 실수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마주 웃어버렸다. "키가 아주 큰데? 아마 테리온에서 네가 제일 클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카스트로는 머쓱하게 미소지었다. 확실히 아베르노와는 분위기가 틀 렸다. 지스카르의 분위기도, 그를 대하는 카스트로 자신의 태도도. 하 지만 카스트로가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 분위기를 깨뜨리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스카르 전하. 하실 말씀이 계시지 않습니까?" 지스카르는 흠칫해서, 슬쩍 고개를 돌려 가스티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짓으로 무엇인가를 재촉받고는 난처한 얼굴로 카스트로 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카스트로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스카르의 타이르는 듯한 말 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냐. 벌써 오래 전부터 대신관님께서 너 를 기다리고 계신단다."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카스트로는 지스카르의 어깨너머로 가스티오 네를 쏘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가스티오네는 어깨를 으쓱하고 콧수 염 달린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지어 보인다. '저 너구리같은 중늙은이가!' 저 밉살스런 테라인의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짚었다, 중늙은이!' 명령이라면 모르거니와 인정에 밀려 양보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 다. 그리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국왕 칼리에르 3세 와 왕세자 아베르노뿐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곳에는 없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만 들어가자꾸나. 네게 소개해줄 사람도 많 고……."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회유의 말을 끊고, 카스트로는 고집스런 눈 빛으로 가스티오네를 노려보면서 딱딱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웬만하면 그리하겠으나, 예상보다 여행길이 길어 진데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저를 호위해준 기사들에게 차마 이대로 돌아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키아경께서 마침 지금까지 수 고해준 기사단원들을 성심껏 대접하겠다고 하셨으니, 기사들의 만족스 런 얼굴을 보아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 곤혹스러운 얼굴로 카스트로를, 그리고 가스티오네를 번갈아 바라보 는 지스카르에게, 카스트로는 더욱 힘을 주어 강조했다. "미흡하나마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 합니다만, 그것도 불가하다 하십 니까? 먼 여정에 지친 기사들에게 그 정도도 안 된다 하시면, 차라리 저도 기사들과 함께 굶고 이 성밖에서 노숙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손 님으로 온 사람들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는 테라를, 제가 어떻게 믿고 5년이나 살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믿을 수 있는 기사들과 함께 눈밭에서 몸을 쉬겠습니다." 지스카르는 물론 가스티오네도 입을 저억 벌리고 말았다. 이렇게 말 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다. 이후 두 사람의 태도는 천양지차로 바뀌었지만, 이 순간만은 똑같 이 놀랍기만 했다. "쿡……, 푸후후후훗, 아하하하하하하하………."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점점 커다랗고 호쾌하게 울려 퍼 진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줄만 알았던 지스카르가 배를 끌어안고 폭소하는 것을 보며, 가스티오네는 다시 한번 당혹스러워졌다. "아아…… 정말, 바뀐 게 하나도 없구나, 카스트로. 여전히 고집쟁이 에, 말썽꾸러기. 키만 컸지, 세월이 너만 비껴가는 것 같구나." 지스카르는 카스트로의 모자를 벗기고, 귀엽다는 듯이 슥슥 머리를 쓸어준다. 자신이 아이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 는 카스트로를 보며, 지스카르는 다시 한번 카스트로를 품에 끌어당겼 다. "변하지 말거라. 너는 변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당당 하고 고집스러운 내 동생, 카스트로로 있어주렴." 지스카르는 자신의 어깨에 카스트로의 얼굴을 묻게 하고, 카스트로 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스트로의 몸이 움찔했지만, 지 스카르는 다시 한번 힘주어 껴안고는, 슥 몸을 밀어내었다. "보셨다시피 나도 이 아이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소. 옛날에도 그랬 으니 지금이라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오, 마키아 경." 지스카르가 깨끗이 물러나겠다는 몸짓을 해보이며 한발 뒤로 물러서 자, 마키아경은 욹으락붉으락하는 얼굴로 죽일 듯이 두 형제를 노려보 았다. 절대 이런 상황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예상대로라면 지스카르가 카스트로의 행동을 꾸짖고, 풀이 죽은 카스트로가 군말없이 신전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상급자에게 절대 적으로 충성해야하는 카르노인의 풍습이, 왜 저 두 왕자에게서 빗겨가 야 한다는 말인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기사들의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형과 함께 회포를 풀 어야겠소. 기사들의 식사가 도착하면 알려주시오, 마키아경." 말을 잇지 못하는 가스티오네 대신, 카스트로가 상황을 종료시켰다. 지스카르의 손을 잡아끌고 마차로 가자 지스카르는 즐거운 얼굴로 따 라온다. 가스티오네는 경계의 눈초리로 살벌하게 쳐다보는 라에르 때 문에 붙잡지도 못하고 이를 북북북 갈아대고 있었다. 성산 테라. 아직 대륙이 분할되기 전인 자피카 제국의 혼란기에 국 교로 인정받은 케테르교의 성지(聖地)로, 그들이 말하는 주신 케테르와 그 아들인 자디크, 그리고 자디크와 인간여자의 아들인 한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다. 저 감색머리와 감색눈을 가진 한족들은 모두 한 의 후손이라고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주신에게까지 이른다는 것을 대 단한 긍지로 아는 오만한 종족들이다. 카스트로는 기어이 기사들이 배를 두드리며 나가떨어질 때까지 지켜 보고서야, 다이크경과 그 휘하 기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신의 마차 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푸노산보다는 조금 높을 듯한 테라는 산중턱부터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산정상으로 향하는 네모반듯한 돌계단을 올려다보니, 이것은 사람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다. 끝도없이 이어진 길고 긴 돌계단들은 보는 것만으로 카스트로를 질리게 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지스카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젓는다. "유감스럽게도." 카스트로는 기가 막혀서 멍하니 계단만 올려다보았다. "올라가시지요. 산 정상의 신전에서 대신관님과 한족 5가문의 수장 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얄밉게 끼어드는 가스티오네였다. 고소하다는 듯한 표정인 것은 단 순히 눈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카스트로는 그를 쏘아보며 불퉁스럽 게 내뱉었다. "마키아경께서 앞장서시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가스티오네는 사양하는 듯 하면서도 날 듯이 앞장서고 있었다. 얼마 나 많이 계단을 올랐는지, 그다지 힘든 기색도 없이 오르고 있었다. "우리도 오르자." 지스카르의 재촉을 받아, 카스트로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계단으로 옮겼다. 카스트로의 뒤를 따라 오르는 사람은 라에르를 비롯한 친위대 원 십여명과 시종장 하미르에게 뽑힌 시종 다섯명, 그리고 사신단의 대표와 부대표인 로페냐와 마로니아경, 그리고 지스카르의 뒤로 호위 기사인 듯한 남자 한 명이 더 따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었지만, 카스트로는 갈수록 몸 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욱씬거리고 있 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거칠게 숨을 내쉬는 카스트로를 바라보며, 라에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카스트로는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노려보았다. "카스트로? 힘든 거니? 그럼 조금 쉬었다가……."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카르노인들의 체력이 대단하다 고 들었지만, 다 부풀린 말이었던 게지요?" 지스카르가 염려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스티오네가 슬쩍 끼어들었 다. 카스트로는 숨을 몰아쉬며 가스티오네를 쏘아보았다. "전하께서는 며칠 전 목숨이 위중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 다. 상처가 아물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무리한 움직임은 불가능하십 니다. 그런데, 이따위 계단으로 사람을 농락하다니요! 지나치신 말씀, 사과해주십시오." 마키아경은 살기를 품고 노려보며 말을 내뱉는 라에르의 기세에 눌 려 얼굴빛이 핼쓱해졌다. 지스카르는 굳은 얼굴로 카스트로를 들여다 보았다. 창백하고 땀이 번질거리는 얼굴이 가만히 보기에도 상태가 심 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소리냐? 목숨이 위중할 정도의 상처라니? 그러잖아도 오겠다 던 날보다 꽤 늦어져서 걱정했더니……. 지금은…… 괜찮은 거냐?" 로페냐는 괜히 자신의 잘못을 추궁받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며 걱 정과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숨을 고르고, 시종장 하미르가 부축하며 땀을 닦아주는 것을 물리치며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다시 출발하지요." "카스트로……." 지스카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카스트로는 파랗게 질린 입 술에 미소를 띄웠다. "이 정도로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테라인에게 조롱 받을 정도면 차 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가스티오네에게 가서 꽂혔다. 가스 티오네는 속앓는 소리를 삼키며 내키지 않는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 다. "제가 사정을 모르고 성급하게 내뱉은 말에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다소 늦더라도, 대신관님께서는 너그러우시니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 다." 조금전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발언 이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억지로 자존심을 죽인 가스티오네의 기분이 빤히 들여다보였기도 하고, 그것보다 카스트로의 상태가 걱정스럽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 쉬었다 가십시오. 이대로는 무리십니다." 라에르가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다 하지 않았나? 내가 앞장서야 하겠소, 마키아경?" 카스트로는 날선 목소리로 고집을 부렸다. 가스티오네의 말이 상당 히 자존심을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다들 난감해하며, 다시 한번 비난의 화살을 가스티오네에게 꽂아버렸다. 가스티오네는 화가 나서 펄쩍 뛸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 버르장머리없는 왕자는 왜 자신을 골탕먹이지 못해서 안달이란 말인가! 그만큼 사과를 했으면 되었지, 또 뭘 바란단 말인가! "정 올라가셔야겠다면, 제게 업히십시오." "뭐?" 카스트로는 자신의 팔을 잡아 어깨에 두르는 라에르를 보며 눈에 띄 게 당혹스러워했다. "제가 전하를 업고 산정상까지 뒤쳐지지 않고 올라간다면, 마키아경 이 하신 말씀은 허언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키아경께서 하신 말 씀은 카르노인의 체력이지, 전하의 체력만 일컬은 것이 아닙니다. 제게 업히시면, 전하께서도 마키아경께서도 만족하실 게 아닙니까? 그러니 까 제게 업히십시오." 고집스럽게 들이밀어지는 라에르의 등을 노려보며, 카스트로는 입술 을 꾹 깨물었다.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라에르가 자신을 업고 저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무리다. 아니 그전에 카스트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됐어! 여기서 쉬었다 가면 되겠지? 나를 업겠다는 따위의 말은 그 만둬!" 카스트로는 잡힌 팔을 떼어내며 시종장 하미르가 계단 위에 펴놓은 외투 위에 앉았다.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러섰 다. 카스트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라에르를 쏘아보았지만 라에르는 입가에 미소까지 달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번인가 멈추었다가 다시 오르기를 되풀이한 끝에, 거의 한시간이 다 지나서야 산 정상에 다다 를 수 있었다. ================================================================== 인간의 암시능력(?)은 의외로 뛰어나서.. ...한참 달게 자다가, 9시쯤 되니까 저절로 몸이 깨어진다. '글올려야 되는데. 아직 늦지 않았겠지?' 라고.. --; 좋은 하루 되세요.. ^^ - 아직도 졸린 눈을 비비는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58 - 관련자료:없음 [3101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6 23:12 조회:174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8 - ================================================================== 성산 테라의 정상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신전과는 다른 형태의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 끝부터 이어지는 돌로 된 길을 따라가면 세 개의 계단 위에 카르노 왕궁의 예배당에서 보았던 문양, 동그란 원 안에 파란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태극이라는 문양이 그려진 갈색바탕 의 대문이 있었다. 대문의 앞쪽으로는 나무기둥 4개가 받치고 있었고, 다닥다닥 세 개가 나란히 붙은 대문은 주재료를 목재로 해서, 문 하나 하나마다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대문 위에 올려진 지붕은 자그마한 기와로 촘촘하게 이어져있고, 지붕의 선은 날렵한 유선으로 휘어져있 다. 지붕 옆으로 산 정상을 빙 둘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낮은 돌담들이 이어져있었는데, 그 돌담 위에까지 지붕이 씌워져있었다. "들어가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가스티오네가 말하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앞을 양보한다는 의 미였다.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카스트로는 특이한 건물들과 맑은 종소리에 주의를 빼앗긴 채 발을 내딛었다. 끼이익--! 불협화음이 들린 것은 세 개의 계단을 몇 발자국 앞에 남 겨두었을 때였다. 가운데의 제일 커다란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그 안에서 흰색 신관복을 입은 감색머리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좌우에는 문을 연 문지기들이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한족!' 카스트로는 손에 땀이 배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시작이다. 가스티오 네와 실랑이를 벌이고 힘든 계단을 올라오면서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 같은 것이 이제서야, 한족을 눈앞에 두고서야 몸으로 와 닿았 다. '이제 적지 한복판이다!' 긴장감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그 한족을 쳐다보았다. 한족은 소리없 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조용 하고 차분한 몸놀림은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야로비 후작 로페냐가 한족의 비제님께 인사올립니다." "사이카 자작 마로니아, 한족의 비제님께 인사올립니다." 비제라고 불린 한족 소년은 카스트로의 앞으로 와서, 로페냐와 마로 니아경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에 있 는 카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전하이십니까?" 맑은 미성을 내며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족의 모습 은 마치 어른을 올려다보는 아이같았다. 카스트로는 한족을 마주 내려 보다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다시 그 한족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한족이라는 종족은 감색 머리와 감색 눈이라는 공통적인 외모를 하 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비제라는 한족은 감색 눈 대신 청록색의 기이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대신관 제이리트님의 제자인 류가문의 비제입니다. 제이리트님의 명을 받들어, 카스트로 전하를 신전 안으로 안내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생글생글대던 비제는 말을 끝내자, 환하게 미소지으 며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 카스트로는 당혹스럽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비제를 마주보고 있었 다. 눈앞의 한족 소년이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한두살박이 아기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웃느라고 조그맣게 된 눈매사이로 수많은 반짝임 이 일렁이고, 젖비린내가 날 것 같은 작고 예쁘장한 얼굴은 아기피부 처럼 뽀얗다. 체리처럼 빨갛고 탄력있는 입술은 하얀 치아를 살짝 내 보이며 아기천사같은 해맑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흠, 흠, 카스트로 전하?" 뒤에서 가스티오네가 무언가를 재촉했지만, 카스트로는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만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비제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비제는 자신을 뚫어보려는 듯한 카스트로의 시선에 난처한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카스트로는 그것도 아기처럼 귀엽다고 생각했다. "꼭 필요한 인원만 선별해서 따라와 주십시오." 뒤에 서 있던 라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히 줄였다고 생각합니다." 비제는 시선을 돌려 라에르를 보며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당신 한분만 따라와도 충분합니다. 물론 카스트로 전하의 신변은 완벽히 보장될 테니 굳이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무래도 안심 하실 수 없으신 것 같으니까요. 시중을 들 사람은 따로 필요없습니다." 카스트로의 눈썹이 꿈틀 치켜올라갔다. 라에르는 긴장된 모습으로 비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카스트로. ……신전 안에서는 피를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신변안전 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지스카르의 말이었다. 카스트로는 지스카르를 돌아보았다. 진지한 눈 빛으로 믿어달라는 뜻을 비추는 모습을 보고,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 였다. 라에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른 친위대원들과 시종들에게 기다 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비제는 예의 그 천진스러운 미소지으며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단층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 역시 주재료를 목재로 해서, 주춧돌과 계단, 그리고 지붕의 기와만 빼면 전 부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선명한 초록색의 격자무늬 문들이 거의 기둥만 빼고 빽빽이 채워져 있었고, 커다란 건물들의 지붕과 처 마에 걸쳐 자피아어가 아닌 것이 분명한 글씨가 쓰인 액자가 달려있었 다. 색다른 건물들에 정신이 팔려 무의식적으로 비제를 따라가던 카스 트로는, 문득 눈앞에서 찰랑거리는 감색 머리에 시선을 두었다. 종아리 까지 땋아내린 머리가 빛을 머금은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문 득 이 비제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몇 살일까? 열 여섯? 일곱?' 아무리 봐도 자신의 위라고는 볼 수 없다. 자그마한 키도 키려니와, 저 젖비린내 날 것 같은 피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닥에 끌릴 듯한 흰색의 신관복이 소리없이 미끄러진다. 어떻게 저런 걸음걸이가 가능 한지 알 수 없었지만, '한족이니까'라고 생각해버렸다. 한족은 워낙 특 이한 종족인 것이다. '하지만 저 청록색 눈동자는…….' 혼혈인건가? 한족과 인간 사이에 혼혈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지 만, 저 감정이 풍부해 보이는 청록색 눈동자는 그 외의 다른 설명을 불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 무표정한 무기질의 감색 눈보다 훨씬 사람 다워 보이고 예뻤다. 무엇보다 미소지을 때의 명멸하는 빛무리는 감탄 스러울 정도다. 카스트로는 지금까지 저렇게 예쁜 눈을 보지 못했다. 아니 저렇게 웃는 모습이 순수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면, 저절로 따라웃어버리고 싶어지는 미소였다. "……!" 문득 자신의 정처없이 떠도는 생각을 인식한 순간, 카스트로는 스스 로에게 당혹스러워졌다. 남자보고 예쁘다? 따라 웃고 싶다? 카스트로 는 드디어 자신의 이성이 자신의 머릿속을 탈출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너무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생각 들을 한켠으로 처박아버리며, 카스트로는 다시 주위에 시선을 던졌다. 건물들 주위에는 색바랜 잔디와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 그리고 군데 군데 쌓인 눈더미들이 보였다. 건물들은 몇 개씩 무리져서 담과 중간 문으로 가로막혀있어, 건물들은 몇 개씩인가의 건물군으로 분리되어있 었다. 중간문을 세 개나 지나서야 비제는 걸음을 멈추고 도착을 알렸 다. "제이리트님,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안으로 모셔주십시오." 비제는 앞서서 문을 조용히 열었다. 카르노의 왕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그곳에는 열 사람 정도가 모여있었다. 말의 키까지 계산해서 높이도 넓이도 크게 한 대륙의 다 른 건물들과는 달리 테라의 신전은 순수하게 사람만 들어오도록 만들 어진 모양인지, 머리위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어서 오십시오. 케테르님의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대표로 인사말을 건넨 사람은 긴 탁자의 상석에 서있는 흰색 신관복 의 남자였다.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말한 저 자 가 바로 대신관 제이리트라는 한족이라는 것을. 하지만 카스트로는 의 혹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제가 바로 케테르님의 제일사제, 대신관 제이리트입니다." 케테르의 대신관 제이리트. 어지간히 한족을 싫어하는 카스트로라도 그 이름쯤은 오래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었다. 최근 에 들어서는 거의 자피아 대륙의 판도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자의 이 름이었다. 그는 카스트로가 태어났을 때도 대신관이었고, 그 끔찍했던 12살의 여름에도 대신관이였으며, 18살이 되어 가는 지금에도 대신관 인 자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일 것이라고 생각해왔 었다. 하지만 대체 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은 뭐란 말인가! 잘 봐줘야 스물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카스트로의 의혹을 풀어주려는 듯, 굳이 '제가 바로' 라는 말을 앞에 넣어 자신을 소개한 제이리트를 보며, 카스트로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을 놀리려는 것이 아닐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유치한 장난을 할 리는 없지만, 그런 생각까지 드는 카스트로였다. "카스트로……." 옆에서 지스카르가 살짝 팔뚝을 건드린다. 카스트로는 일단 인사말 을 건넸다.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입니다." 그윽하게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제이리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제이 리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 했다. "지가문의 수장 세크리트님이십니다." 왼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자를 가리켜 보인다. 신관복을 입지 않 았지만 그와 유사한 형태의 복식을 입고 있다. 신관복보다 밑단이 짧 고, 색깔이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일까? 세크리트라고 소개된 남자 역 시 갓 스물에서 스물 두세살까지로 보이는 젊은 남자로 푸른색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세크리트 지입니다." 다소 오만한 눈빛과 가파른 얼굴 윤곽이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카스 트로는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류가문의 수장 레위제님이십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있는 남자를 소개한다. 무뚝뚝하게 다물어진 입 술은 열릴 줄 모르고, 슬쩍 고개짓만으로 인사를 생략한다. 개중에 나 이가 들어보이는 모습으로, 서른살에서 마흔살 사이로 보인다. "시가문의 수장 제피스님이십니다." "테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폼이 제이리트와 유사하다. 역시 이십 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세크리트의 옆에 서 있는 자였다. "오가문의 수장 체이스트님이십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가문의 수장 로스민님이십니다." 좌우로 번갈아가며 한사람씩 소개한 제이리트는 뒤이어 한족이 아닌 자들을 소개했다. "테라의 행정을 맡고 계신 수상 유스 라니엘 백작." 비정상적으로 젊은 한족들에 비해 제대로 된 연륜을 가진 것으로 느 껴지는 50대 초반의 남자가 사교적인 미소로 인사했다. "라니엘 백작 유스입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부디 테리온에서의 생활이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짧막짧막한 한족들의 인사에 비해 장황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카스 트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도 그러길 바라오." 머쓱한 미소를 짓는 라니엘 백작을 일별하며, 다음 소개된 자를 쳐 다보았다. "테리아의 교장이신 마리아나 쾨르니 후작." 카스트로는 제이리트를 소개받을 때 이후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내 었다. 솔직히 쾨르니 후작 본인에게라기보다 그가 관리하고 있는 학교 테리아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쾨르니 후작 마리아나입니다. 테리아에서 학업을 유지하는데 있어, 불편한 점이나 의문나는 점이 있다면, 거리낌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좋든 싫든 앞으로 5년간은 테리아에서 유학해야할 것이다. 자신을 테라에 불러들인 본래 목적이야 어쨌든, 명목은 테리아에서의 유학이 었으니까. 제이리트는 그 뒤에도 두 사람의 직책, 작위 그리고 이름을 소개했지만, 카스트로에게는 별로 관심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제이리 트는 꽤나 세심하게 카스트로에게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카스트 로가 머물 저택과 유지비를 신전에서 부담하겠다는 것과 도움이 필요 하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것, 그리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 안 유용한 지식을 많이 얻어가라는 등의 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카스트로의 테라 소환은 마치 순수한 의미의 호의적인 유학으로 보였 다. 물론 카스트로는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더 일찍 오셨다면 천천히 오찬을 즐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지 만,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마련한 저택으로 가서 짐을 푸시는 것만으로 도 시간이 빡빡하겠군요.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 기로 하지요. 전하께서 머무실 저택은 저의 제자님이신 비제님께서 안 내해드릴 것입니다." 한족들의 이름이나 직함 끝에 붙이는 '님'이라는 말이 경칭이라는 것 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칭을 제자에게까지 한다는 것은 무척 의 외였다. 자신의 경우야 스승보다 신분이 위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신분 이 같은 한족사이에 스승이 제자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한다는 게 특이 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서로를 존중한다는 뜻인가?' 희한한 종족들이었다. 자칭 신의 후손이라 칭하는 자들.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사람들과는 확실히 틀린 구석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로페냐경과 마로니아경께서는 잠시 남아주십시오. 그리고 지스카르 전하께서도 잠깐 남아주시겠습니까?" 의례적인 작별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제이리트가 로페냐들과 지스카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로페냐는 미리 짐작했던 듯, 가볍게 대답하고 카스트로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 전하의 환영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뵙겠 습니다." 카스트로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지스카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서 보자꾸나. 소개시켜줄 사람도 있고……." 말끝을 흐리는 지스카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잠시간의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비제를 따라 신전 밖으로 나갔다. 지 스카르에게 뭐라고 할지는 몰라도 로페냐는 아마 여행이 늦어진 일과 그 경과에 대한 보고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에 대한 감시결과도. 한 달이 넘게 보아왔어도, 그렇게 수많은 친구되기 공격을 받아왔어도, 역시 한 가닥 의심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더 구나 여행 후반에 있었던 마법사에 대한 고의인지 우연인지 모를 실수 들을 생각하면,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는 말 그대로 적지 한복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를 무턱대고 믿는다면, 그것이 곧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 될 터였다. 저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몰라도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 "전하!" 신전 밖으로 나오자,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 하미르와 시종 들, 그리고 친위대원들이 카스트로를 감싼다. 라에르는 침착하게 친위 대원들을 배치시켰다. 계단 끝에서 내려다보자, 그 까마득한 높이에 현 기증이 일 것 같다. 카스트로는 조금 질린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길이 정말 이 계단밖에 없습니까?" 비제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길지요? 한족들은 다른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만, 일반사람들 은 그냥 이 길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족들은 다른 길이 있다는 말입니까?" 카스트로는 불만스럽게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을 자기들만 특별해서 편한 길로 다닌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제 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카스트로의 오해를 곧장 풀어주었다. "다른 길이 아닌 다른 방법입니다. 한족들은 자신들의 몸을 한순간 다른 장소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공간마법의 일종입니다만, 그 마법 을 행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한두명씩 더 데리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 능력으로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무리입니 다." 마법에 대한 문외한인 카스트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간 마법이 뭐고, 다른 장소로 이동이 한순간에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의 미인지 몸에 와 닿지 않은 것이다. 비제는 그런 카스트로의 모습, 정확 히는 그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오라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 며 말했다. "저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순간." 카스트로는 물론 다른 시종들과 친위대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 다는 것을 확인한 비제는 짧게 신어를 읊조렸다. "엇!"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비제가 시야에서 깜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저마다 경악에 찬 신음을 내뱉고 있을 때, 다시 비제의 맑은 미성이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저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일제히 돌아보자, 비제는 신전의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생글생글, 그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한족은 힘든 길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모시고 이렇게 이동하는 것은 저로서는 무리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계 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천천히 다가오며 설명하는 비제를 모두 마물이나 되는 듯이 쳐다보 았다. 하지만 비제는 그 시선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생글생글 웃어주며 앞장서는 비제를 바라보며, 카스트로는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고작 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그 희한 한 짓을 했단 말인가! 어쨌든 이제는 확실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수밖 에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려가지." "네, 전하."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는 친위대원들이었지만, 곧 저 여리여리한 한족에게 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비제의 뒤를 맹렬히 따라 내려갔다. 물론 카스트로가 먼저 지쳐버리는 바람에 멈추어야 했지만. ================================================================== 쩝.. 암시효과의 기능은 이틀이 다였던가.. --; 늦어서 죄송.. 요새는 생활리듬이 또 바뀌어서, 잠자는 시간대가 일정치 않네요.. 결국 피로는 안풀리고, 잠은 계속 오고.. 과연 퇴고는 제대로 한 건지 의문이 가지만.. ... 휴우.. 그래도 오늘을 넘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졸린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59 - 관련자료:없음 [3103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7 20:30 조회:174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59 - ================================================================== "다치셨군요." 비제는 창백해진 카스트로를 보면서 말했다. 정확히는 카스트로의 오라를 보고 한 말이었다. "조금 쉬면 괜찮을 겁니다." 카스트로가 말했다. 폐는 끼치지 않겠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저렇 게 창백한 얼굴로, 저렇게 약해진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카스트로의 오라는 유난히 강렬한 빛을 발한다. 고집스럽다고도 할 수 있는 높고 강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다. 비제는 그 순간, 이 카스트로라는 이국 의 왕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호기심에 가까운 호감은 저 특이하고 멋 진 오라에서 기인했다. 저렇게 사람을 빨아들일 듯 강렬한 오라의 빛 은 처음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상처를 보아드릴까요?" 비제로서는 드물게 순수한 호의에서 한 말이었지만, 카스트로의 표 정은 불쾌한 듯이 굳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면 의사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호의 따위 필요없습니다. 비제는 소리가 되어 나오 지 못한 숨은 말을 들으며 생긋 미소지었다. 역시, 마음에 든다. "일반 의사들의 치료법과 한족들의 치료법은 틀립니다. 한족들의 치 료법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마치 계단을 내려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물 론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카스트로는 그 제의가 그다지 반갑 지 않았다. 아까부터 보여주는 비제의 초인간적인 능력들은, 카스트로 에게 '한족은 이렇게 대단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라고 협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오해를 하시는 것 같군요. 순수한 호의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자기 마음을 읽는 것처럼 집어내는 비제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한족은 독심술도 합니까?" 비제는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저었다. 감색의 길다랗게 땋은 머리채가 비제의 등뒤에서 출렁출렁거렸다. "독심술과는 다릅니다. 단지 타인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을 뿐입니 다. 나머지는 추리의 영역에 들어가지요. 이를테면, 전하께 상처를 보 아드리겠다고 했는데, 전하께서는 급작스럽게 기분이 나빠지셨습니다. 그렇다면 호의를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죠." 비제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의심스레 쳐다보는 카스트로를 보 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믿지 않으시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하의 처지에 대해 서는, 제 스승님께서 하신 일이니 만큼 잘 알고 있습니다. 한족을 경계 하시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비꼬는 듯한 말투에 냉소가 묻어난다. 비제는 청록색 눈망울에 씁쓰 름한 색을 덧입혔다. "하지만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한족이지만, 또한 한 족이 아닙니다." 카스트로는 흔들리는 비제의 청록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웃을 때와 는 또 다른 빛무리가 눈동자 안에 가득 차있었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왠지 비슷한 처지라는 느낌이 들어서……" "비슷한 처지?" 비제는 머리를 저었다. "잊어주십시오." 그 뒤로 비제는 말을 하지 않고, 멀리 테리온시 쪽으로 시선을 던졌 다. 무의식적으로 비제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는 순간, 카스트로는 작 게 탄성을 내뱉었다. 올라올 때는 몰랐지만, 계단에 앉아서 느긋하게 내려다보니 테리온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에서 남동쪽 으로 길게 푸른 강줄기가 뻗어있고, 테리온시 가운데의 광장으로 보이 는 둥근 공터를 중심으로 네 개의 대로가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그 네 개의 대로 중에 북쪽으로 뻗은 것은 곧장 테라 신전의 아래까지 오고 있었다. 대로와 대로 사이의, 마치 케잌의 1/4조각 같은 모양의 공간들 에는 앙상한 나무들과 벽돌색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한동안 카 스트로는 테리온 시내의 전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적국의 수도라고 하 지만, 감탄스럽고 아름다웠다. 라에르와 친위대원들, 그리고 시종들도 모두 테리온시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문득 시선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비제를 바라보았다. 무 채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소년의 가냘픈 뒷모습은 카스트로에게 기묘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같이 놀자며 따라 오는데 무정하게 뿌리치고 달아나 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매서운 바 람에 흰색 신관복과 감색머리가 흔들리는 순간 맑은 금속성이 울렸다. 비제의 귀에 매달린 작은 금속 귀걸이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 스트로는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을 일축하며, 조소를 흘렸다. 지금은 자 신의 일만으로 벅찬데다, 상대는 한족 우두머리의 제자다. "갑시다." 카스트로가 일어서자, 비제는 조용히 앞장섰다. 저 작은 체구로 지치 지도 않는 모습이어서, 계단 끝까지 내려갔을 때쯤에는 체력좋은 친위 대원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대신관 제이리트와 한족 5가문의 수장만 모인 자리에서 로페냐는 그 동안의 일정과 여행이 지연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카스 트로의 목숨을 노리고, 그 마법사도 누군가에게 암살되었다는 말에 제 이리트와 한족 5가문의 수장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그 사건이 저희 테라에서 사주한 일이 아 닌가 의심하고 계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가문의 세크리트가 툭 내뱉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의심이라니. 테라에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의심받는다는 것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 뜻을 전하께 전했지만, 그 마법사를 잡겠 다고 하고 잡지 못한 것도, 그 때문에 전하의 목숨이 위험해진 것도, 그리고 그 마법사가 암살된 것도 모두 제 관리가 소홀한 탓이었습니 다. 저로서는 변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풀이 죽은 로페냐를 보며, 세크리트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그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가는 바는 없습니까?" 제이리트가 침착하게 물었다. 하지만 로페냐는 머리를 가로 저을 뿐 이었다. "로페냐경이 보는 카스트로 전하는 어떤 분 같습니까? 한달 가까이 함께 지내보았으니, 조금은 생각하는 바가 있을 듯 합니다만?" 바뀐 화제에 대해 로페냐는 보조개까지 띄우며 미소지었다. "멋진 남자입니다! 지금까지 본 어떤 사람보다 마음에 듭니다." 은밀하게 한족 수장들 사이에 눈길이 오갔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부추김까지 받은 로페냐는 마냥 즐거운 얼굴로 과장까지 섞어가며 카스트로를 칭찬했다. "무엇보다 그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꼭 듭니다. 좋고 싫고가 분 명해서 저로서도 골머리를 앓은 적이 많지만, 그래도 미적미적대는 사 람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사냥도 굉장히 잘하십니다. 말도 상당히 잘 다루고, 검술과 궁술도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화살 하나로 멧돼지도 잡으시더라구요." 심각하게 듣고있던 한족들은 하나같이 뭐씹은 얼굴로 로페냐를 바라 보았다. 한족들이 원한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위험한 사 람이라거나, 장차 한족이나 테라에 위협을 줄 사람이라거나, 그런 대답 을 원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자식 자랑하는 팔푼이 아버지 같지 않 은가! 카르노인이 검과 활을 잘 다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또, 뭐 없습니까?" "아, 네. 다 좋으신데, 딱 한가지 단점이 있으시더군요." "단점?" 그제서야 한족들의 떨떠름한 표정이 풀리고, 다시 또렷한 눈으로 로 페냐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로페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나이가 나이신지라, 여자 다루는 솜씨가 영 서투시더군요. 라 에니 왕세자비 전하의 일만 해도, 가볍게 인사 몇 마디만 건넸어도 그 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요. 뭐, 그런 것쯤이야 차차 결혼도 하시고, 다른 여성들도 많이 만나시면서 나아지시겠지요." 어디선가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가문의 세크리트는 인상을 구기고 로페냐를 노려보았으며, 오가문의 체이스트는 고개를 외로 돌 렸다. 제이리트는 멍한 표정으로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았 다. 누군가가 한숨을 불어냈다. 로페냐는 상당히 심각해진 분위기를 눈 치채고 어리둥절해졌다. "제가 뭐 잘못 말씀드린 것이라도 있습니까?" 제이리트는 뒤늦은 수습을 시도했다. "아닙니다. 이제 되었으니 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나가시는 길에 마 로니아경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케테르님께 영광이 있기 를!" "케테르님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한족들은 로페냐가 나간 뒤, 인기척이 없어진 뒤에야 소리나게 한숨 과 불평을 쏟아냈다. "뭡니까, 대체! 저런 어리숙한 자를 대표로 보내자고 한 것이 누구였 습니까?" 오가문의 체이스트가 볼을 부풀리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 사람 만한 마법사도 드뭅니다! 게다가 작위까지 겸했으니, 사신 으로는 적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로니아경을 부대표로 함께 보낸 것 이 아닙니까?" 리가문의 로스민이 항변했다. 흉흉해지는 분위기를 재빠르게 제이리 트가 막아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입니까? 우선 마로니아경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험악해지는 회의실의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며 제이리트는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로니아 폰 사이카, 대신관님과 한족 5가문의 수장님들께 인사올 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제이리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남으시라고 했습니다." "네에." 마흔 살 가량의 냉정한 일처리를 하는 사이카 자작 마로니아경은 어 째서인지 지금 꽤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이리트는 흔들리는 마로니 아경의 오라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스트로 전하는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질문이 던져진 순간, 마로니아경의 오라가 진정되었다. "위험한 사람입니다." 한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오갔다. 그들은 바로 이런 대답을 원했던 것이다. "위험한 사람?" "네. 테라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안좋은데다, 기이할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직 어리다고 얕보다가는 어느새 그의 손아 귀에서 놀아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상황판단력이 기민하고, 알게 모 르게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습니다. 저번 레이노 백작의 사건만 보아도, 애송이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이노 백작의 사건이라……. 그 독살 사건 말입니까?" 순간 마로니아경의 오라가 눈에 띄게 불안정해졌다. 탁한 붉은 색의 기운이 불안하게 넘실거린다. 제이리트는 요동치는 오라와는 달리 무 덤덤한 마로니아경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직감처럼 어떤 의심이 치솟 았다. "독살……이라면……." "당신입니까?" "네?" 마로니아경이 놀란 눈으로 제이리트를 쳐다보자, 제이리트는 다시 또박또박 물었다. 물론 짐작가는 것을 찍어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이리트의 직감은 거의 틀려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 그를 독살했습니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제이리트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그를 독살했군요. 저를 속이실 생각이셨습니까?" 꿀꺽! 자신의 침음성이 마로니아경의 귀에는 천둥처럼 울렸다. 마로 니아경은 질린 얼굴로 제이리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스스로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손을 써야 하겠습니까?" "……!" "지금 당신의 행동, 한족과 테라에 대한 배반행위로 간주해도 좋습 니까?" 한마디 한마디에 냉기가 서려있었다. '한족과 테라에 대한 배반행위.' 마로니아경은 입안이 말라서 꺼끌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오지도 않 는 침을 넘기며, 제이리트가 내뱉은 말을 자꾸만 반복해서 생각했다. 이십여년 전 있었던 귀족들의 반란을, 마로니아경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한족들의 독재적인 정치에 대해 십여 명의 크고작은 귀족들이 단합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던 사건. 그 것은 저 제이리트 대신관에 의해 '한족과 테라에 대한 배반행위'로 명 명되고, '반란'이라 규정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된 무차별한 가문단 위의 학살! 마로니아경은 무릎꿇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일가족이 피투성이로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절대적인 위협 이었다. "……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저는 그저 약간의 정보만 제공해주기로……, 절대로 한족과 테라를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사주받았습니까?" 냉정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로, 제이리트는 핵심을 캐물었다. "그, 그것은……." "누구입니까?" 억양이 없는 말투였다. 마로니아경은 울 듯한 얼굴로 한 사람의 이 름을 입에 담았다. "소렐 공작……." 제이리트의 입술이 비틀렸다. 차가운 감색의 눈이 마로니아경을 노 려보고 있었다. "소렐 공작을 등에 업고, 한족을 배반하려 했군요." "그런……!" 경악에 찬 마로니아경을 싸늘하게 쏘아보며, 제이리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짧은 신어와 함께 손을 가로로 긋자 마로니아경의 목에 가로 로 가는 혈선이 그어졌다. 다음순간 마로니아경은 경악에 찬 표정 그 대로 목이 잘라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명조차 울릴 사이도 없 이 죽어버린 마로니아경의 목과 몸뚱이를 작고 큰 두 개의 투명한 구 체가 감싸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제이리트는 다시 신어를 읊조렸다. 마 로니아경의 몸을 실은 구체 속에서 새파란 불길이 화륵 타올랐다. 그 것은 삽시간에 살점을 태우고 뼈마저 태운 뒤에야 하얀 재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매끄럽게 절단된 마로니아경의 머리가 담긴, 피로 물든 구체였다. "너무 성급한 것 아닙니까? 몇 가지 더 알아낸 뒤에 죽여도 좋았을 것을." 세크리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세크리트는 물론 주위의 한족 수장들 누구도 사람을 죽인 일 자체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 다. 제이리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대답했다. "더 알아낼 것이 있습니까? 소렐 공작이 이번 혼사를 못마땅해하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던 일입니다. 실제로 카스트로 전하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뜻밖이지만, 가볍게 경고를 해두는 것으로 될 겁니다." 제이리트는 목이 담긴 구체를 감색의 천으로 감쌌다. 이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소렐 공작에게 전해질 터였다. "그러면 회의를 계속할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제이리트는 성스러울 정도로 자비로운 모습 이었다. ================================================================== 올해는 유난히 감기에 잘 걸리는군요.. 좀전에 감기약 먹었더니 지금 어질어질.. 약기운 돌기 전에 두다다.. 퇴고해서 올립니다. ^^ 감기 조심 하시고.. (감기 걸려서야 맨날 남 생각해주는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 @.@ -> 이런 눈의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0 - 관련자료:없음 [3105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8 18:58 조회:173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0 - ================================================================== 친위대원으로부터 건네받은 말에 오른 비제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일행들을 안내했다. 제이리트가 마련한 저택은 테리온시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르노 왕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은 정원도 있 었고, 유백색으로 벽이 칠해진 저택도 삼층높이로 지어져 있었다. 방도 백여개는 되어 보였다. "얼마 전까지 아베르노 전하께서 사용하신 저택입니다. 물론 저택이 비어있는 사이 새로 단장했습니다." 카스트로는 홀에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홀의 양쪽 벽을 따라 유선형로 휘어진 계단이 이층 복도까지 둥글게 이어져있었다. 전체적 으로 유백색과 흐린 연녹색으로 칠해진 벽이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 다. "전하께서 머무실 침실은 이층에 마련했습니다. 올라가시겠습니까?"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제를 따라 왼쪽에 있는 계단을 올랐 다. 비제는 라에르를 사이에 두고 카스트로를 향해 설명을 계속했다. "침실은 두 개가 이어져있습니다. 하나는 전하께서 쓰실 침실이고, 다른 하나는 왕자비 전하께서 머무실 침실입니다." 계단을 오르던 카스트로의 발걸음이 무의식중에 멈춰버렸다. 불쾌하 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쓰여있는 얼굴이었다. 비제는 불만스럽게 입술 을 꿈틀거리는 카스트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불편하시다면, 다음부터는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유연한 말투였다. 카스트로는 자신보다 두세 살은 어려보이는 비제가 자신을 어리게 생각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 다. 하지만 맞대응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태연한 척 발길을 다시 옮겼다. "가운데에 있는 침실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전하께서 쓰실 공간입니 다. 욕실, 의상실, 거실은 전하의 침실과 이어져있고, 서재는 3층에 있 습니다." 이층 오른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카스트로는 그 왼쪽에 대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비슷한 구조로, 아마도 여성적인 공 간일 것이 뻔했다.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왕자비'가 될 여자의 공 간! '빌어먹을!' 카스트로는 욕설을 되씹으며, 건물의 왼쪽을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결혼에 대한 것들이 한꺼번에 물밀 듯이 뇌리 속을 휘말아가고 있었다. "이곳이 전하께서 쓰실 침실입니다." 비제는 한 방문 앞에 멈춰섰다. 카스트로는 그 문을 흘끗 쳐다보았 다. 3프리 높이의 흰색 문이 천천히 비제의 손에 의해 열려졌다. "들어가시죠." 앞으로 5년간 지내야 할 공간 속으로 카스트로는 첫 발길을 내딛었 다. 푹신한 융단의 느낌을 발끝으로 느끼며, 은은한 장미향이 떠돌아 다니는 침실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면에 보이는 큼직큼직한 유리창들이었다. 아니 유리창이라기보다 유리문이라고 해 야 어울릴 그것들과 널찍한 테라스, 그 너머 눈이 다 녹지 않은 숲과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가 바라다 보인다. 카스트로가 창문을 열고 테라 스로 나가자, 비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테라의 젖줄기, 아라입니다. 이곳부터 아라까지는 전에 계시던 아베 르노 전하께서도 꽤 즐기던 승마코스였습니다." "아……." 카스트로는 다시 한번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아라까지를 바 라보았다. 아베르노가 즐기던 승마코스라니까,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 다.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뭐한 기분. 그리움도, 증오도 아닌 뒤죽박 죽인 감정이었다. "제가 이곳까지 안내해드린 길은 테라의 신전까지 가는 지름길입니 다. 이 저택에서 대로로 나가 서쪽으로 가시면 파르나 광장이 나옵니 다. 주요 행사나 축제 때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가 열립니다." 테라로 올라가는 그 장황스런 계단에서 본 테리온시 가운데에 있던 둥근 광장을 말하는 것인가 보다고, 카스트로는 짐작했다. "전하께서 다니실 테리아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파르나 광장으로 질러가는 길에 있고, 이 저택 3층에서 내려다보시면 쉽게 알 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근방에서 가장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까요."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유리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왔 다.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차가운 곳에 있다가 들어와 보니 방안이 따 스하게 데워져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스트로는 기분좋은 온기 를 느끼며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주황색의 반투명한 휘장이 쳐진 침대는 장정 셋이 굴러도 될 만큼 커다랬고, 벽난로는 흰색바탕에 검 은색이 섞여 들어간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다. 카스트로는 벽난로 앞의 소파로 가서 다소 지친 몸을 앉혔다. 비제의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소파에 기대앉아, 한 귀로 비제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어차피 라에르와 시종장 하미르가 알아서 챙겨듣고 있을 터였 다. 무리를 해서인지 몰라도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피곤하십니까?" "아아. 좀 그렇습니다. 괜찮다면 이만 쉬고 싶습니다." 비제가 물어오는 말에 대고, 카스트로는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대꾸 했다. 비제는 의미 모를 깜찍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저녁 7시부터 지스카르 전하의 저택에서 전하의 환영연회가 있 습니다. 장소는 마부에게 일러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말씀 다시 드리기 뭐하지만, 한족의 치료술은 일반 의사에 비 할 바가 아닙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물론 절대 한족 따위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사교성을 발휘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비제는 두 손을 정갈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비제는 다시 그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조용한 몸놀림으로 침 실에서 나갔다. 카스트로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며칠 동안 푹 쉬고 싶었다. 낮부터 흐리던 하늘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스트로는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찾아온 로페냐와 함께 지스카르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력자들은 전부 모일 겁니다. 낮에 뵈었던 수상 각하와 테리 온 시장은 물론이고, 이 북동지구의 유명인사는 거의 전부 초청을 받 았다고 하더군요." "북동지구?" 카스트로의 질문이 들어오자 로페냐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카스트로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네. 전하께서 살게 되실 북동지구는 테라의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 관료들, 그리고 유력한 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아, 북동지구라는 것 은 파르나 광장을 중심으로 북동쪽에 있는 지역을 그렇게 부릅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더 물었다. "그러면 다른 지역은?" 로페냐는 신이 나서 주절주절 설명해댔다. 카스트로가 이만큼 자신 의 말에 관심을 기울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장 북서쪽인 북서지구는 한족들의 주거지역입니다. 한족들이 부 리는 하인들 외에는, 저희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지역입니다. 혹 시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전하께서도 그쪽으로는 걸음을 하지 마십 시오. 이것은 전하의 안전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카스트로는 입술을 비틀었다. 오만하기 끝갈 데가 없는 한족들이 하 는 짓다웠다. 자기들만 특별하고 위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 마저 꺼린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카스트로는 불쾌한 화제를 한구석에 처박아버리고, 다른 지역에 대해 물었다. "남쪽에는 누가 살고 있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스트로의 표정을 살피던 로페냐는 불안스런 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남쪽에는 주로 평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동지구의 위쪽으 로는 리케아 거리라고, 극장, 카지노, 고급 술집 등 귀족들을 위한 각 종 위락시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서인 지, 구걸하는 걸인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로페냐는 뭔가 꺼리는 듯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을 흐리며 카스트 로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카스트로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하라는 듯 한 제스처를 보였다. 그제서야 로페냐는 배시시 웃으며 못다한 말을 꺼냈다. "여자들도 많습니다." "여자?" 되물어오는 말에 로페냐는 보조개를 피워올리며, 고개를 깊숙이 아 래로 내렸다가 위로 들어올렸다. "그렇습니다. 고급 창부에서 길거리 창녀까지 골고루 있지요. 전하께 서도 언제 한번 저와 함께……" "로페냐경! 그런 저급한 발언은 삼가주십시오!" 은밀한 미소를 피워올리는 로페냐에게 따끔하다 못해 뜨끔한 일침을 가한 사람은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라에르였다. 무시무시하게 쏘아보는 시선을 느끼며, 로페냐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 제, 제가 실언을 했나보군요. 죄송합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창녀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존재 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아르노의 뒷골목에서도 한두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다른 길로 끌고가는 라에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라에르가 실은 시종장 베제르 이상으로 까다롭 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창녀…….' 그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왕궁의 정원에서였다. 어머니 미에라 왕 비가 돌아가시고 나서 두 달이나 지났을까? 키가 큰 꽃들을 등지고 혼 자 앉아있었을 때, 우연히 귀족 두 명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 었다. '폐하께서는 왕비전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싸구 려 창녀를 옆에 두신다는 건가?' '……폐하와 왕비전하의 금슬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었네만, 에이, 사람일이란 모를 일이지.' 아마도 그와 비슷한 푸념과 한탄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 들었던 말 을 곧이곧대로 시종장 베제르에게 물었다가, 새파랗게 질린 그에게 장 장 세시간이나 그런 저급하고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는 게 아니라고 설교를 들어야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와 시종장 베제르를 떠올리자, 기분이 우울해진다. 카스트로는 마차 창문을 가린 커튼을 열어보았다. 집집마다 켜진 불들 로 그다지 어둡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밤이다. 그러고보니, 지스카르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이 먼 이역땅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었을 것 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머니 임종시에도 곁에서 유언을 들었으니, 형들보다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카스트로는 우울한 상념을 되씹으 며, 언제고 지스카르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 각했다. 암울한 하늘을 이고 까맣게만 보이는 성산 테라를 등에 진 저택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밝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벽돌로 지어진 저 택은 길죽길죽한 수없이 많은 아치형의 창문들을 통해 빛을 토해내고 있었고, 저택 밖의 정원에서도 샹들리에를 옮겨놓은 듯한 밝은 빛들이 마차들의 길을 인도하듯 길게 늘어서 있다. 상록수를 심어놓은 정원은 옅은 안개와 흐릿한 불빛이 뒤섞여 음울하고 몽환적인 자태를 드러낸 다. 페트라르카는 창가에 서서 창 밖 정원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보세요? 차라리 저를 보아주시면 기쁠 텐 데……." 농염한 여인의 향기가 페트라르카를 삼킬 듯 유혹해온다. 페트라르 카는 익숙해진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자신의 팔에 손을 대고 있는 여 성을 돌아보았다. 흰색에 가까운 분홍색의 머리를 최신 유행하는 스타 일로 풍성하게 틀어올리고, 색기가 흐르는 금색 눈으로 살살 눈웃음치 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멋쟁이 여성이었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기보 다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한, 그리고 자신의 매력에 유난히 자신만만 한 여성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언제쯤 도착할까 생각하는 중이었소, 아름다운 여 인.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 사이에 끼워놓은 칭찬을 놓치지 않은 여성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 며 요염하게 웃었다. 익숙해진 여성의 교태에 페트라르카는 식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귀족 여성들이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인 비슷비슷한 반 응밖에 하지 못하는 판박이들이 아니던가! "호호호, 그렇군요. 전하께서는 지금 강력한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사람 때문에 긴장하고 계시는 건가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지만, 페트라르카는 기대감 어린 그녀 의 눈길에 오히려 역겨움을 느꼈다. "라이벌이라니요, 후작부인. 상대는 고작 열일곱살의 소년이라고 들 었습니다." "노련한 바람둥이이신 전하께 열일곱살의 소년은 풋내기라서 상대가 안된다는 뜻?" 어떻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든, 페트라르카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 로 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페트라르카는 입술을 끌어올려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후 작부인에게 어떤 의미로 비치든 상관없었다. 음흉한 바람둥이의 미소 든, 타락한 퇴폐주의자의 미소든. 아니, 그런 오해라면 오히려 감사해 야 할 판인지도 모른다. "호호호홋, 하지만 카르노의 남자들은 묘하게 매력있으니까, 긴장을 늦추시면 안될 텐데요." 뭔가 부추기는 듯한 말투. '설마 꼬마와 싸우기라도 하라는 건가?' 페트라르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보니 로페냐경도 오늘 연회에 나오시겠지요? 그 동안 로페냐 경의 열렬한 구애가 없어서 서운했었는데." 눈꼬리를 살살 치며 암내를 풍기는 후작부인을 더 이상은 상대하기 귀찮아졌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에게 질투심이라도 유발하려는 것 같 다. 그것도 가장 친하다 싶은 로페냐를 끌어들여서. 페트라르카는 안색 을 굳히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시면 로페냐경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던지요.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전하……." 페트라르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크게 내딛었다. 로페냐의 눈 에 뭐가 씌었는지 몰라도, 왜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수년간이나 자신만을 보아온 로페냐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 을 충동질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한다는 것에 혐오감이 치밀었다. 아 마 후작부인은 지금쯤 자신이 로페냐를 질투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 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일 테지만. 불쾌한 기분을 삭이려고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홀의 깊숙한 곳에 있던 페트라르카는 돌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난 모양이다. "카르노의 삼왕자이신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 전하께서 듭십니 다." 고개를 든 페트라르카의 시선에 막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말그대로 시선 안에 들어와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머리 하나는 큰 듯한 인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것은 장님이나 얼간이밖에 안 될테니까. "하아?" 페트라르카는 다소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그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 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눈에, 저 자가 그 소문의 왕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테리아에 다니면서 얼굴을 마주치 던 상대와 너무나 흡사한 그였으니까. 아베르노 폰 카르노. 저 커다란 남자는 그 건방지고 오만하던 작자를 빼다 박은 듯한 모습이었다. ================================================================== 드디어.. 랄까요? 솔직히 한번쯤 불평이 터져나올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터졌네요.. 메일로 답변해드리는 것보다, 혹시 다른 분들께서도 같은 불만이 있으실지도 모르니까, 이곳에서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줄을 잡아먹으면서 씁니다. [신군주론]에서 여성들이 너무 남성의존적이지 않는가, 라는 말씀이셨는데요.. 세계를 주도하는 '성'은 생산력이나 노동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카르노는 아시다시피 남성들의 노동력이 절대적인 사회입니다. 여성들은 이런 사회에서 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여성들이 권리주장을 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 여성들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성문제는 지금 세계관으로부터 몇 세기 더 후의 다른 대륙에서의 이야기로 다루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정말 소설로 쓸지 안 쓸지는 미지수입니다만.. --;) 게다가, 아직 [신군주론] 속 여성 캐릭터의 수난기 --; 라면, 아직 시작도 안됐습니다. 설정 자체에 대해서 뭐라 하신다면, 저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외에 왜 여자 캐릭터들이 저렇게 악녀지향적인가.. --; 를 물으신다면, 저로서도 머리 쥐어뜯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왜 새는 천사표(--; 과연?)인데, 나오는 여자들은 죄다 저 모양인지.. ^^; 답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참 이래저래 심란한 하루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엉망으로 힘들어서.. ^^ 이제는 못잔 잠을 자야겠습니다.. (자야돼서 일찍 올린다는 말, 참 길게도 하는군요.. --;) 그럼 좋은 하루 되시구요.. - 긴장이 풀려 슬슬 졸리는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1 - 관련자료:없음 [3107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29 20:03 조회:171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1 - ================================================================== "어서 오너라, 카스트로." 우글우글거리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 속에서, 카스트로는 낯익 은 목소리를 찾아내어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닮은 부드러운 연갈색 머 리카락의 지스카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 다. "형." 지금까지의 우울했던 기분을 잊고, 카스트로는 그 특유의 시원스런 미소를 띄워올렸다. "여기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오렴." "알겠습니다." 지스카르가 내밀어준 손을 잡으며, 카스트로는 순순히 대답하고 순 순하게 웃었다. 옆에 있던 로페냐가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처음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저런 미소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저렇게 기분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로페냐는 풀이 죽는 자신을 느꼈다. 역시 자신이 테라인이라는 것 때문에 편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너에게…… 우선,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 내 아내, 시에나. 너도 시에나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시에나, 이 아이가 내 동생 카스트로 요." 카스트로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 오는 시선이 그대로 지스카르의 옆에 서 있는 여성에게 가 박혔다. "시에나 폰 카르노입니다. 남편에게 전하에 대한 말씀, 많이 들었습 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현하는 카스트로를 앞에 두고 왠만한 남자라도 기가 죽을 상황에서, 붉은 기가 도는 검은머리의 여자는 턱을 쳐들고 도전하듯이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하!' 카스트로는 내심 감탄스러웠다. 그만한 배짱을 가진 여성은 드물었 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더 증오스러워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반란군 총수인 미노 공작의 외동딸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부친이신 미노 공작께서는 아직까지 미노에 잘 계시는 지 모르겠군요." 느릿하게, 일부러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경멸어린 표정 으로 말했다. 일부러 '미다'라는 국명(國名)대신, 예전 공작령의 이름인 '미노'를 언급해서, 카스트로가 미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노 골적으로 드러나는 발언이었다. 시에나의 치켜올라간 눈썹 밑으로 검 은 눈동자가 시퍼런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여 유로운 말투로, 다시 한번 확실하게 그녀를 짓밟았다. "건강하게 계시는 게 좋겠지요. 나는 힘없고 늙은 적을 짓밟는 것은 흥미가 없거든요. 그럼, 이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모처럼의 연회 인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군요." 주위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근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테라의 귀족들까지 질린 얼굴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로페냐는 얼이 빠진 얼굴로 경악과 경탄을 차례로 드러내더니, 급기야 비실비실 웃음이 비 어져나오려는 것을 높디높은 천장을 올려다봄으로써 애써 참아내고 있 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인 로페냐라지만, 지금 분위기에서 웃었다가는 귀족사회에서 따돌림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저렇 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어떻게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모욕할 수 있 는지. 상대가 여성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성별조차 무시하고 그렇 게 대담하게 모욕할 수 있다는 것까지 멋있게 느껴진다. 로페냐의 상 식을 벗어난 사고방식은 그렇게까지 치달아가고 있었다. '역시 멋있어! 이것이 바로 사내다움이지! 거침없는 말투, 상황에 억 눌리지 않는 자유스러움. 아암. 역시 난 사람을 잘 본다니까.' 카스트로와 자신을 한데 엮어넣어 칭찬을 아끼지 않던 로페냐는 문 득, 따갑게 쏘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천장에서 살짝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층계단으로 가는 구석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느릿하게 술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로페냐는 그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신경전을 벌이는 중인 카스트로를 돌아 보며 말했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제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카스트로는 슬쩍 고개를 돌려 로페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끄덕였다. 옆에서 라에르가 안도의 숨을 쉬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웠으며, 또한 속으로는 누구보다 통쾌하게 느끼고 있던 지스카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려무나." 카스트로는 지스카르에게 목례하고, 시에나는 그대로 무시하며 로페 냐를 따라 걸었다. 자신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사람들이 길을 내주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테라를 가장 못마땅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강제로 요구한 결혼에 대한 조항이었다. 다음대의 왕이 될 아베르노에게는 레 이얄의 대공 나엘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해서 카르노 왕국의 핏줄에 커 다란 오점을 남겼다. 그 나약하기 짝이 없는 레트라는 꼬마가 그 증거 가 아니던가! 그리고 둘째 왕자인 지스카르에게는 반란군 총수 미노 공작의 딸을 아내로 맞게 했다. 그것도 지스카르보다 다섯 살이나 많 은 여자를! 시에나라는 여자를 한번 보고 나니, 지스카르의 지금 상황 을 한눈에 꿸 수 있었다. 보나마나 저 기가 센 여자의 손에 모든 게 놀아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왕세자를 레이얄에 묶이게 하고, 이왕자를 미노에 발목잡히게 한다고 해서, 그 끔찍했던 치욕이 흐지부지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걸까? 카스트로는 한족의 더러운 수작에 치를 떨었다. 5년 전의 그 날 이 후로 공공연히 자피아 대륙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물러대고 있 는 한족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인지 자신마저 레이 얄에 묶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왜? 아베르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 던 것일까? 카스트로는 곧 있을 결혼식에 대한 생각으로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상대는 다름 아닌 국적(國賊) 소렐 공작의 딸이었다. "전하?" 카스트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느 새 로페냐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소개시켜준다던 사람은?" "그건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군. 비쉬의 페트라르카라고 하오." 카스트로는 천천히 로페냐에게서 방금 말을 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연한 하늘색머리에 바다처럼 파란 눈을 가진 이십대 초중반의 젊은 남자였다. "언제까지 손을 기다리게 할거요?" 카스트로는 다소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침없이 존대 를 걷어치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이분은 비쉬의 이왕자이신 페트라르카 전하이십니 다. 그리고 이분은 아시겠지만……."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보람도 없이, 페트라르카는 무심하게 로페냐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니까 설명할 필요없네. 카르노에서 오신 불운의 삼왕자 카스트로 전하가 아니신가?" 씨익 입술을 끌어올리는 페트라르카가 얄밉게 보인다.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페트라르카의 손을 잡았다. 미지근한 체온이 손바닥 으로 전해져온다. "로페냐경은 친구도 괴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페트라르카는 장난스럽게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그것은 당신 자신도 괴짜라는 소리요?" 마주잡은 손을 떼어내며 카스트로는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로페냐경과 친구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페트라르카는 재밌다는 눈으로 대번에 풀이 죽어 어깨가 내려가는 로페냐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그렇다면 로페냐가 왜 당신을 내게 소개하는 거지?" "내게 할 질문이 아니군요." 페트라르카는 말 한마디 지지 않고 대꾸하는 이 엄청나게 큰 소년에 게 흥미가 돌았다. "어떻게 된 건가? 설명을 해줘야지, 로페냐!" 로페냐는 두 왕자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소개하는데 과연 꼭 친구일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왠 지 그래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카스트로 전하와 친구가 될 테니까……, 미 리 인사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헛수고를 했군, 로페냐경. 태양신 하야가 미쳐 동쪽으로 마차를 모는 것만큼이나 헛된 바램이오. 나는 테라인과 친구가 될 생 각은 전혀 없으니까." "저언하." 로페냐의 울 것 같은 얼굴이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스트 로는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그 두 사람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트라르카는 얼마 안 가 시원스런 웃음소리를 토해내었다. 주위에서 궁금함을 내포한 눈빛들이 몰려들었지만, 페트라르카는 양껏 웃어제낀 뒤에야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이거, 천하에 다시없을 바람둥이 하야로비 후작을 울리는 사람 이 여자가 아닌 남자일 줄이야! 하하하하하!" 카스트로는 기분나쁜 표정으로 페트라르카를 쳐다보았다. 로페냐는 불편해하는 카스트로의 기분을 눈치채고, 재빨리 페트라르카에게 항변 했다. "그만두십시오, 전하. 그런 애매한 발언이라니, 저는 다만 카스트로 전하와 친구가……." "누가 뭐라고 그랬나, 로페냐?" 페트라르카는 더욱 재밌다는 얼굴로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 "자네야말로 그런 애매한 발언은 그만두게. 나는 자네가 이 왕자를 성적대상으로 보고있다는 소리를 한 게 아닐세." "저언하아!" 로페냐가 비명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곧이어 들린 냉혹스런 말에 덮여 사라졌다. "말을 삼가해 주십시오. 카스트로 전하를 모욕하시는 거라면, 제 목 숨을 걸고라도 당신에게 검을 겨눌 것입니다. 국가적인 분쟁을 원하시 는 겁니까?"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라에르의 일침이었다. 협박과도 비 슷한 말을 들은 페트라르카는 물론 옆에 있던 로페냐마저 뜨끔해진 표 정으로 라에르를 쳐다보았다. 페트라르카는 하늘색의 숱 많은 눈썹을 찌푸리며, 카스트로의 뒤에 서 있는 라에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단정 한 얼굴에 진심인 냉혹함이 서려있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한 말이다. "아아, 내 농담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다니, 절망스러운데?" 농담처럼 얼버무리려했지만, 라에르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자기 주 장을 밝혔다. "카스트로 전하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삼가주십시오. 경박한 입놀림에 놀아나실 분이 아니십니다. 전하를 욕되게 하지 말아주십시 오." 페트라르카는 침묵했다. 굽힘없이 말하는 라에르를 향한 바다처럼 파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 파문이 멈추었을 때 진심으로 미안 해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실수했소. 인정하지. 그런 농담은 하지 않겠네. 이제 되었나, 자네?" 라에르는 굳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비쉬의 왕자전하께 무례를 범한 점, 사죄드립니다." 페트라르카는 파란 눈동자에 미풍을 실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자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순간, 라에르의 몸 동작이 굳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몸을 긴장시키고 절도있게 대답했다. "카스트로 전하의 제 1 호위기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입니다." 페트라르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카스트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좋은 신하를 두었군요. 솔직히 말해, 부럽소."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싱긋 웃는 미소에는 시원스러움이 묻 어났다. "좋은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아……, 그렇군요." 페트라르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페냐는 카스트로가 당당하게 '좋 은 친구'라고 말하는 라에르를 보며 부럽다못해 질투마저 느꼈다. 자신 은 정말 '좋은'이라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라는 말까지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회의가 밀려들었지만, 이내 불굴의 의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기회는 5년이나 남은 것이다. "로페냐경, 정말 오랜만이군요." 로페냐는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에 끌려 옆을 쳐다보았다. 매 혹적인 트레아 후작부인이 어느 새인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트레아 후작부인,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로페냐는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페트라르카를 눈치채지 못하고, 환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호호호, 경이 없어서 서운했답니다." "저도 항상 후작부인을 그리워했답니다." 후작부인의 말은 사교적인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귀족의 사교계라는 것이 그렇듯, 바람둥이들의 입에 발린 말들이 그렇듯, 두 사람 모두 알 면서도 사실인척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호홋, 카르노는 어떻던가요?" 은근슬쩍 카스트로를 곁눈질하는 후작부인이었다. 로페냐는 그 시선 을 따라 카스트로를 바라보다가, 망설이듯이 후작부인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멋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분은 소개시켜주지 않으실 셈이세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용건을 말해오자 로페냐는 다시 카스트로를 쳐 다보았다. 조금 전, 페트라르카를 소개했다가 면박당했던 일이 생각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로페냐는 자신을 마주보는 카스트로가 쓴웃음 을 짓는 것을 보며 조금 용기를 얻었다. "전하, 전하께 아름다운 숙녀를 한 분 소개시켜드려도 되겠습니까?"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로페냐는 얼굴을 펴고 보조 개를 피워냈다. "후작부인, 카르노의 삼왕자이신 카스트로 전하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우신 숙녀분은 트레아 후작 부인이십니다. 수년째 테리온 사교 계의 꽃이시지요." 후작부인은 화사한 드레스자락을 붙잡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스트로 전하. 현재 테리온 사교계에서의 화제의 주인공인 전하가 어떤 분인지, 무척 궁금했었답니다." 거리낌없이 생글생글 웃어오는 후작부인에게 카스트로는 사교적인 답례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부인." 사교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말투였다. 로페냐는 다시 한번 자신 의 판단력에 감탄했다. 역시 카스트로에게는 여자를 대하는 테크닉이 부족하다. 모름지기 남자란 여자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야한다는 지 론을 가진 로페냐는 카스트로의 유일한 단점을 고쳐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두 남녀 사이에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갔지만, 카스트로의 적 극성 없는 태도 때문인지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후작부인이 제풀에 질려 물러가고, 카스트로는 다시 페트라르카와 말을 나눴다. 물론 로페 냐와 비슷한 지론을 가진 페트라르카의 충고로 시작된 대화였다. "쯧쯧, 오는 여자도 잡지 못한다니. 혹시 여자 경험이 없는 게 아니 오?" 라에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와 박혔지만 페트라르카로서도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의외로 카스트로가 순순히 대꾸했 다. "여자라면, 얼마 뒤에 결혼하게 될 여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끔찍 합니다." "호오, 하긴 아내라면 끔찍할 만도 하겠군요. 하지만 애인은 다르지 않겠소?" 카스트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습니까?" "물론이오. 아내는 후계자만 낳아주면 되는 거요. 진정한 쾌락은 애 인에게서 얻는 거지. 이를테면 저 요염한 후작부인같은 여자 말이오. 잠자리에서의 테크닉이 대단해서 여러 남자를 울렸다더군." 은밀해야 될, 저질스러운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는 페트라르카는 자 신의 말이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로페냐도 쓴웃음 을 지을 뿐, 달리 부정하거나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아서, 카스 트로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졌다.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듣고 있자니 점점 더 가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 후작부인이 이번에는 당신을 타겟으로 삼은 모양이오. 아직까지 숫총각이라면, 저 여자를 조심하시오. 언제 어떻게 당신을 덥칠 지 모 르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낯뜨거운 이야기에 끼어서도, 카스트로는 그다지 안색의 변화없이 대꾸하고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재밌다는 듯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 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고, 테리온에는 여자도 많소. 테리온에 온 이상, 갖가지 여성을 다 체험해보는 것도 재미요. 테리온의 세 가지 명물이 무엇인줄 아시오?" "세 가지 명물?" 페트라르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세 가지 명물. 그 첫 번째가 바로 도박이오. 테리온의 카지 노는 유명하지. 테리아에 유학 온 돈 많은 귀족 자제들이 돈을 쓰지 못해 안달이거든." "그렇군요." "둘째는 오페라요. 레이얄에서 귀족들이 즐기던 것이 테라에 와서 발전한 것이라더군. 언제 시간나면 아름다운 여인을 데리고 한번 가보 시오. 보면 후회는 하지 않을 거요." "셋째는 여자입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카스트로를 보며 라에르는 인상을 북북 긁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비쉬의 왕자나 로페냐나 질이 안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되도록 떼어내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라에르는 페트라르카 를 노려보았다. "잘 아시는군요. 테리온의 여자는 일품이죠. 저 난체하는 귀부인들부 터 백실프를 홋가라는 리케아 거리의 고급 창녀들은 물론, 동전 하나 만 건네줘도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까지. 제각각의 맛이 틀리지만, 개 인적으로는 리케아 거리의 창녀를 추천하는 바요." 페트라르카는 수없이 찔러대는 라에르의 비난을 맞으면서도, 일부러 더 짓궂게 말하고 있었다. 저 충성스런 호위기사를 조금쯤은 곯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하고 수많은 저질스 런 이야기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카스트로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트로." "형." 카스트로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지스카르에게 돌아섰다. 지스카르는 카스트로가 함께 있던 페트라르카를 발견하고, 무뚝뚝한 미소를 건넸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트라르카 전하.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 상상이상으로 즐겁습니다. 초대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페트라르카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지스카르는 가볍게 끄 덕여 보이고 카스트로를 향해 돌아섰다. 예의바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스트로, 소개할 사람들이 있다." 지스카르가 다시 카스트로를 돌아보며 말하자, 카스트로는 정중하게 페트라르카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전하의 창녀에 대한 해박한 견해 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가 된다면 듣도록 하겠습니다." '창녀에 대한 전하의 해박한 견해'라는 말을 듣고, 지스카르는 표정 을 딱딱하게 굳혀서 페트라르카를 돌아보았다. 페트라르카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스카르는 카스트로의 손목을 단단 히 잡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지스카르는 급하다 싶은 걸음으로 카스트로를 끌고 가더니, 사람이 없는 한산한 곳으로 가서 카스트로를 잡은 손을 놓고 마주보았다. "그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한 거냐?" "……." 미적거리는 카스트로를 향해 인상을 쓰며, 지스카르는 질책의 소리 를 높였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저 타락한 왕자야 그렇다 치지만, 너마저 카르노 왕실의 명예를 금가게 하지는 않겠지?"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하는 카스트로를 지켜보던 지스카르는 한숨을 푹 쉬어내었다. "로페냐경이나 페트라르카 전하나 둘 다, 상대해서 좋을 게 없는 사 람들이다. 두 번 다시 어울리지 말아!" 명령조의 말이 불편해서 대답을 머뭇거렸지만, 결국 아버지같은 얼 굴로 노려보는 눈길 아래서 굴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조금 더 제대로 된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해보렴. 가자, 카스 트로." 지스카르는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그들의 뒤에서 라에르가 전신 로마의 가호를 확신하며 미소짓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 ...아직까지 불안정한 생활리듬때문에.. 졸린 눈으로 글 올리는 새입니다. 자를 부분이 마땅치 않아서 좀 길어졌네요.. 어제오늘 제대로 글도 못쓰고 있는데, 이렇게 겁없이 올려도 될지.. 쩝.. ^^ 슬슬 얼굴에 깔 철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철가면? 아이언마스크? 디카프리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글써야하는데..를 고민하며 자려는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2 - 관련자료:없음 [3109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30 20:13 조회:173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2 - ================================================================== 성산 테라의 밤은 언제나 조용하다. 신성스러운 케테르님의 신전이 있으며, 대신관을 비롯한 한족의 신관들과 사제들이 머무는 곳이라서, 시끄럽게 하는 것은 터부시되어왔다.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는 신전 건 물들 중에, 케테르 신상을 모신 본전을 빼고 가장 중요하게 치는 곳은 대신관 제이리트가 머무는 숙소였다. 바람에 요요로이 울리는 풍경소 리만을 제한다면 날아가던 새들마저 숨을 죽이는 곳. 비제는 스승의 시중을 든다는 명목 하에 제이리트의 침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에 서 머물고 있었다. 대신관 제이리트의 유일한 제자라는 호화로운 지위에 있는 자가 머 무는 방이라기보다는 신관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작고 검소한 방이었 다. 사방 3프리 정도의 크기로, 방에 있는 가구라고는 한사람이 눕기도 빠듯한 침대와 침대 옆의 작은 사이드테이블이 전부였고, 작은 붙박이 장이 하나 붙어있을 뿐이다. 흰색의 벽에는 투박한 못이 몇 개인가 달 려있어서 신관복 몇 개를 걸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검박한 방에 어울리지 않게 그 방에 들어앉아있는 사람은 어느 쪽이나 할 것 없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비제님." 감미로운 미성의 주인은 침대 위에 앉아 비제의 긴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보석을 다루듯 조심스런 손길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얼굴에 는 만족감 어린 미소가 스며들어있다. 속이 들여다보일 듯한 상아색의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는 불빛을 받아 더욱 명암이 뚜렷해진, 흰색의 대리석 조각품 같은 미인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와 달의 여신 실라의 빛 자락을 끌어다놓은 듯한 황금의 머릿결. 풍성한 머리를 묶 은 몇 줄의 청색 머리띠가 새파란 눈과 어울려 유난히 눈을 끈다. 산 뜻하게 뻗은 눈썹 아래 짙은 음영을 드리운 청색의 눈은 길다란 속눈 썹 밑에서 그윽하게 잠겨있고, 곧게 선 콧날 밑으로는 얇은 윗입술과 도톰한 아랫입술이 손을 대기 아까울 정도로 완벽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천상의 미. 가히 신의 예술품이라 할 만한 남자였다.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났어. 아주 예쁜 아이지." 비제의 반짝이는 감색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며, 와인 향기라도 음미하듯 진지하게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묻던 남자의 몸 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남자의 새파란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또 인간인가요? 이번에는 어떤 계집입니까?" 딱딱하게 긴장된 목소리였지만, 비제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만둬 주십시오. 저번에도 말했듯이, 당신에게 인간의 여자는 어울 리지 않으니까요." "벨…….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이라고 불린 남자는 비제의 어깨를 그러쥐고 자신에게 돌렸다. 비제가 아픈 듯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벨은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고작 7년입니다. 벌써 잊으신 겁니까?" 차분하게 웃으면서 벨의 오해를 바로잡으려던 비제의 천사같은 얼굴 이 서늘하게 변해갔다. "벨……." "그 계집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받고 계시면서, 어떻게 또 인간 계집 을 마음에 두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만 해. 그 얘기는 더 이상 입밖에 내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비제는 고집스럽게 지지 않고 대꾸하는 벨을 보며 미간을 접었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엉뚱하게 흘러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났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넘겨짚지마. 내가 말한 마음에 든다는 것은, 드물게 보는 멋진 오라 를 가진 인간이라는 뜻이었어. 카르미나처럼, 사랑한다거나 그런 게 아 니라, 그냥 마음에 든다는 것 뿐이야. 더구나 내가 말한 아이는 나보다 팔뚝하나는 더 커보이는 사내아이라고." 그제서야 벨은 비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비제의 말대 로 너무 성급하게 지레짐작해버린 것 같았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바보같이.' 벨은 스스로의 성급함을 반성하며, 화해와 용서의 의미로 눈부신 미 소를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다시 상처받으실까 두려워서……. 이해 해 주시겠지요, 비제님?"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벨의 사 과에 비제는 나즉한 한숨을 불어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상당 히 오해할만한 모습이었지만, 어차피 이 모습을 볼 사람도 없었다. 숨 소리조차 밖으로 새어나갈 듯 조용한 대신관의 거처였다. 정석대로라 면, 지금껏 목소리를 죽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가 밖 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제껏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고, 설사 누군가가 불쑥 들어온다고 해도 보이는 것이라고 는 어두운 방안에 돌아누운 비제의 환영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비 제와 벨,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벨이 이 방에 들어오면서 쳐놓은 결계 안이었던 것이다. "휴우,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주겠어?" 벨은 서운한 미소를 지으며 비제의 목에 감긴 팔을 풀었다. 그리고 살살 웃으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비제를 떠본다. "화나신 것은 아니지요, 비제님?" "별로." 비제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벨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언제 그 랬냐는 듯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길래 비제님께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는지 궁 금하군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비제는 물끄러미 벨을 쳐다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 싹였다. "말했듯이 예쁜 오라를 가진 사람이야." 능숙하게 말을 이끌어내는 벨의 의도에 따라 비제는 편안하게 자신 이 본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테리온에서의 첫아침이 밝았다. 카스트로의 새 저택에서는 유달리 조심스럽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연회에서 시달리 던 카스트로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연회가 피곤해서였는지, 아 니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며칠을 못 잔 사람처럼 탐욕스럽게 자고 있었다. 시종장 하미르는 곤히 자는 카스트로를 깨우지 않고 시종들에 게 조용히 움직일 것을 지시해두었다. 하지만 저택 내 시종들과 시녀 들의 조심성있는 몸가짐에도 불구하고, 느지막한 아침에 찾아든 두 명 의 불청객 덕분에 결국 카스트로는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을 씻고, 옷이 갈아입혀지는 내내 카스트로는 부르퉁 한 얼굴이었다. 응접실로 안내된 두 명의 불청객은 주인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산뜻 한 매무새와 기분좋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리 양해도 얻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 카스트로 전하께서 언짢아 하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카스트로에 대한 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로페냐의 말이었다. 소 파에 앉아서도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로페냐와는 대조적으로, 제 집인 양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페트라르카는 그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설마 찾아온 손님을 내쫓기야 하겠나? 그것도 이미 응접실 까지 들여놓은 마당에." 로페냐는 태평스럽다 못해 무신경해 보이기까지 하는 페트라르카를 곱지 않게 흘겨보았다. 흰색의 린네르 셔츠와 촘촘하게 자수가 놓인 하늘색의 겉옷을 입고 있는 페트라르카는 상당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있는 모습이 한가로운 티타임이라도 갖는 것처럼 여유롭 다. "전하께서는 상관없으실지 모르지만, 제게는 카스트로 전하의 기분 이 어떨지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단 말입니다. 여기서 더 미움받는다면 저는……." 페트라르카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구는 로페냐를 흘낏 보고, 절 망에 빠진 가련한 친구를 위해 무척 유용한 조언을 해주었다. "쯧쯧, 사람이 소심하기는! 그렇게 눈치만 본다고 그 콧대높은 왕자 가 '네 정성이 갸륵하니 친구하자'고 할 성싶은가? 차라리 일부터 저지 르는 쪽이 먹혀드는 타입일걸세." "……일부터……저지르다니요? 무슨 말입니까?" 두 눈을 꿈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페냐는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페트라르카는 그에 걸맞는 진지함으로 대답했다.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나? 알아서 생각하시게." 로페냐는 기대와 호기심에 찼던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뜨렸다. 괜히 폼만 잡았지, 결국 별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친구가 되려면 대체 무슨 일을 벌려야 된다는 거지?' 미간을 접고 인상을 찌푸리는 친구를 보며, 페트라르카는 찻잔 뒤에 서 작게 키들거리며 웃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언제 놀려도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였다. "카스트로 전하께서 듭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로페냐는 즉각 몸을 일으켜 문 쪽 을 향했다. 척 보기에도 짜증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카스트로가 인 상을 그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애써 보조개까지 만들어 미소짓는 로페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억 지로 떠밀리듯 응접실로 들어간 카스트로는 시원스러운 눈매를 옆으로 찢고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카스트로의 피곤이 묻어나는 모습과는 달리 두 명의 불청객은 카스트로에게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보내고 있 었다. "잠도 못 자게 일찍 찾아온 누구덕분에 안녕히 자지 못했소. 경도 새벽까지 연회장에서 있었던 것 같은데, 피곤하지도 않소?" 퉁명스러운 말투와 표정만으로도 로페냐는 안색까지 변하며 쩔쩔매 었다. 그런 가련한 친구를 위해 페트라르카가 나섰다. "생각보다 약골이시군요. 카르노인은 강하다고 알고있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로페냐는 벌써 두 시간 전에 저희 집까지 찾아왔 는데요."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 페트라르카를 쏘아보았 다. 그때까지 찻잔을 들고 여유롭게 앉아있던 페트라르카는, 말없이 노 려보는 시선을 접하고서야 악의없는 미소로 뒤늦은 인사말을 건넸다. "다시 만나서 반갑소." 한껏 비위를 긁어놓은 뒤에 달래듯이 인사하는 페트라르카를 보며, 카스트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이 자가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와 서 저런 소리를 해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페냐와의 관계는 어찌되 었든 간에, 그와 자신과는 어제 단 한차례 만났을 뿐인 사이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로페냐도 그랬다. 처음 본 사이에 적국의 사신이라는 지 위를 가지고도 뻔뻔스럽게 따라다니며 참견을 해댔었다. 역시 친구는 닮는 건가? 카스트로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걸어가 페트라르카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시트는 푹신했지만 침대보다 편할 리가 없었다. 숙취와 여행의 피로가 뒤범벅되어 머리를 울려댄다. "안녕하셨습니까. 무슨 용무로 절 찾으셨습니까?" 간략한 인사말에 이은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다. 페트라르카는 두어번 눈을 꿈뻑하고는 가볍게 소리내어 웃었다. 카스트로의 얼굴이 찌푸려 지고, 로페냐는 그런 두 왕자를 불안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로페냐가 왜 당신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알 것 같군." "무슨 뜻입니까?" 카스트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뭐가 그리 재미 있는지 연신 싱글거리는 페트라르카를 쳐다보았다. "저 친구는 자신만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너무 잘나서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면 정신 못차리고 빠져들거든. 그런 사람과 어울리다가는 자신이 상처받을 게 뻔한데도, 부나방처럼 그런 사람이 라면 혹해서……. 참 곤란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안 그런가, 로페냐?" 로페냐는 자신을 쳐다보는 카스트로의 시선을 받고 불안스럽게 미소 지었다. 옆에서는 페트라르카의 흥미로운 시선까지 들어와서 더욱 당 혹스러워졌다. 로페냐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끌리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다만 사람됨이 시원시 원하고 거침없이 자기 할 말을 하는 카스트로가 멋있었고, 그래서 꼭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하면 뭔가 통쾌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로페냐는 어쩌면 페트라르카의 말이 맞는지 도 모르겠다고,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그리고 지금 친구인 사람이나, 모두 남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할 줄을 모르니까. 로페냐는 자신 을 이상한 사람 보듯 하는 카스트로의 시선을 받으며 저, 사람 골탕먹 이기 좋아하는 친.구.를 저주했다. 카스트로는 어설프게 웃는 로페냐에 게서 다시 페트라르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리 급한 용건이 아 니라면, 전 더 쉬고 싶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카스트로의 얼굴을 보고도, 페트라르카는 아 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들이 온 이유를 말했다. "테리온시를 안내해드리려고 왔소. 며칠 뒤면 하고 싶어도 못할 테 니까 말이오." 말은 안했지만, 굉장한 호의를 베푼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스트로 는 멀뚱하게 페트라르카를 쳐다보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며칠 뒤에는 왜 안된다는 겁니까?" "연말연초잖소. 개천절(開天節)까지 끼어있어서, 전국의 테라인들이 테리온으로 몰려들텐데." 페트라르카는 알고있는 게 당연하다는 말투였지만, 카스트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개천절? 그게 뭡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페트라르카가 눈까지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서 묻자, 카스트로는 자 신이 크게 잘못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는 걸 묻겠습니까? 내가 왜 남의 나라 기념일까지 알아야 된다는 겁니까?" 불퉁스럽게 내뱉는 카스트로를 멍하니 보던 페트라르카는 놀란 표정 을 수습하며, 억지로 납득하려고 들었다. "하긴, 카르노는 전신 로마를 섬긴다고 들었소. 비쉬는 주신과 수신 (水神)을 함께 섬기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만……." 카스트로는 혼자 생각에 빠져 정신없어 보이는 페트라르카에게서, 잠자코 있던 로페냐를 돌아보았다. 로페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하 기 시작했다. "매년 1월 1일은 테라인, 아니 케테르님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성탄 절(聖誕節)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일입니다. 케테르님의 아드 님이시며, 한님의 아버님이신 자디크님께서 여러 신들을 거느리고 세 상으로 내려오신 날입니다." 타국의 신화 따위는 모른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쪽이 옳았다. 카스트로는 케테르나 자디크보다 전신 로마의 축일이 더 중요했다. "한족들에게는 먼 조상이기도 해서, 매년 1월 1일 테라의 신전에서 케테르님, 자디크님, 한님, 세 분께 제의를 올립니다. 드물게 보통 사람 들에게도 신전이 개방되는 날이라서, 순례자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이 맘때쯤 각지에서 테리온으로 몰려듭니다." 테라인이라면, 그리고 케테르를 믿는 자들이라면 대단히 감명 깊게 들었을 지 몰라도, 카스트로에게는 따분한 설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다. 그래서 대답할 수 있는 말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테리온시를 돌아보는 것이 그렇게 급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질문은 페트라르카에게 돌려졌다. 로페냐가 옆에서 웅얼거리듯 대답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페냐가 곤란한 눈으로 페트라르카를 보자, 구원하듯 페트라르카가 나섰다. "물론 급할 것은 없지만 굳이 미뤄둘 필요도 없지 않소? 당신 사정 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싫다고 피하면 되는 일도 아니고. 어쨌든 당 신이 수년간 지내야 할 곳이니, 이런저런 이유로 피하는 것보다 하루 라도 빨리 이 도시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오." 카스트로는 황당한 표정으로 페트라르카를 쳐다보았다. 빤히 마주보 는 시선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한 점의 의혹도 엿보이지 않고 당당하 기까지 하다. '내 사정을 알아? 대체 무슨 비약을 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테라까지 온 이상, 일부러 시간을 끌며 도피하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단지 피곤해서 쉬고 싶은 것뿐이다. 자신의 사정과 테리온 을 나중에 둘러보겠다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개천절에 당장 테라에 올라가야 할텐데,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대로 말고 지름길을 알아두는 것도 도움이 될 거요." 자신에 찬 페트라르카의 말투에 어이없어하며, 카스트로는 방금 들 었던 말을 되물었다. "그날 테라에 올라간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말입니까?" 물으면서, 동시에 카스트로는 스스로 대답을 깨달았다. 볼모라는 것 은 잡아두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볼모로 잡혀온 자가 잡혀 온 나라에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더 나아가 동경까지 느끼는 것. 그 래서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대항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볼모다. 가장 잘 길들여진 예가, 바로 아베르노가 아니던가. 카스트로는 입꼬리 를 끌어올려 냉소했다. 아베르노도 이런 식으로 길들여졌을 것이다. "그렇군요." 중얼거리듯 말한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을 하고 페트라르카를 쳐다보 았다. "당신 말대로 미룰 필요도 없으니까, 나가죠."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페트라 르카는 주의깊게 카스트로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단단한 눈빛에 오기가 엿보인다. 마치 단신으로 테라와 싸우기라도 할 듯한 고집스러 운 오기. 페트라르카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앞으로 몇년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철판 깐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3 - 관련자료:없음 [3111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0-31 20:06 조회:168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3 - ================================================================== 로페냐와 페트라르카의 반강제적인 안내를 받으며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5년간 카스트로가 유학하게 될 테리아였다. 케테르 교단에서 운 영하는 테리아는 자타가 공인한 자피아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대 륙의 분열 이전부터 자피카 황실의 지지를 받아 고위귀족 자제들의 신 학과 교양을 책임졌었고, 대륙이 지금처럼 분열된 이후에도 지배계급을 위한 엘리트 코스로 자리잡았다. 왕실의 자제들이 유학을 오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에 속했다. 물론 카스트로 형 제들의 경우는 유학이라기보다 인질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테리아는 빠르면 5년, 길면 10년도 좋고 20년도 좋은 학교지. 나는 4년째 다니고 있네. 비쉬로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만 해 서, 뭐… 마냥 널널한 학생이네만……." 페트라르카는 흘깃 카스트로를 곁눈질하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나도 그렇지만 자네도 그다지 열성적인 학생이 될 것 같지는 않 군." 카스트로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테리아를 쳐다보았다. 높이 솟은 두 개의 탑을 정면으로 내세운 본관은 수백년의 세월에 묻 은 때를 자랑하듯 드러내 보인다. 낮고 흐릿한 하늘아래 길게 뻗은 삼 층의 건물들과 마른 흙을 내보이는 넓은 공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 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군." 한참 뒤에 나온 카스트로의 말에 페트라르카는 다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카스트로는 또다시 자신이 잘못했다는 기분을 느껴야했고, 어 이없어하는 페트라르카의 말도 들어야했다. "정말 자네, 아는 게 하나도 없군. 카르노에는 학교가 없나? 지금은 동계휴강 중일세. 당연히 테리아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동계휴강?" 처음 듣는 단어를 따라 발음해보자, 페트라르카가 기이한 표정을 지 으며 카스트로를 쳐다본다. "테리아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 학생들에게 휴가를 줍니다. 가장 더 울 때와 가장 추울 때를 전후해서 두세달씩 쉬도록 하는 겁니다. 어차 피 공부도 되지 않을 때니까요."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페트라르카를 대신해서 로페냐가 친 절하게 설명했다. 카스트로는 같은 자피카어를 쓰는데 자신과 페트라 르카 사이에 로페냐라는 통역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유 용성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다른 학교도 같은 식이오?" "제가 다녔던 유레카도 비슷했습니다." "유레카?" "레이얄…… 왕립 마법대학의 정식 이름입니다." 왠지 꺼리는 듯이 대답하고, 로페냐는 자신을 향한 카스트로의 눈길 을 피했다. 카스트로는 '그랬던가?' 라고 중얼거렸다. 항상 잊게 되지 만, 저 로페냐는 마법사였다. "테라에는 마법학교가 없소?" 스치듯 묻는 말이었지만, 로페냐는 이 화제가 내키지 않았다. "테리아에서도 가르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마법에 관한 한 레이얄 이 최고입니다. 어느 정도 고위 마법사라면, 대부분 유레카를 거쳤다고 보셔도 좋을 겁니다." "그렇군." '카르노의 용병과 레이얄의 마법사' 수백년전부터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용병은 카르노인을 최고 로 치고, 마법사는 레이얄인을 최고로 친다. 수백년전부터의 앙숙인 카 르노와 레이얄은 여러 면으로 비교되고는 했다. 비슷비슷한 국토의 크 기와 인구를 가진 두 나라는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적대적일 수밖 에 없었다. 북쪽에 대국인 라디프가 있다고는 하지만, 라디프는 덩치가 큰 만큼 움직이는 것도 굼떴다. 대륙의 패권보다는 자국내 대제후들끼리의 내 분으로 정신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만약 그 대제후들이 대륙의 패권 을 쥐겠다고 뭉친다면 카르노도 레이얄도 단독으로 라디프를 막을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카르노와 레이얄의 공통적인 대라디프 외교 는 대제후들을 이간질시키는데 있었다. 그리고 해상 왕국 비쉬.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이 테라와 맞닿아있고 나머지 모든 방향으로는 바다를 접한 나라다. 그래서인지 대륙 내에서 해군력이 가장 강한 나라이며, 바닷길을 이용한 각국과의 교역에도 뛰어난 나라이다. 카스트로는 새삼스레 페트라르카를 돌아보았다. 비쉬의 왕자인 페트 라르카가 테라에 유학까지 온 것을 보면 두 나라는 생각보다 더 가까 운 사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국의 왕자가 뭐가 부족해서 타국으로 유학까지 왔을까. 친테라적인 인물이었던가, 저 왕자는. 거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스트로는 불쾌해졌다. 자신이 왜 저런 인물과 어울리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겠나? 교수실이나 강의실이라든가, 휴게실이라든 가……." 카스트로는 시선을 들어 테리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하나 없 이 텅 빈 곳이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이곳이 자신을 가둘 감옥으로 느 껴져서 답답했다. "아니. 다른 곳으로 안내해 주시겠소?" 페트라르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로페냐가 재빨리 대답해버렸다. "그러시죠, 우선 파르나 광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흐응, 속편하게도 지금 테리온시 관광에 나섰다는 말인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일그러진 입모양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마키아 폰 가스티오네였다. 테리온 시 북동지구에 있는 자신의 저택 집무실에 서, 그는 반질거리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한 사내와 마주하고 있었다. "로페냐경과 비쉬의 왕자와 함께라고?" 가스티오네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널따란 책상 너머의 사내를 건너 다보며 물었다. 투박한 셔츠와 조끼를 입은 평범한 하인 복장의 사내 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침 일찍 두 사람이 저택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세분이 함께 마차를 타고 나가셨습니다." "그런가?" "테리아에 들렀다가 파르나 광장을 거쳐 리케아 거리로 들어가는 것 까지 보고 왔습니다. 마차를 따라가느라고 무척 힘들었지요." 이마에 없는 땀까지 훔치는 사내를 보며 가스티오네는 경멸어린 표 정을 지었다. 가스티오네는 옆에 있는 돈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알겠네. 자, 이건 수고비일세. 앞으로도 계속 그 왕자의 일거수일투 족에 주의를 기울이게." 가스티오네의 손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동전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내는 손을 뻗어 금화를 잡아채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 다.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 아침부터 밤까지 눈을 떼지 않겠습니다." "그만 돌아가보게." "예, 나으리." 사내가 문밖으로 나가자, 가스티오네는 푹신한 의자 시트에 등을 기 댔다. "로페냐와 비쉬의 왕자라……." 가스티오네는 천천히 콧수염을 어루만졌다. 카스트로가 어떻게 사람 사귀기 까다로운 로페냐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비 쉬의 페트라르카까지 합세한다면……. 가스티오네는 얼굴을 찡그렸다. 눈가에 잔주름이 생겨 심각한 표정 이 되었다. 어느 쪽이나 할 것 없이 타락한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버젓 이 활개치고 다니는 것은 두 사람의 막강한 배경 탓이었다. 하야로비 후작의 본가인 레이얄의 세이알 백작가는 대륙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 투는 거대한 금광을 소유하고 있었고, 페트라르카는 두말할 것도 없는 비쉬의 왕자였다. 즉 도덕적으로야 얼마든지 타락하더라도, 그 두 사람 이 미칠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스티오네는 그런 두 사람이 카스트로와 어울린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같이 타락해준다면, 오히려 좋을지도……." 가스티오네는 문득 스치고 간 생각을 입밖에 내었다. 카스트로를 테 라에 묶어두는 이유는 테라에 어떤 화근이 될지도 모를 그를 가까이 잡아두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그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아베르노 처럼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손쓸 수 없이 타락해준다면 그 것도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폐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 무 것도 없을 테니까. 가스티오네는 허리를 세우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양피지를 한 장 끌어다 앞에다 펼쳐놓았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깃털펜을 잉크병 속에 푹 담갔다가 양피지위로 부드럽게 굴리기 시작했다. 카스트로가 테라에 있는 동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보고하는 것. 그것이 한족 5 가문의 수장과 제이리트가 그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라에르는 내심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별도 없이 찾아 와서는 테리온시를 안내하겠다는 억지를 부려 카스트로를 꼬여내는데 성공한 무뢰한들은, 느지막한 시간이 되자 여기까지 온 김에 술이나 한잔 마시자며 카스트로를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물론 단순한 술 집이었다면, 라에르도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술집의 실체가 단순한 술집이 아닌, 고급 창녀들이 포진한 윤락가 라는 데에 있었다. 가뜩이나 밀폐된 방에서 술시중을 핑계로 들어온 여자들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노출된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의 옆구리 에 착 달라붙어 몸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이쪽 나리는 왜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세요?" 어거지로 잡혀 앉은 라에르에게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추근대는 여 자도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좀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냉랭하게 대꾸해도 여자는 더욱 끈적하게 엉겨들 뿐이다. 기대오는 머리에서 야릇한 향수냄새가 풍겨왔지만, 라에르는 역겹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페트라르카의 무릎에 앉아서 아양을 떠는 여자와 로페냐의 팔에 매달려 안주를 먹여주는 여자, 그리고 카스트로에게 눈웃음치며 안겨드는 여자. 모두 추잡하고 짜증스러웠다. 시종장 베제르가 이 꼴을 봤다면 사흘 밤낮을 잔소리해댔을 광경이지만, 언뜻 보기에도 카스트 로는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라에르는 더욱 안 절부절못했고, 기회를 봐서 조금이라도 빨리 카스트로를 빼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어떤가? 이 리케아에서도 가장 물 좋은 집이지. 마음에 드는 아이 가 있나?" 나른한 목소리로 페트라르카가 물었다. 잘 그을린 얼굴위로 부드러 운 하늘색 머리카락이 흩어져있었고, 셔츠도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풀 어져있었다. 이런 자리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에서 한두 번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네 왕자가 이렇게까지 방종하게 행동하고 다닌다는 것을 비쉬 의 국민들은 알고나 있을까?' 카스트로는 내심 한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전 처음 경험하 는 일이었기에 호기심과 흥미도 함께 느껴졌다. 카르노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탈을 테라에서 과감하게 해보는 것도 묘하게 재미있었다. 게 다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거리낌없이 안겨드는 여자들도 흥미로웠다. 이들이 바로 창녀라는 여자들일까? 카스트로가 접해본 귀족 여성들과 는 달랐다. 새침하게 빼는 여자,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자 등 골고루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여자들과 이 여자들은 근본적으로 틀리게 느껴진다. 자신이 소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여자들은 능동적이고 적극 적으로 유혹해온다. 노골적인 스킨십과 달콤한 밀어, 그리고 적당히 이 성을 흐트리는 술. 어쨌거나 카스트로는 혈기왕성한 열일곱살의 젊은 이였다. 그런 유혹을 받고 무덤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꿋꿋 이 버티고있는 이유는, 옆에서 살기등등하게 지켜보고 있는 라에르라 는 존재와, 전날 지스카르가 했던 충고 때문이었다. '카르노 왕실의 명예를 떨어뜨릴 참인가?' 대답은 하나였다. 사랑하는 조국 카르노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실례하겠소. 천천히 즐기고 돌아가시오." 적당히 호기심이 채워지자, 카스트로는 여자들의 손을 물리치고 일 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카스트로의 얼굴로 모여든다.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데로 옮기지." 페트라르카가 태연스럽게 말하며 따라 일어서자, 여자들이 그의 팔 에 매달리며 칭얼댄다. 카스트로는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번은 멋모르고 따라왔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니 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테라까지 와서 내 명예를 더럽힐 생각은 없소. 이럴려고 먼길은 온 것은 아니니까." "흐응,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나? 역시 자네도 그렇고 그런 속물일 뿐이군. 로페냐가 사람을 잘못 봤어." 페트라르카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카스트로는 싸늘한 시선으로 맞받았다. "나는 자신과 내 나라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오. 당신처럼 타락해야 속물이 아닌 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속물이 되겠소." "흐응." 페트라르카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다시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그는 술잔을 집어들며 흐릿한 눈으로 웅얼거렸다. "역시 어려. 어른인척 하지만 아직 세상을 몰라." 카스트로는 멈칫하고 페트라르카를 내려다보았다. 어리다는 말은 상 당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혀를 차는 페트라르카를 보며 카스 트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이 취급을 받고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 었다. 아니, 아주 기분이 나빴다.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왜 어리다는 거지?"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4 - 관련자료:없음 [3113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1 20:40 조회:169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4 - ================================================================== "내가 왜 어리다는 거지?" 페트라르카는 느긋하게 여자를 옆에 끼고 앉아, 씨이익 웃으며 과장 되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네 명예? 네 나라의 명예? 흐으, 개나 주라고 해. 너나 나나 자기 나라에서 버림받고 쫓겨난 사람 들이다. 그런 주제에 자기 나라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하하하하, 기가 막히는군. 명예? 그게 뭐였더라? 푸하하하하하." 카스트로의 얼굴에서 싸악 핏기가 가셨다. '버림받고 쫓겨난 사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온몸을 고통스럽게 울려대는 잔혹한 진실. 자신의 처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 말에, 카스트로는 대책없이 상 처입었다.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카스트로의 입술은 풀로 붙인 듯이 들러붙어 버렸 다. 테라로 떠나는 것이 확정되던 날, 국왕의 침실에서 아버지가 보여 주었던 싸늘한 말과 태도, 알게 모르게 자신을 무시하고 아베르노에게 아부하던 귀족들, 그리고 아베르노의 너무도 자신만만한 모습. '카르노는 내 것이다.' 당당하게 내뱉던 그 말이, 카스트로의 뇌리를 쿵쿵거리며 울려댄다. 믿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에게 자신은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자 신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모에게도, 귀족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쓸모없는 삼왕자가 아닌 왕세자 아베르노 였고, 자신은 고작 아베르노가 없는 사이에 자리를 지킬 대체물에 불 과했다. 왕세자를 빛내줄, 왕세자의 방에 걸린 짐승의 박제같은 곁다리 장식품에 불과했다. 아니 어쩌면 아베르노에게는 방해물에 불과할 지 도 모른다. 고집 세고 말도 잘 안 듣는 방해물. 어느 쪽이든 카스트로 는 스스로가 비참하고 한심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길거리에 나뒹구 는 돌멩이보다 못하게 느껴졌다. 아니 자신이 아닌 부모가, 아베르노 가, 귀족들과 백성들이 모두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팠다. 애써 잊어버리려 했던 상처가 타인의 무심한 돌팔매질에 무 참하게 다시 찢겨져버렸다. 버림받았다는 자각과 무너져버린 자신의 존재가치가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각인을 찍어버린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상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단지 아프다는 이유로 외면하려고만 했던 상처는 모른 척한다 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마음의 각오도 없이 거칠게 헤집어 진 상처의 고통에 카스트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대응 이전에 너무 아파서, 아무도 없었다면 울어버렸을지도 몰랐 다. "울 것 같은 얼굴이구나, 꼬마."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페트라르카가 말했다. 버림받았다. 부모에게, 형제에게, 국가에게, 국민에게! 아버지에게 버 림받던 날 생긴 상처는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보니 더욱 곪고 썩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생겼을지도 모르는 그 상처는, 그 당시보다 이렇게 느닷없이 들춰진 지금에서야 더욱 실체를 가지고 아 파온다. 발밑이 내려앉고,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어둠 속 절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현기증, 끔찍한 상실감. 라에르는 망연해하는 카스트로의 표정을 보며 이 일의 원흉인 페트 라르카에게 살의를 느꼈다. 처음 보는 주군의 약한 모습이 그를 분노 하게 만들었다. "그만두십시오, 페트라르카 전하! 다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을 뿐,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나서서 말한 것은 로페냐였다. 굳은 얼굴로, 마치 훼손당한 것 이 자신의 명예인 듯 정색을 하고 따진다. "글쎄, 본인에게 물어볼까?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페트라르카는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카스트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존재가치마저 부정당한 상처와 타인으로부터 치부를 찔린 모욕감 속에 서, 카스트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올렸다. 오기와도 같은 자존 심으로 카스트로는 우겼다. "버림받았다고 했나?" "……!" "너도 버림받았다고 했나?"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며 싸늘하게 굳는 페트라르카를 보며, 카스트 로는 지루할 정도로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몇년전에 스승에게서 들 은 적이 있었다. "그래, 생각나는군. 비쉬의 국왕은 새 왕비에게 홀려서, 전 왕비 소 생대신 새 왕비의 소생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싶어한다고." 페트라르카의 바다빛 눈동자가 더욱 격렬하게 흔들리고, 더욱 색이 깊어진다. 카스트로는 오만하고 냉정한 얼굴로 그런 페트라르카를 내 려다보았다. "그래서……, 너는 버림받아서 스스로 타락했다고 하는 건가?" 페트라르카의 파란 눈이 거칠게 회오리친다. 카스트로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위험스러운 저음으로 말을 이었다. "너의 방식은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것일지 몰라도, 나는 다르다. 네 가 너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듯, 나도 내 방식대로 살아가. 네 방식을 내 게 강요하지 마라. 버림받았다고? 그래서 스스로를 타락시킨다고? 너 마저 너를 버린다는 건가? 그리고 그걸 자랑이라고 내 앞에서 으스대 는 건가?" 페트라르카의 눈빛에 한 가닥 위험스러운 살기가 배어간다. 하지만 아직 카스트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자포자기의 방식을 내게까지 요구하지 마라! 나는 남이 나를 버린다고 나마저 날 버리지는 않는다. 버림받을 바에는 차라리 내 쪽 에서 먼저 버리고 짓밟아버리겠어. 배신당할 바에는 내 쪽에서 먼저 처분해 버린다. 나는 너처럼 스스로를 진창에 빠뜨리는 방법 따위는 몰라. 나는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며 살 것이다. 나 를 버린 카르노? 그런 건 세상에 없어!" 오기와도 같은 의지를 거침없이 내보이고, 카스트로는 차가운 미소 를 띄웠다. 마치 타락해버린 페트라르카를 조소하는 듯 하다. "이만 실례하지." 더 할말이 없다는 듯, 마치 쓰레기와 어울리는 것이 혐오스럽다는 듯, 단호한 태도로 뒤돌아나가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숨이 막히게 당당 했다. 카스트로와 라에르 두 사람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방안은 침묵 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적막해졌다. 뒤늦게 페트라르카의 표정이 기묘 하게 일그러졌다. 화난 듯, 웃는 듯,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담고, 페트 라르카는 잔뜩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버림받을 바에는 먼저 버리고 짓밟아버린다고?" 로페냐는 카스트로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페트라르카가 지껄인 말을 듣고 그를 돌아보았다. 얼이 빠진 것처럼 중얼거리는 모 습이 불안해 보여,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를 불렀다. "페트라르카 전하?" "하!" 페트라르카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호탕한 웃음소리 로 이어졌다. "하하하하하하-----!" 한동안 정신없이 웃어제끼던 페트라르카는 배를 움켜잡고 로페냐를 돌아보았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어디서 저런 희한한 녀석을 데려왔나? 하하하, 걸작이야! 하하하하 하하-----!" 카스트로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응접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 다. 시종장 하미르가 가르쳐준 응접실로 들어가며 카스트로는 내심 거 북스러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손님은 지스카르였다. "별로. 앉거라." 지스카르는 손에 든 책을 테이블 위에 엎어놓고, 카스트로를 보며 앉으라고 눈짓했다. "오늘, 페트라르카 왕자와 로페냐경, 두 사람과 함께 외출했다고?"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카스트로는 껄끄러운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스트로는 힘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축 쳐져서 생기없는 모습이 지 스카르의 눈에 거슬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카스트로?" "모르겠습니다." "뭐?" 지스카르는 카스트로의 말을 이해하려고 인상을 썼다. 카스트로는 불쑥 내뱉고, 한참 뒤에야 설명을 붙였다.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게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페트라르카에게 큰소리를 치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오기와 만 용일 뿐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혼란스러웠고, 아직도 가슴언저리가 저 릿하게 아팠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습니다. 나중에 찾아뵙 겠습니다." 지스카르는 하루사이에 핼쓱해진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처음 테라에 왔을 때의 혼란을 떠 올리고 납득하려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고 힘들 테지.' "그래. …… 뭐든 힘드는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너라. 푹 쉬 고, 기운 내라." "네." 지스카르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 없는 카스트로를 침실로 올 려보내고 나서, 밖으로 나섰다. 침실로 올라온 카스트로는 모든 시중을 시종장 하미르에게 맡긴 채 무기력하게 서있었다. 곁에서 라에르가 걱정스레 쳐다보았지만 신경쓰 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아무생각도 하기 싫고, 잠만 자고 싶었다. 시도때도없이 울컥거리며 아파오는 상처 따위, 말끔히 잊고 싶었다. '버림받은 것은 나만은 아닌데.' 지스카르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자신도 그렇게 되 는 것일까, 생각하며,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테라에 익숙해지고, 테라에 무덤덤해지는 것. 그것이, 과연 잘 지내는 것일까? 조금씩조금씩, 자신 의 의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카스트로는 또다시 늦잠을 잤다. 그리고 마치 어제의 일과를 되풀이하듯 두 명의 불청객을 맞아, 새벽녘에야 힘들게 청한 잠에서 깨어야 했다. 카스트로는 지치지도 않고 찾아온 뻔뻔스런 두 불청객에 게 이를 갈아붙였다. 카스트로가 머물도록 제공된 유백색의 아름다운 저택 앞에는 흑자색 옷 위에 자주색의 망토를 걸친 친위대원 두 명이 서 있었다. 짧은 갈 색 머리에 검은 깃털이 달린 자주색 모자를 쓴 왼쪽의 기사는 곰같은 덩치에 불퉁스런 얼굴로 서있었다. 반대쪽 문 옆에는 적갈색 머리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몸매의, 유쾌한 인상을 가진 기사가 같은 복 장을 하고 서 있었다. 제법 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저택 정문에 버텨 선 두 사람은 얼마 전 기사단원에서 친위대원으로 전임된 베이경과 로 카르경이었다. 테리온에 도착하기 전날, 그들 여섯 명의 기사단원들은 갑작스런 왕 자의 호출을 받았다. 며칠이나 처벌이 미뤄지고 그에 대한 어떠한 언 급도 없었기 때문에, 워낙 바쁘신 왕자전하께서는 자신들의 일을 잊고 계실 거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대번에 시퍼렇게 질린 채로 왕자 앞에 끌려갔다. 어떤 처벌이 떨어질까 조바심을 치던 그들 에게 내려진 지시는 친위대원으로의 입대지시였다. 기사단원에서 친위 대원으로의 위치변화는 두말할 것도 없는 승진이었다. 처벌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승진을 시켜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누구 도 그 처분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다. 승진이긴 하되, 그것은 명백한 처벌이었기 때문이었다. "휘유우우우우" 베이경의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얼어붙은 겨울 공 기중으로 하얀 한숨이 퍼져나간다. "아침부터 웬 한숨이냐? 재수없게시리." 로카르경이 재깍 핀잔을 주었지만, 베이경은 더 크게 한숨을 뿜어낼 뿐이었다. 로카르경은 최근 들어 말수가 줄은 베이경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쌍해지는 것은 아니다. 처벌은 그 여섯 명이 전부 똑같이 받았으니까. 이 정도 선에서 처벌이 끝난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여섯 명 중 다섯 명의 공통된 결론이었지만, 원래부터 불평불만이 많은데다, 카스 트로에 대한 악감정이 많은 베이경에게는 다르게 생각되는 모양이었 다. 어찌됐든 뜻하지 않게, 5년간을 카르노 근처도 못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쯤 해둬, 베이. 선배들이 알면, 또 불호령이 떨어질 걸. 난 네 옆 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벌받기 싫단 말이다!" 베이경의 눈꼬리가 곱지 않게 치켜올라간다. 베이경이 이렇게 기운 이 빠진 이유는 단지 아르노에 있는 애인이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마치 기사단원 시절 초반기를 연상케 하는, 하지만 강도에 있어 수배 에 달하는 지독한 훈련 탓이기도 했다. 기사단원시절의 훈련은, 친위대 원들의 훈련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기사단원과 근위대원 중 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들만을 뽑아놓은 곳이 친위대다. 그러 다 보니 얼결에 처벌을 받는 대신 친위대로 들어온 자신들의 실력으로 는 신입대원이라기에도 모자라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친위대 선배들 로부터 실력향상이라는 명분아래 매일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 다. 차라리 이렇게 문이라도 지키는 임무는 그들에게 축복과도 같았다. 이런 임무도 없었다면 그들은 하루종일 강도높은 훈련을 받아야 했을 테니까. 훈련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육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익히는 내내, 그들은 정신적인 훈련도 받아야했다. 그것은 기사에서 친 위대원이 되는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나'를 죽이고, '주인'을 살리는 것.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 물론이고, 어느 때 어느 경우라도 주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을 배 우는 것. 그것은 마치 세뇌교육이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더 이 상 사람이 아니라 주인을 따라 다니는 방패와도 같은 것이고, 자신의 의지가 필요한 것은 오직 주인의 안전을 위해 어느 쪽이 더 효율적으 로 지킬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뿐이다. 단 며칠 사이에, 그들은 자신들 이 예전의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이질감을 느껴야했다. 평소에 친위 대원들이 목숨걸고 주인을 지킨다는 것을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해왔었 다. 하지만 이제는 주인을 위해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친위대원들이 인간같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만약 친위대원이 되 는 것이 꿈이라는 기사단원이 있다면 기필코 목숨걸고 말리리라. 로카르경은 한숨을 푹 쉬고,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이런데, 카스 트로에 대한 반감이 있는 베이경이 어떨지는 뻔했다. 지금 그들이 목 숨을 걸고 지켜야되는 '주인'은 바로 카스트로였으니까. "실례합니다만, 카스트로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전하께서는 안에 계 십니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년을 보고, 로카르경은 물론 옆에서 한숨만 쉬던 베이경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 다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납득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전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만,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놀랐기는 마찬가지지만, 행동이 빠른 로카르경이 조금 더 일찍 정신 을 차리고 재빠르게 대응했다. "테라의 신전에서 온 비제 류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빛이 날 것 같은 감색 머리와 희디흰 옷의 의미 를 깨달았다. 이제 갓 열 여섯이나 일곱쯤 되어 보이는 아기같이 천진 한 미소를 지은 소년은 이 저택에 온 첫날에 봤던 사람인 것도 같았 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로카르경은 살짝 목례를 하고, 베이경에게 눈짓해 보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잘 지키라는 뜻이었는데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 다. ==================================================================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감기 달고 사는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5 - 관련자료:없음 [3115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2 21:18 조회:168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5 - ================================================================== 대신관 제이리트의 명령으로 카스트로를 찾아온 비제는 느긋한 걸음 으로 시종의 뒤를 따랐다. 다시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은 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가슴 두근거리게 빛나던 그 기분 좋은 오라를 다시 보고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비제님." 인사하는 사람은 시종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비제는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지금 다른 손님들과 만나고 계십니다. 비제님께서 그분 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불편하시지 않다면 그쪽으로 모시고, 불편하시 다면 따로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비제는 무표정의 시종장 하미르에게 천진스럽고 선한 미소를 지어보 였다. "전하와 그분들이 괜찮으시면,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전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장 하미르는 짧으면서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카스트 로가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1층 복도의 한 방문 앞에 멈춰서 서 목청을 돋구어 말했다. "전하, 비제님께서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안에서 시원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제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편안한 분위기의 응접실에는 비쉬의 페트라르카와 하야로비 후작 로 페냐가 함께 있었다. 로페냐는 깍듯한 태도로 비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주신 케테르님의 미천한 종 로페냐 폰 하야로비가 한족의 비제님을 뵙습니다." "주신 케테르님의 종 비쉬의 페트라르카, 한족의 비제님을 뵙습니 다." 비제는 정갈한 신관의 태도로 인사했다. "케테르님의 축복이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종'이라 운운하는 페트라르카의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마치 비쉬라는 나라 위에 테라의 한족 이 군림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카스트로 전하?" 비제가 미소지으며 인사했지만, 카스트로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 였다. "어서 오십시오." "테리온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우셨으면 합니다만, 그렇지 않으신 것 같군요." 카스트로는 불친절한 눈초리로 비제를 쏘아보았다. 마치 다 알고 있 다는 듯한 미소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라에르가 순간 바짝 긴장했고, 로페냐는 불안스럽게 비제와 카스트 로를 번갈아 보았다. 페트라르카는 무언가를 충격 받은 듯한 얼굴이더 니 서서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대신관 제이리트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분명한 냉대에도, 비제의 깜찍할 정도로 천진스런 미소는 바뀌지 않 았다. "앉으십시오." 마지못한 말투였지만, 비제는 태연스럽게 카스트로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그제서야 서있던 로페냐와 페트라르카도 소파에 앉는다. "제이리트님의 전언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카스트로의 오라는 상당히 불안정한 빛을 내고 있었다. 비제는 카스트로가 기분 나쁜 것이 단순히 자신의 방문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을 눈치챘다. 페트라르카와 카스트로의 오라가 서로 위협적으로 맞서 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페트라르카 전하를 뵐 줄은 몰랐습니다." 비제가 미소지으며 돌아보자, 페트라르카는 움찔하며 놀라다가 이내 능글맞게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비제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비제님께서 신전 밖으 로 직접 걸음하시다니, 카스트로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인가 보지 요?" 언제부터인가, 카스트로와 페트라르카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카스트로가 허락한 적은 없었다. 다 만 먼저 말을 놓아버리는 페트라르카와 말다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서 로 말을 트게 된 것이다. "페트라르카 전하께서도 개천절 행사에 테라로 오시겠지요?" "물론입니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질문이 깨끗이 무시당한 것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제는 그대로 시선을 미끄러뜨려 카스트로를 돌아 보았다. "제이리트님께서는 이번 개천절 행사에 카스트로 전하께서 꼭 오시 기를 바란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전하를 위해 전망 좋은 곳을 마 련해 놓으시겠답니다." 카스트로는 며칠 전에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 트라르카와 로페냐의 장담에 자신이 그 날 테라에 가게 될 줄은 알았 지만, 직접 비제까지 보내어 참석해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못마땅했지 만, 거절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어차피 볼모로 끌려온 자신이다. 자신의 처지에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처지, 그게 지금 자신의 현 실이 아닌가! "생활하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무엇이든 부족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별로. 괜찮습니다." 저 콧대높은 한족의 신관이 저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데도, 마치 귀 찮아 짜증스럽다는 듯이 대꾸하는 카스트로를 지켜보며 페트라르카는 재미의 수준을 넘어,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불성실한 신자라고는 해도 이런 카스트로의 태도는 파격으로 느껴졌다. "그러면 1월 1일에 뵙겠습니다." 비제는 더 이상 있어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섰다. 때가 좋지 않을 때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케테르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비제님께도 케테르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페트라르카와 로페냐의 인사를 받으며, 비제는 그곳을 나섰다. "자주오나?" "음?" 비제가 돌아가고서도 한참 만에야 페트라르카가 물었다. "저 신관, 자주 오느냐는 말이야."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관심없다는 투였다. "처음 왔을 때 여기까지 안내해주고, 오늘이 처음이야. 저 자를 잘 아나?" "잘 안다는 것보다,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것뿐이지. 한족 중 에서도 대신관님을 빼면 저 자가 가장 유명할걸?" "소문?" "대륙에 하나 있는 혼혈이지. 한족이 다른 종족과 결혼하지 않는다 는 것은 알고 있겠지? 유난히 피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한족이니까. 하 지만 그 하나뿐인 예외가 바로 저자다. 한족과 인간의 하나뿐인 혼혈. 덕분에 온갖 악담이 뒤를 따라다니지만." "악담?" 모처럼 관심있게 물어보는 카스트로였기에, 페트라르카는 흔쾌히 대 답했다. "인간들보다 한족들 사이에서 나온 악담들이지. 이를테면, 그가 악마 의 자식이라고 불린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야. 왜 한족과 인간의 혼혈 이 악마의 자식이 되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웬만한 한족보다 훨씬 나아." 카스트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생각난 질문을 입에 담 았다.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그런데 대신관은 나이가 어느 정도 되었지? 꽤 젊어 보이던데?" 적어도 중년 이상은 되어야 할 제이리트의 비정상적인 젊음, 그리고 한족 수장들의 젊은 모습들이 새삼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상하지 않은가! "글쎄. 모르겠는데? 로페냐, 자네는 알고있나?" 한족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를, 속을 삭 여가며 듣던 로페냐는 불만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100세는 넘으셨을 겁니다." "100세?" 