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있거라(하) 어네스트 헤밍웨이 저 }} {{작가소개 2 }} 제3편 {{25 3 }} {{26 14 }} {{27 17 }} {{28 27 }} {{29 34 }} {{30 39 }} {{31 52 }} {{32 55 }} 제4편 {{33 57 }} {{34 62 }} {{35 69 }} {{36 77 }} {{37 82 }} 제5편 {{38 94 }} {{39 103 }} {{40 106 }} {{41 110 }} {{}}{{작가소개 }}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 근교인 오크 파크에서 탄생. 1917년 <캔자스시티 스타>지(紙)의 기자가 되어 '문장의 간결성'과 '약동적 표현'을 배우다. 1925년 단편집 <우리들 세대에> 발간. 1926년 <봄의 급류>, <해는 또다시 뜬다>를 발간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다.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발간.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정부군 원조를 위한 활동을 했으며 <킬리만자로의 눈> 발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발간. 1952년 <노인과 바다> 발간. 퓰리처 상 수상. 1954년 미국 아카데미 상, 노벨 상 수상. 1961년 자택에서 엽총으로 죽음. 제 3 편 {{}}{{25 }} 이제 가을로 접어들어 나무는 모두 잎이 떨어지고 길은 진창이 되었다. 나는 군용 화물차를 타고 우디네에서 고리치아로 달렸다. 도중에 다른 군용 화물차들을 지나쳤고, 시골 풍경을 구경하며 갔다. 뽕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들판은 갈색이었다. 길에는 헐벗은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나무에서 떨어진 젖은 가랑잎이 흩어져 있었고, 병사들이 가로수 사이에서 자갈을 주워다가 차바퀴로 팬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산은 안개로 안 보이지만 안개가 자욱히 드리워 있는 시가지가 보였다. 강을 건넜는데 물이 불어난 것을 보았다. 산악 지대에서는 그 동안 줄곧 비가 내렸다. 공장들이랑 주택이랑 별장을 지나서 시가지로 들어섰는데, 더욱 많은 주택이 포격으로 부서져 있었다. 좁은 거리에서 영국 적십자 앰뷸런스를 지나쳤다. 운전병은 캡을 쓰고 있었는데, 여위고 새까맣게 그을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시장 저택 앞의 넓은 광장에서 군용차를 내렸다. 운전병이 내 륙색을 내려 주었다. 나는 륙색을 메고, 배낭 두 개를 들고, 우리 숙사인 별장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별장을 바라보면서 축축한 자갈길을 걸어 내려갔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으나 문은 열려 있었다. 들어가니까 아무 가구도 없는 방에는, 벽에 지도와 타이프 친 서류만이 붙어 있고, 소령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여어. 하고 그는 인사를 했다. 어떤가? 그는 더 늙고 맥빠진 것 같아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여기는 모두 잘 돼 갑니까? 만사는 끝장났다네. 하고 그는 말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좀 앉게. 나는 배낭과 잡낭 두 개를 마루 바닥에 놓고 모자를 벗어서 배낭 위에 놓았다. 벽으로 가서 의자를 갖다 놓고 책상 곁에 앉았다. 형편없는 여름이었어. 하고 소령은 말했다. 자네는 이제 건강한가? 네. 훈장은 탔나? 네. 훌륭한 걸 탔지요. 감사합니다. 어디 좀 보세. 나는 망토를 헤치고 그에게 약장(略章)들을 보여 주었다. 정장(正章)이 들어 있는 상자도 주던가? 아니요. 상장 뿐입니다. 상자는 뒤에 보내 주겠지. 그건 좀 시일이 걸리니까. 저는 무슨 임무를 맡게 됩니까? 차는 모두 나가 있어. 여섯 대가 북부의 카포레토에 있네. 자네는 카포레토를 아는가? 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골짜기에 종루(鐘樓)가 있는 조그만 흰 고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깨끗한 소읍인데 광장에는 멋있는 분수가 있었다. 거기를 본부로 일하고 있다네. 지금 환자가 많아. 싸움은 끝난 거야. 다른 차들은 어디 있나요? 두 대는 산악 지대에 가 있고, 네 대는 아직도 바인시차에 있지. 다른 두 앰뷸런스 소대는 제 3군에 속해서 카르소에 있을 거야. 저는 뭘 했으면 좋을까요? 글쎄, 원한다면 바인시차에 가서 거기 있는 네 대를 맡게나. 지노가 벌써 오랫동안 가 있지. 자네는 아직 그 쪽은 가 본 일이 없지? 없습니다. 형편 없었어. 세 대를 잃었으니까. 소식은 들었지요. 그럴 테지. 리날디가 편지를 했겠지. 리날디는 어디 있나요? 여기 병원에 있어. 여름내 가을내 있는 걸. 그렇군요. 형편 없었어. 하고 소령은 말했다. 얼마나 형편없게 당했는지 자네는 안 믿을 거야. 그 때 자네가 부상당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몇 번 생각했는지 모르겠네. 재수가 좋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죠. 내년에는 더 나쁠걸. 하고 소령이 말했다. 아마 이제 공격으로 나올지도 몰라. 공세를 취할 거라고 모두들 말하는데 나는 믿어지지 않아. 시기가 늦었어. 자네 그 강 봤나? 네, 벌써 물이 불었더군요. 이제 우기(雨期)가 시작되었으니까 공세를 취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 곧 눈이 올 테지. 자네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가? 자네 말고도 미국인이 올 모양인가? 1천만의 군대를 훈련 중이랍니다. 그 중에서 우리도 약간 얻어 왔으면 좋겠군. 그렇지만 프랑스 군이 모조리 차지할 테지. 여기까지 굴러올 가망은 절대 없어. 좋아, 자네는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소형차로 가서 지노를 돌려보내게. 누구 길을 아는 병사를 딸려 보내지. 지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걸세. 아직 조금씩은 포격을 가해 오지만 다 끝난 거야. 바인시차고 한 번 봐 두고 싶잖나? 물론입니다. 소령님 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미소지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네. 난 이 전쟁에는 지쳐 버렸어. 만약 내가 일단 후송된다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형편 없는가요? 그럼. 형편 없다뿐인가. 가서 씻고, 자네 친구 리날디나 찾아보게. 나는 방에서 나와서 짐을 이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리날디는 방에 없었지만 소지품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각반을 풀고 오른쪽 발의 군화를 벗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피로하고 오른쪽 발이 아팠다. 한쪽 신만 벗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우스울 것 같아서 일어나서 왼쪽 발의 구두끈을 풀고 구두를 침대 밑으로 벗어 던지고 다시 담요 위에 벌렁 누웠다. 창문이 닫혀 있어서 방 안 공기가 무더웠으나, 너무 피로해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 기운도 없었다. 내 소지품이 모두 방 한구석에 있는 것을 보았다. 바깥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캐서린 생각을 하고 리날디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앞으로는 밤에 잠들기 전에 말고는 캐서린 생각을 안 하기로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피로했고, 할 일도 없고 해서 누운 채로 그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리날디가 들어왔다. 그는 전과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약간 더 여윈 것 같기도 했다. 야아, 우리 애기로군.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내 곁에 앉더니 두 팔로 나는 얼싸 안았다. 착한 애기가 돌아왔군. 그는 내 등을 철썩 때렸고, 나는 그의 두 팔을 붙들었다. 착안 애기야. 어디 무릎 좀 보자구. 바지를 벗어야 하는 걸. 바지를 벗지 뭘. 여기선 다들 친구 아닌가. 그 녀석들이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 나는 일어서서 바지를 벗고 무릎받이를 풀었다. 리날디는 마루바닥에 주저 앉아서 내 무릎을 앞뒤로 가만가만 폈다 구부렸다 해 보았다. 손을 펴서 상처를 쓰다듬었다.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무릎뼈를 누르고, 무릎을 가만가만 흔들어 보기도 했다. 관절 접합(關節接合)이 이걸로 끝났다는 건가? 응. 자네를 돌려보낸 건 죄악인걸. 좀더 완전한 접합을 해야지. 그래도 전보다 훨씬 나아졌네. 전에는 판자처럼 빳빳했는데. 리날디는 무릎을 더 구부렸다. 나는 그의 두 손을 지켜 보았다. 외과 의사의 손답게 손가락이 미끈했다. 그의 머리 정수리를 내려다보니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고 좌우로 부드럽게 갈라 놓았다. 그는 무릎을 과도하게 구부렸다. 아얏! 내가 소리를 질렀다. 기계로 좀 더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거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전보다 낫다니까. 그건 알아. 여기 관해서는 내가 자네보다 좀 더 안단 말이야.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무릎 자체는 잘 됐군. 그는 무릎 검사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자아, 이제 모조리 이야기하게. 뭐 할 이야기가 없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조용한 생활을 보냈으니까. 결혼한 사람처럼 점잖아졌군 그래. 어떻게 된 셈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야말로 어떻게 된 건가? 이놈의 전쟁이 나를 죽이는 군. 하고 리날디는 말했다. 전쟁 때문에 우울해서 죽겠어. 그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오오. 하고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인간적인 충동조차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건가? 아니야. 자네가 퍽 재미를 봤다는 걸 알겠어. 이야기해 보라구. 여름내 가을내 수술만 했네. 줄곧 일만 했어. 모든 사람의 일을 나 혼자 맡아서 했어. 힘드는 일은 모조리 내게 다 떠맡겼으니까. 정말이지 여보게, 나도 명의(名醫)가 될 모양이야. 그건 잘 됐군. 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어. 아니 절대로 생각을 안 해. 그저 수술이야. 그럴 테지. 그러나 여보게, 이젠 모두 끝났어. 이젠 수술은 안 하지만 지옥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놈의 전쟁, 지긋지긋한 전쟁이야. 내 말을 그대로 믿게. 이젠 자네가 내 기분을 유쾌하게 해 주게. 레코드는 사 왔겠지? 그럼. 레코드는 내 륙색에 마분지 상자 속에 종이로 싸서 넣어 두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피로해서 그것을 꺼낼 기운도 없었다. 어디 몸이 좋지 않은가? 피곤해서 죽겠군. 이놈의 전쟁 지긋지긋해서. 하고 리날디는 말했다. 자아, 우리 술이나 취해서 기운을 내보세. 그리고 밖에 나가서 진탕 노세 그려. 그럼 기분이 좀 나아질 테지. 난 황달을 앓았다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안 돼. 아니 여보게, 그래 가지고도 용케 내 곁으로 돌아왔네 그려. 아주 얌전해지고 겁장이가 됐군. 아뭏든 이놈의 전쟁이 돼 먹지 않았어. 대관절 왜 이런 짓을 시작했을까? 같이 한 잔 하세. 취하고 싶진 않지만 한 잔 하세. 리날디는 방을 가로질러 세면대 있는 데로 가서 유리컵 두 개와 코냑 병을 들고 왔다. 오스트리아의 코냑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칠성 표. 산가브리엘레에서 노획한 건 이것 뿐이야. 거기 갔더랬나? 아니. 난 아무데도 안 갔어. 줄곧 여기 있으면서 수술만 했다니까. 여보게, 이건 자네가 쓰던 양치용 컵일세. 자네를 잊지 않으려고 그대로 갖고 있었지. 자네 이 닦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겠지. 천만에. 나는 내 것이 있는걸. 자네가 아침이면 욕지거리를 하거나 연방 아스피린을 먹으면서 갈보를 저주하고 말이지, 자네 이빨에서 빌라 로사를 닦아 내려고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걸 그대로 두었다. 저 유리컵을 볼 때마다 자네가 치솔로 양심을 소제하려던 일을 생각하곤 하지. 그는 침대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내게 키스하고 자네가 얌전해지지 않았다고 말해주게. 절대로 자네에게 키스하진 않겠네. 자네는 원숭이야. 옳지, 자네는 훌륭한 앵글로 색슨 청년이지. 올아, 자네는 참회하는 청년이야. 나는 앵글로 색슨이 치솔로 갈보 오입 뒷맛을 닦아 내는 구경이나 해야지. 컵에 코냑이나 따르게. 우리는 서로 컵을 부딪쳤다가 마셨다. 리날디는 나를 비웃었다. 난 자네를 취하게 해 자기고 자네 간(肝) 주머니를 뽑아 버리고 질긴 이탈리아 식 간 주머니를 넣어서 다시 한 번 사내 대장부로 만들어 줄 테야. 나는 컵을 내밀어 코냑을 더 받았다. 이제 바깥은 어두웠다. 코냑 술잔을 든 채 나는 창 앞으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비는 개었다. 바깥은 방 안보다 춥고 나무들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코냑을 창 박으로 내버리진 말게.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마시지 못하겠거든 내게 주게. 술독에 가서 빠지지 그래. 내가 대꾸했다. 나는 리날디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기뻤다. 그는 2년 동안이나 나를 곯렸지만 나는 항상 그를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다. 자네 결혼했나? 그는 침대에서 물었다. 나는 창 곁에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직 안 했어. 사랑을 했나? 응. 그 영국 여자하고? 응. 저것 보지. 그래 잘해 주던가? 물론. 아니, 실제 면에서 잘해 주었느냐는 거야. 닥쳐. 그만두지, 내가 굉장히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런데 그 여자는 - 리날디 군. 제발 그만두게. 자네가 내 친구가 되고 싶거든 그만둬 주게. 나는 자네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바로 자네 친구 아냐. 그럼 그만 둬. 그러지. 나는 침대로 다가가서 리날디 곁에 걸터 앉았다. 그는 유리컵을 든 채 마루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심정을 알겠지. 오오, 그럼. 나는 평생에 농담해서 안 되는 신성한 문제를 많이 보아 왔지만 자네하고는 그런 흉허물이 없는 것으로 알았지. 생각해 보면 자네도 역시 그런 게 있어야겠지. 그는 마루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자네는 그런 게 전혀 없단 말인가? 없어. 전혀? 그럼 자네 어머니나 누이를 두고 그런 농담을 해도 좋다는 건가? 자네 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하고 리날디가 재빨리 보충을 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자넨 못 당하겠어. 내가 질투를 하나 보군, 아마.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아니야, 질투가 아닐 테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다른 뜻에서 말한 거야. 자넨 누구 결혼한 친구 있나? 있지. 난 없네.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부부간에 사랑하는 녀석과는 친구가 될 수 없거든. 왜? 나를 싫어하니까. 왜? 난 뱀이거든. 이성(理性)의 뱀 말이야. 자네는 뒤범벅으로 생각하는군. 능금이 이성일세. 아니야, 뱀이야. 그는 더욱 쾌활해졌다. 자네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더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난 자네가 좋아. 내가 위대한 이탈리아의 사상가가 되는 순간 자네가 나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단 말이야. 그러나 나는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거든. 내가 자네보다 아는 게 많단 말일세. 그럼, 자네가 더 알지. 그러나 재미는 자네가 더 볼 거야. 설사 후회를 하면서라도 재미는 자네가 더 볼 걸. 그렇지도 않겠지. 아니 그래. 이건 정말이야. 이미 내가 행복을 느끼는 건 일을 할 때뿐이야. 그는 마루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장차 그런 감정을 극복할 테지. 아니야. 그 밖에 내가 좋아하는 건 두 가지가 있지. 그런데 한 가지는 내 일에 해롭고, 또 한 가지는 반 시간이나 15분이면 끝나는 일이거든. 어떤 때는 그보다도 덜 걸리지. 어떤 때는 훨씬 덜 걸리겠지. 아마 그건 훨씬 숙달해졌을 거야, 이 사람아. 자네는 잘 몰라. 그러나 하여간 이 두 가지와 일이 있을 따름이란 말이야. 장차 다른 재미가 생기겠지. 천만에. 우리는 그런 게 생길 가망이 전혀 없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지금대로 타고 나왔고, 무얼 배워서 알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 우리는 절대로 새 것을 얻는 일이 없단 말이야. 우리는 완전한 기성물로 출발하는 거야. 자네는 라틴 계 국민으로 태어나지 않길 잘했지. 라틴 계 국민이란 없는 거야. 그건 라틴 식 사고 방식이라는 거지. 자네는 자신의 결점을 무척 자랑으로 알거든. 리날디는 눈을 들고 껄껄 웃었다. 이젠 그만두세, 이 사람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 피로해서. 그는 방에 들어올 때부터 피로해 보였다. 거의 식사 시간이 다 됐군. 자네가 돌아와서 반갑네. 자네는 내 최상의 친구요, 또 전우니까. 그 전우들은 몇 시에 식사를 하나? 하고 내가 물었다. 곧. 자네 간 주머니를 위해서 한 번 더 마시세. 성(聖) 바울처럼 말이야. 자네도 부정확하군. 그건 포도주와 위 주머니이지. 그대 위 주머니를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 들지어다. 이렇게 되지. 그 병 속에 무엇이 들어 있건. 하고 내가 말했다. 자네가 말하려는 그 무엇을 위해서든. 자네 애인을 위해서. 하고 리날디는 컵을 내밀었다. 좋아. 나는 그녀에 관해서는 절대로 추잡한 말은 안 하겠네. 그렇게 억지를 쓸 건 없네. 그는 코냑을 비웠다. 난 순수해. 하고 그는 말했다. 난 자네와 비슷하단 말이야. 나도 영국 색시를 얻어야지. 사실은 자네 애인은 내가 먼저 알았는데 나한테는 키가 약간 크더란 말이야. 키 큰 여자는 누이로 모셔라, 이런 거지. 하고 그는 어디서인지 인용을 했다. 자네는 사랑스럽고도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야 이를 말인가. 그래서 모두들 나를 순결한 리날도라고 하지 않나. 난봉꾼 리날도는 어떻구. 자아, 이 사람아, 내 마음이 순진할 때 내려가서 식사나 하세.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계단을 내려갔다. 리날디는 약간 취해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할 방에는 식사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지 않았다. 가서 술병을 가지고 와야겠군.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갔다. 앉아서 기다리자니까 그는 술병을 가지고 돌아와서 각각 반 컵씩 코냑을 따랐다. 너무 많아. 하며 나는 컵을 쳐들고 테이블 위의 램프에 비쳐 보았다. 빈 위(胃)에는 많지 않나. 이것 참 기묘한 물건이지. 위를 완전히 태워 버리거든. 이보다 나쁜 음료는 없을 거야. 아무렴. 하루하루 자멸해 가는 거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위를 망치고 손이 떨리게 하고. 외과 의사에게는 꼭 제격이야. 그래 그걸 자네는 권하는 건가? 진심으로. 다른 건 필요 없어. 쭉 마시란 말이야. 그리구서 병을 앓을 것을 각오하란 말이야. 나는 반쯤 마셨다. 홀에서 당번병이 수프! 수프가 올랐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령이 들어와서 우리들에게 목례를 하고 앉았다. 식탁에 앉은 그가 무척 조그맣게 보였다. 이게 다들 온 건가? 하고 그가 물었다. 당번병이 수프 그릇을 놓고 한 접시 가득히 떠 담았다. 이게 다입니다.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군목이 안 온다면 말입니다. 페데리코가 여기 있는 줄 알면 군목이 나타날 텐데요. 그 친구는 어디 있나요? 하고 내가 물었다. 307에 가 있지. 하고 소령이 말했다. 그는 열심히 수프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닦았다. 위로 비벼올린 회색 수염을 조심스레 닦았다. 군목이 올 것 같군. 내가 전화를 해서 자네가 왔다고 전하랬으니까. 식당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퍽 아쉽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 조용해졌어. 소령이 말했다. 내가 떠들지.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엔리코, 포도주 좀 들게. 소령이 내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스파게티가 들어와서 그걸 먹느라고 분주했다. 스파게티를 다 먹자 신부가 들어왔다. 그는 예나 다름없이 조그맣고 가무잡잡하고 빈틈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일어나서 악수를 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소식을 듣는 길로 달려왔소. 앉으시오. 늦었구려. 소령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리날디가 영어로 말했다. 그들은 신부를 잘 놀리는 그 대위한테서 이런 말을 배웠다. 그는 몇 마디 영어를 지껄였다. 안녕하시오, 리날디. 하고 신부가 말했다. 당번병이 그에게 수프를 가지고 왔으나 그는 스파게티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래 어떠시오? 하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 동안 재미 좋으셨나요? 포도주 좀 드시오, 신부님.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그대 위를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만 들지어다. 이건 아시다시피 성(聖) 바울입니다. 네 압니다. 신부는 공손하게 말했다. 리날디가 그의 잔을 채웠다. 그래 성 바울이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이분이 바로 모든 재난의 근원이거든. 신부는 나를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이제는 놀려 봐야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성 바울이란 사람을 말이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도대체가 술꾼이고 색골이었는데, 한창때가 지난 다음에야 그런 짓을 해서는 못 쓴다고 했거든. 자기는 할 대로 다해 놓구선 아직 한창때인 우리들에게 규칙을 만들어 뒤집어 씌웠단 말이야. 안 그런가 페데리코? 소령은 미소지었다. 우리는 쇠고기 스튜를 먹고 있었다. 난 날이 저문 후에는 절대로 성자에 관한 시비는 하지 않기로 했어. 하고 내가 말했다. 신부가 스튜 그릇에서 눈을 들고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저것 보게. 신부편에 가 붙었네.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신부님을 놀려 먹던 그 선량한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어? 카발칸티는? 브룬디는? 체사레는? 나 혼자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신부님을 놀려야 하나? 이분은 훌륭한 신부님이야. 소령이 말했다. 이분은 훌륭한 신부님이죠. 리날디가 받았다. 그래도 역시 신부는 신부거든. 난 이 식당을 그리운 옛날처럼 만들어 보려는 거야. 페데리코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말이야. 신부님, 지옥으로나 가소! 소령이 그를 바라보고 그가 취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의 야윈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흰 앞이마에 헝클어진 머리 가닥이 유난히 검게 보였다. 좋습니다, 리날도 중위. 하고 신부가 말했다. 좋습니다. 지옥으로 가란 말요.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이놈의 전쟁이고 뭐고 깡그리 지옥으로 가란 말야. 그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쭉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지친 거야. 하고 소령이 나에게 말했다. 그는 쇠고기를 다 먹고 빵 조각으로 고기 국물을 닦아 먹었다. 될 대로 되라지. 리날디는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놈의 짓들일랑 깡그리 지옥으로나 가라는 거야. 그는 방약무인하게 식탁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눈은 생기가 없고 안색은 창백했다. 그럼. 하고 내가 맞장구를 쳤다. 이건 모두 빌어먹을 짓들이지. 안 돼, 안 돼.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자네는 안 돼. 자네는 안 돼. 자네는 술을 안 마시고, 자네는 텅 비었고, 그 밖엔 아무것도 없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어. 빌어먹을 것 눈꼽만큼도 없단 말이야. 난 알거든, 내가 일을 그치는 날을 말야. 신부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번병이 스튜 접시를 가지고 갔다. 어째서 고기를 먹는 거요? 리날디는 신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도 모르오? 오늘은 목요일이지요. 신부가 말했다. 거짓말 말아. 금요일이야. 우리 주님의 살을 먹고 있는 거요. 하나님의 살이란 말야. 내가 알지. 그건 오스트리아 병정의 시체야. 지금 그걸 자시고 있는 거야. 흰 고기는 장교의 살이지. 나는 그의 농담을 보충했다. 리날디는 껄껄 웃었다. 그는 또 잔을 채웠다. 날 상관하지 말게. 하고 그는 말했다. 난 약간 돌았어. 휴가를 얻어야겠군요. 신부가 말했다. 소령이 그를 향해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리날디는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가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하오? 소령이 신부를 향해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리날디는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시는 거죠. 하고 신부가 말했다. 원치 않는다면 그만두는 거고. 지옥으로나 가오.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모두들 나를 빼돌리려 든단 말이야. 저녁마다 나를 빼돌리려고 하거든. 내가 싸워서 이것들을 몰아내 버리지. 내가 그것에 걸렸다면 어쨌다는 거야. 누구나 다 걸려 있는걸. 온 세상이 다 걸린걸. 처음에는 말씀이야. 하면서 그는 제법 강의하는 태도로 계속했다. 그저 조그만 구진(丘疹)이지. 다음에는 어깨죽지 사이로 홍진(紅疹)이 나타나거든. 그리고는 전혀 아무런 징후도 확인할 수 없는 법이야. 우리는 수은(水銀)만 하나님처럼 믿지. 살바르산이나. 하고 소령이 조용히 참견했다. 수은제 약이죠.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그는 아주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 두 가지에 관해서는 제가 어지간히 알걸요. 여보시오, 신부님. 당신은 절대로 걸릴 염려 없소. 우리 친구 애기는 걸리겠지만 말요. 이건 직업에 따른 사고야. 이건 단순한 직업적인 사고야. 당번병이 과자와 커피를 가지고 왔다. 과자란 굳은 소스를 친 일종의 검은 빵 같은 푸딩이었다. 램프에서 연기가 났다. 검은 연기가 등피 속에 가득히 맴돌았다. 양초를 두 자루 가져오고, 램프는 치워라. 하고 소령이 말했다. 당번병이 불을 켠 양초 두 자루를 접시에 붙여 가져오고 램프를 들고 가면서 불어서 불을 꺼버렸다. 리날디는 이제 조용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잡담을 나누고 커피를 마신 다음에는 모두 홀로 나갔다. 자네는 신부님하고 이야기하고 싶겠지. 나는 거리에 나가 봐야 하니까. 하고 리날디가 말했다. 신부님, 굿 나이트. 굿 나이트, 리날디 중위. 프레디, 나중에 만나세. 리날디가 말했다. 그러세. 하고 내가 말했다. 일찍 돌아오게. 그는 얼굴을 찌푸려 보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소령은 우리들과 같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무척 피로해 있어. 과로야. 하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자기가 매독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지. 난 믿지는 않지만 또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지. 제 손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네. 굿 나이트. 엔리코, 자네는 날이 새기 전에 떠나지? 네. 그럼 잘 가게. 하고 그는 말했다. 행운을 비네. 페두치가 자네를 깨워서 같이 갈 걸세. 안녕히 계십시오, 소령님. 안녕. 오스트리아 군의 공격이 있으리라고들 하지만 난 그걸 안 믿어. 없었으면 좋겠어. 좌우간 여기는 아닐 테니깐. 지노가 모든 이야기를 해 줄 걸세. 요새는 전화가 잘 돼네.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지요. 그래 주게. 잘 자게. 리날디도 브랜디를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도록 하게. 그러지 않도록 해 보죠. 굿 나이트, 신부님. 굿 나이트, 소령님. 그는 자기 사무실로 가버렸다. {{}}{{26 }} 나는 문 앞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그쳤으나 안개가 자욱했다. 이층으로 올라갈까요? 하고 내가 신부에게 물었다. 나는 잠깐밖에 못 있겠습니다. 올라가십시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리날디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신부는 당번병이 만들어 놓은 내 침상에 걸터 앉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런데. 하고 신부가 말했다. 정말 건강은 어떻소?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늘 밤은 피로하군요. 나 역시 피로하군요. 별로 필요할 까닭도 없지만. 전쟁은 어떻게 되는 거요? 내 생각에는 곧 끝날 것 같소. 이유는 알 수 없고,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어떻게 느낀단 말이오? 소령의 태도를 아시겠소? 온순하죠?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답니다. 나 자신도 그런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지난 여름은 지긋지긋했죠. 하고 신부가 말했다. 그는 이제 내가 이 곳을 떠날 때보다 자신이 있는 듯했다. 얼마나 지독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할 거요. 직접 현장에 있어서 얼마나 지독할 수 있는가를 알기 전에는 말이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여름에는 전쟁이라는 걸 인식했죠. 내가 생각하기에 절대로 전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장교들도 이제는 똑똑히 인식했죠. 어떻게 될까요? 나는 손으로 담요를 툭툭 쳤다.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어떻게 되나요, 그럼? 전쟁을 그만두겠죠. 어느 편이. 쌍방이. 그랬으면 좋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오? 쌍방이 동시에 전쟁을 그만두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데요. 나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기대가 너무 큰 거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변하는 걸 보면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이번 여름 전투는 누가 이긴 거죠? 이긴 편이 없죠. 오스트리아 군이 이긴 거죠. 하고 내가 말했다. 산가브리엘레를 빼앗기지 않고 지켰으니까. 그들이 이긴 거죠. 전쟁을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 역시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느낀다면 그만둘 겁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꼭 같은 것을 겪어 왔으니까요. 싸움에 이기는 도중에 싸움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어요. 그 말을 들으니 맥이 풀리는군요. 나는 생각하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자꾸만 자꾸만 계속될 것 같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모르겠어요. 그저 오스트리아 군은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크리스찬이 되는 건 지고 있을 때니까. 오스트리아 인도 크리스찬입니다 - 보스니아 인만 제외하고. 난 형식적인 의미에서 크리스찬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주님 같은 사람을 뜻하는 거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패배했으니까 이젠 더욱 온순해진 거예요. 만약에 베드로가 감람(橄欖) 동산에서 주님을 구했더라면 주님은 어떻게 되었겠어요? 조금도 다를 게 없었을 테죠. 나는 그렇게 안 생각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용기를 꺾는 말만 하는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무엇인가 일어날 것을 믿고 또 빌고 있어요. 그것이 아주 가까워진 걸 느끼는데요. 무엇인가 일어날지도 모르죠.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건 우리에게만 일어날 겁니다. 그들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느낀다면 좋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이겼으니까요. 그들이 느끼는 건 다르단 말입니다. 많은 병사들이 늘 그렇게 느껴 온 거지요. 반드시 졌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지요. 그들은 처음부터 진 겁니다. 그들을 농장에서 잡아다가 군대에 넣었을 때 이미 진 거예요. 농부들이 지혜가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권력을 맡기고 그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가를 보십시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나는 용기를 잃었어요. 하고 내가 말했다. 이런 생각을 안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을 안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 없이 마음 속에서 찾아 낸 것들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나는 줄곧 무엇인가를 희망해 왔어요. 패배를? 아니. 그보다 더한 무엇을. 그보다 더한 무엇은 없답니다. 승리 말고는. 그게 더 나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랫동안 승리를 희구했지요. 나 역시 그랬어요. 이제 모르겠어요. 이게 아니면 저것일 수밖엔 없지요. 난 이제 승리를 믿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러나 나는 패배도 믿지 않아요.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뭘 믿소? 잠을.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너무 오래 있어서 미안합니다.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요. 다시 이야기하게 되어서 여간 유쾌한 게 아닙니다. 잠 이야기는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요. 우리는 일어나서 어둠 속에서 악수를 했다. 난 지금 307에 묵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내일 이른 아침에 임지로 떠납니다. 돌아오거든 또 만납시다. 같이 산보나 하면서 이야기합시다. 하면서 나는 그를 따라 문으로 갔다. 내려오지 마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이 돌아와서 무척 반갑습니다. 당신에게는 별로 신통한 것도 없겠지만. 나는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시오. 안녕히. 안녕! 하고 나도 인사를 했다. 졸려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27 }} 리날디가 들어왔을 때 잠이 깨었으나 그가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에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밝기 전에 옷을 입고 떠났다. 내가 나올 때 리날디는 깨지 않았다. 나는 아직 바인시차를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전에 부상을 입었던 강의 지점을 넘어서 오스트리아 군이 진치고 있던 경사면을 올라가자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파른 새 길이 생기고 트럭이 많이 있었다. 그 곳을 지나면 길이 평평해지고 안개 속에 숲과 가파른 산들이 보였다. 신속하게 점령했기 때문에 엉망으로 파괴되지 않은 숲들이었다. 그리고 산으로 도로가 엄호되어 있지 않은 지점은 양측과 상부를 멍석으로 차면해 놓았다. 다 부서진 어느 마을에서 도로는 끝났다. 전선은 그 너머 높은 곳이었다. 주위에는 포들이 많이 있었다. 가옥은 형편없이 파괴되었으나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었고, 도처에 표지판이 있었다. 지노가 있는 곳을 찾아서 커피를 얻어 마시고 나중에 그를 데리고 나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내가 맡은 지점을 돌아보았다. 지노는 바인시차에서 훨씬 내려간 라브네라는 곳에서 영국의 병원차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인에게 크게 탄복하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아직 어느 정도의 포탄 세례가 있지만 부상자는 많지 않다고 했다. 이제 우기가 시작되었으니까 환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 군이 공격을 개시할 것 같다고들 하나 그는 그걸 믿지 않았다. 아군이 공격할 것 같기도 하지만 새 증원 부대를 전혀 안 보내는 것을 보면 이 역시 단념한 모양이다. 여기는 식사가 변변치 않은데 고리치아에서 실컷 먹었으면 그것 참 굉장한 식사라고 부러워했다. 그는 특히 디저트에 감탄했다. 나는 자세한 설명은 안 하고 그저 디저트라고만 했다. 아마 빵으로 만든 푸딩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가 어디로 배치될 것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모르겠으나 카포레토에 다른 병원차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로나 가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담한 곳이고, 건너편에 솟아 있는 높은 산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똑똑한 청년이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는 산가브리엘레의 전투와 실패로 돌아간 롬의 공격은, 정말 지옥이란 그런 것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 군이 아군의 바로 건너편과 머리 위인 테르노바의 능선을 따라 숲속에 막대한 야포 진지를 가지고 있어서 야간에 도로를 맹렬히 포격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신경을 자극한 것은 해군포의 사격이었다. 이것들은 탄도가 수평이기 때문에 나도 곧 알게 될 거라고 했다. 포격이 개시되었구나 하는 순간 대기를 찢는 듯한 포성이 시작된다. 그들은 대개 한 발 쏘고는 연달아 제 2탄을 쏘아서 거의 동시에 두 발을 사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폭발을 하면 파편이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파편 한 쪽을 내게 보여 주었는데, 민들민들한 톱날 모양의 금속편이었다. 배비트 합금인 것 같았다. 그다지 위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고 지노는 말했다. 겁이 나거든. 파편이란 파편은 전부 똑바로 자기를 향해서 떨어지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야. 쿵하는 소리가 나는가 하면 대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나고는 폭발이야. 겁이 나서 사람이 죽을 판이니 부상을 안 당하는 것쯤 무슨 소용인가 말이야. 그는 현재 아군 진지 반대편에는 크로아티아 인과 마자르 인이 약간 있다고 했다. 