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은 침대에서 (Courting trouble) 지은이: J.조이스 옮긴이: 김명순 발행: 로맨스파트너 R-474 (1988) 1 "미스터 맥브라이드, 세번째 경고입니다. 게다가 최후의 경고입니다." 크레이머 판사는 엄중히 언도했다. "이 재판은 사회복지국을 재판하는게 아닙니다. 또 미스 베이커는 공적인 입장으로 출정한 것도 아닙니다. 이의 신청을 철회하지 않으면 법정모독죄로엄중히 문초하겠습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화가 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송의뢰인인 시나 와인부시가 승소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세 자녀를 양부모에게 맡긴 이유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 겨우 20세의 와인 부시가 세 자녀의 어머니 의무를 다 하기엔 미흡한 것처럼 보이지만 패트릭은 그녀가 아이들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따. 시나 와인부시는 생활능력이 없는 생모보다는 생판 남인 양부모가 아이를 돌보는데 더 합당하다는 양부모 제도의희생자인 셈이다. 사정이야 어찌됐던 패트릭은 와인부시가 아이들의 양육권을 주 정부에 일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법정에 제시해야 한다. 분명히 와인부시의 자녀건을 담당했던 사회복지업무 담당자 마드레느 베이커는 사회복지국 대표로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문제는 베이커가 증언대에서자마자 벙어리처럼 입을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재판관님, 미스 베이커가 사회복지 업무 담당자로서의 직무를 태만하게 했다는 점에 대해 대답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법이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원고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양부모에게 맡겨야 했던 불행한 사연을 법정에서 밝히지 못하고 있고 또 이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임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이 재판은 증인을 재판하는 것이아닙니다." 패트릭은 재판관이나 베이커나 모두 인간적인 양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베이커가 진실을 증언하지 않으면 와인부시는 또다시 그릇된 재판의 희생자가 된다. 법정모독죄로 벌금을 무는 한이 있어도 이 일은 그냥 넘길 수 없다. 아니, 한번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패트릭은 푸른 눈동자에 분노를 가득 담고 판사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재판관님, 이의를 신청합니다. 판사님의 지금 처사는 진실을 밝혀야 하는 법적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이 재판은 사회복지국을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미스 베이커가 변호인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는 행동은 사회복지국이 유죄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증거입니다." 패트릭은 증인석을 향해 돌아서서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 증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미스 베이커는 원고가 불공평한 제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유죄인 것입니다." 위험한 모험인줄 알지만 패트릭은 단호히 말한 다음 다시 재판관석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판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본 변호인의 이의신청을 직권으로 각하시키려 하신다면, 존경하는 판사님, 당신은 유죄를 묵인하는 과오를 범하게 됨을 명심하십시오." "변호인은 내 판결을 멋대로 죄우할 셈인가요?" 크레이머 판사는 노기를 억누르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패트릭은 판사가 자신의 도전을 권위로서 얼버무리자 화가 났다.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가 아닙니까? 정의를 지켜 주시길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이때 묵직하고 우렁찬 망치소리가 났다. "잘 알겠어요." 크레이머 판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언도했다. "내 명력을 따르지 않고 법정을 업신여기고, 게다가 판사의 결정을 좌우하려는 행동은 법정모독죄에 해당합니다. 귀하의 발언은 신성한 법정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따라서 5달러의 벌금과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칠 때까지 변호인을 구속하는 바입니다. 집행관, 미스터 맥브라이드를 연단 밑으로 내려오게 하세요." 다시 망치소리가 났지만 좀전보다는 약했다. "지금부터 20분간 휴정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할 죄를 기어이 무죄로 만들려고 애쓰는 변호에 협의시간이 필요하다면 본 법정은 휴정시간 연장을 허락합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틀림없이 아일랜드 인의 피를 이어받았을 거예요." 브라이스 크레이머 판사는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있었나요?" 리오나 피터슨은 응접실 도어를 닫으면서 대답했다. "네." 브라이스는 조깅용 쇼트 팬트가 드러날만큼 법복을 걷어올리고 소매를 둘둘 말아올리면서 먼지 하나 없는 비서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말이지, 그 남자의 얼굴에 책을 던져주고 싶어! 어쩜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담!"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했었어요." 55세의 리오나는 지난 30년간 단 한번도 바꿔본 적 없는 올림머리를 풀어 은발을 곱게 말아올리면서 말했다. "왜 내가 그런말까지 해야만 되나요?" 분해 펄펄뛰는 브라이스의 눈에서 어느새 분노의 빛이 사라지고 후회의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법정모독죄로 그를 구속했어요." "알고 있어요. 그 이름도 유명한 '콜럼버스의 십자군'은 스스로 무덤을 판셈이 되었어요." 리오나는 휴정선고를 듣는 즉시 준비해두었던 아이스티를 브라이스에게 넘겨 주면서 위로했다. "아마 그 사람은 판사가 여자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아요." "법정에서는 판사는 여자가 아니에요!" 브라이스가 즉시 정정했다. 리오나는 브라이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뒤돌아서서 살며시 웃었다. 판사는 이번 재판의 소송자 명단을 보는 순간부터 신경질적이 되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라는 이름을 봤을때 브라이스가 보여준 지극히 여성다운 반응과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말을 리오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느님! 아일랜드 계 남자의 매혹적인 미소와 섹시한 육체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비록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제 임무를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브라이스는 찻잔 너머로 리오나를 향해 살짝 미소지어 보이며 갈증이 해소되자 자신있게 말을 걸었다. "이젠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도 괜찮겠어요. 그 사람 매력에 현혹되어 공정한 판단력이 흐려질까봐 걱정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그 말씀의 뜻은 비장의 무기로 감춰뒀던 카드잭을 내던져도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리오나는 의미있는 말을 던지곤 여느때처럼 그녀가 반격해오길 기다렸다. 자기가 내린 판결이 비평당하면, 플랭클린군 가정법인에서 최연소자이자 유일한 여성판사 브라이스 크레이머는 어려운 법률용어와 성경귀절을 인용해가며 강경하게 반박한다. 브라이스는 결코 법률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성미가 아니었다. "하니님, 오늘 제 행동이 절대 그의 매력탓이 아니었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 아무런 반격이 없자 놀란 리오나는 브라이스의 뒤를 쫓아왔다. 브라이스는 비서의 놀란 얼굴을 보고 웃었다. "문을 닫고 들어와요, 리오나. 존경받는 크레이머 판사가 공정성이 없는 판결을 내렸다는 평을 들을 수 있겠어요?" 브라이스는 농담조로 말하곤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아! 에어콘 수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빌딩을 새로 짓는게 빠르겠어!" 두터운 법복을 벗은 후 브라이스는 단 한개 열려 있는 창문가에 걸쳐 앉았다. 조깅용 쇼트 팬츠 타림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에 땀이 영글어 있는 모습은 판사라기 보다는 육상선수같은 인상을 주지만 어떤 차림새를 하든 그녀의 마음은 판사로서의 임무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만약 이 일이 신문에 나면 대단히 시끄러울 거예요.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싸울 준비는 하고 있지만..." 리오나는 금방 말뜻을 알아차렸다. 브라이스가 처음 판사로 임명되었을때 모든 방면에서 뜨거운 시선이 집중되었었고 지금도 그녀가 내린 판결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부자에다 골수 공화당파인 크레이머 집안 사람들은 주 정부 요직에 골고루 앉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 크레이머 집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지사가 그녀를 월권으로 임명했다며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문 하버드 법대를 톱으로 졸업하고 최고의 법률학자이자 덕망높은 판사였던 숙부 도널드 크레이머 판사 휘하에서 5년이나 경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스는 숙부의 잔여임기를 맡을만한역량을 인정받지 못했다. 도널드가 사망했을때 크레이머 집안은 강력한 정치력을 이용하여 브라이스를 판사로 임명시켰다. 옛날부터 힘 있는 집안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긴 하나 브라이스는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집안의 힘을 빌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솔직히 인정했다. 이제 숙부의 잔여임기 2년을 맡는 동안 유능한 판사로서 인정받고 그 후에는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브라이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소한 실수도 과장해서 떠벌이고, 판사라라는 중책을 이제 겨우 33살의 젊고 경험도 적은 여자가 맡기에는 무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집무실 문을 닫은 순간부터 리오나는 비평가가 되었다. 리오나는 18세때 처음으로 법원비서직에 발을 디딘 후 35년간 수많은 판사를 모셔온 베테랑 비서이다. 따라서 그녀는 우수한 판사를 선별해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브라이스 크레이머는 유능하다.' 라고 결론을 내린 리오나는 브라이스를 위해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충고해주었다. "제가 본 견지로는,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천성이 자유주의자고 그 사람과 당신이 정면대결한다면 우리들의 정적에게 유리한 스캔들만 제공할 뿐이에요.그 사람은 아마 차기 선거에 의원으로 출마할 예정인가봐요." 리오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타고난 정치가로서의 매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어요. 여자들은 모두 그 사람에게 아낌없는 표를 던질거예요." 브라이스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에게 섹스 어필한다고 해서 반드시 선거에 이기는 것은 아니에요." "그야 물론이죠." 리오나는 조목조목 따지며 역설했다. "맥브라이드는 핸섬할 뿐만 아니라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어린이와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는 감시자 역도 완벽하게 수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어요. 또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귀감이 되고 있어요. 그 사람의 형인 신은 보수파, 혁신파 양쪽의 신뢰를 받고 있어요." "'맥브라이드 & 맥브라이드' 라...온통 맥브라이드 투성이군." 브라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 도시에서 그 빨강머리 사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닐 맥브라이드는 '조니 허슬'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고 막내인 캐빈도 패트릭과 맞먹을 정도로 대활약하고 있죠. 고십기사란에 의하면 그 집 형제들 주변엔 여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부잣집 출신에다 하이올드 미스인 공화파의 브라이스 크레이머 판사는 핸섬한 영웅을 만나 어떻게 하셨죠?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 주려고 싸우는 용감한 사나이를 여자판사님께서는 어떻게 요리하셨죠?" "무슨 말이 그래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거예요?" "적어도 정치에 눈꼽만큼의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죠." 리오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건 그렇다치고 공정치 못한 판결을 내린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브라이스는 깜짝 놀라며 네이비 블루 빛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십자로 교차시켜 비서의 면전에 댔다. "절대로 감정적으로 판결을 내리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걸고 맹세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리오나는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법원 유치장속으로 끌려간 불쌍한 남자를 어쩔 셈인가요?" 브라이스는 창가에서 발딱 일어나 초조한 듯이 융단위를 서성대며 양팔을 뒤로 두른채 말했다. "우린 비공식적으로 그 사람에게 벌금과 사죄를 받아야 해요. 따라서 그는 대중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자유주의 신문의 고십란을 장식할 염려도 없게 되죠. 우린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심리를 진행시키므로 법정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진실의 열매를 맺게 하는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는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브라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보곤 이내 눈동자가 흐려졌다. "기자들이 제 4호 법정이 임시 휴정한데 대해 수상해 여기지 않도록 속히 개정해야만 해요." 리오나는 알아들었다는듯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이고 책상위에 벗어둔 법복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벌써 아홉시 반이에요. 다시 한번 수리센터에 전화해서 에어컨을 고쳐달라고 해야겠어요.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이젠 나도 몰라요." 브라이스는 두터운 법복을 입고 근엄한 판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오늘은 무덥기도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는 어둡기만 하군요." "힘내세요, 판사님. 정의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 법이니까." 브라이스는 웃으면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을 나서려는 순간 우뚝 멈춰서서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가 국민학교 동창이었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아니요." 리오나는 놀라면서 대답했다.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했다는 얘기는?" "아니요!" "하버드 법대를 같은 해에 졸업하고 같은 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얘기는?" 리오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렇다면 그 남자를 잘 알겠군요?" "27년간에나 라이벌이었으니 잘 알 수 밖에요." 리오나가 등뒤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으면서 브라이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유치장은 열 개의 작은 감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패트릭은 구석방에 혼자 수감되어 있었다. 다른 감방을 둘러보니 넓은 챙모자를 쓴 매춘알선업자인듯한 사나이와 눈을 반쯤 감고 축 늘어진 상습 주정뱅이, 험상궂은 얼굴의 절도범들이 재판을 기다리며 구류되어 있었다. 패트릭 자신은 이미 재판을 받아 구속당했지만 자신의 행위를 뉘우칠 마음은 전혀 없었다. 크레이머 판사의 집행관인 미치 폽스는 이젠 수감수가 된 패트릭을 엘리베이터로 호송할때까지만 해도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싱글벙글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이번엔 진짜 막강한 적에게 걸려들었군요, 맥브라이드씨. 당신에겐 좋은 약이 될거요." 패트릭은 목구멍까지 기어나온 말을 삼키느라 애썼다. 막강한 적이라고? 크레이머 판사의 예쁜 엉덩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사람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게다가 법률 이외의 분야에서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게있다는 것도. 애석하게도 구류되어 있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란 주로 그런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철의 여성'이라 불리우는 그녀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가 뜨거운 사랑을 나눌 것이고 네이비 블루 눈동자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정열을 일깨워 그녀를 만족시킬 테크닉도 가르쳐 주리라. 굵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도촘한 아랫입술에 키스해 주고 여름이면 복숭아빛을 띄고 겨울이면 맥노리아 꽃입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애무해주리라. 그래, 브라이스 크 레이머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멋지게 봉우리를 터뜨리는 한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이다. "그 장미 화원 관리인이 되길 원한다면, 맥브라이드, 넌 정말 바보짓을 했어." 패트릭을 스스로를 꾸짖으며 중얼댔다. "빌어먹을!" 큰소리로 욕을 내뱉으며 뒷벽에 맞붙은 2단 철침대 위에 양복 웃도리를 내동댕이치고 아래쪽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고상한 말은 무더위에 대한 말인가요? 변호사님." 갑작스런 브라이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서던 패트릭은 그만 상단 침대의 철 스프링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일 정도의 통증때문에 마음과는 달리 저주스런 말이 튀어나왔다. "고명하신 판사님께 무례한 말을 내뱉은 죄로 바닥에 꿇어앉아 법정의 자비로움을 구걸하겠나이다." 부딪힌 부위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꿇어앉는데 손바닥 사이로 선혈이 새어나와 어느새 팔을 타고 흘러 새하얀 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패트릭은 땅바닥에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나는 이제 출혈과다로 죽을 겁니다!" "이봐요, 간수! 문을 열어요! 그리고 빨리 가서 붕대를 갖고 와요!" 브라이스의 명령에 간수는 얼른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는 당황하며 패트릭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옆으로 눕는게 좋겠군요." 브라이스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 비스듬히 뉘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양복 포켓을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브라이스는 피로 더럽혀진 그의 팔과 겨드랑이까지 잘 닦은 다음 이마의 상처 위에 고급손수건을 살짝 갖다댔다. 브라이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일 아침 신문 1면 기사가 훤히 떠올랐다. '웨인라이트 주지사가 직접 인명한 판사가 불쌍한 사람을 위해 투쟁하던 용감한 변호사에게 구류판결을 내리고 중상을 입히다!' 브라이스는 초조했으나 패트릭은 심바람이 났다. 지난 18년간 그녀가 만져주길 얼마나 기대해왔던가? 이제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천천히, 그리고 마음껏 그녀의 감촉을 즐기자. 언제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좀더 세게 누르도록 이쪽으로 기대 주시겠어요?" 부상당한 사람의 음흉한 속마음을 전혀 알리 없는 브라이스는 스캔들이 걱정스러워 열심히 간호했다. "좋습니다." 패트릭은 고통에 못 이기는 듯이 괴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와 같은 침대위에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브라이스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허벅지가 허리 부근에 착 달라붙어 있고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이 그의 셔츠를 스칠 적마다 패트릭은 숨이 막혔다. 그는 황홀한 마음에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장미 향기가 났다. 그 옛날과 똑같은 장미 향기가! "피를 보고 졸도한 타입은 아니잖아요?" 이마에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보고 학창시절의 그리운 추억을 상기한 브라이스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런데...패트릭의 얼굴이 이상하게 창백해 보인다. 눈도 감고 ....너무 조용하다. "패트릭! 패트릭! 정신차려요!" "으음..." 패트릭은 일부러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사랑스런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퍼스트 네임을 불러주면서 갸름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붕대 감고 왔습니다, 판사님." 간수가 구급약 상자와 페이퍼 타올을 갖고 달려왔다. "소독약을 바르고 잘 치료하면 하루 정도면 생채기가 아물겁니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엄살을 떨고 있는지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투의 간수의 말에 패트릭은 몽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왔다. 촉감좋은 순면 손수건 대신 꺼칠한 페이퍼 타올이 닿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아파!" 조금 전만 해도 출혈과다로 죽는다고 고통을 호소하던 사람치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소리쳤다. 일어나려는 그를 브라이스가 저지했다.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일 때까지 움직이지 말아요." 엄하게 주의를 준다음 브라이스는 재빨리 치료를 시작했다. 10분 후 패트릭은 일어나 피로 얼룩진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꼴로 법정에 나갈 수는 없겠는데요." "그렇군요." 브라이스도 동의하며 간수를 돌아보았다. "죠지, 맥브라이드씨는 내 집무실까지 호위해주시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지 라일리는 공손히 대답하고 홀을 향해 그를 안내했다. 세 사람은 민첩하게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내리기 전에 조지가 고개를 삐끔이 내밀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나머지 3개 법정은 현재 모두 개정 중에 있기 때문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패트릭과 브라이스는 재빨리 집무실로 들어갔다. 리오나는 브라이스와 함께 들어오는 남자를 알아보고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어머나!"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데요?" 패트릭의 눈에 장난기가 어리더니 이내 눈썹을 치켜뜨고 농담을 걸었다. "사람을 구타하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브라이스나 비서도 그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 두 여자가 마주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뭔가 두려워하고 있는 듯 했다. 뭘까? 내가 그녀들을 난차하게 만들 행동을 취할까봐 두려워하는 걸까? 내가 고소라도 할까봐?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다친 것은 자신의 부주의때문이고 남에게 드러내는 게 오히려 수치스런 일인데.. "미스터 패트릭 맥브라이예요. 이쪽은 내 비서인 리오나 피터슨입니다." 집무실의 문을 닫으며 브라이스가 양쪽을 소개했다. 패트릭은, 마치 바위 틈새로 기어나오는 뱀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나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두 여자는 분명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게 대답한 상처는 아닙니다. 서둘러 일어서다가 그만 머릴 찧은 것뿐입니다. 곧 낫겠지요." "내 법정에선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어요." 브라이스가 석연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요?" 패트릭은 심술궂게 웃었다. "고명하신 크레이머 판사님의 화려한 평판에 오점이 될뻔했군요." 두 여자는 아무 대꾸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브라이스가 입을 열었다. "리오나에게 당신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게 할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죠? 집? 아니면 사무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30분 이내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안되요!" 두 여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안된다구? 패트릭은 의아했다. 법정모독죄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니 어쩌구 하는 브라이스의 구차스런 변명을 듣는 동안 패트릭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지나치게 법률에 구애하는 게 아닙니까? 판사님."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판사님이나 저나 어느쪽도 피해에 입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 비서를 보내는 것보다는 제가 직접 다녀오는 것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옷을 갈아입고 와서 정식으로 좀전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벌금을 낸 다음 심리를 계속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가 아닐까요?" "법률 조항을 따르는 게 내 임무입니다." 브라이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집은 부렸다. 패트릭이 피투성이가 된채 법원 복도를 걸어다닌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좋습니다." 브라이스가 절대 결심을 바꿀 용의가 없음을 알고 패트릭은 그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미세스 패터슨, 수고스럽겠지만 제 형님에게 편지 한장 전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편지죠?" 브라이스가 대뜸 경계태세를 취하며 물었다. "속옷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속옷이 더러워진 건 아니잖아요?" 리오나는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브라이스가 평소에 강력히 주장해오던 '의심만으로는 벌주지 않는다'라는 절대 원칙이 왜 이 남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판사님." 패트릭은 바지를 벗으려는 시늉을 하며 벨트에 손을 갖다대었다. 브라이스는 귓복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남자는 날 곤란하게 만들 편지를 쓸게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기 위해 바지를 벗게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속이 뒤틀렸지만 한참 후 브라이스는 조용히 말했다. "리오나, 종이와 펜을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판사님." 패트릭은 웃음을 참으며 필기도구를 받아들고 비서자리에 가 앉았다. 브라이스가 뭘 두려워하는지는 분명히 알수 있으나 만약 이 편지 내용을 읽는다면 저 아름다운 핑크빛 두 뺨이 새빨갛게 물들겠지? '신 형인, 이 편지 갖고 온 여자분에게 옷 한벌을 보내 주십시오. 크레이머 판사가 제 옷을 홀딱 벗겨 버렸습니다.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패트릭' "봉투 한 장 주시겠습니까? 미세스 피터슨." "왜 암호를 사용하지 않나요?" 브라이스가 아직도 분을 풀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패트릭은 리오나가 준 봉투에 편지를 차곡차곡 접어 봉한 다음 재차 확인하고 리오나에게 넘겨 주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라 형님에게는 숨길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리오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둘으면서 빙긋이 웃으며 방을 나왔다. 2 "너무나 신경질을 부리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패트릭은 집무실을 빙 둘러보았다. "물론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브라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와는 27년간 알고 지낸 사이지만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은 실로 몇 번밖에 되지 않았다. 국민학교때 같은 반이 된 적은 딱 한번 있었으나 어울리는 친구또래가 달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 시절에도 같은 과였으니 행인지 불행인지 수강과목이 달라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브라이스와 패트릭이 동시에 주목받는 기회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만큼 적었기 때문에 브라이스는 늘 다른 사람을 통해 그에 관한 정보를 탐색했다. 그 역시 그랬을 것이다. "재미있는 관찰이군요.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눈에 떠돌던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녀의 묘한 태도를 분석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오랫동안 벼루어 왔던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이게 되어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솔직한 심정을 털어놔 볼까? 정말 오랜 세월이었지. 언제나 뒤돌아보면 네가 서 있었어." "그 말은 틀렸어. 바로 옆에 서 있었겠지. 그 말은 내가 신경질적이라는 말의 증거가 되지 못해." "브라이스 크레이머!" 패트릭은 말은 완전 무시한 채 분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브라이스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불렀다. "지난 27년간 내가 같은 줄에 씌여 있었어. 게다가 알파벳 순서로 적기 때문에 언제나 네 이름이 나보다 먼저 나와있었어! 난 그게 분해 견딜 수 없었어. 내가 아무리 밤 새워 공부하고 노력해도...어떤 과목이든...언제나 우수학생은 브라이스 크레이머와 페트릭 맥브라이드였지." 브라이스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녀 역시 그동안 수없이 같은 생각을 하며 치를 떨었다. 단 한번도 골드 스타나 블루 리본을 혼자 받아본적이 없었다. 톱 자리를 단독으로 앉아 본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패트릭에게 이를 갈며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사법고시에도 동점으로 합격했다는 정보를 관련기관에 근무하는 동창생을 통해 입수했다. 자기 점수는 절대 가르쳐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었는데 패트릭이 자신의 점수를 알지 못하기만 빌어 왔었다. "네 기분은 잘 알겠어. 맥브라이드.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신경질적이라는 그릇된 결론을 내리게 된 설명이 되진 않아. 내 이름이 먼저 나은 것은 내가 너보다 우수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기 때무이야. 그게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진실은 너와 내가 알고 있잖아?" 패트릭은 그녀의 말을 흘려 듣고 비서살과 이어진 집무실과 들어가 브라이스의 의자에 앉았다. 쿠션 좋은 등받이에 몸을 느긋이 기대고 기지개를 켜면서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으음...기분 좋은데...." "부디 편히 쉬시도록." 브라이스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와 책상에 걸터 앉으면서 비꼬았다. "이제 말을 계속해 봐." "뭘? 아까 그 말?" "그래." "예를 들어 법정모독죄니 어쩌구하는 것 말인데." 패트릭의 눈이 즐거운 듯이 반짝였다. "대부분의 판사들은 내가 그런 발언을 해도 관대히 보아 주고 속이 뒤틀리긴 하지만 수단좋은 변호사를 고용했구나, 라고 지나치는 게 보통이야. 그런데 넌 필요 이상으로 권리를 지키려 한단 말이야. 그게 신경질이 지나친게 아니고 뭐야?" "말 같지 않은 소리." 브라이스는 설득력이 부족한 그의 의견에 실망했다. "더 진지한 얘길 하는게 어때?" "그것 좋지." 패트릭도 동의했다. "그럼 과거로 돌아가 볼까? 고등학교 2학년때의 '불과 얼음의 댄스파티' 기억하지? 내가 킹으로 뽑히고 네가 퀸으로 선발되었지." 브라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건은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고 두 번 다시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패트릭도 깨끗이 잊었기를 바랐는데 때맞춰 그 일을 들춰내는 구나. 그날 밤, 브라이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현기증 날 정도로 불타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 골짜기가 깊게 패인 디자인은 그녀를 한층 성숙한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가느다란 끈 하나가 겨우 옷을 몸에 붙어 있도록 유지해 주는, 정말 대담한 드레스였다. 둘다 각각의 파트너를 동행하여 참석했으나 킹과 퀸으로 선발되어 길게 깔린 붉은 융단 위를 손을 잡고 행진하여 왕좌로 장식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 다음 선서가 문제였다. 두 사람 모두 마음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킹과 퀸이 댄스의 첫 장을 장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제 생각났나 보군?" 패트릭을 빨갛게 달아오른 브라이스의 얼굴을 쳐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브라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15년이나 지난 일이야. 그렇게 어렸을때는...신경질을 부렸다고 해도 허물이 되진 않아. 그리고 그 후 난 성인이 되었으니까." "확인해 볼까?" 패트릭은 그날 밤 브라이스를 꼭 껴안고 춤추었던 자세를 취하며 빙긋이 웃었다. "춤출까?"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브라이스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두터운 법복 가슴께에 머물고 있음을 느끼고 한대 걷어 차 주고픈 충동을 느꼈다. 정말 지긋지긋한 남자야!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춤을 추지 않으며 입증할 수가 없잖아." 패트릭은 비난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리 방해라고 생각하십니까? 판사님." "휴전하는 게 어때?" "좋아." 패트릭은 관대히 대답했다. "넌 어릴 적부터 구제불능이었지만 어른이 돼서는 더 심한 것 같아. 너한테 채이고 복수를 맹세하는 여자를 몇 명 봤지. 그 광경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우린 지금 변호사 대 판사가 아니라, 남자 대 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군. 너의 그 예쁜 가슴을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드레스 끈이 끊어졌을때 잠깐밖에 못 본게 한이 되어 견딜 수 없었지." 그는 즐거운 추억을 상기하는 것이 자못 황홀하다는 듯이, 놀라 입을 딱 벌이고 있는 브라이스를 바라보며 연신 싱글거렸다. "그날 이후 더욱 성숙해고 아름다워진 것 같아." 푸른 눈을 브라이스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그녀의 반격을 기다렸다. 브라이스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화난 나머지 전신이 화끈 달아올라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패트릭은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라고 허물없이 대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에는 막된 행동에다 교활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남자로 비쳤다.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라이스의 머리도 재빨리 회전하며 대응을 시작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정신적으로 무척 성숙해졌어. 나에 비해 넌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패트릭이 나지막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법정에서 화를 내며 열변을 토할 때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다른 모든 방면에서는 절대 그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저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웃음소리만은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브라이스는 황급히 책상 서랍을 열고 서류를 꺼내며 화제를 돌려 버렸다. "필요한 부분에 기입해 줘."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업무 얘기로 되돌아가는게 좋겠어. 지금부터의 대화는 엄밀하게 판사 대 변호사의 대화임을 명심하도록." 서류를 책상위에 놓으면서 펜을 내밀었다. 벌금을 내밀었다. "벌금은 5달러야." 패트릭은 웃도리를 집어들고 안주머니를 더듬으며 수표책을 꺼냈다. 브라이스가 내민 펜을 받아 수표를 끊고 '담당판사 브라이스 크레이머'라고 적힌밑부분에 사인을 했다. "이제 벌금은 전액 지불했습니다, 재판관님." "인정합니다, 변호인." 패트릭의 천연덕스런 태도에 지지 않으려고 맞장구를 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면서 가능한 그와 떨어진 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다음은 사죄할 차례야." "그 구두 멋있는데." 책상 밑으로 삐쳐나온 브라이스의 발가락과 복사뼈를 삐끔히 내려다보며 패트릭은 싱긋이 웃었다. 브라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사소한 농담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 같아 재빨리 냉정을 되착고 대꾸했다. "고마워." 브라이스는 태연한 척 대답하며 미소를 띄웠다. "아주 착용감이 좋은 신발이야." 