카스트로가 경악하는 모습을 보며, 로페냐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이리트님이 대신관이 되신 것이 40년 전이니까요. 그전에 신관으 로서 적어도 50년은 계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100세는 넘으셨다는 게 맞을 겁니다." "하, 하지만 보기로는, 꽤 젊어 보이던데……, 100살의 노인이 어떻 게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지?" 카스트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횡설수설하자, 로페냐는 한숨 을 쉬며 설명했다. "한족을 보통 인간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한족들의 평균수명은 300세 가량이라고 하니까요." 진지한 로페냐와 고개를 끄덕이는 페트라르카를 보며, 카스트로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00세? 300년을 산다는 말인가? 인간이 길어야 100년밖에 못사니까 그 3배? 아니, 실제 수명은 훨씬 짧으니까……' 카스트로는 문득 스쳐간 생각을 집어냈다. "그럼 저 비제라는 자는 몇 살이나 된 거지?"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전하보다는 나이가 많으실 겁니다. 6년 전인가, 처음 뵈었을 때에도 저분은 저 모습 그대로이셨으니까요." 카스트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로 나보다 연상이라고?' 앳되어 보이는 비제의 얼굴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 같다. 거 짓말 같았다. 하지만 굳이 저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 고, 대신관과 한족들의 비정상적인 젊음과도 맞아떨어진다. 확실히, 한 족은 인간이 아니었던가? 카스트로는 새삼 한족이라는 것이 괴이쩍게 느껴졌다. 테라의 정상, 신전의 깊은 곳에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찰나의 순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색 머리와 청록색 눈동자의 기묘한 조화를 가진 비제였다. 비제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와 있는 곳은 대신관의 거처 에 있는 앞뜰이었다. 비제는 혹시나 흐트러졌을지 모를 옷매무새를 고 치고, 정갈하고 유연한 걸음으로 대신관 제이리트의 명상실로 들어갔 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게 걸어서 도착한 명상실 앞에서 막 스승을 부 르려던 비제는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 동작을 멈추었다.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그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 인지.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일 아닙니까?" 세크리트 지. 지가문의 수장인 자의 목소리였다. "비제님 정도는 되어야 저희 쪽도 격식에 맞습니다. 무얼 그리 심각 하게 생각하십니까? 단순한 심부름일 뿐입니다." 차분하고 타이르는 듯한 말투는 스승 제이리트의 것이다. 여유를 두 지 않고, 다시 세크리트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위험인물입니다. 지금이야 제이리트님 밑에서 철저하게 감시 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 지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런 자를 또 다른 위험인물과 접촉하게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는다는 말 입니다!" 완고한 말투를 들으며 비제는 눈을 감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직접 말로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위험인물이라……." 비제의 붉고 윤기 흐르는 입술 끝에 냉소가 붙었다. "저를 못믿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비제님의 기억과 능력은 저와 당신들 다섯 수장께서 함께 봉인했습니다. 그 봉인을 깰 수 있는 자가 이 테라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이미 7년간 아무런 말썽 없이 신실한 케테르님의 사제로 살아오셨 습니다. 저야말로 세크리트님의 기우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제와서 비제님을 의심하신다는 것은, 비제님보다 세크리트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문제라고요? 무슨 뜻입니까!" 칼날같이 신경이 곤두서서 따지는 세크리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제는 이쯤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스승님, 카스트로 전하께 다녀왔습니다."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제이리트의 음 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석을 마주놓고 앉아있는 제이리트와 세크리트가 보였다. "세크리트님께서도 계셨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시치미를 떼고 미소지으며 묻자, 세크리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 주 미소지었다. "비제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손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방해가 되었다면 나중에 다시 찾 아 뵙겠습니다." 세크리트는 머리를 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만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세크리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비제는 제이리트를 바라보았다. 제이 리트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앉으십시오.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비제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천진스런 미소를 지으며 붉 은 입술을 움직였다. 물론 자신의 오라를 기분 좋은 상태로 관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한시도 틈을 주지 않고, 언제나 밝고 차분한 감 정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비제가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 으로 배워야 했던 일이었다. ================================================================== 머리가 핑핑~ ㅠ.ㅠ 가뜩이나 감기로 골골거리는데, 보일러는 밤에야 작동된다는군요.. 모기랑 벌레 없다고 겨울이 4계절 중 젤 낫다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할래요.. 추워어어어~~~~~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ㅠ.ㅠ -추운 방에서 잤더니 머리 더 아픈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6 - 관련자료:없음 [3117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3 20:41 조회:165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6 - ================================================================== 테라력 696년 1월 1일. 테라는 축제 분위기였다. 전 국민이 주신 케테르를 믿는 종교국가인 테라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종교행사일 중 하나였으며, 또한 새해 의 시작인 날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들뜰 수밖에 없었다. 연말 부터 꾸준히 사람수가 늘어가던 테리온시는 12월의 마지막날을 기점으 로 과포화상태에 다다랐다. 테리온시의 여관은 물론이고, 민박이 되는 일반 집들마저도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테리온 북동지구의 귀족 들도 시골에서 올라오는 친척이나 친구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여, 연일 무도회와 연회를 열어 북적대고 있었다. 1월 1일 아침이 되자, 카스트로도 분주해졌다. 테라 신전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있을 때, 로페냐와 페트라르카 두 사람이 도착했다고 시종이 알려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매일같이 카스트로를 방문 해서 술 마시러 나가자고 유혹하는 것이 일인 사람들이었다. 로페냐라 면 원래 그려려니 하겠지만, 페트라르카까지 합세해서 그를 피곤하게 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카스트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마차에 올랐다. 카르노 왕 실의 문장을 단 암녹색의 사륜마차 안에는 카스트로와 라에르, 그리고 페트라르카와 로페냐까지 합세해서 마주앉았다. 마차를 가져오지 않았 느냐는 질문에, 이런 복잡한 날에는 마차 수가 적을수록 좋다는 대답 이었다. 테라로 올라가는 길은 두 사람이 말했던 대로 마차가 제대로 움직이 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메우고 있었다. 10프리 (10m)를 이동하는데도 반시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하늘은 맑았다. 불쾌할 정도로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해서, 케테르도 자신에게 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 도였다. 카스트로는 굼벵이처럼 전진하는 마차의 창을 내다보며, 지금 쯤 신년하례를 받고 있을 카르노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카르노의 하늘 도 이만큼 맑을까? 아버지는 지금 아베르노 일가의 인사를 받으며 웃 고 계실까? 자신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잡했다.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진다. 버림받기 전에 버리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카르노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런 감정만이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그런 감정적인 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 아 버지는, 카르노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을 키워준 토양이다. 아직 까지 땅을 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카스트로는 알지 못했다.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 건지…….' 카스트로는 스스로의 생각이 못마땅해서 혀를 찼다. "멀었나?" 침울해하던 카스트로가 불쑥 물어오자, 로페냐가 재빨리 창 밖을 내 다보고 대답했다. 라에르는 아직 테리온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페트 라르카는 그런 질문에 답해줄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를 빼고라도 카스트로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그 자신 의 마음이 가장 컸지만. "거의 다 와갑니다. 조금만 더 가면 천계(天階)에 도착할 겁니다." "천계?" "네. 케테르님께 닿는 계단이라는 뜻입니다. 전에 테라에 가실 때 오 르셨던 그 긴 계단 말입니다." "아아." 카스트로는 그 '끔찍한 계단'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다시 그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새삼 인식하고 인상을 구겼다. 왜 그 런 쓸데없는 계단을 만들어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한족들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게 이상하지.' 이상한 방법으로 납득하고, 카스트로는 그 문제를 접었다. 며칠동안 마음은 불편해도, 몸은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처럼 힘들다고 나가떨어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을 맞아 빛의 주인이며, 모든 신의 주인이신 주신 케테르님께 정성과……"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감색머리의 한족신관들과, 그들과 같은 흰색 으로 맞춰 입은 한족 5가문의 수장들이 제단 앞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 고 있었다. 부드럽고 깊이 있는 목소리로 제문을 읽어 내려가는 제이 리트의 조금 뒤에는 단정한 자세로 제이리트의 시중을 드는 비제가 서 있었다. 제단은 테라의 정상에 있었다. 신전 내의 탁 트인 정상에 세 개의 신상이 놓여져 있었고, 그 앞으로 반반한 흰색의 대리석 제단이 놓여 있었다. 황금의 향로에는 수십 개의 향이 꽂혀 희고 가는 연기를 길게 뽑아내고 있었고, 사이사이로 갖가지 제물들이 황금의 제기 위에 소담 스럽게 놓여있었다. "……세상으로 내려와 무지한 인간들은 깨우쳐주시고 바른길로 인도 해주신 케테르님의 아드님이시며, 한님의 아버님이신 자디크님께……." 전신 로마께 드리는 제의(祭儀)와는 달랐다. 카스트로는 제의 주체인 한족들의 조금 뒤에 서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케테르교에 대해서 는 막연한 적대감을 느꼈을 뿐 정작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한족들이 멀고먼 한 대륙에서부터 가지고 들어 온 외래종교이며, 케테르가 그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신이라는 것. 그리 고 한족들과 케테르교인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케테르가 모든 신 들의 주인인 주신이라는 것. 하지만 카스트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일 뿐, 증명된 바는 없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카스트로는 카르노의 수호신 인 전신 로마가 케테르의 하위 신중 하나일 뿐이라는 가능성을 인정하 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세상의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당신의 후손이며 인간의 후손인 한족이……" 맑아야할 산 정상의 공기가 저 지독한 향내와 우글거리는 사람들의 향수냄새, 체향으로 더럽혀져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였다. 어쩌면 카스 트로 자신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케테르를 믿지 않으면 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런 자리에 서 있다는 부담감이 기분을 무겁 게 한다. 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결국 힘의 논리다. 카르노는 테라의 힘에 눌렸고, 그래서 테라의 뜻 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노예다.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우리의 선조 한님께 바칩니다……." 제의는 지루했다. 처음의 색다른 이질감은 잠깐일 뿐, 세 명의 신에 게 거의 비슷한 제문을 바치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케테르 의 종이라면 감격스러울지 몰라도, 이교도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동 도,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언제 의식이 끝날까만 기다리던 카스트로는 문득, 낯익은 음성이 굉장히 가깝게 들려온다는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을 따라하십시오.' "……!" '두리번거리지도 마십시오. 이것은 전하께만 들리는 말입니다. 전하 의 영혼에 직접 전하는 겁니다.' 카스트로는 당혹스러움을 애써 수습하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이 목 소리.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비제 류입니다. 저를 보지 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십시오.' 카스트로는 놀라움에 작게 입술을 벌렸다. 뭐라고 묻고 싶었지만, 제 단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비제에게 말을 전할 방법은 없었다. '한족들이 전하를 살피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 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잘 조절하십시오. 섣불리 한족 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의아했다. 왜 비제는 자신에게 그 런 말을 하는 것일까. '겉으로 감정을 감춘다고, 표정만 감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한족들은 표정보다 오라를 봅니다. 얼굴표정에 속는 어리석은 한족은 없습니다. 한족에 대한 적대감을 숨길 수 없다 면, 뭔가 전에 있었던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십시오. 기분 좋은 일을 생 각하십시오. 그것이 전하 자신을 저 한족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지름길입니다.' 카스트로는 슬쩍 고개를 틀어 비제를 바라보았다. 비제는 제이리트 의 옆에서 다소곳이 신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저를 보지 마십시오.' 카스트로는 미간을 접으며, 곧장 케테르 신상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가 이런 말을 해주는지 알 수 없었다. 혼혈이라서인가? 하지만 혼혈이라도 한족으로 인정받은 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대신관 의 제자까지 된 자가 아니던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인 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페트라르카가 해주었던 말을 기억해낸 것은 그때였다. '악마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한족들로부터 그런 악명을 듣고 있다 고?' 새삼 비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족의 혼혈이면서, 한족 대신관 의 제자가 된 자.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던가?' 그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비제라는 자는 혼혈인만큼 다 른 한족들과는 다를 지도 모른다. 카스트로는 무생물같은 감색 눈동자 의 세리카와 웃을 때 환해지는 청록색 눈의 비제를 비교해보았다. 확 실히 비제쪽이 인간다웠다. 한족만 아니라면, 동생으로 삼고 싶을 정도 로 깜찍한 아이. 아니,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때 다시 비제의 음성이 울려왔다. '내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면, 따라서 숙여주십시 오. ……지금입니다!' 카스트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늦게 다른 사람들처럼 허리를 숙였 다. 옆에서 라에르가 놀라 움칫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떠랴 싶었 다. 비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간단한 머리조아림으로 한족들의 이목을 속이고 잠시나마 편해질 수 있다면, 이 정도는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거짓이다. 머리를 숙여도, 케테르 따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다. '오라를 조절하십시오. 아니, 카르노에서 즐거웠던 일을 떠올려보십 시오. 지금 전하의 오라는 반항을 뜻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리고 카르노를 떠올렸다. 분명히 카르노에서 17 년간 즐거운 일도 많았을 테지만, 아픈 느낌만이 가슴을 채웠다. 아버 지도 어머니도, 유리나 누나와 체리나도, 가슴아프게만 다가왔다. '좋습니다. 계속 유지하십시오. 한족에 대한 불만은 자택에 돌아가셔 서 하십시오. 지금은 그 감정만 유지하시는 겁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고 케테르 신상을 쳐다보았다. 되도록 아무 것 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한족에 대한 반감도, 아프기만 한 추억도. 감정의 문제라면,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감정이 나을지도 모른다. 제 의가 끝날 때까지 비제의 음성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상대의 영혼 에 직접 말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 러고 보면 며칠새 비제가 보여준 여러 가지 능력들은 듣도보도 못한 것들이었다. 지루했던 제의가 끝나자 천천히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지. 이제는 즐기는 것만 남았네. 오늘부터 파르나 광장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가 열릴 거야. 그야말로 축제에 돌입하는 거지." 옆에서 페트라르카가 말해왔다. 카스트로는 제이리트를 따라 한족들 과 섞여드는 비제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천천히 페트라르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한족들의 이번 심사는 거의 끝난 것 같 다. 결과가 좋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떤 이벤트가 열리나?" 친위대원들의 호위 속에서 걸어가며 물었다. "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가장 행렬도 있을 것이고. 힘겨루기 대 회나 그런 것도 있을 거야. 참, 오늘 저녁에는 리오경의 저택에서 가장 무도회가 있는데, 거기……." "카스트로 전하!" 부드러운 어감의 호명에 카스트로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대신관 제이리트와 비제가 가까운 곳에 서 있었 다. "케테르님의 축복이 전하와 함께 하시길.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트로는 잔잔하게 미소 띈 얼굴로 자신을 보는 제이리트를 마주 쳐다보았다. 억지로 사람을 불러놓고 이따위 인사치레라니, 역겨웠다. '아까대로 하십시오. 적의라니, 경솔하십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움칫하다가, 애써 좋은 기분을 떠올리려 애썼다. "제이리트님께서 직접 초청해 주셨잖습니까. 오지 않을 수가 없더군 요." 제이리트 뒤의 비제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카스트로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오늘 제의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럼." 카스트로는 페트라르카를 재촉해서 신전을 나섰다. 뒤통수에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다음에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비제의 인사였다. "뒤죽박죽이군." "네?" 비제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에 시선을 박은 채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제이리트를 돌아보았다. "감정의 변화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비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벌써부터 마음이 흔들리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요?" 제이리트는 생각에 빠진 얼굴로 카스트로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쉽게 마음이 흔들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수장 들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지요. 그럼 제단의 뒷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이리트는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신어를 들 으며, 비제는 제이리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호감을 가진 상대가 무방비하게 감시당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 과 같은 처지가 된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적 어도 그가 스스로의 처지를 알고 방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은 동류의식일지도 몰랐다. 비제는 낮게 호흡을 내쉬며, 몸을 돌렸 다. 제단 주위에 인간 사제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물을 치 우고, 사람들이 있던 자리를 청소한다. 비제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같잖은 감기때문에 자고 또 자고.. 그래도 머리는 맑아지지 않고.. 지금도 또 졸린다.. 글은 언제 쓰라는 말인지... 쩝.. 이제는 투정씩이나 해보는 새.. --; ^^ 감기 걸리지 마시고, 좋은 하루 되시길.. -추워서 겨울도 싫어진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7 - 관련자료:없음 [3120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4 20:37 조회:166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7 - ================================================================== 전에는 카르노의 영토였던 미다와 국경을 맞댄 아름다운 물의 도시 소렐. 레이얄의 실권자인 소렐 공작의 영지에서도 신년축하와 개천절 을 겸한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는 소렐 공작의 무남독 녀 루시타니아 공녀의 결혼을 앞둔 때여서 축제는 더욱 화려했다. 어 쩌면 두 번 다시 이 축제를 보지 못할 지도 모를 딸을 위해 소렐 공작 은 더욱 화려하게 축제를 준비했다. 도시 남쪽에 위치한 광장과 도시 곳곳을 관통하는 강줄기를 잇는 다 리들에서 심심찮게 광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거리와 강가에는 수많은 연인들을 찾아 볼 수도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각종 음식과 가면을 파는 행상들도 눈에 띄었다. 소렐에서의 신년 축제는 다른 지역의 축제와는 달리 연인들을 위한 날이기도 했다. 얼음이 얼지 않은 강에서 가면을 쓴 연인들이 배를 타 고 사랑을 속삭이면 그 사랑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 아름다운 물의 요정 실피와 소렐의 영주 아르니스가 신년 축제의 배 안에서 가면을 쓴 채로 만나 사랑을 이루었던 것처럼. 소렐은 연인들의 도시였다. 케니아스 미카노르 폰 소렐. 21대 소렐 후작이며, 제1대 소렐 공작인 케니아스는 그가 공작이 되도록 해준 그의 아내 아나엘라 왕녀와 무남 독녀 루시타니아와 함께 아침 일찍 소렐 외성 안에 있는 케테르의 예 배당에서 조촐한 개천절 제의를 보고 성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름 답지만 병약한 아나엘라는 그 잠깐의 외출만으로도 피곤한 듯 케니아 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맞은 편에서는 아직 철없는 딸 루시타니아가 마차창문을 내다보며 연신 몸을 촐싹거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시끌시끌한 축제에 휩싸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케니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린아이가 몇 달 뒤에는 결혼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한다. 그것도 자신 을 원수 보듯 할 거친 카르노 왕자의 아내가.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 다. 조금 더 곁에 두고, 조금 더 그녀를 사랑해줄 남편을 찾아주고 싶 었다. 유능하고 자상한 그런 사람을. 하지만……. 마차는 잘 닦인 길을 따라 내성으로 들어서서 호수를 낀 정원 사이 를 달렸다. 루시타니아는 익숙한 광경을 접하자 창문에서 눈을 떼고 다정하게 보이는 부모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멋쟁이인 아버지가 가만 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슬퍼보이는 눈빛이라서 루시타 니아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최근 들어 그런 눈빛을 자주 보게 되었지 만 그 이유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다정하면서도 어 려운 사람이었다. "축제를 보고 싶은 거냐, 루시타니아?"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진 잔잔한 음성이었다. 루시타니아는 아버지가 한 말을 듣고 보라색의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가봐도 되요, 아버지?" 케니아스는 자신을 빼닮은 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디를 가든 아젤과 함께 다닌다고 약속하면 허락해주마." "네, 그렇게 할게요. 꼭 그렇게 하겠어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대는 딸에게 케니아스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늦지 않게 돌아오너라." "네. 그럴게요." 마차가 성 앞에서 멈추자마자 루시타니아는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 으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루시타니아!" 뒤따라 내려선 어머니가 조심성 없는 그녀를 나무랐지만, 루시타니 아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조신하게 행동할게요. 먼저 들어가 봐도 되 죠, 어머니?" "휴우, 그래." 아나엘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소란스럽게 성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딸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젤! 아제에엘! 어딨어? 아젤!" 아나엘라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들어갑시다. 괜찮겠소?" 자신을 부축해주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아나엘라는 흐린 미소를 지 었다. "네." 아내의 무거운 표정이 케니아스의 기분을 더욱 침울하게 했다. 아내를 침실에 데려다주고, 버릇처럼 집무실로 들어서자 갈색 머리 의 비서 에리스 리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케니아스는 안색이 좋지 않 은 에리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커다랗고 고풍스런 책상으로 다가가며 묻자 경직된 목소리가 대답했 다. "테라에서 신년 축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인가?" 케니아스는 책상 위에 놓인 나무 상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풀어보았 는지 그 주위에 고급스런 감색의 천과 리본이 풀어져 있었다. "각하께서 예배당에 가신 뒤, 한 남자가 경비병에게 그것을 건네주 었다고 하더군요. 테라에서 온 축하선물이니까, 꼭 각하께서 열어보셔 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케니아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나무 상자의 뚜껑을 집었다. "그 남자는 그것만을 건네주고 부랴부랴 돌아가더라고 하더군요. 느 낌이 이상해서 먼저 풀어보았는데……." 에리스의 설명을 들으며 케니아스는 뚜껑을 열었다. "마로니아경의 수급이 들어있었습니다." "흐읍!" 케니아스는 확 풍겨오는 피비린내와 정체불명의 역겨운 냄새에 코와 입을 막고 뒤로 물러섰다. 에리스는 상자에서 집히는 머리카락을 들고 위로 들어올렸다. 금방 자른 듯한 수급이 목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살 아있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케니아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목울대 를 움찔거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테라 신전의 인장이 찍힌 포장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낸 것은, 테라 의 대신관인 것 같습니다." 다시 상자에 목을 집어넣고 상자를 닫는 에리스를 멍하니 쳐다보다 가, 케니아스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방안 가득 역겨운 냄새가 차 있는 것 같다. 아직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재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나가고 있었다. "경고……인가?" 케니아스는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놀란 몸이 아직까지 잘 게 떨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그런 것을 보아서일 것이다. 전쟁터에서 이보다 더 참혹한 시체도 얼마든지 보아왔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의 떨림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놀라다니, 바보 같았다. "마로니아경은 어쩌다 들킨 거지? 거기다가 고스란히 내 이름까지 불어버렸군." 찬 목소리였다. 언제 떨었냐 싶게 냉정하고 단단한 음성이다. 다시 열린 보라색 눈은 목소리만큼 냉철해져 있었다. "한족들이 알았다면, 뭔가 대처방법이라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요." 케니아스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나를 어떻게 하려고 했다면, 벌써 무슨 짓이든 벌였을 것이다. 이건 경고야.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줄테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 "얌전히 딸을 내놓으라는 거겠지. 제기랄!" 케니아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책상 뒤쪽의 유리문을 열어제끼자, 찬바람이 안으로 휘몰아 쳐 들어온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나?" "네, 각하." 케니아스는 발코니로 나서서 창백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까지 일이 꼬이는지, 신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조금의 희망도 사라졌다. 예정대로 결혼하지 않는다면, 한족들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한족들의 잔혹성은 5년 전 이미 질리도록 보아왔던 터였다. 저 철옹성 같던 카르노의 왕성을 단 6시간만에 완전히 점령해 버린 저력을, 카르노의 왕실이 당했던 처절한 고통과 수치를, 케니아스 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처지가 되는 것 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결혼을 시키는 게 낫다. 전 가족이 쥐 도새도 모르게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준비를 서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 더 일찍, 테라로 들어가 야겠다." "알겠습니다, 각하." 케니아스는 암담한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이 흩어져 뺨을 때린다. 멀리서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놀이의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연인들의 축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짐작했어야 옳았다. 카스트로는 인상을 구기고 자신이 발 딛은 곳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다. 파르나 광장에서 갖은 묘기를 부리는 광대들을 구경하고, 화려 하게 터지는 불꽃놀이도 감상했었다. 가지각색의 희한하고 괴상망측한 가면을 쓴 사람들의 가장행렬도 재미있었다. 카르노에서는 자신의 입 장 때문에 한번도 경험해볼 수 없었던 광경들이기에 흥미로웠었다. 전 쟁과 패배의 굴욕 속에서 전신 로마마저 부정당한 채 제대로 된 축제 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조촐하게 열렸던 축제마저도 매번 흐 지부지 끝났던 데다, 왕자의 신분으로 축제 속 인파에 휘말리는 방법 은 아무리 카스트로라도 찾아내지 못했다. 백성들이 축제를 열면 왕궁 에서는 항상 빠질 수 없는 연회와 무도회가 열렸고, 카스트로는 축제 보다는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어땠던 간에 카스트로는 축제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라고 처음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의 꼬 득임에 빠져 리케아 거리로 들어선 순간, 순수한 축제의 감상은 라디 프에서 저 먼 섬나라 이드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것이다. "어떤가? 멋진 곳이지? 자, 이리로 오게. 역시 도박의 묘미는 블랙잭 이지. 아니면 룰렛을 해보겠나?" 페트라르카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지 팔까지 잡아끌면서 재촉하 고 있었다. 페트라르카와 로페냐가 끌어들인 곳은 다분히 퇴폐적인 분 위기를 풍기는 도박장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노출시킨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의 여성들과 시가 연기를 연신 뿜어내며 여성들의 옆 에서 귓속말을 속삭이는 남성들. 손에는 카드와 시가를 들고 저마다 앞에 칩을 쌓아놓은 도박꾼들 속으로 저 페트라르카와 로페냐라는 두 타락한 사람들이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나? 설마 도박장에 처음 와 본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돈 이 걱정되는 건가? 뭐하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네." 카스트로는 살벌한 눈으로 페트라르카를 쏘아보았다. 능글맞게 웃는 얼굴을 한 대 쳐주고 싶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무슨 핑계를 대어서 든 밖으로 끌어내고, 그 다음에는 항상 리케아 거리의 타락한 술집으 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번에는 도박장으로 바뀌었지만. "돌아가겠어. 둘이서 천천히 즐기시지. 당신 아버지도 당신이 테라에 서 이러고 다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군." 미련없이 돌아서는 순간, 불쾌한 키득거림이 뒤통수를 쳤다. "킥킥. 역시 어리다니까. 아직까지 아버지, 아버지. 자네는 아버지 없 으면 아무 것도 못하나?"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저 구제불능인 말버릇도 거슬린다. 항상 모든 걸 냉소적으로 비꼬아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 "자네 시가는 피워봤나? 시가는 역시 디쉬산이 최고지. 디쉬에서 상 납들어온 것이 있는데, 자네에게 나누어주지. 이런 곳에서 세련되게 시 가를 피우는 것도 풍류일세." 홧김에 뒤돌아보자, 페트라르카는 어느새 손가락 사이에 시가를 끼 운 채 하얀 연기를 입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갑자기 자신 의 앞으로 뿜어져온 연기에 숨이 막혀 기침을 했다. 손으로 앞으로 밀 려든 연기를 헤치자, 페트라르카가 얄밉게 웃고 있었다. "그만 하십시오, 페트라르카 전하. 카스트로 전하께서 싫어하시지 않 습니까?" 보다못해 로페냐가 나섰다. 하지만 페트라르카는 희한한 사람 본다 는 얼굴로 멀뚱하게 로페냐를 쳐다본다. "전하. 돌아가시죠." 카스트로의 옆에서 라에르가 속삭였다. 목소리로 보아, 카스트로 이 상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어, 충신친구께서 나섰군. 자네 또 화났나? 난 자네가 화내면 겁 이나." 라에르는 뿌득 이를 갈아붙였다. 다른 나라의 왕자만 아니라면, 벌써 수십 번은 몸에다 검을 쑤셔 박았을 터였다. 저자는 대체 무슨 억하심 정이 있어서 말끝마다 사람 신경을 긁어대고, 하는 행동마다 카스트로 전하를 타락시키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돌아가지." 카스트로가 무뚝뚝하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페트라르카가 뒤에서 소리쳤다. "오늘 저녁, 무도회를 잊지 말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 자네 친구 손 을 꼭 잡고 가고." 울컥! 카스트로는 목이 꽉 잠기도록 이빨을 사려물고 문을 나섰다. 카르노로 돌아간다면, 비쉬와의 외교는 심사숙고해봐야겠다고 아버지 에게 건의해야겠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버럭 화를 내는 로페냐를 흘낏 돌아보며 페트라르카는 어깨를 으쓱 했다. 느긋하게 시가를 입에 무는 모습이 로페냐의 복장을 터지게 했 다. "전하의 행동,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그러시지 않 아도 충분히 힘드신 분입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게 무슨……."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나. 조용히 좀 말하게!" "전하!" 페트라르카는 긴 연기를 뿜어내면서, 다시 로페냐를 쳐다보았다. 나 직하게 들릴락 말락한 음성이 도박장의 소음에 묻혀 미세하게 들려왔 다. "내가 못나서 그래.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린 녀석이 질투가 나서. 어 차피 자네도 그와 친구가 되고 나서, 술집에 도박장에 안 데려가려고 했나? 여자를 알게 해주겠다는 것은 자네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로페냐는 중간중간 끊긴 말을 대충 알아듣고 입술을 삐죽였다. 입술 주위의 콧수염이 귀엽게 비틀렸다. "그래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뭐가 너무한지 모르겠군. 자자, 어떤가?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우리 를 맞이해 줄까?" 어거지로 로페냐를 끌어들여 테이블에 앉히는 페트라르카였다.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8 - 관련자료:없음 [3123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5 20:05 조회:164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8 - ================================================================== 성산 테라의 정상, 신전의 회의실에는 대신관 제이리트와 한족 5가 문의 수장이 한데 모여있었다. 제의가 끝난 뒤 시작되었던 회의는 오 후가 넘어가도 끝날 줄을 몰랐다. 새해의 첫 모임인 만큼 이것저것 의 논할 게 많았던 탓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할만한 안건이 지금 그들의 입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습니다. 제의 내내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위험하게 보이는 점이 없었습니다. 벌써부터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띄더군요. 오히려 아베르노 전하 때보다 쉬울 것 같습니다." 리가문의 로스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 주장을 펼쳤다. 대부분이 그 의견에 동조한 듯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제이리트님께서 실수하신 것 같 습니다. 그 신탁의 해석 말입니다." 제이리트의 부드러운 얼굴이 순간 날카롭게 변해 방금 말한 자를 쏘 아보았다. 오가문의 체이스트였다. 체이스트는 제이리트의 시선에 움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상해지는 회의장의 분위기를 지가문의 세크리 트가 나서서 막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려고 회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사 람들의 의견도 들어보도록 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카스트로 전하가 불안합니다. 어찌되었든 신탁에서 나온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이니까요." "모두들 성급한 판단 같습니다. 이제 두 번을 봤을 뿐입니다. 앞으로 그를 관찰할 시간은 많습니다.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시가문의 제피스였다. 제이리트와는 형제간인 제피스는 결국 중립에 서는 것을 택했다. "레위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피스가 묻자, 잠자코 듣기만 하던 레위제는 생기없는 눈으로 조용 히 입을 열었다. "제피스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아직 판단할 수 없군요." 세크리트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레위제를 쏘아보았다. 레위제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조금은 일족의 일에 도움이 될만한 말씀을 해보시지요, 레위제님." 날선 세크리트의 말에 레위제는 대꾸하는 대신 눈을 감아버렸다. 그 수습은 제이리트의 몫이었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세크리트님께서도 싸우러 회 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안건은 좀더 미뤄두도 록 하지요. 계속 카스트로 전하의 근황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5가문의 수장들은 납득의 뜻을 비추고, 다음 안건을 기다렸다. 제이 리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다음은 다음달에 있을 카스트로 전하와 소렐 공작의 공녀와의 혼담 에 대해서입니다. 그 준비는 세크리트님께서 맡아하시기로 하셨는데,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벌써 라디프에서는 축하사절이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곧 각국의 사절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세크리트는 마른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웠다. "모처럼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도록 할 셈입니다. 제이리트님께서 직 접 주례를 맡아주시고 각국 인사들을 증인으로 세워서 말입니다." "발뺌할 수 없도록 말이지요?" 시가문의 제피스가 잔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모두의 분위기가 화 기애애하게 바뀌어갔다. 더 축제를 구경할 기분도 나지 않고 해서, 카스트로는 근처까지 따 라온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차가 움직이 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기분으로 사람들과 부대낀다면 무 슨 일을 낼 것 같았다. 기분이 더러웠다. "다음부터는 그 두 분이 오셔도 전하와 만나지 않도록 조처하겠습니 다." 카스트로만큼이나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있는 라에르가 옆에서 말했 다. 카스트로는 창문에 눈길을 박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차라리 지스카르 전하와 만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집으로 돌아가겠다." "……알겠습니다." 테라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쯤 얼마든지 예상했던 바였 다. 누가 뭐래도 테라는 적지 한복판이다. 그런 곳에서 예전처럼 편하 게 지낼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보천치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전개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조금이나마 로페냐를 좋게 생각했던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지금 누구보다 테라에서의 생활을 고달프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로페냐와 그의 친구였으니까. 뜻밖의 복병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테라에 서 가장 속을 썩이는 자가 테라인이 아닌 비쉬인이라는 사실이! 그런 왕자를 둔 비쉬의 앞날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저녁의 무도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키지 않아." 로페냐들이 갈 무도회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무도 회고 연회고 다 내키지 않았다. 첫날의 연회를 비롯해서 매일 연회와 무도회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하지만 매번 로페냐들에게 둘러싸여, 어 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연회는 즐기지 않았던 데다, 테라에 서의 연회라니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항상 심기를 긁는 방해꾼들과 함께인 데야 즐길 수 있는 게 이상한 것이다. 비제가 불편 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든 게 불편하고 불만 족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카르노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 디까지나 어린애같은 감상일 뿐, 실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답답했다. 전후좌우 전부다 자신의 숨통을 틀어쥔 기분이다. 어디 한 군데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편하지 않았고, 몸이 나아진 틈틈이 검을 휘둘러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카르노가 그리 웠다. 수다쟁이 루아 사제의 입담도 그리웠고, 미레야가 풀어내는 용병 들의 이야기도 그리웠다. 하다못해 항상 경계의 눈초리로 보던 숙부 미카에르 대공과 잰체하는 사촌 메스메르경도 그리웠다. 아직 어리광 부리기 좋아하는 체리나도, 우아하고 고상한 척은 혼자 다하는 누나 유리나도 그리웠다. 그리고, 가장 그리운 것은…… 아버지……. '왜 이러지?' 갑작스레 밀물처럼 밀려드는 향수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다가, 카스트로는 문득 자신의 감정을 냉정하게 직시했다. 이런 식이라면, 5 년은커녕 다섯달만 지나도 저절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런 식은 안 된다. 카스트로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카스트로의 저택 정문을 지키는 두 명의 신입 친위대원, 포에르경과 마시르경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느닷없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그 사람은 그야말로 눈이 부신 미 인이었다. 세상의 어느 그림 속 여인이 이 사람보다 아름다울 것이며, 세상 어느 조각품이 이 사람보다 근사할 것인가. "이봐. 이보세요. 내 말 안 들려?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지만, 묻는 말에 대답은 해주고 넋을 빼야 할 것 아냐!"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린 모습마저도 환상적이다. "정말 대답 안 할래? 그냥 쳐들어간다? 뭐 이따위 얼빠진 녀석들만 있어? 나 정말 들어간다?" 한겨울의 빛이 그 사람의 얼굴을 창백하리만치 희게 비춘다. 더하거 나 덜한다면 그 균형이 깨져버릴 것 같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신의 예술품. 또렷한 윤곽을 가진 얼굴선과 조각같은 턱선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매끈하고, 불쾌한 듯이 찌푸린 눈썹은 우아한 선을 그리며 곱 게 뻗어있었다. 감정이 풍부해 보이는 맑은 청색의 눈동자, 하얀 피부 색에서 유난히 튀는 붉은 입술, 허리까지 흘러내린 금발 머리와 그 미 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화사한 의상까지,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 운 사람이었다. "흥! 부하 놈이 저 모양인 걸 보면, 카스트론지 뭔지, 그 놈도 별 볼 일 없겠군. 비제님이 사람을 잘못 보신 거야!" 별 반응이 없던 포에르경의 눈빛이 살짝 바뀐 것은 그때였다. 목울 대가 실룩거리더니 화내듯이 내뱉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거의 본능처럼 튀어나와버린 말이었다. 포에르경은 자신이 말을 내 뱉고도, 스스로에게 놀라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세뇌되듯 들어차 버 린 카스트로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의 훈련이 그 빛을 보고 있었다. 한번 미혹에서 벗어나자, 포에르경은 자신들의 어이없는 추태가 한눈 에 들어왔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선배들이 알면, 죽음이다. "용건을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들의 앞에 서서 화를 내던 미인은 아직까지 몽환 속을 헤매는 마 시르경에게서 쌀쌀맞게까지 대하는 포에르경을 돌아보았다. 냉소적으 로 비틀려있던 그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카스트로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던 사람답지 않게, 정중한 모습이 었다. "미리 말씀하고 오셨습니까?" 눈앞에 선 미인은 살포시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그것은 아니지만 꼭 만나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아무나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닙 니다. 돌아가십시오." 자신의 추태가 신경쓰여서 더 쌀쌀맞게 대꾸하는 포에르경이었다. 미인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그래도 무반응보다는 나았던지라, 차 근차근 다시 설명했다. "나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분을 만날만 하니까 만나겠다는 거 아 닙니까? 전하께서 안에 계시다면……." 바닥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마차소리를 눈치챈 것은 그때였다. 포 에르경은 저만치서 오는 낯익은 마차와 기사들을 보고 긴장한 얼굴로 맞은편 문가의 마시르경을 돌아보았다. "비켜주십시오. 전하께서 오신다. 정신차려, 마시르경! 문지기! 문을 열어라!" 포에르경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앞을 응시하자, 그 말을 들은 앞의 미인도 마차를 쳐다보았다. 고르고 고른 흑갈색의 잘생긴 말 여덟마리 가 위압적인 기세로 달음박질쳐온다. 그 주위를 감싸고오는 여덟 명의 기사들의 모습도 그에 못지 않은 위엄이 넘친다.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삐걱거리며 활짝 열렸다. 일정한 속도로 달려 오던 마차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는 기색 없이 문을 통과했다. 얼결에 옆으로 물러섰던 벨은 눈앞을 스쳐가는 마차의 창문을 응시했다. 두터 운 천으로 커튼이 쳐진 창문 속은 조금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옆에서 들려온 묵직한 음성에, 벨은 마차에서 시선을 떼어 방금 말 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리 언질도 받지 못해서 막고 있는 중입니다." 포에르경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상급자인 듯 보이는 그 남자는 잠시 벨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귀하의 성명과 전하를 알현하려는 목적을 말씀해주십시오." 벨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가벼운 미소 에 넋을 빼던 두 사람과는 달랐다. 벨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테라의 비제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카스트로 전하께만 드리라 는 편지도 가져왔습니다." 남자는 다시 벨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까딱이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근처에 세워놓았던 듯한 말에 올라타고, 저택 안으로 말을 몰았다. 벨은 고개를 돌려 포에르경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카스트로 전하의 친위대 서열 5위, 아무르경입니다." 벨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아무르경의 뒤를 쳐다보았다. '저 정도의 기를 가진 자가 서열 5위라…….' "서열 1위는 누굽니까?" "카스트로 전하의 친위대 서열 1위는 라에르경입니다." "능력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는 겁니까? 당신은 어느 정도의 서열입 니까?" 호기심에 반짝이는 청색 눈을 보며, 포에르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존심 때문에 그것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69 - 관련자료:없음 [3128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7 01:53 조회:165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69 - ================================================================== 응접실로 안내받은 벨은 숨막힐 정도로 정중한 시종들을 보며, 지금 만나려는 사람의 신분을 새삼 실감했다. 가는 곳마다 긴장한 모습으로 지키고 서있는 흑자색과 자주색 제복의 친위대원들과 파란 색이 바탕 이 된 제복을 입은 시종들, 간간이 보이는 시녀들마저 규격에 맞춰놓 은 듯한 모습들이었다. '이런데서 살다가는 숨이 막혀 죽고 말지.' 그러고 보면 왕족이란 인간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걸음걸음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과 살면서 제정신인 게 감탄스러웠다. "카스트로 전하께서 듭십니다." 벨은 몸을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상당한 장신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 테라에서는 보기 힘든 꽤나 전투적인 성향의 옷차림을 한 청년이다. 거침없는 걸음걸이는 시원스러운 박력이 있었고 그것은 걸음걸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앉으시오. 비제님이 보내셨다고 들었소." 시종이 내어주는 의자에 앉는 모습과 처음에는 놀란 듯하다가 곧 흔 들림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깊이 있는 검은 눈망울. 오만하고, 거만했 으며, 태생에서 우러나오는 우아함과 위엄이 있었다. 벨은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왠지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제 본명을 말씀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시길. 비제님은 저를 벨이라 부르십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스트로는 가만히 눈앞의 미인을 응시했다. 질릴 정도로 화려한 남 자다. '본명을 말하지 못한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카스트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용건은?" "우선 이것을 읽어주십시오." 벨은 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었다.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그것을 받아 카스트로에게 건넸다. 벨은 카스트로가 그것을 읽는 것을 바라보 다가, 긴장한 채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을 느꼈다. 카스트로의 옆에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벨은 살포시 미소지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혹으로 빠져들 그 미소를 보고, 그 흑갈색머리의 남자는 특이하게도 적의를 불태웠다. 벨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 다. "이것 무슨 뜻이오?" 벨은 불쑥 묻는 질문에, 라에르에게서 시선을 내려 카스트로를 바라 보았다.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손안에 든 편지를 들어보인다. "비제님께서는 전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십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테라에서 살아가시기 편하도록 도와주시고 싶어하시죠." 카스트로의 남자다운 입술이 냉소적으로 비틀렸다. "테라에서 편하게 사는 방법이, 여기 쓰인 것을 말하는 건가?" 벨은 아름다운 미소를 흘렸다. "물론입니다." "하! 기가 막히는군." 어이없다는 얼굴로 벨을 쳐다보던 카스트로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 며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못 본 걸로 하지." "다 읽어보지도 않으신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도 가장 무난한 방 법입니다. 아니면 상대의 감정을 보는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감시당 하고, 알게 모르게 조종당하고,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족의 개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카스트로의 짙은 눈썹이 불쾌감으로 꿈틀거렸다. "개?" "그렇습니다. 개! 한족이 손을 내밀면 즉시 달려가 핥아주고, 쓰다듬 어주면 만족해서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어대는 개! 훈련받은 대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뼈다귀 하나에 감격해서 힘들여 잡은 토 끼를 그대로 주인에게 내맡기는 멍청한 개 말입니다, 전하."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주 듯, 만족해서 해사하게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 카스트로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개라고?' 누구도 감히 그에게 그런 망발을 내뱉은 사람은 없었다. 모욕감에 악다물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굳이 개가 되고 싶으시다면 모르겠거니와, 만일 인간으로 남아계시 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계시다면 비제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시 는 쪽이 나을 겁니다. 적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대 로 속을 내보인다는 것은 만용일 뿐입니다. 결국 적에게 먹히는 수밖 에 없는 것이지요." 라에르는 저 앞에 인간같지 않는 남자를 보며 싸늘한 분노를 불태웠 다. 처음부터 기분이 나빴던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주인 을 모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비 제가 보낸 자라는 것과 카스트로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 로페냐와 페트라르카 두 사람에게 휘 둘려져 기분 나빠하고 힘들어하던 카스트로는 오늘, 그야말로 최악의 기분으로 치달아있었다. 바닥에 바닥으로 치닫는 주인의 기분을 더욱 더 끌어내리는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을 속이라?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도 한 것을 하라고 하 는 건가?" 묘하게 기운이 빠진 말투였다. 벨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힘드실 것 같다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도록 암시를 걸 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들더라도, 한족들의 뜻대로 되는 것보 다는 나을 것입니다. 오늘의 일만해도, 한족들은 전하에 대한 견해가 서로 제멋대로 엇갈리고 있었으니까요." "……!"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카스트로는 그를 보낸 자가 비제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과연, 자신이 비제를 믿어도 될 것인가! 반이라고 해도 한족의 피가 흐르는 자였다.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대신관의 제자인 자의 말을, 믿어도 좋은가!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 이었다. 그를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농 락하는 게 아니라는 근거 또한 없었다. 한족들의 복잡한 머릿속을 어 떻게 알 수 있겠는가! "비제님은 한족들의 치부입니다. 제이리트의 제자라는 것은 허울일 뿐, 사실은 항상 눈에 띄는 곳에서 감시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비 제님은 전하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래서 도와드리려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만하면, 전하께서 비제님을 믿을 만한 근거는 되었 을까요?" 카스트로는 까만 눈을 더 짙게 만들며 벨을 쏘아보았다. 마음이 읽 힌 게 아닌가해서 섬뜩해졌다. 이런 기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군가 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읽는다면……. 검은 두 눈이 경직되었다가, 깊게 내려앉는다. '이런 감정이라는 말이지?' 자신의 마음을 남이 읽는다는 것, 절대 유쾌하지 않다. 아니 아주 기 분이 나쁘다. 그것도 상대가 드러내는 것이 이런 기분인데,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마음을 읽는다면?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한족이라는 종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한족들이 자신을 그대로 읽어낸다면 그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 다. 한줄기 오기같은 것이 카스트로의 답답했던 마음을 채워나갔다.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겠어!' 자신은 타락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한족의 개가 되기 위해 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다. 그것을 위해서는 잠시 명예는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기사가 아니니까.' 다이크경이 가르쳐준 말이 새삼 뇌리를 스친다. 적지에서 중요한 것 은 명예와 예법이 아니라, 생존이다. 다이크경이 지금 상황을 알고 그 것을 말해준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그것 이 비록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해도. 카스트로는 다시 편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대충 훑어보던 것을 다 시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모난 돌이 어떻게 둥글어지는 지 알고 계십니까?' 간단한 인사말 뒤에 나온 말은 이런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모난 돌이고, 한족들은 모난 돌을 둥글고 예쁜 조 약돌로 만들려는 커다란 파도입니다. 아베르노 전하께서도 처음에는 전하처럼 지극히 모난 돌이었습니다. 한족들이 그런 아베르노 전하를 어떻게 예쁘장한 돌로 다듬어 놓았는지 아십니까?' 카스트로는 입가를 씰룩였다. 특이한 표현이었다. '아베르노 전하는 어찌보면 전하보다도 더욱 모난 돌이었습니다. 사 사건건 한족들과 부딪히고 싸우려 들었습니다. 한족들은 매번 그 싸움 을 흔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무장된 신학과 이론으 로 그 분을 설득했습니다. 그 분이 싸움을 걸면 걸수록, 그 분이 케테 르교에 동화되어가는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모난 부분이 깎이고 깎여, 4년이 지나자 한족들의 손아귀에 딱 들어오는 예쁜 돌이 되어버렸습니 다. 지금 전하께서도 그 분의 전철을 밟으신다면, 전하 역시 한족들의 장난감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카스트로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벨은 수시로 변하는 카스트로 의 오라를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슬쩍 본 내용으로 봐도 저 왕자 라는, 지극히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는 속이 뒤집힐 지도 모를 말들이 었다. '한족들은 당신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려고 할겁니다. 그것이 최선이 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의 차선으로는 아예 당신을 망가뜨리려 할 것 입니다. 길들이느냐, 망가지느냐의 길에서 저는 망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망가뜨리기 전에, 전하께서 먼저 망가지십시오. 그 좋은 모델이 바로 옆에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페트라르카 전하나 로페냐경같은. 그들과 어울려서 적절하게 타락하십시오.' 타락. 지금까지 카스트로가 벗어나려 애쓰는 것과 상반된 방법을, 비 제는 해결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만큼만 하셔도, 한족들로서는 전하를 길들이기보다는 포 기하려 들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베르노 전하처럼 하셨다 가는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족이 갖고 놀기 좋은 예 쁜 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너무 거칠어서 손댈 수도 없는 돌이 되기 를 바라십니까?' 편지는 일부러 카스트로를 격앙시키려는 듯 비위를 긁는 말들로 이 루어져 있었다. '타락……, 타락이라…….' 과연 그렇게 한다면, 한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카 스트로는 고민스럽게 한숨을 불어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과연 5년 내내 버틸 수 있을까? 그 전에 정말 자 신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해, 정신마저 썩어버린다면? 카스트로는 되든 안되든 일단 해보기로 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면,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망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알겠소. 잘 참고하도록 하지, 비제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벨은 우중충하게 내려앉던 카스트로의 오라가 생동감 있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비제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저는 이 만 물러가겠습니다." 벨이 방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쫓던 카스트로는 몸을 일으키고 편지 를 움켜쥐었다. "올라가지. 시종장 하미르, 무도회에 갈 의상을 준비하라." 뒤에 서있던 라에르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전하?" 카스트로는 친구를 돌아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마음먹었으니, 시작해야지. 한족들을 멋지게 속여보자고."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해지는 2월의 중순. 아름다운 물 의 도시 소렐의 성은 공작과 공녀의 여행준비로 부산했다. 3월 15일,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의 18세 생일과 맞추어 소렐의 공녀 루시타 니아와의 결혼식이 치러질 예정이다. 케니아스는 최상의 것들로만 이 루어진 혼수품과 결혼지참금으로 가지고 갈 예물들을 마차에 실어놓 고, 우울하게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결혼 사실을 통고했을 때,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응하던 루시타 니아는 막상 소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던지 어머니의 품 에 매달려 울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도 딸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부둥켜안고 우는 모녀를 보는 케니아스 역시 가슴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행복해야할 결혼을 위해 가는 길이, 마치 죽으러 가는 듯 슬프고 애달팠다. 바람이 불었다. 살을 에일 듯 찬바람은 아니더라도, 길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만큼은 찼다. 케니아스는 마차 옆에 서서 아직도 얼어붙은 땅과 얼음이 녹아가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소렐로 돌아올 때는 정원에 새 풀이 돋고, 칙칙한 얼음으로 뒤덮 인 호수는 새파란 색의 맑은 물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다시 보지 못할 지도 모를 딸을 보고 있자니, 속 아픈 한숨만 새어나온다. "그만 가자꾸나, 루시타니아. 날씨가 차. 그만 들어가시구려, 아나엘 라." 재촉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두 모녀는 야속하게 쳐다보았다. 더 서럽 게 울어대는 두 모녀의 모습에 케니아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벌 써 한 시간이 지났다. "경사스러운 일에 그렇게 우는 게 아니오. 들어가요, 아나엘라. 루시 타니아가 결혼한다고 해도 평생 못 보는 게 아니잖소." 케니아스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에게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 단 말인가. "하지만, 흑, 여보……." 아름다운 눈에 한가득 눈물을 달고 쳐다보는 아내에게 단호한 말투 로 되풀이했다. "루시타니아가 올 수 없다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는 거요. 그만 울어 요, 아나엘라. 내 약속하리다." 아나엘라는 남편에게서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였다. 듣던 바대로 카르노 사람들이 거칠다면, 이 어린아이가 얼마 나 마음고생이 심할지. 아나엘라는 다시 딸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편지 자주하고, 꼭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알겠니, 루시타니아?" "네, 어머니." 울먹이면서 대답하는 딸이 가엾어서, 아나엘라는 딸을 놓을 수가 없 었다. 몸만 이렇지 않다면, 테라까지 따라가서 잘 사는지 어떤지 지켜 볼 수도 있으련만. 아나엘라는 다시금 자신의 병약한 몸이 한스러웠다. "좋은 사람일거야. 설마 폐하께서 네게 나쁜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 셨겠니? 나도 이렇게 네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잖니. 그 러니까, 너도…… 너도……흐흐흑." 루시타니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마주 껴안았다. 다시 는 못 볼지도 모를 어머니였다. 항상 자신보다 약하고 여리셨던 어머 니. 루시타니아는 실감도 나지 않는 자신의 문제보다, 지금 당장 어머 니와 헤어진다는 것이 더 슬펐다. "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 때문에 울지 마세 요." "루시타니아……."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해요? 매일 매일 편지 쓸게요. 걱정마세요. 저도 어머니처럼 행복하게 살 거예요." "루시타니아……흑흑" 케니아스는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신 하야가 그들을 재촉하듯 따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만 가야겠소.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아나엘라는 자신의 축축한 뺨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입술을 느끼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딸의 손을 꼭 잡은 아나엘라는 자신의 손에서 새파란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 지를 빼내 딸의 손에 끼워주었다. "어머니, 이건……." 루시타니아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네 거다, 루시타니아. 잊지 마라, 너는 폐하의 핏줄이야. 언 제 어느 경우라도 그 자긍심을 잃지 마라." 레이얄의 왕실 문장이 새겨진 사파이어 반지는 역대 레이얄 왕비에 게 이어져오는 것이었다. 바벨 4세는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그것을 새 왕비에게 주는 대신 하나뿐인 딸에게 주었다. 레이얄 왕가의 보물인 그것을 루시타니아는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네 거야, 루시타니아!" 아나엘라는 딸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부디 행복하거라." 루시타니아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놓고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마 차 옆에서 기다리던 케니아스는 딸을 마차위로 올려주었다. "다녀오겠소. 그 동안 식사 제때 챙겨먹고 약도 잊지 마시오. 루시타 니아는 괜찮을 거요." 케니아스는 아나엘라의 뺨에 입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마차 위에 올라탔다. 시종들이 마차문을 닫았다. 커튼이 쳐진 창문이 빼꼼이 열리고, 루시타니아가 얼굴을 들이밀고는 손을 흔들었 다. 아름다운 유백색과 금색의 마차는 천천히 바퀴를 움직였다. 눈처럼 하얀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루시타니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창 밖에다 시선을 고정 시켰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아름다운 고향, 소렐의 성이 새 삼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빛 바랜 상록수도, 얼어붙은 호수도, 넓디넓 은 흰색의 소렐 성도. 두고 떠나는 루시타니아는 벌써부터 소렐이 그 리워지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 갑작스레 전화가 이상해지는 바람에.. 이쪽 전화 전부가 저녁부터 계속.. 오는 전화는 되고, 거는 전화는 안되는 희한한 증상에 걸렸다고.. --; 한숨자고 일어나니까, 지금 되네요.. ^^ 하여튼 희한한 한통... --; 좋은 하루 되세요.. ^^ -막 일어난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0 - 관련자료:없음 [3129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7 19:58 조회:162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0 - ================================================================== "오십 더!" 시가연기가 자욱한 도박장의 한곳에는 한참 포커판이 벌어지고 있었 다. 둘러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 앞에는 정교한 무늬로 조각된 나무칩 이 쌓여있었다. "제기랄! 난 죽었어." 한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카드를 엎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얼굴 로 옆에 있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징그러운 녀석이었다. 도박에는 타고 난 소질을 가지고 있는 듯, 저 징글맞은 포커페이스에 속아 벌써 얼마 나 잃었는지 몰랐다. 그는 답답한 기분에 시가를 빼물고 가까운 곳의 촛불을 가져다 불을 붙였다. "나도 죽겠네. 오늘도 승승장구로군, 카스트로?" 뒤따라 카드를 엎고 물러선 사람은 페트라르카였다. 페트라르카는 아예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한사람 건너에 있는 카스트로를 구경 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여기까지 와서 돈이나 잃으면 체면이 안 서지 않나?" "흐응, 오늘 저녁은 어디로 갈 텐가? 어제 '모아 클럽'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다던데……." 페트라르카는 은근히 성량을 줄이며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카스트로는 마지막 남은 상대에게 신경쓰면서 별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늘은 안돼. 이미 선약이 있거든." "호오, 오늘은 어느 귀부인이신가?" 카스트로는 관심있는 척 물어오는 페트라르카의 음흉한 눈에 대고 코웃음쳤다. "사생활까지 자네에게 보고해야하나? 자네 연애에나 신경 쓰게. 나 는 다이아몬드의 스트레이트 플러시. 내가 이긴 것 같군요, 파옌경." 테이블 중앙에 쌓인 나무칩을 끌어 모으며 카스트로는 상대에게 미 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요즘 로안경의 부인과 사귄다던데, 사실인가?" 카스트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틀 전에 끝냈네. 따고 일어나서 미안하지만, 아름다운 숙녀와의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소. 그럼 내일 보지." 몸을 일으켜 출구 쪽으로 가서 코트를 입는 동안, 한 소년이 나무칩 을 모아서 돈으로 바꾸었다. 소년은 익숙한 듯이 돈을 카스트로의 뒤 에 서있는 라에르에게 건네고 허리를 숙였다. "또 오십시오, 전하." "수고했다, 센." 라에르는 한숨을 내쉬고, 받은 돈에서 은화 하나를 소년에게 건네주 었다. 라에르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소년에게서 앞서 나가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부터인가 카스트로는 과감 하게 카르노의 복장을 버리고 테라의 복식을 따르고 있었다. 뿌연 안개 속 같던 도박장에서 나오자 싸늘한 바람이 카스트로의 몸 을 휘감는다. 부츠대신 신은 고급스런 실크스타킹과 짧은 단화가 멋만 큼의 실용성은 없어서 조금 추운 감이 들었다. "전하?" 카스트로는 옆으로 다가오는 라에르를 돌아보다가, 곧 앞에 와 서는 자신의 마차에 시선을 던졌다. 덤덤한 눈빛이었다. "싫으면 먼저 돌아가, 라엘. 일부러 따라갈 필요는 없다." 라에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닙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마차에 올라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어색해진 대화가, 라에르는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카스트로가 아무리 마음에 안드는 짓을 벌여도 그는 자신의 주군이었다. 언제나 지켜주고, 따라야 할 상대. 너무 주제넘게 참견하려 들었는지도 모른 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잘 닦인 테라의 거리를 달려나간다. 조금씩 어두 워지는 거리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거리를 지나는 마차에도 램프가 켜진다. 방탕한 자들의 거리, 리케아는 밤에 더욱 화려해진다. 슬프도 록 화려한 거리를, 카스트로는 무심한 눈길로 내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라에르는 나날이 도를 더해가는 카 스트로의 난잡한 생활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국의 왕자에게 호기심을 품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전같 으면 예의바르게 거절했을 카스트로였지만, 그날 이후 다가오는 여자 를 거절하지도 않고, 이제는 스스로 여자를 유혹하기에 이르렀다. 카스 트로의 변화를 가장 환영한 사람은 로페냐와 페트라르카였다. 카스트 로는 그 두 사람이 이끄는 대로, 타락하고 방종한 생활을 빠르게 흡수 해갔다. 도박, 여자, 그리고 술.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여자문제였다. 카스트로가 고르는 여자는 대부분, 남편이 있는 연상의 귀부인들이었다. 스캔들이 나기 쉬 운 상대를 고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타락한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주효했다. 이제 카르노의 왕자라고 하면, '그 파렴치한 자식'이라고 덧붙일 정도였으니까. 비록 의도했던 바였다고는 하나, 자신의 주인이 욕을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뒤에서 떠들어대는 저급한 욕설 들. 카스트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더 큰 스캔들을 터트리는 것으 로 대응했다. 두 달 사이에 일으킨 스캔들만 4건이었으며, 그 중 2명의 남편들에게 결투신청을 받아 한 명의 부인을 미망인으로 만들었다. 그 리고 카스트로는 미망인이 된 애인을 무시했다. 철저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그에게, 이제는 페트라르카마저 두 손 들고 있었다. 물론 은근히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라에르는 깊은 한숨을 뽑아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다. 카스트로 자신의 모습을 잃고 마는 이것은, 뭔가 상당히 잘못되어 있다. 마차는 대로를 따라가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얼마가지 않아 멈춘 곳은 며칠 전 새로 사귀기 시작한 트레아 후작부인의 저택이었다. 저 택의 하인들은 카스트로의 마차가 나타나자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 다. 후작부인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듯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늦으셨어요, 전하." 가벼운 투정의 말을 건넨 후작부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카스트 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스트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을 대며 속 삭였다. "친구녀석이 자꾸 캐묻는 바람에 따돌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여전 히 아름다우시군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미모를 살피느라 오페라 따 위에는 관심도 갖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호호호홋, 과찬이세요, 전하. 전하께서도 오늘 너무 멋지시군요."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실까요?" 후작부인은 우쭐해진 기분으로 카스트로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위엄 이 넘치는 크고 멋진 마차에 오르자 후작부인은 자신이 공주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카스트로가 들어와 자리를 잡고서야 서서히 마차 가 움직였다. 호위기사인 라에르는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오늘 보는 오페라의 여주인공이 꽤 유명한 가수라던데, 알고 계세 요?" "그렇습니까?" 짐짓 관심있다는 표정으로 묻자, 후작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몰락한 귀족의 딸이라고 하던데, 전에는 페트라르카 전하의 정부였 죠. 상당히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죠. 물론 노래도 잘 부르고." "페트라르카의 정부……라고요." 뜻밖의 말이었다. 그 방탕한 비쉬의 왕자는 귀부인과 창녀로 부족해 서 오페라 가수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던가? 가볍게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페트라르카 전하께서 은밀히 뒤를 봐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 요." "흠……." 후작부인은 생각에 잠긴 카스트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귀여운 남자 였다. 누구보다 큰 장신과 단련된 몸에도 불구하고, 후작부인은 이 남 자가 너무 사랑스럽고 이뻤다. 이대로 애인으로 사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후작부인은 이런 관계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길어야 보름. 그것이 지금껏 카스트로가 가장 오래 사귄 여성과의 교제기간이었다. 재미없어진 장난감을 아낌없이 진흙탕에 내던져버리 는, 잔인하고 순수한 아이의 성정을 가진 이 매력적인 청년은 폭풍처 럼 휘몰아쳐 상대의 혼을 빼놓고는 냉정하게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후 작부인은 그런 장난감이 되기 싫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친구가 되 고 싶었다. 조금 가슴은 아프지만, 언제나 장난감을 마련해줄 수 있는 친구. 그리고 후작부인은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저 냉담한 비쉬의 왕 자를 골탕먹여주기를 원했다. "카스트로 전하! ……트레아 후작 부인?" 오페라극장의 특별석으로 찾아가던 카스트로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 해진 목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앞쪽에서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로페냐가 놀란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 로페냐경. 요즘 통 안보이시더니……." 카스트로의 팔에 매달려 해사한 미소를 짓는 후작부인의 모습에, 로 페냐는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클럽에서 일찍 빠져나가더니, 여기 오려던 거였나?" 카스트로는 그렇게 대꾸하고, 후작부인과 함께 로페냐가 있는 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오는 카스트로와 후작부인을 보던 로페 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페라를 보러 오셨나보군요." "그럼 오페라극장에 오페라를 보러오지, 또 무얼 보러 오겠어요? 호 호호." 후작부인은 뭔가 뼈있는 듯한 말로 대꾸하며 교태스럽게 눈웃음치며 웃었다. 로페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전하. 그리고 후작부인." 팔짱낀 손이 가볍게 당기는 것을 느끼고, 카스트로는 시선을 내려 후작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시작시간이 다 되었어요. 들어가요, 전하." 애교있게 웃는 모습이었다. 카스트로는 로페냐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특별석쪽으로 향했다. 솔직히 오페라를 즐기지는 않았다. 여자가 나오고 남자가 나오고, 귀 족이 나오고 평민이 나온다. 가끔 왕과 왕자도 나온다.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슬프고.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카스트로는 이런 한심한 광대놀음에 열광하는 테라의 귀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때요?" 1막이 끝나고 커튼이 내려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작부인이 물어왔 다.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재밌군요." "호호호. 재미없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요? 그것 말고 방금 들어간 여주인공역의 여자 말예요.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 말투에 섞인 미묘한 뉘앙스에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마음에 든다면?" "제가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어요." 카스트로는 멈칫해서는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후작부인을 쳐다보았 다. '소개시켜 줘?' 그게 함께 데이트 나온 상대에게 할 말인가? 카스트로의 어이없어하 는 얼굴에도, 후작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진심인 듯 했 다. "내가 부인의 마음에 안 드십니까?" 기분이 상해 다소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말에, 후작부인은 배시시 웃 으며 머리를 저었다. "제가 마음에 안드는 상대와 이렇게 단둘이 있을 것 같나요?" "그럼 그 말뜻은 뭡니까?" "말 그대로. 그 여가수를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인상을 쓰는 카스트로를 후작부인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역시 귀여운 아이였다. 뺨을 토닥여 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만큼. "전하께서 제게 진지하게 관심있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요." "……." "부정하지 않는군요?" 카스트로는 서운해하면서도 재미있어하는 후작부인을 가만히 응시했 다. 영리한 여자였다.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감정을 관리하는 게 소홀 했거나. "요 두 달간 본 전하의 모습,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계세요?" "……." 내심 긴장하고 있었지만, 카스트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장했다. 이어 생글거리며 후작부인이 말했다. "욕심 많은 아이 같아요. 맛있는 음식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널려있 어서, 어느 것 하나에 진득하게 손을 대지 못하고 금새 다른 음식에 손을 대버리는, 탐욕스러운 아이." 어느새 카스트로는 서서히 긴장을 풀면서 느긋한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비칠 수도 있다는 건 새로운 느 낌이었지만, 그것뿐이었다. 한순간 자신이 뒤집어쓴 가면이 그대로 벗 겨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는 카스트로였다.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뭡니까?" "제가 전하의 음식들을 제공해드리죠." "……!" 후작부인은 멈칫 굳어서 뻣뻣하게 돌아보는 카스트로를 즐겁게 바라 보았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저는 보름만에 전하와 이별하기보다는 전하 의 곁에서 오래동안 함께 하는 친구가 되고 싶어요. 제 제안, 마음에 안드세요?" 아주 특이한 여자였다. 카스트로는 신기한 뭔가를 보듯 그녀를 새삼 스레 훑어보았다. 아주 이상한 여자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것은 뭡니까?" "가끔씩 전하와 이렇게 오페라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러는 거죠. 전하의 친구라는 멋진 간판도 얻고." 그 사이 다시 막이 오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무대 위로 시선을 옮 긴 채 생각에 빠졌다. 여자의 고운 노래소리와 남자들의 낮고 울림있 는 노래소리가 얽혀든다. 어떨까? 슬슬 여자들을 고르는데도 지쳐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를 어떻게 믿고……. 흘낏 옆자리를 보자, 후작부인은 오페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 다. 서른 살쯤 되었을까?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농염한 아름다움을 물 씬 풍겨내는 여자였다. 듣기로는 상당한 바람둥이고, 남편은 거의 그녀 의 손에서 놀아난다던가? 어떨까? 카스트로는 심사숙고했다. 아무 대 가도 없이 자신을 도울 만큼 착한 여자가 아니다. 그것이 착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의문이 가지만, 어쨌든 영리한 만큼 위험한 여자다. 어 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매력적인 여성을 얼마든지 제공해드릴 수 있어요. 어떤 타입을 원 하시죠?" 카스트로는 마치 악마의 꼬득임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떨까? 어차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도 그리 도덕적이지 못한 일이다. 앞으로 테라에서는 5년을 더 살아야 하고, 조심만 한다면 이 여자와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내게 매달리지 않을 여자로." "호호호호……" 후작부인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렇게 카스트로는 트레 아 후작부인과 친구가 됐다. ================================================================== 날씨가 추워진다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시길.. ^^ -왠지 목이 간질거려 걱정되는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1 - 관련자료:없음 [3132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8 20:53 조회:164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1 - ================================================================== 트레아 후작부인의 소개로 무대 뒤에서 만난 오페라가수는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청보라색의 머리와 눈의 미인이었다. 조금 말랐다 싶은 몸매였지만 적당히 보기 좋은 정도였다. 특별히 성적으로 끌린다기보 다는 어딘지 지쳐 보이는 퇴폐성이 눈에 띄는 여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라 킬트라고 합니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몸을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 어설프게 배운 인사법과는 달리 제대로 된 궁중인사법이다. 카스트로는 그 예법에 호 기심이 동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킬트양." 헤라의 손을 잡고 귀족가의 아가씨에게 하듯 입술을 대자, 그 손이 움찔하고 놀란다. 천천히 손을 놓으며 허리를 폈을 때, 후작부인이 기 다렸다는 듯이 헤라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 아주 귀한 분이니까 잘 모시도록 해요, 킬트양. 그 럼, 저는 이만 사라지죠.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하."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후작부인이 물러났다. 정작 두 사람이 남게 되자, 카스트로는 이 상황이 왠지 멋쩍어졌다. 무대 뒤라 그런지 이것 저것 무대 뒤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물건을 옮기는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것 같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헤라는 고개를 들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어색해하는 게 묻어 나는 카스트로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러시는 거, 처음이신가요?" "네?" 조금 동공이 커지는 카스트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헤라는 수년간이 나 연인이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카스트로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 었다. "나가요. 마차는 가져오셨겠죠?" "……네에." 뭔가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이 못마땅해서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 렸다. 하지만 너무 익숙하게 이끄는 그녀를 무시할 수도 없어서 보조 를 맞추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극장을 나가자, 수많은 마차와 사람들을 헤치고 유난히 크고 눈에 띄는 카르노 왕실의 마차가 그들 앞에 멈추어 섰다. 극장가에 밝 혀놓은 수많은 불빛에 비쳐보이는 마차 문의 문장을 보며, 헤라는 순 간 몸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조금 전, 후작부인이 자신에게, 그리고 이 키 큰 남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주 귀한 분에, 전하라고?' 언젠가 소문으로 들은 적은 있었다. 카르노의 두 왕자가 여기 테리 온에 와 있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산다는 둘째 왕자와 새로 온다던 셋째 왕자 중에 어느 쪽일까, 이 남자는. 마차에 오르면서, 헤라는 다시 한번 옆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싱긋 매력있는 웃음을 보내온다. 아까 전까지 어색해하 던 그 남자가 맞는 걸까 의심이 갈 정도로 능숙한 웃음이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아뇨, ……실례가 안된다면, 성함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왕자전하?" 카스트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헤라를 쳐다보았다. 왕자 라는 신분까지 알면서 자신을 모른다는 것인가? "카스트로. 카스트로 폰 카르노. 늦었지만, 식사 전이시면 함께 하시 겠습니까?" "……네, …전하." 한동안 두 사람은 마차의 흔들림을 느끼며 마주앉아있었다. 다시 어 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의식하던 카스트로는 문득, 마차 안에서 후작부 인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킬트양?" "네?" 놀란 듯이 내리 뜬 눈을 치켜올리는 헤라를 보며, 카스트로는 안심 시키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혹시 페트라르카의……" 막상 말을 꺼내놓았지만, 여자에게 노골적으로 '정부'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가 말을 끊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헤라는 얼어붙은 얼굴로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그를…… 알고 계시나요?" 헤라의 떨리는 입술을 내려다보던 카스트로는 고개를 까딱했다.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킨 김에 그렇게 물은 카스트로는 안색이 몇번이고 바뀌는 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카스트로의 시선을 피 하고는, 한참 뒤에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소문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분과 저, 애인이나 그 런 것은 아니니까." 왠지 더 물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에 다른 화제로 돌리려던 카스 트로는, 마차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느꼈다. 카스트로는 열린 마차 문 으로 내려 헤라의 손을 잡았다. 마치 귀부인처럼 에스코트를 받는 것 에도 익숙한 여자였다. 그러고 보면, 몰락한 귀족가의 여자였다던가? 어느새 그들은 리케아 거리에 와 있었다. 리케아 거리에는 술집과 도박장 말고도 값비싼 음식들을 파는 음식점도 있었다. 주로 이 거리 에서 살다시피하는 쾌락주의자들을 위한 곳이었지만, 종종 여자들과 함께 갈곳이 마땅치 않을 때 바람둥이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기도 했 다. 마차에서 내려 이층에 있는 음식점으로 올라가자, 지배인인 듯 보 이는 남자가 카스트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고개만 까딱하는 카스트로에게, 지배인은 더없이 친절하게 물어왔다. "자리는 항상 앉으시는 곳으로 할까요?" "그러지." 지배인이 안내한 곳은 사방의 이목이 가려진 작은 방이었다. 헤라에 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고, 이것저것 주문하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 인다. "자주 오시나 보지요?" "……어쩌다 보니." 카스트로는 웃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페트라르카, 로페냐와 함께 어울려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곳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의미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카스트로는 여자를 상대로 처음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전에는 그저 조잘조잘거리는 여 자들에게 맞춰 간단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몇마디만 해주면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려갔었다. 하지만 헤라는 그다지 말이 많은 여자도, 카스트 로의 기분을 맞춰주는 여자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걸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 새인가 자신의 저택까지 도착해 있었다. 옆에는 날씬한 몸매의 오페라가수를 데리고서 말이다. 카스트로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헤라의 손을 잡아 마 차에서 내려주었다.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카스트로는 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리 고 있는 손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근래 들어 열심 히 피해다니고 있던 형, 지스카르가 아예 작정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내가 온 것을 알리지 말게. 적당히 돌려보……!"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카스트로?" 어느 새인가 시야를 막고 있는 지스카르를 쳐다보며 카스트로는 입 술을 깨물었다. 지스카르는 못마땅한 눈으로 카스트로를 노려보다가, 카스트로의 옆에 망토를 걸치고 서있는 헤라를 발견하더니 더욱 인상 을 험악하게 했다. "그 추잡한 소문이 전부 사실인가 보구나?" "……." "잠시 나 좀 보자, 카스트로. 라에르경!" "네, 지스카르 전하." 카스트로의 뒤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라에르가 나왔다. 지스카르는 턱짓으로 헤라를 가리켰다. "사람을 시켜 돌려보내도록 하게. 따라오너라, 카스트로." 지스카르는 뒤도 안돌아보고 제집인양 앞장섰다. 카스트로는 지스카 르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모양이다. 카스트로는 라에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킬트양을 댁까지 안전하게 모시게." "네, 전하." 카스트로는 안색이 굳은 헤라의 손을 잡아올려 입맞춤을 하며 부드 럽게 속삭였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그냥 헤어져야겠군요. 다음 기회에 뵙기로 하 겠습니다. 그럼." 헤라에게 정중한 사과인사를 하고, 라에르가 헤라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카스트로는 그대로 지스카르를 따라갔다. 카스트로는 아버지를 닮은 지스카르에게 유난히 약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그만둘 정도로는 아니다. 그래서 카스트 로는 형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는 지스카르가 짜증스러우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항상 미안했다. 그리고 오늘도 지스카르에게 미안한 마음 을 갖고 대해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나 듣자꾸나.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냐?"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스카르는 냉엄한 눈초리로 추궁했다. 카스 트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이유 따위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멀쩡하던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카스트로는 근처의 소파에 몸을 묻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금은 멀쩡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지금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 카스트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미친 사 람 취급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 "페트라르카가 그러더군요." "페트라르카?" 지스카르는 맞은편의 의자에 앉으며,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높였다. 카스트로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버림받은 왕자 주제에 무슨 명예를 지키겠다고 고상한 척 하느냐구 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날 버린 카르노의 명예 따위 지켜주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왜 날 버린 나라를 위해 하고싶은 것, 갖고싶은 것, 모두 포기해야한다는 겁니까?" 지스카르의 갈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확대된다. 카스트로는 시니컬한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형도 이제 그 지긋지긋한 명예 따위 벗어버리십시오. 미노의 딸같 은 거보다 훨씬 아름답고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여자는 많습니다. 설마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 질린 듯이 보이던 지스카르의 눈동자가 점차 실망으로 채워진다. 카 스트로는 마무리로 다분히 퇴폐적인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소개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아까 그 아가씨도 형에게 양보해드리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형을, 카스트로는 나른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벌써 가시게요, 형?" "실망이다, 카스트로.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변해버릴 줄은 몰랐 다. 그것도 이따위 저질로 말이다!" 아프게 가슴을, 심장을 긁어대는 듯한 질책이었다. 카스트로는 어깨 를 으쓱했다. "뭐든 빨리 적응하는 것이 삶의 지혜죠.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 다." "……! 적응도 적응 나름이야! 이것은 적응이 아니다, 카스트로. 이 건 허접한 쓰레기로의 타락일 뿐이야!" 냉혹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스카르의 모습에서 아버지가 생각났다. 카스트로는 울컥 솟아오는 슬픔을 꾹꾹 짓밟아버렸다. 이대 로는 형도 자신을 버릴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 피 아버지도 자신을 버렸다. 형이 자신을 버린다고 새삼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것이 원치 않는 오해로 생긴 일일 지라도. "저는 제가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 겁니다. 쓰레기라도 제가 즐거우 면 되는 일 아닙니까?" "실망했다. 아니 절망했어, 카스트로. 며칠 뒤면 소렐 공작과 공녀가 도착한다. 네 아내 될 사람에게 이따위 추태를 보여줄 참이냐?" 소렐! 카스트로는 이빨을 사려물었다. 언제 들어도 피를 들끓게 하 는 이름이다. "제 실체를 알게 하는 게 그녀를 위해서도 좋겠지요. 어리석은 환상 을 품게 하는 것보다,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자비롭습니다. 통쾌하지 않습니까? 소렐이 자기 딸의 남편 될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될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하하하!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어느 쪽이 더 소렐에게 충격적일까요?" "미친 녀석! 넌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다!" 자극을 받은 카스트로는 살벌하게 눈빛을 번뜩였다. "제정신인 게 이상한 겁니다. 이런 숨막히는 적지 한복판에서, 제정 신일 수 있다는 게 이상한 거란 말입니다!" "……너……!" "지긋지긋합니다. 이제 겨우 두 달인데, 소름끼치도록 징그럽단 말입 니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감시하는 시선이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짓을 하든, 테라 전체가 저를 감시하는 기분입니 다!" "카스트로……, 나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형체를 느끼고, 카스트로는 몸을 일으켜 세웠 다. 실망했다고, 절망했다고 냉정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동정으로 바뀌 어가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말실수에 입술을 물어뜯고 싶었다. 그냥 실망하고 돌아가게 하는 게 낫다. "돌아가십시오. 제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단 말입니다." 뒤돌아 서서, 지스카르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감춘 채 그렇게 내 뱉었다. 한참 뒤에 카스트로는 어깨를 감싸안는 온기를 느꼈다. "힘들면 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혼자 그렇게 무너지지 말고, 카스 트로……." "돌아가 주십시오. ……쉬고 싶습니다." "휴우……, 왜 내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냐? 그래, 오늘은 이 만 돌아가마. 쉬고, ……다시 얘기하자꾸나." 지스카르는 위로하듯 카스트로의 어깨를 토닥이고 돌아섰다. 문소리 가 날 때까지 카스트로는 그대로 뒤돌아서있었다. 왜 형과 있으면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지 몰랐다. 형이 아버지와 닮 아서 그런 걸까? 카스트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흐트러져 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도 아프다. 형과의 대화는 항상 카스 트로를 지치게 만든다. ==================================================================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2 - 관련자료:없음 [3134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09 21:20 조회:164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2 - ================================================================== 느지막한 아침이었다. 추위도 한풀 꺾인 2월의 테리온에는 새벽부터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넓은 테라스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침 대 위의 남자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운다. 숱 많은 눈썹을 꿈틀거리 며 눈꺼풀을 들어올린 남자는 잠투정하듯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눈을 감았다. 푹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재차 잠을 청하는 남자의 방으로 흑갈색 머리의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라에르는 납작하게 접힌 편지를 들고, 아직 자고있는 카스트로에게 다가갔다. 가식적인 미소와 말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카스트로가 유일하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좋은 꿈을 꾸 는 듯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라에르는 잠시 망 설이다가 테라스가 내다보이는 창가의 테이블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 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생각을 않는다. 라에르는 가만히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물안개로 가려진 숲길 과 빗줄기를 받아마시는 강, 아라가 흐릿하게 보인다. 전날 밤 라에르는 편지를 받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친위대원들 도 편지를 받았다더니, 오늘 아침에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하나같 이 오랜만에 활기가 차 있었다. 카르노에서 온 편지는 이국에 온 그들 에게 그리움인 동시에 의지가 되어주는 버팀대였다. 라에르가 받은 편 지는 두통이었다. 하나는 시에르와 어머니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이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그 편지였다. 편지를 쓴 사람은 전신 로마의 사제 루아였다. 옅은 신음소리를 감지한 라에르는 시선을 침대 쪽으로 돌렸다. 푹 감싸인 이불을 밀어내며 카스트로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다가가며 묻는 말에, 카스트로가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린 다. "시종장 하미르는?" "잠깐 비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카스트로는 부시시한 얼굴을 손등으로 부벼대다가 하품을 했다. 어 렸을 때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보며, 라에르 는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변하지 않는다. 카스 트로는 여전히 카스트로다. 그 사소한 일만으로도 그런 확신을 갖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지금 기분은 그런 확신으로 무척 좋았다. "무슨 할 말이 있나?" 라에르는 테이블에서 집어들고 온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내밀었다. 카스트로는 편지를 받아들면서, 하품이 비어져 나오는 입술로 말했다. "마실 물 좀 주겠나?" "네, 전하."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카스트로는 기운없는 손놀림으로 편 지를 펼쳤다. 그러다가 어두워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닫고, 혀를 차며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가운을 입어야 하겠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수없이 카스트로는 잠옷바람으로 어슬렁거 리며 창가의 테이블로 다가가 쿠션이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아버렸다. 편지는 낯익은 글씨체로 쓰여있었다. 동글동글하고 매끄러운 필기체. 카스트로는 그 글씨체의 주인을 눈치채고, 진지하게 편지를 읽어나갔 다. 간단한 인사로 시작한 편지는 최근 카르노의 동향과 자신이 맡긴 일 들의 진척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직접 대화할 때는 그렇게 수다가 늘 어지는 사람이 편지에서는 할 말들만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다. 과연 같 은 사람의 것인가 싶을 정도다. 두 달 동안 카르노에서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왕 세자 아베르노가 정식으로 섭정이 되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 사단장 다이크경의 파면이었다. 첫 번째 소식은 이미 짐작했던 바였지 만, 두 번째 소식은 카스트로로서도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파면?' 황당한 소식이어서, 카스트로는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다 시 읽어도 파면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카스트로 전하의 호위에 실책이 있었음을 구실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다이크경과 아베르노 전하와의 불화에 기인한 것으로……' 카스트로는 이마를 접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화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의문을 뒤로 하고, 카스트로는 계속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 외에도 루아 사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카르노에서의 상황에 대한 조심스런 전망까지 내비쳤다. 아베르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장차 그를 중심으로 국정이 원활 하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 길을 닦는 것이었다. 다이크경의 파면은 시작일 뿐, 곧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작될 것이다. 말 그대로 '아베르노 체제'를 만들어 가는 중인 것이다. 카스트로는 루아 사제의 견해에 동감했다. 자신이 아베르노였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이크경같은 유능한 기사가 파면당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다이크경이나 카르노에게 나 마찬가지로. 루아 사제는 자신이 맡긴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년 전부터 루아 사제와 함께 만들어온 '열한개의 검'은 용병대라는 허 울을 뒤집어쓴 특수집단이었다. 카스트로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 세한 그들은 각국에 흩어져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하다면 암살과 테러 도 불사하도록 훈련받고 있었다. 그들의 지상 목표는 미노의 카르노 복속과 레이얄, 테라 두 나라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루아 사제와 카스트로의 전 호위기사 루페르트경의 지휘 아래 맹훈련을 받은 그들은 이제 조금씩 그 훈련의 성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각국의 동향에 대한 자세한 보고였다. 카스트로는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고 한참동안 생각했다. 그 리고 서재에서 가져온 양피지에다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라에르는 흐뭇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다. 역시 카스트로는 변하지 않았다. 테리온과 이틀거리의 한 도시에서, 소렐 공작 케니아스는 같은 여관 에 묵은 한 귀족으로부터 기가 막힌 정보를 얻어들었다. 자신이 누구 라는 것을 알고 신나게 떠들어대는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사위 될 사 람의 기막힌 여성편력과 추잡한 스캔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사이키경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 카스트로 전하의 검에 손수건 을 매달아줬다고 하더군요. 그걸 보고 사이키경이 제정신일 리가 없었 죠. 그래서……" 케니아스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을 억누르려고, 독한 술을 연신 들이부었다. 역겨웠다. 이만큼 더럽고 추잡한 스캔들을 들어본 적이 없 는 것 같았다. '그런 자였다니……!' 최악이었다. 비밀리에 알아본 카스트로 왕자에 대한 소문에는 여성 편력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단 두 달 사이에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차라리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쪽이 훨씬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편했다. 그러면 적어도 인간이라고는 봐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다. "……결국 패가망신한 겁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잃고, 애인에게마저 버림받고, 테리온 사교계에서 발붙일 수도 없게 되었죠. 귀부인들을 그 렇게 망가뜨려 놓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카스트로 전하도 대단 한 사람이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할까요? 겁이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뒷손가락질하든 여전히 애정행각을 계속하고 있으니 까요." 케니아스는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윗층에서 잠들어있을 루시타니아를 생각하면, 머리꼭 대기까지 분노가 치솟는다. "테라의 유부남들은 저마다 제 부인들을 숨기기 바빠졌죠. 단 두달 새 말입니다." 케니아스는 기분나쁜 표정으로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대체 뭘 알고 싶어서, 뭘 보고 싶어서 이렇게 떠들어대는 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카스트로 왕자의 일이라기에 호기심을 갖고 들 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적 어도 며칠동안은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을 알면서도, 케니아스는 솟구치는 짜 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요, 경?" "예에?" 바에 앉아 술을 들이키며 이야기를 풀어내던 귀족은 황당한 표정으 로 케니아스를 돌아보았다. 케니아스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 귀족을 노 려보았다. "그 사람이 내 사위 될 자라는 것을 알고 있소?" "아, 네,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 까?" 케니아스는 냉소적으로 그 남자를 눈 밑으로 깔보았다. 키 때문이 아닌 위압감의 차이였다. 그 남자는 자신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안색을 굳혔다. "이날 이때까지 무상으로 정보를 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뭘 원하 는 거요?" "무, 무슨, 나는 단지……." "아니면 나, 레이얄의 소렐 공작이 낭패한 꼴을 보고 싶은 거였소? 그래서 지금 주절주절 입 가볍게 떠들어대는 건가?" 그 남자는 안색이 확 변하며 가까이 있던 몸을 뒤로 뺐다. 지금의 소렐 공작은 아까 만났을 때의 온화한 귀족이 아니었다. 두 눈으로 불 기둥을 뿜어내며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듯 이를 갈고 있었다. 그로서 는 감히 마주하기 힘든 살기였다. "아, 아니, 난, 죄, 죄송합니다. 실수, 한 것 같군요. 정말, 저는 ……,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허둥지둥 도망쳐나가는 남자를 증오스럽다는 듯이 쏘아보던 케니아 스는 살기등등한 시선을 여관주인에게 돌렸다. "뭐하나? 술 달라고 한지가 언젠데!"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여관주인은 화급하게 술을 만들어서 케니아스의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케니아스는 그 독한 술을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타는 것 같다. 술 때문이 아니라, 그 빌 어먹을 사위녀석 때문에! 아침부터 내린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모른다. 달빛이 비구름 에 가려, 방안은 촛불을 켜놓아도 어두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방안에 는 발그스름한 금발을 등뒤로 땋아 넘긴 젊은 여자가 방 가운데 있는 침대 맡에 앉아있었다. 다소 마르고 예리한 인상인 이십대 중반의 여 자는 침대 위에서 자고있는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 속에 푹 파묻혀 세상 모르게 자고있는 소녀는 밝은 금발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썹과 조그맣고 붉은 입술의, 꽉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소녀 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냄새를 맡으면 젖내가 날 것처럼 애티를 내는 소녀는, 소렐 공작의 무남독녀인 루시타니아 폰 소렐이었다. 아젤은 곱게 잠든 루시타니아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소리없이 걸음을 옮겨 방을 나왔다. 방밖에는 공작이 풀어놓은 호위가 지키고 있어서 지금은 루시타니아의 안전을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다. 아젤은 레이얄 에서 몇 안 되는 여자 마법사였다. 마법대학 유레카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온 그녀는, 대학 시절 유레카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인 소 렐 공작에게 발탁되어 7년간을 한결같이 공작을 위해 일해왔다. 아젤 은 공작의 명에 따라 그의 딸 루시타니아를 보호해왔고, 이제는 루시 타니아를 따라 멀고 먼 타국으로 가는 처지였다. 아직 어리기만 한 루 시타니아를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이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젤은 계단을 내려오다, 어두침침한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공작 을 발견했다. 비마저 내리는 밤에 아무도 상대해주는 사람 없이 자작 하는 모습이, 아젤로 하여금 묘한 보호본능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아 젤은 곧 자신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실소했다. 아젤이 아는 한 소렐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누구의 보호 따위가 필요한 자가 아니었다. 그리 고 소렐 공작이 필요로 하는 것 역시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상대일 뿐, 자신을 보호해줄 상대가 아니다. 아젤은 7년간 그의 곁에서 있던 경험으로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저도 한잔 주시겠어요, 공작 각하." 케니아스는 흘낏 눈을 들어 아젤을 쳐다보더니, 이내 졸린 눈의 여 관주인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여관주인은 재빠르게 술잔을 꺼내 술을 따라 아젤의 앞에 밀어냈다. 아젤은 케니아스의 옆에 앉아 잠시 술잔 을 들고 술맛을 음미했다. 약하게 만든 위스키였다. 그녀가 가끔 즐기 는 술이다. "왜 그렇게 처량맞게 앉아 계세요? 벌써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연습을 하시는 건가요?" 케니아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또 묘하게 서글프다. 비 가 와서인지, 오늘의 케니아스는 평소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루시타니아는?" "자고 있어요. 아주 편하게." 언제나 자신에게 물어오는 것은 그거였다. '루시타니아는?' 마치 그것밖에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그것이 아젤은 너무 서운했 다. "그렇게 걱정되면 당분간 테라에 계시지 그러세요? 당신이 곁에 있 다면 아가씨도 마음 든든할 테고요." 케니아스는 가타부타 대꾸없이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독한 술을 한 병이 넘게 들이부었건만, 아직까지 취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 니, 더욱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아직도 울컥거리는 감정과 함께. 케니아스는 빈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술이 많이 늘었다. '아나엘라가 걱정하겠군.' 분명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슬퍼서 음식도 제 대로 못 먹고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주치의 로일경에게 호되게 혼나고 서야 무언가를 조금 입으로 넘길 수 있을 게다. "부인 걱정을 하고 계시는군요." 정곡을 찌르는 단정적인 말투에 흠칫해 돌아보자, 아젤이 입술에 술 잔을 대고 씁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젤은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바 위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었다. 고개만 돌려 케니아스를 돌아보 는 폼이 그 한 모금만으로도 취한 사람 같았다. "각하께서 그런 표정 지으실 때는 한가지밖에 없죠. 친애하는 공주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실 때. 제 말이 맞죠?" 케니아스는 대답하지 않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조르륵 맑은 소리가 주향 가득한 바 위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때는 벌써 자정을 넘기고 있었고 여관에는 오늘따라 손님이 없었다. 바깥의 빗소리라도 없었다 면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해보세요. 늦게까지 혼자 이러시는 이유를. 지금까지 잘 참아오셨 잖아요?" 케니아스는 한참을 더 술잔을 기울이다가, 아젤이 대답을 포기할 때 쯤 말문을 열었다. 나직하고 허탈해하는 음색이었다. "바람둥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 아젤은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을 미끌어뜨릴뻔 하다가 간신히 몸을 바 로 하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케니아스를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빗어넘 긴 금발 아래의 이지적인 얼굴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부녀와 관계하고, 결투라도 들어오면 가차없이 그 남편을 찔러 죽이고……, 그리고 애인이었던 유부녀를 냉정하게 내버리는 바람둥이 말이야."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당혹스러워하는 아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니아스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쓰디쓴 표정으로 말을 뱉어냈다. "루시타니아의 남편감을 말하는 거야." "……!"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아젤은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무슨 소리죠? 카르노의 왕자는 이제 열 일곱 살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아이가 무슨……." "천하의 개망나니지. 빌어먹을!" 다시 화가 치미는 듯, 케니아스는 병째로 들고 술을 입 속에 들이부 었다. 아젤은 놀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급하게 케니아스가 든 술병을 잡고 늘어졌다. "그렇게 술만 마시지 말고 말해봐요. 그런 말, 처음 듣는데,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어요?" "방금 전에 어느 껄렁한 테라 귀족놈에게서. 테리온에서 왔다면서 신나게 지껄이더군." 아젤은 찌푸린 얼굴로 케니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 는 케니아스의 모습은 흔치 않았다. '뭐, 그럴 만도 하겠지만…….' 아젤이 아는 그 누구보다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왕녀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야심에 눈이 먼 사람쯤으로 생각했던 아젤에 게는 상당히 뜻밖인 일이었지만, 케니아스는 진심으로 아내와 딸에게 충실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저 국왕에게 잘 보기이기 위한 거짓이 아니다. 과연 낭만적인 연인의 표상인 실피와 아르니스의 후손다운 사 람이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에게는 결국 남의 일인 것이지만, 저 지극히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사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역시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일 것이다.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하시다니, 각하답지 않으세요." 툭 내던진 말에 곧바로 시선이 닿아온다. 절망적이기까지 하던 케니 아스의 눈에 조금씩 희망이 엿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죠. 아가씨의 일이라 너무 감정적이신 것 같군요. 이성을 찾 으세요. 사람을 잘 보기로 당신 만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 케니아스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미소가 어린다. "그래. 고맙다, 아젤." "뭘요." 아젤은 술잔을 집어들고 케니아스의 시선을 비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았더니, 벌써 목이 칼칼해오네요.. 아무래도 감기 걸릴 것 같은 예감이.. --; ^^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졸린 새 씀-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3 - 관련자료:없음 [3137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0 21:01 조회:160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3 - ================================================================== 비가 개인 화창한 날의 오후에 테리온 시내로 들어오는 마차들이 있 었다. 긴 여행에 먼지로 뒤덮일 만도 하건만 아직 말끔하게만 보이는 유백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마차와 갖가지 값비싼 물건들을 싣고 오는 짐마차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할 용병과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무리였 다. 그들은 테라의 수상 라니엘 백작과 안색이 나쁜 카르노의 왕자 지 스카르의 환영을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스러워서, 전날 일 부러 카스트로에게 사람을 보내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통고해놓았더니, 아침에 카스트로의 저택으로 갔을 때는 이미 사라지 고 없었다.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동생을 생각하고 있자니 다 시 속에서 열불이 났다. 좋든 싫든 이제 결혼해야 할 사람이고, 결혼할 사람의 아버지였다. 여기까지 마중 나오는 것은 지스카르보다 카스트 로의 몫이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사람을 풀어서 리케아 거리의 도박장 과 술집을 뒤지도록 하고, 요즘 사귄다는 트레아 후작부인의 저택에까 지 사람을 보냈지만 카스트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로페냐와 페트라르카에게도 사람을 보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스카르는 기막히다 못해 허탈했다. 대체 이른 아침부 터 어디로 사라져버렸다는 말인가! 애꿎은 카스트로의 시종들과 친위 대원들에게 화풀이를 했지만, 그런다고 없어진 카스트로가 다시 나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리석은 녀석!' 지스카르는 입맛이 썼다. 카스트로만은 그 애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성정 그대로, 이 테라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멋지게 살 아주길 바랬다.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커준 카스트로라면 아베르노 나 자신처럼 무너지지 않고 버텨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사태란 말인가! 차라리 아베르노처럼 서서히 테라색에 물들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아베르노는 적어도 그 자신과 나라의 명예를 망치지는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은근슬쩍 동생에 대해 물어오고, 뒤에서 수근거리기 때문에 지스카르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제 테리온의 귀족들은 카르노라고 하면, 타락한 왕자의 나라라고 먼저 떠 올리고 있었다. 대체 고국으로 돌아가면 무슨 낯으로 폐하와 국민들을 본다는 말인가! 자신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자신까지 옆에 버젓이 있는 이때에 카스트로의 타락은 고스란히 지스카르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올 터였다. 지스카르는 처음으로 형이라는 위치의 어려움에 대해 실감했다. 그리고 오늘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동생의 뒷처리는 자 신이 해야만 할 것이다. '젠장!' 지스카르는 마차에서 내려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며 억지로 인상을 폈다.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자. 과연 가 능할까 모르겠지만. "어서 오십시오, 소렐 공작 각하. 무척 오랜만이지요?" 테라의 수상, 라니엘 백작은 소렐 공작과 안면이 있는 듯 반갑게 나 아가 인사를 했다. 소렐 공작도 라니엘 백작을 보자, 단정한 얼굴에 반 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오랜만이오, 유스경. 아니 이제는 수상 각하이신가요?" 지스카르는 금발머리의 중년 남자를 보며 생각 이상으로 몸이 굳어 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지난 일이라고 애써 마음을 돌려보려고 해도, 그 끔찍했던 5년 전의 일이 잊혀질 리가 없었다. 아니 새삼 더 선명해 지고 있었다. 그 5년 동안 소렐 공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 다.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잔인한 권력가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아, 각하의 염려 덕분에요. 그런데 저 젊은 분이 바로 카스트로 전 하이신가 보지요?" 지스카르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더욱 긴장해버렸 다. 소렐 공작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찬다. "이런, 어쩌지요? 저 분은 카스트로 전하의 형이신 지스카르 전하이 십니다." 매끄러운 라니엘 백작의 소개를 들으며, 지스카르는 자신이 나설 때 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스카르 폰 카르노입니다." 소렐 공작은 날카로운 눈매로 지스카르를 훑어보다가, 이내 다시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 카스트로를 찾는 것이리라. 지스카르는 속으 로 말썽꾸러기 동생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카스트로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 녁, 환영연회에서는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대번에 기분 나쁜 얼굴이 되는 소렐 공작을 보며, 지스카르는 연신 카스트로를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되뇌었다. 왜 모든 난처한 일은 자신에게 떠맡겨지는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지스카르는 정신을 차린 순간, 자 신이 소렐 공작과 말머리를 함께 하고 신전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신 카스트로에 대한 변명을 지껄이며! 정말이지, 카스트로 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재차 다짐하는 지스카르였다. "정말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트레아 후작가의 내실 깊숙한 곳에서 한가롭게 위스키와 도박을 즐 기고 있던 카스트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가 간다고, 온 사람이 도로 가지는 않겠지요. 물론 돌아가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호호호홋, 정말 못말리겠군요, 전하." 트레아 후작부인은 지금 묘한 스릴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새벽부터 호위기사 한 명만 데리고 숨어 들어온 카스트로는 다짜고짜 아무에게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요구해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후작부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스 카르가 보낸 사람들이 카스트로를 찾기에 모른다고 잡아떼며 은근슬쩍 그 이유를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내고 후작부인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약혼녀를 피해 달아난 약혼자라……. 약혼녀가 불쌍 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미래의 부인에게 찍혀서 소박맞으시면 어쩌려고 이러세 요?" 후작부인이 카드를 바꾸며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카스트로는 불만스 러운 듯 눈을 흘긴다. "소렐의 딸 따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소." "호오, 그러세요?" 실실 웃는 후작부인을, 카스트로가 눈을 치뜨고 노려보았다. 그래도 후작부인은 뭐가 좋은지 마냥 생글거릴 뿐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다면 나가겠소.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 군." 하던 카드마저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인 카스트로를 올려다 보며, 후작부인은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집어삼키고 카스트로 의 팔을 잡았다. 삐친 아이는 달래줘야 하는 법이다. "불편하다니요.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다만 걱정이 되어 서 그런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이제 그 얘기는 하지 않겠어 요." 카스트로는 지그시 끌어다 의자에 앉히는 후작부인의 손길에 모르는 척 다시 앉았다. 그리고 툴툴거리며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앞에서 다시 그 부녀 얘기를 꺼낸다면, 차라리 다른 곳을 찾겠 소." "알겠어요. 제가 실수했어요." 다정다감하게 대꾸하면서도, 후작부인의 속은 미처 터지지 못한 웃 음으로 견딜 수 없이 간질거렸다. 사내라는 족속이 이렇게 귀여울 수 도 있나 싶었다. 저 늠름한 몸매와 정중한 말투 뒤에 숨은 천진한 아 이같은 면면이, 매번 만날 때마다 그녀를 매혹시켰다. 자기 딴에는 어 른인척 하지만, 속은 호기심 많고 장난기 많은 아이에 불과했다. 때로 는 잘난 척 잰체하기도 하지만, 어린 꼬마가 아버지 옷을 훔쳐입고 자 랑하는 것처럼 눈물나도록 귀여웠다. 페트라르카 같은 세련된 귀족 타입의 남자가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지만, 요즘 들어서는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카스트로에게 마음 이 쓰이고 있었다. 자신의 취향이 이런 어린애 취향이었나하는 생각까 지 들 정도다. 그러고 보면 저 테리온의 바람둥이 귀부인들이 왜 이 꼬마에게 정신 을 못차리는 지 알 것도 같았다. 누구보다 남성적인 향취를 가진 이국 의 왕자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영혼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아이가 남의 고통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욕심껏 눈앞의 아 름다운 것들을 탐하는 잔인한 이기주의자라고 해도. 후작부인은 다시 카드를 집어드는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아이였다. 옆 사람의 앞에 놓인 맛있는 음식만 골라먹다 금세 싫증을 내고 다른 사람의 음식에 손을 대지만, 정작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이. 그에게 버림받은 귀부인들에 대 해서 그는 정작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그의 약혼녀는 어떤 기 분으로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오?" 테이블 너머에서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카스트로의 모습은 이미 조 금 전 일은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후작부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그것보다 카드는 그만하고 새로운 놀이를 해 보지 않겠어요?" "새로운 놀이?" 금새 흥미를 드러내는 카스트로의 솔직한 반응이 다시 후작부인의 미소를 자아냈다. 후작부인은 재미있는 듯 눈웃음치며 아까 전부터 머 리에 떠돌던 짓궂은 생각을 공개했다. 테라의 신전에 들러 대신관을 만났다가, 전에 테리온에 사두었던 저 택에 도착해서도 소렐 공작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건 생각했 던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다. 그런 더러운 소문을 듣고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던 것은, 적어도 카스트로가 한 나라의 왕자이기 때문이었 다.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다녀도, 정식으로 예의를 지킬 것은 지 킬 줄 아는 그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일로 봐서는 장차 사위 될 사람이 그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형이라는 사람도 나와있는데, 어떻게 사위 될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스카르가 부자연스 럽게 늘어놓았던 변명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케니아스는 절대 눈치 없는 사람도, 뻔히 아는 것을 믿으려하지 않는 바보도 아니었다. "아버지?" 인상을 쓰고 초조한 기색을 띤 아버지가 이상했는지 루시타니아가 그를 불렀다. 케니아스는 너무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을 깨닫고, 애써 온화한 표정으로 바꿔 루시타니아를 바라보았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연회에 갈 때까지 쉬거라. 이층 복도 첫번째 방이다. 아젤의 방은 그 옆방이니까……." "알겠어요. 그럼 이따가 뵈어요, 아버지." "그래." 뺨에다 입을 맞추고 계단을 오르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케니 아스는 다시 찌푸린 얼굴로 홀을 가로질러갔다. 그 뒤를 이 집의 집사 샤른이 따랐다. 전에 테라와의 관계를 위해 자주 테리온을 오갔던 소렐 공작은 그다 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택을 이곳에 마련했다. 집사인 샤른은 그때 남겨두고 간 사람으로, 케니아스의 심복 중 한 명이었다. 샤른은 이 저 택을 관리하는 외에도 이곳 테라의 사정을 주기적으로 혹은 비주기적 으로 케니아스에게 전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집사라는 명칭을 가진 밀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케니아스는 집무실로 마련했던 방으로 들어서서 한참동안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의 정원에는 아기자기한 정원수들이 깔끔하게 다듬어져있었다. 하지만 지 금 복잡한 케니아스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속이 부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케니아스는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한 채로 입을 떼었다. 샤른은 갈라 진 듯한 케니아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쳐다보았다. 케니아스는 헛기 침을 하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난 두 달간, 카르노 삼왕자의 행적과 자네가 그에 대해 파악한 바를 말해보게." 샤른은 짐작했던 질문을 받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답을 시작했다. 망설임 없는 단호한 말투였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 루시타니아는 화사한 흰색과 핑크색이 어우러진 침대시트 위에 앉아 우울한 듯이 중얼거렸다. "네?" 아젤은 깃털이 달린 모자를 벗으면서 루시타니아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말이야.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아젤은 알아?" 아젤은 그냥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도 모르시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가씨를 여기서 시 집보내니까 서운해서 그러시는 거겠지요. 신부의 아버지는 딸을 뺏기 는 기분이라고 하던데요."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타니아를 보며, 아젤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 다.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가의 아가씨답게 아직은 순진하고 순수하기 만 한 루시타니아였다. 남편 될 사람이 마중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 았다고 해서, 그 이면에 숨겨진 많은 속뜻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인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젤은 괜히 그런 것까지 말해서 루시타니아까지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울한 사람은 소렐 공작 한사람만으로 도 충분히 벅차다. "연회 때까지 좀 쉬세요. 여행으로 얼굴이 많이 안되셨어요." 루시타니아는 기운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정신없이 바쁘실 거예요. 연회나 무도회의 초청도 많을 테고, 나름대로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요. 당분간 아가씨가 사실 곳은 이곳 테리온이니까 이곳의 귀족들과도 안면을 익히셔야 하고요." 루시타니아의 작고 붉은 입술에서 벌써부터 지친 한숨이 포옥 새어 나왔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제 열 여섯인 자신이 결혼이라니. 물론 왕족들 사이에서는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왕 족이라기보다 귀족이라는 인식으로 살아온 루시타니아였다. "오늘, 연회에 그분이 나오실까?" "네?" 아젤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분 말이야. 카르노의……." 말을 채 다 끝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루시타니아의 목덜 미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젤은 루시타니아가 말한 '그분'이 누구인가 를 눈치채고, 들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대답은 긍정적으로 해야했다. "물론이지요. 아가씨의 남편되실 분이신데, 당연히 나오셔야죠. 호호,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어째 아무 관심도 없다 싶었는데, 그것만도 아 닌 모양이죠?" 짓궂은 말투로 놀리는 아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루시타니아는 휘휘 머리를 내저었다. "피곤해. 자야겠어. 그럼 이따가 봐요." 아젤은 자신도 곤란했던 터라, 루시타니아의 어설픈 회피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 졸려서, 제정신이 아닌 듯.. --; 왠지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졸린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4 - 관련자료:없음 [3140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1 20:32 조회:159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4 - ================================================================== "시위라, 이건가?" 침착해진 말투로 말하는 케니아스의 표정은 냉정한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샤른이 알아본 카스트로의 행적과 그에 대한 소감을 차 근히 듣고 난 뒤, 케니아스는 지금까지 장황했던 설명을 한마디로 압 축해서 내뱉었다. 결국 결론은 그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말을 나누어본 적도 없고, 가까이서 뵌 적 도 없어서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 느낌에는 그렇습니다." 샤른의 느낌은 대부분 정확하다. 그 정도 상황판단능력이 아니라면, 테라의 중심지에 밀정으로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설픈 정보는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것이 평소 케니아스의 지론이었다. "시위라……. 그랬던가?" 같은 말을 되뇌이며, 케니아스는 그 말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헤아려 보았다. 분명히 카스트로의 지나친 여성편력은 갑작스러운 만큼, 조금 만 냉정하게 지켜본다면 고의성이 엿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나같이 말많을 게 뻔한 유부녀들이 상대인 것부터, 누구에게라도 쉬쉬 할 행동들이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 눈에 띈 점이라든가. 마치 보라는 듯이 스캔들을 만들고 다니는 것이다. '보라는 듯이……. 누구에게 보라는 것일까? 테라? 아니면 나? …… 어쩌면 둘 다인가?' 케니아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카스트로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 정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다 면 카스트로를 죽여서라도 두 사람의 혼사를 막으려 했던 것이기도 했 다. 어쩌면 카스트로는 자신을 원수로 여길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거의 99%의 확률로. "사람됨은 어때 보이던가? 아니, 이건 물을 필요 없겠군. 내가 직접 보지. 오늘 연회에도 설마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샤른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반반의 확률이라……." 케니아스의 입술 끝에 고소가 맺혔다. 고의로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 해 이러는 것이라면 충분히 오지 않고도 남을 것이다. 마중에도 나오 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전날밤까지 내린 비로, 세상은 세수를 한 듯 말끔해졌다. 특히 비 개 인 날의 밤하늘은 투명하리만큼 맑은 어둠을 사람들에게 눈요기로 선 사한다. 평소에 보이지도 않던 별들마저 선명하게 빛나 스스로의 존재 를 주장하는 밤에, 페트라르카는 또 한번의 구경거리를 즐겨보기 위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라의 수상인 라니엘 백작의 자택은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2층 저 택이었다. 누가 보아도 테라 최고위층의 자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 도로 검소한 저택이어서, 페트라르카는 라니엘 백작이 그의 자택에서 연회를 여는 경우가 거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좋은 말로해서 검소하다였지, 실상 페트라르카 같은 왕족이나 소렐 공작 같 은 대귀족의 눈에는 초라하다고 밖에 비치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적으 로 테라 수상의 지위를 대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더 초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입에 담지는 않지만, 테라의 정부라는 것 은 결국 한족들이 결정한 일을 수행하는 기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페트라르카는 그런 것에는 별 구애됨 없이 연회를 즐기고 있 었다. 건물의 화려함을 보려고 하면 왕궁만큼이나 화려한 곳이 있을까. 페트라르카가 보고자 하는 것은, 단 두 달만에 밑바닥까지 타락하고 방종해진 카스트로의 부인이 될 불운의 여인이었다. 미다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유명한 소렐 공작의 무남독녀 말이다. 솔직히 참으로 악취미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혼사였다. 카스트로로 서는 굴욕의 상징인 결혼이다. 그렇다고, 소렐 공작이라고 카스트로가 마음에 들어서 이 결혼을 허락한 것도 아닐 것이고. '대체 앙숙일 수밖에 없는 두 나라의 왕족을 묶어서 뭘 하려는 건 지……' 페트라르카는 혀를 찼다. 카스트로 위의 두 형들을 레이얄과 미다 왕실과 묶어놓았으면 된 거지, 다시 카스트로까지 레이얄에 얽매이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한족들끼리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페트라르카 전하." 간드러진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페트라르카는 남모르게 얼굴을 찌푸 렸다. 하지만 돌아서는 얼굴에는 예의바른, 그러나 능수능란한 바람둥 이다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 부인." 트레아 후작부인은 쥘부채 뒤에서 호호 웃었다. "네, 전하. 카스트로 전하 편에 전하의 소식은 항상 듣고 있었답니 다." 후작부인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몰라서, 페트라르카는 이마에 조 심스럽게 주름을 잡았다. 카스트로가 최근에 후작부인과 사귄다는 말 은 들었지만,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티를 내고 싶나? 하지만 하필 이런 자리에서…….' 페트라르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부쩍 의심이 들어 다시 후작부인 을 돌아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성숙한 여인의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이 연회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불순한 의도의, 카스트로가 약혼녀를 맞는 나름대로의 환영 식이라면? 소렐 공작과 공녀가 그 불쾌한 소문을 들어버린다면 어떻게 나올까? 페트라르카는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너무 앞지른 생각이다. 그리고 설마하니 카스트로가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방금 왔는데, 신부와 신부의 아버지는 아직인가 보지요? 아직 이른 가요?" 그리 넓지 않은 홀을 둘러보며 말하는 후작부인을 보며, 페트라르카 는 다시 의심을 일깨웠다. 하지만 페트라르카는 곧 또 다른 이유를 들 어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천하의 소렐 공작을 적으로 만들만큼 후작 부인은 멍청하지 않으니까. "카스트로도 보이지 않는군요. 양측이 모두 주인공답게 연회가 무르 익을 때 극적으로 나타날 모양인가 봅니다." 후작부인은 주위를 배회하던 시선을 예의바른 가면의 페트라르카에 게 돌렸다. 이국적인 하늘색머리와 맑디맑은 파란 눈이 잘 그을린 구 릿빛 피부와 함께 묘한 성적매력을 만들어낸다. 후작부인은 이 사람을 볼 때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바다 한가운데가 생각났다. 왠지 이 사람은 하늘만큼 바다만큼 시원스럽고 자유로워 보인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유독 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려서부터 귀족가의 예절과 규범에 얽매여야 했던 그녀에게 제멋대로인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이국의 왕자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카스트로와는 달랐다. 같은 왕자의 신분이면서도 어쩌면 저렇게 다 른 분위기를 낼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카스트로는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곱게 커온 아이가 사방이 모두 길인 곳을 막 들어서서 이것저 것 호기심이 닿는 대로 탐하는 것 같은 귀염성을 가진 남자였다. 왠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새로운 것과 좋은 것들을 손잡고 데리고 다니며 보여주고 또 사주고싶은 상대였다. 보듬어주고 싶고 사랑해주 고 싶은 상대였다. 그에 반해, 페트라르카는 처음부터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자라, 이곳 테라에서 더욱 자유로워진 남자였다. 이미 성숙해버 린 귀염성 없는 남자로, 사랑해주기보다는 사랑 받고 싶은 상대다. 후 작부인으로서는 어느 한쪽도 포기하기 싫은 남자들이었다. "카스트로 전하의 새 애인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페트라르카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후작부인을 내려보았다. "부인께서 카스트로의 새 애인이라고 들었소만?" 숱 많은 하늘색 눈썹을 의심스럽게 휘는 페트라르카에게 후작부인은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선사했다. "호호호, 그랬으면 좋겠지만, 카스트로 전하께서 어디 한 여인에게 오래 머무시던 분이신가요?" "또 바뀌었소? 이번에는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카스트로 전하에게 여자를 가르친 것이 전하라고 들었어요. 전하께 서는 지금 카스트로 전하의 행동들이 만족스러우신가요?" 도저히 속을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페트라르카는 거짓말과 사기에 능수능란한 장사치들보다 이 여자의 속을 파악하기가 더 어려웠다. "글쎄요. 스승으로서의 감상이라면, 솔직히 너무 뛰어난 학생이라 내 명성에 위협을 느낄 정도요. 그 대답을 원하셨소?" 자신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는 페트라르카의 시선을 망설임 없이 맞 받으며, 후작부인은 여유만만한 미소로 대꾸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물으시오." "아직도 그 여가수를 사랑하시나요?" 페트라르카는 움칫 굳어진 몸을 느끼며, 빤히 쳐다보는 후작부인을 바라보았다. 후작부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져있었다. 드물게 보이 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소." 시침을 떼며 시선을 돌리는 페트라르카의 뒤통수에 대고, 후작부인 은 잔잔한, 그리고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카스트로 전하의 새 애인이 바로 헤라 킬트, 그 여가수예요." 뻣뻣한 고개를 돌리는 페트라르카의 구릿빛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 다. 후작부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로 생글생글 웃어가 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늘,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그 여가수와 함께 나타날지도 모르죠.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그 여가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시더군 요." 하얗게 질린 페트라르카의 입술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후작 부인은 묘한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부아도 치밀었다. 이미 헤어진 옛 정부의 일에 왜 저렇게까지 안색을 달리하는지. 화가 났다. 그래서 더 욱 페트라르카를 자극하고 말았다. "벌써 며칠째 그 여가수의 아파트에서 살다시피 하고 계시죠. 전하 께서 사주신 그 아파트 말이에요." "그만, 됐소. 그만해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페트라르카는 어느새 싸늘해진 눈초리로 후작부인을 내려다보고 있 었다. 더 이상은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후작부인 은 욱하는 감정을 꿀꺽 삼켜버렸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을 뿐이다. "그렇군요. 옛 애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은 기분은 아닐테니까요. 제가 실수했어요. 어머, 라니엘 백작 부인!" 페트라르카는 할말을 끝까지 다하고, 잽싸게 빠져나가는 후작부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정말 징그러운 여자였다. 페트라르카는 잔머리 쓰 는 여자는 질색이었다. 특히 남자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손끝하나로 조종하려드는 여자를! 그래서 저 음모가 타입의 후작부인은 절대 상대 하기 싫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고있는 거지, 저 여자?' 뒤늦은 의문이 페트라르카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다. 연회가 중반을 향해갈 때, 이번 연회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루시타니 아가 소렐 공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주황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아직은 어려보이기만 하는 열 여섯 살의 예비 신부는 순결하고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탐스러운 금발과 뽀얀 피부, 그리고 신비로운 보 라색 눈동자가 뭇남성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세상을 모르는, 아직 사 랑을 꿈꾸는 소녀의 모습은 이 사교적인 도시 테리온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과연 듣던 대로 소렐 공작이 애지중지하는 딸다운, 온실 속 화초 같은 소녀였다. 남자들의 그 같은 반응과 대비되어, 귀부인들의 눈길은 한결같이 중 년의 미남자를 쫓아가고 있었다. 루시타니아와 같은 윤기 흐르는 금발 과 보라색 눈을 한 소렐 공작은 예의에 벗어나지는 않는 한도 내에서,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노련한 사교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페 트라르카나 로페냐같은 퇴폐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 건강한 느낌의 남 성이었다. 소렐 가문의 낭만적인 전설을 아는 귀부인들에게는 한번쯤 유혹해보고 싶은 상대임에 틀림없었다. "후작부인께서는 전에 저 분을 뵌 적이 있다고 하셨죠? 어떤 분이 죠, 소렐 공작은?" 