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헨- 어른을 위한 사랑의 동화- 헤르만 헷세 <<< 차례 >>> 책을 엮으며 - MARCHEN I 픽토르의 변신 - PIKTORS II 아우구스투스 - MARCHEN1 시인 - MARCHEN2 피리의 꿈 - MARCHEN3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 MARCHEN4 고난의 길 - MARCHEN5 꿈에서 꿈으로 - MARCHEN6 팔돔 - MARCHEN7 붓꽃 - MARCHEN8 III 두 죄인 - FABUL1 유년시절의 성 프란체스코 - FABUL2 사랑의 상처 - FABUL3 한스 - FABUL4 난장이 - FABUL5 내면과 외면 - FABUL6 <<< 책을 엮으며 >>> 헤르만 헷세의 동화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일로 가을을 보냈다. 생전에 헷세는 장편소설을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분량의 시와 단편소 설, 사회와 정치에 대한 평론, 수필, 서간, 그리고 '우화' '동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일련의 작품을 남겼다. 장편소설은 이미 거의 다 국 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지만, 동화나 우화는 아직 체계적으로 소개되 어 있지 못한 형편이라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도 좋을 만한 것들을 함께 묶어보았다. '픽토르의 변신'은 헷세 자신이 직접 글씨를 쓰고 자신이 그린 수 채화를 곁들여 엮은 소책자로 1925년에 출간되어 두번째 부인인 루 트 벵거에게 헌정된 책이다. 무척 짧은 동화이긴 하지만 생명의 나 무(태양과 달의 나무)라든가 나무로 변신한 픽토르가 남자와 여자로 된 나무를 예감한다든지 하는 놀라운 상상력의 형상화에서 이미 이 후의 헷세의 대표적인 걸작들에서 추구되고 있는 신.인 합일의 전일 성에 대한 시초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데미안'에서의 에바 부인의 이미지가 이곳에서 이미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변신과 조화된 완성에 대한 추구는 모든 작가의, 아니 모든 인간의 내면적 추구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헷세는 다음과 같은 단 두 귀절로 그 본질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나무가 된 픽토르는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변신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후로 픽토르의 행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늙어가기 시작했고, 점점 고목이 된 많은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피곤하고도 심각하며 근심에 가득찬 모습 을 지니게 되었다. 말이나 새나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 즉 변신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면 모든 존재는 세월과 더불어 슬픔과 근심 속에 빠지게 되며 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II부는 1919년에 출판된 '동화집'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 묶인 여러 편의 동화는 소재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빈스반겔 노인이라든지, '시인' 의 스승 혹은 한혹 자신, '피리의 꿈'의 사나이, 그리고 그 사나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소년, '고난의 길'의 안내자 등, 여러 작품에서 보 이는 선지자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든지 불행이라든지 삶과 죽음 등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 방식을 가르쳐주 고 있는 스승으로서의 헷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진실하고 치열하게 자신에게 충실했을 때 비로소 얻어낼 수 있는 삶에 대한 관조의 아 름다움을 이 짧은 몇 편의 동화를 통해서나마 독자들이 느낄 수 있 기를 기대한다. III부는 1904~27년 사이에 집필된, 주로 전설에서 소재를 따온 동 화와 장편의 구상 중에 발췌된 것으로 보이는 단편을 모은 '우화집' 에서 특징적인 몇 편을 뽑아 모았다. 이 우화들이 집필된 시기는 상당한 기간상의 경과가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헷세의 생애에 있어서 가정적인 파탄과 질병, 사회.정치 적 여건의 악화, 경제적인 고난이 겹쳐졌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다양한 소재의 발굴과 그것을 재구성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헷세의 또 다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1935년에 출판된 이 책에는 단편이 모두 23편 수록되어 있는데 다 옮기기에는 분량의 문제도 있고 다소 내용상 중복되는 점도 있어서 편집자의 임의로 6편에 국한시켰다. 이 점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1988년 가을 <<< 픽토르의 변신 >>> 픽토르는 낙원에 들어서자마자 한 그루의 나무 앞에 서게 되었다. 그 나무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였다. 픽토르는 나무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당신이 생명의 나무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나 무 대신에 나무에 몸을 걸치고 있던 뱀이 대답을 하려 했으므로 픽 토르는 방향을 바꾸어 계속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그는 마침내 고향에 이르렀고 생명의 원천에 와 있다는 것 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또 다시 한 그루의 나무를 보았다. 그것은 태양인 동시에 달 이었다. "당신은 생명의 나무입니까?"하고 픽토르는 물었다. 태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 었다. 몹시도 신비로운 꽃들이 여러 가지 색깔과 광채로 빛나며 제각기 다른 눈과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꽃들은 고개를 끄덕 이면서 웃었고, 어떤 꽃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어 떤 꽃들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그 꽃 들은 초연히 침묵을 지켰으며 홀로 생각에 잠겨 있거나 자신의 향기 속에 빠져버린 듯 침잠하여 있었다. 하나의 꽃은 라일락의 노래를 불렀고, 다른 꽃은 보라빛의 자장가를 불렀다. 그 꽃들 중의 한 송이 는 커다랗고 파란 눈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 송이는 픽토르에게 첫 사랑을 생각나게 했다. 또 한 송이의 꽃은 어린 시절의 정원의 향기 를 풍겨주었고 그 꽃의 달콤한 냄새는 어머니의 음성처럼 울려 퍼졌 다. 다른 한 송이의 꽃은 미소를 머금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빨갛게 굽은 혀를 그를 향해 길게 내뻗었다. 픽토르는 그것을 핥아보았다. 그건 강하고 거친 맛으로 송진과 꿀맛 같기도 했고 어쩌면 어느 여 인과의 입맞춤 같기도 했다. 이 많은 꽃들 사이에서 픽토르는 그리움과 불안한 기쁨에 가득 찬 채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하나의 종처럼 무겁고 격렬하게 고 동치고 있었다. 그의 욕구는 미지의 것, 불가사의하게 예감된 그 무 엇인가를 갈망하여 불타고 있었다. 픽토르는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풀숲에 앉아 있 는 그 새는 갖가지 색깔로 빛났다. 그 아름다운 새는 세상의 모든 색채를 다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새에게 그 는 "오, 새여! 행복이란 대체 어디에 있읍니까?"하고 물어보았다. "행복이라고요?"하고 그 아름다운 새는 되물으며 황금색의 부리로 미소지었다. "오 친구여, 행복이란 어디에나 있답니다. 산과 계속에 도 있고 꽃과 수정 속에도 있지요." 이렇게 말하고 그 새는 즐거운 듯 깃털을 흔들어 털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꼬리를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 고 다시 한번 웃고 나서는 조용히 풀숲에 앉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새는 가지각색의 꽃이 되었다. 깃털은 꽃잎 으로 변했고 발톱은 뿌리가 되었다. 찬란한 색채 속에서, 아름다운 운무 속에서 새는 식물로 변하였다. 픽토르는 그 광경을 놀란 얼굴 로 바라보았다. 그 후 곧 이 새의 꽃은 꽃잎과 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꽃의 존재에 벌써 싫증을 느낀 것이었다. 새의 꽃은 이미 뿌리가 없어져 버렸다. 가벼이 몸을 움직여 천천히 날아오르자 반짝반짝 빛나는 나 비가 되었다. 그 나비는 하늘하늘 무게도 없이 떠올라서는 빛이 되 었고 빛으로 반짝이는 얼굴이 되었다. 픽토르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 래 뜨고 바라보았다. 이 새롭게 탄생한 나비는, 즉 형형색색의 즐거운 새의 꽃인 나비 는, 빛나는 빛의 얼굴로 놀란 픽토르가 주위를 빙빙 돌면서 날아다 니다. 햇빛 속에 반짝거리면서 눈송이처럼 사뿐히 땅바닥에 내려앉 았다. 그리고는 픽토르의 발 가까이에 머물러 부드럽게 숨을 쉬면서 반짝이는 날개를 약간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곧 화려한 빛깔의 수 정으로 변하였다. 그 모서리에서는 붉은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 다. 그 붉은 보석은 초록빛의 풀과 잡초 사이에서 축제일의 밝은 종 소리처럼 즐겁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석의 고향인 대지의 내면이 그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보석은 점점 작아져서 사라지려고 하였다. 그때 픽토르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에 사로잡혀 이 사라져가는 보 석을 얼른 집어들었다. 황홀한 마음으로 그는 보석의 매혹적인 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픽토르의 가슴 속에 모든 행복의 예감을 비추 어주는 것 같았다. 갑자기 죽어버린 나뭇가지를 휘감고 있던 뱀 한 마리가 픽토르의 귓전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 보석은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변하게 해줄 것이다. 너무 늦 기 전에 빨리 네 소원을 말하여라!" 픽토르는 깜짝 놀랐다. 행운을 놓칠까봐 부러워졌다. 그는 재빨리 소원을 말했고, 한 그루의 나무로 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나 무는 진정한 고요와 활력과 품위로 가득 찬 것처럼 생각되었으므로 그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나무가 되기를 희망했었던 것이다. 픽토르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았고, 하늘 높이 기지개를 켜면서 사지로부터 잎과 가지를 뻗쳐나갔다. 이런 모 든 것에 그는 아주 행복을 느꼈다. 목마른 실 뿌리는 서늘한 대지 깊숙이에서 물을 빨아들였고, 나뭇잎들은 푸른 하늘 높이에서 바람 에 나부꼈다. 그의 껍질 속에는 딱정벌레들이 모여 살았고, 발치에는 토끼나 고슴도치가 굴을 팠으며, 가지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 나무가 된 픽토르는 행복해서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를 헤아리 지 않았다. 몹시도 오랜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야 그는 자신의 행복 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서서히 나무의 눈으 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눈을 뜨게 되었고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즉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낙원의 모든 존재가 몹시 자주 변하고 있다는 것을, 즉 모든 것들이 영원한 변화의 마법의 흐름 속에서 흐 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꽃들이 보석으로 변화하거나 반 짝이는 나비 떼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자기 옆에 서 있던 많은 나무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도 보았다. 어떤 나무는 샘물 이 되어 흘러갔다. 다른 나무는 악어가 되었으며, 또 다른 나무는 환 희의 감정으로 충만한 채 명랑한 감각을 지닌 물고기가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유의를 시작하기 위해 자기가 서 있던 자리를 즐겁 고도 냉담하게 헤엄치며 떠나갔다. 코끼리들은 바위로 모습을 바꾸 고 기린들은 꽃들과 그들의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나 나무가 된 픽토르는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변신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 픽토르의 행 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늙어가기 시작했고, 점점 고목이 된 많 은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피곤하고도 심각하며 근심에 가득 찬 모습 을 지니게 되었다. 말이나 새나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 즉 변신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면 모든 존재는 세월과 더불어 슬픔과 근심 속에 빠지게 되며 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색 옷을 입은 금발의 젊은 아가씨가 길을 잃 고 낙원인 바로 그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금발의 아가씨는 노 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나무 숲 사이를 뛰어다녔다. 아직 변신의 재능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아가씨였다. 영리한 원숭이들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미소지었고, 많은 덤불들 은 덩굴손으로 보드랍게 그녀를 쓰다듬었으며, 많은 나무들은 그녀 의 뒤에다 꽃잎을 뿌리고 호도와 사과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그녀 는 그런 것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무가 된 픽토르는 그 처녀를 보자 이제까지 결코 느껴보지 못했 던 커다란 그리움이, 행복에 대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는 것을 느꼈 다. 동시에 그는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피가 이렇게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 생각해 봐! 이제야말로 너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고 의미를 찾 을 때가 된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넌 너무 늙어버릴 거야. 행복은 결 코 두번 다시 너를 찾아오지 않을 거야." 그는 곧 이 외침에 복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탄생과 인간으로서의 세월, 이 낙원으로 오게 된 과정을 남김없이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특히 그가 나무로 변신하게 된 순간, 즉 그가 마술의 보석을 손에 들고 있던 그 경이에 찬 순간을 생각해 보았다. 어떤 것으로도 변신 이 가능했었던 그 당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이 그의 내면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 미소짓던 새를 생각했고, 해와 달을 겸하고 있던 나무를 생각해냈다. 그러자 그때 그가 무엇인가를 게을리 했으며 그 무엇인가를 잊어버렸었다는 생각이, 그리고 뱀의 충고가 좋지 않았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처녀는 나무가 된 픽토르의 나뭇잎에서 울려나오는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파오며 새로운 생각, 그녀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무 밑에 앉았다. 나무가 고독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없 이 슬퍼하고 있는 나무가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고귀하게 생각되었 다. 나지막하게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노래소리는 그녀를 현혹시킬 듯 울려왔다. 거친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자 그녀는 나무가 깊은 곳 에서 몸을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그와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의 영혼의 하늘에 구름이 몰려왔으며, 그녀의 눈에서는 서서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나는 왜 이다지도 괴 로와하고 있을까? 왜 심장을 파괴시켜버리고 저 나무에게로, 저 아 름다운 고독한 이에게로 녹아들어가려 갈망하는 것일까? 나무는 잎에서부터 뿌리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몸을 떨었다. 나무 는 그녀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타는 듯한 소망으로 그 처녀를 향해 모든 생명력을 격렬하게 집중시켰다. "아, 뱀의 충동에 넘어가서 영원히 홀로 나무 속에 붙잡혀 있다니! 아, 나는 얼마나 눈이 멀었고, 얼마나 바보스러웠던가! 도대체 그렇 게 아무것도 몰랐었던가! 인생의 비밀에 그다지도 무지하였던가? 아 니다, 어쩌면 당시에 이미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예감하고 있었을지 도 모른다. - 아, 이제 그는 깊이 슬퍼하고 이해하면서 남자와 여자 로 된 나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왔다. 빨갛고 파란 새였다. 그 아름다운 새는 활 모양의 곡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아가씨는 새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고, 그 부리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초록 의 풀숲에 떨어져, 그 속에서 아주 은밀하게 빛났다. 그 빨간 빛은 그녀가 그것을 잡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정답게 유혹하고 있었 다. 그것은 루비였다. 그것은 어느 면이나 어두워질 수가 없었다. 마법의 보석을 하얀 손으로 주워들자마자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 우고 있었던 소원이 곧 실현되었다.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정신없이 넘어지며 나무와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강하고 젊은 가지를 뻗어 픽토르 쪽으로 점점 뻗어갔다. 이제 모든 것은 좋아졌다. 세계는 정연하였다. 이제야 낙원이 발견 된 것이었다. 픽토르는 더 이상 우울한 나무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픽토르아, 픽토르아"하고 소리높이 노래불렀다. 그는 변하였다. 이번에야말로 올바른 변화를, 영원한 변화를 성취 했기 때문에 그는 절반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 이후로 는 그가 원하는 대로 계속 변신할 수 있었다. 생성의 마법의 흐름은 끊임없이 그의 핏속을 흘렀으며, 그는 매시간 소생하는 창조에 영원 히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사슴이 되었다. 그는 물고기가 되었다. 그는 인간과 뱀, 구름 과 새가 되었다. 이런 모든 형상 속에서도 그는 완전하였고 일체였 으며 달과 해를, 남자와 여자를 자신 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쌍 동이 시냇물로 여러 마을들을 흘러내려갔으며, 쌍동이 별로서 밤하 늘에 떠 있었다. <<< 아우구스투스 >>> 모스트악켈 거리에 한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불행하게 도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이제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될 운명의 아이가 태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외토리였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라고는 늘 태어날 아기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아기를 위해 생 각해내고, 바라고, 꿈꾸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소망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 뿐이었다. 이 아이에게는 햇빛이 찬란하 게 비치는 유리창이 있고 뜰에 분수가 있는 돌로 만든 집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는 장래에 적어도 대학 교수나 왕 정도는 되 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가난한 엘리자베트 부인의 옆집에는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노인이 외출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어쩌다가 외출할 때 보면 백발의 키가 작은 사나이로, 차양이 달린 이상하나 모자를 눌러쓰고 녹색의 박쥐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 우산의 손잡이는 옛날 것처럼 고래뼈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이 노인을 무서워했고, 어른들 은 이 노인이 필경 무슨 까닭이 있어 이곳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 노인은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모습을 보이 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밤이 되면 이따금 노인의 다 허물어 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아주 작고 정교한 여러 개의 악기에서 나오는 듯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음악이 울려 나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것을 지나가는 아이들은 으레 어머니에게 저 안에서 혹시 천사나 물의 요정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들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었다. "아니, 아니야, 저것은 오르골일 거야." 이웃사람들에게 빈스반겔 씨라고 불리고 있던 이 작은 노인은 엘 리자베트 부인과는 묘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지껏 한 번도 서로 말을 나눈 적은 없었으나 이 작은 빈스반겔 노인은 이 웃인 그녀의 창가를 지날 때면 언제나 아주 친근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그녀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좋은 사람이라 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속으로 내가 혹시 무슨 곤경에 처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필히 옆집에 가서 도 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 작하면 엘리자베트 부인은 혼자 창가에 앉아 사랑했던 죽은 남편 생 각에 마음이 슬퍼지거나 아니면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꿈속으 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럴 때면 빈스반겔 씨는 창문을 가만히 열 어놓고 자신의 어두운 방에서 나지막이 은구슬을 굴리는 듯한 위로 의 음악을 구름 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처럼 흘려 보내는 것이었다. 이 노인은 창문 가에 해묵은 제라뉸 화분을 놓아두고 있었는데, 항 상 물 주는 것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도 잎은 늘 푸르렀고 꽃은 활 짝 펴있었으며 떡잎 하나 시들거나 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엘리 자베트 부인이 매일 아침 일찍 물을 주고 손질을 해주는 까닭이었 다.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밤이었다. 모스트악켈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침 이날 저녁에 가엾은 엘리자베트 부인은 해산할 때가 임박한 것을 알게 되 었다. 그녀는 오로지 혼자뿐인 것이 몹시 두려웠다. 그런데 밤이 되 자 뜻밖에도 어떤 나이든 부인이 초롱불을 들고 찾아와서 물을 끊이 고 면 포대기를 준비하는 등, 아이가 태어날 때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춰주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잠자코 모든 일을 그 부인에게 맡 겨버렸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나고, 깨끗한 새 포대기에 싸여 이 세 상에서의 최소의 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그 나이든 부인에 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빈스반겔 씨의 부탁으로 왔어요."하고 나이든 부인이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 지친 산모는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야 눈을 떠보니, 벌써 그녀를 위해 우유가 끓여져 있었고 집안이 말 끔히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조그마한 사내 아이가 누 워서 배고 고픈지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든 부인은 이미 떠나 고 없었다. 산모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아기가 그토록 예쁘고 힘차 게 보이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죽은 아기의 아버지를 생각 했다. 아기를 볼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하니 새삼 눈물이 솟았다. 그 러나 갓난아기를 가슴에 품고 있자나 이내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 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아기와 함께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이 깨자 또 우유와 수프가 마련되어 있고, 아기는 정갈한 새 포대 기에 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모는 기력을 회복하게 되어 자신과 갓난아이 아우구스투스의 시중을 혼자서 들 수 있게 되었다. 기력을 회복한 그녀는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 입회해줄 대부 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두워질 무렵 옆 집에서 다시금 달콤한 음악이 흘려 나오기 시작하자 빈스반겔 씨를 찾아갔다. 그녀는 주저하면서 어두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빈스반 겔 씨는 "들어오시오!"하고 상냥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맞으러 나왔 다. 음악이 돌연 그쳤다. 방안에는 오래된 작은 탁상 램프가 책상 위 에 펼쳐 놓은 책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여느 집과 마찬가지였 다. "이렇게 찾아 온 것은...."하고 엘리자베트 부인은 입을 열었다. "친 절한 할머니를 보내주신 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 해서예요. 제가 다시 일을 시작해서 돈을 벌게 되는 대로 할머니한테 사례는 하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도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서 왔어요. 아기한테 세례를 받게 하고, 제 아버지처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 을 갖게 해주고 싶은데 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세례를 받 을 때 대부를 해주실 분이 없군요." "아, 그래요.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이웃 노인은 이렇게 말 하면서 회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인께서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 는 경우, 아기를 보살펴줄 돈 많고 훌륭한 대부가 나타났으면 좋겠 다고요. 하지만 난 이렇게 혼자 외롭게 사는 노인이라 내가 직접 대 부가 되어 드린다면 또 모를까, 이렇다 하게 소개해 드릴 만한 친구 도 없군요." 이 말을 듣고 가난한 어머니는 기뻐하며 노인에게 부디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일요일 두 사람은 아이를 교회로 데리고 가 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그 나이 지긋한 부인도 함께 나와 아기 에게 일 타렐짜리 은화를 선물했다. 아기 어머니가 그 돈을 받지 않 으려 하자 나이 먹은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받아 둬 요. 나는 늙은데다 필요한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어요. 어쩌면 이 은 화가 아기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잖아요. 난 빈스반겔 씨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요." 그들은 한께 짐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손님을 위해 커 피를 끓이고 빈스반겔 씨는 과자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세례 축하잔 치는 소박하게나마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아기는 이미 잠이 들어버렸다. 빈스반겔 씨는 일어나면서 이렇 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난 이제 아우구스투스의 대부가 되었소이다. 왕의 성이나 금화가 가득 찬 자루라도 선물하고 싶지만 그런 것은 갖질 못했소. 그러니 내가 아우구수투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만큼은 해 주고 싶소. 엘리자베트 부인, 부인께서는 아기를 위해 이제까지 여러 가지 아름답고 좋은 일들을 기원했겠지요. 그중에서 아기에게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오. 내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 록 힘써볼 테니까. 하지만 그건 딱 한 가지뿐이오. 그러니 잘 생각해 봐요. 오늘밤 우리집의 작은 오르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거든 그 소원을 아기의 왼쪽 귀에 대고 말하시오. 그러면 그 소원이 이루어 질거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급히 돌아갔다. 대모를 서 주었던 그 나이 먹은 부인도 그를 따라나갔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혼자 남아 의아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일 타렐짜리 은화 두 닢이 요람 안에 들 어 있지 않고, 과자가 식탁 위에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꿈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요람 곁에 앉아 아기를 흔들어주면서 무엇이 가장 소망스러운 소원일까를 생각 해 보았다. 처음에는 아기를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어떨까, 아 니면 아름답게, 또는 힘이 세게 해 달랠까, 아니면 총명하고 슬기롭 게 해 달라는 것이 어떨까,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지쳐버려 "아, 그 런 말을 했어도 그저 노인의 농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하고 흐지 부지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어느 사이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 다. 그녀는 손님 접대와 여러 가지 소원을 생각하느라고 피로해져서 요람 곁에 앉은 채 막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서 아름 답고 섬세한 음악이 울려왔다. 그 어떤 오르골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토록 감미롭고 황홀한 음악이었다. 그 소리에 엘리자베트 부 인은 문득 제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다시금 이웃집 빈스반겔 씨와 그의 축하 선물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려 하면 할 수록, 그리고 보다 나은 소원을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 속 은 어지러워져 아무런 소원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초조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렀다. 음악 소리는 차츰 낮아지고 약해져갔다. 이 제 당장 소원을 말하지 못하면 늦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더욱 애가 탔다. 그리하여 그녀는 밭은 숨을 토하면서 아기에게로 몸을 굽히고는 왼쪽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가야, 내 너에게 소원하노니.... 내 너에게 소원하노니..."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사이에 그 아름다운 선율은 완전히 끝 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당황하여 말해버렸 다. "내 너에게 원하노니, 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다오." 오르골의 선율은 이제 완전히 그쳤고, 어두운 방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녀는 요람 위에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슴이 미어질 듯하여 소리쳤다. "아아, 나는 너를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소원하 느라고는 했지만, 그게 정말 좋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날 사랑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의 어머니보다 더 사랑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는 밝은 눈매를 가진 귀여운 아이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어디를 가건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엘리자베트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세례를 받던 날의 소원이 아기의 몸에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깨 달았다. 이 아기가 걷게 되어 골목이며 행길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 면서 부터 사람들은 모두들 이 아이를 기막힐 정도로 귀여워했고, 낯가림을 하지 않는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하여 보는 사람 마다 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호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제은 어머 니들은 그를 보면 미소를 지었고, 할머니들은 그를 보면 사과 같은 것을 주었다. 그가 어딘가에서 못된 장난을 쳐도 아무도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한 장난이라는 것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어깨를 흠칫 추켜보이면 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렇게 귀여운 애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저 귀엽기만 하단 말 이야." 아름다운 소년에게 아음이 끌린 많은 사람들이 그 어머니와도 알 고 지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때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질 않아서 바느질거리도 적었지만, 이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 로 널리 알려져 일거리도 바라는 이상으로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충분히 살 수 있게 되었고 살림살 이는 눈에 띄게 윤택해졌다. 그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때면 사 람들은 즐겁게 인사를 하면서 행복한 두 사람을 전송해주는 것이었 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즐겁게 생각하는 곳은 그의 대부가 되어준 이웃 노인의 집이었다. 노인은 이따금 저녁 나절에 그를 집으로 불 러들였다. 그 집은 어둠침침했고 검은 난로의 작은 구멍으로 타오르 고 있는 불빛이 가늘게 새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키 작은 노인은 아이를 자기 곁으로 가까이 끌어다 마룻바닥에 깐 모피 위에 앉혔 다. 그리고는 함께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긴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아 이는 종종 졸음이 와서 어둠 속에서 반쯤 뜬 졸린 눈으로 불빛을 바 라보고 있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둠 속에서 감미롭고 묵직한 음악 의 선율이 샘솟듯이 울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랫동안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 사이에 온 방안이 찬란하게 빛나 는 작은 아이들로 가득 차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 아이들은 밝은 금 빛의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아름다운 군무를 추듯 원을 그리고 빙빙 돌면서 둘씩 짝을 지어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백 수천 명의 기쁨과 밝은 아름다움이 합쳐진 울림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우구스투스가 듣고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훗날 그가 자기의 어린 시절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추억 속에서 되 살아나 향수를 불러 일으킨 것은 그 친절한 노인의 조용하고 어두운 방과, 난로 속의 빨간 불꽃, 그리고 그 음악과 눈이 부시게 금빛으로 빛나면서 불가사의하게 떠올라 천사처럼 날아다니던 아이들의 모습 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은 차츰 성장해갔다. 그의 어머니는 슬픈 심정 으로 세례받던 날의 밤을 회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는 즐겁게 이웃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고,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 으며, 호도, 배, 과자, 장난감 등을 선물로 받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무릎 위에 앉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고, 뜰에서 꽃을 따도 내버려두었다. 그는 때로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가 정성들여 끓여준 스프를 매몰차게 밀어내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 가 서운해서 눈물이라도 흘리면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뾰루퉁 한 표정으로 몇 마디 하고는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언젠가 어머니 가 그를 꾸짖으며 벌을 주자 그는 엉엉 울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한테 상냥하게 잘 대해주는데 어머니만 그렇지 않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슬퍼졌다. 아이를 엄하게 꾸짖 고 난 다음 아이가 이불 속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고, 촛불이 그 천 진난만한 얼굴을 비추노라면 마음 속의 화는 이내 썩은 듯이 사라지 고, 그녀는 아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입을 맞추는 것이었 다. 모든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녀의 책임이었 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소원을 갖지 않았던 편이 오히려 낫지 않았 을까 생각하면서 간간이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곤 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빈스반겔 씨의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는 창문 앞 에서 작은 가위로 시든 꽃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 때 집 뒤쪽 공터 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고 울 타리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담장에 기대 서 있는 아들의 아 름답고도 약간 거만을 떠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그보 다 약간 큰 소녀가 서 있었는데 그녀는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넌 정말 아름답구나. 내게 입맞춰져. 응?" "싫다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정말 부탁이야. 어서" 소녀는 다시 말했다. "그 대신 선물을 줄 께." "대체 뭘 주겠다는 거야?" 소년이 물었다. "내게 사과 두 알이 있어." 소녀는 수줍어하면서 말했다. "사과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 그는 경멸하듯이 이렇게 말하고 이내 달려가 버리려 했다. 그러자 소녀는 그를 와락 붙잡고는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난 예쁜 반지를 갖고 있어." "어디 봐!" 아우구스투스는 말했다. 그녀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반 지를 그녀의 손가락에서 뽑아 자기 손가락에 끼고 햇빛에 비추어보 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래, 입맟춰줄께." 그는 이렇게 건성으로 말하고는 소녀의 입에 형식적인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놀러가지 않을래?" 소녀는 정답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소녀를 모질게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 다. "이제 그만 귀찮게 굴어! 내겐 너 말고도 같이 놀 아이들이 많단 말야." 소녀가 울면서 뜰에서 사라지자 그는 지루하고 골치아픈 것 같은 얼굴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반지를 빙빙 돌리면서 살펴보더니 휘파 람을 불면서 천천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손에 가위를 든 채 아들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 아들이는 그 냉혹하고도 거만한 태도에 놀랐다. 그녀는 기가 막혀 가위질을 멈추고 머리를 내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정말 몹쓸 녀석이야.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구나."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꾸짖었다. 그러나 아들은 파란 눈으로 웃으면서 어머니를 바라볼 뿐 자기 잘못 을 뉘우치는 태도는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노래를 하 고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리는 태도가 익살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아이에게 너무 갑작스럽게 엄하 게 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의 그릇된 행위는 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 부인 빈스반겔 씨는 소년이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이었다. 소년이 저녁 나절 노인의 집을 찾아가자 노인은 말했다. "오 늘은 난로에 불이 타지도, 음악도 울리자 않는다. 네가 너무나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작은 천사가 슬퍼하고 있어." 이 말을 듣고 소년은 말없이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울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 후의 며칠간은 선량해지려 고 노력했다. 그러나 난로에 불이 타오르는 일은 차츰 드물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어리광을 부린다고 해서 노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 다. 아우구스투스가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빈스반겔 씨 방에서 마법 처럼 날아다니는 천사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득한 꿈처럼 되어버 렸다. 날아다니는 천사의 모습을 보고난 이튿날에는 여느때보다 두 배나 거친 골목대장이 되어 못된 장난을 마구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아들을 칭찬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들이 아무리 귀엽고 잘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다만 행동거지가 나쁜 아들이 근심스러 운 뿐이었다. 어느 날 이들이 다니는 학교 선생이 그녀를 찾아와서 아우구스투스를 큰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보내 공부시키려는 사람이 나섰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그녀는 곧 이웃집 빈스반겔 노인에 게 가서 상의를 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어는 봄날 아침, 한 대의 마차가 왔다. 아우 구스투스는 호사스러운 새옷을 입고 마차에 탔다. 그는 이웃 노인과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수도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금발을 아름답게 빗어주고 축복을 해주었다. 마침내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 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낯선 세계로 떠나갔다. 여러 해가 지나고, 아우구스투스는 대학생이 되어 빨간 모자를 쓰 고 수염을 기르게 되고 나서야 다시 한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웃 집 빈스반겔 노인이 그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이제 얼마 살 수 없 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해 질 무렵에 고향에 닿았다. 그가 마 차에서 내리자 마부가 그의 뒤에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를 작은 집안 으로 나르는 것을 사람들은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 니는 낡은 오두막집 아예 누워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늠름해진 대학생인 그는 베개에 묻힌 창백하고 시든 얼굴이 눈인사조차 할 기 력이 없는 것을 보자 울면서 침대에 엎드려 어머니의 차가운 두 손 에 입맞추고 밤새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은 더욱 차가와지고 눈의 광채는 끝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빈스반겔 노인은 청년의 팔을 잡고 함께 자기의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청년에게 그 집은 전보다 더욱 낮고 어두워진 것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작은 창만이 어둠 속에서 아직 어렴풋한 빛을 띠고 있을 무 렵이 되자, 노인은 마른 손가락으로 흰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아우구 스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로에 불을 피우자. 그러면 램프는 필 요하지 않을 테니까. 너는 내일 다시 떠나겠지. 네 어머니마저 돌아 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테지." 그러면서 노인은 난로에 조그마하게 불을 지피고는 의자를 앞으로 가까이 당겼다. 대학생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의자를 끌어 당겼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마주앉아 차츰 타들어가는 장작불을 바라보고 있었 다. 드디어 불꽃이 사그러지자 노인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잘 가거라. 아우구스투스. 너의 행복을 빌어주마. 네 어머니는 착 한 사람이었다. 네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어머니는 생을 위해 정성 을 다했지. 나는 다시금 너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작은 천사를 보여 주고 싶지만 이제는 그것이 힘든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러 나 이걸 잊지 말아라. 천사들은 언제나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언젠가 고독한 동경에 넘친 마음으로 듣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자아, 이제 그만 악수를 하자. 난 늙어서 이젠 자야 할 시간이 되었어." 아우구스투스는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쓰러져가는 집으로 힘없이 돌아가 그리운 고향에서의 마지막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런데 잠이 들기 전에 어렸을 때 듣던 그 감미 로운 음악이 어디선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튿날 아침 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사 람들은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고향을 떠난 그는 빈스반겔 노인이나 천사들에 대한 것은 잊고 말 았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그의 둘레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물결을 타고 살아갔다. 어는 누구도 그처럼 말굽소리를 높 이 울리며 골목으로 말을 달리고, 우러러보는 처녀들에게 비웃는 눈 길로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처럼 경쾌하 고 매혹적으로 춤을 추고, 그 만큼 가볍게 말을 잘 타고, 호화롭고 떠들썩하게 여름 밤을 술에 취해 뜰에서 지새울 줄 아는 자는 한 사 람도 없었다. 그는 부유한 미망인의 애인이 되었다. 미망인은 그에게 돈이며, 옷, 말 등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주었다. 그는 그녀와 더불어 파리나 로마로 여행을 떠났으며 그녀의 호화스러운 비단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순하 고, 착한 금발의 처녀였다. 그는 밤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집 을 찾아갔다. 그가 먼 여행을 떠나면 처녀는 길고도 열렬한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새로 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공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기가 싫어 졌고 부유한 애인에게도 싫증이 났다. 그는 외국에 머물면서 마치 상류사회 사람들처럼, 말과 개와 여자를 데리고 생활하며 큰 돈을 잃기도 하고 또 벌기도 하였다. 어디를 가든 그를 따르고 그에게 몸 을 바치고, 그를 섬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만한 미소를 지으며 어렸을 때 소녀의 반지를 받던 것처럼 그런 것들을 받아들였다. 매 사가 순조롭게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마력이 그의 눈과 입술에 머 물러 있었다. 여인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그를 둘러쌌으며 남자들은 그에게 서로 가까와지려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하고 욕심스러워졌으며, 그의 영혼이 얼마나 병 들어 있는가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 다.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에 싫증이 나서 그는 이따금 변장 을 하고 혼자 낯선 거리를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어리석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서나 그를 정신없이 좇아와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도 만족해하는 여자들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곤 했다. 여자나 남자나 좀더 긍지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는 귀찮고 불쌍하게 여겨지 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며칠씩 계속해서 개와 지내거나 경치가 아름다운 산 속의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며 보냈다. 그가 쏘아 죽인 한 마리의 사슴은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한 여성의 구애 보다도 그를 더한층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젊고 아리따운 공사 의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북국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부인으로서 다른 고귀한 부인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아름답고 자랑스러워 보였고 말이 적었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눈길은 무관심한 듯이 그를 잠깐 스쳤을 뿐이었다. 그때 그는 비로 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결심 했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그녀 곁에, 그녀의 시선 앞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끊임없이 그를 찬미하고 그와의 교재를 원하는 숱 한 남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그가 여행자들 가운데서 그 아 름다운 부인과 나란히 섰을 때는 마치 공작과 공작부인같이 보였다. 금발 머리인 그 부인의 남편도 그를 소중하게 여겼고,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이윽고 배가 남국의 항구 도시에 닿을 때까지 그가 이 이국의 부 인과 단둘이 있을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여행자들은 이국땅을 구경하고 오랜 만에 땅을 밟아보기 위해 몇 시간의 기항중 모두를 배에서 내렸다. 그때 그는 그 부인 곁에 있었 고, 마침내 번잡한 거리의 인파 속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 수가 있었 다. 작고 어두운 많은 골목이 광장에서부터 갈라져 나가 있었다. 그 는 그 중 한 골목으로 그 부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가 그와 단 둘이 있게 된 것을, 동행했던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는 불안 해 하자 그는 밝은 표정으로 망설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자 기와 함께 먼 곳으로 도망쳐 달라고 간청했다. 부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슨 말씀을, 그것은 기사답지 않아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비 난하듯 말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은 잊어주세요!"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쳤다. "나는 단지 사랑 에 빠진 사나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나이는 연인 말고는 아무것 도 모릅니다. 연인 곁에 있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않지요. 아아, 아름다운 분이여, 나와 함께 가십시다. 우리는 분명 행복해질 겁니 다." 그녀는 진지한 파란 눈으로 나무라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호소하듯이 속삭였다. "대체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거짓말을 못 합니다. 저는 당신 이 좋아요.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없이 생각 했어요. 당신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첫번째 사람이니까요. 아아, 사랑은 어째서 이렇듯 심하게 사람을 혼란시키는 것일까요! 저는 순 결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여지껏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남편을 그리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남편은 기사이고, 당신이 모르는 명예와 고귀함을 갖추고 있어요. 자 아, 이제 다시는 아무 말씀 마시고 저를 배로 데려다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큰 소리로 당신의 무분별한 행동을 막기 위해 이 낯선 고장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겠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그가 아무리 애원을 해도 돌아서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만일 그가 잠자코 그녀를 배로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혼자 가버렸을 것이었다. 배에 도착하자 아우구스투스 는 트렁크를 배에서 내리고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채 혼자 떠났다. 그때부터 숱한 사람들에게서 열렬한 사랑을 받아온 사나이의 행운 도 기울기 시작했다. 그에게 도덕성이나 성실성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덕목이었다. 그는 그런 것을 발로 짓밟아버렸다. 정숙한 부인을 온갖 수단으로 유혹하거나, 순진한 사람들과 사귀고는 돈을 빼앗은 다음 비웃으며 차버리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부인네나 처녀들의 돈 을 갈취한 다음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위한 집안의 청년들을 유 혹해서는 타락의 길에 빠뜨렸다. 그가 찾아내어 즐겨보지 않은 향락 이란 이제 하나도 없었다. 그가 알고 버리지 못하는 악덕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었다. 온갖 곳에서 그 를 맞는 사랑도 그 영혼에는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그곳을 찾아온 여자들이나 친구들을 미치광이 같은 변덕이나 악의로 괴롭혔 다. 그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싶은 감정의 유혹을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는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사랑에 둘러싸여 있는 것에 싫증이 났다. 결코 주는 일은 없고, 늘 받아들일 뿐인 낭비적이 고 문란한 생활의 무가치함을 느꼈다. 그는 진정한 욕구만을 지니고 허황된 생활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바램을 실현하기 위하 여 오랫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는 그가 병이 났으며, 휴식과 고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편지가 계속 왔으나 그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근심스러워진 사람들은 심부름꾼을 보내 그의 안부를 물어 왔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수척해진 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방에 홀 로 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생활은 너무나 공허해서, 솨아 하 고 밀려왔다가 이내 밀려나가는 잿빛 바닷물처럼 아무런 결실일 없 었다. 거기엔 사랑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높은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렇듯 자기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흰 갈매기가 바닷가의 바람을 타고 날아가 는 것을 그는 기쁨도 흥미도 사라져버린 생기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 라보았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벨을 울려 하녀를 불렀을 때, 그의 입술만은 냉혹하고 심술궂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날짜를 정해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여 연회를 열기로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텅 빈 빈과 자신의 시체를 보여주어 손님들 을 놀라게 하고 비웃어주려는 데 있었다. 그는 연회 직전에 독약을 마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회가 있기 전날 저녁, 그는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집안이 조 용해지자 침실로 가서 사이프러스 포도주에 강한 독약을 섞고는 그 잔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가 그것을 막 마시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 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문이 열리고 한 작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아우구스투스 쪽으로 다가와 넘치는 술잔을 그의 손에서 천 천히 빼앗아 들고는 귀에 익은 목소리로 "잘 있었니, 아우구스투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하고 조용히 묻는 것이었다. 뜻밖의 일에 놀란 그는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여 자멸에 찬 미 소를 띠면서 말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아직 살아계셨나요?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할아버진 조금도 나이를 안 먹는 모양이죠? 그런데 지금은 제게 방해가 됩니다. 전 피로에 지쳐서 잠자는 약을 마시려 던 중이었거든요." "알고 있다. 아무렴, 다 알고 있어." 노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너는 잠자는 약을 마시려는 중이지. 당연한 일이야. 그것은 너에게 효력이 있는 마지막 술일 게다. 그런데 그걸 마시기 전에 잠 시 이야기를 좀 하자구나. 그건 그렇고, 워낙 먼 길을 오느라 지쳤으 니 한잔 마시고 기운을 내야겠네, 양해하게." 노인은 빼앗은 술잔을 아우구스투스가 미처 말릴새도 없이 단숨에 마셔버리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노인에게 덤벼들어 그 어깨를 잡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당신 이 무엇 마셨는지 아세요?" 빈스반겔 노인은 슬기로와 보이는 백발의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사이프러스 포도주구나. 나쁘지는 않은데? 너는 그래도 여 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쨌든 내겐 시간이 그리 많 지 않으니 내 말을 잠시만 들어다오.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 까...." 심란해진 청년은 두려움에 떨면서 노인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노인이 쓰러질 때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염려스럽게 기다렸다. 그러나 노인은 유유히 의자에 앉아 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너 는 내가 방금 마신 포도주가 내 몸에 지장이 있을까 근심하고 있구 나? 그렇다면 안심하거라. 네가 나를 이해 근심해주다니 고마운 일 이야. 정말 뚯밖이구나. 어쨌든 이제 옛날처럼 이야기를 좀 해보자. 너는 텅 빈 방탕한 생활에 진력이 난 모양이지? 그럴 테지. 내가 이 집에서 나가거든 술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마시거라. 그렇지만 그 전에 나한테 할 얘기가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벽에 기대 서서 이 나이 많은 작은 노인의 상냥하 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는 어느새 과거의 환영을 그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천진한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듯이 부끄러움 과 깊은 슬픔에 잠겨 들어갔다. "네 독약은 내가 마셔버렸다." 