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가의 살인사건 S.S 밴 다인 그린 가의 참극 내게는 아주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일이 있다. 세상에는 일류 범죄학자도 많을 터인데, 그 그린가(家)에 얽힌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 람이 없다는 것은 대체 어찌된 일일까? 실상 이 사건이야말로 틀림없이 손 꼽히는 현대의 살인미스테리의 하나이며 범례로서도 근대 범죄사상 보기드 물게 특이한 사건인 것이다. 딴은 외면적인 사실이라면 온 세계가 알고 있다. 당시 미국은 물론, 유럽에 서도 저널리즘은 한달동안이나 이 기기묘묘한 사건을 화려하게 보도했으니 까. 그러나 이윽고 찾아온 마지막 결말의 기상천외함! 이것만은 제 아무리 비 약한 대중의 공상으로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뜻밖의 것이었다. 이 흉악한 범죄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발명의 재간이 얼마나 처참하고, 범죄를 일으키게 만든 심리적 동기가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범 죄의 기법이 그 얼마나 괴이하고 숨겨진 것이었는지----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소식이다. 뿐만 아니라 사건을 종결로 이끈 것이 여느 경찰의 수사방법의 결과였다고 대중은 지금도 믿고 있다. 하기는 대중은 범죄 자체가 지니는 기본적인 요 인의 태반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나아가서 뉴욕의 경찰본부도, 뉴욕의 특별지구지방검사국도 마치 당연한 양해이기라도 한 듯이 이 사건의 진상을 숨겨온 것이다----어차피 발표해 보았자 불신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배려에서였는지, 아니면 사건의 양상에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데가 있고 지 금 역시 도저히 입에 옮길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런 만큼 내가 이제부터 적으려는 기록은 그린가 연속살인사건에 관한 최 초의 완전한 기록이며, 사실 그대로임을 밝혀 둔다. 아무튼 사건은 이제 하나의 역사로 되었다. 따라서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뚜껑을 덮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또 한가지, 사건 해 결의 영예를 지닐 자격이 있는 인간이 실재한다면, 영예는 의당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 신비극에 해명의 빛을 던져 막을 내리게 한 인간----그것은 경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살인사건의 공식문서 속에는 이 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 인물이 존재치 않았고, 또한 그의 참신한 범죄추리의 방법론이 없었다면, 그린 일족 에 대한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음모는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르 는 것이다. 이 인물----끝없는 노력과 실망이 되풀이되었던 몇 주간의 분석 결과 공포 의 근원을 꿰뚫은 그 인간은----당시는 아직 젊은, 사회적으로는 귀족 계층 의 일원이며, 뉴욕 지방검사 존 FX매컴의 친구였다. 나는 이 인물의 이름을 밝힐 수가 없다. 까닭에 파일로 밴스라는 가명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는 이미 이 나라에는 없다. 벌써 몇해전에 본적을 피렌체 교외의 별장으로 옮겼고, 게다가 미국으로 되돌아올 의사도 없다. 한편 매컴도 이제는 은퇴해서 일반 시민으로 돌아와 있고, 경찰본부를 대 표해서 그린가 연속살인사건을 담당한 배짱있고 곧은 경찰관 어네스트 히스 경찰부장도 뜻밖의 유산이 굴러들어온 것을 계기로 지금은 허드슨 계곡 상 류에 제법 커다란 농장을 마련해서 갖가지 닭을 기르느라 여념이 없다. 결국 이런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린가의 참극에 얽힌 진상을 발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의 이 사건에 대한 참가(하기는 어디까지나 제삼자에 지나지 않았 지만)----를 설명하자면, 불과 몇 마디로 족하다. 나는 몇 년동안 밴스의 고문변호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친의 법률사무소에서도 물러나 있 었는데, 그것은 밴스의 법률상, 재정상의 용건에 오직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용건이란 많지는 않았다. 밴스와 나는 하버드 대학 시절 때부터의 친구였으며, 그의 법적대리인, 금 전상의 집사라는 새로운 일거리를 맡은 덕분으로 한가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밴스는 당시 34세였다. 6피트 가까운 키에 늘씬하고, 맵시 있는 사나이였 다. 음영이 뚜렷한 단정한 용모가 그의 얼굴에 힘과 통일을 나타내는 우아 한 매력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한 가닥 비웃는 것 같은 차가움이 있어, 이것이 미남이라 는 호칭을 그에게 줄 가능성을 빼앗고 있었다. 눈은 초연하고 우울로 흐려 져 있고, 코는 날카롭게 뻗어 있으며, 입가에는 잔인함과 금욕주의를 연상 시키는 선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엄한 용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감수 성이 강한, 정에 이끌리기 쉬운 인간이었다. 그의 교육의 태반은 유럽에서 지닌 것으로 아직도 옥스퍼드식의 엑센트와 말투가 남아있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인생의 탐구자였다. 틈만 있으면 민족학이나 심리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최대의 정열을 바친 것은 미술이었는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 분으로 미술품 콜렉션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 게는 심리학에 대한 대단한 흥미가 있었고, 개인의 행동을 일반심리학으로 분석해 보이는 능력이 뛰어나 있어, 그것이 그의 주의를 본시 매컴의 영역 인 범죄방면으로 끌고간 것이다. 그가 참가한 첫 번째 사건은 내가 전에 발표한 일명 [벤슨살인사건] 이다. 두 번째는 해결이 전현 불가능해 보였던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가수 마가렛 오델 교살사건인 [카나리아 살인사건] 이다. 그리고 이 그린가의 참극이 일 어난 것은 같은 해의 가을도 짙어갈 무렵이었다. 그것은 그렇고 그린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은 매컴이 지방검사로 취임한 첫해가 바야흐로 저물어가려는 그런 때였다. 독자들도 기억하실 테지만, 그 해는 겨울이 매우 빨리 찾아왔다. 11월인데 도 두 번이나 폭설이 쏟아져, 과거 18년간의 기록을 깨뜨렸을 정도이다. 내가 여느때보다 이른 눈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실은 이 눈이 그린가 살인 사건 속에서 어떤 은밀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이 눈이 살인자의 계획에 있어 결정적인 조건의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밴스가 그린살인사건의 수사에 참가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매컴과 밴스는 오랜 친구였다. 그들은 취미도 다르고, 윤리적인 세계관이 달랐는데도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서로가 상대방의 특성에, 자기에게는 부족해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것이 서로를 이끌 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컴은 무뚝뚝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내려다보며, 인생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를 때에는 어떤 장해에도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 성실하고 청렴결백하며, 좀체로 굽히지 않는 인간이다. 이에 대해 밴스는 매사에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며 우아하고, 그러면서도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인생의 그 어떤 냉엄한 현실에 대해서도 비꼬는 미소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며, 언제나 인생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서 인생의 방관자라는 역할을 연출해가는 인간이다. 그런데도 인간을 이해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의 미술에 대한 조예의 깊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 다. 분명히 11월 6일 오전 10시 전이었다고 기억한다. 밴스와 나는 프랭클린 행길과 센타 행길 모퉁이에 있는 형사재판소 빌딩으로 차를 몰고 갔으며, 직접 4층 지방검사국으로 올라갔다. 이 기념할만한 아침, 두 갱이 강도사건에서 살인의 원인이 된 발포를 한 것은 너다, 아니 너다, 이렇게 서로 죄를 뒤집어씌우는 통에 매컴에 의해 반 대심문에 회부될 예정으로 있었다. 이 심문 결과에 따라 두 명중 한 녀석이 살인용의자가 되고, 한 녀석은 검찰측의 증인이 될 판이었다. 매컴과 밴스는 전날밤 이 상황에 대해 피차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거니 와, 밴스가 심문에 입회해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고, 매컴도 기꺼이 동의했 으므로 우리는 덕분에 일찍부터 일어나 다운타운으로 차를 몰게 되었던 것 이다. 두 용의자의 심문은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밴스의 의견은 놀랍게도 두 녀석이 모두 진짜 저격범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그럴 것이, 여보게 매컴, 밴스가 모음을 길게 빼는 그 우아한 영어로 말했다. 보안관이 두 피고를 뉴욕시 교도소로 데리고 간 뒤의 일이다. 그 두 녀석은 모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단 말야. 따라서 그 어느쪽도 저격범이 아니노라, 이게 삼단논법이지. 여보게, 그 권총강도 사 건엔 또 한 놈의 일당이 끼어 있었지? 매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놈은 도망쳤어. 그 놈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갱이라는구먼. 그렇다면 그 놈이 진범이야. 매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재 밴스가 천천히 일어나 외투쪽으로 손 을 뻗쳤다. 그런데 말일세, 외투를 입으면서 그가 말했다. 오늘 아침 조간에 말야, 일면 톱 기사가 있었잖나? 명문인 그린가에서 어 젯밤 피비린내나는 살인사건이 있었다던가, 뭔가? 매컴이 벽시계쪽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 말로 생각이 나는군. 사건이 일어난 그린가의 체스터 그린이 오늘 아침 일착으로 전화를 걸어왔지. 꼭 나를 만나고 싶다는구먼. 열한시에 오 겠다는 거야. 자네가 나설 이유가 어디 있나? 밴스가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그야 나설 만한 까닭은 없지. 매컴이 대들 듯이 말했다. 그런데 대중들은 지방검사국이 마치 자기네 귀찮은 일을 해결해주는 곳 쯤으로 알고 있단 말야. 게다가 나는 체스터 그린하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는 터지. 그러니 별 수 없이 녀석의 푸념을 들어주는 수 밖에. 보나마나 그 린가 대대로 내려오는 유명한 은그릇을 훔쳐가는 놈이 있다거나, 그런 소 리를 하러 올테지만. 절도범----얘기라? 밴스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여자가 두 명이나 총에 맞았단 말야. 그런데도 말인가? 그야, 실수를 한 게 뻔하지. 풋내기 녀석의 짓이 분명하다고. 물건을 털러 들어갔다가 그만 겁에 질려 마구 쏘아대고 삼십육계 줄행랑이라! 어쩐지 이치에 닿지 않는구먼, 이봐. 밴스는 다시금 문가 가까이에 있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그래 그 유명한 식기인지 뭔지 하는 물건은 실제로 없어졌나? 도난품은 없어. 놈은 그걸 챙길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도망쳐 버린 모양 이야. 좀 수상하잖나? 그 얘기가 말야. 풋내기 절도범이 저택에 숨어들어 식당 에 있는 식기에 눈독을 들였는데, 무슨 영문인지 겁을 집어먹고 이층으로 올라가, 난데없이 여자들의 방으로 뛰어들어 탕탕 쏘아젖히곤 도망쳤다?.. 이거 도무지...... 매컴은 노여움을 터뜨릴 것만 같았는데, 다음 말을 할 때는 어느정도 누그 러져 있었다. 내 보좌관이 어젯밤 당직이었는데, 경찰하고 같이 그린가에 갔었지. 그 역 시 경찰과 같은 결론이었다고. 그건 그렇다 치고, 체스터 그린이 무슨 용건으로 자네를 만나려는 게지? 내게도 들어 줄 만한 아량은 있단 말야. 매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오늘 아침 기분이 매우 언짢았던 것이다. 그 래도 그는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절도미수가 그렇듯 마음에 든다면 하는 수 없지. 그린의 말을 직접 들어 보라구. 그렇다면 기다려 볼 수 밖에. 밴스는 싱긋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그 체스터 그린이란 친구는 그린가의 뭐가 되나? 두 사망자와의 관계는? 살인을 한 것 뿐이었어. 매컴이 그제서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정해 주었다. 제일 큰 딸--하긴 사십대의 올드 미스이긴 하지만 말야--이 여자는 즉사. 아래쪽 딸, 이 여자도 맞았지만 소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모양이야. 그래 체스터란? 체스터는 장남이야. 사십 여세쯤 됐지. 살인 직후 현장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지. 달리 가족은? 전의 주인이었던 트바이어스 그린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 지. 맞아. 그 트바이어스가 죽은 지 십이 년이 되는데 말야, 그렇지만 그 부인 은 아직 살아 있다고. 전신마비의 늙은이지. 자손이 다섯이야--맏딸이 쥬리 어, 다음이 체스터, 그 밑에 딸이 또 하나, 시베라이지. 서른 살쯤 됐을까. 다음이 렉스. 이 친구는 꼭 미치광이 청년 같은데, 나이는 시베라보다 한두 살쯤 아래지. 다음이 에이다. 막내딸인데--이 애는 양녀라네. 나이는 스물 한두살쯤 되지. 그럼 살해된 것은 쥬리어 뿐이었구먼? 총을 맞은 것은 나머지 두 딸 중의 누구지? 막내딸---에이다야. 그녀의 방은 복도를 마주보고 쥬리어의 방 정면에 있 는 모양이더군. 내 짐작으론 강도는 쥬리어를 쏜 직후 에이다의 방으로 침 입, 잘못을 깨닫자 다시금 총을 쏘아대고는 도주. 결국은 계단을 뛰어내려 현관에서 밖으로 나간 게야. 밴스는 잠시 말없이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자네가 말하는 침입자는 아주 안성맞춤으로 착란을 일으킨 모양이군. 에 이다의 방문을 층계로 내려가는 곳으로 알지를 않나, 게다가 그 은그릇 문 제도 있지. 이 얼빠진 범인 녀석, 은그릇을 훔치러 들어갔는데, 뭣 때문에 엉뚱한 이층으로 올라갔지? 아마 다른 귀중품이라도 찾고 있었을 테지. 매컴이 참다못해 느닷없이 한마디 했다. 그 억양에는 비꼬임이 담겨 있었 다. 이 순간 매컴의 젊은 비서가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체스터 그린 씨가 오셨습니다. 전등의 수수께끼 체스터 그린은 방으로 들어왔는데, 보기에 초조와 긴장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나이의 신경질은 나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그런 성질의 것이 못 되었다. 사나이의 첫인상부터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키는 중키이고, 약간 뚱뚱하며, 윤곽의 어딘가에 나약하고 뜨뜻미지근한 데가 있다. 옷차림 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고, 제딴에는 어지간히 멋을 부리고 있는 모양 이지만, 복장 하나하나에 엑센트가 지나치게 강하다. 머리는 약간 벗겨지고, 작은 두눈에서 동자만이 튀어나와 있는 모양은 영 락없는 블라이트병 환자를 연상케 했다. 코밑에는 말끔히 손질된 블론드의 입수염이 나 있는데도 입술은 늘어져 있다. 철두철미한 유한족의 전형이었 다. 매컴과 악수를 마치자 밴스와 내가 소개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더니 이내 호박과 금으로 된 긴 파이프에 다색의 러시아 담배를 집어 넣었다. 매컴, 좀 봐줘야 겠구먼. 상아로 된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당기면서 그가 말했다. 어젯밤 우리집에서 일어난 그 골치아픈 일 말일세. 자네가 직접 조사해 줬으면 고맙겠단 말야. 경찰은 글쎄요, 그런 식이라구. 그따위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지. 이번 사건엔 뭔가가 있다구----글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제대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아무튼 묘한 예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구먼. 매컴이 잠시 상대방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그린? 상대방은 아직 몇 모금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맥없이 안락의자를 두드렸다. 그걸 알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이상한 사건이라구----묘하게 마음 에 걸린단 말이거든. 그러구 말야, 이번 사건의 배후엔 틀림없이 뭔가 있 다구. 그렇지만 막상 그게 뭔지 설명해 보라고 해 봤자 할 수가 없다는 게 내 느낌이라네. 그린씨께선 아마 심령현상의 능력을 갖고 계신 게 분명할 테죠. 밴스가 불쑥 한 마디 했다. 지극히 태연한 태도였다. 그린은 갑자기 돌아보고 손아랫사람에 대한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서 밴스의 사람됨을 관찰하더니 쳇! 이렇게 혀를 차고는 러시아 담배를 또 한 개피 꺼내면서 매컴 쪽으로 얼굴 을 돌렸다. 정말 부탁이라구,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현장을 잠깐 봐 주지 않겠나? 매컴이 잠시 주저했다. 하기야 자네에겐 자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 경찰의 의견에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한테 호소해 온 것일 테지만. 그게 도무지 이상하다구.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경찰이 말하는 절도 설 따위는 내 지성이 무조건 반대해 버린다는 사실 뿐이지. 이 사나이가 진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것은 좀체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의 느낌으로는 이 사나이의 불 기함 밑에는 무엇인지 몰라도 공포 같은 것이 숨어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 고, 또한 이 사나이는 이번 사건으로 결코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인상이 들었다. 자네는 그렇게 말하지만, 매컴이 말했다. 절도설에도 일리가 있잖나? 완전히 사실과 일치한단 말야. 그동안 강도가 난데없이 겁을 집어먹고 무턱 총을 쏘아댄 사건은 숱하단 말야. 그린을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나보고 사건의 분석을 하라는 것은 무리야. 그는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런 것을 떠난 데 있다구. 내가 말하려는 뜻을 이해해 준다면 말 이지만. 하긴 좀 야릇한 사건이니까. 매컴이 동정섞인 투로 말했다. 자네는 사건 때문에 얼떨떨해 있는 게야. 보나마나 이삼 일 지나면 사건 도---- 천만에, 그렇게는 안될걸.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경찰이 제아무리 절도범 을 뒤쫓아 봤자 나올 리가 없지. 난 육감으로 알 수 있다구---- 여기 말일 세. 그는 매니큐어를 칠한 손을 가슴에 얹어 보였다. 밴스는 이때까지 만족한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이 사내를 지켜보고 있 었는데, 두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보세요, 그린 씨----생각에 잠겨 있는데 안됐습니다만, 누님과 여동생 을 죽일 만한 동기를 지닌 인간에 대해 혹시 짐작가는 게 없으신가요? 그린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했다. 아뇨. 그는 가까스로 말했다. 짐작은 없소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절도범의 소행이라는 설을 배척하고 계시고, 두 여자분이 총에 맞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두 분을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다는 게 되죠. 당신은 두 분의 동생이기도 하고 오빠란 말씀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만한 인간에 대해 혹 시 짚이는 데가 없을까 해서요. 그린은 분연히 짚이는 데가 있을 리 있나! 이렇게 말하고는 창가를 서성거리는 매컴 쪽을 힐끗 보았다. 밴스는 겉으로는 무표정을 꾸미면서도 그린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매컴이 아무 말도 없자 자세를 약간 고쳐세웠다. 한 말씀 묻겠는데요, 그는 입을 열었는데,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는 어투로 달라져 있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의 자초지종만이라도 좀 얘기해 주시죠. 제가 아는 바로는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사람은 당신이라면서요? 누님인 쥬리어한테 달려간 것은 나요. 그린이 이렇게 대답했는데,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는 기색이 없지도 않다. 그렇지만 에이다를 발견한 것은 집사인 스프루트요. 등에 심한 상처를 입 어, 출혈 때문에 기절해 있었지. 등이라구요? 밴스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크게 떴다. 그렇소이다. 그린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톱을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그 사 실 속에 새삼스럽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은 투였다. 그럼 쥬리어 그린, 누님도 역시 뒤에서 총을 맞았던가요? 아니지----정면에서 맞았소. 그것 참, 괴이한 일이로고! 밴스가 담배연기를 둥글게 토해내어 먼지투성이 샹제리아에 불어댔다. 매컴이 이쪽으로 돌아오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아까부터 줄곧 호기 심에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밴스의 질문은 자기의 질문이나 마찬가지 니까 그렇게 알아 달라고 말했다. 그린이 입을 오므리고 담배파이프를 포켓 에 챙겼다. 그렇다면 좋소. 다음엔 무엇을 알고 싶소? 밴스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최초의 총소리를 듣고난 뒤, 곧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순서 있게 말씀해 주시죠. 짐작컨대 당신은 총소리를 분명히 들으셨겠다? 물론 들었지. 쥬리어의 방은 바로 내 옆방이고, 난 아직 잠들지 않았었으 니까. 이게 웬일인가 싶어, 슬리퍼를 신고, 허둥지둥 가운을 걸치고는 복도 로 나갔소. 깜깜절벽이었지. 그래서 벽을 더듬어가며 간신히 쥬리어의 방에 닿자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지. 내 눈에 띈 누이는 침대에 쓰러져 있었 는데, 가운 정면이 피투성이었소. 방에 인기척이 없기에 나는 곧장 누님에 게로 달려갔었소. 마침 그때였소. 또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려오더군. 에이다 의 방쪽 같았소. 난 그렇게 되자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이거 대체 어 떻게 한담, 이렇게 생각하면서 쥬리어의 침대 곁에 멍청히 서 있었는데,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군----맞아, 난 분명히 얼어붙은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소...... 하긴 그랬을 겝니다. 밴스가 그를 격려했다. 그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 되게 난처한 입장에 몰렸구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멍하게 서 있으려니, 누군지 삼층에 있는 심부름꾼 방 쪽에서 층계를 내려오는 발 소리가 들리더군. 그 사이에 그 발소리가 스프루트의 것임을 알게 됐소이 다. 이윽고 에이다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지. 이어 내 이름을 부르 는 소리가 나길래 그 길로 뛰어갔소. 에이다는 화장대 정면에 쓰러져 있더 군. 그래서 스프루트하고 같이 안아올려 침대에 눕혀 줬소. 그제서야 정신 을 차려 보니, 무릎이 떨려오고 당장 주저앉아 버릴 것 같더군. 잠시 후 스 프루트가 복도에서 전화로 펀 브론 의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소. 자네 얘기를 들으니 절도설하고 모순되는 점이 하나도 없잖나? 매컴이 한 마디 했다. 뿐만 아니라 내 보좌관의 말로는 현관 밖 눈 위에 발자국이 두 쌍 있었다 는 게야. 그린은 어깨를 흠칫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그린씨. 밴스는 이 때에는 의자 안에서 몸을 길게 뻗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어 그린을 쳐다보고 말했다. 당신 얘기로는 쥬리어양의 방을 들여다봤을 때,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전등 을 켜셨나요? 천만에, 그런 바보 같은 일이! 그린은 이 질문에 어지간히 놀란 듯 했다. 전등은 켜져 있었소. 밴스의 눈동자에 번쩍 하고 흥미의 잔물결이 일었다. 그럼 에이다양의 방은 어떻던가요? 거기에도 불이 켜져 있었습니까? 그렇지. 밴스는 포켓을 뒤져 담배케이스를 꺼내고 꼼꼼하게 담배 한 개비를 골라 냈다. 그가 이런 거동을 보일 때는 내심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증거라는 사 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양쪽 방 모두 불은 켜져 있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도다! 매컴 역시 밴스의 표면적인 무관심 밑에 흥분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만큼 기대에 빛나는 눈을 쏟고 있었다. 그러면. 밴스가 태연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다시금 물었다. 두 총소리 사이에는 얼마 만한 시간의 경과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제는 그린이 그의 질문을 귀찮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는 간단히, 그러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삼 분이었을까?----분명히 그 정도밖에 안되었소. 그렇다면 말씀입니다. 밴스가 되씹듯이 말했다. 당신은 최초의 총소리를 듣자 침대에서 일어나 손으로 벽을 더듬어 옆방 까지 가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까지 갔어요----이것은 모두 내 추리에 의하면 두 번째 총소리가 들 릴 때까지 사이의 일이었어요. 분명하죠? 틀림없소이다. 그것 참! 당신 말씀대로 하자면 이분 아니면 삼분, 그렇죠? 적어도 그만한 사이가 있었죠. 정말 놀라운 일인데! 밴스가 매컴 쪽으로 돌아앉았다. 사실이라구, 아늑런가? 자네의 판단에 이러쿵저러쿵 영향을 주기는 싫지 만 말일세, 역시 난 이렇게 생각하는구먼. 자네는 그린씨의 간청을 받아들 여, 이번 사건에 개입해야 될 것이라고 말야. 나 역시 이 사건엔 심령감응 을 느끼고 있다네. 매컴이 사색과 호기심이 얽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밴스의 그린에 대한 질문방법에 몹시 흥미를 이끌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 다. 밴스라는 사나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이는 시사 따위를 하는 인간이 아님을 그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닭에 나는 그가 그린 쪽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조금도 뜻밖이라는 느낌은 품지 않 았다. 좋아, 그린.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 보세. 아마 오늘 오후 일찌감치 자네 집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 때 집안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 게끔 조치해 달라구. 직접 심문해 볼 작정이니까. 그린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전원---가족도 심부름꾼도---자네 도착시엔 모두 집 안에 있게 하겠네. 그리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밴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상류계급이라고는 할수 없구먼, 매컴----무슨 얼어죽을 놈의 상류계급이 지? 그건 어쨌든, 그 친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무언가 용의 사실을 잡고 있 다, 그게 자네의 의견이지? 밴스는 창가로 다가가서 을씨년스러운 겨울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세----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서는 다시금 덧붙였다. 체스터는 내 짐작이지만, 그린가의 대대의 인물중에서도 아주 전형적인 인물로 태어나 있는 게 아닐까? 난 이 몇 년 사이 상류 사회의 엘리트족들 사고는 통 접촉이 없는 바람에 이스트 사이드 근처 부호들의 소식에는 도 통 어둡지만. 매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됐지만 그 인물이 대표가 될 테지. 그린의 종주는 실하고 호탕한 씨족 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츰 떨어져가고 있는 게 사실이야. 삼대째 인 트바이어스----이 사람이 체스터의 부친이지----는 그런대로 여러 모 로 훌륭한 사람이었지.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면 유서 있는 그린가의 특질 을 계승한 것은 이 인물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구만. 남겨진 일족은 어떤 종류의 풍화작용에 드러내어져 있지. 과일을 너무 오 랫동안 땅바닥에 버려둔 것이나 같지.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은 게야. 게다가 억제라는 게 도통 없으니. 그렇지만 한편 새로운 세대의 그린에겐 어떤 종 류의 지성이 깃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 모두들 머리가 좋은 모양이야. 설령 방향감각은 뒤틀려 있어도 말일세. 아냐, 자네는 체스터를 과소평가하 고 있다고. 그 속물근성, 그 여성적인 사고방식이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바보가 아니라네. 내가 체스터를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다구? 천만에! 그건 자네의 지나친 오해야. 그게 아니지. 그 친구 우리가 생각하기보다는 훨씬 빈틈없는 인간 이라구. 자네보고 수사에 직접 나서라고 말하게 된 동기도 실은 그 천치 비슷하게, 일부러 꾸민 포즈 때문이라네. 매컴이 몸을 뒤로 젖히고는 밴스를 똑바로 보았다. 여보게, 밴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말했잖나, 심령현상이라구 말야. 매컴은 어깨를 흠칫하고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내가 이 사건을 맡게 된 이상, 담당자가 누군지 알아내서 예비 정보를 수 집해 두는 편이 좋을 테지. 그는 형사국의 모랑 국장을 불러내어 짤막한 대화를 마치자마자 밴스 쪽을 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자네 친구 히스 부장이 이 사건의 담당자야. 카나리아 살인사건 때의 경 찰부장 말일세. 마침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리 오겠다는 거야. 히스는 15분도 안되어 찾아왔다. 밤샘을 했을 터인데도 여느때처럼 동작이 민첩하고 정력적이었다. 우락부락한 성질급해 보이는 용모에는 투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매컴과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정중한 악수를 나누고 나더니, 밴스를 알아보 자 온통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거 밴스 선생 아닙니까?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데를 다 오셨소?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악수를 했다. 아아, 말세라구요, 부장. 당신하고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 난 줄곧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소. 그런데 천만다행히 세상엔 범죄가 끊이지 않는 모양이라 서재에서 이렇게 뛰쳐나온 거요. 기막히게 뒤얽힌 살인사건이라도 있어 줘 야 살 맛이 나질 않겠소? 히스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지방검사쪽을 돌아보았다. 밴스의 농담을 파악 하는 기술을 벌써 옛날에 익혀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살인사건이라고요, 부장. 매컴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죠. 히스는 자리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검은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렇지만 아직 아무 것도 나타난 게 없는 걸요. 현재 상습범들을 모조리 붙들어다가 어젯밤의 알리바이를 캐고 있지요. 완전히 가려내려면 아직도 며칠 걸리지 않겠습니까? 이건 내 짐작이지만, 보나마나 풋내기 녀석의 짓 이 분명하죠. 하긴 그렇게 되면, 이쪽은 훨씬 힘이 들지만. 그는 성냥 한 개비를 두 손 안에 넣고 시가에 불을 당겨 연거푸 연기를 토 해 냈다. 그런데 밴스 선생, 이 평범한 절도사건에 대해 무엇을 아시려고요? 매컴이 망설였다. 흔해빠진 절도사건이라 잔뜩 믿고 있는 부장의 태도에 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체스터 그린이 여기 와서 하는 말이, 그는 잠시 후 설명했다. 아무래도 절도범의 소행으로는 여겨지지 않느다는 거야. 그러니 나보고 특별히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걸세. 히스가 경멸하듯 쳇! 하고 혀를 찼다. 절도범의 소행이 아니라면 여자 두 사람을 권총으로 마구 쏘아대는 미친 놈이 세상에 어디 있죠? 옳은 말씀이오, 부장. 이렇게 대답한 것은 밴스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씀입니다. 양쪽 방 모두 불이 켜져 있고, 여자들이 침 실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두 총소리 사이에는 몇 분의 간격이 있어요. 그런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죠. 히스가 약간 성가신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어젯밤 이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건 전혀 알 수가 없 죠. 무릇 도둑이란 흥분해 버리면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잠깐, 바로 그게 문제라구요. 도둑이 흥분해 버려----이 방, 저 방을 찾아 다니며 전등을 켜고 돌아다녔고, 놈은 누군가를 쏘아죽였고, 그 통에 온 집 안식구를 깨워놨으면서 어두운 복도를 몇 분 동안이나 숨을 죽이고 돌아다 니는 얼빠진 짓을 했다? 게다가 정작 놈이 노린 물건은 일층 식당에 있는 데, 난데없이 이층에 있는 여자들의 침실로 뛰어들어 허튼 장난을 치다니, 대체 그 도적선생의 뜻이 뭐요? 그런 거야 놈을 잡기만 하면 드러날 테죠. 히스가 강경히 반박해 왔다. 요점은 말일세, 경찰부장. 매컴이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내 족에서 밴스씨한테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단 말야. 그런 만큼 자네가 쥐고 있는 구체적인 사항을 알고 있어야 되리라 생각한 게지. 물론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지만 말일세. 그가 달래듯이 덧붙였다. 나로서는 자네들의 활동상황에 간섭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고. 사건의 결과가 어찌되든, 그런 것은 모두 자네가 소속해 있는 경찰본부의 업적이 될 테니까. 천만에요, 그런 걸 염려하는 것은 아니죠, 검사님. 매컴과 같이 일을 할 때 명예와 영광을 손상당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히스 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밴스 선생의 의견은 어떻든 간에, 이번 사건에 열을 올릴 만한 까닭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보나마나 시시한 사건이죠.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매컴이 그의 말을 인정했다. 난 약속해 버렸단 말이네. 그래서 오늘 오후 직접 현장을 찾아갈 작정이 지. 물론 자네한테 대충 설명을 듣고 판단을 내려야 할 테지만 말일세. 별로 대단한 정보도 없군요. 히스가 시가를 빨아들이며 궁리하듯 말했다. 의사인 펀 브론----결국 그린가의 시의죠----한테서 본부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 한밤중이었죠. 그 때 나는 마침 권총강도 사건 비상소집에서 막 풀려 돌아왔죠. 살인과의 부하녀석을 둘 데리고 그린가로 뛰어갈 수밖에 요. 피해자는 여자 둘, 물론 알고 계실테지만, 하나는 사망, 또 하나는 의식 불명----모두 권총에 맞았죠. 이내 검시관인 드라머즈 선생한테 전화를 걸 고는 대충 상황조사에 나섰죠. 범인은 아마 정면 현관에서 들어간 게 분명해 보이더군요. 그럴 것이 눈 속에 오고간 발자국 한 쌍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브론 박사의 발자국하고는 다른 놈이죠. 그런데 어젯밤 내린 눈은 많이 쌓이긴 했지만 바삭바삭해서 발자국 본을 뜰 수도 없었죠. 열 한시 경엔 눈이 그쳤으니까, 이 발자국이 절도범의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죠. 눈이 내린 이후에 그 집을 드나든 사 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풋내기 강도가 그린가 현관문에 딱 맞는 열쇠를 갖고 있었다니. 밴스가 중얼거렸다. 그것 참 괴이한 일이로고! 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히스가 뿌루퉁해서 항의했다. 난 사실대로를 말하고 있을 뿐이죠. 대문고리가 벗겨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또 누가 안에서 열어 줬는지도 모르지 않소? 얘기를 계속하라고, 경찰부장. 매컴이 이렇게 재촉하고 밴스를 향해 잠자코 있으라고 눈짓했다. 잠시 후 드라머즈 선생이 도착해서 큰딸의 시체검증, 그리고 젊은 여자의 부상을 검사했죠. 그 뒤 내가 가족 전원을 심문했어요----집사가 하나, 여 자 심부름꾼이 둘, 여자 요리사가 하나. 첫 번째 총소리를 들은 것은 체스 터 그린하고 집사 둘 뿐, 그 총소리가 일어난 건 열한시 반 경입니다. 그런 데 두 번째 총소리엔 그린 노파가 깨어났죠----부인의 방은 그 총을 맞은 젊은 여자의 방하고 붙어 있죠. 빠짐없이 심문해 봤지만, 그 누구도 아무것 도 모르더군요. 한 두 시간쯤 지나 데리고 간 부하 두 녀석을 배치시키고 돌아왔죠. 드라머즈 선생이 피해자의 시체를 해부해 보겠다고 했으니까 곧 보고가 있으 테지만, 아마 별 신통한 단서는 안 나올 걸요. 그 젊은 피해자에게서 뭣좀 알아볼 수 없었나? 아직 못했죠. 어젯밤엔 내내 의식불명이었고, 오늘아침에도 신경쇠약이 심 해서 맬을 제대로 못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의사----펀 브론----말로는 오 늘 오후에는 심문이 가능할 것이라는군요. 그 이야기로 문득 생각이 났는데요, 부장님. 이제까지 줄곧 듣기만 하고 있던 밴스가 몸을 뒤로 기대면서 말했다. 그 집 가족 중에 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던가요? 히스가 큰 눈으로 밴스를 보았다. 체스터 그린이 오래된 삼십이 구경 회전식 권총을 갖고 있고 항상 침실 책상서랍에 넣어 두고 있다더군요. 허어, 그래요? 그래 당신 그 총을 봤소? 가져오라니까 어디 뒀는지 보이질 않는다더군요.이따가 내가 갈 때까지 찾 아놓겠다고 약속했지만. 부장, 보나 마나 찾지 못할 걸요. 밴스가 뜻 있는 시선을 매컴 쪽으로 보냈다. 이제 차츰 알게 되는군. 체스터의 마음적인 고민의 근원을 말일세. 자네 생각으로는 총이 없어졌고, 그래서 그 친구가 겁을 집어먹고 달려왔 다는 겐가? 글쎄----아마 그럴는지도......하긴 단언할 수는 없지. 아무튼 묘하게 얽혀 있단 말야, 그 대목의 심리가. 그는 나른한 시선을 경찰부장한테 돌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부장, 절도범이 사용한 총은 어떤 형이었나요? 히스가 불안한 듯한 소리로 웃었다. 과연 빈틈이 없으시군, 밴스 선생. 총탄은 모두 찾아냈죠----삼십이 구경, 발사는 회전식, 자동권총은 아닙니다. 매컴이 이야기를 매듭짓듯이 말했다. 부장, 점심을 먹고 그린가로 갈 작정이야. 자네 동행할 수 있을까? 있구말구요. 아무튼 나는 가볼 작정이죠. 좋아, 그럼 이리로 두 시에 와주게. 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놀리는 듯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밴스 선생, 당신도 가실 테죠? 내 길을 가로막는 자, 그 누구뇨? 밴스가 역시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기묘한 가족관계 그린 맨션----그것이 흔히 뉴욕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다----은 식민 지 시대의 유적 가운데 하나였다. 오십삼블럭 동쪽 끄트머리에 벌써 삼대째 내려오는 건물로써, 그 이층의 튀어나온 창 두 개는 이스트 강 더러운 물 위에 삐져나와 있었다. 저택이 서 있는 부지는 한 귀퉁이 전체에 걸쳐있어----그래서 깊이와 길이가 200 피트나 되며----가로도 세로도 행길로 면한 거리는 똑같았다. 근처의 거리는 초기에 비하면, 전혀 달라져 버렸지만, 아랫녘에서 웃녘으로 차츰 발전해 온 눈부신 풍조도 그린가의 저택만은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선대인 트바이어스 그린의 유언장 가운데 자기가 죽은지 적어도 사반세기 동안은 자기와 조상의 영을 받드는 의미에서 저택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결과 오십삼블럭쪽으로 난 현관에는 육중한 이중의 철문 이, 뒤쪽 오십이블럭에는 단골상인이 드나드는, 역시 쇠로 된 문이 달린 애 초부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저택 자체는 2층에 중간이층이 딸린 구조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뾰족한 탑이며, 난로용 굴뚝 따위가 숱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 거대한 정방형의 흰 석회암 덩어리에서 스며나오는 차분한 위엄과 어딘지 봉건적인 전통주의 의 분위기만은 세상의 변천에도 아랑곳 않는 여유를 풍기고 있었다. 집의 건축양식은 16세기 고딕이지만, 부분 부분에는 근세의 이탈리아 르네 상스식 장식이라고도 생각되는 풍취가 어려 있고, 튀어나온 뾰족탑에는 비 잔틴식의 정취가 있었다. 세부의 장식이 이렇듯 다채로운데도 불구하고 건 물 전체에 우아하고 찬란한 빛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정면의 정원에는 북부 특유의 단풍나무와 상록수가 심어져 있고, 그 사이 를 누비고 라일락 숲이 이어져 있다. 뒤쪽 정원은 늘어진 수양버들이 무성 하여 개울에까지 그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돌담 안쪽은 화단이 깔려 있었다. 저택의 양쪽, 결국 등쪽인 강가 반대쪽에는 아스팔트의 차도가 있고, 두 채가 되는 차고로 이어져 있 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인 그린 일족이 새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꽃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어, 차도의 근대감각을 숨기고 있었다. 그 잿빛의 11월 오후, 우리가 저택 안으로 한걸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무 언가 불길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저택 전체를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도, 숲도 상록수를 제외하고는 낙엽진 벌거숭이의 모습을 보였 고, 여기저기의 가지에 눈의 얼룩무늬를 달고 있었다. 나는 높은 현관으로 이어지는 낮은 층계를 올라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길한 오한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프루트----그는 집사이며, 백발의 작은 노인이었는데, 얼굴은 주름 투성 이의 염소상이었다----가 나와 말없이, 장례식 때 같은 위엄으로 우리를 맞 이했다. 우리는 이내 커다란, 음울한 객실로 안내되었는데, 그 무거운 커튼이 쳐져 있는 창으로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였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체스터 그린이 나타나, 매컴에게 정중한 인사를 보냈다. 히스와 밴스, 그리고 내게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해 보였을 뿐이었다. 고맙구먼, 정말 잘 와줬네, 매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초조한 심정을 누르듯이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케이스 를 꺼냈다. 우선 먼저 심문부터 하고 싶을 테지? 누구를 일차로 불러다 줄까? 그건 잠시 후에 하세. 매컴이 이렇게 말했다. 먼저 심부름꾼들에 대해 좀 알고 싶구먼, 자네가 말할 수 있는 데까지 해 주겠나? 그린은 의자에 앉은채 무척 몸을 뒤척이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에도 곤 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명 뿐이라네. 큰 집에 고작 네 명이냐고 생각할 테지만, 그 정도면 충 분하니까. 누이인 쥬리어가 가정부 역할을 하고 있고, 에이다가 모친을 보 살피고 있으니까. 우선 제일차로 스프루트 영감. 삼십 년 동안 집사 노릇을 하고 있네.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우며, 공손하고 또한 독재자적, 게다가 노 상 가족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지.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만, 그런 골칫 거리 영감은 뻗어버리는 것이 상책이지. 다음은 여자 심부름꾼이 둘---- 하나는 주로 방일을, 또 하나는 닥치는 대로인데, 이쪽은 여자들이 독차지 하고 있네. 헤밍이라는 나이먹은 심부름꾼, 벌써 십년이나 집에 있는데, 아 직도 세례에 편리한 나무구두를 신고 있다고.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파 프테즈마 신자라고나 할까. 또 하나는 버튼, 젊고, 순진하고, 자신의 매력에 반하지 않는 남자란 이 세상에 없다고 믿고 있지. 다음, 요리사는 덩치 큰 독일 여자야. 산 같은 가슴, 신발 사이즈 십이라면 말 다 한 거지. 부친이 죽기 일 년 전에 고용했는데, 그 여자가 있고 싶을 때 까지 집에 두라는 명령이라네. 자가용 운전사는? 필요가 없다네. 쥬리어는 차를 싫어했고, 렉스는 자동차 공포증이야---- 멀미를 일으킨단 말야, 젊은 녀석이. 나는 내 레이서를 직접 운전하고 있 지. 시베라의 차는 여느 바아니 올드필드야. 에이다도 운전을 하지. 시베라 의 차가 차고에 있을 때는 말일세. 이걸로 끝이라구. 체스터 그린이 이것 저것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사이, 매컴은 메모를 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피우고 있던 시가를 비벼껐다. 그럼 이제 집안의 구조를 볼까? 그린이 재빨리 일어나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은 아래층의 큰 홀로 되어 있고----둥근 천정식의 떡갈나무 판대기를 깔은 복도였는데, 양쪽에 프란다스제의 커다란 조각책상 한 쌍과 앵글로 터 치식의 왕관 모양의 등이 달린 의자 몇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방금 나온 곳, 그곳은 물론 객실이지만. 그린이 거만한 투로 설명했다. 저 배후, 복도 끝이. 그는 넓은 대리석 계단을 지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집 임자의 서재 겸 아지트였지. 벌써 십이 년 동안 비밀의 방이 된 채야. 부친이 죽자 어머니가 자물쇠를 채워 버렸지. 아예 말끔히 치워 버리 고, 당구장이나 만들자고 해도 요지부동이거든. 우리 모친은 말야, 고집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네. 그는 홀을 지나 객실의 반대편이 되는 방문 입구에 걸려 있는 커튼을 당겼 다. 여기가 응접실이지. 근래엔 통 쓴 일이 없다네. 우울하고 멋대가리 없는 방이야. 난로가 바람 한 모금 안빨아당기니 말야. 여기서 불을 피울 때 마 다 성가시게 청소부를 불러 재를 치워야 하거든. 그는 담배케이스를 손깃발처럼 흔들며 두 장의 아름다운 돗자리를 가리켰 다. 저 뒤가 말일세, 이 작은 문 바로 뒤가 식당으로 되어 있지. 그 뒤는 집사 가 밥상을 차리는 곳, 그 앞이 조리실. 자네들, 우리집의 조리실까지 검증 할 셈인가? 아니, 안봐도 될 테지. 매컴이 이렇게 말했다. 주방은 놔두고, 이제 이층을 보여 줄까? 우리는 큰 층계를 올라가는데, 이 층계는 원형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는 대 리석의 조각이 서 있었다. 그곳을 올라가자 이층의 큰 복도가 나왔으며, 집 의 정면을 따라 있는데, 삼련식 유리창으로는 벌거숭이 나무들이 보였다. 이층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며, 저택의 커다란 장방형 건물과 대칭형으로 되어 있는데, 독자들의 이해를 돋구기 위해서 대략적인 배치도를 첨부해 두 겠다. 무엇을 숨기랴----살인자의 괴이한 음모를 가능하게 만든 것----그 것은 바로 이 방의 배치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린가 이층의 배치도> +--------------------+---+--+--+--+--+-------━━━━----------+ | | | | | | | 그린부인의 방 | | | +--+ +--+ | | | 시베라의 방 +---+--------+--+ | | | 심부름꾼 | | | | 전용계단 | ↙세탁물을 넣는 곳 | +--------------------+ +--------+ +--+---------+------+-----+ | | | | | | 화장실 | |발코 | | | | | +--+---------+------+니 | | 체스터의 방 | | | | +--+--+ | | ++------++ | 에이다의 방 | | | | ++ ++ | | | +--------------------+ 정면계단 +-------------------+--+ | | | | ↖ | | | | 발코니에서 | 쥬리어의 방 | | 렉스의 방 | 땅으로의 | | | | 계단 | | 호올 | | | | +-------------------+ +--------------------+ | +---------------+ 이층에는 침실이 여섯 개나 있다----복도를 사이로 좌우에 세 개씩 각기 가 그린가 가족들의 침실이다. 이 배치도의 오른쪽이 막내아들 렉스 그린, 그 옆이 에이다 그린, 등쪽이 그린 미망인의 침실. 에이다의 방과의 사이 에는 상당한 크기의 화장실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 두 침실은 자유롭게 드 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도면으로 알 수 있듯이, 그린 미망인의 방은 집 양쪽에서 튀어나와 있고, 이렇게 형성된 L자형의 면적은 난간이 딸린 작은 발코니로 되어, 그곳에서 집의 벽을 따라 좁은 층계가 달려 있으며, 밑의 잔디로 이어져 있다. 이 발 코니는 에이다의 방에서도, 그린 미망인의 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 복도를 마주보고 있는 세 개의 방은 각각 쥬리어, 체스터, 시베라의 것이다 . 쥬리어의 방이 집의 정면, 시베라의 방이 배면, 체스터의 방이 중앙. 이 세 개는 서로 드나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주의해 둘 것은, 시베라의 방도, 그린 미망인의 방도 입구의 문 은 바로 현관으로 가는 층계 뒤에 있는 반면 체스터와 에이다의 입구는 층 계를 올라선 바로 머리 부분에, 쥬리어와 렉스의 방은 훨씬 떨어진 정면 부 분에 있다. 에이다의 방과 그린 미망인의 방 사이에는 작은 리넨실(세탁물 을 넣는 방)이 있다. 복도 끄트머리는 심부름꾼 전용 층계로 되어 있다. <쥬리어의 침실평면도> | | | | | 욕실 | 옷장 | | +------------------+----------+-----------------+ | | | | | 호올로 | | 나가는 문↘ | | \ | 전등 스위치↘\ 호올 | +------------------+ +----+| | | 쥬리어가 총에 | | 장 || | | 맞은 침대 | | || | | | | 농 || | +------------------+ +----+| +-----------------------------------------------+ 체스터 그린은 이 배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서 성큼 성큼 복도를 나아 가 쥬리어의 방 앞에 이르렀다. 여러분은 보나마나 이 방이 가장 궁금할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손을 댄 것은 없소이다----경찰의 명령이지. 그렇지만 저 피투성이 침대 커버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알수 없구만. 보기에도 처참한 광경이. 방은 넓었다. 입구 정면에 한 단 높은 자리가 만들어져 있고, 침대가 놓 여져 있었다. 수를 놓은 시트에 검은 얼룩점이 몇 군데 묻어 있는 것이 어 젯밤 이곳에서 빚어진 비극의 말 없는 표지가 되어 있었다. 밴스는 방 안의 가구의 배치를 주목한 뒤, 천정을 올려다보고 옛날식 샹 제리아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어젯밤 누님을 발견했을 때 켜져 있었다던 전등은 저거군요, 그린 씨? 체스터 그린은 벌컥 화를 내면서도 난처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치는 어디 있죠? 옷장 끄트머리 뒤요. 그린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방문 가까이에 있는 장농을 가리켰다. 밴스가 어슬렁어슬렁 장농 앞까지 다가가서 그 뒤를 들여다보았다. 그것 참, 기막힌 도적 선생이구만! 그리고는 매컴 쪽으로 가서 무어라고 귓속말을 했다. 매컴이 끄덕였다. 체스터 그린. 매컴은 말했다. 자네 방으로 돌아가서 어젯밤 총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침대에 누워 있어 주지 않으려나? 그리고 내가 벽을 두드리거든 어젯밤과 똑같은 행동을 해 달라고----매사를 어젯밤하고 똑같이 말일세. 시간의 경과를 알고 싶은 거 야. 체스터 그린은 얼굴을 굳히며 항의의 시선을 매컴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내 어깨를 흠칫하고는 거만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밴스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매컴은 그린이 방에 닿았을 때쯤 해서 벽을 두 드렸다. 참으로 지루한 시간 동안 우리는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체스터가 얼굴을 디밀었다. 그의 눈은 서서히 방 안을 둘러보았고, 이어 방 문을 좀더 열자 살며시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로 갔다. 삼분 이십초. 밴스가 말했다. 매컴이 집사가 첫 번째 총소리를 듣고 내려왔다는 심부름 꾼 전용의 층계를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침실은 현재 검사할 필요는 없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덧붙였다. 물론 의사가 지장이 없다고 할 때 에이다양의 방을 봐야 할 테지만. 그런 데 체스터, 언제쯤이면 의사의 결정을 알 수 있겠나? 세 시가 되면 오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 시간은 참 잘 지키지. 그런 놈은 뻗어버려야 하는 거야. 오늘 아침 간호원을 보내 줬지. 그 여자가 지금 에 이다하고 모친을 보고 있네. 여보시오, 그린 씨. 밴스가 가로막았다. 누님인 쥬리어씨는 밤에 장문을 안 잠그는 습관이 있나요? 체스터가 턱을 약간 젖히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바보 같은!----설마! 그러고보니...... 누이는 언제나 방문을 걸어잠그 고 있었단 말야. 밴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금 복도로 나왔다. 배면의 심부름꾼 전용 층계에는 엷은 베이 즈를 친 작은 문이 달려 있고, 그것이 체재를 유지하고 있다. 매컴이 그것을 열었다. 이거야 소음 효과가 있을 턱이 없구먼. 맞아. 체스터도 동의를 나타냈다. 게다가 스프루트 영감의 방은 층계 바로 위야. 귀도 밝단 말야, 놈은----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날카롭지. 우리가 되돌아서려는 때, 오른쪽 반쯤 열려진 방문에서 튀어나온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있었다. 체스터, 너냐? 대체 왜 그렇게 허둥대는 게지? 사람을 그만큼 놀라게 해 놓고, 근심을 시켜놓고도 아직 모자란단 말이냐? 체스터는 어느새 모친의 방 앞에 서서 머리만을 안에 디밀고 있었다. 염려 말라니까요, 어머니. 그는 성가신 듯이 말했다. 경찰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뿐이라구요. 경찰이? 그녀의 목소리는 경멸에 차 있었다. 어젯밤 소동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단 말이냐? 냉큼 악당을 찾아내야 하잖 아? 남의 방 앞에 몰려들어 떠들어대는 것은 질색이라고 전하려므나---- 그래? 경찰이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집념깊은 것으로 변했다. 당장 이리 들여보내라구. 내가 결말을 내줄 테니까. 경찰? 흥! 내 원 기가 막혀서! 체스터가 한심스러운 듯 매컴을 보았다. 그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우리는 이윽고 환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으로서, 삼면에 창이 있고, 잡다한 골동품으로 꼼꼼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내가 힐끗 본 것 만으로도----동인도의 카펫, 루이 왕조 때의 옷장, 거대 한 금도금의 불상, 티크재의 중후한 중국식 의자가 몇 개, 빛이 바랜 페르시 아 돗자리, 이런 식이었다. 기막히게 큰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이 집의 여주인 이다. 커다란 침구에 기대어 우리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이는 65세에서 70세 사이로 생각되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검다. 말을 연 상시키는 긴 얼굴은 황달 기운이 있고, 게다가 고대의 양피지 흡사한 주름 투성이지만, 발랄한 활기를 아직도 발산시키고 있었다. 노부인의 어깨에는 수를 놓은 동양식 쇼올이 걸려 있다. 이 이상하고 다채 로운 방을 배경으로 이 여자가 비쳐지고 있는 모습은 일종의 독특한 이국 정서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 곁에는 풀이 잘 먹힌 흰 유니폼을 입고,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간호원이 덩그라니 서 있는 것이 침대의 여인과는 야릇 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체스터 그린이 매컴을 소개했는데, 나머지 사람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투 였다. 모처럼의 소개에도 그녀는 인사말 한 마디 없이 매컴의 인물을 감정 하더니, 이윽고 치밀어오르는 노여움을 관용의 덕으로 누르기라도 한 듯 끄 덕이며 길고 뼈마디 투성이인 손을 매컴 쪽으로 내밀었다. 내 집을 이런 식으로 짓밟히면서도 여전히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요? 그녀는 나른한 듯이 말했다. 잠깐이라도 좀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죠. 어젯밤의 그 소동 뒤가 아 닌가요? 오늘은 등의 고통이 어찌나 심하든지. 보나마나 나 따위는 아무래 도 괜찮다는 거겠죠? 쓸모 없이 늙어 바진, 전신마비의 여자 따위는 말이 에요. 하기사 어차피 내게 신경을 써 주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매컴이 연거푸 정중한 사과의 말을 했다. 침대 위의 여인은 매컴 쪽으로 시선을 쏟고 있었는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의 표정이 그곳에 있었다. 불구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몹쓸 놈의 운명이죠? 걷는 걷도, 혼자서 설 수도 없다니까요. 두 다리가 전치불능의 마비를 일으킨 지가 자그만치 10 년이나 된답니다. 짐작이 가시나요, 매컴 씨? 그 기나긴 10년을 이 침대와 저 의자 사이에서 살아왔다구요. 그녀는 방에 놓여 있는 작은 환자용 의자를 가리켰다. 게다가 온 몸을 들어올려 주지 않으면, 나는 한 군데 붙박혀 꼼짝도 못하 죠. 하지만 어차피 세상을 떠날 날은 멀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답니 다. 그래도 자식들이 좀더 다정하게 대해 준다면, 이렇듯 암담한 세상을 보 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하지만 뭐랄까, 그건 당치도 않은 바램이죠. 그래 서 나는 주어진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거에요. 자식들의 짐이 되는 것은 내 운명이니까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 쇼올을 힘있게 여미었다. 내게 뭔가 질문이 없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의 도움이 될 것 같지 는 않지만, 뭐건 간에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기쁜 일이죠. 매컴은 얼어붙은 듯 자리에 서서 동정하는 얼굴로 이 늙은 귀부인을 바라 보고 있었다. 사실 그 모습에는 연민과 동정이 이끌리는 데가 없지 않았다. 절대로 필요한 질문 외에 부인을 괴롭혀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질문을 받아 주신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고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나 두 가지 질문이나 괴롭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녀는 자세를 바로 세웠다. 알았어요, 무엇이건 질문하세요. 매컴이 유럽식 예의로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체스터씨의 말을 듣자면, 부인께서는 맏따님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는 못 들으셨지만, 에이다 양의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에는 잠을 깨셨다는데요? 그래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쥬리어의 방은 제법 떨어져 있죠----복도 반대쪽이에요. 하지만 에이다는 항상 양쪽 방 사이의 문을 열어놓고 있어요. 내가 밤중에 혹시 볼일이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죠. 