우리 부대는 아직도 공격 태세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군이 공격해 오면 아군측에는 철조망도 없고, 후퇴에 적합한 장소도 없었다. 고원 지대에서 내려오면서 방어에는 절호의 지형으로 낮은 산악 지대가 있었으나, 방어를 위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여간 이 바인시차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이 곳이 좀더 평탄하고 고원 지대처럼 생겼으리라고 기대했었다. 이렇게 기복이 심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고원(高原)이지 그냥 평원(平原)은 아니야. 하고 지노가 말했다. 우리는 그가 거처하고 있는 집 지하실로 돌아왔다. 나는 정상이 평평하고 약간 깊은 곳도 있는 능선이, 작은 산들이 연달아 있는 곳보다는 방어하기 더욱 쉽고 실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산악 지대를 공격하는 것이 평탄한 지형을 공격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야 산 나름이지. 산가브리엘레를 보라구.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말이야, 곤란을 당한 건 평탄한 산꼭대기였거든. 정상까지는 쉽게 갔으니 말이야. 그다지 쉬운 것도 아니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건 산이라기보다는 요새였으니까 특수한 경우지. 오스트리아 군은 수년간을 두고 그 곳을 요새화해 왔거든. 나는 약간 기동성이 있는 전쟁의 경우를 전략적인 견지에서 이야기한 것이었다. 산악 지대라도 쉽게 우회할 수 있기 때문에 전선으로 유지하는데는 아무 소용도 없다. 가능한 한 기동성을 가져야겠는데 산이란 별로 기동성이 없다. 또 산상에서의 사격은 항상 사정(射程)을 지나치게 멀리 잡는다. 만약에 측면을 우회 당하기라도 할라치면 정예 부대가 최상봉에 남게 마련이다. 나는 산악전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도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군이 산정 하나를 빼앗으면 적군이 산정 하나를 빼앗고 하다가 정말 결전을 할 단계에 이르면 산악 지대를 떠나서 내려가야 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럼 만약에 국경이 산악 지대라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고 그가 말했다. 거기까지는 아직 연구가 미치지 못했어. 하고 함께 껄껄 웃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오스트리아 군은 언제든지 베로나 부근의 방형(方形) 지대에서 큰 타격을 받았거든. 평원 지대로 내려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거기서 격파했단 말이야. 그렇지. 하고 지노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프랑스 군대였거든. 군대란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싸우면 군사적 문제를 거침없이 해결할 수 있는 법이야. 러시아 군대는 그걸 했지. 나폴레옹을 함정에 빠뜨렸거든. 그래. 그러나 그들은 광활한 국토가 있었으니 그렇지. 만약에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후퇴를 하다가는 브린디시(이탈리아 남단의 도시 - 역자 주)까지 밀려가게 될 테니 말이야. 브린디시란 지독한 곳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거기 가 본 일 있나? 체류한 일은 없어. 나는 애국자지만. 하고 지노가 말했다. 브린디시라든가 타란토는 사랑할 수가 없어. 바인시차는 사랑하는가? 하고 내가 물었다. 땅은 신성하지.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좀더 감자 생산이 많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여기 왔더니 말이야, 오스트리아 군이 심은 감자밭이 있겠지. 식량은 정말 부족한가? 나 자신 한 번도 배불리 먹진 못했으니까. 하긴 나는 대식가지만 굶어죽진 않았지. 식사는 보통이야. 전선에 배치된 연대는 제법 괜찮은 급식을 하는 모양이지만 지원 부대는 그렇게 많은 보급을 못 받고 있어. 뭣인가가 어디서인지 잘못되고 있는 거야. 먹을 것쯤 충분히 있을 거야. 개새끼들이 다른 데다가 팔아 먹는 모양이야. 그럼. 전선에 있는 부대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보급하지만 후방 부대는 형편없어. 오스트리아 군의 감자고 숲에서 딴 밤이고 간에 모조리 먹어치웠거든. 좀 더 급식을 잘해 줘야 하는 거야. 우리는 대식가거든. 확실히 식량은 많이 있을 거야. 군대가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아주 나쁜 현상이지. 급식이 병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본 일 있나? 그럼. 하고 내가 말했다. 전쟁에 이길 수 없고, 패전이 있을 뿐이지. 패전 이야기는 그만두세. 패전 이야기는 그렇잖아도 파다하니까. 올 여름에 한 일이 헛되이 끝날 리는 없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신성하다느니 영광스럽다느니 희생이니 그 밖에도 공허한 표현에는 어리둥절한다. 우리는 어떤 때는 거의 사람 음성이 안 들리는 빗속에 서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고함 소리만이 들려 온 것 뿐이고, 다른 포고문 위에 벌써 오래 전에 덧붙인 포고문 같은 데서 그런 말을 읽은 적도 있지만, 신성한 것을 눈으로 본 일은 없고, 영광스러웠다는 것에서 영광을 찾아 볼 수 없었고, 희생이라는 것도 고기덩이를 매장하는 것 이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다면 시카고의 도살장과 다를 것이 없겠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는 말들이 하도 많기 때문에 마침내는 지명(地名)만이 위엄을 갖게 된다. 어떤 숫자라든지 어떤 날짜 같은 것, 이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무슨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들이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촌락명, 도로 번호, 하천의 이름, 연대나 날짜의 숫자 같은 구상적인 이름 곁에 갖다 놓으면 추잡하기조차 하다. 지노는 애국자였다. 그래서 가끔 우리들을 갈라 놓는 말을 하곤 했지만 좋은 친구에 틀림없었고, 나는 그가 애국자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애국자였다. 그는 고리치아로 돌아가기 위해서 페두치와 같이 자동차로 떠났다. 그 날은 종일 폭풍우가 불었다. 바람이 비를 몰아쳐서 어디를 가나 물 웅덩이와 진창이었다. 파괴된 집의 회벽은 회색으로 젖어 있었다. 오후 늦게야 비는 그쳤으며, 우리 제 2번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산봉우리에 구름이 둘린 헐벗고 젖은 가을 경치며, 도로를 차면한 짚단이 젖어서 물방울이 듣는 것이 보였다. 해가 가라앉기 전에 한 번 나와서 산마루 너머에 있는 헐벗은 숲을 비췄다. 그 산마루의 숲에는 오스트리아 군의 야포가 많이 있었으나 몇 대만이 포화를 토했다. 전선 가까이의 파괴된 농가의 상공에 갑자기 둥그런 유산탄 포연이 오르는 것을 나는 지켜 보고 있었다. 중심부에 황백색 섬광이 있는 부드러운 연기 덩어리였다. 섬광이 번쩍하고, 다음에 발사한 포성이 들리고 연기 덩어리가 부서지면서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보인다. 파괴된 인가의 허접쓰레기 속이나 주차장으로 쓰이는 파괴된 가옥 곁의 도로에 많은 유산탄 파편이 있었지만 그 날 오후는 주차장 근처에는 포격이 없었다. 우리는 두 차에 부상병을 싣고 젖은 멍석으로 차면한 도로를 몰고 가는데 태양의 마지막 잔광이 멍석의 빈 틈을 뚫고 비쳤다. 우리가 산 후면에 있는 차면되지 않은 도로에 나오기 전에 해는 넘어갔다. 계속해서 차면되지 않은 도로를 달려 모퉁이를 돌아 넓은 곳으로 나왔다가, 다시 멍석으로 네모지게 차면을 한 터널로 들어가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일고, 새벽 세 시에는 억수로 퍼붓는 비와 더불어 포격이 시작되고, 크로아티아 인 부대가 산간의 목장을 횡단하고 숲을 통과해서 전선에 습격을 가해 왔다. 그들은 어둠 속, 빗속에서 싸우다가 제 2선에 있던 놀란 병사들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우중에도 많은 포탄이 쏟아졌고 로켓탄이 발사되었으며, 전선 일대에 걸쳐 기관총과 소총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재차 내습해 오지는 않았고 차차 조용해졌으며, 비바람 사이로 멀리 북쪽의 큰 포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상병들이 더러는 들것에 운반되고, 더러는 걷고, 더러는 들판을 건너 병사의 등에 업혀서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흠뻑 비에 젖고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주차장 지하실에서 담가가 올라오는 대로 병원차 두 대를 부상병으로 채웠는데, 두번째 차의 문을 닫고 잠글 때 얼굴을 때리는 비가 눈으로 변한 것을 느꼈다. 비에 섞여서 눈이 펑펑 빠르게 내리고 있었다. 날이 밝자 폭풍우는 여전히 불었으나 눈은 그쳤다. 눈은 진 땅에 내려앉자 곧 녹았고, 이제는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밝은 직후에도 또 한 번 공격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공격을 기다렸으나 해가 지도록은 아무 일도 없었다. 포격은 오스트리아의 포병대가 집결해 있는 기다란 산림 지대 남방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도 포격이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포격해 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을 뒤쪽 들판에서 야포들이 포격을 하고 있었는데, 날아가는 포탄이 기분좋은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남쪽에서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밤에는 공격해 오지 않았으나 북쪽 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중에 후퇴할 준비를 하라는 전령이 왔다. 주차장에 있는 대위가 이 말을 전해 주었다. 여단 사령부에서 통지가 있었다고 했다. 잠시 후에 그는 전화구에서 돌아오더니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말했다. 여단 사령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인시차의 전선은 확보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돌파당한 곳에 관해서 물었더니 여단 사령부에서 오스트리아 군이 카포레토를 향해서 우군의 27 군단을 돌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북방에서는 하루종일 큰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백정놈들이 적에게 돌파당했다면 우리는 끝장 본 거야. 하고 그가 말했다. 공격하고 있는 건 독일군이랍니다. 의무 장교 한 사람이 말했다. 독일군이라는 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독일군과 관련을 가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독일군 15개 사단이 있다니까. 하고 그 의무 장교가 말했다. 만약에 그들이 돌파했다면 우리는 섬멸당하는 거지. 여단 사령부에서는 이 전선은 확보해야 한다는 거야. 돌파당했다 해서 그렇게 치명적인 건 아니라니까 마조레 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산악 지대를 횡단하는 일선을 확보하자는 거지.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사단 본부에서. 우리가 후퇴할 계획이라는 말도 사단 본부에서 나왔다는데. 우리는 군단 사령부 휘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위님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요. 당연히 대위님이 후퇴하라고 명령하면 후퇴하는 거죠. 그러나 명령을 정확하게 받으세요. 명령은 이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거야. 자네는 부상자들을 가수용소로 수용해 주게. 어떤 때는 가수용소에서 야전 병원으로 수용할 적도 있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후퇴라는 걸 경험한 일이 없는데, 만약에 후퇴할 때는 부상자들을 어떻게 전원 후송하는 겁니까? 전원은 아니지. 될 수 있는 대로 후송하지만 나머지는 남겨 두고 가지. 병원차에는 뭘 싣고 가야 합니까? 병원 시설. 알겠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다음 날 밤 후퇴는 시작되었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 군이 북방 전선을 돌파하고, 치비달레와 우디네를 향해서 계곡을 타고 전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후퇴는 질서정연했고 비에 젖고 침울했다. 밤중에 혼잡한 도로를 따라 서서히 나아가면서 빗속을 행군하는 부대와, 대포와 수레를 끄는 군마와 노새, 트럭 등 모두 일선을 버리고 나오는 대열을 지나쳤다. 전진할 때보다도 오히려 혼란은 없었다. 그 날 밤 우리는 고지(高地)의 가장 덜 파괴된 마을에 세웠던 야전 병원을 비우는 데 협력했다. 부상병은 하상(河床)에 있는 플라바로 이동시켰다. 다음 날은 플라바의 야전 병원과 가수용소를 철수하느라고 우중인데도 종일 일을 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 시월의 비를 맞으면서 바인시차의 부대들은 고원 지대를 버리고 이동해 내려와서 그 해 여름에 큰 승리를 시작했던 강을 건넜다. 다음 날 점심때나 되어서 우리는 고리치아에 도착했다. 비는 그치고 시가지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가 거리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군인 위안소에서 창녀들을 트럭에 싣고 있었다. 일곱 명인데 모자와 외투 차림에 옷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 중 둘은 울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우리에게 미소를 던지다가 혀를 내밀어 위아래로 날름거려 보았다. 입술이 두텁고 눈이 검은 여자였다. 나는 차를 세우고 포주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장교 위안소의 창녀들은 그 날 아침에 출발했다고 그 여자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코넬리아노로 간다는 대답이었다. 트럭은 출발했다. 입술이 두터운 여자는 또 한 번 우리에게 혀를 내보였다. 포주는 손을 흔들었다. 두 창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재미있는 듯이 바깥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차로 돌아왔다. 우리도 저치들하고 같이 가면 좋겠는데요.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유쾌한 여행일 텐데요. 이제 유쾌한 여행을 하게 될 거다. 하고 내가 말했다. 이제 지옥 같은 여행을 하게 될 테죠. 내 말이 그 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차도를 몰아 별장으로 향했다. 그 왈패 녀석들이 갈보집으로 기어드는 꼴을 봤으면 좋겠군. 그럴 것 같은가? 그럼요. 제 2군에서 저 포주를 모르는 병사는 하나도 없지요. 우리는 별장 근처로 나왔다. 저치를 모두들 수녀원장이라고 부른답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계집애들은 낯설지만 그치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후퇴 직전에 데려온 여자들인가 봐요. 그것들 단단히 당하겠는걸. 단단히 당할 테죠. 저것들을 공짜로 해치웠으면 좋겠는데. 뭐니 뭐니 해도 그놈의 집에서는 너무 비싸게 받거든요. 정부가 우리를 착취하는 거죠. 차를 밖에 내놓고 기계공에게 정비를 시키라구. 하고 내가 말했다. 오일을 바꿔 넣고 차동 장치(差動裝置)를 점검해. 가솔린을 채워 놓고 좀 자라구. 네, 중위님. 별장은 비어 있었다. 리날디는 병원을 따라가고 없었다. 소령도 간부 전용차에 병원 요원을 싣고 떠나 버린 후였다. 창문에 내 앞으로 써 놓은 쪽지가 있었는데 복도에 쌓아 둔 물건들을 싣고 포르데노레로 오라고 적혀 있었다. 기계공도 벌써 가고 없었다. 나는 다시 차고로 돌아갔다. 내가 거기 있는 동안에 다른 두 차도 도착해서 운전병이 내렸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졸린지 - 플라바에서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세 번이나 잠이 들었는걸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중위님, 우리는 뭘 합니까? 오일을 바꿔 넣고, 그리스를 칠하고, 가솔린을 채우고 난 다음에 차를 앞으로 몰고 나와서 선발대가 남기고 간 허접쓰레기를 실어라. 그리고는 출발합니까? 아니야, 세 시간 동안 수면이다. 하나님, 잠을 자다니 고맙습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도무지 눈을 뜨고 운전할 수가 있어야지. 네 차는 어떠냐, 아이모? 이상 없습니다. 작업복을 가져오라구. 오일 치는 걸 도와 주지. 아닙니다, 중위님.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걸요. 중위님은 가셔서 짐이나 꾸리세요. 내 짐은 다 꾸려 놨어.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가서 선발대가 남기고 간 짐을 가지고 나올 테니 준비가 되는 대로 차를 앞으로 돌려라. 병사들이 별장 전면으로 차를 몰고 와서 우리는 복도에 쌓여 있던 병원 시설을 실었다. 짐 싣는 일을 마치고 차 세 대를 우중에 나무 밑 차도에도 열지어 세워 놓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불을 지피고 옷들을 말리지. 하고 내가 말했다. 옷이야 마르건 말건 상관 없습니다.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잠을 자야겠어요. 내가 소령님 침대에서 자야겠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어디서 자든 아무래도 좋아.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여기에도 침대가 둘이 있어. 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난 그 방에 뭐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그게 늙다리 물고기 쌍판 영감의 방이었다네.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너희 둘이 거기서 자거라.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깨울 테니. 너무 늦게까지 자면 오스트리아 군이 와서 깨웁니다, 중위님. 보넬로가 말했다. 나는 늦잠 안 자. 하고 내가 말했다. 아이모는 어디 있나? 주방으로 갔습니다. 이제 그만 자. 하고 내가 말했다. 자야겠어요. 피아니가 말했다. 하루 종일 앉은 채로 잤어요. 머리 정수리가 온통 눈을 덮어 누르는군요. 구두를 벗으라구. 보넬로가 말했다. 물고기 쌍판 영감의 침대야. 물고기 쌍판이 무슨 상관이야. 피아니는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은 채 발을 뻗고 팔로 머리를 고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주방으로 가 봤다. 아이모가 난로에 불을 피우고 물 주전자를 올려 놓고 있었다. 파스타 아슈타(요리의 일종 - 역자 주)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잠이 깨면 모두 배가 고플 거예요. 자네는 졸리지 않나? 그렇게 졸리지는 않습니다. 물이 끓으면 놔 두고 자지요. 불은 저절로 꺼질 테죠. 좀 자 두는 게 좋을걸. 하고 내가 말했다. 치즈하고 통조림 고기를 먹으면 되니까. 이게 낫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저 무정부주의자 두 놈들에겐 뭐든 뜨거운 게 좋을 거예요. 중위님은 주무세요. 소령 방에 가면 침대가 하나 있다. 중위님이 거기서 주무세요. 아니야, 나는 내가 전에 쓰던 방으로 올라가겠어. 한 잔 생각 있나? 중위님, 떠날 때 하지요. 지금은 마셔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시간 후에 일어나서 내가 깨우러 가지 않거든 나를 깨우라구, 알겠지? 시계가 없는데요, 중위님. 소령 거실 벽에 시계가 있어. 알겠습니다. 그제야 나는 식당을 빠져서 복도로 나와서 대리석 층계를 올라 내가 리날디와 같이 쓰던 방으로 갔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 가까이로 가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나무 밑에 나란히 세워둔 세 대의 차량이 보였다. 나무는 비에 젖어 빗방울이 듣고 있었다. 공기는 차고 나뭇가지에 물방울이 달려 있었다. 나는 리날디의 침대로 가서 몸을 눕히고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주방에서 요기를 했다. 아이모가 마늘과 통조림 고기를 다져서 넣은 스파게티를 내놓았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별장 지하실에 남아 있던 포도주를 두 병 마셨다. 바깥은 아직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아니는 무척 졸린 얼굴을 해 가지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진격보다도 후퇴가 재미있어.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후퇴할 때는 바르베라를 마시거든. 지금은 그걸 마시지만 내일은 빗물을 마실 테지.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내일 우리는 우디네에 가 있을 거야. 샴페인을 마시자구. 거기는 병역 기피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거든. 피아니, 잠을 깨라구! 우린 내일 우디네에서 샴페인을 마신단 말이야. 잠은 깨었어.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그는 스파게티와 쇠고기를 접시에 가득 채웠다. 토마토 소스는 없던가, 아이모? 없던데. 하고 아이모가 대답했다. 우디네에서 샴페인을 마시자구. 보넬로가 말했다. 맑고 붉은 바르베라 포도주로 술잔을 채웠다. 많이 잡수셨습니까, 중위님?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실컷 먹었어. 그 술병 이리 달라구. 한 사람이 한 병씩 가지고 가도록 해 놨습니다. 아이모가 말했다. 조금 잤나? 저는 많이 잘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잤지요. 내일 우리는 임금님 침대에서 잘 거야.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왕비 마마하고 동침하거든.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그는 내가 이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하고 눈치를 살폈다. 닥쳐. 하고 내가 말했다. 그까짓 술을 마시고 너무 기분이 들떴어. 바깥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반이었다. 출발 시간이야. 하고 나는 일어났다. 중위님은 누구 차에 타시렵니까? 하고 보넬로가 물었다. 아이모 차에 타겠다. 다음은 자네. 다음은 피아니. 코르몬스를 향해 출발한다. 도중에서 잠들까 봐 겁나는데.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좋아. 내가 자네 차에 타지. 다음 보넬로. 다음이 아이모. 그게 좋겠어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졸려서 죽겠으니까요. 내가 운전할 테니 자네는 좀 자라구. 아닙니다. 만약 내가 잠이 들면 누가 나를 깨우리라는 것을 아는 동안은 운전할 수 있어요. 내가 깨우지. 아이모, 불을 끄라구. 그냥 두면 어때서 그러세요?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이제 이 곳은 아무 소용도 없지 않아요. 내 방에 조그만 트렁크가 하나 있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피아니, 자네가 좀 도와 주겠나? 우리가 내려오지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보넬로, 가세. 그는 보넬로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썩 좋은 곳이었는데.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그는 포도주 두 병과 치즈 반 덩어리를 잡낭 속에 넣었다. 이런 곳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어디로 후퇴하는 겁니까, 중위님? 탈리아멘토 너머라고들 하더군. 병원과 소속 부대는 포르데노네에 있게 될 거야. 여기가 포르데노네보다 좋은 곳입니다. 나는 포르데노네는 몰라. 하고 내가 말했다. 통과한 일밖에 없으니까. 대단한 곳이 아닙니다. 아이모가 말했다. {{}}{{28 }} 우리가 시가지 거리를 빠져 나가면서 보니까, 큰 거리를 지나가는 군대와 야포의 대열 이외에는 비와 어둠 속에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거리로 지나가는 많은 트럭과 약간의 짐마차가 역시 큰 거리에서 집결했다. 우리가 피혁 공장 곁을 지나 큰 거리로 나오자 부대며 트럭이며 짐마차며 야포들이 느릿느릿 나아가는 넓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빗속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아갔다. 우리 차량의 라디에이터 뚜껑이, 높이 짐을 싣고 젖은 돛베로 짐을 덮은 트럭의 꽁무니를 물다시피 따라갔다. 그러자 트럭이 정지했다. 대열 전체가 정지했다. 다시 트럭이 움직이고, 우리도 약간 나아가다가 또 섰다. 나는 차에서 내려 트럭이니 짐마차의 사이를 뚫고 젖은 말의 목 밑을 스쳐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을 버리고 도랑에 놓인 발판을 건너서 도랑 저편의 들판을 따라 걸었다. 들판을 횡단해서 나아가 보니까, 우중에 나무들 사이에 못박힌 채 꼼짝 못 하는 대열이 보였다. 나는 1마일 가량 걸었다. 대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못박힌 대열 너머로 다른 쪽에서는 부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로 돌아왔다. 이 움직이지 않는 대열은 우디네까지 뻗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아니는 핸들 위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나도 그 옆자리에서 기어 올라 잠이 들었다. 몇 시간 후에 우리 바로 앞의 트럭이 기어를 넣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피아니를 깨우고 출발했으나 몇 야드 움직이다가는 멈추고 다시 나아가고 했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열은 밤에 다시 서버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내려서 아이모와 보넬로를 보러 뒤로 돌아갔다. 보넬로는 자기 차 좌석에 공병 상사 두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내가 가자 그들은 몸가짐을 고쳤다. 이 친구들은 다리에 무슨 장치를 하려고 남았더랍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자기 소속 부대를 찾을 수가 없다기에 태웠습니다. 중위님, 허가를 해 주십시오. 허가하지. 하고 내가 말했다. 중위님은 미국인이야.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누구든지 태워 주시거든. 상사 중 한 사람이 미소했다. 또 한 상사는 내가 북부 또는 남부 미주에서 온 이탈리아 인이냐고 물었다. 이 분은 이탈리아 인이 아니라니까. 북부 미주의 영국인이야. 두 상사는 공손했으나 이 사실은 믿지 않았다. 나는 그들 곁을 떠나서 아이모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옆자리에 두 여자를 앉히고 구석에 비스듬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모, 아이모. 하고 내가 불렀다. 그는 웃었다. 이들에게 말을 걸어 보세요, 중위님! 하고 그가 말했다. 저는 도무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헤이! 그는 여자 허벅다리에 손을 얹고 가만히 꼬집는 시늉을 했다. 여자는 숄로 몸을 감싸고 그의 손을 떼어 놓았다. 헤이! 중위님께 이름하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려.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른 한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뭐라고 말을 했다. 뚱뚱하고 살빛이 검고 열 여섯 가량 되어 보였다. 동생이야? 나는 이렇게 물으며, 또 한 여자를 가리켰다. 그 여자는 머리를 끄덕거리고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여자 무릎을 가볍게 쳤다. 내 손이 닿자 여자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생이라는 여자는 한번도 눈을 들지 않았다. 아마 한 살쯤 아래인 것 같아 보였다. 아이모가 여자 허벅다리에 손을 얹으니까 얼른 떼어 놓았다. 그는 여자를 보고 웃었다. 좋은 사람. 하고 그는 자기를 가리켰다. 좋은 사람. 하고 그는 이번에는 나를 가리켰다. 염려 말어. 여자는 무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두 여자는 마치 두 마리의 야조(野鳥)와 같았다. 나를 꺼려한다면 뭣 때문에 나하고 같이 타고 간담?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이 여자들은 내가 몸짓을 하기가 무섭게 차에 올라탔답니다. 그는 여자 편으로 몸을 들렸다. 염려 말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럴 위험은 없어. 그는 상소리를 했다. 그럴 장소도 없고.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숄을 바싹 몸에 감았다. 자동차 만원.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그럴 위험 없어. 그럴 장소도 없어. 그 말을 할 때마다 여자는 약간 몸이 긴장했다. 그러자 딱딱한 몸가짐으로 앉은 채 그를 바라보고 울기 시작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더니 눈물이 통통한 볼에 흘러내렸다. 동생은 눈을 내리깐 채 언니 손을 잡고 둘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매섭던 언니 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겁이 나게 했나 본데.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겁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이모는 자기 잡낭을 꺼내서 치즈를 두 쪽 잘랐다. 자아. 하고 그는 말했다. 울지 말어. 언니 편은 고개를 젓고 그대로 울었고, 동생은 치즈를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동생이 언니에게 치즈 조각을 주니까 둘이 같이 먹었다. 아직도 언니는 흐느꼈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겠군.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그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처녀?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맹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처녀? 그는 동생을 가리켰다. 두 여자는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언니가 뭐라고 사투리로 말했다. 좋아, 좋아.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나는 두 여자와 비스듬히 앉아 있는 아이모를 남겨 두고 피아니의 차로 돌아왔다. 차량의 대열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부대는 계속해서 곁을 지나갔다. 아직도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어 대열이 정지하는 것은 더러는 젖은 가선(架線) 공사에 차가 걸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보다는 사람이나 말이 꾸벅꾸벅 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졸지 않고 도시를 통과할 때에도 교통은 마비되는 수가 있었다. 사실은 말과 자동차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농부의 짐마차 역시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아이모하고 같이 있는 두 민께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가 후퇴하는 마당은 두 처녀가 나타날 곳이 못 된다. 진짜 처녀가. 아무래도 무척 신앙심이 깊은 것 같다. 만약에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어 있을 것이다. 침대에서 나는 머리를 베개에 눕힌다. 침대와 식탁. 침대 속에서 빳빳이 사지를 펴고 눕는다. 이미 캐서린은 홑이불을 깔고 덮고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어떤 쪽으로 자든가? 안 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드러누워서 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어라 불어라, 너 서풍이여, 옳지, 바람이 분다. 그러나 내리는 것은 이슬비가 아니라 굵은 빗줄기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그 바람이 비를 몰아다가 쏟아주는 것이다. 저것들을 보라. 제기랄, 내 사랑이 품에 안겼고, 내가 다시 침대에 누워 있다면. 내 사랑 캐서린과. 내 사랑 캐서린을 비처럼 내리게 하소서. 다시 내 곁으로 불어 보내소서. 그래, 우리는 모두 비바람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비바람 속에 휩쓸렸고 조금 오는 비로는 바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캐서린 잘 자.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잘 자기를 바라오. 여보, 그렇게 누워서 불편하거든 돌아누워요. 냉수를 좀 가져다 주지. 조금만 있으면 아침이 될 텐데. 아침이 되면 좀 나아질 거요. 당신을 이렇게 불편하게 해 줘서 미안하구려. 여보, 잠을 좀 청해 보오. 쭉 잤는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은 잠꼬대를 하시는군요. 괜찮으세요? 당신 정말 거기 있소? 물론이죠, 저 여기 있어요. 달아나지 않아요. 이 때문에 우리들 사이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애인! 당신, 밤에도 안 달아나지, 응? 물론 안 달아나지요. 전 언제든지 여기 있어요. 당신이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갈게요. -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깜빡 졸고 있었나 보군. 하고 내가 말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세 시였다. 나는 좌석 뒤에 있는 바르베라 병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큰 소리로 잠꼬대를 하시던데요. 피아니가 말했다. 영어로 꿈을 꾸고 있었어. 하고 내가 말했다. 비는 차차 약해지고 우리는 앞으로 향해서 움직였다. 동이 트기 전에 또 한 번 정지를 했는데 날이 밝자 우리는 약간 높은 지대에 와 있었고, 후퇴로가 멀리 전방에까지 뻗어 있는 것이 보였으며, 보병이 자동차 대열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 상태였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낮이라 전진하는 속도가 눈에 보이는데, 우디네까지 갈 생각이 있다면 아예 어떻게 해서든지 간선 도로를 벗어나서 들판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밤이 되자 이곳저곳 시골길에서 많은 농부들이 대열에 끼어들어서 대열 중에는 세간살이를 실은 짐마차들이 눈에 띄었다. 침대 매트리스 사이로 불거져 나온 체경이 있는가 하면 닭이나 집오리를 짐마차에 잡아맨 것도 있었다. 빗속을 바로 우리 앞에 서서 가는 짐마차에는 재봉틀이 보였다. 그들은 가장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어떤 짐마차에는 부녀자들이 비를 피해서 서로 의지하면서 웅크리고 앉았고, 어떤 여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마차에 바싹 다가서서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보니까 대열 속에는 굴러가는 마차 밑을 따라가는 개도 있었다. 길은 질고 양편 도랑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길 옆에 늘어선 가로수 너머로 보이는 들판은 너무나 물에 젖어 있어서 그 곳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아예 단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서 이 곳을 횡단해서 갈 수 있는 옆길을 발견하려고 그럴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옆 길이 여러 갈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방향이 다른 길이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는 항상 차로 간선 도로를 달리면서 지났기 때문에 기억할 수가 없었고, 모두 비슷비슷해서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이 대열을 뚫고 나가려면 옆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군이 어디 위치해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만약에 비가 그치고 비행기가 날아와서 이 대열에 공격을 가하기만 하면 만사는 끝장이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몇 사람이라도 자기 트럭을 버리게 된다든지 말 몇 마리라도 죽기만 하면 노상의 모든 행동은 완전히 마비돼 버리게 마련이었다. 이제는 비도 많이 오지 않아서 나는 어쩌면 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길 가장자리를 따라 나아가다가 북쪽으로 뚫린 조그만 길이 양쪽에 나무 울타리 사이로 들 가운데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차라리 이 길을 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차가 있는 곳으로 급히 돌아갔다. 피아니에게 차를 그 길로 돌리라고 말한 다음에 보넬로와 아이모에게도 가서 말했다. 만약 이 길로 빠져 나갈 수가 없다면 되돌아와서 대열에 끼면 되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보넬로가 말했다. 그가 태운 두 상사가 아직 그의 좌석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면도를 하지 않았으나, 이른 아침에 보니까 그래도 군인 티가 났다. 차를 밀기에는 적당하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아이모에게로 가서 들판을 횡단해 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우리 처녀 가족을 어떻게 하죠? 하고 아이모가 물었다. 두 여자는 잠이 들어 있었다. 별로 쓸모가 없을걸. 하고 내가 말했다. 차라리 차를 밀 수 있는 사람이 낫지. 차 뒷칸에 태울 수는 있겠는데요.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뒷칸에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요. 자네가 그러고 싶다면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차를 밀 수 있도록 어깨가 떡 벌어진 녀석을 골라 태우라구. 저격병이 좋겠군요. 하면서 아이모가 빙긋이 웃었다. 그 녀석들이 제일 어깨가 넓지요. 넓이를 재어 보고 합격시키니까요. 중위님, 기분은 어떠십니까? 난 좋아. 자네 어때? 좋습니다. 그런데 무척 시장하군요. 이 길을 따라가면 뭐가 있을 테니까 차를 세우고 먹도록 하자. 다리는 어떠세요, 중위님? 괜찮아. 하고 내가 말했다. 자동차 발판에 올라서서 전방을 내다보니까 피아니의 차가 대열을 빠져 나와서 옆길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잎 떨어진 생울타리를 통하여 그의 차가 보였다. 보넬로가 방향을 돌려서 뒤를 따르고 피아니가 앞서서 길을 헤치며 나아갔으므로, 우리는 울타리 사이 좁을 길을 앞선 두 대의 병원차만 따라갔다. 이 길은 어느 농가로 통해 있었다. 우리는 피아니와 보넬로가 농가 마당에 차를 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집은 낮고 길었으며, 입구에는 포도나무 시렁이 있었다. 마당에 샘이 있어서 피아니는 라디에이터에 넣으려고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너무 낮은 기어로 달렸기 때문에 라디에이터가 끓는 듯이 뜨거웠다. 농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온 길을 돌아다 보았다. 농가는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들판 너머를 볼 수 있었다. 길과 울타리와 들과 후퇴 대열이 통과하고 있는 간선 도로의 나란히 선 가로수가 보였다. 두 상사는 집 안을 뒤지고 있었다. 두 여자는 잠을 깨고 모여 있는 세 운전병들을 바라보았다. 상사 중 하나가 손에 괘종 시계를 들고 나왔다. 돌려 놓고 나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집으로 들어갔다가 빈 손으로 나왔다. 자네 친구는 어디 갔나? 하고 내가 물었다. 변소에 갔습니다. 그는 앰뷸런스 좌석으로 기어 올라갔다. 우리가 저희를 내버리고 갈까 봐서 겁이 난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어요, 중위님? 하고 보넬로가 물었다. 뭘 먹을 수 있을 테죠. 