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우구스투스 -헤르만 헤세- 모스트아켈 거리에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불행한 일 때문에 결혼후에 곧 남편을 잃고 지금은 가난한 생활속에 의지 할 데 없이 좁고 작은 단칸방에 살며 아버지 없는 유복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이고 완전히 외토리였기 때문에 생각이 언제나 한시바삐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아기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아름다 운 일, 빛나는 일, 부러운 일을 아기와 관련지어 아기만을 위해 생각해 내고 바 라고 꿈꿀 뿐이었다. 창문에 유리 거울이 달리고 뜰에 분수가 있는 석조건물 집이면 우선 아기에게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으나, 아이의 장래에 마음이 미치면 적어도 대학교수나 임금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가난한 엘리자베트 부인의 이웃에 한 늙은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노인이 외출하는 것을 보기란 좀체로 드문 일이었는데, 어쩌다 간혹 외출할 때 보면 흰 머리에 키는 작달막한데 술이 달린 모자를 쓰고 초록색 양산을 들고 있었다. 그 양산의 손잡이는 옛날 것과 마찬가지로 고래뼈로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했고, 어른들은 저마다 이 노인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어 서 저렇게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으나, 밤이 되면 때때로 다 쓰러져가는 그의 오두막에서 아주 많은 정교한 소악기에서 울려 나오 는 듯한 아름답고 묘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때 아이들이 그 집 언저리 를 지나칠라 치면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저 안에서 천사가, 혹은 어쩌면 물의 요 정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도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아 "아냐, 아냐. 저건 틀림없이 오 르골(음악상자, 자명악) 소리일거야" 하고 말했다 이웃 사람들은 이 작은 노인을 빈스반겔 씨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는 엘리자 베트 부인과 남다르고 별난 일종의 친구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여태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 작은 몸집 의 늙은 빈스반겔 씨는 이웃 엘리자베트 부인 집 창문 앞을 지나갈 때면 그때 마다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했고, 그녀도 반가운 듯이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사람은 저마다 "내게 큰 불행이 닥쳐오게 되면 꼭 이웃집에 가서 의논을 하고 지혜를 빌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엘리자베트 부인이 혼자 창가에 걸터앉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슬퍼하거나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고 몽상에 잠겨 있을 때면 빈스반겔씨는 살짝 창문을 열었다 그러면 어두운 방안에서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빛처럼 마음을 어루만지며 달래주는 음악이 살며시 은빛 가락을 허공중에 뿌리는 것이었다. 또한 이웃 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는 뒤쪽 창가에 낡은 제라늄 화분을 몇 개 놓아두고 있었는데 늘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그 제라늄은 언제나 푸릇푸릇하게 잘 자라 꽃을 활짝 피우고 결코 잎이 시드는 일 이 없었다. 그것은 엘리자베트 부인이 아침마다 일찍 물을 주고 돌보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거센 비바람이 불어오는 밤이면, 모 스트아켈 거리에서는 아이들의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 때마침 그때 가엾은 부인은 해산할 때가 가까와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는 완전한 외토리인 까닭에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어떤 할머니가 호롱불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물을 끓이고, 린네르(아마포)천을 마련하고 해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해주었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말없이 모든 일을 할머니가 하는 대로 맡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가 태어나 깨끗한 새 포대기에 싸여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잠들기 시작했을때, 비로소 부인은 할머니에게 대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빈스반겔 씨의 부탁을 받고 왔다오."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부인은 피로에 지쳐 잠이 들고 말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녀를 위해 더운 우유가 준비돼 있고 방안이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 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조그만 사내 아이가 잠들어 있다가 배가 고픈지 울 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아기를 들어올려 가슴에 꼭 껴안았다. 너무도 귀여운 데다 튼튼 해 보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 아기를 이미 볼 수 없는 죽은 애아버지를 생 각하고 부인은 눈에 눈물을 글썽였지만, 아버지 없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품자 다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아기와 함께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또다시 따뜻한 우유와 스프가 준비돼 있었고 아기는 새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멀지 않아 곧 어머니는 본래의 건강을 되찾고 힘도 나서 자신과 어린 아우구스투스를 혼자서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곧 아들로 하여금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인데 대부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이 웃의 오두막에서 다시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올 무렵에 그녀는 빈스반겔 씨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가 머뭇머뭇하면서 어둠 속에서 문을 두르리자 빈스반겔씨는 상냥하게, "어서 오세요!" 하고 마중을 나왔다. 그러자 음악소리가 뚝 그쳐버렸다. 방안에서는 낡고 작은 탁상 램프가 책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게 다른집과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제가 찾아뵙게 된 것은,' 하고 엘리자베트 부인은 말했다 "친절한 할머니를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제 가 다시 일하게 되어돈을 얼마간 벌 수 있게 된다면 할머니께도 사례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하여 아버지와 똑같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대부가 되어주십사고 부탁드릴 분이 없어요" "그렇구려,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오." 하고 이웃 노인은 흰 수염을 쓰다 듬었다. "부인에게 무슨 곤란한 일이 일어났을때 아기를 돌봐줄 수 있는 친절하고 돈 많은 대부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혼자 사는 가난한 늙은이인데다 친구도 없 어 나를 대부로 삼아주신다면 모를까 권할 만한 사람이 없다오." 이 말을 듣고 가난한 어머니는 무척 기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노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를 대부로 삼기로 했다. 다음 일요일날 두 사람은 아기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예의 할머니도 다시 나타나 아기에게 1달란트의 은화를 주었다. 