담소를 나누던 귀부인이 은밀히 물어오자, 트레아 후작부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고 말했다. "누구든 저 사람을 함락시킬 수 있다면, 제가 그 사람에게 제 재산 의 절반을 주고 스승으로 모시겠어요." "네? 무슨……." 머리가 둔한 귀부인을 속으로 비웃으며, 트레아 후작부인은 생긋 웃 으며 단언했다. "저 사람, 아내밖에 모르는 돌덩이예요. 맹세코 저 남자, 테라의 어 떤 여성도 함락시킬 수 없을 걸요?" "하지만 그 낭만적인 소렐의 영주인데……." 미련이 남은 듯한 귀부인의 얼굴에 대고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 낭만은 공작의 부인 몫이죠. 다른 여자에게 줄 낭만 따위 없는 사람이에요." 후작부인은 자신만만했다. 벌써 수년전에 수차례에 걸쳐 그를 유혹 했던 바 있다. 결과는 페트라르카 이상의 참패였다. 군더더기 없이, 미 련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거절해버렸다. 그런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인 남자는 처음일 정도로, 소렐 공작은 그 문제에 관한 한 견고한 철옹성 이었던 것이다. 후작부인은 옆에 있던 귀부인이 잠잠해지자 느긋하고 날카롭게, 소렐 공작의 옆에서 웃고있는 금발의 소녀를 살펴보았다. 꽤 나 날카로운 눈썰미를 자랑하는 후작부인의 눈에는 한숨이 날 정도로 순진한 소녀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아.' 후작부인은 그렇게 단언했다. 카스트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카스트로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감싸주고 보듬어줄, 연륜 있고 매력적 인 여성이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할 것 같은 저 가녀린 소녀는 카스트로를 부담스럽게 할뿐이다. 가뜩이나 소렐 공작에게 반감이 많은 카스트로다. 순진한 소녀를 친 절하고 상냥하게 여인으로 이끌어줄 만큼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카스 트로다. 두 사람의 결혼은, 자신이 결정할 권리가 있다면 말이지만, 절 대 반대할 것이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5 - 관련자료:없음 [3143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2 20:22 조회:165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5 - ================================================================== 사람들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기만 한 연회장으로 카스트로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연회도 거의 막바지로 치달아갈 무렵이었다. 오늘 연회에서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아해하고, 지스카르가 주위 사람들의 질문을 받아, 있는 말 없는 말 죄 다 끌어다 변명하다가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을 때. 그리고 참고있는 게 분명한 소렐 공작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가 주위를 빙판 으로 만들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맵시있게 자주색의 테라식 연회복을 차려입고, 보는 사람이 복장 터질 만큼 느긋한 걸음걸이로 나타난 카 스트로의 팔에는 예쁘장한 청보라색 머리의 아가씨가 매달려있었다. 연회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몰려들었지만, 청보라 색 머리의 아가씨는 오연할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카스트로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표정의 카스트로는 상체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작은 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보라는 듯이 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사람들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갔다. 그 수다스런 귀부인들마저 입을 벌리고 쳐다보느라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연회장은 하인 한 명이 실수로 떨어뜨린 포크의 소리 가 홀 전체를 울릴 만큼의 정적에 휩싸였다. 카스트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띈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지스카르를 향했던 시선은 그 옆을 거쳐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남 자에게 가서 딱 멈추었다.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의, 죽어서도 잊지 못 할 남자의 얼굴이 자신과 불과 5프리(5M) 남짓한 거리에서 얼음석상 처럼 숨도 쉬지 않고 굳어있었다. 그 오만하고 잔인한 눈에 어리는 싸 늘한 분노를 마주하며, 카스트로는 한껏 비웃는 미소를 입술 끝에 매 달았다. 소렐의 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수년간이나 벼르던 원수를 바로 앞에 대한 이때에, 다른 사람 생각 같은 게 날 리가 없었다. 오로 지 카스트로의 머리를 장악하는 것은, 비록 유치할지라도 소렐이 굴욕 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정식으로 소렐을 자신의 발아래 무릎꿇게 할 것이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짓 거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 같은 경악의 파동이 갓 들어온 한 쌍의 남녀에 의해 점점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케니아스는 한 쌍의 연인 같이 다정한 두 사람 중 장신의 남자 쪽이 자신을 향해 입꼬리를 치켜 올리고 웃는 것을 충격에 휩싸여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 도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바로 카르노의 삼왕자라는 것을. 케니아스는 몸이, 그리고 마음이 싸늘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깊숙 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혐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이 뒤범벅되어 어찌할 수도 없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저 자는 자신의 약혼녀를 환영하는 연회에 버젓이 다른 여자를 데리 고 나타나서는 과시라도 하듯 연인처럼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완벽한 무시이며 모욕이었다.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를 앞에 두고 벌이 는 추태는 혐오스럽다 못해 추악했다. 최악이다. 장차 장인 될 사람이 있는 앞에서도 저러는데, 앞으로 두 사람이 결 혼하고 자신마저 소렐로 돌아간다면 루시타니아가 어떤 모욕과 멸시를 받을지는 뻔하다. 소렐이라는 이름도, 레이얄이라는 이름도 저 왕자에 게는 아무런 견제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반감과 치기 어린 충 동의 소산일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준 행동은 이 다음에도 그 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렐은 어금니를 악물 었다. 이 결혼은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루시타니아를 저런 파렴치한 자와 결혼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여린 아이가 저런 뻔뻔스럽고 몰염 치한 자를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랜만이군요, 케니아스경. 그다지 변하지 않으셔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카르노의 카스트로입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케니아스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흑발의 청년을 쏘아보았 다.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이곳 테리온에서 두어번 본 적이 있는 아베르노와 닮은 외모이지만, 아베르노가 가진 예절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한 남자였다. 그 큰 키로 자신을 깔보듯 내 려다보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카스트로는 눈싸움을 하듯 노려보는 소렐 공작에게서, 자꾸 시선 안 에 걸리적거리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 일순 카스트로의 유들거리는 표정이 흔들렸다. 소렐 공작과 꼭 닮은 외모의 아직 어린 아가씨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 었다. 그제서야 카스트로는 자신이 이곳에 참석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기억해냈다. 바로 이 여자 때문이었다. 소렐 공작의 딸!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대고, 카스트로는 더욱 싸늘해진 미소를 내보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케니아스경의 영애시군요. 카스트로 폰 카르노입니다. 처음 뵙지만, 상당히 눈에 익은 외모십니다. 부친을 많이 닮으셨군요." "……루시타니아 폰 소렐입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그만 여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내려다보며, 카스트로는 잔인한 미소를 띄었다. "헤라, 이 공녀께서 내 아내되실 루시타니아양이시오. 루시타니아양, 이쪽은 헤라 킬트. 지금의 제 애인인 여성입니다." 루시타니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뻣뻣이 굳은 반면, 헤라는 여유롭게 웃으며 뒤로 다리를 빼고 허리를 숙였다. 정중한 궁중식 예법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라 킬트입니다." 루시타니아의 커다란 보라색 눈망울이 흔들리더니, 금세 맑은 물방 을을 눈 속 가득 담아냈다. 케니아스는 이 어이없는 사태에 기가 막혀 굳어 있다가, 자신의 팔을 잡고 당기는 것을 느끼고는 울먹이는 루시 타니아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무너진다. 곱게만 길러온 딸아이의 눈물 에, 케니아스는 카스트로를 짓이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돌아가자,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는 케니아스가 끄는 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냉기 흐르는 목소리를 듣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례하시군요, 케니아스경. 경이 아무리 내 장인 될 사람이라 하나, 나는 엄연히 일국의 왕자요. 내 인사를 받고도 답례도 하지 않은 채, 제 약혼녀까지 데리고 그냥 가시다니요? 레이얄의 예법은 그따위밖에 안됩니까?" 케니아스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끼며 홱 몸을 돌렸다. 거만 하고 잔인한 눈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대고, 케니아스는 지 지 않을 만큼의 냉기를 내뿜었다. "예법? 유감스럽게도 레이얄의 예법에는 사람에게 하는 예법밖에 없 습니다. 짐승에게 하는 예법은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씹어뱉듯이 단어 하나하나에 악센트를 주어 내뱉자, 그들을 주시하 던 사람들이 놀란 숨을 들이킨다. 카스트로는 하! 하고 기가 막힌 듯 한 소리를 내고 케니아스를 쏘아보았다. 카스트로는 뒤에 있는 라에르 가 한 걸음 걸어나오는 것을 알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짐승이라……재미있군요. 그러면 짐승과 결혼할 여자는 뭐라고 부 릅니까?" 여유롭게 말장난하는 투였다. 케니아스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욕설을 삼키며, 분노로 인해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떤 여자든 짐승과 결혼하는 불상사는 없어야겠지요. 이만 실 례하겠습니다." 케니아스는 딸의 팔뚝을 움켜쥐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사람들은 절로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들의 등뒤로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코 유쾌해서 웃는 웃음소리가 아닌 것을 들으며, 케니아스는 뒤통수가 뜨듯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런 모욕은 맹세코 태 어난 이래 처음이었다. 지스카르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망 신도 이런 망신이 없고,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 리 나타나지 않는 게 나았다. 뭐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을 테니까. "카스트로! 나 좀 보자!" 지스카르는 키들거리는 카스트로의 팔을 잡고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발 떼기도 전에 버팅기는 저항감을 느끼며 멈추었다. "죄송합니다만, 헤라를 에스코트해야 합니다." 카스트로는 턱짓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헤라를 가리켰다. 지스카르 는 다시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 약혼녀를 그 따위로 취급 하고, 저 싸구려 창녀는 공주 대하듯 하는 카스트로가 어이없었다. "제 정신이냐? 저 여자는, 라에르경, 자네가……." "킬트양은 제가 집까지 에스코트해 드리겠소. 내 명예를 걸고 안전 하게 모실 테니까, 카스트로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지스카르 전하를 따라가 보게."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옆에 와 있던 페트라르카가 말했다. 카스트로 는 잠깐 페트라르카와 헤라를 번갈아 보았다. 며칠 전, 헤라가 보였던 반응을 기억해내며 헤라에게 물었다. "괜찮겠소, 헤라?" "……네, 전하." 다소 굳은 얼굴이지만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대답하는 헤라를 보며,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네." 끄덕이는 페트라르카와 가만히 서 있는 헤라를 뒤로 하고, 카스트로 는 손목을 잡아끄는 지스카르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지스카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스트로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 이고 앞서 나갔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지만, 뒤 따르는 라에르는 죄지은 사람의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카스트로가 가 지지 않은 죄책감을 라에르가 대신 짊어진 것 같았다. "호호호호, 멋진 연회지 않아요? 이렇게 재미있는 연회, 본 적 있으 세요, 로페냐경?" 로페냐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느리게 트레아 후작부인을 돌아보았 다. 연회는 자연스럽게 파장 분위기였다. 두 주인공이 그런 불미스런 사건으로 나가버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기분들로 부지런 히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기가 막힌 연회를 보고 즐거워하 는 사람은 트레아 후작부인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혹시, 미리 알고 계셨소? 카스트로 전하께서 이런 일을 꾸미시리라 는 걸?" 너무 즐거워하는 후작부인이 의심스러워, 생각없이 물어본 말에 불 과했다. 하지만 대답은 뜻밖에도 긍정이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 참석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제가 싫더라도 참 석해야 한다고 충고해 드렸죠. 어때요? 카스트로 전하께서 참석하지 않아 어정쩡한 것보다 낫잖아요?" 로페냐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자신이 반한 여 자라지만, 이 여자가 겁 없이 벌이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 었다. 후작부인은 연회장을 둘러보던 시선을 휙 돌려 로페냐를 돌아보 았다. "놀라셨어요?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모르고 계셨나요?" 로페냐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저었다. 후작부인은 빨간 입술에 만 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이제 가죠, 로페냐경. 오늘 제 에스코트를 해 주시겠어요?" 진홍색 실크장갑을 낀 작은 손을 로페냐는 보물이라도 대하듯 조심 스럽게 잡았다. 절세의 미녀도,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닌 여자에게 왜 이 렇게 주체할 수 없이 끌리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후작부인의 손끝 하나로 움직이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뭐에라도 홀린 듯 처음 이 여자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이 여자를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철없던 시절, 멋모르고 세상을 구경하겠다고 나선 것이 실수였다. 겁 없이 테리온의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민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이 지독한 여자를 만나버린 것, 그것이 가장 큰 실수. 이 여자 때문에 로페냐는 조국도 영지도 가족도 내팽개치고, 이곳 테리온에 머 물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여자.'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으면서 트레아 후작과 결혼했으며, 트레아 후 작과 결혼했으면서 페트라르카를 탐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들었다. 하지만 로페냐는 조 금이라도 이 여자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니 만족하기로 했다. 더 이상을 바란다고 해도, 이 여자는 아무 것도 들어 주지 않을 테니까. 곁에서 있을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니까. ================================================================== 이곳에는 오늘 첫눈이 왔습니다.. 할아버지 생신이라, 많은 친척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가셨네요.. 참 기뻐야 할 날입니다.. 지금은 꽤 피곤하네요.. 일찍 자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밤, 좋은 하루 되시길.. -무슨 정신으로 퇴고했는지 모를 새 씀(갈수록 배짱인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6 - 관련자료:없음 [3146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3 21:13 조회:169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6 - ================================================================== 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며 페트라르카는 푹신한 시트에 등 을 기댔다. 가라않은 파란 눈빛은 쉼 없이 눈앞의 여자를 훑어가고 있 었다. 여전히 가냘픈 몸, 가녀린 얼굴. 그런 모습으로 잘도 소렐 공작 앞에서 그리 대담하게 굴었다. '이제는 정말 연기에 익숙해져버린 건가?' 노래도 잘하지만, 그 이상으로 연기도 잘하는 여자였다. 다른 사람들 의 시선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대담한 여자였다. "그 자리에는 오는 게 아니었어, 헤라." 마차에 오르고서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었다. 헤라는 아래쪽을 헤매 던 시선을 들어 페트라르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화난 것 같 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 보이는 모습도 아니었다. 헤라는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며 외면했다. "당신을 카스트로에게 소개시킨 사람, 혹 트레아 후작부인인가?" 아무 대꾸없이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앉아있는 헤라는 고작 오페라 의 여가수답지 않게 고고한 인상을 풍긴다. 돌리고 있는 옆얼굴에 흘 러내린 부드러운 청보라색 머리와 담담하게 다물어진 섬세한 턱선이 고상하기까지 하다. '타고난 기품이 사라질 리 없는 거겠지.' 페트라르카는 내심 한숨을 쉬어내며, 대답없는 말을 계속해나갔다. 피곤한 듯한 음색이었다. "아무렇게나 남자 사귀고, 그러지 말아. 몸 함부로 굴리지 말란 말이 오. 원한다면 내가 괜찮은 신랑감을 알아볼 수도……" "주제넘으시군요, 전하." 쌀쌀맞게 튀어나온 대꾸에 페트라르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난 듯 치켜올려진 눈꼬리가 자신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헤라……."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말아요. 저는 이제 비쉬 사람이라면 지긋 지긋하니까. 당신도, 오르파샤도, 이제는 저와 하등 관계없는 사람들이 에요. 그만둬요, 전하. 그냥 내버려둬요."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형 의 이름을 듣는 순간 페트라르카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스 스로 숨을 가다듬기 위해, 헤라처럼 자신도 그녀를 외면할 수밖에 없 었다. 마차의 창 밖으로 맑은 어둠과 어둠을 밝히는 몇 개의 불빛인가가 스쳐갔다. 아직 테리온은 잠들지 않는 시각이다. 마차는 한참을 달리더 니 어느 한 곳에 멈춰섰다. 밖에서 문이 열리자, 앞서 내린 페트라르카 는 헤라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리케아 거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 는 아파트였다. 북동지구가 귀족들의 터전이라면, 이곳 남동지구는 평 민들의 터전이다. 그 중에서도 조금은 생활이 나은 사람들이 사는 곳 에 자신이 사준 헤라의 아파트가 있었다. "고마웠어요. 그럼 살펴 돌아가세요." 미련없이 돌아서는 헤라를 보던 페트라르카는 충동적으로 헤라의 팔 꿈치를 잡아챘다. 돌리는 대로 휙 돌아서는 헤라는 균형을 잡지 못한 탓인지 비틀거렸다. "당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겠소. 하지만 하나만 들 어줘. 카스트로는 안되오. 절대 안돼! 무슨 말인지 알아? 상대는 소렐 이야. 카스트로는 입장이 다르지만, 소렐 공작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 하나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냐. 당신도 자기목숨 귀한 줄은 알아야할 것 아니오?" 헤라는 찌푸린 얼굴로 페트라르카의 손을 털어내더니,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당신네들이 사람목숨이 귀한 것씩이나 알고있는 줄은 몰랐군요.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헤라!"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말대로 내 목숨 귀한 줄은 나도 아니까. 그 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페트라르카는 멍한 눈으로 헤라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 켜보았다. "전하?" 마부가 물어오는 소리에, 페트라르카는 무언가를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어내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모아 클럽으로 가지." "네, 전하."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자신의 저택까지 끌려들어온 카스트로는 응접실 소파에 처박힌 채, 쩌렁쩌렁 울리는 지스카르의 목소리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내고 있었다. "제정신이냐, 네가? 응? 어떻게 그런 정신나간 짓을 벌일 수가 있 어? 기가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뭐? 제 애인입니다? 네가 정말 그러고 도 사람이냐?" 미친 녀석 취급에서 일보 진전해, 사람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것도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도 소렐 공작이 한발 앞서 짐승 취급 해 버렸으니까. "내 말 듣고 있니, 카스트로? 내 말 듣고 있냐고! 이젠 내 말도 우습 게 들리는 거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사람들 이 네 뒤에서 뭐라고 하는 지 알고 있니? 뭐라고 손가락질하는지 알고 있어? 자기 처지를 모를 녀석도 아니면서, 대체 왜 그래?" 얼굴에 철판이라도 두른 듯 표정하나 바뀌지 않는 카스트로가 불만 이었던지, 지스카르는 공격의 방향성을 바꿨다. 카스트로의 얼굴에 느 릿한 짜증이 스쳐갔다. 이런 패턴이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작은 꼬 투리를 찾아내면 그것을 공격하다가 이내 카스트로의 생활 전반에 걸 친 비난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지스카르가 하는 말이 모두 옳고, 모두 자신을 위해 해주는 말일지라도, 같은 말을 자주 듣다보면 아무래도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빈정거리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고 꾹 참고 앉아있는 이유는, 역시 저 아버지를 빼닮은 얼굴 때문일 것이다. 성질대로 대들고 짜증을 부린다면 자신의 마음이 부담스러워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래서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더라도, 그것이 훨씬 낫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잠자코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조차 마음 에 들지 않았던가 보다. "카스트로! 뭐라고 말 좀 해봐. 네 입으로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말이 다. 입은 돼지처럼 먹으라고만 있는 게 아니야." 지스카르의 언사는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제가 죄인인 것처럼 고 개를 푹 숙이고 있던 라에르가 싸늘한 눈을 하고 지스카르를 보고 있 었다. 카스트로는 그만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몸을 일 으켰다. "같은 말 듣는 거 피곤합니다. 형도 그러실 테고, 듣는 저도 괴롭습 니다. 그만하시죠. 형이 하시는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제 행동, 잘못된 줄 알면서도 지금 제 행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카스트로……." "형이 생각하시는 만큼, 저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둬 주십 시오. 당분간만이라도 이렇게 내버려둬 주세요." 지스카르는 흔들림 없이 부딪혀오는 카스트로의 검은 눈을 말없이 마주보았다. 진지하다. 귀찮아서 되는대로 내뱉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냥 내버려둬 주길 바라는 그런 눈초리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아닌 그런 눈이다. 지스카르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물러나야겠 다고 느꼈다. 눈빛으로 그것을 강요받은 느낌이었다. "네 말대로……, 당분간은 그냥 지켜보마. 좋든 싫든, 네 아내 될 사 람이고, 네 장인 될 사람이야. 잘 알아서 처신하기를 바란다." 지스카르는 그 말을 끝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그의 호위기사가 뒤따 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스트로는 지친 듯한 몸짓으로 소파에 주저 앉아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아내……라고? ……후우……" 카스트로의 검은 눈이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에 소렐 공작 케니아스는 새벽예배를 핑계로 테라에 올라갔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봤지 만, 역시 이 결혼은 안 된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혼사였다. 아베르노와 나엘 공녀와의 결혼과는 틀린 문제인 것이다. "부지런하시군요, 공작 각하." 제이리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케니아스를 맞았다. 케니아스는 의미심 장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제이리트님을 뵐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이 시간에 올 수 있습니 다." 흰 신관복의 제이리트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새벽예배를 시작했다. 케니아스는 그리 신실한 케테르의 신자는 아니었다. 예로부터 소렐 은 수신(水神) 코델을 섬겨왔고, 자피카 황실에서 케테르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래 두 신을 함께 섬겨왔다. 현 레이얄 국왕인 바벨 4세에게 중용된 한족의 신관 체이스 오 덕분에 레이얄에서는 케테르교의 교세 가 급격히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케니아스는 그 시류를 타고 한족 을 이용할 줄 알았다. 물론 지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예배는 지루했다. 하지만 지루해하든 말든 일단 신전 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한족들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적절 한 헌금만 더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신자가 된다. 물론 케니아 스는 충분한 헌금을 할 용의가 있었다. 이번 혼사만 없었던 것으로 해 준다면! 그리 길지 않은 예배가 끝나고, 케니아스는 제이리트와의 면담을 요 청했다. 마뜩치 않은 일일텐데도 제이리트는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는 다. "하루하루 날이 풀리는 게 느껴집니다. 곧 봄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 습니까?" 뚱딴지같은 날씨타령을 하는 제이리트를 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케니아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뱉었다. "어제 연회에서의 일, 제이리트님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 다." "……." 방석을 놓고 마주앉은 두 사람의 사이에는 한족특유의 작은 다과상 이 놓여있었다. 제이리트는 대답하지 않고, 다과상 위의 찻잔을 손으로 감싸들었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막돼먹은 자에게 내 딸의 일생을 맡 길 수는 없습니다. 그 혼사, 물러주십시오." 강경한 어조였다. 제이리트는 한숨섞인 고소를 지으며, 천천히 케니 아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일렁이는 격랑이 보인다. 춤을 추듯 동요하 는 오라로, 단단하게 다짐하고 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혼 사는 무를 수 없다. "안됩니다." 케니아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째서입니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그렇게 마구 잡이로 밀어붙이신다면 누가 제이리트님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후우. 제이리트의 붉은 입술에서 얕은 한숨이 번져나간다. 제이리트 가 대답한 것은 케니아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다그치려 할 때 였다. "카스트로 전하를, 저희는 위험인물로 점찍고 있습니다." "……위험인물?" 케니아스의 떨떠름한 되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제이리트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 분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대륙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다시 한번 대륙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 릅니다. 그것을 공작각하께서 미리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공작각하께서 대륙의 평화를 위해 다시 한번 힘을 써주십시오." 제이리트의 어조는 간곡하기까지 했다. 케니아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번드르르한 말은 믿지 않는다. 언제부터 한족이 대륙의 평 화씩이나 생각해 주었던가. 하지만 어쩌면 카스트로가 위험인물이라는 말만은 사실일지 모른다. 솔직히 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위험인물이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대륙의 평화를 외치는 한족보다야 타당성 있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 결혼을 추진하는 것일까. 루시타니아와 카 스트로가 결혼한다고 해서, 카스트로가 자신의 뜻대로 따라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힘을 쓰라는 겁니까?" 케니아스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화해와 사랑입니다." "화해와 사랑?" 어이없어서 엉겁결에 되묻는 케니아스였다. 제이리트는 잔잔하게 웃 으며 대꾸했다. 평화의 전도사 같은 자비로운 미소였다. "그렇습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저 아 르니스의 후손인 소렐의 혈족뿐이겠지요. 다아,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입니다." '다'라는 단어와 '대륙의 평화'라는 말에 유난히 악센트를 주어 말하 는 제이리트의 자비로운 미소와 반비례되게, 케니아스의 표정이 더욱 더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 쩌비.. 오타가.. --; 급하게 수정을 봐서, 이것저것 엉망인 느낌입니다.. 올리고나서, 뭔가 사고쳤다..라는 느낌이라니... 요즘 슬럼프인지 이래저래 엉망입니다.. 죄송..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7 - 관련자료:없음 [3148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4 21:05 조회:158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7 - ================================================================== 소문과 스캔들을 좋아하는 테리온의 귀족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또 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렐 공작은 그의 방종한 사위를 상대 하기보다는 테라의 신전으로 쳐들어가 담판 짓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 만 케니아스는 대신관 제이리트의 궤변에 말려 번번이 소득도 없이 허 탈하게 돌아서야 했다. 매일 이어지는 케니아스의 집요한 파혼 요구에 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은 강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소렐 공작이 그 결 정에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려왔지만, 공작도 공녀도 대부분 의 연회와 무도회의 초대를 거절하고 조용히 은둔하고 있었다. 반면, 카스트로는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페트라르카 패거리들과 어울려 도박판과 술집을 휩쓸고 다녔고, 밤이면 어떻게 만 났는지도 모를 귀부인들을 상대했다. 소렐 공작과 카스트로는 어느 쪽도 서로에 대해 터치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느낌이 강했다. 양측이 아무리 싫다고 발 버둥쳐도 시간은 흘러갔고, 결혼식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카스트 로는 결혼 전에 테리아의 입학식을 치러야 했다. 카스트로에게 있어 입학식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기보다 이후의 생활에 있어 낮시간의 대부분을 테리아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이 중요 한 것이었다. 적어도 하루종일 방탕한 생활을 하던 것에서, 낮동안은 테리아에서의 건전한 생활을 보장받은 셈이다. 그런 의미로 밤낮 카스 트로 때문에 골치를 썩이던 지스카르와 라에르는 테리아 입학에 환호 하며 안도했다. 그들과 달리 로페냐나 트레아 후작부인은 그런 카스트 로의 처지에 마음깊이 애도했고, 카스트로와 같이 테리아에 다시 다니 는 처지가 된 페트라르카와는 동병상련의 애상을 교류하고 있었다. 테리온에 처음 왔을 때, 반강제로 구경했던 테리아는 그때의 텅빈 공간에서 벗어나 어디를 가나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학교라는 단체생활이 처음이었던 카스트로는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다 소 당혹스런 기분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 틈에 섞여든다는 것이 어색하고 끔찍하게만 느껴진다. 무리 중의 일원이라는 것은 아주 생소 한 경험이었다. 그것보다는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 한 사람에게만 종속된 친위대원과 시종, 시녀의 수만해도 백 명을 거 뜬히 넘었고, 카스트로는 어려서부터 그들 위에 군림하며 살아왔다. 카 스트로는 익숙지 않은 처지에 봉착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더 군다나 아까부터 저쪽에서 미행자가 흘끔거리는 것도 느껴져서, 더욱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앞으로 한두달은 정신없을 거야. 공부도 공부지만, 학생들 하나하나 알고 보면 어디의 누구라는 꽤 쓸만한 집 자제들이니까 적당하게 사귀 어두는 것도 좋고." 페트라르카가 선배답게 조언을 했다. 카스트로는 옆에 있는 페트라 르카를 내려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우글거리는 학생들에게 눈 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들 속으로 섞여드는 것은 엄두가 안 난다. 보기만 해도 질리는 것 같았다. "테리아는 인재들의 집합소야. 장차 자피아 대륙을 이끌 자들의 대 다수가 이 속에 섞여있다. 쓸만한 녀석이 있다면, 출신을 불문하고 잡 아봐. 뭐, 최근 들어 그다지 눈에 띄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아직은 차갑기만 한 바람이 불어온다. 카스트로는 고풍스런 테리아 의 건물들을 주욱 일별했다. 그리고 그 안에 바글거리는 학생들의 무 리들도. "쾨르니 후작이 단 위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곧 시작될 거야. 들어 가자. 참, 라에르경은 카스트로가 수업 받는 동안 뭐할 거지?" 라에르는 갑작스레 돌려진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전하의 배려로 함께 수업을 들을 겁니다. 물론 호위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한 방편입니다만." 페트라르카는 살짝 고개짓을 하고, 미소지었다. "언제봐도 저 친구를 둔 것은 부러워. 카르노의 친위대는 어느 나라 보다 더 엄격한 느낌이야. 어떤 식으로 훈련시키는지 배워가고 싶은 걸?" 카스트로는 그 훈련과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고, 라에르는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이라 말할 수가 없 었다. "죄송합니다. 알려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알았네, 알았어. 정색하기는. 그럼 있다가 보세. 클럽으로 갈 테지?" 금방이라도 테리아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모양새로 페트라르카가 돌아보았다. 카스트로는 미미하게 고개짓을 했다. "테리아에서의 첫날을 즐겁게 보내길 바라네." 페트라르카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사람들 속으로 섞여버렸다. 카스트로는 꺼림칙한 감정을 애써 털어내버리며 라에르에게 말했다. "우리도 슬슬 움직이지." "네, 전하." 발밑을 붙잡고 늘어지는 끈끈한 불쾌함을 떨쳐버리듯, 카스트로의 발걸음은 힘차고 건강해 보였다. 입학식날의 일정은 담당교수와의 만남과 학과소개, 그리고 몇 가지 테리아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점 등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학과공부에 필요할 것이라며 주는 책 몇 권을 받아 나오는 하교길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건물을 오가는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로 바뀌어있었다. 담당교수는 신학을 가르친다던 마르티에 테빌로 흰색의 사제복을 입 은 중년의 남자였다. 마르티에는 자신의 학생들 몇몇에게 온화한 미소 로 이것저것을 설명하고 질문을 받으면서도, 간간이 카스트로를 훔쳐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카스트로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심기 불편한대로 다른 유순하게 설명을 듣는 학생들과는 달리 교수에게 비릿한 비웃음을 선사해주었다. 마르 티에의 간혹 가다 터져나온 헛기침소리는 카스트로가 노골적으로 노려 보았던 데 대한 부작용이었다. 담당교수를 만나본 것만으로도 테라와 한족들이 자신에게 주입시키 려는 교육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베르노와 지스카르 두 형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일, 카스트로를 그들의 신 케테르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만들려는 심산일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 도 모를 신 따위, 카스트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케 테르를 빙자해 사람들로 하여금 교묘하게 자신들에게의 충성을 요구하 는 한족들의 썩어빠진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처럼은 되지 않아.' 카스트로는 스스로의 다짐을 재확인했다. 누군가의 종이 되지는 않 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한족뿐 아니라 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절 대 종 따위는 되지 않는다. 악마에게 혼을 팔 망정, 신의 종 따위는 되 지 않는다. 한족의 개는 되지 않는다. 누구의 종 같은 게 되기 위해 태 어난 것이 아니다. 전신 로마와 케테르는 성격자체가 달랐다. 로마는 카르노의 수호신 이며 카르노의 정신적 지주다. 카르노인들은 그에게 승리를 기원하지, 그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지 않는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로마 는 그 위에서 축복과 용기를 내려주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케테르는 틀렸다. 케테르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굴종 을 요구했다. 케테르를 믿는 자들은 케테르의 종을 자처한다. 어디까지 나 인간은 종이고, 주체는 케테르다. 아니, 정확히는 케테르의 후손이 라는 한족이 주체다. 아무리 대단한 종족이라 할지라도, 카스트로는 그 종족을 위해 헌신 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먼저고, 자신의 나라가 우선이 다. 신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으로 족하다. 인간을 함부로 휘두르는 신 따위, 이쪽에서 거절이다. 신의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하 기 싫은 것은 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도 카스트로는 예전 비제의 충고를 되살려 충실하게 연기했다. 비록 비웃음을 지었다고는 하나, 그들도 처음부터 자신이 고분고분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저들에 의해 세뇌되느냐, 아니면 5년간 무사히 제 정신 으로 귀국할 수 있느냐. 그 성패가 이곳 테리아에서 갈릴 것이다. 카스 트로는 호승심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지루하고 끈질긴 싸움이 될 테 지만, 카스트로는 이겨낼 것이다. 이겨내야 했다. 카르노의 멋모르는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정신이 박힌 왕자가 한명쯤은 있어야 할 테니까. 카스트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테라는 자피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중소국가이다. 북으로는 카 르노와 레이얄을, 남으로는 비쉬를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과 자피카 말기에 국교로 인정된 케테르교로 인한 종교적 지위,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부각되기 시작한 정치적인 지위에 힘입어, 테라는 테라력 690 년경에는 명실공히 자피아 대륙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대 륙 어느 곳에도 테라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반대로 대륙 곳곳에서 온 사람들은 테라의 수도 테리온에서 그 문물을 교환하게 되 었다. 각기 다른 문물과 풍속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드는 곳, 테리온은 각국의 문물을 서로 용해시켜 새로운 문화로 일구어내는 용광로의 역 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테리온시에는 자질구레한 물 품부터 보석같은 귀중품 류의 물품까지 없는 것이 없을 만큼의 상가가 늘어서 있었다. 테리온시의 리케아 거리만큼이나 유명한 또 하나의 거 리, 사파리 거리가 바로 대륙 제일의 상가(商街)였다. 수많은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는 사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뒤따르 는 호위들에게 턱끝까지 선물상자를 들게 하고, 유유낙낙 웃음꽃을 피 우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겨울과 봄의 사잇길에 서있는 날씨 탓에 옷차림도 외출복 위에 얇지도 두텁지도 않은 코트를 걸친 두 사람은 붉은 금발의 20대 아가씨인 아젤과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없는 금 발의 소녀 루시타니아였다. 환영연회의 밤 이후, 루시타니아는 많이 울고, 계속 의기소침해 있었 다. 큰 키의 무서운 남자가 자신을 '카스트로 폰 카르노'라고 소개하고, 그 옆에 있던 여자를 '제 애인입니다'라고 할 때부터, 루시타니아는 암 담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나와 마차 로 돌아갈 때부터 루시타니아는 아버지 품에서 복받치는 설움을 견디 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었다. 이 결혼이 원만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 았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굴욕적인 것이라고도 역시 생각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면, 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도망가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침대에 엎드려 울고만 있는 루시타니아를 달래준 것은 언제나와 같 이 아젤이었다. 싫다는 데도 음식들을 가져와서 떠먹여 주고, 침대에서 버팅기는 그녀를 달래 쇼핑을 시작한 것도 아젤이었다. '각하께서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 은 전부 각하께 맡겨버리고, 우리는 모두 잊고 테리온이나 구경하는 거예요.' 아젤이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분간이라도 암담하기만 한 장래를 잊는 것에는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 아젤은 쉴새없이 루시타니아를 데리고 테리온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루시타 니아는 생각하고 우는 대신 이것저것 구경하고 사들이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현실도피라도, 지금은 잊는 쪽이 편했던 것이다. "저기도 들어가 봐요." 루시타니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갖가지 여성용품들이 진열 되어있는 가게였다. 아젤은 고개를 끄덕이고, 루시타니아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 사고 싶으세요?" 인상 좋아 보이는 30대 여성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루시 타니아는 생긋 마주 웃어주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는 그 들 말고도 두 팀이 더 들어와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또 다른 여성이 그들에게 물건들을 이것저것 보여주고 있었다. 주인 앞에 길게 늘어선 유리 진열대 안에는 색색깔의 실크장갑과 여 러 가지 재질의 쥘부채, 보석이 박힌 핀들과 머리끈, 그리고 조그만 유 리병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벽에는 예쁘게 장식된 모자 들이 걸려있었고, 진열대 위의 조그만 유리상자 안에는 각종 화장품들 이 진열되어 있었다. 루시타니아는 한바퀴 둘러보고 나서 벽에 걸린 모자를 보며 말했다. "봄에 쓰고 다닐 모자를 보려구요. 예쁜 거 있으면 보여주세요." 귀공녀처럼 생긴 예쁘장한 금발머리 소녀가 애교스럽게 하는 말에, 주인인 여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봄에는 하늘색 모자가 유행일 것 같아요. 이걸 보시겠어요? 하늘색 실크와 순백의 리본이 매여진 깔끔한 스타일인데요. 리본을 사 파이어로 고정시켜서 산뜻하죠." "와, 예쁘네요. 잠깐 써봐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루시타니아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고, 하늘색의 모자를 머리 위에 올려 썼다. 그리고 진열대에 올라앉아 있는 작은 거울에 얼굴을 요리 조리 움직여 살펴보다가 아젤을 돌아보았다. "어때, 아젤? 어울려?" 아젤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보였다. "네. 깔끔한데요." 루시타니아는 마주 웃으며, 모자를 풀어냈다. 그리고 다시 주인을 향 해 말했다. "다른 모자도 보여주세요." "흠, 그럼 이건 어떠세요? 연하늘색 바탕에 감색으로 테두리를 두른 건데요." 주인여자가 줄줄이 이어가는 설명을 루시타니아는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집중해서 들었다. 그래서 막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주인의 인사를 받고 가게 안을 둘러보던 한 쌍의 남녀 중, 남자 쪽이 루시타니아의 옆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던 것이다. "……무얼 보고 계세요, 전하?" "아니, 아무 것도." '전하'라는 호칭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던 루시타니아는 기분 나쁘다 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보고 안색이 확 변했다. 저 커다란 키와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이 무섭게 루시타니아를 압박해오는 것만 같았다. 루시타니아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사렸다. 저 남자는 사나운 짐 승처럼 자신을 물어뜯어서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카스트로는 하얗다못해 파랗게 질리는 조그만 소녀를 내려다보며 싸 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그녀가 소렐의 딸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예의 는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짓을 하 고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요, 소렐양. 모자를 사러 오셨나보군요?" "아, 아, 예. 아, 안녕하세요, 전하." 겁에 질려 떨면서도 예를 갖춰 인사하는 루시타니아가 만일 다른 사 람의 딸이었다면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로 가냘퍼 보였지 만, 카스트로의 머릿속에서 루시타니아는 어디까지나 소렐의 딸이었다. 적의 딸에게 동정심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카스트로는 그래서 더 냉소 적으로 말을 이었다. "제 애인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왔습니다만, 이곳에서 소렐양을 만나 다니 뜻밖이군요." "……네." 왜 이 남자는 꼭 '제 애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무서운 한편으 로 그런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루시타니아는 떨리는 두 손을 내려뜨 린 채 들고있는 모자를 꼭 움켜쥐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초리로 가늘게 떨고 있는 루시타니아를 일별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전 이만 기다리고 있는 애인에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결혼 식 때나 뵙겠군요. 그때까지 안녕히 계시길." 가차없는 눈길로 파리한 소녀를 내려다보고, 막 몸을 돌리려던 카스 트로는 문득 적대적인 시선을 느끼고 그 쪽을 쳐다보았다. 발그스름한 금발의 이십대여성이 루시타니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노려보 고 있었다. 하는 양을 보아하니 루시타니아의 보모라도 되는 모양이었 다. 카스트로는 오만하고 차가운 눈으로 그 여자에게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그리고 피식 비웃음을 날리며 미련없이 뒤돌아섰다. 카스트로 가 함께 온 헤라에게 다가가는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가 뛰 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따르는 여자의 목소리. "아가씨! 아가씨!" 카스트로는 냉소를 흘리며 무시해버렸다. 가소로웠다. 겨우 그 정도 의 모욕을 못견디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여자가 소렐의 딸이라니. 카 스트로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니, 느낀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그러는 것이 당 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소렐의 딸이니까! ================================================================== 수능 보시는 분들, 시험 잘 보시길.. ^^ 그리고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8 - 관련자료:없음 [3151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5 19:57 조회:157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8 - ================================================================== 강의 도중에 빠져 나와 리케아 거리의 단골 도박장에서 빈둥거리던 카스트로는, 때마침 똑같은 행동으로 뒤늦게 도착한 페트라르카와 그 곳에서 마주쳤다. 평소처럼 손을 들어 아는 척하고 다시 도박에 열중 하려는 카스트로를 다짜고짜 구석으로 끌어낸 페트라르카는 무슨 일인 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헤라는 건드리지 마라.'였 다. 언제나 나른하고 퇴폐적인 미소만 짓던 페트라르카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경고하듯 하는 말을 듣고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카스트로는 가 볍게 거절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자네와는 상관없다고 들었네.' '너와 소렐의 유치한 싸움에 헤라를 끌어들이지마! 헤라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조금씩 언성을 높이는 페트라르카와 자신을 호기심 많은 테라의 귀 족들이 안보는 척하며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 역시, 자네와는 상관없어. 불쾌하네, 페트라르카. 내가 자네의 여성편력에 상관하지 않듯이, 자네도 내 사생활에 상관할 필요 없어. 방금 것은 못들은 걸로 하겠네.' 카스트로는 보라는 듯이 페트라르카와의 불화를 확대시키고, 도박장 을 빠져나와 곧장 헤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무언가 살 것이 있다는 그 녀를 따라갔다가, 루시타이나와 마주쳤던 것이다. "……하, ……전하?" "으음?" 카스트로는 자신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소리를 들으며, 앞에 있는 여 자를 바라보았다. "차를 드시겠냐고 물었어요." "그러지." 조르륵, 녹색의 찻물이 찻잔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낸다. 카스트로 는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찻잔을 손으로 감싸 들어올렸다. 정신을 맑게 하는 듯한 그윽한 향기가 조심스레 퍼진다. 카스트로가 지금 앉 아있는 곳은, 페트라르카가 사주었다는 헤라의 아파트 안이었다. 카스 트로의 눈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안 풍경이었다. 지금 마주앉아있 는, 부엌과 맞붙은 작은 식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곳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아니 이 장소보다는 여기의 주인이 편해서일 것이다. "약혼녀에게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전하의 아내가 될 분인데요." 식탁 맞은편에 앉아있는 헤라를 쳐다보다가, 카스트로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소렐의 딸이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헤라는 고집스러운 카스트로의 눈매를 쳐다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었다. "그렇군요." 헤라는 그렇게 말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묘하게 억양이 없는 말투였다. 카스트로는 그녀의 그런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깊이 알려고 들지도 않고, 누구처럼 충고를 하려드는 것도 아니고, 언 제나 대화할 때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지만, 얼마간 같이 있다보니 그리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여 자였다. 여자라는 성보다는 그저 편안한 말동무 상대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가끔씩 그녀를 찾아와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페트라르카가 찾아왔었소. 당신을 끌어들이지 말라더군." "……그래요?" 대꾸하고 있지만, 그다지 흥미가 동하는 것 같지는 않은 밋밋한 어 조였다.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소렐이 당신을 해코지할 지 도 몰라." 헤라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카스 트로를 바라보았다. "그 위험의 대가는 충분히 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일까지 전 하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카스트로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참 뒤에야 피싯 실 소를 흘려냈다. "……당신은 특이한 여자요." "칭찬으로 듣죠." 헤라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총각파티?"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테리아의 한 강의실에서 무슨 소리냐 는 듯한 카스트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스트로의 앞에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로페냐와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페트라르카가 앉 아있었다. "네, 전하. 결혼식 전날에, 유부남이 되시는 전하를 위로하기 위한 파티입니다.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의미 있게 보내자는 의도이지 요." "의미 있게?" "네, 전하." 부담스러울 정도로 즐거워하는 로페냐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카스트로는 옆에 있는 페트라르카를 돌아보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자는 건가? 의미 있게, 뭘 어떻게 하는 거 지?" 추궁하는 듯한 눈빛을 맞받으며, 페트라르카는 비밀스럽고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을 꾸밀 때의 표정이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세. 신랑과 들러리들이 모여 밤새 마시고 놀아보자는 거지." "정말 그것뿐인가?" 냉랭한 말투로 추궁하자, 페트라르카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 다. "여자도 있네. 부인에게 얽매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총각인 채 여자 들과 즐겨보자는 거지. 어떤가?" 카스트로는 팔짱을 꼈다. 심각하게 고려해보는 중이었다. "안됩니다, 전하. 그 다음날을 위해서라도 일찍 돌아가시는 편이 ……." 뒤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라에르가 속삭였다. 카스트로는 흐음, 하 며 로페냐와 페트라르카, 그리고 강의실의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 나쁠 건 없겠지. 그렇게 하지." "전하!" 라에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질렀지만,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관없잖아. 아니면 발육부진에 성적매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소렐의 딸을 위해 목욕재개하고 저녁부터 착하게 잠자리에 들어야한다 는 거야?" "……!" 일부러 가혹하게 말하고 흘낏 돌아보자, 라에르의 얼굴에서 경악이 스치고는 곧 심각하게 입술을 짓깨물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 며 로페냐에게 말했다. "추진하시오, 로페냐경." "네, 전하!" 기뻐서 들뜬 로페냐의 말 뒤에, 페트라르카가 키득거리며 말을 덧붙 였다. "기대하라고.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라에르는 비난의 눈초리를 저 페트라르카에게 꽂아버렸다. 아무래도 이 일의 실질적인 원흉은 저 비뚤어지고 타락한 비쉬의 왕자인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당사자들의 감정과 그 측근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시간은 흐르고, 결 혼식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모든 결혼식 준비는 테라 신전 측 에서 알아서하기로 했지만, 신부측도 신랑측도 나름대로 바쁘게 보내 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측이 바쁘다는 것이지, 정작 본인들은 그 다지 할 일도 없이 초조한 마음만을 추스르고 있었다. 두 신랑 신부에 게 주어진 일은 그것밖에 없는 듯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암녹색의 카르노 왕실 마차가 리케 아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거리에는 벌써 호객하는 듯한 불빛이 들어차고 있었다. 마차 안에 있는 카스트로는 푹신한 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무심한 시선을 거리의 불빛으로 내던졌다. 피곤하고 나 른한 듯한 모양새였다. 본인이 한 일은 없을지라도 내일로 닥친 결혼 이라는 것이 꽤 부담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닦인 거리를 거칠 것 없이 미끄러져 가던 마차는 '모아 클럽'이라 는 간판이 있는 건물 아래서 멈추었다. 마차 문이 활짝 열리고 라에르 가 앞서 내린다. 카스트로는 천천히 거리로 내려섰다. 카스트로는 간판은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익숙한 걸음으로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좀처럼 친위기사들을 대동하는 일이 없는 카스트로가 이번에는 그들로 하여금 클럽의 입구를 지키라고 지시했었 다. 친위대원은 클럽의 정문과 후문을 모두 막고 서서, 건물로 들어서 려는 사람들에게서 '초대장'을 확인하고서야 통과시켰다. 상당히 엄중 한 경비여서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 었다. 카스트로가 클럽의 홀로 들어서자 클럽의 지배인인 제이 페인이 말 끔한 조끼차림으로 다가와 가장된 친절의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말끔히 쓸어 올린 올백의 머리와 검은 실크 조끼가 깔끔하지만 얍삽한 인상을 준다. "어서 오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페트라르카 전하께서 벌써부터 기다 리고 계십니다."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한 카스트로는 옆에 서 있는 라에르에 게 시선을 돌렸다. 마주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걱정과 충성심의 결정체다. 카스트로는 씁쓰레한 기분으로 명령했다.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라, 라엘.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전하!" 뭐라고 항의하려는 라에르의 말을 자르며, 카스트로는 단호하게 잘 라냈다. "들어오지마! 보지 마라, 라엘. 네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라에르는 시선을 피하는 카스트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혼을 앞둔 새신랑의 얼굴이 아니었다. 긴장과 초조함이 어린 기쁜 표정이 아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스트로는 뭔가 벽에 몰 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입구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지배인 제이 페인이 안내하는 대 로 따라갔다. 그 뒷모습이 그늘져 보인다. 라에르는 한참동안 카스트로 의 잔영을 느끼며 그렇게 서 있었다. 신랑이 되는 카스트로를 위로하 기 위한 오늘밤의 이벤트가 그다지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카스트로 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굳이 여기를 찾은 이유는 아마도 각인 받기 위해서일 터였다. 예전의 건강한 삶을 완전히 잃어버린, 갈 곳 없는 탕아로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연극, 광대놀음이다. 오늘밤의 이 이벤트는 머지않아 테리온의 모든 귀족이 알게 될 것이다. 라에르 는 새삼, 카스트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한족들에게 분노의 방향 을 돌렸다. 카스트로가 안내 받은 곳은 클럽의 안쪽에 있는 넓은 방이었다. 문 을 열자마자 카스트로를 맞은 것은 안개처럼 방안을 떠돌아다니는 흰 색의 연기와, 향불과는 또 다른 냄새의 향냄새였다. 왠지 거부감이 느 껴지는 냄새와 연기 사이를 뚫고 들어가자, 흐릿하게 방안 풍경이 눈 에 들어왔다. 두툼한 카펫이 깔린 방안에는 낮은 테이블을 길게 붙여 놓은 것과 길다란 소파들이 놓여있었고, 방의 가장자리에는 빙 둘러가 며 몇 개인가의 향로가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방안 구석구석에 는 카펫 위에 부드러울 것 같은 모피들이 깔려 있었다. 테이블 주위에는 벌써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먼 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눈에 익은 페트라르카였다. "여어, 드디어 오셨군, 오늘의 주인공께서." 액체가 찰랑이는 은잔을 들어올리며 아는 척을 하는 페트라르카의 손위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제대로 앉지도 않고 소파 등에 몸 을 기댄 모습이 벌써부터 취한 듯 흐트러져 보인다. "로페냐는 안 보이는군." "아, 곧 올 걸세.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데리고 말이지. 자, 이거 한 잔 받게." 테이블 위에는 이국적인 느낌의 청동항아리가 놓여져 있었다. 가운 데가 쏙 들어간 '8' 모양의 항아리는 겉에 뱀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있 고, 열려있는 뚜껑 바로 밑의 주둥이에 손잡이가 매달려 있었다. 페트 라르카는 은색으로 빛나는 길고 작은 국자로 그 안의 액체를 푹 퍼서 은잔에 담아 카스트로에게 내밀었다. "뭔가?" "아아, 오늘의 흥취를 돋구어줄 천상의 감로주지. 마셔보게." 카스트로는 받아든 은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다지 맛있다 는 것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부추김을 받아서 그냥 쭈욱 마셔버렸다. "자, 한 잔 더 마셔봐!" 다시 한잔을 퍼주면서도 페트라르카는 왠지 호기심과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면 서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두 번째 잔을 비우고 났을 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로페냐가 들어왔다. 로페냐는 카스트로를 보며 화색을 띄었다. "와 계셨군요, 전하. 그럼 지금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로페냐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자, 옆에서 페트라르카가 팔을 잡아 끌어앉힌다. 카스트로는 머리가 핑도는 것은 느끼며 끌리는 대로 소파 에 주저앉았다. 로페냐가 다시 들어와서 가까운 소파에 앉고 나자, 몇 명인가 이국 적인 옷차림의 여자들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와 방 한구석으로 가서 앉 는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들은 들고 온 것들을 앞에 놓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리링 링링---! 그것들은 악기였다. 몇몇은 입으로 나팔과 피리를 불고, 몇몇은 손으 로 현을 튕긴다. 처음 보는 악기에서 나는 소리답게 대륙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독특한 음색과 분위기였다. "이제부터 시작일세. 특별히 자네를 위해 저 야만인들의 섬나라 이 드의 무희들을 초빙했지." 비릿한 미소를 짓는 페트라르카의 설명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열리 는 문으로 들어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하늘하늘하게 비 치는 보라색 옷감으로 대담하게 노출된 옷을 입고 있었다. 가운데가 노랗고 가장자리가 하얀 특이한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가무잡잡한 얼굴은 코부터 턱 끝까지 같은 보라색의 비치는 천으로 살짝 가리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무희들이 날 듯이 가벼운 몸짓으 로 테이블 앞쪽의 공간에 자리잡고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음 악에 맞춰 유연하게 허리를 돌리고, 천으로 휘감은 팔과 손을 특이한 몸짓으로 흔든다. 옆에서 권하는 것을 먹고 마시며, 카스트로는 점차 기분이 이상해지 는 것을 느꼈다. 아니 몸이 이상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꿈을 꾸 는 것처럼 몽롱하다. 안개 속에서 춤추는 무희들이 지독하게 유혹적으 로 느껴진다. 면사 사이로 보이는 황금의 눈동자가, 살짝살짝 치켜 올 라간 눈꼬리가 뭔가를 부추기고 있는 듯 했다. 무희들의 춤이 한창일 때, 새빨간 색의 천으로 몸을 두른 무희가 그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온다. 다른 무희들보다 더욱 유혹적인 몸짓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손 을 들어 카스트로를 향해 손짓한다. 카스트로는 더욱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지독한 향 때 문인지, 아니면 아까부터 자꾸만 권하는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성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저 춤만 으로 자신이 이렇게 흥분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지, 이 술은?"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페트라르카가 옆에서 잠긴 목소 리로 대꾸해준다. "하시시." "하시시?" "마약이야. 오늘의 총각파티를 위해 특별히 주문해놓은 거지." 카스트로는 잠시 페트라르카를 돌아다보았다. 페트라르카는 다소 거 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셔츠의 단추를 몇 개인가 풀어놓고 있었고, 욕 망이 넘실대는 바다빛 눈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카스트로는 주위 사 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또 다른 의심을 집어냈다. "저 향불은?" "이드 제의 미약이지. 괜찮아. 하시시도 저 향도 뒤끝은 없으니까. 비싸기는 했지만, 이런 파티에 유용한 거지." 하아. 카스트로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때였다. 카스트로는 짙은 향수의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자신의 목에 감겨드는 매끈한 팔의 감촉을 느꼈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붉은 옷의 무희가 카스트로에게로 얼굴을 기울이고 있었다. 짙은 황금의 눈동자 가 눈웃음을 친다. 가느다란 다리 하나가 하늘하늘한 붉은 치마의 갈 라진 틈에서 뻗어 나와 카스트로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고, 무희의 손 은 카스트로의 머리와 뺨을 쓸어가더니 카스트로의 손을 잡고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훅하고 뜨거운 입김이 귓속을 파고든다.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에 카스트로는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저절로 무희의 가느다란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이 더해진다. 무희의 손 이 옷 사이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세상이 환희 속에 돌아간다. 능숙한 여자의 손길과 주변의 끈적한 신음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른하게 반쯤 감겨진, 마약과 미약과 유혹에 취한 까만 눈은 이미 이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 었다. '……망가져 보는 거야.' 지스카르의 질책이 벌써부터 귓가에 윙윙대는 것 같다. 하지만 별로 심각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상관없었다.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지 금만이 중요할 뿐이다. ================================================================== 수능 보신 분들, 시험을 잘 보셨는지.. 마지막 수능이라니.. 쩌비..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이 정도 선이면, 18금은 아니겠지요.. --; ^^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건전한(? ... --;)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79 - 관 련자료:없음 [3154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6 20:36 조회:156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79 - ==================================================================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라에르는 결혼식 시간이 다 되어가도 카스 트로가 나오지 않자, 저지하는 지배인을 물리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엉망으로 뒹굴다 잠이 들어버린 남자와 여자의 원초적인 모 습들이 널려있었다. 라에르는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간신히 펴고, 카스트로를 찾아 들러보았다. 그리고 라에르는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 없는 상태의 카스트로를 발견했다. 라에르는 한숨을 쉬고 망토를 벗어 카스트로의 몸 위에 덮어씌웠다. "전하. 전하. 일어나십시오, 전하." "으음." 카스트로는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릴 뿐,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하! 시간이 없습니다. 전하!" 흔들면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축 늘어져 눈을 뜨지 않 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라에르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이마를 짚어 봤지만 열은 없었다. 라에르는 몇번인가를 더 흔들어 깨우다가, 결국 어딘가에 떨어져있는 카스트로의 옷가지를 가져다 입히고 안아들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급하다. 카스트로가 라에르에게 안겨 나오자, 밤새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원 들의 피로한 눈이 경악으로 번쩍 뜨여진다. "무슨 일입니까, 라에르경? 전하께서는……." 라에르는 우선 카스트로를 마차 안에다 비스듬히 눕히고는, 뒤돌아 서 친위대원들에게 말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것뿐이다. 서둘러야겠다. 시간이 없어. 그리 고 아무르경." "네, 라에르경." 절도있게 발뒤꿈치를 붙이며 대답해오는 친위대원에게 라에르는 심 각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저 안에 결혼식의 들러리가 되실 페트라르카 전하와 로페냐경들이 계신다. 들어가서 깨우고 시간에 맞춰 신전으로 올라오도록 도와라. 그 리고 이 일은 전적으로 자네 혼자서 하도록 하고, 그 안에서 본 광경 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라에르경." 충성스러운 친위대원의 대답에 라에르는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지 않아 전 테리온에 알려질 일을 함구하라 명령한 자신이 웃겼다. 하지만 라에르는 아무르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마차에 올랐다. "저택까지 최대한 빨리 몰아라." "알겠습니다!" 암녹색 마차는 빠르게 리케아 거리를 벗어났다. 사람들의 웅성임이 커지고 있었다. 하늘은 티없이 맑았고, 각국에서 온 축하객들은 테라 신전의 넓은 공터를 꽉꽉 메우고 있었다. 열 여섯 살 어린 신부의 새하얀 웨딩드레스에 닿은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소렐 공작 케니아스는 제단 옆에 서서 굳은 얼굴로 대신관 제이리트 를 노려보고 있었다. 끝에 끝까지 결혼시켜야된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이 꼴이 대체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는데, 단 하 나, 신랑이 결혼식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됩니까? 신랑측도 이 결혼이 달갑지 않은가 본 데, 지금이라도 이 결혼,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없었던 일로 해 주십시오, 제이리트님." 제이리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매번 제이리트가 진땀 을 뺄 정도로 질긴 남자였다, 저 소렐 공작이라는 남자도. "안 된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결혼식은 오늘 치러집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마나 더 참아야 한다는 겁니까! 아무리 일국의 왕자라도, 이렇게 까지 사람을 괄시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하는 꼴만 보아도 앞으로 제 딸이……!" "카스트로 전하께서 천계에 이르셨다고 합니다." 제이리트는 때맞추어 와준 비제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반대로 소렐 공작은 잡아죽일 듯한 눈으로 비제를 노려보았다. 제이리트는 난 처했던 얼굴을 펴면서,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준비하지요. 천계에 이르셨으면, 곧 도착할 것입니다." 케니아스는 이를 갈아붙이며 딸에게 돌아섰다. 일생 중 가장 아름다 운 때를 맞은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신부가 신부의 아버지 눈에는 마냥 가냘프고 어리게만 보였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여린 모습이었다. 들러 리가 되어줄 테라 귀족가의 딸들과 함께 있는 루시타니아의 옆으로 가 자, 실크 장갑을 낀 여린 손이 케니아스의 손을 꼭 잡아온다. 케니아스 는 딸을 가볍게 안아주고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을 거야, 루시타니아." 떨고 있는 딸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지만, 케니아스 자신도 믿지 않 는 말이었다. 케니아스는 어린 딸이 안쓰러운 만큼 저 타락한 사위가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저 한족들이 끔찍했다. 뒤늦게 신랑이 도착하고, 속속 신랑의 들러리들도 도착했다. 하나같 이 푸석푸석하고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하객들은 들러리들의 모습보다 는 쓰러질 듯 휘청이는 신랑의 모습에 혀를 차고 있었다. 케니아스는 갈아마실 듯한 표정으로 사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테라 신전의 케테르 신상과 대신관 제이리트를 앞에 두 고 루시타니아의 옆에 섰다. 전날 마셨던 하시시가 꽤 독했던지 아직 까지 제 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뭐가 뒤끝이 없다는 거냐, 망할 페트라르카!' 아프고 멍한 머리와 푸석거리는 얼굴을 근거로, 카스트로는 그 원흉 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썼다. 잠에서 깬 것은 불 과 두시간반 전이었다. 눈을 떴을 때, 카스트로는 목까지 물 속에 잠겨 져 시종들에게 몸이 씻겨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깨지 않는 카스트 로를 저택까지 데려간 라에르가 곧장 의사에게 보이고 별 이상 없다는 소리에, 시종장에게 넘겨 목욕까지 시키던 중이었다. 깨어났다고는 해 도 금방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멍한 기분으로 라에르와 시종장 하 미르가 시키는 대로 서 있으라면 서있고 앉으라면 앉아 있다가 결혼식 장에 도착한 것이 바로 삼십분 전. 여전히 흐릿한 의식으로 누군가가 부축해서 세워놓은 대로 서 있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케테르님과 자디크님, 그리고 한님의 앞에서 아름다운 한 쌍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 카스트로는 둔한 통증이 이는 머리로 간간이 들리는 말을 제대로 해 석하려고 애썼다. 저 눈앞에 있는 조그만 한족의 우두머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결혼식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대충 감이라도 잡겠지만, 카스트로는 지금껏 결혼식이란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참석했어야 할 두 형의 결혼식도 이렇 게 멀리 타국에 잡혀와서 어거지로 치러버렸고, 다른 가까운 친족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서약이 있겠습니다. 신랑 카스트로 폰 카르노는 신부 루시타니 아 폰 소렐을 아내로 맞아 케테르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아껴주며 보호하겠습니까?" 피곤하다못해 쑤시기까지 하는 눈을 깜빡거리던 카스트로는 문득 사 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깨닫고, 뭐냐는 듯한 시선으로 제 이리트를 쳐다보았다. 제이리트는 일그러지려는 얼굴로 억지 미소를 띄우고는 재차 같은 질문을 해왔다. "신랑 카스트로 폰 카르노는 신부 루시타니아 폰 소렐을 아내로 맞 아 케테르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고 아껴주며 보 호해줄 수 있겠습니까?" 말소리는 들었지만, 그 뜻이 두뇌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 다. 그 사이에 장내는 들쑤신 듯이 웅성대고 있었다. '신랑이 신부를 거부하는 건가?'에서부터 '숨겨둔 연인을 잊을 수 없어서 서약하지 않 는다'라는 억측이 난무한다. 케니아스는 아젤과 나란히 서서 안색을 수 시로 달리하며 이를 갈아대고 있었다. 아젤은 색다른 케니아스의 모습 에 마음속 깊이 동정을 표했다. "아, ……네." 뒤늦은 대답에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제이리트는 헛기 침을 하며, 이번에는 루시타니아를 바라보며 거의 같은 말을 물었다. "신부 루시타니아 폰 소렐은 신랑 카스트로 폰 카르노를 남편으로 맞아 케테르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를 존경하고 복종 하며 사랑하겠습니까?" 루시타니아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닌지, 커다란 보라색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하니 매달고 간신히 대답했다. "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카스트로는 흘깃 눈을 돌려 손을 맞잡고있는 루시타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 시야에도 루시타니아 는 굉장히 슬퍼 보였다. 카스트로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 꼈다. 자존심이 상했다. 감히 자신과 결혼하는데, 저 여자가 싫어서 울 고 있는 거다. 저 보잘것없는 계집이! 저 빌어먹을 소렐의 딸이! "……!" 카스트로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몸을 흠칫했다. 잠깐동안 잊고 있 었다. 저 여자가 소렐의 딸이라는 것을. 자신은 지금 소렐의 딸과 결혼 하고 있는 거다. 일평생 저 여자를 보호하고, 아껴주고, 사랑하겠노라 고……, 그렇게 맹세해버렸다. '빌어먹을!' 눈길을 돌리며, 카스트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시시의 효력이 다 해 가는지 이제서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선명하게 의식 안으로 들 어온다. 지금 자신은 바로 그 원수인 소렐의 딸과……, 평생을 함께 할 맹세를 하고 있다. 울컥 치미는 화를 삼키느라 악다문 턱이 뻐근해진 다. 이런 결혼을 원한 게 아니다. 이런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다. 카스트 로의 이상형은 어머니 미에라 왕비를 닮은 여자였다. 애교스럽기보다 위엄 있고, 자신이 힘들 때 언제나 곁에 있으면서 의지가 되어주는 여 자. 저렇게 별 것 아닌 일에도 눈물이나 흘려대는 여리디여린 계집이 아니라, 강인하고 긍지 높은 그런 아내를 원했다. "……해서 두 사람이 완벽하게 부부가 되었음을, 주신 케테르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핫!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요란한 갈채소리에 파묻혀 사람들의 축하인사를 받고 있었다. "축하하네, 카스트로. 자네에게 앙심먹은 남자들이 많으니까, 자네 부인 잘 간수해야 할거야." 페트라르카가 얄밉게 한 인사말이었다. "경하드립니다, 카스트로 전하. 행복한 결혼생활 되시기 바랍니다." 뒤따른 로페냐경의 축하 인사였다. "축하한다, 카스트로. 이제 결혼도 했으니 마음잡고, 가정에 충실하 거라." 축하보다 걱정이 앞서는 지스카르의 말이다. 그 외에도 얼굴만 스친 사람들과 다른 나라에서 축하사절로 온 사람들, 그리고 한족의 수장들 까지 다가와 축하와 행복을 기원해주었다. 하지만 행복해야 할 결혼식 날의 새신랑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뜻하지 않은 결 혼 때문에 불행과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비단 신랑 혼자만의 감정은 아닌 듯, 새신부의 얼굴에도 짙은 수 심이 깔려있었다. 테라력 696년 3월 15일. 하늘은 무척이나 쾌청했고, 바람마저 따사로운 이른 봄날의 오후. 카 스트로 폰 카르노와 루시타니아 폰 소렐은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자체보다, 후대 사람들에게 타락의 대명사로 기억될 그 전날의 '악당들의 총각파티'로 더 유명한 그 결혼식은 그렇 게 원치 않는 두 당사자와, 분노와 씁쓸함이 섞인 얼굴로 그들을 지켜 보는 신부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각국의 사절들 속에서 위태위태하게 치러졌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피로연은 신랑의 저택에서 밤늦게 까지 열렸다. 모두들 카르노와 레이얄, 두 왕가의 결혼을 축하하고 아 직 젊고 어린 두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복했다. 그 밤이 다 가도록 이 날 카스트로의 열여덟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사람 만을 빼고는 아무도 이 날이 카스트로의 생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 했다. 피로연에서 빠져나와 신방으로 들어가는 신랑을 붙잡고 축하인 사를 건넸던 사람은 그의 첫 번째 호위기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였다. "전하의 열여덟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무뚝뚝한 호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카스트로는 자신의 생일이었음 을 깨달았다. 그것은 싸아한 느낌, 슬픔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자신 의 생일이 타인에게 침범 당해 이제 순수하게 생일을 즐거워할 수만은 없게 된 느낌. 십오야에만 최고조에 이르는 달의 여신 실라의 황금은 그 날 따라 유혹적으로 빛을 사방에 뿌려대었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0 - 관련자료:없음 [3158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7 21:14 조회:152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0 - ================================================================== 싱그러운 햇살과 풋풋한 풀내음 가득한 5월의 근사한 오후였다. 카 스트로가 사는 유백색의 저택 뒤쪽으로 난 승마로를 따라가다 보면, 테라의 젖줄 아라와 맞닿은 강변과 마주치게 된다. 짙푸른 녹음이 우 거진 숲을 뒤로 한, 시원하게 그늘진 나무 아래에는 두 명의 남녀가 기분 좋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아직 여린 풀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있 는 그들의 옆에는 정성스레 천으로 감싸인 바구니들이 몇 개인가 놓여 있었고, 그리 멀지 않은 나무 그늘에는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이 고삐가 매어진 채 풀을 뜯고 있었다. "페트라르카 전하께서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무심한 듯한 목소리에 로페냐는 옆에 앉은 트레아 후작부인을 돌아 보았다. 후작부인은 로페냐를 돌아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루시타니아 전하께서도 보이지 않으시고요." 로페냐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물살이 세지 않은 강 위에 떠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양산을 받히고 있는 여자와 그 여자의 다리 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남자, 그리고 서서 느릿하게 배를 젓는 또 다른 남자가 배 위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로페냐는 이 자리에서도 잘 보이는 배 위 연인들의 행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워있는 남 자는 카스트로였고, 양산을 쓴 여자는 카스트로가 유일하게 꾸준히 만 나고 있다는 헤라 킬트였다. 결혼 후에도 멈추지 않는 카스트로의 여성편력을 지켜보면서, 로페 냐는 루시타니아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애초에 카스트로를 꼬드긴 사 람 중 한 명이기에, 그리고 카스트로에게 저 방탕한 페트라르카를 소 개해준 장본인이기에 더욱 죄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 페트라르 카는 또 입장이 틀려서, 페트라르카는 죄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타락하신 왕자께서는 아내의 외도를 어떻게 대처하실 지. 호호 홋, 벌써부터 너무 궁금해지는 걸요?" 페트라르카가 루시타니아를 유혹하려 한다는 것은 조금 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난히 루시타니아에게 살갑게 굴 때부터 이상했던 것이 다. 그리고 벌써부터 후작부인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며칠 내로 테리온의 귀족들 대부분이 알게 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로페냐는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며, 어디까지 비약될 지 모를 후작부인의 말을 잘랐다. "시장하지 않습니까, 후작부인?" 기껏 그런 말로 후작부인의 말을 끊어낸 로페냐는 돌아다 본 후작부 인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며 혀를 깨물었다. 후작부인은 어깨를 으 쓱하며, 빙긋 웃었다. "그러죠.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겠어요." 후작부인이 일어서서 양산을 펴는 것을 지켜보다, 로페냐는 자괴감 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생각같아서는 같이 가자고 하고 싶지만, 방금 전 후작부인의 그 표정이 로페냐를 만류한다. 하지만 구원의 손은 뜻 밖에도 후작부인 쪽에서 내밀었다. "함께 가시겠어요, 로페냐경." 로페냐는 고개를 홱 들고, 생글생글 웃고있는 후작부인에게 눈을 고 정시켰다. 잠시 머뭇거린 것이 못마땅했는지 금새 쌜쭉한 표정이 되는 후작부인을 보며, 로페냐는 허겁지겁 대답해버렸다. "가겠습니다. 가고 말고요, 후작부인." 호호호호, 하는 간드러진 후작부인의 웃음소리가 아라 강변에 울려 퍼진다. "……안색이 좋지 않아. 어디 아픈 거 아니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위에 있는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살짝살짝 뺨을 스치는 손의 온기가 따스하다. "아니에요. 뱃멀미를 하나 보지요." 생긋 미소짓는 헤라는 그 미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파리해 보인다. "휴강에 들어가면 함께 온천이라도 갈까? 당신과 여행해 본 적은 없 잖소?" "부인과 함께 가세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재깍 돌아온 대답에 카스트로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항상 나를 루시타니아에게 밀어내려 하는군. 하지만 싫소. 당신이라면 나를 보자마자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는 사람과 여행까 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날 것 같소?" 헤라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업자득이지요. 그러게 좀더 부인께 잘 해드렸어야지요." "소렐의 딸에게, 내가 왜!" 따지듯이 대꾸하는 카스트로는 어지간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헤라 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시다가 언젠가 후회하실 거예요." 먼데를 보는 눈으로 흘리듯이 하는 말에,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 고 되물었다. "후회?" "옛날부터 부인에게 잘못하는 남자 치고, 후회 안 하는 남자가 없다 잖아요." 헤라는 생긋 웃으며, 다시 카스트로를 향해 웃어주었다. "부인도 부인 나름이겠지." 여전히 카스트로는 완고했다. 헤라는 한숨을 쉬고, 멀리로 시선을 던 졌다. 잔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참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저어어언하아아아!" 헤라는 강가에서 소리쳐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카스트로를 내 려다보았다. "로페냐경이 부르시는데요?" "그렇소?" 그다지 흥미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따사 로운 햇살과 잔잔하게 흔들리는 요람 같은 배, 그리고 무척이나 따스 한 체온을 가진 애인이 함께였다. 저절로 잠이 올 듯한 느낌이었다. "저어어어언하아아아아! 시이이익사아아 하십시이이오오!" 헤라가 즉시 통역했다. "식사하자고 하네요." "귀찮아." 헤라는 쿡쿡 웃으며, 카스트로의 머리를 흩뜨렸다. 부드러운 머리카 락이 헤라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마치 짓궂은, 하지만 사랑스러 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따스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저는 배고파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러지." 배는 유유히 강물을 거슬러, 피크닉 장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려 강기슭을 올라가자, 넓게 펴진 자리에 벌써 다른 사람 들이 모두 자리잡고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앉은 가운데에는 바구 니에서 꺼낸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아침에 구운 빵과 싱싱한 과일, 소 고기와 양고기로 만든 몇 가지 음식과 카르발산 적포도주까지 마련되 어 있었다. 카스트로는 앉아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루시타니아에게 서 시선을 멈추었다. 아니 그보다는 루시타니아와 딱 붙어서 삐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페트라르카를 본다는 게 맞을 것이다. 카스트로는 헤라를 옆에 앉히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았다. 루 시타니아는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배를 타는 것은 즐거웠나, 카스트로?" 페트라르카가 물어오는 말에,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애인과 함께인데 즐겁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 "그렇지. 애인과 함께인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지. 내가 실수했네. 자, 식사하자구." 싱글싱글거리는 페트라르카가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렸다. 카스트로 는 잠시동안 페트라르카를 계속 바라보다가, 헤라가 음식을 집어주는 것을 느끼고서야 시선을 돌렸다. "페트라르카 전하께서는 어디 계셨나요? 찾아봐도 안보이시던데." 생글생글 웃으며, 화제의 주인공을 페트라르카로 만들어버린 인물은 트레아 후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페트라르카와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루시타니아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잠시 산책을 했소.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말이오." 페트라르카는 잠깐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후작부인은 즐거 운 듯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호호호, 산책이라면 저도 무척 좋아하는데, 저도 불러주시지 그러셨 어요. 참, 루시타니아 전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지요?" "……저, 저는……저도 산책을……."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어 루시타니아에게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푹 고개 숙인 모습이 어딘지 눈에 거슬린다. 뭔가 불쾌한 기 분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어머, 그럼 페트라르카 전하와 루시타니아 전하 두 분이 함께?" 전혀 몰랐다는 듯, 과장되게 표현하는 트레아 후작부인을 보며 로페 냐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런 순간만은 트레아 후작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이 엄청난 트러블메이커인 여자와 일생을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로페냐는 솔직히, 그것도 부러웠다. "후작부인." "네, 부르셨어요, 카스트로 전하?" 카스트로는 찜찜한 기분으로, 활짝 웃는 후작부인을 보며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내일 함께 점심식사를 하지 않으시겠소?" 후작부인은 멈칫 하다가, 날카롭게 쏘아보는 카스트로의 눈빛을 보 고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후작부인은 카스트로의 눈에 비친 경고를 눈치챘다. 그녀로서도 카 스트로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좋 은 친구로 남으려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으리라는 것은 본능적으 로 깨닫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페트라르카와 루시타니아를 돌아보았 다. 뭔가가 자신을 둘러싸고 쉬쉬하고 있다는 것을 며칠 전부터 느끼 고 있었다. 무언가 귀찮은 일일 거라는 느낌에 모르는 척 하려고 했지 만, 만일 그것이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일 때문이라면 모르는 척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카스트로는 아예 머리가 땅에 닿을 듯한 루시타니 아를 다시 한번 노려보고서, 헤라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가스티오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으며 나직이 혀를 찼다. 경멸과 혐오가 뒤얽힌 표정으로, 그는 책상 앞의 사내가 하는 말을 듣 고 있었다. "……부인 댁에서 나와 굉장히 화가 난 표정으로 마차에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되도록 빨리 몰아!' 라고 소리치 셨습니다. 굉장히 화난 표정이시더군요. 마차는 정말 엄청난 속도로 그 곳을 빠져나갔습니다. 제가 본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가스티오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금화 하나를 밀어냈다. 냉큼 집어 가 는 사내를 보며, 가스티오네는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택에도 밀정이 있다고 했지?" "네, 마키아경." 사내는 더없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신거린다. 가스티오네는 그런 사 내를 벌레 보듯 보면서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일어날 일들도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게. 내일 다시 보고하 러 와주게." "네, 마키아경." 채신없이 헤헤거리고 웃으며 인사하고 나가는 사내를 지켜보다가, 가스티오네는 다시 혀를 찼다. "방종한 젊은이들이 하는 짓거리란. 쯧쯧." 그 남편에 그 아내였다. 일년 내내 외도를 하는 남편 곁에서 잘도 조용히 버틴다 싶더니, 결국 그 아내도 바람을 피워대는 것이다. 페트 라르카도 나을 게 없었다. 어떻게 친구라는 자의 아내를 유혹할 수 있 다는 말인가! 정말 할 일없는 왕족이라는 것들끼리 모여서 하는 짓거 리란, 그 타락의 도가 상식을 초월한다. 왜 그렇게 겁이 없는지, 왜 그 렇게 자신만만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얼굴을 빳빳이 들고 다 니며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가스티오네는 그렇게 상식을 벗어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 2 의 아베르노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의욕적으로 이 일을 수행했던 가스티오네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짜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들어오는 정보라고는 매일같이 카스트로가 어떤 여자와 어디에 갔다, 그 여자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와는 또 어떤 이유로 헤어졌다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 늘도 강의 도중에 빠져 나와 어디 도박장으로 들어가 얼마를 따고, 얼 마를 잃었다는 정보 같지도 않은 정보들뿐이다. 신전에서 건네준 돈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솔직히 이런 정보를 사들이려고 쓰는 돈이 아까 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베르노가 감시하는 맛은 있었다. 그토록 반항적이던 아베르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카르노와 서신을 주고받는 것을 은밀하게 빼돌려 살펴보고, 그러다가 아베르노 가 점차 신전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고, 진심으로 케테르님께 복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비록 지루할지라도 지금 카스트로의 여성편력 을 보는 것보다는 보람이 있었다. 카스트로의 타락이 테라에 나쁜 것 은 아니었지만,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일이 었다. "츳,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대신관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짜증스런 한탄을 뱉으며, 가스티오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나저나 페트라르카와 카스트로의 신경전이라면, 비록 여자문제라고는 해도 다른 여자들에 얽힌 일들보다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 가스티오네 는 조심스럽게 카르노와 비쉬의 불화를 점쳐보았다. ================================================================== 80회군요.. ...이제 20회만 더 가면, 100회.. ....새도 이 정도 장편이 가능했어.. 라고 스스로 감탄을.. (--;) ...하지만 완결은 언제냐, 대체.. T.T 지금 써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벌써 중반은 넘은 듯.. ..쩌비.. 요즘들어 빨리 완결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 그냥 횡수였습니당~ 좋은 하루 되시구요.. - 오늘따라 감상적인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1 - 관련자료:없음 [3163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8 21:21 조회:153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1 - ================================================================== 따스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유백색의 널따란 테라스에서, 카르노의 삼왕자비가 된 루시타니아는 한 남자의 열렬한 사랑고백을 받고 있었다. "…… 장미꽃잎보다 더 붉고, 그대의 아름다운 금발은 저 오만한 태 양신 하야의 머리카락보다 빛나는 것 같군요." 루시타니아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남자를 마주보았다. 그 녀의 뒤쪽에서는 아젤이 일그러진 얼굴로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제 삼자로서는 차마 맨정신으로 듣기 어려운, 소름 돋는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고, 고마워요, 페트라르카. 하지만, 그래도 산책은 안되겠는데요." 결혼 일 년째를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열 여섯 의 소녀는 조금씩 조금씩 성숙해져서, 이제는 어느덧 한 남자의 부인 이라는 위치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늘을 봐요, 루시타니아. 이렇게 쾌청한 날에 실내에만 있는 것은 태양신 하야에 대한 모욕이며 죄악입니다. 그리 멀리 가자는 것도 아 니고, 아라강가까지만 건전한 대화를 나누며 걸어보자는 겁니다. 어제 는 당신도 즐겁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건전한 대화'라는 말에 악센트를 준 말이었지만, 루시타니아는 여전 히 난처하게 웃는 얼굴로 머리를 살랑살랑 저었다. "미안해요. 페트라르카도 저 같은 유부녀 말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만나셔야지요." 하늘색 머리의 낭만적인 왕자 페트라르카는 한숨을 푸욱 뿜어내면 서,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필요 없답니다. 제 마음은 이미 전부 당신에게 빼앗겼으니까요." 진지하게 말하고 나서, 슬그머니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악 동 같다. 하늘색 머리칼 사이의 건강한 구릿빛 얼굴에서 생동감 넘치 는 파란 눈동자가 매력적으로 반짝인다. 루시타니아는 진심인줄 알고 질겁했다가, 페트라르카의 장난기 어린 미소에 마음을 놓으며 부드럽게 나무랐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페트라르카." "왜, 카스트로, 그 녀석이 질투가 심하던 가요? 혹시 어제 뭐라고 그 런 건……." "아……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마저 돌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전날 찜찜한 기 분으로 돌아갔던 페트라르카는 아무래도 카스트로의 태도가 마음에 걸 려서 확인차 찾아온 길이었다. 더군다나 눈치 빠른 후작부인과 카스트 로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루시타니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루시타니아는 부담스러운 페트라르카의 시선을 피해 손안에 든 자수 만 내려다보았다. 피크닉에서 돌아온 이후 루시타니아는 내심 겁을 집 어먹고 있었지만, 결국 어제는 더 이상 카스트로를 만나 볼 수도 없었 다. 하기는 자신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카스트로가 그런 일로 자신에 게 화를 낸다는 것이 말도 안되기는 했다. 자신이 누구와 산책을 하든, 혹은 무슨 짓을 하든, 자신 때문에 카스트로가 질투할 거라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질투?' 루시타니아는 씁쓸한 기분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상대가 저 오페라 가수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질투 같은 것을 느낄 리가 없었다. 벌레같 이 싫어하는 여자 때문에 질투를 느낄 남자가 있을까. 테라스와 내실을 가르는 얇은 상아색 커튼이 바람에 흔들린다. 테라 스에서 내다보이는 곳에는 저 멀리 아라까지의 승마로가 환히 바라다 보인다. 짙어져 가는 녹색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어디선가 날아드는 솜털같은 꽃씨들이 눈처럼 테라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철제 테이블 옆에 연노랑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무릎 위에 자수를 내려 놓은 채 다소곳이 앉아있는 금발의 소녀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 다. 그림 속에서 웃고 있어야 할 소녀가, 아니 여성이 미소대신 우울하 고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이유를, 페트라르카는 잘 알고 있었다. 결혼 1 년이 지나도록 냉담하기만 한 그녀의 남편은 지금까지도 숱한 염문을 뿌려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더할 수 없는 친절과 미소로 맞는 그녀의 남편은 오직 자신의 아내에게만 그렇게 차고 못되게 굴었 다. 테리온의 내노라하는 탕아, 페트라르카로서도 너무 심하다 싶은 생 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 부인되는 소녀에게 동정심이 생길 만큼, 그리고 그 동정심이 조금씩 질을 달리해가고 있을 만큼, 카스트로는 악부(惡夫)였다.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요. 그러니까 기분 전환도 할 겸, 산책 이라도 합시다. 아니면 함께 승마라도……." 페트라르카는 뒤에서 쿵하고 울려대는 소리에 끝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보았다. 저만치 내실에 서 있던 루시타니아의 호위기사들이 일제 히 몸을 곧추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 테라스의 밝은 햇 살 아래로 성큼 들어선 사람은 루시타니아의 남편 카스트로와 그 호위 기사 라에르였다. "카스트로,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카스트로는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는 루시타니아를 매섭게 쏘 아보다가,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페트라르카에게 싸늘한 눈빛 을 돌렸다. 페트라르카는 죄를 지은 듯 가슴속이 따끔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색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기가 막힌 소리로군. 그건 내가 물을 말인 것 같은데? 아내의 침실 에 남편인 내가 들어오는 게 이상한가? 아니면 남편의 친구가 들어와 있는 게 이상한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남의 아내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직나직한 저음의 목소리로 추궁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그것은 페트라르카도 예외가 아니었던지라,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일그러진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자네가 너무 부인에게 무심한 것 같아서, 말벗이라도 해 주려 고 왔던 것뿐일세." 카스트로는 말없이 페트라르카를 바라보다가, 여전히 그 음성 그대 로 말을 건넸다. "내 아내와 노닥거리는 걸 보니 시간이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 있 다가 나와 얘기 좀 하지.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부부사이에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내 아내'라는 말과 '부부사이에' 라는 단어를 강하게 발음한 카스트 로는 거만한 눈으로 페트라르카를 내려다보았다. 페트라르카는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무심하고 못된 남편이라고 는 하지만, 루시타니아의 남편은 어디까지나 카스트로였으니까. 페트라 르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시타니아에게 목례했다. 그리고 찬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돌려 방문을 나섰다. 페트라르카가 사라지자, 카스트로는 잠시 숨을 돌리고 테라스 너머 를 내려다보았다. 정원의 푸른 잔디에 둘러싸여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들과 점점 더 푸르러지는 숲 속의 나무들. 카스트로의 시야 안에는 연 노랑색의 드레스를 입은 아내는 들어있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지금 후 작부인의 저택에서 오는 중이었다. 점심식사를 핑계로 요즘 떠도는 소 문을 추궁하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전하?"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오는 호칭을 듣고, 카스트로는 인 상을 썼다. 그 소문을 듣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차 안에서 치솟 는 화를 삭이려고 애썼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애써 감정을 죽이며 돌아왔지만, 시종장 하미르에게서 들은 말은 지금 루시타니아의 침실 에 페트라르카가 와 있다는 말이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혹시나 했던 일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남의 아내를 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탐해지는 대상 이 될 줄은 몰랐다. 카스트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시 한 번 식혀내기 위해, 한참을 그렇게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카스트로 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자,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눈이 마주치자마 자 고개를 떨구는 아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죄를 지어서일 테지. 카스트로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기껏 사그 라지던 분노가 다시 솟구친다. "페트라르카와는 어떤 관계요?" "……네?" 화들짝 놀라 마주보는 보라색눈에 대고, 카스트로는 한껏 짜증과 분 노를 쏟아부었다. "지금 테리온에 돌고 있는 소문을 알고 있소?" "무……, 무슨……." "말을 더듬는 걸 보면, 찔리는 게 있나보군. 어디까지 갔소? 침실까 지 끌어들인 거 보면,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건가?" 안색이 희게 질리는 모습이 더욱 의심을 부추긴다. 카스트로는 더 신경질적으로 루시타니아를 몰아붙였다. "정말 그런 건가? 왜 대답이 없어!" 루시타니아는 질려서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눈만 들어 카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보라빛 눈망울이 흐릿해지더니 금세 방울방울 이슬을 토해낸다. 천천히 바르르 떨리는 조그만 손으로 입술을 막는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원망스레 카스트로를 올려다본다. 화내는 게 아니다. 카스트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모함을 하고 어떤 트집을 잡아도 루시타니아는 자신에게 소리내 어 화를 내고 대드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항상 이 여자를 보면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이렇게 몰아붙이는 지도 몰랐 다. 카스트로는 입술을 막는 루시타니아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 고, 루시타니아에게 밀어대면서 다그쳤다. "페트라르카와 잤어? 대답해봐! 그러면 그렇고, 아니면 아니라고 대 답 좀 해보란 말야!" 왁! 하고, 루시타니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손아귀에 잡힌 가냘픈 손 목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카스트로는 그 손목을 더욱 꽉 잡고, 다그쳤다. "당신 벙어리야? 내가 벙어리와 결혼했나? 왜 울어? 왜 그렇게 답답 하고 짜증나게 굴어!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단 한마디가 그렇 게 어렵나? 시끄러우니까 울지마!" 거짓말처럼, 울음소리가 그친다. 카스트로는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 로 이빨을 갈아붙였다. 손아귀에 잡힌 손도 내팽개치듯이 내던져버리 고, 냉혹스럽기까지한 모습으로 거만하게 말했다. "페트라르카에게도 일러놓겠지만, 앞으로 그와의 만남을 자제하시오. 당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잊지마! 나는 누구 자식인지도 모를 사생 아에게 내 이름을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카스트로는 문득, 강하게 부딪혀오는 루시타니아의 시선을 느꼈다. 강한 원망이 서린 눈빛이었다. 저렇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람 비위 만 긁는 저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익숙해졌던 터라, 카스트로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내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있어도, 다른 자가 내 명예를 더럽 히는 것은 용서 못 해. 그것이 아무리 당신일지라도 마찬가지요. 기억 하시오, 부인. 내 입에서 다시는 이따위 지저분하고 불쾌한 말, 나오지 않게 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저 허약하기 짝이 없는 아내라는 여자를 경멸하 듯 노려본 카스트로는 미련없이 돌아섰다. 등뒤로 따가운 시선이 꽂힌 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깨끗이 무시해버리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칠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아가씨……." 아젤은 카스트로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소리 죽여 흐느끼는 루 시타니아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라고 다독여주자, 결국 잔뜩 억눌 렀던 소리를 내어 울어버린다. "흐흐흑, 흐흑, 아젤……흐윽, 흑……." 축축하게 젖어오는 가슴을 느끼며, 아젤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처음 그러시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러시면 어떡해요? 아 가씨? 왕자비 전하. 이제 괜찮아요." 같은 여자로서도 가냘픈 느낌의 어깨가 서럽게 울며 흔들린다. 만일 결혼식 직후 소렐로 돌아간 공작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저 인정머리 없는 왕자녀석은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항상 옆에 있는 아젤은 알았다. 진심으로, 저 왕자가 루시타니아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짜증스러워하고, 진심으로 저주한다는 것을. 언제나 루시타니아를 볼 때는 짜증이 묻어 있고, 분노가 스며들어있었다.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 살벌한 야생동물의 눈빛을, 옆에서 보는 아젤도 충분히 눈 치챌 수 있었다. 자신마저도 때로 섬뜩해지는데, 이 어리고 마음 여린 귀공녀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괜찮아요. 그만, 됐어요. 그냥 잊어버려요."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는 루시타니아를 품안에 느끼며, 아젤은 근처 에 있던 시녀장에게 눈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눈치빠른 시녀장이 부 지런히 침대시트를 걷어내고 있었다. "좀 쉬어요. 한숨 자고 나면, 좀 나아질 거예요." "……응." 어린 새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타니아를 데리고 침대로 다 가가자, 그때까지 방안에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 호위기사들이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이 패턴은 호위기사들도 익숙한 것이었다. "푹 자요." 아젤은 시트를 덮고, 루시타니아의 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루시타니 아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섬세한 금색의 속눈썹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물기 가득한 보라색 눈망울을 숨긴다. 아젤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내몰리듯 나온 세 명의 친위대원은 카스트로가 사라졌을 복 도 끝을 향해 이를 갈았다. "사람이 할 짓이냐, 이게." 부리부리한 갈색 눈을 부릅뜨고 울분을 토해낸 것은 루시타니아의 친위기사로 임명받은 베이경이었다. 그 옆에서 함께 맞장구치는 것은 포에르경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네 말에 동감이다, 베이. 너무하신다, 전하께서." "여자에게 저렇게 모질게 대하는 건 야만인이야!" "그것도 동감이다!" 신기하게 죽이 맞는 두 사람에게 일침을 놓는 것은, 루시타니아의 제 1 호위기사로 임명받은 로카르경이었다. "그만둬, 둘 다. 부부간의 일이다. 우리가 끼어 들어 가타부타 할 일 이 아냐!" "우우, 너 지금 우리보다 위라고 재는 거냐?" 엉뚱하게 시비거는 베이경을 보며, 로카르경이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안 풀렸냐? 대체 몇 년을 울궈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사실 말이야 바로 해야지, 내가 잘나서 너희들보다 상급자가 된 거지, 내가 못나서 상급자가 됐겠냐? 똑바로 안 하면 너희라고 해도 봐주지 않 아!" 재는 듯이 턱을 치켜올리고 말하는 로카르경에게 두 하급자가 하극 상적인 발언을 했다. "재수 없는 자식! 저거, 기사단에 있을 때부터 싹이 보였어. 그때 아 주 밟아줬어야 되는 건데!" "이번에도 동감이다, 베이. 상급자는 제쳐두고, 우리끼리 교대하고 가서 상급자나 씹으며 술 한잔 어때?" "좋지, 아암." 상급자 로카르경은 금새 높이 치켜들던 턱을 내리고 사람 좋은 미소 를 지었다. "그러면 섭하지이. 이따가 근무 끝나고, '모아의 아침'에서 한잔 어 때? 우리 소원했던 사이도 풀고, 응?" "싫습니다, 호위기사 나리, 그럼 저희는 교대하러 갑니다. 충성!" 얄밉게 대꾸하고 사라지는 포에르경과 곰처럼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베이경을 보며, 로카르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급자가 된 것은 좋은 데, 욕은 먹기 싫었다. "상관노릇도 힘들구만, 젠장!" ================================================================== To. 오늘 글 칸 떼는 것으로 메일 주신 분.. 본인 아이디가 아니라고 하셔서, 여기에 씁니다.. ㅠ.ㅠ 죄송하지만, 다운받으셔서 한글에서 보시면 안될까요? 줄 간격을 넓게 하셔서.. 300%정도로 하시면 한 줄 뗀 정도의 공간여유가 생기더군요. 시험삼아 한줄한줄 떼어보았는데요.. 그거 장난 아니게 막노동이라는.. --; 한번 해보기는 했는데, 매일매일 그렇게 올릴 걸 생각하니까.. 식은땀이 삐질삐질.. (지레 질려버린 새 --;) ㅠ.ㅠ 죄송합니다.. 꾸벅. * * * [신군주론]은 1월쯤에 완결 볼 생각입니다. T.T 지금도 늘어진다는 소리 듣는데, 더 늘이라니요.. 장으로는 6장까지인데, 써가는 모양새가 4장부터 앞부분에 비해서 짧더라는.. 수정보면,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지만요..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졸린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2 - 관련자료:없음 [3167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19 20:49 조회:152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2 - ================================================================== "또 울렸나?" 멈칫. 밖으로 나오자마자 불쑥 들려온 말에, 카스트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철제 테이블에 삐딱한 태도 로 기대고 앉은 페트라르카가 비난하듯 카스트로를 올려다보고 있었 다. 카스트로는 스스로의 반응에 기분 나빠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왜 그 말에 자신이 놀라야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부부사이의 일일세." 카스트로는 쌀쌀맞게 대꾸하고, 테이블 건너편의 의자에 앉았다. 고 개를 들자, 페트라르카가 화난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카스트로는 코웃음을 쳤다. 이 상황이 기가 막힌다. 그 렇게 많이 유부녀들과 놀아나고, 그 남편들과 결투까지 해봤어도, 스스 로 그 남편들의 입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테라에서 가장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그리 고스란히 당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해봤을까. "나는 상관해야겠네. 루시타니아가 자네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 가 없으니까." 생각과는 달리 페트라르카는 제법 강경하게 나오고 있었다. 마치 루 시타니아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 같다. 카스트로는 팔짱을 끼고, 심드렁 한 표정으로 페트라르카를 건너다보았다. 어디까지 말하나 두고 볼 심 산이었다. "그런 취급이라니?" "그거야 자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 아닌가! 루시타니아는 자네 아내야. 자네의 그 수많은 애인들에게 해주는 것의 반만큼만 해줘도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을 거야!" 모르겠다는 듯,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 에 눈빛만 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애인은 애인이고, 아내는 아내야. 다르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 닌가?" "자네는 아내가 학대의 대상으로 보이나? 아니면 복수의 대상? 그게 자네가 말하는 아내가 받을 대우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을 주먹까지 쥔 채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카스트로는 잠시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주제넘다고 주먹을 날려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 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저 바람은 지치지도 않는지, 지겹게도 머리를 흩트리고 있었다. "자네가 소렐 공작에게 유감이 있다는 것은 알고있네. 하지만 그 사 람의 딸에게까지 이러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카스트로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뒤틀렸다. 서늘한 눈매가 페트라르 카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페트라르카." "뭐?" 어이없어하는 페트라르카에게, 카스트로는 더욱 짙은 미소를 띄웠다. "부모의 죄는 결국 자식의 죄야. 소렐의 죄는 결국 루시타니아의 죄 지." "무슨 헛소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시선이, 못 견디게 짜증스럽다. 카스트로 는 이가는 듯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왕자인 것은 자네 아버지가 왕이기 때문이야. 자네가 농노 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자네도 농노야! 부모가 주는 혜택은 그대로 받으면서, 부모가 지은 죄는 절대 감수할 수 없다는 건가?" "무슨!"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적국까지 끌려와 이렇게 허송세월이나 하고 있나? 내 형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여기까지 끌려와 인질이 되어야 했 는데? 내가 왜, 원수의 딸을 아내로 맞아야 했는지 아나! 내가 왜 소 렐의 딸과 결혼해야했는데!" 점점 높아지는 언성과 말뜻에 페트라르카의 안색이 질리고 있었다. "무슨……, 자네 정말 루시타니아를……." 하! 카스트로는 코웃음을 치고, 타오르는 눈으로 페트라르카를 쏘아 보았다. "나는 원수와 원수의 딸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그런 편리한 사 고방식 따위 몰라. 어디까지나 루시타니아는 소렐의 딸이고, 나는 카르 노의 왕자다. 십년이 지나든 이십년이 지나든 그건 변하지 않아! 그리 고……." 멍하니 뭐에라도 홀린 듯한 눈을 한 페트라르카에게, 카스트로는 하 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루시타니아는 죽을 때까지 내 아내다. 나는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꼴은 못 봐! 기억해둬, 페트라르카. 자네를 죽일 수 없다면, 나는 내 아내를 죽일 거야. 사고사라면 소렐도 할 말이 없을 테지. 내 아내로서 만족하고 살 수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겠지. 내 생애에 이혼 이라는 불명예는 없을 테니까!" 페트라르카는 입술 끝을 비끌어올리며 웃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몸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잔인한 미소다. 저것은, 정말로 루시타니 아를 죽일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의 미소다. "자네와는 두 번 다시 이런 불쾌한 일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 네. 그럼 난 이만 바빠서." 카스트로가 매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눈으로 쫓던 페트라르카는 이 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술에 닿는 손바닥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생 긴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아직도 카스트로의 그 잔인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어리숙해 보이던 인상은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그래서 손쉽게 그를 놀리던 것도, 장난 삼아 그를 타락의 길로 유혹한 것도. 과연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저 모습이, 방금 전 본 그 모습 이 카스트로의 본모습이라면……. 페트라르카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자신은 대단 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든다. 한참을 뭐에 홀린 듯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일어선 페트라르카는 시 선을 들어 햇빛을 반사해내는 저택 2층의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유 백색의 아름다운 건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순수한 흰색으 로 뒤덮여있다. 루시타니아를 닮은 순수한 빛깔의 건물을 한참동안 바 라보다가,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휘저었다. 카스트로의 협박은 상당히 잘 먹혀든 것 같았다. 의외로 협박하는데 재능이 있는 녀석인지도 모른다. 결투 따위가 아닌, 그녀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도 그런 눈빛으로라니. '차라리 결투라면…….'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카스트로나 자신이나 두 사람의 결투는 두 사람만의 결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둘 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카르노와 비쉬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겨도, 져도, 어느 쪽도 이득 될 게 없는 싸움이다. '약삭빠른 녀석!' 자신이 아는 대로 어리석은 꼬마가 아니었다. 키만 큰 어린아이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문득, 페트라르카는 머릿속을 스치는 뭔가를 느꼈다. 가닥이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 히지 않는 그 무언가. 뭔가를 놓치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감질나게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동안 멍하니 그 잔상을 쫓아가던 페트라르카는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언젠가는 생각나겠지." 페트라르카는 다시 이층을 올려다본 뒤에, 쓸쓸한 눈으로 돌아섰다. 때때로 자신이 하는 농담으로 슬픈 그림자에서 벗어나 웃곤 하던 그녀 의 얼굴을,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언제나 겁에 질려 떠 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켜보기만 해야할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진심이 되어버렸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에는 단지 심술이었다. 카스트로가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헤라를 사 귀는 데 대한, 치졸한 심술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득 보아버린 루시타 니아의 그 슬픈 미소 때문에, 그만 발목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정처없이 말을 몰아가는 페트라르카의 가슴 한구석에 바람이 분다. 왜 항상 자신의 사랑은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야하는지. 왜 그렇게 사 랑한다 말 한마디 못해보고 끝나는 그런 사랑이어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하다. 아젤은 낯선 거리에 서서 낯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차양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옆에는 길잡이 삼아 데리고 온 소렐 공작의 테 라 저택 집사인 샤른도 함께였다. "저 혼자 올라가 보겠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중한 샤른의 태도에 아젤은 긴장한 미소로 대꾸했다. "여자들끼리의 문제니까요. 누구, 다른 사람이 올라오지 않도록 부탁 해요." "알겠습니다." 아젤은 샤른을 뒤에 남겨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평민들이 산다 는 남쪽에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산다는 이 아파트 3 층에는 어떤 여자가 살고 있었다. 똑똑똑똑. 손잡이로 문을 노크하고, 아젤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누구세요?" 조그만 구멍 사이로 집주인이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헤라 킬트양이시지요?"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아젤은 단호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몇 번 뵌 적이 있죠? 카스트로 전하의 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 으면 하는데요."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문 뒤에서 덜컥덜컥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조용히 문이 열렸다. 어딘지 피곤해 보이는 청보라색 머리의 헤라가 아젤을 향해 고개짓을 했다.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아젤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며 모자를 벗었다. '친애하는 카스트로 전하. 편지가 늦어지게 되어 삼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지만 최근에 국내외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널따란 창을 거쳐, 늦은 아침의 햇살이 방안으로 손길을 뻗는다. 햇 살은 어두운 갈색의 반지르르한 책상 위에 올라앉아있는 남자의 얼굴 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지만, 남자는 햇살의 은밀한 애무를 아는 지 모르는지, 손안에 든 편지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소식부터 전하게 되어,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 합니다. 하지만 이 일부터 전해드리는 것이 먼저라 생각되어 제일 첫 머리에 이 소식을 올립니다. 섭정 왕세자 전하께서는 지난 4월 말, 카 르노 각지에 다섯 곳의 케테르 신전을 지을 것을 결정하시고…….' "뭐?" 싱그러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있던 카스트로는, 입술을 벌리고 황 당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확연히 드 러나 있었다. "전하?" 의아한 듯이 다가오는 사람은 카스트로의 제일 호위기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였다. 1년 사이 키가 더 커진 라에르는 이제 카스트로와 비슷 할 정도였고, 어린 티가 남아있던 얼굴은 조금씩 성인의 그것으로 변 해가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더니, 작게 소리내어 그 부분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굵은 눈썹을 꿈틀하며 라에르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 라에르의 표정도 심각하게 어두워진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지만, 결 국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온 말은 없었다. 카스트로는 심호흡을 하고, 다음부분을 읽어갔다. "그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레이얄에 차관 천만 실프를 부탁하러 사 신단을 보냈고, 테라에도 조만간 사신단을 보낼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도 국민의 세금을 인상해서……, 빌어먹을! 미친 거야! 기어이 아베르 노 전하께서는 미쳐버린 거다!" 편지를 쥐고있는 옆부분이 무의식중에 움켜쥔 카스트로의 손아귀힘 에 꾸깃하게 구겨져 있었다. 라에르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내렸다. 왕 세자가 미쳤다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보다 더한 말도 해주고 싶은 라에르였다. "구걸을 해? 그것도 테라와 레이얄에 구걸을 해? 하! 국민들에게서 더 짜낼 게 어딨다고 세금을 올려! 돌은 거다. 미쳐버린 거야! 신전? 그따위 케테르놈의 신전 따위가 왜 필요한데!" "진정, 하십시오, 전하." 말리는 라에르의 목소리가 부분부분 끊겨진다. "진정하십시오. 누가 들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가 테리온이라는 사실 을 잊으신 것은 아닐 테지요?" 카스트로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분노를 삭였다. 식식거리는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가득 울리고 있었다. "다음부분을 읽어보십시오. 루아 사제가 보낸 정보는 아직 많이 남 아있습니다." 카스트로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눈을 내 려 편지를 읽었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만, 뜻은 잘 파악되지 않고 있 었다. 카스트로는 몇번이고 같은 부분을 반복하다가, 차차 다시 편지에 내용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편지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왔다. 이번에 새로 기사단장으로 취임된 카나이트 폰 루시노에 대 한 신상과 친테라파로 재구성된 정부의 움직임들. 새로 근위대장에 임 명된 테르니크 폰 레이노에 대한 소식과 미카에르 대공이 헤르트 폰 사르노와 손을 잡은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정보가 있었고, 헤르트 폰 사르노의 조카 레이니트 폰 사르노가 일왕녀 유리나에게 청혼한 사건 도 있었다. 카스트로는 잠깐 레이니트 폰 사르노라는 자를 떠올려보았 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꽤 잘생긴 청년이라는 것과 사냥 을 잘하는 자라는 것. 그리고 헤르트경이 그 청년을 꽤 아끼는 것 같 다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유리나도 벌써 스무 살이다. 충분히 결혼 할 나이가 되었고, 왕족으로서는 조금 늦은 감도 있었다. '축하할 일인지도…….' 카스트로는 심각하지 않게 넘겨버리고 다음 소식을 읽었다. 국내 사 정에 이어 각국의 최근 동향이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십여일전 비쉬에서 일어난 참극에 관한 것이었다. "참극?" 비쉬라면, 페트라르카의 나라다. 레이얄이나 테라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의미로 관심이 가는 나라였다. 카스트로는 주의깊게 글을 읽어나 갔다. 그 참극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참혹한 골육상잔이었다. 그것도 왕 실의 세력다툼에 관한 처절하고 추잡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비쉬의 현 국왕 네즈퍼스 1세에게는 다섯 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 중, 왕세자 오르파샤와 이왕자 페트라르카는 전 왕비의 소생이고, 삼왕 자, 사왕자, 오왕자는 모두 현 왕비의 소생이다. 첫 번째 문제는 이미 전 왕비를 두고, 다른 아가씨를 마음에 두게 된 네즈퍼스 1세에게 있었다. 네즈퍼스 1세는 이미 두 왕자의 어머니 이기도 한 전 왕비와의 이혼을 감행했고, 현 왕비 이사벨라와 재혼했 다. 당시 13세의 오르파샤는 그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게 되었던 모 양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현 왕비 이사벨라의 야욕이었다. 내리 세 명의 왕자 를 출산한 이사벨라는 자신을 보기만 해도 살기를 내비치는 전 왕비의 소생보다, 자신의 친아들 중 한 명이 네즈퍼스 1세의 뒤를 이어 국왕 이 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바램은 자신을 총애하는 국왕과 재능 있 는 삼왕자의 뒷받침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오르파샤 가 이미 왕세자로서의 위를 인정받았다고는 해도, 이사벨라도 네즈파 샤 1세도 공공연히 그 전복을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쉬의 왕세자 오르파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만큼 호락호 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4월로 스물아홉번째의 생일을 맞은 오르 파샤가 십육년간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친위세력을 만들었고, 결국 지난 5월 26일 사왕자의 열세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기습했다. 그날 삼왕자와 사왕자, 그리고 왕비 이사벨 라는 오르파샤의 시린 검날 아래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이제 아홉 살인 오왕자는 어딘지도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비쉬의 국 왕 네즈퍼스 1세는 비쉬 왕성 어딘가에 감금되었고, 이미 옥새는 오르 파샤가 넘겨받은 상태였다. ================================================================== 귀여운 카스트로.. 라.. 저말고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 친구는 그 호칭에 질겁을 하더라는.. --; 카스트로, 귀여운 놈입니다.. ^^; ^^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의 러브러브는.. 호홋.. 글쎄요.. (대답 회피하는 새.. --;) 요즘은 이런저런 답변들을 쓰다보니까, 아닌척 하면서 결국 다 불어버리는 것 같아요.. 쩌비.. 주절주절 쓰다가, 허걱하고 다시 지운다는.. --; ^^ 그러면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3 - 관련자료:없음 [3171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0 21:01 조회:156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3 - ================================================================== 조금 더운 감이 드는 아파트의 식탁의자에 앉아, 아젤은 식탁 건너 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같은 여자로서도 부러운 신비로운 청보라색 머 리를 목뒤에서 소박하게 청색리본으로 묶고, 창백하다 싶은 얼굴은 오 페라 가수답지 않게 화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표정만으로 보면 누구 못지 않은 포커페이스로 무장한, 색스럽다거나 천박하다기보다는 오히 려 여염집의 긍지 높은 아가씨처럼 보인다. 솔직히 말해, 카스트로만 연관되지 않았다면 아젤로서도 조금쯤은 호감을 가질만한 타입의 여자 였다. 수다스럽지 않고, 신중한 모습이 참 마음에 드는 여자다. "떠나주세요. 어디로 가든, 평생 당신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헤라는 멍하니 앉아 찻잔을 양손으로 들고 들여다보았다. 귓가에 들 리는 말소리가 가뜩이나 아픈 그녀의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한다. "원하신다면, 은신처를 마련해 드릴 수도 있어요. 테라와 카르노만 제외한다면, 어디든 당신이 살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왜……." 아젤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는 헤라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혼란으 로 소용돌이치는 눈동자가 멍하게 초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본다. "왜……, 이제 와서 제게 이러는 거죠? 지금까지는……." 힘겨워하는 헤라를 보며, 아젤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근 일년간을 아무 간섭 없이 놓 아두었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아젤은 좀더 잔인해지기로 작정했다. "당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있어요." 탕! 얼마 남지 않은 찻물이 튀고, 찻잔이 식탁 위로 나뒹굴었다. 푸 른색의 식탁보가 짙게 얼룩이 밴다. 아젤은 아연해하는 헤라를 보며,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젤은 더욱 강경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찾아갔던 의사에게서 확인을 해본 거니까.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 분이라는 것도." "……뒷조사를……하셨나보군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이내 헤라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아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 아젤은 지지 않고 헤라의 찬 시선을 맞받으며, 생각해 둔 말을 입밖 에 내었다. "공작각하께서 당신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죠. 물론 당신이 임신한 사실까지 아신 다음에는 더욱더." 헤라는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얼룩이 번진 식탁보를 내 려다보았다. 나뒹구는 찻잔을 바로 세울 정도의 여유도, 지금의 헤라에 게는 없었다. "공작각하께서는 루시타니아 전하를 무척이나 사랑하시죠. 그 분을 위해서는 힘없는 오페라 가수 한 명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드 는 거, 별 거리낌없이 하실 수 있을 만큼. 아니 그 이상도 하실 수 있 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에 대고, 아젤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의미한 살상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은 최악의 경우죠. 당신에게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당신이 영원히 카스트로 전하의 앞에 나서지 않는다면, 공작각하께서도 당신에게 평생을 편히 살도록 해 줄만큼의 아량은 베풀겠다는 겁니다." 헤라는 차갑게 식은 손을 깍지끼고, 그 위에 이마를 얹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가볍게 입밖에 낼 수 있 는 말이 아니었고, 카스트로에게는 더욱 말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 도 벌써 며칠째 대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있어도 되는지. 아니면 카스트로에게 말하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지. 헤라는 자신이 카스트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 지 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전 약혼자인 오르파샤에게 느낀 감정과는 사 뭇 다른 감정이라는 것. 볼 때마다 가슴 설레고 경외감을 느꼈던 오르 파샤와는 달리, 카스트로는 마냥 편한 느낌이다. 어리광부리는 그를 감 싸주기도 하고, 자신이 힘들 때마다 기대고 싶어지기도 하고,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상처받 은 그를 감싸주며, 그리고 자신의 상처도 위로 받으며,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만큼, 카스트로는 포근하고 안 락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그렇게 기 쁘지만은 않았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현실적인 장애가 너무 많았다. 자 신이 낳을 아이는 사생아일 테고, 평생 그런 오명을 달고 살아야했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뒤, 카스트로의 반응도 두려웠다. 기뻐할까? 싫어 할까? 카스트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미지수였다. 불명예밖에 안 되는 사생아를 기꺼워할 남자가 있을까? 어떻게 해도, 카스트로에게 누가 되는 일이 다. 그냥 정부와, 아이까지 있는 정부는 틀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카 스트로라고 해도, 분명히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너무 앞날이 암담했다. 방법만 있다면 아이를 떼어버리고 싶은 마음 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고는 했다. 하지만 의심 없이 미소지어주는 카스트로를 보며, 아마도 배속에서 살아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헤라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그 분의 정부인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그 분 아이의 어머 니라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카스트로 전하의 아이는 오직 한 사 람, 루시타니아 전하의 아이만 인정합니다. 지금 아이를 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원하신다면, 아이를 낳으신 뒤에,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저 희들이 아이의 적절한 부모를 찾아드리죠. 당신은 새로운 인생을 사셔 도 좋구요." 헤라는 웃었다. 허탈하게 그냥 웃음이 나왔다. "당신들이 내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죠?" "……당신이 아이를 맡긴다면, 이미 당신은 아이를 버린 거겠죠. 그 뒤의 생사까지 당신이 관여할 것은 없습니다." 헤라는 등줄기가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삼 눈앞의 여자가 무섭 게 보였다. 아젤은 질린 얼굴의 헤라에게 싱긋 미소지어 주었다. "이런 제의를 하는 것도, 당신을 상당히 많이 생각해드리는 것입니 다. 그것을 아신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아젤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헤라를 바라보았다. 고집스러운 눈빛 이 아젤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틀 뒤에, 다시 와 주세요.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겠지요?" 아젤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알겠습니다. 그럼, 현명하게 판단해 주세요." "나가지 않겠습니다." 헤라는 아파트를 나가는 아젤을 지켜보다가,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깍지낀 손을 풀어 그 속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슬프 지도 않았다. 다만, 막연하게 가슴이 아파오기만 했다. 며칠동안이나 비가 내렸다. 카스트로는 비 핑계를 대며 며칠간 테리 아에 가지 않았다. 테리아에 처음 다니던 작년 초에는 그다지 성실하 지 못한 카스트로의 태도에 대해서 교수들은 물론 제이리트와 지스카 르마저 열성으로 설교를 늘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시큰둥한 카스트로 의 태도에 질렸는지 이년째인 지금에는 별다른 설교도 늘어놓지 않는 다. 애초에 비제가 설명했던 대로, 저들은 자신에 대해 손대기를 포기 했는지도 모른다. 카스트로는 2층 침실에서 창 밖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를 바 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시종장 하미르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준비시켜라." "네, 전하." 비 때문인가. 기분이 이상했다. 카스트로는 이상하게도 안절부절 하 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기분이 나빠졌다. 유리창을 넘어 차갑게 들 려오는 빗소리가 묘하게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비워낸다. 초조하기는 한데, 그 초조함의 원인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무얼까. 무엇 때문일 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하는 일 없이 자꾸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 고향이 새삼 그리워져서인지도 모른다. 고국을 떠난 지 이년 째인 있는 지금, 막연히 앞날이 두려워졌는지도 모른다. '뭐지? 왜 이렇게…….'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것일까.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장 하미르가 들고 있는 겉옷을 입 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홀을 지나던 카스트로는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2층 계단 끝에 선 루시타니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이마를 찌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 목적지를 가르쳐 주고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루시타니아의 모습이 왠지 눈에 걸린다. 촤악! 채찍질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더 크게 들린다. 아라강가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비는 끈질기게 오고 있었고, 아직도 비는 멈추지 않는다. 헤라를 찾아간 것은 어떤 예감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카스 트로는 다만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가끔씩 이렇게 초조해지고는 했다. 밑도 끝도 없는 불 안으로 잠을 설치기도 하면서, 온 밤을 온갖 생각으로 뒤채며 하얗게 새워버리는 것이다. 딱히 뭐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가 아니라, 그저 시 간이 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었다. 아무 하는 일없이, 그저 시간 만 보낼 뿐인 매일매일이 그렇게나 사람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이 날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릇처럼 위로 를 받기 위해 그녀를 찾았을 뿐이다. 정말, 단지 그것뿐이었다. 마차에 서 내려 부지런히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서 닫혀있는 문을 두드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안에서 대답이 없었을 때, 카스트로는 더욱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고문이다. 카스트로는 문을 두드리는 손의 힘이 더욱 세지는 것 을 느꼈다. 쾅쾅쾅쾅! 아파트의 그다지 크지 않은 문이 카스트로의 주 먹에 의해 흔들린다. 라에르가 점점 더 강하게 두드리려는 손을 잡아 버렸을 때, 카스트로는 누구에랄 것도 없이 화를 쏟아낼 준비가 된 상 태였다. "놔, 라엘." "지금 킬트양께서는 안에 계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 면 오실 테니까……." 그때였다. 문소리가 꽤 시끄러웠던지, 헤라의 아파트 옆호실에서 문 이 빼꼼이 열렸다. 나온 사람은 거친 회색 머리의 노파였다. "옆집 아가씨 찾아오셨수?" 카스트로는 고개를 홱 돌려 노파를 쳐다보았다. 노파가 움찔 놀라는 것을 보았지만, 카스트로는 자신의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헤라, 어디 갔는지 아나?" 노파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수. 그저께 갑자기 이거 건네주고 가던데. 자기가 가고 나서 댁이 찾아오면 이걸 주라고." 노파는 품에서 구겨진 양피지를 한 장 꺼내었다. 카스트로는 더욱 불안해지는 기분으로 거의 빼앗듯이 그것을 가로챘다. 밝은 창가로 옮 겨 양피지에 적힌 글들을 읽어가는 카스트로의 안색이 수시로 변해간 다. 라에르는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찾아." "전하?" 카스트로는 손안에 양피지를 아귀힘으로 구기며, 눈에 불을 켜고 소 리쳤다. "헤라를 찾아! 사람을 풀어! ……젠장! ……젠장! 젠장!" "전하……." 정신없어 보이는 카스트로를 보며, 라에르는 아연해졌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홱 돌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노파를 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고 아파트를 내려갔다. "전하! 무슨 일인지……." 카스트로는 뛰듯이 아파트를 내려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마차에 오르며 소리쳤다. "페트라르카의 저택으로 가라!" 마차가 덜컹이며 거칠게 거리를 달려간다. 라에르는 무섭게 굳은 카 스트로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문제의 양피지를 흘깃 노려보았다. 카스 트로는 누구를 칠 듯 꽉 움켜쥔 주먹으로 머리를 짓누르며, 마차의 어 두운 부분을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 요즘은 올리고 나서, 아차싶어 수정하는 일이 느는 듯.. --; 왜 이러는지.. 쩌비..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4 - 관련자료:없음 [3174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1 21:25 조회:151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4 - ================================================================== 페트라르카의 저택에서 허탕을 친 카스트로는 리케아 거리에 있는 모아클럽의 구석진 방에서 페트라르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양옆에 여 자를 끼고 앉아서 흐트러진 옷차림새에 엉망인 모습으로, 그렇게 망가 져서 잔뜩 비틀린 미소를 띄우며 카스트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어, 안녕하신가? 나 따위는 영영 안 볼 사람처럼 굴더니, 예까지 어인 행차신가?" 막바로 추궁하려던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비쉬에서의 일을 생각해냈 다. 페트라르카가 과연 본국의 소식을 알고 저러는 건지, 단지 루시타 니아의 일로 자신에게 협박받은 일이 불쾌해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페트라르카에게는 힘든 일이겠지만, 카스트로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헤라가 어디 갔는지 아나?" "……뭐?" 술에 취해 흐릿한 눈으로 되묻는 페트라르카에게, 카스트로는 인내 심을 끌어내며 다시 하나하나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헤라가 갈 만한 곳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페트라르카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카스트로를 노려보았다. 카스트로 는 입술을 깨물면서 되는대로 간략히 설명했다. "헤라가 없어졌어. 찾지 말라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사라져버 렸단 말이다! 자네는 나보다 헤라에 대해 잘 알잖아! 어디 갔는지 아 나? 갈만한 곳을 알아? 벌써 이틀 전에 사라졌어!" "하!" 페트라르카는 김빠진 소리를 내며 앉아있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몸 을 폈다. "헤라가 사라져?" "그래!" 카스트로는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하는 페트라르카에게 버럭 짜 증을 냈다. "하!" 페트라르카는 다시 기막힌 듯 그렇게 소리내더니, 이내 입술을 끌어 올려 피식피식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웃지마!"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페트라르카가 발작하듯이 웃어댔다. 카스트로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분노로 달아오른 카스트로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 대며 페트라르카는 더 크게 웃어댔다. "너!"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카스트로는 페트라르카의 멱살을 잡아 끌 어올렸다. 그래도 페트라르카는 눈물을 흘려대며, 웃음을 멈추지 않는 다. "웃지마! 웃지 말란 말야! 헤라는 어디 있어?" 키득키득거리는 페트라르카를 윽박지르며, 카스트로는 진정할 기미 가 보이지 않는 페트라르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전하!" 여자들의 비명과 라에르의 외침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그래도 웃고 있는 페트라르카를 소파 위에다 내던졌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방밖으 로 도망 나가고, 방안에는 이제 그들 셋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고도 한 참을 웃기만 하는 페트라르카를 내버려두고, 카스트로는 소파에 주저 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을 들어 통째로 입 속에 들이부었다. 콸콸 흘러나오는 술이 입 속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턱을 타고 목으로 흘 러내린다. 목이 탔다. 아니 속이 탔다. 술병을 입술에서 떼어내고, 손등으로 턱 을 닦아내는 카스트로는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과는 달리 지칠 대 로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카스트로는 숨을 돌리고, 다시 술병을 입으 로 가져갔다. 반쯤 차있던 병을 다 비워내고 또 다른 병으로 손을 가 져가자, 페트라르카가 먼저 가로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카스트로 는 라에르를 돌아보았다. "술을 더 가져오라고 해."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라에르는 걱정하면서도 지시 에 따랐다. 술과 안주가 들어오고, 카스트로는 묵묵히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모습을 페트라르카의 시선이 집요 하게 쫓는다. "찾을 수 없어." 불쑥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카스트로는 술잔을 들어올리려다 멈추고 서 페트라르카를 쳐다보았다. 페트라르카는 입술을 비틀고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내가 여기서 찾아낸 것만도 대단한 우연과 운이었으니까." "……!" 페트라르카는 다시 술병을 비워내며, 마치 회고하듯이 아련한 눈으 로 간간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헤라……, 헤라 폰 리스. 그게 헤라의 본명이지. 지금에야 몰락해버 렸지만,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의 딸이었지. 그리 고……, 내 형의 약혼녀이기도 했고." 뜻밖의 말을 듣고, 카스트로는 그대로 굳어서 페트라르카를 쳐다보 았다. "자네 형이라면……, 비쉬의 왕세자 말인가?" "훗, 그래. 헤라는 정상대로라면 비쉬의 왕세자비고, 비쉬의 왕비가 될 여자였지. ……왕비전하의 눈에 거슬려 몰락해버리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카스트로는 묵묵히 술을 따라 마셨다. 사라진 정부의 과거 이야기는 술이 필요한 모양인지, 자꾸만 목이 탔다. "내가 테라로 오고 나서, 이년인가 지났을 때에 오페라를 구경하다 가 다시 만났네. 그때는 눈에도 띄지 않는 삼류배우였고……,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찾아가니까, 자기도 놀라더군. ……아무 리 망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사는 게 비참해서……, 아파트와 생활비를 억지로 떠안겼어. 뭐, 그것도 자네가 대신 떠맡아서 작년부터는 그나마 도 해주지 못했지만." 헤라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페트라르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기품이 넘치는 귀족이었다는 것. 일년 사이에, 자신이 그녀에게 투정부리고 위 로를 받기는 했어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랐다. 자신이 무 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완벽하게 숨긴 것일까. "찾지 못할 거야." "……." "형도 헤라가 사라지고 나서 끈질기게 사람을 풀었어. 연고지를 찾 고 찾아, 아는 사람들을 닦달해가며 찾아댔지만 소용없었지. 결국 그렇 게 만나지 못했다면, 그나마 찾지 못했을 지도. …누가 알았겠나. 이렇 게 사람 많은 도시에 와서 살고 있을지. 그것도 보라는 듯 오페라 가 수가 되어서." 쓰기만 한 입안에 카스트로는 독한 술을 부어댔다. 술병을 들어 자 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던 카스트로의 손에서 술병이 빠져나간다. 페트 라르카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카스트로의 술잔에도 따랐다. "마시게. 이런 날에야말로 술 마시는 거겠지." 페트라르카는 카스트로가 든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히고는 한번 에 꿀꺽 술을 들이켰다. 카스트로는 기계적으로 술을 마셨다. 독한 술 이 목을 지지는 것 같다. 뱃속이 뜨거워진다. 머리가 어지럽다. 카스트 로는 다시 빈 술잔을 내밀었다. "비쉬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어." 