시간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고. 이 길을 저쪽으로 빠져 내려가면 될 것 같나? 그럼요. 좋아. 그럼 먹자. 피아니와 보넬로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리지. 아이모가 두 여자에게 말했다. 그들이 내리는 것을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다. 언니되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빈 집에는 절대로 안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뒷모양만 지켜 보고 있었다. 까다로운 치들이야.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우리는 같이 그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크고 어둡고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보넬로와 피아니는 주방에 있었다. 먹을 게 별로 많지 않은데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말끔히 치우고 떠났군요. 보넬로는 육중한 주방 식탁 위에서 커다랗고 흰 치즈를 자르고 있었다. 치즈는 어디 있던가? 지하실에. 피아니가 포도주하고 사과를 발견했어요. 그만하면 훌륭한 조반이군. 피아니는 버들가지로 덮어씌운 포도주 항아리의 코르크 마개를 빼고 있었다. 그는 항아리를 기울여 구리쇠 남비에다 하나 가득히 따랐다. 냄새는 됐는걸. 하고 그는 말했다. 술잔을 몇 개 찾아 보게. 두 상사가 들어왔다. 치즈 좀 드시게 그려, 상사님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한 상사가 치즈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물론 가야지, 염려 마시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군인이란 배 힘으로 가는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네? 하고 상사가 물었다. 먹어 두는 게 좋단 말이야. 네, 그렇지만 시간은 귀중합니다. 이 새끼들은 벌써 먹어 둔 모양이군.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두 상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했다. 이 길을 아십니까? 하고 그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아니.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편 얼굴을 바라보았다.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번 상사가 말했다. 이제 출발하는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치즈와 사과를 먹은 다음이라 술맛이 좋았다. 치즈는 가지고 오라구. 하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보넬로는 커다란 술 항아리를 들고 나왔다. 그건 너무 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아까운 듯이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너무 큰 것 같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술을 넣게 물통들을 내놓게. 그는 물통에 술을 채웠다. 마당 돌을 깐 곳에 술이 넘쳐서 흘렀다. 다음에 그는 술 항아리를 들어서 바로 문 안에다 들여놓았다. 오스트리아 군이 문을 부수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겠지. 이제 떠나자. 하고 내가 말했다. 피아니와 내가 선두에 서마. 두 공병은 벌써 보넬로 옆 좌석에 가서 앉아 있었다. 여자들은 치즈와 사과를 먹고 있었다. 아이모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좁은 길을 몰고 내려갔다. 나는 뒤따라오는 두 차와 농가를 뒤돌아 보았다. 낮고 탄탄한 훌륭한 집이고 우물 주위에 쇠로 만든 시렁은 참 잘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는 앞길은 좁고 진흙 투성이었으며, 길 양쪽에는 높은 울타리가 있었다. 뒤에는 차들이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29 }} 오정때쯤 우디네로부터 10킬로 가까이의 거리라고 추측되는 진창길에서 우리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오전 중에 비는 그쳤고,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를 세 번 들었고,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멀리 좌측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 이어서 간선 도로를 폭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복잡하게 엉킨 샛길을 가까스로 찾아 나가다가 막힌 길로 들어선 일도 여러 번이었고, 그럴 때마다 되돌아서서 다른 길을 찾아 우디네로 근접해 갔다. 그런데 아이모의 차가 막힌 길을 벗어나려고 되돌아오다가 길 옆의 무른 땅에 빠져서 바퀴가 겉돌기만 하고 점점 땅을 파고 내려앉더니 결국 차동 장치까지 땅에 닿고 말았다. 이제 유일한 방법은 바퀴 앞을 파내고 나뭇가지를 펴서 체인이 물리도록 해 놓고 차가 길 위로 올라설 때까지 미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내려서 그 차 주위에 모였다. 두 상사는 그 차를 살펴보고 바퀴를 조사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길 아래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내가 그들 뒤를 따라갔다. 이봐 하고 내가 말했다. 나뭇 가지를 좀 잘라 와. 저희는 가야겠어요. 하고 한 상사가 말했다. 빨리 해. 하고 내가 말했다. 나뭇가지를 잘라 와. 저희는 가야겠어요. 하고 한 상사가 말했다. 또 한 상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떠나려고만 서둘렀다. 나를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명령이다. 차로 돌아와서 나뭇가지를 잘라. 하고 내가 말했다. 한 상사가 돌아다 보았다. 우리는 가야겠어요. 조금 있으면 퇴로가 차단됩니다. 중위님은 우리에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중위님은 우리 직속 상관이 아닙니다. 명령이다, 나뭇가지를 잘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들은 몸을 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지. 하고 내가 소리쳤다. 그들은 양쪽에 울타리가 있는 진창길을 계속해서 내려갔다. 명령이다, 정지. 하고 내가 소리쳤다. 그들은 약간 걸음을 빨리 했다. 나는 권총집을 열고 권총을 꺼내어 말이 많은 한 상사놈을 겨누고 발사했다. 빗나가서 맞지 않자 두 놈은 함께 뛰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세 발을 쏘아서 한 놈을 쓰러뜨렸다. 한 놈은 울타리를 뚫고 뛰어들어 달아났다. 그가 밭을 가로질러 뛰는 것을 보고 나는 울타리 사이로 쏘았다. 피스톨이 짤깍 소리를 내고 탄환이 떨어져서 또 한 갑을 끼웠다. 두번째 상사에게 발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멀리 밭을 가로질러 머리를 숙이고 뛰고 있었다. 나는 빈 탄약창을 다시 장전하기 시작했다. 보넬로가 다가왔다. 제가 가서 저놈 숨을 끊고 오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피스톨을 내주었다. 그는 상사가 땅에 머리를 박고 뻗어 있는 곳으로 갔다. 보넬로는 몸을 숙이고 상사의 머리에 피스톨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스톨은 발사되지 않았다. 공이치기를 세워야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공이치기를 세우고 두 번 쏘았다. 그는 상사의 다리를 쥐고 길가로 끌어내어 울타리 곁에 내던졌다. 그는 돌아와서 내게 피스톨을 돌려주었다. 백정놈의 자식 같으니라구.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상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총을 쏘는 것을 보셨습니까, 중위님? 빨리 나뭇가지를 잘라 와야 한다. 하고 내가 말했다. 또 한 놈도 맞기는 했나? 안 맞은 것 같아요.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피스톨로 맞히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어요. 개새끼.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우리는 전원이 나뭇가지와 곁가지를 잘랐다. 차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내렸다. 보넬로는 바퀴 앞을 파고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아이모가 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바퀴는 곁가지와 진탕을 튀기면서 겉돌았다. 보넬로와 나는 관절에서 소리가 나도록 밀었다.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모, 차를 앞뒤로 흔들어 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엔진을 거꾸로 넣었다가 바로 넣었다가 했다. 바퀴는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그리고는 차는 다시 차동 장치까지 빠지고, 바퀴는 파놓은 구멍에서 멋대로 겉돌았다. 나는 허리를 펴고 섰다. 밧줄로 당겨 보자. 하고 내가 말했다. 아무 소용도 없을 겁니다, 중위님. 똑바로 당길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해 봐야지. 하고 내가 말했다. 달리는 나오려 들지 않으니 말이야. 피아니와 보넬로의 차는 좁은 길을 곧장 내려갈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두 차에 밧줄을 걸고 당겼다. 바퀴는 구멍에서 옆으로 당겨질 뿐이었다. 소용 없다. 그만 해. 하고 내가 소리쳤다. 피아니와 보넬로는 차에서 내려서 돌아왔다. 아이모도 내렸다. 여자들은 약 50야드 가량 길을 올라가서 돌담에 앉아 있었다. 어떠하시렵니까, 중위님? 하고 보넬로가 물었다. 땅을 파고 또 한 번 나뭇가지로 해 보자. 나는 길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건 내 실수였다. 내가 그들을 이리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해가 구름 뒤에서 거의 나오고 상사의 시체가 울타리 곁에 눕혀져 있었다. 저놈의 상의와 외투를 아래에다 깔아 보자. 하고 내가 말했다. 보넬로가 그걸 벗기러 갔다. 내가 가지를 꺾고 아이모와 피아니는 바퀴 앞과 사이를 팠다. 나는 외투를 찢어서 두 쪽을 내 가지고 바퀴 밑 진창에다 깔고 바퀴가 걸리도록 가지를 그 위에다 쌓았다. 스타트의 준비가 되어 아이모가 운전대로 올라가서 차를 발동시켰다. 바퀴는 겉돌고 우리는 밀도 또 밀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만이다. 하고 내가 말했다. 차 안에 뭐 필요한 것 없나, 바르토? 아이모가 보넬로와 함께 기어 올라가서 치즈와 포도주 두 병과 외투를 가지고 내려왔다. 보넬로는 바퀴 뒤에 앉아서 죽은 상사의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내버리라구. 내가 말했다. 아이모의 처녀들은 어떻게 하지? 뒤에 태우면 되죠.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그렇게 먼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병원차의 뒷문을 열었다. 이리 와. 하고 내가 말했다. 올라 타. 두 여자는 기어 올라가서 구석에 가 앉았다. 아까의 사격 사건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길 위를 돌아다 보았다. 상사의 소매가 기다란 내의 바람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피아니와 한 차를 타고 출발했다. 우리는 들판을 횡단할 생각이었다. 길이 들로 접어들자 나는 내려서 앞서 걸었다. 횡단만 할 수 있다면 저쪽에 길이 있었다. 그러나 횡단할 수 없었다. 너무 무르고 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완전히 차가 정지해 버리고 바퀴가 바퀴통까지 묻히자 우리는 차를 들판에 버리고 도보로 우디네를 향해서 출발했다. 간선 도로로 되돌아가는 길까지 왔을 때 나는 두 여자에게 간선 도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리로 가 봐. 하고 내가 말했다. 사람들을 만날 테니까.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갑을 꺼내서 10 리라 짜리 지폐를 한 장씩 주었다. 저리로 내려가. 하고 또 큰 길을 가리켰다. 친구들! 가족들! 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돈을 꼭 쥐고 길을 걸어 내려갔다. 내가 돈을 도로 빼앗을까 봐 겁이 나는지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그들이 숄을 단단히 두르고 걱정스러운 듯이 우리를 돌아보면서 길을 내려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세 운전병은 껄껄 웃었다. 제가 저 방향으로 가면 얼마 주시렵니까, 중위님! 하고 아이모가 물었다.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들은 둘이 있는 거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좋을 테지. 하고 내가 말했다. 2백 리라만 준다면 곧장 오스트리아 군 있는 데로 걸어가지.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적군이 빼앗아 버릴걸.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아마 도달할 때까지 전쟁이 끝날 테지.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길을 걸었다. 해가 구름 사이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길 옆에는 뽕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 사이로 버리고 온 대형 수송차 두 대가 들 가운데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피아니도 돌아다 보았다. 저걸 꺼내려면 새로 길을 닦아야겠군. 하고 그가 말했다. 제발 자전거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보넬로가 말했다. 미국에서도 자전거 탑니까?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많이들 탔지. 여기서는 자전거가 굉장한 물건이랍니다.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자전거란 굉장한 귀중품이죠. 제발 자전거라도 있었으면.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나는 걷는 건 질색이야. 저것 포성인가? 하고 내가 물었다. 멀리서 포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모르겠는데요.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그는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런가 본데.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만나는 건 기병일 겁니다.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적군은 기병이 없을걸. 제발 없었으면 좋겠군요. 보넬로가 말했다. 난 기병의 창에 찔려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중위님은 확실히 그 상사를 쏘았지요? 하고 피아니가 물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내가 그놈을 죽였지.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한 놈도 죽여 본 일이 없었고, 상사 한 놈 죽이는 게 평생 소원이었거든. 자네는 꼼짝 않는 놈을 멋있게 쏘던데.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자네가 죽일 때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걱정 말아. 하여간 내가 평생 못 잊을 사건이야. 내가 그 상사새끼를 죽였단 말이야. 고해(告解)할 때 뭐라고 할 건가? 하고 아이모가 물었다. 이렇게 하지. 축복해 주십시오, 신부님. 제가 상사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껄껄거리고 웃었다. 저치는 무정부주의자랍니다.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성당 같은 데는 가지도 않아요. 피아니도 무정부주의자랍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정말 무정부주의자야? 하고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중위님. 우리는 사회주의자지요. 우리는 이몰라 출신입니다. 거기 가 보신 일 있습니까? 아니. 정말이지 좋은 곳입니다, 중위님. 전쟁이 끝나거든 한 번 오세요.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모두 사회주의자란 말이지? 모두 그렇지요. 좋은 곳인가? 멋있습니다. 아마 그런 도시는 못 보셨을 거예요. 어떻게 하다가 모두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자에요.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사회주의자에요. 한 번 오세요, 중위님. 중위님도 사회주의자로 만들어 드리지요. 조금 앞에서 길은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조그만 산이 있었으며, 돌담 너머로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길이 오르막이 되자 그들은 말을 그쳤다. 우리는 촌각을 다투며 걸음을 재촉했다. {{}}{{30 }} 얼마 후 우리는 강으로 나가는 길로 나섰다. 다리로 뚫린 길에는 내버린 트럭과 짐마차가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물은 불었는데 다리는 중심부를 폭파해서 돌 아치가 강에 떨어져 있고, 그 위로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강을 건널 지점을 발견하려고 둑을 따라 올라갔다. 훨씬 올라가면 철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리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길은 젖고 질었다. 부대는 일체 보이지 않았고, 내버리고 간 트럭과 물자뿐이었다. 강둑을 따라서는 아무것도 없고 젖은 덤불과 진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둑을 따라 자꾸 올라가서 철교가 보이는 곳까지 나왔다. 아름다운 철교로군. 아이모가 말했다. 수수한 긴 철교인데 보통때는 물이 흐르지 않는 강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폭파하기 전에 빨리 서둘러 건너는 게 좋겠다. 하고 내가 말했다. 폭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모두 달아나고 없는걸요. 아마 지뢰를 묻었을 겁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중위님이 먼저 건너세요. 저 무정부주의자 하는 소리 좀 들어 보지.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저치보구 먼저 건너라고 하세요. 내가 가지. 하고 내가 말했다. 사람 하나 건넌다고 터지도록 장치하지는 않았을 거야. 저 봐.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저게 머리라는 거야. 자넨 왜 머리가 없나, 이 무정부주의자야. 내가 머리가 있다면야 이런 델 와.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그건 제법 똑똑한 말인데요, 중위님.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제법 똑똑한 말인데. 내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다리 가까이까지 왔다. 하늘에는 또 구름이 끼고 비가 조금씩 내렸다. 다리는 견고하고 길어 보였다. 우리는 둑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한 번에 한 사람씩 건너. 하고 내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침목과 철길을 살피면서 철사 장치나 폭파 장치의 흔적이라도 있나 하고 찾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목 사이로 보이는 발 아래는 강물이 벌겋게 급류로 흐르고 있었다. 전면에 젖은 전원 건너로 빗속에 묻힌 우디네 시가가 보였다. 다리를 건너도 나는 돌아다보았다. 강 바로 위에 또 하나의 다리가 있었다. 내가 지켜 보고 있을 때 누런 진흙색 차가 한 대 그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다리 난간이 높았으므로 잠깐 보인 차체는 안계(眼界)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운전병과 그 옆 좌석에 한 사람, 뒷좌석에 두 사람 앉아 있는 군인의 머리는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독일군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러자 차는 다리를 건너서 나무와 도로변에 버려진 차량 뒤로 사라졌다. 나는 철교를 건너고 있는 아이모와 나머지 두 병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기어 내려가서 철둑 옆에 엎드렸다. 아이모가 나를 따라왔다. 그 차 봤나? 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요. 중위님만 지켜 보고 있었지요. 독일군 참모 차가 저 위 다리를 건너갔어. 참모 차요? 그래. 하나님 맙소사! 다른 둘도 건너와서 우리는 모두 철둑 뒤 진창에 웅크리고 앉아서, 다리의 철로와 줄지어진 나무와 도랑과 도로를 살폈다. 그럼 우리는 퇴로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위님?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독일군 참모 차가 저 길을 갔다는 사실이야. 기분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중위님? 머리가 어떻게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농담이 아니야, 보넬로. 한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피아니가 물었다. 만약에 퇴로를 차단 당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한잔해 두는 게 좋겠지요. 그는 물병 단추를 풀러 물병을 꺼내서 마개를 뽑았다. 저거! 저거! 하고 아이모가 길 쪽을 가리켰다. 돌다리 난간 위로 독일군 철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앞으로 구부리고 거의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다리를 빠져 나오자 그들의 전신이 보였다. 자전거 부대였다. 앞선 두 병사의 얼굴이 보였다. 불그스레하고 건강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철모가 앞 이마와 옆 얼굴 깊숙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들의 소총은 자전거 뼈대에 묶여 있었다. 그들의 철모와 군복은 젖어 있었고, 그들은 앞과 양옆을 두루 살피면서 미끄러지듯 자전거를 달려갔다. 앞선 둘 - 다음에 나란히 넷, 또 둘, 다음은 거의 십여 명 또 십여 명, 그 뒤에 하나,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강물 소리 때문에 우리가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길 위쪽을 향해 사라졌다. 하나님 맙소사.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독일군이야.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오스트리아 군은 아니었어. 왜 여기 누가 남아서 저들을 막지 않는가?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저 다리는 폭파하지 않았나? 왜 이 강둑에는 기관총이 없나? 중위님이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나는 잔뜩 화가 났다. 대관절 하는 짓들이 미친 지랄이야. 강 아래 쪽에서는 조그만 교량을 폭파해 놓고, 여기 간선 도로 교량은 그냥 놔 두고. 모두들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대관절 적을 막으려는 생각이 있나 없나? 중위님이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내 임무란 앰뷸런스 세 대를 이끌고 포르데노네까지 도달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걸 실패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임무도 포르데노네에 도착하는 일이다. 아마 우디네까지도 못 가고 말지도 모른다. 못 가면 대수냐. 이제는 침착해져서 총에 맞아 죽거나 포로가 안 되는 것뿐이다. 물병 마개 뽑았나? 하고 피아니가 물었다. 그가 물병을 건냈다. 나는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출발하는 게 좋겠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서두를 건 없어. 뭐 먹고 싶지 않나? 여기는 머물러 있을 곳이 못 됩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좋다. 출발하자. 이 편을 따라갈까요 - 아무것도 안 보이게요. 위로 올라가서 걷는 게 좋다. 이 다리로도 올지 모르거든. 우리가 보기도 전에 적군이 우리 머리 위에 와 있으면 안 되니까. 우리는 기차 철길을 따라 걸었다. 양옆으로는 젖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평야 건너 전방에 우디네의 산이 보였다. 산 위에 성(城) 모양으로 지은 큰 저택은 지붕이 날아가고 없었다. 종루와 시계탑을 볼 수 있었다. 들에는 뽕나무가 많았다. 전방에 철로가 파괴된 곳이 있었다. 침목을 파내서 철로 둑에 내버린 광경이 보였다. 내려와! 내려와!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우리는 철둑 옆으로 뛰어내렸다. 또 일대의 자전거 부대가 도로를 통과했다. 나는 둑 너머로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를 봤는데 그냥 지나가는군. 하고 아이모가 말했다. 중위님, 그리 가다가는 맞아 죽겠습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우리에겐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무슨 다른 목표가 있는 거야. 우리 위로 갑자기 닥치면 더 위험하단 말이야. 저는 여기 안 보이는 데로 걷고 싶은데요. 보넬로가 말했다. 좋다. 우리는 선로를 따라 걷겠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이모가 말했다. 그럼. 아직 적군이 많이 온 건 아니니까. 밤에 빠져 나가지. 그 참모 차라는 건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걸 누가 알아?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선로를 따라 걸었다. 보넬로도 강둑 진창을 걷는데 지쳐서 우리 있는 데로 올라왔다. 철로는 이제 간선 도로를 벗어나서 남쪽으로 뻗어 있었으므로, 도로에 뭐가 지나가는지 볼 수가 없었다. 운하를 가로지른 짧은 다리가 폭파되어 있었으나 붙어 있는 교각을 기어 올라가서 건넜다. 전방에서 총성이 들렸다. 우리는 운하 건너편 철로로 올라갔다. 철로는 낮은 들을 가로질러 똑바로 우디네 시가지를 향해 있었다. 전방에 다른 철로가 보였다. 북쪽으로는 우리가 자전거 부대를 본 간선 도로가 보였다. 남쪽으로는 양측에 짙은 숲이 있는 조그만 지선 도로가 들을 가로질러 있었다. 나는 남쪽으로 가로질러 가서 우디네를 우회하고 들을 횡단해서 캄포포르미오로 빠져 거기서 간선 도로로 나와 탈리아멘토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디네 너머에서는 샛길로만 감으로써 후퇴하는 간선 도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철둑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와.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옆길을 걸어서 우디네 남단으로 빠질 작정이었다. 우리는 모두 철둑 아래로 내려갔다. 옆길에서 누가 우리를 보고 총을 한 방 쏘았다. 탄환은 철둑 진흙에 가서 맞았다. 물러나라. 하고 나는 소리쳤다. 나는 진창에 미끄러지면서 철둑으로 뛰어 올라갔다. 운전병들은 내 앞을 달렸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둑 위로 올라갔다. 짙은 숲에서 총성이 두 번 더 나고, 아이모가 철로를 가로지르다가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비틀비틀하더니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졌다. 우리는 그를 철둑 저편으로 끌고 내려가서 반듯이 눕혔다. 머리를 둑 쪽으로 눕혀. 하고 내가 말했다. 피아니가 그를 돌려 눕혔다. 그는 철둑 비탈에 다리를 아래쪽으로 하고 누워서 불규칙적으로 피를 토했다. 우리 세 사람은 비를 맞으며 그를 둘러싸고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목 뒤 아래쪽을 맞았고, 탄환은 위로 관통해서 바른쪽 눈 아래로 나왔다. 내가 두 개의 총구멍에 피를 막고 있는 동안에 그는 죽었다. 피아니는 그의 머리를 내리고 구급 붕대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고 그대로 땅에 놓았다. 개새끼들 같으니. 하고 그가 말했다. 이번 건 독일군이 아니야. 하고 내가 말했다. 거기에는 독일군이 있을 턱이 없거든. 이탈리아 군이야. 피아니가 이탈리아 인이라는 별명 이탈리아니 라는 말을 써서 이렇게 말했다. 보넬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아이모 옆에 앉아서 그를 바로 보지 않고 있었다. 피아니가 철둑 아래 굴러 있던 군모를 주워서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는 물병을 꺼냈다. 한 모금 하겠나? 피아니가 보넬로에게 물병을 내주었다. 싫어.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그는 나를 향해 말했다. 철길을 걸었다가는 저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아니야.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가 들판을 횡단했기 때문이었어. 보넬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모는 죽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다음 차례는 누구죠, 중위님? 이제 우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이모는 죽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다음 차례는 누구죠, 중위님? 이제 우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총을 쏜 건 이탈리아 군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독일군이 아니었어. 아마 그게 독일군이었다면 우리를 전부 죽였을 거예요.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우리는 독일군보다 이탈리아 군 때문에 더 위험하다. 하고 내가 말했다. 후위 부대는 뭐든지 겁을 내니까. 독일군은 목표물을 알고 있거든. 이론은 그렇지만요, 중위님.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하고 피아니가 물었다. 어디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드러누웠다 가는 게 좋겠다. 남쪽으로만 갈 수 있으면 성공인데. 첫번째 사격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 쏘아 죽일걸요.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저는 그런 모험은 안 하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우디네 가까운 곳에 가서 누워 있다가 어두워지면 돌파하는 거야. 그럼 갑시다. 보넬로가 말했다. 우리는 철둑 북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돌아다보았다. 아이모는 철둑 모퉁이 진창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아주 작게 보였고, 두 팔을 몸 양쪽에 붙이고 각반 친 다리랑 진흙투성이 장화를 모으고 모자로 얼굴을 덮고 누워 있었다. 분명히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비가 내렸다. 나는 내가 아는 누구에 못지 않게 그를 좋아했다. 그의 수첩이 내 호주머니에 들었으니까 가족에게 편지나 해 주어야겠다. 들을 가로지른 전방에 농가가 한 채 있었다. 주위에는 나무가 서 있고 농가의 부속 건물이 몸채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이층에는 기둥을 세워 만든 발코니가 있었다. 서로 좀 떨어져 가는 게 좋겠다.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앞서마. 나는 농가를 향해서 걸어갔다. 들을 가로지르는 샛길이 있었다. 들을 건너가면서도, 누가 농가 가까이 숲이나 혹시 농가에서라도 우리를 향해서 사격을 해 올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형을 똑똑히 봐 놓고 그 곳을 향해서 걸어갔다. 이층 발코니는 헛간과 근접해 있었고, 기둥 사이로 건초가 삐어져 나온 게 보였다. 마당에는 돌이 깔렸고, 나무에서는 빗방울이 듣고 있었다. 바퀴 둘이 달린 커다란 짐마차가 채를 공중으로 쳐들고 비를 맞으면서 빈 채로 서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서 가로질러 발코니 밑으로 가 섰다.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보넬로와 피아니가 따라 들어왔다. 안은 어두웠다. 나는 주방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개방식 아궁이에는 재가 있었다. 재 위에 남비가 매달려 있었으나 빈 남비였다.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먹을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저 헛간에 가서 누워 있자. 하고 내가 말했다. 피아니, 뭐든지 먹을 것을 찾아서 그리로 가지고 올 수 있겠니? 찾아 보지요. 피아니가 말했다. 저도 찾아 보겠습니다. 하고 보넬로가 말했다.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올라가서 헛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봐 두지. 아래 마굿간에서 돌 층계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굿간은 비가 오는데도 마르고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가축은 아마 피난 갈 때 모두 쫓아 버렸는지 한 마리도 없었다. 헛간에는 건초가 반쯤 차 있었다. 지붕에 들창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판자로 못질을 했고, 또 하나는 북쪽으로 난 좁다란 채광창이었다. 가축에게 건초를 주기 위해 비스듬히 세운 널빤지가 있었다. 건초 마차를 몰고 들어와서 건초를 헛간까지 실어 올리는 작업을 하는 광 바닥에서 입구에 이르기까지에는 들보가 여러 개 서로 엇갈려 있었다. 지붕에 빗소리가 들리고 건초 냄새가 나고 아래로 내려가니까 마굿간에서 마른 말똥의 깨끗한 냄새가 풍겼다. 우리가 널빤지를 조금 물려 내기만 하면 남창으로 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북창으로는 북쪽 들판을 내다볼 수 있었다. 여차하면 두 창으로 지붕까지 빠져 나와서 내려 뛸 수 있었고, 계단을 못 쓰게 된다면 가축에게 건초를 쏟아 주는 널빤지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다. 큰 헛간이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들으면 건초 속에 숨어 버릴 수도 있었다. 숨기에는 적합한 장소인 것 같았다. 만약 놈들이 총만 쏘지 않았더라면 남쪽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거기에 독일군이 있을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군은 북쪽에서 침입해서 치비달레 가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탈리아 군이 훨씬 더 위험했다. 놀란 판이라 뭣이든지 보기만 하면 쏘는 것이다. 어젯밤에 후퇴하면서 우리는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많은 독일군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후퇴군에 섞여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런 소문은 전쟁에는 으레 따르기 마련이다. 적은 언제나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도대체 적을 교란하기 위해서 우리편에서 독일군 군복을 입고 침투해 들어갔다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런 짓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일군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 후퇴를 교란할 필요가 없었다. 군대의 규모와 도로의 부족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독일군은 멋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를 독일군이라고 쏘려고 한다. 그들은 아이모를 쏘아 죽였다. 건초 냄새가 구수했고, 헛간 건초 위에 누워 있으려니까 그 동안의 세월은 없었던 것처럼 옛날로 돌아갔다. 우리는 건초 위에 누워서 이야기를 했었고, 헛간 높은 곳에 뚫린 삼각형 구멍에 앉은 참새를 공기총으로 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헛간은 없어졌고 헴록나무를 벌채해 버렸기 때문에, 전에 숲이 있던 곳에는 그루터기와 마른 나뭇가지나 잡초가 있을 뿐이다. 이제 뒤돌아 설 수는 없다. 앞으로도 못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밀라노에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면 만약 밀라노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북쪽 우디네 방면의 총성에 귀를 기울였다. 기관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도로변에다 약간의 부대를 배치했음에 틀림없다. 헛간의 희미한 광선 속에서 내려다 보니까 피아니가 광 바닥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기다란 소시지와 뭔지 항아리 하나와 겨드랑이에 포도주 두 병을 끼고 있었다. 올라와. 하고 내가 말했다. 거기 층계가 있어. 그러나 가진 것이 있어서 내가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갔다. 건초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넬로는 어디 있나? 하고 내가 물었다. 이제 말씀드리죠.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건초 위에다 가져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피아니는 병마개 따는 송곳이 달린 칼을 꺼내어 포도주 병 마개를 뽑았다. 밀로 봉했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다. 고급품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빙긋 웃었다. 보넬로는 어디 갔어? 하고 내가 물었다. 달아났어요, 중위님. 하고 그가 말했다. 포로가 되고 싶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총맞아 죽을까 봐 겁이 난 겁니다. 나는 포도주 병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전쟁에 대해서 신념이 없습니다, 중위님. 자네는 왜 갔나? 하고 내가 물었다. 저는 중위님을 버리고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디로 간 거야? 모르겠습니다, 중위님. 그저 휭하고 가버렸으니까요 .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소시지를 잘라 주게. 피아니는 희미한 광선 속에서 나를 바라다 보았다. 지금 이야기하는 동안에 잘랐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건초 위에 앉아서 소시지를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결혼에 쓰려고 아껴 둔 포도주임에 틀림없었다. 하도 오래 되어서 빛이 변할 지경이었다. 자네는 이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으라구.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저쪽 창으로 내다볼 테니. 서로 한 병씩 차지해 가지고 마시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마시던 술병을 들고 가서 건초 위에 주저앉아 좁은 들창으로 바깥의 젖은 시골 풍경을 내다보았다. 어떤 광경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지만 보이는 것은 들과 잎 없는 뽕나무들과 비오는 것뿐이었다. 포도주를 마셨으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 오래 저장해 두어서 술이 삭아 버렸고 술 기운이나 색깔이 없어진 것 같았다. 나는 바깥이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둠은 빨리 왔다. 비가 오니 깜깜한 밤이 될 것이다. 어두워지면 바깥을 감시할 필요도 없겠기에 피아니 곁으로 갔다. 그는 잠이 들어 있어서 깨우지 않고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는 몸집이 큰 사나이고 잠도 깊이 들어 있었다. 