어머니가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자 그 할머니가 말하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두구료, 나는 나이먹고 늙은 데다 필요한 만큼은 돈을 갖고 있으니까, 이 은화가 아기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지 모르지 않수, 나는 빈스반 겔씨를 도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우. 우리는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우."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돌아왔다. 엘리자베트 부인이 손님을 위해 커피를 끓이 자 이웃 노인이 과자를 갖고 와서 정식으로 세례축하연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동안에 아기가 어느새 잠들자 빈스반겔씨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제 나는 아우구스투스의 대부가 되었소. 임금님의 성이나 금화가 가득 든 돈주머니라도 선물로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보시다시피 그런 건 내게 없소. 대부 할머니가 준 은화 옆에 나란히 나도 1달란트의 은화 한 닢을 놓아둘 수 있을뿐이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일이라면 가능한 한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소. 엘리자베트 부인, 부인은 이미 아기를 위해 지금까지 뭔가 마음 속에 작정을 하고 여러 가지 아름답고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을 거요. 헌데 그중에서도 아기에게 제일 좋은 일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 해봐요. 그러면 그일이 꼭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내가 힘써보겠소, 아기를 위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 한 가지만은 가져도 좋아요. 그렇지만 한 가지만이어야 돼요. 그게 뭔지 잘 생각해 보고 오늘 밤에 내 작 은 오르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 소원을 아기의 왼쪽 귀에 대고 말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그 소원이 이루어질거요."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곧 작별을 고했다. 할머니도 함께 돌아갔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혼자 남아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달란트 은화 두 닢이 요람속에 들어 있지 않고 과자가 식탁위에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 녀는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요람 옆에 앉아 아기를 흔들어주면서 아름다운 소원을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아기를 부자로 만들까, 미남으로 만들까, 힘센 장사로 만들까 아니면 현명하고 영리한 사람으로 만들까 하고 생각했으나, 어느 경우든 마음에 걸리 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는, '그래,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그 작은 노인의 농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손님 접대와 앞으로 살 걱정과 여러 가지 소원 때문에 지쳐 요람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아름답 고 부드러운 음악이 울려왔다. 어떤 오르골로부터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감미로운 가락이었다. 그것을 듣고 있으려니 엘리자베트 부인은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지금 그녀는 다시 이웃집 빈스반겔씨의 말과 대부의 선물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고 소원을 말하려 하면 할수록 머리 속이 완전히 뒤죽박죽 이 되어 뭐라고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애가 타서 눈에 눈물 이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음악 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약해지기 시작했 다. 지금 곧 소원을 말하지 않으면 때를 놓쳐 모두 허사가 되리라고 그녀는 생 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숨을 쉬고 아기 쪽으로 몸을 굽히고 왼쪽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가야, 엄마는 너를 위해 바란다....... 바란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이제 막 그치려고 할 때 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 둥 서둘러 말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바란다. 모든 사람이 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 기를." 오르골 소리는 이제 완전히 그치고 어두운 방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 했다. 그녀는 요람 위에 털썩 엎드려 가슴 가득히 불안을 느끼며 흐느끼면서 외쳤다. "아, 나는 너를 위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일을 바랬는데, 어쩌 면 실제로는 좋은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설사 모든 사람들이 너를 사랑 하게 된다 하더라도 누구도 너의 엄마만큼 너를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야"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잘 자랐다. 명랑하고 씩씩한 눈에 귀여운 금발의 소년으로 어머니의 온갖 사랑을 다 받았고 어디를 가든 사람들 로부터 호감을 샀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얼마 되지 않아 곧 세례일의 소원이 이 아기에게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윽고 이 아이가 걸어 다니게 되고 길을 걷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척 귀여워하고 낯가림을 하지 않는 데다 똑똑하기 이를데 없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눈 속을 들여다보며 호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젊은 어머니들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 니들은 아이에게 사과를 주었다. 그 아이가 어디서 못된 장난을 처더라도 그가 한 짓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한 짓이 분명해 부정할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모두 어깨를 움츠리며, "저렇게 착한 아이는 무슨 짓을 했든 나쁘게 볼 수 없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년에게 마음이 이끌린 사람들이 어머니를 많이 찾아오게 되었 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이전에는 얼마 안 되는 삯바 느질감을 부탁받아 집에 갖고 오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도 잘 알려지게 되었고 호의를 보이 사람들이 일찌기 그런 일을 바란적이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어머니에게도 아들에게도 형편이 아주 좋아지게 되었다. 모자가 함께 길을 걸어가면 어디에서고 이웃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행복 한 두 모자를 전송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좋아하고 즐겁게 여기 는 곳은 이웃 대부의 집이었다. 노인은 때때로 밤중에 그를 그의 오두막으로 불렀다. 그곳은 어둡고 검은 난로 구멍에서 작은 빨간 불꽃이 타고있을 뿐이었 다. 작은 노인은 아이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겨 마루에 깐 털가죽 위에 앉혔다. 그리고 함께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따금 긴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가 온통 졸음에 빠져 어둡고 조용한 방안에서 절반밖에 뜨지 않은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둠 속에서 달콤한 선율 의 음악 소리가 샘솟듯이 울려나왔다. 