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어른을 위한 동화) 지은이: 헤르만 헤세 지음 책 머리에 이름 모를 꽃, 신비한 새, 아름다운 별에의 동경, 여행에의 유혹, 소년과 소녀, 첫사랑의 아린 기억, 유년의 깊고 슬픈 추억들. 이 작품에서 헤르만 헤세가 보여 주는 동화 속의 풍경이다. 헤세의 잘 알려진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에 수록된 12편의 소설은 동화 적이고 우화적인 작품들이다. 동양적이고 명상적인 헤세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면서도 동화로 꾸며져 있어 청소년들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한마디로 우화 형식을 통해 진리 와 참된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다. 특히, <소나기>는 우리의 기억에 새록새록 남아 있는 황순원의 작품을 떠올 리게 되고, <사랑의 폭풍>은 열여덟 살에 겪게 되는 사랑의 성장을 그리고 있 다. 진리를 찾아 떠나는 소년의 여행 이야기, 신비한 새와 시인에 대한 전설 이야 기, 프리지아와 아이리스라는 꽃을 통하여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은 인생의 여러 구석을 비추어 보게 한다. 이렇게 소박하고 동화같은 이야기를 통해 헤세가 보여주는 폭넓은 진리에의 여행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편집부 소나기 에를렌호프 별장은 숲과 산악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높직한 평지 위에 서 있 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자갈밭이 있었는데 길이 여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손님 이 올 때는 차들이 더러 이곳을 통과하는 수가 있지만, 대부분 이 네모난 자갈 밭은 텅 빈 채 조용하였고 그래서 실제보다 유난히 더 커 보였다. 특히 좋은 여 름 날씨에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뜨겁게 떠는 듯한 대기가 감돌 때면 누구도 이곳을 건너가 볼 생각을 못할 만큼이나 커보이는 것이었다. 자갈밭과 길은 집과 정원 사이에 있었는데 정원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오 히려 알맞게 큰 공원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았으나 늠름한 느릅나무, 단풍나무, 플라타너스로 울창했고 꾸불꾸불한 산보길과 어린 잣나무 숲이며 수많은 벤치들 이 놓여 있는 깊숙한 공원이었다. 그 사이사이로는 밝게 양지바른 잔디밭들이 군데군데 원형 화단으로 장식 관목으로 꾸며 있었는데, 이 밝고 따뜻한 잔디의 자유 천지 위에 우뚝 우뚝 눈에 띄게 몇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양버들이었다. 이 나무 둥치 둘레에는 좁다란 격자식 벤치가 둘러져 있었다. 그 주위로 비단 같이 보드랍게 늘어진 가지들이 촘촘히 늘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그 안은 천막 이나 절같이 되어서 항상 그늘로 빛을 못 받으면서도 늘 나른한 온기가 깃들고 있었다. 다른 나무는 수양버들과 나직이 울타리를 한 잔디밭 사이에 서 있었는데 그것 은 거대한 핏빛 너도밤나무였다. 이것은 멀리서는 다갈색이나 거의 까만색으로 보였다. 더 가까이 가거나 그 밑에 들어가서 위를 쳐다보면, 햇빛을 받은 바깥 가지들의 잎사귀들이 따뜻하면서도 조용한 진홍색 호염 속에 온통 불타고 있었 다. 마치 교회 창에 비치는, 찬란하게 억눌려진 불꽃과도 같았다. 이 고목인 핏 빛 너도밤나무는 커다란 정원이 가진 가장 유명하고 진귀한 아름다움이었으며 정원 어느 쪽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이 나무는 홀로 밝은 잔디밭 한가운데 어둡게 서 있었다. 키도 상당히 커서 공원에서부터 나무를 바라보면 푸른 하늘에 뻗어 있는 둥글고 단단한 나뭇가지 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푸르름이 밝고 눈부셔지면 질수록 더욱 더 새까맣고 찬 란하게 수관은 빛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기후나 날씨에 따라 대단히 다르게 보였고 때로는 자기가 아름답다는 것, 홀로 의기양양하게 다른 나무들과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것은 까닭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가슴을 젖히고 모든 것을 넘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그가 정 원에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나무는 하나뿐이고 형제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면 그는 멀리 떨어진 다른 나무들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침 에 제일 아름답고 해가 밖에 있을 때까지는 저녁에도 아름다웠다. 해가 저물면 이 곳은 다른 곳보다 한 시간쯤 빨리 밤이 되는 듯 보였다. 그 나무가 가장 괴 상하면서도 음침한 모양이 될 때는 비오는 날이었다. 다른 나무들이 즐겁게 숨 쉬고 몸을 펴며 푸르러진 녹색 잎을 자랑할 때 그는 죽은 듯이 고독 속에 새까 맣게 서 있었다. 그가 떨지 않더라도 추워서 불안과 수치로 외롭게 절망한 채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손질한 공원은 엄격한 예술품에 속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애써 기다리고 잘라 내는 일에 사람들은 싫증을 냈다. 아무도 공을 들여 가꿔 온 정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되자 나무들은 제멋대로 컸다. 그들은 서 로 우정을 맺어 나갔다. 사람들의 기교로 고립되었던 과거를 잊고 곤궁할 때는 옛 숲의 고향을 연상하며 서로 기대고 안고 의지했다. 그들은 울창한 잎사귀로 길들을 감추어 버렸고 뻗어 나간 뿌리로 비옥한 산림 지를 변질시켰다. 그들의 정상은 서로 얽혀 굳게 뭉쳐져 있어서 이 보호 밑에 강력히 뻗어 오르는 나무의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나무들은 매끈한 기근과 밝은 녹색으로 대공을 채우며 황폐한 대지를 정복하여 나갔다. 그 나무들의 그 늘과 낙엽으로 땅이 까맣고 부드럽고 축축하게 만들어지자 이끼와 풀들과 관목 들이 번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예전에 정원이었던 곳을 오락 장소로 사 용하려 하였다. 그 정원은 조그만 숲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양옆에 늘어섰던 플라타너스들 사이의 옛 길을 다시 재생시켰다. 그 외에는 그저 좁고 꼬불꼬불 한 산보길들을 숲을 통해 냈고 관목들이 늘어서 있는 방향으로 잔디씨를 뿌리고 적당한 곳에 녹색의 벤치를 정비해 놓은 정도였다. 그리고 플라타너스를 똑바로 기르고 손질하며 모양을 내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숲을 찾아왔 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무관심 속에서도 가로수 길이 숲으로 변해서 그 숲속에 서 햇빛과 바람이 잠자고 새들이 노래하며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랑과 꿈과 욕망 에 몰두할 수 있음을 기뻐하였다. 관목과 잔디 사이의 반쯤 그늘진 곳에 누워 있던 파울 압데렉은 그의 손에 하 얗고 빨갛게 제본된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으며 거닐다가 때로는 풀밭 을 지나 팔딱이는 송어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는 프리트요프가 항해하는 대목까 지 읽고 있었다. 프리트요프는 연인이었고 고향에서 추방당한 성물 절취자였다. 분노와 후회를 가슴에 안고 그는 사나운 바다를 노저어 갔다. 폭풍과 파도가 빠 른 바이킹 배를 삼키려 들고 쓰디쓴 향수가 강한 뱃사공을 사로잡는다. 잔디 위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고 귀뚜라미는 귀따갑게 울고 있었으며 숲 속 깊은 곳에서는 새들이 은은하고 달콤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이 뒤엉킨 이런 한적한 곳에서 뜨거운 하늘을 바라보거나 어두운 나무들에 귀를 기 울이거나, 눈은 감은 채 몸을 펴고 깊고 따뜻한 숲속의 쾌감을 전신에 느껴 보 는 것은 진정 멋진 일이었다. 내일 손님이 오면 지난 가을처럼 그 책을 끝까지 못 읽게 될 것이다. 작년에도 그는 여기에 누워서 프리트요프 전설을 읽기 시작 했었는데 손님이 와서 독서를 그만두어야 했던 것이다. 책을 거기 그대로 남겨 놓은 채 그는 학교에 갔다. 그는 학교에서 호머와 타키투스를 배우면서도 그 책 에 대한 내용을 생각하며 절에서 반지와 입상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 하였다. 그는 책을 끝까지 읽고자 하는 새로운 정열로 반쯤 소리를 높여 읽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느릅나무 꼭대기에서 오는 바람이 스쳐갔다. 새들은 노래했 으며 번쩍거리는 나비들과 모기들과 풀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책을 다 읽었을 때 그는 책을 접고 벌떡 일어났다. 잔디에는 그림자가 가득하였고 하늘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지친 벌 한 마리가 그의 팔소매에 앉은 채로 붙어 다녔다. 귀뚜라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파울은 빨리 그곳을 떠나 관목과 플라타너스를 지나 집으로 들어 갔다. 그는 열여섯 살이고 날씬한 체구에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채 그는 북극의 주인공 프리트요프의 숙명에 대한 사색에 잠 겨 있었다. 점심을 먹는 여름방은 집 맨 뒤채에 있었다. 이 방은 사실은 하나의 홀인데 유리벽으로 정원과 구분되어 있었으며 조그만 별채로 집 앞에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가 정말 정원이었는데 예부터 `호숫가`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호수라기보다 화단과 울타리, 길들과 과수들 사이에 있는 조그만 연못이었을 뿐이다. 홀에서 밖으로 통하는 층계는 협죽도와 야자수로 만들어졌다. `호숫가`는 생기에 넘친다 기보다는 평안하며 소박하게 보였다. “내일은 손님들이 오는거야. 분명히 너도 좋을 테지?”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죠.” “허나, 이 녀석아. 정말로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서너 사람에게는 집과 정원이 너무 크고 누구 하나만을 위해서 이 훌륭한 경치가 있 는 게 아니다. 별장이라든지 공원은 사람들이 즐겁게 들랑거리라고 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많이 올수록 좋은 것이다. 그런데 너는 태연히 늦게 오는구나. 우리는 모두 밥을 먹었다. 국은 이젠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정교사에게 몸을 돌렸다. “선생, 정원에서는 통 뵐 수가 없군요. 선생께서는 시골의 생활을 무척 좋아 하신다고 저는 늘 믿고 있었는데요.” 흠부르거 씨는 이마에 주름을 지었다.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되도록 휴가를 제 개인 공부에 이용하고 싶 어서요.” “흠부르거 선생, 진정으로 존경합니다. 훗날 선생의 명성이 세상을 진동할 때 당신 창 아래 기념틀을 달게 하겠어요. 꼭 그 날을 맞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교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저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제겐 제 이름이 알려지든지 안 알려지든지는 관 심이 전혀 없습니다. 하물며 기념틀에 대해서야...” “선생,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선생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파울아, 본 을 받아라!” 아주머니는 교직원 중에서 가정교사를 구해줄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주 인이 즐겨하는 이런 종류의 정중한 대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녀 는 주인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이야기를 했다. 주로 이 곳에 오기로 된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파울은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먹으며 어떻게 가정교사가 거의 백발이 된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들어보일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창과 유리문 앞에서 정원, 숲, 연못과 하늘은 막 다가오는 밤의 전율에 젖어 변형되기 시작했다. 숲은 까맣게 되어 어두운 물 결 속으로 휩쓸려 들고 먼 구릉선을 끊고 서 있는 나무들은 낮에는 본 적이 없 는 이상한 모습으로 어둡게 뻗어 있었다. 다양했고 풍성했던 모양을 차차 잃고 단단히 뭉쳐진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갔다. 멀리 있던 산들이 더욱 웅장하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평지는 거무스름하게 펼 쳐져 한단 높은 언덕이 우뚝 눈에 들어왔다. 창 앞에는 아직 남은 햇볕이 램프 의 불꽃과 싸우다 지친 듯 하였다. 파울은 열려진 문 앞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 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밤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서도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관조하 여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그가 생각한 것은 북극해의 어느 날 밤의 모습이었다. 해변가 새까만 나무들 사이로 침침하게 이글거리는 신전 화재가 하늘을 향해 화염과 연기를 내뿜고 있 었다. 파도는 바위에 부서지고 거칠고 빨간 불빛을 반사해 주며 어둠 속에서 바 이킹 배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얘야, 그런데 너는 오늘 밖에서 또 무슨 책을 읽었느냐?” 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어보았다. “프리트요프를 읽었죠.” “그래 그래, 젊은애들은 그것을 여전히들 읽고 있는가? 흠부르거 선생, 여기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이 늙은 스웨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 지요? 아직도 인정을 받는가요?” “에사야스 테그너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에사야스 말이죠.” “죽었어요. 에사야스는 완전히 고인이 됐군요.” “그 사실이야 제가 믿죠. 그 남자는 우리 시대에도 살고 있지 않았죠.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읽었던 그때 말입니다, 그의 책이 아직까지 유행이 되고 있나 하는 것을 묻고 싶었죠.” “미안합니다만, 저는 유행이나 풍조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학문적, 심미적 가치에 관한 문제라면...” “물론 그걸 의미하는 거죠. 학문이 어떻게 된 건가요?” “문학사는 테그너를 단순히 이름만 기록해 놓았을 뿐이에요. 표현을 아주 제 대로 해주셨는데 그는 정말 한낱 유행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뻔한 거지요. 진실 한 것이나 선한 것은 결코 유행이 된 적이 없었지만 늘 존재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대로 테그너는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거짓 을 억지로 달콤하게 꾸며낸 것 같아요.” 파울은 힘차게 몸을 돌렸다. “흠부르거 선생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지 않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아름답기 때문이죠. 그저 아름다우니까요.” “그래? 그렇다고 그렇게 흥분할 까닭이야 없지.” “그러나 선생님께선 달콤하나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 나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렇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확실히 안다 면 강좌를 하나 열어 줘야겠군. 허나 파울, 이번은 자네의 판단이 미학과는 맞지 가 않네. 보게, 그건 투키디데스를 아름답다고 보거든, 자넨 그걸 흉하다고 보고. 그래서 프리트요프를...” “아, 그건 학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허나, 이 세상에 학문과 관계 없는 것이 어디 있나? 압데렉씨, 전 이제는 일 어서야겠는데요.” “벌써요?” “무얼 좀 쓸 게 있어서요.” “유감인데, 마침 멋지게 대화가 되어 갔는데... 허나 자유란 중요하니까. 그럼 안녕히 주무시오!” 흠부르거 씨는 예의바르나 딱딱하게 방을 떠나 소리없이 복도로 사라졌다. “그래, 그 옛날 모험담이 네 마음에 들었더냐, 파울?”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학문도 그걸 망치지 못하게 하렴. 그렇다면 제대로 될 거야. 혹시 우울 해진 건 아니겠지?”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제가 흠부르거 선생님이 이 시골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는 걸 아버지께선 아시죠. 이 방학에 그렇게 공부를 깊이 하지 않 아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내가 한번 이야기했으면 그렇게 하는 거야. 아 그러니 명랑하게 지내 라. 네 선생이 너를 물어뜯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왜 그는 같이 와야 했나요?” “얘야, 내 말을 들어라. 그럼 그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니? 자기 집은 별로 있을 만한 곳이 못 되니까 말야. 그리고 나도 즐거움을 갖고 싶었다. 유식하고 박식한 남자들과 사귀는 것은 이익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나는 우리 흠부르거 선생이 없다면 쓸쓸할 것이다.” “아유, 아버지의 말은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모르겠어요. ” “그런 것을 구별하는 걸 배워라. 유익한 일일 거다. 이젠 약간 음악을 즐겨 볼까, 어떻겠니?” 파울은 아주 기뻐서 아버지를 옆방으로 인도했다. 청하지도 않는데 아버지가 자기와 연주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피아노의 명수였고 아버지와 비교하면 그는 그저 서툴게 조금 두들기는 정도였 으니까. 그런데 아주머니는 혼자 남아 있었다. 이 부자는 자기의 연주를 듣는 사람을 눈 앞에 두기 싫어하며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사람이 있어 자기의 연 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는 음악사였기 때문이다. 이 아주머니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수 년간 두 사람을 어린애들처 럼 돌보아 온 그녀가 부자의 아무리 조그맣고 섬세한 성품인들 눈치 못 챌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등을 기댈 수 있는 등의자에 앉아 쉬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들은 것은 네 손으로 연주되는 서곡이었는데 분명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곡 목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즐겨서 음악을 듣지만 그리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 문이었다. 얼마 후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오면서 `아주머니, 지금 그게 무슨 곡이 었지요?`하고 물어볼 것을 알고 있었다. `모짜르트의 것이에요`라고 말하거나 또 는 `카르멘 중에 나오지요`라고 대답하면 언제나 틀리니까 또 웃음거리가 될 테 지.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뒤로 몸을 기대며 미소지었다. 아무도 이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인지. 왜냐하면 그녀의 미소는 진정 순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입술로 웃기보다 눈으로 웃었다. 얼굴 전체와 이빨 그리고 양볼이 모 두 같이 웃고 있었으며 그것은 깊숙한 이해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듣고 있었다. 음악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라며 무척이 나 마음에 들어 했다. 곡에 따라가려고 애는 쓰면서도 그녀는 다른 것도 생각하 고 있었다. 우선 그녀는 누가 위에서 치고 누가 아래서 치고 있나를 구별하려고 애썼다. 파울이 아래에서 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걸 곧 알아내었다. 더듬거려서가 아니라 위에서 나는 멜로디는 경쾌 하며 대담하게 울렸고, 결코 어느 학생이 연주할 수 없을 만큼 내면으로부터 울 려 나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옆방에서 있는 일을 상상할 수 있었 다. 피아노 옆에 앉은 두 사람이 눈앞에 선했다. 아주 멋진 대목에 왔을 때 아버 지가 다정하게 웃음짓는 것을 본다. 이런 대목에선 파울은 입술을 벌린 채 눈동자를 빛내며 좀더 높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지 않을까. 유달리 명랑한 곳에서는 혹 파울이 웃지나 않을까 상상해 본 다. 그러면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고 아주 거칠게 팔짓을 해서 파울이 그 행동 을 참아 내기는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서곡이 자꾸자꾸 무르익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아주머니는 그들 둘을 눈앞에 보는 것이다. 점점 더 애정깊게 연주로 상기된 얼굴들을 읽어 가는 것이다. 재빠른 음악과 같이 한 조각 인생, 경험과 사랑이 그녀를 스쳐 지나는 것이다. 밤이 되자 서로들 밤인사를 나누고 제각기 자기 방으로 갔다. 여기저기서 문 이나 유리창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시골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 밤의 정적은 도시인에게는 항상 하나의 기적 과 같은 것이다. 자기가 살던 도시에서 벗어나 어느 농장에든가 농가에 와서 첫 날밤 창가에 서거나 침대에 누우면 이 정적이 고향의 마력이나 안식처처럼 사람 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진실함과 건강함에 접근한 것을 느끼게 하며 영원의 비 애를 느끼게 한다. 물론 순전히 정적만은 아니었다. 많은 소음이 있으나 도시에선 그 소음이 낮 의 것과 밤의 것이 구별 안 되는 반면 여기서 그 두 소음은 어둡고, 눌린 듯이 신비한 밤의 소음이었다. 그것은 개구리들의 노래였고 나무들의 속삭임이었고 시냇물의 졸졸거림이었고 밤새와 박쥐의 비상이었다. 어쩌다 늦게 오는 건초 마 차가 지나거나 개가 짖는 소리는 생에 대한 반가운 인사가 되었다가는 멀리로 은은하게 사라졌다. 가정교사는 아직 불을 켜 둔 채 방안에서 불안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왔다갔다 하였다. 그는 저녁부터 자정까지 독서를 하였다. 이 젊은 흠부르거 선생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결코 사색가는 아니었다. 학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좀 재능이 있는 젊은이 였다. 그의 본질에는 아직 어떤 지상 명령의 불가피한 핵심이 이루어지지 않았 기 때문에 많은 이상이 엇갈리고 있었다. 방금 그는 몇 개의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책들 속에서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은 러스킨이나 니체의 부드럽고 운율적인 언어로부터 가볍게 달 고 다닐 수 있는 각종의 보석들을 훔쳐내어 새로운 문화의 초석을 만들 수 있겠 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이 책들은 러스킨이나 니체의 책보다 읽기에 훨씬 재 미있었다. 요염한 우아함이 있었고 자잘한 뉘앙스가 풍부하였으며 비단처럼 고 상한 광채가 있었다. 위대한 계획이나 대명이나 정열이 문제가 될 때에는 단테 나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흠부르거의 이마엔 구름이 끼었고 그의 눈은 넓은 광장을 훔쳐 본 듯 지쳐 있었고 그의 걸음걸이는 들떠 있어 일정하지가 않았다. 자기를 둘러 싼 천박한 일상생활에는 도처에 벽을 뚫는 망치가 놓여 있어서 새로운 행복을 예언하는 자나 초대하는 자들을 따라갈 때 그 벽이 뚫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들의 세계에는 미와 정신이 넘칠 것이고 그들의 세계에 들여놓는 한 발짝 한 발 짝은 시와 지혜로 적셔질 것이다. 그의 창 앞에는 별이 뜬 하늘, 몰려가는 구름, 꿈을 꾸는 듯한 공원, 자는 듯 숨을 쉬는 들판, 이 밤의 온갖 아름다움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아름다움은 그가 창가로 와 바라보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이 그리움과 향수를 이기도록, 그의 눈을 식히도록 구부러진 영혼의 나래를 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대 가까이에 램프를 끌어다가 누운 채 다시 책을 읽어갈 뿐이었 다. 파울 압데렉은 불을 꺼 놓지 않았다. 허나 아직 잠은 안 자고 내의바람에 창 가에 앉아 조용한 나무 꼭대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특정한 것을 생 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늦은 밤시간을 즐기고 있고, 그 흥분된 행복감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아름답게 저 새까만 하늘에는 별들 이 빛나고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오늘 연주를 다 하시다니! 얼마나 조용하게 정원은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것인지! 유월의 밤은 이 소년을 부드럽게 꼭꼭 감싸 주었다.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그의 마음 속에 뜨겁게 불타고 있는 것을 서늘히 식혀 주었다. 그의 눈은 조용 해졌고 그의 머리는 식었다. 밤은 훌륭한 어머니처럼 미소지으며 그의 눈을 들 여다보았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있는지 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지도 못 하며 혼동한 채 누워 있었다. 깊은 호흡을 하며 허탈하게 내맡겨 논 커다랗고 조용한 눈길을 들여다 보았다. 이 반사에서 어제와 오늘이 찬란히 얽혀 그림이 되고 풀 길 없는 전설처럼 되었다. 가정교사의 방은 이제 불이 꺼졌다. 어느 몽유병 환자가 이리로 와서 집, 안 뜰, 공원과 정원이 소리없이 잠자며 누워 있는 것을 본다면 분명 향수를 가지고 넘겨다보며 반은 선망의 마음으로 평화로운 전경을 즐길 것이다. 만일 가난한 집 없는 걸인이 보았다면 아무 거리낌과 악의없이 환영하는 공원으로 들어와 제 일 긴 의자를 잠자리로 택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가정교사는 평상시 습관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깨었 지만 별로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램프 불 밑에서 어젯밤 오랫동안 독서를 했 기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불을 껐을 때는 침대가 잠들기에는 너무 더워서 마음 이 흩어져 있고 눈은 피로하여 완전히 잠은 달아났고 오한을 느끼며 일어나 있 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새로운 르네상스의 필연성을 느꼈다. 얼마 동안 자기 공부를 계속할 의욕은 없었고 신선한 공기가 절실히 갈망됨을 느꼈 다. 그래서 조용히 집을 빠져 나와 천천히 들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에서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한 농부들이 심각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며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괴로왔다. 그는 급히 서 둘러 서늘함과 보드라운 여명이 감싸고 있는 가까운 숲속을 찾으려 했다. 30분 정도 불쾌한 기분으로 그 주위를 헤매었다. 마음 속에 황폐함이 느껴지자 혹 곧 커피 마실 때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따스히 햇볕이 내리쬐이는 들판과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농부들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 다. 현관 앞에 오자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허기진 듯이 조반을 먹으러 달려오는 게 무례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몸을 돌려 일부러 느린 발걸음으로 공 원길을 거닐다가 숨가쁘지 않게 식탁에 나타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억지로 편안한 듯 꾸민 산책의 발걸음으로 가로수 길을 지나 막 느릅나무 모 퉁이를 돌려는 찰나에 그는 뜻하지 않은 광경을 보고 놀랐다. 맨 끝에 놓인 라 일락 나무들로 약간 가려진 긴 의자 위에 사람 하나가 누워 있지 않은가! 그는 얼굴을 팔꿈치와 손에 묻은 채 있었다. 놀란 흠부르거 씨는 처음에는 흉칙한 살인을 얼핏 연상했으나 깊은 호흡 소리 를 듣고 자기 앞의 사람은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한 젊은이 같다는 생 각이 짙어질수록 그의 마음 속에 용기와 화가 치밀어 왔다. 우월감과 남자의 긍 지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얼마 동안 주저한 후에 결심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잠자는 자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세요, 일어나요.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요?” 공장 직원은 놀라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얼떨떨한 듯 불안하게 허공을 쳐 다보았다. 자기 앞에 프록코우트를 입은 남자가 서서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을 보 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마침내 그는 어젯밤에 열린 정원에 들어와서 밤을 지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날이 새면 길을 떠나려고 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고 해명을 하려고 했다. “말을 할 줄 모르나?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그저 잤을 뿐이죠.”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두 발을 짚고 일어섰을 때 그의 연약한 체구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 주는 미숙한 표정을 더 뚜렷이 해주었다. 기껏해야 열여덟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를 따라와!” 가정교사는 기운없이 따라오는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다가 문 밑에서 압 데렉 씨를 만났다. “안녕히 주무셨소? 흠부르거 선생, 일찍 일어나셨군요. 낯선 사람과 같이 오 는데 그게 누군가요?” “이 청년이 당신의 공원을 숙박소로 이용했습니다. 제 생각엔 이걸 알려 드 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집주인은 곧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 “아휴,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 선생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씨가 있으셨는지 몰랐어요. 잘 하셨어요. 허나 저 친구에게 커피 한 잔은 주어야 되겠지요. 안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얘기하세요. 그에게 조반을 내보내 주라고요. 아니 잠깐만, 그럴 것 없이 우리가 얼른 가서 부엌에서 가져오지요. 이리 와봐. 뭐가 좀 남았 을 텐데.” 커피 테이블 가에서는 이 새로운 문화의 건설자가 진지함과 침묵의 장엄한 구 름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조그만 농담도 오가지 않았다. 오늘 오게 될 손님들 에 대한 생각이 주인의 머리 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걱정 스러운 듯 미소지으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뛰어다녔고 하인들은 이 설레임에 적당히 참가하거나 빙글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점심 무렵이 되자 주인은 파울과 같이 마차를 타고 가까운 정거장으로 갔다. 파울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이 손님들의 내방으로 중단될 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온 사람과는 잘 사귀어서 그들의 성품을 관찰하며 알아 놓는 것도 그에게는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귀가 도중에도 만원의 마차 속에서 세 사람의 손님들, 신나게 이 야기를 하고 있는 교수와 약간 부끄러운 듯 말하는 두 소녀들을 조용히 눈여겨 관찰하였다. 교수는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교수가 아버지의 죽마고우임을 알았기 때 문이다. 교수는 약간 엄하고 늙게 보였으나 결코 싫지 않았다. 그는 말할 수 없 이 현철해 보였다. 소녀들을 잘 알기란 훨씬 힘들었다. 그 중 하나는 그저 어린 소녀 애숭이였고, 여하튼 자기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소녀였다. 그녀가 비웃는 태도를 보이느냐 또는 친절한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파울과 그녀 사이에는 싸움이든 우정이든 둘 중 하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나이의 소녀란 모두 같았다. 모두가 말 붙이기가 힘들었고 사 귀기도 힘들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지만 다짜고짜로 한 무더기의 질문을 쏟아 놓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한 여자가 그에게 더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그녀는 아마 스물셋의 이미 성숙한 숙녀인 것 같았다. 파울은 숙녀들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다가 가까이 가면 부끄러워하고 아주 당황하곤 했었다. 그는 이런 숙녀들과 자연의 아름다움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는 숙녀들의 행동과 머리 모양을 아주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를 만난 숙녀들 은 그가 뛰어난 많은 지식들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숙녀란 존재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으나 모두가 돌같이 겸손한 척하는 꾸밈과 오만함을 가지 고 있었다. 또 그 나이 또래에 대한 경멸적인 멸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미소지을 때면 얼굴에 가면을 쓴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이 점에 있어서는 풋나기 처녀들이 훨씬 순수했다. 두 남자들 외에 더 나이 든 고상한 투스넬데 양만이 대화에 참가하고 있었다. 조그만 금발머리의 베르타는 파울과 마주앉아 있었는데 수줍어하며 끝까지 침묵 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고 약간 휘인, 파란 리본이 달린 무색의 밀짚모 자를 쓰고 있었고 헐거운 벨트와 가늘고 하얀 단을 댄 여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햇살이 내리쬐는 들과 건초밭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그녀는 파울에게 재빨리 시선을 돌리곤 하였다. 파울을 본 그녀 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녀석만 없다면 이 에를렌호프에 다시 한 번 꼭 오고 싶을 텐데. 이 녀석은 꽤 단정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재치 있어 보이는 구나. 그녀는 재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아니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는 그들이 고약한 외래어가 섞인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들었다. 들꽃의 이름을 묻는다든가 하는 질문을 해서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면 그들은 아주 뻔뻔스럽게 웃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모습을 두 명의 사촌들로부터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대학생이고 다른 한 명은 고등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 학생이 훨씬 더 못됐었다. 때로는 머슴아이처럼 버릇없이 굴다가도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조소적인 기사도적 친절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들에게 늘 겁을 냈었다. 그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배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울지도 말고 또 화를 내지도 말자고 거듭 다짐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지고 마는 것이니까. 그녀는 파울에게도 꼭 이걸 지키려 하였다. 여기엔 아주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만일 위급하다면 아주 머니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파울아, 왜 그리 말이 없니?” 압데렉 씨는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아버지. 왜 그러세요?” “너 혼자서 이 마차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잊은 것 같아서 말이다. 베르타에게 좀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지 않겠니?” 파울은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자, 보셔요. 베르타 양, 저기 뒤가 우리 집이에요.” “얘들아, 너희들은 서로 존칭을 쓰니?”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계속하렴. 허나 사실 공연한 짓일 텐데.” 베르타는 얼굴이 빨개졌다. 파울도 이 모습을 보자마자 돌같이 얼굴이 굳어 버렸다. 둘 사이의 대화는 벌써 끝이 났고 어른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게 다 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차가 별안간 소리를 내며 자갈밭을 지나 집 앞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기분 이 언짢아졌다. “자 붙드세요, 아가씨.” 파울은 베르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로써 우선은 그녀에 대한 시중이 끝난 셈이었다. 왜냐하면 문 앞에는 벌써 아주머니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머니는 상냥하면서도 기쁘고 진실된 표정으로 눈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한 명씩 악수를 하더니 모든 사람과 다시 한 번 악수를 하였다. 손님들은 자기들 방으로 안내되었으며 식탁으로 와서 맛있게 식사할 것을 부탁받았다. 하얀 식탁 위에는 두 개의 커다란 꽃다발이 놓여 있어서 음식 냄새와 섞여 향 기를 발하고 있었다. 압데렉 씨는 군고기를 잘라 분배하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날카로운 눈으로 접시와 대접을 검사하고 있었다. 프록코우트를 입고 상좌에 앉은 교수는 기분이 좋은 듯 아주머니에게 부드러 운 시선을 던지며 수없는 질문과 농담을 하였다. 그래서 아주머니와 주인이 열 심히 나누고 있는 이야기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아주머니는 옆에 앉은 가정교사 가 조금밖에 먹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말도 적게 하므로 자기가 너무나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구석의 교수와 두 명의 젊은 숙녀가 있다는 것이 가정교사를 굳어 버리게 하 였던 것이다. 그는 젊은이로서의 자기 권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혹시 닥칠지 모를 공격이나 모욕을 끊임없이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싸늘한 시선과 무거운 침묵으로 이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베르타는 아주머니 옆에 앉아서 안도감을 느꼈다. 파울은 대화에 끼여들지 않 기 위해 애써 먹는 데만 몰두하려다가 먹는 데 취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주인은 자기 친구인 교수와의 열전 후말의 주도권을 빼앗 았다. 싸움에 진 교수는 이제서야 식사를 할 시간을 얻게 되어 천천히 먹기 시 작했다. 홈부르거 씨는 마침내 아무도 자기를 공격할 뜻이 없다는 것과 자기의 침묵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옆에 앉은 소녀로부터 조롱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턱 밑에 가벼운 주름이 생길만큼 깊숙하게 머리를 숙인 채 눈썹을 짙게 모으고 무슨 문제를 머릿속에서 쥐어짜고 있는 듯 보였다. 가정교사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스넬데 양은 베르타와 다정한 대화를 시작했으며 여기에 아주머니가 참가하였다. 파울은 그 동안 열심히 먹다가 별안간 과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이프와 포크를 놓았다. 고개를 들고 앞을 쳐다보다가 그는 우연히도 아주 우스운 교수 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침 큼직하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미쳐 포크를 떼지 도 않았을 때 압데렉의 강력한 말 한마디가 교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는 포크를 내리는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 고, 이야기하고 있는 자기 친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에 파울은 돌발적으로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다가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압데렉 씨는 성난 눈길을 보냈다. 가정교사도 나오려는 웃음을 아랫입술로 깨물며 참았다. 베르타는 아무 까닭도 모르고 별안간 함께 따라 웃었다. 파울이 젊은애다운 장난을 했다는 것이 베르타에게는 재미있었다. 그는 적어도 지나칠 정도로 모범생은 아니었으니까. “무엇이 그리 재미있어요?” 투스넬데 양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베르타, 넌 또 왜 그래?” “나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같이 웃은 거지 뭐.” “더 좀 따라 드려도 될까요?” 홈부르거 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맙습니다만 그만 하겠어요.” 홈부르거 선생이 상냥하게 권했지만 아주머니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두었다. 잠시 후에 식탁을 치우고 커피, 코냑 그리고 담배를 내왔다. 파울은 투스넬데 양으로부터 담배를 피우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안 피웁니다. 제겐 별 맛이 없어요.” 파울이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얼마후에 솔직하게 덧붙 여 말했다. “사실 피워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 말을 하자 투스넬데 양은 그를 보며 짓궂게 미소지었다. 이 때에 그 녀는 머리를 약간 옆으로 갸우뚱하였다. 이 순간 소년은 그녀의 모습을 아주 매 력적으로 느꼈으며 그 전에 자기가 그녀에게 던졌던 증오감을 후회하였다. 그녀 는 아주 상냥할 것 같이 보였다. 사람들은 열한 시까지 정원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샹들리에 밑에 앉아 있었 다. 손님들이 여행에 피곤을 느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간은 무더웠지만 따뜻한 바람이 고르지 않게 꿈꾸듯이 이리저리 불어왔다. 하늘에는 영롱한 별들이 축축하게 빛나고 있었고 산들은 번갯불의 시뻘건 무늬 때문에 새까만 데다가 황금빛으로 팽창되어 있었다. 숲은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향기를 발했으며 어둠으로부터 하얀 재스민이 희미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문화의 개혁이 민족 의식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소 수의 천재들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으신단 말씀이지요?” 교수는 자리가 하는 질문의 억양에 확실히 양보하는 기색을 보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정교사는 약간 자신없게 대답하고 긴 연설을 시작했는데 교수 이외에는 아 무도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압데렉 씨는 조그만 베르타와 농담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옆에서 편을 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탄산수를 섞은 포도주를 의자에 기댄 채 마셨다. “당신도 역시 읽으셨겠지요?” 파울은 투스넬데 양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주 낮게 놓인 접는 의자에 누워 머 리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 곧장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사실은 그런 책들은 당신에게는 금해야 했을텐데요.” “그래요? 왜 그렇죠?” “당신이 아직 모든 것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입니다.” “허나 어떤 대목은 당신보다 아마 제가 더 잘 이해했을 수도 있을 걸요.” “정말로? 도대체 그게 어디죠?” “라틴어 말이에요.” “그런 농담도 다 하실 줄 아는군요.” 파울은 아주 명랑하게 말했다. 저녁 식사 때 약간의 포도주를 얻어 마셔서 그 런지 그에게는 부드럽고 어두운 밤 속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멋 있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상한 귀부인에게서 나른한 휴식을 뺏어 좀더 열정적인 항변이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할 수 없을까 해서 호기심 있게 기다렸 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한 손은 의자 위에 다른 한 손은 땅까지 떨군채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 있었다. 그 녀의 하얀 목과 얼굴은 새까만 나무들과 유달리 구별되어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 다. “그런데 엑케하르트 중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들었지요?” 그녀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물었다. “스파쪼 씨의 도취하는 장면입니다.” “아, 그래요?” “아뇨. 숲 속의 노파가 쫓겨나는 광경 같은 거 말이죠.” “그래요?” “또는 프락세디스가 그를 감옥으로부터 도망가게 하는 장면이 내 마음에 제 일 들었어요. 정말 훌륭하죠.” “물론 거긴 훌륭하죠. 그게 어땠었죠?” “그녀가 후에 재를 뿌리는 모습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이젠 그쪽에서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 하셔야지요.” “엑케하르트 중에서 말이죠?” “물론이지요.” “바로 프락세디스가 수도승을 도와 도망가게 하는 곳, 그녀가 그에게 키스를 하며 성을 돌아가는 장면이지요.” “네, 그래요.” 이렇게 파울이 천천히 대답했으나 그는 프락세디스가 키스하는 장면에 대해서 는 기억하지 못했다. 가정교사와 교수와의 대담은 이젠 끝이 났다. 버어지니아 담배 하나를 붙여 몰고 기다란 여송연의 끝을 촛불에 붙이고 있는 압데렉 씨의 모습을 베르타는 호기심 있게 지켜 보고 있었다. 그 소녀는 옆에 앉은 아주머니의 허리를 오른팔 로 꼭 안고 주인이 이야기해 주는 동화 같은 경험담을 눈을 크게 뜬 채 듣고 있 었다. 그것은 나폴리에서의 여행 모험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한번 물어볼 용기를 내었다. “조그만 아가씨, 그건 오직 아가씨에게 달렸네. 항상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믿는 부분만큼만 진실일 수 있으니까.”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아빠에게 여쭈어 보아야겠어요.” “그렇게 해.” 아주머니는 자기의 허리를 감고 있는 베르타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건 농담이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는 베르타의 포도주 잔으로부터 밤벌레들을 쫓으며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정다운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주인, 아주머니, 생기 있게 지껄이고 있는 파울, 모임에서 떠나 밤의 푸르름을 바라보고 있는 아 름다운 투스넬데 그리고 자기의 꾀 있는 이야기를 대견하다고 기뻐하고 있는 가 정교사, 이 모두를 바라보는데 즐거움을 느꼈다. 아직 젊은 그녀에게 청춘 시절에 보내는 이런 정원의 여름 밤은 얼마나 화려 하며 멋진 것일까? 어떤 운명이 이 아름다운 젊은이들과 현명한 노인들을 기다 리고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자기의 인생과 사상과 소망은 다 중요한 것이다. 투스넬데 양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정말 그녀는 미인이었다. 그 다정한 부인은 베르타의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약간 고립된 가정교사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던졌다. 때때로 주인의 의자 뒤로 그의 포도주 병이 여전히 얼 음에 채워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학교에 대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좀 하세요!” 투스넬데 양이 파울에게 말했다. “아 학교 말이예요? 지금은 방학인 걸요.” “학교에 가길 싫어하나요?” “학교 가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면 누군지 말해 보세요.” “그런데 당신은 공부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나요?” “차라리 저는 해적이 되고 싶어요.” “해적?” “물론이지요. 바다의 도적인 해적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많이 독서를 할 수 없을 텐데요.” “독서가 별로 필요하지도 않겠죠. 다른 심심풀이가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이죠. 저는...” “그래서?” “해적이 되겠다는 말을 미리 할 수야 없지요.” “그렇다면 지금 말하지 마세요.” 파울에게 이런 대화는 좀 지루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베르타와 같이 아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는 아주 기분이 좋으셨다. 지금은 아빠 혼자만 이 야기를 하시고 모든 사람들은 듣고 웃었다. 그때 하늘하늘하고 보드라운 영국식 드레스를 입고 있는 투스넬데 양이 천천 히 일어서더니 식탁으로 걸어왔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고 벌써 자정이 되었다는 것을 의아 하게 생각하였다. 집까지의 얼마 안 되는 길을 가면서 파울은 베르타 옆에서 같 이 걸어갔다. 아빠의 농담을 듣고 마음껏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더욱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손님들의 방문을 귀찮게 생각한 것에 대해 후회하였다. 