얼마 후에 그를 깨워서 출발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 아마 죽음이나 어둠 속에서의 사격이나 도주 같은 것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독일군 일개 대대가 통과하는 동안 간선 도로 옆 도랑에 납작하게 엎드려 기다리다가 다 가버린 후에 길을 건너서 북쪽으로 갔다. 빗속에서 두 번이나 독일군과 아주 근거리에서 부딪친 일도 있었으나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 군도 전혀 만나지 않고 시가지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서 얼마 후 후퇴의 주류에 휩쓸려 들어갔고, 탈리아멘토를 향해서 밤새도록 걸었다. 나는 이 후퇴가 얼마나 거창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지방 전체가 군대와 더불어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량보다 빠른 속도로 밤새도록 걸었다. 다리가 아프고 피로했지만 걸음은 빨랐다. 보넬로가 포로로 잡히기로 결심한 것은 퍽 어리석은 일 같아 보였다. 위험이라곤 없었다. 아무 사고 없이 두 나라 군대 사이를 돌파한 셈이다. 아이모만 사살되지 않았던들 위험 같은 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차길에서 전신을 드러내고 걸었어도 아무도 귀찮게 구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살인은 돌연히 그리고 아무 까닭 없이 닥쳐 왔던 것이다. 나는 보넬로는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중위님? 피아니가 물었다. 우리는 차량과 부대로 혼잡한 도로의 한쪽 편으로 걷고 있었다. 좋지. 저는 걷는 데 지쳤습니다. 글쎄,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걷는 것 뿐이야. 걱정할 것 없어. 보넬로는 바보 녀석이었군요. 정말 바보 짓을 했어. 그 녀석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중위님? 모르겠어. 그냥 포로로 잡힌 것으로 해 주실 순 없습니까? 모르겠어. 아시겠지만 전쟁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당국에서 가족을 귀찮게 굴 테니까요. 전쟁은 계속 안 되지. 하고 어떤 병사가 말했다. 우리는 집에 가는 길이야. 전쟁은 끝났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모두들 제대 귀향이야. 가십시다, 중위님.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그는 이 병사들을 앞설 생각이었다. 중위님? 중위님이 누구야? 장교를 타도하라! 장교를 타도하라! 피아니는 내 팔을 붙들었다. 이제부터는 이름을 부르는 게 좋겠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놈들이 무슨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요. 놈들은 장교를 몇 명이나 쏘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서 그들을 지나쳤다. 가족에게 누를 끼칠 만한 보고서는 안 내도록 하지. 나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전쟁이 끝난다면 아무래도 좋지만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그러나 끝나리라고 믿어지지 않아요. 끝난다면 너무 다행한 일이지요. 곧 알게 될 테지. 하고 내가 말했다. 끝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믿지 않아요. 평화 만세! 하고 한 병사가 소리쳤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네. 모두 집으로 간다면 좋겠지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가고 싶지. 절대 못 돌아갈 겁니다. 저는 전쟁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가세! 하고 한 병사가 소리쳤다. 총을 내버리는군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행군을 하면서 총을 풀어서 내버리는데요. 그리고는 아우성을 치는군요. 총은 가지고 있어야지. 총만 내버리면 전쟁을 안 시킬 줄 아는가 보지요. 어둠과 빗속에서 길가로 비켜서서 걸어가면서 나는 부대의 대부분이 아직도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총이 외투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어느 여단인가? 하고 어떤 장교가 큰 소리로 물었다. 평화 여단이오. 하고 누가 외쳤다. 평화 여단! 장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라 그랬어? 그 장교가 뭐랬지? 장교 타도! 평화 만세! 우리는 차량 대열 속에 버리고 간 두 대의 영국 앰뷸런스를 지나쳤다. 저건 고리치아에서 온 차에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저 차를 잘 알지요. 우리보다 훨씬 많이 왔군. 먼저 떠났으니까요. 운전병들은 어디 있을까? 아마 훨씬 앞이겠지요. 독일군은 우디네 외곽에서 정지하고 있어.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다 강을 건너겠군. 그렇죠.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겁니다. 독일군은 진격해올 수 있었거든.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왜 안 오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모르겠어요. 저는 이런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마 수송 차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거겠지. 모르지요.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혼자 있으니까 퍽 얌전했다. 다른 병사와 어울리면 그는 말이 거친 병사였다. 자네 결혼했나? 결혼한 줄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래서 자네는 포로가 되고 싶지 않았던가? 그것도 이유의 하나죠. 중위님은 결혼하셨나요? 아니. 보넬로도 아직 미혼이에요. 사람이 결혼했다고 해서 어떻다는 건 아니야.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법이지.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요. 발은 어때? 무던히 아프군요. 날이 밝기 전에 우리는 탈리아멘토 강 둑에 도착했고, 물이 불은 강을 따라 내려가서 모든 인마(人馬)가 건너고 있는 다리까지 갔다. 이 강에서 적을 막아 낼 수 있을 텐데. 하고 피아니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강물이 많이 불은 것 같았다. 물은 굽이치고 강 폭은 넓었다. 나무 다리는 거의 길이가 4분의 3마일은 되었고, 여느께 같으면 다리 훨씬 아래에서 자갈투성이의 넓은 강바닥에 좁은 흐름을 이루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다리 바닥 판자에 넘실넘실 닿을 정도였다. 우리는 강둑을 따라가서 다리를 건너고 있는 군중 틈에 끼어들었다. 탁류의 불과 수 피트 위를 군중 틈에 꼼짝 못하게 끼어서 포병 탄약 상자 바로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난간 너머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제 걸음으로 걸을 수도 없게 되니까 무척 피곤했다. 다리를 건너는 즐거움 같은 것도 없었다. 낮이 되어서 비행기가 이 다리를 폭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피아니. 하고 내가 불렀다. 여기 있습니다, 중위님. 그는 약간 앞에 군중 틈에 끼어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두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다리를 건너자는 생각뿐인 것 같았다. 우리는 거의 다 건넜다. 다리 저편에 장교 수명과 헌병이 회중 전등을 비치면서 양쪽에서 있었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그들의 검은 윤곽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들과 가까워졌을 때 장교 한 명이 대열에 섞인 사나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헌병이 그에게로 가서 팔을 붙들고 끌어냈다. 그는 그 사나이를 길에서 데리고 가버렸다. 우리는 거의 그들 앞에까지 왔다. 장교들은 대열 속에 있는 사람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이따금 서로 뭐라고 지껄이고, 성큼성큼 걸어나가서 누군가의 얼굴에 전등불을 비춰 보기도 했다. 우리가 바로 그들 앞에 갔을 때 그들은 또 누군가를 잡아 냈다.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그는 중령이었다. 그들이 전등불을 비추었을 때 그의 소매에 네모 안에 든 별이 눈에 띄었다. 그는 머리가 회색이고 키가 작고 비대했다. 헌병은 그를 장교들이 서 있는 뒤로 끌고 갔다. 그들 앞에 왔을 때 그들 중 한 두 명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헌병에게 뭐라고 했다. 헌병이 나를 향해서 나오더니 대열을 헤치고 내 앞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멱살을 잡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는 거야? 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갈겼다. 모자 밑에 그의 얼굴이 보이는데, 수염이 위로 뻗친 뺨에 피가 흘렀다. 또 한 헌병이 나 있는 데로 헤치며 왔다. 왜 이러는 거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붙들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나는 피스톨을 꺼내려고 팔을 뒤로 돌렸다. 장교에게 손을 못 댄다는 걸 모르느냐? 또 한 놈이 뒤에서 내게 덤벼들어 팔을 잡아 올려 비틀었다. 내가 몸을 돌리자 또 한 놈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 녀석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왼쪽 무릎으로 녀석의 사타구니를 내질렀다. 반항하거든 쏴라. 누군가가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음성이 그렇게 크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나를 길가로 끌고 나왔다. 반항하면 쏴라. 하고 한 장교가 말했다. 이 뒤로 끌고 오너라. 너는 누구냐? 알게 될 거다. 너는 누구야? 야전 헌병이야. 하고 또 한 장교가 대답했다. 왜 좀 와 달라고 내게 말하지 못하고 이 헌병놈을 시켜 나를 붙드느냐?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야전 헌병인 것이다. 다른 놈들과 같이 저 뒤로 끌고 가거라. 하고 먼저번 장교가 말했다. 이탈리아 말에 사투리가 있다. 네 놈도 마찬가지다, 이 개자식아. 하고 내가 말했다. 다른 놈들하고 함께 뒤로 끌고 가거라. 하고 그 장교가 말했다. 그들은 장교들이 서 있는 뒤로 해서 길 아래 강둑 옆 밭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가 그리로 걸어갈 때 총성이 들렷다. 번쩍하고 불빛이 보이고 총성이 들렸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장교 네 명 앞에 한 군인이 서 있고 양쪽에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헌병이 다른 한 떼의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헌병 네 명이 심문하는 장교들 가까이에서 소총을 짚고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차양이 넓은 군모를 쓴 헌병이었다. 나를 끌고 온 두 명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는 패에 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장교의 심문을 받고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비대하고 머리가 회색이고 키가 작은, 그들이 대열에서 빼내온 중령이었다. 심문하는 장교들은 매우 능률적이고 냉정하고 자제심을 갖춘, 남을 사격만 했지 사격을 당해 본 일이 없는 그야말로 이탈리아 군다운 놈들이었다. 소속 여단은? 그는 대답했다. 연대는? 그는 대답했다. 왜 연대에서 이탈했지요? 그는 대답했다. 장교는 소속 부대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걸 모르시나요? 알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다른 장교가 말했다. 신성한 조국 땅을 야만인이 짓밟도록 한 것은 당신이나 당신과 같은 군인들이오. 뭐라고요? 하고 중령이 말했다. 우리가 승리의 성과를 놓친 것은 당신 같은 사람들의 반역 행위 때문이오. 자네는 후퇴해 본 경험이 있나? 하고 중령이 물었다. 이탈리아는 후퇴하는 일이 없소.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이걸 듣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장교들 맞은편에, 그리고 체포된 중령은 우리가 있는 앞에서 약간 한쪽으로 비킨 곳에 서 있었다. 만약 나를 총살하려거든 하고 그 중령이 말했다. 제발 더 묻지 말고 즉시 집행해라. 심문이 졸렬하다. 그는 십자를 그었다. 한 장교가 종이에다가 뭐라고 썼다. 부대 이탈 죄로 총살을 명함. 하고 그가 말했다. 두 헌병이 중령을 강둑으로 끌고 갔다. 그 늙은이는 모자도 안 쓰고 비를 맞으면서 양쪽에 헌병이 지켜서서 걸어갔다. 나는 그를 총살하는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총성을 들었다. 그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심문하고 있었다. 이 장교 역시 소속 부대와 헤어진 것이다. 그에게는 해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종이쪽에 쓴 선고를 읽을 때 울었다. 헌병이 데리고 갈 때에도 울었으며, 총살을 집행할 때 장교들은 이미 다른 군인을 심문하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심문받은 자가 총살되는 동안에 다른 군인을 심문한다는 점에 열중해 있는 듯했다. 이렇게 하면 한 번 결정한 총살은 집행했지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기다려서 심문을 받아야 할 것인지 지금 도망을 쳐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명백히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독일 군인이었다. 나는 그들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머리가 있고 또 그것이 돌아간다면 말이다. 그들은 모두가 젊고 조국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탈리아멘토 건너에서 제 2군을 재편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소속 부대를 이탈한 소령 이상의 장교를 처형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독일군 선동자를 즉결로 처형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우리들 중에 철모를 쓴 것은 두 명뿐이었다. 헌병 중에도 철모를 쓴 자가 있었다. 다른 헌병들은 차양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비행기라고 불렀다. 우리는 비를 맞고 서 있다가 한 명씩 불려 나가서 심문을 받고 총살을 당하러 갔다. 지금까지 그들은 심문한 자를 모조리 총살했다. 그들 자신은 조금도 위험한 경우를 당하지 않고 죽음을 다루는 인간에게 특유한 아름다운 공평무사 정신과 엄격한 재판에 대한 헌신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야전 연대의 대령을 심문하고 있었다. 그 때 세 장교를 더 붙들어다가 우리 패에 보태었다. 소속 연대는? 나는 헌병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로 잡혀 온 자들을 보고 있었다. 다른 헌병들은 대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추고 두 군인 사이를 밀어 헤치고 강을 향해서 머리를 숙이고 뛰었다. 강가에서 고꾸라지면서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물은 무척 차가웠으나 나는 참을 수 있는 데까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물결이 나를 빙빙 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다시는 물 위로 올라올 수 없으리라고 느낄 때까지 물 밑에서 참고 있었다.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을 타서 숨을 쉬고는 다시 물 밑으로 잠겼다. 옷을 죄다 입고 장화까지 신고 물 밑에 남아 있기는 쉬운 일이었다. 두번째 물 위로 올라왔을 때 마침 앞에 있는 나무 토막을 발견하고 한 손으로 그걸 잡았다. 나는 그 뒤에다 내 머리를 눕히고 그것을 눈여겨 바라보지도 않았다. 강둑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뛰기 시작할 때 총성이 들렸고 내가 처음 물 위로 솟았을 때 또 한 번 총성이 들렸다. 나는 거의 물 위로 올라와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총소리도 없었다. 나무 판자는 물결을 따라 굽이치고, 나는 한 손으로 그것에 매달렸다. 강에는 숲이 많았다. 물은 무척 차가웠다. 나는 판자에 매달려서 그것이 흐르는 대로 맡겨 두었다. 이제 강둑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31 }} 급류일 때는 물 속에 잠겨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아주 오래된 것 같아도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물이 차고 넘쳐 흘렀고, 물이 불을 때 강둑에서 떠내려온 여러 가지 물건들이 스쳐갔다. 나는 재수가 좋아서 무거운 재목에 매달릴 수 있었고, 얼음같이 찬 물 속에서 턱을 그 나무에 올려놓고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한 자세로 두 손으로 그 나무 토막을 붙들고 누워 있었다. 쥐가 날까 봐 염려가 되었고, 강둑으로 흘러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기다란 곡선을 그리면서 나는 떠내려갔다. 이제는 아주 밝기 시작해서 강변에 있는 덤불을 볼 수 있었다. 전방에 덤불로 된 섬이 있어서 물결이 강변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장화랑 군복을 벗고 강둑으로 헤엄을 쳐 갈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어떻게든지 해서 강변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지만 맨발로 상륙한다면 난처할 것 같았다. 하여간 어떻게든 메스트레까지는 가야만 했다. 나는 강변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리 물러나고 다시 가까워지고 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보다 느린 속도로 떠내려갔다. 이제 기슭이 아주 가까워졌다. 버드나무 숲의 가지가 보였다. 나무 토막은 천천히 돌았기 때문에 강변이 내 뒤로 돌아갔고, 나는 소용돌이 속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나는 천천히 맴을 돌았다. 다시 이번에는 아주 가까워진 기슭을 보았을 때 한 팔로 재목을 붙들고 물을 차고, 한 팔로는 나무 토막을 기슭으로 밀고 가려고 해 봤으나 조금도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소용돌이를 벗어나 버릴까 봐 겁이 나서 한 손으로 토막을 붙들고 두 다리가 토막 옆에 밀착되도록 다리를 구부려 올리고 기슭을 향해서 힘껏 떠밀었다. 덤불이 보이기는 했지만 힘껏 반동을 주어 물을 헤쳤는데도 물결 때문에 멀어지고 말았다. 그 때 장화 때문에 물에 빠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물결을 헤치며 죽을 힘을 내었고, 기슭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무거운 장화를 신은 군복 차림으로 기슭에 닿을 때까지 힘을 다해서 허우적거렸다. 나는 버드나무 가지를 붙든 채 몸을 끌어올릴 힘도 없었으나 이제 물에 빠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무 토막에 매달려 있을 때는 물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나는 하도 발악을 했기 때문에 위와 가슴이 텅 빈 것 같았고 구역질이 났으나 가지를 붙들고 기다렸다. 구역질이 멎자 나는 버드나무 숲으로 몸을 끌어올리고 팔로 덤불을 끌어안고 두 손으로 가지를 단단히 쥔 채 잠깐 쉬었다. 그제서야 기어 나와서 버드나무를 헤치고 기슭으로 올라갔다. 날은 거의 다 밝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슭에 드러누워서 강물 소리와 빗소리를 들었다. 조금 후에 일어나서 기슭을 따라 걸었다. 나는 라티사나까지는 다리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현재 위치가 산비토 맞은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방에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도랑이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갔다. 지금까지는 사람 그림자를 보지 않았기에 나는 도랑둑에 있는 어떤 덤불 옆에 앉아서 구두를 벗어서 안에 든 물을 비웠다. 상의를 벗고 서류가 들어 있는 지갑을 꺼내고 안주머니에서 흠뻑 젖은 돈을 꺼내고는 옷을 짰다. 바지도 벗어서 짜고 셔츠와 내의도 짰다. 내 몸을 두들기고 문지르고 한 다음에 다시 옷을 입었다. 모자는 잃어버렸다. 상의를 입기 전에 소매에 달린 별표를 뜯어서 돈과 함께 안주머니에 넣었다. 돈은 젖어 있었으나 별일 없었다. 세어 보았다. 3천 리라하고 얼마쯤 더 있었다. 옷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했으며 나는 피가 순환하도록 하느라고 내 팔을 두들겼다. 털내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움직이기만 하면 감기는 안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헌병들이 내 피스톨을 빼앗았기 때문에 권총집은 상의 안에 찼다. 외투가 없으니까 우중에 추웠다. 나는 도랑의 둑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날이 밝았는데 사방은 비에 젖어 낮고 음산하게 보였다. 들도 헐벗고 젖어 있었다. 멀리 들판에 종루가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길로 나섰다. 전방에 무슨 부대인지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길 한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아무도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강을 향해서 올라가는 기관총 부대였다. 나는 그대로 걸어 내려갔다. 그 날 나는 베네치아 평야를 횡단했다. 그 곳은 낮고 평탄한 지대인 데다가 비가 오니까 더욱 낮아 보였다. 바다 쪽으로는 소름 늪이 많고 길이 별로 없었다. 길은 모두 강 어귀를 따라 바다고 향했기 때문에 평야를 횡단하려면 운하 곁에 난 길을 따라가야 한다. 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 지방을 횡단했는데 두 개의 철로와 많은 도로를 건너서 드디어 골목길이 끝나는 곳이 어느 늪가를 달리는 철둑길이었다. 베니스 시발(始發)로 트리에스테까지 달리는 간선 철도였으며, 둑이 높고 튼튼하고 견고한 노반(路盤)에 복선 궤도가 깔려 있었다. 선로를 약간 내려가면 간이 정거장이 있었고, 입초 서 있는 병사가 보였다. 선로 위쪽으로는 늪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울에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에도 입초가 서 있었다. 들을 북쪽으로 횡단하면서 이 철로를 통과하는 열차를 보았다. 평야이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포르토 그루아로에서 오는 열차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입초병을 주의해 본 후에 철길을 따라 양쪽을 다 볼 수 있도록 철둑에 드러누웠다. 다리에 있던 입초가 약간 걸어와서 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까이 왔으나 이내 돌아서서 다리로 가버렸다. 나는 누워서, 공복감을 느끼면서 열차를 기다렸다. 아까 본 열차는 무척 길어서 기관차가 아주 천천히 끌고 갔는데 그 정도라면 잡아탈 자신이 있었다. 열차가 오리라는 희망을 거의 단념했을 때 열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기관차는 똑바로 달려오는 것이 조금씩 커졌다. 나는 다리에 있는 입초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리 이쪽을 걷고 있었으나 철로 반대편이었다. 열차가 지나가면 그에게는 안 보이게 마련이었다. 나는 기관차가 더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끄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많은 차량이 달려 있었다. 열차에도 경비병이 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디 탔나 하고 찾아 보려고 했으나 시야가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기관차가 거의 내가 누워 있는 곳까지 왔다. 평지인데도 연기를 뿜으면서 헐떡거리고, 기관차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그리고 기관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일어서서 지나가는 차량 바로 곁에 바싹 붙어섰다. 경비병이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철로가에 서 있는 별로 의심스럽지 않은 존재에 불과했다. 유개(有蓋) 화차가 대여섯 차량 지나갔다. 그 다음에 흔히 곤돌라라고 부르는 낮은 무개화차 한 량에 돛베를 덮은 것이 다가왔다. 그 화차가 거의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날려서 꽁무니에 달린 손잡이를 붙들고 달라붙었다. 나는 곤돌라와 그 위에 연결된 높은 유개화차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아무도 나는 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손잡이에 매달린 채 발을 연결기에 올려놓고 웅크리고 있었다. 열차는 거의 다리 맞은편까지 왔다. 나는 입초병이 있는 것을 기억했다. 열차가 지나갈 대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나이 어린 병사여서 철모가 머리에 너무 컸다. 내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자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내가 열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열차는 지나갔다. 나는 그가 아직 불안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차량들을 지켜 보고 있는 것을 보다가 그만두고 돛베를 어떻게 묶어 놓았나를 살폈다. 밧줄 고리들이 있고 끝머리에 밧줄이 묶여 있었다. 나는 나이프를 꺼내어 밧줄을 끊고 팔을 안으로 넣었다. 비를 맞아 뻣뻣해진 돛베 밑에 딱딱한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앞 화차에 경비병이 타고 있었으나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놓고 돛베 밑으로 기어들었다. 앞이마가 뭣엔지 부딪쳐서 눈에 불이 번쩍 나고 얼굴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으나 기어 들어가서 납작하게 누웠다. 그제서야 몸을 돌려서 돛베를 다시 묶어 놓았다. 나는 돛베 밑에서 대포와 같이 있었다. 대포는 깨끗한 오일과 그리스 냄새를 풍겼다. 나는 누운 채로 돛베에 맞는 빗소리며 철로에 바퀴가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돛베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광선이 약간 있어서 나는 누운 채로 대포들을 구경했다. 대포에도 돛베 외피(外被)가 덮여 있었다. 제 3군으로부터 전방으로 수송하는 대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앞이마에 혹이 커다랗게 부풀었으나, 출혈만은 가만히 누워 응혈(凝血)로 멎게 하고, 말라 붙은 피를 상처만 빼놓고 떼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수건은 없었지만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피가 말라붙었던 곳을 돛배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씻고 상의 소매로 깨끗하게 닦아 냈다. 사람 눈에 띄게 되면 좋지 않은 것이다. 메스트레에 닿으면 대포를 점검할 테니까 그 전에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려도 좋은 대포라고는 없는 것이다. 나는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32 }} 무개화차 바닥에 돛베를 뒤집어 쓰고 대포 곁에 누워서, 나는 젖고 춥고 배가 고팠다. 드디어 나는 몸을 굴려서 배를 깔고 팔 위에 머리를 얹고 엎드렸다. 무릎이 뻣뻣했으나 아무 고장은 없었다. 발렌티니가 수술을 썩 잘해 준 셈이다. 나는 후퇴의 반을 도보로 해치웠고 탈리아멘토까지 일부분은 그의 무릎으로 헤엄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무릎이나 다름없었다. 또 한쪽 무릎은 내 것임에 틀림없다. 의사가 몸에 손질을 하면 그것은 이미 자기 몸이 아니다. 머리는 내 것이고 뱃속도 내 것이었다. 그 뱃속이 무척 시작했다. 저희끼리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는 내 것이었으나 쓸모 없는 것이었다. 생각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기억하기 위한 것, 그것도 많이 기억하기 위한 것은 못 되었다. 캐서린의 기억을 더듬을 수는 없었으나 아직 캐서린을 만나게 될지 확실치도 않은데 그 생각을 했다가는 미칠 것이기에 캐서린 생각은 않기로 하고 그저 조금만, 그저 차가 덜커덩거리고 갈 때, 그리고 햇빛이 돛베 사이로 새어들 때 조금만 생각하기로, 가령 차 바닥에 캐서린과 내가 누워 있는 생각이나 하기로 했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된 캐서린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면서 누워 있기에는 바닥이 너무나 딱딱했고 옷은 젖어 있었고, 바닥은 너무 조금씩 움직였고 너무 쓸쓸했고 외로웠고, 아내를 맞기에는 너무 젖은 옷, 너무 딱딱한 바닥이었다. 돛베 밑이 유쾌하고 대포와 같이 있는 것이 아무리 기분 좋다 하더라도 무개화차의 바닥이며 돛베 외피를 뒤집어씌운 대포며 바셀린 칠을 한 금속 냄새며 비가 새는 돛베는 사랑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 있다고 감히 가상할 수조차 없는 누구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 이제는 아주 똑똑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 아니 냉정하게라기보다는 똑똑하고 공허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한 군단이 물러나고 다른 군단이 전진하는 지금, 배를 깔고 누웠노라면 공허하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차도 잃고 부하도 잃고, 마치 백화점 매장 감독이 화재로 상품을 모조리 잃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보험이 없다. 이제는 그것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아무런 의무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백화점에서 매장 감독의 말에 전부터 늘 써 오던 사투리가 있다고 해서 화재 후에 그를 총살해 버린다면, 백화점 문을 다시 열고 장사를 시작했을 때 매장 감독이 돌아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직업을 찾을 것이다. 다른 직업이 있고, 순경이 찾아가지 않으면 말이다. 분노는 강에서 의무와 더불어 씻겨 내려가 버렸다. 의무는 헌병이 내 멱살을 잡았을 때 벌써 없어져 버렸다. 나는 외양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군복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별을 떼버렸지만 그것은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은 명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항하는 것도 아니다. 끝장이 나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 전부의 행운을 바랐다. 좋은 놈도 있었고, 용감한 놈도 있었고, 조용한 놈도, 섬세한 놈도 있었으니 행운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나설 막(幕)이 아니다. 나는 이 경칠 놈의 열차가 메스트레에 닿아서 내가 요기를 하고 생각을 그쳐 버리기를 바랐다. 이제 그만 집어치워야 한다. 피아니는 헌병이 나를 총살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총살한 자의 서류를 몰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서류는 못 가질 것이다. 내가 익사했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미국에는 뭐라고 보고가 갈는지 모르겠다. 부상으로 인한 전사라든지 적당한 이유를 달겠지. 그건 그렇고 배고파 못 살겠다. 식당의 그 신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리날디는. 그는 아마 포르데노네에 있을 것이다. 만약 더 후방으로 후퇴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글쎄 이젠 그를 만나기도 글렀다. 아무도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생활은 끝난 것이다. 그가 매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여간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쓰면 매독도 대단한 병은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는 걱정할 것이다. 나도 그게 걸렸다면 걱정할 것이다. 누구든지 걱정할 것이다. 나는 본래 생각하도록 생겨 먹지 않았다. 나는 먹도록 생겨 먹었다. 정말이지 그렇다. 먹고 마시고 캐서린과 자고. 아마 오늘 저녁에는.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일 밤에는 맛있는 음식과 홑이불과, 둘이서 같이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데도 안 간다. 아마도 경치게 빨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캐서린은 가고 싶어할 것이다. 언제 갈까? 그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누워서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했다. 갈 데는 많았다. 제 4 편 {{}}{{33 }} 아침 일찍 날이 밝기 전에 열차가 밀라노 정거장에 들어가느라고 속력을 늦추었을 때 나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선로를 가로질러 건물 사이를 빠져 거리로 나갔다. 술집이 한 군데 열려 있어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 쓸어 낸 먼지, 커피 잔에 잠긴 스푼, 술잔이 남긴 동그란 물자국 같은 것이 이른 아침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카운터 뒤에 있었다. 군인 두 명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는 카운터에 가 서서 커피 한 잔과 빵을 한 쪽 들었다. 커피는 우유를 쳐서 색깔이 뿌옇고, 우유 더껑이가 앉은 것을 빵 조각으로 걷어 냈다. 주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파를 한 잔 하실까요? 아니, 좋습니다. 내가 한 잔 드리지요. 하면서 작은 잔에 한 잔 따라서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전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르겠소. 저 사람들은 취했어요. 하고 그는 두 군인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들은 취한 것 같아 보였다. 전선이 어떻게 됐는지 말해 주시오. 전선 이야기는 모르겠소. 저쪽 담에서 오시는 걸 봤어요. 기차에서 내리셨죠. 대규모 후퇴가 있지요.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요? 끝났나요? 그렇지도 않겠지요. 그는 키 작은 술병에서 그래파를 따라 잔을 채웠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시면 제가 숨겨 드리지요. 곤란한 일은 없소.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면 여기 나와 같이 있습시다. 어디 있는단 말이오? 이 집에요. 많이들 있습니다. 곤란한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 있습니다. 어디 있는단 말이오? 이 집에요. 많이들 있습니다. 곤란한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 있습니다. 곤란한 일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그야 곤란도 곤란 나름이죠? 남 아메리카 분이신가요? 아니요. 스페인 말 하세요? 조금은. 그는 카운터를 훔쳤다. 요즘은 출국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요. 나는 출국할 생각은 전혀 없소. 있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여기 있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오늘 아침에는 가야 하지만 주소를 기억해 뒀다가 돌아오겠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돌아오시는 거지요. 나는 정말 무슨 곤란한 일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곤란한 일은 없소. 그러나 친구 주소는 귀중한 거지요. 나는 커피 값을 치르려고 10리라 짜리를 카운터 위에 내놓았다. 나하고 그래파 한 잔 드십시다. 뭘요. 한 잔 드시오. 그는 두 잔을 따랐다. 기억해 두세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이리로 오세요. 다른 패들에게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여기 오시면 안전합니다. 확실히 믿소.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소.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말해 드리지요. 그 상의를 입고 돌아다니지는 마십시오. 왜요? 그 소매에는 별을 뜯어 낸 자리가 뚜렷합니다. 천 색깔이 다르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안 가지셨으면 서류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무슨 서류를? 휴가 증명서. 난 서류가 필요 없소. 내게도 있소. 좋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서류가 필요하시다면 원하는 서류를 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서류는 얼마나 가오? 그야 서류 나름이죠. 값은 턱없이 비싸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무 서류도 필요 없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괜찮소.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술집에서 나올 때 그는 말했다. 내가 친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리다.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좋소. 하고 내가 말했다. 밖에 나오자 헌병이 있는 정거장을 피해서 조그만 공원 모퉁이에서 마차를 잡았다. 나는 마부에게 병원 주소를 대주었다. 병원에 닿자 포터의 숙소로 갔다. 그의 아내가 나를 포옹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돌아오셨군요. 안전하시군요. 그럼. 아침 식사 하셨어요? 했어. 안녕하셨어요? 안녕하셨어요. 중위님? 하고 그의 아내가 물었다. 건강합니다. 우리하고 같이 조반 안 드시겠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미스 바클리가 이 병원에 있나? 미스 바클리요? 영국 부인 간호사 말이야. 이분 애인이에요. 하고 그의 아내가 말하고 내 팔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미소를 띄웠다. 없어요. 하고 포터가 말했다. 가버렸어요.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확실해? 그 왜 키가 크고 젊고 금발인 영국 부인 말이야. 확실합니다. 스트레사로 가버렸어요. 언제 갔는데? 이틀 전에 다른 영국 부인들하고 같이 떠났어요.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나를 위해서 뭘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누구에게든 나를 봤다는 말은 하지 말게. 이건 아주 중대한 일이야. 아무에게도 말 안 하지요. 하고 포터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10리라를 주었다. 그는 받으려고 하지 않고 밀어 냈다. 아무에게도 말 안하기로 약속합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중위님을 위해서 우리가 뭘 도와 드릴 수 있겠어요? 하고 아내가 물었다. 그것뿐이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벙어리 노릇을 하지요. 하고 포터가 말했다. 뭐든지 시키실 일이 있거든 알려 주세요. 