문득 패트릭은 와이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데도 땀이 나는데 저렇게 두터운 법복을 입고 있는 브라이스는 얼마나 더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브라이스는 내색않는 걸 보면 틀림없이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둘 밖에 없는데 편하게 법복을 벗지 그래? 여긴 한증막이군." 패트릭의 엉큼한 수작에 저의기 놀라면서도 모른척 하고 대답했다. "고맙지만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판사." 패트릭은 계속 충돌질 했다. "법복을 입고 위엄을 차리지 않아도 네가 판사란 사실을 잊지 않을 테니까 잠시나마 그 무거운 법복을 벗고 더위를 식히지 그래." 위엄뿐이랴, 누구보다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지, 패트릭은 속으로 덧붙였다.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미스터 맥브라이드, 사죄나 빨리 해주실까?" 브라이스는 현 상황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위압적으로 말했다. "법정 모독죄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 사실을 숙지하고 차후 두 번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맹세하겠습니까? 변호인." 패트릭은 브라이스를 빤히 쳐다보며 읊조렸다. "재판관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판결에 지장을 미친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두번 다시 이런 불미스런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을 맹세합니다." 패트릭의 달콤하고 나직한 목소리는 마치 애무하듯이,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사죄를 수리하겠습니다." 브라이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갑자기 목이 막혀 헛기침을 먼저 한 다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30분 후에 개정키로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리오나가 오리라 믿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섰다. 브라이스가 방을 나가겠다고 하자 패트릭은 정중하게 인사로 대응했다. 그의 예의바른 태도에 브라이스의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열 두시까지 내 집무실을 사용해도 좋아요. 미스터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소다수를 마시면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 두시다. 패트릭은 나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옷을 갈아입는 중일까? 리오나가 그의 옷을 갖고 온지 벌써 20분이 지났는데 여태 집무실에서 나가는 기척이 없었다. 도대체 뭘하고 있을까 집무실에서 벌거벗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지 가슴이 두그거렸다. 동시에 또 하나의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품안에 무리하게 가슴을 꼭 밀착시켜야만 했던 고교시절의 굴욕적인 댄스 장면이었다. "빨리 한번 추고 끝내 버리자." 주위 사람들의 성화가 극에 달하자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내려갔다. 그날 밤 브라이스는 대담한 디자인의 드레스 덕분에 패트릭이 우람한 두 팔로 자신을 꼭 껴안고 춤을 추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짝 긴장한 채 플로어를 돌고 있는 동안 축구팀 멤버와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빈정대는 이야기가 귓가에 들려왔다. "불쌍한 맥브라이드! 성적은 꼭 같으면서 포옹하는 솜씨는 크레이머쪽이 단연 우수한데." "저 녀석이!" 브라이스는 발끈하여 대들려고 몸을 돌렸다. "참아. 지껄이게 내버려 둬." 패트릭은 숨이 막힐 정도로 힘차게 껴안으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너무 세게 껴안지 마!" 겨우 숨을 돌리게 되자 브라이스는 필사적으로 애원했지만 패트릭은 능글맞게 웃으며 막무가내였다. 그는 브라이스에게 품었던 그 동안의 한을 오늘밤 죄다 풀 작정인 것 같았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실컷 추는게 어때?" "벌써 충분히 췄잖아." "마음을 편히 하도록 해."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 녀석들에게 내가 너보다 솜씨가 좋다는 걸 증명해보일 거야. 자, 몸을 느긋이 해. 이건 마치 로보트와 춤추는 것 같잖아?" 천만 다행히도 다른 커플들이 댄스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악동들의 시선을 끌지 않아도 되었다. 플로어가 춤추는 커플들로 꽉 차게 되자 브라이스는 빠져나갈 궁리를 모색했다. 그런데, 문득 브라이스는 드레스 끈이 끊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슴을 반이나 드러내며 아슬아슬한 어깨끈 하나에 지탱하고 있던 드레스가 스텝을 밟을 적마다 슬슬 흘러내리자 브라이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꼭 밀착시켰다. 그는 브라이스의 양손을 꽉 잡고 억지로 한쪽손을 자신의 허리에 갖다대게 하고 나머지 한손으로 목을 두르게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힘차게 잡아당겨 자신의 몸에 착 달라 붙게 하고 한 손을 그녀의 무성한 머리 속에 넣고 구석구석 어루만졌다. 더 괘씸한 것은 브라이스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아 마치 브라이스가 포옹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브라이스는 바둥대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실크 드레스는 무정하게도 흘러내려 장미빛 유듀가 드러났기 때문에 당황하며 포기했다. 고동소리가 빨라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따. 그렇찮아도 꼬투리를 잡아 브라이스를 망신줄 궁리만 하는 패트릭이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없었다. 패트릭은 그녀를 꼼짝못하게 몸을 밀착시킨 다음 우아하게 말아올린 머리를 풀어 나체에 가까운 브라이스의 등에 커튼처럼 드리워 주었다. "정말 멋진 몸이야, 크레이어. 근사한데." 푸른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내려다 보는 그를, 브라이스는 증오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착한 아이지? 얌전하게 구는게 좋을 거야. 내가 뒤에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어떻게 될건지 잘 알고 있겠지?" 브라이스는 새빨개졌다. 댄스가 끝날때까지 그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인정했다. 더 이상 수치스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라는 인간은 뱀처럼 징그러워." 브라이스는 그의 목에 달라붙은채 저주의 말을 내뱉았다. "너한테는 경멸감외엔 아무것도 못 느껴!" "오늘밤까지만 해도 나도 널 그렇게 생각했어." 패트릭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정을 억누른 저윽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네게도 좋아할만한 곳이 있다는 걸 알았어." 그의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다. 도저히 더이상의 굴욕을 견뎌낼 수 없었다. 브라이스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패트릭의 셔츠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잠자코 그에게 몸을 맡긴채 비참한 마음을 달래며 이 괴로운 시간이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의외로 그 순간은 빨리 찾아왔다. 음악은 아직 흐르고 있는데 패트릭은 갑자기 춤을 멈췄다. 브라이스가 고개를 들고 그의 용태를 살피려 하자 그는 플로어를 가로질러 여성용탈의실을 향해 그녀를 데리고 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주기 위해 브라이스의 등위에 바싹 달라 붙은 채 걸어갔따. 가슴속에 숨어 있는 어깨끈을 찾아내어 당겨 주자 브라이스는 당황하여 얼른 옷을 끌어올려 가슴 위까지 완전히 가리고 패트릭이 받쳐 주고 있는 끈을 받아쥐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울지마, 브라이스." 그는 애원조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널 울리다니 내가 나빴어." 저쪽으로 꺼져 버려! 브라이스는 속으로 악을 쓰고 있었다. 그가 꼼짝않고 서 있으니 탈의실에 들어가기도 어쩐지 어색했다. "나 외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 절대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께." 브라이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도권을 쥔 그가 보내주지 않는 한 이 곳을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패트릭은 그녀의 턱을 쥐고 억지로 자기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본 순간 패트릭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난 정말...아! 브라이스, 정말 미안해." 브라이스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던 패트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브라이스의 턱을 끌어당겨 살짝 입술을 포갰다. 깃털처럼 가볍게 날쌘 키스였다. 브라이스의 마음 속에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브라이스는 탈의실로 달려 들어갔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파티장에 돌아왔을때 패트릭은 이미 파트너를 데리고 모습을 감추었다. 브라이스도 서둘러 파트너에게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브라이스는 굳게 맹세했다. 이제부터 절대 패트릭 맥브라이드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그 맹세를 깨뜨리지 않았따. 브라이스가 과거의 세계를 헤매이고 있을대 복도 맞은 편에 있는 집무실에서는 패트릭도 꿈같은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 이마에 붙은 반창고가 거슬려 앞머리를 살짝 드리웠다. 패트릭은 벽쪽에 다가가 액자 속에 들어있는 그녀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따. 브라이스 크레이머 판사. 이 사진은 그녀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다. 수십년동안 패트릭을 짓눌러 왔던 저 교만한 미소나 시선도 이제 두렵지 않았다. 만약 학창시절에 지금만큼이나 그녀에 대해 잘알고 있었다면 훨씬 일찍 그녀에게 도전해봤을텐데. 패트릭은 다시 한번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따. 이제 5분 후엔 샴페인보다 더 기분좋은, 장미꽃 향기 그윽한 이 방을 나가야 한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호가니 책상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데스크 스탠드에 꽂힌 펜을 집어들고 윗서랍을 열어 메모지를 꺼냈다. 집무실을 사용토록 해준데 대한 감사의 말과 함께 '가까운 장래에 다시 만납시다'라는 협박인지 부탁인지 구분이 모호한 문귀로 끝을 맺었다. 거창하게 사인한 후 편지를 접어, 이번 소송심리를 마치고 돌아왔을때 가장 먼저 눈에 띄일 곳에 놓았다. 브라이스에게 마음 한 구석에 밀쳐둔 나라는 존재를 다시 일깨우고 싶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리오나가 들어왔다. "크레이머 판사님은 윗쪽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재판에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 "지금 나가려던 참입니다. 미세스 피터슨." 패트릭은 그녀 옆을 스쳐지나 밖으로 나서면서 행복에 겨운 미소를 던졌다. 그리고 강한 아일랜드 사투리로 물었다.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멋진 하루였다고 생각치 않으십니까?" "네, 정말 그렇군요." 리오나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패트릭의 남성적인 매력에 거스리지 못하고 미소로 답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제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운을 한번 시험해 보세요." 패트릭은 뒤돌아서서 리오나에게 가볍게 경례하며 자기 편이 되어준 것에 사의를 표했다. "오! 나의 사랑하는 여인이여! 기다려 다오. 소년은 행운을 시험하고 사나이는 위험에 도전한다!" 농담을 던지며 패트릭은 방을 나섰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변호인." 브라이스는 원고측 변호사 패트릭의 질문을 저지시키고 직접 증인에게 질문했다. "미스 베이머, 그러니까 사회복지국은 생모에게는 월 3백달러의 양육비를 지불하면서 양부모에게는 월 6백달러의 양육비를 지불했단 말입니까?" "네." 마드레느 베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당황하며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미즈 시나 와인부시는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관님, 본 변호인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패트릭이 다시 끼어들자 브라이스는 잠자코 있으라는 표시로 손을 저었다. 패트릭은 자기가 하고자 했던 나머지 질문을 브라이스가 직접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변호인석으로 되돌아갔다. 놀란 원고에게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낸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자신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말은 결국 미즈 와인부시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네." 베이커가 대답했다. "그럼 양부모측의 여성도 직업을 갖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양자를 입양한 부모측의 여성은 주법률상으로 직업을 갖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증인은 내려가도 좋습니다." 마드레느 베이커는 구세주라도 만난양 서둘러 증인석에서 내려갔다. 브라이스가 말을 이었다. "변호인들은 재판관석 가까이로 와주세요." 패트릭은 주 대표로 나온 로이드 헤이스팅스보다 몇 보 앞에 섰다. 패트릭은 지금부터의 심리에는 자신이 젼혀 필요치 않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부터 벌어질 재미있는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브라이스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미스터 헤이스팅스. 사회복지국은 이 아이들의 양육비로서, 양부모에게 생모보다 두 배나 되는 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네, 재판관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제도입니까?" 헤이스팅스가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고심하는 동안 브라이스가 호통쳤다. "그만 됐어요! 듣고 싶지도 않아요!" 결국 시나 와인부시는 생모가 키울때보다 양부모가 더 많은 양육비를 보조받기 때문에 자신이 '안정되게 아이들을 돌볼 만큼 돈을 모을때까지' 라는 조건으로 양육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인정받게 되었다. 주정부는 여자와 아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라는 따끔한 판결과 함께 브라이스는 폐정을 선언했다. "만약 맥브라이드가 법정모독죄로 자기를 기소한 나에게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이것으로 그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에요." 집무실에서 법복을 벗으면서 리오나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미스 베이커를 취조하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러나 유능한 변호사가 말재주로 판결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나가려는 줄로 아셨잖아요?" 브라이스는 리오나의 말을 적당히 흘려 들었다. "가난한 여자가 우수한 변호사 덕분에 법정이 부자편만 드는게 아니라 자기만 정당하면 가난한 사람편도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리오나도 그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판사님도 맥브라이드씨 덕분이죠." "그 사람은 오늘밤 베개를 높게 하고 편히 자겠지요?" 브라이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상처부위가 아프지 않다면 말이에요." "판사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부주의했던 탓이니까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그야 그렇지만.." 대답은 그렇게 했으니 왠지 마음이 언짢았다. "샌드위치를 내 방에 갖다 주겠어요? 리오나.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오후소송건을 준비하고 싶어요." 여러 가지 개운치 못한 생각에 얽매여 있던 탓에 브라이스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오! 하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금주 내내 찜통 속에 견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쇼트팬츠만 입고 있다가는 감기 들어요." 리오나도 그제서야 주위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는게 좋겠어요, 판사님." "그래야겠어요." 브라이스도 동의했지만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오늘오후 패트릭과 또 한건의 재판에서 대결해야 하므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심정으로는 옷장 속에 갑옷이 마련되어 있다면 법정에 입고 나가고픈 심정이었다. 쇼트팬츠와 소매없는 셔츠를 벗고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옷장 앞에 서서 갈아입을 옷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브라이스는 분홍빛 셔츠 드레스를 집어들도 전화기에 달려갔다. 한 손에 드레스를 쥐고 책상에 걸터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려는 순간 패트릭이 남긴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편지가 접혀 있어서 내용은 보이지 않으나 힘찬 사인만은 뚜렷이 보였다. 깜짝놀란 브라이스는 엉겁결에 수화기를 든 책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때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고수화기도 두어번 굴러 저쪽 구석에 처박혔다. 브라이스는 몸을 구부려 수화기를 집어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전화기가 떨어져서 그만..." 아무런 대꾸가 없다. 전화가 끊어졌나? "여보세요? 크레이머 판사인데, 누구십니까?" "만약 제게 분별력이 없었다면, 판사님. 이렇게 어줍잖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크레이머 판사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겠죠?" 키득거리며 놀려대는 패트릭의 목소리에 이번엔 브라이스가 침묵을 지켜야 했다. "축배를 들고 싶은 기분이야, 브라이스." 비아냥거리는 말만 제외하면 말꼬리를 길게 빼는 아일랜드 발음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존경하는 판사님. 제가 오늘 밤 식사에 와주십사하고 부탁드리면 재고해 주시겠습니까?" 3 "심리를 담당한 판사를 승소 축하 파티에 초대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 아닐까요?" 브라이스는 겨우 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변호사는 재판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 하나이지만 재판관은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비록 미즈 와인부시가 이겼다 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축배를 들순 없어요." "승소 축하가 아니야, 브라이스." 위엄이 가득한 브라이스의 말투에 모처럼의 좋은 기분이 상해 버린 그는 약간 언짢은 투로 대꾸했다. "몇 년 만의 재회를 축하하려는 거야." "재회라고?" 브라이스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다시 유쾌한 듯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듣고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놀리고 있느 거야. 그 수작에 넘어갈까봐. "죄송합니다만 나는 축하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금도 죄송스러워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녀의 질려 있는 표정을 상상하면서 패트릭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한테 보상해 줄 일이 있을텐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패트릭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고교 시절의 어리숙했던 내가 아니야. 지금은 그만 찬스가 주어져도 알차게 활용하고 있지. 우린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하는데." 브라이스는 그의 말뜻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되받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공통점이 많다니?" 다시 섹시하고 허스키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브라이스는 또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저 매력적인 웃음소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지금 데이트에 초대하는 거야?"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는 것 뿐이야." 패트릭은 딱 잘라 대답했다. 브라이스는 자신을 고리타분한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재차 다짐했다. "정말 업무와는 관계없는 거지?" "먹고 마시고 즐길 뿐이야." 그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과연 패트릭을 믿어도 괜찮을까? 만약 저녁식사에 초대해 놓고 유치장에 수용했던 일을 신문에 발표하겟다며 협박을 한다면? 옛날부터 나에게 복수심을 불태워오던 사람이니까 어쩌면 대중들 앞에 날 불러내어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높이는데 이용하려 들지도 몰라. 더 나쁜 것은 보다 개인적인 뭔가를 얻기 위해 날 이용하려 든다면 어떻게 하지? 오늘 그의 눈은 욕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패트릭은 플레이보이로 소문이 자자하다. 어쩌면 다음 목표가 나일지도 모른다. 수치심이라곤 모르는 남자니까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비밀을 지켜준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생사가 걸린 결단을 내려달라고는 부탁하지 않았어, 브라이스." 패트릭은 약간 초조한 듯이 대답을 재촉했다. "식사하면서 수다나 떨어 보자는 것뿐이야." "그 말 진심이지?" 브라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는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며 후회했다. 선약이 있다하더라도 취소하고 그의 초대에 응하고 싶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와 외출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그렇다면 좋아. 시간과 장소는?" "일곱시 반에 '앙드레'를 예약해 둘께. 프랑스 요리 좋아하지?" 오케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패트릭의 입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아마 레스토랑 선택도 식사 초대만큼이나 꼬치꼬치 따지며 뜸을 들일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브라이스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패트릭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럼 됐어. 주소를 가르쳐 주면 일곱 시 경에 데리러 갈께. 식사 전에 라운지에서 술 한잔 하는게 어때?" "앙드레는 법원에서 가까우니까 걸어가도 돼. 오후에 심리가 2건이나 남아있고 내일 아침까지 처리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데리러 올 것 없이 앙드레에서 만나기로 해." "너만 좋다면 난 아무래도 관계없어." 브라이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집앞까지 데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럼 식사 후에 집까지 바래다 주지." "그럴 필요도 없어. 오늘은 차를 타고 왔으니까." "무슨 데이트가 이래?" 드디어 패트릭이 언성을 높였다. "함께 식사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란 소리야?" "데이트가 아니라 저녁식사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브라이스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시험하면서 놀려 주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따. "변호사와 데이트하는 것은 판사의 직무에 들어 있지 않잖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필요한 예약은 내가 알아서 해둘 테니까 밤에 만나자." 마지막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브라이스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첫 데이트 나가는 소녀마냥 가슴이 두근거려서야...혹시 큰 실수라도 저지르는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옛날부터 브라이스는 패트릭의 매력에 심한 반발심으로 대처해왔으나 지난 몇 년 사이에 그의 매력에 서서히 빨려들어 이제는 저항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의 패트릭은 어느 면에서 보나 완벽한 성인남자이며 여자를 혹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허스키한 웃음소리는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군다. 긴 저녁식사동안 그와 함께 있으면서 과연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앙드레의 프랑스 요리 풀코스는 맛잇고 메뉴가 풍성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혀끝에 살살녹는 요리를 들면서, 과연 그의 매력에 혹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결국 대답을 내리지 못한채 브라이스는 업무에 정신을 집중시키기로 했다. "전화온 것 없어요?" 집무실을 향하면서 리오나에게 물었다. 패트릭이 마음이 변해 디너 취소를 통고해왔을까봐 걱정되었다. 지금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데 일곱시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하나 있어요." 리오나는 별뜻없이 대답했으나 갑자기 브라이스가 울상을 짓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 얼굴을 하시다니? 괜찮으세요? 어머니가 일요일 오후에 있을 자선파티에 참석하실 것인지 알아보려고 전화하셨어요. 누구 전화였을 거라고 생각 하셨어요?" "그야 물론 어머니죠." 패트릭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브라이스는 얼른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자연스런 미소를 띄우며 당당하게 리오나 앞을 지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지금 전화를 걸어 반드시 참석할 거라고 전해 주겠어요?" "그러나 평소에는 이런 파티를 싫어하셨잖아요?" "오늘은 달라요." 브라이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곤 적당히 얼버무렸다. "별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오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싶은 기분이에요. 뭐든지 부탁해보세요, 리오나. 뭐든지 들어드릴테니까" "그럼 월급을 올려주시겠어요?" 브라이스는 집무실로 들어가 고개만 쏙 내미었다. "리오나, 이 가엾은 어린 양을 그 사나운 사자 에버네이시 판사와 대결시킬 작정이세요? 당신이 부탁한 신형 전자타자기만으로도 예산초과에요." "방금 한 말 잊어 주세요." 리오나는 웃으면서 브라이스에게 차가운 아이스티를 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 사람 비서를 그만두고 당신 비서가 되었다고 수전노같은 에버네이시 판사는 어떻게 하든 날 해고시키려고 벼르고 있는걸요."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브라이스는 비서를 안심시키고 책상으로 돌아와 다음 심리할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패트릭의 메모를 읽어보았다. 패트릭은 '숫사슴머리' 뒷편 도로에 차를 세우고 뒷문을 통해 펍에 들어갔다. 밤 동안이 개인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 집을 들리는 것이 맥브라이드 형제들의 일과로 되어 있고 모두들 이 일일행사를 즐기고 잇었따. 그러나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많은 질문이 패트릭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행이 이른 시간이어서 손님들은 별로 없을 테지. "아무도 안 왔습니까?" 맥브라이드 집안과는 오랜 친구이자 요리사인 놀랑무니가 그릴 앞에 서서 기름방울을 튀겨가며 햄버거를 굽고 있는 것을 보고 패트릭이 말을 걸었다. "네가 제일 꼴찌야." 놀랑은 바와 요리자 사이에 있는미닫이 문을 가리키고는 손을 저었따. "내가 너라면 이 길로 되돌아가겠어. 진짠지 거짓인지 모르는 괴상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같던데. 그리고 너의 아버지도 대단해 화가 나 있어. " 패트릭은 이대로 발길을 돌려 파렴치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형제들의 조롱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차피 한번은 대결해야 함을 잘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형 같으니라구! 잠자코 있으라고 했는데!" 발소리도 험상궂게 바를 향해 걸어가다가 뒤에 바짝 따라오는 놀랑을 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저씨는 어딜 가시는 겁니까?" 놀랑은 빙긋이 웃었다. "이봐, 난 네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야. 저 징글맞은 악마들에게 네가 당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겟어? 내가 옆에 있어 줘야지." "어이!" 패트릭은 놀랑에게 눈을 흘기고 기세 좋게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신 형! 무슨 말을 어떻게 꾸며 댄 거야?" "누가? 내가?" 장남인 신 맥브라이드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카운터에 기대서서 반문했다. 40세인 그는 패트릭보다도 키가 컸고 덩치도 좋지만 혈기에 넘치는 패트릭은 형의 연륜이나 거대한 체구에 조금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언제나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차남인 닐과 막내인 캐빈도 형에게 부추김을 당해 호기심이 가득득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어머니, 지지리도 못난 저 녀석을 내쫓아 버리세요." 신은 동생의 눈에서 심상찮은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느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머니에게 매달리면서 들고 있던 맥주잔을 자기 가슴에 들이대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내게 손대지 마! 이건 새로 맞춘 양복이야." 몰리 맥브라이드는 155센티의 작달만한 키에다 빨강 머리를 가진 혈기 왕성한 여성으로서 남자밖에 없는 집안을 늠름하게 다스리고 있으며 아들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 독립했어도 여전히 하루에 한번씩 본가에 모이도록 하는 수완을 갖고 있다. 60세가 넘어 이제는 빨강머리에도 흰머리가 섞여 있지만 엄한 표정만은 여전했고 녹색눈은 아직도 맑고 아름다웠다. "여기는 싸움하는 곳이 아니야! 신성한 영업장이란 말이다!" 어릴 적부터 뒤엉켜 싸우는 아들을 말리는데 이골이 난 몰리는 지금도 여전히 두 아들 사이에 들어가 멀지감치 떼어 놓았다. "자! 패티. 오늘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법정에서 옷을 벗기게 되었니? 바른대로 말해 봐!" 그녀는 장남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신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만." "불쌍한 패티!" 두번째 형인 35세의 닐은 패트릭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패트릭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어릴 적 애칭을 불렀다. "철의 여성이 멍청이 변호사의 껍데기를 벗겼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난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네 머리 밑에 타박상이 감춰져 있는 것같은데?"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어." 패트릭은 무심결에 손을 이마에 갖다대며 말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닐은 양 볼에 보조개를 만들면서 놀려댔다. "옷을 벗기기 전인지 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법정모독죄로 구속당했다면서?" "어떻게 알았지? 신 앞으로 보낸 편지에 법정모독죄 선을 적지 않았었다. "도처에 스파이들을 깔아놨지." 신이 옆에서 설명했다. "사실은 네 옷을 가지러온 여자가 수다를 떨어 알게 됐지." 닐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 크레이머 판사는 네 몸 중 어느 부분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든?" "형, 나는 말이야, 형이 크레이머 판사의 어느 부분을 더듬다가 이마에 혹을 달게 되었는지 그게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케빈과 닐은 눈썹이 앞머리에 닿을 만큼 치켜 뜨고 있었고 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당히 해 둬!" 패트릭이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마 다리가 제일 마음에 들어했겠지?" 신은 패트릭의 호통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짓궂게 말했다. "털이 부숭부숭하고 단단한 무릎이 솟아 있는 긴다리를 제일 좋아했겠지? 어떻게 생각하니, 닐?" "불쌍한 패티, 형님 말에 신경 쓰지 마라." 닐은 동정어린 목소리를 꾸며대며 패트릭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그렇지만 확실히 멋진 다리라는 데는 나도 동감이야." "아버지, 형님들에게 맥주나 한잔 주세요." 빈컵 두개를 내밀면서 케빈이 말했다. "맥주로 입을 막지 않으면 잠자코 있지 않을 테니까요." 스탠드 앞에서는 토마스 맥브라이드가 가족들에게 등을 돌린 채 맥주를 따르면서 아들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일랜드 시골에서 이민온 뚱뚱하고 대머리가 벗겨진 일개 바텐더 출신인 그가 저렇게 아름다운 미안과 결혼하고 이렇게 늠름한 네 아들을 두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네 아들은 모두 사랑하는 아내의 푸른 눈과 짙은 붉은 머리를 물려 받았다. 게다가 닐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머니의귀여운 보조개를 물려 받았고 패트릭과 케빈은 아내의 다혈질 기질을 물려 받았다. 자그마하고 뚱뚱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네 아들은 한결같이 키가 190센티를 넘었고 늠름하고 쭉 빠진 체격을 갖고 있었다. 네 아들 모두 이제 힘으로는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지만 어느 누구도 아버지와 힘자랑을 시도해본 아들은 없었다. 거칠고 다혈질인 아들들은 그만큼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었다. 토마스는 최대한 노력하여 자식 교육에 헌신했으나 네 아들 모두가 공부를 잘해서 변호사가 될줄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장님 신이 변호사 사무소에 삼형제가 공동경영자로 참여하게 되어 '맥브라이드 & 맥브라이드'란 간판을 내걸었을 때의 기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아들들을 볼 적마다 그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버지, 신 형님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패트릭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말한 뒤 닐의 팔을 뿌리치며 스톨을 끌어당겨 앉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나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토마스는 이제 슬슬 분위기를 진정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대화에 참여했다. "이런 벽창호같은 녀석들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해보자, 패티. 몰리, 여길 대신 맡아 주겠소?" "물론이죠." 몰리는 환히 웃으며 카운터 안에 들어왔다. "놀랑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아버지는 대단히 화가 나셨다면서요?" 패트릭은 아버지에게 말하는 도중에도 형제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냥 벼르고 있었을 뿐이다." 토맛는 카운터에서 나와 요리장을 향해 걸으면서 말했다. "네가 아름다운 여성 판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바지를 벗었다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게다." "죽일 형 같으니라구!" 패트릭이 맥주 컵을 쥔 손에 힘을 넣자 맥주가 조금 쏟아졌다. 신은 미안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별 뜻은 없었어. 단지 네가 편지에다 오늘 하루는 네게 있어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야." "한대 맞아보고 싶어?" 패트릭은 신 곁에 다가가서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신이 뒤로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카라가 라이언을 어머니에게 맡기러 올거야. 카라와 단 둘이서 식사하기로 되어 있어. 네 형수가 그 지긋지긋한 부이야베스 요리를 만들어 준다는구나." "그것 잘 됐군." 패트릭은 형이 제일 싫어하는 요리를 형수가 억지로 먹이는 광경을 상상하며 싱긋이 웃었다. 20분후 가족은 모두 펍 레스토랑 테이블에 둘러앉아 패트릭의 설명을 들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형제들은 부모님 가게를 나서면 다른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할 스케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몰리는 상관않고 언제나 푸짐한 식사를 대접했다. 오늘도 싱싱한 버섯을 볶은 요리와 양파링, 스파이스를 곁들인 야채 등을 내놓았다. 매일 저녁마다 영양가 풍부한 요리를 먹지만 하루저녁만 마음놓고 프렌치 프라이를 먹으면 당장 2킬로그램이나 불어나는 놀랑 에 비해 전혀 체중이 달라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크레이머 판사는 형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거야?" 캐빈은 잘 익은 버섯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이거 정말 놀랄 일인데." "분별력이 있는 여자니까." 패트릭의 말에 모두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계면쩍은 듯이 얼른 둘러댔다. "내가 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내 기억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예전에는 브라이스 크레이머를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노처녀'라고 했었지? 몰리가 대표로 설명했다. "사람은 변하는 법입니다." 패트릭은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네 말이 맞다. 패티, 너두 이렇게 컸는걸." 몰리가 손을 뻗어 패트릭을 다독거리자 남자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제를 바꿉시다." 패트릭은 가족들에게 놀림당하는데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잠자코 시계만 바라보았따. 