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1.두 개의 영역 열 살이 되던 때, 나는 고향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그때부터 내 체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갖가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슬픔과 감미로운 전률이 내 온 마음을 뒤 흔든다. 어두침침하고 음습한 골목이나 밝은 집들과 탑, 시계 소리며 온갖 사람들의 얼굴, 따뜻한 분위기와 안락한 방들, 그리고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신비에 싸인 여러 개의 방들, 집토 끼, 하녀들의 체취가 물씬거렸고, 약과 말린 과일 냄새가 나던 그 시절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뒤섞여, 그 두 개의 극으로부터 낮과 밤이 오는 것이 었다. 그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아니, 사실은 더 작은 세계, 내 부모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였다. 이 세계는 그 대부분이 아주 정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 과 엄격함, 모범과 가르침이었다. 이 세계에는 부드러운 빛, 밝음과 깨끗함이 속해 있었고, 부드럽고 정다운 이야기와 깨끗한 손과 옷, 훌륭한 예절이 깃들어 살고 있었다. 이 세계 속 에서는 아침 찬송가가 불리워졌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였다. 이 세계 속에는 미래로 통하는 똑바른 길이 있었으며, 의무와 죄, 옳지 못한 생각과 고해(告解), 용서와 선량한 목적, 사랑 과 존경, 성서의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삶을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질서 있게 하기 위해 서는 이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들 자신들의 집안에서 이미 다른 세계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주 달랐고 다른 냄새가 났으며, 다르게 이야기를 했고, 다른 약속과 요구를 했다. 이 두번째 세계 속에 는 하녀와 직공과 유령의 얘기와 소문으로 떠도는 추문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도살장, 교도 소, 술주정꾼, 욕지거리하는 아낙네와 새끼를 낳는 암소, 쓰러진 말, 강도, 살인과 자살의 이 야기와 같은 괴상하면서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많은 일들이 꼬리를 물 고 일어난다. 이 모든 아름답고 끔찍하며 야만적이고 참혹한 일들이 주위에서, 가까운 골목 에서, 이웃에서 일어났다. 순경과 부랑자가 여기저기로 쫓고 도망치며, 주정꾼이 자기 마누 라를 때리고, 젊은 여직공들이 저녁때 공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노파들은 사람에게 마술 을 걸어 병에 걸리게 하고, 숲속에서 도적들이 출몰하고, 방화범이 수렵장 감시원에게 체포 되었다. 사방 어디에서나, 이 둘째 번의 강렬한 세계가 모습을 나타내고 냄새를 풍겼다. 아 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 방을 제외하고는...... 사실, 그것은 매우 좋았다. 여기 우리 집 에 평화와 질서와 휴식이 있다는 것은, 의무와 선량한 양심과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것들 - 소란과 뒤죽박죽, 암흑과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서 우리가 한 달음에 어머니 곁으로 도망하여 올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신기한 일이 있다. 그것은 이들 두 세계가 경계를 접한 채 아주 가 까운 곳에 겹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시간에 방문 가까이에 앉아, 매끈하게 다린 앞치마 위에 깨끗하게 씻은 두 손을 포개 놓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같이 부른다.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들의 밝고 옳은 세계에 완벽히 속해 있었다. 하지만 부엌이나 마구간에서 머리없는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해줄 때면, 또 작은 가게에서 이웃 여인네와 싸움을 할 때면, 그녀는 비밀에 휩싸이게 되어 다른 세계에 속하는 전혀 별 개의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이 그러했으며 내 자신이 가장 그러했다. 확실히 나는 밝고 옳은 세계에 속해 있었고, 내 부모의 어린애였다. 그러나 나의 눈과 귀가 향하는 곳은 어디에나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때로 그것은 나에게 낯설고 기분 나빴다. 나는 거기서 어김없이 양심 의 가책과 불안을 얻었지만, 이 다른 세계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다. 때ㄸ로 나는 이 금지된 세계 속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끔 밝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 그것은 그토록 필요하고 좋은 일인지 모른다 - 어쩐지 좀 더 아름 답지 못한, 권태로운, 그리고 황량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인생 목표는 나 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그렇게 밝고 깨끗하고, 뛰어나고 정돈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으 나, 거기까지 이르는 그 길은 멀었고, 거기까지 이르려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고 시험을 치 러야 했다. 그리고 그 길은 항상 다른 어두운 세계의 옆을 지나, 그 어두운 세계를 통하여 가야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 세계에 머무른 채 가라앉는 수도 없지 않았다. 이런 것을 경험한 탕아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열심히 그것을 읽었다. 그런 이야기에서 는 언제나 아버지의 품이나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고 되 어 있어서, 이것만이 올바른 것, 선한 것, 그리고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나도 마 음 속속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야기 가운데서도 악한 자와 탕아가 속죄하고 다시금 구원 을 받는다는 것은 가끔 정말로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사람 들은 말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예감과 가능성으로써 감정의 아주 밑바닥에 막연하게 존재해 있었다. 내가 악마를 상상해 볼 때면 변장했거나, 정체를 드러내고 있거나, 나는 그놈을 상가에나 시장에 나, 또는 음식점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집에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누이들도 역시 밝은 세계에 살고 있었다. 간혹 그들의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가까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보다 더욱 선량하였고 예절이 있었고 결점이 적었다. 그들에게도 결점과 버릇 없음이 있었으나, 그것은 뿌리 깊은 것이라고 나에게 생각되지 않 았으며, 때때로 악한 자와의 접촉에서 그렇게 무겁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되는, 어두운 세계 와 마찬가지로 아낌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떤 사람이 싸움을 했다면 그 사람은 뒤에 자기의 양심에 비춰서 언제나 자기가 나쁜 놈이었고 용서를 빌어야 되는 싸 움의 도전자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누이들을 모욕한 그 사람들은 부모의 선과 율법을 모욕 하는 무례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이들보다는 오히려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털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이 있었다. 날씨가 맑고 양심에 꺼림직한 점이 없는 좋은 날에는 누이들과 놀며, 선량하고 얌전하게 그들과 같 이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훌륭하고 고귀한 빛 속에서 발견하는 일도 때ㄸ로 있었다. 내가 천사라면 늘 그러했으리라.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최고의 것이었으며, 크리스마스나 행복 과 같은 밝은 음향과 향기에 둘러싸여 천사가 된다는 것은 감미롭고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오, 이런 시간과 날이 온다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이었던가! 가끔 놀고 있을 때, 착하고 악의가 없고 허락된 놀이를 할 때, 나는 누이들에게 지나치게 굴고 그들과 싸움 과 불행으로 이끌도록 정열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나는 홧김에 지나치게 행동하고 말하는데 자신의 그 릇됨을 깊이 마음 속에 느끼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후회와 회한의 어두운 시간이 온다. 다음엔 용서를 비는 고통의 순간이, 그리고 다음에 다시 밝은 빛과 투쟁이 없 는, 조용하고 고마운 행복이 몇 시간인지 순간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시장의 아들과 산림관의 아들이 우리 학급에 있었는데 그들이 때때로 나에게 왔다. 그들은 개구쟁이 소년들이었지만 자신들이 하락된 세계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전에 경멸하던 이웃 소년들인 국민학교 아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명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수업이 끝난 어느 날 후의 오후 - 열 살은 넘지 않았었다 - 나는 이웃의 두 소년과 여기 저기를 쏘다니고 있었다. 그 때에 우리보다 키가 더 크고, 힘도 세고, 거칠게 생긴 열세 살 쯤 되어 보이는 국민학교 학생인 양복점 아들이 우리에게 왔다. 그의 아버지는 주정꾼이었 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평 역시 좋지 않았다. 나는 이 프란쯔 크로머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두려워서, 우리가 그들 만났을 때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벌써 어른 티를 냈고, 젊은 공장 직공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냈다. 우리는 그의 지휘 아래 다리 옆 강둑으로 내려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첫번째 다리 기둥 뒤에 숨어 버렸다. 아치형 다리의 벽과 완만하게 흐르는 강물 사이에 있는 좁은 강둑 은 단지 쓰레기, 유리 조각, 넝마, 녹슨 철사줄의 뒤엉킨 뭉치, 그리고 다른 지저분한 것들이 많았다. 가끔 거기서 쓸 만한 물건을 찾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프란쯔 크로머의 지휘 아래 그 지역을 샅샅이 찾아보고 우리가 발견한 것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면 그는 그걸 받 아 넣거나, 그렇지 않으면 강물에다 내던졌다. 그는 우리에게 납이나 놋쇠, 아연으로 된 물 건이 그 가운데 있는가를 주의하여서 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런 모든 것, 뿔로 된 빗까지 도 받아 넣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무리 속에 끼어 있는 것에 마음이 불안하였다. 이것을 아 버지가 아신다면 당장 교제를 끊게 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같이 어울릴 수 있게 하여 다른 애들과 함께 취급해 주는 것이 기뻤다. 나는 그와 함께 있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명령했고, 그것이 오래된 관습인 듯이 우리는 명령대로 복종했다. 드디어 우리는 땅바닥에 앉았다. 프란쯔는 강물에 침을 뱉었다. 그는 어른처럼 보였다. 그 는 잇새로 침을 뱉어 그가 원하는 장소에 맞혔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소년들은 학생 특유의 영웅적 행동과 나쁜 장난에 대해서 자랑했고 위대한 행동처럼 뽐냈다. 나는 잠자코 있었지 만, 나의 침묵이 눈에 띄어 나에 대한 크로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 다. 두 친구들은 처음부터 나를 등지고는 그에게 붙어 있었다. 나는 그들 속에 있어서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의 옷과 행동부터가 도전적이라고 느껴졌다. 라틴어 학교 학생인 데다가 양가집의 자식인 나를 프란쯔가 좋아할 리가 없었고, 다른 아이들도 때가 되면 곧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나도 불안스러운 나머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굉장한 도둑의 이야기를 꾸며 대 고 나를 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모퉁이 물방앗간 옆에 있는 과수원에서 나는 동급생들과 보통 사과가 아닌, 라이네트와 황금빛 나는 파르메네와 같은 최고의 품종을 훔쳤다고 말했 다. 이처럼 이야기를 꾸며댄 것은 순간적으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다행하 게도 이야기가 잘 생각나고 말도 술술 흘러나왔다. 혹시 이야기가 빨리 끝나고 더욱 곤란한 처지가 될까봐 나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한 놈이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따서 던지는 동 안 우리 중의 한 놈은 쭉 망을 봐야 했으며 사과를 담은 부대가 너무 무거워 드디어 그것을 열어 반은 쏟고 반 시간 뒤에 다시 와서 그것까지도 모두 가져왔노라고 이야기 했다.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박수라도 칠 것을 기대했으며, 마지막엔 열이 올라 그 이야기에 스 스로 도취되었다. 두 아이는 기대에 차서 침묵하고 있었으나, 프란쯔 크로머는 실눈을 뜨고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더니 위협하더니 물었다. "정말이냐?" "물론이지......" 나는 말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란 말이지?" "물론, 사실이야." 나는 속으로 불안에 떨면서도 분명히 말했다. "맹세할 수 있니?" 나는 좀 겁이 났지만 대답했다. "응." "그렇다면 하느님께 대고 말해 봐." "하느님께 대고......" 하고 나는 말했다. "좋다." 하더니 프란쯔는 얼굴을 돌렸다. 나는 이것으로 만사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가 곧 일어나 집으로 가자 하여 기뻤다. 우 리가 다리 위에 다다르자 나는 이제 집에 가야 된다고 겁먹은 듯이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프란쯔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우리는 방향이 같지 않니." 그는 천천히 걷기를 계속했고 나는 감히 도망치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로 우리 집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우리가 집앞에 이르러, 우리 집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우리가 집 앞에 이르러, 우리 집 문들과 뭉툭한 놋쇠의 손잡이들과 창문에 비친 햇빛과, 어머니 방의 커튼을 보았을 때, 나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돌아왔구나! 집으로, 밝은 세계로, 티없이 평화로운 셰게로 돌아왔구나!' 내가 문을 열고 재빨리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프란쯔 크로머가 후다닥 뛰어들었다. 마당으로밖에는 광선이 비치지 않는 차갑고 어둠침침한 타일 복도에서 그는 내 팔을 붙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야, 그렇게 서둘지 마." 놀라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나의 팔을 움켜잡고 있는 손이 쇠처럼 단단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혹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내가 지금 크게 소리친다면, 나를 구하기 위해 저 위층에서 빨리 내려올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포기했다. "뭐야?" 나는 물었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냐, 단지 네게 뭘 좀 물어 볼게 있어. 다른 놈들이 들을 필요는 없지." "그래? 좋아, 무얼 네게 더 말하란 말이냐? 난 이제 이층으로 올라가야 해." "넌 알겠지?" 프란쯔는 조용히 말했다. "물방앗간 모퉁이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가를.." "몰라, 난 모른단 말야. 글쎄, 물방앗간 주인 것이겠지." "뭐?" 프란쯔는 한쪽 팔로 나를 휘 어감아 왈칵 끌어당겼기 대문에 나는 바로 코 앞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악의에 가득차 있었으며, 심술궂은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가득차 있었다. "임마, 그것이 누구네 것인지를 분명히 말해 주지.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사과를 도둑맞았 다는 걸 들었어. 그리고 주인이, 누가 사과를 훔쳐갔는지 말해 주는 사람에게는 2마르크를 준다고 말한 것도 알고 있단 말야." "뭐.......뭐라고!" 나는 외쳤다. "그렇지만 넌 그에게 일러바치진 않겠지?" 명예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느꼈다. 그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으며, 그 에게 있어서 배신은 죄라고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하게 느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들과 같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다고?" 크로머는 웃었다. "얘! 너는 도데체 내가 위조 지폐범이 되어서, 스스로 2마르크 짜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난한 놈이야, 너처럼 부자 아버지를 가지지 못했어. 내가 2마르크를 벌 수 있다면 나는 벌어야 된단 말이야. 아마 주인은 더 많이 줄지도 몰라." 그는 갑작스레 나를 놓아 주었다. 우리 집의 복도는 이제 더 이상 평화화 안전의 냄새를 풍기기 않았고, 온 세계가 내 주위에서 무너져 버렸다. 그는 나를 밀고할 것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아버지에게 말할 것이고, 어쩌면 경찰마저도 올는지도 모른다. 모든 무질서한 공포가 나를 위협했고 모든 흉칙스럽고 위험스러운 일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난 맹세까지 했다. 하느님이시여! 하느님 이시여! 눈물이 나왔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절망적으 로 주머니 속을 모두 뒤져보았다. 사과도, 주머니칼도 거기에는 없었다. 그때 내 시계 생각 이 났다. 그것은 낡은 시계였는데, 가지는 않지만 그저 지니고 있었다. 그 시계는 할머니가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걸 재빨리 꺼냈다. "크로머......" 나는 말했다. "얘, 이르지 마. 이른다고 네게 좋을 것도 없자나. 내 시계를 줄 께, 여기 있어. 미안하지만 그것밖엔 아무 것도 없어. 이걸 줄께. 은으로 만든거야. 제품은 좋은 것인데 조금 고장이 났으니 고치기만 하면 돼." 그는 엷은 웃음을 띠면서 시계를 커다 란 손으로 받았다. 나는 그 손을 보며 그 손이 얼마나 나에게 난폭하고 깊은 적의에 찬 것 인가를 느꼈고, 얼마나 내 생애와 평화를 잡을 것인가를 느꼈다. "은으로 된 거야......" 나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은 같은 건 문제도 아냐. 그리고 네 고물 딱지 시계를 가지고" 그는 경멸에 차서 말했다. "네가 가서 고쳐보렴" "그러나 프란쯔......" 나는 그가 달아날까 봐 불안에 떨면서 외쳤다. " 잠깐만 기다려 줘. 시계는 제발 받아 줘. 이건 은이란 말야, 정말야, 갖고 있는게 이것 밖에 없어." 그는 멸시하는 듯이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넌 내가 누구에게 가는지 알겠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정도는 경찰에라도 연락할 수 있어. 거기 순경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정원을 향하여 돌아섰다. 나는 뒤에서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렇게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렇게 사라진 뒤에 올 일을 겪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 "프란쯔......" 나는 흥분해서 목이 쉰 소리로 간청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은 제발 그만뭐, 응! 그건 농담이지?" "물론 농담야. 그러나 너는 비싼 대가를 치뤄야 해." "제발 내가 무얼 해야 되는지 말해 줘. 뭐든지 할게." 그는 간악한 눈을 뜨고 나를 살펴보고 웃었다. "어리석게 굴지 마." 그는 친절한 체하며 말했다. "너는 나처럼 잘 알겠지만, 나는 2마르크 를 벌 수 있어. 네가 알다시피 나는 그걸 마다 할 부자는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만 넌 부자 야. 시계까지 있잖아. 나에게 2마르크만 주면 모든 것은 잘 될거야." 나는 그 이치를 알 수 있 었다. 그러나 2마르크!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10마르크나 백마르크 또는 천 마르크보다 더 많은, 그리고 구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나는 돈이 없다. 어머니 방에는 벙어리 저금통이 있 고, 거기에는 아저씨가 오셨을 때나 그와 비슷한 이유로 생긴 10페니히와 50페니히 짜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그 밖엔 나는 돈이라고는 없다. 내 나이 또래는 용돈을 받지 못했다. "나는 돈이 없는걸." 나는 슬프게 말했다. "나는 정말 돈이 없어.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뭐든 지 줄께. 나는 인디언의 책과, 병정과 나침반을 갖고 있어. 그걸 네게 갖다 줄께." 크로머는 건방지고 심술궂어 보이는 입을 삐쭉거리더니 땅에 침을 뱉었다. "수다 떨지 마." 그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그 따위 잡동사니는 너나 가져. 나침반? 내 비위 를 거슬리지 말아, 알아듣겠어? 그 돈만 내란 말야." "그렇지만 돈이 한푼도 없는걸. 또 돈을 얻을 수도 없어. 어쩌면 좋지?" "그렇다면 내일 2마르크를 가져 와. 학교 파한 다음 저 아래 시장에서 기다리겠다. 이제 얘 기는 끝났다. 만약 돈을 갖고 오지 않으면 각오해!" "그래, 그렇지만 어디서 그걸 구하지? 만약 돈을 구하지 못하면?" "너의 집에는 돈이 얼마든지 있잖아. 그건 네 사정이야. 그럼 내일 학교 끝난 뒤야. 한번 더 말하겠는데, 만약 안 가지고 오면-" 그는 무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침을 뱉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갈 용기가 없었다. 나의 생활은 이제 엉망이 되었다. 나는 달아나서 집 에 다시 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제일 아래 계단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않아서 불행으로 몸을 떨 었다. 리나가 바구니를 들고 장작을 가지러 가다가 거기서 울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나는 리나에게 아무 말도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오른편 쪽에는 아버지의 모자와 어머니의 양산이 걸려 있었고, 이 모든 것에서 나 의 집이라는 생각과 부드러움이 나에게 홍수처럼 밀어닥쳐 탕아가 고향에 돌아와서 옛 고향 집의 방을 보고 냄새 맡을 때처럼 내 마음을 기원하고 또한 감사하면서 부모님의 사랑에 손 을 내밀었다.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을 뿐이다. 큰 죄 를 지은 나는 낯선 물결 속으로 가라앉았고, 모험과 죄에 휘말려 들어갔고, 적에게 위협을 받았고, 위험과 불안과 치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좋고 훌륭한 사암(砂岩) 으로 된 바닥, 현관 장롱 위의 그림, 안방에서 들려 오는 누이들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은 어 느 때보다도 더욱 사랑스럽고 부드럽고 정다웁게 느껴졌으나, 더이상 위안은 되지 못했고 안전한 재산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단지 비난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의 명랑함과 평온함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내가 이제껏 느꼈던 공포라는 것 은, 내가 오늘 이 방에 갖고 온 것에 비하면 그런 것은 하나의 장난거리요 농담이었다. 운명 이 가까이 왔고, 그 누구도- 어머니도 결코- 나를 보호할 수 없고 무엇인지 알수도 없는 그 것이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지금 나의 죄가 도둑질이건 거짓말이건 (나는 하느님께 거 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왜 나는 아버지에게 한 것보다 더 복종했던가? 왜 나는 거짓으로 사과 훔친 이야기를 꾸며 말했던가? 왜 나는 그것이 영웅적 행위인 듯이 그런 범죄를 뽐냈던가? 지금 악마가 내 손 을 잡았고 원수가 나의 뒤를 다라붙어 오고 있다. 잠시 동안 나는 내일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의 길은 지금부터 저 아래로, 어 두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확신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확실히 내 잘못에 새로운 잘못이 따르리라는 것, 나의 형제 자매들 옆에 나타나고 부모에게 인사와 키 스를 하는 거은 거짓이라는 것, 또 나는 나의 내부에 운명과 비밀을 숨기고 다닌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아버지의 모자를 보았을 때 신뢰와 희망이 나의 마음 속에서 솟아 올랐다. 나는 아버지에 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의 심판과 형벌을 순순히 받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가끔 고백했던 것과 같은 하나의 속죄에 불과하며 무겁고 마음 아플 시간, 무겁고 후회에 찬 용서를 비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울림이었던가.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유혹이었던가. 그러나 그건 소용이 없다.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비밀을 가졌으며 나 혼자만이 해결해야 하는 죄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확실히 기로에 서 있 으며, 이 시간부터 영원히 악의 세계에 속하고, 악한 자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에게 종속 되고, 그들에게 복종하며, 그들과 똑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어른이나 영 웅 행세를 했으니 이제 거짓말을 한 결과 또한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안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내 젖은 신발에 대해서 야단치신 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가 나쁜 일을 눈치채지 못하시고, 나는 또 속으로 그것을 더 나쁜 일과 관련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비난을 참을 수가 있었다. 그때 내 마음 속에서 야릇한 새로운 감정이 번쩍 떠올랐는데, 그것은 가시 돋친, 반항으로 충만한, 심술궂은 빈정대는 감 정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데 대해 일종의 경멸감을 느꼈고, 젖은 신발에 대한 꾸중은 나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는 정말 째째하군!' 나는 생각했 다. 그리고 살인했음을 고백해햐 되는데, 훔친 빵을 갖고 심문당하는 범죄자처럼 생각되었 다. 그것은 천하고 좋지 않은 감정이었으나, 그것은 강렬했고 깊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생각보다도 나를 사슬로 비밀과 죄에 더욱 단단히 묶어 놓고 있었다. 아 마 지금쯤 크로머는 경할서에 가서 나를 고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여기선 모두 나를 어린애처럼 보고 있는데 내 머리 위에서는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 각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훗날까지 남겨질 만큼 전체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성스러운 아버지의 세계에 생긴 최초의 틈이었고, 나의 어린 시절이 의지하고 있던 기둥에 처음으로 금이 간 것을 의미했다. 그런 기둥은,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 여서는 먼저 파괴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 들의 운명의 내적이며 본질적인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틈과 금은 생성되고, 아물고, 잊혀지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방에 살아 남아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것이다. 나 자신 곧 이 새로운 감정에 대해 공포를 느꼈고, 아버지께 사죄하기 위해서 그의 발 위 에 엎드려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용서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린이라도 모든 현인들에 뒤지지 않게 느끼고 깊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문제를 생각해 보고 내일에 대한 대비책을 궁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거기 까지는 도저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단지 우리 집 거실의 변한 공기에 익숙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벽시계와 책상, 성경과 거울, 책꽂이와 벽의 그림은 마치 나에게서부터 분리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빨아들이는 새 뿌리를 갖고자 어둠 속 미지의 세계에 닻을 내리고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그 죽음의 맛은 쓰디쓴 맛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은 탄생이고 새 삶에 대한 두려운 불안과 근심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기뻤다. 그보다 앞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것은 최후의 시련 이었다. 그때 우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같이 부르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그 노래 한마디 한마디는 독이었다. 아버지가 '우리 모두와 함꼐 계시옵소 서' 라는 축복으로 끝을 맺었을 때, 그때 하나의 경련이 우리 가족으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 놓았다. 은총이 깊으신 신은 그들 모두와 함께 있었으나 나와는 이미 함께 있지 않았다. 차갑고 깊 고 피곤을 느끼며 나는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에 따뜻함과 안도감이 충만한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었으나, 내 가슴 은 다시금 불안 속에서 헤매며 공포에 싸여 나비처럼 지난 일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밤인사를 했고, 어머니의 발자욱 소리가 방안에서 울렸으며 불빛이 아직 도 문틈으로 비쳐 들어왔다. 그때 어머니가 다시 한번 되돌아올 것 같이 느껴졌다-어머니는 이를 눈치채고 나에게 키스를 하시면서 친절하게 고무적인 말투로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 는 울음을 터뜨리고 내 목의 돌멩이가 녹아 내려 어머리를 껴안고 모든 것을 말하리라. 만 사는 해결되고 나는 구원을 받으리라. 문틈이 어두워진 뒤에도 잠시 동안 귀를 기울리고 그 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일로 되돌아와서 원수의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사악하게 한쪽 눈을 뜨고 거칠게 웃고 있는 그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 속에서부 터 되씹고 있는 동안, 그는 더 커지고 증오스러워졌으며, 악의에 그의 찬 눈은 악마처럼 빛 났다.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었으나, 그에 관한 꿈도 오늘 일에 관 한 꿈도 꾸지 않고 부모와 보우트를 타고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단지 휴일의 평화와 광 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밤중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그 때까지도 축복의 여운을 느끼 며 햇빛에 빛나는 누이들의 흰 여름옷이 눈에 아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낙원으로 부터 현실로 되돌아왔고 원수가 심술궂은 눈을 하고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급히 오셔서 벌써 시간이 늦었다고 하시며 왜 아직도 누워 있느냐고 외 쳤을 때 나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디 불편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토했다. 그것으로 무엇인가 이득이 생긴 것 같았다. 병에 좀 걸리는 것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래 서 아침 내내 카밀레차 끓는 옆에 누워 있을 수 있고, 어머니가 옆방 치우는 소리와 리나가 바깥 현관에서 고기 장수를 맞이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수업을 빼먹는 오전은 무엇인가 매혹적인 것, 동화와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때면 햇볕이 방 바닥에서 장난질을 치는데, 학교에서 볕을 막으려고 커튼을 치는 그런 햇볕은 아니었다. 그 러나 그런 것까지도 오늘은 향내가 나지 않았고 거짓의 음향만이 울려 왔다. 그래, 차라리 내가 죽는다면! 그러나 가끔 그렇듯이 단지 조금 몸이 아픈 그걸 갖고는 아 무 일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학교에 가지 않게는 해주었으나 결코 11시에 나를 기다 리는 크로머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하였다. 어머니의 친절도 이번에는 위안이 되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짐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곧 다시 잠자는 체하며 생각해 보았다. 모 든 것은 소용이 없고, 나는 11시에는 시장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10시쯤 천천히 일어 나 다시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그런 때는 의레 침대에 좀더 누워 있든지 또는 오후에 학교 에 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돈도 없이 크로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나에게 속하는 그 작은 저금통을 얻어야만 했다. 그 속에는 충분한 돈이 있지 않다는 것을, 또 도저히 셈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좀 낫고 적어도 크로머를 달래 놓기라도 해야만 된다는 기분이었다. 양말을 신은 채 어머니 방에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 어머니의 책상에서 내 저금통을 꺼내 올때, 내 마음은 언짢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일만큼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목을 죌듯했다. 계단 아래층에서 비로소 살펴보았을 때 저금통이 쇠로 잠겨 있었는 데 이것은 사실 아무런 구실도 못했다. 그것을 여는 것은 매우 쉬웠다. 단지 얇은 생철 격자 를 찢어내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잡아당겨 찢는다는 것은 그것으로써 도둑질을 하는 것 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단지 사탕조각이나 과일을 훔쳐먹는 일은 있었다. 비록 이것이 내 자신의 돈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 돈을 훔친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다시금 한 발짝 크로머에게로, 또 그의 세계로 가까이 갔으며 얼마나 멋지게 그것을 차츰차츰 실행해 가고 있나 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반항을 했다. 그러나 악 마가 나를 데려간다 해도 되돌아서 갈 길이 이젠 없다. 나는 불안스럽게 그 돈을 세어 보았 다. 저금통 속에서는 그렇게 꽉 찬 듯이 소리가 났었는데 지금 손 안에 든 것은 비참할 정 도로 적었다. 65페니히 밖에 되지 않았다. 저금통을 아래층 복도에 감추고, 손 안에 돈을 움 켜 쥐고 집을 나섰는데, 지금까지 이 문을 드나들 때와는 아주 달랐다. 이층에서 나를 부르 는 것 같아서 급히 달려나갔다. 시간이 남아서, 길을 멀리 돌아, 변해버린 도시의 골목을 통해 아직 본 적이 없는 멀리 떠 있는 구름 아래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집 옆을 거쳐, 나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옆을 지나갔다. 언젠가 나의 친구 하나가 시장에서 3마르크를 주웠던 일이 생각났다. 내게도 그런 기적이 생겨나길 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빌 자격이 없다. 기도를 한다 해도 저금통은 다시 처음처럼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프란쯔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보았지만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으며, 나에게 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가까이 왔을 때, 그는 나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듯 한 눈짓을 보내고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밀 짚이 쌓인 좁은 길을 걸 어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변두리의 새로 지은 집 앞에 섰다. 거기서는 작업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대문과 창문이 없어 벽만이 앙상하게 서 있었다. 크로머가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는 벽 뒤에 가더니, 나에게 눈짓을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돈 가지고 왔니?" 그는 쌀쌀하게 물었다. "나는 꼭 움켜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돈은 크로머 손바닥에 놓아 주었다. 그는 5페니히 짜리가 아직도 소리를 내고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 계산을 끝냈다. "65 페니히군." 그는 말하고 나를 보았다. "응......" 나는 주뼛주뼛하며 말했다. "내가 가진 건 이 뿐이야. 그게 너무 적다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야, 이것밖에 가진 게 없어." "좀 더 똑똑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는 거의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씨로 나를 나무랐 다. "신사들 사이에는 규칙이 있어. 나는 네게서 옳지 않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지. 이 따위 돈일랑은 걷어 치워. 다른 사람이 - 너도 누군지 알겠지만 - 값을 깎으려고 하진 않을 거야. 그 사람 이 지불해 주겠지." "하지만 난 더 이상 가진게 없는걸. 이것은 내가 저금한 돈이야." "그건 네 사정이야. 그러나 난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너는 나에게 아직도 1마르 크 35페니히의 빚이 있어. 언제 그걸 갚을 수 있지?" "오, 그건 틀림없이 줄께. 크로머! 지금 난 모르겠어- 아마 곧 더 구할 수 있을 거야. 내일 안 되면 모레. 내가 그걸 우리 아버지에게 애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줘." "그건 내게 관계 없어. 나도 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 나머지 돈을 오전 중에 받을 수도 있어. 알지, 난 가난해. 너는 좋은 옷을 입었고 나보다 점심 때 훨씬 좋은 음식을 먹을 수가 있다. 그러나 더 말하지 않겠어. 좀 기다려 줄 께. 모레 오후에 휘파람을 불테니 그때 꼭 가져와. 너는 네 휘파람 소리 알지?" 그는 내게 휘파람을 불었는데 간혹 들어 본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 나는 말했다. "알겠어" 그는 가 버렸다. 나 같은 건 그의 친구가 아니라는 듯이. 우리들 사이엔 거래가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갑자기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를 다시 듣는다면 지금도 섬뜩해질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 는 그 때부터 자주 그 소리를 들었고, 줄곧 귀에 들려오는것 같았다. 어떠한 장소에도, 놀 때도, 사색할 때도 이 휘파람 소리가 따라다니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 소리에 나는 얽매였 고, 그것은 이미 나의 운명이 되었다. 때로 나는 단풍이 든 청명한 가을 하늘 오후에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우리 집 꽃밭이 있는 정원에 나와 있으면, 이상한 충동이 나에게 지난 시 절의 소년들의 놀이를 다시 해 보는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나보다 나어린 아직도 선량하 고, 자유롭고, 죄가 없고, 숨김 없는 소년이 되어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언제나 예기한 대로, 엄청나게 흥분시키고 놀랍게 하는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어디에선가 울려와 실마리를 끊어야 했고, 옳지 않고 증오스런 장소로 나를 괴롭히 는 자에게로 가서 그에게 변명을 하고 돈에 관해 재촉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것이 아마 몇 주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나에겐 그것이 몇 년이나 되는 것처럼 아니, 영원하게도 느껴졌다. 때때로 나는 리나가 시장 바구니를 요리대 위에 놓아 두었을 때 거기 서 몰래 집어온 5페니히나 10페니히 돈을 가지고 갔었다. 그럴 때마다 늘 크로머는 나를 나 무라며 모욕했다. 크로머는 나를 향해서, 나는 그를 속이는 사람이며, 그에게 훌륭한 권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었고, 불행하게 만들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나의 생애에서 그렇 게 괴로운 심정에 빠진 적은 없었고, 그보다 더 심하게 희망을 잃고 굴욕감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나는 저금통을 장난감 돈으로 채워서 제 자리에 놓았는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 묻지 않았 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들통이 날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걸어오실 때면 - 어머니가 저금통에 관해서 물으시러 오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크로머의 야비한 휘 파람 소리보다 어머니를 더욱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 돈도 없이 그 악마 앞에 나타나는 나를 그는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 작했다. 즉 그가 그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해야 했을 때, 나는 그를 대신해서 심부름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다른 어려운 일을 시키던가, 10분간 한 쪽 발로만 뛰어가도록 하 든가, 길가는 사람의 웃옷에 종이 조각을 붙이는 일을 명령받곤 했다. 여러 날 밤, 꿈 속에 서 이 괴로움이 계속되었고 가위눌려 식은땀을 흘렸다. 한동안 나는 아팠다. 때때로 토하였고 으슬으슬 추웠으나, 밤에는 땀과 열에 싸여 누워 있 었다. 어머니는 무엇인가 탈이 났다고 느껴 나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내가 신뢰로써 보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밤, 내가 이미 침대에 들었을 때 어머니는 초콜렛 한 개를 가져왔다. 전에도 어머 니는 종종 그랬다. 그것은 내가 밤에 얌전하게 굴면 잠잘 때 상으로 과자를 받았던 일을 상 기시켰다. 어머니는 침대가에 서서 나에게 초콜렛을 내밀었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머리 를 흔들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싫어요, 싫어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단지 이렇게 소리지를 뿐이었다. 어머니는 초콜렛을 책상 위에 놓고는 나가셨다. 어머니께서 그 후에 그 일에 관해 물으려 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듯이 행동했다. 어느 때, 어머니는 의사를 불러 왔는데, 그는 진찰해 보더니 나에게 아침마다 냉수욕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 시절의 상태는 일종의 정신 착란이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스러움 속에서 나는 마치 유령처럼 겁을 먹고 고통을 받으며 살았고, 다른 가족들의 생활에 어울리지 못하였고, 한 시간도 나를 잊고 지내질 못했다. 때ㄸ로 화가 나셔서 나에게 따져 물으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나는 꽁한 마음과 무뚝뚝한 마음을 가졌다. 2.카인 나의 고민에 대한 구원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부터 왔고, 그 구원과 함께 새 로운 것이 나의 생활에 끼어 들어 왔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 최근에 학생이 한 명 전학해 왔다. 그는 이 도시에 이사해 온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이었으며, 소매에 상장(喪章)을 달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상급반이었고 나이 가 몇 살 위였으나, 다른 애들에게 그러하듯이 곧 나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 이 유별난 소년 은 보기에는 아주 나이가 든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그가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우리 어린이들 사이에서 그는 낯설게, 어른처럼 엄숙하게, 아니 오히려 신사처럼 행동했다. 그가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놀이에도 끼어들지 않았으며 더욱이 싸움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단지 선생님에 대한 자신있고 확고한 그의 목소리가 다른 애들의 마음에 들 었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간혹 있는 일이지만, 어떤 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큰 우리 교실에 또 다 른 반이 합석을 하였다. 데미안의 학급이었다. 우리 하급생들은 성경 이야기를 공부했고 상급생들은 작문을 공부했 다. 우리가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배우고 있는 동안, 나는 자주 데미안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영리하고 밝고 보통이 아닌 야무진 얼굴이 주의 깊게 온 정신을 모아 공부에 열 심인 것을 보았다. 그는 학과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그 자신의 문제를 추구하 는 철학자 같았다. 그가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그에게 무슨 반감을 가졌었다. 그는 나보다 우월했고 냉정했으며 그의 태도는 약이 오를 정도로 확고했다. 그의 눈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 그런 표정을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 그 가운데는 얼마간 슬픈 듯하면서도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줄곧 그를 쳐다봤는데 그 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한 번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나는 찔끔 놀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당시 데미안이 어떤 학생이었는가를 오늘날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애들과 달리 아주 특 이했고 개성적으로 여겨졌으며, 그것 때문에 눈에 띄었다. 동시에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농부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이 어울리려고 애쓰는 변장한 왕자처럼 옷을 입었고 행동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내 뒤를 따라왔다. 