그러지. 잘 있게. 다시 만나세. 그들은 문간에 서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시몬스의 집 주소를 일러 주었다. 내 친구의 한 사람인데 노래 공부를 하는 친구였다. 시몬스는 포르타 마젠타 방면의 훨씬 떨어진 교외에 살고 있었다. 내가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아직 자리에 있었으며 졸린 표정이었다. 굉장히 일찍 일어났군, 헨리. 하고 그가 말했다. 새벽 기차로 닿았네. 이번 후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 일선에 가 있었나? 담배 피우겠나? 그 테이블 위 상자에 있네. 벽 옆에 침대가 있고, 멀찌감치 피아노가 있고, 옷장과 테이블이 놓여 있는 큰 방이었다. 나는 침대 곁에 의자에 앉았다. 시몬스는 벌떡 일어나 베개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내가 궁지에 빠졌네, 심. 하고 내가 말했다. 나 역시 그렇다네. 하고 까 말했다. 나야 항상 궁지에 빠져 있지만. 담배 피우겠나? 아니. 하고 내가 말했다. 스위스로 가는 수속은 어떤 건가? 자네가? 이탈리아 인들이 자네를 국외로 안 내보낼걸. 그렇지. 그건 나도 알아. 그러나 스위스 말일세. 그들은 어떻게 나올까? 구금하겠지. 그건 알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간단하지 뭘. 자네야 아무 데고 갈 수 있어. 신고나 뭐 그런 걸 하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러나? 경찰을 피하고 있나? 아직 아무 결정도 한 건 없네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거든 하지 말게. 그러나 들으면 재미있겠군. 여기서는 아무 일도 없어. 나는 피아첸차에서 큰 실패를 했다네. 그것 참 유감인데. 아아, 그럼 - 형편없이 돼버렸어. 노래야 잘 불렀는데 말야. 여기 릴리코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불러 볼 작정이야. 나도 들었으면 좋겠군. 고마운 말일세. 자네가 아주 딱한 처지에 있는 건 아니겠지. 응? 나도 모르겠어. 말하고 싶지 않거든 하지 말게. 그 피비린내 나는 일선을 어떻게 빠져 나왔나, 그래? 나는 이제 그 곳과는 청산을 끝낸 셈이야. 잘 했네 그려. 자네가 영리한 건 나도 알지만. 뭐 내가 도와 줄 거라도 있나? 자네는 굉장히 바쁠 텐데. 여보게 헨리, 눈꼽만큼도 바쁘지 않으이. 조금도 바쁠 것 없어. 뭐든지 해 주지. 자네는 내 몸집과 비슷하지. 밖에 나가서 평복을 한 벌 사다 주겠나? 옷이 있긴 한데 모두 로마에 뒀거든. 자네 거기서 좀 살았지? 너절한 곳이야. 어떻게 돼서 거기는 가 있었나? 건축가가 될 생각이었지. 거기는 그럴 만한 곳이 못 돼. 옷은 사지 말게. 자네가 원하는 옷이면 내가 다 줄 테니. 몸에 맞는 옷을 입혀서 근사하게 차려 놓지. 저 화장실로 가 보게. 거기 양복장이 있어. 뭐든지 꺼내 입게. 이 친구야, 살 필요는 없어. 나는 샀으면 하네, 심. 여보게, 나로서는 나가서 옷을 사오느니보다 한 벌 주는 게 쉽네. 여권은 있나? 여권 없이는 멀리 못 갈걸. 응, 아직 여권은 가지고 있네. 그럼 옷을 입게, 이 사람아. 그러고 그리운 헬베티아(스위스를 가리키는 말 - 역자 주)로 떠나게. 그렇게 간단치 않아. 나는 먼저 스트레사로 가야 한단 말이야. 이 사람아, 그것 참 이상적이군. 보트를 저어 건너가게. 노래 부를 예정만 없었으면 동행할 걸. 그러나 가게 되긴 할 거야. 자네 스위스 목동의 민요를 불러 보지 그래. 옳아, 그거 한 번 불러 볼까. 그야 물론 불러 낼 수 있지. 좀 괴상한 곡이지만 말이야. 자네 같으면 장담하고 부를 수 있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너무 장담은 말게. 그러나 부를 수 있을 테지. 괴상하게 돼 먹은 곡이지만 부를 수 있어.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니까? 들어 보게. 그는 아프리카나 를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목이 부풀어 오르고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나는 부를 수 있어. 청중이야 좋아하건 말건 말이야. 나는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내려가서 마차를 보내야지. 보내고 오게, 이 사람아. 아침을 먹세.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서더니 심호흡을 하고 허리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마차 삯을 치르고 보냈다. {{}}{{34 }} 평복을 입으니까 꼭 가면 무도회에 가는 기분이었다. 오래 군복만 입어서 그런지 보통 옷으로는 몸에 깔끔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바지 가랑이가 너무 헐렁한 느낌이었다. 나는 밀라노에서 스트레사 행 기차표를 샀다. 새 모자도 하나 샀다. 심의 모자는 쓸 수가 없었으나 양복은 근사했다. 양복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는데 차간에 앉아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까 모자는 너무 새 것이고 옷은 너무 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비에 젖은 롬바르디아 지방처럼 나 자신이 구슬퍼졌다. 차간에는 비행사가 몇 명 있었는데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내 나이에 평복을 입은 사람은 여간 경멸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모욕당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옛날 같으면 나도 그들을 모욕하고 싸움이라도 걸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라라테에서 하차한 다음부터는 혼자라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신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 이야기를 읽기가 싫어서 읽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전쟁을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나는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은 것이다. 못 견디게 쓸쓸하다가 열차가 스트레사에 도착한 것이 반가웠다. 정거장에 호텔에서 나온 포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도 없었다. 시즌이 끝난 지 오래 되어서 아무도 열차 손님을 맞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그것도 심의 가방을 들고 내렸다. 내의 두 벌밖에 안 들어서 매우 가벼웠다. 열차가 다시 떠날 때까지 나는 비오는 정거장의 지붕 밑에 서 있었다. 정거장에 있는 한 사나이를 발견하고 어떤 호텔이 영업 중인지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일 보로메 그랑 오뗄 이 영업 중이고, 그 밖에 일 년 내내 영업을 하는 몇 개의 작은 호텔이 문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비를 맞으면서 일 보로메를 향해서 나섰다. 마차가 거리를 내려오는 것을 보고 마부에게 손짓을 했다. 마차로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큰 호텔의 마차 주차장에 닿자 수위가 우산을 가지고 나왔는데 언동이 퍽 공손했다. 나는 좋은 방을 잡았다. 퍽 넓고 밝고, 호수가 내다보이는 방이었다. 구름이 호수를 덮고 있었으나 햇빛이 나면 아름다운 풍경일 것 같았다. 아내는 나중에 올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벨벳 커버를 씌운 더블 베드, 즉 신혼 여행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퍽 호화스러운 호텔이었다. 나는 기다란 복도와 넓은 층계와 여러 방을 거쳐 바로 내려갔다. 이 곳 바텐더는 그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높은 의자에 앉아 절인 아먼드와 얇게 썰어 말린 감자를 먹었다. 마티니가 시원하고 신선했다. 평복으로 여기서 뭘하고 계십니까? 바텐더가 두 잔째 마티니를 만들어 놓고 물었다. 휴가 중이야. 정양 휴가야. 이 호텔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뭣 때문에 호텔 문을 열어 놓는지 알 수 없어요. 낚시질 좀 했나? 멋진 놈을 몇 마리 잡았지요. 이맘때 같으면 멋진 놈들이 올라옵니다. 내가 보낸 담배 받았던가? 네, 제가 보낸 카드 보셨어요? 나는 껄껄 웃었다. 담배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제 파이프 담배였는데, 나의 친척이 보내 주던 담배를 중지했는지, 중도에서 압수당하는지 하여간 안 오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서고 또 구해 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혹시 거리에서 두 영국 여자를 본 일이 있는가? 그저께 이리로 왔을 텐데. 이 호텔에는 없습니다. 간호사들인데. 간호사는 둘을 봤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어디 있는지 알아다 드리죠. 그 중 하나는 내 아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아내를 만나러 온 거야. 또 하나는 제 마누라지요. 농담이 아니야. 실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모르고 그랬읍죠. 그는 자리를 뜨더니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올리브와 절인 아먼드와 썰어 말린 감자를 먹으면서 카운터 뒤에 있는 거울에 비친 평복 차림의 내 자신을 바라보았다. 바텐더가 돌아왔다. 정거장 근처의 조그만 호텔에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샌드위치를 좀 먹을까? 시켜다 드리지요. 여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손님이 없으니까요. 그래 전혀 손님이 없단 말인가? 아니요. 몇 분은 있지만요. 샌드위치가 와서 세 쪽을 먹고 마티니를 두어 잔 더 마셨다. 그렇게 시원하고 신선한 술은 마셔 본 일이 없다. 문화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포도주, 빵, 치즈, 질이 낮은 커피, 그래파 같은 것에 물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마호가니 카운터와 놋쇠와 거울 앞의 높은 의자에 앉아서 아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바텐더가 뭐라고 물었다. 전쟁 이야길랑 하지 말게. 하고 내가 말했다. 전쟁은 먼 곳으로 가버렸다. 아마 전쟁이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전쟁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전쟁은 내게서는 끝난 것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정말 끝났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학교에서 지금쯤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 학생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 호텔로 찾아갔을 때 캐서린과 헬렌 퍼거슨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복도에 서서 식탁에 앉아 있는 그들을 보았다. 캐서린은 저쪽을 향해 앉았는데, 머리며 볼이며 귀여운 목과 어깨의 윤곽이 보였다. 퍼거슨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말을 뚝 그쳤다. 아이구머니나.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 당신이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너무 기뻐서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키스를 했다. 캐서린은 얼굴을 붉혔고 나는 식탁에 앉았다. 참 훌륭한 분이시군.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여기서 뭘하고 계세요? 저녁 드셨어요? 아뇨. 식사 시중을 하고 있던 여자가 들어왔기에 나는 내 것도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캐서린은 행복한 눈으로 줄곧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복을 입고 뭘하고 계셔요? 하고 퍼거슨이 물었다. 내각에 들어갔죠. 무슨 사고를 내신 게로구만. 기운을 내시오, 퍼기. 좀 더 기운을 내요. 당신은 봤다고 기운이 나진 않아요. 이 여자를 난처한 처지에 몰아넣은 걸 알고 있거든요. 당신이 내게는 조금도 반가운 분이 아니에요. 캐서린은 내게 미소를 던지고 식탁 밑으로 내 발을 건드렸다. 누가 나를 난처한 처지에 몰아넣은 건 아니야, 퍼기. 내가 사서 그렇게 된 게지. 나는 참고 보고 있을 수 없어.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비열하게 이탈리아 식의 속임수로 너를 망친 것밖에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 미국인은 이탈리아 인보다 더 악질이야. 스코틀랜드 인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지.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저분의 이탈리아 식 비열을 말하는 거야. 내가 비열한가요, 퍼기? 비열하죠. 비열(sneaky)보다 더 나빠요. 꼭 구렁이(snake) 같아요. 이탈리아 군복을 입고 목에 망토를 두른 구렁이에요. 지금은 이탈리아 군복을 안 입었는데요. 그게 당신이 비열한 또 하나의 예지요. 여름내 연애를 하고 이 여자에게 아이를 가지게 해 놓고, 이젠 아마 슬그머니 달아나려는 거예요. 나는 캐서린에게 미소를 던지고 캐서린도 미소를 보냈다. 둘이 함께 슬그머니 달아나지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둘이 똑같다니까.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 캐서린 바클리. 너는 수치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저이하고 똑같이 비열해. 그만해요, 퍼기. 캐서린은 이렇게 말하고 그 여자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를 욕하지 말아.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줄 알잖아. 손 치워.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네가 창피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는 안 됐을 거야. 몇 달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아이를 갖고 그걸 모두 장난으로 돌리고, 너를 꼬인 사람이 돌아왔다고 해서 만면에 웃음이구나. 창피도 없고, 감정도 없어. 퍼거슨은 울기 시작했다. 캐서린이 다가가서 팔로 끌어안았다. 퍼거슨을 달래고 있는 캐서린의 몸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난 상관없어. 퍼거슨은 흐느꼈다. 무서운 일야. 자아 그만해, 퍼기. 하고 캐서린이 달랬다. 창피해 할게. 울지 마, 퍼기. 인제 그만 울어, 퍼기. 우는 게 아니야. 하고 퍼거슨은 흐느꼈다. 울지 않아. 네가 빠진 무서운 함정을 슬퍼하는 거야. 퍼거슨은 나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을 증오해요. 하고 말했다. 캐서린이 내가 당신을 증오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못할 거예요. 더럽고 비열한 미국식 이탈리아 인 같으니라구. 그 여자의 눈과 코는 울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내게 미소를 보냈다. 팔로 나를 끌어안고 저이한테 미소를 보내지 말아. 넌 지금 침착하지 못해, 퍼기. 알고 있어. 퍼기는 흐느꼈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 둘 다 말이야. 난 흥분했어. 난 침착하지 않아. 나도 그건 알아. 둘이 행복하게 살라구. 우리는 행복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넌 참 착한 퍼기야. 퍼거슨은 또 울기 시작했다. 난 네가 지금 식으로 행복한 건 바라지 않아. 왜 결혼 안 하는 거야? 당신은 다른 아내가 있는 건 아니죠? 없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캐서린은 깔깔 웃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다른 마누라가 있는 사람도 많으니까. 우리는 결혼할 거야, 퍼기.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결혼해야 네 마음에 든다면 말이야. 내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게 아니야. 너 자신이 결혼을 원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그 동안 바빴으니까. 그래. 나도 알아. 아이 만들기에 바빴지. 나는 그 여자가 또 울기 시작하려나 보다 했는데 우는 대신 신랄해졌다. 이젠 오늘밤에라도 저 사람하고 가겠지, 아마? 그럼.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저이가 그러자면. 나는 어떻게 하구? 너 여기 혼자 있는 게 겁나니? 그래, 겁나. 그럼, 내가 같이 있지. 아니야, 저이하고 같이 가렴. 지금 곧 따라가거라. 나는 두 사람 다 보기 싫어 죽겠다. 저녁은 마치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지금 곧 가. 퍼기, 침착해요. 당장 가버리란 말이야. 둘 다 가버려. 그럼, 가지 그래.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퍼거슨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너는 가고 싶은 거야. 저녁도 혼자 먹게 내버려두고 가고 싶은 거야. 평소에 늘 이탈리아 호숫가에 한 번 가 보고 싶더니 결국 이런 꼴을 보는군. 오오, 오오. 그 여자는 흐느끼고 캐서린을 바라보더니 목이 메었다. 저녁을 마치도록 우리가 여기 있을게.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기를 원한다면 나는 너만 두고 가지 않겠어. 혼자 두고 안 갈 테야, 퍼기.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가 가기를 원해. 퍼거슨은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렇게 주책이 없는 여자야. 제발 재 걱정을 말아 줘. 시중을 들던 여자는 울고불고 야단이 난 광경을 보고 퍽 놀랐던 모양이었다. 다음 요리를 가지고 왔을 때는 사태가 호전된 것을 보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 날 밤 호텔에서, 텅 비고 긴 복도가 밖에 있고, 우리 구두가 문 밖에 나란히 놓이고, 방바닥에는 두꺼운 융단이 깔리고,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방 안은 밝고 즐겁고 유쾌하며, 불을 끄면 보드라운 홑이불과 편안한 침대가 가슴 뛰게 하는데, 마침내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 이제는 홀로가 아니라는 느낌이고, 밤에 잠을 깨면 바로 거기 그리운 이가 있고, 가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 밖에도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우리는 피로하면 자고, 잠을 깨면 또 한 사람도 눈을 떠서 홀로 있지 않았다. 남자는 가끔 혼자이기를 원하는 법이고, 여자 역시 이따금 혼자이기를 원하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편의 그러한 기분을 질투하게 되는데, 숨김없이 말해서 우리는 조금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은 남과 함께 있을 때 고독하다는 기분, 즉 남들과 떨어져서 고독하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내게도 전에 한 번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일이 있다. 많은 여자들과 같이 있는데 나는 고독했고, 사실은 이것이 가장 심한 고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하지 않았고, 둘이 같이 있으면 두려운 것이 없었다. 나는 밤이 낮과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일어난 일은 낮이 되면 벌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밤이란 일단 고독감을 느끼기 시작한 고독한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이 세계에 누구든 너무 많은 용기를 불러들이면 이 세계는 그를 때려부수기 위해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고, 물론 죽이게 마련이다. 이 세계는 누구나를 때려부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파괴를 당한 장소에서 강해진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는 인간은 죽이고 만다. 아주 착한 사람, 아주 온순한 사람, 아주 용감한 사람 할 것 없이 무차별하게 죽인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역시 죽이는 것은 확실하지만 특히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캐서린은 자고 있고,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비는 그쳤고, 나는 침대를 벗어나 방바닥을 가로질러 창으로 갔다. 아래 정원이 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아름답도록 정연했고, 자갈길이며 수목이며 호숫가의 돌담이며 멀리 산을 등지고 햇빛을 받은 호수가 보였다. 내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다가 돌아섰더니 캐서린이 잠에서 깨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름다운 날씨지요? 당신은 기분이 어떻소? 무척 좋아요.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아침 들까? 캐서린은 아침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나 역시 시장해서 침대에서 아침을 들었다. 창으로 11월의 햇빛이 들어오고, 내 무릎에 밥상을 올려놓고 먹었다. 신문 안 읽고 싶으세요? 병원에서는 늘 신문을 읽고 싶어하시더니. 아니.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은 신문 생각 없어. 그 이야기를 읽기도 싫을 만큼 사태가 악화됐어요? 거기 관한 건 읽고 싶지 않아. 나도 당신하고 같이 있었으면 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텐데. 머리가 정리되면 언제고 내가 이야기해 주지. 그렇지만 군복을 벗은 당신을 보면 체포하지 않을까요? 아마 총살이겠지. 그럼, 여기 있지 말아요. 국외로 나가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봤어. 나가 버려요. 여보, 어리석은 모험은 해선 안 돼요. 메스트레에서 밀라노까지는 어떻게 왔나 말씀하세요. 기차로 왔지. 그 때는 군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 때는 위험하지 않았어요? 별로, 오래된 이동 명령서를 가지고 있었어. 메스트레에서 날짜를 써 넣었지. 여보, 여기서는 언제 체포당할는지 몰라요. 나는 그런 꼴은 못 봐요.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어리석어요. 만약 당신이 잡혀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생각일랑 그만둡시다. 그런 생각에는 지쳐 버렸어. 만약 당신을 체포하러 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쏴버리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어디 있어요. 여기를 떠날 때까지는 호텔 밖에 못 나가시게 하겠어요. 어디로 간단 말이오? 여보, 제발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마세요. 당신이 가자는 데면 어디든지 가요. 그렇지만 제발 즉시 떠날 곳을 찾아 봐요. 스위스가 저 호수 건너편에 있으니까 그리로 갈 수 있지. 그것 참 좋겠군요. 바깥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호수도 어두워졌다. 우리는 언제나 죄인처럼 살 필요가 없는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여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오랜 동안을 죄인처럼 산 것도 아니잖아요. 또 앞으로는 죄인처럼 살지 않을 거구요. 우리는 재미나게 살 테니까요. 나는 죄인처럼 느낀단 말이야. 군에서 탈출했으니까. 여보,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군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에요. 이탈리아 군인걸요 뭘. 나는 껄껄 웃었다. 당신은 그만이야. 침대로 돌아갑시다. 침대라야 기분이 좋아. 조금 후에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 죄인처럼 느끼지 않죠, 네? 그렇지.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는. 당신은 바보야.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살펴 드릴 테니까. 여보, 나 인제는 입덧도 없어졌어요. 멋있죠. 굉장한데.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아내를 가졌는지 당신은 모르시는군요. 그렇지만 난 상관없어요. 당신을 체포하러 오지 않는 곳에 데려다 놓고 마음껏 재미있게 살 거예요. 지금 곧 그리로 갑시다 그려. 가요, 그럼. 난 어디고 언제고 당신 가자는 데로 가겠어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맙시다. 좋아요. {{}}{{35 }} 캐서린은 호수를 따라 그 조그만 호텔로 퍼거슨을 만나러 가고, 나는 바에 앉아서 신문을 읽었다. 바 안에 편안한 가죽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아 신문을 읽으면서 바텐더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군(軍)은 탈리아멘토도 지탱하지 못했다. 피아베 강까지 밀려 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피아베 강을 기억하고 있다. 철도가 산도나 근방에서 강을 횡단하고 일선으로 올라간다. 거기서는 강이 깊고 흐름이 느리고 강폭이 퍽 좁았다. 그 아래로는 모기가 들끓는 늪과 운하가 있었다. 아름다운 별장이 몇 채 있었다. 전쟁 전에 한 번은, 코르티나 담페초에 가는 길에 나는 몇 시간 동안 산 사이로 그 강을 따라간 일이 있었다. 상류는 송어가 사는 강 같았으며, 바위 밑에는 웅덩이가 있고 여울도 있었으며, 흐름이 빨랐다. 도로는 카도레에서 강을 벗어났다. 나는 그 상류에 있던 군대가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때 바텐더가 들어왔다. 그레피 백작께서 손님 이야기를 물으셨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누가? 그레피 백작이오. 전에 손님께서 오셨을 때 여기 있던 노인 기억하시겠지요? 지금 와 있단 말이야? 네, 질녀를 데리고 와 있지요. 선생님이 여기 계신다고 말씀드렸죠. 당구 상대를 해 줬으면 하시던데요. 지금 어디 있나? 산보하고 계십니다. 건강하던가? 전보다 더 젊어지셨어요. 어젯밤에는 저녁 식사 전에 샴페인 칵테일을 석 잔이나 드셨습니다. 당구 솜씨는 어떤가? 잘 치시지요. 제가 지는 걸요. 선생님이 여기 계시다니까 퍽 좋아하시더군요. 여기서는 아무도 당구 상대자가 없거든요. 그레피 백작은 아흔 네 살이었다. 메테르니히와 동 시대의 사람인데 흰 머리와 수염의 예의가 바른 노인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양국의 외교계에 근무한 경력이 있고, 그의 생일 파티는 밀라노에서도 큰 잔치였다. 백 살은 채워 살 모양이어서 아흔 넷이라는 노령과는 대조적으로 조금도 무리가 없는 미끈한 당구를 쳤다. 그전에 한 번 시즌도 아닐 떼 스트레사에 갔다가 그를 만났는데 둘이 같이 당구를 치면서 샴페인을 마셨다. 나는 이걸 훌륭한 습관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백 점 내기에서 15점의 핸디캡을 주고도 나를 이겼다. 그분이 여기 계신단 말을 왜 안 했나? 깜박 잊었지요. 다른 손님은 누가 있지? 선생님이 아시는 분은 없어요. 모두 해야 여섯 분밖에 없는걸요. 자네 지금 할 일 있나? 없습니다. 낚시질하러 가세. 한 시간쯤은 갈 수 있습니다. 자아, 낚시 도구를 가지고 나오게. 바텐더는 코트를 입고 같이 나섰다. 호숫가로 내려가서 보트를 타고 내가 노를 젓고, 바텐더는 고물에 앉아서 호수의 송어를 낚으려고 끝에 뱅뱅 도는 미끼와 무거운 납덩이를 단 낚싯줄을 풀어 내렸다. 우리는 호수를 따라 배를 저어갔는데, 바텐더가 줄을 잡고 있다가 간간이 휙 앞으로 당겨 보곤 했다. 스트레사는 호수에서 바라보니까 아주 황량한 경치였다. 헐벗은 가로수가 길게 줄지어 늘어섰고, 큰 호텔이며 문을 닫은 별장들이 보였다. 나는 이솔라 벨라(아름다운 섬이라는 이탈리아 말 - 역자 주)로 저어가서 암벽으로 바싹 다가갔는데 그 곳은 물이 갑자기 깊어지고 암벽이 맑은 물 속으로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다시 어부들이 있는 섬까지 저었다. 해가 구름에 가려 물은 어둡고 잔잔하고 무척 차가웠다. 고기가 떠오를 때 생기는 동그라미가 물 위에 여러 개 보였으나 잡지는 못했다. 나는 어부들의 섬 맞은편으로 저어가서 보트들이 있고 어부들이 어망을 고치고 있는 데까지 갔다. 한 잔 하실까요? 그러지. 나는 보트를 돌 방파제에 대고, 바텐더는 낚싯줄을 당겨서 보트 바닥에 사려 놓고, 뱅뱅 도는 미끼는 배 가장자리에 걸어 놓았다. 나는 내려서 보트를 잡아매었다. 우리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가서 칠도 하지 않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 베르무트를 주문했다. 노를 저어서 피로하시지요? 아니. 돌아갈 때는 제가 젓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노 젓는 걸 좋아해. 아마 선생님이 낚싯줄을 잡고 계시면 재수가 좋아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지. 전쟁이 어떻게 되는 건지나 이야기해 주십시오. 형편없어. 저는 전쟁에 안 나가도 되겠지요. 그레피 백작처럼 너무 늙었어요.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할지도 모를걸. 내년이면 우리 연령층도 불러 내겠지요. 그래도 저는 안 갈 겁니다. 어떻게 안 가나? 국외로 도망가지요. 전쟁에는 갈 생각이 없어요. 전에 아비시니아에서 한 번 해 본 일이 있는데요. 질색이에요. 선생님은 뭣 때문에 나가셨어요? 모르지. 바보였었지. 베르무트 한 잔 더 하실까요? 그러지. 돌아오는 길은 바텐더가 저었다. 우리는 스트레사를 지날 때까지 호수를 훑어 올라갔다가 기슭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까지 저어 내려왔다. 어두운 11월의 호수와 쓸쓸한 기슭을 바라보면서 팽팽한 낚싯줄을 쥐고 미끼가 돌아가는 조용한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바텐더는 노를 길게 뻗어 저었으므로, 앞으로 노를 던질 때에는 낚싯줄이 일렁거렸다. 한 번은 반응이 있었다. 줄이 갑자기 팽팽해지며 뒤로 켕겨졌다. 나는 줄을 당겨 싱싱한 송어의 중량감을 느꼈는데, 낚싯줄이 다시 일렁거렸다. 놓친 것이다. 큰 놈 같습니까? 꽤 컸어. 한 번은 저 혼자 낚시질을 하는데, 줄을 이빨에 걸었다가 한 마리가 물리는데 하마터면 입을 빼앗길 뻔했어요. 그럴 때는 다리에다 걸어 두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면 반응을 느낄 수도 있고, 이빨도 안전하단 말이야. 나는 물에 손을 넣어 보았다. 퍽 차가웠다. 이제 거의 호텔 맞은편에 닿았다. 그만 들어가 봐야 하겠습니다. 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열 한 시까지 가기로 되어 있어서요. 칵테일 시간이니 말씀이에요. 그러지. 나는 낚싯줄을 사려서 양끝을 톱니처럼 새긴 막대기에 감았다. 바텐더는 암벽의 조그만 사면(斜面)에다 보트를 저어 넣고 쇠사슬과 자물쇠로 잠갔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쓰세요. 하고 그가 말했다. 열쇠를 드리지요. 고맙네. 우리는 호텔로 올라가서 바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부터 또 술을 마실 생각은 없어서 우리 방으로 올라갔다. 하녀가 막 방 소제를 마쳤고, 캐서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되도록 아무 생각도 안하려고 했다. 캐서린이 돌아오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퍼거슨이 아래층에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점심을 먹으러 왔다고 했다. 당신이 싫어하시지 않을 줄 알고 데리고 왔어요. 그럼. 내가 말했다. 왜 그러세요, 여보? 몰라. 난 알아요. 할 일이 없었던 거지요. 당신이 가진 것 전부가 나인데 내가 없었으니까요. 사실 그래. 미안해요, 여보. 갑자기 모든 것을 잃게 되면 몸서리치는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내 인생은 모든 것이 가득했었단 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젠 당신이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거든. 그렇지만 내가 같이 있을 텐데요, 뭘. 두 시간 비웠을 뿐이에요. 무슨 심심풀이가 없으세요. 바텐더하고 낚시질 갔었지. 재미 없었어요? 재미 있었어. 내가 여기 없을 때는 내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일선에 있을 때는 그렇게 했는데. 거기서는 할 일이 있었거든. 할 일이 없어진 오셀로(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인물로 질투 때문에 아내를 죽였음 - 역자 주) 격이군요. 하고 캐서린이 놀렸다. 오셀로는 깜둥인걸. 하고 내가 말했다. 게다가 난 질투하는 건 아니야.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어. 우리 애기 말 잘 듣지, 퍼거슨에게 잘해 주세요. 그녀가 나를 저주하지 않으면 나야 항상 잘해 주지. 잘해 주세요. 우리가 가진 게 얼마나 많으며 그 애는 아무것도 못 가졌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가진 것 같은 것을 퍼거슨이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여보, 당신은 영리한 셈치고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잘해 주지. 그러실 줄 나도 알아요. 참 씩씩한 분이니까.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작정은 아니겠지? 아뇨. 어떻게든 보내도록 해야지요. 그런 다음에 이리로 오도록 하지. 물론이죠. 내가 원하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우리는 퍼거슨과 점심을 하기 위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퍼거슨은 이 호텔의 규모와 식당의 호화스러움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우리는 흰 카프리 술 두어 병과 맛있는 점심을 들었다. 그레피 백작이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우리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의 질녀라는 여자는 우리 할머니와 닮은 데가 약간 있었는데 백작과 같이 들어왔다. 내가 캐서린과 퍼거슨에게 백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퍼거슨은 매우 감탄했다. 호텔은 굉장히 규모가 크고 호화스럽고, 손님이 없어도 음식 맛이 좋고, 술맛 역시 좋아서 결국은 술이 우리 모두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캐서린은 기분이 더 좋아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퍽 행복했으니까. 퍼거슨도 아주 유쾌해졌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점심 후에 퍼거슨은 자기 호텔로 돌아갔다. 점심을 했으니까 잠깐 누워야겠다고 말했다. 누구요? 그레피 백작께서 당구 상대를 해 주시겠는지 여쭈어 보라고 하십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풀어서 베개 밑에 넣어 두었었다. 여보, 가셔야 해요? 하고 캐서린이 속삭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 시계는 네 시 십 오 분이었다. 밖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다섯 시에 당구실에 가겠다고 그레피 백작께 말씀드리게. 다섯 시 십 오분 전에 나는 캐서린에게 잠시 이별의 키스를 하고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입었다. 넥타이를 매고 거울을 들여다보니까 평복을 입은 나 자신이 어색해 보였다. 셔츠와 양말을 좀 더 사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한참 걸리시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태가 귀여웠다. 브러시 좀 주시겠어요. 나는 캐서린이 머리를 갸우뚱하게 기울여 머리 숱을 한쪽으로 쏟아지게 하고 머리에 브러시 질을 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어두워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전등 불빛이 머리와 목과 어깨를 비춰 주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키스를 하고 브러시를 든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머리가 베개에 묻혔다. 나는 목이며 어깨에 키스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나 가고 싶지 않아.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럼 안 가겠어. 아니 가세요. 잠깐 갔다가 곧 돌아오실 텐데요, 뭘. 우리 저녁은 여기서 먹읍시다. 빨리 갔다 오세요. 그레피 백작은 당구실에 있었다. 그는 스트로크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당구대 위로 내려오는 불 밑에 보이는 모습이 퍽 쇠약해 보였다. 전등에서 약간 떨어진 저쪽 카드 테이블 위에 은제(銀製) 얼음통이 놓여 있고, 샴페인 병 둘이 얼음 위로 목과 마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그레피 백작은 허리를 펴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귀하가 여기 계신 건 여간한 기쁨이 아니오. 내 상대를 하러 와 주셔서 고맙소.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아주 괜찮소? 이손초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완쾌를 빕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께서도 건강하셨습니까? 오오, 나야 늘 건강하지요. 그러나 이젠 늙는구려. 이제 나이먹은 흔적을 찾아 내게 되거든. 그러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니요. 예를 하나 듣고 싶소? 나는 이탈리아 말을 하는 것이 훨씬 쉽거든. 그러나 안 쓰려고 애를 쓰지만 피로했을 때에는 어느새 이탈리아 말을 쓰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나도 늙는구나 싶지요. 이탈리아 말로 하시지요. 저도 약간 피로했으니까요. 아아, 그렇지만 귀하는 피로하면 영어로 말하는 게 쉬울 테지. 미국어지요. 그래, 미국어. 그 미국어로 말하시오. 미국어란 유쾌한 언어요. 미국인을 만난 일이 거의 없습니다. 퍽 만나고 싶겠구려. 사람이란 자기 동포가 그립고, 특히 모국 여성이 그리운 법이라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소. 한 판 쳐 보겠소, 아니면 피로하오? 그렇게 피로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농담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제게 몇 점이나 핸디캡을 주시겠습니까? 많이 치셨나요? 전혀 안 했습니다. 퍽 잘 치시면서. 백 점에 10점씩 드릴까요? 저를 너무 과대 평가하십니다. 15점? 그 정도면 되겠지만 제가 질 겁니다. 어디 내기를 해 볼까요? 귀하는 늘 내기를 좋아하시던데. 그게 좋겠습니다. 좋소. 그럼 18점을 드릴 테니 한 점에 1프랑씩 겁시다. 그는 당구 솜씨가 능숙했고, 핸디캡을 얻고도 50점에서 나는 겨우 4점을 앞섰을 뿐이었다. 그레피 백작은 벽에 달린 단추를 눌러서 바텐더를 불렀다. 병 마개를 따게. 하고 그는 일렀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자극제를 조금 듭시다. 했다. 술은 얼음처럼 차고, 퍽 독하고 맛이 좋았다. 이탈리아 말로 할까요? 괜찮겠소? 이젠 이게 내 큰 약점이라 말이야. 우리는 게임을 계속하면서 치는 사이사이로 술을 조금씩 마시고 이탈리아 말로 이야기를 했지만, 게임에 열중해서 별로 많이 지껄이지는 않았다. 그레피 백작이 백 점을 쳤을 때 핸디캡을 넣고도 나는 겨우 94점이었다. 그는 미소짓고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남은 한 병을 마시면서 전쟁 얘기나 들읍시다. 그는 내가 앉기를 기다렸다.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전쟁 얘기는 하기 싫소? 좋소. 요새 무슨 책을 읽었소? 없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아주 멍청해 놔서요. 천만에, 그렇지만 독서는 해야지. 전시에 나온 걸로 어떤 책이 있습니까? 프랑스 인 바르뷔스가 쓴 <포화(砲火)> (1916년 출판. 콩쿠르 상 수상 - 역자 주)이라는 게 있지요. <브리틀링 씨는 꿰뚫어본다.> (H.G 웰즈의 소설 - 역자 주)라는 것도 있구요. 아니 그렇지 않던데요. 뭐가요? 그는 꿰뚫어보지 않습니다. 그런 책이 병원에 있더군요. 그럼 읽었구려? 네, 그러나 좋은 작품이 아니더군요. 나는 그 책이 영국의 중산 계급의 정신을 썩 잘 분석했다고 보는데. 저는 정신은 모릅니다. 저런. 하기야 정신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만. 신자시오? 밤에는요. 그레피 백작은 미소를 머금고 손가락으로 유리잔을 돌렸다. 늙으면 신앙이 두터워질 줄 알았더니 웬일인지 그렇게 안 되는군. 