옷갈아 입고 일곱시까지 약속장소에 나가려면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한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오늘 밤에 데이트가 있어요." "잠깐 앉아 있어라." 막 일어서려는 패트릭을 닐이 저지시켰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이번엔 무슨 얘기야." 패트릭은 지겹다는 듯이 투덜대며 자리에 앉았다. 닐은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평정을 되찾은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언제 또 말할 용기가 날는지 알 수 없게 때문이다. 네 여자 소동을 보고 오늘밤 나의 발표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지독한 봉변을 당하는 건 오로지 형님들 때문이라구." 패트릭이 빈정댔다. "네게 겸허함을 가르치는게 형들의 의무가 아니겠니?" 신이 놀렸다. "아주 중대한 의무이지." 닐도 동의했다. "한대 때려줄까?" 케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싶지만 아직 맥주를 다 마시지 않아서." 형제들이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자 몰리가 손을 들어 중단시켰다. "조용히들 해라!" 닐의 발표에 심각함이 깃들어 있음을 눈치챈 몰리가 재촉했다. "자, 빨리 말해봐라, 닐." "네, 어머니." 닐이 서두를 꺼냈다. "어머니는 이 집안에 손자들을 가득 채우고 싶어하셨죠?" 케빈이 눈을 크게 떴다. "알았다! 형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웬 추태? 옆 사무실에 있는 건축기사 아가씨를 임신시켰지?" 케빈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너, 그게 정말이냐?" "난 아무도 임신시키지 않았어!" 닐이 지겹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었따. "그런게 아니야. 이제 슬슬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신 형처럼 결혼이란 신성한 감옥에 갇히고 싶어서 그래." "결혼이라구?" 삼형제가 동시에 소리쳤다. "결혼준비나 해주세요."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맥브라이드 형제들은 콜럼버스 시의 적지 않은 여학생들을 울리고 다녔다. 다행히 신은 몇 년 전에 결혼했지만 나머지 삼형제는 30세가 넘도록 여전히 여자들의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가정을 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결혼하여 가정 속에 갇히는 것보다 스포츠카와 악마 같은 매력을 지닌 여자들이 훨씬 낫다고 공표하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분방하고 놀기 좋아하는 닐의 독신 포기 선언은 대단한 뉴스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꿈은 또 하나 이루어지는 셈이다. "아일랜드 여자냐?" 몰리는 팔짱을 끼고 눈을 반짝였다. "모르겠어요. 아직 물어보지 않았어요." 닐은 아직 평정을 되찾지 못한채 퉁명스레 대답했다. "좋아." 아들의 태도에 몰리는 당황하며 말했다. "건강하면 그걸로 됐다. "어머니! 말을 고르는게 아니에요!" 닐은 어머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입을 벌리고 이빨을 조사해볼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타마라를 못 만나게 할 테니까." "타마라라고 했니?" 몰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름을 들으니 어쩐지 아일랜드 사람같구나. 당신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톰?" "그럴 것 같은데." 토마스는 닐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어디 출신이든 우리는 그녀를 좋아하기로 결정했다. 언제 만나게 해줄 참이냐? 거창하게 환영준비를 해주지 않겠소? 몰리." 이번 주말에 타마라 윌슨을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겠다고 닐이 약속하자 이번엔 결혼식 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 패트릭은 닐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꼭 가야 돼. 벌써 늦었어." "데이트가 있는 게냐?" 몰리는 아들의 말투를 흉내내며 물었다. "특별한 여자냐?" 말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는 패트릭을 보고, 몰리는 두 손을 모아 애원하는 시늉을 했다. "이제 형님들을 본받을 때가 되었지 않니? 너도 이제 젊지 않다. "알았습니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가 더이상 설교하기 전에 패트릭은 쏜살같이 밖으로 나왔다. 차 있는 곳을 향하면서 그런 상상에 잠겨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지금까지 결혼을 생각할 만큼 친하게 지낸 여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브라이스 같이 유서 깊은 가문의 아가씨를 결혼상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브라이스 크레이머와 몰리 맥브라이드는 눈을 씻고 봐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지만 두 여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유쾌해진다. 패트릭이 기억하는한, 어머니와 브라이스는 사친회에서 한 두 번 마주친 적은 있겠지만 몰리는 브라이스를 기억하지 못하고 브라이스 역시 맥브라이드 집안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맥브라이드 집안은 중산층 지역에 살고 있지만 브라이스는 드넓은 부지가 딸린 대저택에서 자랐다. 그는 브라이스의 부모가 왜 딸을 명문 사립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까 하고 항상 궁금해왔다. 브라이스가 부자학교에 전학가면 혼자서 일등을 차지할 수 있을텐데라고 수없이 원망해왔다.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날부터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다. 패트릭은 의식적으로 그녀를 피해왔다. 제멋대로 자란 부잣집 딸이란 점보다는 자기 주위에서 볼 수 없는 품위있고 멋진 여자였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으로 패트릭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패트릭은 애차 알파 로메오 스파티더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작은 마을 통해 하이웨이로 빠져나가면서 외쳤다. "두고봐라, 브라이스 크레이머. 널 꼭 손에 넣고 말테다!" 4 브라이스는 정각 일곱 시 반에 앙드레에 도착했다. 소매 부근이 깊게 패인 검은 드레스를 갈아 입기위해 집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무실에서 일하다 달려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늦게 왔다. 다섯시 정각에 집에 달려가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머리를 매만지고, 드레스를 죄다 꺼내놓고 입어 본 다음 겨우 노슬리브의 실크 드레스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패트릭은 모를테지. 이 드레스를 선택한 것은 뜨거운 6월의 기후 때만은 아니다.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벌어진 소매 틈새로 가슴 부근이 살짝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나 업무상 동료와의 식사에 입고 나가도 별다른 오해는 받지 않을 거라고 누누히 자신에게 들려 주었다. "할 말 있으면 해봐." 문을 밀고 들어서려는 데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다. 브라이스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뒤돌아보았다. 웨이브진 머리가 바람에 헝크러진 걸 보면 그도 서둘러 달려온 게 틀림없지만 그는 기다리다 지친 사람마냥 큰 소리 치고 있었다. "내일 소송준비에 열중하다가 그만 깜빡 잊어버렸어."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거짓말인줄 알지만 패트릭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밤 브라이스의 화장은 완벽했다. 매력적인 네이비 블루 눈위에 아이새도우를 살짝 바르고 엷은 핑크빛을 띤 볼은 오똑 솟은 광대뼈를 강조하여 멋지게 볼 터치를 발랐으며 장미빛 립스틱 색조는 장미 송이와 같은 입술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투명한 빛깔을 띄고 있는 도톰한 귓볼에서 귀엽게 달랑거렸고 윤기 있는 검은 머리는 단 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소송 사건 서류더미에 묻혀 있다 온 사람치곤 지나치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자기와 식사하기 위해 저렇게 차려입었다고 생각하자 패트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통체증이 심해 나도 늦게 왔어." "어머나, 그랬어?" 브라이스는 싱긋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는 평소보다 많이 헝크러져 있지만 하얀 와이셔츠 깃은 풀을 먹여 빳빳하게 세우고 가는 격자 무늬 넥타이는 단정하게 매어져 있으며 회색 펜실스트라이프 양복은 주름 하나 없었다. "할 말은 나중으로 접어두고, 어쨌든 옷차림은 합격인데." "너만큼은 아니지만 신경썼지." 패트릭은 싱긋 웃으면서 계면쩍은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그녀에게 팔을 둘렀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살갗에 닿자 그의 가슴은 참기 힘들 정도로 두근거렸다. 패트릭은 심호흡을 한 뒤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아! 지금 장미 송이 같은 입술에 키스하고 있다!' "술은 생략하고 바로 식사할까?" 빨간 드레스 사건을 회상하니 목소리는 자연 비단차럼 매끄러웠다. "그래." 브라이스는 겨우 대답은 했으나 목이 까칠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룻밤 내내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술만 거르자는 것이 아니라 식사도 생략하고 바로 다음 코스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눈초리다. 과연 우리 둘 사이에 놓여진 수많은 문제를 무시한 채 침대를 같이 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이 절여올 정도로 취하는데 과연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까? 그와 데이트하는 것은 고통을 자청하는 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녀는 오늘 오후 내내 10학년때의 그날밤, 그가 키스하고 그의 손가락이 부풀어오른 가슴께를 스쳐 지나가던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와 키스하고 손가락으로 애무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라고 생각할 적마다 괴로웠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사람이 많아 불편하지 않겠어?" 어두운 레스토랑이 겨우 눈에 익어졌을 때 패트릭이 물었다. "내가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뭐지?" 브라이스는 도전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패트릭은 그녀에게, 맥브라이드 형제들이 온 시내에 퍼뜨리고 다니는 전염병에 감염시키기로 결심했다. '한번 보기만 해도 감염되는' 맥브라이드 병은 죽을 때까지 후유증이 남는다. 오늘밤 그는 최대한의 매력을 발산하여 무서운 세균을 퍼뜨릴 작정이었다. 브라이스는 패트릭이 그녀의 약점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오늘 아침 사건을 비밀에 붙여 주는 대신 침대로 유혹한다면 완강히 거부하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그런 불미스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상은 원래 머릿속에서만 만족되는 것이다. "요리 솜씨가 좋아 앙드레로 선택했지." 패트릭이 단호히 말했다. "둘이서 식사를 즐기고 싶었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그래?" 여전히 의심스러워 하는 브라이스의 눈을 보고 패트릭은 눈썹을 조아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주고 받자면 1~ 2 시간 정도는 걸리겠지?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보다는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물론 라이벌끼리는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보다는 훨씬 가깝지." 브라이스도 솔직히 인정하자 패트릭의 찡그러진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럼 많은 사람들 앞에 도전할 각오가 되어 있겠지?" "너만 괜찮다면 난 전혀 신경쓰지 않아." 불빛이 어두운 로비는 피아노 바와 레스토랑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패트릭은 예약확인 카운터를 향해 자신있게 돌진하는 브라이스의 어깨에 팔을 올려 놓은채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몸을 밀착시켜 장미 향기를 즐기면서 그는 브라이스가 아무리 늦게 와도 끈기 있게 기다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 몸에서는 언제나 이런 향기가 나는구나. 자연스런 피부향기야? 아니면 장미꽃잎을 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거야? 난 옛날부터 무척 궁금했어." 그는 브라이스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브라이스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너무 성급한 짓을 했다며 후회했다. "못들은 걸로 하겠어." 브라이스는 그의 도발적인 질문에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새침하게 쏘아 붙였다. 브라이스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고결하신 판사님께 실례를 했군." 그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브라이스의 어깨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넣으면서 말했다. 브라이스는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힘을 느끼자 몸이 이내 반응을 보였다. 만약 그가 이번 식사를, 두 사람 사이가 좀더 친해지기 위한 계획으로 생각했다면 그 목적은 이제 충분히 달성된 셈이다. 그가 조금만 건드려도 몸이 바르르 떨렸다. 이미 15세 소녀는 아니므로 왜 몸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급사장이 다가오자 패트릭은 마지못해 손을 내려놓았다. "패트릭 맥브라이드와 브라이스 크레이머로 예약했소." 두 사람의 이름 순서를 유난히 강조하고선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이번엔 네가 먼저로군." 브라이스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 모를테지?" 급사장 뒤를 따라가며 그는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넓은 레스토랑 구석자리를 잡고 호화로운 푸른색 벨벳소파에 앉아 몸을 편히했다. 다른 테이블과는 떨어져 있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고 은은한 조명이 밝혀진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패트릭이 바로 옆에 다가 앉았을때 브라이스는 몸을 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뜻밖에도 모든 상표를 죄다 알고 있었으며 발음도 정확했다. 주문한 샴페인을 시음한 뒤 브라이스의 글라스에 따라주며, 패트릭은 소파 깊숙히 몸을 묻고 있는 브라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난 비록 하류층 출신이지만 성인이 되어 한 가지 배운 게 있어. 상류사회 인간들과 데이트할 때는 술을 멋지게 권할줄 알아야 한다. 어때? 술시중을 잘들면 널 유혹할 수 있을까?" "난 샴페인 따위에 숩게 넘어가진 않아." 브라이스는 자신을 상류사회출신이라고 레벨을 붙이자 화가 났지만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안됐군. 오늘은 내가 승리했어." "뭐가?" "난 고교시절처럼 멋모르고 행동하진 않아. 지금 네 앞에 앉아있는 나는 어떤 장소에든 어울리는 연기를 멋지게 해낼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남자라는 걸 명심해 둬." "그렇다고 하더군." 브라이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말뜻은 그도안 나에게 관심을 가져왔다는 뜻이야? 이거 정말 기분 좋은데." "관심을 가져왔다는 게 아니야!" 브라이스는 냉점함을 잃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관심을 가지다니, 말도 안돼. 신문에서 보고, 법원에 떠도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야.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을 때 패트릭이란 이름이 몇번 거론된 적은 있지만 너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한번도 없어." 브라이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브라이스의 네이비 블루 눈에 분노의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패트릭은 유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난 오래 전부터 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왔었어. 언젠가 너와 만나게 될날을 손꼽아 기다렸지. 그날이 와도 당황하지 않도록 단단하게 대비해 왔어." 브라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대체 이 남자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신중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유분방한 남자와의 연애사건을 조작하여 크레이머 집안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려는 속셈일까? "본심이 뭐지?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 흥미를 갖는 거지? 목적이 뭐야?" 그의 푸른 눈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듯이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우선, 너와...친구가 되고 싶어." "갑자기 왜 친구가 되고 싶은지 난 잘 모르겟어." 브라이스는 냉점함을 되찾고 몸을 움직여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모른다면 구태여 알 필요는 없어. 날 믿어줘,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날 위해서라구?" "정말 고집 센 여자야, 크레이머!" "너야말로 지긋지긋한 남자야, 맥브라이드!" "우린 하늘이 정해준 커플이야. 두 사람을 위해서 건배!" 패트릭은 샴페인 글라스를 노려보며 뺨에 주름을 지어 보였다. "자, 크레이머. 친구가 된 걸 축하하는 건배야. 평행동안 서로 묶어둘 약속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마음을 편히 하라구." "좋아, 친구를 위해 건배! 두 사람이 어떤 사이든간에." 브라이스는 고급 샴페인을 한모금 들이킨 뒤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패트릭은 분명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고 머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그가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두 사람은 정치면에서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이다. 친한 관계가 되어 봤자 양쪽 모두에게 이로울게 없다. 그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걸까? "좋아, 맥브라이드,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털어놓기로 해." 웨이터가 주문한 요리를 놓고 사라지자 브라이스가 제안했다. "업무상으로도 우린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 개인적으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앙숙이야. 정치적으로 의견이 일치될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오늘 식사의 목적이 뭐야?"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자기의 마음을 몰라 주는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그녀가 늘어놓은 단어를 하나씩 분석해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건초더미에 불이라도 붙일 것 같은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몸에 손가락이 닿으면 온 몸이 불같이 달아오른다. 브라이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멀어질 생각만 하는 걸까? "그런 의심을 품었다면 왜 오늘 식사 초대에 응했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패트릭은 불길한 대답을 들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 난 진심으로 말하고 있어. 나와 식사하는게 싫다는 소리야?" "전혀 그렇지 않아." 패트릭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의자 깊숙히 등을 묻으며 매력적인 미소를 띄웠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해.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잖아? 오늘 법정에서 생긴 사건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난 믿고 싶어." 무릎위에 살포시 내려둔 브라이스의 손을 잡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브라이스는 숨이 막혔다. 그는 꽉 움켜 쥐고 있는 그녀의 주먹을 엄지손가락으로 간질러 기어코 부드러운 손바닥을 펴게 했다. "알고 있지?" "알다니? 뭘?" 브라이스는 손바닥을 부드럽게 간지르고 있는 패트릭의 관능적인 손바닥 움직임에 말초신경까지 마비되는 것 같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꾸했다. 부드러운 애무에 몸이 떨려왔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 몸의 모든 부분은 나를 향해 활짝 열리기를 바라고 있어." 패트릭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인정하려 않지만." "그만두지 못해!" 브라이스는 세차게 그의 손을 떨쳐 버렸다. 그의 말 속에 담겨진 의미에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올았다. 그가 허벅지를 밀착해 오자 브라이스는 불에 덴 양 반사적으로 몸을 뗐다. 브라이스는 경멸을 담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두번 다시 그런 야비한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보통방법으로 안되니까 협박까지 하다니, 정말 비겁해!" 패트릭은 분노에 불타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고 의아해했다. "협박이라니? 난 그저 손목 한번 잡아봤을 뿐이야. 너도 즐기고 있었잖아?" "그만둬!" 브라이스는 모욕감은 느꼈지만 그의 순진한 반응에 오히려 안심했다. "내가 사회적 평판에 신경 쓰는 줄 알고 이용할 속셈이라면 부탁해도 소용없겠지. 그러나 네 행동이 올바른 이상 네가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절대 굽히지 않아."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군. 뭐가 어쨌다는 거지?" "다음 선거에 입후보할 예정이라며?" "뭐라고?" 패트릭은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출마하는 게 죄가 되나?" "물론 죄가 되진 않아." "이봐, 왜 그런 말을 하는거지? 나같은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이기 싫어서 이야기 하는 거야? 아니면 공화당이 반대당의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할 셈이야? 그따위 편집광적이인 생각을 깨끗이 떨쳐버려." 패트릭은 기가 막혔다. 몇분 전만 해도 샴페인을 마시며 기분 좋게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난 편집광이 아니야. 정적들은 오늘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알고 싶어할 거야. 어떤 신문기사가 나올지 헤드라인을 말해볼까? '정의의 십자군, 교만한 판사에게 맞아 기절하다!" 패트릭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서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네가 걱정하고 있는게 바로 그거였어? 걱정하지 마, 브라이스. 신문을 이용해 숙녀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비록 네가 공화당파이긴 하지만." 브라이스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패트릭은 한손을 들고 선서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나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네 애인이 되어 준다면 그 말을 신문에 흘리지 않겠다는 뜻이지?" 브라이스는 태연한 척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제발 패트릭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느 제안을 정확한 단어로 끄집어내지 않기를 빌었다. "정말 지독한 말만 하는군." 패트릭은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패트릭은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블쾌한 기분에 그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만약 네가 내 애인이 되어 준다면 판사로서의 명예에 먹칠할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브라이스는 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말, 믿을 수 있을까?" "물론." 패트릭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실망감 비슷한 통증을 느꼈다. "이 연애 게임을 장기전이야? 아니면 단기전?" 브라이스는 평정을 가장하고 질문했지만 속바음을 감추지 못했다. 테이블 밑으로 내려놓은 손으로 냅킨을 꽉 쥐며 패트릭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제하고 있었다. 패트릭은 놀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샴페인을 마셨다. 대답을 망설이고 있던 참에 요리가 나와 겨우 안심했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브라이스를 영영 잃어버릴 가능성이 짙다. 브라이스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을 조종하려 든다. 연애감정을 제한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사랑의 기간까지 결정하려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의 기분을 납득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세파에 닳은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쾌했다. 패트릭이 하룻밤 이상의 관계를 원할만큼 사랑하는 여자는 여태까지 없었다. 지금 그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그녀는 지금까지 신중하게 관계를 맺어왔던 남자들 중 한사람으로 나를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자 패트릭은 가슴이 아려왔다. 브라이스는 장기전 연애인지 단기전 연애인지 알고 싶어한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해 주려 하지 않고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듯 법률적으로 기간을 정하려 든다. 브라이스는 이미 고교 시절의 순진한 소녀가 아니구나. 웨이터가 요리를 테이블 위에 놓고 물러갈 때까지 패트릭은 자신의 연심을 브라이스가 헤아려 주길 내심 바라면서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우리들의 관계는 반드시 장기간이어야 돼. 너에 대한 내 마음은 하룻밤 정도로는 채워지지 않으니까." 브라이스는 잠자코 패트릭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패트릭은 실망했다. 자기가 바라고 있는 정열과 사랑의 불꽃은 그녀의 눈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랑의 언어가, 짙은 네이비 블루 눈동자에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널 생각하는 내 마음도 하룻밤만드로는 만족되지 않을거야." 브라이스는 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는 그 허무맹랑한 자유주의 정치 사랑과 마찬가지로 최저의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는 인간이구나, 맥브라이드. 난 너와 놀아볼 생각도 없거니와 대가를 치룰 필요도 없어. 내 이름을 신문에 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너 같은 인간과 침대를 같이 할 줄 알았어?" 브라이스는 천천히 샴페인 글라스를 집어 들어 황금빛 약체를 그의 얼굴에 퍼부었다. 그가 반격을 가해 오기 전에 브라이스는 얼른 일어서서 그의 뒤를 돌아가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샴페인은 슬픔을 치유하는데 특효약이라고 하더군." 브라이스느 하이 프트리트를 따라 맹렬한 속도로 운전하고 있었따. 도시 북쪽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까지는 겨우 8킬로미터 정도이다. 화가 나서 질주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속도를 늦추었다. 속도 위반으로 잡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녀의 경우 조그만 규정을 위반해도 사람들은 엄하게 비판한다. 브라이스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보도를 걸어갔다. 아파트 방범 도어를 밀려는 순간 뭔가 억센 힘에 의해 꼼짝 못하게 되었다. 브라이스의 양팔을 패트릭이 억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과 마주 보도록 브라이스를 안아 올렸다.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까지 안아올린 다음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안에 들어가 싸울까? 아니면 얌전히 굴겠어?" "내려줘! 내려달라니까!" 그러나 브라이스는 막상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균형을 잃고 그의 품에 쓰려졌다. "놔줘!" 이번엔 그의 양복 깃을 움켜잡고 악을 썼다. 그는 양복 깃을 잡고 바둥대는 그녀를 마치 아기 고양이를 품듯이 안고 있다가 천천히 풀어 주었따. 비단같은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면서 브라이스가 똑바로 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도전도 기다렸다. 브라이스가 몸의 균형을 잡고 그를 올려본 순간 그는 브라이스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싸우자. 널 k.o 시켜 버릴 테다!" 브라이스는 화가 나서 맞서 대항하려다가 패트릭이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여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분하지만 단념키로 했다. "좋아!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 브라이스는 얼굴을 바짝 쳐들고 그를 한번 쏘아본 뒤 몸을 돌려 용감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패트릭도 그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브라이스는 다음 말을 계속해 보라는 듯이 눈으로 재촉했지만 패트릭은 모른체했다. 저 모습은 최저의 인간이라고 통고받은 저질스런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뭔가 부당한 일로 비난받은 자의 억울해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실수한 걸까? 그를 오해한 건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지금 변명할 기회를 주었잖아? 그런데도 아무 말을 못하는 걸보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어. 패트릭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서되 가능한 한 브라이스로부터 멀찍히 떨어졌다. 만약 브라이스가 남자였다면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천성이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입을 바라보며 늙어서 이빨이 쏙 빠진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브라이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굴욕적인 대우를 받고도 아파트까지 따라온 것은 남자의 에고이즘때문이 아니다. 그는 인격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도덕심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섹스 상대가 되어주면 입을 다물어 주리라고 생각하다니...그녀의 어리석은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쳐줘야 한다. 절대적으로! 게다가 연심을 품고 있는 여자이니만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오래 전부터 그녀를 흠모해왔는데 15년도 넘은 그날 밤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 브라이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일방통행임을 알고 그는 고통을 참기 위해 주먹이 하얗게 될 때까지 양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 봐! 당장 형무소로 보내 버릴테니! " 브라이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패트릭의 모습을 오해하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빠져나가는 브라이스를 향해 패트릭은 등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좀 전에는 협박하더니, 이젠 실력 행사를 하는 거야? 만약 내게 복수가 허용된다면 네가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을 거야." "애석하게도 희생되는 건 오늘밤뿐이야. 널 두번 다시 만나지 않을 테니까!" 브라이스는 조금도 지지 않고 대꾸하면서 키를 돌려 문을 열었다. 불을 켠다음 패트릭을 향해 정중하게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패트릭은 엉거주춤한 발걸음을 옮겼다. 미끄러질 정도로 잘 닦여진 순백의 대리석 현관을 지나 넓은 거실에 들어온 그는 기묘한 눈으로 안을 둘러 보았다. 장방형의 침실이 한쪽 구석에 딸린 거실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했다. 전체적으로 순백의 색조로 꾸며진 가운데 낮고 큼직한 소파와 고급스런 의자, 크롬과 유리로 된 테이블, 그리고 호화로운 카페트가 깔려 있어 마치 모든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의 꿈을 이곳에 실현시킨 것 같았다. 등나무색과 회색벽만이 유일하게 따스한 느낌을 주었고 인간이 살고 있다는 냄새를 풍기는 것은 오직 알데코의 그림뿐이었다. 방을 둘러보는 동안 패트릭의 눈에 어렸던 분노가 어느덧 사라졌다. 이런 방에 살고 있는 여자가 행복할 리가 없다. 브라이스가 자신을 오해했듯이 그 역시 브라이스를 오해했던 것 같다. 얼음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여자에게 자신의 성실한 마음이나 사랑을 알아주길 바랬던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는 브라이스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좀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쿠션이 어지러져 있고 쿠션 사이에 읽다 만 책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옆에 있는 의자 밑에는 아름다운 백색의 담요가 구겨진 채 떨어져 있고 유리 테이블 밑에는 푹신해보이는 핑크색 슬리퍼 한 짝이 뒹굴고 있었다. 여자다운 데라고는 없는 여자로군. 그녀의 약점을 발견하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대단히 고상한 취미인데? 직접 디자인한 거야?" 그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잘 아는 분의 딸이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있어." 브라이스는 의아한 듯이 대답했다. 화난 모습보다는 호기심을 가지는 편이 그녀로서는 다행이지만 갑작스런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녀의 취향에 맡겨 버렸어. 이건 내 취향이아니야. 그리고...어딜 가는 거야?" "호!" 패트릭은 침실에 들어가 감탄사를 발했다. "이쪽이 훨씬 브라이스다운데?" 고풍스런 가구에 빽빽한 책들, 기분좋게 잠들 푹신한 침대까지. 그는 밤이면 침대 옆의 작은 램프가 천정까지 은은한 빛을 뻗고 있을 광경을 상상하면서 아름다운 페이스로 장식된 네 기둥 침대의 천정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스가 책장 가득히 꽂힌 책중에서 한권을 골라 베개에 머리를 늘어뜨린 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옆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가지.두 사람의 독서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패트릭 맥브라이드! 당장 나오지 못해!" 브라이스가 말했다. "할 말이 있어 왔다고 했지? 그럼 빨리 말해. 그런 다음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알았어." 패트릭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브라이스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아. 잘 들어주길 바라." 거실로 나온 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문 앞에 서 있는 브라이스의 앞을 지나 유유히 소파로 향했다. 웃도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로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었다. 단 한점의 흐린 데도 없이 깨끗하게 닦여진 유리 테이블 위에 길다란 다리를 올려 놓여며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이 방은 완벽하지만 단 한 가지, 남자 냄새가 부족해. 내가 여기 10초만 있으면 방안 가득히 채울 수 있을 거야. 그럼 기분 좋은 방으로 변하겠지?" "그 말이 하고 싶어 여기까지 온거야?" 단 몇 분만에 완전히 변한 패트릭의 태도에 당황하며 말했다. "아래층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어?" 패틀기은 옆에 있는 쿠션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 크레이머. 얘기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말이 있으니까." 5 브라이스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자신을 포함한 가구까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남자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주인의 귀여움을 받기 위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다루듯이 자기 옆에 와 앉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나도 한 가지 분명히 해 둘게 있어, 맥브라이드." 패트릭이 화났을 때 내뱉았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여 말했다. "집에 오더니 신경이 꽤나 둔해진 것 같아. 나에게 명령할 참이야?" "강철만큼이나 둔해졌지."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과장된 표현에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오늘밤 네가 받끝하나 다치지 않고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게 그 증거야." 패트릭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감사히 생각하라구. 내게 화를 내면 레스토랑에서 당한 분훌이를 할 테니까." 푸른 눈을 한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의 남자에게 대항해 봤자 수치스런 꼴을 당하리라. 브라이스는 절망감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너 같은 인간과 평생을 살 여자가 불쌍해." 브라이스는 마지 못해 소파에 앉으면서 가능한 그와 멀직히 떨어졌다. "두 손 다 들었어." "그럴 리가 있나." 패트릭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유혹한 것이 순수한 감정이었다는 것만 이해해 준다면 내가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다시 말해 네가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린단 뜻이야." "난 피곤해, 맥브라이드. 농담할 힘이 없어." 