저녁에 소녀와 잡담하는 것은 즐거웠다. 파울은 마치 자신이 신사나 된 듯이 느꼈고 저녁 내내 투스넬데에게만 신경을 썼었다. 그녀는 짓궂었던 걸! 파울은 베르타를 사랑스럽 게 느끼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서 그는 그녀에게 말해 보려고 하였다. 그녀는 파울을 보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오, 당신 아빠께서는 정말로 재미있으셨어요!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는 베르타에게 내일 도토리 산으로 함께 소풍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그 산의 길과 전망에 대해서 아주 열띠게 설명을 하였다. 그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마침 투스넬데 양이 그들 옆을 지나갔 다. 그녀는 약간 몸을 돌려 파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약간 호기심에 차서 한 행동이었으나 파울은 그녀의 행동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안간 그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베르타는 갑자기 조용해지자 놀라서 파울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그녀는 그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벌써 집에 도착했다. 베르타는 파울에게 손을 흔들었고 파울은 잘 자라는 인 사도 없이 먼저 갔다. 파울은 투스넬데 양이 초롱을 들고 층계를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그녀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었다. 파울은 잠에서 깨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따스한 밤이 주는 섬세한 열기에 취 해 있었다. 무더위는 더해 가는 중이었고, 번개는 끊임없이 벽에 반사되었다. 때 때로 저 멀리서 조용하게 천둥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씩 있다가 는 나무 꼭대기조차 설렁거리게 하지도 못하고 미미한 바람이 불어왔다가 가곤 하였다. 파울은 꿈꾸듯 지난 저녁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자신이 오늘은 다른 때와 달랐 었다고 느꼈다. 자신이 성숙해진 듯 생각되었고, 오늘 그가 시도한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예전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 같았다. 투스넬데 양하고도 멋지게 대화를 나누었고 후에 베르타하고도 그랬다. 간혹 투스넬데 양이 자기를 진심으 로 대한 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파울은 그저 장난을 한 것 이겠지라고 위안하며 프락세디스의 키스에 대해서는 내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는 그것에 대해 정말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잊어버린 것일 까? 투스넬데 양이 정말 예쁜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는 그녀를 예쁘다고 생 각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은 물론 투스넬데 양조차도 신용하지 않았 다. 그녀가 희미한 램프 빛 곁 의자에 반쯤은 앉고 반쯤은 누워 있었을 때의 모 습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었다. 절반은 만족한 채 절반은 지친 채 위를 쳐다볼 때 밝고 기다란 숙녀 드레스 위로 드러나는 하얗고 가느다란 목 - 이런 것은 그대로 그림에 나오는 것 같았 다. 물론 베르타는 그에게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순진하면서 부드럽고 귀 여웠으며 남을 누르려는 악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부터 그녀와 사귀었더라면 그들은 벌써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단지 이틀만 머물 손님들과의 만남이 짧게 느껴졌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베르타와 같이 웃고 있는 그를 왜 투스넬데 양은 그렇 게 쳐다본 것일까? 그는 자기 옆으로 지나가며 머리를 돌리는 그녀를 다시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녀의 시선을 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모든 것을 다시 차분히 상상해 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를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조롱적이었다. 건방지게 조롱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엑케하르트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가 베르타와 같이 웃었기 때문이었 을까? 이것에 대한 분함은 꿈속에서까지 느껴졌다. 아침에는 하늘이 온통 흐렸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사방에서 건초의 훈 훈한 흙먼지의 냄새가 났다. “속상하군요. 오늘은 산보를 할 수 없게 되겠지요?” 베르타가 내려오면서 불평하였다. “오, 오늘 하루 종일 참을 것도 같은데...” 압데렉 씨가 위로하였다. “넌 보통 때는 산보 가는 데 그리 열심히 아니었잖니?” 투스넬데 양이 말했다. “우리가 짧은 시간 동안만 여기 있으니까 그렇지.” “공중 구주희 놀이터가 있어요.” 파울이 웃으면서 제안했다. “정원에는 크로켓 놀이도 있고요. 그런데 크로켓 놀이는 지루하죠.” “전 크로켓 놀이는 꽤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투스넬데 양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해 볼 수 있죠.” “좋아요. 조금 있다가요. 우선 커피부터 마셔야 해요.”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젊은 사람들은 정원으로 갔다. 가정교사도 같이 끼여 있 었다. 크로켓 놀이를 하기에는 잔디가 너무 키가 크다고 생각되어 다른 놀이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파울은 열심히 알맹이를 끌어 와서는 세워 놓았다. “누가 처음에 시작하나요?” “묻는 사람이 늘 하게 되어 있죠.” “그럼 좋아요. 누가 같이 하겠어요?” 파울은 투스넬데와 한 편이 되었다. 그는 아주 잘해서 그녀에게 칭찬을 받거 나 그렇지 않으면 놀림만을 받게 될 것을 예상하였다. 허나 그녀는 전연 보지도 않았고 도대체 그 게임에는 전혀 관심을 안 두었다. 파울이 그녀에게 공을 주면 그녀는 주의도 하지 않고 공을 던지고는 몇 개의 공이 쓰러졌는지도 세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녀는 투르게니에프에 대해서 가정교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홈부르거 씨는 오늘은 꽤 상냥하였다. 베르타만이 게임에 몰두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녀는 늘 세워 놓는 일을 같이 도왔으며 파울에게 겨냥을 표시하도록 하였다. “가운데서 왕을 몰아내자, 아가씨. 이젠 우리가 이길 거예요. 열두 개째거든 요.” 파울이 소리를 쳤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사실 트루게니에프는 제대로 러시아 인이 아니죠.” 가정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자기 차례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파울은 화가 났다. “홈부르거 선생님, 선생님 차례예요.” “내 차례야?” “그렇고 말고요. 우리 모두가 기다리잖아요?” 그의 마음 같아서는 가정교사의 정갱이에 공을 던져 버렸으면 시원할 것 같았 다. 그의 불쾌감을 눈치챈 베르타는 불안해져 전연 맞추지를 못했다. “그럼 이젠 끝냅시다.” 아무도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투스넬데 양은 천천히 물러났고 가정교 사도 그녀를 따랐다. 파울은 화가 나서 아직도 서 있는 공들을 발로 차서 던져 버렸다. “우리 계속해서 게임할까?” 베르타가 수줍은 듯 말했다. “아, 둘이서는 재미 없어. 내가 치워 놓아야지.” 그녀는 얌전하게 도와주었다. 구주희 말이 모두 다 상자 안에 들어갔을 때 그 는 투스넬데 양을 둘러보며 찾았다. 투스넬데 양은 공원으로 사라졌다. “왜 그래요?” “혹시 제게 공원을 좀 보여 주실 수 있는지요?” 그때 그는 길을 뚫고 아주 빨리 앞으로 내달았다. 베르타는 따라가기 위하여 거의 뛰어야만 했기 때문에 숨이 찼다. 그는 그녀에게 숲과 플라타너스 길을 보 여주었고, 그 후에 단풍나무와 잔디도 보여주었다. 그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이 있는 걸 약간 창피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베르타 앞 에서는 하나도 수줍어하지 않는 게 이상스러웠다. 그는 그녀가 자기보다 두 살 쯤 어린 것처럼 대했다. 그녀는 조용하고 부드러웠으며 수줍어하였다. 거의 말이 없었고 마치 용서를 비는 듯이 그를 가끔 쳐다보곤 하였다. 능수버들 옆에서 그들은 다른 두 사람을 만났다. 가정교사는 계속해서 이야기 했고 투스넬데 양은 기분이 나쁜 것같이 조용히 있었다. 파울은 갑자기 수다를 떨었다. 그는 고목을 지적하고 내리어진 가지를 양편으로 제치며 나무 둥지 주 위에 놓여 있는 둥근 의자를 가리켰다. “우리 앉읍시다.” 투스넬데 양이 말했다. 모두가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았다. 이 곳은 따뜻했고 안 개가 낀 푸르스름한 어스름은 사람들을 나른하고 졸리게 하였다. 파울은 투스넬 데 옆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여긴 얼마나 조용한지!” 홈부르거 씨가 말했다. 투스넬데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몹시 더웁기도 하군요. 얼마 동안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맙시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사람 모두가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파울 옆에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섬세하게 다듬어진 흐릿하게 반짝거리는 손톱을 가진 투스넬데의 손이 의자위에 놓여 있었다. 파울은 끊임없이 투스넬데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 손은 넓은 연회색 소매로부 터 나와서 팔꿈치까지 드러나 있었다. 모두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파울은 어 제 저녁을 회상하였다. 그때에도 똑같은 손이 그렇게 길게 조용하고 가볍게 내 려져 있었고, 온 몸이 그렇게 움직임 없이 반쯤은 앉았고 반쯤은 누워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몸매와 그녀의 옷과 그녀의 부드러우나 그다지 대담하지 못한 목소리와 조용한 눈과 더불어 현명하며 방관적이며 침착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 굴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홈부르거 씨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부인. 저는 이젠 일하러 가야겠어요. 파울, 여기 남아 있겠는가? ” 그는 허리를 굽히고 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파 울은 자기의 왼손을 천천히 그리고 마치 범죄자처럼 불안한 조심성을 가지고 그 여인의 손 가까이에 바싹 가져다 놓았다. 그는 왜 자기가 그랬는지 알 수 없었 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불안함과 초조함 때문에 그의 이마 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크로켓 게임은 나도 좋아하지 않아.” 베르타가 꿈 속에서처럼 조용하게 말했다. 가정교사가 가 버렸기 때문에 그녀 와 파울 사이엔 간격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다가가야 할지 어쩔지 한참 동안 생각하였다. 그녀가 오래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그렇게 하는 게 더 어렵게 생각되었다. 그 녀는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건 정말이지 재미있는 게임이 아녜요.” 그녀는 긴 침묵 후에 불안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파울은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그냥 도망 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올라 왔다. 그러나 그는 그의 손을 그대로 둔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점점 공기가 줄어 들어 마침내는 질식할 것 같이 느꼈다. 단지 기분이 좋았다면 슬프고 괴로운 방 법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투스넬데 양은 평온하면서도 약간 피로한 시선으로 파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 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오른손 바로 옆 걸상 위에 놓인 그의 왼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오른손을 약간 올려 파울의 손에 올 려 놓았다. 그녀의 손은 보드라웠고 또한 힘찼으며 따스하게 말라 있었다. 파울은 마치 습격당한 도둑처럼 놀라서 떨기 시작하였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심장은 급격히 뛰었고 그의 전신은 불타 올랐으며 동시에 얼어 왔다. 서서히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그 아가씨를 애원 하는 듯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놀랐어요? 난 잠이 든 줄 알았지요.”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투스넬데는 그녀의 손을 빼냈지만 파울은 여 전히 그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손을 빼내고 싶었으나 너무 당황해서 어떤 생각이나 결심을 할 수가 없었으며 손을 치우는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별안간 그는 질식당한 듯이 무서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투스넬데 양도 일어났다. 베르타는 제자리에서 깊숙이 머리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우린 곧 따라 들어가지요.” 투스넬데가 파울에게 말했다. 그리고 파울이 갈 때 이렇게 덧붙이면서 말했다. “머리가 아픈 모양이에요.” “이리 와. 베르타야. 여긴 너무 덥다. 무더위에 질식할 것 같구나. 자, 정신 차려라! 집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조용하고 낮게 흐느끼며 울었다. 한참 후 몸을 일으켜 머리를 뒤로 쓸 어 넘기더니 천천히 그리고 기계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파울은 평안을 찾지 못 했다. 왜 투스넬데는 그녀의 손을 자기의 손 위에 얹었을까? 그저 한낱 장난이 었을까? 혹시 그녀의 행동이 내게 얼마나 이상스런 아픔을 주었는지 알았을까? 다시 상상할 때마다 그는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수많은 신경과 핏줄 이 질식한 것 같은 경련, 머리에 오는 압박과 가벼운 현기증, 목에 오는 뜨거움, 또 맥박이 묶인 것처럼 마비된 불규칙적이며 요란스런 심장의 파동이었다. 그러 나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집을 지나 연못으로 뛰어갔으며 과수원 안을 왔다갔다 뛰어다녔다. 그러 는 사이에 무더움은 점점 더해갔다. 하늘은 온통 흐렸고 소나기가 올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었고 가끔 가느다란 빗발이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졌다. 이 빗발로 투명하고 매끈하던 연못의 표면이 한 순간 흐트러져 은빛으로 떨렸다. 잔디 둑에 묶여 있는 조그만 낡은 배가 젊은이의 눈에 띄었다. 그는 배에 타 서 하나 남아 있는 노젖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노는 없어진 지 오래인 것 같았 다. 그는 연못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그 물은 기분 나쁘게 미적지근하였다. 이유 없는 슬픔이 그를 엄습하였으며 그 슬픔은 그에겐 아주 낯선 것이었다. 그는 짓눌리는 꿈을 꾸고 있는 듯 생각하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지를 전연 꼼 짝할 수 없었다. 희미한 불빛, 어둡게 구름 덮인 하늘, 미지근하며 안개낀 연못, 노도 없이 바닥에 이끼 낀 낡은 나무배. 이 모든 것은 우울하고 슬프고 비참하 게 보였으며 어떤 무겁고 맥빠진 절망 앞에 굴복한 것 같았다. 그는 까닭없이 이 절망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이 있는 곳으로부터 흐릿하고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오는 것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을 다 집안에 모아놓고 아빠가 그들 앞에서 연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파울은 단번에 그 곡목을 알았다. 그것은 `페르귄트`에 대한 그리그의 음악이 었다. 그는 집으로 얼른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머물러 앉아 느릿느릿 움직이는 물결을 넘어 지친 듯 움직이지 않는 과수들의 가지를 뚫고 잿빛 하늘 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여름 들어서는 처음 오는 제격의 소나기가 곧 쏟아질 것 같은데도 그는 예 전처럼 소나기가 반갑지 않았다.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그치고 한동안 아주 조용하였다. 한참 후에 자장가처럼 은은한 박자를 타고 부드러운 곡목 몇 가지가 연주되었는데 그것은 나직하나 들 어보지 못한 음악이었다. 그 다음에 노래 소리가 들렸는데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 노래를 몰랐지만 노래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 목소리는 낯이 익은 소리였다. 가볍게 숨죽인 약간 맥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투스넬데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녀의 노래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 노래는 그녀의 손이 주는 감촉과도 같이 가 슴을 죄며 고통스럽게 그의 마음을 때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이는 동안 힘없는 첫 번째 빗방 울이 미지근하고 묵직하게 연못에 떨어졌다. 빗방울이 그의 손과 얼굴에도 떨어 졌으나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치미는 것 같은 무엇, 이글이글 끓는 어떤 것, 팽창된 무엇이 자기 주위와 내부에서 뭉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듯이 느 꼈다. 그와 동시에 엑케하르트에서의 한 장면이 그에게 떠올랐고 순간 뚜렷해진 인 식이 엄습해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투스넬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동시에 그녀는 성숙한 숙녀이고, 자기는 아직 학생이라는 사실과 내 일이면 그녀가 떠난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 소리가 그친 지 얼마 후 밝은 식사종 소리가 울려 왔다. 그래서 파울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그는 옷에 있는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 내고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마치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것처럼 깊은 숨을 쉬었 다. “아, 지금 비가 오는군요. 그러면 그건 다 틀렸지요?” 베르타가 투덜거렸다. “무얼 말이야?” “우린 오늘 약속이... 당신이 약속하지 않았어요, 나를 도토리 산에 데려가 준 다고요?” “아, 그렇군. 물론 이런 날씨엔 안 되지.” 베르타는 그가 자기를 쳐다보고 안부를 물어 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그렇게 하 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파울은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던 수양버들 밑에 서의 불쾌한 순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녀의 급격한 발작은 별달리 그의 인 상에 남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정말 어린 여자 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오히려 굳혀 줄 뿐이었다. 그녀에게 주의를 하는 대신 그는 끊임없이 투스넬데 양이 있 는 곳을 보며 곁눈질하였다. 투스넬데 양은 가정교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가정교사는 어제의 바보스 런 행동을 창피하게 생각했는지 오늘은 활발하게 스포츠에 대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홈부르거 씨는 자기가 잘 알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보다는 자기가 모르 고 있는 일에 대해서 훨씬 마음 편하게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은 투스넬데 양이 이야기했으며, 그는 질문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등 쉬는 공간을 메꾸는 화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젊은 부인의 약간 애교있는 화술은 가정교사의 무뚝뚝한 태도를 변화시켰다. 그는 포도주를 따를 때에 웃기까지 하고 무슨 일을 가볍게 우습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책에서 한 장을 읽어 줄 수 있느냐는 그의 계략이 섞인 요청은 투스넬데에게 거절되었다. “이젠 머리가 안 아프지?” 그레테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이젠 하나도 안 아파요.” 베르타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허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아!” 파울이 안절부절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아주머니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파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아주머니는 이 젊은 사람들을 쓸데없이 혼란시키지 않고 잘 주의했다가 어리석은 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었지만 파울에게는 그런 일이 처음이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너희들이 내 보호를 받을 것인가! 그는 머지않아 그녀의 보 살핌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 자기 길을 갈 것이어늘! 밖은 거의 어두워졌다. 비는 내리다가 회오리치는 바람줄기 때문에 멈추었고, 뇌우는 아직도 멈칫거리며 다가오고 있었고 천둥은 아직도 저 먼 곳에서 들려왔 다. “소나기가 무서우세요?” 홈부르거 씨가 그 부인에게 물었다. “천만예요. 나는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자를 가 면 소나기를 볼 수 있을 거야. 베르타, 너도 같이 갈래?” “아주머니가 간다면 나도 가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도 가시겠어요?” “선생님, 좋아요. 아이 좋아라. 이 해에는 처음 오는 소나기죠. 그렇지 않아 요?” 식사가 끝난 후, 곧 그들은 우산을 가지고 가까운 정자로 떠났다. 베르타는 책 을 한 권 가지고 갔다. “파울, 넌 같이 안 갈래?” 아주머니가 격려하며 권유하였다. “아뇨. 저는 피아노 치는 연습을 해야 해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샘솟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아노실로 갔다. 그는 무언지 잘 모르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마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얘야, 좀 떨어져 있는 방으로 가 주지 않겠니? 연습을 하겠다니 신통하구나. 허나 모든 일은 때가 있느니라. 우리 늙은이들은 이 무더위 속에 잠을 자야 한 다. 또 만나자!” 파울은 밖으로 나가서 식당과 복도를 지나 문으로 갔다. 저 위에서 다른 사람 들이 마침 정자에 들어서려 하는 걸 보았다. 그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급히 밖 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 속을 뚫고 달렸다. 천둥은 더 잦아졌고 멈 칫거리던 번개는 새까만 회색의 어둠을 뚫고 번쩍였다. 파울은 집 주위를 돌아서 연못을 향해 갔다. 반항적인 슬픔을 안고 빗물이 자 기 옷 속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다. 아직 신선해지지 못한 공기가 그를 하도 덥 게 해서, 그는 두 손과 팔을 반쯤 걷어 올린 채 무겁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고 서 있었다. 정자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여 앉아서 기분 좋게 웃고 지껄였으며 아무도 그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꾸 그의 감정은 그리로 끌려갔으나 그의 의지는 허 락하지 않았다. 아주머니 외에는 파울에게 같이 가자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므 로 그들 뒤를 쫓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투스넬데는 그에게 가자고 권유하지 도 않았다. 그녀는 베르타와 홈부르거 씨에게는 같이 가자고 말을 해놓고 파울 에게는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 파울에게는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까? 온통 젖은 파울은 길을 별로 주의해 보지 않고 정원사의 집에 이르렀다. 번개 가 지금은 거의 쉬지 않고 내려치며 환상적으로 대담한 선을 그으며 하늘을 가 로질렀으며 비는 더 크게 소리를 내며 내렸다. 정원에 있는 광의 나무계단 밑에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커다란 개는 으 르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 개가 파울을 알아보았다. 그 개가 자신을 알아보자 파울은 기쁘고 아첨하는 듯 개에게 달려들었다. 별 안간 정이 솟구쳐 올라 개의 목에 팔을 감고서 어둑어둑한 곳에 서 있는 층계 모퉁이로 가서 그 개와 같이 쪼그리고 앉아 얼마 동안 이야기하고 애무해 주었 다. 정자에서 홈부르거 씨는 철로 된 정원 테이블을 이탈리아의 해안 경지가 그려 진 울타리의 한 뒷벽으로 밀었다. 파란 색, 흰 색, 분홍색 등 밝은 색깔들이 비 오는 회색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무더위에서도 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에를렌호프까지 오셨는데 하필 날씨가 좋지 않군요.” 홈부르거 씨가 말했다. “왜요? 저는 뇌우를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베르타 양, 당신도 그래요?” “오, 저는 소나기를 즐겨 본답니다.” 이 꼬마가 같이 따라온 것은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투스넬데와 좀 더 잘 사귀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내일 떠나셔야 하나요?” “왜 그리 슬프게 말씀을 하시나요?” “제가 아주 섭섭해서요.” “정말로요?” “그렇고말고요, 아가씨.” 비는 얇은 지붕 위로 소리치며 퍼부었고 정열적인 힘을 가지고 낙수물 구멍에 서 흘러 나왔다. “가정교사님, 당신은 저 귀여운 젊은이를 학생으로 데리고 계시군요. 그런 학 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죠.” “네, 그래요. 그는 멋진 젊은이죠. 베르타, 그렇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를 별로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가 도대체 네 마음에 안 든단 말이냐?” “네, 마음엔 들지요. 네, 그래요.” “선생님, 저 벽화는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리비엘라의 풍경화 같은데 요.” 파울은 두 시간이 지난 후 흠뻑 젖은 채 몹시 피곤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 는 냉수마찰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 다. 마침내 사람들이 돌아왔다. 투스넬데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크게 울렸을 때 그는 소스라쳐 놀랐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조금 전까지만도 스스로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지 못했던 일을 용기있게 착수한 것이다. 투스넬데가 혼자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을 때 그 는 숨어 지키다가 윗복도에서 그녀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그만 꽃다발 한송이를 건네주었다. 그가 밖에서 비를 맞으며 꺾은 야생 들장 미였다. “나를 주려고?” 투스넬데가 물었다. “네, 당신을 드리려고요.” “내가 이런 걸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당신이 나를 전연 싫어한다고 믿 고 있었거든요.” “저를 비웃으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어요? 친애하는 파울. 정말 꽃 고마와요. 들장미군요. 그렇지 요?” “들장미죠.” “나중에 그 중 하나를 허리띠에 꽂겠어요.”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홀에 나와 앉아 있 었다. 날씨는 알맞게 서늘해졌고 밖에는 여전히 눈부시게 씻겨진 가지 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파울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지만 교수는 두어 시간 압데렉씨와 대화하는 편 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커다란 홀에서 이야기하며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고, 젊은 사람들은 레몬수 잔을 앞에 놓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베르타와 함께 앨범을 보면서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투르넬데 양은 기분이 좋은 듯 자주 웃었다. 가정교사는 정자에서 오랜 시간 나누었던 토론으로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 그 는 다시 신경이 예민해져서 괴로운 듯 얼굴근육을 찡그렸다. 그녀가 지금 우스 꽝스럽게 애녀석 파울과 장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는 상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파울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생기가 넘쳤다. 장미 꽃을 허리띠에 달고 있는 투스넬데가 그에게 친애하는 파울이라고 말했을 때 파울은 포도주를 마신 듯 머 리가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농담을 하고 이야기도 했으며 빨갛게 상기 된 얼굴을 하고 자기의 애정을 애교 있게 받아주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 았다. 그는 영혼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가 간 다. 내일이면 그녀가 간다. 이런 사실이 뚜렷하게 인식되면 될수록 점점 더 애타 게 과거의 아름다운 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유쾌한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 동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압데렉 씨가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 했다. “아직 일러, 파울.” 파울은 그런 소리에는 개의치 않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밖으로 나가서 문턱 에 머리를 기댄 채 흐느끼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허나 안 되 지, 그래서는 안 되지 하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는 동안 베르타는 아주머니와 친해졌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자기를 보 호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파울이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는 것이 마치 무거운 고통처럼 그녀에게 덮 쳐 왔다. 지치고 우울한 그녀는 아주머니의 친절한 애정으로 위로 받으려 했다. 두 명의 남자 노인들은 서로 다투듯이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느라 옆에 있 는 젊은이들이 숨겨진 정열로 서로 얽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전연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홈부르거 씨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가끔 독설적인 가하 제를 대화 속에 던졌으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에 대한 반항심 이 그의 마음 속에 생겼다. 그로 인해 그가 대화에 참여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그는 파울의 행동에 대하여 유치하다고 느꼈고 투스넬데가 거기에 응수하는 것 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 같아선 그저 잘 자라고 말하고 방으로 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가 총알을 다 쏘아 버려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래서 계속 남아 있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투스넬데의 침착하고 유희적인 태도를 역겨워 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짓을 하며 약간 붉어진 얼굴의 투스넬데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투스넬데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파울이 보내는 정열적인 관심 에 대해 무척 즐거워 하였다. 그녀는 가정교사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감정을 감 추려고 애쓰지 않았다. 가정교사는 자기의 분노가 여성적인 슬픈 체념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이 체념으로 투스넬데에 대한 사랑의 시도는 끝장이 나고 말 았던 것이다. 그가 여지껏 어느 여자에게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오, 그러나 그는 실 망, 고통, 고독, 이것들이 주는 가장 은밀한 자극을 맛보는 데 있어서는 충분히 한 예술가라 할 수 있었다. 입술을 씰룩이고서라도 그는 그걸 즐겼고, 설사 사람 들이 오해하고 비웃어도 이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되었다. 가슴에 비수를 품고도 웃을 수 있는 침묵의 비극을 아는 자였다. 사람들은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파울은 침실로 들어왔을 때 열린 창으로 조용한 하늘이 우유빛 솜털 같은 구름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부드러운 구름 사이로 강력한 달빛이 새어 나와 공원 나무들의 축축한 잎사귀 들 위로 반사되었다. 어두운 수평선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엔 좁고 뻗어 있는 하나의 섬처럼 깨끗한 하늘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엔 창백한 별 하나 가 빛나고 있었다. 파울은 오랫동안 단지 창백한 물결만을 보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느끼며 들어본 적 없는 깊은 목소리가 폭풍우처럼 쏴 소리를 내 는 것을 들었다. 마치 다른 어떤 세계의 부드러운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앞으로 몸을 숙인 채 그는 창가에서 눈부신 사람처럼 보지도 않으면서 서 있 었다. 그의 앞에서는 힘찬 생과 정열의 나라가 뜨거운 폭풍에 흔들렸고, 어둡고 무더운 구름이 그늘진 채 펼쳐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제일 나중에 잠자리로 갔다. 그녀는 문과 덧문을 잠그고, 불을 끄 고 어두운 부엌을 한 번 둘러본 후 자기 방으로 가서 촛불 곁에 있는 안락의자 에 앉았다. 그녀는 꼬마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일 손님들이 모든 것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만을 바랬다. 파울의 영혼은 점점 그녀에게서 빠져 나가 보이지 않 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 그가 최초의 소년다운 발걸음을 사랑 속에 내딛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았던 것이다. 그녀 자신은 젊었을 때에 거의 사랑의 결실을 경험한 적이 없고, 단지 사랑의 쓰디쓴 맛만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베르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약간 미소를 지으며 서랍 속에서 베르타에게 줄만한 이별의 선물을 찾아보았 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고는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하며 놀랐다. 잠들어 있는 집과 어스레한 정원엔 우유빛의 솜털처럼 얇은 구름장이 조용하 게 떠 있었다. 저 수평선 부근의 섬처럼 남은 한 조각 구름은 보드랍고 은은하 게 반짝이는 별들에 비추어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멀리 언덕 위에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은빛 선이 그어져 하늘과 경계를 그어주고 있었다. 정원에는 서늘하게 식혀진 나무들이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공원 잔디 위에 는 얇은 구릅장들이 짓는 그늘이 핏빛 너도밤나무의 새까만 그늘과 섞이고 있었 다 아침이 되자 부드러우면서도 아직 습기에 찬 공기는 이젠 밝은 하늘을 향하여 수증기를 내었다. 자갈밭과 길 위에 생긴 조그만 물 웅덩이는 황금빛으로 반짝 였으며 부드러운 푸르름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차가 소리를 내며 도착하자 사람들은 마차에 올라탔다. 가정교사는 여러 번 깊은 인사를 했고 아주머니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모두와 악 수를 나눴다. 하녀는 복도 저 뒤에서 출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에 탄 파울은 투스넬데와 마주 앉아서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하였다. 그 는 날씨가 좋다고 칭찬했으며 산으로 가게 될 멋진 휴가 여행을 자랑하듯 이야 기하면서 그 소녀의 모든 말, 모든 웃음을 열망하듯 들이마셨다. 아침 일찍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정원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가꿔 놓은 가장 아 끼는 꽃밭에서 반쯤 열린 차향기 나는 장미를 꺾었었다. 그는 비단 종이에 장미를 싸서 가슴 안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다. 꽃이 찌부러 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아버지한테 들킬 것 같은 불안감이 교차하였다. 조그만 베르타는 아주 조용히 앉아 아주머니가 준 활짝 핀 재스민꽃 가지를 얼굴 앞에 들고 있었다.베르타는 속으로 떠나는 것을 기뻐하였다. “내가 카드나 한 장 당신에게 띄울까요?” 투스넬데가 명랑하게 물었다. “네, 꼭 띄워 주세요! 투스넬데 양이 보낸 카드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도 꼭 함께 서명을 해서 보내주세요. 베르타양!” 베르타는 약간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좋아, 카드를 보낼 때 나에게도 알려 줘.” 투스넬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네게 일러 줄께.” 벌써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15분 후에야 올 것이다. 파울에게는 이 15분이 마 치 귀중한 은혜의 시간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차에서 내려 역 앞에서 이리저리 산책을 하자 파울은 더 이상 농담도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별안간 짓눌려져 자신이 작아진 듯 느 꼈다. 시계를 보며 기차가 벌써 오고 있는지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그는 숨겨 놓았던 장미를 꺼내 계단 곁에 서 있 는 투스넬데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기 차는 떠났고 모든 것은 끝났다. 아빠와 같이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니 그는 무서워졌다. 아빠가 벌써 마차에 올 라탔는데도 그는 계단에서 다시 발을 뒤로 빼며 말했다. “저는 걸어서 가고 싶은데요.” 압데렉 씨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혼자서 떠났다. “끝까지 네 스스로 해 보아야 한다. 설마 죽진 않을 테지.” 압데렉 씨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파울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아 는 그는 지난 몇 년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첫사랑의 모험을 생각해 보았다. 그 는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데 놀랐다. 이제는 벌써 아들에게 차례가 온 것이구나! 압데렉 씨는 파울이 장미를 몰래 꺾는 것을 보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잠시 거실에 있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베르테르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가 다시 꺼내 이리저리 들척여보았다. 노래 한 곡을 휘파람으로 불고는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그러는 동안 파울은 따뜻한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 운 투스넬데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덥고 지쳐서 공원 담장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무얼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았다. 순간 갑자기 떠오 르는 추억에 이끌려 수양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파도처럼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나무를 찾아내서 깊게 늘어진 가지를 헤 치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제 투스넬데 옆에 앉아 있었을 때, 그녀의 손이 자기 손 위에 올려졌던 걸상 위에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손을 나무 위에 올려 놓은 채 다시 한 번 어제 그를 사로잡아 도취시키고 괴롭혔던 그 폭풍을 온몸으로 느껴보았다. 불빛이 그의 주위에 비쳤 으며 바다는 소리를 내며 물결쳤고 뜨거운 물줄기는 진홍빛 나래를 타고 쏴쏴하 며 요동쳐 갔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지 않았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파울에게 다가왔다. 그는 당황하여 꿈 속에서 깨어 난 듯 위를 쳐다보았다. 홈부르거 씨가 자기앞에 서 있지 않은가! “아, 자네가 여기 있군, 파울. 오래 됐나?” “아뇨, 저는 역에 같이 갔었잖아요. 걸어서 집에 돌아온 걸요.” “그런데 여기 앉아서 울적해 있군.” “아뇨. 울적한 것이 아녜요.” “그래 아니라고. 나는 자네가 더 명랑한 줄 알았는데.” 파울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넨 여자들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특별히 한 여자에게 말야. 나는 어린 소녀를 오히려 더 좋아하리라고 생각 했었는데...” “풋나기 말예요? 흥.” “바로 그래, 풋나기 말야.” 그때 파울은 가정교사가 보기 흉한 주름살 짓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잔디밭 속으로 뛰어 달아났다. 점심 때 식탁에서는 대단히 평온하게 지나갔다. “우린 모두 약간은 피곤한 것 같군.” 압데렉 씨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파울아, 너도 그렇지? 홈부르거 선생, 당신도 그러시죠? 허나 흐뭇한 기분 전환이 됐죠, 그렇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압데렉 씨.” “당신은 그 아가씨와 아주 재미있게 대화를 나눴지요? 그녀는 상당히 박식하 다고 하던데요?” “그녀에 대해서는 파울이 더 잘 알아요. 저는 유감스럽게도 그저 잠깐 동안 밖에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파울아,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저요?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지요?” “투스넬데 양에 대해서다. 별로 불만은 없겠지. 너는 약간 멍청해 있는 것 같 구나. 무엇 때문에 사내아이가 그 일에 그렇게 마음을 쓰지?” 아주머니가 끼어들며 말했다. 또 다시 더워졌다. 앞뜰엔 열기가 내뿜어지고 길 위에는 마지막 남은 빗물의 웅덩이조차 말라 버렸다. 양지바른 잔디 위에는 늙은 핏빛 너도밤나무가 따스한 빛에 담뿍 쌓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힘센 가지에 젊은 파울이 나무 둥지에 기 댄 채 컴컴하게 어두워진 잎사귀 그늘에 싸여 앉아 있었다. 그것은 이 소년이 가장 아끼는 장소였다. 그곳에 있으면 그는 모든 놀라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너도밤나무 가지 저 위에서 그는 3년 전 가을에 몰래 처 음으로 담배를 반이나 피웠었다. 아주머니는 파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몹시 흥 분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기분으로 옛날에 했던 것처럼 다른 장난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린애 같은 것! 유치한 장난!” 한숨을 쉰 후 그는 앉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몸을 돌리고 주머니 속 에서 칼을 빼내어 나무 둥지에 무엇인가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T자를 둘러싼 심 장 모양을 새길 생각을 하면서 비록 여러 날이 걸린다 해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새길 것을 결심하였다. 그날 저녁 그는 자전거를 타고 정원사를 찾아가서 칼을 갈았다. 돌아오는 길 에, 그는 잠깐 동안 낡은 보트에 앉아 보았다. 손으로 물을 철썩거려 보다가 어 제 여기서 들었던 그 노래의 멜로디를 생각해 보았다. 하늘에는 약간 구름이 끼여 있어서 밤이 되면 또 다시 소나기가 올 것 같았 다. 사랑의 폭풍 1890년대 중반이었다. 나는 고향의 작은 공장 견습공으로 있었다. 그 해에 나 는 고향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언제나 청춘을 즐기던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나는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에게는, 내가 고향을 떠나던 해에 우리 지방이 거센 폭풍 의 피해을 입었다는 것을 말해주면 될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아주 대단한 폭풍이었다. 폭풍이 시작되기 이삼일 전에 나는 강철의 끌로 왼손을 다 쳤다. 상처가 부풀어 올라서 붕대로 매고 다녔다. 나는 공장에 일을 하러 갈 수 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좁은 골짜기는 무더위로 찌는 듯이 더웠다. 그러더 니 갑자기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폭풍우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내가 무의식 중에 경험한, 자연에 대한 불안이었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회상할 수 있다. 폭풍을 예감한 것처럼 흥분한 물고기가 서로 밀치며 뛰쳐나와 낚시에 걸렸다. 이른 아침에는 벌써 가을 같은 기분이 났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집을 나서면서 책과 빵을 주머니에 넣고 마음 내키는 대 로 걸어갔다. 어린 시절처럼 그림자가 늘어진 정원으로 뛰어갔다. 아버지가 심었 을 당시에는 아주 어려서 밑동이 가늘었다는 전나무가 지금은 높이 서 있었다. 그 밑에는 밝은 갈색의 낙엽이 쌓여 있었다. 몇 해 동안 그 곳에는 전나무만 자 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옆의 화단에는 어머니가 심은 꽃나무들이 즐겁게 빛 났다. 나는 일요일마다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었다. 나는 가느다란 줄기에 심장 모양의 꽃을 늘이고 있는 약한 꽃 나무를 `여인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그 옆에 는 가는 줄기의 국화가 있었다. 국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기름진 석련화 와 우스꽝스러운 포트락이 가시를 내밀면서 기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나에게 꿈의 화원이었다. 장미가 자라는 원형의 화단보다 더욱 귀하고 사랑스러운 꽃들이 많이 피어 있기 때문이었다. 햇빛이 담쟁이 덩굴 위를 비추 면, 모든 꽃들은 자신의 독특한 자태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글라디올라스는 불타는 듯한 빛깔을 자랑했다. 잿빛의 헬리오트로프는 마법에 걸린 듯이 자신의 향기에 젖어 있었다. 폭스슈반츠 꽃은 고개를 숙였다. 힘차게 뻗은 아켈라이 나 무는 네 겹으로 된 꽃을 흔들고 있었다. 골드루트 꽃과 푸른 플록스 꽃에는 꿀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고 있었다. 무성한 전나무 숲에는 작은 갈색의 거미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자르린 꽃에는 모기가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다. 뚱뚱한 몸 집과 엷은 날개를 가진 그 모기는 `새모기`나 `비둘기꽁지`라고 불렀다. 한가한 휴일에는 화원을 살펴보았다. 꽃향기를 맡으며, 꽃받침을 조심조심 손 가락으로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밀스럽고 창백한 입술과 꽃잎 줄기, 부드 러운 머리털처럼 투명한 세과의 정연한 조직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실처럼 피 어오르는 수증기와 양털 구름이 서로 엉켜 있는 짙은 하늘이었다. 오늘은 폭풍 이 불어올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후에 두세 시간 동안 낚시질을 하기로 결심 했다.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를 잡으려고 작은 돌을 들쳐보았지만, 지렁이는 보이 지 않았다. 회색의 가느다란 벌레들이 기어나와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었 다.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 았다. 일 년 전, 내가 마지막 휴가를 얻었을 때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그 당 시에 좋아하던 개암나무 열매를 활촉에 꽂아 과녁을 쏘거나, 하늘 높이 연을 올 리거나, 쥐구멍을 화약으로 폭발시키거나 하는 일들은 더 이상 매력을 갖지 못 했다. 마치 내 영혼의 한 부분이 늙어버린 것 같았다. 놀랍고 벅찬 가슴으로 나는 어린 시절의 즐거운 장소였던 낯익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작은 정원과 꽃이 가득한 마당, 푸른 이끼가 낀 디딤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라보였다. 