노인과 아이가 오랫동안 그 음악 소리에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뜻밖에 도 방안이 온통 빛나는 꼬마 아이들로 가득 차고 그 아이들이 휘황찬란한 금빛 날개를 퍼덕이면서 원을 그리며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춤을 추듯이 교묘히 서로 자리를 바꾸고 둘이 짝을 지어 날아다니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기쁨과 싱그런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채 조화를 이루어 울려퍼졌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일찌기 듣거나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뒷날 그가 유년시절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추억 속에 되살아나 향수를 불러일으 키는 것은, 대부의 조용하고 어두운 방과 난로 속의 빨간 불꽃과 그 음악과 눈 부시게 금빛으로 빛나면서 신비롭게 날아다니던 천사와 같은 무리였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은 크게 자라났다. 이제는 어머니에게 슬픈 마음으로 저 세 례를 받던날 밤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아우구스투스는 즐거운 듯이 근처 골목길을 뛰어 돌아다니며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았고 호두나 배나 과자나 장난감들을 얻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무릎 위에 앉히거나 뜰에서 꽃을 꺽게 하거나 했다. 그는 이따금 밤늦게 겨우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끓여 내놓은 수프를 퉁명스럽게 밀쳐버렸다. 그럴 때 어머니가 슬퍼서 울라치면 그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 고 투덜거리면서 침대에 드러누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가 그를 야단치며 벌을 주자, 그는 엉엉 울면서 누구든지 다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며 잘 대해 주 는데 어머니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대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곧잘 몇 시간 씩이나 줄곧 슬픔에 잠겼다. 때로는 아들에게 진짜로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후에 아들이 이부자리 속에서 잠들고 그녀의 촛불이 일렁거리며 티없이 맑고 순진한 아들의 얼굴을 아련히 비 추면, 그녀는 울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아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 하며 그에게 키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아우구스투스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탓이었다. 그녀는 그런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었던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 는 슬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두려움까지 느끼며 생각하는 일이 종종 있 었다. 어느 날 마침 그녀가 빈스반겔씨의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는 창가에 서 서 작은 가위로 시든 꽃을 그루에서 잘라내고 있는데 이 두 집 뒤뜰에서 그녀의 아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쪽을 바라보려고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쪽을 바라보려고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쪽을 바라보자 아들은 아름다운 얼굴 에 약간 교만한 표정을 짓고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그보다 키가 좀더 큰 소녀가 서서 애원하는 듯이 그이 얼굴을 보며, "자, 착하고 귀엽지, 나한테 키스 좀 해줘."하고 말했다 "싫어." 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말하고 호주머니에 양손을 쑤셔넣었다. "하지만 제발 부탁이야."하고 소녀는 말을 이었다 "키스해 주면 좋은 걸 줄께." "그게 뭔데?" 하고 소년은 물었다 "사과를 두 개 갖고 있어." 하고 소녀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휙 몸을 돌이켜 딴 곳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과 같은 건 필요없어." 하고 그는 경멸하듯이 말하고 달려가려고 했다 소녀는 그를 꽉 붙잡고 아양떨듯이 말했다. "저기, 나 예쁜 반지를 갖고 있어." "그럼 보여줘봐!" 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말했다 소녀는 반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소년은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소녀의 손가락에서 그것을 빼내어 자기 손가락에 끼우고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키스해 줄께." 하고 소년은 마음이 들떠 건성으로 말하고 그녀의 입에 가볍게 키스했다 "지금부터 나와 함께 놀러가지 않을래?" 하고 소녀는 매우 친한 듯이 묻고 소년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를 떠밀고 퉁명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이젠 내게 잘 대해 주며 귀찮게 줄지 말아! 내겐 너말고 놀아줄 아이가 있으니 까 말야." 소녀가 울면서 뜰에서 바깥으로 슬며시 나가자, 소년은 따분하고 지겨운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손에 꽃을 자른 가위를 든 채로 서서 아들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 들이는 냉혹하고 깔보는 듯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꽃을 그대로 둔 채 머리를 흔들면서 되풀이하여 "정말로 심술궂은 아이야, 마치 사랑을 모르는 아 이 같아." 하고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후 곧 아우구스투스가 돌아와 어머니는 그를 나무라며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파란 눈을 깜박이며 웃 으면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표정을 전혀 짓지 않았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찌나 익살맞고 귀엽고 예쁜지 어머니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곧 지나치게 엄히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이소년의 고약한 짓에 대해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지는 않았다. 대부인 빈스반겔씨는 소년이 어려워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년이 저녁 무렵에 대부의 방에 갔을 때, "오늘은 난로에 불길이 타오르지 않고 음악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거야. 네가 몹시 고약한 짓을 했기 때문에 작은 천사들이 슬퍼하고 있어" 하고 대부가 말하면, 소년은 말없이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온뒤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은 그는 얌전하고 착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게 되었다. 울기도 하고 응석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대부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의 방에서 요술처럼 천사가 날아다니 는 모습을 보기란 이미 먼 꿈이 되어버렸다. 밤에 혹여 그 광경을 꿈꾸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는 이튿날에는 두 배나 더 사납고 난폭해져 소동을 벌이고, 골목 대장이 되어 지나치게 흥분하며 많은 아이들을 이끌고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이 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두 자기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를 신물이 나도록 듣고 있었다. 아들이 아무리 미끈하고 귀여워도 그녀는 그저 아들이 걱정스러울 뿐 이었다. 어느날 아들의 선생님이 그녀를 찾아와, 아우구스투스를 다른 고장의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자고 제의해 온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웃집 노인과 의논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봄날 아침에 한 대의 마차 가 집앞에 도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름다운 새옷을 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어머니와 대부와 이웃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서울에 가서 공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금발을 아름답게 잘 라주고 아들을 축복해 주었다. 