하고 그는 말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야. 죽고 난 후에도 사시고 싶으십니까? 하고 불쑥 물어 놓고는 이내 죽음 이야기를 한 건 바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그 말을 개의하지 않았다. 그야 생활 여하에 달렸지. 인생이 아주 즐겁소. 나는 영원히 살고 싶소 그려. 그는 미소했다. 하기야 거의 그만큼 산 셈이지. 우리는 깊숙한 가죽 의자에 앉아서 얼음통에 샴페인 병을 담궈 놓고,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유리잔들이 있었다. 귀하가 내 나이만큼 살게 되면 여러 가지 이상한 발견을 할 거요. 조금도 나이 잡수신 것 같지 않습니다. 늙는 것은 신체요, 어떤 때는 백묵이라도 분질러지듯이 나도 손가락을 부러뜨리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나오. 헌데 정신은 늙지도 않고 더 지혜로워지지도 않는구려. 백작께서야 지혜로우시지요. 아니요. 그 노인의 지혜라는 건 큰 착오란 말이오. 노인은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요. 조심스러워지는 거요. 아마 그게 지혜겠지요. 그건 아주 매력 없는 지혜요. 귀하는 뭘 가장 존중하시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요. 그야 나도 같소. 그건 지혜가 아니오. 생명을 존중하시오? 네. 나도 그렇소. 그게 내가 가진 전부니까. 그리고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서도. 그는 껄껄 웃었다. 아마 귀하가 나보다 지혜로울 거요. 생일 파티를 안 여니까.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전쟁을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바보 짓이라고 생각하오. 어느 편이 이길까요? 이탈리아가. 왜요? 좀 더 젊은 나라니까. 젊은 나라가 항상 전쟁이 이기나요? 한동안은 이길 가능성이 많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늙은 나라가 되지. 지혜롭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여보시오, 그건 지혜가 아니오. 그건 냉소요. 제게는 아주 지혜로운 말씀으로 들립니다. 별로 그런 것도 아니요. 반대적인 예를 들 수도 있소. 그러나 지금 말도 나쁘지는 않소. 샴페인은 다 마셨소? 거의 다 됐습니다. 좀 더 할까요? 그런 다음에 옷을 갈아 입어야겠군. 이젠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더할 생각 없소? 네. 그는 일어섰다. 귀하의 최대의 행운과 무한한 행복과 무상의 건강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히 사실 것을 빕니다. 고맙소. 이미 오래 살았소. 그리고 장차라도 신앙심이 두터워지거든 내가 죽고 난 뒤에 나를 위해서 기도를 주시오. 나는 몇몇 친구에게 같은 부탁을 해 두었소. 나 자신이 신앙심이 두터워지기를 기대했는데 그렇게 안 되고 말았소. 그가 서글프게 미소한 것 같았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그는 나이가 너무 많고 주름살이 너무 많아서 미소지어도 늘 많은 주름살이 잡혔으며 표정의 변화라는 게 없었다. 저는 신앙심이 두터워질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하여간 백작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늘 신앙심이 두터워지기를 기대했는데. 우리 가족은 모두 독신자로 죽었소.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내게는 그게 안 오는구려. 아직 너무 이른 게지요. 아마 너무 늦은 게지. 아마 너무 오래 살아서 종교적 감정이 먼저 죽은 모양이오. 제 것은 밤에만 옵니다. 그럼 귀하도 사랑을 하고 있는 거요. 그게 종교적 감정이라는 것만 잊지 마시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는 테이블을 향해서 한 걸음 내디뎠다. 와서 상대를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소. 퍽 즐거웠습니다. 이층까지 같이 올라갑시다. {{}}{{36 }} 그 날 밤은 폭풍우가 불었는데 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빗소리에 잠을 깨었다. 열린 창으로 비바람이 들어왔다. 그 때 누군지 문을 노크했다. 나는 캐서린이 잠을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가서 문을 열었다. 바텐더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비옷을 입고 접은 모자를 들고 있었다. 잠깐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중위님? 무슨 일이야? 퍽 중대한 일입니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방은 어두웠다. 방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들어오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의 팔을 끌고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불을 켰다. 나는 목욕통 가장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에밀리오? 자네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나? 아닙니다. 중위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래? 아침에 중위님을 체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 일러 드리러 왔어요. 거리에 나갔다가 그들이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알겠네. 그는 젖은 비옷을 입고, 젖은 모자를 들고 우두커니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나를 체포하겠다던가? 뭔지 전쟁에 관한 것 때문인가 봐요. 그게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위님이 전에는 장교로 여기 나타나셨는데, 지금은 군복을 안 입고 오신 것을 알고 있어요. 후퇴 이후로는 누구든지 체포합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몇 시에 체포하러 올 모양인가? 아침에요. 시간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는 모자를 세면기 위에 놓았다. 그것은 흠뻑 젖어서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것도 겁날 일이 없다면 체포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렇지만 체포라는 건 항상 좋은 일이 못되고, 특히 지금은 그렇습니다. 나는 체포당하고 싶지 않아. 그럼 스위스로 가세요. 어떻게? 제 보트로요. 폭풍운가 본데. 하고 내가 말했다. 폭풍우는 멎었습니다. 수면은 거칠지만 중위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언제 가야 할까? 즉시 가셔야죠. 아침 일찍 체포하러 올지도 모르니까요. 우리 짐은 어떡하지? 꾸리세요. 부인께 옷을 입도록 하세요. 짐은 제가 갖다 드리지요.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제가 복도에 있는 것을 누가 보면 곤란하니까요. 나는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닫고 침실로 들어갔다. 캐서린은 깨어 있었다. 여보,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 곧 옷을 입고 보트로 스위스까지 갈 생각 없소? 당신은요? 싫은데. 나는 자리에 들어가서 자고 싶어. 대관절 무슨 일이에요? 바텐더가 그러는데 아침에 나를 잡으러 온다는군. 바텐더가 돌았나요? 아니. 그럼 빨리 하세요. 옷을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하세요. 캐서린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아직 졸린 얼굴이었다. 욕실에 있는 게 그 바텐더에요? 그래. 그럼 세수 안 하겠어요. 다른 데를 보고 계세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잠옷을 벗을 때 흰 등이 보였으나 보지 말라기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기 때문에 배가 약간 부르기 시작해서 내게 벗은 몸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치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입었다. 가방에 넣을 것도 별로 없었다. 여보, 내 가방이 많이 비었으니 뭐 넣을 테면 넣으라구. 거의 다 꾸렸어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여보 굉장히 바보 같은 말을 물어서 미안해요. 그런데 바텐더가 왜 욕실에 있어요? 쉬이 - 우리 가방을 내려다 주려고 기다리고 있어. 굉장히 좋은 분이네요. 옛 친구야. 하고 내가 말했다. 한 번은 파이프 담배를 거의 보내 줄 뻔 했던 일도 있지. 나는 열린 창으로 어두운 밤을 내다보았다. 호수는 보이지 않고 어둠과 비뿐이었으나, 바람은 훨씬 조용해졌다. 저는 다 준비됐어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됐어. 나는 욕실 문 앞으로 갔다. 에밀리오, 가방이 여기 있네. 하고 내가 말했다. 바텐더가 가방 두 개를 받았다. 도와 줘서 고마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부인. 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저 자신이 귀찮은 일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자진해서 도와 드리는 겁니다. 이거 보세요. 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제가 이걸 종업원 전용 계단으로 갖고 나가서 보트까지 들어다 드리지요. 손님들은 그냥 산보 나가시는 것처럼 나가세요. 산보하기에 알맞은 날씨군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정말 날씨가 고약합니다. 마침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는 복도를 걸어서 두꺼운 융단을 깐 넓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 아래 문 앞에는 포터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릴 보고 놀라는 듯했다. 나가시는 건 아니겠죠, 손님? 하고 그는 물었다. 나가는 거요. 하고 내가 말했다. 호숫가의 폭풍우를 구경하려고. 우산 안 가지셨습니까, 손님? 없소.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코트는 물기를 빨아들이지 않으니까. 그는 의심쩍다는 듯이 내 코트를 훑어보았다. 우산을 하나 갖다 드리지요, 손님. 하고 안으로 가더니 우산을 들고 돌아왔다. 약간 큽니다, 손님.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10 리라를 주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기다리고, 우리는 빗속으로 나갔다. 캐서린에게 미소를 보내고 캐서린도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래 폭풍우 속에 계시지는 마십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두 분이 다 젖으시겠습니다. 그는 겨우 보조 포터로 영어도 아직 글자 그대로 번역한 말투였다. 곧 돌아오지. 하고 나는 말했다. 커다란 우산을 쓰고 좁은 길을 걸어 내려와 어둡고 젖은 정원을 지나 한길로 나와서, 한길을 가로질러 호숫가 나무로 덮인 길로 나섰다. 이제 바람은 호수 중앙을 향해 불고 있었다. 차고 눅눅한 동짓달 바람이었으며, 나는 산악 지방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암벽 사이사이에서 쇠사슬로 묶여 있는 보트를 지나서 바텐더의 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바위를 등지고 물은 어두웠다. 바텐더는 나무가 늘어선 옆에서 불쑥 나왔다. 가방들은 보트 안에 있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보트 값을 치르고 싶은데. 하고 내가 말했다.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별로 많지는 않으이. 돈은 나중에 부쳐 주세요. 그러면 돼요. 얼마를? 생각대로 보내세요. 얼마라고 말해 주게. 만약 무사히 출국하시거든 5백 프랑 보내 주세요. 출국에 성공하신다면 그만큼 주셔도 되겠지요. 그러지. 여기 샌드위치가 있습니다. 그는 내게 꾸러미 하나를 내주었다. 바에 있는 거 다에요. 모두 걷어 넣었습니다. 이건 브랜디고 이건 포도주 병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서 가방 속에 넣었다. 이것 값은 치르겠네. 좋습니다. 50리라만 주십시오. 나는 돈을 주었다. 브랜디는 질이 좋은 물건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부인께 드려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보트를 타시는 게 좋겠는데요. 그가 보트를 붙들고 있었다. 보트는 암벽을 등지고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고 했으며, 내가 캐서린을 도와서 타게 했다. 캐서린은 고물 쪽에 앉아 케이프로 몸을 감쌌다. 방향은 아십니까? 호수 위쪽으로 가야지. 거리도 아세요? 루이노를 지나가겠지. 루이노, 카네로, 카노비아, 트란차노를 지납니다. 브리사고에 닿을 때까지는 스위스 땅이 아닙니다. 타라마 산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몇 시죠?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아직 열 한 시야. 내가 말했다. 줄곧 저으시면 아침 일곱 시에는 닿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먼가? 25 킬로미터니까요. 어떻게 가야 하나? 비가 이렇게 오면 나침반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아닙니다. 우선 벨라 섬으로 가세요. 거기서 마드레 섬까지 바람을 따라 가세요. 바람이 팔란차까지 데려다 줍니다. 불빛이 보일 겁니다. 거기서부터는 호반을 따라 저으세요. 바람은 방향이 바뀔지도 모르지. 아니요. 하고 그가 말했다. 이 바람은 이 방향으로 사흘 동안은 붑니다. 모테로네에서 곧장 부는 바람이니까요. 물을 퍼낼 깡통을 넣어 뒀습니다. 지금 보트 값으로 다소라도 치러 두지. 아닙니다. 저도 한번 투기를 해 보지요. 무사히 가시거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치뤄 주세요. 그러지, 그럼. 물에 빠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바람을 따라 호수 중심지로 나가세요. 그래. 나는 보트에 올랐다. 호텔 값은 두고 오셨습니까? 응, 방 안에 봉투에 넣어 뒀어. 좋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중위님. 잘 있게. 몇 번이고 고맙네. 물에 빠지시면 고마워하시지 않겠지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행운을 빈다는 거야. 행운을 빌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됐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보트를 밀어 냈다. 나는 노를 물 속에 깊이 세우고 한 손을 흔들었다. 바텐더도 그러지 말라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호텔의 불빛을 보면서 저어 나갔다. 불빛이 안 보일 때까지 똑바로 저어 나갔다. 파도는 꽤 높았으나 우리는 바람을 따라 저어갔다. {{}}{{37 }} 나는 어둠 속에서 줄곧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저었다. 비는 그치고 간혹 우수수하고 쏟아질 뿐이었다. 밤은 어둡고 바람은 차가웠다. 고물에 앉아 있는 캐서린은 보였으나 노의 끝이 잠기는 수면은 보이지 않았다. 노는 길고,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가죽이 없었다. 나는 끌어당겨서 위로 쳐들고, 몸을 앞으로 구부려 수면을 찾아서 노를 담가 다시 당기고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힘 안 들이고 저었다.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 때문에 노를 수평으로 잦히지는 않았다. 손이 부르트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될 수 있으면 그걸 늦춰 볼 생각이었다. 보트는 가볍고, 젖는 데 힘이 안 들었다. 나는 깜깜한 수면을 저어 나갔다.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빨리 대안(對岸)인 팔란차에 닿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팔란차는 못 보고 말았다. 바람이 호수 위쪽으로 불어서, 어둠 속에 팔란차를 가리고 있는 갑(岬)을 지나면서도 불은 못 보고 말았다. 드디어 불빛이 호수 먼 곳에 조금 보여서 기슭 가까이 저어가 보니까 인트라였다. 그러나 오랜 동안을 우리는 아무 불빛도 보지 못하고, 기슭도 보지 못했으며, 그저 물결을 타고 어둠 속에서 꾸준히 저어가기만 했다. 간혹 물결이 보트를 솟구쳐 올리면 어둠 속에서 노에 물이 닿지 않는 일도 있었다. 물결은 무척 거칠었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로 곁에 솟은 바위 모퉁이에 부딪칠 뻔하면서 기슭에 근접했다.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높이 솟구쳐 올랐다간 물러나곤 했다. 나는 바른편 노를 힘껏 당기고 왼편 노로 물을 뒤로 보내고 해서 다시 호수로 나갔다. 삐죽이 나온 암벽은 안 보이고 우리는 호수 위쪽으로 저어 나갔다. 호수를 횡단하고 있는 거야. 하고 내가 캐서린에게 말했다. 팔란차가 보이게 되어 있잖아요? 그만 지나가 버린 모양이군. 기분이 어떠세요? 좋아. 잠깐은 나도 노를 잡을 수 있어요. 아니 괜찮아. 퍼거슨이 가엾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아침에 호텔로 찾아왔다가 우리가 없어진 걸 알게 될 거예요. 난 그건 별로 걱정이 안 되고, 날이 밝기 전에 스위스 령 호수로 넘어가야 세관 감시인에게 안 들킬 텐데. 퍽 멀지요? 여기서 약 30킬로 가량 되지. 나는 밤새도록 저었다. 나중에는 손바닥이 너무 아파서 노 위에 올려놓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몇 번이고 시간을 잡아먹을까 봐 기슭에 꽤 가까운 수면을 저어갔던 것이다. 어떤 때는 아주 가까워져서 산을 등지고 늘어선 나무와 기슭을 따라 나 있는 길을 볼 수 있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구름을 몰고 가자 달이 얼굴을 내밀어서 뒤를 돌아다보니까 카스타뇨라의 길고 시꺼먼 갑이 보였고, 흰 물결에 덮인 호면(湖面)과 멀리 높이 눈 덮인 산에 달이 보였다. 그러자 구름은 다시 달을 가렸고, 산과 호면은 사라졌으나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밝아져서 기슭을 볼 수 있었다. 너무 똑똑하게 보였으므로, 팔란차 가도에 세관 감시원이 있더라도 보트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호수 가운데로 끌고 들어갔다. 다시 달이 나왔을 때는 산기슭에 서 있는 별장이며 나무 사이로 흰 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줄곧 노를 저었다. 호수가 넓어지면서 대안의 산기슭에 루이노임에 틀림없는 불이 몇 개 보였다. 대안의 산과 산 사이에 쐐기 모양의 협곡이 보여서 그 곳이 루이노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꽤 시간을 번 셈이다. 나는 노를 보트 안으로 올려놓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노 젓기에 피로할 대로 피로했다. 팔과 어깨와 등이 아프고 손바닥이 벗겨졌다. 내가 우산을 펴 들고 있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바람을 이용해서 돛 대용을 하면 되니까요. 당신이 키를 잡을 수 있겠어? 될 것 같아요. 그럼 이 노를 겨드랑이에 끼고 뱃전에 꼭 붙여 가지고 키질을 해요. 나는 우산을 들고 있을 테니. 나는 고물 쪽으로 가서 노 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물을 향해 앉아서 포터가 갖다 준 큰 우산을 폈다. 펄럭 하면서 우산이 열렸다. 손잡이를 앉은 자리에 걸고 타고 앉아서 우산 양끝을 꼭 붙들었다. 바람이 그 속에 가득해지고 내가 양끝을 힘껏 붙들고 있는 동안은 보트가 바람을 빨아들이듯이 앞으로 나갔다. 나는 힘껏 당겼다. 보트는 빨리 달렸다. 멋있게 나가네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우산대 뿐이었다. 우산은 팽팽해지고 켕기고 마치 우리가 우산을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다. 다리로 버티고 허리를 제끼고 있노라니까 갑자기 우산이 비틀렸다. 우산대 하나가 내 이마를 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바람에 휜 우산대 꼭대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우산 전체가 비틀리면서 홀딱 뒤집혀지고, 대만 남은 우산을 나는 타고 앉았다. 좌석에 매어 두었던 손잡이를 끌러 우산을 이물에다 눕혀 두고, 노를 받으러 캐서린 곁으로 갔다. 캐서린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 손을 잡더니 여전히 깔깔 웃었다. 왜 이래? 나는 노를 쥐었다. 그걸 붙들고 있는 꼴이 여간 우습잖아요. 그렇겠지. 화내지 마세요, 여보.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어요. 당신이 20피트나 폭이 넓어진 것 같고, 죽자살자 우산 끝을 붙잡고 있는 게 - 캐서린은 숨이 막혔다. 저어야지. 좀 쉬고 한 잔 드세요. 멋진 밤이고 벌써 많이 왔어요. 보트가 파도 골짜기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해야 하는데. 내가 술을 꺼내 드리지요. 그리고 좀 쉬세요, 여보. 나는 노를 세우고, 노에 닿는 바람으로 나아갔다. 캐서린이 가방을 열었다. 내게 브랜디 병을 내밀었다. 나는 포켓 나이프로 병마개를 따고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순하면서도 독한 술이 들어가자 전신이 후끈해지고 기분도 훈훈하고 유쾌해졌다. 좋은 브랜디로군. 하고 내가 말했다. 달은 졌으나 대안이 보였다. 갑이 또 하나 길게 호면에 뻗어 있는 것 같았다. 춥잖아, 캣? 아무렇지도 않아요. 좀 몸이 굳어진 것 같긴 하지만. 그 물을 퍼내고 발을 내려놓지 그래. 나는 노를 저으면서 노받이에서 나는 삐걱삐걱하는 소리와 고물 좌석 밑에서 깡통이 물에 담겼다가 뱃바닥을 긁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깡통 이리 좀 주구려. 하고 내가 말했다. 목이 말라서. 지독하게 더러워요. 괜찮아. 부시면 되지 뭐. 캐서린이 뱃전에서 깡통을 부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물을 가득 뜬 깡통을 내게 내주었다. 브랜디를 마신 다음이라 목이 말랐는데 그 물은 얼음처럼 찼다. 너무 차서 이가 저릿하게 아팠다. 나는 대안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 기다란 갑에 근접해 있었다. 전방의 만(灣)에 불빛이 보였다. 고맙소. 하면서 나는 깡통을 돌려 주었다. 천만의 말씀.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당신은 뭘 좀 먹고 싶지 않소? 아니요. 조금 있으면 시장해질 거예요. 그 때까지 아껴 둬요. 그럽시다 그려. 갑처럼 전방에 보이던 것은 높은 육지가 길게 뻗어 나온 곳이었다. 나는 그것을 통과하느라고 호수 가운데로 훨씬 나갔다. 이제 호수는 많이 좁아졌다. 다시 달이 나타나고, 세관 감시원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면 시꺼먼 우리 보트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때, 캣? 하고 내가 물었다. 난 괜찮아요. 어디쯤 왔죠? 앞으로 8마일 이상 남지는 않았을 거야. 노로 저으려면 여간 먼 거리가 아니죠 뭘. 녹초가 되지 않았어요? 아니 괜찮아. 손이 좀 부르텄을 뿐이야. 우리는 호수 위쪽으로 저어 올라갔다. 우안(右岸)에 산이 터진 곳이 있어 낮은 해안선을 이루면서 평평하게 퍼져 있는 것이 필경 카노비오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감시원에게 들킬 위험성은 지금부터가 가장 고비이기 때문에, 나는 멀리 호수 가운데로만 저어갔다. 멀리 전방에는 둥근 지붕을 이고 있는 것 같은 산이 왼편에 높이 솟아 있었다. 나는 피로했다. 노 젓기에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는 그 산을 지나서도 적어도 5마일은 더 저어가야 스위스 수역(水域)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은 거의 졌지만 지기 전에 다시 구름이 끼어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나는 한동안 젓다가는 바람이 놋날에 맞도록 노를 든 채 쉬고 하면서 호수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내가 좀 저을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이 저을 것까지는 없어. 어때요. 나한테도 그게 좋아요. 저으면 몸이 너무 굳어지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젓지 않아도 괜찮아, 글쎄. 어때요. 적당히만 저으면 임신한 여자에게 퍽 좋은 거예요. 그래, 그럼 적당히 조금만 저어요. 내가 그리 갈 테니 당신은 이리 오라구. 올 때 뱃전을 두 손으로 잘 잡아야 해. 나는 고물에 앉아서 상의를 입고 깃을 세우고는 캐서린이 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저었으나 노가 너무 길어서 힘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샌드위치를 두 쪽 꺼내 먹고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피로하거든 말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노가 복부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하고 캐서린은 연방 노를 저으면서 말했다. 인생이 간단해지게요. 나는 브랜디를 또 한 모금 마셨다. 괜찮소? 그럼요. 그만하고 싶거든 알려. 그래요. 나는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보트를 양쪽 전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에요. 내가 잘 젓는데요, 뭘. 고물 쪽으로 가오. 많이 쉬었으니. 한동안 브랜디 기운으로 힘 안 들이고 줄곧 저었다. 그러나 브랜디를 마신 다음에 너무 맹렬하게 저었기 때문에 약간 기분 나쁜 신트림이 올라와서 노를 헛젓기 시작했고, 이내 노를 놔둔 채 물결에 찰싹거리도록 두어 둘 수 밖에 없었다. 물 한 모금만 주겠소? 하고 내가 말했다. 그거야 쉬운 일이죠.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날이 새기 전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잤거나 그렇지 않으면 호수 때문에 생긴 만곡부를 둘러싼 산에 바람이 막혀 있는 것이었다. 곧 동이 트기 시작할 것을 알자 나는 마음을 사려 먹고 열심히 저었다. 우리가 있는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스위스 령 호수로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우리는 호반에 아주 근접해 있었다. 나는 바위가 많은 호반과 수목을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에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나는 노에 기대고 쉬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건 모터 보트가 퐁퐁거리면서 호수로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호반으로 바싹 보트를 대고 조용히 기다렸다. 퐁퐁하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자 우리는 약간 비스듬히 전방에서 우중에도 모터 보트를 볼 수 있었다. 고물 쪽에 감시원 네 명이 타고 있었다. 알프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외투 깃을 세우고 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모두 졸린 듯했다. 모터 보트는 퐁퐁거리고 왔다가 빗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호수 가운데로 천천히 저어 나갔다. 이렇게 국경 가까이 근접했다면 호반의 도로를 경계하는 입초가 소리쳐 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간신히 호반이 보이는 거리까지 저어나가서 우중에 45분 가량 저었다. 또 한 번 모터 보트 소리를 들었으나 가만히 있으니까 엔진 소리는 호수를 건너가 버렸다. 스위스 령인 것 같아, 캣. 하고 내가 말했다. 정말요? 스위스 군대를 보지 않고서는 알 도리가 없는데. 스위스 해군인가요. 스위스 해군이라면 웃을 일이 아니야. 아까 들려 온 모터 보트는 아마 스위스 해군 소속이겠지. 스위스에 가거든 굉장한 아침 식사를 먹어요. 스위스에는 훌륭한 롤빵이랑 버터랑 쨈이 있어요. 이제 날은 환하게 밝고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여전히 전면에서 불어왔으며, 호면의 흰 물결이나 우리 배가 일으킨 흰 파도가 뒤로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제 스위스 수역에 들어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호반의 나무들 뒤로 많은 집이 보였고, 약간 올라간 곳에는 돌로 만든 집들이 있는 마을이 있었고, 몇 채의 별장과 교회당도 하나 있었다. 호반을 따라 나 있는 길에 감시원이 없나 하고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길이 호수와 아주 가까워지는 곳에서 나는 병사 한 명이 카페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연록색 군복으로 입고 독일군 것과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얼굴에 칫솔처럼 빳빳한 수염이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어 보오. 하고 내가 캐서린에게 말했다. 캐서린이 손을 흔드니까 군인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젓는 속도를 늦췄다. 우리는 마을 정면의 수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국경에서는 훨씬 들어온 것이 틀림없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좋겠네요, 여보. 국경에서 등을 밀어 돌려보내면 곤란하니까요. 국경은 훨씬 뒤에 있을 거요. 나는 이것이 세관이 있는 마을이 아닌가 하는데. 확실히 브리사고일 거야. 그럼 거기에도 이탈리아 인이 있잖겠어요? 세관 도시에는 언제든지 양국인이 있으니까요. 전시에는 안 그래. 이탈리아 인에게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을 거야. 아담한 소읍(小邑)이었다. 선창에는 많은 어선이 매여 있고, 시렁에는 어망이 널려 있었다. 동짓달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우중에도 명랑해 보이고 깨끗한 곳이었다. 그럼 올라가서 아침을 먹을까? 좋아요. 나는 왼쪽 노를 힘껏 당겨서 다가가서 선창에 가까워졌을 때에는 다시 노를 바로해서 보트를 방파제에 나란히 대었다. 노를 당겨 쇠고리를 붙들고 젖은 돌을 딛고 나가니 스위스 땅이었다. 나는 보트를 매고 캐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라오오, 캣. 상쾌한 기분이야. 가방들은 어떡하죠? 보트 안에 둬 두구려. 캐서린도 상륙하니 우리는 두 사람이 함께 스위스 땅을 밟고 선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나라네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멋있지? 가서 아침을 먹어요! 멋있는 나라지? 구두 밑의 감촉이 그만이야. 난 너무 몸이 굳어져서 그런 감촉은 잘 못 느끼겠어요. 그렇지만 훌륭한 나라 같긴 해요. 여보, 그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 나와서 여기 와 있다는 실감이 나요? 나지. 나구 말구. 지금까지의 실감이라는 건 다 거짓말이오. 저 집들 좀 봐요. 이 거리 참 아담하네요. 저기 아침 먹을 만한 곳이 있군요. 비도 멎었지? 이탈리아에는 도대체 이런 비가 없어. 명랑한 비야.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군요. 여기 와 있다는 실감이 나세요? 우리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깨끗한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는 쑥스러울 만큼 흥분해 있었다. 훌륭하고 깨끗해 보이는 여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다가와서 뭘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롤빵하고 잼하고 커피를 주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전시라 놔서 롤빵은 없습니다. 그럼 그냥 빵으로 주세요. 토스트를 만들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래 주세요. 계란도 몇 개 프라이해 주십시오. 몇 개나 해 드릴까요? 세 개만. 여보, 네 개로 하세요. 계란 네 개. 여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캐서린에게 키스하고 손을 꼭 쥐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카페 안을 둘러보고 했다. 여보, 여보, 참한 집이지요? 훌륭하군. 하고 내가 말했다. 롤빵쯤은 없어도 괜찮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밤새도록 그것 먹을 생각만 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조금도 섭섭하지 않아요. 아마 곧 여기서 우리를 체포할 거야. 걱정 말아요, 여보. 먼저 아침이나 먹어 두는 거죠. 아침을 먹고 나면 체포도 별로 걱정이 안 될 거예요. 그리구 우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어엿한 영국인과 미국인인걸요. 당신 여권 있지? 물론이죠. 아이, 그런 이야기는 그만둬요. 즐거운 마음으로 있어요. 이보다 더 즐거운 수야 없지. 하고 내가 말했다. 깃처럼 꼬리를 세운 살찐 회색 고양이가 마루를 가로질러 우리 식탁으로 오더니 내 다리에 대고 등을 구부리고 비벼댈 때마다 골골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팔을 뻗어 고양이 등을 쓸어 주었다. 캐서린은 지극히 행복한 표정으로 내게 미소를 보냈다. 커피가 오는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조반 후에 우리는 체포되었다. 우리는 마을 가운데를 조금 산보하고, 가방을 가지러 보트로 갔다. 한 병사가 그 보트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거 당신들 보트요?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호수 저편에서요. 그럼, 같이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가방은 어떻게 할까요? 가지고 오시죠. 내가 가방을 들고, 캐서린이 내 곁에 서서 걷고, 병사가 뒤를 따라 우리는 낡은 세관으로 들어갔다. 세관에서는 아주 야위고 군인답게 생긴 중위가 우리를 심문했다. 국적이 어디죠? 미국과 영국입니다. 여권을 보여 주시오. 나는 내 것을 내주고 캐서린은 핸드백에서 자기 것을 꺼냈다. 왜 보트로 스위스에 들어오셨나요? 나는 운동 선수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노 젓는 게 내게는 큰 운동입니다.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젓지요. 왜 여기로 오셨지요? 동계(冬季) 스포츠를 하러 왔지요. 우리는 관광 겸 동계 스포츠를 했으면 해서요. 여기는 동계 스포츠에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그건 압니다. 동계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이탈리아에서는 뭘하고 계셨나요? 나는 건축 공부를 했구요. 내 종매는 그림 공부를 했어요. 왜 거기를 떠나셨지요? 동계 스포츠를 하고 싶었다니까요. 전쟁은 계속되고 어디 건축 공부를 할 수 있어야지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좀 기다리시오. 하고 중위가 말했다. 그는 우리 여권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썩 잘 하시는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대로만 우기세요. 동계 스포츠를 하고 싶다구요. 당신은 미술에 관해서 좀 아오? 루벤스.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몸집이 크고 살이 쪘지. 하고 내가 말했다. 티티안.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티티안 식 머리지. 하고 내가 말했다. 만테냐는 어때? 어려운 것 묻지 마세요. 캐서린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알아요. 아주 심술꾸러기. 그래, 심술꾸러기지. 하고 내가 말했다. 못 구멍 투성이고. 내가 훌륭한 아내라는 것 아시겠지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세관원하고 그림 이야기도 할 수 있구요. 저 친구가 오는군. 하고 내가 말했다. 여윈 중위는 우리 여권을 들고 세관 복도를 걸어나갔다. 당신들을 로카르노로 이송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마차를 한 대 잡으시면 병사가 따라갈 겁니다. 좋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보트는 어떻게 합니까? 보트는 몰수합니다. 가방에 든 건 뭡니까? 그는 빽 두 개를 샅샅이 뒤지고 4분의 1 남은 브랜디 병을 쳐들었다. 같이 한 잔 하실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돈은 얼마나 가지셨죠? 2천 5백 리라. 그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종매되시는 분은요? 캐서린도 1,200 리라가 조금 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중위는 기분이 누그러졌다. 우리를 대하는 거만한 태도도 훨씬 덜해졌다. 동계 스포츠를 하시려면. 하고 그가 말했다. 벵겐이 좋을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벵겐에 아주 훌륭한 호텔을 가지고 있지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것 참 잘됐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명함에다 써 드리지요. 그는 아주 공손하게 명함을 내주었다. 이 병사가 로카르노까지 모시고 갈 겁니다. 여권은 병사가 가지고 있습니다. 유감이지만 그러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로카르노에 가시면 십중팔구는 비자를 내주든지 경찰 허가증을 줄 겁니다. 그는 두 사람의 여권을 병사에게 주었고, 우리는 마차를 부르러 가방을 들고 마을로 나갔다. 어이! 하고 중위가 그 병사를 불렀다. 뭐라고 독일어 사투리로 그에게 일렀다. 병사는 총을 등에 둘러메더니 우리 가방을 들었다. 훌륭한 나라로군. 하고 내가 캐서린에게 말했다. 아주 실용적이군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고 나는 중위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공무인걸요!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감시원 뒤를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병사와 마부와 나란히 앞자리에 앉은 마차에 몸을 싣고 우리는 로카르노를 향해 달렸다. 로카르노에서도 불쾌한 일은 없었다. 우리가 여권과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심문을 받기는 했으나 태도가 공손했다. 그들은 우리가 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믿는 것 같지 않았고, 나 자신이 쑥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심문이란 꼭 법정과 같은 것이다. 이치에 맞는다든지 할 필요는 없고, 기술적인 이유만 있으면 설명 없이도 버티면 그만인 것이다. 여권이 있겠다, 돈을 써 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가(假) 비자를 내주었다. 이 비자는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경찰에 거처를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가? 물론. 어디로 갈 생각인가? 어디로 갈까, 캣? 몽트뢰. 훌륭한 곳이지요. 하고 담당관이 말했다. 그 곳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여기 로카르노도 좋은 곳이지요. 하고 다른 관리가 말했다. 장담해도 좋지만 여기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로카르노는 퍽 매력이 있는 도시니까요. 우리는 어디든 동계 스포츠를 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요. 몽트뢰에서는 동계 스포츠를 할 수 없습니다. 뭐라고? 하고 다른 관리가 말했다. 나는 몽트뢰 출신이야. 몽트뢰 오베르랑 베르누아 철도 연변에서 동계 스포츠를 할 수 있다는 건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야. 그걸 부정한다는 건 거짓말이 될 걸세. 그걸 부정하는 게 아냐. 그저 몽트뢰에는 동계 스포츠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야. 나는 그 말에 이의가 있어. 하고 다른 관리가 말했다. 바로 그 설에 이의가 있는 거야. 나는 그 설을 굽힐 생각이 없는데. 그 설에 이의가 있단 말이야. 나 자신이 몽트뢰 거리로 루즈를 타고 들어간 일이 있으니까.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말이야. 루즈는 확실히 동계 스포츠거든. 다른 관리가 내게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생각하는 동계 스포츠가 고작 루즈타기 정돕니까? 