간단한 말이었지만, 페트라르카는 대번에 흐트러진 모습을 살기등등 한 모습으로 바꾸었다. 상처받아서, 되려 공격적으로 되어버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비웃어주려고? 아니면 상냥하게 위로씩이나 해주려고" 카스트로는 몇 번인가 술잔을 들이키고 페트라르카를 건너다보았다. 잔뜩 독오른 뱀처럼, 페트라르카는 한껏 긴장해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씁쓸한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무심한 표정이다. "내가, 어설프게 자네를 위로해줄 만큼 그렇게 여유로와 보이나?" "……!" "내 일만으로도 벅차. 내 여자가 사라진 것만도 벅차고,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기가 막혀. 이런 판국에, 자네 사정을 위 로하고, 비웃어줄 만큼, 나, 그렇게 여유롭지 못해." 다시 또 한 잔. 또 한 잔. 쉼 없이 들이키는 카스트로를 멍하니 바라 보던 페트라르카는 피식 웃으며, 술병 비우는 일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안주도 먹지 않고 술만 몇 병을 거덜내는 두 사람을, 아니 솔직히 말 해 카스트로를, 라에르가 걱정스레 쳐다본다. "자네도 들지." 페트라르카가 눈을 맞추며 라에르에게 잔을 권했다. 라에르는 칼같 은 태도로 거절했다. "전하를 호위하는 중입니다." "그래, 그랬지." 페트라르카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고, 라에르에게 주려던 술을 자신 의 입 속에 들이부었다. 내기라도 하듯 술을 마시던 두 사람 중 페트 라르카가 먼저 정신없이 취해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발음마저 이상 해진 상태였지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 습이었다. "자네 말이 맞았어." "……?" "부모의 죄는 자식이 뒤집어쓰게 되어있지. 전에는 그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이번 소식을 듣고 나서야 깨달아버렸지. 보 라고. 죄는 아버지가 지었는데, 벌은 엉뚱하게 내 동생들이 다 뒤집어 쓰지 않았나 말일세." 앞 뒤 없이 하는 말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알아듣지 못 할 정도로 툭툭 튀어나왔다. "어려서부터 나는 형이 무서웠어. 무서운 사람이었네, 내 형은. 항상 나를 보면 화를 냈어.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하게 웃고 다니니, 뭐가 좋 아서 그렇게 웃고 다니니. 그 여자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내가 어머니 에게 가면, 형은 쫓아와서 내 손목을 움켜쥐고 바깥으로 끌어냈어. 저 여자가 우리 어머니를 죽인 거다. 우리 어머니를 쫓아내고, 기어이 죽 게 만든 거야." 목이 메이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문 페트라르카는 곧이어 술잔을 몇 번인가 더 비워냈다. 흐트러진 하늘색머리와 풀어진 파란 눈, 가슴까지 풀어진 셔츠,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술까지, 페트라르카는 퇴폐적 인 인상을 강하게 자아냈다. 카스트로는 술을 마시고 페트라르카가 따 르는 술을 받았다. 마셔도 마셔도, 속이 뒤집힐 듯이 마셔도 갈증이 가 시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네. 내 친어머니인 전 왕비 말이야. 하 지만 형은 항상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지. 내게 검을 쥐어준 사람도 형이야. 너는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우리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나는 동조할 수 없었네. 그럴 마음, 생기지 않았어. 친어머니께 미안한 말일지 모르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지금까 지 어머니라고 부르던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어." 말을 끊고 잠시 멍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페트라르카는 미 친 사람처럼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나를 꺼리는 게, 형 탓이라고 생각했어. 형이 그렇게 못되게 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형과 엄청나게 싸운 적이 있었지. 싸웠다기보다 반항에 가까운 거였지 만……, 형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정신을 잃은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페트라르카의 말소리가 잠깐이나마 끊긴 방안은 쥐죽은듯이 적막하 다. 카스트로도 흐려진 눈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가슴에 쇳 덩이라도 매단 듯이 답답하다. 남의 이야기였다. 남의 나라, 남의 일.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 "입이 막히고, 손발이 묶인 채로 눈을 떴을 때는 암흑 같은 곳이었 어. 언제부턴가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뚜렷해졌지. 왕궁에는 비밀통로 가 있었고, 내가 있었던 곳도 그런 곳이었어. 바로 왕비의 방과 맞닿은 곳의 통로였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한참을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것은 그것 뿐이야. '세이야, 네가 왕이 되는 거다. 이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미리미리 국왕다운 몸가짐을 하거라.'" "……." "형이, 나를 다시 풀어주면서 그러더군. 세이야가 왕이 되기 위해서 는, 나뿐만 아니라 너도 죽어야 한다. 왕위계승권자 1위는 나고, 2위는 너니까. 그만 꿈에서 깨라, 페트라르카. 그 여자는 악마야!" 목울대를 떨며, 일그러진 얼굴을 한 페트라르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도망친 거야. 비겁하게, 형에게만 맡기고, 나는 여기로 도망친 거다. 이제 다 끝난 일인데,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 목이 메이는지, 왜 이렇게 심장이 아파 오는지." 카스트로는 가슴을 쥐어뜯을 듯 움켜쥐며 고개 숙이는 페트라르카를 보면서,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너나 나나 자기 나라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런 주제에 자기 나 라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하하하, 기가 막히는군. 명예? 그게 뭐더라?' '울 것 같은 얼굴이구나, 꼬마.' 그때와는 반대인 상황이다. 자신 대신에, 페트라르카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반대입장인 거라고,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 만. '버림받은 자들…….' 그랬다. 페트라르카나 자신이나, 버림받은 자들이다. 카스트로는 아 버지에 이어 또 다시 자신을 버린 한 여자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 다. '왜……' 카스트로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왜 버림받아야 했을까. 내가 뭐를 잘못했길래, 버림……받아야 했던 걸까.' 카스트로는 늘어지는 몸을 소파에 기댔다. 소파에 기댄 머리가 무겁 다. '왜 떠난 거지, 헤라?' 눈을 가린 팔이 뜨겁게 느껴진 것은, 그냥 착각일 뿐일 것이다. '왜……너마저 날 버린 거야?' 심장이 찢겨지는 것 같았다. '너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모아클럽에서 나왔을 때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카스트로는 짙은 비 내음을 맡으며 잠시 어두운 밤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현란한 거리의 불 빛을 받은 오색의 빗줄기가 매섭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불쑥 거리로 내려선 카스트로의 얼굴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떨어져 내린다. "전하!" 카스트로는 자신의 머리를 덮는 망토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강한 손이 카스트로를 마차 안으로 잡아끈다. 줄곧 무기력하게 라에르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던 카스트로는 문득, 자신이 침실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앞에는 시종장 하미 르가 조심스럽게 카스트로의 옷가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코트를 다 벗 기고 셔츠에 손을 댔을 때,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전하?" 카스트로는 잡고 있던 시종장 하미르의 손을 밀어내고, 그대로 휘청 휘청하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라에르가 부지런히 쫓아가서 카스트로의 옆을 부축했다. "전하?" 카스트로는 라에르의 손마저 뿌리치고는, 그대로 침실에 연결된 문 하나를 열어제꼈다. 타앙! 문이 벽에 부딪히며 반향을 만들어낸다. 카 스트로는 기운이 빠진 듯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물끄러미 그 안을 들 여다보았다. 그 방은 카스트로의 침실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된 또 하나 의 침실이었고, 카스트로의 부인 루시타니아가 쓰는 방이었다. "전하……?"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얇은 잠옷에 가운을 걸치고 있던 루시타 니아가 몸을 일으켜 카스트로를 바라본다. "당신인가……?" 취했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낮게, 지독하리 만치 낮게 울리는 그 음색은 어디인가 아픔이 배어있었다. 루시타니아는 의아한 눈으로 카 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카스트로는 문틀에서 몸을 떼어, 휘청거리며 루시타니아에게 다가갔 다. "당신이냐고 물었어!" "……무슨?" 루시타니아의 바로 앞에 서서, 카스트로는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쥐 었다. 루시타니아는 냄새만으로 취할 것 같은 주향과 어깨를 그러쥔 손의 악력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어깨를 움츠렸다. 카스트로는 그녀 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물었다. "당신이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밖에 생각이 안나. 당 신인가? 당신이 내게서 헤라를 빼앗아갔어? 왜? 내가 페트라르카를 만나지 못하게 해서? 그랬어? 그런 거야?" 휘둥그레진 보라색 눈망울이 충격을 담아 카스트로를 올려다본다. 카스트로는 그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해봐! 또 벙어리 흉낸가? 당신이 그랬어? 그래서……, 이제는 속 시원해? 내게서 헤라를 빼앗아가서, 이제 속이 후련해?" "무…무슨 말씀이신지……." 루시타니아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토끼처럼 순한 눈을 깜 빡이며 카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을 모른다는 듯 깨끗하게만 보이는 그 눈이 가증스러웠다. 카스트로는 질린다는 표 정으로 루시타니아를 밀쳐냈다. "……징그러워." "……!" 루시타니아의 커다래진 눈이 상처를 받고 젖어간다. 카스트로는 더 욱 잔인하게 말을 뱉었다. "당신이란 여자, 정말 끔찍해. 아나? 알고 있어?" "……왜……제게…이러시는지……전, 정말……."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눈으로, 루시타니아는 떠듬거렸 다. 끝까지 카스트로의 눈을 직시하는 상처받은 눈망울에, 카스트로는 소름이 끼쳤다. "후회할거야! 당신이 정말 헤라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당신……, 후 회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 당신……, ……정말………." "전하……!" 카스트로는 팔꿈치를 잡아오는 라에르를 흘깃 돌아보았다. 라에르는 카스트로의 상처 입은 눈에 흠칫 놀랐지만,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밀어 붙였다. "너무 취하셨습니다. 그만 주무십시오." "……." "전하께서 취중에 하신 말씀이니, 잊어주십시오. 그럼." 라에르는 루시타니아에게 목례를 하고, 거의 끌 듯이 카스트로를 데 리고 돌아왔다. 침대에 눕히자 카스트로는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라에르는 시종장 하미르에게 눈짓하고, 카스트로의 몸 위에 조용히 시 트를 덮었다. 여전히 미동도 않는 카스트로를 무거운 눈으로 보며, 라 에르는 침대 기둥에 매달린 휘장을 쳤다. ================================================================== 역시 잡담을 줄이는 게.. --;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5 - 관련자료:없음 [3178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2 21:22 조회:154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5 - ================================================================== 칼리에르 3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698년 2월이었 다. 카스트로가 테라로 온 지도 2년을 훨씬 넘기고 있었고, 페트라르카 가 반강제적으로 비쉬 본국에 송환되고도 몇 개월 뒤에 있었던 일이 다. 호수처럼 마냥 잠잠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파도에 휩쓸리듯 격랑을 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동계휴강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카스트로는 그날도 트레 아 후작부인의 저택에서 후작부인과 함께 느긋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 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주던 헤라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 이래, 카 스트로는 더 이상 고정적인 상대를 두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트레아 후작부인이 카스트로의 정부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카스트로도 후작부인도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직까지 두 사람은 편한 '친구' 사이였다. 후작부인은 곧 다가올 카스트로의 스무 번째 생일을 위해 근사한 가 장무도회를 계획 중이었다. 내색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우울해하는 카스트로의 기분을 확실하게 풀어줄 생각이었다. 헤라가 사라지고 힘 들어하는 카스트로를 지켜보던 후작부인은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 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말아요. 그것이 사람 마음일 경우에는 더더 욱 말이에요.' '그럼 뭘 믿어야 하지?' 멍하게 물어오는 카스트로를 보며, 후작부인은 생긋 미소지었다.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 후작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나는 것들을 입밖에 내었다. '황금, 보석, 집문서, 결혼서약서.' '…….' '사람 감정이라는 거, 특히 남녀간의 애정에 관한 것만큼 가변적인 것은 없어요. 지금 눈앞의 연인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고 해도, 실 은 어딘가에서 다른 상대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결국 마음을 주는 쪽이 상처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런가?' 카스트로는 멍하니 되묻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건가?' 그 이후, 카스트로는 묘하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카스트로 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비단 후작부인만은 아니었다. 후작부인은 카스 트로를 마음에 둔 여성들과 카스트로를 만나게 하기 위해 이번 가장 무도회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디저트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택 바깥이 시끄러워지더니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 한 명과 시종장 하미르가 함 께 들어왔다. 평소 시종을 데리고 움직이지 않는 카스트로였기 때문에 시종장 하미르도 저택 밖으로 나오는 것이 드물다. 항상 저택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하미르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 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했다. 카스트로는 긴장되는 마 음을 추스르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무슨 일인가?" "카르노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국왕폐하께서 위독하시니, 급히 귀 국하시라는 어명이십니다." 잠시간, 카스트로는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귀를 의 심할 수 있었던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뭐……라고?" "국왕폐하께서 위독하시니, 급히 귀국하시라는 어명이 내려졌습니 다." 표정이 바뀌지 않은 상태 그대로 썰물이 빠지듯, 안색이 하얗게 탈 색된다. 그 변화는 색소가 많던 입술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뒤늦게 바 들바들 떨리는 창백한 입술이, 억지로 무슨 소리인가를 만들어낸다. "무슨, ……무슨 소리야. 폐하께서 왜……, 이렇게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들을 정도로, 폐하의 건강이 나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확인해본 말인가, 시종장 하미르? 누가 한 말인가? 그 말을 전한 자가 누군가!" 딱딱 끊어지는 발음으로, 떨리듯 시작한 말은 이내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으로 바뀌었다. 시종장 하미르는 그런 카스트로의 반응에도 여전 히 냉정하게 대답했다. "소식을 가져오신 분은, 전 근위대장이시며, 현 친위대부대장이신 메 스메르 폰 키노, 메스메르경이십니다." "메스메르경?" 카스트로는 목에 뭔가가 걸린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미카에르 대 공의 아들이며, 자신의 사촌인 남자다. 그가 직접 테라까지 왔다는 것 은, 방금 들은 믿기 싫은 소식이,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뜻한다. "메스메르경이, 직접, 왔다는 건가, 이 테리온에?" 재차 강조해가며 물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메스메르경께서는 전하와 지스카르 전하의 일시 귀국을 요청하기 위해 테라 신전으로 가셨습니다. 저녁 무렵, 다시 들 르겠다고 언질해주셨습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의 인내로 억누르며, 카스트로 는 희게 질린 입술을 짓깨물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아 니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서, 뇌가 마비된 것 같았다. 카 스트로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가위라도 눌린 듯, 움직이지 않는 몸 을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무리였던 듯, 의자에서 일어서자마자 하얗 게 이는 스파크를 보며 몸을 비틀거렸다. "전하!" 뒤에서 받쳐주는 라에르의 손길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카스트로는 라에 르의 도움을 밀쳐냈다. "지스카르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침착하고 냉정한 얼 굴이었다. "메스메르경과 함께 테라 신전으로 가셨습니다." "나도 그리로 간다. 마차를 준비시켜!" "네, 전하." 시종장 하미르가 밖으로 나갔다. 카스트로는 몸을 돌려, 테이블 맞은 편에서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후작부인에게 정중히 사죄했다. "보시다시피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돌아가 봐야겠소. 이해해주기 바라오." "무, 물론이죠, 전하." 후작부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실례하겠소." 카스트로는 다시 단단한 갑옷을 몸에 두른 듯, 빈틈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저택을 걸어나갔다. 부모의 위독함을 안 상황에서 저만큼 빨 리 침착함을 되찾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후작부인은 왠 지 품안의 아이가 다 커서 떠나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인지도.' 테라 신전의 회의실 앞에서, 비제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해방의 기회다.' 깊어진 청록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격자무늬의 방문을 향해 꽂힌다. 비제는 조금 전, 카르노의 사신을 제이리트에게 안내해주었다. 무슨 용 무냐고 스치듯이 물었을 때, 카르노의 사신이라는 자는 순진하게 그 목적을 모두 말해주었다. 카르노의 국왕이 위독하다고, 그래서 두 왕자 전하를 잠시나마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하려고 한다고. 솔직히 말해, 가당치도 않은 요구다. 이왕자 지스카르의 경우에는 귀 국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삼왕자 카스트로의 경우는 다르다. 이제 2년 남짓한 테라에서의 생활동안, 카스트로는 자신이 충고한대로 충실하게 저 잘난 줄만 아는 한족들의 이목을 속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 이다. 한족들은 아직 카스트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 를 보내 줄 마음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가능하게 할 수도 있어.' 비제는 오만하게 자신했다. 비록 어려움이 따를지는 몰라도, 가능하 기는 하다. "비제님! 신전밖에, 카스트로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 요?" 신전의 사제 중 한 명인 인간이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한다. 비 제는 생각에 잠긴 눈을 들어 신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제가 직접 모셔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비제님." 정갈한 움직임으로 허리를 숙이고 물러서는 사제를 보다가, 비제는 한숨같은 호흡을 내쉬었다. 거래할 물건과 거래할 당사자가 모두 생긴 이상, 협상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야한다. 비제는 눈을 감고, 신어를 읊조렸다. 소리도 형체도 없이, 비제는 그 공간에서 사라졌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카스트로는 회의실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족의 장, 대신관 제이리 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대답을 해줄 때까지 그러고 있겠다는 듯이 숙인 채로 있는 카스트로를, 주위 사람들은 소리 없는 경악 속에 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카스트로를 보아왔던 메스메르 경으로서는 입조차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자존심덩어리가, 아무리 한족이라고는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진 심으로, 선처를 구걸하고 있다. "흠, ……카스트로 전하. 이 일은 저로서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 는 일입니다." 제이리트는 난처한 미소로 얼버무리려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쉽게 물러날 상대가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어 제이리트를 직시하 며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어려운 일이니까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부탁드립니다. 제이리트님께서도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가 계실 것 아닙니까. 어머 니도 여의고, 이제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아버지의 임종이라도 보고 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 니다. 부디, 들어주십시오." 속속들이 들어와 앉아있던 한족 5가문의 수장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 하고 있었다. 제이리트는 어렵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스트 로는 지금 떼쟁이 어린아이 같았다. 되든 안되든 무조건 조르고 고집 부터 부리는. '하긴, 어리긴 어리지. 이제 겨우 열 아홉…….' 제이리트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족 5가문 수장들을 살폈다. 흥미로 운 시선으로 카스트로를 보는 자, 조금은 연민이 섞인 눈으로 보는 자, 냉정하게 제이리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이는 자. 가지각색의 반응들 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전하. 저희로서도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충분히 토의를 하고 전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댁에 돌아가서 마음을 진정시 키고 기다려주십시오." 차분한 음성이 제이리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카스트로는 울컥하 는 기분을 억누르고 다시 애원했다. "위독하시답니다. 내 아버지가 위독하시답니다! 한시가 급한데, 언제 까지 토의만 하시겠다는 겁니까? 다시는 이런 부탁, 드리지 않겠습니 다. 그러니까, 이번만 선처해주십시오.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제이리트는 신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짓깨물고, 숨을 가다듬어 평온 을 가장했다. "되도록 빨리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장은 이말 밖에 드릴 수 없군요." 절망과 원망이 어리는 카스트로의 눈이 제이리트의 시선을 꿰뚫는 다. 제이리트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스트로. 그만하거라. 제이리트님과 한족 5가문의 수장님들께서 어 련히 알아서 결정하실까. 걱정 말고 돌아가자, 카스트로." 보다못한 지스카르가 울 듯이 서 있는 카스트로를 다독였다. 카스트 로는 고개를 숙이고, 억눌린 듯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떻게 되실 지 모른단 말입니다!" "알아.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니. 돌아가자, 카 스트로." 지스카르는 카스트로를 다독이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상상도 못 했던 그 이질적인 광경을, 메스메르경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리 국왕폐하의 소식이 충격적이라고는 하지 만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걸까, 의심이 들었다. 과연 저 사람이 자 신이 아는 사촌 카스트로가 맞는지. 언제나 도도하고 고집불통에, 제 잘난 줄만 아는 철부지 왕자가 맞는지. 메스메르경은 쫓아가서 과연 카스트로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메스메르경이라고 하셨던가요?" "아, 네. 제이리트님." 메스메르경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길다란 탁자의 상석에 앉아있는 젊은 한족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족 특유의 신비스러운 외모에 온화하 고 부드러운 느낌이 더해진 모습이다. "메스메르경께서도 내일쯤, 다시 들러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결론이 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찾아 뵙겠습니다." 메스메르경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한족을 만난다는 설 렘과 경외감은 이미 뒷전이었다. 그보다 더욱 기가 막히고 놀라운 일 이, 카스트로의 신상에 일어났으니까. 메스메르경은 여기로 오기 전에 아버지가 당부했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되도록 한족들의 환심을 사둘 것. 한족들이 카스트로를 어떻게 생각 하는지 알아볼 것. 카르노까지 들려오는 카스트로에 대한 소문의 진상 을 확인할 것. 그리고 일년사이 카스트로가 어떻게 바뀌어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것. 메스메르경은 아버지 미카에르 대공이 가장 강조하던 마지막 조항 이, 의외로 흥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스트로를 만나 다시 한번 그 변화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 요즘에는 경황없이 올리는 경우가 많은 듯.. --; 실수가 없어야할텐데..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6 - 관련자료:없음 [3183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3 21:32 조회:163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6 - ================================================================== 어느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까지 나가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벽난로 불빛이 휘장 사이로 스며들어와서, 침대 안은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카스트로 는 가슴을 들썩이며 한숨을 쉬어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에 의지해 촉감 좋은 가운을 걸치고 벽난로 앞 소파에 가서 몸을 파묻었다. 술이라도 한잔 있다면 좋겠지만, 일부러 내보낸 시종장 하미르를 부 를 수도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런 소식 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무디지도 않았 다. 지금도 온몸의 피가 아프게 뛰고 있다. '오늘 밤, 전하를 찾아 뵙겠습니다.' 카스트로가 신전으로 안내 받을 때,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라고 충고 하던 말끝에 붙였던 말이다. 그 작고 어려 보이던 한족, 아니 한족의 이단아 비제가 소리 없이 전한 말이다. 카스트로는 불쑥 전해져온 말 에 흠칫했지만, 곧 전의 경험을 되살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가 있었다. '전하와 한가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라에르는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것 같지만, 비제가 카스트로에게 어 떤 말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 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서 조용히 걸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카스트로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카스트로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래야만 머릿속도 정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데워진 공기의 흔들림을 느낀 것은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카스트 로가 혹시, 하며 눈을 떴을 때는 비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전에 도 직접 눈앞에서 보여준 것이지만, 소리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사람 이 나타난다는 것은 섬뜩하기만 했다. "늦으셨군요, 비제님. 앉으십시오." 인사는 생략한 채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면서 새삼 느 긋하게 예의까지 갖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비제 역시 마 찬가지였던 듯, 아무 말 없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아 카스트로의 얼 굴을 직시한다. 벽난로의 희미한 빛밖에 없는데도, 비제의 맑고 투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인식된다. 그 안에는 평소와 같은 천진스런 미소가 들어있지 않다. 대신 보이는 것은, 깊고 깊은 수렁 같은 어둠이 다. "전하를 카르노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서두를 그렇게 꺼내고, 비제는 잠시 간격을 두어 차분하게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다시는 테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해드릴 수도 있습니 다." 카스트로는 놀란 눈으로 비제를 바라보았다. 비제는 단호한 말투로 말하며, 카스트로의 눈을 빨아들일 듯이 응시했다. "원하신다면, 카르노를 전하의 손안에 쥐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 저와, …거래, 하시겠습니까?" 마치 악마의 유혹 같다고 느꼈다. 카스트로는 놀람에 이어 당혹스런 기분으로 비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은 한마 디도 하지 않았지만, 비제는 그런 카스트로의 마음을 읽는 듯 짚어내 었다. "저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저와 전하, 서로를 위한 거래이지, 전하께 해를 입히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럼,……." 카스트로는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다시 말했다. "그럼 비제님이 원하는 게 무언지 말해주시겠습니까? 내게서 비제님 이 얻고 싶은 게 뭡니까?" 비제는 카스트로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피처럼 붉은 입술이 단호하게 움직인다. "저도 카르노로 데려가 주십시오. 지가문의 세리카님이 가지고 계신 자리, 그걸 주십시오."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카스트로에게, 비제는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테라를 벗어나고 싶어하시는 이상으로, 저도 이 땅 테라 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테라를 싫어하는 이상으로, 저도 테라 를 싫어합니다. 한족을 증오하시지요? 저는 이 테라에 있는 한족 전부 를 말살시키고 싶습니다." 그 격렬한 증오의 감정이 눈에 보일 듯 일렁인다. 카스트로는 비제 가 보여주는 뜻밖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진심이다, 라고 느껴진다. 저 한족의 이단아가 보여주는 저 감정들은 정말이다, 라고. 어째서인지 는 모르지만, 그런 믿음이 왔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악질적인 장난 이 아니다. "어째서……라고, 물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혼혈인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한족을 증오해야하는 이유가 되는지. 납득할 만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아무 근거도 없이 당신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비제는 빨간 입술을 꾹 다물며, 벽난로의 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꽉 다문 입술과 살짝 찡그려진 눈썹만으로도 그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저런 사람이었던가?' 항상 웃는 모습밖에는 보여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혼 을 빼놓을 정도로 천진하고 예쁜 웃음을. 티없이 맑았던 그 미소가 모 두 거짓말처럼 사라져있는 얼굴은 차고 독해 보였으며, 또한 묘하게 아름다웠다. "제 어머님은 류가문의 따님이셨습니다. 류가의 수장이신 레위제님 이 제 어머님의 아버님이시고, ……그래서 레위제님은 제 외할아버님 이 되십니다." 카스트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비제를 쳐다보았다. 길게 드리워진 감색의 속눈썹 아래, 청록색의 맑은 눈망울이 아련하게 잠기어간다. "제 어머님은 지가문의 수장 세크리트님의 약혼녀이셨습니다. …… 아름다우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청혼자 중에 가장 유력 한 지가의 세크리트님을 선택할 정도로." 한족도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 왔다. 카스트로는 한족을 이상한 종족이라고 치부해버렸기 때문에, 그 들이 다른 인간과 다름없이 약혼하고 결혼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들도 사람이었던가?' 카스트로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비제의 맑은 음성이 차가운 향취와 함께 흘러나온다. "하지만 어머님은 가문끼리의 정략으로 결정된 약혼자, 세크리트님 이 아닌 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셨습니다. 만남은 비밀스러웠고,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이미 어머님이 저를 가지신 뒤 였습니다. 한족들은, ……비밀리에 제 아버지를 죽이려했습니다. 한족 들은 아버지를 죽이는데 실패했지만, 아버지는 테라에 두 번 다시 발 붙일 수 없게 되셨습니다." 비제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한 투였다. "한족들은 아버지를 쫓아버리고, 남겨진 어머님의 처리에 골몰했습 니다. 어머님의 태내에 있던 저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 니다. 한족은 지상최고의 종족이고, 한족은 한족 자체로 완벽하니까, 혼혈 따위,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제가 선례가 된다면, 제 2, 제 3의 혼혈아가 나올 테니까. 혈통의 순수성을 위해서라도, 저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니까요. 결국……." 비제의 청록색 눈동자가 더욱 찬 기운을 토해냈다. 놀랍도록 감정이 잘 드러나는 눈이었다. 천사의 미소와 악마의 분노가 공존하는 매혹적 인 눈이다. "한족들은 어머님을 감금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게 하고, 그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죽일 심산이었겠지요. 제가 태내에 있는 동 안, 어머님은 빛도 한 번 보지 못하고,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갇혀 계 시다가, 2년 반만에 저를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그때 죽 지 않은 것은, ……어머님께서 외할아버님께 하신 부탁 때문이었습니 다. 저를 류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달라는. 외할아버님은 죽어 가는 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생소한 소리였다. 아이를 2년 반만에 낳는다는 얘기도 그렇고, 죽이 려던 아이를 가문에서 받아준다는 이유만으로 살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류가문 이 당신을 보호한다는 뜻입니까?" 비제는 벽난로의 불빛에서 시선을 돌려, 당혹스러운 눈으로 카스트 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예쁘게 미소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용서를. 전하께서 아시리라고 생각하고, 제 멋대로 말해버렸군요. 한족은, 한족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의 불문율입니 다. 아무래도 한족의 수가 워낙 적다보니, 그런 불문율이 생긴 것이 아 닌가 합니다만. 류가문에서 저를 받아준다는 의미는, 저를 한족으로 인 정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족은 저를 죽일 수 없었던 겁니다. 고지식하지만, 의외로 그런 규칙에 얽매이는 자들이 한족들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한족들을 증오한다는 것입니까? 어머니와 아버지 의 복수를 위해서?" 비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몇 가닥 흘러내린 감색의 머리카락이 비제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실은, 그 전말을 알게 된 것은 ……10년 전이었습니다. 그 일이 없 었다면, 지금까지도 제 부모님에 대한 진실을 몰랐을 겁니다." "그 일?" 비제의 긴장해있던 어깨가 무겁게 내려가고, 눈빛은 한없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인간이었습니다. 한없이 밝게 웃던 카르미 나는 제게, 케테르님보다 더 빛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 그때였다. 조용하던 침실에 조그마한 문소리가 나고, 소리 없이 한 사람이 들어왔다. 카스트로가 일어나려는 것을 비제가 팔로 붙잡았다. "그냥 계십시오." "하지만……." 카스트로는 지금 들어온 사람이 시종장 하미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시간에 하미르가 왜…….' 시종장 하미르는 양탄자를 밟으며 소리 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휘장 을 헤치고 들어갔던 시종장 하미르는 곧이어 벽난로 쪽으로 다가왔다. 카스트로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카스트 로와 비제가 벽난로를 마주하며 앉아있었지만, 시종장 하미르는 마치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곧바로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올 때부터 결계를 쳐두었습니다. 저 사 람은 전하와 저를 볼 수도 없고,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저 사 람에게는 전하께서 침대에 잠들어있는 것으로만 보일 겁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비제를 바라보던 카스트로는 이내 옆을 스쳐가는 시종장 하미르를 다시 쳐다보았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종장 하미르 는 벽난로 앞에 서더니, 불쏘시개를 들고 벽난로의 장작을 헤치고 있 었다. '뭐 하는 거지?'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의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이다. 언제나 속모를 냉담한 얼굴로 가장하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다.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던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 르가 마른 장작을 벽난로에 집어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재 를 밀어내고, 빨갛게 달아오른 장작더미 위에 새로운 장작을 올려놓고, 가만히 뒤로 물러나 불이 옮겨 붙기를 기다린다. "충실한 시종을 두셨군요." 비제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시종장 하미르는 장작에 불이 옮겨 붙자, 손을 들어 불을 쬐어보더니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불쏘시개를 내 려놓았다. 카스트로는 뭔가 뜨끔한 기분이었다. 시종장 하미르가 미소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시종장 하미르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조용히 바깥으로 나갔다. 카 스트로는 묘한 침묵이 어색해 비제를 돌아보았다. 비제는 잔잔한 미소 를 띄우고 카스트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천진한 아기 같던 미 소와는 다른, 조금은 성숙한, 아픔을 아는 사람의 미소였다. "비제님?"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평생 곁에 두십시오. 결코 전하께 해되는 일 없을 사람입니다." 카스트로는 흠칫해서 굳어버렸다. 전에도 몇 번인가 자신의 속을 짚 어낸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저 다 아는 듯한 말투와 미소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전하 곁에는 전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전하와 함께 다니는 그 호위기사도 그렇고……, 전하를 믿고 전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가?"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입에 배인 자연스러운 하대. 비제는 초점 이 흐려진 카스트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 는 것 같았다. 후회와도 같은, 미안함을 지닌 오라의 색이 아름다웠다. 비제의 얼굴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저 사람은 저렇게 솔 직하다. 그 솔직함을 죽이고, 자신의 충고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속이 고, 그 자신마저 속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워도 그는 해냈다. 그런 강한 근성이, 그의 운명을 이끌어 가는 것일 테다. 바로 지배자로서의 운명을. 비제는 그것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가 자 신을 도와준다면. "카르노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 퇴고하면서, 이렇게 진땀빼는 것도 오랜만인듯..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7 - 관련자료:없음 [3184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4 20:50 조회:148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7 - ================================================================== "카르노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던 말이, 갑작스레 쇳덩이 같은 무게로 카스트로의 가슴과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다. 카르노를 손아귀에 쥐 어주겠다고, 카르노의 주인이 되게 해주겠다고. 어떻게, 이 사람은 그 리 쉽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 "전하께서는 남의 아래에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아십니까? 스스로 얼마나 찬란한 오라를 뿌리고 계신지.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위협하고, 또한 얼마나 끌어당기는지. 타고난 지배자의 오라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무슨……." "모르는 척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지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런 오라를 뿌릴 리가 없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솔직하게 생각해보십시 오. 정말 아베르노 전하의 동생으로서 만족하십니까? 저절로 주어질 공작의 자리에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카스트로는 턱에 힘을 주고 비제를 쏘아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조심 스럽고 거리껴지는 것들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외면하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가슴에 있는 욕망을. 왜 카르노로 돌 아가고 싶으신 겁니까? 단지 부정을 못 잊어서? 그것뿐입니까, 정말? 솔직하신 분이,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숨기려고 하시는지 모르겠군 요. 가장 솔직해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전하의 운명이 걸린 문제 니까요." 카스트로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 유일한 빛인 벽난로의 장작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솔직하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 버지가 돌아가시면 끝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초조해하는 것은 단 지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다음의 일이 그리 골머리 썩이지 않고도 훤히 내다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테라로 오기 전에 그토록 사이가 악화 되었던 아베르노와 자신이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대로 아베 르노가 왕위를 잇는다면, 카스트로는 더 이상 카르노에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왕세자비와 미카에르 대공이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도 모른다. 국왕의 신뢰와 총애 를 얻는다면 모를까, 이미 눈밖에 난 왕제의 목숨이란 그야말로 벌레 만도 못한 것이다. 가볍게는 힘없는 무기력자나, 무겁게는 목숨이 위험 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버지 칼리에르 3세의 사후에 카스트로를 기다 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그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하게.' 카스트로는 한 겹을 더 파고 들어갔다. 아베르노가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것은 최악의 가정일 뿐, 실 제로는 아베르노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다른 왕제들처럼 살게 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로시에르 숙부처럼 시골 영 지에서 묻혀 살거나, 미카에르 대공처럼 권력의 주위에서 얼쩡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온다. 싫었다! 그런 버러지 같은 삶을 바란 게 아니다. 형의 지배 아래에서 다른 신하들처럼 굽실거리며 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형 의 눈치만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남이 해코지하기 이전 에 스스로가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카스트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카르노!' 밑바닥으로 파고 들어간 감정의 끝에는 결국 저런 추악한 욕망만이 들어있었다. '갖고 싶어!' 갖고 싶었다. 죽을 것처럼 갖고 싶었다. 스스로의 욕망이 혐오스럽지 만, 그래도 너무나 갖고 싶었다. 아베르노가 아니다. 아베르노를 도와 카르노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지만, 정말은 그 게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힘으로 카르노를 완전하게 하고 싶 었다. 자신의 손으로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고, 대륙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키워놓고 싶었다. '내 손으로!' 이대로 아베르노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카르노를 테라 의 종으로 전락시킬 아베르노에게는 절대로 넘길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어머니의 태 내와 같은, 자신의 나라다. 누구의 손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누구 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종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카스트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카르노로 돌아가야 했다. 너무 늦기 전에 무슨 일인가를 해야 했다. '그 무슨 일이라는 것은…….' 카스트로는 입술을 악물었다. 쉽게 입밖에 낼 수도, 생각하기도 거리 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카르노를 아베르노에게 넘 겨줄 셈인가? 라고, 자문해본 것의 대답은 하나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카스트로는 어느 때보다 강한 오라를 내뿜으며 비제를 바라보았다. "내가…… 카르노를 갖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어느 새인가 잠기어버린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비제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한족 한 명의 힘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한 나라의 국왕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비제는 싱긋 미소지었다. 음모가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그러면서도 한없이 사람을 홀릴 듯한 그런 미소다. "한족이 아니라, 저 '비제'의 힘입니다. 그리고 제가 전하를 도우면, 벨도 전하를 돕게 될 겁니다." "벨?" 그게 누구냐는 듯한 시선으로 보는 카스트로에게, 비제는 난처한 듯 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전에 전하께 제 편지를 들려보냈던 자 말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쉽 게 잊혀질 종류의 남자가 아닐 텐데요. 상당한 미남이지요. 이곳 물질 계에서뿐만 아니라, 천계와 마계를 통틀어서도 그만한 미모는 드뭅니 다." 미묘한 뉘앙스의 말이다.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계와 마계?" 비제는 여유롭게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 악마입니다. 들어보셨을 지도 모르겠지만, 흔히 불리는 이 름은 벨리알입니다. 현 마계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루시퍼를 따라 마계 로 간 타천사이고, 신들마저도 감탄했다던 미모라더군요." "……악마? 악마 따위가 왜 당신과……" 카스트로의 경악으로 굳은 얼굴을 마주하며, 비제는 천사처럼 순수 하고 악마처럼 요기로운 미소를 띄웠다. "한족들의 억측도 때로는 놀랄 만큼 정곡을 찌를 때가 있더군요." "……?" 비제는 예의 그 천진스러운 아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거 렸다. "제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말……, 한족들은 제가 있어서는 안될 자 라는 뜻으로 한말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제 아버지라는 남자, 악마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꽤 고위급의." "……!" 말도 못하고 질려버린 카스트로를 씁쓸한 눈으로 응시하며, 비제는 되도록 가볍게 말을 이었다. "악마의 자식이라면, 절대 도움 따위 받지 않겠다는 류이신가요, 카 스트로 전하?" "……." "신의 종이 되는 것도 좋을 지 모릅니다. 그렇게 평생 한족들에게 얽매여 종처럼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굳이 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할……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비제는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들은 말 때문에 충격과 혼란이 카스트로의 온몸과 정신을 휘감고 있었 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 말 듣고 놀라지 않으면 인간이 아닐 테니까. 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되도록 빨리 해주십시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 보답으로 전하의 손에 카르노를 쥐어드리겠 습니다. 테라를 치시겠다면, 한족은 제가 맡아서 처리해드리죠. 그것은 제 소망이기도 합니다. 전하께서는 테라의 인간들을, 저는 테라의 한족 들을. 어떻습니까?" 입술끝을 들어올리고 웃는 비제는 완연하게 악마의 사악함을 띄고 있었다. 역시, 라고 할만큼 한족들의 결정은 뻔한 것이었다. 전날처럼 장황하 지도 않게 제이리트와 단 둘이 만나는 자리에서, 제이리트는 매우 유 감이라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해왔던 것이다. "지스카르 전하께서는 이미 테리아의 과정을 마치셨으니, 언제든 돌 아가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겨우 2년의 과정을 마 치셨습니다. 이제 며칠이면 테리아도 개강할 것이고, 그러니, 아무래도 카스트로 전하께서 귀국하시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핑계였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렇게 따졌다. "당신은 이 따위 공부가 당신 부모의 임종보다 중요하시오?" 같잖은 존댓말도 치워버린 뒤였다. 기가 막히는 상황에 예의까지 따 질 여유는 없었다. "공부라는 것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는 지금이 가장 공부하 기 좋은 시기입니다." 점잖게 충고하듯 하는 말에 머리에 핏대가 오른다. 카스트로는 회의 실 탁자 너머에 있는 제이리트의 멱살을 움켜쥐고 윽박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당신은 부모도 없나? 한족은 부모도 없 어? 이 상황에서 공부가 무슨 필요야!" "무례하십니다, 카스트로 전하!" 제이리트는 노기어린 눈으로 카스트로를 쏘아보았다. 멱살 쥔 손을 푸는 힘은 의외로 강했다. 카스트로는 제이리트의 작은 손에 손목을 비틀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리트는 싸늘한 목소리로 나직나직하게 말했다. "어리석게 굴지 마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전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든, 카르노가 망해먹든 말든, 전하께 서 계셔야 할 곳은 바로 이곳, 테라입니다.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 다." 제이리트는 신경질적으로 카스트로의 손을 뿌리치고, 신관복이 더러 워졌다는 듯 탁탁 털어냈다. "절대……안 된다고?" 잔뜩 억눌린 말투였다. 카스트로의 이를 가는 듯한 모습에도, 제이리 트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꾸하는 제이리트를, 카스트로는 감추지 못한 살기로 쏘아보았다. 제이리트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가겠어." "못가십니다." 카스트로는 몸을 바로 세우더니, 비릿하게 비웃었다. "두고 볼까? 내가 가는지, 못가는지." "무슨……!" 카스트로는 싸늘한 눈초리로 제이리트를 일별하고, 미련 없이 뒤돌 아섰다. 드르륵! 쾅! 매끄럽게 여닫히는 미닫이문이 거칠게 닫혔다. 제 이리트는 닫혔다가 반동으로 다시 조금 열린 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 았다. 제이리트가 인간에게, 순간이나마 압도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카스트로는 뚜벅뚜벅 걸어나가다가, 라에르와 비제만 남아있게 되었 을 때 스치듯이 말했다. "거래, 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빠른 시일 내, 제가 직접, 아니면 벨을 통해 찾아 뵙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위아래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와 손잡는 것? 두렵지 않았다. 전에 카르노를 떠나며 했던 생각이 현실로 나타날 줄 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생존을 위한 것이다. 자신과 카르노의! 죽는 것 아니면 사는 것.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카스트로는 곱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 벌써 12월이 성큼~ 이군요. 생각만큼 글은 안써지고.. 날짜는 제멋대로 날아가고.. --; 시계약을 빼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하는 헛생각만 하며, 살고 있네요.. ^^; 대체 오타수정은 언제 할 것이며..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중..) ^^ 우울해서 하는 넋두리였습니다. 건강 주의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8 - 관련자료:없음 [3188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5 21:19 조회:157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8 - ================================================================== 세상에 밤이 내려앉듯, 테라 정상에도 밤은 어김없이 들어서고 있었 다. 평소라면 숙면을 취하고 있을 시각이었지만, 이날 대신관 제이리트 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있었던 카스트로와의 일이 자꾸 만 제이리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겠어. 두고볼까? 내가 가는지, 못가는지?' 자신의 입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든다. 전혀 자신만만할 이유가 없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마 치 손안에 든 것을 이야기하듯 말할 수 있는 걸까. 소박한 침대에 앉아있던 제이리트는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조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 어 더욱 답답했다. 제이리트는 문득 신탁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마치 암호와도 같았 던 그 신탁은, 몇 개의 단어로 되어있을 뿐이었다. '카르노의 3, 멸(滅)' 해석은 대신관인 제이리트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카르노의 3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카르노에 한족에게 위험한 무언가가 세 개 있다는 것인지,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인지, 3과 관련된 날짜를 뜻하는 것인지. 제이리트 는 곰곰이 생각해 본 뒤에 카르노의 세 번째 왕자일 것이라고 해석해 냈지만, 그것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래 뜻한 대로 테라에 데려오지 않은 카르노의 삼왕자가 은근히 마음에 걸려서였을 수도 있 었다. 카르노의 3이 카스트로라고 해도, 멸(滅)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판 단할 수가 없었다. 카스트로를 멸하라는 것인지, 카스트로가 누군가를 멸한다는 뜻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카르노의 삼왕자가 아마도 한족에 게 좋지 않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짐작뿐이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좋지 않은가, 라고 한족 수장들의 뜻이 모인 적이 있었다. 어떤 의미이든, 그 카스트로라는 왕자가 자신 들에게 좋은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아예 화근을 없애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견은 곧 일단 테라로 데려오자는 의견에 밀려버렸다. '카르노의 3'이 삼왕자를 뜻한다는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한 때에 괜히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아무리 세력을 약화시켜놓아도 카르노는 카르노였다. 그 호 전적인 성향으로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지 않는 그 오만한 국가가, 그 거만한 국민들이, 제 나라의 왕자가 타국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인질로 잡는 것과, 죽이는 것은 차원이 틀린 문제였다. 인질로 잡아두면, 카르노인들은 수치스러워하면서도 결 국 인질을 쥔 한족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죽여버린다 면 그 사나운 국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라를 향해 날카로운 이 빨과 발톱을 치켜세우고 치명적인 상처를 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확장해 가는 테라의 영향 력을 불만스러워하는 나라는 비단 카르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묵 묵히 테라를 묵인해 주고있는 비쉬도, 레이얄도, 그리고 저 북국의 라 디프도, 테라가 일국의 왕자까지 살해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카르노의 왕궁을 점령하고 왕가의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었으 면서도, 기어이 왕실의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족이 카스트로를 살해한다면, 그들은 한족이 자신들에게도 위협이 되 리라 판단할 게 틀림없었다. 테라는, 아니 한족은 아직 그들 중 어느 한 나라와도 정면으로 맞설 만큼 강하지 못하다. 결국 인질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인질로 삼아 옆에 두고 보는 것이 나았다.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다른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게. 쇠목걸이로 매달아 묶어두고,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날개는 미리 꺾어버려 날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게.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억 센 두 팔을 결박해서, 그렇게 새장 속에 가둬두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제이리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그 망할 카르 노 국왕은 죽으려 든단 말인가! 이제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꺾 인 날개로 자포자기한 모습일지라도, 2년은 아직 너무 짧다. 잠깐일지 라도 방심해서 새를 날려보낸다면, 그 사나운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 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은 카스트로는 보내줄 수 없었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한숨으로 땅이 꺼지겠어, 제이." "……!" 제이리트는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경악으로 물드는 시야 가득,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 왔다. 상아빛의 단단한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느슨하게 풀어놓 은 흰색 셔츠와 늘씬한 다리를 감싼 검은색 바지만의 단출한 차림이지 만, 이 남자가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옷차림은 더없이 야한 모습이 된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금발이 침대까지 흘러내리고, 손대면 물들 것 같은 청색의 눈동자가 방글방글 눈웃음치며 제이리트를 바라 보고 있었다. "오랜만인데, 인사도 하지 않나, 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듯이 달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이리트 의 생각은 달랐던지, 순간적으로 놀랐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린다. 제 이리트의 굳은 입술이 급박한 느낌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어…어떻게……." 벨리알은 해사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우아하기까지 한 몸의 궤적을 따라 반짝이는 금발이 출렁거린다. 벨리알은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쥐를 몰듯이 제이리트에게 다가섰다. 제이리트는 뭔가에 떠밀리듯 벽 쪽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벌써부터 흥분돼서 말을 더듬는 거야? 쿡, 여전히 귀엽구나, 제이." 제이리트는 등에 벽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제이리트의 마음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제이리트는 공포에 젖은 눈을 내리깔며, 파리해진 입술을 아프게 배어 물고 있었다. 슥! 벨리알은 제이리트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희고 모양 좋은 손가 락을 들어 제이리트의 얼굴선을 따라 그어 내렸다. 비 맞은 새처럼 애 처롭게 파르르 떨리는 모양새가 벨리알을 즐겁게 한다. 겁에 질린 어 린아이를 놀리는 것은, 역시 재미있다. 벨리알은 제이리트의 뺨을 쓰다 듬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여전히 매끄러운 피부로군. 내가 무서워? 왜 그렇게 떨지, 제이?" 벨리알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연인에게 묻는 듯한 어 투였다. 벨리알은 뺨을 쓸던 손을 턱밑으로 끌어내려 제이리트의 턱을 들어올렸다. 벨리알의 수려한 눈이 제이리트의 투명한 감색 눈을 지그 시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위치에서 벨리알은 유난히 촉촉한 입술을 끌어올렸다. 손끝으로 바들바들하는 떨림이 전달된다. 벨리알은 점점 더 이번 일이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역시 이런 게 체 질인 모양이다. 힘없는 아이를 괴롭히고, 협박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종족보다 감촉이 좋은 한족의 아이를 건드리는 것은, 확실히 다른 귀 찮은 일들보다 일할 맛도 났다. 매일 이런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뭐, 비제님을 멀리 두고 감상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역시 따스 한 체온과 달콤한 체향을 직접 느끼는 것이 좋아.' 제이리트는 벨리알이 웃는 모습에 더욱 바싹 긴장했다. 정신이 나갈 듯한 공포 속에서 제이리트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듣기에 도 괴로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왜, 왜 또 나타난 겁니까? 또 내게 뭘 시키려고!" 키득키득. 벨리알은 몸을 뒤로 물리고 배를 감싸안으며 웃었다. 마치 광대의 연기처럼 과장되게 웃던 벨리알은, 여전히 실실거리며 아름다 운 눈썹을 휘었다. "대신관 자리를 오래하다 보면, 멍청한 한족녀석도 똑똑해지나 보구 나. 아니면 내 교육방식이 워낙 뛰어났던 건가?" "허, 헛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씀하십시오!" 벨리알은 유혹적인 입술을 슥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큰소리도 저렇 게 부들부들 떨면서 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나. 벨리알은 혀를 찼다. '어쨌든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너무 겁먹어버린 제이리트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벨리알은 피식 웃음 지었다. "좀 앉지? 아, 그리고 뭐, 알고있을 테지만 혹시 몰라서 말해두지. 한족이란 녀석들, 하나같이 학습능력이 부족하니까. 내가 들어선 순간 부터 너는 내 결계 안에 있는 거야.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얌전히 말 들어, 알겠지, 귀염둥이?" '귀, 귀염둥이?' 제이리트는 두려운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올해 나이 112세였다. 한 족들은 물론이고, 다른 인간들마저 경의를 표하는 자신에게, 귀염둥이 라니! '하니'이라는 말보다 더 황당했다. "뭐해, 앉으라니까? 아니면 내가 앉혀줘? 내 무릎에 앉고 싶다면 굳 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어느새 제 방인 양 침대 위에 앉아서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벨 리알이었다. 제이리트는 이를 갈면서도 책상 옆에 있던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화난 와중에도 신관다운 정갈한 자태였다. 벨리알은 귀엽다는 듯이 제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뭐……, 그렇게 급하게 군다니 어쩔 수 없지. 비제님이 카르노로 가 고 싶어하신다." "네?" 벨리알은 다시 츳츳 혀를 찼다. 한번 말해서는 알아듣는 법이 없다, 한족이란 녀석들은. "비제님을 카르노로 보내라는 말이야. 아, 그리고 카스트로라는 인간 도 같이 보내. 비제님이 그 인간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시더군."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카스트로 전하는 물론 비제님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강하게 말해놓고 나서, 제이리트는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눈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라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경직되어 굳은 제 이리트의 눈에, 벌써부터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는 벨리알의 모습 이 들어왔다. "정말 학습능력이 없다니까. 나는 거절을 싫어한다고 말했을 텐데, 제이. 너도 잘 알잖아? 어차피 너는 내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 을!" 제이리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벨리알이라고 해도, 이번 일은 안 된다. "이것은 쉽게 들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에 있었던 비제 님의 문제와는 차원이 틀린 문제란 말입니다!" "알아. 어려운 문제니까 네게 왔지. 그래서, 대답은?" 징글맞도록 태연한 모습이었다. 제이리트는 속으로 이를 북북 갈았 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송합……뭐, 뭐얏!" 제이리트는 머리채 위쪽을 잡으며 비명을 올렸다. 순식간에 제이리 트의 뒤로 이동한 벨리알이 제이리트의 머리채를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벨리알의 격한 몸짓에 길게 땋은 머리가 통째로 빠져나갈 것 만 같았다. 벨리알은 길다란 머리채를 한 바퀴 손에 돌려 감고, 더 강 하게 아래로 잡아당겼다. 뒷머리가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위로 향한 제 이리트의 고통스런 눈가에 맑은 눈물이 맺혀졌다. "나를 화나게 하지마, 제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네게 온 거 다. 내가 바보인줄 아나?" 벨리알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눈가에서 관자놀이로 또르륵 굴러 떨 어지는 눈물을 핥았다. 눈물줄기를 따라 올라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위에 키스하고, 제이리트의 입술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낮고 쉰 듯한 목소리가 경고하듯 울려 퍼졌다. "카스트로를 카르노로 돌려보내. 그리고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비제 님을 그에게 딸려보내라." 춥. 벨리알은 제이리트의 떨리는 입술에 입맞추고, 그대로 입술을 미 끄러뜨려 귓불을 깨물었다. "말 들어, 하니. 그러지 않으면, 케테르의 신상 앞에서, 그 반반한 제 단 위에 널 올려놓고 범해버릴 테니까. 이왕이면 구경꾼들도 많이 불 러모으는 게 좋겠지. 어떨까? 우리 둘만 있을 때처럼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달콤한 신음을 내고, 내 목에 매달릴까? 궁금하지 않아? 응? 정말 해보고 싶어지는데? 할까? 응?" 제이리트는 억눌린 울음을 삼키며 머리를 내저었다. 쉴새없이 눈물 이 흘러나왔다. 이 남자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런 일이라도 얼마 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족의 대신관이라는 최고의 지 위에 있어도 제이리트는 이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방어수단도 갖지 못 했다. 이 남자가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제이리트가 숨겨야하는 치부였다. 한족의 대신관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였다. 그것도 이런 성적 노리개 라는 사실은……. 간간이 억눌린 울음소리를 뱉어내는 제이리트의 젖은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벨리알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대답은?" "……해, 해보겠습니다." 벨리알은 다시 머리를 잡아당겼다. 의자의 등받이에 제이리트의 뒤 통수가 아프게 부딪혔다. 싸늘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해보겠다 따위의 어설픈 대답이 아니야. 대답 은, 제이?" 제이리트는 눈물을 삼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벨리알은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제이리트의 머리를 손에서 떼어냈다. 땋은 머리끝의 매듭이 언제 풀었는지도 모르게 풀려있었고, 벨리알은 잘했다는 듯이 제이리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땋은 머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내 사랑." 숨막히도록 꽉 묶여있던 감색의 머리가 바닥까지 출렁거리며 풀어져 내렸다. 벨리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다가, 천 천히 제이리트의 신관복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촉촉이 젖은 듯한 목소 리가 제이리트를 유혹한다. "잘했으니 상을 주지. 모처럼 근사한 밤이 될 거야." 제이리트는 고개를 틀면서 눈을 감았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저주와 벨리알의 손을 느끼는 자신의 몸에 대한 역겨움에 다시 눈물이 흘렀 다. 사랑스럽다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아른거린다. "괜찮아, 제이. 쉬이." ================================================================== ... 꾸벅.. 좋은 하루 되세요.. - 겁먹고 도망가는 새 씀 (18금 아닐거야, 를 외치며) - 제 목:[新군주론] 제 3 장 - 89 - 관련자료:없음 [3192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1-26 21:58 조회:167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89 - ================================================================== 그 시간, 비제는 전날 밤과 같은 장소에서 카스트로와 마주하고 있 었다. 침실의 풍경은 전날과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벽난로의 불빛은 희미하게 빛났고, 카스트로는 그 앞 소파에 앉아있었다. 마치 전날 밤 의 연속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암살입니다." "암살?" 비제의 단호한 대답에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는 꽤 구 체적인 계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어떻게 카르노를 손에 넣을 수 있 는지, 어떻게 한족들을 처리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세력을 끌어 모아 쿠데타를 일 으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모자랍니다. 명분도 없구요."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카스트로는 별로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실패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패해도 전하께는 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암살자라도 고용하겠다는 겁니까?" 마뜩찮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비제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씁쓸 한 미소를 짓는다. "전하께서 카르노의 국왕이 되시려면, 어차피 두 사람이 죽어야 합 니다. 한사람을 암살하고, 다른 한사람에게 씌우면 완벽하지요. 그 일 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 몇 명 만 소개해주십시오." 한사람을 죽이고 다른 한사람에게 씌운다? 내키지 않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터였다. 비제의 말대로 쿠데타는, 이 촉박하기 짝이 없는 시간 안에는 불가능하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런 엄청난 말을 해대는 비제도, 그것을 태연하 게 받아들이는 카스트로 자신도 내심 한구석에는 소름이 끼쳐오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루어둘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해야만 될 일이라면, 카스트로는 할 것이다. "전하께서 카르노의 국왕이 되신 뒤에 제게 해주실 일은, 아무에게 도 간섭받지 않을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시는 것, 그것뿐입니다. 세 리카님의 자리가 제일 적합하겠지요." 카스트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카 스트로는 비제를 돌아보았다. 악마의 자식이건 천사의 자식이건, 그것 은 이미 상관없었다. 마음에 거리낌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악마와 손잡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카르노가 테 라의 종이 아닌, 카르노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하지만 악마와 손잡는 것이 악마에게 카르노를 넘겨주는 게 되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꺼림칙할 것이다. 저 천사의 얼굴 을 한 악마가 앞으로 어떤 다른 마음을 품게 될지. 카스트로는 몸을 일으켜 벽난로가로 걸아 갔다. 불을 쬐는 듯 벽난 로를 내려다보면서, 카스트로는 말을 꺼냈다. 붉게 달아오른 불빛이 카 스트로가 입고 있는 벨벳 가운위로 흐른다. "이 거래를 마무리짓기 전에, 한가지 비제님께 요구하고 싶은 게 있 습니다." 비제는 어둠 속에서 눈을 차갑게 빛냈다. "요구……라고 하셨습니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만약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거래는 무효로 하겠습니다." "……!" 카스트로는 천천히 몸을 돌려 비제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카스트로에게 쏘아진다. 악마에게 주시 당하는 느낌은 소름끼치는 것 이다. 그것이 악마가 아닌 반쪽짜리 악마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런 시 선 따위에 굴복해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질 수 없 다는 고집으로 시선을 맞받았다. 비제는 찡그린 얼굴로, 한참동안 카스 트로의 내심을 알아내려고 살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그 요구가 무엇입니까?" 카스트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생각했던 것을 입밖에 내었다. "비제님께서 제 신하로서의 맹세를 해주십시오." "……!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하?" 비약적으로 올라간 말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경악하는 감정이 표정으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카스트로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나는 타국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한족의 최고위층과 맞 닿아있는 악마와 한족의 혼혈아를,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거래? 거 래가 끝난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무슨 마음을 먹을지 내가 어떻게 알 겠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강요하시면 제가 거짓으로 맹세할 수도 있 습니다!" 카스트로는 피식 웃음 지었다. "어차피 신뢰가 없는 거래는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만 두지요. 정 안 되면, 저는 밤을 타거나 강행돌파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제 한 몸, 테라를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카르노를 손에 넣는 것 역시. 어차피 제 손으로 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전하!"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리겠다는 발언에 비제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하 지만 카스트로는 정말 관심 없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알면서도 해될지도 모르는 자를 곁에 둘 수는 없습니다. 거짓맹세 를 하겠다는 자의 맹세를 받아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겠지요. 돌아가십 시오. 저는 탈출 계획이나 세워봐야겠습니다." 비제는, 알고 있었다. 저것이 호기를 부리는 것이라는 걸. 실제로는 자신을 붙잡고 싶어한다는 것을. 저 떨리는 오라로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비제는 시선을 돌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카스 트로가 정말 거래를 물릴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인간의 신하가 된다? 생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생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인간 따위의 신하가 된다는 말 인가! 하지만……. '아쉬운 거였던가, 내가?' 비제는 허탈한 기분이었다. 확실히 테라에서 벗어날 명분을 얻는 것 도, 힘을 되찾을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그리고 나아가 한족에게 복수 하는 것도, 모두 카스트로가 있으면 훨씬 수월할 터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몇십 년이 걸려서야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기회 를 눈앞에 두고 놓치는 것은, 왠지 다급해진 비제로서는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이 답답한 생활을 견딜 수 없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채운다. '정말 맹세하는 척만 하면…….'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신계(神系)의 힘을 가 진 자들이 한 말은 말로서만 끝나지 않는다. 한번 한 말은 운명에 덧 씌워져 빠져 나올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맹세 같은 중 요한 일일 경우,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평생을 가는 맹세가 될 것이다.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언어의 굴레. 비제는 고집스럽게 맹세를 요구하는 카스트로에게, 어떻게 그런 신계 종족의 특성을 아는지 따져 묻고 싶을 정도였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비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자 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해야 되는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비제는 그것이 단순히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스트로 는 거래의 조건에 맹세를 덧붙인 것뿐이고, 받아들일지 말지는 비제의 몫이다. 거래는 하고 싶지만, 그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조건 때문에 거래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제는 불 끈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카스트로를 노려보았다. 카스트로는 어린애 처럼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집에서 꺾일 사람이 아니다. 비제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한심스 럽고, 짜증스럽다. 슬금슬금 피 속에서 파괴본능이 꿈틀거린다. 차라리 모두 다 날려버리고 싶었다. 카스트로는 동요하는 비제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감정이 잘 드러 나지 않던 사람이, 무방비하게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새삼 그 반응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카 스트로는 카르노에 위험이 될 지도 모를 자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 럴 바에는 차라리 힘들더라도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게 낫다. "알겠습니다. 맹세하지요." 씹어뱉는 듯한 말투였다. 카스트로와 마주친 청록색 눈이 분노와 모 욕감에 떨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것 은 패자의 분노다. 그리고 비제의 맹세에 거짓이 없으리라는 것도 깨 달을 수 있었다. "맹세의 예를 시작하지." 당당하고 오만한 지배자의 모습이, 어느 새인가 카스트로의 전신에 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비제는 이를 갈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벽난로 가에 허리를 짚고 서 있는 카스트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를 조아렸다. 원한이라도 서린 듯한 강렬한 색채의 말투가, 비제의 입 술에서 방안으로 메아리쳤다. "마계 루시퍼의 아들이며, 한족 류가, 엘리제님의 아들인 저 비제는 지금 이 순간부터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 카스트로 전하께 충성 을 바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전하를 보호하며, 전하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러운 일이 없이 충실하고 정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마계의 주인이 신 다아트님과 한족의 수호자이며 이 땅 예소드의 지배자이신 자디크 님의 이름으로, 저 비제는 카스트로 전하의 신하가 되었음을 맹세합니 다." 길고 장황한 맹세를 하는 동안, 비제는 한번도 끊지 않고 충성을 다 짐했다. 카스트로는 맹세의 첫머리에 튀어나온 최고위 악마의 이름에 놀라 멍하니 비제를 내려다보았다. "전하?"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시선을 마주치자,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손을 내밀었다. 비제는 그 손을 잡고 맹세의 입맞춤을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 비제를 내 신하로 인정하겠소. 일어서시오." "감사합니다." 비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무리한 요구에 응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그대가 나를 주군으 로 인정하고, 충성하는 이상, 나 역시 그대를 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여전히 화가 삭지 않은 말투였지만, 신하의 예만은 꼬박꼬박 지켜 대답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다. "그대가 원하는 일들, 테라를, 한족을 치는 일은 나 역시 강렬하게 원하는 일이다. 앞으로 긴 세월이 필요할 터. 그대가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심술난 아이의 얼굴을 한 새로운 신하를, 카스트로는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곁에 두고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알 던 누구보다 영리하고, 누구보다 특이한 출신내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비제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치 환영이었던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카스트로는 긴장해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근처의 소파에 주저 앉았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뜻밖의 사실도 알았고. '루시퍼의 아들이라……, 후…….' 카스트로는 아직도 그 이름이 준 충격의 여운에 잠겨있었다. 다음날 아침, 테라 신전의 회의실에는 대신관 제이리트의 느닷없는 호출을 받고 속속 도착한 다섯 명의 수장들이 앉아있었다. 아침부터 비제의 방문을 받은 다섯 수장들은 자신들이 모인 이유에 대해서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다. 아직 대신관 제이리트는 회의실로 들 어오지 않았고, 회의장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이런 식의 갑작스런 호출 은 몇 년 전 신탁을 받았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끝난 일 가지고 이렇게 갑자기 소집할 리가 있겠습니 까?" "기다려 봅시다. 제이리트님께서 직접 이야기해주시겠지요." 이런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수장들은 저마다 불안감을 떠안 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회의실의 미닫이문이 소리 없 이 열렸다. 수선스럽던 회의장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다. "갑작스런 소집을 하게 되어 여러분 모두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합니 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을 질질 끄는 것은 좋지 않으리라 생각되 어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모이도록 부탁드렸습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것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오늘 제이리 트의 상태는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불안정한 오라도 오라지만, 하루밤 새 어딘지 핼쓱해 보였던 것이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같은 시가문의 수장 제피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제이리트는 흠칫했 지만, 곧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지가문의 세크리트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모습에는 언제나 처럼 예민하게 신경이 서 있었다. 제이리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억지 를 부려야했다. 스스로가 옳다는 듯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먹히 지 않을 것이다. 제이리트는 시선을 회의실 탁자 중앙에다 두었다. "카스트로 전하의 일시귀국문제를 재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부친의 임종만큼은 보도록 배려하는 것이, 장차를 위해서도 나을 것이 라 생각됩니다." "……무슨?" 회의장은 제이리트를 중심으로 경악과 침묵에 휩싸였다. 제이리트는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말들을 입밖에 흘려내었다. "카스트로 전하는 지금 테라에 대해 별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 다. 지금 사태로 굳이 테라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양보하는 것으로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이상 가는 방어책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일시귀국이니만치 꼭 다시 테라로 돌아 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요. 그래서 한가지 보완책을 생각해냈습 니다." "보완책?" 세크리트 지였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치켜 뜬 눈으로 쳐다보는 그를, 제이리트는 애써 무심한 듯이 무시해버렸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 린다. "저희 한족 가운데 한 명이 카르노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의 하 나일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이지만, 한족 두 명이라면 카스트로 전하 를 강제로라도 이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누가 그 험한 길을 따라가겠습니까? 저희들 다섯은 안 되 는 게 당연하고, ……아니,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히 그렇게 애써 서까지 카스트로 전하를 귀국시켜야하는가에 의문이 생깁니다." 제이리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부터 자꾸 목이 말라왔다. "아까 그 이유는 말씀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그리고 카르노로 동행 하는 사람으로는 제 제자인 비제님을 보낼까 합니다." "뭐?" 탁자를 짚고 의자에서 일어날 정도로 과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지 가문의 세크리트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룻밤 새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게 아닙니까? 비제님을 보낸다고요? 비제님을요? 비제님이 얼마나 위험인물인지 아 시면서……." "말을 삼가십시오, 세크리트님. 비제님의 기억과 능력을 봉인한 것은 여러분들과 저입니다. 무엇을 못믿어서 이러십니까? 비제님에 관한 사 항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런 말씀, 하시겠습니까?" 세크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제이리트의 보증이라면, 믿을 수 있어서 가 아니라, 믿어야 되기 때문에 반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제이리트는 여전히 반항적인 눈으로 노려보는 세크리트를 마주 노려보 았다. 세크리트는 결국 고개를 홱 돌리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말씀들 없으시면 그리 하겠습니다." 제이리트는 제일 큰 고비를 넘긴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속으로 가슴 을 쓸어내렸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평소 과묵하기만 한 류가문의 레 위제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리트는 그 시선을 무시했 다. 곧 다른 수장들이 몇 가지 반론을 폈지만, 제이리트는 조금 편하게 그 반론을 막아낼 수 있었다. 대신관 제이리트는 한족들에게 절대적으 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그가 보증하겠다는 일에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짙게 안개가 깔린 테리온시를 경쾌한 말발굽소리와 마차소 리를 이끌며 내닫는 사람들이 있었다. 친위대원들에 둘러싸여 날 듯이 말을 모는 검은머리의 청년은 카르노의 삼왕자 카스트로 폰 카르노였 고, 그 옆을 보호하듯 달리는 흑갈색 머리의 청년은 그의 제 1 호위기 사 라에르 폰 소르미노였다. 그 뒤로 장중한 느낌의 암녹색 마차를 타 고 오는 한 쌍의 부부와 작은 여자아이는 카르노의 이왕자 일가였고, 그 뒤로 역시 암녹색 마차를 타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카르노의 삼왕자 비 루시타니아와 그녀의 가정교사 아젤이었다. 전체가 카르노인들로 구성된 인원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한족 특유의 감색머리와 이질적인 청록색 눈의, 천사처럼 깜찍하게 아 름다운 소년 비제 류였다.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서 느긋하게 마차에 탄 채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비제의 표정은 마치 처음 세상을 구경 나가는 천진한 아이의 표정과 같았다. 테리온성 밖에는 안개 속에 멀어져 가는 카르노 왕자들의 일행을 먼 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이 타고 나온 마차 옆에, 아쉬움과 허전함이 가득한 금발의 남자는 로페냐 폰 하야로비 후작이었고, 그 옆에서 짙은 감색의 실크 양산을 받치고 서 있는 푸른 드레스의 멋쟁이 귀부인은 트레아 후작부인이었다. "뭘 그렇게 아쉬워해요? 누가 보면 당신이 카스트로 전하의 애인인 줄 알겠어요." 로페냐는 몇번이고 한숨을 내쉬고, 보이지 않는 카스트로를 발돋움 해 쳐다보다가, 새초롬히 말하는 후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정말 전에 '애인'이었던 그녀는, 그다지 아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전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소?" 후작부인은 가냘픈 어깨를 살포시 들었다 놓았다. 생긋 웃는 미소는 나이답지 않게 깜찍할 정도였다. "아주 안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봐야 겨우 몇 달인데, 저 는 로페냐경께서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시는 지 모르겠어요." "그렇……겠지요?" "네?" 로페냐는 머리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돌아오시겠지요. 그럼, 후작부인, 오늘은 저희 둘이 오붓 한 저녁식사를 하시는 것은?" 금새 능글맞은 바람둥이다운 태도로 돌아온 로페냐를 보며, 후작부 인은 소리높여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로페냐경. 모처럼이니까요."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눈웃음지었다. 테라력 698년 2월 27일. 카스트로 폰 카르노는 테라에 도착한지 2년여가 지난 이른 봄날, 왕자비 루시타니아와 함께 카르노로 향한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의 일 행에는 이왕자 지스카르 일가도 함께였으며, 귀국일행은 150여명이나 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카스트로의 일행에 한족 신관 비제 류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테라에게 적대적이던 카스트로가 한족 신관을 동행했 으며, 또한 상당히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는 데서, 카스트로를 예의 주 시하는 인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부터 카스트로가 다시 테리온 땅을 밟는 것은 수년이라는 시간 이 흐른 뒤였다. 처절한 피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잔인한 학살자의 모 습으로 돌아오는 카스트로를 보게 되리라고는, 이 날의 하야로비 후작 과 트레아 후작부인은 물론,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 [신군주론] 3장 끝났습니다. 4장 준비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만 쉬겠습니다. 글쓰면서, 많은 격려 주신 여러분께 감사~ ^^ 이런저런 충고 주신분들께도 무척 감사드립니다. ^^ 이제 곧 12월이군요. 솔직히 12월, 한달쯤 더 있다가 왔으면 한다는.. --; 지지부진인 글의 진도 때문이겠지요.. ^^ 그래도 여전히 찾아올 12월쯤에 4장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되시길.. ^^ - 3장 완결이 아닌 전체 완결이라는 말을 썼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새였음당 ^^;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0 - 관련자료:없음 [3215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4 21:10 조회:149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0 - ================================================================== 제 4 장 군주와 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여명이 가까워오는 나르강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파란 야청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아르노의 동부를 가로지르는 나르강은 그 곁줄기를 남 쪽외곽으로 뻗고 있다. 카르노 남동쪽에 위치한 루시노 후작가의 저택 은 교묘하게 선정된 위치로, 나르강을 보기에는 최고의 경관을 보유하 고 있었다. 루시노 후작가에서도 가장 좋은 경치를 가진 방은 2층에 있는 후작 가의 후계자 카나이트의 침실이다. 일년동안 수 차례나 자태를 바꾸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표정을 바꾸는 나르강을 유난히 좋아하는 카나이 트였다. 유타르경은 그런 아들을 배려해, 자신의 침실이기도 했던 방을 일찌감치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몇 달 전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카나이트는 이른 시각부터 무장을 하 고 있었다. 은색 체인메일 위에 왕실 기사단의 문장이 수놓아진 흰색 의 예복을 걸치고, 암녹색의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이런 차림은 완전 무장이라기보다는 각종 행사에 있어서의 예복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시 종의 도움 없이 망토까지 걸친 카나이트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는 옷차림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허리에는 기사단장 취임식 때 왕세자로 부터 받은 장검을 매고, 건틀릿을 낀 손에는 은색 투구가 들려있었다. 점검을 마친 카나이트는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 널찍한 침실을 가로질러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매끄럽게 열리는 문밖으 로 나가 계단을 내려서자,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이 바라보인다. 카나이 트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가운 차림에 반질하게 벗겨진 머리를 한 유타르경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는 아들을 응시했다. "벌써 가는 게냐?" 카나이트는 아버지 앞에 서서, 살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기사다운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유타르경은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유심하게 카나이트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아들의 얼굴이 일이년 사이에 유달리 차가워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뿜어냈다. "그래. 잘 다녀오너라. 내일이면 돌아오는 게지?" 카나이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더 말붙일 여지가 없는, 간결하고 배타적인 대답이다. 유타르경은 쓸 쓸해지는 가슴을 숨기고, 자애롭게 미소지었다. "임무, 잘 수행하고 돌아오너라." "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저벅저벅, 한번도 뒤돌아보는 일없이 당당하게 나가는 아들의 모습 이 유타르경에게는 듬직하면서도 가슴아팠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마저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자신의 능 력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아들의 포부가 자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로서는 가까운 길을 두고 돌아가려는 아들이 안 타까웠다. 해줄 수 있는 일을 아들의 의지 때문에 해줄 수 없다는 것 도, 아버지로서는 속이 탔다. 그런 면에서 보면, 헤르트경은 축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조카인 레이니트경은 그 능력과 재능도 누구에게 뒤지는 것 없이, 어느 누구 보다 빠르게 출세의 길을 타고 있었으니까. 유타르경으로서는 자신의 아들이 레이니트경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나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제 나 레이니트경과 함께인 헤르트경에게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나 다정한 숙질지간이라는 것이 부러웠다. 혼자 고된 길을 가려 는 아들을 두고 보기만 하는 아버지로서는, 언제나 힘을 모아 한길을 가는 그들 숙질이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다. '역시 그러지 말아야 했던 걸까?' 유타르경은 말을 타고 새벽길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유리창으로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다이크경이 카스트로 전하의 호위임무에 소홀했 다는 이유로 경질 당하고 기사단장의 자리가 비워지게 되자, 유타르경 은 자신의 직위와 권력을 이용해 카나이트를 기사단장으로 추천했다. 그 일로 기사단장직을 대리하던 기사단 부단장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부단장 쪽에서 기사단을 그만두고 낙향해버렸다. 결국 유타르경은 자 신의 뜻대로 아들을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아들은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기도 꺼려하기 시작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다. 어미도 없이 외롭게 큰 아이였다. 그런 아들에게 그만한 일도 해줄 수 없다는 말인가! 남의 자식들은 오히려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해 안달인데, 왜 유독 카나이트만 그리 고집불통 이라는 말인가! 유타르경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벌써 조금씩 밝아오는 바깥에는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맞닿은 유리에 한숨 과 함께 뿜어져 나온 입김이 하얗게 서린다. 기사단장이 된 이후로 모든 일에 의욕을 잃은 듯, 매사에 적극성을 잃어버린 아들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속상했다. 어떻게 하면 예 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유타르경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아아……" 길게 꼬리가 늘어지는 한숨이 옆에서 포옥 내쉬어진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정갈하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비제는 귀 옆에서 퍼부어지는 한숨소리에 눈썹을 치켜 떴다. "아아아……후우……"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른다. 저렇게 신경을 벅벅 긁는 한숨을 바로 옆에서 퍼부어 대는 것이. 비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에 있는 남 자에게 툭 내뱉었다. "심심하면 돌아가. 누가 따라오라고 그랬어?" 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더욱 칭얼거리며, 비제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린다. "비제님은 너무 냉정하십니다. 그래도 저는 비제님께서 혼자 적적해 하실까봐, 이렇게 다른 일 다 팽개쳐두고 왔는데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어깨에 기대어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벨리알을 보며, 비제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외모로 보나, 뭐로 보나 벨리알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벨리알은 그런 것쯤 말끔히 무시하고 아직 애티가 가시지도 않은 비제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비제로서는 마차 안에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비제님과 저, 단 둘이 먼저 아르노로 가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니면 저와 다른 데 구 경이라도 하고 있다가, 이 일행이 아르노에 도착할 때쯤 해서 합류하 는 방법도 있을 테고요.." 비제는 초롱초롱 빛나는 청색의 눈망울이 주는 유혹을 간단히 무시 했다. "나는 이대로 갈 테니까, 벨은 가고 싶으면 먼저 가." "비제니이임." 아무리 코맹맹이 소리를 내도 비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그만치 20년을 넘게 그런 투정을 보아왔던 것이다. 정말이지 누가 더 나이를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벨리알은 결국 자기 애교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하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저번 일에 대해 상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비제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벨리알을 쳐다보다가, 마찬가지로 눈치 를 보던 벨리알의 눈과 딱 마주쳤다. 언제 삐쳤냐는 듯 방실방실 미소 짓는 벨리알을 보며, 비제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아르노야.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벨도 충 분히 즐겼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일 자체가 상, 아니었어?" 벨리알은 멈칫하며 비제를 바라보았다. 뜻밖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일을 '처리했다'고는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었다. 머뭇 거리는 벨리알을 보며, 비제는 피식 웃었다. "남색으로 악명 높은 벨리알이 제이리트님같은 먹음직스런 먹이를 그냥 보고만 왔을 리는 없잖아. 뭘 고민하는 거야?" 더욱 경직된 얼굴로 낯선 사람을 보듯 비제를 보던 벨리알은, 결국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모르셔서 그렇게 냉정하신 줄 알았는데요, 비제님. 제가 그렇게 수 없이 프로포즈했어도 항상 장난으로만……." "아니까 그런 거야. 나는 벨과는 취향이 다르거든." 쓸쓸하게 웃던 벨리알은 와락 비제의 품에 뛰어들어서 과장되게 우 는 척을 했다. "흑, 저 실연 당한 건가요?" 비제는 마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은 벨리알의 매끄러운 머리결을 쓰다듬고 있었다. "차라리 실연이 나아. 가질 수는 없어도, 항상 옆에서 볼 수 있잖 아." "……비제님?"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던 벨리알은 허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비제를 당혹스런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알고있어. 벨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 넉살좋은 벨리알도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비제는 지금 너 무나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절로 이빨이 악다물어진다. 저절로 한사람을 저주하게 된다. '카르미나……, 그 망할 계집애! 죽어서도 비제님을 놓지 않는구나!' 아마도, 한족들이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녀를 죽여버렸 을지도 몰랐다. 벨리알은 얼음 같은 눈으로 이미 죽어버린 소녀를 향 해 살기를 내뿜었다. 그때였다. 마차 밖으로 기사들이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잠시 뒤,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멈추어 섰다. 비제는 마차 창문을 열고, 가까이 있던 친위대원 한 명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왕실에서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두 분 왕자전하께서 지금 기사단 장과 만나고 계십니다." 비제는 알겠다며 살짝 미소지어주고는 다시 마차 문을 닫았다. 벨리 알이 옆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사단장이라고요? 어떤 남자입니까? 구경하러 가지 않으시겠어 요?" 비제는 헛웃음을 웃다가, 앞쪽으로 옮겨 앉은 벨리알의 정강이를 냅 다 걷어찼다. 윽!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벨리알이 엄살을 떨며 다리를 감싸안는다. "경고하지만, 벨. 카르노에서 나를 난처하게 만들면 가만 두지 않을 줄 알아! 아무 남자에게나 추파 던지지 마!" "비제니이임!" 벨리알은 잔뜩 콧소리를 내며 비제에게 항의했다. "분명히 경고했어. 그때는 두 번 다시 벨을 안볼 테니까!" 하지만 비제는 냉정했다. ================================================================== [신군주론] 4장 시작합니다. 하루쯤 늦는데, 뭐.. 라고 생각했다가.. 쪽지를 받고는 아차, 해서 --; 어제 예고(?)를 올렸습니다. 기다리셨던 분들께는 다시 한번 죄송~ 옛... 지난 일주일간.. 새로서는 정말 다사다난(--;)했더라는.. 우선, 어떻게 하다가 제 글이 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실 확인하고, 그 주소 찾아가보고.. (그 주소, 어케 됐는지 접속이 안돼더군요. 폐쇄된건가? 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한동안 글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모니터 앞에 앉기만 해도 머리에서 열이 났기 때문에.. 그 주소 확인하기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더군요.. 내가 글 왜 쓰지? 부터 나 무슨 바보짓 하고 있는 거냐? 까지.. 예, 제일먼저 생각났던 것은.. 지금까지 퍼가시겠다는 분들께 거절했던 거.. 저도 바보되고, 그분들도 바보만든 것 같아서 정말 그분들께 죄송했습니다. 무슨 열성이라고 오타 수정까지 해볼려고 폼잡았는지, 소설이다라고 생각하고 쓴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서였겠지요.. 모든 걸 초고 완결 뒤로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오타수정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네요.. ..조금.. 아니 실은 많이 억울했습니다.. 퇴고 몇번이고 보면서, 조금이라도 다듬어보려고 했던 노력이.. 참, 허무하게 느껴지더군요. 기껏해야 불펌이나 시킬거면서, 그 고생한건가.. 글 쓴다는 거에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다른 작가분들이 비슷한 문제 때문에 마음상해 하신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도.. 글 쓰고, 퇴고하고, 올리고 하면서 정신없었기때문에.. 그런 가능성 같은 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통신에 글 올리면, 그 정도 각오해야하는건가.. 라고.. 좀 여유롭게 생각해볼려고 해도 쉽지가 않더군요.. 새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대로 몸에 이상이 가는 타입이라.. 그 일 있고나서, 머리 부여잡고 있다가.. 엄마 손 잡고(--;) 설에 맥잘본다는 한의원까지 끌려갔습니다. 한의사 아저씨가, 컴앞에 많이 앉지 마라.. 11시에는 자야된다.. 계속 컴앞에서 죽치고 있으면, 쓰러질 거다! 라는 악담까지(--;) 한참 바쁠 때 그런 소리를.. --; 그래서.. 또 하루 날려버렸습니다. (원래 이틀 예정이었지만..--;) 뒤늦게 정신차리고 부랴부랴 글 수정했지만, 오늘에야 올리게 되네요.. 잡담이 길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만, 불펌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 일이 얼마나 글 쓰는 사람 힘들게 하는지 한번만이라도 생각해주시길.. 이제 정말로 인사를.. 좋은 하루 되시구요.. ^^ 건강하세요.. - 쓴 약 먹을 생각에 울상짓는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1 - 관련자료:없음 [3217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5 21:13 조회:143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1 - ================================================================== 카스트로는 말에 탄 채로, 다이크경을 대신해 기사단장이 된 카나이 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오던 지스카르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지만, 카스트로는 굳이 말에서 내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마음이 급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르노다. 위독하 시다는 아버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 지 기사단장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시선은 멀리 아르노를 향하고 있었 다. "……폰 루시노입니다. 아베르노 섭정 왕세자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두분 왕자 전하를 아르노까지 호위하기 위해 왔습니다." 옆구리에 은빛 투구를 끼고, 두 왕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은 백금 발의 미남은 두 왕자에게는 생소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카스트로는 루 아 사제의 편지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고, 또 루시노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척을 했다. "루시노 후작 유타르경이 부친이신가? 유타르경이 아들을 꽤나 아낀 다고 들었다." 카나이트의 굵다란 백금색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카나이트 는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들어, 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카스트로를 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군부대신 유타르경의 아들이 아니라, 카르노 왕실 기사단장 카나이 트입니다." 조금씩 흔들리는 말 위에 있던 카스트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 다. "유타르경의 아들이 아니라고?" 카나이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무게 실린 음성으로 정리해서 설 명했다. "제 아버지가 유타르경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를 군부대신 유 타르경의 아들로만 인식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버지, 저는 저 카나이트입니다." 카스트로의 뒤쪽에서 기다리던 라에르는 흠칫해서 카나이트를 쳐다 보았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고?' 순간 라에르는 마주친 카나이트의 시선에 붙들려 가만히 마주보았 다. 강하고, 도전적이기까지 한 시선이다. 카스트로는 잠시 카나이트의 완고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알겠다, 기사단장 카나이트경. 나는 한시라도 빨리 왕궁 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 출발했으면 하는데?" 카나이트는 묘한 눈으로 라에르를 스쳐 카스트로를 쳐다보다가, 그 옆에 서있는 지스카르를 바라보았다. 지스카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7년만에 가는 사람보다 더 오랜만에 가는 사람 같군. 출발하세." 카나이트는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땅바닥에 닿아있던 암녹색 망토 가 아직 찬 바람에 펄럭인다. 카나이트가 부관에게 맡겨두었던 말에 오르자, 기사들이 카나이트를 보며 기다린다. 카나이트는 손을 들고 명 령했다. "출발한다." 기사단을 선두로, 잠시 멈추었던 아르노로의 귀국길은 다시 재촉되 었다. 카나이트는 조금 전 눈을 마주친 남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전에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 남자였고, 또한 카나이 트가 필생의 라이벌로 삼고 있는 기사였다. '소르미노가의 신동!' 투구 속의 색소가 짙은 입술이 차갑게 미소지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라에르경.' 카나이트는 가벼운 긴장과 흥분을 즐기며, 힘차게 말을 몰았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실된 실 력을 인정받을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그 실력을 인정받는 것으 로, 소르미노가의 신동을 꺾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드물 것이다. 카 나이트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테라력 698년 3월 7일 이날 카르노의 수도 아르노에는 아침부터 1프리(=1m)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차고 짙은 안개가 부유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안개 속을, 카스트로는 기사단장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달려갔 다. 주위에는 수십 명의 기사와 친위대원들이 열을 맞추어 왕자들과 그 일가를 호위하며 달리고 있었다. 2년하고도 4개월만에 밟는 아르노 의 성은 카스트로에게 향수를 담은 격동을 일으켰다. 짙은 안개 속의 아르노는 마치 꿈처럼 카스트로에게 안겨왔다. "잘 왔다, 지스카르. 어서 오너라, 카스트로." 카르노 왕궁의 알현실에는 수년만에 세 왕자가 한자리에 모여있었 다. 암녹색의 방패와 은빛 검의 문장 아래, 카르노 국왕의 권위를 상징 하는 백금과 에메랄드의 옥좌가 비어있는 채 놓여 있고, 그 옆에 왕세 자 아베르노가 오만하게 서있었다. 아베르노는 비록 옥좌에 앉지는 않 았지만 충분히 그 위에 앉아있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며, 두 동생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콧수염을 기르고 테라풍의 복식을 입고 있는 아베르노는 자못 반갑다는 듯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 다. "지스카르 폰 카르노, 왕세자 아베르노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카스트로 폰 카르노, 아베르노 전하를 뵙습니다."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커다란 알현실에 웅웅거리며 퍼져나간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베르노 전하." 두 왕자의 인사에 이어, 다소곳이 드레스자락을 잡고 허리 숙여 인 사한 것은 이왕자비 시에나였다. 아베르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시에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나는 더 일찍 당신과 재회할 줄 알았는데……." 이왕자비 시에나와 왕세자 아베르노는 서로 상당히 친밀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에나는 곁에 있는 지스카르를 슬쩍 눈짓하고는, 아베르 노를 향해 말했다. "지스카르는 테라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이번에도 폐하의 일이 아니 었다면 오지 않았을 걸요?" "테라는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니까. 이해해요, 시에나. 나라도 시 간만 괜찮다면 테라에서 몇 년 더 공부하고 싶었으니까. 참, 카스트로, 네 부인을 소개해주겠니?" 아베르노의 시선이 카스트로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다소 긴장한 듯 보이는, 여린 느낌의 금발 미인이었다. 카스트로는 그런 루 시타니아를 못마땅한 듯 흘깃 내려다보고 퉁명스럽게 소개했다. "소렐 공작의 딸 루시타니아입니다." 아래에서 루시타니아가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씩 몸이 떨리는 것도. 카스트로는 그런 그녀를 모르는 척 했고, 아베르 노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곧 몸에 배인 사교성을 발휘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타니아에게 손을 내 밀었다. "카르노에 잘 오셨습니다. 카스트로의 큰형인 아베르노입니다. 카스 트로가 키만 컸지, 아직 어린애 같아서……." 루시타니아는 아베르노의 큰손을 맞잡으면서 살짝 몸을 굽혔다. "루시타니아입니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이름만 말하는 루시타니아를 보며, 아베 르노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베르노는 루시타니아의 손을 놓고, 막 생각났다는 듯이 시에나에게 물었다. "참, 내 귀여운 조카는 어디 있습니까?" "유모 품에서 자고 있어요. 여행이 피곤했던가봐요." "어린 아가씨가 그럴 만도 하지요." 아베르노는 다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자신의 형제들 을 돌아보았다. "먼저 짐을 풀고 나서 폐하를 뵙거라. 오늘 저녁 만찬에는 모처럼 모인 우리 삼형제가 축배를 들어야하지 않겠니?" '축배?' 카스트로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반발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데, 삼형제가 모였다고 축배를 들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카스트로의 시선을 느낀 아베르노가 눈을 마주쳐온다. 형으로서의 자애와 위엄마저 갖춘 모습으로, 아베르노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숙소는 귀빈관에 마련했다. 어차피 지스카르는 따로 궁 밖에 저택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카스트로는 곧 테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참, 예전의 삼왕자궁은 지금 레트가 쓰고 있다. 라에니가 굳이 그 궁을 고집하더구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베르노는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확실히, 지금의 아베르노는 2년 전의 아베르노와는 또 달랐다. 벌써부터 국왕 이라도 된 듯 우쭐하고 거만한데다, 거리낌없이 자신의 형제들을 '손 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속에서는 불 같은 질투가 치솟았다. 그러고 보면 눈가림 식으로 아르노 입성 하루 전에야 기사단을 파견 한 것부터, 아르노 입성 시에도 누가 오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던 시내의 모습이 모두 의도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긴다. 확 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너희들은 이제 주인이 아닌 머물어 가는 손님이다' '더 이상 왕궁에 너희가 있을 곳은 없다.' '누구도 너희들의 존재를 반기지 않는다. 알아서 물러가라.' 라고. 지나친 상상의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카스트로에게는 그렇게 느껴졌 다. 환하게 미소짓는 아베르노의 얼굴이 가증스럽다. "참, 유리나와 체리나가 귀빈관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다. 오늘 만찬 때에는 유리나의 약혼자도 소개시켜주지. 그럼 이만 가서 쉬거라. 폐하는 만찬 전에 뵐 수 있도록 일러두겠다." 카스트로는 굳어진 얼굴로 아베르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옥좌 앞 에 가로막듯이 서 있는 아베르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선을 맞받았 다. 가소롭다는 눈빛이다. 뭐냐는 듯한, 네가 그렇게 봐서 뭘 어쩌겠냐 는 듯한, 승자의 눈빛. 카스트로는 울컥 치솟는 부아를 억누르고 머리 를 숙여 인사했다. 알현실을 빠져 나오는 걸음걸이는 딱딱하게 긴장되 어있었다. 막 알현실을 나오다가 마주친 비제는 그런 카스트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카스트로의 뒤로 놀란 듯한, 또는 비굴한 듯한 아베 르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제이리트님의 수제자이신 비제님이 아니십니까!" 카스트로는 더욱 걸음을 빨리 해 그 곳을 빠져나갔다. 오물덩이를 피하는 느낌이다. "오라버니!" 귀빈관 안의 숙소를 찾아가 문을 열자마자 한 여자가 와락 카스트로 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몸무게를 그대로 밀어붙이며 안겨드는 밤색 머리 소녀를, 카스트로는 뒤로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지탱해냈다. 카스 트로는 진심인 미소를 지으며 가녀린 어깨를 마주 안아갔다. "체리나!" 이년간이나 부부로 살아오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다정한 미소를 짓는 카스트로와 그런 표정을 짓도록 만든 소녀를 번갈아 보던 루시타 니아는 마음 한구석에 묘한 질투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오 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저 소녀가 카스트로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루시타니아의 상실감에 가까운 질투를 없애지는 못했다. "너무 보고싶었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없으니까 너무……." 체리나는 커다란 갈색 눈망울에 맑은 이슬을 담뿍 매달고 그리운 오 빠의 품에 안겨 조잘거렸다. 그러다가 체리나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아챘다. 카스트로는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돌리는 체리나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딘지 창백해 보이는 루 시타니아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 혹시 저 분이……." 체리나는 카스트로의 품에서 스륵 빠져나가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며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 덕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루시타니아. 소렐의 딸이다." 루시타니아가 더욱 핼쓱해진 얼굴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자, 카스 트로는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그녀를 외면했다. "체리나라고 해요. 5남매의 막내죠." 시종장 베제르가 보았다면 펄쩍 뛰고도 남을 만큼, 예의를 싹 무시 해버린 간결한 인사말이었다. 루시타니아는 체리나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더욱 기가 죽어서 우물쭈물하며 인사했다. "루시타니아입니……." "누나는?" 시종장 하미르의 도움을 받아 모자와 망토를 벗던 카스트로는 루시 타니아의 말을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체리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 개를 숙이는 루시타니아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틀어 카스트로 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니트경이랑 같이 온다고 했는데,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오라 버니, 방금……." "지스카르 전하께도 가봐야지, 체리나. 루시타니아도 긴 여행으로 피 곤할 테니, 쉬게 해주렴. 옷 갈아입고 나서, 폐하도 뵈어야 하고." 체리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뭔가 고민스런 얼굴로 카스트로를 바 라보았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가차없이 체리나를 밖으로 몰아냈다. "지스카르 전하께서도 너를 많이 기다리고 계신다. 가서 얼굴 보여 드리고,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하자꾸나. 피곤해, 체리나." 체리나는 가만히 카스트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별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알겠어요. 그럼 있다가 봬요. 그리고……, 루시타니아도요." 체리나가 밖으로 나가자, 카스트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루시타니아에 게 돌아서서 경고의 말을 던졌다. "체리나에게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시오, 부인. 테라에서도 그렇지 만, 여기서는 더욱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될 거요." "……네." 들릴 듯 말 듯, 작고 힘없이 들리는 말소리가 카스트로의 신경을 갉 아댄다. 울컥해서 한마디 더 해주려던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아젤을 눈치채고 공격의 방향을 돌렸다. 카스트로는 아젤을 마주 노려보며 시비를 걸었다. "나에게 할 말이 많은 것 같군요, 세리니아양." 아젤은 자신의 손을 지그시 잡아오는 루시타니아의 손길을 느끼며 머뭇거렸다. 그 손길의 뜻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결국 아 젤은 루시타니아를 위해서 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전하." 아젤은 고개를 숙이며 부정했다. 카스트로는 아젤과 루시타니아를 기분 나쁜 듯 번갈아 보고 몸을 돌렸다. 저 가정교사라는 여자도 마음 에 들지 않는다. "폐하를 배알하러 가야되니까 준비하고 계시오. 하미르, 침실로 안내 하라." "네, 전하." 시종장 하미르는 귀빈관의 객실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지, 머뭇거림 없이 한쪽 방문을 열었다. 카스트로와 라에르, 그리고 시종들이 따라서 침실로 들어갔다. 아젤은 그제서야 긴장했던 몸을 풀면서 루시타니아 를 위로했다. "한두 번 그러시는 것도 아닌데, 매번 상처 입으시면 어떡해요. 다 나, 아가씨가 쉴 곳은 어디죠?" "침실은 카스트로 전하와 함께 쓰셔야 합니다. 방금 카스트로 전하 께서 들어가신 그 침실 말입니다." 곧바로 들려온 시녀장 다나의 대답이었다. 아젤에게 안겨있던 루시 타니아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뻣뻣하게 고개를 든 루시타니아는 곧 죽 을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실제로 루시타니아는 호흡에 곤란을 느 끼는 중이었다. "……저, 전하와…… 같은 침실……이라구요?" 루시타니아의 새된 소리에, 시녀장 다나는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두 분은 부부이십니다. 함께 침실을 쓰시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 십니까?" "……하,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루시타니아가 힘들게 하려는 말은 시녀장 다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곳은 임시거처입니다. 집에서와 같은 편안은 생각지 마셔야 합니 다. 그리고 서먹서먹하신 왕자전하와 비전하를 위해서도, 같은 침실을 쓰시는 것은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하지만……." 시녀장 다나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저 침실은 왕자전하뿐만 아니라, 비전하의 침실 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오셔서도 각방을 쓰신다면, 두 분 전하께 좋 지 않은 소문이 돌게 분명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루시타니아는 울먹이며 머리를 저었다. 루시타니아에게는 사신(死神) 이 있는 곳보다 더 무서운 곳이었지만, 시녀장 다나도, 믿고있던 아젤 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루시타니아를 그 침실로 밀어 넣어버렸다. ================================================================== ^^ 위로의 말씀들 감사.. 불펌하신 분도 이 글 읽지 않을까 해서 길게 쓴 말이었는데.. 걱정을 끼쳐버린 것 같네요.. 죄송.. 꾸벅. 그래도 위로받으니까 기분은 좋았다는..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구요.. 건강하세요.. ^^ - 약이 싫은 새 씀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2 - 관련자료:없음 [3220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6 21:42 조회:141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2 - ================================================================== 아베르노를 따라가던 비제는 예배당을 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테 라 신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건물구조 때문이 아니라, 여기저기 필요이 상으로 많아 보이는 시종들과 예배당 주위에 새로 건조되는 화려한 한 식 건물들 때문이었다. 완벽한 한식 건물은 아니지만,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어 가는 것이 테라 신전의 본당을 연상케 한다. "……비제님께서 친히 와주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세리카님께서도 비제님을 보시면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과연 그럴까, 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 비제는 예의 그 천진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저 건물들을 보니까, 마치 테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것만으로도 아베르노 전하의 신심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겠군 요." "하하, 별 말씀을. 아무래도 딱딱한 사각의 건물 안에 케테르님을 모 시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세리카님께서도 불편해하시는 것 같고 말입니다." 우쭐한 듯이 말하는 아베르노를 바라보며, 비제는 입에 배인 칭찬의 말을 옮겼다. "그렇군요. 이 정도의 건물들을 지으려면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 을 텐데요. 한식 건물을 지을 줄 아는 목공들도 구하기 힘들 테고……. 정말 아베르노 전하의 깊은 신심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지나치리만큼 공경스럽게 비제를 맞았던 아베르노는 친히 예배당까 지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수년간 테라 신전에서 보아왔던 아베르 노는 여기에서 보니 또 다르게 보였다. 알게 모르게 위축되어있던 테 라에서와는 달리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사람처럼, 혹은 이미 자신이 카르노의 국왕이라도 된 것처럼. 비제로서 는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한족들에게서 자유를 얻고, 한족들에게 복수 를 하기 위해서, 이 아베르노라는 왕세자는 필히 죽어주어야 할 상대 였으니까. "이곳입니다. 상당히 누추하지만, 밖의 건물들이 완성되면 곧 옮길 테니까 이해해주십시오. 폐하부터 국민들까지, 케테르님의 은총을 못 받은 무지한 사람들뿐이었으니까요. 물론 곧 당당한 케테르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말투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케테르님께서도 아베르노 전하의 정성에는 감복하고 말 것입니다." "하하하." 감색바탕에 태극의 무늬가 그려진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열린 다. 어두컴컴한 예배당에 케테르 신상이 정면으로 보인다. 희게 연기가 피어나는 향들이 꽂힌 향로와 노란 촛불이 놓인 제단의 정면에, 한족 특유의 감색 머리와 감색 눈의 한 남자가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비제도 얼핏 얼굴을 알고있는 지가문의 세리카였다. "어서 오십시오, 비제님. 조금 전, 아베르노 전하로부터 소식은 들었 지만, 아직까지 놀람이 가시지 않는군요. 대신관 제이리트님께서는 안 녕하십니까?" 놀랄 만도 하겠지. 세리카는 지가문의 수장 세크리트의 동생이었다. 세리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한 것이다. 비제는 속으로 비웃 으며, 생긋 미소지었다. "물론입니다. 대신관님과 5가문의 수장님들 모두 평안하십니다. 세리 카님께서도 안녕하셨는지요?" "아, 아베르노 전하 덕분에 무척 편안하고, 또 보람에 찬 매일을 보 내고 있습니다." "제가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하하 하." 아베르노는 겸양의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어딘지 말과 행동이 상당히 틀린 느낌을 주지만, 비제는 미소와 칭찬밖에 모르는 얼간이처 럼, 다시 웃고 칭찬을 했다. 벌써 십여 년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아베르노 전하께서는 겸양의 미덕도 갖추셨군요." "보기 드문 신심과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신 분이시죠. 카르노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실 분이십니다." 세리카가 칭찬을 더하자, 아베르노의 콧수염 밑으로 입술이 길게 찢 어진다. 표정만이 아닌, 그가 뿜어내는 오라를 보아도 지금 아베르노의 기쁨은 짐작하고 남았다. "죄송하지만, 전하. 잠시 비제님과 단둘이 나누고 싶은 말이 있습니 다만……." "아, 너무 기쁜 나머지 두 분을 배려하지 못했군요. 마음껏 대화를 나누십시오. 비제님께서는 이곳에 머무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지 시를……." 비제는 재빨리 거절의 말을 던졌다. 이곳에까지 와서 밤낮 세리카에 게 감시당하는 것은 사절이다. "저는 카스트로 전하의 동행으로 왔습니다. 카스트로 전하와 가까운 곳에 숙소를 마련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리카가 미묘한 시선을 던졌지만 비제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 다. 오라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잡히면, 앞으로의 모든 계 획이 방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시종장에게 귀빈관으로 모 시도록 일러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베르노 전하."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베르노가 밖으로 나가고 나자, 예배당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세리카는 둘만 보자고 하기는 했지만, 딱히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솔직하게,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습 니까,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리트님께서는……." 말을 먼저 건넨 것은 비제였다. 세리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마 주보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카스트로 전하를 잠시 귀국하도록 허락하기는 하셨지만, 마음을 놓 지 못하셨습니다." 세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비제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소심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저를 함께 보내서, 만약의 경우에 카스트로 전하만이라도 테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 서 당분간 카스트로 전하를 따라다니며 감시할 생각입니다." "그러셨군요." 완전히 의문이 풀린 얼굴은 아니었지만, 세리카는 차마 '왜 하필 당 신이 왔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을 숨겨둔 질문과 대답이 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중심을 빗겨가고 있었다. 비제는 의외로 소심한 세리카의 태도에 힘입어, 계속 비껴 가는 화제를 끄집어내다가 얼렁뚱땅 세리카와의 첫 면담을 끝마쳤다. 예배당을 빠져 나오며 비제 는 속으로 한참을 웃어대고 있었다. 카르노 왕궁의 본궁, 정전의 위층에 위치한 국왕의 거실은 눈에 띄 게 많아진 친위대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왕세자의 허락 없이는 국 왕을 알현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해듣고 기막혀하던 카스트로는, 전에 무단으로 들어가려다가 겪었던 참담한 일들을 기억해내고는 순순히 '왕세자의 허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 장하고 있었지만, 절대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슴이 휑하니 뚫 린 것 같은 상실감과 또다시 내쳐질 것 같은 불안감을 추스르느라 정 신이 없었다. 자신보다 더 긴장한 루시타니아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지 만, 거기까지 뭐라고 할만큼의 여유가 지금의 카스트로에게는 없었다. 카르노가 그런 말못할 치욕을 겪지 않고, 아베르노가 왕세자의 자리 를 굳건히 지켰다면, 어쩌면 자신은 참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 이 있었다. 아버지와 형이 다스리는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마치 어렸 을 때처럼 어리광도 마음대로 부리고, 가끔가다 말썽도 피우고, 말도 안 되는 고집도 부려보고, 그리고 어머니 같은 현명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보고도 싶었다. 고작 열살 때의 파라다이스를, 카스트로는 줄곧 마 음 깊은 곳에 품고 살았었다, 바로 이년 전까지는. 하지만 세상은 그런 카스트로의 어리광을 처절하게 비웃었다. 아버 지와 형이 다스리는 파라다이스는 없었다. 슬프게도, 그것은 단지 어린 아이의 망상이었을 뿐, 현실은 이런 것이다. 왕세자인 형의 허락 없이 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뵐 수 없는 천덕꾸러기 왕자. 무단으로 아버지 를 만나려한다면 전 친위대원이 목숨걸고 말리는 데다, 그 아버지라는 사람은 천한 여자와 뒹굴며 왜 왔느냐고 타박을 하는 신세. 몇 년 전 의 묵은 상처가 다시 혈관을 타고 찌르르하게 아파 온다. 어렸을 때는 세상이 모두 자신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 썽을 피워도 아버지는 너털웃음으로 감싸주셨고, 어머니는 화를 내다 가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형들과 누이는 장난치는 대상이었으며, 잰 체하던 귀족들은 골탕먹이 는 대상이었다. 무슨 실수도 용납되었으며, 어떤 고집도 용인되었다. 그렇게 세상은 만만했고, 또 아름다웠다. "아베르노 전하께서, 폐하를 뵙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폐하께 서 힘들어하실까 저어되니, 그리 오랜 시간을 허용치는 못하신다 하셨 습니다." 카스트로는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베르노의 시종장을 죽일 듯이 노 려보았다. 울컥 화가 치솟는다. 아들이 아버지 만나겠다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다는 말인가! 아베르노 혼자만 아버지를 생각하고, 혼자만 아버 지 건강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아들이기는 아베르노나 자신이나 매한 가지였다. 단지 왕세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아버지를 만나는 것마 저 통제하려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울 분을 속으로 씹어 삼켰다.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수록 아베르노에 대한 반감은 깊어져갔다.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한 죄책감도 희미해져간 다. "알겠으니, 문을 열어라." "네, 전하." 시종들에 의해 문이 열렸다. 참으로 어렵게 열리는 문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의 중년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친위대장 피오르 폰 소르미 노, 라에르의 아버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카스트로 전하." "오랜만이오, 피오르경. 폐하는 어떠시오?" "조금 전, 카스트로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스트로는 묵묵히 고개짓을 하고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뒤에 서 있는 라에르도 지금이 귀국 후 피오르경과의 첫 만남일 것이다. "루시타니아와 나만 들어가겠다. 라에르경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네, 전하." 침실 문이 열렸다. 어둑어둑한 침실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또 틀렸다. 요기를 풍기는 것 같던 침대의 붉은 휘장도 사라져있었고, 완 연히 병자의 침실로 느껴지는 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병자의 냄새가 가득한 커다란 침대 위에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버지가 베개에 기대앉아 퀭한 눈으로 카스트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콧날이 시큰해져왔다. 단지 이년 만인데, 겨우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아버지는 몰라볼 정도로 야위고 초췌해 져있었다. 어디로 보나 죽음을 목전에 둔 초로의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카스트로……, 가까이…… 와주겠…느냐? 눈이 침침해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받아왔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만 으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당혹스러울 만큼 감정이 격해진다. 이년간 참아왔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것 만 같다. 감정가는 대로 화도 내고, 원망의 말도 하고, 왜 이렇게 몸이 나빠졌는지 물어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너무나 그리웠 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줄기가 뻐근할 정도로 참는 이 유는 한 가닥 남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약한 모습, 설사 자신을 낳은 아버지에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을 그리 매정하게 내친 사람 앞에서 그러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심호흡을 하고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었다. 차분하게, 침착하게. 마치 어제 집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처럼,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폐하." 아버지라는 말과 폐하라는 말 중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 던 카스트로는 결국 '폐하'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신 하로 생각한 만큼 자신도 아버지를 국왕으로 대하리라 결심했다. 아버 지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카스트로는 대 꾸를 하지 않는 칼리에르 3세를 흘낏 보다가, 옆에 있던 루시타니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팔 안에서 얼어버린 루 시타니아의 몸이 느껴진다. 또 다른 이유로 불쾌해진다. 어째서 남편의 팔 안에 있는데 그렇게 긴장하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실수 없이 처신하시오, 부인." 낮게 경고하는 소리에, 루시타니아는 더욱 긴장해버렸다. "제 아내, 루시타니아입니다. 알고 계시듯, 소렐 공작의 딸입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말투에서 비난조가 되어버린 다. 루시타니아와 칼리에르 3세 모두가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카스트로 는 쓴웃음을 지으며, 슬쩍 팔 안의 루시타니아를 재촉했다. 루시타니아 는 떨리는 몸으로 용케 실수 없이 인사를 올렸다. "삼왕자비 루시타니아입니다. 폐하를 뵙게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 다." 칼리에르 3세의 생기 없는 눈이 루시타니아에게로 향한다. 루시타니 아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침묵이 길어지고, 물끄럼한 시선이 깊어질수록 루시타니아의 안색이 핏기를 잃어간다. 옆에서 보 기만 하던 카스트로조차 안쓰러울 정도로, 루시타니아는 연약해 보였 다. 다시 울컥 부아가 치민다. "그래……, 네가……, 카스트로의 아내라고?" 루시타니아가 졸도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에르 3세가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카스트로는 속으로 실소를 터트리며,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다. "네…, 네, 폐하." 칼리에르 3세는 지루할 정도로 늦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카스트로……." "네, 폐하."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폐하'라는 대답에, 칼리에르 3세는 가슴 한 구석이 비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도 남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화나면 화나는 대로, 삐치면 삐치는 대로. 제 딴 에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같지만, 칼리에르 3세에게는 아직 까지 뿌루퉁하게 부어있는 얼굴이 보이는 것이다. 아직 그렇게, 카스트 로는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었다. 어리광도 투정도 마냥 받아주기만 해서 세상 어려운 거 모르는 철부지 막내아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칼리에르 3세는 이 키만 큰 어린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지 금까지는 자신의 비호 아래 무사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죽은 다음에 는 어떻게 될지 암담했다. 아베르노가 그리 만만하고 마음좋은 형이 아니라는 것을, 칼리에르 3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마저 없다면 아베르노가, 가뜩이나 못마땅해하는 카스트로를 어떻게 대할지……. "폐하?" 불러놓고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카스트로는 고개 를 갸웃하며 칼리에르 3세를 불렀다. 칼리에르 3세는 한숨을 내쉬며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테라에서는……, 잘 지냈느냐?" "……네, 덕분에요." 여전히 가시 박힌 목소리다. "이리……더 가까이 오너라." 칼리에르 3세가 내미는 마르고 앙상한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스트 로는 쭈뼛거리며 다가가 손을 잡았다. 마주잡은 손위에 다시 칼리에르 3세의 손이 와 덮인다. 갑자기 뜨거운 온기가 손을 파고들어서 카스트 로는 움찔했다. 칼리에르 3세는 그 손을 꾸욱 맞잡고, 손을 더듬어 올 라가 아들의 팔과 어깨를, 그리고 등을 쓰다듬었다. "……폐……하?" 눈앞에 있는 아들의 실체를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골격을 따라 올라 간 손길은 부드러운 머리와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카 스트로는 엉겁결에 허리를 숙이고 양 볼과 입술, 코를 거쳐 눈썹을 더 듬거리는 손길에 얼굴을 내맡기며 눈을 감았다. "카스트로……, 카스트로……, ……잘…… 돌아왔다." 따스한 목소리가 대책 없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달래듯이 반복 되는 말이 고집스럽던 카스트로의 자존심을 깨고 표면 밖으로 감정을 끄집어낸다. "잘 돌아왔다, 카스트로. 잘 돌아왔다……, 내 아들아." "……ㅅ!" 칼리에르 3세는 아들의 감은 눈에서 솟는 눈물을 앙상한 손으로 닦 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샘솟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칼리에르 3세는 애 잔한 기분으로 닦아내며, 아들을 끌어당겨 가슴에 품어 안았다. "카스트로……. 카스트로……." 허리에 매달려,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울어버리는 아들의 떨리는 등을 칼리에르는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루시타니아는 자신의 입장도 잊은 채, 처음 보는 남편의 약한 모습 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오만한 남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한참 을 보고있던 루시타니아는 마주 안고 우는 부자를 보면서, 자기도 모 르게 훌쩍이고 있었다. 두 부자의 모습에서 먼 곳에 계신 부모 생각이 불쑥 머리를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벌써 2년이나 보지 못했다. 삶이 고될수록 향 수는 더욱 짙었다. 루시타니아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아냈다. "이리 오겠느냐, ……루시타니아." 불쑥 들린 목소리에, 루시타니아는 놀란 눈으로 칼리에르 3세를 바 라보았다. 무서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자애로와 보이는 칼리에르 3세가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손짓하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다가와 내민 손을 잡자, 칼리에르 3세는 양손에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를 잡고 한곳으로 모았다. 루시타니아와 카스트로의 손이 마주쳐서 양쪽 다 움찔하고 놀 란다. "아직 철부지인 아이다. 루시타니아, 네가……, 내 아들을 잘 보살펴 주어라. 할 수 있겠느냐?" 루시타니아의 커다란 눈망울이 휑뎅그레하게 커진 것과, 카스트로의 잘 그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음순간, 카스트로의 비명 같은 외침이 칼리에르 3세의 침실에 울려 퍼졌다. "무…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카스트로는 놀라서 커다래진 보라색눈이 자신을 향하자, 더욱 빨개 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보지마!" 루시타니아는,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칼리에르 3세와 자신의 사이 에 끼인 손을 빼내려고 애쓰는 남편을 새삼스런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일그러지고 낭패한 듯한 표정의 남편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무섭다 기보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곧바로 자신의 그런 생각에 스 스로 황당해하며 부정했지만. "아내에게 그렇게 윽박지르는 게 아니다, 카스트로." "아버지!" 더 이상 폐하라고 부르지 않는 아들을, 칼리에르 3세는 조금 가벼워 진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아내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 카스트로." 그예 카스트로는 주먹을 부르쥐고, 이빨을 갈아붙였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칼리에르 3세는 몇 년만에 웃음을 되찾고 있었다.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카스트로는, 칼리에르 3세로서도 참 오랜만에 보는 모습 이었다. "아내에게 사랑 받는 남편이 되는 게, 네 어릴 적 꿈이었잖니, 카스 트로." "아주 어렸을 때 얘깁니다! 그리고 제 이상형은 어머니 같은 분이란 말입니다!" "네 어머니 같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없다. 그러니 포기하고 네 아내 에게나 사랑 받을 궁리를 해." "아버지!" 도저히 일국의 국왕과 왕자의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유치하기 짝 이 없는 대화를 들으며, 루시타니아는 남편에 대한 이미지를 상당부분 수정해야했다. 왠지 너무 어렵고 무섭게만 보았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 쩌비.. 고쳐도 고쳐도 마음에 안드는군요.. --; 요즘, 제정신으로 사는 게 아닌 것 같네요.. 지금으로서는 머릿속 마비 증상이..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두 녀석.. 이혼시키라구요? T.T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3 - 관련자료:없음 [3221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7 21:42 조회:140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3 - ================================================================== 값비싼 향신료가 어우러진 각종 고기요리의 냄새와 갓 구워낸 구수 한 빵냄새가 만찬장을 풍성하게 메운다. 식욕을 돋구는 스프와 군데군 데 놓여진 과일도, 어딘가의 특산품으로 올라온 생선요리도, 무엇하나 빠진 것 없이 풍요로운 식단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만족한 미소를 짓는 다. 길게 늘여진 식탁의 주인석에는 왕세자 아베르노와 왕세자비 라에니 가 나란히 앉아있었고, 주빈석에는 한족의 비제가 자리잡았다. 카스트 로는 루시타니아와 함께 아베르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지스카 르 부부와 마주하고 있었다. 새하얀 식탁보위에 밝혀진 촛불들은 어딘 지 사람들을 신비로와 보이게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주빈석의 비제였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제님."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해주신 아베르노 전하께 감사드릴 사람은 저 입니다. 덕분에 즐거운 식사가 될 것 같군요." 아베르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오늘은 무척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 5남매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 벌써 7년이 넘었군요. 이런 기쁜 날에, 비제님께서도 동참해주셔서 무 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건배합시다." 만찬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이 미소 띈 얼굴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아베르노의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케테르님의 축복으로 우리 다섯 남매가 다시 모였습니다. 케테르님 을 위해, 건배!" "건배!" 카스트로는 얼빠진 표정으로 잔을 들어올린 채 아베르노를 돌아보았 다. '케테르님의 축복으로 다섯 남매가 다시 모여?'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하면 저런 황당한 말이 나올 수 있는지, 기가 막히다 못해 손수 저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은 기분까 지 들었다. 과연 저 머릿속에 뭐가 채워져 있는지! 애초에 잘 살고있던 다섯 남매를 떼어놓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 가! 뒤에서부터 시중들던 시종장 하미르가 가만히 아베르노를 노려보고 있던 카스트로를 살짝 건드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카스트로는 술잔에 든 술을 홧김에 꿀꺽 마셔버렸다.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 "비제님께서는 카르노에 처음 오셨을 텐데. 어떻습니까, 카르노의 풍 광이." 아베르노는 아무래도 이년만에 본 형제들보다 비제에게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네, 마차에서만 오느라 스쳐 가는 광경만 보았습니다만, 높은 산들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테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그렇지요. 테라에서는 이렇다할 만큼 큰 산이 없으니까요." 인사치레가 분명한 말과 별 의미 없는 문답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못들은 척 식사를 했다. 별 것 아닌 칭찬에도 입이 찢어지 게 웃는 아베르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베르노의 태도는 마치, 주 인이 던진 뼈다귀를 물고 돌아와 꼬리를 흔들며 귀여워해 달라고 조르 는 개 같았다. 개! 카스트로는 슬그머니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다. '맞군, 잘 훈련된 테라의 개. 한족의 개! 케테르의 개!' 한 나라의 국왕 될 자가 개가 된다면, 그 나라는 뭐가 될 거라는 말 인가! "참, 지스카르, 카스트로. 너희들에게 유리나의 약혼자를 소개하지 않은 것 같구나. 레이니트경?" "네, 전하." 유리나의 옆에 앉아 있다가 아베르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남 자는 어두운 보라색의 머리와 눈동자의 미남이었다. "두분 왕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레이니트 폰 사르노, 사르노의 백 작입니다. 케테르님의 은총과 아베르노 전하의 은혜로 유리나 전하와 의 결혼을 허락 받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테르의 은총?' 카스트로는 심기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레이니트경을 매섭게 쏘 아보았다. 하지만 레이니트경의 시선은 아베르노를 향해 있었다. "앞으로 한가족이 될 사람이니, 지스카르와 카스트로도 레이니트경 과 잘 지내거라." 아베르노는 레이니트경의 인사말에 매우 만족한 모습이었다. 카스트 로는 다시 식사에 전념했다. 