브라이스느 마지못해 쿠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결론은 내가 내릴 테니.우수한 변호사라면 증인을 유도심문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야 물론이지." 패트릭은 한 손을 들고 선허했다. "나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절대 선거에 입후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유명한 소송보다는 이름없는 소송을,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판에 임하겠습니다. 난 변호사 사무실을 걷어치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항상 자신의 행동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는 브라이스가 귀엽게 여겨주길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드디어 통했다는 걸 느끼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스는 패트릭의 태도에 화가 나긴 했으나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오해했다면 그가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넌..." "그래, 난 출마할 마음 없어." "그럼 연애 게임은?" "그건 환영하지. 네가 나와 같은 감정일 경우에만, 오늘 아침 네 사무실에서 불이 붙었어. 10학년 때의 그날 밤 이후 이렇게 가슴이 뜨거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 또다시 10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비하고 싶지는 않아. 널 데이트에 유혹한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었어." "으음..." 브라이스는 숨이 막혀 신음했다. 다시 10대 소녀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패트릭에 의해 흥분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몰랐다. "내가...터무니 없는 오해를 했던 거 같아." "그래,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 "미안해, 사과할께." "좋으실대로." 패트릭은 우쭐거리며 말했다. "나만큼 관대한 남자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도록. 존경하는 재판관님, 당신의 죄목은 명예훼손에다 중상모략, 정신적 고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범죄는..." 그는 아직도 젖어있는 어깨 부근에 시선을 돌렸다. "내가 가장 즐겨 입는 양복을 더럽힌 죄입니다." 브라이스는 천정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난 정말..." 패트릭은 싱긋이 웃으며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브라이스가 뿌리치려 하지 않자 용기를 내어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브라이스가 아무 저항없이 옆에 다가오자 패트릭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가 주의원에 입후보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은 어디서 나온거지?" 브라이스는 판사의 신분으로 헛소문을 믿었다는 사실을 인저하고 싶지는 않않았지만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법원에 소문이 자자해서..." "잊어버려, 브라이스." 이 한마디에 브라이스는 그가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호통을 쳤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좀전에 사랑의 고백을 할 때처럼 동등한 입장에 서고 싶었다. 정적들이 만들어 낼 고십을 두려워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너무나 싫었다. "신문기자들에게 몰리다 보면 가끔 머리가 돌아 버리는 경우가 있어." 브라이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늘 법정에서 생긴 일을 신문기자들이 알아봐, 네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신문에 난다면, 이 일을 기회로 삼아 날 법원에서 몰아내려는 사람이 있을 거야. 보수당 판사를 내모는데 콜럼버스의 십자군 만큼 적격인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별명이야. 식료품을 훔친 90세 할머니를 형무소 행에서 구해 줬더니 그렇게 부르는 거야. 국선 변호사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걸 가지고." "넌 거창한 별명으로 불리울 자격이 있어. 너의 경력을 조사해 보면 누구나 가까운 장래에 행정직에 입후보할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 날 무리하게 섹스나 강요하는 저질스런 남자라고 외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브라이스는 부끄러우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은 그러게 생각하지 않아." "아니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패트릭은 재미있다는 듯이 놀렸다. 그는 브라이스의 빨개진 얼굴을 좋아했다. 그날 밤 이후 가끔 새빨개진 브라이스의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한번 빨개진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내 생각을 그녀가 안다면 얼마나 놀랄까? 또 빨개지겠지? 브라이스가 난처해 하는 걸알면서도 계속 놀려댔다. "샴페인, 촛불, 꿈같이 멋지게 세팅된 테이블에다 맛있는 요리. 만약 네가 날 애인으로 생각해 준다며 평생을 두고 충성을 맹세할께.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어딘가로 끌고 가 내 마음을 이해해 줄때까지 두고두고 사랑해 줄 작정이야."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벌떡 일어서려다가 그에게 잡혀 소파 구석에 쳐박혔다. 그는 허벅지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여자라면 누구도 거스리지 못할 강한 기력을 뿜어댔다. 짙은 샤워코롱 향기, 불타는 듯한 푸른 눈... "난...난 ..아무것도..." 패트릭은 엄지손가락으로 브라이스의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문질렀다. "너만큼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여자는 없었어. 크레이머 판사. 오늘 네가 입고 있던 법복은 무척이나 섹시했지. 그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을때 난 미칠 것만 같았어. 그날 밤의 빨간 드레스 이상으로 자극적 이었어." 패트릭이 부드러운 가슴을 애무하자 브라이스의 몸이 떨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흘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네이비 블루 눈동자는 그의 입술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저 입술에 닿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저 혀에 닿으면... "그만둬! 누가 너 따위에게.." "뭐라고? 내가 키스하지 않았다고 투정하는 거야?" 패트릭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넌 나를 원하고 있어. 그렇지? 네 눈에는 내 입술만 비치고 있는걸." 그에게 속마음을 읽히자 브라이스는 숨이 막혔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온다. 브라이스는 자신이 이때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생후 처음으로 자세심을 버리고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여자로서의 욕망을 자유로이 풀어 주었을 때 그녀는 작은 놀람의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패트릭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입술을 겹친 채 그의 풍성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따. 하루종일 그리워했던 그의 냄새. 야성와 위험한 향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호을 빼앗는 나지막한 웃음소리,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 이것이 패트릭 맥브라이드의 매력이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혀가 자극받자 브라이스는 점점 대담해졌다. 패트릭은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무시하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몸은 뇌의 명령을 거역했다. 브라이스는 상상과는 완전히 다랐다. 달콤한 그녀의 키스는 차라리 고문에 가까왔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거부하면 힘으로 차지하고 싶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두번 다시 그녀를 안을 수 없게 되겠지. 그래서는 안돼. 절대 그래서는 안돼. "빌어먹을!" 패트릭은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입술을 비틀어 떼어냈다. 겨우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비명에 가까우 소리를 질렀다. "정말 두 손 들었어! 믿을 수가 없어. 이런 일, 믿을 수가 없어!" 그는 소파에 한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처음으로 여자를 안은 소년처럼 떨고 있었다. "난 전부터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었어. 너한테 키스받는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남자들이 지금까지 네게 결혼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브라이스는 그의 말에 치를 떨었다. 아직 격정을 가라앉히지도 못했고 키스에 취하여 여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았지만 남자를 지독히도 밝히는 색골취급을 당하면서까지 계속할 수는 없었다. 브라이스는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감에 몸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브라이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그러나 그따위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그런 여자가...절대로 그런 여자가..." 더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쿠션을 움켜 잡고 패트릭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변호 따윈 필요없어. 당장 나가!"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격분하자 당황했다. 그녀는 위풍당당한 법복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듯이 냉정한 가면 뒤에는 연약한 마음씨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즐거워졌다. 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번 승부에 점수를 매긴다면 단연 브라이스의 승리다. "나가라니까!" 브라이스는 재차 외쳤다. 단 일초라도 그와 마주 있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브라이스는 불안해졌다. 패트릭을 만난 오늘 밤까지만 해도 뜨거운 정열을 감싸고 있는 갑옷을 녹일 만한 남자가 없었다. 그는 단 한번의 키스로 방어벽을 허물었다. 어째서일까? 그토록 신중하고 든든하게 쳐둔 울타리를 부숴버린 사람이 왜 하필이면 패트릭 맥브라이드라야 했을까? "좋아."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절대 움직일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브라이스는 도어를 가리키며 재차 말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네가 나간 다음 들리는 문닫히는 소리뿐이야." "알았어. 그런데 지금 당장엔 안되겠어." 브라이스의 눈에 실망의 빛이 역력이 떠올랐다. 발끝에서부터 힘이 쏙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그녀는 다시 소파에 털석 주저앉았다. 어디라도 좋으니 패트릭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약간의 위엄을 되찾고 그녀는 팔짱을 낀채 정면으로 응시했다. "왜?" "넌 정말 아름다워, 브라이스." 패트릭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션을 집어던질때의 무시무시한 여자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는 브라이스의 하얀 얼굴과 빛나는 네이비 블루의 눈, 장미빛 뺨, 그리고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목숨과도 맞바꿀만 키스를 구사하는 도톰한 입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넌 화났을 때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아. 난 내 자존심을 지키려 위해 널 화나게 만들어야겠어." "뭐라고?" 브라이스는 놀라 소리쳤다. 패트릭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토해냈다. "오해를 살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만은 알아 줘. 난 네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야. 내 자신이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야. 지금의 내 상태로는 네가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 "네가? 천하의 플레이보이 패트릭이?" "놀랐지? 두려워서 잠시 정신을 잃었어." 패트릭은 수줍은 듯이 웃었다. "네가 가볍게 키스해도 난 당장 그 옛날 벌거벗은 가슴을 볼때처럼 기절할 것 같아. 10학년때의 얼간이 십대로 되돌아간거야. 바닥에 쓰러뜨려 힘껏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자신에게 질렸다는 듯이 코를 끙끙거렸다. "난 이제 세상을 아는 성인이 되었다고 과시하려 했지만 너의 키스가 나로하여금 자아를 상실하게 만들었어. 난 그저 본능대로 움직여야 했지." 브라이스는 말을 잃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나의 키스를 그렇게 느꼈고, 섹스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여자답지 못한 내 행동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브라이스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조명에 눈이 부신 듯 두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성욕과 투쟁하는 문명인의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야. 넌 이제 두번다시 사랑스런 미소를 띄우며 내 곁에 앉지 않겠지? 모두 내 탓이야." 브라이스는 그제서야 활짝 웃었다. "내 키스를 그토록 끔찍하고 두렵다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맥브라이드." 패트릭은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겠지. 난 아직도 고교시절 그대로의 냉혹하고 둔감한 소년인가봐. 지성있는 여자라면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마주 대하기 싫어하겠지?" 브라이스는 소파 깊숙히 몸을 묻고 그를 지켜보았다. 우리 테이블 밑으로 뻗은 길고 단단한 다리에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천천히 회색바지를 거슬러 올라가 날씬한 허릴 꽉 죄고 있는 벨트를 지나 하얀 와이셔츠 단추에 뜨거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래, 넌 아직도 소년티를 못 벗었지만 지성있는 여자로 불리운 나도 아직 뜨거운 눈으로 널 보고 있어."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럼, 다시 한번 키스해도 괜찮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겠지?" "나같이 지성있는 여자는 남자의 약점을 잘 골라내지." 노골적인 말을 한 것같아 브라이스는 미안한듯이 말을 덧붙였다. "여성답지 않다고 힐책하지만 않는다면...그러나 필요하다면 남자 품에 안겨 음란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참아낼 자신은 있어." "너라면 가능하겠지, 브라이스."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무릎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 모두." 두 라이벌은 이제 사랑 싸움에 돌입했다. 미친 듯이 키스하며 뜨겁게 상대방을 갈구했다. 혀가 뒤엉키고 애무에 열중했으나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브라이스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패트릭을 원하는 욕망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패트릭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는 결심을 했을 때 그녀는 과감하게 혀와 손과 부드러운 몸으로 그를 끌어당겼고 패트릭도 질세라 힘껏 껴안았다. 관습에서 탈히하여 자유세계에 나선다면 어떤 남자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이 패트릭이 될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출 수가 없어. 멈추고 싶지 않아, 넌?" "나도 멈추고 싶지 않아." 브라이스가 속삭였다. 그가 브라이스를 안고 일어섰을때 브라이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실로 향하는 도중에 브라이스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침실로 향하는 도중에 브라이스는 그의 가슴에 기대 오직 그와 맺어지는 순간만을 머릿속 가득히 그려보고 있었다. 침대 커버를 벗기고 차가운 시트 위에 뉘어진 채 그가 옷을 벗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브라이스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옷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이 막혔다. 드디어 두 사람은 나체가 되었다. 그의 몸을 보고 브라이스는 몸을 떨었다. 근육질의 몸은 정말 훌륭했다. 단단한 어깨, 늠름하고 넓직한 가슴, 훌쭉한 배, 보기 좋은 히프, 그리고 강하고 긴 다리, 수영선수나 장거리 육상선수 같은 몸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몸이구나." "너야말로 아름다워." 이어 몇 분간의 침묵은, 두 사람의 터질듯한 웃음소리와 브라이스의 가느다란 신음소리, 여기에 응하는 패트릭의 참기 어려운 듯한 신음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패트릭은 맹렬한 기세로 브라이스를 덮쳤다. 달콤한 사랑의 단어나 정열로 가득한 애무를 천천히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지체없이 합쳐지길 갈망했다. 패트릭은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했다. 그녀의 벌거벗은 가슴에 닿자 몸의 율동을 타고 리드미컬하게 그의 가슴을 간질렀다. 괴로울 정도로 거칠게 헐떡이던 호흡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에 완전히 합치되었을때 비로소 힘껏 내쉴 수 있었다. "브라이스...브라이스..." "패트릭!" 그의 몸이 들어옴과 동시에 브라이스는 비명을 질렀다. 단숨에 그를 받아들이고 싶지만 지나친 정열에 지고 싶지 않았다. 브라이스는 사랑의 잔물결이 구석구석까지 고루 퍼지도록 육체의 내부와 외부를 모두 동원하여 몸전체로 대응했다.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 브라이스는 극도의 행복가에 휩싸이며 드디어 영원한 환희에 자아를 상실했다. 지금까지 이토록 강하게 결합된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하나로 융해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바친 적이 없는 힘과 정열과 사랑을 브라이스에게 바쳤고 그의 모든 것을 쏟아넣었다. 패트릭이 마비된 감각을 회복하려는 즈음 달콤한 장미 향기가 났다. 풍만한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옆으로 돌아누웠다. 브라이스는 미동도 않고 호흡을 가다듬고 잇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브라이스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바싹 긴장하고 있을때 검고 긴 속눈썹이 위로 향하더니 깊은 네이비 블루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물었다. "괜찮아? 너무 난폭하지는 않았어?" 난폭하다구? 아니, 전혀! 몸이 가루가 되어도 상관없어. 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패트릭은 움직이며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브라이스는 느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 그는 나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가? 내 몸이 계속 그를 원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 그가 내 맘을 안다면 정말 큰일이다! "브라이스! 뭐든지 말좀 해봐!" 패트릭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가 세차게 흔들자 몽롱하나마 의식이 되살아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다행이야." 그제서야 패트릭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상처입은 줄 알고 걱정했었어." "아무렇지도 않아." 브라이스는 거짓말을 하며 시트를 끌어당겨 가슴을 덮었다. "나..너무 피곤해.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패트릭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싱긋이 웃으며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럼 자도록 해. 마이 스위트. 눈을 감아요. 우리 두 사람의 좋은 꿈을 꾸도록." 그리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능한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지만 집에 돌아가봐야 해. 내일 아침 여섯시에 케빈과 조깅하기로 약속했거든. 양복을 입고 달릴 수는 없잖아? " 잠시 후 패트릭은 가만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옷을 입는 동안에도 그녀의 늘씬한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쉽다는 듯이 다시 한번 그녀를 쳐다보고 침실로 나와 거실에 벗어 둔 웃도리를 집어 들고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잠든 척하고 있던 브라이스는 그가 돌아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6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즐기던 브라이스는 삐-삐-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자명종 알람 보턴을 눌렀다. 소리가 꺼지자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브라이스는 세 시간 정도밖에 잠들지 못했다. 여느때처럼 시간을 맞춰두기는 했으나 오늘은 토요일이므로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실컷 자고 나서 어젯밤 일을 논리적으로 평가하고 자기 분석을 하기로 했다.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브라으스는 다시 시계에 손을 뻗어 투덜다며 알람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자명종은 다시 큰 소리로 울어댔다. 브라이스는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실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이 소음의 원흉을 집어던지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리는 자명종 알람 소리가 아니라 현관벨 소리였다. 끈기있게 눌려대는 걸 보니 바깥에 있는 사람은 브라이스가 나갈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기색이었다. 브라이스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새벽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무례한 사람은 누굴까? 내 귀중한 휴일을 이렇게 망치다니. 그건 그렇고 관리인은 왜 연락해주지 않았을까? 프레드의 눈을 피해 들어온걸보니 잘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정신이 들자 브라이스는 새벽녁에 찾아온 무신경한 방문자가 누군지 상상해 보았다. 부모님? 아니, 부모님은 내가 아침에는 강하지 못하단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만약 긴급사태가 생겼다면 전화로 연락하셨을 것이다. 리오나? 브라이스는 비서도 젖혀 놓았다. 사인을 잊은 서류나 급히 읽어봐야할 소송사건 각서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브라이스를 잘 알고 있는 리오나는 보스가 모닝커피를 마시기 전에는 절대 말을 걸지 않는 타입이다. 그렇다면 단 하나, 법원에서 긴급 출두명령을 보내온게 틀림없다. 침대에서 뛰쳐나와 로브를 입으면서 침실을 나왔다. 맞춤복인 푸른색 벨로아 로브는 검은 법복만큼은 아니지만 판사의 위엄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디자인이었따. 브라이스는 걸으면서 벨트를 여미고 문을 열기 전에 방문객 확인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볼록렌즈가 달린 작은 구멍을 통해 일그러진 복도가 넓게 보였다. 거기에는 패트릭의 모습이 섞여 있었다. 회색 스웨트 팬츠에 편안한 셔츠를 입고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 참이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 운동화, 그리고계속 한쪽 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은 약속대로 동생과 조깅을 하고 왔다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먹이를 찾는 새처럼 해뜨자마자 일어나 조깅하는 사람은, 브라이스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녀는 오전 중에 달리기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침 잠을 망쳤다는 분노보다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를 마주하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어젯밤에는 패트릭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해답도 얻지 못한 채 잠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녀의 인생 모든 면에서 복잡한 문제로 야기시킬 것이라는 예감이다. 브라이스가 있는 것을 아는 패트릭은 절대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브라이스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패트릭은 상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4블록 밖에서. 우린 말 그대로 이웃 사촌이지." 브라이스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더 가까운 곳에 살지 않음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올라왔지?" 패트릭은 방금 은행에서 나온 동전마냥 빛나는 미소를 띄우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관리인과는 친구사이야." 그녀로 하여금 경계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이제 막 일어났군? 넌 정말 태양이야. 하니.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은데."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이제 겨우 새벽이 밝았는걸. 나가줘." 브라이스는 허리에 손을 대고 턱 끝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지금은 그와 다툴 기력도 없다. 패트릭은 현관에 선채 브라이스의 흐트러진 머리와 상기된 뺨,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입술을 바라보며 연신 싱글거렸다. 옷깃의 레이스에 시선이 머물자 그의 입매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크게 V자로 패여 있는 로브 앞섶에 자수가 놓여 있다. 어젯밤 자기가 돌아간 다음 일어나 나이트 웨어를 입었을 것이다. 절대 발가벗고 잘 타입은 아니니까. "남의 눈을 의식한 디자인인걸. 좋아. 그래야지.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지는데." 패트릭이 일보 전진하자 브라이스는 일보 후퇴했다.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가운 앞섶을 단단히 여미면서 소리쳤다. 저 손에 닿으면 나가달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질 것 같다. 패트릭의 미소가 잠시 어두워졌으나 눈만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는 문을 닫았다. "넌 모닝 커피를 마시기 전엔 꼼짝도 못하는 인종이구나. 부엌이 어딘지 가르쳐 줘. 내가 끓여줄테니." "내게 필요한 것은 2~3시간 정도 침대에서 푹 자는 거야." "그거 좋지!" 그는 재빨리 한 손을 브라이스의 허리에 두르고 한손으로 등을 끌어당기며 키스했다. "굿모닝 ! 판사님."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키스했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유혹하는 키스였다. 그의 입술 감촉은 브라이스의 가슴 속에서 욕망이 불타올랐던 어젯밤의 정열을 상기시켰다. 법정에서는 검은 법복 밑에 숨겨져 있는 정열이 이성의 힘에 짓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패트릭은 여자의 순수한 감정을 일깨우는데 정말 명수였다. 그를 멀리해야 한다는 경꼐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몸은 저항없이 반응하고 있었다. 밀려오는 잔물결처럼, 몸안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브라이스도 유혹적인 키스로 응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힘껏 끌어당겨 깊은 키스를 했다. 단단한 몸에 유연한 몸을 밀착시켰다. 그는 몸을 떨면서 점점힘을 가해 그녀를 꼭 껴안고 목에서 간신히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1~2시간 정도 침대에 있는 편이 조깅하는 것보다 혈액순환에 더좋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는 브라이스의 얼굴에서 목까지 입술로 핥은 후 뱅그르 몸을 도려 놓고 코끝으로 목덜미를 밀면서 침실로 재촉했다. "음....따스하고 달콤한 내음새." 뜨거운 키스가 멈추자 조금씩 냉정을 되찾은 브라이스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졌다. 아! 내가 어떻게 된 걸까? 정신이 돌아버린 건 아닐까? 이처럼 마음이 혼란스러운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브라이스는 그에게서 멀찍히 떨어졌다. "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달콤하지 않구나." 그녀는 애써 냉정을 가장했다. 사실은 패트릭의 몸에서 강한 남자냄새가 났다. 산뜻한 비누 냄새와 세이빙 크림 그리고 신선한 바깥 공기가 혼합된 자극적인 냄새였다. "먼저 샤워부터 해야겠어."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몸을 떼도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밀해 그녀가 이토록 열렬한 키스로 응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어젯밤 일을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침대에 들어가 사랑을 나눌 생각으로 온건 아니지만 그는 건강한 남자이다. 브라이스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다시 한번 키스했다. 언제나 정오부터 잠들때까지의 시간이 허무하다고 느껴왔으나 이제부터는 그녀를 위해 일과를 변경해보자. 다시 한번 그녀의 따스한 입술에 키스한다면, 불타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를 마루에 쓰러뜨려 사랑을 나눈다면, 섹스만 탐닉하는 남자로 오인받아 그녀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그녀에게는 표면적인 아름다움 이상으로 내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어 왔었다. 어젯밤 그것을 확인했었지만 그 상상은 그녀를 안을 적마다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손가락으로 등을 애무했다. 브라이스는 그의 욕망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정열의 쳇바퀴는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브라이스의 몸은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욕망의 힘에 멋대로 응하고 있었다. 두렵다. 멈추지 않으면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의 명령대로 조종당하게 될 것이다. "패트릭..." 크게 소리칠 생각이엇으나 막상 입밖에 나온 목소리는 나약했다. 브라이스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저으며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맥브라이드...그만둬!" 애원조의 목소리였다. "이런 기분에 젖고 싶지 않아." 패트릭은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이 점차 냉정함을 되찾는 것을 주시했다. 틀렸구나! 역시 그녀는 후회하고 있는 거야. 유감스럽지만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패트릭은 천천히 몸을 뗐다. 브라이스에게 이런식으로 거부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녀 모두, 일단 욕망에 불타오르면 간단하게 억제할 수 없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브라이스는 뜨겁게 타오르다가 이내 식어버린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아침 식사로 뭘 대접해 줄거지?" 브라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올지 의문스러웠다. 힘이 빠져버린 다리를 끌며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하고 싶었지만 패트릭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강철도 녹일 만한 뜨거운 키스를 하고서도 어깨에 힘을 주며 걸어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병이 부딪히는 소리와 종이팩을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시작이군.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남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들어와 방을 점령하고, 모든 면에서 나에게 도전하려 든다.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지,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정열면에서도 그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자기도 뜨거운 여자라는 걸 어젯밤 증명했다. 호락호락하게 끌려다닐 것 같아? "난 누구에게든 아침식사를 대접하는 성미가 아니야." 브라이스는 쌀쌀맞게 대답하곤 큰 걸음으로 부엌을 향했다. 스툴에 앉아 양손을 마주 잡아 합성 수지 페인트를 칠한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패트릭은 냉장고 문을 닫고 팔짱을 끼며 문에 기대섰다. 냉기 덕분에 머리가 어느 정도 식었고 몸 전체에 이성의 힘이 퍼져나갔다. 시선을 브라이스에게 고정시킨 채 계속 의미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타오르는 정열에 몸을 불태운 것은 브라이스만은 아니었건만 그는 교묘하게 속마음을 감추고 잇었다. 내부에는 아직 불꽃이 꺼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는 완벽하게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장미빛 입술은 아직도 젖어 있다. 그 입술만이 조금전까지 뜨거운 키스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그녀 역시 냉정함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키스를 통해 분명한 사랑의 증거를 잡았다. 몸이 잠기고 숨이 거칠어지고 손이 떨린다. 고결하신 크레이머 판사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몸 전체로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번 싸움은 무승부로 해야 하는건가? 아니면 굿모닝 키스로부터 시작하여 시종일관 우위를 지켜온 패트릭의 승리인가? 패트릭은 무승부로 해두고 싶었다. 브라이스 크레이머와 함께 정열을 불태우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다. 어젯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었으니 무승부로 쳐주자. "다시 한번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판사님?" 그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말투로 질문했다. "아침식사로는 뭘 대접해 주실 예정입니까?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엾은 남자에게도 조금은 나눠 주시겠어요?" "가까운 팬 케이크 집까지 조깅하지 그랬어? 브라이스는 빈정대는 투로 대꾸했다. 깍지 끼고 있던 팔을 풀어 떨림을 감추기 위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넌 아침식사를 드는 사람과 조깅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을 미워하는거야?" 패트릭이 반문했다. "글쎄, 어느쪽일까?" 브라이스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쪽을 생각하든 위가 따끔거려."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고 그가 눈치채지 않기만 빌었다. 조깅복 차림의 남자가 부엌에서 서성대는 모습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편안해 보이는 회색스웨드 팬츠와 잘 어울리는 셔츠 차림은 보기 좋았다. 브라이스는 불만스러웠다. 만약 이렇게 이른 아침이 아니고 내 의식이 불투명한 시간이 아닌 때를 골라 찾아왔더라면... 브라이스는 패트릭이ㅡ 머리 윗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일곱시밖에 안됐어. 넌 예의도 모르니?" "아마 그럴 거야." 패트릭은 냉장고에서 몸을 일으켜 브라이스 곁으로 다가왔다. 카운터에 기대자마자 재빨리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내가 얼마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다면 빨리 가서 그 옷부터 갈아입고 오는 게 좋겠어. 그 동안 아침식사를 준비해 둘테니." "아침식사 따위는 원하지 않아. 네가 나가주기만 원할 뿐이야." "하루중에는 시작이 가장 중요해, 브라이스." 패트릭은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내며 계속했다.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어야 뺨은 장미빛으로 빛나고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법이다." "네가 여길 나가 준다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넌 아무것도 먹지 않아. 내가 알고 있어." 그는 달래는 투로 설교했다. "식사란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맛있는 법이야. 네가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자 먹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내가 매일 아침식사 상대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널 위한 최선의 방법이겠지?" "정말 너라는 인간은..." "뭐가?" 네이비 블루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푸른 눈을 흘겨보고 있다. 고집 세어보이는 두 개의 턱이 동시에 같은 각도에서 마주하고 있다. 완전히 대조적인 몸이 마주 향한 채 새로운 싸움에 돌입하려고 바싹 긴장하고 있다. "이봐, 옷을 갈아입고 누에 붙은 밤의 요정 가루를 씻고 오는게 어때? 어차피 이번 게임은 내가 승리했지만 점수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 안심해." "넌 정말 어린애같아." 브라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보물 있는 곳을 알려 준다는, 아일랜드 전설에 등장하는 장난 좋아하는 요정, 레프리콘 같은 그의 미소에는 도저히당해낼 수 가 없다. "두 사람 다 이미 어린애가 아니야. 빨리 가서 그 잠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보일테야."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브라이스는 이만 퇴장하기로 작정했다. 서둘러 침실을 향하면서 당황하여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만일 웃기라도 한다면 되돌아가서 혼을 내주리라 생각했다. 장난꾸러기 요정 레프리콘 따위에게 질까봐. 그러나 패트릭은 웃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브라이스의 눈에는 들리지 않았다. 