정원의 꽃들까지도 이전처럼 강렬한 매력 을 풍기지는 못했다. 정원의 구석에는 낡은 물통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이전 에 나는 물통에다 물을 채워서 폭포를 만들었다. 흘러가는 물을 이용하여 물레 방아 바퀴를 달았다. 제방과 운하도 만들어서 큰 홍수가 나게 하였다. 모두 어린 시절의 장난이었다. 못쓰게 된 물통은 내가 사랑하던 장난감이었다. 그걸 바라보 니,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어쩐지 슬펐다. 이제 물통 은 더 이상 샘이나 강, 나이아가라 폭포도 아니었다. 파란 들꽃이 나의 얼굴을 스쳤다. 나는 그것을 따서 입에 물었다. 산으로 올라 가 아래쪽에 있는 거리를 내려다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산책은 유쾌한 일이 아 니었다. 남자란 산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도둑이나 기사, 인도사람과 같 은 기분으로 산을 올라야 한다. 강에 간다고 할지라도 어부처럼 뗏목을 타거나 물방앗간을 만드는 사람의 기분으로 가야 한다. 들판에 간다면 나비나 도마뱀을 잡으러 가야 한다. 산책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점잖은 어른들의 권태스러 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물었던 들꽃은 곧 시들어 버렸다. 나는 꽃을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이 번에는 황버들가지를 꺾어서 씹었다. 쓴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커다란 긴스테 르 나무가 서 있는 기차 선로 둑에서 녹색 도마뱀이 쏜살같이 달아났다. 나는 장난기가 솟아났다. 나는 쉬지 않고 달려가서 도마뱀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희 게 빛나는 보석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을 즐거운 마음으로 회 상하였다. 도마뱀의 미끌미끌한 몸은 나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도마뱀에 대한 흥미는 곧 없어져 버렸다. 나는 이 동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을 굽혀서 놓아주었다. 도마뱀은 잠시 동안 숨을 고르더니 풀 밭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철로 위로 기차가 달려와서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그 뒤를 바라보았다. 이 곳에서는 참다운 기쁨을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가차처럼 다른 세계로 떠나가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차역을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빨 리 철로를 넘어서 건너편 돌산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철도공사를 하기 위하 여 화약을 터뜨렸던 구멍이 시꺼멓게 남아 있었다. 나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을 알고 있었다. 나는 긴슈테르 나무를 꼭 붙잡았다. 붉은 바위에는 뜨거운 태양 이 비치고 있었다. 뜨거운 모래가 소매 속으로 흘러들었다. 깎아지른 암벽 너머 로 밝게 빛나는 하늘이 보였다. 나는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바위에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뾰족한 가시가 있는 아카시아의 밑동을 붙잡았다. 경사진 풀밭으로 걸어갔다. 기 차가 달려가던 고요한 황무지는 옛날 나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여기의 풀들은 베어내는 법이 없었다. 여기에는 작은 가시가 있는 장미꽃 나무와 구부러진 아 카시아 나무가 무성했다. 엷고 투명한 잎을 통하여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붉은 암벽으로 싸인 풀밭 위에서, 나는 `로빈슨`이 되곤 하였다. 이 쓸쓸한 장소는 험 한 바위를 올라와 정복할 수 있는 용기와 모험심을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소유 할 수 없었다. 나는 열두 살 때 여기 있는 바위에 끌로 내 이름을 새겼었다. 이 곳에서 <로자폰 탄넨브로그>를 읽었으며, 몰락하는 인디안의 용감한 추장을 소 재로 하여 어린애 장난같은 희곡도 썼었다. 타는 듯한 햇볕에 창백해진 풀들은 험한 절벽 위로 늘어졌다. 뜨거운 진슈테 르 나뭇잎은 바람 한 점 없는 더위 속에서 강하고 진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메 마른 황무지 위에 드러누웠다. 우거진 아카시아 잎이 아름답게 정돈되어, 햇볕을 쬐며 푸른 하늘 아래 쉬고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야말로 나의 생활과 미래를 위한 참다운 시간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모든 면에서 나늘 위협하고 있는 빈곤을, 그리고 예전의 즐거움과 사랑스러운 생각이 이상하게도 쇠퇴하여 낡아가는 것을 볼 뿐이었다. 나의 의지를 거스르며 행동할 수밖에 없 었던 일들. 완전히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행복. 나는 내 직업을 좋아하지 않았으 며, 충실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 었다. 넓은 세계를 보면서 돈을 모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에 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일요일마다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다만 지엽적인 것일 뿐이며, 결코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 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진정한 의미는 더욱 깊고, 더욱 아름답고, 더욱 은밀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처녀와의 사랑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는 느 꼈다. 사랑은 깊은 쾌락과 만족을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나는 많은 연인들을 보기도 하고 이상스럽 게 취하게 만드는 연애시를 읽기도 하였다. 여러 번 짝사랑에 빠지기도 하였다. 사랑을 얻으려고 뜨거운 생명을 걸며, 사랑이 죽음의 참된 의미가 되는 꿈 속에 서 감미로운 기분을 느끼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처녀를 사귀는 친구들이 있었다. 일요일 밤의 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하는 공장의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있어 연애는 아직 닫혀진 화원이었다. 그 문 밖에서 나는 수줍은 동경을 품고 기다리고 있었다. 끌로 부상을 당하기 직전에, 나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나의 내면에서 들려왔다. 나는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이제까지의 생 활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미래의 의미는 분명해졌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공 장의 견습공이 나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늘 사랑하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그녀는 아직 애인이 없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는 아무 도 좋아하지 않으며, 나에게 선물할 명주 주머니를 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녀의 이름을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이름을 상상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꾸 이름을 캐묻던 나는 지쳐버려서 그만 포기해 버 렸다. 갑자기 그가 멈추었다. 우리는 바로 물레방앗간 다리 위에 와 있었다. 그 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우리 뒤에 오고 있어.” 나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직공장에서 나온 젊은 처녀가 다리의 계단 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 처녀는 성서공부를 처음으로 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베 르타 포에그틀린이었다. 그녀는 우뚝 선 채,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 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그 처녀를 두 번이나 만났다. 한 번은 우리들이 같이 일하고 있 는 방직공장에서, 또 한 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그녀는 나에게 인사 를 건넸다. “벌써 일이 끝났어요?” 그녀는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하는 뜻을 보였다. “네, 그래요.” 당황한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달아나고 말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아름다운 처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지금까지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가 나타나, 나의 키스를 원하며 안기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 처녀는, 피부가 희었으며 얼굴은 아름다웠다. 목덜미에는 그 늘진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기대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녀의 뒤를 따라가거나, 그녀의 이름을 베개 위에서 불러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 쳐녀를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풀밭에서 일어났다. 우울한 기분이 밀려왔다. 나는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나는 경사진 바위로 뛰어 올 라갔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지나서, 인적없는 산등성이로 달려갔다. 땀을 흘리 며 숨을 헐떡거렸다. 높은 지대의 희박한 공기를 해방된 것처럼 마음껏 들이마 셨다. 시들은 장미가 덩굴에 걸려 있었다. 퇴색한 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녹색의 산딸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나비는 천천히 날고 있었다. 푸른 빛의 가루를 뿌 리고 있는 가새풀 꽃에는 무수한 벌레가 모여들고 있었다. 등에 붉은 반점이 있 는 갑충이들이었다. 벌레는 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맑게 열 려져 있었다. 나는 가을의 모닥불이 피어나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햇빛을 반사하는 강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물레방아를 설치하기 위해 쌓아놓은 둑이 보였다. 갈색 지붕이 있는 오래된 거리도 보였다. 대낮의 굴뚝 연 기가 일직선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집과 방직공장이 보였다. 공장에는 희게 빛나는 유리창 뒤에서 베르타 포에르틀린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낯익은 고향거리는 친밀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교회의 시계탑에는 금 빛 바늘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늘진 몰레방아의 운하에는 산그림자가 어둡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작은 고향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좁은 고향의 울 타리를 넘어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는 동경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진지하고 존엄한 일이었다. 갑자기 베르타 포에그틀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런 노력 도 없이 완성된 행복과 사랑을 얻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는 나를 좋아하 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정오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거리로 내려가는 작은 길로 들어 섰다. 작은 철교와 묘지의 담벼락을 지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곳에서 공작나 비의 검은 성충을 잡았다. 이끼가 낀 호두나무가 진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 었다.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도회가 열리는 유원지의 광장이 보였다. 늙은 밤나무의 그늘에 묻힌 광장은 붉은 모래위에 비치는 눈부신 햇빛의 반점을 지켜보고 있었다. 햇빛이 잘 비치는 길에는 한낮의 열기가 사정없이 들끓었다. 강둑에는 물푸레 나뭇잎과 단풍잎이 흩어져서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물가로 가서 물고기를 들여다보았다. 유리처럼 투명한 물 속에는 무성한 수염이 달린 해초가 길게 꼬 리를 달고 흔들리고 있었다. 해초들 사이로 통통하게 살찐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낚시를 하러 가지 않기를 잘 하였다고 생각했다. 투명 한 물에서는 커다란 잉어가 쉬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고기가 잘 낚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집은 지하실같이 차가웠다. 나는 현관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폭풍이 불어올 것만 같다.” 식사를 하면서 하늘을 살펴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요. 서풍도 불어오지 않잖아요.” 나는 아버지의 말에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공기가 저렇게 팽창한 것을 모르겠니?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으며, 하수도에서는 폭풍이 불어오기 전처럼 아주 고 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정원을 향하고 있는 베란다에 앉아서 쉬었다. 산만한 기 분으로 <고르돈 장군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는 중에 나도 점점 폭풍이 닥쳐 오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지만,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 지 시작했다. 하늘에 우뚝 걸린 태양 앞에 뜨거운 구름이 여러 층으로 쌓여 있 는 것 같았다. 나는 낚시줄과 낚시를 점검하였다. 고기를 낚는 흥분이 손 끝으로 생생하게 살아왔다. 낚시에 대한 깊은 열정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나를 압박하는 듯한 그날 오후의 무더운 기분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나 는 고기망태를 들고 강으로 걸어갔다. 작은 다리가 보였다. 근처의 방직공장으로 부터 단조로운 기계소리가 들렸다. 물레방앗간에서는 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기 분 나쁘게 들려왔다. 이빨빠진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듯한 소리였다. 직공들은 모두 공장에 들어가 있었다.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물레방아가 있는 섬에서는 작은 남자가 발가벗은 채, 젖은 바위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차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햇빛에 마르는 생나무 판자의 냄새가 고약하게 풍겨 왔다. 비릿한 물냄새는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고기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잡혔다. 빨간 지느러미를 가진 커다란 물고기는 내가 손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줄을 끊고 달 아났다. 갑자기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진흙 속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수 면에는 알에서 갓 부화된 듯한 어린 고기떼가 보였다. 어린 고기떼는 마치 도망 을 치듯이 하류로 내려갔다. 베르타 포에그틀린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 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었다. 공장의 나쁜 폐수가 물고기를 쫓아버린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낚시 를 단념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직공장의 창 고 주변을 지나갈 때였다. 베르타 포에그틀린이 공장의 창문에 나타나, 나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못본 척하고 낚시 도구 위에 몸을 굽혔다. 물은 검은 빛을 띠고 흘러갔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물 위로 비쳤다. 베르타가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물결 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낚시질을 하기는 이미 틀려버렸다. 물고기들은 급한 일이 있는 듯이 조급하게 움직였다. 나는 짓누르는 듯한 더위에 피로함을 느꼈다. 빨리 밤이 되었으며 하 고 생각했다. 등 뒤에서는 넓은 방직 공장의 끊임없는 기계소리가 들여왔다. 시 냇물은 이끼 낀 벽에 부딪치면서 낮은 소리를 내며 흘렀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런 멍한 상태로 한 삼십 분 가량 지났을까. 나는 갑자기 불안과 심한 불쾌 감을 느꼈다. 졸음이 달아났다. 회오리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는 무겁게 드리워 져 있었다. 제비가 물 위를 스칠 듯이 낮게 날아갔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물은 비릿한 냄새를 아까보다 더욱 강렬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 렀다. 나는 낚시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먼지가 작은 구름처럼 하늘로 휘말려 올라갔다. 골짜기의 공기 가 심한 눈보라처럼 흰빛을 띠었다. 이상하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모자가 날라갔다. 거세어진 바람은 주먹으로 때리듯이 나의 얼굴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숨이 답답해졌다. 물결이 사납게 치솟아 올랐다. 폭풍이 일어난 것이다. 폭풍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날뛰었다. 흩날리는 돌이 머리에 와 부딪혔다. 흙이 하 늘 높이 튀어 오르고, 모래와 나무조각이 날아 올랐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무서운 일이 일어나서 위험 해졌다고 느낄 뿐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창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쇠기 둥을 꼭 붙잡고 있었다. 현기증과 불안 때문에 숨도 쉬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몇분 동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거센 폭풍 이 악마같은 모습으로 불어닥쳤다. 사나운 바람이 날뛰는 소기가 들렸다. 커다란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박과 바람은 서로 뒤섞이면서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강물은 매를 맞는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모든 것들이 사라져갔다. 나무 조각, 지붕, 나뭇가지 등이 찢기어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돌과 석회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 가 들려왔다. 단단한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기와가 부서져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유리가 깨어졌다. 빗물을 받아두는 홈통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 군가 공장의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우박으로 뒤덮인 정원을 지나오고 있었 다. 거센 바람 때문에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거렸다. 그 사람의 모습은 처참하게 엉클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창고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창고로 들어서자, 그 사람은 나에게 달려들었다.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사람이 었다.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뜨거운 입술이 나의 입술 을 휘감아왔다. 숨쉴틈도 없이, 우리는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두 손은 나의 목을 감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칼이 나의 얼굴을 덮었다. 우박이 떨어지고 있는 동안, 숨가쁜 사랑의 폭풍이 나를 습격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둥켜 안은 채, 널판지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두려워하는 베르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다가왔다. 그녀의 달콤한 정열 이 나를 감싸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베르타는 나의 머리를 들어서 가슴 위에 다가 얹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은 나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껴서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사라졌을 때, 나는 베르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베르타의 얼굴에는 슬픔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카 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한 줄기의 빨간 피가 이마에서 흐르고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예요?” 나는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힘없이 웃었다. “이 세상이 꺼져 없어지는 것 같아요.” 베르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듯한 폭풍의 소음 이 그녀의 말을 삼켜버렸다. “피가 흐르는데요.” 내가 말했다. “우박에 이마를 부딪혔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폭풍이 무서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베르타, 당신은 어때요?”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마을 전체가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아요.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건가요?” 그녀의 눈에는 슬픈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맑고 큰 눈을 들여 다보았다. 그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뜨거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 동안 나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그녀의 진실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감각은 온통 취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사랑의 폭풍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베르타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르타는 몸을 돌리며, 화난 듯이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손 을 내밀었다. 그녀는 나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끊어앉아서 울기 시작했 다. 그녀의 눈물이 나의 손등을 뜨겁게 적셨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의 목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 면, 나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녀의 목을 매만지며 입을 맞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점점 냉정해졌다. 내가 전혀 사랑하 지 않는 여자가, 발 밑에서 꿇어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괴 로운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아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러한 일들은 매우 오랜 시간 에 걸쳐서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불과 몇 분간 사이의 일이었다. 갑자기 햇빛이 비쳤다. 푸른 하늘이 맑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로 베는 듯한 폭 풍의 소음도 멎었다. 곧이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적막함이 우리를 둘러쌌다. 나는 꿈의 동굴에서 나오듯이, 창고로부터 회복된 일광 속으로 걸어나왔다. 내 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원은 참담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움푹 패 인 땅은, 말굽에 짓이겨진 것 같았다. 커다란 우박이 쌓여 있었다. 나의 낚시 도 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고기를 담은 망태기도 없어졌다. 공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부서진 창문을 통하여 넓은 방안이 보였다. 깨어진 문으로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마루에는 유리조각과 깨어진 기와조각으로 가득찼다. 함석으로 만든 물받이는 구부러진 채, 옆으로 매달려 있었다. 폭풍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공장에 입혔는지 알고 싶었다. 깨어진 공장의 유리 창과 기와는 매우 황폐하고 암당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도 폭풍이 나 에게 주었던 무서운 인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꿈 속에서 깨어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집들은 이전과 같이 튼튼하게 서 있었다. 산과 골짜기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세계는 꺼져버리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건너서 공장으로 들어섰다. 가까이서 보니 피해는 더욱 심했다. 유리의 파편과 깨어진 창의 덧문이 쌓여 있었다. 굴뚝은 파괴되고, 여러 채의 지 붕이 무너져 있었다. 놀란 사람들은 슬픔에 젖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림책에 서 보았던 전쟁터의 폐허와도 같았다. 돌과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었다. 정원 의 담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았다.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너무나 흥분하였던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집과 정원이 입은 피해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폐허의 더미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다 른 곳으로 떠나려고 결심했다. 나는 다시 다리를 건넜다.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의 탑이 그대로 서 있는 것 이 보였다. 운동장에도 그렇게 큰 피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전과 조금 다르게 보였다. 포플러 나무 두 그루가 보이지 않았다. 폭풍에 꺾여 버린 것이다. 낯익은 풍경은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것들이 파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던 것이다. 내가 고향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친숙한 지붕, 탑, 다리, 길, 나무, 정원, 숲과 함께 성장한 것이다. 흥분과 불 안에 휩싸인 나는 산 위로 급히 달려갔다. 그곳은 말할 수 없이 파괴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던 회상의 장소는 몹 시 거칠어져 있었다. 황폐하게 변해 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 여러 명이 손을 잡 고 둘러싸도 다 안을 수 없었던 나무 둥치를 가진 늙은 떡갈나무는 뿌리까지 뽑 혀진 채, 땅 위로 넘어져 있었다. 주위에 있던 나무들도 모두 뽑혀서 날아가 버 렸다. 축제를 즐기던 언덕은 소름끼치는 전쟁터와 같이 변해 버렸다. 보리수와 단풍나무도 쓰러져 있었다. 부러진 가지와 찢어진 나무둥치, 무너져 내린 흙덩이 가 뒤섞여 있었다. 튼튼한 뿌리를 가졌던 나무들은 아직 땅 위에 서 있었다. 하 지만 나뭇가지는 죄다 없어지거나 꺾여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더 이상 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뿌리까지 파헤쳐진 나무들과 흙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신성한 계곡의 그림자와 높은 나무들 만 있었던 이곳은 텅 비어 버렸다. 하늘이 우울한 표정으로 황폐해진 산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신비스럽게 숨겨 두었던 나의 비밀이 모두 드러난 기분이었다. 나는 온종일 산을 돌아다녔다. 그리운 숲 속의 길이나 호두나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기어오르던 참나무도 사라져 버렸다. 가는 곳마다 나무의 파편과 뿌리가 파헤쳐진 구멍, 풀을 깎은 것처럼 무너진 언덕이 있었다. 뿌리가 파헤쳐 진 나무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햇빛이 창백하게 빛났다. 나와 나의 어린 시절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겼다. 고향은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난 날 의 즐거운 기억들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이 거리를 떠났다. 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아름다운 별의 남쪽 지방에 재난이 일어났다. 무서운 폭풍과 홍수, 지진으로 여러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정원과 들판, 숲이나 나무들도 보이 지 않았다. 가장 슬픈 것은, 그 지방의 풍습에 따라 죽은 사람을 치장하거나 묘 지를 장식하는 일에 필요한 꽃이 모조리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재난이 끝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을의 탑에서는 동정의 여신에게 보내는 노래가 구슬프게 울려 나왔다. 동정과 구원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다가왔다. 여러 지방에서 음식, 옷, 수레, 말, 돌, 목재 를 보내주었다. 집이 없어진 사람들은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친절한 초대를 받았 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온정이 넘쳐 흘렀다. 노인이나 부녀자, 아이들은 친절 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다친 사람들은 신중하고 세심한 간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무너진 집더미 속에서 시체를 꺼내 묻어주었다. 무너진 지붕을 새롭게 올리거나, 흔들리는 벽을 나무로 받치기도 하였다. 지진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하였다. 사람들은 다시 부지런히 일했 다. 그들의 표정에는 삶에 대한 확신이 넘쳐 흘렀다. 얼마 동안은 불안과 침묵 속에서 일을 했지만, 복구를 위한 구원의 손길이 이어짐에 따라 명랑한 목소리 로 노래를 부르면서 일했다. 민요는 `재난을 당한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자는 진정으로 행복하다. 구원을 받은 자는 마른 들판이 물을 흡수하듯이 자비 를 받아들이고, 감사의 꽃으로 대답할 것이다.` 라는 것과 `신의 웃음은 서로 도 울 때 흘러나온다` 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꽃이 부족하였다. 처음에는 황폐한 뜰에서 가져온 꽃과 나뭇가지로 죽은 사람을 장식하였다. 조금이라도 피어 있는 꽃들은 모두 꺾어왔 다. 크고 아름다운 꽃밭을 가지고 있던 세 마을이 한꺼번에 지진의 피해를 입었 기 때문에 가장 만발한 시기에 꽃들이 사라지는 불행을 당한 것이다. 그 마을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구경하기 위하여 찾아왔었다. 그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꽃을 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엉망 이 되어버려서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장례를 치루어야 할지 당황하였다. 이 지방에는 죽은 사람을 꽃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갑작스럽고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을 때에는, 더욱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하였 다.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로가 마차를 타고 왔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단단하게 눌렀다. 맑고 상냥한 눈을 가진 장로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수염으로 덮여진 입술은, 현자의 조용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를 엄습한 불행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무너지고 파괴된 것은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여러분에게 감사 를 드립니다. 하지만 죽은 형제들을 아름답게 장식할 꽃이 없습니다. 어디서 구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순교자들의 시신과 무덤은 의식을 갖춘 꽃으로 장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뜻이기도 합니다.” 장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공물로 꽃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이렇게 외쳤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매장할 수 없는 시신들은 높은 산에 세워진 신전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 곳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습니다. 꽃이 준비될 때까지 안전하게 시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도울 사람은 왕뿐입니다. 그는 많은 꽃을 가지고 있습니 다.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왕에게 파견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로가 말했다. 모두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왕에게 사람을 보냅시다.” “그 말이 옳습니다.” 사람들은 장로의 수염 밑에서 아름다운 미소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장로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누구를 왕에게 보내야 할까요? 그 사람은 젊고 튼튼해야 합니다.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일 좋은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깨끗하 고 친절한 마음과 빛나는 눈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왕의 마음을 움직 일 수 있을 것입니다. 눈빛은 말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어린 아이를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힘든 여행을 견디 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이 일의 적임자가 있다면, 그 를 알고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주십시오.” 누군가 얼굴을 붉히면서 걸어 나왔다.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 다.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장로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로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자로서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장로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가겠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무엇 때문인지 말해주지 않겠느냐?” 머리를 든 소년은 장로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저를 보내주십시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외쳤다. “장로님, 그를 보내십시오. 우리는 그 소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 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로는 친근하게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진으로 꽃을 잃은 것이 아깝느냐?”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가까운 친구와 말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지진으로 죽었습니다. 그 들의 장례를 마치기 위해서는 꽃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는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에 얹었다. 축복을 받은 소년은 곧 말에 올라탔 다. 소년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작별을 하였다. 소년은 황폐해진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 산길을 택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았다. 그는 숲과 바위 사이의 험준한 산길을 계속 올라갔 다. 크고 검은 새가 소년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새는 작은 신전의 지붕에 내려앉 았다. 소년은 나무에 말을 묶어두고 나무로 만들어진 원주를 지나서 신전으로 들어갔다. 예물을 바치기 위한 검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이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곳에는 이상한 모습의 신이 그려져 있었다. 사 나운 새에게 심장을 파먹히는 신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우상에게 절을 드리고는, 산기슭에서 꺽어온 파란색의 초롱꽃을 바쳤 다. 피로에 지친 그는, 구석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도무지 잠이 들지 않 았다. 검은 돌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기분 나쁜 우상이 어두운 신전에서 유 령처럼 빛났다. 지붕에 앉은 새가 거대한 날개를 퍼득일 때마다, 숲은 폭풍을 만 난 것처럼 흔들렸다. 몸을 일으킨 소년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날 개를 퍼득거렸다. “왜 잠들지 않지?” 새가 거만하게 물었다. “슬픔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야.” 소년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슬픔을 겪었지?” “다정한 친구와 사랑하는 말이 죽었어.”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야.” 새는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야. 죽음은 이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슬픈 것은, 꽃이 없어서 그들을 매장할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쁜 일도 있지.” 새는 기분이 언짢은 듯 날개를 퍼득이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것보다 나쁜 일은 없어. 꽃을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없어. 영혼에게 꽃을 바치지 않으면, 꿈에서 죽은 사람의 환영을 보게 된단 말이야.” 소년은 더 크게 말했다. “너는 그보다 더욱 슬픈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거야. 슬픔이 어떤 것인 지 너는 모르고 있어. 너는 죄악이나 증오, 살인, 질투에 대해서 알고 있니?” 구부러진 주둥이를 열면서, 새는 날카롭게 외쳤다. 소년은 검은 새가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옛날에 그런 것이 있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것은 정말이 아닐꺼야. 꽃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을 무렵,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 무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아.” 새는 가슴을 내밀고 커다랗게 웃으면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왕을 찾아가는 중이지? 데려다 줄까?” “어떻게 알았지? 그래, 나를 안내해 주었으면 좋겠어.” 소년은 반가와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검은 새는 소리없이 신전으로 내려 와서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눈을 감아라!”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들은 어두운 하늘을 뚫고 부엉이처럼 날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는 땅으로 내려앉았다. “이제는 눈을 떠도 괜찮아.” 소년은 눈을 떴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빛을 받은 들판이 눈부시게 빛났다. “여기에서 다시 만나자.” 이렇게 말한 새는, 화살처럼 날아서 하늘로 사라졌다. 소년은 안개에 쌓여 있 는 들판을 걷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고향의 모습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의 손길은 꽃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지진이 지나간 것 같았다. 허물어진 건물이 버려져 있었으며, 쓰러진 나무와 울타리 주변에는 농기구가 흩어져 있엇다. 밭에서는 죽은 사람이 썩어가고 있었다. 매장이 되어 있지 않았 던 것이다. 소년은 심한 공포와 구역질을 느꼈다. 죽은 사람은 얼굴조차 가리고 있지 않았다. 그의 형상은 거의 짓뭉개져 있었다. 소년은 나뭇가지와 꽃으로 죽 은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들판에는 썩는 냄새가 가득 풍기고 있었다. 수풀 사이에는 죽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불길한 까마귀가 주위를 날아다녔다. 머리가 잘린 말 과 사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꽃으로 치장하거나 매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지방의 사람들이 재난으로 모두 죽어 버린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소년은 꽃으로 얼굴을 가려주는 일도 그만 두었다.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걸었다. 썩은 살의 악취와 피냄새가 풍겨왔다. 집이 무너진 자리에는 시체의 무더기가 버려져 있었다. 소년은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신전에서 검은 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쁜 일도 있지.” 새가 다른 곳으로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모두가 사실이었다. 다른 별로 오게 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즐거 움이 있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지만, 이야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세계였다. 새들이 죽은 사람을 뜯어먹 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잔인함이 머무르는 땅. 어리석음과 추악함이 지 배하는 곳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풀밭을 걸어가는 것이 소년의 눈에 보였다. 소년은 급히 그 사람에게 뛰어갔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소년은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너무 추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갑자기 슬퍼졌다. 그 사람은 이기심 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위와 더러움에 익숙한 그는, 끝없는 악몽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나 행동에서는 믿음이나 기쁨, 선량함, 감사의 덕목을 조금 도 찾을 수 없었다. 불행한 그 사람은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소년은 불행의 낙인이 찍힌 사람에게 다가갔다.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소년은 그 사람에게 형제처럼 인사를 건네면서 말을 하였다. 추악한 사람은 차가운 눈 빛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소년의 눈에 어리는 순수한 빛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소년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주름이 많은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지하의 어둠에서 벗어난 영혼이 처음으로 지어보이는 미소처럼 경이로 운 것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니?” 그 사람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주위를 가리키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지금처럼 무섭게 변했나요?” 그는 소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참 동안을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너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구나. 이것은 전쟁이야. 전쟁의 모습이라구.” 그는 허물어진 집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곳에 나의 집이 있었어.” 소년은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감추기 위하여 고 개를 숙였다. “왕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다시 말했다. “왕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손을 들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막사를 가리켰다. 소년은 그 사람의 이마에 손을 얹은 후 작별을 하였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어 루만지면서 멀어져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황량한 벌판을 지나서 막사에 도착했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모여 있 었다. 소년은 많은 막사를 헤치면서 지나갔다. 아무도 소년의 행동을 막지 않았 다. 가장 크고 아름다운 막사가 보였다. 그곳은 왕이 생활하는 막사였다. 소년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침대에 왕이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는 그의 외투 가 걸려 있었으며, 구석진 어두운 그늘에는 시종이 조그리고 앉아 잠을 자고 있 었다. 왕은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늘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칼이 그의 발 옆에서 싸늘한 빛을 뿌렸다. 소년은 왕에게 절을 하고는, 팔을 모은 채 엎드렸다. 소년을 바라보면서 왕이 말했다. “너는 누구냐?” 왕은 근엄하게 물으면서 두꺼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소년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믿음에 가득찬 표정으로 왕을 다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엄숙 하던 왕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왕은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렸을 때 알고 있던 누군가와 닮았을 것이다.” “저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입니다.” 소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에서 보았던 얼굴과 닮은 모양이군.” 왕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래, 찾아온 용건은 무엇인 가?” “검은 새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마을에 거센 지진 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습 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위한 꽃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이 없다고?” 왕이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을 치장할 꽃이 없습니다. 가엾게 죽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려면 아름다운 꽃이 필요합니다.” 소년은 무서운 싸움터에서 보았던 시체를 생각했다. 