마침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 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몇 해 후에 젊은 아우구스투스는 대학생이 되어 빨간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르 게 되고부터 다시 한 번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부가 그의 어머니가 중병으로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는 편지를 띄웠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저녁 무렵 에 도착했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고 마부가 그의 뒤에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를 작은 집안으로 운반하는 것을 사람들은 경탄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천정이 낮은 낡은 방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대학생은 어머니가 흰 베개에 창백하고 초췌해진 얼굴을 눕히고 조용히 눈으로밖에 자기를 맞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보자 울면서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엎드려 어머니의 차가운 양손에 키스하고 밤새도록 옆에 엎드려 있었지만, 마침 내 어머니의 손이 싸늘해지고 눈빛이 꺼져버렸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뒤 대부인 빈스반겔씨는 청년의 팔을 잡고 함께 자신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청년에게는 그 집이 전보다 더한층 낮아지고 어두워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함께 앉아 있자니 작은 창문만이 컴컴한 방 안에 희미하게 빛을 뿌리게 되었다 그러자 노인은 여윈 손가락으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말했 다. "난로에 불을 피워야겠구나. 그러면 램프는 필요없어. 너는 내일이면 서울 로 떠나야겠지?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한참 동안은 다시 만나보지 못하겠구나."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의자를 난로 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대학생도 자기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오랫동안 마주 앉아 점점 세차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불꽃이 튀기는 소리도 뜸해졌다. 그러자 노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가거라, 아우구스투스야, 너의 행운을 빈다. 너의 어머니는 훌륭한 분이셨다.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어머니는 너를 위해 애쓰셨다. 나는 다시 한 번 너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작은 천사들을 보여주고 싶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것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잊지 말기 바란 다. 그리고 천사들이 언제나 노래부르고 있다는 것과, 네가 언젠가 마음이 외 로와 그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하면 아마 다시 들을수 있으리라는 것을 꼭 기억 해 두기 바란다. 자, 그럼 악수하자, 나는 늙어서 이제 자야하니까" 아우구스투스는 노인과 악수를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낡아빠진 작은 집으로 혼자 돌아와 그리운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잠들 준 비를 했다. 잠들기 전에 저쪽 멀리에서 희미하게 유년시절의 감미로운 음악소 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그는 떠났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미 그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는 곧 대부인 빈스 반겔씨와 그 천사들의 일을 잊어버렸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그의 주위에서 소 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그 호화로운 파도에 올라타고 있었다. 누구도 아우 구스투스처럼 행길에서 말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말을 달리거나 우러러보는 처녀들에게 비웃는 듯한 눈초리를 던지지는 못했다. 누구도 아우구스투스만큼 경쾌하게 매혹적으로 춤을 추거나, 아우구스투스만큼 경쾌하게 마차를 몰거나, 아우구스투스만큼 활기차고 화려하게 정원에서 여름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시는 데 익숙해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부유한 미망인의 연인이 되었다 미망인은 그에게 돈과 옷과 말등 그가 필요로 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파리나 로마 등지를 여행하고, 그녀의 비단침대에서 함께 잤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염집의 얌전한 부드러운 금발의 아 가씨였다. 그는 밤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아버지 집 정원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가 여행을 떠나 멀리 가 있으면 그녀는 정열에 찬 긴 편지를 그에게 써 보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이다. 부유한 연인에게 권태를 느끼고, 학문에 싫증을 느낀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는 먼 나라에 머무르며 상류사회의 사람들처럼 생활하면서 여자와 말과 개를 거느리고 큰돈을 물쓰듯 쓰거나 벌어들였다 그가 어디를 가든 그의 뒤를 따르고 그에게 몸을 바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 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일찌기 소년시절에 어린 소녀에게서 반지를 받듯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룰 수 있는 마력이 그의 눈과 입술에 깃들여 있었다. 여자들은 사랑을 쏟으면서 그를 에워쌌고 친구들은 호감을 갖 고 그에게 열중했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마음이 얼만 공허하고 욕심에 차 있 으며 그의 영혼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때때로 그는 그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질려 혼자서 변장하 고 낯선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어리석어 너무도 쉽게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자기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약간의 호의만 베풀 어도 감지덕지하는 여인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여자나 남자나 할것없이 자존심이 없는 것이 그에게는 때때로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그는 며칠씩 온종일 혼자서 개와 함께 지내기도 하고, 산속의 아름다운 사냥지역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참고 기다리다 쏘아맞힌 한 마리의 사슴이 아름답고 호사스런 생활에 젖어 있는 여성의 사랑고백보다 그를 더 기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를 여행하다가 공사의 젊은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북국 귀족 출신의 날씬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는데, 다른 많은 귀부인이나 사교 가들 틈에 서 있어도 누구도 그녀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신비로운 분 위기를 풍기며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고 말수도 적었다 그가 그녀를 보고, 또 유심히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의 눈길이 무관심한 듯이 그 를 살짝 스쳐 지나간 듯이 생각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그는 온종일 어떠한 순간에도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의 시선이 닿을 만한 곳에서 맴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끊임없이 그를 찬미하고 그와의 교제를 원하는 남녀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행자 일행의 한가운데 에 아름답고 날씬한 부인과 함께 서 있을라치면 마치 공작과 공작 부인이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발 부인의 남편도 그를 특별히 대우하여 그의 호감을 사려고 애썼다. 