그러니 그 애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에 잠을 깰 수 밖에요. 마침 그 때, 간신히 잠이 막 들락말락 했을 때였죠. 무섭기 는 하지, 그렇다고 꼼작할 수는 없고. 정말 아주 혼이 났었죠. 그런데도 누 구 하나 내 안부를 염려해서 달려와 주는 인간이라곤 없으니. 하긴 언제나 내 생각을 해 주는 애들은 없지만.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린 부인. 매컴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편상 여러분의 머리에서 두 피해자 이외의 일은 잠시 사라졌을 겝니다. 그건 그렇고, 총소리에 놀라 깬 뒤, 에이다 양의 방에서 다른 소리는 못들 으셨던가요? 딱하게도, 그 애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죠----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렸 어요. 그러면 다른 소리는 없었겠군요? 가령 발자국 소리라든가? 발자국 소리? 노부인은 생각해내려고 무척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뇨, 아무 소리도. 문이 여닫히는 소리는 못들으셨습니까, 부인? 이 질문을 한 것은 밴스였다. 부인은 날카롭게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노려보았다. 아뇨, 문이 열리는 것도, 닫히는 소리도 안들렸어요. 그것 참 신기하구만, 안그렇습니까? 밴스가 바싹 조였다. 침입자는 반드시 방에서 나갔을 거란 말입니다. 그야 그럴 테죠.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저 방에 있어야 할 테니까. 그녀는 이렇게 비꼬고는 지방검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매컴이 물었다. 물론 집사와 큰아드님이 에이다양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들으셨겠죠 ? 그야 들었고말고요. 그 정도로 법석을 떠는데----이봐요, 내 감정 따위엔 아예 신경을 안쓴다우. 아아, 어젯밤의 내겐 평화도, 휴식도 깡그리 빼앗긴 상태였지. 게다가 경찰 또한 미친 황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꼴이라니 ! 대체 이런 치욕이 있나요? 그런데도 나는----늙고 병든 나는----버림받 고, 잊혀진 존재 속에서 홀로 고통에 짓눌려 있어야 하니, 세상에 이런.... 아아...... 매컴은 허둥지둥 틀에 박힌 인사의 말을 하며 그녀의 도움을 감사하고 방 에서 물러났다. 우리가 층계 쪽으로 가고 있는 사이에도 부인의 노여움에 거칠어진 목소리 가 들려왔다. 간호원! 간호원, 안들리나? 곧 와서 베개를 고치라고! 날 이렇게 무시할 작정이야? 우리가 홀로 내려감에 따라 고맙게도 목소리의 여운도 사라졌다. 권총의 행방 모친의 당치않은 푸념에는 이제 질렸다니까. 체스터가 이렇게 변명을 했다. 우리들이 다시금 객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노상 푸념을 늘어놓는 게 이제 아예 버릇이 되어 버렸단 말야----그건 그렇고, 다음은 어떻게 할 셈인가? 매컴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대답을 한 것은 밴스였다. 그럼 심부름꾼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봐야겠군. 우선 스프루트를 먼저. 매컴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가까이에 있는 초인종 끈을 잡아당겼다. 1분후 집사가 나타나 객실 입구에 공손한 자세로 섰다. 매컴은 아까부터 어쩐 일인지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고, 결국 밴스가 나서서 물었다. 앉게, 스프루트. 되도록 간결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 달라구. 스프루트가 눈은 마루를 향한 채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방 한가 운데 책상 앞까지 오자 여전히 선 채로 말했다. 저는 방에서 마르시어리스(로마의 시인)의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투로 시선을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총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군요. 하지만 분명히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행길을 지나가는 자동차가 이따금 폭음을 내는 때가 많으니까 요. 그렇지만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 습니다. 그래서 가운을 걸치고는 밑으로 내려갔어요. 층계를 절반쯤 내려섰 을 때 또 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나더군요. 이번엔 에이다 아가씨의 방쪽이 었죠.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이 잠겨져 있지를 않더군요. 들여다보니 에이다 아가씨가 마루바닥에 쓰러져 있지 않 겠어요? 정말 딱한 모습이었죠. 저는 허둥지둥 체스터 서방님을 불렀고, 둘 이서 아가씨를 안아 침대에 눕혀드리고는 펀 브론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 니다. 밴스가 상대방을 빈틈없이 관찰했다. 에이다 양의 방 전등은 켜져 있었다----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자네가 문을 열었을 때 틀림없이 켜져 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단 말이지? 가령 문이 닫히는 소리라든가, 발자국 소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권총을 쏜 인물은 자네가 복도에 닿았을 때쯤 틀림없 이 그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었을 거란 말일세. 그랬을 겝니다. 흠, 자네가 펀 브론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집에 있었는가? 아뇨. 그렇지만 당직간호원의 말이 선생님은 곧 돌아오실 테니까 돌아오 시는 즉시 가시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정말 삼십 분도 안되어 오셨습죠. 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해두세. 고맙군, 스프루트----그럼 다음엔 요리사 부인을 보내 주게 나.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그대로 뒷걸음쳐 물러났다. 밴스의 눈은 사색하듯 노인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여자 요리사는 뚱뚱하고, 둔해 보이며, 감각이 없어 보이는 독일 여자였는 데, 나이는 45세. 게르투르드 만하임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 오자 입구의 의자에 멋없이 앉았다. 밴스는 잠시 날카롭게 관찰하고 나서 질문했다. 보아하니 평생 요리사 노릇을 해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처음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답니다. 그녀는 가까스로 말했다. 남편이 죽은 뒤 부터였죠. 어떤 경위로 그린가와 가깝게 됐소? 다시금 그녀는 망설였다. 저, 트바이어스 그린님을 만나뵌 일이 있지요. 내 남편과 자별하신 사이였 답니다. 남편이 죽고나자 모아놓은 돈푼도 없었고, 그린 나리 생각이 나길 래, 그래서---- 내 짐작으로는. 밴스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당신은 어젯밤 이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면서요? 그렇답니다. 체스터님이 모두들 옷을 입고 내려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아무 것도.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향했다. 이상이요, 만하임. 수고스럽지만 헤밍을 좀 불러 주구려. 요리사는 말없이 물러났는데, 이내 나타난 것은 큰 키에 묘하게 점잔을 뺀 타입의 여자였는데, 얼굴은 날카롭고 숙녀인 체 하는 데가 있었으며, 머리에 는 기막힐 정도로 빗질을 하고 있었다. 이 얼굴의 준엄함을 한층 돋보이게 라도 하듯 그녀는 두꺼운 렌즈의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짐작컨대, 헤밍. 밴스가 다시금 난로가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물었다. 당신 역시 어젯밤의 총소리는 듣지 못했고, 체스터 서방님이 부를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가요? 여자는 격렬하면서도 강조하는 듯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노여움도 헤매는 넋을 면해 주신 거죠. 그녀는 목에 걸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비극이란 조만간 찾아들게끔 돼있었던 거죠. 건방 진 말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신의 복수가 분명해요. 헤밍, 그런 것은 어떻든 당신의 의견을 들려줘서 영광이고----결국 이번 비극의 현장에 신의 손이 작용했다, 그 뜻인가? 신의 뜻이 분명하구말구요! 여자는 종교적 열광을 담은 그런 말투가 되었다. 그린가는 신을 경멸하는 못된 족속이에요. 그녀는 체스터 그린을 곁눈으로 노려보았고, 체스터는 불안한 듯이 쓴웃음 만 짓고 있었다. 밴스가 사색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 말인가? 전능하신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 일에 어찌 놀라겠어요! 밴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 물러가 보지, 헤밍. 조용히 성경연구나 하라구. 한 가지 부탁하겠는 데, 버튼양에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줘요.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방에서 나갔는데, 그 모양은 마치 쇠막대기에 생명 이라도 불어넣은 듯 뻣뻣했다. 버튼이 들어왔는데, 분명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 있 어서는 그 어떤 공포도 본능적으로 갖추어진 미태를 몰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겁을 먹고 바라보는 시선에도 우선 아양을 떠는 듯한 투가 역력했 고, 한 손은 어느새 귀에 덮인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당신, 사실은 곤색이 훨씬 어울릴 것 같구만, 버튼 양. 밴스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그 감람색 살갗에는 연분홍빛보다 그게 훨씬 더 어울린다구. 소녀의 근심스러웠던 얼굴이 이내 누그러지고, 수수께끼를 던지는 것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말야, 잘 들으라구. 당신을 불러오게 한 용건이란 그린 도련님이 당신에게 키스를 한 일이 없는지, 그게 알고 싶었던 거야. 어느쪽----그린 도련님이죠?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체스터 그린은 밴스의 질문을 들은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 칠 것 같이 덤벼들어 항의하려고 했으나,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노여움이 담 긴 눈으로 말없이 매컴 쪽을 보았다. 밴스의 입이 굳게 다물리고 약간 경련 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버튼 양. 그가 빠른 투로 말했다. 저한테 질문이 있으신 것 아닌가요?----어젯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 씀이에요. 여자가 이렇게 물었는데, 분명히 실망한 빛이었다. 어, 그래?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그러고보니 아무 것도. 그녀가 이내 인정했다. 난, 잠이 흠뻑 들어 버려---- 그것 보라구, 그러니 질문 공세를 퍼부을 생각이 없을 수 밖에. 밴스는 좋게 그녀를 물러나게 했다. 빌어먹을! 매컴, 나는 참을 수가 없다고! 버튼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체스터가 외쳤다. 이 자식----이 신사 낯짝의 뻔뻔스러운 질문이라니!----난 이대로는 절 대 못참겠어! 매컴 역시 밴스의 질문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아 버린 사실에 은근히 실망 하고 있었던 터라 한동안 밴스를 노려보더니, 그런 당찮은 심문을 해서 무슨 소득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이렇게 말하고 간신히 노여움을 눌렀다. 간단하지. 그것은 아직도 자네들이 절도설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밴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렇지가 않고 그린씨도 어렴풋이 느끼고 계시듯이, 어제 범죄 에 다른 해명요인이 있다고 한다면, 이곳에 있는 그대로의 조건을 모조리 알아둘 필요가 있지. 우리가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여러 인간적 요인에 대 한 종합분석----내가 하려는 것은 그거라구. 게다가 적지 않은 성과가 있 었다고 생각하고 있네. 매컴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스프루트가 방문 앞에 나타나 방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누군가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있었다. 체스터가 이내 현관쪽으로 뛰어갔다. 펀 브론이라고. 잠시 후 체스터가 객실로 돌아와서 설명했다. 에이다의 상태에 대해 조만간 보고가 있을 테지. 펀 브론 선생과 댁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요? 밴스가 느닷없이 불쑥 물었다. 언제부터? 체스터가 의표를 찔린 것 같은 멍한 시늉을 했다. 글세, 내가 태어난 뒤부터 줄곧이요. 나하고는 그 친구는 같은 국민학교에 다녔고, 그 친구의 부친----선대의 의사 베레너스 펀 브론은----그린가에 옛날부터 드나들고 있었으니까. 그 부친이 죽자 아들은 당연한 결과로 우 리집 시의가 된 것이지. 게다가 이 아들인 아더란 친구 보통 솜씨가 아니 라오. 집에서 부친한테 기술을 익힌 데다가 독일 의과대학에서 실력을 연 마했으니까. 밴스가 아무렇게나 끄덕였다. 펀 브론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어떨까요? 시베라양, 렉스 두 분을 만나보고 싶군요. 먼저 동생되는 분부터 시작하죠. 체스터가 매컴 쪽을 돌아보고 확인을 구하고는 초인종을 눌러 집사를 불렀 다. 렉스 그린은 소환에 응해 이내 출두했다. 여러분, 무슨 용건인가요? 그는 신경을 극도로 억누른 투로 우리의 얼굴을 차례로 음미하면서 물었 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토라진 것 같은 푸념 비슷한 것이었으며, 그린 미 망인의 성깔 있는 음성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별 게 아니고, 어젯밤 사건에 대해 몇 마디 묻고 싶을 뿐이죠. 밴스가 달래듯이 말했다. 잘 하면 당신이 큰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어째서요? 렉스가 무뚝뚝하게 말하고 의자에 주저앉아 형을 향해 냉소적인 곁눈질을 했다. 집안에서 자지 않고 있었던 것은 체스터 뿐이었다구. 렉스 그린은 난쟁이 같은 키의 황달색 얼굴의 사나이로서 어깨 폭이 좁고 등이 꾸부정하며, 이상하게 큰 머리를 영양실조로 쇠약해져 버린 것 같은 가냘픈 목에 얹어 놓고 있었다. 노상 안절부절을 못하는 작은 눈을 가리듯이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으며, 턱은 작고 뾰족하고, 얄팍한 입술은 줄곧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눈에 거슬려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그런데도 이 인간에게는 무언가---- 지나치게 발달한 지적 탐구심이라고나 할까----심상치는 않은 지능에 뛰어 난 사나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데가 있었다. 밴스는 한동안 날카롭게 관찰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때야말로 그가 상대 방의 구석구석마저도 흡수소화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담배를 내려놓고 나른한 시선을 탁상의 스탠드로 집중시켰다. 당신 얘기에 의하면 어젯밤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 었다는데,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오. 당신은 이 사실에 대해 무어라고 설명 할 거요? 그럴 것이 총소리 하나는 당신 옆방에서 일어났단 말입니다. 렉스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자칫 의자 끄트머리에서 떨어질 것처럼 되면 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는 우리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난 설명해 보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구요.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거니와, 노여움을 억누른 비난의 빛이 역력히 엿보 였다. 이윽고 그는 서둘러 이렇게 덧붙였다. 이 집의 벽은 제법 두툼하고, 게다가 행길에는 소음이 끊이지를 않으니까 ..... 아마 침대 커버를 뒤집어쓰고 잠들었던 모양이라구...... 당신의 범죄자설은 어떤가요, 렉스씨? 모든 상황을 잘 아실 테니까. 경찰에선 절도설로 결정하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요? 젊은이의 영리해 보이는 눈이 히스에게로 쏠렸다. 그게 여러분의 결론이었잖아요? 물론이지. 경찰부장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줄곧 지루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형님께선 의견이 다른 모양이라구. 허어, 체스터는 의견이 다른가요? 렉스가 심술궂은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며 형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 체스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테죠. 이 말의 뜻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밴스가 다시금 말했다. 형님은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 뿐이죠. 현재 문제가 되 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죠. 렉스의 입술이 더한층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손은 스모킹 자켓의 단추 를 정신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틀림 없겠죠? 총소리를 못들었다는 게? 밴스가 다시금 물었다. 몇 번 말해야 알겠소, 못들었다지 않소? 그의 목소리는 찢어질 것 같았고, 두 손으로 의자 귀퉁이를 움켜쥐고 있 었다. 얌전히 굴라고, 렉스. 체스터가 타일렀다. 밴스가 진정시키듯이 말했다. 당신 역시 누님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 복수를 바란다는 것은 마 찬가지일 거요. 렉스가 약간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야 알고 있다면 무엇이건 얘기하죠. 그는 말하고 나서 마른 입술을 연거푸 적셨다. 그렇지만 당신이 말하는 쥬리어의 죽음에 대한 복수니 뭐니 하는 얘기, 그런 건 도통 흥미 없어요. 그보다 괘씸한 것은 에이다를 쏜 개 같은 놈 이라구요. 이놈한텐 천벌을 내려줘야 마땅하죠. 그 여자는 여태껏 불행 한 처지에 놓여 있었단 말이오. 어머니는 그 애를 집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하고 식모처럼 부려먹고 있었단 말이오. 밴스가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렉 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젊은이, 이번 일 때문에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 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에이다양을 쏜 놈을 찾아내 징벌해 보일 테니까요 ----더 이상 당신을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 그만 가 보시죠. 렉스가 일어섰는데, 그 태도는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형을 향해 마음에 숨긴 승리감을 나타내듯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렉스 녀석 좀 묘한 놈이죠. 체스터가 잠시의 침묵 뒤에 말했다. 녀석은 틈만 있으면 책을 보거나, 숫자와 천문학 문제 따위를 풀고 있 죠. 녀석 너무 나약해요.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늘 충고해 주지 만 소용 없죠. 그런데도 나를 대하는 그 태도라니! 고약하다니깐. 밴스는 다시금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고 있다 가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린씨, 당신의 권총은 발견이 됐나요? 그의 말투에는 이제 변화가 나타났고, 그 명상적인 기분은 모습을 감추 고 있었다. 체스터는 흠칫 놀라 재빨리 히스를 곁눈질했다. 히스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뇨, 빌어먹을! 어디에 들어박혔는지 나타나지 않더군요. 체스터는 이렇게 인정하고 포켓을 뒤졌다. 담배케이스를 찾고 있었던 것 이다. 아무래도 묘하단 말야. 항상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있었는데----이쪽 양반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게 말했었지만. 그는 담배케이스를 히스 쪽으로 돌리고 가리켰다. 마치 상대방이 생명이 없는 물체이기라도 한 듯한 동작이었다. 이 몇 년 사이 그 총을 본 기억이 없단 말야. 그렇지만 도대체 어디로 꺼져 버렸담? 빌어먹을! 내 방에 들어와서 만질 놈도 없을 테고, 가정부 역시 청소할 때도 서랍엔 손을 못 대게 하고 있는데. 젠장,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구먼. 여보슈, 약속대로 틀림없이 찾아 봤소? 히스가 물었다.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을 잔뜩 내밀고 질문한 것이 다. 물론이죠. 틀림없이 찾구말구요. 체스터가 노여움이 담긴 눈으로 대답했다. 온 집안을 모조리 들춰봤소. 그런데 깨끗이 없어져 버렸단 말이오...... 혹시 대청소 때 잘못돼 어딘가에 쳐박힌 게 아닐까 모르겠구먼. 가능성으로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밴스가 이렇게 동의했다. 어던 모양의 권총이었나요? 구식 스미드 앤드 스웨슨 삼십이 구경이오. 체스터가 기억을 되새기듯이 말했다. 자루는 진주모 상안, 총신엔 물결 모양의 조각이 있고----정확하게는 모르겠구먼. 산 것은 십오 년 전----아냐, 더 전일까?----어느 해 여름 사격연습에 썼었는데, 이내 싫증이 나 버려서 서랍속에 쳐넣어 버린 거 요. 당시에도 조작이 가능한 상태에 있었던가요? 아마 그럴 거요. 실은 처음 샀을 때엔 너무 뻑뻑했는데, 좀 갈았더니 그야말로 헤어 트릿거(깃털로도 당길 수 있는 방아쇠)가 되어 버렸소. 그저 손가락만 갖다대도 탕 하고 나올 판이었으니까. 하긴 사격연습엔 그 편이 편리하지만. 챙길 때 총알이 장전돼 있었는지,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글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밴스가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그린씨, 앞으로 혹시 우연히 발견되면, 물론 매컴 검사나 히스 부장에게 제출해 주실 테죠? 그야 물론이죠. 기꺼이 그렇게 해야죠. 체스터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밴스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 다. 가만 있자, 펀 브론 성생은 아직도 환자 곁에 계신 모양이니, 그 사이 에 시베라양을 만나보는 게 어떨까? 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는 분명히 권총문제가 일단락지워진 사실에 어지간히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도어 가까이의 초인종끈 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뻗치던 손을 움츠렸다. 내가 직접 데려오는 게 낫겠군.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매컴이 싱긋 웃으며 밴스쪽을 돌아보았다. 없어진 권총에 관한 자네의 예언, 아마 그게 들어맞은 것 같구만. 아니,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 헤어 트릿거가 달린 진귀한 무기 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지. 밴스가 여느때에 없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또다시 말했다. 그건 어찌됐건, 이 체스터 선생 시베라를 납치하는 데 어지간히 시간이 걸리는구먼. 마침 이 때 대리석 층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몇 초 후 시베라 그 린이 체스터와 더불어 모습을 나타냈다. 타살의 조건 시베라는 힘찬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목을 젖히고, 여러 사람 위에 대담한 심문을 하는 것 같은 시선을 던진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키가 늘씬하고, 나긋나긋한 운동가 타입이었다. 미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모의 어딘가에 차가운 음영이 깃들인 매력이 있어, 보는 이 의 주의를 이끄는 데가 있었다. 얼굴은 생명력과 긴장에 넘쳐흐르고, 그 표정에는 오만과 종이 한 장 차 이로 일종의 기품이 있었다. 곱슬곱슬한 검은머리를 유행의 단발로 커트 하고 있었으나 웨이브는 없었다. 엷은 다색의 눈동자가 시원스럽도록 큼 지막하고, 코는 약간 높은 감이 없지 않았다. 입은 크고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얇은 입술에는 잔인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체스터가 지방검사를 오랜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서는 매컴에게 소개를 시켰다. 그녀는 한가운데의 책상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두 다리를 모았다. 그리 고는 체스터를 돌아보고 말했다. 담배 한 대 안 주겠소, 체스터? 그 말투에는 주문마저도 강제명령으로 삼고 있는 울림이 있었다. 밴스가 재빨리 일어서서 그녀에게 담배케이스를 내밀었다. 이 담배를 피워 보시겠습니까, 그린 양? 그는 사교장의 에티켓을 발휘하여 열심히 권했다. 이 담배가 안맞으신다면, 저는 당장 다른 담배로 바꿀 셈입니다. 어머, 성질도 급하셔라. 시베라는 담배를 뽑아 밴스가 불을 붙여 주게 놔두었다. 그리고는 의자 에 깊숙이 앉아 매컴쪽으로 수수께끼를 던지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어젯밤엔 생각잖은 소동이 일어났지 뭐에요? 이 해묵은 저택에서 그렇 게 신나는 일은 벌어져 본 적이 없거든요. 그걸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 다니, 정말 재수가 없군요. 실망이라는 듯이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말괄량이같은 말투나 행동은 다른 타입의 여성이 었다면 반드시 느꼈을 불쾌감을 내게 전해 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시베라라는 여자는 감수성의 예민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어떤 불운에도 손쉽게 굴복해 버리는 처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컴은 그녀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시베라를 타일렀다. 약한 여자를 잔학무도하게 살해하고, 게다가 또 한 처녀에게 살인미수 를 범한 행위가 오락의 대상이 될 수야 없는 노릇이죠. 이번에는 시베라가 매컴에게 비난하는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지해져서 말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만 있으면 뭘 하죠? 그것은 어떻든 쥬리어는 자기의 작은 세계 에도 등불을 비치지 못하는 그런 여자였어요. 항상 삐뚤어진 근성에 남 의 흠만 찾고 있었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동생의 도리에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리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걸 요. 그럼 동생에 대한 처참한 저격사건은 어떻구요? 매컴은 기가 막히다는 태도였다. 시베라가 이내 눈을 갸름히 뜨고 얼굴의 선을 굳혔다. 그렇지만 에이다는 소생할 가망이 있을걸. 그렇죠?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냉혹함을 그녀의 음성에서 빼버 릴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긴, 즐거운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테죠 뭐. 그것도 간호원 한테 떠받들리면서 말예요. 동생 하나,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서 뭣 때문 에 내가 기쁜 눈물을 흘려야 하나요? 밴스는 시베라와 매컴의 입씨름을 곰곰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안되겠다 고 생각했는지 사이에 끼어 들어 한 마디 했다. 이봐, 매컴. 딴은 그린 양의 태도는 이런 입장에 놓여진 젊은 귀부인이 취해야 할 세상의 도덕률과는 일치하지 않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인생관에도 그 나름의 훌륭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만 그린양의 도움 을 요청하는 것이 어떨까? 시베라는 이렇게 말한 밴스쪽으로 기분이 흡족할 것 같은, 감사하는 것 같은 시선을 힐끗 던졌는데, 매컴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말하고 싶은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현재의 심문을 이미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밴스가 여자쪽으로 매혹하는 것 같은 미소를 보냈다. 사실은 내가 나빴습니다, 그린 아가씨.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미안하 군요. 그는 이렇게 변명을 하고 나서 말했다. 오빠되시는 분께서 절도설에 대해 불신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매컴 검 사보고 직접 조사해 보라고 충동한 게 바로 나였으니까요. 그녀가 이해를 나타내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체스터는 이따금 기막힌 육감을 느끼는 모양이죠. 오빠의 얼마 안 되는 가치 가운데 하나에요. 그럼 당신 역시, 절도설에 대해 회의적이라 느껴집니다마는. 회의적? 그녀가 짧게 웃었다. 나는 철저한 회의주의자라구요. 절도범 따위하곤 교제가 없지만, 한 번 만나볼 수 있다면, 아마 무척 즐거운 느낌이 들 거에요. 오빠의 확신의 근거란 제가 이해하는 한, 어떤 종류의 심령현상에 의한 영감이 찾아듭니다. 알고는 있지만, 설명은 못한다. 확신은 있지만, 증거 가 없다. 체스터한테 그런 영감이 있었다니, 정말 뜻밖이에요. 그녀는 오빠를 향해 장난스러운, 그러나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오빠는 실상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에요. 오빠를 잘 알게 되 면 당신도 이내 사실을 깨닫게 될 걸요. 이봐, 그만두지 못해! 시베라! 체스터가 분통을 터뜨리고 말했다. 경찰이 절도범을 결사적으로 쫓고 있다는 얘길 했더니 손뼉을 치며 좋 아한 주제에 무슨 당치않은 소리야? 시베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몸을 굽히더니 담배를 난로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었다. 그린 아가씨. 밴스가 입을 열었다. 오빠의 권총이 없어져 버렸죠. 책상서럽에서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겝 니다. 혹시 집안에서 그 권총을 본 일이 없나요? 권총 이야기가 나오자 시베라는 약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는 어 렴풋이 비꼬는 미소조차 떠올랐다. 체스터의 권총이 없어졌다구요? 그녀의 질문은 무감동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지난 주엔 체스터의 책상 안에 있었어요. 체스터가 노여움에 떨리는 몸을 무거운 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내 책상에서 지난 주에 뭘 하고 있었지? 어머, 그만 흥분하라구요.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러브 레터 따위를 뒤지진 않았으니까. 오빠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상상 못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는 자기의 말에 흐뭇한 모양이었다. 난 그저 오빠가 빌려간 에메랄드의 타이 핀을 찾고 있었을 뿐이야. 그건 클럽에 있다구. 체스터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설명했다. 어머, 정말? 어쨌든 못찾았었어. 그렇지만 권총은 진짜로 봤어요----없 어졌다니, 그게 분명해요? 바보 같은 소리를. 체스터가 눈을 부라리며 목쉰 소리로 외쳤다. 모조리 뒤졌단 말야----네 방도 말이지. 흥, 오빠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린 양, 당신은 절도설엔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셨죠? 밴스는 나른한 듯이 눈을 절반쯤 감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해명하는 것으로, 뭔가 다른 생각을 품고 계십니까?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계산하듯이 그를 보았다. 여자를 둘이나 총으로 쏘아 놓고는 아무 것도 안 가지고 도망간 째째 한 도둑이란, 물론 믿어지질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나는 여자 경찰 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명랑하게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 대만 더 주세요. 밴스가 담배를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고 불을 붙여 주면서 물었다. 언니와 동생 두 사람을 죽일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을 인물에 대해 혹시 짐작가는 바가 정말 없습니까? 어머, 그 건이라면, 우리 모두 용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집 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상적인 가정적 단란 따위는 약으로 쓸래야 없 고, 그린가란 괴짜들의 전람회 같은 곳이죠. 가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 요. 아무럼요. 벌써 옛날에 살인이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죠. 게 다가 우리는 모두들 1932년까지는 여기서 살고 있지 않으면 안 될 팔자 라구요. 그것이 싫으면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라는 거에요. 물론 자기 힘 으로 살아갈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죠. 참 어처구니 없는 유산도 다 있 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맞아요. 이 집에선 누구건 다른 모든 가족들에 대해 살의를 품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어요. 여기 있는 체스터 역시 마찬가지지요. 안그래요, 오빠? 렉스 역시 우리를 열등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벌써 옛날에 우 리를 모두 죽여 버리지 않은 것은 자기가 고도의 박애주의자라고 여기 고 있기 때문이죠. 어머니 역시 우리를 여지껏 죽이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자기가 전신마비에 걸려 방도가 없기 때문이죠. 쥬리 어 역시 마찬가지에요. 아마 우리가 모두 기름가마에 들어가 타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구경할 걸요. 그리고 에이다 역시. 그녀의 미간이 흐려지고 야릇한 사나운 빛이 떠올랐다. 우리가 모두 죽어 버리는 것을 박수갈채로 환영할 걸요. 그애는 사실은 우리 식구가 아니죠. 그래서 가족을 모조리 미워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 하고 있는 나 역시 그리운 가족 전원을 처치해 버리는 것에 양심의 가 책은 느끼지 않을 거에요. 벌써 수차 처치해 버릴까 궁리한 일도 있지만 다만 신통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담뱃재를 떨었다. 대충 이상과 같군요. 당신네들이 살해의 가능성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죠. 이 유서깊은 집안에서 자격이 없는 인간이란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풍자의 뜻을 담은 것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음울한, 가공 할 만한 하나의 진리가 누워 있다는 감회를 나를 피할 수 없었다. 밴스도 겉으로는 감탄한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그녀의 어미변화의 하나 하나, 표정 연기의 하나 하나마저 흡수하여 그 대담한 고발의 내용과 눈 앞의 문제와의 고리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그때 마침 펀 브론 의사가 객실로 들어왔다. 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펀 브론은 어딘지 억제한 정중함으로 절을 했는 데, 그의 시베라의 대한 태도에는 묘하게 남다른 데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선생, 오늘 부상당한 아가씨를 심문해도 지장이 없습니까? 매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별다른 지장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펀 브론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체스터 옆자리에 앉았다. 물론 쇼크에서 아직 말끔히 깨어나지는 못했고, 출혈로 인한 쇠약도 제 법 있습니다. 펀 브론 의사는 서글서글한 느낌의 40대 사나이로 이목구비가 작은, 거 의 여성적인 얼굴에 애교가 틀에 박혀 있었다. 그 일부러 꾸민 행동에는 너무 기교가 엿보여 직업적이라는 형용사가 딱 들어맞지만, 이 사나이가 빚어내는 분위기에는 야심에 불타는 에고이스트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반발도다도 매력을 더 느끼고 있었다. 그럼 중상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매컴이 질문했다. 그렇습니다. 중상은 아닙니다. 의사가 다짐을 했다. 자칫했으면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총알이 일 인치만 더 깊이 파고 들었다면 폐열상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죠. 제가 짐작하건대. 밴스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총탄은 좌측견갑골 상부를 횡단관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 는. 펀 브론이 동의를 나타내듯 목을 밑으로 기울였다. 총은 분명히 등 뒤에서 심장을 노린 결과였습니다. 그가 부드러운, 그러나 억양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폭발 순간 에이다가 약간 오른쪽으로 몸을 뒤틀었던 모양입니 다. 그래서 총탄은 직접 흉부를 관통하지 못하고, 제삼척추수와 같은 수 준께에서 견갑골을 따라 열상하여 삼각근 속에 파묻힌 것입니다. 그는 말하고 나서 자기 왼쪽팔의 삼각근의 위치를 가리켜 보였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이내 기절해 버릴 수 있을까요? 실제의 부상은 표 피열상 뿐이었는데 말씀입니다. 밴스가 약간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고통이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쇼크문제도 의당 계산에 넣어야 할 겝니다. 에이다 뿐만 아니라, 여자라면 아마 모두 그 럴 걸요. 이내 실신상태에 빠진 것이라 여겨지는군요. 그렇다면 말씀입니다. 밴스가 물었다. 범인은 한방으로 에이다양을 처치해 버렸다고 생각하고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이렇게 되겠군요? 그게 진상이었다고 생각해도 큰 잘못은 없을 겝니다. 밴스는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다시금 말했다. 이렇게 되면, 발포 직후 집사가 달려왔을 때, 어째서 방에 불이 켜져 있었느냐 하는 사실의 해명이 더한층 필요해지는군요. 펀 브론은 이 말을 듣자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전등이 들어와 있었다구요?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눈을 빛내면서 말했 다. 하긴 그 사실 자체가 범행의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군요. 범인이 불이 켜진 방에 들어간 것이라면, 피해자한테 얼굴을 보여선 곤란하다고 생각 하고는 무턱대고 총을 쏘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딴은 그렇군요. 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에이다양을 만나 얘기해 보면 혹시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겠군. 밴스는 다시금 펀 브론 쪽을 향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선생. 에이다양의 부상과 당신의 진찰 사 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의 경과가 있었던가요? 집사가 진술했잖소, 밴스 선생. 히스가 좀이 쑤시는 듯 사이에 끼어들었다. 선생은 반 시간 뒤에는 도착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죠, 아마 그쯤 될 겁니다. 펀 브론이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스프루트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하필 왕진을 나가 있었죠. 십오 분 쯤 후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달려왔죠. 다행히 우리집은 이 근처라서 요. 밴스가 고맙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죄송하지만 환자한테로 안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흥분은 좋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환자를 흥분시키는 질문은 당분간 절 대로 삼가해 주셔야겠습니다. 펀 브론은 이렇게 타이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층계로 향했다. 시베라와 체스터는 우리를 따라올 것인가 어떨까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 으나, 이내 이층복도에 있는 우리를 따랐다. 에이다 그린의 방은 지나칠 정도로 간소했으나, 청결하기가 이를 데 없 었고, 게다가 여자다운 장식이 짜임새 있게 안배되어 있어, 주인의 빈틈 없는 사람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방의 왼쪽, 그린 미망인의 거실로 통하는 화장실 문 근처에 간소한 디자 인의 마호가니 싱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저쪽에 문이 보이는데, 이것이 돌로 된 발코니를 따라 열려 있었다. 오른쪽 창가에는 화장대가 보였다. 그 화장대 앞면에 퍼지는 호박색 중국제 카펫 위에 커다란 갈색의 얼룩 점이 보였는데, 그것이 상처를 입은 에이다가 쓰러진 자국이었다. 오른쪽 벽의 중앙은 난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높은 떡갈나무의 경판 으로 둘러싼 맨틀피이스가 된, 소위 15세기 측우들 왕조식의 난로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젊은 여인이 이상한 듯이 이쪽을 보 고는 얼굴을 붉혔다. 붕대를 감은 어깨는 침구로 받치고, 가냘픈 왼손을 파란 무늬의 홑이불 위에 내놓고 있었다. 펀 브론 의사는 여자쪽으로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여자의 손 위에 자 기의 손을 얹었다. 여기 여러분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겠다는 게야, 에이다. 그가 이렇게 설명하고 안심하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나른한 듯 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눈은 의사를 지켜본 채였다. 밴스는 난로가에 멈춰서서 방 안을 둘러보고 있다가 침대로 다가섰다. 부장. 밴스는 쾌활하게 말했다. 지장 없다면, 우선 나부터 질문을 해 볼까요? 히스는 상황이 자질구레한 신경을 써야 하는 데다가 위트가 필요하다고 느끼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밴스가 침대옆 의자에 앉으면서 조용한, 온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다 양, 우리는 어젯밤의 비극에 얽힌 신비의 베일을 다소라도 벗 겨 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사실대로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 군요. 젊은 여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찌나----어찌나 무서운지. 그녀는 앞쪽을 바라본 채 약하디 약하게 말했다. 잠이 들고 나서----글쎄요, 얼만큼 시간이 지났을까요----문득 잠에서 깨어났는데----그 길로 잠을 들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아주 이상한 느 낌이 드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는 눈을 감았고, 온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방에 있고, 나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꺼지고, 이윽고 짓눌린 것 같은 침묵으로 변 했다. 방은 어두웠었나요? 밴스가 상냥하게 물었다. 아주 깜깜 절벽이었어요. 그녀는 서서히 밴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더 한층 소름이 끼쳤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혹시 유령이 아닐까----이런 짐작이 들어, 큰 소리를 내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와야 죠. 목은 말라 버리고...... 공포작용에 의한 근육수축이라고, 에이다. 펀 브론이 설명했다. 대개의 사람이 격심한 공포에 쫓기게 되면, 발성능력을 잃게 마련이지 ----그리고 어떻게 됐지? 이삼 분 동안 떨면서 누워 있었는데, 방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어요. 하지만 난 알고 있었죠. 사람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가 있어 나를 해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가까스로 살며시 일어나 전등을 켜려고 했죠. 너무 어두워서 잠시 이 침대 곁에 서 있었어요. 그제서야 주위가 좀 밝아지길래 문 옆에 있는 스위치 쪽으로 걸어갔죠. 한 두어 걸음 걷자......갑자기......한 손이 내게 닿아...... 그녀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고, 크게 뜬 눈에 공포의 표정이 나타났다. 나----나, 그냥 멍하니 서서. 그녀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 뒤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창 쪽으로 향했 죠. 그런데 거기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그 순간 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뜨거운 것이 어깨를 내려치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려...... 그녀가 말을 끝냈을 때 팽팽한 침묵이 주위를 감돌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기막히게 실감이 나며 생생했다. 듣는이에게 이야기의 감동적인 알맹이만을 전하는 궁리의 뛰어남에는 어 딘가 명배우의 대사를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밴스는 잠시 사이를 두고 나서 말했다. 정말 무서운 일을 당했군요. 되도록 괴롭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몇 가지 밝혀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내 말에 대답해 주세요. 밴스의 마음씨에 감사하는 증거로 그녀가 생긋 웃고 기다렸다. 잘 생각해 봐요. 왜 잠이 깼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요. 어젯밤엔 방을 잠그지 않았었나요? 그럴 거에요. 보통 잠그지를 않으니까요. 그럼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닫히는 소리도 못들었나요?----어느쪽 문 도? 그래요. 집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어요. 그런데도 누군가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단 말이죠? 모르겠어요......뭔가 예감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밴스가 에이다 옆으로 다가앉았다. 잘 생각해 봐요. 사람 냄새 같은 건 어때요?----그 인물이 침대를 스 치고 지나갔을 때에 낸, 어렴풋한 기척이라든가, 향수 냄새라든가. 그녀는 안타까운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창 쪽으로 도망쳤을 때, 그 인물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그 소리에 어딘가 친근감이 없었나요? 발소리 뿐이었는걸요----부드러운, 미끄러지는 것 같은 발소리뿐...... 밴스가 잠시 기다렸다. 그 발소리를 잘 생각해 봐요----아니, 그보다도 당신의 느낌을. 남자의 발소리, 아니면 여자의 발소리 같던가요? 푸르스레했던 여자의 얼굴에 더한층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공포로 크게 뜬 눈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두 번쯤 입술을 열고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자신을 억제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에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모르겠어요----전혀 모르겠어요. 이 때였다. 짧고 찢어지는 듯한 비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베라였 다. 아연해진 눈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려졌다. 시베라는 얼굴을 붉히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뻣뻣이 서 있었다. 흥! 왜 말을 않지?----분명히 내 발소리를 들었다고 말야. 시베라가 통렬한 투로 에이다를 힐난했다.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 좀이 쑤실걸? 에이다는 숨을 들이마시고 의자에게 의지하듯 몸을 움츠렸다. 의사는 나무라는 눈으로 시베라를 노려보았다. 시베라, 입 닥쳐! 격정의 소용돌이 뒤에 이어진 놀라움의 침묵을 깬 것은 체스터였다. 시베라가 어깨를 흠칫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밴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금 심문을 시작했다. 또 한 가지 묻겠는데요, 그린 양. 당신은 스위치를 찾으려고 방 안을 더듬거렸어요. 그 때 범인하고 닿게 됐죠. 그게 어디쯤이었죠? 입구에서 절반쯤 되는 곳----그래요, 저 한복판 책상 저쪽이었어요. 손이 당신 몸에 닿았다고 했죠? 그런데 어떤 식으로 닿았죠? 꼭 누르 던가요, 아니면 덤벼들던가요? 그녀가 막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양쪽 다 아녜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마치 내가 스스로 빠져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렇다면 커다란 손, 아니면 작은 손? 가령 손의 힘에서 느낌 같은 것 은?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금 그녀의 숨결이 가빠지고, 겁먹은 시선 이 시베라에게 향해졌다. 몰라요----아아,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고민을 짓누른 절규에 가까웠다. 그래도 생각해 봐요. 밴스가 낮은, 끈질긴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인상이 남아 있을 거요. 남자의 손, 아니면 여자의 손? 시베라가 뚜벅뚜벅 침대로 다가갔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의 여인을 노려보고, 결연히 밴스 쪽으로 몸을 돌렸 다. 당신은 아래층에서 내게 물었었죠? 범인에 관한 내 의견을요. 그 때는 답변을 못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요. 범인이 누군지 말할 까요? 그녀는 침대쪽으로 몸을 내밀고 그곳에 누워 있는 에이다를 떨리는 손 으로 가리켰다. 이 애가 바로 범인이에요----이 천사인 체 하는, 새침한 얼굴의 작은 악마가 범인이 아니면 누가 범인이겠어요? 모두들 멍하니, 잠시 동안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에이다의 입술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절망의 경련 가운데 의사의 손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머나, 시베라----너무 해요. 정말 너무 해요! 펀 브론은 정색을 했다. 노여운 빛이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 나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시베라는 연거푸 외쳐대고 있었다. 그렇구말구요. 범인은 이 애가 틀림없어요. 그런데도 여러 사람을 홀리 려 들다니! 이 애는 우리집 식구가 미운 거에요----아버지가 이 애를 데려온 이후로 줄곧 미워하고 있어요. 이 인간의 피가 어떤 피를 이어받 고 있는지 알 게 뭐에요! 우리가 미운 것은 자기가 평등한 대우를 못받 기 때문이죠. 우리 식구를 모조리 죽여 버려도 끄떡 않을 걸요. 제일 먼 저 쥬리어를 죽인 것은 쥬리어가 살림을 맡고 있고, 이 애한테는 항상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에요. 침대에 엎드린 여자는 연민을 구하는 것 같은 시선을 번갈아 우리에게 던졌다. 그 눈에는 원망하는 빛이라고는 없었다.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 듯 그저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야 말로 흥미 만점이군! 밴스의 목소리였다. 모든 사람의 눈을 그에게 집중시킨 것은 이 말 자체 보다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아이러니의 말투였다. 당신은 진정으로 동생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시베라를 향해서 던진 이 말에는 우호적인 말투조차 담겨 있었다. 진정이고말고요! 그녀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 고발에는 뭔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까닭이 있나요? 이유야 뚜렷하죠. 이 애가 우리를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 나 아가서 그린가의 유산을 상속할 사람이 모조리 없어지면, 모든 것---- 안락과 사치와 자유를 독차지하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잠시 생각해 보시죠. 에이다양 자신이 등을 맞은 사실은 당신 역시 전혀 무시해 버릴 수는 없죠, 안그런가요?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시베라는 새삼스럽게 생각 이 미쳤는지 입을 힘껏 다물자 좌절감을 노여움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나는 여자경찰이 아니라구요. 범죄학은 내 전공과 목이 아닌걸요. 또한 논리학에도 젬병인 것 같군요. 밴스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환상 비슷한 투가 어려 있었다. 이렇게 되자 방 안의 긴장이 어느 정도 가셨다. 펀 브론은 에이다 쪽으로 몸을 숙이고 머리맡을 정돈해 주었다. 모두들 제 정신이 아닌 게야, 에이다. 그가 달래듯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로 신경을 쓸 필요는 조금도 없는 거라구. 시베 라도 아마 곧 잘못을 뉘우치게 될 거야. 에이다는 감사의 눈길로 펀 브론을 올려다보았다. 이 의사 곁에 있는 한 기분이 저으기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펀 브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컴을 보았다. 오늘은 이쯤 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밴스도, 매컴도 일어섰다. 히스와 나도 그들을 따랐다. 그때였다----시베라가 다시 힘찬 걸음으로 다가왔다. 기다려요! 여왕 같은 명령이었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요. 체스터의 권총이에요. 난 그 행방을 알고 있어 요. 이 애가 가져간 게 분명하죠! 그녀는 다시금 고발하듯이 에이다를 가리켰다. 얼마 전 이 애가 체스터의 방에 있는 것을 봤죠. 그 때는 무엇 때문에 방에서 얼쩡거리나 생각했지만. 그녀는 밴스를 향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만하면 두드러진 이유가 될까요? 그게 언제였나요, 시베라 양? 언제인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지난 주였어요. 하지만 이것 만은 분명해요. 체스터의 방문이 절반쯤 열려 있었고, 이 애가 그 안에 있었어요. 책상 곁에요. 에이다양이 오빠의 방에 있었다는 게 그렇듯 특이한 일인가요? 밴스가 과히 흥미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이 애는 우리 방엔 절대로 안 들어오죠. 시베라가 잘라 말했다. 고작해야 렉스의 방에 가는 정도죠. 훨씬 전에 쥬리어가 명령했어요. 드나들면 못쓴다구요. 에이다가 언니를 향해 간청하는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 어머, 시베라 언니. 그녀는 낮게 신음했다.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당찮은 말을 안 듣게 되지? 잔말 말라구! 시베라의 음성은 다시금 높아졌고, 에이다를 노려보는 눈에는 격렬한 증 오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야, 넌 현명하다구. 그렇지만 내 눈을 속이려 해 봤자 어림 반푼어치 도 없지. 넌 우리집에 온 뒤로 줄곧 우리 식구를 미워하고 있었잖아? 그 래서 호시탐탐 우리 가족들을 죽여 버릴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냐? 시베라! 그것은 펀 브론의 목소리였는데, 마치 채찍이 울린 것처럼 시베라의 말 을 갈기갈기 잘라 버리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 그는 앞으로 나서서 무서운 얼굴로 시베라를 노려보았다. 나는 시베라의 난데없는 고발에도 어지간히 놀라고 있었지만, 이 의사의 태도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어떤 종류의 괴이한 친밀함이 있 었다. 당신은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거야. 펀 브론은 여전히 노려본 채 말했다. 당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남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이 사나이는 더 고압적인 말을 썼을 것이라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시베라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 리는가 싶더니, 온 몸을 떨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정말 미안해. 그만 정신이 없어져서----내가 왜 이럴까? 그따위 말을 하다니? 시베라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게 좋을 것 같구먼, 체스터. 펀 브론이 냉정을 되찾아 말했다. 이런 일에 여동생은 지나치게 긴장을 하게 된다구. 시베라는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체스터가 따랐다. 펀 브론이 에이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자, 아가씨.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약을 조제해 드리죠. 우리는 에이다에게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왔다. 제 2의 살인 우리가 형사재판소 빌딩으로 돌아간 것은 벌써 5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상류가정이 한심하구먼, 매컴. 밴스가 한숨을 쉬며 푹신한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절대로 상류가정이라곤 할 수 없어. 그렇듯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도 안 일과 나태한 환경에 놓여지면, 오직 조락만이 있을 뿐이야. 나라에 대해 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사치와 안일이야말로 부패의 요인이라구. 그 무장을 황제로 삼은 로마는 어떻던가?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앗시리 아의 살더 나파알의 죽음은 어떻던가? 여보게, 자네의 심원한 학설은 사회학 학도들에겐 흥미의 초점이 될는 지는 모르지만 말일세. 매컴이 초조의 빛을 뚜렷이 보이면서 푸념했다. 현재의 상황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관련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군. 내 인상에 의하면, 이번 사건은 흔해빠진 평범한 범죄에 불과하다구. 자네 는 분명히 즐거운 하오의 한 때를 보냈을 테지만, 이쪽은 덕분에 세 시 간분의 일거리가 밀려 버려 이제부터가 고생이구먼. 그의 말뜻은 우리보고 자리를 물러나 달라는 노골적인 수수께끼였던 것 이다. 그러나 밴스는 그런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구. 그는 놀리는 듯한 웃음을 띠고 선언했다. 현재의 슬픈 오류상태째 자네를 혼자 쓸쓸하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자 네에겐 지표가 필요하다구, 매컴. 매컴이 눈살을 찌푸렸다. 밴스의 장난기 섞은 태도가 다만 표면적인 것 이고, 사실은 무언가 중대한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글세, 그것도 좋을 테지. 매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밴스는 한 동안 히스를 보고 있더니 물었다. 부장, 당신은 쥬리어 그린의 시체를 물론 봤겠죠? 그야 보고말구요. 침대에서의 자세는 자연스럽디까? 피해자의 평소 잠든 모습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히스는 어딘가 반항적이며 기분이 언짢았다. 절반쯤 일어나 있더군요. 어깨 밑엔 베개가 두 개, 홑이불을 걷어차구 요. 내가 본 바로는 격투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게 당신 질문의 뜻이 라면 말입니다. 두 손은? 홑이불 밖이었소, 아니면 안? 