왕은 소년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꽃을 구하기 위하여 왕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소년은 계속해서 말을 하였다. “험한 산에는 이상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커다랗고 검은 새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새가 앉아 있던 곳은 낯선 신이 머무르던 곳이었습니다. 신은 이상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나운 새가 신의 심장을 파먹는 그림이었 습니다. 그날 밤, 저는 검은 새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야 새의 말을 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제가 알던 것보다 더욱 많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들판을 가로질러 오면서 끝없는 슬픔과 불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왕은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굳어진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에 얼룩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척 고맙구나.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어머니의 기억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년은 웃음을 잃어버린 왕이 가엾어서 가슴이 아팠다. “무척 슬퍼보이는군요. 전쟁 때문입니까?” “그렇다.” 왕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년은 고결한 기풍이 느껴지는 왕에게 다시 물었다. “이 별은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지요? 누구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까? 왕이 좋지 않은 일을 해서인가요?” 왕은 오랫동안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의 무례한 질문에 기분이 상했다. 자신의 어두운 눈길로 소년의 맑고 깨끗한 표정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가 없었 다.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 전쟁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폭풍과 번개처 럼 전쟁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도 전쟁의 희생물이다.” “이 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별에 서는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아요. 죽음은 또 다른 삶이 시작되기 위한 과정이 니까요.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왕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별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장 무거운 죄로 다스린다. 하지만 전쟁 에서는 그것이 허용된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미움이나 질투,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요구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죽 음을 두려워한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몹시 괴로워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소년은 낯선 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들은 너무나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소년은 더욱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이 별의 사람들 은 어둠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왕에게 모욕을 주는 일인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안스럽고 잔인한 일이었던 것이다. 죽 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사람들. 거칠 고 사나운 표정을 짓거나, 슬픔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는 그들이 한없이 가여웠 다.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러나 소년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를 얻지 못한 버려진 사람들이 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꿈이 있을 것이다. 상처받은 생활을 하거나 죽은 사람 을 싸움터에 버려서 짐승과 새들이 뜯어먹게 하더라도 신들의 사랑, 영혼의 희 망이 숨어있을 것이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 오.” 소년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보아도 좋다.” 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승낙했다. 다른 별에서 온 소년을 바라보면서, 왕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 들엇다. 이 소년은 성자처럼 민감하고 성숙한 정신을 가지 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는 낯선 나라의 왕을 만나면서 슬픔을 느꼈습니다. 저는 검은 신전의 새 와 함께 다른 별에서 왔습니다. 이 별에는 악몽과도 같은 고통과 절망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별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신인지, 악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 습니다. 저의 별에서도 오랜 옛날에는 전쟁과 절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 야기를 책에서 읽으면, 무섭기도 했지만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 는 그것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이 별에서 벌 어지고 있습니다. 이 별의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평화의 신이나 현명한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지 않 습니까? 이성과 질서, 친절과 사랑으로 가득한 생활을 바라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습니까? 음악, 기도 행복을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까?” 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왕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미 소가 깃들어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름다운 소년아.” 왕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성자인지, 어린아이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네가 말한 것들을 모 두 알고 있다. 우리도 자유와 행복, 평화의 신을 느끼고 있다. 이 별의 사람들도 성자와 평화로운 신들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나의 대답이 너를 만족시켰는지 모르겠다. 너는 천국에서 온 성자일 것이다. 아니, 평화의 신일 수도 있겠지. 너 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행복과 평화는, 우리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 을 바라고만 있을 뿐이지.” 왕은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드러난 것처럼, 그의 얼굴 에는 그림자 없는 밝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제 가거라. 이 별의 전쟁과 절망을 그냥 두고 떠나거라. 그러나 너의 맑은 눈을 보면서 나는 잊었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소년아, 이제 이 별해야 하겠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어서 피해라. 마을이 불타고 피가 흐를 때 마다 너를 기억할 것이다. 너의 별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사나운 새에게 심장이 파먹히는 신에게도 소식을 전해다오. 나는 그 심장과 새를 잘 알고 있다. 다른 별에서 온 아름다운 친구여! 잊지 말아다오. 나를 기억할 때마다 침대에 걸터앉 아 슬픔에 잠겨 있는 왕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피로 물들이는 왕 으로 생각해다오.” 왕은 친절하게 소년을 배웅해 주었다. 소년은 지평선 너머에서 커다란 도시가 불타는 것을 보았다.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벌판을 지나면서 앞으로 걸어갔 다.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검은 새가 기다리는 산으로 들어갔다. 구름 사이에서 검은 새가 내려왔다. 새는 소년을 날개에 태웠다. 검은 새는 부 엉이처럼 어둠을 뚫고 소리없이 날아갔다.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산 속의 작은 신전에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슬에 젖은 숲에서 말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울고 있었다. 검은 새와 다른 별에의 여 행 그리고 슬픈 표정의 왕과 전쟁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소년의 마음 속에 그림자 정도로 남아 있었다. 작은 가시처럼 숨겨진 고통이었던 것이다. 소년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마침내 소년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도 착하였다. 왕은 소년의 눈길을 바라보았다. 왕은 소년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너 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맑은 눈이 나에게 이미 말을 하였다. 나는 승낙을 내렸다. 너의 소망은 내가 듣기도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소년은 그 나라의 꽃을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는 왕의 허가를 받았다. 시종 들이 말과 수레를 가져왔다. 소년은 꽃을 수레에 가득 실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 다. 수레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 꽃을 바치거나 무덤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소년은 죽은 친구과 말에게 꽃을 바쳤다. 무덤에는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다른 별에의 여행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소년은 꽃나무 와 과일나무 밑에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소년은 장로에게 다른 별에 대한 이야 기를 들려주었다. 장로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별에의 여행이 혹시 꿈은 아니었느냐?”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슬픔의 그림자 가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장로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일 다시 신전을 찾아가거라. 그 신의 상징은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나는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다른 별에서 온 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래 전에 이 별을 다스리던 신일 수도 있겠지. 죽음의 불안과 절망이 존재하던 시대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 곳인지도 모른다. 꽃과 꿀과 노래를 그 신전에 바치는 것이 좋겠다.” 소년은 장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여름의 꿀벌축제가 시작될 때,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그릇과 비파를 준비했다. 소년은 산 속에서 파란 초롱꽃을 찾 았다. 험준한 바위길도 그대로였다. 며칠 전에 말을 끌고 올라가던 곳이었다. 하 지만 소년은 신전이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신전과 검은 돌, 신전을 지탱하던 둥근 기둥, 검은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년이 보았 던 신전을 알고 있던 사람도 없었다. 소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른 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소 년은 벌꿀을 바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소년은 추억의 영혼에게 신전을 지키는 검은 새와 죽은 사람들, 슬픈 표정의 왕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은 가벼 운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소년은 지진의 복구작업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었 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 사이로 즐거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시인 어느 시인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는 한혹이라는 시인 이 있었다. 그는 시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배워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황하강 근처였 다. 한혹은 부모님의 중매로 아름다운 여자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그는 그 여자 를 무척 사랑하였다. 한혹의 나이는 스무살이었으며, 훌륭한 모습의 예의바른 청 년이었다. 이웃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학문도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가 쓴 시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스무 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시는 매우 뛰어났다. 상속을 받게 될 재산도 많았다. 약혼녀의 지참금을 포함하면, 남 부럽지 않을 만큼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정혼을 한 여자는 매우 정숙 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아무런 부족함을 느낄 필요가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 만 무엇인가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혹은 뛰어난 시인이 되고 싶었 던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강에는 많은 배들이 모여서 관등행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혹은 혼자서 강둑을 산책하였다. 그는 강물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많은 등불이 수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흘러가는 배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름다운 꽃과 같이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졌다. 그는 불빛이 어린 물결의 가느다란 속삭임 소리, 가희들의 노래 소리, 울려나오는 비파 소리, 달콤한 피리 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신전의 천정같이 반원형으로 드리워진 밤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방랑 자처럼 고독하게 서 있는 그의 가슴에는 격랑이 일었다. 약혼녀나 친구들과 함 께 배를 타고 관등행사를 즐기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시에 대한 감동적 인 열정이 그 유혹을 뿌리치게 만들었다. 푸르른 밤의 노래, 물결을 따라 춤추듯 흔들리는 불빛의 유희, 관등행사에 취한 사람들의 환희, 나무에 기대어 선 방랑 자의 그리움 -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하나의 시로 표현하고 싶었다. 어떠한 축제가 벌어지거나,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한혹은 그 속에 몰입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고독한 사람으로, 방관자로,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닫고는 몹시 울적해 졌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참다운 행복과 깊은 만족을 얻으려면 세상 을 시에 완전히 담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 속에서 정화된 세상이 흔들리 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혹은 비단결이 스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 보았다. 붉은색 옷을 입은 노인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노인에게 허 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낯선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두세 줄의 시를 읊었다. 노인의 시에는 지금 한혹이 느끼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 었다. 그는 심장이 일시에 멈출 만큼 놀랐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혹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를 읊는 당신은 어느 곳에서 오셨습니까?”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은 원숙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였다. “그대가 시인이 되려는 뜻을 가졌다면, 나를 찾아오게. 나는 황하의 상류에서 살고 있지. 나의 이름은 `언어의 스승`이라고 하네.” 말을 마친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한혹은 숲으로 들어가서 노인을 찾아 헤매었지만, 발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꿈을 꾼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는 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관등행사에 참여하였다. 피리의 섬세한 가락을 따라, 그 노인의 신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영혼은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을 따라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혹은 꿈을 꾸듯이 눈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몇 일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한혹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하여 친척을 부르도록 하였다. 한혹은 결혼식을 연기해 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이 자식된 도리가 아닌 줄 알지만 용서해 주십 시오. 제가 시 공부에 전념하여 완전한 시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 한지 아버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친구들은 제가 쓴 시 를 칭찬하지만, 저는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조금만 더 제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내와 가정을 거느리면, 시를 익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릅니다. 얼마 동안이 라도 시작에 정진할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의 아버지는 신중하게 말했다. “결혼까지 연기하는 것을 보니, 너에게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구나. 혹시 무 슨 불화가 생긴 것이 아니냐? 만약 그렇다면 내가 화해를 주선해 주마. 너에게 다른 처녀를 소개해 줄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너를 도울 것이다.” 한혹은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관등놀이를 하던 날, 진정한 시인을 만났다고 말했다. 한혹은 그 시인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너에게 일 년간의 여유를 주마. 그 동안 너는 시를 익히도록 해라. ” “이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한혹은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혹의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면서도, 그가 떠나는 것을 차마 막지 못했다. 그 는 약혼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오랜 여행을 한 다음, 그는 황하의 상류에서 대나무로 엮은 초막을 발견하였 다. 마당에 펼쳐 둔 돗자리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시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시인은 한혹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의 손가락은 비파에 머물러 있었다. 신비로운 음악이 은빛 구름처럼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한혹은 감미로운 여운을 즐겼다. 시인은 비파를 가지고 초막으로 들어갔다. 한혹은 그를 따라서 공손하게 들어갔다. 한 달이 지났다. 한혹은 자신의 시들이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날들이 흘렀다. 한혹은 이제까지 배웠던 모든 시들을 잊어버렸다. 시인은 한혹에 게 한 마디의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한혹에게 비파를 연주하는 기술을 가 르쳤다. 한혹은 조금씩 음악에 젖어들었다. 어느 날, 한혹은 가을 하늘에 두 마리 새가 날아가는 것을 묘사한 시를 지었 다. 한혹은 초막 옆에서 시를 읊었다. 스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한 음 색으로 비파를 뜯었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여름인데도 하늘이 회색빛 으로 변했다. 두 마리의 백로가 외로운 나그네의 그리움을 달래듯이 날아갔다. 한혹의 시보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 승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를 일깨워 주었다. 일 년이 지나자, 한혹은 비파를 연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 년이 지났을 때, 한혹은 고향의 가족들과 약혼녀가 보고 싶었다. 한혹은 향 수를 달래기 위하여 고향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스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너는 언제나 자유의 몸이다.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가 있다. 다 시 돌아와도 좋고,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은 너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한혹은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였다. 며칠이 지난 다 음 날이 밝아올 무렵 한혹은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월형의 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들어간 한혹은, 침실에서 잠이 든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었다. 집을 나온 그는 배나무에 올라가서 약혼녀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머리를 빗고 있었 다. 한혹은 지금 눈으로 확인한 그녀의 모습과, 향수어린 마음으로 그리던 그녀 의 영상을 서로 비교하다가 불현듯 자신이 시인임을 깨달았다. 시에는 현실 속 에서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혹은 도망 치듯 달려나와서 스승에게 되돌아갔다. 시인은 검소한 돗자리에 앉아서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한혹은 인사를 올리 는 대신, 스승이 가르쳐준 예술에 대한 은혜를 시로 지어서 바쳤다. 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깨달은 한혹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혹은 스승 곁에서 머물렀다. 그는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러 날들이 서풍에 녹는 눈처럼 사라졌다. 한혹은 두 차례에 걸쳐 고향에 대한 향수에 시달 리다가 밤에 몰라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골짜기의 모퉁이를 돌 수가 없었따. 초막의 입구에 걸어 놓은 가야금 위로 스쳐가던 바람이 현을 울렸 기 때문이었다. 가야금의 맑은 소리는 그를 쫓아와서 불러 세웠다. 어느 날에는 나무를 심는 꿈을 꾸었다. 아내가 그를 돕고 있었으며, 아이들이 물을 부어 주었 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조용한 달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한 혹은, 잠든 스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승의 수염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스 승에 대한 증오심으로 몸을 거세게 떨었다. 자신의 생활은 스승 때문에 산산조 각으로 부서져버렸다. 스승에게 속아서 미래를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한혹이 스승 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고 하였을 때, 노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스승의 얼굴 에는 슬픈 온정의 미소가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스승의 미소는 한혹의 마음 을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 “한혹아, 생각해 보아라. 너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있다. 고향 에 돌아가 나무를 심을 수도 있고,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은 어려운 일 이 아니다.” 시인은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어떻게 스승님을 미워하겠습니까?” 한혹은 벅찬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것은 하늘을 미워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가야금을 배운 후,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스승의 가르침 을 따라서 시를 지었다. 한혹은 시의 비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갔다. 단순하고 소 박한 표현이지만,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듯이 사람의 영혼을 파헤치는 비법이었 다. 그는 떠오른 태양이 산등성이를 망설이듯 맴도는 장면을 묘사했다. 물고기가 움직일 때의 소리 없는 빠른 동작과, 푸른 새순이 돋아난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묘사하였다. 그것은 평범한 태양이나 물고기의 움직임 그리고 버드나무의 속삭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과 지상이 완전하게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였다. 시를 듣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을 생각했다. 소년은 즐거움을, 청년은 사랑을, 노인은 죽음을 떠올렸다. 몇 년 동안 스승에게 시를 익혔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어제 저녁에 이 골 짜기를 찾아온 것 같기도 하였다 어느 때에는 시간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형체도 찾을 수 없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초막에서 눈을 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스승의 자취는 보 이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가을이 찾아온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바람 이 낡은 초막을 흔들고 지나갔다. 철새들이 산등성이를 지나서 날아갔다. 한혹은 비파를 들고 고향으로 찾아갔다. 만나는 사람들은 한혹에게 예절을 차 리며 인사를 했다. 마침내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나 약혼녀 그 리고 친척들은 살아있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낯선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밤이 깊 어가자 황하에서는 관등행사가 벌어졌다. 시인은 어두운 강기슭의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면서 비파를 연주하였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어둠을 응시하였다. 젊은 남자들은 비파를 연주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다. 이러한 비파 소리는 이제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시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등불이 반사되 는 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물에 비친 영상이 실제의 모습과 잘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한혹은 처음으로 스승을 만났던 시절의 축제와 지금의 축제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피리 부는 소년 “이 피리를 너에게 주마.” 아버지는 상아로 만들어진 피리를 나에게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먼 나라에서 피리를 불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때 에도 나를 잊지 말아라. 이제는 너도 넓은 세상을 여행하면서 무엇인가를 배워 야 할 나이다. 네가 노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피리를 만든 것이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노래만을 불러야 한다. 너에게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말 이다.” 학자였던 아버지는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피리만 있으면 내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파리 를 주머니에 넣은 다음,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전부는 마을의 골짜기와 커다란 농장의 물방 앗간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드넓은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즐거운 곳일 것이다. 들뜬 기분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 꿀벌이 날아와서 내 소매 위에 앉았다. 나는 꿀벌을 소매 위에 살며시 올려 놓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숲과 들판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맑은 시냇물은 세차게 흘렀다. 세상은 내가 살던 고향과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무, 풀꽃, 보리, 개암나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세상은 나의 기분을 잘 이해하 여 주었다. 마치 고향에서 지내는 듯한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노래 소리에 잠을 깬 꿀벌은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와 붕붕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깊고 달콤한 환성 을 울리며 주위를 맴돌더니, 곧장 날아가 버렸다. 나는 어느 숲에서 소녀를 만났다.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녀는 금발의 머리에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안녕? 어디로 가는 거죠?”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식사를 날라주고 있어요.” 친절한 목소리로 소녀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넓은 세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피리 소리를 들려주라고 아버지 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나는 아직 파리를 잘 불지 못합니다. 조금 더 배워 야지요.” “그러면 당신이 잘 하는 것은 무엇이죠?”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습니다.” “무슨 노래를?” “아침이나 저녁에 대한 노래, 나무와 짐승 그리고 풀꽃의 노래도 할 수 있어 요.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식사를 들고 가는 숲의 소녀에 대한 노래 도 아름답게 부를 수 있어요.” “그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세요.” “좋아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저의 이름은 브리깃테라고 해요.” 나는 밀짚모자를 쓴 브리깃테의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브리깃테가 바구니 를 들고 있는 모습, 풀꽃들이 그녀를 전송하는 모습, 울타리를 감싼 파란 꽃이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노래로 불렀다. 브리깃테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좋은 노래라고 칭찬하면서 빵을 꺼내주었다. 빵을 베어 물면서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조용한 목소리로 브리깃테가 말했다. “걸으면서 먹으면 안돼요. 저기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해요.” 우리는 풀밭 위에 앉았다. 나는 빵을 먹었으며, 브리깃테는 손을 무릎 위에 차 분하게 올려 놓았다. “다른 노래를 들려줘요.” 브리깃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무엇에 관한 노래를 할까요?” “떠나간 사랑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소녀의 노래는 어때요?” “그런 노래는 부르지 못해요.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 렇게 슬픈 노래는 안돼요. 사랑스럽고 즐거운 노래만 부르라고 아버지께서는 말 씀하셨어요. 뻐꾸기나 나비의 노래를 하면 어때요?” “사랑에 대한 노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요?” 브리깃테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랑에 대한 노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는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빨간 양귀비꽃을 사랑한 태양이 춤추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짝을 애타게 기다리던 암새가, 수새가 다가오자 도망을 치면서 놀라 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다갈색 눈의 아름다운 소녀와, 그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젊은이는 다갈색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맞 춤을 하고 싶다는 노래를 오랫동안 불렀다. 미소를 지은 다갈색 눈의 소녀가 입 맞춤을 해 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브리깃테는 두 눈을 감고 나에게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나는 다갈색 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몇 송이의 들꽃이 비쳤다. “세상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어요. 자아, 함께 음식을 나르기로 해요.” 진지하게 말하면서 나는 브리깃테의 바구니를 들었다. 우리는 앞으로 걸어갔 다. 그녀의 발소리가 나의 발소리와 서로 어울렸으며, 그녀의 명랑함이 나의 명 랑함과 잘 조화되어서 울려 퍼졌다. 정답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몹시 즐거워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골짜기, 산, 들풀, 나뭇잎, 작은 개울, 우거진 숲 들이 친근하게 말을 건네왔다. 내가 세상의 수많은 노래를 동시에 이해하고 부를 수 있다면, 풀이나 들꽃, 사 람이나 구름, 활엽수의 숲, 소나무의 숲 그리고 모든 동물들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머나먼 바다와 산과 별들이 부르는 노래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부를 수 있다면. 만일 이 모든 것이 동시에 나의 가슴에서 울려 퍼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사랑하는 신이었을지도 모르며, 모든 새로운 노래는 별이 되 어 하늘에서 빛날지도 모른다. 나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건한 마음이 들었 다. 브리깃테가 걸음을 멈추며 내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잡으면서 서운한 듯이 말 했다. “저쪽으로 올라가야 해요. 밭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어요. 저와 함께 가 주시겠어요?” “미안해요. 나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브리깃테,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갈색의 그림자가 나에게로 드리워졌다.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와 닿았 다. 그녀의 입맞춤은 너무나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행복에 겨운 나머지 슬퍼질 것만 같았다. 서둘러서 작별을 하고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브리깃테는 밤나무 그늘 밑에서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모 자를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그림처럼 조용하게 밤나무 숲으로 사라졌다. 나는 물레방아가 있는 강에 도착하였다. 물레방아 곁에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 다. 배에는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모자를 벗고 배에 올랐다. 배는 곧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그 남자는 그늘진 잿빛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 는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어디이든, 자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있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다나 도시,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모두 다 나의 것이니까.” “모두 당신의 것이라구요? 당신은 왕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해. 자네는 마치 시인처럼 보이는군. 강에 대한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게.” 나는 조금씩 긴장했다. 위엄있는 사나이가 어쩐지 두려웠다. 나는 강물의 즐거 운 여행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태양이 밝게 바위기슭으로 내려 비쳤다. 그의 표 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노래를 마치자, 그는 꿈꾸는 사람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계곡을 흐르는 강물은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강 은 거친 파괴자였다. 어둡고 사납게 달려오면서 물레방아를 돌렸다. 강은 배들을 미워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거친 물살과 물풀로 휘감아 버렸다. 그가 부 르는 노래는 훨씬 아름답고 힘이 있었으며 신비로운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나 는 숨이 막혔다. 나의 노래는 어리석고 하찮은 아이의 장난같았다. 세상은 어둡 고 답답해 보였다. 스치는 바람결에 숲이 소리를 내는 것은 즐겁기 때문이 아니 라, 견디지 못할 만큼 괴롭기 때문이었다. 배는 하류로 내려갔다.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나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지 만, 이전처럼 명랑한 것은 아니었다. 노래 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그 사나이는 세상을 더욱 모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노래를 불러서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괴로운 마음에 시달렸다. 왜 고향을 떠나왔던가? 아름다운 브리깃테에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노을이 짙게 깔렸다. 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하였다. 브리깃테의 사랑과 입맞춤을 노래했던 것이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키를 잡고 있던 사나이가 노래 를 불렀다. 그는 입맞춤하는 기쁨과 다갈색 눈과 빨갛게 젖은 입술의 사랑을 노 래하였다. 어두운 강을 흘러가며 괴로운 심정으로 부르는 노래는 감동적이었다. 노래는 어둡고 불안한 사랑과 죽음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금지된 비밀 을 들추다가 상처를 입는다. 우리는 그 비밀 때문에 서로를 괴롭히다가 죽어가 는 것이다. 끊임없는 슬픔과 우울이 차갑게 흘러나와 스며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방랑 생 활을 하면서 비참한 불행을 겪어온 것처럼 피곤하였다. “그렇다면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슬픔의 왕이여! 나에게 죽음의 노래를 들려주십시오.” 그 사나이는 장중한 목소리로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일이 전혀 없을 만큼 아름답게 불렀다. 그러나 죽음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아 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죽음에는 위안이 없었다. 죽음은 삶이었으며, 삶은 죽음 이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격렬하게 사랑하면서 뒤엉켜 있었다. 삶과 죽음은 세상의 처음이었으며,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어떠한 불행이라도 밝게 비출 수 있었다. 기쁨이나 아름다움도 흐리게 만들었으 며, 아늑한 어둠으로 감싸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사랑은 더욱 강하 고 아름답게 불타올랐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나의 영혼을 빼앗았다. 나는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서글픔과 다정함이 가라앉아 있었 다. 잿빛 눈은 세계의 괴로움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 어서 그에게 부탁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어둠 속에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브리 깃테의 사랑을 찾고 싶습니다.” 그는 말없이 어둠을 가리켰다. 등불이 그의 엄한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세상을 알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 다. 다갈색 눈을 가진 소녀에게 자네는 이미 사랑을 얻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 록 사랑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너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제부터 키를 너에게 맡기겠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 다. 이제는 소중한 기억들을 모두 잊어야 했다. 나는 키를 잡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등불을 건네주었다. 나는 등불을 들고 키를 잡았다. 배에는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떤 것이 다. 아름다운 방랑의 나날과 브리깃테의 사랑, 아버지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한 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나이를 먹었다. 강물을 따라 계속 흘러 내려갔다. 나는 그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등불을 들고 수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수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롭고 진지한 잿빛의 눈이었다. 잿빛의 눈은 세상을 깨달은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 다. 그 얼굴은 바로 나였다.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검은 강을 따라 어둠을 헤치면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신비한 새 새는 오래 전부터 몬탁스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 새는 특별하게 색깔이 아 름답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독수리처럼 몸집이 크거나 당당한 날개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새를 보았던 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 다고 말했다. 그 마을의 새는 조금 독특하고 색다른 새였다. 날카로운 매를 닮지도 않았으 며 닭도 아니었다. 딱새나 딱따구리도 아니었다. 단지 몬탁스 마을의 하나뿐인 새였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새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몬탁스 지방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주 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아주 신기한 것을 몬탁스 마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몬탁스 마을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새를 가지고 있어.” 카레노를 지나 모르비에 이르기까지, 나중에는 그보다 더욱 멀리까지 그 새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다. 오래 전에는 그 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우연 히 새와 만나게 되었던 사람들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동물을 아끼는 사람들이 여우나 뻐꾸기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 새를 만나는 것은 하나의 체험이고 행운이었으며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새는 몬탁스 마을의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새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 가 자신의 마음이 아주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 새를 매우 사랑했다. 새를 만나는 것은 그들에게 무척이나 기쁘 고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불길하다고 여겼다. 그 새를 본 다 음에는 마음이 흥분되어서 언제나 불안한 꿈을 꾸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불 안과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새를 만나는 것보다 더욱 아름답고 깊은 감동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성찬식이나 즐 거운 노래를 듣고 난 다음에 느낄 수 있는 흥겨운 마음과도 같았다. 그 새를 만 나면서 사람들은 순결하고 올바른 것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보다 착하게 살아 갈 것을 다짐하였다. 몬탁스 마을을 다스리는 관리는 제우스터였다. 그의 사촌인 살라스터는 마을 의 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살라스터는 여러 번 그 새를 보았 다. 새를 보고 난 살라스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즐거운 감정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기대와 예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날에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조금 슬퍼진다는 것이다. 평소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조 차도 자기의 가슴에 숨어 있는 감정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살라스터는 그 새가 아주 희귀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새를 자주 보는 사람은 무엇인가 고귀한 점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살라스터는 많은 지 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잊혀져버린 사건을 설명하는 증인이었다. 그 때문에 여러번 소환되기도 하였다. 잊혀진 사건이란, 사라진 새에 대한 것이었다. 살라 스터는 몬탁스 마을의 새가 사라진 다음에 만들어진 작은 모임의 대표였다. 그 모임의 사람들은 새가 아직도 살아 있으며,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 다. 살라스터는 그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새를 본 것은, 아직 어려서 학교를 다니기 전이었습니다. 과수원에서 풀을 베어낸 다음이었습니다. 나는 벚나무 곁에서 새파란 버찌를 바 라보고 있었습니다. 새는 나무로 날아왔습니다. 나는 그 새가 다른 새들과는 다 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새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 습니다. 나는 그 새를 따라 갔습니다. 