노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 의 불행은 내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지. 네 어머니는 어의 세례 때 너를 위해 한 가지 소망을 했었다. 그 소망은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나는 네 어머니를 위해 그것을 이루에 해주었다. 네기 지금 새삼스 럽게 그것을 알 필요는 없다. 그것이 저주가 됐다는 것은 너 스스로 뼈아프게 느꼈을 테니까. 이렇게 된 것을 나 역시 안타깝게 생각한 다. 네가 다시 우리집 난로 가에 앉아 천사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서도 기쁜 노릇일 테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 지. 이제 와서 네 아음이 다시금 건간을 되찾아 맑고 깨끗하게 된다 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로 생각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나는 그렇게 해보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네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망은 너에게 해가 됐어. 아우구스투스, 어떠냐? 어떤 소망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무엇을 원하겠니? 넌 보 내나 돈을 바라진 않을 테지? 권력이나 여자의 사랑도 이젠 싫증이 났을 게고, 생각해보려무나. 만일 너의 타락한 생활을 다시 보다 아 름답고 보다 착하게 만들어주고 너를 즐겁게 해줄 이상한 힘이 있다 고 한다면 너는 무엇을 소원하겠느냐?" 아우구스투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희망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후에 이 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그렇지만 이제 제 생 활은 어떤 빗으로 빗어도 가지런해지지는 않습니다. 역시 할아버지 가 들어왔을 때 제가 하려고 했던 일은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와주신 것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하고 노인은 신중하게 말했다. "너로서는 그 일이 그리 쉽 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 을 고쳐봐라, 아우구스투스. 그러면 이제껏 너한테 무엇이 가장 부족 했는지 알게 될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또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시 고, 네가 해질 무렵 종종 나를 찾아오던 옛날이 생각날지도 모르지. 그 무렵에는 너도 이따금은 행복하지 않았니?" "네! 그때는 그랬었죠." 아우구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는 인생의 아침의 모습이 마치 옛날 거울에 비치듯이 저 멀리서 바랜 빛깔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요. 또 다시 어린애로 돌아가는 것은 바랄 수도 없고요. 아아, 모든 것을 처 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물론 그건 무의미할 테지. 네 말이 옳아. 그렇지만 우리가 고향에 있었을 때의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또 네가 학생일 때 밤마다 가엾은 처녀를 뜰로 찾아간 일, 아름다운 금발의 부인하고 배를 타 고 여행한 일, 그리고 네가 행복했었던 시절의 일들을 남김없이 생 각해보거라. 그러면 무엇이 널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아마 알게 될게 다. 그것을 소망하면 되는 거야. 나를 위해 부디 그렇게 해다오." 아우구스투스는 눈을 감고 자기의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자기가 나온 아득히 먼 밝은 점을 보는 것 같았다. 한때는 자기의 주위가 무지개처럼 밝고 아름다왔는데 그것이 서서히 어두워 져 마침내는 자기가 캄캄한 암흑 가운데 서서 매사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된 과정을 회상하였다. 생각하면, 돌이켜보면 볼수록 저 멀리 아득한 작은 빛은 점점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바람직스럽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 빛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자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해보겠읍니다." 그는 노인에게 힘차게 말했다. "저에게 도움이 되 지 못했던 옛 마력을 이제부터 없애주세요. 그 대신 제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는 울면서 노인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벌써 이 노인에 대 한 뜨거운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마음 속에서 타오르며, 자기가 잊 었던 말이며 몸짓을 기억해내고자 애쓰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노 인은 그를 살며시 안아 올려 침대로 데리고 가서 눕히고는 열에 단 이마며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이제 되었다." 노인은 낮은 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된 거야. 이제 매사 잘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있는 순간 아우구수투스는 면 년이나 더 나이를 먹 은 것처럼 무거운 피로를 느꼈다. 그는 이내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 었다. 노인은 그 텅 빈 집에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떴 다. 그는 일어나 앉아 가까이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실은 물 론 방마다 친구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회에 초 대를 받고 왔다가 집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알고는 기대가 어긋나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그들 앞으로 나가 여느 때처럼 미소와 농담 으로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러한 힘이 자기에게서 사라져버렸음을 느꼈다. 그들은 그를 보자마자 한 꺼번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가 당황하여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제지하듯 두 손을 뻗치자 그들은 화를 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이 사기꾼! 나한테 빌려간 돈은 어디 있지?"하고 한 사람이 외쳤 다. 그러자 또 한 사나이가 외쳤다. "이놈아, 내가 빌려준 말은 어떻게 했어?" 어는 아름다운 부인도 찢어지는 듯 앙칼진 소리로 쏘아붙였다. "네가 내 비밀을 퍼드려 온 세상에 소문을 냈지. 비열하고 더러운 놈아!" 그러자 또 눈이 움푹 패인 젊은 사나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들었 다. "나를 어떻게 망쳐놨는지 네놈은 알고 있겠지? 이 악마 같은 놈,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나쁜 놈!" 이렇듯 모두가 한결같이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다. 다 옳은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렸다. 그들은 그렇게 난동 을 피우다가 돌아갔는데 돌아가면서 거울을 부수기도 하고 옷이며 그밖의 귀중품들을 밑천을 건질 셈으로 모조리 가져가고 말았다. 침 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니 초췌하고 추한 얼굴이 그를 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붉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것이 죄의 보답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이마 에서 흐르는 피를 씻었다.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층계를 올라왔다. 집을 저당잡은 빚장이, 아내를 유혹 당한 남편, 그의 유혹으로 아들들이 죄악과 불행에 빠진 부모, 휴가 를 받아 나왔던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경찰관과 변호사들이었다. 한 시간 후 그는 결박당해 마차에 실려 형무소로 끌려갔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마구 욕설을 퍼부었고, 비웃는 노래를 불렀다. 한 개구장이 아이는 그가 끌려가는 마차 안으로 한 주먹의 오물을 던져 넣었다. 그처럼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고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추 행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가 고발당하지 않은 죄악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부정할 수 있는 죄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이미 잊어버리 고 있었던 사람들이 재판관 앞에서 그가 까마득한 옛날에 저지른 비 행을 낱낱이 들추어냈다. 그에게서 급료를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물건을 훔쳐간 하인들은 그의 숨겨진 죄악을 폭로했다. 어느 얼굴에 도 증오가 넘쳐 있었다. 그를 변호하고, 옹호하고, 용서하고, 그의 선 행을 생각해주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되는 대로 맡겨버렸다. 그는 독방에 갇혔고, 그 독 방에서 판사나 증인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는 증오를 가득 품고 있 는 주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어는 얼굴에서든 증오에 찬 표정 밑에는 정다움과 애정의 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모든 사람들은 전에는 그를 사랑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 중의 단 한 사람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이제 비로소 그는 그 들에게 사과하고, 개개인에게 무언가 좋은 점을 생각해내려고 했다. 그는 마침내 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어는 누구도 그를 만 나려 오지 않았다. 그는 열에 들뜬 꿈 속에서 어머니와 최초의 애인, 빈스반겔 노인, 같은 배에 탔던 북국의 귀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무수한 나날을 하는 일 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갈망과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이 뼈에 사무쳐왔고 사람 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물밀 듯 이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어떤 향 락이나 소유욕도 이렇듯 초조하게 가슴을 태운 적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늙고 병들어 있었다. 이젠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었 다. 사람들은 거리를 마차나 말을 타고 지나가기도 하고 산책을 하 기도 하고 있었다. 과일이나 꽃, 장난감, 신문 등을 파는 모습도 여 전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를 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뿐이었 다. 그가 전에 음악을 듣고 샴펜을 마시면서 가슴에 안았던 아름다 운 여자들이 마차를 타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차가 지나가자 뿌 연 흙먼지가 아우구스투스를 덮쳐왔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그를 질식시킬 것 같았 던 그 무서운 공허와 고독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타는 것 같은 뜨거운 햇빛을 피하려고 가까운 집 처마에 멈춰 서기도 하고, 뒷뜰에서 한 사발의 물을 청하거나 할 때, 전에는 그의 교만하고 퉁 명스런 말에도 그렇듯 고마와하고 눈을 빛내며 대답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퉁명스러운 적의를 품고 듣는 것이 그에게는 이상스럽게 생 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어떤 사람을 보아도 기뻐하고 감탄하 고 감동되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나 학교에 가는 광경을 보면 귀여웠다. 집 앞의 의자에 앉아 마르고 주름진 손을 햇볕에 녹이고 있는 노인들을 그는 사랑했다. 연모의 눈빛으로 처녀의 뒤를 좇는 젊은이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팔에 안는 노동자나, 마차를 타고 조용히 서둘러 가면서 환자를 생각하고 있는 기품있고 현명해보이는 의사나, 저녁 무렵 변두리 가로등 밑에 기대 선 자기 와 같은 초라한 인간이나, 애교를 파는 구차한 옷차림의 가련한 창 녀를 보아도 그에게는 그 모두가 자신의 형제자매로 여겨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착한 어머니와 보다 착한 성품에의 회상과 보다 아름답고 늠름한 사명의 은밀한 징표를 몸에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는 사랑스럽고, 소중했고, 반성의 계기를 주었다.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나쁜 인간이란 없는 것 같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온 세계를 방랑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한 자기의 사랑을 펴보일 수 있는 곳을 찾기로 결심 했다. 그는 자기의 모습이 이미 그 누구도 기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해지고 옷이 나 구두는 거지와 똑같았다. 그의 목소리나 걸음걸이도 일찌기 사람 을 기쁘게 해주고 황홀하게 해주던 옛 모습이 아니었다. 덥수룩한 흰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어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옷차림이 말 쑥한 사람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가까이 하는 것을 자신들의 위신이 깎이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 들은 그를 자기네의 얼마 남지 않을 훔쳐가려는 타관 사람으로 여기 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데 힘이 들었다. 결국 그는 많은 수업을 쌓고 무슨 일이든 마다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빵가게 문의 손잡이에 귀여운 손을 한껏 뻗어도 닿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때로는 그 자신보다도 더욱 가엾은 사람, 가령 장님이나 불구자를 만나기도 했 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잠시 동안 길을 안내해주고 친절하게 보살펴주기도 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물건마저 기꺼이 넘겨주었다. 밝고 상냥한 눈길 을, 형제같은 친밀한 인사를 이해와 동정의 몸짓을 던져주었다. - 이 러는 사이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무엇에 기 쁨을 느끼는지를 배웠다. 어떤 사람은 힘찬 인사를, 어떤 사람은 조 용한 눈인사를, 어떤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불행한 사람이 있는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얼마나 만족해하고 있는지, 그는 매일같이 그런 사실을 깨 닫고 놀라는 것이었다. 온갖 고뇌 곁에는 즐거운 웃음이, 모든 장례 의 종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노래가, 모든 곤궁과 비참한 곁에 정 중함과 위로의 미소가 있음을 깨닫고 그는 놀라며 감동했다. 그는 인간 생활이 잘 짜여져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길 목을 돌아들면 어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그에게로 달려오는 때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생기와 생활의 기쁨에 찬 우아한 아 름다움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놀리거나 난처하게 만드는 수가 있어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진열장 유리에서나 물을 마실 때 샘 속에 비치고 있는 자 기의 얼굴을 보고 그는 자기가 몹시 초췌하고 지저분한 몰골임을 새 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거나 힘을 발휘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전에 자기가 걸어온 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노력하며 사는 보람을 느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름답게 여겨졌고 위안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힘과 긍지와 기쁨 을 느끼면서 목절을 뒤쫓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겨울이 되고, 다시금 여름이 왔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들어 오랫동안 무료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완전 히 짓눌린 가난한 사람들이 놀라운 투지력과 희망을 갖고 삶에 집착 하며 죽음을 이겨내려 하고 있는 숭고한 모습을 보고 얻은 벅찬 행 복감을 조용히 감시하면서 맛보았다. 중병을 앓는 환자의 표정에 인 내가. 회복기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밝은 삶의 기쁨이 차곡차곡 쌓 이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경의였다. 죽은 사람들의 고요하고 엄 숙한 얼굴도 아름다왔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보다 더 한층 아름다 운 것은 사랑스럽고 맑은 모습의 간호원들의 사랑과 인내였다. 그러 나 입원 시기도 끝나고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아우구스투스는 겨울 을 앞두고 방랑을 계속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찾아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정답게 보고 싶었으나 자신의 걸음이 도무지 느리고 처진 것을 느끼며 마음 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다.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고 눈은 굵게 늘어진 눈꺼풀 안에서 힘없이 끔벅이고 있었다. 차츰 그의 기 억도 희미해져서 세상을 늘 똑같이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러나 그는 만족했으며, 세상은 참으로 훌륭하고 사랑할 만한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겨울에 접어들자 어는 도시에 찾아들었다. 어두운 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늦도록 길에서 놀다 돌아가는 심술궂은 개구장이들이 그에게 눈뭉치를 던졌을 뿐 그 밖에는 모든 것이 밤의 적막 속에 닫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심한 피로를 느끼며 어떤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 다. 낯이 익은 정다운 골목같이 여겨졌다. 또 다시 어는 골목으로 들 어가니 그곳엔 그의 어머니의 오두막집과 빈 빈스반겔 노인의 집이 차가운 눈보라 속에 낡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인의 집 창문 하나 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불빛은 겨울 밤의 대기 속에서 빨갛고 아늑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집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작은 노인이 그를 다정하게 맞으며 말없이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따뜻하고 조용했다. 난로에서는 작고 밝은 불이 여 전히 예전처럼 타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노인이 물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조금도 배고프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었 다. "그렇지만 피로해 있을 테지?" 노인은 거듭 묻고는 낡은 모피를 마루에 깔았다. 두 노인은 그곳 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불을 바라보았다. "자넨 먼 길을 왔군." 빈스반겔 노인은 말했다. "아아,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전 그저 좀 피로해졌을 뿐입니 다. 할아버지 집에서 묵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내일 다 시 여행을 계속하겠읍니다." "아아,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 옛날의 그 천사의 춤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천사의? 네, 그야 보고 싶죠.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정말 우린 오랫동안 못 봤구나."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는 다시 착해진 것 같군. 자네의 눈은 자네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 던 옛날처럼 부드러워졌어. 정말 나를 잘 찾아왔네." 누더기 옷을 걸친 나그네는 옛날 친구 곁에 쓰러진 것처럼 웅크리 고 있었다. 오늘밤처럼 피곤한 것은 처음이었다. 훈훈함과 불빛 속에 서는 그는 정신이 흐려졌다. 현재와 과거 사이의 구분을 할 수가 없 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하고 그는 말했다. "제가 도 장난을 쳐서 어 머니가 집에서 울고 계세요. 할아버지. 어머니한테 말씀드려주세요. 제가 다시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요." "그래, 그래." 노인은 말했다. "안심해라. 어머니는 너를 지극히 사 랑하니까." 벌써 난로의 불꽃이 사그러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어릴 때 처럼 잠이 꽉 찬 큰 눈으로 사그러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얹었다.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 이 방안을 부드럽고도 행복하게 가득 채웠다. 그러자 수많은 어린 천사들이 날아와 얼싸안거나 둘씩 짝을 지어 즐겁게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찾은 천국을 향해 어린 아이의 감수성을 활짝 열어놓았다. 문득 그는 어머니가 부르는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피곤에 지쳐 있었다. 게다가 빈스반겔 할아버지는 어머니에 게 얘기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가 잠이 들자, 노인은 그의 두 손 을 가지런히 모아주고 조용해진 심장에 귀를 대었다. 그 사이에 방 안은 완전히 밤이 되고 말았다. <<< 시인 >>> 전설에 의하면 중국의 시인 한혹은 젊었을 때 시가에 관한 것이라 면 무엇이든지 배워 그 방면에서는 완성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큰 포 부를 지니고 자신을 체찍질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황하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택하기고 했지만 그보다 자신을 아끼는 양친의 주선으로 어떤 양가의 규수와 혼약을 하였다. 길일을 택해 곧 혼례식도 올리게 되어 있었다. 한혹의 나이는 그때 스무 살 정도 로 훤칠한 외모에 예의가 바른 청년이었다. 대인 관계도 무난할 뿐 아니라 학식은 무불통지여서 약관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많은 탁월한 시가는 고향의 문인들 간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신부의 지참금까지 보태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약혼녀가 절세의 가인인 데다 정숙하여 이 청년은 아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행복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늘 완전한 시인이 되려는 야망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강 위에서는 관등놀이가 한창인데 한혹은 혼자서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강물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등걸에 몸 을 기대어 서서 무수히 많은 등불이 수면에 아롱져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와 뗏목 위에서 남녀노소가 서로 정답게 인사를 주고 받는 모습과 화려한 차림으로 아름다운 꽃과 같이 반짝이는 사 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는 불빛이 어린 물결의 가느다 란 속삭임 소리, 하희들의 노래 소리, 울려나오는 비파 소리, 달콤한 피리 소리 등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 위로 신전의 반원형 천정같이 드리워져 있는 푸른 잠의 자태를 보았다. 고독한 방관자처럼 홀로 우두커니 서서 이 모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청년의 가슴에는 격랑이 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저편 강가로 건너가 약혼녀나 친구들과 놀이를 즐기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더욱 강한 열정으로 가슴을 채워오는 저 감동적인 욕망이 그 유혹을 뿌리쳤다. 밤의 푸르름, 물결을 따라 덩실덩실 춤추는 불빛의 유희, 놀이에 취한 사람들의 환희, 강둑 나 무등걸에 기대 선 고적한 방랑자의 그리움 -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받아들여 완벽한 시로 표현해보려는 마음의 욕구가 있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축제가 벌어지더라도, 이 지장에서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고 자신을 결코 그 속에 도취해 들어갈 수 없으며, 생활 의 한복판에 들어 서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고독한 사람으로, 방관 자로,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또 자신의 영혼은 많은 다른 영혼들과 섞여 살면서도 이 지상 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물론 국외자의 은밀한 소원까지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운명임을 느끼고 마음이 슬퍼졌다. 그는 이 문 제를 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이 참다운 행복과 깊은 만족을 얻을 수 있으려면 훗날 세계 그 자체를 완전히 시 속에 담아내어 그 영상 속에서 세상이 정화되고 새로운 불멸의 형태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한혹은 이런 생각에 잠겨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듯한 상태에서 언 뜻 가벼운 비단결 스치는 소리와 흡사한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한 혹은 소리나는 쪽을 얼른 돌아보았다.거기에는 자색 도포를 입은 노 인이 근엄한 얼굴로 나무 옆에 서 있었다. 한혹은 일어서서 노인이 나 귀인들에게 드리는 예로써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낯선 귀 인은 빙긋이 미소를 띄우며 두세 줄의 시 귀절을 읊었다. 그 시에는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던 모든 것이 아주 아름답고 완전하게, 그리 고 위대한 시인들이 쓴 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젊 은이는 놀라움으로 심장의 고동이 일시에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오, 당신은 누구신지요."하고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제 마음속을 꿰뚫어보시고 제가 여지껏 스승으로부터 듣던 것보 다 몇 배나 더한 아름다움이 깃든 시를 읊으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 구십니까?" 낯선 귀인은 다시 한번 원숙한 도인의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을 받았다. "만약 그대가 시인이 되려는 뜻을 품었거든 나를 따라오도록 하 라. 나의 거치를 찾으려거든 이 대하의 상류 부근, 서북쪽 산간으로 오너라. 내 이름은 완전한 언어의 스승이니라." 이 말의 여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연로한 귀인은 숲속 나무 그늘사 이로 들어서 이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한혹은 그를 찾아보았 으나 그의 발자국마저 찾지 못하였다.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은 피곤 에 지쳐 잠시 잠든 사이에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배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축제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야기 소리, 피리 소리 사이사이에도 항상 그의 귀에는 계속 그 낯선 노인의 신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영혼은 이미 그 노인을 따라 어디론지 가 버 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랑에 빠져 들떠 있다고 골려 대고 있는 쾌활한 친구들 틈에 앉아서도 그는 서먹서먹하게, 그리고 꿈꾸는 듯한 눈을 끔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갔다. 한혹은 아버지는 결혼 날짜를 잡기 위하여 친구 며 친척들을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 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이 자식된 도리가 아닌 줄 알지만 용서해주십시요. 제가 시 공부에 전념하여 완전한 시인이 되고자 하 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아버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 실 것입니다. 저의 친구들 가운데서 몇몇은 저의 시를 칭찬하지만 저는 아직 많은 것을 모르며 이 길을 첫 계단을 밟고 있는데 불과합 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잠시만이라도 더 제가 조용히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와 가정을 거느리 게 되면 면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읍니다. 아직 저는 결혼을 하기에 는 젊고 다른 의무도 없읍니다. 앞으로 얼마 동안만 시작에 정진하 여 생의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도록 허락 하여주십시오. 아들의 말은 아버지를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 일을 위해 혼례까지 연기하려는 것을 보니 너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가 보구나. 혹시 다른 사정이 있다면 말해봐라. 너와 약혼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니냐? 그렇다면 그 애와의 화해를 주선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다른 규수를 구해준다거 나 해서 너를 도와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러나 아들은 변함없이 약혼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약혼녀와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그는 관등놀이 가 벌어졌던 날 꿈결에 스승이 나타난 일이며, 자신은 그 스승의 제 자가 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고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고백했다. "좋아, 그렇다면 일 년간의 여유를 너에게 주마. 그 동안 너는 그 꿈을 좇도록 해라. 혹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니." "이 년도 더 걸릴지 모릅니다. 그런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읍니까." 한혹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슬퍼하기만 했다. 젊은이는 약혼녀에게 한 통의 긴 편지로서 이별을 고한 다음 고향을 뜨고 말았다. 길고 긴 여행 끝에 강의 상류에 도달한 그는 정말 호젓하게 후미 진 곳에서 대나무로 엮은 한 채의 초막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초막 앞마당에 펼쳐진 돗자리 위에는 그가 강가 나무 옆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연로한 귀인이 앉아 있었다. 귀인은 단정히 앉아서 비파를 뜯고 있었다. 그는 방문객이 공손히 읍하며 접근하는 것을 보고서도 일어 서기는커녕 말도 없이 다만 빙긋이 미소만을 지을 뿐, 화사한 손가 락으로 계속 비파줄을 뜯고 있었다. 신비로운 음악이 은빛 구름과도 같이 온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젊은이는 걸음을 멈추고 다소의 의 아함과 감미로운 경탄 속에서 다른 일체의 생각을 잊어버렸다. 이윽 고 완전한 언어의 스승은 조그마한 비파를 들고 초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혹은 그 위인을 공손히 달려들어가 그냥 그대로 그의 문 하에서 하인겸 제자로서 머물게 되었다. 한 달이 나났다. 그는 전에 자신이 지었던 모든 시들이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수개월이 지나갔다. 그는 이제까지 고 향의 스승들한테서 배웠던 시편들도 그의 기억에서 씻어버렸다. 이 스승은 그와 거의 한 마디도 말도 교환하지 않았다. 스승은 그에게 비파 뜯는 기술을 무언으로 가려쳤다. 곡 제자는 음악을 완전히 관 류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한혹은 가을 하늘에 두 마리 새가 날아 가는 것을 묘사한 짤막한 시를 짓고 스스로 만족했다. 그것을 스승 에게 보여드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어느 날 저녁때 초막 옆 에서 나지막이 그 시를 읊었다. 스승은 그 시를 듣고 있었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스승은 다만 조용한 음색으로 비파를 뜯고 있을 뿐이 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공기는 쌀쌀해지고 저녁놀을 재촉하여 아직 한 여름인데도 매서운 바람이 일며 회색빛이 된 하늘을 두 마리의 백조가 외로운 나그네의 그리움을 아는 듯 바람을 거스르며 날아가 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시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완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슬픈 심정으로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무능함을 통절히 느꼈다. 이 스승은 언제나 이렇게 그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일 년이 지나자 한혹은 비파의 연주는 거의 완전하게 습득했으나, 시작의 기술은 점점 어렵고 자꾸자꾸 닿을 길 없이 높아만 가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이 년이 지났을 때 젊은이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약혼녀에 대해 간절한 향수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떠나게 해달라고 스승 에게 부탁했다. 스승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자유의 몸이니라.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 디든 갈 수가 없느니라. 다시 돌아와도 좋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상 관없느니라. 모든 것이 그대의 마음 하나에 달렸느니라." 스승이 말 하였다. 한혹은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어느날 아침 먼동이 부옇게 틀 무렵 강가에 서서 반월형 다리 저편에 위치 한 그리던 고향을 건너다 보고 있었다. 조용히 집으로 들어간 한혹 은 침실의 창 너머로 아직도 곤히 주무시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었 다. 집을 나온 그는 약혼녀의 집 곁에 있는 과수원으로 몰래 기어들 어가 배나무 위에 올라갔다. 나무 위에서 건너다 보니 약혼녀가 방 안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한혹은 제 눈으로 본 모습들과 그의 향수어린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영상을 비교하다가 문득 시인 으로서의 천분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리고 시인들의 가슴 깊이에는 현실의 사물 가운데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 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나무를 내려오기가 우습 게 정원에서 도망치듯 달려나와 다리를 건너 고향 마을을 빠져 나와 산중의 그 골짜기로 되돌아왔다. 거기에는 며칠 전과 똑같이 연로하 신 스승이 초막 앞 검소한 돗자리 위에 앉아 비파 줄을 타고 있었 다. 이번에는 그가 인사를 올리는 대신 연로하신 스승께서 가르쳐 주신 예술의 은혜에 대한 두 귀절의 시를 읊었다. 그 시의 내용의 깊이와 아름다운 형식을 느끼며 젊은이의 두 눈에서는 그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시 한혹은 완전한 언어의 스승 곁에 머물게 되었다. 이제 그는 비파를 마음대로 뜯을 줄 알았기 때문에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 수개월이 서풍에 녹는 눈처럼 사라져 갔다. 그 동안 그는 두 차 례에 걸쳐 애 타는 향수에 몸을 태웠던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한밤 중에 몰래 도망쳤으나 그가 골짜기의 마지막 모퉁이를 채 돌기도 전 에 초막의 입구에 걸어 놓은 가야금 위로 스쳐 지난 바람이 낸 소리 가 뒤쫓아와 그를 불러 세웠으므로 저항할 수가 없었다. 또 한번은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자신이 집 정원에 나무를 심고 있는 장면 인데 아내가 옆에 서 있고 아이들이 나무에 포도주와 우유를 부어주 고 있는 꿈이었다. 눈을 떠보니 달빛이 그의 방안을 비치고 있었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 그는 옆자리에서 스승이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 을 보았다. 흰 수염이 가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불현듯 인간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이 온몸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이 노인 때문에 자신의 생활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에게 속아서 자신의 미래를 빼앗 겨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막 노인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였을 때 노인은 두 눈을 떴다. 노인의 얼굴에는 우 아하고도 슬픈 온정의 미소가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이 온정의 미 소가 제자의 가슴 속에서 타는 적개심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아라, 한혹아. 그대는 무엇이든지 그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느니라. 고향에 돌아가 나무를 심든 나를 미워하여 죽 이든 그대 마음대로 하도록 하라. 그것은 그리 대수로운 문제가 아 니니라." 노인은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 어찌 제가 당신을 미워할 수 있겠읍니까?" 한혹은 벅찬 심정 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하늘 그 자체를 미워 하려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읍니까."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스승 곁에 머물면서 가야금 뜯는 것을 배 운 다음 피리를 배웠다. 그리고 그 후에는 스승의 지도 아래 시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비법을 터득해나갔다. 얼핏 보기에 는 다만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이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바람이 수면 을 뒤집어 읊듯이 듣는 사람의 영혼을 파헤쳐 놓는 그런 비법이었 다. 그는 떠오르는 태양이 산등성이를 망설이듯 맴도는 일출을 묘사 했다. 또 물고기가 그림자처럼 물 속으로 도망쳐 갈 때의 그 소리 없는 빠른 동작을, 푸른 새순으로 파릇파릇 몸단장한 수양버들이 춘 풍을 받아 흐느적흐느적 흔들리는 모양을 그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시를 귀담아 들었을 때 그것은 평범한 태양이나 물고기의 희롱이 나 버드나무의 속삭임만이 아니라 하늘과 세계가 한 순간 완전한 음 악이 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소년은 유희를, 청년은 사랑을, 노인은 죽음을 생각했다. 한혹은 자신이 스승 곁에서 몇 해를 머물고 있는지 이젠 기억도 희미하였다. 어느 때는 바로 어제 저녁에 이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 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자신의 과거의 모든 세대와 시간 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형체도 잡을 수 없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홀로 초막 안에서 눈을 떴다. 그가 사방을 둘 러보며 소리쳐 찾아보았지만 스승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가을이 찾아온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낡은 초막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직 제 철도 아닌데 산등성이를 넘어 많 은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갔다. 한혹은 조그마한 비파를 들고 고향땅을 행해 발길을 돌렸다. 여러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혹에게 귀인에게 드리는 예로써 절을 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보이 그의 아버지나 약혼자, 일가천척들 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고 그의 옛집에는 낯선 사람이 살고 있 었다. 저녁이 되자 강가에서 관등놀이가 벌어졌다. 시인 한혹은 저편 어두컴컴한 강기슭의 어떤 고목나무 줄기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리 고 그가 조그마한 비파를 뜯기 시작하자 여인들은 한숨을 쉬며 황홀 한 듯이 애타게 밤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 은 아무 데서도 모습을 볼 수 없는 비파 소리는 생전에 들어본 일이 없노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혹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수없 는 등불의 영상이 흐느적거리는 강을 그쳐 지켜보고 있었다. 물에 비친 그 영상들과 실제의 등불이 구별이 안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도 지금의 축제와 한 젊은이로서 낯선 스승의 말씀을 귀담아 듣던 그때의 축제와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 피리의 꿈 >>> "자아 --"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내게 상아로 된 작은 피리를 넘겨주었다. "이걸 가져 가거라. 그리고 머나먼 나라에서 이걸 불어 사람들을 기쁘게 할 때 이 늙은 아버지를 잊지 말아라. 이제는 너도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무언가 배워야 할 나이다. 네가 다른 일은 하려 들지 않고, 늘 노래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 피리를 만들 게 한 것이다. 다만 언제나 맑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연주해야 한다 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게 그러한 춘분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말 이다." 아버지는 학자였으므로 음악에 대한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들 은 작은 피리를 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아 버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모처럼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피리를 주 머니에 넣고는 작별을 고했다. 내가 살고 있던 마을의 골짜기에 대해서 나는 커다란 농장의 물방 앗간 근처까지 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저편으로 넓은 세상이 시 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드넓은 세상은 내게 매우 즐거운 곳으로 생 각되었다. 이윽고 최초의 휴식을 했을 때 피곤에 지친 꿀벌이 내 소 매에 앉았다. 나는 고향으로 인사를 보내는 심부름꾼으로 삼고자 그 꿀벌을 소매에 살며시 올려놓은 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숲이며 들판이 내가 가는 길 좌우에 계속 이어져 있었다. 맑은 시 냇물은 나의 발걸음에 맞추듯 세차게 흘러 내려갔다. 넓은 세상은 고향과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무와 꽃, 보리 이삭, 개암나무가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그들과 함께 불렀다. 모두가 그런 나의 기분을 잘 이해해주었다. 마치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노래에 나의 꿀벌도 잠이 깨어 천천히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와 붕 붕 날개를 치더니, 깊고 달콤한 환성을 올리며 내 주위를 두어 번 맴돌고 나서 이제껏 걸어왔던 고향쪽 길로 곧장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느 숲에 이르러 한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팔에 바구니를 들고, 금발의 머리에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딜 가십니까?"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추수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점심을 가지고 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와 나란히 걸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세요?" "넓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죠. 아버지가 가라고 하였어요. 모든 사 람들에게 피리를 불어 들려주라고. 그렇지만 난 아직 잘 불지는 못 해요 좀더 배워야지요." "아, 그래요.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할 줄 아나요? 무언가는 할 줄 알아야지요." "특별히 할 줄 아는 것은 없어요.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엔." "어떤 노래죠?" "어떤 노래라뇨? 아침 노래건, 저녁 노래건, 또 나무나 짐승이나 꽃의 노래도 할 수 있어요. 가령 숲속에서 나와 추수를 하는 사람들 한테 도시락을 가지고 가는 소녀에 대한 일도 아름다운 노래로 부를 수 있죠."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불러봐요." "좋아요. 그런데 이름이 뭐지요?" "브리깃테." 그래서 나는 밀짚모자를 쓴 아름다운 브리깃테의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바구니 안에 넣어 가지고 있는 것, 풀이며 꽃이 그녀를 전송 하는 모습, 울타리의 파란 메꽃이 그녀에게 손을 뻗치는 모습, 그밖 에 그녀에 얽힌 여러 가지를 노래했다. 그녀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 고 듣더니 정말 좋은 노래라고 말했다. 내가 배고 고프다고 하자 그 녀는 바구니 안에서 빵 한 덩어리를 꺼내 주었다. 나는 빵을 받아 내어 물면서 계속 걸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걸으면서 먹으면 안돼요. 모든 일은 천천히 해야지." 그래서 우리는 풀밭 위에 앉았 다. 나는 빵을 먹었고, 그녀는 곁에 앉아 햇볕에 그을은 두 손을 무 릎에 울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노래를 불러봐요." 그녀는 내가 먹는 것을 마치자 기다 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무엇에 관한 모래를 할까요?" "떠나간 연인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는 소녀의 노래는 어때요?" "난 그런 것 못 해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거든요. 게다가 그 렇게 슬퍼하면 못써요. 아버지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사람들이 기뻐 할 수 있는 노래만 부르라고 하셨어요. 그 노래 대신 뻐꾸기나 나비 의 노래를 들려주지요." "그런 당신은 사랑에 대한 노래는 아무것도 모르나요?" 그녀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사랑에 대한 노래? 알고 있죠.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 운 거죠." 나는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햇빛이 빨간 양귀비꽃을 사랑하 고 함께 춤추는, 기쁨에 넘치는 모양을 노래했다. 또한 암새가 숫새 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가 막상 숫새가 오자 허둥지둥 도망치며 놀 란 체하는 모습을 노래했다. 또한 다갈색 눈의 소녀와 그곳에 와서 노래를 하고 답례로 빵을 받은 젊은이의 노래를 했다. 젊은이는 이 제 빵은 필요치 않다. 입맞춤을 해주었으면 싶다. 다갈색의 눈을 들 여다보고 싶다라는 노래를 오랫동안 불렀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로 그의 입을 막을 때까지 줄곧 노래했다는 그런 내용의 노래였다. 그러자 브리깃테는 내게로 몸을 굽히고 내 입에 그녀의 입술을 대 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나는 코앞에 보이는 그녀의 다갈색을 띤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나 자신과 흰 들꽃 몇 송 이가 비치고 있었다. "세상은 정말 아름다와요."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말씀 하신 대로야. 자아, 그럼 이젠 그만 당신이 사람들한테 점심 나르는 일을 도와야지." 나는 그녀의 바구니를 들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소 리가 나의 발소리와, 그녀의 명랑함이 나의 명랑함과 조화되어 울려 퍼졌다. 숲은 산으로부터 정답고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고 있었다. 나 는 여지껏 이렇게 즐거운 심정으로 걸은 적이 없었다. 나는 줄곧 힘 차게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나중에는 마음 속이 충만해져서 더이상 노래를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많은 것이 골짜기며 산속에서, 풀이 니 잎이니 개울이니 우거진 숲속에서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 다. 나는 이렇게 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숱한 노래를 - 풀이나 꽃이나 사람이나 구름이나 활엽수의 숲과 소나무의 숲과 모 든 동물의 노래를, 그리고 머나먼 바다나 산이나 별의 노래를 모두 동시에 이해하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이 일시에 내 가슴에 서 울려퍼질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 되고, 새로운 노래 하나 하나 는 새로운 별로 변해 하늘에서 반짝이게 되리라고. 이런 생각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어서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그 때 브리깃테가 걸음을 멈 추며 내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잡았다. "이제 저쪽으로 올라가야 해요." 그녀는 서운한 듯이 말했다. "저 위쪽 밭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로 가실 거죠? 저 와 함께 가실래요?" "아니, 같이 갈 수는 없어요. 나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브리깃테, 빵하고 입맞춤 고마워요. 난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도시락 바구니를 들었다. 다갈색 그림자 속의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내게로 기울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포시 닿 았다. 그녀의 입맞춤은 너무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행복한 나 머지 슬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급히 작별인사를 하고는 허둥 지둥 언덕길을 내려갔다. 소녀는 천천히 산을 올라가더니 너도밤나무 잎 그늘에 멈춰서서 밑을 내려다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모자를 흔들어 신호를 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림처럼 조용하게 너도밤나무 숲 속 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곳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물레방아 곁에는 배 한 척이 물에 떠 있었다. 배 안에는 한 사나이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모자를 벗고 배에 오르자 배는 곧 움직이기 시작해서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는 얼굴을 들고 그늘이 진 잿빛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든 자네 좋을 곳으로."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강을 따라 바다건 큰 도시건, 자네 마음대로 어느 곳이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니까." "모두 당신 거라구요? 그런 당신은 왕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해." 그는 또 말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자넨 시 인 같은데? 그렇다면 뱃길 여행의 노래나 불러보게나!" 나는 은근히 긴장했다. 이 위엄있는 사람이 어쩐지 무서워졌다. 나 는 우리의 배를 운반해주는, 태양이 비치고 바위 기슭에서 소용돌이 치는 강물의 즐거운 여행에 대해서 노래했다. 사나이의 얼굴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내가 노래를 마치자 그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그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강물에 대해, 골짜기를 흘 러 내려가는 강물의 여행에 대해서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내 노래 보다 훨씬 아름답고 힘이 있었으며 나와는 전혀 다른 울림을 내고 있었다. 그가 노래하는 강은 거친 파괴자로서 산 위에서부터 어둡고 사납 게 달려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레방아를 돌리고 다리가 나오 면 이를 거칠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강은 자기가 운반해야 되는 배 를 모두 미워했다. 강은 물에 빠진 사람의 흰 몸을 보면 거친 물살 과 긴 물풀로 통쾌해하며 휘감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목소 리만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울림을 지니고 있어 나는 그만 어리둥절 해졌고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이 친절 하고 현명해보이는 늙은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 것이 사실이 라면, 나의 노래를 모두가 어리석고 하찮은 어린애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처럼 좋지도 밝 지도 않으며, 어둡고 답답하고 심술궂은 것이었다. 숲이 쏴아 하고 소리치는 것은 즐거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못견딜 정도로 괴로워 서였다. 우리가 탄 배는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림자는 점점 길어져 갔다. 나는 다시금 노래를 시작했지만 전처럼 명랑하게 울리지는 않 았다. 나의 목소리는 가늘어졌다. 그때마다 사나이는 세상을 한층 야 릇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고 슬프게 만드는 노 래로 내게 답해왔다. 내 마음은 괴로워졌다. 나는 시골의 풀숲에, 아니면 아름다운 브리 깃테 곁에 남아 있지 않았음을 위로했다.. 차츰 짙어가는 그늘 속에 서 나는 마음을 달래려고 다시금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브리깃테와, 그녀와의 입맞춤을 저녁놀 속에서 노래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키를 잡고 있던 사 나이가 노래를 했다. 그 역시 사랑에 대해서, 입맞춤하는 기쁨에 대 해, 다갈색 눈과 빨갛게 젖은 입술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었다. 어두 워지는 강을 흘러가며 울려퍼지는 괴로운 심정으로 부르는 노래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 노래 속에서는 사랑도 어둡고 불안하고,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은 비밀이 되었다. 인간은 그 비밀을 들추어 내어 곤란과 공경 속에서 망설이고 헤매다 상처받는 것이었다. 그 비밀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괴롭히고 죽이고 있었다.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방랑 생 활을 하며 비참한 불행만을 겪어온 것처럼 피로해지고 슬퍼졌다. 그 사나이에게서 끊임없는 슬픔과 우울의 차가운 흐름이 흘러나와 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삶이 아니라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말씀이군 요?" 나는 마침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슬픔의 왕이여! 제발 죽음의 노래를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키를 잡고 있던 사나이는 죽음의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여지껏 이 세상에서 들어본 일이 전혀 없을 만큼 아름답 게 노래불렀다. 그러나 죽음 역시 가장 아름다운 것도, 최고의 것도 아니었다. 삶과 죽음은 항상 격렬한 사랑의 싸움을 하면서 뒤엉켜 있었다. 그것은 세상 그 자체였고, 모든 일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세상의 뜻이었다. 동시에 거기엔 그 어떤 기쁨이나 아름다움도 흐리 게 하고, 암흑으로 감싸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서 도 기쁨은 더 한층 강하고 아름답게 불타오르고, 사랑은 그 어둠 속 에서도 더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침묵한 채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의지 외에는 그 어떤 의지도 내게는 이미 없었다. 그의 눈길이 강하게 내게 쏠려 있었다. 거기엔 서글픔과 더 불어 다정함이 어려 있었다. 그의 잿빛 눈은 세계의 괴로움과 아름 다음에 넘쳐 있었다. 그는 내게 웃어보였다.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 어 그에게 부탁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주세요! 이런 어둠 속에서는 견딜 수가 없읍니 다. 나는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브리깃테를 다시 볼 수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고향의 아버지 곁으로요." 사나이는 뱃머리에서 일어서서 말없이 어둠 속을 가리켰다. 그러 자 그가 들고 있는 등불 빛이 그의 맑고 엄한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 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는 진지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을 알고 싶은 사람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 하네. 다갈색 눈 의 소녀에게서 자네는 이미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얻었네. 그 러나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녀는 한층 아름다와지 는 걸세. 그러니 어디로건 좋을 대로 가보게. 키를 자네에게 맡길 테 니까!" 나는 몹시 슬펐지만 그의 말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브리깃테와 고향의 일을, 그리고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밝고 몸 가까이에 있었으며 내 것이었는데 이제는 잃어 버리고 만 모든 것을 생각했다. 그런 소중한 기억들을 이제 모두 잊 어버려야 했다. 나는 낯선 사람의 자리로 가서 키를 잡으려 했다. 그 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일어서서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사나이 도 말없이 내 쪽으로 왔다. 서로 몸을 스쳤을 때 그는 내 얼굴을 한 동안 보고는 내게 그의 등불을 넘겨주었다. 키 앞에 앉아 등불을 곁에 놓고 보니 배 안에 나만 홀로 남아 있 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낯선 사나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방랑의 나날도, 브리깃테도, 아버지도, 고향도,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나이를 먹었고, 벌써 오래 전부터 힘없 이 이 밤의 강물을 흘러온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낯선 사나이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식은땀이 흘렀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 나는 물 위로 몸을 내밀고 등불을 들었다. 그러자 검은 수면에서 날카롭고 진지한 잿빛의 눈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세상은 모두 깨달은 노인의 얼굴 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되돌아갈 길은 없었으므로 나는 어둠을 뚫고, 검은 물 위를 그대 로 따라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 우리들의 아름다운 별의 남쪽 지방에 소름끼치는 끔찍한 불행이 일어났다. 무서운 폭풍과 뇌우 그리고 홍수와 함께 지진이 일어나 세 마을과 그 마을의 정원과 들판, 숲이나 나무들을 모조리 집어 삼 키고 만 것이었다. 사람이나 가축들도 많이 죽었다. 그러나 가장 슬 픈 것은 그 지방의 풍습에 따라 사망자를 덮어주고 그 묘지를 아늑 하게 장식하는 데 필요한 꽃이 모조리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것들은 이내 준비가 되어졌다. 무서운 재난의 시기가 지나자 곧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랑의 손길을 찾아 소리높이 외치면서 이웃 마을들로 뛰어다녔다. 온 마을의 모든 탑에서 선창자들이 그 눈물겹 고 감동적인 시구를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옛부터 동정 의 여신에게 보내는 노래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 울림은 누구에게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이웃 마을에서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보 내왔다. 집을 잃은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친척이나 친구나 미지의 사람들에게서 자기 집에 와서 묵으라는 친절한 초대와 위로가 온정 과 더불어 쇄도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수레와 말, 돌과 재목 등이 구제를 위해 여러 곳에서 보내져왔다. 또한 노인이나 부녀자, 아이들 은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의 따뜻한 동정을 받았고, 부상자는 세 심하고 신중한 간호를 받았다. 무너진 집더미 속에서 시체를 찾아내 고 있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무너진 지붕을 새로 올리고 흔들리고 있는 벽을 나무토막으로 받치는 등 조속한 복구를 위한 모든 조처가 취해졌다. 지진이 일어난 이래 공포의 기운은 아직도 공중에 떠돌고 있었고, 죽은 자에게서는 장례를 치를 동안 경건히 침묵하라는 경고가 나오 고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는 당당한 확신에 넘쳐 있었기 때문에 차츰 모든 사람의 얼굴이나 목소리에서는 늠름한 태 도와 부드러운 축제 기분이 느껴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불안과 침 묵 속에서 일을 했지만 복구를 위한 구원의 손길들이 속속 도착함에 따라 여기저기서 명랑한 목소리로 공동의 일을 위해 노래하는 소리 가 낮게 들려오게 되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여러 노래 가운 데서도 두드러진 것은 오래된 두 가지 민요의 귀절이었다. 