다른 애들이 흩어져 가버리자 그는 따라 와 인사를 했다. 이 인사조차도 물론 학생 말투를 흉내냈지만 어른 같았고 아주 공손했다. "같이 갈래?" 그는 정답게 물었다. 나는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에 그에게 내가 사는 곳이 어디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 거기야?" 그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그 집이라면 벌써부터 알고 있지. 너의 집 문에 아주 묘한 것이 붙어 있더라. 그것에 퍽 흥미를 느꼈어."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우리 집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랐다. 아치형 문 위에 부채꼴의 돌로써 일종의 문장(紋章)이 있었는데, 그 것은 세월이 감에 따라 닳아 납작해졌고, 때때로 색깔을 다시 칠하기는 했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우리 집이나 우리 가족과 관계가 없었다. "거기 관해선 아는 바가 없어." 나는 주저하며 말했다. "그것은 한 마리의 새이거나 아마 그 비슷한 것인데, 아주 오래 되었어. 우리 집은 한 때 수도원의 소유지였다고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고 한 번 잘 살펴봐. 그런 것은 꽤 흥미 있거든, 내가 생각하기엔 그건 새 같아."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갔고, 나는 아주 당황했다. 갑자기 무엇인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 오른 듯이 데미안이 웃었다. "참, 내가 아까 너희들 공부 시간에 같이 있었지." 그는 생기있게 웃었다. "표적을 이마에 달고 다니는 카인 이야기였지? 그 이야기가 재미있었니?" 재미가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치고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야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데미안은 내 어깨를 쳤다. "얘! 넌 나에게 조금도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수업 시간에 배우는 대부분의 다른 것들보다 주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선생님은 물론 거기에 관해선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하느님과 죄에 대한 흔히 있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야. 내 생각으로는." 그는 말을 멈추고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흥미가 있니?"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는 말을 계속했다. "이 카인의 이야기를 아주 다르게 해석할 수가 있지.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대체로 사실이고 옳지만, 선생님이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아주 만족할 순 없어. 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니? 싸우다가 아우를 때려 죽인다는 건 확 실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후 그가 불안해지고 소심해진다는 것도 가능하지. 그러나 그가 비겁 때문에 특별히 보호받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불안의 표적으로 표창받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이야기야." "그렇구나." 나는 흥미있게 말했다. 그 이야기가 나를 매혹시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달리 어떻게 그 이야길 해석할 수 있니?"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주 간단해! 사실 이야기의 발단이 된 것은 그 '표적'이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얼굴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 어. 사람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와 그의 자식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어.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 표적은 우표의 소인과 같이 실제로 붙어있는 것은 아 냐. 그런 것은 밖으로 드러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 알아볼 수 없는 기분 나쁜 것이 있었고, 눈초리에는 사람들이 늘상 보던 것보다 좀 다른 정신력과 대담성이 번뜩이고 있었 지. 그는 힘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했지.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인간'이란 항상 자기 형편에 맞도록 정당성을 주장하는 존재야. 사람들은 카인의 후예를 두려워 해. 그들은 그 '표적'을 가졌지. 그러니까 그 표적을 사실 자체로서, 하나의 특성으로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이해한 것이지. 이 표적을 가진 사람은 흉측한 놈들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 용기와 특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항상 겁나게 하거든. 두려움을 모르는 무서운 자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매 우 불안한 일이야. 그래서 그들에게 복수하고, 자기들이 견디어 낸 공포를 조금이라도 보상 받기 위해 그들에게 별명과 지어낸 이야기가 덧붙여진 거야. 알겠니?" "알겠어. 그렇다면 카 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럼 성경 속의 이야긴 사실이 아닌 거니?"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오래된 그 성경 이야기는 항상 정말이지만, 그것이 사실대 로 기록되고 그것이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아. 간단히 말해서 카인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 각해. 사람들이 그에게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이야길 지어 붙인 거야. 그런 이 야기는 단순이 소문이며,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지껄이는 것과 같지. 카인과 그의 후예들이 참말로 일종의 '표적'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에 있어선 그 이야긴 사실이야." 나는 몹시 놀랐다. "그렇다면 너는 카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다는 것도 믿지 않니?" "아니,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 죽였던 거야. 그게 정말로 자기 형제인지 어떤지는 의문이야. 그렇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결국 인간은 누구나 형제야. 어쨌든 그 행위가 영웅적이거나 그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약한 자들은 그만 불안에 휩써여 한탄하고, 만약 누군가 그들에게 '왜 당신은 그 강한 자를 죽여 버리지 않느냐' 고 물으면 '우리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어' 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순 없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 그에게 준 표적을!' 하고 말하지. 아마 이렇게 해서 그런 속임수가 생기는 걸 거야 - 참 너무 오래 서 있게 했구나. 그럼 잘 가라!" 그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이때만큼 현혹된 적은 없었다. 그가 사라지자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 처럼 생각되었다. 카인은 고귀한 사람이고, 아벨은 겁장이라고! 카인의 표적은 하나의 특성 이라고! 그것은 불합리했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느 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아벨을 사랑하시지 않으셨던가? 아니다, 어리석은 소리다. 데미안은 나를 조롱하고, 어둠 속으로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굉장히 총명하고 말을 잘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성서의 어떤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그 프란쯔 크로머를 그렇게 완전히 몇 시간 동안 아니, 온 저녁 내내 잊어 본 적은 없었다. 집에 와서 나는 다시 한번 성서의 그 이야기가 씌여져 있는 곳 을 통독했는데 그것은 간단하고 분명해서, 거기서 어떤 특별한 주관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때려죽인 자는 누구나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미친 소리다. 그러나 데미안이 그런 일을 그렇게 쉽 게,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듯이 이야기 할 수 있는 태도는...... 게다가 그의 눈은 몹시 매혹적이었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정돈되지 않은 아주 무질서한 어떤 것이 있었다. 나는 밝은, 그리고 깨 끗한 세계에 살고 있었으며 일종의 아벨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대단히 깊게 '다른' 세계 속에 빠져들어 떨어지고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거기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마음이 내킨 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던가? 그렇다. 지금 하나의 추억이 나에게 떠올랐는데 그것은 잠시 동안 나를 질식시켰다. 지금의 비참이 시작된 바로 그 저주스러운 밤에, 아버지 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와 예지를 한번에 꿰뚫어보고는 경멸했었다. 그렇다! 그 때 카인이 되어 표적을 가졌던 나 자신은 수치가 아 니라 그것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표시이고, 나는 사악함과 불행을 통하여 나의 아버지보다도 더 위대하고, 착한 사람이나 경건한 사람들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내가 경험한 것은 이와 같이 분명한 사고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이 모든 것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나를 괴롭히고, 그러면서도 자랑을 가지고 나를 채워 줬 던 감정과 이상하게 타오르는 흥분의 불길이었다. 생각해보면 -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과 비겁한 자에 대한 데미안의 해석은 생각할수록 기 묘했다. 카인의 이마의 표적을 얼마나 이상하게 해석했던가! 그 때 데이만의 눈, 어른같은 독특한 그의 눈이 어떻게 빛났던가! 그리고 그것은 내 머리에 문득 스쳐갔다. 그 자신, 데미 안 자신이 일종의 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가 카인을 닮지 않았다면 왜 그를 변호 하는 것인가? 왜 그는 '다른 사람들', 즉 본래는 경건한 사람들이고 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들인,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경멸했던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끝이 없었다. 그것은 샘 위에 떨어진 돌멩이였으며 그 샘은 내 어린 영혼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말 오랜기간 동안 카인, 이마의 '표적'을 내포한 이 문제는 인식과 의혹에 대한 나의 탐구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인에 대한 이야기 를 나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으나, 다른 아이들도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새로운 학생에 대한 소문이 여러 가지 떠돌았다. 내가 만일 그 소문을 모두 기억 한다면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밝혀지고 분명해졌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데미안의 어머니가 부자라는 소문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에 가지 않고, 그도 역시 가지 않는다 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들은 표면에 내세 우지 않는 마호멧 교도일는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밖에 소문은 막스 데미안의 힘 에 관한 것이었다. 반에서 가장 힘센 놈이 그에게 싸움을 걸어왔을 때 그가 피하자 그를 비 겁자라고 불러서 데미안이 그를 여지없이 굴복시켰다는 사실이다. 거기 있던 아이들은, 데미 안이 단지 그를 한 손으로 목덜미를 잡고 꽉 눌렀을 뿐인데, 그 소년은 겁을 집어먹고 뺑소 니를 쳤으며, 하루 종일 팔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에는 그 소년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얼마 동안은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다.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고, 놀라웠 다. 당분간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우리 학생들 사이에, 데미안이 어느 소녀 와 친하게 교제를 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프란쯔 크로머와 어쩔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에게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며칠 동안 편안히 내버려둔다 해도 나는 그에게 얽매여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그림자처럼 같이 살았으며, 그가 나에게 실제로 가하 지 않은 것을 꿈 속에서 나의 환상이 그에게 행하도록 시켰다. 그 꿈 속에서는 나는 완전 무결한 그의 노예였다. 나는 현실에서보다 꿈 속에서 - 나는 늘 아주 강렬한 꿈을 꾸는 사 람이었다 - 더 많이 살았고 힘과 생활은 이 그늘 때문에 잃어버렸다. 꿈 속에선 가끔 크로 머가 나를 학대하고, 나에게 힘을 뱉고, 나를 잡아탔고, 더욱 나쁜 것은 그가 나를 더욱 나 쁜 죄를 짓도록 유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힘있는 영향력으로 억눌러서 무서운 범행 을 저지르게 하는 그러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꿈은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이었다. 크로머는 칼을 갈아서 내 손에 쥐어 주었으며, 우리는 어떤 골목의 나무 뒤에 서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누군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타났을 때 크로머가 나의 팔을 누르면서 저 자가 찔러죽여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였 다. 나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깨어났다. 이런 일에 관련해서 나는 카인과 아벨의 일을 곧잘 생각하게 되었다. 데미안에 관해선 이 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다시 가까이 온 것은 이상하게도 역시 꿈 속이었다. 또 나는 학대와 폭행당하는 꿈을 다시 꾸었는데 이번에는 나를 ?b5Ⅹ潔횬潔駭? 그리고 그 것은 새로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가 크로머로부터 고통과 반항으로 당했던 모든 것을 데미안에게서는 기꺼이, 그리고 불안과 마찬가지로 황홀한 감정을 갖고 견디어 냈던 것이다. 이런 꿈을 두 번 꾼 후에 크로머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왔다. 이러한, 꿈 속에서 경험한 것과 현실에서 경험한 것을 나는 오랫동안 아주 분명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크로머와의 좋지 않은 관계는 계속되었고 내가 드디어 순전히 살짝살짝 나쁜 손버릇질을 해서 빚진 돈 전부를 그에게 다 갚아 주었을 때도 그 관계는 끝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돈의 출저를 캐물었고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그의 손아귀 속에 더욱 깊게 사로잡혀 있었다. 때때로 그는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겠다고 위협을 했는데, 그럴 때면 스스로가 애초부터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의 마음이 나의 불안감을 넘어서 곤 했다. 그동안 나는 비참하였지만 모든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고, 적어도 항상 후회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만사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운명이 내 위에 덮여 있었고 그것을 깨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나의 부모는 이런 상태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으셨으리라. 낯선 영혼이 나에게 덮 쳐 와서 나는 그렇게 친밀했던 우리 집안의 일원으로 이미 조화될 수가 없었고, 그것에 대 해서 마치 실낙원에 대해서와 같이 가끔 격렬한 향수가 엄습했다. 특히 어머니로부터는 악 동으로보다 환자로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로 식구들의 기분이 어떤가 하는 것은 나의 두 누 이들의 행동으로 잘 알 수가 있었다. 건강을 돌봐 주었으나 나에게 끝없이 비참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그들의 행동은 내가 일종의 마귀에 홀렸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 명하게 해 줬다. 이런 자들은 그 상태에 대해 꾸중을 하느니보다는 동정을 해 줘야 된다는 것이며, 이들의 내부에는 지금 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두가 나를 위해 기도 하는 것을 느꼈고, 이런 기도가 소용 없으리라는 것도 느꼈다. 짐을 벗고 가볍게 되고 싶은 소망과, 참마음으로 고해하고픈 갈망을 나는 가끔 불타오르듯 느꼈으나, 아버지에게도 어머 니에게도 모든 것을 올바르게 말하고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이미 느꼈다. 사람들은 자애롭게 그것을 받아 주고,나를 잘 보살펴 주고, 참 안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인데도 일종의 탈선으로 생각되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어린 아이가 이렇게 느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 들에게 내 신상에 일어난 일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좀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의 일부분을 사상으로 바꿀 수 있는 어른 들은 어린이에게 이런 생각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경험까지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 나 나의 생애에 있어서 그 당시처럼 그렇게 깊게 경험하고 괴로워한 적도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놈은 나에게 광장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거기 서서 기다리며, 검고 잎이 많은 나무에서 줄곧 떨어지는 젖은 밤나무 잎을 발로 비비 고 있었다. 돈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크로머에게 적어도 무엇인가를 줄 수 있도록 두 조각의 과자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나는 오랫동안 이렇게 모퉁이의 어느 곳에 서서 때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나는 인간들이 어쩔 수 없는 것을 감수하 듯이 그것을 감수했다. 드디어 크로머가 왔다. 그는 이 날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내 갈비뼈를 주먹으로 몇 차례 치더니, 웃으며 과자를 받았다.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젖은 여송연 한 대를 내밀기까지 했고 보통 때보다 한결 친절했다. "참......" 헤어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잊지 않게 미리 말해 두겠는데 - 다음 번에는 네 큰 누나를 데리고 나와. 이름이 뭐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놀라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아듣지 못하겠니? 네 누나를 데려오란 말이야." "알아, 크로머. 그러나 그것은 안돼. 나 는 그걸 할 수 없어. 게다가 누나도 함께 올 리가 없고......" 나는 그것이 또 다시 하나의 술책이요, 구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이따금 그러했다. 어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여 나를 공포 속으로 빠지게 하고, 내 기를 죽이고 나서는 서서 히 행동해 갔다. 그러면 나는 돈이나 다른 물건을 주어서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주 달랐다. 내가 거절했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 좋다." 그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걸 생각해 봐. 나는 네 누나와 사귀고 싶단 말이야. 훗날 틀림없이 잘될 때가 있겠지. 넌 누나를 데리고 산보를 나오기만 하면 돼.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내일 내가 휘파람을 불 테니, 그때 다시 한번 거기에 대해 말해 보자." 그가 사라진 뒤 그가 요구하는 의미가 어떤 것이라는 게 나에게 희미하게 짐작되었다. 나 는 아직 철부지 어린애였으나 소년 소녀들이 좀 나이가 들면 비밀을 갖고, 부끄럽고 금지된 짓을 서로 한다는 것에 관하여 주워들은 소리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 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갑자기 그의 요구의 의미가 내게 명백해진 것이다. 그런 일은 안 하리라는 나의 결심은 곧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며, 크로머가 나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에 대해 나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고민이 시 작되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두 주머니에 찌른 채 나는 텅빈 광장을 서성거렸다. 새로운 고민. 새로운 노예 상태. 그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시원스러운 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뛰기 시 작했다. 누군가가 내 손을 뒤에서 부드럽게 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달아 나지 않았다. "너였니?" 나는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 때만 큼 그의 시선이, 어른이나 우월한 자나 마음을 샅샅이 뚫어보는 자의 눈초리 같았던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입을 떼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는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그래, 그렇지만 놀랄 수도 있지." "그럴는지도 몰라. 그러나 알아 둬, 네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까지 그렇게 위 축된다면 그 사람은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기 시작하지.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고 호기심 이 나거든. 그 사람은 네가 유별나게 잘 놀란다고 생각하고, 또 누구든 불안할 때 놀란다는 생각을 덧붙일 것이야. 네가 본래부터 비겁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 물론 영웅도 아니지 만.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 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따위 감정을 결코 가져선 안 돼. 사람 앞에선 절대 두려움을 가져선 안돼. 넌 나를 두려워하지 않겠지? 어때?" "아냐, 전 혀 아냐" "그것 봐! 그러나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지?" "나는 모르겠는데...... 제발 이젠 보내 줘. 날 도대체 어찌하려 하는 거지?" 그는 나와 함께 걸었다 - 나는 도망칠 생각을 갖고 더 빨리 걸었다 - 나는 그의 시선이 내 옆에 있는 것을 느꼈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넌 나 때문에 불안을 가질 필요는 없어. 나는 네게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다. 그것은 재미있고 너도 대단히 유익한 것을 배울 수가 있지. 주의해 들어. 때ㄸ로 나는 사람들이 독심술(讀心術) 이라 부르는 기술을 연구해. 그것은 마법은 아니야. 그렇지만 독심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독특하 게 보이거든.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할 수 있어. 자, 우리 한번 시험해 보자. 나는 너를 좋아 하거나 네게 흥미를 갖고 있다. 나는 지금 네 마음 속이 어떤가를 알아내고 싶어. 거기에 대 해서 나는 첫 발자욱을 벌써 내디뎠지. 나는 너를 놀라게 했거든. 너는 놀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는 거야.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 어. 만약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에게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주었기 때문이야. 예를 들면, 나쁜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너를 뜻대로 할 수 있 게 되는 거야. 알겠니? 그건 분명한 일이 아니니?" 나는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영리해 보이고, 호의에 찬 그의 얼굴을 어쩔줄 몰라서 쳐다만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움이라곤 없이 엄격해 보였다. 그 속엔 올바른 것이거나 또는 그 와 유사한 것이 있었다. 나는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는 마술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알겠지?"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것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나는 물론 그 독심술이란 게 좀 괴상해 보인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 예컨대 내가 전에 너에게 카인과 아벨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 네가 나를 어떻게 생 각했는지 꽤 자세히 말할 수 있어. 그것은 지금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지만...... 나는 언젠가 네가 내 꿈을 꾸었으리라는 건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애. 그러나 이 얘긴 그만두자! 대부 분의 녀석들은 멍텅구리인데 너는 아주 총명한 애야. 나는 믿을 수 있는 영리한 소년들과 때ㄸ로 즐겨 이야기하지. 그건 너두 싫지 않겠지?" "응, 그래.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한번 재미있는 실험을 계속해 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걸 알게 된다. S라는 소년 은 잘 놀란다. 그는 누군가를 두려워 하고 있다- 그는 확실히 다른 누구와 몹시 난처한 비 밀을 가지고 있다. 어때 이 말이 맞니?" 나는 꿈 속에서처럼 그의 음성과 영향력 밑에 굴복하였다.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가 모든 것을 안단 말인가? 그가 나 자신보타 더 잘, 더 분명히 모든 것을 안단 말인가? 힘있게 데미안은 내 등을 두드렸다. "역시 맞는군. 나는 그런 줄 알았어. 그럼 몇 마디 더 묻겠어. 아까 저쪽으로 사라진 녀석 이름이 뭔지 너는 알지." 나는 몹시 놀랐고, 나의 침해당한 비 밀이 내 속에서 고통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광명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누구? 나밖에 아무도 없었는데......" 그는 웃었다. "그의 이름이 뭔지 말해 봐" 그는 웃었다. 나는 속삭였다. "프란쯔 크로머 말이야?" 기쁜 듯 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얘기가 통하는 아이야. 우리는 더욱 친하게 될 거야. 그렇지만 지금 너에게 이야 길 좀 해야겠어. 크로머인가 뭔가 하는 놈은 나쁜 놈이야. 그의 얼굴을 보고 난 그가 불량배 라는 걸 알았지! 네 생각은 어때!" "응, 맞았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쁜 놈이야. 악마야. 그가 이런 걸 알아선 안돼! 절대로 알아선 안돼! 너는 그를 아니? 그도 너를 알 고?" "진정해! 그는 가 버렸어. 그는 나를 몰라. 아직은 몰라. 그러나 난 그 놈을 알고 싶어. 국민학교 학생이니?" "응" "몇 학년?" "5학년 -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제발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 줘" "염려 말아. 네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아마 너는 나에게 이 크로머에 관해 좀 더 이야 기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할 수 없어! 안돼. 날 내버려둬."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섭섭한데." 그는 말하였다. "실험을 좀 더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난 너를 괴롭힐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는 걸 너는 알고 있겠지?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돼. 만일 네가 올바른 사람이 되려 한다면 넌 거기서 벗어나야 돼. 알아 듣 겠니?" "확실히, 너는 아주 옳아...... 그러나 그건 안돼. 너는 정말 몰라......" "너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지. 너는 그에게 혹시 빚을 졌니?" "응, 빚도 졌지. 그러나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야. 난 그걸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단 말 이야!" "내가 그에게 빚진 만큼의 돈을 네게 주어도 아무 소용없을까? 그 정도는 충분히 네게 줄 수 있을텐데" "아냐, 아냐, 그게 아냐. 거기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아무 말도! 넌 나를 불행 하게 만들지도 몰라." "싱클레어, 나를 믿어. 훗날 언젠가는 내게 네 비밀을 털어놓을 거야 -." "아니야, 절대로." 나는 펄쩍 뛰며 소리쳤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그저 네가 언젠가는 이야기 해 주리라고 생각해. 네 스스로 말이야. 설마! 내가 크로머처럼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천만에- 그러나 넌 그 일에 관해선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걸." "그래, 아무 것도 몰라. 나는 단지 거기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내가 크로머가 했던 것처럼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어 줘. 너는 나에게 아무 것도 빚 진 게 없어." 우리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점점 냉정해졌다. 그러나 데미안이 어떻게 이 일을 알 고 있는지 수수께끼였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가야겠어." 그는 말하고는, 빗속에서 거친 마직물 외투를 더욱 바짝 잡 아당겼다. "우리가 벌써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네게 꼭 한가지만 더 말하고 싶어 - 너는 그 놈에게서 벗어나야 돼! 만약 별다른 도리가 없다면 그를 죽여버려! 네가 그렇게 행 동하면 나는 감명을 받게 되고, 내 마음에 들게 될거야. 난 물론 너를 도울 테니까." 나는 새로운 불안에 싸였다.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생각났다. 나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무시무시한 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 좋다." 하고 막스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가라! 우리들은 틀림없이 그 일을 하게 될 거야. 물론 때려 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긴 하지만. 그런 일에 있어선 가장 간단한 일이 항상 제일이야. 너와 크로머와의 관계는 좋은 교제가 아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1년 동안이나 타향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르게 보 였다. 나와 데미안 사이엔 무엇인가 미래와 같은, 희망과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나는 주일마다 비밀을 가지고 얼마나 외 로이 지냈던가 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 내가 여러 번 숙고했었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 다. 나의 부모 앞에서 고해하는 것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겠지만 나를 완전히 구제할 수 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구제에 대한 예감이 강렬한 향기처럼 나를 향하여 날아왔다. 어쨌든 오랫동안 나의 불안은 극복되지 않았었고, 나는 나의 원수와의 두려운 대결을 각오 했었다. 모든 일이 그렇게 고요하게, 그렇게 완전하게 살짝, 그리고 조용하게 지나간다는 것 이 나에게 더욱더 이상했다.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우리 집 앞에서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1주일이 지나도록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감히 그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예기치 않을 때 갑자기 나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는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멀리 사라져갔다! 이 새로운 자유를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여전히 거기에 대해 의혹을 품었다. 어느 때인가 드 디어 내가 프란쯔 크로머와 맞부딪칠 때까지 그랬다. 그는 자일러 골목을 나를 향해 똑바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움찔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사납게 찡그리고 나를 피해 홱 돌아서 가버렸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당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의 적이 내 앞에서 도망쳤다. 나의 악마가 나를 두려워한 것이다! 기쁨과 경이가 내 몸을 휘감았다. 어느 날 데미안이 다시 나타났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나는 말했다. "잘 있었어, 싱클레어? 나는 네가 어떻게 지내나 꼭 한 번 보고 싶었어. 그 크로머는 이제 너를 귀찮게 하지 않지?" "네가 그랬구나? 하지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했니? 나는 그걸 통 알 수 없어. 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잘됐어. 만약 그가 다시 오거든 -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타나지 못할 거야. 그러나 그는 정 말 철면피니까 모르지 - 그 땐 그에게 그저, '데미안을 생각해 봐' 라고만 하면 돼"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니? 너는 그와 싸워서 그를 호되게 갈겨 주었니?" "아니, 난 싸움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나는 단지 너와 이야기 했던 것처럼, 그와 이야기 하고 그가 너를 편안히 놔두어야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해주었을 뿐이 야." "설마, 넌 그에게 돈을 주진 않았겠지?" "아니, 너는 그런 방법은 이미 시험해 보았잖니." 아무리 그에게 캐물을려고 했지만 그는 가버렸다. 나는 감사와 부끄러움, 놀람과 불안, 애착과 내적 반항이 뒤엉킨 채, 그에게 느꼈 던 고통스런 감정을 가지고 서 있었다. 나는 곧 그를 다시 만나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그와 함께 그 모든 것에 관해서, 카인의 문제에 관해서까지도 좀더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은혜를 느낀다는 것은 내가 믿지 않는 편이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 같이 생각된다. 그래서 내가 막스 데미안에게 조금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내가 오늘날 확신하고 있는 바는 만일 그가 나를 크로머의 발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 았다면, 나는 일생 동안 병들고 타락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해방을 나는 그 당시 벌써 내 소 년 시절의 가장 큰 경험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해방을 시켜 준 자가 그 기적을 달성하자마 자 나는 그를 무시해 버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같은 배은이 나에게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표시한 호기 심의 부족만이 나에게 이상했다. 데미안에게 감동한 그 비밀에 근접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단 하루라도 평온히 살 수 있 단 말인가. 카인에 관한 나머지 이야기나 독심술에 관한 호기심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었을 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나는 갑자기 내가 악마의 그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았 고 세상이 다시 내 앞에 밝고 즐겁게 놓여 있음을 알았으며, 더 이상 불안의 발작이나 목을 죄는 듯이 가슴이 뛰는 일에도 굴복되지 않았다. 금령(禁令) 위반의 벌은 끝났고, 나는 더 이상 괴로움을 받는 죄인이 아니었으며 다시 이 전의 학생이 되었다. 나의 본성은 될 수 있 는 대로 빨리 본래의 균형과 휴식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갖가지 증오 스런 것과 위협적인 일들을 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상처나 인상을 남기지도 않고, 나의 죄와 불안의 아주 오랜 역사는 놀랍 게도 빨리 나의 기억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조력자, 구원자를 마찬가지로 빨리 잊으려고 했다는 것을 오늘날의 나는 알고 있다. 저주받은 한탄스런 골짜기로부터, 크로머에게서의 무서운 노예 상태로부터 모든 힘을 다하여 전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곳으로 도망쳤다. 즉 다시 열린 실낙원으로, 아버 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로, 누이들에게로, 순수한 향기가 충만한 세계, 신의 사랑을 받는 아벨의 세계로...... 데미안과 짧은 대화를 한 다음날, 다시 얻은 자유를 완전히 확신하고 재발을 더 이상 두려 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렇게나 자주 갈망하여 바라던 그 일 - 고해를 했다. 어머니에게로 가서 자물쇠가 부서지고, 돈 대신 장난감 돈으로 채워진 저금통을 보이고, 오 랫동안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사악한 괴로움을 주는 자에게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저금통과 나의 달라진 시선을 보고는, 그리고 달라 진 음성을 듣고는 내가 회복이 되어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 곧 열띤 감정으로 새로 돌아온 축제, 탕아의 귀향 축제 속에 묻혔다.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에게로 데리고 가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자, 질문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몰려 들었고, 부모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긴 압박감에서 해방된 한숨을 쉬셨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 모든 것이 이야기 같았고, 모든 것이 놀라운 조화 속에 융화되어 갔다. 이 조화 속으로 나는 진실로 정열을 갖고 뛰어들어갔다. 내가 다시 평화와 아버지의 신뢰를 되찾았다는 데 대해 아무리 만족해도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집안의 모범적인 소년 이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누이들과 잘 놀고, 기도를 드릴 때에는 구원을 받은 자와 개심자의 마음을 갖고 좋아하는 옛 찬송가를 불렀다. 그것을 진심으로 하였으며 거기엔 어떤 거짓이 없었다. 그렇지만 만사가 다 질서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데미안을 잊어 버린 것을 참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점이 있었다. 그에게 나는 고해해야 했었다. 그 고해는 더 화려하지도, 감동적이 되지도 못했지만 나에게 굉장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사방팔방으로 뿌리를 뻗쳐 예전의 낙원과 작은 세계에 달라붙었으며, 귀향을 했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절대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유혹자이며 - 크로머와 전혀 다른 뜻에서 - 나를 제2의 세계, 사악하고 나쁜 세계로 연결시 켰다. 그 세계에 관해서는 나는 더이상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막 아벨이 된 지금, 아벨을 포기하고 카인을 찬미하는 일을 도울 수도 없었고, 도우려 하지도 않았다. 외면적 관계는 그러했다. 그러나 내면적 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크로머와 악마의 손으 로부터 구제되었으나 그것은 나 자신의 힘과 행동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새로운 세계 의 오솔길을 걸으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미끄러웠다. 우정에 찬 손이 나를 잡아서 구제해 준 지금, 더 이상 한눈을 팔지 않고 어머니의 품으로, 울타리 둘러친 경건한 유년시절의 안전 속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종속적이고, 어린이같이 행동했다. 크로머에게서의 종속을 새로운 종속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서 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맹목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의 예속 을, 옛날에 사랑하던 '밝은 세계' 로의 예속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세계가 유일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데미안을 의식하 고 자신을 그에게 의지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 특이한 그의 사고 방식에 대해 불신을 가진 나로서는 그것이 올바른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프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불안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부모들의 요구보 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했을 것이고, 자극과 충고로써, 조롱과 비웃음으로 써 나를 더욱 독립적이도록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제야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았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장애가 많은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한 반 년 뒤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어서 산보 증에 아버지 에게, 많은 사람들이 카인을 아벨보다 더 낫다고 설명하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물었다. 아버지는 매우 놀라시면서 나에게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이런 해석은 이미 원시 기독교 시 대에 떠돌았으며, 그렇게 주장하는 여러 종파도 있었는데 그 중 한 종파는 <카인파> 라고 불린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미친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것이며, 악마의 유 혹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왜나하면 사람들이 카인이 올바르고 아벨이 부당하다고 믿는다면, 하느님은 잘못을 저지른 게 되며, 따라서 성서의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올바른 하느님이 아니라 가짜 하느님이란 결 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카인파들은 역시 그런 유사한 것을 설교했을 것이며, 이런 사교(邪敎)는 오래 전에 인류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의 학교 친구 하나가 거기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씀하셨다. 어쨌든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생각을 버리라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3.죄인 나의 유년 시절에 관해서, 그리고 부모님 곁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에 관해서, 자식의 사랑에 관해서, 온화하고 그리운 밝은 환경 속에서의 충족된 유희적인 한가로운 생활에 관해서 이 야기할 만한 아름다운 점, 미묘한 점,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나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내가 일생 동안 걸었던 과정만이 관심 을 끄는 것이다. 아름다운 휴식처와 행복의 섬과 낙원 등의 매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런 건 모두 먼 과거의 시간속에 남겨둘 뿐, 다시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려고는 생각지 않는 다. 그러므로 나의 소년 시절에 관한 한, 나는 내가 겪었던 새로운 일, 나를 앞으로 몰아 대고 끌고 갔던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이런 자극은 '다른 세계' 에서 왔으며 불안과 강요와 양심의 가책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항상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내가 기쁘게 누리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 허용된 밝은 세계 속에서는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는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 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그런 나이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처럼 나에게도 천천히 깨 어나는 성(性)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적으로서, 파괴자로서, 금지된 것으로서, 죄악으로서 습 격해 왔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쾌락, 불안이 나에게 창조해 준 것, 그리고 야릇한 사춘기의 비밀, 이런 것들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나의 소년 시절의 평화라는 행복에는 어울 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과 같이 행동했다. 나는 이미 어린이가 아닌 소년의 이중 생활을 해나갔다. 나의 의식은 가정과 허용된 세계 속에서 살았고, 겨우 머리를 들기 시작한 새로운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모든 의식적인 불안과 생활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그 밑바닥 감정에 대한 끔과 충동과 소망 속에서 살았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 유년의 세계 는 붕괴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들처럼 나의 부모들도 또한 거기에 관해선 눈뜨는 생 명력의 충동을 돕지 못했다. 