새는 빛나는 눈으로 가끔씩 나를 쳐다보았 습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처럼 뛰어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 새는 나를 몹시 즐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목에 하얀 깃털이 나 있는 새는 풀밭을 지나 울타리 까지 뛰어가서는 기둥에 내려 앉았습니다. 무어라고 지저귀면서 나를 쳐다보다 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떤 짐승도 그 새처럼 빠르게 나타나거나 사라 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말 했습니다. 그 새는 이름이 없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를 본 것은 행운이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새에 대하여 살라스터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새는 굴뚝새보다도 작은 머리를 가졌다. 금회색의 머리를 가진 새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 만 사람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어치새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머리를 경쾌하게 움직인다. 움직일 때의 동작은 아주 민첩하 고 재빠르다. 그 새는 눈빛과 머리의 움직임 그리고 날개짓으로 우리에게 무엇 인가를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새는 마치 무엇인가 전할 것이 있는 것처럼 나 타난다. 그 새는 사람이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았다. 새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언제나 그 곳에 앉아 있었 던 것처럼 다정한 눈초리를 보낸다고 하였다. 다른 새들은 딱딱하고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지만, 몬탁스 마을의 새는 언제나 호의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본다 는 것이다. 새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몬탁 스 마을에서는 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마을 사람들의 삶이 더욱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갔다. 여름날 저녁, 가족들은 문간의 계단으로 모이지 않았다. 겨울 밤에도 난로의 주변으로 모여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젊은 사람들은 들꽃이나 나비의 이름조차 몰랐다. 하지만 가끔씩 늙은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몬탁스 마을의 새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그 전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몬탁스 마을의 새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한다. 아벨이 카인에 게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아벨의 피를 마신 새는, 사람들 에게 비참한 살인의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일깨워 준다고 하였다. 서로 우 애를 가지고 경건하게 살도록 `죽음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다 아벨의 전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그것에 관한 노래들도 많이 만들 어져 있다. 학자들은 `아벨새` 의 전설이 아주 오래된 것이며, 여러 나라에서 전 해진다고 주장하였다. 몬탁스 마을의 새는 `아벨새`의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 이며, 수천 년 동안이나 `아벨새`가 몬탁스 마을에서만 살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우리는 전설이 합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새에 대 한 이야기가 불확실성과 모순에 빠지게 된것은 바로 학자들 때문이 아니냐고 반 문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몬탁스 마을의 새와 `아벨새`의 전설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새에 대하여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새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이야 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자랑이었다. 우리는 학자들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러한 전설을 모두 사라져 버리 게 한다. 새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 새에 관한 추억과 전설까지도 소멸시키기 위하여 연구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학자들에게 이렇듯 거친 공격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몬탁스 마을의 새에 대한 전설을 들어보도록 하자. 그 전설의 대부분은 몬탁 스 마을의 새를 마법의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몬탁스 마을과 모르비오 지방에 서는 그러한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전설은 동방에서 온 여행자들 로부터 전해졌다. 몬탁스 마을의 새는 호엔슈타우펜 왕족이 변신한 것이라고 한 다. 시실리를 다스렸으며, 아라비아 학문의 비밀을 알고 있던 호엔슈타우펜 혈통 의 마지막 황제인 마법사가 마법으로 변신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새가 왕자였거나, 제우스터의 이야기처럼 마술 사였다고 믿고 있다. 마술사는 뱀이 살고 있는 언덕의 붉은 집에서 살았다. 그는 마을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플락센팅게라는 새로운 법의 시행으로 더 이상 마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술사는 붉은 집 주위에 가시딸기와 아카시아 나무 의 씨를 뿌린 후 뱀의 호위를 받으며 집을 떠났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마술사 의 집은 가시덤불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집을 떠난 마법사는 인간의 영혼을 유혹 하기 위하여 새로 변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다. 그 새가 많은 사람들 에게 특이한 감동을 주는 것은 마술의 힘이라고 제우스터는 말하였다. 하지만 그 마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동방에서 온 여행자로부터 전해진 이야기는 주로 모계 사회의 문화를 나타내 준다. 니논이라는 외국 여인에 대한 전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니논이라는 외 국 여인은 몬탁스 마을의 새를 잡아서 여러 해 동안 가두어 놓았지만, 격분한 사람들이 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 다. 니논은 마법사가 새의 모습으로 변하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며, 붉은 집 에서 마법사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붉은 집에서 검은 뱀과 초록빛 도 마뱀을 길렀다. 그래서 몬탁스 마을의 가시딸기 언덕에는 뱀들이 득실거리고 있 으며, 마술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뱀들과 도마뱀들이 머리를 쳐들고 인 사를 한다는 것이다. 몬탁스 마을에서 살았던 니나라는 할머니가 이러한 이야기 를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할머니는 가시딸기 언덕에서 약초를 캘 때, 뱀들이 인 사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곳에는 수백년 묵은 장미의 울타리가 마술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마술사와 니논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들은 니논이 몬탁스 마을의 새보다 훨씬 나중에 나타났으며, 동방에서 온 여행 자를 따라 이 곳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몬탁스 마을의 새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뒤, 지금까지 한 세대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새에 대하여 알고 있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 세 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미 남작은 죽었으며, 마리오도 그렇게 건강해 보이 지 않는다. 나중에는 몬탁스 마을의 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될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새에 대한 전설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비록 몬탁 스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고, 솔개와 뻐꾸기가 함께 어울리는 그 지방의 조용한 골짜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서도 몬탁스 마을의 새와 전설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제우스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가 전해졌다. 몬탁스 마을의 새에 대한 연구가 문교부의 후원으로 뤼츠켄슈텐에 의하여 추 진되고 있습니다. 그 새의 생활과 먹이, 격언이나 전설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 은 관리를 통하여 베른주재의 동고트제국 영사 앞으로 보고서를 제출해 주십시 오. 몬탁스 마을의 새를 산 채로 잡아오는 사람은 일천 두칸텐의 금화를 상금으로 받을 수 있으며, 죽은 것이나 박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일백 두칸텐의 금화 가 지급될 것입니다. 제우스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문서에 대한 답신을 보내지 않고 폐기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리들은 아주 친절한 태도로 제우스터에게 일을 맡겼다. 몬탁스 마을을 관할하는 관청으로부터 내려온 문서였기 때문에 그는 명 령에 따라야만 하였다. 서기를 맡고 있는 발멜리도 팔을 꼰 채, 비웃는 듯한 표 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명령에는 따라야만 하겠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제가 이 문서를 게시판에 붙이겠습니다.” 몬탁스 마을의 사람들은 그 문서를 읽게 되었다. 그들의 새는 위기에 처해 있다. 외국에서 그 새를 요구하고 있다. 가엾은 새의 생명에는 상금이 걸려 있다. 몬탁스 마을의 새를 잡아 오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청의 게시판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와서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젊은 사람들은 함정을 설치 하고 덫을 놓으려고 하였다. 니나는 하얗게 센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이것은 죄악이야. 정부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해. 돈만 주면 그들은 하 나님도 잡아서 팔아 버리겠지. 하지만 그들은 새를 잡을 수 없을 거야.” 살라스터도 그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얼마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곧바로 제우스터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는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살라스터는 일생 동 안 그 새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새를 만났었다. 그 일로 그는 몬탁스 마을의 새를 받들고, 고귀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 람이 되었다. 관청의 게시판에 붙어 있는 문서는 그의 마음을 매우 격분하도록 만들었다. 살라스터의 마음은 니나처럼 나이가 많고 전통적인 것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외국의 요구 때문에 마을 의 상징이자 보물인 새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비밀로 가득 찬 숲에서 온 희귀한 손님을, 동화적인 새를, 옛날부터 잘 알려진 생물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새 때문에 몬탁스 마을이 유명해졌다. 많은 전설에 싸여 있는 신비 한 새를 잔인한 학자의 제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나 신성을 모 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성한 새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미리 예 정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 새와 친숙한 관계에 있으며 운명적으로 함 께 묶여져 있는 사람, 그는 바로 살라스터 자신이었다. 몬탁스 마을의 새를 잡는 일이 신성모독이며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과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정된 것이다. 만약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맡겨진 직무를 기피하거나 배반한다 면, 신의 의지를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살라스터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 새를 처음 보았던 과수원에서 살라스터는 불안해 하며 염소와 토끼의 우리 를 지나서 창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창고벽에 걸려 있는 건조갈퀴와 쇠시랑 그 리고 낫이 살라스터의 눈에 띄었다. 그는 유다의 배반을 생각하며 흥분하고 있 었다. 일천 두칸텐의 금화에 대한 꿈도 지울 수 없었다. 몬탁스 마을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문서의 내용이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 사 람들은 매일 관청으로 모였다. 어떤 사람들은 게시판으로 다가가서 그 문서를 다시 읽기도 하였다. 그들은 성서에서 찾아낸 증거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말했다. 그 문서는 몬탁스 마을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새를 잡는 것은 싫어하지만, 금 화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갈등을 다스 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은 청년들은 그것을 모험이라고 생각하였다. 전통에 대한 사랑으로도 그들 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몬탁스 마을의 새를 어떤 방법으로 유혹해 야 하는지 몰랐다. 어떤 사람은 시험삼아 덫을 놓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새를 보게 될 때, 주저하지 않고 총을 쏘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천 두칸텐의 금화를 생각하는 것보다 일백 두칸텐의 금화를 버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새를 잡는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청년들은 좋 은 총과 반 두칸텐의 선금을 주면, 즉시 새를 잡으러 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든 사람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들은 돈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린 청년들을 위하여 주문을 외우기도 하였다. 청 년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전통과 신앙이 아니라 사격솜씨이며, 주문만을 외우는 그들은 새를 겨냥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은 마비되어서 산탄총을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청에 모인 그들은 점심식사도 잊어버린 듯 하였다. 마을의 나이 든 사람들 은 몬탁스 마을의 새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구절이나 가극 에 나오는 말은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선조들의 경험이나 기 록에서 찾아낸 원칙들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나간 이야기를 중얼거렸으며, 불치 병을 이겨낸 사실을 말하기도 하였다. 중병을 앓던 늙은 농부가 우연히 그 새를 본 후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비난하거나 우롱하였다. 늙은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옳 다고 주장했으며, 청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내세웠다. 전통을 자랑하거 나 옹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경멸하는 사람도 있 다. 경험을 내세우는 늙은 사람들에 대해 젊은이들은 젊음과 자부심을 주장하였 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하였다. 서로 자신의 말이 옳다고 확신하였다. 의견이 엇갈리는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아흔 살의 니나는 금발머리의 손자에게 전통을 생각해서라도 새를 잡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 새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타락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그러나 젊은 손자는 그녀의 면전에서 사냥하는 흉내를 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겨냥을 하면서 총을 쏘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늙은 발멜리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굳어 버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몬탁스 마을의 새가 날아와서 게시판의 모퉁이에 앉은 것이다. 새는 작고 동그란 머리를 날개에 문지르며 꼬리를 흔들었다. 머리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동안 깃을 다듬더니 게시판을 굽어 보았다. 얼마나 많은 상금이 자기에게 걸려 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몬탁스 마을의 새가 머물렀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숙한 방 문이며, 도전으로 여겨졌다. 아무도 총을 쏘지 못했다. 마법에 걸린 듯이 조용하 게 있었을 뿐이다. 그 새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이 장소와 시간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가득찬 눈으로 새를 바라보았다. 이 새로 인하여 그들의 고장은 유명해졌다. 아벨의 죽음에 대한 증인이었으며, 호엔슈타 우펜 왕족이었던 새. 가시딸기 언덕의 붉은 집에서 살았던 마법사이기도 했던 새. 지금은 많은 상금이 걸려 있는 새이다. 새는 꼬리를 흔들면서 머리를 세우고는 그들의 왕처럼 게시판 위에 앉아 있었 다. 새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응시하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들은 서서히 마법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웃거나 환호성을 질렀 다. 새를 찬양하거나, 총을 달라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 새가 늙은 농부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이상한 분위기가 휩쓸고 지나 갔다. 사람들은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관청앞의 모임은 끝나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것은 분명히 몬탁스 마을의 새였다. 관청은 조용해졌 다.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을 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문서 위에는 새가 앉아 있었던 게시판 난간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살라스터의 걸음은 침착해졌다. 그의 사고는 균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정오 의 종소리가 그를 깨웠다. 오랜 생각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제 잠시 후면 식사준 비를 마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는 약간 낯을 붉히면서 힘차게 걸었 다. 마을의 종소리를 확인하듯이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살라스터는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짧은 기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벚나무 가지에 그 새가 가볍게 앉아 있었다. 마치 한 송이의 꽃처럼 보였다. 새는 가볍게 머리를 움직이더니, 자그마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살라스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몬탁스 마을의 새를 알고 있었다. 살라스터의 맥박이 빨라지기도 전에, 그 새는 날아 올라서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살라스터는 순간 새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를 생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산탄총을 손질해 두었다. 굵기가 아주 가 느다란 산탄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의 계산은 치밀했다. 가느다란 산탄을 쏘 면, 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미세한 산탄에 맞아 상처를 입으면, 새는 놀라서 기 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산 채로 잡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었다. 새를 가두기 위한 새장도 마련해 놓았으며 장전된 산탄총은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교회를 갈 때 총을 들고 가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안타깝게도 살라스터가 새를 다시 만났을 때에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해 가을, 그의 집 근처에 다시 새가 나타났다. 새는 친밀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살라스터가 울타리에 열린 과일을 묶어 올리기 위하여 잘라 두었던 버 드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새는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서 지저귀고 있었다. 살라스터는 기쁘면서도 슬픈,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그 소리 는 사람들에게 삶을 영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살라 스터는 빨리 총을 가져오고 싶었다. 목덜미에는 불안감 때문에 땀이 흐르고 있 었다. 그는 새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가서 산탄총을 가지고 나왔다. 새는 버드나무에 그대 로 앉아 있었다. 살라스터는 새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몬탁스 마을의 순수 한 새는 사람이나 산탄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처럼 가 장하기 위하여 살라스터는 진땀을 흘렸다. 새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도 가만히 있었다. 그는 친밀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살라스터는 총을 들어서 한참 동안 겨냥하였다. 새는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총소리가 났다. 연기가 나기도 전에 살라스터는 버드나무 아래를 살펴보았다.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서 과수원 울타리와 콩밭과 양봉장이 있는 곳까지 살펴보 았다. 그는 풀밭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새는 찾을 수 없었다. 살라스터는 새 의 깃털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몬탁스 마을의 새는 날아가 버렸다. 숲과 자유와 평화를 사랑했던 새는 이 곳 이 더이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새는 사라졌다. 살라스터는 새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가시딸기 언덕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초록빛의 도마뱀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시간과 공간을 거슬 러 올라가 호엔슈타우펜 왕족이나 카인과 아벨의 시대 혹은 천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몬탁스 마을의 새에 대한 이야기는 그치 지 않았다. 동고트의 어느 대학에서는 몬탁스 마을의 새에 대한 책도 출판되었 다. 오랜 옛날부터 여러가지 말이 전해 내려왔지만, 새가 사라진 다음부터 하나 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새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과 몬탁 스 마을에서 그 새로 인해 벌어졌던 사건들도 잊혀져 갈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이 전설을 연구하게 된다면, 모든 것은 민속의 산물로서 전해질 것이고, 신화형성의 법칙에 의하여 해명될 것이다. 결국 손자는 할아버지 시절의 착한 영혼을 비웃을 것이다. 상금이 걸린 새는 사라졌다. 이제 그 새는 전설 속의 존재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앞으로 새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라스터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도 소문에 의해 벌써 사람들에게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아우구스투스 어느 젊은 여자가 모스타케르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 아서 남편을 잃은 엘리자베스라는 그 여자는 의지할 데도 없이 가난하게 살았 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태어날 아기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 다. 아기를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것을 꿈꾸었다. 곧 태어날 아 기에게는 찬란한 빛이 비치는 유리창, 분수가 있는 정원, 대리석으로 지은 집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이 소중한 아기가 대학교수나 작은 나라의 왕 정도는 되길 소망했다. 가난한 엘리자베스 부인의 옆집에는 키가 작은 노인이 살았다. 그 노인이 외 출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외출 할 때는 차양이 달린 모자를 깊숙 히 눌러 썼으며, 녹색 박쥐 우산을 들고 외출하였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 이 술병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모자 밑으로 빛나고 있었다. 들고 있는 박쥐우산의 손잡이는 고래의 뼈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러한 모습의 노인을 무서워 하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떠한 사정 때문에 그 노인이 여기에서 생활을 한다 고 생각하였다. 그 노인은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 어가면, 그 노인이 살고 있는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아주 작고 정교한 악 기 소리가 울려나왔다. 여러개의 악기를 동시에 연주할 때 나는 듯한, 이상한 소 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천사와 물의 정령이 합창 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어머니들은 이렇게 대답하 였다. “아니야, 저것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란다.” 빈스반겔 노인은 엘리자베스 부인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아직까지 서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빈스반겔 노인은 엘리자베스 부인이 사는 집의 창문 을 지나갈 때마다 아주 친근하게 인사를 하였다. 엘리자베스 부인도 반갑게 인 사를 하면서 그 노인이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날이 저물어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엘리자베스 부인은 창가에 앉아, 죽은 남 편을 그리워하거나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 하였다. 이 모습을 본 빈스반겔 노인 은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은구슬을 굴리는 듯한 위로의 음악을 엘리자베스 부인 에게 흘려 보냈다. 그 노인의 집에는 해묵은 제라늄 화분이 창가에 놓여져 있었 다. 노인은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제라늄의 잎은 언제나 푸르렀으며 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조그마한 떡잎 하나도 시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부인 이 매일 아침마다 물을 주거나 다듬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몹시 사납게 몰아쳤다. 모스타케르 거 리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가엾은 엘리자베스 부인이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아기를 낳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나이 많은 부인이 초롱불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물을 끓 이고 포대기를 준비하였다. 아기가 태어날 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나이 많은 부인에게 맡겼다. 얼마 후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는 깨끗한 포대기에 쌓인 채 잠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나이 많은 부 인에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빈스반겔 노인의 부탁으로 오게 되었어요.” 그 부인이 대답하였다. 산모는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눈을 떴다. 집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으며 그녀를 위해 따뜻한 우유가 준비되어 있 었다. 작은 사내 아기가 그녀 곁에 누워서 울고 있었다. 나이 많은 부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아기는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아기를 보자 죽은 남편 생각이 났다. 태어난 아기를 보지도 못하고 죽은 남편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 렸다. 하지만 가슴에 안고 있는 아기 때문에 곧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엘리자 베스 부인은 아기와 함께 잠이 들었다. 산모가 잠에서 깨어나자 우유와 스프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아기는 깨끗한 새 포대기에 쌓인 채 자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다음, 산모는 기력을 회복하였다. 아기의 시중도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회를 해 줄 대부가 필요 하였다. 어두워질 무렵 그녀는 빈스반겔 노인을 찾아갔다. 안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 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주저하면서 어두운 문을 두드렸다. 빈스반겔 노 인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음악이 멈추었다. 낡고 조그마한 램프의 빛이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책을 비추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친절한 분을 보내주신 데 대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을 시작해서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그 분에게 사례를 하겠습 니다. 아기는 남편의 이름처럼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었습니다.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싶은데, 대부를 해주실 분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마침,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빈스반겔 노인은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인께서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될 때, 아기를 보살펴 줄 훌륭한 대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외롭게 사는 노인이라 소개를 할 만한 사 람이 없군요. 나라도 대부가 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가난한 엘리자베스 부인은 매우 기뻐하면서 노인에게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 탁하였다. 일요일 아침, 두 사람은 교회로 가서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아 기를 낳을 때 돌보아 주던, 나이 많은 부인도 함께 참석해서 이 타렐짜리 은화 를 선물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그 돈을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나이 많은 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사양하지 말고 받으세요.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달리 쓸 데도 없는 돈이니 까요. 어쩌면 이 은화가 아기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빈스 반겔 노인으로부터 이미 사례를 받았어요.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지내왔습니다. 부인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그들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손님을 위하여 커피를 끓였 다. 빈스반겔 노인은 과자를 가져왔다. 아기의 세례를 축하하는 모임이 소박하게 치루어졌다. 아기는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빈스반겔 노인은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우구스투스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커다란 성이나 금화로 가득한 자 루를 선물하고 싶지만, 그러한 것들은 나에게 없군요. 대모가 은화를 선물한 것 처럼 나도 은화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아기를 위하여 행복하고 좋은 일들을 빌었겠지요. 그 중에서 아기에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생각해 두 십시오. 그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의 소원만 가능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이 깊어서 음악 소리가 들리면, 그 소원을 아기의 왼쪽 귀에 다가 말하세요.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빈스반겔 노인은 서둘러서 돌아갔다. 대모를 서 주었던 나이 많은 부인도 함 께 나갔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홀로 앉아 있었다. 아기의 요람 안에 일 타렐짜리 은화 두 개가 들어 있지 않고 과자가 식탁 위에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모두 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요람 곁 에 앉아 아기를 흔들어 주면서 무엇이 가장 훌륭한 소원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 기를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어떨까. 아기를 아름답게 자라도록 해 달라는 건 어떨까. 힘이 세게 해 달라면 어떨까. 총명하고 슬기롭게 자라도록 해 달라면 어떨까, 오랫동안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을 계속 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지쳐 버렸다. “아마, 빈스반겔 노인이 농담을 하였을 꺼야.” 그녀는 혼란한 생각들을 지우려고 애썼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많은 일들을 정리한 뒤 지친 그녀는 요람 곁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그때 빈스반겔 노인의 오두막집에서 아름답고 섬세한 음악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감미롭고 황홀한 음악이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 는 다시 빈스반겔 노인의 말을 생각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노력을 했다. 보다 좋은 소원을 생각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머리 속은 더욱 어지러웠 다. 그래서 아무런 소원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초조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음악 소리는 조금씩 약해지고 낮아졌다. 음악이 멈추면 모든 것이 수포로 끝난 다. 그녀는 더욱 안타까웠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가쁜 숨을 쉬면서 아기에게 몸 을 굽혔다. “아가야, 나의 소원은 네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사이에 아름다운 선율은 끝나려 하고 있었다. 엘리 자베스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면...” 음악 소리는 완전히 그쳤다. 어두운 방안은 아주 조용하였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불안과 걱정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가야, 나는 너를 위해서 가장 좋다는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으로 좋은 것인가는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더라도, 이 엄마보 다 더 깊이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튼튼하게 자라났다. 그는 밝은 눈매를 가진 귀여운 소년이었 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세례를 받 던 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를 아주 귀여워 하였다.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하면서 많은 호의를 보여주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 에게 먹을 것을 건네 주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나쁜 장난을 치더라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귀여운 애는 무슨 장난을 치더라도 그저 귀엽기만 하단 밀이야.” 아우구스투스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부인과도 친하게 지내려 고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일거리를 많이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투 스의 어머니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풍요로와졌다.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걸어가면, 사람들은 반가운 인사를 하면서 전송해 주었 다. 아우구스투스 가장 좋아하는 곳은 빈스반겔 노인의 집이었다. 노인은 가끔씩 저녁 나절에 그를 불렀다. 오두막집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불빛이 난로의 작은 구멍으로 가늘게 새어 나왔다. 빈스반겔 노인은 마루에 깔아 둔 모피 위에 아우 구스투스를 앉게 하였다.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아우구스 투스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아우구스투스는 반 쯤 감겨진 눈으로 졸린 듯이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름답고 장중한 음악의 선율이 울려 나왔다. 아우구스투스가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노인의 방은 작은 아이들 로 가득 찼다. 몸에서 찬란한 빛이 나는 아이들이었다. 금빛의 날개를 가진 아이 들은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었다. 짝을 지어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 다. 그것은 즐거운 마음과 순결한 아름다움이 합쳐진 소리였다. 지금까지 아우구 스투스가 보았던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커서 어린 시절 을 생각할 때마다 추억 속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은, 친절한 노인의 조용하고 어두운 방과 난로 속의 빨간 불꽃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금빛으로 밝게 빛나 면서 날아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조금씩 성장하였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가끔씩 아우구스투스가 세례를 받던 날을 회상하였다. 소년은 어디를 가 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호도나 과자, 장난감 등을 선물로 주는 사 람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있었 다. 정원에서 꽃을 따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는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정성을 들여서 어머니가 마련해 준 음식도 먹지 않았다. 엘리 자베스 부인은 너무 서운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우구스투스는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머니에게 거칠게 몇 마디의 말을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그를 꾸짖으며 벌을 준 적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소리 내어 울었다. 모든 사람들이 상냥하게 잘 대해 주는데, 어머니만 나를 야단친다 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슬펐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는 이내 풀렸다. 그녀는 아들 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입을 맞추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차라리 소원을 말하지 않았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후회하면서 이따금씩 두려움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빈스반겔 노인의 창문 앞에서 작은 가위로 제라늄 화분을 다듬고 있었다. 울타리 뒤편에서 아우구스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 지 살펴보기 위하여 그녀는 울타리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담장에 기대 서있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약간 거만한 듯한 표정이 었다. 그의 앞에 어느 소녀가 서서 수줍은 듯이 말하고 있었다. “넌 정말 아름답구나. 내게 입을 맞추어 주지 않겠니?” “싫어.” 이렇게 말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두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소녀는 다시 말했다. “그 대신 너에게 선물을 줄께.” `도대체 뭘 주겠다는 거야?“ 소년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에게 두 개의 사과가 있어.” 소녀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우구스투스는 경멸하듯이 말하고는 떠나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그를 붙잡고는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나는 아름다운 반지를 가지고 있어.” “어디, 보여줘.” 아우구스투스가 말했다. 소녀는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주었다. 그는 반지를 햇빛에 비추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 반지를 마음에 들어했다. “좋아, 입을 맞추어 줄께. 하지만 한 번뿐이야.” 소년은 가볍게 형식적인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제부터는 나하고 같이 놀자.” 소녀는 정답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소녀를 거칠게 밀어 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귀찮게 굴지마! 나에게는 같이 놀아야 할 아이들이 많단 말이야.” 소녀는 울면서 뛰어갔다. 그는 지겹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반지를 빙빙 돌리면서 살펴보 더니 휘파람을 불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냉정하고 거만한 태도에 놀랐다. 꽃을 자르던 가위를 멈춘 채, 머리를 내저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저녁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낮에 보았던 일을 꾸짖었 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파란 눈을 빛내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뉘 우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부르거나 어리광을 피우며 어 머니에게 매달렸다. 그 태도가 몹시 귀여워서 어머니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머니는 갑작스럽게 엄한 교육을 시켜서는 안되겠다고 바꿔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사람인 빈스반겔 노인에게 벌을 받았다. 빈스반겔 노인은 침울한 목소리로 아우구스투스에게 말 했다. “오늘은 난로에 불이 타오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도 들리지 않아. 네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작은 천사들이 슬퍼하고 있는 거야.” 소년은 말없이 물러 나왔다. 그는 침대에 엎드려서 서럽게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은 착하게 행동하여 노인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 로에 불이 타오르는 일은 차츰 드물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어리광을 부린 다고 해서 노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열 두 살이 되었 을 때, 빈스반겔 노인의 집에서 천사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득한 꿈처럼 되어 버렸다. 간혹 꿈 속에서 천사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 다음 날에는 훨씬 거칠게 행동하면서 소란스럽게 굴었다. 엘리자베스 부인은 오래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이 귀엽고 잘 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 다.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언제나 근심스러울 뿐이었다. 어느 날 아들을 가르치 는 학교의 선생님이 그녀를 찾아왔다. 아우구스투스를 큰 도시의 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키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이 문제에 관해 빈스반 겔 노인과 의논을 하였다. 따사로운 봄 날 아침, 한 대의 마차가 아우구스투스 집 앞에 도착하였다. 아우 구스투스는 새로 만든 옷을 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빈스반겔 노인과 어머 니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도시로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 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금발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주면서 축복을 해 주었다.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는 낯선 세계로 떠나갔다. 여러 해가 지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대학생이 되어서 빨간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 식을 빈스반겔 노인이 보냈기 때문이다. 청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해질 무렵 고향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늠름하게 자란 아들은 하얀 침대 위에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어머 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침대에 엎드려 어머니의 차가운 손에 입을 맞추고 는 밤새 흐느껴 울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손이 차가와지고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 지 무릎을 꿇고 앉아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뒤, 빈스반겔 노인은 아우구스투스의 팔을 잡고 자기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청년에게 그 집은 전보다 다욱 낮고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창문 틈 사이로 어 렴풋한 빛이 새어 들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말했다. “난로에 불을 피워야 되겠다. 