그 하나 는 "재난을 당한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자는 행복하도다. 구 원을 받은 자의 마음은 마른 뜰이 최초의 빗물을 빨아들이듯이 자비 를 받아들이고 감사의 꽃으로 대답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신의 웃음은 서로 도울 때 흘러나오느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꽃이 모자랐다. 처음에 발견된 시체는 고래도 황 폐한 뜰에서 모은 꽃이나 나뭇가지로 장식하였다. 이어 이웃 고장에 서도 쓸 만한 꽃은 모두 가져왔다. 그 어느 곳에도 비길 수 없을 만 큼 크고 아름다운 꽃밭을 가지고 있던 세 마을이 가장 꽃이 만발한 시기에 지진의 피해를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불행이었다. 그 곳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수선화나 사프란 꽃을 구경하려고 찾 아오곤 했다. 그 어느 곳을 가보아도 그렇게 많은, 또 손질이 잘 된 아름다운 꽃은 없었다. 그 꽃이 이제 모조리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 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망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을 지키 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도를 모르고 있었다. 이 지방에는 죽은 사람이나 가축은 모두 계절의 꽃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목숨을 읽은 것이 갑작스럽고 비참하면 그럴 수록 매장은 더 한층 성대히 거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마을의 가장 존경받는 장로가 구원자의 최초의 한 사람으로서 마차를 타고 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많은 질문이나 호소를 받게 되어 미처 신 중함과 명랑함을 지키기가 힘이 들었다. 그는 가슴을 두 손으로 단 단히 누르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맑고 상냥했으며 목소리는 분명하 고 정중했다. 흰 수염 밑의 입술은 단 한 순간도 현자와 조언자다운 조용하고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러분, 우리를 엄습한 이 불행은 신들이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하신 결과입니다. 이 고장에서 파괴된 것은 우리가 이내 부흥시켜 이웃에게 돌려줄 수가 있을 겁니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 히 여러분이 자기 일을 제쳐놓고 이웃을 도우려 하는 모습을 보고 신들에게 감사드리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들 죽은 우리 형제들의 장 례를 아름답게 살아 있는 한 이들 피로한 순례자의 단 한 사람이라 도 격식을 갖춘 꽃의 공물 없이 매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여러 분의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저희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이렇게 외쳤다.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 매장할 수 없는 시신들을 모두 저기 높은 산중턱의 커다란 여름 신전으로 옮겨야 하겠읍니다. 그곳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어요. 그곳이라면 안전할 것이고, 꽃이 준비될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계절에 그토록 많은 꽃을 수중에 넣 을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읍 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의 왕뿐이지요. 그러니 우리들 중에서 한 사람을 왕께 보내 원조를 부탁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읍니 다." 장로는 어버이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렇소, 그렇소, 왕에게 로!" "그 말이 맞소." 장로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모두들 그의 흰 수염 밑에서 아름 다운 미소가 빛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장로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그러면 누구 를 왕에게 보내면 될까요? 그 사람은 젊고 튼튼해야 합니다. 갈 길 이 워낙 멀고 험하니까요. 우리는 그 사람한테 제일 좋은 말을 주어 야 합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고, 상냥하고, 눈에는 풍요로 운 빛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말 이지요.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눈빛은 웅변이어야 합니 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을의 제일 아름다운 아이를 보내는 일일 테지 만, 어린 아이가 어찌 그런 힘든 여행을 할 수가 있겠소? 여러분, 내 게 힘을 주시요. 이 심부름을 맡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누군가 그럴 만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서슴없이 내게 말해보시오." 그가 거듭 묻자, 여러 사람 속에서 한 소년이 나왔다. 열 여섯 살 쯤 되어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장 로에게 인사를 했다. 장로는 그를 보았다. 그 순간 그야말로 사자로서 적당한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자가 되겠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 은 사람 중에서 네가 나선 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러자 소년은 머리를 들고 말했다. "가겠다는 분이 없다면 저를 보내주십시요."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그를 보내십시오, 장로님. 우리는 그를 알고 있읍니다. 이 마을 태생이에요. 그의 꽃밭도 지진으로 엉망이 됐읍니다. 우리 마을에선 제일 아름다운 화원이었지요." 노인은 친근하게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꽃을 읽은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느냐?"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저 는 절친한 친구와 한 마리의 젊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말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이번 지진으로 모두 잃어버렸읍니다. 지금은 회 당에 누워 있어요. 그들의 장례를 치르려면 꽃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는 두 손을 소년의 머리 위에 얹고 축복을 해주었다. 그를 위 해 곧 가장 좋은 말이 한 필 준비되었다. 그는 즉시 말에 올라타 말 의 목을 몇 번 두드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작별인사를 한 뒤 마을을 달려나가 황폐해진 들판을 가로질러갔다. 소년은 온종일 말 을 달렸다. 머나먼 곳의 왕에게로 속히 달려가고자 산길을 택했다. 저녁 나절이 되어 점점 어두워지자 그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숲과 바위 사이를 지나는 험준한 산길을 힘들여 올라갔다. 그때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크고 검은 새가 그의 앞을 가로질러 날 아갔다. 그 뒤를 따라가니, 새는 열려 있는 작은 신전의 지붕 위에 앉았다. 젊은이는 말을 숲속에 놓아두고 나무의 원주 사이를 지나 간소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제물을 바치는 한 개의 바 위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가 사는 지압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돌이었다. 그것은 이 소년이 전혀 본 일이 없는 이상한 우상의 상징 으로 사나운 새에게 심장을 파먹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 우상에게 공손히 예배를 하고 나서 산기슭에서 따러 옷에 꽂고 온 파란 초롱꽃을 바쳤다. 그리고는 한 구석에 누워 너무나 피 로에 지쳐 잠을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느 때 같으면 자려고 생각지 않아도 눕기만 하면 잠이 왔는데 이 밤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초롱꽃에서인지 아니면 그 검은 돌에서인지 혹은 다른 그 무엇에선지 묘하게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우상의 기분나쁜 상징이 어두운 신전 속에서 유령처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지붕 위에 앉은 이 상한 새가 이따금 거대한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숲은 마치 폭풍을 만난 것처럼 소리내어 흔들렸다. 소년은 한밤중에 일어나 신전에서 나와 그 새를 올려다보았다. 새 는 날개를 퍼덕거리고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왜 여태 잠을 자지 않았지?"하고 새가 거만하게 물어왔다. "모르겠어. 아마 내가 겪은 슬픔 때문일 테지." 소년은 대답했다. "대체 어떤 슬픔을 겪었는데?" "내 친구와 사랑하는 말이 모두 죽었어." "죽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야." 새는 비웃듯이 말했다. "아니야, 큰 새야. 죽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야. 죽음은 이 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결코 그것을 슬퍼하는 게 아냐. 내가 슬 픈 것은 꽃이 하나도 없어서 친구와 말을 매장할 수 없기 때문이 야." "그보다 더 나쁜 일도 있어." 새가 말했다. 새는 기분이 언짢은 듯 날개를 퍼덕거렸다. "아니야, 새야. 그보다 나쁜 일은 분명히 없어. 꽃을 받지 못하고 매장되는 자는 소망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거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면서 꽃의 축제를 행하지 않으면 꿈속에서 죽은 사람의 환영을 보게 된단 말이야." 새는 구부러진 주둥이로 앙칼지게 외쳐댔다. "젊은 친구, 너는 그 보다 더 슬픈 일을 맛본 일이 없기 때문에 슬픔이라는 것이 진정 어 떤 것인지를 모르는 거야. 너는 큰 죄악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 나? 증오와 살인, 그리고 질투 따위에 대해서도." 소년은 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군, 새야, 옛날 이야기엔 그런 것이 있어, 그 렇지만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야. 혹시 아득한 옛날, 아직 꽃도 없고, 훌륭한 신들도 없었을 무렵엔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몰 라.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아." 새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가슴을 내밀고 소년에 게 말했다. "그래서 너는 왕에게로 가는 모양이지? 길을 안내해줄 까?" "아니,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그래 데려다주겠다면 부탁하 겠어." 소년은 반가와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큰 새는 소리없이 땅으로 내려앉아 조용히 날개를 펼치더 니, 말은 여기에 남겨두고 자기와 함께 왕에게로 가자고 했다. "눈을 감아라!" 새는 이렇게 명령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은 암흑의 하 늘을 꿰뚫고 부엉이가 나는 것처럼 소리없이 날아갔다. 다만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울려왔다. 그들은 밤새도록 하 늘을 날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새는 나는 것을 멈추고 소리질렀다. "이제 눈을 떠도 돼!" 소년은 눈을 떴다. 그러자 자기는 숲의 끝에 서 있었고, 저 너머에 는 밝아오는 새벽 속에 빛나는 평원이 누워 있었다. 그 평원의 끝에 서 오는 밝은 빛에 그는 눈이 부셨다. "이 숲 가에서 다시 만나자." 새는 이렇게 외치더니 화살처럼 날아올라 순식간에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숲에서 나와 넓은 평원 속으로 걸어가고 있으려니 소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모습이 온통 변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꿈인 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초원이나 나무들은 고향의 모 습과 비슷했고, 태양은 빛나고, 바람은 다투어 피어난 꽃들을 어루만 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가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집도 뜰도 없었다. 소년의 고향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지진이 지나간 것 같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자취에 부러진 나뭇가지, 쓰러진 나무, 부서진 울타리에 마구 흩어진 농기구 따위가 땅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갑 자기 밭 한가운데에 죽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뛰었다. 그 사람은 매장이 안 된 채 놓여 있어 절반은 썩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보자 심한 공포와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광경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자는 얼굴조차 가리워져 있지 않아 새가 파먹고 썩어들어가 형상이 거의 뭉개져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 모습을 외면한 채 녹색의 나뭇가지와 몇 송이의 꽃을 꺾 어 죽은 사람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드는 썩은 냄새가 평 원 전체에 은근하고 끈끈하게 떠돌고 있었다. 또 다른 시체가 풀 속 에 누워 있었다. 불길한 까마귀가 그 둘레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리고 또 머리가 없는 말이며 사람과 동물의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모두가 돌보는 사람없이 밝은 햇볕 아래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꽃축제나 매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곤 없는 듯했다. 이는 뜻밖의 재 난으로 이 지방 사람이 모두 죽어버린 탓 인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그는 꽃을 꺾어 얼굴을 가려주는 일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서움으로 눈을 절반쯤 감고 얼 었다. 사방에서 썩은 살의 악취와 피냄새가 풍겨왔다. 수많은 무너진 집더미와 시체의 더미 속에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함과 고뇌 의 물결이 차츰 심하게 밀려왔다. 소년은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것 이라고, 고향의 죽은 사람들에게 아직 꽃 축제도 매장도 거행시키지 않고 있어서 신들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어젯밤 신전 지붕 위에서 검은 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엔 더 나쁜 일도 있어." 이렇게 말하던 새의 날카로운 목소 리가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새가 자신을 다 른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현실 속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 렸다. 그는 다른 별로, 이상한 별로 온 것이라고 느꼈다. 어린 시절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듣던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때와 같은 느낌을 이제 다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의 느낌은 소름이 오 싹 끼치는 두려움이었으나, 또 다른 즐거운 위안이 있었다. 그도 그 럴 것이 그것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 있 는 모든 것은 그 무시무시한 옛날 이야기가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잔학함과 시체와 썩은 살고기를 먹는 새 등, 그야말로 세계 전체가 뜻도 질서도 없이 야릇한 법칙에 따르 고 있는 기괴한 이야기 속인 것 같았다. 아름다움과 선함 대신에 노 상 사악함과 어리석음과 추함만이 따르는 미치광이 같은 법칙이 작 용하는 세계인 것 같았다. 그때 한 사람이 풀밭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농부 같기도 했고 하인 같기도 했다. 소년은 급히 그에게로 뛰어가며 소리쳐 불 렀다. 그러나 곁에 가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 소년은 깜짝 놀랐다. 그 농부의 얼굴은 너무나 추하게 생겨 도무지 이 세상 사람같이 보 이지 않았다. 소년의 마음은 안됐다는 생각으로 슬퍼졌다. 그 사나이 는 자기에 대한 생각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온 세상에 허위와 추악함과 악이 행해지고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처럼, 또 끊 임없이 몸부림치는 악몽 속에 살고 있는 인간처럼 보였다. 그의 눈 이나 얼굴, 태도, 그 어디에도 기쁨이나 선량함, 감사나 신뢰 등은 손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지극히 단순한 덕성조차도 이 불행 한 인간에게는 모조리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년은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불행의 낙인이 찍힌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은 상냥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형제처럼 인사를하 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추하게 생긴 사나이는 굳어버린 듯 이 우뚝 멈춰서서 크고 슬픔이 담긴 시선으로 수상쩍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처럼 거칠고 귀에 거 슬렸으나 소년의 눈길 속에 서려 있는 명랑함과 순진한 신뢰를 거역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소년의 시선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고 주름 이 많은 그의 얼굴에 미소라고도, 이를 드러낸 웃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추하기는 했지만 지하의 가장 밑바닥에서 소생되어 갓 나타난 영혼의 최초의 미소처럼 상냥했으며 경이로움에 넘쳐 있었다. "내게 무슨 볼 일이 있나?" 그 사람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고향의 풍습에 따라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도움 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부디 일러주세요." 그 농부가 말없이 놀라면서 어리둥절한 미소만 띄우고 있자 소년 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고장의 이 소름끼치는 무서운 모양은 어 찌된 일인가요?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손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농부에게는 소년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영문을 모르 겠다는 듯이 멍하니 있다가 소년이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을 때야 입 열 열었다. "너는 이런 것을 본 일이 없는 모양이구나. 이것은 전쟁이야. 이게 바로 전쟁의 모습이라고." 그는 뭉개진 집더미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에 내 집이 있었어." 낯선 소년이 진심으로 안됐다는 눈빛으로 그의 탁한 눈을 들여다 보자 농부는 고개를 숙이면서 땅을 내려다보았다. "왕은 안 계신가요?" 소년은 질문을 계속했다. 농부가 고개를 끄 덕이자 그는 다시 물었다. "왕은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농부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멀리 막사가 보였다. 그래서 소년은 농부의 이마에 손을 얹어 작별을 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농부는 두 손으로 이마를 만져보고 무거운 머리를 우울한 듯이 흔들며 한동 안 우두커니 선 채 낯선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황량한 흙더미를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막사에 닿았다. 그곳에는 무장을 갖춘 사람들이 사방에 서 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거 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천막 사이를 걸어갔다. 그때 막사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막사를 발견했다. 그것이 왕의 막 사인 듯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의 간소한 낮은 침대 위에 왕이 걸터앉아 있었다. 곁에는 망토가 벗겨져 놓여 있었고, 안쪽 어두운 그늘에는 시종이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왕은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 다. 그 얼굴은 아름답지만 슬퍼보였다. 한 움큼의 백발이 햇볕에 그 을린 아마에 늘어져 있었다. 칼은 왕의 발 옆에 놓여 있었다. 소년은 자기 나라의 왕에게 하듯이 공손하게 경례를 하고는 팔짱 을 가슴에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왕이 그를 보았다. "너는 누구냐?" 왕은 근엄하게 묻고 두꺼운 눈썹을 찌푸렸다. 그 의 눈길은 낯선 소년의, 맑고 밝은 얼굴에 쏠려 있었다. 소년은 신뢰 에 가득 찬 다정한 눈길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목소리도 부 드러워졌다. "그대를 한 번 본 일이 있다." 왕은 생각에 잠기면서 말 했다. "아니면 내가 어렸을 때 알고 있던 그 누군가를 닮은 것인가?" "저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입니다." 소년은 말했다. "그럼 꿈 속에서 보았던 얼굴과 닮은 모양이군." 왕은 낮은 소리 로 중얼거렸다. "너를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생각나는구나. 그래, 여기에 찾아온 영문을 말해보아라." "커다란 새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읍니다. 저희 나라에는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자들을 매장하려고 해도 꽃이 없습니다." "꽃이 없다고!" 왕은 물었다. "네, 꽃이라고는 하나도 없읍니다. 죽은 자를 매장할 때에 꽃축제 를 행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이겠읍니까? 죽은 사람은 화려 하고 즐겁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건데요." 소년은 문득 조금 전에 본 그 무서운 싸움터에는 아직도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그 얼마나 많이 누워 있는가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 다. 왕은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저희 왕에게 많은 꽃을 부탁드리려고 가는 길이었읍니다." 소년은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산 뒤 신전으로 가자 큰 새가 와서 저를 왕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하고 공중을 날아 당신에게로 데리고 왔읍니다. 아아, 왕이여. 그 새가 지붕에 앉아 있었던 곳은 제가 모 르는 신의 신전이었읍니다. 그 신은 묘한 상징으로 돌 위에 얹혀져 있더군요. 그것은 심장의 모양이었는데 그 심장을 사나운 새가 쪼고 있었읍니다. 그날 밤 그 큰 새와 저는 얘기를 나누었지요. 이제서야 간신히 그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새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 씬 많은 슬픔이나 나쁜 일이 있다고 말했읍니다. 저는 커다란 들판 을 넘어왔읍니다. 그리고 끝없는 슬픔과 불행을 보았읍니다. 아아, 그것은 우리의 가장 무서운 옛날 이야기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슬픔과 불행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당신 곁으로 왔읍니다. 왕이시여, 제가 무언가 도움이 돼 드릴 만한 것은 없겠읍니까?" 조심스럽게 소년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 러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슬픔 때문에 아주 엄숙하고 고통스럽게 굳어져 있어서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고맙군. 나를 위해서 그대가 할 일은 없다. 그대는 내게 어머니를 생각나게 해주었어. 그것만으로도 고맙구나." 왕은 말했다. 소년은 왕이 웃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다. "몹시 슬퍼하고 계시는데, 그건 전쟁 탓인가요?" "그렇단다." 왕은 대답했다. 깊이 고민하고 있는 중에도 높은 기풍이 느껴지는 왕에 대해 예의 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년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별에서는 어째서 그런 전쟁을 하나요?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대 체 누구에게 죄가 있읍니까? 당신 자신에게 죄가 있나요?" 왕은 한동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소년의 무례한 질문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어두운 눈길을 타국 소년의 밝고 사심없는 눈길에 언제까지나 반영시켜 둘 수는 없었다. "너는 아직 어리다." 왕은 말했다. "이것은 너로선 아직 모르는 일 일 것이다. 전쟁은 아무의 죄도 아니다. 전쟁은 폭풍이나 번개처럼 스스로 찾아오니까.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도 전쟁의 장 본인이 아니라 그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면 어째서 당신들은 그렇게 어이없이 죽는가요? 저희 고양에 서는 죽음을 그렇게 두렵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기뻐하 는 사람도 많이 있지요. 이 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소년 이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인도 결코 드문 일은 아니다." 하고 왕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걸 가장 무거운 범죄로 여기고 있지. 그러나 전쟁 때만은 그것이 허용되고 있다. 전쟁터에서는 어느 누구도 미움이나 질투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단체에서 요구하는 짓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 리 두려움없이 죽길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죽은 자의 얼굴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그들은 괴로워하면서 하는 수 없이 마지 못해 죽는 것이다." 소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 별에서 사람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 활의 비참함에 놀랐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으나 이 어둡고 무서운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이해하려는 충분한 의지도 자기에게는 없다고 느꼈다. 이 별에 있는 사람들은 비열한 질서에 매여 있거나 아직 광명의 신을 가지지 못하고 미신에 지배되고 있거나 한 것 같 았다. 이 별에서는 모든 것이 불운과 과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 같았다. 왕에게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보고 대답이나 고백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쓰디쓴 굴욕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안스럽고 잔인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죽음에 대한 어두운 공포 속에 살면서 서로 대 량살인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는 그들과, 농부의 얼굴처럼 천하고 거 친 표정을 짓고 왕의 얼굴처럼 심각하고 무서운 슬픔의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이 소년에게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묘하게 한 심스럽고 부끄러워질 정도로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의문만은 누를 수가 없었다. 이곳의 가엾은 사람들이 남겨진 자들이고, 평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뒤늦게 온 별 의 말세의 자손이었다. 하더라도, 또한 이들의 생활이 상처투성이로 경련하듯이 지나가고, 자포자기한 살해로 끝날지라도 그들의 시체를 싸움터에 버리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짐승이나 새에게 먹힌다고 할 지라도 - 그런 일이 무서운 몇 가지 옛날 이야기에 있었다. - 미래 의 예감, 신들의 꿈, 영혼의 싹 같은 것이 그들 마음 한구석에 존재 할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아름답지 못한 세 계는 온통 잘못된 것이거나 무의미한 세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 아닌 가. "죄송합니다만 왕이시여." 소년은 아첨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이상한 나라를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여쭤보는 것을 허락 해주십시오." "서슴없이 물어보라." 왕은 쾌히 승낙했다. 왕은 이 다른 별에서 온 소년을 상대하면서 매우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민감하고 성숙하며 미 처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넓은 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이면서 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히 진지하게 상대할 만한 대상이 아닌 그저 적당히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 어린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낯선 나라의 왕이시여." 소년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만나 뵙고 저는 슬퍼졌읍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다른 별에서 왔읍니 다. 신전 지붕 위에서 큰 새가 말한 대로입니다. 당신네 나라에는 미 처 제가 생각조차 못한 숱한 비참함이 있더군요. 당신네들의 생활은 제겐 악몽같이 생각됩니다. 당신들이 신들에게 지배되고 있는지, 악 마에게 지배되고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읍니다. 왕이시여, 저 의 나라에도 한때는 전쟁이며 살인이며 절망이 있었다는 옛날 이야 기가 있읍니다. 오래 전부터 거의 없어진 그런 무서운 옛날 이야기 를 책에서 읽노라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읍니다. 그런 데 저는 오늘 그런 모든 것이 현실임을 알았읍니다. 또한 제가 무서 운 옛날 이야기로만 알았던 것을 당신과 당신의 신하들이 행하고 있 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올바른 짓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음 속으론 스스로 느끼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밝고 명랑한 신들이나, 분별있는 현명한 지도자나 영도자에 대한 동정을 품고 있진 않나요? 모든 사람이 바라지 않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기 를 바라는,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생활을, 인간이 서로 오직 명랑함과 동정으로 사귀는 그런 아름다운 생활을, 당신네들이 잠자 고 있는 사이에 꿈꾸는 일이 한 번도 없나요? 세계는 하나의 전체이 고, 전체를 예감하고 숭배하고 사랑하면서 이것에 봉사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이고 구원이라는 생각을 품어보신 일은 한 번도 없읍니까? 저희 나라에서 음악, 예배, 행복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에 대해 당 신들은 전혀 모르시나요?" 왕은 이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 을 때, 그의 표정은 달라져 있었고 어렴풋한 미소에 싸여 있었다. 눈 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아름다운 소년아." 왕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린애인지, 현자인 지, 아니면 신인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나는 네가 말한 모 든 것을 알고 있고,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들도 역시 행복이나 자유나 신들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다. 우리도 옛 현자의 전설을 가지고 있단다. 그 현자는 세계의 통일을 조화로운 우주의 첫 단계로 말했다는 거야. 이 대답으로 만족하겠느냐? 너는 피안에서 온 성자인지도 몰라. 신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너의 마음 속에 있는 행복이나 힘이나 의지가 우리 마음 속에 예감이나 반영이 나 나아가서 그림자로서 살아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단다." 말을 마치자 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왕의 얼굴에는 새벽녘 미명에 비추어진 것처럼 그늘없는 밝은 미소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아, 이제 가거라." 왕은 소년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전 쟁을 하고, 살인하는 것을 내버려두거라! 그러나 덕분으로 나는 잊었 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런 감상은 그것으로 족하다. 귀여운 소년아, 이제 가거라.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피 해라! 피가 흐르고 거리 거리가 불탈 때 나는 너를 생각하마. 세계가 하나의 전체이고, 우리의 어리석음이나 노여움, 야만스러움도 우리를 그것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잘 가라. 너 희들의 별에게도 안부를 전해다오. 새가 쪼고 있는 심장을 상징으로 하는 그 신에게도 안부를 부탁한다. 나는 그 심장도 새도 잘 알고 있지 먼 곳에서 온 아름다운 벗이여. 기억해다오. 네가 친구를, 전쟁 을 하고 있는 가엾은 왕을 생각할 때에는 침대에 걸터 앉아 슬픔에 잠겨 있던 왕이 아니라.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두 손을 피로 물들 이고 웃음짓고 있던 왕으로 생각해다오!" 왕은 잠들어 있는 하인을 깨우지 않고, 친절하게도 손수 천막을 제쳐 이국의 소년을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소년이 새로운 생각에 잠기면서 평원을 걷고 있으려니, 지평선 너 머 저녁 노을을 받고 있는 큰 거리가 불길에 싸여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수많은 시체를 넘으며 앞으로 나갔다. 마침내 주위는 어두어지 고, 숲으로 덮인 산록에 닿게 되었다. 그러자 재빨리 커다란 새가 구름 사이에서 내려와 그를 날개에 태 웠다. 그들은 부엉이가 나는 듯 소리도 없이 어둠을 뚫고 훨훨 날아 갔다. 소년이 편치 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산속의 작은 신전 안 에 누워 있었다. 신전 앞 이슬에 젖은 풀숲에서 그의 말이 아침 햇 살을 받으며 울고 있었다. 소년은 큰 새에 대한 것도, 다른 별로 간 여행에 대한 것도, 왕에 대한 것도 그리고 전쟁에 대한 것도 벌써 잊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 다만 하나의 그림자로 남아 있 을 뿐이었다. 그것은 작은 가시처럼 숨겨진 고통이었으며 안타까운 동정의 고통이었다. 그것은 마침내 사랑을 나타내고, 그 기쁨을 나누 고, 그 미소를 보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까 지 꿈속에서 우리를 늘 안타깝게 만드는 채워지지 않는 작은 소망과 도 같은 것이었다. 소년은 말을 타고 종일 달려 마침내 그가 본래 찾아가려 했던 왕 에게 이르렀다.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왕은 그가 알맞은 사자임을 즉시 알게 되었다. 왕은 그의 이마를 자비롭게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눈이 내 가슴에 말을 했느니라. 내 가슴은 벌써 좋다 고 승낙을 했다. 너의 소망은 내가 듣기도 전에 이루어졌구나." 소년은 즉시 온 나라의 꽃을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 는 왕의 허가장을 받았다. 안내인과 하인들이 말이며 수레를 가져와 서 그들 도와주었다. 소년은 산을 돌아다니며 꽃을 수레에 가득 싣 고, 며칠 후 평탄한 국도를 지나 자기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수레 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수레마다 뜰이나 북국에 있는 온 실에서 따낸 가장 아름다움 꽃들이 실려 있었다. 시체에게 꽃다발을 바치고, 무덤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풍습에 따라 죽은 사람을 기념 하기 위한 꽃나무를 심는 데에도 충분한 꽃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죽은 친구와 말을 그 꽃으로 장식하고, 무덤에 두 그루의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어 그들을 추모하고는 조용히 추억 속에 잠겼다. 이리하여 자신의 마음에 흡족할 만큼 의무를 잘 수행하고 나자 소 년에게는 그날 밤의 다른 별로의 여행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 작했다. 그는 이웃 사람들에게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겨 지내고 싶다 고 말하고 기념으로 심은 나무 밑에 온종일 앉아 다른 별에서 본 광 경을 기억 속에 되살려내었다. 그 후 어느 날 그는 장로를 찾아가서 혼자만의 면담을 요청하고는 그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장로는 그의 이야기를 심각하 게 귀 기울여 듣고 있더니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때 그것을 분명 눈으로 봤단 말이지? 혹시 꿈은 아니었느냐?" "저로서는 알 수가 없읍니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설령 그것이 제 오관으로 실제로 느끼지 못한 일이라 하더 라도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의 그림자가 제 마음 속에 남아 있읍니다. 행복한 생활 속에서도 그 별에서 부는 찬바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니 장로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장로는 한동안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내일 다시 산 속으로 가서 신정을 발견했던 곳을 찾아가거라. 그 신의 상징은 아무래도 묘하구 나. 나는 여지껏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다른 별의 신인지도 모르지. 또는 그 신전과 신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우리에게도 무기 나 공포, 죽음의 불안이 존재하고 있었다던 먼 옛날의 우리 조상들 의 이야기가 비롯된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신전으로 다시 가 서 꽃과 벌꿀과 노래를 바치도록 해라." 소년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장로의 말에 따랐다. 그는 초여름 첫 꿀벌 축제 때에 언제나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꿀을 넣은 그릇 과 비파를 준비했다. 그는 산 속에서 그때 파란 초롱꽃을 딴 장소를 찾아냈다. 숲속의 험준한 바위길도 찾아냈다. 불과 며칠 전에 말을 끌고 올라간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전이 있었던 자리도, 신전도, 신전에 놓여져 있던 검은 돌도, 나무로 된 둥근 기둥도, 지붕 위의 큰 새도 다시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 다음 날도. 그가 설 명하는 그런 신전을 아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추억의 성당을 지 나갈 때 그는 안으로 들어가 벌꿀을 바치고 비파를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는 그리운 추억의 영혼에게 그의 꿈과 신전의 새, 가엾은 농부와 싸움터의 시체, 특히 진영 막사 안의 왕을 보살펴달라고 부 탁했다. 그런 다음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침실에 세 계 통일의 상징을 걸고는 깊이 잠들어 이 며칠 사이의 경험의 피로 함을 달랬다. 그 이튿날 아침부터 그는 밭으로 나가 노래를 하면서 지진의 복구 작업을 마무리하며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이웃사람들을 돕기 시작했 다. <<< 고난의 길 >>> 나는 좁은 골짜기 입구의 어두운 바위문 곁에 서서 망설이다가 갑 자기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녹색의 상쾌한 세계 위로 태양이 빛나고, 초원에는 암갈색 비슷한 풀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늑함과 상쾌 함이 있었다. 따사함과 알맞은 쾌적함이 있었다. 향기로운 내음이 넘 치는 영혼과 빛으로 가득 찬 산벌의 날개소리처럼 깊고 만족스러운 산들바람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런 모든 것들을 버리고 산 속으 로 올라가려 하다니, 나는 필경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안내인은 가만히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상쾌한 목욕물에서 마지 못해 나오듯이 기분좋은 경치에서 하는 수 없이 눈길을 돌렸다. 그 러나 좁은 골짜기 햇살이 닿지 않는 암흑 속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 다. 검은 한 줄기 개울물이 바위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빛 바랜 풀이 작은 묶음을 이루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 다. 개울물 밑바닥에는 온갖 빛깔의 물에 씻겨내린 암석이 전에는 싱싱했을 생물의 화석처럼 완연히 바래져 누워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나는 안내인에게 말했다. 그는 대범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서늘하고 상 쾌한 바위였다. 바위문에서 돌처럼 차가운 음산한 공기가 물줄기처 럼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이런 길을 가다니! 이런 불쾌한 바위문을 지나가야 하다니. 이렇게 차가운 시냇물을 건너서 좁고 험한 어둠 속을 기어 올라가야 하다니, 정말 싫다! "길이 무척 험해보이는군요."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주저와 후회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되돌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내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렇다, 대체 안 될 까닭이 무엇인가? 우리가 떠나온 그곳이 어두운 동굴 속보다 천 배나 아름답지 않았는가? 그 곳에서는 생활이 보다 밝고 따사롭고 기분좋게 흐르고 있지 않았던 가? 그리고 나는 약간의 행복과 햇살을 막아주는 작은 그늘과 푸른 하늘과 꽃으로 가득 찬 자그마한 뜰만 가지면 만족하는 소박한 욕심 을 지닌 인간, 덧없는 생명의 순진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다. 나는 영웅이나 순교자의 역 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골짜기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 다면 평생 만족할 작정이었다. 나는 어느새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추우신 모양이군요?" 안내인은 이렇게 말했다. "걷는 편이 훨씬 낫지요." 그리고 그는 일어서서 잠시 기지개를 켜더니 웃으면서 나를 바라 보았다. 그 미소에는 비웃음도 동정도 엄격함도 보살핌도 없었다. 거 기에는 오직 이해와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당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고 있지요. 어제와 그저께 말한 당신의 큰소리를 나는 결코 두려워하고 있지 않 아요. 지금 당신의 넋의 겁에 질린 절망적인 토기뜀도, 저쪽의 아늑 한 햇살로 보내고 있는 추파도 나는 모조리 알고 있다오. 당신이 그 렇게 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오.' 안내인은 이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어두운 바위 골짜 기 안으로 첫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 면서도 사랑했다.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 목 위의 도끼날을 미워하 면서도 사랑하듯이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것을 아는 듯 한 지식과 안내인의 신분과 냉정함과 그리고 인간적인 약함이 없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를 옳다고 여기고, 시인하고, 그와 동류가 되어 그를 따르려 하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그는 벌써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다. 돌 위를, 검은 샘물을 건 너, 그리고 처음 나타난 바위 모서리를 돌아 바야흐로 나의 시야에 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불안에 가득 차서 소리질렀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이 가공스러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구요!" 나는 다시 외쳤다. "나는 갈 수가 없어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어요." 안내인은 멈춰서서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비난은 담겨져 있 지 않았으나 그 무서운 이해와 견디기 힘든 눈빛과 꿰뚫어보는 통찰 과 예감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되돌아가는 편이 좋단 말인가요?" 그는 물었다. 그가 마지막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나는 벌써 내 가 반감으로 가득 차서 아니라고 할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마음 속의 낡은 것, 익 숙해진 것, 사랑한 것, 잊었던 것이 모조리 절망적으로 외치는 것이 었다. '그렇다고 말하라. 그렇다고 말해.' 온 세상과 고향이 저울의 추처럼 무겁게 나의 발에 매달려왔다. 그때 안내인이 손을 들어 뒤쪽 골짜기를 가리켰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리운 그 고장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내가 볼 수 있는 것 중 의 가장 고통스러운 광경이 보였다. 그리운 골짜기와 평야는 피로한 태양 아래 빛이 바래 얼빠진 것처럼 누워 있었다. 숱한 빛깔이 야유 하듯 떠들썩한 소리를 냈다. 그림자는 희미하고 검었으며, 이상하게 도 힘을 잃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서 심장이 잘리워져 나간 듯 매 력도 향기도 없었다. 모든 것에서 이미 아득한 옛날에 구역질이 날 만큼 잔뜩 먹어본 것 같은 냄새와 맛이 났다. 아아, 나는 그 얼마나 이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었는가! 내가 사랑 하는 상쾌한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그 축축한 수분과 정신 을 흘러나가게 하고, 향기를 불순하게 하고, 색채를 바래게 하는 안 내인의 그 가공할 능력을! 아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제는 아직 포 도주였던 것이 오늘은 시큼한 초로 변해 있음을. 그리고 그 초는 결 코 다시는 포도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두 번 다시는. 나는 슬픔에 잠긴 채 말없이 안내인을 따라갔다. 그는 역시 옳았 다. 여느 때처럼, 지금도 좋다. 그가 내 곁에,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주기만 하면 좋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막상 중요한 고비 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어 나를 외토리로, 그의 변신이기도 한 낯선 목소리만을 내 가슴 속에 남겨놓고 나를 외토리로 만들지만 않으면 좋은 것이다. 나는 잠자코 있었으나 마음은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제발 나를 떼어놓지 말아주시오. 난 따라갈 테니까!' 냇물 속의 돌은 기분나쁘게 뜨뜻미지근했다. 발바닥에서 미끄러지 는 물 속의 자질구레한 돌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은 나 를 무섭도록 피로하게 만들었고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다. 게다가 냇 물을 따라 뻗어 있는 길이 갑자기 오르막 언덕이 되고 있었다. 어두 운 암벽은 더 한층 좁아져 심술궂게 다가섰다. 그 모퉁이 하나하나 가 우리를 가두어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음흉한 속마 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우툴두툴한 누런 바위 위로 엷은 물의 막이 미끈미끈하게 덮여 있었다. 머리 위에는 이미 하늘이 안 보이게 된 지 오래였다. 구름도 파란 빛깔도.... 나는 안내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불안과 반감으로 자주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길바닥에 한 송이의 어두운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 였다. 그 꽃은 비로드처럼 검고, 슬픈 눈길을 하고 있었다. 꽃은 아 름답게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안내인은 한층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한 순간이라도 멈춰서서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이 슬픈 비로 드의 눈길을 들여다본다면 비애와 절망적인 우울은 한층 무겁고 견 딜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무의미와 광 기로 이 굴욕적인 지역에 단단히 묶이고 말 것이라는 것도. 나는 몸을 적시고 더럽히면서 계속 기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젖은 암벽이 우리의 머리 위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안내인은 그의 해묵은 위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고 힘찬 젊은 목소리로 그는 걸음마다 박자를 맞추어,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라는 노래 를 불렀다. 그가 나에게 격려를 하고 힘을 주려고 하며 이 지옥 같은 방랑의 어두운 고통과 절망을 몰아내주려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 수 가 있었다. 내가 그 노래를 같이 따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승리를 그에게 허용하 고 싶진 않았다. 내가 노래를 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나는 어쩌다가 신도 요구할 수 없는 일과 행위 속에 끌려들어간, 한마디로 가엾은 단순한 사나이가 아닌가? 패랭이꽃도 물망초도 그것이 피어 있던 시 냇물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본성대로 피고 지고 하지 않는가!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안내인은 여전히 노래하고 있었다. 아아,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나는 안내인의 야릇한 도움으로 이 미 암벽과 벼랑을 기어올 라 넘어서 있었다. 그것을 넘어 되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울음 이 터질 것처럼 목이 꽉 막혔다. 그러나 울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집을 부려 큰 소리로 안내인의 노래에 맞추어 노래 를 불렀다. 같은 박자와 같은 음조로, 하지만 그와 똑같은 가사가 아 니고, "나 피할 수 없노니, 나 피할 수 없노니, 나 피할 수 없노니." 하고 가사를 바꾸어서 소리쳤다. 그러나 힘겹게 벼랑을 기어오르면 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내 숨이 가빠져 서 헐떡거리며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피곤함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힘차게 노래했다.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압박해왔다. 마침내 나는 그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이제는 기어오르는 것도 훨씬 편해졌다. 이젠 피할 수 없노니가 아니라 나 자신이 실제로 그러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었다. 노래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차츰 사라져갔다. 그러자 내 마음이 밝아졌고, 그에 따라 미끈거리던 바위도 건조해 져서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암벽에 흐르는 물 기가 적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 위로 엷은 파란 빛깔의 하늘이 차츰 나타나더니, 이윽고 작은 호수처럼 시방으로 펼쳐지는 것이었 다. 나는 좀더 강해지고 좀더 참을성을 지니려고 했다. 이렇게 마음 을 먹자 하늘의 호수는 더욱 넓어지고, 비탈길은 한결 걷기 쉽게 되 었다. 나는 웬만한 거리를 전혀 힘을 안 들이고 안내인과 같이 달리 기도 했다. 그러자 갑자기 험준한 산마루가 태양의 대기 속에서 불 쑥 솟아올라 머리 위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산마루 바로 아래쪽의 좁은 틈으로 기어나갔다. 강한 햇살이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숨막히는 현상에 무릎이 떨렸다. 왜냐하면 내가 끝없는 하늘과 푸른 심연에 둘러싸여 깎아지른 산등성이에 잡을 것도 하나 없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만 좁은 산마루가 마치 사다리처럼 가늘게 솟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늘과 태양이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마지막 숨막히는 험준 한 길을 입술을 깨물고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올라갔다. 마침 내 좁은 꼭대기, 타는 것 같은 바위 위에 올라 엄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희박한 대기 속에 서 있게 되었다. 그것은 기묘한 산, 기묘한 꼭대기였다. 그렇듯 끝없이 벌거벗은 암 벽을 넘어 기어오른 이 산마루에는 바위 틈을 비집고 한 그루의 나 무가 몇 가닥 짧으면서도 강한 가지를 뻗고 돋아나 있었다. 그 나무 는 바위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엄한 느낌이 들도록 꼼짝도 하지 않 은 채 가지 사이로 차디찬 푸른 하늘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끝에는 한 마리의 검은 새가 앉아 목쉰 소리로 울어대고 있 었다. 높은 곳에서의 짧은 휴식. 그 고요한 꿈. 태양은 벌겋게 타오 르고, 바위는 녹을 듯이 이글거렸다. 나무는 꼼짝하지 않았으며 새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 쉰 목소리에 찢어지는 노래 는 영원! 영원을 노래하고 있었다. 검은 새는 계속 노래했다. 검은 수정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무정한 눈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나는 그 눈길을 견뎌내기 힘들었고, 그 노래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장소의 적적함과 공허함과 눈이 부시도 록 넓은 하늘의 황량함이 무서웠다.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희였다. 이곳에 머 문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으 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우리도, 이 세상도 공포스런 돌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일이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회 오리바람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타는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느 꼈다. 나는 그것이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처럼 몸과 마음에 떠도는 것을 의식했다. 그것은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니 마침내 나타났다. 새가 허둥지둥 가지에서 뛰어내리더니 아래쪽 허공으로 급강하했 다. 그러자 나의 안내인도 한달음에 몸을 날려 푸른 하늘로 뛰어들었 고, 이내 경련하는 하늘 속에 빠져 흩날렸다. 아! 운명의 물결은 그 절정에 이르러, 나의 심장을 떼어내더니 소 리없이 갈갈이 찢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떨어져 버둥거리며, 뛰며 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대기의 광란에 짓눌려 행복하게 환희의 괴로움에 경 련하면서 무한한 공간을 누비다 급강하했다. 어머니의 가슴을 향해서. <<< 꿈에서 꿈으로 >>> 나는 시끄러운 술집에 앉아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술집 창문 바깥으로는 인공적으로 꾸민 피요르드 식 바다가 보일 뿐 시선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어딘가 죄의식에 사 로잡힌 듯이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 여 인의 얼굴을 똑똑히 보려고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숱이 적은 머 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불안에 떨고 있었으며 무 척 창백했다. 그녀의 눈은 아주 검은 갈색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애썼으며 그 표정에서 깊고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낯선 두 젊은이가 술집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들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그 여인에게 인사를 건넸고 나에게도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들의 태도가 몹시 당돌하고도 잰 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는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입은 잘 재단 된 멋진 적갈색 웃옷이 내게 부끄러움과 동시에 질투심을 불러일으 켰기 때문이었다. 흠 잡을 데 없는 옷차림과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당당한 태도가 마치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자 강 한 질투심이 솟구쳤다. "어디 두고보자!"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 다. 두 사나이는 내가 내민 손을 마주잡으며 - 도대체 나는 왜 그들 에게 손을 내민 것인지? - 조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옷차림이 엉망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더 냉소적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얼굴에서 피가 가시는 듯한 기분으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나는 구두 도 없이 양말바람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왜 항상 짜증스럽고 불쌍 하게도 이다지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걸까! 흠잡을 데 없이 점 잖은 사람들이 모인 술집 안에서 벌거벗거나 아니면 반쯤 벌거벗은 상태로 앉아 있게 되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나는 왼쪽 발로 오 른쪽 발을 최소한이나마 가리려고 애를 쓰며 시선을 창문 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가파르게 경사진 바다가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어두 운 창문 안으로 악마처럼 거칠게 밀어닥칠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간절하고도 비탄에 젖은 눈으로 그 사나이들을 쳐다보았다. -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나에 대한 더 큰 미움을 가득 담은 채 -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잘되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런 데 나는 왜 어두운 바다에서 대답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 곳 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에 그러했던 거야, 나는 적갈색 옷을 입 은 사나이의 얼굴을 세심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뺨은 건강하게 빛났 으며 수염을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쓸데없이 자포자기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에서야 나도 내가 커다란 녹색 양말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 아! 그 양말에 구멍이 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 그리고 그는 보기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는 자기 와 함께 온 사나이를 건드리더니 나의 발을 가리켰다. 그 사람 역시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저 바다를 좀 보시오!" 나는 주위를 돌리기 위해 이렇게 소리치 며 창문을 가리켰다. 적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는 문득 무엇이 생각이라도 난 듯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창문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곁에 서 있던 사나이 에게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내가 얼핏 듣기로는 나에 대한 이야기 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이런 술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랑 아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술집은 고귀한 품위를 가진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이 어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탁자 밑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러자 슬 리퍼가 눈에 띄었다. 그 슬리퍼는 큼직한, 부드러운 적갈색 천으로 된 것으로 내 발 뒤꿈치 쪽에 놓여 있었다. 나는 주저하면서도 간간 이 그 슬리퍼를 집고 올리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몹시 힘드는 일이 었다. 슬리퍼는 번번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는데 어쩌다 그 슬리퍼를 손아귀에 쥘 수 있게 되자 나는 그것을 꼭 잡고 놓치지 않 았다.. 그리고는 슬리퍼를 내 발 앞에다 내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내 손에서 떠난 그 슬리퍼의 효용가치를 느 꼈다. 그래, 이 붉은 슬리퍼는 부드럽지만 두툼하지! 나는 시험삼아 슬리퍼를 공중으로 치켜들고 약간 흔들어보았다. 그렇게 해보니 무 척 기분이 좋아졌다. 고무 호스나 몽둥이는 이 슬리퍼에 비하면 아 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이탈리아 말로 '칼지글리오네'라고 불 렀다. 적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의 머리에 그것을 장난삼아 던지자 그 젊 은 사나이는 의외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의자 위로 넘어졌다. 