히스가 얼굴을 들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와 있었죠. 가만 있자, 그러고보니 두 손 모두 홑이불을 잔뜩 쥐고 있었겠다? 밴스가 재빨리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얼굴은, 피해자는 수면 중에 맞았소? 그렇다곤 할 수 없죠.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니까. 크게 뜬 눈이라? 밴스가 되받아 말했는데, 그 음성에는 한 가닥의 열기가 어려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가리키는 바, 당신은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요? 공포? 전 율? 놀라움? 히스가 빈틈없이 밴스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입을 멍청히 벌리고 있엇소. 마치 난데없는 것을 보고 놀란 표 정이라고 할까? 밴스의 시선은 한동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 나 초조한 듯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검사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우뚝 멈추어서서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들으라구, 매컴. 그 집에선 뭔가 무서운, 상상을 벗어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야. 엉뚱한 절도범이 어젯밤 집에 들어가서 두 여자를 저격하고 도망쳤다는 것은 말도 안 돼지. 범죄는 계획되고----심사숙고 끝에 단 행된 거야. 누군가가 노리고 있었던 걸세. 그 누군가란 집안의 구조를 알고 있는 인간이고, 스위치의 소재를 알고 있는 인간이고----결국 다 시 없는 기회에 다시 없는 절묘한 방법으로 일격을 가할 줄 아는 인간 이라구. 그 범죄의 배후에는 무언가 깊디깊은, 상상못할 동기가 도사리 고 있어. 그런데도 자네는 의자에 버티고 앉아 이 뜻을 인식하기를 거부 한다면, 할 일 없이 범인의 꾀에 넘어갈 뿐이지.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기괴한, 음울한 울림이 담겨 있었고, 이 것이 여느 때의 우아하고 냉소적인 밴스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저택은 오염되고 있다고, 마컴. 부패한 나머지 바야흐로 무너져내릴 판이지. 따라서 그 내부에 사는 모든 인간이 동시에 썩어내려, 정신도 지성도 성격도 분해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게야. 그들이 오염되고 있는 환경 그 자체는 실은 그들이 만들어낸 거라고. 자네는 이 사건을 대수 롭지 않게 보고 있는 모양이지만, 천만에, 이 범조는 이런 무대배경상 불가피한 것이지.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한 손을 뻗쳐 과연 말세라는 시늉을 했다. 상황을 생각해 보라구. 그 곳에 있는 것은 낡고, 적막하고, 을씨년스러 운 드넓은 집이야. 그리고 이 영상 위에 그 여섯 사람들을 쌓아올려 보 게나. 전혀 통일이라고는 없는 엇갈린 가족들, 초조하고, 불안하고, 병들 은 목숨들. 서로가 서로의 모습에 대한 증오를 끓어올리면서 냉소와 질 투, 적의를 던지고 있는 그 꼴이라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드는 폭발 점----무릇 이런 증오가 가져오는 논리적, 또한 불가항력적인 변용 이 외에 대체 뭐가 있겠나? 딴은 옳은 말이야. 매컴이 이렇게 동의했다. 그렇지만 요컨대 자네의 결론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다구-- --도대체 어떤 고리가 있길래 그린 맨션에서의 색다른 일반상황하구 어 젯밤 살인사건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겐가? 눈에 띄는 고리는 전혀 없노라----그게 바로 이번 사건의 무서운 소치 라구. 그렇지만 매듭은 있지. 현재는 비록 그림자뿐이지만 말일세. 나는 저택 내부로 들어선 순간 그걸 감각으로 알았지. 그리고 오늘 오후 내내 맹목적으로 그걸 찾으려고 했다구. 그런데 그놈은 어느새 매끄럽게 빠져 나간단 말야. 정상적인 것은 전혀 없어. 있는 것이라곤 정신이상----악 몽의 집, 그곳에 사는 인물들은 모두 야릇한, 이 세상 존재들이 아니라 네. 그걸 느끼지 못했나? 매컴은 불안한 듯이 몸을 도사리고, 앞에 있는 서류뭉치를 챙기고 있었 다. 밴스의 여느 때엔 없는 엄숙함에 감탄한 것이다. 자네가 말하려는 요점은 충분히 알 수가 있다구.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자네의 인상이 우리를 새로운 범죄해석으로 이꿀어 갈 수 있 을 것 같지는 않구먼. 그린 맨션은 불건강해----그건 나도 인정하네. 하 지만 자네의 그 분위기에 대한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했다고 봐야 할 테지. 자네 얘기를 들아면, 어젯밤 사건이 마치 미궁에 빠졌던 기막힌 살인사건에 못지않다는 뜻이 아닌가? 딴은 무대배경은 그럴 듯 해. 하 지만 전국 온갖 곳에서 툭하면 권총을 쏘아대는 강도범이 숱한 세상이 라구. 그린가의 여자들이 맞은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말야. 자네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으려고 하는 게야, 매컴. 밴스가 진지하게 단언했다. 자네는 어젯밤의 사건에 얽혀 있는 몇 가지 야릇한 특징을 무시하고 있는 거야. 쥬리어의 공포에 넘친 놀라운 태도가 한가지. 다음은 두 총 소리 사이의 그 기나긴 간격이 해명되지 않는 점. 다음은 두 방 모두 불 이 들어와 있었던 점. 다음은 에이다의 진술. 손이 다가왔다느니 하는 점. 눈 위의 그 발자국은요? 이렇게 말한 것은 히스의 감동없는 목소리였다. 딴은, 그것도 있구먼. 밴스가 재빨리 부장쪽을 돌아보았다. 그것 역시 이상한 점이죠. 범행이 있은 후 삼십분 이내에 누군가 집과 의 사이를 왕복한 인간이 있었다. 게다가 그 누군가는 남에게 절대로 들 킬 염려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그 사실엔 별 이상한 점은 없죠. 히스 부장이 주장했다. 그 집엔 심부름꾼이 넷이나 있소. 그 중의 하나가 이 절도범의 공범자 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죠. 밴스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집 안에 있는 그 공범자가 약속할 시간에 현관문을 열어 줄 만 큼 아량이 있었는데도 범인에게 정작 눈독을 들인 물건의 소재를 알려 주는 것을 잊은 것은 고사하구, 집 안의 구조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래서 절도범이 집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식당도 무사통 과, 난데없는 이층으로 올라가지 않나, 가구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을 전 등 스위치를 찾아내지 않나, 전등을 켜지 않나...... 그것 참 묘한 강도도 다 있군요. 부장님, 당신 설명으로는 납득이 안가요. 그는 다시금 매컴 쪽으로 돌아앉았다. 이상으로 이번 사건의 참뜻을 설명하는 키를 찾아내려면, 그 집 자체에 존재하는 부조리상황을 인식하는 방법밖에 없다구. 그렇지만 상황이라면 우리도 알고 있단 말야, 밴스. 매컴이 여전히 끈질기게 반박했다. 나 역시 인정하기로 하지. 하긴 좀 색다른 상황이야. 그렇지만 반드시 범죄를 낳을 정도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단 말야. 단순한 증오가 살 인동기가 되는 일이란 좀체로 없는 일이고, 하물며 증오가 범행의 증거 로서 입증력을 지닐 수도 없지. 타당한 의견이야. 하지만 증오가 쌓이고 쌓이면 가능하다네. 게다가 현 재의 경우는 해명을 필요로 하는 괴이하고 불길한 사실이 너무나 많다 구. 허어, 그래 그 해명을 요하는 사실이란 뭔가? 밴스가 담배에 불을 당기고 의자에 앉았다. 가령 말일세, 체스터 그린은 왜 제일 먼저 이리로 달려와서 자네의 도 움을 간청했는가? 권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는가? 그럴지도 모르지. 다 음은 권총은 과연 어떻게 됐는가? 정말 없어져 버렸는가? 아니면 체스 터가 숨긴 것이 아닐까? 게다가 시베라는 지난 주에 봤다는 거야. 그런 데 봤다는 게 사실일까? 또한 체스터는 첫 번째 총소리를 쉽게 들었는 데, 렉스는 에이다의 옆방에 있으면서도 못들었다고 진술하고 있지. 이 건 왜 그런가? 그리고 두 총소리 사이의 그 긴 간격----여기에도 어떤 설명이 필요하다구. 다음은 스프루트야. 영감이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는 데도 아무도 못만났고,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있지----그리고 그 신들린 헤밍. 그 신탁 같은 선고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면 돼지? 그 여자는 무언 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관념을 품고 있다고. 다음은 독일인 요리사. 그녀는 얼핏 말하자면 과거를 지닌 여자야. 겉으로 보기엔 우둔 해 보이지만, 결코 심부름꾼 계급의 여자가 아니라구. 그런데도 십여년 간, 그린 일족의 주방을 맡아 충성을 다하고 있단 말야. 이 여자의 해명 도 필요하다구. 다음은 렉스야. 그 묘하게 생긴 모습하며, 우리 심문에 대한 그 발작은 뭣을 뜻하지? 다음은 거듭 말하거니와 전등이 켜져 있 다는 사실. 대체 누가 왜 불을 켰지? 쥬리어의 방은 발포 전에 켜져 있 었어. 그녀가 범인의 얼굴을 봤고, 범인의 뜻을 짐작했다는 것은 이것으 로 분명해지지. 그런데 에이다의 방은 발포 이후란 말일세. 이것을 해명 하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이해할 도리가 없다구----끝으로 펀 브론. 밤중에 스프루트가 전화를 걸었을 때 집에 없었던 이유는? 그런데도 그 렇게 신속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또 뭔가? 다음은, 그런데 참 부 장, 그 발자국, 그것은 의사 한 사람의 발자국 같던가요? 그건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소. 눈이 차분히 쌓여 있지를 않아서요. 밴스는 또다시 매컴을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음으로----두 공격에는 몇 가지 모순점이 있지. 쥬리어는 취침 중 정면에서 총을 맞았는데 비해, 에이다는 침대에서 일어난 뒤 등을 맞고 있단 말야. 그런데 범인은 왜 여자가 일어나서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것 을 기다리고 있었느냐? 이미 쥬리어를 죽인 뒤라 온 가족이 일어났을 텐데 말이야.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이라구.----다음에 그날밤 쥬리어의 방문이 걸려 있지 않았다는 것은 또 어찌 된 일이지? 다음은 자네도 아마 깨달았으리라 생각하지만, 시베라를 심문하려고 했을 때 체 스터가 자기가 직접 불러오겠따고 말하고는 오랬동안 단 둘이 있었지 않나? 그들이 나타날 때 까지의 사이에 어떤 꿍꿍이 속이 있었느냐? 다음은 시베라. 그린가 전원, 그녀마저도 포함시켜서 모조리 용의자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을 때의 그 풍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다음은 에이다의 얘기야. 여보게, 그것은 너무나 야릇하고 종잡을 수 없어. 아니, 거의 옛날얘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구---- 다음은 시베라의 에이다에 대한 히스테릭한 고발. 이 배후에 있는 것은 뭐냐? 다음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시베라와 펀 브론 사이에 연출된 그 괴상한 일막. 남자가 여자의 미치광이 같은 태도를 꾸짖은 그 장면 말 일세. 이건 기막히게 이상하다구. 밴스가 입에 문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매컴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자네의 말은 잘 들었지만 말야, 밴스. 그는 가까스로 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감의 불꽃은 튕기지 못했어. 자네는 일련의 흥 미 있는 가능성을 지적해 냈고, 뒷조사를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점도 들 춰냈다고. 그런데도 말일세, 자네의 종합분석의 단위가 되어 잇는 정수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인과의 실이 없다고. 그게 문제지. 아아, 정말 벽창호 같은 법률가구만! 밴스가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범죄를 둘러싸고 기묘하며 해명되지 않는 사실의 총화가 여기 에 있다구. 그것마저도 인상적일 수도 없을뿐더러 전체에 있어서의 개 개인의 단위도 인상적일 수 없다는 데 이르러서야! 그것 참, 이제 그만 두겠네. 그는 외투를 손에 들었다. 자네가 말하는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 절도범은 자네한테 맡기겠네. 그 렇지만 보나마나 그 친구가 범인이 될 수는 없을걸. 매컴은 그렇듯 반론을 내세우긴 했어도 실은 깊른 감명을 받고 있었다. 실상 다음 그의 말은 그의 이러한 태도의 증명이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이 겉보기보다는 뿌리깊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마저 부 정하는 것은 아니라구. 하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꼬투리가 너무 없단 말일세. 더군다나 상대방은 명문 일족이지. 그들에게 아직 의심가 는 점이 전혀 없는 이 마당에 섣불리 들춰낸다는 것은 공연히 스캔들을 퍼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고 말야. 우리는 당분간 경찰수사가 끝날 때까 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구. 그 때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다시 결정해서 할 문제지. 밴스가 딱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외투의 단추를 끼우고는 입 구 쪽으로 걸어갔다. 자네들이 부질없는 수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사이에 난 집에 들어박혀 드라크루아의 일기 번역이나 하고 있겠네. 그러나 밴스는 그렇게 오랫동안 뜻하고 있던 이 숙제를 마칠 운명에는 있지 않았다. 3일 후, 전국의 신문들은 큼지막한 제호로 명문 그린가에서 일어난 제 2의 야릇한 살인사건을 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 이 결과 사건의 성격은----180도로 달라져 그린 맨션사건은 한 달음에 유명해진 것이다. 우리가 매컴과 헤어진 다음날은 날씨가 갑작스럽게 풀려 온도계는 자그 만치 화씨30도 가까이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 이튿날 저녁나절이 되자 가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엷고 새 하얀 담요를 뉴욕시 위에 펼쳤다. 하지만 11시 경이 되어 하늘은 다시금 맑아졌다. 내가 이 사실을 굳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 그린맨션에서의 제 2의 살인 과 기묘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또다시 정면 보도에 나타났다. 나아가서 눈이 어느정도 쌓였기 때문에 경찰은 일층 복도와 대리석 층계에서도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밴스는 이틀 동안을 서재에 들어박혀 독서를 하거나 세잔의 수채화 목 록을 조사하거나 하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는 차분하지 못하고, 방심한 듯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 눈에도 분명했다. 그런데 금요일 아침, 아직 8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매컴이 그린가의 두 번째 참극을 연락해 온 것은. 내가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매컴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밴스를 당장 깨우라고----알겠나, 밴? 그가 다짜고짜로 말했다. 큰 일이 일어났다구! 나는 서둘러 밴스를 데릴러 갔고,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잠옷을 손질 하고는 태평스럽게 서재에 나타났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매컴? 밴스는 비꼬듯이 말했다. 새벽부터 방문을 해주시다니, 무척 영광인데? 매컴이 명령투로 잘라말했다. 체스터 그린이 살해됐다구! 아니, 그래? 밴스가 초인종을 눌러 심부름꾼을 불렀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는, 나타난 심부름꾼에게 일렀다. 커피 2인분. 그는 난로 앞 의자에 앉아 매컴을 향해 익살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골동품이 없어졌겠다? 매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만에. 이제는 나 역시 절도범의 소행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 아. 아무래도 자네 예감이 맞았던 모양이야. 그는 다시금 말했다. 이 연락을 밤중에 본부로 한 것은 집사인 스프루트야. 살인과의 교환수 가 히스의 집으로 연락했고, 부장은 삼십분도 미처 안되어 그린가로 달 려갔지. 지금도 그곳에 있네----오늘 아침 일곱시에 나한테 연락을 취 해왔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체스터 그린이 어젯밤 총에 맞아 즉사했다 는 것, 게다가 그 시간은 전번 시간대와 거의 똑같은 열한시 반 경이었 다는 사실뿐이라구. 그 때 그는 자기방에 있었나?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밴스가 물었다. 자기 침실에서 발견됐다는 것 같더군. 정면에서 맞았나? 맞아. 심장을 관통,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게 분명하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구만! 밴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발견자는 누구인가? 시베라야. 그 여자의 방은, 기억하고 있나? 체스터의 옆방이지. 그래서 총소리를 듣고 깨어난 것일테지. 어쨌든 당장 가보세. 밴스의 집에서 그린맨션까지는 지방검사의 자동차로 2,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커다란 철문 밖에는 순경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고, 현관 밑 계단에는 사복형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히스는 객실에서 방금 도착한 모랑 형사국장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 안은 을씨년스러운 침묵에 싸여 있었다. 가족들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히스 경찰부장이 이내 마중을 나왔다. 여느때의 불그레한 얼굴은 간곳 이 없고, 눈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는 매컴과 악수 를 나누고는 밴스를 향해 정다운 눈길을 보냈다. 당신 짐작이 들어맞았어요, 밴스 선생! 목적은 물건이 아니죠. 모랑 국장도 우리를 보고 다가와 힘껏 손을 마주잡았다. 이 사건 덕분에 한 바탕 떠들썩해지겠는데요. 모랑이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 조속히 처리해 버려야지, 우물쭈물하다가는 또 비난당하는 게 십상일 테니. 매컴의 얼굴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모랑이 물러가자 히스는 즉시 우리에게 범행의 개요를 설명했다. 11시 반 경, 총소리가 일어났다. 시베라는 그 때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 었기 때문에 총소리를 뚜렷이 들었다. 그녀는 곧 일어나 몇 분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심부름꾼 전용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녀는 집사를 깨워 둘이서 체스터의 방으로 향했다. 도어는 잠겨져 있지 않았고, 방의 전등도 환하게 켜져 있었다. 체스터 그린은 약간 쭈그리듯이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스프루트 가 다가서다가 한 눈에 절명해 버린 사실을 알고는 곧 방에서 나와 방문 을 잠그어 버렸다. 그리고는 경찰과 펀 브론 양쪽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와보니 펀 브론은 아직 와 있지를 않더군요. 히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집사가 전화했을 때는 외출중이었고, 한참 있어야 돌아온다고 하더라는 말을 듣자 나는 잘됐다고 속으로 생각했죠. 바깥의 발자국을 조사하기엔 안성마춤이었으니까요. 문을 들어설 때 알았지만, 누군지 들어갔다가 나 온 놈이 있단 말입니다. 전번 사건 때와 똑같죠. 그래서 호각을 불어 순 찰 중인 순경한테 스니트킹이 올때까지 대문을 감시하도록 이르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죠. 집사가 현관문을 열어 준 순간 깨달은 것은 홀 카펫 에 묻어 있는 작은 물웅덩이었어요. 홀에는 그밖에도 두 군데쯤 젖은 자 국이 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도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더군요. 오분 뒤 스니트킹이 달려왔고, 바깥의 발자국을 조사시켰죠. 발자국은 뚜렷했고, 그래서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어요. 스니트킹에게 일을 시키고, 부장은 체스터의 방으로 올라가 현장검증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어 다시금 아래층으로 내려와 식당으로 갔다. 그곳에 시베라와 스프루트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 이다. 두 사람의 심문을 막 시작했을 때 펀 브론 의사가 헐레벌떡 나타 났다. 난 선생을 이층으로 데려갔죠. 히스가 보충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시체를 흘끗 보고는 공연히 우물거리는 거에요. 그만 물러나 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 복도에서 시베라하고 한동안 지껄이더니 돌아가 더군요. 펀 브론 의사가 물러나자 살인과에서도 두 형사가 도착했고, 2시간 동안 가족들에 대한 심문을 했는데, 시베라를 제외하고는 총소리를 들은 자 조 차 없었다. 그린 미망인에 대한 심문은 행해지지 않았다. 에이다도 깨우 지 않기로 했다. 간호원의 말로는 에이다는 9시부터 잠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렉스 그린만은 막연하고, 또한 모순된 증거를 한 가지 제출했다. 그의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눈이 그칠 무렵, 그러니 11시 지나서 그는 잠이 깨어 있었다. 그 뒤 약 10분쯤 후, 복도를 살며시 걸어가는 것 같은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로부터 15분 쯤 뒤에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25분 이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이놈 얘기에 한가지 묘한 점이 있단 말입니다. 히스가 이렇게 비평했다. 그건 시간이죠. 녀석이 틀림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발소리와 문이 닫히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은 총소리가 일어나기 자그만치 20 분 전이라는 결론이 나오죠. 정확히 시간에 대해 거듭 물었는데 요지부 동, 틀림없다는 거에요. 녀석의 시계하고 내것을 맞춰봤더니 딱 맞거든 요. 하긴 대수로운 얘기는 못 되지만. 바람 때문에 문이 저절로 닫혔는 지도 모르고, 또 행길에서 들려온 소리를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기도 할 테지만 부장, 밴스가 한 마디 했다. 나 같으면 렉스의 이야기를 기록에 남겨 참고로 삼을 거요.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걸린단 말입니다. 히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질문을 하려다가 생각이 달라졌는 지 이렇게 말했다. 벌써 기록해 뒀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매컴에게 보고를 마쳤다. 매컴이 엄숙하게 끄덕이고는 밴스쪽 을 힐끗 보았다. 밴스는 시선을 벽에 걸린 트바이어스 그린의 해묵은 초 상화에 향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진전으로 자네의 전의 인상을 정리하는 데 기여하는 점이 있었나? 검사가 그를 보고 이렇게 질문햇다. 이 유서깊은 저택이 죽음을 부르는 독기로 뒤덮여 있다는 느낌은 틀림 없이 실증된 셈이지. 밴스가 이렇게 대답하고 덧붙였다. 이거야말로 바로 <악마의 잔치> 야. 아무래도 자네가 힘겨운 일에 부 딪치게 된 것 같구먼. 매컴이 쓰디쓴 얼굴을 했다. 그럼 부장, 검시관이 오기 전에 시체를 좀 보여 줄까? 히스는 말없이 우리를 안내했다. 층계를 올라서자 그는 포켓에서 열쇠 를 꺼내 체스터의 방 문을 열었다. 방은 길이가 길고 옆이 좁으며, 시대착오적인 가구의 배열이었다. 전형 적인 남자의 방으로, 아늑하면서도 게으른 기분이 떠돌고 있었다. 신문 이나 스포츠 잡지 따위가 식탁에도, 책상에도 흩어져 있고, 재떨이가 여 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침대는 잠을 잔 흔적이 없엇다. 방 한가운데, 해묵은 스타일의 샹제리아 바로 밑에 테이블이 있고, 그 곁에는 푹신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체 스터 그린이 잠옷과 슬리퍼째로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의자였 다. 약간 옆으로 기울어진 자세로 목을 얼마간 뒤로 젖히고는 의자의 등에 기대어 있었다. 샹제리아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닿아, 처절한 조명이 되 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평소에도 가 뜩이나 튀어나와 있던 안구가 당장 튀어 나올 것 같아 보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을 나타내듯 응시한 채였다. 밴스는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장, 맞춰 보지 않겠소? 그가 시선도 들지 않고 물었다. 체스터도, 쥬리어도,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렇게 생각지 않소? 히스가 불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글쎄올시다. 두 사람 모두다 놀라 자빠졌다, 이건 틀림 없군요. 놀라자빠졌다는 표현이 그럴듯하구만. 부장, 이 살인마의 소행의 모든 진실은 이 둥근 눈알, 이 헤벌어진 입에 있소. 에이다의 경우와 달리 쥬 리어도, 체스터도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놈을 목격한 거요. 그는 몸을 구부리고 마루에서 작은 책을 주워올렸는데, 그것은 의자의 팔걸이에 맥없이 늘어져 있는 시체의 한쪽 팔 바로 밑에 있었다. 허어, 친애하는 체스터 선생. 이 세상을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고 한 문학취미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군. 그가 책을 몇 장 펼쳤다. 허어, <물리치료법과 변비> 라? 맞아, 체스터는 변비에 걸릴 그런 타 입이었겠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이 책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겠나, 매컴? 체스터는 여기에 앉아 이 책 을 읽고 있었다, 그때 살인자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일어서지 않았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침입자가 직접 자기의 정면에 섰는데도 태연했다, 왜 그렇지? 그것은 범인이 체스터가 알고 있는----게다가 신 용하고 있는 누군가였기 때문이야! 그러는데 총이 느닷없이 조준되고, 그 의 심장을 노렸어. 그 때 그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꼼짝달싹을 못했던 거야. 그리고 이 놀라움에 어리둥절해 있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 지고, 총알은 그의 심장을 뚫었지. 매컴이 깊은 혼란에 빠진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는 시체의 자세를 다시 면밀히 살피기 시작햇다. 그건 과연 그럴듯한 생각이군. 부장도 마침내 양보했다. 맞았어. 이 친구는 범인에 대해 손톱만큼도 의심을 품지 않았어. 쥬리 어도 마찬가지지. 바로 그렇소, 부장. 두 살인에는 너무나도 비슷한 데가 있소. 그렇기는 하지만,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다구요. 히스의 눈썹이 올라가고, 쓰디쓴 표정이 되었다. 체스터의 방문은 어젯밤엔 안잠겨져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가 침대에 들어간 흔적이 없다는 사실로 이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범인은 손쉽게 들어왔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쥬리어는 옷을 벗고 침대에 들 어가 있었거든요. 게다가 그 여자는 방문을 잠그는 습관이었단 말입니 다. 그런데 범인은 어떻게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느냐, 어때요, 밴스 선생? 그건 별 문제가 없소. 가령 쥬리어는 옷을 벗고, 전등을 끄고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마 상대방이 누 구인지 알 수 있는 그런 식으로 두드렸을 거란 말이죠. 그녀는 일어나서 불을 켜고 문을 연다, 그리고 다시금 침대로 돌아온다, 방문자와 정답게 얘기를 나누면서 말입니다. 이윽고 방문자는 느닷없이 권총을 꺼내 방아 쇠를 당기고 서둘러 물러간다, 허둥대는 통에 전등을 끄는 것을 잊어버 렸다, 이런 해석이라면 납득이 간다고 생각하는데요. 하긴,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히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인정했다. 이 때 복도를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스니트킹이 잔뜩 긴장한 얼 굴을 나타냈다. 히스가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 발자국에서 뭔가 나왔나? 재료는 틀림없이 찾아냈죠. 스니트킹이 부장쪽으로 달려와 큰 마닐라봉투를 내밀었다. 사이즈를 재어 본을 뜨는 것쯤 간단했죠. 그렇지만 이것만으론 꼬투리 를 잡을 길이 없단 말씀입니다. 그럴 것이 이 사이즈의 발을 가진 사람 은 수십만명이나 될 테니까요. 히스가 봉투에서 얄팍한 흰 마분지를 꺼냈다. 구두깔개 비슷하다. 스니 트킹이 말했다. 사이즈만 가지곤 알 길이 없죠. 이놈은 구두자국이 아니니까요. 이런 자국을 내는 신발이라면, 고오르인의 구두라고 말하는, 즉 오버슈즈가 분명하죠. 그런데 이놈으로는 신고 있는 인간의 실제의 발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사이즈 팔에서 십까지의 구두라면 어떤 구 두 위에건 신을 수 있으니까요. 히스가 눈에 띄게 낙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니트킹의 눈길이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루바닥 한 구석으로 쏠렸다. 그 발자국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신발이지요. 그가 가리킨 것은 신발장 밑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한 켤레의 방한 화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는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이즈 역시 비슷하군. 그는 부장의 손에서 구두자국 본을 뜬 마분지를 받아 그것을 이 오버슈 즈 밑바닥에다 갖다댔다. 그러자 마치 같은 재단기로 잘라낸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히스가 펄쩍 뛰듯이 기뻐했다. 이것 참, 신기한 일이구먼! 매컴도 흥미를 느끼고 곁으로 다가섰다. 보나마나 체스터가 어젯밤 늦게 외출이라도 한 거겠지. 그렇지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죠, 검사님. 히스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밤중, 그 시간에 볼일이 있었따면 집사를 대신 보낼 게 분명하죠. 게다 가 이 근처엔 그 시간까지 열려 있는 가게는 없을 거란 말씀입니다. 아 시겠어요? 그 발자국이 생긴 것은 눈이 그친 시각, 즉 열한 시 이후였 을 테니까. 스니트킹이 그 뒤를 보충했다. 게다가 그 발자국만으로는 그것이 집에서 나온 놈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죠. 서로 겹쳐진 놈은 전혀 없으니까요. 밴스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부장, 나로서는 체스터가 방한구두를 신고 몰래 밤중에 집 안을 돌아다 녔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렇지만 이 구두가 바깥의 발자국 사이즈와 똑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소? 그러자 매컴이 의견을 말했다. 그 발자국이 체스터의 것이 아니라면, 필연적인 결과로서 범인의 것이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지. 밴스가 천천히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그렇겠군. 그 가설이 진리라고 봐야 할 테지. 완벽한 알리바이 마침 이 때 검시관인 드라머즈 의사가----동작이 재빠르면서도 신경질적 이고, 어딘가 냉정해 보이는 사나이였다----형사에게 안내되어 들어왔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윙크를 해 보이고, 모자와 외투를 의자 위에 집어던지고 는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시작했다. 이건 또 뭔가, 부장? 자네 단골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그는 의자 위의 시체를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일가족 몰살인가? 무서운 뜻이 담긴 자신의 농담에 대한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그는 성 큼성큼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거두었다. 재빨리 좀 봐주슈. 히스가 말했다. 체스터의 시체는 침대로 옮겨졌다. 선생, 시체해부 전에 총알을 꺼낼 가망성은 없소? 검침도, 핀셋도 없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여보게? 드라머즈 의사는 잠옷 자락을 걷어올리고는 상처의 검시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 보지. 그는 벌떡 일어서서 익살스러운 얼굴로 부장을 비스듬히 보았다. 이제 자네 차례야. 사망시간은 몇 시 쯤이냐, 그 질문을 안하나? 그야 물론. 흥, 그럴 테지. 시체를 한 번 본 것만으로 정확한 사망시간을 정하기란 틀 린 수작이지. 우리 동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대충이라네. 사후경직 은 사람마다 틀리게 마련이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어디...... 그는 침대 위의 시체를 만져보고, 손가락의 굴절을 풀어보고 머리를 움직 여 보는가 싶으면, 다시금 상처의 굳어진 피를 들여다 보곤 하더니, 이윽고 뻐쩡다리로 서서 천정을 한 동안 노려 보았다. 열 시간이라면 어떻게 되나? 결국 열한 시 반부터 열두 시 사이야. 맞았 나? 히스가 한바탕 껄껄 웃었다. 훌륭하십니다, 선생----딱 맞아떨어졌구먼. 천만에. 같은 짓을 수십 년 해온 덕이지. 이렇게 말하는 드라머즈 의사의 태도는 참으로 쾌활해 보였다. 마침 이 때 그린 미망인의 문 앞에 간호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 등 뒤의 방 안에서는 앙칼진 목소리의 독재자 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누구라도 좋으니 책임자를 붙잡아 말해 주려무나! 내가 꼭 만나봐야 하겠다고 말야----당장이라고, 알겠지? 언어도단에도 정도가 있지, 아니, 남이 괴로워서 누워 있는데, 그래 그렇게 소동을 피운단 말이냐? 히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눈을 흘겼다. 그러나 밴스가 매컴의 팔을 잡았다. 마님에게 문안을 드리러 가세.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미망인은 여전히 그 울긋불긋한 베개를 등에 대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 쌀쌀한 표정으로 쇼올을 여몄다. 어머, 당신이었군요? 그녀가 약간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표정도 약간 누그러졌다. 난 또 우리집을 멋대로 쏘다니고 있는 그 경찰 나부랑이들인줄만 알았지. 그런데 이 소란은 또 뭐죠? 매컴씨? 간호운 말이 체스터가 총에 맞았다던 데, 정말 한심한 일이라구요. 가엾은, 외톨박이 늙은이를 괴롭히다니 정말 언어도단이죠----하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요즘들어 부쩍 그 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구요. 내 감정 따위는 누구하나 아랑곳하지 않으니 까요. 자업자득이죠. 게다가 피를 나눈 자식들마저 나를 들들 괴롭히는 판 이니, 아, 남들이야 오죽하겠어요? 부인, 살의를 결심한 인간은---- 매컴은 말을 미처 못잇고 노부인을 보았다. 지나친 냉혹감에 흥분해 있었 기 때문이다. 자기 잘못으로 남이 어떤 폐를 입게 되는지를 생각할 여유란 없게 마련 이죠. 그야 물론 그럴 테죠. 그녀는 자신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자식들이 나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이 집에까 지 쳐들어와 죽이려들지는 않을 걸요. 그녀는 갑자기 신랄한 말투로 변했다. 그게 다 천벌이라는 거죠. 가엾은 어미가 이렇게 온 몸을 쓰지 못하고 누 워 있고, 고칠 희망도 없이 가련하게 신세타령만 하고 있는데 그렇듯 매몰 차게 굴었으니까요. 그녀의 사나운 늙은 눈에 혐오의 빛이 이글거렸다. 하긴 내 생각을 할 때도 있죠. 정말이에요! 나를 밀어내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내 돈을 몽땅---- 그런데 부인. 매컴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젯밤 아드님이 피살되었을 때 부인은 잠이 들어 있었지요? 글세, 아마 그랫던 모양이죠. 하지만 이상한 일이 딱 한 가지 있었어요. 언제나 열어 놓은 채인 내 방문을 일부러 닫아 놓은 인간이 있다구요. 이 거야 말로 나보고 잠을 깨지 말라는 것 아니고 뭡니까? 그럼 부인은 아드님을 죽일 만한 이유를 지닌 사람에 대해선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까? 설마하니 내가 그런!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니까요. 난 버림 받은 외톨박이 병신 늙은이에...... 그럼 부인, 이제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매컴의 말투에는 동정과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상류층의 부인이라고는 할 수 없구만. 일동이 객실로 들어섰을 때 밴스가 싱글거렸다. 맞았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딱한 생각도 드는구만. 그 여자의 세계에서 는 이번의 저주받은 사건 전체가 자기를 혼구멍에 빠뜨리기 위해서 꾸며진 음모로 비치고 있는 모양이거든. 스프루트가 입구에 나타나 공손히 서 있었다. 여러분께 커피라도 갖다드릴까요?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연거푸 일어난 살인사건도 이 사나이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는 못 할 성싶었다. 고맙구먼, 스프루트. 매컴이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그보다도 시베라양보고 이리 와달라고 전해 주지 않겠나? 네. 노인은 뒷걸음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잠시 후 시베라가 힘차게 들어왔다. 담배를 쥔 채, 한 손은 눈부신 녹색 스 웨터의 포켓에 찔러넣은 채였다. 그녀는 태연한 체 하고는 있었으나 얼굴은 창백하여, 그 창백함이 입술의 진한 립스틱에 비치어 산뜻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을 때에도 마음과는 걸맞지 않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이 꾸민 목소리의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쾌활한 인사를 했다. 안녕. 여러분들. 사교적인 방문을 받기엔 너무나 끔찍한 모임의 주최자가 되어 버렸군요. 안그래요? 그녀는 의자에 앉자 차분하지를 못하고 한쪽 발을 흔들고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 그린가에 원한을 품고 있는 인간이 있다구요. 아아, 가엾은 체스터! 구두도 신지 못하고 죽어 버리다니? 그건 그렇고, 내가 여기에 호 출된 것은 어젯밤 얘기를 하라는 것일 테죠? 무슨 말부터 먼저 할까요? 그녀는 일어서서 담배꽁초를 난로에 집어던지고는 매컴의 정면에 있는 의 자에 앉아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매컴이 잠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젯밤 침대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죠? 그 때 방에서 총소리가 일어났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나요?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오. 나는 책을 놓고 일어나 옷을 입고는 몇 분 동안 방문 앞에 서서 귀를 기 울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뿐 다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길래 살며시 밖 을 내다봤죠. 복도는 캄캄하고 쥐죽은 듯 조용한 것이 어쩐지 유령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어요. 당장 체스터의 방으로 뛰어가 보는 게 도리인 줄 알 았지만, 까놓고 얘기하자면 겁이 더럭 나버렸죠. 그래서 심부름꾼들의 층 계를 뛰어올라가 스프루트를 두드려 깨워 같이 조사를 해봤어요. 체스터의 방문은 걸려 있지를 않았죠. 겁을 모르는 스프루트가 문을 열자 체스터가 앉아 있었는데,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나는 이내 체 스터가 죽은 걸 알았죠. 우리는 곧 식당으로 내려왔고, 스프루트가 여기저 기 전화를 걸더군요. 그 총소리가 나기 전의 얘기인데요, 당신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나요? 전혀. 모두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어요.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 리라고는 어머니가 간호원에게 하던 말 정도였죠. 그 뒤 열한시 반 까지는 평화와 정적이 지배했었죠. 그런데 난데없이 총소리가 난 거에요. 그 정적은 어느 때까지 이어졌죠? 글쎄요, 어머니의 일과(日課)인 가족들에 대한 욕지거리가 끝나는 것은 대 개 열시 반 쯤이니까, 고요함은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됐다고 봐야 하지 않 을까요? 시베라는 스웨터 포켓 속에 들어있는 작은 담배케이스에서 다시금 담배 한 개피를 꺼냈다. 밴스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성냥을 켜주었다. 당신은 조금도 두려워하지를 않는 것 같군요. 어머, 내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해야 하죠? 그녀가 딱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해보였다. 내 신상에 뭔가가 덮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 하건 덮칠 것은 덮치게 마 련이죠. 하지만 난 죽는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들어요. 나를 죽일 만한 이유룰 지닌 인간이 있을 리는 없는 일이고---- 그런데 말씀입니다. 밴스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당신 언니와 동생, 그리고 오빠한테 살의를 품을 만한 이유가 있는 인간 역시 보기에 없지 않습니까? 그 점이라면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우리집 식구들이란 피차 비밀을 밝히는 경우가 없으니까요. 서로 거짓말을 하는 게 이 집의 인생철학이죠. 그리고 그 비밀을 굳게 지키는 점에 이르러서는 식구들 각자가 비밀결사 같아, 아마 죽어도 말을 안할 걸요. 이번의 일련의 살인사건에는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을 거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담배를 한 모금 피워물고 또다시 말했다. 그래요, 거기엔 반드시 뭔가 배경이 되는 동기가 있어요----하긴 그걸 나 보고 대라고 해봤자 깜깜무소식이지만. 그러자 매컴이 안심하라는 듯이 한 마디 했다. 아가씨, 이 자리에서 당장 명령을 내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또다시 사건이 일어날 위험성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이상은 집안을 빈틈없이 감시시킬 테니까요. 히스가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나타내 보였다. 당장 수배해 놓겠습니다, 검사님. 앞으로는 밤낮없이 두 명을 배치해 놓도 록 되어 있으니까요. 어머, 그것 참 스릴 만점이네요. 시베라가 외쳤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눈에는 야릇한 불안의 그 늘이 있었다. 더 이상 만류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린 양. 매컴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도 일어섰다. 그러나 심문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 방에 계셔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물 론 어머님방으로 가시는 것은 지장 없습니다. 친절하시네요. 하지만 난 미용을 위해 잃어버린 잠을 되찾고 싶어요. 그녀는 손을 흔들면서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발소리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드라머즈 의사가 의기양양해서 들 어왔다. 보게, 고대하던 총알이라구. 부장. 그가 객실 의자 위에 내던진 것은 둔한 빛깔의 작고 둥근 납덩어리였다. 돌입구는 제오늑간근질, 그곳에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달려 심장을 관통 표피하(表皮下)를 우연히 만졌더니 반응이 있더군. 그래서 부장 생각을 하 고 당장 펜나이프로 도려냈다, 이말씀이지. 허어! 과연 놀라운 솜씨구먼. 어쨌든 이쪽은 총알만 손에 들어오면 만사 오케이라. 히스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는 그 총알을 주워 올려 손바닥에 얹었다. 그리고는 포켓을 들추어 다른 총알 두 개를 꺼내 이번의 총알과 나란히 놓았다. 그가 만족한 듯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증거품을 매컴에게 내밀었다. 이 집에서 발사된 총탄 세 개가 이것입니다. 모두 삼십이 구경의 총알이 었지요----똑같습니다. 이제 틀림없죠, 검사님. 세 사람의 피해자는 모두 똑같은 권총에 맞은 겝니다. 히스가 이렇게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스프루트가 복도를 빠져 현관문을 여는 동시에 펀 브론 의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 스프루트. 그 상냥한 목소리가 둘려왔다. 펀 브론은 객실을 힐끗 들여다보고, 우리를 발견하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드라머즈 의사를 보자 상냥하게 아, 안녕하십니까, 선생 하며 앞으로 나왔다. 이거 수고가 너무 많으십니다. 천만의 말씀. 드라머즈가 쾌활하게 말했다. 펀 브론이 지방검사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에이다양을 만나봐야겠는데, 상관 없을 테죠? 좋소이다, 선생. 매컴이 선뜻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만하면 우리도 같이 가보고 싶군요. 에이다양에게 몇 마디 질문해 보고 싶은 점도 있고, 아무래도 선생이 입회해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 말 씀입니다. 펀 브론이 순순히 동의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야겠군. 드라머즈가 시원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다양이 오빠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확인해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우리가 층계를 올라가고 있는 사이에 밴스가 제안했다. 이층 복도에는 스프루트로부터 펀 브론의 도착을 기별받은 모양으로 간호 원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가 알고 있는 한으로 는 에이다는 체스터의 죽음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에이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무릎 위에 잡지를 펼쳐놓고 있었다. 안색 은 아직도 창백하지만, 젊디젊은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눈치를 보였으나, 의사의 모습을 보고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 오늘아침의 기분은 어떻지, 에이다? 의사는 직업적인 부드러운 말로 질문했다. 저기에 있는 분들을 기억 하고 있을 테지? 에이다는 불안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던지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절을 했다. 네,ㅡ 기억하고 있어요...... 이제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군요----그래서--- 쥬리어 살해사건에 대해 더 물어보실 일이라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라구. 펀 브론이 그녀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다른 일로 좀 알아 볼 일이 있어서 오신 거라구. 의사의 음성에는 동정의 빛이 넘쳐흘렀다. 어젯밤 체스터가 사고를 당했거든---- 사고라구요? 어머나! 그녀의 눈이 멍청히 뜨여지고, 어렴풋한 전율이 치달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끊어졌다. 말씀하시는 뜻을 알겠어요...... 체스터는 죽었군요? 펀 브론이 헛기침을 하고 딴 곳을 보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에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구. 알 테지? ----총에 맞아죽다니! 설마? 이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고, 공포의 표정이 온 몸을 짓눌렀다. 쥬리어와 내 경우와 똑같아.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밖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공포에 묶인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곧장 응시하고 있었다. 펀 브론이 입을 다물었다. 밴스가 뚜벅뚜벅 침대로 걸어갔다. 그는 부드럽 게 말했다. 당신은 바로 진실을 맞췄다고. 그럼 렉스는 어떻게 됐죠?----시베라는? 두 사람은 괜찮지. 밴스가 대답했다. 그런데 오빠가 쥬리어 언니나 당신처럼 똑같이 총에 맞았다고 생각한 것 은 무슨 까닭이지? 말해 주지 않겠나? 그녀가 서서히 밴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몰라요----그저 느낌으로 안 거죠. 난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 뭔가 무서 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먼젓번 밤에는 마 침내 그 때가 온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아아,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밴스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가벼운 투로 말했다. 뭐 초자연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당신이 그런 환상을 품은 것 과 이번 사건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것과의 사이엔 우연의 일치밖에 없다 구.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컴이 거듭 보증하는 것 같은 미소를 띄우면서 몸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온종일 집을 감시시킬 테니까 이 집 식구 외엔 아마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할 겝니다. 거 보라구, 에이다. 펀 브론이 한 마디 했다. 이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구. 어서 속히 나을 수 있도록 마음을 푹 놓도록 해요. 필요 없는 신경은 쓰지 말구. 그러나 그녀의 눈은 매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이렇게 그녀가 물었는데, 긴장되고 불안한 목소리였다. 그 범인----그 인물이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말이죠. 두 번 모두 범인의 발자국이 현관 보도에서 발견되었으니까요. 발자국?----그게 정말이에요? 그녀는 열심히 물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쪽 부장이. 매컴은 히스를 손짓해서 불렀다. 여보게, 아가씨한테 그 발자국을 본뜬 종이를 보여 주게나. 히스가 마닐라 봉투를 꺼내 마분지를 빼냈다. 에이다는 그것을 한 동안 들 여다보더니 부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공포는 말끔히 가셨고, 동시에 그 때까지 눈동자를 묶고 있던 불안한 그늘도 사라졌다. 에이다양. 밴스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구. 우선 간호원 말이 당신은 어젯 밤 아홉 시 에는 잠이 들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난, 잠든 체 했을 뿐이에요. 간호원이 고단해 하는데도 어머니는 똑같은 푸념을 늘어놓는 거에요. 정말 잠든 것은 훨씬 뒤였어요. 그런데 오빠의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는 못들었단 말이죠? 그래요. 그 때는 아마 잠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 전에는 아무 소리도 못들었소? 스프루트가 문단속을 한 뒤에는 아무 것도. 스프루트가 물러난 뒤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있었어요? 에이다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아마 한 시간쯤...... 하지만 분명치는 않아요. 한 시간을 훨씬 지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럴 것이 총성이 일어난 것은 열 한 시 반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복도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요. 공포의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왜 그런 질문을? 작은오빠 렉스가 말이오, 밴스가 이렇게 설명했다. 열한 시 조금 지나, 발자국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에이다는 밑을 보고 자유로운 쪽 손으로 받치고 있던 잡지 모서리를 움켜 잡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이 혼잣말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어머나, 렉스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뇨? 갑자기 그녀가 눈을 떴다. 숨결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나 역시 그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제 간신히 생각난 일이지만.. .... 그 문은 어디 있는 문이었나요? 밴스가 짐짓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에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너무 작은 소리여서----그렇지만 분명히 들었어요. 맞아요.... 아아, 그게 어떻게 됐나요? 아마 별 대수로운 일은 못될 거요. 밴스가 대단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공포를 덜어주려는 뜻이 분명 했다. 보나마나 바람일 테지. 그러나 그 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우리가 그녀의 방을 물러설 때도 에이다의 얼굴은 여전히 불안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다음 한시간은 두 여자심부름꾼과 요리사에 대한 심문으로 지나갔다. 매컴 의 그들에 대한 심문은 철두철미한 것으로, 비단 현재의 실정뿐만 아니라 그린가의 일반조건에까지 미쳐 면밀한 질문이 행해졌다. 그런데 막상 살인사건에 이르면, 설령 아무리 간접적인 것이든 그것과 관 계가 있어 보이는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지간히 뚜렷이 떠오른 것은 그린 맨션에는 훨씬 옛날부터 증오와 악감정과 적의가 숱하게 존재해 왔다 는 사실이었다. 심부름꾼들의 입에서 새어나온 이야기는 별로 유쾌한 것이 못 되었다. 이런 이해하기 힘든 가족관계의 대부분은 나이 많은 헤밍의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 심문 때처럼 도도하지는 않았어도 이 여자의 해설은 온통 성경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법 선명하게 그려 보인 인생축도는 십여 년 동안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생생히 비추어내어, 그야말로 너무나도 인상 깊은 한폭의 그림을 보여 주었던 것이 다. 이에 대해 나이가 아래인 버튼은 이제 그린가하고는 굿 바이라고 서슴없 이 말했다. 진심으로 무서워진 것이다----시베라와 스프루트에게 상의했더 니 급료를 지불해 주면서 아무때건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하더라는 것이 었다. 실상 심문을 마친 지 30분도 안되어 그녀는 짐을 싸들고 나가 버렸다. 그녀의 정보 역시 헤밍의 수다와 비슷한 것으로서, 그것의 방증(傍證)이라 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녀의 관찰은 좀더 실제적이고 속세적이었다. 이 집 식구들이란 아주 이상한 사람들이라구요. 게다가 심부름꾼 역시 이 상하죠----스프루트는 외국책을 읽고 있고, 헤밍은 불과 유황이 곧 떨어져 내려 모두를 몰살할 것이라느니,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나, 주방 일을 보고 있는 독일 여자는 더욱 까닭을 알 수 없죠. 남이 기껏 묻는 말 에도 대답조차 안하니까요. 식구들이란 숫제 말도 못할 정도죠.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님은 아예 피도 눈물도 없죠. 그야말로 마귀할망구라구요. 만일 내가 에 이다 아가씨였다면 미쳐도 벌써 옛날에 미쳐 버렸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에이다 아가씨 역시 그 타령이죠. 겉으로는 정숙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언 젠가 방 안에서 발을 구르며 이를 갈고 있는 꼴을 봤는데, 영락없이 악마 같았어요. 글세, 나한테 더러운 욕지거리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 붓더라니까요. 다음, 시베라 아가씨는 정말 고드름이죠. 성질이 나면 당장 쳐죽일 것처럼 덤벼드는 꼴이라니! 게다가 그 사람하고 체스터 서방님 사 이 역시 수상했죠. 먼젓번 사건이 난 뒤로는 항상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수군거리고 있더라니까요. 또 그 펀 브론 의사 말이에요, 왜 그렇게 뻔질 나게 찾아오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를 않아요. 노상 와서는 시베라의 방에 들어박히거든요. 여자는 고뿔 하나 안 앓는데, 의사가 뭣 때문에 오 죠 ? 다음은 렉스 도련님. 이 사람이 또 이상망측하거든요. 난 그 사람의 교태를 보기만 해도 소름이 죽죽 끼친다니까요. 그녀는 그러면서 실제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쥬리어 아가씨는 과히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싫어하는 데다가 기 막힌 노랭이죠. 버튼은 청산유수로 지껄여댔는데 매컴은 한 번도 막지를 않았다. 이 여자 의 수다의 진흙 속에서 사금이라도 건져낼 작정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지막 채를 쳐보니 남은 것을 쓸모 없는 모래뿐이었다고나 할까? 독일 여자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맥빠지는 것들 뿐이었다. 원래 말수가 적 은데다가 화제가 살인사건이 되고 보면, 숫제 혀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으 니. 매컴이 끈질기게 입을 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에 나의 인상 에 강하게 새겨진 것은 이 여자의 무반응은 일부러 꾸민 방어자세이며, 침 묵만이 상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밴스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심문이 일단 중단되자 그가 의자를 움 직여 그녀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기 대문이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프라우 만하임, 일전에 당신은 작고한 트바이어스 그린씨가 당신 남편과 자별한 사이였고 남편이 돌아가시자 이 집으로 직업을 구해왔다고 하셨지 요? 그게 왜 나쁩니까? 그녀가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가난했고, 달리 의지할 만한 사람, 친구가 없었으니까요. 허어, 친구가요? 밴스가 그 말꼬리를 잡아 바싹 조였다. 그래서 당신은 옛날 그린 씨와 가깝게 지내셨다? 그러면 그 분의 과거와 이번 사건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안그 런가요? 이번에 일어난 사건이 옜날에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으리라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밴스가 말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위엄을 갖추려고 애 쓰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린 씨가 당신한테 있고 싶을 때까지 이 집에 있어도 좋다는 각별한 명령을 내린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죠? 그린 나리는 아주 친절하고 너그러운 분이셨지요. 그 분을 공연히 헐뜯는 사람도 있지만 나한테는, 우리 식구한테는 항상 잘 해 주셨으니까요. 당신 남편인 만하임씨하고는 어떤 사이였나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여자의 눈은 멍하니 앞쪽을 보고 있었다. 남편이 언젠가 몹시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나리께서 도와주셨지요. 남편 하고 같이 뭔가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그린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어디였죠? 뉴 올리언스에 있는 우리집이었죠. 흠, 그 때부터 당신한테도 친절하게 대해 줬다? 여자는 완고하게 침묵을 지켰다. 조금 전에 당신은 <나나 우리 식구> 라는 말을 썼죠?----그렇다면 당신, 애가 있나요, 만하임 부인? 비로소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노여운 빛이 눈에서 번쩍였다. 