부모들은 단지 끊임없는 표정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더욱 비 현실적이 되는 소년 시절을 지속하려고 나의 가망 없는 노력을 도와 주었다. 여기에 있어서 부모들이 얼마 만큼의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내 부모에 대해서 비난을 하지 않는다. 나를 완성하고, 나의 길을 발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자 란 대부분의 애들이 그러하듯이 나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군나 이 어려움을 겪고 사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생명의 요구 가 주위의 세계와의 가장 극심하게 대립하는 시기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장 치열하게 싸워 얻어야 되는 심각한 시기이다. 어린 시절이 부패하고 붕괴하여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우리를 떠나려 하고 우리가 갑자기 주위에 우주 공간의 고독과 죽음과 같은 차가움을 느낄 때,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단 한 번 우리들의 운명인 죽음과 재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리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은 영원히 이 암초에 걸려 그들의 전 생애를 고통스럽게도 되돌아 오지 않는 과거에 집착한다. 모든 꿈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살인적인 꿈인 실락원의 꿈에 달라붙는 것이다. 내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에게 소년 시절의 종말을 고해 준 감정과 헛된 꿈은 이야기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어두운 세계', '다른 세계'가 다시 생겼다는 것이다. 일찍이 프란쯔 크로머의 모습을 취했던 어떤 것이 지금은 나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세계와 외부로부터 다시금 내 위에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크로머와의 사건 이래 몇 해가 흘러갔다. 내 생애의 그 극적이고 죄많은 시절은 아주 멀리 가버려 마치 짧디짧은 악몽을 꾼 것과 같았다. 프란쯔 크로머는 오래 전에 나의 생활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의 비극의 다른 중요한 인물인 막스 데미안은 나의 둘레에서 완전 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먼 변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볼 수는 있었 으나 영향을 미치치는 않았다. 그런데 점차 그는 가까이 와서 다시금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 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그 당시 데미안에 관해서 알고 있던 것을 회상해 본다. 나는 1년, 어쩌면 훨씬 오랫동안 단 한 번도 그와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그를 피했고, 그는 절대로 강 제로는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 다. 그리고 나서는 때때로 그의 우정 속에는 냉소와 어떤 비난의 미묘한 울림이 있는 것 같 았으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경험했던 사건과 그 당시 그 가 나에게 작용했던 그 이상한 영향력은 내가 그렇듯이 그도 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찾아본다. 그리고 내가 그를 생각해 보는 지금, 역시 그가 거기에 있어서 주의를 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큰 학생들 틈에 끼어서 학교에 가는 데미안을 본 다. 이상한 태도로 고독하고 조용히 자기 자신의 공기에 둘러싸여 자기의 법칙에 따라 사는 그 를 친구들은 사랑하지 않고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그의 어머니만이 그를 사랑하고 신 뢰하며 그는 또한 어머니와도, 어린이처럼이 아니라 성인처럼 교제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도 가능한 한 그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는 그가 선생에 대해 했다는 쌀쌀한 비평이나 생각될 수 없는 말이나 항의를 소문으로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어디서 있었던 일이던가? 그렇다. 그것도 다시 생각난다. 우리집 앞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날 나는 메모 노우트를 손에 들고 스케치 하는 그를 보았다. 그는 우리 집 문위의 새가 새겨진 옛 문장(紋章)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 있었고, 커튼 뒤에 숨어서 그를 바라다 보았다. 나는 깊은 놀라움을 갖고 문장을 향하고 있는 그의 주의깊고 냉정하고 맑은 얼굴을 보았다. 어른의 얼굴이며, 탐구자나 예술 가의 얼굴이며, 우울했고 의지가 충만했으며 특별히 밝고 냉정하며 학구적인 눈을 갖고 있 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얼마 뒤 거리에서였다. 학교로부터 돌아오면서 우리들 모두는 쓰러진 말 주위에 서 있었다. 그 말은 아직도 멍에 를 메고 농부의 마차 옆에 누워 있었으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무엇을 구하는 듯이, 애원하 는 듯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거리의 흰 먼지는 천 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가 불쾌한 기분으로 그 광경으로부터 얼굴을 돌렸을 때, 데미안 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는 앞으로 밀고 나오지 않고 가장 뒤쪽에 언제나처럼 편안히 아 주 고상하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말의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한 깊고 도 조용한, 거의 환상적인, 그러나 정열을 잃지 않은 신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아야만 했고 그 당시 아직 의식에 떠오른 건 아니지만 무엇인가 대단히 독특한 것을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데미안의 얼굴을 본다. 단지 그가 소년의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만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보았으며, 그의 얼굴이 어른의 얼굴이 아니고 어떤 다른 것이라는 걸 보고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여자의 얼굴과 같은 그 무엇도 있는 것 같고, 남자의 얼 굴도 아니고 특히 잠시 동안은 이 얼굴은 나에게 어른 같지도 어린이 같지도 않고, 늙지도 젊지도 않고, 어쩌면 천 살 먹은, 어쩌면 시간을 초월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인상이 찍혀진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동물이라면 그렇게 보일 수가 있다. 나무들과 별들도 - 내가 지금 어른이 되어서 거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했고, 정확히 느 끼지도 못했으나 무엇인가 그와 비슷한 것을 알고 느꼈었다. 아마도 데미안은 아름다웠을지 도, 내 마음에 들었는지도, 어떤 때는 반감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것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그가 우리와는 다르고 하나의 동물 같지 않으면 영혼 같거나 환상 같기 도 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의 실체가 어떤가를 알지 못했으나 그는 우리 모두와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의 추억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아마 이것까지도 부분적으로는 그 뒤의 인상으로 미루어 만들어 내졌을지도 모른다. 몇 해가 더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와 가까이 접촉할 수 있었다. 데미안만은 그와 같은 나 이의 애들이 받는 견진성사를 받지 않았다. 거기에 곧 소문이 따랐다. 다시 학교에서 그는 원래 유대교도이거나 아니면 이교도일 거라고들 말했고, 다른 애들은 그가 어머니와 함께 아무 종교도 믿지 않거나 어떤 터무니 없는 사악한 종파에 속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것과 관련하여 그가 마치 애인처럼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추측 컨대 그는 지금까지 신앙도 없이 교육되었고 이것이 그의 장래에 대해서 불리한 점이 될까 두려워졌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어머니는 지금 그의 동년배보다도 2년 늦게 견진성사에 참가하도록 결정을 했다. 그래서 그가 당시 한 달간의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동안 나의 반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그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었다. 나는 그와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너 무나 소문과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고, 특히 크로머 사건 이래 내 마음 속에 남겨졌던 부담 감이 나를 혼란시켰다. 그 당시 나는 나 자신의 비밀을 처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게 있 어서 견진성사 준비 시기는 성(性)문제에 관한 결정적인 눈뜨는 시기와 일치했다. 나의 관심 도 그것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신부님의 말하는 일들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요하고 성스러운 비현실 속에 놓여 있었 고, 그것은 아마도 대단히 아름답고 가치 있었던 것 같았지만 절대로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밖의 모든 일들은 아주 현실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이런 상태가 수업에 대한 내 성의를 무관심하게 하면 할수록 나의 관심은 다시금 막스 데 미안에게 쏠렸다.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결합해 주는 것 같았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야기 의 실마리를 따라가야만 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아직도 교실의 불이 켜져 있 었던 이른 아침 어떤 시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신부 선생님은 마침 카인과 아벨에 관 해서 이야기하는 참이었다. 나는 거의 그 이야기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졸려서 거의 듣고 있 지 않았다. 그때 마침 신부님은 높은 목소리로 박력있게 카인의 표적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 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 나는 일종의 감동과 경고 같은 것을 느꼈고 순간적으로 앞쪽 걸상 의 옆으로부터 데미안의 얼굴이 밝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인상은 진지하면서도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가 나를 기켜 본 것은 순간 뿐이었다. 나 는 갑자기 긴장하여 신부님의 말에 귀를 기울려 카인과 그 표적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 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대로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역시 다르게 볼 수 있고, 거기에 관해 비평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내 마음 깊이 느껴졌다. 이 순간에 데미안과 나 사이에 다시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같은 영역에 두 영역에 두 영혼이 함께 속하고 있다는 공감을 느끼자마자, 요술처럼 그것이 공간적인 것으로 옮겨져 갔다. 나는 내가 스스로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 었는지, 그것이 순전히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다. 며칠 뒤에 데미안은 갑자기 자기의 자리를 바꾸고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교실에 가득 찬, 비참하게 가난한 농부집 같은 공기 가 운데서, 내가 아침마다 그의 목덜미로부터 풍기는 부드러운 비누 냄새를 들이마시기를 얼마 나 좋아했는가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에 그는 다시 자리를 바꿔 내 옆에 앉았고 그 해 겨울과 이듬해 봄 내내 죽 거기에 앉았다. 아침 수업 분위기는 아주 변했다. 그 시간은 더 이상 졸리거나 권태롭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을 기뻐하였다. 때때로 우리들은 굉장한 주의력을 갖고 신부님의 말에 귀를 기울렸고, 내 옆에 앉은 그의 시선 하나로 주목할 만한 이야기나 이상한 말에 내 주위를 환기시키기에 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의 다른, 아주 확고한 시선은 나를 경고하고, 비판과 의혹을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했다. 그러나 자주 우리는 충실치 못한 학생 노릇을 하여 아무 가르침도 듣지 않는 때도 많았다. 데미안은 선생님이나 반아이들에 대해 상냥했다. 나는 다른 학생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아무도 그가 크게 웃거나 잡담하거나 선생님의 꾸중을 듣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속삭이는 말이라기 보다는 무슨 표시와 눈짓으로 나를 그 자신의 일에 참가하도록 하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학생 중에 누가 그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고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그는 많은 학생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수업 전에 내게 말했다. "만약 엄지 손가락으로 너에게 손짓을 하면, 저 애하고 저 애가 우리를 돌아보거나 혹은 목을 긁거나 또는 그 밖에 무슨 짓을 할 거다." 그러고 공부 시간중에 내가 그 일에 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을 때, 데미안이 갑자기 눈에 띄는 몸짓으로 자기의 엄지를 나에게 향했다. 나는 재빨리 지적된 학생을 바라보았고, 나는 매번 사슬에 끌리는 듯 요구된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았다. 나는 데미안에게 선생도 한번 시험해 볼 것을 졸랐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수업에 들어가서 그에게 오늘 내가 숙제를 안 했기 때문에 신부님이 나에게 질문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그는 나를 도와 주었다. 신부님이 교리 문답의 한 귀절을 암송할 학생을 찾고 있었는데 그의 두 리번거리던 시선이 죄진 듯한 내 얼굴 위에 머물렀다.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서는 나를 손가 락으로 가리켰고 곧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혼란과 불안에 빠진 듯이 목의 칼라를 만지작거리며,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데미안에게로 갔다. 그러고는 그에게 무엇인가 물으려고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되돌아서서 잠시 헛기침 을 한 후 딴 학생을 지명했다. 나는 이 장난이 나에게 재미있는 반면 내 친구가 나에게도 때ㄸ로 이와 같은 장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교길에 데미안이 내 뒤에서 좀 떨어져 걸어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영락없이 그는 거기서 걸어오고 있었다. "너는 정말로 네가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 수 있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침착하고 요령있게 어른과 같은 태도로 기꺼이 설명을 했다. "아니." 그는 말했다.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비록 신부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생각하 게 만들수도 없어. 그러나 어떤 사람을 잘 관찰할 수는 있을 거야. 그러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비교적 자세하게 말할 수가 있고, 그가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대부분 예측할 수도 있지. 그것은 아주 간단해.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야. 물론 그것은 연습이 필요하지. 예컨대 나방 중에는 암컷이 수컷보다 아주 드문 어떤 종류 의 나방이 있어. 이 나방도 모든 동물과 아주 똑같이 번식하지. 수컷이 암컷에게 수정시킨 다음 암컷이 알을 낳아. 만약 네가 지금 이 나방 중에서 한 마리의 암컷을 가졌다면- 이것 은 자연 과학자가 때때로 실험하는 일이지만- 밤에 이 암컷에게 수컷들이 날아 와. 몇 시간 씩 걸리는 먼 곳에서도! 몇 시간씩 걸리는 먼 곳을 생각해 봐!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 는 모든 수컷은 그 일대에 있는 단 한 마리의 암컷을 알아내는 거야! 학자들은 그것을 설명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야. 훌륭한 사냥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발견하 여 뒤쫓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후각이거나, 혹은 그와 같은 것임에 틀림없어. 알겠니? 나방도 이런 거야. 자연에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설명 할 수 없어. 그러나 지금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 만약 나방 중에 암컷이 수컷만큼 흔하다면 수컷들은 그 날카로운 후각을 갖지 않게 될 것이야! 그것들은 단지 거기에 훈련되 었기 ㏏ 날카로운 후각을 갖게 되었던 거야. 동물이나 사람이나 그의 온 주의력과 의지 를 하나의 일정한 사물에 돌린다면, 그것들도 가능하지. 그것이 전부야. 그리고 이것은 네가 생각하는 바와 똑같아. 어떤 사람을 자세히 살펴본다고 가정을 해봐. 그러면 넌 그 자신보다 그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 하마터면 '독심술(讀心術)' 이란 말을 입 밖에 내어, 지금은 먼 과거의 일이 된 크로머와의 장면을 데미안에게 상기시킬 뻔했다. 이것도 우리 두 사람 사이만의 기묘한 점이었다. 즉 그 가 몇 년 전에 나의 생활에 대해 그토록 진지하게 개입했던 것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그런 일은 두 사람 다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이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혹은 우리 두 사람이 다 상대방이 그것 을 잊어버렸기를 굳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두 번 우리가 같이 거리를 걸어 가다가 프란쯔 크로머를 만난 일도 있었지만, 우리는 시 선을 교환하지도 않고 그에 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의지는 어떻게 되지?" 나는 물었다. "너는 인간들이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했지. 그 런데 너는 다시 의지를 집중시킨다면 사람들은 목적에 도달한다고 말했어! 그 말은 서로 모 순되는데! 내가 만약 나의 의지를 지배할 수 없다면 난 의지를 이곳 저곳 마음대로 돌릴 수 도 없잖아."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그를 기쁘게 했을 때면 언제나 그는 그렇게 했다. "좋은 질문이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항상 물어야 되고 의심해야 돼. 그러나 문제 는 간단해. 예를 들어 만약에 나방이 그의 의지를 별이나 그 밖의 어떤 곳으로 향하게 한다 해도 그렇게 될 수 없어. 사실 나방은 그런 일을 절대로 시도하지 않는다. 나방은 단지 자기 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 자기에게 소용되는 것, 자지가 무조건 가져야 하는 것만을 찾 아. 바로 그럴 때에 믿을 수 없는 일까지도 그는 달성할 수 있지. 그들은 그들 외의 다른 동 물들이 가지지 못한 불가사의한 육감을 발달시키는 거야. 인간은 더 많은 활동 범위와 확실 히 동물보다 더 많은 흥미를 갖고 있어. 그러나 우리도 비교적 아주 좁은 범위에 묶여 있으 며, 그 이상으로 벗어날 순 없어. 나는 이것 저것을 공상할 수 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 극에 가고 싶다든가 아무튼 온갖 공상을 다 할 수 있어. 그러나 그 소망이 나 자신 속에 잘 자리잡고, 사실로 나의 존재가 그 소망으로 충만되어 있을 때에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하고 강하게 원할 수 있어. 그런 경우라면 너의 내심에서 우러 나오는 명령을 시험하려 고 하자마자, 그것은 성취될 것이고 너의 의지를 잘 훈련된 말을 다루듯이 구사할 수가 있 어. 만약 내가 우리 신부님이 앞으로 안경을 더 이상 쓰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장난이야. 그러나 저 앞 내 의자로 자리를 옮기려고 확고한 의지를 내가 가졌을 때는 그것은 아주 잘 되지. 그땐 가을이었어. 그때 갑자기 알파벳 순으로 내 앞 이고, 그 때까기 병을 앓고 있던 한 애가 나왔어. 누군가가 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에 내가 그렇게 했지. 왜냐하면 내 의지가 곧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 하 고 나는 말했다. "그 당시 그게 나에겐 아주 이상했어. 우리가 서로 흥미를 가졌던 그 순간 으로부터 너는 내 자리로 점점 가까이 왔어.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이지? 처음에 넌 바로 내 곁에 앉지 않고 두세 번 내 앞의 의자에 앉았지? 왜 그랬어?" "그것은 사실 이래. 내가 나의 처음 자리로 떠나려고 했을 때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스 스로도 잘 알지 못했어. 나는 단지 내가 좀 뒤로 가고 싶다는 것만 알고 있었어. 네게 가는 것이 나의 의지였지만 그것을 아직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 동시에 너 자신의 의지가 나를 끌어 주고 나를 도왔어. 내가 네 앞에 앉았을 때 비로소 나의 소망이 반쯤 채워졌다고 생각 했어. 나는 본래부터 네 옆에 앉는 것 외엔 다른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 "그러나 그 때는 새로 들어온 학생은 없었는걸." "없었어.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간단히 했어. 그리고 손쉽게 네 옆으로 자리를 옮겼지. 나하고 자리를 바꾼 그 아이는 그저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 나하는 대로 내버려 뒀어. 그리고 신부님은 어느때 물론 거기에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았을 거야. 어쨌든 그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 때마다 무엇인가 속에서 그를 괴롭혔지. 즉 신부님 은 데미안이라는 내가, 이름 첫머리에 D자를 가진 내가, 뒤쪽 S사이에 앉아 있다는 게 어울 리지 않다는 걸 아셨지!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의식에까지 밀고 나오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의 의지가 그것에 대항했고, 자꾸만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야. 그 사람 좋으신 선생님은 다시 또 한 번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나를 연구하기 시작했 지. 나는 그러나 그 때 간단한 방법이 있었어. 나는 매번 그의 눈을 아주 똑바로 바라보았 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지.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져. 만약 네가 누 구에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갑자기 그의 눈을 응시해 보고 그가 전혀 불안해하지 않 으면 그 일을 포기하도록 해. 그런 경우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야. 나는 사실 그 방법이 소용없는 단 한명을 알지." "그게 누구야?" 나는 재빨리 물었다. 언제나 생각에 잠길 때 하듯이 그는 살며시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에 그는 시선을 돌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지만 그 질문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의 어머니에 관해서 이야기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함께 그는 매우 친밀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에게 어머니에 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자기 집에 나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거의 몰랐다. 그 당시 나는 자주 데미안을 흉내내어, 내 의지를 그렇게 함께 모아서, 그것을 이루고자 시 도해 보았다. 그것은 내게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성공 하지 못했다. 그것에 관해 데미안과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도 또한 묻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종교 문제에 관한 나의 신앙심에는 많은 틈이 생겼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데미안으로부터 영향받은 사고방식과 완전히 무신론을 들고 나서는 친구들과는 차이가 있었 다. 그들은 때때로 하나의 신을 믿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인간답지 못하며, 삼위일체나 예수 의 동정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웃음거리이고,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이런 부질없는 것을 쳐들고 다닌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는 따위의 말을 들려 주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회의를 느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온갖 경험에 비추 어 나의 부모님이 살아 가시는 것과 같은 경건한 생활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또 이것은 가치없는 것도 아니고 위선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종교적 인 것에 대하여 여전히 매우 깊은 경외감을 가졌다. 단지 데미안만이 내가 이야기와 교리를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이고 유희적이고 환상에 가득 차게 보도록 설명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 었을 따름이다. 적어도 그가 나에게 알게 한 설명을 나는 항상 기쁘게 만족을 가지고 따랐다. 많은 것이 나에게 너무도 뚜렷한 것 같았다. 카인에 대한 해석까지 그랬다. 그리고 한 번은 견진성사 수업중에 대담한 해석을 해서 나 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은 골고다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구세주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성경 의 보고는 아주 엣날부터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때때로 성 금요일 (예수 수난일) 같은 때에 아버지가 고난의 이야기를 낭독하신 뒤엔 진정으로 감동이 되어, 이 고난이 가득찼으며 아름답고 창백하고 불가사의하고 굉장히 활기에 찬 세계에서, 즉 겟 세마네나 골고다에서 나는 살고 있는 듯했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엔 이 비밀 에 가득찬 세계의 어둡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모든 신비한 전율울 가지고 넘쳐 흘렀다. 나 는 오늘날도 이 음악 속에서 그리고 <비극의 행동 (Actus tragicus)> 속에서, 모든 시와 예 술적 표현의 정수(精髓)를 발견한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 시간이 끝났을 때 명상에 잠겨 나 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싱클레어, 무엇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읽고 입 속에 서 음미해 보면 거기엔 바보같은 무언가가 있어. 바로 두 도둑에 대한 일 말이야. 세 개의 십자가가 언덕 위에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굉장해! 그러나 이 정직한 도둑에 대한 감상적 인 성경 이야기를 좀 봐! 맨 처음엔 그는 범죄인이었고 수치스러운 짓을 범했다는 걸 모르 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 말 한마디에 녹아나서 별안간 착하게 되어 후회한다는 그 따위 일이 어디 있어! 무덤을 단 두 발 앞둔 곳에서의 그런 후회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지? 그것 은 달콤하고 부정직하고 감동적인 면과 기껏해야 교화적인 배경을 갖는 신부 이야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냐. 만약 오늘날 그 도둑 중의 하나를 친구로 고르지 않으면 안 되거나, 둘 중 어느 한쪽에 신뢰를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는 아니 야. 아니지,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은) 사나이이고 성격있는 다른 도둑이야. 그는 자기의 위치에선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회개 따위는 문제삼지 않고, 제 갈길을 끝까 가며, 마지막 판국에 가서 그를 그때까지 도와줬던 악마에게 비겹하게 설교한다거나 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는 성격이 있는 자야. 성격이 있는 사람은 성경 이야기에선 손해를 보지. 아마 그도 카인 의 후예가 아닌가 하고 너는 생각지 않니?"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나는 이 십자가 고행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고 믿었는데 이제 비로소 얼마나 틀에 박힌 태도로, 그리고 얼마나 빈약한 상상력과 환상으로 그것을 듣 고 읽었는가 하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데미안의 새로운 사상은 내게는 치명적이었다. 그 것은 진리라고 믿어왔던 이제까자의 생각을 단번에 뒤엎으려고 위협했다. 아니다, 절대로 모 든 것을, 더구나 가장 신성한 것까지를 함부로 보아서는 절대 안된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직 내가 미처 입을 열고 말하기도 전에 나의 반발을 먼저 알아챘다. "알고 있어." 그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건 옛 이야기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아! 그러나 네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종교의 결점을 뚜렷 하게 볼 수 있는 점이 하나 여기에 있다는 것이야.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완전은, 하느님은 훌륭한 현상이지만, 원래 하느님이 나타내야 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야, 하느님은 선한 것, 고귀한 것, 아버지와 같은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높 고 감상적인 것이기도 하지. 아주 옳아! 그러나 세상은 다른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어. 그런 데 그것을 모두 악마의 세계로만 돌려 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근원을 이루는 모든 성적 생활 을 간단하게 묵살하고, 가능하면 악마의 것으로, 그리고 죄악으로 설명하고 있단 말이야! 나 는 사람들이 이 여호와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아무 반대도 하지 않아, 조금도. 그러나 나 는 우리는 단지 인위적으로 분리한 공인된 반쪽 세상뿐이 아니라 온 세상을 숭배하고 마땅 히 신성시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게 봉사함과 동시에 악마에게도 봉사해 야 돼.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악마까지도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는 하느님을 창조해야 돼. 그 하느님 앞에선,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일이 일어날 때 눈 감을 필요가 없을 거야." 데미안은 그답지 않게 거의 격렬하게 되었으나 곧 다시 미소를 되찾고 더 이상 나에게 강 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내 마음 속에서 언제나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거기에 대해 누구에게 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소년 시절의 수수께끼에 적중되는 일이 있다. 데미안이 그때 하느님과 악마에 대해서, 그리고 신적이며 공인된 세계와 묵살된 악마적인 세계에 관해 이 야기 한 것은 참으로 나 자신의 생각이었고 신화였으며, 또 한 두개의 세계, 혹은 세계의 반 쪽-밝은 쪽과 어두운 쪽-에 관한 생각 바로 그것이었다. 나 개인의 문제가 모든 사람의 문 제이며, 인생과 사색의 문제라는 판단이 갑자기 성스러운 그림자처럼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위대한 이념의 도도한 흐름 위에 불현 듯 내 개인적 삶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을 때, 불안감과 경건함이 동시에 엄습해왔다. 그 깨달음은 물론 무엇인가 확인할 수 았게 해주었고, 그 확인은 나를 기쁘게 했지만, 그렇 다고 기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책임과, 더 이상 어린이일 수가 없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소 리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으나, 이 유독히 유년 시절 이래 품어온 '두 개의 세계'에 대한 나의 생각에 관해서 내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은 데미안은 내 마음 깊숙이 있는 감정이 그와 통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 을 이용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내게 기울였던 적이 없는 깊은 주의를 갖고 귀를 기울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나 는 시선 속에서 다시 이상한, 동물적인 시간의 초월과 헤아릴 수도 없는 연령을 보았기 때 문이다. "우리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이야기해 보자." 그는 달래는 듯한 투로 말했다. "난 네가 어떤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이 생각하고 있는 애라는 것을 알아. 만약 그렇다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전부를 결코 생활해 보지 못했다는 걸 알거야. 그건 좋은 일은 아냐. 너는 너의 '허용된 세계'가 단지 세계의 절반 밖에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리고 너는 신부님이나 선생님이 하듯, 그 나머지 반쪽을 은폐하려고 노력했어. 잘 되지 않을걸! 일단 사색하기 시작한 사람에겐 누구에게도 그건 잘 되지 않아." 이 말은 내 가슴 깊게 부딪혔다. "그렇지만......" 나는 외치다시피 물었다. "하지만 사실상 실제로 금지되고 증오할 만한 일이 있다는 걸 너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 그것들이 금지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잖아? 살인과 모든 부도덕한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그런 것이 존재 한다고 해서 우리도 휘말려 들어가 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오늘 당장 그 문젤 해결할 순 없어." 그는 나를 위로했다. "너는 확실히 살인을 하거나 강간해서는 안돼. 그러나 사실 너는 아직 '허용된 것'과 '금지 된 것' 이라 불리우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진 못했어. 넌 아직 진리의 한 조각 을 감지했을 뿐이야. 다른 것도 차츰 알게 될거야. 그것을 기대해! 이를테면 넌 지금 한 1년 전부터 네 속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강한 하나의 충동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금지된 일 이라고 생각되는 거야. 그리스인들과 다른 많은 민족들은 반대로 이 충동을 하나의 신적인 것으로 받들어, 대축제를 베풀며 그것을 숭배했어. 그러므로 '금지된 것'이 영원한 것은 아 냐. 그것은 변할 수가 있어. 누구나 신부님께 가서 결혼 서약을 하면 오늘이라도 곧 그 여자 와 사는 것을 허락받는 것은 물론이야. 다른 민족에 있어서는 달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러니까 우리들 각자는 무엇이 허락되어 있고, 무엇이 금지되었나를-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스스로가 찾아야 돼. 사람은 금지된 것 을 전혀 범하지 않고서도 동시에 악한이 될 수가 있어.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사실 그건 편의상의 문제야! 너무 게으른 사람은 이때까지 있어 온 것과 같은 금지사항에 복종하 기 마련이지. 그러는게 속 편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그들 내부에서 계명을 느끼기 때 문에 신사들이 매일 같이 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보통의 경우 엄금된 다른 일들 이 허용되기도 하는 거야.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돼." 그는 갑자기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을 후회하는 듯 말을 멈췄다. 그 당시 나는 이미 데미 안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가 있었다. 즉 그는 자기의 생각을 기분좋게, 그리고 겉보기에는 피상적으로 말하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말한대로 '단지 말하 기 위한 이야기'는 한사코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한 흥미 이외의 다분히 장난기와 놀이의 기쁨, 혹은 그 밖의 무엇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요컨대 완전한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느꼈던 것이 다. 내가 지금 막 쓴- '완전한 진지성의 결여'란 말을 다시 읽으니, 또 하나의 장면이 갑자기 나에게 떠오른다. 그 장면은 가장 인상 깊은 것이었다. 아직 반쪽은 어린이였던 그 시절에 막스 데미안과 함께 경험한 것이다. 우리의 견진성사가 가까워졌다. 종교 수업의 마지막 몇 시간은 최후의 만찬에 관한 것이었 다. 신부님은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신성한 분위기가 고조된 것을 이 시간 동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마지막 두서너 시간 중에 내 생각은 다른 곳에, 즉 내 친구의 인품에 얽매 여 있었다. 우리에게 교회라는 사회로의 엄숙한 입문이라고 설명되는 견진성사를 기다리는 동안의 이 약 반년 간의 종교 교육의 가치는 내게 있어서는 여기서 배운 데 있는 것이 아니 라, 데미안의 옆에 있으면서 그의 영향을 받은 데에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생각이 나에게 몰 려들었다. 나는 지금 입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주 다른 사상과 개성있는 단체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 지상 어딘가에 존재하여야 하고 그 대표자나 사도가 내 친구라고 나는 느꼈다. 나는 이 생각을 뿌리치려고 노력했다.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견진성사 의식을 어떤 품위를 가지고 경험해야겠다는 것을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의식은 나의 새로운 생각과는 거의 조화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내 가 아무리 애써도 나의 새로운 사상은 역시 변하지 않고 깊게 자리를 잡아 점차로 가까이 오는 교회의 의식에 대한 생각에 연결되었다. 나는 다른 태도로 의식을 마칠 각오를 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내가 데미안에 의해서 알게 된 하나의 사상의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 한다. 그 당시 나는 다시금 그와 활발하게 토론했다. 바로 수업시간 전이었다. 데미안은 말이 없 었고, 아마도 좀 건방지고 점잖을 빼는듯한 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많이 지껄였어." 그는 전에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들떠서 떠드는 말은 아무 가치도 없어. 전혀 없어.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갈 뿐이야.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 처럼 자기 자신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어 가지 않으면 안돼" 그리고 나서 우리는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에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자리 쪽에 무엇인가 독특한 것, 공허랄까 냉기랄 까, 또는 마치 그 자리가 텅 빙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압박해오 자 나는 돌아다보았다. 거기에 데미안은 여느 때와 같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상시와는 아주 다르게 보였다. 내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로부터 발 산되어 그를 에워쌌다. 나는 그가 눈을 감았다고 믿었으나 자세히 보니 눈을 뜬 채였다. 그 러나 그 눈을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눈은 꼼짝 않고 내면으로 향해 있었고 아주 먼 곳으로 향해 있었도. 꼼짝도 않고 그는 거기에 앉아 있었고, 숨조차 쉬는 것 같지 않았으 며 그의 입은 나무나 돌로 조각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돌처럼 아무 데도 핏기 가 없었다. 그의 갈색 머리칼만이 뚜렷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 손은 앞에 있는 의자 위에 돌 이나 과일 같은 물체처럼 창백하고, 꼼짝 않고 놓여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축 늘어지지 않았고, 마치 숨겨진 강한 생명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단단하고 강한 껍질 같았다. 이 광경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는 죽었다, 라고 생각하고 거의 큰 소리로 말할 뻔했 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곤혹에 찬 시선으로 그의 얼굴, 그의 창백 한 돌과 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것이야말로 데미안이라고 느꼈다. 나와 걷고 이야기하던 평상시의 데미안은 데미안이 반쪽- 그런 역할을 하고 나와 맞추고 친절로서 협조했던 반쪽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짜의 데미안은 이처럼 무정하고 태고적이며, 동물 같고 돌 같으며, 아름답고 차갑 고, 죽어 있는 동시에 은밀히 이제까지 없었던 생명력에 충만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이와 같은 적막한 공허와 영기(靈氣)와 고독한 죽음이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 데미안은 완전히 자기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렇게 느꼈다. 나는 이렇게 고독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와 아무 관계가 없고, 그는 나에게도 말할 수가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먼 섬 위에 있는 듯이 나에게는 멀어 보였다. 나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이쪽을 봐야 하고, 모두가 전율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조각과 같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상처럼 꼿꼿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이마에 앉아서 천천히 코를 거쳐 입술로 기어다녔다- 그러나 그는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어디에,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 그는 천국에 있는 가? 지옥에 있는가? 그 점에 관해서 그에게 묻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끝나서 그가 다시 살아서 숨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는 전과 같았다. 어디에서 그는 돌아왔는가?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피로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다시 생기가 돌고 그의 손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지금 광 채를 잃고 지친것 같았다. 그후 며칠 동안 나는 침실에서 여러 번 하나의 새로운 연습에 몰두했다. 즉, 의자 위에 꼿 꼿이 앉아 눈을 딱 고장시키고 전혀 움직이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지속할 수 있으 며 동시에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단지 피로했고 눈꺼플 이 지독하게 갑갑하기만 했다. 그후 견진성사의 날이 왔다. 그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추억도 남아 있지 않다. 이때 모든 것은 변했다. 소년 시절은 내 주위에서 서서히 무너져갔다. 부모님들은 나를 어 쩐지 난처한 마음을 품고 바라다보았다. 누나들은 나에게 아주 낯설어졌다.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지금까지 익숙했던 감정과 기쁨은 변조되고 빛 바랜 것이 되었다. 정 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유혹하지 않았고, 세상은 내 주위에서 고물상처럼 맥빠지고 매력 이 없었고, 책은 종이 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날 나무 주위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나무 위에 비가 내 리고, 햇빛과 서리가 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 생명은 서서히 맨 안쪽으로 답답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방학이 끝나면 나는 다른 학교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때 때로 어머니가 아주 정답게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미리 이별을 말하고 사랑과 향수와 잊을 수 없는 것들을 내 가슴 속에 마술처럼 만들어 주려고 하셨다. 그 무렵에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4.베아트리체 나는 데미안을 다시 보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나자 그곳을 떠났다. 부모님이 함께 오셔서 대 단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나를 김나지움의 어느 선생님에게 맡기셨다. 만약 부모님들이 어떤 곳에다 나를 들여보냈는가를 아셨다면 놀라신 나머지 온몸이 마비된 듯 굳어졌을 것이 다. 문제는 항상 시간이 감에 따라 내가 선량한 아들이 되고 쓸모있는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또는 내 천성이 다른 길로 나아갈 것인가에 있었다.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의 정신, 그런 그 늘 속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던 나의 마지막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때때로 성공한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견진성사 뒤의 방학 동안 처음으로 느껴본 이상한 공허와 고독은 (이 공허와 이 희박한 공 기를 후에 나는 얼마나 맛보게 되었던가?) 그렇게 빨리 지나가지는 않았다. 고향을 이별하 는 것은 의외로 아주 쉬웠다. 나는 사실 내가 가슴 아파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누이 들은 이유없이 울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놀랐다. 