그 러자 돌연 나에게는 어느 누구도, 그 술집도, 사나운 호수도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강하고 힘이 세졌다. 나는 자유로와졌다. 그 사 나이들을 향해 또 한번 슬리퍼를 던지자 더 이상 싸움은 확대되지 않았다. 칼부림이 난다든지, 치사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든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환호성이 일면서 한결 분위기가 자유스러워 졌다. 나 역시 더 이상 쓰러진 적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친근하게,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내가 그의 창조주이며 주 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슬리퍼를 던져 그를 때림으로써 그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나이를 깨우쳐주었고 그를 단련시켰으며 그를 교육시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었다. 그런 교훈이 담긴 타격으로 그는 더 쾌 할하고, 상냥하고 온순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는 (나를 즐겁게 해 주고 내가 아끼는) 나의 창조물이며 작품처럼 느껴졌다. 내가 마지막 으로 한 대 더 부드럽게 그를 때림으로써 그는 내면적으로는 모자람 이 없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면서 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좋아." 나는 이렇게 눈짓으로 말했다. 그는 손을 앞으로 마주잡고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기쁨의 감정이 나의 가슴에 훈훈하게 퍼져나갔으며, 이 방 은 더 이상 술집이 아니었다! 이방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의기소침해 짐도 느낄 것이 없었다. 나는 바닷가에 나와 섰다. 바다는 검푸른 빛 을 띠고 있었다. 구름이 두터운 잿빛으로 주변의 산을 에워쌌다. 피 요르드 식 해안에는 검푸른 파도가 거품을 일으키며 부딪쳐 오고 있 었다. 열대의 바람이 성난 듯이 원을 그리며 몰아들고 있었다. 나는 앞을 바라보면서 폭풍이 시작된 것 같은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번개가 차갑게 번쩍이고 어두운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으며 열대성 태풍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가며 불어닥치고 있었 다. 하늘 저편으로부터 검은 폭풍이 대리석의 결처럼 몰려오고 있었 다.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로부터 성안 듯이 솟구쳐올랐고 그 파도 뒤로 폭풍우의 포말이 부서져 내리고 철석이는 파도의 물보라 가 나의 얼굴로 튀었다. 검게 뒤덮인 산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산의 웅크린 모습과 침묵은 무엇을 간청하는 간절 한 호소처럼 보였다. 유령처럼 거대하게 몰려오는 장엄한 폭풍우 속에서 수줍어하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는 긴 검은 머리의 창백한 여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 온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바다뿐,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죄의식을 가진 듯한 그녀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파도가 철 썩이며 나의 무릎과 가슴에 부딪쳐왔다. 그러자 그녀는 솟구쳐 오르 는 파도에 실려 무기력하고도 조용하게 흔들렸다. 슬며시 미소를 지 으며 나의 손을 그녀의 무릎에 놓자 그녀는 나를 마주보며 일어섰 다. 그녀의 태도는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가볍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녀는 따뜻한 체온을 지녔으며 진실한 눈은 믿음으 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죄인이 아니며 수상쩍은 여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죄도, 비밀도 없었 다. 그녀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바위를 넘어 비가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이는 곳으로부터 비탄에 잠겨 있는 듯한 정원으로 데리고 왔다. 그 정원 은 폭풍우가 와 닿을 수 없는 곳이며 고개 숙인, 왕관 같은 오래된 나무들로부터 온화한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으며 시가 있고 교향악이 흐르는 곳이었다. 경건한 분위기와 사랑의 충만 함을 향유할 수도 있고 코로의 그림처럼 사랑스러운 나무들과 슈베 르트의 목가적이고도 거룩한 관현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 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나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밀려오는 향수에 젖어 들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사랑으로 가득 찬 사원으로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 세계는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모든 것의 영 혼에는 기간과 준비된 때가 있었다.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여자, 창백한, 그 어린아이와 같은 여자가 어떻게 이별을 하고 내게서 떠나갔는지를 신은 알고 계시리라. 그곳 에는 석조의 계단과 웅장한 문과 하인이 있었고 모든 것이 뿌연 유 리의 뒷면을 보는 것처럼 의미하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밖의 다른 형체들은 더욱 아련하게, 바람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돌연 나에 대한 비난과 힐책의 소리가 아련한 기억의 그림자를 싫어지도록 만들었 다. 그 소리 때문에 폴 같은 인물, 즉 나의 친구이자 아들인 폴 같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 모습에는,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친숙한 얼굴, 학교 친구들의 얼굴, 이 전에 말했던 어린 소녀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 그 얼굴은 어렸을 적 에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 같은 아름다운 기억으로부터 퍼져나오는 것이었다. 선, 내면의 어두움, 따스한 영혼의 요람,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기 억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불구의 시대인 것이다. 근원으로부터의 최초의 격동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 근원 아래에 태고의 시대가 원 시림의 꿈과 더불어 잠자고 있을 것이다. 영혼은 어두운 원천을 더 듬고 헤매어 다니면서 순수한 여명의 충동을 헤집고 나가는 것인가! 나는 근심에 찬 영혼, 당신을 알고 있다. 당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잠자는 일도 당신에게는 필요치 않다. 마치 당신 자신이 태초의 시작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곳에선 파도가 당신의 주위를 철썩이며 다가든다. 당신은 파도가 된다. 나 무, 그렇다 당신은 나무가 된다. 그것은 이미 내외적인 일이 아니다. 당신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그것은 이미 내외적인 일이 아니다. 당신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물고기가 되어 바다를 헤엄쳐 다닌 다. 빛을 흡수하여 빛이 되고 어둠을 얻어 어둠이 된다. 우리들의 영 혼을 방황하고, 헤엄쳐다니고, 날아다니며 끊어진 실을 가녀린 영혼 의 손가락으로 다시 이어준다. 부서진 날개를 다시 가라앉힌다. 우리는 신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우리가 신이다. 우리가 바로 이 세계이다. 우리는 함께 주고, 우리는 우리의 꿈을 함께 창조한다. 우 리의 가장 아름다운 꿈, 그것은 바로 푸른 하늘이다. 우리의 가장 아 름다운 꿈, 그것은 바로 바다이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꿈, 그것은 별이 빛나는 밤이다. 물고기이며, 밝고 기쁘게 울리는 소리이며 밝게 비치는 빛이다.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꿈이다. 이것 모두가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 흙이 된다. 어차피 우리 는 웅덩이를 찾게 된다. 어차피 우리는 별자리를 정렬해 놓게 된다. 목소리가 울려온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이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리의 요람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길은 방사선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다. 그것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풀이라 불리우는 나의 피조물이자 나의 친구가 다시 그 자리에 왔는데 그는 나만큼 늙은 것 같았다. 그는 누군지 어떤 젊은 친구와 닮았는데, 나 는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다소 의심스러운 기분이긴 했지만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그는 힘을 얻었다. 세상은 나를 따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순종하였다. 이전의 모든 상황은 사라지고, 나는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온갖 것에 대해서 그가 우월하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파 리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으며 내 앞으로 높이 대들보가 서 있었 다. 그 대들보에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양편으로는 가느다란 사 다리 디딤판이 있었다. 이 사다리를 손으로 잡고 사람들은 그 사다 리를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때 풀이 우리도 그곳에 올라가자고 했다. 나는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고 그도 역시 내 옆에서 기어오르기 시 작했다. 우리가 지붕 위나 아주 높은 나무 위 같은 꼭대기로 올라가자, 나 는 갑자기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풀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전 혀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 차린 듯 웃었다. 그가 웃고 있는 순간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면 서 그의 얼굴과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과 거의 틈새가 학창시절까지 거슬러 열려갔다. 그리하여 기억은 내가 무려 두 살이었던 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는 내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기간이었다. 모든 것이 향기로왔고 우수했으며, 모든 것이 먹음직스러운 신선한 빵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모험담과 영웅담으로 찬란했던 시기였다. - 예수가 사원에서 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 을 때, 그때의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 때, 모든 선 생님들과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 어는 학자나 선생님들보다 영리했다. 그들보다 뛰어났으며 그들보다 용감했다. 갑자기 과거의 추억과 갖가지 연상이 혼란스럽게 밀려왔다. 잃어버렸던 공책, 방과 후까지 남아 벌을 받던 일, 새총에 맞아 죽은 새, 웃옷 주머니 가득 히 훔쳐 넣었던 자두, 수영장에서 짓궂게 첨벙거리며 물장난을 치던 사내아이들, 찢어진 예복 바지, 속으로 품었던 나쁜 마음, 세속적인 걱정거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드리던 저녁 기도, 쉴러의 시를 읽으며 느꼈던 놀랍고도 영웅적인 화려한 감정 등.... 그러나 중심도 없이 빠 르게 지나가는 갖가지 장면의 흐름, 즉 번쩍거림만이 남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폴이 나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괴로운 듯이, 반쯤 은 인정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더이상 과거를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는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파리라고 불리우는 거리 전체가 우리가 오르고 있는 가늘고 긴 사다 리 아래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우리가 탑보다 더 높이 올라가 마침 내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는 편편한 널판지로 덮여진 작은 옥상 지붕이 보였다. 그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 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폴은 그렇게 했으며 나도 뒤따라야만 했다. 나는 그 널판지 위에 올라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높게 떠가는 조그만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 다. 나의 시선은 흡사 돌이라도 된 듯 초점을 읽은 채 허공 속에 머 물러 있었다. 그때 내 옆의 사나이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 신기한 광경에 시선을 멈추었다. 거기서 나는 그 큰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붕 위에 줄타는 광대처 럼 보이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은 우리 가 있는 곳보다는 훨씬 아래에 있었다. 실제로 그 사람들 중의 하나 가 장대인지, 아니면 밧줄인지를 타오르고 있었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린 소녀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집시거나 방랑자들 같았다. 그들은 가느다란 막 대로 울타리를 둘러친 지붕 위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야 영할 준비를 하는가 하면 앉아서 쉬거나 돌아다녔다. 그들은 그곳에 서 살면서 그 지역을 고향처럼 생각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들의 발 아래에 펼쳐진 도시에는 뿌연 안개가 아득히 먼 맨 아래쪽에서부터 그들의 발치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폴이 그 광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 나는 대답했다. "감동 적이야, 소녀들까지 모두가." 나는 어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었지 만 몹시 불안해서 꼭대기에 꽉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그러는 동 안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높은 곳에 있긴 하지만 그곳 이 나에게 적당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은 적당한 높이를 갖고 있다. 그들은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이렇게 높고 아득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 람들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들 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가 도달하 지 못하는 축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 는 언젠가 다시 이 무서운 사다리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담담해졌다. 나는 메스꺼움을 느껴 이 아득히 높은 곳에서 어디에도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기절할 것만 같은 절망감으로 사다리에 걸친 두 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음을 느 꼈다. - 나는 널판지를 밟고 있는 발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 몇 분 동안을 무시무시한 심정으로 매달려 있었으며 불안하게 떨면서 높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폴은 내 앞 쪽에 있었다. 깊은 공포심 속에서 나는 위험스레 사다리를 붙들고 앞쪽으로 걸 음을 내딛었다. 그때 어떤 느낌이 안개처럼 나를 감쌌다. 그 느낌은 높은 사다리 위에 있다는 위기감이나 기절할 것 같다는 느낌은 아니 었다. 나는 그러한 기분을 한껏 맛보면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갑자 기 사물의 가시적인 면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안개처럼 불투명해 졌다. 때로 나는 사다리에서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 으며 때로는 땅속에 뚫린 비좁은 구멍과 지하실의 길을 통해 불안하 게 기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때로는 늪이나 형편없는 진창 속에 서 희망없이 기다리며 입속에 까지 진흙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주위가 온통 어둠과 억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근심과 식 은땀, 마비와 추위, 어려운 죽음과 힘든 탄생 등이었다.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밤이 찾아왔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 통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우리의 숨겨진 영혼, 영원히 가련한 주인 공, 영원한 오딧세이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간다. 우리는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몸을 구부리기도 하고, 건너뛰기 도 하고 질식할 듯이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밋밋한 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울기고 하고, 낙심하기도 하며, 한탄하기 도 하고, 고통스레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인내하며 나아간다. 그리고는 필경에는 난관을 뚫고 헤쳐나간다. 또 다시 흐릿한 지옥의 연기로부터 상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그러다가는 다시 작고 어두운 길이 기억의 빛에 의해 비추어지 고 있었다. 영혼은 속세로부터 그 시대의 고향 같은 곳으로 가고 있 었다. 여기가 어디였던가? 눈에 익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나는 다시 느 끼기 시작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방은 크고 약간 어두웠다. 책상 위 에는 등잔불이 있었는데 그 등잔불은 내 것이었고 책상은 크고 둥그 스름했다. 그리고 피아노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나의 누이와 그녀 의 남편이 방안에 있었다. 아마 내가 초대를 했든지, 아니면 그들이 방문을 해온 것이었을 터이다. 그들은 말이 없었고 조심스러워 보였 다. 나도 또한 조심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먼지 쌓 인 방안에 서 있다가 서성이며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슬픈 감정이 구름처럼,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 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 중요한 것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책이 나, 가위,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등잔불을 손으로 쥐었다. 그것은 매우 무거웠다. 마음 이 아주 지겨워졌다. 나는 등잔을 곧 내려놓았다가는 다시 쥐었다. 그리고는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모 든 것을 더 흩트려놓았다. 할 수 없이 등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 방안을 헤매면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다. 마치 가엾은 나의 일생 동안 내내 그러해왔듯이. 누이의 남편이 조심스러우나 비난이 담신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 다. 그들은 내가 미친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는 다시 등잔을 집어들었다. 누이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걱정과 사랑 을 가득 담은 채, 조용히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녀의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외쳤다. 나를 좀 내버려둬!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란 말이야! 너희들은 내가 얼마나 슬픈지 알지 못해!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둬! 제발! 붉은 등잔 불빛이 커다란 방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고 나무들이 창밖에서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바깥의 어둠을 내 면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바람과 습기, 가을, 코를 찌르는 듯한 나뭇 잎의 냄새, 느릅나무 꽃잎의 날림, 가을, 가을! 다음 순간 나는 또 나 자체가 아닌, 다른 모습의 나를 보았다. 나는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창백하고 여윈 음악가였다. 그 이름은 유고 볼프였으며, 오늘 저녁 그는 마치 미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시 헛되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었다. 무거운 등잔을 들고 둥근 탁자 위를, 그리고 의자 위를, 책을 쌓아둔 곳을 뒤졌다. 나의 누이가 다시 슬프고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면서 나를 위로하고자 내 곁으로 와서 나를 도우려 했을 때, 나는 애원하는 듯한 몸짓으로 거절했다. 슬픔이 커질 대로 커져 마침내 부서지면서 나의 온몸을 채우는 것 같았다. 내 주위의 모습은 간절 하게 호소하는 듯한 분명한 표정에 의해 실제보다 더 확실하게 보였 다. 물컵에 한 쌍의 가을꽃이 꽂혀 있었다. 그 가운데에 적갈색의 천 축 모란이 있었다. 모든 사물과, 등잔의 빛나는 놋쇠다리조차도 마법 처럼 아름다왔고 위대한 화가의 초상처럼 운명적인 고독감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자신의 운명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여전히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누이의 시선도 여전했으며 아름다운 영혼 같은 꽃 의 시선도 여전했다. - 그런 심정에 겨워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나 를 내버려둬! 너희들은 몰라!" 잘 닦여진 피아노의 검은 뚜껑 위로 한 줄기 등잔 불빛이 연주하듯 비치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도 아 름다왔고 신비로왔으며 슬픔으로 터질 것 같았다! 또 다시 누이가 일어나서 피아노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애 원했다. 마음속으로는 간곡히 거절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럴 수 가 없었다. 어떠한 힘도 나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극복하게 할 수 없었다. 아! 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 명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어떤 노래라도 부를 수 있고, 모든 것을 말해주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한 멜로디를 깨달았다. 무서운 긴장이 나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나는 솟아나는 눈물을 감추려고 머리와 가사와 멜로디를 감명깊게 들었다. 볼프쉬의 멜로디, 즉 다음 과 같은 시를 들었다. 어두운 정상, 당신은 아름다운 시대로부터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정상 뒤편에는 고향이, 그 고향은 아주 아득한데, 아주 아득한데! 따라서 세상은 내 앞과 내 속에서 나뉘어져가고 눈물과 소리 속으 로 가라앉아갔다. 마치 퍼붓는 듯이, 몰아치듯이, 아름답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말없이 묵묵히. 오! 운다는 것은 달콤한 분해이며 은혜 로운 용해였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사상과 시로 가득 찼으며 바로 그것이 잠시 동안의 흐느낌이었다. 그 흐느낌 속에서 감정은 격동으 로 흔들리면서, 영혼은 깊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발견하게 되는 것 이었다. 눈물은 영혼의 얼음이 녹은 것이며 모든 천사들은 흐느끼는 자와 더 가까와진다. 나는 모든 원인과 까닭을 잊고 울었다. 견디기 어려운 긴장으로부 터 온유한 빛 속으로 일상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런 증명도 없이, 그러는 동안 한 장면이 떠올랐다! 관이었다. 그 관 속에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당신 자신이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을 아득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드러나게 했을 것 이었다. 나는 한 번도, 몇 해 전, 아니 지극히 오래 전에도, 그같이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젊은 소녀 한 사람이 공중 높은 곳 에 살면서 구름처럼 걱정없이 아름답고 은혜롭게, 마치 공기처럼 가 볍게 떠다니며 현악기의 음악처럼 풍요롭게....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고 그 광경은 내게서 서서히 사라졌다. 아! 아마도 나의 생에는 고고하게 떠다니는 소녀를 보거나, 그녀들에게로 가거나, 그녀들과 같이 되기 위한 감성만을 가졌던 것 같았다. 이제 그녀들은 먼 곳, 도달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곳으로 멀어져갔으며 애매한 동경만이 지친 듯 떠돌아다녔다. 햇살이 날리던 눈발처럼 스쳐 지나가고 세상은 변했다. 슬픈 듯이 나는 작은 집을 떠나 돌아다녔다. 나는 가련한 기분이 들었으며, 입 안이 아픈 것을 느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혀로 미심쩍은 이빨을 건 드려보았다. 그러자 이빨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이상하게 되었다. - 그 다음 것도 역시 - 그때 한 젊은 의사가 나타났다. 나는 그 의사 에게 간청했다. 나는 그에게 손으로 이빨이 아프다는 시늉을 해보였 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거만한 태도로 내 부탁을 거절하며 머리를 내저었다. - 괜찮소, 해는 없을 것이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거요. 사랑하는 신이여,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나의 왼쪽 무릎을 가리켰다. 그 곳에 앉아서 거의 농담도 하지 않았 다. 나는 아주 재빠르게 아래로 손을 뻗어 무릎을 잡았다. - 그렇다! 거기에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을 수도 있었 다. 피부와 근육 외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오! 신이여. 이것 은 몰락이요. 죽음과 부패입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지요?" 나는 어색하게 물었다. "없소." 그 젊은 의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가버렸 다. 나는 기진맥진한 듯이 집으로 가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아무 의심도 없이, 아무것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이제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야만 했다. - 나는 어머니 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얼굴을 뵐 수 있을까? 계단이 위로 뻗어 있었다. 엄청난 계단이 난간도 없이 높고 밋밋하게 뻗어 있었다. 그 것은 산이요, 정상이요, 빙하 같았다. 확실히 나는 너무 늦게 왔다. - 그녀는 아마 먼저 와 있거나 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 니를 다시 부른 적이 없었는가? 말없이 나는 가파른 산길 계단과 씨 름을 했다.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용감하게, 또는 울면서도 참고 올라 갔다. 다친 팔과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버티었다. 위로 올라가니 문이 있었다. 걸음을 떼기가 진흙 속이나 아교 속을 걷는 것처럼 끈 적거리며 힘들었다. 이젠 더 나아갈 길도 없었다. 문이 열려져 있었 다. 안으로 들어서자 회색 옷을 입고 작은 바구니를 손에 든 어머니께 서 조용하게,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오! 작은 그물망 속으로 그녀 의 다소 회색빛 나는 머리칼이 보이는구나! 그리고 그녀의 걸음걸이, 아주 자그마한 몸매! 회색빛 옷! 나는 그렇다면 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녀의 모습을 모두 잊어버리고 한 번도 그녀를 생각한 적이 없었단 말인가? 그 곳에 어머니가 계셨다. 그녀가 서 계셨다. 뒷모습 만 보일 뿐이었지만 분명히 어머니 같았다. 맑고 아름다운 모습, 순 결한 사랑이여! 미친 듯이 나는 절뚝거리면서 진뜩진뜩한 공간을 건너갔다. 얇고 질긴 실 같은 나무 덩굴이 나를 점점 휘감아왔다. 사방에 장애물이 있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구나! "어머니!" 나는 소리쳤다. - 그 러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울리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계속 느리게 걷고 계셨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없이 조심스럽게 보였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걸어가고 계셨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옷에 붙은 실부스러기를 털 어 냈으며 작은 바구니에 담겨져 있는 재봉도구를 꺼내려고 몸을 구 부렸다. 아! 작은 바구니! 그 속에다 어머니께서는 나 몰래 부활절 달걀을 숨겨 두신 적이 있었지. 나는 헛되이 외쳐대었다. 내가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다니, 나 자 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어머니께서는 천천히 정 원의 길을 가로질러 가시더니 열려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셨다. 어머니는 마치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시는 듯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구부리시고는 무심하게 바구니를 올렸다. 내렸다 하셨다. - 나는 내 가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의 바구니에서 보았던 메모지에 대한 생각 이 떠올랐다. 그 메모지 위에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그 날 한 일과 생각했던 것을 적어놓으시곤 했다. - "헤르만의 바지가 튿어졌다. - 빨래를 집어 넣었다. - 디킨슨의 책을 빌렸다. - 헤르만 은 어제 기도를 안 했다." 기억이 폭풍처럼 밀려오고 사랑의 감정이 나를 짓눌러왔다. 나는 문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내 위쪽으로 회색옷을 입은 부인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정원 안 으로 사라져버렸다. <<< 팔돔 >>> 큰 장 팔돔 나라의 도시로 통하는 길은 숲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녹 색의 넓은 목장 옆이나 보리밭 사이로 뻗어 언덕이 많은 지대를 빠 져 멀리 달리고 있었다. 시내에 가까와질수록 농가나 농원, 정원이나 별장이 길가에 자주 나타났다. 바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 않 았다. 여기서는 세상이 작은 언덕이나 아름다운 골짜기, 목장이나 푸 른 숲, 그리고 밭과 과수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 곳은 과일과 목재, 우유와 고기, 능금이나 호도가 부족함이 없는 지 방이었다. 마을들은 아름답고 깨끗했으며 사람들은 대개가 고지식하 고 부지런하며, 위험하거나 자극적인 일들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 었다. 이웃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잘 살고 있지만 않으면 각자 그런 대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팔돔이라는 나라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자 않는 한 이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는 이와 비슷한 것이다. 팔돔 시(도시 이름이 나라 이름과 같았다)로 통하는 아름다운 길 에는 이날 아침 첫닭이 울기 시작할 무렵부터 사람이며 수레가 떠들 썩하게 지나갔다. 시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서는 큰 장이 서게 되 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위 이십 마일에 걸쳐 농사꾼 남자나, 여자, 직공이나 감동, 하인이나 하녀, 사내아이나 계집아니 할 것 없이 몇 주일 내내 대목 장이 서는 것을 생각지 않은 사람은, 장터로 가보려 고 벼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축을 돌봐야 하는 사람, 어린애나 환자를 돌보거나 노인의 시중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장에 갈 수가 없었다. 이날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일생 중에서 거의 일 년을 잃어 버렸다고 여길 지경이었다. 그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따스하고 맑은 맑은 늦여름의 하늘에 솟아오른 아름다운 태양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와했다. 아낙네와 아이들은 저마다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일찍부터 모여 들었다. 젊은이들은 수염을 깎고 왔다. 제각기 패랭이꽃이나 들국화 를 단추 구멍에 꽂고 모두들 화려한 나들이옷을 입었다. 소녀들의 단장하게 땋아늘인 머리는 아직도 젖은 채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 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채찍자루에 꽃이나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 다. 말들은 반짝이는 놋쇠판이 달려 있는 폭넓은 장식가죽을 무릎까 지 신고 따각거리며 달렸다. 양쪽에 사다리 모양의 테를 두르고 둥 글게 구부린 너도밤나무의 가지로 지붕을 친 마차가 지나갔다. 그 안에는 무릎에 망태기나 아이들을 올려놓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 었다. 대개는 소리높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이따금 녹 색의 너도밤나무 잎 속에 빨강, 파랑, 흰 깃발 또는 조화로 장식한 마차가 오는 것이었다. 안에서는 떠들썩한 음악이 들려오고 절반쯤 그늘진 가지 사이로 금빛 오른이나 나팔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미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걷기 시작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려, 땀을 비오듯 쏟고 있는 어머니들은 아이를 달래느라 애를 업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좋은 마부를 만나 마차를 탈 수 있는 행운 을 차지한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할머니가 한 쌍의 쌍동이를 유 모차에 태우고 밀고 왔다. 두 아이들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 머리 사이에는 역시 둥글고 빨간 뺨을 한 아름다운 옷 을 입고 머리를 곱게 빗은 두 개의 인형이 잠을 자고 있었다. 길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비록 오늘 큰 장을 보러 가지는 못하더 라도 재미있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두 눈에 넘칠 만큼 구경거 리가 널려 있었다. 하기는 장에 못 가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뜰의 층 계에 열 살쯤 되는 소년이 혼자 앉아 아까부터 울고 있었다. 아버지 로부터 할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 었다. 그런데 한동안 층계에 걸터앉아 울고 있던 그도 마침 마을의 개구장이 서너 명이 달려가는 것을 보자 한길로 뛰어나가 그들 사이 에 끼었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이가 좀 많은 혼자 사는 총각이 있었다. 그는 돈이 아까워 큰 장 같은 곳에는 아예 가볼 염두도 안 냈다. 그는 모두들 일을 쉬는 오늘 혼자 조용히 뜰에 있는 키가 큰 하얀 가시나무 울타리를 다듬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아침이슬이 걷히자 곧 큰 가위를 들고 힘차게 일을 시작했다. 그러 나 한 시간 쯤 지나자 일을 집어치우고 화를 내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걸어가거나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이 중에서 울타리를 손질하고 있는 그를 이상스럽게 쳐다보거나 이 사 나이의 때아닌 부지런함을 비꼬지 않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처녀들도 덩달아 웃어대었다.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긴 가위로 위협을 하자 모두들 모자를 흔들며 이리 오라고 놀려댔다. 그는 덧문까지 닫고 실내에 앉아 있었지만 자꾸만 문 틈으로 사람들 의 행렬을 부러운 듯이 내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 라 그의 화는 점점 눈 녹듯이 사라지고 큰 장으로 가는 마지막 사람 들이 띄엄띄엄, 마치 행복을 놓칠세라 허둥지둥 뛰어가는 것을 보고 는 마침내 그도 장화를 신고 일 타렐을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단장 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문득 일 타렐은 큰 돈이라 는 생각이 들어 그는 반 타렐짜리로 바꾸어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는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집과 뜰의 문을 잠근 다음 시내에 닿을 때가지 수많은 사람들과 두 대의 마차까지 따라넘길 만큼 성급하게 달려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버리자 집과 뜰은 텅 비고, 거리의 먼지도 차 츰 가라앉았다. 말이 달리는 소리나 악대의 음악소리도 멀리 사라져 버렸다. 재빨리 참새가 밭에서 날아와 흰 먼지 속에서 떠들썩함 뒤 에 남은 적막을 힐끔거렸다. 길은 이제 텅 비어 조용하고 햇살은 뜨 거웠다. 그래도 아직 먼곳에서 이따금 어렴풋하게 환성과 호른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넓은 챙이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나이 하나가 숲속에 서 나와 쓸쓸해진 시골길을 서두르지 않고 혼자서 걸어갔다. 그는 키가 크고, 도보로 매우 많은 여행을 해본 방랑자 특유의 차분하고 힘찬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회색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자의 그늘에 가린 그의 눈은 이제 이 세상에 아무것 도 바랄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무엇 하나 빠뜨 리는 일이 없는 사람의 눈처럼 세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보았다. 숱한 마차 자국이 뒤섞여 있는 것도, 왼쪽 뒷굽을 질질 끌고 간 말굽 자국도, 멀리 먼지투성이의 안개 속에서 팔돔의 거리가 언덕 가까이에 언뜻 지붕을 빛내면서 솟아 있는 것도 보았다. 어떤 집 뜰 안에선 한 할머니가 난처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 는 것도 보았다. 할머니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길바닥에 작은 쇳조각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굽혀 집 었다. 광택이 있는 둥근 놋쇠판이었다. 말의 목에 다는 고리에서 떨 어진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접해 있는 해묵은 하얀 가시나무의 생울타리를 보았다. 그것은 몇 걸음 정도의 길이만 손질이 되어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의 일은 착실하 고 꼼꼼했으나 차츰 거칠어져 있었다. 어떤 곳은 너무 깊이 깎여지 고, 어떤 곳은 깎이지 않은 가시가 불쑥 나와 있었다. 앞으로 더 나 아가자 이 낯선 길손은 길가에 아이들의 인형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인형의 머리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간 것을 알아볼 수 있 었다. 그리고 녹은 버터가 흘러내려 아직도 빛나고 있는 한 조각의 검은 빵을 보았다. 그는 또 마지막으로 반 타렐이 들어 있는 튼튼한 가죽지갑을 발견했다. 그는 인형을 길가 돌에 세워놓았다. 빵조각은 부수어 새들의 먹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반 타렐이 든 지갑은 주머니에 넣었다. 인적이 없는 길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쪽의 잔디는 먼지 를 잔뜩 뒤집어쓴 채 햇살을 따갑게 받고 있었다. 그 곁의 농가에서 는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가 않는 따뜻한 양지에서 닭들이 돌 아다니며 꿈을 꾸듯이 떠들어대거나 먹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푸릇 푸릇한 양배추 밭에서 한 노파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마른 땅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방랑자는 장이 열리는 거리까지 얼마나 남았느 냐고 물었다. 그러나 노파는 벙어리였다. 그가 큰 소리로 물어도 노 파는 난처한 듯이 흰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한동안 더 걸어가니 이따금 시내 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 다. 그 소리는 차츰 변하면서 길어졌다. 나중에는 음악과 뒤섞인 목 소리가 먼 곳에서 폭포소리처럼 줄곧 울려왔다. 마치 사람들의 무리 전체가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서 한 줄기 시냇물이 흐르 고 물오리들이 조용히 떠다녔다. 파란 거울 같은 냇물은 다색의 물 풀을 흔들며 흐르고 있었다. 언덕으로 접어들자 냇물은 옆으로 구부 러져 흘렀다. 돌다리가 그 위에 걸려 있었다. 낮은 다리 가에 양복 직공 같아 보이는 마른 사나이가 앉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자고 있었 다. 모자는 먼지 속에 떨어져 있었다. 곁에 한 마리의 개가 앉아 주 인을 지키고 있었다. 낯선 사나이는 잠들어 있는 사나이를 깨워주려 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다리 너머로 떨어 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의 높 이는 얼마 높지 않았고 물도 얕았다. 그래서 양복장이를 그대로 놓 아두기로 했다. 좁고 가파른 언덕을 넘자 팔돔 시의 문이 나타났다. 문은 활짝 열 려져 있었는데, 그 곳에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사나 이는 그 문을 지났다. 그의 발소리는 돌이 깔린 작은 길에 높이 울 렸다. 이곳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골목에는 빈 수레와 마차들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좁은 골목은 그늘진 채 어두웠고 높 은 창만이 금빛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그네는 사다리 모양으로 테가 달린 마차에 기대 앉아 잠시 쉬었다. 일어섰을 때 그는 아가 길에서 주운 놋쇠판의 쉬고 있던 마차의 마부자리에 올려놓았다. 미처 다음 골목에 이르기도 전에 근처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와 장터의 환성이 들려왔다. 수많은 노점에서 장사꾼들이 소리치며 물건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은빛 도금을 한 나팔을 불었고, 고기 장사는 펄펄 끓는 큰 가마솥에서 갓 만들어진 소시지를 꺼냈다. 돌 팔이 의사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그의 뒤에 걸려 있는 인간의 모든 질병이나 결함을 나타내는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곁을 검고 긴 머리의 사나이가 낙타를 끌고 지나갔다. 낙타는 긴 목을 쑥 내밀고 거만스럽게 군중을 내려다보고는 벌어진 입을 우물거렸다. 숲속에서 나온 사나이는 주의깊게 그런 것들을 바라보았다. 사람 들에게 여기저기 떠밀리면서 그림을 파는 사나이의 노점을 들여다보 기도 하고, 사탕 바른 과자 위에 쓰인 속담이나 격언을 읽는 것이었 다. 그는 찾고 있는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듯 어느 곳에서도 발 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렇게 느릿느릿 가고 있는 사이에 시내 중심 지에 있는 큰 광장으로 나왔다. 그 한쪽 구석에 새장사가 노점을 벌 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새장에서 나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빨간방울새, 메추라기, 카나리아, 꾀꼬리 등의 새들 에게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어 대답을 했다. 그는 몸 가까이에서 무엇인가가 갑자기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번 쩍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햇빛이 모조리 이 한 점으로 집중되기라 도 한 것 같았다. 따라가 보니 그것은 어느 노점에서 걸려 있는 커 다란 거울이었다. 그 거울 곁에 다른 거울이 숱하게 많이 걸려 있었다. 큰 것, 작은 것, 네모난 것, 둥근 것, 계란 모양이나 걸어놓는 거울은 물론 세워 놓는 거울도 있었다. 자기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들고 다닐 수 있는 작고 얇은 손거울도 있었다. 거울 장사는 일어서서 번쩍거리는 손거울에 햇빛을 잡아 눈부신 반사광을 자기의 가게 위에서 춤추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쉬지 않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거울입니다. 거울! 여러분, 거울이라면 여기서 사세요! 팔돔에서 가장 좋고 가장 싼 거울입니다! 거울이에요. 아주머니들, 기막힌 거 울입니다! 모두들 구경하세요. 모두 진짜 가장 좋은 유리로 된 거울 입니다!" 낯선 사나이는 그가 구하던 것을 찾아낸 사람처럼 이 거울가게 앞 에 멈춰섰다. 거울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세 명의 시골 처녀도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 세 사람을 유심히 보았다. 싱싱하고 건강해 보이는 시골 처녀들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으며, 튼튼한 밑창이 달린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얼마 간 햇볕에 그을은 금발을 늘이고 젊디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세 사 람은 제각기 거울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는데, 모두가 크거나 값 진 물건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거울 사는 것을 망설이며 선택의 기 쁨과 고민을 맛보고 있었다. 각기 번쩍이는 거울 속을 꿈꾸듯이 바 라보며 입이며 눈이며 작은 목걸이며 코 위의 주근깨며 윤기가 나는 머리나 장미빛 귀 등 자기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들은 아무 말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낯선 사나이는 세 처녀의 뒤에 서서 그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새 개의 거울에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아아!" 그는 첫번째 처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 머리가 붉은 금빛이고, 무릎에 닿을 만큼 길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번째 처녀는 친구의 소원을 듣자 한숨을 쉬고는 더 한층 열심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고 전부터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던 것을 수줍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약 가질 수만 있다면 뛰어나게 아름다운 손을 가졌으면 해. 길고 가는 손가락의 장미빛 새하얀 나긋나긋한 손을 말이야." 그러면서 계란 모양의 거울을 들고 있는 자기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보기 흉하진 않았지만, 약간 짧고 굵었으며, 일 때문에 거칠어 져 있었다. 세번째의 가장 작고 즐거워보이는 처녀는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외쳤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소망이지만, 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냐. 나 는 오늘부터 팔돔 온 나라 안에서 제일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때 그 처녀는 갑자기 놀라면서 뒤돌아보았다. 거울 속의 자기 얼굴 뒤에서 검게 빛나는 눈의 낯선 사나이 얼굴이 들여다보였기 때 문이었다. 그것은 그녀 뒤에 다가서 있던 낯선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세 처녀는 그때까지 그 사나이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세 처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보자 그는 처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말했다. "아가씨들은 방금 세 가지 아름다운 소망을 말했었지요. 아가씨들 은 정말 그것을 바라시나요?" 작은 처녀는 거울을 놓고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녀는 자기 를 깜짝 놀라게 한 보복을 그 사나이에게 해주려고 따끔한 말을 생 각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눈에서 대단한 힘이 전해져오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바란 소원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그녀는 겨우 그렇게만 말하고 얼굴이 빨개졌다. 이에 비해 아름다운 손을 원했던 처녀는 사나이에게 신뢰의 마음 이 들었다. 그 사나이의 모습에서 어딘가 아버지같이 존경할 만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네, 그래요. 우리의 소원은 진정이예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바랄 수 있나요?" 거울장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였다. 낯선 사나이는 모자의 차양을 올렸다. 그러자 밝고 높은 이마와 빛나는 눈이 보였다. 그는 세 처녀에게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면 서 큰 소리로 말했다. 처녀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허둥지 둥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모두들 놀라움과 기쁨에 파랗게 질렸다. 첫번째 처녀는 무릎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처녀는 매우 희고 보드라운 공주님 같은 손에 거울을 들고 있 었다. 세번째 처녀는 갑자기 빨간 가죽 무도화를 신고, 새끼 사슴처 럼 탄력있는 가는 발목 위에 서 있었다. 그녀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아한 손을 갖게 된 처녀는 기뻐서 울음을 터뜨리며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그 긴 금발 속에 행복한 눈 물을 쏟았다. 갑자기 그 가게 앞은 이상한 일로 떠들썩했다. 처음부터 이를 목 격한 젊은 직공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돌처럼 되어 사나이를 보았 다. "당신도 뭔가 소원을 말하고 싶은 것이 있소?" 갑자기 그 낯선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직공은 놀라 몸을 흠칫했다. 그는 어리둥절해져서 무엇을 바랄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푸줏간에 굵고 빨간 소시지의 큰 고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엉겁결에 그곳을 가리키면서 "저런 소시지 고리를 하나 받았으면 좋겠네요."하고 중얼거렸다. 그 러자 놀랍게도 정신을 차려보니 소시지 고리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 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각자가 좀더 사 나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버둥댔다. 사나이는 그들을 제지하고 차례로 소망을 말하게 했다. 먼저 차례가 된 자는 이제 제법 대담해 져서, 아래 위 새로운 순모 양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치 기가 무섭게 그는 시장조차 그보다 더 좋은 옷은 없을 정도로 기막 히게 값진 새옷을 입고 있었다. 다음 차례의 시골여자는 마음을 다 부지게 먹고 십 타렐을 원했다. 그러자 십 타렐이 주머니 속에서 쩔 렁쩔렁 소리를 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 소식은 곧 장터를 넘어 온 거리에 전해졌다. 그러자 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 은 거울가게 앞에 쉴 새 없이 모여들었다. 아직도 웃거나 야유를 하 는 자도 많았고, 그 사실은 믿지 않고 의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욕망의 열에 들떠 눈을 빛내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 뛰어왔다. 모두들 자기가 소원할 차례가 되기도 전에 샘물이 말라버리면 큰일이라고 여기며 욕망과 근심으로 뒤틀린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과자나 화살, 개, 호도가 잔뜩 든 자 루, 책이나 장난감을 원했다. 소녀들은 새옷이며, 리본, 장갑이나 양 산을 받고 기쁨에 들떠 돌아갔다. 할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지 않고 도망쳐 나온 열 두 살 가량의 작은 사내아이는 그저 기막힘과 장터 의 호화로운 정경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는 명랑한 목소리로 살 아 있는 새끼말이 필요하다, 그것도 검은 빛깔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뒤에서 검은 새끼말이 히힝거리며 소 년의 어깨에 정답게 머리를 문질렀다. 마법에 취해버린 군중들을 비집고 단장을 든 노총각이 앞으로 나 섰다.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낯선 사람 앞에 다가서더니 흥분한 나 머지 거의 입이 벌려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 난...."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난, 이, 이백 타렐을 원.... 원하..... 합니다." 그러자 낯선 사나이는 그를 힐끗 보고 나서 가죽지갑을 주머니에 서 꺼내 흥분하고 있는 사나이의 눈 앞에 내보이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 당신, 이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소? 안에 반 타 렐이 들어있는데." "예, 제, 제가 잃었읍니다." 노총각은 외쳤다. "그, 그건 제겁니다." "돌려받고 싶소?" "예. 이, 이리 주세요." 이리하려 그는 지갑을 손에 넣었다. 그것으로 그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들 고 있던 지팡이로 낯선 사나이를 내리쳤다. 그러나 낯선 사나이에게 맞지 않고 거울을 한 개 깨뜨렸을 뿐이었다. 그러자 장사꾼이 재빨 리 달려들어 돈을 요구했다. 노총각은 거울값을 치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뚱뚱한 사나이가 나서서 자기 집의 지붕을 새로 올리기 위한 돈을 소망했다. 그러자 그의 집은 어느새 새로 올린 기와와 흰 칠을 한 굴뚝을 지붕에 올린 채 골목 안에서 그를 향해 빛났다. 그 렇게 되자 모두들 환성을 올렸고 소망은 더 한층 높아졌다. 이윽고 한 사나이가 서슴치 않고 매우 겸손스러운 태도로 시장 한복판에 오 층집이 한 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십 오 분 후 에 벌써 오 층짜리 자기 집 창가에서 장터를 자랑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렇듯 기대에 부풀었던 장구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 져버렸다. 거리의 활기는 모두, 개울이 샘에서 흘러나오듯이 낯선 사 나이가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고 서 있는 거울가게 앞으로만 모이 게 되었다. 하나하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때마다 경이의 탄성, 부러 움, 안타까움 등의 뒤섞인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굶주린 작은 소년은 모자에 가득 찰 만큼의 살구를 바랬을 뿐이었는데, 다른 사나이의 덕분으로 모자는 은화로 가득 차게 되었다. 또한 뚱뚱한 장사꾼의 아내가 고치기 힘든 목의 종기를 고쳐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는 커다 란 환성과 갈채가 일었다. 그런데 이때 노여움이나 악의가 과연 무 슨 일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여자의 남편은 그녀 와 사이가 나빠 항상 다투고 있었다. 그는 부자가 되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는 소망을 뿌리치고, 없어진 아내의 목에 종기가 돋아나 고 만 것이었다. 어쨌든 일단 아픈 곳이 완치되는 것을 보자 사람들 은 저마다 몸이 불구이거나 아픈 환자를 데리고 왔다. 절름발이가 춤을 추고, 장님이 축복받은 눈으로 놀라운 듯이 햇빛을 향해 보인 다고 외쳐대자 군중들은 새로운 흥분 속에 잠겼다. 소년들은 그 사이에 재빨리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이 놀라운 기 적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나이 많은 충실한 여자 요리사는 주인을 위해 화덕 앞에서 거위를 기름으로 튀기고 있다가 시장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소원을 빌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청 하기 위해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록 양심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막상 그녀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욕망을 누른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가 돌아갈 때까지 거위가 타지 않게 해달라고만 빌었다. 그녀의 소원도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소동은 끝이 없었다. 아기를 돌보던 소녀들은 아기를 안은 채 집 에서 빠져나와 달려왔다.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들도 정 신없이 속옷바람으로 골목을 뛰어나왔다. 한 할머니는 시골에서 거의 절망상태로 순례를 떠나왔었는데, 무 슨 소망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는 흐느끼면서 잃어버린 손자를 무사한 모습 그대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보라, 할머니의 손 자가 검은 새끼말을 타고 와서는 웃으면서 노파의 팔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온 거리가 열광에 사로잡혔다. 소원이 이루어진 연인들은 쌍쌍이 팔을 잡고 거닐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입었던 낡은 옷을 입은 채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어리석은 소망을 한 것 을 후회하는 사람들은 슬퍼하며 돌아가거나 장터의 명물이 된 샘터 에서 술을 퍼마시는 것으로 섭섭함을 달랬다. 그 샘은 한 익살꾼의 소망으로 기막힌 포도주가 솟아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팔돔 거리에서 이 기적의 소식을 몰라 소망을 품어보지 못한 사람은 단 두 명의 청년뿐이었다. 그들은 변두리의 낡은 집 다락방 에서 창문을 굳게 닫고 틀어박혀 있었다. 한 사람은 방 한가운데 서 서 바이올린을 턱 밑에 대고 정신없이 켜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구석자리에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 그 바이올린 소리를 듣 고 있었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태양이 어느새 비스듬히 기 울어 노을져 빛났다. 노을 빛은 테이블 위의 꽃다발 속에 불타고 있 었고 찢어진 벽지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방은 마치 작고 비밀스 러운 보물창고가 보석의 번쩍임으로 채워지듯이 따사한 햇살과 바이 올린의 열렬한 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청 년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또 한 청 년은 조용히 마루를 바라보며 자신을 잊은 듯이 도취경에 빠져 꼼짝 도 않고 있었다. 그때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골목에 들리고, 현관문이 열려졌다. 무 겁고 요란한 발소리는 층계를 올라 지붕밑 다락방 문 앞에 이르렀 다. 집주인이었다. 그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크게 웃으면서 방안 을 향해 외쳤다. 이 와중에 바이올린 소리는 갑자기 멈춰지고, 묵묵 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청년은 거칠게 뛰어 일어났다. 바이올린을 켜던 청년도 방해받은 사실에 화가 치밀어 웃고 있는 집주인의 얼굴 을 나무라듯이 쏘아보았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 지 않고 마치 술주정뱅이처럼 팔을 흔들며 외쳤다. "이 바로 같은 사람들아. 이런 데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니. 바깥 세상은 온통 변해버렸어. 눈을 비비고 늦지 않도록 어서 가보라구, 장터로 말이야. 누구의 소원이건 틀림없이 들어주는 사나이가 있어. 그 사람한테 가서 소망만 말한다면 당신들도 이런 다락방 구석에서 그 잘난 집세 걱정을 안 해도 된단 말이야. 자아, 늦기 전에 어서어 서 가보라구! 나도 오늘, 덕분에 부자가 됐어."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집주인이 자꾸 귀찮게 재촉하는 바람에 그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모자를 썼다. 친구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집을 나서자 이내 거리의 절반이 이상야릇하게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꿈을 꾸듯이 숨막히는 느낌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그 집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잿빛으로 그을러 있었고 단층이었는데, 이제는 궁전처럼 드높 이 아름답게 서 있었다. 거지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고, 아름다운 집의 창가에서 자랑스러 운 듯이 거만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라빠진 양복 직공차림의 한 사나이는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있었는데, 어깨에 무거운 푸 대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푸대에서는 금화가 땅 위 로 줄줄 떨어져내렸다. 그들 두 청년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장터로 나가 거울을 팔고 있는 가게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 낯선 사나이가 서 있다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소망을 말하는 것이 그리 급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나 는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었소. 그럼 어디 필요한 것을 말해보시오. 조금도 사양하거나 겸손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바이올린을 켜던 청년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아! 나를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필 요하지 않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구? 