없어요! 부인(否認)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밴스가 담배를 몇 모금 빨아당겼다. 남편이 돌아가신 곳도 뉴 올리언스였소? 그는 한참만에 물었다. 그래요. 그게 십삼년전의 일이었군요? 그렇죠? 맞아요. 공포에 가까운 근심어린 빛이 여자의 눈에 나타났다. 당신은 그 뒤 그린씨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뉴욕으로 왔어요. 그런데 말입 니다, 틀림없이 직업을 주리라고 믿게 된 것은 어떤 까닭에서였지요? 그린 나리는 몹시 친절한 분이었으니까요. 그린씨는 전부터 당신에게 호의를 나타내 줬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를 의 지하려고 생각했다----이게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를! 그녀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밴스는 화제를 바꿨다. 이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요? 그녀는 우물우물 말했다. 뭔가 의견이 있을게 아닙니까, 만하임 부인? 이 집에서 그렇듯 오래 살고 있는 당신인데 말입니다. 갑자기 여자의 자제심이 무너져 버렸다. 알 게 뭐에요! 내가 알 게 뭐냐구요! 그것은 고민의 절규에 가까웠다. 쥬리어 아가씨나 체스터 서방님 같으면 아마 무리도 아니겠죠. 사람을 미 워하고, 싫어하고, 냉정하고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귀여운 에이다 가----그 사람한테까지 해를 끼치려는 것은 무슨 영문인가요? 그녀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는데, 다시금 그 둔중한 표정으로 서서히 돌아 갔다. 글세, 왜 그럴까요? 밴스의 목소리에는 동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창가쪽으로 갔다. 그만 물러가도 돼요, 만하임.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귀여운 에이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할 테니까.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밴스쪽을 불안한 눈으로 힐끗 보고 밖으로 나갔다. 그 따위 케케묵은 내력을 들춰서는 뭐하겠다는 건가? 매컴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이 며칠 사이의 일이라구. 그런데 자네는 자그 만치 십삼년이나 전에 트바이어스 그린이 요리사 여자를 고용한 시시한 이 유 따위를 캐내는 것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야. 이 세상엔 인과(因果)의 실이라는 게 있다네. 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게다가 이 인(因)과 과(果)를 연결하는 실은 생각지도 못할 오랜 세월의 흐름이 따르는 수가 흔히 있게 마련이지. 그건 물론 그렇다구. 하지만 그 독일 주방여자하고, 이번 살인하건하고 대 체 어떤 연관의 실이 있다는 말인가? 그야 없을지도 모르지. 밴스가 다시금 방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선은 떨어뜨린 채였다. 그렇지만 매컴, 이번 살인사건과 관련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보이는 반면에 모두가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나? 집 전체가 희미 한 빛깔로 물들여져 있지. 뜻을 지니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까닭에 모든 것이 뜻을 지니노라야. 자네 참 딱하구먼,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매컴의 말투에는 고뇌와 비난이 번갈아 나타나 있었다. 자네의 이론은 마술사의 잠꼬대보다 못하다구. 트바이어스 그린이 과거에 만하임이라는 인간과 거래가 있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야? 물론 트바이어 스 그린은 정상적인 사업가는 아니었어. 뭔지 정체모를 용건으로 온 세상 을 돌아다녔고, 귀국할 때마다 재산을 모아갔지. 또한 그 사람이 독일에 오 랫동안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자네가 이번 사건의 타당한 설명을 캐내려 고 그의 과거를 들춰내려든다면, 아마 한이 없을걸. 자네는 내 기발한 착상을 오해하고 있다구. 밴스가 이렇게 되받았다. 난로 위에 걸려있는 트바이어스 그린의 제법 큰 해묵은 유화 앞에 멈추어선 채였다. 그건 어떻든 간에, 이 트바이어스 그린이란 사람, 인물이 그럴듯하군. 그는 초상화를 거듭 들여다보며 이렇게 비평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인물이야. 역동적인 앞이마, 여기엔 학자의 용모 이 상의 뭔가가 있구먼. 게다가 이 우람스런 코, 잔인한 입---- 매컴이 조롱하듯 응수했다. 내게 골상학 따위는 길바닥의 돌이지. 범죄예행 매컴은 초조한 듯이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이거 안되겠군. 그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정오에 중요한 약속이 있단 말야. 렉스를 만나 대충 물어보고 물러가야겠 어. 뒷일은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히스 부장. 히스는 우울한 듯이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우선 먼저 할 일은 집 안을 이잡듯이 뒤져 권총을 찾아내는 일이죠. 권총만 발견되면, 전망은 밝아질 테니까요. 부장, 당신의 모처럼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 밴스가 태평스런 음성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이 찾고 있는 그 무기는 아무래도 쉽게 나올 것 같지가 않은데요. 히스가 맥풀린 듯이 말했다. 이놈은 정말 거지 같은 사건이란 말씀이야. 잡아당길 꼬투리라고는 도통 없으니 이거 원 기가 차서----재료가 있어야 무얼 하지! 그는 초인종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스프루트가 모습을 나타내자 대뜸 렉스 그린을 당장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렉스가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우다 남은 담배를 입에 문 채였 다. 그는 절반쯤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힐끗 보고 나서 매컴이 가리킨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도전적인 태도로 버티고 섰다. 그러더니 느닷없 이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쥬리어와 체스터를 죽인 범인을 당신들 아직도 못 찾아냈소? 그렇소. 매컴이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재범(再犯)에 대한 예방조치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소...... 예방조치? 어떤? 집 안팎에 사복형사를 배치했고----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매컴의 말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그것 참 대단한 솜씨구만! 우리 그린 일가를 노리고 있는 범인은 말이오, 열쇠를 갖고 있다, 그 말이오! 열쇠를 말이오. 그놈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가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 얘기엔 과장이 좀 지나친 것 같군요? 매컴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튼, 조만간 그 열쇠를 가진 인물을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을 거요. 그 래서 이렇게 당신에게 수고를 끼치고 있는 거죠. 내가 뭘 알고 있따는 거요? 렉스의 말은 도전적이었고, 담배를 몇 모금 빨아당겼는데, 재가 재킷에 떨 어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매컴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히스 부장의 보고에 따르면, 당신은 어젯밤 열한시 경까지 잠을 자지 않 고 있었고, 복도에서 일어난 소리를 들었다면서요? 좀 자세히 말해주지 않 겠소? 자세히구 뭐구 말할 게 있어야죠! 렉스가 충동적으로 외쳤다. 내가 침대에 들어간 것은 열시 오십분 경이라구요. 그런데 도무지 잠이 와야지.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아마 한 십분쯤 됐을까? 복도에서 무슨 소 리가 나더니, 이어 살며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깐, 렉스씨. 밴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소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나요? 어떤 소리 같았죠? 난 전혀 주의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렉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가 물건을 놓은 소리라고도, 뭔가를 끌고 지나간 소리라고도 할 수 있죠. 그리고는? 그리고는? 난 그대로 십분인지 이십분인지 침대에 누워 있었죠. 공연히 불안했고----동시에 어떤 기대도 있었죠. 그래서 몇시쯤 됐을까 하고 불 을 켜고는 시계를 본 다음 담배를 절반쯤 피웠는데---- 그때가 열한시 이십오분이었단 말이죠? 그래요. 난 한 이삼 분 있다가 불을 껐어요. 아마 이내 잠든 모양입니다. 순간 침묵이 계속되었다. 히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눈을 부라렸다. 이봐, 렉스. 너 권총 건으로 뭘 숨기고 있지? 이 질문은 아닌밤중에 홍두깨격이었고, 사나운 울림이 있었다. 렉스가 펄쩍 뛰며 몸을 도사렸다. 입술은 헤벌어지고, 들고 있던 담배는 마 루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턱을 경련하면서 히스를 노려보았는데, 당장 덤 벼들 것만 같았다. 뭐가 어쨌다고? 이미 욕설에 가까웠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 형의 권총을 어디다 뒀냐는 뜻이라구. 히스가 턱을 내밀고 가차없이 조여들었다. 렉스의 입이 분노와 공포의 경 련발작을 일으켰고, 그는 발언능력을 잃은 것만 같았다. 형님 권총?...... 내가 숨겼다구?...... 그는 한참만에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이 새끼----얼간이 녀석 같으니! 당장 내 방에 가서 모조리 뒤져 봐라! 이 미친 놈을 그저! 그의 두 눈은 이글거렸고, 윗입술은 뒤틀려 이가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그 태도에는 비단 분노뿐이 아니라, 공포도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몸을 내밀고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이 돼지새끼야! 네놈이 그 따위 허튼 수작을 한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으 냐? 렉스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둘째손가락을 내밀고 부장을 가리켰다. 이어서 저주와 욕지거리가 실룩거리는 입술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밴스도 일어서서 몸을 가누며 빈틈없이 상대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컴은 본능적으로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옮겼다. 정작 히스조차도 렉스의 터무니 없는 적개심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마침 그 때 펀 브론이 허둥지둥 들어와서는 젊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렉스, 진정하라구. 에이다를 괴롭힐 뿐이야. 렉스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사나운 태도만은 여전했다. 그는 의 사의 손을 밀어내고 한 바퀴 뒤로 돌아 펀 브론과 대결했다. 부질없는 참견 말라구! 그는 미친 듯이 외쳐댔다. 네놈은 노상 집 안을 헝클어 놓고 있잖아?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선 남의 일에 부질없이 참견을 하는 꼴이라니! 어머니의 병은 핑계라구! 네놈 이 그랬잖아? 어머니는 완치될 수 없다구 말야. 그런데도 자꾸 찾아와서 약을 주고 있는 이유가 뭐냐구? 그는 의사를 향해 교활해 보이는 곁눈질을 했다. 네놈이 찾아오는 까닭을 모를 줄 알구? 흥! 시베라가 목표지? 그는 또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싱긋 웃었다. 하찮은 의사 나부랭이한테는 좋은 미끼일 수밖에----안그래? 돈은 잔뜩 있겠다---- 문득 말이 끊겼다. 그의 눈은 펀 브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몸은 뒷걸 음질을 쳤고, 또다시 경련이 일었다. 지껄이고 있는 사이에 차츰 이성을 잃 은 음성으로 변해갔다. 천만에! 시베라의 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 네놈은 우리 식구들의 돈이 모조리 탐이 날걸? 그래서 시베라한테 유산을 몽땅 상속시키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맞았어, 그랬구먼? 바로 네놈이구나, 일을 꾸민 놈은. 펀 브론이 슬픈 듯 목을 흔들며 우수 가운데에도 관용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몹시 난처한 일막이었으나 그는 이 역할을 보기좋게 해냈다. 이봐, 렉스. 그는 아동을 타이르는 교사처럼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 하면 화가 풀렸을 테지? 풀리긴 뭐가 풀려? 젊은이는 여전히 외쳐댔다. 너는 체스터가 권총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 총을 산 그 해 여 름 형과 함께 캠핑을 갔잖아? 쥬리어가 살해된 직후 형이 그러더라구. 그의 염주알같은 작은 눈이 의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펀 브론이 재빨리 다가가서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흔들었다. 적당히 해두라고, 렉스! 그 말은 채찍같은 명령이었다. 여전히 헛소리를 늘어놓겠다면, 너를 정신병원에 격리시키는 수밖에 없다 고. 이 협박의 효과는 대단했다. 렉스의 눈에 순간 마귀에라도 홀린 것 같은 공포의 빛이 감돌았다. 갑자기 맥없이 자세가 헝클어지더니, 펀 브론이 시키 는 대로 고분고분 밖으로 나갔다. 그것 참 기가 막힐 노릇이군. 밴스가 한 마디 했다. 그런 괴짜라면 친구가 되 줄 사람도 없겠는걸. 그렇지만 이봐요, 부장.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요. 히스가 이 말에 불평을 토했다. 선생이 뭐라고 하건, 놈이 전혀 용의(容疑)밖이라곤 할 수 없잖소? 아시겠 어요?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의 방을 모조리 뒤져 권총을 찾아내고 말겠 소. 내가 찾아보는 한. 밴스가 부드럽게 응수했다. 그 중풍쟁이가 대학살을 꾸밀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질 않는군요. 그야 어떤 충동으로 권총을 마구 쏘아대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면 밀하고, 은밀하고 끈기 있는 음모를 꾸밀 만한 위인은 못되는 것 같구먼. 놈은 뭔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게 있을 거라구요. 히스는 여전히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는데 펀 브론이 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렉스는 진정시켜 놨습니다. 루미널을 복용시켰으니 잠이 들 테고, 깨어나 면 뉘우칠 테죠. 오늘 처럼 심한 일은 좀 드물죠. 신경과민----결국 뇌신 경 쇠약증입니다. 하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죠. 그런데 참, 선생. 밴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체스터 그린이 권총을 산 해 당신하고 같이 캠핑을 갔었다는 그 얘기 말 씀인데요, 그건 사실인가요? 아니면 렉스의 환상인가요? 펀 브론은 귀공자 같은 우아한 태도로 미소를 짓고는 잠시 옛 일을 되새기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체스터하고 캠핑을 같이 간 일이 있었습니다. 십오 년 전, 분명히 체스터씨가 그렇게 말했었죠. 그런데 선생, 그 때 체스 터가 권총을 가지고 갔었는지, 어떤지 기억 나십니까?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요. 물론 명확한 진술은 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밴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우아하게 절을 하고는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문득 돌아섰다. 그만 깜빡 잊을 뻔 했군요. 실은 여러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린 미망 인께서 잠시 뵙자고 하시더군요.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그분의 비위를 상 하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선생, 당신이 그린 마님 얘기를 하신 사실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밴스였다. 마침 노부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던 참이지요. 부인의 마비 상태는 어떤 성질의 것인가요? 펀 브론이 적지않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세요, 말하자면 말초성 전신마비----즉 하지(下肢) 및 동체(胴體)하반신 의 마비로서, 이따금 척추와 신경에 대한 감각장해를 일으켜 압박을 유발 하게 되어 심한 아픔의 발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히스테리성 근육운동불수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천만의 말씀을! 아니죠. 의사의 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크게 변했다. 허어, 딴은 아닙니다. 회복 가능은 전혀 없죠. 어쨌든 기관마비이니까요. 매우 고마웠습니다. 밴스가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펀 브론은 밖으로 나갔다. 매컴이 일어서서 다리를 폈다. 이번엔 우리쪽에서 출두명령에 응할 차례구먼.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건의 어두운 우울을 떨쳐 버리려 할 때 그가 흔히 쓰는 수법이다. 그린 미망인이 우리를 맞아들인 태도에는 아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 의 비굴함이 있었다. 그녀는 대뜸 입을 열었다. 난 알고 있었죠. 아마 당신이라면 이 가엾은, 보잘 것 없는 늙은 절름발이 의 소원을 틀림없이 들어 주실 거라구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사뭇 호소하는 듯이 웃어 보였다. 간호원이 머리맡 에 서서 노부인의 어깨 밑의 침구를 고치고 있었다. 그린 미망인이 귀찮다 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이제 여기엔 볼일이 없으니, 당장 에이다한테나 가서 간호해 주라구. 간호원은 긴 한숨을 들이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그린 미망인은 다시 상냥한 태도로 변했다. 자아, 여러분, 거기에 좀 앉으세요. 매컴은 앉을 생각도 않고 천천히 말했다. 부디 제가 진심으로 동정을 하고 있는 인간임을 믿어 주십시오...... 펀 브 론 선생의 말이 부인께서 제게 할 말씀이 있다던데요? 그래요. 부인은 상대방의 마음을 계산하듯이 ㅂ라보았다. 당신한테 부탁이 있어요.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매컴은 고개를 숙였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부탁이란----이 수사를 제발 끝내 달라는 거에요. 그 동안의 소동만으로 이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내가 신경을 쓰고 안 쓰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 가문이죠. 그린가 대대로 내려오는 명예 말 씀이에요. 자랑스러운 빛이 그녀의 목소리에 나타났다. 도대체 어떤 까닭으로 우리를 수렁 속에 빠뜨린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상 것들의 터무니없는 스캔들, 수모를 받아야 하죠? 난 안정이 필요없다구요, 아시겠어요, 매컴씨?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고, 음성은 차츰 신랄해졌다. 도대체 여러분은 무슨 권리로 집 안을 온통 수세미로 만들고, 이렇게 모 욕을 주나요? 이번 소동이 일어난 뒤로 난 단 일분도 편히 쉬지를 못했고, 등뼈가 아파 숨도 제대로 못쉬는 판이라구요. 그녀는 코를 골듯이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 다. 내 자식들이 상냥한 인간이 되기만 바라는 것이 어리석죠. 어차피 비정하 고 분별없는 자식들인 걸요. 하지만 당신은, 매컴씨----제 삼자이고, 우리 하곤 하등 인연이 없는 당신이 뭣 때문에 이런 소란을 피워, 나를 고문하 는 거죠? 법의 집행자가 드나드는 것이 방해가 되신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매컴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범죄가 발생하면, 그것을 수사 해서 죄 있는 자를 그려내 정의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제 의무니까요. 정의? 노부인은 경멸하듯 되풀이했다. 정의라구요? 내 참, 정의는 베풀어진 지 오래에요. 오랫동안 여기에 혼자 누워 있는 나----내가 받은 푸대접에 대해 훌륭히 정의의 심판이 내려 졌 지 않나요? 이 여인의 자식들에 대한 잔인하고도 다구진 증오, 나아가서 자식들 중 둘 이 죽음의 벌을 받은 것에 대한 살인귀(殺人鬼)비슷한 만족감----그곳에는 거의 몸서리쳐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동정심이 남달리 강한 매컴도 여인 의 이런 기막힌 태도에는 어지간히 반발심이 솟아난 모양이었다. 아드님과 따님의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태에 대해 당신이 어떤 흐뭇한 심 정을 품고 있든 간에 말씀입니다, 부인. 그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살인자를 찾아내는 의무에서 내가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이죠. 또 그밖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녀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무능력자의 격한 감정 이 나타나 있었다. 매컴을 쏘아보는 시선은 사나운 빛마저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눈매가 풀어지고,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아뇨. 이제 그만 물러들 가세요. 할 말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어차피 이 쓸 모없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를 두둔해 줄 인간이 있나요? 정말, 딱하구먼! 내가 어쩌자고 이 따위 바보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담? 우리가 밖으로 나오는 사이에도 그녀의 푸념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일세, 매컴. 밴스가 말했다. 우리가 일층 홀로 내려왔을 때였다. 노마님의 설(設)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매컴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셋은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려고 밖으로 나왔다. 수사는 뉴욕 경찰본부의 전통에 따라 추진되어갔다. 화기전문가 칼 헤지던 경부는 총탄의 정밀한 과학감정을 행했다. 그 결과 세 개의 총알이 모두 같 은 권총에서 발산된 것이었음이 판명했다. 나아가서 그가 자신 있게 발표한 사실에 의하면, 문제의 총은 구식 스미스 앤드 윗슨이며, 그런 형식의 것은 현재는 제조중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사결과는 행방불명이 된 체스터 그린의 총과 범인이 사용한 것이 같다는 방증(傍證)은 될 수 있었어도 수사에 도움을 줄만한 것은 못 되었다. 한편 지문감정 담당관과 그 조수는 그린가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요, 펀 브론 의사의 지문마저 채취해서 이것을 그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된 지문과 대조해 보았으나, 신원불명의 지문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또한 이미 발 견된 촬영이 끝난 모든 지문은 논리적으로 뒷받침이 되는 것들뿐이었다. 체스터 그린의 고오르인의 구두는 본부에 압수되어 면밀한 조사가 행해졌 으나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눈 위의 발자국은 오버슈즈라 고 생각해도 되며, 같은 사이즈, 같은 구두모양이기만 하면 다른 어떤 구두 가 남긴 발자국으로 생각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수사결과에 의하면, 그린 맨션에서 오버슈즈 소지자는 체스터와 렉스 뿐이 었고, 렉스의 것은 사이즈 7이며----체스터의 방에서 발견된 것보다 사이즈 가 3 작다. 행방불명된 권총의 수사에는 며칠이 걸렸다. 히스는 이 일은 특히 이 방면 에서 훈련된 계원들에게 시켰고, 저택은 지하실에서 지붕 위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뒤져졌다. 그린 미망인의 거실도 수색을 당했다. 노부인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마침 내 고집을 꺾었다. 형사들의 수색이 끝났을 때에는 약간 낙심한 빛을 보였 을 정도였다. 대상에서 제외된 방은 트바이어스 그린의 서재뿐이다. 그린 미 망인이 열쇠를 제대로 내놓으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권총은 간 곳이 없었다. 시체해부의 결과도 드라머즈 의사의 예비검진과 모순되는 점은 하나도 나 타나지를 않았다. 두 살인사건이 있었던 날 밤, 같은 시간에 근처에 있었던 사람이 몇 명 떠 올랐지만, 수상스런 자는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린 맨션에 잠복시킨 감시의 손길이 결코 누그러진 것은 아니다. 저택의 두 입구에는 밤낮없이 경찰관이 배치되어 출 입자는 누구건 간에 엄중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감시는 철통 같았다. 심부름꾼들에 대한 신원조사도 차례로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뾰죽 한 실마리는 역시 잡히지를 않았다. 제 2의 살인 직후 그린 맨션을 떠나간 그 젊은 심부름꾼 버튼은 어느 중류 가정의 회사원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그녀의 경력에는 흠이라고는 전혀 없 었고, 친구들도 모두 같은 계급의 순진한 시민들이었다. 헤밍에 대해서 판명된 바는 현재는 과부이지만, 그린가에 고용되기 전까지 는 펜실베니아주 아르토우너에 살았고, 그곳 철공서의 공원이었던 남편 대 신 살림을 꾸려온 여자였다. 전의 이웃사람들은 그녀가 철두철미한 신사였 다는 것, 심지어 남편이 철공소의 난로가 폭발하는 바람에 죽었을 때도 그 것은 남편의 숨겨진 죄에 대해 신의 손이 징벌을 내린 탓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만하임 부인 및 스프루트의 소행과 신원에 관한 조서에서 떠오른 것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실상 이 두 사람의 소행은 틀에 박힌 것이었고, 외부와의 접촉 역시 거의 없었던 것이다. 스프루트에게는 친구라고는 거의 없었고, 그 저 아는 사람이라고는 파크 가(街)에 있는 영국인 문지기와 근처의 장사꾼 정도였다. 만하임 부인에 이르러서는 그린가에 살게 된 이후로는 밖에 나간 일은 거의 없고, 뉴욕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린가 안에 있는 공범자쪽에서 단서를 잡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히스 부장의 모처럼의 희망도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범인내부설은 단념해 버려야 하겠는걸요. 어느날 그가 매컴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이렇게 푸념을 했다. 밴스가----마침 한 자리에 있었는데----태평스럽게 부장을 보았다. 나 같으면 그런 말은 않겠소. 틀림없이 내부에 있는 자의 소행이오. 그렇다면 선생 생각으로는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 짓을 했을 거란 말씀인 가요? 아마----그럴 게요. 매컴은 사건의 여러 보고서를 암기할 수 있을 정도로 되읽고 있었는데, 서 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는 쓰디쓴 표정 으로 혼잣말을 했다. 신문은 살판 났다고 마구 공격해대고 있단 말야. 오늘아침에도 또 다른 기자들이 몰려와서 한 바탕 법석을 떨고 갔지. 실상 뉴욕의 신문지상에도 이렇듯 일반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한 사건은 그 리 없었다. 신문의 많은 스페이스가 그린가의 연대지(年代誌)로 장식되었다. 먼 옛날의 파묻힌 로맨스를 찾아내고자 여기저기에서 호적등기소의 창고가 불이 날 정도로 드나드는 판이었다. 죽은 트바이어스 그린의 이력도 들춰서 그 반생(半生)의 이야기는 일반 대중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 었다. 이러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스토리식의 기사와 더불어 그린가 전원의 사진 이 신문을 요란하게 장식하는 한편으로는 그린 맨션의 건물사진이 여러 각 도에서 게재되어 살인사건에 가뜩이나 호기심을 품고 있는 시민들의 눈요기 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거니와, 경찰과 지방검사국은 기자들의 극성에 시달리게 되었고 , 히스와 매컴이 골머리를 앓게 된 것 역시 당연한 노릇이었다. 체스터 그린 이 살해된 지도 2주일, 사건은 바야흐로 미궁에 빠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2주일 동안 밴스가 결코 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는 사건에 대한 말을 거의 입밖에 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수사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고, 노상 그 사건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 같 았다. 그린 맨션에서 벌어진 범죄의 비밀을 쥐는 것은 저택 자체라는 그의 굳은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고, 그는 그 동안 수차 그린가를 방문하고 있었다. 시베라의 주장에 따라 쥬리어와 체스터의 장례식이 합동으로 행해졌다. 통 지를 받은 것은 불과 몇 사람 안되었는데도 군중들이 건물밖에 구름처럼 모 여들어 있었다. 펀 브론 의사는 시베라와 렉스를 따라 예배당으로 들어갔고, 식이 끝날 때 까지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에이다는 순조롭게 회복이 되어 가고 있었 지만, 장례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린 미망인은 물론 마비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부인이 참석할 리가 만무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 다. 밴스가 그린 맨션으로 비공식방문을 한 것은 장례식 이튿날이었다. 시베라 가 전혀 놀란 빛도 없이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인사했는데 그 태도는 명랑해 보였다. 난 처음부터 당신이 경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그건 어쨌든 마침 잘 오셨어요. 도무지 심심해서 못배기는 판이었거든요. 아는 사람들 모두가 마치 콜레라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하려들지를 않는다니까 요. 쥬리어가 세상을 떠난 뒤로 글세 초대 한 번 받은 일이 없다니까요. 죽 은 사람에 대한 애도, 어쩌고들 하잖아요. 그녀는 초인종 끈을 당겨 집사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나, 요즘 자극이 필요해서 견딜 수 없어요. 그녀는 태평스러운 듯이 설명했다. 명문(名門)이라는 이 무거운 짐, 정말 답답해요. 그린가 전원이 명사가 돼 있는 판국이니. 그까짓 살인이 몇번쯤 있었다고 해서 어떤 집안이 이렇듯 갑작스럽게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날리다뇨? 정말 기가 찰 노릇이 에요. 아마 난, 불원간 헐리우드로 초청당해 배우가 될는지도 모른다구요. 그녀는 명랑하게 웃었는데, 약간 꾸며낸 웃음처럼 보였다. 명문 일족도 도(度)가 지나치면 비정상이 되는 모양이죠? 어머니는 숫제 즐거워하고 있는 걸요. 신문을 모조리 가져오게 해서 우리 집안에 관한 기 사를 글세 정신없이 읽고 있다구요----이거야말로 하늘의 뜻이라는 식이 죠. 정말이라니까요. 그녀는 반 시간쯤 이런 말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밴스는 재미있는 듯이 열 심히 듣고 있었는데, 우리가 물러나기 훨씬 전에 교묘한 화제를 유도해서 흔히 있는 세상이야기로 돌려 버리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시베라가 또 와달라고 연거푸 당부했다. 당신, 정말 유쾌한 분이군요, 밴스씨.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게다가 두 번이나 초상을 당한 나보고 한 번도 애도의 말을 안하시는 걸 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구요. 밴스와 나는 또다시 일주일 사이에 두 번 방문했고, 두 번 모두 정중한 대 접을 받았다. 시베라의 호연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가정에 그렇듯 갑작스럽게, 그렇듯 엉뚱하게 덮친 전율과 공포를 그녀가 느끼고 있었다고는 해도 교묘히 감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밴스는 연거푸 그 집을 방문하면서도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 태도를 보고 나는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언가를 캐 내려고 그 집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미적 지근한 탐사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날 밴스는 렉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은 처음 우리를 보자마자 불쾌한 듯이 외면해 버리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물러갈 무렵이 되 자, 밴스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니, 포앙카레의 수리론이니 하는 차 원높은 화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렉스는 거의 친구를 대하는 그런 태도 를 보이기 시작했다. 작별 때에는 스스로 손을 내밀어 밴스에게 악수를 청 했을 정도이다. 밴스와 에이다의 회담은 두 번이나 이루어졌다. 그녀는 팔에 아직도 삼각 건을 매달고 있는 채였는데, 밴스를 보면 묘하게 수줍어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로 그린 맨션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생 각지 않은 어떤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훗날 사건의 발전에 빛을 던졌다는 뜻에서 그 에피소드에 대해 적어 둘 필 요가 있다. 당시의 나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없었더라면, 그린가의 피비린내나는 연속살인의 비극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뻔 한 것이다. 체스터 그린이 죽은 지 2주일쯤 지났을 무렵, 날씨가 눈에 띄게 화창해졌 다. 며칠 동안은 아름답고 맑게 갠 날이 계속되어, 하늘은 상쾌하고 온누리 는 햇빛에 넘쳐 있었다. 해빙기에 흔히 있는 수렁도 전혀 없었다. 목요일, 밴스와 나는 여느때보다 약간 일찍 그린 맨션을 찾아갔는데, 문 앞 에 펀 브론 의사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 밴스가 농담 섞인 투로 말했다. 바라건대 의사 선생께서 곧 물러나셨으면 좋겠구먼. 이 친구와 그린가와 의 관계는 과연 어디에 있느뇨? 생각만해도 호기심이 자극된단 말야. 펀 브론은 우리가 홀로 들어서자 물러서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시베라와 에이다가 그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날씨가 하도 좋길래. 펀 브론이 약간 당황한 듯이 말했다. 아가씨들하고 드라이브를 할까 해서요. 당신하고 밴 다인씨, 함께 안가시겠어요? 시베라가 이내 밴스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밴스는 망설이지 않고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몇분 후, 우리는 의사 의 다이믈러에 기분좋게 자리잡고 앉아 시가지의 중심을 달리고 있었다. 시 베라는 앞자리, 에이다를 사이에 두고 밴스와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차는 이내 센트럴 파크를 빠져나와 곧장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로 향했다. 허드슨 강이 눈 밑에 파란 돗자리처럼 퍼지고, 뉴저지쪽의 단애(斷崖)가 하 오의 조용히 맑게 갠 대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뚜렷이 떠오르고 있었 다. 다이크맨 가도에서 왼쪽으로 꺾어 길을 브로드웨이로 잡아, 다시금 오른쪽 으로 몰아 스파이팅 다이뷔르 도로를 지나 아베뉴로 나왔다. 여기서는 물가 에 따라 서 있는, 해묵은 숲이 있는 별장지가 보인다. 이어 북상(北上)해서 롱 뷰우 언덕의 중턱을 달렸다. 허드슨 가도로 들어가 아즈레 정류장을 지나자 길은 좁은 자갈길이 되고, 강줄기를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간다. 이곳에서 한 1마일쯤 더 나가게 되면, 아즈레와 타리 다운의 중간 지점에 해당된다. 가는 길 앞쪽에 작은 초콜릿빛의 언덕이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치 둥근 돌 같다. 그 기슭에 이르자 길은 급커브로 오른쪽으로 꺾이고, 절벽 사이를 누 비게 된다. 이 길은 좁고 위험한 커브였다. 한쪽은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이 뻗어 있고, 한쪽은 강으로 향한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 이 경사의 S자길 끄트머리까지 오자 펀 브론이 차를 세웠다. 앞바퀴를 곧 장 절벽 언저리로 향한 채였다. 우리 앞쪽에 펼쳐진 전망의 그 기막힘! 몇 마일에 걸쳐 위아래로 허드슨 강의 장대한 조망이 내려다보인다. 게다가 이 지점에서는 고독감조차 떠돌 고 있었다. 동쪽의 언덕이 안쪽 육지에 시계(視界)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앉은 채 이 장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시베라가 말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살인에는 안성맞춤의 장소가 아니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외치고는 절벽 경사면으로 몸을 내밀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총으로 쏘아죽인다거나, 그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할 필요도 없다구요. 보 라구요. 이 아늑한 울타리에까지 자동차를 몰고와서 자기는 재빨리 뛰어 내리고, 자동차째 밀어내 버린다면, 간단히 끝나는 거죠. 불행한 자동차사 고가 또 일어났다, 이렇게 되는 거죠. 게다가 절대로 발각될 염려는 없는 것이구...... 진짜로 한 번 해 볼까? 에이다의 몸에 전율이 가로지르는 것이 나의 살갗에 전해져왔고,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진 사실도 나는 깨닫고 있었다. 밴스는 재빨리 에이다를 힐끗 보고 나서 팽팽히 긴장된 침묵 속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몰아내듯 이렇게 말 했다. 시베라양, 이런 상쾌한 날에 그런 음산한 생각을 품을 사람은 없을 걸요. 펀 브론이 꾸짖듯이 시베라를 응시하고는 차를 돌렸다. 잠시 후 우리는 뉴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 3의 살인 11월 28일 저녁, 매컴은 모랑 형사국장과 히스를 초대해서 비공식 회의를 열었다. 밴스와 나는 매컴과 함께 저녁을 든 뒤여서 두 경찰관이 도착했을 때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내 그린가 살인사건의 일반토의로 들어갔다. 정말 기막힌 일이라구. 모랑은 이렇게 말했는데 그 음성은 여느때보다도 침착했다. 수사의 중심이 될 만한 게 전혀 떠오르지 않으니 말야. 집중할 만한 것이 전무(全無)해. 그 사실 자체가 말씀입니다, 밴스가 이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이번 사건의 뚜렷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그대로 넘겨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점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안그렇습니까? 국장 님, 이것은 중요하고 또 기본적인 단서임이 분명하죠. 기막힌 단서도 다 보겠구먼. 히스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밴스가 싱긋 웃었다. 부장,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이렇소. 어떤 사건에 단서가 전혀 없다고 합시다----출발점도 없거니와 표시가 되는 기색조차 없다----이런 경우 에는 전체를 하나의 단서로 보라는 겝니다. 아니, 그보다는 전체를 미스테 리를 푸는 하나의 요인이라 생각해도 큰 잘못은 없다는 게죠. 이번 사건에 서 우리는 적어도 백 개의 단서를 쥐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도 다른 것과는 관련이 안보인다, 안보이는 이상, 하나도 뜻을 지니지 않는다---- 이 사건은 흔히 있는 바보스러운 글자풀이 같은 거죠. 단서가 백 가지나 있다고 하셨는데, 그 중 몇 가지만 가르쳐 주시죠. 히스가 비꼬듯이 말했다. 나는 구체적인 것과 맞붙고 싶다, 이 말씀입니다. 밴스는 상대방의 비꼬는 말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첫 번째 살인에 접한 뒤에 일어난 모든 것을 단서로 봐도 무방할 거요. 맞아! 경찰부장은 또다시 우울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발자국, 권총, 렉스가 복도에서 들은 소리. 그런데 이게 뭐람? 이놈을 모 조리 당긴 결과라고는 캄캄절벽, 기가 차는구먼. 낙심은 아직 이르다구, 부장. 단서는 얼마든지 또 나타날 테니까. 모랑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밴스 선생? 끝은 아직 나지 않았노라죠. 밴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림은 구도가 뒤틀려 있죠. 또 다른 비극을 보기 전엔 이 잔인한 그림은 초점을 잃고 있다고 할 밖에요. 게다가 이 사실의 저주스러운 점은 이 구 도가 완성되는 것을 막을 수단이 없다는 것이죠. 당신 역시 그렇게 느끼셨나요? 모랑은 흥분해서 말했다. 사실 말이지, 이렇게 무서운 사건은 나도 처음이외다. 천만에요, 국장님. 잊으시면 안되죠. 히스가 반박했으나, 과히 자신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밤낮없이 감시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보장이 안될 걸요, 부장. 밴스가 부드럽게 주장했다. 살인자는 집 안에 있노라. 히스가 놀라면서 눈을 들었다. 그 놈은 가족 중에 있나요? 선생은 지난 번에도 그런 말을 하셨죠?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소. 그러나 트바이어스씨의 괴벽한 사상에 서 생겨난, 도착적인 상황에 중독된 누군가일 테죠. 가만 있자,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 집에 첩자를 침투시켜 매 시간을 감 시시킨다면? 모랑 국장이 제안했다. 아니면 가족들 모두 분산시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 밴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스파이 잠입설은 헛일이라 여겨지는군요. 현재 역시 그 집 식구들 개개인 이 모두 스파이 아닙니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또 가족분산책 역시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노마님이 응할 리가 없고, 듣자하니 트바이어스의 유언 결과로 이십오 년 동안 그 저택에 계속 거주하지 않는 자는 한 푼도 상속을 못받게 되어 있다는 겝니다. 뿐 만 아니라 설령 법률의 힘으로 가족들을 분산시키고, 저택을 폐쇄해 버린 다고 해도 범인을 잡는 일은 불가능해질 수 밖에요. 이 말에 모두들 우울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만에 말문을 연 것 은 히스였다. 아까 말씀하신 건(件) 말입니다, 밴스 선생. 트바이어스 그린의 유산문제 죠. 나 역시 줄곧 그 생각을 해봤죠. 만일 그 유언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 으면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또 그 고집쟁이 할망구가 어떤 유언장 을 만들어 놓고 있는지도 궁금하군요. 아무튼 막대한 돈이 얽혀 있으니까 생각잖은 동기를 잡게 될는지도 모른단 말씀입니다. 동감, 동감이요! 밴스가 진정 찬탄의 눈으로 히스를 보았다. 이제껏 그렇듯 분별에 뛰어난 제안은 없었죠. 정말 놀랍습니다, 부장. 맞 아요, 트바이어스의 돈이 사건과 관계를 지닌다,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매 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제 삼자의 유언장 내용을 탐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매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 어려운 일은 없다고 보네. 다행히 그린가 고문변호사인 바크웨이 영감 과는 안면이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유언장 내용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 해 봐야겠군. 반 시간 뒤 회의는 끝났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밴스는 말했다. 내 나쁜 예감이지만, 그 유언장도 별 도움은 안되는 게 아닐까? 이틀 뒤인 11월 30일, 오전 10시가 지났을 무렵, 매컴이 밴스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즉시 자기의 사무실로 나와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내 형사재 판소 빌딩으로 달려갔다. 오늘 아침 에이다 그린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당장 나를 만나 보고 싶다는 게야. 매컴이 이렇게 설명했다. 그래서 히스 부장을 보내고, 필요하면 나도 뒤에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자 기가 직접 오겠다고 고집하는 거야. 흥분해 있는 것 같길래 그럼 곧 오라 고 한 것이라네. 그래서 자네한테 전화를 걸고, 히스한테도 연락을 취한 거 야. 밴스가 자리에 앉아 담배에 불을 당겼다. 그녀가 우리 수사에 있어 매우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게 내 결론이지. 아마 뭔가 속에 품고 있던 것을 이제서야 털어놓을 결심이 선 게 분명하구먼. 그러는데 히스가 안내되어 왔고, 매컴이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10분 후에 에이다 그린이 안내를 받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얼굴의 창백함 은 가셨고, 팔에도 이제는 삼각건을 매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쇠약의 인상은 여전했다. 그녀는 매컴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것인지 망설 이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실은 렉스에 대한 일이랍니다, 매컴 검사님. 그녀는 간신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 입장이 너무나 난처해서요. 여기 온 것이 혹시 잘못된 일이나 아닌지 저으기 염려가 되는군요...... 자신의 우유부단을 호소하는 것 같은 시선을 던지면서 그녀는 말했다. 가르쳐 주세요,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나쁜 일이라면----게다가 상대방이 아주 가까운, 친밀한 인물일 경우 그 사람은 고자질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고자질 때문에 상대방이 자 칫하면 무서운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경우에도 말씀입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죠. 매컴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당신이 언니와 오빠가 살해된 사건에 관한 해결의 도움이 되는 사실 을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입니다. 그녀는 끈질기게 말했다. 설령 그 사람이 가족의 한 사람이라도 그럴까요? 설사 그런 조건 하에서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매컴이 부성애(父性愛)가 담긴 투로 말했다. 가공할 범죄가 두 가지나 행해져 있으니까요. 무엇이건 절대로 숨길 일이 못됩니다. 상대방이 누구이건. 에이다는 여전히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이 갑 자기 얼굴을 들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검사님은 렉스를 보고 제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 를 못들었냐고 심문하셨죠? 렉스는 못들었다고 대답했죠. 그런데, 렉스가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사실은 그 총소리를 들었다구요. 하지만 그 사실을 검사님한테 말하게 되면, 왜 즉시 일어나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추궁당할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는 거에요. 렉스가 왜 일어나 있었는데도 잠든 체 했다고 생각하나요? 매컴은 그녀의 정보에 이끌린 흥분을 누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걸 도무지 모르겠어요. 렉스는 그 말을 안해 주는걸요. 하지만 뭔가 이 유가 있었던 거에요----있었던 게 분명해요. 게다가 총소리만 들은 게 아 니라는 거에요. 총소리만 들은 게 아니다? 매컴이 이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럼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그 때 그런 사실을 우리 에게 말해 줬으면 됐을 텐데? 그 점이 이상해요. 제가 물으면 마구 골을 내버려요. 하지만 뭔가 알고 있 는 게 분명해요----뭔가 무서운 비밀을. 그녀는 다시금 매컴을 보았는데, 그 눈에는 어떤 정체를 모르는 공포에 대 해 사람들이 나타내는 불안의 빛이 있었다. 매컴이 가까스로 흥분을 누르고 상냥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 그 이유를 알아내 볼 테니까요. 그래도 집에서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이리 오라고 그래 주세요. 검사님, 부탁이에요. 집으로 몰려가서 얘기를 듣 게 되면 누군가에게 알려지게 된답니다. 렉스는 지금 집에 있어요. 이리 오 라고 하세요. 저도 여기 와 있다구 해 주세요. 네, 검사님! 매컴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면회예정표를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 는 수화기를 들고 비서에게 그린가를 대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일어난 대화를 듣자니 렉스에게 검사국으로 오라고 설명하는데 상당 히 고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간신히 목적을 이룰 때까지에는 강제집행이 어떻고 하는 위협의 말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 사람, 분명히 함정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군요. 매컴은 수화기를 놓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즉시 출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도의 표정이 젊은 여인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또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녀는 허둥지둥 말했다. 아마 별로 대수로운 일은 못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며칠 전 밤에 일층 복 도, 층계쯤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주웠답니다----노트를 찢은 것 같은 종 이였어요. 거기엔 우리집 이층의 침실 도면이 그려져 있고, 잉크로 작은 X 표 네 개가 적혀 있더군요----하나는 쥬리어의 방, 하나는 체스터의 방, 한는 렉스의 방, 그리고 나머지 한 개가 제방이에요. 그리고 도면 밑에 이 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하나는 하트형에 세 개의 못이 박힌 것, 하 나는 앵무새 같았고, 또 하나는 세 개의 돌멩이하고 그 밑에 줄을 그은 것 같은 그림---- 히스가 깜짝 놀라 몸을 내밀었다. 그 종이쪽지를 지금 갖고 있나요, 에이다양? 매컴이 열심히 물었다. 어머, 미안해요. 그녀는 서둘러 대답했다. 별로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거든요. 가져와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물 건이었나요? 당신, 설마 찢어 버린 것은 아닐 테죠? 히스가 흥분해서 곁에서 질문했다. 천만에요. 간직해 두고 있어요. 이건 절대로 입수해야 하겠는 걸요, 매컴 검사. 여러분이 그렇듯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에이다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제가 렉스한테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이르겠어요. 그것 참 잘 됐군. 찾아가는 시간도 절약되구. 히스가 매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화기를 들어올리고 다시금 매컴이 비서에게 일러 렉스를 불러내라고 했 다. 잠시 후 검사가 수화기를 에이다에게 넘겨주었다. 안녕, 렉스. 에이다는 또렷하게 말했다. 오빠, 화내지 말아요. 근심할 것 없어요...... 나 부탁할 게 있어요. 왜 우리 비밀이 우체함 말이에요, 거기에 내 개인용 파란 편지지를 넣은 봉투가 있 다구요...... 그걸 갖고 매컴 검사님 사무실로 와줘요. 알겠죠? 그걸 갖고오 는 걸 누구한테 들키면 안된다구요...... 그래요. 렉스가 도착하기까지는 적어도 삼십분은 걸릴 테니까. 매컴이 이렇게 말하고 밴스쪽을 돌아보았다. 난 응접실에 손님을 잔뜩 기다리게 하고 있다고. 그러니 자네하고 밴 다 인군이 같이 이 아가씨를 주식거래장으로 안내하는 게 어떨까? 소일거리는 될 거란 말야. 기막혀요! 소녀가 좋아라 하고 외쳤다. 밴스와 나는 차로 브로드 스트리트 18번지까지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 래자를 내려다보는 참관자용 이층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 주식시장은 이상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회장 안은 귀가 따가울 정도 여서 거래게시판 근처의 군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은 어딘지 폭도들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나는 이런 광경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감명은 받지 않았고, 밴스는 본래 소음과 무질서를 무척 싫어하는 편이라 따분한 듯이 앉아 있었 다. 그러나 에이다의 얼굴은 이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죠, 에이다양? 인간이 때에 따라 그 얼마나 어리석은 동물인가 를 말입니다. 네, 하지만 정말 기막혀요! 그녀가 이내 열띤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럴 것이, 저 사람들, 모두 살아 있는 걸요. 인생을 느끼고 있어요. 저마 다 싸우는 목표를 지니고 있어요. 그 거치른 그린 맨션에서 몇 년씩 환자 상대의 단조로운 봉사로 세월을 보 내온 그녀이고 보니 이 반응은 손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문득 고개를 든 순간, 놀랍게도 히스가 입구에서 참관자 사이 를 정신없이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여느 때는 볼 수 없는 무서 운 표정이었고,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보고 있는 모습에도 열띤 조바심이 엿 보였다.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는 이내 우리에게 다가왔다. 보스가 속히 와달라고 하십니다, 밴스 선생. 그의 말투에는 심상치 않은 불길한 울림이 있었다. 에이다가 부장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는데, 공포의 빛이 한 줄기 얼굴 가득 히 퍼졌다. 이건 또 뭐야? 밴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흠칫해 보였다. 모처럼 한참 신나는 판이었는데 말야. 그러나 보스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 물러갈 수 밖에. 안그렇습니까, 아가씨? 그러나 에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침묵에 잠긴 채였다. 자동차를 타고 검사국으로 돌아가는 사이에도 멍하니 자리에 앉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 다. 지방검사국으로 들어가자 매컴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다를 향해 다시 없 는 자애로운 눈길을 보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에이다 양. 그가 조용히 동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비극적인,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렉스죠? 그녀가 맥없이 매컴의 테이블 앞면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습니다. 매컴이 부드럽게 말했다. 방금 스프루트한테 전화가 걸려와...... 그리고 총에 맞아죽은 것일 테죠? 그녀의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것은 재빨리 지저분하 고 해묵은 사무실을 공포감으로 뒤덮었다. 매컴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전화로 통화를 한 지 불과 오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렉스의 방으로 들어가 그를 쏜 것입니다. 마른 흐느낌이 소녀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 었다. 우리는 곧 댁으로 가서 전력을 다 할 셈입니다. 당신도 함께 가시죠? 아아, 난 가고싶지 않아요. 그녀가 이렇게 신음했다. 난 무서워요----무서워요...... 매컴은 에이다를 데리고 가는 일에 상당히 애를 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녀는 공포로 인해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렉스의 죽 음에 대해 비록 간접적이지만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그의 말에 따랐다. 히스는 이미 살인과에 통보를 끝내 놓고 있었다. 경찰본부에서는 스니트킹, 지방검사국 형사과에서는 파크라는 형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매컴의 차의 뒷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린 맨션까지 겁날 정도로 빠르게 달려 20분도 안되어 현장에 닿았다. 사복형사 한 사람이 그린가의 대문 앞 거리 모퉁이의 철책에 멍하니 기대 어 서 있다가 히스를 보고 다가왔다. 뭘 멍청히 있나? 부장이 찢어지는 소리로 물었다. 오늘아침 이곳을 드나든 게 누군지 말해 보라고!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형사가 불끈해서 말했다. 그 늙은 집사가 외출, 시간은 아홉 시, 삼십분만에 돌아왔죠. 그리고 말하 기를 개한테 먹일 비스킷을 사왔다나요. 다음은 이집 단골 돌팔이의사, 자 동차로 온 게 열 시 십오분 경----저기 있는 게 바로 그 친구이 차죠. 그가 펀 브론의 다이믈러를 가리켰는데,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아직도 안에 있죠. 에에, 다음은 의사 선생이 나타난 지 십분쯤 지나 이 아가씨가. 그는 에이다를 가리키고 말했다. 밖으로 나와 저기서 택시를 집어탔죠. 이상이 내가 오늘아침 여덟 시에 교대한 뒤 이 대문을 드나든 전부죠. 그럼 교대 전에는? 밤새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비집고 들어온 놈이 있단 말야. 히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너 당장 가서 뒷문을 지키고 있는 놈을 불러오라구. 형사가 현관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삼 분 지나 뒷문을 지키던 형사가 뛰어 왔다. 오늘아침 뒷문으로 들어온 것은 누구야? 아무도 없어요, 부장. 주방여자가 열 시쯤 시장을 보러 외출, 우편배달부 가 편지를 전하고 갔고----이상이 어제부터 뒷문을 드나든 전부죠. 알았어. 가보라구. 부장이 파크를 뒤돌아보았다. 이 벽에 기어올라 조사해 보라구. 누군가 올라간 놈이 없는지. 그리고 스 니트킹, 뜰을 모조리 뒤져 발자국을 조사해 보지. 끝나는 즉시 내게 보고하 라구. 우리는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스프루트가 우리를 맞아들였다. 그 얼굴은 여 전히 무감동 그것이었다. 이제 당신 방에 가 있으시죠, 에이다 양. 매컴이 에이다를 보고 상냥하게 말했다. 잠시 쉬도록 해요. 돌아가기 전에 당신 방에 들를 테니까요. 에이다는 말없이 얌전히 따랐다. 스프루트, 거실로 오게나. 매컴이 명령했다. 늙은 집사는 우리를 따라오자 방 한가운데에 머리를 숙 이고 서 있었다. 매컴이 앉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자네 얘기를 들어 보세. 스프루트가 헛기침을 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별로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요, 검사님. 저는 식당 안 배선실에서 유리그릇 을 닦고 있었죠. 그때 총소리가 들려오길래---- 매컴이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 알기로는 오늘아침 아홉 시에 외출을 했다면서? 예, 시베라 아가씨가 어제 강아지를 한 마리 사오셨습니다. 오늘 아침식사 가 끝났을 때 개한테 먹일 비스켓을 사오라고 하시더군요. 좋아, 그럼 일어난 일을 차분하게 말해 보라구. 별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에이다 아가씨는 외출하셨고, 열한 시 조금 지나 검사님한테서 렉스 도련님께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래서 저는 배선실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총소리가 들려온 것입 니다. 그게 몇 시 몇 분 경이라 생각하나? 열한 시 이십분 경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했나? 