항상 나 는 감정이 풍부한 어린이였고 근본에 있어 아주 선량한 아이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주 변해서 외부세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온종일 나의 내부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 속 깊이 흐르는 금지된 어두운 강물 소리를 듣는 데만 몰두했다. 이 반 년 동안에 나는 갑자기 성장했으며 키는 크고 야위었다. 몸은 아직 성숙치 않았으나 세상을 보는 눈을 달라졌다. 소년의 상냥함도 나에게서 사라졌기에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막스 데미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를 싫어했고 정신적으로 메말라 가는 내 생활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 다. 기숙사 학생들 사이에서 처음에 나는 사랑 받지도 못했고 주의를 끌지도 못했다. 동료들은 처음엔 나를 조롱했고 이윽고는 나로부터 떨어져 갔다. 그리고 나를 위선자이며 기분 나쁜 괴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대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한층 그 태도를 과장했 다. 나는 남몰래 슬픔과 썩어감, 그리고 가끔 발작하는 절망에 지쳐 있으면서, 겉보기에는 남자답게 세상을 멸시하는 듯한 표정을 가졌다. 그러고는 고독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자신을 저주했다. 나는 학교에서, 집에서 쌓아올린 지식을 파먹으며 보냈다. 이 학급은 나의 이전 학급 (라틴어 학교) 에 비하여 좀 뒤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은 어 린이 취급을 하고 업신여기는 버릇이 생겼다. 1년 동안이나, 아니 그 이상을 그렇게 지냈다. 처음 몇 번인가의 귀향도 새로운 태도를 가 져 오게 하지 않았다. 나는 기꺼이 학교로 돌아왔다. 11월 초순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겨서 가벼운 산책을 하곤 했다. 산책 도중에 나는 가끔 일 종의 황홀함과 우울함, 세상에 대한 멸시와 자기 경시가 가득 찬 황홀감을 맛보았다. 나는 어느 날 저녁, 습기차고, 안개 낀, 땅거미가 질 무렵의 도시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공원의 넓은 가로수길은 완전히 비어 있어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길에는 나뭇잎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야릇한 어떤 쾌락을 느끼면서 그 나뭇잎을 발로 파헤쳤다. 축축하고 쓴 냄새가 올라왔다. 안개 속에서 먼 곳의 나무들이 마치 유령처럼 큰 영상과 그 림자를 던져 주었다. 가로수 끝에서 나는 망설이며 멈추어 서서 검은 나뭇잎을 바라보며 풍화되고 죽어버린 습 기찬 향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아! 얼마나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인가? 그때 옆길에서 깃 달린 외투를 바람에 나부끼며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내가 계속해서 더 걸 어 나가려고 했을 때 그가 나를 불렀다. "어이! 싱클레어!" 그는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 기숙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알퐁스 벡이였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 어린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에 대해서도 늘 짖궂고 점잖은 티를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나는 조금도 반감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곰처럼 힘이 세어 사감 선생님도 꼼짝 못한다는 소문이 김나지움 학생들 사이에서 있 었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니?" 그는 어른들에게 겸손하게 대할 때의 말투로 상냥하게 말했다. " 이봐, 알아맞춰 볼까? 너 시를 짓고 있지?" "아니, 그런 생각 안 했어." 나는 무뚝뚝하게 부인했다. 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지껄였다. 이런 일은 전혀 내 습관에 없는 일 이었다. "싱클레어,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나 하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저녁 안개 속을 거닐며, 가을의 상념에 잠겨 있을 때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럴 땐 시를 짓기를 좋아하는 걸 난 알고 있어. 물론, 죽어가는 자연에 관해서, 그리고 또한 그와 더불어 사라져가는 청춘에 관해서 시를 짓는단 말이야. 하린리히 하이네처럼." "난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나는 항의했다. "그런 건 어떻든 좋아. 그러나 이런 날씨엔, 포도주 한 잔쯤 마실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근사하다고 생각해. 같이 가지 않을래? 마침 나도 혼자라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싫은가? 네마 모범생이 되어 야 한다면 굳이 너를 유혹하고 싶지 않아."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교회에 있는 조그만 술집에 앉아 알쏭달쏭한 포도주를 들며, 두꺼운 잔을 서로 부딪혔다. 어쨌든 처음엔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술에 익숙치 않아서 곧 나는 많이 떠벌리기 시작했다. 내 속에서 하나의 창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세계 가 그 안으로 비쳐 들어왔다.- 오랫동안, 굉장히 오랫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주 훌륭하게 했다. 벡은 만족스럽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드디어 나는 무엇인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어깨를 치고는 굉장한 놈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 데 대한 막혔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었다는 것,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연장자에 게 무엇인가 중요시되었다는 것 때문에 내 가슴은 기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놈이라고 불렀을 때, 그말은 달콤하고 독한 술처럼 내 마음 속으로 흘러들었다. 세 상은 새로운 색깔로 불탔고, 생각은 백 개의 콸콸 솟는 샘에서처럼 흘러내리고, 불꽃이 마음 속에서 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동급생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는데 두 사람의 의견은 서로 일치하는 듯이 보였다. 서로를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벡은 어떻게 해서든지 내 연애 경험을 고백시키려고 했다. 그 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야기거리가 될 만한 연애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 느낀 것, 꾸며낸 것, 상상한 것은 내 속에서 불타 오르고 있었으나, 술로는 마음만 울적해질 뿐 속을 터놓게 되지 않았다. 여자들에 관해서 벡은 훨씬 많이 알았다. 나는 그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일이 그에게는 평범한 사실로 드러났고, 당연한 일로 보였다. 알퐁스 벡은 18세쯤 되었는 데, 벌써 많은 경험을 쌓았다. 특히 여자들이란 기분을 맞춰 주고 친절하게 대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존재들이며, 그러나 그건 참으로 근사하게 보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보다 부인들에게 노우트나 연필을 하는 가게의 야켈트 부인- 그녀와는 통할 수 있다, 그 여자네 카운터 뒤에서 일어났던 온갖 일은, 어떤 책에도 씌저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깊이 매혹되었으며 정신을 빼앗기고 앉아 있었다. 물론 나는 야켈트 부인에게 흥미가 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어른들의 세계에는 내가 한 번도 꿈꾸어 본 일이 없는 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거기에는 과장된 점도 있 었다. 그리고 그것 모두는 내가 생각했던 사랑의 맛보다는 훨씬 덜했고 평범했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사실이었고, 생활이었고, 모험이었다. 그것을 경험했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 각하는 사람이 내 옆에 앉아 있다. 우리의 대화는 좀 저속했고, 점점 더 내용을 잃어갔다. 나는 지금 더 이상 천재적인 작은 놈도 아니고, 단지 어른의 말에 귀기울리는 작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난 몇 달 간 의 내 생활에 비해 보면 이것은 가치있고 낙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츰 술집에 앉아있다는 것과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은 아주 엄하게 금지되어 있는 사항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튼 나는 그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과 혁명적인 기분을 맛 보았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아주 똑똑하게 기억한다. 우리들이 밤늦게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로등 옆을 지나, 차갑고 눅눅한 귀로에 올랐을 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그것은 즐겁 지도 않았고,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무엇인가 매력적이고 달콤한 것을 지니고 있었으며, 반 란과 방종이 있었으며, 생명과 정신이 있었다. 벡은 나를 풋나기라고 욕을 했지만, 나를 부지런히 돌보아 주었다. 그는 나를 반쯤 안다시 피하여 기숙사로 왔다. 거기서 둘은 열린 복도의 창문으로 살짝 숨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잠깐 잠을 자다가 고통에 못 이겨 잠을 깼을 땐 이미 취기는 가셔 있었고, 미 칠 듯한 슬픔이 나를 엄습해 왔다.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나는 아직도 낮에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있었고, 옷과 신발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담배 냄새와 토한 음식 냄새가났다. 그리고 두통과 구토와 미칠듯 한 갈증 사이에서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하나의 광경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나는 고향와 집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누나와 정원을 보았다. 고요하고 고향 냄새가 나는 나의 침대를 보았고, 학교와 시장을 보았고, 데미안과 견진성사 수업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밝 았고, 광채에 둘러싸여 있었고, 놀라웠고, 신성했고, 깨끗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금에 서야 내가 그렇다는 걸 알지만- 어제까지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도 나에게 속해 있었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시각 그것들은 가라앉았고, 저주받았으며, 더 이상 나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나를 추방했고 더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온갖 사랑과 친밀, 내가 예전에 아 득한 황금의 소년 시절의 정원에서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경험했던 것들, 어머니의 키스, 해 마다의 크리스마스, 경건하고 밝았던 주일날 아침, 정원의 모든 꽃- 이 모든 것은 황폐하게 변하고 말았다. 나는 두 발로 모든 것을 밟아 버렸다. 만약 지금 경찰이 와서 나를 묶는다 해도, 그리고 불량배로서, 신전을 모독한 놈으로서 교수대로 끌어간다고 해도 나는 이해를 하고, 기꺼이 끌려가며, 그것이 옳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쭐거리면서 세상을 경멸한 나! 오만한 정신으로 데미안의 생각에 따라갈수 있었던 나! 내던져지고 음탕하며, 무서운 충동의 습격을 받아 술취했고, 더럽고 메스껍고, 속되고 방종 한 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수하고 광채와 사랑스런 부드러움이 가득찬 정원 속에 묻혀 있던 나, 바하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이 꼴이 된 것이다. 나는 메스껍고 분노에 넘쳐 자신의 조소를 듣는다. 술에 취했고 자제할 수 없고, 경련적으로 어리석게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를...... 이것이 나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감정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통받는 것이 내게는 또한 쾌락이 되기도 했다. 너무 오래 나는 맹목적으로 무감각하게 기어다녔고,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은 침묵을 하여 초라하게 한쪽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와 같은 자기 탄식과 공포와 무서운 감정에까지도 환영의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감정은 있었고, 불꽃도 타올랐고, 심장은 움직였다! 비참한 가운데서 나는 어수선하게 자유의 봄과 같은 무 엇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외관상으로 몹시 타락해 갔다. 최초로 술에 취했던 것은 곧 그것만으로 그치 치 않았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많이 마셨고, 행패를 부렸다. 나는 그 패거리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차츰 그들에게 끌려 다니거나 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인솔자였고 중심 인 물이었으며, 대담하게 술집을 찾아가는 단골 손님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두운 그 세계에, 그리고 악마의 패거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에선 멋들어진 놈으로 통했다. 동시에 내 마음은 비참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자기를 파괴하는 방탕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거리들에게서 인솔자이며 굉장한 놈이며, 대단히 과단성 있고 기지 있는 놈이라고 일컬 어지는 반면, 내 가슴 깊은 곳에는 근심에 가득 찬 불안한 마음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술집을 나와 거리에서 어린애들이 깨끗하게 머리를 빗고 일요일의 옷 차림을 하고 밝고 만족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눈물이 흘러내렸던 것을 아직도 나 는 기억한다. 술집의 더러운 식탁을 끼고 앉아 거품이 넘치는 맥주를 마시면서 대단한 독설 로써 친구들을 즐겁게 하고 때때로 놀라게하며 지냈으나, 남모르는 나의 가슴 속에서는 반 대로 내가 조소했던 모든 것을 존경해 오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울면서 나의 영혼 앞에 서, 나의 과거 앞에서, 어머니와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결코 다른 친구들과 일체가 되지 않았다는 것, 내가 그들 사이에서 고독했고, 그래서 이렇게 괴로워하게 된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나는 술집의 영웅이요, 독설가였다. 나 는 선생님과 학교, 부모님과 교회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에 슬기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나는 음담패설에도 끄덕않았고 때로는 나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친 구들이 여자에게 갈때엔 절대로 함께 가지 않았다. 나는 고독했고 사랑에 대해 불붙는 동경 과 절망적인 동경에 차있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난 난봉꾼같을 수도 있었지만 사실 나보다 더 상처받기 쉽고, 수줍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내 앞을 지나가는 아름답고 깨끗하에 밝고 우아한 소녀를 볼 때마다 나는 굉장히 순결한 꿈을 가꿀 수 있었다. 그 소녀들은 나보다 천 배나 선량하고 결백한 듯 보였다. 한동안 나는 야켈트 부인의 문방구에는 가지 않았다. 그 여자를 보면 알퐁스 벡이 그 여자에 대해 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새 친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독하고, 남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더 그들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폭음과 호언 장담이 정말로 나에게 만족을 준 때가 있는 지는 사실 알지 못한다. 나는 술을 먹는 것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매번 고통스러운 결과 를 느껴야만 했다. 모든 것이 강제와 같았다. 나는 충동이 명하는 대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밖에는 무엇을 내가 해야 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오래 혼자 있으면 나는 공포를 느꼈 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느껴지는 부드럽고 부끄러운 내적 발작에 대해 불안을 가졌다. 나는 또한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부드러운 사랑의 생각에 불안을 느꼈다. 나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하나 있었다 - 친구였다. 내가 만나기를 좋아하는 두 세명의 동 급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얌전한 애들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품행 나쁜 내 행동은 오래 전부터 파다하게 소문이 나서 누구나 알고 있었다. 모두들 나를 바탕이 흔들거리는 희 망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피했다. 선생님은 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엄하게 벌을 받았다. 내가 결 국 퇴학당하리라는 것은 모두들 예측하고 있는 일이다. 나자신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 는 오래 전부터 선량한 학생은 아니었기때문에 더 이상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끼면 서, 어물어물 속여가며 가까스로 모면해 나가고 있었다. 하느님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많은 길이 있다. 그 당시 하느님은 나와 함꼐 그런 길을 걸어갔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더럽고 끈적끈 적한 것 너머로, 그리고 깨어진 맥주 잔과 독설로 지새운 밤들 너머로 쉬지않고 괴로워하며, 무섭고, 더러운 길을 기어다니는 추방된 몽유병자인 나를 본다. 어떤 사람이 공주에게 가다 가 악취와 오물이 가득찬 뒷골목 진창 속에 빠졌다는 그런 꿈 이야기가 있다. 내 경우가 바 로 그러했다. 이런 좋지 않은 방식으로 해서 나는 고독하게 되고,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 사 이에 닫힌 에덴동산의 문에는 자비심이 없는, 삼엄한 문지기들이 있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향수의 시작이요, 깨어남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사감 선생님의 편지로 경고를 받고 성(聖) # # 시에 나타나 갑자기 나 에게 걸어오셨을 때 나는 놀랐고, 몸이 굳어졌다. 그해 겨울의 끝무렵 두 번째로 아버님이 오셔서 꾸짖고, 간청하고, 어머니를 상기시키려고 했을 때는, 나는 이미 신경이 굳었고 무관 심하게 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끝내 화를 내시며 만약 내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나를 모욕적이고 불명예스럽지만 퇴학을 시켜 감화원에 넣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때 아버님이 떠나셨을 때, 나는 그런 배짱이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고, 나에게로 통하는 어떤 길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 마 동안 그렇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느꼈다. 내가 무엇이 되든 나로서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었다. 술집에 앉아 누군가를 꾸짖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이상하고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세상과 싸웠다. 이것이 내가 항의하 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을 이겨 나갔다. 때때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 세상이 나 같은 사람을 쓸 수 없다면, 나와 같은 사람들은 파멸할 것이며, 세상이 그 손해를 입어도 하는 수 없다. 그 해, 크리스마스 휴가는 아주 우울했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보시고 놀라셨다. 나는 전에 비해서 몰라보게 숙성했고, 홀쭉한 얼굴은 회색빛이 되고 거칠어 보였다. 표정은 축 늘어진 듯했고, 눈 언저리엔 부스럼이 나 있었다. 처음 나기 시작한 몇 가닥 수염과 얼마 전부터 쓰 기 시작한 안경으로 어머니를 더욱 낯설게 했다. 누나들은 뒤로 물러나 킥킥대고 있었다. 그 저 불쾌할 뿐이었다. 아버님과 서재에서 대화할 때도 기분이 언짢았으며, 쓴맛이 났다. 몇몇 친척들의 인사도 기분이 나빴고,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더욱 그러했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크리스마스 날은 우리 집에선 굉장한 날로 되어 있었다. 축제와 사랑과 감사의 밤이 었으며, 부모님과 나와의 유대를 새롭게 해주는 밤이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모든 것이 나를 압박할 뿐이었고 난처하게 했다. 전과 같이 아버님은 '그들은 거기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라는 들판의 목자에 대한 복음서를 읽으셨고, 누나들은 전과 같이 눈을 빛 내면서 선물이 놓인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버님의 목소리는 슬프게 울렸고 그의 얼굴은 늙고 괴로운 모습이었고, 어머니도 슬픈 듯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고통스럽고 귀찮았다. 선물과 축하의 인사, 성경과 불켜진 크리스마스 트리도, 꿀과 호도로 만든 과자에 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감미로운 추억이 짙은 구름을 밀려들게 했다. 전나무는 향기를 풍 기고, 이미 지나간 일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인 축제의 날이 어 서 지나가기를 바랬다. 휴가 내내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바로 얼마 전에 나는 평신도 모임에서부터 심한 경고 를 받고 제명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이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 는 일이다. 나는 막스 데미안에게 특별한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랫동안 한 번도 그를 보 지 못했다. 나는 성(聖) # # 시의 학교 시절 초기에 그에게 두 번 편지를 했는데 답장을 받 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방학 동안에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알퐁스 벡을 만났던 그 공원 가시나무 올타리가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봄, 한 소 녀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근심에 가득 차서 혼자서 산보하고 있었다. 나의 건강은 나빠졌고, 뿐만 아니라 나는 계속 빚에 쪼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빚을 졌고, 집에서 얼마라도 얻어 내기 위해 필요한 변명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많은 가게에는 담배값과 같은 외상값이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근심이 아주 심각했던 것 은 아니다- 만약에 얼마 안가서 나의 이곳 생활이 끝나게 되어 강물에 투신하거나 감화원 에 끌려가게 된다면, 이와 같은 몇몇의 사소한 일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름답지 못한 일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그 봄날 공원에서 나는 몹시 마음을 끄는 소녀를 만났다. 그 여자는 키가 컸고, 날씬했으며, 우 아한 옷을 입었고 영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유형으로 곧 내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 대해 나는 가지가지 공상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훨씬 숙성했고, 우아했고, 윤곽이 잡혔고, 거의 완전한 처녀였다. 더구나 내 가 대단히 좋아하는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났다. 나는 한 번도 사랑했던 소녀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 적은 없었고, 그리고 역시 이 소녀한 테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지난날의 어떤 소녀들보다도 더 깊었다. 내 생활에 끼친 이 짝사랑의 영향력은 굉장했다. 갑자기 나는 한 모습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숭배하던 키가 큰 모습- 아, 내 마음 속의 어떤 욕망이나 어떤 충동도 이 존경과 숭배의 욕망보다 더 강하고 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테를 읽지 않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의 복사화에서 베아트리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그려진 베아트리체는 영국 의 라파엘 전파(前派)적인 소녀의 모습으로 날씬하고 팔다리가 긴 몸매와, 가늘고 긴 목과 정신적인 손과 표정의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아름답고 나이 어린 소녀는 내가 좋아하는 날씬하고 소녀 같은 몸짓과 정신적이고 영혼이 담긴 얼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 의 여자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내 앞에 자기 모습을 뚜렷이 보였고, 성스러운 영역으로 가는 문으로 나를 인도 해 갔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점점 나는 술집과 밤거 리의 방황을 멀리하였다. 나는 다시 혼자 있을 수 있었고, 독서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고 다 시 산책을 즐겼다. 이 갑작스러운 전향으로 나는 많은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고 존경할 무엇을 가졌고, 다시 이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삶은 다시 예감과 형형색색의 신비스 러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조소 속에서 나를 지탱할 수 있었 다. 나는 다시 내 본질 속에 있었다. 숭배하는 모습의 노예와 하인으로서, 나는 일종의 감동 없이 그 시절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다시 절실한 노력으로 파괴된 삶의 한 시대의 잔해로 부터 '밝은 세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는 다시 나의 내부로부터 암흑과 악을 제거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완전히 밝음 속에 있으려는 유일한 갈망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현 재의 이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내 자신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머니에 韜經 또는 무책임한 보호 속으로 도피해 가거나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임과 자 기 규율을 가지고 발견되고 요구된 새로운 봉사였다. 나를 괴롭혔고 내가 언제나 피해 달아 나고 있었던 성(性)의 문제는, 이제는 이 성화(聖火)에 의해서 정신과 명상으로 승화되어야 만 했었다. 어두운 것, 추악한 것, 신음 속에서 지샌 밤, 부도덕한 그림을 보았을 때의 심장 의 두근거림, 금단의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 것, 음탕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이 모든 것 대신에 나는 내 제단을 세웠다.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가지고...... 그리고 나를 그 여자에게 바침으로 해서 정신과 신에게 나를 바쳤다. 내가 어두운 힘으로 부터 끌어냈던 삶의 어떤 부분은 나로 하여금 밝은 힘을 회생시킨 것이다. 쾌락이 나의 목 적이 아니고 순결이 나의 목적이었다. 행복이 나의 목적이 아니고, 미와 정신이 나의 목적이 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나의 이 숭배는 내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어제만 해도 조 숙한 냉소자였던 나는 지금은 성자가 될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도자였다. 나는 습관화되 어 있었던 악한 생활을 버렸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모든 것 속에 순결과 고귀와 품위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음식, 언어, 의복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렇게 노 력했다. 나는 아침을 냉수 마찰로 시작했다. 그것을 처음에는 강제로 나 자신에게 강요해야 만 했었다. 나는 성실하고 점잖은 태도를 취했고, 똑바로 섰고 보다 천천히 보다 위엄 있게 걸음을 걸었다. 남들은 이상하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내부는 신에의 봉사로 가 득차 있었다. 내가 나의 새로은 각오로 찾으려고 노력한 이 모든 새로운 연습 중에서 한 가 지가 나에겐 중요한 것으로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갖고 있는 영국 사 람이 그린 베아트리체의 그림이 나의 소녀와 충분히 닮지 않았다는 것이 이 작업의 계기였 다. 나는 베아트리체를 나를 위해서 그리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환희와 희망을 가지고 있 駭莉 좋은 종이와 물감과 붓을 모아 놓고, 파레트와 컵과 사기 접시와 연필을 챙겨 놓았다. 내가 산 작은 튜브에 들어 있는 템페라의 물감은 내 마음에 몹시 들었다. 그 중에는 선명한 연두색도 있었는데 그것을 처음으로 작은 접시에 담았을 때 나는 그런 색을 생전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을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엔 다른 것을 그려 보려고 했다. 나는 장식 무늬 꽃, 작은 환상적인 풍경화, 교회당 옆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로마의 다리를 그렸다. 때때로 나는 이 유희적인 작업에 골몰했었고, 물감 상자를 가진 어린이처럼 행복했다. 나는 마침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장은 아주 실패했으며 내버렸다. 내가 여러 번 길 에서 만난 그 소녀의 얼굴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마침내 그것을 포기하고 이미 공상으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서, 물감과 붓이 움직여지는 데 따라 그저 어떤 얼굴을 하나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은 공상적인 얼굴이었 고, 나는 그것에 만족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도를 곧 다시 계속했으며 새 종이마다 보다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났다. 현실과 가까워지진 않았으나 그 소녀의 생김새에 가까웠다. 나는 점점 붓놀림으로 선을 긋고, 화면을 채우는 일에 습관이 되었다. 거기에는 모델이 없 었고, 유희적인 작업이며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어떤 날 마침내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떤 얼굴을 그렸다. 그 얼굴은 전에 그린 어느 것보다 훨씬 강하게 나에게 호소하는 듯했 다. 그것은 그 소녀의 얼굴은 아니었다. 물론 그 얼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 비현실적인 무엇이었으며, 그와 똑같은 가 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소년의 얼굴처럼 보였다. 머리카락 은 나의 아름다운 소녀의 머리처럼 밝은 금발이 아니고 불그스름한 갈색이었다. 턱은 강직 하고 딱딱했으나,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딱딱하고 가면 같은 인상이었 으나 강한 인상을 주었고, 신비한 생명에 넘쳐 있었다.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반은 남자, 반은 여자 같았고, 연령이 없었고, 의지가 강하면서도 몽상적이고 굳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생기에 넘쳐 있는 일종의 신의 모습, 또는 성스러운 가면같이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는 듯 싶었고, 나에게 요구를 제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와 닮은 듯도 싶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 그림은 얼마 동 안 모든 내 생각에 따라다녔고, 나의 생활 속으로 침입했다. 나는 아무도 그것을 보고 조롱할 수 없도록 그것을 서랍 속에 감춰 두었다. 그러나 내 방 에 혼자 있을 때면 그 그림을 꺼내서 그것을 사귀었다. 밤에 나는 그것을 침대 위 벽에 핀 으로 꽂아 놓고는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에 눈을 뜨면 그림부터 쳐다보곤 했다. 바 로 그 때부터 나느 어렸을 때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꿈을 많이 꾸기 시작했다. 나는 몇 해 동안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아. 꿈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그림처럼 되어 내게 다가왔 다. 더욱이 내가 그린 그림은 꿈 속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 그림은 살아서 얘기를 했고, 나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적의를 품었는지 얼굴을 보기 싫게 찡그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한없이 아름답고 조화에 넘쳤고 고귀해 보였다. 어느 날 아침 내가 그런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갑자기 그것의 정체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림은 나를 그처럼 친밀감을 가진 얼굴로 바라보았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처럼 나를 아는 것 같았고, 옛날부터 나를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는 가슴을 두군거리면서 그 그림을 보았다. 숱이 많은 갈색 머리, 반은 여성적인 입, 물감이 말라감에 따라 이상스러운 밝음이 두드러져 보이는 넓은 이마를 나는 보았고, 점점 가까이 낯이 익다, 전에 만난 일이 있다, 아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점점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림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초록빛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오른편 눈이, 섬세하게 그러나 틀림없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 꿈틀거림으로 나는 그 그림을 알아본 것이다..... 어째서 이 렇게 늦게야 알았던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후에 나는 그 그림을 매우 자주, 내 기억 속에 있는 데미안의 실제의 얼굴과 비교했다. 그것은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슷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데미안이었다. 언젠가 어떤 이른 여름 저녁에 태양이 붉게 서쪽 창으로 비스듬이 비쳐들고 있었다. 방안 은 어둑어둑했다. 그대 나는 문득 베아트리체 또는 데미안의 그림을 유리창 창살에 핀으로 꽂고 저녁 햇살이 엷게 스며드는 그림의 모양을 보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은 윤곽을 잃 고 흐려져 있으나 붉은 눈언저리, 밝은 이마, 강렬하게 붉은 입술은 화면으로부터 깊고 사납 게 불타 올랐다. 나는 천천히 그 그림과 마주앉았다. 불길은 이미 꺼진 뒤였다. 그때 점점 그것이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그림은 나와 닮지 않았다. 또 그럴 리도 없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내 생활을 이루고 있는 무엇이며, 나의 내면, 나의 운명, 나의 수호신이었다. 내가 다시 친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내 친구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나의 삶도, 나의 죽음도,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운명의 메아리이고 리듬이었다. 그 몇 주일 동안에 나는 전에 읽은 어느 책보다도 나에게 강한 인상을 준 어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나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없었다.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니체 정도였 을 것이다. 그것은 노발리스가 지은 책으로 서간집과 산문으로 되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별로 많이 이해하지 못했으나,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을 굉장히 끌었고 압도 했다. 그 말 중의 하나가 지금 생각났다. 나는 그 말을 펜으로 그림 밑에 썼다. '운명과 감정은 같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그 말을 나는 이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라고 불렀던 소녀를 자주 만났다. 나는 이제는 조금도 동요를 느끼지 않았 으나, 언제나 부드러운 일치감과 감정에 넘친 예감을 느꼈었다. 즉 너는 나와 연결되어 있 다. 그러나 네 자신이 아니고 너의 그림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 운명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이었 다. 막스 데미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다시 강렬해졌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그의 소식을 몰 랐었다. 나는 방학 동안에 꼭 한번 그를 만난 일이 있었다. 내가 이 짧은 해후를 내 수기 속 에서 은폐한 것을 지금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수치심과 허영심에서 일어난 것임을 안다. 나는 그것을 여기서 뒤늦게나마 써야겠다. 그러니까 방학 동안에 내가 술집 출입을 즐기던 시절, 언제나 좀 건방진 얼굴을 하고 지팡 이를 흔들면서 초라하고 변함없는 속물들 속에 끼어 내가 경멸하는 얼굴을 보면서 내 고향 도시를 배회하고 있을 때에 나는 데미안은 만난 순간, 깜짝 놀랐다. 번개처럼 빨리, 프란쯔 크로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데미안이 그 사건을 잊어 주었으면! 그에 대해서 그런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불쾌한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어리석은 어리석은 어린이들의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열등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그는 내가 그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가능한 한 태연히 인사를 했을 때 그는 나중에 손을 내밀었다. 또 그의 독특 한 악수! 그렇게도 굳고 따뜻하면서도 싸늘하고 남성적인! 그는 내 얼굴을 차근차근 보고 말했다. "많이 자랐군, 싱클레어." 그 자신은 조금도 달라지 지 않은 것 같이 보였고 언제나 똑같은 나이로 똑같이 젊어 보였다. 그는 나와 함께 걸었다. 우리는 산보를 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관해서만 얘기를 했 고, 당시의 일에 관해선 조금도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여러 번 편지를 부쳤으나 회 답을 받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가 그것까지도 잊어버려 주었으면! 그 어리석은 편지를! 그는 편지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그림도 없었고 나는 황폐한 시내의 한복판에 있었다. 도시 변두리에서 나는 그에게 술집에 같이 가자고 권했다. 그는 같이 갔다. 나는 자랑스럽게 한 병의 포도주를 주문하고, 술잔에 따르고, 그의 잔과 부 딪치고, 학생들이 술마실 때의 버릇에 내가 얼마나 익숙한가를 보이면서, 첫잔을 단숨에 비 웠다. "술집에 자주 가니?" 그가 물었다. "그럼." 나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뭐 할 일이 있어야지? 그것이 결국 언제 나 제일 재미있는 일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럴지도 모르지. 아주 아름다운 것도 그 중에는 있어- 도취, 그리고 쾌락적인 것!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술집에 자주 가는 대부분 의 사람들에겐 그런 요소가 완전히 상실되어 버린 것 같아, 술집에 가는 거야말로 정말로 속물처럼 나에게는 생각된다. 그래 하룻밤 동안 불타는 횃불을 들고 정말로 아름다운 도취 에 맘껏 취해버리는 것도 좋긴 하지! 그러나 이렇게 날마다 반복해서 한 잔, 또 한 잔 마시 는 것은 진짜가 아니잖아? 너는 매일 밤 단골 술집에 가서 앉아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니?" 나는 술잔을 들어 쭉 들이키고 나서 적개심에 찬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누구나 다 파우스트는 아니니까." 라고 나는 짧게 말했다. 그는 좀 놀란 듯이 나를 바라다보있다. 그리고 그는 옛날과 똑같은 신선함과 자신에 찬 음 성으로 웃었다. "그런 것으로 논쟁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주정뱅이나 탕아의 생활이, 어쩌면 나무랄 데 없 는 시민의 생활보다는 생기가 있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읽은 일이 있는데 탕아의 생활이야말로 신비주의자가 될 최초의 준비 단계란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예언자 가 된 성 아우그스티누스와 같이. 그도 전에는 향락주의자였고 탕아였어." 나는 그를 불신했고, 조금도 그의 설교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건방지게 말했다. "그래, 누구나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금도 예언자라든지 하는 따위가 될 생각은 없어." 데미안은 약간 감은 눈으로 알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싱클레어" 하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불쾌한 말을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그뿐 아니라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술을 마시는지 우리 둘이 다 모르고 있는 거야. 그러나 너 의 내면에 있는 것, 너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 우리의 내부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이야. 이만 실례하겠어. 집에 가야 해." 우리는 곧 헤어졌다. 나는 매우 불쾌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한 병을 완전히 다 마시고 나서 가려고 할 때에 데미안이 벌써 그 값을 지불한 것을 알고 나는 더 화가 났다. 지금 내 생각이 이 작은 사건에 다시 머물렀다. 내 머리는 데미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 다. 그리고 그가 그 술집에서 나에게 한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이상스럽게도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우리의 내부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하나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나는 창문을 붙여둔 그림을 쳐다 보았다. 그림은 거의 보이지 않아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불타는 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데미안의 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데미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소식을 몰랐다. 나는 그에게 도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가 아마 어느 대학에서 공부할 것이라는 것과 김나지움 졸업 후 에 어머니와 함께 이 도시를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로머와 나와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나는 막스 데미안에 대한 모든 추억을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까지도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고, 현실적이었고, 나하고 관련이 있었다. 또한 그가 우리의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그 마지막 해후에서 탕아와 성자 에 관해서 했던 말도 갑자기 내 영혼 앞에 밝게 떠올랐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와 똑같이 된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또한 도취와 오욕 속에서, 취미와 상실감 속에서 산 것이 아니었던 가? 이윽고 새로운 삶의 충동으로서 바로 그 정반대의 것, 즉 순결에의 욕망, 성스러움의 동 경이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추억을 더듬어 갔다. 밤이 깊어지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추억 속에도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밤나무 밑에서의 어떤 시간이었다. 그때 그는 프란쯔 크로머에 관해서 나에게 물었고, 나는 첫 번째 비밀을 그에게 털어 놓았던 것 이다. 하나하나씩 추억이 떠올랐다. 학교에 가는 길에서의 대화, 교리 문답 시간, 그리고 막 스 데미안과의 마지막 해후가 생각났다. 그때 무엇이 화제였던가? 나는 곧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는 완전히 그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이제 다시 생각이 난다. 그가 카인에 관한 그의 의견을 말하고 난 후 우리들은 우리 집 앞에서 있었다. 그때 그는 우리 집 대문 위에 있는 낡고 빛이 퇴색한 문장(紋章)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것에 흥 미를 느꼈다. 그런 물건에 우리는 주의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데미안과 문장에 관한 꿈을 꾸었다. 문장은 자꾸 변했다. 데미안은 그것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회색 빛이었다가는 또 거대하고 요란한 색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것이 언제나 한개이며,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에 그는 나에게 문장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내가 그것을 삼켜 버렸을 때 나는 끔찍스런 놀라움을 느 꼈다. 내가 삼킨 문장의 새가 내 속에 살아 있으며, 나를 가득 채우며, 내부에서 나를 쪼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가득 차서 나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었다. 방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기 위 해 일어섰을 때 나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밟았다. 아침에 나는 그것이 내가 그 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축축하게 젖어 방바닥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펴서 말리기 위하여 흡인지 사이에 끼워서 무거운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 종이는 말라 있었으나 변해 있었다. 