그러면 램프 불은 꺼도 될 것이다. 너는 내일 떠나야 하겠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은 조그마한 난로에 불을 피웠다. 두 사람은 의자를 난로 가까이 옮겨 앉 았다. 그들은 마주 앉아서 조금씩 타들어가는 장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이 사그러들자 노인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잘 가거라, 아우구스투스. 언제나 너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겠다. 어머니는 착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음악도 들려주고, 작은 천사도 보여주고 싶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언 제나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네가 진정으로 듣기를 바란다면, 다 시 들을 수 있다. 이제, 이별의 악수를 하자. 늙고 지친 나는 잠 자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아우구스투스는 빈스반겔 노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는 힘없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고향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아침,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난 그는 빈스반겔 노인이 말한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잊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는 날마다 향락 을 즐기며 살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처녀들 이 있으면 비웃었다. 매혹적인 춤을 추고, 멋있게 말을 타는 그는 호화로운 여름 밤의 축제에서 처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부유한 미망인의 애인이 되었다. 그 미망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다. 그는 파리나 로마로 여행을 다녔으며, 그 미망 인의 호화스러운 침대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 람은 순결하고 착한 금발의 처녀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밤마다 그녀의 집 을 찾아갔다. 그가 먼 여행을 떠나면, 금발의 처녀는 그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 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 처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공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기가 싫어졌다. 부유한 애인 에게도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처럼 말과 개를 데리고 생활하였다. 필요한 돈은 도박으로 벌어 들였다. 그는 교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마치 어렸을 때 소녀의 반지를 받았던 것처럼. 그의 눈과 입술에는 사람들을 끄는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여자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그를 둘러쌌으며, 남자들은 그와 친근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 나 어느 누구도 아우구스투스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하고 타락하였는지 알지 못 했다. 그의 영혼은 병들어 있었다. 그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에 싫증이 난 그는, 가끔씩 변장을 하고 낯선 거리 를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어디를 가든지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따라 주었다. 사랑한다며 자신을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무척이나 우습게 여겨졌다. 그 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날마다 그는 개와 함께 사냥을 하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산 속에서 사 슴 사냥을 즐겼다.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한 여자들의 사랑보다도 사슴잡는 일 이 그를 더욱 기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배를 타고 여행을 다녔다. 항해를 하는 도중에 아름다운 귀부인을 만났 다. 그녀는 북구 출신의 귀부인이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아름답고 사 랑스러웠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관심 한 듯 그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이번 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항상 그녀의 주위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다른 사 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점잖게 행동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 부인의 남편은 아우 구스투스의 마음을 끌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배가 남구의 항구 도시에 닿았다. 여행자들은 낯선 도시를 구경하기 위하여 배에서 내렸다. 그 때까지 귀부인과 단 둘이 있을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열망을 숨길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거리의 번잡한 인파 속에서 그녀와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작고 어두운 골목 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아우구스투스와 단 둘이 있 게 되자 두려움을 느꼈는지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는 망설이는 그녀를 밝은 곳 으로 데리고 갔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애원을 하였다. “나와 같이 이곳에서 도망칩시다.” 부인은 하얗게 질린 채, 시선을 떨구었다. “안돼요. 그것은 신사가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닙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야단을 치듯이 말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은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신사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소리쳤다. “나는 단지 사랑에 빠진 남자일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제외하고는 아 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 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나와 함께 있어 주십시오.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녀는 파란 눈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원망하듯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시게 되었나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저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입니다. 저는 당신이 좋아요. 당신이 나의 남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요.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입니다. 아, 사랑은 어째서 나를 혼란시키 는 것일까요. 하지만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량하지 않고 행실도 나쁜 사람 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저는 남편을 그리 사랑하지 않지만, 그와 함께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당신은 나의 마음을 전혀 모 르고 있었겠지만.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저를 배로 데려다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의 무분별한 행동을 막기 위해 비명을 지르겠어요.” 그가 아무리 애원을 하거나 매달려도 그녀는 그의 행동을 외면하였다. 그가 그녀를 배로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혼자서라도 가버렸을 것이다. 그는 깊은 수렁에 빠진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가 꿈꾸었던 행복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걷잡을 수 없 이 타락해 갔다. 도덕이나 성실은 그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었다. 그 는 미덕을 발로 짓밟는 행동만 했다. 정숙한 여자를 유혹하거나, 진실한 사람들 을 우롱하고 배신했다. 많은 부인과 처녀들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귀족 가문의 청년들을 타락의 길로 유혹했다. 그가 즐기지 않은 향락과 악덕은 하나도 없었 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데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는 바닷가의 별장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그곳을 찾아오는 친구들 을 괴롭혔다. 그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고 싶은 감정의 유혹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생활에 심한 권태를 느꼈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사랑의 낭비적인 생활에 지쳐 버린 것이다. 그는 타락의 연속인 생활을 반 성하고 진실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도 인생의 허무와 좌절을 극복할 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병에 걸렸으며, 휴식과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편지가 계속해서 왔으나, 그는 한 통도 읽지 않았다. 그를 걱정 하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하인에게 안부를 물어 보았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황량한 바다가 바라보이는 방에 앉아서 고독 을 삭였다. 그의 생활은 너무나 공허해서, 밀려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잿빛 의 파도처럼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랑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높은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삶을 멈추려는 그의 모습은 아주 비참해 보였다. 갈매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는 생기를 잃어 버린 눈으로 날아가는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냉혹하고 심술궂은 미소를 띤 얼굴로 하인을 불렀다. 그의 친 구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도록 하인에게 명령하였다. 쓸쓸하게 비어 있는 집과 자신의 시체를 친구들에게 보여주어서 찾아온 손님들을 마지막으로 비웃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이 오기 직전에, 독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고 계획하였다. 허위로 꾸며지는 파티가 열리기 전 날이었다. 그는 집에 있던 하인들을 모두 쫓아냈다. 짙은 정적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지중해 의 사이프러스 섬에서 만들어진 포도주에 강한 독약을 넣어서 마시려고 하였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침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키가 작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조용하게 다가와서 독약이 들어 있는 술잔을 잡았다. 노인은 귀에 익은 목소리로 물었다. “잘 있었니, 아우구스투스.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뜻밖의 일에 놀란 아우구스투스는 몹시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는 빈정대면서 말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아직도 살아 있었군요. 할아버진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 모양이죠? 저는 지금 피곤합니다. 술을 마시고 조금 쉴까 하는데,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나는 모두 알고 있단다.” 빈스반겔 노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잠을 자기 위하여 이 잔을 비우겠다고 하였지. 하지만 나는 이것이 너 에게 마지막 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단다. 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이야기를 나 누고 싶어. 나는 먼 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몹시 지쳐 있단다. 내가 먼저 마시고 기운을 차려도 되겠지?” 빈스반겔 노인은 아우구스투스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단숨에 독약이 들어 있는 포도주를 마셔 버리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 하게 질렸다. 그는 노인의 어깨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당신이 무얼 마셨는지 아세요?” 빈스반겔 노인은 백발의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사이프러스 섬에서 만든 포도주구나. 향이 무척 좋군. 너는 어느 정도 여유있게 생활을 하는 모양이군. 시간이 없구나. 나의 말을 잠시만 들어다오. 오 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우구스투스는 두려움에 떨면서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빈스반겔 노인이 금방 쓰러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노인은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 아서 평안한 표정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한 잔의 포도주가 나의 생명을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너의 호의는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예전처럼 함께 이야기를 해 보자. 너는 방탕한 생 활에 진력이 난 모양이구나. 나는 언제나 너를 이해할 수 있단다. 내가 이 집에 서 나가거든 다시 술잔을 채워 포도주를 마시거라. 하지만 그 전에 들려줄 이야 기가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벽에 기대어 서서 나이 많은 노인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 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낯익은 목소리는 그에게 과거의 환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겼다. “독약은 내가 마셔 버렸다.” 노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의 불행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네가 세례를 받던 날, 너의 어머니 에게 너를 위한 한 가지 소원을 빌도록 말했단다. 너의 어머니는 너에게 가장 좋은 소원을 빌었단다. 비록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이 루게 해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네가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소원은 저주가 되어 버렸지. 나는 네가 난로가에 앉아서 작은 천사의 노래를 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단다. 다시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맑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다. 나는 다 시 해 보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네 어머니의 소망이 너에게 해로움을 남겨 주었 구나. 아우구스투스, 무엇이든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 준다면, 너는 어떤 것을 원하겠니? 보물이나 돈을 바라지는 않겠지? 권력이나 사랑도 싫증이 났을 것이 고. 만약 타락한 생활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고 너를 즐겁게 만들어 줄 이상 한 힘이 있다고 한다면, 너는 무엇을 원하겠니?” 아우구스투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 지 않았다. 그는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의 말씀은 무척 고맙습니다. 하지만 헝클어진 나의 생활 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역시, 제가 하려던 일을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와 주신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 노인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아우구스투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 밤마다 너는 나를 찾아왔었 지. 그 무렵에는 너도 행복하지 않았니?” “예, 그 때에는 그랬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바랜 빛깔로 떠 올랐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 록 소원을 말 할 수도 없잖아요. 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 면...” “아우구스투스, 네 말처럼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향에 있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거라. 네가 학생일 때 밤마다 가엾은 처녀를 찾아간 일, 아름다운 귀부인하고 항해를 하였던 일, 네가 행복했던 시절의 일들을 생각 해 보거라. 그러면 무엇이 너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알게 될 거다. 그것을 바라 면 되는 거야.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다오.” 아우구스투스는 눈을 감고 자기의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어두운 복도에서 밝 은 빛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주위가 무지개처럼 밝고 아름다웠 다. 하지만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캄캄한 어둠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지금처럼 어둠에 갇히게 된 과정을 회상하였다. 멀리에서 작은 빛이 아득하게 보였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빛이 무엇인가를 알 아내었다. 그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다시 해 보겠어요.” 그는 고개를 들고 빈스반겔 노인에게 말했다. “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힘을 가져다 주세요. 그 대신 제가 사람들을 사 랑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아우구스투스는 노인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빈스반겔 노인에 대한 사랑이 예전처럼 타올랐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말과 몸짓을 기억해 냈다. 빈스반겔 노 인은 그를 침대로 데려갔다. 노인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되었다.” 노인은 낮은 소리로 그를 위로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제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그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빈스반겔 노인은 쓸쓸한 집에서 걸어 나왔다. 아우구스투스는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 다. 파티에 초대를 받은 친구들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화 를 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미소와 농담으로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하였 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서 모든 힘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우 구스투스를 보자 화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이 사기꾼!”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에게 빌려간 돈은 어디 있지?” 어느 사람이 커다랗게 말했다. “내가 빌려주었던 말은 어떻게 했어?” 아름다운 부인은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나는 너의 잘못과 비밀을 알고 있었어. 그 동안 나는 너를 무척 증오했지. 이 비열한 자식!” 눈이 움푹 패인 젊은 사나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달려들었다. “나를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 너는 잘 알고 있겠지? 내 청춘을 타락시킨 나쁜 자식!” 그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하였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 많 은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달려들어서 울분을 풀었다. 옷이나 귀중품들도 남기지 않고 가져갔다. 마루에 쓰러져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얼 굴을 닦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충혈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이마 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추악한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이것은 죄의 보답이야.”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씻었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소란이 시작되었다. 집을 저당잡힌 빚장이, 아내를 빼앗겼던 남편, 그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은 아이들의 부모, 해고당한 하인과 하녀들, 경찰관과 변호사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한 시간이 지난 다음, 그는 결박을 당한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 남 아 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비난하였다.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그 의 얼굴에 흙을 집어 던졌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의 죄악으로 고발당했다. 사람들이 재판관 앞에서 그의 과거의 잘못을 고소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하인들도 등을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증오와 혐 오의 빛만 남아 있었다. 그를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독방에 갇혔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그는 판사와 증인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는 증오에 가득 찬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증오에 찬 표정 밑에는 정다움과 애정의 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 랑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단 한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사과하고, 그들에 대해 좋은 점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판결을 받은 그는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는 열병으로 앓아 누웠다. 어머니, 빈스반겔 노인, 북구의 귀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어두운 날들을 보내며 말없이 앉아 있 었다. 날이 갈수록 외로움이 커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이자 위안이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 람이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차나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갔다.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일, 꽃, 장난감, 신문 등을 파는 모습도 여전하였다. 다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함께 음악을 듣고 샴페 인을 마시면서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마차 가 지나간 다음, 그는 흙먼지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 속에서 느꼈던, 질식할 것만 같았던 무서운 공허와 고독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가까운 집 에 들어가거나 뒷마당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부탁했을 때, 예전에는 그토록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던 사람들이 이제는 적의를 품은 듯한 표정으로 냉대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감동하였다. 학교에 가거나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귀여웠다. 아이들은 주름진 손을 햇 빛에 녹이며 앉아 있는 노인 옆으로 모여들었다. 연모의 눈빛으로 처녀의 뒤를 따라가는 젊은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마중나온 아이들을 안고 가는 노동자, 마 차를 타고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 헌신을 바쳐 섬긴 주인에게 쫓겨나 가로등 아 래 서 있는 하녀의 모습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징표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모두 가 사랑스럽고 소중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아우구스투스에게 반성의 계기를 주 었다. 아무리 가련한 것이라도 자신에게 느꼈던 환멸보다 더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 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으며, 옷과 구두는 낡은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나 걸음걸이도 매력을 잃어버렸다. 덥수룩한 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 했다. 단정한 옷차림의 사람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가난한 사람 들조차 그와 함께 있는 것을 피하면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어린 아이들이 빵집의 문을 열지 못하면, 그가 열어 주었다. 때로는 장님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길을 안내해 주거나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경우에 애정이 담긴 밝은 미소, 친절한 인사, 이해와 동 정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친구 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였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한 눈인사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남들로부터 방 해받지 않기를 바랬다. 아우구스투스는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한 일도 많고 비참 한 일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 뒤에는 즐거운 웃음이 있고, 가난 속에서 도 기쁨과 위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밝게 했다. 어떤 길목을 돌아서면 어린 학생들 이 몰려 나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들이 아우구스투스를 놀리거나 난처하게 만들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진열장 유리나 우물에 비 친 얼굴을 보고, 자신이 몹시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은 그에게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노력하며 살아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열심히 노 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들어서 오랜 기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 그는 벅찬 행복을 느꼈다. 중병을 앓는 환자의 표정에는 인내심이 깃들어 있었 고, 회복되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기쁨의 빛이 밝게 빛났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었다. 죽은 사람들의 얼굴조차도 아름답게 보였다. 사랑스럽고 맑은 모습을 지닌 간호원들의 사랑과 인내도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가을이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 스는 퇴원을 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방랑을 계속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찾아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의 머리카 락은 새하얗게 변했다. 피부에는 잔주름이 무수히 잡혔으며, 병색이 짙은 눈은 언제나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기억력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만족했다. 세상은 참으로 훌륭하고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자, 그는 어느 마을을 찾아갔다. 어두운 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을의 개구장이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눈을 뭉쳐서 던졌다. 마을은 밤의 적막에 갇혀서 한적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낯익은 골 목같이 정겹게 여겨졌다. 비좁은 골목길로 계속 들어가자,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어머니의 옛 집과 빈스반겔 노인의 낡은 집이 보였다. 빈스반겔 노인의 집에서 비치는 불빛은 겨울 밤의 대기 속에서 빨갛고 아늑하게 빛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빈스반겔 노인은 그를 다정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방은 따뜻하고 조용하였다. 작은 난로에서는 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빈스반겔 노인이 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는 뜻 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몹시 피곤하겠지.” 노인은 바닥에다가 오래 된 모피를 깔았다. 두 노인은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불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먼 길을 걸어서 왔군.” 빈스반겔 노인은 말했다.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전 조금 피곤할 뿐입니다. 할아버지 집에서 쉬 어갈 수 있을까요? 내일은 다시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물론이야. 천사들을 다시 만나보지 않겠니?” “보고 싶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정말 우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구나.”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착한 마음을 되찾았어. 자네의 눈빛은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군. 정말 잘 찾아왔네.” 누더기를 걸친 아우구스투스는 빈스반겔 노인 곁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는 너 무나 지쳐 있었다. 따사로운 온기와 난로의 불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 이 혼란스러웠다. 현재와 과거를 잘 구분할 수 없었다. “빈스반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조용하게 말했다. “제가 오늘 잘못을 해서 어머니가 울고 계셔요.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잘 말 씀드려 주시겠어요? 저는 착한 아이가 될 거예요.” “그래, 안심하거라.” 빈스반겔 노인은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단다.” 난로의 불꽃이 사그러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어린 시절처럼 졸리운 눈 으로 약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이 부드럽게 들려왔다. 작은 천사들이 섬세한 선율에 맞추어 멋있는 춤을 추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귀를 기울이면서, 되찾은 천 국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 놓았다. 문득 아우구스투스는 어머니가 부르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지 쳐 있었다. 빈스반겔 노인은 어머니에게 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아 우구스투스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빈스반겔 노인은 그의 손을 가지런히 모은 다음, 조용해진 심장에 귀를 대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흐르는 꿈 나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하여 시끄러운 술집에 앉아 있었다. 피요르드 식 바다가 창문으로 보였다. 아무것도 나의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다. 문득 죄의식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나의 눈길이 끌렸다.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애를 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흩날리는 머 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불안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창 백한 얼굴에서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 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깊고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명의 젊은이가 술집으로 들어섰다. 낯선 그들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그 여 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내 앞에도 와서 자신들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그 들은 몹시 당돌하게 행동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잘 만들어진 멋진 적갈색 외투가 나에게 수치와 질투를 불러일으켰 다. 거칠 것 없는 그들의 당당한 태도와 단정한 옷차림이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두 젊은이는 나의 손을 잡으며 조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옷차림이 엉망이라는 것과, 그들이 나를 냉소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마음이 상해서 눈길을 돌렸다. 몹시 부끄러 운 기분으로 아래를 바라 보았다. 나는 구두도 신지 않은 채 양말차림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짜증나고 궁핍한 생활에서 언제쯤 헤어날 수 있을까, 언 제쯤 단정한 옷차림으로 점잖은 사람들이 모인 술집에 당당히 앉아 있을 수 있 는 것일까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가슴을 졸이면서 조금이라도 나의 부끄러운 발 을 가리기 위하여 왼쪽 발을 오른쪽 발 위에다가 올려 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는 푸르게 펼쳐진 바다가 보 였다. 바다의 거친 파도는 어두운 창문 안으로 악마처럼 거칠게 밀어닥칠 것 같 았다. 나는 슬픈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겐 언 제나 슬픈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적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을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그 의 얼굴은 건강한 빛을 띠고 있었고, 수염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나는 녹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양말에 구멍이 나 있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 스러운 일이었다. 적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은 나를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그는 함께 온 사람을 건드리면서 나의 발을 가리켰다. 그 사람 역시 비웃는듯한 웃음을 지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시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이렇게 소리치면서 창문쪽을 가리켰다. 적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창문 반대 방향으로 몸 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얼핏 보기에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이런 술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랑아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술집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나는 탁자 밑으로 몸을 구부렸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슬리퍼가 눈에 띄 었다. 그것은 나의 발꿈치 뒤쪽에 놓여 있었다. 슬리퍼를 집어 올리려고 하자 나 의 손에서 미끌어 떨어졌다. 나는 다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하여 슬리퍼를 손으 로 꼭 쥐어서 내 발 앞에다 내려 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슬리퍼의 이용가치가 생각났다. 그래, 이 슬리퍼는 부드럽지만 약간 두툼하지. 나는 슬리퍼를 치켜 들고 약간 흔들어 보았다. 무척 기분이 좋았 다. 고무호스나 몽둥이는 이 슬리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이탈리아 말로 `칼지글리오네`라고 불렀다. 나는 적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의 머리를 겨냥해서 슬리퍼 한 짝을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슬리퍼로 머리를 맞은 그는 몇 번 머리를 흔들더니 뒤로 넘어졌다. 이제 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에게 어떤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두 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들을 향하여 남은 슬리퍼 한 짝도 던졌다. 다행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사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약간 의 환호성이 일면서 술집 분위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적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이 더 이상 밉지 않았다. 그가 친근하고 사랑스러우며 소중하게 여겨졌다. 내가 그의 창조주이자 주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자 슬리퍼를 던졌다. 그의 잘못 된 태도를 고쳐주고 싶었다. 나의 교훈이 담긴 슬리퍼를 맞은 그는 상냥하고 온 순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창조물이며 작품처럼 느껴졌다. 내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때려 주자 그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한 것 같았다. 그의 인격이 비로소 완성된 것 같았다. 나의 탁자로 다가온 그는 마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 듯이 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좋아.” 나는 눈짓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손을 잡은 그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폴이라고 합니다.” 즐거운 감정이 나를 감싸안았다.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움이나 처연함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바다는 검푸른 빛을 띠 고 있었다. 두터운 잿빛의 구름이 주위의 산을 에워싸고 있었다. 피요르드 식 해 안에는 검푸른 파도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열대성 태풍이 성난 듯이 원을 그리며 불어왔다. 나는 태풍이 시작된 방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번개가 무 섭게 번쩍거렸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천둥 소리가 울려 나왔다. 열대성 태풍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가며 거세게 불었다. 하늘 저편으로부터 검은 폭풍이 대리 석의 결처럼 몰려들었다. 일렁이는 바다로부터 거대한 파도가 성난 듯이 솟구쳐 올랐다. 폭풍우의 포말이 부서져 내렸다. 거센 파도의 물보라가 나의 얼굴을 적 셨다. 검게 뒤덮인 산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웅크린 산 의 모습과 음습한 침묵은 무엇을 간청하기 위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 수줍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한 여자가 검은 머리를 길게 날리며 서 있었다. 술집에서 본 창백한 얼굴의 여자였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친절하게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결 치는 파도가 나의 가슴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은 파도에 실려서 조 용하게 흔들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올려 놓았다. 그녀 는 나를 마주보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태도는 아름답고 자연스러 웠다. 따뜻한 체온을 지닌 그녀는 진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약간 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그리고 수상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비가 거세게 몰아치고, 높은 파도가 일렁이는 곳으로부터 떠나온 것이다. 그 정원은 폭풍우가 닿을 수 없는 곳이었 다. 왕관처럼 생긴 오래된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정원에서는 온화 한 아름다움이 풍겨 나왔다. 시가 들려오고 교향악도 흐르고 있었다. 경건한 분 위기의 정원은 나무들과 함께 슈베르트의 목가적인 관현악을 들을 수도 있는 곳 이었다. 그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나를 향수에 젖어 들게 하였으며, 사랑으로 가득 찬 사원으로 유혹하였다. 정원은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여자, 창백한 표정의 어린 소녀가 나에게서 어떻게 떠 나갔는지 하늘의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뿌연 유리의 뒷면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나에 대한 비난과 힐책의 소리가 아련한 기억의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비난의 소리 때문에 나의 친구이자 아들인 폴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함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창백한 표정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친숙함이었다. 그들의 얼굴 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으로부터 떠올랐다. 착함, 내면의 어두움, 온화한 영혼의 요람,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기억이 떠오 른다. 그것은 바로 불구의 시대인 것이다. 근원으로부터의 격동이 머물러 있으 며, 그 근원 아래에는 태고의 시대가 원시림의 꿈과 더불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영혼은 어두운 근원을 더듬고 다니면서 순수한 여명의 충동을 느낀다. 나는 근 심에 찬 영혼이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당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 다. 음식이나 수면도 당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태초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 럼, 그 곳에서는 파도가 당신의 주위를 부드럽게 에워싼다. 당신은 파도가 된다. 당신은 영혼의 나무가 된다. 당신은 새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간다. 물고기로 변 해서 바다를 헤엄쳐 다닌다. 빛을 받아들여서 빛이 된다. 어둠을 얻어서 진실한 어둠이 된다. 헤엄치거나 날아디니면서, 끊어진 실처럼 방황하는 우리의 가녀린 영혼을 되찾아 다시 이어 준다. 부서진 날개를 다시 다듬어 준다. 우리는 더 이상 신이 찾지 않는다. 우리가 신이다. 세계는 우리의 것이다. 우 리는 함께 죽음을 찾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꿈을 함께 창조한다. 우리의 가장 아 름다운 꿈, 그것은 바로 푸른 하늘이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꿈, 그것은 바로 바다이다. 우리의 가장아름다운 꿈, 그것은 별이 빛나는 밤이다. 물고기이다. 맑 게 울리는 소리이다. 밝게 비치는 빛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꿈이다. 모두가 우리의 아름다운 꿈이다. 우리는 죽어서 흙이 된다. 우리는 무덤을 찾게 된다. 우리는 별자리를 정하게 된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이다. 울창한 나무들이 우리 의 요람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길은 방사선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다. 집으 로 돌아가는 길이다. 폴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나의 창조물이자 친구이 다. 그는 나만큼 늙은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젊은 친구와 닮았는데, 나는 그 젊 은 친구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그래서 그는 힘을 얻었다. 세상은 내가 아니라 폴에게 순종하였다. 이전의 모 든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 다 우월하게 생각되었다. 우리는 파리라고 불리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앞 에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에는 사다리가 결쳐져 있었으며, 사다리 양편으 로는 가느다란 디딤판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올라갔다. 함께 올라가자고 폴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폴도 나의 옆에서 기어올 랐다. 우리는 지붕이나 나무의 꼭대기처럼 생긴 곳으로 올라갔다. 나는 갑자기 두려 움을 느꼈다. 그러나 폴은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불안 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웃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의 얼 굴과 이름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과거의 기억은 학창시절 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내가 열두 살이었던 시절에서 멈추었다.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때였다. 모든 것이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먹음직스러운 신선한 빵과도 같 은 시절이며 영웅들의 빛나는 모험과 이야기로 가득한 시기이기도 하다. 예수가 사원에서 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때, 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다. 우리는 열두 살 때, 모든 선생님과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학자나 선생님들보다 우리가 훨씬 영리했다. 우리는 그들보다 뛰어났으며, 그들보다 용감했다. 과거의 추억들이 혼란스럽게 밀려왔다. 잃어버린 공책, 선생님으로부터 받던 벌, 새총에 맞아 죽은 새, 주머니 가득히 넣어 두었던 자두, 수영장에서 첨벙거 리며 물장난을 치던 아이들, 찢어진 예복 바지, 마음 속으로 품었던 악한 생각, 세속적인 걱정에 대해 열성적으로 드리던 저녁 기도, 쉴러의 시를 읽으면서 느 꼈던 화려한 감정. 