잘 생각해보시오!" 낯선 사나이는 외 쳤다. "무엇이건 좋아요. 생각나는 것을 바라면 되는 거요." 바이올린 연주자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이올린이 하나 필요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떠들썩해도 그 소동이 내게 닿지 않도록 자신을 잊고 켤 수 있는 기 막힌 바이올린이." 그는 벌써 훌륭한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켜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천국의 노래처럼 달콤하고 힘 차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바이올린 연주자는 열심히, 훌륭히 켤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올라가 마침내 공중으 로 사라져버렸다. 아득히 먼 곳에서 그의 음악은 저녁놀처럼 어렴풋 이 빛나면서 계속 울려왔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무얼 바라나요?" 낯선 사나이는 다른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바이올린 켜는 내 친구를 하늘로 올려 보냈읍니다!" 그 젊은 청년은 말했다. "나는 그 친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 것과 그 친구를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원이 없어요. 그러니 나는 산이 되고 싶습니다. 팔돔 나라만큼 크고, 구름보다 높이 솟은 불멸의 산 말입니다." 그러자 땅 밑이 울리기 시작하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리고, 거울은 차례로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 졌다. 장터는 마치 잠들어 있던 고양이가 눈을 뜨고 등을 추켜올리 는 바람에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깔개가 들어 올려지듯이 온통 서서 히 들어 올려지는 것이었다. 무서운 공포가 군중들을 엄습했다. 수많 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들판으로 도망쳤다. 장터에 남은 사람들은 시가지 뒤에 커다란 산이 저녁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기슭에서 조용히 흐르던 냇물이 희고 사나운 골짜기의 냇물로 변 하고, 높은 산에서 거품을 품어내면서 숱한 폭포를 이루거나 춤을 추면서 골짜기로 떨어져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주 잠깐 사이에 팔돔 나라 전체가 큰 산이 되어 그 기슭에 시가지가 놓여 있었다. 멀리 낮은 곳에 바다가 보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피해를 입은 자는 없었다. 거울가게 앞에 서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노인은 이웃사람에게 말 했다. "세상이 미쳐버렸구먼. 나는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게 즐겁네만. 다 만 그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깝구만. 나는 그 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단 말이야." "정말 그렇군요." 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낯선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나이는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들이 새로 생긴 산을 올려다보니 그 낯선 사나이가 가장 높은 곳 으로 망토를 바람에 날리면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저 녁하늘을 향해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더니 이내 바위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산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고, 모든 새로운 것은 낡아지게 마련이다. 오 랜 세월이 흘러 큰 장은 옛날에 사라져버렸다. 그때 부자가 되기를 바랐고, 부자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벌서 옛날에 다시 가난뱅이로 돌아와 있었다. 긴 붉은 금발머리를 원했던 시골처녀는 어느덧 결혼 을 한 지 오래 되어, 아이들을 줄줄이 갖게 되었다. 그 아이들은 여 름철마다 거리의 장터로 가곤 하였다. 능숙하게 춤을 출 수 있기를 원했던 처녀는 목수의 아내가 되었는데, 여전히 춤을 잘 추었다. 그 녀의 남편은 그때 아주 많은 돈을 받았지만 이들 내외의 씀씀이가 너무나 헤퍼 얼마 못 가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아름다 운 손을 원했던 세번째 처녀는 그들 중에서 그 낯선 사나이를 가장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이 처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부자도 되 지 않았지만 예쁘고 고운 손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손 때문에 농사일도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마을에서 아이들을 보아주 거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갔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여 가난 뱅이가 부자가 되었고, 팔돔 나라가 산이 되었는지 하는 이상한 장 터의 이야기를 모두 그녀에게서 들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할 때 면 미소를 띠우고 자기의 공주님같이 고운 손을 바라보며 감동한 듯 한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녀는 항상 가난하고, 남편도 없었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줄 때면 그때 거울가게 앞에서 그녀보다 빛나는 행복의 제비를 뽑은 사람은 없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무렵에 젊었던 사람은 이제 모두 나이를 먹었고 그 당시에 늙 었던 사람은 이제는 죽어버린 지 오래였으나 산만은 여전히 그대로 였다. 산마루의 눈이 구름 사이에서 번쩍일 때면, 산은 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알고는 새삼스럽게 기뻐하며 미소짓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산위 바 위는 시가지와 온 나라를 굽어보며 드높이 빛났고, 그 커다란 그림 자는 매일같이 그 위를 지나갔다. 기슭의 크고 작은 냇물이나 강은 사계절의 변화를 알렸다. 산은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어버이가 되었다. 산에는 숲이 생기고 초원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풀이나 꽃으로 뒤덮였다. 샘물이 산에서 흘러나왔고 눈과 얼음과 돌이 어우러졌다. 돌 위에는 아름다 운 빛깔의 이끼가 끼고, 냇가에는 물망초가 피었다. 산 속에는 깊은 동굴이 있어, 은실 같은 물이 사시사철 맑은 음악을 연주하면서 바 위에서 바위로 떨어져내렸다. 또한 바위 틈에는 숨겨진 암맥이 있어 천 년의 인내를 지닌 수정이 비밀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아직 산의 정상에 올라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상에는 작고 둥근 호수가 있 었다. 태양과 달과 구름과 별만이 그곳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나 동물도, 하늘을 향하고 있는 산의 이 움푹 패인 속을 들여다본 자는 없었다. 독수리조차도 그렇게 높이 날아오르지 못할 터였다. 팔돔 사람들은 이 산의 맑은 골짜기 사이에서 명랑하게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산과 더불어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상공업을 영위하 고, 서로를 무덤으로 날랐다.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또 그의 자식으로 전해져 살아 남은 것은 산에 관한 이야기와 꿈뿐이었다. 양치기가 영양 사냥꾼, 고원의 풀 베는 사람이나 꽃을 채집하고 노 래를 만드는 자나 이야기꾼이 그것을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끝없이 어두운 동굴이나 숨겨진 협곡 사이의 햇빛이 들지 않는 폭포나 깊이 갈라진 빙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산이 무너져내리는 길목이 며 천둥번개가 일어나는 곳을 알았다. 이 나라가 받는 따뜻함이나 추위, 물이나 농작물의 성장, 날씨나 바람 등은 모두가 산에서 오는 것이었다. 옛일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몰랐다. 팔돔 사람들은 누구나 바라 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는 옛날의 신기했던 큰 장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은 믿었으나, 그 날 팔돔의 산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산은 태고 때부터 그곳에 있었고, 영원히 그 자 리에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산은 그들의 고향이었고, 팔돔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세 처녀나 바이올린 연주자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즐겨 들었다. 그리고 어느 시대이건 그때 그 청년처럼 문 을 닫고 정신없이 바이올린을 켜는 데 열중하고 있는 청년이 있었 고, 그들은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하늘로 올라간 그 바이올린 연주 자처럼 자기도 바람을 타고 사라지고 싶다고 꿈꾸는 것이었다. 산은 커다란 모습으로 조용히 살아 있었다. 산은 매일같이 붉은 태양이 먼 대양 위로 떠올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산마루를 도는 것 을, 또한 매일 밤별이 같은 길을 지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해마다 겨울은 두터운 눈과 얼음으로 산을 덮었다. 해마다 봄이 오 는 계절에는 눈사태가 길을 덮고 잔설 언저리에서 시원한 눈의 꽃이 파랗고 노랗게 웃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냇물은 더 한층 불어나고 호수는 빛을 받아 따사롭게 푸른 빛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협곡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둔하게 울렸고 산꼭대기의 작고 둥 근 호수는 얼음에 무겁게 덮이어, 여름 한철 잠시 동안 맑은 눈을 열어 태양을 비추고, 별을 비추기 위해 일 년 내내 여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두운 동굴에는 물이 고이고, 바위는 끊임없이 물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울렸다. 숨겨진 깊은 골짜기에서는 천 년의 수정이 충실하게 완성을 향해 커가고 있었다. 산기슭, 거리에서 그리 높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한 골짜기에는 폭넓은 냇물이 거울처럼 맑게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 사이를 흐르 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은 그곳으로 가서 산이나 나무들 에게서 계절의 경이로운 신비와 변화를 배웠다. 다른 골짜기에서는 사나이들이 말이나 무기로 훈련을 했다. 험준한 높은 바위의 둥근 꼭대기에서는 매년 하지 날 밤에 큰 불이 지펴졌다. 세월은 흘러갔다. 산은 사랑의 골짜기나 연무장을 보호했다. 산은 목동이나 나무꾼이나 뗏목 사공에게 일하는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최초의 하지 날 불이 바위 위에서 빨갛게 타는 것은 태연히 바라보 며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그것이 수백 번이나 되풀이되는 것을 보 았다. 산은 저 아래 시가지에 우둔한 사람들이 더욱 많이 찾아들고, 낡은 성벽 밖에까지 뻗어가는 것을 보았다. 산은 다시금 사냥꾼들이 활을 버리고 총으로 짐승을 쏘는 것을 보았다. 산에게 있어서는 한 세기가 한 계절처럼, 한 해가 한 시간처럼 흘러갔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제부턴가 바위 꼭대기에선 빨간 하지 날의 불이 지펴지지 않았고, 그것은 그때부터 줄곧 잊혀져버린 사실 이 되어갔어도 산은 개의치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무술 을 연마하던 골짜기가 황폐해지고, 말이 훈련을 받던 풀밭에 차전초 나 엉겅퀴가 무성해도 산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몇 세기나 되는 긴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산사대로 산의 모양이 변하고 굴러떨어진 바 위 때문에 팔돔의 거리가 절반이 파괴되어버려도 산은 그것을 저지 하려 들지 않았다. 산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부 서진 거리가 그대로 몰골 사납게 방치되어 재건되지 않고 있다는 사 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런 모든 것에 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다른 것이, 산 자신의 문제들이 산을 슬프게 만들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과연 산은 나이를 먹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이 동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보아도 옛날 같지가 않았다. 별이 잿빛의 빙하에 비칠 때도 산은 이미 자기가 별과 동류라고는 느끼지 않았 다. 산에서 있어 태양과 별은 이제는 중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산에게 중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나고 있는 일이었다. 바위와 동굴 아래 깊은 곳에서 낯선 손이 일을 하고 있고, 굳은 원 시암이 풍화로 물러져서 바위의 층이 되고, 냇물이나 폭포가 차츰 깊이 파고드는 것을 산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빙하는 사라지고, 호수는 커졌다. 숲은 돌의 들판으로 초원은 검은 늪으로 변했다. 빙하로 인해 생긴 퇴적암이나 자갈의 황량한 흐름이 뾰쪽한 혓바닥 모양을 이루어 끝없이 깊게 산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 왔다. 산 밑의 땅은 이상스럽게 변해버렸다. 돌투성이가 되고, 불타 버리고 말았다. 산은 더욱 더 자신의 깊은 생각 속으로 잠겨들었다. 태양이나 별처럼 산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산은 강하게 느꼈다. 그의 동류는 바람과 눈과 얼음이었다. 그의 동류는 영원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서서히 사라지고, 서서히 없어지고 있는 것이 었다. 산은 더 한층 열심히 냇물을 골짜기로 이끌고, 더한층 조심스럽게 눈사태를 밑으로 굴리고, 정성스럽게 꽃의 들판을 태양 아래에 내놓 았다. 늙어진 산은 인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을 자기의 동류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산은 쓸쓸한 생각이 들게 되었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도시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의 골짜기에서는 더 이상 노래는 들리지 않았으며, 목장의 오두막집이 없어진 지도 이미 오래였다. 인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고 어떤 불길한 그림자 만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소멸이 무엇인가를 느끼자 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산이 떨리자 꼭대기가 옆으로 쓰러져 굴러 내렸다. 바위는 그 뒤를 따라 오래 전 부터 돌투성이가 되어 있던 사랑의 골짜기를 넘어 바다 속까지 굴러 들어갔다. 시대는 완전히 바뀌었다. 산은 이제서야 인간에 대해 회상하고, 생 각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여름의 불이 타오르고, 사랑의 골짜기에 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거닐던 그때는 얼마나 아름다왔던 가! 아아, 그들의 노래는 그 얼마나 달콤하고 따사롭게 울렸던가! 늙은 산은 추억에 잠겨버렸다. 몇 세기가 흘러가도, 여기저기 동굴 속에서 어렴풋한 천둥소리와 함께 땅이 무너져 내리거나 주저앉아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산이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지나간 시절의 아련한 여운이며, 야릇한 감동, 사랑, 동경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자기도 과거에는 인간이었거나 인간과 비슷한 것이었던 것처럼, 자기도 노래 부르고 남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던 것처럼, 덧 없는 세월의 화상이 그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왔다. 세월은 흘러가버렸다. 점차 가라앉으며 울퉁불퉁한 돌의 황야에 둘러싸여 빈사상태의 산은 꿈에 잠겼다. 전에는 어떠했던가? 산을 과거의 세계와 연결시킨 울림과 가느다란 은빛 실은 정녕 없어졌는 가? 산은 애써 낡은 기억의 어둠 속을 파헤쳐 끊어져나간 실을 침착하 지 못한 손으로 더듬어갔다. 산은 사라져가는 과거의 심연 속에 헛 손질을 되풀이하고는 몸을 가누었다. 자신에게도 아득한 옛날에는 가족이 있었고 사랑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만물의 초창기에는 그를 위해서 어머니가 노래해주지 않았던가? 산은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호수는 탁해지고 무거워져 늪으로 변했다. 풀과 꽃이 만발했던 아늑한 곳으로 눈물처럼 돌이 굴러 떨어졌다. 산은 생각했다. 멀고 먼 곳에서부터 무엇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노래였다. 인간 의 노래였다. 아아! 그것이다. 산은 이것을 깨닫고 안타까운 기쁨에 떨었다. 그 소리는 계속 들렸다. 한 인간이, 젊은 청년이 완전히 소리에 싸여 공 중을 떠돌다가 햇살이 비치는 하늘로 들어가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파묻혀 있던 온갖 기억이 흔들리며 풀려나오고, 굴러나오기 시작했 다. 어두운 눈을 가진 인간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강요하듯이 산에게 물었다. "소망을 말해보고 싶지는 않나?" 산은 한 가지 소망을, 비밀의 소망을 말했다. 그러자 그렇듯 먼,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된 과거를 회상하던 고민이 산의 어깨에서 떨 어져내렸다. 산을 슬프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그 어깨에서 떨어져내 렸다. 그리고 산은 뒤집혀서 팔돔과 하나가 되었다. 팔돔이 있었던 곳에 는 끝없는 바다가 드높게 물결치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위를 태양과 별이 차례로 지나갔다. <<< 붓꽃 >>> 안젤름은 어린 시절의 어느 봄날에 푸른 정원에서 뛰어 놀고 있었 다. 어머니가 가꾸는 꽃 중에 아이리스라는 꽃이 있었는데 안젤름은 그 꽃을 특히 아꼈다. 그는 푸른 잎사귀에 뺨을 문지르기도 하고, 손 가락으로 그 끝을 눌러보기도 하고, 활홀하게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기를 즐겼다. 푸르스름한 꽃 밑바닥으로부터 노란 손가락 같은 것이 여러 개 일어나면서 그 사이로 밝은 길이 꽃받침 아래쪽으로 뻗어 꽃의 아득하고 푸른 신비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젤름은 그 꽃을 매우 사랑했으며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하였다. 이 꽃들이 늘어선 광경은 마치 왕의 정원에 세워진 황금 울타리같이 보였으며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꿈속의 나무가 두 줄로 이어 서 있 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나무가 늘어 서 있는 사이로 신비에 싸인 길 이 유리같이 섬세하고 생기 있는 수맥관을 통해 내부로 밝게 이어져 있었다. 꾸불꾸불한 만곡이 끝없이 확장되어갔으며, 뒤쪽으로는 황금 빛 나무 사이로 난 길이 수맥 속으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위로 보랏빛 지붕이 왕관처럼 드리워져 마법의 힘을 느끼게 하는 검은 그늘을 만들어 놓았다. 안젤름은 이것이 그 꽃의 출입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노랗고 화려한 꽃 뒤에는 그 꽃의 마음과 생각이 푸른 수맥 속에 담겨져 있 다는 것과 이러한 거룩하고 밝은 유리 같은 맥관이 있는 길로 그 꽃 의 숨결과 꿈이 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꽃 옆에 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작은 봉오리들이 있었는데 그 봉오리들은 단 단하고 부드러운 줄기에 달린 푸르스름한 작은 꽃받침에 달려 있었 고 그 봉오리로부터 어린 꽃이 조용하고 힘차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푸른 나뭇가지와 라일락 사이에 잠겨들곤 하였다. 어떤 때 는 어린 진보라색 꽃이 팽팽하고 연약하게 위로 감겨 올라간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감겨 올라간 어린 꽃잎에는 맥관과 수백 갈래의 무 늬가 보였다. 안젤름이 집과 잠, 꿈과 낯선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는 아침에 정원은 항시 새롭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안젤름은 그 정원에서 푸른 깍지로부터 나온 파란 꽃잎 끝을 보았으며 어린 꽃이 푸르스름 하게, 마치 허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달려 있는 것도 보았다. 그것은 마치 혀나 입술같이 보였다. 그 꽃들은 오랫동안 꿈꾸어온 형상을 어루만지듯이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에서는 여전히 껍질을 뚫기 위해 조용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인간들은 연한 금빛 식물, 밝게 빛나는 길 그리고 아득하게 향기를 뿜는 영혼 의 심연이 준비된 것을 예감한다. 아마도 그 꽃은 정오나 저녁때 피 어나 황금빛 꿈의 숲속에서 파란 명주 천막처럼 펼쳐지게 될 것이 다. 그리고 그 꽃들의 최초의 꿈, 생각과 노래가 마법의 심연으로부 터 고요히 울려나온다. 날이 새면 파란 초롱꽃이 풀밭 가득 피어 있었고 갑자기 정원에는 새로운 울림과 향기가 가득 차게 되고 불그스레하게 볕을 받은 나뭇 잎 위로 최초로 피어난 차 향기 가득한 장미가 연하고 발그레한 모 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날이 새면 아이리스 꽃은 더 이상 피지 않았 다. 꽃은 시들어버리고 금빛의 좁은 길은 향기 가득한 신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단단한 잎사귀만이 날카롭고 차갑게, 낯설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붉은 딸기가 덤불 속에서 익은 채 열려 있었고 아 네모네나 앵초 위에는 새로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나비가 자유로이 노닐며 살고 있었다. 그 나비는 진주빛 등을 가진 적갈색 나비로 윙윙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는데 나방과에 속하는 것 같았 다. 안젤름은 나비와 잔돌맹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딱정벌레와 도마뱀을 친구로 삼았다. 새들은 안젤름에게 새의 역사에 대해서 이 야기해주었고, 양치류 식물들은 그에게 커다란 잎사귀 지붕 밑에 있 는 갈색의 씨들을 몰래 보여주었고, 유리 조각들은 태양 광선을 푸 르고 투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마치 왕궁의 정원이나 번쩍번쩍 빛나는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백합들이 시들자 카프친 꽃이 만발하 였고, 다향장미가 시들자 나무딸기도 갈색으로 변하였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항시 시들고, 사라지고는 또 다시 피어났다. 바람이 차갑게 잣나무 가지를 흔들고 정원 가득히 시든 나뭇잎이 잿빛의 빛바랜 색 깔로 나부끼고 있는 근심의 계절에도 역시 노래와 삶의 경험과 역사 가 있었다. 이윽고 다시 모든 것은 시들고 창문에는 눈이 쌓이고 또 다시 창 가에 종려나무가 자라고 천사들이 은빛 종을 울리며 저녁하늘을 날 며, 평야와 대지에는 과일 말리는 향기가 가득했다. 어떠한 것도 이 행복한 세계에서 우애와 신뢰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검은 송악 잎사귀 옆에 핀 눈꽃풀이 색채를 발하고 푸른 창공 높이 한 마리의 새가 날게 될 때 모든 것이 다시 소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늘 그래야 되는 것처럼 똑같이 꽃이 피기를 바라며 아이러스 줄기로부터 푸른 꽃망 울이 서서히 움터오는 것이 보이곤 했다. 안젤름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반갑고, 친근하고, 믿음직스러 웠다. 하지만 그에게 매년 은혜와 마법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최초로 피는 아이러스 꽃이었다. 그 꽃의 꽃받침에서 그 소년은 언젠가 어린 시절의 꿈속에서, 성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꽃의 향기와 나부끼는 잎사귀가 안젤름에게는 창조의 열쇠와 부름으 로 느껴졌다. 아이러스 꽃은 안젤름에게는 매년 순결함을 일깨워주 었다. 그 꽃은 매년 여름 새롭게, 더 신비롭게 그리고 더 포근하게 피어났다. 다른 꽃도 역시 봉오리를 가지고 있으며, 향기와 상념을 풍기고, 벌과 나비를 작고 달콤한 방 속에 가두기도 한다. 그러나 파 란 아이리스 꽃이 소년에게는 모든 생각의 가치와 놀라움의 상징과 모범이 되었다. 그가 그 꽃의 봉오리와 밝게 빛나는 꿈길을 보며 생 각에 잠겨 관목 사이로, 어두운 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노라면 그 의 영혼은 꽃의 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문은 소년에게 환 상의 수수께끼로 보였고 예감으로 느껴졌다. 소년은 밤에도 이 꽃의 꿈을 꾸었다. 이 꽃의 꽃받침은 천국으로 통하는 문처럼 거대하게 보였으며, 백조가 날아와 그를 태우고 마법 의 세계를 미끄러지듯 날아서 거룩한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 그 심 연에서는 모든 기다림이 이루어졌고 예감해오던 것이 실재의 것으로 이루어졌다. 대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하나의 상징이고 그 상 징은 열려진 문이다. 그 문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와 나, 낮과 밤, 그 모든 것들이 그 세계에서는 하나가 된다. 우리 모두는 이곳저곳에서 살아가는 동안 열려진 문으 로 들어서게 되고 보여지는 모든 것이 상징이고 상징의 이면에는 영 혼과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언젠가는 하게 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자유로이 그 문을 통과하며 예감된 내부의 현실에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어린 안젤름에게 그 꽃은 (어린 영 혼의 은혜로운 대답에 대한 솟구치는 예감에서 나온) 열려진, 고요한 의문으로 보였다. 따라서 사랑스러운 여러 가지의 것들이 그에게는 그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친근한 것들, 풀과 돌, 뿌리, 덤불숲, 동 물의 놀이나 이야기와 연관되어졌다. 종종 그는 그러한 것들을 관찰하는 일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그 리고 그 모습의 아름다움에 빠진 채 앉아 있곤 하였다. 또한 눈을 감은 채 물을 마시거나, 노래를 하거나, 숨을 쉴 때 입이나 목 속에 서 특별한 움직임과 느낌, 어떤 표상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 좁은 길과 문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문과 길을 통해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찬탄의 심정으로 그는 그 색깔을 관찰했 다. 색깔은 눈을 감으면 종종 진보라빛으로 보였다. 또한 그 색상은 푸르고 검붉은 조각이나 반원처럼 보였고, 그 사이로 밝은 선이 보 였다. 때때로 안젤름은 놀라운 심정으로 눈과 귀, 후각과 촉각 사이의 섬세하고 다양한 관련성을 느꼈다.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음 색, 음향, 문자들이 동류의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어우러져 부드러움과 딱딱함이 잘 조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또 한 그는 풀잎이나 잘려진 푸른 나무껍질의 냄새를 맡을 때면 놀라움 을 느꼈다. 마치 후각과 촉각이 특별히 가깝게 공존하는 것 같았고,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되어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모든 어린아이들 은 처음엔 딱딱함과 섬세함으로 모든 것이 구별되지 않을지라도 곧 잘 그러한 방식으로 느낄 수 있지만 글자를 배우게 될 때쯤이면 대 부분의 어린이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잊게 되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몇몇 사람들만이 어린 시절의 그러한 비밀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나이 들어 지칠 때까지 그 같은 여운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이 그러한 비밀을 지니고 있는 한, 끊임없이 그들의 영혼 속에 자기만의 것을 창조해간다.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가면서 주위 세계와 인간 사이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를 형성해간다. 창조자와 현자들은 성숙의 계절에 이르러서도 창조의 작업에 다시 착수하게 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작업을 잊어버리고, 일직 부터 이러한 진실된 내면 세계를 버리게 되며, 평생 동안 걱정과 갈 망, 목표에 대한 방황 속에서 헤매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와 갈 망은 그들의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그들 자신의 내면이나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안젤름의 어린 시절의 여름과 가을은 살며시 다가와 지나가버렸 다. 계속해서 눈꽃, 제비꽃, 계란꽃, 백합, 상록수, 그리고 장미가 예 쁘고 풍성하게 꽃을 피우고는 다시 시들어버리곤 했다. 그는 꽃과 새와 더불어 살며 이야기를 나누고, 나무와 샘물과 같 이 지내며,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기도 하고, 정원, 어머니, 정원의 가 지각색의 돌과 오랜 우정의 근심을 최초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 해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봄이 찾아왔다. 검은 지바귀가 노래하 였지만 이전과는 달랐으며, 푸른 아이리스 꽃이 피었지만 꿈과 동화 가 아이리스 꽃의 꽃받침으로 난 금빛 길로 이어지지 않았다. 딸기 는 푸른 그늘에 숨은 채 피어 있고, 나비는 키 큰 산형화 위로 취한 듯이 날아다니고, 모든 것은 이전과 꼭 같았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대로였지만, 그는 어머니와 언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왜 그에게 상처를 주는지, 그리고 어째서 계속해서 그를 방해하는지를 몰랐다. 그는 비로소 세상이 변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느꼈던 우정도 사라졌으며 그는 그가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더 흘러가, 이제 안 젤름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정원의 수많은 돌들은 지루하게 느껴 졌고 꽃들은 침묵했으며, 그는 딱정벌레를 서랍 속에 있던 바늘로 찌르기도 했다. 영혼은 길고 경직된 미로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예전 에 느꼈던 기쁨은 마르고 시들어갔다. 한 젊은이가 최초로 시작된 듯한 삶 속으로 성급하게 뛰어든 것이었다. 상징적 세계는 사라져버 리고 새로운 희망과 길이 그를 유혹하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아련한 안개처럼 의미한 기억 속 에 남아 있었지만 그가 기억을 하더라도 어제는 그것을 더 이상 사 랑하지 않았으며, 그의 머리는 근시안적이 되어버렸고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용기와 가질 수 있는 만큼의 지혜로 눈에 보이는 것 안 에서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한정되고 지루한 시간 속에서, 우울함에 빠져들게 되자 좋은 학교 친구와 사귀기도 하고 혼자 있기도 하고, 책속에 밤새도록 몰 두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연회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보기도 하였다. 그는 전혀 향수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가 훌륭 한 모습으로 변하여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것을 같이 가져왔다. 그가 옛날의 정원으로 갔을 때 그의 눈에 정원은 작고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돌과 꽃의 무늬 속에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 푸르고 신비한 아이리스 꽃 속에 살고 있는 신과 영생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었다. 안젤름은 학생이 되어, 붉은 옷과 노란 모자를 쓰고 고향에 왔다. 입 주위에는 수염이 돋고 턱수염도 났다. 그는 외국어로 된 책과 개 를 데리고 다니며 가슴에 매단 가죽 가방 속에 서정적인 시집을 넣 고 다녔다. 또한 옛 현인들의 금언집과 예쁜 소녀의 사진과 편지도 넣고 다녔다.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멀리 외국을 돌아다녔으며 커 다란 배를 타고 전 세계의 대양을 돌아다녔다. 그는 검은 모자를 쓰 고 검은 신을 신은 선생님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옛 이웃들은 그를 보면 인사를 했고 그가 교수가 아닌데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다시 고향에 왔다. 그의 어머니를 안치한 관을 실은 길다란 마차 뒤를 그는 엄숙하게 따라갔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안젤름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유명한 교사로 대우를 받 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책을 하고 멋진 외투와 모자를 쓴 채 앉아 있거나 점잖게 혹은 유쾌하게 서 있거나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열정적으로 보이기도 하였으며 때 로는 피곤의 그늘이 눈가에 역력하였다. 그리고 마치 그가 그렇게 되기라도 한 듯이 선생님이나 연구가로 불리웠다. 그는 이제 어린 시절을 완전히 지나쳐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갑자기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 가운데 홀로 자유를 잃은 채 서 있는 자신을 느꼈다. 교수가 될 행운도 없었으며, 시민과 학생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기쁨으로도 가슴은 충족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먼지에 쌓인 것 같았다. 희망은 다시 먼 훗날 로 멀어져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길은 덥고 진부하고 낡은 것처럼 보였다. 이 당시 안젤름은 한 친구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 친 구의 누이가 그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아름다운 용모에 쉽게 끌리지는 않았다. 이것도 역시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었 다. 그 친구의 누이는 그의 마음에 꼭 들었으며 그는 자신이 그 여 자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특별한 처녀였다. 걸음 걸이와 말투가 채색되고 꾸민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걸을 때면 보 조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는 밤에 홀로 있는 동안 빈 방에 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자신의 걸음걸이에 대해 신중하게 주의 를 기울이면서 그의 여자 친구 때문에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가 부 인으로 기울이면서 그의 여자 친구 때문에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 가 부인으로 맞기에는 그녀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성미가 까다로왔으며 그녀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유식한 체하는 공 명심을 따라가는 것이 힘이 들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아무것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건강하지도 않아서 사교모임이 나 연회를 겨우 견디어낼 정도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꽃, 음악, 책, 그리고 혼자 있으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으며 세상은 그 녀에게 오직 그런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너무 섬세하고 감성적이어 서, 때때로 모든 낯선 것들이 그녀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슬프게 만 들었다. 그녀는 고독한 운명 속에서 고요하고도 품위있게 빛을 발하였는데 그런 것들은 그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부인에게 무 엇인가를 주고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 하였다. 때때로 안젤름은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다 가도 때로는 그녀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 였다. 그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상냥하고 친절한 듯하면서도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삶으 로부터 특별한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얻는다면 집 안에서 살며 음악과 손님과 더불어 지내고 싶었다. "아이리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이러스, 세상이 나 에게 또 다른 것을 줄 수 있을까! 꽃과 사색과 음악이 있는 당신의 아름답고 고요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당신과 함께 평 생을 같이하기를 원하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의 생 각 속에 함께 하기를 원하오. 당신의 이름이 나를 기쁘게 하오. 아이 리스는 훌륭한 이름이오. 그런데 나는 왜 그 이름이 특별히 느껴지 는지를 모르겠소." "하지만 당신은 알고 계세요." 그녀가 말했다. "푸 르고 노란 참붓꽃을 그렇게 불러요." "맞아!" 그는 우울한 기분으로 외쳤다.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소, 그 이름은 매우 아름다운 이름 이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에게는 어떤 아련 한 것이 생각났는데 그게 무언인지 몰랐어요. 그 이름은 마치 나에 게 깊고 아련한 기억과 연관을 갖고 있는 듯했소. 그런데도 나는 그 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아이리스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는 말없이 서서 손으로 그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그 꽃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녀는 새처럼 맑은 음성으로 안젤름에게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가슴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 꽃 의 향기가 아련한 기억과 전에 생각했던, 그러나 잃어버렸던 아름답 고 고귀한 어떤 것을 연관시켜 준다고요. 음악을 들을 때에도 그랬 고 시를 읽을 때도 그랬어요. 어떤 때는 잠깐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 고 어떤 때는 오랫동안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했어요.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계속 아래서 찾은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는 다시 잊혀져버 렸어요. 사랑하는 안젤름. 나는 믿어요. 우리가 아득히 잃어버렸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력하고,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리 라고. 그러며 그 뒤에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있을 거예요." "당신 이 그렇게 멋진 말을 하다니!" 안젤름은 칭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는 마치 숨어 있던 콤파스가 필연적으로 그에게 아득한 어떤 방향을 가리켜주는 것 같았다. 그러 나 이러한 방향은 그가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내재된 꿈 속에 서 사는 것이 과연 가치있는 것일까? 어느덧 날이 가고, 안젤름은 고독한 여행으로부터 돌아오게 되었 다. 그는 가르치는 일에 대해 느끼는 허무감과 권태로움에 견디다 못해 그의 친구집으로 가서 아름다운 아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 다. "아이리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그렇게 오래 견딜 수가 없소. 당신은 항상 나의 좋은 친구였소. 나는 이제 당신에게 모 든 것을 말해야겠소. 나는 아내를 맞이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삶은 공허해지고 의미가 없어져버릴 것이오. 내가 누구를 아내 로 맞을 수 있겠소? 당신뿐이오, 사랑하는 꽃, 당신이오. 아이리스, 당신은 어찌하겠소? 당신이 만약 꽃을 갖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갖게 될 것이요. 당신은 나에게로 와주겠소?" 아이 리스는 오래도록 침착하게 그를 쳐다보며 웃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은 채 굳은 어조로 대답했다. "안젤름! 저는 당신의 말씀이 전혀 놀랍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사 랑해요. 비록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 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보세요, 내 친구여!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 면 나는 당신에게 커다란 요구를 할 거예요.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 러한 것보다 더 큰 요구를 할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꽃을 주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요. 나는 꽃이 없어도 살 수 있 으며 음악이 없어도 살 수 있읍니다. 나는 그러한 모든 것과 그밖의 많은 것이 없어도 지낼 수 있읍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요.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없이 지낼 수가 없어요.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수 는 없읍니다. 나의 가슴 속에 있는 음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 한 남자와 같이 살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 다. 그 남자의 음악이 내 음악과 훌륭하고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어 야 하고 그 남자의 음악은 아주 순수해야 하며, 그 음악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이 그 남자의 유일한 갈망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은 항상 진실해야 하며 더 이상 유명해지 거나 명예를 바래서는 안 돼요. 당신의 집은 시끄럽지 않아야 하고, 당신의 이마에 해마다 생기는 주름살을 모두 없애야 해요. 아, 안젤 름, 그것은 불가능해요. 봐요. 공부나 새로운 근심 때문에 당신의 이 마에는 새로운 주름살이 생기게 될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 그것을 당신은 사랑하고 아름답게 보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 은 당신에게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아! 잘 들어보세요. 당신에게 장난감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삶 그 자체이고 당신에게도 역시 그래야 합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노력하고 남들 역시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가치가 없어요. 나는 변하지 않아요. 안젤름! 따라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규범에 따라 살 거예요. 당신은 변화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변화한다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안젤름은 그가 가볍고 유희적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의지 앞에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있다가 무심코 책상 앞에 놓아둔 꽃을 손안에 넣고 눌러 부숴뜨렸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그의 손에서 부드 럽게 꽃을 빼앗았다. -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 무거운 질책을 느끼 게 했다. -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밝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마치 어 둠속에서 하나의 길을 우연히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나직이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당 신은 그 꽃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꽃은 기분을 좌우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 꽃의 충 고를 받았나요? 당신은 그 꽃이 나와 당신 사이를 결정할 것이라고 믿으신 거예요?"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녀를 창백한 표정으로 조 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그를 압도했다. 그는 신뢰를 가 지고 긍정의 뜻을 표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과제를 드리겠어요." 이렇게 그녀는 말하면서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 뜻대로 하시오." 그는 굴복하였다. "이것은 진심이며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 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영혼으로부터 나를 생각하며, 당신 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값을 깎아서 팔려고 내놓지는 않겠 지요?" 안젤름은 약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은 매번 나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마다 잊었던 무엇이 생각난다 고 말했어요. 잊었던 것은 당신에게는 처음으로 중대하고 성스럽게 느껴졌었던 것이에요. 꽃이 그 표시예요. 안젤름, 이것은 당신과 나 를 매년 이어주었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의 영혼속 에 중요하고 성스러운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했다고 말이에요. 당신 은 이제 그 성스러움을 되찾아야 해요. 그래야만 행운이 찾아오고 당신을 정해진 곳으로 이끌어줄 거예요. 잘 사세요, 안젤름! 나는 당 신에게 손을 주었고 당신에게 요구했어요.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생각나는 기억 속에서 아이리스 꽃의 기억을 다시 찾으세요. 당신이 다시 그것을 발견하는 날,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될 거예요. 당 신이 원하는 대로, 그러면 당신은 더 바랄 것이 없게 될 거예요." 당황한 안젤름은 그녀의 말에 놀라와하며 이 요구를 변덕으로 생 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렷한 시선으로 그에게 약속해주기를 바라 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말없이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내리깐 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에 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가버렸다. 그는 그 여자가 준 제안을 살아가는 동안 받아들이고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처럼 특이하고, 어렵고,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 는 것 같았다. 그는 날이 감에 따라 더 심하게 방황하게 되었고 피 곤함을 느꼈다. 시간이 더 흐르자 그는 이 제안들에 대하 의심하기 시작했고 단순한 여자의 변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깊이 고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면에서 무엇인가 깊은 항변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본래의 고통, 즉 들리지 않을 듯이 조그맣게 들리는 훈계 의 말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이 자그마한 소리는 아이 리스가 했던 바로 그것을 그에게 요구했다. 이 제안은 학식이 많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요구였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 를 기억해내야만 했다. 거미줄같이 엉킨 지난 여러 해로부터 실마리 를 찾아야 했다. 그것을 찾아내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쳐 야 했다. 그것은 흩어져버리는 새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아주 작은 슬픔이나 기쁨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 색보다도 더 희박하고 덧없는 무형의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 꾸는 꿈보다도 더 하찮고, 아침 안개보다 더 불분명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가 낙담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아득한 정원의 향기 같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에 게로 불어왔다. 그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수십 번, 아니 그 이상 으로 되뇌었다. 나직하고 즐겁게 되뇌었다. 마치 팽팽한 줄의 울림을 음미하듯이. "아이리스." "아이리스." 그는 속삭이며 되뇌었다. 작은 슬픔과 더불어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버려둔 집의 문이 이유없이 열리고 서랍이 이유없이 덜그 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차근차근히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하 여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가 기억해낸 것은 전에 생각 했던 것보다 더 사소한 것이었다. 모든 세월이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책장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는 많은 노력 끝에 어머니의 모습을 분명하게 떠올렸다. 그는 한 소녀에 대한 기억(이름과 얼굴 모습에 대한)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 그 소녀는 그가 어렸을 때 일년 내내 구애를 하며 좇 아 다녔던 소녀였다. 갑자기 그에게 한 마리 개에 대한 기억이 떠올 랐다. 그 개는 학생 시절에 한때의 일시적인 기분으로 산 것인데 그 는 오랫동안 그 개와 함께 살았었다. 그는 그 개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여러 날을 애썼다. 많은 슬 픔과 근심을 가진 가엾은 그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의 삶이 마치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낯설게 여겨졌고 그가 한때 외워 왔거나 노력하여 주워모은 것들처럼 공허하게 없어져버린 것 같아 보였다.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겪었던 가장 중 요한 체험들을 기록하였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체험은 무엇이었던가? 교수가 된 것이었던가? 아니면 의사,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것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한때 잃어 버렸던 시절에 소녀들과 또는 그밖의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것 이었던가? 그게 삶이었던가? 그게 전부였던가?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이마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세월이 그렇 게 빠르게 덧없이 흘러간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어느덧 한 해가 가 고 그는 아이리스를 떠났던 그 시각, 그 장소에 여전히 있었다. 그럼 에도 그는 매우 변해 있었다. 그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그를 이전 에 알았던 사람들은 그를 낯설게 느꼈으며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 하였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기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오래도 록 미혼인 채로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의무를 잊은 채 학생들을 헛되이 기다리게 했으며 조심스레 거리를 숨어다니거나 집을 돌아다 니며 버려진 돌로 추녀의 먼지를 닦아내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강의 도중 어린아이처럼 아무도 의식하지 않은 채 웃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목소리를 수업을 계속했던 적도 있었다. 오래도록 의미없이 배회하는 가운데 아득한 세월의 향기와 자취 뒤에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건만 그는 여전히 그것 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제 더 자주 이전의 기억 뒤에 있는 또다른 기억을 해냈다. 마치 오래된 벽에 걸린 낡은 그림 뒤에 더 오래된 채색된 그림이 숨어 있는 것처럼. 그는 어느 도시의 이름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려고 했다. 그 도 시는 그가 여행을 다니다 한때 머물던 곳이었다. 그는 친구의 생일 이나 그밖의 다른 것도 생각해내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과거의 잔상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에게 갑자기 또다른 무엇인가가 퍼뜩 생각이 났다. 봄날 아침에 부는 바람이나 구월의 안개낀 날 같은 향기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그 향기를 맡았 다. 그리고 그 풍취를 맛보며, 눈으로, 피부로, 가슴으로, 아득하고 섬세한 느낌을 느꼈다. 그것은 그에게 찬찬히 와 닿았다 처음에는 이러한 것, 즉 따스함, 푸르름, 차가움, 잿빛 등을 느끼는 날이 있었 다. 이런 날의 본체가 그의 마음 속에 잠재워져 있고 어두운 기억 속에 묻혀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느끼고 향기를 맡던 봄 또는 겨울날을 과거의 기억 속에서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이름이나 숫 자도 기억나지 않았다. 학생 시절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였던가! 하 지만 그때는 향취가 있었다. 그는 자신 속에서 그가 알지 못했던, 이 름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느꼈다. 때때로 이러한 기억들은 현실을 넘어 이전의 과거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안젤름은 기 억의 심연을 통해, 방황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를 감동시 키고 사로잡았던 많은 것을 찾아내었고 그를 방황하게 만들고 조심 스럽게 했던 많은 것을 발견해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아이리스란 이름이 그에게 주는 의미는 찾아내지 못했다. 언젠가 그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는 고통 속에서, 그의 옛 고 향을 다시 찾았다. 벽과 오솔길, 나무로 만든 다리, 그리고 울타리를 다시 보았다. 어린 시절의 옛 정원에 서서 마음에 격동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과거가 꿈처럼 그를 에워쌌다. 그는 슬픈 듯이 말없 이 그곳으로부터 되돌아왔다. 그는 병이 났다는 전갈을 친구에게 보 냈다. 그러자 친구가 왔다. 그 친구는 그가 구혼한 이후 볼 수 없었 던 친구였다. 그는 쓸쓸한 방안으로 들어와서 안젤름을 덤덤하게 쳐 다보며 앉았다. "일어나게." 그는 안젤름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가세, 아이리스가 자네를 보길 원하네." 안젤름은 벌떡 일어났다. "아이리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래." 그 친구는 말했다. "가세! 그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 녀는 오랫동안 앓고 있었네." 그들은 아이리스에게로 갔다. 그녀는 침대 위에 어린아이처럼 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큰 눈에는 여전히 밝은 웃음을 담고 있었 다. 그녀는 안젤름에게 희고 연약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한 송이 꽃같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빛을 발하듯 밝았 다. "안젤름." 그녀는 말했다. "당신, 나에게 화났어요?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과제를 주었죠. 당신이 충실하게 그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목표에 달할 때까지 더 노력하고 길을 찾아보세요! 당 신은 나를 위해 그것을 찾았지만 이제는 당신을 위해 찾아야 해요. 당신은 그것을 아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이제는 알고 있소." 안젤름은 말했다. "그 길은 너무 멀어요. 아이리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찾아보았소. 하 지만 나는 더 이상 기억해낼 수 없소.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모르겠소." 그녀는 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밝게 웃으며 위로해주었다. 그는 그녀의 가녀린 손 위로 몸을 구부려 오래도록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눈물로 촉촉하게 젖었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묻지 마세요."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을 얻 었어요. 명예도 얻고, 행운도 얻고, 지식도 얻고, 당신이 작은 '아이 리스'라 부르는 나도 얻었어요. 그것은 모두 단지 아름다운 그림일 뿐이에요. 이제는 그것들은 당신을 떠났어요. 내가 당신에게서 지금 떠나려 하듯이 나도 역시 그렇게 떠나야 해요. 나는 늘 아름다움 모 습을 지니려 애썼고 아름다왔어요. 그러나 그 모습은 지고 시들고 말았어요.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모습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아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휴양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고향에 머물거예요. 당신 또한 거기로 가세요. 안젤름. 그리고 당신 이마에 더 이상 주름을 생기게 하지 마세요." 그녀가 너무 창백해 보였기 때문에 안젤름은 안타깝게 외쳤다. "기다려요. 아이리스. 가지 말아요!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면 징표를 나에게 남겨주시오!" 그녀는 고개를 꺼덕이며 곁에 놓아둔 꽃을 들어 그에게 주었다. 그 꽃은 싱싱하게 피어난 푸른색 아이리스 꽃이었다. "거기에 있는 나의 꽃, 아이리스를 가지세요. 그리고 나를 잊지 마 세요, 나를 가지듯 아이리스 꽃을 가지세요. 그럼 당신은 나에게 오 게 될 거예요." 안젤름은 울면서 그 꽃을 받았고 이별을 고했다. 그의 친구가 그 에게 전갈을 보내왔을 때 그는 그곳에 다시 왔다. 그리고 그녀의 관 의 반을 꽃으로 장식하고 땅에 묻었다. 그의 삶은 이제 그의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가 삶을 이전처 럼 영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도시와 모든 직위를 버렸고 세상에서 행 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불현듯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오래된 정원의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며 인사를 하러 오자. 그는 다시 떠나가버 렸다. 그는 여전히 아이리스 꽃을 사랑하였다. 그는 종종 그 꽃잎에 몸 을 구부리거나 서서 쳐다보았으며, 오랫동안 그 꽃의 꽃받침을 쳐다 보며 자신을 잊었다. 그때마다 푸르스름한 대지로부터 모든 존재하 는 꽃의 향기와 태어날 꽃에 대한 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여 전히 우울했다. 왜냐하면 활짝 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쯤 벌 어진 문에 귀를 기울이며 그 꽃에 숨겨진 비밀스러움을 은밀히 들었 다. 그가 전과 같았다면 지금 바로 그 모든 것이 그에게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어야 했다. 문이 닫히자 이 세상의 바람이 싸늘하게 불 어와 그의 고독감을 휘감고 스쳐갔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과 얼굴을 그는 이제 오래전 만큼 그렇게 분명하게 가깝게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 고는 아이리스가 꿈에 나타났다. 그가 꿈에서 깨어나자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머물 곳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집에서 자기도 하고 숲에서 자기도 하고, 빵을 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나무의 잎 사귀에 맺힌 이슬을 마시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멍청이로 보거나 마술사 로 생각했으며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기도 하고 사랑 이 하기도 했다. 그는 그가 몰랐던 것을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우며, 그들이 하는 특이한 놀이를 같이 하였다. 그 놀이는 부러진 나뭇가 지와 작은 돌맹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놀이였다. 겨울과 여름이 지나 가자 그는 꽃봉오리를 보았으며, 시냇물과 바다도 보았다. "형상." 그는 때때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형 상일 뿐이야." 그러나 그는 내면으로부터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형상이 아닌 본질을, 그리고 그는 그 본질을 추구하였다. 그 본질적인 존재는 그 에게 이따금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목소리는 위로와 희망의 소리 였다. 그 같은 기적이 그에게 일어나도 그는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 다. 그는 겨울의 눈 속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몹시 추워 그의 수염은 얼어붙었다. 눈 속에 아이리스 꽃이 뾰족하고 멋지게 피어 있었다. 그는 그 꽃을 향해 몸을 굽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아이리스 꽃이 늘 그를 격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 을 다시 상기했다. 황금 줄기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길이 밝게 꽃의 신비한 심장부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그가 얻으려 하는 것, 본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본질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다지 재 촉의 소리가 들리며 꿈이 그를 인도하였다. 그는 한 오두막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 은 그에게 우유를 주었으며 그는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아이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기적이 숯굽는 사람들에 의해 숲에서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그는 천 년마다 한 번 열리 는 영혼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광경을 주시하면서 고 개를 끄덕였다. 