붉은 입술은 핏기를 잃었고, 좀 가 늘어져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데미안의 입이었다. 나는 다시 문장의 새를 그리려고 했다. 그 새가 정말로 무슨 새였는지 나는 뚜렷이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중에 몇 가지는 내가 아는 한에는 바로 옆에서 보아도 잘 식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워낙 오래 되었고 자주 색칠 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새는 서 있었거나, 어쩌면 무엇위에, 어쩌면 꽃이나 광주리나 둥우 리나 나무 꼭대기 위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내적 욕구에서 나는 곧 강한 색채로 그리기 시작했다. 내 종위 위에 그려진 나는 그것을 계속 그려 나가서 며칠 내에 완성되었다. 결국 그것은 사나운 날짐승이었다. 날카롭고 대담한 머리를 가진 그 새는 마치 거대한 알 로부터 부화되듯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곳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그 그림을 오래 들여 다보면 볼수록 그것은 마치 내 꿈속에 나타났던 채색된 문장처럼 보였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주소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모든 행위를 몽상적인 예감 속에서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같은 예감으로 그에 게 새의 그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에게 전해지든 말든 상관 없었다. 나는 그림 위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내 이름도 안 썼다.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자르고 큰 봉투를 사 서 내 친구의 옛 주소를 그 위에 썼다. 그리고 그것을 보냈다. 시험이 다가왔다. 나는 전보다 훨씬 더 공부를 해야 했다. 선생들은 내가 갑자기 불안정한 생활 태도를 바꾸자 다시 나를 자비스럽게 받아들여 주었 다. 나는 지금도 역시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도 내가 반 년 전처럼 아 마 거의 확정적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비난이 나 위협 없이 부드러운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나 또는 누구에게도 내 내부 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변화가 나의 부모님과 선 생들의 소망과 일치한 것은 다만 우연에 불과했다. 이 변화로 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다거나 그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를 보다 더 고독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어딘지 모를 곳에, 데미안에게, 먼 운명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으니까. 그것은 베아트리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그린 그림과, 데미안에 대한 생각과 함께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베아트리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 꿈과 내 기대와 내 변화에 관해서 한 마디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설사 내가 원했을지라도......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떻게 원할 수가 있었을까? 5.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내가 그린 꿈의 새는 날아가서 내 친구를 찾아 내었다. 나에게 가장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답장이 왔다. 나는 교실의 내 자리에서 수업 사이의 휴식 시간에 책갈피에 쪽지가 끼어 있 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수업 시간 중에 반 친구들이 서로 몰래 편지를 전할 때 쓰는 방식 으로 접혀 있었다. 나는 누가 그 쪽지를 보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급우의 아무와도 그런 편지 교환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여기고 그런 장난에 나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쪽지를 읽지 않 은 채 책갈피 속에 끼워 두었다. 수업 중에 그 쪽지가 우연히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그 종 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것을 펴보았더니 몇 마디의 말이 그 속에 씌어 있 었다. 나는 그 종이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 그 중에 한마디에 끌려들어 깜짝 놀라서 읽었다. 내 가슴은 냉기를 뒤집어 쓴 것처럼 운명 앞에서 오그라들었다. -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 브라삭스. 나는 몇 번이고 그 글을 읽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답장이었다. 그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새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내 그림을 받은 것이다. 그는 나를 이해했고 나로 하여금 해석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 아브라삭 스란 무엇일까?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었고 읽은 일도 없었다.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다!' 수업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시간을 흘러갔다. 다음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전 중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얼마 전에 대학에서 온 조교가 그 시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젊었 고 우리에 대해서 조금도 일부러 위엄을 갖추려 하지 않았기에 인기가 있었다. 이 수업은 내 마음에 드는 몇 개 안되는 과목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내 생각은 다른 데가 있었다. 나는 전에 데미안이 종교 시간에 한 말이 얼마나 옳은 말이었는가를 여러 번 경험하고 있 었다. 그것은 강한 의지로 바라고 있는 것은 꼭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수업 도중에 어 떤 생각에 몹시 골몰하고 있으면 틀림없이 이 교사는 나를 가만히 놔두었다. 주의가 산만하 거나 졸고 있으면 선생은 갑자기 그 학생 옆에 와 있었다. 그런 일은 나도 몇 번 겪었다. 그 러나 정말로 생각에 잠기어 있거나 정말로 생각 속에 빠져 있을 경우 나는 보호되어 있었 다. 그뿐 아니라 강한 시선에 관해서도 나는 실험을 해보았고, 그것이 정말인 것을 알았다. 전에 데미안이 있을 때는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종종 사람이 시선과 사고 력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상태로 나는 지금 앉아 있었고 헤로도투스며 학교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의식 속에 선생의 목소리가 섬광처럼 내 의식 속에서 들어왔고 나는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불렀는 줄 알 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나를 흔들었다. 그 목소리는 크게 '아브라삭스' 라고 말했 다. 앞부분은 듣지 못한 설명을 폴렌 박사는 계속했다. "우리는 그 종족의 세계관과 고대 문화 의 신비주의적 결합을 합리적 견해의 입장에서 보듯이 그렇게 소박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 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의미로서의 학문이란 고대에는 도대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고 도로 발달된 철학적 신비주의적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더러는 마술과 유희가 생겨났고, 그것은 종종 사기와 범죄로 연결되는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까 예를 든 아브라삭스 같은 것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그리스의 주문(呪文)과 결부시키고, 그것을 오늘날 미개 민족간에 더러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일종의 마귀의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브라 삭스는 보다 의미 있는 무엇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예를 들면 신적인 것과 악마 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과제를 가진 어떤 신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집이 작은 이 박식한 남자는 계속해서 세련된 말투로 열심히 얘기했으나 아무도 별로 주 의 깊게 듣지 않았고, 나도 그 이름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내 주의를 나 자 신 속으로 집중시켰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 이라는 말이 내 속에서 울렸다. 바로 이 점에 나 는 생각을 결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우정이 마지막 시기에 데미안과의 대화에 의해서 나에게 친숙해진 사상이었 다. 그 당시에 데미안은,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신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신은 세계의 제멋대로 절단된 절반- 그것은 공적인,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 하고,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서 숭배할 수 있어야 하므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갖거나 또는 신에 대한 숭배와 함께 악마에 대해서도 숭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아브라삭스가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것이다. 얼마 동안 나는 대단히 열심히 그 흔적을 더듬어 갔으나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을 모조리 뒤져서 아브라삭스를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러나 본질은 이런 종류 의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모색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 이런 모색에서 우리는 언제나 손 안에 서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할 뿐이니까. 내가 얼마 동안 그처럼 많이 그리고 열중했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이제는 차차 가라앉아 버렸다. 아니 그 여자의 모습은 서서히 나로부터 멀어져 점점 지평선에 가까워지고 그림자 같이 멀고 퇴색되고 말았다. 그녀는 이미 내 영혼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제 다시 마치 몽유병자처럼 특이한 방법으로 나의 껍질 속에 숨어있던 짜놓은 생활 속에 한 새로운 활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동경이 내 속에 피어났다. 아니 그것은 사 람에 대한 동경, 성(性)의 충동이었다. 나는 그 충동을 얼마 동안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에 의해서 해소시킬 수가 있었으나, 지금 그것은 새로운 모습과 목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전 히 나에게는 충족이 오지 않았으며, 진정한 동경을 속이고 내 친구들이 만족하고 있는 소녀 들에게서 나도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전의 어떤 때보다도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다 시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도 밤보다는 낮에 더 많이...... 온갖 마음이 모습과 형태와 소망이 내 마음 속에 솟아오르고 나를 외부 세계로 잡아당겼기 때문에, 나는 현실에 대해서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모습들과 꿈과 그림자들과, 보다 진실 하게 보다 생기있게 교제를 했고,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어떤 특수한 꿈, 또는 환상과 유희가 자꾸 반복되어 나에게 찾아 왔고, 그것은 나에게 의미 깊은 것이 되었다. 이 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꿈은 대강 이러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 다- 대문에는 파란 바탕 위에 노란 빛으로 가문(家紋)인 새가 그려져 있었다- 집 안에서 어 머니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나 내가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포옹하려고 하니까 그것 은 어머니가 아니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키가 크고 힘있게 생 겼으며, 막스 데미안과 비슷했고, 내가 그린 그림과도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고, 힘있게 생 겼는데도 매우 여성적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나를 끌어당기고 온몸이 떨리는 애무 속에 나를 받아들렸다. 쾌락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고, 포옹은 예배이며 동시에 범죄이기도 했다. 나를 껴안은 이 모습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내 친구 데미안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 이 나타나 있었다. 그 사람의 포옹은 온갖 외경심에 벗어나는 불순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이상 없는 행복을 뜻했다. 나는 이 꿈에서 깊은 행복감을 안고 깨어나고, 때때로는 또 끔찍 한 죄를 저지른 것 같은 양심의 가책과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깨어났다. 다만 서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완전히 내면적인 영상과 찾아야 할 신에 관해서 외부 세계로부터 나에게 온 암시 사이에 어떤 결합이 성립되게 되었다. 그 결합은 이윽고 보다 가까워지고 친해졌으며, 나는 내가 바로 이 예감의 꿈 속에서 아브라삭스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쾌락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이고 성스러운 것과 추악한 것이 서로 얽힌, 그리고 가장 섬세한 순수함에 의해서 깜짝 놀라는 깊은 죄악- 이러한 것이 나의 사랑 의 꿈의 모습이었고 또한 아브라삭스의 모습이었다. 사랑은 내가 처음에 두려워하며 느낀 것 같은 동물적인 어두운 본능도 아니었고, 또한 내가 베아트리체의 모습 속에서 구현시켰 던 것과 같은 경건하고 정신적인 숭배의 감동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두가지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랑은 천사의 모습이면서 악마였 고, 여자와 남자를 한 몸 속에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면서 짐승이었고, 최선이면서 동시에 최악이었다. 이 모든 것을 살도록 나는 운명지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내 低資繭箚 생각되었다. 나는 그것을 동경하면서도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거 기에 있었으며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내년 봄에 김나지움을 졸업하면 대학에 갈 예정이었으나, 나는 아직도 어느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입술 위에는 옅은 수염이 자랐고 내 키 는 다 컷으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못잡고 있었고 목적도 없었다. 뚜렷한 것 은 다만 한 가지였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와 그 꿈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야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웠으며 나는 매일 그것을 거부했다. 어쩌면 나는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는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과는 다 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다 할 수 있다. 약간의 근면과 노력만 있으면 플라톤도 읽을 수 있고, 삼각함수의 숙제도 풀 수 가 있고, 화학 분석도 할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만은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목적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이 하듯이 내 앞에 그것을 그리는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교수나 판사나 의사 또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얼마나 시일이 걸릴 것이며 그것이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될지 모르 지만 어떻게 내가 그것을 지금 알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나는 몇 년 동안 노력하고 또 노 력해도 아무 것도 되지 않고 아무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또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위험하고 끔찍한 목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 내부로부터 스스로 쏟아져 나오려는 것만을 잘 알아 보려고 한 것인데, 왜 그것은 그다지도 힘든 일이었을까? 나는 꿈 속에 나타난 힘찬 사랑의 모습을 여러 번 그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그것을 그릴 수 있었다면 나는 그 그림을 데미 안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와 내가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베아트리체에 열중하였던 몇 주일, 몇 달을 지배하던 평온한 고요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 다. 그 당시 나는 하나의 섬에 도착했고 평화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언제 나 그랬었지만, 어떤 상태가 나에게 정다운 것이 되고 어떤 꿈이 나에게 쾌감을 주는 순간 그것은 벌써 시들고 흐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사라져버린 것을 갈망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지금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긴장된 기대의 불길 속에 살고 있었고, 그 상태는 나를 종종 완 전히 사납게 또 거칠게 만들었다. 나는 꿈 속의 연인의 모습을 종종 지나치게 생생하고 분 명하게 보았다. 그 모습은 나 자신의 손보다 더 뚜렷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과 얘기하고 그 앞에서 울고 그녀를 저주했다. 나는 그 모습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나는 그 것을 연인이라고 불렀고,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성숙한 입맞춤을 예감했다. 나는 그것 을 악마, 매춘부, 흡혈귀, 또는 살인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나를 가장 섬세한 사랑의 꿈 속으 로 유혹하는가 하면 황페하고 나쁜 행위로 유혹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좋은 것도, 고귀한 것도 없었고 또 나쁘고 저속한 것도 없었다. 그 해 겨울 동안,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인 폭풍우 속에 살았다. 고독은 이제 나에게 습관이 된 지 오래되어 그 고독으로 인해 괴로워하진 않았다. 나는 데 미안과 또 그 새와 같이 살았고, 내 운명이며, 연인인 저 커다란 꿈의 모습과 살았다. 그것 들 속에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위대함과 광대함을 향하고 있었 고, 모두가 아브라삭스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꿈이나 내 공상의 어떤 것도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아무 것도 나는 부를 수가 없었고, 아무 것에도 내가 마음대로 색채를 더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 와서 나를 데려갔다. 나는 그들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들에 의 해서 살았다. 외적으로 나는 안전한 상태에 있었다. 나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 동급생도 그것을 알고 그들은 나에게 은연중에 존경을 보였는데 그것은 나에게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의 대부분을 매우 잘 통찰할 수가 있었고 그 럼으로써 그들을 때때로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럴 마음이 내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제나 나 자신을 생각했다. 나는 진실된 생활 속에 살아 볼 것을, 또 나의 내부로부터 무언 가를 꺼내서 세계에 줄 것을, 세계와의 관련 속에, 투쟁 속에 들어설 것을 몹시 갈망하게 되 었다. 때때로 저녁 거리를 방황하다가 마음의 동요 때문에 자정까지 귀가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종종 생각했다. 지금 바로 나의 연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저 길모퉁이를 돌고 있고, 유리창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고, 때때로 나는 이 모든 일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게 느껴 졌다. 그럴 때의 나는 언젠가 자살을 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 당시 나는 기이한 피난처를-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우연의 힘으로 찾았다. 그러나 우연 이라는 것은 없다. 무엇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이 그 필요한 것을 찾은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의 욕망과 필연성이 그를 인도하는 것 이다. 나는 시내를 산책하는 동안 어느 교외의 작은 교회로부터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두서 너 번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멈춰서서 듣지는 않았다. 다음 번에 내가 그 앞을 지나갔을 때 또 그 오르간 소리가 났다. 나는 바하의 곡이 연주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문 앞으로 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그 골목에 거의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 옆의 돌 위에 앉아 서 외투 깃을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크지는 않지만 좋은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연주법이 또한 이상했다. 그 음악 소리는 특이했고, 마치 기도처럼 울리는 매우 개인적은 의지와 완강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런 느낌을 가졌다. 저 연주자는 이 음악속에 이 보물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두들기고 애쓰는 것이라고...... 나는 기교적인 의미에 서의 음악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영혼의 바로 이러한 표현을 어려서부터 본능적으로 이 해하였고 음악적인 것을 당연한 무엇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연주자는 바하에 이어서 어떤 현대적인 곡을 연주했다. 그것은 막스 레거의 곡 같기도 했다. 교회는 거의가 캄캄했다. 다만 아주 엷은 광선 한 줄기가 바로 옆의 유리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오르간 연주자가 나오는 것이 보일 때까지 왔다갔다 거닐었다. 그는 젊은 남자였다. 그러나 나보다는 나이가 들었고 키가 작고 네모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거의 불쾌한 듯한 빠르고 힘찬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그날 이후 나는 때때로 저녁때에 교회 앞에 앉거나 거닐었다. 언젠가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반 시간 가량 추위에 떨면서, 그러나 행복하게 의자에 앉아, 위에서 오르간 연주자가 희미한 가스등 밑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는 연주 하는 음악 속에 있었고, 나는 연주하는 소리만을 들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음악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고, 어떤 신비스러운 영관을 가 진 것처럼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은 신앙심에 넘쳤고 헌신적이었고 경건했다. 그것은 교회의 신자들이나 신부님과 같은 경건이 아니라 중세기의 순례자나 거지와도 같은 경건, 온갖 종교를 초월한 세계 감정에 대한 남김 없는 헌신의 경건이었다. 바하 이전의 대 가들의 작품이 자주 연주되었고, 옛날 이탈리아 작곡가의 작품도 연주되었다. 그것은 모두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그 연주자가 영혼 속에 갖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경, 세계의 가장 깊은 인식과 세계에의 과격한 고별, 자기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해 타는 듯한 갈망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헌신의 도취와 경이적인 것에 대한 깊은 호기심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를 몰래 따라갔을 때, 나는 그가 멀리 변두리에 있는 작은 술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 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그를 똑똑히 보았다. 그는 작은 방안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검은 모자를 쓴 채 포도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바로 내가 기대했던 바와 꼭 같이 약간 야성적으로 보였고, 탐구자와 같았고, 고집장이같이 완고하게 보였고, 의지가 굳 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입가는 부드럽고 어린애다웠다. 남성적이고 강한 요소는 눈과 이마에 전부 깃들어 있었고, 얼굴의 아래 부분은 부드럽고 미숙했으며, 억제되지 않았고, 더러는 유 순하게 보였다. 결단력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턱은 이마와 눈에 비하여 소년다운 모습을 지 니고 있었다. 내 마음에 든 것은 오만과 적의에 넘친 그의 흑갈색 눈이었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술집에는 우리 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쫓으려는 듯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지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마침내 그는 불쾌한 듯이 중 얼거렸다.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거요? 나 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소?" "아무 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벌써 많은 것을 당신에게서 얻었습니다."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당신은 음악 애호가시로군요? 나는 음악을 애호하는 것을 보면 구역질을 느낍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연주하시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저 밖에 있는 교회에서." 라고 나는 말했 다. "당신을 귀찮게 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당신한테서 무엇을 찾을지도 모른다, 특 별한 무엇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내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당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 까요." "나는 언제나 문을 잠가 놓는데." "최근에 당신은 잠그는 걸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에 앉을 수 있었지요. 그 외에는 밖에 서 있거나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요? 다음 번엔 들어오시오. 그 편이 덜 추우니까. 문을 노크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힘 껏 노크하시오. 그러나 내가 연주하고 있는 도중에는 안 됩니다. 자, 그럼 이제는 말해 보시 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요? 당신은 아주 젊은 청년이군요. 고교생이거나 대학생 같은데, 음악가요?" "아닙니다. 음악을 듣기를 좋아할 뿐입니다. 특히 당신이 연주하시는 것 같은 아 무 제한을 받지 않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런 음악에서 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흔들고 있는 것 같은 작곡가의 영혼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음악은 내 마음에 듭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다른 모든 것은 도덕적인데 비해 음악은 가장 도덕적인 면을 적게 가 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그렇지 않은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도덕 밑에서 언 제나 괴로움만 받아 왔습니다. 나 자신을 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만- 동시에 신과 악마일 수 있는 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 신이 전에는 있었대요.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있어요." 음악가는 폭넓은 모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넓은 이마 위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리고 낮고 긴장된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신의 이름은 무엇이요?" " 그 신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름 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삭스입니다." 음악가는 마치 누가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의심에 찬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당신은 누구요?" "나는 김나지움 학생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브라삭스에 관해서 알았지요?" "우연히......" 그는 테이블을 탕 쳤고 그의 술잔에서는 술이 흘렀다. "우연이라고! 엉터리 같은 수작을...... 젊은 친구! 아브라삭스를 우연히 알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도 짐작할 거요. 그 신에 관해서 내가 좀 더 얘기해 드리지. 나는 그에 관해서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입을 다물었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내가 기대에 넘친 눈초리로 바라보았더니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안돼, 여기서는! 다음 번에. 자 이걸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벗지 않고 있었던 외투의 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몇 개의 군밤을 꺼내서 나에게 던졌다.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매우 만족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먹었다. "자!" 그는 잠시 후에 속삭였다. "그에 관해서 어떻게 알았지요?" 나는 그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나는 혼자였고 불안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때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매우 많은 것 을 알고 있다고 내가 믿고 있던 어떤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무엇을 그렸습니다. 새였어요. 세계로부터 빠져나가려는, 그것을 나는 그 친구에게 보냈지요. 얼마 후 내가 더 이상 그 생각을 잊고 있을 때 한 장의 종이가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새는 알에 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 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 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군밤을 까서 포도주의 안주로 먹었다. "한잔 할까?" 라고 그가 물었다. "감사합니다만 안하겠어요.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간 실망한 듯이 웃었다. "좋으신 대로.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 여기에 더 머물러 있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며칠 후 다시 오르간 연주가 끝나고 나와 함께 걸어갈 때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 를 오래 된 골목 안에 있는 커다란 낡은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크고 약간 어둡고 잘 정 돈되지 않은 방에서는 한 대의 피아노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암시하는 것이라곤 없었고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그 방에 학자다운 맛을 주고 있었다. "책이 참 많군요!"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 중의 일부는 내 아버지의 장서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을 그들 에게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집에서는 내 친구라면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나는 버림 받은 자식이오. 아시겠소? 내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도시의 유명한 목사이 며, 설교자지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정확히 아시도록 말씀해 드리면- 그의 재능 있고 장 래 유망한 아들이었으나 탈선해서 약간 돌아버린 놈이지요. 나는 신학도였는데 국가 시험 직전에 그 건실한 신학대학을 그만두었어요. 내 개인적인 연구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아직 도 신학도인 셈이요. 매번 어떤 신을 생각해냈는가는 나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흥미있 는 문제요.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 음악가입니다. 그리고 아마 오르간 연주자의 조그만 자 리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또 다시 교회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책표지를 ㅎ어 보았다. 작은 전기 스탠드의 희미한 불로 볼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라 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등의 제목이었다. 그 동안에 내 친구는 어둠 속에서 벽가의 방 바닥에 누워서 무얼 하고 있었다. "이리 와요." 라고 그는 잠시 후에 불렀다. "철학을 좀 합시다. 입을 다물고 엎드려 생각하 는 겁니다." 그는 성냥을 그어 그가 누워 있는 앞에 놓인 벽난로 속의 종이와 장작에 불을 지폈다. 불 길은 높이 타올랐다. 그는 불길을 돋구어 일으켰고 아주 조심성 있게 장작을 집어 넣곤 했 다. 나는 그의 곁에 가서 빛이 바랜 양탄자 위에 엎드렸다. 그는 불을 응시했다. 나도 불에 이끌렸다. 우리는 말없이 아마 한 시간쯤은 배를 깔고 엎드려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고 있 었다. 우리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다가 가라앉고 구부러지고 펄럭거리고 꿈틀거리다가 마침 내는 조용히 사그라지며 바닥으로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배화교는 인간이 창안한 것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어." 라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외에는 둘 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연기 속에서 한 형상을, 재 속에 서 광명을 보았다. 한 번 나는 흠짓했다. 그가 송진을 한 덩어리 불길 속에 던져 넣자 가느 다랗고 작은 불길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나는 불길 속에서 금빛 머리를 가진 새를 보았다. 사그라져 가는 벽난로 불길 속에서 금빛으로 타는 듯한 실이 그물이 되고 갖가지 글자와 형상이 나타나더니 온갖 얼굴과 짐승과 화초와 벌레와 뱀에 대한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내 가 깨어나면서 그를 돌아보니까 그는 턱을 주먹으로 바친 채 열광적으로 몰두해서 재를 보 고 있었다. "가야겠습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가시오, 안녕!"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등잔불이 꺼져서 나는 간신히 어두운 방과 복도와 층계를 더듬어 가며 도깨비굴 같은 집을 나와야만 했다. 길에 나와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낡은 집을 올려 다 보았다. 어느 유리창에도 불이 안 보였다. 문패가 가스등 빛을 받고 문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주임 목사 피스토리우스' 라고 그 위에 씌어 있었다. 집에 와서 비로소 저녁 식사 후에 내 작은 방에 혼자 않았을 때, 나는 아브라삭스에 관해 서도 다른 무엇에 관해서도 피스토리우스로부터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우리는 열 마디도 주고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방문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더욱이 다음번에 그는 옛날 오르간 음악의 걸작인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줄 것을 약속했다.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컴컴한 은둔자의 방바닥에 엎드려서 벽난로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 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는 나에게 첫번째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불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나에게 좋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것은 내 내부에 언제나 있었으나 내가 한번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던 여러 가지 성질을 강하게 했고 인정했다. 점점 나는 그것을 부분적 으로나마 뚜렷이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자연의 특이한 모습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관찰이라기보다 그들 자신의 매력, 그들의 뒤엉킨 깊은 언어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속이 텅 빈 긴 나무의 뿌리, 광석에 나타난 갖가지의 줄무늬, 물 위에 떠 있는 기름, 유리 의 깨어진 곳-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나에게 때때로 크나큰 매력을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물과 불과 연기와 구름과 먼지가 나를 매혹했으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끌린 것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색색가지의 반점이었다. 처음으로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한 후 며칠 동안 나는 다시 이 모든 것을 상기했다. 내가 그 이래로 느껴온 어떤 특수한 활기와 기쁨, 내 감정이나 스스로에 의한 상승 같은 것이 활활 타는 불을 오래 응시한 데서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행위는 이상하게 기분 좋고도 풍요 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태까지 나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발견했던 얼마 안 되는 체험 에 또 하나의 체험이 끼어들었다. 그런 형상을 만든 자연의 의지와 우리는 내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 리는 얼마 안 있어서 그것을 우리 자신의 기분으로 우리 자신의 창조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흔들려 찢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 눈에 비친 영 상이 외적인 인상에서 온 것인지, 내적인 것에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없어지는 어떤 기분을 알게 된다. 이 훈련으로 우리는 어디서보다도 단순하게, 쉽게 우리가 창조자라는 것을 발견 했고, 우리의 영혼이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에 얼마나 부단하게 참여하고 있는가를 발견했다. 우리들 내부에 있는 신과, 자연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은 서로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신이었다. 외적인 세계가 몰락하면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그것을 세울 수가 있다. 우리의 내 부에 있는 신과 자연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은 동일한 불가분의 신이었다. 외적인 세계가 몰락하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세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산과 강물과 나무와 잎, 뿌리와 꽃과 자연의 모든 현상은 우리들 내부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 영혼으로부터 나온 다. 그 영혼의 본질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때때로 사랑의 힘, 또는 창조의 힘 으로 느껴진다. 그 후 몇 년 지나서 비로소 나는 나의 이 관찰이 어떤 책 속에 증명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 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쓴 것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은 담벽을 보는 것은 얼마나 깊은 자극이 되는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젖은 담벽의 얼룩 앞에서 나 와 피스토리우스가 느낀 것과 똑같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오르간 연주자는 나에게 이런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는 인격의 한계를 너무 좁게 생각하고 있소! 우리들 인간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별 하고 있는 것만을 우리라고 생각하는 빗나간 인식을 하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 로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는 각각 우리의 육체가 물고기에 이르기까지의, 아니 더 먼 곳까지 의 진화의 계보를 포함하고 있듯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체험한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소. 여태까지 존재한 모든 신과 악마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것이든 중국인의 것이든 아프리카 흑인의 것이든 모두 우리 속에 함께 있고,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출구 로서 존재하는 것이요. 만약 인류가 다 망해 버리고 한번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보통 정 도의 재능을 가진 어린아이가 꼭 한 명만 살아 남는다 해도 이 아이는 사물의 과정 전부를 다시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신으로, 악마로, 천국으로, 계명과 금지로, 신구약 성서로 될 것 이오.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하고 나는 반문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요? 만약에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속에 벌써 완성된 것으로 가지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우 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잠깐만!" 하고 피스토리우스는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세계를 당신 내부에 그저 간직하고 있는 것과,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 사이 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친 사람도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사상을 생각해 낼 수도 있고 헤른후트파 학교의 독실한 어린 국민 학생이 그노시스파 (Gnosis, 異端) 나 조르아스터교 (Zoroater, 二元敎) 에서 나타내는 신비적인 경위를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 나 그 학생은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무나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식의 첫 불꽃이 밝혀지면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당인은 설마 길가 를 두 다리로 걷고 있는 동물을 모두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요? 단지 그들이 똑 바로 걸어가고 자식을 9개월간 임신하고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을 전부 인간이라고 생각 지는 않겠지요. 그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물고기나 양이나 벌레나 또는 거머리이고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개이며, 얼마나 많은 자들이 벌들인가를 알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들의 각자 속에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이 이 가능 성을 부분적으로라도 자각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이 가능성은 그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 다." 우리의 대화는 대강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 대화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무엇, 완 전히 의외이고 놀라운 무엇을 가져다 주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장 진부 한 것까지도 낮은 소리로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면서 내 내부에 있는 바로 같은 장소를 자꾸 만 때렸다. 그것은 모두가 나를 형성하도록 도와 주었고, 껍질이 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도 와주었다. 