저는 아무래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층으로 올라 갔는데, 렉스 도련님 방문이 열려 있길래 먼저 그리 달려가 봤습니다. 거기 서 제가 본 것, 아아, 딱해라, 도련님이 쓰러져 있고,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겁니다. 저는 곧 펀 브론 선생을 불러---- 의사는 그 때 어디 있었나? 밴스가 곁에서 질문을 했다. 이층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곧 나오셨는데---- 허어, 이층이라? 밴스의 눈이 집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봐, 스프루트, 선생은 어디에 있었지?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시베라 아가씨의 방에서 불쑥 나타나---- 흠, 그렇다면 선생은 총소리를 못들은 셈이구먼? 그런 것 같았습니다요. 그럴 것이 렉스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 라던걸요. 시베라 아가씨도 이내 뛰어나오셨는데, 역시 자지러지게 놀라셨 습니다. 그러는데 에이다가 모습을 나타냈다. 공포로 인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누군지 내 방에 들어온 사람이 있어요. 그녀가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봤더니, 발코니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고, 방바닥에 발자 국이 묻어 있어요...... 아아, 이게 웬일이죠? 아아, 무서워! 매컴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외출 때 분명히 그 문을 닫았나요? 그럼요. 그녀는 이내 대답했다. 겨울에는 좀체로 열지를 않는걸요. 히스가 일어서서 쓰디쓴 얼굴로 듣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또 그놈의 고오르인의 구두를 신은 범인이구먼, 그것 참!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에이다를 보았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가씨. 다른 방으로 가서 기다리시죠. 그 방은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뒤에 천천히 조사해 볼 테니까요. 난, 주방에 가 있겠어요. 혼자 있긴 싫어요. 그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펀 브론 의사는 지금 어디 계신가? 매컴이 스프루트에게 물었다. 노마님방에 계십니다. 곧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게. 집사는 절을 깍듯이 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밴스는 서성대고 있었는데, 눈은 감은 채였다. 갈수록 태산, 갈수록 기기묘묘하구먼!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발자국이 어떻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느니...... 가뜩이나 그런 것이 없어도 이미 도깨비 장난 같은데 말야. 그러는데 펀 브론이 들어왔다. 여느때의 그 유쾌한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말도 없이 꾸벅 절을 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입수염을 만졌다. 선생, 스프루트의 설명을 듣자 하니, 매컴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렉스의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를 못들으신 모양이던데? 그렇습니다. 이 사실이 의사를 어리둥절함과 불안함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로서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그럴 것이 렉스의 방문은 복도를 향하고 있고, 게다가 열려 있었으니까요. 이층에서 혹시 누군가 낯선 외부사람을 봤다든가, 수상한 소리를 들었다 든가 그런 일도 없었던가요? 전혀요. 집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린 미망인의 현재상태는 어떤가요? 밴스가 불쑥 물었다. 이 질문은 묘하게 태평스러운 울림이 있어, 방 분위기 와는 동떨어진 느낌이 있었다. 펀 브론이 움찔했다. 부인은 처음 뵈었을 때 보다는 평소보다 얼마간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마는, 렉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굉장한 동요를 나타냈지요. 방금 척추의 격통을 호소하고 계셨습니다. 매컴이 차분하지 못한 태도로 방문쪽으로 다가섰다. 검시관이 올 때도 됐을 텐데. 그는 잠시 후 말했다. 그 전에 렉스의 방을 대충 살펴 봐야겠군.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펀 브론 선생?----그리고 스프루트, 자네는 현관에 남아 있게나. 범인은 내부에 있다 우리는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렉스의 방은 그린 맨션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넓었다. 정면에 한 개, 측면에 하나씩 커다란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햇빛을 가리는 커튼이 없 어, 겨울의 대낮의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쪼이고 있었다. 벽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고, 문서 따위가 구석구석에 쌓여 있었다. 방은 침실이라기 보다는 학자의 집무실 같았다. 왼쪽 벽의 중간에 있는 츄들 왕조식의 난로----에이다의 방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정면에 렉스 그린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왼손은 뻗쳐 있고, 오른손은 구부러져 있어, 손가락이 수축되어 무엇을 쥐려고 한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가느다란 피가 한 줄기 오른쪽 눈 위에서 흘러내려 관자 놀이를 지나 방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히스가 시체를 한 동안 조사하고 있었다. 이 친구는 선 채로 맞았는데요, 매컴 검사님. 한 방 맞고 털썩 쓰러진 거 에요. 밴스는 몸을 쭈그리고 시체를 바라보다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모순점이 있단 말야.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밝은 대낮, 피해자는 정면에서 맞고 있어----안 면엔 화약에 의한 얼룩점조차 있단 말야. 그런데도 표정은 완전히 자연스 러워. 공포, 놀라운 흔적은 전혀 없구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범인 도, 권총도 안보였던 거야. 히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깨닫고 있었죠, 선생. 기가 찬 일이라구요. 그는 더한층 몸을 굽히고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상처의 모양을 보니 삼십이 구경 같군. 그리고는 확인을 구하듯 의사쪽을 돌아보았다. 펀 브론이 말했다. 맞습니다. 먼젓번에 사용된 권총에 의한 상처와 같아 보이는군요. 밴스가 깊은 생각에 잠겨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게다가 그것을 사용한 것도 같은 범인이지.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는데, 눈은 렉스의 얼굴을 바라본 채였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해치운 것은? 대낮, 근처엔 사람들조차 있는데도? 어 째서 놈은 밤중까지 기다리지를 못했지? 이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쓴 것은 무슨 이유야? 잊어서는 안될 게 하나 있지. 매컴이 기억을 되새기듯이 말했다. 렉스는 내 사무실로 와서 뭔가를 알리려고 집을 나서기 직전이었단 말야. 그럼 그가 폭로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누구지? 자네가 전화로 불러낸 지 십분도 안되어 죽었으니 말이야. 밴스는 문득 말을 중단하고 재빨리 의사쪽을 돌아보았다. 이 집엔 전화의 내선이 몇 개 있나요? 세 개 있을 겝니다. 펀 브론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린 부인의 방에 하나, 시베라의 방에 하나, 그리고 아마 주방에 하나. 본선은 물론 일층 정면 홀에 있지요. 그렇다면 도청은 누워서 떡먹기군! 히스가 소리쳤다. 그는 시체 곁에 무릎을 꿇고는 렉스의 오른손 손가락을 강제로 폈다. 그 암호도면을 찾으려 했자 아마 헛일일 걸요, 부장. 밴스가 그를 보고 중얼거렸다. 범인이 렉스의 입을 틀어막고자 죽인 거라면, 종이쪽지는 없어졌다고 봐야 할 밖에. 그래도 히스는 시체의 포켓을 하나 하나 조사했다. 하지만 에이다가 말하 던 봉투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서둘러 복 도로 뛰어나가서 큰 소리로 집사를 불렀다. 집사가 나타났을 때 히스는 사 나운 짐승처럼 소리쳤다. 비밀의 우체함은 어디 있나? 스프루트의 대답은 태연자약했다. 정면 현관 안쪽에 있죠. 그걸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만둬! 개인용----알겠나?----비밀의 우체함 말야! 아마 그렇다면 일층 홀의 테이블에 있는 작은 은상자일 겝니다. 당장 뛰어내려가서 그 안에 든 것을 모조리 가져오라구----아냐, 기다려- ---나도 같이 갈테니까. 부장은 이내 돌아왔지만 완전히 맥이 풀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 따위 수상쩍은 도면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리 절망할 것은 못 되죠. 밴스가 태연히 한 마디 했다. 원래 나는 그게 큰 도움이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죠. 이 사건은 그따위 퀴 즈풀이 그림이 아니라, 수학공식의 복합이니까. 무한소수, 양자론, 배수, 계 수가 가득 들어찬---- 매컴이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그만 객실로 내려가 드라머즈 의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구 먼.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에이다의 방을 지나갈 때 히스가 느닷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발코니로 통하는 문은 약간 열려져 있었고, 몰아치는 바람에 녹색의 커튼 이 펄럭이고 있었다. 베이지색 카펫 위를 젖은 지저분한 발자국이 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침대가를 한 바튀 돌아 우리가 서 있는 복도의 문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히스는 이 자국을 관찰하고 나서 문을 닫았다. 틀림없이 발자국입니다. 누군가가 발코니로 눈이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 왔다가 유리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 겝니다. 우리가 객실에 닿았을 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스프루트 가 스니트킹과 파크를 맞아들였다. 우선 너부터 대답하라구, 파크. 두 형사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히스는 물었다. 벽을 넘어 들어온 흔적이 있나? 전혀 없는 걸요. 형사의 외투는 흙 투성이었다. 그럼 스니트킹, 자네는? 난 수확이 있었죠. 스니트킹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누군가가 저택 양쪽에 있는 외부계단을 올라 돌로 된 발코니로 간 놈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발자국은 먼젓번에 현관에서 발견한 놈과 똑같은 사이즈죠. 그 발자국은 어느쪽에서 왔나? 히스가 열심히 물었다. 그게 글세 분통이 터질 노릇이라구요, 부장. 현관 층계 바로 밑 복도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한데, 그 뒤는 보도를 깨끗이 청소해 버렸으니 알 재간이 있어야죠. 이거 한 대 맞았는걸. 히스가 신음했다. 그럼 그 발자국은 일방통행 뿐이란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정면 입구 바로 밑 이삼 피트 지점에서 보도로 벗어나, 집 을 한 바퀴 돌아 발코니의 층계를 올라갔으면서도 놈은 똑같은 층계로 내 려오고 있지를 않단 말씀입니다. 부장은 실망한 듯 시가를 마구 빨아당겼다. 범인이 현관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지 않나? 매컴이 말했다. 부장이 짐짓 긴장한 얼굴로 스프루트를 불렀다. 이봐, 총소리를 듣고 자네는 어느쪽에서 이층으로 올라갔지? 저는 심부름꾼 전용계단으로 올라갔었습니다. 그럼 자네가 올라가고, 동시에 한쪽에서는 정면 계단을 내려간 놈이 있었 다고 하면, 자네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 아닌가? 예, 맞는 말씀입니다. 대체로 이상이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결과올시다, 검사님. 히스가 매컴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밴스는 창가에 서서 아득한 강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눈이 올 때마다 생기는 발자국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단 말야. 범인은 발에 서투른 허점을 잔뜩 보이면서도 선에 대해서는 빈 틈이 없거든. 지문이나 그밖에 증명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안남기면서 발자국 은 무턱대고 남겨 놓는단 말야. 그런데도 이 괴이한 사건의 다른 줄거리와 의 연결은 전혀 없으니. 히스는 낙심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역시 밴스와 같은 의견이었 던 것이다. 밴스가 창가를 떠나 방 한가운데로 되돌아와서 의사가 앉아 있는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사건 이전과 사건발생시의 여러 사람의 소재를 파악해 보는 게 어떨까 생 각하는데...... 우선 펀 브론 선생, 당신이 도착한 것은 열시 십오분 경, 그건 알고 있습니다. 노부인의 방에는 얼마나 계셨나요? 펀 브론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밴스를 향해 비난하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재빨리 달라져 정중한 대답으로 대신했다. 내가 부인의 방에 앉아 있던 것은 대략 삼십분 정도. 그리고는 시베라의 방으로 가서----열한 시 조금 전이었을 겝니다----그곳에, 스프루트가 부 를 때까지 있었던 셈이지요. 그 사이 시베라양은 줄곧 당신하고 한 방에 있었단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밴스는 창가로 돌아가고, 호전적인 태도로 의사를 지켜보고 있던 히스는 시가를 문 채 매컴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검사님, 방금 생각난 사실인데요, 왜 그 모랑 국장의 의견 말씀입니다, 집 안에 스파이를 잠입시킨다는 아이디어 있잖아요? 지금 있는 간호원을 내보 내고 본부의 여형사와 바꿔치기하면 어떨까요? 펀 브론이 대단히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히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것 참 묘안이외다! 그는 감탄한 듯 외쳤다. 좋소, 부장. 매컴이 선뜻 동의했다. 그 여형사를 오늘로부터라도 당장 배치시키도록 하죠. 펀 브론이 히스에게 말했다. 나중에 나를 만나게 해주시면, 그 분한테 필요한 지시를 하겠습니다. 기술 적인 어려운 일이란 별로 없으니까요. 그럼 여섯 시에 만나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 시간이라면 나도 좋습니다. 펀 브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선생. 매컴이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펀 브론은 그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었고, 시베라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 스니트킹이 돌아와서 담당인 경부(警部)가 즉시 본부를 출발, 반 시간 뒤에는 도착할 예정이라고 경찰부장에게 보고하고는 또다시 밖으로 나 갔다. 발코니 계단의 발자국 사이즈를 재기 위해서였다. 그럼 다음에는. 매컴이 이렇게 제안했다. 노부인을 만나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 생각되는군. 밴스가 이 말을 받아 말했다. 그게 좋겠구먼. 그런데 그러기 전에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두세. 첫째, 렉스가 죽기 전 삼십분 동안 그 간호원 아가씨는 어디에 있었는가? 둘째, 그 노마님은 권총발사 직후 밤에 혼자 있었는가? 이것부터 확인해 보자구. 매컴도 동의했으므로 히스가 집사를 시켜 간호원을 부르게 했다. 간호원은 새침한 모습으로 들어왔는데, 장미빛 볼이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아가씨. 밴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아침 열시 반부터 열한시 반 사이에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 나요? 삼층 제방에 있었어요. 그녀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방으로 간 것은 열시 조금 지나, 펀 브론 선생님이 도착하셨을 때였고, 선 생님이 마님의 뷔용(계란 스프)을 가져오라고 하셨을때까지 줄곧 거기에 있었답니다. 당신이 방에 있을 동안 방문은 열려 있었던가요? 물론이죠. 저는 낮에는 항상 열어 두고 있어요. 마님의 분부가 언제 있을 지 모르니까요. 그럼 마님의 방문도 열려 있었소? 그래요. 당신 혹시 총소리를 못들었나요? 아뇨. 못들었어요. 이제 됐습니다. 아가씨, 그만 가보시죠. 밴스가 그녀를 홀까지 따라가 전송했다. 우리는 이제 마님을 뵈러 갈 셈이니까 당신은 잠시 방에 가 있는게 좋을 것 같군요. 우리가 노크를 하고, 교만한 여왕 같은 목소리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들은 다음 방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자 그린 부인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맞았다. 또 재난이 일어났군요? 그녀는 대뜸 푸념하듯 말했다. 난 내 집에 있으면서도 맘대로 편히 쉴 수 없다는 건가요? 몇 주일만에 간신히 평화를 되찾아 이제 좀 마음편히 누워 있을 셈이었는데----이게 대체 무슨 꼴이죠? 또 소동이 일어나 날 괴롭히다뇨? 진정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인. 저희 일동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 리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매컴이 예의바르게 말했다. 나아가서 이 비극의 결과로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 드리게 된 사실을 안 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제공하실 수 있는 정보를 알아 보는 것 또한 현 상황에서는 참으로 부득이한 일입니다. 내가 어떤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거죠? 나 따위가----의지할 데 없는 마비환자인 내가, 혼자 적적하게 여기 누워 있는 이 늙은 몸이. 노여움의 불길이 그녀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매컴은 부인의 말을 무시했다. 간호원 말에 의하면, 부인의 방문은 오늘아침 줄곧 열려 있었고...... 그게 어째서 나쁘다는 거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다만 부인께서 복도에서 일어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입장에 계셨던 것이 아닐까 여쭤보려고 한 것 뿐입니다, 부인. 혹시 누군가가 에이다양의 방에 들어가거나 방문을 열거나 하는 소리를 못들으 셨습니까? 아무 것도 몰랐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노부인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면 오늘 아침엔 손님이 오기로 돼 있었던가요? 아드님을 쏘아죽인 손님이 있었지요. 매컴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그 애가 나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일침(一針)을 가하고는 약간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렉스는 다른 애들처럼 그렇게 몰인정하지는 않았죠. 그래도 나를 무 시하기는 역시 매한가지였어요. 그녀는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표독스럽게 말했다. 맞아요. 그렇게 된 것도 나를 푸대접한 천벌이지! 매컴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냉정히 말했다. 부인이 총소리를 못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군요. 노부인이 비꼬는 시선을 던졌다. 당신의 이해부족을 나더러 동정하라는 건가요?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우리가 밑의 홀로 내려갔을 때 드라머즈 의사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모자 와 외투를 집사에게 넘겨 주고 우리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나누었다. 정말 따분한 친구들이구먼. 영락없지 아침 때가 아니면 점심 때에 불러내 니 말씀이야. 그래, 시체는 어디 있나? 히스가 그를 이층으로 안내해가더니 이내 객실로 돌아왔다. 그는 시가를 꺼내어 끄트머리를 질끈 깨물었다. 다음은 시베라를 시문할 차례일 테죠? 그렇겠지. 매컴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심부름꾼들을 모조리. 그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극성스런 신문 기자들이다렬올 때도 됐구먼. 아마 이번엔 된통 얻어맞을 걸요. 히스는 집사를 불러 시베라를 데려오게 했다. 잠시 후 그녀가 강아지를 안고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눈에는 감출 길이 없는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우리에게 인사를 했을 때도 여느때의 쾌활 함은 없었다. 이 사건은 점점 처참해져 가는군요? 자리에 앉자 그녀는 말했다. 참으로 가공할 노릇입니다. 매컴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심으로 동정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머, 친절하셔라. 밴스가 내민 담배를 그녀가 받았다. 난, 이렇게 이 집에 앉아 동정만 받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답니 다. 그녀는 굳이 농을 섞어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그것은 되지를 않았다. 매컴이 동정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여행을 떠나시는 것도 좋은 생각이죠----가령 친구의 집이라든가, 가능하다면 뚝 떨어진 곳으로. 설마하니, 그럴 수야. 그녀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 나, 절대로 도망치진 않겠어요. 나를 죽이려고 노리는 인간이 있다면, 내 가 어디에 있건 마찬가지일 테죠. 시베라는 불안과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매컴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아직 짐작을 못하시나요? 우리 식구를 모조리 죽여 없애려는 살 인마가 누구인지. 매컴은 우물쭈물했다. 그녀가 호소하듯 밴스쪽을 바라보았다. 밴스씨, 당신은 가르쳐 주실 테죠? 과연 용의자가 있는지 없는지요. 그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매컴 검사가 잠시 집을 뜨시라고 권한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시베라가 말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버틸 셈이에요. 제법 용기가 있는 분이군요, 당신은. 매컴이 불안과 감탄이 뒤섞인 눈으로 물었다. 물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셈입니다. 그건 그쯤 해두구요. 시베라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집어던지고는 무릎 위의 강아지를 어루만 졌다. 아마 내가 총소리를 들었는지 어떤지 알고 싶으실 테지만, 딱하게도 듣지 를 못했어요. 그렇지만 동생이 총에 맞은 시간엔 방에 계셨죠? 오전 중 내내 방에 있었어요. 그녀가 시름없는 투로 물었다. 내가 방문 밖으로 처음 나온 것은 집사가 렉스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을 때였죠. 펀 브론 선생이 당신방으로 온 것은 몇 시였나요? 밴스가 이렇게 물었다. 으음.. 그게 몇시였더라? 보나마나 브론 선생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했을 테니, 나도 조심해야겠군...... 열한시 조금 전, 아마 그쯤 될걸요. 브론 선생하고 짜놓은 것 같군요. 히스가 수상하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펀 브론 선생은 집사가 찾으러 올 때까지 줄곧 당신방에 있었군요? 밴스가 재빨리 물었다. 그래요. 담배를 피우고 계셨죠. 어머니는 담배냄새가 질색이거든요. 그래 서 선생은 흔히 내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거에요.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있었나요? 나는 이 맹수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있었죠. 그녀가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밴스에게 검사해 보라는 투였다. 보세요, 귀엽죠?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시베라양. 괜찮으시다면 잠시 방에 가 계시겠습니까? 괜찮다면? 천만에요. 내가 안전을 느끼는 곳은 그곳뿐이거든요. 그녀는 안으로 걸어갔다. 뭔가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 연락해 주세요. 정말이에요! 이젠 위장해 봤 자 소용 없죠. 난 정말 무서운 걸요. 이렇게 말하고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낸 것을 부끄러워하듯 재빨리 복 도로 나갔다. 마침 그때 스프루트가 지문담당자 두 사람과 사진계원을 안내해 들어왔다. 다음은? 매컴은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경찰부장의 질문에 답변한 것은 밴스 였다. 내 생각으로는 그 신을 믿는 헤밍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만하임을 불러 거듭 부딪쳐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먼. 헤밍이 이내 호출되었다. 그녀는 극도의 흥분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기가 낸 점괘가 들어맞았을 때의 무당처럼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 다. 그러나 정작 정보제공은 백지였다. 나는 오전중 빨래를 하고 있었다느니 , 비극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스프루트가 가르쳐 주어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었다. 주방여자도 렉스살인사건에 대한 해명의 빛을 던져 주지는 못했다. 나는 오 전 내내 주방에 있었고, 장을 보러 나갔다 돌아왔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 다. 총소리도 듣지 못했고, 또한 헤밍과 마찬가지로 비극을 안 것은 스프루 트를 통해서였다. 밴스는 그 사이 분석하듯이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막판에 가서 갑자 기 이렇게 질문의 각도를 돌렸다. 에이다양은 지금 주방에 와 있소? 에이다의 이름이 나온 순간 여자의 공포는 눈에 띄게 드러났고, 이어 안도 의 한숨을 쉬었다. 네, 에이다 아가씨는 제게 와 계십니다. 게다가, 아아, 위대한 신께 감사드 려야죠. 오늘 아침 렉스 도련님이 돌아가셨을 때 외출을 하셨으니 망정이 지,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가 그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가씨 를 쏘아죽이려고 한 놈인 걸요. 또 그 짓거리를 할 게 분명하죠. 밴스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에이다양에겐 엄중한 감시를 딸려두기로 했으니까요. 여자가 감사의 뜻을 담아 그를 보았다. 그녀가 사라지자 밴스가 말했다. 내 짐작이지만 말일세, 매컴. 에이다에게 있어 그 모성애적인 독일여자 이 상의 보호자는 이 집 안에 없을걸. 그건 그렇고---- 그는 다시금 덧붙였다. 우리가 범인을 옭아넣는 날까지 아마 이 음산한 수라장에 종말은 없을 것 같구먼. 그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매컴이 역시 힘없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럴 거야. 이 일련의 비극엔 상상못할 무서운 동기가 얽혀 있는 것이 분 명하다구. 그는 나른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지문담당 경부가 도착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뚱뚱한 사나이로서 그 조용한 태도가 유능한 장사꾼을 연상케 했다. 히스의 안내를 받아 그는 이내 이층으로 올라갔다. 밴스는 외투를 입고 있 었는데, 갑자기 다시 벗었다. 매컴, 잠시 기다렸다가 그 발자국에 대한 경부의 의견을 듣고 돌아가겠 네. 매컴은 잠시 동안 호기심에 넘친 눈으로 밴스를 보고 있떠니 이어 팔목시 계를 보았다. 그는 말했다. 자네하고 같이 기다리기로 하지. 10분후 드라머즈 의사가 내려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즉 렉스는 32구경 권총에 맞았고, 게다가 불과 1피트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발 사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머즈 의사가 사라진 지 15분 후 히스가 객실로 돌아왔다. 우리가 아직 도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불안한 것 같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밴스군이 경부의 보고를 듣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매컴이 설명했다. 부장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지문쪽은? 매컴이 불쑥 물었다. 아직, 나오지 않는군요. 나올 리가 없지. 밴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발자국 역시 우리를 현혹시킬 목적 아니면, 안 남겨 놨을게 아닌가? 히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경부와 스니트킹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경부, 어떻던가요? 히스 부장이 물었다. 발코니 층계 위의 발자국은 말일세. 경부가 부장쪽을 보고 말했다. 얼마 전 스니트킹이 내게 보낸 지형(紙型)하고 같은 사이즈인 고오르인의 구두로 생긴 자국이지. 실내의 발자국에 대해서는 자신은 없지만 같은 것 같구먼. 사진을 몇 장 찍었으니까 현미경에 의한 확대도가 완성되는 대로 결정적인 사실이 판명될 테지.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안쪽으로 걸어갔다. 부장, 이층에 잠시 올라가도 되겠소? 히스가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승낙 했다. 그야, 좋고말고요. 밴스가 모습을 감춘 것은 5분도 미처 안되었다. 돌아온 것을 보니 고오르 인의 구두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체스터의 방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했다. 그는 그것을 경부에게 넘겨 주었다. 이놈이 발자국을 남기게 한 구두라는 결론을 얻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경부와 스니트킹은 즉시 면밀한 조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경부가 한 켤레 를 창에 갖다대고 한 동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맞습니다. 그놈이 분명하군요. 히스가 펄쩍 뛰면서 밴스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생, 이것을 어디서 찾아냈소? 층계를 올라선 곳에 있는 리넨실 안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부장은 너무나 흥분해 버려 미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 려 매컴쪽을 향했는데, 지나친 경악으로 침을 마구 튕기며 더듬거렸다. 사, 살인과 녀석들, 권총을 찾느라 이집을 이잡듯이 뒤, 뒤졌단 말입니다. 놈들 말이 고오르인의 구두같은 것은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보라구요, 밴 스 선생이 이층 복도에 있는 리넨실에서 발견했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렇지만 부장, 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부하들이 권총수색을 했을 때엔 이 구두는 그곳에 없었죠. 먼젓번 두 사건 때에는 이놈을 신은 범인은 안전한 곳에 숨길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소. 그렇지만 오늘은 말씀입니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거죠. 아시겠소? 난 또 뭐라구. 히스가 신음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요, 밴스 선생? 밴스가 싱긋 웃었다. 그뿐이죠. 그렇지만 생각해 볼 문제가 있소이다. 당신의 충실한 부하들은 수상한 인간이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못봤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죠. 뭐라고, 밴스! 매컴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 말의 뜻은 범인이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는 게 아닌가? 아무튼 말일세, 밴스가 나른한 것 같은 투로 말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범인은 여기에 있었다고 봐서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구먼. 하긴 그래요. 나간 자는 아무도 없단 말씀이야. 펀 브론 뿐이거든. 히스가 느닷없이 외쳤다. 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 범인이 아직 이 집 안에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사라진 독약 매컴과 밴스와 나는 스타이비센트 클럽에서 때늦은 점심을 들었다. 식사 동안에 살인사건에 관한 화제는 약속한 듯이 피해져 있었으나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게 되자 매컴이 준엄한 얼굴로 밴스를 바라보고 있었 다. 이제 자네가 그 고오르인의 구두를 리넨실에서 발견하게 된 경위를 좀 들 어 보세. 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얘기는 몹시 간단하다네.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당기고 또한 커피를 따랐다. 쥬리어와 에이다가 사살된 밤 이중의 발자국이 발견됐지. 쏟아지던 눈이 그친 것은 열한시 경, 까닭에 발자국은 그 시간 이후 심야에 걸쳐 생긴 것 일세. 체스터가 살해된 밤에도 똑같은 발자국이 또 나타났어. 이 역시 눈이 그친 바로 뒤에 생긴 것이지. 그렇다면 이 일련의 눈 속의 발자국은 정면 현관을 왔다갔다 했는데, 모두가 범행 전에 생긴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네. 게다가 양쪽 발자국 모두 눈이 그친 뒤, 알아 보기 쉬운 발자국이 되도록 시간을 골라 만들어져 있딴 말야. 우연의 일치라고 해버리면 그뿐이지만, 이 사실은 내 흥미를 상당히 이끌었네. 그런데 오늘아침 발코니 층계에서 또다시 발자국이 생기고 보니, 흥미는 고조될 수밖에. 그리하여 내가 무조 건 이끌려간 귀납법이란 이렇게 되네. 결국 살인자는 매사를 이미 계산하 고 움직이는 용의주도한 인간이다, 따라서 이 일련의 발자국 역시 일부러 우리의 수사를 어지럽힐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일세. 여보게, 알아 듣겠나?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속하라구. 듣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말하리다. 이 세 쌍의 발자국엔 또 한가지 부합(附合)이 있지. 첫 번째 발자국은 눈이 건조한 바삭바삭한 것이어서 집 안에서 나왔다가 돌아간 것인지 처음 행길에서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간 것인지, 측 정은 불가능했어. 그런데 체스터 때의 눈은 축축하고 많이 쌓여 있었기 때 문에 뚜렷한 발자국이 남을 수 있었지. 따라서 같은 의문이 또다시 일어났 어. 집을 드나든 발자국은 각각 정면 보도의 반대쪽에 있고, 단 하나도 겹 쳐진 것이 없었단 말야. 물론 우연일 수도 있을 테지만, 합리적인 생각이 못 되네. 그럼 이번엔 오늘아침에 본 발자국을 생각해 보라구. 집안으로 들 어간 한 가닥의 발자국뿐 나온 놈은 없지. 까닭에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지. 범인은 정면 현관을 지나 말끔히 청소된 보도를 지나서 집 밖으 로 사라진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요컨대 가설에 불과하지. 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빨아들였다. 내가 제기하려는 점은 이렇다네. 즉 이 모든 발자국을 남긴 인물은 집 안 에 있는 누구이며, 범인은 외부사람이라고 그릇 판단케 할 의도하에서 집 에서 나왔다가 되돌아간 인물이라는 것이지. 그럴 것이 외부 사람이 발자 국을 남긴 것이라면, 기점문제를 혼동시키는 데 그렇듯 고생할 필요는 없 는 것이고, 그 경우에는 발자국을 추적당하는 한계란 고작 행길과의 경계 까지이고, 그 앞은 알아낼 길이 없겠잖나? 이상의 이유에 의해 나는 이 발 자국은 집안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가정한 거야. 자네의 추리는 거기까지 질서정연하다구. 매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자네를 리넨실로 인도해간 이유는 될 수 없단 말야. 그렇지. 하지만 그곳으로 인도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네. 가령 스니트 킹이 체스터의 방에서 찾아낸 고오르인의 구두, 그놈은 눈 위에 생긴 발자 국 사이즈와 똑같았어. 그러나 이 구두는 본부에서 압수해갔지. 그런데 또 똑같은 발자국이----오늘아침에 발견된 놈이지----나타났단 말야.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체스터는 오버슈즈를 두 켤레 갖고 있었다고 결론지은 걸 세. 경부의 보고를 듣고 싶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새 발자국이 먼저 번 것들과 같은가 아닌가 확인을 해보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발자국의 발생지가 모두 집 안에 있다는 자네의 이야 기는 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 생각되는군. 그것 참. 밴스가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그 침입자가 쥬리어와 에이다를 저격한 뒤, 어떤 도주수단을 썼는가를 생 각해 보세. 집사는 에이다의 방에서 총소리가 일어난 것을 듣기가 무섭게 이층 복도로 달려갔지.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그 상황이라면 범인이 도주하는 소리를 집사가 들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이 상의 이 이유에 의해 그 설명은 명백해지지. 결국 범인은 도주하지 않았다, 라고 말야. 그렇다면 외부의 발자국은? 누군가가 정면 문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으로 사전에 만들어 놓은 거 라구. 그러고 보니 체스터가 살해된 밤의 일이 생각나는군. 자네도 기억하 고 있을 테지? 총성이 일어나기 이십분 전, 복도에서 일어난 소리와 살며 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는 렉스의 얘기를 말야. 게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는 에이다의 증언이 있찌. 매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았어. 렉스와 에이다가 들은 소리는 그 설명으로 이해가 가는군. 오늘아침의 일은 더한층 명백하지. 발코니 층계엔 발자국이 있어. 아홉 시 에서 정오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런데 형사들은 양쪽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보지 못했어. 뿐만 아니라 집사는 렉스의 방에서 총성이 들 리자 잠시 식당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따라서 누군가가 층계를 내려 오거나 정면 현관으로 나갔다거나 했다면,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었을 거 란 말야. 딴은 집사가 심부름꾼 전용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똑같은 시간에 범인이 정면계단을 내려왔다는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과연 그 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나? 렉스를 죽여 놓고 복도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니, 범인이 취할 행동이 아니지. 게다가 형사는 집을 나간 사람을 보지 못 했단 말야. 이상의 이유에 의해 렉스의 피살 후 정면계단을 내려간 자는 없다. 이게 내 결론이라구. 딴은 그럴 듯 하군. 매컴이 몸을 굽히고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불어냈다. 이상의 이유에 의해 자네는 고오르인의 구두가 아직 집 안에 있다고 추리 한 셈이군? 바로 그렇다네. 물론 나 역시 그놈이 리넨실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 지. 체스터의 방, 쥬리어의 방,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찾아낸 거야. 몇 분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매컴이 입을 열었다. 자네의 추리가 옳다고 한다면, 범인은 오늘 아침에 우리가 만나서 얘기를 나눈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를 않겠나?...... 이건 그야말로 놀라운 생각이야. 난 그 집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아까부터 줄곧 추측해 봤지만, 그 중의 누군가가 이 금찍한 연속살인의 범인이라고는 전 혀 생각할 수 없구먼. 밴스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반박했다. 그린 맨션에서 가능성으로 제거될 수 있는 인물은 프라우 만하임 정도지. 그 여자라면 이 연속살인을 꾸밀 만한 상상력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다 른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 악마적인 대량살인의 흑막이 될 수 있다고 보네. 살인자가 살인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가는 큰 잘못이 지. 역사상 그 어떤 살인자도 살인자같이는 안보였어. 여보게. 케임브리지 의 리치즈슨 목사의 그 온화안 미남 모습이 생각나지 않나? 그런데 그 친 구, 치정 끝에 애인한테 청산가리를 투약하지 않았나? 암스트롱 소령은 부 드러운 신사 타입의 젊은이였지. 그런데도 그는 부인에게 비소를 먹였어. 하버드의 웹스터 교수는 결코 범죄자 타입이 아니었다구. 그렇지만 동료교 수인 파크 박사를 토막내 죽였지...... 여자 또한 마찬가지야, 에디스 톰프슨 은 남편의 스프에 유리조각을 넣은 사실을 자백했어. 그녀는 얼핏 보기엔 신앙심 깊은 주일학교 선생님같아 보였지. 마드레느 스미스는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숙녀 타입이었어. 또 마담 피네르는 어떤가? 그만, 이제 그만 하라구! 매컴이 이제 질렸다는 듯이 항의했다. 밴스, 자네가 제출한 이 기막힌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을까? 도대체 렉스 그린의 방으로 들어가 들어가 백주 대낮에 그를 쏘아죽일 가능성을 그 집 식구들 중 누가 갖고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먼. 그건 역시 나도 몰라. 밴스도 사건이 지니는 불길한 양상에는 어지간히 골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그 집에 있는 누군가의 소행이지. 피차간엔 꿈에도 의 심할 수가 없는 누군가가 말일세. 쥬리어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그 눈길, 그리고 체스터의 그 놀란 표정---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일 테지? 그 두사람 역시 꿈에도 범인을 의 심하고 있지 않았어. 그래서 최후의 너무나도 놀라운 진실을 보고 망연자 실해 버린 게야----맞아, 그런 모든 상황이 자네의 설(說)에 딱 들어맞는구 먼. 그렇지 않노라, 벗이여, 딱 들어맞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어. 밴스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테이블을 응시했다. 렉스는 평화로운 얼굴로 죽어 있었지. 분명히 살인자의 존재를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구. 그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지? 이 것은 괴이하다기보다도 숫제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야. 그야말로 영문을 모 를 일이라구. 그는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게다가 렉스의 죽음에는 또 한가지 불가사의한 점이 있지. 복도쪽으로 난 그의 방문은 열려 있었어. 그런데 이츠에 있던 그 누구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단 말야----이층의 그 누구도 말일세. 그런데도 기가 찰 일이지. 집사 는----일층 식당 안쪽에 있었는데----뚜렷이 총소리를 듣고 있단 말야. 아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 테지. 매컴이 이렇게 반박했으나 힘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투였다. 천만에. <어쩌다가 그렇게 됐다>, 이 사건에서 그런 우연이란 있을 수 없 다구. 매사가 빈틈없는 논리 위에서 저질러지고 있지. 한 가지 한 가지의 배후에는 면밀히 계획된 빈틈 없는 합리성이 있다네. 이 때 매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는 전갈이 왔다. 잠시 후에 돌아온 매컴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펀 브론이 지금 내사무실에 와있다는군. 내게 상의할 일이 있다는 게야. 갈수록 흥미진진하구먼. 밴스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이내 지방검사국으로 갔다. 펀 브론이 안내되어 돌아왔다. 이 사나이는 분명히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는 눈 치였다. 매컴은 정중한 태도로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실은, 매컴씨, 나는 항상 가방에 비상약을 넣고 다니고 있지요...... 비상약? 스트리키니네, 몰핀, 카페인 기타 각종 수명제와 흥분제 말씀입니다. 그편 이 여러 모로 편리한 경우가 많아---- 그래서 나를 만나자는 것은 그런 약품에 관한 일인가요? 간접적으로는----그렇습니다. 펀 브론은 잠시 입을 다물고 나서 말했다. 오늘 우연히 몰핀 1/4그램들이 새 튜브 한 개, 그리고 스트리키니네 1/3그 램들이 튜브 네 개가 들은 상자 하나를 가방에 막 넣어뒀지요. 그런데, 그 약이 어떻게 되었지요, 선생? 실은, 저어, 몰핀과 스트리키니네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매컴이 몸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는 괴이한 생기가 넘쳐 있었다. 오늘아침 병원을 나섰을 때는 가방에 있었지요. 펀 브론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두 군데쯤 간단한 왕진을 마치고는 그 길로 그린가로 간 것입니다. 그런 데 병원에 돌아와보니 튜브가 없어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매컴이 잠시 의사를 뚫어지게 보았다. 왕진 때 약을 꺼낸 일은 없었고, 또 그 때 가방에서 약을 꺼내 갈 수는 없 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그렇습니다. 가방은 내 눈 앞에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린가에서는요? 매컴의 흥분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나는 직접 노부인의 방으로 갔었고, 그 때 가방은 들고 있었지요. 잠깐, 선생. 밴스가 사이에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간호원 얘기를 듣건대, 당신은 그녀보고 노부인의 뷔용을 가져오라고 하 셨던데, 간호원을 그 때 어디서 불렀나요? 펀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분명히 간호원한테 연락을 취했었지요. 문간에 서서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습니다. 딴은. 그러고 나서? 간호원이 올 때까지 미망인을 치료하고 있었지요. 아마 한 십분쯤 걸렸을 겝니다. 그리고는 시베라의 방으로 갔습니다. 가방은? 매컴이 느닷없이 가로막았다. 복도에 놓아둔 채, 중앙계단 난간 뒤쪽에 세워놨었지요. 그리고는 집사가 부를 때까지 내내 시베라양의 방에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방은 선생이 그린가를 떠날 때까지 무감시상태에 있었던 셈이 군요? 그렇지요. 객실에 계시던 여러분한테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이층으로 올 라가 가방을 가지고 내려온 겝니다. 그 사라진 약품의 분량은? 매컴이 날카롭게 물었다. 스트리키니네의 함유량은 약 3그램----정확히 말해서 3과 1/3그램. 그리 고 상자에 들어있던 몰핀은 모두 스물 다섯 알이었습니다. 그것은 치사량인가요, 선생? 글쎄요, 한 마디로 답변하기는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마는. 펀 브론이 직업적인 태도로 말했다. 몰핀에는 개인차가 있어놔서 놀라운 분량을 섭취할 수 있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대개는 6그램이면 치사량이 충분히 되지요. 키니네 역시 치사량에 관해서는 매우 적용범위가 넓고, 환자의 체질과 연령에 의한 차가 심합니 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3과 1/3그램이면 충분히 치사량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겝니다. 펀 브론이 사라졌을 때 매컴이 불안한 듯이 밴스를 보았다. 여보게,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나? 전혀 무서운 생각이 안드는구먼. 밴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되게 이상하지 않나? 자초지종이 말야. 그 의사선생의 일부러 꾸민 우아 함 밑바닥엔 공포의 물결이 치고 있다구. 그것도 자기의 극약이 없어졌다 는 자체가 아니지. 매컴, 그의 눈에는 쫓기는 자의 일그러진 표정이 있었다 구. 밴스가 문득 얼굴을 들었다. 그것보다도 그 두 통의 유언장은 어떻게 됐나? 그러자 매컴이 말했다. 오늘 오후엔 입수될 예정이지. 밴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무래도 그 두 통의 유서가 의사 선생의 극약분실의 수수께끼를 푸 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그는 외투를 입고 모자와 단장을 들었다. 자아, 이 저주스러운 사건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야지----여보게, 밴, 오 늘 오후 이오리언 홀에서 기막힌 실내악이 있다구. 서둘러 가보세. 그날밤 8시, 모랑 국장, 히스 부장, 매컴, 밴스, 그리고 나는 작은 회의용 책상을 둘러싸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석간신문은 렉스살인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뉴욕 시민의 열광적인 호 기심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매컴이 맨 먼저 발언을 했다. 나는 유언장 복사본을 갖고 있는데, 이 심의에 앞서 새로운 진전이 있었 는지 우선 그것부터 듣고 싶소. 진전이 다 뭐 말라비틀어진 겝니까! 히스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 오후 내내 한 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을 뿐이죠. 매컴 검사, 수사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떠오르질 않는단 말씀입니다. 밴스가 과히 흥미 없다는 투로 물었다. 지문발견도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죠? 지문? 지문이야 틀림없이 찾아냈죠. 에이다의 지문, 렉스의 지문, 스프루트 의 지문, 의사의 지문이 둘----이거야 도로아미타불이라구요. 그럼 발자국 건으로 새로운 사실은? 없어요. 젠장, 이런 사건은 정말 금시초문이라니까. 선생이 찾아낸 고오르 인의 구두 발자국과 같다는 것 말고는 뾰족한 사실이 있어야 말이지. 그 말로 생각이 나는구먼, 부장. 당신 그 구두를 어떻게 했쏘? 히스가 자랑스러운 듯이 웃어만 보였다. 밴스 선생의 수법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먼저였죠. 밴스가 싱긋 웃었다. 그 구두를 어떻게 했는지 가르쳐 줬으면 고맙겠군. 매컴이 좀이 쑤셔서 못견디겠다는 듯 물었다. 부장은 그것을 시침 뚝 떼고 도로 리넨실에 넣어 둔 거요. 히스가 자랑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새로 잠입시킨 간호원에게 잘 감시하라고 일러 뒀죠. 그 여형사를 잠입시키는 데는 문제는 없었나? 매컴이 흥미 있는 얼굴로 물었다. 문제가 아니었죠. 만사가 시계바늘처럼 딱딱 맞아떨어졌으니까요. 여섯 시 에 본부의 여형사 등장, 펀 브론에게 예비지식을 전수받고 흰 옷으로 갈아 입은 뒤 그린 미망인께 아뢰오. 할망구 왈, 먼젓번 간호원은 어차피 보기싫 었으니 잘 됐노라, 앞으로 열심히 일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여경관 중 누구를 배치시켰나, 부장? 모랑 국장이 물었다. 오브라이언입니다----그 시트웰 사건을 다룬 오브라이언이죠. 그만 하면 일급 아닙니까? 게다가 힘이 천하장사니까요. 또 한가지 신속히 연락을 취해 둘 일이 있네. 매컴이 펀 브론의 극약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만일 이 약품이 그린 매션 안에서 도난당한 것이라면 그 여형사가 뭔가 단서를 찾아 줄지도 모르니까. 사라진 독약에 관한 매컴의 이야기는 히스에게도, 모랑 국장에게도 강한 쇼크를 주었다. 이거 큰일이구먼! 모랑이 놀라서 외쳤다. 이번 사건은 독살사건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아닌가? 히스는 놀라움으로 멍하니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몰핀에 키니네라? 야단났구먼! 이건 아무리 찾아봤자 소용 없을 거란 말 야. 그 집 같으면 숨길 만한 장소는 무진장이란 말씀입니다. 내가 경탄해 마지않는 것은. 국장이 주석을 달듯이 말했다. 이 범인의 태연자약한 자신이라구. 렉스 사살 후 미처 한 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독약이 사라지다니? 정말 대단한 배짱, 대단한 솜씨야. 살인마의 냉혈과 자신만만함, 이 사건에는 그런 것이 얼마든지 있지요. 밴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 일련의 살인사건 배후에 있는 것----그것은 가차없는 집념, 끝없는 타 산입니다. 의사의 비상약이 수없이 도난당해왔었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습 니다. 아마도 이제까지 끈기 있는 독약의 비축이 행해진 것이라 여겨지는 군요. 오늘 아침 훔친 것은 마지막 비축인지도 모르죠. 내가 이 사건 전체 에서 보는 것----그것은 빈틈없이 책정된 음모올시다. 아마 그 준비엔 몇 년이 걸렸을 거요. 모랑 국장은 정색을 하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오늘밤 회담의 목적이라 여겨지는데. 그는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언장의 내용을 알려 주실 수 없겠소, 매컴 검사? 모랑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혹시 동기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이 살인의 배후엔 상당히 강한 동기가 있으리라는 것은 밴스 선생, 당신도 인정하실 테죠? 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겝니다. 그렇지만 내게는 금전관계가 동기라 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물론 금전도 동기의 일부분은 될 수 있을 테지만 말입니다. 나로서는 동기는 더 근원적인 것----억압된 인간의 정열에 바탕 을 둔, 그런 강렬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매컴이 포켓에서 몇 통의 문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것을 일일이 다 읽을 필요는 없소이다. 그 내용만을 여러분에게 말하기 로 하겠소. 그는 맨 위쪽 문서를 꺼내들고 말했다. 트바이어스 그린의 유언장은 그가 죽기 일 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가족 전원을 유산상속인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거 니와, 단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자 전원이 이십오 년 동안 부동산상(不動産 上)에 거주해야 하며, 또한 그 저택을 손질 않고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 이 채워질 경우에 한해서만 상속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거주조항은 매우 엄격하여 유산상속인은 그린 맨션에 살고 있어야 한 다는 사실이지요. 상속자는 여행이나 외박의 자유는 인정되지만, 그런 부재 기간이 일 년에 삼 개월 이상을 초과할 수 없게 되어 있소이다---- 누군가가 결혼했을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모랑 국장이 질문했다. 일정한 규정은 없습니다. 결혼을 한 경우에도 그, 또는 그녀는 결혼한 사 실에 관계없이 부동산상의 거주를 이십오 년 동안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것 이지요. 물론 이 경우 그 남편, 또는 아내는 거주권분여(居住權分與)를 받 을 권리가 발생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경우는 유언장에는 저택 안에 작은 주택 두 채를 건축하는 자유를 주고 있지요. 단 에이다에 한해서 결혼했을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살아도 상속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는 그녀가 트바이어스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유언장의 거주조하엥 위반할 경우에는 어떤 벌칙이 있나요? 또다시 국장이 물었다. 벌칙은 하나----상속권의 완전한 상실이요. 고약스런 영감이군. 밴스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물었다. 유언장의 중점은 금전분배의 방법에 있는 것 같은데, 그 분배는 어떻게 되 어 있나? 분배되어 있지는 않지. 작은 액수의 기부가 몇 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미망인한테 양도되어 있다고. 미망인은 살아 있을 동안 처분권을 지니며 죽게 될 때는 본인이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으로 마음대로 이를 자식- ---또는 손자가 있으면 손자----에게 나눠줄 수 있네. 가족들은 현재 어디에서 생활비를 타쓰고 있지? 전원이 노부인한테 의지 하고 있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그들의 생활비는 다섯 명의 자식이 각자 그린 미 망인의 소득을 원천으로 해서 살림에 필요한 일정한 금액을 집행인의 손을 거쳐서 받고 있다네. 매컴이 문서를 둘둘 말았다. 이상이 트바이어스의 유언장 내용이요. 작은 액수의 기부가 몇 건 있다고 했겠다? 그건 뭔가? 밴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가령 집사인 스프루트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증여가 있지. 현직에서 물러 나고 싶을 때는 아무 때건 은퇴할 수 있고,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 의 밑천일세. 만하임 부인 역시 이십오 년이 경과한 뒤에는 평생 일정한 소득을 받을 수 있지. 허어, 딴은. 이것 참,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구먼. 달리 기부는 없나? 병원에 한 건. 트바이어스의 열대지방에서 걸린 장티푸스를 치료해주고 고쳐준 병원이야. 다음은 좀 기묘한 조항이라 할 수밖에 없는데, 트바이어 스는 뉴욕시 경찰본부에 대해 장서(藏書)를 기증하고 있다구. 단 이 역시 이십오 년이 지난 뒤라야 하지. 밴스가 어처구니 없는 것 같은, 흥미진진하다는 몸짓으로 정색을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먼! 다음은 그린 미망인의 유언장인데. 매컴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이것은 현재의 조건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닿는 핵심조항이라 할 수 있 지. 부인은 재산상속에 대해서는 공평을 중히 여기는 사람인 모양이야. 다 섯 명의 자식----쥬리어, 체스터, 시베라, 렉스, 및 에이다는 각기 같은 액 수의 재산을 물려받게 돼 있네----결국 전재산의 1/5를 각자가 취득하는 셈이지. 그런 것은 조금도 흥미 없는 일이구요. 경찰부장이 한 마디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중 누군가가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의 몫이 누구한 테 어떻게 돌아가느냐죠. 그러자 매컴이 구체적인 설명을 했다. 다른 유언장이 작성되기 전에 자식들 중의 누군가가 사망했을 경우는 그 몫은 나머지 자식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되도록 되어 있지. 그럼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나머지 인간이 득을 본다는 것 아닙니까? 모 조리 죽어 버리면, 나머지 한 사람이 몽땅 손에 넣는다? 흥! 그렇지. 그렇다면 현재 입장으로는 시베라와 에이다가 몽땅 수중에 넣는다----절 반씩 말씀입니다----할망구가 하직한다면? 자네 말대로야, 부장. 히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이거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구먼. 히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3마이너스 2는 1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도록, 부장. 밴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선생? 몰핀과 키니네. 히스가 흠칫 놀라며 잔뜩 긴장했다. 빌어먹을! 그는 책상을 주먹으로 탕 치고는 그렇게는 안될걸, 두고 보라구! 싸움이라도 하듯 사나운 얼굴로 앞을 노려보더니, 이내 맥없이 입을 다물 어 버렸다. 그 심정 짐작이 갑니다. 밴스 역시 절망은 부득이한 것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따분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기다리는 일 뿐이 란 말야. 두 딸한테 사정을 털어놓으면 어떨까? 