그는 한 번도 이 외국 부인과 단둘이서만 만날 기회를 갖지 못 했는데, 마침내 남국의 항구도시에서 함께 여행하던 일행이 모두 몇 시간 동안 이국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오래간만에 잠시 발밑으로 대지를 느껴보기 위해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때 그는 연인과 함께 걸어가다가 드디어 번화한 시장 이 서 있는 혼잡한 광장 속에서 용케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를 멈춰서게 할 수 있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이 거미줄같이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중 한 골목길로 그를 믿고 있는 부인을 데리고 갔다. 그녀가 갑자기 그와 단둘이 있게 된 것을 느끼고 불안감에 젖고 동행하던 사람 들이 이젠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때, 그는 얼굴을 빛내며 부인을 바라보면서 망설이는 부인의 손을 잡고 이곳에서 그대로 자기와 함께 도망치자고 애원하였다 외국의 부인은 그만 얼굴에 핏기를 잃고 눈을 땅 쪽으로 내리깔았다 "저, 그건 기사답지 않은 행동이세요."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방금 하신 말씀은 깨끗이 잊어버리세요!"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하고 아우구스투스는 외쳤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남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밖에 모 릅니다. 연인 곁에 있는 일 이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아요. 오, 아름다운 분이시요, 저와 함께 가주세요.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엷은 물기가 흐르는 푸른 눈으로 진실로 탓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아셨지요?" 하고 그녀는 호소하는 듯이 속삭였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예요. 저는 이제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제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여러 번 생 각했어요. 당신은 제가 처음으로 진정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아, 사랑은 어째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방황하게 하는 걸까요! 저는 순결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남편 곁에 있기를 한결 더 바라 고 있어요. 저는 남편을 그다지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남편은 기사이고 당신 이 갖고 있지 못한 높은 명예와 참으로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어요. 자, 이제 아무 말씀도 마시고 저를 배로 데려다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의 뻔뻔스런 행동을 막기 위해 큰소리를 질러 낯선 이 고장 사람들에게 도 움을 청할 거예요." 그가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그녀는 귀담아듣지 않은 체 외면했다. 그가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배로 가지 않았더라면 혼자서 가버렸을 것이다. 배에 이르자 그 는 트렁크를 내리게 하고 누구와도 작별을 고하지 않은 채 떠났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사나이의 행운도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도리나 성실 같은 것에 진정 혐오를 느껴 이런 것들을 발로 짓밟아 버렸다. 정숙한 부인을 그의 마력적인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유혹하거나, 악 의 없는 선량한 사람을 금세 친구로 삼아 돈을 우려내고는 조롱하듯이 발길로 차버리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다. 남의 아내나 아가씨들의 돈을 가로채고는 곧 생판 처음 보는 남처럼 대했다. 고귀한 명문 출신의 청년들을 찾아내서는 유 혹해 타락의 길에 빠뜨렸다. 그가 찾아 헤매며 탐닉하지 않은 향락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배우고 다시 미련없이 버리지 않은 악덕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선 이미 기쁨은 사라져버렸다. 어느 곳에서나 그를 맞아 주는 사람도 이미 그의 영혼에 아무런 반항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해변가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오는 여자나 친구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처럼 악의로 대하고 죽 끓듯 하는 변덕으로 괴롭혔다. 그는 사람들을 깔보고, 또 자신이 사람들을 깔보고 있다는 것 을 보여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찾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랑에 둘러싸여 있는 것에 질 려 싫증이 났다. 그는 결코 남에게 주는 일 없이 언제나 다만 받기만 하면서 낭비 하고 파괴하는 생활이 얼마나 가치없는 일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는 진정한 욕망을 느끼고 헛된 갈망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오랫동안 굶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가 병들어 휴식과 고독이 필요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에게 편지가 잇달아 날아들었지만 그는 한번도 읽지 않았다. 사람들은 걱정이 되어 하인을 보내 그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는 홀로 깊은 슬픔에 잠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홀에 앉아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의 생활은 공허하고 무절제한 삶으로 가득 차 있고 밀려오는 잿빛 파도처럼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사랑의 흔적조차 남기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높다란 창문옆에 놓인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자기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추하게만 느껴졌다. 한 갈매기가 바닷바람을 타고 가볍게 날아서 지나가는 것을 그는 기쁨도 흥미도 모두 사라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결론에 이르러 벨을 눌러 하인을 불렀을 때, 그의 입술 한쪽에 냉혹하고 짓궂은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 다. 그는 어느 하루를 정해 친구들을 모두 연회에 초대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텅 빈 집과 그 자신의 시체를 보여 손님들을 놀라게 하고 비웃어 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에 앞서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하 고 있었던 것이다. 연회를 베풀기로 한 전날 밤에 그는 하인들을 모두 집에서 내 보내고 넓은 방들이 조용해지자 침실로 가서 키프로스산 포도주를 따른 잔에 강한 독을 타고 그것을 입에 대었다. 그가 막 마시려고 할 때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꾸를 하지 않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작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아우구스투스 쪽으로 걸어와 넘치는 술잔을 그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빼앗고 귀에 익은 목소리로, "잘 있었나, 아우구스투스야, 그래 어떻게 살아가고 있니?" 하고 말했다. 뜻밖의 일을 다한 사나이는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 부끄럽기도 하 여 얼굴에 조소로 가득 찬 엷은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아직 살아 계셨군요. 참으로 오래간만이에요. 할아버지는 전혀 나이를 잡숫지 않는 것 같군요.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있어요. 저는 피곤해 서 수면제를 먹으려던 참이에요." "알고 있어." 