심장이 불끈거리고, 머리가 아파 왔다. 이 건 뭐란 말인가! 케테르에 미친 사람은 아베르노 혼자만이 아닌 모양 이었다. '설마 전부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 카스트로는 언뜻 스친 생각에 하얗게 질려, 의혹에 찬 눈으로 만찬 장을 채운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미카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 유타르 경, 헤르트경,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러던 카스트로는 문득 눈 에 자꾸 걸리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다 싶었더니, 저것은……. 눈이 마주치자, 굳은 얼굴로 슬쩍 목례를 하는 흑자주색 머리의 남 자는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이었다. '저 자가…….' 잠시 놀라던 카스트로는 곧, 루아에게서 받은 편지에 저 사람에 대 한 말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근위대장이라고 했던가?' 테르니크경이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겨우 납득한 카스트로는 불 편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히 짜증스러운 식사시간이다. "그래, 카스트로. 이년간 테라에서 지내본 소감은 어떠하냐?" 고기를 입에 물던 카스트로는 고기를 질긴 쇠심줄인양 씹어 넘기고, 와인으로 목을 축인 뒤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재미있는 곳입니다." "다행이구나. 네가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했었는데." 카스트로는 입맛이 쓰다고 느끼면서 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한번 사람이 달리 보이니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두 비틀려 보인다. 예전 이라면, 그저 형이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라고 기뻐했을 일이, 이제는 마지못한 인사치레와 반응을 살피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아 마, 이런 현상은 카스트로가 테라로 가기 전부터 있어왔던 것 같다. 시 종장 베제르가 죽고, 아베르노가 자신을 실망시켰을 때부터. 아니 어쩌 면 더 오래 전,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냉정하게 내쳐졌을 때부터, 어딘 가부터 비틀려있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걸까.' 이제, 더 이상 오붓한 가족이라는 것은 없다. 자신부터 아베르노를 없앨 궁리를 하고 있고, 아베르노도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한다. 한 나라에 두 왕은 있을 수 없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리고 카르노를 카르노로 남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다. 그래, 부정하지 말자. 실은 …스스로가 국왕이 되고 싶은 거다. 무슨 이유를 끌어다 붙여도 용납되지 않을 일. 아무리 포장이 그럴듯 해도 혈육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하극상. 그것은 어차피 스 스로에게도 용납되지 않는다. 문득 페트라르카가 생각났다. 엉망으로 취해 울먹이던 일, 동생들과 계모를 죽인 형을 두려워하던 것들……. 입맛이 썼다. 짐승의 쓸개라도 입 속에 넣고 터트린 것처럼, 입맛이 지독하게도 썼다. "……참석하겠지, 카스트로?" 돌연 이름을 불려져서,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고 아베르노를 바라보 았다. "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베르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만찬 뒤에 너희들을 위한 환영무도회가 열린다. 거기에 참석하겠느 냐고 물었다." 카스트로는 슬쩍 루시타니아를 돌아보았다. 그다지 주위를 신경 쓰 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이, 우습게도 편안해 보인다. 마치 아무 걱정 없는 사람처럼. "아닙니다. 긴 여행 때문인지 무척 피곤하군요. 일찍 쉬고 싶습니다. 루시타니아도 그럴 테구요. 그렇지, 루시타니아?" 별안간 호명된 루시타니아는 놀란 눈으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강박감을 받으며, 루시타니아 는 작게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예상대로 아베르노는 더 이상 귀찮 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별 수 없지. 푹 쉬고, 내일부터의 연회에는 꼭 나오거라." "네, 전하."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카스트로는 속으로 되물었다. '내일부터의 연회?' 같잖은 신전을 짓겠다고 각국에 돈을 얻으러 다니는 주제에, 또 연 일 연회를 열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카스트로는 한마디 튀어나가려는 것을 꾹 참아냈다. 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왕세자로서의 긍지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뭐가, 이렇게까지 아베르노 를 바뀌게 만든 걸까? '대체 뭐가!' 그 시각, 기사들 전용 주점인 '라이아나의 술잔'에서는 이년이상 떨 어져있던 세 명의 기사가 뭉쳐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이년간 테라에 머물던 베이경과 포에르경, 그리고 카르노에 남아있던 또 다른 술친구 사로트경이 그들이었다. "…축하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 그러고 보면, 나만 여 전히 이 모양 이 꼴이군. 하아, 너희가 친위대원이라고?" 사로트경이 중얼거리는 말에, 벌써 얼큰하게 취한 베이경이 사로트 경의 어깨를 그 커다란 손으로 툭툭 다독였다. 딴에는 위로인지 몰라 도, 맞는 사로트경에게는 구타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걱정 마. 세상이란 게 웃기지도 않는 거니까, 너도 충분히 친위대원 될 수 있어." 사로트경은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결론 은 약올리는 거다, 라는 것이었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너, 약올리는 거지, 지금?" "아냐아냐, 정말이라니까. 뭐하면 기사단장 해먹든지." "하!"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는 사로트경의 모습에, 옆에서 가만히 술 마시던 포에르경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카나이트는 어떻게 된 거야? 다이크경은 또 어떻게 되신 거고?" 사로트경은 술을 쭉 들이키고 어깨를 들썩였다. 냉소적인 표정이 짙 게 깔려있었다. "뭐, 세상사 다 그렇게 되는 거지. 높으신 군부대신나리께서 아들을 평기사로 두는데 만족하시겠어? 다이크경은 왕세자 전하와 뭔가 안 좋 은 일이 있으셨나본데,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고……, 자리 비니까 냉큼 제 아들 올려놓은 거지." "흐응, 그렇게 안 봤는데. 결국 카나이트도 속물이군." 베이경이 대꾸했다. 함께 술 마시며 혼자 힘으로 출세할거라고 큰소 리치던 카나이트가 아직 눈에 선하다.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 이다. "기사들 분위기는 어때?" 안주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포에르경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 로트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뭐……, 어쩌겠어. 처음에는 반발하던 녀석들이 단장에게 대 련을 신청하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유치하게 기사단 건물 문 앞에다 가 이런저런 욕설을 써놓기도 하고." "그래서?" 구미가 동했는지, 의자를 바싹 끌어 앉으며 베이경이 재촉했다. 사로 트경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는 뭘. 대련 신청하면 오는 족족 받아주고, 낙서는 그냥 무시 해버리고……." "대련에서 누가 이겼는데?" 사로트경은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는 베이 경을 질린 얼굴로 밀어냈다. "입냄새나는 얼굴 저리 치워, 임마! 하여튼 남 안 좋은 일에는 마냥 신나서……." "어떻게 됐냐니까아!" 사로트경은 말을 길게 끌며 끝끝내 답을 얻어내려는 베이경을 한숨 섞인 눈으로 일별하고, 고개를 외로 돌리며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꾸 했다. "보면 모르냐? 다 깨졌지. 빌어먹을 자식! 신입 주제에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검술을 배워 가지고!" 베이경이 '에엣' 하고 놀라는 사이, 포에르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 굴로 되물었다. "다 깨졌다고? 설마 토르 선배도?" "……네번짼가, 다섯번짼가 신청해서 깨졌지. 그 선배 깨지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도 잠잠해지더군." 포에르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토르경이라면, 차기 부단장 감으로 가장 유력했던 기사였다. 다른 기사들보다 한 단계 위의 검술 을 구사한다던 그 사람이,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신입기사에게 대련 을 신청해서 졌다, 라는 것은……, 솔직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만일 카나이트가 처음부터 그런 검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대체 왜 기사단으로 시험까지 봐가며 들어온 것일까? 출세를 원한다면 평기사 같은 것보다 근위대를 거치는 것이 빠를 텐데. 그리고 왕세자의 친위 대원으로 임명되기라도 한다면……. 포에르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끊었다. 도저 히 풀 수 없는 문제는 괜히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차라리 나중에 로카르경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대련 신청도 없으면, 지금은 어떤 분위기인데?" 포에르경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자, 사로트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 답했다. "모르겠어. 소강상태라고나 할까?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기는 한데, 겉으로는 다들 카나이트의 명령에 따르고 있지." 그때 베이경이 막 생각났다는 얼굴로, 사로트경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을 던졌다. "혹시, 너도 대련신청해서 깨진 거 아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한마디 건네려던 포에르경은, 김을 뿜는 주전자처럼 달아오른 사로트경을 보고 멈칫했다. "정말이구나. 맞지? 응? 너도 깨졌지? 에이, 얼굴 보니까 맞는데? 그 치?" 오늘따라 눈치가 빨랐던 베이경은 결국 사로트경의 주먹에 장렬하게 나가떨어졌다. "오냐! 깨졌다! 너라면 안 깨졌을 것 같아? 가뜩이나 열 받아 죽겠 는데!" 사로트경은 불의의 습격을 당해 뻗어버린 베이경을 사정없이 밟아버 렸다. 포에르경은 자존심이 상해서 흉폭하게 변한 사로트경을 부지런 히 뜯어말렸다. "그만해, 그만! 뭐 하는 거야!" "와앗! 싸움이닷!" "근데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잖아! 어이, 일어나 봐! 맞붙으라고!" "덩치가 아깝잖아, 거기! 싸우라고!" "호이, 호이, 호이!" 한사람은 맞고, 한사람은 때리고, 한사람은 뜯어말리는 광경을, '라이 아나의 술잔'에 들른 기사들은 빙 둘러서서 기쁘게 관전했다. 포에르경 은 카르노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오락은 '싸움구경'이라는 말을 절실하 게 실감하며, 자신에게까지 주먹을 뻗는 사로트경의 허리를 부여잡았 다. 친구 하나 잘못 둔 게 뼈아프게 후회되는 포에르경이었다. ================================================================== 신군주론, 6장에서 끝나는 것 맞습니다.. 그리고 이혼반대라는 의견이 날라왔습니다. 씨익..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4 - 관련자료:없음 [3224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8 19:21 조회:139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4 - ================================================================== "……글쎄, 어의의 말로는 한 달을 넘기기가 어려우실 거라더군." 카스트로는 팔짱을 끼고 벽난로에 기댄 채, 비제를 향해 대답했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머무는 객실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비제의 객실에 있었다. 카스트로는 따라 들어오려는 라에르에게 밖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해두었다. 라에르에게는 아직까지 비제가 신하의 맹세를 했다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진행시키는 은밀한 음모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고지식한 라에르에게 그런 말 해봤자 고민만 하게 될 게 분명했다. 엉뚱한데서 일이 새어나갈 수 도 있다는 비제의 말에는, 카스트로도 찬성하는 바였다. "우선은 시간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겠군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폐 하를 뵙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폐하를?"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카스트로에게, 비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이 성사될 때까지만이라도, 폐하께서 살아주셔야 할 테니까요. 전 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한족의 치료술은 제법 쓸만한 편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드릴 수 있습 니다." 이년도 더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카스트로는 느리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지. 그리고 내일쯤 전신전에 갈텐데 함께 가겠나? 소개해줄 사 람도 있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맹세를 한 다음부터, 비제는 좋든 싫든 카스트로를 깎듯이 주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아직 벨리알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이 이제는 제법 실감이 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신하라고 하는 지위가. 카스트로는 벽난로에서 몸을 떼고, 팔짱을 풀어 한 손을 허리에 얹 었다. "참, 나와 동행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비제는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앳된 얼굴이 귀여운 미소를 머금는 다. "전하를 감시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따라붙을수록 좋아하겠지요." "……그런가? 그럼, 내일 보지." "안녕히 주무십시오." 신관답게 정갈한 태도로 인사하는 비제는 여전히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단둘이만 있을 때, 케테르가 어쩌니하 는 헛소리를 하지 말라'는 명령에 충실하게, 입에 밴 축복인사를 하지 않는 비제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2년간 신물나게 들어온 '케테르님의 축복을' 소리만 들어도 머리에 경련이 일 것 같았던 것이다. 한번에 말 기를 알아듣는 데다, 모사가로서는 지금껏 본 중 최고의 재능을 지닌 비제는 참 마음에 드는 신하였다. "자네도, 아르노에서 첫밤을 편안하게 지내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문밖으로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에르가 따라붙는다. 어딘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라, 카스트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가자마자 캐물었다. "왜 그래?" 묻자마자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왜 전하께서 그 한족을 가까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대체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겁니까?" 카스트로는 시종들에게 몸을 맡기며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케테르의 종이 되어볼까 생각중이야." "전하!" 정색을 하고 소리지르는 라에르의 목청에 애꿎은 시종들만 놀라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식구들도 만나봐야지, 라엘. 뭘 걱정하는 거 야? 나를 믿지 못해?" 라에르는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의지를 담은 흑갈색눈 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카스트로를 응시한다. "저는 오히려 전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 습니다." 잠깐동안, 카스트로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라에르에 지지 않을 진지 함으로 대답했다. "내가 자네를 믿고 있다는 것은 자네가 가장 잘 알 거야. 하지만 믿 는 것과 내가 하는 일 전부를 자네에게 보고해야한다는 것은 틀린 문 제야." 칼로 자르듯 단호한 말투였다. 라에르는 잠시 할말을 찾지 못했고, 그 사이 카스트로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나는 목숨을 내맡기고 있는 거다, 라엘, 자네에게. 쓸데없는 생각하 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내일 일찍 보지. 자네 어머니께도 안부 전하 고." 라에르는 굳은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였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라에르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동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자 긴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카스트로는 노곤해진 몸에 잠옷과 가운을 걸치고, 시종들 이 문열어주는 대로 침실에 들어갔다. 화려하기는 하되 낯선 방이다. 마치 남의 집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의, 아주 낯선 기분이었다. 카스트로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집'이 왕궁이다. 하지만 이년만에 집 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방은 조카-인정하기는 싫지만-가 떡 하니 차 지하고 있고, 자신은 낯설기만 한 손님방으로 쫓겨나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은 '집'이 아니라고 알려주는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카스트로는 씁쓸한 기분으로 침실을 둘러보았다. 마치 딛고 있던 대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뿌리박고 있던 토양을 잃고 부유해야만 하는 부평초 같은 느낌. '미카에르 대공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왕세자가 전대 국왕의 뒤를 이어 왕 위를 계승할 때, 계승권에서 멀어진 다른 왕자들은 왕궁에서 나오는 것이 관례다. 어떤 왕자들은 더 일찍 다른 보금자리를 찾기도 하지만, 그들이 나고 자란 왕궁을 떠나는 기분이 그리 좋았으리라고는 생각되 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카스트로는 꿋꿋이 왕궁 가까이에 터를 잡고있는 미카에르 대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질기도록 권력에 기생하는 그 기분도. 하지만 대공과 자신의 차이점은, 자신이 좀더 욕심이 많다는 것일지 도 모른다. 대공은 권력의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데 만족하지만, 카스트 로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 살거나, 아니 면 죽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목숨을 내건 도 박. 이 계획이 틀어진다면, 자신의 목숨은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잠시 방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카스트로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 었다. '만약 아베르노 전하가 내 뜻대로……, 테라의 개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냥 만족하면서 살았을까? 이렇게 형을 죽이려 는 생각 따위 하지 않으면서, 조그만 영지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자신이 그렇게 만족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선은 미노를 되찾고, 테라를 응징하고……, 레이얄에게도 적절한 경고를 주었겠지. 그리고……, 그리고는? 그냥 로시에르 숙부처럼 시골 에서 은둔하며 살아야 했던 걸까?' 어떤 일이든 자신이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객체 따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이 되어 바보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처분을 기다리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무 기력하고 무능력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오지 않았던가. 먼저, 아베르 노가 배신해준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 다. 아베르노가 이렇게 실망시켜준 데에 대해서. 아니면 평생, 기생충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런 결심, 하게 해준 데 대해서, 감사 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작게 중얼거리고, 카스트로는 피로한 눈을 들어올렸다. 조그마한 촛 불로 밝혀진 침실에는 연녹색의 휘장이 가려진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 었다. 카스트로는 방문에서 무겁게 몸을 떼고 침대로 걸어갔다. 가운을 벗고, 휘장을 들치던 카스트로는 순간,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있 는 사람의 모습에 놀라 숨을 멈추었다. 흘러 들어오는 불빛에 비쳐 보이는 매끄러운 금발이 베개위로 풍성 하게 드리워져있다. 그 아래 속눈썹을 바르르 떨면서도 두 눈을 꾹 감 고 있는 여자는 카스트로의 아내 루시타니아였다. 카스트로는 짧은 신 음을 삼키고, 얼른 휘장을 내린 뒤에 성난 걸음으로 침실 문을 열어제 쳤다. "달리 필요하신 것이라도……." 시종장 하미르가 재깍 물어오는 것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카스트로 는 손가락 끝으로 방금 나온 방문을 가리켰다. "저건 뭔가, 하미르! 왜 저 여자가 여기 있는 거야?" "귀빈관에는 부부에게 다른 침실을 마련해놓지 않습니다. 만일 굳이 따로 침실을 쓰시겠다면 달리 방을 마련해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면 두 분의 불화에 대한 소문이 왕궁에 퍼질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 까?" 이런 때마저도 침착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시종장 하미르를 보며, 카스트로는 뿌득 이를 갈아붙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누가 보아도 충성스런 시종장의 태도로, 시종장 하미르는 카스트로 의 대답을 촉구했다. 카스트로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홱 소리나도록 몸을 돌렸다. "됐다! 따로 구할 필요 없어!" 콰앙! 떨어져나갈 정도로 세게 문이 닫혔다. 그 뒤에서 시녀장 다나 와 루시타니아의 제일 호위기사 로카르경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소리 없이 키득거렸다. 시종장 하미르는 그들을 조용히 노려보고는, 시종들 에게 짐들을 마저 정리하라고 재촉했다. 카스트로는 침대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침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휘장 안쪽에 있을 여자를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이년 이상을 부부로 살아오면서도, 의무적으로 합방을 해야했 던 신혼초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같은 침대를 쓴 적이 없었다. 당연하 지 않은가, 누가 원수의 딸과 한 침대를 쓰고 싶겠는가! 카스트로에게 는 아직 '아내'이기 이전에 '소렐의 딸'인 것이다.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침대로 걸어갔다. 아내이건 소렐의 딸이건,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두고 안 좋은 소문이 떠도는 것 은 원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겨우 한 침대 를 쓰는 것쯤이야! 카스트로는 심호흡을 하고 호전적인 기세로 폭신한 이불 한쪽을 들 추었다. 너무 세게 들춰진 이불 끄트머리에, 얇고 속살이 다 비치는 잠 옷을 입고 바들바들 떠는 루시타니아의 팔이 보인다. 카스트로는 속으 로 누구에겐지 모를 욕설을 퍼부으면서 모르는 척, 그 옆으로 들어가 누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 옆에 눕는데 무뢰한을 대하듯 떨 고 있는 루시타니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첫날밤도 아닌데, 저런 웃기지도 않는 잠옷을 입힌 시녀들의 의도도 심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스트로는 들어가다가 닿아버린 보드라운 살갗에 놀라 몸을 굳혔 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리를 떼어내고 침대 가장자리로 가서 루시타니 아를 외면하고 누웠다. 베개 하나를 끌어다 베면서, 카스트로는 입술을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침대가 두 사람이 편하게 떨어져 누울 만큼 크지 않은 것도 상당히 기분 나쁘다. '자지도 않으면서 자는 척은!' 살이 닿았을 때 뱀이라도 닿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서도, 두 눈 을 꼭 감고 부들부들 떨던 루시타니아였다. 카스트로는 스스로가 한심 스러웠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그래도, 루시타니아가 자신만 보 면 놀라거나, 겁먹거나, 울먹이거나, 그런 표정들밖에 보이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포악한 남편들처럼 아내를 구타하는 것도 아니 고, 막 대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누가 보면 자신은 아주 질이 나쁜 남편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저렇게 자신만 보면 질 겁하는 아내를 보면! 스스로가 알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꼬이고 꼬여 도저히 풀 수 없는 모순들을 고민하며 밤새 뒤척이던 카스트로는 새벽녘이 밝아와서야 겨 우 잠들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옆자리에서도 고운 숨소리가 들려 왔던 것을, 카스트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아! 혀엉!" 제 덩치를 생각지 않고 와락 달려드는 형체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다 가, 라에르는 잽싸게 몸을 피해버렸다. 겨우 이년하고 몇 개월 사이에 훌쩍 커버린 동생은 180리는 충분히 넘는 장정이 되어있었다. "뭐야아, 형! 이년이나 못 본 동생이 좀 안아보자는 데, 치사하게 피 하기냐?" 라에르는 어깨를 으쓱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2년 4개월이다. 그게 안아보자는 거였냐? 매달리려는 폼이었지. 대 체 뭘 먹고 그렇게 커버린 거냐, 시엘?" 하하핫, 하고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머리를 긁는 시에르는 키만 컸지,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아직 형 따라잡으려면 멀었는데, 뭘. 형도 더 큰 것 같은 데?" 라에르는 픽 웃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 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라엘……." 연갈색 머리와 선한 눈망울의 감수성 풍부한 자작부인은 눈물도 그 만큼 풍부했다. 울먹이면서, 아들을 끌어안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기 분도 이상하게 만든다. 시에르는 그래서, 소름 돋는 팔뚝을 벅벅 긁어 내리며 한마디 던졌다. "어머니, 형이 전쟁터 갔다가 온 것도 아닌데……." 아들의 몸뚱이를 부여잡고 머리를 쓰다듬던 자작부인은 마치 뺏기지 않겠다는 듯 더욱 꼭 끌어안으며, 시에르를 비난했다. "테라가 어디냐! 전쟁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게 없는 곳이잖니! 아차, 저녁은 먹었니? 얼굴 좀 보자. 까칠해진 것 같은데……." 뺨에 와 닿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라에르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먹었습니다. 여행 때문에 조금 피로해서 그래요. 아버지는 아직 들 어오지 않으셨어요?" "너희 아버지는 요즘 통 못 들어오신다. 못 뵈었니?" 라에르는 다시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 뵈었어요, 궁에서." 자작부인은 아들의 손을 끌어 거실 소파에 앉히며 물었다. "테라에서 고되지는 않았고?" "네." 거의 이년 반만에 돌아온 아들이 마냥 반가웠던지, 자작부인은 쉴새 없이 이것저것을 물어대었다. 평소에 무뚝뚝하기만 하던 라에르도 웬 일인지 순순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시에르는 지나치게 다정 해 보이는 모자의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자신에게는 저래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색다른 모습이 질투를 일으킨다. "형, 선물은?" 라에르는 시선을 들어 시에르를 쳐다보았다. 한심하다는 눈이다. 시 에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빈손의 형을 비난했다. "이년만에 그 먼 테라까지 갔다왔으면서 아무 것도 없냐, 형? 정말 아무 것도 없어?" 라에르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테라 물건이 갖고 싶으면 직접 가서 사! 너도 그새 테라물이 든 거 냐? 정작 테라에서 살고 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카르노에 있던 사 람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생각이상으로 심한 꾸짖음을 듣고 나서, 시에르는 불퉁스럽게 튀어 나온 입술을 다시 원래대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 걸 건 드린 것 같다. "미안, 형.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냥 선물 받고 싶어서……." 라에르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안하다. 내가 지나쳤어. 선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에 가 면 사다주지." 두 아들의 신경전에 숨을 죽이던 자작부인은 겨우 숨을 토해내며, 다시 라에르의 손을 꼭 잡았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아들의 눈을 마주 하고 자작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다. 우리는 그냥 네가 몸 건강하게 돌아와 준 것만도 기뻐요. 시엘도 그렇게 생각할거다, 그렇지, 시엘?" 시에르는 어머니의 반강제적인 눈빛공격에 굴복했다. "네, 어머니. 그래요.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 형." 자작부인은 다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형제가 화목하면 부모는 기 쁘다. "참, 라엘, 너 이번에 온 김에, 참한 아가씨와 선보지 않으련? 시엘 은 벌써 귀여운 아가씨와 약혼하겠다고 떼를 쓰는데, 아무래도 형인 네가 먼저 결혼해야 할 것 아니니?" 라에르는 질린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방실방실 웃고 계신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 라에르는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서……선이라고요?" ================================================================== 흐음.. 요즘 새는.. 크리스마스에는 친구(T.T)와 포도주를.. 이라는 일념하에.. 크리스마스 전까지, 지어온 한약을 다 먹어 없앨 양으로 부지런히 착실하게 쓴약먹고 있음당.. 약먹을 동안에는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먹을 수 없는 게 더 많더군요.. 맛난 것.. 먹고시퍼요.. ㅠ.ㅠ 가루음식, 면류,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음료수, 과일, 김밥도. NO 고기는 돼지고기와 닭고기만 된다는데, 닭고기도 백숙만 된다는 --; ㅠ.ㅠ 여러분은 건강하세요.. 특히 위는 망가트릴게 못된다는.. ... 매운 것도 먹고시퍼요~~~~ ㅠ.ㅠ -쓰다보니, 왠지 처절해지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5 - 관련자료:없음 [3227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09 20:43 조회:145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5 - ================================================================== 긴장 속에서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던 루시타니아는 문득 이 상한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까지 혼몽한 가운데에서도 품 안이 뭔가 간지럽다는 느낌이 전해져왔던 것이다. 루시타니아는 시야 가 채 회복되지도 않은 눈으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연녹색 휘장을 지나며 푸르게 변한 아침 햇빛이 주위를 어렴풋이 분간할 수 있게 해준다. 루시타니아는 비몽사몽간에 가슴에 매달려있는 낯선 물 체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놀란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 입을 벌렸지만, 차마 비명도 뭣도 나오지 않는다. 루시타니아는 아연 해진 얼굴로, 자신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카스트로를 보고 꺽꺽 대고만 있었다. 검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맞닿아있는 목과 가슴 윗부분 을 간지른다. 점점 빨라지는 루시타니아의 숨소리와는 달리 깊고 느린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그때마다 얇은 잠옷 안쪽의 살갗에까 지 따스한 숨결이 닿아온다. 처음의 놀람이 가시자, 루시타니아는 지금 두 사람이 취하고 있는 포즈에 당황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았 다. "저……전하?" 조심스럽게, 깨우려는 것인지 깨지 않도록 하려는 것인지 애매한 목 소리로 부르고 나서, 루시타니아는 뜨거워진 얼굴을 감싸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아니 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떨어지자마자 허리에 얹혀있던 카스트로의 팔이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꽈악 옥죄어온다. 루 시타니아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처럼 아프다. 게다가 조금 떨어져있던 카스트로의 얼굴이 더욱 가슴에 밀착해오더니 부비적부비적 비벼대고 있었다. 루시타니아는……, 난감 했다. 부부사이에 있을 수 있는 스킨쉽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거의 남 남이나 다름없던 부부사이다. 카스트로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낯뜨거운 잠버릇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게 당연했다. 루시타니아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움츠리면서, 어떻게 해야될지 머리를 굴려댔다. 만약 이 모습 그대로 카스트로가 깨기라도 한다 면……. '난 몰라…….' 루시타니아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 시녀장 다 나가 자신을 이곳으로 몰아넣은 탓이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것도 없 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시종장 하미르의 목소리였다. 루시타니아는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렸 지만, 카스트로의 팔이 더욱 죄어오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카스트로 전하, 루시타니아 전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시종장 하미르와는 판이하게 다른,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것은 시녀장 다나였다.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 게 시녀장을 부를 뻔했던 루시타니아는 다급하게 입을 막으며 조심스 럽게 카스트로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꽤 피곤했던 모양이다. "전하. 왕세자궁에서 조찬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부터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루시타니아 전하!" 마치 오페라의 이중창처럼 두 사람은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를 불러 댔다. 루시타니아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엄두가 나지 않기는 하지만,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저 두 사람이 이런 낯뜨거운 모습을 볼 지도 모르니까. 루시타니아는 속으로 '난 몰라!'를 외치며 카스트로의 어깨에 손을 댔다. 매끄러운 실크 잠옷의 감촉너머 단단한 골격이 느껴진다. 왠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루시타니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카스트로를 흔들며 불렀다. "전하. 카스트로 전하." "……." "전하……." 반응이 없는 카스트로를 더 강하게 흔들며 부르자, 반응이 있었다. 끄응, 하고는 더욱 품안을 파고들며 몸을 휘감아왔던 것이다. 순간적으 로 화들짝 놀란 루시타니아는 자기도 모르는 새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 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 "전하!" 촤라락! 휘장이 격하게 젖혀지고, 그 사이로 시종장 하미르와 시녀 장 다나가 놀란 얼굴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삼왕 자 부부의 모습이란, 이런 거였다. 아침부터 음흉하게 아내를 탐하던 카스트로와, 온몸으로 덮치는 남편을 필사적으로 떼어내는 루시타니아. 카스트로가 막 잠에서 깨어 상황파악을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다는 것 을, 시종장 하미르도, 시녀장 다나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엉겨있는 모습을 본 시종장과 시녀장은 황급하게 시선을 내리 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때를 잘못 택한 것 같습니다. ……천천히 나오 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그럼, 계속 하십시오." 촤라락! 다시 휘장이 닫혀버렸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루시타니아의 허리를 휘감은 채 굳어서, 멍하니 닫혀진 휘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대 체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소리야?' 뭔지 모르지만 자다가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저기… 저기, 전하…파, 팔 좀……." 신경을 긁는 어눌한 말투가 들려오자 카스트로는 인상을 그으며 고 개를 휙 돌렸다. 하얀, 은은한 살냄새가 묻어나는 탐스러운 가슴이 아 슬아슬하게 옷에 걸쳐진 채로 눈앞에 아른거린다. 카스트로는 흠칫 몸 을 굳혔다.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천천히 가슴선을 따라 위로 올 라가자, 낯익은 보라색 눈동자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자신을 내려보 고 있었다. "저……언하" "……!" 카스트로는 경악했다. 다음순간 정신을 차린 카스트로는 경직되었던 몸을 재빨리 루시타니아에게서 떼어냈다. 급하게 일어나느라 젖혀진 이불 틈으로, 둘둘 말려 올라간 루시타니아의 잠옷과 그 아래 드러난 가늘고 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온다. 카스트로는 당혹스러워져서 얼 른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시종장 하미르와 시녀장 다나가 했던 말 들이 떠오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때를 잘못 택한 것 같습니다. ……천천히 나오 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그럼, 계속 하십시오.' 카스트로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두 사람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카스트로는 관자 놀이를 누르며 상황을 정리했다. 왜 자신이 루시타니아를 껴안고 있었 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떻게 되었든 오늘 아침의 일이 과 장에 과장을 더해서 시종과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퍼질 것은 뻔한 일 이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왕궁의 모든 시녀들이 알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고, 그러면……. '오, 로마여!' 왕궁에 두 사람의 불화가 소문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그 짓(?)을 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 소문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누가 소렐의 딸과……! 카스트로는 부아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살벌하게 루시타니아를 노려 보았다. 순간 움찔하고 다시 기가 죽는 루시타니아를 보고있자니 더욱 화가 났다. "쓸데없는 소문 퍼지지 않게 하시오. 알겠소?" 카스트로는 되지도 않을 억지를 부리며, 루시타니아가 대답하는 걸 듣지도 않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휘장을 들치고 걸어나가는 걸음폭이 평소보다 더 크다. 카스트로는 화가 났다. 소문도 소문이지만,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 다. 왜 소렐의 딸을 보고 가슴이 뛰었는지, 왜 그녀의 가슴과 허벅지에 몸이 뜨거워졌는지, 카스트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 기 싫었다. 그런 일은, 카스트로 일생에 없어야했다. 원수의 딸을 보고 욕정을 느끼다니, 그건 변태다! 라고 생각하는 카스트로였다. 그런 한 편으로, 이년 사이에 빈약했던 가슴이 기분 좋게 풍성해진 것이 놀랍 다고 생각하는 카스트로는, 곧 스무 살이 되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좋은 소리가 들리더구나,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조금 늦게 식사를 하러 들어가다가 멈칫하고, 아베르노 를 돌아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것 같다. 카스트로는 왠지 불안해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되물었다. "좋은 소리라니요?" "하하하……." 한바탕 웃으며 뜸을 들이던 아베르노는 우선 앉으라고 말하고, 능글 맞은 얼굴로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시작할 무렵에야, 아베르노는 여전히 싱글거 리는 얼굴로 나직하게 말해왔다. "많이 먹거라. 고기를 많이 먹어야지. 아침부터 힘썼으니 기운을 보 충해야할 것 아니냐? 하하핫" 켁! 입에 넣고 씹어 삼키던 고기가 목에 걸린다.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하자, 시종장 하미르가 냅킨을 주며 조심스럽게 등을 두드린다. "콜록, 콜록!" "하핫, 사내녀석이 쑥스러워하긴!" 불과 두 시간 전이었다. 씻고 나서 옷 입고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 말이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그 소문이 어떻게 아베르노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는 말인가!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슬쩍 옆에 앉아있는 루시타니아를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시뻘개진 얼굴을 접시에 박을 듯이 숙이고 있었다. 루시타니아의 옆얼 굴을 잠깐 쳐다본 카스트로는 천천히 식탁을 휘둘러보았다. 조촐하게 5남매와 그 배우자들만 모인 자리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실 웃음을 쪼개고 있는 지스카르와 제 일인 양 얼굴 빨개져서 마치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쳐다보는 체리나의 모습이 쿡쿡 심장을 찔러댔다. 새침한 시에나와 왠지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 같은 라에니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뒤에 붙어있는 시종들조차 웃고있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게다가 뒤에서 라에르가 보는 시선도 신경 쓰였다. "다행이구나. 테라에서 너희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들려 와서 걱정했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없는 모양이다." 카스트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방금 전에 한 말은 어디서 들었 는지 묻고 싶었다. 어차피 그것도 소문이 아닌가! "참, 네 생일이 너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 은데, 올해는 왕궁에서 화려하게 무도회를 열자꾸나. 어떻습니까, 루시 타니아?" 루시타니아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겨우겨우 치켜들고 떨리는 목소 리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가, 감사합니다, 전하." "하하하, 감사는 무슨. 동생의 생일이고 결혼기념일인데, 당연히 해 줘야 할 일이지요." '해줘야 할 일?' 비위가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카스트로는 짐짓 감사의 말을 던졌 다. "그런 것까지 챙겨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아니다, 카스트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다." 시원하게 웃음 짓는 아베르노는, 누구의 눈에나 '인심 좋은 형'임에 틀림없었다. ================================================================== 요즘 이래저래 정신없이 바빠서, 메일 주신 분들께 제대로 답장 못해드리고 있습니다.. 잡담도 메일도 재미있게 읽고만 있다는.. --; 죄송.. 꾸벅.. 게을러서..가 아니라고(--; 정말이냐?).. 믿어주세요! (국회로? --;)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6 - 관련자료:없음 [3231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0 21:08 조회:145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6 - ================================================================== "루시타니아!"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카스트로는 낯익은 목소리가 루시타니아를 불 러 세우자 얼결에 걸음을 멈추었다. 빠르게 걸어와서인지 숨찬 얼굴로 다가온 사람은 막내인 체리나였다. "오라버니, 루시타니아 전하와 놀아도 되지요? 아니면 특별히 할 일 이라도……." 말끝을 흐리며 슬금슬금 카스트로를 훔쳐보는 꼴이 다시 한번 카스 트로의 심기를 긁어내린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부 부사이의 일인데 다들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카스트로는 자신이 치한이나 색골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불쾌해졌다. "루시타니아와의 일은 루시타니아에게 물어!" "…루시타니아, 잠깐 저와 이야기 좀 하실래요?" 곧바로 루시타니아에게 묻는 체리나를,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체리나는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고 루시타니아만 상대했다. 루시타니아는 난감한 얼굴로 카스트로의 표정을 훔쳐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루시타니아는 제가 잠시 빌려갈게요." 잽싸게 루시타니아의 손을 잡아끌고 가버리는 체리나는 어딘지 모르 게 악동같이 느껴졌다. 저 말괄량이가 순진한 루시타니아를 얼마나 난 처하게 만들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전하, 가시지요." 카스트로는 옆에 서 있는 라에르와, 뒤에서 줄줄이 기다리고있는 시 종,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시녀들 몇몇이 루시타니아를 쫓아간다. 체리나에게 잡혀간 이상, 쓸데없는 말까지 줄줄이 늘어놓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체리나의 수 다에 말려들면……. 카스트로는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휘저었다. 조금 긴 듯한 머리가 뺨에 부딪혀온다. "전하?" "아니다." 카스트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라에르는 상당히 볼이 부어있었다. 불만스럽게 눈꼬리가 찢어진 눈 이 한 사람의 옆머리를 노려보고 있다. 단정하게 땋아져 내린 긴 감색 머리의 주인은 한족의 비제 류였다. 라에르의 시선이 카스트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늘어붙은 이유는, 아무래도 못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숙소까지 가서 일부러 비제를 데리 고 나와 함께 전신전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라에르는 솔직히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아니면 환청이 들릴 리가 없는 것이다. 아마 세상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터였다. 그 누가, 케테르의 신 관을 전신 로마의 신전에 데려갈 생각을 하겠는가! 라에르는 다시 그 옆에 앉아있는 카스트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루아와 휘둥그레진 눈의 나자르도 한번씩 쳐다보았다. 카스트로는 결국 비제를 전신전으로 데려왔다. 그래서 지금 이 어색 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고! "흠, 흐음, 그, 그러니까, 비제… 님이시라구요?" 다갈색 머리의 사람 좋은 루아도 적잖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었 다. 하지만 비제쪽은 달랐다. "류가문의 비제입니다. 카스트로 전하께 말씀 들었습니다. 전하를 도 와 힘든 일을 하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당혹과 놀라움, 그리고 의문이 차례로 루아의 얼굴을 스쳐간다. 루아 는 무언으로 카스트로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우선, 라엘도 좀 앉지. 조금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까." 라에르가 의자를 가져다 카스트로의 옆에 앉자, 카스트로는 루아를 쳐다보고 다시 나자르를 흘깃 쳐다보았다. 루아는 재깍 알아듣고 나자 르를 내보냈다. "나자르, 손님들 점심 드시고 갈 거니까 가서 식사준비 좀 하거라. 너도 알다시피 한족의 비제님도 계시니까, 특별히 신경 써서. 알겠지?" 나자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루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흘끗 비제 를 쳐다보고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신전이 테라의 한족들에게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는 귀에 딱지 가 앉도록 들어왔던 터였다. 그런 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얕보일 수 없었다. 나자르는 상당히 진지했다. "네. 그럼 점심식사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 나자르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자 비제는 짧게 신어를 읊조렸다. 카스 트로는 몇 번 보아왔던 터라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라에 르나 루아는 바짝 긴장하며 비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비제는 생긋 웃 으면서 방금 전의 행동을 설명했다. "혹시나 해서 이 방 안에 결계를 쳤습니다. 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이곳에서 하는 말을 엿들을 수 없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아와 라에르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적잖이 긴장한 모습들이다. "우선, 먼저 확인해둘 것은, 어떤 경우에도 두 사람이 나를 따를 수 있는지,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 카스트로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정에 신경 쓰며, 남은 말을 뱉었다. "왕세자 전하를 폐하고, 내가 카르노를 차지하는 경우 말입니다." "……!" "전하!" 라에르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짧게 소리쳤다. 카스트로는 당혹스러 워하는 두 사람을 단호한 눈빛으로 마주했다. "비제님은 그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셨을 겁니다. 왕세자 전하와 나, 둘 사이에 양립은 불가능합니다. 확답을 주십시오." 루아는 낮은 신음을 삼키고 혼란스러운 시선을 닫았다. 솔직히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베르노가 전국 각지 에 케테르의 신전을 세우라고 명령했을 때부터, 충동적으로 떠올랐던 생각들이다. '아베르노 대신 카스트로가 국왕이 된다면.' 케테르의 신전이 늘어나는 만큼 전신 로마가 설 자리는 사라진다. 이대로 아베르노가 국왕이 되어 집권한다면, 어느 순간 이 초라해진 신전마저 철거하라고 지시할 지 모른다. 확실히 케테르의 광신도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아베르노의 행동들은 이후 카르노에서 전신 로마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왕실의 권력다툼에 끼어드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이 일은 자신이 먼저 카스 트로를 부추겨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전신 로마를 부정하고 있는 왕 세자와, 전신 로마와 깊은 연대의식을 가진 삼왕자. 전신 로마의 사제 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베르노 전하께서 먼저, …저희를 배신하셨습니다. 저희 로마 교단으로서는 아베르노 전하에 대한 의리 따위, 이미 가지고 있지 않 습니다. ……전력을 다해 전하를 돕겠습니다." 카스트로는 안도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도 혼란 스러워하는 라에르를 돌아보았다. "결정하기 어려운가, 라엘?" 카스트로가 부르는 자신의 애칭을 듣고 라에르는 더욱 혼란스러워지 고 있었다. 카르노에 대한 충성과 카스트로에 대한 충성의 사잇길에서 라에르는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카르노를 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카스트로를 택해야 하는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걸까' 카르노에 대한 충성이 카스트로에 대한 충성과 다르다고 결론지어야 하는 이유는? 카르노가 아닌 아베르노와 카스트로의 일만이라고 시야 를 좁힐 수도 있었다. 정통성을 가진 왕세자와 그를 폐하려는 삼왕자. 어느 쪽을 선택해야 옳은가. 카스트로가 옳지 않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카스트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힘들겠지. 도의적으로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쪽을 고르라고 한다는 게 잔인한 일이지. 하지만, 라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카르노를 카르노로 남아있게 하기 위해서, …아베르노 전하 는 안 된다. 아베르노 전하의 카르노는 이미 카르노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라에르와 카스트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카스트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딘가 아픔이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믿는 듯 당당한 미소를. 순간 가슴이 욱씬거려왔다. 먼 옛날 자신이 했던 맹세가 떠올랐다. 맹세했던 것은 오로지 카스트로를 위해 살겠다는 것. 카스트로를 위해 죽겠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라에르는 자신의 고민이 우스워졌다. 주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멍청하게 카르노니, 아베르노니 를 저울질하고 있었다니! "저는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달리 대답이 필요하십니 까?" "……."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맞받으며, 라에르는 확신 어린 말투로 대 답했다. "전하를 믿습니다. 전하가 옳다고 믿으신다면, 저도 그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전하가 옳지 않아도, 저는 전하를 따를 겁니다.' 라고 이어지는 말은 그대로 마음속에 봉인해버렸다. 카스트로는 라에르의 어깨를 짚었다. 카스트로의 눈은 명백한 뜻을 전해오고 있었다. '고맙다' 라고. '믿어줘 서 고맙다.'라고. 라에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트로는 빙긋 웃으며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그럼, 세부계획으로 들어갑시다. 제피르경의 훈련은 어떻습니까?" 평상시의 그 시원스러운 말투로 회의를 이끌어나가는 카스트로는, 더욱 묵직해진 무게감과 함께 더욱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삼왕자비의 호위기사인 로카르경은 지금에야 새삼 왕족들의 우아하 고 위엄 있는 모습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난잡한 사생활을 지켜보는 것과 왕녀의 가공할만한 수다를 지켜보는 것은 차 원이 틀렸다. 전자가 같은 남자로서의 은근한 부러움을 내포한 질투와 혐오였다면, 후자는 그야말로 왕족도 사람이었다, 라는 환상의 붕괴였 다. 지금 루시타니아에게 들러붙어 몇 시간째 집요한 추궁의 날을 숨 기지 않는 체리나는, 유감스럽게도 집에 있는 여동생과 별 다를 게 없 어 보였다. "정말 오라버니가 아침부터……, 음……, 그랬어요?" 차마 스스로도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끝까지 묻는 이유를, 로카 르경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체리나 전하……." 난처한 듯이 고개를 숙이는 루시타니아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 같 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그만둘 체리나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요? 오라버니는 수 우운 내숭쟁이! 괜히 좋으면서 아닌 척 차갑게 군거구나. 그렇죠, 루시 타니아?" 오, 로마여! 로카르경은 주인의 처지가 안쓰러웠지만, 거기서 구해주 는 것까지는 자신의 임무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호위기사의 임무는 '신변' 보호이지 사생활 보호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자들 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듣고있어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다른 사내 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지 몰라도, 로카르경은 손댈 수 없 는 여자들의 수다는 사양이었다. "대답 좀 해봐요,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도 우리 오라버니 좋아해 요? 아니 사랑해요? 사랑이라는 거, 어떤 기분이죠? 정말 좋아요?" 저쪽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는 체리나 전하의 호위기사가 존경스러 워진다. 로카르경은 솔직히 오늘 아침에 소문으로 전해들은 말들을 믿 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측근으로서, 카스트로가 얼마나 루시타 니아를 무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 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싸늘한 눈으로 흘겨보고, 해야 될 말만 북국의 눈보라처럼 찬 목소리로 툭툭 내뱉고 가는 사람이다. 같은 카 르노인으로서, 소렐 공작을 싫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 조그맣고 가녀린 여자를 그리 심하게 대할 수 있다는 데는 차라리 존 경스러워질 지경인 것이다. 남자라면, 이렇게 곤경에 처한 숙녀를 보고 서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무서워서 파 랗게 질려 떠는 모습을 보면 위로해주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 가! 그것도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자를! 그 당연한 일을, 카스트로는 무시하다 못해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있었다. "어때요, 오라버니는 밤에…… 그러니까, 정열적인가요?" 콜록! 얼결에 기침을 하고 만 로카르경에게 새침한 체리나의 눈빛이 쏘아진다. 로카르경은 얼른 붉어진 얼굴을 추스르고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체리나의 시큰둥한 시선이, 다시 새빨개진 루시타니아에게 닿아 반 짝반짝 빛난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그, 그게……." 곤경에 처한 루시타니아를 도운 사람은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남 편인 카스트로였다. "삼왕자 전하 듭십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체리나는 입을 다물고 방문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물론 루시타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오던 카스트로는 두 여 자를 쳐다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하루종일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덕분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왕궁에 익숙하지 못한 루시타니아 를 혼자 내버려두고 가시다니요. 자상한 남편이라면, 그런 짓 하지 않 는다구요." 체리나가 생글거리며 카스트로에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네가 내 대신 충분히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카스트로는 체리나를 거쳐 루시타니아를 쳐다보았다.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늘 연회에는 나오실 거죠? 오랜만에 오라버니와 춤을 추고 싶은 데요." 체리나는 잘 만났다는 듯이 카스트로를 붙잡고 재잘거렸다. 카스트 로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지. 참, 두 사람 만난 적이 있던가? 내 여동생 체리나, 그리고 이쪽은 비제님이시다." 체리나는 신경도 쓰지 않던 카스트로의 옆을 쳐다보았다. 얼핏 보기 에 전에 만찬장에서 본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서 보기는 처음이다. 열 여섯, 열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반짝임이 느 껴지는 감색머리를 땋아 내린 한족의 신관이 체리나를 향해 단정하고 정갈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한족 류가문의 비제입니다. 체리나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아……." 인사 끝에 생긋 미소를 붙이는 비제를, 체리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다. 굉장히 예쁜 미소다. 그 미소에 홀린 체리나는 답례 같은 것은 벌써 잊어먹은 눈치였다. "체리나?" 카스트로가 부르고 나서야, 체리나는 놀란 얼굴을 수습하고, 좀 전의 추태를 메우려는 듯 우아하고 기품 있게 인사하려고 했다. "카르노의 이왕녀 체리나입니다. 비제님을 뵙게 되어 무척……, 무척 기뻐요." 다시 생글 웃는 비제의 주변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체리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넋을 잃고 비제를 쳐다보았다.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 거다, 라고 생각하며, 체리나는 얼굴을 발 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신또래의 한족 남자라니 너무너무 귀여웠다. 왜 진작 몰랐을까? 체리나의 기이한 행태를 목격한 카스트로는 헛바람을 내며 머리를 저었다. '체리나가 열 일곱 살이던가?' 다른 남자를 황홀한 눈으로 보는 체리나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 제 저 말괄량이도 여자가 되나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럼, 계속 얘기들 나누지. 비제님, 들어가시죠." 당분간 누구에게도 두 사람 사이의 맹세를 숨기기로 한 카스트로는 비제에게 깍듯이 말했다. "네, 전하." 비제는 카스트로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집무실로, 커 다란 책상과 푹신한 소파가 있는 공간이다. 카스트로와 비제, 그리고 라에르까지 그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체리나는 아쉬운 눈으로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체리나 전하?" "……저분, 루시타니아도 알고 있어요? 어떤 분이죠? 혹시 저분, 사 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멍하니 넋을 빼고 중얼거리는 체리나는 뜻하지 않은 첫사랑에 푹 빠 진 열 일곱 살의 꿈 많은 소녀였다. 루시타니아는 좀 전까지와는 또 다른 질문의 홍수를 예감하며 나직이 한숨을 뱉어냈다. ================================================================== ^^ 간만에 조카가 놀라와서, 그 녀석 재롱보느라 한참 웃었네요.. 놀이방에서 배웠다며 노래하고 춤추며 어설프게 엉덩이를 씰룩씰룩.. ^^ 두 주인공 녀석의 이혼을 바라는 분이 많으셔서.. 어제 글 올리면서 솔직히, 욕먹겠군.. 걱정했는데.. 의외로 주인공 커플 인기가 급상승해서 놀랐다는.. ^^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7 - 관련자료:없음 [3233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1 20:23 조회:141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7 - ================================================================== "……래도 될까?" 머뭇거리는 듯한 카스트로의 목소리에 이어, 비제의 잔잔한 음성이 이어진다. "루아 사제께서 도와주시기로 한 이상, 나머지 일은 저와 그분이 처 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전하께서 이일 저일 관여하시면 일이 잘못 될 수 있습니다. 일이 완료될 때까지 모르는 척, 오히려 아베르노 전하 와 가깝게 지내십시오. 그쪽이 사후의 일에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라에르는 조용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일단 카 스트로에게 그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혼란스럽다. 과연 자신 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위험 한 일을 말리는 것이 카스트로를 위해 더 나은 것은 아닌지, 조금 더 두고보자고 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에르는 폭풍의 핵 근처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거센 회오리를 몰고 올, 은밀하고 적막한 중심부. 모 든 일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구체적인 진행상황은 수시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보안에는 각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라에르는 그 말을 하며 자신을 흘깃 보는 비제를 마주 쳐다보았다. 아무리 같은 목적을 가진다고는 해도 역시 저 한족은 불길했다. 카스 트로는 자신과는 달리 그를 신용하고 있는 듯 했지만, 어떻더라도 저 자는 한족이다. 비제는 라에르에게 스치듯 미소짓고, 다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책상에 걸터앉아서, 카스트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전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지. 어차피 친형을 죽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 카스트로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자학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비제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요구했 다. "'열 한 개의 검'의 지휘권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 라에르는 거리낌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 비제를 의구심 가득한 눈으 로 쏘아보았다. 비제는 꺼림칙해하는 카스트로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 을 이었다. "한 다리 건너는 것보다, 제가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이 기밀 유지 에도 좋을 겁니다. 맡겨 주십시오. 대륙 최고의 첩보조직으로 만들겠습 니다." 카스트로는 묵묵히 앉아 생각해보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 다. "루아 사제와 의논해보지. 처음부터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차츰 그렇 게 되도록 할 수는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전하." 라에르는 입술을 꽉 닫고 비제를 노려보았다. 카스트로가 저 자를 '열 한 개의 검'까지 맡길 정도로 믿는다는 게 다시 한번 꺼림칙해졌 다. 저 자를 보면, 한족이라는 존재는 상당히 위험한 자들일 것이라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 휘황스런 샹들리에 불빛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웃고 떠들어댄다. 부 드러운 선율 속에 젊은 남녀가 어우러져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춤을 추 고 있었다. 빚더미에 올라있는 왕실의 무도회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 지만, 귀족들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은 채 춤과 파티 자체에만 열 중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도 지금 그들 무리에 끼어서, 장님인척, 귀머거리인척, 백치 인척, 그렇게 웃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테라에서 2년 동안 익힌 솜씨로 아베르노를 비롯한 모두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것쯤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쾌락을 쫓아, 그렇게 타락해 가는 것.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거짓말은, 세상을 속이는 것은 이 렇게나 쉬웠던 것이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카스트로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트너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춤을 추는 내내 카스트로를 쳐다보던 유리나는 살짝 머리를 저었다. "아니, …뭔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아서……, 테라가 사람을 변 하게 하기는 하는가 보군요." "칭찬입니까?" 가만히 웃던 유리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소문은 어떻게 된 겁니까? 테라에서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신 것 같던데……."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싱긋 미소짓는 카스트로는, 어딘지 퇴폐적인 분위기를 깔고 있었다. 유리나는 그 소문이 사실일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와 여자를 능숙하게 이끄는 팔이 그랬다. "카르노에서는 자제해줘요. 가뜩이나 안 좋은 때에 그런 소문, 듣고 싶지 않습니다." "네, 그러죠. 여전하시군요, 누나는. 저만 보면 꾸짖을 것부터 찾으시 고……." 아이 같은 투덜거림에, 유리나는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전하께서도 여전하십니다. 어렸을 때처럼 말썽만 피우시고……." "누나아!"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카스트로가 호소했지만, 유리나는 자신의 태 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한 살 차이인 남매의 관계는 여전히 어른과 아이의 관계였다. 위로 한 살 차이인 유리나보다, 밑으로 두 살 차이인 체리나와 더욱 정신연령이 가까운 카스트로는 항상 어른 같은 누이가 힘들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고, 이야기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틀었 다. "레이니트경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시는 겁니 까?" 매끄럽게 춤을 추던 유리나의 스텝이 잠깐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자 리를 찾는다. 카스트로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이는 누이 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멋진 분입니다. 능력도 있고, 적당하게 야심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 다 항상 저에게는 자상하게 신경 써 주시죠. 근사한 남편감이라고 생 각합니다." 유리나는 한참동안 아무 대답이 없자, 슬그머니 눈을 들어 카스트로 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카스트로……." "자상하게 신경 써 주면……, 근사한 남편감입니까? 자상하게 신경 쓴다는 게 어떤 거죠? 의자를 빼주는 거? 마차에 오르내릴 때 도와주 는 거? 그건 남편이 아니라 시종이 할 몫이 아닙니까?" 혼란에 빠진 남동생을, 유리나는 쿡쿡 조그맣게 소리내어 웃으며 쳐 다보았다. 회오리치는 검은 눈이 유리나를 응시한다. "그게 아닙니다. ……글쎄요, 저도 뭐라고 설명하기 애매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상대가 스스로 뭐가 필요하다 고 말하기 전에 미리 눈치채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 물론 물질적 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말입니다. 아마 그런 거라고 생각하 는데요."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동생을 유리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놀렸다. "왕자비 전하께서 전하께 자상하지 못하다고 하시던가요?" "……! 저만한 남편감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울컥하는 김에 말을 내뱉고도, 카스트로는 가슴께가 심히 찔리는 것 을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자신처럼 불친절한 남편도 없을 것이다. 하 지만 상대가 소렐의 딸인데다가, 헤라까지 어떻게 했을 지 모를……. 카스트로는 얽혀버린 생각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막았다. 결론도 나 지 않고 가슴만 답답해지는 생각들이다. 헤라의 일이라면, 그녀를 직접 찾아내지 않는 한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몇 달째, 대륙 각지의 '열 한 개의 검' 단원들도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시간 이 갈수록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정말 헤라 는 자신이 싫어서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카스트로는 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잘해드리세요. 왕세자 전하처럼, ……그러지 마시고…, 과거는 과거 일 뿐이고, 왕자비 전하는 평생을 전하와 함께 할, 전하의 부인이잖아 요?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를 생각해 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 라는 위치와 원수의 딸이라는 위치. 두 가지가 왜 하나가 되어서 이렇 게 골머리를 썩이는지 모르겠다. 모두 다 그 정신나간 한족들의 머리 에서 나온 짓거리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소렐의 딸만 아니라 면 루시타니아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을 텐데. 자기 앞 에서 매번 움츠러드는 루시타니아를 보면서 자신이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체리나처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을 때마다 바 락바락 대들기라도 하면, 이렇게 가슴에 돌을 매단 것처럼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바보처럼 아무소리 못하고 싫은 소리하면 하는 대로, 화 를 내면 내는 대로 고스란히 들어버리고 상처 입는 루시타니아는 곁에 서 지켜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그래서 더 매몰차게 대하는지도 몰랐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악순환이다. 후우. 카스트로는 짜증스런 한숨을 뱉 어냈다. 평생동안 이렇게 산다면, 아마 무척 끔찍할 터였다. "오라버니!" 유리나와의 춤이 끝나자마자, 카스트로는 얼결에 체리나에게 떠밀려 춤을 춰야했다. 춤이 시작된 이상 춤이 끝날 때까지는 체리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영악한 체리나는 거기까지 계산한 듯 춤이 시작되자마자 질문을 퍼부어 댔다. "비제님은 안보이시네요?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신대요?" 왜인지는 모르게 예감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카스트로는 김빠진 얼 굴로 대꾸했다. "높으신 한족님들이 이런 연회에 참석하는 거 봤냐?" 체리나는 실망한 얼굴로 그 커다란 금갈색 눈망울을 또르륵하고 굴 린다. "그분하고 친하세요, 오라버니?" 어느 때보다 사근사근하게 물어보는 여동생을 내려다보다가, 카스트 로는 잠시 높다란 천장의 샹들리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소 냉정할 지도 모를 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족은 보통 인간들과는 결혼하지 않아. 그건 평민과 왕족이 결혼 하는 것보다 더 가능성 없는 얘기야. 그러니까, 비제님께 관심 갖지 마 라, 체리나." 그 말에 입을 꾹 다문 체리나는 비난이 역력한 눈으로 카스트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체리나가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단호 하게 잘라 말했다. "왕족은 결혼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껴봤자 자신만 상처 입 을 뿐이야. 알잖아, 체리나. 유리나 전하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야. 거 기다가, 너는 상대가 안 좋아. 처음부터 안될 사람이다." "너무해요, 오라버니. 잔인해. 난 다만 그 분에 대해 알고싶을 뿐인 데." "비제님을 보기만 해도 황홀해하는 너를 보고, 그저 궁금해서 물어 보는구나, 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 같았니? 그렇게 눈치 없지 않아. 내 말 들어, 체리나. 비제님에 대해 알아서 좋을 것 없어." 체리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카스트로의 리드에 맡겨 춤을 추었 다. 잔뜩 기죽은 체리나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다. 춤이 끝날 때쯤 고개를 쳐든 체리나는 기운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참 잔인해진 거 알아요?" 카스트로는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그런지도……." 가슴이 뜨끔한 이유는 체리나에게 그런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카스 트로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의 여자와 웃고있 는 아베르노를 쳐다보았다. ================================================================== 글의 진도는 원하는 만큼 안나와주고..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가뜩이나 스트레스 쉽게 받는 새를.. 심심하면 한번씩 긁어대고.. 덕분에 머리아프고 속답답하고.. ...몸까지 안 좋은 백수는 슬픕니다.. T.T ..건강하세요.. - 왠쥐.. 우울해지는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8 - 관련자료:없음 [3236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2 19:50 조회:143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8 - ================================================================== 라에르는 찜찜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누군 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저절로 경각심을 일으키는 집요하고 불쾌한 시선이다. 하지만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자신을 쳐다 보는지, 라에르는 몇 번을 둘러봐도 찾아낼 수 없었다. 누가, 왜 자신 을 쳐다보는 것일까. 하루종일 엄청난 소리를 들어야했던지라 신경이 곤두서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쳐가는 시선을 그렇게 예민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라에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카스트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오래 고정되지 못했다. "오랜만이에요, 라에르경. 거의 2년 반 만이지요?"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에 라에르는 뜨악한 표정을 지우지도 못하고 돌아보았다. 화사한 주황색과 노랑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의 미녀가 거기 서 있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그 여 자다. 모리노 남작부인. "무례하시군요. 인사도 하지 않으시나요?" 생글생글 웃는 남작부인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 다. 하긴 겨우 2년만에 그 미모가 어디로 달아난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이지만. 라에르는 살짝 목례하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폐하께서 아직도 부인을 곁에 두는지는 몰랐습니다." 국왕의 정부이면서, 국왕이 위중한 때에 아직도 왕궁에 있는 그녀가 의아스럽다는 말이다. 주디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 후원자는 국왕폐하뿐만이 아니니까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 지만 지금은 왕세자비 전하의 오른팔이랍니다." 라에르는 불편하게 계속 곁에 있는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멀리 있는 카스트로를 지켜보았다. "여자까지 상대하시는 줄은 몰랐군요." 주디나는 생긋 미소지었다. 손안에 든 쥘부채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다. "질투하시는 건가요, 라에르경?" 기가 막혀 되돌아온 라에르에 시선에 대고, 주디나는 매혹적인 미소 를 흩뿌렸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실례하겠습니다. 전하를 호위해야 돼서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 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재빨리 말을 끊고 도망치듯 벗어나는 라 에르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주디나는 화가 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더욱 훤칠해진 키와 더욱 성숙해진 몸 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라에르는 '소년'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 는 걸까. 언제나 되어야 '성인'이 되는 걸까. 5년간, 아니 어쩌면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을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되어 기쁘면서도, 여자 의 마음하나 받아주지 못하는 소년의 마음이 슬펐다. 열 아홉 살이면 충분히 여자를 알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소년의 모 습에 주디나는 애만 태우고 있었다. 루시타니아는 먼 친척뻘 되는 왕세자비와 함께 있었다. 레이얄의 국 왕 바벨 4세의 동생인 나엘 대공의 딸 라에니는 어머니와 함께 왕국의 수도인 레얄로 가곤 할 때마다 한번씩 얼굴을 마주치던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모뻘 되는 라에니는 상당히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 다. 다소 거만하고 이기적인 편이지만 왕족으로서는 그리 튈 만한 성 격도 아니었다. "너희 부부 사이가 그리 썩 좋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구나? 오늘 아침의 그 민망스런 소문, 사실이니?" 하루종일 체리나에게 추궁 당한 걸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루시타니 아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수그렸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흥, 그 거만한 작자가 잘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전하……." 막 다가오던 모리나 남작부인이 라에니의 막나가는 말을 잘라냈다. 라에니가 불쾌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주디나는 생긋 웃으며 루시타니 아를 바라보았다. "제게는 소개시켜주시지 않으실 셈입니까, 전하?" 그제서야 라에니는 새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이쪽은 삼왕자비 루시타니아예요. 루시타니아, 이 분은 내 절친한 친구 모리나 남작부인이시다." "주디나라고 불러주세요, 삼왕자비 전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루시타니아는 눈앞의 화려한 미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요염하게 살 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피를 머금은 듯 강렬한 색의 눈동자가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것 같다. 루시타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살짝 몸 을 숙여 답례했다. "루시타니아입니다. 미인이시네요, 남작부인." 못내 부러운 눈치인 루시타니아를 보며, 주디나는 뜻밖인 표정이 되 었다가 슬쩍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미인이십니다." "아니요, 저는……" 금세 기가 죽은 얼굴로 얼버무리던 루시타니아는 작은 입술을 꼭 다 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당당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남작부인이 부러 웠다. 다 예뻐서 저런 자신이 생기는 것일 테지. 자신처럼 예쁘지 않은 여자는 남편마저도 거부하지 않던가. 2년간 남편에게 외면 당한 아내 의 소심한 생각은 끝이 없었다. 별별 생각을 다하며 내린 결론은, 자신 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굳이 다른 여자들을 찾 아다니는 남편을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루시타니아는 몇 번인가 카스트로의 연인들을 본적이 있었다. 하나 같이 눈앞의 남작부인처럼 아름답고 자신만만한 여성들이었다. 루시타 니아는 자신도 그런 여성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카스트로의 앞에 만 서면 한없이 움츠러드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굳게 먹고 당당하게 대하리라 결심했으면서도 카스트로의 같잖다는 눈빛 한번이면 그대로 의지고 결심이고 그냥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침울하게 바 뀌어 가는 루시타니아의 표정을, 주디나는 그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름다우세요. 결혼하신 분답지 않게 순진하고 순수해 보이세요, 전 하께서는." 주디나가 칭찬하는 말에 루시타니아는 씁쓸한 미소로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런 순진하고 순수한 것 따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어떤 것이다. 한눈에 남자의 눈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그 어떤 것. 루시타니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스스로가 상상하 는 모습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정숙하지 못하게……, 바보같이…….' 하지만 카스트로가 자신을 달리 보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는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만큼만이라도 보게 할 수만 있다면, 정숙한 것 따윈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었다. 그 생각에 다시 얼굴을 붉히는 루시 타니아는, 날카로운 주디나의 눈에 퍽 우습고 또 귀엽게 보였다. 수시 로 얼굴을 붉히고 안색을 달리하는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아무래도 이 조그만 소녀 같은 왕자비에게는 뭔가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게 틀림없었 다. 그것도 외모와 관련된 고민이. '어쩌면, 삼왕자 취향이 의외로 수준 높던가…….' 어떻든, 그 바위보다 더 단단하고 북국의 얼음보다 더 차가운 라에 르보다는 나을 것이다. 주디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왕자비 전하께서는 왕세자 전하와 가까우신가보지요? 지스카르 전하는 저쪽에 계신데……." 주디나는 시선을 돌리다 아베르노와 함께 이야기하는 여자를 발견하 고 슬쩍 물어보았다. 가벼운 코웃음소리가 나자, 주디나는 재빨리 라에 니를 바라보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게 깔린 얼굴로 라에니가 거 만하게 내뱉었다. "세상에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는 여자지요. 아베르노는 저 여자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주디나는 뭔가를 잡았다는 느낌으로 은근하게 캐물었다. "어머, 어떤 분이시지요, 이왕자비 전하께서는?" 경멸스런 눈초리로 저 멀리 시에나를 노려보며, 라에니는 자신의 머 릿속에 든 나쁜 말은 죄다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시건방진 여자예요. 인사를 할 때도 마지못해 하는 티가 역력하죠. 손바닥만한 영지로, 국가라 칭하기도 우스운 나라의 왕녀인 주제에! 우리 레이얄이 아니었으면 멸망했을 텐데도,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이에요.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데다가, 몇 살 나이가 많은 게 자랑이라고 제 남편인 지스카르 전하마저 우습게 보는 여자예요. 그런 여자가 뭐가 그리 좋다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왕자비의 험담을 들으며, 주디나 뿐만 아니라 루시타니아까지 당혹스런 표정으로 이왕자비를 흘낏 바라보았다. 이야 기하다가 흥분해버린 듯 왕세자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 문에 주위의 몇몇 사람들도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주디나는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이왕자비가 이후 정계에 중요 변수가 될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무얼 그리 유심히 보는 게냐?" 푸르른 원형의 대리석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카나이트는 불쑥 어 깨를 짚어오는 손길에 몸을 굳혔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가 아버지 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몸을 기둥에서 세우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유타르경은 아들의 차가운 초록색 눈을 들여다보다가, 아들이 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들이 대답해주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직접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 시야권내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삼왕자 카스트로였다. 유타르경은 얼마간 그곳을 쳐다보다 가 다시 아들을 돌아보았다. 고집스레 다물어진 입술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네가 관심 둘 사람이 아니구나. 네가 관심 두고 지켜볼 사람은 삼 왕자 전하가 아니라, 왕세자 전하시다." "……." "카나이트, 얘야……." 카나이트는 더욱 꽉 입술을 닫아버리고 아버지를 외면했다. 삼왕자 가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시 테라로 돌아가 든 말든, 명령이 떨어지면 테라까지 호위해주면 그뿐이다. 삼왕자도 왕 세자도 모두 관심 밖이다. 그가 관심 갖는 것은 오로지 저 '소르미노의 신동' 뿐. 아니 더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기사단원들 전원에게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다. 아버지 잘 둔 덕에 기사단장이 되었다는 말 은, 지금껏 그가 노력해온 것들을 모두 물거품으로 돌리는 일밖에 되 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기서 뜻을 꺾고 기사단을 그만 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야망을,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왜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버렸는지!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대체 기사단장이 되는 것을 왜 그리 무리하게 서둘렀는 지. 가만히 내버려둬도, 카나이트는 자신의 힘만으로 그 자리를 획득할 자신이 있었다. 더 산뜻하고 당당한 기분으로, 기분 좋게 그 자리를 얻 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카나이트는 상황을 타개해나갈 방법 을 찾아야 했다. 기사단원들에게도 인정받고, 스스로에게도 당당한 그 런 방법. 카나이트는 그것으로, 카르노 최고의 검사라 칭해지는 라에르 와의 대련을 선택했다. 결투든 뭐든, 어떤 이름을 갖다 붙여도 상관없 다. 실력도 없이 아버지의 힘만으로 기사단장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하지만 쓸데없이 일을 벌리는 것 역시 현명한 일은 아닐 것 이다. 카나이트는 기회를 기다렸다. 라에르경이 다시 테라로 돌아가기 전에 정당한 방법으로 대련을 청할 기회를. 카나이트는 그 '소르미노가 의 신동'과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 꽉 막힌 녀석 같으니! 내 말을……." 카나이트는 다소 길어진, 그러나 여전히 짧은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쓸어 넘기면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옆에서 뭐라고 해대던 아 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화가 났던 모양이다. 머리까지 붉히는 아 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나이트는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목례했 다. "실례하겠습니다." "카나이트!" 그대로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카나이트의 뒤에 대고 유타 르경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카나이트는 더욱 보폭을 크게 해서 걸어 나갔다. 애초에 이런 연회에 끼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기사가 뭐 좋을 게 있다고 이런 정치색 짙은 연회에 서성댔는지. 카나이트는 알면서도 찾 아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성큼성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아 마 라에르경이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도 올 생각을 하지 않 았을 것이다. 디리링- 카나이트는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벗어나 막 기사단 건물로 향하다 가, 마치 사람을 불러 세우는 듯한 현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돌아보는 시야에 걸린 것은, 정원 한가운데의 메마른 분수대에 걸터앉 아 수금(竪琴)을 들고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한 존재였다. 수금의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틀 위에 턱하니 팔 한쪽을 걸쳐놓고 미 소짓는 눈부신 금발의 미인은 유혹하듯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을 건넸 다. "카르노 왕궁 제일의 미남이시군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어 떻습니까? 제가 기쁘게 해드릴까요?" 명명백백, 유혹이 분명한 말을 듣고, 카나이트는 여지없이 코웃음을 날렸다. "내가 기쁘려면 당신 갖고는 안돼. 날 기쁘게 하려면, 그를 이기고 오시오." "하……!" 기가 막한 듯 헛바람을 들이키던 미인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카나이 트를 보다가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하핫-----------!" 카나이트는 한번도 뒤돌아봄 없이 기사단 건물로 걸어갔다. 분수대 의 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벨리알은 배를 끌어안고 웃어 대다가, 슬그머니 흥미로 빛나는 눈을 들어 카나이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예뻐. 그리고 둔해. 그나저나, '그'라니, 내 연적이 대체 누구란 말이 야?" 벨리알은 노래하듯 흥얼거리고 분수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쉽지 만 카르노 최고의 미남도 보았으니, 이제는 '아기'를 돌보러 가야 할 시간이다. 벨리알은 아름답게 미소를 흩뿌리며, '아기'가 있는 곳을 떠 올렸다. 다음순간, 벨리알은 비제의 방안에 서 있었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99 - 관련자료:없음 [323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3 20:21 조회:130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99 - ================================================================== 밝은 파스텔톤의 벽지가 사방을 감싸고, 유백색의 유려한 곡선을 이 루는 장식장들이 들어찬 이 방은, 불과 이년반 전 만해도 삼왕자 카스 트로가 쓰던 침실이었다. 카스트로가 테라로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벽지와 장식장을 바꾸는 등의 공사를 벌인 라에니는, 자신의 마음 에 흡족해진 삼왕자궁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 레트에게 쓰도록 했다. 왕비가 없는 카르노의 안주인은 왕세자비였기에 누구도 그 결정에 반 대하지 않았다. 왕세자 아베르노의 장자인 레트는 올해 네 살의 어린 왕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트 외의 다른 아이가 없는 왕세자 부부의 유일한 아들 이었고, 다다음대의 왕이 될 귀한 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귀한 만큼 레 트는 친구 하나 없이 외로웠다. 그 누가 다다음대 왕이 될 아이의 친 구가 될 수 있겠는가! 자만심 강한 라에니의 눈에 차는 아이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라에니의 눈에 아들의 친구가 될만한 아이는 애 초에 없었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에 있는 유모와 함께 커다란 왕자궁에 내버려진 레트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또래 아이들과 놀아본 적도 없어 서 사교성도 없었다. 그런 레트에게 요 며칠간은 색다른 나날이 되고 있었다. 한 살 많은 사촌누이 조안나가 놀이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 이다. 물론 시에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라에니의 결정이 아닌, 왕세자 아베르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라에니는 아베르노의 결정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너무 예쁘다." 레이스가 수도 없이 많이 달린 앙증맞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무릎 까지 오는 실크스타킹을 신은 네다섯 살의 여자아이가 품에 새하얀 토 끼인형을 껴안고 말했다. 연갈색의 머리를 예쁜 끈으로 올려 묶은 여 자아이는 방의 반을 채운 장난감들이 마냥 부러운 모양이었다. 친구가 없는 대신, 레트에게는 침실의 반을 채울 만큼의 장난감이 있었다. 라 에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귀족부인들이 꾸준히 선물해온 것들로, 어느 것 할 것 없이 값비싼 것들이었다. 반짝이는 보석들이 박힌 장난 감 목검과 커다란 루비가 박힌 토끼인형 등, 장난감이라는 명목의 뇌 물이 대부분이었다. 라에니는 아들인 레트가 그런 사치스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짓고는 했다. 그녀의 아들은 그 런 것을 갖고 놀만큼 고귀했으니까. "예…뻐?" 레트는 사촌누이 조안나의 손에 들린 빨간 눈의 토끼인형을 바라보 았다. 새하얀 털에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눈을 가진 예쁜 토끼였다. 토끼를 품에 안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연신 쓰다듬는 조안나 를, 레트는 어린애답지 않게 그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안나는 고개 를 크게 끄덕이고 레트에게 얼굴을 기울여 물었다. "이거 나 주면 안돼?" "그거 주면……." 망설이면서 조그만 얼굴을 고민스레 찡그리는 레트를 보며, 조안나 는 애가 타는 얼굴로 바짝 다가앉았다. "주면?" "나랑 계속 같이 놀아줄래?" "계속?" 조안나가 두 눈을 깜빡거리자, 레트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우물쭈물 말했다. "응, 내일도, 모레도. 같이 놀자. 장난감 너 좋아하는 거, 하나 더 줄 게. 응?" 조안나는 작은 입을 움찔거리며 또르륵 눈을 굴렸다. 레트는 초조한 얼굴로 조안나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조안나의 입술이 열 렸다. "하나 말고 두 개 줘. 그러면 내일도 모레도 너랑 놀아줄게." "응!" 신이 난 듯 크게 대답하는 레트였다. 먼발치서 바라보는 시녀들은 그런 두 아이가 귀엽다는 듯이 웃어댔다. 하지만 그 방안에 있던 또 다른 존재는 따분한 듯이 하품을 하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영악한 꼬마들이군. 벌써부터 거래라니. 그나저나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지……." 같은 방안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남자, 언제나처럼 화사한 미 모의 벨리알은 한숨 섞인 표정으로 근처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비제로 부터 부탁은 받았지만, 사실 어린아이 상대라니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다. 물론 도의적인 차원에서 내키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는 꼬마들을 상대한다는 게 심심한 거였다. '차라리 그 기사단장과 놀라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대할 수 있을 텐데…….' 벨리알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어쨌든 일은 일이다. 다 른 누구도 아닌 비제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벨리알은 자신이 쳐놓은 결계를 조금만 넓혔다. 가까이에 있는 조안나라는 계집아이가 결계 안으로 들어올 만큼만. "귀여운 아가씨, 예쁜 장난감이 갖고 싶습니까?" 달콤하게까지 들리는 미성이 들려오자, 조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앞에 허리를 숙 여 눈을 맞추는 사람이 보였다. 인형보다 더 예쁜 금발과 보석보다 더 파란 눈을 한, 천사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조안나는 커다란 눈망울 가득 그 예쁜 사람을 채우며 조그맣게 입술을 말았다. 와아, 하는 감탄 사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귀여운 아가씨? 내가 아주 예쁜 장난감을 줄 테니까, 아가씨도 내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는 것이." "예, 예쁜 장난감이요?" 벨리알은 싱그러운 미소를 흩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성이 깃든 미소에 조안나의 눈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아주 예쁜 장난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형을 드리지 요. 어때요? 나와 거래, 하겠습니까?" "어떤 인형이요?" 벨리알은 잠시 생각하는 눈으로 '흐음'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내더니 조안나의 앞에 머리카락을 쥔 주먹을 내밀었다. 조안나의 입술 이 뭐냐는 듯 불만스레 꼬물거리는 순간, 벨리알은 '얍!'하는 기합소리 를 장난스레 내질렀다. 순간 벨리알의 손에는 반짝이는 금색 머리칼 한 올이 아닌, 벨리알을 꼭 닮은 예쁜 천사 인형이 들려있었다. "와아!" 감탄을 금치 못하는 조안나는 탐이 나는 눈으로 그 인형을 쳐다보았 다. 벨리알은 생글생글 웃으며 약올리듯 그 인형을 조안나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 정도면 거래할 마음이 생겼나요, 귀여운 아가씨?" "네에!" 조안나는 반짝이는 눈을 하고 성급하게 인형으로 손을 뻗었다. 벨리 알은 슬쩍 인형을 뒤로 물리며 재차 다짐했다. "나와 이 인형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됩니다. 만약 아가씨 가 누구에게 지금 있었던 말을 한다면, 아가씨는 물론이고 아가씨 아 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죽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에!" 앞 뒤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아이의 천진함에 벨리알은 씨익 미소 지었다. 악마다운 미소였지만, 조안나는 그저 예쁘다고만 여길 뿐이었 다. "그럼,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자, 이제 아가씨 인형입니다." 조안나는 자기 키의 반 만한 그 인형을 두 손으로 잡고 행복한 미소 를 지었다. 벨리알은 여전히 허리를 숙여 조안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입술 위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막았다. "지금 있었던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입니다." "예에." 조안나도 자기 입에 손가락을 세워서 붙였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 다. "그런데 아저씨 마법사세요?" 궁금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눈망울에 대고, 벨리알은 생긋 미소지었 다. "글쎄요." 벨리알은 귀엽다는 듯 조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럼 계약조건을 이행하도록 해볼까요?" 벨리알의 몸이 빨려들어 가듯 조안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조 안나는 몸 안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 들 떨다가 바닥으로 털썩 쓰러져버렸다. 순간, 시녀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조안나 아가씨!" "아가씨!" 서둘러 달려온 시녀들은 갑자기 혼자 중얼중얼거리다 쓰러져버린 조 안나를 끌어안았다. 몇 번 가볍게 흔들자 조안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시녀의 품에서 눈을 뜬 조안나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바라보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긋 미소지었다. "아가씨?" 조안나는 주위 시녀들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는. 나 좀 놔줄래?" "하지만……." 시녀들의 품에서 벗어난 조안나는 밝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깡총깡 총 귀엽게 뛰어 보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시녀들을 쳐다보았다. "봐. 괜찮잖아. 저리 가 있어. 난 레트와 놀 거야." "아, 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시녀들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조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벽난로 앞 두터운 양탄자 위에 앉아 자 신을 쳐다보는 아이를 마주보았다. 웃음이 없는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조안나는 생글 웃으며 레트에게 다가갔다. 레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 으려 하자, 레트가 움찔하며 손을 피한다. 조안나는 조금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조용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니?" 레트는 커다란 눈망울로 조안나의 눈을 직시하며,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조안나 안에 들어가 있어요? 조안나는 어떻게 된 거 죠?" "……!" 안색을 확 바꾼 조안나, 아니 그 속의 벨리알은 천천히 입가에 쓴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보이니, 꼬마?" 레트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목을 위아래로 힘들게 끄덕였다. 벨리알 은 더욱 화사한 미소로 레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사이좋 은 오누이 같은 모양새였다. "뜻밖이구나. 너 같은 꼬마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하지만 너는 보지 말아야 할 걸 보게 되었단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니?" 레트는 눈이 부신 듯 벨리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 때보다 아 름다운 마성의 미소가 레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벨리알은 부드 럽게 레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레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네 목숨이란다, 꼬마. 유감이야.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 는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벨리알은 레트의 등을 벽난로 속으로 떠밀었 다. 활활 타고 있는 불 속으로 머리부터 엎어져 들어간 레트의 몸은 금세 불이 붙어버렸다. "꺄아아아아-------!" "물! 물 가져와아아아-------!" 시녀들이 허둥지둥 다가오는 것을 몇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며, 벨리 알은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순간, 벽난로의 불꽃이 커다란 벽난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커지더니 앞쪽의 양탄자에까지 옮겨 붙었 다. "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 불이야아아아!" "불이야! 불이야아앗!" 양탄자에 옮겨 붙은 불은 순식간에 온 방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시녀들의 비명소리에 놀라 들어온 시종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 물 을 떠오라고 소리질러댔다. 벨리알은 그런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 보다가, 아무도 안보는 틈을 타 조안나에게서 빠져 나왔다. 풀썩 엎어 진 조안나는 이내 무작정 들어온 친위기사들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벨 리알은 자신의 결계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그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어 디선가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구경 중에는 불구경이 제일이라던가?" 벨리알은 씨익 악마다운 미소를 흘리며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허둥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성질 나쁜 여자의 아들을 조금 다치 게 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죽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조안 나'가 저지른 짓이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레트는 죽어야 했으니 까. 왕세자를 죽이면서 왕세자의 아들을 살려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다. 시종들과 친위대원, 그리고 근위대원까지 동원되었지만 불길은 쉽사 리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불은 기름을 만난 것처럼 격 렬하게 타올랐다. 침실에서 시작된 불은 쉽게 다른 곳으로 번져갔다. 복도와 옆방으로 치닫는 불길은 마치 지옥의 불꽃같았다. ================================================================== 99회군요..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시길.. -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0 - 관련자료:없음 [3240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4 19:27 조회:128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0 - ================================================================== "전하아아! 전하아아아아아!" 응접실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던 라에니는 숨넘어가 는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응접실에는 루시타니아를 비롯 해 대공비와 모리나 남작부인, 그리고 몇몇 가까운 귀부인들이 앉아있 었다. 왕궁에 잘 나오지 않는 대공비까지 모처럼 나선 자리라 더욱 우 쭐해있던 라에니는 호들갑스럽게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시종을 힐난했 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냐! 귀하신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 는 게냐?" 시종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소식을 알렸다. "지, 지금, 레트 저하의 궁에 불이… 불이 나서……, 전하……, 레트 저하께서……." 혀가 꼬이는 말을 들으며, 라에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 불이라니? 레트의 궁에? 레트는? 레트 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살벌하게 소리지르는 라에니는 당장 달려가서 시 종의 멱살이라도 움켜쥘 기세였다. 시종은 혀를 꾹 깨물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시도했다. "레트 저하께서는 아직 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자 세한 사정은 소신도 모르지만, 어서 전하…, 그곳으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굳어있던 라에니는 다음순간, 앉아있던 의자 를 밀쳐내고 달려나갔다. 우당탕! 뒤늦게야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커 다랗게 울린다. 모여있던 귀부인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숨막힐 듯한 적막이 제일 먼저 신음소리를 낸 대공비에 의해 깨져나갔 다. "오, 로마여!" "어, 어떻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놀라서 커다래진 보라색 눈의 루시타니아가 그 뒤를 이었고, 차례차 례 소감을 발표했다. "레트 저하께서? 맙소사!" "우리도 나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제일 먼저 이성을 차리고, 모두를 둘러보며 제대로 된 말을 한 것은 모리노 남작부인 주디나였다. 주디나는 일단 확인해봐야겠다고 판단하 고, 부지런히 드레스를 펄럭이며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조금 씩 정신을 차린 귀부인들도 앞다투어 주디나의 뒤를 따라갔다. 왕세자궁과 레트의 궁은 직각의 위치에 있었다. 계단을 뛰듯이 내려 가서 넓은 홀을 지나, 왕세자궁에 딸린 정원을 가로질렀다. 루시타니아 는 정원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두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카스트로와 무척이나 닮은 모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틀린 분위기인 아베르노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자주색 망토의 호위기사 세시르경 이었다. 루시타니아는 왕세자까지 체통을 잃고 달려나가는 모습에 놀 라 멈칫거리다가,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왕궁의 가운데를 차지하고있 는 커다란 중앙정원에 이르러서야 루시타니아는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정원을 뛰어가는 수많은 시종들과 기사들의 모 습이 보였다. 루시타니아는 사람들이 몰려서 웅성거리는 곳으로 다가 가 시뻘건 불길을 내며 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더 잘 보려고 발 돋움을 하던 루시타니아는 다음순간, 누군가에게 팔을 잡아 채여 비틀 거렸다. 당혹스런 감정으로 몸의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지독하게 차갑고 냉랭한 카스트로의 목소리 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루시타니아?" "아……." 입은 벌렸지만, 심상치 않은 카스트로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말 을 이을 수가 없었다. 카스트로는 그런 루시타니아의 팔을 잡은 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질질 끌려가듯 하면서 묻자, 카스트로는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성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오. 숙소로 돌아가시오." "하, 하지만……." 토를 달려고 하는 루시타니아를 못마땅한 듯 쏘아보던 카스트로는, 어느 샌가 루시타니아의 뒤에 서있는 로카르경을 돌아보았다. "왕자비를 숙소까지 모셔라. 심심하면 세리니아양을 불러서 수다나 떨든가! 어쨌든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는 나오지 마시오. 내말 알아듣 겠소?" 고압적인 카스트로의 명령에 루시타니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트로는 로카르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불타고 있는 궁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카, 카스트로 전하!" 발길을 크게 내딛던 카스트로는 고개만 돌려 루시타니아를 돌아보았 다. 루시타니아는 초조한 얼굴로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물었다.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가지 않으세요?" 카스트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희미한 조소를 띄웠다. "먼저 돌아가 있으시오, 나중에 따라갈 테니!" 루시타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카스트로를 망연히 바라 보았다. 로카르경이 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다. "루시타니아 전하? 이제 가시지요." "왜……, 나보고는 돌아가 있으라고 그러고, 전하는 왜……" 로카르경은 슬쩍 카스트로를 돌아보고 대답했다. "저런 난리통에는, 자칫 잘못하면 전하께서도 다치실 지 모릅니다.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도 전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거친 사내들이 그 근처에 깔렸을 테니까요. 그리고 카스트로 전하께서 그쪽으로 돌아 가신 이유는……." 루시타니아의 보라색 눈이 로카르경에게 고정되었다. 로카르경은 어 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카스트로 전하께서는 테라로 가시기 전까지, 저 궁의 주인이셨습니 다." "……저 궁이요?" 물었지만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던 듯, 루시타니아는 멍하니 화 마에 갇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궁은 지옥도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줄기차게 치솟는 불길은 궁을 전부 태워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늘은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그을음에 질려 창백해졌고, 궁 주위로는 지옥을 연상시키는 아비규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둘러싸인 사람 들을 헤치고 가장 앞쪽으로 가서 궁을 올려다보았다. 이층에서 시작된 불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온갖 것이 타는 냄새가 역겹게 넘실거리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다급 한 외침이 먼데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련하게 얽혀든다. 그렇게 카스트 로가 17년간을 살았던 궁은 잿더미로 화하고 있었다. "전하……." 라에르가 걱정스러운 듯 불렀지만, 카스트로는 넋이 나간 듯 불길이 이는 건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17년간 수많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시종장 베제르가 매번 울상이 되어 자신을 원망하던 일부터, 자신이 아팠을 때 미에라 왕비가 직접 찾아와 간호해주었던 일, 체리 나와 온방을 뒤엎으며 뛰어다니던 일들, 모두 기억이 났다. 카스트로는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흔적이 지워지는 느낌은 그리 좋은 게 아니다. 자신이 살던 집이, 자신이 자던 침실이, 자신이 놀던 놀이방이 모두 불길 속에 타버리고 있었다. 물론 레트의 궁이 된 다음부터 이미 자신의 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남 의 것이 되는 것과 아예 자취를 없애는 것은 또 달랐다. "안돼! 레트! 레에트-----!" 고음의 여자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카스트로는 상념에서 깨어나, 저만치에서 친위기사들에게 붙잡혀 버둥거리는 주홍색머리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왕세자비 라에니였다. "이거 놔! 이거 놔라! 아직 레트가 저기 있다잖아! 레트! 레트야아아 아---!"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 났다. "안됩니다, 전하. 이미 늦었습니다." "안돼! 내 아가! 레트! 흐흐흑, 레트……, 내 아들을 살려내! 내 아들 이 누군지 아느냐!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아느냐 말이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유감스럽게도 카스트로는 느낄 수 없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리는 라에 니의 모습에서 카스트로는 오히려 통쾌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시종장 베제르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한 여자다. 조카라고는 하지만, 아베 르노가 귀국할 때 딱 한번 본 적 밖에 없는 아이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도 못마땅했던 아이. 어차피, 죽어야 할 아이였다. 하지만 뭘까. 카스트로는 가슴 한구석을 찔러대는 아픔에 대고 물었다. '왜 아픈 거지?' 통쾌했다. 라에니는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뿐이다. 아니 앞으로 그 이상의 죄값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에니가 아픈 것은 자신에게는 쾌감 이었다. 쾌감……이었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단지 저 궁이, 지상에서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세리카님! 세리카님을 모셔와라! 당장 세리카님을 모셔와---!"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아베르노 역시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한 모 습이었다. 몇 사람인가가 부지런히 예배당으로 뛰어갔다. 아베르노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죽일 듯이 불타는 궁을 노려보았다. "레트……! 내 아가 레트……야……."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울어대던 라에니의 목소리가 곧 죽을 듯이 사 그라들었다. 아베르노는 저만치에서 쓰러져 땅바닥을 치는 라에니를 돌아보았다. 모르고 보았다면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한 모습 이었다. 하지만 아베르노는 이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아무리 못마땅한 점이 많아도, 하나밖에 없 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그것은 저 머리 빈, 자신의 아들을 낳은 어미라 는 여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전하!" 아베르노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 의 앞에 무릎 꿇려지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도 옷에도 시커먼 그을음을 묻힌 여자들은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군데군데 타버린 듯한 옷들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레트 전하께서 사고를 당하실 때 같이 있던 시녀들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베르노의 눈이 기이한 광채를 발했다. 한 가닥 희망이라도 찾으려는 듯, 아베르노는 그녀들을 추궁했다. "그래, 레트는! 레트는 어찌 되었느냐! 너희들이 살아온 걸 보면 레 트도 괜찮겠지? 레트는 어찌 되었느냐!" 죄인처럼 꿇려진 다섯 명의 시녀는 누구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돌렸다. "레트는 어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가! 왜 대답이 없느냐!" "흐으흑흑……." 벼락같은 호통소리에, 다른 사람보다 어려 보이는 시녀 한 명이 울 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가장 앞쪽의 나이 든 시녀가 나직한 소리로 나 이 어린 시녀를 윽박질렀다. "그치지 못하겠느냐! 뉘 안전이라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냐!" 시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 시녀는 이내 아베르노를 향해 놀랄 만큼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레트 저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이 번지기 전에, ……조안 나 아가씨께서 실수로 레트 저하를 벽난로 쪽으로 밀치시는 바람 에……." "뭐라고?"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마치 밟아 죽일 듯 굽어보는 아베르노였 다. 하지만 시녀는 그것에 위축되지 않고 할 말을 마쳤다. "저하를 구하려고 했지만, 불길이 겉잡을 수 없이 번져서 누구도 구 할 수 없었습니다. 레트 저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아베르노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윙윙거리는 이명 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또 다른 시녀가 미친 것처럼 소리쳐대던 것이! "원령의 짓입니다! 전부터 카스트로 전하의 시종장, 베제르의 원령이 그 궁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시종장 베제르의 원령이 레트 저하를……!" "닥치지 못하겠느냐!" 나이 많은 시녀가 말을 끊었다. 아베르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왕세자비에게 돌렸다. 울고있는 그의 아내, 그의 아이의 어머니. 하지 만 아까의 가슴아픈 동질감과는 달리,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증오스럽 게 느껴졌다. 시종장 베제르를 죽인 것은 라에니였다. 그리고 제멋대로 삼왕자궁에 레트를 집어넣은 것도 라에니였다. 결국 레트를 죽인 것은 라에니였다! ================================================================== 드디어 100회입니다. ^^ 100회면 100회답게 산뜻한 내용이면 좋을텐데, 저런 칙칙한 내용이라니.. --; ^^ 미리 축하인사 주신분들 감사드립니다. (무척요.. ^^) 100회까지 오도록 꾸준히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신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 ...100회써놓고, 완결한 것처럼 감상에 젖어버리는 새.. --; ^^ 네.. 열씨미 쓰겠습니다. 꾸벅. (-> 말주변 없는 새의 필살기)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9줄 쓰며 진땀빼는 새였음당. ^^;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1 - 관련자료:없음 [3244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5 21:23 조회:131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1 - ================================================================== 아베르노의 급박하게 치달아 가는 생각도 모르고, 아베르노의 눈빛 에 점차 원한이 서려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라에니는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죽이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결혼하기 전부터, 결혼식 날에도, 그 다음에도 쭈욱, 그렇게 죽이고 싶었다. 원치 않은 원수와의 결혼을 누가 달갑다고 할까. 그저 정략인 것과는 틀리다. 자신을 레이 얄에 묶어두려는 것이 뻔한 인질과도 같은 결혼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기쁜 것이 있었다면, 아들 레트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레트마저 저 어리석은 여자의 실수로 죽어버리고 나자, 아베르노는 더더욱 치미는 살기를 참기 어려웠다. "……일부러 밀치신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안나 아가씨께서 일 부러 밀치신 듯…… 그리 보였습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뒤늦게야 아베르노의 고막을 파고 들어왔다. 아베 르노는 시선을 돌려 방금 말한 시녀를 쳐다보았다. "일부러 밀쳤다? 조안나가 레트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조안나 아가씨께서는 조금 이상해 보이셨습니다.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확실치도 않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때, 다시 나이 많은 시녀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실수를 하면 여자아이가 자기 만한 레트 저하를 벽난로 속에 밀어 넣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아까 말을 마저 하지 못했던 시녀가 다시 원령 때문이라고 소리질렀다. "그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죽은 장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저 불이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저 불은 원령이 일으 킨 불입니다." 아베르노는 아웅다웅하는 시녀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시 궁을 쳐다 보았다. 아직도 불길이 잡히지 않는 궁 주위에 근위대와 기사단의 기 사들뿐 아니라 시종들까지도 부지런히 물을 퍼나르며 소리질러대고 있 었다. '레트…….' 속으로 아들을 부르는 아베르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넋이 빠진 듯 멍하니 하늘을 수놓은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전하!" "전하! 우리 조안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두 사람의 목소리에 아베르노는 연기처럼 흩어지려 는 이성을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묻는 두 사람은 지스카르와 시에나였다. '조안나 아가씨께서 일부러 밀치신 듯…… 그리 보였습니다.' 방금 전, 시녀에게서 들었던 말이 귀 옆에서 점점 커지면서 반복된 다. '조안나 아가씨께서 일부러 밀치신 듯…… 그리 보였습니다.' 아베르노는 경련이 이는 얼굴로 무섭게 두 사람을 쏘아보며 내뱉었 다. "조안나는 무사하다, 지스카르." "다행이군요, 그럼 레트 저하께서는……." 다소 안도하는 모습으로 레트의 안부를 묻는 지스카르가 소름끼치게 증오스러웠다. "왜, 혹여나 살아있을까 겁나느냐?" "네?" 휘둥그레 눈을 뜨는 지스카르를 보며, 아베르는 이를 갈아붙였다. "걱정 마라, 지스카르! 내 아들은 죽었다는 구나. 하지만 너무 안심 하지는 마! 네 딸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전하? 무, 무슨!" 시에나가 놀란 얼굴로 물었지만, 아베르노는 예전처럼 시에나에게 친절한 시아주버니가 아니었다. "몰라서 묻소, 시에나? 당신 딸이 내 아들을 죽였어! 당신 딸은 물론 당신도, 지스카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하!" 아베르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지스카르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 마디 한 마디 씹듯이 내뱉었다. "내 아들을 죽이고 무사할 듯 싶으냐, 지스카르? 어림도 없어! 어림 도 없다, 지스카르! 난 누구도 내 것에 손대는 자를 용서하지 않아! 여 봐라!" "네, 전하!" 근처에 있던 친위대원들이 아베르노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아베르 노는 지스카르의 멱살을 풀고, 손가락으로 지스카르와 시에나를 가리 켰다. "두 사람을 숙소로 모셔라! 단 한 발짝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한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그 죄를 추궁할 것이다. 근위대에게 전해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라!" "네, 전하!" 지스카르 부부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아베르노를 불렀다. "전하!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지만 아베르노는 이미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고, 친위대원들은 그 들 부부를 둘러싸고 있었다. "순순히 가주십시오, 전하." "하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가시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모실 수밖에 없습니 다!" 단호한 친위대원들의 말투에, 지스카르는 분노와 굴욕을 함께 느꼈 다. "일단, 가요, 지스카르. 아베르노 전하께서 지금은 이성을 잃으신 것 같으니까, 나중에 자세한 사정도 듣고, 그래요, 지스카르." 시에라의 설득으로 지스카르는 돌아섰다. 아직 보지 못한 조안나가 걱정되었지만, 역시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싶었다. 지스카르는 왜 아베르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조안나가 레트를?' 말도 안 된다. …말도 되지 않는다. "전하!" 아베르노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부지런히 걸어온 세리카는 다소 질린 눈으로 불이 난 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베르노가 보 이자 그를 불렀다. 아베르노는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세리카 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리카를 확인하자마자 뭔가를 기대하는 듯, 혹 은 갈망하는 듯한 눈으로 세리카에게 달려갔다. "세리카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베르노는 떨리는 두 손을 모아 세리카에게 애원했다. 일국의 왕세 자로서의 자존심도 체면도 전부다 내던져버린 채, 구걸하듯이 그렇게 애원했다. "제 아들을, 레트를 살려주십시오!" "……!" "세리카님! 제발 레트를……."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세리카는 자신이 들었던 말과 지 금 아베르노의 말을 비교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시종들 에게 들었던 말은 '레트 저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고, 아베르노는 '레트를 살려달라'고 하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게 아니었던가?' 어쩌면 위독한 정도인지도 모른다. 세리카는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 으로 애걸하는 아베르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트 저하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레트는… 레트는 아직도 저기에……." 아베르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세리카는 체신도 잃고 입을 쩍 벌렸 다. 서서히 불길이 잡혀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이곳까지 후끈할 정도의 열기가 전해져온다. 어린아이가 저런 불길 속에서 살아있을 리가 없었 다. 더군다나 불은 레트의 방에서 번져나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세리 카는 지근거리는 머리로 다시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 와 검정이 묻은 얼굴, 눈물까지 고인 검은 눈이 애처로웠지만 이제 와 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세리카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써댔다. "이미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불편한 마음 때문인지 차가운 음색이었다. 아베르노는 더욱 애걸조 로 세리카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살려주십시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세리카님께서 살려주십 시오!" 끈적하게 잡아오는 아베르노의 손에서 차마 자신의 손을 빼내지는 못했지만, 세리카의 머릿속은 충분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는 건가?' 억지였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 누구도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미 사신이 죽은 자의 영혼을 회수해 갔을 게 뻔하다. 세리카는 기가 막혀서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이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 다고 믿었던가? 어떻게 그런 헛된 망상을……. "죄송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늦은 것 같습니다." "세리카니임!" 아베르노는 일그러진 얼굴로 세리카를 쳐다보았다. 세리카는 그 시 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거라면 누구도 살리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늦게 저를 찾으셨습 니다!" 교묘하게 돌린 말은, 마치 아베르노가 늦어서 레트가 죽었다는 말로 들렸다. 아베르노는 덜덜덜 떨리는 두 손을 주먹 쥔 채로 느리게 얼굴 위로 가져가더니, 앞머리를 붙잡고 뽑아낼 듯이 밑으로 잡아당겼다.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몸을 둥글게 말며, 천천히 땅으로 쓰러지듯이 무릎꿇는 아베르노의 입술에서 괴성과 함께 줄줄 침이 흘러나왔다. 세리카는 입술을 꾹 다 물고 그 자리에서 약간 비켜섰다. "전하!" "저언하!" 친위대원들과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베르노의 주위를 감쌌다. "……죽여버리겠어! 다 죽여버리겠어! 내 아들을 죽인 놈들을 죄다 죽여버리고 말 테다아-------!" "저어언하아!" 세리카는 눈물을 흘리고 미친 듯이 콧물과 침까지 흘려대며 괴성을 지르는 아베르노를 외면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리카는 자식이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잃고 괴로워한다는 감정 을 세리카는 알 지 못했다. 아니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감정은 평생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감히 한족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을 까. 세리카는 도의적으로 안됐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저 아베 르노의 광태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공감할 수 없었다. "세리카님! 전하를……, 전하를……." 주먹으로 땅을 쳐서 바닥이 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세리카는 세시 르경의 애절한 눈빛에,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올렸다. 수면의 주문을 걸어 아베르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미친 듯이 땅바닥을 쳐대며 울 부짖던 아베르노가 스르륵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세리카는 세시르경에 게 지시했다. "일단 주무시도록 해놓았습니다. 어의를 전하의 침실로 들여보내도 록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세리카님." 세시르경은 처음으로 세리카에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아베르 노를 들어올렸다. 보호하듯 끌어안자 그 주위를 친위대원들이 둘러싼 다. 세시르경은 천천히 왕세자궁으로 걸어들어갔다. 폐허. 카스트로는 지친 눈으로 폐허가 된 궁을 올려다보았다. 이로써 자신이 왕궁에서 살던 흔적은 완전히 재로 돌아가 버렸다. "돌아가십시오, 전하." 느린 시선으로 돌아보자, 라에르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 었다. 카스트로는 슬쩍 의미 없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독한 화재의 주범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 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 일에 대해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기는, 이미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주 인이었을 뿐이고, 현재 이 궁의 주인은 레트라는 꼬마였으니까. '아니, 그것도 이미 과거인가?' 카스트로는 무겁게 걸음을 옮기며 피식피식 웃었다. 차라리 잘된 것 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던 궁이 멀쩡하게 남의 것이 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저리 타버리는 것이,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래, 잘된 거야, 차라리.' 어차피 죽을 아이가 죽은 것이고, 없어져야 할 게 없어진 것이다. '그래, 그런 거야. 잘된 거야.' 이제 과거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앞만 보는 거다! 과거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앞만을 보는 거다. 아 베르노 전하에 대한 인도적인 미안함도,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도 잊고, 지금의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거다.' 자신이 살던 곳이 사라졌으면 앞으로 살 곳을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카르노 왕궁의 중심부가 될 것이다. 이미 도박은 시작되 었다.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도박에서 승리해 보일 것이다! 카스트로는 귀빈관의 숙소로 돌아가 침대 위에 풀썩 누워버렸다. 팔 로 지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인다. 먼저 와있던 루시 타니아와 아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런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아 젤은 곧 눈치껏 밖으로 빠져나갔고, 라에르도 그녀의 뒤를 따라 카스 트로 부부만을 침실에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루시타니아가 지금의 카 스트로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부인인 루시 타니아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라에르의 배려도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전하! 카스트로 전하!" 거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소리부터 지르며 들어오는 사람을 보 고, 라에르는 눈살을 찌푸리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본궁의 시종장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스트로 전하를 뵈어야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다급한 말투에 힘겨운 숨소리가 섞여있다. 라에르는 찡그린 얼굴을 펴고 냉정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십시오!" "폐하께서…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빨리 카스트로 전하를……." 라에르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답답하 다는 듯이 냅다 소리질렀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단 말입니다!" 콰앙! 거센 문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카스트로가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그 가운데 서 있었다. "뭐……라고?" 본궁의 시종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레트 저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 시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스트로는 내달리고 있었다. 라에르가 부지런 히 그 뒤를 따랐고, 본궁의 시종장과 시종장 하미르가 그 뒤를 따랐다. 아젤은 삽시간에 휑해진 그곳을 둘러보다가, 멍하니 침실에 서있는 루 시타니아에게 다가갔다. "아가씨께서도 어서 그곳으로 가십시오!" "아……아젤……." 쓰러질 듯 기대오는 루시타니아를 부축하며, 아젤은 시녀장 다나를 돌아보았다. 시녀장 다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루시타니아 를 부축했다. "가셔야 합니다. 제 손을 잡고 따라 오십시오." "네, …네, 알겠어요, 다나." 루시타니아까지 나가버리자, 아젤은 지친 몸을 근처의 소파에 내던 졌다. 하루만에 일어난 일 치고는 너무 많고, 너무 충격적이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아젤도 벅찰 정도로 힘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깊은 한숨이 아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 ^^ 100회 축하해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썰렁한 새의 멘트를 용서해주시길.. --;) 며칠동안.. 아니 실은 꽤 오래.. 바빴었는데요.. 오늘 드뎌 발등에 떨어진 불 껐습니당.. --; 그래서 이제 시간이 여유가 생기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떨어지는지 모르겠네요.. T.T 메일도 써야 하는데.. 잠도 안오고, 뭐 할 의욕도 안나고.. --;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네요.. ^^ 그래도 이제 여유로우니까.. 글 올리는 거 더 신경쓰겠습니다. ^^ 꾸벅..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그래도 마음은 편한 새였음당 ^^ - 꼬리) 근데 요즘 접속하는 거 힘드네요.. 며칠째 속 박박 썩이는 한통..혹은 하이텔.. --; 벌써 몇번째 접속인지.. --; 전용선 쓰고 시퍼어어어~~~ T.T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2 - 관련자료:없음 [3247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6 19:02 조회:133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2 - ================================================================== 이렇게 필사적으로 뛰었던 적이 있을까.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몇 번이고 거꾸러질 듯한 순간을 넘기면서도 카스트로 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었다! 숨이 턱에 차서 도착한 국왕의 침실에는 친위대원들이 평소보다 엄 중하게 지켜서 있었다. 뚜벅 걸어가자, 궁내부원들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침실은 어두웠다. 죽음의 내음이 가득한 침대 주위에는 어의를 비롯 한 몇 명의 의사들과 시종들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카스트로는 거 칠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물러서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 칼리에르 3세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 내쉬는 숨보다 들이쉬는 숨이 더 많은 칼리에르 3세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허허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곧 죽을 사람처럼 보 인다. 카스트로는 손을 뻗어 칼리에르 3세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아버지……, 눈을 떠보십시오. 아버지. 접니다, 카스트로입니다. 아 버지." 앙상하니 마른 손은 차가웠다. 카스트로는 더럭 겁이 나는 것을 느 끼며, 어의 하이파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되신 건가?" "……레트 저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셔 서……, 최선을 다했지만, 저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는 건가! 한 나라의 어의라는 자들이!" 대뜸 터져 나온 질책에 의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 "폐하!" 가벼운 문소리와 함께 두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서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리나와 체리나였다. "오라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이렇게 병세가 악화된 거지요?" 두 공주가 번갈아 가며 질문을 해댔지만, 카스트로는 거기에 대답하 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카스트로는 노한 눈으로 여전히 의사들을 노 려보고 있었다. "어의라면 어떻게든 해봐야 할 것 아닌가! 가만히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자는 건가!" "오라버니!" 체리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대로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어의 하이파경의 대답에 카스트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아버 지가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다. 그따위 레트 녀석이 뭐가 그리 대단 하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한다는 말인가! 그따위 겁쟁이에, 어차피 쓸모도 없던 레이얄 계집의 자식 따위가! 부득부득 이를 갈아붙이던 카스트로는 문득,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자신에게 의술에 대해 장담했 던 한 남자가. '일이 성사될 때까지 만이라도, 폐하께서 살아주셔야 할 테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한족의 치료술은 제법 쓸만한 편입니다. 최악 의 경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드릴 수 있 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드 릴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아버지를 잡았던 손을 풀고 달려가 문을 열어제꼈다. 그 곳에 막 들어오려고 하던 루시타니아가 흠칫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 다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그대로 루시타니아를 밀치고, 근처에 있는 라에르를 찾아내어 소리쳤다. "라엘! 가서 비제를 데려와! 당장!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된다! 느긋 하게 뛰어올 생각 말고, 곧장 이리로 오라고 해!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그 죄는 그에게 추궁하겠다고 전하라!" 입을 저억 벌리고 있는 라에르를 보며, 카스트로는 다시 버럭 소리 질렀다. "당장 가! 뭘 꾸물거리는 건가!" "네, 알겠습니다, 전하!" 라에르가 그 자리에서 달려가기 시작하자,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가 까이에 있던 루시타니아의 팔을 잡고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전하?" 놀란 루시타니아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카스트로는 나직이 대꾸했다. "할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 지금은 폐하의 침실을 지키는 게 우선이 오." "……."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베르노와 지스 카르는 오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초조한 마음을 죽이며 입술을 짓깨물 었다. 시간이 지나는 매 순간 순간이 미칠 것처럼 끔찍했다. 그러던 한 순간, 국왕의 침실 한가운데에 돌연 두 사람이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 러냈다. "누, 누구……!" 누군가가 놀란 듯 소리쳤다. 침실 안의 웅성거림을 도외시하고, 카스 트로는 그 두 사람중 한 명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비제님!" 라에르는 한쪽 팔을 비제에게 잡힌 채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제는 약간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카스트로를 향해 맑은 미소를 지 어 보였다. "이 곳에 온 적이 없어서 라에르경의 기억을 빌렸습니다. 잠시 다른 분들을 밖으로 내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리나를 비롯한 의사들과 시종장의 얼굴이 항의의 빛을 띄었다. 하 지만 카스트로는 단호하게 지시했다. "다들 잠시 물러가 있으시오. 라에르경!" 카스트로는 라에르에게 어의와 시종장을 눈짓하고, 유리나와 체리나 를 돌아보았다. "비제님이 폐하를 치료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잠시 자리를 비켜주십 시오." "하지만, 전하……." "저를 믿어주십시오. 제가 믿는 사람이니 만큼, 저를 믿는 마음으로 잠시만 맡겨주십시오." 유리나는 카스트로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고개 를 끄덕였다. 체리나는 비제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유리나에 게 팔을 잡혀 끌려나갔다. 모두 나가게 되자 카스트로는 비제를 향해 물었다. "나도 나가있어야 되나?" 비제는 머리를 살랑살랑 저으면서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전하께는 특별히 감출 이유도 없으니까요." 칼리에르 3세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침대로 다가간 비제는 천천히 칼리에르 3세의 몸 위에 손을 가져갔다. 아래에서 위로 허공을 쓸어간 비제의 손은 칼리에르 3세의 정수리 위에서 멈추었다. "……제 힘이 회복되지 못한 게 아쉽군요. ……근본적인 치료는 불 가능합니다. 다만 얼마라도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 뿐. 괜찮으시겠습니 까?" 카스트로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당연한 걸 묻는군." "그럼." 그 말을 끝으로 비제는 눈을 감았다. 그것은 색깔도 냄새도 없어서 그 존재를 알기란 쉽지 않았지만, 보통사람인 카스트로에게도 그 힘만 은 여실히 느껴졌다. 주변의 공기가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비제에게서 시작된 그 무형의 힘은 천천히 칼리에르 3세의 전신을 훑어갔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 힘의 순환이 반복될 때마다 칼리에르 3세의 거친 숨 이 진정되어 갔고 안색마저 평온해져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치 잠 자는 사람처럼 편안한 안색이 되었다. 큭! 급격한 신음소리가 비제에 게서 터져 나왔다. 카스트로는 놀란 눈으로 비제를 쳐다보았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침대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비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비제의 몸을 붙잡자, 눈처럼 하얀 안색의 비제가 우울하게 웃어 보였다. "원래 갖고 있던 힘의 반만 있었어도……, 후……, 별 것 아닙니다. 정도 이상의 힘을 쓰게 되면, 자연적으로 몸에 금제가 가해져서……. 괜찮습니다. 좀, 쉬고 싶습니다. 이제… 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 카스트로는 격동이 이는 감정을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차분했던 걸음걸이에 조금씩 휘청임이 섞인다. 카스트로는 비제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제이리트보다도, 루아보다도, 그 누구 보다 성결한, 그런 느낌이었다. "비제……." 카스트로는 막 문고리를 잡는 비제를 불렀다. 슬며시 돌아보는 비제 에게, 카스트로는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비제는 그 창백한 얼굴에 때묻지 않은 천사의 미소를 떠올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고맙다." 비제는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그 뒤를 이어 유리나와 어의, 시종장 들이 몰려들어왔다. "전하, 폐하께서는……." 카스트로는 칼리에르 3세를 돌아보았다. 이불 위에 드러난 마른 손 을 잡자 아까와는 달리 따스한 온기가 묻어난다. 유리나가 옆으로 와 서는 게 느껴졌다. "폐하께서……."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칼리에르 3세를 본 유리나의 눈이 경외감으로 크게 뜨여졌다. "비제님이 살리셨다." 카스트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체리나는 문밖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비제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 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 안쓰러워서, 체리나는 방문과 비제 를 번갈아 보며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 '폐하'라 는 말이 터져 나오자, 체리나는 곁에 있던 자신의 호위기사에게 비제 를 부축하라고 이르고는 침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기적이라며 놀라 워하는 의사들을 보며, 체리나는 다시 한번 비제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방은 굉장히 넓었다. 침대 하나와 키 낮은 테이블 하나, 그리고 소파 하나가 놓인 방안은 반을 갈라 또 다른 방을 만들어도 될 만큼 넓었 다. 그 방안에 있는 것은 네댓 살의 갈색머리 계집아이와 정교하게 만 들어진 무척이나 예쁜 금발의 인형뿐이다. 탕 탕 탕! "열어줘요! 문 열어 줘! 아아아아앙! 나 여기 있기 싫어, 문 열어 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키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랗고 육중한 문을 두드리는 계집아이는 레트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조안나 폰 카 르노, 지스카르와 시에나의 딸인 조안나였다. "열어 줘! 열어달란 말야! 어머니이! 어어어엉! 어머니! 아버지이이! 아아아아아앙! 열어 줘! 빨리 열란 말이야!" 섭정 왕세자 아베르노의 명령으로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감금된 조 안나는 벌써 하루 밤, 하루 낮을 혼자서 이 넓은 방안에서 지내야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조안나가 레트를 고의로 죽였다는 것이 확실 시되자, 아베르노는 사색이 되어 애원하는 동생 부부를 물리치고 '감 금'을 지시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뒤, 바로 처벌내용을 결정할 예 정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를 처벌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며 뒷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누구도 분노한 아베르노의 앞에서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만하십시오, 아가씨. 왕세자 전하의 지시 없이는 누구도 그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문밖에서 새어 들어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조안나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들기며 소리질렀다. "어머니 보고 싶어! 문 열어 줘! 어머니한테 갈 거야! 어머니한테 갈 래!"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쾅 쾅 쾅! "문 열어 줘어----! 어머니이이! 아버지이이! 어어어어엉! 어머니이 이이!" "……죄송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앙----!" 아무리 울고 발버둥쳐 봐도, 더 이상은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 다. 목이 쉬도록 불러도 어머니는 와주지 않았고, 아무리 애타게 외쳐 도 아버지는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 이틀 밤을 울어대던 조안나는 그날 새벽을 고비로 우는 것을 멈추었다. 시녀가 식사를 들여올 때 빠 져나가려던 허술하기 짝이 없던 탈출계획도 몇 겹으로 둘러싼 기사들 때문에 포기해야했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누워있는 조안나 의 퀭하게 들어간 눈과 초췌한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 다를 것 이 없었다. 조안나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도 울어 대서 울리는 머리와 뭔가가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뒤섞여 꿈을 꾸는 지, 아니면 환각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지?' "……." '네 소원대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장난감을 얻었잖아. 왜 기뻐하지 않는 거지?' 톡톡. 뺨을 두드리는 손을 따라 조안나는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을 바 라보았다. 자기 키의 반 만한 금발머리의 천사 인형이 자신을 향해 예 쁘게 웃고 있었다. "……말… 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있는 거잖아. 왜 그러고 있니? 나랑 놀자고.' 새빨갛고 조그만 입술이 오물오물 거리고 있었다. 조안나는 신기한 마음이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에도 힘에 겨웠다. "어머니 보고 싶어. 아버지도 보고 싶어. 나, 왜 여기 이렇게 있어야 되는지 아니?" 금발의 예쁜 천사 인형은 입술을 벌리고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하하, 너 바보구나?' "바… 보? 내가 왜 바보야?" 인형은 침대 위에 일어서서 갖은 제스처를 해보이며 말했다. '넌 네 사촌 레트를 죽였어. 이렇게 레트의 등을 확 밀어서, 불이 활 활 타오르는 벽난로 속에 밀어 넣었지. 레트가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며 죽어갔는지, 넌 모르겠지?' "아, 아냐! 난 레트를 죽이지 않았어!" 조안나는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인형은 침대에 엎드려 양손 으로 턱을 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네가 죽였다니까. 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너무 많은 장난감 을 가진 레트가 부러워서 그 애를 죽인 거야.' "아니야!" 상체를 일으키고 완고하게 고개를 젓는 조안나를 보며, 인형은 똑같 이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서 손가락을 내저었다. '정말이라니까. 아니면 너의 어머니가 시켰구나? 맞아, 맞아. 네 어머 니가 시킨 거야. 레트를 죽이라고!' "아냐, 아냐!" '네 어머니가 시킨 거야. 네 어머니는 이제 네 큰아버지도 죽일 거 야. 큰어머니도 죽이고. 다아 죽일 거야!' 조안나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아아! 와아아아아아앙------!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상급의 악마 벨리알을 닮은 악마의 분신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마 치 세뇌라도 시킬 듯 반복해서 주입시켰다. '너의 어머니가 시킨 거야. 너의 아버지도 알고 계셨지. 너의 어머니 가 너에게 레트를 죽이라고 시킨 거야.' "아니야아아아아아아---------------!" ================================================================== ^^ 100회와 101회 축하해 주셔서 감사.. 연참이라.. 쩌비.. --; 본인 아이디가 아니신 분께 답멜 못드렸네요.. 천리안에서는 연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족조라니요.. T.T 별비님과 또 한분 계셨죠.. 