더 지나자 오리나무 숲속에서 새가 노래를 했는데 그 새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죽은 아이리스의 목소리 같았다. 그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계속 뛰어갔다. 시냇물을 건너 숲속 깊이까 지 들어갔다. 새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자, 안젤 름은 멈추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숲 골짜기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며 푸른 나무 밑으로 냇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 뿐 모든 것 이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계속해서 새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절벽 앞에 이를 때까지 계속 걸어갔다. 그 절벽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었고 중앙에는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는 산의 내부로 좁게 이어져 있었다. 한 늙은 노인이 그 틈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안젤름에게 다가와 쳐다보며 외쳤다. "돌아가게, 젊은이. 돌아가! 이곳은 영혼들이 드나드는 문이야. 거 기로 일단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네." 안젤름은 시선을 들어 바위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넋을 잃은 듯이 산속 깊이 펼쳐진 푸른 길을 보았다. 금빛 기둥들이 양편으로 빽빽하게 서 있었고 길은 커다란 꽃의 꽃받침처럼 밑으로 뻗어 있었 다. 그의 가슴에는 새소리가 맑게 들렸다. 그래서 안젤름은 파수꾼을 지나 틈새 속으로 들어갔으며, 금빛 기둥들을 지나 내부의 푸른 신 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아이리스 꽃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정원에 있는 아이리스 꽃이었다. 그는 그 꽃의 꽃봉오리 속으로 떠다니듯 들어갔다. 그는 어스름한 황금빛과 마주쳤는데 그 때 모든 기억과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만졌다. 그것 은 작고 연약했다. 사랑의 소리가 그의 귀속에 가깝고 분명하게 들 렸다. 그리고 금빛 기둥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봄날 그 에게 들려오던 소리와 빛나던 빛과 같았다. 그의 꿈이 다시 재현된 것이었다. 그 꿈은 바로 그가 어렸을 대 꾸었던 꿈이었다. 그는 봉오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 세상의 모 습이 그의 뒤쪽으로 물러갔고 신비 속으로 들어갔다. 그 신비는 모 든 겉 모습 뒤에 있었다. 안젤름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 며, 그가 가는 길은 조용히 고향 속으로 이어져가고 있었다. <<< 두 죄인 >>> 티이바의 외딴 마을에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은자가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속세를 떠나 지금까지의 죄를 뉘 우치고 몸을 경건히 하며 새로운 믿음의 생활을 하고자 결심한 것이 었다. 한 사람은 바지리우스, 또 한 사람은 유스티누스였다. 그들은 심하게 방탕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향락적인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서 세속적인 생활에 젖어 있다간 아무래도 몸 가짐을 단정히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이가 많 은 바지리우스는 주사위 놀이와 술을 좋아했으며, 나이가 어린 유스 티누스는 애욕과 향락에서 헤어나질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유혹과 타락의 수렁이 그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타고난 성벽의 위험성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욕정을 억누르려는 간절한 염 원을 품과 고향과 재산을 송두리째 내던진 채 신앙과 금욕을 통한 경건한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은둔 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들은 신성한 은자들의 자취를 그대로 따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오직 기도와 경건한 명상에만 몰두했으 며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가 들어 있는 성서를 읽었 다. 얼마간 준비해간 식량을 서서히 축내면서 머지 않아 곧 자기들 의 은둔 생활이 널리 소문이 나면 독실한 신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 들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이 건강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음식을 가 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날 이 갈수록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잊혀졌고 굶주림에 시달렸 다. 그들은 뒤늦게 서야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과 예언자는 결 코 소홀히 대접하지 않으나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은 그 은총에서 제 외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 했다. 곧 그들의 일하는 손길 위엔 넘치는 축복이 내려졌다. 그들은 과일, 딸기, 나무뿌리 등을 모았으며 새 묘목을 심고 거친 땅을 일구 어 보리나 옥수수의 씨앗을 뿌렸다. 또한 바위에 수반을 파서 깨끗 한 물이 고이게 하고 다시 그것을 마당에까지 끌어들였다. 이러한 노동을 하는 동안 그들은 더없이 건강해졌으며 독서나 기 도에만 전념했던 때보다 훨씬 예전의 욕정이나 번뇌를 억누르기가 쉬워졌다. 그러나 작은 땅에서 얻은 수확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야자나무나 딸기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음 파종 기에는 어디에서 곡물의 씨앗을 구할 것인가에 대 해 걱정을 했다. 더구나 옷가지들도 변변한 게 없었다. 생각 끝에 그 들은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유스티누스는 버드나무 가지 로 갖가지 모양의 바구니를 짜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연습을 하지 익숙한 솜씨로 여러 가지 바구니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바지리우스는 예전에 알고 있었던 약초에 관한 다소간의 지식을 활용해서 약초 수집을 하였다. 약초를 캐어 그것을 햇볕에 말리고, 뿌리에서 즙을 짜내고, 줄기나 잎과 씨앗을 정성껏 가려내어 깨끗하게 갈무리했다. 밭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이같이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그들은 자 신들도 언젠가는 곧 생활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 대하였다.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도시에 나갔을 때 그들은 그 동안 채집한 약초 전부와 유스티누스가 짠 바구니 공예품 을 곧 상인들에게 팔 수가 있었다. 그 덕분에 식량과 다른 씨앗들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쓸쓸한 산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번 화한 거리나 상점, 사람들과의 거래, 호화스런 오락거리 등을 보고 온 것은 그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못했다. 그들의 잠든 번뇌는 슬그머니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두 사람은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것 도 없었으면서 승리자라기보다는 도망자와 같은 모습으로 도시를 떠 나와야 했다. 조용한 들녘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노동과 기도와 절 제를 통한 자기 정화에 힘쓰기로 다짐했다. 또한 도시는 곧 유혹의 장소이니 만큼 갈 때에는 반드시 함께 가기로 했으며, 그것도 꼭 필 요한 경우에만 가기로 했다. 그들의 생활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유스티 누스는 더욱 훌륭한 솜씨로 바구니를 쐈다. 그것은 어디에다 내놓아 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으므로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 었다. 바지리우스는 약초를 모아 가루와 즙액을 만들었다. 그들은 함께 밭을 일구었으며 나무 열매를 거둬들여 비록 가난하 긴 했으나 기초가 튼튼하고 알찬 살림을 이루었다. 또한 일정한 날 을 정해놓고 금식을 하거나 성서를 읽었으며 이레 째의 안식일을 지 켰다. 이따금 다른 곳의 수도자들이 지나치면서 그들을 격려하는 말 을 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해마다 두 차례씩 나들이를 했다. 그곳에선 해마다 두 차 례씩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때맞춰 파종하기 위해서는 도 시에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맥과 소맥, 옥수수 등을 상인 에게서 사들여야만 했다. 그들의 얼마 안되는 수확은 언제나 마지막 한 톨에 이르기까지 매일의 양식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로의 나들이는 매번 떠나기 며칠 전부터 시작해서 다녀온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수도자에게 벅찬 흥분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세속 적인 생활을 기웃거리거나 목격하게 되면 그것은 곧 그들의 마음을 자극시켰고 예전의 욕망에 불을 붙여 수도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유혹을 계속적인 기도와 노동에 의해 서서 히 물리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일 년에 한두 번뿐인 나들이였지 만 도시에 나설 때마다 고독과 참회를 통해 마음 속에 쌓아올려진 성곽이 거의 절반 이상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두 경건한 수도자들은 새로운 죄에 빠져들지는 않았지 만 수도의 방해를 받고 오랜 세월 동안 부질없는 노력만을 기울일 뿐 끝내 처음 꿈꾸었던 신이 바라는 경지까지는 이를 수 없었다. 은 자의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일정한 시기가 되면 그들은 언제나 애써 일하고 만든 것들을 내다 팔고 곡물과 옷가지들을 사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한 사람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들진 않았으나 밤이면 둘이 서 말없이 마주보고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또다시 농사철 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스티누스가 짠 바구니는 가득 쌓였다. 바지리 우스도 약과 약초를 부대나 작은 바구니에 챙겨 넣어 나들이의 준비 를 마쳤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바지리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내일은 도시로 가야 하겠지?" 그러자 유스티누스가 그를 보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렇군, 내 바구니도 다 챙겨졌어. 한데 자네는 벌써 마음이 설레 고 불안한 모양이군." "그렇다네." 하고 바지리우스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벌써 속세의 환락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이 보이는 듯 싶네. 우리 마음이 그것을 물리칠 수 있도록,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기운 을 차리지 않으면 안 돼. 하나님께선 이런 방법으로 나약한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라고. 난 내 영혼의 구원을 하나님께 다 맡겼어. 유스 티누스, 우리 함께 기도하세."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엎드려 밤이 이슥하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들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큰 소리로 외치거나 열심히 자신을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또다시 눈 앞에 닥친 속세로의 나들이는 그들로 하여금 도취시키는 것처럼 온갖 선한 결 심을 약하게 하고 끝내는 잠재워버리는 탓이었다. 그들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새벽이 되자 함께 길을 나섰다. 그들은 짐을 어깨에 짊어졌다.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 락 소리를 냈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상상의 나래는 이미 거리의 환락을 좇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거리의 아름 답고 육감적인 여자들만을 훔쳐 보았으며 바지리우스는 달콤한 술과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고 대리석 탁자 위를 구르는 주사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이러한 유혹과 양심의 싸움을 격렬히 벌여야만 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메마른 입술 은 기도를 중얼거렸으나 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기승을 부리고 있 었다. 누군가가 지금의 그들을 지켜보았다면 순결한 순례자로 보기 는커녕 절망에 빠진 사나이들이라고 여겼을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조금 전에 그들은 거리의 동쪽 문 근처에 닿았다. 불 안하고도 착잡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그들은 재빨리 문을 지나 골목길 을 접어들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제각기 물건들을 팔고 사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잠시 헤어졌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일을 다 마 치면 미리 정해둔 여관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만나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한 뒤에 소란한 도시 를 빠져 나오곤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스티누스의 거래는 여느 때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끝났다. 첫 골목에서 만난 한 상인이 그를 둥근 천정의 가게 안으로 불러들이더 니 짊어지고 온 바구니를 송두리째, 그것도 좋은 가격으로 사버렸던 것이다. 그는 올리브 열매를 취급하는 상인으로서 시장에 보낼 올리 브를 넣을 바구니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스티누스 는 무거운 짐과 걱정을 한꺼번에 덜어버렸을 뿐 아니라 커다란 은화 두 개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속으로 감사하면서 그럴수록 죄를 짓지 않으려는 생각에 곧장 약속된 여관으로 달려가 바지리우 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바지리우스는 쉽게 물건을 팔지 못해 사방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다. 그 시각의 여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주인 혼자 마루에 깔린 돗자리 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점잖게 기다란 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채 그가 잠에 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 체로 잠에서 깨 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젊은 하녀가 유스티누스에게 다가와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얼떨결에 빵과 차를 주문했다. 그 순간 그 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 눈을 내리깔고 있었으나 그녀가 급히 돌아서자 눈을 들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살진 몸매, 검은 머리카 락,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목덜미, 매끈한 양팔, 걸음을 옮 길 때마다 낭창거리는 날씬한 허리, 구두를 신은 하얀 다리 등이었 다. 그 광경은 가련한 은자의 이마에 땀을 맺히게 했다. 머쓱히 허공 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세찬 부끄러움과 답답함, 두려움이 가슴속 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이마를 소매 끝으로 문지르고 나서 마침 그녀가 되돌아오는 모 습이 눈에 띄자 얼른 눈을 식탁 위로 떨구었다. 그녀는 그에게 음식 을 바싹 밀어놓으며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는 곧바로 사내의 마음 속 에 일고 있는 괴로운 갈등을 눈치챘다. 그녀는 음흉한 마음으로 이 고기는 내 낚시에 걸린 게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유스티누스 자신은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추리는 적중했다. 그의 심장은 펄떡이고 맥박은 빨라졌다. 그 의 눈길은 자꾸만 아가씨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짓고 짐짓 정숙한 체하면서 속삭였다. "손님은 수도하는 성자이신 것 같군요. 음식값을 낼 돈은 갖고 계시나요? 말 씀드리기가 좀 쑥스럽지만.... 식사를 갖다 드린 이상 제게 책임이 있 거든요." 이 말을 듣자 그는 당장 은화 두 개를 꺼내어 보였다. "그럼 됐어요. 믿을 말한 손님이군요. 손님께 꼭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하지만 여기선 안 돼요. 주인이 엿들을지도 모르니.... 그건 아주 은밀한 얘기거든요. 부탁이에요. 저를 따라오세요. 손님이 꼭 도와주셔야만 할 일이에요."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유스티 누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그를 자기 방으로 끌어들이 자마자 목에서 가슴께로 드리웠던 붉은 천을 풀어 던지며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 몸을 그에게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내게 은화 한 개만 줘요. 그러면 제 몸의 아름다운 곳을 다 보여 드릴께요. 두 개를 주 시면 제 몸을 드리겠어요." 그 말은 마치 사막의 열풍처럼 괴로와하는 사내를 마구 뒤흔들었 다. 창부가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양손을 움켜쥐고 그녀의 눈을 사 내의 눈과 맞추려고 점점 가까이 다가들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힘 을 잃어버렸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는 두 개의 은화를 건네주고는 젊은 여자 의 웃음소리에 넋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가벼운 천 밑으로 내비치는 살진 어깨와 새하얀 유방의 비밀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이성을 잃 은 채 그녀에게 쓰러지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수한 애무의 말을 퍼붓고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맹목적인 본능으로 날뛰었다. 그녀 는 완전히 사내 밑에 깔려 있었다. 얼마 후 다시 정신이 들었을 대, 그는 여관의 식탁에 앉아 빵과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주인은 돗자리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죽음과 같은 깊은 감각의 도취와 경련에서 깨어난 시선으로 그는 서서히 자신이 저지른 일체의 과오를 돌이켜볼 수가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에 잠겼다. 후회와 수치감, 그리고 절망이 그를 휩쌌다. 도무지 자기 자신이 저 지른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러운 은둔 생활을 보냈던 그토록 오랜 세월 이 순식간에 어디론지 사라지고 참회나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것을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깨달아야만 했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그제서야 거래를 끝내고 은화 한 닢을 손에 쥔 바지리우스가 나타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그는 멍청이 앉아 있는 유스티 누스를 보자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러자 유스티누스는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어제 나 는 틀렸어!" 그러나 그는 차마 자기가 저지른 사실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으므 로 다만 절망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빈 손바닥을 털어 보였다. 바지리우스는 다정하게 그를 다독거리며 돌아가는 발길을 재촉했 다. 도시 밖으로 나오자 유스티누스는 길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제발 나를 이대로 버려두고 혼자 서 돌아가게. 나는 악마의 유혹에 졌어.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모두 바지리우스에게 털어놓았다. 바지리우스는 불행한 친구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여기는 그를 나무라거나 타이를 곳이 못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의 마음은 타락한 친구 때문에 사뭇 피를 흘리는 듯 아팠다. 그는 살갗을 에이는 듯한 동정과 애정으로 친구를 위안하기 위하여 매우 위험스런 선의의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완전히 허구였다. "여보게 친구여!" 하고 그는 일부러 수치스러움을 가장하면서 거 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잘못이야. 아, 지금 내가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가를 자네가 안다면! 자네가 여관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다 죄를 짓는 순간에 나는 자네보다 몇 배나 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어." 그는 은화 세 닢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술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배 불리 먹고 도박판에까지 끼여 들어 처음엔 판돈을 거의 휩쓸었으나 다른 도박판에서 다시 잃었다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꾸며 말했다. 친 구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 자신을 나쁜 놈으로 깎아 내 려 자기를 마구 짓이기고, 친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더 럽혔다. 절망에 찬 유스티누스는 그의 말을 듣자 울면서 손을 내밀어 탄식 했다. "오, 형제여,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은가?" 바지리우스는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위로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네. 자, 어서 함께 가서 회계하세나." 두 사람은 먼길을 걸어 밤이 늦어서야 제각기 깊은 생각에 빠진 채 은둔처에 도착했다. 유스티누스는 슬픔에 잠긴 채 자신의 청결한 자리와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나뭇잎을 깐 잠자리에 들지 않 고 차가운 바위 위에 엎드려 끝없는 자책과 회한의 눈물을 흘린 후,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바지리우스는 바지리우스대로 밤새 고통에 시달렸다. 슬픔에 잠긴 친구에게 건넨 말은 비록 모두가 거짓이었으나, 거짓은 결국 나쁜 씨앗을 잉태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친구를 위로하는 동안에 그 거 짓 이야기는 그 자신을 혼란시켰다. 유스티누스는 죄를 범하고 아프 게 뉘우쳤지만, 바지리우스는 비록 선의이긴 했지만 결국 죄를 농락 하고 악의 문을 두드린 셈이었다. 뒤늦게 그의 충동은 굶주린 것처 럼 환상의 생각들을 화려한 빛깔로 마음 속에 선명히 그려내었고 그 때문에 악한 번뇌로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유스티누스는 그날 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뼈아프게 뉘우쳤음에 반하여 바지리루스는 죄를 실제로 저지르지 않은 것을 더욱 심하게 뉘우쳤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선과 악이 서로 뒤엉켜 있 는 것일까. 유스티누스는 아침 일찍 딱딱한 잠자리에서 눈을 떴다. 그는 혼자 였다. 그는 경건하게 기도를 마친 뒤에 비록 지쳐 있긴 했으나 여느 때와 같이 작업을 시작하며 친구는 아마 약초를 캐러 가까운 들판에 나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유스티누스는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고 그는 이제 자기의 죄 가 미운 나머지 혼자서 여길 떠난 게 틀림없으며, 자기 같은 사람과 친구가 되기 싫어서 떠난 것이라고 혼자서 단정을 내리고 슬퍼했다. 바지리우스의 고백이 생각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 자신의 죄업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비열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여러 날을 단식하였 으며, 버드나무 회초리로 피가 흐르도록 자신의 몸에 매질을 했을 뿐 아니라 밤이면 발가벗은 채 바위 위에서 잠을 잤다. 한편 바지리우스는 밤새 도망을 쳐서 몰래 도시로 들어가 운 좋게 노름판에서 딴 돈으로 호주머니가 두둑해지자 그리스 인이 경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온갖 욕망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제 신의 정의는 이들 두 사나이를 망각했다. 그들의 정성어린 참회조차 들어주지 않은 채 한낱 우스갯거리로 만든 듯이 보일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 마음은 참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가련한 은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아직도 세속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신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은 그들을 타락시켰지만 그것은 결코 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고자 함이 아니었다. 유스티누스는 참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어느 새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악한 욕망이 영원히 자기를 떠나버린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고 더욱 경건히 몸과 마음을 지키며 이미 저지른 자신의 죄를 씻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의 은총으로 자신을 떠 나간 친구가 되돌아와서 자기를 용서할 때까지는 엄격한 고행을 늦 추지 않을 결심으로 간절한 기도를 계속했다. 이윽고 신은 착한 마음의 사나이를 어여삐 여겨 꿈 속에 나타나 하나의 음성을 들려주었다. 그 음성은 바지리우스가 동정심에서 거 짓말장이가 되었고, 그 거짓말로 인해 그가 죄인이 되었음을 모두 그에게 설명한 뒤, 이제 다시금 신의 자비가 두 사람에 의해 빛을 발하도록, 없어진 친구를 찾아 나설 것을 명령했다. 기쁨에 찬 유스티누스는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났으며 도시를 향 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저 평정한 마음으로 한 올의 불안감도 없 이 그 길을 걷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일찍 도시에 닿았으며 확신을 지니고 그 안에 들어서서 바지리우스를 찾기 위해 시장 쪽으 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평판이 나쁜 술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아치형의 문 안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상스 러운 말과 웃음소리,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섞여 물건 부딪히는 소리 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가 마침 그 앞을 지나칠 때, 문에 드리운 장막이 찢기면서 발로 채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은 한 주정뱅이가 불 쑥 길거리에 내던져졌다. 그는 옷이 찢기고 얼굴은 피투성이인 채 몸의 중심을 잃고 허공을 한 바퀴 맴돌더니 휘청하면서 쓰레기더미 위에 나동그라졌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를 동려하지 않고 이 개 돼지 같은 놈, 주정뱅이, 팔푼이 등의 욕지거리들을 등 뒤로 마구 퍼부었다. 술집 주인은 침을 탁 뱉더니 돌아서서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스티누스는 놀라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 비참한 사나이를 일 으키려고 몸을 굽혔다. 사나이는 너무도 심한 매를 맞았기 때문에 간신히 눈을 끔뻑일 뿐 전신이 일그러지고 피투성이였다. 자세히 들 여다보니 바지리우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그를 안아 일으킨 뒤 등에 업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것은 다 내 잘못 때문이야." 하고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상처 입은 사나이를 가 장 사랑하는 형제를 안 듯이 소중히 가슴에 안고 샘물로 씻기고 물 을 먹였다. 그런 다음 아직도 비틀거리는 그를 업고 구경꾼들이 에 워싸고 야유를 퍼붓는 거리에서 빠져 나왔다. 있는 힘을 다해서 그는 바지리우스를 등에 업고 옛 움막으로 돌아 와서는 잠자리를 돌보고 상처 입은 손발을 치료해주었다. 유스티누 스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환자를 보살피고 어루만졌다. 드 디어 바지리우스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어둠과 절망 속을 맴돌았다. 유스티누스는 그의 곁에서 위로하여 함께 기도 하고 신의 은총이 이제까지 그들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바지리우스의 감동은 유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만 신의 은총에 보답하고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고, 악 행을 근절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를 두고 상의한 끝에 두 사람은 이 제 다시는 시장에 가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그들은 서로 속세 와 거래를 하느니 차라리 그대로 굶어 죽거나 가난에 시달리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그들의 생활은 다시 오랫동안 진정 평화롭고 성실하게 이어 져갔다. 그들은 늙고 영영 속세를 잊어 버렸으나 그날의 맹세만은 잊지 않았다. 신은 그들의 생활에 만족했다. 어느 때 사나운 기근이 몰아닥쳐 야자나무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못하자 은자들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 러나 서로의 맹세를 깨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 다. 그들은 믿음을 다하여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면 기꺼이 굶어 죽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틀간이나 굶고 있다는 것을 안 하나님은 한 마리 의 까마귀를 내려 보냈다. 까마귀는 천국의 빵을 가져와 은자들 앞 에 내려놓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만 베푸시는 음식을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 유년시절의 성 프란체스코 >>> "체스코!" 어머니의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졸음이 올 듯한 따스하며 부드러운,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날씨의 늦은 오후였다. 다시 한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체스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 다. 열 두 살 소년은 현관 밖 계단의 응달에서 먼지투성이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우두커니 앉은 채 야윈 두 손을 뾰족한 무릎 위에 깍지끼고 있었다. 다갈색 곱슬머리가 가느다란 힘줄이 드러난 시원한 이마 위에 부드럽고 가볍게 흩으러져 있었다. 아, 얼마나 듣기 좋은 음성인가? 마치 새의 날개에 실린 듯한 어 머니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인품과 같이 온화하고 독특하여 우아했 다. 프란체스코는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좇아, 어머니에 대한 넘치는 그리움에 부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문득 일어나고 싶은 충동으 로 다리를 움찔거렸으나 곧 다시 잠잠해졌다. 잔잔한 햇볕 아래 깊 은 정적 속에서 그리운 그 목소리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 사리에 그 의 생각은 먼 허공을 날고 있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근사한 일들이 많았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해 서 누구나 자기처럼 아버지에게 훈계를 받거나 어머니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기 집 계단 앞 따스한 햇빛이 비쳐드는 모퉁이 한 구석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이웃집과 분수, 늙은 소나무와 산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변 함없이.... 하지만 말을 타도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온 세계에 널려 있는 성과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나쁜 일 이 생기거나 어떤 신앙심 깊은 착한 사람이 살해된다든지, 도는 아 름답고 가련한 공주가 마법에 걸려 괴로움을 당할 때면 영웅이나 기 사와 같은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서 커다란 칼을 빼들고 정의를 실현 시켰다. 그 중에는 혼자서 여러 명의 무어 인을 물리친 기사도 있었 다. 그들은 배를 타고 세계의 끝까지 항해를 했다. 폭풍이 앞질러서 그들의 위대한 용맹과 업적을 온 세계에 전했다. 하인인 피에르는 어제 꼭 이런 말투로 올란도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프란체스코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끼가 무성한 이웃집의 지 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포도나무의 덩굴이 우거진 정자의 네모난 돌기둥 사이로 멀리 운브리아 들판과 그 건너 산까지 내다볼 수가 있었다. 산벼랑에 새하얀 종각이 솟은 작은 마을이 마 치 콩알만큼 작고 아득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뒤쪽에는 푸른 하 늘과 하려한 공상이 펼쳐지는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는 강이나 다리, 도시와 바다, 왕궁과 병영, 악대를 거느린 기사의 무리와 말을 탄 영웅, 아름다운 귀족 여인들, 기사들의 시합, 현악, 황금의 무장, 반짝이는 비단 옷 등, 온갖 것이 다 갖춰져 있다 는 생각을 하면 과연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것인가. 무엇이거나 한 용사가 나타나서 용감하게 그것을 골라 가져갈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용서를 위해 마련된 식탁 이었다. 그렇다. 용기! 유령과 기분나쁜 요기가 넘치는 동굴 속에 해골만이 뒹굴고 있는 한밤중, 이국의 황야에 말을 달리는 그런 용기이다. 프란츠 배르날드네의 아들인 그에게 과연 그만한 용기가 있을까? 만약 사로잡혀서 노한 무어 인 왕 앞에 끌려나가거나 마법의 성에 갇히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곤란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혹시 아버지라면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 아니지, 하지만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가 능한 사람이 있다면, 올란도나 란젤롯 등이 그들의 사명을 완수했다 고 하면, 젊은이들로선 그들에게서 배우는 길 외에 다른 무슨 방법 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공이나 상인, 사제나 그밖의 무엇 이 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얀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잡히고 눈은 찡그린 눈썹 밑에 숨어버렸 다. 참으로 결심이란 힘든 일이었다. 한번쯤 결심하여 시도했지만 처 음부터 기가 꺾인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젊은 시동과 기사로서 공주한테 끝내 알려지는 일이 없이 노래로 불려지지도 않 고 세상의 소문거리도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 을까. 그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마 맞아 죽거나 독살당하고, 물에 빠 져 죽거나 바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고, 용에게 먹히거나 동굴에 갇히 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의 출전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질없 이 가난을 견디거나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몸을 부르르 떨며 햇빛에 그을린 가냘픈 손을 내려 다보았다. 아마도 이 손은 언젠가 사라센 인에 의해 절단되거나 십 자가에 못 박히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독수리에게 먹힐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 세상이 그 얼마나 착하고 아름 답고 흐뭇하고 맛있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생각할 때면 더욱 그 런 느낌이 들었다. 아, 얼마나 좋은 것들이 존재하는가! 군밤을 넣은 가을의 난로불, 귀족의 딸들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는 봄의 축제, 혹은 열 네 살이 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선물로 받기로 되어 있는 온순한 어린 말, 그 밖에도 좀더 간단하면서도 다채로운 일들로 해서 아름답고 놀라 운 일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발끝에 햇살을 받으며 등을 차가운 벽에 기 댄 채 반은 그늘진 곳에서 이렇게 여유있게 앉아 있는 일이 그러했 다. 또한 밤에 침대에 몸을 눕힌 채 그 평화롭고도 부드러운 따스함 과 달디단 피곤에서 오는 몽롱함에 젖는 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 거나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머리카락에서 느끼는 일. 여러 가지 일 들이 그러했다.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이었다. 눈을 뜰 때나 잠을 잘 때, 밤이나 아 침이, 이 세상 어디에나 향기와 아름다운 음향, 멋진 색깔과 사랑스 러운 것, 매혹적인 것들이 그토록 풍요롭게 널려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하나같이 경멸하고 희생하면서까지 모 험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만 용을 물리치거나 - 오히려 용에게 먹히기 위해 - 왕으로부터 공작의 칭호를 받기 위해서? 과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것이 진정 옳은 일이었을까? 세상의 그 누구도,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그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 자신의 마음만이 그걸 얘기하고 꿈꾸며 원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욕구를 느꼈다. 이상은 세워졌다. 어떤 자극이 그에게 주어지고 마음 깊숙이 있는 심지에 불이 당겨졌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즉 영웅이 된다는 것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왜 사람들은 선택이 나 희생,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왜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싶 은 것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좋아.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이것저것 다 하고 싶기 도 하고 또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무엇이나 모두 순간 에 머무는 것이고 영원히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 이 목마름! 오, 송두리째 몸을 불사르고야 말 것 같은 욕망! 더우기 그것에는 그 토록 숱한 고뇌와 남모르는 두려움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화가 치밀어 머리를 무릎에 부딪쳤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은 없다. - 기사가 되자. 맞아 죽는다 해도 상관없이. 사막에서 굶어 죽 어도 좋아. - 그는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마리에타나 피에르 뿐 아니라 어머니와 과묵한 라틴 어 선생마저도 깜짝 놀라겠지. 백마를 타고, 스페인의 깃털을 단 금 빛 투구를 쓰고, 이마에 커다란 상처를 새긴 채 어느 날 나는 돌아 오겠지.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벌렁 드러누운 채 포도나무 기둥 사이로 노 을이 붉게 드리워진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아스라히 망막에 비치 는 푸른 점 하나하나가 곧 꿈이요 약속이었다. 창고 근처에서 피에 로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의 곁에 드리운 그림자의 띠가 점점 넓어지더니 뚜렷한 형태로 해가 비치는 거리로 번져나가고 있 었다. 아득한 언덕 위에는 뜨겁던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작은 행렬이 오솔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예닐곱 명 쯤 되는 조그만 소녀와 소년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행렬놀이를 하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뭇 잎으로 엮은 고리를 먼지투성이의 목과 옷에다 두르고 손에손에 들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미나리아재 비와 데이지, 샐비어 들을 아무렇게나 꺾어 만든 것으로서 절반은 부러지고 거의 시들어서 볼품이 없었다. 그 중에는 풀 줄기도 섞여 있었다. 맨발이 자갈길 위에서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그 중 나이 들어 보 이는 소년이 나막신 소리를 내면서 곁에서 구령을 붙였다. 모두들 따라서 목청을 돋구어 짤막한 노래를 불렀다. 뒤죽박죽이 된 찬송가 의 여운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천 가지 꽃을 만 가지 꽃송이를 그대, 산타 마리아에게.... 후렴을 더욱 높은 소리로 불렀다. 조그마한 순례자들은 드디어 언덕에 올라섰다. 그러자 여태껏 호 젓하기만 하던 오솔길에는 금방 생기가 감돌고 화사한 빛깔들로 수 놓여졌다. 맨 뒤로 따라온 소녀는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있었다. 머 리의 한쪽 갈래를 꽃잎과 함께 입에 물고 잘근거리면서도 계속 노래 를 부르거나 흥얼거렸다. 떨어진 꽃잎이 두세 개 행렬의 뒤에서 뒹 굴며 먼지에 묻혀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귀에 익은 노래의 가락을 따라 곧 흥얼거렸다. 그도 이러한 놀이를 백 번도 더 되풀이하면서 자랐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가 즐긴 놀이였다. 이제는 어느새 커다란 소년들 축에 끼게 되어 금지된 나쁜 놀이에 몇 번 어울린 후로는 이토록 천진스런 놀이는 어린 시절의 순수성과 더불어 아득히 멀어져갔다. 그는 남달리 감수성이 뛰어난 성격이었으므로 이러한 영혼의 최초 의 변화를 겪는 동안에 이미 덧없는 기쁨의 노래를 경건하고도 슬픈 생각에 잠겨서 듣는 것이었다. 더우기 오늘은 영웅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으므로 어린아이들의 놀 이 같은 것은 정녕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을 담담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바라다보았 다. 그때 마침 머리를 길게 풀어 늘어뜨린 소녀와 함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나타났다. 그 아이는 꽃을 꺾어 든 두 손을 유 난히 높이 치켜들고 마치 기수처럼 의젓하고 경건하게 냇물이라도 건너는 듯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노래는 제대로 불려지지 않았으나 그 소년의 동그란 눈망울은 장엄함과 신앙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천 가지 꽃을.... 그대, 산타 마리아에게...." 하고 그 아이는 열심히 노래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보자 갑자기 이 꽃놀이의 아름다움과 경건 함, 또는 자신이 어렸을 때에 체험했던 더없는 기쁨과 사라져버린 감격이 되살아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순간 그는 열정적으로 몸을 일으켜 어린아이들의 뒤를 좇았다. 그리고는 사뭇 명령하는 투로 그 들을 가까이 불러모아 집 앞에서 잠깐 기다리도록 했다. 어린아이들은 그의 말을 따랐다. - 그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못 되었으며 더군다나 그는 부자이고,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 그들 은 시들어버린 꽃을 손에 든 채 기다렸다. 노래는 그쳤다. 그 동안에 프란체스코는 어머니가 있는 작은 정원으로 뛰어갔다. 집들 사이의 공간에 흙을 일구어 정성껏 손질한 서너 발자국 길이의 아담한 꽃밭이 거기에 있었다. 꽃은 드물었다. 수선화는 시들었고 십 자형 꽃망울을 단 아라세이토우는 이미 씨받이만 남아 있었다. 하지 만 자주색 붓꽃의 뾰족한 봉오리가 두어 송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그는 손을 뻗쳐 크고 탐스 러운 꽃송이를 거의 남김없이 꺾어버렸다. 물기가 있는 제법 통통한 줄기가 손바닥 안에서 아작아작 소리를 내었다. 그는 한 송이의 꽃을 벌려 그 새하얀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은 희미한 보라빛이 났으며 노란 털이 돋아나 있는 수술이 가지런 히 놓여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손을 뻗쳐 제각기 꽃은 나누어 받았다. 그 자신도 꽃 한 송이를 손에 든 채 줄 앞에 서서 걸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다른 오솔길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정원의 꽃, 더구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지휘자를 따라 많은 어린아이들이 꼬리를 물었다. 손에 꽃을 든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맨 손으로 따라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음 오솔길에서는 더 많은 아이들이 어울려 들었다. 신나게 노래 부르며 사원의 광장에 닿았을 무렵 - 저녁놀이 붉게 물든 하늘에 크 고 작은 산들이 보라빛을 띨 무렵에는 큰 무리를 이루었다. "천 개의 꽃, 천만 개의 꽃." 하면서 그들은 다 함께 노래했다. 사원 앞에서 그들은 한 무리가 되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프란체 스코는 볼이 발그레해지도록 열중하여 맨앞에 서서 춤을 추었다. 저녁 무렵 산책하려 나온 사람들과 밭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이 멈 춰서서 구경을 했다. 젊은 처녀들은 프란체스코를 찬양했다. 마침내 한 처녀가 대담하게 나서더니 모두가 원하는 바를 실행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소년에게 다가서서 손을 내밀고 함께 춤을 추었다. 드높은 웃음소리와 갈채가 뒤섞여 어린아이들의 행렬놀이는 마침내 경건하 면서도 즐거운 축제로 탈바꿈했다. 앳된 소녀의 입술 위에 부서지는 천진스런 웃음이 곧 처녀의 미소 가 되듯이.... 저녁 기도 시간이 되자 축제는 그쳤다. 프란체스코는 아주 흥분해 서 집에 돌아왔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맨발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행렬에 끼어들어 춤을 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일이 없도 록 요즘 들어 특히 주의해왔었는데 - 그는 이제 훨씬 더 나이가 많 은 소년들이나 귀족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그는 약간 마음의 갈등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 다. 불현듯 마음 속에 결정했던 기사도나 사나이다운 의무에 대한 신념이 생각났다. 어쩌다가 그런 충동으로 그토록 정신없이 열중했 었는가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올라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면 서 파리해지도록 자신을 경멸했다. 어머니의 꽃을 꺾어서까지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그런 늠름한 영웅이나 용감 한 올란도과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훌륭한 기사는커녕 꼭두 각시나 어릿광대에 불과한 자신이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해서 정의롭고 기품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 각을 감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 아, 사원 앞에서 춤 출 때만 해 도 저녁놀의 황홀함과 부드럽게 금빛나는 원경이 자신의 마음에 얼 마나 따스하게 젖어들었던가! 그것은 마치 사자의 전언처럼 높고 열정적으로 울려오지 않았던 가. 유혹하거나 경고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는 춤에만 열중했었 다. 어디 그뿐인가. 나중엔 어느 농부의 딸과 입맞춤까지 하지 않았 는가. 광대다! 허수아비다! 그는 손톱끝을 부르쥔 주먹 안에 움켜쥐 고 참회를 위해 자신을 꾸짖으며 신음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한 일들은 무엇이거나 후회투성이였다. 무슨 일이든 - 언제나 긍지를 갖고 의젓하게 시작하고, 사실 또 그럴 작정이었지만, 어디선가 엉뚱 한 것, 바람, 냄새, 유혹이 슬그머니 손짓해오곤 했다. 늠름한 영웅은 또다시 원래의 악동이나 어리석은 자로 되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고상한 꿈과 굳은 결심이나 감격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 그것은 자신 같은 존재와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 좀더 기 품있는 사람, 가치있는 사람의 일이었다. 오, 란젤롯이여 - 오, 올란 도여, 오, 영웅의 노래, 아득한 트라시메노 산상의 신성한 불길이여. 이때 어둠 속에서 문이 살며시 열리고 어머니가 소리없이 들었다. 아버지가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자고 있었다. 가벼운 실내화를 신은 채 그녀는 살며시 아들의 침대 맡에 다가섰 다. "아직 안 자고 있느냐? 체스코."하고 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잠든 채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답 대 신에 그는 어머니의 손목을 꼭 잡았다. 그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손 을 그 목소리와 함께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른손을 내 맡긴 채 왼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가 아프니?"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저, 나쁜 짓을 했어요." "무슨 나쁜 짓? 어서 얘기해보렴." "오늘 저는 엄마의 꽃을 다 꺾어버렸어요. 파란 꽃, 그 탐스런 꽃 송이를 말이에요. 이젠 한 송이도 없어요." "알고 있단다. 엄마도 그걸 보았었지. 그게 바로 너였었구나. 난 필립이나 그라페가 한 짓으로 여겼었다. - 그런 나쁜 장난은 평소에 잘 안하는 성격이었지, 넌...." "엄마, 저는 곧 후회했어요. 그래서 그 꽃을 모두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어떤 어린아이들?" "아이들이 나타나서 저도 그만 함께 행렬놀이를 했거든요." "아니 뭐라고? 너도 그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했단 말이니?" "네, 갑자기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어요. 모두가 다 시든 꽃들을 들고 있어서 난 싱싱한 새것으로 바꿔주고 싶었어요." "그럼 사원으로 갔었니?" "네, 사원으로 갔었어요. 그전처럼." 어머니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체스코, 그건 결코 나쁜 짓이 아니란다. 물론 장난으로 마구 꽃을 꺾었다면 얘긴 다르지만, 하지만 네 말대로 그런 이유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잘 한 일이야.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아들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이 안정되 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들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건 꽃 얘기가 아녜요." "그럼, 무슨 얘기?"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괜찮아. 어서 솔직히 말해봐.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니?" "엄마, 난 기사가 되고 싶어요." "뭐, 기사라고? 그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그것과 이것이 무슨 관 계가 있니?" "있어요. 많은 관계가 있어요. 하지만 엄마는 잘 모르실 거예요. 엄마, 난 정말 훌륭한 기사가 되고 싶은데 역시 어려울 것 같아요. 늘 못난 짓만 되풀이하니깐. 기사가 되는 것은 아주 어려운데 말이 에요. 진정한 기사는 나쁜 짓이나 어리석은 짓이나 남의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고 또 노력은 하지만 역시 어려워요. 오늘만 하더라도 엉겁결에 그 아이들을 따라 가다 앞장서서 춤을 췄지 뭐예요, 엄마.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는 그를 침대 위에 편안히 눕혔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라. 그들과 함께 춤춘 것은 나쁜 일이 아 니야. 체스코. 기사라 할지라도 기쁠 때나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 기 위해 춤을 추는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너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야. 한번 마음 먹었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 기사도 마찬가지야. 그도 한때는 어린아이였을 뿐만 아니라 놀이며 춤이며 어려 가지 일을 다 겪고 난 후에 기사가 된 거야. 한데 넌 어떤 이유로 기사가 되고 싶은 거지? 그걸 말해보렴. 시가는 정의감과 용감성을 갖췄기 때문이니?" "네, 그래요. 그뿐 아니라 기사가 되면 왕이나 귀족이 될 수도 있 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겠구나. 하지만 왜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거 니?" "그건.... 난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엄마."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말을 듣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거야."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들의 머리맡을 기키며 손을 꼭 쥐어주었다. 그 소망과 결심에 담긴 어린아이다운 천진성과, 그 때문에 자극된 열정과 괴로운 흥분을 비교해보고 어머니는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이 아이는 앞으로 갖가지 애정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 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숱한 환멸을 또한 맛 보게 될 것이다. 아마 기사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어딘지 남다른 데 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좋든 싫든간에.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아들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나직히 체스코가 뒷날 스스로를 불렀던 보베레로(역주: 작은 가난한 자)라는 이름으로 잠든 아들을 불러보았다. <<< 사랑의 상처 >>> 오래 전부터 바로아 국의 수도 칸볼레 교외에는 귀족들이 수많은 호화 천막을 치고 기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무술 시합이 불꽃을 튀겼다. 승자에겐 헬체로이트 왕비, 카스티스의 처녀 와 같은 과부, 성배와 프림텔의 아름다운 공주 등과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무술을 겨루는 사람들 가운데는 영국의 펜드라곤 와, 노르웨이의 로트 왕, 아라곤 왕, 브란반트 왕, 유명한 백작과 기 사, 모르홀트와 리버린 등의 영웅들이 있었다. 그것은 볼프람의 '파르찌발'의 두 번째 노래 속에 수록되어 있었 다. 어떤 이는 젊은 왕비의 아름답고 파란, 소녀다운 눈을 찬양했으 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기름지고 풍요한 나라와 성곽을 염두 에 두고 있었다. 수많은 높은 직위의 귀족들과 유명한 영웅들 외에 이름없는 기사 나 모험가, 산적과 가난한 사람들도 떼지어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 는 자신의 천막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 데서 나 야영을 했다. 어떤 때는 비바람을 피할 곳도 없어서 들판에서 망 토를 둘러쓰고 지내기도 했다. 그들은 가까운 초원에 말을 풀어놓고 풀을 뜯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초청을 받거나 안 받거나 아랑곳없이 다른 사람의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합에 나가려 는 생각과 함께 행운과 우연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말은 볼품없는 조랑말이라 아무래도 이길 가 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조랑말로는 아무리 용감 무쌍한 기사라 할지라도 시합에서 이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출전 희망자들은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만 출전해서 전체적인 즐거움을 맛보거나 어떤 우연으로 인한 이익을 얻고 싶다 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매일같이 환대와 축연이 베풀 어졌다. 어느 때는 왕비의 성에서, 때로는 유력하고 부유한 귀족의 천막 안에서 - 가난한 기사들 가운데는 경기의 결전이 자꾸만 늦춰 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말을 몰고 나가 산책 을 즐기거나 사냥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놀이를 하 거나 시합을 구경하거나 때로는 시합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처 입은 말을 치료하거나 부자나 고관의 사치와 낭비를 구경하면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난한 무명 전사 가운데 마르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남국의 자 그마한 남작의 의붓자식으로서 아름답고 다소 꺼칠해 보이는, 행운 을 찾는 젊은 모험가였다. 그는 허름한 복장에다 메릿사라는 야위고 늙은 말을 부리고 있었다. 그 역시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호기 심을 가지고 행운을 꿈꾸면서 축제 분위기와 흥겨운 생활에 잠시나 마 끼여들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자기 나이 또래의 동료들과 이름있는 소수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그는 꽤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사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가수와 악사로서였다. 그는 시를 지었으며 자신이 직접 지은 칸쏘네 를 기타에 맞추어 퍽 아름답게 노래할 줄 알았다. 한 해에 한 번 열 리는 큰 도시의 저자거리처럼 흥청거리는 이 행사를 그는 몹시 흐뭇 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즐거운 일이 잦은 이 활달한 진영이 될 수 있으면 오래 계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런 어느 날 밤 후견인의 한 사람인 브란반트 공작이 뛰어난 기 사들을 위해 마련한 왕비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그를 초청했다. 마르 셀은 그와 함께 수도로 가서 성에 들어섰다. 연회장은 휘황찬란했으 며 커다란 접시나 항아리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들이 그득그득 담겨 져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날 밤 돌아올 때의 그는 조금도 즐거 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왕비 헬체로이트를 보았고 그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으며 달콤한 눈길에 취해버린 것이었다. 지금 그의 가슴은 그 고귀한 여인에 대한 가눌 길 없는 사랑으로 불타오 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처럼 부드럽고 순수하게 보였지만 함부로 손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왕비를 손에 넣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는 똑같이 주어져 있었다. 무술 경기를 통해 행운 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유롭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무 기는 보잘것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대용사라고 나설 만큼 실력 이 대단하지도 못했다. 두려움없이 언제라도 흠모하는 왕비를 위한 싸움에 목숨을 걸 만 큼 각오는 되어 있었으나 그의 역량은 모르홀트나 로트 왕, 리버린 이나 기타 다른 용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점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시험해보려 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기의 말인 메릿사에게 빵과 구걸해서 겨 우 얻은 훌륭한 건초를 먹인 뒤에 자기 자신도 규칙적인 식사와 수 면을 취하여 몸을 단련했을 뿐만 아니라 볼품없는 무기나마 정성껏 손질을 했다. 며칠 수 그는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경기장으로 나아가 크게 자 기 이름을 외쳤다. 스페인의 기사가 그의 상대였다. 두 사람은 긴 창 을 들고 맡겨졌다. 마르셀은 곧 말과 함께 넘어졌다. 그의 입에선 피 가 흘러내렸으며 전신이 쑤시고 아팠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혼자 힘으로 일어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말을 끌고 퇴장하여 부근에 있 는 냇물에서 몸을 씻은 다음 그 자리에 혼자 처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천막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사방에선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브란반트 공작이 그를 보고 아는 체 했다. "자네는 오늘 무운을 시험해 봤다지?" 하고 공은 은근하게 말했 다. "다시 한번 겨뤄볼 테면 이번에 내 말을 타도록 하게. 만약 이기 는 경우엔 그 말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 대신 지금은 기분을 돌리고 편안한 저녁을 지낼 수 있도록.... 아름다운 노래나 한 곡 들려주게 나." 