여기 로카르노에 머무르시는 게 편할 겁니다. 기후가 좋겠다, 환경이 매력적이겠다, 꼭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분은 몽트뢰로 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잖아. 루즈타기란 뭡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이거 보게. 이분은 아직 루즈타기란 스포츠는 금시초문이셔! 둘째번 관리는 퍽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루즈타기란 하고 먼젓번 관리가 말했다. 터보건 썰매지요. 미안하지만 다르지. 둘째번 관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또 의견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터보건 썰매란 루즈와는 퍽 다르지. 터보건 썰매란 얇은 판자로 캐나다에서 만드는 거야. 루즈란 미끄럼쇠가 달린 보통 썰매고 말이야.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터보건 썰매는 탈 수 없나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물론 탈 수 있지요. 하고 첫번째 관리가 말했다. 얼마든지 탈 수 있지요. 몽트뢰에서 훌륭한 캐나다 제 터보건 썰매를 팔고 있습니다. 옥스 형제 상점에서 팔지요, 직접 수입한 물건을요. 둘째번 관리는 외면을 해버렸다. 터보건 썰매란 하고 그는 말했다. 특별한 활주로가 필요한 거예요. 몽트뢰 거리로 터보건을 타고 들어갈 수는 없어요. 여기서는 어디 묵고 계시죠?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브리사고에서 지금 막 도착했으니까요. 마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몽트뢰에 가시면 틀림없습니다. 하고 첫번째 관리가 말했다. 기후가 쾌적하고 이상적이지요. 멀리 안 나가고 동계 스포츠를 할 수 있어요. 정말 동계 스포츠가 소원이시라면 하고 둘째번 관리가 말했다. 엥가디네나 뮈렌으로 가십시오. 나는 동계 스포츠를 하기 위해서 몽트뢰로 가라는 훈수에는 항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몽트뢰 위에 있는 레자방에서는 멋있는 동계 스포츠라고는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몽트뢰 편 옹호자는 자기의 동료를 노려보았다. 여러분.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가 봐야겠습니다. 내 종매가 몹시 피로해서요. 우리는 시험삼아 몽트뢰로 가 보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첫번째 관리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로카르노를 떠난 것을 후회하실 겁니다. 하고 두번째 관리가 말했다. 하여간 몽트뢰에 가시면 경찰에 신고하십시오. 경찰도 조금도 불쾌하지 않습니다. 하고 첫번째 관리가 보증했다. 주민 전부가 무척 공손하고 친절하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두 분께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두 분의 충고가 퍽 도움이 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두 분 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문까지 따라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로카르노 편의 옹호자는 약간 태도가 냉담했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서 마차를 탔다. 여보, 아이, 기가 막혀서.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좀더 빨리 마치고 나올 수 없었어요? 나는 둘 중의 한 사람이 추천한 호텔의 이름을 마부에게 일러 주었다. 마부는 고삐를 잡았다. 저 군인 양반을 잊으셨네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 병사는 마차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10리라를 내주었다. 아직 스위스 돈이 없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경례를 하고는 가버렸다.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해서 호텔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몽트뢰는 생각이 났어? 하고 내가 캐서린에게 물었다. 정말 거기 가고 싶어? 갑자기 생각나는 이름이 그거였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괜찮은 곳이에요. 산 위에 가면 적당한 곳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졸려? 지금도 자고 있어요. 한숨 푹 자라구. 가엾게도 긴 밤을 고생만 했군. 재미있었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특히 당신이 우산으로 달릴 때는요. 스위스 땅에 왔다는 실감이 들어? 아니요. 잠이 깨면 모든 게 꿈이 될까 봐 걱정이에요. 나도 그렇군. 정말 그렇죠? 밀라노에서 당신을 전송하러 정거장으로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아니지요. 아니기를 희망해 두지.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소름이 끼쳐요. 우리가 가는 게 거긴지도 모르겠어요. 난 녹초가 돼서 잘 모르겠어.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 손 좀 보여 주세요. 나는 두 손을 내밀었다. 물집이 터져서 형편 없었다. 옆구리에 구멍은 안 났으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벌받을 말은 마세요. 나는 몹시 피로해서 머리가 몽롱했다. 기뻐 날뛰던 감정도 다 사라졌다. 마차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가엾게도 손이 엉망이셔. 캐서린이 말했다. 만지지 마오. 하고 내가 말했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군. 어디로 가는 거요, 마부?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호텔 메트로폴로요. 거기 가자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소. 내가 말했다. 제대로 가는 거야, 캣. 옳게 가는 거예요, 여보. 흥분하지 마세요. 한숨 푹 자고 나면 내일은 정신이 맑아지시겠죠. 꽤 얼떨떨한데. 하고 내가 말했다. 오늘은 꼭 희극 오페라 같군. 배가 고픈 것도 같아. 피로하신 거예요. 곧 나아지실 거예요. 마차가 호텔 앞에 닿았다. 누군지 가방을 받으러 나왔다.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호텔로 들어가는 포도에 내려섰다. 나아지실 줄 알고 있었어요. 피로하신 것뿐이에요. 장시간을 한잠도 못 주무셨으니까. 하여간 다 왔군. 네, 정말이지 다 왔군요. 우리는 가방을 든 소년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제 5 편 {{}}{{38 }} 그 해 가을에는 눈이 퍽 늦게야 내렸다. 우리는 산허리의 소나무 숲 사이에 있는 갈색 목조 집에서 살았는데, 밤이 되면 서리가 내리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보면 화장대 위에 놓아 둔 두 물그릇에 얇은 얼음이 서려 있곤 했다. 미세스 구팅겐이 아침 일찍 방에 들어와서 창문을 닫고 높다란 자기(磁器) 난로에 불을 피웠다. 소나무 장작이 튀면서 불이 붙고 불길이 난로 안에서 활활 타오르면 미세스 구팅겐이 두번째로 굵은 장작과 더운 물을 들고 들어왔다. 방이 따뜻해진 다음에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우리는 호수를 내다보고, 호수 건너로 프랑스 쪽 산들을 바라보았다. 산정에는 눈이 있었고, 호수는 희끄무레한 강철 같은 푸른색이었다. 바깥에는 이 산장 앞에서 산으로 난 길이 있었다. 수레바퀴 자국과 길이 울퉁불퉁한 곳에 서리가 내려 쇳덩이처럼 딱딱했고, 길은 숲을 지나 목장이 있는 곳까지 산을 오르고 돌고 하면서 꾸준히 올라갔다. 그 목장은 계곡을 건너다보는 숲 언저리에 헛간이며 판자집이 있었다. 계곡은 깊고 그 바닥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가 흐르고, 바람이 계곡 건너서 불어올 때는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간혹 우리는 길을 버리고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바닥은 걷기에 보드라웠다. 서리가 내려도 큰 길과는 달리 굳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길이 딱딱한 것에 별로 개의하지 않았다. 구두바닥과 뒤축에 징이 박혀 있었고, 그것이 얼어붙은 땅에 박히기 때문이다. 징 박은 구두로 걷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상쾌한 일이다. 그건 그렇고 숲속을 걷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 앞에는 산이 호수를 따라 이루어진 좁은 평지까지 가파르게 뻗어 있어, 우리는 햇빛을 쪼이면서 집 현관에 앉아서 산허리를 내려오는 꾸불꾸불한 길이며, 훨씬 얕은 산허리에 계단식으로 꾸민 포도밭을 바라보았다. 포도 덩굴은 이제 겨울이라 모두 말랐고, 밭은 돌담으로 구획이 되어 있고, 포도밭 밑으로는 호반을 따라 좁은 평지에 마을의 집들이 보였다. 호수에는 나무가 두 그루 나 있는 섬이 있었는데, 그 나무가 마치 고기잡이 배의 쌍돛 같았다. 호수 저편은 산이 날카롭고 가팔랐으며, 호수 끝에는 두 산맥 사이로 로네 계곡의 평지가 있었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산맥으로 계곡이 단절되는 곳이 당 듀 미디 산이었다. 눈에 덮인 높은 산이고 계곡에 군림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멀어서 그림자가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해가 났을 때는 현관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대개는 수수한 나무 벽과 구석에 커다란 난로가 있는 이층의 조그만 방에서 식사를 했다. 우리는 읍에서 책이랑 잡지를 사왔고, 카드놀이 책을 사다가 둘이서 노는 게임을 여러 가지 배웠다. 난로가 있는 조그만 방은 우리가 거처하는 방이었다. 편안한 의자가 두 개, 책과 잡지를 얹어 두는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카드놀이는 식탁을 치우면 거기서 했다. 구팅겐 내외는 아래층에서 살았고, 저녁때면 그들이 무슨 이야긴지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 소리가 들렸고, 그들 역시 두 사람만이 퍽 행복했다. 남편은 호텔의 급사장이었고, 부인도 같은 호텔에 하녀로 있었는데, 돈을 모아서 이 집을 샀다고 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역시 급사장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취리히의 호텔에 가 있었다. 아래층에는 넓은 마루방이 있고 포도주와 맥주를 팔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저녁때 짐마차가 멎고 남자들이 포도주를 마시러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처방 밖 복도에 장작 궤짝이 있어서 내가 거기서 장작을 갖다가 난로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밤늦게까지 일어나 있지 않았다. 커다란 침실의 어둠 속에서 자리에 들 때는 나는 옷을 벗고 창문을 열고 밤과 차가운 별들과 창 밑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는 잘 잤으며, 밤에 잠을 깬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인데, 캐서린이 잠을 깨지 않도록 가만히 깃털 이불을 바로 덮고 따뜻하고 얇은 이불의 가벼움을 새삼 느끼면서 다시 꿈나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쟁이란 먼나라 이야기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신문으로 아직 눈이 안 오기 때문에 산악 지대에서는 지금도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혹 우리는 산을 걸어 내려가서 몽트뢰까지 가곤 했다. 산을 타고 내려가는 오솔길도 있었으나, 그 길은 너무 가팔라서 우리는 대개 큰 길로 나가서 들 가운데로 난 넓고 딱딱한 길을 걸어서 포도밭 돌담 사이를 빠져 길 양쪽에 서 있는 마을의 집들 사이로 내려갔다. 쉐르네, 퐁타니방, 또 하나는 이름도 잊었으나 세 마을이 있었다. 길을 다라 계단식 포도밭이 있는 산허리에 튀어나온 암벽에 네모지게 지은 석조 성관(城館)을 지난다. 포도밭에는 덩굴을 올리는 막대기에 비끄러맨 덩굴이 말라서 갈색으로 되었고, 땅은 눈이 내려도 좋도록 준비가 되어 있고, 멀리 눈 아래 보이는 호수는 평평하고 강철처럼 희끄무레했다. 길은 성관 아래로 길게 언덕을 이루고 바른편으로 구부러져서 가파르게 자갈로 포장한 길로 나서면 몽트뢰로 들어간다. 우리는 몽트뢰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호반을 따라 걸으면서 백조랑 많은 갈매기를 보았고, 사람이 가까이 가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서 호수를 내려다보며 끽끽거리고 우는 제비 갈매기도 보았다. 호수 중앙부에는 몸이 작고 검은 농병아리 떼가 헤엄을 치면서 꼬리에 기다란 파문을 남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가에서 우리는 큰 거리를 걸으면서 상점의 진열장을 구경했다. 큰 호텔이 많았는데 대개는 문을 닫았지만 상점은 거의 문을 열었고, 우리를 보면 퍽 반겨 주었다. 캐서린이 머리를 하러 가는 참한 미용실이 하나 있었다. 그 가게를 경영하는 부인은 퍽 명랑했고, 우리가 몽트뢰에서 알고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캐서린이 거기 가 있는 동안 나는 맥주집에 가서 색깔이 검은 뮈니히 맥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었다. 콜리에레 델라 세라를 읽고, 파리에서 온 미국과 영국의 신문도 읽었다. 광고란은 전부 꺼먼 먹칠을 해 놓은 것이 아마 그런 방법으로 적과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 목적인 듯 했다. 신문을 읽어도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처에서 모든 일이 악화되어 가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구석 자리에 커다란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서 프레츨(소금을 묻힌 비스킷 - 역자 주)의 초먹인 포장지를 뜯어서 그 짭짤한 소금 맛과 그 맛으로 맥주가 한결 맛있어지는 것을 즐기면서 비참한 기사들을 읽었다. 캐서린이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오지 않아서, 신문을 신문걸이에 갖다 걸어 놓고, 맥주 값을 치르고, 캐서린을 찾으러 거리로 나갔다. 날씨는 춥고 어둡고 겨울 맛이 났으며, 건물의 돌까지 싸늘해 보였다. 캐서린은 아직도 미장원에 있었다. 나는 조그만 구석 좌석에 앉아서 구경을 했다. 구경을 하면 흥분이 되었고, 캐서린은 미소를 머금고 나와 이야기를 했는데, 흥분해서 그런지 내 음성이 약간 탁하게 들렸다. 머리 집게가 경쾌하게 금속성을 내고, 삼면의 거울에 캐서린이 비친 것을 볼 수 있었고, 좌석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이윽고 여인의 캐서린의 머리를 올리고, 캐서린은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핀을 빼기도 하고, 또 꽂기도 해서 약간 고쳤다. 마침내 캐서린은 일어났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서방님께서는 퍽 재미가 있으신가 본데요. 그렇죠, 선생님?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춥고 겨울 기분이 나고 바람이 불었다. 여보, 난 당신을 지극히 사랑해.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 행복을 즐기고 있잖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이것 봐요. 우리 어디 가서 차 대신 맥주 마셔요. 꼬마 캐서린에게 맥주가 퍽 좋아요. 몸집을 작게 만드니까요. 꼬마 캐서린. 하고 내가 말했다. 이 게으름뱅이. 지금까지는 얼마나 얌전한지 몰라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별로 말썽을 부린 일이 없어요. 의사 말이 맥주가 몸에도 좋고 아이도 안 큰대요. 그런데 너무 작게만 했다가, 그게 사내아이면 경마 기수가 되겠구먼. 정말 이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해야 될 것만 같아요.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는 맥줏집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직 시간은 일렀으나 바깥은 어둑어둑하고 황혼이 오는 게 빨랐다. 지금 당장 결혼합시다.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지금은 거북해요. 너무 뚜렷하게 눈에 띄는 걸요. 이 꼴을 하고는 누구 앞에 나가서든 결혼할 수 없어요. 진작 결혼해 두었으면 좋았을걸. 나도 그랬더라면 싶긴 해요. 언제나 결혼할 수 있게 될까요? 임신부 같지 않은데 뭘. 아니, 그래요. 미용사가 첫아이냐고 묻던데요. 거짓말로, 아니에요. 아들이 둘이고 딸이 둘이라고 했죠. 언제 결혼할까? 언제든지 몸이 가벼워지거든요. 모든 사람이 참 예쁜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 그래 걱정이 안 되우? 여보, 왜 내가 걱정이 되겠어요?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꼭 한 번 밀라노에서 내가 창부 같은 기분을 느꼈을 뿐인데, 그것도 겨우 7분간 계속된 감정이고, 게다가 방의 가구 영향도 있었던 거예요. 지금 좋은 아내 노릇을 하고 있잖아요? 물론 귀여운 마누라지. 그럼 너무 형식에 구애되지 말아요. 몸만 풀면 곧 결혼식을 올리겠어요. 그러지. 맥주 한 잔 더 해도 괜찮겠어요? 의사 말은 내 골반이 좁은 편이라서 꼬마 캐서린을 작게 만드는 게 상책이래요. 또 다른 말은? 나는 염려가 되었다. 없어요. 혈압은 훌륭하대요. 내 혈압을 굉장히 칭찬했어요. 당신 골반이 너무 좁다는 데 대해서 뭐라고 했어? 없어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스키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야 물론이지. 전에 해 본 일이 없다면 시작하기에는 시기가 늦었다는 거예요. 넘어지지만 않으면 스키를 해도 무방하대요. 친절한 농담이군 그래.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어린애 낳을 때는 그분 모셔 오도록 해야겠어요. 식을 올려야 하느냐고 그 사람한테 물어 봤소? 아니요. 결혼한 지 4년 되었다고 한 걸요. 여보,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면 내가 미국인이 되고, 또 우리가 언제든지 미국 법률 밑에서 결혼하면 아이는 합법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건 어디서 알아냈지? 도서관에서 뉴욕 판 <세계 연감> 을 보고 알아냈죠. 참 굉장한 여자로군. 난 미국인이 되는 건 대찬성이니까, 여보, 우리 미국으로 가요, 네? 나이애가라 폭포 구경이 하고 싶어요. 당신은 훌륭한 여자야. 그 밖에도 구경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잊어버렸군요. 도살장? 아니요.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울워드 빌딩? 아뇨. 그랜드 캐니언? 아니. 그렇지만 그건 봐 두고 싶어요. 그럼 뭘까? 골든 게이트에요! 그게 보고 싶었어요. 골든 게이트가 어디 있지요? 샌프란시스코에 있지. 그럼, 거기로 가요. 그렇잖아도 샌프란시스코는 구경하고 싶으니까요. 좋아. 거기로 가지. 이젠 산에 올라가기로 해요. 그래도 괜찮죠? 기차를 탈 수 있을까요? 다섯 시 조금 지나서 기차가 있지. 그걸 타요. 그래. 난 먼저 맥주를 한 잔 더 해야지. 우리가 밖에 나와서 거리를 걸어 올라가 정거장으로 가는 층계를 오를 때는 몹시 추웠다. 로네 계곡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다. 상점 진열장에는 불이 켜졌고, 우리는 가파른 돌층계를 기어 올라가서 높은 거리로 나섰고, 또 한 번 층계를 올라서 정거장에 도달했다. 전기 기차가 불을 전부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는 시간을 표시한 다이알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까 다섯 시 십 분이었다. 정거장 시계를 봤다. 다섯 시 오 분이었다. 우리가 올라타자 기관사와 차장이 정거장 주점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창을 열었다. 기차는 전기 난방이 되어 있어서 무더웠는데, 창으로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피로해, 캣? 하고 내가 물었다. 아뇨. 기분 좋아요. 오래 타지는 않으니까. 난 타는 게 좋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여보, 내 걱정은 마세요. 기분이 썩 좋아요. 크리스마스 사흘 전까지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는 일어나 보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난로에 불을 활활 지피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눈 내리는 구경을 했다. 미세스 구팅겐이 아침상을 치우고 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대단한 눈보라였다. 주인 여자 말로는 밤중부터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창 앞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으나 길 건너가 보이지 않았다. 맹렬하게 바람이 불고 눈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나는 침대로 돌아가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스키를 할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스키도 못 한다는 건 따분하지 뭐에요. 쌍 썰매를 구해다가 길을 내려가 보지. 자동차 타는 것보다 몸에 해롭지는 않을 거야. 너무 운동이 과하지 않을까요? 해 보면 알겠지.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조금 있다가 눈을 맞으면서 산보를 하자구. 점심 전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래야 밥맛이 있지요. 나야 항상 배가 고픈걸. 나도 그래요. 우리는 눈 속으로 나갔으나 눈이 바람에 몰려 쌓인 곳이 있었으므로 멀리는 가지 못했다. 내가 앞서 걸으면서 정거장까지 길을 이끌었지만 그 이상은 나갈 수가 없었다. 눈이 바람에 날려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정거장 곁에 있는 조그만 여인숙으로 들어가서 비로 서로 눈을 털어 주고 벤치에 앉아서 베르무트를 마셨다. 대단한 눈보라에요. 하고 여자 급사가 말했다. 그렇군요. 금년에는 눈이 퍽 늦었어요. 그렇군요. 초콜렛을 하나 먹을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곧 점심 먹을 테니 그만둘까? 항상 배가 고파요. 하나 먹지 그래. 내가 말했다. 개암 들어 있는 걸로 하나 주세요. 캐서린이 말했다. 그것 참 맛있지요. 하고 급사가 말했다. 저도 그걸 제일 좋아한답니다. 난 베르무트를 한 잔 더 주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가 그 집에서 나와서 다시 길을 더듬어 올라가려니까 우리 발자국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발자국이 있던 곳에 보일락말락하는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눈이 얼굴에 불어 닥쳐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리는 눈을 털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구팅겐 씨가 점심을 날라왔다. 내일은 스키를 할 겁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미스터 헨리는 스키를 하세요? 아뇨. 그러나 배울 생각이죠. 쉽게 배우실 겁니다. 내 자식놈이 크리스마스에 올 테니까 가르쳐 드리도록 하지요. 그것 참 잘 됐군요. 언제 옵니까? 내일 밤에요. 점심을 마치고 좁은 방 난로가에 앉아서 창 밖으로 눈 내리는 구경을 하고 있는데 캐서린이 이런 말을 했다. 여보, 어디 당신 혼자 여행이라도 가서 남자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스키 하실 생각 없으세요? 아니. 그건 또 왜?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가끔 만나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소? 아니요. 나도 안 그래. 알아요. 그래도 당신은 달라요. 난 아이를 가졌으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만족하지만요. 이제 생각하니깐 내가 너무 멍청했고 너무 많이 지껄이는데, 당신이 내 곁을 떠나서 나한테 싫증이 안 나도록 해야겠어요. 내가 당신 곁을 떠났으면 해? 아뇨. 곁에 있어 줬으면 해요. 내가 그러려는 건데 뭘. 이리 오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 머리의 혹을 만져 보고 싶어요. 굉장히 큰 혹이에요. 캐서린은 내 혹을 쓰다듬었다. 여보, 당신 수염을 기르고 싶지 않으세요? 길렀으면 싶어? 재미있을 거예요. 수염을 기른 당신을 보고 싶어요. 좋아. 길러 보지. 지금 이 시각부터 시작하지.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나도 할 일이 생길 테니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걱정이세요? 아니, 난 그게 좋아. 지금 멋진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안 그러오? 행복한 생활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배가 불러서 당신이 싫증이 날까 봐 겁이 나요. 여보, 캣. 당신은 내가 얼마나 미칠 듯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르는군. 이래두요? 지금 그대로 말이야. 나는 재미있는 생활을 하고 있어. 우리 생활이 행복하잖아? 나야 그렇지만 당신은 좀이 쑤시지 않나 했어요. 아니. 간혹 일선이나 아는 사람 생각은 하지만 걱정은 안 해. 난 아무것도 많이 생각하지는 않아. 누구 생각을 하세요? 리날디랑 신부랑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지. 그러나 그들 생각도 오래는 안 해. 전쟁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전쟁은 나로서는 끝난 셈이니까.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아무 생각도 안 해. 하고 있었어요. 말해 봐요. 리날디가 정말 매독에 걸렸나 하는 생각을 했지. 그게 전부에요? 응. 그분 매독이던가요? 모르지. 당신이 아니기 다행이군요. 당신도 그런 종류의 병에 걸린 일 있으세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지.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무척 아파요? 굉장하지. 나도 걸렸더라면 좋았을걸. 그건 무슨 당찮은 소리야. 정말이에요. 당신처럼 되기 위해서 걸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당신이 관계한 모든 여자들과 내가 같이 있으면서 그들과 같이 당신을 놀려 주고 싶어요. 그것 참 아름다운 광경이겠군. 당신이 임질 걸린 광경은 별로 아름다운 게 못 되지요. 나도 알아. 이제 눈 오는 구경이나 하오.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싶어요. 여보, 당신은 왜 머리를 안 기르세요? 어떻게 길러? 조금 더 길게 말이에요. 이만하면 길지 뭘. 아니, 조금만 더 기르고, 나는 내 머리를 조금만 짧게 자르고 해서 두 사람이 하나는 금발이고, 하나는 검은 것 말고는 똑같이 만들어 봐요. 난 당신 머리를 자르는 건 반대야. 재미있을 거예요. 이 머리가 싫어졌어요. 밤에 잠자리에서 무척 주체스러워요. 난 그래도 좋은걸. 좀 더 짧은 게 안 좋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지금대로가 좋아. 짧은 게 좋을지도 몰라요. 그럼 우리는 둘이 비슷해진 거예요. 여보, 내가 당신을 갖고 싶은 나머지 그만 당신 자신이 되어 버리고 싶어요. 벌써 그렇게 된 걸. 우리는 일심동체야. 그건 나도 알아요. 밤에는 그래요. 밤은 위대한 것이니까. 난 두 사람이 한데 섞여 버렸으면 해요. 난 당신이 내 곁을 떠나는 건 싫어요. 방금 그런 말을 했지요. 가고 싶거든 가세요. 그렇지만 얼른 돌아오세요. 당신하고 같이 있지 않으면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아무 데도 안 갈 테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당신이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 전혀 생활이라는 걸 갖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리거든. 난 당신이 생활을 갖기 바래요. 멋있는 생활을 갖기 바래요. 그렇지만 우리 둘이 함께 그걸 가져야지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수염을 기르기를 바라는 거야. 그만두는 걸 바라는 거야? 기르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아마 신년에는 멋진 수염이 될 거예요. 자, 장기나 한 판 둘까? 당신하고 놀고 싶어요. 아냐, 장기를 두자구. 그럼 끝나고 놀지요? 그래. 좋아요. 나는 장기판을 꺼내 놓고 말을 늘어놓았다. 아직도 밖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밤에 한 번 잠이 깨어 보니까 캐서린도 잠이 깨어 있었다. 창에는 달이 비치고 침대 위에 유리창의 창살 그림자가 떨어져 있었다. 잠이 깨셨군요? 응, 잠이 안 와? 잠이 깨어서,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미쳤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당신도 기억하세요? 조금 미쳤더랬지. 다시는 그렇게 미치지 않을 거예요. 난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당신은 굉장하다는 말을 해 주세요. 아주 부드럽게 말이에요. 한 번 해 보세요. 굉장해. 아이,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 난 지금은 안 미쳤거든요. 난 그저 아주, 아주, 행복해요. 잠을 청해 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 둘이 똑같은 시각에 잠들어요. 그래.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눈을 뜨고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얼굴에 달빛을 받고 잠들어 있는 캐서린을 지켜 보았다. 이윽고 나도 잠이 들었다. {{}}{{39 }} 정월 중순께가 되자 나는 수염을 갖게 되었고, 맑고 추운 밤이 계속되는 겨울철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다시 산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건초를 나르는 썰매, 산에서 벌채해 내리는 재목 때문에 길의 눈은 다져지고 미끄러워졌다. 눈은 거의 몽트뢰에 이르도록 이 지방 일대를 온통 덮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산들도 온통 흰빛이었고, 로네 계곡의 평원도 눈에 덮여 있었다. 우리는 산의 뒤쪽 문을 돌아서 벵 달리에까지 먼 길을 걸어 보았다. 캐서린은 징이 박힌 신을 신고, 망토를 두르고, 날카로운 강철 끝이 달린 지팡이를 들었다. 캐서린은 망토를 둘렀기 때문에, 배가 불러 보이지 않았고, 길을 서둘러 걷지 않고, 피로하면 걸음을 멈추고 길가 통나무 위에 앉아 쉬었다. 벵 달리에의 숲속에는 나뭇꾼들이 쉬면서 술을 마시는 주막이 있었는데, 우리는 난로를 피운 방 안에서 향료와 레몬이 들어 있는 뜨거운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그들은 그 술을 글뤼바인이라고 했는데, 마시면 몸이 후끈해지고 잔치를 하기에도 좋은 술이었다. 주막 안은 어둡고 연기가 자욱했으나, 밖으로 나오면 차가운 공기가 날카롭게 폐로 들어오고 숨을 들이마시면 코끝이 얼얼했다. 우리는 창으로 불이 비치는 주막과 나뭇꾼의 말이 집 밖에서 몸을 녹이려고 발을 구르고 머리를 흔들고 있는 것을 돌아다 보았다. 말의 콧등 털에는 서리가 서려 있고, 숨을 쉴 때마다 공중에 깃털 같은 김을 내뿜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올라가노라면 한동안은 길이 반들반들하고 미끄러웠으나, 재목을 내리는 길이 구부러져 나가는 데까지는 말들이 짓밟아서 얼음이 오렌지색이 되어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길에 깨끗한 눈이 다져 있고 숲 사이로 빠져 나가는데,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두 번 여우를 보았다. 경치가 좋은 고장이라 우리는 나갈 때마다 재미있었다. 이제 당신 수염이 멋있게 자랐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꼭 나무꾼 같아 보여요. 조그만 금 귀고리를 단 사람 보셨어요? 그 사람은 알프스 영양(羚羊) 사냥꾼이라오. 하고 내가 말했다. 그걸 달면 잘 들린다는 거야. 정말이에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영양 사냥꾼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달고 다니는 거겠지요. 이 근방에 영양이 있나요? 그럼, 당 듀 쟈망 저편이 있지. 여우를 보니까 재미있는데요. 여우는 잘 때 제 꼬리로 몸을 감아서 보온을 하지. 기분 좋겠군요. 나는 늘 그런 꼬리가 있었으면 하는데. 우리가 여우 같은 꼬리를 가졌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 옷을 입기가 어려울 거예요. 특별히 주문을 하거나 옷을 안 입어도 되는 고장에 가서 살면 되지. 지금도 우리는 아무래도 괜찮은 곳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안 만나는 곳에 있는 게 얼마나 멋있어요? 여보, 당신 아는 사람 만나고 싶은 생각 없지요, 네? 없어. 우리 여기 잠깐 앉을까요? 조금 피로해요. 우리는 통나무 위에 바싹 붙어서 앉았다. 앞에 보이는 길은 숲속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 애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지는 않겠지요? 이 꼬마 말이에요. 천만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지. 돈 문제는 어때요? 넉넉해. 일람불(一覽拂) 환어음을 인수해서 지불해 주었으니까. 당신이 이제 스위스에 와 있다는 걸 아니까, 당신 가족이 당신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지. 뭐라고 편지를 해 둬야겠군. 아직 편지 안 하셨어요? 아니, 일람불 어음 지불 청구만 했지. 가족에게 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전보라도 쳐야겠군. 가족은 전혀 관심이 없으세요. 전에야 안 그랬지만, 싸움을 몇 번이나 해서 관심 같은 건 자연 소멸되었지. 나는 그분들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무척 좋아하게 될 것도 같아요. 가족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내가 또 걱정하기 시작하면 안 되니까. 조금 있다가 내가 말했다. 쉬었거든 또 걸읍시다. 쉬었어요. 우리는 다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날은 어두워지고 장화 밑에서 눈이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를 내었다. 밤은 공기가 건조하고 춥고 카랑카랑했다. 난 당신 수염이 좋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성공작이에요. 보기에도 빳빳하고 고슴도치 같은데 사실은 아주 보드랍고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에요. 없을 때보다 나은 것 같아? 그럴 것 같아요. 나는 꼬마 캐서린을 낳을 때까지는 머리를 안 자를 생각이에요. 난 이제 너무 배가 부르고 임신부 티가 나요. 그렇지만 해산을 하고 다시 몸이 가벼워지면 머리를 자르고, 당신을 위해서 새롭고 전혀 달라진 멋진 여자가 돼 드리겠어요. 우리 둘이 같이 가서 자르든지 나 혼자 가서 자르고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든지 해 드려야겠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네? 아니, 그것 참 재미있을 거야. 아이, 참 착한 분이셔. 여보, 그 때는 내가 예뻐 보일 거예요. 몸이 홀쭉하고 당신을 자극시켜서 당신은 다시 나하고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예요. 원, 참.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이상 어떻게 사랑한단 말이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녹여 없앨 생각이야? 그럼요. 당신을 녹여 없애고 싶어요.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나 역시 그게 소원이야. {{}}{{40 }}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정월, 2월이 지난 동안 겨울은 더할 나위 없이 날씨가 좋았고, 우리는 행복하기만 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눈이 물러지는 짤막한 해동이 간혹 있어 대기에 봄 기운을 느끼는 일도 있었으나, 그 때마다 카랑카랑하고 매서운 추위가 다시 찾아와서 겨울이 되돌아오곤 하였다.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겨울에 틈이 나기 시작했다. 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내 비가 내리고 눈이 진창으로 변하고 산허리가 흉한 꼴이 되고 말았다. 호수 상공과 계곡 상공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다. 높은 산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캐서린은 무거운 덧신을 신고, 나는 구팅겐 씨의 고무 장화를 신고 우산을 받고, 진창과 길가의 눈을 씻어 내리는 흐르는 물 속을 정거장까지 걸어가서 술집에 들러 점심 전의 베르무트를 마셨다. 바깥의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시가지로 옮겨 와야 할 것 같잖아?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겨울이 끝나고 비가 줄곧 내리면 여기 산 위라고 별재미가 있는 것도 아닐 거야. 꼬마 캐서린이 나오려면 얼마나 남았지? 한 달 가량. 조금 더 남았는지도 몰라요. 내려가서 몽트뢰에 머물러도 좋겠는데. 로잔으로 가는 게 어때요? 거기는 병원도 있는데. 그래.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건 너무 큰 도시 같군. 큰 도시일수록 우리만이 있을 수 있고, 로잔은 괜찮은 곳일 것 같아요. 언제쯤 갈까? 아무때고 괜찮아요. 당신이 가고 싶을 때 가요. 당신이 떠나기 싫다면 여기서 안 떠나도 좋아요. 날씨가 어떻게 되나 두고 봅시다.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이제는 정거장 아래 산허리에는 눈이 전부 녹아 버렸다. 길은 눈 녹은 흙탕물의 개울이었다. 너무 질고 철벅거려서 나갈 수도 없었다. 비가 내린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우리는 시가지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괜찮습니다, 헨리 씨. 하고 구팅겐이 말했다. 미리 알려 주시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이제 날씨가 나쁜 계절이 되었으니까 여기 머물러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집사람 때문에 병원 가까이 가 있어야 하겠어서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언제 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꼬마 애기하구요. 그러지요, 방이 비어 있으면. 봄이 되어 날씨가 좋아지거든 또 오십시오. 애기하고 유모는 지금 닫아 둔 큰 방을 쓰게 하고, 선생님 내외분은 호수를 내다보는 지금 그 방을 쓰시도록 하겠습니다. 오게 되면 편지로 알리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짐을 꾸려 가지고 점심 후에 내려가는 기차로 그 곳을 떠났다. 구팅겐 부처가 우리하고 동행해서 정거장까지 내려왔고, 썰매로 진창 속을 우리 짐을 날라다 주었다. 그들은 정거장 옆에 서서 우중에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한테 잘해 줬지. 우리는 몽트뢰에서 로잔까지 기차를 탔다. 차창으로 우리가 살던 곳을 돌아다 보았으나 구름에 가려서 산이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베베이에서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해서 한쪽으로는 호수를 끼고, 한쪽은 젖은 갈색 들과 헐벗은 숲과 젖은 집들을 바라보면서 달렸다. 우리는 로잔에 도착해서 중 정도의 규모로 지은 호텔에 들었다. 우리가 거리로 마차를 달릴 때나 호텔 현관에 닿았을 때나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놋쇠 열쇠를 앞자락에 달고 있는 수위, 승강기, 바닥에 깔린 융단, 번쩍번쩍하는 부속품이 달린 세면기, 놋쇠 침대, 크고 편안한 침실, 이런 모든 것이 구팅겐 부처 집에서의 생활 다음이라 굉장히 호화스러워 보였다. 방의 창문은 꼭대기에 철책을 두른 담이 있는 젖은 정원을 면하고 있었다. 가파르게 경사진 거리 건너편에는 비슷한 담과 정원이 있는 호텔이 또 하나 있었다. 나는 정원 분수에 비가 내리는 것을 내다보았다. 캐서린은 방 안의 불을 모두 켜 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위스키 소다를 주문하고 침대에 누워서 정거장에서 사온 신문을 읽었다. 1918년 3월, 프랑스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캐서린이 짐을 풀고 방안에서 왔다갔다하는 동안 나는 위스키 소다를 마시고 신문을 읽었다. 여보, 내가 뭘 사와야 하는지 아시죠.