그런 멋없는 발음의 이름 싫다구요~~~~ 예쁘게 우리말로 발없는새, 혹은 새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그 이름 싫어한다고 더 좋아하면서 부르시지 말라구요~~~~ 그리고.. 어제 늦게 올려서 죄송.. 꾸벅. 하지만 새는 주로 9시 이후에 올리는데요.. 요즘 빨리 올린 게 이상한 거였다는.. --;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갈수록 잡담이 느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3 - 관련자료:없음 [3250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7 20:11 조회:141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3 - ==================================================================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건가요?" 날카로운 여자의 노성이 공기를 찢어낸다. 몇 겹인가의 감시로 둘러 싸인 귀빈관의 한 방에는 지스카르와 그의 아내 시에나가 감금되어 있 었다. 시에나는 벌써 며칠째 아무 대책도 없이 갇혀만 있는 것에 진절 머리를 냈다. 더군다나 소식을 알아오라고 시킨 시종장에게서 들은 말 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들이었다. 지스카르는 기운 없이 소 파에 주저앉은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는 시에나의 드레스 자락에 시선을 두었다. "우리 조안나는 어떡할 거예요? 설마 이대로 앉아서 억울하게 죽도 록 내버려 둘 건가요? 말 좀 해봐요! 당신, 그 아이의 아버지잖아요!" 지스카르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라고 속이 타지 않 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방법이 없잖소. 전하를 뵙고 사정을 얘기하려고 해도 뵐 수 없다고 하기만 하고. 나보고 더 이상 어쩌란 말이요, 시에나?" 시에나는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는 남편을 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정 말이지 저 남편이란 작자의 무능함은 도저히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 었다. 저 인간을 보면 카르노가 그렇게 무너져 내린 것도 저절로 이해 가 가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로서 할 말이에요? 당신이 언제 방법을 찾아보기나 했 어요? 당신 형은 틀렸어! 제 아들 죽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무 슨 부탁을 하겠다는 거죠?" "그럼 어떡하라는 말이오?" 시에나는 방안을 휘젓던 걸음을 멈추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너 무나 불리한 상황이었다. 조안나가 레트를 죽였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다가, 이곳 카르노에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무 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 무능한 지스카르가 권력자와 친분을 다졌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있지만은 않았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결국…….' 시에나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생각을 재검토했다. 시간적 으로 촉박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더 군다나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자신들마저 누명을 쓰고 처형될지도 모 른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펜, 양피지가 어디 있죠?" 불쑥 튀어나온 시에나의 말에 지스카르는 멍한 눈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 있을 거요." 시에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양피지 하나를 끌어다 앞에 놓고 깃털 펜과 잉크를 옆에다 두었다. 시 에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깃털펜을 들어 잉크 속에 푹 담갔다 빼고는 빠르게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첫 말머리는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말투로 쓰여있었다. '너무나 보고싶은 아버지께.' 카르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면, 미노에 사람을 청할 수밖에 없다. 시에나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로 확대될 수 있는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라력 698년 3월 14일 아직 완연한 봄이라기에는 어설픈 그런 봄날이었다. 따사로운 햇살 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머리와 살갗을 데우고, 아직 싸늘한 바람 이 옷깃을 파고든다. 왕궁의 서쪽 푸노산, 전신전과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위치한 왕실의 묘지에 또 하나의 작은 묘혈이 파여졌다. 미리 준비 된 대리석 묘비에는 한 아이의 이름과 살았던 연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가.'라는 서명이 들어있었다. 암녹색 바탕에 왕실의 문장이 들어 간 천이 조그맣고 반질반질한 관 위에 덮여져있었다. 천천히 무덤으로 자리잡는 관을 보던 한 여자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곁에 있던 여자들이 붉은 흙을 움켜쥐고 따라 들어갈 기세인 아이의 어머니를 붙들었다. 하얀 신관복을 입은 신관이 사자(死者)를 위한 기 도를 끝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무덤을 메워갔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내는 여자들이 보였다. 침울한 얼굴 의 귀족남성들이 애도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다음대 카르노 의 국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아이의 장례식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아베르노는 며칠 새 초췌해진 얼굴로 멍하니 무덤의 비석을 바라보 았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 것이 아들의 무덤이고, 아들의 묘비 라는 것이. 지겹도록 끔찍한 악몽을 깨지도 않고 꾸는 것만 같았다. 아 베르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입술을 떼었다. 착 가라앉은 쉰 목소리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돌아가지. 판결을 위한 준비는 다 되었는가?" "네, 전하." 아베르노는 무겁게 고개짓을 하고, 아직까지 주저앉아 울어대는 라 에니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증스러운 여자였다. 제가 제 아 들을 죽여놓고도 저리 뻔뻔스러운 것을 보면. 생각 같아서는 그녀까지 한꺼번에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원령이니 뭐니 하는,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아베르노는 고개를 돌리고 왕궁을 바라보았다. "가자." "네, 전하." 카스트로는 타고 왔던 마차로 돌아가면서, 스치듯이 아베르노를 바 라보았다. 며칠동안 계속 술만 마셔댔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지금의 아 베르노는 조금도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아베르노가 그 볼품없는 레트 를 그렇게까지 아꼈다는 것은 솔직히 의외였다. 아베르노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카스트로는 그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어 차피 형제를 죽일 자신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친형을 죽이려는 자신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런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카스트로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카르노를 자신 의 것으로 하기 위해, 카스트로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 미 악마와도 손을 잡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이제는 앞으로 갈 수밖 에 없었다. 앞으로 가야만 한다. 카스트로는 귀빈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가 는 지스카르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며칠 새 몰라볼 정도로 여윈 지 스카르와, 그래도 그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는 시에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스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불편해지는 기분을 애써 내버렸다. 지스카르를 이 지경 으로 몰아넣은 자신이 지스카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있을 리 없다. 하 지만 카스트로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얼굴이 많이 안되셨습니다." 지스카르는 홀쭉한 뺨에 쓰디쓴 미소를 그린다. 아베르노 이상으로 황폐해진 모습이다. "……그래? ……후우……." "아베르노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이제 그만 가십시오." 아베르노의 친위대원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지스카르는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너에게까지 이런 못난 꼴 보여서 민망하구나." "……!" "어서 가시지요." 재촉을 받아 다시 걸음을 옮기는 지스카르는 정말 죄인이라도 되는 사람 같았다. 자신을 스쳐지나, 친위대원들에게 빈틈없이 둘러싸여 걸 어가는 형의 뒷모습에, 카스트로는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하?" 부르는 소리에 내려다보자, 루시타니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 본다. 카스트로는 그 눈빛에 흠칫 놀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루시타니아가 자신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아니 언제부 터 저런 눈으로 자신을 봤는지. 언제나 두려움에 떨던 그녀가, 왜 저런 눈으로 동정하듯 자신을 보는지! 묘하게 화가 나는 것을 느끼며, 카스 트로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먼저 들어가시오. 나는 들렀다 갈 데가 있소." "……네." 다소곳이 숙여지는 검은 베일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카스트로는 홱 소리 나도록 몸을 돌리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딱히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걸음은 못마땅한 기색을 풀풀 날리며, 흉측하게 그을린 삼왕자궁이었던 폐허로 내닫고 있었다. 본궁의 1층, 길게 책상을 늘어놓은 회의실에는 아베르노를 비롯한 재상 미카에르 대공과 법부대신 호스타경, 아베르노의 수석 비서관인 레이니트경이 앉아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네다섯 살로 보이는 어린 계 집아이가 멍한 눈을 하고서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앉아있었다. "네가 레트를 죽였다는 게 사실인가?" "네." 정신 나간 듯 멍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대답은 의외로 또렷한 목 소리로 돌아왔다. 너무 순순히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모여있던 사람들 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다시 아베르노가 질문을 던졌다. "네가 레트를 죽인 이유가 뭐지? 누가 레트를 죽이라고 시켰나?" "어머니." 경악한 듯한 시선이 아이에게 쏟아졌다. 아베르노는 굳은 얼굴로 아 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른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이었지 만 아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범함을 보였다. 아베르노는 빠르 게 머리를 굴리며 시에나가 했을법한 생각들을 짚어나갔다. 대체 왜 시에나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뭔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낀 아베르노 는 잠시 그 생각을 접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아들은 죽었는 데, 아들을 죽인 저 계집애는 뻔뻔스레 장난감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 다. 살기가 치미는 것을 애써 누른 아베르노는 무언가를 더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노크소리 때문에 미루어둘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사이에서 친위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지스카르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안나!" 시에나는 며칠 만에야 무사한 모습의 딸을 확인하자, 앞 뒤 생각 없 이 딸에게로 달려갔다. 시에나를 저지하려던 친위대원들은 아베르노의 손짓으로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시에나에게 끌어안긴 조안나에게 다가 가며, 조안나의 예쁘게 매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 괜찮니? 조안나……."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가 조금 풀어주며 걱정스럽게 묻는 시에나는 강한 모성의 상징처럼 보였다. 순간, 조안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더듬더 듬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했는데……, 어어어엉. 조안나는 착하게 어머 니가 시키신 대로 레트를 밀어버렸는데, 왜 나에게 그래요? 어어어엉." "……!" 시에나는 경악한 얼굴로 조안나를 품에서 떼어냈다. 마치 괴물이라 도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어어엉! 어머니, 나빠요. 왜 레트를 죽이래서, 그래서…… 어어어 어어엉!" "무… 무슨 말이야? 너, 왜 이래? 무슨 소리야?" 소리를 질러대는 시에나를 보며, 아베르노는 차갑게 조소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순진한 아이를 윽박지르면 쓰나, 시에나? 발뺌해 도 이미 늦었소. 예상대로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군." "무슨 소리예요? 대체 아이를 어떻게 한 거죠? 얘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격분해서 소리치는 시에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 아베르노는 책상을 내려치고 마주 소리질렀다. "닥치시오! 아이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오! 이제 솔직히 말해보시지! 레트 다음은 누구요? 라에니? 아니면 나인가? 반란이라도 꾀하려던 거요, 시에나?"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질러대는 아베르노와 시에나를 보며, 지스카 르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조안나를 끌어안았다. 지스카르는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게 현실성이 없었다. '차라리 테라에서 오지 않는 게 나았는데…….' 새삼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조안나……, 조안나……." 지스카르는 딸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모든 게 꿈이었다고 깨닫기를 바랬다. 모든 게 악몽이었다고. '반란'이 라고 언급한 이상, 쉽게 이 누명을 벗지는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아들 을 잃은 슬픔으로 이성을 잃은 아베르노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억지 부리지 마세요! 반란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이건 누명이에 요!" "흥, 두고 봅시다! 어디까지 뻗댈 수 있는지! 내 증거를 잡아 당신 코앞에 들이밀 테니!" "어디 한번 해보시죠! 결코 그런 적 없으니까요!" 지스카르는 계속되는 아베르노와 시에나의 언쟁에서 귀를 닫아걸었 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직이 속삭였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4 - 관련자료:없음 [3253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8 20:43 조회:126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4 - ================================================================== 짝짝짝짝! "와아아아----! 오라버니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해요." "전하의 스무 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카스트로는 놀란 눈으로 촛불이 켜진 케잌을 바라보았다. 오전동안 칼리에르 3세와 시간을 보냈던 카스트로는, 국왕의 침실에서 나오자마 자 체리나의 시녀장을 만나야 했다. 다급한 목소리로 '급히 와달라.'는 전언이었기 때문에, 카스트로는 체리나가 또 사고를 쳐버린 것으로 짐 작하고 부지런히 이왕녀궁으로 향했다. 왕궁에서 말썽을 부렸다 하면 카스트로 아니면 체리나였기 때문에 부모의 꾸지람을 함께 들으며 질 기디 질긴 동질감을 키운 두 오누이였다. 때문에 말썽을 부린 다음의 뒤처리 역시 종종 함께 처리하고는 했는데, 카스트로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말괄 량이 동생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거리며 막 문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체리나! 무슨 일……?" 체리나를 부르며 들어서던 카스트로는 느닷없는 갈채소리에 흠칫 몸 을 굳혔다. 그리고 난데없이 생일 축하인사를 들으며 깜짝파티의 주인 공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요 몇 년 사이에는 오라버니가 테라에 계셔서 어떻게도 할 수 없었 지만, 올해도 그렇게 넘기기에는 너무 아쉬워서요. 이제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도 모르구요. 뭐, 아베르노 오라버니께는 죄송하지만, 우 리끼리만 살짝 축하해요. 괜찮죠, 오라버니?" 촛불너머에서 살살 웃으며 말하는 체리나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앙증맞았다. 유감스럽게도 레트의 죽음은 체리나에게도 그다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도 못했었는데…… 고맙다, 체리나."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카스트로를 보며, 헤헤, 하고 웃는 체리 나는 아직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참, 아직 촛불 끄지 말아요. 루시타니아에게도 오라고 했으니까. 오 늘이 두 분 결혼기념일이라지요?" "……!" 살짝 얼굴을 굳히는 카스트로를 눈치채지 못하고, 체리나는 때마침 조용히 열리는 문 사이로 드러난 사람을 보며 반색했다. "어서 오세요, 루시타니아. 그리고 비제님." '비제?' 카스트로는 의외의 인물이 호명되자 의아한 기분으로 비제를 돌아보 았다. 언제나처럼 정갈한 사제복을 입은 조신한 몸가짐으로 다가온 비 제는 살짝 미소지으며 카스트로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전하의 스무 번째 생신과 두 분의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카스트로는 존대말로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다시 체리나를 되돌아보면서 물었다. "또 누가 올 예정이지?" 체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웃었다. "글쎄요." "체리나!" "에에, 걱정 마세요.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니까. 비제님은 아버지도 구해주셨으니까, 너무 고마워서 제가 오시라고 했어요. 괜찮죠, 오라버 니?" 애교만점인 체리나의 미소에 카스트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체리나는 얼떨떨하게 서 있는 루시타니아의 손을 끌어 카스트로의 옆 에다 세웠다. "에이, 참, 루시타니아는! 루시타니아도 오늘의 주인공이니까 오라버 니와 나란히 서요. 촛불 다 타겠어요, 어서 소원을 빌고 촛불 꺼요." "소……원?" 어색한 듯이 말하는 카스트로를 올려다보며, 체리나는 당연한 걸 묻 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기서 떠나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했잖아요?" "……." 루시타니아는 슬쩍 카스트로를 올려다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 다. 카스트로가 난처해하는 모습이 귀엽다. 라고 생각한 루시타니아는 자신의 기막힌 발상에 스스로 놀라버렸다. '세상에, 이 남자가 귀엽다구?' 루시타니아가 패닉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카스트로는 어쩔 수 없다 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알았어. 자, ……올해에는 말괄량이 체리나를 꼭 시집가게 해주 세요. 됐지? 불끈다." "오라버니!" 못마땅한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떽떽거리는 체리나를 모르는척하 며,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의 허리를 잡고 속삭였다. "셋 하면 끄시오. 하나, 둘, 셋!" 후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따스한 입김이 케잌 위의 작은 촛불들을 꺼버 린다. 짝짝짝짝짝-----! "축하해요, 오라버니."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어둑했던 방안이, 체리나의 시녀장이 붙이는 촛불들로 환하게 밝아 왔다.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듯 숨어서 하는 축하파티였지만, 가까운 사람들만 모여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카스트로 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이건?" 선물을 풀어보라는 체리나의 재촉에 못 이겨 풀어본 첫 번째 선물은 조그만 보석이 박힌 반지 한 쌍이었다. "최고급 자수정과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반지입니다. 수정 반지는 서 로의 마음을 서로에게 전하기도 한다더군요. 두 분께 드리는 선물입니 다." "……!" 무슨 의미로 이런 반지를 주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 른 사람들의 눈도 있기에 꾹 눌러 참았다. 두 사람의 부부생활을 비난 하려는 건가? 의아해하는 카스트로의 뇌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직접 뜻 을 전해왔다. '언제라도 그것을 끼고 계십시오. 마법에 대한 방어력도 있으니까요. 한족이나 마법사를 대할 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비제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고맙소. 언제나 끼고 있겠소." 비제는 고개를 끄덕여 예쁘게 미소지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하나 를 끼고, 작은 쪽의 반지를 루시타니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체리나 가 즉각 반응해왔다. "오라버니! 반지는 직접 끼워주는 거래요. 그냥 주는 게 어디 있어 요?" "아아……, 그래." 어쩐지 기분이 좋은 카스트로는 다시 반지를 받아들어 루시타니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루시타니아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 를 숙였다. 이년전의 결혼식을 떠올리는 그녀였지만, 무심한 남편은 아 무생각 없이 다음 선물을 풀고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리본을 풀고 조 그만 상자 속에서 멋모르고 그것을 끄집어내던 카스트로는, 질겁을 하 고 다시 닫아버렸다. "체리나아아아-----!" "호호호홋. 그거 루시타니아가 입으면, 오라버니에게 선물한 거나 마 찬가지잖아요." "어머." 몸둘 바를 모르고 얼굴을 가리는 루시타니아를 보며 체리나는 더욱 소리 높여 웃었다. "너어, 처녀애가 대체!" "호호호호홋, 뭐 그래도 알건 다 알아요. 저도 벌써 결혼적령기의 숙 녀라구요." 비제와 라에르는 묵묵히 웃음을 삼키며, 애꿎은 음식만 공격해대고 있었다. 아르노 서쪽에 있는 '마르의 여관'에는 얼마 전부터 낯선 용병들이 손님으로 들었다. 주인인 마르는 항상 있는 일이라 그다지 신경을 쓰 지 않았지만, 이 여관의 또 다른 손님 세니크는 그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전신의 사제 루아로부터 저들을 잘 감시할 것을 지시 받은 세니크는, 벌써 이틀째 이곳에서 저들을 감시하며 미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다 왕국'이라는 전 미노 공작의 영지에서 온 기사와 용병들일 것이다. 모두 용병들인 양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 몸가짐이라든가 말투에서 몇 명인가가 기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 습이었다. 몇 명씩 어딘가로 나가기도 하고, 술집처럼 사람이 많은 곳 에 가서 이런저런 수소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는지, 그들 은 매번 어두워진 얼굴로 돌아오고는 하는 것이다. 이틀째의 날도 그 렇게 흐지부지 흘러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세니크는 상당히 수상하게 보이는 갈색 로브 차림의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가 는 것을 목격했다. 카르노에서는 여자라면 모를까, 로브를 입는 남자는 드물다. 그리고 둘 중의 하나는 분명 남자의 실루엣이었다. 마침 그들 의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니크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약간이나마 엿들을 수 있었다.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체격이 작은 로브였다. 가느다 랗고 톤이 높은 말투의 여자였다. "서쪽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나직하게 되물었다. "아가씨가 보내신 분들이오?" "네.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지." 다섯 명의 용병차림을 한 사내들과 수상한 로브 차림을 한 여자 한 명, 훤칠하고 당당한 체격으로 보아 남자인 것이 분명한 사람 한 명이 슬쩍 주위를 살피며 묵고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세니크는 남자인 게 분명한 로브 주인의 소매 아래로 슬쩍 엿보이는 쇠고리를 보며 술을 들이켰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신전 사제의 솜씨는 혀를 내두 를만했다. '이제 슬슬 일이 시작되려는 건가?' 아무 것도 하는 일없이 빈둥대며 왕실 용병대를 들락거리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 할 일이 맡겨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극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 짜릿하지 않은가! 전쟁 이상으로 이 숨막히는 지하활동은 못 견디게 매력적이었다. 세니크는 그런 면에서 삼왕자 카스트로에게 감사했다. 그다지 사람이 오가지 않는 복도 끝의 객실문이 열렸다. 제피르경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시녀장 안나를 먼저 들여보내고 곧바로 뒤를 따라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3프리는 될 듯한 방에는 그들 말고 도 두 명이 더 있었다. 장정만 8명에 여자 하나까지 들어간 방은 숨쉬 기도 힘들만큼 비좁아 보였다. 거칠게 다듬어진 나무 테이블 위에 앉 아있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피르경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로브 의 모자를 벗는 시녀장 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짙은 잿빛의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서른 남짓한 남자였다. 제피르경은 본능적으로 저 사내가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다. 안나 는 침착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이왕자비 시에나 전하의 시녀장 안나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여러분을 도와줄 분이십니다. 왕궁의 지리에 매우 익숙하신 분이시죠." "레이크라고 부르시오. 내가 저들을 지휘하고 있지. 그런데 저쪽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실 건지?" 제피르경은 천천히 왼손을 들어 코끝까지 눌러쓴 모자를 뒤로 넘겼 다. 기다렸다는 듯이 탐색해오는 예리한 잿빛 눈동자에도 제피르경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레이크는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눈썹을 슬 쩍 들었다 놓는다. "왼손잡이인가? 아니, 아니군. 오른손을 보여주시겠소?" 명령하는 데 익숙한 자였다. 하지만 레이크라는 이름만으로 그의 신 분이나 직위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제피르경은 오른손을 들어 보여주 었다. 갈고리모양의 쇠붙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레이크경은 찌푸린 얼 굴로 손과 제피르경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턱을 더 느리게 쓸 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 손에 얽힌 사연을 물어도 되겠소? 아니, 당신의 신분을 말해주 겠소?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와 함께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제피르경은 무미건조하게 자신의 신상내력을 읊었다. "왕세자비의 전 호위기사 제피르 폰 이노. 이 손은 왕세자비를 호위 하던 중에 생긴 결과요." "……호오, 전 호위기사라……. 그런데 왜 우리를 돕겠다는 거지?" 제피르경은 슬쩍 레이크와 눈길을 마주치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당신들을 돕는 게 아니오. 나도 내 일을 할뿐이지." "당신 일?" 뭐냐는 듯한 시선에 제피르경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왕세자비는 내 손으로 죽이겠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레이크는 테이블 위에서 내려와 제피르경에 게 다가갔다. 키는 제피르경보다 꽤 작았지만, 키 때문에 위압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왕세자비를 죽인다? 우리가 할 일은 시에나 전하 부부를 구하는 게 아니었던가?" 추궁하는 레이크에게 대답한 것은 시녀장 안나였다. "사정이 틀려졌습니다. 자세한 것은 이 밀서에 적혀있습니다." 시녀장 안나는 로브 소매에서 작게 접혀진 양피지를 꺼내서 레이크 에게 건네주었다. "시에나 전하의 친서입니다." 양피지를 받아 읽어 내려가는 레이크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 다. 레이크는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양피지를 옆에 있는 사내에게 건넸 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시녀장 안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요?" 시녀장 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워낙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뭐에라 도 홀린 사람처럼 지스카르 전하와 시에나 전하를 반역으로만 몰아붙 이고 있습니다. 감금된 곳에는 수십 명의 친위대원과 근위대원이 감시 하고 있어서, 그분들을 구해낼 방법은 없습니다. 조안나 아가씨도 마찬 가지고요. 시에나 전하께서도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신이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하시며……." 레이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제기랄!' 하고 테이블을 걷어찼 다. 시녀장 안나는 놀라서 입술을 다물고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좀더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져!" "하지만 이틀 뒤가 마지막 판결이 내려지는 날입니다. 더 이상 지체 하시면, 시에나 전하께서는 결국……." 기어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까지 찍어내는 시녀장 안나를 보며, 레이 크는 나직이 욕설을 퍼붓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결국 긍정으로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으니, 우선 계획이나 들어봅시다. 카르노 왕궁이 그리 쉽게 침 투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왕궁에도 뒷구멍은 있습니다. 왕궁에서의 안내는 제가 맡겠습니다." 제피르경이 말했다. 레이크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제피르경을 돌아 보았다. "그 손으로 말인가? 아니면 따로 왼손검술이라도 연마했소? 짐만 되 는 자를 데려갈 수는 없어." "……내 한 몸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소. 아니면 당신들이 궁을 헤 매 다니며 일을 수행할 거요? 시녀장 안나도 왕궁지리에는 어두울 텐 데?" 레이크는 말이 막혀서, 못마땅한 듯 제피르경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까딱도 하지 않는 제피르경의 모습에 질려 어깨를 으쓱하며, 시녀장 안나에게 말했다. "좋소. 구체적인 계획을 짜도록 하지." 레이크는 뭔가 떠밀리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의 국왕이 명령한 것은 '시에나 왕녀를 구하라'는 것이었고, 이곳 사정을 잘 알리 없는 레이크는 저 미덥지 못한 '전 호위기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크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무리하게 계획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5 - 관련자료:없음 [3255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19 19:39 조회:132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5 - ================================================================== '마르의 여관'에서 나온 시녀장 안나는 로브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어둑해진 시간이라서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 은 없는 듯 쉽게 대로로 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대로로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 한 대가 다가와서 멈춰섰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초대하듯 마차 문이 열린다. 시녀장 안나는 문틀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잘 닦 인 거리를 매끄럽게 질주해 가는 마차 안에서, 시녀장 안나는 로브의 모자를 벗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하다못해 컴컴 한 마차 안에서도 묘하게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인식된다. 그 남 자의 빠알간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갔던 일은 잘 됐습니까?" "네, 주인님." 아름다운 청록색 눈이 예쁘게 미소짓는다. "그럼 다음에 하셔야 할 일도 잘 알고 있겠지요?" "네, 주인님." 감색머리의 소년은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흩뿌리며, 시녀장 안나의 눈길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여기서 사라진 이후로 안나는 나와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 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억할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 니다. 나에게 말해보겠습니까? 시에나 전하가 당신에게 무엇을 시켰는 지,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가 시녀장 안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시에나 전하께서는 미다의 세력을 끌어들여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저는 시에나 전하와 미다에서 온 기사들 사이에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왕세자와 왕세자비 전하를 위해 시에나 전하는 왕세자비 전하의 전 호 위기사인 제피르경을 고용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럼 이만 헤어질 시간이군요. 내가 사라지고 열을 세 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평소의 안나로 돌아갑니다." "네, 주인님." 마차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감색머리와 청록색 눈의 천사 같은 소년 은 생글 미소짓고,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순간, 마치 그 자리에 처 음부터 없었던 듯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여자의 가는 목소리는 마차의 바퀴와 말발굽소리에 섞 여 사라지고 있었다. "내일……이란 말이지?" 카스트로는 씁쓸하게 뇌까렸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고, 계획해오던 일이다. 지지세력을 모아 그 자리를 움켜쥐려던 계획이 비제와의 만남 으로 인해 더욱 은밀한 음모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 카스트로는 처 음부터 자신의 친형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것을 결심한 순간부터 양심이나 인정 같은 감상은 버리자고 생각했다. 자신은 더없이 비열하 고 잔혹한 인간이라고,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 입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내일이라는 날짜까지 받아놓고 나니 왼 쪽 심장 가까운 곳이 쑤시듯이 아파 온다. 아팠다. 그리고 슬펐다. 카 스트로도 사람이다. 혈육을 죽이면서 냉정할 수 있는 쪽이 이상한 것 이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이를 악물고 감정을 죽였다. 아직 시작도 하 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약한 마음이라니! 카스트로는 스스로를 조소했 다. '슬퍼할 자격도 없어.' 카스트로는 담담한 척 눈을 들어 비제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전하께서는 내일 밤 일찍 잠자리에 드시기 바랍니다. 의심받을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아기천사 같은 얼굴의 비제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비제는 아베르노와 형제가 아니다. "알겠다." 비제는 맑은 눈으로 카스트로를 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슬퍼하셔도 괜찮습니다." "……!" 경직된 얼굴로 보는 카스트로에게, 비제는 천진한 천사의 미소를 지 어주었다. "제 앞이라면, 얼마든지 슬퍼하셔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내색 하지 않으신다면, 제 앞에서는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다." 꿀꺽. 카스트로는 침을 삼켰다. "어디까지 내 마음을 읽는지 모르겠군." "……보이는 만큼 알고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비제를 한참 바라보다가, 가벼 운 웃음을 날렸다. "아직 신하에게 내 감정을 털어 버릴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내 감정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전하……." 카스트로는 자신을 보는 비제의 시선을 비끼며 말을 돌렸다. "제피르경은 뭐라던가?" 비제는 탐색하듯 카스트로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 답했다. 저렇게 속으로만 삭이는 것은 좋지 않다. 좋지 않았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원망……하지 않던가?" 카스트로는 무겁게 깜빡인 눈으로 비제를 돌아보았다. 비제는 살랑 살랑 머리를 저었다. "죄송하다더군요." 카스트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감은 눈 속에 수많은 상념이 스친다. 카스트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있었다. 정원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4월을 며 칠 남겨둔, 아직은 쌀쌀한 봄날이다.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와 함께 본 궁으로 가고 있었다. 적어도 삼일에 한번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칼리에르 3세는 의외로 루시타니아를 마음에 들어해서 올 때 마다 동행하게 하도록 했다. 카스트로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도 종종 루시타니아와 함께 찾아가고 있었다. 줄줄이 시종들과 시녀들을 데리고 본궁으로 들어가자, 마침 정신들 몇몇과 함께 어딘가로 향하던 아베르노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안녕하세요." 아베르노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 배어있었다. 움푹 들어간 눈과 홀 쭉한 뺨, 생기 없는 눈을 하고서,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에게 의무적으 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냐?" "네." 다시 끄덕끄덕 고개짓을 한 아베르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폐하께 신경을 못쓰고 있구나. 네가 내 대신 잘 보살펴드리렴." 다소 안색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내일, ……휴우, 아니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 어서 가보거라. 폐하께서 기다리시겠다." "네, 전하." 카스트로는 자신에게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는 아베르노를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헤르트경과 레이니트경, 두 숙질이 아베르노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전하?" 옆에서 나는 가녀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카스트로는 그들에게서 시 선을 거두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까? '네가 내 대신 잘 보살펴드리렴.' 그냥 한 말일 테지만, 마치 지금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네가 내 대신 잘 보살펴드리렴.' 카스트로는 갑자기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감 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걸음을 옮겼다. 다시 뜬 눈 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그런 말을 하신 걸까.' 심장부근이 찌릿찌릿하고 아파 온다. "얘야, 안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걱정스러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카스트로는 멍하니 있던 것에서 깨어났다. 칼리에르 3세는 침대에 베개와 쿠션을 기대놓고 앉 아서,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넋을 빼놓고 있 는 아들을 보며 의아해하던 칼리에르 3세는 자신의 말을 듣고 쓴웃음 을 짓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평소와는 다른 아들의 모습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한 것뿐입니다. 제 걱정이라야 폐하의 건 강 말고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지스카르에 대한 것은 아직 칼리에르 3세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베 르노의 지시이기도 했고, 레트라는 아이의 죽음으로 충격 받았던 아버 지가 아들의 불길한 소식을 듣고 괜찮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카스트 로는 문득 조소를 지었다. 자신이 우스웠다. 그렇게 부친의 건강을 걱 정하는 척 하면서, 실은 가장 충격을 줄 사건을 진행해가고 있는 자신 이 가증스러웠다. 둘째 아들의 반역혐의와는 비교도 안될 그런 사건 을! 사건이 터지면, 당장 내일 어떻게 아버지를 대해야할지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비제와 함께 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카스트로는 이 상황에서 내일 할 일을 잘도 생 각해내는 자신이 인간 같지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냉혈한 사람이었 던가.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만 가서 쉬거라. 젊은 녀석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게냐. 어의에게 말해서 몸에 좋은 약재를……." "아닙니다." 카스트로는 앙상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웃었다. "괜찮습니다. 좀 피곤할 뿐이니까……." 마주잡아오는 마른 손에 힘이 들어간다. 카스트로는 다시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50이 조금 넘었을 뿐인 아버지가 70넘은 노인처럼 세월의 풍파에 찌들어 보였다. "카스트로……?" "……루시타니아와 얘기 나누십시오.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칼리에르 3세는 의혹 어린 얼굴로 카스트로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려무나." "그럼, 전 이만."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겸한 부탁을 하고, 국 왕의 침실에서 물러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 시녀들이 일 제히 고개를 숙인다. 카스트로는 시녀장 다나에게 말했다. "왕자비는 더 있다 갈 것이다." "네, 전하." 대답을 듣고, 카스트로는 앞서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본궁에서 나온 카스트로는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불타버린 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 커멓게 그을려 보기 흉한 뼈만 남긴 건물 주위에는 높다란 나무들이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나무들은 파릇파 릇한 새 잎을 피워낼 것이다. 왜인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왕실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의 연속으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열리던 연회도 최근에는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시끌시끌하던 연 회장의 불도 꺼진 왕궁의 밤은 쓸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자 정을 넘어선 시각, 왕궁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는 왕궁바깥의 경 비를 서던 경비병들과 왕궁 내부의 경비를 맡은 근위대원들, 그리고 왕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친위대원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간혹 아직 깨어있는 왕족을 시중드는 궁내부원 몇 명이 있을 뿐이다. 파란색의 제복을 입은 궁내부원들은 그다지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 다. 한 궁에 수십에서 수백 명씩 있는 궁내부원들은 거의가 비슷비슷 한 느낌을 주는 존재들이라,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은 각 궁의 최 고 책임자인 시종장이나 수석 시종장이라 할지라도 다 기억할 수 없었 다. 그래서 그들 두 명씩 짝을 지은 침입자들은 궁내부원의 파란 제복 을 입고 머리를 숙인 채로 태연히 친위대원의 묵인 아래 궁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제피르경은 함께 따라온 용병의 나직한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 었다. 확실히 그런 빈틈을 이용해 들어오기는 했어도, 정말 적들에게 이용된다면 큰일일 터였다. 신기한 듯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는 용병 을 툭 치면서, 제피르경은 한쪽을 턱짓해 보였다. "저쪽이오." 용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없이 제피르경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왕세자궁의 서쪽, 왕세자비의 거처였다. 동쪽과 창문으로 들어갔을 레이크들도 무사히 들어갔는지, 아직 왕세자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복도를 지나자 넓은 홀이 나온다. 제피르경은 근 2년 반만에 와보는 궁을 익숙하게 걸어가며, 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왕세자궁에서 마지 막으로 걸어나갔을 때는 곧 죽을 줄로만 알았었다. 소문으로 들은 삼 왕자 카스트로의 성격은 결코 너그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확 실히 소문대로 삼왕자 카스트로는 너그럽지 않았다. 본의든 타의든 자 신의 사람을 죽인 자를 용서할 만큼은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그에게 살 수 있는 시간을 조금 연장해주는 대신 왕세자 비의 암살을 요구했다. 제피르경은 그리 나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 래서 제피르경은 그 제의에 동의했다. 5년간의 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번 일로 비록 살 수 있 는 시간이 갑작스레 줄어들었지만, 그 여자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흥분도 느껴졌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목을 베는 기분은 어떨까. 제피르경은 어서 빨리 그녀의 경악하는 얼 굴을 보고 싶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 그녀가 살려달라고 비는 꼴 을 보고 싶었다. 잔인하게 비웃어주고, 망설임 없이 죽여줄 것이다. 지 난 2년간 지독한 암살훈련을 받으면서, 죽고싶을 만큼 힘들 때마다 그 는 오늘의 광경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오늘밤에 현실로 만 들 것이다. "저긴가? 그런데 그 앞의 친위대원은 어떻게 하지? 아까처럼?" 용병의 말을 듣고, 제피르경은 입술을 비틀고 조소했다. 그들은 3층 계단과 복도 사이의 모퉁이에 있었다. 3층 왕세자비의 내실 문 앞을 지키는 친위대원은 제피르경도 아는 얼굴이었다. 단지 이년사이에 자 신의 부하였던 기사도 못 알아 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지나야 할 문은 둘, 처리해야 할 친위대원의 수는 넷이다. 그리고 만약 호위기사 마저 남아있다면, 일은 더 어려워지게 된다. 하지만 일단 왕세자비의 침실까지만 들어가면 일은 성공이다. 제피르경은 품에서 얇은 단검을 두 자루 꺼내었다. 전신의 사제 루아가 직접 건네준 열 자루의 단검은 오늘 중으로 모두 그 역할을 다 할 것이다. "오른쪽의 친위대원을 부탁하오. 그들이 말을 거는 것을 신호로 기 습하는……잠깐." 소근소근 작게 속삭이던 제피르경은 때마침 문안에서 한 명의 친위 대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용병의 팔을 잡아 모퉁이에 숨었다. "오늘도 수고하도록." "네, 자이르경." 고개를 까딱이고 걷는 친위대원은 제피르경으로서도 처음 보는 사람 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거드름이 묻어나는 몸짓과 흐트러진 발걸음이, 과연 친위대원인지도 의심스러운 남자였다. 그가 자신들이 있는 쪽으 로 걸어오자, 옆에 있던 용병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제피르경은 얼 른 용병의 머리를 숙이게 하고 계단 옆으로 물러섰다. 뚜벅. 뚜벅. 뚜 벅. 걸음소리가 가까이 들릴수록 제피르경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이 윽고 모퉁이를 돌아 계단으로 내려선 그 친위대원은 고개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보더니 경멸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오는 건가? 게을러빠진 것들. 어서 들어가 보도록 해라. 전 하께서 기다리신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친위대원의 뒷모습을 돌아보던 제피르경은 눈 살을 찌푸리고 다시 방문 앞을 바라보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왕세자비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 어제 깜빡 잊어버린 건데.. 제피르경의 성을 바꿨습니다. 전에 쉬면서 수정할 때, 이름이 겹친 거 보고 꽤 당황했다는 --; 요즘 제가 정신이 없네요.. --; 어제 제목도 틀리게 올리지 않나.. 쩌비.. (벌써 치매가? --;)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6 - 관련자료:없음 [3258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0 19:52 조회:127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6 - ================================================================== '어차피 모험이다.' 제피르경은 용병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는, 심호흡을 하고 모퉁이 에서 복도로 빠져 나왔다.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제피르경 의 얼굴은 그 상태에서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친위대 원이 지키고 있는 방문 앞에 섰다. 친위대원 두 명이 자신들을 쳐다보 는 것을 느끼며 제피르경이 말을 꺼냈다. "전하께 급히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두근두근. 순간순간이 끔찍한 무게로 다가온다. 들통나면 예정대로 죽이는 수밖에 없다. 삐걱. 조용한 복도에 문소리가 크게 들린다. 제피 르경은 보이지 않게 안도하며 방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등뒤에서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눈을 들어 방안을 바라보았 다. 새로운 시녀장인 듯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침 실 문 앞으로 두 명의 친위대원이 서 있었다. "어디서 오셨죠? 처음 보는 분들인 것 같은데……." 제피르경은 헛웃음을 웃고 재빨리 옆의 용병에게 속삭였다. "뒤에 빗장 거시오." 용병이 흘낏 보고 뒤돌아서 빗장을 걸었다. 제피르경은 의아한 얼굴 로 다가오는 시녀장에게 마주 다가가면서 미소지었다. 소매 사이로 집 어넣었던 단검을 하나 꺼내며, 눈동자는 저만치 있는 친위대원을 향하 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네? 그런데 왜 문은……." "……!" 제피르경은 성큼 다가가다가 재빨리 왼손으로 단검을 날렸다. 타--악! 정확히 한 개의 단검이 친위대원 한 명의 미간에 꽂힌 순간, 제피르 경은 가까이 다가온 시녀장의 몸을 잡아 돌리며, 그녀의 목을 오른팔 로 조여갔다. "무……무슨, 뭐 하는 놈들이냐!" 살아있는 또 한 명의 친위대원이 검을 빼들며 소리를 지르자, 빗장 을 지르고 따라온 용병이 옷 사이로 숨겨든 검을 꺼내든다. 소검이지 만 충분히 위협적이다. 친위대원은 긴장한 얼굴로 제피르경과 용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문 열어! 뭐냐! 무슨 일이야!" 제피르경은 피식 웃으며 앞쪽으로 다가갔다. 친위대원이 긴장하며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제피르경은 다음순간 자신의 팔 안에 있던 시녀장을 친위대원에게로 힘껏 밀쳐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얼결에 시녀장을 받아든 친위대원을 보며, 제피르경은 나직이 혀를 찼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검을 꺼내들며 힘껏 던졌다. "……헉!" 단검이 친위대원의 왼쪽 심장 근처를 빗겨 맞자, 제피르경은 다시 단검을 꺼내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아아아아아악!" 시녀장은 비명을 지르며, 벽을 따라 쓰러지는 친위대원에게 매달렸 다. 제피르경은 뒤에 있는 용병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 처치할 수 있겠지요?" "물론." 제피르경은 문 옆의 벽에 기댄 채 무너져 내리는 친위대원을 지나 그때까지도 잠잠하기만 한 왕세자비의 침실 문을 열어제꼈다. 크고 화 려한 침실이었다. 은은한 장미향이 코끝을 스치는 걸 맡으며, 제피르경 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누, 누구냐!" 앙칼진 목소리. 제피르경은 씨익 웃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목소리 던가. "오랜만입니다, 전하." 제피르경은 달달달 떨리고있는 침대시트를 보며 그쪽으로 걸음을 내 딛었다. "누구……" 왕세자비는 침대 시트로 목까지 가리고 얼굴만 빼꼼이 내밀었다. 제피르경은 바로 옆까지 다가가 왕세자비를 내려다보았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누구, 누군데?" "빨리 끝내자구!" 어느새 친위대원의 장검을 손에 든 용병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시뻘겋게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용병의 흉흉한 기세에, 라에니는 더더욱 질린 얼굴로 시트를 잡아끌었다. 제피르경은 용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문도 빗장 걸어." "하지만 빨리 하고 가야……." 우둔한 용병에게 냉소를 날리며, 제피르경은 빠른 목소리로 내뱉었 다. "저 문 걸어. 우리가 도망칠 곳은 저기가 아니니까. 아니면 그대로 잡혀갈 생각인가?" 언제부터인지 반말을 하고 있는 제피르경이었지만, 용병은 거기까지 신경이 미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문이 흔들흔들하는 것이 금방이라도 열릴 것만 같다. 우선은 방문부터 잠그는 게 우선일 거라고 생각하고, 용병은 재빨리 다가가 문을 잠갔다. 제피르경은 다시 시선을 왕세자비에게 돌렸다. 그리고 단검을 소매에 집어넣고 왼손을 뻗어 시트를 걷어냈다. "안돼!" 제피르경은 필사적으로 시트를 부여잡는 왕세자비를 보며 눈살을 찌 푸렸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시트를 끌어내렸다. 그 시트에 매달려 왕세 자비가 딸려오는 게 보였다. 더욱 힘주어 시트를 빼내자 새하얀 알몸 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 제피르경은 순간 경직된 얼굴로 왕세자비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울 긋불긋한 키스마크와 끈적끈적한 체액으로 범벅이 된 하체의 모습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아!" 상대는 왕세자가 아니었다. 알 수 있었다. 방금 나갔던 그 거만한 친 위대원이 바로 오늘밤 그녀의 상대였음을. "……흐으윽, 흑흑……." 주홍색의 흐트러진 머리를 하얀 등에 드리우고, 시트 끝을 부여잡으 며 엎어져 우는 왕세자비의 모습은 왜인지 모르게 제피르경의 화를 더 욱 부채질했다. "더러운 창녀 같으니! 너 때문에! 고작 너 같은 것 때문에 내가!" 제피르경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얼굴을 들게 했 다. 그리고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이를 갈아붙 였다. "나를 봐! 내 얼굴을 모르겠나?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이잖아!" "몰라! …흐흑, 몰라. 모른단 말이야!" 제피르경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아이가 투정부리듯 소리지르는 그녀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아아악----!" 튕겨져 나가 나뒹구는 왕세자비를 있는 힘껏 걷어찬 제피르경은 근 처에 있던 가운을 집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입어!" "이봐! 뭐 하는 거야? 어서 일을 끝내고 나가야 하잖아!" 용병이 초조하게 악을 쓰는 모습을 흘낏 쳐다보고, 제피르경은 피식 거리며 웃어버렸다. "아직도 모르는 건가?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어차피 없어. 정 탈출 하고 싶거든 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던가." "너어! 말이 틀리잖아!"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용병을 보면서, 제피르경은 다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제피르경은 얄밉게 씨익 웃으면서 깔보는 말투로 조롱하듯 말 했다. "아니면 죽을 곳이라고 했어야 했나? 그러면 네가 따라왔을 것 같 아? 유감스럽게도 나 혼자서 여기까지 올 자신은 없었거든." "너!" 제피르경은 가운을 주섬주섬 입고 옷을 여미는 라에니를 잡아 자신 의 앞에 끌어당겼다. 오른팔로는 라에니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단 검으로 라에니의 목을 겨누었다. "이 여자가 살아있다면, 나중에 인질로 해서 살아나갈 수도 있어. 나 는 별로 살 생각이 없으니까, 괜히 신경 거슬리게 해서 이 여자를 죽 이게 하지는 마." 기가 막힌 얼굴로 욹으락붉으락하는 용병의 얼굴이 가관이다. 제피 르경은 느긋하게 라에니를 끌고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쾅 쾅 쾅! "문 열어라! 당장 문 열어!" 어느새, 저쪽의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침실 문이 들썩거린다. 제피르 경은 가만히 시간을 짐작했다. 오래 끌면 오래 끌수록 좋다. 그것이 전 체 계획을 위해 이쪽에서 지시 받은 바다. 타악! 타악! 두터운 문 사이로 언뜻언뜻 도끼날이 비친다. 제피르경은 감상하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이대로 죽을 참이냐!" 용병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피르경을 노려보았다. 제피르경은 어깨 를 으쓱했다. 그리고 품에서 조그만 병 하나를 꺼내어, 왕세자비의 입 속에 틀어넣고 목을 젖히게 했다. "음…음…" 병이 비는 것을 느끼며, 제피르경은 조금 더 시간을 두어 병을 빼내 었다. 그 안의 액체는 하나도 남김없이 라에니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 갔다. "살고 싶으면 저기로 뛰어내려." 제피르경은 장난하듯 창문을 가리켰다. 용병은 못마땅한 얼굴로 물 었다. "비밀통로는……." 제피르경은 다시 헛웃음을 웃었다. "헛소문을 너무 많이 들었군. 비밀통로 따위는 없어. 있으면 이 고생 하고 정문으로 들어왔을 것 같아?" "하!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군." 제피르경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앞에서 떨고있는 왕세자비를 바 라보았다. "뭐야, 내게 뭘 먹인 거야?" "아직도 나를 기억 못하겠습니까, 전하?" "……누, 누군데? 그렇게 가린 얼굴로 내가 어떻게 알란 말이야?" 떠는 와중에도 큰소리치는 왕세자비를 보며, 제피르경은 혀를 찼다. 그리고 단검으로 그녀의 턱을 찔러 올려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자, 이만큼 보여줘도 모르겠나?" 머리를 흔들자 그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확연히 나타나는 경악의 표정. 제피르경은 만족한 미소로 말했다. "이제 기억났나 보군. 그러면 내가 이러는 이유도 잘 알겠고." "어, 어떻게……" 우직-! 콰아아앙! 문짝 째로 떨어져나간 문 사이로 친위대원 다섯 명과 근위대원들이 들어왔다. 그들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 계 단에서 마주쳤던 친위대원이었다. 파랗게 질린 그를 보자마자, 라에니 는 소리를 질렀다. "자일! 자일! 살려줘요. 이 자가 내게……." "전하!" 제피르경은 단검으로 라에니의 턱을 치켜올리며, 그 남자를 향해 씨 익 웃어보였다. "네 직위와 이름을 대라." "뭐, 뭐냐, 너는!" 날카로운 단검이 라에니의 목을 파고든다. "아아아악!" "직위와 이름!" 냉혹한 목소리에 친위기사 몇몇이 제피르경을 유심히 바라본다. 자 이르경이라고 했던 라에니의 정부는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왕세자비 전하의 호위기사, 자이르 폰 지노." "호위기사라…… 훗, 웃기는군. 친위대에서 너 따위 녀석 본적도 없 다." 비웃듯이 말하는 소리에 울컥한 자이르경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네 놈은 뭐 하는 놈이냐! 당장 전하에게서 손을 떼지 못할까!" "쯧쯧. 요즘 친위대에서는 허풍만 가르치나보군. 아니아니, 그리고 또 있지. 제 주인과 놀아나는 법. 왕세자 전하께서는 모르고 계시겠 지?" "닥쳐라! 네 놈이……" 노성을 지르는 자이르경의 뒤에서, 유심히 제피르경을 살피던 한 친 위대원이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제피르경?" 그 말을 듣자, 다른 친위대원들이 일제히 제피르경의 얼굴을 살폈다. "제피르경……." "오, 로마여!" 자신들을 알아보는 옛 부하들을 향해, 제피르경은 싱긋 이빨을 드러 내며 웃어보였다. "오랜만이다." 등뒤로 용병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제피르경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점점 많아지는 친위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저 중에는 왕세자 의 친위대원들도 상당수 끼어있었다. '잘 되고 있겠지?' 제피르경은 왕세자궁의 동쪽으로 갔을 레이크들을 떠올렸다. 제피르 경이 맡았던 임무는 왕세자비의 암살과 왕세자의 암살을 용이하도록 시간과 이목을 끄는 것이다. 제피르경은 적당히 시간이 끌어지자, 단검 의 날을 왕세자비의 목에 베어 들어가게 했다. "아아아악-----!" 지레 겁먹고 소리지르는 왕세자비의 모습에 제피르경은 쓴웃음을 지 었다. "전하를 놓아줘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자이르경의 어설픈 협박이었다. 제피르경은 손을 멈추고 피식 웃으 며 대꾸했다. "싫은데?" "원하는 게 뭐냐! 돈? 영지? 우선 전하에게서 손을 떼!" "내가 원하면, 네가 줄 수 있나?" 제법 흥미를 보이는 제피르경의 태도에 자이르경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 재미있었다. 제피르경은 실실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런 불확실한 말로는 안되지. 그렇지 않나, 에밀?" 그러자 뒤에 있던 용병이 움찔했다. 제피르경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자네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게. 저 왕세자비 전하 의 정부께서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잖은가? 참, 레이크라는 녀석의 소 원도 부탁해야지. 그 녀석은 뭘 바랄까? 그 레이크라는 녀석은 미다의 왕실 기사단 소속이겠지? 땅덩어리를 더 달라고 하려나?" "너, 미쳤어? 그런 말 함부로 지껄이다니!" 뒤에서 용병이 으르렁거린다. 제피르경은 피식 비웃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어리석군. 내가, 미다의 스파이와 진심으로 손잡 을 것 같나?" "뭐?" 입을 저억 벌리던 용병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제피르경이 더 빨랐다. "이만 끝낼 때가 된 것 같은데? 잘 가시오, 라에니 전하." 이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멈춤도 없이 라에니의 목을 절개했다. 비 명을 지르려던 라에니는 경동맥을 잘려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앞으 로 고꾸라졌다. "너--!" 용병이 미친 듯이 소리치는 것과 친위대원들이 거리낌없이 들이닥치 는 것을 눈과 귀에 담으며, 제피르경은 자신의 목을 그었다. 화악하고 목에서부터 피가 뿜어져나가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제피르경----!" 옛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제피르경은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사치스러운 융단 위에 붉은 핏물이 스며들어 간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7 - 관련자료:없음 [3260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1 20:29 조회:130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7 - ==================================================================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던 아베르노는 문밖이 시끄러워지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자정도 훨씬 넘어간 시각이다. 이런 시간에 누 가 감히 자신이 있는 방밖에서 떠들어댄단 말인가! 눈치 빠른 시종장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알 려왔다. "전하, 왕세자비 전하의 침실에 침입자가 들었답니다!" "치……밉자?" 독한 술을 두 병째 비우는 참인 아베르노의 혀가 꼬인다. 흐릿한 시 야에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장과 굳은 얼굴의 세시르경이 들어온다. "전하……, 가보셔야……." "흐음……."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닫았다 들어올리자, 두 사람의 얼굴이 더욱 흔들린다. "친위대원들을 몇 명 지원 보내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세시르경이 그렇게 말하자, 시종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베르노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김에 끄덕인 것인지, 허락의 뜻으로 끄덕인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세시르경은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 리고 밖으로 나가 친위대원 몇 명인가를 왕세자비에게 보내었다. "전하……, 정신을 좀 차리시고, 어서 가보셔야 합니다. 전하……." 세시르경이 푹신한 소파에 거의 널브러져 있는 아베르노를 흔들어 깨우자, 아베르노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 손을 뿌리쳤다. "치미짜?" "전하……." 둔한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 속에서 한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주그라고 그래. 그 여자……, 주그라고……. 내 아드……주기…" "전하……." 라에니는 이제 아베르노에게 있어 '아들을 죽인 여자'일 뿐이다. 아 베르노는 아들을 죽인 그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감히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라에니든, 지스카르든, 조안나든 다 마찬가지였다. 힘들었던 테라에서의 생활과 결혼생활을 버텨낸 것은 아들 레트의 덕분이었다. 혼자서 힘들어 지쳐 갈 때, 레트가 웃어주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옹알대는 것만으로도 아 베르노는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그의 분신이었다. 아무리 그 내성적인 성격이 못마땅해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 런 아들을 죽인 여자가, 바로 왕세자비 라에니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죽어야 했다. 그때, 밖에서부터 시종 한 명이 들어와 아베르노에게 말 했다. "전하, 침입자의 신분이 밝혀졌습니다. 전에 왕세자비 전하의 호위기 사였던 제피르경이 왕세자비 전하를 인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전 하……, 전하를 뵙고 싶다고……." 어느새 시종장의 옆에는 못 보던 얼굴의 시종이 서 있었다. 아베르 노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그 시종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는다. 아베르노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손가락질했다. "자에, 무가? 가히 내 아페어……" 아베르노의 손끝을 따라 시종장과 세시르경의 시선이 옮겨갔다. 순 간, 그 시종의 소매에서 시퍼런 검날이 튀어나와 세시르경의 목을 베 어갔다. "……!" 시뻘건 핏줄기가 허공을 가른다. 너무나 갑작스런 습격이었기 때문 에 세시르경은 미처 대응할 방법도 없이 치명상을 입어버렸다. 깊게 베어진 목에서 꾸역꾸역 피가 뿜어져 나온다. 그런 상태에서도 세시르 경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시종으로 변장해있던 레이크는 씨 익 웃으며 뒤에 대고 소리쳤다. "다들 들어와!" 벌컥 열린 문으로 시종 차림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레이크까지 합쳐 서 네 명이다. 레이크가 손을 내밀자, 한 사내가 장검을 들려준다. "무,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검을 빼드는가!" 레이크는 질려버린 얼굴로 잘도 소리지른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그 리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미다 왕국의 왕실 기사단이다. 대답이 되었나? 그럼 잘 가시게." 레이크는 가차없이 시종장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다른 사 내들에게 세시르경을 가리키고, 그 자신은 술에 취해 널브러진 아베르 노에게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르노의 왕세자 전하." "……." 입술을 악물고 노려보는 아베르노를 향해, 레이크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미다의 왕실 기사단 부단장 레이크 폰 커먼입니다. 적어도 저승길 에 제 이름 정도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레이크를 쏘아보며 아베르노는 마른침을 삼 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어, 어떠게… 여기가지……" 레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공주 전하께서 목숨이 위험하시다길래,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분에게 누명을 씌우십니까?" "누…며엉? "그렇습니다, 누명. 자, 이만하면 전하께 예의도 다 차린 것 같으니, 오래 끌 것 없이 끝냅시다. 우리는 시간이 없거든요, 전하." "무… 무스……" 레이크가 목에 검을 가져다대자, 아베르노의 취한 눈이 경악으로 커 다래졌다. 취기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정신은 갈수록 명료 해지지만, 그렇다고 몸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베르노는 반사적으로 곁에 있던 스틱을 움켜쥐었다. 이 순간, 스틱대신 검이 있었다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지만, 바란다고 스틱이 검으로 바뀔 리가 없었다. "자, 그럼, 안녕히 가시길!" 레이크의 검이 정확히 자신의 목으로 떨어져 내리자, 아베르노는 스 틱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것은 버티지도 못한 채 깨끗이 잘려나갔고, 이어 검날이 아베르노의 목을 가르고 있었다. "전하아아아----!" 세시르경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아베르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커다랗게 뜬 눈 위로 시뻘건 핏줄기가 분 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이 비친다. "간단하군. 마저 처리해!" 냉정한 말투의 지시에 세 명의 사내가 일제히 대답했다. "네, 레이크경!" 미노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레이크 폰 커먼은 죽은 아베르노의 심장 에 검을 밀어 넣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아베르노의 심장에서 뜨거운 핏물이 왈칵왈칵 솟아오른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를 들으며, 레이크는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미다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상반신이 갈라진 채 무너지는 세시 르경의 참혹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아가자. 지체해서 좋을 게 없어." "알겠습니다." "네, 레이크경." 미다의 기사들은 신속하게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카르노의 기사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당혹스러 움과 낭패감이 그들의 얼굴에 어렸다. "전하는! 아베르노 전하는!" 카르노의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레이크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 으며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직접 찾아보시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이크는 검을 휘둘러 앞사람부터 베어갔다. "으아아아아악-----!"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째 베려고 할 때, 레이크의 검이 가로막 혔다. 그 순간 옆에서부터 검날이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피 했지만, 다섯 개의 검을 전신의 급소에 맞대어야만 했다. 레이크는 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함께 온 기사들도 자신과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방문을 지키고 있던 용병들은 이미 죽거나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빌어먹을!" 나직한 욕설을 뱉으며, 레이크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처음 자신의 검을 막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백금발과 눈에 띄게 화사한 외모를 가진 젊은 기사가 싸늘하게 레이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포박해! 안으로 들어가 전하를 살펴라!" "네, 카나이트경." 검을 빼앗기고, 밧줄로 꽁꽁 묶이면서도 레이크는 카나이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주위는 눈에 띄게 웅성이고 있었지만, 카나이트는 그 상황에서도 담 담한 얼굴이었다. 레이크는 조금 질린 눈으로 카나이트를 바라보았다. 쥐 한 마리가 죽었다고 잘못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섬뜩하 도록 침착한 모습이다. "사로트경, 당장 삼왕자 전하께 가서 지금 소식을 알리고, 곧 이곳으 로 와달라고 하십시오." "…네, 카나이트경." "토르경은 재상저로 가서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카나이트경." 차례차례, 기사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나서야 카나이트는 냉정한 눈으로 레이크들을 돌아보았다. "시체를 치우고, 생포한 자들은 왕실 지하감옥에 가두도록. 근위대장 에게 인수할 때까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하도록 하시 오." "알겠습니다." 카나이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뒤돌아섰다. 레이크는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 되어,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누구나 적의 신분과 이름을 궁금해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은 카나이트에게만은 예외인가 보았다. "너희들의 심문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재상이신 미카에르 대공이 나 삼왕자 카스트로 전하께서 하시겠지. 내 역할은 여기가 끝이다. 그 럼." 암녹색 망토를 휘날리며 가는 카나이트의 뒷모습을 레이크는 한참동 안이나 홀린 듯 바라보았다. 빼도박도 못하게 꽁꽁 묶인 채로 레이크 들은 어딘가로 끌려갔다. 타오르는 횃불과 어둠이 어울려 밤이 현란하 게 느껴진다. 레이크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 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저들이 그렇게 빨리 알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잡혀버릴 그런 계획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철로 된 감옥 안으로 처박혔 을 때, 레이크는 먼저 자리잡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에밀?' 자신과 별 다를 것 없는 처지로 앉아있는 그는 제피르경과 함께 왕 세자비를 처치하러 갔던 용병이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침실 밖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뒤척이던 침 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저 소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 직한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미……끝난 건가? 성공했을까?' 성공했어도 그리 기쁜 소식은 아니고, 실패했다고 해도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래도 카스트로는 일이 성공했기를 바랬다.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융단을 밟고 침대로 걸어 오는 조용한 발소리도 예민해진 카스트로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 왔다. "전하. …전하. 주무시는데 방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일어나 주십시 오. 전하." 다소 성량이 높은 목소리가 휘장 밖에서 들려온다. "전하! 왕세자궁에 암살자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전하!" 옆에서 자고 있던 루시타니아가 끄득거리며 돌아눕는다. "전하! 일어나십시오. 전하, …전하!"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반응해 루시타니아의 몸이 움찔한다. "전하!" 천천히 루시타니아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며,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잠에 취한 루시타니아가 밖에다 대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루시타니아 전하. 왕세자궁에 암살자가 들어,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 비 전하께서 시해당하셨다고 합니다. 카스트로 전하를 깨워주십시오. 기사단장이 보낸 전령이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그게 무슨 말이죠?" 떨리는 목소리.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우선 카스트로 전하를 깨워주십시오." "아, 아, 네." 루시타니아는 여전히 어수선한 어조로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전하. 전하. 일어나세요, 전하. 전하……." 귀찮은 듯 몸을 틀자, 더욱 강하게 어깨를 흔든다. "전하! 전하, 일어나세요. 전하." 카스트로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오?" 막 잠에서 깬 듯, 잔뜩 잠겨있는 목소리였다. "모르겠어요,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께서……, 암살자가……." "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서 일어나 보세요." ================================================================== 결국 나우에 퍼가게 되었습니다. 나우를 끝으로 더 이상 연재장소를 늘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곳으로 퍼가겠다고 말씀하신분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꾸벅. 아무래도 불펌이라는 게 머릿속에 기생충처럼 틀어박혀 있어서.. 나우도 결심하기까지 수십번을 뒤집었다는.. --; 나우에는 제가 직접 올리겠다는 결심을 깨고(--; 100회 넘어가니까 엄두가 안나더군요..) 다른 분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솔로이신 분들, 손전등과 핸폰을 지참하시고 24일 12시에 명동으로 집합하.... (퍼어억!)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시길..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8 - 관련자료:없음 [3263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2 20:21 조회:1295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8 - ================================================================== 루시타니아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면서, 카스트로는 스스로의 가증스 러움에 치를 떨었다. 마치 정말 모르는 것처럼 이토록 자연스럽게 연 기가 될 줄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일이다. 카스트로는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쓸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침대를 둘러싼 휘장을 걷어냈다. 바로 앞에 시종장 하미르가 서 있었다. "……무슨 소린가?" 침대에서 내려서면서 묻자, 시종장 하미르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 로 대답한다. 그 뒤에 있는 시종이 촛불을 들고 있어서 침실은 그다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왕세자궁에 암살자가 들었습니다.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 두 분 모두 참혹하게 시해당하셨다고 합니다. 밖에 기사단장께서 보내신 기사가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분에게 들으십시오." 카스트로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계획은 결국 성공했다. 이제 마무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무섭게 달음박 질치는 심장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온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카스트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무겁게 잠긴, 그리고 떨리는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의장을……." "네, 전하." 시종장 하미르는 옆의 시종에게서 촛대를 받아 침대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촛대를 건네준 시종이 침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라에르에게……, 즉시 입궁하도록……." "네, 전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은 충격이었다. 정말 자신이 형을 죽여버린 것이다. 알고 있었는데, 아니 자신이 직접 지시한 일이면서도, 왜 이렇 게 혼란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물끄러미 내려다본 손이 수전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린다. 카스트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고, 거 칠게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떨리는 손, 떨리는 입술. 카스트로는 자신 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시종들이 의복을 가지고 들어왔다. 잠옷이 벗겨지고, 하얀 린네르 셔 츠가 몸 위에 걸쳐진다. 카스트로는 마치 남의 일인 양 그것을 지켜보 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게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망토까지 걸치고서야, 카스트로는 성큼 침실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기다리고 있던 암녹색 망토의 기사가 카스트로를 향해 무릎을 꿇는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서 듣지. ……왕세자궁으로 가야 되나?" "네, 전하." 카스트로가 문밖으로 나가자, 친위대원 네 명과 시종 몇 명이 따라 붙는다. 조금 뒤에 따라오는 기사를 돌아보지도 않고, 카스트로는 이번 일의 경과를 물었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기사 단으로 시종 한 명이 왕세자궁에 암살자가 들었다면서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마침 남아 계시던 기사단장 카나이트경이 기사단 건물에 있 던 기사들을 모아 왕세자궁으로 갔을 때는, 이미 왕세자 전하께서 시 해된 뒤였습니다. 막 도주하려던 암살범들 몇몇은 죽고, 네 명은 생포 했습니다. 카나이트경은 그들을 모두 지하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하셨습 니다." 카스트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빈관에서 나와 정원 건너편 의 환하게 밝혀진 왕세자궁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하던 카스트로는 속도를 더해 그 방향으로 발을 내딛었다. "국왕폐하께 이 소식을 알렸나?" 사로트경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카나이트경이 재상저와 전하께 이 소식을 전하라고 지시하는 것만 듣고 왔습니다." "카나이트경은 지금 어디 있나?" "왕세자궁에……." 카스트로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왕세자궁을 보며 걸어갔다. 빨리 가 고싶으면서도, 결코 가고싶지 않은 기분이 교차한다. 자신이 지시한 일, 자신이 명령한 일의 결과를 직접 확인하러 가는 길이지만, 카스트 로는 그 길이 내키지 않았다. '위선자!' 테라에서의 이년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짓된 행동을 해왔지 만 이런 자괴감은 없었다.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해온 여자의 남편을 죽이면서도 이런 괴로움은 없었다. '차라리……, 쿠데타가 나았을까? 내놓고 쳤더라면, 이런 울지도 웃 지도 못할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까?' 카스트로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방법이야 어쨌든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자신을 형을 죽였고, 그 죄값은 자신의 몫이다. 이런 괴로 움, 자괴감, 모두 자신이 받아내야 할 죄값이다. '피하지 않겠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내 몫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 가하려는 거냐, 카스트로. 네가 저지른 일이야!'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왕세자궁 안으로 들어가자, 모여있던 사람들 이 분분히 물러난다. 무섭게 굳은 얼굴로 들어서는 카스트로에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왕세자궁의 동쪽 작은 홀 앞에서, 카스트로는 근위대장 테르니크경과 함께 서있는 기사단장 카나이트와 마주쳤다. 성큼 홀 안으로 들어서자, 테르니크경과 카나이트가 절도 있게 인사를 해온다. "……전하는……어디로 모셨나?" 끔찍하게 잠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용케 알아들었는지, 카나이트경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옮기지 않았습니다. 3층 거실에 계십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계단을 올랐다. 사로트경 대신 카 나이트와 테르니크경이 뒤를 따랐다. 카스트로는 3층에 있는 왕세자의 거실 문 앞에 도착해서 잠시 멈춰섰다. 대낮처럼 밝은 3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기사들이 철옹성처럼 막 아서 있었다. 카스트로는 문 앞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아니 마음을 가 다듬었다. 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지고, 자신의 옆에 있던 친위대원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친위대원이 닫힌 문을 열었다. 화악하고 숨막히는 피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하게 풍겨 나왔다. 짙은 향수의 냄새와 어우러진 피비린내는 속의 것을 게워낼 정도로 역겨웠다. 카스트로는 입과 코를 손으로 막고 거실 안으로 들 어섰다. 전에 와본 적이 있던 방이었다. 온통 테라색에 물들었던 방이 이제는 핏빛으로 물들어있다. 카스트로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융단 위를 질척한 피로 적시고, 목과 가슴이 갈라져있는 두 사람은 푸른 제 복의 시종과 언제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던 아베르노의 호위기사 세 시르경이었다. 카스트로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 옆에 등을 보 이고 있는 소파에 삐죽이 튀어나온 하얀 손을 눈치챘다.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의 임자를, 카스트로는 가슴이 내 려앉는 기분으로 추측해냈다. 뭐에 홀린 듯 다가간 소파에는 아직까지 두 눈을 부릅뜬 아베르노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목은 시뻘건 속 살을 내보이며 갈라져 있었고, 심장에도 정확히 구멍이 뚫려 소파와 융단을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ㅅ!" 왈칵 치미는 욕지기를 막을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헛구역질이 나는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쳤다. "전하--!" "우우욱……, 우우…………." "전하!" 보이지 않는 비수가 심장을 찌른다. 카스트로는 몸을 꺾고, 한동안 정신없이 헛구역질을 했다. "전하……." "우우욱……우윽………." "전하……!" 자신이 한 일이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닌, 자신이 저지른 일이다. 저렇게 두 눈 부릅뜨고 공포 속에 형을 죽도록 만든 사람이 자신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든 것도 자신이다. 모두 자신이 한 일이 었다.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무리 미워도 그는 형이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 고,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고, 누구보 다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어야 할 사람이다. 자신의 우상이었으며 동경 의 대상이었던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는 추잡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저렇게 참혹하게 죽게 만들었다. 카스트로는 그런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자 신이 역겹고 더러웠다. 더없이 비열하고 가증스러웠다. 과연 이 방법밖 에 없었을까? 아베르노를 옆에서 보좌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왕이 잘 못되면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신하의 도리다. 하지만 자신은 제 욕심 에 눈이 어두워,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신하의 도리를 무시하고 군주 가 되려고 했다. 친형일지라도 그의 밑에서 신하로서 굽신거리는 것이 싫어서, 그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에, 친형을 죽여버렸다. 친형을 자신 의 손으로 죽여버린 것이다. "……우욱……으우으으윽……" 카나이트는 문가에 있는 기사에게 손짓해 방문을 닫도록 지시했다. 거실 안에는 카스트로와 시종장 하미르, 그리고 친위기사 네 명과 근 위대장 테르니크경, 그리고 카나이트 밖에 없었다. 카나이트는 문이 닫 히는 것을 확인하고, 흘낏 테르니크경을 보았다. 막 소식을 듣고 달려 온 테르니크경도 이 거실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테르니크경은 일그러진 얼굴로 아베르노의 시신을 보고 있었다. 카나이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거친 숨만 내쉬고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죽을 사람 처럼, 금세 울어버릴 듯한 눈을 하고서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솔직 히 이런 카스트로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카스트로가 테라로 떠 나기 전 두 사람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것은 전 카르노인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형제가 없는 카나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스트로 를 바라보았다. '사이가 나빠도, 형제가 죽으면 저렇게 슬픈 걸까?' 카나이트에게는 처음부터 아버지밖에 없었다. 자신이 한 살 되던 해 겪었다던 어머니의 죽음은 아직 아기였던 그에게 어떤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 언제나 교육받았던 것은 다음 대 루시노 후작가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기사로서의 자존심과 감정의 절제였다. 어느 새인가 구역질과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카나이트는 그것 을 인식한 순간 고개를 들어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빨갛게 충혈된 검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카스트로의 유난히 창백해 보이 는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아버지……, 폐하께는 이 소식을 알렸나?" 잔뜩 잠긴 쉰 목소리였다. 카나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건강 때문에, 우선 전하와 대공을 모시도록 했습니다." "……당분간…, ……폐하께는 비밀로 하도록……." 거기까지 말한 카스트로는 울음을 삼키듯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카나이트는 꽉 다문 턱이 경련을 일으키는 카스트로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전하를 우선 따로 모시고……, ……암살범들은 왕실지하감옥에 가두었다고?" "네, 전하." "누가 보낸 자들인가?"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신을 차리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모 습이 대견할 정도였다.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라는 건가? 카나이 트는 새삼스러운 듯 카스트로를 훑어보고 있었다. "…대공은 언제쯤 오시는가?" "전하께 전령을 보낸 그 시간에 재상저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머 지않아 도착하실 겁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아베르노를 바라보았다. 흰자를 보이며 부릅뜬 눈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스트로는 걸 음을 옮겨 아베르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베르노의 눈꺼 풀을 내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속눈썹의 감촉과 차디찬 시신의 느낌 에 소름이 돋는다. '죄송합니다, 전하.'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카스트로는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떨구어냈 다. 자신에게 울 자격씩이나 있을 리가 없었다. 울 수 없었다. '저를 원망하십시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카스트로는 자신의 망토를 끌러 아베르노의 차가운 육신을 덮었다. '이런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아베르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 카스트로는 물었다. "……지스카르 전하께는 알렸나?" 감정이 삭은 듯한 목소리였다.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지스카르 전하께도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리도록. 그리고 두 왕녀 에게도." "네, 전하." 카나이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며, 카스트로는 지친 듯한 긴 숨을 뿜어냈다. "근위대장 테르니크경." "네, 전하." 카스트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테르니크경을 쏘아보았다. "근위대의 임무는 수도와 왕궁의 수비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자네는 무얼 하고 있었나?" "……!" 눈에 띄게 굳어버리는 테르니크경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어내며 머리를 저었다. "날이 밝으면……, 암살자들의 심문과 함께 경의 과실도 추궁할 테 니, 근신하고 있도록." "……네, ……전하." 똑똑똑똑.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의 미카에르 대공과 메스메르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아베르노 전하는!" 미카에르 대공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가와 망토를 들치고 아베르 노를 확인했다. "오오, 로마여! 안돼! 이럴 수는 없어어어!" 카스트로는 절규와 같은 미카에르 대공의 목소리에 질끈 눈을 감았 다. 그 절규가 가슴을 후벼판다. 테라력 698년 3월 29일 밤은 그렇게 피와 비명 속에 잠겨갔다. ==================================================================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네요.. ^^ ...(헤유.. --;)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시길..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09 - 관련자료:없음 [32654]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3 20:34 조회:124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09 - ==================================================================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카스트로는 하룻밤 새에 달라진 자 신의 지위를 진절머리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떨거지쯤으로 여기 던 귀족들이 먼저 다가와 웃는 낯으로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데에는 저절로 혐오감이 치밀었다. 루시타니아에게 선물이란 명목으로 들어오 는 뇌물 역시 역겹기 짝이 없었다. 왕세자 부부 암살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간의 심문과 증인들의 증언으로, 그들 암살범은 '미다 왕국'의 왕실과 관련되었음을 밝혀내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그들을 꼼짝없이 '미다'에서 보낸 암살자로 몰아넣은 것은 왕세자비의 암살 당시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그날 밤, 왕세자비의 옛 호위기사인 제피 르경은 수십 명이 보는 앞에서 공범자인 용병을 보며 '미다의 스파이 와 진심으로 손잡을 것 같나?' '그 레이크라는 녀석은 미다의 왕실 기 사단 소속이겠지?'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비록 제피르경이 왕세자 비의 목을 그으면서 함께 자살해버리는 바람에 그 말의 진실여부를 추 궁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을 바탕으로 '미다'와 관련이 깊은 이왕자 부부와 그 측근들을 심문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왕자비의 시녀장 안나라는 여자로부터 암살자들과 이왕자 부부 사이를 오가며 일을 진행시켰다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일이 그렇게 풀려간 이상, 왕세자 암살사건 이상의 관심사로 떠오른 '왕위 계승자'의 지위는 삼왕자 카스트로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별 볼일 없는 삼왕자에서 '왕위 계승자'로 뛰어오른 카스트로는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접근해오는 귀족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 다. "……단호하게 처벌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타국의 기사까지 끌어들여 왕세자 전하를 시해한 것은 단순한 정권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절대 인정에 밀려 판단을 흐리시면 안됩니다!" 왕세자가 죽은 지금, 카스트로는 국왕과 왕세자를 대신해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자리에 앉았지만, 설레거나 기쁘지 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거나, 짜증스럽거나. 지금은 후자였다. 카스트로 는 심적으로 피곤했다. "……전하께서 망설이시는 까닭은 짐작이 가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며칠 새 마른 얼굴로, 카스트로는 방금 말한 미카에르 대공을 무심 하게 돌아보았다. 미카에르 대공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정신들이 왕세 자 암살의 주모자인 지스카르와 시에나 부부의 처형을 강력하게 요청 해오고 있었다. 저들이 그저 왕세자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그런 주청 을 해오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타르경같은 대쪽같은 사람이 야 그럴 수 있겠지만, 미카에르 대공은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 고 싶을 뿐일 것이다.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왕위계승서열 1위가 된 지스카르는 지금 왕위계승이 확실시되는 카스트로에게 존재 자체가 껄 끄러운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카스트로의 부담을 줄 이자,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환심을 사두자, 라는 심산일 터였다. 카스 트로는 하루아침에 변한 그들의 살가운 얼굴들이 역겨워서 그냥 이 자 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바란 것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런데도 그것이 그토록 카스트로를 괴롭게 했다. "……내게…… 이제 하나 남은 형을 죽이라는 겁니까, 재상?" 회의 시작 이후, 카스트로의 입에서 나온 첫 발언이었다. 덤덤함으로 포장한 얼굴로 카스트로는 회의실에 있는 정신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전하……, 이 일은 인정에 얽매여 처리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스카 르 전하께서는 친형이신 아베르노 전하를 암살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 에게 인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미카에르 대공은 충심 어린 모습으로 그렇게 진언했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며 그를 외면했다. "내게……, 지스카르 전하를 처벌할 권위가 있습니까? 나는 왕세자 도 아니고, 국왕은 더더욱 아닙니다." "전하께 그런 권위가 없다면, 그 누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폐하께 서는 위독하시기 때문에 이 일을 알리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지스카르 전하에게 자신을 처벌하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카스트로는 다시 또 한 명의 혈육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 니 한 명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괴로웠다. 또다시 그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강경하게 나오는 정신들을 보 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유폐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카스트로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는 게 힘들었다. 수십 명의 정신들이 하나같이 '처형'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하, 비명에 돌아가신 왕세자 전하를 생각해보십시오! 왕위 때문에 친형을 죽인 사람이, 친동생마저 죽이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 게 우유부단하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뭔가 가슴에 푹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카스트로는 방금 말한 헤르트경을 살벌하게 쏘아보았다. 자신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카스트로는 고통스러웠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헤르트경! 어찌되었든, 이 일은 경솔히 다룰 일이 아니오! 좀더 시간을 두고 결정합시다." "전하!"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말을 자르며 일어섰다. "경들도 모두 너무 과열되어있는 것 같소. 잠시 머리를 식히고,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 "전하!" "전하아!" 수십 명의 정신들이 앉아있는 대회의장이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높 은 천장과 넓은 공간에 울려 부딪히는 소리들이 카스트로의 날선 신경 을 긁어내린다. 칼리에르 3세는 며칠 새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나날인데도, 어의라든가 시종장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어색했다. 제대로 자신의 얼굴을 못보고 외면한다든지, 시킬 일이 있어 부를 때면 화들짝 놀란다든지. 칼리에르 3세는 그 모든 것이 신경 쓰 여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아도, 아무 일도 없다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손자의 죽음 말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카스트로는…… 아직 오지 않았느냐?" 막내아들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카스트로에게 직접 물어봐 야겠다고 다짐하며 시종장에게 물은 칼리에르 3세는 이내 실망할 수밖 에 없었다. "오늘은 바쁘신 일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연락해 오셨습니다." 아들을 보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칼리에르 3세는 그것마저 좌절되 자 버럭 화를 내었다. 딱히 누구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불끈불끈 치솟 는 불만을 폭발시킨 것에 불과했다. "아니, 그 녀석이 뭐가 그리 바쁘다는 게야! 제 애비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매일도 아니고 삼일에 한번 오면서 그것도 바쁘다고 안 와? 에잇, 고약한 것! 가서 당장 불러와!" "폐하……" "당장 불러오라고 했다! 아니면 짐이 직접 찾아갈까?" 역정을 내는 칼리에르 3세를 보며 시종장은 난감해했다. 하지만 버 르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칼리에르 3세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곧 카스트로 전하께 연락하겠습니다." 시종장이 나가자, 칼리에르 3세는 어의의 팔에 이끌려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씨근씨근, 거친 숨이 아직까지 칼리에르 3세의 가슴을 들 썩인다. "휴우, 옥체를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폐하." 어의 하이파경이 한숨 섞인 말투로 말하자, 칼리에르 3세는 퉁명스 럽게 내뱉었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하고싶은 것도 못하면서 몸을 아끼겠는 가!" "폐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폐하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신다면……." 마치 심술난 아이처럼 입술가를 씰룩이던 칼리에르 3세는 흘낏 하이 파경을 노려보면서 냉랭하게 물어보았다. "누가 말인가? 바쁘다고 문안도 오지 않는 카스트로 말인가? 아니면 짐이 죽을 뻔했는데 찾아오지도 않는 아베르노가 말인가? 대체 누가 짐을 그렇게 걱정한다는 게야?" 하이파경은 수염사이로 입술을 꾹 다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설마 바쁘지 않은데 그런 핑계를 대고 안 오실 카스트로 전 하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분 마음도 헤아려주십시오." "글쎄, 뭘 알아야 헤아리고 말고를 하지! 뭘 하고 다니는지, 언제 제 놈이 짐에게 얘기를 비추기라도 하던가? 바쁘다가 끝이지, 뭘 해서 바 쁜지 어떻게 알아? 그게 그저 핑계인지 아닌지, 짐이 어떻게 아느냔 말일세!" 오늘따라 유난히 고집스럽고 심술궂은 칼리에르 3세였다. 하이파경 은 목 끝까지 치닫는 말들을 집어삼키며, 애꿎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 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겐가? 말해보게. 짐도 무슨 일인가가 일어 났다는 것은 알아! 이미 손자의 죽음도 보았네. 말못할 게 뭐란 말인 가?" 하이파경은 착잡한 눈으로 결의에 불타는 칼리에르 3세를 내려다보 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한번 더 충격을 받는 다면, 칼리에르 3세는 신이라도 살릴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억측하지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짐을 바보로 아는가?" 순간적으로 열이 치받친 칼리에르 3세는 버럭 소리질렀다. "왜 말을 못하는 게야?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사람을 귀머거리 취급하고 그래? 무슨 일인가? 무슨 말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 해보게! 무슨 일이야?" 일그러진 하이파경의 얼굴을 보면서, 칼리에르 3세는 어쩐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순간 오늘 오지 못한다는 카스트로에게 생각 이 미쳤다. "혹시…… 그 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하이파경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주름진 얼굴에 커다래진 눈 망울만 불안스럽게 흔들린다. 칼리에르 3세는 그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고 재차 추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야?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말해보게!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폐하……." 괴로운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하이파경의 모습에 칼리에르 3세는 피 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 놈이! 아베르노 이 놈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야! 당장 사 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카스트로는 지금 어디 있느냐?" 칼리에르 3세가 성급한 지레짐작으로 노성을 지를 때, 침실 문이 열 리며 시종장이 들어왔다. "폐하, 체리나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시종장은 노기등등한 칼리에르 3세와 하이파경을 흘깃 보고 문밖으 로 나갔다. 야윈 듯한 모습의 체리나가 그 곳에서 시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고개를 까딱하고, 체리나는 커다란 침실문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긴 장된 공기가 흐르는 것을 눈치채며 칼리에르 3세의 앞으로 다가가자, 인사를 하기도 전에 대뜸 큰소리가 날아왔다. "카스트로는 어떻게 됐느냐? 너도 날 기만하지는 않겠지, 체리나?" 불을 뿜어내는 듯한 분노에 놀라, 체리나는 잠시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해서 대답했다. "…카스트로 오라버니께서 어떻게 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칼리에르 3세는 고개를 갸웃하는 체리나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아베르노는 어디 있느냐! 당장 그 놈을 불러와! 직접 얘기를 들어 야겠다. 내, 그렇게 일렀거늘!" 체리나는 아베르노의 이름을 듣자 금갈색 눈을 크게 떴다. "당장 불러오라니까 뭣들 하는 게야!" 칼리에르 3세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체리나는 기어이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어냈다. 체리나는 작게 흐느끼며 얼굴을 가렸다. "체리나!"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딸을, 칼리에르 3세는 당혹스런 기분으로 바 라보았다. 대체 왜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왜 우는 거냐? 아베르노를 불러오라니……, …무슨 일이지? 정확히 고하라! 어명이다, 하이파경!" 칼리에르 3세는 울고있는 딸에게서 곁에 있는 하이파경에게로 시선 을 옮겼다.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일국의 국왕인 그였다. 진심으로 노 해서 명령하는 모습은 하이파경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말하라, 당장!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하이파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의사로서의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 다. 하지만 어명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이파경!" 엄청난 노성에 하이파경은 천천히 체념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틀 전 밤에 왕세자궁에 암살자가 들었습니다." "…암살…자?" 목에 뭔가가 걸린 듯 탁한 목소리였다. 하이파경은 침을 꿀꺽 삼키 고 말을 이었다. "미다 왕국에서 보낸 암살자들이었습니다. 아베르노 전하께서는 레 트 저하께서 돌아가신 일이 지스카르 전하와 시에나 전하께서 사주한 일이라고 의심하셔서 두 분을 추궁하셨습니다. 견디다 못한 지스카르 전하와 시에나 전하께서 미다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아베르노는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숨을 가다듬으며, 하이파경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에르 3세 를 마주했다. 느린 목소리가 칼리에르 3세에게 철퇴처럼 내리쳐졌다.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 두 분 모두 그날 밤, 시해당하셨습니 다." 칼리에르 3세의 갈색 눈이 커다래졌다. 까칠하고 핏기없는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거리고, 이내 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하이파경은 조금 들었던 머리를 침대위로 힘없이 떨구는 칼리에르 3 세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충격을 받아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에 하이파경은 곁에 두었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는 의사로 서의 임무를 수행해야할 때였다. ================================================================== 내일이면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 손전등과 핸드폰은 완비되셨는지.. --; ^^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0 - 관련자료:없음 [3267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4 20:24 조회:1189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0 - ================================================================== 답답한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정원을 거닐고 있던 카스트로는 헐 레벌떡 달려오는 시종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앞에서 멈추 어선 시종은 카스트로의 시종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그 시종은 다시 시종장 하미르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시종장 하미르는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스트로를 향해 말했다. "본궁의 시종입니다. 폐하께서 전하를 찾아 계신답니다." 카스트로는 잠시 정원의 여린 풀잎에 시선을 두다가, 본궁의 시종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뵙지 못한다고 말했을 텐데?" 본궁의 시종은 카스트로의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 "하오나 폐하께서 역정을 내시며 당장 불러오라 하셔서 어쩔 수 없 었습니다. 잠시만이라도 들러주시면……." 애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시종을 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부터 누군가가 카스트로를 부르며 달려왔다. "전하! 카스트로 전하아!"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역시 파란 제복의 시종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다가온 시종은 카스트로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 치듯이 말했다. "폐하께서……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어서 본궁으로……." 놀란 나머지 한 박자를 놓치고 나서야 카스트로는 버럭 소리를 내질 렀다. "……뭐?" "폐하께서 위독……."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카스트로는 그 시종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노려보다가, 다음순간 뛰듯이 본궁으로 향했다. "당장 가서 비제님을 모셔와라. 아니, 곧바로 폐하의 침실로 오시라 고 그래!" "네, 전하!" 시종 한 명이 부지런히 귀빈관쪽으로 뛰어간다. 카스트로는 더욱 발 걸음을 재촉했다. 쌀쌀한 봄바람에 암녹색의 망토가 거칠게 펄럭인다. 칼리에르 3세가 위독하다는 사실은 카스트로에게뿐만 아니라 정신들 에게도 알려졌다. 단 며칠 새 벌어진 왕가의 연이은 불상사는 정신들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파장을 미치고 있었다. 카르노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이런 격변 속에서 정신들은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특히나 카스트로에게 적대적이었던 미카에르 대공과 유타르경은 매일매일 손에 땀을 쥐고 상황을 주시하 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국왕의 위독 소식은 그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권력의 기반이 칼리에르 3세인 미카에르 대공의 무리들은 더욱 그러했다. "대공!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되는 겁니까?" 본궁의 소회의실에서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근 들어 미카에르 대공과 행동을 함께 하던 헤르트경이었다. 헤르트 경의 옆에는 레이니트경이 함께 있었다. 뭔가 행동을 촉구하는 헤르트 경의 말투에 미카에르 대공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나보고 뭘 어쩌라는 말이오? 내가 의사요? 아니면 신이요? 경 이 초조해하는 이상으로 나도 초조하오! 경이 그렇게 정신을 빼놓지 않아도 충분히 정신 사납단 말이오!" 헤르트경이 사납게 노려보자, 미카에르 대공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 보았다. 보다못한 레이니트경이 나서서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두 분 다 그만 하십시오. 지금 저희들끼리 싸울 때입니까? 숙부, 지 금 가장 초조한 사람은 대공이실 겁니다. 그만 하십시오." 헤르트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짚고 있던 테이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하긴, 그도 그럴 테지. 예전부터 카스트로 전하와 사이가 나쁘셨지 요, 대공?" 미카에르 대공은 묵묵히 헤르트경을 노려보았다. 헤르트경은 그래도 대공에 비하면 형편이 나았다. 적어도 카스트로를 노골적으로 적대시 한적도 없었고, 또 레이니트경과 결혼을 약속한 유리나라는 강력한 아 군이 있었다. '설마 제 누이의 약혼자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헤르트경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흘깃 미카에르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입술을 꾹 다물고 음침한 분위기만 풍겨내는 대공을 보고있자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하나 있는 아들도 친위대 부대장이라는 걸맞지 않은 감투를 쓴 덕에 근신중이지 않던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악취미는 없었지만, 헤 르트경은 그래도 조금쯤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카에르 대공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만 실례하겠소. 다른 대신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아 야겠고. 그럼." 미카에르 대공은 털 듯이 회의실을 나서는 헤르트경의 뒷모습을 죽 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설펐던 헤르트경과의 동맹은 이것으로 끝장일 터였다. 그가 아는 한 헤르트경은 손해나는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테 니까. 미카에르 대공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국왕폐하께 가보아야 했다. 칼리에르 3세의 죽음을 지켜보는 자리에서, 혹시라도 자신이 가장 가까운 친족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카에르 대공은 이미 고인이 된 아베르노의 존재 가 아쉬웠다. 그만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의 앞날은 평탄했을 터였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 힘없이 늘어진 주름진 손. 새액새액 힘겹게 내쉬는 급격한 숨소리가 넓은 방안을 침통하게 몰고 간다. 카스트로는 울 듯한 얼굴로 칼리에르 3세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버지가 지금 죽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형을……지스카르 전하를 모셔와라." "전하, 하지만……." "불가합니다. 지스카르 전하는 지금 죄인의 몸……" 머뭇거리는 시종장과 단호하게 반대하는 미카에르 대공의 말은 이내 강건하게 맞받아치는 고함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지스카르 전하를 모셔와!" 카스트로는 촉촉하게 젖은 눈에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시 명령했다. "죄인이기 이전에, 폐하의 아들이다. 모셔와! 당장!" 본궁의 시종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나가는 시종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카스트로는 다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카스트로의 옆에는 감색머리와 초록색 눈의 비 제가 힘없이 서 있었다. 바쁘게 서둘러서 국왕의 침실로 왔지만 이번 에는 비제도 머리를 저었다. 전과 같은 치료술을 사용해도 칼리에르 3 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모두 자신의 죄였다. 카스트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으로 형을 죽이고, 이제 그 벌을 받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의 목숨 으로. "눈을 떠보십시오, 아버지……. 접니다, 카스트로입니다." 넓디넓은 침실에 울먹이는 목소리만이 떠돌아다닌다. 침실에는 어느 새 유리나와 체리나, 루시타니아, 그리고 미카에르 대공까지 모두 와 있었다. 체리나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대며 울고 있었고, 루시 타니아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칼리에르 3세와 카스트로를 바라보 고 있었다. 유리나는 꼿꼿이 서서 입술을 앙다물고 손아귀에 쥔 손수 건을 비틀고 있었다. 비제는 슬픈 얼굴을 하고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옆에서 느껴 지는 강렬한 슬픔을 못 느낄 리 없었다. 그래도 비제는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 칼리에르 3세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것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인 왕세자도 죽었고, 곧 이왕자도 처치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칼리에르 3세의 존재는 필요 없었다. 하 루빨리 카스트로가 카르노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칼리에르 3 세가 죽어줘야 했다. 비제로서는 스스로 죽어주는 칼리에르 3세가 고 마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마음일 뿐, 카스트로가 알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비제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왕자 지스카르 전하 드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친위대원 두 명에게 포위 당한 채인 지스카 르가 들어왔다. 못 본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마르고 수염도 덥수룩해 져서, 첫눈에 지스카르라고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버지?" 지스카르는 망연한 눈으로 칼리에르 3세를 쳐다보며, 홀린 듯이 걸 음을 옮겼다. 친위대원들이 따라붙으려는 것을 보고 카스트로가 제지 했다. "경들은 물러가 있으라!" "……네, 전하." 전에는 아베르노의 친위대원이었던 그 둘은 카스트로의 지시에 멈춰 서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갔다. "아버지……흐으윽, 아버지이……!" 침대로 다가간 지스카르는 몸을 무너뜨리며 칼리에르 3세를 붙잡고 울었다. 다 큰 성인남자가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은 여자가 우는 모습 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아팠다. 카스트로는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차마 지스카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저토록 슬 프게 우는 형을, 저렇게 만든 장본인인 자신이 볼 염치가 없었다. "폐, 폐하!" 누군가가 크게 외치는 소리에 놀라 카스트로는 얼른 칼리에르 3세를 쳐다보았다. 죽어 가는 사람 같지 않게 또렷한 눈을 하고 입술을 달싹 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금세라도 끊길 것 같은 가냘픈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네가……지스카……아베……했…느냐?" 카스트로는 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버지의 얼굴과 형의 뒷 머리를 바라보았다. 지스카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순간, 카스트로는 자신을 향하는 아버지의 시선과 마주쳤다. 카스트 로는 급격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마주보았다. 칼리에르 3세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인다. "카스트……로……." "네……, 아버지." 죽음을 앞둔 사람만큼이나 힘겨운 목소리로 카스트로는 대답했다. 칼리에르 3세는 한참동안 카스트로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다시 힘들게 눈을 떴다. 카스트로는 그 시선에 포함된 갖가지 감 정에 더욱 떨리는 자신을 느꼈다. 추궁, 비난, 그리고 슬픈 듯한 눈빛. 마주잡고있던 칼리에르 3세의 손이, 기운 없는 가운데서도 힘을 주는 것이 전해져왔다. 카스트로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을 꽈악 마주 쥐었다. "…지스…르를……, 사……사려……주……게……니?" 힘겹게, 아주 힘겹게 말을 잇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애절한 애원 의 눈빛에서, 카스트로는 이미 칼리에르 3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 다. "……아…버지……." 칼리에르 3세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지스카……르……사…려……주겐……니?" 더욱 옥죄어오는 마른 손의 감촉에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 개를 숙인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삽시간에 고이더니 후두둑 떨어 져 내린다. "…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손등에 떨어지는 뜨거운 물기에 칼리에르 3세는 맞잡은 아들의 손을 풀고 위로하듯 그 손을 덮었다. "아버지! 아버지이!" 지스카르의 절규에 카스트로는 고개를 들었다. 어의 하이파경이 재 빨리 칼리에르 3세의 숨을 살폈다. 하지만 이미 호흡은 끊어졌고, 심장 은 멈추었다. 카스트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손 위에 놓인 칼리에르 3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폐하아아----!" "폐하아아아아-----!" "아버지이이---!" 카스트로는 멍해진 눈으로 미동도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모든 소리가, 모든 광경이 자신에게 직접 와 닿지 않는다. 모든 게 멍멍하고 이질적이다. "전하……."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비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 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다시 머리를 흔들어 흐릿한 정신 을 일깨우며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흰머리가 섞인 연갈색 머리와 아 직도 갈색인 눈썹, 우뚝 선 콧날과 소름끼치도록 하얀 입술. 위에서부 터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는 카스트로는 차가워지는 아버지의 손을 느 끼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주위에서 우는소리가 들려와도, 카스트로의 목은 제 기능을 상실했는지 막혀오 기만 하고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흐릿해져오는 시야와 이미 식어버린 눈물이 차갑다. 카스트로는 차갑다고 느꼈다. 너무 시리다. "전하……." 카스트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도록 입술을 깨 물고, 카스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후회하지 않아!' 버릇처럼 중얼거렸지만, 과연 그런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 자 신이 후회하지 않는 것인지, 후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어떤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후회하지 않게 만들겠어!' 카스트로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런 희생을 치른 이상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할 수 없었다. 후회한다면 카스트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희생 이 후회 따위로 전락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값싼 희생이 아니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고통도 잊지 않겠어. ……잊지 않는다.' 카스트로의 목에 힘줄이 파랗게 돋아나는 것을 보며, 비제는 조심스 럽게 속으로 미소지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비제, 자신을 그토록 끌어 들인 강하디 강한 오라는! 궁지에 몰려서 더욱 빛을 발하는 지배자로 서의 아름다운 의지와 긍지! 비제는 이 오라의 색이 너무 눈부셨다. 그 빛이 바로 비제의 '주인'이었다. 테라력 698년 4월 1일 카르노의 제 16대 국왕 칼리에르 3세가 서거했다. 5일 뒤에 국장이 치러졌으며, 수백 수천 명의 국민들이 장례행렬을 따랐다. 며칠 전에 치른 왕세자 부부의 참사와 겹친 국왕의 서거는 전 카르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왕세자를 암살한 이왕자 지스 카르를 저주했으며, 초췌한 얼굴로 장례행렬을 따라 푸노산으로 오르 는 삼왕자 카스트로를 안쓰러워했다. 날씨도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하 루종일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 제목과 [군주론]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어서 적습니다. 군주론 [ 君主論, II Principe ]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마키아벨리의 저서. 구분 : 정치학서 저자 : 마키아벨리 시대 : 르네상스기(期)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정치학의 중요한 고전이다. 군주의 통치기술을 다룬 것인데, 군주가 국가를 통치 ·유지하기 위해 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에 대한 의지 ·야심 ·용기가 있어야 하며, 필 요하면 불성실 ·몰인정 ·잔인해도 무방하고, 종교까지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후세에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게 된 권모술수주의(權謀術 數主義)를 주장하였다 하여 비난의 대상 및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었 다. 그러나 당시 분열과 외국의 간섭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 진 이탈리아를 강력한 군주에 의하여 구하고자 한 저자의 애국심의 발 로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근대 정치학을 개척한 획기적 문헌으로 높이 평가된다. 참조항목 · 마키아벨리 · 마키아벨리즘 · 보르지아 · 정치학 ******* [군주론]은 이론서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상적인 군주의 한 모델로 체 사레 보르지아를 삼았습니다. ^^ 제가 무척 좋아하는 인물이지요. 절대 왕정의 군주들이 이 책을 많이 보고 배웠다고(--;) 하더군요.. [新군주론]의 모델도 체사레 보르지아입니다. 그뿐 아니라 동서양의 맘 에 드는 군주들을 혼합해서 만든 게 [新군주론]이지요. 제 소설 제목에 왜 '新'이 붙느냐고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별 뜻 없습니다. [군주론]이라는 제목의 책이 이미 있기 때문에, 괜한 시비(--; 몇백년전의 마키아벨리군이 표절시비를 붙일 것 같지는 않지 만..)거리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제목을 [군주론]으로 하면, 마키아벨 리군이 묘지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 제목에 대한 설명이 되었을까요? ^^ 카스트로의 모델이 궁금하시다면, [군주론]보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군주론]은 저도 읽기는 했지만, 재미있다는 말 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이론서기 때문에.. --; MERRY X-MAS!! ^^ -어른들 다 놀러나간 집(--;)의 집 지키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1 - 관련자료:없음 [3269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5 20:48 조회:115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1 - ================================================================== 국가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그저 후계자가 대관식을 치르는 것만 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 좋건 싫건 그 밑의 정신들까지도 최고 권력자의 정책수행에 맞도록 바뀌어야 했 다. 최고 권력자의 뜻에 맞춘 '정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후계자의 최 측근부터 소원하거나 적대적이었던 정신들과 귀족들까지 나름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당연했다. 그것도 예정되었던 왕세자가 아닌 다른 왕자가 국왕이 되는 뜻밖의 상황변화까지 맞물려서 대관식까지의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었다. 대내외적인 대관식 준비는 물 론이거니와 미루어두었던 암살자들의 처리문제, 그리고 그 주모자의 처분에 대한 것도 다른 어느 시기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게 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며칠이나 질질 끌던 그들의 판결에 대해, 카스트로 는 장례식 직후 정신들을 모으고 왕세자 암살사건에 대한 마지막 회의 를 열었다. 회의 시작 때, 그 안건에 대한 '마지막 회의'라고 못박아버 리자 정신들의 주장은 더욱 치열해졌다. "……관대히 처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대죄인을 그리 허술히 처벌하셨다가는, 왕실의 지엄한 권위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 기회에 확실히 본보기로서 처리하지 않으면, 왕실을 쉬이 보고 언 제 또다시 그런 불순한 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군부대신 유타르경의 열변이었다. 카스트로는 상석에 앉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일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니, 당연히 그리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정에 밀려 맑은 성정을 흐리지 마십시오, 폐하. 이미 미다와 결탁 해 왕실의 전복을 꿈꾸던 자입니다. 다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 다. 밝게 살펴주십시오." 이번에는 외부대신 헤르트경이었다. 카스트로는 잠시 헤르트경을 쳐 다보다가 넓은 회의실을 휘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미카에르 대공 은 칼리에르 3세의 유언을 들어서인지, 더 이상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입을 다물고 자신을 쳐다 보든가, 아니면 강도 있는 처벌을 주장하고는 했다. 정권을 맡은 처음부터 이 렇게 정신들과 반대의견으로 맞서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문제에 대해 서는 양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길게 끌기 전에 여기에서 끊는 게 좋 을 것이다. "선왕의 유언이오." 밑도 끝도 없이 카스트로가 툭 내뱉은 말에 회의장안이 삽시간에 조 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음을 느끼며, 카스트로는 왼쪽에 앉 은 유타르경부터 테이블 끝까지 주욱 시선을 밀어붙였다. "지스카르 전하의 목숨만을 살려두라는, 선왕폐하의 유언이 계셨소. 재상께서도 들으셨으리라 생각하오." 시선을 미카에르 대공에게로 미끄러뜨리자, 대공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폐하."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신들을 쳐다보았다. "선왕폐하의 유언을 차마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소. 지스카르 전하의 목숨만은 유지시키는 한도 내에서, 적절한 처벌을 말씀해보시오." 알게 모르게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트로는 단호한 얼굴로 정신들의 시선을 맞받았다. 이미 확고한 의지가 서린 표정과 함께 강 렬하게 부각되는 권위와 위엄의 후광이 정신들의 반론을 막아냈다. "……정 그러시다면, 지스카르 전하만은 평생 폐궁에 유폐시키는 것 이 어떻습니까?" "폐궁……?" 왕궁의 북쪽, 왕의 숲에 숨어있는 조그만 궁이다. 처음에는 국왕과 애첩의 밀회장소로 만들어졌지만, 이후 처치 곤란한 고귀한 신분의 정 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과도 같이 되어버린 곳이다. 지금은 비록 아무 도 쓰는 사람이 없는 비어있는 궁이지만, 카스트로는 순간 그럴 듯 하 다고 여겼다. "그렇습니다. 지스카르 전하를 모시기에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사 료됩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문제를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이왕자비와 그 딸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이왕자비 전하는 지스카르 전하와 미다 사이의 중계역할을 하고 있 으니, 당연히 그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언제 또다시 미다와 결탁해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요. 물론 레 트 저하를 살해한 공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직한 유타르경의 발언이었다. 곧바로 외부대신 헤르트경이 되받았 다. "하지만 지스카르 전하도 살려주었는데, 왕자비 전하를 처형한다 하 시면 미다에서 항의해올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왕세자를 암살한 자를 살려두자는 말씀이오? 그깟 미다가 두려워 그러시오?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 추락되는 카르노 왕 실의 권위는 어찌하시겠소?" 유타르경과 헤르트경의 열띤 논쟁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다른 정신 들도 돌아보았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여기저기서 우물쭈물하더니,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 두 모녀는 처형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지스카르 전하를 살려둔 것만으로도 왕실의 권위가 흔들릴 지경인데, 두 모녀마저 살려두시면 앞으로 어떤 사람이 왕실을 두렵게 여기겠습니까?" "일국의 왕녀입니다. 그런 이왕자비 전하를 처형한다면, 다른 나라에 서도 곱지 않게 볼 게 뻔합니다." "레이얄도 이왕자비 전하의 처형을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왕세자와 왕세자비 전하를 죽이도록 사주한 이왕자비를 처형하지 않으 면, 레이얄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역시 같은 의견들이었다. 처형의 찬성과 반대로. 카스트로는 미노의 딸에게까지 인정을 베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하시오!" 분분히 떠들어대던 정신들이 카스트로의 한마디에 수그러든다. 카스 트로는 주위가 진정되길 기다려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유타르경의 말대로, 그들 모녀에게까지 인정을 베풀 수는 없소. 미 다에서 항의가 오기 전에, 미다의 왕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수급을 미다 왕실에 보내도록 하시오. 그들이 항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왕 세자 전하의 암살에 대한 항의를 할 것이오. 공식적으로도 그리 발표 할 것이니, 다른 나라에서도 문제 될 것은 없을 거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레이니트경?" 왕세자의 비서관이었던 레이니트경은 현재 임시비서관으로서 카스트 로를 보좌하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옆자리에 서 있는 레이니트경은 양 피지를 손에 든 채로 정신들에게 말했다. "이번 안건은 왕세자 전하의 암살 당시, 근무지 이탈과 직무유기를 저지른 친위대 부대장 메스메르 폰 키노와 근위대장 테르니크 폰 레이 노에 대한 처벌건입니다." 정신들의 시선이 흘끗 미카에르 대공을 살핀다. 카스트로는 냉랭한 표정으로 회의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에게 어떤 처벌을 해야 할지 의견들을 말씀해보시오." 미카에르 대공은 안면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회의실 테이블 한복판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과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의 눈길 이 바쁘다. 카스트로는 그 눈치를 알아채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물론 국가의 기강을 잡기 위해 이왕자비와 조카까지 처형시키는 마 당에 혈연 따위에 연연할 생각은 없소. 선왕폐하의 유언은 어디까지나 지스카르 전하께만 해당되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든 납득할 만한 결정 을 내리도록 할 것이오. 경들도 그리 알고 말씀들 하시오." 미카에르 대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차피 희망적인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할 줄은 몰랐다. 카 스트로의 그 한마디로 정신들의 의견은 과격하게까지 치달아갔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냉기가 치올라오는 차갑고 빈틈없는 돌바닥과 돌 벽, 그리고 간신히 사람의 손 하나가 왕래할 수 있을 만한 촘촘한 철 창. 그 속에 다섯 명의 사내가 전신에 상처를 뒤집어쓰고 벽에 기대거 나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부단장 레이크를 비롯한 미다 왕실 기사단의 단원 세 명과 용병 한 명인 카르노 왕세자 암살범들이었다. 레이크는 돌벽에 기대앉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끈질기게 고문하고 추궁해대더니, 어이없 게 시에나 왕녀의 시녀장 안나가 모두 자백하는 바람에 모든 게 끝나 버렸다. 레이크로서는 이미 죽어버린 제피르경을 비롯해 시녀장 안나 까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너무 쉽게 자백해버린 게 아 닌가 싶었다. 에밀로부터 왕세자비궁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 느꼈 던 뭔가 '당했다'는 불쾌한 느낌이 시녀장 안나를 거치면서 점점 확신 으로 굳어진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그래야 한다고 우 겼던 것은 시녀장 안나였다. 그런데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지켜 야 할 비밀을 그렇게 쉽게 나불대다니! 아무리 여자라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당분간이야 몸은 편해졌지만 남은 것은 처형당하는 것밖에 없 었다. 타국의 왕족을 죽이고 현장에서 잡히고서도 살아남기를 바란다 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잡혔을 당시부터 죽음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께름칙했다. 원치도 않게 이용만 당하고 처분 당하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모르겠나? 어리석군. 내가, 미다의 스파이와 진심으로 손잡 을 것 같나?' 자살하기 전에 제피르경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무얼 모르고, 뭐가 어리석다는 것인지. 진심이 아니면 왜 자신들과 손을 잡았는지. 레이크는 욱씬거리는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감'일 뿐,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대로 그냥 죽어야 되나?' 한심스러웠다. 임무에서 절반의 성공은 결국 실패였다. 그것을 지금 레이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야 되나?' 레이크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죽기 싫었다. 카르노 왕궁의 본궁은 새 주인을 맞기 위한 새단장으로 부산스러웠 다. 특히 국왕의 거실과 왕비의 사실 등의 개인적인 공간은 더욱 그러 할 수밖에 없었다. 시종장 하미르와 시녀장 다나는 왕실의 수석 시종 장과 수석 시녀장으로 승격되어서 본궁을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의 취 향에 맞춰나갔다. 궁내부의 최고 책임자인 궁내부 대신은 왕실의 살림 을 맡아볼 왕실 집사와 보충될 본궁의 궁내부원들을 선발하느라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카스트로를 가까이 모셨던 시종들과 시녀 들을 중심으로 선왕을 모시던 시종시녀들을 추리고, 궁내부의 새로운 인물들을 골라내어 새로이 궁내부의 체계를 잡는 것. 이미 왕세자를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가던 중이라, 단기간 내에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바꾼다는 것은 또 다른 고역이었다. 카스트로는 발 딛기도 힘든 국왕의 거실을 피해, 본궁의 아래층에 있는 접견실에서 한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감색머리와 감색눈의 차 가운 외모를 한 한족의 세리카 지가 알현을 요청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세리카님이 대관식을 주재하시겠다는 겁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카스트로는 의자에 몸을 묻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단정하고 냉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세리카를 건너다보았 다.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보려는 듯 흔들림 없이 곧장 파고드는 눈빛 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세리카가 비제 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대답했다. "카르노 국왕의 대관식은 역대로 전신전에서, 전신전의 최고 사제에 의해 주재되었습니다. 나라고 달리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호수처럼 담담한 목소리지만, 그 속에 깰 수 없는 단호함이 섞여있 다. 세리카는 이미 짐작했던 일이라 그리 동요되지 않은 목소리로 반 박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왕세자 전하께서 미리 약조하신 일입니다. 그 분 의 뒤를 이으신 분이 아니신가요, 폐하께서는?" 카스트로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돌아가신 왕세자 전하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십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였지만, 카스트로는 간단하게 세리카를 압도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왕세자 전하의 뒤를 잇는 게 아닙니다." "……!" 냉정한 세리카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갔다. 설명을 요구하는 투명한 감색 눈빛을 마주하며, 카스트로는 여유롭게 덧붙였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카르노의 국왕이라는 자리이지, 카르노의 왕 세자라는 지위가 아닙니다. 착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선왕폐하께서도 그 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일그러지는 대리석 조각을 보는 기분이란 묘한 쾌감을 동반한다. 카 스트로는 말하는 김에 전부터 미루어두었던 말들을 꺼내었다. "그리고 세리카님께서는 이만 테라로 돌아가 주십시오." "뭐……라고요?" 목에 걸린 듯한 목소리가 세리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급작스런 추 방령에 놀란 눈빛이, 카스트로에게는 흥미로웠다. 이 사람에게도 이런 표정이 가능한가 따위를 떠올리며 설명을 부연했다. "그 동안 선왕폐하의 고문관으로서 힘써주신 일은 감사하게 생각합 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세리카님보다는 선왕폐하의 목숨을 구해주 기도 하셨던 비제님께 더 신뢰가 갑니다. 같은 케테르님의 신관이라면, 카르노 왕실의 불상사에도 아무 도움이 안되시는 세리카님보다, 여러 모로 카르노 왕실에 호의를 보이는 비제님이 더 믿음이 가는 건 당연 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비제님은 대신관 제이리트님의 애제자시기도 하니까요." 주위를 얼릴 듯한 냉기가 세리카를 중심으로 뻗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에 동요될 카스트로가 아니었다. "세리카님께서 지켜주신 예배당은 비제님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비 제님께서 카르노 왕실에 보여주신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한시 바삐 예배당에 그분의 처소를 마련하고 싶은 게 제 심정입니다. 되도 록 빨리 예배당을 비워주십시오." 세리카는 이빨을 사려 물었다. 저절로 뿌드득 이가 갈릴 것 같은 것 을 참아내며, 반박할 말들을 찾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카르노에 한 명의 신관보다 두 명의 신관이 있는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포교에도 더욱 도움이 될 테고……." "비제님께 세리카님의 지가문과 비제님과는 악연이 있다고 들었습니 다. 굳이 사이 나쁘신 분들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악취미는 없습니다. 포교라면 이제까지 세리카님 혼자 하셨던 것처럼, 비제님 한 분만으로 로 충분합니다." 세리카의 안색이 욹으락붉으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카스트로는 승리 의 미소를 지었다. "대관식 전까지는 예배당을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참, 그리고 돌아가 시거든 제이리트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길. 테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 은 무척 유감스럽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리 고 테라에서 제이리트님이 보여주신 호의는 평생 기억하겠다고 말입니 다. 그럼 전 이만 바빠서. 떠나시기 전에 한 번 들러주십시오." 카스트로는 거리낌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뒤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제는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자니까. ==================================================================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즐겁게들 보내셨는지. ^^ 이제 연말이네요.. 쩌비.. 그다지 연말이 반갑지 않은 이유는.. --;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2 - 관련자료:없음 [3273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6 20:40 조회:115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2 - ================================================================== 경질된 근위대장 테르니크경 대신 근위대장직을 맡게 된 전 근위대 부대장 아로이드경은 수하 근위대원 수십 명과 함께 귀빈관으로 향하 고 있었다. 이왕자 지스카르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고, 그들은 지금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두 명씩 대열을 맞춰 절도 있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지나가던 궁내부원들과 귀족들은 복잡한 마 음으로 지켜보았다. 아로이드경은 십여 명의 근위대원들이 감시하고 있는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는 그곳에 있던 근위대원들의 인사를 받고 말했다. "문을 열어라. 국왕폐하의 명으로 지스카르 전하의 처벌을 시행하기 위해 왔다." 조용히, 불길한 느낌으로 문이 열린다. 문 사이로 드러난 거실에는 몇 명의 시종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로이드경은 그 안으로 성큼 들 어섰다. 그의 등장에, 거실에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경직된다. 이어, 시종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시종장의 파리한 안색으로 보아 이미 용건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로이드경은 명령서를 꺼내들며 말했다. "국왕폐하의 명으로 지스카르 전하의 처벌을 시행하러 왔소. 지스카 르 전하께서는 지금 곧 국왕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전하시오." 시종장은 창백해진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십시오." 시종장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거실과 연결된 문을 두드렸다.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종장은 그대로 문을 비죽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로이드경은 자신의 뒤로 도열한 근위대원들을 흘 깃 보고, 넓고 썰렁한 느낌의 거실을 바라보았다. 호화롭지만 생기가 없는 방이다. 그것은 요 며칠간 이곳을 쓰고 있는 사람의 분위기에 기 인한 것일 터였다. 방안으로 들어갔던 시종장과 그 안에 있을 지스카 르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아로이드경이 미간을 좁히고 수 색하라고 지시해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방문이 열리고 초췌 한 얼굴의 젊은 남자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젊은 여자가 나왔다. 아로이드경은 연민과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불운의 왕자를 바라보았 다. "……처벌이 결정되었다고 했나?" 기운 없는 목소리, 어떻게 보면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지스카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융단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지스카르 폰 카르노, 국왕폐하의 성지를 받듭니다." 지스카르의 조금 뒤쪽 옆으로 이왕자비 시에나가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로이드경은 둘둘 말린 양피지를 펴들 고 옥새가 찍힌 명령서를 읽어내려 갔다. "죄인 지스카르 폰 카르노는 카르노의 제 1 왕위계승자인 아베르노 폰 카르노와 그 일가를 시해하고, 적국 미다 왕국의 첩자를 끌어들여 국가를 전복하려 한 죄를 인정하여, 최고형인 참수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특별히 선왕 칼리에르 3세의 유지를 받들어 사형만 은 면하도록 하겠노라. 앞으로 일생동안 지스카르 폰 카르노를 폐궁에 유폐시키며, 카르노 왕실에서 영원토록 그 이름을 제한다. 카르노의 제 17대 국왕 카스트로 폰 카르노의 이름으로 명한다." "……신 지스카르……, 국왕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지스카르를 보며, 아로이 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지금 폐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알겠소." 무릎꿇은 자세에서 일어서던 지스카르는 현기증이 이는지 몸을 비틀 거렸다. 시종장이 받쳐주려고 다가왔지만 지스카르는 그 전에 몸을 바 로 세웠다. "전하……." 지스카르는 몸을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정이 든 방도 아 닌 임시거처일 뿐이다. 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 내인 시에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아내에게 다가갔 다. 평소 자신보다 강건하던 아내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지스카르…… 지스카르……." 지스카르는 그녀의 손을 잡고, 힘껏 끌어안았다. "무능한 남편이라서…… 미안하오." "흐으윽, 지스카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조안나는……." 지스카르는 머리를 저었다.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어떻게 할 방 도도 없었다. "지스카르……." 두 사람의 이별을 아로이드경은 오래 지켜보지 않았다. "어서 떠나야 합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지스카르는 다시 아내의 어깨를 다독였 다. "잘 풀릴 거요." 자신보다 강했던 아내가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스카르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을 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봅시다." "지스카르……." 울고있는 아내를 떼어내고 아로이드경에게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근위대원들이 지스카르를 둘러쌌다. "갑시다." 짧은 말로 지껄이고, 지스카르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 방을 나섰다. 제복을 입은 근위대원 사이의 지스카르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터덜 터덜 힘없이 걷는 지스카르와 기사다운 걸음걸이의 근위대원 뒤로, 지 스카르의 시종장이 뒤따랐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 로, 그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왕세자 아베르노가 섭정으로 있던 약 2년여의 기간동안, 왕세자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케테르교를 받아들였다. 대부 분이 아베르노의 호감을 사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는 해도, 그 중에 진 심으로 케테르를 믿는 사람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리나의 약혼자인 레이니트경이었다. 세리카는 전날 카스트로와의 접견을 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강제로 추방당하는 것 같은 굴욕감과 불쾌감이 세리카를 붙잡고 놔주 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리카는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한의 노력을 해보아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레이니트경이었다. 일왕녀 유리나와의 관계도 그렇거니와 단 이년 사이에 유리나와 헤르트경을 발판으로 그에 동조하는 무리를 만들어낸 저력도 세리카에게는 새록새 록 흥미가 끌렸다. 젊은 귀족들을 주축으로 한 그들 무리는 대부분 급 진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들을 움직인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듯도 싶었다. 세리카는 결국 아침 일찍 시종을 레이니트경에게 보 내 예배당에서 만날 것을 제의했다. "세리카님?" 세리카는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젊고 잘생긴 검보라색 머리의 남자에 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과연 그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되는 것 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니트경." 평소에는 잘 짓지 않는 미소를 띄우며, 세리카는 그를 반갑게 맞았 다. 어쩌면 이것이 세리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케테르님의 후예이신 한족의 세리카님께 케테르님의 미천한 종 레이니트 폰 사르노가 인사드립니다."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절하는 레이니트에게 일상적인 답례를 하고 슬쩍 말했다. "신실한 케테르님의 종인 그대에게 주신 케테르님의 축복이 있기를.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레이니트경?" 레이니트경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족이 자신에게 차를 청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 거절할 일이 아닌 것 이다. 레이니트경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세리카님." 