그리고 매번 나는 머리를 좀 더 높이 쳐들었고 좀더 자유로워졌으며 이윽고 나의 금빛 새가 아름다운 야생의 머리를 파괴된 세계의 껍질로부터 내밀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꿈을 이야기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그 꿈을 해석할 줄 알았다. 한 신기 한 예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꿈을 꾸었는데 난 꿈에서 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큰 힘에 의해서 공중에 내던져진 것이었다. 이 비행의 감정은 감명깊었다. 그때 나는 내 비행의 상승과 강하가, 호흡의 중지와 내쉬는 것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는 구제책을 발견했다. 이 꿈에 관해 피스토리우스는 말했다. "당신을 날게 하는 그 힘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인류의 큰 재산입니다. 그것은 온갖 힘 의 뿌리와 결함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끔직하게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 분의 사람은은 그처럼 나는 것을 포기해 버리기를 좋아합니다. 법규가 정하는 데 따라서 보 도를 거니는 편을 택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유능한 청년답게 계속 날아갑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즉 당신이 점점 이 비행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을 끌어가는 커다란 보편적인 힘에 미묘하고 조그마한 독특한 힘, 하 나의 가관, 하나의 조종이 작용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 발견 없이는 떠내려가고 맙니다. 예를 들면 광인들이 그렇듯이. 당신에게는 보도 위를 걷는 사람들에게보다는 더 깊은 예감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열쇠도 조종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지고 마는 겁 니다. 그러나 싱클레어, 당신은 그것을 해나가고 있어요. 그것도 썩 잘! 당신은 아직 모르지요? 새 기관 즉, 호흡 조절기를 가지고 날고 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의 영혼이 그 심층에 있어서 얼마나 '비개인적' 인가를! 당신의 영혼이 이러한 조절기를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 발견입니다. 그것은 다만 빌어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몇천 년 전부터 존재하 니까요. 그것은 물고기의 평형기관, 즉 부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몇 종류의 특이하고 옛스러 운 물고기의 종류가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부레가 일종의 허파처럼 되어 있어서 경우 에 따라서는 호흡 기능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꿈에 '비행사의 부레'로 사용했던 허파와 조금도 틀린 점이 없이 똑같은 것이지요!" 그는 나에게 동물학 책을 한 권 주면서 물고기의 이름과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상 한 전율감을 느끼면서 내 내부에 있는 초기 진화의 단계로부터 남아 있는 한 기능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을 느꼈다. 6.야곱의 투쟁 내가 괴상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아브라삭스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를 여기에 간단 하게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도달하는 길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일이다. 나는 그 당시에 열여덟 살 가량의 특이한 청년이 었다. 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조숙한 반면, 또 여러가지 면에서 뒤떨어져 갈피를 못 잡고 있 었다. 나는 나 자신을 남과 비교할 때면 언제나 오만과 자만심을 느꼈으나, 또한 동시에 우 울과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나는 때론 나 자신을 천재로 보았고 또 어떤 때는 미친 것 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내 동년배의 청년들과 생활과 기쁨을 같이 나눌 수가 없었 다. 나는 종종 내가 절망적으로 그들과 분리되어 있으며, 삶의 문이 나에게는 닫혀져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근심과 자책으로 나 자신을 괴롭혔다. 자기 자신도 기인(奇人)이었던 피스토리우스는 나에게 나 자신에 대한 존경과 용기를 간직 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의 말과 나의 환상과 사상 속에서 언제나 가치 있는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을 심각하게 다루고 심각하게 그것에 대해서 토론함으로써 나에게 모범을 보 여 주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 자신도 도덕가여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남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당신은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종종 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간다고 스스로를 비난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불을 보십시오. 구름을 보십시오. 그래서 예감이 떠오르고 당신의 영 혼의 목소리가 말을 시작하면 당신은 그것에 몸을 맡겨 버리십시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 버님이나, 또는 어떤 신의 마음에 들까 어떨까를 물을 것도 없이! 그런 물음 때문에 사람은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보도에 서게 되고 화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싱클레어! 우리의 신 은 아브라삭스입니다. 그는 신이면서도 악마이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모두 자기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삭스는 당신의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또 당신의 어떤 꿈에 대해서 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흠 잡을 곳 없이 정상적으로 된 날에 아브라삭스는 당신 곁을 떠나 버릴 겁니다. 그는 당신을 버리고 자신의 사상을 끓이기 위한 새 남비를 어디선가 찾게 되겠지요." 나는 모든 꿈 중에서 애매한 사랑의 꿈이 가장 충실한 꿈이었다. 매우 되풀이해서 나는 그 꿈을 꾸었다. 내가 새 문장 아래를 지나서 낡은 내 집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안으려고 하 면 그 대신 키가 크고 남성적이면서도 모성적인 여자를 안게 되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나 는 내 친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뜨거운 갈망이 나를 그 여자에게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 꿈을 나는 내 친구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른 것은 말했으나 이것만큼은 남겨 두었다. 그 꿈은 나만의 숨을 곳이며, 내 피난처였다. 우울할 때면 나는 피스토리우스에게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저녁 때의 어두운 교회 안에 넋을 잃고 앉아, 이상스럽고 내면적이고 자기 자 신 속에 빠져있고 자기 자신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이 음악을 들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 다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었고, 내 영혼의 목소리가 옳다는 믿음을 강하게 해 주었다. 때때로 우리는 오르간 소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얼마 동안 교회 안에 앉아 있었고, 희미 한 불빛이 높은 고딕식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는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요." 라고 피스토리우스는 말했다. "내가 신학도였고 거의 목사가 될 뻔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내가 저질렀던 형식상의 과오였습니다. 성직자가 되는 것이 내 천직이고 내 목표였습니다만 나는 너무 빨리 만족해 버렸고 아브라 삭스를 알기 전에 나를 여호와에게 바쳤던 것이오. 종교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종교는 영혼 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식 성찬을 취하든 메카로 순례를 가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은 목사가 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싱클레어, 아닙니다. 거짓말을 했어야 하니까요. 우리의 종교는 어찌나 닳아 버렸는지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종 교는 마치 오성(悟性)의 산물인 양 굴고 있습니다. 가톨릭이 되는 것은 또 참을 수 있었을 것 같지만 프로테스탄트의 목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몇 명 안 되는 정말로 신앙심 이 두터운 사람들은-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을 좋아합니 다. 나는 그들에게, 예를 든다면, 그리스도가 내 생각으로는 인간이 아니라 영웅이고 신화이 며 영원의 벽 위에다 인류가 자기 자신을 그린 거대한 그림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똑똑한 말을 들으려, 또는 의무를 다하려, 또는 남이 하는 것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교회로 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들을 개종시키라 고요?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목사는 개종시킬 것을 원하지 않고, 다만 신자들 가운데, 자기와 똑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며, 우리가 신을 만들어내는 감정의 표 현이요, 담당자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는 말을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했다. "우리가 택한 아브라삭스라는 이름의 새 신앙은 아 름답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젖먹이지요. 날개도 아직 안 돋았습니다. 아, 고독한 종교는 아직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의 것이 되어야 하고 예배와 도취와 신비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생각에 잠겨서 자기 속으로 침잠해 갔다. "우리는 비밀 의식을 혼자서 또는 적은 인원수로 행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나는 주저하 며 물었다. "그야 할 수 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하고 있으니까요. 누가 알면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만한 예배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정말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젊은 친구."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 도 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말하지 않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꿈을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그 꿈 을 생활하십시오. 그 꿈을 즐기십시오. 그 꿈을 위해 제단을 세우십시오! 그것은 완전한 것 은 아니지만 하나의 계기가 될것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내가 언젠가 세계를 혁신할 수 있을 지는 두고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내부의 세계는 매일 혁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그걸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열여덟 살이고, 싱클레어, 당신은 매춘부에게 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사랑의 꿈을, 사랑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들이 당신 을 두렵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 의 것입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나는 당신만한 나이 때에 사랑의 꿈을 유린해 버림으로 써 많은 것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영원히 우리의 내부에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지되지 않은 것으로 알아야 합 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일을 모두 다 행동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를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의 경우 과오입니다. 나도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전부 다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좋은 의 미를 가진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몰아내고, 또 그것을 도덕적으로 트집을 잡음으로써 해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또는 남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신 우리는 엄숙한 생각으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희생의 신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런 행위 없이도 자신의 본능과 소위 유혹을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다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모두 그것대로 의미를 나타내 줄 것이며, 모두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당신에게 언젠가 다시 미친 것 같은, 죄악에 넘친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당신이 누구를 죽이거나 어떤 불결한 행위를 하고 싶어지면, 그렇게 당신 속에서 환상을 만들고 있 는 것이 바로 아브라삭스라는 것을 잠깐만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다만 옷을 바꾸어 입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증오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내부에 들어 있는 무엇을 찾아 내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부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다." 피스토리우스가 이와 같이 나의 가장 큰 비밀을 깊숙이 찌르는 말을 한 적은 이것이 처음 이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이상한 느낌으로 감동시킨 것은 그의 말과, 몇 해나 내가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데미안의 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 지 않았으나 서로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피스토리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현실이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그림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내부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 계에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도 행복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다른 것을 알고 나면 우리는 다른 사 람들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어집니다.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쉽고 우리의 길은 어렵습니다 - 그래도 우린 갑니다."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나는 두 번이나 그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다. 나는 저녁 늦게 그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그는 고독한 모습으로 추운 밤 바람 속에서 길모퉁이를 돌아왔다. 그는 비틀거렸고 몹시 취해 있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내 곁을 지나갔으며 마치 미지의 사람이 어두운 부름을 따라가듯이 타는 듯한 고독한 눈을 하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어떤 골목으로 갔다. 피스토리우스는 마치 눈에 안 보이는 끈이 잡아당겨진 것처럼, 유령같이 광적이고 맥빠진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슬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풀 수 없는 꿈 에게로. '그는 그런 방법으로 세계를 혁신하고 있군!' 하고 나는 생각했고, 그 순간에 내 생각이 저 속한 도덕적 사고방식이라고 느꼈다. 나는 그의 꿈에 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어 쩌면 그는 취기 속에서도 내가 내 불안 속을 가는 것보다 더 확실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도 몰랐다. 학교 휴식시간에 내가 한 번도 관심가져 본 일이 없는 동급생 하나가 나에게 접근하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키가 작고 약해 보이는 마른 소년으로서 숱이 적은, 붉은 빛이 도는 금발 머리를 가졌고, 시선과 태도에 독특한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집에 올 때 그는 길에서 나를 몰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기 곁을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더니 다시 내 뒤를 따라와서 내가 있는 집의 문 앞에 섰다. "무슨 할 말이 있니?" 라고 나는 물었다.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라고 그는 수줍게 말했다. "나하고 좀 걷지 않을래? 미안하지만......"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그가 몹시 흥분해 있고 기대에 넘쳐 있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너는 심령론자(心靈論者)지?" 라고 그는 느닷없이 물었다. "아니야, 크나우어" 라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전혀 그런 건 몰라.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니?" "그럼 너는 신학도지?" "아니." "이봐, 싱클레어! 그렇게 숨기려 들지 말아! 나는 너한테 아주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네 눈 속에 그 특별한 것이 담겨 있어. 너는 틀림없이 영혼과 어떤 교제를 하고 있을 거야- 나는 호기심 때문에 그걸 묻는 것이 아니야. 싱클레어, 조금도 그렇지 않아! 나 도 모색하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나는 아주 고독해." "더 얘기해." 라고 나는 그를 재촉했다. "나는 영혼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지만 나는 내 꿈 속에 살고 있어. 그것을 네가 느낀 것일 거야. 다른 사람들도 꿈 속에 살긴 하지만 그들 자신의 꿈은 아니야. 그것이 차이야." "그래, 아마 그럴 거야." 라고 크나우어가 속삭였다.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꿈이 어떤 종류의 꿈인가가 결국 문제일 거야- 너는 하얀 마술에 관한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니?" 나는 부정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거야. 그러면 인간은 불사(不死)의 몸이 될 수 있고 마술을 행할 수 있어. 한 번도 그런 연습을 한 일이 없어?" 이 연습에 대해 내가 호기심에 넘친 질문을 해대자 그는 처음에 거드름을 피우며 좀처럼 말하지 않으려하다가 내가 가려고 돌아섰을 때야 말을 꺼냈다. "예를 들면 나는 잠이 들고 싶거나 자기 집중을 하고 싶을 때 그런 연습을 해. 나는 무엇 이든지 한 가지를 생각해 내. 예를 들면 어떤 이름, 또는 어떤 기하학적인 형태를, 그것을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강하게 내 속에 생각하고 그것을 내 머리의 내부에서 상상하려고 노 력하지, 그러면 이윽고 그것이 내 내부에 있는 것을 느끼게 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몸 전체 로 생각하고, 차례로 내려가 마침내는 내 전체가 그것으로 꽉 차게 되고 나는 아주 확고해 진다. 아무 것도 나를 동요시킬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다른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상하게 흥분해 있었고 조바심이 나 보였다. 나는 그가 질문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했고, 얼마 안 있어 그는 자기의 본래의 문제를 나에게 제시했다. "너는 금욕하고 있지?" 라고 그는 두려운 듯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의미지? 성적인 것 말이야?" "그래, 그래. 나는 2년 전부터 금욕하고 있어. 내가 이 학설을 안 이후부터. 그전에 나는 부 도덕한 짓을 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너는 한 번도 여자하고 잔 일이 없니?" " 없어." 나는 말했다. "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 못했어." "만약에 그 여자를 발견했다면, 너는 그 여자와 자겠니?" "그럼 물론이지- 그 여자가 반대만 안 한다면......" 나는 약간 조롱 조로 말했다. "그럼, 너는 길을 잘못 들어선 거야! 우리는 완전히 금욕생활을 할 때만 내면의 힘을 형성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그것을 2년 동안이나 했어. 2년하고 1개월 조금 넘었어. 참 힘들어. 때때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어." "이것 봐, 크나우어. 나는 금욕이 그 렇게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나도 알아." 라고 그는 내 말을 막았다. "누구나가 그렇지만 너마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 랐어. 보다 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순결해야 해, 절대로!"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러나 나는 성을 억제한다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순결 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어. 너는 그럽 성적인 모든 생각을 꿈에서 추방했단 말이야?" 그는 절망에 넘쳐서 나를 보았다. "아니 그게 문제야! 맙소사,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변함이 없어. 나는 나 자신에게도 말을 못할 꿈을 밤에 꾼다. 끔찍스러운 꿈이야!"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주 옳다고 생각 은 했었지만 남에게 다시 전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고, 그것의 추 구를 내가 아직 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충고도 남에게 줄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가 나로부터 충고를 구하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줄 수 없다는 사 실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다. "나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어!" 라고 크나우어가 내 옆에서 호소했다. "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았어. 냉수욕도 했고, 눈을 가지고도 씻었어. 또 체조와 달리기...... 그러나 아무 것도 다 소용이 없었어. 매일 밤 나는 생각해서는 안 되는 꿈들만 꾸다가 깨 어나지.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그런 꿈 때문에 내가 정신적으로 배운 것이 점점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이야. 나는 자기 집중을 하거나 잠드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종종 밤새 도록 깨어 있어. 정말 더 이상 못 견디겠어. 내가 이 투쟁을 끝까지 이겨내지 못한다면, 나 는 전혀 한 번도 투쟁을 안 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너도 알겠지?" 나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는 나를 권태롭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노골적인 괴로움과 절망이 나에게 조금도 깊은 인상을 주지 않는 데 놀랐다. 내가 느낀 것은 다만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다' 는 것 뿐이었 다. "그래, 너는 나에게 할 말이 없니?" 라고 그는 마침내 지친 듯이 슬프게 말했다. "무슨 방 법이 있을 텐데! 너는 어떻게 하고 있니?" "말할 수가 없어, 크나우어.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도와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정말로 너의 본질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행동하면 되는 거야. 그 이외에 아무 방법도 없어. 네가 너 스스로를 발견하지 못한다 면 너는 영혼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내 생각으로는......" 그 친구는 실망한 듯이 말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시선에서 증오 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소리쳤다. "흥, 대단한 성자로군! 너도 부도덕한 짓을 하고 있지? 나는 잘 알아. 마치 현자인 양하고 있지만 나나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뒷 구멍으로는 더러운 것에 매달려 있어! 넌 돼지야. 나와 마찬가지로 돼지야. 우린 모두 돼지야!" 나는 그를 세워 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두 세걸음 나를 따라오더니 멈추고는 돌아 서서 뛰어가 버렸다. 나는 동정과 혐오의 마음 때문에 구역질을 느꼈다. 나는 집에 와서 내 가 그린 그림 몇 장을 방주위에 세워 놓고, 동경에 넘친 절박감을 가지고 내 꿈에 몸을 던 질 때까지 이 기분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다. 내 꿈은 곧 다시 나타났다. 대문과 가문(家紋), 어머니와 미지의 여인의 꿈이었다. 그 여자의 모습이 어찌나 또렷했는지 나는 바로 그 밤 안으로 그 여자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몽상적인 짧은 시간을 몇 번인가 이용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이 며칠 후에 완성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저녁 때 내 방벽에 걸고 스탠드를 그 앞에 갖다 놓고 마치 어떤 결 판이 내려질때까지 내가 싸워야 하는 영혼 앞에 서듯이 그 앞에 가서 섰다. 그것은 전에 본 얼굴과 비슷했고 내 친구 데미안의 얼굴과도 비슷했으며, 또 나 자신과도 비슷했다. 한쪽 눈 이 다른 한쪽 눈보다 두드러지게 위에 있었고, 시선은 내부에 가라앉아 굳어진 빛으로, 운명 에 넘친 표정으로 내 위를 지나 먼 곳에 쏠려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 있었고 내면적 긴장 때문에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추워졌다. 나는 그 그림 에게 물었고 그것을 애무했고 그것에 기도 드렸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라고 불렀고, 매춘부 라고 불렀고, 아브라삭스라고 불렀다. 그 사이에 피스토리우스의- 또는 데미안의?- 말이 떠 올랐다. 나는 그 말을 언제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으나 그 말을 다시 듣는 것 같이 느껴 졌다. 그것은 하느님의 천사와 야곱과의 투쟁에 관한 말이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놓아 주지 않겠나이다.' (창세기 제 32장 16절) 등불에 비친 내 그림의 얼굴은 내가 청할 때마다 다른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밝아지고 빛 났고 또 검게 되고 어두워졌다. 죽은 눈 위에 눈꺼플이 덮이었나 했더니 눈을 다시 뜨고 타 는 듯한 시선을 빛냈다. 그것은 여인, 남자, 소녀, 어린이, 짐승이었고, 작은점으로 희미해지 더니 다시 커지고 뚜렷해졌다. 마침내 나는 강한 내면적 요구에 따라서 눈을 감고 이번에는 그 그림을 내 내부에서 보았다. 보다 강하고 보다 힘차게. 나는 그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나의 내부에 있었으므로 나는 마치 그것이 너무 완전히 '내' 가 되어 버린 것처럼 나와 분리시킬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마치 봄의 폭풍우 때처럼 어둡고 무거운 바람 소리를 들었다. 나는 새롭게 느끼는 공포와 표현할 수 없는 감정때문에 전율했 다. 별이 눈 앞에서 떠올랐다가 꺼졌다. 잊어버렸던 최초의 유년 시절의 추억, 아니 탄생 이전 과 생성의 초기 단계까지의 추억이 몰려와서 내 곁을 흘러 지나갔다. 가장 비밀스러운 것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전부를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이는 추억은 어제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 니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갔고, 미래에 반영되었고, 나를 오늘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새로운 삶의 형식 속으로 끌고 갔다. 그 형체들은 무섭게 밝았고 눈부셨으나 나중에는 하나도 생각 나지 않았었다. 밤중에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옷을 입은 채 잠들었고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불을 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느꼈으나 몇 시간 전의 일은 이 미 생각나지 않았다. 불은 켜졌고 추억은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그림을 찾았다. 그것은 이미 벽에 걸려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어렴풋이 내가 그것을 태웠던 것이 생각났다. 아니면 내가 그것을 태우고 재를 먹었던 것은 꿈이었던가? 커다란 경련적인 불안이 나를 몰아 댔다. 나는 모자를 쓰고 마치 누가 강요하기나 하는 것 처럼 집과 골목을 지나서 폭풍을 휘몰리듯이 거리와 광장으로 뛰어갔고, 내 친구의 어두운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무엇을 찾는지 알지 못한 채 찾고 또 찾았다. 마침내 나는 매춘 부들의 집이 즐비한 교외로 나왔다. 그 곳에는 아직 더러 불빛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새로 지은 건물과 벽돌 더미가 잿빛 눈에 덮여 있었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마지의 힘에 밀려 이 황량한 곳을 달려가고 있던 나는 내 고향 도시의 새 건물이 생각났다. 그 곳에 크로머는 최 초의 계산 문제로 나를 끌고 갔었다. 그와 비슷한 건물이 잿빛 어둠 속에 지금 내 앞에 가 로놓여, 시커먼 입구가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 이끌렸다. 들어가고 싶 었다. 나는 피하려고 하다가 모래와 돌조각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피하고 싶은 욕망보다 강했다. 나는 들어가야만 했다. 판자와 부스러 진 벽돌이 넘어서 나는 쓸쓸한 곳간 속에 들어갔다. 차가운 습기와 돌 냄새가 났다. 모래 더 미가 거기에 놓여 있었다. 희미한 잿빛의 덩어리였다. 그 이외에는 완전히 어두웠다. 그때 어떤 무섭게 놀란 목소리가 나에게 소리질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싱클레어. 어떻게 여기 왔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옆에서 일어 섰다. 나는 머리칼이 곤두서면서도 그것이 내 급우인 크나우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여기에 왔어?" 라고 그는 흥분한 나머지 놀란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나를 발견 했어?" 나는 이해가 안 갔다. "나는 너를 찾은 게 아니야." 라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는 힘 이 들었고, 생기 없이 무겁고 얼어붙은 입술에서 겨우 새어나왔다. 그는 나를 응시했다. "찾으려 한 게 아니라고?" "그래, 뭐가 나를 잡아당겼어. 네가 나를 불렀니? 네가 나를 불렀을 거야. 틀림없어.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밤중인데......" 그는 여윈 팔로 경련을 일으키며 나를 안았다. "그래, 밤이야. 곧 아침이 될 거야, 오, 싱클레어, 너는 나를 안잊었구나! 나를 용서할 수 있 어?" "무얼 용서해?" "아, 내가 너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이제야 비로소 우리의 대화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4,5 일 전이었을까? 그때부터 나 는 일생을 산 것같이 그것은 먼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 에 일어났던 일 뿐 아니라 내가 왜 여기까지 왔으며, 크나우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다 알 수 있었다. "죽으려고 했구나, 크나우어?" 그는 추위와 공포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그러나 그걸 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 나는 아침까지 기다리려고 했었어." 나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새벽빛이 옆으로 똑바로, 말할 수 없이 차갑게, 무표정하 게, 잿빛 공기 속에 비쳤다. 나는 크나우어의 팔을 얼마 동안 잡고 걸어갔다. 그리고 무의식 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집에 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너는 잘못된 길은 걸은 거야! 잘못된 길을!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돼지가 아니야. 우린 인간이야. 우리는 신을 만들고는 신과 싸 우고 신은 우리를 축복하는 거야." 우리는 말없이 걸었고 헤어졌다.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낮이 되어 있었다. 성(聖) # #시에서 내가 보낸 시간 중에서 나에게 주어진 최대의 것은 오르간을 앞에 놓고 피스토리우스와 보낸 시간, 또는 벽난로 불 앞에서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브라삭스에 관한 그리스어로 씌어진 글을 같이 읽었다. 그는 <베다>의 번역문 몇 귀절을 읽어서 들려 주었고, 성스러운 '옴'이라는 말의 발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 를 내면적으로 전진시킨 것은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나에게 유쾌한 기분을 준 것은 나 자신 속으로 내가 전진해 가는 것, 나 자신의 꿈과 사랑과 예감에 대한 신뢰가 증가하는 것, 내 속에 내가 간직하고 있는 힘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는 것 등이었다. 피스토리우스와 나는 온갖 방법으로 서로 이해했다. 내가 강렬하게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가, 또는 그의 편지가 왔다. 나는 그에게, 마치 데미안의 경우처럼, 그 자신이 나 와 같이 있지 않아도 무엇을 물을 수가 있었다. 나는 그를 강렬하게 상상하기만 하면 되었 다. 그리고 내 질문을 긴장된 사고로써 그에게 향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질문 속 에 주어진 모든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것은 피스토리우스도 막스 데미안도 아니었고, 내가 꿈 속에서 보고 그림으로 그린 그 상(像), 남녀 양성적인 모습의 바로 그 상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불러야 했다. 그 모습은 인제는 내 꿈 속에, 또는 내가 그린 종이 위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모습으로서, 그리고 나 자신의 승화로서 내 속에 살아 있었다. 독특하고, 또 우습기도 한 것은 자살 미수자 크나우어와 나와의 관계였다. 내가 그에게 보 내졌던 그날 밤 이래, 그는 충실한 하인이나 개처럼 나를 흠모했고, 그의 삶을 나의 삶과 연 결시키려고 했고, 맹목적으로 나에게 복종했다. 아주 이상스러운 질문과 소망을 가지고 그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영혼을 보고 싶어했고 카발라 (중세기 유대의 신비설) 를 배우고 싶어 했다. 내가 그에게 그 모든 것에 관해서 조금도 모른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으려고 들지 를 않았다. 그는 나에게 모든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묘했던 일은 내가 내부에 있는 어떤 매듭을 풀려고 할 때면 꼭 찾아왔고, 그의 변하기 쉬운 착상과 일이 내게 종종 해결의 실마리나, 내 문제를 풀도록 만들어 준 일이었다. 종종 그가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건방진 태도로 그를 쫓아보냈다. 그러나 그도 나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로부터는 두 배로 되어서 나에게 돌아왔고, 그도 나의 지도자나 또는 길인 것 같 이 여겨졌다. 그가 나에게 가져오는 광기에 넘친 책과 글들은 그 순간에 내가 알 수 獵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런 책 속에서 구제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이 크나우어는 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길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와는 싸움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는 그렇지 않았다. 성(聖) # # 시에서의 내 김나지움 시 절의 끝날 무렵, 나는 이 친구와 묘한 체험을 가졌다. 가장 악의 없는 사람에게도 일생에 한 번, 또는 몇 번 경건과 감사라는 미덕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법이다. 누구나가 그의 아버지, 그의 스승과 헤어지는 순간을 맞이해야 하며, 누구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말지만- 고독의 냉혹을 느껴야만 한다. 나는 부모님과 그들의 세계, 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밝은 세계'와 격렬한 투쟁 속에서 헤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과 서서히, 거의 눈에 안 띄게 멀어졌고 낯설어진 것이다. 그 것은 나에게 가슴 아픈 느낌을 주었고 내가 고향을 찾을 때마다 종종 괴로운 시간을 자아냈 으나, 그것은 가슴이 메어지도록 심하지는 않았으며 견디어 낼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욕구로 사랑과 공경을 바쳤을 때, 우 리가 마음 속에서부터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을 분리시키려는 것을 인식할 경우에는 더없이 괴롭고 끔찍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친구와 스승을 배척하는 모든 생각이 독침 되어서 우리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사방의 회초리가 우리 자신의 얼굴을 친다. 그 때 에 세속의 도덕을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우리에게, '불성실' '배은 ' 같은 말이 마치 파렴치한 호칭이나 낙인처럼 떠오르고, 그때 우리들의 놀란 심장은 유년 시절의 애정에 넘친 골짜기로 다시 도망친다. 그리고 그것과도 이미 우리가 이별했으며 그 유대도 끊어져야 할 성질의 것임을 파악 못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서서히 내 마음 속에서 내 친구 피스토리우스를 그처럼 절대적인 지 도자라 인정하는 데 반대하는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의 가장 중요한 몇 개월 동안에 체험했던 것은 그와의 우정이었으며, 그의 충고와 위안이었으며 그와 가깝게 지낸 것이었다. 그를 통해서 신은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내 꿈은 나에게 다시 돌 아왔고 설명되었고 해석되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아, 그런데 나는 지금 점점 그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의 말 속에서 너무 설교적인 것 을 느꼈고, 그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우리들 사이에는 싸움도 불쾌한 장면도 절교도 청산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 한 마디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들 사이에서 환상이 조각으로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예감은 벌써 얼마 전부터 나 를 눌렀었다. 그러나 그것이 뚜렷한 감정으로 된 것은 일요일에 그의 서재에서였다. 우리는 벽난로 불을 앞에 놓고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자기가 연구하고 있고 사색하고 있으며, 그것과 가 능한 미래에 그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신비와 종교 양식에 관해서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 모든 것이 삶에 불가피하게 중요한 일이라기 보다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로 생각되었 고, 과거 세계의 잔재 밑에서의 피곤한 모색이 그의 말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이 모든 방법에 대한 반감, 신비주의에 대한 반감, 전통적인 종교형식 의 모자이크 유희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피스토리우스!" 하고, 나는 갑자기, 그리고 나 자 신에게도 의외였고 깜짝 놀랄만큼 폭발적인 악의를 가지고 말했다. "꿈에 관해서 한번 얘기 하시는 것이 어때요? 당신이 밤중에 꾸는 진짜 꿈 말입니다. 지금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몹시 진부한 느낌이 드니까요." 그는 내가 그런 투로 말하는 것을 아직까지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순 간에 내가 그에게 쏜 화살이, 그의 심장을 찌른 화살이, 그 자신의 무기 창고에서 끄집어낸 것이라는 것을 번개처럼 느끼고 재빨리 수치와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때때로 심술ㄱ은 어조로 말하곤 한 자기 비난을, 내가 지금 악의 있는 날카로운 형태로 그에게 던 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당장에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음 속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몹시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새로 장작을 불 위에 얹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이 맞소. 싱클레어, 당신은 영리한 청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진부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매우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상처입은 아픔을 그의 목소리에서 들을 수 있었 다. 아,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다정한 태도를 퓌하고 싶었고, 용서를 빌고 싶었고, 나의 애정과 따뜻한 감사를 보이고 싶었다. 감 동적인 말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느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운 채 불을 바라보고 침묵을 지켰다. 그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우리는 누워 있었고, 불은 다 타서 떨어지고 사그라졌다. 소리를 내 면서 타서 꺼지는 불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답고 다정한 무엇이 꺼지 는 것을,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저를 오해하신 것 같은 데요." 라고 나는 마침내 메마른 쉰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말은 마치 신문 소설을 소리내서 읽듯이 내 입술에서 기계적으로 새 어나왔다.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라고 피스토리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 이 옳습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정당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는 당신이 옳습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내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옳지 않아!- 그러나 나는 말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대수롭지 않은 단 한 마디로 그의 본질적인 약점과 그의 고뇌와 상처를 찌른 것을 알았다.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을 회의하고 있을 것에 틀림없는 바로 그 점 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의 이념은 '진부한' 것이었고, 그는 과거를 향한 탐구자였으며 낭만 주의자였다. 갑자기 나는 깊이 느꼈다. 피스토리우스는 이제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주던 그가 아니고 내게 주던 것도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나를 어떤 길로 인도했으나 피 스토리우스 자신도 자신을 초월하여 그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라고.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정말로 알 수 없다. 나는 조금도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 니었으며 그런 엉뚱한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예감하지도 못했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는 조금도 알지 못하고 말을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약간 재치 있고, 그럴듯한 돌 연한 생각에 몸을 맡긴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내가 저지른 작은 부주의에서 나온 거친 태도가 그에게는 하나의 심판이 되어 버렸다. 아, 얼마나 나는 그 당시에 그가 화를 낼 것을, 자기 변호를 할 것을, 나에게 소리를 지를 것을 소망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나는 혼자서 나의 내부에서 해야만 했다. 그는 할 수 있었다면,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 나 그가 미소를 지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그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가를 알 수 있었다. 피스토리우스가 그의 배은 망덕하고 건방진 제자인 나로부터 받은 타격을 그렇게 소리 없 이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잠자코 내 말이 옳다고 시인함으로써, 그리고 내 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무분별이 천 배나 확대됐고, 나 자신으로 하여금 나를 증오하게 만들 었다. 내가 때렸을 때 나는 강자를, 그리고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자를 친 것으로 알았었다 - 그러나 그는 조용하게 견디는 사람이었다. 말 없이 항복한 무방비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꺼져가는 불 앞에 엎드려 있었다. 불 속에 보이는 모든 타고 있는 모습과 꺼져가는 장작이 나에게 아름답고 행복하며 풍요했던 시간을 상기시켰고, 피스토리우스로부 터 받은 여러가지 도움이 눈 앞에 자꾸만 크게 쌓여 갔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다. 나는 일어서서 나갔다. 오랫동안 나는 그의 방문 앞에서, 어두운 계단에서,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가 나와서 나를 따라오지나 않을가 하고, 이윽고 나는 다시 걸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시내와 교외와 공원과 숲속을 밤늦도록 돌아다녔다. 