그 집을 잠시 떠나도록 말야. 매컴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다만 찾아올 필연을 연기하는 결과밖에 안 되지. 게다가 유산상속 권의 상실과도 직결될 염려가 있단 말야. 2시간 가까이 사건처리에 관한 방법론이 토의되었으나, 결론은 보통의 수 사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회의가 끝날 때까지에는 결정된 특정사항이 있었다. 그린 맨션 부 근의 잠복근무를 철저히 할 것, 정면에 있는 나아코스 아파트 이층에 형사 를 배치시켜 저택의 정문과 창을 감시시킬 것, 그린가의 전화선에 도청장치 를 달 것 등이 그것이었다. 매컴이 토의를 끝내고 일어서려는 순간, 밴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독살사건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를 해야 되리라 보는데 어 떨까? 난 이렇게 제안하고 싶소. 나아코스 아파트엔 그린가를 감시하는 사 람과 함께 의무관 한 사람을 배치할 것. 이 의무관에게는 약물중독의 긴급 치료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해독제를 휴대시킬 것. 아울러 집사와 새 간호 원 사이에 어떤 신호수단을 미리 정해두게 했다가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지체없이 아파트에 배치된 의무관한테 연락할 수 있도록 할 것. 이 상입니다. 독살미수 피해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독약을 먹인 범인을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은 전원의 절대적인 찬성을 얻었다. 국장은 당장 경찰 의무관을 한 사람 골라 배치시키겠다고 말했다. 밀실의 정체 이튿날 아침 밴스는 여느때 없이 일찍 일어났다. 기분이 몹시 언짢은 것 같기에 나는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우리는 매컴 검사와 오후 1시에 클러벵서 점심을 같이 들기로 되어 있었 다. 12시가 조금 지나자 밴스가 자동차 이스파뇨 쉬저의 준비를 명했다. 문제 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직접 차를 운전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는데, 이 운 동이 신경을 가라앉히고 두뇌를 명석하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매컴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을 보기만 해도 무언가 심상 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두려워 말라, 나의 벗이여." 우리가 큰 식당 한구석에 있는 식탁에 자리를 잡았을 때 밴스가 유도하듯 매컴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엄숙한 얼굴이라니, 영락없이 사도 요한과 똑같구먼. 뭔가, 고오르 인의 구두라도 없어졌다는 겐가?" 매컴이 한 대 맞은 것처럼 흠칫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맞았어! 그 오브라이언 형사가 오늘 아침 아홉 시에 연락을 취해왔는데, 그게 리넨실에서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게야." "흠, 이거 놀랐는걸. 그래, 경찰부장의 의견은 어떤가?" "히스가 맨션에 닿은 것은 열시 전. 즉시 수사를 했지만 헛일이었다는군. 밤중에 복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사람도 없다는 게야." "자네한테 오늘 아침 펀 브론에게서 연락은 없었나?" "아니. 그렇지만 히스가 만났지. 그린가에 나타난 건 열시 경. 한 시간 가 까이 있었다는군. 약을 도둑맞고 몹시 낭패스러워하는 모양이었고, 뭔가 단 서를 잡았느냐고 만나자마자 질문하더라는 거야. 한 시간 중 태반은 시베 라와 단둘이있었다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로고! 그만 맛있는 음식이라도 들어 보세. 불유 쾌한 생각 따위는 잊어버리고. 여보게, 이 집의 마디라 소오스는 제법 맛이 있다네." 이리하여 밴스는 사건의 화제를 끊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회식은 기념할 만한 것이었음이 이윽고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밴스가 어떤 제안을 했는 데----그보다는 어떤 행동을 주장했는데----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일련 의 무서운 사건도 해결되고,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운명에 있었기 때문이다. 디저트 때였다. 밴스가 매컴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판도라의 상자의 고집스러운 관념이 말일세, 내 머리에 달라붙어 견딜 수 없구먼. 난 꼭 좀 그 트바이어스의 밀실의 서재에 들어가 보고 싶단 말야. 그 성역 안이 보고 싶어 이젠 도저히 못견딜 지경이지. 특히 자네가 장서 기증 얘기를 꺼낸 뒤로는 더하다구." "이 사람아, 그 따위 사실이 사건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게야?" "논쟁은 중지하세. 설령 좀 귀찮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강제집행을 하는 한이 있어도 그 서재엔 꼭좀 들어가 보고 싶다구. 매컴, 그 비밀의 방에서 단서가 나타날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잖나?" "그린 부인이 끝까지 열쇠를 안내놓겠다고 버틴다면, 귀찮은 법률문제가 뒤 따르게 될텐데." 매컴은 이렇게 말하며 주저의 빛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승낙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3시 경이었다. 매컴의 연락이 있었으므로 히스는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즉시 미망인 앞에 대령했다. 부장이 눈짓을 하자 새 간호원은 자리 를 떴다. 매컴이 느닷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늙은 귀부인은 우리가 들어갈 때도 수상쩍은 듯이 노려보고 있었는데, 매 컴의 말을 듣자 침구에 기대어 준엄하게 도사리고 앉아 불 같은 눈으로 바 라보았다. "부인." 매컴은 준엄한 어조로 굽힘없이 말했다. "이 부득이한 방문을 저희 역시 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고(故) 그린씨의 서재에 들어가 보아야 할 긴급하고도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여--" "그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는 대번에 물리쳐 버렸다. 그 목소리는 표독스럽게 울려퍼졌다. 그 방안엔 단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갈 수 없어요. 근 십이 년 동안 어떤 누구도 감히 그 방에 들어간 일은 없으니까. 부인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매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서재에 대한 수색을 부 득이하게 강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용서 못해요! 그녀가 소리쳤다. 매컴이 권위를 나타내듯 한 손을 들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시비곡절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인에게 열쇠 를 내주십사,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하기는 법률의 힘으로 문을 파괴해 야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그는 포켓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저는 그 방의 수색영장을 확보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보이고 강제집 행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저로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린 부인은 저주와 노여움의 욕설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노여움은 차츰 그녀를 미치광이처럼 만들어 갔다. 매컴은 부인의 발작이 끝나기를 차 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인의 기력은 어느새 빠져 버렸고, 상대방의 의연 한 태도를 보자 마침내 헛일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안면이 창백해 져 맥없이 침구에 몸을 기대었다. 열쇠를 가져가요. 그녀는 쓰디쓴 표정으로 말했다. 상것들에게 내집을 파괴당하는 마지막 수모만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으 니까요...... 저기, 그 장농 서랍 안 상아보석상자에 들어있어요. 그녀는 힘없이 장농을 가리켰다. 밴스가 방을 가로질러 열쇠를 손에 넣었다. 길다란 옛날식 열쇠였다. 부인, 열쇠는 항상 이 보석상자에 넣어두시나요? 밴스가 서랍을 닫으면서 물었다. 십이 년 동안이나. 그린 미망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완력으로 빼앗기고 있는 거야----그것도 상대방은 경 찰. 그 경찰이야 말로 나 같은 늙고 병들은 사람을 보호해야 하지 않나요? 이런 모욕이 또 있담!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나! 모두가 덤벼들 어 나를 괴롭히고 기뻐하고 있는 거야! 매컴은 목적을 달성한 탓인지, 뉘우치는 것 같은 태도로 열심히 그녀를 달 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었던 양, 몇 분 후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 던 우리에게로 왔다. 난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진 않다구, 밴스. 그는 심란한 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 연기는 일급이었어. 점심 이후 줄곧 자네하고 함께 있 지 않았더라면, 진짜 수색영장을 갖고 왔다고 생각했을 거란 말야. 아무튼 놀랐네. 열쇠가 들어왔으니 맘대로 일을 착수하라구. 매컴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밑의 홀로 내려갔다. 밴스는 누가 혹시 보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서재를 향 해 앞서 걸었다. 십이 년 동안이나 사용을 않던 열쇠치고는 제법 부드럽잖나? 그는 열쇠를 돌리고 육중한 떡갈나무 방문을 살며시 밀면서 말했다. 게다가 자물쇠 역시 작동이 매끄럽단 말야. 놀라운 일이로군. 안은 캄캄절벽이었다. 밴스가 성냥을 그었다. 아무 것이건 손을 대지 않도록 부탁하겠소. 그는 이렇게 경고하고 성냥불을 머리 위로 올리면서 동쪽창의 빌로도 커튼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커튼을 열어젖히자 뽀얀 먼지가 방 안을 채웠다. 이 커튼만은 오랜 세월 동안 만진 자가 없는 것 같군. 그가 이렇게 말했다. 오후의 잿빛 햇살이 방 안으로 퍼져 들어오자 그곳에 나타난 것은 세상에 도 놀라운 은둔자의 비경이었다. 벽에는 서가(書架)가 잔뜩 늘어서고, 바닥에서 천정 가까이까지 닿고 있었 다. 얼마 안남은 공간에는 한 줄의 대리석 흉상과 브론즈의 꽃병이 널려 있 었다. 방의 남쪽 끄트머리에는 크고 판판한 책상이 놓여지고, 한가운데에는 괴이한 장식의 긴 조각책상이 놓여 있었다. 천정에는 놋쇠의 거대한 페르샤 램프가 두 개 매달려 늘어져 있고, 한복판 의 책상 곁에는 높이 8피트나 되는 중국 촛대가 서 있었다. 바닥에는 온갖 각도에서 동양식 카펫이 깔려 있었고, 두꺼운 먼지가 온갖 것을 덮고 있었 다. 밴스는 방문쪽으로 되돌아가서 성냥을 켜고 안쪽 손잡이를 면밀히 검사했 다. 그는 말했다. 누군가 최근 이곳에 온 자가 있군. 이 손잡이에는 먼지가 없어. 지문을 채취할 수 없을까요? 히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해봐야 헛일이죠. 우리의 적은 보통놈이 아니라구. 지문을 남길 놈이 아니 지. 그는 살며시 문을 잠그고는 둘레를 보았다. 그러다가 책상 옆에 있는 커 다란 지구본 옆을 가리켰다. 저기, 찾고 있던 고오르인의 구두가 있군요, 부장. 이 방에 있으리라는 생 각은 했었지만. 히스가 한 달음에 뛰어가서 그것을 움켜잡고 창가로 가지고 갔다. 이놈이 분명하구먼. 그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밴스는 한가운데의 책상 근처에 서서 방안의 물건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낮은 등나무의자 위로 쏠렸다. 오른쪽 팔걸이가 책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의자의 위치는 난로와 마주보는 벽에서 몇 피트 떨어진 곳이었으며, 의자는 서가와 서가 사이의 좁은 장식 선반을 향해 놓여져 있었다. 이 의자가 십이 년 전부터 저자리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그쪽으로 가서 의자를 내려다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본능적으로 매컴도, 히스도 따라갔는데, 그들도 이내 밴스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팔걸이에 달린 대(臺) 위에 움푹 패인 접시가 놓여 있고, 그 접시에는 굵은 촛농이 잔뜩 있었다. 촛농이 엉겨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접시를 이 정도로 채우기까지엔 필시 초가 몇 자루나 들었을 테지. 밴스는 이렇게 말하고 의자의 등이며 자리를 만져보고 나서 자기의 손을 조사했다. 먼지는 있군. 그렇지만 십여 년간 쌓여진 것은 절대로 아니야. 누군가가 최근에 이 서재로 와서 책을 읽고 있었어. 게다가 그 친구가 하는 짓은 만 사가 수상쩍구먼. 커튼을 젖히지도 않았고, 전등을 켜지도 않았어. 촛불 한 자루를 켜놓고 앉아 독서삼매경에잠기다니! 오늘아침 고오르인의 구두를 숨기고 나서 다시 열쇠를 제 자리에 갖다놓 을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 할망구한테 물어보면 어떻겠소? 히스가 이렇게 제안했다. 아무도 오늘 아침 열쇠를 도로 갖다놓은 사람은 없죠, 부장. 여기를 찾아 오는 인물이 그때마다 열쇠를 훔쳤다가 제자리에 놓을 리가 없어요. 십오 분이면 족히 열쇠를 만들 수 있는데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딴은 그렇군요. 부장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우리의 서재조사는 아직 끝난 것은 아니죠. 밴스가 낙심 말라는 듯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트바이어스의 문학취미를 확인하기 위해서죠. 아 시겠습니까? 트바이어스는 자기 책을 경찰본부에 기증하고 있단 말입니다. ..... 어디 그 영감은 어떤 책을 즐겨 읽었을까? 밴스는 모노클(한쪽 알이 달린 안경)을 꺼내 눈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가까 운 서가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도 앞으로 다가서서 그의 어깨너머로 들여다 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그만 경탄의 외마디 소 리를 울렸다. 놀랍게도 그곳에 있는 것은 미국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이 상한 범죄학의 개인장서가 아닌가! 게다가 국내의 유명한 장서의 태반을 알 고 있는 나로서도 대부분이 초면의 것이었던 것이다. 범죄에 대한 모든 전 문서적이 꽉 차 있는 것이다. 이 책들의 테마도 좁은 의미에서의 범죄학 학설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범죄학과 관련이 있는 한, 전반적인 부문에 걸친 저작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제목만 보아도 다음과 같았다----사회, 범죄병리학, 자살론, 형무 소제도 개혁사, 사형론, 변태심리학, 형법론, 암호해독법, 독물학, 형사수사방 법론. 이 저작들은 숱한 나라의 원서로 되어 있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 빽빽이 책이 늘어선 서가 사이를 걸어가는 밴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매 컴 또한 흥분하고 있었다. 히스만은 여기저기의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어이 없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 그것 참! 밴스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군요, 부장. 이 숱한 장서의 미래의 보관 인으로 당신네 경찰본부가 선정됐다는 사실 말씀이요. 안그렇습니까? 그렇 다고는 해도 참으로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구먼. 느닷없이 그가 몸을 움츠리고 문쪽으로 목을 내밀더니, 동시에 한 손을 들 어 우리를 제지했다. 순간 우리는 극도의 긴장 가운데 몸을 도사리고 있었 다.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밴스가 문 쪽으로 재빨리 다가서며 문을 활짝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문지방에 선 채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다시금 문을 닫고 방쪽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뭔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것 같았지만 말야. 매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스프루트나 가정부가 지나가는 것인 줄 알고 별 신경을 안썼단 말야. 누군가가 복도를 어슬렁거렸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밴스 선생? 히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가려낼 수 있다면 문제가 아니죠. 그렇지만 역시 마음에 걸린단 말입 니다. 누군가 엿듣고 있던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가 여기에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인간에겐 그것이 근심거리가 됐다는 증거 아니겠소? 그 누군가는 우리가 여기서 뭣을 발견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 르는 일이죠. 밴스는 등의자 정면에 있는 책꽂이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성냥을 연거푸 켜면서 책의 제목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바닥에서 두 번째 책꽂이 앞 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두꺼운 두 권의 책을 한 동안 들여다보고 있더니 그것을 창가로 가지고 갔다. 이건 정말 미친 장난이군. 잠시 조사해 보고 나서 그가 말했다. 저 의자에서 손이 닿는 범위내에 있었고, 게다가 최근에 손을 댄 것은 이 두 권 뿐이란 말야. 그런데 그게 뭔줄 아나, 매컴? 한스 그로스 교수가 쓴 두 권으로 된 예심판사를 위한 범죄체계 편람 이라네. 매컴은 별로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나마나 아무런 연관이 없는 책제목일 테지. 밴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책을 제 자리에 꽂아 놓고는 맨 아랫줄을 들 여다 보았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또다시 성냥불을 켰다. 여기 또 몇 권이 있군. 그는 흥분을 누르고 말했따. 이 책들은 허둥지둥 꽂은 탓인지 간추려져 있질 않구먼. 게다가 책의 먼 지도 말끔히 닦여져 있단 말야----허어, 그것 참, 매컴, 제아무리 법률벌레 인 자네라도 이것마저 우연이라고는 말 못할 테지. 잘 들으라구, 이 제목을 말야---- 독물, 그 효과와 검출 , 저자는 알렉산더 윈터 브라이스. 다음은 법의학, 독물학, 보건문제교과서 야. 그 다음 책은 프리드리히 브류겔만의 히스테리성 몽중보행론(夢中步行論) , 또 다음은 슈워즈와트의 히스테리성 마비와 몽유병에 대하여 .. 이것 참 기가 막히군! 그는 일어서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냐----천만에,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만무하단 말야...... 펀 브론이 그녀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니 당치 않은 일이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었다. 히스조차도 이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밴스는 매컴을 엄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 사건은 더한층 깊이, 더한층 야릇한 양상을 띠어가는군. 여기서는 상상 못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자아, 이제 그만 이 방에서 탈출하 세. 부장, 내가 이 책을 정리하는 사이에 그 커튼을 닫아 주시죠. 우리가 들 어온 증거는 안남기는게 좋을 테니까요. 우리가 그린 부인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노부인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래 서 우리는 간호원 오브라이언에게 열쇠를 제 자리에 넣어 두라고 이르고 아 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4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겨울의 빠른 황혼은 장막을 내리고 있었다. 집사는 아직 전등을 켜놓고 있지 않았다. 아래층 홀에는 어슴프레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고, 저택 안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고요함마저 압박감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외투를 벗어 놓은 현관 테이블쪽으로 곧장 다가갔는데, 마음은 한 시바삐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묵은 저택의 따분한 기분을 그렇게 속히 떨쳐 버릴 수 는 없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미처 닿기도 전에 객실 안쪽 커튼이 살며시 움 직이더니 긴장된,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밴스 선생님----저어. 우리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응접실 안쪽, 두꺼운 커튼 뒤에 에이다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은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떠오르듯, 창백한 베일로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제지하듯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서늘한, 별 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 방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꼭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주 무서운 얘기에요! 아까 전화를 드리려고 했지만 무서워서...... 갑자기 경련이 그녀를 엄습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구, 에이다. 밴스가 달래듯이 그녀를 격려했다. 이삼 일 지나면, 이 사건도 완전히 매듭지어질 테니까----그래, 당신 얘 기란 뭐지? 그녀는 잠시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더니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열두 시가 훨씬 지나----잠이 깼는데, 시장기가 들더군요. 그 래서 일어나서 살며시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그 주방아줌마가 항상 먹을 것을 놔두거든요. 그녀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눈이 우리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런데 아래층까지 내려왔을 때,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 같은게 홀에서 들 려오질 않겠어요?----훨씬 안쪽의 서재쪽에서였어요. 난 깜짝 놀라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난간에서 쳐다봤죠. 그러는데 마침----누군가 가 성냥을 켜고...... 또다시 그녀의 발작이 일어났고, 밴스의 팔에 와락 매달렸다. 그녀가 실신 할 것 같기에 나는 그녀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밴스의 목소리로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게 누구였소, 에이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고 둘레를 보았다. 그 얼굴은 흔히 있는 죽음의 공포 의 그림과 똑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어머니였어요!...... 게다가 어머니는 걷고 있었어요! 이 계시(啓示)의 무서운 뜻이 우리를 몸서리치게 만들었고, 순간 우리는 멍 하니 서 있었다. 최초로 침착을 되찾은 것은 밴스였다. 어머니가 서재 근처에 있었다? 그래요. 손에 열쇠를 들고 있는 것 같았어요. 다른 물건은 들고 있지 않았소? 밴스가 흥분을 누르고 물었다. 모르겠어요----너무나 무섭고 놀라운 일이라서. 가령 어머니가 오버슈즈를 들고 있었다든가? 글세요. 그 긴 오리엔탈 쇼올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마 그 쇼올 밑에...... 성냥을 켰을 때는 짐을 밑으로 내려놨는지도. 그때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어머니를 봤다는 사실 뿐이었어요----천천히 움직여...... 저기, 저 어둠 속 을...... 이 믿어지지 않는 사실의 연상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공포의 포로로 만들 고 있었다. 눈은 멍하니 앞을 바라본 채 꼼짝을 안했다. 매컴이 헛기침을 했다. 당신은 아까 말했었죠? 그린 양. 어젯밤 홀은 캄캄했었다구요. 아마 당신 은 공포에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겝니다. 그런 상태였으니 그 그림자가 헤밍 이나 만하임이 아니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 않겠어요? 에이다는 매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그럴 리가 그리고는 또다시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분명히 어머니였어요. 밴스의 팔을 잡은 손이 으스러질 것처럼 조요지고, 그녀는 또다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무서워요. 밴스는 그녀의 호소를 가볍게 물리쳤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오. 어머니는 당신을 봤나요? 난----모르겠어요. 그 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난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놀라 버려 뒷걸음질로 살며시 층계로 올라가 그 대로 내방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요. 밴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 위로하듯 미소를 보냈다. 이젠 어젯밤에 본 것 때문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요. 두려워할 것은 없으니까. 마비환자 중엔 쇼크로 흥분을 받으면 수면보행을 하는 일 조차 있다는 말이 있죠. 오늘 밤엔 새 간호원한테 당신 침실에서 같이 자 라고 일러 둘 테니까. 그는 에이다의 팔을 상냥하게 두드려 주고는 그녀를 이층으로 돌려보냈다. 이거 큰일났군! 매컴이 목쉰 소리로 말했다. 빨리 수를 써야지 자칫하다간 새로운 사건이 돌발할지도 모르겠군! 검사님, 내일이라도 당장 그 할망구를 격리병실로 보내 버립시다! 히스가 굳어진 눈으로 말했다. 강제격리의 이유가 뭔가? 이것은 순전히 병리학상의 문제라구. 우리한테는 손톱만큼도 증거가 없잖나? 나 같으면 그런 서투른 짓은 안하지. 밴스가 한 마디 했다. 에이다의 얘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몇 가지나 된다구. 현재 우 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만일 잘못이었다고 하세. 그렇게 되면 우리는 허 위의 행위를 범한 것이 되고, 고작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지. 물론 그것이 연속살인의 시기를 지연시킬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진상을 찾아내는 데 도 움이 되리라곤 생각되지 않는군.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요, 밴스 선생? 히스가 자포자기해서 덤벼들 듯이 말했다. 그건 나 역시 모르겠소. 아무튼 오늘 밤엔 그린 일가는 안전할 테고, 덕분 으로 시간을 좀 벌 수 있을 거요. 어디 펀 브론 선생이라도 만나 볼까? 그 생각ㄷ 나쁘지는 않군. 매컴이 재빨리 동의했다. 게다가 뭔가 새로운 사실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언제 만나볼 셈인가? 이때 이미 히스가 택시를 붙잡고 있었다. 우리는 다운 타운으로 향했다. 밴 스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만난다고 해서 나쁠 거야 없지. 문득 밴스의 기분이 달라져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집은 바로 지척이야. 게다가 티타임이라? 이건 안성맞춤인 걸. 그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택시는 이내 펀 브론의 화려한 현관 앞 보도에 닿아 있었다. 제 4의 비극 의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변고가 있어서 오신 것은 아닐 테죠? 아닙니다. 밴스가 웃으며 말했다. 마침 이 앞을 지나가게 됐길래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의학 잡담이나 해 볼까 해서요. 펀 브론이 약간 찜찜한 듯이 그를 보았다. 좋고말고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는 벨을 울려 심부름꾼을 불렀다. 변변치는 않습니다마는 해묵은 셰리주라도 대접해 드려야겠군요. 이거, 수고가 많으십니다. 밴스가 사교적인 투로 머리를 숙였다. 셰리주가 나왔고, 우리는 잡담을 하며 술을 마셨다. 밴스는 술맛이 마음에 든다는 듯 연거푸 홀짝 홀짝 마시고 있었다. 아아, 친애하는 선생. 그는 이렇게 말했는데, 아첨의 느낌이 없지도 않았다. 셰리는 선생도 아시다시피 옛날엔 중풍을 비롯해서 그 밖의 신진대사결함 에 의한 질병의 특효약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말을 끊고 술잔을 놓았다. 이 맛있는 술을 그린 노마님의 처방전에 첨가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러자 펀 브론이 대뜸 받아 말했다. 병에 담아서 가져간 일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체스터를 주어 버리셨죠. 부 인은 술은 한방울도 못마시는 분입니다. 제 부친한테 들은 얘기지만, 트바 이어스씨의 음주에 몹시 반대를 하셨다는 군요. 그 부친이 돌아가신 것은 그린 부인이 척수마비에 걸리기 전이었던가요? 밴스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물었다. 그렇죠----일년 쯤 전이었을 겝니다. 그렇다면, 부인의 임상진단은 선생 한 분만의 것인가요? 펀 브론이 예의바른,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고명하신 분의 진단을 받아 재확인해 볼 필요성이 별로 없으 니까요. 증세는 명백한 것, 모든 조건이 척수마비와 일치하지요. 뿐만 아니 라 그 뒤의 경과도 모두 내 진찰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선생. 밴스는 정중히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의학상식이 없는 우리같은 제 삼자로서는 그 런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여쭤 봐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린 부인의 질환에 대해 또 하나의 해석을 달 수가 없을런지요?...... 가령 그리 중병이 아니라든가...... 펀 브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린 노부인께서. 그는 한참만에 말햇다. 현재의 마비상태 이외의 병에 걸려 있을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사실은, 하반신 전체의 바라프레져, 즉 전기능장해지요. 만일 선생이 노부인이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사실을 보았다면, 선생의 정신반응은 어떻게 될까요? 펀 브론은 도저히 곧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이 노려보고 나서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돈 것이 아닐까,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겠죠. 선생의 정신이 말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그때는요? 그때는 즉각 열렬한 기적의 신봉자가 될 겁니다. 밴스가 유쾌한 듯이 웃었다. 펀 브론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린 부인의 진단에 관한 한, 잘못을 저지를 여지는 전혀 없지요. 만일 노 부인이 다리를 움직였다면, 그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생리학적인 체계 전 체에 대한 모순인 동시에 도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 밴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선생은 브류겔만의 히스테리성 몽중보행론 을 알고 계십니까? 글세요----들은 일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슈워즈와트의 히스테리성 마비와 몽유병에 대해서 는요? 펀 브론이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은 기막히게 빨리 생각을 간추리는 사람 처럼 한 점을 무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슈워즈와트라면 물론 알고 있죠. 그는 생각을 되씹듯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논문은 본 일이 없소이다. 그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서서히 떠올랐다. 뭐라구,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여보시오, 혹시 그 책제목하고 그린 부인의 상태를 결부시키려는 것은 아닐 테죠? 이 두 논문이 그린 맨션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린다면, 선생의 의견은? 그 책들의 존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나 하이네의 로난체로 가 그 집의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 지요. 안타까운 노릇입니다만, 선생 말씀엔 찬성할 수가 없군요. 밴스가 정중히 반박했다. 이 두 책이 우리 수사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요. 선생님 이라면 이 두 책의 연결을 해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펀 브론은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좋겠지만. 그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새로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건방진 말씀 같지만 참고로 삼아 주셔야 할 게 있소이다. 당신은 이 두 책 의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는 술어(術語)의 정확한 과학적인 뜻에 대해 대단 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정신분석학 관계의 것 이라면, 나 역시 상당한 연구를 쌓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 및 융그에 의하면, 몽유병, 몽중보행이 더불어 우리의 일상용어인 <꿈인지 생 시인지 모르는 잠> 이나 <반마비상태> 가 뜻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의 로 사용되고 있지요. 즉 심리병리학 및 이상심리학의 술어에 의하면, <몽 유병> 이란 반사심리공존(反射心理共存) 및 이중인격과의 관련으로 사용되 는 것이며, 실어증, 기억상실증, 그밖의 경우에 있어서 잠몰자아(潛沒自我), 또는 잠재의식자아에 의한 행위를 호칭하는 명사인 것입니다. 인간이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걸었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일어서서 책꽂이로 다가가더니 잠시 뒤적거리다가 몇 권의 책을 꺼내 왔다. 이게 프로이트와 브로이엘의 논문입니다. 또 이것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 석 , 그리고 이게 슈테켈의 신경공포증 이죠. 펀 브론은 밴스 앞에 책 세 권을 놓았다.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십시오. 현재의 혼미상태에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군 요. 그럼 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몽유병이란 잠이 깨어있을 때의 이상심리를 가리키는 것이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꿈속에서 걸어 다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슈워즈와트가 전에 정신병리연구소 강사였다는 것, 따라서 프 로이트 개인과도, 또한 그 학설과도 노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그 저서를 잘 모르기 때문 에. 밴스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실은 선생님께 외람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만----선생도 아시다시피 경찰 및 검사국에 대한 비판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은 매 컴 검사로서는 그린 부인의 육체적 조건에 관한 보고서----게다가 학계 최고 권위자의 것----가 입수된다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정을 내 렸지요. 제 의견 같아서는 오펜하이머 박사 같은 분한테 보고서를 받는다 면, 아주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펀 브론은 잠시 동안 입을 열지 않고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동자 만은 계산하듯 밴스를 노려본 채였다. 보고서를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이렇게 마지막으로 그가 양보했다. 환자에 대한 의심을 풀기 위해서입니다----아니, 나로서도 그 생각에 반 대는 없습니다. 뭣하면 제가 연락해 드리지요.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왕 편의를 봐주시는 김에 되도록 속히 끝날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는 오펜하이머 박사에게 연락을 취할 테니까요. 아마 박사라면 시원시원하게 결말을 내줄 겁니다. 우리는 또다시 택시를 집어탔다. 그 이튿날은 나의 추억에 영원히 남는 날이 되었다. 이날 일어난 일은 우리들 모두가 짐작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이 막상 현실로 되어 버리자, 한동안 말조차 못하고 멍청히 있었을 정도였 다. 그날 아침은 어두운, 당장에라도 한 줄기 쏟아질 것 같은 날씨 가운데 밝 았다. 대기에는 축축한 매서운 추위가 있었다. 납빛 하늘은 땅에 닿을 듯이 늘어져 질식할 것처럼 답답했다. 날씨마저 우리의 음산한 정신을 나타내 주 고 있었다. 밴스는 일찍 일어났으나,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사건이 그의 마음에 무겁 게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조반이 끝난 뒤에도 난로 앞에 앉아 1 시간 이상이나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11시 반, 매컴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그린 맨션으로 가는 길이니 도중에 우리를 태워갈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온 것은 12시 10분 전이었는데, 그 엄숙하고 실망한 표정은 말보다도 명백하게 또다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음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외 투를 입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이내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래, 이번엔 누군가? 차가 파크 아베뉴로 구부러졌을 때 밴스가 물었다. 에이다야. 매컴이 쓰디쓴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그녀가 어제 그런 말을 한 뒤라, 혹시 이렇게 되지나 않았을까 생각은 했 었지만----보나마나 독일 테지? 맞아, 몰핀이라구. 이 사람아, 그러지 말게. 스트리키니네보다는 훨씬 안락사니까. 죽지는 않았다구, 고맙게도 말야. 그녀는 죽지 않았다고 말했겠다? 드럼----모랑 국장이 배치시킨 경찰의지만----이 쏜살같이 달려가서 간 신히 목숨만은 건져냈다네. 그렇다면 집사의 신호가 제대로 전달된 셈이군? 그렇지. 아무튼 난 자네한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네. 의사를 대기시키 자고 제안한 것은 자네였으니까. 우리가 그린가에 도착하자 먼저 와있던 히스가 직접 현관을 열어 주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가 그 내용을 설명했다. 독살사건은 아직 아무도 모르지요. 알고 있는 것은 집사하고 오브라이언 뿐입니다. 집사가 피해자를 발견, 이내 드럼 선생이 달려오자 달려오자 이 층으로 직행. 아무도 모습을 본 자가 없음. 의사는 오브라이언을 불러 잠시 응급처치를 하고는 오브라이언한테 본부로 통보하라고 명령. 이렇게 척척 이루어진 것이죠. 일을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운 자네 행위는 훌륭했어.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에이다가 살아나 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사님. 가족들은 현재 어디에 있나? 시베라는 자기방에 있구요, 할망구도 자고 있구요. 심부름꾼은 보나마나 집 뒤 어디에 있을 테죠. 펀 브론은 오늘아침에도 왔었나요? 밴스가 곁에서 물었다. 그 친구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오브라이언 말이 열시에 와서 할망 구 방에 한시간쯤 있다가 돌아갔다는 군요. 그 친구한테는 몰핀사건을 안알렸나요? 그럴 필요는 없을 테죠. 드럼 역시 훌륭한 의사이고, 펀 브론한테 알렸다 간 시베라를 비롯해서 가족들에게 새나갈 게 뻔하니까요. 맞아, 동감이요. 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우리는 복도로 나와 외투를 벗었다. 매컴이 말했다. 드럼 의사를 기다리는 사이에 집사를 심문해 보는 게 어떨까? 우리는 객실로 들어갔고, 히스가 초인종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스프루트는 이내 나타나 우리 앞에 섰는데, 감정의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지나치게 차분한 냉정함이 내게는 비인간적으로조차 보였다. 매컴이 좀더 다가오라고 눈짓했다. 스프루트, 자초지종을 정확히 말해 보게나. 저는 주방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나무를 두드리듯 생기가 없었다. 막 시계를 올려다보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에이다 아가씨의 방의 벨이 울 리더군요. 각 방의 벨은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그럴 필요는 없다구. 그 시간은? 정각 열한 시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이층으로 올라가 문을 노크했지요. 그런데 대꾸가 없더군요. 실례라고는 생각했지만 문을 열고 들여다봤습니 다. 아가씨는 침대에 누워계셨는데 그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하더군요. 게 다가 묘한 것이 눈에 띄어서. 시베라 아가씨가 귀여워하고 계시는 강아지 가 침대 위에 있고---- 침대 곁엔 의자 같은 게 있었소? 밴스가 곁에서 한 마디 했다. 예, 안락의자 큰 게 하나. 그럼 개는 혼자 침대로 기어올라갈 수 있었나? 예, 그렇습니다. 좋아요, 계속하시오. 개가 침대 위에 있었는데, 보기에 뒷다리로 서서 초인종 끈에 매달려 있 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묘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 개가 아가씨 얼굴 위에 서 있는데, 아가씨는 그냥 태평스럽게 누워계셨다는 점이지요. 저는 속으로 질겁을 하고는 달려가서 강아지를 주워올렸습니다. 그러자 알 게 된 일입니다마는 초인종 끈 끄트머리에 달려 있는 비단실 몇 가닥이 강 아지 이빨에 엉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설마하지 그럴 리가 있 겠느냐 말씀하실 테지만----아가씨의 초인종을 울린 것은 실은 강아지였 던 셈이어서---- 이것 참 놀랐는데. 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스프루트? 아가씨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밑으로 내려와서 응접실 커튼을 열어젖 힌 것이지요. 위급할 시에는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의 사 선생이 오시자 저는 즉시 아가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렸습닏. 고맙구먼, 스프루트. 매컴이 초조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드럼 선생에게 우리가 와있다고 알려 주게. 그러나 몇분 후 객실로 내려온 것은 여형사인 간호원이었다. 그녀는 중간 키에 나이는 서른 대여섯쯤 된, 단단한 체격의 여자로서 날카로운 적갈색의 눈, 얇은 입술, 의지가 강해 보이는 턱의 유능한 수사원 타입이었다. 드럼 선생님은 환자를 보시느라 바쁘기 때문에.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보고하는 투로 말햇다. 그래서 나보고 가보라는군요. 아마 곧 내려오시게 될거에요. 그보다도 진단 결과는 어떤가? 매컴은 아직도 선 채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리라 봅니다. 선생님 의견으로는 곧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시던데요. 매컴은 초조함이 얼마간 가셨는지 자리에 앉았다. 오브라이언 형사,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실정을 얘기해 주시오. 독약사용 에 관해 어떤 증거라도 있었소? 있는 것은 빈 뷔용 접시뿐이에요. 접시를 조사하면, 아마 독약 찌꺼기가 있을 걸요. 독을 넣은 수단이 뷔용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히스를 향해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까닭은 이렇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열한 시 조금 전에 그린 부인한테 뷔 용을 갖다주고 있지요. 에이다양이 한 자리에 있을 때는 두 접시를 가져다 주지요----그게 노부인의 분부니까요. 오늘 아침 그 시간엔 이 아가씨가 방에 와있었기 때문에 두 접시를 들고 올라간 거지요. 그런데 올라가 보니 까 노부인밖에 없기에 한접시는 부인을 주고, 또 한접시는 에이다의 방으로 가지고 가서 침대 옆 테이블에 놓고는 복도로 나와 그녀를 불렀어요. 그때 에이다는 아래층----객실이었다고 생각해요----에 있었고, 이내 올라오길 래 저는 볼일을 보러 삼층 제 방으로 올라갔지요. 그렇다면 문제의 뷔용은 당신이 방에서 나오고, 에이다양이 일층에서 올라 오는 사이인 불과 일이 분 동안이지만 테이블 위에 무방비상태로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아뇨. 불과 일분도 안되는 사이였지요. 게다가 나는 그 사이 복도에 있었 고, 문은 열려 있었으니까요.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었답 니다. 매컴의 말에 직무태만을 꾸짖는 투가 있음을 본 여형사는 이렇게 강경히 주장했다. 그러자 밴스가 물었다. 당신이 밑의 홀에 있는 에이다를 봤을 때 다른 사람은 그곳에 없었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펀 브론 선생 뿐입니다. 그때 선생은 마침 혼자서 일층 홀에서 외투를 입고 있었지요. 선생은 그 길로 바로 집을 떠났나요? 물론이죠. 그럼 혹시 그때쯤 시베라양의 강아지를 못봤습니까? 복도 근처나 에이다 양의 방 같은 데서 말입니다. 아뇨. 내가 거기 있었을 때는 없었어요. 밴스는 졸린 듯이 의자에 기대앉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간호원이 이층으로 사라지자마자 히스가 핏대를 올렸다. 그 여자, 이런 일에는 본부에서도 손꼽히는 민완형사란 말야. 그런데 이 따위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이런 놈의 일이! 나 같으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는 안할 걸요, 부장. 밴스가 이렇게 말했는데, 꿈을 꾸는 것 같은 누으로 천정을 올려다본 채였 다. 별 게 아니란 말이오. 그 여자는 그저 몇 초 동안 복도에 나가 에이다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드럼 의사가 나타났다. 그는 젊고 힘찬 사나이로서 그 태도도 과감한 데가 있었다. 드럼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손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 애는 이제 고비를 넘겼지요. 그는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나는 오늘아침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죠----물론 요행이었지만-- --그런데 커튼이 젖혀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가방을 들고 단숨에 뛰어 왔죠. 피해자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스트리키니네 증상이 아님은 이내 분명해졌지요. 경련도 없고 땀도 없으며, 평화로운 얼굴이었으니까요. 치아 노제(입술이 파래지는 증상)도 없었죠. 분명한 몰핀 증세지요. 동공을 보니 까 수축을 일으키고 있더군요. 의심할 여지라곤 없었지요. 그래서 즉시 간 호원을 불러 응급처치를 실시한 겝니다. 그야말로 긴급출동이었던 셈이군요? 긴급출동이고 뭐고. 의사는 거드름을 섞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살려내긴 힘들었을 겝니다. 내가 보기에 분실했다는 6그램을 모조리 먹인 것 같았지요. 그래서 서둘러 강력아트로핀 피하주사 를 한 대 놓고----1/50짜리죠. 이것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이어 과망간 산 칼륨으로 위를 세척하고 인공호흡을 시켰지요. 실상 그럴 필요는 없었 습니다만. 그러고 있으려니까 차츰 회복이 되기에 1/100아트로핀을 또 한 대 놓았더니 완전히 정상을 회복했지요. 드럼 의사는 또다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매컴이 말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소. 그래 그 환자는 언제쯤 심문에 답변할 수 있겠소? 그녀는 종일 멍청할 겁니다. 게다가 구토증세가 일어날 테죠. 호흡곤란, 두통 따위도 발병할 테니까 현재로서는 아마 심문에 답할 재간은 없겠죠.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봅니다. 그런데 간호원이 말하는 뷔용 접시는 어떻던가요? 쓴 맛이 있었지요----몰핀이 틀림없습니다. 드럼이 말을 끝냈을 때 집사가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 고, 잠시 후 펀 브론이 나타나 개깃ㄹ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방 안의 침울한 분위기를 깨닫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 말에 대답한 것은 밴스였다. 그렇습니다, 선생. 누군가가 에이다에게 몰핀을 먹였지요. 마침 드럼 의무 관이 건너편 나아코스 아파트에 있다가 긴급출동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럼 시베라는?----시베라는 괜찮은가요? 펀 브론이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숨가쁘게 물었다. 네, 그 아가씨는 염려 없습니다. 안심한 듯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의사는 한숨을 푸욱 쉬고 의자에 힘 없이 주저앉았다.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그 살인사건이 발견된 게 언제입니까? 드럼이 상대방의 말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한 순간, 밴스가 재빨리 말했다. 당신이 오늘아침 이 집에서 나가신 직후의 일이지요. 독은 간호원이 주방 에서 가져온 뷔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서......설마하니, 그럴 리가? 펀 브론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시늉을 했다. 내가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간호원이 뷔용 접시를 들고 올라갔습니다. 난 그녀가 그것을 방으로 갖고 들어가는 것도 봤소. 그런데 그 속에 어떻게 독이----? 그 말씀으로 생각이 났는데요, 선생. 밴스의 어조는 매우 상쾌했다. 혹시 외투를 입고 나서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신 것은 아닐 테죠? 펀 브론이 당치 않은 모욕을 받은 것처럼 아연해져서 밴스를 쳐다보았다. 천만에요. 난 즉시 이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간호원이 밑에 있는 에이다양을 부른 직후가 될 테죠? 그, 그렇소. 그러자 에이다도 이내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밴스는 잠시 담배를 피우며 의사의 얼굴을 한 동안 보고 있더니 이윽고 물 었다. 선생은 뭐랄까, 드럼 의사가 에이다의 치료를 계속 행하는 일에 반대는 없으실 테죠? 계속한다구요? 펀 브론이 벌떡 일어섰다. 이해하기가 곤란하군요. 당신이 금방---- 에이다에게 누군가 독을 투약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지만 에이다는 다 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방은 너무나 놀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정말 잘 됐군! 그는 이렇게 외치고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그러자 매컴이 말햇다. 우리는 이번의 일을 일체 비밀로 묻어 둘 작정입니다. 그런즉 선생도 우 리의 결정에 따라 주셔야겠소. 좋구말구요----그 조건으로 에이다를 만나봐도 될까요? 매컴이 망설였다. 그러자 밴스가 대꾸했다.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밴스는 드럼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선생, 미안하지만 펀 브론 선생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드럼과 펀 브론은 함께 방에서 나갔다. 그 친구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자기 잘못으로 잃어버린 약품이 제 삼자를 살해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언짢을 것은 분명하단 말야. 그게 아니죠. 에이다가 염려되서 그런 게 아니고, 그가 더 염려하는 쪽은 시베라란 말씀입니다. 히스가 한 마디 했다. 과연 놀라운 추리로다! 밴스가 이렇게 말하고 싱긋 웃었다. 동감입니다, 부장. 그 친구는 에이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시베라 의 안전을 더 염려할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가, 로구먼. 그때 드럼 의사가 혼자 돌아왔다. 그 사람은 이내 다른 여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곧 내려오겠다더 군요. 에이다에 대한 그 사람 의견은 어떻던가요? 별다른 의견은 없더군요. 하긴 그 환자는 그 선생 얼굴을 보자마자 걸음 걸이에도 힘이 생기던데요. 게다가 미소조차 보였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드럼이 미처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층계를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금 펀 브론이 객실로 들어왔다. 그러자 밴스가 물었다. 선생, 오펜하이머 박사를 만나 보셨나요? 열한 시에 만났습니다. 실은 오늘아침 이 집에서 곧장 박사를 만나러 갔 었지요. 내일 열 시에 검진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린 부인도 동의하셨나요? 그렇죠. 오늘 아침에 말씀입니다. 반대는 안하시더구요. 잠시 후 우리는 그린 가를 떠났다. 내일 이맘때는 뭔가 좀 판명되었으면 좋겠지만.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매컴이 말했다. 여느때없이 힘이 하나도 없었고, 눈은 고민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 여보게, 밴스, 오펜하이머의 검진보고가 과연 어떤 것이 될지, 저으기 궁 금하구먼. 그러나----오펜하이머 박사의 검진보고는 작성될 운명에 있지를 않았다. 그날 밤 1시부터 2시 사이에 고집쟁이 그린 미망인은 스트리키니네 중독으 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고 만 것이다. 마지막 두 용의자 매컴이 그린 부인의 죽음을 우리에게 알려온 것은 이튿날 아침 10시 전이 었다. 이 놀라운 비극이 발견된 것은 아침 9시가 되어 간호원이 여느때처럼 노부 인의 아침 차를 가지고 갔을 때였다. 매컴은 그린 맨션으로 가는 도중 이 놀라운 사건을 알려 주었고, 우리는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잇었으므로 이내 그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주도 완전히 무너져내렸군. 매컴이 낙심하면서 말했다. 차가 애프 타운을 지나 메디슨 아베뉴를 달리 고 있을 때였다. 그 노파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 이었어. 하긴 그 부인은 정신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위로 하려고 애써왔지만. 그런데 이제 문제는 너무나 엄청난 상황을 보여 주고 있구먼. 남겨진 가능성쪽이 훨씬 더 무서워 보이니 말이야. 우리가 대결하 고 있는 것, 그것은 냉혈살인귀에 의한 완전범죄라고. 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가 대결하고 있는 놈은 보통 범인이 아니지. 그건 그렇고, 나 개 인으로서는 그린 부인의 죽음으로 별 충격을 받았다곤 할 수 없구먼. 그 노 파는 더러운 여자였네, 매컴. 세상에도 더러운 저주스러운 여자였지. 밴스의 말은 매컴이 그녀의 죽음을 알려왔을 때 내가 느낀 감회와 똑같은 것이었다. 실상 이 뉴스는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딱한 생각이라고는 들지 않았던 것이다. 히스와 드럼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부장의 얼굴에는 흥분과 실망이 뒤섞여 있었고, 될 대로 되라는 따분한 빛이 어려 있었다. 히스는 건성으로 악수를 하고 나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브라이언이 오늘 아침 아홉 시 할망구가 죽어 버린 것을 발견, 스프루트 에게 부탁해서 드럼 선생을 오게 했죠. 그리곤 본부에도 연락했고, 난 검사 님하고 드라머즈 선생한테 통보하고는 곧장 달려와서 방을 잠그어 버렸죠. 펀 브론한테는 연락 했나? 곧 전호를 걸어 오늘 아침 열 시에 있을 예정인 오펜하이머 박사의 검진 을 중지시켜 달라고 부탁했죠. 매컴은 잘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드럼 쪽을 보았다. 선생 얘기를 들려 주실까? 드럼은 자세를 바로잡고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마침 나아코스 아파트 일층 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있는데, 동료가 와서 그린가의 커튼이 열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방을 들고 한달음에 뛰어 왔죠. 집사가 노인의 방으로 안내해 줬는데, 간호원이 벌써 대기하고 있더 군요. 이미 끝장난 뒤라 손 쓸 도리가 없었죠----체온은 싸늘하고----사 후경직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사인은 스트리키니네의 대량 투약. 괴로워할 시간조차 없었을 겝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기전환 훨씬 전에 강직이 지속된 것인지, 아니면 독약을 마신 직후에 사 기전환이 일어났는지, 그 둘 중의 어느 편일 테죠. 의학적인 설명은 젖혀 두고, 그린 부인은 몇 시에 죽었다고 생각하오? 드럼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말하자면 오늘 새벽 두 시, 그쯤 될 겁니다. 그렇다면 독약을 마신 것은 어젯밤 열한 시나 열두 시라고 생각하면 되겠 구먼?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어차피 드라머즈 선생이 오게 되면, 이내 드러날 겝니다. 히스가 따분한 듯이 말했다. 그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독을 투약했다고 생각되는 잔이나 컵을 발견 못하셨나요, 선생? 매컴이 허둥지둥 의사에게 물었는데, 이것은 히스의 분별없는 무례한 말을 얼버무리려는 뜻이 분명했다. 침대가에 잔이 한 개 있었고, 알칼로이드 결정 같은 것이 묻어 있었습니 다. 그렇지만 말씀입니다, 키니네를 대량으로 마시게 되면, 이내 쓴 맛을 알게 될 텐데요? 밴스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죠. 그런데 책상에는 탄산레몬제의 병이 있었지요. 만일 이것에 독 을 섞은 것을 함께 마셨다면, 쓴 맛은 분간 못했을 겁니다. 그린 부인이 혼자 탄산레몬을 마실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테죠. 물을 섞어야 하고, 이 작업은 침대에 누운 채로는 좀 무리입니다. 자아, 이거 점점 묘해져 가는구먼. 밴스가 나른한 듯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노파한테 탄산레몬을 준 인물이 키니네마저 줬다고 가정해도 되 겠군. 밴스는 매컴 쪽으로 돌아앉았다. 이 점은 오브라이언 양이 도와주리라 생각되는데. 히스가 즉시 뛰어나가 간호원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녀의 증언도 새로운 빛을 던져 주지는 못했다. 어젯밤 그녀가 독 서 중인 그린 부인 곁을 떠난 것은 11시 경이었고, 자기 방으로 물러갔다가 30분 뒤에 에이다의 방으로 돌아가서 밤새 자고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것 이 히스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일어난 것은 8시. 옷을 입고 주방으로 갔다. 노파의 차를 가지러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한, 미망인은 그녀가 물러갈 때까지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다----11시까지 탄산레몬을 마시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린 부인이 탄산레몬을 혼자 마시려고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밴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당신 짐작대로 하자면, 그것을 마시게 한 인간이 달리 있다는 얘기군요? 물론이죠.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군. 밴스가 매컴을 향해서 말했다. 노부인은 직접 탄산레몬을 마시지는 않았다. 열한 시 이후 노파의 방으로 들어가 탄산레몬을 조합(調合)한 인물이 틀림없이 있다, 이걸세. 