세리카는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앞서서 어두운 예배당의 벽 가로 가 서 내실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나갔다. 조용한 발걸음소리가 뒤따라 들 려온다. 아직 케테르님과 한족의 영향이 모자란 땅이다. 비록 비제가 남는다고 하지만, 완벽한 한족도 아닌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이 땅에 세리카, 자신이 남아있어야 했다. 화창한 4월의 한낮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르노는 온통 연푸른색과 이른 봄꽃의 노랗고 붉은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산에서 불 어오는 봄바람은 맑은 풀내음이 섞인 약간은 쌀쌀한 것이었고, 높이 솟은 태양신 하야의 햇살은 고양이가 갸릉거릴 만큼 따사로웠다. 그렇 게나 아름다운 날, 아르노의 성안 남서쪽의 공터에는 전날 세워진 처 형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이 날은 왕세자를 시해한 미다 의 암살자들과 그들을 사주한 이왕자비 시에나, 그리고 그 딸인 조안 나의 처형일이었다. 마지막 아침식탁에는 시에나가 좋아하던 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맛의 스프와 향긋한 냄새를 피워내는 따스한 빵, 최고급 치 즈, 담백한 생선과 뒷맛이 깔끔한 테라의 차까지. 하지만 평소라면 기 분 좋게 먹었을 그 음식들은 '마지막 식사'라는 이유로 쓸개보다도 더 쓰게만 느껴졌다. 처형될 거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아베르노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반역'으로 몰아갈 때부터 혹시, 하면서도 애써 생각지 않 으려던 일들이다. 그대로 앉아 죽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지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뿐이다. 시에나는 아직도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악화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시녀장 안나 에게 그들을 만나 자신들을 탈출시켜 주기를 요구하라고 지시했을 뿐 이다. 시녀장 안나는 왜 자신들의 탈출을 왕세자 부부의 암살로 바꾸 어서 전달했을까. 시에나는 카스트로를 비롯한 재상과 법부대신이 있 는 자리에서 시녀장 안나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조안나가 레트를 죽였다는 것부터가 이 상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시켰다고 증언했을 때.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세뇌를 받아 그런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일까. 근위대장 아로이드경과 함께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시에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대답을 알 수 없는 의문, 뭔가 음모에 휘말린 듯한 음습 한 냄새,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가엾은 자신의 아이 조안나. 그리 고 아버지. 시에나는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숙 였다. 시에나는 아버지를 존경했었다. 카르노 왕실을 상대로 희망 없는 투 쟁을 계속해왔던 강인한 남자였다. 비록 레이얄과 테라의 힘을 빌어서 야 독립을 완성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미노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환호했다. 수백년간 삶의 터전을 전쟁터로 바쳐야했던 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처음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미노의 독립을 인정받은 그 '아르노 강화조 약' 중에 자신이 카르노의 이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줄 을. 결혼을 하기 위해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사신(死神)에게로 한 걸 음씩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는 지금 정말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끔찍스럽게 화창한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시에나는 죄수 용 마차를 타고 처형장으로 향했다. 왕궁을 벗어나 아르노 시내를 가 로지르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욕설과 함께 돌과 계란, 썩은 과일 따위를 던져왔다. 마차를 호위하는 근위대원들이 시민들에 게 호통쳤지만 별 소용도 없었고, 그 호통도 진심이 아니라는 게 느껴 진다. 파악---! "뒈져! 이 사악한 년!" "살인자! 죽어! 죽어---!" "죽어랏!" 어디선가 날아온 계란이 머리에 부딪혀 깨진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 리는 계란의 끈적한 느낌에 시에나는 입술을 악다물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지독한 악몽이다. 시에나는 그만 깨어나고 싶었다. 따악--! "죽어라! 죽어랏! 왕세자 전하를 죽이고 네가 살 것 같았냐?" "뒈져라! 이 마녀야!" 수천수백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숨막 히는 원념이 시에나를 질리게 했다. 돌에 맞았는지 뜨거운 피가 끈적 거리며 흘러내리는 얼굴로 시에나는 울지 않으려 기를 썼다. 저 무정 한 카르노인들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통 쾌한 기분 따위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감은 눈 사이로 흐 르는 눈물은 도저히 그녀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레이크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씁쓸하게 앞쪽의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 이상으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처형장으로 향하는 시 에나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련된 기사인 자신이 이런 더 러운 기분인데, 귀하게만 자란 왕녀는 어떤 기분일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레이크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목을 칠 도 끼를 대하면 그제서야 실감이 날 것인가 하고, 레이크는 허탈하게 웃 었다. 아무리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기사와 용병일지라도 삶에 대한 미련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함께 처형장으로 가는 몇몇은 보이지 않게 울며 울음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사신이 긴 낫을 들고 나타나 영혼을 거두어 가는 것일까?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으니 확인할 길은 조금 뒤에 죽어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확인을, 레이크는 그다지 해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야유와 원성 속에 도착한 처형장은 높다란 무대처럼 되어 있었다. 목을 자르기 위한 도끼를 들고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이 미 처형대 위로 올라가 있었다. 목을 대기 위한 받침대와 떨어진 목을 담을 바구니가 세 개씩이나 놓여 있었다. 레이크는 그제서야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죽는 건가?' 가슴속을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레이크는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더럽게 맑은 날이군.'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마차가 덜 컹거리며 멈추어 섰다. 그들은 근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마차에서 내 려와 처형대 뒤쪽으로 걸어갔다. ================================================================== 오후 늦게 전기가 나가서, 까딱하면 오늘 건너 뛸 뻔했네요. 어두운 데서 촛불켜고 동동거리며, 춰! 춰!를 연발했다는.. --; 전기가 나가면, 이 추운 겨울에 어케 살라는 건지.. (보일러까지 전기라서, 전기 나가면 얼어죽는 집.. --;) 쩝.. 다행히 넘 늦지 않게 고쳤네요.. ^^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따뜻한 방안에 앉아서 배실거리는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3 - 관련자료:없음 [3275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7 19:36 조회:101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3 - ================================================================== 용병 에밀과 다른 두 명의 기사가 근위대원들에게 밀려 처형대로 올 라갔다. 젊은 기사 기어이 왁!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레이크는 그런 그가 못마땅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덩치만 컸 지, 아직 죽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다. 사형대 위로 올라간 자들의 얼굴 위로 복면이 씌워지고 목부분이 둥 글게 파인 받침대에 개처럼 엎드려졌다. 세 명의 사형집행인이 거의 동시에 시퍼런 도끼날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 가 숨을 죽인다. 그 순간 밝은 햇살을 새하얗게 반사하는 도끼날이 우 아한 곡선을 그리며 목받침대 앞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목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시뻘건 피가 솟구친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간간이 비명과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 개의 머리가 깨끗이 잘린 채 바구니 위로 떨어져 내 렸다. 레이크는 눈을 감아버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와아아아---! 미노의 마녀를 죽여라!" "마녀를 죽여라!" "마녀를 죽여라아아!" 레이크는 자신의 양팔이 세게 붙잡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제 네 차례다." 나직한 울림의 목소리가 죽음을 통고한다. 레이크는 울어야 될지 웃 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가장 끔찍한 난제를 앞두 고, 레이크의 머릿속은 파탄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원치 않게 계단위로 떠밀려 올라가는 동안 레이크는 자신을 앞선 하얀 드레스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처음인, 그의 주군의 딸이다. 그가 구했어야하는 여인. 결국 자신의 불찰이었다. 좀더 신중하게 처리했어 야 할 일이었는데. 얼굴 위로 검은 복면이 씌워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푸른 하늘, 그 리고 자신과 시에나에게 죽으라고 외쳐대는 카르노인들, 그리고……,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우악스런 손놀림에 의해 받침대 위에 목을 대고 엎드렸다. 목에 와 닿는 차갑고 축축한, 피비린내 가득한 피의 느낌이 소름끼친다. 레이크 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바람소리가 났다. 피잉-! 하는 파공성을 동반 한 바람소리, 그리고 단말마의 비명! "끄아아아악!" "커억!" 사태를 채 알아채기도 전에 레이크는 누군가에게 팔을 잡혀 일으켜 졌다. 복면이 다시 위로 올라가고 손을 속박하던 밧줄이 검날에 끊어 져나간다. 놀라서 굳어있는 레이크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멍청하게 굳어있는 거야? 공주 전하를 모시고 마차에 올라!" 처형대 앞으로 밀쳐지자, 사람들 사이를 맹렬히 뚫고 오는 짐마차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머뭇거리는 순간 마차가 스쳐 지날 듯이 가까 이 지나치고, 레이크는 떠밀리듯 그 안으로 내팽개쳐졌다. "꺄아악!" 옆을 보니, 시에나도 자신과 마찬가지 처지였다. 짚더미 위에서 고개 를 들자, 멀어지는 처형대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 을 볼 수 있었다. "반트경……?"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카르노의 근위대원들을 묶어놓는 사이, 짐마 차는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뚫고 성의 남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처형장에서의 이변은 신속하게 왕궁으로 전해졌다. 레이니트경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느긋이 접견실에 마주앉아있던 카스트로는 때마침 함께 있던 비제와 함께 그 소식을 접했다. "……아무래도 미다의 기사단인 것 같습니다. 성문에 있던 경비병들 과 근위대원들은 사전에 제압되어 있었던 것 같고, 지금 그들은 미다 를 향해 도주중입니다. 근위대원 수십 명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습니 다." 카스트로는 소식을 전한 근위대원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 "그래서 지금 그따위 걸 보고라고 가져왔나!" 이를 갈아붙이며 내뱉는 고함소리에 근위대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카스트로가 내뿜고 있는 살기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카 스트로는 살벌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서 근위대원들을 전부 동원해 성안의 침입자들을 잡아라! 레이니트경! 카나이트경에게 앞서 간 근위대원들과 함께 도망자들을 잡아오라고 전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왕자비만은 죽여야 한다, 알 겠나?" "네, 전하!" "네, 전하!" 카스트로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 한마디 말도 못 붙여본 채로 두 사람은 접견실을 나와 부지런히 달렸다. 귀족이고 뭐고 체면을 차릴 여유가 없었다. 레이니트경은 막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나서 하려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세리카에게 미안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카스트로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고 일 어났다.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고 방안을 서성였다. 라에르 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이 새삼 걸리적거릴 이유 는 없었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시에나를 미노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 다는 생각과 감히 아르노까지 숨어 들어와 그들을 탈취해간 자들의 대 담함에 대한 분노, 그리고 또 하나……. '지스카르 전하께서는 역시 살아 계시는 것이 위험한 분입니다. 허락 해주십시오.' 음성이 아닌 뇌리로 파고드는 비제의 말이었다.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더욱 꽉 악물었다. 비제는 카스트로의 오라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위험은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부러 곁에 둘 필요는 더 욱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아베르노의 처참한 시체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도. 하지 만 만에 하나 미다에서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추궁해온다면……. 자신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미다 뿐만 아니라 레이얄 과 테라까지도 책임을 물어올 게 뻔하다. 맹세했었다. 절대 형과 아버지의 목숨값을 헛되이 쓰지는 않겠노라 고. 이제 와서 어이없게 사실이 밝혀져 모든 일이 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또 형을 죽인단 말인가! 혈육간의 칼부림은 이제 진저리가 쳐진다. 시에나만 죽는다면, 이런 불안 없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일단……기다려보지. 결과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라에르는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았지 만, 카스트로도 비제도 그 의문에 답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은빛 갑옷과 암녹색 망토를 걸친 오십여 명의 기사들이 아르노 남쪽 성문을 박차고 나섰다. 커다란 전투마에 위협적인 은빛 투구를 쓴 기 사단의 위용에, 길을 비켜서던 사람들은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두두두두두----! 미다의 기사들과 도주자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갔다고 한다. 잘 닦 인 성안의 대로를 지나 성밖으로 나선 기사들은 두 갈래길이 나타나자 잠시 멈추어섰다. 카나이트는 기사들의 반을 나누어 한쪽 길로 보내고, 그 자신은 나머지 반의 기사들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말을 몰았다. 천 둥 같은 말발굽소리가 밭에 나온 농노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뽀얀 흙먼지가 그들의 뒤에 구름처럼 일어난다. 카나이트는 두 시간을 달려서야 미다의 무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시에나가 있었다. 이미 카르노의 근위대원들과 대치 하고 있던 미다의 기사들은 낭패한 표정으로 카나이트들을 바라보았 다. 카나이트는 수하 기사들에게 시에나가 타고있는 말을 포위하도록 지시했다. 미다의 기사 일곱 명과 카르노의 기사 삼십여 명은 그렇게 압도적인 숫자 차이로 대치했다. "정신들 차려라! 너희들은 미다 최고의 기사다! 저깟 외양만 그럴듯 한 카르노 기사들의 숫자에 겁낼 것 없다!" 미다측 우두머리인 듯한 갈색머리의 사내가 말 위에서 소리쳤다. 투 구 안에서 카나이트는 비죽이 비웃었다. "그럼 어디 미다 최고의 기사들 솜씨를 볼까? 나는 카르노 왕실 기 사단장 카나이트 폰 루시노다. 그대 이름은?" 깔보는 것이 분명한 말투에 갈색머리의 사내는 사납게 눈을 치켜 떴 다. 적어도 카나이트의 지위에 겁먹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사내는 말고 삐를 잡아채어 카나이트에게 다가왔다. 마상에서 쓰기 편한 긴 검을 겨누는 그에게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미다 왕실 기사단장 반트 폰 리노. 어떤가? 그대와 나, 두 사람의 대결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것이. 내가 진다면 나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모두가 얌전히 아르노로 가주겠다. 대신 그대가 진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우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카나이트는 능숙하게 전투마를 움직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어줍잖은 충동질이군. 미안하지만 방향이 틀렸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나 개인의 명예보다도 폐하의 '명령'이니까. 물론 내가 질 일은 없지만, 만에 하나 내가 지더라도 너희들은 폐하의 앞으로 끌려가야 한다. 물론 시체라도 상관없다는 언질을 받았으니까 거리낌은 없어. 자, 그래도 나와 겨룰 생각이 있나?" 뿌드득. 일그러진 얼굴로 이빨을 갈아붙이던 반트는 검을 세우고 기 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검을 피해낸 카나이트는 빠르게 검을 뽑아내어 반트의 검을 내리쳤다. 채애앵! 격한 금속음 뒤에, 연속적인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여전히 침착 하고 냉정하게만 들리는 목소리도. "기사단원은 전원 이왕자비를 공격하라! 죽여도 좋다! 이왕자비를 죽이는 자에게 기사단 1대대를 맡기겠다!" "네, 카나이트경!" 잔뜩 기합이 들어간 카르노 왕실 기사단원들과는 달리 미다의 기사 단원들은 절망적으로 이를 갈아댔다. "이 비겁한 놈!" 카아앙! 분노로 가득 찬 일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며, 카나이트는 심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반트의 허점을 베어갔다. 완벽하지 않은 무장을 한 기 사였다. 하지만 완전무장한 채로도 속도에 지지 않을 자신이 카나이트 에게는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에 반트가 흠칫 놀라 물러서려는 사이, 카나이트의 검이 반트의 가슴을 갈라갔다. 다급하게 막아내는 반트의 검에는 힘이 부족했다. 카나이트는 어설프게 막은 반트의 검을 밀쳐내며, 다시 한번 확실하게 반트의 목을 쳐냈다. 갈색의 머리가 허공을 나른다. 시뻘건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목격하고, 카나이트는 말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에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옆으로는 미다의 기사 세 명이 남 아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얼마 버텨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도망……도망치십시오, 전하!" 미다 기사 두 명이 거의 몸으로 카르노 기사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시에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말고삐를 잡고 도망치기 시 작했다. 카나이트는 악전고투하는 세 명의 미다 기사를 돌아, 필사적으 로 달리는 시에나의 뒤를 따라갔다. "안돼에에에!" 자신들이 막지 못한 카나이트의 모습에 미다 기사가 비명을 질러댔 다. 카나이트는 한달음에 시에나의 곁으로 달려가 그 기세를 빌어 검 을 휘둘렀다. 검을 쥔 손에 살과 뼈가 잘리는 느낌이 전해진다. 길다란 머리카락들이 몸을 떠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음순간 피범벅이 된 검 붉은 머리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쓰러지는 몸을 매단 채 달리는 말까지 베어낸 카나이트는, 자신의 말을 세우고 훌쩍 뛰어내렸다. 몇 걸음 걸어가서 허리를 굽힌 그의 손에 시에나의 수급이 들려졌다. "카나이트경……." 어느새 남아있던 미다 기사들을 해치운 카르노 왕실 기사단원들과 근위대원들이 카나이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카나이트는 자신의 망토 를 떼어내 시에나의 수급을 감싸 묶고는 가까이 있던 기사에게 던져주 었다. "임무는 끝났다. 리세르경과 페이트경은 근위대원들과 함께 뒤처리 를 하고, 나머지는 왕궁으로 복귀한다." "네, 카나이트경!" 카나이트는 냉정하게 뒤돌아 말에 올랐다. 그런 카나이트를 보는 기 사들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인정사정 없이 여자를 벤 카나이트에 대한 혐오와 신속하고 정확한 일 처리에 대한 경외, 그 리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뒤섞여있었다. 그저 군부대신인 아버지만 믿고 기사단장이 되었다고 깔보던 기사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새 로운 기사단장이 도무지 인간 같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기사 다섯 명과 함께 도주하던 레이크는 카르노 왕실 기사단의 모습 을 보자마자, 함께 온 기사들에게 가까운 산 속으로 숨어들도록 지시 했다. "각자 살아남아라! 어차피 산 속에서는 저들도 한꺼번에 공격하지 못해!" "네, 레이크경!" 불안해하면서도 그들은 산 속으로 흩어졌다. 레이크는 한참을 달린 끝에 말까지 버리고 숨어들었다. 평지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아니면 꼼짝없이 포위되어 죽어야했을 테니까. 레이크는 일대일 대결이라면 자신 있었다. 물론 그 때의 그 백금발의 기사단장은 조금 자신 없었지 만, 설마 자신에게 그가 걸리랴 싶었다. 무작정 운에 맡기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인 레이크는 이번에도 근거 없 는 낙관을 유지했다. 카르노 기사들이 버린 말이 간대로만 따라가 준 다면 굳이 부딪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 뒤에 저만 치에서 말달리는 카르노 기사들로 확인되었다. 긴장과 안도가 교차된 다. 며칠동안인가의 고문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지친 몸이 힘 겨웠지만, 사지까지 갔다가 살아 나온 그에게는 그다지 심각하게 느껴 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지나간 방향과 직각인 방향으로 짚어나가며, 레 이크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신경을 곤두세웠다. ================================================================== 카스트로의 애칭에 대해 물어보신 분께. (본인 아이디가 아니라고 하셔서 답멜 못드렸습니다.) 카스트로의 애칭이라.. ^^ 따로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카스트로는 카스, 루시타니아는 루시라고 불리던데요.. 칼.. 그것도 나쁘지는 않구요. ^^ 편하신대로 부르시길..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4 - 관련자료:없음 [32788]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8 19:41 조회:98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4 - ================================================================== 카르노 왕궁의 대회의실에는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중 신들이 모인 회의실의 탁자 위에는 피범벅이 된 수급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빙 둘러싼 탁자들의 앞에 근위대장 아로이드경과 기사단장 카 나이트가 나란히 서 있었다. "미다의 기사단 부단장은 놓쳤다는 건가?" 의외로 흥분하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가 상석에서 흘러나왔다. 카나 이트는 담담한 안색으로, 화난 듯도 아닌 듯도 보이는 카스트로를 마 주보았다. "그렇습니다." 카스트로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카나이트를 노려보다가, 징글맞도록 태연한 카나이트에게 질려 피식 웃어버렸다. 과연 꼬장꼬장한 유타르 경의 아들다웠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에 들기도 했다. 아니, 무엇보다 너무 다행스러웠다. 이제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지스카르를 죽이지 않 아도 될 테니까. 어찌되었든 미다와 지스카르의 연결고리는 끊어져버 린 것이다. 시에나의 처형시간에 맞춰 있었던 조안나의 처형과 더불어 완벽하게 잘라 냈다. "미다의 기사단장과 부단장의 목숨을 바꾼 것으로 치고, 죄인의 수 급을 가져온 것은 엄연히 공이다. 그 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자네 뜻을 묻는 게 좋겠군. 영지를 원하나? 아니면 직위? 넘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선택권을 주지." 카나이트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카나이트는 고개를 돌려 카스트로의 옆에 있는 라에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대 답했다. "영지도 직위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만 허락해주십시오." "허락?" 뭐냐는 듯 바라보는 카스트로를 마주하며, 카나이트는 단호하게 말 했다. "폐하의 호위기사인 라에르경과 검을 나누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 시오." 카스트로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옆에 서 있는 라에르를 돌아보았다. 라에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카나이트를 쏘아보았다. 카스트로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카나이트에게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라에르경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다소 냉정해진 눈이었다. 하지만 카나이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닙니다. 다만 기사로서, 역량을 겨루어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카스트로는 슬쩍 라에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가, 라에르경? 도전에 응하겠나?" 라에르는 못마땅한 듯이 찌푸린 눈으로 한참을 있다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명이라면." 카스트로는 픽 웃었다. "좋겠지. 차기 친위대장과 기사단장의 대결이라……, 어느 쪽이든 그 리 심한 부상을 입히지 않는다고 맹세한다면, 허락하겠다. 나는 라에르 경도 카나이트경도 잃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라에르와 카나이트를 번갈아 보며, 카스트로는 웃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와 시간은 두 사람 편한 시간에 정해서 알려주도록. 멋진 대결, 기대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까지 숙이는 카나이트에게, 카스트로는 아니라는 듯 머리를 저 었다. "그만 나가보도록. 자, 이제 아로이드경의 보고를 들어볼까?" 다소 창백해지는 아로이드경을 뒤로하고 카나이트는 대회의장을 나 섰다. 아까부터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시선이 아직까지 뒤를 따라붙는 다. 맑았던 한낮의 날씨가 밤까지 이어진 쾌청한 밤이었다. 카르노 왕궁 의 북쪽, 왕의 숲에 숨어있는 푸른색의 작은 궁은 어둠 속으로 고요히 잠겨들고 있었다. 폐궁이라 불리는 그 곳의 3층에 있는 한 방만이 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왕실에 속한 궁답게 부족함 없이 꾸며진 방안에서 지스카르는 멍하니 넋을 빼고 앉아있었다. 며칠간 폐궁에서 의 생활로 느낀 점은 그저 궁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과 언제든 따라 붙는 감시의 시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스카르는 저녁 무렵, 이곳을 지 키는 근위대원들에게서 아내와 딸이 오늘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 다.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해준 근위대원의 대답에, 지스카르는 끝도 없는 수렁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수년간이나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였다. 살뜰 히 사랑해주지는 못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접한 순간, 지스카르는 슬프다기보다는 절망스러웠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왜 시에나는 그런 짓을 벌였을까. 왜 꼭 그래야 했을까. 자신도 모르 게 미다와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대담하게 아베르 노를 죽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가만히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능히 그럴 수 있다고도 여겨졌다. 어머니인 미에라 왕비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강인한 여자였다. 당당하면서도 품위 있는 현모양처가 미에라 왕비라면, 시에나는 현모 양처라기보다는 여장부였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서도 전투적으로 느 껴지는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스카르와 맞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기 목소리가 강한 여성이라서, 지스카르는 항상 자신이 눌리는 듯한 억압감을 느껴왔다. 그런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듯한 이 느낌은 대체 뭐라는 말인가. 슬픈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슬픈 것인지. 이렇게 자신의 알 맹이가 모두 사라져버린 듯 허전한 것이 슬픔인지. 희미한 촛불빛과 벽난로의 여린 불빛이 방안의 어둠과 뒤섞여 더욱 감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지스카르는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 아 있다가 문득,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놀라 고개를 든 눈에 비친 것은 하얀 신관복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땋아내린 한 족의 신관이었다. 불과 열 여섯이나 일곱 살로 보이는, 하지만 알고 있 기로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다는 테라의 신관 비제였다. "오랜만이군요, 지스카르 전하." 생긋 웃는 미소에 넋이 팔려있던 지스카르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대 답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는 비제님께서 어떻게……." "전하께 볼일이 있어서, 이런 시간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 다." 지스카르는 왠지 탐탁지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비제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전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자살해 주셔야겠습니다." "……! 뭐……라고요?"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마냥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를 흩뿌리며 비제는 다시 한번 말했다. "유서를 쓰고 자살해 주십시오." "무……무슨!" 지스카르는 몸을 일으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앉아있던 의자에 걸 려 비틀거리던 지스카르는 간신히 테이블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그 서슬에 양탄자위로 의자가 나뒹굴었다. 둔탁한 마찰음이 침실을 울린 다. "카르노를 위해 죽어주십시오. 당신보다는 카스트로 전하께서 카르 노의 국왕이 되시는 게 카르노를 위해 바람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전하께서 걸리적거리니까요." "무… 무슨 소립니까! 저는 이미 아무런 권리도……." 지스카르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하지만 비제는 그런 지스카르를 꿰뚫을 듯 응시하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카스트로 전하의 형입니다. 걸리적거리는 존재임에 는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불운은 카스트로 전하의 형이라는 것이니 까요." 지스카르의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힌다. 그런 지스카르를 여 지없이 몰아치는 비제는 소름끼치도록 천진스러웠다. "……싫소! 내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았다면 크게 착각……" "물론, 그런 착각씩이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의식도 못하고 사신 과 만나게 해드릴 수는 없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소, 소리 지를 거요. 밖에는 근위대원들이……." 킥, 하고 비제는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소리였다. 아주 재미 있는 장난감을 만난 듯 흥미로운 표정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에서는 들을 수도 볼 수 도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지 스카르 전하, 저를 보시겠습니까?" 비제는 당혹스럽게 흔들리는 연갈색의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한순간 그 연갈색의 눈이 꿈을 꾸듯 몽롱해진다. 힘없이 풀린 눈과 표 정, 그리고 몸. 비제는 부드럽게 지시했다. "나는 당신의 주인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 말에만 따릅니다. 자, 지스카르, 내가 누구입니까?" 초점이 없는 눈이 깜빡임도 없이 비제를 향하고 있었다. 인형 같은 표정의 지스카르는 멍하니 대답했다. "제 주인이십니다." 비제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다시 지시했다. "자, 저쪽 책상에 양피지와 필기도구가 있습니다. 가서 유서를 쓰십 시오. 당신은 미다에 도움을 요청해 아베르노 전하를 죽여 카르노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하고 아내와 딸이 오늘 처 형당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죽음이 너무 슬프고, 아베르노 전하에 대 한 죄책감에 시달려서 더 이상 살 의지가 없습니다. 왕실과 국민에 대 한 사죄를 당신의 유서 안에 적습니다." 비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스카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벽가에 붙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지스카르는 의자에 앉아 양피지를 꺼내고 깃 털펜을 들어 잉크를 흠뻑 묻힌 뒤 무언가를 써내려 갔다. 순순히 지시 에 따르는 지스카르의 모습을 보며, 비제는 생긋 미소지었다. 의외로 너무 쉬웠다. 지스카르가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도움이 된 듯 했다. 한참을 사각거리며 유서를 쓰던 지스카르는 양피지를 들 고 비제에게 와서 건네주었다. 비제는 유서를 받아들고 읽어내려 갔다. 결과는 역시 만족스럽다. 비제는 다시 지스카르를 향해 지시했다. "자아, 그럼 당신 허리에 호신용 단검이 있군요. 그것으로 당신의 심 장을 찌릅니다. 단번에. 그래야만 고통스럽지 않으니까요." 무표정한 지스카르는 거리낌없이 단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정확하게 심장에 꽂힌 검을 타 고 붉은 피가 비어져 나온다. 천천히 무광채의 흑갈색 눈동자가 감기 고, 쿵! 소리를 내며 지스카르의 몸뚱이가 뒤로 쓰러졌다. 비제는 유서 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죽어 가는 지스카르를 지켜보았다.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 곧 사신(死神)이 도착할 것이다. 비제는 사신의 냄새를 맡으며 공간이동의 주문을 읊었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 로 소리도 기척도 없이 사라지자, 그가 쳐놓았던 결계도 사라진다. 다 음날 아침, 벽난로의 불을 보러 들어왔던 지스카르의 시종장에 의해 지스카르의 죽음과 유서는 세상에 공개되었다. 한 장의 유서를 들고,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그가 서 있 는 곳은 국왕의 집무실이었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지스카르의 시 종장이었던 자와 근위대 부대장인 마스트경이었다. 줄줄이 늘어놓은,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이 가득한 유서를 든 카스트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지스카르가 정말 자살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아니, 그것 보다는 유서를 믿을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지스카르가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카스트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 까. 카스트로는 눈앞에 죄지은 듯이 고개 숙인 두 사람을 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따로 그대들을 추궁하지는 않겠다. 그만 물러가라." "네, 폐하." 두 사람이 물러가자, 카스트로는 지친 얼굴로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폐하?" 걱정스러운 눈치로 라에르가 불러온다. 카스트로는 쓰게 웃으며 머 리를 저었다. 아베르노와 칼리에르 3세가 죽을 때, 지스카르마저 죽으 면 자신은 너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괴롭고, 너무나 슬플 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지스카르의 죽음을 접하자, 생각 외로 눈 물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허탈했다. 어쩌면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 버렸는지도 모른다. "비제를…… 불러주게." "…네, 폐하." 라에르가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카스트로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래도 하나 남은 형제나마 살리려 아둥바둥하던 자신이 우스웠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왜 그토록 수많은 밤을 번뇌로 지새웠는지. 결국 이렇 게 간단하게 죽는 것을.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는 것을! 이 일을 저지른 것이 비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달리 할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은밀하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사람이, 달리 있을 리가 없으니까.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 모르겠지 만, 정말 소름끼치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만약 자신의 편으 로 끌어들이지 못했다면.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면. 카스트로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내저었다. 무의미한 가정이다. 그 런 가정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 그를 그렇게 겁 없이 맹세시 킨 자신이 이제서야 새삼 감탄스러울 정도다. 카스트로는 길게 숨을 뿜어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라면, 그 일 을 유용하게 쓸 수밖에 없다. 이제 카스트로, 그는 유일한 왕위계승자 였다. 절대부동의 위치를 굳힌 것이다. 죄책감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이제는 앞날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제부터 시작인, 카르노의 부흥을. ================================================================== 맥주...라.. T_T - 새 - 쩝.. 숫자에서 헤매는군요.. -뒤늦게 수정한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4 장 - 115 - 관련자료:없음 [3280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0-12-29 21:03 조회:837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5 - ================================================================== 테라력 698년 7월 1일 태양신 하야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한여름의 싱그러운 아침이었 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잎새들이 건강한 푸른색으로 물들은 그날의 아 침은 전신 로마의 축복을 받은 날이라서인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 다. 그날은 수년간이나 제 위상을 잃고 있던 카르노의 수호신인 전신 로 마의 신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전성기의 로 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그날은 카르노의 제 17대 국왕 카스트로 1세의 대관식이 있는 날이었다. 전신 로마의 신전이 있는 푸노 산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마차가 빽빽이 올라가고 있었다. 마차들이 지나가는 길 양옆으로는 수천을 헤 아릴 사람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르노의 평범 한 시민들과 아르노에 근거지를 둔 용병들, 먼 곳에서부터 대관식을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까지 뒤섞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 었다. 열 한 개의 녹색 기둥을 전면에 내세운 웅장한 신전의 안에는 이미 암녹색 망토의 기사단원들이 새로운 국왕이 지나갈 융단 옆을 지키고 있었다. 대관식이 치러질 제단실의 융단이 깔린 길옆과 정면에 놓인 대관식 의자의 주위로는 각국의 축하사절들과 카르노의 대귀족들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중소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상기된 얼굴들로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니트경을 비롯한 젊은 귀족 스무 명이 요구해왔던, 케테르의 신 관이 대관식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건의는 카스트로의 냉담한 반응과 비제의 해맑은 미소를 동반한 우회적인 거절로 철회되었다. 아직 케테 르의 신전이 완성되지 않았고, 수백 년 왕가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 는 것이 그 반박의 주된 이유였다. 어찌되었든 아직까지 카르노의 수 호신은 로마였고, 그 로마의 사제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카르노의 국왕 은 없다는 주장이 나이 지긋한 정신들에게 먹혀 들어간 결과였다. 그 건의 때문에 골수 '친테라파'로 낙인찍힌 레이니트경은 새로운 국왕의 심기를 거슬려서 이후 파멸의 길을 치닫게 되지만, 그것은 조금 더 나 중의 일이다. 널따란 제단실은 족히 7프리는 됨직한 높이와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꽉 차버린 전신전의 안은 수근거리 는 사람들의 음성으로 가득했다. 천장을 받치는 대리석의 기둥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고, 정면에는 둥글게 패여 들어간 공간 속에 전신 로 마의 웅장한 신상이 장검을 앞에 세우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제단실 의 양 벽에는 암녹색 바탕의 카르노 왕실 문장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길다랗게 늘여져 있었다. 로마신상의 앞에, 둥그렇게 쌓아올려진 열 한 개의 계단 위로 백금과 에메랄드의 권좌가 암녹색 융단 위에 놓여져 있었다. 오늘의 대관식을 주재할 전신 로마의 신관 루아가 시중들어줄 사제 나자르와 함께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몇 년 만에야 정식으로 입어보 는 암녹색의 예복과 높다란 모자가 경건함을 더한다. 루아는 열 한 개 의 계단을 올라가서 정면을 향해 섰다. 사람들의 술렁임을 들으며 루 아는 심호흡을 했다. 이런 긴장감도 처음인 듯 싶었다. 카스트로는 제단실 옆의 사제실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아 예복을 입고 있었다. 암녹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예복 위에 테두리를 흰 색 모피로 감싼, 바닥까지 끌리는 암녹색 벨벳의 망토를 걸친다.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보석들을 몸에 두른 카스트로는 담담한 눈으로 거울 속 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이제 식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시종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알겠다." 카스트로는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했다. 자신이 암송해야 할 맹세를 다시 한번 속으로 읊어본 뒤에, 카스트로는 천천히 눈을 뜨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죄책감 따위는 잊어야 했다. 그런 마음으로 카르노의 국왕 이 되는 맹세를 할 수는 없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눈빛이 자신감을 되찾아가자, 망토 끝을 들고 따라오는 시종장 하미르와 함께 사제실을 나섰다. 카스트로의 모습이 보이자, 사람들의 술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어졌 다. 융단 위에 선 카스트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융단과 그 끝에 놓인 권좌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대관식 음악을 들으며 똑바로 융단 위 를 걸어갔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희생한 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희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손에 넣은 왕좌는 앞으로 최강국 카르노를 위한 발판이 될 것 이다. 카스트로는 그것으로, 그들의 희생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고 믿 었다. 카스트로는 바닥에 끌리는 망토를 느끼며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 었다. 수많은 귀족들의 눈에 드러난 그들의 새로운 국왕 카스트로 1세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근엄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기상 을 가진 늠름한 젊은이였다. 결코 권위를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경쾌함 이 느껴지는 새 국왕의 걸음걸음은 뭇 사람들의 가슴을 기대로 부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자신감 있는 젊은 국왕은 이제부터 뭔가가 달라 질 것이라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젊은 국왕은 카르노의 수호신 로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신 관은 길고 긴 축사와 함께 카르노의 국왕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질문을 했다. 젊은 국왕은 시원스러운 음성으로 수호신 로마와 국민들 앞에서 선서했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국토를 지킬 것이며, 죽는 날까지 카르노의 명예와 부흥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나,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는 카르노의 국왕으로서 카르노 국민들을 보호할 것을 맹세합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의지가 스며들어간 맹세의 말이 끝나자, 전신 로마 의 신관은 벨벳의 쿠션 위에 놓인 황금의 왕관을 집어들었다. 사람들 의 숨소리가 더더욱 잦아든다. 루아는 카스트로의 검은머리 위에 황금 의 관을 씌워주었다. 카스트로는 머리에 묵직한 왕관이 씌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어, 전신 로마의 축복을 상징하는 보검 이 카스트로의 손에 넘겨지고, 왕홀이 또 다른 손에 쥐어졌다. "전신 로마의 상징인 보검과 카르노 국왕의 증표인 왕관과 왕홀로 서,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는 위대한 카르노의 제 17대 국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부디 성군이 되십시오." 전신의 신관이 큰 소리로 선언하자, 신전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아아--------!" "국왕폐하 만세에에에------!" "카스트로 폐하 만세에에에---! "카르노 만세에에에----!" 수천 명이 하나 되어 외치는 함성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몸을 일으켰 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작 하나 하나에 호흡을 맞추는 국민들을 느 끼며, 천천히 권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스트로는 권좌 앞에서 몸 을 돌려 환성을 지르는 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명실공히 카스트 로 자신의 국민들이었다. 카스트로는 천천히 보검을 빼들었다. 스릉-! 맑은 소리와 함께 너무나 매끄럽게 빠져 나온 은빛의 검을 치켜들며, 카스트로는 국민들과 각국의 사절들 앞에서 자신의 치세를 선포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부터, 전신 로마의 축복을 받은 대 카르노는 짐, 카스트로 1세에 의해 다스려짐을 선포한다." 와아아아아아아----------! "카스트로 1세 만세에에에---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 "카르노 만세에에에----!" 다시금 물결치는 환호성 속에 카스트로는 백금과 에메랄드의 권좌 위에 앉았다. 카스트로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 만만 하게 미소지었다. 이제야말로 카르노는 자신의 것이 된 것이다! 각국의 사절들과 귀족들의 축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전신의 신전 에서 벗어나 왕궁의 알현실에서까지 계속된 축사의 행렬은 곧 성대한 만찬으로 이어졌다. 바쁘고 정신없는 대관식의 일정에는 그 다음날 열 릴 마상시합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초에 기사단장 카나이트가 새로운 친위대장 라에르에게 대결을 신청한 것과 맞물려, 무능함이 여실하게 입증된 근위대와 현 군사체제에 대한 변혁의 움직임이기도 했다. 대대 적으로 며칠에 걸쳐 열릴 이 시합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기사들에게는 왕실 근위대와 왕실 기사단에로의 입단 기회를 줌과 동시에 푸짐한 포 상도 마련되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고 전국의 영지 에 그 소식을 전했었기 때문에, 그 모처럼의 기회를 얻으려는 기사들 과 용병들이 아르노 시내와 그 외곽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왕실의 재정까지 털어 준비한 이 마상시합은 앞으로 군사강국으로서 의 정치이념을 표방한 카스트로 1세의 첫 의지표현이었다. 테라와 미 다에서 제기한 '군의 확장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는, 연달아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왕궁과 아르노의 방위가 허술했던 점을 들 어 반박했다. 기사단과 근위대를 늘리는 것은 '자위'를 위한 방책이라 는 주장에 테라와 미다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앙! 마상시합의 마지막에 있었던 결승전 이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 던 기사단장 카나이트와 친위대장 라에르의 검술 대결은 느지막한 오 후에 시작되었다. 쩌어엉! 카나이트는 검을 쥔 손아귀가 마비될 듯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붉은 입술을 악물었다. 벌써 세시간 째 이어지는 대결에서 카나이트는 슬슬 지쳐 가는 자신을 느꼈다. 캉! 카앙! 그그극! 챙! 수백 번 검을 맞대었지만 카나이트는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역시 신동은 신동, 천재는 천재인 것이다. 카나이트는 그런 패배감에 어린 자포자기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라, 더욱 입술을 악다물었다. 이대로 질 수 없었다. 카나이트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악착같이 따 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매번 여지없이 물리쳐지고 만다. 힘과 속도, 기술, 어느 것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괴물 같은 녀석!' 이를 갈아대는 카나이트였지만, 라에르라고 마음이 느긋한 것도 아 니었다. 되도록 힘을 줄여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승패를 내지 못했다는 데서 상당히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하군. 내가 수련을 너무 게을리 한 건가?' 입맛이 썼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이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카스 트로의 호위로 임명되고 나서 거의 개인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라에르 는 수련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카앙! 캉! 두 사람 모두 입에서 단내가 나고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어 느 쪽도 끝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합장 주위로 빽빽이 모여 든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아직까지 그대로 서서 두 사람을 응원해 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그렇게 지쳐가고만 했을 때,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시합은 끝이 났다. 아니 끝이라기보다 중단되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멈춰라!" 위엄 있고 늠름한 목소리는 새 국왕 카스트로의 것이었다. 거친 숨 을 내쉬며 검을 내린 두 사람은 관전석에 앉아있던 카스트로를 돌아보 았다. "아무리해도 승패가 갈리지 않을 것 같군. 그러니 짐이 판결을 내리 겠다." 카나이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리고 흘낏 옆에 서 있는 라 에르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와 라에르가 둘도 없는 친구라는 것은 왕 궁에 몸을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카스트로가 의도적으로 친구의 편을 든다면……. "두 사람의 대결은 무승부로 한다. 각기 한 단체의 장이니 만큼 최 고의 실력들을 갖추었다고 본다. 모두 수고했다. 카나이트경, 그대의 검술실력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며, 멋진 대결을 보여준 데 대한 보 답으로 오늘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 라에르경,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나?" 라에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순종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카나이트는 편협된 판결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땀내 가득한, 건강한 미소는 평소의 단아한 카나이트의 미모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매혹적이다. 카스트로는 두 사람의 대답에 만족하며 의 자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그대들이 카르노의 기둥이 되어주길 바란다. 라이벌이라 생 각해 소원해지지 말고 가깝게 지내도록 하라." "네, 폐하!" "네, 폐하!" 라에르는 먼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나이트에게 손을 내밀었 다.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심인 말이었다. 자신의 검술에 만족하려던 자신의 나태를 일깨운 시합이며 상대였기에, 라에르는 카나이트에게 묘한 호감을 보였다. 카 나이트는 싱그러운 미소를 흩뿌리며 라에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기 리라는 호승심은 무너졌지만, 적어도 무승부를 낸 것만으로도 만족했 다. 더 이상 자신을 아버지의 후광으로 기사단장이 된 얼빠진 놈으로 취급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무례했던 대결요청에 응해주어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손이 강하게 얽혔다. 카스트로는 기분 좋게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 [신군주론] 4 장 끝났습니다. [신군주론]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구요. ^^ 새가 게을러서 답멜 못드린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꾸벅. 5장 준비와 휴식을 겸해서 일주일이나 열흘쯤 쉬겠습니다. ^^ 새해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인사드려야겠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새해에는 기쁜 일만 가득하시길. HAPPY NEW YEAR! - 올해 마지막 인사드리는 새였음당. ^^ - 제 목 : [新군주론] 제 5 장 - 116 -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6 - ================================================================== 제 5 장 결혼정략에 대하여 어둡고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이 그려져 있 다. 두 겹의 둥근 테두리를 가진 마법진의 외곽에는 조그만 은접시에 받쳐진 촛불들이 노란 불꽃을 내며 어둠을 몰아낸다. 마법진의 정 중앙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차분하게 다리를 접고 앉은 그 사람은 열 여섯이나 일곱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과 여리한 몸매의 소년이었다. 엇갈리게 접고 앉은 두 다리 위에 두 손을 내려놓 고,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 두 눈을 내리 감은 그는 경건한 표정으로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바람 한 점 없지만 바닥까지 드리워진 길고 긴 감색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송글송글 맺히는 이마의 땀방울이 조각 같은 얼굴선 을 따라 또르륵 굴러 내린다.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는 붉은 입술 사이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마법진 밖에는 금발머리의 화사한 미남이 진중한 표정으로 마법진 안의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색의 수려한 눈망울을 가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의 이름은 벨리알. 그리고 마법진 안에서 주문을 외우는 감색머리의 남자는 비제 류. 비제는 지금 21일째 이 예배당 안에 틀어 박힌 채, 육체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가시광선밖에 있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빛이 마 법진과 그 안에 있는 비제의 몸을 치열하게 감싸 돌고 있다. 벨리알은 마법진의 밖에 결계를 두르고, 21일간을 꼬박 이 자리에 앉아서 의식 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소 힘에 벅차하는 비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며, 벨리알은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전 차원에 걸쳐 가 장 순수한 것만을 추려서 만들어놓은 듯한 천진스럽고 해맑은 모습의,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존재. 저 주신의 혈통을 상징 하는 칙칙한 감색 머리를 눈부신 빛의 플라티나 블론드로 바꾼다 면……. 벨리알은 단아한 아미를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의식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와 있는 비제에게 시 선을 두며, 벨리알은 조심스레 결계의 강도를 높였다. 의식이 성공한다 면, 과연 어느 정도의 프라나를 방출할지 모른다. 태초의 가장 축복 받 은 신의 피조물이었던 루시퍼와 주신의 혈통을 지닌 한족의 결합이다. 봉인되기 전, 각성 이전의 상태에서도 한족의 능력치를 훨씬 뛰어넘는 프라나의 양을 가졌던 비제다. 봉인을 풀고, 각성을 한다면, 드디어 저 냉혹한 주인 루시퍼의 실험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알 수 있다. 벨리 알은 비제가 봉인해제는 물론 각성까지 단숨에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실험이 ……하기를, 두 갈래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 다. 뜨겁다. 비제는 전신을 휘젓는 열기로 힘들어지는 몸을 간신히 지탱 하며 주문을 외웠다. 몸 안 곳곳을 막고 있던 봉인들이 하나 둘 고통 과 함께 풀려가고 있었다. 한족의 우두머리 여섯 명이 힘을 모아 해놓 은 봉인은 종류만도 두 가지로, 프라나의 봉인과 프라나를 관리하는 일곱 차크라를 봉인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일곱 차크라의 봉인 중 기억에 관련된 것은 벨리알의 도움으로 풀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단 시간에 할 수 없는 것이라 지금까지 미루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푸는 것은 나머지 차크라의 봉인이었다. 21일간, 비제는 목욕재개를 하고 이 의식에만 매달려있었다. 보통사 람이라면 진작에 지쳐 떨어져 나갔을 일이지만, 비제는 필사적이었다. 차라리 기억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이미 모든 기억을 되찾은 상태에 서 예전과 다른 몸 상태를 감당하기는 꽤나 벅찬 것이었다. 게다가 한 순간도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과 목전에 그녀의 원수를 두고 봐야만 하는 고통은 근 10년간이나 그의 영혼을 좀먹고 있었다. '카르미나…….' 가장 가까운 혈육에게조차 한 올의 정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에게 아 무조건 없이 다가와 따스하게 감싸주었던 그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보물이었다. 사랑했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녀를 죽였던 자들을 모조 리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십 년 간 오로지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왔을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그것 때 문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10년 전의 그날을 비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잘 난 한족들 특유의 기가 막힌 배타성으로 거침없이 그녀를 죽여버린 그 날의 그 참담한 광경을. 자신을 완전한 한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주제에, 마치 더러운 오물덩이를 보듯 보았던 주제에, 한족들은 자신이 한족이라는 이유로 인간여자와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름조차 희미해진 한족의 소녀를 주축으로 한 일단의 한족 소년들은 지 독한 우월감과 아집과 배타성으로 가득 차서 '타락한 마녀' 카르미나를 '처형'했다. 비제가 그녀를 찾아낸 것은 이미 사신이 지나간 뒤였다. 차가운 몸 을 하고서도 심장에서 피를 내뿜는 모습이 비제가 본 연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피! 선명한 붉은 색의 피가, 그녀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그 시뻘건 피가 그의 이성을 깨부수고, 두근 두근 온몸을 두들겨 댔었다. 빠르게 전신을 도는 피는 지류가 큰 강으로 합쳐지듯 한 가닥 한 가닥 파괴의 욕구와 결합해서 모여들었다. 죽인다. 죽인다. 죽여버린다! 죽 여버리겠어! 푸르른 초록색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세상이 온통 빨갛 게 변했다. 전신을 미친 듯이 휘돌던 프라나가 한순간에 파괴적인 형 태로 폭발해버렸다. 눈앞에서 비웃음을 가득 띄우던 한족의 아이 하나 가 표정을 바꾸기도 전에 먼지로 바뀌었다. 다급하게 도망치던 다른 한족 소년의 모습, 그들을 뒤쫓던 자신, 그리고……, 그리고…… 갑자 기 닥쳐든 암흑. 다시 깨어났을 때, 비제는 여섯 명의 한족 우두머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온몸을 조이는 듯한 고통에 비제는 제대로 반항할 수도 없이 봉인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백치가 되어 테라의 신전에서 제이리트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라는 허울좋은 이름이 자신을 더욱 쉽게 감시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은, 이후 벨리알을 만나 기억을 되찾은 뒤의 일이 었다. 점점 더 기의 흐름이 빨라지고 있었다. 비제는 점차 주문을 잊고 무 아지경에 들어갔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다. 비제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꾹 베어 물고 버텼다. 이제 막바지 다. 점차 속도를 올리던 빛의 현란함이 비제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벨리알은 그것을 보며 자신의 앞에 결계를 한 겹 더 강화했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비제의 몸을 가리던 빛무리가 완벽하게 비제 를 감싸안은 순간, 폭발하듯 빛줄기가 전방향으로 폭사되어 나갔다. 벨 리알은 이중 결계의 사이에서 천천히 사그러드는 빛줄기와 천천히 쓰 러지는 비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벨리알은 손상된 안쪽 결계를 깨 뜨려버리고 달려가 쓰러져버린 비제를 안아들었다.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감색의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바닥으로 흘러내 린다. 길다란 속눈썹을 드리운 비제의 얼굴은 열 아홉 살이나 스무 살 쯤으로 조금 성숙되어 있었다. 여리하기만 하던 소년의 육체도 조금은 청년다운 늠름함을 더하고 있었다. 적어도 육체에 걸린 차크라의 봉인 은 풀려버린 것 같았다. "한꺼번에 풀기는 무리였던가?" 벨리알은 아쉬움의 한숨을 쉬고, 짧게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다 음순간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어두운 예배당에는 이미 마법진의 흔적 도, 두 존재의 흔적도 없었다. 금욕적인 신관의 침대에 비제를 눕히고, 벨리알은 땀이 가득한 비제 의 이마를 쓸었다. 더욱 루시퍼를 닮아간 그 모습이 벨리알의 시야와 가슴을 혼란하게 한다. "이것도 좋겠지. ……조금 더 여유를 두고 당신을 지켜보는 것도." 벨리알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비제의 붉은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수고했어요, 나의 비제님." 비제는 새근새근 고운 숨소리를 내며 평온한 잠 속에 빠져있었다. 카르노가 새 국왕을 맞이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는 제각 기 흩어지고 어수선했던 정국 초의 불안이 겉으로나마 안정세에 들어 갔다. 대관식 이후 발표되었던 새 정부에는 기존의 정신들과 함께 정 치권을 떠나 낙향했던 옛 신료들, 그리고 새롭게 뽑힌 무관들로 적절 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직까지 명실공히 '카스트로 정부'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것에 근접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이 과정에서 떨구어져 나간 정신들의 불만이 점차 하나 둘 뭉쳐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카르노의 중심부, 카르노 왕궁의 본궁에서는 한참 열띤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정전의 대회의장에는 수십 명의 정신들과 회의를 주재하는 국왕 카스트로 1세가 모두 한가지 문제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급작스럽게 증원한 기사단에서 군살을 빼는 것 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재무대신 노르경은 험악해진 카스트로의 눈초리에 시르죽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아니나다를까, 곧바로 카스 트로의 싸늘한 꾸중이 그 뒤를 따랐다. "고작 몇 실프의 돈을 구하지 못해서, 간신히 이만큼 뽑아놓은 인재 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라도 하라는 거요? 아베르노 전하의 참 사가 있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들 기사단에 군살 타령이오? 돈 없 으니 허술한 수도 방위력, 국방력으로 만족하고 살라 그거요, 지금, 노 르경?" 신랄하게까지 들리는 카스트로의 진노를 받으며, 노르경은 전신에 쫙 흐르는 소름과 식은땀을 느꼈다. "시, 신이 실언을 했습니다, 폐하. 다른 방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벌써 이 문제만으로 회의를 여는 게 몇 번째요? 고작해야 고식적인 임시방편만 해결책이라고 내놓으니까 계속 되풀이되는 것 아닌가!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시오!" 카스트로가 국왕이 되고 나서 가장 고심하는 문제가 바로 재정문제 였다. 아직 다 갚지도 못한 전쟁배상금과 수년동안 재정의 확충보다 재정을 소비하는데 열을 올린 선왕 칼리에르 3세와 섭정 왕세자 아베 르노의 잘못된 정책방향 때문에 빚은 갚기는커녕 더 늘어나 있는 상태 였다. 게다가 왕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를 틈타 고위 정신들 은 물론이고 하위 관료와 지방귀족들까지 부지런히 제 뱃속을 챙기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아직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전신 로마의 사제 와 자신이 일구어낸 비밀결사 '열 한 개의 검'으로부터 그들의 명단을 건네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은 딱히 명단이랄 것도 없었다. 차라리 귀족 명부라고 부르는 게 나았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는 미카에르 대공에서 부터 이름도 모르는 지방귀족까지 말이다. 카스트로는 거기까지 생각해내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명인 가를 본보기로 숙청해야 한다는 것은 비제와 루아의 귀뜸이 아니더라 도 그 자신이 필요를 느낀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었 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전 귀족이 들고일어나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 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루어 둘 수만도 없는 일. 요는 구실, 즉 명분이 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으로선 숙청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 야 했다. "다른 의견들은 없으시오?" 카스트로는 회의장 안의 인물들을 주욱 돌아보았다. 새로 재상이 된 전 법부대신 비네르경부터, 새 군부대신이 된 소르미노 자작 피오르경, 외부대신 헤르트경과 내부대신 유타르경. 그들이 지금 현 카르노를 움 직이는 핵심인사들이었다. 침묵이 흐르는 회의장의 분위기에 카스트로 는 나직이 혀를 차고, 화제를 돌렸다. "레이얄에 보내는 사신단은 결정이 되었소, 헤르트경?" 카스트로의 지목을 받은 헤르트경은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폐하. 레이얄의 내부대신 카르발 공작 세르세스경과 친분이 있 는 아페르경을 대표로, 레이얄의 사정에 밝은 프로트경을 부대표로 해 서 편성했습니다. 사신단을 호위할 기사들만 정해지면 언제든지 레이 얄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군부대신 피오르경을 돌아보았다. "파견될 기사들은 준비되었소, 피오르경?" 피오르경은 다른 대신들보다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사단장 카나이트경에게서 오전에 명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틀 뒤 출발시킵시다. 사신으로 결정된 사람들은 준비를 철저히 시키도록 하고. 이번에는 좋은 결과를 얻어오길 바라겠소." "네, 폐하." 카스트로는 고갯짓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회의를 마쳤다. "더 이상 하실 말씀들 없는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치 겠소.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언제까지나 지지부진하게 무능한 모습들 을 보이신다면, 짐은 가차없이 새로운 인재를 그대들의 자리에 끌어 앉힐 것이오. 마지막 기회요, 특히 재무대신, 노르경! 이번에도 그런 식이면 재무대신의 자리를 걸고 그 해결안을 공개로 붙일 거요. 명심 하시오. 그럼 내일 봅시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정신들의 인사를 받으며 회의장을 나선 카스 트로는 답답한지 목가의 옷들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일년이 지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는 재정문제가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와 있 었다. 아베르노가 추진하던 그 말도 안되던 '케테르 신전 건립건'은 모 두 중단하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시작되었던 공사였던지라 꽤나 돈이 빠져나간 뒤였다. 더구나 카스트로 치세 첫해의 농작물은 평년작에 못 지치는 흉작이어서 더욱 상황은 나빠져 있었다. 급한 대로 아베르노가 차관해 온 '신전 건립비'에서 남은 돈을 돌려 재정을 충당했지만, 그것으로는 일년치 예산에 못 미치고 있었다. 더군 다나 카스트로 1세 즉위 초부터 증강해온 기사단과 근위대를 유지하는 데 예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이런 와중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일단 미다에는 왕세자 아베르노의 살해를 이유를 들어 적국으로 선포, 못다한 전쟁배상금은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레이얄에는 벌써 두 차례의 사신을 보내어 배상금의 삭감과 지 불시기를 연장하도록 로비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이얄의 실권자라고 할 소렐 공작이 카르노의 그런 활동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랄까? 카스트로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러니 였다. 자신을 레이얄에 묶어두려고 추진했던 결혼이,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될 줄은 테라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반대 했을 소렐 공작이 이렇게 묵인해준 것만도 대단한 것이니까. 문득 결 혼식 날 보았던 소렐 공작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비몽사몽이었 던 그 순간에도 그의 얼굴을 보며 가슴 떨리도록 짜릿했던 통쾌함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다. '참, 그러고 보니…….' 카스트로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조금 뒤쪽에 따라오는 라에르가 시선을 느끼고 마주 쳐다본다. 카스트로는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자네 동생이 결혼한다던 게 오늘이었던가?" 머뭇거리던 라에르는 곧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나뿐인 동생인데,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지 않나?" 카스트로는 몇 번인가 만나본 시에르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이제 열 아홉 살이 된 시에르 폰 소르미노는 몇 달 전에 근위대 부대장이 되었 다. 그 동안 '신동'으로 소문난 라에르의 빛에 가려있었지만, 시에르 자 신의 실력도 누구에게 뒤질 정도는 아니었다. 훤칠한 청년이 된 시에 르는 벌써 몇 년째 사귄다던 아가씨와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묵묵히 걸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라에르와 시종장 하미르, 그리 고 국왕의 비서관으로 임명된 이제르경만이 따라 들어왔다. 파격적으로 국왕의 비서관이라는 지위를 움켜쥔 이제르경은 카스트 로의 정치학 스승이기도 했던 전 재상 라이스트 폰 사피르의 둘째아들 이었다. 카스트로가 대관식 전에 스승인 라이스트경에게 복귀를 청했 었지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거절하 고는 달랑 둘째아들만 올려보냈던 것이다. '쓸만한 놈이니 마음대로 부 려먹어도 된다'는 라이스트경 친필의 소개서와 함께. 이십대 중후반의 이제르경은 그 부친의 장담대로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어서, 카스트로 는 스승의 뜻대로 잘 '부려먹고' 있었다.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섭섭하지는 않나?" 집무실의 책상 뒤로 가서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앉자, 이제르경이 검토해 볼 서류들을 착착 앞에 펼쳐놓는다. 라에르는 가볍게 미소지으 며 대답했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별 수 없잖습니까? 폐하의 뒷모습만 쳐다보기 도 바쁜 터라서 말입니다." 어쩐 일인지, 라에르가 농담 삼아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거, 나보고 휴가 달라는 말인가?" 라에르는 그 비약적인 결론에 다시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별로 결혼생각이 없습니다. 휴가를 주신다 면 기쁘게 쉬기는 하겠습니다만." 카스트로는 기분 좋은 얼굴로 서류에 눈길을 두고 가볍게 대꾸했다. "언제 날을 잡아보도록 하지." 한참동안 서류를 읽어가던 카스트로는 서류를 들고 이제르경을 바라 보았다. "상인길드가 미다에 대한 통상금지를 완화해달라고?" "아무래도 레이얄과 미노 상인들의 입김이 큰 것 같습니다. 일 년째 미노와의 교역이 금지되면서 가장 빠른 길이 가로막혀버렸으니까요. 덕분에 먼길을 돌아가야 하는 레이얄 상인이나 아예 금지된 미노 상인 들보다 밀무역자들이 활약하는 것 같습니다. 손해가 클 겁니다." 재깍 돌아오는 이제르경의 대답이었다. 카스트로는 흐음, 하고, 서류 를 들여다보았다. "카르노 상인들도 같은 입장인가?" "대륙 서쪽과의 무역을 독점하던 몇몇 대상들은 이미 수년 전에 무 너졌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레이얄이나 미노와의 교역을 주로 레이얄의 상인들이 도맡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카르노인으로서는 자잘한 중소상 인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카스트로는 턱을 쓸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 재정문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나?" "전쟁 전 거둬들인 세금의 5%가량이 사라졌다고 보셔도 좋을 겁니 다." 명쾌하게 대답하는 이제르경을 흘낏 올려다보며, 카스트로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와 차가운 잿빛 눈동자의 이 냉철한 이 성을 가진 남자는 비서관이 천직인 것만 같았다. 어떤 것을 물어도 막 힘 없이 대답하는 그가 참 듬직하다. "그러면 다시 레이얄 상대의 대상을 키운다면? 그만큼의 재정이 회 복될까?" "단기계획으로는 힘들겠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하실 수 있다면 가능 합니다." "좋아. 해당 부처에 그 구체적인 계획안을 올리라 전하게. 그리고 이 건은, 기각하지." 카스트로는 깃털펜을 들어 '기각'이라는 글자를 써놓고는 다음 서류 를 집어들었다. "다음 것은……." "북쪽 국경에서 급전된 소식입니다. 라디프의 사신단이 카르노에 파 견되었다는군요." "라디프에서 사신이? 무슨 일이지?" 갸웃거리며 서류를 들여다보는 카스트로의 옆에서 이제르경은 알고 있는 대로 설명했다. "라디프 국왕의 혼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는 의아하다는 듯이 이제르경을 돌아보았다. "혼담?" ================================================================== [신군주론] 5장 시작합니다. ^^ 열흘간 여러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집 한번 나가면 기본이 2박 3일로 안들어왔습니다. 한번은 3박 4일로 친구집에서 빈둥거렸더니, 부모님께서 화내시더군요. --; 그래도 모처럼 친구와 친척과 놀아서 즐거웠다는.. ^^; 집에 붙어있지 않은 덕분에 메일 확인과 답멜도 늦어져서, 죄송했습니다. 메일주신분, 위로, 축하해 주신분, 쪽지 주신분, 추천, 감상 주신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꾸벅.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17 - 관련자료:없음 [3311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09 20:31 조회:144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7 - ================================================================== 상큼한 풀내음과 정원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한 봄꽃들의 향기가 커 다란 왕궁을 살포시 감싸안고 있었다. 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과 왕궁을 둘러싼 높다란 나무들이 암녹색의 궁을 더욱 푸르고 생기 있게 만들어간다. 바야흐로 연인들의 계절이라는 5월은 더욱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발랄한 목소리가 호기심으로 가득 채워져서 상대를 재촉한다. 체리 나는 철제 벤치에 앉아 상대에게 몸을 틀고서 눈을 반짝거리며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죠. '당신처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여자는 싫습니다. 정통 한족인 당신에게는 저보다 순수한족이 더 어울리겠지요. 지금 일은 못들은 일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화사한 금발과 청색의 맑은 눈을 가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는 목 소리까지 바꾸면서 누군가를 흉내냈다. 체리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남자, 벨리알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저기, 그럼……, 벨, ……이렇게 묻는 게 어떻게 들릴 지는 모르겠 지만, 저는 어때요? 저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여요?" 애처로운 눈으로 올려다보며 묻는 체리나를 흘깃 내려다보며, 벨리 알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밤색의 윤기 나는 머 리가 햇살아래 반짝이고, 금갈색의 귀여운 눈망울은 깜찍한 불안으로 가녀리게 흔들린다. 그만 금단의 첫사랑에 빠져버린 이 어린 아가씨는 벨리알이 이 궁에서 유일하게 상대해주는 여자였다. "글쎄요. 체리나 전하께서는 그리 교만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아직 어리시다고나 할까요?" 벨리알은 짐짓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여자라기보다는 깜 찍하고 감수성 풍부한 소녀였다. 가만히 종알종알대는 모습을 지켜보 고 있노라면, 귀염성 있는 강아지나 조그만 카나리아같은 느낌이 든다. 확실히 여자로서의 성숙한 요염함이나 색기 같은 게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상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벨리알은 속으로 웃어버렸다. 둘 다 비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라 이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아마 이 귀염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비제의 취향이 이런 순수한 소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역시 벨리알의 마음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요인일 것이다. "저도 벌써 열 여덟 살이에요. 어리다니요? 제 나이부터가 결혼적령 기라구요." 조그맣고 빨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을 흘기는 모습은 역시 어린애 라는 것을 재삼 확인시킨다. 벨리알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비제님께서는 올해 몇 살인지 아십니까?" "……저랑 비슷하지 않아요?" 여전히 생글생글거리며, 벨리알은 동작도 크게 머리를 저었다. 곱슬 곱슬한 금발머리가 우아하게 허공에서 춤을 춘다. "저렇게 보이셔도 비제님은 올해 스물 아홉 살이십니다. 체리나 전 하와는 정확히 11년이나 차이가 나는군요." "에엑! 말도 안돼요. 거짓말하는 거죠, 벨?" 질겁을 하는 체리나의 모습은 벨리알을 적잖이 즐겁게 했다. 벨리알 은 심술궂은 얼굴로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저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 못믿으시겠으면, 언제 비제님 께 직접 물어보시던가요." 금세 풀이 죽어서 어깨를 늘어뜨린 체리나의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 다. 어쩌면 비제에게는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렇게 티없이 맑게만 자란 아가씨라면 비제를 행복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뿐, 비제를 체리나에게 양 보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열 한 살이나 차이가 난다구요? ……열 한 살……." 망연히 중얼거리는 체리나를 보며, 벨리알은 왠지 괴롭혀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매우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던 것이다. "한족은 수명이 300년 가까이 됩니다. 비제님은 아직 어리신 편이지 요. 비제님의 외모는 거의 200년 가량을 지금의 모습에서 별다른 변화 를 겪지 않고 유지하실 겁니다." "……!" 놀란 듯 휘둥그래진 금갈색의 눈을 마주보며, 벨리알은 얄미운 미소 를 띄웠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7, 80년이지요. 게다가 외모는 40이 넘어가면 벌써 노인티가 나지요. 체리나 전하께서 만에 하나 비제님과 결혼하신 다면, 4, 50년 뒤에는 어떨까요? 체리나 전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계실 것이고, 비제님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래도 비제님의 마음을 얻고 싶으십니까? 할머니가 되어 손자뻘로 보이 는 비제님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금새 금갈색의 눈망울에 습기가 차오른다. 벨리알은 순수한 쾌락을 느끼며, 짐짓 체리나를 위로하는 척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체리나 전하께서는 어리시니까 앞 으로 1, 20년간은 비제님을 감당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체리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벨리알을 노려보았다. "벨은 너무 잔인해요! 어떻게 그런 말을……." "사실일 뿐입니다. 언제 제가 거짓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 까?" "흑……, 흑…, 벨, 미워요." 체리나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벨리알의 팔을 후려치고, 그대로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이왕녀궁으로 달려갔다. 멀찌감치 있던 시녀들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벨리알은 히죽 웃어 댔다. 아직 순수한 아이니 만큼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라이벌이라기에 는 너무나 어리고,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다. 자신이 비제에게 관심 받지 못하는 만큼이나, 저 꼬마도 비제의 관 심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유일하게 비제가 사랑했던 여자는 사 랑 받기보다 사랑해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여자였다. 저 꼬마는 절대로 사랑 받을 타입이었다. 벨리알은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쬐고 있다가, 문득 저만치 다 정하게 지나가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 카르노 왕궁에서 본 두 번째 미남인 사르노 백작 레이니트경과 일왕녀 유리나였다. 벨리알은 쩝, 아 쉬운 입맛을 다시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슬슬 비제를 만나러 가 봐야겠다. 꽃향기가 묻어나는 봄바람에 검보라색 머리가 살랑거린다. 유리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의 약혼자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적절한 교양과 예의를 갖춘 그녀의 약혼자는 지금 그녀에게 진지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 서요. 이제 폐하께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셨으니, 지금쯤 결혼 이 야기를 꺼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유리나의 나이 벌써 스물 두 살이다. 늦은 감마저 있는 나이였지만, 지금까지 결혼을 미룬 것은 전해에 있었던 불상사와 그 뒤를 이은 카 스트로의 대관식, 그리고 그 전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탓이었다. 이제 레이니트경은 미루어 두었던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군요. 아시잖아요, 레이니트경." 처녀답게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레이니트경은 살포시 볼을 붉히는 유리나를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오늘이라도 당장 폐하께 알현을 요청하겠습니다." 유리나는 수줍은 미소를 짓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나로서 도 일년이상을 기다려온 결혼이었다. 시기가 좋지 않아 말조차 꺼내보 지 못했었다. 레이니트경의 말대로,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 을 것 같았다. 레이니트경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용히 유리나의 곁에서 걸었다. 곁에서는 유리나가 즐겨 쓰는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오고, 날씨는 더없이 쾌청한 봄날이었다. 노란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 고,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유리나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물론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관식 이전부터 레이니트경의 출세는 벽에 부딪혔다. 젊음과 자신 에게 모인 인기를 바탕으로 호기 있게 밀어붙였던 대관식의 세리카 주 재에 대한 문제는 결국 카스트로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아베르노와 카스트로의 차이를 더 일찍 깨닫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다. 비제라는 한족을 신뢰하는 카스트로가 한족에 대해 우호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 던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인기를 과신했던 것 역시 잘못이었 다. 그 결과, 지금 레이니트경의 처지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되고 말았다. 국왕의 비서관이 될 기회도 잃어버리고, 괜한 짓을 한 덕 에 새 국왕의 미움만 받아버리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을 부 추겼던 세리카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레이니트경은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주신 케테르의 신관인 세리카를 미워해서 어 쩌자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제는 머나먼 테라땅으로 돌아간 사람을. 레 이니트경은 기분이 답답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한숨 한번에 금방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는 유리나는 결혼하면 분명 히 사랑스럽고 현명한 아내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하게 레이 니트경의 위치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레이니트경 은 그녀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하. 다만 폐하께서 쉽게 허락하실 지……." 유리나는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니트경을 위로했다. "폐하께서도 경의 진심을 알아주실 거예요. 기운 내세요." "고맙습니다, 전하." 달콤한 미소와 듣기 좋은 목소리.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옆에 있는 레이니트경의 손을 잡았다. 레이니트경의 얼굴에 잔잔한 놀람과 기쁨 이 스쳐간다. "기운내세요." 레이니트경은 그녀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입맞추었다. 유리 나는 그에게 있어 행운이며, 승리의 여신으로 느껴졌다. "사랑합니다, 유리나."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는 유리나에게 레이니트경은 한껏 멋진 미소 를 흩뿌렸다. 따스한 바람이 산길을 스친다. 백여 필의 말과 다섯 대의 마차가 숲 의 평화를 깨뜨리며 남으로, 남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행렬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차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은회색의 바탕에 은으로 테를 둘 러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마차보다 그 크기가 훨씬 큰 그 마차의 문에는 검은 방패 속에 눈이 붉은 백호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문장 이 새겨져있었다. 그것은 북국 라디프의 왕실을 상징하는 문장이었고, 그곳에 타고 있는 사람은 라디프 국왕 세아니크 2세의 사촌인 실레니 크 폰 리아프였다. 리아프 대공가의 장자인 실레니크는 올해 스물 아홉 살의 젊은이로, 좋은 혈통과 재능을 모두 겸비한 촉망받는 정치가였다. 왕가의 핏줄을 과시하듯 차가운 은발을 등까지 드리우고, 맑은 연하늘색 눈동자를 차 분하게 내리깐 모습이 이지적이다. 가만히 있으면 얼음처럼 차갑고 냉 정해 보여 범접하기 어렵게 느껴지지만, 의외로 다정다감한 성격의 남 자였다. 지금도 실레니크는 옛 친구와의 재회를 몇 번이고 상상해보며 가슴 설레어 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변했을까?' 자그마치 10년도 전에 헤어진 친구다. 깊은 상처를 숨기기 위해, 오 히려 잰 체하며 오만하게 콧대를 높이고 다니던 친구의 예쁘장한 얼굴 이 고스란히 기억난다. '잘 지내고 있는지…….' 테라와 카르노에 심어놓은 첩자로부터 그가 카르노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카르노로 갈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있는 라디프로 와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테라와 카르노 사이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만큼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굳이 카르노로 갔을까. 자신에게 온다면 누 구보다 그를 이해해주고, 누구보다 더 따스하게 감싸줄 수 있는데. '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무심한 녀석 같으니!' 속으로 나직이 투덜거리던 실레니크는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추는 것 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창문에 가려진 커튼을 열자, 라디프 왕실 기사단장 시라크경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마물입니다. 용병들이 처치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실레니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커튼을 쳤다. 대륙 어느 곳보다 마물이 많은 라디프에는 여행 도중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마물들 이라고 해도 백 명에 가까운 용병들과 기사들 앞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하고 소멸된다. 카르노 왕실과의 혼담을 추진하기 위해 라디프의 수 도 에디프를 떠나온 이래, 벌써 네 번째 겪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걱정 되기도 해서 마음을 졸였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아서 마물들을 전부 처치해버리는 용병들의 모습을 몇 번이고 보게 되니까 더 이상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뿐이다. 시끄러운 마물의 괴성과 비명, 그리고 병장기가 뭔가에 부딪히는 소 리와 기합성이 한동안 이어졌다. 반시간이나 지났을까? 마차 문을 두 드리는 소리에 커튼을 여니, 기사단장 시라크경이 와 있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가볍게 끄덕여 대답하고, 실레니크는 다시 흔들리는 마차 진동을 느 끼며 밖을 쳐다보았다. 건강하게 뻗은 침엽수 사이로 난 길가에 시퍼 런 피를 내뿜고 죽어버린 마물들의 사체가 널려있었다. 평화로운 남쪽 나라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구역질을 하고 고개를 돌릴 광경이지만, 라 디프인 치고 그런 모습을 한두 번이라도 보지 못한 자가 없기 때문에, 실레니크 역시 별다른 감정 없이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카르노의 왕녀께서는 기겁을 하시겠지만…….' 왕녀를 모시고 라디프로 되돌아갈 때는 되도록 창문을 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실레니크였다. ================================================================== 어제 쪽지, 메일 주신분 감사~ 아직 제 페이스를 찾지 못한 새가, 제대로 답장 못하고 있네요. 왜 이렇게 늘어지는지.. ^^ 눈이 많이 왔네요. 눈길 조심하시고, 낼부터 추워진다는데 감기 조심하시길.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새-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18 - 관련자료:없음 [3314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0 19:58 조회:1424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8 - ================================================================== 춤을 위한 음악이 넓은 홀을 흘러 다닌다. 친구의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한 레이니트경은 무료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무지 춤에도 여자에게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은, 며칠 동안 계속 거부된 국왕과의 알현신청 때문일 것이다. 애꿎은 술만 마셔대며 홀의 창가를 서성이던 레이니트경은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나?" 오늘 무도회를 연 페시노 백작의 동생 제라르경이었다. 비슷한 나이 에 권력의 주변에 있는 점, 그리고 함께 개종한 케테르교인이라는 점 등이 그들을 친밀하게 만들어주었다. 대관식 때의 건의를 올릴 때 뜻 을 같이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글쎄…, 그냥 기운 날 일이 별로 없군." "아아…… 혹시, 그 소문 때문에 이러나?" "그 소문?" 제라르경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위로의 빛을 띄우고, 레이니트경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나도 그 소문 듣기는 했지만, 뭐…… 그냥 소문일 테지. 기운 내게. 그런 뜬소문에 이렇게 쳐져있다니, 사람 참, 소심하기는." 레이니트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라르경을 바라보았다. 제라르 경은 레이니트경의 미묘한 표정에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뜬소문? 대체 무슨 소린가? 무슨 소문이 돌길래?" 순간 제라르경의 얼굴에 난처한, 혹은 실수했다는 듯한 뜨악한 표정 이 떠올랐다. 멈칫하며 어깨에서 손을 떼는 제라르경을 의심스러운 눈 으로 지켜보며, 레이니트경은 그를 추궁했다. "무슨 소린가? 말해 주게." "아……, 그게, 그걸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못들었다면 못들은 대로……." 슬그머니 뒤로 빼는 제라르경의 손목을 와락 움켜쥐며, 레이니트경 은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무슨 소문인가 물었네. 나와 관련된 소문 같은데, 뭔가?"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난처해하던 제라르경은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 고, 얼마 전부터 떠도는 소문을 입밖에 내었다. "라디프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문, 들었나?" "음……." 고개를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이는 레이니트경을 확인하고, 제라르경 은 말을 한참 고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사신이 무슨 목적으로 오는 지도 알고 있나?" "……글쎄……. 그게 소문과 관련이 있나?" 쯧쯧, 제라르경은 혀를 찼다. "정말 깜깜이군, 자네. 이번에 라디프에서 오는 사신은 혼담 때문에 온다더군. 라디프 왕실과 우리 카르노 왕실간의 혼담 말일세." "혼담?" 미간을 접으며, 혼담이 오갈 만한 왕족을 생각해가던 레이니트경은 뭔가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제라르경을 쳐다보았다. "그래, 표정을 보아하니, 짐작한 것 같군. 라디프에서 지목한 것이 바로 유리나 전하일세." 하얗게 질리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제라르경은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마, 뭔가 착오가 있겠지. 자네와 유리나 전하의 약혼소식까지는 라디프에서 몰랐던 걸 거야. 뭐, 큰 일이야 있겠나? 유리나 전하께서 쉽게 변심하실 분도 아니고. 사정을 알고 나면 그 혼담은 철회되겠지." 레이니트경은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심각하게 눈살을 찌 푸렸다.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은, 며칠간이나 국왕이 알현을 미룬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혼담 때문에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면……. 레이니트경은 확인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미안, 이만 좀 실례해야겠네." "레이니트?" "그럼 나중에 다시 보세." 레이니트경은 당황하는 친구의 팔을 떼어놓고 부지런히 무도회장을 나섰다. "레이니트경이 또 알현을 요청해오셨습니다." 집무실에서 몇 가지 사안으로 고심하던 카스트로의 미간이 짜증스럽 게 찌푸려진다. 깃털펜을 지면의 조금 위에 멈추고 있는 카스트로의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제르경이 말을 덧붙였다. "한번은 만나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물러갈 것 같지 않습니 다만." 카스트로는 사삭거리며 서류에 싸인하고, 깃털펜을 잉크병 속에 꽂 아 넣었다. 의자시트에 등을 기대는 카스트로는 적잖이 불쾌한 표정이 었다. "그렇게 귀찮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신없이 바쁜데, ……휴, 별 수 없지. 잠깐 여기로 부르게." "네, 폐하." 카스트로는 이제르경이 나간 틈을 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이 부족 한 것은 아닌데 요새는 자꾸 눈이 감긴다. 연일 격무에 시달려서 몸이 나 마음이나 피곤해져서인지도 모른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카스트로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요새 조금 무리했나봐." "어의는 뭐라고 합니까?" "피로야. 괜찮다, 라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등을 떼어냈다. 잠깐 눈을 감았더니, 피로가 더욱 민감 하게 느껴진다. 카스트로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레이니트경에게 시선을 던졌다. "신 레이니트 폰 사르노, 국왕폐하께 문안드립니다." 카스트로는 깃털 달린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를 숙이는 검보라색 머 리의 남자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오, 레이니트경. 며칠 전부터 짐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들 었소. 무슨 일이오?" 레이니트경은 탐색하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카스트로를 쳐다보았다. 카스트로는 굉장히 지친 듯한 모습으로 레이니트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을 기피하는 것 같지도,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지 도 않은 모습은, 내심 자신의 지레짐작을 확신하고 왔던 레이니트경의 생각을 흔들리게 했다. "한 가지 폐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카스트로는 묵언의 재촉을 하며 레이니트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레 이니트경은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말투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라디프로부터 혼담이 들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이니트경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스트로를 확인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 카스트로는 어떤 특별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문에, 라디프로부터의 혼담이……, 유리나 전하께 들어온 것이라 고 하더군요. 그게……사실입니까?" 대답을 미루어둔 채, 카스트로는 잠시동안 레이니트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니트경이 초조해하는 이 유는 납득할 수 있었다. "모르겠소." 간단하지만, 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레이니트경은 미간을 접고, 그 뜻을 파악해내려 애썼다. 카스트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 붙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오. 확실한 것은 라디프의 사신이 와야 알 수 있소. 질문에 답이 되었소?" 할 말을 잃고 있던 레이니트경은 곧 또 하나의 질문을 떠올렸다. "……한 가지 질문을 더해도 되겠습니까?" 카스트로는 고개만 까딱했다. 레이니트경은 좀 전보다 더욱 망설이 는 어조로 물었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폐하께서는 그 혼담을 어떻게 하 실 겁니까?"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카스트로는 한참동안 생각해본 뒤에야 입술 을 떼었다. "모르겠소." "네?" 어이없어하는 레이니트경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카스트로는 느리게 대꾸했다.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건 그때 가 봐서 생각해 볼 일이오." "폐하! 하지만 돌아가신 아베르노 전하께서는 이미 유리나 전하와 저와의 결혼을 승낙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었다. "그래서?" "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카스트로는 지친 듯한 얼굴로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렸소? 뭐, 했어도 좋고 안 했어도 좋소. 하지 만 아베르노 전하께서 하신 약속을 짐에게까지 강요하지 마시오." "폐하!" "아직 사신도 도착하지 않았소. 경은 닥치지도 않은 일에 신경 쓸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모르지만, 짐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소." 안색을 굳히는 레이니트경에게 카스트로는 다시 한번 말했다. "용건이 그것뿐이면 물러가시오. 어디서 뜬소문이나 듣고 와서 이렇 게 시간을 뺏는 거, 다시 용납하지 않겠소. 물러가시오." 레이니트경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굽혀 인사했다. 카스트로는 짜증 스런 한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피곤해서인지, 모든 게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무척이나 따사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피아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라디프에서는 아직까지 두터운 옷을 벗지 못하는 날씨지만, 남 쪽으로 내려와서 맞은 5월은 그렇게나 포근할 수가 없었다. 라디프의 사신 실레니크 폰 리아프는 5월도 다 가는 그런 여름의 문턱에 카르노 의 수도 아르노에 도착했다. "아르노에는 처음이십니까?" 카르노의 근위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적자색 머리의 다이크경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인 듯 그렇게 물어왔다. 실레니크는 그런 다이크경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실레니크 경."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실레니크를 향해 다이크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베르노와의 불화 때문에 영지로 돌아가 쉬고있던 다이 크경은 카스트로의 즉위 후, 공백이던 근위대장의 직위를 떠넘겨 받았 다. 일년이나 쉬고있던 다이크경은 무료하던 시골에서의 생활에 질려 하던 참이라, 그 제의를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제의 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의 끈질긴 결혼 협박도 떨구어낼 수 있었다. 다이크경은 다시 침묵에 감싸여 왕궁의 귀빈관을 안내했다. 함께 나 갔던 재상 비네르경과 외부대신 헤르트경은 귀빈관 앞에서 헤어져 알 현실로 먼저 가버렸다. 숙소의 안내를 맡은 다이크경은 이 조용한 남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귀빈관의 숙소에 도착한 다이크경은 문 앞에서 실 레니크경을 돌아보았다. "이곳이 실레니크경께서 머무실 곳입니다. 이 궁내부원들이 경께서 왕궁에 계시는 동안, 안내와 시중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네." "그러면 준비를 마치시고 알현실로 와 주십시오. 그럼, 이만 실례하 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실레니크에게 목례하고 다이크경은 그 자리를 벗어 났다. 그 자신도 달변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용하다못해 차가운 느 낌까지 드는 실레니크는 부담스러웠다. 실레니크는 궁내부원들이 열어주는 문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 를 카르노의 궁내부원 다섯 명과 실레니크의 시종들이 따라 들어온다. 넓은 거실과 몇 개인가의 방으로 구성된 숙소는 부드럽고 편한 느낌과 왕궁다운 규모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실레니크는 궁내부원이 안내하 는 침실로 들어가서 둘러보다가, 궁내부원에게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비제님이 이 왕궁에 계시다고 들었네.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있겠 나?" 궁내부원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비제님께서는 왕궁의 예배당에 계십니다. 지시만 하시면, 언제든 그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실레니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것 이다. "알현이 끝나고, 바로 만나고 싶네." "알겠습니다." 넓은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카스트로는 라디프 사신의 인사를 받고 라디프 국왕 세아니크 2세의 서신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알현실 안 에는 정식 알현의 예법대로 정신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고, 옥 좌가 있는 곳의 아래쪽에 라디프의 사신 대표 실레니크경을 비롯한 수 행원들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테라 사신들의 오만방자한 태도와는 또 틀렸다. 자피카 황실의 정통을 잇는 나라라는 자부심과 대륙 제일의 대국이라는 여유에서 우 러나는 당당함과 자존심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예로부터 카르노와 라디프 양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친선도 적대도 아닌 태도를 견지해왔다. 유난히 마물이 많이 나오는 라디프와 용병들의 본고장인 카르노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라 디프에 있어서 카르노의 비중만큼 레이얄의 비중도 상당해서, 라디프 는 딱히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와의 절대적인 친선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이른바 중립이라는 태도로 소극적인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솔직히 이런 혼담이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번 혼담 은 라디프 국왕 세아니크 2세와 유리나의 결혼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제르경이 말한 바로는 세아니크 2세는 올해 36세이며, 2년 전에 왕비 와 사별했다고 한다. 이미 열 여섯 살이 된 왕세자와 열 네 살의 왕녀 가 슬하에 있고, 일년 전부터 대제후들의 영애들 중에서 새 왕비를 간 택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우리에게? 그것도 이런 조건으로…….' 카스트로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사이, 실레니크는 정신없이 옥좌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갈하게 땋아 내린 감색의 긴 머리와 아이처럼 순수한 청록색의 눈망울을 가진 미청년이 새하얀 신 관복을 입고 다소곳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실레니 크는 당장이라도 말을 붙이고 싶은 자신을 간신히 억눌렀다. 힘들게 찾아갈 필요도 없이 비제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알 아보고 미소짓고 있었다. 차가웠던 얼굴이 저절로 부드럽게 풀려간다. 카스트로는 다 읽은 서신을 비서관 이제르경에게 넘기고 실레니크를 바라보았다. 실레니크의 차갑기만 하던 첫인상이 잔잔한 미소로 뒤바 뀌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실레니크의 시선이 향한 곳을 흘깃 보고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디프 국왕 폐하의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쉽게 결정할 일이 아 니로군. 당사자의 의견도 들어봐야겠고." 실레니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암녹색의 벨벳 망토를 걸치고, 약식 왕관을 머리에 쓴 카스트로는 그 까만 눈으 로 탐색하듯 실레니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하겠소. 여독이 풀리면 내일 접견실로 와 주시오. 그리고……." 카스트로는 다시 비제를 돌아보다가, 실레니크를 향해 시선을 던졌 다. "아니오. 그럼 편안한 일정이 되기를 바라겠소. 만찬장에서 봅시다." "알겠습니다, 폐하."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제에게 말했다. "비제님께서는 나중에 집무실로 와 주십시오." "네, 폐하." 다소곳이 대답하는 비제를 확인하고, 카스트로는 실레니크와 정신들 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알현은 이것으로 마치겠소." 고개를 숙이는 실레니크와 일제히 대답하고 물러나가는 정신들을 바 라보다가, 카스트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상과 외부대신은 짐을 따라오시오." "네, 폐하." ================================================================== 휴우.. 요즘은 손에 잡히는 일 없이 싱숭생숭하네요. 그동안 잠잠하던 우울증이 도지는 건지.. 쩝.. 해야 할 일 앞에 두고 이러는 것도 참 못할 짓이네요. 그래도 님들은 좋은 하루 되세요. ^^ - 땅파는 새였음당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19 - 관련자 료:없음 [3317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1 20:07 조회:139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19 - ================================================================== "실레니크경?" 알현실 밖 복도에서 머뭇거리며 멈춰서는 실레니크를 수행원 중 한 명이 의아한 듯이 불렀다. "아, 나는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먼저들 돌아가시오." 실레니크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수행원들을 먼저 보냈다. 들뜬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실레니크의 옆에는 궁의 안내를 맡은 궁내부원 한 명이 조용히 서 있었다. 정신들도 어느 정도 빠져나가고 복도가 조금 한산하게 느껴질 무렵, 한 궁내부원이 실레니크에게 다가 왔다. "실레니크경이십니까?" "……그렇네만?" 궁내부원은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비제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예배당에서 기다릴 테니, 그쪽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실레니크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주시오." 궁내부원의 뒤를 따라 왕궁의 회랑을 지나며, 실레니크는 잠시 화사 한 봄의 정원에 눈길을 빼앗겼다. 갖가지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난 노 랗고 붉고, 푸른 정원이 아름답다. 그리고 힘차게 치솟는 분수의 하얗 게 부서지는 물방울들과 그 위에 군림하듯 서 있는 눈부신 여신, 라이 아나. 실레니크는 과연 카르노답다고 생각했다. '전신 로마와 그 연인인 승리의 여신 라이아나라…….' 실레니크는 어느 한 건물로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 마 가지 않아 감색의 문과 태극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제님은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궁내부원이 문에 노크를 하고 물러서자, 안에서부터 그리웠던 청량 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실레니크는 양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부터 문이 닫힌다. 실레니크는 케테르 신상과 향촉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제를 찾아내고,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비…제…?" 비제는 그 해맑은 얼굴에 예의 그 천진스러운 웃음을 가득 담아 실 레니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실키." 실레니크는 하, 하고 웃더니, 나직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성큼 발 을 내딛었다. "……이 망할 녀석! 얼마나 걱정했는데!" 뛰듯이 큰 걸음으로 다가가 와락 껴안으면서, 실레니크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듯이. "비제……, 비제!" 전보다 키는 컸지만, 여전히 껴안으면 품안에 푹 감싸이는 여린 몸 이다. 180리에 가까운 실레니크는 간신히 170리가 넘을 듯한 비제의 머리를 슥슥 쓸어주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조금 컸구나. 전에는 어깨밖에 안 오던 녀석이……." 비제는 거리낌없이 다가서는 옛친구의 태도를 난처해하면서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는 여전하네. 조금 늙었나?" "이 녀석! 늙다니! 이제 스물 아홉이야! 성숙했다고 하는 거다!" 비제의 볼을 잡고 비트는 모습은 여전히 십대의 소년처럼 장난스러 웠다. 비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실레니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아직도 차를 좋아해?" "물론이지. 그때 입맛을 버릴 수가 없더군. 물론 최고급 테라산 차겠 지?" "하하……, 여전히 까다롭군." 비제는 핀잔을 주면서도, 가식적인 천사의 미소가 아닌 편안한 웃음 을 웃고 있었다. 십여 년만에 만난 친구는 여전히 밝고 유쾌했다. 비제는 그에 반해 너무 많이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레 싫어졌다. 지난 십여 년 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주마등처럼 힘들었던 시간들이 머릿 속을 스쳐간다. "카스트로 1세의 대관식 때 축하사절로 갔던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알았어. 네가 드디어 테라에서 빠져 나온 걸 알고는 기쁘고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실레니크는 삐친 듯한 모습으로 비제를 노려보고, 스스로의 유치한 행동에 피식 웃었다. "왜 하필 라디프가 아닌 카르노로 갔는지 서운했고. 왜 한번도 안 온 거냐, 라디프에는? 올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앉은 친구를 보며, 비제는 장난기어린 눈으 로 눈웃음쳤다. "나 혼자 길도 모르고 갔다가 마물에게 먹혀버리면 어쩌라고?" "잘도 그러겠다. 여기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이번 기회에 나와 같이 라디프로 가자." 손안에 들고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비제는 물끄러미 실레니크를 바라보았다. "라디프로?" "그래. 라디프로. 연고지 하나 없는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솔직히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카르노는 한족에 대한 인식이 나쁘 다고 하던데."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비제는 살랑살랑 머리를 저었다. "못 떠나." "응?" "못 떠난다고, 실키. 나, 여기 못 떠나." 실레니크는 말이 막힌 듯 멍하니 비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질렀다. "한족들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면, 카르노 국왕이 뭔가 네 약점 이라도 잡고 있는 거냐?" 피식 웃으며, 비제는 다정다감한 친구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 다. 참,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사생활에서는 더욱 더. "그러면? 네가 나를 풀어줄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야." 입을 꾹 다무는 실레니크의 얼굴에는 분하다는 듯한, 그리고 안타까 운 듯한 표정이 스쳐간다. 참 재미있다, 이 친구는. 어떻게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감정적일 수 있을까. 비제는 문득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 같은 또래의 한족 아이가 그를 멸시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악마의 자식이라고, 너 같은 아이는 더럽고 재수 없다고. 그런 모습을 우연히 보고 말았던 실레니크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비제를 보호하 려고 들었다. 물론 가차없이 실레니크를 죽이려는 그 한족 아이에게서 비제가 오히려 실레니크를 보호해야 했지만. "왜 웃어?" "어?" 비제는 쿡쿡 웃고있던 자신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 실레니크를 바라 보았다. 다시 웃음이 솟아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왜 웃는 거니?" "훗, 글쎄……." 가만히 웃는 비제를 지켜보던 실레니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 다. "마음에 안 들어." "응?" "마음에 안 든다구. 여전히 네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비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꾸하며, 비제는 다시 찻잔을 손에 넣었다. "당연하지. 네가 한족이냐? 한족들도 내 생각을 읽지는 못해." "그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실레니크의 모습이 꽤나 힘들어 보인다. 비제는 그쯤에서 실레니크의 고민을 풀어주기로 했다.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하지만 알잖아. 나는 감정을 솔직 히 표현하는 데 익숙지 못해. 언제나 감정을 감추는 것만 배우며 살아 왔으니까. 너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래. 신경 쓰지마, 실키." 기운이 쳐져서 테이블만 바라보는 실레니크를 위해, 비제는 스스로 화제를 돌렸다. "라디프에 못 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때문이야." "비제?" 실레니크가 의아하다는 듯,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본다. 비제는 자조하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할 일이 있어. 그리고 지금 힘들어하시는 폐하를 두고 갈 수도 없고." "……무슨……, 카르노 국왕을 돕는 거냐? 네가?" 불신과 경악이 겹치는 소리를 내며, 실레니크는 입을 쩍 벌렸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 "그럼 정말이란 소리야?" 비제는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를 끊고,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 어나지 못한 실레니크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실레니크는 곧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 이기적인 비제가? 내가 과제물 제출 좀 대신 해달라는 것도 깨끗이 거절하던 녀석이, …누가 힘들어한다고 갈 수가 없어?"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비제를 돌아보는 실레니크는 연신 '믿을 수 없어'를 중얼거리며 머리를 저었다. 비제는 그저 쓰게 웃고만 있었다. 똑똑똑똑. 그 때였다. 조심스런 노크소리가 들리고, 응접실의 문이 빼꼼이 열렸 다. "계세요, 비제님?" 아직 어리게만 느껴지는 소녀의 목소리다. 비제는 순간 안색을 굳히 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실레니크도 덩달아 긴장해서 돌아보자, 열린 문 사이로 열 여섯, 일곱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들 어오고 있었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들어와 떡하니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실레니크를 돌아보았다. 얼결에 비제를 따라 일어난 실레니크는 조심스럽게 비제와 소녀를 돌아보았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은발이라니……, 라디프에서 오신 분인가요?" "아……, 네, 그렇습니다만……." 의아함이 가득 묻어나는 실레니크에게 생긋 미소지으며, 윤기 나는 밤색 머리의 소녀는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버릇처럼 소 녀의 손을 잡아버린 실레니크의 귀에 신음 섞인 비제의 음성이 들려왔 다. "이왕녀 체리나 전하시다. 전하, 이 사람은 라디프에서 사신으로 온 실레니크경입니다." 실레니크는 마주잡은 손을 움찔거리며,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기듯 허리를 숙였다. "리아프 공작가의 실레니크입니다. 아름다우신 이왕녀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체리나 폰 카르노예요. 그런데 비제님과는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거침없이 묻는,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도 보일 모습을 대하며, 실레니 크는 의혹의 시선을 비제에게 던졌다. "비제와는 오랜 친구입니다, 전하." 비제의 외로 돌린 얼굴과 생글생글거리는 체리나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며 실레니크는 부지런히 이 상황의 원인을 추리해내기 바빴다. "이, 이건……." 대소 신료들이 전부 모일 수 있는 대회의장과는 달리, 주로 중역들 만 모여 사안을 의논하곤 하는 소회의실에는 다섯 명만이 단출하게 자 리잡고 있었다. 회의의 중심인 국왕 카스트로 1세와 재상 비네르경, 외 부대신 헤르트경 등의 세 사람과 친위대장 라에르와 국왕의 비서관 이 제르경이 그들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경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 헤르트경의 손에는 얼마 전 실레니크로부터 넘겨받은 라디프 국왕의 친서가 들려있었다. 재상 비네르경은 뭔가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푸리 고 있었고, 헤르트경은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것은…… 대체……." "누군지 모르지만, 라디프에도 카르노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오. 지금 카르노에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아." 헤르트경은 입술을 짓깨물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여태껏 그 는 신부측이 지참금을 가져가는 것은 보았어도, 신랑측이 거금을 내놓 으며 청혼한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것도 자그마치 2억 실프나 되는 거금을.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이 혼담을 받아들이실 겁 니까?" 비네르경의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헤르트경은 말도 못할 만큼 긴장 해서 카스트로를 보고 있었고, 카스트로는 두 사람의 반응을 눈에 담 으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걸 결정하려고 경들을 부른 것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혼담 받아들이고 싶소." "폐하! 하지만 유리나 전하께는 이미……." 카스트로는 냉담한 눈으로 헤르트경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레이니트경의 숙부로서 하는 말이오, 아니면 카르노의 외부 대신으로서 하는 말이오?" "……!"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어버린 헤르트경을 엄격한 눈으로 쏘아보며, 카스트로는 냉엄하게 질책했다. "그렇게까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겠다면, 경은 이번 혼담에 대 해서는 빠지시오." "하, 하지만 돈 때문에 신의를 저버릴 셈이십니까, 폐하?" 카스트로는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해오는 헤르트경을 보며 눈살을 찌 푸렸다. 솔직히 이러는 자신도, 헤르트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돈이라는 게 지금 절실히 필요해서요. 2억이야. 그 정도면 일년 치 예산을 웃도는 액수요. 게다가 금광도 하나 있지. 이것은 지나치게 구미당기는 조건이란 말이오." "하지만 유리나 전하의 행복을 생각해서도 그리하시면 안됩니다. 정 혼담을 성사시켜야 된다면,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체리나 전하께 서도 계십니다." "그만 하시오, 헤르트경!" 불쾌한 듯이 윽박지르는 카스트로의 기세에 헤르트경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헤르트경을 노 려보고 있었다. 헤르트경은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유리나 누나의 행복을 위해 제 나이또래의 아들이 있는 라디프 국 왕에게 체리나를 제물로 바치라는 말인가? 아니 더 솔직히 말해보지. 누나의 행복을 위해서? 과연 그러한가? 그게 자네 숙질의 야심을 위 해서는 아닌가?" "폐…폐하!" "솔직히 레이니트경이 순수한 의도로 누나에게 접근했으리라고는 믿 지 않소. 아베르노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셨든, 짐은 레이니트경이 마 음에 들지 않아!" 헤르트경의 안색이 하얗게 파랗게 변해간다. 비네르경은 전신에서 분노를 뿜어내는 카스트로의 기세에 숨을 죽이며, 안쓰러울 정도로 눌 려버린 헤르트경을 지켜보았다. 달변가인 헤르트경이 말을 잃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그까짓 돈 때문이라고? 돈이 그렇게 별 게 아니라면, 경이 2억 을 가져와 보시오. 얼마든지 누나를 건네줄 테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면 입다물고 지켜보시오! 벌써 일년째 재정에 관해서 아무 방안도 없 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란 말이오!" 헤르트경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경이 경의 야심을 위해 레이니트경과 내 누이의 혼사를 추진했듯 이, 짐도 짐의 야심을 위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소. 행복? 아직까지 순 진하게 그런 걸 바라오? 더구나 왕족에게? 떠돌아다니는 허무맹랑한 궁중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건 아닌가 심히 걱정스럽소, 헤르트경!" 잔인할 정도의 독설이었다. 헤르트경은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말 았다. "그만 물러들 가시오! 이 일은 차후 다시 의논하겠소." 성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카스트로는 그렇게 내뱉었다.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헤르트경은 회의실 문을 나오면서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레이 니트와 유리나 사이의 일을 순수하게 사랑이라고 믿으리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양쪽 다 묵인된 권력과의 악수다. 하지만 그 손을 잡은 또 하나의 손은 아베르노였고, 새로이 손을 잡아야 할 카스트로는 전혀 손을 내밀 마음이 없어 보였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베 르노의 약속과 결혼에 대한 언질만을 믿고서. 손잡을 상대를 바보처럼 유리나라고 믿어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기운 내시오, 헤르트경." 비네르경의 위로에 헤르트경은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그런 말만으 로 기운이 날 리가 없다. 앞으로 어떻게 조카를 대해야 할지,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처음으로 헤르트경은 레이니트경을 만 나는 게 꺼려졌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0 - 관련자료:없음 [3320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2 20:30 조회:1298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0 - ================================================================== 백여 명이 함께 하는 만찬장은 장중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국왕 카스트로 1세와 왕비 루시타니아를 중심으로, 라디프의 사신들이 주객 인 만찬이었다. 만찬장의 높은 천장에는 수십 개의 초가 불꽃을 내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깨끗한 식탁보 위에는 고풍스런 은촛대의 행 렬이 식탁 위를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초 대받은 정신들은 국왕과 실레니크 사이에 오가는 사사로운 대화마저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으며 식사하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 초대받은 귀 부인들은 최대한 교양있게 식사를 하려 애쓰고 있었다. 실레니크는 의례적인 질문에 간단간단하게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그 리고 유심하게 카스트로를 지켜보았다. 아직까지 조금 전 비제와 나눈 이야기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분을 염려하 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비제는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입에 담 았다. 하지만 실레니크로서는 경악하다못해 태양신 하야가 하늘 한곳 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아야 했다. 믿을 수 있는가, 한족의 수장들과 대신관마저 코웃음치며 눈 아래로 보던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일국의 국왕이라고는 하지만 한갓 인간에 불과한 자를 '주군' 이라고 불렀다. 이쯤 되니, 실레니크는 그저 그렇게 시운이 잘 맞아 얼결에 국왕이 라는 행운을 손에 쥔 것으로 생각했던 카스트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약관의 젊은 카르노 국왕은 권력과 권위에서 나 오는 후광 때문인지 그 또래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다듬어지고 강인한 느낌이었다.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실레니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꿰뚫어보듯 진지한 검은 눈빛이 실레니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심껏 대답해드리겠 습니다." 카스트로는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실레니크의 찬 얼굴을 보며, 슬쩍 떠보았다. "굳이 카르노 왕실과 혼사를 성사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 오." 카스트로의 강인한 얼굴에서 시선을 비껴, 실레니크는 카스트로의 옆에 앉은 갈색 머리의 기품 있는 왕녀를 바라보았다. 식사하기 전에 일왕녀 유리나라고 소개받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라디프로부터 라디프 의 국모로 지목 받은 여성이기도 했다. 실레니크는 생각을 다듬으며 카스트로를 향해 대답했다. "……라디프 내의 사정 때문입니다. 몇몇 대제후의 영애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것이 대제후들 간의 심각한 권력다툼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폐하께서는 국내의 혼란을 막기 위해, 타국의 왕실과 혼사를 맺 기로 결정하신 것이죠. 때마침 혼기가 찬 왕녀가 계신 카르노가 가장 적합했고 말입니다."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실레니크였다. 카스트로는 흐음, 하고 고개 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믿지 않았다. 짐작이 가는 것이라고는 아무래도 대륙의 균형 때문일 것이다. 자피아 대륙은 레이얄과 카르노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중심으로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 테라는 그저 이름뿐인 신성국으로 존재할 뿐이 었고, 비쉬는 약삭빠르게 레이얄과 카르노 양국와 교역을 하며 적절하 게 외교를 해왔다. 서쪽 바다의 제해권을 놓고, 저 섬나라의 미개종족 이드와 다투는 것은 해상왕국 비쉬만의 특이한 환경일 뿐, 그것이 대 륙의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국 라디프. 기세등등한 대제후들의 등살에, 미처 다른 나라와의 본격적인 외교를 수행하지 못하는 나라였다.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외교방식은 중립이었고, 그래서 레이얄과 카르노, 어느 한쪽 왕실과의 혼사도 드문 것이 사실이다. 카스트로는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만찬장을 흘깃 일별했다. 아직까 지 침울해하는 헤르트경과 숨을 죽이고 자신을 주시하는 귀족들이 눈 에 띄었다. 카스트로는 다시 옆에 앉은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소문을 들었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가끔씩 입술을 꼭 깨문다든지, 나이프를 쥔 손이 불끈 힘을 준 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유리나가 라디프의 왕비가 된다면, 이 어그러진 대륙의 균형이 어느 정도 다시 맞추어질까? 라디프는 레이얄에 비해 형편없이 무너져버린 카르노 왕실의 부실함이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소리없이 대륙에서 입지를 넓히는 레이얄과 테라의 번영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레 이얄과 테라가 지금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속해서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중립을 유지하던 라디프도 이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카르노와 동맹을 맺고, 여차하면 더욱 방대해 질 레이얄을 방비하려는 것일 테다. 이것은 카스트로에게, 아니 카르노에게 너무나 유리한 기회였다. 저 느려터진 북국 라디프가 조금씩 대륙의 일에 간섭하려 하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이 기회를 잡고 싶었다. 배후에 라디프를 둔다면 테라와 전쟁을 벌여도 든든할 것이기에. 하지만 어떨까. 과연 유리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레이니트경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녀의 행복을 자신이 제 임의대로 깨뜨려도 되는 것일까? 일말의 망설임이 카스트로의 결정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또한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내릴 최종 결정 을. 이미 친형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이다. 고작 누이의 '행복'이라는 환상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카 스트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라도 팔 준 비가 되어있었다. 누이와 레이니트경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카스트로 는 이 혼담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선은 레이니트경에게 파혼을 통보하 는 게 먼저일 터였다. "폐하." 만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 카스트로는 옆에서 조용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차분한 모습 그대로 유리나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만찬 뒤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그러시죠." 유리나가 그리 녹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카스트로 는 속으로 걱정스런 한숨을 불어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식사를 마치는 유리나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에 만날 일이 걱정이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자가, 다른 일도 아니고 혼사에 관한 일에 이따위로 신뢰를 무너뜨리다니요! 지난 일년간 결혼 식을 미룬 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요?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다니!" 아르노 남쪽의 한 저택에서 쩌렁쩌렁한 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붉게 물들이고,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한 채 포화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람은 사르노 백작 레이니트경이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 리도록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헤르트경은 그런 조카를 소파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가서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가서 따져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사람 을 무시하고 농락해도 되는지 말입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인 레이니트경을 지친 눈으로 응시하며, 헤르트경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막았다. "그만둬라, 레이." "숙부!" 자신을 돌아보며 목청이 터질 듯 소리치는 조카의 비통한 모습을 차 마 볼 수가 없었다. 헤르트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한번 명령했 다. "앉거라, 레이. 바보 같은 짓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숙부!"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헤르트경은 눈을 뜨고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성급하게 굴지 말고, 앉아서 찬찬히 생각해보자. 다른 방법이 있을 게야." "방법은 무슨 방법입니까? 이미 폐하께서는 마음이 돌아서신 거라구 요. 그런 말씀을 들으셨으면서도 모르시겠습니까?" 헤르트경은 조카를 달래는 것을 그만두고, 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폐하께 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다 는 게야?"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앉아서 파혼 통보만을 기다리라구요?" 두 숙질의 눈이 사나운 기세로 허공에서 마주쳤다. 팽팽하게 맞서는 신경전은 결국 헤르트경의 승리로 끝났다. 레이니트경은 성질을 죽이 고 헤르트경의 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고뇌 어린 표정으로 레 이니트경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쩌란 말입니까? 이대로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숙부. 나는 끝장입 니다. 유리나 전하가 없으면, 나는 허깨비란 말입니다." 헤르트경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귀족들을 모으자. 너는 내일 유리나 전하를 찾아 뵙거라. 절대 정략 결혼에 찬성하지 말라고 말해. 알겠느냐, 레이?" 손가락으로 움켜쥔 머리가 흐트러진 채로, 레이니트경은 고개를 끄 덕였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을 게야. 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헤르트경의 눈에 오기와도 같은 의지가 서렸다. 유리나와 헤어진 뒤, 카스트로는 집무실로 향했다. 비제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리나와의 자리를 서둘러 파했던 것이 다.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게다가 상대는 전부터 대하기 어려웠던 누이였다. 항상 어른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던 한 살 위의 누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자신 때문에 그녀를 희생 하려는 일이라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이다. "폐하."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제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인사한다. 카스트로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오래 기다렸소?" "아닙니다." 카스트로는 널따란 책상 뒤로 가서 의자에 앉으며 비제를 올려다보 았다. 년 초, 즉위 후 어느 정도의 혼란이 가시자 의식이라는 것을 치 른 비제는 근 한달 만에 나타나서는 갑작스런 외모의 변화로 주위 사 람들을 놀라게 했다. 카스트로도 한달 만에 저만큼 외모가 바뀌는 사 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카스트로는 '한족이니 까'라는 간단한 이론으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게다가 순수 한족도 아닌 악마와의 혼혈이니까. 한달 만에 성장기의 두세 살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듯한 비제였지만, 바뀐 것은 그야말로 외모만의 변화였던 듯 카 스트로는 비제에게서 그 외의 어떤 바뀐 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그 변화를 처음 본 직후, 또 바뀐다면 놀라지 않게 진작 말해달라고 점잖게 한 마디 부탁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누나에게 붙잡혀 있다가 오는 길이오. 아무래도 자신의 일이라 신경이 쓰였을 테지. 어떻게 생각하오? 이 혼담에 대해서." "받아들이십시오. 이 혼담을 거절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이었다. 카스트로는 처음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대답을 듣고,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대며 재밌다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이유는?" "배후에 협력자를 두는 일입니다. 그것도 저희 쪽에서가 아니라 라 디프에서 먼저 손을 내민 겁니다. 제시해왔다는 조건 때문이 아니더라 도, 라디프와는 어떻게든 동맹을 맺어야 했습니다. 이 혼담만큼의 호기 는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웃었다. "내 누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더군. 레이니트경을 사랑한다던가?" "그래서 혼담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청록색의 눈동자가 카스트로를 꿰뚫어본다.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 하며, 피식 웃었다. "아니. 조금 누이에게 미안할 뿐이야." 비제도 카스트로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자조하듯 미소를 그리던 카 스트로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다시 말을 건넸다. "실레니크경과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알현실에서부터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비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 했다. "실레니크는 10년도 전에 테리아에 유학을 왔었습니다. 당시에는 저 도 테리아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친했었나보군. 실레니크경이 내내 자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데." "정이 많은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득도 없이 참견하기도 좋 아하고." 카스트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뜻밖이군. 그건 그렇고, 이번 일로 헤르 트경이 화가 많이 났더군. 그와 그 측근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시오." 비제는 예쁘장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실레니크경이 사냥을 좋아할까?" 카스트로가 곁에 있던 서류를 집으며 지나치듯 묻자, 비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하지 않아도, 하고 싶을 겁니다. 라디프도 카르노의 환심을 사 고 싶을 테니까요." 카스트로는 가볍게 웃는 얼굴로 비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날짜를 정해보지. 모처럼 몸도 풀 겸."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1 - 관련자료:없음 [33240]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3 21:16 조회:131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1 - ================================================================== 헤르트경은 몇 번인가 와보았던 응접실에 앉아, 초조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융 단부터 벽난로 위에 올려놓은 은촛대, 참나무로 만든 값비싼 가구들과 지금 헤르트경이 손에 쥐고 있는 테라산 차와 찻잔까지. 사치스러울 정도로 치장해 놓았으면서도 품격이 엿보이는 분위기에는 헤르트경도 이 집주인의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트경은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흘 뒤, 라디프 사신단의 유흥을 위해 사냥회를 연다는 소식은 몇 가지의 양념을 덧붙여 아르노의 귀족들에게 큰 파문을 던졌다. 이 혼 담에 대해 찬성하는 쪽으로 기운 듯한 국왕의 태도와 맞물려 벌써 혼 사가 성사되는 듯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정신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엇갈렸다. 레이니트경에게 동정적인 혼담반대의 측과 이 혼담을 적극 적으로 지지하는 혼담찬성의 측이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헤르트경은 지금 미카에르 대공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대공저에 와 있었다. 삐걱. 문이 열리고, 여전히 정정한 미카에르 대공이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헤르트경. 오랜만이오." "안녕하십니까, 대공. 그 동안 적조했습니다. 테라와 비쉬를 둘러보 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을 일으켜 정중하게 인사하는 헤르트경을 향해 미카에르 대공은 피식 미소지었다. "할 일도 없고 해서 아들녀석이랑 바람이나 좀 쐬고 왔소. 가는 김 에 테라의 신전에도 들러 대신관님도 뵙고 말이오." "그러셨군요. 그곳은 어떻습니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미카에르 대공은 시종이 내려놓고 간 찻 잔를 손에 넣었다. 재상직에서 물러난 후로 미카에르 대공은 평화롭고 여유로워진 느낌이었다. 헤르트경은 평소 권력에 아둥바둥하던 대공의 모습과 지금의 한가로운 모습에 적잖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테라에서도 카르노를 예의 주시하고 있더군요. 특히 국왕폐하의 행 보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있었소." "네에.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말 하려고 나를 찾은 게 아닐 것 같소만. 본론을 말해 보시오, 헤르트경." 미카에르 대공은 느긋하게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예리한 눈길로 헤 르트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헤르트경이 여기 온 이유를 다 알고 있다 는 듯한 눈빛이었다. 헤르트경은 어쩌면, 대공이 정말 자신이 여기까지 찾아 온 이유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에는 정보 도 눈치도 빠른 미카에르 대공이었던 것이다. "염치불구하고, 대공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마 대 공께서도 짐작하고 계실 것 같은데요. 제 조카 레이니트와 유리나 전 하의 결혼에 대해서, 대공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훗. 미카에르 대공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짙게 냉소 어 린 얼굴로 어깨를 들었다가 놓았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이다, 헤르트경. 경도 아시지 않소? 내게 무 슨 힘이 있다고 이러시오?"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관리하며 헤르트경은 다시 한번 자존심을 죽였다. "지금 왕실에 있어 가장 어른은 바로 대공이 아니십니까? 대공이 저 희에게 힘이 되어주신다면, 폐하께서도 그리 쉽게 거절하시지만은 못 하실 겁니다." "허허, 뜻밖이군요. 경이 나를 그렇게까지 높게 쳐주시는 줄 미처 몰 랐소이다." 가소롭다는 투였다. 아직까지 대관식 전후에 있던 일을, 대공은 잊지 않고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대공의 태도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헤 르트경은 지금 대공의 힘이 필요했다. 다름 아닌 왕가의 혼사이기 때 문에. 이제서야 그때의 경솔했던 처사를 후회했지만 지금에 와서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자존심을 죽이고 죽여, 대공의 뭉친 기분 을 풀어내는 수밖에는. "대공의 야심이 이대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심을 접 으셨다면 이미 일년 전에 키노 영지로 돌아가셨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미카에르 대공?" 그때까지 마냥 비아냥거리고만 있던 미카에르 대공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감돌았다.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는 대공이었지만, 헤르트경의 눈치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헤르트경은 자신 이 제대로 찔렀음을 직감했다. 사람을 대하며 느끼는 감각은 수십 년 외교관생활을 한 헤르트경에게는 더욱 민감한 것이다. 헤르트경은 더 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메스메르경의 장래도 생각하셔야지요. 어떻습니까? 제 조카의 혼사 를 도와주신다면, 제 조카도 대공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도와 주십시오, 대공!" 한참을 침묵이 감돌았다. 미카에르 대공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헤르 트경의 가슴께를 응시했다. 헤르트경의 말 그대로, 아직은 야심을 접기 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어이없게 퇴출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권력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기회만 볼 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도 괜찮을지도.' 궁한 사람끼리 돕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 자신을 외면하던 헤르트경의 작태가 괘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 도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대공이었다. 미카에르 대공은 자신의 감정을 잘라내고, 헤르트경의 손을 잡기로 했다. "…생각 좀 해봐야겠소. 하지만 내가 뭘 도울 수 있는지 모르겠구 료." 헤르트경은 이 방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표정을 폈다. 일단 대공 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어두운 밤, 왕궁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긴축재정상태 의 카르노 왕실에서는 요 근래 드물게 열리는 연회였다. 모처럼 국왕 과 왕비를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르노의 귀족들은 부지런히 왕궁 의 연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카스트로는 의무적인 첫 춤을 루시타니아 와 추고는, 자리에 앉아 인사를 하겠다고 오는 귀족들과 간단하게 담 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연회의 주인공격인 실레니크는 열성적인 한 아가씨에게 잡혀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라디프에서는 그 차가운 외모와 높은 신분으로 인해 수많은 귀족 여성들에게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던 실레니크였다. 장차 리아프 공작이 되고, 라디프의 이인자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실 레니크는 모든 귀족여성들에게 꿈속의 왕자인 동시에 쉽게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나이 어린 소녀는 그런 경외감이나 거 리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지, 소개받은 그 날부터 집요하게 들러붙어 이런저런 것들을 추궁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라는 게 대부분 한 사람 에 대한 것들이지만. "그래서 비제님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러니까, 흐음, 아마 '고귀하신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면 속이 언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양하겠습 니다.'라고 했을 겁니다." 단아한 이마를 곱게 찌푸리는 체리나를 보며 실레니크는 슬쩍 미소 지었다. 참 극성맞은 아가씨였지만, 그만큼 순수해서 보기 좋았다. "비제님이 너무하셨네요. 어떻게 여성에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실 수 있죠? 그래도 비제님을 좋아하는 여성인데……." 왠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그 거절당한 한족의 여성과 자 신을 동일시시키는 모양이었다. 똑같이 거절받는 처지이기 때문일까. "그것은 그 여성이 한족이기 때문일 겁니다. 모르십니까? 비제는 한 족을 혐오합니다. 아마 어려서부터 한족들에게 멸시받으며 자란 데 대 한 반발이겠지요." "그, 그럴까요?" 조심스럽게 희망을 떠올리는 표정이 귀엽기 짝이 없다. 실레니크는 1남 4녀의 막내였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 틈에 끼어 산 실레 니크는 귀여운 여동생을 가져보는 게 꿈이었다. 실레니크는 지금 이 금갈색눈의 귀여운 아가씨가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깜찍한 여 동생이 있다면 매일 살뜰하게 돌봐줄 텐데.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실 레니크였다. "비제는 한족보다는 차라리 보통 사람을 좋아합니다. 비제의 첫사랑 도 인간 여자였으니까요." "첫사랑이요?" 호기심 반, 미묘한 아픔이 반 뒤섞인 눈빛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실 레니크는 아차 싶은 기분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해주려다가 또다시 제 무덤을 파버린 것이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끈 질기게 질문을 해대는 체리나도 체리나지만, 그 예쁜 눈으로 올려다보 며 묻는 말에 주춤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자신도 문제였다. 거 기에다 대답하면서 꼭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버려서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까지 덤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곤란하다. 비제의 첫사랑은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전하, 비제가 좋아하는 차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비제는……." "테라산 차를 좋아하시죠.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으시고, 채소류를 즐기시고요. 그런 건 다 알아요. 그것보다 첫사랑이라뇨? 어떤 여자였 죠? 가르쳐 줘요, 실키이." 콧소리까지 내며 졸라대는 체리나를 보며, 실레니크는 굵다란 식은 땀을 흘려댔다.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려지기는 누나들 빼고는 처 음이었다. "저, 저기 그것은 아무래도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차라리 비제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편이……." "비제님은 제게 그런 얘기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는 걸요? 그러니까 실키가 말해줘요, 네?" "아, 저기, 그게……." 정말 곤란했다. 실레니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을지. 하지만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대체 어 떻게 물리친다는 말인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만의 연회라서 그런지,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사람들까지 모습 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몇 달만에 아르노로 돌아온 미 카에르 대공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하하, 염려덕분에 잘 지냈소. 비쉬의 온천은 정말 좋더군요. 경도 언제 시간이 나면 가보시오." 모여든 사람들과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여전히 정력적으 로 보인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한창 활동하던 시기의 모습과 달 라진 게 없는 모습이다. 그런 미카에르 대공의 주위에는 헤르트경과 레이니트경이 있었다. 그리고 대공의 바로 옆에는 늘씬한 붉은 머리의 미인이 우아하고 요염한 자태로 부채를 펄럭이고 있었다. 역시 몇 달 동안 보이지 않던 모리노 남작 부인 주디나였다. 미카에르 대공과 함께 테라와 비쉬를 돌아온 주디나는 적당히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조심스럽게 왕좌 주위에 있는 라에르 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달만에 나타난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라에르는 여전히 카스트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디나는 서글픈 한 편, 카스트로에 대한 맹렬한 증오를 느꼈다. 