그때 나는 처 음으로 카인의 표적을 내 이마 위에서 느꼈다. 내가 냉정을 되찾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생각은 나를 고발하고 피스토리우 스를 변호할 모든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정반대였다. 나는 경솔했던 나의 말을 취소하려고 몇 번이나 결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말은 진실이 기도 했던 것 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피스토리우스를 이해할 수가 있었고, 그의 꿈 전부를 내 앞에 세워볼 수가 있었다. 그 꿈은 성직자가 되는 것, 새로운 종교를 선언하는 것, 숭고와 사랑과 예배의 새로운 형식을 주고 새로운 상징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힘에 닿지 않았고 그의 의무도 아니었다. 그는 과거 속에 너무 안주해 있었고, 이집트와 인도와 미트라스 (아 리안 계의 빛의 신) 와 아브라삭스에 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지상에 이미 존재했던 그런 상징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서 새로운 것은 낡은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고 있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땅에서 솟아나야 하지 결코 지식의 수집이나 도서관에서 취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스토리우스의 역할은 어쩌면, 나에게 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그들 자신의 길로 가도록 도와 주는데 있었는지도 몰랐다. 인간에게 미지의 것을, 새 로운 신을 주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에게 갑자기 밝은 불길 같은 깨달음이 타올랐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그 자신이 임의로 선택하고 변화시키고 마음대로 관리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신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세계에 무엇을 주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성 장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자신속에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전 진하는 일밖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 길이든, 더듬어 전진한다는 한 가지 일밖에는- 이 사실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이 인식은 나에게 있어서 이 체험이 준 결실이었다. 이제까지의 나는 환상으로 미래를 그리고는 시인, 또는 예언자, 또는 무엇이든지 간에 나에게 주어질 역할에 관해서 공상했다. 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쓰거나 설교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부수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진정한 역할은 다만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 한 가지 뿐이었다. 인 간은 시인, 광인, 예언자 또는 범죄인으로 끝날지 모른다-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고, 결국 자신과 전연 무관한 것이다. 인간의 일은 멋대로의 운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 하고, 그것을 완전히, 그리고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사는 일이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중도에서 포기한 일, 도피의 시도, 대중의 이상 속으로 퇴보, 기회주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공포였다. 끔찍하고도 성스럽게 새로운 형상이 내 앞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이미 수없이 예감했고, 어쩌면 말을 하기도 했었으나 이제서야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나는 자연이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 주사위와 같았다. 불확실 속에의 시도, 어쩌면 새로운 것에 의, 또 어쩌면 무(無)에의 시도였다. 그리고 깊고 깊은 심연에서 나온 이 시도를 작용시키고, 그것의 의지를 내부에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역할이었 다. 그것만이! 나는 이미 많은 고독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보다 더 깊이 고독이 있다는 것을 예 감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피스토리우스와 화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로 있었으나 관계는 달라졌다. 단 한 번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해서 말을 했다. 사실은 그 말을 한 것은 그였다. 그는 말했 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성직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처럼 많은 예감을 갖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성직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고, 나 스스로 시인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벌써 오래 전 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 성직에 근무하겠습니다. 어쩌면 오르간 연주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가 아름답고 성스럽다고 느끼는 것들- 오르간, 음악, 신비, 상징, 신화 등- 에 에워싸여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내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싱클레어, 나는 항상 그런 욕망을 가져 서는 안 되고 그것이 사치와 약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요구 없이 완전한 운명에 몸을 맡긴다면 보다 위대하고 보다 정당했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 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어쩌면 자네는 언젠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가지의, 정 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종종 그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었습 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나도 가엾고 약한 개에 불과합니다. 약간의 따스함과 먹이를 필요 로 하고 때때로 자기의 친구가 가까이에 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자기의 운명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친구를 이미 가질 수 없게 되고, 완전히 혼자 있으며 차가운 세계의 공간만을 자기 주변에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 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순교자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범도 이상도 가지 고 있지 않으며 사랑스러운 것, 위안적인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길을 우리는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나 당신 같은 사람들은 매우 고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서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다르게 반항하는 것, 유별난 것을 욕망하는 것 속에 은밀한 만족을 느끼고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완전히, 끝까지 가려면 그런 것도 없어져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순교 자도 모범자도 되기를 원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을 일일히 생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꿀 수 있고, 미리 감지할 수 있고, 예감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아주 고요한 시간에 몇 번인가 그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나의 내부를 보고, 크게 열린 내 운명의 모습이 어려 있는 눈을 보았다. 그 눈은 지혜에 넘 칠 수도 있고 광기에 넘칠 수도 있으며, 사랑에 빛나거나 깊은 악의에 차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중의 어떤 것도 우리는 선택할 수 없고 소망할 수도 없었다. 우리 는 다만 자기 자신을, 운명을 소망해야 했다. 이 인식의 길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 있어서 피스토리우스는 나에게 지도자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 날 나는 미친 것처럼 방황하며 헤매였다. 마음 속에서는 폭풍우가 울부짖었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길이 흘러들어 가라앉은 깊은 암흑 외 에는 아무 것도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내부에서 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 다. 그 모습은 데미안과 비슷했으며, 그의 눈에는 내 운명이 어리여 있었다. 나는 종이에다 썼다. '한 지도자가 나를 버렸다. 나는 완전히 암흑 속에 서 있다. 나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다. 도와 다오.' 나는 이 종이를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모든 일은 내가 그것을 하 려고 하면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기도문을 암기했고, 그것 을 종종 나 자신에게 들려 주었다. 그것은 언제나 나를 따라왔다. 나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김나지움 시절은 끝났다. 나는 방학 동안 여행을 할 예정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제안이었다. 그 뒤에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어느 학과로 갈 것인가는 아직 미정이었다. 한 학기 동안 철학 공부를 해 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어떤 다른 과목이었더라도 다 만족했을 것 이다. 7.에바 부인 방학 동안의 어느 날, 몇 년 전 막스 데미안이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던 집에 가 보았다. 어떤 늙은 부인이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내가 데미안 집안에 관해서 물으니 그 여자는 데 미안네를 잘 기억하고 있었으나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 여자는 나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는지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가죽 앨범을 꺼내더니 데미안 어머니의 사진 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여자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내 심장 이 멈추는 것 같았다 - 그것은 바로 내 꿈에 나타났던 모습이었다! 바로 그 여자였다. 크고 거의 남성적인 여자의 모습, 아들과 비슷하고, 모성의 표정, 엄격의 표정, 깊은 정열의 표정 이 담긴, 아름답고 유혹적이며 동시에 아름답고도 가까이 갈 수 없게 엄숙한 모습이었다. 악 령과 모성, 운명과 애인, 바로 그 여자였다. 내 꿈의 모습이 지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 을 때, 나는 기적 같은 것을 느끼고 심하게 몸을 떨었다. 이렇게 생긴 여자가, 내 운명의 모 습을 그대로 지닌 여자가 있는 것이다! 어디에? 더구나 그 여자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그 뒤 예정대로 나는 여행을 떠났다. 기이한 여행! 나는 쫓기듯이 이곳에서 저곳에서 영감 이 떠오르는 곳을 찾아서 이 여인을 찾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데미안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비슷하게 닮은 모습들만을 자꾸 찾았다. 그래서 나는 낯선 도시의 골목을, 역으로, 기차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마치 착잡하게 엉킨 꿈 속에서처럼, 또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헛일인가를 깨닫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하릴없이 아무 공원이나 호텔 정원, 아니면 대합실에 앉아서 내 내부를 응시하고 내 속에 있는 모습을 생 생하게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제는 수줍은 듯했고 사라져 가는 듯이 느껴졌 다. 나는 잠을 조금도 잘 수가 없었다. 다만 낯선 풍경 속을 기차로 달리는 동안 15분 가량 졸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 번은 취리 히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예쁘게 생긴 좀 뻔뻔스러운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보지도 않고 마치 그 여자가 공기인 양 무시한 채 그냥 걸어갔다. 다른 여자에게 단 한 시 간이라도 흥미를 가질 바에는 나는 차라리 당장에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내 운명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고, 그 실현이 멀지 않은 것을 느끼고 초조한 나머지 미칠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언젠가는 어느 역에서, 아마 인스부르크에서였던 것 같은데, 막 떠난 기차의 유리창가에서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고 하루종일 속을 태 웠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습이 밤에 내 꿈 속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찾아봐야 무의미하 다는 수치스럽고 쓸쓸한 느낌을 안고 깨어나서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일 뒤에 H대학에 등록을 했다. 모든 것이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 강의 는 대학생들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비본질적이고 단순했다. 누구나가 똑같은 행동을 했고, 열 기 띤 명랑한 소년 같은 얼굴 표정은 모두가 똑같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 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조용하고 쾌적하게 고도시의 성곽 내에서 살았고, 내 책상 위에는 니체의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았다. 나는 그의 영혼이 고독을 느꼈고, 그를 쉴새없이 몰아낸 운명을 짐작했고,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나는 그처럼 타협하 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나는 불어대는 가을 바람 속을 밤늦도록 거닐었다. 음식점에서 학생들 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열어 놓은 창으로 담배 연기가 구름같이 흘러나왔고 빽빽한 높 은 목소리의, 그러나 경쾌하지 않고 생명이 없고 단조로운 노래소리가 파도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길모퉁이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두 개의 술집에서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연습 된 쾌활한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밤 공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디를 보나 공동 생활과 모임과 운명의 포기와, 따뜻한 군중들에게로의 도피가 있었다. 내 뒤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의 한 토막을 들었다. "이건 꼭 흑인 부락의 젊은이들 집같지 않습니까?" 라고 한 명이 말했다. "모든 점에서 똑 같습니다. 심지어는 문신(文身)까지도 유행이랍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젊은 유럽이지 요."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상하게도 경고하듯이 들렸고 - 귀익은 목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어 두운 골목 속을,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 중의 하나는 일본인이었다. 키가 작고 단아하게 생겼으며 가로등 밑에서 그의 미소 띤 노란 얼굴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 때 또 한 사람 이 말을 이었다. "당신네 나라 일본에서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군중을 좇아서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나 희귀한 법입니다. 여기에도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기꺼운 놀라움으로 내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말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데미안이었다. 바람이 부튼 어둠 속을 나는 그와 일본인을 뒤쫓아 어두 운 골목을 걸어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데미안의 목소리를 즐겼다. 데미안의 목소리에는 옛날과 같은 어조가 있었고 옛날같은 아름다운 고요와 안정이 있었 고, 나를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그를 찾아낸 것이다. 교외의 어떤 길 끝에서 일본인은 작별 인사를 하고 대문을 열었다. 데미안은 왔던 길을 다 시 돌아섰다. 나는 길 한복판에 멈추어 서서 그를 기다렸다. 데미안이 갈색 고무 외투를 입 고 가느다란 지팡이를 팔에 걸고 똑바로 탄력 있게 내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 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그의 규칙적인 걸음걸이를 바꾸지 않고 바로 내 앞에까지 오더 니 모자를 벗었다. 밝고 굳은 결심이 어린 이마를 가진 그 낯익고 쾌할한 얼굴이 보였다. "데미안!" 하고 나는 소리질렀다. "너로구나, 싱클레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희망하고 있었어. 너를 본 것은 오늘 밤이 처음이지만, 너는 우리를 내내 따라왔지 않아!" "나를 금방 알 수 있었어?" "물론이지. 너는 좀 변하기는 했지만 표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표적이라고? 무슨 표적?" "우리는 전에 그것을 카인의 표적이라고 불렀었지. 아직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 의 표적이야. 너는 그것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내 친구가 된 거야.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뚜렷해졌군." "나는 몰랐어.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언젠가 나는 네 그림을 그린 일이 있어, 데미안. 그리고 그 그림이 나하고도 닮은 데 놀랐어. 그것이 표적이야." "그것이 표적이야. 네가 여기 있어서 잘됐군! 나의 어머니가 기뻐할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너의 어머니? 여기 계시니? 나를 모르시는데!" "너를 잘 알고 있어. 네가 누구라는 것을 내가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너를 알아 보실거야. 오랫동안 네 소식을 못들었어." "아, 종종 편지쓰려고 했지만 되지를 않았어. 얼마 전부터 나는 너를 꼭 찾아야 한다는 것 을 느꼈어. 나는 매일 그것을 기다렸어." 그는 내 팔을 끼고 나하고 같이 걸어갔다. 고요가 그에게 발산되어 내 속으로 들어왔다. 우 리는 곧 전과 마찬가지로 얘기했다. 우리 학교 시절과 교리 문답 시간과 또 방학 동안의 그 불행했던 공동 생활을 회상했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의 가장 오래 된, 가장 밀접한 사건인 프란쯔 크로머 사건에 관해서만 얘기하지 않았다. 갑자기 우리는 이상스럽고 예감에 넘친 대화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데 미안이 일본인과의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생활에 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러다가 딴 화제로 옮겨갔다. 그것은 우연한 것 같이 보였으나 데미안의 말 속에서는 모든 것이 긴밀한 연관을 맺었다. 그는 유럽의 정신에 관해서 말하고 이 시대의 상징에 관해서 말했다. 그는 도처에 연합과 군중의 집단이 지배하고 있지만 자유와 사랑은 아무 곳에도 없다고 말했다. 이 모든 단체들은 대학생들의 조직과 합창대회에서부터 국가의 연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강제로 조직된 것이며, 불안과 공포와 낭패에서 나온 공동체이며, 내부는 썩고 낡고 파괴에 직면하 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집단이란......" 하고 데미안은 말했다. "아름다운 거야. 그러나 지금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집단이란 개인의 상호 이해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면 안돼. 그것은 얼마 동안 세계를 개조할 것이지만, 지금 집단으로 서 있는 것은 다만 군중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사람들 서 로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서로 달아나고 만나고 하는 거야. 상류 계급은 상류 계급 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는 학자끼리,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우리 는 자신과 일치할 수 없을 때만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들은 한 번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결심을 표명한 일이 없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인 거야, 그것은...... 모두 그들의 생활 법칙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어. 뒤 떨어진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그들의 종교도 윤리도, 아무 것도 우리가 필요한 것과는 부합되지 않아. 백 년 동안 유럽은 단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웠어! 그들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몇 그램의 탄약이 필요한가는 정확히 알고 있으나 신에 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는 모르지. 아니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어떻게 즐거울 수 있는가 조차도 몰라. 저 학생들 클럽을 좀 보아! 또는 부자들이 가는 오락장을! 절망적이야!- 싱클 레어, 이런 것에서는 명랑한 것이 태어날 수 없어. 이처럼 두려움에 넘쳐서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공포심과 악의에 넘쳐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신용하지 않아. 그들은 이미 이상이, 아니, 이상에 매달려서 새로운 이상을 세우려는 자를 돌팔매질을 하고 있어. 투쟁이 있을 거 야. 곧 있을 거야. 내 말을 믿어! 곧 일어날 거야! 물론 그렇다고 세계가 '개선'되지는 않아. 노동자가 공장주를 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하거나. 지배자가 바뀌어지거나 하는 것 뿐이야. 그러나 그것은 헛일은 아닐 거야. 오늘날 무가치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며 석기 시대의 신들이 사라지겠지. 지금과 같은 세계는 죽을 것이고 몰락할 것이다. 반드시 그 렇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라고 물었다. "우리? 어쩌면 우리도 같이 몰락할 지도 몰라. 우리 같은 사람들도 살해당할 지도 몰라. 그 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야. 우리에게서 남 는 것, 또 살아 남은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중심으로 미래의 의지가 모일 거야. 우리의 유 럽이 얼마 동안 기술과 과학이라고 불리는 시장으로 뒤덮어 버렸던 인류의 의지가 나타날 거야. 그렇게 되면 인류의 의지가 오늘날의 공동체의 의지나 국가와 국민들의 의지, 또는 연맹과 교회의 의지와 조금도 같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거야. 자연이 인간에게 원하는 바는 개개인 속에 그리고 너나 나의 마음 속에 씌어져 있어. 그것은 예수 속에도 니체 속에도 씌어 있었 어. 이 유일하고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 물론 매일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야. 오늘날의 집단들이 다 붕괴하고 난 후에......" 우리가 강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밤이 깊었다. "우리는 이 집에 살고 있어." 데미안이 말했다. "곧 우리 집에 와!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 어." 기쁜 마음을 안고 나는 추워진 밤공기를 마시면서 먼 집으로 향했다. 시내에는 집으로 가 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소리를 지르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그들의 유쾌하며 우스 꽝스러운 태도와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 대립을 느꼈었다. 그것은 나를 가끔 결핍의 느낌 이나 조롱의 마음으로 채웠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오늘처럼 고요와 신비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이 나하고 얼마나 상관없는 일인가를, 그리고 이 세계가 나에게는 얼마나 멀 리 사라진 세계인가를 느낀 일은 없었다. 나는 고향 도시에 있는 관리를 생각했다. 늙고 위 풍 있는 신사인 그는, 술집에서 보년 그의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마치 행복한 기념품이기나 한 것처럼 애착을 느끼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대학생 시절의 '자유'에 대해서, 마치 시인이 나 소설가가 그들의 유년기에 대해서 하듯이 예찬을 바치고 있었다. 어디서나 그들은 '자유' 와 '행복'을 지나온 자취 어느 곳에서나 찾는다. 그들 다신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그들 자신 의 길로 가라고 충고 받을까 봐 두려워서...... 사람은 몇 년 동안 술을 마시고 즐기고는 움츠 주저앉아서 국가 공무를 보는 성실한 신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도 부패되어 있다. 그리고 이 대학생들의 어리석은 짓들은 생각해 보면 다른 몇 백개의 일보다 더 이리 지도 더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도심지에서 떨어진 내 집에 와서 침대에 들어갔을 때는 이런 생각은 다 없어져 버렸다. 이 날 나에게 준 커다란 약속에 내 모든 정신은 매달 려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곧 내일이라도 나는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 이 주막에서 살든, 얼굴에 문신을 파든, 세계가 썩었든, 몰락을 기다리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내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향해서 올 것만을 기다렸 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깊이 잠잤다. 새 날은 나에게는 마치 소년 시절의 성탄절 때 체험해 본 이후 처음 느끼는 엄숙한 축제의 기분을 가지고 밝아왔다. 나는 가장 깊은 내면의 불안 에 넘쳐 있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날이 시작된 것을 나는 느꼈고, 내 주위의 세계가 변모했고 깊은 관계를 가지고 엄숙하게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또 느꼈 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을 비도 아름다웠다. 그것은 마치 엄숙하면서도 기쁨을 감추고 있는 음악이 울리고 있는 축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외부의 세계가 나의 내부의 세계와 순수하게 일치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축 제일이다. 그럴 때면 인간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장도, 길거리를 가는 어떤 얼굴도 나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대로였다. 그러면서 도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고,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고, 외경에 넘쳐서 운명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성탄절 같은 대축제일 아침에 세계를 바 로 이렇게 보았었다. 나는 이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 다. 나는 나 자신의 내부로 향해서 사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었고, 저 밖의 세상의 의미가 나에게는 상실되어 버렸다는 것, 빛나는 색채의 상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남성적인 영혼의 자유를 이 고귀한 빛의 상실로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 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런 모든 것이 다만 흩어지고 가려졌을 뿐, 자유로운 사람, 유년기의 행복을 체념한 사람도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어린 시절의 사물을 볼 때 느끼던 내적인 전율을 아직도 맛볼 수 있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뻤다. 그날 밤 내가 막스 데미안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교외의 정원을 다시 찾아가는 시간이 왔다. 비에 젖어 잿빛으로 보이는 높은 나무 뒤에 숨겨진 밝고 쾌적한 작은 집이 있었다. 커 다란 유리벽 뒤에 꽃나무가 보였고, 투명한 유리창 뒤에는 그림과 책장이 있는 어두운 색깔 의 벽이 보였다. 검은 옷에 하얀 앞치마를 입은 말없는 늙은 하녀가 나를 안내했고 내 외투 를 받아서 걸었다. 그 여자는 나를 현관에 혼자 남겨 두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금방 내 꿈의 한 가운데에 들어갔다. 문 위에 있는 검은 나무 벽에는 검은 틀의 액자가 끼워진 낯익은 그림 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세계의 껍질로부터 날아오르려 하는 노란 황금빛 새의 머리를 가진 내가 그린 새였다. 나는 가슴이 뿌듯하여 서 있었다. 마치 이 순간에 내가 체험하고 행동한 모든 게 대답과 실현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의 광경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내 영혼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문 위에 낡은 석조 문장이 달린 고향의 내 아버지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나의 적인 크로머의 나쁜 올가미에 걸려든 공포에 찬 소 년이었던 나 자신, 청년으로서의 나, 학생 방의 조용한 책상을 앞에 두고 내 동경의 새를 그 리던 나, 동경의 실로 그물에 사로잡힌 영혼- 그리고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까지의 모든 것이 내 속에 다시 울려 왔고 긍정되었고 대답을 얻었고 정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젖은 눈으로 나는 내 그림을 응시했고 내 마음 속을 읽었다. 그 때, 내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새의 그림 곁에서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커다란 여 자가 서 있었다.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연령도 없고 영혼 으로 넘친 의지만을 담고 있는 얼굴을 하고, 그 아름답고 위엄 있는 여인이 나에게 다정하 게 미소지었다. 그 여자의 시선은 실현이었고, 그 여자의 인사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뜻했 다. 말없이 나는 그 여자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내 두 손을 따뜻한 그 여자의 두 손으로 굳게 잡았다. "당신이 싱클레어지요! 나는 당신을 곧 알아 보았어요. 반갑습니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깊고 따스했다. 나는 달콤한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를 마셨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그 여자의 조용한 얼굴, 검고 신비스런 눈, 신선하고 성숙한 입, 표적을 지니고 있는 넓고 위엄 있는 이마를 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라고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고 손에 키스했다. "나는 이제까 지 일생 동안 떠돌아 다닌 것 같습니다." 그 여자는 어머니와 같은 미소를 띠었다.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야 할 수 없겠지요." 그 여자는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에 익은 길을 만나면 얼마 동안 온 세계가 고향같이 보이는 거랍니다." 그 여자는 내가 그 여자에게 오는 과정에서 혼자 느낀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 여자의 목 소리와 그 여자의 말씨는 아들과 비슷했으나 또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이 보다 성숙하였고 따뜻했고 분명했다. 예전에 막스가 아무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어 머니도 조금도 다 자란 아들의 어머니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그 여자의 얼굴과 머리카 락 위에는 젊고 달콤한 빛이 감돌았고 그만큼 그 여자의 피부는 매끄럽고 주름이 없었다. 그만큼 그 여자의 입은 아름다웠다. 내 꿈의 모습 보다도 더 여왕 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는 내 앞에 서 있었고, 그 여자 곁에는 사랑의 행복이, 그 여자의 눈에는 실현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 운명이 스스로를 나에게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제 엄격하지도 않 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아니, 성숙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나는 결심을 하지 않았고 맹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목적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에서부터는 앞으로 먼 길이 넓고 아름답게 약속의 나라를 향해서, 가까운 행복의 나무 그늘에 덮이고 다가올 온갖 쾌락이 정원에 의해서 시원하게 그늘지어져 보였다. 내가 어떻 게 되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 여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 여 자가 나에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간에 하여간 그 여자가 있기만 한다 면! 내 길이 그 여자의 길과 가깝기만 하다면! 그 여자는 내가 그린 새의 그림을 가리켰다. "막스가 당신한테서 이 그림을 받았을 때만큼 기뻐한 적은 없었어요." 그 여자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리고 나도.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림이 왔을 때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싱클레어, 어느날 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말 했어요. 이마에 '표적'이 있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내 친구가 되어야 해요, 라고...... 그게 바 로 당신이었어요. 당신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당신을 믿었지요. 언젠가는 당신이 방학 때 집에 있을 때 막스하고 다시 만났지죠. 그 때 당신은 열여섯쯤 되었을 거예요." 내가 말을 가로 막았다. "막스가 그런 말까지 하다니! 그것은 나의 가장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네, 막스는 나에게 말했어요. 지금 싱클레어는 가장 어려운 과제를 앞에 놓고 있어요. 그 는 또 한 번 단체 속으로 도망가려 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술집 단골까지 되었지만, 그는 끝 까지 그러지는 못할 걸요. 그의 표적은 가려져 있지만 몰래 그것을 불태우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나요?" "네, 바로 그랬어요. 그리고 나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마침내 지도자가 나에게 왔습니 다.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나는 어째서 나의 어린 시절이 그처럼 막스와 결합되 어 있었고, 내가 그것에서부터 놓여날 수 없는가를 알았습니다. 부인! 아니, 어머니, 나는 그 당시 종종 자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어려운가요?" 그 여자는 공기처럼 가볍게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태어난다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거예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아시지요? 지난 일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요. 길은 그렇게도 괴로웠던가요? 그저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어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쉬운 길을 알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괴로웠습니다." 라고 나는 꿈 속에서처럼 말했다. "아주 많이, 그 꿈에 나타났을 때까지 는......"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 인간은 자기의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세계는 가벼워질거예요. 그러나 영원한 꿈은 없어요. 새 꿈이 교대됩니다. 우리는 어떤 꿈도 붙들어 두려고 해서는 안돼요." 나는 크게 놀랐다. 이말은 경고인가? 거부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목적을 묻지 않 았고 그 여자의 인도를 받을 용의가 되어 있었다. "모르겠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얼마 동안 내 꿈이 계속될지는. 나는 그것이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 새 그림 밑에서 내 운명이 나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어머니처럼, 또 연인처럼. 그 운명에 나는 속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아요."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일 동안은 당신은 꿈에 충실하셔야 해요." 라고 그 여자는 진지하게 다짐했다. 어떤 슬픈 느낌, 그리고 이 매혹적 시간에 죽고 싶은 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눈물이 -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울 수 없었던가!- 끊임없이 내 속에서 솟아나고 나를 압도하는 것 을 느꼈다. 나는 격렬한 몸짓으로 그 여자로부터 돌아서서 유리창가로 가 눈물에 가려진 눈으로 화분 위를 보았다. 내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마치 찰찰 넘치게 잔에 부어진 포도주같이 부드러움에 넘쳐 있었다. "싱클레어, 당신은 정말 순진한 사람이군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 이 그것에 충실하기만 하면, 꿈 속에서와 같이 그것은 언젠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될 거 예요." 나는 억지로 돌아서서 얼굴을 그 여자에게 향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친구 몇 명을 가지고 있어요." 라고 그 여자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주 가까이 지 내는 극소수의 몇몇 친구들인데,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신도 원하신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도 좋아요." 그 여자는 나를 문간으로 데리고 가서 문을 열더니 정원을 가리켰다. "저기에 가시면 막스를 만나실 거예요." 높은 나무 밑에서 나는 마비되고 감동에 뒤흔들린 채 서 있었다. 깨어 있는 상태인지 꿈꾸는 상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뭇가지에서 빗방울이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강가를 따라서 퍼져 있는 정원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나는 데미안을 발견했다. 그는 문을 열어 놓은 정자 안에서 웃통을 벗고, 매달아 놓은 모래주머니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멋있게 보였다. 넓은 가슴, 단단하고 남성적인 머리, 들어 올린 팔은 딱딱한 근육이 솟아 올라 굵고 힘차게 보였다. 동작은 허리와 어깨와 팔꿈치로부터 마치 용솟음치는 샘물같이 자유롭게 솟아났다. "데미안!" 나는 불렀다. "거기서 무얼 하는 거야." 그는 명랑하게 웃었다. "연습중이야. 그 작은 일본인과 권투 시합을 하기로 약속을 했어. 그 사람은 고양이처럼 재 빠르고 빈틈이 없어. 하지만 난 지고 있지는 않을 거야. 아직은 약간 그에게 뒤지고 있지 만." 그는 셔츠와 웃옷을 입었다. "어머니를 만났니?" "그래 데미안, 어쩌면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니! 에바 부인! 그분에게 완전히 어울리는 이름이야. 그 분은 만물의 어머니와도 같으니까."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동안 유심히 보았다. "벌써 이름을 알고 있어? 자랑으로 생각해! 네가 처음이야, 처음 만나서 어머니가 이름을 가르쳐 준 사람은....." 그 날부터 나는 그 집을 아들처럼, 동생처럼, 그리고 또 연인처럼 드 나들었다. 문에 들어설 때마다, 아니, 정원의 높은 나무가 멀리 나타나는 것을 볼 때면, 나는 퐁요해지고 행복했다. 밖에는 현실이 있었고 거리와 집, 인간과 제도가 있었고, 도서관과 강의실이 있었다- 그러 나 이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여기서는 동화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 금도 세계에 대해서 폐쇄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를 통해서 종종 세 계의 한가운데에 살았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였다. 우리는 대다수의 인간들과 경계선에 의 해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 차이로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세상에 하나의 섬, 대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 어쨌든 다른 생활 방법의 가능성을 알 려 주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고독하게 지내온 나는, 완전한 고독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만 있 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었다. 나는 이제 행복한 사람의 식탁이나 기꺼운 자들의 축제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고, 다른 사람의 행복한 생활을 보았을 때, 질투도, 향수도 나를 엄 습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표적'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비밀을 알 게 되었다. 우리들, 표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상하게 보이고, 위험한 사람들로 통하 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깨어난 자, 또는 깨어나고 있는 자들로서 우리의 노력은 더더욱 완전하고 지속적인 깨어 있음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의 추구는 그들 의 의견과 이상과 의문과 생활과 행복을 점점 좁게 밀착시키고 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고 힘과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 표적을 가진 자들이 자연의 의지를 새로운 것으로 상상 하는 데 반해서 다른 사람들은 고집과 의지 속에 살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 랑하고 있는 인류가 그들에게는 유지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어떤 완성품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류란 먼 미래이며 그것을 향해서 우리는 모두 가고 있는 도중이고, 그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고, 그 법률은 아무 데도 안 씌어 있었다. 우리들의 무리 속에서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 이외의 친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러 가지 종류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독특한 길을 걷고 있었고 색다른 목적을 향하고 있었고, 특별한 의견과 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 중에는 점성학자와 카발리스트도 있었고, 톨스토이의 숭배자도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부드럽고 수줍고 상처받 기 쉬운 사람들, 새로운 종파의 신봉자, 인도의 수신법(修身法)을 닦고 있는 사람, 채식주의 자등도 있었다. 그들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 것은 다만 각자가 각자 의 비밀인 삶의 꿈을 존중한다는 점 뿐이었다. 신에 대한 인간의 모색과 새로운 세계상의 모색을 과거 속에서 추구해 보려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보다 가까웠는데 그들의 연구는 종종 내 친구 피스토리우스의 연구를 연상시켰다. 그들은 책을 가져오고 고대어로 된 원전 을 번역했고, 고대의 상징과 의식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인류가 여태까지 이상에 대해서 가 졌던 전재산이 무의식적인 영혼의 꿈, 인류가 그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의 예감을 더듬어 따 라가야 하는 꿈에서 생겨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 세계 의 수천 개의 머리가 달린 괴상한 신의 무리 속을 뚫고 나와 기독교의 전환의 여명에까지 이르렀다. 고독한 신자의 고백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민족마다 다른 종교의 변화를 알게 되 었다. 그리고 우리가 수집한 모든 것에서부터 우리 시대와 현대 유럽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유럽은 굉장한 노력으로 인류의 새로운 무기를 창조했으나 마침내는 절규하는 정신으로 황 폐 속에 빠져 버렸다. 유럽은 전 세계를 자신 대신에 영혼을 잃어 버렸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특정한 소망이나 구원론을 믿는 신봉자들이 있었다. 유럽을 개종시킬 것을 원하는 불교도가 있었고, 톨스토이를 교조로 받드는 사람, 또 다른 신앙이 있었다. 우리들, 제일 가까운 사람들은 다만 그들의 의견을 듣고만 있었고, 그들의 이론을 다만 상 징으로써만 받아들였다. 