브라이스의 냉장고와 식품고는 패트릭의 집과 마찬가지로 거의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아침식사로 뭔 만들건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메뉴는 토스트와 커피뿐이다. 토요일은 쇼핑하는 날이고 브라이스는 모닝 커피만 마시므로 보통의 아침식사를 요리할 재료는 준비해 두지 않는다. "넌 식사 습관을 바꿔야만 해." 패트릭은 마지막 한조각 남은 토스트를 아쉬운 듯이 압안에 털어넣고 불평했따. "이래 가지고야 굶어죽기 딱 알맞지. 최소한 내가 등장하는 날만이라도 바꿔 줬으면 해." "등장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는 의자에 몸을 묻고 싱글거렸다. 속으로는 자기도 아침식사 습관을 바꿔야 겠다고 생각했다. "현재로는 이걸로 만족해. 그렇지만 오늘 저녁에는 반드시 내 말대로 해야해." "바보 같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브라이스는 자기가 먹은 요리 접시와 은컵을 들고 일어나 싱크대로 가져갔다. "식사가 끝나면 자기 그릇은 직접 씻도록." "그게 이 집의 규칙이야?" "그래." 브라이스는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 외에 나에게 일러둘 만한 것은 없어?" 브라이스의 명령대로 식기를 옮기면서 패트릭이 물었다. "이곳이 네 집인 이상 네 방식을 따는 게 당연하겠지." 그는 브라이스를 울타리에 가두듯이 양팔을 카운터에 둘렀다. "지금 생각한 건데, 식사를 둘이서 분담하든지 아니면 교대로 하든지 정해두는 게 좋겠어. 어느 쪽이든 네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정하자. 난 부엌일을 아주 잘하기 때문에 배탈을 나게 한다든가 굶어죽게 하지는 않아. 또 순응력이 뛰어나서 침대의 어느편을 사용하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 샤워 커튼을 망가뜨리지도 않을 것이고 타올도 차곡타곡 개어 놓을 줄 알지. 옷을 벗어 아무데나 집어던지지도 않고 게다가..." "그만 됐어." 브라이스는 그의 팔 안에서 빠져나와 안전거리까지 떨어졌다. 목덜미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으니 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네가 집안일을 얼마나 잘하든, 듣고 싶지 않아." 패트릭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룸 메이트인지 설명을 계속했다. "치약을 가운데부터 짜지도 않고 뚜껑도 잘 닫아. 구두와 양말을 아무데나 벗어 던지는 건 어쩔수 없는 버릇이지만 백 퍼센트 완전한 인간이 어디있어? 침대에서 크랙커도 먹지 않아. 이건 너도 지켜야 될 사항이야. 크랙카 부스러기는 피부에 묻으면 끈적대기 때문에 절대 안돼." 브라이스는 한쪽 손으로 카운터를 잡고 다른 손가락끝으로 톡톡 치며 무심한 듯이 말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또 하나 있어. 주차장 계약은 어떻게 하면 좋지?" "임대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돼. 하지만 다행히도 마침 빈 곳이 하나도 없어! 알아 듣겠어?" "허니, 넌 항상 파란색 옷을 입는 게 좋겠어." 갑작스런 화제 변화에 브라이스는 맥이 풀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패트릭은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턱을 들어올리고는 입술로 덮어 버렸다. "아름다운 네이비 블루 눈과 잘 어울리니까." 입술을 뗀 다음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가는 허리와 포플린 팬츠에 감싸인 모양 좋은 히프를 거쳐가는 다리를 훑으면서 나지막하게 감탄의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멋진 다린데. 그러나 오늘부터는 나와 함께 바깥에서 달리기를 해야 돼. 그 멋있는 각선미가 무너져서 유감이지만." "운동은 적당한 시간에 하는 걸 좋아해." 브라이스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달리는 습관이 있어." "좋아. 그럼 하루는 아침에, 하루는 저녁에 달리기고 하자. 모든 관계에는 타협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는 브라이스의 콧등을 살짝 두들기곤 몸을 돌려 부엌 문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짐 챙기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여섯 시 경에도 못 올 가능성이 있어. 가능하면 빨리 오도록 하지. 저녁식사로 무슨 요리를 할건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 난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기어이 브라이스의 인내심은 극에 달해 분노를 터뜨렸다. "맥브라이드! 두번 다시 여기 오지 마! 침대에서 크랙카를 먹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제발 다른 여자를 골라봐 줘." 패트릭은 천천히 몸을 돌려, 요새를 수비하는 방위병같이 허리에 손을 대고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브라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의 눈도 멋있지만 화났을 때 불타오르는 눈동자는 더욱 매력적이다. 기묘한 웃음을 띄우며 그가 물었다. "그랬어?" "그랬다니, 뭐가?" 브라이스는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침대에 누워 크랙카를 먹는 버릇이 있었나?" 브라이스는 눈을 감고, '제발 살려줘!'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먹든지 안 먹든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는 말없이 웃고만 있다. 브라이스는 오랜 세월 계속해 오던 경쟁에서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벽에 기대섰다. "왜 날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는 거지? 어젯밤과 같은 일은 이제 다시는 없다는 걸 아직도 이해 못하겠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우린 물과 기름이야. 설령 우리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남자와 여자라고 해도 절대 맺어질 수 없어." "우린 언제나 잘 맞는 한쌍이었어." 패트릭은 자기 심정을 고백한 후 어떤 사태가 발생할는지 두려워하면서도 속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고집이 세서 모든 것을 솔직히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어. 난 너의 모든 것을 좋아해. 브라이스, 지금까지 넌 절대 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일러 왔지만 어젯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난 네가 필요해. 우리 두 사람 모두 서로를 갈구하고 있잖아?" "아! 패트릭..." 브라이스는 어쩔바를 몰라 힘없이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앞으로 떨어뜨리고 꿇어앉아 무릎위에 놓은 팔만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의 매혹적인 푸른 눈에는 도저히 못 당하겠어." 브라이스는 중얼거렸다. 패트릭은 곁에 앉아 그녀와 같은 자세로 꿇어앉았다. 힘차게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겨우 참았다. 눈앞에 놓인 장애물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극복해야만 된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전에 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야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 살 수 없어, 패트릭. 너무 빨라." 브라이스가 침묵을 깼다. "3일만 같이 지내면 단 일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질리게 될 거야." "절대 그럴 리 없어." 패트릭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린 확실히 같은 학교에서 같은 학문을 공부하고 같은 법율계에 종사하고 있어.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어울리는 한쌍이라고는 할 수 없어." 브라이스는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가장 중요한 점 하나를 의도적으로 빼면서 말했다. "넌 가장 중요한 것을 일부러 빼버렸어. 우리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육체적으로도 가장 잘 어울리는 한쌍이야.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적당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네가 뭐라 하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가 있어. 그건 과거부터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잖아?" 그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달링, 너만큼 귀여운 입을 가진 여자는 드물어. 장미꽃잎같은 입술에 처음 키스하던 날의 감격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거야. 그리고 어젯밤 맛본 환희도." 가벼운 키스를 받으며 브라이스는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난 절대 질리지 않아." "이 곳에 이사올 생각은 아니지?" "아직은." 그는 한번 더 키스했다. "오늘 밤 함께 지내자는 것 뿐이야. 그럼 여덟시경에 다시 만나자." 그가 몸을 기대오자 브라이스는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오늘밤에는 다른 약속이 있어." "취소하면 되잖아." 손으로 입이 막혀 중얼거리며 대답하던 패트릭은 혀끝으로 손바닥을 간질렀다. 브라이스는 불에 덴 사람 마냥 놀라며 손을 떼었다. "그럴 순 없어. 변경할 생각 없어." 무릎을 껴안고 앉아있는 그녀의 입술에 패트릭은 입술을 갖다대었다. 여자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하지만 브라이스가 상대가 되면 섬세한 테크닉은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브라이스는 내 거다! 아무데도 보낼 수 없다. 하물며 다른 남자의 손가락 하나 닿게 할 줄 알아? 그는 더욱 힘차게 입술을 밀어 붙였다. 마치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히 힘차게 껴안았다. 브라이스가 몸을 떨자 그녀를 껴안고 있는 패트릭의 팔도 함께 떨렸다. 패트릭이 깊은 신음소리를 내자 브라이스의 목도 함께 울렸다. 그가 승리를 확신하며 입술을 뗐을때 브라이스가 손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패트릭의 가슴 속에서는 우뢰가 치고 있었으나 애써 이성을 되찾고 그녀의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의 머리를 가슴으로 감싼 채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정리했다. 그는 지금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고 있다. "브라이스, '오늘밤 외출할때 이 키스를 기억해줘'라고 부탁은 하지만 '약속을 따돌려라'가 솔직한 내 심정이야." 7 드넓은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떠다니고, 리버 힐을 뒤덮고 있는 나무들과 벨벳처럼 보드러워 보이는 초원의 푸르름에 둘러싸인 웅장한 저택은 한폭의 풍경화는 연상케 했다. 근처의 사이오트 강가의 활엽수 잎사귀가 펄렁거릴 때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는 파티오에서 연주되는 현악 5중주의 은은한 선율에 뒤섞여 노래하고, 산들바람이 저택부지 경계선을 표시하는 소나무 사이를 스쳐지나면서 한껏 들이킨 솔방울 향기가 정원가득히 피어있는 장미, 제라늄, 라벤다, 자코우 그리고 막 깎은 잔디향과 혼합되어 한층 싱그러움을 느끼게 한다. 사실 최고의 여름 향기이긴 하나 자연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리버 힐의 안주인 낸시 모리스 크레이머의 손길에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향기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낸시는 치밀한 설계하에 묘목 한그루 한그루를 신중히 선택하여 각각의 화단에 옮겨 심었다. 낸시 크레이머 여사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튜더 양식의 광대한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정원은 완벽했다. 낸시 크레이머는 일초라도 헛되이 보내는 법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 날씨는 말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브라이스는 중얼댔다. 어떻게 날을 정하는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주최하는 파티 날은 언제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화려하게 장식된 차양이 여기저기 세워져 파티 분위기를 돋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간 느낌을 주었다. 밝고 화려하게 채색된 천막이 중세 기사의 갑옷과 투구 및 각종 무기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리넨 식탁보 위의 맛있는 요리가 강한 햇빛에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있었다. 작은 테이블 몇 개가 손님들이 호화로운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초대객의 태반은 동물원 앞에 세워질 브론즈 장식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을 영예를 얻기 위해 이 야외 파티에 참가비 조로 거액을 기부한 콜럼버스 최고의 상류인사들이다. 올 여름 사교행사로는 가장 성대한 이 파티에 불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의 호스테스는 전 주지사의 손녀이자 오하이오 주 역사가 형성될 당시 큰 공을 세운 이래 오랜 세월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모리스 가문의 후손이다. 호스트의 가문도 이에 지지 않을 만큼 명문이다. 모리스 집안과 마찬가지로 크레이머 집안도 주 정계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낸시 크레이머의 남편인 로버트 크레이머의 선조는 황무지였던 이 땅을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크레이머는 오하이오 주 여성 판사였다. 이제 그의 무남독녀인 브라이스 크레이머가 할머니의 빛나는 업적을 잇고 있다. 숙부가 사망한 뒤 잔여 임가를 맡을 판사로 지명된이래 브라이스는 판사로서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해왔다. 그녀는 판결을 내릴때 충분한 심리를 거쳐 공평한 선고를 내린다는 신념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브라이스가 이번 자선 파티에 참석키로 결정한 것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의무감이나 동물보호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차기 판사 지명때까지는 아직 2년 가까이 남아 있으나 미리 발판을 구축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원 성금 기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으면 그녀가 사회복지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 놓을 수 있다. 브라이스는 정치와 파티가 얼마나 강하게 맺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두어시간 정도 미소를 띄우면서 상냥하게 질문에 응답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정중하게 청취하는 동안 브라이스는 입 언저리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이상 애교스런 웃음을 짓고 따분한 질문을 들어 주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어릴 적, 할머니의 집무실을 처음 방문한 이후부터 그녀는 판사가 되길 꿈꾸어 왔다. 판사 지명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로비 활동을 잘해야 한다. 사교계에서 성공하는 것보다는 공정한 판결실적으로 판사지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지명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재력과 배후에 막강한 지지력을 얻어야 한다. 이상론을 말하자면 법조계는 정치와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재판관석에 앉아 판결을 내릴 적에는 정치적 사상을 개입히키지 않지만 그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당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 파티의 초대객은 공화당의 막강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장래에 지원받기 위해서는 견딜 수 있는 만큼은 견뎌보자고 결심한 브라이스는 부모님 모습을 찾았다. 파티오 주변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과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속에 뒤섞여 있는 어머니의 엷은 장미빛 드레스를 찾아냈다. 브라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파티오를 향했다. 챙 넓은 모자 덕분에 수다스런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시야가 좁아져 아버지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나! 어서 오너라, 브라이스." 낸시는 고상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딸의 옷차림을 재빨리 훑어보면서 인사했다. 푸른 색 리넨 드레스에 풍성한 소매의 흰색 상의를 조화롭게 맞춰 입은 모습은 그녀의 차분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낸시는 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브라이스가 거절의 뜻을 비추기 전에 시원스런 물소리를 내는 분수 옆에서 한참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데려갔다. "바이어즈 부부가 오셨단다." 브라이스는 두통을 참고 싱긋 웃으면서, 은발의 저명한 상원의원과 그의 아내에게 인사했다. "다시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두 사람과 교대로 따스한 포옹을 주고 받은 다음 말했다. 이 부부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이며 지난번 상원의원 재출마때 선거운동에 참여하여 지원까지 했었다. 워렌 바이어스는 브라이스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귀엽던 브라이스가 이제는 고명한 크레이머판사가 되었구나.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시겠니? 내가 변호사였던 때의 첫 의뢰인을 그녀의 법정에 데려갔었는데 그날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게다. 플로렌스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았단다. 이 도시의 변호사라면 누구나 플로렌스의 법정에서는 판결에 얌전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지금은 그분의 손녀가 훌륭하게 혈통을 잇고 있습니다." 그윽한 바리톤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현재의 크레이머 판사도 법정 질서유지에는 엄한 분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브라이스는 정신이 아찔했다. 패트릭이다! 그가 이 파티에 참석하다니? 브라이스는 다음 나올 대사에 대비하여 공격태세를 취했다. 두 사람이 침대를 같이 했다는 말이나, 사소한 일을 법정 모독죄로 다스렸다는 말을, 비록 그가 절대 폭로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으나 그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브라이스는 뒤돌아서서 그에게 아는 체했다. 그래. 자진해서 저 사람을 소개하자. 그러면 화제를 돌릴 수 있어. 그렇게 되어 주길 간절히 빌면서 브라이스는 가볍게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맥브라이드." 브라이스가 소개하기 전에 워렌 바이어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맥브라이드라구? 당신이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십자군입니까?" 패트릭은 은발의 노신사에게 손을 내밀며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평판만큼 대단한 사람은 못됩니다. 상원의원님, 패트릭 맥브라이드라고 합니다." 노련한 정치가답게 바이어즈 의원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브라이스는 그의 눈에서 냉기가 빛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덕분에 화제가 브라이스 자신의 문제와 법정사건에서 벗어나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바이어즈 의원은 미소를 띄우며 대화를 계속했다. "당신 소문은 위싱턴까지 퍼져 있습니다. 국선변호사 사무실에서 출발하셨다지요?" "저희 네 형제는 약 1년전까지만 해도 국선변호사로서 콜럼버스 시를 위해 일해 왔습니다. 지금은 개인 사무소를 차리고 있습니다만 공익을 위한 의뢰가 들어오면 기꺼이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바이어즈 의원은 가시돋힌 말투로 대꾸했다. "그게 바로 이상주의자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핑계삼아 싸우는 방법이 아닙니까? 물론 개인 법률사무소가 돈은 더 많이 벌겠지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재판에서 승리할 때가, 재판비용으로 백만달러를 쏟아붓는 인간들을 위해 변호할 때보다 훨씬 큰 보람을 느낍니다. 소송의뢰를 수락하기 전에 변호사 수수료를 생각할 만큼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저는 과감히 변호사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과연! 정말 훌륭하십니다. 당신이 속한 당에서는 언젠가 당신이 내 의원석을 노리는 기수가 될 거라고 하던데요?"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입니다. 전 정치적 야심따윈 전혀 없습니다. 현재 일에 만족하고 있으며 법정이야말로 제게 잘 어울리는 활약의 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정이라구요?" 선거전 적수가 아니라는데 안심한 바이어즈 의원의 눈이 이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질문했다. "그럼 판사자리를 노리고 있습니까?" "법정에서의 유일한 야망은 재판을 어떻게 하면 제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시킬지 알기 위해서 판사를 연구분석하는 것입니다." 바이어즈 의원은 환하게 웃었다. "그 결과 크레이머 판사의 법정에서는 신사답게 처신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까?" 과연 패트릭 답군. 짙은 감색 브레이저에 하얀 팬츠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콧대 높은 상원의원과도 자신만만하게 대화를 유도해간다. 문제는 이제 사람들 눈을 더 많이 끌게 됐다. 대개 자선파티란 모든 분야의 매스컴으로부터 취재대상이 되기 마련이어서 여섯 시 뉴스에 같이 있는 모습이 방송되면 곤란한 일을 당할 우려가 있다.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브라이스는 패트릭을 내쫓을 방안을 궁리했다. "상원의원님,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만, 미스터 맥브라이드를 잠시 빌려도 될까요?" 패트릭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를 소개시켜 주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있어 이만 실례해야 될 것 같습니다. 미스터 맥브라드는 곧 돌아가셔야 되기 때문에 빨리 약속을 실천해야 되겠군요. 두 분 모두 만나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겨우 상원의원 부부 곁에서 빠져나왔는데 이번엔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당신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스터 맥브라이드." 낸시는 약간 냉랭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소문은 몇년전부터 들어왔지만." "미세스 크레이머,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택은 물론이고 파티도 대단히 훌륭하군요." 패트릭은 매혹적인 미소를 띄우며 인사했다.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동물원의 영장류 우리를 금년안으로 신축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사회를 위해 활약하시는 부인과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관입니다." 낸시의 얼굴에서 냉기가 차차 사라져갔다. 그것이 매력적인 남자의 칭찬때문인지, 아니면 능숙한 처세술 때문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지자 브라이스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건 그렇고 패트릭이 어떻게 이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을까? "정말 고마워요...그런데 이름이 패트릭이라고 하셨나요?" 낸시는 떫은 표정을 짓고 있는 딸을 무시하고 질문했다. "혹시 브라이스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네, 국민학교 1학년부터 하버드까지 함께 다녔습니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감정을 쉽사리 노출시키지 않는 낸시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그가 하버드 출신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이후에도 내 딸과 같은 코스를 밟은 줄은 전혀 몰랐어요." "우리들의 인생은 수십년전부터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교차하게 되었지요." 패트릭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띠우고 브라이스를 흘깃 쳐다 보았다. "우리들은...저.. 최근에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브라이스에게 불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을 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잇따. 신음소리를 내며 브라이스는 그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팔을 무의식적으로 내려놓았다. 패트릭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고 은근히 힘을 가했따. 게다가 손목을 누르며 엄지 손가락 끝으로 살그머니 간질렀다. 애정이 깃든 그의 행동은 누가 봐도 친밀한 관계로 보일 것이다. 두 사람이 무언중에 싸우고 잇는 것을 전혀 모르는 낸시는 계속 말을 걸면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우아한 호스테스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노련미를 과시했다. 패트릭은 낸시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도 쉬지 않고 브라이스의 몸과 뜨거운 보디 랭귀지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이번 주 당신이 브라이스의 법정에서 변호한 소송 이야기를 드었는데." 낸시가 말을 이었다. "브라이스가 당신에게 유리한 한결을 내렸다고 신문에 났더군요. 하긴 사회 복지제도의 모순점은 개선되어야만 되죠." "동감입니다., 부인. 크레이머 판사님의 판결은 앞으로 사회 복지 소송에 큰의미를 부여하게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뭔데요?" 낸시는 딸에 대한 우호적인 말을 기대하면서 반문했다. "처음으로 우리 두 사람이 결합된 것입니다." 낸시의 기품 있는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으나 냉정함을 가장하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우호적인 친분관계를 많이 맺어둘 수록 유리하죠." "얼마전까지만 해도 운명은 그렇게 호의적이질 못했습니다." 이제 그만해둬! 패트릭. 더이상말하게 했다가는 금요일 밤 함꼐 지낸 이야기까지 말할지도모른다. 상황은 계속 불리한 쪽으로 진전하고 잇었다. 그때 브라이스는 석간신문의 사회부 기자가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판사가 유리한 판결을 내린 변호사와 다정스레이야기하는 모습이 신문에 나면 큰일이다. 브라이스는 다시 한번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바둥대며 그의 발꿈치를 걷어찼다. "어머니, 미스터 맥브라이드를 혼자 독차지해서는 안돼요." 패트릭이 통증을 참으며 얼굴을 찡그린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의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이분은 다른 약속이 있으세요. 저도 이제 가야되구요. 제 일을 마치고 배웅해 드려야죠. 정말 멋진 파티에요. 아버지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그게 무슨 말이냐, 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갈 셈이냐?" 로버트 크레이머가 아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면서 세 사람의 대화 속에 끼어들었따. "어머나...미안해요, 아버지. 옆에 계신 줄 몰랐어요." 브라이스는 작전이 수포 돌아가 속이 끓었으나 별수 없이 생긋 웃어보였따. "아버지, 소개할꼐요." "패트릭은 좀전에 만나 인사를 나누었단다. 이 사람은 만나게 되서 정말 즐거웠다." "저도 그렇습니다." 패트릭이 예의바르게말했다. 여성 신문기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카메라맨은 바이어즈 의원을 찍느라 잠시 멈춰서 이었다.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브라이스는 부모님의 뺨에 재빨리 키스했다. "미안해요. 빨리 가봐야겠어요." 패트릭도 뒤따라와 주기를 빌면서 브라이스는 발길을 돌렸다. 브라이스는 문을 향해 총총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흘깃 뒤돌아보니 패트릭이 바로 뒤에 따라와 있었따. 겨우 안심하고 다시 몸을 돌려 황급히 걸어나가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던 브라이스는 바싹 뒤따라오던 패트릭과 다시 충돌하여 그의 허리를 잡고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로 잡다가 이번에는 모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안합니다." 모자를 고쳐쓰며 엉겁결에 사과하고 브라이스는 부딪힌 남자를 울려다보았다. 상대방이 누군지 안 순간 차라리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것을 잘못했다고 후회했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가쉽기사만 전문으로 다루는 유명한 신문기자 봅 화이티커였다. "크레이머 판사님 아니십니까? 게다가 콜럼버스의 십자군까지! 함꼐 오셨습니까?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 조금 전에 호스트와 호스테스와 이갸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가족과는 우연히 만나게 된겁니까" 혹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십니까? 법정 적수끼리는 가끔 사적인 장소에서 만나 감정을 푼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문에 만나고 계신 겁니까?" 화이티커는 주위의 시선을 끌기 위해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가지 질문을 할 적마다 우리에 갇힌 동물의 안색을 살피듯이 브라이스와 패트릭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탐색했따. 브라이스가 어쩔 수 없이 상대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마지막 질문에 쇼크를 받았따. "혹시 정략적으로 배드 파트너가 된건 아닙니까?" 패트릭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따. "이봐, 화이티커. 무슨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숙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우린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이야. 우연히 재회하게 된걸 기회로 오래간만에 그리웠던 학창시절을 상기하며 담소를 나눴을 뿐이라구. 자네가 좀더 분별이 있다면 신문기자들이 바이어즈 의원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을 진작 눈치챌 수 있었을 거야. 뉴스거리를 찾고 있다면 그쪽으로 가보지 그래? 무너가 중대한 발표를 하실것 같으니 아마 동물원 이사회장을 지명발표하지 않을까?" "바이어즈 의원이 여기에?" 화이티커는 흥분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동물원 이사회장에 관한 발표하구?" 화이티커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따. 화이티커가 사라지자 겨우 안심하며 부라이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아, 그말? 바이어즈 의원은 동물원 이사회 이사장감을 탐색중이라고 했으니 새로운 인물을 발표할지도 모르잖아?" "속은 걸 알면 그 사람, 이를 갈면서 복수하려 들텐데." 패트릭이 귀찮은 신문기자를 어쩌면 그렇게 교묘히 따돌리는지 브라이스로서는 신기했다. "그럴테지. 그러나 운이 좋으면...그는 상원의원이 특별이나 인물을 내정하고 있으면서 시침뗀다고 추측하고는 수수께끼의 인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우리 일을 하얗게 잊어줄 수도 있지." "정말 지겨워!" 브라이스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터문니없는 스캔들 기사에 시달린 벨린다 바이어즈 여사가 불쌍해." "남의 일에 신경쓸 필요는 없어." 패트릭은 딱 잘라 말하고 브라이스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따. "멋있어! 정말 멋있어." 그는 거실에 우뚝 선채 방안을 둘러보면서 감탄사를 연발 했다. "저택 부지나 한바퀴 둘러볼까? 브라이스 공주님이 자란 궁전에 전부터 흥미를 느끼고 이었지." "부지를 둘러보겠다고?" 브라이스는 그에게서 멀찍히 떨어짐녀서 놀라 반문했다. 방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맥브라이드. 우린 아주 귀찮은 소동에 말려들지도 몰라. 난 이제 돌아가겠어. 넌 어떻게 할래?" 브라이스는 값비싼 융단위를 가로질러 나가다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건 그렇게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정문 현관에서 걸어 들어왔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언제나 브라이스의 속을 뒤집어놓을 말만 골라했다. 말썽꾸러기 요정 레프리콘 같은 웃음을 띤 그의 푸른 눈엔 장난기가 반짜였다. "난 어릴 적부터 동물원 단골 손님이었지. 동물을 아주 좋아해. 특히 원숭이를." "너하고 꼭 닮았구나." 브라이스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전부터 원숭이 같은 짓을 잘한다고 생각했었지." "그런 말을 하려면, 바나나 사주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알았어. 기억해 둘꼐." 브라이스는 딱 잘라 대답하고 다시 이 방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 거실을 나와 넓은 응접실을 통과하는 브라이스의 위를 패트릭이 바싹 따라왔다. "나중이라니? 그게 언제야?" 패트릭은 브라이스를 자기를 쳐다보도록 돌려 세웠다. "나중에라는 게 바로 지금이야. 너의 어머니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린 이제야 겨우 교차하게 되었어. 또 다시 서로 피해다니는 짓은 그만두고 싶어." 그의 눈에서 반짝 이던 장난기는 이미 사라졌고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브라이스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 그의 턱을 바라보고 농담이 아님을 느꼈다. 그는 진지했다. 금요일 밤의 사건을 단순히 하룻밤 게임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패트릭의 표정이 다시 누그러지고 눈은 욕망으로 번뜩였다. "네 입술은 자석처럼 날 끌어당겨 브라이스. 널 껴앉고 키스하고 싶어. 네 몸을 느껴보고 싶어." "패트릭! 그만둬! 누가 오면 어쩔려고 그래?" 브라이스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만약 누군가가 들어오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설령 아무말도 엿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빨갛게 물든 브라이스의 얼굴만 보면 이내 상황을 눈치챌 것이다. 패트릭은 기어코 자기를 이기려 드는 브라이스의 전면에 유혹의 눈을 들이댔다. 패트릭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루와 고가의 동양풍 융단, 값을 매길 수 없는 훌륭한 도자기가 진열된 응접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아무도 여기 들어오지 않을 거야. 빨리 이층으로 올라가자. 새침떼기 소녀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로 성장할 때까지 잠잤던 침실 을 보고 싶어."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브라이스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브라이스는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는 일아ㄷ. 그는 안아서라도 강제로 데려갈 테니까. 옛날 사용했던 방을 보여줄 수는 없다. 어느 방이든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위험하다. 정원에는 이 도시의 유명인사들로 가득차 있고 매스컴 관계자들도 와있다. 지금 소동을 일으키면 끝장이다. 그것만은 피해야만 한다. "맥브라이드.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패트릭은 계단을 올라가 무도장에 이르자 갑자기 몸을 돌려 반격했다. "네가 날 패트릭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을 나눌때 뿐이구나. 왜 그래? 내가 아무 방에나 끌고 들어가 뭄을 잠그고 겁탈이라고 할까봐서?" 사람들 이야기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을 느낀 브라이스는 황급히 제일 가까운 방에 그를 밀어넣고 손을 뒤로 내밀고 문을 닫은 뒤 열쇠를 채웠다. 문에 기대 가슴을 지키려는 듯이 모자와 백을 꼭 껴안고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따. "패트릭, 넌 정말.." "키스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그날 밤 이후 벌써 24시간이나 지났어. 더이상 기다 리고 있을 수는 없어." 브라이스는 그의 품에 끌어당기자 놀라 눈을 떴다. 순간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키스의 마법에 걸려 그의 감촉, 냄새, 맛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브라이스의 어깨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미친 듯이 입술을 탐하다가 갑자기 힘을 뺐다. "이게 아니야." 그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자와 핸드백을 빼앗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내가 느끼고 싶은 것은 모자가 아니라 바로 네 몸이야./" 브라이스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가까이 다가서게 한 다음 다시 등에 손을 둘렀다. 입술을 겹치는 순간 힘차게 몸을 짓눌렀다. 패트릭의 품에 안겨 키스를 나누는 것은 마법에 걸리는 거나 다름없다. 마치 물위에 둥실 떠 있는 느낌이 오는가 했더니 이내 찬란하고 강렬한 세계에 말려 들어갔따. 그곳은 정열의 세계로서 너무나 뜨겁고 격한 정열 탓에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너하고 키스할 적엔 이성이 어디론가 달아나버려." 패트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 신히 말하고는 뜨겁게 포옹하고 있던 손에 힘을 ㅃㅒ고 그녀의 허리께에 양팔을 둘렀다. 두 세번 심호흡을 하면서 요동치는 맥박을 조절했다. 브라이스는 그에게서 약간 몸을 때고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짚고 말했다. "멋진 말솜씨로군요, 변호사님." "다시 한번만 키스해 주신다면, 판사님. 동물원에 새로지을 영장류 우리에 제일 먼저 같힐 이 원숭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짝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브라이스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넌 위험한 상황을 넘기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지?" 패트릭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브라이슨느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설명 을 덧붙였다.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이 어기서 무엇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수상 하게 여기지 않도록 내려갈 방법이 뭐야? 몸은 아직도 뜨겁게 달아올라 키스를 원하고 있지만, 지금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우선 저 거울 앞에 가서 화장이나 고쳐." 