매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할 일없이 서성대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기회가 있었던 인물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일이군. 그는 간호원을 보고, 당신은 돌아가 있으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줄을 당겨 집사를 불렀다. 집사를 심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문단속을 하고 스 프루트가 물러간 것은 11시 반 경이었다는 것. 시베라는 저녁식사 이후 자 기 방으로 물러가서 줄곧 그대로 있었다는 것. 헤밍과 만하임은 11시 조금 지나서까지 주방에 있었는데, 그 후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물러가는 것 을 스프루트가 보았다는 것. 스프루트가 그린 부인의 죽음을 안 것은 아침 9시, 간호원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는 것. 매컴은 심문을 끝내고 주방여자를 불렀다. 호출된 그녀는 그린 부인의 죽 음도, 에이다가 독을 마신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 고 있었다. 다음은 헤밍의 차례였다. 이 여자는 한두 마디 질문에 이내 경계심을 일으 켜 버리고는 그 날카로운 눈을 더한층 가늘게 뜨고 우리를 둘러보는 것이었 다. 흥! 날 옭아넣으려 해봤자 그렇겐 안될 걸요.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그렇게 소리쳤다. 밴스가 말했다. 에이다도, 노부인도 모두 독살을 당했다네. 그러자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턱의 힘이 눈에 띄게 늘어져 갔다. 나 이제 이 집에 볼일이 없어요. 그녀는 힘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주를 위해 증인으로 보내어진 나지만, 이제 충분히 증명을 본 걸요. 매우 좋은 일이요. 밴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밍은 정신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가더 니 이내 뒤를 돌아보고 매컴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불법의 동굴을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요. 알겠어요? 악인 투 성이 집에서 더한층 나쁜 것은 시베라라구요. 주는 이 다음에 틀림없이 그 여자를 응징하시고 멸망시켜 버릴 걸요. 밴스가 나른한 듯 얼굴을 들었다. 이봐요, 헤밍, 시베라양이 어째서 그렇게 나쁘단 말이오? 여자는 혀를 적시고는 말햇다. 이봐요, 그 여자를 음부(淫婦)라고 하는 거에요. 펀 브론인지 뭔지, 그 돌 팔이 의사하고 붙어 있는 꼴이라니, 정말 지저분하다구요. 그리고는 뜻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선생, 어젯밤에도 찾아와서 그 여자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구요. 언제 돌아갔는지 알게 뭐에요. 이것 참, 점점 괴이해지는군. 그래,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알았소?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단 말인가요? 허어 ,당신이? 그런데 그건 몇 시였소? 그리고 스프루트는 그때 어디 있 었소? 집사는 저녁식사 중이었고, 마침 내가 현관쪽으로 가려니까 그 선생이 오 지 않겠어요? 내 곁을 성큼성큼 지나 이내 시베라의 방으로 가버립디다. 아마 시베라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의사를 부르신 거겠죠. 흥! 헤밍은 비웃듯이 돌아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밴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불렀다. 펀 브론 의사가 어젯밤 이집 안에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소? 밴스가 나타나자마자 그는 질문했다. 집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죠. 그뿐일세, 스프루트. 미안하지만 시베라 양좀 불러 주게. 예. 그래도 시베라가 나타날 때까지는 족히 15분은 걸렸다. 의자에 앉자 그녀 는 말했다. 오늘 아침엔 또 무엇을 위한 파티인가요? 밴스가 약간 정중한 태도로 시가를 권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기 전에 말씀입니다. 밴스는 또다시 말했다. 어젯밤 펀 브론 선생이 여기서 떠난 시간을 알려 주실수 있다면 영광이 겠습니다만. 열한 시 십오분이에요. 이렇게 대답하는 눈에는 적의가 담긴 도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맙소. 그럼 이번엔 내편에서 알려드릴 사실이 있습니다. 어머님도, 에이 다양도 모두 독약을 투여당했지요. 어머님도, 에이다도 모두 독약을 투여당했다? 그녀는 되받아 말했는데, 의식이 흐리멍텅한지 마치 절반밖에 뜻을 모르는 것 같은 그런 태도였다. 그리고는 몇 초 동안 꼼짝않고 앉은 채 화석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매컴 위로 고정되었다. 이젠 당신의 충고에 따르기로 하겠어요.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애틀랜타 시티에 단짝친구가 있어요...... 이젠 이 집에 있을 수 없는 걸요. 소름이 끼쳐서 도저히---- 그녀는 어색하게 웃고 나서 말했다. 나, 오늘 오후에라도 당장 애틀랜타 시티로 가기로 하겠어요. 그렇게 신경이 강한 처녀도 이제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양이었다. 그건 현명한 결심입니다. 밴스가 잘한 일이라는 듯 의견을 말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가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그곳에 묵으시지요. 그러자 시베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묵을 수는 없을 걸요.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군요, 어머니도, 에이다도 죽었군요? 어머님뿐입니다. 밴스가 안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다는 살아났지요. 그래요?...... 하긴 그 애 같으면 살아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닐 걸요. 그녀의 얼굴이 자랑스러운 경멸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천한 인간의 육체는 저항력도 강하다든가요, 어디서 들은 일이 있어요.흥! 그렇담 이제 그 애가 차지할 그린가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막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셈이군요? 동생은 긴급출동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매컴이 꾸짖듯이 말했다. 우리가 의사를 대기시켜 놓지 않았드라면 그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사람 은 당신 뿐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대단히 수상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그녀의 반박은 너무도 솔직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내가 이번 범행을 꾀했다면, 그 앙큼한 계집애를 소생 시키는 것 같은 서투른 짓은 절대로 안할 걸요.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여행준비를 서둘러야지. 그녀가 방에서 사라지자 히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매컴을 보았다. 검사님, 괜찮겠어요? 그 여자를 제멋대로 뉴욕에서 떠나게 만든단 말입니 까? 그린가에서 멀쩡한 것은 그 여자 뿐이라구요. 히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리에게도 이내 짐작이 갔다. 우리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당하고 보니 모두들 우울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여자를 강제적으로 이 집에 있게 만드는 것으로 위험부담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매컴이 가까스로 응수했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검사님, 알겠습니다. 히스는 벌써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전 미행을 붙이고 말 겁니다----괜찮겠죠? 그 여자가 현관을 나 설 때는 영락없이 뒤를 밟히게 될 겁니다. 그는 홀로 나가 이내 스니트킹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5분후 드라머즈 의사가 왔다. 그렇게 쾌활한 의사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드럼과 히스를 따라 이내 그린 부인의 방으로 올라갔고, 그 사 이 매컴과 밴스와 나는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15분 쯤 지나 의사는 돌아왔는데, 눈에 띄게 근엄햇다. 검시결과는? 매컴이 물었다. 드럼과 같소. 할머니가 죽은 것은 글쎄요, 한시와 두시 사이, 아마 그쯤 될 걸요. 스트리키니네 섭취는요? 열두 시 경일 거요. 물론 추정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튼 탄산레몬과 동시 에 마셨소. 컵을 핥아 보고 알았소. 그건 그렇고, 선생. 밴스가 드라머즈에게 말했다. 시체해부를 하실 때에 하지근육(下肢筋肉)의 위축상황에 대한 자세한 보고 서를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좋습니다. 드라머즈는 선뜻 대답은 했으나 이 부탁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매컴이 드럼에게 물었다. 에이다를 만나보고 싶은데, 오늘 아침 상태는 어떻소? 썩 좋습니다. 드럼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할머니를 본 뒤 이내 그쪽도 봤지요. 쇠약해져 있기는 하지만 매우 정상 입니다. 그럼 모친의 죽음에 대해선 알리지 않았을 테죠? 한 마디도. 그러자 밴스가 말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고, 사실을 숨겨봤자 별 뜻이 없다고 생각되는구 먼. 기왕에 받을 충격이라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받게 하는 편이 나을걸 세. 우리가 에이다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팔꿈치를 창틀에 대고 두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눈이 쌓인 중간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는데, 마치 느닷없는 공포에 짓 눌린 것 같았다. 간단한 대화가 오고갔다. 그 사이에도 밴스와 매컴은 연방 그녀의 신경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매컴이 뷔용에 대한 질문을 했다. 우리는 되도록 어제 오전에 일어난 그 끔찍스러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어제 아침 일에 대해 당신 이 상세히 설명해 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해결에 중대한 영향이 있지요--- -당신은 간호원이 불렀을 때 거실에 있었다, 그랬었죠? 소녀의 입술은 말을 하는 데에도 어딘가 괴로운 느낌이었다. 그래요. 어머니가 잡지를 가져오라고 하길래 그걸 찾으러 밑으로 내려갔 는데 그 때 마침 간호원이 부른 거에요. 당신은 이층으로 올라왔어요. 그 때 당신은 간호원을 봤습니까? 봤어요. 마침 심부름꾼 전용층계쪽으로 가고 있었지요. 당신은 자기방으로 들어갔지요. 그 때 당신방엔 아무도 없었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있었단 말씀인가요? 우리가 밝히려는 점도 바로 그 점입니다. 에이다 양. 매컴이 엄숙하게 말했다. 어떤 인물이 당신 뷔용에 독을 넣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당신이 방으로 들어간 뒤 누군가 들어온 사람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히스가 좀이 쑤신 듯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서----당신 곧 스프를 마셨소? 아뇨----몸이 으시시시해져서 쥬리어의 방으로 갔어요. 그 방에 오래된 쇼올이 있어서, 그걸 걸칠려구요. 히스가 따분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무튼 이 사건은 언제나 막판에 가서 방해가 끼어들어 도로아미타불이 된단 말야. 안그래요, 매컴 검사? 쇼올을 가지러 간 사이에 스프에 독을 섞 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요. 젠장. 정말 미안해요. 에아다가 사과를 했다. 당신 탓이 아니라구. 밴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복도라 나갔을 때 혹시 시베라의 강아지를 못봤소? 그녀는 영문을 모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나! 시베라의 강아지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필경은 그 개가 당신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르지요. 밴스는 그리고 나서 집사가 그녀를 발견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 다. 그러자 에이다는 너무 놀라운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듯 연거푸 뭐라고 중얼거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니의 방에서 돌아온 뒤 이내 뷔용을 마셨소? 밴스가 다시금 질문했다. 이 질문을 받고 에이다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래요. 그 때 맛이 이상하지 않던가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스프에 소금을 잔뜩 넣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밴스가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에이다양. 그는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을 테지? 또 한가지 나쁜 소식이 있어요...... 어머니는 어젯밤 돌아가셨다구. 소녀는 순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이윽고 절망 가운데서도 꿰뚫듯이 밴스 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셨다구요? 그녀가 되물었다. 어떻게 돌아가셨죠? 독약을 마신 거야...... 스트리키니네를 잔뜩. 설마...... 어머니가 자살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이 질문에 우리는 흠칫했다. 그 물음이 우리가 미처 생각조차 못한 가능성 을 나타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밴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 었다. 틀려. 난 꿈에도 그렇게 생각지 않아. 당신에게 독을 먹이려던 인물하고 어머님을 독살한 인간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밴스의 이 대답을 듣자 에이다는 멍청해졌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은 공 포로 굳어진 채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 다. 아아,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난담?...... 나, 나 무서워요! 이제 괜찮으니 안심해요. 밴스가 강조하듯 말했다. 이제 아무 일도 못 일어나게 할 테니까. 당신 신변엔 이십사시간 감시를 딸리게 되어 있어요. 게다가 시베라는 오늘 오후 애틀랜타 시티로 떠나 당 분간 그곳에 묵기로 했으니까. 나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걸요. 매컴이 곁에서 다짐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뉴욕 쪽이 안전합니다. 그 간호원은 그대로 있게 해서 당신을 보 살피도록 할 것이고, 밤낮없이 형사 한 사람을 딸려두기로 할 테니까요. 헤 밍은 오늘 이 집에서 나갈 테지만, 스프루트하고 만하임 부인이 시중을 들 겝니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렸다. 우리가 아래층 홀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집사가 펀 브론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처사죠? 그는 눈을 부라리며 다가섰다. 시베라한테서 전화를 받고 비로소 그린 부인이 돌아가신 사실을 알았소. 그는 매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여느때의 그 우아함도 잊고 있는 모양이 었다. 내게 연락을 취해주지 않은 의도가 뭔가요? 당신을 귀찮게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오, 선생. 매컴이 태연히 받아넘겼다. 노부인이 발견된 것은 돌아가신 지 몇 시간이나 지나서였고, 마침 우리쪽 의사가 곁에 있었으니까요. 펀 브론의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그렇다면 내가 시베라를 만나는 일조차도 강제적으로 막겠다는 건가요? 그는 쌀쌀하게 대들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뉴욕을 떠난다는 것이었소. 매컴이 한 걸음 후퇴했다. 그건 선생의 자유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는데, 한 가닥 경멸감이 담긴 소리였다. 펀 브론은 뿌루퉁해서 꾸벅 인사를 하고 층계를 올라갔다. 선생, 화가 났구먼. 히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틀려요, 부장. 밴스가 그 말을 정정했다. 선생은 근심하고 계시지----대단히 근심하고 계시단 말씀이야. 그날 정오 지나 헤밍은 그린 맨션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시베라는 3시 15분 발 애틀랜타 시티행 기차를 탔다. 당초의 가족 중 남아 있는 것은 에이다, 스프루트, 만하임 부인 세 사람 뿐 이었다. 기막힌 살인설계도 그날 저녁 6시, 매컴은 다시금 비공식회의를 소집했다. 모랑 국장과 히스가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총감마저도 퇴근길에 들러 합석을 했다. 그러내 매컴도, 히스도 수사가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보니 이제는 초조해 질대로 초조해져 있었고, 모랑 국장 또한 지방검사 옆자리에 힘없이 앉아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으며, 밴스 역시도 긴장과 불안을 얼굴에 드러내 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히스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사건의 줄거리를 간단 하게 설명했다. 그는 여러 수사의 선(線)에 대해 대충 설명을 한 뒤, 예방조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히스는 남이 미처 의견을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경찰총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게 여느 보통의 사건이라면 말입니다, 총감님. 그런 대로 이쪽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번 그린가 사건은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놈은 우리가 권총을 찾아내거나, 독약을 찾아내는 그런 것쯤으 로는 끄덕도 안할 놈이죠. 물론 그 동안 가족을 모조리 끌고 와서 한 바탕 족칠 수도 있었습니다만, 상대가 그린가이고 보니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니 었지요. 그런 집안의 사람들을 경찰이 함부로 다루었다, 마구 족쳐댔다고 신문이 떠들어댈 거고, 그 집에서도 가만 있지는 않을 거란 말씀입니다. 보 나마나 일류변호사를 시켜 어쩌구 저쩌구 시끄럽게 굴 테니...... 그렇다고 해서 무한정 기동대를 배치시켜 놓을 수도 없구요. 배치시켜 놓으면 뭘 합 니까? 해산한 순간 또 범행을 저지를 게 분명하구요. 총감님, 이번 사건은 정말 성가시고도 어려운 사건입니다. 경찰총감이 화가 나는 듯 혀를 차고 긴 입수염을 잡아당겼다. 경찰부장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랑 국장이 한 마디 했다. 보통 수사방법이나 경비를 적용시킬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것이 문제는 상속을 둘러싼 집안싸움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밴스가 덧붙여 말했다. 상대방은 신출귀몰이라고나 할까요----하나하나가 빈틈없이 짜여진 각본 에 의해 자행대고 있다고나 할까요. 살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불사하는 그런 기백조차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을 상대로 보통 예방수단이 전혀 소용 없다는 사실은 아마 쉽사리 짐작하실 겁니다. 집안싸움이라? 경찰총감이 우울한 듯이 말했다. 집안싸움이라지만, 이젠 별로 남은 사람이 없지 않소? 혹시 일가족몰살을 뜻하는 제삼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무서운 얼굴로 히스를 보았다. 심부름꾼들은 어떻게 조치했나? 놈들을 잡아 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매컴이 즉시 히스를 변호하며 말했다. 이번 사건에 있어 만일 부장 쪽에 태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오. 심부름꾼에 관해서는 한 사람도 용의사실이 없지요. 헤밍은 다만 광신자일 뿐, 살인을 계획할 만한 정신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아침 그 린가를 떠나도 좋다고 내가 허가를 한 것은...... 그 여자 행방은 알고 있습니다, 총감님. 히스가 이렇게 서둘러 보충설명을 했다. 주방여자에 대해서는? 매컴은 다시금 말했다. 이 여자 역시 고려대상 밖에 있는 인물로서, 살인을 하기에는 기질적으로 도저히 적격성이 부족하지요. 그럼 집사는 어떤가? 총감은 신랄한 투로 물었다. 그 사나이는 삼십 년이나 그 집에서 일하고 있으며, 트바이어스의 유언장 에 의하면 그 노고에 대해 윤택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소. 딴은 괴짜 이긴 하지만, 그에게 그린 일족을 죽일 만한 내력이 있다면, 굳이 늙을 때 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서 그 영감한테 과거를 숨기려는 것 같은 눈치가 전혀 안보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네. 밴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그 집사는 이번 연속살인에 관한 한, 해당자가 될 수는 없을걸. 그 친구는 합리적인 테두리 안에서밖에 추리를 안하지. 발각될 가망이 전 혀 없는 경우라면, 한 사람쯤 죽일 수도 있을 테지만, 이번의 잔학하기 짝 이 없는 살인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그런 용기는 없다고 할 수 밖에. 그 친구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아----너무 늙었지...... 아차, 나좀 보게! 밴스는 몸을 내밀고 책상을 두드렸다. 이제껏 눈앞을 번번히 빠져나갔던 게 바로 이거였어! 생명의 힘! 맞아! 이 것이야말로 이번 범죄의 밑바탕에 있는 거야----기막히게 크고, 자유자재 의 유연성을 가진, 자신에 넘친 생명의 힘! 그리고 이는 노인의 정신구조 를 형성하는 분자(分子)가 아니지. 이 모든 분자 속에는 젊음이 있어---- 젊음에 알맞는 야망과 운명에 도전하는 젊음이 있단 말야. 맞아! 모랑이 지루한 듯이 의자를 앞당기고 히스 쪽을 보았다. 시베라에 관한 감시는 빈틈 없겠지? 경찰부장이 잔혹한 만족감을 나타내듯 싱긋 웃었다. 그 여자는 이제 힘을 못쓰죠. 우리를 속이려 해봤자 어림 없는 일입니다. 경찰총감은 답답한 듯이 책상 앞으로 몸을 숙이고 시가의 재를 떨고 있었 는데 문득 눈을 들어 지방검사를 보았다. 이 모랑국장의 보고에 따르면, 그 노파의 마비증세가 엉터리가 아닌가 의 심하고들 있다면서? 총감은 두툼한 손가락을 매컴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가령 말일세, 노파가 세 자식을 쏘아죽였고, 권총에 들어 있던 총알도 없 어졌다, 그래서 독약을 훔쳤다----남아 있는 두 딸을 처치하기 위해서지. 우선 에이다한테 독을 먹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사람 몫의 독약이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입을 다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생각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컴이 총감을 보고 말했다. 결국 총감님 의견은 이렇습니다. 노파는 우리가 의사를 곁에 배치하고 있 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다를 처치하는 일에 실패해 버렸고, 그렇게 되자 이제는 다 틀렸다고 각오를 하고 스스로 키니네를 마셨다, 이 뜻일 테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총감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 하고 쳤다. 그거라면 질서정연하지. 안 그렇소? 그렇죠. 의심할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밴스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사실에 맞고 있죠.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이론 이란 말씀입니다. 총감, 그 그린 부인은 살인형이기는 했어도 결코 자살형 은 아니었단 말씀입니다. 밴스가 말하고 히스는 밖으로 나갔었는데, 이내 돌아오자 여전히 자살설을 늘어놓고 있는 총감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걸 가지고 떠들어 봤자, 시간낭비입니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방금 드라머즈 의사하고 통화를 했는데, 의사 말씀이 할망구의 하지근육 은 말라비틀어져 있어,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서서 걷다니 온 세 상이 뒤집혀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겝니다. 그런 엉터리가! 이 소식에 아연해져 있는 우리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모 랑 국장이었다. 그렇다면 에이다가 홀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봤다는 그 인간은 도대체 누 구냐구? 맞습니다, 바로 그 점이죠! 밴스가 치밀어오르는 흥분을 가까스로 누르고 말했다. 아아,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게 모든 문제의 해답일 겁니다. 설령 그것 이 범인이 아닐지라도 그 서재에 앉아 밤마다 책을 일고 있었던 인물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지요. 그렇지만 에이다는 그토록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매컴이 이렇게 말했으나 어지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애를 나무라 봤자 소용 없는 일이지. 밴스가 한 마디 했다. 그 애는 딱하게도 무서운 경험에서 벗어난 직후였고, 정상적인 상태라고 는 할 수 없었을 거란 말야. 게다가 협박관념에 빠진 인간이 대상을 삐뚤 어지게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히스가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선생 말씀은 그 애가 본 것은 다른 사람이었는데, 할망구 생각이 머리에 들러붙어 있어 모친을 본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래도 쇼올을 걸치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언이 있지 않나? 매컴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에이다가 그 인물의 얼굴을 잘못 봤다는 것은 있을지언정 이 쇼올을 봤다 는 증언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데? 밴스도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한 말씀이야. 맞아, 그 쇼올 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 군. 그리고 이것이 회의의 결정사항이 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총감은 자리를 떴고 우리는 클럽에서 식사를 했다. 8시 반, 우리는 그린 맨션으로 향했다. 가보니 에이다와 주방여자만이 응접실에 있었다. 그녀는 난로 앞에 앉아 그림의 동화집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책은 덮은 채였다. 만하임 부 인은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녀는 입구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격식을 까다롭게 따지는 이 집으로서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만하임 부인은 뜨개질감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 다. 그러나 밴스가 그대로 있으라고 눈짓을 했고, 그녀는 말없이 다시금 자 리에 앉았따. 또 괴롭히러 왔다구, 에이다. 밴스가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에이다 뿐이란 말야. 밴스의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는 또다시 상냥한 투로 말 했다. 왜 먼젓번에 에이다가 얘기해 준 것 있잖아?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거라구 요. 그녀는 눈을 가지런히 뜨고, 무어라고 할까, 신의 두려움을 깨달은 것처럼 굳은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었따. 복도에서 어머님을 봤다고 그랬지? 정말 봤어요----정말이에요. 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려요. 그것은 어머님이 아니었지. 어머니는 보행불능이었다구. 진짜 마 비환자였단 말야.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거야. 하지만----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곤혹감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오늘 펀 브론 선생님이 유명한 박사를 모시고 와서 어머니를 진찰한다고 어머니한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어젯밤 돌아가셨죠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광기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싸우고 있는 사람 같은 태도를 보 였다. 그러나 밴스는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오펜하이머 박사가 어머니를 진찰한 것은 아니라구. 드라머즈 선생이었지 ----오늘 말야. 그리고 보행불능이었음이 증명된 거라구. 어머나! 이 놀라움의 목소리조차도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에이다는 발성능력을 잃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또 온 것은 말야. 밴스가 말을 계속했다. 에이다가 그날밤 일을 다시 생각해 줬으면 해서야. 아무 것이라도 좋아요. 사실 아가씨가 그 인물을 봤다고는 해도 고작 흔들리는 성냥불로 본 것 뿐 이거든.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래도, 제가 잘못 보다니, 그런? 난 바로 곁에서 어머니를 본 걸요. 그날 밤중에 잠시 깨어 시장기를 느낄 때까지, 혹시 어머니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았나? 에이다가 몸을 흔들고는 부르르 떨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머니 꿈이라면 항상 꾸고 있어요.----그게 아주 무 서운, 소름끼치는 꿈이지만. 잘못을 저지른 까닭도 거기에 있겠구먼. 밴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나서 또다시 물었다. 복도에서 본 인물이 걸치고 있던 어머님의 쇼올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 나? 그러믄요. 에이다는 이렇게 말했는데, 약간 망설인 뒤의 일이었다. 마침 이 때 어떤 사소한,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만하임 부 인과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그녀가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다. 갑자기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부인쪽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무릎에 얹어놓고 있떤 뜨개질 바구니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만하임 부인의 생기없는 유리알 같은 눈이 우리를 응시하 고 있었다. 아가씨가 본 게 누구건간에,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그녀는 생기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봤는지도 모르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게르트루드. 에이다가 재빨리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구요. 밴스가 희한하다는 듯이 여인의 거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우 만하임, 당신은 그린 부인의 쇼올을 쓰는 일이 있소? 저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요. 에이다가 느닷없이 끼어들어 말했따. 또 당신은 밤중에 서재에 숨어들어 독서를 한 일이 있소? 밴스가 또다시 캐물었다. 여자는 말없이 뜨개질감을 줍더니 또다시 침묵으 로 돌아갔다. 밴스는 잠시 그녀를 보고 나서 에이다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런데, 그날 밤 쇼올을 걸칠 만한 인물에 대해 짐작가는 것이 없나? 모, 모르겠어요. 소녀는 더듬거렸고,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면 안되지. 밴스의 어조에는 거친 데가 있었다. 지금은 두둔할 때가 아니라구. 그 쇼올을 걸치는 버릇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지 숨김없이 말해 보라구. 버릇 같은 건 아무도 없지만...... 그녀는 중간에서 말을 끊고 애원하는 눈으로 밴스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냉정히 그대로 쏘아보았다. 그럼 어머니 말고 걸친 일이 있는 사람은? 하지만 내가 본 게 시베라였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테고---- 시베라? 그럼 그 사람도 쇼올을 걸칠 때가 있었군? 에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어쩌다가에요----시베라는 그 쇼올을 좋아했죠..... 어머, 이런 고자 질을 시키다니...... 너무 해요! 밴스는 시무룩해져 있는 에이다의 우울을 몰아내 줄 셈인지 이상한, 안심 시키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것 보라구. 복도에서 본 것은 언니였던 거야. 그런데 아가씨는 어머니 꿈을 항상 꾸고 있었고, 그래서 어머니라고 생각해 버린 거라구. 잠시 후 우리는 그집에서 물러났다. 내가 항상 강조하고 있는 대로라구. 모랑 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다운타운으로 가는 차 안에서의 일이다. 흥분상태하에서 목격한 사실에 대한 증언이란 무가치한 것이지. 그런데 우리 형편은 어찌 되어 있나? 매컴이 잠시의 침묵 뒤에 밴스를 보고 물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야지. 밴스가 낙심천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끝없는 바다라네----그렇지만 난 조금도 안믿고 있어. 에이다가 복도에서 본 게 시베라라는 사실 말일세. 매컴이 펄쩍 뛰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밴스가 음산한 한숨을 쉬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시라, 하오면 이 신비스러운 사건은 풀리나이다. 그날 밤 밴스는 2시 가까이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토요일은 지방검사국의 공휴이이어서 매컴은 밴스와 나를 은행협회 클럽에 서의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형사재판소 빌딩에 닿아보니 그는 일이 잔뜩 밀려 진땀을 빼고 있 어 우리는 그의 전용회의실에서 식사를 주문해 먹었다. 이날 정오에 집을 나설 때 밴스는 몇 장의 문서를 포켓에 넣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전 날밤 그가 쓰고 있었던 것은 이 문서였던 것이다. 점심이 끝나자 밴스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담배에 불을 당겼다.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매컴, 오늘의 초대를 고맙게 받은 것도, 이 모두가 예술을 논하 기 위해서였다네. 바라건대 자네의 경청 있기를! 매컴이 노골적으로 귀찮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 사람아, 나는 지금 정신없이 바쁘다구. 그만 물러가서 일을 해야겠어. 밴스가 한숨을 쉬며 익살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의자에 앉아, 심미적 구성에 관한 계몽적인 강의를 안할 수가 없다네. 너무 큰 소리로 하지 말게. 매컴이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옆방에서 일을 해야 한단 말야. 그런데 내 강의란 것은 그린 살인사건에 관한 것이라구. 매컴이 멈추어서서 뒤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좋아. 뭔가 유익한 시사(示唆)가 있다면 들어 줄 수도 있지. 밴스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당겼다. 알겠나, 매컴?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는데, 그 태도는 보기에는 생기라고는 없었다. 훌륭한 그림과 사진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위(相違)가 딱 한 가지 있네. 대 다수의 화가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兩者)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는 거야. 실은 이 기술적인 단 절, 이게 바로 내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강의의 알맹이지...... 매컴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밴스가 손을 높이 들어 막았다. 잠시 참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라! 무릇 예술적인 그림과 사진과의 차 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림이 배합, 구성, 체계화가 베풀어져 있는 데 대하 여 사진은 하나의 광경, 또는 한 단편의 리얼리즘에 대한 우발적인 인상에 불과하지. 그뿐이라고. 결국 사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로의 현실주의에 지나지 않는 거야.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림에는 형태가 있지만, 사진은 혼 돈의 복사그림이지. 참된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는 경우, 알겠나? 그는 빛과 색깔의 퍼짐, 선과 윤곽의 모든 것을 배합하는 것으로 자기의 아이디어 속 에는 이미 존재하는 바 구성관념에 맞추려고 노력하지----바꾸어 말하면, 그는 그림의 모든 요인을 어떤 기초적 디자인에 종속시키려고 하네. 나아 가서 이런 디자인에 모순되는 대상이나 세부가 있으면, 이를 뭉개나간단 말야. 매우 유이간 강의구먼. 매컴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린살인사건이 어떻다는 겐가? 그런데 이에 비해 사진은. 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심미주의적 뜻에 있어 디자인도, 배합조차도 빠져 있지. 딴은 사진가가 어 떤 상에 포즈를 취하게 하거나, 옷을 걸치게 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어. 어 떤 나무를 촬영하고자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경우 또한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사진의 테마가 되는 피사체에 대해 화가가 그림을 대했을 때처럼 자유로운 구상을 덧붙이는 것으로, 예정한 예술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디자 인에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구. 사진의 경우 언제나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 남게 마련이지. 뜻도, 목적도 지니지 못하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단 말야. 결국 통일개념이 없지----자연 그대로처럼 말일세. 매컴이 견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굳이 자네의 말을 안들어도 내게도 초보 정도의 이론은 있다구.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본론을 말하지 그래? 그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또 한가지 말할 게 있네. 흔히 있는 일이지만, 복잡하고 유현(幽玄)한 디자인에 의한 그림은 그것을 보는 자에게는 당장 에는 구성을 드러내지 않지.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도 단순하고 명백한 그림의 디자인만이 순간적으로 파악되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제삼자가 그림의 심층에 있는 디자인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그림을 면밀히 분석한 뒤의 일이지. 결국...... 맞아, 맞아요. 매컴이 손을 들고 가로막았다. 그림과 사진은 틀려. 그림에 있는 대상엔 디자인이 있어. 사진에 있는 대 상엔 디자인이 없지. 그 디자인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연구해라, 그 말이 아닌가? 그래서? 밴스가 다시금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매컴, 우리가 그린가에서 일어난 그 숱한 사건을 보아온 그 관찰법이, 바 로 사진의 대상이 모두 헝클어져 있는 것과 같았다는 거라구. 우리는 개개 의 사실을 그것이 떠올라온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찰만 했지, 정작 분석하 는 작업을 게을리했단 말일세.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이 사건 전체가 개 개의 독립된 정수(整數)의 순서 또는 짝지음인 것처럼 다루는 잘못을 저지 른 거야. 따라서 각 정수 자체의 뜻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지. 어때, 알 수 있겠나? 그것 참, 기가 차구먼. 어서 말이나 해보라구. 그래? 아무튼----이 놀라운 살인사건 전체에는 어떤 디자인----음모가 있다구. 모든 연기의 배후에는 예견이 있다구. 그림의 경우로 말하자면, 면 밀히 배합된 구성이 있단 말일세. 모든 사건이 이 중심적인 형태에서 발생 한 것이고, 매사는 근본적인 구조개념에 의해 조형된 것이지. 간단히 말하 지. 그린사건은 그림이야. 사진이 아니지. 그리고 이 계시에 빛에 비추어 사건을 분석한다면----모든 외부요인에 내재하는 바 연관관계를 꿰뚫어, 시각에 나타난 형태를 해체시켜 그 발생의 뿌리로 환원해 본다면----그때 야말로 우리는 이 그림의 구성을 알게 될 걸세. 이 때야말로 우리는 이 놀 라운 범인이 그림을 조립하는 데 쓴 기초적인 디자인을 뚜렷이 보게 될 거 라구. 그리고 동시에 그 인물도 판명될 걸세. 자네가 말하는 뜻은 알 수 있어. 매컴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직은 그럴 테지. 밴스도 그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우리가 전체를 체계적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구. 우리는 추상(抽象)이 지니는 알맹이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좀 가르쳐 주게. 이 피로 그려진 구성적 디자인을 측정하려면 어디 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매컴의 질문에 응해, 밴스가 마침내 가져온 문서를 꺼내놓았다. 어젯밤의 일이야. 밴스는 간결하게 설명했다. 난 그린사건의 뚜렷한 사실을 역년체(曆年體)로 간추려 봤네. 그림의 경우 에 비유하자면, 우리가 과거 몇 주간에 걸쳐 들여다본, 이 잔인한 그림의 외부요인에 대해 중요한 것을 몽땅 적어 본 거야. 그러니까 분석의 기초로 서는 충분하다고 보네. 그는 문서를 매컴에게 내주었다. 진실은 이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구. 만일 우리가 이 사실들의 연관 을 지닐 수 있다면----결국 각기의 사실이 지니는 정확한 가치에 따라 위 치를 정하고, 상호간의 관계를 확립시킬 수 있다면----그 때는 이 가공할 범죄의 흑막에 있는 인간의 정체를 정확히 꿰뚫는 때가 되는 것이지. 매컴이 의자를 햇빛쪽으로 돌리고 말없이 읽어내려갔다. 나는 이 문서를 보관해 두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가 장 중요한, 깊은 효과를 지니는 문서였다. 아니, 그보다는 이것이야말로 그 린가 연속살인사건의 해결의 열쇠가 된 문서였던 것이다. 이하는 원문(原文)그대로의 내용이다. 일반적인 사실 1. 그린 맨션에는 서로 증오하는 분위기가 있음. 2. 그린 미망인은 잔소리와 푸념이 많은 마비환자로서, 가족들 전체의 인생 을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음. 3. 자식은 5명 있음----딸 둘, 아들 둘 그리고 양딸 하나----각자가 서로 적개심과 비꼬임을 드러내며 생활함. 4. 만하임 부인은 옛날 죽은 트바이어스 그린과 안면이 있으며, 그 유서에 도 재산의 일부를 상속받도록 지정하고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의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음. 5. 트바이어스 그린의 유언장 조항에 따르면, 직계가족은 25년간 그린 맨션 에 거주해야 하며, 위반하는 자는 유산상속권을 잃게 되어 있음. 단 에이 다만은 결혼 후에는 자유임. 6. 그린 미망인의 유언장에 의하면, 자식들은 모두 똑같은 액수의 재산을 상속받으며, 그중 사망자가 있으면 생존자가 골고루 나눠갖도록 되어 있 음. 7. 그린가의 침실 위치는 다음과 같음. 쥬리어와 렉스는 정면에 있어, 서로 대면(對面)함. 체스터와 에이다는 중앙에 있어 서로 대면함. 시베라와 그 린 미망인은 배면(背面)에 있어 서로 대면함. 두 방 사이의 통로는 없음. 단 에이다와 미망인의 경우는 예외이며 이 두 방은 같은 발코니를 향하 고 있고, 왕래가 가능함. 8. 트바이어스 그린의 서재는 12년간 폐쇄되어 있었다고 하며, 범죄학에 관 한 놀라운 장서로 가득차 있음. 제 1의 범행 9. 쥬리어의 살해는 가까운 거리에서 정면으로 저격당한 것에 의함. 밤 11 시 30분. 10. 에이다는 등에 맞았음. 본인은 소생함. 11. 쥬리어는 침대에서 발견. 얼굴에 두려움과 놀라움의 표정이 있음. 12. 에이다는 방바닥, 화장대 앞에서 발견. 13. 두 방 모두 전등이 켜져 있음. 14. 두 총소리 사이의 경과시간 3분 이상. 15. 펀 브론은 즉시 호출을 받고 30분 후에 도착. 16. 펀 브론의 것이 아닌 발자국 한 쌍이 집 안을 왕복한 것을 발견했으나, 식별은 불가능. 범행 전 30분 이내의 것임. 17. 양쪽 모두 32구경 연발권총에 의한 것임. 18. 체스터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오래된 32구경 연발총이 행방불명이 되었 다고 함. 19. 그린 미망인은 에이다의 침실에서 발사된 총소리로 잠을 깼으나, 발자국 소리도, 문이 닫히는 소리도 못들었음. 20. 집사인 스프루트는 두 번째 총소리가 일어난 순간 심부름꾼 전용계단을 내려왔으나, 도중에 아무도 못만났고, 또한 아무 소리도 못들었음. 21. 렉스는 에이다의 옆방에 있었으나 총소리를 못들었다고 함. 22. 시베라는 체스터와 마찬가지로 절도설을 부정하면서도 대안의 제시를 거부. 단 그린가 전원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함. 23. 에이다의 진술. 방은 어두웠으나 누군가가 있는 것을 깨닫고 잠에서 깨 어났음. 또한 침입자에게서 도망치다가 붙잡혔음. 24. 에이다의 진술(2). 침대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갔을 때 몸에 닿은 손이 있었음. 그러나 그 손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고 함. 25. 시베라는 쥬리어를 쏘아죽인 범인이 에이다라고 고발함. 또한 체스터의 방에서 권총을 훔쳐낸 것도 에이다라고 고발함. 26. 펀 브론은 그 거동에 의해 시베라와의 사이에 기묘한 사귐이 있음을 스 스로 드러냄. 제 2의 범행 27. 쥬리어 및 에이다 저격사건 4일 후 밤 11시 30분 체스터 살해됨. 32구 경 권총에 의한 가까운 거리에서의 정면발사임. 28. 그의 얼굴에 공포와 놀라움의 표정이 있음. 29. 시베라가 총소리를 듣고 집사를 부름. 그녀는 총소리를 들은 직후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함. 30. 체스터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음. 그는 독서 중 사살되었음. 31. 정면 보도에서 뚜렷한 발자국 2쌍이 발견됨. 이 발자국은 범행 전 30분 이내의 것임. 32. 이 발자국에 들어맞는 고오르인의 구두 한 켤레가 체스터의 방에서 발 견됨. 33. 에이다는 체스터의 죽음을 예감. 그 사실을 알자마자 쥬리어와 같은 방 법에 의한 살인임을 이내 짐작함. 34. 렉스의 진술. 총성이 일어나기 20분 전에 복도에서 소리가 나는 것과 문 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함. 35. 에이다도 렉스의 진술내용을 듣자 11시 지나 문이 닫히는 소리 같은 것 을 들은 것을 생각해 냄. 36. 주방여자는 에이다에게 해를 미치려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흥분함. 단 쥬리어와 체스터는 살해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 장함. 37. 렉스는 심문 도중 펀 브론을 살인자라고 고발함. 제 3의 범행 38. 렉스, 미간을 맞아 즉사함. 32구경 권총에 의함. 아침 11시 20분. 매컴 검사와 통화 후 5분밖에 지나지 않음. 39. 쥬리어, 체스터의 경우와 달리 렉스의 얼굴에는 공포나 놀라운 표정이 없음. 40. 시체는 난로 앞 방바닥에서 발견. 41. 에이다가 가져오도록 한 도면, 현장에서 사라짐. 42. 이층에 있는 자 전원 총소리를 못들음. 이에 비해 아래층 식당에 있던 집사는 분명히 들었음. 43. 에이다의 방에서 발자국 발견. 발코니로 들어온 것임. 44. 정면 보도에서 발코니에 걸쳐 한 쌍의 발자국 발견. 이는 이날 아침 9 시 이후에는 아무 때고 생길 수 있음. 45. 이상 3쌍의 발자국 원형(原型)인 고오르인의 구두가 리넨실에서 발견됨. 46. 이 구두를 도로 리넨실에 두었는데, 그날 밤 안으로 없어짐. 제 4의 범행 47. 렉스 피살 2일후 에이다와 그린 미망인 12시간 간격으로 각각 독약에 중 독당함. 48. 에이다는 긴급구조로 목숨을 건짐. 49. 에이다가 독을 마시기 직전 집에서 나가는 펀 브론의 모습을 봄. 50. 에이다의 발견은 시베라의 강아지가 초인종 끈을 입에 물고 있었기 때 문임. 51. 에이다의 진술. 간호원이 뷔용 준비가 되었노라고 알려준 후 그녀의 방 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고 함. 단 쥬리어의 방으로 쇼올을 가지러 갔었으 며, 따라서 몇 분간 문제의 뷔용은 무방비상태에 있었다고 함. 52. 그린 미망인은 이튿날 아침 키니네 중독으로 사망했음이 발견됨. 53. 이 키니네는 전날밤 11시 이후에 투약된 것으로 추정됨. 54. 이날밤 펀 브론은 시베라를 방문했음. 그는 11시 15분에 집을 나갔다고 함. 55. 문제의 키니네는 탄산레몬에 섞여 있었음. 따라서 미망인 혼자의 힘으로 이것을 마셨을 가능성은 없다고 추정됨. 순서와 배열에 수정을 요하는 사실 56. 쥬리어, 에이다, 체스터, 렉스의 4명에게 사용된 권총은 같은 것임. 57. 3쌍의 발자국은 외부사람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집 안의 인간이 만 든 것이 분명함. 58. 범인은 쥬리어, 체스터와도 밤늦게도 허물없이 만날 수 있는 인물임. 59. 범인은 에이다에 대해서는 정체를 나타내지 않고 침입했음. 60. 렉스가 살해되던 날 펀 브론은 약품가방에서 키니네 3그램, 몰핀 6그램 을 도난당했다고 보고함. 도난장소는 그린 맨션임. 61. 서재의 수사에 의해 밤중에 그곳에 드나든 인간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자가 촛불을 켜놓고 범죄학에 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판명됨. 62. 서재를 드나든 자는 독일어를 잘 아는 인물임. 63. 그 전날 밤 그린 미망인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고 말함. 64. 펀 브론은 부인의 마비증세는 운동불가능이라고 주장함. 65. 시체해부 결과 그린 부인의 마비증은 매우 심하여 절대로 걸어다닐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됨. 66. 에이다는 해부 결과를 듣자 복도에서 모친의 쇼올을 걸친 인물을 보았 노라고 증언함. 67. 쥬리어 및 에이다에 대한 저격 때 집안에 있었던 자, 또는 그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음. 체스터, 시베라, 렉스, 그린 부인, 펀 브론, 버 튼, 헤밍, 스프루트 및 만하임 부인. 68. 체스터에 대한 저격 때 집 안에 있던 자, 또는 그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음. 시베라, 에이다, 그린 미망인, 펀 브론, 헤밍, 스프루트 및 만하임 부인. 69. 렉스에 대한 저격 때 집 안에 있던 자, 또는 그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음. 시베라, 그린 미망인, 펀 브론, 헤밍, 스프루트 및 만하임 부인. 70. 에이다에 대한 독물투약 때 집 안에 있던 자, 또는 그 가능성이 있는 인 물은 다음과 같음. 시베라, 그린 부인, 펀 브론, 헤밍, 스프루트 및 만하 임 부인. 71. 그린 미망인 독살 때 집 안에 있던 자, 또는 그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음. 시베라, 펀 브론, 에이다, 헤밍, 스프루트 및 만하임 부인. 필사의 추적 매컴은 이 문서를 읽고 나서 처음부터 거듭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그것 을 테이블 위에 놓고 말했다. "하긴, 주요점들에 대해서는 제법 철저하게 나열되어 있구먼. 그렇지만 내 가 보기에 그 사이의 고리가 없어. 오히려 이번 사건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닌가?" "글세. 나는 신념으로 말할 수 있거니와, 그 배열을 고치고, 해석을 주는 것으로 필경 백일하(白日下) 같은 명석함을 얻을 수 있을걸." 매컴은 또다시 문서를 펼쳐보았다. "이걸 당사자 전원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쓰면 아마 효과적일걸." "얼핏 보기에는 그럴 테지." 밴스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지만 우선 디자인의 발생학적인 선을 찾아내어, 이어 거기에 따르는 도안의 보조적 형태의 연관관계를 더듬어 볼 셈이지." "그럼 자네 같으면 이 속에서 어떤 뜻을 끄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매컴이 딱하다는 듯 어깨를 흠칫했다. "격자무늬의 매듭은 몇 가지 보이고 있지----결국 도안의 시사(示唆)야. 그렇지만 근본적인 디자인에 대해서는 솔직한 말이지만 아직 희미하다네." 그러는데 비서가 들어와서 매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전했다. 매컴이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갔다. 그는 그것을 읽 고 나서 밴스에게 넘겨주었다. 존 FX 매컴 검사 본인은 제가 알고 있는 한, 비밀의 맹세를 깨드린 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하오나 뜻밖의 예기치 않은 사정이 돌발하고 보니, 침묵을 지키는 의무보다 는 더 큰 의무의 부채를 짊어지는 것 또한 부득이한 일이라 믿어집니다. 신문에서 보건대 뉴욕 소재 그린 맨션에서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참사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본인으로서는 이 1년 남 짓 선서에 의해 본인 혼자의 가슴에만 간직해온 사실에 대하여 귀하에게 그 대로 알려드리는 것이 성직의 선서에 따른 의무라는 결론에 이르른 것입니 다. 물론 이렇게 결심하기까지에는 모든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본인이 이 신 뢰를 배반하게 된 것도 오로지 선을 위해서임을 거듭 밝히는 바입니다. 이 점 헤아리십시오. 작년 8월 29일 밤, 한 대의 차가 목사관 앞에 와서 멈추었고, 한 쌍의 남녀 가 비밀로 결혼식을 거행토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직책상 이런 부탁을 받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이 남녀를 보건대 양가집의 자손 같았으 며 신을 믿는 마음 또한 두터워 보여, 본인은 그들의 말에 의하여 비밀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것입니다. 결혼허가증----이미 그날 오후 뉴하벤 시청에서 교부받은 것이었거니와-- --에 의하면, 그들 남녀는 뉴욕시 거주 시베라 그린과 역시 뉴욕시 거주 아 더 펀 브론이었습니다. 밴스는 편지를 읽고 나서 매컴에게 돌려주었다. 이윽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서서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틀렸어!" 그는 느닷없이 소리쳤다. 매컴이 어리벙벙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요점을 말하게!" "그래도 모른단 말인가?" 밴스는 재빨리 지방검사의 책상으로 다가섰다. "맞았어! 이것이야말로 내 메모에서 누락되고 있던 마지막 사실이라구!" 그리고는 그는 마지막 문서를 펼쳐 다음같이 보충했다. 72. 시베라와 펀 브론은 1년 전 비밀리에 결혼했음. "그런데 그게 무슨 참고가 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군." 매컴이 답답하다는 듯이 항의했다. 그러자 밴스가 말했다.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 그렇지만 오늘밤 심사숙고해 보겠네."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밴스는 내게 저녁인사를 하고는 서재로 들어갔 다. 이날밤에는 나역시 할 일이 제법 많았고, 일을 끝낸 것은 12시가 임박해 서였다. 침실로 물러가려고 서재 앞을 지나려니, 문이 약간 열려 있어, 싫어 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밴스의 모습이 보였다----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그 문서를 앞에 펼쳐 둔 채였다----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 다. 팔꿈치께에 놓여진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다. 밤중 3시 반 경에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어디선지 발소리가 들리는 사실 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나는 살며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복도 끄트머리에 는 한 줄기의 불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내 그것이 서재의 열려진 문 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니 밴스가 방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턱을 가슴께까지 파묻고, 두 손은 가운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였다. 방 안에 자욱한 담배 연기가 깔려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희미해 보였다. 나 는 침대로 돌아와 한 동안 누워 있다가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 다. 나는 8시에 일어났다. 어둡고 음산한 일요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커피를 가 져오게 해서 전등 밑에서 마셨다. 9시, 서재쪽을 보니 밴스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10시 경이었다. 밴스가 거실로 들어왔다. 이 기나긴, 잠못이룬 밤의 효과는 한눈에 나타나 있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은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으며, 어깨마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과업과 밤새 싸우고 있 었던 것이다. "디자인의 궤적은 따라갈 수 있었는데 말야." 그는 두 손을 난로 쪽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그건 상상을 벗어난, 무서운 것이었다." 그는 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 대신 매컴에게 연락해 주게. 곧 만나자고 하라구. 아침식사나 같이 하 자구 말야."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는데, 하인에게 목욕 준비를 시키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컴은 한 시간도 안되어 찾아왔다. 밴스는 수염도 깎고, 옷도 갈아입고 있어서 훨씬 생기있어 보였다. 식사 동안 그린사건에 대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서재의 안락의 자에 자리를 잡게 되자 매컴은 좀이 쑤셔서 이내 이렇게 물었다. "밴의 이야기를 듣자니, 자네 뭔가 알아낸 것 아냐?" "글세----" 밴스가 나른한 듯이 말했다. "모든 항목의 배열이 제대로 된거야. 애쓴 보람은 있었지. 그렇지만 그것은 도저히 이세상 일 같지가 않단 말야." 매컴이 몸을 내밀었다. 얼굴은 긴장과 불신에 넘쳐 있었다. "그럼 진상을 알았구먼?" "암. 알았지." 조용한 대답이었다. "결국 이 지옥 같은 살인설계도 배후에 있는 게 누구인지를 말야. 그렇지 만 도저히 믿어지질 않는구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밴스는 애써 웃으려고 했으나 헛일이었다. 매컴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잠시 후 밴스가 말했다. 용서하게나, 아직은 자네에게 말할 수가 없구먼. 몇 가지 사실을 조사해 보기 전엔 말할 수 없다구. 도안은 이미 뚜렷하지만, 확증을 찾아내야 한단 말야. 그래, 그 확증작업은 언제 끝나나? 이 경우 강경수단을 취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매컴은 잘 알고 있었 다. 되도록 속히 마쳐 버려야지. 밴스가 한 장의 종이쪽지에 무언가 적어넣더니 그것을 매컴에게 넘겨주었 다. 이게 바로 그 트바이어스의 서재에 있던 책 중에서 밤이면 찾아가서 읽던 인물이 남겨놓고 있는 책이지. 난 이 책이 필요하다구. 하지만 이걸 갖고 나온 사실이 알려지면 거북하지. 간호원한테 연락해서 그린 부인의 열쇠를 훔쳐내 아무도 모르게 빼돌리게 할 수는 없을까? 어느 책꽂이에 있는지는 자네도 알고 있을 테니까. 매컴은 쪽지를 받아들고는 말없이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문 앞에서 멈추 어섰다. 그 여자가 집을 비워도 별 탈이 없을까? 상관 없다구. 밴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현재상태로는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매컴은 잠시 후에 돌아왔다. 아마 곧 가지고 올 걸세. 30분 뒤 간호원이 책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밴스는 보자기를 풀러 책을 곁 에 놓았다. 