가련한 기사는 노래를 부르거나 유쾌하게 떠들거나 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을 준다는 약속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공작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작의 천막에 들어서 자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신 뒤에 기타를 집어들었다. 그는 여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친구나 귀족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를 위해 건배를 했다. "오, 훌륭한 가수여. 신이 그대에 게 은총을 베푸시기를...." 하면서 공작은 자못 흐뭇해했다. "창을 휘 두르는 무술 따위는 집어치우고 내 집에 와서 같이 사는 게 어떤가. 한 평생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친절하신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마르셀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당신은 제게 좋은 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다른 일을 생각하기 전에 한번 더 그 말을 타고 나가 싸워보고 싶습 니다. 다른 기사들이 명예와 사랑을 걸과 싸우고 있는 동안에 즐거 운 날과 아름다운 노래가 과연 무슨 보람이 있겠읍니까?" 그때 한 사람이 쿡쿡 웃었다. "그래, 그대는 왕비를 얻으려고 생각 하고 있는가, 마르셀?" 그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나는 가난한 기사에 지나지 않 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나도 원할 권리가 있소. 설사 내가 왕비 를 얻을 순 없을지라도 나 역시 왕비를 위해 싸우고 피를 흘리며 패 배와 고통을 맛볼 수는 있소. 왕비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겁많게 편 안한 생활을 즐기느니보다 차라리 왕비를 위해 죽는 편이 내겐 훨씬 떳떳하고 보람있는 일이오. 만약 이 자리에서 내 이야길 비웃는 자 가 있다면 그와 싸우기 위해 내 칼은 날이 서 있소, 기사들이여!" 공작은 그와 기사들을 달래어 화해를 시켰다. 이윽고 기사들은 저 마다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르셀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공작 은 눈짓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공작은 상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 면서 은근하게 타일렀다. "자네는 역시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야. 그래 끝내 꿈에 그리는 사 람을 위해 고통과 유혈을 감수하려는가. 자네는 결코 바로아의 왕이 될 수 없어. 헬체로이트 왕비를 자네가 차지할 순 없는 일이야.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대수롭잖은 기사 한두 명을 말에서 떨어 뜨렸다고 해서 곧 행운이 잡힐 줄 아나? 기필코 목적을 달성하려면 몇 사람의 왕과 리버린과 나와 기타의 영웅 전체를 쓰러뜨려야만 한 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자네에게 말하건대, 정녕 싸울 의사가 있다면 맨처음에 바로 나를 상대하는 게 좋아. 만약 나를 이길 수 없다면 자네가 품은 환상을 깨끗이 버리고 내 휘하에 들어오는 게 좋을 거 야. 전에도 여러 차례 이야기해왔지만." 마르셀은 흠칫했으나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공작님과 말 위에서 겨루기로 하겠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공작의 천막에서 나와 자기 말에게로 갔다. 말은 그를 알아 보고 반가운 듯 다정하게 콧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빵을 받아 먹으면서 주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너는 정말.... 메릿사." 하고 그는 낮게 속삭이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너는 나 를 잘 따라주었지 하지만 우리는 차라리 이곳에 오기 전에 도중에 있는 숲속에서 죽어버릴 걸 그랬어. 쯧쯧.... 잘 자, 메릿사." 이튿날,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그는 칸볼레의 거리로 말을 몰고 가서 그 말을 팔아서 새 투구와 긴 장화를 샀다. 그가 떠날 때 말은 목을 늘여 그에게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두번 다시 뒤돌아다보지 않았다. 이윽고 공작의 하인이 적갈색 털의 훌륭한 말을 한 필 끌고 왔다. 젊고 다부지게 생긴 말이었다. 한 시간쯤 지난 뒤에 공작이 그와 싸 우기 위해서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귀족이 직접 시합에 나선다는 소 문을 듣고 구경꾼이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첫번째 대결에선 어느 쪽 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브란반트 공작이 상대를 약간 깔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대결에선 공작이 우직한 아이 같은 상대 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맹렬히 공격했으므로 마르셀은 말에서 굴러 떨 어지며 간신히 등자에 매달린 채 말에서 질질 끌려다녔다. 이 겁없는 젊은이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공작 진용의 한 천막 속에 눕혀져 간호를 받고 있을 무렵에 도시와 야영지에는 온 세계에 그 용맹을 떨친 영웅 거쉬밀레의 도착을 알리는 함성이 크게 울렸다. 위풍도 당당하게 그가 나타났다. 그의 명성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한 것이었다. 이름난 기사들은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가난한 신 분의 기사들은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왕비 헬체로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멀리서 눈짓으로 그를 환영했다. 다음 날 거쉬밀레는 당당한 위용으로 초원에서 말을 달리 며 상대와 맞서 싸움을 시작했으며 내노라하는 기사들을 차례차례 거꾸러뜨렸다.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승리 자였다. 마침내 왕비의 남편이 되어 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그에 겐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마르셀에게도 야영지의 소식이 전해졌다. 헬체 로이트를 자기에게서 빼앗아간 거쉬밀레가 찬양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말없이 천막의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운 채 이를 악물며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공작이 그를 위문하러 와서 옷가지를 선물하고는 승리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 었다. 또한 왕비 헬체로이트가 거쉬밀레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들떠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거쉬밀레는 프랑스의 앙프리 즈 왕비의 기사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나라에 무어 인 아내를 두 고 있는 몸이라는 것이었다. 공작이 돌아가고 난 후 마르셀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고통을 참아가며 승리자 거쉬밀레를 찾아다녔다. 그는 햇빛에 구리빛으로 그을린 늠름한 전사, 우람한 손발을 자랑하는 거인을 보 았다. 마치 도살자 같았다. 마르셀은 교묘히 성 안에 잠입하여 몰래 손님들 틈에 끼어들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아한 소녀와 같 은 왕비가 행복과 수줍음에 겨워 볼을 붉히며 이국의 영웅에게 입술 을 내맡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연회가 끝날 무렵, 마르셀의 후견 인인 공작이 그를 알아보고 눈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외람되오나 이 젊은 기사를 소개해 드리겠읍니다." 하고 공작은 왕비를 향해 말했다. "마르셀이라는 가수인데 그의 노래는 때때로 저희들을 즐겁게 해주었읍니다. 원하신다면 한 곡 부르도록 하겠읍 니다." 왕비는 공작과 기사를 향해 대답 대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고 기타를 가져오도록 했다. 젊은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 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곁에 놓인 기타를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한 차례 줄을 퉁기고 난 뒤에 한참 동안 왕비를 바라보고 나서 예전에 고향에서 지은 노래를 부르기 시 작했다. 후렴으로 각 절마다 짧게 두 줄의 가사를 곁들었다. 그것은 그의 상처받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슬픈 여운을 남겼다. 그날 밤 성 안에서 처음으로 불려진 그 두 줄의 가사는 곧 멀리까 지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다. 그 가사는 이런 것이었 다. 사랑의 기쁨은 순간이나 사랑의 상처는 영원하리라. 노래를 마치자 마르셀은 성을 떠났다. 창마다 새어나오는 밝은 불 빛을 멀리까지 그의 등뒤를 비췄다. 그는 천막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어둠 속으로 걷기 시작했 다. 기사의 신분을 버리고 기타를 맨 방랑 생활에 나서기 위함이었 다. 축연은 끝나고 천막은 걷혀졌다. 브란반트 공작이나 영웅 거쉬밀 레, 아름다운 왕비도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칸볼레에서 일어난 일 이나 헬체로이트를 위한 시합 등도 지금에 와선 모두 잊혀졌다. 수 세기를 지나 남아 있는 것이라곤 낡고 이상하게 들리는 그들의 이름 과 젊은 기사의 그 가사뿐이었다. 그 노래는 지금도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 한 스 >>> 어느 작은 고을에 재혼한 돈많은 부자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에 겐 전부인이 낳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큰 아들은 힘이 세고 성질이 난폭했다. 이에 비해 둘째 아들은 몹시 연약해서 어렸을 때 부터 거의 바보 취급을 당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자 한스에겐 나날이 몹시 괴로왔다. 형은 그를 멸시하고 심술을 부렸고, 아버지는 형의 편만 들었다. 아버지로서는 자신에게 그토록 어리석은 아들이 있다는 것이 여간 수치스러운 일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갈수록 모자란 아이라는 소 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소년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다 른 사람이 무어라 하든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어머니 곁에서 도피처를 찾을 수가 없게 된 뒤로부터는 집을 벗어 날 때마다 성문 밖 들판이나 꽃들을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그는 때때로 교외의 들판에서 한나절 이상을 혼자서 지냈으며 풀 과 꽃을 바라보거나 돌과 새와 벌레들에 관해 알려고 애썼으며 그것 들과 친근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대개의 경우 그는 혼자였지만 때로는 예외도 있었다. 동네 어린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일 도 간혹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가 없었으나 저보다 훨씬 어린아이들과는 퍽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꼬 마들에게 신기한 풀이나 꽃들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 라 그들과 함께 놀아주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들이 지치면 업어주기도 하고 서로 싸우면 화해를 시키기도 했다. 처음에 동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한스와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쯤 지나자 아이들이 한스와 즐 겁게 노는 것을 보고 어머니들 가운데는 이따금 한스 소년에게 아이 를 부탁하기도 하는 사람이 생겼다. 몇 해가 지나자 한스는 자신이 돌본 아이들 때문에 불쾌한 곤욕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들은 자라서 한스의 보호를 받을 필 요가 없게 되자 여러 사람에게 한스가 그 얼마나 바보인가를 엿듣고 는 집안이 좋은 애들은 그를 피하고 버릇없는 애들은 그를 비웃었 다. 그로 인해 화가 치밀거나 서러워지면 그는 혼자서 꽃밭이나 숲속 으로 도망쳐 잡초로 염소를 부르거나 빵부스러기로 새를 모아들였 다. 그리하여 배신을 당하거나 자신에게 적의를 품지 않을 나무나 짐승들과 어울려 지냈다. 아득히 비구름을 탄 신이 땅 위를 스쳐 지나가고 구세주가 조용한 들길을 거니는 것을 그는 종종 보았다. 구세주를 보면 그는 얼른 덤 불 속에 몸을 숨기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가 지나쳐 가기만을 기 다렸다. 차츰 나이가 들어 직업을 택할 때가 되자 그는 형처럼 아버지의 일을 거들지 않고 교외에 있는 농장에 나가 양치기 생활을 했다. 그 는 양과 산양과 돼지와 소와 집오리가지 몰고 다녔으며, 그의 가축 은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새 가축들은 그를 따르게 되 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양치기들에게보다 그에게 순종했다.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자 이 젊은 양치기에게 가장 크고, 가장 좋은 양 떼가 맡겨졌다. 그러나 읍내 시장거리에 가야만 할 때면,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고 기분은 침울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개구장이들은 등 뒤에서 그의 별명을 불러댔다. 형은 그를 멸시하여 아예 아는 체도 않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형은 유산의 절반 이상을 속여서 차지했으나 한스는 그것에 아 랑곳하지도 않았고 또한 재산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따금 양치기의 보수에서 일부분을 떼어내어 어린아이들이 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또한 그는 가끔 자기가 특히 좋아하 는 암소나 염소에게 딸랑거리는 방울이 달린 목걸이를 사주곤 했다. 몇 해가 흘렀다. 한스도 이젠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인간생 활에 대해선 그다지 모르고 살았지만 바람과 기후, 풀의 자라남과 수확, 가축과 개 등에 대해선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가 거느린 많은 동물들 하나하나를 그 아름다움과 강함, 기질과 나이등 으로 구별해낼 수 있었다. 비단 가축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새에 대 해서도 그 습성 및 종류에 능통했다. 더우기 도마뱀, 뱀, 딱정벌레, 벌, 족제비, 담비, 다람쥐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꽃과 잡초 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흙과 물, 사계절과 달의 변화도 익숙히 파악하고 있었다. 동물들끼리의 싸움이나 질투도 잘 다스렸으며 간혹 병이 들면 정 성껏 돌보다 낫게 해주었고 홀로 된 새끼 동물들을 거두어 지성껏 키웠다. 그는 한 평생 양치기나 소몰이의 일 외에 다른 일을 할려고 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숲가의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가축들을 지켜보고 있 었는데, 갑자기 읍내 쪽에서 한 여자가 달려오더니 그를 본 체 만 체 지나쳐서 가까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흥분과 슬 픔으로 뒤엉킨 몰골이었으므로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자살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밧줄을 너도밤나무 의 가지끝에 매달고 자기의 목을 줄에 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조심스럽게 다가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일을 만 류했다. 여자는 흠칫 놀라 손놀림을 멈춘 채 사뭇 저주스런 눈초리 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여자를 강제로 앉히고 마치 절망에 빠진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얘기한 끝에 드디어 그녀의 사정과 괴로움을 다 털어놓게 만들었다. 한스는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남편과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 다. 그는 그녀로 하여금 마음껏 불평을 터뜨리게 하고 마음속에 품은 감정들을 다 털어놓게 했다. 말하는 동안에 여자는 얼마간 냉정을 되찾은 듯했으며, 그는 그녀를 위로하고자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냈 다. 자기가 맡은 일과 숲과 양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집으 로 돌아가 다시 한번 남편과 화해를 하도록 타일렀다. 그녀는 울면 서 돌아갔다. 그 뒤 얼마동안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 라 전혀 아무런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가을로 집어 든 어느 날,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남편과 의형제 한 사람까지 더 데리고 왔다. 그녀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서 자기 부부가 화해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꼭 한번 마을에 있는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초대까지 했다. 아울러 의형제 를 소개하며 그에게도 조언과 위로를 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물방앗간이 불에 타버렸고 그 와중에 아들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양치기가 그의 말을 다 듣고 나 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막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할 때, 그의 모 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형언하기 어려운 평온과 힘을 느끼게 했 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한 자에게 친절을 베 풀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안겨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내 부푼 감동 속에서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수 그 의형제는 조언이 필요한 친구 한 사람과 같이 나타났 다. 몇 해가 지나자 온 고을 안에 양치기 한스의 소문이 쫙 퍼졌다. 그는 정신병자를 고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을 건져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으나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 앞에 줄을 이었다. 그는 낭비가 심한 부랑아 를 새사람이 되게 하고 한없는 절망 속에서 괴로와하는 사람에게 인 내심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서로 앙숙이던 부유한 두 가문이 그의 중재로 화해되었을 때는 정말 놀라운 평판이 일었다. 미신이나, 마법이다 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 무에게도 보수나 사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한 비난은 곧 사라 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마치 신성한 은자를 찾아나서듯 양치기를 찾아왔다. 그 의 인품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나 소문은 어디를 가나 떠들썩했다. 숲속의 동물이 그의 뒤를 따른다든가. 그는 새와 말할 줄 알 뿐 아 니라 비를 내리게 하며 번개를 피할 수도 있다는 소문들이 파다했 다. 한스의 이야기라면 여전히 빈정대거나 악의에 가득 찬 험담을 늘 어놓는 사람 가운데는 그의 형도 있었다. 형은 그를 가리켜 바보 같 은 놈, 바보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하여 동생을 들먹이며 자신이 아우를 야단쳐서 그 가 하는 일을 중지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장담을 해놨기 때문에 이튿날 그는 두 사람의 증인을 앞세워 양치 기를 찾아나섰다. 인적이 드문 들판에서 그는 아우를 만났다. 아우는 형을 반갑게 맞이하여 빵과 우유를 권하고 형과 가족의 안부를 물었 다. 형은 심술궂은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아우의 태도에 그만 감 동이 되고 마음이 누그러져 오히려 아우에게 용서를 빌고 크게 뉘우 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마지막 사건은 여태껏 그에게 악의를 품어온 사람들의 입을 완 전히 다물게 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한 새로운 화제를 계속 만들어 냈다. 한 젊은이는 그에 대해 시까지 썼다. 한스가 쉰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다. 하잘 것 없는 마찰이 크게 번져 마침내 유혈 사태가 일어나 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 원수처럼 나뉘어 섰다. 이어 일어난 살인 사 건은, 소문에 따르면 독살이라는 것이었다. 온 마을이 상기되어 흥분과 파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지독 한 전염병이 그곳을 휩쓸었다. 처음엔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 전염병은 나중엔 어른에게까지 번져서 수주일 만에 마을 사람의 사분의 일을 죽게 했다. 때마침 이 나쁜 시기에 늙은 읍장이 죽었다. 시민들끼리의 불화와 역병에 시달린 거리는 기력을 잃고 절망에 빠졌다. 도둑들이 날뛰어 사람들은 더욱 불안에 떨었다. 선량한 주민들은 갈 바를 모르고 갈 팡질팡했다. 부자는 협박장 앞에서 주눅이 들고 가난뱅이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한스는 일찌기 자기가 도움을 준 몇 명의 사람 들을 찾아 읍내에 들어섰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며 한 사람은 병 들어 누워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양친을 잃고 거지가 되어 있었다. 집들은 텅 비어 있었으며 골목마다 공포와 불안과 불신이 넘쳐 있었 다. 한스가 거리 중앙에 있는 광장을 거닐며 자기가 자란 고향의 참 혹한 광경에 가슴 아파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데 수많은 군중들은 그 가 한스임을 곧 알아차리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따라붙어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관청 앞에 이르자 그는 얼떨결에 현관의 계단 위로 떠밀려 서게 되었고 위로와 희망에 목말라 있는 수많은 군중과 정면으로 맞부딪 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위로와 친절을 다하려는 일념으로 양팔을 뻗어 군중 을 잠잠해지게 한 후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질병과 죽음, 죄와 구원에 대해 얘기한 뒤에 한 가지 이야기 로 끝을 맺었다. "어제 저는 마을의 높은 언덕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읍니다. 구세주는 우리가 겪는 온갖 불행을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 다." 그 말을 전할 때의 그의 모습은 마치 동정과 사랑의 화신처럼 보 였을 뿐만 아니라 사뭇 경건한 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들 중 엔 그가 곧 구세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사자임에 틀림없다 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 분을 모셔오라!" 하고 군중은 부르짖었다. "우리를 구원해주도 록 구세주를 이곳에 모셔오라." 이때 비로소 한스는 자신이 기다림에 지친 군중들의 엄청난 힘을 자극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은 어 두워지고 지쳐버렸다. 비로소 그는 속세의 고통이 그 자신의 확신보 다 훨씬 더 거세고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드 리겠소!" 하고 그는 소리쳤다. "사흘 낮 사흘 밤 안에 기어코 그 분 을 찾아, 함께 이 자리에 모셔와 여러분을 구원해주시도록 기도드리 겠소." 극심한 피로와 혼란에 싸인 채 예언자는 군중들 틈을 헤치고 나와 다리를 건너고 성문을 지나서 들판에 다다랐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 도 작별을 하고 하나 둘 흩어졌다. 슬픔에 싸여 그는 숲속을 방황했 다. 이윽고 그는 이따금 신의 존재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한 장 소를 찾아냈다. 기도를 드리면서도 그는 처참한 기분이 된 채 수많 은 군중의 비탄에 압도되어 마음이 스산하기만 했다. 어느 새 그는 한갓 양치기와 어린 아이들의 친구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 들을 위한 영혼의 구제자가 되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지상에 널린 악은 기승을 부리고 진실은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나흘만에 초라한 모습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 거리로 돌아온 그 의 얼굴은 한층 늙고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사람들은 묵묵 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곁을 지나치자 땅에 꿇어 엎드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한 마디 거짓말로 일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 거짓말도 진 실이었다. "예수님을 만났는가? 그 분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군중은 한 스를 다그쳤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내게 분명히 말씀하 셨소 - 돌아가 너희 마을을 위해 죽으라. 내가 온 세상을 위해 죽은 것처럼이라고." 한순간 놀람과 실망이 군중을 엄습했다. 이윽고 한 사람의 노인이 욕설을 퍼부으며 이 예언자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이로써 한스는 일생을 마쳤고 격노한 군중에게 소리없이 희생되었 다. <<< 난장이 >>> 늙은 이야기꾼 체코는 어느 날 저녁 부두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 작했다. 여러분,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제가 아주 옛날 이야기 한 편을 들 려드리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귀부인과 난장이, 진실과 거짓, 사랑과 죽음, 그리고 미약에 관한 것이랍니다. 대개 모험담이나 옛 이야기란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것이든 그런 종류의 얘기로 정해져 있긴 하지 만 말입니다. 마거리트 캐더린 양은 귀족 바티스타 캐더린의 딸로서, 그 당시 베니스의 아름다운 귀부인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미인이었읍 니다. 그녀를 찬미한 시나 노래는 운하 주변의 수많은 아치 형 창문 이나 봄날 밤에 댈빈 다리와 도가나 사이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곤도 라의 숫자보다도 많았읍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를 가릴 것 없이 수많 은 귀족들이, 베니스 인에서부터 무라노 인, 그리고 파두아 인에 이 르기까지 밤에 잠이 들면 틀림없이 그녀에 대한 꿈을 꾸고 아침엔 눈을 뜨자마자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꽉 찰 지경이었답니다. 도시의 잚은 귀부인들 중에서 마거리트 캐더린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답니다. 나로서는 그녀의 모습을 설명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랍니다. 그녀는 금발머리에 마치 푸른 나무처럼 키가 날씬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엔 공기가 아양을 떨고 발바닥엔 대지가 아첨을 할 정도였다고 하면 알 만하지요. 치치안은 그녀를 한 번 보자마자 앞으로 일 년 내내 그녀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 대해 서도 글로 쓰고 싶지 않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아름다왔다니까 그 다 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읍니다. 호화스러운 의상과 레이스, 비잔틴의 비단, 으리으리한 보석과 장 신구 같은 것들을 그녀는 모두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녀의 저택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했읍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소아시아에서 건너 온 두텁고 아름다운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찬장에는 은쟁반들이 가 득 차 있었으며, 식탁은 언제나 보기 좋은 단지와 눈부신 그릇들로 반짝거렸고, 거실의 마루바닥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이루어져 있었 답니다. 천정과 벽은 비단과 명주를 썩어서 짠 고블랑 융단과 눈부 실 정도로 밝은 그림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죠. 심지어는 하녀나 곤 도라의 사공까지도 하려하게 치장시켜 놓았을 정도였으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실은 다른 집에도 있는 것들이었읍니다. 그녀의 저택보다 더 크고 더 호화스런 저택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더 많은 비싼 물건들로 채워진 찬장이나 더 값비싼 그릇들이니 벽걸이, 장신구 등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이었읍니다. 그 당시 베니스는 매우 번성했으니까요. 그런데 유일하게 젊은 마 거리트만이 가지고 있으면서, 더 부유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 던 보물은 바로 필리포라는 난장이였읍니다. 아 글쎄, 그는 키가 불 과 석 자도 채 못 되었을 뿐 아니라 등에 혹이 두 개나 달린 참으로 볼품없는 난장이였답니다. 그 필리포는 키프로스 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빅토리아 바티스타 씨가 여행을 마치고 데리고 왔을 때만 하 더라도 그는 그리스어와 시리아 어 밖에 지껄이지 못했었지만 이제 는 베니스의 중심지인 리바, 혹은 산 지오베 교구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능숙하게 베니스 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 여주인은 참으로 보기 드문 미인이었지만 난장이는 지독하게 도 못생겼었답니다. 그녀가 불구인 그와 함께 서 있노라면 마치 높 다란 교회의 첨탑이 가난한 어부의 움막과 나란히 서 있는 듯이 두 드러져 보였읍니다. 난장이의 손은 주름살 투성이인 데다 검붉었고, 마디마디가 굽어 있었죠, 걸음걸이는 너무도 우스꽝스러웠고, 코는 크고, 발 또한 볼 품없이 넓적한 데다 안짱다리였답니다. 그렇지만 난장이는 비단과 금실로 온몸을 감싸고서 마치 왕족과 같은 차림새로 걸어다녔답니 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그 난장이를 진귀한 보물처럼 돋보이게 했 답니다. 아마 베니스뿐만 아니라 밀라노를 비롯한 온 이탈리아에서 도 그보다 더 기묘하고 웃기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왕족이나 귀족들 가운데는 아마 그 난장이가 상품이었다면 얼마가 들든 많은 돈으로 그를 사고자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궁 전과 도시에도 몇몇 난장이가 있기는 했지만 작고 못생긴 점에 있어 선 필리포와 맞설 만한 사람이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이나 타고난 재질 면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그와는 비교가 안 되었읍니다. 지 혜로만 보자면 그는 아마도 족히 십인 회의에 나갈 수 있거나 공사 관을 통솔할 만한 자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세 나라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있어서나, 조 언을 하는 데 있어서나, 의견 창출자로서도 뛰어나서 옛날 이야기나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야기도 얼마든지 말들어낼 수가 있었읍니다. 그는 좋은 지혜 못지않게 재치도 풍부해서 마음만 내키면 아무나 곧 잘 웃기거나 침울하게 만들고는 했답니다. 날씨가 맑게 개인 날, 여주인이 당시 유행하고 있던 머리 모양을 뽐내며 밝은 햇살에 머리카락을 말리려고 발코니에 앉아 있을 때면 으레 두 사람의 하녀를 비롯해서 아프리카 산 앵무새와 난장이 필리 포가 시중을 들곤 했지요. 하녀들은 여주인의 긴 머리를 적셔서 빗 어 올리거나 넓은 챙이 달린 모자 위에 펼쳐 놓고 말리면서 장미 즙 이나 그리스 항구를 뿌리곤 했답니다. 그렇게 시중을 들면서 그들은 새로운 소식이나 있을 법한 일들, 이를테면 죽음과 의식, 결혼과 출 생, 도난과 우스갯거리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두 다 지껄여대는 것이었지요. 앵무새는 아름다운 빛깔의 깃털을 나풀거리면서 세 가지의 재주를 부렸읍니다. 즉, 마치 피리와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염소 처럼 울음 소리를 내거나, '안녕!'이라고 소리치기도 하는 것이었어 요. 난장이는 그 옆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햇볕을 쬐고 있었지 요. 그는 아가씨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나 달려드는 파리 떼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한 채로 옛날 이야기 책과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것이었 읍니다. 마침내 빛깔 고운 앵무새는 졸음에 겨운 듯 기지개를 켜고 나서는 그대로 잠이 들고 하녀들은 제각기 재잘대는 것에 지쳤는지 잠잠해 져서 그저 기계적으로 손놀림만 해대는 것 같았읍니다. 사실 베니스 의 높은 옥상 발코니보다 더 한낮의 태양이 뜨겁고 나른하게 내려 쪼이는 곳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여주인은 기분이 매우 언짢아져 서 하녀들이 머리를 너무 말려버렸거나 잘못 빗어 넘기면 발칵 화를 내곤 했지요. 그러다가는 으레 "그 사람한테서 책을 빼앗아버려." 하 고 소리치곤 했다나요. 하녀들은 필리포의 무릎에서 책을 빼앗았읍니다. 난장이는 순간 화가 나서 얼굴을 쳐들었지만, 금새 마음을 누그러뜨리고는 "주인님, 무엇을 원하시나요?" 하고 공손하게 묻는 것이었어요. 여주인은 "내 게 이야기를 들려줘요!"라고 명령을 했답니다. 난장이는 "생각해보지 요."하고 대답하고는 정말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다 이따금 그가 지리할 정도로 뜸을 들여서 여주인이 몹시 호 통을 치는 경우가 있었읍니다.그래도 난장이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몸집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태연히 대답 하는 것이었어요. "주인님, 조그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좋은 이야기 란 마치 고상한 야수와 같기 때문에 어디엔가 깊숙이 숨어 있게 마 련이랍니다. 골짜기나 숲 언저리를 오랫동안 서성거리며 참을성 있 게 기다려야만 할 때가 많지요. 그러니 제게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십 시오!" 그러나 그가 충분히 뜸을 들이고 나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 면 그것이 끝날 때까지 결코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었답니다. 그 의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었지요. 그것은 마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하찮은 풀잎에서부터 넓다란 창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적시고, 온 세상을 남김없이 적시는 것과도 같았으니까요. 앵무새는 어느덧 깊이 잠들어 꿈속에서 이따금 구부러진 부리를 딱딱 맞부딪치곤 했읍니다. 작은 운하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 에 물에 비친 집들의 그림자는 실제의 것들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읍 니다. 햇빛은 평평한 지붕에 내리쬐고 하녀들은 졸음을 이기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난장이는 졸기는커녕 한번 이야 기를 꺼냈다 하면 마술사나 임금처럼 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태양 을 등지고 앉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주인으로 하여금 갑자 기 온몸이 벌벌 떨리는 어두운 숲속이나 퍼렇고 썰렁한 바다 밑이나 아니면 수수께끼의 먼나라에 이르게 했답니다. 그의 이야기 솜씨는 마치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 듯이 듣는 사람의 영혼을 마음대로 쥐 고 흔드는 것이어서 마술사의 말솜씨 같다고 인정받을 정도였는데, 그는 먼 동양에서 그 솜씨를 배워왔던 것이었읍니다. 그의 이야기는 상대방의 영혼이 스스로 쉽사리 날아가지 못할 만 큼의 환상 속에서 시작된 적은 거의 없었읍니다. 그는 언제나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황금의 팔찌라든가 비단이라든가 언제라도 당장 몸 가까이에 있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 보물의 예전 주인이나 그것을 처음에 만든 장인이 나 상인들의 이야기로 전개시켜감으로써 여주인의 공상을 어느 사이 에 제 마음대로 이끌어가곤 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야기는 자연 스럽게 서서히 흐름을 이루어 저택의 발코니에서 상인의 거룻배로, 거기에서 배와 항구로, 뿐만 아니라 머나먼 나라로, 이 세상의 끝까 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었읍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이 그 여행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되어 가만히 베니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의 정신은 이미 먼 바다나 수수께끼와 같은 고장을 즐겁고도 호기심에 가득 차서 헤매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런 식으로 필리포는 이야기를 이어갔답니다. 그토록 신비로운 동양의 우화 외에도 옛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나 당대의 것이나 진짜 모험과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요. 예를 들자면 아이네아스 왕 의 여행과 모험에 대해서, 키프로스라는 나라와 요하네스 왕에 대하 여, 마술사 비르길리우스에 대하여, 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대 여 행에 대하여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 생각해 도 엄청나게 재미난 줄거리를 거뜬히 지어서 얘기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읍니다. 어느 날 꾸벅거리고 있는 앵무새를 보고 여주인이 "다재다능한 필 리프, 지금 저 새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고 묻자 그는 잠 시 생각한 끝에 마치 제 자신이 앵무새이기라도 한 것처럼 긴 꿈 얘 기를 털어놓았읍니다. 얘기를 끝낼 무렵에서야 앵무새는 잠에서 깨 어나 염소 울음을 한바탕 울더니 홰를 쳤지요. 한 번은 그녀가 작은 돌멩이를 들어 테라스 건너편에 흐르는 강물 에 던지자 소리가 텀벙 났는데 그 소리를 듣자 그녀는 필리포에게 이렇게 물었읍니다. "이봐요, 필리포, 방금 내가 던진 돌멩이는 어디 로 갔을까." 그러자 대뜸 난장이는 그 돌멩이가 물 속에서 해파리나 물고기, 게나 조개, 익사한 선원의 정령이나 작은 악마, 혹은 인어에게 떨어 져 가는 모습을 생생히 설명했읍니다. 그는 갖가지 사물의 상태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세밀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 던 것이지요. 한편 마거리트 양은 흔히 부유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그렇듯이 그다지 거만하고 야멸차지는 않았으나, 난장이에게만큼은 남다른 애 정을 기울여 모두들 호의와 존경으로 그를 대하도록 배려해 주었읍 니다. 다만 그녀 자신만은 이따금 그를 다소 골탕먹이며 즐거워했읍 니다. 아무튼, 그는 소녀의 소유물임에니 틀림없었읍니다. 그녀는 그의 책을 모조리 빼앗아버리거나 그를 앵무새의 비좁은 조롱 속에 가둔 다든지 번들거리는 마루바닥 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장난을 치 기도 했읍니다. 물론 그런 것은 결코 어떤 심술에서 나온 것은 아니 었지요. 당사자인 필리포도 한 마디의 불평도 흘린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는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잊어버리지 않은 채 간혹 새로 지어낸 이야기가 동화 속에서 넌지시 빗대어 얘기하거나 지나가는 이야기 속에 뼈있는 한마디로 쿡 찌르곤 했답니다. 그러면 그때는 여주인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지요. 그녀는 그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지는 않도록 그녀 나름대로 조심을 했읍니다. 아닌게 아니라 난장 이는 비밀스런 지식이나 금단의 약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누구나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는 온갖 동물들과 대화가 가능했고 날씨나 폭풍에 대한 예측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런 점을 고치 꼬치 캐물을 때면 그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읍니다. 그리고는 비 뚤어진 어깨를 움찔거리며 무겁게 얹혀진 머리를 흔들었는데 대개의 경우 질문한 사람은 그만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치밀어 묻 고 싶은 내용마저도 깡그리 잊어버리곤 했답니다. 인간이란 원래 생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제나름의 애정을 나타내 고 싶어하는 존재지요. 필리포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책 말고 도 검정 강아지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읍니다. 강아지는 그의 소유였 으며 곧잘 그의 곁에서 잠들곤 했읍니다. 그 강아지는 마거리트 양 을 사모하다가 끝내 거절당하고 돌아선 사람이 그녀에게 보낸 것이 었는데, 여주인이 난장이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지요. 그런데 거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읍니다. 다름 아니라 첫날부 터 그 강아지는 운수 사납게도 닫힌 문살에 발목이 삐었던 것입니 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요. 그래서 난장이는 그 강아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했답니다. 정성스런 그의 간호로 인해 강아지의 상처는 아물고 그때부터 그놈은 주인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읍니다. 하 지만 비록 발목의 상처는 나았어도 절름거렸기 때문에 곱사등이 주 인과 잘 어울렸읍니다. 그래서 필리포는 자주 남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요. 난장이가 강아지 사이의 애정은 아마 다른 이에겐 몹시 우 스꽝스럽게 보였겠지만, 가장 진실하고 소박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었지요. 설사 부유한 귀족이라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에게서 발목이 굽은 볼로냐 강아지가 필리포에게서 받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리라고 여겨지는군요. 그는 사랑스러운 그 강아지를 필리포노 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줄여져서 피노라는 애칭이 되었읍니다. 그는 강아지를 마치 어린아이 다르듯 정겹게 돌봐주고 얘기했으며, 맛있 는 음식을 먹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은 침대에서 함께 재웠고 가끔 오랫동안 함께 어울려 놀곤 했지요. 난장이는 자신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몰골의 사랑을 그 영리한 동 물에게 모두 쏟았기 때문에 하녀나 여주인의 놀림감이 되곤 했읍니 다. 그러나 그 애정이 결코 우스갯거리일 수만은 없었다는 사실이 곧 현실화될 날이 닥치게 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단지 강아지와 난장 이와의 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집안 전체에 걸쳐 더없 이 큰 불행이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찮은 한낱 절름발이 강아지 때문에 이토록 장황하게 설 명을 드리는 것이 여러분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읍니 다만 이보다 훨씬 더 하찮은 것이 원인이 되어 중대한 운명을 낳게 되는 실례는 얼마든지 있읍니다. 지체 높고 부유하면서도 잘 생긴 수많은 남성들이 늘 마거리트를 흠모하여 접근해 왔지만 그녀 자신은 마치 이 세상에 남성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거만하고도 냉담하게 굴었읍니다. 그녀는 쥬스 티니아니 가 태생인 도나 마리아(그녀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몹 시 엄격하게 양육되었을 뿐 아니라 천성이 거만한 새침데기로서 베 니스 장안에서도 첫손 꼽히는 차가운 미녀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 지요. 그녀 때문에 파두아의 한 젊은 귀공자는 밀라노의 사관과 결투를 벌이다 죽은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뿐만 아니라 죽은 젊은이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을 들었을 때 도 그녀의 새하얀 이마엔 한 자락 의미한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소네트마저도 그녀는 늘 웃음거리 로만 여겼을 정도였지요. 그 무렵 그 고장에선 가장 명망 있는 집안에서 두 사람의 구혼자 가 나타나서 정식으로 청혼을 해왔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끈질긴 권 유나 반대를 물리치고 양쪽 모드에게 거절의 뜻을 표명했답니다. 그 때문에 집안끼리 반목이 생겨 오랫동안 앙숙으로 지내게 되었지요. 그러나 날개 달린 천사는 장난을 몹시도 좋아해서 사냥감을 결코 놓치는 범이 없거든요. 특히 이토록 아름다운 사냥감은 말이지요. 흔 히 알고 있듯이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나간 다음엔 으레 따뜻한 봄이 찾아오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가까이하기 어렵게 도도한 여성이야말로 순식간에 격렬한 사랑에 빠지기가 쉬운 법이죠. 무라노의 정원에서 베풀어진 어떤 연회에서 마거리트는 소아시아 의 해안 지방에서 막 돌아온 선원인 한 젊은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읍니다. 발더살레 모로지니라고 불리우는 이 젊은이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훤칠한 용모 등 그 어느 모로 보아도 그녀에 비 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녀의 체취는 어디까지나 밝고 산뜻한 것이었음에 비해 그는 무게 있고 다부지게 보였읍니다. 그녀는 그가 오랫동안 바다나 외국에서 지냈으며 모험을 즐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햇빛에 그 을린 이마엔 지적인 반짝임이 어른거렸읍니다. 다부지게 굽은 콧날 위엔 검은 눈망울이 뜨겁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지요. 물론 그도 곧 마거리트를 발견하게 되었읍니다. 그녀의 이름을 알 아내자 그는 즉시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에게 접근할 방법을 궁리했 읍니다. 기회는 곧 다가왔읍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그럴 듯한 인사말을 서로 나누면서 소개가 이루어졌지요. 연회는 거의 자정 무 렵까지 계속되었는데 마지막까지 그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줄곧 그녀의 곁을 맴돌았읍니다. 어쩌다 그가 흘린 말 한 마디도, 그것이 설령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겐 던진 말일지라도, 그녀는 마치 복음에라도 접하는 양 지지 하고 귀담아 듣곤 했지요. 물론 발더살레 씨는 여러 차례 그의 여행 과 활동, 그리고 자신이 극복한 위험에 관한 얘기를 하도록 채근질 당하곤 했읍니다. 그의 말솜씨는 퍽이나 기품있고 쾌활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즐겁게 경청했지요. 사실 그의 모든 얘기는 단 한 사람의 여성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 이었지요. 그는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모험마저도 그것이 마치 누 구나 이미 다 경험해보았던 건인 양 자연스럽게 얘기했읍니다. 하지 만 다른 항해자, 특히 젊은 항해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제 자신을 지 나치게 정면으로 내세우진 않았지요. 단 한 차례 아프리카의 해적과 마주쳐 싸웠을 때의 얘기에선 중상을 입은 사실을 털어놓았읍니다. 그 상처는 지금도 왼쪽 어깨의 바로 위쪽에 비스듬한 흉터를 남기 고 있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마거리트는 숨을 죽인 채 얘기에 빨려 들어가 등에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흥미 있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읍 니다. 연회가 끝난 뒤에 그는 그 부녀를 곤도라까지 배웅했으며 작 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어두운 물살을 가르며 사라져가는 곤도라의 횃불을 지켜보고 있었읍니다. 그는 그것이 완전히 눈에서 사라지자 방갈로에 있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읍니다. 그곳엔 젊은 귀공자들이 서너 명의 미인들에게 둘러 싸여 노란 그리스 포도주와 빨갛고 달콤한 알켈메스로 입술을 적시 면서 따스한 밤을 좀더 즐기고 있었읍니다. 그 가운데는 잔바티스타 젠타리니라는 베니스 장안에서도 소문난 부자이며 한량인 한 젊은이 도 끼어 있었읍니다. 그가 발더살레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팔을 붙잡고 웃으며 말했읍니 다. "나는 오늘밤 자네가 여행중의 연애 모험담을 들려주기를 얼마 나 바랐는지 모른다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 다네. 아름다운 캐더린이 자네의 마음을 이미 빼앗아버렸으니.... 하 지만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마치 돌로 다듬어진 것 같은 여자로서 영혼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걸세. 마치 조르지오네의 그림과도 같지. 조르지오네가 그린 여인은 육체와 생 명을 지니지 못했으며 다만 우리의 시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무런 비난거리가 안 되는 것일세. 진정으로 충고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인데.... 성급하게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게. 그 렇지 않으면 퇴짜맞는 세 번째 사나이가 되어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하녀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테니까." 발더살레는 다만 빙그레 웃고 있을 뿐 아무런 대구도 하려 들지 않았읍니다. 그는 달콤하고도 윤기나는 갈색 키프로스 포도주를 서 너 잔 마신 뒤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그 자리를 떠났읍니다. 이튿날 그는 일찍 서둘러 우아하고도 아늑한 저택으로 늙은 캐더 린 씨를 방문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읍니다. 그날 밤 그는 여러 명의 가수와 악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젊고 아름다운 숙녀에게 세레나데를 바친 끝에 드디어 소 원을 이루게 되었읍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귀를 기울였으며 얼마 동안 발코니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으니까요. 물론 그 소식은 순식간에 온 고을에 파다하게 퍼졌읍니다. 모로지 니가 마거리트의 부친에게 구혼하기 위해 호화로운 행장을 구리기도 전에 이미 건달들과 거리의 참새 떼들은 약혼이 어떻고 혼례 날짜가 어떻고 하면서 제멋대로 입방아들을 찧기 시작했읍니다. 그는 그 당 시의 관습에 따라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한두 명의 친구 를 내세워 청혼을 한다는 절차를 싫어했읍니다. 그러나 곧바로 거리 의 건달들과 참새 떼들은 자기들의 추측이 들어맞은 것을 기뻐했읍 니다. 발더살레 씨가 캐더린 씨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혼을 하자 상대 는 적이 당황했읍니다. "청혼은 감사합니다만!" 하고 그는 사뭇 타이 르듯이 말했읍니다. "귀하의 청혼이 우리 가문에게는 커다란 영광이 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 청혼을 거두어 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해주십시오. 그러는 것이 서 로를 위해서도 좋고 상심과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입니다. 귀 하는 오랫동안 이 고장을 떠나 여행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불행한 내 딸이 지금껏 두 차례나 명예로운 청혼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 절해서 내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었는가를 아실 턱이 없겠지요. 솔직 히 말해서 내 딸은 사랑이나 남성에 대해선 아무런 흥미가 없읍니 다. 내 나름대로 여러 차례 달래기도 하고 설득도 해봤지만, 딸애의 고집을 꺾기엔 아버지로서의 힘이 너무나도 모자랍니다." 발더살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구혼을 철회하기는커녕 거꾸로 실 의에 빠져 있는 노신사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 을 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그는 딸과 얘기를 나눠보겠다고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읍니다. 딸의 대답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짐 작하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녀는 평소의 도도함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인 거절을 몇 번 되풀이했을 것이고, 더우기 아버지 앞이라서 매우 숙녀 티를 내려고 애썼겠지만 속으로는 이미 '좋아요'라고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녀의 대답은 결국 '예' 였읍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발더 살레는 우아하고 값비싼 선물을 들고 나타났으며 약혼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뒤에 처음으로 그토록 아름답고 거만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읍니다. 이렇게 되자 베니스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저 마다 한 마디씩 지껄이거나 질투할 거리가 생겨난 셈이었지요. 누구 도 그토록 어울리는 한 쌍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둘은 다 맵시가 좋고 늘씬할 뿐 아니라 여자 쪽도 결코 작아 보이진 않았읍 니다. 그녀는 금발, 남자는 흑발이었지요. 둘 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가문의 전통이나 기질 면에서 서로 조금도 뒤지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읍니다. 단 한 가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마거리트를 몹시 상심하게 만든 일이 생겼읍니다. 그것은 바로 약혼자가 중요한 사업의 매듭을 짓기 위해 곧 한번 더 키프리스에 다녀와야 되겠다고 한 말 때문이었죠. 벌써 사람들이 온 마을의 축제처럼 고대하고 있는 결혼식을 신랑이 키프리스에서 돌아온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읍니다. 얼마 동안 그들 은 그런 대로 즐거운 나날을 보냈지요. 발더살레는 언제나 마거리트 의 곁을 맴돌며 연회를 자주 마련하였고 선물이나 노래나 갑작스런 만남을 준비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냈읍니다. 그는 또한 케케묵은 관 습을 깨고 덮개를 씌운 곤도라를 타고 여러 차례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읍니다. 마거리트에게는 귀하게 떠받들린 젊은 귀부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못 콧대가 높고 약간 잔인한 면이 있는가 하면, 발더살레는 원래 개인주의적인 데다가 자기만을 내세우길 좋아하는 성미였읍니다. 더 구나 선원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빠른 출세를 해온 탓으 로 거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읍니다. 그러던 사람이 구혼자로서 남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예의바 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온 만큼 드디어 목적을 이루게 되자 더 한 층 자신의 성격과 충동을 거침없이 드러내게 되었읍니다. 원래 거칠 고 난폭한 기질인 데다 선원과 대상인으로서 거침없는 생활을 해왔 었기 때문에 남에 대한 이해심은 거의 없는 편이었지요. 기묘한 일 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약혼녀 주변엔 그의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 많았읍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앵무새와 강아지 피노, 그리고 난장이 필리포를 눈에 거슬려 했읍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그는 속이 뒤틀린 나머지 알게 모르게 학대했을 뿐 아니라 여주인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 했읍니다. 그가 저택에 들어서서 카랑카랑한 목소 리가 나선형 계단에 울리게 되면 강아지는 사납게 짖으면서 도망치 고, 새는 울부짖으며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읍니다. 난장이는 입술 을 비쭉거리며 아예 입을 다문 채 버텼읍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려 두겠읍니다만 마거리트는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되더라도 난장이 필리포를 위해서만은 어떻게 해서 든지 손을 써서 감싸주려고 항상 애를 썼읍니다. 그렇다고 해도 차 마 애인의 기분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못살 게 굴거나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읍니다. 어쩌면 보고 도 못 본 채 했을 수도 있죠. 앵무새는 아주 깨끗이 처치되어 버렸읍니다. 어느 날 모로지니가 또 다시 앵무새를 건드리면서 막대기로 찌르자 성난 앵무새가 그만 그의 손등을 뾰족하고 힘센 주둥이로 쪼아 피가 나도록 상처를 입혔 기 때문에 그는 격분해서 앵무새의 목을 비틀어버리라고 명령했읍니 다. 죽은 새는 아무도 모르게 집 뒤의 비좁고 어두운 강물에 던져졌 읍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강아지 피노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읍니다. 어 느 날 여주인의 약혼자가 들어오자 피노는 계단의 어두운 구석에 숨 어 있었읍니다. 그가 들어올 때마다 항상 눈에 잘 띄지 않게 하기 위해 그곳에 몸을 숨기곤 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날 발더살레는 하 인에게 맡겨선 안 될 어떤 물건을 곤도라에 그대로 놓아둔 채 내리 기라도 했는지 곧장 되돌아 서서 계단을 다시 내려왔읍니다. 깜짝 놀란 피노는 갑자기 마구 짖어대며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에 발더살 레는 하마터면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읍니다. 그는 휘청거리며 강아지와 함께 복도에 내려섰지요. 강아지는 잔 뜩 겁을 먹고 현관까지 마구 뛰쳐 달아났읍니다. 그곳엔 폭이 넓은 돌층계가 놓여 있었고 그 앞은 바로 강물이었읍니다. 그 순간 피노 의 울부짖는 소리와 비명을 들은 난장이가 현관에 나타나 발더살레 의 곁에 섰읍니다. 발더살레는 빈사 상태의 강아지가 마지막 몸부림 을 치면서 물살을 헤집고 있는 모습을 키들키들 웃음을 터뜨리며 바 라보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밖의 소란스런 소리에 놀란 마거리트가 이층 발코니에 나타났읍니다. "이서 곤도라를 내주십시오. 주인님. 제발 도와주세요." 하고 필리 포는 숨가쁜 목소리로 주인에게 외쳤읍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지 금 곧.... 조금만 늦으면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아, 피노, 피노...." 그 러나 발더살레는 능청스런 웃음을 띠면서 서둘러 곤도라를 풀어 막 강물에 띄우려는 사공을 향해 그만 두라는 손짓을 했읍니다. 필리포 는 거듭 여주인 쪽을 향해 애걸했읍니다. 그러자 마거리트는 잠자코 발코니에서 사라져 버렸읍니다. 난장이는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 앞 에 무릎을 꿇고 강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읍니다. 사내는 눈 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고는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고함을 지른 뒤에 작은 피노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아주 물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릴 때까지 곤도라의 선착장에 그대로 서 있었읍니다. 필리포는 지붕 꼭대기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읍니다. 그리고는 구 석진 곳에 앉아서 커다란 머리통을 양손으로 떠받친 채 멍하니 허공 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읍니다. 그때 여주인이 부른다는 전갈이 왔읍 니다. 주인의 몸종이었읍니다. 조금 더 있으려니 또 다른 심부름하는 아이가 왔읍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읍니다. 밤이 깊을 때까지도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지 이번엔 여주인이 손수 램프 를 들고 그곳에 나타났읍니다. 그녀는 난장이 앞에 멈춰 서더니 이 윽고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었어요. "왜 넌 여기에 앉아 있는 거니?" 하고 그녀는 침통하게 물었읍니 다. 난장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읍니다. "왜 이러고 있어?" 하 고 그녀는 다시 물었읍니다. 그러자 그 작은 꼽추는 그녀를 뚫어지 게 쳐다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읍니다. "주인 아가씨는 왜 제 강아지를 죽였나요?" "그건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하고 그녀는 흠칫하면서 대답했읍니다. "아가씨가 죽인 거나 다름없읍니다. 아가씨는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도 그대로 보 고만 계셨읍니다." 하고는 난장이는 마구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읍 니다. "오 불쌍한 녀석. 피노!" 그러자 마거리트는 벌컥 화를 내면서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읍니다. 그제서야 그는 잠자코 주인의 말에 따르긴 했지 만 꼬박 사흘 동안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한 마디 말도 지껄이지 않 고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 거나 말거나 또한 무슨 명령을 받거나 간에 상관없이 아예 눈썹 하 나 까딱도 않았읍니다. 그 무렵 젊은 귀부인은 심각한 불안에 싸여 있었읍니다. 사방에서 약혼자에 대한 험담이 적잖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읍니다. 들리는 소 문에 의하면 젊은 발더살레는 여행 중에 몹시 질이 나쁜 바람둥이였 으며, 키프리스 섬을 위시한 다른 지역에 수많은 애인이 있다는 사 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었어요. 그것은 모두가 사실이었읍니다. 마거리트는 소문에 대한 의심으로 마음이 불안했을 뿐 아니라 특히 약혼자가 마련한 눈앞에 닥친 새로 운 여행 계획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 었읍니다.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어느 날 아침, 발더 살레가 그녀에게 나타나자 그녀로 하여금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모 든 걱정거리를 남김없이 털어 놓았읍니다. 그는 빙긋이 웃었읍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여. 당신이 들은 소문은 일부만이 거짓일 뿐, 거의가 사실이 오. 