브라이스가 당황하며 거울 앞으로 달려가는 못브을 보고 패트릭은 싱긋 웃었다. "이 방이군. 그렇지?" "뭐가?" 브라이스는 작은 부러쉬로 머리를 빗으며 물었다. "네가 옛날에 사용했던 방 말이야." 네 기둥에 덮개가 달린 침대에 앉아 손가락으로 침대 커버를 문질러본 다음 덮개 위에서부터 밑으로 축 드리워져 있는 엷은 커튼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침대를 좋아하는군." "좋아해서 그런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전부 그런 침대 뿐이야." 그는 나폴레옹 시대 풍의 책상 뒤쪽의 붙박이 책상에 장식되어 있는, 추억을 간직하기 위한 장식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거 참 재미있는데." 사진틀 속에 들어있는 각종 사진과 책장 위에 진열된 상장, 상패 등을 빙 둘러보면서 말했다. "화장을 마쳤으면 나가자. 이제 알건 다 알았으니까."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브라이스는 문에 귀를 대고 바깥 소리를 들으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넌 소집가이며 가족이나 자신의 과거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타입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패트릭 답군. 넌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아마 그럴거야. 뒷계단으로 내려갈까?" 두 사람은 마치 도둑처럼 좁은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 널판지로 문을 막아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이 사용하는 부엌인줄 알았는데? 여긴 어디지?" "할머니 서재였던 방이야. 집안을 가로지르지 않아도 이곳에서 곧장 할머니 침실로 통하도록 만들어져 있어." "너희 할머니가 고결하신 플로렌스 크레이머 판사였지?" 방 구석의 작은 벽돌로 만든 난로 위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패트릭이 말했다. 판사용 검은 법복을 입은 검은 머리 여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다. 진지하고 위엄 에 찬 얼굴이지만 짙은 블루 눈동자만은 기쁨에 넘치는 듯 반짝이고 있었고 양 볼에는 예쁜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틀림없이 멋진 분이었을 거야." "응, 그랬었지. 빨리 여길 나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넌 할머니를 쏙 빼닮았구나. 브라이스 플로렌스 크레이머란 이름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군. 너희 부모님은 갓태어난 여자아기가 장래에 판사가 될줄은 모르셨던 모양이지?" "지금 이름 타령이나 하고 있을때가 아니야. 빨리 나가야 해." "네, 알았습니다. 재판관님."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뒤를 따라 이내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두 사람과 마주친 사람은 요리 서비스 회사에서 온 제복입은 메이드와 주차요원으로 고용한 10대 소년뿐이다. 브라이스의 은빛 세단앞에 도착하자 패트릭은 재빠릴 조수석 도어를 열고 브라이스 를 밀어 넣었다. "내가 운전하지." "네 차는 어떻게 하고?" "친구와 함꼐 왔지만 그는 벌써 돌아갔어. 네가 기꺼이 날 태워줄줄 알고 있었거든." 패트릭은 브라이스를 호화로운 시트에 강제로 앉히고는 도어를 닫았다. 그가 운전석에 앉자 브라이스는 화를 냈다. "네 식으로 처리하는 일은 언제나 이 모양이구나! 둘이서 함꼐 떠나는 모습을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패트릭은 차를 출발시켜 사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야? 넌 야만스런 맥브라이드와 함께 있는 모습을 남의 눈에 띄기 싫은 모양이구나!" 8 브라이스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십대 소녀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와 함꼐 있으면 그녀의 평판에 상처를 입는다. 지금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않 았다. 그는 빛나는 콜럼버스의 십자군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이상주의자에 다 자유주의파이다. 반면 그녀는 분별있는 보수파 판사로서 현실주의자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와의 연애는 그녀의 지위에 상당한 불이익을 초래 할 것이 분명하다. 정치 세계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될 룰이 있고 때로는 내용보다는 의견을 중시 하는 경향이 있다. 판사는 청렴결백하야 하며 법은 물론이고 도덕과 관습을 착실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판사가 여자일 경우 더욱 강하게 요구받고 있 다. 패트릭과는 달리 브라이스는 위험한 모험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을 헤아려 패트릭이 단념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브라이스는 차가 몇 킬로미터나 달린 다음에야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차가 북쪽 도로에서 주택가로 접어들자 불안해졌다. "너의 식구를 만나줬으니까 이제 네가 우리 식구를 만나줘야 하지 않겠어?" 패트릭이 말했다. "그게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예의가 아니던가? 남자가 걸 프랜드의 부모를 만나 인정받으면 이번엔 걸프랜드를 자기 어머니에게 소개시키는 게 당연한 순서겠지?" "너의 어머니를 만나게 한다고?" 브라이스는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지난 주말 이후 3일간 여러가지 제안을 제시하고 누가 뭐라든 뜻대로 실 천했다. 브라이스가 꽁무니를 빼면 뺄수록 더욱 힘차게 꼬리를 잡아당겼다. 그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중대한 일을 농담으로 여길 만큼 신중치 못한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어쩔 심산일까? 브라이스는 영문을 몰라 패트릭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 었다. "패트릭 맥브라이드가 언제부터 관습을 따르게 되었지? 내가 왜 네 부모님을 만나야 하지?" "사실을 말하자면." 패트릭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린 저녁식사 시간 무렵에는 항상 부모님 집에 들리게 되어 있어. 이제 슬슬 그쪽으로 가야 될 시간이고...운이 좋으면 너나 나나 식사 주ㅌ비를 하지 않 아도 될 것 같아서." "갑작스런 방문에 식사 대접이라니, 말도 안돼!" 우리집에서는 갑작스런 방문이 오히려 유리해." 패트릭이 자신만만한 목소릴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 일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자와 만날 마음의 준비를 되도록 이면 짧게 하는 편을 좋아하실 테니까." "난 네 평생의 반려자가 아니야." 브라이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 간이 짧을수록 좋아하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만나보면 알게돼." "국민학교 3학년때 학교에서 얼핏 뵌 적은 있지만 또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지 도 못했어." 브라이스가 냉랭한 반응을 보이자 패트릭은 당황하면서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저..어머니는 이내 손자와 결부시키기 때문에.." "손자와 결부시키다니?" 브라이스의 눈이 휘등그래졌다. "어머니는 온 집안에 손자들로 가득 채울 욕심을 갖고 계신데 이제 겨우 한명 을 얻었을 뿐이야. 신 형님이 2년전에 결혼하여 작년에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른 형제들은 아직 결혼도 안했거든." "집에 데려오는 여자는 모두 장래에 맥브라이드라는 성을 단 꼬마들의 어머니 가 될 거라고 생각하신단 말이야?" "응." "그래?" 브라이스는 잠자코 앞만 응시했다. "그렇게 해주지 않겠어?" 그는 애원조로 물었다. 패트릭의 기죽은 얼굴과 애원하는 눈을 마주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브라이스 는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되어 있는 모습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상상해 보았다. 엄마를 쏙 빼닮은 네이비 블루 눈을 가진 건강한 빨강머리 사 내아이,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푸른 눈동자와 새까만 고수머리의 귀여운 여 자아이. 패트릭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 멋있어. 그런데.....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브라이스는 당황하며 얼른 상상을 지워버렸다. 하늘이 두조각 나도 그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은 없을 거야. 아직 해야 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이전에는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제 겨우 30세가 넘었을 뿐이다. 결혼하여 아이나 키우며 시간을 헛되이 소비할 꿈을 꾸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다. 그러나 결혼하여 그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을 절대 그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속마음을 간파당하게 된다. 나는 지금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와 침대를 함꼐 한 것도 그의 말재주에 현혹되었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스는 언젠가 동창생에게 전해 들은 말을 상기했다. 나보고 '생각하기도 싫은 지긋지긋한 노처녀라구? "너의 어머니는 날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실 거야."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말했다. 패트릭은 자신에 넘치는 브라이스의 말을 듣고 의아해졌다. 왜 어머니가 그녀를 장래의 내 아내감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걸까? 명문 크레이머집안 출신은 평범한 서민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뭐라구?"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차를 급회전시켰다. 도어에 어깨를 기댄 채 브라이스는 그를 외면하고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하여 새빨간 포르쉐 바로 뒤에 거칠게 정차할 때까지 브라이스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한쪽 눈을 뜨고 차가 멈춘 것을 확인한 다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어." 충돌할 뻔한 고가의 포르쉐는 쳐다보지도 않고 패트릭은 재차 물었다. "왜 어머니가 널 미래의 내 아내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환신하지?" 브라이스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따. "대답하지 않아도 알텐데?" "난 몰라!" 패트릭은 화를 냈다. "우리같이 하급신분의 사람은 너의 가문같이 고귀한 인간들의 생각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라." "잘 아는군." 브라이스는 경멸조로 대답하고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아올라 혈관이 터져 버릴 것같이 화를 내고 있는 패트릭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얼른 대답해주었다. "너의 어머니같이 멋있는 분이 '생각하기도 싫은 지긋지긋한 노처녀'에게 귀한 손녀를 낳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 패트릭은 할 말을 잃고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연신 눈을 껌벅거렸다. 브라이스는 참으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우스워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내가 한 말을..? 누구한테 그 말을..?" 그는 한참 말을 더듬다가 브라이스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겨우 화를 풀었다. "이 귀여운 새디스트! 날 놀리며 즐기고 있었지?" "그래." 브라이스도 웃으면서 말했다. "패트릭, 내 차를 박을 뻔하고도 웃음이 나오니?" "미안, 닐 형. 숙녀분에게 신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신문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어 브라이스는 그가 닐 맥브라이드임을 금방 알아 차렸다. 그는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면서 패트릭을 노려본 다음 아우의 뒤를 돌아와 브라이스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무릎을 굽히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동생보다 늙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시도록 손을 잡아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크레이머 판사님." 덩치 큰 남자의 양 뺨에 귀여운 보조개가 선명하게 패이는 것을 보고 브라이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패트릭과 꼭 같은 푸른색 눈동자는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자기가 닐을 알아본 것과 같은 경우일 거라고 단정했다. 모자를 뒷좌석에 던지고 브라이스는 닐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브라이스가 차에서 내려서자 닐은 패트릭을 향해 승리의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싱긋이 웃는 모습을 보고 약간 불안감을 느꼈다가 맞은편에서 아일랜드 계 특유의 인상을 풍기는 장신의 두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불안감은 한층 더 강해졌다. 어깨를 들먹거리며 걷는 모습은 이 집안의 내력일까? "드디어 침략이 시작됐군." 패트릭은 중얼거리며 신에게서 브라이스를 보호하듯이 그녀 앞에 버티고 섰다. "신 형, 도대체 어쩔 셈이지?" "판사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신은 패트릭을 무시하고 말했다. "전 오늘 부이야베스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카라가 일개 대대를 먹일만큼 만들었지요." 삼형제가 한결같이 동정의 눈으로 형을 바라보는 걸 보니 아마 가족들만 아는 무슨 뜻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브라이스에게 신이 말을 계속했다. "제 아내 요리를 한번만 잡숴보시면 제 말의 의미를 알게 되실 겁니다, 판사님." 그는 집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카라는 멋있는 여자이고 저도 그녀를 무척 사랑합니다. 그런데 요리 솜씨가 절 곤란하게 만든답니다. 만약 카라에게 메뉴를 바꾸라고 한다든가 제가 부야베스를 싫어한다는 비밀을 털어놓으면 후라이팬으로 내 머리를 내려칠 겁니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브라이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브라이스라고 불러 주세요." 신이 재빨리 브라이스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당신을 데려와서 정말 기쁩니다. 꼭 한번 만나서 감사의 말을 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저녀석에게 법정에서 절대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누누히 일러두었지만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아요. 법정모독죄로 따끔히 혼이 났으니까 이제 얌전해지겠지요." 브라이스는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연신 패트릭 쪽을 흘겨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가족들에게 털어놓았을까? 브라이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패트릭을 변호하는 입장에 섰다. "정말 감동적인 변론이었지요. 만약 제가 변호사의 입장에었다 하더라도 패트릭처럼 변호했을 겁니다. 생모는 세 자녀의 양육권을 박탈당할 뻔했는데 패트릭이 완강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에 그 가족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패트릭은 놀람과 환희가 뒤섞인 얼굴로 외쳤다. "벌금을 낸 보람이 있는데." "판결문 카피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케빈이 끼어들면서 브라이스를 나꿔챘다. 브라이스는 맥브라이드 가의 막내와 나란히 걸어갔다. 신, 닐 그리고 패트릭이 그 뒤를 줄지어 따라왔다. "아무도 날 소개시켜주지 않으니 자기 소개를 할 수 밖에. 전 케빈입니다. 이 집안에서 가장 예의바르고 핸섬한 남자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브라이스는 자신을 호휘하듯 빙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장정들과 발을 맞추며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패트릭의 부모님을 만나는 불안감이나 패트릭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두려워하던 마음이 싹 지워져 버렸다. 현관을 지나 넓은 부엌을 향해 가는 동안 브라이스는 안락한 분위기를 느꼈다. 기분 좋은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유리문을 통과하고 넓은 뒷뜰로 안내되었기 때문에 소감을 말할 겨를이 없었다. 뜰에 나오자 다른 형제들은 저녁식사 전에 배드민턴을 치기 위해 나가고 패트릭과 브라이스만 남게 되었다. 브라이스는 그의 아버지에게 소개되기 전에 벽돌로 만들어진 뜰과 손질이 잘된 잔디, 아름다운 장미 화원을 둘러보았다. "이 분이 미스 브라이스 크레이머신가?" 토마스 맥브라이드는 곰처럼 생긴 남자에게 새우 접시를 넘겨 주고 두 사람쪽으로 걸어오면서 요리사용의 빨간 에이프런에 손을 문지른 다음 브라이스의 손을 잡았다. "제 아들과 오랜 세월 각축전을 벌려온 여자분과 악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브라이스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어릴 적에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귀여웠었죠. 물론 판사가 되는데 는 미모보다는 두뇌가 필요하지만." 토마스는 패트릭에게 브라이스를 빼앗아 명랑하게 말을 계속했다. "학생시절 언제나 당신과 일등의 영광을 나눠가지게 되면 우리 패티는 분해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당신과 동점으로 사법고시에 패스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답니다." 브라이스는 토마스에게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같은 성적으로 패스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패트릭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매수하여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브라이스는 능청스레 거짓말을 했다. "패티와 전 좀처럼 성적을 비교한 적이 없었는걸요."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놀리느라 '패티'라고 부르자 무서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노려보다가 아버지의 엄한 경고의 눈총을 받고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오늘 오후 패티가 당신을 데려온다는 전화를 했을때 무척 놀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집안에서 당신의 이름이 거론되면 반대나 투쟁의 의미로 통했으니까요." "어머나? 왜 그랬을까요?" 브라이스는 짐짓 놀라는 체 하며 물었다. "이쪽은 놀랑 루니야, 브라이스." 아버지가 브라이스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패트릭이 얼른 끼어들었다. "내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며 우리 집안의 오랜 친구이자 요리 솜씨가 일품인 요리사이지." 브라이스는 놀랑이 첫눈에 좋아졌다. 그의 웃는 얼굴은 사람을 감싸주듯이 따스했고 눈은 부드러우며 행동은 꾸밈이 없었다. 덩치는 큰 사람이 브라이스가 손을 잡자 소년처럼 부끄러워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스터 루니." 놀랑은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패트릭의 등을 힘껏 쳤기 때문에 브라이스는 패트릭이 앞으로 넘어지는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이제야 겨우 여자보는 눈이 좋아졌구나, 패티댜. 이 분은 정말 멋진 여성이다. 네가 언제나...앗! 스테이크 타는 냄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놀랑이 마지막까지 말을 다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며 브라이스는 달려가는 놀랑을 향해 얼른 인사했다. "크레이머 판사님." 브라이스의 등뒤에서 부드럽고 청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오셨어요. 패트릭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가족들과의 대화 속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브라이스는 뒤돌아섰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브라이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탐지해내려느 듯한 짙은 푸른 눈동자에 사로잡히자 마치 예리한 핀에 꽂혀 표본 병 속에 갇힌 나비가 된 느낌이었다. "환영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몰리 맥브라이드는 지나친 겸손을 싫어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패트릭의 친구라면 초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일요일에는 늘 스테이크를 굽지요. 냉장고에서 고깃덩어리 하나만 더 꺼내면 되는데 번거로울 게 뭐 있나요." 브라이스는 말 속에 뼈가 담겨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패트릭을 돌아보며 응원을 요청했다. "어머니, 제가 브라이스 집안의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패트릭은 당황하며 변론했다. "그건 자선파티였고 초대객 명단은 몇 개월 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 몰리는 솔직히 받아들이고 정원 한가군에 서있는 커다란 활엽수 밑에 준비된 피크닉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패트릭, 크레이머 판사님에게 카라를 소개시켜 드려야 하잖니?" "브라이스라고 불러 주세요." 브라이스는 딱딱한 분위기를 해소하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그러나 몰리는 결코 브라이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여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몰리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소개했다. "카라는 신의 아내이자 내 첫손자 라이언 토마스 맥브라이드의 어머니이기도 하죠. 그 옆에 앉아 있는 귀여운 아가씨는 타마라 윌슨 양이에요. 타마라와 닐은 어젯밤에 약혼 발표를 했답니다. 그럼 난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감자가 다 익었는지 살펴봐야겠어요." 패트릭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두 개의 불타는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하며 해명했다. "어머니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줘, 브라이스. 오늘 아침 부탁할게 있어 여기 왔었지. 내가 너의 어머니 파티에 숨어 들려는 걸 아시고 화를 내셨어. 어머니의 기분을 이해해 주기 바라." "뭐라고? 숨어들다니?" 브라이스는 비난조가 아니라 호기심이 발동하여 캐물었다. 패트릭의 어머니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 자신도 패트릭을 환영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민주당도 상류계급층과 약간의 연줄을 맺고 있지. 찰리 오리스를 알고 있지? 그는 시의회뿐만 아니라 동물원 이사회에도 속해 있어. 오리스는 이웃에 살고 있지. 그는 맥브라이드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 작년만 해도 도너츠와 커피 등 많은 식료품을 우리에게 지원받았어. 공화당 파티나 다름없는 너의 어머니 파티에 민주당파인 날 데려가면 그의 정치 생명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고 완강히 거부하더군.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 식료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더니 어쩔 수 없이 날 데려가 준 거야."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그게 못마땅하신 거지?" 패트릭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싱긋이 웃었다. "어머니는 내가 그런 파렴치한 수단을 사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자존심을 가져라'라고 꾸짖었으니까." 그는 브라이스의 귀여운 콧등을 톡톡쳤다. "그렇지만 너에 관한 일이라면 난 언제라도 자존심 따윈 내던질 수 있어." "그걸로는 부족해." 브라이스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유혹하듯이 달콤하게 말했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해. 너의 모든 것을 바쳐야 될 거야. "왜? 나보다 더 강한 경쟁상대라도 있는 거야?" 패트릭은 하루종일 할까말까 망설였던 질문을 던지고는 분노에 찬 눈으로 브라이스를 쳐다보았다. 농담처럼 한 말들이 모두 진담임을 왜 알아 주지 않 는 걸까? 그녀에 관한 한 프라이드 따윈 필요없다. "어젯밤 누구와 함께 외출했지?" 뜻밖의 질문에 브라이스는 망설였다. 이번에 처음은 아니다. 패트릭은 논리 적으로 행동해 주길 기대할 만한 상대가 못된다. 언제나 불쑥 엉뚱한 화제를 들먹인다. 다음 커브를 언제 어디서 돌게 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덕분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도 모호하다. 냉정함을 잃게 만들고 유쾌하 지 못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그의 유별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을 권리가 너한테 있다고 생각해?" 패트릭은 체온이 느껴질만큼 가까이 몸을 기댔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한참 을 노려본 다음 서서히 그녀의 입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거 좋은질문인데?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난 대답하지 않겠어." 만약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가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 스럽다. 패트릭에게 자기에 대해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 은 위험한 무기를 맡기면서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히는 거나 다름 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난 대답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패트릭은 브라이스의 팔을 끼고 피크닉 테이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있게 될 거야. 언젠가는 반드시! 그 전에 먼저 어머니의 말씀을 시행해야 겠지?" 브라이스는 카라 맥브라이드와 타마라 윌슨을 만나자마자 곧 친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카라는 언제나 웃고 잇는 갈색눈동자를 가진 검은머리 여자 였다. 그리고 위트도 풍부했다. 타마라는 늘씬한 체격의 블론드 머리의 여자 로서 귀엽게 생간 얼굴과 해맑은 블루눈이 칼날같이 예리한 통찰력을 숨기고 있었다. 브라이스는 두 여자가 어떻게 해서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맥브라이드 집안의 장남과 차남을 낚았는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짤막하게 브라이스를 소 개한 다음 패트릭은 형제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러 갔다. 패트릭이 자리를 뜨자 타마라가 몹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브라이스에게 말 을 걸었다.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브라이스. 덕분에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되 었어요. 난 여기 올때까지만 해도 질문에 대답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 는데 도착해서 지금까지 모든 식구들에게 언제쯤 어머니가 되느냐는 질문만 받아 난처했답니다." 카라가 큰소리로 웃었다. "제발 결혼식을 끝낼때까지는 참아줘요. 피로연 도중에 아기를 낳아도 몰리 는 절대 놀라지 않을 거예요." "설마!" 브라이스와 타마라가 동시에 소리쳤다. 카라는 옆에 있는 아이스 박스에서 캔 소다수를 꺼내 모두에게 건네주고 자기 캔을 따서 한모금 들이킨 뒤 말을 이었다. "몰리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비결을 가르쳐드릴까요? 절대 맥브라이드 집안의 혈통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만 하면 되요. 난 벌써 내 임무는 수행했으니까 걱정 없어요. 어머니처럼 아들 넷을 낳아야 된다고 고집부리지만 않으면 난 끄덕 없어요." 타마라가 화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네 형제는 평생의 한이라도 푸는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배드민턴 경기에 힘하고 있었다. 타마라가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 좀 보세요. 마치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하는 것 같아요. 몰리는 저렇게 거친 아들들을 어떻게 키웠을까요?" "몰리는 체격이 작아 언제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카라가 설명했다. "난 신이 한번씩 실없는 소리로 날 속상하게 만들면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열 어요. 그럼 금방 말을 취소해요." "어째서요?" 브라이스가 물었다. "거기에다 길다란 나무 막대기를 넣어두거든요." 세 여자가 배꼽을 쥐며 웃는 소리가 코트에까지 들려왔다. 케빈은 전혀 이상 한 기색을 느끼지 못했지만 패트릭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신은 모른체 시치 미를 떼고 있었으며, 닐은 불안해했다. 패트릭은 닐과 한조가 되어 시합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브라이스에게 가 있었다. 여자들의 요란한 웃음소리는 시합을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짐작컨대 카라가 이 집안의 비밀을 죄다 털어놓고 있는 듯했다. 닐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 하고 있었다. 닐과 패트릭은 의도적으로 시합을 끝내 버렸다. 시합이 끝나기 무섭게 닐과 패트릭은 꼬리를 감추었고 맥주 통 옆에서 승리의 축배를 드는 사람은 케빈과 신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신 형." 케빈이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킨 뒤 물었다. "마누라 엉덩이에 깔려 지낼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해?" 신은 카라가 의미 있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맥주 반컵 을 단숨에 들이키고 손으로 코를 쓱 문지르며 말했다. "누군 누구야? 바로 나지." 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잔디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백살까지 산다해도 맥브라이드 집안 사람들과의 첫 식사를 잊을 수 없을거 야, 라고 브라이스는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엄격하지만 몰리에 비하면 발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155센티미터 남짓한 몰리의 체구에는 한 집안의 사령관으로서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몰리가 부엌창문을 통해 모이 라고 한 마디를 하자 남자들은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인들마냥 순 식간에 몰려 들었다. 여자들을 여왕폐하 모시듯 의자에 앉아 있게 하고 남자들이 부엌을 왔다갔다 하며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채 바라보고 있는 브라이스를 카라가 손을 토닥거리며 생긋이 웃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버릇만 잘 들이면 저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라이언도 몇년간 할머니 밑에 보내 교육을 시킬 참이에요. 다시 내 품에 돌아오면 난 하루종 일 안락의자에 앉아 내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항상 이래요?" "끝내주는 서비스죠." 카라는 즐거운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닐이 타마라 앞 에 커다란 스테이크 접시를 놓으면서 아주 정중하게 음료수는 뭘로 들겠느냐 고 묻자 어이없다는 눈으로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카 라는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패트릭과 신도 브라이스와 카라에게 닐과 꼭같 이 질문하고 음료수를 가지러 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시어머님을 존경해요. 이 집안 의 일원이 된 다음 지금까지 한번도 설겆이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뿐만이 아니고 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빨래도 하고 카페트 청소도 하며 심지어는 침 대 정리도 하는걸요." 카라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설명했다. "나, 오늘밤 당장에 시험해 봐야겠어요." 타마라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몰리에게 아기 낳는 생각에는 절대 찬성한다는 말부터 한 다음에." "만약 닐이 신과 같다면." 카라는 세상일에 정통한 사람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타마라도 몰리를 존경하게 될 거예요." 브라이스는 타마라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먼드 반지를 보고 이유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외모만 봐도 맥브라이드 형제들은 너나할 것 없이 꼭 닮았다. "오늘 밤 요리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여성여러분." 신이 체크 무늬 테이블 클로스 가운데 커다란 샐러드 접시를 놓으면서 정중 히 예의를 차린 뒤 카라 옆에 앉았다. 세 명의 여자들은 서로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 받은 다음 예의바른 호스트들 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합쳤다. "물론이에요, 달링." 카라가 두 여자의 기분을 대표하여 자신있게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들리가 있나요?" 9 "너희 집 식구들, 정말 멋있어." 브라이스는 맥브라이드 집 사도를 걸어가면 서 패트릭에게 미소를 띄웠다. "마지막에는 어머니하고도 친해졌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음." 조금전에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패트릭은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마음에 들고 따스한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면 왜 내일밤 '숫사슴 머리'에 오지 안겠다는 걸까? 리버힐에 사는 공주님에게 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브라이스는 그의 무서운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패트릭, 어떻게 된거야?" 패트릭은 그녀를 힐깃 쳐다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문제가 가로놓여 있어."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족은 모두 널 좋아해."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확실하다. 며칠 사이에 또 한 아들의 결혼상대가 정해지자 어머니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 아가고 있는 것이 패트릭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게 문제야?" 브라이스는 약간 망설이며 물었다. 나로 하여금 그의 집을 방문케 한 것은 날 자기 가족들 마음에 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 역시 그들을 좋아해 주길 바람에서 시도한 계획이었겠지? 패트릭을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려고 결심하려는 데 그는 어느새 태도를 바꿔 버렸다. 그는 턱을 뾰족히 내밀며 화제를 바꿨다. "내 아파트까지 태워다 주겠지? 난 굿나잇 키스만 하고 차에서 내리고 넌 돌 아가는 거야. 좋지?" 패트릭이 상냥하고 애교스런 말투로 제의하자 브라이스는 무슨 흉계가 숨겨져 있는 듯하여 몸을 도사렸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잖아?" 그는 아파트로 유혹하여 키스 이상의 것을 요 구할는지도 모른다. 브라이스는 일방적이고도 교묘한 그의 태도에 약간의 반 발심을 느꼈다. "물론 그럴 계획이었지." 패트릭은 싱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넌 언제나 예 정대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패트릭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좋아. 그럼 나도 내가 결정한 대로 해야겠어! 그러나 입 밖으로 나 온 말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부터 재판이 시작되는 거야?" "첫 공판은 아홉시에 예정되어 있어." 패트릭이 악셀을 힘껏 밟자 차는 급커브를 그렸다. 브라이스는 눈썹을 치켜 떴다. "지금부터 열두 시간이나 남아 있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패트릭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고속으로 달렸다. "금주는 이미 약속이 꽉 차 있겠지?" "응. 너도 그렇지?"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럼 다음 주말에 전화할 테니까 저녁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때?" "네가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면." 패트릭은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브라이스는 어쩐지 비난받는 느 낌이 들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브라이스를 흘깃 쳐다본 다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집을 나오려 할때, 비로소 브라이스에 대한 감정이 풀린 그의 어머니가 다시 한번 들려달라며 상냥스럽 게 인사까지 했었다. 패트릭은 두 사람의 관계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틀 림없다. 브라이스는 자기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채 오늘밤 일을 처음부터 돌이켜 보며 무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 이후 단 한번 서먹한 분위기를 빚었던 대화를 생 각해 냈다. 패트릭의 어머니가 월요일 밤에도 이곳에 들리겠느냐고 질문했을 때였다. 패트릭은 대신 대답해 달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눈짓을 했었다. 그러나 사전에 약속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마치 모 욕을 당한 사람마냥 그녀를 매섭게 흘겨 보았다. 어떻게 하는게 옳았을까? 나도 함께 초대된 것일까? 그 사람 대신 대답하는 게 옳았을까? 패트릭은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르는 타입이 아니다. 그의 사교상의 약속을 대신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설령 그것이 가족들 일이라 할지라도.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브라이스는 패트릭의 호통소리에 놀라 기절할뻔 했다. "어째서 넌 항상 고집만 부리고 있는 거야? 마음이 변한 거야?" 그는 작은 도로를 굽어 10층짜리 석조건물 주차장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리다가 급브레 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여기가 내 아파트야." 브라이스는 이를 악물고 마음 을 진정시키려 했다. "방금 한 말을 설명해 주지 않겠어? 아니면 내가 독심술을 써서 네 마음을 읽 어내기를 바라는 거야?" 