그럼 잠시 독서를 해야겠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으나, 긴장한 빛을 감출 수는 없 었다. 매컴은 곧 일어섰다. 나도 좀 바쁘단 말야. 그럼 언제 만나 볼수 있겠나? 세 시에 들러 볼까? 밴스가 안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다섯 시로 하세. 그 때면 독서도 끝날 테니까. 매컴은 오후 5시 조금 전에 다시 들렀고, 그 때 밴스는 여전히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내 거실로 나와 우리와 합류했다. 그림은 점점 뚜렷해져 가는군.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살인마의 괴이한 소행에도 점차 현실성이 덧붙여지고 있네. 그렇지만 아 직도 확인이 필요한 사실이 몇 가지 남아 있구먼. 자네의 가설을 옹호하기 위해선가? 천만에. 그런 게 아니지. 가설 자체는 빈틈이 없다구. 진실에 대해서는 이 제 손톱만큼도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러나----아아, 역시 안돼! 매컴, 모 든 증거가 입증되지 않고는! 차를 마시고 나서 밴스가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그는 물었다. 그런데 매컴, 시베라의 동정에 대해 뭔가 보고받은 게 없나? 대수로운 것은 없구먼. 그녀는 아직 애틀랜타 시티에 있지. 아마 오래 묵 을 작정일거야. 어제 집사한테 전화를 걸어 옷을 더 보내달라고 했다는 거 야. 흠, 그래야 되겠지. 밴스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결심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식구들하고 잠시 대화를 나눠야겠군. 잠깐 다녀오겠네. 한 시간도 안걸릴 거야. 여기서 기다리게, 매컴. 그러면서 그는 내게 눈짓을 했다. 우리는 이내 복도로 나와 층계를 내려갔다. 15분 후 우리는 그린 맨션 앞 에 차를 세웠다. 스프루트가 나와 대문을 열어 주었는데, 밴스는 다짜고짜 그를 객실로 끌고 갔다. 시베라양이 어제 옷을 더 보내달라고 전화를 했다면서?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예. 옷은 어제 보내드렸습니다. 그 전화의 얘기로 미루어 볼 때, 아가씨는 얼마나 더 그곳에 묵게 되리라 생각하나? 스프루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굳이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시베라 아 가씨는 달포 가량은 더 묵으시는 게 아닌가 짐작이 되는군요. 밴스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썩 중대한 질문이 있네. 에이다양이 총에 맞은 날 밤, 자네가 맨처음 방으로 들어가 아가씨가 화장대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말일세, 그 때 창문은 열려 있었나? 잘 생각해서 대답해 달라구. 그 창은 화장대 바로 옆에 있고, 돌로 된 발코니로 오르는 층계를 내려다 보고 있었지. 창은 열려 있었나, 닫혀 있었나? 스프루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망설임없이 말했 다. 창은 열려 있었습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합니다요. 체스터 서방님하고 저하고 아가씨를 안아 침대로 옮겼는데 감기가 드시면 안되겠다 싶어 이내 닫은 생각이 나는군요. 문은 얼마만큼 열려 있던가? 밴스가 흥분을 누르듯이 말했다. 팔, 구 인치라고 할까요, 아니면 십이 인치쯤 됐을지도. 고맙네, 스프루트. 그럼 만하임 부인을 좀 불러 주게. 그녀가 나타나자 밴스는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그녀가 의자에 앉는 순간 그는 그 앞에 버티고 서서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만하임 부인, 이제 마음의 진실을 알릴 때가 왔소. 이제 당신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하려는데, 정직한 대답을 안해 준다면 경찰에 고발할 테니 그리 아 시오. 여자는 완고하게 입술을 깨물고 다른 곳을 보았다. 당신 남편은 십삼 년 전에 뉴 올리언스에서 죽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 소. 그 사실에 틀림이 없나요? 밴스의 질문이 별 것이 아닌 사실에 안심한 양, 여자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요. 십삼 년 전이죠. 몇 월달이었소? 시월이었어요. 오랫동안 앓았나요? 일 년쯤 될거에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어요? 여자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어떤 병원에. 그리고 당신 나한테 지난 번에 분명히 말했죠? 트바이어스 그린씨를 처음 만난 것은 남편이 죽기 일 년 전이라고 말이오. 그렇다면 남편이 그 병원 에 입원한 것과 같은 무렵----결국 십사 년 전이 되죠? 여자는 멍한 눈으로 밴스를 보았을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또 그린씨가 에이다를 양딸로 삼은 것도 바로 십사 년 전의 일이었죠. 여자가 흑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포의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 다. 그래서 남편이 죽자 이내. 밴스가 여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린씨에게 의지하려고 뉴욕으로 왔죠. 일자리를 주리라고 굳게 믿고 말입니다. 밴스가 여인에게로 다가가서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상냥하게 말했 다. 에이다는 당신 자식입니다. 아닙니까? 여인은 경련하듯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에이프런에 묻었다. 나, 그린 나리한테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틀림없이 지키겠다고 맹세했어 요. 여인은 서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겠다구요----에이다한테조차 말하지 않겠노라구요 ----저를 이 집에 두어 주신다면----그 애 곁에 두어 주신다면----굳게 맹세했는걸요. 당신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밴스가 여인을 위로했다. 내가 짐작으로 맞췄다고 해서 당신 잘못은 될 수 없죠. 잠시 후 만하임 부인이 사라질 때까지 밴스는 그녀의 근심과 슬픔을 더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에이다를 불러냈다. 그녀는 객실로 들어왔는데, 한눈에 이 소녀가 어떤 긴박한 사태하에 있음 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맨 먼저 한 질문 부터가 그러했다. 밴스 선생님, 알아내셨나요? 그녀는 딱할 정도로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무서워요. 이렇게 큰 집에 외톨이로 있다니----밤엔 더군다나 무서워서.. 필요 없는 상상력의 포로가 되면 안돼요, 에이다. 밴스가 이렇게 충고하고 나서 덧붙였다. 멀지 않아 당신의 공포를 말끔히 몰아내 줄 수 있을 거요. 사실 내가 오늘 온 것도 판명된 사실을 보충하기 위해서라구요. 당신 같으면 나를 도와주 리라 믿고 말이죠. 그렇게 해드릴 수 있으면 오죽 좋겠어요? 하지만...... 밴스가 싱긋 웃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시베라가 독일어를 잘 하는지, 어떤지 이것뿐이라구 요. 소녀가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그러고보니 쥬리어도, 렉스도 지껄이고 있었어요. 아버님 이 억지로 배우게 한 거에요. 게다가 아버님도 독일말을 잘 하셨죠. 그래도 시베라의 독일말엔 사투리가 섞이지 않았을까? 그저 약간이에요. 아무튼 독일어는 잘 해요. 당신에게 확인해보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었다구. 그럼, 당신 뭔가 정말 알고 있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아, 언제나 이 지긋지긋한 서스펜스가 끝이 날까 몰라. 이제 당신 목숨을 노리는 자는 없으니까 말야, 에이다. 그녀가 순간 캐듯이 그를 보았다. 그의 태도에 있는 무언가가 그녀를 안심 시켜 준 모양이다. 우리가 물러날 무렵에는 어지간히 침착을 되찾고 있었 다. 집으로 돌아가 보니, 매컴이 서재 안을 초조한 듯 서성대고 있었다. 거듭 밝혀낸 사실이 몇 가지 있네.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밴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점 한 가지를 알 길이 없네. 그는 이내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분 후 그는 되돌아 오더니 심부름꾼을 불러 일주일간의 여행준비를 시켰다. 난 떠나겠네, 매컴. 그는 약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행을 떠나는 거야.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우겠네. 그렇지만 미리 말해 두 겠는데, 그린사건이라면 염려 말게나. 내가 없는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안했고, 30분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없는 사이에 부탁해 둘 일이 있다구. 밴스가 외투를 입으면서 매컴에게 말했다. 쥬리어가 살해된 전날부터 렉스 살해 다음날까지의 사이의 완전하고도 상 세한 기상보고서를 작성시켜 두게. 역으로는 아무도 따라올 필요가 없다면서 그는 서둘러 떠났다. 남겨진 우 리는 이 수수께끼의 여행이 과연 어느 방향으로 밴스를 이끌었는지 알 재 간이 없었다. 위기일발 밴스가 뉴욕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8일 뒤의 일이었다. 그가 도착한 것은 12월 13일 일요일 오후였는데, 그는 옷을 갈아 입고 나자 직접 매컴에 게 전화를 걸어 30분 후에는 그쪽으로 가겠다고 전했다. 그리고는 자랑하는 이스파뇨 쉬저를 차고에서 끌어내라고 일렀다. 다운 타 운으로 차를 몰고 있는 사이에도 그는 우울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러나 형사재판소가 있는 센터가로 접어들었을 때 그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성공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 하지만 난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게야. 내 눈으로 기록을 보지 않고는 내가 내린 판단에 무조건 따를 수가 없었지. 지방검사국에서는 매컴과 히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스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담배에 불을 당겼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구먼." "아무 일도 없었어. 자네 예감은 매우 정확했지. 그린 맨션의 사태는 평온, 또한 정상인 것 같구먼." 그러자 히스가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이번 주엔 우리 운수가 괜찮은 편이죠. 별다른 일은 없었고, 시베라가 어 제 돌아왔어요. 펀 브론은 그 길로 집에 늘어붙어 있죠." "시베라가 돌아왔다구?"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어제 저녁 여섯 시였지." 매컴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신문기자들이 그녀에 대해 냄새를 맡고 선정적인 기사를 써댄 거야. 그 뒤 론 그 여자는 한 시간도 마음편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어제 돌아와 버린 거라네. 난 오늘 아침 그녀를 만나봤지." 밴스는 이 때 창가로 다가서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베라가 돌아왔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이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내가 부탁해 둔 기상보고서를 보여주게." 매컴이 서랍에서 한 통의 타이프된 문서를 넘겨주었다. 밴스는 그것을 한 동안 읽고 나서 책상 위에다 던졌다. "당신 얘기란 뭔가요, 밴스 선생?" 부장은 조바심이 나는 듯 물었다. "매컴 검사 얘기를 듣자니, 뭔가 알아낸 모양이신데, 어서 속시원히 말해 보시죠. 어떤 증거이건, 어떤 놈이건 상관 없소. 나한테 귓속말만 던저 주 면, 당장 쫓아가서 잡아낼 테니까." 밴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죠. 증거도 갖고 있어요. 말하기엔 아직 이 른지도 모르지만----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태를 더이상 관망할 때가 아니지. 어서 외투를 입으시오, 부장----매컴, 자네도 말야. 어두워지기 전에 가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런 법이 어디 있나?" 매컴이 대들듯이 말했다.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단 말야!" "지금은 설명할 수 없다구. 우선 떠나세." 그러자 히스가 물고늘어졌다. "그렇게 환히 알고 있다면서 내게 체포를 시키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죠?" "당신은 조만간 체포하게 된다구요. 부장----한 시간 이내에 말이오." 밴스의 약속은 불쑥 싱겁게 던져진 것이었지만, 히스도, 매컴도 펄쩍 뛰었 다. 5분후 우리 네 사람은 밴스의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스프루트가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밴스가 서둘러 말했다. "우리는 시베라양을 만나러 왔네. 객실로 잠깐 내려오시라고 전해 주게." "미안합니다마는 시베라 아가씨는 외출 중이십니다." "그럼 에이다를 불러 주지." "에이다 아가씨도 안계시는데요." 집사의 감정 없는 말투가 우리가 몰고 온 긴박한 분위기와는 너무도 동떨 어져 있어 괴이한 느낌마저 일으키게 했다. "두 사람은 언제 돌아오나?" "모르겠는데요. 함께 드라이브를 떠나셨죠. 곧 돌아오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밴스가 초조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기다려야겠군."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객실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되돌아서 서 무서운 눈으로 집사를 불렀다. "여보게, 두 사람이 함께 드라이브를 떠났다고 했지? 몇분전인가?" "약 십오분----이십분쯤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 차로 떠났나?" "펀 브론 선생님 차였죠." "그럼 드라이브 얘기를 꺼낸 게 누구야?" 집사는 서슬퍼런 밴스의 태도에 어리둥절했다. "자네가 들은 대로 말하라구!" 밴스가 다그쳐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방으로 들어갔더니, 의사 선생이 젊은 귀부인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 는 게 좋다고 하시더군요. 시베라 아가씨는 신선한 공기는 이제 질릴 정도 라고 말씀하셨죠." "에이다양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펀 브론 선생도 함께 떠났구먼?" "예. 하지만 선생은 리그란더 부인 집 앞에서 내리고, 두 아가씨들만 드라 이브를 떠나신다고 들었죠. 선생은 왕진을 마치고 만찬 뒤에 차를 가지러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거, 야단났군!" 밴스가 몸을 긴장시켰다. "빨리! 스프루트! 리그란더 부인의 주소를 알고 있나?" "메디슨 아베뉴 근처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인을 전화로 불러내라구! 의사가 왔느냐고 묻는 거야!" 집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태도로 나가더니 잠시 후 돌아와서 말했다. "아직 그 댁엔 도착을 안하셨답니다." "분명히 도착했을 시간인데." 밴스는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입구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매컴, 빨리 가세. 난 도무지 불길해서 견딜 수가 없다구. 제발 늦지나 않 았으면 좋으련만." 우리가 차에 올라탄 것을 보자 밴스는 핸들에 뛰어올랐다. 히스와 매컴은 여우에 홀린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있었으나 상대방의 험악한 열의에 이끌려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운전대 옆에 앉았다. "교통규칙이고 속도위반이고 없습니다. 부장, 신분증명서를 미리 준비해 두 시죠." 밴스가 차를 몰면서 말했다. 우리는 한 달음에 골목길을 꺾어 애프 타운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내 전차 에 가로막혔고, 5번가 모퉁이에서는 교통순경에게 제지되었다. 가까스로 리 버사이드 드라이브까지 이르자 과히 붐비지를 않아, 다이크맨 가도까지는 줄곧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참으로 못견디는 드라이브였다. 밤의 장막이 이미 깔려 있다는 조건만은 아니었다. 고속도로 사면을 따라 녹아내린 눈이 얼어붙은 곳에서는 길은 완전히 얼음판이었던 것이다. 차는 그때마다 마구 요동쳤다. 그러나 밴스의 운전솜씨는 대단했다. 한두 번 차가 술에 취한듯 곤두박질을 친 적은 있었지만, 그 얼어붙은 길을 날아가듯 달 려간 것이다. 영커스 건널목에서는 화물열차의 통과 때문에 몇 분씩 지체가 되기도 했 다. 매컴이 이 기회를 잡아 울분을 터뜨렸다. "이 미치광이 운젠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리는 자네 덕분 에 사잣밥을 싸짊어지고 있다고. 자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우 리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밴스가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그의 얼굴은 극도의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는 근심스러운 듯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집에서 영커스까지는 여느때보다는 이십 분 단축시켰군. 게다가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직선코스를 잡고 있으니까 십분은 더 단축될 테지. 내가 두 려워하고 있는 일이 오늘밤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그 차는 스파이틴 다이 빌 도로를 지나 강가 뒷길로 빠질 거란 말이야." 밴스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나의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간 일련의 연상 (聯想)이 있었다. 스파이틴 다이빌 도로----강줄기를 따라가는 뒷길...... 그렇다, 몇 주일 전 시베라, 에이다, 펀 브론과 함께 드라이브한 길도 바로 그 길이었던 것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전율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 다. 나는 그 때를 회상했다----다이크만 가도에서 길을 꺾은 사실, 해묵은 숲 이 있는 별장지를 지나 암벽 밑을 달린 사실, 또한 한산한 시골길을 강줄기 를 따라 타리 타운으로 향했던 일, 그리고는 높은 절벽위에 차를 세우고 허 드슨강의 장대한 전망을 바라본 일...... 그 강물을 내려다보는 절벽----그렇 다. 나의 머리에 그 시베라의 잔혹한 농담이 뚜렷이 되살아났다----여기라 면 완전범죄의 현장으로 안성맞춤이야, 이렇게 말한 그----자기 딴엔 풍자 섞인 아이디어! 이 사실이 생각난 순간, 내게는 밴스가 어느 쪽으로 향하려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롱 뷰우 언덕 밑에 와 있었고, 이내 허드슨 강줄기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밴스는 도중에서 만나는 대형차가 있을 때마다 눈여겨보고 있었으 나, 펀 브론의 황색 다이믈러 같은 것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아즈레 정류장에 이르자 차는 기막힌 스피드로 달렸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두 손으로 좌석을 잡고 있어야 했다. 언덕을 미처 돌기 전에 앗 하는 외침이 밴스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동시에 훨씬 앞쪽에 어른거리는 빨간 라이트가 꺼졌다가는 나타나곤 하는 것이 눈 에 띄었다. 우리의 차는 더한층 속도를 늘려, 이윽고 앞차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다가섰다. 그것은 분명히 펀 브론의 다이믈러였다. 얼굴을 숙이라구! 밴스가 어깨 너머로 매컴과 히스를 향해 외쳤다. 이제 곧 앞지를 테니까 얼굴을 보여선 안된다구! 우리는 몸을 바싹 엎드렸다. 이내 차가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차는 다 시금 궤도에 올라 있었고, 상대방의 차를 뒤쪽으로 보면서 마구 달리고 있 었다. 반 마일쯤 나아가자 길은 갑자기 좁아졌다. 밴스가 브레이크를 밟자 뒷바 퀴가 언 노면상에서 가로로 미끄러지며서 한 바퀴 돌고 나서 멈춘 자동차 는 거의 도로와 직각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도로를 완전히 차단 한 형국이 되어 있었다. 뛰어내리세! 밴스가 숨가쁘게 외쳤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상대방 차가 바로 가까이에 이르렀고, 날 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더불어 급정거를 했는데 우리 차의 불과 몇 피트 앞이었다. 밴스는 이 때 벌써 앞으로 뛰어나가 있었고, 상대방이 정지한 순간 재빨리 앞문을 잡아당겼다. 나머지 우리도 본능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 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과 불길한 느낌에 쫓겨 정신없이 달렸던 것이 다. 그 다이믈러는 세단형으로 작고 높은 창이 달려 있었으나, 안에 있는 사람 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순간 히스의 회중전등이 어둠을 꿰뚫고 번쩍였다. 우리의 얼어붙은 각박한 눈에 비친 광경----아아, 그것은 너무나도 어처구 니가 없는 기막힌 장면이었다. 차의 뒷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펀 브론의 모습은 그 림자도 없었다. 앞자리에는 여자가 두 사람 있었다. 시베라는 한쪽 구석에 있었는데,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관자놀이에는 보기에도 무참한 상처가 나 있었고, 흘러내린 피가 뺨을 지나 흥건히 고여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은 에이다였다. 사나운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 다. 히스의 전등은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얼마 동안은 그녀도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빛에 익숙해지 자 그녀의 눈은 차츰 밴스에게로 쏠렸고, 이윽고 듣기 거북한 욕설과 악담 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핸들을 떠나 곁의 좌석으로 떨어지더니, 그것을 또다시 들었을 때는 작고 빛나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빨간 불꽃이 달리고, 날카로운 폭음이 들렸으며, 동시에 와장창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총알은 앞유리창에 명중한 것이다. 밴스는 이 때까지 승차대에 한 발을 올려놓고 차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있었는데, 에이다의 권총을 쥔 손이 뻗쳐진 순간 손목을 잡아 나꿔채고 있 었던 것이다. 장난은 걷어치우지. 밴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의가 전혀 없는 음성이었다. 나조차 희생자 명단에 넣으려나? 천만에. 난 그럴 줄 알고 이 쇼를 기다 리고 있었어. 에이다는 밴스를 놓친 홧김에 야만인 같은 분노를 터뜨려, 그녀의 일그러 진 입술에서는 연거푸 저주와 욕설이 터져나왔다. 마치 야수 같았다. 궁지에 몰려 패배를 의식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밴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쥔 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빨 리 뒤로 물러나 그녀를 땅 위로 끌어내렸다. 에이다는 또다시 마구 저항했 다. 자아, 부장. 밴스가 말했다. 수갑을 채우시죠. 히스는 현기증이라도 일어난 듯 멍청히 서서 이 놀라운 결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밴스의 목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재빨리 덤벼들어 수갑을 채웠다. 밴스가 몸을 굽혀 땅에 떨어져 있던 권총을 줍고 힐끗 보고는 매컴에게 넘 겼다. 체스터의 권총일세. 그리고는 딱한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에이다쪽을 가리켰다. 자네 사무실로 연행하게, 매컴. 차는 밴이 운전할 테니까. 나도 되도록 속 히 그리 가겠네. 우선 시베라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지. 그는 재빨리 다이믈러에 올라탔다. 부장, 그 여자를 감시하시오. 밴스는 그렇게 말했는데 그 때 차는 이미 아즈레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 이었다. 나는 밴스의 차를 운전해서 뉴욕으로 돌아갔다. 매컴과 히스는 뒷좌석에 에이다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 시간 반 남짓한 드라이브 동안 한 마디도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 컴과 히스는 방금 목격한 사건의 너무나도 놀라운 진상에 멍청해진 것 같았 다. 에이다 쪽은 감정을 잃은 인간처럼 앉아 있었다. 눈은 감았고, 목은 수그 러진 채였다. 그녀가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얼굴에 손수건을 대고 있는 것 이 보였다. 한 번은 짓눌린 흐느낌을 들은 것도 같았다. 내가 프랭클린 행길쪽 형사재판소 빌딩 앞에 차를 세우고 막 엔진을 끄려 고 하는 순간이었다. 히스의 자지러질 것 같은 외침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 게 스위치를 다시 넣어 버렸다. 순간 히스의 손이 내 등을 두드렸다. 빨리! 비크먼 스트리트 병원으로! 우물쭈물하지 말라구요, 밴 다인 선생! 교통신호가 뭐 말라비틀어진 거야! 달려요! 어서! 뒤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병원으로 차 를 마구 몰았다. 밴스가 지방검사국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였다. 그는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고 나서 우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장. 그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비난의 빛도 없 을뿐더러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밴스는 우리의 침묵의 까닭을 이해했는지 안심시키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베라는 염려 없다구. 가벼운 뇌진탕이라는구먼. 에이다가 앞자리에 넣어 두고 있는 스패너로 친 거야. 이삼 일 지나면 퇴원할 테지. 진찰권에는 펀 브론 부인이라고 적어 두었네. 바깥양반한테 연락을 했더니 마침 집에 있 더군. 당장 뛰어갔을 테지. 그런데 우리가 리그란더 부인 집에서 못잡은 것 은 중간에 자기 병원에 들러 약품가방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네. 이 지 체한 시간이 시베라의 목숨을 위기일발에서 구해준 셈이지. 그는 담배를 한모금 빨아당기고 나서 매컴을 보았다. 청산가리인가? 매컴이 찔끔했다. 맞았어. 그는 화가 난 듯 눈을 치켜떴다. 설마, 자네가 알고 있었던 건 아닐 테지? 아아, 어차피 난 말리지는 않았을 걸. 밴스가 힘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난 부장한테 경고를 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아까까지는 나도 몰랐었지. 펀 브론이 정보를 제공해 준 것 뿐이라구. 이번 사건을 전했을 때 달리 독약이 분실된 적은 없었느냐고 물어 봤지. 그럴 것이 그 만한 일을 꾸미는 인간이 말일세, 만약의 경우를 각오하지 않을 수는 없겠잖나? 그런데 선생 왈, 석 달 전에 청산가리 한 알을 분실했다는 거야. 기억을 더듬게 했더니, 그 며칠 전에 에이다가 암실 근처를 서성댄 일이 있었다는구먼. 실패를 대비해서 챙겨둔 게 분명하지. 참고로 말하자면 펀 브론 선생은 아마츄어 사진가여서 청산가리를 암실에 놓아두고 현상을 해 왔다는 걸세.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말이오, 밴스 선생. 히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해치울 수 있었냐는 거요. 혹 시 공범이라도 있었나요? 천만에. 에이다가 모든 것을 기획했고, 실행한 것이죠. 설마하니,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밴스가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단순하고도 간단하죠, 부장----단, 당신이 열쇠만 수중에 넣는다면 말씀 입니다.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간 것, 그것은 살인설계도의 면밀함, 그리고 대담무쌍함이었소. 그러나 이 역시 그녀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죠. 그는 일어나서 외투를 손에 들었다. 여러분을 위해 만찬준비가 되어 있을 겝니다. 식사라도 끝난 뒤 사건 전 체의 해석을 제공해드리기로 하십시다. 놀라운 진상 자네도 인정할 테지, 매컴? 밴스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그날 밤늦게 우리가 밴스의 서재 난로를 둘 러싸고 자리에 앉았을 때의 일이다. 난 그 메모의 배열을 다시 행한 결과 마침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범죄의 기법만은 여전히 애매했지. 그래 서 자네한테 트바이어스의 서재에 있는 그 책을 갖다달라고 부탁한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게 그 안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네. 나는 먼저 그로스의 예심판사를 위한 범죄체계편람 을 읽어 봤는데 그것은 놀라운 논문이라구, 매컴. 내용이 비단 범죄사나 범죄과학 각 분야 에 미쳐 있을 뿐만 아니라, 범행방법의개론이기도 하단 말일세. 말하자면 범죄에 대한 세계적인 백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읽어가는 사이에 나 는 눈이 휘둥그래졌지. 그럴 것이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모조리 수록되어 있지 않겠나? 에이다가 취한 행동의 전부, 방법의 전부, 아이디어의 전부가 이 책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었으니 말야. 기가 찰 일이지. 실제의 범죄사 에서 따온 범행이라구! 우리가 그녀의 음모를 분쇄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을 수밖에. 안그런가? 그 동안 온 세계에서 행해진 교묘한 범죄수법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내 그대로 본땄으니 말야. 밴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그는 또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범행을 해명하는 열쇠를 발견한 뒤에도 뭔가가 부족한 그런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지----무언가 뚜렷한 심리적 경향----바꾸어 말하자면 동기가 알쏭달쏭했다는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에이다의 어린 시절, 즉 트바이어스의 양딸로 들어오기 전의 환 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 이것을 모르고는 그 끔찍한 범죄 를 풀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일세. 내가 취할 다음 수단은 에이 다의 태생과 환경을 확인하는 일이었지. 그녀가 프라우 만하임의 딸이 아 닌가 하는 것이 최초부터의 의문이었고, 실상 이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그것이 사건하고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트바이어스와 만하임의 남편이 옛날에 뭔가 부정한 일을 공모했다는 것이지. 만하임 부인은 이렇게도 말했지. 트바이어스를 만 난 것은 남편이 죽기 일년 전이었다고 말야. 그렇다면 이것은 십사 년 전 의 일이고----트바이어스가 에이다를 양딸로 삼은 것이 바로 같은 해야. 까닭에 나는 만하임과 이번 사건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다고 추리했어. 이 렇게 되면 실제로 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었지. 지난 주의 여행도 뉴 올리 언스가 목적지였다네. 진상을 캐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지. 십삼 년 전 의 사망기록을 들춘 결과, 놀랍게도 만하임은 죽기 일년 전에 이상범죄자 전용의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돼 있지 않았겠나? 그래서 경찰에 가서 이 친 구의 전과를 확인해 봤지. 아돌프 만하임이라는 사나이----결국 에이다의 부친이지만----는 말일세, 독일에서 소문난 범죄자, 살인자였는데, 사형선 고를 받은 뒤 구치소에서 도망쳐 미국으로 건너왔던 모양이라구. 죽은 트 바이어스가 이 탈옥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지. 그 건 어찌되었건 사실은 에이다의 아버지가 살인자였고, 이름난 범죄자였다 는 점이지.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에이다의 범행 배경이 되는 거지." "결국 선생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여자도 아버지와 똑같은 미치광이였다는 점이로군요." 히스가 한 마디 했다. "그게 아니죠, 부장. 내 말은 범죄성향의 잠재성이 그녀의 피 안에 이어받 아져 있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이 사람아, 단순한 금전욕이 말일세." 매컴이 곁에서 끼어들었다. "그렇듯 끔찍한 범행의 동기가 될 수는 없다고 보는데? 그런 모진 짓을 하기엔 그 동기가 아무래도 좀----" "그녀의 잔인성을 돋군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지. 참된 동기는 더 깊은 넋 의 심층에 있는 것이라네. 사랑과 증오, 질투와 자유에의 그리움, 이런 것 이 무서운 혼합을 보일 때는 말일세. 우선 알아둘 것은 그녀가 그린 일족 가운데의 신데렐라였다는 사실이지. 경멸당하고, 소외당하고, 식모취급을 당하고, 잔소리 투성이 환자를 시중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단 말 야. 자그마치 십사 년이나 이런 노예취급 속에 반감을 기르고 노여움을 당 하고, 주위의 독기를 흡수하고 있는 사이에 마침내는 모든 인간을 경멸하고 미워하게 된 거라구.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핏속에 잠들어 있는 본능을 일 깨우기에 충분했을 거란 말야. 그런데 사태를 더 한층 악화시키는 일이 일 어났지. 에이다는 펀 브론 의사를 사랑하게 된 걸세----그런 환경에 처해 진 계집아이로서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윽고 시베라 가 사나이의 애정을 차지해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지. 자아, 이렇게 되고 보니 시베라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이 죽이고 싶도록 미 워져 갔단 말야. 그런데 에이다는 결혼만 해버리면,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가족 이었어. 그녀가 계산한 것은 유산상속에 방해가 되는 가족을 모조리 죽여 그린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펀 브론을 충동질해서 그의 사랑을 차지하자는 것이었네. 사랑이 그녀에게 힘과 용기를 준 것이지. 여기서 잠시 기억해 둘 점이 하나 있네----왜 그 버튼, 나이어린 가정부 말야----에이다가 어떤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잡한 욕지거리를 퍼붓는다고 말하지 않았던 가? 이때 우리 앞에 하나의 단서가 던져졌던 거야. 그걸 흘려들어 버렸다 니! 그건 그렇고, 범행의 근원을 캐내려면, 우선 그 트바이어스의 서재를 빼놓 을 수 없지. 넓은 집에서 오직 홀로 외롭기만 하고, 늘어가는 건 증오와 원한 뿐----이쯤되면 그 꿈많은 처녀가 판도라의 역할을 연출하게 된 것 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열쇠를 훔쳐 똑같은 열쇠를 만 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 이리하여 서재가 그녀의 은신처가 된 걸세.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범죄과학 서적이었어.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매우 잡아 끌었지. 미치광이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의 체질에 불 같은 공감 을 불러일으켰을 거란 말야.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그로스의 위대한 편람 이었어. 기가 막히게도 거기엔 기기묘묘한 범행수법들이 모조리 전시되어 있지 않겠나! 도면이나 실예조차 붙어 있었지. 피비린내나는 끔찍한 생각 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왔지. 이건 당연한 결과였을 거야. 물론 처음에는 이런 살인 수법을 증오하는 상대방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고는 생각지 않 았을 테지. 하지만 이윽고 이 생각이 차츰 현실성을 띠어온 거야. 실행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굳혀져간 게야. 그 가공할 계획은 이렇게 형성되어 간 걸세." 밴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듯 담배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참 묘한 일이라구.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비밀의 진상, 이것을 실증 하는 예는 범죄사에 있었으니 말야. 범죄사를 보게나. 에이다 같은 환경에 처해 있던 처녀 중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여자가 그 얼마나 많은지! 가령 마리 보와이에, 마들레느 스미드..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지. 그런데 그 생각을 전혀 못했다니!" "현재를 잊어선 곤란하지, 밴스." 매컴이 견디지 못하고 가로막았다. "자네 말을 듣자니, 에이다는 그 모든 착상을 그로스의 저서에서 얻었다면 서? 그렇지만 이 사람아, 그 책은 독일어로 적혀 있단 말야. 그 여자가 독 일어를 안다는 사실을 자네가 언제 어떻게 캐냈단 말인가?" "지난번 일요일에 나는 시베라가 독일어를 아느냐고 에이다한테 물었었지. 그 때 그 애 역시 독일어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를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질문했다네. 이어 또 한가지,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시베라라 고 믿게 만들었네. 그러면 내가 뉴 올리언스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녀도 일 을 서둘지는 않을 테니까 말야." "그렇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말씀이야," 히스가 좀이 쑤신다는 듯 말했다. "그 여자는 우리하고 같이 매컴 검사 사무실에 앉아 있었단 말입니다. 그 런데 어떻게 렉스를 죽였다는 건가요?" 이 말에 밴스가 싱긋 웃고 대답했다. "우선 첫번째로 쥬리어가 살해됐소. 그것은 그 여자가 집안의 지배자였기 때문이오. 그녀를 없애 버리면, 자유의 한 발자국을 얻을 수 있다, 에이다 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요. 게다가 또 한가지, 자기도 같은 피해자라는 그럴 듯한 무대연출도 이로써 훌륭하게 성립하죠. 그녀는 체스터의 권총을 입수 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소. 절호의 찬스는 십일월 팔일 밤에 찾아왔지. 열한시 반, 그녀는 쥬리어의 방을 노크했죠. 아마 쥬리어의 침대가에라도 앉아, 이렇게 밤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느니, 어쩌니 그런 얘기를 했을 거 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숨겨온 권총을 꺼내기가 무섭게 쥬리어의 심장을 향해 쏘고는 서둘러 자기방으로 돌아와서 전등을 켜고 화장대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총을 쥐고 자기의 좌측 어깨에 비스듬하게 조준했죠. 이 경우 전등과 거울은 필수 불가결의 연출도구였소. 총 끝을 정확히 알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으니까요. 두 총소리 사이의 삼분이라는 간격은 이래서 생긴 거죠.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소----" "그렇지만 젊은 여자가 자기를 쏘고 시치미를 떼다니?" 히스가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연스럽지가 못하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에이다는 본래 자연스럽게 태어나질 못했다구요, 부장. 이번 사 건의 어느 것을 봐도 자연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죠. 게다가 실상 위험은 거의 없었소. 총이 헤어 트릿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죠. 이내 폭발하죠. 발사 하는 데 압력은 필요치 않아요. 살점을 도려내는 상처쯤이 고작이라 생각 했을 거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상처내는 범례는 얼마든지 있죠. 그로스의 책에도 가득 들어 있소." 그는 곁에 놓아 둔 '예심판사를 위한 범죄체계 편람' 제 1권을 펼쳐 표시 를 해둔 페이지를 젖히고는 말했다. "들어봐요, 부장. '자기의 몸을 상처네는 인간은 드물지 않다. 거짓 도난 피 해자(흉기에 의한 공격의 피해자)를 가장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손해배 상을 받고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서 싸움의 당사자가 커다란 상처를 내보이면서 싸움에서 입은 것이라고 우기는 예도 흔히 있다' 부장, 병역기피자 중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잖소? 그들이 흔히 쓰는 수법은 손으로 총구를 막고 손가락을 날려버리는 것이지요." 밴스는 책을 덮고는 말했다. "게다가 잊어선 안되죠. 그 여자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한 불행한 여자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번 연속살인의 아이디어를 짜내지 않고 있었 다면, 자살조차도 불사할 처지에 있었죠. 어깨의 상처쯤은 그것을 댓가로 얻어지는 막대한 이익을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요." "자, 잠깐----" 히스가 몸을 내밀고 밴스를 향해 시가를 들어올렸다. "권총은 어떻게 되죠? 에이다의 방에서 총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집사가 달 려갔단 말이오. 그런데도 권총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 말씀입니다." 밴스는 말없이 그로스의 편람을 들추더니 역시 표시를 해놓은 페이지를 읽 기 시작했다. "다 여기에 있죠. 들어 보시라구요. '어느날 아침 타살시체가 발견되었다. 현장에는 부자로 소문난 곡물상의 시체가 있었는데, 얼굴은 밑으로 누워 있고 오른쪽 귀 뒤에 총상이 있었다. 총알은 대뇌를 통과하여 왼쪽눈 위인 앞이마에 박혀 있었다. 시체의 발견장소는 상당히 깊은 개울 위 다리의 중 간께쯤이었다. 현장검증도 끝나 시체를 운반하려고 했을 때 우연히 수사관 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체가 누워 있던 장소 바로 건너편, 썩어 가고 있는 다리 난간에 생긴, 위에서 단단한 날이 달린 물건으로 힘껏 내 리쳤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작고도 새로운 손상 자국이었다. 그것이 살인사 건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수사관은 즉시 보트 한 척을 동원시켜 개 울 밑을 수색하게 했다. 그러자 잠시 후 이상한 것이 떠올라왔다. 그것은 길이 4미터쯤 되는 되는 튼튼한 끈이었는데, 그 한쪽 끄트머리에는 큰 돌 이 매달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발사된 권총이 매어져 있었다. 또한 그 총 에는 죽은 곡물상의 머리에서 꺼낸 총알과 똑같은 탄환이 남아 있었다. 사 건은 분명히 자살이다. 문제의 사나이는 돌을 다리의 난간에 늘어뜨리고 오른쪽 귀 뒤에서 자기의 머리를 향해 쏘았고, 쏜 순간 권총을 던졌으며, 끈은 돌의 힘으로 난간 너머로 당겨져 물 속으로 빠진 것이다. 이리하여 권총은 난간을 뛰어넘을 때 부딪쳤고, 문제의 움푹 패인 자국을 남긴 것이 다' 부장, 어때요, 당신 의문에 딱 들어맞을 테죠?" 히스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밴스를 쏘아보았다. "그럼 그 여자의 권총도 지금 말한 그 남자의 총이 다리를 뛰어넘은 것처 럼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갔단 말이군요?" "그럴 겝니다. 달리는 갈 곳이 없죠. 창은 말입니다, 집사한테 들은 바로는 칠팔 인치쯤 열려 있었다는 거예요. 에이다는 자기방으로 돌아오자 권총에 끈을 매달고 끄트머리엔 돌 같은 것을 달고는 그것을 창 밖으로 늘어뜨린 거죠. 한 방 쏘고 총을 놓자, 창틀을 넘어 발코니 층계 위 부드러운 눈 속 에 파묻혀 버린 겝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날씨가 문제가 되죠. 그날밤엔 눈이 제법 왔고, 권총은 이내 눈 속에 파묻혀 버렸으니, 이 얼마나 이상적 인 분위기였느냐 말입니다." "빌어먹을! 그러니 권총이 안보인 것도 당연할 수밖에." 히스가 맥빠진 듯 비명을 울렸다. "그럼 발자국은 어떻게 된다? 밴스 선생, 이것 역시 그 계집아이가 만들어 놨을 테죠?" "물론이죠, 부장. 이 역시 그로스의 빈틈없는 가름침을 본받아 그녀가 꾸며 낸 것이지요. 그날 밤 눈이 그치자 살며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체스터가 신 다가 버려둔 오버슈즈를 신고 대문 앞까지 왕복한 거죠." 밴스는 다시금 그로스의 책을 들어올렸다. "발자국을 만드는 법, 그 탐지방법, 이 모든게 여기에 샅샅이 적혀 있죠. 그리고----가장 그럴듯 한 것은----가짜 발자국을 남기는 경우엔 반드시 자기의 신발보다 큰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도 있소." "게다가 그녀는 우리를 놀림감으로 삼을 만큼 총명했었지." 매컴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감이야." 밴스가 이내 대꾸했다. "이것은 내 짐작이지만, 그린 미망인에게 은연중 혐의를 돌리려는 것이 에 이다의 당초부터의 뜻이었어. 그런데 처음 시베라를 심문했을 때, 그녀가 취한 태도를 보고, 전술을 부득이하게 바꾼 거야. 이제 생각하면 시베라는 그 때 이미 에이다를 의심하고 있었어. 그래서 체스터와 연락을 취한 게야. 체스터 역시 에이다에 대해서 불길한 예감을 품고 있었지." 매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그렇군. 그렇지만 좀 이상하지 않나? 이미 고발은 이루어졌다, 따라 서 에이다는 시베라가 자기한테 혐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당 다음엔 시베라를 노렸어야 할 게 아냐?" "그 점이 바로 보통 만만하지 않다는 증거지.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시베 라의 고발이 보다 진실성을 띄어오지 않겠나? 기막힌 애라구." "어서 계속하시죠, 선생." 히스가 독촉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샐 것 같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럽시다, 부장." 밴스는 흐뭇한 듯이 고쳐앉았다. "그러나 먼저 날씨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소. 왜냐하면 그 뒤에 일어 난 모든 사건이 날씨와 직결되어 있으니까. 쥬리어가 죽은 이틀 뒤의 밤은 제법 날이 따뜻했고, 눈도 어지간히 녹아버리고 있었소. 에이다로서는 권총 을 회수하는 데 안성맞춤인 밤이었죠. 그정도 상처로 사십팔 시간 동안 침 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한다는 건 말이 안되요. 그녀는 발코니로 나아가 몇 단 내려가서 파묻힌 권총을 갖고 돌아왔소. 그리고는 눈이 또다 시 내리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죠. 과연 이튿날 밤 다시금 눈이 쏟아 져 내렸고, 열한 시 경에는 그쳤어요. 무대는 완비된 거죠. 에이다는 살며시 일어나 서재로 내려갔소. 고오르인의 구두를 신고 정면 철문 앞까지 왕복, 그리고는 이층으로 직행. 이층 리넨실에 임시로 구두를 숨긴 거죠. 체스터가 살해되기 몇분 전, 렉스가 들었다는 발자국소리와 문 이 닫히는 소리는 이것이었소. 아무튼 구두를 리넨실에 숨기자 그녀는 잠 옷으로 갈아입고 체스터의 방으로 향했죠. 그리고는 쥬리어를 저격했을 때 와 똑같은 방법으로 체스터의 심장을 향해 한 방 쏜 다음 재빨리 자기 방 으로 돌아가 침대에 숨어들어간 거죠." "자네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나?" 매컴이 밴스를 보고 물었다. "이 두 가지 사건 때, 그 범행시간에 펀 브론이 번번이 자기집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에이다가 어떻게 쥬리어와 체스터를 죽였느냐 하는 것은 별게 아니지만." 히스가 푸념하듯 말했다. "그렇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렉스를 처치했느냐, 이거 요." 밴스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부장, 그 정도의 트릭에 당신 같은 사람이 어리둥절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난 진작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신을 영원히 용서 못할 겝니다. 하지만 그 해설을 하기 전에 그린 맨션의 건축학적인 세부구조에 대해 생 각해 주셔야겠소. 에이다의 방엔 츄들 왕조 때 난로가 있죠. 조각이 새겨진 나무 경판이 달린 거요----그런데 렉스의 방에도 똑같은 게 있죠. 게다가 이 둘은 같은 벽을 사이에 등을 대고 있어요. 그린 맨션은 아시다시피 오 래 된 건물이죠. 아마 난로를 만들었을 때 두 방을 통하게 하는 구멍을 팠 을 거요. 구멍 한쪽 끝은 에이다의 방의 경판에서 비롯되어 나머지 한쪽 끝은 렉스의 난로 경판과 통하고 있죠. 이 터널은 직경이 약 육 인치---- 결국 경판 한 장의 크기와 똑같다----깊이는 이 피트 정도. 결국 등을 대 고 있는 난로와 벽의 두께를 보탠 길이에 해당하는 셈이요. 아마 본시 두 방 사이의 비밀통신으로 사용된 것이리라 생각되지만, 난 오늘 저녁 병원 에서 다운 타운으로 오는 도중 이 집에 들러 그것을 확인했소.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해 둘 것은 이 가로로 된 갱 양쪽 끝의 경판은 모두 용수철 장치 로 되어 있죠. 따라서 열린 뒤에는 자동적으로 닫혀지게 마련이요. 손을 놓 으면 제 자리로 돌아가 닫혀져 경판 세공의 표면 일부로 보일 뿐 흔적이라 고는 없지요." "알았어!" 히스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렉스살해의 수법은 옛날부터 흔히 있는 그 살인금고라는 놈이군! 도둑이 금고의 문을 열면, 안에 장치된 권총에서 총알이 날아와 머리에 한 대 맞는 다, 어때요?" "바로 그거요. 그런 장치가 살인에 사용된 예는 얼마든지 있죠. 개척 초기 서부에서 흔히 쓰여진 수법이지. 목장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적이 와서 문 위 천장에 총을 매달고, 끈 한쪽 끝을 방아쇠에, 또 한쪽을 대문 빗장에 매 달아 두고 간단 말이오. 목장주가 며칠이 지나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머리가 날아간다, 그런데 그 무렵 살인자는 먼 타국을 버젓이 돌아 다닌다, 바로 이거요." "그게 분명할 겝니다." 경찰부장의 눈이 빛났다. "2년 전 애틀란타에서 그런 살인사건이 있었죠." "그런 예는 부지기수요, 부장. 그로스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사건을 인용 하고 있죠. 제법 그럴듯하단 말씀야. 그건 그렇고, 에이다와 렉스는 아마 그 비밀통로를 찾아내고 있었을 거요. 그래야만 그들 사이의 암호----<비 밀의 우편함> 의 뜻도 이해가 갈 수밖에요. 난 아까 에이다의 옷장에서 옛 날식 구두골을 찾아냈죠----필경 트바이어스의 서재에서 갖다놓은 것일 테지만. 폭은 육 인치, 길이는 이 피트 남짓, 그야말로 통신용 구멍에 딱 들어맞죠. 에이다는 그로스의 도면을 참고로, 권총자루를 구두골 사이에 단단히 끼웠소. 그리고는 끈을 방아쇠에 매달고, 한쪽 끝을 렉스의 방의 경판 내면에 달아맨 거죠. 결국 경판을 잡아당기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져 총알은 일직선으로 발사, 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틀림없이 쏘아죽이게 되어 있었지요. 렉스가 앞이마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 순간, 경판은 스프링 장치로 다시금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갑니다. 얼핏 보아 발사한 흔적은 쥐 도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밖에. 여기에 렉스가 아무런 표정없이 조용히 죽 은 까닭이 있죠. 에이다는 우리하고 같이 지방검사국에서 돌아오자 곧장 자기방으로 가서 권총과 구두골을 풀어 그것을 숨기고, 아래층으로 내려 와 우리에게 발자국 얘기를 늘어놨소. 물론 그 발자국은 집을 나서기 전 에 그녀가 미리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럼, 그 이상한 도면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거죠?" 히스는 여전히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물었다. 밴스는 대답대신 그로스의 책 제 2권을 펼쳐 우리쪽으로 내밀었다. "보시오, 세 개의 돌과 앵무새와 심장, 게다가 화살표마저 있소. 이것은 모 두 범죄 세계의 일종의 암호요. 에이다는 이것을 이용했을 뿐이지요. 복도 에서 종이쪽지를 주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돌이켜보면, 그렇듯 야 릇한 문서를 그 때 에이다가 검사국으로 갖고 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소. 그런데도 우리는 이거, 수상쩍다, 이런 의심을 안품었으니! 결국 그녀의 함정에 보기좋게 걸려든 꼴이죠. 렉스에게 전화를 걸어, 죽음 의 장소로 가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우리였으니, 그것 참!" "가만 있자, 그렇다면 말일세," 매컴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첫번째 참극이 일어난 날 밤, 렉스는 에이다의 방에서 일어난 총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렸다, 그 말인가?" "물론이지. 내 생각은 이렇다네. 렉스는 총소리를 듣고 혹시 그린 부인, 자기 어머니가 범인이 아닌가 생각했지. 그래서 그는 시치미를 뗀 거야. 나중에 가서야 에이다한테 알려지. 그리고 이 고백이 에이다로 하여금 그 기막힌 트릭을 가능하게 한 거야. 완전무결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다시 없 는 찬스가 온 걸세. 그렇지만 자기는 경찰관하고 한 자리에 있으면서 살인 을 한다는 이 기막힌 아이디어 역시 그녀의 창작은 아니었지. 그로스의 알 리바이론을 보게나. 그런 자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히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 걸 누가 알았담!" 그러자 밴스가 말했다. "실상은 별 게 아니었소. 완전한 안내서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렉스살해 역 시 대단한 쇼는 못되었소. 딴은 그녀는 검사실에 있었소. 그렇지만 잘 생각 해 보라구요. 당신하고 매컴 검사가 집으로 찾아가겠다는데도 자기쪽에서 오겠다고 우겼죠? 또 와서는 그 엉터리 얘기를 늘어놓고 렉스를 불러 달라 고 했소. 우리가 전화를 걸어 렉스를 오게 만들자 갑자기 종이 쪽지를 주 웠노라면서 비밀장소에 숨겨놓았으니 렉스가 올 때 가지고 오라고 일러두 어야 겠다고 했지요. 이리하여 우리는 앉은 채 그 여자가 렉스를 저 세상 으로 보내는 음모를 도와주고 있었으니!" "그 총소리를 이층에서 들은 사람이 없다는 이유도 이제 알겠네." 매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총소리는 말하자면 벽 속에서 폭발한 셈이니까 자동적으로 소음장치가 되 어 있었단 말야. 그렇지만 아래층에 있던 집사가 그 소리를 뚜렷이 듣게 된 까닭은 뭘까?"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 에이다의 방 바로 밑은 거실의 난로라구---- 체스터가 말하지 않았던가?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해서 좀체로 불을 지피지 않는다고 말야. 집사가 있었던 곳은 바로 그 저쪽이라구. 폭음은 굴뚝을 통해 밑으로 내려갔고, 그 결과 일층에서 뚜렷이 들을 수 있던걸세." "그럼 에이다의 음모 얘기를 계속하라구." "그 뒷얘기는 간단명백하지. 우리가 서재에 있었을 때 엿듣고 있었던 것은 에이다였어. 그녀로서는 우물쭈물할 수 없게 된 걸세. 그래서 우리가 서재 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걷는 것을 봤다느니, 그 극적인 조작을 그 럴듯하게 늘어놓은 거라구. 아마 노부인을 맨 마지막으로 죽이고, 범인자 살설을 꾸며내는 것이 에이다의 애초부터의 계획이었을걸? 그런데 난데없 이 오펜하이머 박사가 검진을 한다는 얘기가 나왔단 말야. 이렇게 되니 계 획을 부득이하게 변경하는 수밖에 없게 됐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네. 우 리보고 어머니가 밤중에 걸어다니는 것을 봤다고 진술한 뒤였으니까. 이거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테지. 대답은 오직 하나, 노부인은----오펜하이머 도 착 이전에 이미 죽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는 이렇게 결단을 내리자 즉 시 스스로 독약을 마셨어. 자기와 동시에 그린 부인한테 독을 먹였다간 의 심을 받을 테니까." "그 때는 이미 서재에 있는 책에서 모든 자료는 수집해 두고 있었다?" 히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옳은 말씀이요. 보나마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마셨을 테지. 그래도 혹시 발견이 늦어지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간단하지만 교묘한 트릭을 쓴 거요. 시베라의 강아지가 급변을 알린다는 그 수법이지. 그것은 동시에 시베라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는 방편도 되었소." "자네 얘기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도저히 이 세상 일로는 여겨지지 않 는군." 매컴이 새삼스럽게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밴스가 고개를 힘껏 가로 젓고는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천만에. 에이다 같은 범죄를 찾아내자면 한이 없지. 간호원 세 명을 한꺼 번에 죽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또 마담 쥬가드, 프라우 찬치텔, 피어시 부인은 어떻지? 그것은 어떻든간에 에이다는 그린 부인 독살의 기회를 노 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 찬스는 그날밤에 찾아들었지. 간호원은 열한 시부 터 삼십분 동안 삼층 자기방으로 가 있었네. 그리고 이 삼십분 사이에 에 이다는 모친의 방으로 간 거야. 그녀가 탄산레몬을 권했는지, 그린 부인이 달라고 했는지는 영원한 비밀이지. 아마 권했으리라 생각되는군. 간호원이 내려왔을 때 그녀는 자기방으로 돌아가 있었지. 보기에는 잠든 것 같았어." "시체 해부 결과를 들었을 때는 어지간히 놀랐을걸?" 매컴이 한 마디 했다. "맞아. 그것으로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뒤틀려 버렸지. 그렇지만 그녀의 후 퇴는 정말 일급이었어. 하긴 쇼올 건으로 자칫하면 꼬리를 드러낼 뻔했지 만서도. 아무튼 그 급한 고비에서도 용케 시베라에게 슬쩍 혐의를 돌리고 는 자기는 유리한 입장으로 돌아서 버렸으니, 나이에 비해 보통 단수가 아 니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는 각기 명상에 잠겼다. 이윽고 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린 부인 살해 후, 에이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시베라 한 사람 뿐이 됐지. 게다가 연속살인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있어, 가장 안전한 살인 방법의 힌트를 준 것도 바로 시베라였다네. 우리는 몇 주일 전 펀 브론하 고 두 여자와 함께 드라이브를 갔었지. 그 때 시베라가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토해낸 말이 있었어. 노리는 상대방을 차에 태운 채 절벽에서 밀어내 버린다면, 기막힌 완전범죄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일세. 시베라는 말 하자면 자기를 죽이려는 인간에게 죽이는 방법을 제시해 준 셈이지. 이 말 에 에이다가 속으로 펄쩍 뛰며 기뻐했으리라는 것은 당연 이상의 것이라 고 할 밖에. 시베라를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게 해 놓고는 나야말로 자칫하 면 시베라에게 살해당할 뻔 했다, 그러나 눈치를 채고 막판에 뛰어내렸다, 그런데 시베라는 차의 조종을 잘못해서 반대로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버렸 다, 그런 식으로 에이다가 주장할 작정이었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걸. 그럴 것이 이 살인방법을 시베라가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펀 브론, 밴,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의 증인이 있다는 사실 이 에이다의 진술을 그대로 뒷받침해 줄 테니까 말일세. 게다가 그 얼마나 멋진 해피 엔드인가----범인 시베라는 죽었다, 사건은 일단락. 에이다만이 그린 가의 상속인, 이 세상을 마음대로! 게다가 그것 참, 그야말로 해피 엔 드 일보 직전이었단 말일세." 밴스는 한숨을 쉬고 술병으로 손을 뻗쳐 여러 사람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 르더니 다시금 의자에 주저앉아 우울한 듯 담배를 피웠다. 이 기록에 이 이상 덧붙일 것은 거의 없다. 진상은 공표되지 않았고, 사건 은 미궁으로 빠진 것으로 처리되었다. 다음해 트바이어스의 유언장은 최고재판소에 의해 뒤집혀졌다----결국 그 집에서 일어난 모든 사정에 입각해서 25년간의 거주조항은 무효판결을 받 았다. 그리고 시베라가 그린 가의 재산을 전액 상속했다. 또한 해묵은 그린 맨션은 그 직후에 철거되고 부동산은 토지회사에 양도되었다. 만하임 부인은 에이다의 죽음에 넋을 잃고 있었으나 그래도 에이다의 상속 분을 요구했고, 시베라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부인은 그 길로 독일로 돌아갔 다. 스프루트는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펀 브론 내외는 유언에 대한 판결이 있었던 직후 리베라를 향해 떠났다. 그곳에서 1년간 뒤늦은 신혼여행을 즐겼는데, 지금은 비인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펀 브론은 부친의 모교였던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고 있다. 소문에 듣자면 정신병학 분야에서 상당한 명성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