하고 대부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수면제를 먹으려고 하고 있어. 당연한 일이야. 그건 네게 효력이 있 는 마지막 술이야. 하지만 그전에 잠깐 이야기를 좀 하지 않겠니, 그런데 나는 먼길을 걸어와서 잠깐 한모금 마시고 기운을 좀 차렸으면 하는데, 어때 괜찮겠지?" 이렇게 말하더니 노인은 술잔을 들어 입에 대고 아우구스투스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단숨에 죽 들이켜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금세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는 대부에게 쏜살같이 덤벼들어 그의 양어깨를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방금 뭘 마셨는지 알기나 하세요?" 빈스반겔씨는 현명한 빛을 풍기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키프로스산 포도주니까 나쁠 것 없어, 너는 그렇게 불편하고 궁색하게 살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나는 시간이 별로 없단다. 하고 싶은 말을 마치면 오래 너를 붙잡지 않고 곧 떠날거야." 당황한 청년은 두려움에 떨면서 대부의 맑은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노인이 쓰러지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는 태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청년에게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너는 방금 내가 마신 포도주가 내 몸을 해칠까봐 걱정하고 있지?. 그렇다면 안심해도 돼! 네가 나를 위해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야. 나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헌데 오늘은 옛날처럼 이야기 좀 하지 않겠니! 너는 들뜬 생활에 싫증을 느끼는 모양이구나. 그렇기도 할테지. 내가 이집에서 나가면 다시 한잔 가득 부 어 마시도록 해라. 헌데 그전에 꼭 너에게 좀 얘기할게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벽에 기대어 작은 노인의 부드럽고 정다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로 그의 마음속에 옛날의 환상을 불러일으 켰다. 그는 자신의 순진무구했던 유년시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속 깊이 부끄러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너의 독은 내가 모두 마셔버렸다" 하고 노인은 말을 이었다. "너의 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야. 네 어머니는 네가 세례를 받을 때 너를 위해 한가지 소원을 빌어단다. 그리고 어리석은 소원 이긴 했지만 나는 네 어머니를 위해 그 소원을 들어주었단다. 네가 이제 와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알 필요는 없겠지. 그것이 이제 네가 느끼고 있는 그대로 저주 가 되어버렸어. 이렇게 된 것을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네가 언젠가 다시 우리 집 난로 앞에 앉아서 천사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면 오죽 좋으련만 그 건 쉬운 일이 아닐거야. 지금으로선 네 마음이 다시 건강하게 맑고 명랑해지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거야.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그렇게 되도록 네가 애써보았으면 좋겠다. 너의 가엾은 어머니의 소원이 너를 해롭게 만들었구나 아우구스투스야. 어떻겠냐, 너를 위해 무엇이든 또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면? 너는 아마도 돈이나 보석 따위는 원하지 않겠지? 또 너는 이미 권력도 많 이 누려보고 여자들로부터도 사랑을 흠뻑 받아봤을 테지. 잘 생각해 봐라. 네가 타락한 생활을 다시 보다 아름답고, 보다 멋지게 할 수 있고, 너를 다시 즐겁게 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 원해도 좋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묵묵히 있었다 그는 너무도 지치고 희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마와요, 빈스반겔할아버지, 그러나 제 생활은 어떠한 빗으로 빗어도 말끔해지 지 않아요. 역시 할아버지께서 들어오실때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그대로 하는 쪽이 좋겠어요. 그렇지만 할아버지께서 와주신 데 대해선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 하고 노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아우구스투스야. 그러면 지금 어쩌면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 네가 저녁때 곧잘 내게 찾아오곤 했던 옛날 일이 생각날지도 몰라, 그 무렵에는 너도 가끔은 행복하지 않았니?" "네, 그 무렵에는 그랬어요." 하고 아우구스투스는 고래를 끄덕였다. 빛나는 인생의 아침 광경이 아주 오래 된 거울에 비치듯이 색바랜 모습으로 떠올 랐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어요. 그리고 바란다 한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구요. 아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 나 좋겠어요!" "그래, 그건 무의미한 일이겠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가 고향에서 살고 있었을 때의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그리고 네가 학생시절에 밤에 가엾은 아가씨를 그녀의 아버지의 집 정원으로 찾았던 일과, 아름다운 금발의 부인과 바 다에서 배를 타고 여행했을 때의 일을 머리속에 떠올려봐라. 그 이후 네가 행복 했을 때의 일과 삶이 정말 가치 있었다고 생각되던 때의 일을 남김없이 떠올려봐 라. 그러면 그 무렵에 무엇이 너를 행복하게 했는지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그걸 원하면 되는거야.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렴!" 아우구스투스는 눈을 감고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보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자기가 나온 먼 밝은 지점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찌기는 자신의 주위가 밝고 아름다왔었는데, 어째서 그것이 점차 어두워져 마 침내 자신이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어떤 일에도 이미 기쁨을 느끼지 못하 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볼수록 멀리 반짝이는 작은 빛이 점점 더 아름답고 정겹고 간 절하게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그 빛을 바라보던 끝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렇게 해보겠어요" 하고 그는 대부에게 말했다. "제게 쓸모없게 된 낡은 마력을 거두어주세요. 그 대신 제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는 울면서 노인 앞에 엎드렸다. 엎드리면서 그는 이미 노인 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 불타오르며 잊혀진 그의 말이나 몸짓을 떠올리려고 애쓰 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작은 대부는 그를 살며시 껴안아 올려 침상으로 데 리고 가 그곳에 눕히고 뜨거운 이마를 짚으며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려주었다. "이젠 됐어" 하고 노인은 작은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젠 됐어. 이젠 모든 것이 잘될 거야" 그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아우구스투스는 삽시간에 몇 살 더 먹은 것같이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노인은 텅 빈 집을 뒤로 하고 조용히 나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온 집안에 울려퍼지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에 있는 문을 열었더니 큰 홀과 방마다 이전의 친구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연회에 초대받아 왔는데 집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대가 어그러져 화를 내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에게 다가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농담 을 하며 그들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 힘이 자신에게서 없어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친구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보자마자 일제히 그를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미소를 지으면서 저지하려는 듯이 양손을 뻗자 그들은 몹 시 화를 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이 사기꾼아" 하고 한 사람이 외쳤다. "나한테 꾸어간 돈은 어디에 있지?" 