대답 대신 패트릭은 차에서 내려 그녀쪽으로 빙둘러 와서는 맹렬한 기세로 문 을 열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자, 집안에 들어가 얘기해 보자." "뭘 얘기한다는 거지? 내가 고집 세다는 말?" 뭐든지 제멋대로 결정하는 패트 릭이 얌전히 굿나잇 키스를 하고 돌려 보내 줄 리가 없다. 브라이스는 방어 전략을 강구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팔을 잡힌 채 주차장 밖으로 끌려갔다. 패트릭의 걸음을 따라가기 힘들어 브라이스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너희 형제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를 약탈하라고 교육받았어? 아니면 천성이 그런 거야?" "뭐라구?" 걸음이 너무 빨라 그녀가 따라오기 힘들다는 것을 안 패트릭은 걸 음을 늦추고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의 힘도 뺐다. "미안해. 미처 생각하 지 못했어." 도대체 너라는 인간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진지하게 생각 해 본 적이 있기는 있는 거야? 라며 속으로 악을 쓰고 있는데 그가 뒤돌아 보았다. 화난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너와 함께 있으면 괜히 난폭해지거든. 미안해, 허니." "역시 넌 영장류 동물과 별 차이가 없는 인간이야." 정말 처치곤란한 인간이라는 투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패트릭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녀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걸어갔다. "그렇지만 네 머리채를 휘어잡고 차에서 끌어내려 난폭하게 침대에 내동댕이 치는 짓은 하지 않았어. 그만하면 얌전하지 뭘 그래? 옛날 석기 시대의 남자 들은 여자의 동의 따윈 구할 필요가 없었지. 10만 년전에 태어났으면 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네 옷을 몽땅 벗겨 버리고 하룻밤 즐긴 다음 버려도 상관 없었을 거야." "그 따위 소린 하지도 말아." 브라이스는 석기시대의 남자에게도 이해심은 있 었다는 것을 맹렬히 반격했다. 그녀가 흐트러진 호흡을 애써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패트릭의 입가에 웃 음이 번졌다. "기억해 두지." 그는 커다란 떡갈나무 문을 열면서 상냥하게 대답하면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빌딩 안으로 걸어갔다. "그렇지만 네 몸은 너의 이론에 절대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얼굴을 빨간 색으로 물들이며 그녀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당당하게 걸어갔다. 복도를 반쯤 지나왔 을때 문득 브라이스는 뒤에 아무도 없음을 느끼고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패트릭은 저쪽 뒷면 벽에 기대서 엘리베이터 도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브라이스는 아무 말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가서 밀폐된 좁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패트릭이 격자문을 당겨 닫자 무거운 도어가 스르르 닫혔다. 10층 버튼을 누 르고 패트릭은 천천히 그녀곁으로 돌아섰다. "이 건물은 아주 오래됐어." 화가 풀린 그의 목소리에서 위험한 향기가 났다. "멋있는 건물이구나." "너무 오래됐어." 그가 몸을 기댔다. "10층까지 올라가는데 한 시간쯤 걸릴 거야." "급할때는 꽤나 초조하겠구나." 패트릭이 다가올 적마다 브라이스는 몸을 뒤로 빼는 실갱이를 계속하다가 드디 어 그녀의 등이 벽에 닿았다. 패트릭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을때 브 라이스는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었 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츰을 이용해서 키스하고픈 심정만큼은 초조하 진 않아. 키스해 줘, 브라이스." 패트릭의 고조된 욕망에 자극받은 브라이스가 침을 삼키는 동안 그의 입술이 유혹해 왔다. 나는 결코 고집센 여자는 아니지만 그의 감정 궤도를 타고 함 께 갈 수는 없다. 패트릭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브라이스는 입릉 한일자로 굳게 다문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너처럼 마음 내키는 대 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 손이 닿는다고 해서 내가 자극받을 줄 알아? 그러나 패트릭이 혀끝으로 입술을 간지럽히자 브라이스는 눈을 감고 신음소 리를 냈다. 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게 되었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입술을 받아들여서는 안되는데. 그러나 브라이스는 지금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적극적이 된 브라이스는 패트릭의 입술에 강하게 밀려 붙혀와서 타오르는 욕 망에 저항없이 몸을 맡겼다. 한순간은 그가 유혹하는 측이 또 한순간은 브라 이스가 유혹하는 칙이 되었다. 그가 키스를 머무면 브라이스가 애무를 계속 했다. 그녀의 몸은 오직 패트릭만이 줄 수 있는 환희를 원하고 있었다. "패트릭, 네가 탐나." 브라이스가 속삭였다. 이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패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쉰 목소리로 대답하곤 달콤한 미소를 띄우며 브라이스의 손을 잡고 융단이 깔려 있는 복도를 따라갔다. 그의 방에 도착하자 호주머니 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에 그는 다시 한번 브라이스에 게 키스했다. 패트릭이 그녀를 안아 올려 넓은 거실을 걷는 동안 브라이스는 방안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없었다. 그가 책상옆을 돌아가면서 한쪽 손을 뻗어 램프를 켰을 때 비로소 방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런 색조의 가죽을 씌운 소파, 황갈색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벽난로, 모든 것에 남자다운 취향이 깃들어 있었다. 광기는 아직 남아 있지만 브라이스는 최대한으로 냉정을 되찾으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이야기하러 들어온 게 아니었어?" "나중에 하지." "어젯밤 데이트에는..." "그 일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 않아." "누구와 외출했는지 물었잖아? 에버네이시 판사 부부와 식사했어." 패트릭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왜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어? 날 속상하게 만들려고? 어젯밤 내내 너의 상대가 누구였을까 생각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 "밤새도록 내 일을 생각했다고?" 그의 귓봇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 거리며 브라이스가 물었다. "아! 밤새도록 네 얼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정말?" 브라이스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에서 셔츠 깃 부분까지 쓸어내리며, 그를 애타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아! 정말이야..." 패트릭이 그녀를 안아올렸기 때문에 브라이스는 그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아 스라한 장미 향기가 그를 감쌌다. 그녀의 입술은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표정 이 부드러워지자 혀끝으로 간지럽혔다. 패트릭은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 그러뜨렸다. 그는 최고의 테크닉을 구사하며 키스를 즐겼다. 이번만은 그녀도 거부하지 못하리라. 기꺼이 순응하는 그녀를 안고 복도를 지나갔다. 입술을 떼고 어깨 로 방문을 닫았다. 여전히 날뛰는 몸을 추스리면서 브라이스는 냉정을 되찾고 그를 놀렸다. "이게 네가 말하던 굿나잇 키스라는 거구나." "너와의 굿나잇 키스는 그리 쉽게 끝낼 수 없어." 그는 명랑하게 대답하고 다시 걸어갔다. 침실은 콘트라이트가 색채로 장식되어 강한 사나이의 방으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침대는 검은 떡갈나무로 만든 킹사이즈이고 선명한 색깔의 멕시코 산 커버가 씌어져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에는 인디언의 동물 가죽이 깔려 있었으며 옷장이나 책장, 의자까지 모두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어서 강 한 남자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너와의 섹스도 그리 쉽게 끝낼 수 없어." 커버를 젖히고 브라이스를 눕히면 서 패트릭이 말했다. "지난번엔 처음이라 성급하게 끝냈지만 오늘은 천천히 즐기고 싶어. 널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 내가 네 몸에 닿을 때의 표정이나 내가 네 몸속에 들어갈때의 표정도 보고 싶어." 그는 웃옷과 넥타이를 풀었 다. "그리고 너에게도 내 몸을 보여주고 싶어." 브라이스는 그가 옷벗는 모습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욕망을 부채 질했다. 지난번에는 그의 말대로 천천히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가능 하다. 브라이스는 그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가슴은 넓적하고 피부는 황금색 으로 빛나고 있다. 그가 벗거벗은 몸으로 눈앞에 섰을때 늠름한 가슴과 평평 한 복부, 그리고 단단한 허벅지에 손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브라이스 곁에 다가와 더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애를 태우며 천천히 옷을 벗겼다. 그의 체중이 실려오는 순간 그녀는 즐거이 몸을 맡겼다. '천천히'라고 했던 그와의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어졌다. "제발 부탁이야." 키스와 애무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욕망이 불타오른 브라 이스는 몸 전체로 애원했다. 그러나 패트릭은 그녀가 가장 환희를 느낄 비밀 스런 곳을 탐색하는데 열중이어서 그녀의 애원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 의 기분을 확신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사랑을 나눌 때 뿐이다. 그녀도 그것 만은 부정하지 못하리라. 브라이스는 모든 사물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만은 논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 관계를 확신 할때까지 그녀에게 아무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브라이 스는 자기 인생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할게 틀림없으니까. 두 사람 이 실질적인 관계를 맺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시간은 서로를 발견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두 사람이 재회했을 당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물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물론 오랜 세월 서로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었지만. 따라서 시간은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유주의자 대 보수파이자, 변호사 대 판사이며 민주당 대 공화당 입장에 있 지만 두 사람은 멋진 커플이다. 왜 내 품에서 불타오르는지, 브라이스느 아 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일 새벽이 밝아올 무렵에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게 되겠지. 패트릭은 브라이스를 꼭 껴안고 모든 점에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여자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남자의 야만적인 본성을 발휘했다. 그녀의 양 손목을 꼭 잡고 그녀의 저항을 즐기다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힘차게 눌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만족스 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여자의 소유물이다. 그녀 없이는 일분 일초라 도 살 수 없다. "아! 사랑하고 있어." 그는 자아를 상실하고 패배와 승리의 감정이 뒤범벅이 된채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잊고 환희에 몸을 맡긴 브라이스는 그의 이름을 몇번인가 불렀다. 그의 허리에 두르고 잇던 손에 힘을 주어 더 깊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날 사랑하고 있다. 환희에 몸을 맡긴 브라이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것 같은 정열의 절정까지 올라갔다. 눈앞에 캄캄해질 정도로 격한 환희에 다시 한번 몸을 크게 떨면서 만족스런 생각에 휩싸였다. 브라이스는 죽음과 맞바꿔도 후회하지 않을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천국에 오른 것 같은 환희가 몸 전체에 밀려오자 민감한 피부 밑의 모든 신경이 동 시에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호흡과 그녀의 호흡이 뒤섞이고 그의 다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이 남자가 방금 나와 함께 천국을 다녀온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 브라이스는 자신이 내린 성급한 결론에 깜짝 놀랐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인생의 길을 가고 싶다. 그는 나를 황홀한 꿈속에 헤매이게 만든다. 그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브라이스는 몇 분 전을 회상했다. 그는 본심으로 말한걸까? 그도 날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면 정열에 불터 순간적인 착각을 일으킨 걸까? 패트릭이 날 사랑 하고 있다는 말을 생각하니 몸은 만족스러워했지만 마음은 정열에 의한 순간 적인 고백 따윈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하긴, 우리 두 사람은 너무 빨리 불타올랐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패트 릭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패트릭?" 가만히 그의 가슴을 흔들면서 이름을 불렀다. "패트릭, 아까 한 말 진심이야?" 패트릭은 고개를 들고 브라이스의 해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신음소리를 삼켰 다. 사랑에 고민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면 외면하는 길밖에 없다. 천정을 응시하며 패트릭은 수만가지 이유를 달아 자시을 꾸짖었다. 남자는 마 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냉정하게 사랑을 고백해야만 한다. 패트릭은 몸을 옆으로 돌며 팔을 베고 누우면서 무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물론이지. 우리가 뭘 했다고 생각해? 사랑을 추구한게 아니라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브라이스는 그의 눈에서 망설이는 기색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며 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이 아니었어. 실망감이 몸 전체에 퍼져갔다. 그러나 이 내 자존심을 가다듬고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랑의 추구라고? 넌 천부적인 코메디언 소질이 있어, 맥브라이드." 패트릭은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에 키스했다. "우스꽝스런 맥브라이드라고 꾸짖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그건 그렇고 넌 정말 맛있었어. 장미 향기에 완전히 취해 버렸다니까. 그게 바로 너야." 그는 쇄골을 따라 키스를 퍼부으며 목젖에 키스한 다음 다시 어깨를 애무했 다. "장미, 언제나 그랬지. 국민학교 1학년대부터 네 몸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었지." "패트릭...." 그의 손가락이 다시 가슴께로 와서 풍만한 가슴을 스치듯이 애 무했다. 브라이스는 그의 손을 잡고 저지시켰다. "이제 돌아가야 돼." "아침까지 함께 있자." 그는 손을 뿌리치고 이불을 끌어당겨 두 사람 위를 덮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그의 품안에 있고 싶은 욕망에 지 지 않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럴 수 없다는 거야? 아니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패트릭이 물 었다. "어느쪽이든 마찬가지야." 브라이스는 레이스가 달린 순면 슬립을 입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 없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의지력이야. 선택 가능한 것이지." "미안해." 브라이스는 리넨 드레스를 머리부터 뒤집어 입으면서 말했다. "반대 심문에 관한 레슬리 박사의 강의는 나도 훌륭한 점수를 받았어. 단어 의 의미론은 중요하지 않아. 돌아가야 돼. 새벽 다섯시나 여섯시 경에 서둘러 돌아가는 것보다는 지금 나가는게 좋아." "그렇게 일찍 돌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네 아파트는 겨우 여기서 네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일곱시 반쯤에 돌아가도 아홉시까지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 고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어." 네 말이 맞아. 그러나 난 아파트 사람들이 어젯밤 내가 어디서 자고 왔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게 싫어. 사람들이 금방 날 알아볼만큼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 도시에는 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아." 패트릭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옷장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때문에 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야?" 한쪽 구두를 찾지 못해 초조한 듯이 브라이스는 한쪽바로 깡총깡총 뛰면서 여기저기 뒤지고 있었다. "그 얘기라면 두번 다시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패트릭은 손에 구두를 들었다. "네가 찾고 있는게 이거야?" 브라이스가 한발로 서서 구두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패트릭이 얼른 껴안았다. "절대 같이 살 수 없다면, 타협할 수는 있겠지?" 브라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는 다시 말을 이었 다. "세 가지 선택안이 있어. 첫째는...이대로 영원히 헤어지는 것. 그러나 이건 안돼. 절대 불가능해. 둘째, 신중하게 관계를 계속하는것, 셋쩨, 결혼하는 것." "결혼한다구?" 브라이스는 깜짝 놀라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마지막 조건은 진심이 아님이 역력했다. "이번 주 안에 결혼식을 올리는게 어때?" 그의 능글맞은 태도에 대항하기 위해 브라이스도 빈정대는 투로 대꾸했다. "모처럼의 제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지만 스캐줄이 꽉 차 있어서 이번 주는 안되겠어." "알았어. 너무 빠른 것 같지? 웨딩 드레스를 고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럼 주말은 어때?" 브라이스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진심으로 결혼을 바라고 있다 하더라도 실현 불가능한 일을 주제로 하여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기분이 아니다. "장난치지 말아!" 패트릭은 더이상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기계약을 맺을 의사가 전혀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제 1선택안만은 절대 채택하지 않겠다는 약소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돌려보낼 수 없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지 않아?" 브라이스는 따끔한 말을 해주려고 몸을 돌려 쏘아보았다. 내가 그따위 시시한 질문에 대답할 줄 알고" 라고 생각했지만 멋진 나신을 보자 브라이스는 몸이 달아올라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패트릭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너한테 세 가지 제안을 했어. 판사는 너니까 판결은 네가 내리도록." 브라이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답했다. "이런 경우에 신중하게 관계를 계속하는 것이 쌍방에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까? "네, 동의합니다." 10 브라이스는 책상 옆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법복 단추를 끌렀다.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몇 번 돌리고 딱딱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긴 오후였다. 오늘따라 두 건이나 있었다. "피곤하시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리오나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브라이스는 눈을 감고 미소를 띄우며 다음 심리를 생각했다. 오늘 두 명의 남자 아이와 한명의 여자아이를, 애정이 풍부하고 자상하기로 유명한 부부의 자녀로 입양시킬 최종 수속을 밟기로 되어 있다. "셀던 씨 사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브라이스는 싱긋 웃었다. "그런 일은 즐거워요. 가족들을 헤어지게 만드는 별거 판결을 내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는 일은 기꺼이 한답니다." "셀던 사건 이외에도 판사님을 기다리는게 있답니다. 개정 중에 도착했어요." 브라이스는 눈을 뜨고 리오나가 책상 위에 올려둔, 에머랄드 그린 리본으로 묶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째깍째깍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던가요?" 가로 세로 30센티정도의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만약을 대비해서 제가 흔들어 보았어요. 걱정스러우시면 폭발물 처리반에 전화할까요?" 판결에 앙심 품은 사람이 보낸 건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소포가 올적마다 두사람이 장난삼아 주고받는 농담이다. 가정법원에서의 판결이 흉악스런 사건을 야기시킨 예는 극히 드물지만 조심성이 많은 브라이스는 발신인이 분명치 않은 소포는 항상 경계했다. 다시 한번 걱정스런 눈으로 상자를 본 다음 브라이스는 리본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물러서요, 리오나. 뭔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아무일도 없었다. 잔뜩 긴장하면서 상자를 열어보니 가슴에 작은 카드를 테이프로 붙인 원숭이 인형이 웃고 있었다. 원숭이를 본 순간 누가 보낸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패트릭은 지난 2주 동안 이런 장난을 치느라 대단히 바빴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비밀에 붙여야 한다는 브라이스의 강경한 주장을 착실히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주장이 얼마나 바보스런 짓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이상한 변장을 하고 다녔다. 전화할 때는 가명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밤 데이트 약속을 하기 위해 암호로 된 전보를 아무때나 치는 바람에 당황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발신인은 언제나 '당신을 숭배하는 사람으로부터'로 되어 있었다. 리오나는 상사 앞으로 열심히 보내지는 괴상한 전언에 대해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며 암호 해독을 하지 못해 불만을 터뜨렸다. 브라이스는 비서가 영원히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시간과 장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두 사람만의 밤 데이트가 어떻게 끝을 맺는지만 상상하면 몸이 뜨거워 진다. 브라이스는 봉투를 들고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도 잠깐 동안 망설였다. 그가 보낸 봉투만 집었을 뿐인데도 몸이 달아 올랐기 때문이다. "원숭이 인형이라..." 리오나는 브라이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물었다. "그 숭배자라는 사람이 혹시 패트릭 맥브라이드가 아닌가요?" 브라이스는 놀라서 침을 끌꺽 삼켰다. "어...어떻게 알았죠?" "간단하죠." 리오나는 인형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 원숭이는 그 사람과 꼭 닮았기 때문이죠. 편지를 뜯지 않으실 셈이에요?" 리오나는 안경까지 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해독할 수 있는 암호로 씌여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라고 씌여 있는지 꼭 알고 싶어요." 리오나는 자기가 간단하게 패트릭의 정체를 밝혀내자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한채 편지와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는 브라이스의 표정에서 드디어 증거를 잡았다고 내심 우쭐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사가 정치적으로 견해를 달리하는 정적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었는지는 상상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스는 패트릭이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는 한 두 사람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브라이스는 리오나가 아직도 편지를 읽어봐야겠다며 안경을 낀 채 서있는 모습을 보고 초조해졌다. "리오나, 셀턴 부부가 오기 전에 처리해야 될 서류는 없나요?" 리오나는 책상 한 가운데에 놓인 서류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판사님." 리오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레 질문했다. "혼자 계시기를 원하신다면 전 다른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리오나는 실망의 빛을 역력히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익살을 부렸다. "암호를 해독하는데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저의 날카로운 추리력을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리오나. 하지만 끝까지 내 힘으로 풀어 보겠어요." 리오나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비록 민주당이긴 하지만 판사님과 닮은 점이 많아요." 리오나는 누가 엿들을 새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받든지 아니면 뭐든지 일거리를 찾아 보세요." 브라이스는 엄하게 말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손에 든 봉투를 뜯지 않고 브라이스는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이번에는 무슨 말로 위장했을까? 겨우 실(seal)을 뜯어내고 카드를 꺼냈다. 틀림없는 그의 필적이었다. 브라이스는 무의식적으로 카드의 가장자리를 문질러 보았다. '7시에 식사- 이어 불꽃놀이- 밤새도록- 어떤 취향이든 당신이 원하느대로- 원숭이 친구로부터- ' 브라이스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한동안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 바보같은 놀이를 시작한 이래 픽 라텐(어두의 자으을 어미에 옮기고 ay를 첨가하여 사용하는 은어)에다 모르스 부호까지 다양하게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영어로 씌여 있다. 그는 브라이스가 암호를 잘못 해독하여 오해를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상황을 우려하여 분명한 통고를 해온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새벽이 되기 전에 뒷계단을 통해 빠져나가지 말고 밤새도록 즐기자는 뜻이다. 거절해 봤자 싸움만 하게 될게 뻔하다. 브라이스는 카드에 키스하고 싱긋 웃었다. 패트릭도 현재의 상태에 초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침까지 한 침대에서 지내는 것만은 절대 반대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강경하게 요구해 왔다. 브라이스는 패트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가 돌아갈 적마다 불러세우고픈 충동을 참느라 괴로웠다. 날 이토록 괴롭힌 데 대해 반드시 보복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가 뭐라든 두 사람이 관계를 정당화시키고 싶은 생각도 해보았다. 패트릭에게는 화낼 일도 많지만 웃을 일은 더욱 많았다. 자신의 업무상 능력을 인정해주고 판사로서의 존경심을 표하다가도 지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야만인처럼 격렬하게 사랑해 준다. 시시 때때로 급변하는 그의 태도는 날 화나게 만들기 보다는 환희를 느끼게 한다. 브라이스는 전부터 여자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두뇌도 인정해주는 남자를 탐색해 왔다. 패트릭이 바로 브라이스가 오랜 세월 찾아왔던 이상형이다. 브라이스는 다시 한번 카드를 일거 보면서 그가 자신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덕분에 전형적인 보수주의였던 크레이머 판사는 뜨거운 열정에 몸을 불사르는 자유로운 여자로 변신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크레이머 판사와 콜럼버스의 십자군 사이가 수상하다는 화이티커의 가쉽 기사를 읽으면서도 화를 내기는 커녕 재미있어 했던 자신에게 깜짝 놀랐었다. 정당이 다른 자유주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인정한 후에 냉 정하게 자기 분석을 해본 결과 선거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찌됐던 이젠 그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카드를 내려다 보며 오늘 밤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가 불꽃 폭죽이 손안에서 터질까봐 얼른 카드를 봉투 안에 집어 넣었다. 패트릭이 어떤 불꽃 폭죽에 불을 붙힐 계획인지 생각만 해도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화끈 달아오른다. 머릿속에서 패트릭을 몰아내려고 봉투를 상자 속에 집어넣고 리본으로 묶어 버렸다. 언제쯤이면 그가 진심으로 날 사랑해 줄까? 라고 생각하다가 리오나가 준비해 둔 셀턴 부부의 양자 입양 서류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브라이스는 이 소송이 원만하게 풀리길 기원하고 이었다. 바바라과 제리 셀턴 부부는 귀여운 3남매의 부모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브라이스는 양자 입양 소송 결과를 떠올리다가 또 하나의 선망을 향해 달음질 쳤다. 패트릭을 사랑하기 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남편과 아이들을 원하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오직 직업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 희생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법조계에서 지위를 얻으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명망있는 판사가 될 수 있다면 개인 생활 따윈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판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복이 침대에서도 따스하게 몸을 감싸주지 않는다는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는 재판관석을 내려왔을때 기다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사람이 바로 패트릭이다. 오늘 밤이야 말로 용기를 내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연애관계를 청산 하자고 제의해야겠다. 그는 뭐라고 할까?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할까? 아니면? 리오나가 인터폰을 눌렀기 때문에 브라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후 한 시간은 양자 입양 심리에 몰두했다. 브라이스는 도날드 삼촌의 관습을 그대 로 따르고 있었다. 즉, 마치 결혼식을 하듯이 양부모가 될 사람과 양자가 될 아이들이 엄숙하게 선서를 하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서류에 사인을 끝내 고는 리오나가 준비해 둔 작은 케이크와 후루츠 펀치를 들며 새로이 탄생한 가정을 축하했다. 브라이스가 핸드백과 서류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려 하는데 리오나가 불러 세웠다. "뭐 잊어버린 건 없으세요?" 장난스런 미소를 띄우면서 리오나는 브라이스가 잊은 하얀 상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이 원숭이는 집에 장식해 두는 게 어울 릴 것 같은데요. 삭막한 집무실에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시계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벌써 여섯시네! 서둘러 가셔야 겠어요. 매력적인 악마를 만나기 전에 예쁘게 몸단장을 하셔야 죠." "그런 정보는 어디서 입수한 거죠?" 브라이스는 의아한 눈으로 비서를 바라보 았다. "제게도 정보원은 있답니다." 리오나는 비밀이라는 듯이 말하고는 브라이스 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안녕히 가세요, 판사님." 아파트에 도착한 브라이스는 패트릭이 오기 전 한시간동안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고 완벽하게 털어놓을 방법을 강구하기로 작정하고 피로에 지친 몸을 따스한 욕조에 담갔다. 욕조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모른척한다 해서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너무 일찍 왔잖아?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투덜대며 후드 가 달린 로브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 패트릭은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두 개나 안고 학처럼 목을 빼며 안을 들여다 본 다음 현관에 들어섰다. "야! 달링, 배고프지?" 브라이스가 화나 있는 것을 짐작했는지 그녀의 얼굴 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반쯤 지나다가 갑자기 뒤돌아 서서 꾸러미를 마루바닥에 놓고 아직도 현관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브라이스 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볍게 키스한 다음 다시 부엌을 향해 걸어들어갔 다. "오늘은 정말 끔찍한 날이었어. 귀찮게 밖에서 식사할 필요 없이 여기서 먹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부엌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인스턴트 식품을 사왔 어. 중화요리 좋아하지?" 브라이스는 그의 뒤를 따라 부엌에 들오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댔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패트릭도 나와 마찬가지로 재판에 시달려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일 테니까. 브라이스는 지금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지, 망설였다. 그도 나처럼 사랑에 빠져 있을까? 내 쪽에서 먼저 사랑을 고백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브라이스는 한동안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그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와 마주치자 마음이 달라졌다. 목이 마음과는 다리 아름답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싫어한다면 어떻게 할래?" 빌어먹을! 패트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종이 꾸러 미에서 음식물을 꺼냈다. "내가 전부 먹어치우면 되지." 그는 브라이스를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았다. 나와 함께 있는게 전혀 즐겁지 않은 걸까? 강경하게 밀어붙이기 식의 내 행 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러는 걸까? 아니면 벌써 끝난걸까? 그가 밤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두 사람은 2주일 전부터 매일밤 함께 지내기로 약속했다. 패트릭은 일일이 그녀의 허락을 맡는 것은 바보스런 짓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눈을 피해 다니지 말고 당당하게 동거하 자고 제의했지만 완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케케묵은 관 념에 좌우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설득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브라이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매사에 임하는 여자다. 패트릭은 그녀가 도 덕적 규범을 기반으로 하여 법률이나 정의에 따라 생활하는 여성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신념이 있으니까 그처럼 멋진 판결을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번 경우는 결코 냉정한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약속시간보다 좀더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가 디지 않는다. 더 이 상 자존심을 짓밟하지 않도록 그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두 사람의 관계 를 결정하고 싶었다. 결혼해 달라고 애원한다 해서 감정적으로 신청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다. 브라이스는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끝까지 싸우는 여 자이다. 틀에 박힌 생활을 먼저 침략하여 질서라는 미명하에 굳게 쌓아올린 방어벽부터 허물어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 시키는 것이 승리를 향하는 지름길이다. 불행히도 그는 브라이스가 그런 사 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새벽녘에 남의 눈에 띄일세라 뒷계단으로 내려오는 관계에 벌써 질려 버렸다. 패트릭은 생각에 잠겼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 거절당할 경우 죽음보다 괴로운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그는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이런 생활 을 계속 할 수 없다. 만약 브라이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공개적인 동거 는 절대 승락하지 않겠지. 브라이스는 문에서 몸을 떼어 패트릭 뒷편에 있는 식기 선반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에 몰두해 있던 패트릭은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난 언제나 은식기를 사용하고 있어. 설겆이 기계에 넣어 흠이 생겨도 상관 하지 않아. 중화요리 먹는건 좋지만 젓가락과 혈투를 벌이더라도 모른척해줘. 오늘은 나에게도 끔찍한 하루였으니까." 패트릭은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젓가락질을 못한다 하더라도 난 언제나 판사님을 존경하니까." 그녀의 커다란 네이비 블루 눈을 거역하지 못하고 패트릭은 키스했다. 영혼 까지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키스가 끝나고 입술을 떼었을 때 브라이스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 하루 종일 너와 키스하고 싶었어." 그는 브라이스의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면서 중얼댔다. "내 등에 팔을 돌려 줘, 브라이스. 날 안아 줘." 