그러나 빠르게 지나가는 여러 장면의 기억은 잔영처럼 남을 뿐이었다. 폴은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과거를 기억 해 낼 수가 없었다. 사다리 밑의 거리는 콩알만하게 보였다. 가늘고 긴 사다리로 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마침내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착하였다. 편편한 널빤지 로 덮여 있는 작은 지붕이 보였다. 옥상의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해 보였다. 그러나 폴은 그 곳으로 건너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서 건너갔다. 나는 편편한 널빤지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 같았다. 나의 눈길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폴이 손으로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낯선 사람들이 우리보다 아래 쪽에 모여 있었다. 어떤 사 람이 밧줄을 타고 있었다. 그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시끄럽게 재잘대는 어린 소녀들도 있었다. 집시나 방랑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가느다란 막대기로 울 타리를 엮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야영할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 었으며, 앉아서 쉬거나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낯선 사람들은 그 지역을 고 향처럼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발 아래 펼쳐진 도시에는 뿌 연 안개가 아득히 쌓여 있었다. 폴이 신기한 광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감동적인 모습이야. 소녀들까지 모두가.”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있었다. 몹시 불안해진 나는 널빤지를 단단 하게 붙들었다. 높은 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사 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다. 낯선 사람들은 바닥에 있 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이렇게 높고 아득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외 롭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모여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내가 얻지 못한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무서운 사다리에서 다시 내려가 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한결 담담해졌다. 갑자기 높은 곳에 대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나는 어는 곳에도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절망감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사다리에 걸친 발이 후들후들 떨렸 다. 널빤지를 밟고 있는 발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몇 분 동안 불안에 떨면서 높 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폴은 나의 앞쪽에 있었 다.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사다리를 붙잡고 발을 내딛었다. 어떤 느낌이 안개처럼 나를 감쌌다. 높은 사다리에 올라와 있다는 위기감이나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한껏 맛보면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갑자기 모든 사물이 안개처럼 불투명해 보였다. 나는 사다리에서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며, 땅 속의 비좁은 구멍이나 지하실의 길을 기어가는 것 같은 불 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늪이나 진창에 빠져서 진흙이 입으로 밀려드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주위가 온통 어둠과 억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갑 자기 엄숙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 어려운 문제들이 생각났다. 근심과 식은 땀, 마비와 추위, 죽음과 탄생의 문제들이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밤이 찾아왔던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우리의 영혼은 숨겨졌다. 흩어진 채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원한 비극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 리는 간다. 우리는 늪에 들어가 몸을 숙여서 건너뛰거나, 질식할 듯 숨가쁘게 허 우적거리기도 한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벽을 기어오른다. 슬픔에 겨워서 울거나 절망으로 작심하기도 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남겨진 삶의 여정을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험난한 난관이 있어도 자신의 힘으로 헤치면서 나아간다. 자욱한 지옥의 연기로 부터 어두운 상징이 나타난다. 작고 어두운 길이 기억의 빛으로 밝게 비친다. 영 혼은 현실을 떠나 영원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눈에 익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나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커다란 방은 조금 어두웠다. 책상 위에는 등잔불이 피어올랐다. 책상은 크고 둥근 모양이었으 며, 그 옆에는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다. 나의 누이와 그녀의 남편이 함께 있었 다. 내가 초대를 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방문을 한 것이다. 그들은 말이 없었으 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나는 답답한 심정으로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방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슬픔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책이나 가 위 등과 같이 하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등 잔을 손으로 쥐었다. 등잔은 매우 무거웠다. 나는 모든 것들이 아주 지겹게 느껴 졌다. 나는 등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 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방은 점점 더 흩어졌다. 등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등잔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방을 미친 듯이 헤매면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였다. 나는 일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누이의 남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시 등잔을 들어올렸다. 누이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잔잔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애잔한 누이의 마음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나는 손을 들어서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커다랗게 소리쳤다. 나를 좀 내버려둬. 제발 가만히 두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슬픈지 너 희는 알지 못해.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부탁이야! 하지만 나의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등잔의 붉은 불빛이 커다란 방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 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나는 깊어가는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은 나 의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싸늘한 바람, 축축한 습기, 우울한 가을, 코를 찌르는 나뭇잎의 냄새, 느릅나무 꽃잎의 흔들림. 가을이다, 가을! 나는 이제까지의 나와 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를 보았다. 나는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창백한 음악가였 다. 이름은 유고 볼프라고 불렸다. 그는 오늘 저녁에 미친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다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매었다. 무거운 등잔을 들고 둥근 탁자와 의 자, 책을 쌓아둔 곳을 살펴보았다. 누이가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는 나를 위로하면서 도와주려고 하였다. 나는 애원하는 몸짓으로 누이의 도움을 거절했다. 슬픔은 커질만큼 커졌다. 마침내 커진 슬픔은 나의 온몸을 절망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주위의 모습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꽃병에는 가 을에 피는 꽃들이 꽃혀 있었다. 적갈색의 모란이 보였다. 모란은 고통스러울 정 도로 향기로운 고독을 뿜어내었다. 모든 사물은 아름다웠다. 등잔의 놋쇠다리조 차도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그것은 위대한 화가의 초상과 같은 고독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운명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슬픔의 그늘은 여전히 나를 뒤덮고 있 었다. 누이의 슬픈 눈빛도 변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꽃의 향기도 그 대로였다.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등잔의 붉은 빛이 피아노의 검은 뚜껑을 적시고 있었다. 불빛은 마치 연주하 는 것처럼 부드럽게 피아노를 감쌌다. 그 빛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불빛의 신비 로움과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이는 피아노를 향하여 걸어왔다. 나는 마음 속으로 애원하면서 간곡하게 거 절하였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나를 짓눌렀다. 고독이나 슬픔으 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독은 운명처럼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리듬은 모든 진실을 말해 주며, 또한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 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머리를 숙였다. 탁자가 머리에 와 닿았다. 새로 운 감성을 가진 볼프의 노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노래는 한편의 아름다 운 시와도 같았다. 어두운 정상, 그대는 아름다운 시대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정상의 뒤에는 고향이 있으며, 고향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상은 눈물과 노래 속으로 고요히 가라앉았다. 울음은 세상을 달콤하게 해체 한다. 은혜로운 마음으로 잠시 녹이는 것이다. 책들은 사상과 시로 가득 찼다. 책들은 잠시 동안의 흐느낌이다. 흐느끼는 영혼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 다. 눈물은 영혼의 얼음이 녹은 것이며, 천사는 흐느끼는 사람과 더욱 가깝게 지 낸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울었다. 온유로운 빛이 일상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검은 관이 보였다. 관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나에게 보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린 소녀가 공기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아름다운 현악기의 음 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처럼 놀라운 광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나의 삶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녀에게 다가서기 위하여 마련된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들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아득히 먼 곳이었다. 나에게 는 슬픈 동경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햇살에 날리는 눈발처럼 세상은 변해갔 다. 가련한 나는 집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갑작스럽게 입이 아팠다. 나는 조심스 럽게 혀로 이빨을 건드렸다. 그러자 이빨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때, 젊은 의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의사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나의 청을 거절하면서 거만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가벼운 웃음이 그의 얼굴에 피어올 랐다. “괜찮습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 나을 겁니다.” 의사는 가까이 다가와서 나의 왼쪽 무릎을 가리켰다. 나는 아래로 손을 뻗어 서 무릎을 잡았다. 그 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손가락을 넣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었다. 피부와 근육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나의 몰락이자, 죽음의 순간이었다. 곧 부패가 시작될 것이다. “다른 곳은 이상이 없습니까?”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없습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떠나가 버렸다. 지쳐버린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다정 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부드러운 표정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까? 높은 계단이 있었다. 난간도 없는, 엄청난 높이의 계단이 위쪽으로 뻗어 있었다. 계단 은 산이나 빙하처럼 보였다. 나는 너무 늦게 왔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 다. 넘어져서 몸을 다쳤지만, 아픔을 참고 올라갔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친 팔 과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였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문이 있었다. 진흙 위를 걷 는 것처럼, 걸음을 옮기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길은 자꾸만 끈적거렸다. 이제는 더 이상 나아갈 길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문은 열려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하게 걸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회색빛 옷을 입 은 어머니는 작은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작은 그물망 속으로 어머니의 머 리칼이 보였다. 느린 걸음걸이와 작은 몸매도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기에 있었다. 이곳에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 그 순결한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끈적끈적한 길을 미친 듯이 걸어갔다. 질긴 나무덩 굴이 나를 휘감아왔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 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약간 조심스러운 걸음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익숙한 솜씨로 옷에 붙어 있는 실먼지를 털었다. 작은 바 구니에 담긴 재봉도구를 꺼내기 위해 어머니는 몸을 구부렸다. 어머니는 작은 바구니에다가 부활절 달걀을 숨겨 두었던 적이 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머니에 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어머 니는 정원의 길을 가로질러서 열린 문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무언가에 귀를 기 울리는 듯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구부리면서 바구니를 잡았다. 내가 아직 어렸 을 때 어머니의 바구니에서 보았던 메모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메모지 위에다 그날 있었던 일이나 생각한 것들을 적어두셨다. `헤르만의 바지가 뜯어졌다` `빨래를 했다` `디킨슨의 책을 빌렸다` `헤르만은 어제 기도를 하지 않았다` 기억이 폭풍처럼 밀려오고, 사랑의 감정이 나를 거세게 짓눌렀다. 나는 문 앞 에서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어머니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원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이리스 어린 시절에 안젤름은 푸른 정원에서 뛰놀곤 하였다. 안젤름은 어머니가 가꾸 는 꽃들 가운데 아이리스를 특히 좋아하였다. 그는 푸른 잎사귀에 뺨을 문지르 거나 손가락으로 잎사귀를 눌러보기도 하면서 아이리스의 향기를 맡았다. 노란 꽃의 아래쪽에는 푸른색 줄기가 자라면서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안젤름은 아이리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피어 있는 꽃들의 모습은, 마치 왕 의 정원에 세워진 황금 울타리와 같았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꿈의 나무가 두 줄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같이 맑고 생기가 넘치는 수맥이 밝게 빛났다. 수맥 위로는 보랏빛 지붕이 왕관처럼 드리워져서 마법의 검은 그늘을 만들어 놓 았다. 안젤름은 꽃의 근원지를 알고 있었다. 노란 꽃의 마음은 푸른 수맥 속에 담겨 있었다. 유리같이 맑은 수맥에서 꽃의 숨결과 꿈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꽃 옆에는 아직도 피어나지 않은 작은 꽃봉오리들이 있었다. 꽃봉오리는 부드러운 줄기에 달린 작은 꽃받침 위에 얹혀져 있었다. 그 꽃봉오리가 어린 꽃으로 힘차 게 피어나는 것이다. 아이리스 꽃은 푸른 나뭇가지와 라일락 사이로 감겨 들어 가곤 하였다. 감겨 올라간 어린 꽃잎에서는 수백 갈래의 수맥이 보였다. 아름다운 정원은 언제나 안젤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젤름은 정원에서 푸른 꽃봉오리로부터 피어난 꽃을 보았다. 조그마한 꽃은 마치 사람의 입술처럼 보였 다. 작은 꽃봉오리들은 오랫동안 꿈꾸어 온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피어나고 있 었다. 안젤름은 꽃들이 피어날 때, 아득한 향기를 내뿜는 영혼의 심연이 준비된 것을 예감한다. 아마도 꽃은 정오나 저녁 무렵, 황금빛 꿈의 숲 속에서 파란 명 주천막처럼 활짝 펼쳐질 것이다. 꽃들이 피어나는 것에 맞춰서 마법의 심연으로 부터 노래가 울려 나온다. 다음날 아침 파란 초롱꽃이 풀밭 가득히 피었다. 정원에는 새로운 울림과 향 기가 채워졌다. 나뭇잎 사이로 향기 가득한 장미가 발그레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아이리스 꽃은 오래 피어 있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면 아이리스는 시들 어 버렸다. 꽃의 단단한 잎사귀만이 차갑고 낯설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덤불에서는 붉은 딸기가 익어갔으며, 아네모네와 앵초꽃 위에는 적갈 색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안젤름은 나비나 돌멩이와 이 야기를 나누었으며, 딱정벌레와 도마뱀을 친구 삼아 놀았다. 새들은 안젤름에게 새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양치류 식물들은 커다란 잎사귀에 숨 어 있는 갈색의 씨를 몰래 보여주었다. 유리조각은 빛을 반사하면서 왕궁의 창 고에 있는 보물처럼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백합이 시들자, 카프친 꽃이 만발하였 다. 장미가 시들자 딸기는 갈색으로 변했다. 꽃들은 차례대로 피어났다. 한 꽃이 시들어 사라지면 다시 다른 꽃이 피어났다. 차가운 바람이 잣나무 가지를 흔들 었다. 빛바랜 나뭇잎이 뒹구는 근심의 계절에도 꽃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창가에는 종려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저녁 하늘에는 은빛의 천사들이 날아다 녔다. 말라 있는 과일의 향기가 정원에 가득했다. 정원의 행복한 세계에는 사랑 과 믿음이 가득 차 있었다. 소나무 잎사귀에는 눈꽃풀이 아름답게 빛났다. 푸른 하늘위로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갔다. 아이리스는 푸른 꽃망울을 피우기 시작했다. 안젤름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안젤름이 가장 좋아하 는 것은 이제 막 피는 아이리스 꽃이었다. 아이리스 꽃받침을 바라보면서 안젤 름은 성서를 읽었다. 아이리스의 향기는 안젤름에게 창조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 아이리스 꽃은 안젤름에게 순결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리스 꽃은 더욱 신비롭게 피어났다. 다른 꽃들도 향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젤름에게는 파란 아이리스 꽃이 다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하였다. 안 젤름은 관목 사이에 피어 있는 꽃들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꽃의 영혼을 들여다보 았다. 안젤름은 밤마다 아이리스의 꿈을 꾸었다. 아이리스의 꽃받침은 천국으로 들 어가는 문처럼 거대해 보였다. 백조가 날아와서 안젤름을 태우고 마법의 세계로 미끄러지듯이 날아갔다. 마법의 세계는 현실과 달랐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하나의 상징이며, 그 상징은 염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와 나, 낮 과 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내면의 세계에서는 하나가 된다. 상징의 이면에는 영원한 삶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상징의 문을 통과하며, 내 면의 세계에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어린 안젤름은 아이리스의 상징을 통하여 열 려진 문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들이 친근하게 여겨졌다. 그는 꽃들을 관찰하는 일에 깊이 빠져들었다. 물을 마시거나 숨을 쉴 때에도, 입이나 목의 특별한 움직임과 느낌에 의한 상징을 느꼈다. 그리고 상징에는 좁 은 길과 열려진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과 문을 통하여 영혼과 영 혼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안젤름은 꽃의 빛깔을 관찰했다. 색깔은 종종 진 보라빛으로 보였다. 안젤름은 빛과 소리, 후각과 촉각 사이의 섬세한 연관을 느꼈다. 시각적인 아 름다움을 통해 음색이나 음향도 느꼈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어우러지면 부드 러움과 딱딱함의 조화를 느꼈다. 그는 풀잎이나 나무 껍질의 냄새를 맡으면서 따뜻함을 느꼈다. 후각과 촉각이 공존하는 것 같았으며,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 도로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글자를 배우게 될 쯤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상징의 열려진 문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린 시절의 비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영혼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창조한다.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면서 현실과 환상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한 내면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평생 동안 걱정과 갈망, 목표에 대한 욕망의 포로가 된다. 그들의 목표나 욕망은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여름과 가을은 살며시 다가왔다. 눈꽃, 제비꽃, 백합, 상록수, 장미가 아름답고 풍성한 꽃을 피우고는 다시 시들어 버렸다. 안젤름은 꽃이나 새와 함께 살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나 샘물과 어울리기도 하였으며, 글자를 배우기도 하고 정원의 돌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난 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개똥지빠귀가 노래를 불렀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푸른 아이리스 꽃의 동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딸기는 그늘에 숨은 채 익어갔으며, 산형화 위로 나비가 취한 듯이 날아다녔다. 모든 것은 작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안젤름은 어머니와 말다툼 도 하게 되었다. 안젤름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것이 안젤름을 방해하 고 상처를 입히려 하였다. 돌과의 우정도 사라졌다. 안젤름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렀다. 안젤름은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정원의 돌들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딱정벌레를 잡아서 바늘로 찌르기도 하였다. 그의 영혼은 어두운 미로에 들어섰다. 어린 시절에 느끼던 기쁨도 조금씩 시들어 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상징의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 청년 시절의 새로운 희망이 그를 유혹했다. 어린 시절이 아련한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안젤름은 그것 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나이가 들면서 근시안적으로 변해 버 린 것이다. 안젤름은 친구와 사귀거나, 혼자서 책을 읽기도 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있는 파티에서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거의 느끼 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안젤름은 많이 변해 있었다. 안젤름에게 정원은 작고 적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돌이나 꽃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푸른 아이리스 꽃의 영혼들과 신비한 만남을 가질 수도 없었다. 학생이 된 안젤름은 붉은 옷과 노란 모자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굴에 는 수염도 많이 돋아 있었다. 그는 외국어로 쓰여진 책과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손에는 서정시집을 들고 다녔다. 현인들의 금언집이나 아름다운 소녀의 사진과 편지도 가지고 다녔다. 다시 고향을 떠난 그는 멀리 외국으로 여행을 다녔다. 커다란 배를 타고 세계 를 돌아다닌 것이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젤름은 검은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친절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어머니 가 안치된 관을 싣고 가는 마차를 엄숙하게 따라갔다. 그 후, 그는 다시 고향으 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시에서 안젤름은 학생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멋 진 외투와 모자를 쓰고 산책을 하거나 점잖은 표정으로 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 는 열정을 가진 듯이 보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기도 했 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생님으로 불렸다. 안젤름의 어린 시절은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그는 많은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을 느꼈다. 그는 자유를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가슴은 충족되지 않았다. 세상은 먼지로 가득 쌓인 것만 같았다.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들이 낡고 진부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안젤름은 친구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리스라는 친구의 누이에게 그의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친구의 누이는 안젤름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여자였다. 그녀의 말투와 걸음걸이는 여느 사람과 달랐다. 안젤름이 그녀와 함께 걸어갈 때면, 보 조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녀는 성미가 까다로웠으며, 누구의 충고도 귀 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건강하지도 않은 그녀는, 사교모임이나 연회를 싫어 하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꽃과 음악, 책 그리고 기다림이었다. 그녀는 너무 섬세하고 감성적이어서, 쉽게 상처를 입거나 슬픔에 젖었다. 그녀는 고독한 운명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안젤름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다가도, 때로는 그녀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 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상냥하고 친절한 듯 하면서도,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 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안젤름은 그녀와 결혼을 해서 함께 음악을 들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아이리스.” 안젤름은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이리스, 세상이 나에게 준 가장 커다란 선물은 바로 당신입니다. 꽃과 사색과 음악이 있는 당신의 고요한 세계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 과 같이 지내기를 원합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리 스, 당신의 이름이 나를 기쁘게 합니다. 나에게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노란 색의 붓꽃을 아이리스라고 불러요.” “네.” 안젤름은 우울한 기분으로 외쳤다. “나는 아이리스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에게는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 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름은 나의 아득한 기억과 깊은 연관이 있 는 것 같습니다.” 아이리스는 안젤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서 그의 이 마를 짚어 주었다.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안젤름에게 말했다. “나는 그 꽃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가슴 속으로 생각했어요. 아이리스의 향 기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음악을 들을 때에나, 시를 읽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잠깐 동안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 앞에 보이기도 했어요. 마치 잃어버 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말을 당신에게서 들을 수 있다니...” 안젤름은 그녀를 칭찬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리스의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고통을 느꼈다. 가슴 속의 무거운 추가 아득한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젤름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아름다운 환상 속 에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독한 여행을 떠났던 안젤름은 도시로 돌아왔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허무와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안젤름은 아름다운 아이리스에게 위안을 얻고 싶었다. “아이리스.” 안젤름은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좋은 친구입니다. 나는 이제 아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삶은 공허할 것입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꽃은 바로 당신입니다. 아 이리스, 당신의 생각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정원을 바 치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의 정원으로 들어와 주겠습니까?” 아이리스는 침착한 표정으로 안젤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대 답하였다. “안젤름,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생 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된다면, 나는 당신에게 많은 요 구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아내들보다 더욱 많은 요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당 신의 꽃의 정원을 바친다고 하였지만, 나는 꽃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으며, 음악 이 없어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노래가 나의 노래와 섬세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당신의 노래는 순수해야 하며, 나에게 감동을 줄 수 있 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당신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당 신은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항상 진실해야 하며, 명예를 얻으려고 노 력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집은 시끄럽지 않아야 하고, 당신의 이마에는 주름살 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젤름, 그것은 당신에겐 불가능해요. 학문에 대한 새 로운 열정과 근심 때문에 당신의 이마에는 해마다 주름살이 늘어갈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장난감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장 난감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에게는 삶,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입 니다. 당신이 노력하고 추구하는 것들은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안젤름, 나는 나의 규범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기준에 맞추어 변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변한다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안젤름은 말없이 서 있었다. 무심코 그는 책상 위에 맞게 놓여진 꽃을 잡아서 줄기를 꺾었다. 아이리스는 안젤름의 손에서 부드럽게 꽃을 빼앗았다. 그것은 안 젤름에게 무거운 질책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출구를 발견한 것처럼 밝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녀는 나직이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아이리스 꽃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꽃은 당신의 기 분을 변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기분에 따라 아이리스 꽃이 변하지는 않아요. 아이리스 꽃이 우리의 사이를 결정할 것입니다.” 안젤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안젤름을 압도하였다. 안젤름은 그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한 가지 과제를 드리겠어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안젤름은 아이리스에게 굴복하였다. “당신은 나의 영혼을 버리지 않겠지요?” 안젤름은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리스는 일어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 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무엇인가 생각난다고 했어요. 당신이 잃어 버린 기억은 몹시 중요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 아이리스 꽃에 대한 잃어버린 상징의 표시입니다. 당신은 영혼의 성스러움을 되찾아야 합니다. 상징은 당신을 진실한 곳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안젤름,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이리스 꽃의 잃어버린 기억을 생각하세요. 당신이 그것을 발견하는 날,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녀의 제안을 들은 안젤름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이리스는 맑은 시선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젤름은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이 리스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나가버렸다. 안젤름은 아이리스의 요구대로 하려고 애썼지만 소용 없었다. 그것은 몹시 어 렵고 절망적인 일이었다. 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방황하였다. 안젤름의 영혼은 극도로 피곤해 졌다. 그는 아이리스의 제안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여자의 변덕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는 깊이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안 젤름은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느낌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이리스가 제안했던 것들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것은 안젤름처럼 학식이 많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요구였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생각해 냈다. 거미줄 같이 엉켜버린 과거 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것을 찾아서 사랑하 는 아이리스에게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하늘 속으로 흩어져 버리 는 새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조용한 음악을 들을 때 느껴지는 작은 슬픔과 같은 것이었다. 사색보다도 더 희박하고, 아무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 었다. 밤에 꾸는 꿈보다도 하찮고, 아침 안개보다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마다 안젤름은 정원의 향기를 맡았다. 바람 은 안젤름에게 은은한 과거의 향기를 실어 다 주었다. 그는 줄이 팽팽하게 당겨 진 현악기의 울림을 음미하듯이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 하였다. “아이리스.” “아이리스.” 안젤름은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속에 작은 슬픔이 일어났다. 무엇인가 내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 돌보지 않은 집의 출입 문이 이유없이 열리거나, 서랍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았다. 그는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기억해 낸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는 놀 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 것도 씌여 있지 않은 책장처럼 모든 것이 공 허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모습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느 소녀의 이름과 모습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안 젤름이 어렸을 때, 일년 내내 구애를 하며 쫓아다니던 소녀였다. 개에 대한 기억 도 되살아 났다. 아직 학생이었을 무렵 일시적인 기분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오 랫동안 개와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개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하여 안젤름은 여러 날을 고민했다. 많은 슬픔과 근 심을 받아들인 그는 아주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의 삶이 자신 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공부하거나, 소중하게 모아 두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안젤름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겪었던 가장 중요한 체험들을 기록하였다. 아이리스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떠오르는 대로 과거의 기억들을 적어 두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체험이란 무엇인가? 선생님이 된 것인가? 아니면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에 경험한 것들인가? 어린 시절의 소녀에 대한 기억인가? 가까운 사 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보낸 시간들인가? 그게 나의 삶인가? 그게 안젤름의 전부 인가? 그는 갑자기 이마를 치면서 크게 웃었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덧 없이 흘러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 해가 지났다.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이전에 안젤름을 알던 사람들은, 그를 낯설게 느꼈 으며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미혼이었다. 그는 선생님으 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잊은 채, 학생들을 기다리도록 만들었다. 거리를 조심스럽 게 걸어다니면서 기억 속에 있는 먼지를 닦아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안젤름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어린 아이처럼 갑자기 미소를 짓고는 아무 일도 없 었던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했던 적도 있었다. 아득한 세월의 향 기를 맡으면서, 그는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리스 에 대한 기억은 떠올리지 못했다. 오래된 벽에 걸린 낡은 그림속에 더욱 오래된 그림이 숨어 있는 것처럼, 그는 이전의 기억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기억을 찾 아내려고 애썼다. 그는 어느 도시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 도시는 안젤름이 여행을 하다가 잠 시 머물렀던 곳이다. 친구의 생일도 기억해 냈다. 안젤름은 퇴색한 과거의 기억 들을 하나씩 파헤쳐 나갔다. 어느 날이었다. 무엇인가 머리 속에 퍼뜩 떠올랐다. 봄 날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이나 안개 낀 9월의 향기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안젤름은 신비한 향기를 맡았다. 향기는 안젤름의 눈과 피부, 가슴에 와 닿았 다. 희미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이었다. 따사로움과 푸르름, 차가움과 잿빛과 같은 이미지가 자꾸만 생각났다. 무엇이 이러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일까? 어두운 기 억속에 이러한 느낌의 실체가 잠자고 있었다. 안젤름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 는 향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느꼈던 향기인가? 가끔씩 이러한 기억들이 현실을 넘어서 과거에까지 이르는 경 우도 있었다. 안젤름은 기억의 심연을 통해, 많은 것들을 찾아냈다. 그에게 감동 을 주고 눈길을 사로잡던 것들도 찾아내었다. 그러나 아이리스란 이름이 그에게 주는 의미는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어두운 기억의 늪에서 고향을 바라보았다. 벽과 오솔길,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관목의 울타리가 보였다. 어린 시절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과거 가 꿈처럼 그를 에워쌌다. 그는 슬픔 표정을 지으며 현실로 되돌아 왔다. 안젤름 은 병이 났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보냈다. 아이리스의 오빠인 그 친구는 안젤름 을 찾아왔다. 친구는 안젤름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젤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리스가 너를 만나고 싶어해.” 안젤름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기다려 줘.” “그래.” 친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아이리스가 죽어가고 있어. 동생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던 거야.” 친구 집에 도착한 안젤름은 아이리스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힘없이 누워 있었다. 커다란 눈에는 여전히 밝은 웃음이 있었다. 그녀 는 안젤름에게 희고 연약한 손을 내밀었다. 안젤름은 가까이 다가가 한 송이 꽃 과 같은 아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안젤름.” 그녀는 말했다. “당신 나에게 화났어요?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과제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그 과제를 잘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조금만 더 노력해 보세요. 과 거의 신비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은 나를 위하여 그것 을 찾았지만, 지금부터는 당신을 위하여 찾아야만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안젤름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리 있어요. 아이리스, 나는 오랫동안 찾아 보았습 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리스는 슬픈 눈으로 안젤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안젤름을 위로해 주었다. 안젤름은 그녀의 가녀린 손위로 몸을 숙인 채,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손은 안젤름의 눈물로 촉촉하게 젖었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묻지 마세요.”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명예와 행운, 지식도 얻었습니 다. 당신은 이미 작은 `아이리스`인 나를 얻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아름 다운 그림일 뿐입니다. 언제인가 그것들은 당신을 떠날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지금 떠나려 하듯이, 그렇게 떠나갈 것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시들고 말았어요. 나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영혼의 안식처로 돌아가서 휴양을 하 려고 합니다. 당신 역시 그 곳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안젤름, 당신의 이마에 더 이상 주름살이 생기도록 하지 마세요.” 아이리스는 너무나 창백해 보였다. 안젤름은 안타깝게 외쳤다. “기다려요, 아이리스. 제발 가지 말아요. 당신이 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곁에 놓아둔 꽃을 들어 안젤름에게 전해주었다. 푸 른 색의 아이리스 꽃이었다. “나의 꽃, 아이리스를 가져가세요. 그리고 영원토록 나를 잊지 마세요. 나를 대하듯이 아이리스 꽃을 바라보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 곁에 머물러 있을 것입 니다.” 안젤름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리스 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안젤름이 친구의 전갈을 다시 받고 친구의 집에 왔을때에는 아이리스의 주검이 들어 있는 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이리스는 땅 속에 묻혔다. 