사랑이란 마치 거대한 파도와도 같아서 한바탕 휘몰아쳐서 사람 들을 들어 올렸다간 사라지므로 반항할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나 의 약혼녀인 고귀한 가문의 따님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은 하나도 염려할 것이 없소. 사방에서 미녀들 과 어울리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을 준 여성들도 있었지만 당신에게 견줄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 그의 용기와 솔직성에서는 일종의 마력이 풍겼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그의 단단하고 햇볕에 그 을은 손등을 어루만졌읍니다. 그러나 그가 곁을 떠나자마자 그녀는 다시 불안해져서 속을 태우곤 했읍니다. 결국 그 퍽이나 콧대높은 귀부인은 지금에 외선 그저 사랑과 질투의 은근한 굴욕적 오뇌에 시 달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단 이불 속에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곤 하게 되었읍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또 다시 난장이 필리포를 가까이 하 기 시작했읍니다. 난장이는 그 동안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피노의 가련한 죽음은 아제 깡그리 잊은 듯 했읍니다. 발코니에서 마거리트 가 머리를 햇볕에 말리고 있는 사이. 그는 예전처럼 책을 읽거나 이 야기를 들려주곤 했읍니다. 그러나 꼭 한 차례 그는 '그날'의 일을 떠올린 적이 있었읍니다. 어느 날 그녀가 난장이에게 불쑥 무슨 생각을 그다지도 골똘히 하 느냐고 묻자 그는 기묘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읍니다. "주인 아 가씨, 사별하거나 생이별하거나 간에 머지않아 이 집을 떠날지라도 부디 하나님의 은총이 이 집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체 왜 그런 소릴 하지?" 하고 그녀는 다그쳐 물었읍니다. "글쎄요. 왠지 그런 느 낌이 듭니다. 주인 아가씨, 이제 앵무새나 강아지도 없어졌읍니다. 저 같은 존재가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그 말을 듣자 그 녀는 굳은 표정으로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고 야단을 쳤읍 니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그 얘기를 끄집어내지는 않았읍니다. 귀부 인은 그가 이런 생각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온 전히 그를 믿게 되었지요. 그는 발더살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은 근히 그를 추켜올리기까지 하며 조금도 원한을 품고 있는 듯한 내색 은 전혀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여주인에게 서 예전과 같은 신뢰를 회복할 수가 있었읍니다. 어느 여름 날 저녁 무렵, 바다에서 서늘한 미풍이 불어올 때 마거 리트는 난장이와 함께 곤도라를 타고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가게 했읍 니다. 곤도라가 무라노에 가까와짐에 따라 베니스가 마치 하얀 허깨 비처럼 잔잔하게 빛나는 파도 저편에서 아스라이 떠 보일 무렵 그녀 는 필리포에게 이야기를 졸랐읍니다. 그녀는 검고 긴 의자에 드러누 워 있었읍니다. 난장이는 곤도라의 길쭉한 뱃머리에 등을 돌린 채 그녀의 건너편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읍니다. 태양은 장미빛 노을 때 문에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먼 산자락 끝에 걸려 있었읍니다. 무라노 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읍니다. 곤도라의 사공은 더 위에 시달려 사뭇 졸리운 듯 꾸벅꾸벅 졸면서 긴 노를 젓고 있었읍 니다. 그 구부린 모습이 곤도라와 함께 크로츠노마다가 온통 번져있 는 수면에 고스란히 비쳤읍니다. 이따금 부근엔 화물선과 어선들이 지나쳐가곤 했지요. 끝이 뾰족한 세모 돛이 일순간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도시의 탑을 가렸읍니다. "어서 얘기를 좀 하라니깐" 하고 마거리트는 재촉했읍니다. 필리 포는 무거운 머리를 쳐들고 비단으로 된 깃 옷에 달린 금실 술을 만 지작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 려주었읍니다. "제 아버지가 아직 비잔틴에서 살고 있을 무렵에 참으로 기묘한 일을 겪었읍니다.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지요. 당시 아버 지는 의사겸 어려운 사건의 조언자 노릇을 하고 있었읍니다. 스미르너에 살았던 한 페르시아 인에게서 의술과 마술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두 분야에 걸쳐 퍽이나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는 워낙 정직한 성품이어서 거짓이나 아첨은 질 색으로 여기고 전적으로 자기의 실력에만 의존하고 있었지요. 그 때 문에 얼치기 마법사나 돌팔이 의사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여러모 로 괴롭힘을 당한 끝에 오래 전부터 귀향의 기회만을 찾고 있었읍니 다. 그러나 불쌍한 아버지는 비록 변변치 못한 재산일지라도 타향에 서 한몫 잡기 전에는 결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 답니다.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한데 사기꾼이나 건달들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부자로 잘 사는데 비해 착하기만 한 아버지는 비잔틴에서는 제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 않자 더욱 심한 좌절감에 빠져 풀 이 죽어 지냈읍니다. 그러면서도 환자들은 극진히 돌봐주어서 내버 려진 사람들을 수백 명이나 살려냈읍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영세민들이었기 때문에 설사 그들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다소간의 사례를 할 경우가 있다 해도 아버지는 한사코 그것을 거절했읍니다. 그런 실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찬바람 만 부는 호주머니에 빈 주먹으로 그곳을 떠나든지 아니면 배에서 일 감을 찾든지 하려고 결심했지요. 하지만 그대로 한 달만 더 버티기 로 작정했읍니다. 점성술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에 어쩌면 행운을 만날 수도 있는 운세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 기간도 아무 일 없 이 지나가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마지막 날에 슬픔에 잠긴 채 얼마 안 되는 짐을 꾸려 다음날 아침에 떠나기로 마 음먹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저녁, 그는 거리를 벗어나 해변을 어슬렁거리며 거닐고 있었읍니다. 그때 그의 심정이 말할 수 없이 절망적이었으리라는 것 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지요. 태양은 오래 전에 저물어서 어느새 별이 떠올라 총총히 새하얀 광채를 잔잔한 수면에 드리우고 있었읍 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는 갑자기 몹시 가까운 거리에서 신음소리와 비슷한 기척을 들었읍니다.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 았으므로 그는 더욱 등골이 오싹했읍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일의 출 발에 대한 불길한 전조라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런데 울음 소리와 신음 소리는 점점 더 확실히 들려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용기를 내어 "누구요?"하고 소리쳤읍니다. 그러자 바로 코 앞의 물가에서 물소리가 들렸읍니다. 흠칫 놀라 그쪽을 살펴보니 푸르스름한 별빛 속에 희끄무레한 어떤 물체가 누 워 있는 것이 얼핏 눈에 띄었읍니다. 난파선에서 살아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멱을 감는 사람이겠거니 싶어 그는 마음을 다잡고 성큼 그쪽 으로 다가섰읍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늘씬한 몸매의 눈처 럼 흰 인어가 물가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니겠읍니까? 그 는 정말 깜짝 놀랐읍니다. 그때 인어가 애걸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 을 걸어왔읍니다. "당신은 혹시 노란 골목에 살고 있는 그리스의 마 술사가 아닙니까?" 아버지의 놀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읍 니다. "그렇습니다만...." 하고 아버지는 퍽 친절히 대답했읍니다. 그리고 나서 인어에게 물었읍니다. "왜 날 찾는거죠?" 그러자 젊은 인어는 더욱 소리내어 슬피 울더니 아름다운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거듭 한숨을 내쉬었읍니다. 바라건대 강한 미약을 만들어달라, 자기는 애인을 짝사랑한 나머 지 아주 지쳐버렸으니 제발 좀 살려달라는 이야기였읍니다. 아름다 운 눈망울을 들어 깊은 슬픔에 겨워 애걸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무척 감동했읍니다. 그래서 당장 그 소원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지요. 아 버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 은혜에 보답해줄 것인가 를 물었읍니다. 그러자 인어는 그녀가 지닌 목에 여덟 겹으로 감을 수 있는 진주목걸이를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렇지만." 하고 그녀 는 말을 계속했지요. "당신의 마법이 효력이 발생한 것을 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그 보물을 드릴 수 없어요." 아버지는 그런 것에 하나도 개의치 않았읍니다. 자기의 솜씨에 자 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즉시 마을에 돌아와 이미 가뿐하게 꾸려놓 은 짐 꾸러미를 푼 뒤에 주문 받은 미약을 서둘러 만들었지요. 드디 어 한밤중엔 그것을 완성해서 인어가 기다리고 있는 해변으로 돌아 갔읍니다. 그는 귀중한 액체가 들어 있는, 주둥이가 아주 좁고 기다 랗게 생긴 병을 그녀에게 건넸읍니다. 인어는 수백 번 머리 숙여 절 을 한 뒤에 다음날 밤에 약속한 물건을 받으러 다시 이 자리에 와 달라는 얘기를 했읍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인어와 작별했으며 다 음 약속시간을 기다렸지요. 자기가 만든 미약의 효력은 조금도 의심 하지 않았으나 막상 인어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지 어떨지 미심적 었으니까요.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날 밤이 되자 약속 장소 로 갔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어는 근처의 물 속에서 모습을 드 러냈읍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솜씨가 낳은 결과를 한눈에 보고 자칫 하면 놀라 나자빠질 뻔했읍니다. 인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오른 손을 쳐들어 묵직한 진주 목걸이를 그에게 내밀었을 때, 그녀의 팔 에는 유난히 아름다운 청년의 시체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옷차림만으로도 그는 그리스의 선원임을 알 수 있었읍니다. 얼굴 은 시체답게 창백했으며 머리카락은 물살에 씻기고 있었읍니다. 인 어는 그를 아주 사랑스럽게 껴안고 나서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이 팔 위에 놓고 흔들어댔읍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자 "으악!" 하고 소리 를 질렀으며 자신과 자신의 솜씨를 마구 저주했읍니다. 그러자 인어 는 죽은 애인을 부둥켜 안은 채 재빨리 몸을 돌려 바다 속으로 사라 져버렸읍니다. 그 바닷가의 모래 위엔 진주 목걸이가 놓여져 있었읍 니다. 이제와서 그러한 불행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 는 진주를 챙겨 들고 망토 안에 간수한 채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진 주를 낱낱이 때어 팔기 위해 그 엮음새를 풀었읍니다. 그것을 판 돈 으로 키프로스로 가는 배를 타면 영원히 가난에서 풀려날 수 있겠거 니 싶었지요. 그러나 그 돈에 달라붙은 억울한 사내의 저주는 아버 지를 잇달은 불행에 빠뜨려 넣고야 말았읍니다. 폭풍과 해적 때문에 지니고 있던 돈을 몽땅 털렸을 뿐만 아니라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두어 해 뒤에야 한낱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줄곧 여주인은 의자 위에 누워서 아주 열심 히 듣고 있었읍니다. 난장이가 얘기를 마치고 입을 다물자 그녀도 한 동안 잠자코 있었으므로 사공도 머쓱히 손을 쉰 채 눈치만 살피 고 있었읍니다. 이윽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깬 듯이 벌떡 몸을 일으 키더니 사공에게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읍니다. 노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고 곤도라는 검은 새처럼 시내를 향해 나는 듯 물살을 갈랐읍 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난장이는 조용하고도 진지한 모습으로 마치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점점 더 어두워지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이윽고 기슭에 닿은 곤 도라는 리오 파나다와 여러 갈래의 작은 운하를 지나 귀로를 재촉했 읍니다. 그날 밤 마거리트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 읍니다. 난장이의 예상대로 그녀는 미약 이야기를 듣고 약혼자의 마 음을 확실히 붙잡아 매기 위해 그 약을 사용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튿날 그녀는 필리포를 불러놓고 그 얘기를 꺼냈는데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고 슬슬 이야기를 돌려 상대편의 반응을 떠 보기만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약은 도대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오늘날에도 누군가 그 조제법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유독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인가 등에 관해서 그녀는 깊은 관심을 갖고 꼬치꼬치 캐물었읍니다. 빈틈없는 필리포는 그러한 물음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를 하면서, 그녀의 진심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시늉을 했지요. 마침내 그녀는 심중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아주 솔직하게 그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베니스에 살고 있는지를 물었읍니다. 그러자 필리포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읍니다. "그처럼 대단한 현인이었던 아 버지에게서 자란 제가 그 정도로 손쉬운 마술 한 가지쯤 배우지 않 았다고 생각하셨다면 제 솜씨를 과소평가하신 셈이죠. 주인님." "그럼 넌 지금이라도 직접 그 약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거야?" 그녀 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지요. "그런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 다." 필리포는 단호히 말했읍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게 필요한지 모 르겠군요. 주인님께서는 오랜 소망 끝에 가장 멋지고 부유한 도련님 을 약혼자로 맞으셨잖아요?" 그러나 그 아름다운 여주인은 그가 잔 소리를 늘어 놓는 걸 그냥 듣고 있지는 않았읍니다. 마침내 그는 일 부러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명령대로 따르기로 했 답니다. 그래서 난장이는 필요한 향료와 희귀한 약품을 손에 넣기 위한 비 용을 건네 받았지요.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면 나중에 푸짐한 선물까지 받기로 했답니다. 그리하여 이틀 뒤에 서둘러 준비 를 마친 그는 그 마법의 액체를 여주인의 화장대에서 가져온 작고 파아란 유리병에 담아두었답니다. 발더살레가 키프로스로 떠나는 날 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빨리 서두르라는 명령을 받았었으니까요. 한편, 그 며칠 뒤, 발더살레는 약혼녀에게 오후에 호젓한 뱃놀이를 즐기자고 청해왔답니다. 그 무렵에는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그 시각 에 뱃놀이를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마거리트와 난장 이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지요. 약속된 시간에 발더살레의 곤도라가 집 후문 쪽에 닿자 마거리트는 벌서 난장이를 데리고 기다 리고 있었읍니다. 난장이는 포도주 병과 예쁘게 꾸며진 복숭아 바구니를 먼저 배 안 에 갖다 놓았지요. 그리고 주인들이 배에 오르자 함께 따라 올라서 배 뒷전의 사공의 발 밑에 자리를 잡았읍니다. 발더살레는 필리포가 함께 탄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내버려 두었읍니다. 떠나기 전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은 평소 때보다 애인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공은 노를 젓기 시작했읍니다. 발더살레는 외부로부터 배 안을 가리는 덮개가 달린 좌석에서 커 튼을 두텁게 둘러쳐놓고서 약혼녀와 둘이서 끝없이 속삭이고 있었읍 니다. 난장이는 곤도라의 뒷전에 조용히 앉아서 사공이 배를 저어 나가는 리오 데 바르카롤리의 고색 창연한 높고 어두운 집들을 바라 보고 있었읍니다. 이윽고 배는 그 당시 아직도 작은 정원을 끼고 서 있는 오래된 쥬 스티니아의 궁 곁의 운하 어귀의 수면에 이르렀읍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오늘날엔 그 모퉁이에 아름다운 바로찌 궁이 높이 솟아 있지요. 그때쯤 닫혀진 커튼 안쪽에선 나지막한 웃음 소리와 입맞춤 의 몸짓과 토막토막 끊어진 대화들이 새어나왔읍니다. 필리포는 그 저 무심히 앉아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그는 수면 건너편에서 햇살을 안고 있는 리버니 산 조르조 마르졸 레의 밋밋한 탑과 등 뒤로 스쳐가는 피아제타의 사자 기둥을 번갈아 바라 보기도 하고 이따금 부지런히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시선을 보내거나 물에서 건져 올린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로 물장난을 치 거나 하고 있었읍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추하고 무표정했으 며, 속마음의 한 조각도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있었읍니다. 그때 그는 물에 빠져 죽은 강아지 피노와 목 졸려 죽은 앵무새에 대한 회상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읍니다. 그는 인간이나 동물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생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끊임없이 파멸하고 있 다는 사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 실 등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그가 지내온 전 생애를 돌이켜 보았읍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대개 현명한 자가 우매한 자들에게 짓밟히고, 대부분의 인간생활이 어설 픈 희극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줄기 쓴 웃음을 얼굴에 떠올 렸읍니다. 그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비단 옷을 쳐다보다가 실소하고 말았읍니다. 얼마동안 야릇한 웃음을 띤 채 그대로 앉아 있으려니 드디어 그가 내심으로 기다려온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읍니다. 곤도라의 덮개 밑 에서 발더살레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서 마거리트가 필리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읍니다. "필리포, 포도주와 술잔을 어디에 두었 지?" 하고 마거리트가 소리쳤읍니다. 발더살레가 마침 목이 말랐던 것이지요. 이때야말로 포도주와 함께 그 미약을 마시도록 할 때였읍 니다. 그는 작고 파란 병을 열어서 그 안의 액체를 잔에 따른 뒤에 붉은 포두주를 섞었읍니다. 마거리트는 마침내 커튼을 젖혔읍니다. 난장이는 여주인에게는 복숭아를,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에겐 술잔을 바치는 시중을 들었답니다. 그녀는 그에게 뭔가 되묻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며 상당히 불안 스러운 표정이었읍니다. 발더살레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읍니 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시선이 아직도 그 앞에 서 있는 난장이에 게 머물렀읍니다.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 한 가닥 의심이 일었던 것 이지요. "잠깐!" 그가 소리쳤읍니다. "너처럼 유들유들한 녀석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마시기 전에 네 녀석이 먼저 맛을 보도록 해라." 필리포 는 얼굴을 찡그렸읍니다. "이 포도주는 최상품입니다." 하고 그가 정 중하게 말했지만 상대방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읍니다. "왜 안 마시려 드는 거야?" 발더살레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렀읍니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주인님, 전 이제껏 포도주를 한 번도 입에 대 본 적이 없답니다." 그렇게 난장이는 용서를 빌었읍니다. "좋아, 그럼 내가 마시라고 명령하겠다. 그리고 네가 마시기 전에 는 단 한 방울도 내 입술에 대지 않겠다." "그럼 마시겠읍니다." 필리포는 빙긋이 웃으면서 절을 꾸벅 하고 는 술잔을 발더살레에게서 받아 들고선 한 모금 주욱 들이킨 뒤에 그 잔을 되돌려 주었읍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는 안심이 되었는지 남은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읍니다. 그날은 참으로 무더웠지요. 수면은 영롱한 빛을 뿜으며 반짝거렸 읍니다. 두 연인은 다시 커튼 안으로 사라졌읍니다. 난장이는 곤도라 의 뒷전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넓은 이마를 한 손으로 마구 문지 르며, 매우 고통스러운 듯 가뜩이나 못생긴 입을 꼬집어대었읍니다. 한 시간 후면 자기는 이미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가 마신 술은 독약이었거든요.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그의 마음은 야릇한 기대에 부푸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거리를 뒤돌아다 보았고, 조금 전까지도 골몰했던 생각의 줄기를 찾아 헤맸 읍니다. 그는 조용히 반짝이는 수면에 눈길을 던진 채 그의 지나온 삶을 회상했읍니다. 단조롭고 가난한 일생이었지요. 어리석은 자들에 게 짓밟힌 현자의 삶, 한낱 우스꽝스럽기만 한 희극 같은 삶이었읍 니다. 그때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불규칙해지고 이마에 마구 구슬땀이 맺히면서 그는 온 몸을 뒤척이며 괴로운 웃음소리를 토해냈읍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답니다. 사공은 노를 쥔 채로 졸고 있었으니까요. 한편 커튼 안에서는 아름다운 마거리트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약혼 자를 기겁을 하며 애써 일으켜 세우려 들었지만 그는 그녀의 팔 안 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내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만 것이었읍니다. 찢 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녀는 밖으로 뛰쳐 나왔지요. 거기에는 난장이가 마치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호화스러운 비단 옷을 입은 채 배의 바닥에 누워 죽어 있었읍니다. 그것은 결코 강아지의 슬픈 죽 음에 대한 필리포의 복수극이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시체를 싣고 돌아온 그 불행한 곤도라는 온 베니스를 발칵 뒤집어 놓았답니다. 도나 마거리트는 그만 미쳐버렸지만 한동안 더 살았다지요. 그 후 그녀는 이따금씩 발코니의 난간 옆에 걸터앉은 채 곤도라나 거룻배 가 지나갈 때마다 소리쳤다고 합니다. "구해주세요! 저 강아지 좀 살려주세요! 저 작은 피노를 제발 구해 주세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쳐다보지 않 았다고 합니다. <<< 내면과 외면 >>> 프리드리히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신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이었고, 여러 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좀 특별한 면이 있었고, 사상도 다른 사람의 사상과 동일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특정한 사고만을 좋아했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거의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가 좋아하고 몰두한 것은 논리학, 즉 저 매우 훌륭한 방법론으로서, 그가 보통 '학문'이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둘 곱하기 둘은 넷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모든 인간의 사고는 이 진리로부터 시작해 나가야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물론 다른 종류의 사고나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으나 그것들은 '학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는 하등의 가치도 부여 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사상가였으나 종료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 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료란 묵계 적으로 학문적인 것과 일치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태도였다. 종료와 학문은 수세기 동안 단 한가지의 대상물, 즉 인간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지상에 존재하며 알 아야 할 가치가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해왔던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종교에 의탁하는 것이나 영혼에 대한 종교의 사변을 중요시하지는 않았지만 별 의의없이 허용한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른 관습이 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역시 종교에 대해서는 퍽 관 대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가 미신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증오했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문명화되지 못하고 뒤진 민족이 그 런 미신에 얽매여 있거나, 아득한 고대에 신비롭고도 마술적인 사상 이 존재했거나간에 - 학문과 논리학이 존재하게 된 이후로는 그런 낡고도 불투명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 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간혹 그가 자신의 주변에서 이런 미신의 자치에 접하게 되거나 하면 그는 깊은 분노를 금치 못했으며, 자신이 아끼고 있는 그 어떤 소중한 것 이 적대적인 것으로부터 침해를 당한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들, 즉 학문 적인 사고의 원칙에 익숙해 있는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같은 미신의 자취를 발견하게 될 때였다. 또한 최근에 와서 교양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논란이 되곤 하는 저 모독적인 사상, 예 의 불합리한 사상에 관한 말을 들을 때보다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은 없었다. 그 불합리한 사상이란 다름 아니라 '학문적인 사고'가 최고의 사유방법,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며 예정된 확고 부동의 것이 아니라 그저 수많은 사유 방법 중의 하나이며 잠정적인 것이고, 변화하고 몰락하는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프리드리히도 그렇게 모독적이고 파괴적이며 몰상식한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쟁과 변혁과 기아의 고난에 직면하여 생겨난 하나의 경고와도 같 이 전세계의 여기저기서 대두되었으며, 유령의 주문과도 같이 하얀 손에 의해 하얀 벽에 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존재해 있으며, 자신을 이다지도 심각하게 고뇌에 빠뜨리고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프리드리히가 괴로워 하면 할수록 이 사상과 그것을 남몰래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격정적으로 적대감을 품게 되었 다.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이 새로운 학설 - 만일 그 학설이 파급되 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경우에는 모든 정신문화를 파괴하고 혼란 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확실한 학설 - 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 나 아직은 사태가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사살을 공 공연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기 때문에 대개는 그들을 괴 팍스런 인간이나 변덕스런 기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방 울의 독약과 다름없는 그 사상의 전염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 다. 대중과 얼치기 교양인들 사이에서는 그 새로운 학설과 신비학이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각 종파와 그 추종자들이 무수히 나타났 다. 세상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찼으며, 도처에서 미신과 신비, 우상 숭배와 다른 암흑의 마력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학문도 은연중에 약한 감정에 빠진 것인지 아무 말없이 그대로 묵인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리드리히는 이제까지 여러 분야의 연구를 함께 하곤 했 던 어느 친구 집을 방문했다. 그는 우연하게도 꽤 오랫동안 이 친구 를 만나지 못했었다. 친구의 집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이 친구와 언제 어디서 마지막으로 만났었는지를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다. 여 느 때 같으면 누구 앞에서도 자신만만했던 기억력이었는데 도무지 그 생각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 불 쾌하고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그 친구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 는 한동안 그런 기분에서 헤어나려고 억지로 애를 썼다. 친구 엘빈과 인사를 나눌 때 그는 반가워하는 친구의 얼굴에서 예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다소 경계하는 듯한 미소가 깃들여 있음을 발견했다. 친구의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조소적이며 적의가 깃든 미 소를 보자 프리드리히는 순간적으로 조금 전에 자신이 애써 기억해 내려 했던 그와의 만남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에 자신이 엘빈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일, 그 당시 비록 언쟁을 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미신에 대해 공격을 했을 때 엘빈이 지극히 소극적 으로밖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쾌해져서 해 어졌던 일을 회상해낸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그러한 일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 가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그 불쾌감 때문에 그렇게도 오 랫동안 친구와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 이 방문을 자꾸 연기한 것에 대해 다른 적당한 이류들을 끌어댔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언제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음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서로 마주서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옛날의 그 사소한 감정의 불화와 균열이 그 동안에 남 모르게 확대되고 있었다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자신과 엘 빈 사이에 옛날에는 항상 존재했던 그 어떤 것, 즉 공감과 구체적인 이해의 여지나 심지어는 우정의 감정조차 이제는 쉽사리 우러나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감정 대신에 공허감과 거리감, 그리고 냉랭하고 낯선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메우고 있 을 뿐이었다. 그들은 계절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또 서로의 건강상태 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프리드리히 에게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한테 이해되지도 못하며, 자신의 말이 자꾸만 겉돌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통의 맥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불안스 러운 감정이 일었다. 엘빈은 줄곧 친절에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었 는데, 프리드리히는 오히려 이 미소가 견딜 수 없이 싫고 역겹기만 했다. 불편한 대화 속에서나마 프리드리히는 낯익은 그의 서재를 둘러보 다가 벽에 핀으로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 것을 보자 프리드리히의 마음은 이상하게 감동을 받았고 옛날의 기 억들이 되살아났다. 때때로 어느 사상가의 명언이나 어느 시인의 시 구를 이런 식으로 눈앞에 붙여놓고 외우곤 한 것이 이미 오래 전, 대학 시절부터 길들여진 엘빈의 습성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 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그 종이에 씌어진 것을 읽어보려고 일어나서 벽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엘빈의 필체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외면이란 없다. 내면도 없다. 왜냐하면 외면은 바로 내면이기 때 문이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그는 바로 지금껏 그가 두려워했던 것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다른 때라면 그는 아마도 이 종이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것을 우발적 충동으로 누구에게나 허락된 한낱 위안거리로서, 혹은 위로 를 필요로 하는 조그만 감상으로 관대하게 보아 넘겼을 것이다. 그 러나 지금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엘빈이 이 말을 결코 일시적인 시 적 감상에서 써 붙인 것이 아니며, 또는 우발적 충동 때문에 그렇게 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외서 다시 청년 시절의 습성으로 돌아 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종이에 써 붙인 것은 엘빈이 현재 몰두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관심의 고백으로 신비설이었던 것이다. 엘빈은 변절한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엘빈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미소가 다시금 밝게 빛났다. "이것을 좀 설명해주게나!" 하고 그가 말했다. 엘빈은 친절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자넨 이 문구를 어디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나?" "그럼!" 하고 프리드리히가 외쳤다. "물론 그것을 알고는 있지. 그 것은 신비주의, 그노시스파 학설이지. 매우 시적이기도 하지만.... 어 디 자네 이 문구를 좀 설명해보게. 그리고 어째서 이게 자네 방의 벽에 붙어 있는지 말해보게나." "그러지." 엘빈이 말했다. "이 문구는 지금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인 식론의 최초의 입문이지. 나는 그것으로부터 벌써 여러 가지 기쁨을 맛보았다네." 프리드리히는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새로운 인식론이 란 말인가? 도대체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그건 대체 뭐라 고 하는 건가?" "아, 그건 내게만 새로울 뿐이야.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것이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거든. 그것은 마술이라고 하네." 엘빈의 이토록 솔직한 고백을 크게 놀라고 경악한 프리드리히는 친구의 안에 깃들여 있는 숙적과 서로 눈에 눈을 맞대고 버티고 선 자신을 의식했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분이 분 노에 가까운지 통곡에 가까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받은 감정이 그의 마음을 쓰리게 휩싸고 있었다. 그는 오 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는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자넨 이제 마술사 가 되려는 건가?" "그래." 하고 엘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마법사의 제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프리드리히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옆방에서 똑딱거리는 시계 소 리가 들려올 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이윽고 프리드리히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넨 진지한 학문과는 모든 유대를 포기하게 되는 거란 사실을 알고 있나? 나와의 모든 유대까지도 말일세."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닐세." 엘빈이 대답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야 한다면.... 달리 무슨 수가 있겠나?" 프리드리히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뭐? 달리 어쩔 수가 있겠느냐고? 이따위 유치하고 비참하고도 무 가치한 미신을 가지고 절교를 하다니!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절교를 하다니! 자네가 계속 내 존경을 받는 것은 자네 마음에 달렸어!" 엘빈은 이제 더 이상 명랑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약간은 미소짓고 있었다. "자네 말은 알겠네만." 하고 그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분노에 찬 목소리는 엘빈이 조용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방안에 여운을 남기며 울리는 것 같았다. "프리드리히, 자넨 그게 내 수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네. 마술을 택 한 것은 내가 아니야. 마술이 오히려 나를 택했지." 프리드리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잘 있게."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이렇게 말하고는 친구에게 악수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이래서는 안 돼!" 엘빈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돼, 자네와 이런 식으로 헤어져선 안 돼. 우리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봐. 사실이 그렇기도 하네만. 그러 면 우리는 이렇게 영영 이별을 해야 할 거야." "그러면 엘빈, 우리들 중에 누가 죽어 가는 자라는 건가?" "여보게. 오늘은 내가 죽어 가는 자네. 새로운 탄생을 원하는 자는 죽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거야."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번 그 종이 앞으로 걸어가서 내면과 외면에 대한 문구를 읽었다.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네." 하고 그는 결론적으로 말했다. "옳은 얘기야. 화를 내고 헤어진다는 건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짓이야.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들 중 하나가 죽어 가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 세. 바로 내가 그 죽어 가는 자일 수도 있지. 헤어지기 전에 자네한 테 마지막 청을 하나 하고 싶군." "고맙네." 엘빈이 말했다. "이별의 기념으로 내가 자네한테 무슨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지 말해보게." "내가 처음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네. 그게 바로 내 소원이네. 자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이 문구를 자세히 설명해주게!" 엘빈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외면은 없고 내면도 없다. 이 말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는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신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이지. 신은 정신 속에도 있고 자연 속에도 있어. 신은 곧 우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신적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러한 것을 예전에는 범신론이라고들 했지. 다음으로 철학적인 의미를 말하자면, 외면과 내면에 대한 구분은 우 리들 생각에 깃들여 있지만 반드시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네. 우리 들 정신에는 우리 자신이 설정한 한계의 배후, 즉 피안의 세계로 되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네. 인간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대립적 인 편성의 배후, 즉 피안에서 새롭고 다른 인식이 시작되는 거라네. 그렇지만 여보게, 자네한테 고백하겠네만 내 사고가 변화된 이래로 내게는 단 한 가지 뜻만을 가진 말이나 격언이란 아무 소용이 없어 졌네. 말이란 저마다 열 가지, 백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네. 바로 여기에서 자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마술이 시작되는 것이지." 프리드리히는 이마를 찌푸리며 그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 나 엘빈은 달래듯이 그를 쳐다보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자네한테 한 가지 예를 보여주도록 허락해주게나! 이 방에서 아 무것이나 원하는 물건을 하나 가지고 가게. 그리고 때때로 그걸 관 찰해보게. 그러면 내면과 외면에 대한 문구가 언젠가는 여러 가지 의미 중의 한 가지를 자네한테 보여줄 걸세."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벽에 달린 선반에서 표면이 유리처럼 빛 나는 점토로 만든 조그만 인형을 집어들어 프리드리히에게 건네주었 다. 그리고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이걸 내 이별의 선물로 받아주게. 내가 손에다 쥐어주는 이 물건 이 자네 외면에 존재하기를 중단하고 자네 내면에 존재하게 되거든 다시 나를 찾아오게! 그러나 이 물건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계속 자 네 외면에 존재하는 한 오늘의 이별은 영원한 것이 되고 말 걸세." 프리드리히는 미처 하지 못할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빈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더 이상 한 마디의 말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그가 이 계단을 올라 간 이후 그 얼마나 두렵고 오랜 시간이 흘렀던가!). 그는 점토로 만 든 그 조그마한 인형을 손에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불행한 심정 으로 집에 돌아왔다. 집 앞에 멈춰선 그는 잠시 분노에 가득 찬 심정으로 조그마한 인 형을 들고 있는 주먹을 힘껏 흔들어댔다. 그러면서 그는 그 우스꽝 스러운 물건을 땅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이 내고 싶은 거친 충동을 느 꼈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꼭 깨물며 감정을 자제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그는 이렇게 흥분해본 적이 결코 없었으며, 이렇게 까지 모순된 감정에 시달린 적도 없었다. 그는 인형을 놓아둘 자리를 찾다가 책상 위의 선반에 그것을 올려 놓았다. 그 인형은 그 후 얼마간 거기에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는 때때로 그 인형과 그것의 유래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그 바보스러운 물건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 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여러 번 바라보았다. 그것은 조그마한 인간상 이나 신상 또는 우상이었다. 고대 로마의 신인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점토로 다소 거칠게 만들어진 데다가 불에 구워서 생긴 약간씩 갈라진 틈 위로 에나멜이 칠해져 있었다. 그 작은 형상 은 조잡하고도 왜소하게 보였다. 그건 로만 인이나 그리스 인의 손 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섬 에 살고 있는 원시 민족의 작품인 것이 확실했다. 꼭 닮은 두 개의 얼굴에는 을씨년스럽고 나른하며 약간 이를 드러내고 웃는 미소가 깃들여 있었다. 그 미소는 작은 악마가 계속 무의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추악하게 보였다. 프리드리히는 도무지 그 인형에 친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전 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불쾌했다. 그것은 늘 그의 신경을 건드 렸고, 때로는 그를 정신착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다음 날 그는 인형 을 내려다가 난로 위에 놀려 놓았으며, 또 어느 날엔가는 옷장 위에 다 옮겨 놓았다. 인형은 앞으로 밀고 나오기라도 하듯 자꾸만 그의 눈에 띄었으며, 그에게 차갑고 우둔한 미소를 보내며 자못 거만하게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줄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두세 주일만에 그 는 다시 그것을 옆방으로 가져가서, 이탈리아에서 부쳐온 사진들과 여기저기에 흩어놓은 채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앙징스러운 기념품들 사이에 세워 놓았다. 프리드리히는 그 우상을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만 문간에서 잠시 보게 되었을 뿐 이 때에도 결코 자세히 보지 않고 그 곁을 재빨리 지나쳤다. 그런데도 그 물건은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것을 부인했지만 그 두 개의 얼굴이 달린 괴물은 불 쾌감과 고통으로 그의 생활에 잦아들게 되었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프리드리히는 가벼운 여행에서 돌아왔다. - 그 무렵 무엇인가가 안절부절 못하게 그를 몰아대는 듯한 기분이 들 때 그는 가끔 이러한 여행을 하곤 했다. - 그는 집으로 돌아와 옆방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서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그 동안 모아진 편지들을 얽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 럼 불안했고 정신이 멍멍했다. 어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 았고, 아무리 푹신한 의자에 앉아도 편하지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다보며 그 원인을 캐내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 이 생겼을까? 자신이 어떤 중요한 일을 게을리 한 건 아닌가? 무슨 불쾌한 일이 있었던가? 무엇인가 해로운 것을 먹었던가? 그는 여러 모로 자문하며 고심했다. 그러다가 언뜻 자신이 거실에 들어섰을 때 옆방에서 이런 기묘한 느낌이 엄습해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곧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점토로 만든 인형을 찾았다. 우상이 보이지 않자 순간 이상한 전율이 그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 갔다. 우상은 사라진 것이다. 우상은 없었다. 진흙으로 빚은 그 조그 마한 다리로 걸어나갔단 말인가? 아니면 날아갔단 말인가? 마법이 작용하여 그 우상이 태어난 어느 곳으로 다시 불려갔단 말인가? 프리드리히는 애써 용기를 내고 미소를 지으며, 두려운 마음을 쫓 으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서 침착하게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끝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그는 하녀를 불렀다. 하녀 는 어쩔 줄 모르며 청소를 하다가 그 물건을 그만 손에서 떨어뜨려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게 어디 있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 조그만 물건은 아주 단단하게 보여서 하녀는 자주 만지작거리곤 했었다. 그러다가 바닥 에 떨어뜨려 그 인형은 다시 어쩔 수 없을 전도로 산산조각으로 깨 어져버렸던 것이다. 하녀는 그 부서진 조각들을 유리세공인에게 보 였지만 웃음거리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조각들을 모 두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그 하녀를 해고해버렸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었 다. 그는 하녀의 실수를 나무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제 괴물은 사라진 것이다. 이젠 안정을 갖게 되겠지. 그 물건을 가져왔던 첫날 깨뜨려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무엇 때문에 그 동안 줄곧 괴로와 했단 말인가! 그 우상은 그 얼마나 귀찮고 야릇하게, 뻔뻔스럽고도 심술사납게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던가! 이제 그 우상이 없어졌으니 솔직히 고백했지만, 자신은 사실 그 점토로 만든 신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 우상은 프리드리히가 꺼려 하고 참기 어려워한 모든 것, 그가 옛날부터 경계해오고 적대적 입 장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든 미신과 암흑, 양심과 전신을 압박하는 요소들이 상징이요 표적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때 때로 땅 밑을 뒤흔드는 듯이 느껴지는 저 비밀스러운 힘, 저 먼 곳 의 지진, 가까와지고 있는 운명의 몰락, 그리고 위협을 가해오는 혼 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보잘것없는 형체가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를 빼앗아가지 않았던가, 아니,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그것은 사라졌다. 깨끗 이 사라져버렸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흔적도 없이 치워졌다. 그뿐 이었다. 그 자신이 그것을 깨뜨린 것보다 하녀의 손으로 그렇게 된 것이 한결 더 좋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고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와도 같았다. 그가 어느 정도 그 우스꽝스러운 인형에 익숙해져서, 옆방의 책상 위에 놓인 그것을 보는 일에 점차 로 자연스러워지고 관대해져 가는 지금, 이번엔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옆방을 지나갈 때마다 인형이 눈에 띄지 않음을 깨달았다. 전에 인형이 놓였던 자리는 텅 비어서 공허로 채워져 있었다. 그곳에서 솟아나는 공허는 방 전체를 낯설고 도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프리드리히에게는 언짢고 불운한 낮과, 보다 더 고통스러운 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우상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옆방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인형은 어느덧 그를 괴롭히는 멍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는 옆방을 지나가는 순간에 만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인형이 놓였 던 텅 빈 책상의 그 자리에서 공허와 황량함이 퍼져나오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건 서서히 다른 모든 것을 밀어내고 주위를 침식해 들 어가서는 사방을 공허감과 이질감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자꾸만 되풀이하여 그 인형을 아주 선명하게 떠올렸고 한편 으로는 그것이 없어졌음을 한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를 스스로에게 일깨우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 가의 강요에 못 이기기라도 한 듯 입을 일그러뜨려서 추악하고 야만 스럽고 교활하게 느껴지는 그 인형의 미소를 흉내내려고까지 했다. 두 개의 얼굴은 정말 서로 똑같았던가 하는 의문이 무섭게 그를 엄습해왔다. 혹시 한쪽 얼굴이 에나멜 칠을 할 때 아주 약간은 거칠 게 되거나 솟아올라서 조금이라도 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던 가? 무엇인가 간절히 묻고 싶어하는, 마치 스핑크스와도 같은 점을 지니고 있진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 에나멜의 색채는 그 얼마나 신 비스럽고도 기묘하였던가? 적어도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을 주 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초록빛, 푸른빛, 회색빛도 있었으며 또는 붉은빛도 깃들여 있었다. 이제야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빛깔은 창문에 햇빛이 반짝거릴 때나 축축이 젖은 포장된 도로가 빛에 반사 될 때에 발하던 바로 그 빛깔이었다. 그 에나멜에 대해서 그는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했으며 그 생각은 밤에까지 연장되었다. '에나멜(Glasur)!' 이것은 정말 괴상하고도 낯 설고 불쾌하게 들리며 거의 악의에 찬 어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는 이 말을 분석해보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되씹어보았다. 한 번은 거꾸로 뒤집어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루살크(Rusalg)'라는 말이 되었 다. 이 단어가 이제 이렇게 울리는지는 악마나 알 것인가? 프리드리 히는 이 '루살크'라는 말을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적의 에 넘친 좋지 못한 말로서 추악한, 숨겨진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말 이었다. 그는 이 단어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읽었던, 그늘 놀라게 하고 괴롭혔을 뿐 아니라 은밀히 현혹시켰던 책의 제목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루살크 공작부인'이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저주와도 같았다. 그 인형과 에나멜 그리고 파란색 과 초록색, 나아가서 미소와 관계된 모든 것은 적대적인 것을 의미 했고, 그를 날카롭게 찔러대거나 괴롭히며 독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상을 자신의 손에 쥐어줄 때 그의 친구 엘빈은 얼마나 의미심 장한 미소를 지었던가! 얼마나 특이하고 얼마나 은밀하며 얼마나 적 대적이었던가!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불가피하게 몰입되어 가는 자신의 생각에 안 간힘을 다해 저항했고, 여러 날 동안은 성과가 없지도 않았다. 그러 나 그는 분명히 위험을 예감했다. 그는 미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보 다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삶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성이 필요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은 엘빈이 그 인형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자신에 게 최면을 걸어 그 불가사의한 어두운 힘에 대항하는 이성과 학문의 방어자가 몰락해 가는 표본으로 만들려는 마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 마술이나 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닌가. 아 니, 그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몸서 리를 쳤다. 의사는 그에게 산책과 목욕을 권했다. 가끔 그는 저녁에 술집에 가서 울적한 기분을 풀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 도움 이 되지 않았다. 그는 엘빈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어느 날 밤, 그 즈음에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그는 일찍 자 리에 들었으나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뜬 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극도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생각에 골몰했다.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 켜주고 위안을 안겨다주며 '둘 곱하기 둘은 넷이다'라는 놀라와 같이 기운을 돋구어주는 안정과 명확성이 깃든 문장들에 젖고 싶었다. 아 무것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상 태에서 짧은 문구들을 중얼거렸다. 차츰 그의 입술에서는 단어들이 새어나왔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짤막한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중얼거렸다. 그 문장으로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라도 하려 는 듯이, 그 문장을 다리 난간처럼 잡고 깊은 심연 곁에 놓여 있는 비좁은 길을 더듬어 내려가 잃어버린 잠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좀더 큰 소리로 말을 하자 갑자기 그 웅얼거리던 말 이 그의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렇다. 이제 너는 나의 내면에 들어 있다!"라는 문장이었 다. 그는 순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그 문장 이 점토로 만든 우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바로 이 음울한 한밤중에 그 불쾌했던 날 엘빈이 그에게 예언했던 것이 정확 하고 엄밀하게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그때 자신이 경멸 하며 손아귀에 쥐고 있었던 그 인형은 이제 자신의 외면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내면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외면은 바로 내면이기 때문이다." 이 한 문장을 생각해내자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몸에 얼 음과 불덩이가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세계가 그의 주위를 빙 빙 돌았고 유성들은 미칠 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불 을 켜고 거칠게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나와 집을 뛰 쳐나와서는 한밤중에 엘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낯익은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고 대문도 잠겨져 있지 않 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엘빈의 서재로 들 어서서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엘빈은 옆에 놓인 램프의 은은한 빛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미소지으며 앉아 있었다. 엘빈은 친절한 태도로 일어났다. "자네가 왔군, 잘 왔어." "자넨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프리드리히가 속삭였다. "알다시피 내가 준 작은 선물을 가지고 자네가 여기를 떠난 그 시 간부터 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때 내가 한 말이 들어맞았나?" 프리드리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네, 자네 말이 맞았어. 그 우상은 이제 나의 내면에 들어 있어. 난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네."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엘빈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자네의 마술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주게! 이보게, 어떻게 하면 우상을 다시 내 안 에서 나가게 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게." 엘빈은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그를 안락의자에 데리고 가서 앉혔다. 그런 다음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진심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우상은 다시 자네한테서 나갈 걸세. 내 말을 믿게나. 아니, 자 네 자신을 믿게나. 자네는 그 우상을 믿는 법을 배웠지. 이제는 그걸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지금 그것은 자네 내면에 들어 있지만 아직 도 죽어 있어. 자네에게는 아직 한낱 유령에 불과할 뿐일세. 그를 죽 음에서 소생시켜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물어보게! 그 것은 바로 자네 자신이야! 더 이상 그를 증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도 말고 괴롭히지도 말게. 자네는 바로 자네 자신이기도 한 그 가련 한 우상을 얼마나 괴롭혔는가! 자네는 바로 자네 자신을 또 얼마나 괴롭혔는가!" "그것이 마술로 통하는 길이란 말인가?" 프리드리히가 물었다. 그 는 아제 늙어버린 것처럼 안락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앉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엘빈이 말했다. "이것인 그 길이지. 자네는 이제 가장 어려운 첫걸 음을 내디딘 것일세. 자네는 외면이 내면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체 험했네. 자네는 대립적인 한 쌍의 저편에 가 본 것이지. 그건 자네에 겐 지옥처럼 여겨졌겠지. 하지만 이보게. 이제부턴 그것이 천국이라 는 것을 배우게! 왜냐하면 자네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이네. 보게나, 이것이 바로 마술이네. 즉 자네가 했던 것처럼 압 박과 괴로움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움 속에서 외면과 내면을 교체하는 것이지, 과거를 불러오고 미래를 불러들이게나! 이 두 가지는 다 자 네 안에 있는 거야. 자네는 오늘날까지 자네 마음 속의 노예에 불과 했었지. 이젠 그 지배자가 되는 법을 배우게. 이것이 바로 마술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