브라이스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는 팔에 힘을 주며 그녀의 얼굴에 뺨을 부비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절망적인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패트릭?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하면 우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으니까." 그녀의 향기를 깊게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청결하고 신선한 장미 향기가 나는구나." 브라이스의 직감력이 발동했다. "좋지 않을 일이 있었구나." "역겨울 정도로." 패트릭은 적당한 화제를 발견하여 겨우 한숨돌였다. 중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서두를 부드럽게 꺼내면 그만큼 충격도 적어지는 법이다. "더러운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을 길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싶었지만 증거를 잡지 못해 막대한 보수를 거절해야 했어." 브라이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느지 이내 알아차렸다. 어젯밤, 젊은 층을 상 대로 큰 사업을 벌이고 있던 이 지방의 유명사업가가 사실을 마약과 10대 매춘업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큰 소동이 일어 나고 여론은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매춘 조직은 학교 주변 을 맴돌며 중학생을 협박하여 매춘행위를 시켰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공평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루종일 정보수집하러 헤매이고 다녔 지만..." 그는 브라이스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식탁을 쾅쾅 내리쳤다. "빌어먹을! 물론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놈이 무죄라는걸 인정해 줘야 겠지만, 만약 그놈이 유죄란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죄 를 짓고도 거리를 활보하게 내버려 둬야 하다니!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숨어 버린거야?" "변호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지 않아. 사건 의뢰를 거절했다 하여 죄가 되는 건 아니야." "이봐, 우린 입으로만 떠들고 있는게 아니란 말이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패트릭의 또다른 일면이었다. 와인부시 사건으로 법정에서 대들어을때도 이만큼 격노하지는 않았었다. 과연 학대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는 십자군이라는 별명을 들을만 했다. 그는 너무나도 정열적으로 정의를 사랑하고 있다. "변호사를 때려치우고 검사나 판사가 되어 그놈에게 종신형을 선고해 주고 싶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판결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해낼 수 있겠어?" "이런 경우, 무죄냐, 유죄냐를 결정하는 것은 배심원들이고, 판사는 단지 배 심원들의 결정을 대신 언도할 뿐이야." "그러나 판사는 교묘히 단어를 구사하여 배심원들의 감정을 좌우할 수도 있고 변호사의 변론도 조절할 수 있잖아?" "물론 가능하지, 또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옳은 일은 아니야." 브라이스는 약간 불쾌해졌다. 문득 패트릭이 화제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일로 자신을 힐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결에는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 켜서는 안돼. 우수한 판사라면 반드시 그래야돼." "넌 정말 우수한 판사야. 몸안에 스위치가 달려 있어 감정을 마음대로 조정 하니까."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브라이스는 그의 비겁한 공격에 심한 상 처를 입었다. "너야말로 하나의 감정에서 갑자기 다른 감정으로 옮겨가는 변덕스런 감정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같아.난 어느 감정을 믿어야 좋을지 당황했었단 말야. 지난 2주간이나 서로를 알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난 너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어." "그게 바로 증거야. 날 조금으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침대에 서 몸을 교환하는 것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거야. 잠자는 거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어." "그외에 뭘 더 기대하고 있는 거야?" 드디어 진심을 고백할 때가 왔다. 브라 이스는 그를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순간을 기다리며 그도 날 사랑 한다는 말을 해주길 기대했다. 뭘 더 기대하느냐구? 패트릭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하고는 그따위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좋아! " 그는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댔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철의 여성'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모든 사람들이 말한대로 넌 감정이 없는 차가운 여자야." 브라이스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거론되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의 곁에 다가가 양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싸쥐고 발돋음을 하며 키스했다. "이래도 내가 차가운 여자라고 할 테야?" 패트릭의 눈이 노기를 띠었다. "내게 바라는 것이 그것뿐이지? 난 널 사랑한다고 말했어. 결혼해달라고 애 원까지 했어. 그런데 넌 뭘 해주었지? 지저분한 사랑놀이 외엔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 법정에서 변혼하듯이 열변을 토한뒤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젠 질렸어. 섹스만이 목적인 관계는 더이상 지속 하고 싶지 않아. 네 정부 역할도 오늘로써 끝이야." 브라이스는 너무나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날 사랑하고 있다 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날, 스쳐가는 말로 했던 결혼신청이 진짜 프로포즈 인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패트릭, 이 바보야. 그런것을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그러나 패트릭은 그녀의 말을 오해했다. 그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이성을 잃고 소리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같은 하등 인간은 조그마한 감정이라도 생기면 이내 표면에 드러내고 맙니다. 판사님 같이 고결하신 분은 그런 저질스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지난 2주이간, 아니 30 년간 판사님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판사님께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이젠 판사님의 갑옷을 향해 돌진하는 어리석을 짓은 절대 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정말 지겹습니다!" "패트릭, 부탁이야. 잠깐만 내 말을 들어 줘!"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갈 작정임을 안 브라이스는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변호인." 패트릭은 브라이스가 전에 법정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 대사를 인용하여 빈정댔다. "침대에 들어오라고 설득해 봤자 소용없어. 마음은 네게 함락당했지만 프라 이드만은 아직 살아 있어." 그는 큰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브라이스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패트릭! 가면 안돼! " 그는 대답도 않고 그녀의 코 앞에서 보란듯이 문을 꽝하고 닫았다. 브라이스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사람. 사랑하고 있다는 말도 듣지 않고 나가 버리다니." 브라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얼굴에는 함박 웃 음을 띤채 안으로 들어왔다. 11 저녁 아홉시에 패트릭은 벌써 네 잔째의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금요일 밤 이어서 '숫사슴 머리'는 새벽 한 시까지 개점한다. 가족들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한거라 짐작하여 일체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쓸쓸하고 비통 했다. 그는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다. 한 잔 더 마시려고 글라스를 들었지만 입이 어디 붙었는지 분간조차 힘들 정도로 의식이 몽롱했다. 브라이스와의 슬 픈 결별을 생각하니 머리가 어느 정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미칠 정도로 그녀 를 사랑하고 있는데, 다혈질 성격 탓에 우리 두 사람은 이제 끝나버렸다. 그 토록 심한 말을 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는 언젠가는 헤어질 게 틀림 없는 사실이다. 조금만 혈기를 누르고 있었다면 최소한 오늘 밤에는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질이 너무 강해 당해낼 수 없다. 언젠까지 브라이스 말에 질질 끌러 다니다가는 결국 회의를 느끼게 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그때는 오늘 밤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므로 어쩌면 잘된일인지도 모른다. 심한 말다툼 끝에 헤어지는 편이 서로에게 상처를 덜 입힌다. 그녀를 사랑하 는 이상 일방적으로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승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 2주일 동안 브라이스도 자신과 같은 감정이 되길 빌면서 그녀의 장단 에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종해 왔다. 2주간이란 시간은 사람에 따라서는 짧 다고 말하겠지만 패트릭에게 있어서는 영원만큼이나 길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현재의 은밀한 관계에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날짜를 끈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2개월, 아니 2년이 지나도 그녀는 사랑놀이나 즐길뿐 나와 같은 심정이 되지않을 것이다. 패트릭은 술잔을 높이 들고 중얼댔다. "아! 자존심이여, 바보 같은 남자이 굴레여!" 조금 남은 액체를 단숨에 들이 키고 빈 잔을 카운터에 놓으면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한잔 더 줘, 랠프." "패트릭 D. 맥브라이드씨입니까?" 뒤를 돌아본 패트릭은 두 사람의 키 큰 경관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 다. 몽롱한 의식을 가다듬고 상대방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내가 누군진 알고 있잖아? 데이비스." 그래도 시침떼며 모른척하는 그를 보 고 패트릭은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당신을 체포합니다." 테드 데이비스가 말했다. "뭐라고?" 데이비스의 사무적인 말투에 패트릭은 의아해졌다. 데이비스와는 몇 년 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고, 몇 건의 사건에서 함께 뛰었 으며 술을 같이 마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장난치느라 저러겠지..그런데 데이비스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도대체 무슨 어처구니 없는 농담을 하는 거야? 난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야." 패트릭은 카운터를 향해 돌아 앉았다. 랠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패트릭을 술을 더 마셔야겠 다고 생각했다. 기분도 언짢고 아직 전신이 마비될 정도는 아니니까. "이봐요, 경찰관. 죄목이 뭐요?" 케빈이 방에서 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계기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던 온 가족이 의아한 시선으로 이 쪽을 돌아보았다. "패트릭 형이 또 법을 어겼단 말이오?" 패트릭이 테이블 쪽을 쳐다보니 가족들이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자기를 응시 하고 잇었다. 부모님은 뭔가 소근거리고 닐과 케빈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싱글벙글하고 잇다. 쇼크를 받고 놀라는 사람은 타마라 뿐이었다. "그의 권리에 대한 법적 조문을 읽어주는 의무를 잊지 말도록 하게, 데이비스." 닐이 농담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넨 임무를 소홀리 한 꼴이 되는 거야. 결국 패 트릭은 경찰관의 업무 집행상의 과실에 의해 무죄로 풀려나게 될 테니까 명심 해 두게." "이건 도대체 무슨 뚱따지 같은 장난들이야?" 패트릭은 욕을 내뱉으며 호통쳤다. 테두 데이비스는 옆에 있는 경고나 스텐 바레트의 호주머니에서 플라스틱 카드 를 꺼내 읽었따. "패트릭 맥브라이드, 당신은 법정모독죄 외에 6가지 죄목으로 기소당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의 재구속을 명령받았습니다. 대답을 하기 싫으면 묵비권을 행 사해도 좋으며..." "법정모독죄라구?" 패트릭이 소리쳤다. "지금에 와서 왜? 그건 2주전의 일이잖아?" 데이비스는 영장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이 구속영장은 한 시간 전에 발부 된 것입니다. 순순히 동행합시다." 닐이 다가와서 위로하듯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걱정하지 마라." 다시 데이비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변호사 니까 연행하기 전에 죄목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려주는게 좋지 않을까, 데이 비스?" 데이비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큰 소리로 영장을 읽기 시작했다. "브라이스 크레이머 판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브라이스란 이름이 나오는 순간 패트릭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도 대체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걸까? 좀전에 내가 심한 말을 했다고 앙갚음을 하는 걸까? 확실히 감정이 격해져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해버렸지만 내 법적 지식으로는 절대 범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외 수많은 불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무례하고 신성한 법정을 모독 하였으며..." 데이비스는 한 가지 죄목을 읽을 적마다 패트릭이 심한 욕설을 퍼붓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무슨 근거로 그 따위 소릴 하는 거야?" 마신 술이 도로 튀어나올 정도로 속 이 끓었다. "그 여자한테 무슨 증거가 있는지 물어봐!" 닐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따. "침착해라, 패트릭. 말하면 할수록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아. 데이 비스의 말을 다 들어본 다음 반론을 제기하자." 닐의 충고에 대한 패트릭의 욕지거리 대답이 어머니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 만 해도 불행중 다행이었다. 데이비스는 모른척하고 계속했다. "법정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했고, 더러운욕설을 퍼부었으며 그리고..."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욕을 퍼붓고 있는 패트릭을 노려보며 잠자코 들으 라는 시늉을 했다. "풍기문란죄로 기소하는 바입니다. "오! 신이여 우리를 지켜 주소서!" 토마스 맥브라이드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 귀여운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이놈이 그렇 게 예쁘고 상냥한 여성에게 난폭한 짓을 했다면, 경찰관님, 더 엄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이런 놈은 자식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이럴수가 있나! 곤란한 일을 당하면 잘했던 잘못했던 가족들 편을 드시던 아버지가! 브라이스는 앙갚음을 하기 위해 우리들의 동거 관계를 영장에 기 록하여 가족들에게 공개함으로써 날 창피주려는게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도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했길래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노처녀가'가 온 식구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렸을까? 가게 내의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패트릭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브라이스를 만나기만 하면 본때를 보여 주리라. 패트릭은 분노를 참으며 창피하여 빨개 진 얼굴로 손님들이게 말했다. "여러분 아무 일도 아닙니다. 농담으로...그러니까..친구가 날 놀리느라... 신경쓰지 마시고 즐기십시오." 처음 보는 남자 손님이 엄하게 꾸짖었다. "풍기를 문란하게 만든 죄를 그리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우리들은 공동 체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 바보같은 장난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패트릭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분명 연극이 아니다. 연극일 리가 없다. 완고한 브라이 스가 개인적인 보복을 위해 법을 악용하다니. 게다가 이번 일의 폭로는 결국 그녀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일인데 스스로를 해할 정도로 화가 났던 것일까? '경멸 받아야 마땅한 여자는 지옥으로 보내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건 분 명 꿈은 아니다.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혹시 누가 뒤 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패트릭은 케빈을 힐끗 쳐다보았다. 케빈이 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브라이스는 절대 이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세상에 알 려질까봐 누구보다도 두려워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서는 판사로서의 고결한 이미지 관리가 패트릭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혹시 모 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나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각오한게 아닐 까? 자존심이 강하고 감정이 격한 여자니까 억누르고 있던 자제력이 폭발하 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따. 더 이상 굴욕을 참아내기 힘들고 또 이 영장을 발급하게 된 배후 조종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패트릭은 말했다.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하는게 어떻겠어, 데이비스?" 닐이 당황하며 반대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 고소장은 전혀 하자가 없어. 내 동생은 지금까지 한번도 경찰관을 매수하는 부도덕한 행동을 한적이 없었다." 닐이 듣기 좋은 핑계를 대며 말렸다. "그렇지, 패티?" "그만해 둬! 닐 형." 패트릭이 지겹다는 듯이 소리쳤다. "날 변호해 줄 필요는 없어!" "그 말이 맞아." 케빈이 패트릭 곁으로 다가와싸ㄷ. "형의 변호는 내가 맡도록 하지. 내 전문이 풍기문란죄 아니유?" 모든 사람의 즐거운 농담 대상으로 몰아붙히자 패티릭은 신음 소리를 냈다. "제발 그만들 해둬! 알았다니까!" "진작 그럴 것이지."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기 문란죄를 범하기 전에 진작 알았더라면 그 아름다운 여성을 화나게 만들지 않았을것 아니요?" "뭐라고?" 패트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죄목 하나 쯤 더 붙힌다고 해서 손해볼게 뭐 있나? 저 놈을 한대 후려치면 속이라도 풀리겠지 케빈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는 순간 뒤에서 어머니 소리가 났다. "그만들 두지 못해? 너희들! 여긴 싸움하는 곳이 아니야. 신성한 영업장이 다!" 몰리 맥브라이드는 케빈과 패트릭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멀직히 떼어 놓은 다음 삼형제를 엄한 눈으로 훑어 보았다. "자, 빨리 가거라! 패티,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 "어머니까지 그런 말씀을?" 패트릭은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젠 어머니 까지 적이 되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장난에 희생된 불쌍한 나를, 어느 누구 도 동정해 주지 않는구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게 모두 브라이스 때문이 다. 어디 두고 보자. 어머니까지 이 연극에 참가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수갑을 채워 연행하지 그래, 데이비스? 규칙을 따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판사님께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경찰관을 향해 빈정댔다. "지긋지긋한 노처녀는 사소한 일을 갖고 신경질을 자주 부리잖아? 잘 알고 있겠지? 매사를 정확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잖아?" 차가운 수갑을 찰칵하고 예리한 소리를 냈을때 패트릭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수고했어, 데이비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철의 여성'은 자네의 경찰관 배지를 떼버릴 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는게 좋을거요, 맥브라이드." 바레트 경관이 경고했다. "그만큼 욕 했으면 충분하지 않소? 내가 당신이라면 판사님의 별명을 함부로 불러대진 않을 거요." 턱을 쑥 내밀고 당당한 자세로, 패트릭은 연행되었다. 등 뒤에서 문닫히는 소리가 나는 순간 아버지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손님 여러분, 우리 모두 축배를 듭시다.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실컷 드십시오!" "피고에게 죄목을 알려 주었습니까?" "네, 판사님." 테드 데이비스는 정중하게 대답하고 패트릭을 앞으로 끌어냈 다. 패트릭은 눈부신 조명 탓에 눈살을 찌푸리며아직도 술기운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채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뭐야? 여긴 법정이 아니잖아? 브라이스는 법복을 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 앞의 테이블 위에는 규격 용지 한 자오가 오하이오 주 법원의 서류 카피 한 장이 놓여져 있었따. 격식을 제대로 차린 것을 보니 중벌을 내릴 심산인가? "이번엔 몇 시간이나 구류시킬 생각이십니까, 크레이머 판사님?" 브라이스는 판사용 망치 대신 고무 주걱으로 테이블을 탕탕 내리쳤다. 소리는 둔탁했지만 효과는 있었따.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설 그대로, 패트릭은 반사 적으로 주의하는 자세를 취했다. "귀하에게는 이 법정에서 발언이 허가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스터 맥브라이 드. 당신 대신 발언할 변호인을 선정했습니까?" 패트릭은 실눈을 뜨고 브라이스를 노려 보면서 빈정댔다. "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해도 괜찮겠습니까?" "좋습니다." 브라이스는 경찰관을 향해 방긋이 웃으며 말했따. "집행관, 변호사를 자리에 앉게 하세요." 스탠 바레트는 패트릭을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패트릭은 테이블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브라이스가 두 명의 경관을 돌려보낸 다음에도 그는 잠자코 있었다. 한참 후 아직도 자신이 수갑을 찬 채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단둘이 있는게 무섭지 않아? 수갑만 채워 놓으면 아무것도 못하리라 생각하나? 그는 수갑찬 손을 들어보였다. "영리한 크레이머 판사가 한가지 실수한게 있어. 수갑은 몸 앞쪽으로 채워져 있어. 그러니 방심하지 말도록." 브라이스는 윤이 나는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랑스런 남자를 쳐다보 았다. 대단히 화나 있군. 난폭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한동 안 수갑찬채로 내버려 두자. 식기 선반에는 칼이 들어있고 아쉬운 대로 눈앞 에는 크리스탈 글라스가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 그가 이렇게 화를 내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이번 연극을 통해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고, 타고난 유머로 내가 이런 고육지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웃어 넘기리라 생각했다. 결 과적으로는 승리했지만 내가 생각하던 그런 승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판사." 패트릭은 수갑을 짜랑짜랑 흔들며 말했다. "보통 피고가 법 정에 나갈 때는 수갑을 풀어주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은 예외입니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브라이스는 자신이 선택한 방법 을 일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군." 패트릭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댔다. 그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곳에 시선을 옮겨 버렸다. 브라이스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곁에 달려가 수갑을 풀어주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몰상식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 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다. 패트릭은 이번 연극의 내용을 전혀 모른채 끌려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 내 심정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쌍방의 의견에 귀기울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손을 모아 왜 이런 소동을 일으켜야 했는지를 그가 이해해 주길 간절히 빌었다. 브라이스는 피고를 향해 재판 시작을 알렸다. "미스터 맥브라이드, 자신의 죄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난 무죄입니다." 브라이스는 피고의 변호사에게 묻는 형식을 취했다. "변호인 미스터 맥브라이드, 귀하의 의뢰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인정했습니까?" "그가 죄를 범했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판사님." 패트릭은 변호사의 입장이 되어 입술을 삐죽이며 변론했다. 그는 어렴풋이 브라이스가 왜 이런 우스꽝스런 연극을 하는지 그 의도가 짐작되었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자제력 하나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브라이스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좋아,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는 데까지 가보자. "판사님은 저에게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제 의뢰인에게는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제가 유능한 변호사임을 확신시켜도 되겠습니까?" 패트릭의 유머 감각이 되살아난 것을 보고 브라이스는 겨우 자신을 얻었다. "좋습니다. 의뢰인은 명심하여 듣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판사님. 경청하겠습니다." 브라이스는 서류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피고 패트릭 맥브라이드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이 방에서 뛰쳐나간 것은 나에 대한 모독죄에 해당합니다. 원고 브라이스 크레이머가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고백할 기회를 거부당한 것은 아름다운 법정정신을 짓밟힌거나 다름없습니다." "판...사님?" 패트릭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브라이스가 날 사랑하다니?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에 산처럼 쌓인 선물을 보고 환호성을 지를 것만 같은 기분이다. 패트릭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생동안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즐거운 선물을 손에 넣은 것을 알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능한 한시간을 끌며 천천히 포장을 뜯는 편이 훨씬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 의뢰인은 보다 상세한 설명을 원하고 있습니 다. 원고가 피고를 사랑한단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네이비 블루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지금은 더 이상 없습니다." 패트릭은 싱긋이 웃었다. 푸른 눈이 다투기 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의뢰인이나 저나 모두 만족합니다. 이제 나머지 죄목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브라이스는 승자의 트로피가 다시 패트릭 손에 넘어 갔음을 알고 놀랐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사랑의 고백을 하면 감격스러워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너무나 냉정하다. 몇 시간 전에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인식시켜 야겠다. 퍄트릭의 도전적인 얼굴을 본 브라이스는 최후까지 재판을 밀고 나갈 결심을 했따. 크게 숨을 들이수니 다음 자신이 직접 작성했던 혐의사항에 대해 설명했다.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풍기문란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피고는 자신의 어느 행위가 범죄에 해당되었는지 분간하지 못해 몹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피고의 말에 의하면 원고는 그의 행위를 즐거이 받아들였고 그의 감촉도 즐겼다고 합니다." 브라이스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때를 상기하자 온 몸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그녀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애써 법정의 위엄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패트릭은 평정을 가장하고 있다. 케빈의 정보에 의하면 영장이 송달되었을 때 그는 취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패트릭을 위해 포트에 커피를 준비해 두었지만 그는 지금 말짱한 정신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커피는 필요 없었다. "원고도 그 말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육체적인 행위 만으로 기소당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도덕을 무시했기 때문에 기소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고 패트릭 맥브라이드는 유죄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패트릭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의뢰인은 원고에게 털끝만큼도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고소 내용을 철회하지 않으시려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증인을 세워 주시길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의를 인정합니다." 잠시 망설인 끝에 브라이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원고가 직접 증인으로 서겠습니다." 패트릭이 1인 2역을 맡았으니 브라이스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브라이스는 판사석에서 내려와 테이블 귀퉁이에 앉았다. 피고측의 변호사가 원고에게 말을 걸려고 할때 브라이스는 다리를 꼬았다. 덕분에 법복이 무릎 위 몇 센티 이상의 부분에서 살짝 벌어져 늘씬한 양다리가 들여다 보였지만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잇었다. 변호사는 선채로 곁눈질을 하며 다리를 훔쳐 보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러니 피고가 풍기문란 행위를 저지를 수 밖에.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걸렸다. "미스 크레이머." 패트릭은 브라이스와 정면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증인 선서를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제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하지 않으면 위증죄로 처벌받게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그는 브라이스 곁에 바싹 다가서서 수갑 찬 양 주먹을 꽉 쥐며 몸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소리로 질문했다. "브라이스 플로렌스 크레이머, 당신은 패트릭 맥브라이드를 평생동안 사랑하겠습니까?" 브라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드러운 눈에 빨려 들어가 재판놀이 중임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브라이스는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브라이스의 눈은 현재의 심리 상태를 어떤 미사여구보다 완벅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이라 해도 애무를 증거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엄중히 경고했지만 스스로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녀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네' '아니오'로 대답해 주십시오. 원고는 피고를 사랑합니까?" 그는 팔을 높이 들어 그녀를 팔 안에 가두었다. 강철같은 근툭에 갇힌 상태에서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뒤에서 깍지를 꼈다. "네." "원고는 피고와 결혼하겠습니까?" 만약 패트릭이 결혼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기꺼이 따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한가지 분명히 다지해 둘 조건이 있다. 이번 '사정청취'가 끝난 이후부터는 원고, 피고 쌍방은 절대 상대방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기로 약속해야 한다. "피고는 앞으로 원고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문제든지 인내심을 갖고 대할 것을 맹세하고, 또 결론을 내리기 전에 원고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할 것을 맹세한다면 원고는 그 질문에 대답할 것입니다." 패트릭은 수갑 찬 손을 뻗어 브라이스를 끌어당겼다. 이제 더 이상 재판관이나 원고, 변호사나 피고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어졌다.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피고는 이번 실패를 경험삼아 앞으로는 보다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를 확인시키는 듯 패트릭은 부드럽게 키스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브라이스의 두 눈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 원고는 질문에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와 결혼하겠습니까?" 브라이스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크레이머 판사가 원고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미스 크레이머는 피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 왔습니다." "판사님, 피고의 원고에 대한 마음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국민학교 1학년때 원고의 땋은 머리를 잡아 당긴 순간부터 시작하여 10학년때 함께 춤춘 순간부터 존경심을 품어 왔었고 하버드에서 수석의 영광을 공동으로 차지했을때부터 그녀를 숭배해 왔습니다. 근엄한 법복 밑에 조깅 슈즈를 신은 모습을 본 순갑부터 사랑에 빠졌고 처음 키스한 순간부터는 그녀가 없는 인생은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은 다음 패트릭은 부푼 기대를 갖고 브라이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훌륭한 최종 변론이었습니다." 브라이스는 발돋움을 하여 승인의 키스를 했다. "나 브라이스 크레이머는 패트릭 맥브라이드의 결혼신청을 수락 합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하기 쉽도록 매달렸다. "사랑하고 있어, 패트릭. 진심이야. 네가 없는 인생은 나도 생각할 수 없게 되버렸어." "이제 됐어." 패트릭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그로부터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사적인 대화도 공적인 변론도 없었다. 겨우 숨을 내쉬며 두 사람은 떨어졌다. "판사님, 피고가 지금까지 간신히 참아왔던 소망을 들어주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법복을 벗기고 그 속에 무엇을 입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아마 머리가 돌아버릴 것입니다." 브라이스는 생긋이 웃으면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어 주었다. 양손이 자유롭게 된 순간 그는 지체하지 않고 법복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자, 풍기문란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볼까?" 그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단추를 다 끄른 다음 법복을 벗겼다. 법복이 마루에 떨어지자 얇은 속옷 한장 만으로 감싸인 나체가 드러났다. 그는 환호성을 지르며 브라이스를 안아올린 다음 침실을 향하면서 엄하게 말했다. "법정에서는 더 많이 껴입도록 약속해야 돼." "보수적이고 완고한 '철의 여성', 크레이머 판사는 당연히 그래야 되질 않겠어?" "좋아, 그런데 예의범정이나 격식에 대한 너의 생각이 꽤 진보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악평이나 남의 시선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람이 어떻게 된거야? 내일 아침 신문이 걱정되지 않아?" "응." 브라이스는 패트릭의 턱에서부터 머리까지 키스를 퍼부우며 말했다. "판결문 내용을 알기 전까지는 대단한 스캔들이 되겠지. 하지만 두렵지는 않아." 패트릭은 브라이스를 침대에 눕혔다. "그런데 판사님, 제가 치워야 할 형벌은 무엇입니까? 형 집행 언도가 생각나지 않는데요?" "이것은 약간 기묘한 판결입니다." 브라이스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고와 피고 양쪽 모두에게 이유없이 사랑에 빠진 죄로 유죄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종신형에 언도합니다." "넌 정말 멋있는 판사야, 브라이스 크레이머." 패트릭은 그녀의 매끈한 어깨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의뢰인에게 가장 멋진 판결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