마치 카스트로를 없앤다면 라에르의 시선이 자신을 찾으리라고 믿는 듯, 그런 근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디나는 옆에서 슬쩍 눈짓하는 미카에르 대공을 눈치채고, 천천히 조금 전 보아둔 사람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담황색의 화사한 드레스와 타오를 듯 붉은 머리의 조화가 뭇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아직 이십대 후반인 남작부인은 여전히 누구라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눈부시게 아 름다웠다. 주디나가 곧장 향하는 길에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냉담한 표정의 라디프 사신 실레니크와 재잘재잘 떠들 어대는 참새 같은 체리나, 두 사람이 말이다. 미카에르 대공은 자신의 지시대로 주디나가 라디프의 사신에게 접근 하자, 그 자신도 슬슬 한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수많은 귀족들 틈에서 도 단연 돋보이는 검은머리의 젊은 국왕 카스트로에게로.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폐하. 신 미카에르 폰 키노, 국왕폐하와 왕비 전하께 문안드립니다." 카스트로는 눈을 들어 미카에르 대공을 바라보았다. 깍듯하게 신하 로서 인사하는 모습을 대하며, 카스트로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 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여행중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셨습니 까?" "안녕하셨어요, 대공." 루시타니아는 미카에르 대공의 눈길을 받고 살짝 목례하며 미소지었 다. 미카에르 대공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카스트로에게 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되었습니다. 조금 더 쉬려고 했지만 유리나 전하의 혼담이 오 간다는 소식을 듣고, 명색이 숙부인지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말 입니다. 그 경과도 궁금하고." "몇몇 신료들의 반대가 있기는 하지만, 혼담은 잘 진행중입니다. 오 늘 낮에 실레니크경에게도 어느 정도 언질을 주었습니다." 카스트로는 다소 딱딱한 어투로 단언하듯 말했다. 그 문제로 인한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의미의 경고였다. 미카에르 대공은 쓴입맛을 다시며,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렇군요. 유리나 전하께서는 이 혼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요?"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 일을 물고 늘어지려는 듯한 미카에르 대공의 태도에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절로 시큰둥 한 말이 튀어나간다. "왕가의 혼담입니다.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던가요?" "하오나 유리나 전하께서는 이미 혼약자가 정해져있습니다. 라디프 와의 혼담도 좋지만, 스스로 귀족들과의 약속을 깨는 것은 왕가의 위 엄에 손상을 줄뿐입니다." 카스트로는 묵묵히 대공의 말을 들었다. 미카에르 대공은 반박하지 않는 카스트로의 태도에 힘입어, 더욱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라디프와의 혼담도, 귀족들과의 약속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다른 방도?" 까맣게 부딪혀오는 암흑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미카에르 대공은 내 심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고비인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도 말입니다." "이를테면?" 옅은 흥미를 보이는 카스트로의 눈치를 살피며, 미카에르 대공은 진 중한 태도로 해결책을 입에 담았다. "유리나 전하는 그대로 혼약을 지키시고, 라디프와는 아직 혼처가 없으신 체리나 전하와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카스트로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보이는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 다. 언제부터인지 실레니크와 친하게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 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직 어리기만 한 여동생이다. 세상 물정은 조금도 모르는, 이렇게 국가의 이익에 관해 자신이 사고 팔리는 목록에 오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순수한 아이. 카스트로는 체리나가 라디프의 왕비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과연 저 철부지가 그 어려운 자리를 감당할 수 있 을까? 말하나마나였다. 자신을 닮아 고집불통인 저 아이가 나라를 위 해서라느니, 왕가를 위해서라느니 하는 이유를 들이밀어도, 지금 열렬 히 사모하는 비제를 내버려두고 순순히 라디프로 갈 리가 없었다. 억 지로 보낸다면 분명 가출이라도 할 것이다.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체리나는 어떻게 보아도 왕비의 재질 은 아니다. 유리나라면 몰라도, 체리나는 아니다. '열 한 개의 검'의 정 보망으로 들은 라디프의 사정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왕비라는 것은 그 자신이 하기에 따라 엄청난 권력을 자기 가문에 선사할 수 있 는 자리다. 왕세자가 정해진 이상 불안정한 권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권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왕비 자리를 놓고 벌어진 대제후들 사이의 알력다툼은 왕비 후보의 암살에까지 미쳤던 모양이다. 세 명의 후보가 죽고 나서야, 대제후들은 암묵적으로 카르노 왕가와의 혼약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런 위험한 자리를 과연 저 철부지 체리나가 잘 지탱해낼 수 있을 까? 그것도 자기 나이 또래의 왕세자와 부딪히지 않고서?' 카스트로는 머리를 저었다. 역시 체리나는 무리다. 지금 당장이야 체 리나를 대신 결혼시키는 것이 해결책일지 모르지만, 장차 카르노와 라 디프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저 어리숙한 아이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 다. "체리나는……, 라디프에 보낼 수 없습니다. 대공께서는 진심으로, 체리나가 왕비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직 나이 어리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왕가의 자제이십니다. 왕비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십시오. 체리나는 안됩니다." "폐하……." 미련이 남은 듯한 미카에르 대공의 말을 자르며, 카스트로는 단호하 게 말을 맺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 혼담은 체리나가 아니라 유리나 누 나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마음대로 상대를 바꾸는 것 또한 라디프에 대한 예의는 아니겠지요. 물러가십시오." 미카에르 대공은 입술을 꾹 다물고, 뻣뻣해진 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미카에르 대공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된 거다. 헤르트경도 뭐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믿을 것은 주디나 밖에 없었다. ================================================================== *이름에 대해서 카르노의 지명은 주로 '노'로 끝납니다. 귀족들의 성(작위명)도 영지를 따라 '노'로 끝나게 되구요. 라디프의 지명은 주로 '프'로 끝나고, 레이얄은 'L'로, 비쉬는 's' 'sh'로 끝납니다. 성과 지명은 거의 그런 식이고, 이름은 대륙에서 거의 비슷비슷하게 쓰입니다. '르' '-o'는 카르노에서 자주 쓰는 이름이고, '크''트'는 주로 라디프계의 이름입니다. 모음으로 끝나는 것은 비쉬나 테라 등 남방계의 이름이구요. 하지만 모든 이름이 이런 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말씀드렸다시피, 멋대로들 섞어 쓰기 때문에... --; 이름에 있어서 규칙은 없다는 게 맞을겁니다. 지명과 성은 그냥 각국에 특색을 줘보기 위해 제멋대로 규칙을 줘본 것 뿐이죠. 거의 장난같은 겁니다. 신경쓰실 필요까지는 없는 일입니다.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말꼬이는 새였음당- 제 목 : [新군주론] 제 5 장 - 122 -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2 - ================================================================== 레이니트경은 머리를 젓는 미카에르 대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내 힘으로는 벅차군. 폐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네. 조금 도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저것이 무슨 뜻인지, 레이니트경은 막막하기만 한 가슴으로 이해하 려 애썼다. "체리나 전하로 바꾸자고 했지만, 역시 꿈쩍도 하지 않고 거절하셨 네.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됐네만……" 천장이 돌고, 세상이 돈다. 레이니트경은 더 이상 자신을 고문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대공께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테지요." 헤르트경은 걱정스런 눈으로 레이니트경을 바라보았다. 허탈한 듯 멍한 표정을 짓는 레이니트경이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였다. "레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미카에르 대공은 하려던 말도 미처 다 못한 채로, 레이니트경이 비 틀거리며 어딘가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직 마지막 히든카드가 있 다는 소리는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 "허어, 참 성급한 젊은이로군." "……대공?" 조카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나오자 헤르트경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 다가, 대공의 말에 담긴 미묘한 뜻을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미카에르 대공은 지나가던 궁내부원에게서 술잔을 받아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모리노 남작부인이 라디프의 사신과 교섭 중이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헤르트경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여느 외교관 못지 않은 능숙한 교섭가가 저 요염한 남작부인이라는 것을, 잠깐이나마 대공의 곁에서 지켜본 헤르트경이었다. 그렇게 많이는 기 대하지 않지만, 또한 은근히 기대하게도 만든다. 헤르트경의 절망스런 표정에 다시 한줄기 빛이 떠올랐다. 연회장의 한구석에 처박히듯 서서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술 을 마셔댔다. 레이니트경은 친구들의 위로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 도 괴롭기만 했다. 처음부터 유리나라는 너무 커다란 거목에만 기대한 것이 잘못일까?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유리나가 자신의 눈앞에 서 신기루마냥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결혼이 약속하는 수많 은 권력의 특권들과 함께. 유리나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지, 레이니트경은 자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너무 쉬워서 조금씩 질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사라지려고 하자 그것은 강렬한, 사랑이라는 느낌의 집착 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사랑했다.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없으면 자신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레이니트경의 머 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만이 소용돌이쳤다. '사랑해……, 유리나……당신을 사랑해…….' 견딜 수 없는 갈증으로 자꾸만 말라오는 입안에 술을 들이부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속은 더 타기만 한다. '보낼 수 없어.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유리나. 이제 다 왔는데, 여기 서 무너질 수 없어.' 술기운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문득 유리나의 모습이 점점 크게 다가 온다. 마치 환영처럼 느껴져서 레이니트경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몸 생각도 하셔야죠, 레이니트경." 앞에 서서 근엄하게 꾸짖듯 말하는 유리나를 보면서, 레이니트는 망 연하게 중얼거렸다. "……유리나……."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유리나가 앞장서는 대로 레이니트경은 정신없이 따라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유리나와 레이니트경은 연회장을 나와 한적한 복도로 나갔다. "여기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들어가세요. 이렇게 힘들어하시면, 제가 더 힘들어요." 유리나는 레이니트경에게 하나의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은 몇 개 인가 되는 접견실 중 하나였다. 길다란 소파가 놓이고, 키 낮은 테이블 이 놓인 편안한 느낌의 방이다. "찬물을 가져오라고 시키겠어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자신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려는 유리나를, 레이니트경은 알 수 없는 다급함에 떠밀려 붙잡고 끌어당겼다. 자신의 품안에 폭 들어오는 자그마한 몸집이 레이니트경의 이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랑하오, 유리나……." "레이니트경……." 난처한 얼굴로 몸을 떼어내려는 유리나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레이 니트경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애타게 속삭였다. "사랑하오. 난 당신이 없으면 안돼. ……날 떠나지 말아요, 유리나." "떠나지……않아요." "우리 둘이 떠날까? 응? 유리나. 우리 둘이 떠납시다. 폐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강하게 풍기는 주향과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레이니트경의 말소리는 유리나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했다. 이 정도까지 무너져버린 레이니트 경이 안쓰럽고, 그가 말하는 불안한 미래가 더욱 그녀를 어지럽게 했 다. "이러지 말아요, 레이니트경. 지금 당신, 너무 취했어요. 기다려요. 시종을 데려오겠어요." 밀착된 몸을 억지로 떼어내려 하자, 레이니트경의 팔이 더욱 유리나 를 옥죄었다. "떠나지마! 떠나지 말아요, 유리나." "레이니트경! 정신 차리세요. 이것 좀 놓고 말해요, 우리." "날 사랑하오?" 갑자기 물어오는 낯뜨거운 말에 유리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것을 레이니트경은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소, 유리나? 나를 사랑하지 않아?" "……사, 사랑해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면서도 유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그 말을 입밖에 내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레이니트경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죄는 강한 팔힘에 답답함을 호소하 려고 하는 순간, 유리나는 자신의 턱이 들려지고 뜨거운 입술이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숨막히는 술의 향과 짙은 체향과 어우러진 향수냄 새가 유리나를 아찔하게 한다. 마치 강탈하듯 입술을 빼앗는 레이니트 경의 난폭한 행동에 유리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아요, 레이니트." "날 사랑한다면……, 내게 확신을 주겠소?" "……." 크게 확대된 유리나의 눈을 직시하며, 레이니트경은 광기에 휩싸인 사람처럼 거칠게 유리나를 소파로 밀어붙였다. "무……슨……." 레이니트경은 열정적이고 안타까운 눈으로 유리나를 응시하며, 탐욕 스럽게 유리나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레이니트경의 손길이 능숙하게 옷 속으로 파고들자, 유리나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확대되었다. "당신을 내게 줘, 유리나. 당신이 내 것이 된다면 이 혼담도 무효가 될 거요. 사랑해, 유리나." 거친 남자의 손길이 유리나의 속살에 와 닿았다. 드레스자락이 들려 지고 속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오자, 유리나는 앞 뒤 생각할 것 없이 눈앞의 잘생긴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 철썩!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마찰음에, 유리나는 스스로도 흠칫 놀랐다. 레 이니트경이 돌아간 얼굴이 차차 분노와 상처로 뒤범벅되어간다. 유리 나는 느리게 자신에게 돌아온 시선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저렇게 사 나운 레이니트경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를…… 거부하는 거요, 유리나?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 어?" 잔뜩 위축된 몸을 느끼면서도 유리나는 조금씩 자신의 몸을 빼내었 다. "사랑해요, 물론. 하지만 이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지? 그러면 이대로 당신을 빼앗겨야 한다는 말인 가? 머저리처럼 이렇게 빼앗겨야 한다는 거야?" "레이니트!" 똑똑. 똑똑. "그 안에 누구 계십니까?" 순간 레이니트경과 유리나,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는 노크소리와 함께 재차 들려왔다. 똑똑. "누구 계십니까?" 아연해진 유리나가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있자, 레이니트경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레이니트경은 몸을 일으키고,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40대의 귀족남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레이니트경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아니니, 지나가십시오." 문밖의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레이니트경의 어깨너머를 흘끗거린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레이니트경은 강경한 태도로 맞받았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유리나는 뒤늦게 정신을 수습하고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드레스를 내리고 소파에서 일어서는 몸이 아직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문 이 닫히고, 다시 레이니트경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유리나는 그대로 스치듯이 레이니트경을 피해 문가로 다가갔다. "유리나!" 유리나는 손잡이를 잡고서야 레이니트경에게 대답했다. "당신은 지금 너무 취해있어요. 내일……, 맨 정신으로 다시 이야기 해요. 그럼."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말투로 내뱉고, 유리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 에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의 일들 때문에 가슴이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놀고 있었다. 남겨진 레이니트경의 절망적인 기분까지는, 지금의 유 리나로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호호호호, 실레니크경께서는 보기와는 달리 무척 다정하신 분 이시군요." 눈이 현란한 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실레니크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참 곤란했던 때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여인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온 듯, 연신 실레니크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실레니크는 슬쩍 옆에서 입술을 삐죽이는 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미 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실키, 그럼 나중에 또 얘기해주세요. 오늘 못들은 얘기, 내일 다 들을 테니까." 선전포고하듯 내뱉고, 얄밉게 싱긋 웃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체 리나의 모습이 실레니크의 심정을 복잡하게 한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지요? 무척 즐거우신 것 같던 데.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체리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실레니크는 다시 평소의 냉정함을 되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노골적인 유혹을 하는 미녀를 대하는 것은, 저 사람 골치 아프게 하는 귀여운 아가씨를 대하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그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남작부인." "호홋, 주디나라고 불러주세요. 그건 그렇고, 체리나 전하와 상당히 친하신 것 같군요, 실레니크경. 애칭으로 부르시는 것 같던데요." 실키라는 애칭은 비제만이 자신을 부를 때 쓰던 것이었다. 비제가 막무가내로 실키라고 줄여 부르는 데야, 실레니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근 10년만에 또 다른 막무가내 아가씨가 그를 실키라고 부르고 있었다. 비제가 자신을 실키라고 부르자,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이름 좋네요. 나도 그렇게 부를래요.'라고 선언해버렸던 것이 다. "제게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남작부인?" 외모와 어울리는 차고 냉담한 말투였다. 체리나를 대할 때와는 상당 히 틀린 모습이었지만,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체리나 전하를 어떻게 생각하시죠?" "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실레니크는 찌푸 린 얼굴로 주디나를 바라보았다. 주디나는 예리한 눈빛을 하고, 입술은 생글 미소지은 채로 말했다. "체리나 전하께서 라디프의 왕비가 되신다면 어떨지를 묻고 있는 거 예요, 실레니크경. 실레니크경께서도 저 분께 호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요." 실레니크는 그 말의 의도를 탐색하기 위해, 냉철한 눈으로 남작부인 을 훑어보았다. 이 여자가 뭐 하는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 에게 이런 말을 묻는지. "라디프에서는 유리나 전하께 혼담을 보내온 것입니다만?" 주디나는 날카로워진 실레니크의 태도를 민감하게 느끼며, 조심스럽 게 말을 이어갔다. "유리나 전하께는 조금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서 체리나 전 하로 상대를 바꾸면 어떨지, 그것을 타진해보는 거죠." "당신, 누굽니까?" 진지하고 차갑게 묻는 말에, 주디나는 호호, 요사스런 웃음을 흩뿌렸 다. "모리나 남작부인이라고 했을 텐데요? 주디나라고 불러주시면 더욱 좋구요." "……." 대답하지 않고, 추궁하듯 쳐다만 보는 실레니크의 시선에 주디나는 조금씩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실레니크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라디프 왕실은 카르노의 일왕녀이신 유리나 전하께 혼약을 청하는 것입니다. 카르노 국왕폐하께서도 그 일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셨고, 그것으로 이번 혼담은 거의 성공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른 변동사항이 있다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전해주십시오." 딱딱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실패인가?' 암담해졌지만, 주디나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주디나가 무어라 도 말을 더 해보려 할 때였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남자가 실레니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주위 사 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주디나는 경악어린 눈으로 실레니크의 멱 살을 잡고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더러운 자식! 그래, 다시 한번 말해봐! 당사자의 감정은 아무렇 지도 않고, 그 잘난 국왕끼리만 좋다고 하면 된다는 거냐! 너도 한번 약혼녀를 뺏겨봐! 이 망할 자식아!" "……무… 무슨……, 당신 뭡니까?" 실레니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검보라 색 머리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술냄새가 실레니 크에게까지 확확 끼쳐온다. 값비싼 연미복이 엉망으로 흐트러져있는 그 남자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다시 주먹을 날려왔다. "내가 바로 유리나의 약혼자다! 이 자식아! 네가 알아? 네가 지금 내 기분을 아냐고! 네가……" 실레니크는 자신에게 날라 오는 주먹을 피하고, 멱살을 잡은 손을 맞잡으며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미처 뭐라 고 하기도 전에 벼락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닥쳐라, 레이니트경!" 찬물을 끼얹은 듯, 주위의 웅성임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레이니 트경은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들어 실레니크 와 그 뒤쪽으로 서 있는 검은머리의 국왕을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갈아 마실 듯한 눈으로 레이니트경을 노려보더니, 주위에 대기하고 있 던 친위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저 무례한 자를 당장 궁에서 끌어내라." "네, 폐하!"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 두 명이 레이니트경의 손을 실레니크에게서 떼어내고, 그대로 양팔을 잡고서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망연하게 굳어진 레이니트경의 눈에, 무섭게 노한 카스트로의 눈빛이 여과 없이 날아와 꽂혔다. 잔혹한 분노를 품은 그 눈빛에 레이니트경은 취기가 확 가시는 것을 느꼈다. "헤르트경은 짐을 따라오시오! 괜찮소, 실레니크경? 짐의 궁에서 일 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짐이 대신 사과하겠소." 실레니크는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카스트로에게 살짝 목례를 했 다. "……사과보다, 이 일에 대한 해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카스트로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다면."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3 - 관련자료:없음 [33285]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5 20:36 조회:138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3 - ================================================================== 6월초의 쾌청한 오후, 아르노 북쪽의 '왕의 숲' 앞에는 수많은 귀족 들이 사냥 준비를 하고 모여있었다. 길게 뿔피리 소리가 숲 속에 메아 리친다. 사람들은 국왕 카스트로의 사냥개시선언을 듣고 분분히 흩어 져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오랜만의 사냥이라 그런지 카스트로 도 무척 유쾌한 기분이었다. 카스트로가 이루는 무리는 라디프 사신대표 실레니크를 비롯해서 내 부대신 유타르경과 친위대장 라에르, 근위대장 다이크경, 근위대부대장 시에르, 그리고 몇몇 귀족들과 왕비 루시타니아, 이왕녀 체리나 등이 뒤따르고 있었다. 루시타니아는 사냥을 즐기는 카스트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한숨을 쉬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루시타니 아를 대동하지만, 카스트로가 루시타니아를 대하는 것은 그다지 달라 진 게 없었다. 벌써 결혼 3년째를 맞은 루시타니아는 누가 보아도 여성스러운 분위 기가 묻어나는 열 아홉 살의 성인이었다. 길게 기른 풍성한 금발머리 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는 깊어 가 는 우수를 담아 더욱 신비스러워졌다. 날씬한 몸매에 푸른색의 드레스 를 입은 모습은 솔직히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한 미인이었지 만, 그녀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도 그다지 그런 자각은 갖고 있지 못했 다. 요즘 들어 루시타니아가 상념이 많아지는 이유는 은근슬쩍 귀부인들 이 물어오는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벌써 3년간의 결혼생활을 하고 도 아이가 없는 루시타니아를 두고 세간에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소문 이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타니아는 그런 소문들과 이런 고민들 의 원흉인 카스트로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신의 고민에는 아랑곳 없이 마냥 즐거워 보이는 카스트로가 참 밉살스럽게 느껴진다. 공식석상에서나 간신히 얼굴을 볼뿐인 남편이 원망스럽다. 그는 후 계자 문제로 고민하지도 않는 것일까. 태연자약한 그를 보고 있자면, 자신만 추궁 받는 것 같아 억울했다. 그렇다고 바쁘다는 것을 뻔히 아 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보다 뭐라고 말하 기가 참 낯뜨거웠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한다는 말인가! 후계자가 필요 하다고? 카스트로가 그 서늘한 눈초리로 자신을 경멸하듯 내려다볼 것 이 눈에 선해서, 루시타니아는 더욱 우울해졌다. "모처럼의 나들이인데, 얼굴 좀 펴요, 루시타니아." 언제나 루시타니아의 편을 들어주는 체리나가 이번에도 위로의 말을 건넨다. 루시타니아는 애써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리나는 왕궁에서 아젤이나 시녀장 다나 말고, 유일하게 편하게 대 할 수 있는 상대였다. "날씨 너무 좋다. 유리나 언니도 함께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 네." 유리나에 관련된 소문에 대해서는 루시타니아도 귀가 따갑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왕실간 정략결혼의 틈바구니에 끼어 힘 들어한다는 소문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마치 대단한 궁중연애담이나 되는 것처럼 떠돌고 있었다. 비운의 왕녀 유리나의 최후 결정은 어떻 게 될 것인지에 대한 성급한 추측이 난무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루 시타니아는 유리나의 그 애달픈 사랑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없었다. 사랑?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부모를 보면서 꿈꾸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은 결혼과 함께 냉혹한 현실로 내려앉았다. 사랑? 그런 거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저 냉담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 정도랄까? 조금은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루시 타니아는 유리나가 부러웠다. 루시타니아도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한 남자가 유리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망가져 버리는 것도 루시타니아의 눈에는 너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것이, 루시타니아는 부러웠다. 너 무 부러웠다. 기분전환이나 하러 가자는 말에 친구인 제라르경들과 함께 사냥에 참가한 레이니트경은 몇 마리의 산짐승을 쏘아 죽이고 나서도 그리 기 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쏟 아지던 국왕의 그 차가운 분노의 눈길이. 심장이 날카로운 검에 베이 는 느낌이었다. 레이니트경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그런 눈길 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여자나 남자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 이 모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누구도 그런 살기어린 눈으로, 짓밟아버 리고 싶은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눈길 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레만도 못한 인간처럼 느끼게 하는 그 시 선은 레이니트경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숙부인 헤르트경의 뒷받침과 유리나라는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왕세자의 총애는 레이니트경에게 너무 쉽게 권력의 맛을 알게 했다. 최상의 코스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레이니트경은 그래서 더욱 아무 것 도 아닌 것으로의 추락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 치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왕녀의 남 편으로서 최고권력과의 인척을 맺는 것이다. 비록 국왕이 자신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혼만 하면 그런 것은 달라질 것 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전, 연회에서의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환상이 었다. 카스트로의 그 눈길을 받고, 레이니트경은 그 미련조차 가당찮은 것임을 깨달았다. 희망? 그런 것은 이제 없었다. 오직 그의 앞날에 남 은 것은 암울한 절망뿐. 친위대원들에게 포대자루처럼 질질 끌려나가 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레이니 트경은 그야말로 '끝'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아니 어디서부터 자신의 인생이 틀어져버리기 시작한 걸까? 모두 그 라디프의 국왕이라는 작자의 탓이라고 하고 싶 지만, 카스트로의 그 싸늘한 눈빛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 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베르노의 측근이라서일까? 현 국왕 카스트로 와 전왕세자 아베르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래서일까? 그래도 이미 죽은 사람인데, 자신이 아베르노의 측근 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증오스러웠을까? 화살을 쏘고, 또 쏘며 말달리던 레이니트경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의식적인 움직임으 로 상념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레이니트경은 줄곧 절망만을 되뇌이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심했다. 참 한심했 다. 자꾸만 국왕의 눈빛이 생각나고, 그 눈빛이 레이니트경을 미칠 것 처럼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다, 자신은. 레이니크경은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못나게 느껴 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쿠궁! 레이니트경은 갑작스런 굉음에 놀라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 다. 그것은 레이니트경의 뒤쪽 저 먼 하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느 새 인가 먹구름이 잔뜩 낀 채로 하늘은 새하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콰아앙! 레이니트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소나기가 올 모양이었다. 급하게 천막을 쳐놓은 곳을 어림짐작해서 말을 달려가던 레이니트경은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웃고 있는 카스트로를 볼 수 있었 다. 그 옆에는 라디프의 사신 실레니크가 함께 있었고, 그 옆으로는 이 왕녀 체리나가 웃고 있었다. 레이니트경은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움 켜쥐고 달리던 말을 멈춰 세웠다. 번쩍! 쿠아아아앙! 그것은 마치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저질러진 일이었다. 저 갑작스런 천둥소리에 반응한 피가 전신의 혈맥에서 끓어올라서. 자신을 여지없 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 눈앞에서 즐거운 듯 웃고 있어 서. 그래서 마치 자신을 광기의 신에게 제물로 바친 듯 증오로 충혈된 눈을 하고서, 뜨겁게 피끓어 오르는 손에 활을 잡고 서서히 그를 조준 해서 들어올렸던 것이다.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오라버니!" "왜? 내 말 맞잖아, 너, 여섯 살 때 왕궁에서 길을 잃어서 왕궁 전체 가 너 찾느라고 발칵 뒤집혔던걸. 아마 그때, 네가 일왕녀궁의 지하에 서 무섭다고 울고 있었지?" 짓궂게 이죽대는 카스트로의 모습과 바짝 약이 올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체리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참 잘 어울리는 오누이다, 라 고 실레니크는 부러움을 담아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웃지 말아요, 실키!" 뾰로통한 얼굴로 윽박지르는 체리나의 기세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 았지만, 실레니크는 즉각 웃음을 멈추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용서를." 체리나는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실레니크를 보며 우쭐해졌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웃지 말아요, 알았죠? 그리고 오라버니도 좀 실 키를 본받아봐요. 오라버니는 전혀 여자를 존중해줄 줄 모르잖아요? 옛날의 있었던 일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말하시면 제 섬세한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는 줄 아세요?" 카스트로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 없이 비아냥거렸다. "서엄세? 네가? 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인 걸?" "오라버니!" 체리나가 다시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때까지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라에르는 일순 소름이 끼칠 듯한 살기를 느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지?' 라에르는 주위 친위대원들을 불러들이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날카 로운 파공성을 내는 화살 하나가 곧장 카스트로를 향해 쏘아져왔다. 라에르는 거의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카스트로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카스트로의 상체가 비스듬히 기울어지자마자 화살이 맹렬 한 기세로 스쳐지나간다. 라에르의 재빠른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처 다 피하지 못했는지, 화살은 카스트로의 팔에 붉은 선을 그어내며 날아가 카스트로의 뒤쪽에 있던 나무기둥에 팍! 소리를 내며 꽂혀버렸다. 그 대로 앉아있었다면 백발백중으로 심장에 맞았을 솜씨였다. 화살 끝의 깃털이 반동으로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라에르는 이를 악물고 소 리질렀다. "친위대원들은 주위를 차단하라! 다이크경! 범인을 잡아주십시오!" 명령이 떨어지자, 친위대원들과 다이크경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숲 저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려왔다. 다이크경은 함께 온 근위대부대장 시에르와 함께 활을 쏜 범인이 있는 쪽으로 말을 몰아갔 다. 콰아아아앙!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들려오던 천둥소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들린다. 그때까지 숨도 못 쉬고 질려있던 체리나가 그제서야 비명을 질러댔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웅성웅성. 숲 속에 길게 메아리치는 체리나의 비명소리에 이끌려 근 처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든다. 카스트로는 화끈거리는 상처를 누르고 있다가, 체리나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라에르의 품 에서 빠져 나와 체리나에게 다가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카스트로는 손을 뻗어 체리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체리나, 쉬이. 괜찮아." 날카롭던 비명소리가 카스트로의 품안에서 점차 잦아들어 갔다. 아 직까지 파들파들 떨리는 여린 몸을 더욱 꼭 안아주며, 카스트로는 다 른 손으로 연신 체리나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체리나? 정신 차려! 체리나." 공포에 질려 떨던 몸이 힘없이 무너지며 흐느낌을 토해낸다. "흑…흐윽,…오라버니……흐어엉, 오라버니……." "괜찮다니까. 봐, 멀쩡하잖아. 괜찮아, 체리나. 괜찮아." 가슴이 축축할 정도로 울어대는 체리나를 다독이며, 카스트로는 슬 쩍 다이크경이 간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였는지…… 보았나?" 라에르는 머리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꽤 먼 거리인데다, 숲 사이에 숨어있어서……."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체리나를 쓰다듬었다. 그때쯤 모 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폐하? 무슨 일이신지……." "폐하……." 카스트로는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품안의 체리나를 근 처에 있던 체리나의 호위기사에게 맡겼다. 카스트로는 친위대원들 밖 에 모여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안됐지만, 오늘 사냥은 여기서 멈추어야겠소. 모두 사냥터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맙소사, 폐하! 그 피는……." 뒤늦게 카스트로의 상처를 발견한 귀족이 놀란 얼굴로 소리질렀다. 카스트로의 팔에 번진 붉은 피가 연녹색의 상의에 번져 어두운 붉은 색을 만들어낸다. 카스트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사냥터 밖에서 할 것이오. 모두 이곳에서 철수하시 오. 가서 사냥의 종료를 알리라고 전하라." "네, 폐하!" 친위대원들의 엄중한 호위 속에서, 카스트로는 사냥터에서 빠져 나 와 천막으로 다가갔다. 뿔피리소리가 길게 울리고, 사람들이 속속 숲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폐하, 잠시 상처를 보겠습니다." 천막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의 하이파경이 카스트로를 의자에 앉히고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때맞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세 굵다란 장대비로 변한 빗줄 기를 맞으며, 귀족들이 낭패한 기색으로 숲을 빠져 나온다. 카스트로는 시종장 하미르의 시중을 받으며 망토와 겉옷 상의를 벗었다. 최대한 조심하며 벗겨냈지만 상처 난 곳이 옷에 쓸리며 쓰라리다. 하이파경이 팔 부분의 셔츠를 걷어내어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바른 뒤 붕대로 동여 맨다. 카스트로는 하얀 붕대에 감기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번쩍이는 하늘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시 종장 하미르에게 명령했다. "천막에 있는 귀족들의 명단과, 함께 왔다가 지금 보이지 않는 자들 의 명단을 만들어 오라." "네, 폐하." 시종장 하미르가 시종 몇 명을 데리고 다른 천막으로 향했다. 카스 트로는 치료를 마친 팔을 가볍게 움직여보고, 다시 줄기차게 비를 토 해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습기 때문일까? 카스트로는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초조하게 다이크경을 기다리던 카스트로는 그보다 먼저 돌아온 시종 장 하미르의 말을 들어야 했다. 평소 냉정할 정도로 무표정한 시종장 하미르가 안색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폐하……." "말하라." 불길한 예감이 더욱 강해진다. "……전하께서, 왕비전하께서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기에 카스트로는 한 박자를 놓치고서야 간신히 말소리를 내었다. "…뭐?" 시종장 하미르는 자신이 죄를 지은 듯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 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다 도착했는데, 아직 왕비전하께서 도착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리고 한두 시간 전부터 왕비전하를 뵌 분이 아무도 없 다고……." ================================================================== 여기서 끊는 사악한 새를 용서하시길.. 끊을 데가 없었다구요오~~~~~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4 - 관련자료:없음 [33312]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6 21:09 조회:135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4 - ================================================================== 콰콰아아앙------! 카스트로의 검은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천둥 때 문인지 들리지 않았다. "폐하?" "…아…, 당장 찾아내! 젠장, 라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카스트로는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친위대원들을 움직여서, 당장 루시타니아를 찾아내라." "안됩니다!" "……!" 카스트로의 명령에 라에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카스트로는 의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질렀다. "라엘!" "안됩니다!" 카스트로의 까만 눈이 노기를 품고 라에르를 쏘아보았다. 라에르는 그 시선을 맞받으며,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위대원들을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왕비전하께도 친위대원들이 붙어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침착하게 생각하십시오!" 입술을 짓깨물며, 카스트로는 정면을 노려보았다. 국왕과 친위대장 사이에 큰 소리가 오가는 것을 들은 귀족들이 수근거린다. 카스트로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눈을 감고 주먹을 이마에 댔다. "왕궁에 사람을 보내. 기사단원이든 근위대원이든 불러모을 수 있는 인원은 전부다 불러와!" 아까보다는 진정된 목소리가 카스트로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라에르도 순순히 대답했다. 친위대원 한 명이 왕궁으로 말 달리는 것을 확인하고, 카스트로는 천막 안을 서성였다. 소나기는 점점 더 거세게 퍼붓고, 밝았던 하늘도 시시각각 어두워진다. 시간이 지날수 록 카스트로는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루시타니아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두 사건이 연관되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카스트로는 지금 머 릿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루시타니아…….' 아직까지도 그녀는 카스트로에게 소렐의 딸이다. '루시타니아……, 젠장! 루시타니아!' 하지만 그녀는 또한 그의 아내였다. '어디 있는 거야? 바보처럼 이럴 때 어디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이유로 카스트로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 차가운 빗소리에 말발굽소리가 섞여든다. 카스트로는 수십 마리의 말발굽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천막 안의 친위대원들이 내준 길 사이로 기사단장 카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나이트는 빗물이 뚝 뚝 떨어지는 몸으로 옆구리에 투구를 들고서 카스트로의 앞에 한쪽 무 릎을 꿇었다. 암녹색의 젖은 망토는 더욱 어두운 색을 띄고 있었다. "기사단장 카나이트 폰 루시노 이하 50명의 기사들이 폐하의 명을 받들어 지금 도착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지시를 내렸다. "왕비가 숲에서 행방불명됐다. 그 전에 짐을 노리는 암살자가 있었 고, 지금 근위대장과 부대장이 그를 추격중이다. 경이 할 일은 왕비를 무사히 찾아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알겠나?" "네, 폐하!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카나이트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져 가는 말 발굽소리들이 카스트로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천막 안에는 언제부터인 지 불이 지펴져있었고, 그래서인지 안에서는 더욱 짙은 비냄새가 감돌 았다. 카스트로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세게 누르다 가 매서운 눈초리로 숲을 노려보았다. '범인이 누굴까?' 일단 루시타니아를 찾을 사람들을 숲으로 들여보내고 나자, 그제서 야 범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카스트로는 근처에 있는 시종장 하미 르를 불렀다. "명단에……, 레이니트경이 있나?" 시종장 하미르는 주욱 적어놓은 두 개의 명단을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숲에서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아직 나오지 않은 자의 명단은?" "몇 명인가 더 있습니다만, 정확히 대조해보지 못했습니다. 잠깐 기 다려주십시오." 그때, 천막 밖에서 당혹스런 외침이 울려 퍼졌다. 카스트로가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친위대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서 보고했다. "왕비전하의 말이, 주인이 없는 채로 돌아왔습니다." "……!" 카스트로의 얼굴에서 탈색되는 것처럼 색소가 빠져나간다. 어느 새 인가 파리해진 입술이 뻐금 열렸다. 하지만 말소리를 내지 못하고 꾹 입술을 다문 카스트로는, 다음순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친위대원을 거칠게 밀쳐내며 천막 밖으로 내딛었다. 천막 밖의 빗속에서 친위대원 한 명이 말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말고삐가 이어진 곳에는 눈에 익은 백마가 빈 안장을 하고서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비어있는 안장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카스트로는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느꼈다. 순식간에 치받아 올라온 그 덩 어리는 지금까지 용케 지켜오던 카스트로의 이성을 한순간에 날려버렸 다. "어느 쪽에서 왔나?" 지옥에서 갓 나온 사신의 것처럼 지독하게 음습한 목소리였다. 친위 대원은 흠칫 놀란 얼굴로 숲 한쪽을 가리켰다. 카스트로의 다음 행동 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친위대원의 손 에서 말고삐를 잡아챈 카스트로는 백마에 훌쩍 올라타, 그대로 친위대 원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폐하!"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지르던 라에르는 이를 악물고, 가까이 있던 말 을 아무거나 잡아타고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친위대원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급한 대로 말을 잡아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지 런히 빗속으로 말달리는 친위대원들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암살자가 숲 속에 있는 지금, 국왕 카스트로의 목숨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쿠르르르릉! 콰아앙! 로카르경은 멀찍이 보이는 건물 쪽으로 말을 끌었다. 그가 끌고 있 는 말 위에는 자주색 망토로 머리와 몸을 가린 루시타니아가 파리한 얼굴로 말고삐를 꼭 쥐고 앉아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사 정없이 그들의 몸을 후려치고, 번쩍거리는 번개와 우릉거리는 천둥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간신히 오래된 건물의 현관까지 도착한 로카 르경과 루시타니아는 건물 입구의 널따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한 숨을 돌렸다. 그들의 뒤를 따라 축 늘어진 아젤을 말등에 매단 채 말 고삐를 잡은 베이경이 털레털레 걸어오고 있었다. 여름이라고는 하지 만 빗줄기는 차갑기만 했다. 루시타니아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부 르르 떨었다. 비를 가린다고 가렸지만 이미 드레스는 서있기도 무거울 만큼 푹 젖어있었고, 언제 풀어졌는지도 모를 머리는 비에 젖어 허리 까지 늘어져있었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오한이 난다. 루시타니아 는 막막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눈 부신 빛을 발하며 벼락이 내리꽂힌다. "비가……언제 그칠까요?" "지나가는 비입니다. 곧 그칠 겁니다." 로카르경은 루시타니아에게서 건네 받은 자신의 망토를 쥐어짜면서 대답했다. 비틀린 천 사이로 엄청난 양의 물이 주루룩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비까지 고스란히 맞은 바람에 일행의 몰골들이 가관이었다. "아젤은 괜찮아요?" "……네, ……전하." 기운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아젤은 덩치 좋은 베이경의 부축 을 받으며 말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운이 나빴다. 그 외에는 달리 설명 할 말이 없었다. 하필이면 왜 번개가 바로 앞의 나무에 떨어졌더란 말 인가! 카스트로의 무리를 따라가던 루시타니아는 이런저런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천천히 말을 몰다가, 어느 순간 앞서가던 일행이 사라져버렸다 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나마 부지런히 앞쪽으로 쫓아갔지만, 가도 가 도 카스트로는커녕 지나가는 사람 하나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한참 을 헤매다가 다시 천막으로 되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릴 무렵에는, 그들 이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먹구름이 두 껍게 끼어버린 뒤였다.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비가 쏟아졌다.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고, 아젤의 앞에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벼락을 맞고 불 꽃과 함께 쩌억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말들이 미쳐 날뛰었다. 특히 루 시타니아와 아젤은 말을 잘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허 공으로 앞발을 드는 말 위에서 아젤이 떨어지고, 말 위에서 미끄러지 던 루시타니아는 간발의 차로 로카르경이 받아냈다. 로카르경과 베이 경은 어느 새인가 도망쳐버린 루시타니아와 아젤의 말 대신 자신들의 말 위에 끙끙거리는 아젤과 파랗게 질린 루시타니아를 말 위에 태웠 다. 그리고 딴에는 천막으로 되돌아간다고 움직였지만, 결국은 이런 엉 뚱한 장소에 와 있게 된 것이다. 로카르경은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노려보며 길게 한숨을 내뿜 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젖어버려서, 몸의 떨림이 이는 것을 막 을 수 없을 만큼 추웠다. 하지만 곁에 자신만을 믿고 있는 루시타니아 를 두고 약한 내색은 추호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로카르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비가 그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지독한 어둠이 가시기를 기다릴 수밖 에 없다. "여기는 어디지요? 왜 왕의 숲 안에 이런 건물이 있죠? 이 안에 누 가 사나요?" 루시타니아의 질문을 받고, 로카르경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서있는 장소를 인식했다. 왕의 숲에 있는 이 정도 규모의 건물, 그것은 하나밖 에 없었다. 바로 폐궁 밖에는. '폐궁…….' 로카르경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스친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안돼요?" 아무 것도 모르는 루시타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로카르경은 소스라치게 놀라 루시타니아의 앞을 막아 섰다. "안됩니다, 전하." "……로카르경?" 루시타니아는 놀란 눈으로 로카르경을 바라보았다. 로카르경은 진지 하게 루시타니아를 만류했다. "안됩니다! 여기는 폐궁입니다.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루시타니아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하지만 로카르경은 물러 서지 않았다. "폐궁이라구요?" "네, 전하. 그러니까 들어가지 마십시오." 루시타니아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얼굴로 로카르경을 응시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로카르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되도록 말을 골라서 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전에 지스카르 전하께서 유폐되셨던 곳입니다." "……!" 여린 보라색 눈망울이 휘둥그레졌다. 로카르경은 루시타니아가 놀란 이유를 확인시키듯 말을 이었다. "지스카르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자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들어 가지 마십시오." 뻣뻣해진 목으로 고개를 끄덕인 루시타니아는 더욱 추워진 얼굴을 하고 건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졌다. 여름 같지 않게 추웠다. 덜덜덜 떨리는 몸을 껴안았지만, 젖은 드레스 때문에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 다. "이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나요?" 잠자코 베이경의 부축을 받고 서 있던 아젤이 물어왔다. 로카르경은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스카르 전하께서 자결하신 뒤, 이 궁은 다시 폐쇄되었다고 들었 습니다." "혹시……이 안에 장작이나, 그런 것이 없을까요? 이대로는 너무 추 워서, 폐렴이라도 걸리면……." 로카르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자신만 해도 이렇게 추운데, 저 여린 왕비야 말할 필요가 있을 까? 하지만 폐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숲으로 가서 불 지필만한 것을 구해보겠 습니다. 베이경, 여기 잘 지키도록." "알겠습니다." 몇 년 사이 제법 친위대원다운 절제를 배운 베이경의 답지 않은 짧 은 대답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만일 뿐, 사석에서는 여전히 그 투덜거리는 성격을 버리지 못했지만. 로카르경은 조금 불안한 눈으로 베이경과 루시타니아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몸을 돌리고 빗속으로 뛰 어들었다. 건물 뒤쪽이나, 안 된다면 숲 속에서 젖은 나뭇가지라도 주 워와야 할 것 같았다. 쏴아아아아아-------! 아직까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빗줄기는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적막에 더욱 큰 소리로 다가온다. 몸을 움찔움찔 떠는 여자들이 안타 깝기는 했지만, 베이경이라고 그녀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젖은 망토를 둘러줄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안아줄 수 도 없지 않은가. 베이경은 물론 두 여자 중 한 명을 꼬옥 안아주고 싶 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물 론 그 한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이 그녀를 안아줄 수 있다는 희 망도 거의 없지만. "이봐요, 이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요? 폐하께 서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셨다던지 하는 거 말예요." 베이경은 사랑스러운 여인을 따사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 눈길을 받은 아젤은 이 덩치 큰 곰 같은 사내가 헤벌쭉 웃는 것으 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폐하께서 특별히 금하신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부터 이상한 소 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가지 않습니 다." "이상한 소문이요?" 궁금하다는 듯이 루시타니아가 물었다. "네, 전하." "어떤 소문인지 말해봐요." 아젤이 눈썹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물었으면 그 소문에 대해 말해야 지, '네, 전하.'로 끝나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것이……." 어설프게 말을 끄는 베이경을 향해 아젤이 더더욱 인상을 그어 보였 다. "그것이 뭐요?" 베이경은 아젤의 표정을 보고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휴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여기에서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 문이 있습니다." "유령?" "유령이요?" 두 여자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지만 그 표정은 상이하게 달랐다. 루 시타니아는 겁에 질려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아젤은 한심하다는 표정 으로 베이경을 노려보았던 것이다. 베이경은 아젤의 눈초리에 밀려, 스 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에……, 여기를 관리하던 사람들이 전부 그 유령 때문에 그만두었 다고……." "흐음……재밌군요. 한번, 확인해 볼까?"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얼굴 가득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아젤이었 다. "그만해, 아젤." 루시타니아는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유령이라니! 그런 거 절대 확 인해보고 싶지 않았다. 아젤은 찔끔 놀란 얼굴로 루시타니아를 돌아보 다가, 루시타니아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요, 전하. 확인 안 해볼 테니까." 조용히, 그러나 드러나도록 안도하는 루시타니아를 보며, 아젤은 한 가닥의 미련을 남겼다. "하지만 안에서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아, 이건 어때요? 전하께서는 여기 계시고, 저 혼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아젤……!" 삐이걱! "……!" 때맞춰 들린 음산한 문소리에 세 사람 모두 숨을 죽였다. 그들의 전 신에 오싹 한기가 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삐걱! 삐이걱! 연달아 들리는 낡은 문소리. 그리고 이내, 세 사람의 시선이 모인 궁 의 문이 덜컹! 소리를 내고 열리면서 시커먼 속을 내보였다. 순간, 루 시타니아는 겁에 질릴 대로 질려 두 눈을 질끈 감고 온 숲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출판이라.. 축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마냥 느긋(--;)해서 별로 실감을 못하고 있네요. 연재 완결한 뒤에, 원고 넘기게 될 것 같습니다. ^^ 아마 2월중에 연재 끝낼 것 같구요. (1월을 못지키네요.. --;) ^^ 아직 이런저런 말씀 드리기에는 이른 것 같아 미루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아는 게 없어서 드릴 말도 없네요. --; 그리고 루시타니아의 일로 제게 협박멜 보내신분.. ^^ 두고보신다더니, 만족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쪽지 주신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느긋하게 굴다가 슬럼프에서 헤매는 새였음당 --;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5 - 관련자료:없음 [33343]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7 20:40 조회:1343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5 - ================================================================== "……!" 카스트로는 힘껏 말고삐를 잡아챘다.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분명 루시타니아의 것이다. 아니, 적어도 카스트로는 그런 확신을 가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카스트로는 그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 뒤따라온 라에르가 초조한 표정으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흠뻑 젖은 흰색의 린네르 셔츠만을 걸친 채 사납게 내리치는 장대비를 고스 란히 맞고 있는 카스트로는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어느…… 쪽이지?" 깊게 잠긴 듯한 음성이었다. 목에 걸린 목소리가 초조함을 띄고 흔 들린다. "폐궁 쪽 같습니다. 지금 가는 방향과도 맞고……." 카스트로는 빗물이 타고 흐르는 얼굴과 착 들러붙은 머리를 뒤로 쓸 면서 폐궁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가자!" "네, 폐하!" 카스트로는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기세가 줄지 않는 빗줄기가 속도를 더하는 카스트로의 전신을 후려친다. 차가운 빗줄기가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자극한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머릿속에는 그런 자극까지 전달될 여유가 없었다. 눈을 파고드는 빗물이 귀찮고 비에 젖은 머리 가 무거웠지만,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저 가슴 한복판을 그어 내리는 섬뜩한 비명과 지금 어떤 지경에 처했을지 모를 루시타니아에 대한 생 각밖에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카스트로는 숲 사이로 드러나는 폐궁을 확인하고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왕의 숲 한 구석에 숨어있듯 자리한 푸른색의 궁은 수백 년 세월의 때를 타서 낡아있었다. 하지만 그 유서 깊은 건 물보다 카스트로의 주의를 온통 차지한 것은, 폐궁의 계단을 뛰어내려 와 어딘지도 모를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금발머리와 푸른 드레스 의 루시타니아였다.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가 달려가는 방향의 조금 앞으로 말을 몰고 갔다. 다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리자, 철벅거리는 소리 와 함께 흙탕물이 부츠 위로 튀어 오른다. 카스트로는 서둘러 루시타 니아에게 다가가, 앞도 보지 않고 달려오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루시타니아의 몸을 받으며, 카스트로의 늘씬한 장 신이 뒤로 휘청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눈을 한 팔로 가리고, 다른 손으로 늘어진 드레스를 잡은 채 달려가 던 루시타니아는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안자, 겁에 질려 더 크게 비명 을 올렸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 졌다. "루시타니아!" "……!"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 정신차려! 괜찮소?" 루시타니아는 가볍게 뺨이 두들겨지자, 공포 때문에 크게 열린 동공 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은 거요? 다친 데는 없어? 말 좀 해봐, 루시타니아!" "어……어,……우아아아아아앙!" 카스트로는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울음을 터트리는 루시타니아 를 안으며 당혹스러워졌다. 비 때문에 차갑게 젖어버린 린네르 셔츠를 금세 뜨거운 눈물이 데워간다. 카스트로는 놀란 표정을 하고서도 연신 루시타니아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루시타니아……." "폐…폐하!" "폐하!" 카스트로는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루 시타니아의 가정교사인 아젤과 친위대원 베이경이었다. 카스트로는 더 욱 파고드는 루시타니아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베이경을 추궁하듯 쳐 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암살자가……, 나타났나?" "네?" 놀란 눈으로 서로 마주보는 그들을 보며, 카스트로는 암살자가 이들 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대체 왜?' 겁에 질려 끊임없이 울어대는 루시타니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 감해졌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먼저 루시타니아를 달래는 게 우선이라 고 판단했다. "괜찮소, 루시타니아. 아무 일도 없어.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 평소보다 낮은 음성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내리치는 빗속에서 끌 어안고 있는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울고있는 루시타니아를 달래는 카스트로를 보며, 아젤은 뜻하지 않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비에 흠뻑 젖은 셔츠가 상체의 골격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상 체에 들러붙은 얇고 하얀 셔츠위로 피부색이 스며 나와 묘하게 사람의 눈을 잡아끈다. 하지만 아젤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 다. 그저 달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듯한, 그리고 뭔 가에 안도하는 듯한 카스트로의 표정 때문이었다. 어떤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은 채 카스트로를 보는 아젤의 얼굴에 기묘한 감 정이 흘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루시타니아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카스트로를 좋게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항상 다른 여자에게서 떠돌고, 항상 루시타 니아를 힘들게 하는 방종하고도 냉정한 사내라고 생각했었다. 여성 공 통의 적쯤으로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젤은 그런 감정이 다르게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 읊조리듯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떨고 있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끌어안고 쓰다듬는 모습이, 이 순간만은 뭐에라도 홀린 듯 너무 멋있 게 느껴졌다. 반할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웠다. 카스트로는 가슴을 적시며 울어대던 루시타니아가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자 그녀를 품안에 안아들었다. 170리가 채 안 되는 루시타니아는 가볍게 두 팔에 안아진다. "폐하?" 라에르가 뒤따라와 카스트로를 불렀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타고 왔 던 백마 위에 루시타니아를 올리고, 자신도 그 뒤에 올라탔다. "라엘, 망토를……." 라에르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카스트로는 루시타니아 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고, 그 위를 자주색 망토로 가려 비를 막았 다. 그리고 한 손에는 루시타니아의 허리를, 다른 손에는 말고삐를 쥔 채 아젤과 베이경을 돌아보았다. "로카르경은 어디 있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베이경은 움찔 놀라, 카스트로를 올려 다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 사이 아젤이 대답했다. "루시타니아 전하의 명으로 장작을 구하러 갔습니다." 카스트로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아젤을 돌아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 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듣기로 하지. 그럼." 카스트로는 천천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방향을 가늠하고, 차츰 속 도를 가해 숲을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앞뒤로 라에르와 친위대 원들이 호위하며 달려가고 나자, 베이경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입술을 삐죽였다. "하필, 그때 오실 게 뭐람. 왜 쓸데없이 들고양이가 거기서 나오는 거야?" 아젤은 베이경의 투덜거림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폐궁 쪽으로 몸 을 돌리며 말했다. 걸음걸이가 절뚝여졌지만, 아젤은 걷는 데 별 어려 움을 느끼지 않았다. "로카르경을 찾아서 돌아가야겠어요." "그러죠, 아젤양." 투덜거림도 잊고, 금세 뒤따라가는 베이경이었다. 두두두두두-------! 비가 멈추어갈 무렵, 자주색 망토를 걸친 친위대원들이 숲에서부터 빠져 나와 왕의 숲 남쪽에 세워둔 임시 천막 앞에 말을 세웠다. 그들 사이에 감싸이듯 호위되어 도착한 카스트로는 친위대원들의 사이로 나 가, 놀란 얼굴로 웅성이는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폐하, 이게 대체……." 비에 흠뻑 젖은 카스트로의 몰골에 귀족들은 말을 못 잇고 버벅대었 다. 카스트로는 쉰 듯한 목소리로 한사람을 불렀다. "다이크경은?" 다른 쪽 천막에서 다이크경이 누군가를 앞세우고 다가와, 카스트로 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신 다이크 폰 하우노, 폐하의 명을 받들어 폐하의 암살미수범을 잡 아왔습니다." 카스트로는 시선을 떨어뜨려 고개를 푹 숙인 채 꽁꽁 묶여있는 사내 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검보라색 머리의 사내였다. 카스트로는 냉랭 한 표정으로 레이니트경을 쏘아보다가, 다이크경에게 지시했다. "이 자를 왕궁 지하감옥에 가두고, 이 길로 가서 헤르트경을 체포하 라!" "네, 폐하!" 다이크경은 절도 있게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다시 시선을 틀어 다른 사람을 불렀다. "하이파경!" "네, 폐하!" 어의 하이파경이 귀족들 사이에서 나와 카스트로 앞에 와서 섰다. "경은 지금 곧 짐을 따라 오라. 오늘 사냥회는 유감스럽지만, 여기서 마치겠소. 근위대는 이 곳의 뒷처리를 하고, 오늘밤 이 자를 친국을 할 테니 준비하고 대기하라!" "네, 폐하!" 다이크경의 대답을 듣고, 카스트로는 다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철 벅철벅. 카스트로가 탄 말이 물이 고인 곳에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카 스트로는 귀족들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그대로 왕궁으로 말을 몰 았다. 그 뒤를 자주색 망토의 친위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뒤따랐다. "무…… 무슨 소리요, 그게!" 대경실색한 헤르트경은 무작정 문을 밀고 들어오는 흰색과 파란색의 제복을 입은 자들을 보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헤르트경의 집으로 들이닥친 근위대원들은 거의 무방비상태인 헤르트경을 잡아 밧줄로 묶 었다. 근위대 부대장 시에르는 사무적인 말투로 헤르트경에게 말했다. "헤르트 폰 사르노. 왕명에 따라 당신을 국왕암살미수의 혐의로 체 포한다." "대체 그게……." 헤르트경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시에르는 넓은 저 택의 홀과 겁에 질린 하인하녀들을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헤르트경 에게 시선을 꽂았다. "레이니트 폰 사르노, 그 자가 사냥터에서 국왕폐하를 암살하려 했 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는 친위대장의 호위로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 지만, 레이니트경의 대역행위에 헤르트경께서도 관여되었을 거라고 의 심하고 계십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카분과 나누어보시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암살이라니! 레이가 그럴 리 가……." "이미 레이니트경은 왕궁의 지하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늘 친국이 있 을 테니 그곳에서 의혹을 풀어보시죠. 돌아가자." 매끄러운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고, 시에르는 자신들이 쳐들어온 문 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시에르경." 꽁꽁 묶인 헤르트경의 노쇠한 몸을 거칠게 밀면서, 근위대원들은 준 비해온 마차를 열었다. 헤르트경이 휘청이며 마차에 오르자 근위대원 두 명이 따라 오른다. "출발!" 말에 올라 탄 시에르의 명령에 따라 마차를 둘러싼 근위대원들이 말 을 몰기 시작했다. 마차도 덜컹거리며 바퀴를 굴리고, 헤르트경은 엄중 한 호위 속에서 왕궁으로 압송됐다. 욕실 전체가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카스트로는 김이 모 락모락 이는 물 속에 전신을 푹 담그고 얼었던 몸을 녹이고 있었다. 부지런히 왕궁까지 따라온 시종장 하미르와 어의 하이파경은 다짜고짜 카스트로와 루시타니아를 떼어내고, 카스트로를 뜨거운 물 속에 내던 져버렸다. 왕비의 침실에서는 시녀장 다나가 루시타니아를 자신과 똑 같은 처지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의 하이파경의 첫 번째 지 시였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전신이 얼어붙을 것 같던 추위는 많이 가 신 것 같았다. 대신 몽롱하니 피로가 쏟아지는 것만 빼면,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휴우……." 카스트로는 졸음과 섞인 한숨을 길게 뿜어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이대로 그냥 자버리고만 싶었다. 온몸이 노곤하기만 하 다. "폐하, 시에르경께서 헤르트경을 체포해 지하감옥에 가두었다고 합 니다." 시종장 하미르가 자욱한 물안개 너머에서 말했다. 카스트로는 무겁 게 내려가던 눈을 뜨고 되물었다. "……뭐?" "시에르경께서 헤르트경을 체포해, 지하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느리게 그 말의 뜻이 카스트로의 뇌리 속을 파고든다. "아……, 곧 가겠다고 이르라." "네, 폐하!" 카스트로는 뜨거운 물로 얼굴을 적시고, 이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 다. 시종들이 눈치 빠르게 가운을 입혀준다. '헤르트경이라…….' 그 약삭빠른 사람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하 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시타니아가 실종되어 당황하는 바람에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역시 이 암살미수는 너무 어설펐다. 아마도 레이니 트경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 는 국왕암살이라는 대죄를 지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물 론 카스트로에게는 그를 너그럽게 대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 다. '하지만 누나라면 다를 테지…….' 이것은 어쩌면 기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쯤 자신이 야비하 게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었지만, 야비한 것쯤 우습지도 않았다. '그래, 이쯤이야…….' 자조하며, 카스트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파경에게 상처를 다시 치료받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말리랴 옷을 입히랴 바쁜 시 종들을 의식치 않고, 카스트로는 계속 이후의 일들을 생각했다. 한시라 도 빨리 레이니트경의 소식이 유리나에게 흘러가면 좋겠지만, 꼭 급할 것은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을 죽이려했던 자였다. 목숨만 붙 여놓으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폐하." 카스트로는 흘끗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도 는 갈색의 옷은 루비로 여며져있고, 등뒤로 검은색의 망토가 길게 드 리워져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머리와 최근 들어 점점 희어진 피 부가 대조적이다. 왠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지." 거친 몸놀림에 검은 망토가 휘날리고, 그 뒤를 라에르가 따랐다. 카 스트로는 모처럼 잡은 기회를 어디까지 확대시켜야 할 지 고민하고 있 었다. 단순히 유리나의 일로 끝낼 것인지, 아니면 레이니트경과 헤르트 경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한꺼번에 처리해버릴지. 어쩌면 아직 일을 확 대시키는 것은 이를 지 모른다. 그들의 무리라고 해 봐야 별 볼일은 없을 테니까. ================================================================== 좋은 하루 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6 - 관련자료:없음 [33366]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8 20:31 조회:124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6 - ================================================================== 왕실의 지하감옥은 주로 정치범들을 체포해서 가두어두곤 하는 곳이 다. 물론 고문도 함께 행해져서, 그 속에서 죽어간 자들의 수는 부지기 수였다. 뚜벅뚜벅뚜벅. 가죽 부츠와 지하로 가는 돌계단의 바닥이 부딪히며 울림이 생겨난다. 라에르를 비롯한 친위대원 몇 명과 급하게 불러온 비서관 이제르경을 대동하고, 카스트로는 근위대 부대장 시에르의 안 내를 받으며 지하감옥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에 카스트로는 살갗에 소름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다이크경이 기다리고 있던 듯 인사했다. 카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이 고 고문실을 둘러보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사각의 공간 속 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가 묻은 각종 고문기구들이 죽 늘어서 매 달려 있다. 카스트로는 조금 더 시선을 돌려, 한쪽 벽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젊고 늙은 두 숙질은 상체가 벗겨진 채로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두 사 람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카스트로는 자신의 자리인 듯한 의자에 가 서 몸을 앉혔다. 고문실은 화로와 횃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카스트로가 앉은 곳은 벽에 걸린 죄인들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그 옆자리에 있는 작은 책상으로 가서 서류뭉치를 내려놓고 이제르경이 앉는다. 잠시 고문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카스트로는 곁에 있는 다이크경을 돌아보며 말 했다. "시작하시오, 다이크경." "네, 폐하!" 절도 있게 대답한 다이크경은 냉엄한 얼굴로 레이니트경을 돌아보며 준비해둔 말들을 입밖에 꺼내기 시작했다. 사냥터에서 있었던 국왕암살의 기도와 왕비의 실종 등의 사건들은 살에 살을 붙여 엄청난 눈덩이로 변해 아르노를 강타했다. 사냥터에 함께 있었던 귀족들과 그 수행원들은 조심스럽게 이후의 일들을 예측 하느라 바빴다. 혹자는 불행한 레이니트경을 동정했고, 혹자는 대역죄 를 저지른 그를 비난하고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들만의 탁상공론일 뿐, 아직은 친국하는 국왕 카스트로의 눈치를 조심 스레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문이 왕궁의 예배당에 있는 비제에게까지 당도한 것은 실상, 그 어떤 곳보다 빨랐다. '열 한 개의 검'의 첩자가 부지런히 그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 직후 실레니크가 찾아와 직접 그 상황을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어딜 가나 권력의 근처에는 피비린내가 나는군. 진절머리 나는 일 이지." 따끈한 차를 마시며, 실레니크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이 있 는 곳은 예배당 안쪽의 내실이었다. 침실과도 연결된, 응접실보다는 조 금 더 편안하고 또 은밀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비제는 테이블을 사이 에 두고 실레니크와 마주앉아있었다. 차갑고 습기 찬 공기 때문인지 유난히 차 향이 짙게 느껴진다. "라디프에서도 한차례 피바람이 불었다지? 바로 그 왕비 자리를 놓 고 말이야." "아아……, 그래. 그러고 보면 참 탈도 많은 혼사로군." 실레니크는 가볍게 혀를 찼다. 비제는 손안에 든 찻잔의 온기만 어 루만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까지 들어. 아무래도 이 혼사,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아니, 유리나 전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국왕폐하 말일세. 피를 너무 많이 봤어. 느낌이 불길해. 그런 생각이 들어."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리며, 실레니크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비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글쎄……. 이쪽에서는 어차피 터질 일이었어. 때가 지금과 맞아떨어 졌을 뿐이지." "그런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다지 납득하지 못하는 실레니크였다. 비제는 피식 웃고, 손안의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윽한 향이 기분을 차 분하게 한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레이니트경은 운이 나빴을 뿐이지. 아니, 폐하 의 눈밖에 난 것부터가 잘못인 거지." "흐음." 실레니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만히 차를 마셨다. 축축했던 습기 로 기분까지 우울했던 것이 조금은 나아진 것도 같았다. 물론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지만. "체리나 전하께서 많이 놀라셨다고?" "아……, 그래." 얼결에 대답한 실레니크는 곧이어 그 냉정한 얼굴에 한 가닥 짓궂은 미소를 떠올렸다. "뒤로 빼기만 하더니, 그래도 체리나 전하께 관심이 있기는 있나보 지?" 살랑살랑 머리를 젓고, 비제는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런 게 아니야. 이성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주군의 여동 생이니까." "호오, 너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친 혈육조차 나 몰라 라하던 게 누구였더라?" 가벼운 빈정거림이었지만, 받아들인 비제는 정색을 했다. "내게 친 혈육 따위는 없어." 지나칠 정도로 싸늘한 반응이었기에 실레니크는 아차, 하는 심정으 로 혀를 물었다. 10년이나 되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까? 비제에게 있어서의 두 가지 역린, 가족과 카르미나의 이야기를. "미안. 잠시 실수했다." 비제는 생각보다 쉽게 경직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냉담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네가 할 일이 있어." "응?"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비제의 말이었다. 실레니크는 연하늘색 동 공을, 놀란 채로 비제에게 고정시켰다. 비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리나 전하를 부탁해." "으응?" 무슨 소리냐는 듯 콧등에 주름을 잡는 실레니크를 똑바로 응시하며, 비제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반복했다. "유리나 전하를 부탁한다." "……?" 차 몇 모금을 마시고서야, 비제는 남은 설명을 덧붙였다. "상처를 많이 받으실 거야. 그분의 마음이 카르노에 대한 악감정으 로 바뀌지 않게, 네가 그분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 줘. 부탁이다, 실 키." 실레니크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놀라움으로 굳어있던 실레 니크는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그 정도냐, 비제? 네가 나에게 부탁씩이나 할 정도로……, 네 주군이 그리 소중한 거냐?" 비제는 어깨를 으쓱하고, 딴청부리듯 찻잔을 들었다. "글쎄."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왕녀궁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 다. 뒤늦게 레이니트경의 소식을 접한 유리나가 다짜고짜 지하감옥으 로 가겠다고 고집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지 마세요, 전하. 이미 밖에 근위대원들이 쫙 깔렸답니다." "비켜요. 직접 확인해 보겠어. 확인만 해보겠다잖아요." 유리나는 인상을 쓰면서 문 앞을 가로막은 시녀장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한 가닥 위엄과 우아함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안되십니다. 그곳이 어디라고 가시겠다는 거예요? 폐하께서도 전하 께 조용히 근신하고 있으라, 지시하시지 않았습니까?" 시녀장을 노려보는 유리나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한 겹 내려앉았 다. "폐하를 뵙겠어요. 나는 믿을 수 없어! 이건 음모일 거예요. 폐하께 서 레이니트경을 마땅치 않아 하신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유리나는 문이 밖에서부터 열리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내보내 주는 건가, 라는 희망을 가지고 바라본 문가에는 눈에 익은 사람이 들 어서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하고서도 어딘지 모를 고집이 드러나 보이는 그 밤색머리의 아가씨는 이왕녀 체리나였다. 체리나가 들어서 자마자 밖에서부터 다시 문이 닫혔다. 유리나는 인상을 쓰며 문가를 노려보았다. "밖에서 언니가 하시는 말씀 들었어요." "……!" 그제서야 주의를 여동생에게 옮긴 유리나는, 기이할 정도로 적대감 을 내뿜는 체리나를 눈치챘다. 반항기 가득한 얼굴이 똑바로 유리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음모라고요? 믿을 수 없다고요?" 유리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상한 반응을 하는 체리나를 불러보았 다. "체리나……?" "언니가 보셨나요? 오라버니가 내 눈앞에서 죽을 뻔했어요. 라에르 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그 화살에 꿰여 돌아가실 뻔했다고요.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지금까지도 그 대역무도한 반역자를 두둔할 수가 있 죠?" '반역자'라는 말에 유리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체리나는 그런 유리나를 더욱 몰아쳤다. "……오라버니께서는 그래도 언니가 걱정하실까봐 일부러 저까지 보 내셨는데. 언니는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겨우 그건가요? 음모요? 너무 하시는군요. 언니에게는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 사람밖에 걱 정되지 않아요? 오라버니가 돌아가셨어도, 언니는 그 사람을 두둔하실 생각이셨나요?" 유리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체리나는 그런 유리나를 증오스럽다 는 듯이 노려보았다. "실망했어요. 정말 실망했어요. 어차피 친국이 끝나면 다 밝혀지겠지 만, 저번에 그 자가 보였던 추태하며, ……그 사람이 오라버니를 해치 려는 의도는 뻔히 보이는 것 아닌가요? 아시면서, 어떻게 그런 말씀 하실 수 있어요? 어떻게 아니라고 우기실 수 있냐구요." "그만해, 체리나!" 유리나는 듣다못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유리나는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근처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로 숨을 고르는 유리나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머리가 욱씬욱씬 쑤셔온 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고, 그래서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럽다.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되고,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리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유리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국왕을 암살하려는 자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남은 것 은 오직 하나, 죽음뿐. 그것이 레이니트경이 아닌 다른 자의 일이라면, 유리나도 가차없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반역자에게 죽음을!' 하지만 국왕을 암살하려 한 사람은 그녀가 사랑해마지않는 레이니트 경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레이니트경이 순수한 의도로 자신에게 접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순진하게만 커온 자신이 아닌지라, 충분히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런 의도라도 유리나는 그를 사랑했다. 본의든 아니든 자신에게 정성스럽게 대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를 사랑했다. '레이니트…….'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걸까? 아닐 거라는, 잘못 안걸 거라 는 고집도 부려보았지만, 가슴 한가득 이렇게 불안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너무 큰 때문이었다. '그래도……확인해 봐야돼.' 유리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체리나의 적대적인 시선 을 맞받으며, 유리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확인도 안 해보고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어. 내 눈으로, 내 귀로 확인해 보고서……, 그리고서야 믿겠어. 비켜주겠니, 체리나?" 이미 확고하게 의지를 다진 눈빛을 보고, 체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비켰다.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죠. 확인한 뒤에도 아니라고 우기신다면, 나는 언니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겠어요." "……." 유리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뻣뻣할 정도로 고개를 세우고 방문을 밀 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근위대원들이 막아섰다. "비켜라. 유리나 전하께서는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니까." 체리나의 명령에 근위대원들은 주춤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체리나 의 앙칼진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어. 폐하께로 유리나 전하를 인도하라!" 이곳을 지키고 있던 시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나에게 허 리를 숙였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유리나는 오만할 정도의 자세로 고개를 까딱였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7 - 관련자료:없음 [33397]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19 20:49 조회:1121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7 - ================================================================== 원래부터 어둡고 습윤한 데다, 비까지 온 지하의 감옥은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다. 유리나는 몇 번이고 되돌아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마치 가시밭을 걷는 심정으로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철컹거리는 철창소리가 들릴 때마다 머리털 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다. 드레스자락을 꽉 쥐고 있는 손의 마디마 디가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옆에서 부축해주겠다는 호위기사의 친절은 깨끗이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 조그만 것 하나라도 남에게 기댔다가는 자신의 한 가닥 남은 의지마저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규칙적인 유리나의 구두소리가 좁은 계단의 벽에 부딪혀 소름끼치는 울림을 만들어낸다. 뚜벅 뚜벅 뚜벅. 호위기사의 발 소리가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서 반 호흡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메아리 친다. 사이를 두고 앞서가는 시에르는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 다. 그의 뒤통수를 보며, 유리나는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시에르는 계단의 끝에서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멈춰라! …시에르경?" 아래에서 들려온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계단까지 울려왔다. "유리나 전하께서 폐하를 뵙기를 청하신다. 폐하께 전해주겠나?" "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 꺼리는 듯한 목소리에 대고, 시에르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체리나 전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고 하셨다. 가서 전하라. 유 리나 전하께서 바로 여기 와 계신다고." "알겠습니다, 시에르경." 끼이익! 뇌리를 긁어내리는 금속성이 울리고, 그 안으로 발소리가 하나 멀어져간다. 유리나는 시에르가 서있는 곳의 바로 옆으로 와서 섰다. 이미 닫혀버린 녹슨 철문이 육중한 무게로 그들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옆으로 근위대원 한 명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다시 안에서부터 발소리 하나가 가까워지고, 안쪽 에서부터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근위대원은 유리나를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폐하께서 지금은 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친국이 끝난 뒤에 일왕 녀궁으로 찾아 뵙겠다고 하십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전하." 유리나는 안색을 굳혔다. 단번에 허락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여 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뵈어야겠다고 전하라!"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들이지 말라는 어명이셨습니 다." 유리나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부쩍 충동이 이는 것이 느껴진다. "가서 아뢰어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뵈어야겠다고!" "안됩니……전하!" 완강하게 거절하는 근위대원의 모습에 유리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근위대원을 밀치고 열려있는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호위기사가 유리나를 잡으려는 자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유리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또각또각또각. 그녀의 발소리가 더욱 급하고 크게 울린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안쪽 어디에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나는 전신에 소름이 일 었다. 흠칫해서 멈춰 선 사이에, 시에르가 쫓아와서 그녀를 막아섰다. "전하! 안됩니다, 전하!" 유리나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드레스 자락을 들고 뛰었다. 탁탁탁탁탁! 카스트로가 있을 만한 곳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좁은 복도 구석구석에 줄지어 선 횃불들이 하나의 문 앞에 몰려 서 있는 자 주색 망토의 친위대원들을 너무나 잘 비춰주고 있었으니까. "전하!" 시에르의 외침을 피해 카스트로가 있는 곳까지 왔지만, 문제는 바로 이 친위대원들이었다. 친위대원들은 조금의 틈도 없이 문 앞을 막아선 채, 유리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멈추십시오, 전하." "비켜라! 폐하를 뵈어야겠다." 유리나의 평소보다 톤이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안됩니다, 전하." 여전히 완고한 친위대원들의 태도에 유리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ㅋ……!"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하감옥을 가득 채워버리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하얗던 유리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더 이상 말다툼하는 것도 시간이 아까웠다. 유리나는 다짜고짜 문을 막은 친위대원을 밀쳐내려 들었다. "전하!" "비켜! 당장 비키지 못할까!" "그만 두십시오!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체격 좋은 친위대원들이 가녀린 여자의 손에 비틀거릴 리도 없었다. 바위처럼 버티고 선 친위대원들을 보며, 유리나는 체면도 내던져버리 고 냅다 소리질렀다. "폐하! 폐하----! 문 열어요, 폐하!" "전하!" 몸으로 막는 친위대원들과 뒤따라온 시에르 사이에서 유리나는 앙칼 진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폐하! 열어요, 폐하! 당장 열어줘요! 왜 피하는 거죠? 폐하! 폐하! ……카스트로------!" 울음기 섞인 외침소리가 웅웅거리며 지하감옥의 습기 찬 복도에 메 아리친다. 잠시동안 유리나의 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조용히 이어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지막한 울음소리와 '카스트로'라는 이름 만이 울리던 복도에 끼익 끼이익! 하는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는 마찰 음이 들려왔다. 조금씩 안에서 열리는 철문 틈으로 조금씩 고문실 안 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들어오십시오." 친위대장 라에르가 문 옆에 서서 유리나에게 말했다. 거짓말처럼 친 위대원들의 장벽이 물러서고, 유리나는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그 안 에 들어섰다. 시각보다 먼저 유리나를 자극시킨 것은 고문실 가득 뭉클거리며 피 어오르는 고기 타는 듯한 냄새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지독한 피비 린내였다. 본능적으로 코를 틀어막은 유리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 렸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벽에 걸린 휘황한 횃불이었다. 어둠 속을 노랗게 밝히는 불빛들이, 벽을 따라 걸려있는 이름도 모를 피묻은 쇳 조각의 고문기구들을 환히 드러나게 해서 더욱 공포심을 가중시킨다. 유리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고개를 돌린 유리나의 공포감 어린 시선 속에 박히듯이 들어온 것은 벽에 양팔이 매달려 고개와 몸을 늘어뜨린, 익숙한 검보라색 머리의 남자였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에서부터 하릴없이 미끄러진 유리나의 눈길은 벗겨진 상체 가득히 채워진 채찍질의 흔적들과 그로 인해 배어 나오는 붉고 붉은 핏자국에 가서 멎었다. "……!"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버텨오던 다리가 꺽 이는 순간, 뒤에서부터 그녀의 호위기사가 부축했다. 그때, 냉랭한 목 소리가 유리나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기절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 레이니트경의 조금 앞쪽에, 미처 있는 지도 몰랐던 의자에서 낯익은 검은머리가 일어나 유리나를 돌아보았 다. 유리나는 그 싸늘한 눈매를 응시하며 망연히 서있었다. 이런 모습 의 카스트로는 처음이었다. 저 장난 많은 말썽꾸러기 동생이 저런 얼 굴을 할 수 있는 줄은 지금 처음 알았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잔 혹한 눈빛을 띄고 있는 저 사람이, 과연 자신이 알던 동생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싸늘한 표정에 잔인한 미소를 덧씌웠다. "이 곳에 오시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가만히 기다리고 계시면, 곧 찾아 뵙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소리가 얼음으로 화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유리나는 할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카스트로의 기세에 눌려 입도 벙긋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마디도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고집 부려서 이곳까지 직접 와 보신 소감은? 만족스럽 습니까?" "……카…스트로……." 신음처럼 간신히 낸 목소리였다. 카스트로는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 해진 누나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돌아가십시오. 아직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 카스트로는 아무 대답도 없는 것에 짜증을 내며, 곁에 있던 다이크 경을 불렀다. "다이크경!" "네, 폐하!" 카스트로는 기절해버린 레이니트경에게 차가운 시선을 고정한 채 명 령했다. "유리나 전하를 궁까지 모셔다 드리시오." "네, 폐하!" 다이크경이 저벅거리며 다가오자, 유리나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고문장! 찬물을 끼얹어라. 언제까지 죄인이 자게 내버려둘 참인가?" "네, 폐하!" "카스트로-----!" 그제서야 막혀있던 유리나의 말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까 지 꼼짝할 수 없었던 몸이 마치 술 취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리 나는 자신을 부축하는 호위기사에게서 몸을 떼고, 다이크경을 스쳐지 나 카스트로의 앞까지 걸어갔다. 카스트로는 앉아있는 채로 양손을 양 쪽의 팔걸이에 걸치고, 슬쩍 눈을 들어 유리나를 쏘아보았다. "뭡니까?" 도전적인 눈빛이 유리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본다. 유리나는 침을 꿀 꺽 삼키고,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말문을 열었다. "나와……, 이야기를 해요. 잠깐만 시간을 내줘요, 폐하." 다시 예의를 갖춰 말하는 유리나였다. 카스트로는 등을 의자 시트에 기대며 오만하게 유리나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일왕녀궁에서 뵙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정 하시겠다면, 지금 여기서 하십시오." 간격을 두었다가 카스트로가 그렇게 말하자, 유리나는 찌푸린 얼굴 로 카스트로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 고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았다. 유리나는 고민하듯 입술을 잘근 깨물다 가, 고개를 돌려 레이니트경과 헤르트경을 바라보았다. 유리나가 다시 카스트로를 돌아보았을 때는 어떤 의지가 실린 모습이었다. "정말…… 레이니트경이 폐하를 암살하려 했나요?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란 말인가요?" 카스트로의 입술이 잔뜩 비틀렸다. 잔혹스런 빛이 검은 눈 속에서 일렁거린다. "없는 말을 꾸몄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직접 확인시켜드리죠. 고문 장! 당장 그 자를 깨워라!" "네, 폐하!" 촤아악----! 양동이 가득 담겨있던 찬물이,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있 던 고문장의 손에 의해 기절해있는 레이니트경에게 뿌려졌다. "…으……으……."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레이니트경의 축 늘어진 머리가 조금씩 흔들 거린다. 유리나는 멍하니 그런 레이니트경을 바라보았다. 카스트로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레이니트경에게 다가갔다. 훅하고 밀려드는 피비 린내와 살 타는 냄새가 카스트로의 속을 뒤집는다. 뚜벅뚜벅. 카스트로 는 레이니트경의 바로 앞에 서서, 손을 뻗어 축 늘어진 레이니트경의 뒷머리를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쩔렁쩔렁, 레이니트경을 묶어놓은 쇠 사슬이 요동을 친다. "정신이 들었나, 레이니트경?" "……으…흐으……." 유리나는 질린 얼굴로 이빨을 사려 물고, 퉁퉁 부어 제 몰골을 찾을 수 없는 레이니트경의 얼굴을 두 눈에 각인시켰다. 카스트로는 손을 축축하게 적셔오는 피와 물이 섞인 액체의 감촉에 인상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뚜벅 말을 내뱉었다. "경을 찾아온 손님이 있소. 인사를 하겠나?" "……누……" "경이 경애해 마지않는 유리나 전하요. 경이 정말 짐을 죽이려 했는 지, 그게 아시고 싶다는군. 자, 짐의 누이에게 사실을 말해주겠소?" 카스트로는 슬쩍 비켜서며, 레이니트경의 얼굴을 유리나에게 향하게 했다. 부어 올라 두둑해진 눈두덩이가 힘겹게 씰룩거린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눈동자에는 이미 빛이 없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움찔거리 는 그의 몸짓에 그가 유리나를 알아보았다는 걸 눈치챘다. "……." "자, 말하시오. 경이 정말 짐에게 활을 겨누었는지, 아닌지! 아까 전 에도 했던 말이 아닌가?" "……으으……." 괴로운 듯이 머리를 젓는 레이니트경의 태도에, 카스트로는 더욱 세 게 레이니트경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물어뜯 을 듯이 낮게 울려 퍼진다. "말하시오, 레이니트경! 짐을 죽이려 했어, 안 했어? 왜, 사랑하는 사 람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못하겠나?" "…우…시…시러……." 카스트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않고, 레이니트경의 머리 를 뒷벽에게 박았다. 둔탁한 마찰음과 나직한 비명소리, 그리고 다시 윽박지르는 카스트로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말하시오, 레이니트경! 더 이상 날 자극하지마! 마지막 자존심인가? 아니면 내 누이에게 어떤 기대라도 걸고 있는 건가? 웃기지 마라, 레 이니트경! 장담하거니와 지금껏 국왕을 암살하려 한 자들 중에 살아남 은 자는 없어!" 레이니트경의 부딪힌 머리에서 뜨겁고 끈적거리는 피가 배어 나왔 다. 유리나는 두 손을 꾹 움켜쥐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말해요." 카스트로는 갑자기 끼여든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잘도 버티고 서있다. 유리나는 멀리서 보기에도 덜덜 떨리는 몸을 하고, 똑바로 레이니트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내게 말해줘요, 레이니트경. 당신이……, 당신이 폐하를 암살하려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실을 알고 싶어요. 폐하께서 당신을 무고한 게 아니라는 건가요? 정말 당신 이……, 폐하를 죽이려 한 건가요?" 차마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레이니트경을 보며, 유리나는 가 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레이니트경의 눈감은 얼굴이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카스트로는 그 모습을 보고, 레이니트경 에게서 손을 떼었다. 셔츠 소매까지 흘러든 핏물이 불쾌하다. "그랬군요. ……그랬어요. 왜……냐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않겠어요. 미안해요, 레이니트경. 우리의 약혼은……, 이걸로 끝이 군요." "……." 레이니트경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전신에 뒤집어쓴 찬물도, 머 리에서 흘러내리는 핏물도 아닌 다른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나는 두 눈 가득 슬픈 이슬을 매달고서 카스트 로를 향해 말했다. "폐하!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 둘이서만 했으 면 하는 말입니다.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다소 쌀쌀맞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카스트로는 생각에 잠긴 눈으 로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먼저 가십시오. 친국이 끝난 뒤에 따라가겠습니다." "아뇨. 전 지금 했으면 좋겠군요, 폐하. 시간을……, 내주십시오." 단호한 의지가 서린 말투다. 카스트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지요. 다이크경!" "네, 폐하!" 유리나에게로 발걸음을 떼며, 카스트로는 다이크경에게 지시했다. "이후부터 저 두 사람의 심문을 경에게 맡기겠소. 이제르경은 마저 지켜보도록 하고." "네, 폐하!" 카스트로의 움직임에 따라 고문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 작했다. 라에르가 카스트로의 뒤를 따랐고, 친위대원들도 그 주위를 감 쌌다. 오후에 있었던 암살기도 때문인지 더욱 호위가 엄중해져 있었다. "가시지요." 카스트로는 유리나의 앞에 서서 먼저 고문실을 나섰다. 유리나는 다 시 한번 레이니트경을 바라보고서야, 힘겹게 카스트로를 따라 고문실 밖으로 나갔다. ================================================================== 쪽지 주신분, 메일 주신 분.. 감사. 잘 받았습니다. ^^ 쩝.. 게으름이 극에 달해(--;) 답변이 필요한 멜이 아닌 한, 답멜을 못드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게으름뱅이 새였음당-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8 - 관련 자료:없음 [3342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20 21:17 조회:772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8 - ================================================================== 크리스털 잔 안에서 찰랑이는 호박색 액체를 내려다보며, 카스트로 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뜨거운 차보다, 이런 때에는 독한 술이 더 나았 다. "라디프의 국왕과 결혼하겠어요." 카스트로는 눈을 감았다.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뭘까. 이 씁쓸함은. "하지만,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그러면……, 아무런 원망도 갖지 않고, 폐하의 뜻에 따라 조신한 라디프의 왕비가 될 테니까." 카스트로는 내키지 않는 눈을 떴다. 커튼 너머 창 밖은 이미 어두워 져 있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또 생각지도 않은 결과까지 얻어낸 하루였다. 유리나는 자신을 마주보지 않는 카스트로에게 힘겹게, 하지 만 떨리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당당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 고 있었다. "레이니트경의 목숨을 보장해 주세요." "……." 유리나는 과연 카스트로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 다. 처음부터 내내 바뀌지 않는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아, 저렇게 담담 하게 술잔과 창 밖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나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약속해주세요, 폐하. 그대로 놓아달라는 게 아니에요. 다만, 다 만……, 어떻게든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겁니다. 그것만 승낙해 주시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어요. 폐하!" 드디어, 본궁으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카스트로는 유리나를 돌아 보았다. "목숨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 카스트로는 날카롭게 변한 눈초리로 유리나를 추궁하듯 쳐다보았다. "이제 누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자의 목숨이 중요합니까?" "그래요." 단호한 말투였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눈으로, 유리나는 그렇게 대 답했다. "중요해요. 무엇보다 중요해요. 폐하께서 아세요? 장래를 함께 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 그 걸 아세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만 있다면,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어떤 것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을, 폐하께서 아세요?" "……." 담담하게, 징그럽도록 담담하게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카스트로를 보며, 유리나는 울분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모르시겠죠. 폐하께서는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으실 테니까. 그 이기적인 마음에, 자신 말고 다른 이를 품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가슴이, 심장이 아프다. 카스트로는 아프다고 느꼈다.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왕족이면서, 사랑 따위의 허황된 감정을 믿으 신다는 겁니까? 레이니트경이 진심으로 누나를 사랑했다고 믿으십니 까?" 그 지독한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상처 입힌다. 유리나 는 그래서 더욱 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루시타니아 전하를 그렇게 대하시나 보지요? 자 신과 아무 상관없는 남을 대하듯이. 아니 가끔씩 증오스럽다는 눈으로 루시타니아 전하를 보시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 게 숨긴다고 언제 까지 숨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 카스트로는 술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어려서부터 폐하를 보아왔습니다." 입술을 스쳐 혀끝에 와 닿는 술맛이 쓰다. "너무 부족함이 없이 자라셨지요. 아베르노 전하께서 가지지 못한 자유와 다른 형제들이 받지 못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셨습니다. 선왕폐하께서는 유독 폐하께만 관대하셨죠. 그렇게 보호받으며 고통을 모르고 자라시더니, 결국 남의 고통에도 무감각해 지시던가요." 여전히 듣는지 마는지 모를 카스트로에게 유리나는 강한 어조로 말 을 이었다. 유리나는 카스트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 게 괴롭히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폐하께서는 강하시죠. 알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의지 를 지닌 분이시죠. 하지만 남의 아픔을 모르는 강함이 과연 언제까지 강할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피곤하군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카스트로의 태도에 유리나는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후회하실 거예요!" "……." 눈썹을 치켜올리는 카스트로를 노려보며, 유리나는 마치 예언을 하 듯 재차 중얼거렸다. "후회하실 거예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무시하다가는, 폐하께 서도 더 큰 아픔으로 후회하실 날이 있을 거예요." "……레이니트경의 목숨, 내 손에 달려있습니다." 유리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꾹 다물어졌다. 카스트로는 손에 든 술을 한번에 마셔버리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누나가 하시는 말씀, 나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내가……, 지금 레이니트경에게 하는 일이 부당하다 고 생각하십니까?" 카스트로는 무표정했던 얼굴에 한줄기 한기를 피워냈다. 유리나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며, 카스트로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직접 확인하셨잖습니까? 아니면 확인이 더 필요하신 겁니까? 그 자 는 감히 신하된 자로서 자신의 국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누나도 아실 텐데요? 동정의 여지도 없는 처형감이라는 것을!" "……그런……." 유리나는 사색이 되어 입술을 달싹였다. 카스트로는 답답한 듯,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넓은 접견실을 서성이는 카스트로의 뒤 로 검은 망토가 조용히 흔들린다. "누나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누나가 생각하 시는 만큼, 그렇게 편하고 행복하게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 "부족함 없이 컸다고 하셨습니까? 네, 그랬죠. 그랬습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카스트로는 성큼성큼 걷던 걸음을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진 앞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로 짙고 숱 많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 내가 아무 고통도 없이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왕폐하께서 나 에게만 사랑을 주셨다고요? 하지만 결국 선왕폐하께서는 날 버리셨습 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어머니는 어떠셨는지 아십니까? 언제나 엄격하시고 현명하신 어머 니! 그 분이 내게는 얼마나 잔혹하신 분이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유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스트로는 그 눈을 짓쳐 들어가듯 노 려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네, 현명하셨죠. 지나치게 현명해서, 셋째아들이 맏아들의 앞길에 방해될까 저어해서, 언제나 제 분수를 알고 크도록 하셨습니 다! 그분께서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주입시킨 생각을 모를 정도로, 나 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카스트로는 거칠게 머리를 흩뜨리며, 유리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사랑 받고 컸다고 하셨습니까? ……우습군요. 내가 얼마나 사랑 받 고 싶었는지 아신다면, ……그때에도 그런 말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 군요." "……폐하?" 어두운 유리창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카스트로는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창가에 늘어진 커튼을 거친 손놀림으로 풀어냈 다. 푸른 벨벳 커튼이 출렁거리며 카스트로의 모습이 드러나는 유리창 을 가려버린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 "왕세자를 도와 카르노의 영광을 되찾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유리나의 시선이 뒤통수로 느껴진다. "마지막 가시면서도 그분은 그렇게 맏아들만 걱정하셨죠.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나였는데, 제 앞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으 셨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어머니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습니 다. 한번도 그 품에 안아주신 적 없습니다. 내가……사랑 받고 컸다고 하셨습니까?" 마지막 물음을 끝으로 카스트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등뒤로 따스한 온기가 맞닿아왔다. "……몰랐어. ……정말 몰랐다. 난, 그저 네가 너무 자유롭게 자라는 것이 부러웠을 뿐이야. 정말, ……몰랐어." 왜 유리나가 울먹이는 지 모르겠다. 카스트로는 냉정함을 되찾으며 유리나에게 말했다. "레이니트경의 목숨만은 유지하도록 해주겠습니다. 누나도 방금 전 말씀하신 그 약속, 잊지 말아주십시오." 등뒤에서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카스트로는 더 이상 유리나에 게 건넬 말이 없었다. "늦었습니다. 이만 쉬고 싶군요." "……고…맙다, 카스트로. ……그 약속, 꼭 지켜주길 바란다." 두터운 융단위로 조용히 걸어나가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카스트로는 다시 차가워진 등을 느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카스트로는 열린 문으로 들어온 시종장 하미르에게 물었다. "왕비는 괜찮은가?" "하이파경께서 며칠 쉬시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왜 이렇게 루시타니아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낮에 루시타니아에 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놀랐던 여파일 것이다. 카스트로는 무겁게 밀 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폐하?" 갑자기 몸을 돌리자, 시종장 하미르가 물어온다. 카스트로는 무뚝뚝 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비에게 가겠다." "……네, 폐하!" 카스트로가 들어서자, 왕비의 시녀들은 저마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 로 카스트로에게 머리를 숙였다. 시녀장 다나도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슬그머니 미소를 내비쳤다. "왕비는?" "두 시간 전부터 주무시고 계십니다. 곧 전하께 폐하께서 오셨음을 전하겠습니다." 곧장 침실로 쳐들어갈 기세인 시녀장 다나를 제지하고, 카스트로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다. 짐이 들어가 볼 테니까……." "네, 폐하." 카스트로는 시녀들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눈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혼자서 루시타니아의 침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침실에는 약냄새가 장미향과 어울려 떠다니고 있었다. 전체 적으로 따스한 연노랑과 연분홍으로 채색된 침실은 예전 어머니가 머 물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카스트로는 방안을 빙 둘러보다 가 침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침대로 걸어갔다. 발밑에 느껴 지는 융단이 카스트로의 발소리를 없애주고 있었다. 푸르고 붉은 꽃무늬가 수놓아진 휘장을 밀자, 한쪽으로 몸을 틀고 자는 루시타니아가 보였다. 길고 긴 굽슬거리는 금발이 루시타니아의 등뒤로 넓게 퍼져있었고 꼭 감은 속눈썹 밑으로 짙은 음영이 져 있었 다. 카스트로는 침대맡에 앉아, 루시타니아의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 을 쓸어 올렸다. 카스트로의 손길을 느꼈는지 오똑한 콧날에 살짝 귀 찮은 주름이 생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카스트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 았다. 아마 평생토록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는 일도 없을 것이다. 루시 타니아는 정략결혼한 상대이고, 또한 원수의 딸이다. 왕족에게 사랑이 사치이듯, 이 원치 않는 결혼에서 사랑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하 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루시타니아가 실종되었을 때 정신없이 불안했 다는 것. 카스트로는 지금 위로가 필요했고, 지금만은…… 그것이 루시타니아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상처 입은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너무나…… 사람의 체온 이 그리웠다. 카스트로는 자고있는 루시타니아의 얼굴선을 따라 손끝으로 그어 내 렸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진다. "으응……." 투정부리듯 이마를 찡그리며 손으로 카스트로의 손을 밀어낸다. 카 스트로는 그 손을 잡아 입술로 가져갔다. 자고 있던 루시타니아의 체 온이 따뜻하다. "으음……" 천천히 루시타니아의 금색 속눈썹이 펄럭인다. 희미한 촛불로도 그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이 보인다. "……폐… 폐하?" 잠 기운 가득하던 눈이 카스트로를 확인한 순간 화등잔만하게 커진 다. 벌떡 일어나려는 루시타니아의 어깨를 누르고, 카스트로는 그대로 루시타니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폐…폐하… 어쩐 일로……." 카스트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정정했다. "카스트로." "네?" 놀라서 반짝이는 눈빛이 이렇게 예쁘다는 사실을 왜 진작에 몰랐을 까? 카스트로는 고개를 숙여 루시타니아의 눈가에 키스했다. "카스트로라고 불러. ……둘이 있을 때는." 입술 밑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느껴진다. "몸은 괜찮소?" "……네, 폐하……." "카스트로!" 단호한 카스트로의 태도에 루시타니아는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입술을 미끄러뜨려 루시타니아의 입술 바로 앞에서 나직 하게 속삭였다. "……." "……네?" 멈칫거리며 되묻는 루시타니아의 귀에 입술을 대고 카스트로는 다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여전히 머뭇거리던 루시타니아는 다음순간, 주춤주춤 손을 들어 카 스트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카스트로는 보드라운 뺨에 입맞추며 루시타니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체 온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테라력 699년 8월 맑고 뜨거운 8월 중순의 아침에, 카르노의 일왕녀 유리나 폰 카르노 는 숙부인 미카에르 대공과 라디프의 사신으로 온 실레니크 폰 리아프 와 함께 멀고 먼 북국으로의 길을 떠났다. 라디프의 제 20대 국왕 세아니크 2세의 두 번째 왕비이며, 쌍둥이 왕자인 아크와 도미니크 형제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훗날 리아프 대공 실레니크와의 화려한 염문을 뿌리며, 제 21대 라디프 국왕 루아니크와 세력다툼을 벌이다가 의문의 암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수십 년 뒤의 일이고, 이 때의 유리나는 사랑하는 이와 원치 않게 이별하게 된 가련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29 - 관련자료:없음 [33451]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21 20:54 조회:1476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29 - ================================================================== 테라력 700년은 카르노에 있어 행과 불행이 겹친 다사다난한 한해로 기록된다. 일왕녀 유리나와 라디프의 국왕 세아니크 2세의 결혼으로 얻은 금전상의 그리고 외교상의 이득으로, 카르노는 빠른 속도로 내부 의 문제점들을 해결해가고 있었다. 때마침 레이얄로부터 얻어낸 배상 금에 대한 감축과 배상기일의 무기한 연장도 카르노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결혼 4년째에 접어든 국왕과 왕비의 임신소식은 카르노를 축제 분위기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붉은 노을이 화사하게 수놓아진 가을 저녁의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 기 시작했다. 쌀쌀한 기운이 사람들의 옷깃을 파고들고, 사람들의 걸음 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왕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저택 안으로 마차 한 대가 미끄 러지듯 들어서고 있었다. 저녁의 남은 햇살자락을 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간 마차 안에서, 흰머리가 많아진 검보라색 머리의 노쇠한 남자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서서도 연신 몸에 잔떨림이 인다. 근 일년만에 몰라보게 수척하고 늙 어버린 이 남자의 이름은 헤르트 폰 사르노, 전 외부대신이었던 헤르 트경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헤르트경. 주인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헤르 트경은 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안내해 주시게." "네, 헤르트경." 대공가의 집사는 앞서서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탁! 탁! 탁! 헤르트 경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팡이가 융단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낸다. 다리를 저는 헤르트경의 이마에 땀이 비쳤지만, 고집스럽게 표정을 흐 트러트리지 않는 모습이 유타르경보다도 완고해 보인다. 똑똑똑똑. "나리, 헤르트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집무실 앞에서 멈춘 집사는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안으로 뫼셔라." 집사는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고는 슬쩍 몸을 비켰다. "들어가십시오." 헤르트경은 고개를 까딱하고, 대공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 침침한 집무실에는 촛불 세 개가 나란히 촛대에 꽂혀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집무실 안에는 책상 너머 의자에 앉아있는 대공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앉으시오, 헤르트경." 헤르트경이 소파에 앉자, 책상을 돌아 나온 미카에르 대공이 소파의 상석에 따라 앉는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소. 몸은 괜찮으시오?" 헤르트경은 지팡이를 자신의 무릎 앞에 세워 짚으며, 차가운 눈으로 미카에르 대공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헤르트경은 품속에 손을 넣어, 접혀지고 조금 구겨진 양피지를 꺼내 미카에르 대공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는 미카에르 대공의 손이 미세하 게 떨렸다. "이게……, 그거요?" "그렇습니다. 오늘에야 도착했더군요." 미카에르 대공은 촛대를 가까이 가져와서 양피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스티노 산맥 건너편의 미다에서부터 온 그 양피지의 원래 주인은, 미다 왕실 기사단장인 레이크 폰 커먼이라는 젊은 기사였다. 수년 전, 아베르노를 살해한 장본인이기도 한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헤르 트경이었다. 헤르트경이 레이크 폰 커먼이라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몇 개월 전부터였다. 그 당시에는 경황중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 었지만, 아베르노 부처의 암살과 지스카르 부처의 자살과 처형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헤르트경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쥐 고 있는 자가 바로 레이크 폰 커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어떤 단서는 쥐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일련의 참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하나밖에 없는 조카이자, 헤 르트경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레이니트경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발 악이기도 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장담한 카스트로에 의해, 레이 니트경은 지금 '철의 감옥'이라 불리는 지스트에 수감되어 있다. 정치 범들과 구제할 길 없는 악독한 범죄자들만을 보낸다는 지스트는 들어 갔다가 살아서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악명을 지닌 생지옥이었 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곳으로 조카를 보내야했던 헤르트 경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전부터 조카를 그곳에서 빼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카스트로에게 무언가 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솔직히 목숨이 살아남은 것만 해도 유리나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하지만 헤르트경은 목숨이 살 아남은 것에 감사하기보다, 자신들을 몰락시킨 카스트로에 대한 증오 심이 더 강했다. 결국 헤르트경이 생각해낸 최후의 방법은 쿠데타였다. 카스트로가 자신들을 구할 수 없다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국왕으로 내세우면 되 는 것이다. 새로운 국왕으로 적합한 사람, 헤르트경은 멀리 돌아볼 것 도 없이 바로 근처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미카에르 대공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 상황에서 정통성을 가지고 국민들의 신임을 얻고있는 카스트로를 내치려했다가는 그 화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은 명분을 찾아야했고, 헤르트경은 아베르노의 암살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너무나 급작 스러웠던 아베르노의 죽음과 끝까지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항변하던 시에나의 모습이 헤트트경에게 그런 상상을 가능케 했다. 당시 아베르노의 측근과 시에나의 측근을 빠짐없이 찾아보던 헤르트 경은 그다지 쓸만한 정보를 가진 자가 없다는 것에 절망해야했다. 대 부분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자들은 죽거나 아무 정보도 없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 철저함에 치를 떨 만큼, 정말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었 다. 하지만 딱 한 사람이 남아있음에, 헤르트경은 적국이라는 거부감도 떨쳐버리고 레이크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흐음,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잖소? 시에나 전하의 시녀장과 제피르경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고……, 역시 무리인가?" 실망한 듯 미카에르 대공은 얼굴을 찌푸렸다. 헤르트경은 냉담한 얼 굴로 불쑥 말을 꺼냈다. "꼭 사실을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요. 필요한 것은 사실이 아닌 명분 이니까!" "흐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미카에르 대공을 마주보며, 헤르트경은 싸늘하고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따위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 두 왕자 전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 럴 듯한 증거만을 만들어 유포시키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에 혹할 사 람이 한둘이 아닐 테지요." 미카에르 대공의 각진 얼굴에 섬뜩한, 그러나 흥미로운 미소가 떠올 랐다. "그렇소? 의외로군. 경이 이렇게까지 무모하고 대담한 줄은 몰랐소."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요. 궁지에 몰리게 되면, 뭐든 하게 된답 니다." 미카에르 대공은 양피지를 쥔 채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음모가다 운 은밀한 미소가 미카에르 대공의 얼굴에 엷게 퍼진다. "좋소. 한번 해보지. 세부 계획을 짜 봅시다." 카르노 왕궁의 본궁, 국왕의 사적인 공간들과 맞물린 왕비의 거실에 서는 한창 들뜬 목소리들이 오가고 있었다. 활기를 띤 분위기의 정점 에 있는 사람은 드레스 밑으로 배를 볼록하게 부풀린 채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왕비 루시타니아였다. 임신 6개월째인 루시타니아는 푹신 한 쿠션을 겹겹이 겹치고 앉아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든 기색이었 다. "…무척 걱정하셨는데, 이번에 전하의 회임소식을 듣고 무척 안심하 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자칫 차갑게 보이기 쉬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소렐 공작령에서 축하사절로 온 소렐 공작의 비서 에리스 리츠였다. 갈색머리에 몇 가닥의 새치가 엿보이는 서른 중반의 에리스는 생각보 다 신색이 좋아 보이는 루시타니아의 모습에 걱정을 덜어내고 있었다. 소렐 공작은 결혼 초반기에 들려온 카스트로의 방탕한 생활과 루시 타니아를 향한 냉정한 태도 때문에 적잖이 골머리를 앓아오다가, 일년 전인가부터 카스트로의 태도에 변화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공녀, 아니 카르노의 왕비를 보고 있자니 괜한 걱정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소식 을 전해도 소렐 공작은 여전히 걱정하고 있을 테지만, 어느 정도는 마 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떠세요? 건강은요?" "여전하십니다. 전하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카르노에 와보겠다고 벼르고 계십니다." 루시타니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에서 온 사람을 보 니 새삼 부모가 그리워진다. 매일 편지를 쓰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물 거품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그래도 가끔씩 안부편지는 오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필체를 접하고 따스한 글 한 줄 한 줄을 읽으면서 소렐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에리츠는 우울해하는 루시타니아의 기색을 읽고 눈치 빠르게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전하께 잘 해드리고 계신지?" 루시타니아는 그제서야 아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살짝 눈웃음을 쳤 다. "잘해주세요, 무척. 특히 제가 아기를 가진 걸 아시고는 무척 기뻐하 시고, 조심스러워하시고……. 솔직히 그분이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에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며칠동안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 더라니까요." "다행입니다." 에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참 심술궂게 굴어 서 보기만 해도 겁먹고 그랬는데……" 루시타니아는 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분이 화를 내도 겁나지 않아요. 이제는 다 투정인 거 알 거든요. 그분이 얼마나 귀여운 분이신지 모르시죠? 어리광도 부리고 심술도 피우고, 호호호……. 남편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에 요." 에리스는 웃어야겠다는 의무감과 솔직한 심정의 사이에서, 웃다 만 것 같은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가 막힌 소리였다. 아무리 남편 에게 푹 빠졌어도, 저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남편 자랑이 늘어지는 루시타니아를 보며, 에리스는 웃어야 될지 울어 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저 냉철하기로 소문난 카스트로 1세가 귀여워? 저 살벌한 눈초리의 커다란 남자가 어리광을 피우고 심술을 피워?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라 고?'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에리스는 그냥 웃었다. 다른 수가 있겠는가? 루시타니아가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그렇군요. 참 다행입니다." "호호호호……, 저번에는요, 글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루시타니아의 남편자랑을 에리스는 얼굴 근육의 조절에 힘쓰며 듣고있었다. 에리스는 지금 루시타니아의 모습 을 소렐 공작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 정도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밝고 할 말도 많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젤이 보고했던, '수심 이 얼굴에서 가실 날이 없다'는 말은 지금의 루시타니아에게서는 조금 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루시타니아의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듣고있던 에리스를 구원해준 것은 시녀장이라는 중년 여 인이었다. "전하. 그만 오수 시간입니다." 루시타니아는 아쉽기 짝이 없는 얼굴로 시녀장 다나를 돌아보더니, 에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내일도 와 주실 거죠, 에리스?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예에, 물론입니다. 며칠동안은 이곳에 머물 생각입니다." 에리스는 시녀장 다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루시타니아를 따라 일어났다. 루시타니아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면 내일 봐요, 에리스. 참, 아르노에 잘 오셨어요. 이곳에서 즐 겁게 지내다 가셨으면 해요." "네에, 감사합니다, 전하." 루시타니아가 침실로 들어가자, 에리스는 애써 힘주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리 오랜만이고 주인의 딸이라지만, 두 시간 이상이나 수다를 들어주는 것은 고역이었다. "나와 술 한 잔 하시겠어요? 보아하니 술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낯익은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자, 아젤이 싱글거리며 에리스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에리스는 기운 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세리니아양." "공작각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세리니아양의 보고에는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특히 루시타니아 전하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에는 어쩔 수 없이 들떠버리시더군요." 에리스는 왕비의 거실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방에 앉아있었다. 아젤 이 건네준 술잔을 들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아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공작각하께서 할아버지가 되신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아요." 아젤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벌써 몇 년째 소렐에 돌아가 보지 못했 다. 소렐 공작도 그만큼이나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일까? "그래도 꽤 기다리시는 눈치입니다. 아무래도 오래 기다리셨으니까 요. 그건 그렇고, 카스트로 폐하께서 정말 루시타니아 전하께 잘 해드 리는 것 맞습니까?" 아젤은 어깨를 으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부사이의 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에리스를 보며, 아젤은 픽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이후로 확실히 변하기는 했어요. 루시타니아 전하의 침실로는 걸음도 안 하시던 분이 꽤 자주 찾아오시죠." "그렇군요." 아젤은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테라에서의 그분과 카르노에서의 그분이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 로 다른 곳에 한눈 파는 것을 못 봤어요. 하긴, 워낙 바쁘셔서 그럴 시 간도 여유도 없었겠지만. 이만하면 공작각하의 걱정이 조금 덜어졌을 까요?"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실은……." 아젤은 뭔가를 꺼리듯 입술을 떼는 에리스를 뭐냐는 시선으로 쳐다 보았다. 에리스는 미간 사이를 접고,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야 다시 말 을 꺼냈다. "왕녀께서 ……건강이 악화되셨습니다." "……!" 아젤은 술잔을 공중에 멈춘 채 에리스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상황이 괜찮다면, 루시타니아 전하께서 한번쯤 소렐에 오셨으면 합 니다만……," 에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맺었다. "지금으로서는 ……긴 여행은 무리인 듯 하군요." "아아……, 그런데 왜 전하께는 그런 말을……." 아젤은 찡그린 얼굴로 에리스를 쳐다보았다. "……밝으신 모습을 뵈니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서요." 씁쓸하게 대꾸하고, 에리스는 술을 한 모금 삼켰다. 아젤의 시선이 그의 모습을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 좋은 하루 되시고, 건강하세요. ^^ - 새 - 제 목:[新군주론] 제 5 장 - 130 - 관련자료:없음 [33489] 보낸이:최순옥 (발없는새) 2001-01-22 20:33 조회:1760 ================================================================== 『 新 군 주 론 』 Il Principe : The Prince 글쓴사람 : 발없는새 knazis24@hitel.net knazis24@nownuri.net - 130 - ================================================================== 점점 짧아지는 오후햇살이 커튼을 스쳐 방안으로 스며든다. 전체적 으로 흑갈색톤을 유지하는 장중하고 권위적인 느낌의 집무실 안에는 서류가 쌓여진 커다란 책상과 벽 한쪽을 메운 책장이 놓여져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검은머리의 늘씬하게 큰 남자가 뒤에서부터 햇살을 받 으며 책상앞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서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앞에 서 있는 감색머리의 사내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레이노 백작과도 접촉하고 있단 말이지?" "네, 폐하." 카르노의 국왕 카스트로 1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다물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기를 반복 하던 카스트로는 곧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헤르트경과 대공, 그리고 레이노 백작이라……." "의외로 그들이 결속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헤르트경이 유타르경도 포섭하려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뒤 만날 약속을 해놓았답니다." 현재 실질적인 '열 한 개의 검'의 두뇌는 비제였다. 전신의 사제 루 아는 뒤로 물러나서 단원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만 주력하고 있었 다. 이를테면 은밀하게 암살자들을 키워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카스 트로가 국왕이 되고 나서 '열 한 개의 검'은 더욱 은밀하게, 그리고 더 욱 치밀하게 활동을 계속해왔다. 전보다 다소 여유로워진 재정으로 인 원도 확충하고 무기공급도 용이해져서, 더욱 훈련과 정보수집에 박차 를 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카스트로는 자신에 대한 반란의 음모를 집 무실 안에서 속속들이 꿰어 듣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싹 쓸어버리는 게 좋겠지. 다만 군부와 결탁하는 것만 미리 막아놓게." "네, 폐하." 카스트로는 턱을 쓸며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유타르경은 위험해. 카나이트경을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유타르경이 그 일에 관련된다고 해서, 카나이트경까지 그 일에 동 조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지금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비제가 확신하듯 말했지만,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 미리미리 염두에 두는 게 좋아." "네, 폐하." 시원스러운 대답에 카스트로는 고개를 짧게 까딱하고, 기대었던 책 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평이해진 말투로 카스트로는 지나가듯 이 물었다. "그런데 그 비쉬와의 혼담은 무슨 소리인가?" 기다렸다는 듯 답변이 날아왔다. "비쉬의 오르파샤 1세께서 왕제이신 페트라르카 전하의 비를 간택하 는 중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비쉬와도 동맹을 맺어야 할 테니, 이 기회 에 혼담을 진행시키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책상 뒤의 의자로 돌아가 앉으며, 카스트로는 곰곰이 생각을 되씹었 다. "페트라르카와 체리나라……." "비쉬는 전부터 테라와 친분이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 비쉬가 뱃길 로 카르노의 배후를 칠 수도 있습니다. 더 끈끈한 유대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체리나를 그 바람둥이에 타락한 왕자에게 시집보낸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비제의 말대로 비쉬와는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바람둥이인만큼 여자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친절하기도 하고. 자신 이 루시타니아에게 하는 것을 보고 비난까지 했던 사람이니, 그가 체 리나에게 막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리나가 과연 순순히 비 쉬로 가줄까? 카스트로는 슬쩍 책상너머의 비제를 올려다보았다. "체리나가 아직도 그대를 귀찮게 하나?" 멈칫 몸을 굳히던 비제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체리나가 꽤 오래 전부터 비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 제인가 넌지시 의사를 물어보았지만, 비제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난색 을 표명했었다. "……페트라르카의 비가 간택되기 전에 비쉬에 사신을 보내야겠군. 누가 좋을까?" "미카에르 대공을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격에도 맞고, 반역자들에 게 시간도 줄 겸 말입니다." 준비해둔 듯 매끄럽게 쏟아지는 비제의 대답을 들으며, 카스트로는 쓰게 미소를 지었다. 저 비제가 체리나의 문제로 어지간히 고민했던 것 같았다. "체리나가…… 나를 많이 원망하겠군." "원망은 제가 듣겠습니다." 비제는 단호한 말투였지만, 카스트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카 스트로는 비제의 시선을 흘리고 기운없이 중얼거렸다. "……왕가의 자녀란 결국……이렇게 밖에 쓸모가 없는 건지도 모르 겠군. ……서두르지." "네, 폐하." 비제와의 독대를 끝내고 나자, 곧바로 라에르와 이제르경이 들이닥 쳤다. 카스트로는 이제르경에게 비쉬와의 혼담건을 다음날 회의에서 진행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제르경마저 밖으로 나가 자, 카스트로는 그제서야 왠지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라에르에게 시선 을 돌렸다.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말과는 달리 안색이 불편해 보이는 라에르를 보며, 카스트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해봐. 불만이 뭐야?" 라에르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미적미적대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저 자, 마음에 안듭니다." "저 자? 이제르경?" 의외라는 표정의 카스트로에게 라에르는 더욱 얼굴을 찡그려 보였 다. "비제라는 자 말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카스트로는 의자에서 떼었던 등을 다시 시트 속에 파 묻으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이유는?" 라에르는 형형한 눈초리로 카스트로를 바라보았다. "저 자와 폐하께서 밀담을 나누시면, 그 다음에는 어김없이 무언가 일이 터지더군요. 그 자에게서는 어딘지 음습한 냄새가 납니다. 폐하께 서 그런 자와 자주 어울리시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음습한 자라……." 따라서 발음해본 카스트로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모습 으로 버티고 선 라에르에게는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아베르노와 지스카르의 암살사건도 라에르에게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은 어려웠다. 그 올곧은 성격에 몇 가지 알고 있는 사건들만도 조용히 묵 인해주는 게 대견할 정도였으니까. 이 고지식한 친구가 자신과 비제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알게 된다면, 자신을 떠나지는 못해도 마음 속 깊 이 자신에 대해 실망할 게 분명했다. 카스트로는 솔직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라에르를 가까이 두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카르노를 위해 어떤 비열하 고 더러운 짓이라도 감수할 결심이 되어있는 자신과, 어디까지나 지켜 야할 도덕의 잣대로 세상을 보는 라에르는 너무나 다른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라에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성격차이 때문이었을 정도로 맞지 않는 성격. 하지만 이제는 라에르가 곁에 없으면 불안했다. 완고하고 고집이 센 만큼 충성스런 사람이라서 일까?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며, 카스트로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나에게, 그리고 카르노에 도움이 되는 자다. 필요하니까 곁에 두는 거야." "……." 여전히 풀리지 않은 표정의 라에르였지만, 카스트로는 한숨을 쉬어 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이왕녀와 비쉬의 왕제 사이의 혼담'에 대한 카스트로의 거의 일방적인 통보가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 운 일이라서인지 정신들이 미처 다른 반박의 말을 찾기도 전에, 카스 트로는 비쉬로의 사절단 대표로 미카에르 대공을 지목하고, 부대표로 는 재상 디아노 백작 비네르경의 아들이며 차기 외부대신감으로 주목 받고 있는 페르경을 붙였다. 그 소식은 빠르게 그 당사자들에게 알려 졌다. 그날 오후, 미카에르 대공의 저택을 몇 명인가의 측근이 은밀히 방 문했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누군가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미카에르 대공도 그 말에는 전적으 로 동감이었다. 비쉬까지 갔다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은 여유를 잡아야했다. 게다가 그것도 일이 잘 풀릴 경우이고, 만약의 경우 더 길 게 걸릴지도 모른다. 비쉬까지라면 테라를 거쳐 육로로 가는 것보다 바닷길로 가는 것이 빠른데, 배에 익숙지 않은 것 역시 마음에 걸린다. 여차해서 풍랑이라도 만난다면, 쿠데타고 뭐고 그냥 끝인 것이다. "혹시 폐하께서 뭔가 눈치를 채신 건 아니실지……."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조용하게 집무실 안에 파문이 인다. 미카에르 대공은 내심 신음을 내지르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런 불안은 자칫 계획이 현실로 옮겨지기도 전에 밖으로 유 출되게 할 수 있었다. 불안해하는 자가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런 경우에는 무조건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폐하께서 그것을 아시면 지금까지 가만히 계시 겠는가? 레이니트경과 헤르트경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게!" 레이니트경이 암살을 시도한지 불과 몇 시간만에 레이니트경은 물론 헤르트경까지 지하감옥에 가두어두고 친국으로 들어가 버린 카스트로 였다. 그 당시의 신속함에 생각이 미치자,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곧 마 음을 가라앉혔다. 카스트로가 그들의 모의를 알고 있다면 들이닥쳐도 벌써 들이닥쳤을 일이다. "그러면 거사는 대공께서 비쉬에서 돌아온 뒤로 미루어지는 것입니 까?" 미카에르 대공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글쎄……." 똑똑똑똑. 밖에서부터 들려온 노크소리에 미카에르 대공은 생각을 접었다. 안으로 집사가 들어서고 있었다. "헤르트경과 테르니크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모시게." 어두침침한 집무실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미카에르 대공은 반 색을 하고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중이오." "비쉬로 가게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레이노 백작 테르니크경은 살짝 고개 숙여 보인 뒤에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헤르트경도 앉으시오." 미카에르 대공의 옆에 있던 측근들이 테르니크경과 헤르트경에게 자 리를 양보했다. 미카에르 대공과 헤르트경, 그리고 테르니크경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현 국왕 카스트로에게 소외 받는 사람들이었다. 근위대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숨은 야 심가 테르니크경은 얼마 전, 카스트로가 아베르노의 암살과 관련되었 다는 증거들을 확인하고서 이들 무리에 합류했다. 어차피 국왕의 눈밖 에 난 이상, 지금 국왕의 밑에서 다시 도약의 기회를 노리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다고 얌전히 영지로 되돌아가 조용히 살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 젊었다. 게다가 영지에는 아내 휴레시아가 버티고 있었고, 아직은 그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지만,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낸 그녀를 아무 렇지 않게 대할 수가 없었다. 테르니크경은 결국 미카에르 대공에게 일생을 건 도박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비쉬로 떠나는 것은 언제입니까?" 젊고 의지 있는 테르니크경의 모습에 미카에르 대공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스트로와 이 젊은이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이 젊은이를 외면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테르니크경은 쿠데타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를 주도 할 만큼의 인재였던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준비하고도 열흘 이내에는 출발하게 될 거요." "열흘……이라……." 테르니크경이 풀기 힘든 문제로 고민하듯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 헤르트경이 말문을 열었다. "유타르경은 내일 만나보겠습니다. 잘 된다면, 일을 서둘러도 될 것 같군요." "서두른다?" 의외라는 듯 미카에르 대공이 묻자, 헤르트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이런 일의 경우 시간을 끌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아시겠지요, 대 공?" "아……그거야 그렇소만……." 망설이듯 대답하는 대공을 향해, 헤르트경은 더욱 강하게 말을 이었 다. "몇 달간이나 끈다면 필시 밖으로 유출될 겁니다. 사기 문제도 그렇 고요. 아예 빠르게 밀어붙이는 편이 낫지요. 비쉬와의 혼담이 성사될 경우, 그것을 꼬투리로 비쉬까지 개입하려든다면 일은 더 커지게 될 테고 말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눈치 빠르신 폐하십니다. 몇 달이나 끌고도 눈치 채지 못하실 리 없습니다." 테르니크경까지 그렇게 말하자, 미카에르 대공은 느리게 고개를 끄 덕였다. "좀 생각해봅시다. 우선 유타르경의 문제가 먼저요. 헤르트경, 잘 부 탁드리오." "염려 마십시오!" 무엇엔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헤르트경은 의지를 담아 대답했다. ================================================================== 설 연휴네요. ^^ 설 즐겁게 보내시길.. ^^ - 새였음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