우리들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미래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에 대해 서 근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모든 신앙과 모든 구원론이 미리부터 무용한 것으로, 죽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무와 운명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즉 우리들 저마다가 완 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자연을 아주 올바르게 대우하여 자연의 뜻에 맞도록 살면서 불확실한 미래가 가져오는 모든 것에 대해 준비해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있는 것의 파괴와 새로운 것의 탄생이 가까이 오고 있고, 벌써 피부로 느낄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가 말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마음으로는 뚜렷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나에게 종종 말했다. "무엇이 올 것인가를 상상할 수도 없어. 유럽의 영혼은 한없이 오랫동안 묶여 있던 짐승이 야. 그것이 해방되었을 때 최초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는 짐작이 갈거야. 그러나 똑 바른 길이든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하든 영혼의 참된 고뇌만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에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너무 오랫동안 속여 왔고 마비시켜 왔으니까. 그러면 우리의 시기가 오는 거야. 이제 사람들은 우릴 필요로 할 거야. 지도자나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새 법칙을 우리는 더 이상 체험하지 못할 거야. 자발적인 자로서 시대와 함께 가고 운명이 부르는 곳에 가서 서 있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로서말이 다. 봐라, 모든 인간은 그들의 이상이 위험받고 있을 때면 믿을 수 없을 만한 일을 할 준비를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새로운 이상이, 자라남이, 새롭고도 어쩌면 위험한 움직임이 문을 두 드릴 때에는 아무도 없어. 그때에 거기 있다가 같이갈 극소수의 사람은 우리들일 것이다. 그 러기 위해서 우리는 표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마치 카인의 표적이 공포와 증오를 일으켜 서 그 당시의 인류를 좁은 목가적인 전원으로부터 위험한 광야로 몰아냈던 것처럼 인류의 과정에서 활약했던 모든 사람들은 차별 없이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유능 했고 효과를 거둔 것이지. 그것은 모세나 부처나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 어느 경우에 도 다 들어맞는다. 우리가 어떤 물결에 봉사하는가, 또는 어떤 극(極)으로부터 우리가 지배 받는가는 우리의 선택권 내에 놓여 있지 않은 문제야. 만약에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당원들을 이해했고 그들 편을 들었다면 그는 영리한 주인은 되었을지 몰라도 운명의 사나이는 되지 못했을 거야. 나폴레옹, 시저, 로욜라, 또 기타 모든 경우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이것을 언제나 생물학적으로, 진화론적으로 생각해야 돼. 지구의 표면의 전복이 물짐승을 육지로, 육지의 짐승을 물 속으로 던졌을 때의 새로운 것, 지금가지 없던 것을 완수하고 그들의 종족을 새로운 적응에 의해서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을 받 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종류였다. 그 종류가 전에는 보수적이고 현상 유지적인 성격이 특징 이었는지 또는 기인들, 혁명가들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들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발전 단계를 넘어서 그들의 종 족을 살릴 수 있었던 거야. 우리는 그걸 알지. 그러니까 우리도 준비되어 있어야 해." 그런 대화를 할 때면 에바 부인도 자주 함께 있었으나 그 여자 자신은 이런 태도로 함께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우리들 가운데서 자기 생각을 발표하는 누구에게나 다 귀 를 기울였고, 이해와 신뢰에 넘쳐 그 말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사고가 그 여자에게서 나와서 그 여자에로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여자 옆에 앉는 것, 때때로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 여자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과 영혼의 분위기에 접하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 여자는 내 속에서 어떤 변화나 우울이나 혁신이 진행되고 있으면 곧 그것을 느꼈다. 내 생각으로는, 내가 잘 때 꾸는 꿈도 그 여자에 게 영감을 얻어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여자에게 자주 내 꿈을 얘기했다. 그 여자는 내 꿈을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해했다. 그 여자가 명확한 감각을 가지고 따라갈 수 없 는 기묘한 일이란 없었다. 나는 얼마 동안 우리의 낮 동안의 대화의 복사판 같은 꿈을 꾸었 다. 나는 전 세계가 혼란상태였고 내가 혼자서, 또는 데미안과 함께 긴장해서 커다란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운명은 가려져 있었으나 어딘지 에바 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 다- 그 여자로부터 선택받든가, 또는 내던져지든가, 그것이 운명이었다. 때때로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꿈은 완전하지 않아요. 싱클레어, 당신은 중요 한 것을 잊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그것이 생각났고, 어떻게 내가 그것을 잊을 수 있었는가 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나는 불만은 느꼈고 욕망으로 괴로워했다. 나는 그 여자 옆에 앉아서 두 팔로 그 여자를 끌어안지 않고 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그 여자는 당장 에 눈치챘다. 내가 한 번은 여러 날 동안 가지 않고 있다가 혼란된 마음으로 찾아가니, 그 여자는 나를 곁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도 믿고 있지 않는 소망에 몸을 맡기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 소망을 체념할 수 있거나, 아니면 진정한 뜻에서 그 소망을 완전히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소망이 확실히 이루어진 다고 믿고 바란다면 그 소망은 또 다시 후회를 하고 공포를 느낍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해요. 내가 동화를 얘기해 드리지요." 그러면서 그 여자는 별에 대 한 사랑에 빠졌던 청년에 관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팔을 내 밀고 별을 숭배하며 별을 꿈꾸었고 그의 생각은 별을 향했다. 그러나 그는 별이 인간의 품 에 안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는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실현될 희망도 없이 별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생각으로부터 자기를 보다 선하게 정화해 줄, 말없는 성실한 고뇌 와 포기에 관해서 삶의 시를 잔뜩 썼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꿈이 모두 별에게로 갔다. 어느 날 밤에 그는 또 바닷가 높은 바위 위에 서서 별을 바라보면서 별에 대한 사랑에 불 탔다. 그리고 이 커다란 그리움의 순간에 그는 별을 향해서 허공으로 뛰었다. 그러나 뛰는 순간에 그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밑으로 해안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 죽고 말았다. 그는 사랑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가 뛰었던 순간에, 사랑의 실현을 굳고 확실하게 믿을 영혼의 힘을 가졌더라면 그는 위로 날아가서 별과 결합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구걸해서는 안 돼요." 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또 요구해서는 안 되고. 사랑은 자기 내부에서 확실성에 도달할 힘을 가져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이끄는 것이 됩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이끌 려 가고 있어요. 만일 그 사랑이 나를 이끈다면 나는 따라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뺏아 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른 때, 또 하나의 동화를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아무 희망도 없이 짝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는 완전히 자기 영혼 속에 파 고들어간 너무나 뜨거운 사랑 때문에 타버린 것 같이 느껴졌었다. 세계는 그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푸른 하늘과 녹색 바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시냇물 소리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으 며 하프 소리도 그에게는 울려 오지 않았었다. 모든 것은 다 가라앉았고 그는 가난하고 비 참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점점 더 커졌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 자를 소유할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고 싶었다. 그때 그는 사랑이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워 버린 것을 알았다. 그의 사랑은 강렬해져서 이끌고 또 이끌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여자는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왔고 그는 그 여자를 안으려고 두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서 섰을 때 그 여자는 변신을 했다. 그는 그가 잃었던 전 세계를 그에게 이끌어다 놓은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전 세계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고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하늘과 숲과 강물과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빛으로 신선하게 그를 향해서 왔고, 그에게 속하고 그의 이야기를 말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여자를 얻는 대신 그는 전 세계를 가슴에 안았고, 하늘의 별마다 그의 내부에서 자 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나는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 생활의 유일한 내용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여 자는 매일 다르게 보였다. 때때로 나는 내 본질이 이끌려가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그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다만 내 내부의 상징적 모습에 불과하며 나를 보다 깊게 내 속으로 인도해 들어가려 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다. 때때로 나에게는 그 여자의 말이, 나를 뒤흔들고 있는 다급한 문제에 대한 내 무의식의 마음의 대답같이 들렸다. 어떤 때 나는 그 여자 옆에 서 관능적인 욕망 때문에 전신을 불태우면서 그 여자가 만진 물건에 키스를 할 때도 있었 다. 그리고 점차 관능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현실과 상징이 서로 뒤섞였다. 그래서 내 가 집에서 내 방에 앉아 조용하고 다정스런 마음을 가지고 그 여자를 생각할 때, 그 여자의 손을 내 손 속에 그리고 여자의 입술을 내 입술 위에 있는 것 같이 느끼는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그 여자 집에 있었고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그 여자와 말을 하고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여자가 정말로 거기 있는 것인지, 또는 꿈인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사랑을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가를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한 개의 새로운 인식을 발견했을 때, 나는 에바 부인의 키쓰를 받은 것과 똑같은 감정을 맛보았다. 그 여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성숙하고 향기로우며 따 스한 감정을 미소에 실어 보냈을 때, 나는 내 자신의 내부를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은 기 분을 맛보았다.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모든 운명은 그 여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 여자 는 나의 모든 생각 속에서 변신할 수 있었고 나의 모든 생각은 그 여자 속에서 변신했다. 부모님과 함께 보낼 성탄절이 오는 것이 나는 두렵기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주일 동안에 에바 부인 없이 지내는 고통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러나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집에 있으면서 그 여자를 생각하는 것은 참 멋있는 일이었다. 내가 H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여자의 감각적인 현실감으로부터의 나의 안전과 독립을 즐 기기 위해 이틀 동안 그 여자의 집에 가지 않았다. 또한 나의 꿈에서 그 여자와 나와의 결 합이, 새로운 비유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바다였고 나는 그 속에 흘러들어가 합류했다. 그 여자는 별이었고 나도 또한 별이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로 가고 있 었고 우리는 만났다. 서로 끌리는 것을 느꼈고, 자신을 느끼는 같은 곳에 머물고 작은 원을 그려가며 교차하면 서 끝없는 행복을 맛보며 영원히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그녀를 찾은 날, 나는 이 꿈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다. "아름다운 꿈이군요." 라고 그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을 실현시켜 보세요!" 이른 어떤 봄날이었다. 나는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따스한 바람이 히아신드의 향기를 방안에 짙게 뿌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계단을 올라가 막스 데미안의 서재로 갔다. 나는 가볍게 노크를 한 다음에 늘 그랬던 것처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방은 어두웠다. 커튼은 모두 내려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 실험실로 쓰고 있는 옆방으로 가 는 문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부터 비구름을 뚫고 비치는 태양의 밝고 흰 빛이 흘러왔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 고 커튼을 열었다. 그때 나는 커튼을 내린 유리창 옆의 의자 위에 막스 데미안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는 웅크리고 있었고, 이상스럽게 달라져 있었다. 이것을 전에 본 일이 있다! 라는 느낌이 섬 광처럼 내 머리를 스쳤다. 그는 팔을 빳빳이 늘어뜨리고 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그의 약 간 앞으로 기울인 얼굴은 죽은 것 같았고, 뜨고 있는 눈의 동공에는 작고 날카로운 한 줄기 빛의 반사가 마치 한 조각의 유리처럼 힘없이 빛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 가라앉아 아주 굳어진 표정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으며 마치 사원의 문간에 있는 태고 때의 짐승의 얼굴같이 보였다. 추억이 나에게 엄습해 왔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한 번 본 일이 있었 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고, 내가 어린 소년 때였다. 꼭 이처럼 눈이 내면을 응시하고 두 손은 생기 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파리가 한 마리 얼굴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는 그때, 아마 6년 전에 꼭 지금과 같은 나이로 보였고 또 시간을 초월한 얼굴로 보였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나는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에서 나는 에바 부 인을 만났다. 그 여자는 내가 여태까지 본 일이 없는 창백하고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늘이 창 밖을 지나갔다.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그림자 하나가 창밖을 스쳤다. "막스한테 갔었어요." 라고 나는 빠른 어조로 속삭여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는 잠자코 있어요. 아니면 내부에 잠겨 있는지...... 잘 모르겠어 요. 나는 그가 전에 한 번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를 깨우지 않으셨겠지요?" 라고 그 여자는 빨리 물었다. "아니오. 그는 내가 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나는 곧 다시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에바 부 인, 말해 주세요. 그가 어떻게 된 것인가를......" 그 여자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걱정하지 마세요, 싱클레어.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아니예요. 그는 그저 틀어박혀 있는 거예요. 곧 끝날 거예요." 그 여자는 일어섰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원으로 나갔다. 나는 같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현관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히아신드의 마취시키는 듯한 향기를 맡았고, 문 위 에 걸린 내 새 그림을 응시했다. 이 집은 그 날 아침 이상스러운 그림자와 불안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에바 부인은 얼마 안 있어 들어왔다. 빗방울이 그 여자의 검은 머리에 맺혀 있었다. 그 여 자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피곤이 그 여자 위에 깃들어 있엇다. 나는 그 여자 옆으로 가서 몸 을 구부리고 그 여자의 머리에 맺힌 빗방울에 입맞추었다. 그 여자의 눈은 밝고 조용했으나, 빗방울은 눈물 같은 맛이 났다. "그에게 가 볼까요?" 라고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 여자는 약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린애같이 굴지 마세요, 싱클레어." 라고 그 여자는 마치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둑을 무너 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큰 소리로 나에게 타일렀다. "지금은 가세요.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금은 당신과 얘기할 수가 없어요." 작별 인사를 한 나는 집과 도시를 떠나서 산으로 갔다. 비스듬히 내리는 가느다란 비가 얼굴에 닿았다. 무거운 압력 밑에서 구름이 낮은 곳을 공 포에 싸인 듯 지나갔다. 밑에는 바람이 거의 없었다. 위에서는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이 강철 같은 잿빛 구름을 뚫고 몇 번이나 창백하고 강렬하게 비치었다. 그때 하늘에 풀어진 노란 구름이 흘러왔다. 그 구름은 잿빛 구름에 막혔다. 바람이 몇 초 동안 노랑과 파랑으로부터 거대한 새 한 마리를 형성했다. 그 새는 파란 빛의 혼돈으로부터 몸을 풀고 날개를 크게 펄럭거리면서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폭풍우 소리가 들렸다. 비가 우박과 섞여서 쏟아져 내렸다. 짧고, 정말 같지 않은 무섭게 들리는 바람 소리가 비에 젖은 풍경 위에 떨어졌다. 그 뒤에 곧 또다시 태양이 뚫고 나왔고, 가까운 갈색 숲 위에서는 흐리고 창백한 눈이 환상처럼 빛나고 있었다. 내가 몇 시간 뒤에 흠뻑 젖은 채 돌아왔을 때 데미안이 직접 대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나 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실험실에는 가스등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는 연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앉아." 하고 그는 권했다. "피곤할 테니까. 지독한 날씨야. 오래 밖에 있었구나. 차가 곧 올 거야." "오늘은 무언지 좀 이상해." 라고 나는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이까짓 폭풍우 때문이 아닐 거야." 그는 살피듯이 나를 보았다. "무엇을 보았니?" "응, 나는 구름 속에서 잠시 동안 뚜렷이 그 그림을 보았어." "무슨 그림?" "새였어." "새야? 그 새였니? 네 꿈의 새?" "그래, 새였어. 그것은 노란 빛이었고, 검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들어갔지." 데미안은 크게 숨을 쉬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늙은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마셔, 싱클레어- 난 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우연이라고? 그런 것을 우연히 볼 수가 있단 말이야?" "맞았어, 아니야. 그것은 무엇을 뜻 하고 있어. 무얼 뜻하는지 알겠어?" "몰라. 나는 다만 그것이 어떤 큰 충격이었다는 것을- 운명이 한 걸음 다가간 것을 뜻한다 는 것을 느꼈을 뿐이야. 내 생각에는 그것이 우리들 모두와 관련이 있을 거야." 그는 힘 있는 걸음으로 왔다갔다했다. "운명에의 한 걸음!"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똑같은 것을 나는 어젯밤에 꿈꾸었어. 그리고 어머니는 어제 그런 예감을 느꼈어. 어머니도 똑같은 말을 했어- 내 꿈은 내가 나무 나 또는 탑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꿈이었어.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나는 전체를 보았 어. 그것은 커다란 평야였는데 도시와 촌락이 전부 타고 있었어. 나는 아직 모든 것을 다 말 할 수 없어. 아직도 모든 것이 뚜렷하지 않으니까." "너는 그 꿈을 너 자신에게 관계된다고 이해했니?" 라고 나는 물었다. "나에게 관계된다고? 물론이지.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과 관계없는 것을 꿈꾸는 법이 없 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나 하나에만 관계되지 않아. 네 말이 옳아. 나는 나 자신의 영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꿈을 꽤 정확히 식별하지. 그리고 또 드문 일이지만, 인간의 운명 전체를 암시하는 예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을 꾼 일은 한 번도 없었어. 말할 수 있는 꿈을 꾼 일은 거의 없었어. 꿈의 해석은 너무나 불확실하거든.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것 은 나 혼자만에 관계되지 않는 어떤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야. 그 꿈은 내가 전에 꾼 일이 있는 그 일부였고, 그 계속이지. 내가 전에도 얘기한 일이 있는 예감을 받은 적은 이 꿈들로 부터야. 싱클레어, 우리의 세계가 부패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계의 몰락, 또는 그와 비슷한 무엇을 예언할 아무 근거도 되지 않아. 그러나 나는 몇 년 동안 꿈을 꾸었어. 그 꿈으로부터 나는 결론을 얻었어. 아니 느끼고 있어. 어쨌든- 낡은 세 계의 붕괴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거야.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고 어렴풋한 예감이었어. 그 러나 그것들은 점점 뚜렷해지고 점점 강해졌어. 아직도 나는 관계되는 어떤 끔찍하고 큰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밖에는 알지 못한다. 싱클레어! 우리는 우리가 가끔 나누었던 것을 체험하게 될 거야! 세계는 새로워지려고 해. 죽음의 냄새가 나지. 죽음 없이는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아-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끔 찍한 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너의 꿈의 나머지 부분도 얘기해 줄 수 없니?" 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어."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여기들 앉아 있군!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신선해 보였고, 이제는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 여자에게 미소지었다. 그 여자는 마치 겁을 내는 아이들 곁에 오는 어머니처 럼 우리들 앞에 왔다. "슬프지는 않아요, 어머니. 우리는 다만 이 새로운 징조에 대해서 풀이해 본 거죠.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어요. 와야 할 것이라면 갑자기 닥쳐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싫어 도 체험하게 되겠죠."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현관을 지나갈 때 히아신드의 냄새를, 시들고 맥빠진 시체같은 냄새를 느꼈다. 이미 그림자는 우리 위에 내려 진 것이다. 8.끝의 시작 나는 여름 학기에도 H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집안에 있지 않고 늘 강가의 정원에 있었다. 권투 시합에 져 버린 일본인은 가고 없었고, 톨스토이 숭배자도 가 버렸다. 데미안은 말을 구해서 매일 끈기 있게 승마를 했다. 나는 자주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 다. 나는 가끔 내 생활의 평화스러움에 대해서 의아한 느낌을 가졌다. 나는 혼자 있는 것, 체념을 길들이는 것, 나의 고뇌와 씨름하는 것이 그처럼 오랫동안 습관 되어 있었으므로 H에서 보낸 몇 달 동안은, 마치 안락하게, 마법에 걸린 듯 아름답고 유쾌 한 감정 속에서만 살 수 있었던 꿈의 섬 나라같이 생각된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저 새롭고 높은 공동체의 전조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행복 위에 깊 은 비애가 내리덮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충족된 안이한 생활 속에서 살게끔 나는 태어나 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고통과 추구가 필요했다. 언젠가 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서 다시 혼자-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세계속에 완전히 혼자 서게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 곳에는 고독과 투쟁만이 있고 평화도 공동 생활도 없을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운명이 아직도 이 아름답고 조용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 면서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에바 부인의 가까이에 머물렀다. 여름의 몇 주일은 가볍고 빠 르게 흘러갔다. 학기는 벌써 끝나 나고 있었다. 이별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 을 생각해서는 안 되었고 또 사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꽃에 매달린 나비같이 이 아름다운 날들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행복한 시대이며 내 삶의 실현이며 동맹 속 에 받아들여진 것을 뜻했다-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나는 다시 나 자신과 싸워 나가 야 하고, 동경에 싸이고 꿈을 꾸면서 혼자 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나의 이런 예감이 갑자기 강하게 엄습해 와서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 이 갑자기 타올랐다. 얼마나 잠깐 동안인가? 나는 곧 그 여자를 못 보게 되고, 그 여자의 탄 력있고 보기 좋은 걸음걸이를 집안에서 못 보게 되며, 내 책상 위에 그 여자가 갖다 놓은 꽃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제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그 여자를 얻고, 그 여자를 위해 서 투쟁하고, 그 여자를 영원히 내 곁에 끌어오는 대신, 꿈을 꾸었고, 쾌적한 분위기에서 몸 을 흔들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가 전에 순수한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말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수백 개의 섬세한 충고의 말, 수백 개의 나직한 유혹, 또는 어쩌면 그것은 약속의 말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아무 것도 못한 것이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모든 나의 의식을 집중하여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에 게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고, 또 그 여자를 나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내 영혼의 힘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그 여자는 와야 했고, 내 포옹을 바라야 했고 나의 키스는 그녀의 성숙 한 입술을 끝없이 파헤쳐야 했다. 나는 손과 말이 싸늘해질 때까지 마음을 긴장시켰다. 내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 꼈다. 잠시 동안 내 속에서 무엇이 굳게 응결되었다. 그것은 밝고 차가운 무엇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하나의 결정(結晶)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자 아(自我)라는 것을 알았다. 차가움이 가슴에까지 올라왔다. 끔찍한 긴장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무엇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죽을 듯이 피로했으나 에바 부인이 방에 들어올 것을 타는 듯한 갈망과 황홀한 심정 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긴 길을 다가왔고 가깝고 딱딱하게 울리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나는 창에서 뛰어내렸다. 밑에서 데미안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뛰어내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어, 데미안? 에바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창백했고 땀이 두 줄로 이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 고 있었다. 그는 달려온 말의 고삐를 정원의 울타리에 매고 내 팔을 잡고, 나와 함께 길을 걸어 내려갔다. "벌써 소식을 들었니?"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데미안은 나의 팔을 누르고 나에게 얼굴을 향하고 어둡고 동정에 넘친 이상한 시선으로 나 를 보았다. "그래, 드디어 시작한 거야. 러시아와의 극도의 긴장 관계를 너도 알고 있었잖아-" "뭐라고? 전쟁이야? 나는 그런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는 가까이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 구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선전 포고는 안 내려졌어. 그러나 전쟁이 있을 거야. 꼭 믿어도 좋아. 나는 그때 이 래 너를 이 일로 괴롭히진 않았지만 사실은 그 후로 세 번이나 그런 징조를 보았어. 그것은 세계의 몰락도 지진도 혁명도 아니고 전쟁이었던 거야. 전쟁이 어떻게 때려부수는지를 너는 보게 될 거야.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구경거리지. 벌써부터 누구나가 그것이 터지기를 기다리 고 있으니까. 그들에게는 삶이 그처럼 무의미한 것으로 된 거야- 그러나, 너도 알게 되겠지 만 싱클레어,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 이것은 큰 전쟁, 아주 큰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다만 시작에 불과해. 새로운것이 시작된다. 새로운 것은 낡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일일 거야. 너는 어떻게 하겠어?"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모두 나에게는 아직 낯설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모르겠어- 너는?" 그는 어깨를 추켜 보였다. "소집영장이 나오면 나가겠어. 나는 소위야." "네가? 나는 그런 줄 조금도 몰랐는데......" "그래. 그것은 나의 적응 중의 하나다. 너도 알지만, 나는 조금도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좋 아하지 않아. 그래서 늘 깨끗하려고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 왔어. 나는 아마 일주 일 내에 일선에 가 있게 될 거야." "맙소사-" "너는 감상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총탄을 쏘라고 명령 하는 것은 나에게 조금도 유쾌한 일이 못 돼.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야. 우리들 중의 누구나가 다 지금은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 들어가게 된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에게도 영장이 나올 거야." "그럼 너의 어머니는? 데미안....." 비로소 나는 15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세계는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나는 달콤한 모습을 불러오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집중했었는데 지금은 운명이 위험한 잿빛 가면으로부 터 갑자기 새로운 모습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머니? 아, 어머니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 어머니는 안전해. 아마 지금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안전할 거야- 너는 어머니를 그렇게도 사랑하니?" 그는 완전히 자유스럽고 밝은 웃음소리를 냈다. "당연한 일이 아니야, 싱클레어! 물론 알고 있었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 게 에바 부인이라고 부른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너는 오늘 어머 니 아니면 나를 불렀지? 안 그래?" "그래, 불렀어- 나는 에바 부인을 불렀어." "어머니는 그것을 느꼈어.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보냈어. 너에게 가 보라고. 나는 마침 어머니에게 러시아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었어." 우리는 돌아섰다. 그리고 별로 말을 안 했다. 그를 말고삐를 풀고 올라탔다. 나는 이층의 내방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데미안의 보고 때문에, 그리고 또 그 전의 나의 긴장 때문에 얼마나 피로해 있는가를 느꼈다. 그러나 에바 부인은 나의 마음 속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는 가슴 속에 내 생각을 가지고 그 여자에게 도달한 것이다- 만약에- 이 모 든 것이 얼마나 이상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제는 전쟁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것에 관해서 그렇게 많은 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세계의 조류가 우리 곁을 그냥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 스러운 일인가- 세계의 조류가 갑자기 우리 심장 한가운데를 흐른다는 것, 그리고 모험과 거친 운명이 우리를 부른다는 것, 또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지금, 또는 이제 곧 오리라는 것, 세계가 변모하려고 한다는 것을 얼마나 이상스러운 일인가. 데미안의 말이 옳 았다. 이것은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다만 내가 이 고독한 운명을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아니, 전 세계와 함꼐 체험해야 한다는 일이다. 그것도 또 좋은 일이리라! 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저녁 때 거리를 산책하고 있으려니까 여기저기가 온통 야릇한 흥분에 뒤끓고 있었다. 어디서나 '전쟁' 이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에바 부인의 집에 가서 함께 마당의 정자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아무도 전쟁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가 떠나오기 직전에 에바 부인이 말했다. "싱클레어, 당신은 오늘 나를 불렀어요. 내가 왜 직접 가지 않았는가를 당신은 아시지요. 그러나 당신이 이제는 부를 줄 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표적을 가진 누군가가 필 요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부르세요." 그 여자는 일어서서 어둑어둑한 마당을 압장서서 걸어갔다. 이 신비스러운 여자는 말없는 나무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 여자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조그맣고 부드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드디어 종말이다. 사태는 급박하게 진전되었다. 곧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은회색 외 투를 입은 군복 차림의 이상스럽게 낯선 데미안도 떠나갔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집에 바래 다주었다. 얼마 안 있어서 나도 그 여자와 작별했다. 그 여자는 내 입술에 키스를 하고, 나 를 잠시 동안 가슴에 껴안아 주었다. 그 여자의 커다란 두 눈은 나의 눈 가까이에 불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생각했으나 그것은 사실은 우 리들 모두가 잠시 동안 드러내어진 '운명'의 모습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나 와서 기차를 탔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표적을- 우리는 표적이 아니라- 사랑과 죽 음을 뜻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표적을 보았다. 나도 전에 본 일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포옹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기꺼이 그것 에 응했다.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운명의 의지가 아니라 도취에서였다. 그러나 그 도취는 성스러웠다. 그들 모두가 이 짧고 절박한 눈길을 운명의 눈 속에 보내고 있었기 때 문에 그 도취는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 갔을 때는 겨울이었다. 나는 처음에 끊임없는 사격 때문에 흥분했음에도 불 구하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전에 나는 왜 인간이 어떤 이상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가를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이 이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것은 개인적이고, 자유스럽고, 스스로 선택한 이상이어서는 안 되고, 공동적으로 받아들여질 이상이어야 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 평가했던 것을 알았다. 임무와 공동의 위 험이 그처럼 그들을 단일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 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 굉장히 많은 사람이 공격 때 뿐이 아니라 그밖의 경우에도 약간 광기를 띤 굳고도 아득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시선은 목적 같은 것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거대한 운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은 각오가 되어 있었고, 유용했으며, 그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어지고 있었다. 세 계가 전쟁과 영웅주의와 기타 낡아빠진 이상을 향해 응결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또 가상적 인 인류의 음성이 그만큼 멀고 비현실적으로 들리면 들릴수록, 그 모든 것은 전쟁의 외부적 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다만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깊은 곳에서 무엇이 생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인류와도 같은 무엇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고 그 중의 많은 사람이 내 옆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증오와 분노와 살 해와 파괴가 그들 자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대상도 목 적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감정조차도 적에게로 돌려지지 않 았다. 그 피비린내나는 작업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광분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분열된 영혼과 내부의 발로에 불과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알은 세 계였다. 세계는 파괴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점령했던 어느 농가 앞에서 나는 이른 봄바람에 보초를 섰다. 맥빠진 바람이 불규 칙하게 멋대로 불었고 놀라운 플랑드르의 하늘에는 떼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구름 뒤에 어 딘가에는 달이 숨어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불안했었다. 무엇인지 모를 어떤 근심이 나를 방해했다. 지금 나의 어두운 초소에서 나는 여태까지의 나의 생활과 에바 부인, 그리고 데미안을 절실히 생각했다. 나는 포플라 나무에 기대서서 움 직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며시 꿈틀거리는 밝은 하늘이 곧 커다랗게 솟아나는 일 련의 그림으로 되었다가는 맥박이 이상하게 약해지고 비바람에 대해서 무감작해진 나의 피 부와 번득이는 내면의 맑게 깬 의식에서 지도자가 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구름 속 에서는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넓은 지 역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한복판에 거대한 신의 모습이 반짝거리는 별을 머리에 달고 산 처럼 크게 에바 부인의 표정을 띠고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모습 속으로 마치 동굴 속으로 사라지듯, 사라져 들어가 버렸다. 여신은 땅에 몸을 구부렸다. 그 여자의 이마 위의 점이 밝게 빛났다. 어떤 꿈이 그 여자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그 여자 는 눈을 감았고, 그 여자의 커다란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 여자는 크게 소리 질렀고, 그 여자의 이마로부터 수천 개 빛나는 별이 쏟아져 나와 아름다운 곡선과 반원을 그으면서 검은 하늘이 날았다. 그 별 하나가 밝은 소리를 내며 바로 나에게로 날아왔고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것은 소리를 내면서 수천 개의 불꽃으로 부서지고 나를 끌어당기고는 다시 땅바닥에 내던져 졌다. 내 위에서 세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나는 포플라 나무 옆에서 흙에 파묻힌 채 상처투성이가 되어 발견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다. 총탄이 내 위를 스쳐갔다. 나는 차에 실려서 텅 빈 들판 위를 덜그럭거리면서 갔다. 나는 거의 언제나 자고 있지 않으면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깊이 자면 잘수록 나는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 나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힘을 내가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헛간의 밀짚 위에 누워 있었다. 헛간 속은 어두웠다. 누가 내 손을 밟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더 멀리 갈 것을 원했다. 그것은 나를 보다 강하 게 끌고 갔다. 나는 다시 차에 실렸고 나중에는 들것인지 사다리엔지 실려서 갔다. 나는 점 점 강하게 어디론지 갈 것을 명령받은 것 같이 느꼈고, 마침내 그곳에 가 닿을 욕망 이외에 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드디어 나는 목적지에 와 닿았다. 밤이었다. 나는 완전히 의식이 깨어 있었고, 나의 내부에 서 인력(引力)과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어떤 방의 바닥에 눕혀져 있었고, 내가 부름을 받은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내 침구 바로 옆에는 또 한 개의 침구가 놓여 있었고 그 침구 위에 누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나 를 보았다. 그는 이마에 표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말을 못 했다. 또는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벽에 걸린 등불의 빛이 비쳐 흘렀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그는 계속해서 내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싱클레어!" 라고 그는 속삭였다. 나는 그에게 그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표시로 눈짓을 했다. "꼬마!" 라고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의 입은 내 입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 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프란쯔 크로머가 생각나니?"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대답을 했고 미소지을 만한 여유도 있었다. "알겠니, 싱클레어! 내 말을 잘 들어! 나는 가야만 해. 크로머나 그밖의 일 때문에 다시 내가 필요할 일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때는 설혹 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지금처럼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그렇게 와 줄 수는 없어. 그때엔 너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네 마음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알겠어?- 그리고 또 한가지! 에바 부인의 부탁인데 나한테 키스를 해 주면서, 언제든지 싱클레어가 불행하게 되거든 그녀가 해주는 거라고 말하며 이 키스를 해주라고 했어......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데미안이 내 입술- 전혀 멈출 것 같지 않은 피가 줄곧 흐 르는 내 입술- 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을 느끼며 곧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잠을 깨었다. 나는 붕대를 갈아야 했다.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얼른 옆자리 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들도 모두 고통스러웠다. 그 러나 때때로 나는 열쇠를 발견하고 나 자신의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들여다 본다. 그 검은 거울 위에 나 자신의 모습이 그- 이제까지 내 친구이며 길잡이 였던 저 데미안과 꼭 같이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