또 다른 사나이는 "내가 빌려준 말은 어떻게 했어?" 하고 외쳤다. 화가 난 아름다운 부인은, "당신이 내 비밀을 떠벌려서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게 됐어. 이 증오스러운 괴물 아!"하고 외쳤다.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사나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네놈이 날 어떤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알기나 해? 이 악마야. 젊은이를 타락시키 는 나쁜 놈아!" 이와 같은 식으로 차례로 모두들 그를 모욕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말은 모두 옳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덤벼들어 그를 때렸다 그들은 결국 그곳을 떠났지만 떠나면서 거울을 깨뜨려버리기도 하고 많은 귀중품 을 훔쳐가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흠씬 얻어맞고 호되게 욕을 당하고 나서 마루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침실에 들어가 얼굴을 씻으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았 더니 초라하고 추한 얼굴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이마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이게 바로 보복이라는 거야"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고 얼굴에서 피를 닦아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제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다시 요란한 소리가 집안에 들려오고, 사람들이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집을 저당잡은 빚장이들과, 그가 유혹해 낸 어느 부인의 남편과, 그가 유혹해 내 죄악과 불행 속에 빠뜨린 자식들의 아버지들과, 휴가를 내보냈던 하인과 하녀들과, 경관과 변호사들이었다. 한 시간 후에 그는 묶인 채 마차에 실려 감옥으 로 끌려갔다. 뒤에서 군중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조롱으로 가득 찬 노래 를 불러댔다. 한 악동이 마차의 창 너머로 끌려가는 사나이의 얼굴을 향 해 오물을 던졌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랑을 받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추행이 거리마다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가 고발당하지 않은 죄악은 없었다. 그가 부인할 수 있는 죄악도 없었 다.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재판관 앞에 서서 그가 몇 해 전 에 저지른 일을 주워섬겼다. 그로부터 선물을 받으면서 그의 물건을 훔 쳤던 하인들이 그의 숨겨진 죄악을 떠벌려댔다. 모든 이의 얼굴이 그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변호하고 칭찬하고 용서하고, 그 의 선행을 상기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되어가는 대로 내맡겨두었다. 독방에 갇힌 그는 독방에서 판사나 증인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는 병든 눈으로 이상하게도 애처로와 보이는, 심술로 가득 차 고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는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얼굴에서도 증 오로 일그러진 살갗 밑에서 은밀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빛이 희미하게 빛 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들으 저마다 전에 아우구스투스를 사랑한 적이 있지만, 그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지금 아우구스투스는 그들 모두에게 사죄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무잇인 가 좋은 점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는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누구와의 면히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열로 들뜬 꿈속에서 어머니 와, 첫사랑의 연인과, 대부인 빈스반겔씨와, 함께 배를 탔던 북국의 귀부 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면서 하릴없이 앉아 있노라면 갈망과 고독에 따른 고통이 여실히 느껴 지고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솟아났다. 어떤 향락도, 어떤 소유도 일찌기 이처럼 간절히 바란적이 없었다. 감옥에서 나왔을때 그는 병들고 노쇠해 있었다. 이미 그 누구도 그를 알 아보지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마차나 말을 타고 지나가거나 산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일이나 꽃이나 장난감이나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 투스를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전에 음악을 듣고 샴페인 을 마시면서 껴안았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마차를 타고 그의 옆을 지나갔다. 마차가 지나간 뒤 모래 먼지가 뿌옇게 아우구스투스에게 몰려와 그를 덮어 씌웠다. 그러나 한창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그를 질식시킬것만 같았던 무서운 공허함과 고독은 그에게서 완전히 떠나 이었다. 때때로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가까운 집문 앞으로 다가 가거나 뒷골목의 어느 집 뜰에서 물 할 그릇 청할때, 전에는 그의 교만하고 무뚝뚝한 말에도 감지덕지하며 눈을 반짝이면서 대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말을 시큰둥한 태도로 적의를 품고 듣는 것을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어떤 사람을 보아도 기쁘고 가슴이 두그거리고 감동됐 다. 아이들이 뛰놀거나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작은 집 앞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아 쭈글쭈글한 손을 벌이고 햇볕을 쬐고 있는 노인들을 그는 가엾게 여겼다 연모하는 눈길로 아가씨의 뒤를 쫓는 젊은이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식을 팔로 안아올리는 노동자나, 마차를 타고 길을 재촉하면서 조용히 병 자를 생각하고 있는 점잖고 현명한 의사나, 저녁때 뒷골목의 가로등 밑에서 손님을 기다라면서 그와 같이 사람들로부터 따롤림을 받는 사람에게조차도 아양을 떠는 가엾은 소녀 등을 보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형제나 자매처럼 생각되었다. 누구나 저마다 사랑하는 어머니나 보다 훌륭한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사명을 은밀히 지니고 있었다. 누구나 그에게는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자기보다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도움 을 주고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곳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기의 모습이 이미 그 누구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의 얼굴은 앙상하게 말라 있고, 옷이나 신발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미 그의 목소리나 걸음걸이에서도 일지기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매혹시켰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덥수룩한 흰 수엽이 길게 늘어 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나빠지고 더러움을 탈 것 같아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의 얼마 안되는 빵을 빼앗으려는 낯선 사람으 로 여기고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 고자 해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고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꼬마 아이가 빵집 문 손잡이를 향해 귀여운 손을 뻗치고 있는데 닿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도움의 손길을 폈다. 