안젤름은 슬픔 때문에 현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가 이전처럼 삶을 영 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린 채 도시를 떠났다. 그는 방랑자로 떠돌아 다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고향에 모습을 다시 나타내었다. 그는 오래된 정원의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이리스 꽃을 사랑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아이리스 꽃을 바라보 면서 자신을 잊었다. 푸르스름한 대지에서 갓 피어나는 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울했다.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젤름은 피어나는 꽃봉오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꽃에 숨겨진 비밀을 은밀하 게 전해 들었다. 꽃은 다시 시들었다.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와 그의 고독을 휘감 고 스쳐갔다. 꿈 속에서 안젤름은 어머니를 보았다. 그는 어머니의 모습과 얼굴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리스가 꿈 속에 나타 나기도 하였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안젤름은 꿈의 여운을 오랫동안 느꼈다. 그는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집에서 잠들기도 하였으며, 숲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빵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나무의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마 시거나 하였다. 어떻게 살아가건 안젤름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 를 바보로 생각해서 조롱하거나, 마법사로 생각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 다. 안젤름은 어린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 배웠다. 부러진 나뭇가지나 작은 돌멩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겨울과 여름이 흘러갔다. 안젤름은 꽃봉오리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지.” 때때로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현실의 모든 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야.” 그는 이미 내면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지가 아닌, 사물의 본질을 깨닫 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질은 가끔씩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목소리는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아이리스의 목소리였으며, 어머니의 목소리이기도 하 였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겨울이 되었다. 안젤름은 흩날리는 눈을 헤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수염 은 추위 때문에 얼어 붙어 있었다. 거센 눈발 속에서 아이리스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그는 꽃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이리스 꽃이 자신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기억하였다. 황금빛 수맥이 꽃의 심장부로 이어 져 있었다. 진실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사물의 본질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환상 이 안젤름을 인도하였다. 안젤름은 어느 오두막에 도착하였다. 오두막에는 어린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안젤름에게 신선한 우유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놀았다. 어린 아이들은 안젤름에게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안젤름은 영혼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영혼의 문은 천년마다 한 번씩 열 리는 것이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나무 숲에서 새가 노래를 불렀다. 죽은 아이리스의 목소리처럼 아주 달콤한 노래였다. 안젤름은 노래 소리를 따라서 계속 뛰어갔다. 새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 자, 안젤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낯선 골짜기에 들어와 있었다. 푸른 나무 밑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 슴 속에는 계속해서 새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노래 소리였다. 그는 절벽 앞으로 다가섰다. 절벽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절벽의 가운데에는 작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작은 틈은 산의 내부로 좁게 이어졌다. 늙은 노인이 작은 틈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지친 몸을 일으키면서 안젤름에 게 다가왔다. “돌아가게, 젊은이. 이 곳은 영혼들이 지나가는 문이야. 이 곳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안젤름은 절벽의 틈을 들여다보았다. 산 속 깊이 펼쳐진 푸른 길이 보였다. 금 빛 기둥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푸른 길은 커다란 꽃의 섬세한 수맥처럼 밑으로 뻗어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 새소리가 맑게 들렸다. 안젤름은 노인을 지나서 절 벽의 틈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이리스 꽃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정원에 피어있는 아이리스 꽃이었다. 그는 구름이 떠다니듯 꽃봉오리 속을 다니며 어스 름한 황금빛을 보았다. 모든 기억과 생각이 일시에 떠올랐다. 그는 황금빛의 꿈 을 손으로 만졌다. 작고 연약해 보였다. 사랑의 소리가 안젤름의 귀에서 가깝고 분명하게 들렸다. 금빛 기둥이 빛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안젤름에게 들려오던 소리와 빛이었다. 안젤름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 꿈은, 어린 시절의 안젤름이 꾸었던 꿈 이었다. 그는 아이리스 꽃봉오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이 그의 뒤로 물러 났다. 그는 영혼의 신비를 보았다. 영혼의 신비는 모든 사물의 겉모습에 깃들어 있었다. 안젤름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길은 고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산으로 변한 남자 큰장 팔덤나라의 도시로 들어가려면, 숲을 지나가기도 하고 녹색의 넓은 목장을 가 로질러 가기도 하였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길게 뻗은 그 길은 언덕이 많은 지 대를 빠져 멀리 이어지고 있었다. 도시와 가까워질수록 농가와 경작지, 정원, 별 장이 자주 보였다. 바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팔덤은 작은 언 덕, 아름다운 골짜기, 목장, 푸른 숲, 밭, 과수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향기로 운 과일, 튼튼한 목재, 신선한 우유와 고기, 아름다운 빛깔의 사과, 호도를 비롯 하여 언제나 물자가 넘치는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마을은 아름답고 깨끗했다. 그 곳의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부지런하였다 그들은 위험하거나 자극적인 일들을 별 로 좋아하지 않았다. 먹고 살아가는 일에 큰 걱정이 없으면, 그런대로 만족하는 사람들이었다. 팔덤이라는 나라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특 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팔덤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팔덤은 이 나라의 국호이자 수도의 지명이기도 하였다. 팔덤 시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에는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과 수레가 떠들썩하게 지나갔다. 이 나라의 수도 팔덤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큰 장이 섰다. 농부나 직공, 공장의 감 독, 하인과 하녀, 소년과 소녀 할것없이, 모든 사람들이 큰 장을 구경하기 위해 준비하고 이었다. 물론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축을 돌봐야 하는 사람, 어린 아이나 환자를 돌보거나 노인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팔덤 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일 년을 허무 하게 흘려보냈다고 여겼다. 늦여름의 맑은 하늘에 솟아오른 아름다운 태양을 부 러워하면서, 집을 지키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였다. 여자와 아이들은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아침 일찍 모여들었다. 젊은 청년들은 수염을 깎은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들은 패랭이꽃이나 들국화를 단추구멍에 꽂 아 두었다. 모두들 화려한 무늬의 나들이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땋아서 길 게 늘인 소녀의 머리칼은 젖은 물기로 햇빛에 반짝거렸다. 마부는 채찍의 끝부 분에 꽃이나 빨간 리본을 매달아 두었다. 말들은 반짝이는 놋쇠판이 달린 폭넓 은 장식을 무릎까지 늘인 채, 경쾌하게 달렸다. 사다리 모양의 테를 두르고, 너 도밤나무 가지로 지붕을 둥글게 이은 포장마차가 지나갔다. 마차에는 무릎에 바 구니나 아이를 올려 놓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 뒤를 여러 색깔의 깃발과 꽃으로 장식한 마차가 따라왔다. 안에서는 떠들썩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늘진 나뭇가지 사이로 금빛 호른이나 나팔이 반짝 거렸다. 걸어가던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렀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던 어 머니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애를 먹었다. 마음씨 착한 마부를 만난 아이 들은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어느 할머니는 쌍둥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 고 왔다. 쌍둥이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이들의 머리밭에는 둥글고 빨 간 뺨을 가진 두 개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머리를 곱게 빗 은 인형이었다. 팔덤으로 가는 길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재미있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 었다. 비록 큰 장을 구경하지는 못하지만, 두 눈에 넘칠 만큼의 구경거리가 널려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울고 있었다. 할머 니와 함께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계단에 걸터앉아 울고 있던 소 년은 마을의 개구장이 서너 명이 달려가는 것을 보자. 함께 뛰어가서 큰 장이 열리는 팔덤으로 향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나이 많은 청년이 있었다. 외롭게 살고 있는 그는 돈 이 아까워서 큰 장에는 아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큰 가시나무 울 타리를 다듬으려고 마음먹었다. 아침 이슬이 걷히자, 큰 가위를 들고 힘차게 일 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는 일을 멈추고 화를 내면서 집 으로 들어갔다. 팔덤으로 향하는 젊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손질하는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때아닌 부지런함은 많은 사람 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아름다운 처녀들도 함께 웃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그는, 들고 있던 긴 가위로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사람들 은 모자를 흔들면서 그를 놀렸다. 그는 덧문까지 닫은 채, 방에 앉아 있었다. 하 지만 문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부러운 듯이 내다보았다. 그의 화는 눈녹듯이 사라졌다. 팔덤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 은 행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서둘러 뛰어갔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장화를 신은 다음, 일 타렐을 지갑에 넣었다. 그는 단장을 들고서 문을 열었다. 문득 일 타렐의 돈은 너무 많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는 지갑의 돈을 반 타렐로 바꾸었다.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그 는, 문을 잠근 다음 팔덤에 닿을 때까지 달려갔다. 그는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 과 두 대의 마차를 따라잡았다. 이제 마을의 집과 정원은 텅 비어 버렸다. 거리에 피어나던 먼지도 조금씩 가 라앉았다. 들판에서 날아온 참새가 고요함을 깨뜨렸다. 길은 한산해졌다. 맑은 햇살이 뜨겁게 비쳤다. 먼 곳에서 어렴풋하게 환성이 들려왔다. 적막이 부드럽게 세상을 감싸안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사나이가 쓸쓸한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키 가 큰 그는, 방랑자 특유의 차분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잘 두드러지지 않는 회색빛 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마차의 바퀴자국이 뒤섞여 있는 것과, 왼쪽 뒷굽을 질질 끌고 간 말굽자국과, 먼지투성이의 안개 속에서 빛나는 팔덤의 거리를 보았다. 어떤 집의 정원에서는 난처한 표정의 할머니가 두리번거 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으나, 아무도 대답하 지 않았다. 길바닥에 작은 금속조각이 빛나고 있었다. 광택이 나는 둥근 놋쇠판 이었다. 말의 목에 다는 고리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놋쇠판을 집어서 주머 니에 넣었다. 해묵은 가시나무의 울타리가 보였다. 울타리는 거의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성실하고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차츰 거 칠어 보였다. 어떤 곳은 너무 깊이 깎여졌으며, 어떤 곳은 깎이지 않은 가지가 불쑥 솟아나와 있었다. 좀 더 걸어가자, 아이들의 인형이 길가에 떨어져 있었다. 그 인형의 머리 위로 는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한 조각의 검은 빵이 버려져 있는 것도 보았다. 빵 속에서 녹은 버터가 흘러내려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머 니 속에 반 타렐이 들어 있는 가죽지갑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인형을 돌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빵조각은 잘게 부수어서 새들의 먹이 로 던져 주었다. 반 타렐이 들어 있는 가죽지갑은 주머니에 도로 집어 넣었다. 인적이 없는 길은 무척이나 조용하였다. 양쪽의 잔디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햇살을 따갑게 받고 있었다. 주위의 농가에서는 닭들이 햇살을 받으며 돌아 다니고 있었다. 꿈을 꾸듯이 떠들어대던 닭들은, 배가 고픈지 먹이를 쪼아 먹었 다. 파릇한 양배추 밭에서는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방랑 자는 장이 열리는 팔덤의 거리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벙어리였다. 그가 큰 소리로 물어보았지만, 할머니는 난처한 듯이 흰 머리를 가 로저을 뿐이었다. 시내가 있는 방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차츰 커졌다. 나 중에는 음악과 뒤섞인 목소리가 폭포처럼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팔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죄다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서 시냇물이 흘렀다. 물오 리들이 웅덩이를 조용히 떠다녔다. 파란 색의 거울 같은 시냇물은 부드러운 물 풀을 흔들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언덕으로 접어들자 냇물은 옆으로 굽어서 흘렀 다. 돌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다리의 난간에는 양복점의 수선공처럼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그의 모자는 바닥에 떨어져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개가 앉아서 주인을 지켰다. 방랑자는 깊이 잠든 사람을 깨우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잠들어 있는 사 이에 다리 너머로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리의 높이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흐르는 물도 얕았다. 그는 잠자는 사람을 그대로 놓아 두기로 하 였다. 좁고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자, 팔덤 시의 입구가 나타났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곳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방랑자는 팔덤 시의 입구를 지나갔 다. 길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 밟히는 자갈들이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이 곳 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빈 수레와 마차들이 골목에 서 있었다. 좁은 골목에는 그늘이 져 있었기 때문에 어두웠다. 높은 곳에 나 있는 창문이 금빛 햇살을 반사하였다. 방랑자는 사다리 모양의 테가 달린 마차에 앉아서 잠시 쉬 었다. 그는 길에서 주운 놋쇠판을 마차 위에다가 올려 놓았다. 다음 골목에 이르기도 전에 근처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터 의 소란이 시작된 것이다. 노점에서는 장사꾼들이 소리를 치면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은빛 도금을 한 나팔을 불었다. 정육점 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 솥에서 방금 만들어진 소시지를 꺼냈다. 돌팔이 의사는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의사는 뒤편에 걸려 있는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의 질병이나 허 약한 신체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그림이었다. 검고 긴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낙 타를 끌고 지나갔다. 낙타는 긴 목을 내밀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모여선 사 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낙타의 벌어진 입은 자꾸만 우물거렸다. 방랑자는 팔덤 시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림을 파는 사람의 노점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설탕을 입힌 과자 위에 쓰여진 속담이나 격언도 읽었다. 그는 장터 의 어느 곳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시내의 중심가에 있는 광장으로 나왔다. 그 곳에는 새를 파는 노점이 벌어져 있었다. 방랑자는 새장에서 울려 나 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빨간 방울새, 메추라기, 카나리아, 꾀꼬리 등의 새 들에게 나지막히 휘파람을 들려주었다. 그는 눈이 부실만큼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치 햇빛이 그 곳으로 모여 드는 것 같았다.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다. 큰 거울, 작은 거울, 네모난 거울, 둥근 거울, 계란 모양을 한 거울, 걸어 놓는 거울, 세워 놓는 거울도 있었다. 들 고 다니기 위한 작은 손거울도 있었다. 반짝거리는 손거울에 햇빛이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반사광이 다른 거울 위로 춤추듯이 흔들렸다. 그는 쉬지 않고 외쳤 다. "거울입니다, 거울. 여러분, 거울을 사세요. 팔덤에서 가장 좋고 가장 싼 거울 입니다. 아주머니, 좋은 거울입니다. 모두들 구경하세요. 가장 좋은 유리로 만들 어진 거울입니다." 방랑자는 거울을 파는 가게에서 멈춰섰다. 거울을 구경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는 세 명의 시골 처녀도 있었다. 방랑자는 세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젊고 건강 해 보이는 시골 처녀들은 튼튼한 밑창이 달린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있었다. 햇빛에 조금 그을은 얼굴에서 젊은 눈동자가 빛났다. 시골 처녀들은 거울을 하 나씩 들고 있었다. 크거나 값진 거울은 아니었다. 처녀들은 거울을 살 것인가 망 설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거울을 꿈꾸듯이 바라보면서 입과 눈, 작은 목걸이와 코 위의 주근깨, 윤기나는 머리칼, 장미빛 귀를 살펴보았다. 방랑자는 시골 처녀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첫번째 처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머리칼이 아름다운 금빛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릎에 닿을 만큼 길 게 자랄 수만 있다면...” 두번째 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마음 속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졌으면 해. 길고 가는 손가락을 가진 장미빛의 하얀 손 말이야.” 그녀는 계란 모양의 거울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손 은 짧고 굵었으며, 많은 일 때문에 거칠어져 있었다. 세번째 처녀는 그 말을 듣자, 웃음을 지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외쳤다. “그것도 좋은 소원이지만, 손 같은 것은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팔덤 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세번째 처녀가 놀란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검게 빛나는 눈을 가진 사 람이 거울에 비쳤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시골 처녀는 그 사람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처녀들은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방랑자를 바라보았 다. 그는 처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말했다. “아가씨들은 아름다운 소원을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그것을 바랍니까?” 세번째 처녀는 거울을 놓고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녀는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한 보복으로 방랑자에게 따끔한 말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랑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대단한 힘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몹시 당황하면 서 말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말을 마친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아름다운 손을 원했던 두번째 처 녀는 방랑자를 신뢰하였다. 그의 모습에는 아버지처럼 진지한 표정이 깃들어 있 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진정입니다. 그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요.” 거울을 파는 사람이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였다. 방랑자는 모자의 차양을 들어 올렸다. 높은 이마와 빛나는 눈이 보였다. 그는 세 처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가씨들은 이미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녀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서둘러 거울을 보았다. 첫번째 처녀는 무릎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금발을 하고 있었다. 두번째 처녀는 매우 희고 보드라운 손에 거울을 들고 있었다. 세번째 처녀는 빨간 가죽 으로 만든 무도화를 신고, 새끼 사슴처럼 탄력 있는 발을 하고 있었다. 처녀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손을 가지게 된 쳐너는 행복 한 울음을 터뜨리며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팔덤 시의 광장은 이상한 일로 인하여 떠들썩해졌다. 젊은 직공은 눈을 동그 랗게 뜬 채, 방랑자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소원이 있습니까?” 방랑자가 직공에게 물었다. 직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육점에 굵은 소시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엉겹결에 그 곳을 가리 키면서 말했다. “저런 소시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커다란 소시지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 은 모두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사람들 에게 차례로 소원을 말하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순모 양복이 필요하 다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아주 훌륭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시골 여자는 십 타렐의 돈을 원했다. 그러자 십 타렐이 주머니에 들어 있 었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 소식은 팔덤의 모든 거리로 전해 졌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욕망으로 뒤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년들은 과자나 화살, 개, 호도가 잔뜩 들어 있는 자루, 책, 장난감을 원 했다. 소녀들은 새 옷, 리본, 장갑, 양산을 받고 즐거워하였다. 할머니와 함께 집 을 지키지 않고, 팔덤으로 뛰어온 열 살 가량의 작은 소년은 검은 털을 가진 새 끼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검은 새끼말이 히힝거리며 소년 의 어깨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술에 취해 버린 사람들을 비집고 나이 많은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단장을 든 그는, 떨리는 걸음으로 방랑자에게 다가섰다. 몹시 흥분한 그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나...나는, 이...이백 타렐의 돈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방랑자는 주머니에서 가죽지갑을 꺼내어 그에게 보였다. “잠깐 기다려요. 이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안에는 반 타렐이 들어 있습니다.” “그, 그것은 나의 것입니다. 내가 잃은 것입니다.” “돌려받고 싶습니까?” “예, 나...나에게 전해 주십시오.” 나이 많은 청년은 지갑을 받았다. 그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청년은 화를 내면서 단장으로 방랑자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는 단장으로 방랑자 를 때리는 대신, 거울을 깨뜨렸다. 거울을 파는 사람이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나이 많은 청년은 거울 값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뚱뚱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지붕의 기와를 새로 올려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집에는 깨끗한 기와가 올려져 있었다. 모두들 환성을 질렀다. 소원 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어떤 사람은 오층 높이의 집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 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오층 높이의 집에서 광장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 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거리의 활기는 방랑자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광장으로 모 이게 되었다. 하나하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때마다 탄성과 부러움, 안타까움이 뒤 섞인 웃음소리가 일었다. 배고픈 소년은 모자에 가득 찰 만큼의 살구를 달라고 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덕택으로 모자는 은화로 가득 차게 되었다. 뚱뚱한 장사꾼의 아내는 목의 종기를 고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의 소원은 즉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사이가 나빠서 항상 다투고 있었다. 남 편은 부자가 되려는 소원을 뿌리치고, 아내의 목에 종기가 다시 생기기를 원했 다.그녀의 목에는 새로운 종기가 돋아났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커 다란 웃음이 일었다. 사람들은 불구이거나 몸이 아픈 환자를 데리고 왔다. 절름발이가 춤을 추고, 장님이 눈을 떴다. 사람들은 새로운 흥분에 잠겼다. 소년들은 재빨리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충실한 요리사는 주인을 위하여 화덕에서 거 위를 튀기고 있었다. 요리사는 광장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원 을 빌고 싶었던 요리사는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부탁하기 위하여 광장으 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양심이 요리사를 괴롭 혔다. 그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요리사는 모든 것을 포 기하고, 자기가 돌아갈 때까지 거위가 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요리사의 소 원이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소란은 끝이 없었다. 아기를 돌보던 소녀는 아기를 안은 채, 집에서 달려왔다. 몸이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들도 정신없이 광장으로 뛰어왔다.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는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몹시 흐느끼면서 손 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검은 새끼말을 탄 손자가 할머니의 팔 에 와 안겼다. 팔덤 시는 열광에 사로잡혔다. 소원이 이루어진 연인들은은 팔을 잡고 거리를 활보했다. 가난한 사람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어리석은 소원을 빌었 던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돌아가거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샘에서 술을 마셨다. 그 샘은 술꾼의 소망으로 기막힌 포도주가 솟아나왔다. 팔덤에서 기적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두 명의 청년뿐이었다. 그들은 변두리 의 낡은 다락방에서 창문을 굳게 닫고 틀어박혀 있었다. 한 사람은 바이올린을 턱 밑에 대고 연주를 하였다. 다른 사람은 구석자리에서 머리를 감싸고 앉아 바 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조금씩 기울어 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은 테이블 위의 꽃다발을 지나 찢어진 벽지 위에서 어른 거렸다. 방은 따사로운운 햇살과 바이올린의 섬세한 선율로 가득 찼다. 바이올린을 켜 는 청년은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몸을 조금씩 흔들었다. 지켜보는 청년은 바이 올린의 선율을 들으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무겁고 요란한 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올라왔다. 집주인은 다 락방의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고, 커다랗게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운 소란 때문에 바이올린 연주는 갑자기 멈춰졌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청년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이올린을 켜던 청년도 연주를 방해받은 사실에 화 가 치밀었다. 그들은 집주인의 얼굴을 나무라듯이 바라보았다. 집주인은 술에 취 한 것처럼 팔을 흔들며 외쳤다. “아직도 이런 곳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니. 도시는 놀랄만큼 변했단 말이 야. 너무 늦지 않도록 광장으로 달려가 봐.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그 사 람에게 가서 소원을 말하면 당신들도 구석진 다락방에서 집세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된단 말이야. 나도 소원이 이루어진 덕분에 부자가 됐어.”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이 주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집주인이 귀찮게 재촉하는 바람에, 그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모자를 썼다. 친구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거리의 모습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그들은 꿈을 꾸는 듯 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잿빛으로 그을려 있던 집들이, 궁전처럼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거지였던 사람들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를 타고 돌아다녔다. 높은 집 창문에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은 사람이 팔덤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양복점의 수선공처럼 보이는 사람은 무거운 자루를 짊어 진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개를 데리고 있었는데, 무거운 자루에서는 금 화가 땅으로 흘러내렸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청년과 그의 친구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광장으로 나갔다. 그 곳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랑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소원을 말하는 것이 그렇게 급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나는 이제 떠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을 나에게 말해요. 사양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켜던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그대로 놓아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방랑자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됩니다.” 바이올린을 켜던 청년은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 로 말했다. “바이올린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바 이올린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 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선율이 천국의 노래처럼 달콤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은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득히 먼 곳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 는 소리가 저녁 노을처럼 어렴풋이 들려왔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랍니까?” 방랑자는 다른 청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친구를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의 친구였던 청년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친구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산이 되어서 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팔덤 나라만큼 크고, 구름보다 높이 솟은 영원의 산 말입 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거울은 차례로 떨어져서 땅 위로 흩어졌다. 광장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울부짖으면서 들 판으로 도망쳤다. 커다란 산이 구름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조용히 흐르던 시 냇물은 사나운 골짜기의 폭포로 변했다. 팔덤 나라 전체가 큰 산이 되었다. 산기 슭에는 팔덤시가 놓여져 있었다. 먼 곳에서 바다가 보였다.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광장에 서 있던 어느 노인이 이웃 사람에게 말했다. “세상이 온통 미쳐 버렸군.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하는 나는 별로 욕심이 없지. 하지만 아까와 같이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는 다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정말 그렇군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던 사람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아무 곳에서도 방랑자는 보이지 않 았다. 사람들은 새롭게 생겨난 산을 올려다보았다. 방랑자가 외투를 바람에 날리면 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저녁하늘을 바라보더니, 산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산 오래된 것은 흘러가고, 새로운 것은 낡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팔덤 의 큰 장은 사라져 버렸다. 부자가 되기를 바랬던 사람들은, 다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원했던 시골 처녀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능 숙하게 춤을 추게 된 처녀는 목수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많은 돈을 얻었지만, 낭비를 해서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손을 원했던 처녀는 방랑자를 가끔씩 생각하였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부자도 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손을 간직하기 위하여 농사 일도 하지 않았다. 대 신 마을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 었다. 아이들은 가난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으며, 팔덤 나라가 산으로 변하게 된 이유를 그녀에게서 들었다. 소원을 들어주던 신비한 사람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마다, 그녀는 고운 손을 바라보면서 행복해 하였 다. 그녀는 가난하게 살면서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자기보다 훌륭한 소원을 말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젊었던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갔다. 늙었던 사람들은 이미 죽고 없었 다. 하지만 산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산마루의 눈이 구름 사이에서 빛나면, 산은 자신이 영원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기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바위는 팔덤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의 커다란 그림자는 매일 저녁마다 팔덤을 지나갔다. 산기슭을 흐르는 냇물은 계절의 변화를 알렸다. 산은 모든 사람들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숲에는 나무들이 자라났으며, 들판에는 꽃들이 피어났다. 차가운 샘 물이 계곡에서 흘러나왔다. 눈과 얼음과 돌들은 서로 어우러졌다. 돌에는 아름다 운 빛깔의 이끼가 자라고, 물가에는 물망초가 피었다. 바위틈에는 수정이 비밀스 럽게 자라고 있었다. 아직까지 산의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상 에는 작고 동그란 호수가 있었다. 태양과 달과 구름과 별만이 산정호수를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산정호수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날쌘 독수리조차도 그렇게 높 이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팔덤의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은 아이를 낳고 일을 하다 가 죽어갔다. 산의 전설과 꿈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또 그의 아들에게로 전해졌다. 목동과 사냥꾼, 농부들이 그 이야기를 널리 퍼뜨 렸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이나 협곡 사이의 폭포, 깊이 갈라진 빙하, 산이 무너 져 내리는 길목, 번개가 치는 곳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팔덤의 따스한 기온과 추위, 풍부한 물, 농작물의 성장, 날씨나 바람은 모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팔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 원을 이루어 주던 광장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팔덤의 산이 어느 사람의 소원에 의해 생겨났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산은 아득한 옛날 부터 그곳에 있었으며,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은 그들의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세 명의 시골처녀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사람의 이야기 를 즐겨 들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바이올린 연주자 처럼, 자신도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사라지고 싶다고 꿈꾸는 것이었다. 영원의 산은 부드러운 눈길로 팔덤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바다에서 솟아오른 태양은 산마루를 돌아 서쪽으로 사라졌다. 밤에는 머리 위로 별이 지나갔다. 겨 울에는 두터운 눈과 얼음이 산을 덮었다. 해마다 봄이면 아름다운 꼿들이 피어 났다. 여름이 되면 냇물은 더욱 불어나고, 호수는 빛을 받아서 푸른 빛을 드러냈 다. 계곡에는 급류가 흘렀으며, 폭포에는 물이 거칠게 떨어져 내렸다. 어두운 동 굴에는 물이 고였다. 깊은 골짜기에서는 수정이 자라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거울처럼 맑은 물이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 사이를 흘렀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와서 자연의 신비를 배웠다. 다른 골짜기에서 는 청년들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운동을 하였다. 밤이 가장 짧은 날에는 험준한 바위에서 불이 피워졌다. 세월은 흘러갔다. 산은 목동이나 나무꾼, 강에서 배를 젓는 사공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많이 찾아왔다. 짐승을 사냥하는 사 람들은 활을 버리고 총을 사용했다. 백 년이 한 계절처럼, 일 년이 한 시간처럼 흘러갔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바위에서 불이 피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산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청년들이 운동하던 골짜기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몇 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산사태로 산이 모양이 변하고, 굴러 떨어진 바위 때문에 팔덤의 도시가 절반이나 파괴되어도 산은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 았다. 부서진 팔덤의 도시가 재건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산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기 대문에 부숴진 도시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도 몰 랐다. 세월이 흘렀다. 산은 나이를 먹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감 정이 생기지 않았다. 별들이 빙하에 비칠 때에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다. 태 양이나 별은 산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산의 내부에서 일어 나는 일이었다. 지층 아래에서 낯선 움직임이 느껴졌던 것이다. 굳은 바위가 풍 화작용으로 떨어져 나갔다. 계곡을 흐르는 냇물이 산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빙하는 사라지고, 호수는 커졌다. 푸른 숲은 황무지로, 들판은 검은 늪으로 변 했다. 빙하로 인해 생긴 퇴적암이 끝없이 산을 비집고 들어왔다. 산을 지탱하고 있던 지층은 더욱 이상하게 변해갔다. 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은 태양이나 별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산은 바람이나 눈, 얼음을 닮아 있 었다. 그것들은 영원한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씩 사라져 갔다. 산은 조심스럽게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았다. 산사태도 일으키지 않 았다. 정성스럽게 가꾼 꽃들을 피어나게 하였다. 늙어 버린 산은 인간에 대해서 도 다시 생각하였다. 쓸쓸한 산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는 그 곳에 있지 않았다.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랑의 골짜기에서는 노래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목장의 오두막집이 없어진 지도 이미 오래였다. 사람의 모습은 자 취를 감추었다. 불길한 그림자만이 허공에 머물렀다. 소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 자, 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산이 떨리자,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바위는 황폐 한 사랑의 골짜기를 지나서 바다까지 굴러 들어갔다. 시대는 완전히 바뀌었다. 여름의 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사랑의 골짜기에서 젊 은이들이 즐겁게 노래를 불렀던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늙은 산은 추억에 잠겼다. 몇백 년이 흘러갔다. 동굴이 무너지거나 땅이 주저앉아도 산은 거의 느 끼지 못했다. 과거를 생각할수록, 지나간 시절의 아련한 여운과 사랑이 산을 괴 롭히는 것이었다. 덧없는 세월에 대한 회상이 산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왔다. 세월은 흘러가 버렸다. 산은 점점 낮아졌다. 빈사상태에 빠진 산은 과거의 향 수에 잠겼다. 과거의 즐거운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산은 낡은 어 둠을 파헤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랑이 타오르던 시절과, 자연이 노래를 불 러주던 시절이 있었다. 산정의 푸른 호수는 점점 탁해져서 늪으로 변했다. 풀과 꽃이 만발했던 계곡 에서 눈물처럼 돌이 굴러 떨어졌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왔 다. 그것은 노래였다. 사람의 노래였다. 산은 기쁨에 몸을 떨었다. 노래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한 청년이 바이올린 의 선율에 싸여 하늘을 떠돌다가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묻혀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두운 눈빛을 가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친근 한 목소리로 산에게 물었다. “나에게 소원을 말하고 싶지 않니?” 산은 숨겨 두었던, 비밀의 소원을 말했다. 많은 고민들이 산의 어깨에서 떨어 져 내렸다. 산을 슬프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산은 뒤집혀서 팔덤과 하나가 되었다. 팔덤이 있었던 곳에는 끝없는 바다가 드높게 물결치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태양과 별이 차례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