때로는 그 자신보다도 가엾은 사람, 예를 들어 소경이나 불구자도 나타났다. 그는 그들을 위해 얼마 동 안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기꺼이 주었다. 밝고 친절한 눈길이라든가, 형제와 같은 다정한 인사라든가, 이 해하고 동정하는 몸짓 등등을.... 이렇게 하는 동안에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에 기 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아주 활기에 찬 인사를, 어떤 사람 은 조용한 눈길을,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고 자기 일을 방해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얼마나 불행한 일이 많은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해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날 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갖 고뇌 곁에서 즐거운 웃음이, 온갖 애도 의 종소리와 함께 어린이의 노랫소리가, 온갖 곤궁함과 비참함 곁에서 동정 과 재치와 위로와 미소가 발견되는 것을 되풀이해 목격하고 그는 멋지고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활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거리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한떼의 어린 학생들이 그가 있는 쪽으로 뛰어올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 누구에게서나 눈에서 활기와 삶의 기쁨과 천진난 만한 아름다움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그를 좀 놀려대거나 난처하게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아이들로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쇼윈도나 혹은 물을 마실때 샘 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 쭈글쭈글 늙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겐 사람들의 마음에 들거나 그들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일은 겪을 대로 겪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에게는 일찌기 자기가 걸어온 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노력하며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고 흐뭇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진지하게 힘과 자부심과 기쁨을 느끼면서 각자의 목적 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경탄스러웠다. 그러던 중 어느새 겨울이 되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선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에 찌들린 가난한 사람들이 끈질기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삶에 집착하며 죽음을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바라보는 행복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맛보았다. 중환자의 표정에서 인내가, 회복기의 사람들의 눈에서 밝은 삶의 기쁨이 더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고 멋진 일이었다. 죽은 사람의 조용하고 엄숙한 얼굴도 아름다왔다. 이 모든 것이 더욱 아름다와 보이는 것은 사랑스럽고 청순한 간호원들의 사랑과 인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도 끝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아우구스투스는 겨울을 앞두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는 앞으로도 여러 곳을 찾아가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몸소 보고 싶었 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 그의 기억도 점점 흐려져 세상을 언제나 오늘과 똑같이 보아온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세상은 아주 멋지고 훌륭하 며 사랑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겨울이 옴과 동시에 도시에 이르렀다. 눈이 어두운 거리에 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몇몇 개구장이 아이들이 방랑객 에게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지만 그밖에 모든 것은 이미 밤의 고요 속에 묻 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몹시 지친 채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웬지 낯익은 골목길 같았다. 또 다른 골목길로 접어들자, 거기에 그의 어머니의 집과 대부 빈스반겔씨의 집이 차가운 눈보라 속에 낡고 퇴색한 모습으로 자그마하게 서 있었다. 대부의 집 창문 하나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것이 겨울 밤 속에 깜박거리며 붉은 색으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두드렸다. 작은 노인이 그를 맞아 말없이 방안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따스하고 조용 했다. 난로에서 작고 밝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나?"하고 대부가 물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렇지만 피로해 보이는데!" 하고 노인은 다시 묻고 낡은 털가죽을 마루에 펴놓았다. 그곳에 두 노인이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불길을 바라보았다. "자네 먼길을 여행했지?" 하고 대부가 물었다 "네. 정말 아름다왔어요. 조금 피로한데 이 집에서 하룻밤 신세져도 될까요? 내일 다시 여행을 계속하려고 해요" "음, 그렇게 하게. 헌데 저 천사의 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지 않나?" "천사의 춤요? 네 그래요, 보고 싶어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군."하고 대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다시 아주 아름다와졌네. 자네의 눈은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셨던 옛날처럼 다시 부드럽고 온화해졌어. 나를 참 잘 찾아와주었네" 너덜너덜 다 떨어진 옷을 걸친 길손은 옛친구 옆에 털썩 무너지듯 주저앉은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렇게 지쳐본 적은 일찌기 없었다. 그는 기분좋은 온기와 불빛으로 온몸이 노곤한 채 의식이 가물가물하여 이제 오늘과 옛날 사이를 뚜렷이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하고 그는 말했다. "제가 또 장난을 치는 바람에 어머니가 집에서 우셨어요. 할아버지, 어머니께 잘 말해서 제가 다시 얌전해질 거라고 해주세요. 네?" "그래"하고 대부는 말했다. "안심해라.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이제는 이미 난로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일찌기 어렸을 때 그리했던 것처럼 졸음이 쏟아지는 눈으로 사그라지는 붉은 불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대부는 아우구스투스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름답고 달콤한 음악 소리가 어두운 방안에 부드럽게 행복한 빛을 띠고 울려퍼졌다. 그러자 빛나는 작은 영혼들이 무수히 떠돌면서 서로 교묘히 얽히기도 하고 둘씩 짝을 짓기도 하면서 즐거운 듯이 허공을 돌아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바라보고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낸 천국을 향해 다감한 어린이의 감각을 활짝 열 었다. 그는 문득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리고 대부가 이미 어머니에게 말해 주 겠다고 약속해 놓고 있었다. 그가 잠들자 대부는 그의 양손을 마주 잡게 하고 조용해진 심장에 귀를 기 울였다. 이윽고 방안은 완전히 캄캄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