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뭔데? 애기 옷 말이에요. 나처럼 달이 찰 때까지 애기 옷을 준비 안 한 사람은 흔치 않을 거예요. 사오면 되지 뭘. 그럼요. 내일 할 일은 그거예요. 뭐가 필요한지 알아 둬야겠어요. 그런 거야 알겠지. 간호사였으니까. 그래두 군인들이 어디 병원에서 어린애를 낳던가요? 나는 낳았지. 캐서린이 베개를 던져서 위스키 소다가 엎질러졌다. 다시 주문해다 드리죠.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술을 엎질러서 미안해요. 얼마 안 남았었어. 침대로 오지. 아니에요. 나는 이 방을 꾸며서 뭣처럼 보이게 해야겠어요. 뭣처럼? 우리집처럼요. 연합국 깃발을 내걸지 그래. 아이, 닥치세요. 또 한 번 말해 봐. 닥치세요. 당신은 그 말을 조심스레 하는군. 하고 내가 말했다. 마치 아무의 비위도 안 거슬리려는 것처럼 말이야. 비위를 거슬리기 싫거든요. 그럼 이리 침대로 오라구. 그래요. 캐서린은 침대로 와서 걸터앉았다. 여보, 난 이제 재미가 없을 거예요. 꼭 커다란 밀가루 통 같은걸요. 아니야, 안 그래. 아름답고 멋있어. 난 당신과 결혼한 보기 싫은 물건처럼 돼버렸어요. 아니, 안 그래. 당신은 더 아름다워만 가는데. 그렇지만, 여보 이제 다시 홀쭉해질 거예요. 지금도 홀쭉하다니까. 취하셨나 봐. 위스키 소다 한 잔 가지구? 한 잔 더 가지고 올 거예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럼 우리 저녁을 이리로 올려오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군. 그리구 나가지 말아요, 네? 오늘 밤은 방 안에 있어요. 그리구 놀자구.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포도주를 좀 마셔야지.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해롭지 않을 거예요. 아마 우리가 좋아하는 백(白) 카프리 주가 있을지도 몰라요. 있구 말구.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정도의 호텔에는 이탈리아 산 술이 있지. 웨이터가 도어를 노크했다. 그는 얼음을 넣은 위스키 글라스와 쟁반에 따로 소다를 넣은 글라스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고맙소. 하고 내가 말했다. 거기다 내려놓으시오. 두 사람분 저녁을 이리로 갖다 주고 독한 백 카프리 주 두 병만 얼음하고 가져오시오. 저녁은 수프로 시작하십니까? 수프 들겠어, 캣? 주세요. 수프 일인분. 감사합니다.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신문으로, 신문에 난 전쟁으로 되돌아갔다. 소다를 천천히 얼음 위로 위스키에 부었다. 이제부터는 위스키에 얼음을 넣어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얼음은 따로 올려오라고 해야겠다. 그래야 위스키가 있는지 알고 소다를 부어도 갑자기 싱거워지지 않을 거다. 위스키를 한 병 사다 놓고 얼음과 소다만 갖다 달래야겠다. 그게 영리한 방법이다. 좋은 위스키란 아주 즐거운 것이다. 그건 인생의 즐거운 부분의 하나이다. 여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위스키에 관한 생각이야. 위스키에 관한 무슨 생각이요? 얼마나 근사한가 하는 생각. 캐서린은 얼굴을 찌푸려 보았다. 좋아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우리는 그 호텔에 3주일 묵었다. 괜찮은 호텔이었다. 식당은 대개 비어 있었지만 밤에는 흔히 방으로 식사를 올려다 먹었다. 우리는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톱니 궤도 철도로 우쉬까지 가서 호숫가를 거닐기도 했다. 날씨는 아주 따뜻해지고 봄답게 되었다. 산에 있었더라면 했으나 봄 날씨는 불과 2, 3일 계속되었을 뿐이고, 다시 겨울의 스산하고 추운 날씨가 불쑥 나타나곤 하였다. 캐서린은 어린애에게 필요한 물건을 거리에서 사들였다. 나는 시중에 있는 체육장에 가서 운동을 위해서 권투를 했다. 대개는 캐서린이 늦게까지 자리에 누웠을 때 아침 시간에 갔다. 완전히 봄도 아니면서 봄답게 따뜻한 날이면 권투를 한 다음에 샤워를 하고, 대기의 봄 냄새를 맡으면서 거리를 산보하고, 카페에 들러서 사람들 구경을 하고, 신문을 읽고, 베르무트를 마시는 게 낙이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캐서린과 점심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권투 체육장의 사범은 수염을 기르고 동작이 아주 정확하고 활발하지만 이쪽에서 끝내 공세를 취하면 쩔쩔매었다. 그러나 체육장에 가면 재미있었다. 공기가 좋고 방이 밝았고, 나는 아주 힘껏 운동을 했다. 줄넘기도 하고, 혼자 때리는 연습도 해 보고,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손바닥 만한 햇볕에 누워 복부 운동도 해 보고, 간혹 사범과 연습 시합을 해서 그를 놀라게도 해 주었다. 수염을 기른 사람이 권투를 하는 꼴이란 이상했으므로 처음에는 좁고 기다란 거울 앞에서 혼자 때리는 연습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권투를 시작하면서부터 수염을 깎아 버리고 싶었으나 캐서린이 말려서 못 했다. 때로는 캐서린과 둘이서 마차로 시골 길을 달리기도 했다. 날씨가 화창할 때 마차로 달리는 기분은 상쾌했으며, 우리는 밥을 싸 가지고 가서 먹기에 적당한 장소를 두 군데 발견했다. 캐서린은 이제 너무 먼 거리는 걷지 못했으므로 둘이서 시골 길을 마차로 달리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기분을 잡친 날은 없었다. 우리는 해산기가 가까워 온 것을 알았고,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을 몰아세우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우리는 둘이서 같이 갖는 시간을 잠시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41 }} 어느 날 아침 캐서린이 자리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소리를 듣고 세 시경에 잠이 깨었다. 괜찮아, 캣? 아까부터 진통이 시작됐어요. 규칙적으로? 아니 별로 그렇진 않아요.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거든 병원에 가도록 하지. 나는 무척 졸려서 다시 잠이 들었다. 조금 후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 모양이에요. 나는 전화구로 가서 의사를 불러 냈다. 진통이 몇 분마다 옵니까? 하고 의사가 물었다. 15분 마다쯤 될 거예요. 그럼 병원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하고 의사가 말했다. 나도 옷을 입고 곧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부르려고 정거장 근처의 차고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한 녀석이 나와서 곧 택시를 보내 주마고 약속을 했다. 캐서린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방에는 병원에서 필요한 물건들과 어린애 옷으로 가득했다. 바깥 복도에 나가서 나는 벨을 눌러 승강기를 불렀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야경꾼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손으로 승강기를 운전해서 캐서린의 가방을 싣고 캐서린을 태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야경꾼이 문을 열어 줘서 우리는 차도로 내려가는 계단의 돌층계에 앉아 택시를 기다렸다. 밤은 맑게 개이고 별이 나 있었다. 캐서린은 퍽 흥분해 있었다. 진통이 시작돼서 다행이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요. 당신은 정말 착하고 용감한 여자야. 난 무섭지 않아요. 그래도 택시가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차가 거리를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았다. 차도로 돌아 들어온 차에 캐서린을 도와 태우고 운전수가 가방을 앞자리에 실었다. 병원으로 갑시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차도를 나와서 언덕길을 올라갔다. 병원에 닿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았던 여자가 캐서린의 성명, 연령, 주소, 친척, 종교 등을 장부에 기입했다. 캐서린이 종교는 없다고 하니까 그 여자는 종교란에 작대기를 그었다. 이름은 캐서린 헨리라고 대답했다. 입원실로 모셔다 드리지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 여자가 승강기를 세우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캐서린은 내 팔을 꼭 붙들고 있었다. 이 방입니다. 하고 여자가 말했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세요. 여기 잠옷이 있으니 입으세요. 내 잠옷이 있는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이 잠옷을 입으시는 게 좋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여자가 문을 열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캐서린은 수수하고 멋없이 마름질을 한 꼭 굵은 홑이불 천 같은 것으로 만든 잠옷을 입고 좁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이제 제법 호되게 아파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여자는 캐서린의 손목을 잡고 시계를 들고 진통의 주기를 재고 있었다. 이번 것은 굉장했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어디 있나요?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주무세요. 필요하면 오실 겁니다. 부인께 뭐 좀 해 드려야겠습니다.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또 밖에 잠깐 나가 계시겠어요? 나는 복도로 나왔다. 창이 둘 있고 복도를 따라 닫힌 도어가 늘어서 있는 텅 빈 복도였다. 거기서는 병원 냄새가 났다. 나는 의자에 앉아 마루바닥을 내려다보고, 캐서린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들어오세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들어갔다. 아이, 여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어때? 이제 아주 자주 와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다시 미소를 띠었다. 이번 건 진짜에요. 또 내 등에 손을 좀 대 주시겠어요, 간호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신다면. 간호사가 말했다. 당신은 나가세요, 여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나가서 뭘 좀 잡수시고 오세요. 간호사 말이 아직 장시간 계속된다니까요. 보통 초산은 진통이 오래갑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조금만 더 있겠어. 하고 내가 말했다. 진통은 아주 규칙적으로 왔다가는 가라앉고 했다. 캐서린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진통이 호되면 캐서린은 오히려 잘된 진통이라고 했다. 진통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실망하고 부끄러워했다. 여보, 나가 줘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당신이 있어서 내가 오히려 신경을 쓰게 되니까요.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아, 이번 건 좋았어요. 저는 착한 아내가 되고 싶고, 이번 아이도 바보 짓은 안 하고 낳고 싶어요. 제발 나가서 뭐 아침 요기를 하세요. 그리구 돌아오세요. 안 계셔도 아쉬워하지 않을게요. 간호사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아침 식사 하실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럼 갔다 오지. 잘 있어, 여보. 갔다 오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리고 내 몫까지 맛있게 잡수세요. 어딜 가면 아침을 먹을 수 있나요? 하고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 거리를 내려가시면 광장에 카페가 있어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아마 지금 열려 있을 거예요. 바깥은 동이 트려는 시간이었다. 나는 텅 빈 거리를 카페를 향해서 걸어 내려갔다. 창문에 불이 비쳤다. 나는 들어가서 함석을 입힌 카운터 앞에 서서 늙은 주인이 내주는 백포도주와 브리오시(계란과 효모로 부풀게 한 과자빵의 일종 - 역자 주)를 들었다. 브리오시는 어제 만든 것이었다. 나는 그걸 술에 적셔서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 시간에 뭘 하시는 분입니까? 하고 노인이 물었다. 아내가 병원에서 산고 중입니다. 그러세요. 행운을 빕니다. 포도주 한 잔 더 주시오. 그는 병을 들어 술을 따랐는데 조금 넘쳐서 함석 바닥에 흘렀다. 나는 이 잔을 마시고 돈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거리를 따라 쓰레기를 담은 통이 청소부를 기다리고 늘어서 있었다. 개가 한 마리 그 통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뭘 먹으려고? 하고 물으면서 나는 혹 내가 꺼내 줄 수 있는 것이 있나 하고 쓰레기통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위에는 커피 찌꺼기와 먼지와 마른 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견공(犬公)!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개는 거리를 건너 달아나 버렸다. 나는 병원 계단을 캐서린이 입원한 방이 있는 층계까지 올라가서 복도를 내려가 병실로 갔다. 문에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벽 못에 잠옷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복도를 걸어 내려가며 사람을 찾았다. 간호사가 눈에 띄었다. 마담 헨리는 어디 있소? 어떤 부인이 지금 막 분만실로 갔어요. 그건 어디요? 안내해 드리죠. 간호사는 나를 복도 막바지까지 데리고 갔다.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캐서린이 홑이불을 덮고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간호사가 한쪽에 서고 맞은편에는 의사가 무슨 기계 옆에 서 있었다. 의사는 고무줄이 달린 마스크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가운을 드릴 테니 입고 들어오세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이리로 오세요. 간호사는 내게 흰 가운을 입히고, 목 뒤에 안전핀을 꽂아 주었다. 이제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여보. 캐서린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간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미스터 헨리신가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네. 어떻습니까, 선생님? 양호한 편입니다. 하고 의사가 말했다. 진통시에 마취를 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리로 데려왔지요. 지금 하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의사가 마스크를 캐서린 얼굴에 씌우고 다이알을 돌렸으며, 나는 캐서린이 깊이 가쁘게 호흡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이윽고 캐서린은 마스크를 치웠다. 의사는 마개를 비틀었다. 이번엔 대단찮았어요. 조금 전에는 굉장한 게 왔었어요. 선생님이 그걸 견뎌 내게 해 주셨어요. 그렇죠, 선생님. 목소리가 이상했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할 때는 음성이 높아졌다. 의사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해 주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고무 마스크를 얼굴에 바짝 대고 가쁜 숨을 쉬었다. 약간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마스크를 떼고 미소지었다. 이번엔 컸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굉장히 큰 거였어요. 여보, 걱정하지 말아요. 가세요. 가서 또 한 번 아침 식사를 하세요. 있겠어.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가 병원에 간 것이 아침 세 시경이었다. 오정이 되었는데도 캐서린은 분만실에 있었다. 진통은 또 힘이 없어졌다. 캐서린은 몹시 피로하고 지쳐 보였으나 그래도 여전히 명랑했다. 여보,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힘 안 들이고 해낼 줄 알았는데. 자아 - 또 왔어요. 캐서린은 손을 뻗어 마스크를 끌어다가 얼굴을 덮었다. 의사는 다이알을 돌리고 지켜 보았다. 조금 있다가 끝났다. 대단하지 않았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마취에 재미를 붙였나 봐요. 참 훌륭한 물건이에요. 집에다가도 좀 사다 둡시다. 하고 내가 말했다. 또 왔어. 캐서린이 급히 말했다. 의사는 다이알을 돌리고 시계를 봤다. 사이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약 1분이군요. 점심 안 자십니까? 곧 뭘 좀 요기하지요. 하고 그가 물었다. 선생님, 뭘 좀 잡수셔야 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너무 오래 걸려서 정말 죄송해요. 제 남편이 마취를 시키면 안 될까요? 원하신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2번까지 돌리십시오. 알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손잡이로 돌릴 수 있는 다이알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리 내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마스크를 얼굴에 꼭 대고 있었다. 나는 2번까지 다이알을 돌리고 캐서린이 마스크를 떼었을 때 다시 돌려 놓았다. 내게 이런 일이라도 시켜 주는 의사가 고마웠다. 당신이 했어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내 손목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 참 착한 분이셔. 캐서린은 약간 마취에 취해 있었다. 난 옆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겠습니다. 하고 의사가 말했다. 아무 때나 부르세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가 점심을 먹고 조금 후에는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캐서린은 점점 기진맥진했다. 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물론이지. 낳구 말구. 내 힘껏은 하는 거예요. 내려 미는데도 빠져나가 버리는군요. 또 왔어요. 걸어 주세요. 두 시에 나는 나가서 점심을 먹었다. 카페에는 두세 명이 커피며 앵두술이나 포도 브랜디 술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도 테이블을 잡아 앉았다. 식사할 수 있소? 하고 웨이터에게 물었다.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시간 외에도 파는 걸로 먹을 건 없소? 자우어 크라우트(소금에 절인 양배추 - 역자 주)는 있습니다. 그럼 자우어 크라우트하고 맥주를 주오. 보통으로 드릴까요, 독한 걸로 드릴까요? 약한 걸로 주오. 웨이터가 햄 쪽을 위에다 놓고 술에 절여 따끈하게 찐 양배추 속에 소시지를 얹은 자우어 크라우트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걸 먹고 맥주를 마셨다. 몹시 시장했다. 나는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테이블에서는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 옆 테이블에서는 두 사나이가 이야기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노인과 검은 옷을 입고 테이블에 내가는 음식을 일일이 눈으로 쫓는 뚱뚱한 부인과 앞치마를 두른 소년이 있었다. 나는 저 여자는 아이를 몇이나 낳았으며 어떻게 낳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우어 크라우트를 말끔히 다 먹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이제 거리는 깨끗했다. 길에 내다놓은 쓰레기통도 없었다. 구름이 끼어 있었으나 해가 가끔 비치기도 했다. 나는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서 복도를 지나 흰 가운을 벗어 놓았던 캐서린의 입원실로 갔다. 나는 그걸 주워 입고 목 뒤에 핀을 꽂았다. 거울을 보니까 수염까지 있는 것이 꼭 가짜 의사 같아 보였다. 나는 복도를 지나 분만실로 갔다. 문이 닫혀 있기에 노크를 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어 나는 핸들을 돌려 열고 들어갔다. 의사가 캐서린 곁에 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방 저쪽 구석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남편 되시는 분이 오셨소. 하고 의사가 말했다. 아이 여보, 선생님 참 훌륭한 분이세요. 하고 캐서린은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아주 심한 진통이 왔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주셨어요. 훌륭한 분이에요. 선생님, 참 훌륭하세요. 취했군. 하고 내가 말했다. 알아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거세요, 거세요. 했다. 캐서린은 마스크를 움켜쥐고 짧고 깊게 헐떡이면서 흡입기에 짤각짤각 소리가 나게 했다. 이윽고 길게 한숨을 쉬고, 의사가 왼손을 뻗쳐 마스크를 치웠다. 굉장히 큰 게 왔었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음성이 아주 이상했다. 여보, 이제는 내가 안 죽겠어요. 꼭 죽을 뻔한 순간을 넘겼어요. 기쁘시죠? 다시는 그런 순간에 빠지지 말어. 그럼요. 그래도 난 그게 무섭지 않아요. 나 안 죽을 거예요, 여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되나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남편을 남겨 두고 죽다니 그렇게는 안 될 거요. 아이, 싫어. 안 죽을 거야. 죽고 싶지 않아요. 죽는 건 바보야. 또 왔어요. 걸어 주세요. 조금 있다가 의사가 말했다. 미스터 헨리. 잠깐만 나가 주시면 검사를 해 보겠습니다. 이분은 내가 해내는 걸 보고 싶을 거예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나중에 돌아오세요, 네? 와도 되죠, 선생님? 그럼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들어오셔도 좋다고 알려 드리지요.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복도를 지나 캐서린이 해산 후에 있을 방으로 갔다. 나는 거기 의자에 앉아서 방을 둘러보았다. 웃저고리에 점심 먹으러 나가서 사온 신문이 있기에 꺼내서 읽었다. 바깥은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나는 불을 켜고 읽었다. 한참 후에 읽는 것을 그만 두고, 불을 끄고, 바깥이 어두워 오는 구경을 했다. 의사가 왜 나를 부르러 보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없는 것이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사는 아마 내가 잠깐 없었으면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10분 이내에 부르러 안 보내면 하여튼 가 봐야겠다. 가엾은, 가엾은 캣. 이것이 같이 잔 죄로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이것이 그 함정의 결말이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얻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도 마취가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마취제가 없을 때는 대관절 어떤 모양이었을까? 이건 일단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캐서린은 임신 중에는 매우 건강했다. 임신의 고통이라고는 없었다. 거의 입덧도 하지 않았다. 최후까지도 몹시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캐서린을 목적지까지 데려온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지옥으로나 빠져나갔지! 그거야 쉰 번을 결혼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죽으면 어떡하나? 안 죽을 거다. 요새는 해산으로 죽는 여자는 없다. 모든 남편은 그렇게 생각하는 법이다. 그렇지, 그러나 죽으면 어떡하나? 안 죽을 테지. 괴로운 고비를 넘기고 있는 거겠지. 초산의 진통은 대개 오래 걸린다니까. 고생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나중에 우리는 그 때 참 혼났지 하고 회고담을 할 거고 캐서린은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테지. 그러나 혹 죽는다면 어떡하나? 죽을 리가 없지. 그럼, 그러나 죽으면 어떡하지? 죽을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 바보 같은 생각 말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조물주가 지옥 구경을 시켜 주는 거야. 초산이니까 그런 거야, 초산은 으레 오래 끌게 마련이니까. 그렇지, 그러나 만일 죽는다면 어떡하지? 죽을 리가 없지. 죽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어린아이가 나오려고 하는 것뿐이다. 밀라노에서 재미 본 밤의 부산물로. 그놈이 말썽을 부리는 거지만 조금 있으면 나올 것이고, 그걸 뒤를 거두어 기르노라면 아마 귀여워하게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죽는다면 어떡하나? 안 죽을 테지. 그러나 죽는다면 어떡하나? 안 죽을 테지. 지금 멀쩡한 걸. 그러나 만약 죽으면 어떡하나? 죽을 리가 없어. 그러나 만약 죽는다면 어떡하나? 야, 어떡할 테냐 말이야? 만일 죽는다면 어떡할 테야?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경과가 어떻습니까, 선생님? 진전이 없는데요. 하고 의사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별 뜻은 없어요. 진찰을 해 봤는데 -. 그는 진찰한 결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때부터 쭉 경과를 보고 있는데요. 도무지 진전이 없군요. 선생님 의견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대형 겸자(鉗子) 분만법인데 산아에게 해로울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찢어지니까 매우 위험하구요. 다음은 제왕 절개(帝王切開)죠. 제왕 절개의 위험도는 어느 정도지요?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보통 분만 이상으로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이 집도하십니까? 네. 수술 준비를 하고 필요한 인원을 모으려면 아마 한 시간 가량 걸리겠지요. 그거보다 조금 덜 걸릴지도 모르지만. 선생님 의견은 어떠세요? 나는 제왕 절개를 권합니다. 만약에 내 아내라면 제왕 절개 수술을 하겠어요. 예후(豫後)는 어떨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처는 남지만요. 병독이 감염할 가능성은요? 대형 겸자 분만처럼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상태로 내버려두고 아무 처치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무슨 처치든 해야 하게 될 겁니다. 미세스 헨리는 벌써 기력이 많이 쇠진했습니다. 이젠 수술이 빠르면 빠를수록 안전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수술해 주십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 가서 지시를 하겠습니다. 나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서 불룩한 배에 홑이불을 가리고 누워 있는 캐서린은 무척 창백하고 피로해 보였으며 그 곁에 간호사가 있었다.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하고 캐서린이 물었다. 그랬어. 잘 됐지 뭐에요. 이젠 한 시간이면 모든 게 끝난다니까. 여보, 이제 내가 거의 기진맥진했어요.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아요. 그걸 걸어 주세요. 안 들어요. 아이, 이게 안 들어요! 크게 숨을 쉬어요. 쉬잖아요. 아아, 이젠 안 들어요. 이게 안 들어요! 새 실린더를 가져 오시오. 하고 내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게 새 통인데요. 내가 바보에요, 여보. 캐서린이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안 듣는걸요. 캐서린은 울기 시작했다. 아아, 내가 얼마나 이 아이를 낳고 싶었고, 말썽없이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기운이 다 빠지고 산산조각이 난 데다가 이게 안 듣는군요. 여보, 이게 이제는 전혀 안 들어요, 글쎄. 이 진통만 그쳐 준다면 죽어도 괜찮아. 아아, 여보, 제발 제발 이것 좀 그치게 해 줘요. 또 왔어요. 오오, 오오, 오오! 캐서린은 마스크 속에서 흐느끼면서 숨을 쉬었다. 안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들어요. 여보, 내 걱정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내 걱정은 마세요. 그저 기진맥진해서 그래요. 가엾은 양반. 난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니까 곧 나을 거예요. 이번에는 잘해 볼게요. 여기서는 날 좀 어떻게 못 해 주나요? 날 좀 어떻게 해 줬으면. 내가 듣게 해 볼게. 끝까지 틀어 놓고 있어 보지. 그거 걸어 주세요. 나는 다이알을 끝까지 돌려 버렸다. 가쁘게 깊은 숨을 쉬면서 마스크를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마취를 멈추고 마스크를 돌렸다. 캐서린은 먼 나라에서 되돌아왔다. 여보, 참 기분 좋았어요. 아아, 정말 고마워요. 용기를 내라구. 자꾸만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죽어 버릴지도 모르거든. 이젠 용기도 없어요. 기진맥진했어요. 여기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누구든지 다 그래. 그래도 지긋지긋해요. 기진맥진할 때가지 기다리는 거예요. 한 시간이면 다 끝나지. 그러면 좋겠지요? 여보, 나 안 죽을 테지요, 네? 그럼. 내가 약속하지. 나는 당신을 남겨 두고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너무 지쳐서 꼭 죽을 것만 같군요. 쓸데없는 소리. 누구든지 다 그렇게 느낀대. 어떤 때는 내가 죽을 것을 아는 것도 같아요. 안 죽어. 죽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죽으면 어떡할래요? 못 죽게 할 테야. 빨리 걸어 줘요. 걸어 줘요! 조금 있다가는 또 중얼거렸다. 안 죽겠지. 안 죽게 해야지. 물론 안 죽어. 내 곁에 있겠어요? 수술을 보고 싶지는 않아. 아니 그냥 있어만 주세요. 그럼. 늘 여기 있잖아. 정말 고마워요. 그거 걸어 주세요. 좀더 거세요. 안 들어요! 나는 다이알을 3으로, 그리고 4로 돌렸다. 나는 의사가 돌아와 주었으면 싶었다. 3이니 4니 하는 숫자가 무서웠다. 드디어 새 의사가 간호사 둘을 데리고 들어와서 캐서린을 바퀴 달린 담가에 올려놓고 복도를 내려갔다. 담가는 복도를 빨리 굴러서 승강기로 들어갔고, 승강기 속에서는 공간을 내기 위해서 모두들 벽에 딱 붙어 섰다. 그러자 움직이기 시작하고 문이 열리는 승강기에서 내리고 고무 바퀴가 복도를 굴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캡과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수술실에는 또 한 의사와 간호사가 몇 명 더 있었다. 뭘 좀 어떻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뭘 좀 어떻게 해 줘야지요. 아이구 제발 선생님, 뭐 좀 효과가 나는 걸 주세요! 한 의사가 캐서린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 문 사이로 밝고 좁은 원형 극장 같은 수술실이 보였다. 저쪽 문으로 들어가셔서 저기 앉아 계셔도 됩니다. 한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흰 테이블과 조명등이 내려다보이는 난간 뒤에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마스크가 덮여 있고 이제는 조용했다. 그들은 담가를 앞으로 굴리고 갔다. 나는 얼굴을 돌리고 복도를 걸어 내려왔다. 두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견학석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제왕 절개야. 하고 한 간호사가 말했다. 제왕 절개 수술이 있을 거야. 다른 간호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꼭 시간에 맞춰 왔네. 재수 좋지? 그들은 견학석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로 들어가세요. 빨리 들어가세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나는 밖에 있겠소. 그 여자는 급히 들어갔다. 나는 복도를 왔다갔다 하며 거닐었다.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웠으나 창에서 비치는 불빛으로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복도 한쪽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유리장 안에 늘어선 병에 붙은 약명을 읽어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돌아 나와서 텅 빈 복도에 서서 수술실 문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한 의사가 간호사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꼭 갓 가죽을 벗긴 토끼 같은 물건을 두 손으로 들고 복도를 가로질러 다른 방문으로 급히 들어갔다. 나는 그가 들어간 방문으로 따라가서 그들이 갓난 어린애에게 무슨 처치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그걸 쳐들어 내게 보였다. 다리를 들고 거꾸로 쳐들어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무 일 없습니까? 굉장한데요. 5킬로는 되겠어요. 나는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우러나지 않았다.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으세요? 하고 간호사가 물었다. 그들은 아이를 씻어서 무엇엔지 쌌다. 검은 얼굴과 검은 손이 보였으나 그 이상은 보지도 못했고 우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의사는 또 그걸 가지고 무슨 처치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요. 하고 내가 말했다. 제 어미를 거의 죽일 뻔한걸요. 그거야 이 꼬마의 잘못이 아니지요. 옥동자가 소원이 아니세요? 아니요. 하고 내가 말했다. 의사는 분주하게 그를 주무르고 있었다. 다리를 두드리고 등을 때렸다. 나는 그걸 보려고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복도를 나와 버렸다. 이제는 들어가서 봐도 되겠지. 나는 문으로 들어가서 견학석 아래쪽으로 갔다. 난간 뒤에 섰던 간호사들이 내게 손짓을 하고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도 잘 보였다. 나는 캐서린이 죽은 줄만 알았다. 죽은 것 같아 보였다. 내가 볼 수 있는 얼굴의 일부분이 잿빛이었다. 훨씬 아래쪽 조명등 아래서 의사가 크고 기다란 상처를 핀셋으로 버려 놓은 두꺼운 상처를 봉합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다른 한 의사는 마취를 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두 간호사가 기계를 집어 주었다. 그건 마치 종교 재판을 하는 그림 같았다. 그걸 바라보면서, 수술하는 과정을 전부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 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절개하는 광경은 차마 못 보았을 것이지만, 의사가 구두쟁이처럼 날랜 솜씨로 높은 상처의 이랑을 남기면서 꿰매 나가는 것을 보고 만족했다. 상처 봉합이 끝나자 나는 복도로 나와서 또 왔다갔다 했다. 조금 있다가 의사가 나왔다. 환자는 어떻습니까? 양호합니다. 보고 계셨나요? 그는 피로해 보였다. 봉합하는 구경을 했습니다. 절개구가 퍽 길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아, 물론이죠. 한참 후에 그들은 바퀴 달린 담가를 밀고 나오더니 승강기 쪽으로 복도를 빨리 굴리고 갔다. 나는 그 곁에 따라갔다. 캐서린은 신음하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그들은 캐서린을 입원실 침대에 눕혔다. 나는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방 안에는 간호사가 한 명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침대 곁에 가 섰다. 방 안은 어두웠다. 캐서린은 손을 내밀었다. 아아, 여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음성이 몹시 약하고 지쳐 있었다. 그래, 여보. 아이가 뭐에요? 쉬이 - 말하지 마세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사내야. 크고 통통하고 검은 놈이야. 괜찮아요? 응, 건강해.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간호부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 난 지칠 대로 지쳤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리구 지독하게 아팠어요. 당신은 괜찮으세요? 나야 괜찮지. 말하지 마오. 당신 참 고마워요. 아이, 여보, 지독하게 아팠어요. 아이가 뭣 같던가요? 노인같이 주름살이 잡혔어. 껍질 벗긴 토끼 같더군. 나가셔야겠어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부인은 말씀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 밖에 있을게. 하고 내가 말했다. 가서 뭘 잡숫고 오세요. 아니, 밖에 있을 테야. 나는 캐서린에게 키스했다. 얼굴이 잿빛이고 쇠약하고 지쳐 있었다. 잠깐 말씀 좀 드릴까요? 하고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나는 복도를 약간 걸어 내려갔다. 어린애가 어떻게 됐나요? 하고 내가 물었다. 모르세요? 모르는데. 살아나지 못했어요. 죽었던가요? 호흡을 시작하게 할 수가 없었답니다. 탯줄이 목에 감겼다든가, 뭐 그랬더래요. 그래서 죽었군요? 네. 참 아깝지 뭐에요. 그렇게 잘 생긴 사내아이였는데. 저는 알고 계신다구요. 몰랐소. 하고 나는 말했다. 부인 곁으로 들어가 보시오. 나는 간호사의 보고서가 클립에 매달려 옆에 걸려 있는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과 창에서 흘러나가는 불빛에 비치는 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랬군 그래. 아이는 죽었군. 그래서 의사가 그렇게 피로해 보였군. 그러나 왜 그 방에서 아이를 가지고 그런 짓은 했을까? 다시 살아나서 아마 호흡을 시작하리라고 생각했던 게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세례라도 해 줘야 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전혀 숨을 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숨을 쉰 일이 없는 거야. 살아 있지 않았던 거야. 캐서린 뱃속에서 밖에는. 캐서린 배를 툭툭 차는 건 내가 여러 번 만져 봤으니까. 그러나 한 1주일 만져 보지 않았거든. 그 동안 죽 질식해 있었는지도 모르지. 가엾은 꼬마 녀석 같으니. 나도 그렇게 질식하길 얼마나 바랐던가. 천만에 그런 일은 없었지. 그러나 질식은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죽지는 않으니까. 이번엔 캐서린이 죽을 테지. 사람은 다 그렇게 되는 거야. 그저 세상에 내던져 놓고 규칙을 말해 주지만, 베이스를 떠나자마자 잡아서 죽여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모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여 버린다. 아니면 리날디처럼 매독을 준다. 그러나 결국은 죽이는 것이다. 이건 틀림없다. 기다리고만 있으면 반드시 죽여 주는 것이다. 한번은 캠프에서 불에다 나무 토막을 놓았더니 나무에 개미가 잔뜩 붙어 있었다. 나무가 타기 시작하자 개미는 떼를 지어 나와서 처음에는 불이 있는 중앙부로 몰려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토막 끝으로 달아났다. 끝에 가서 너무 많이 몰리자 불 속으로 떨어졌다. 어떤 놈은 몸에 화상을 입고 납작해 진 채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버렸다. 그러나 대개는 불 쪽으로 몰려 갔다가 끝으로 되돌아 나왔다가, 뜨겁지 않은 끝에 떼로 몰렸다가는 결국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때 이거야말로 세상의 종말인데 내가 구세주가 될 좋은 기회가 왔으니 나무 토막을 집엇 개미가 땅으로 기어 내뺄 수 있는 곳으로 던질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장작에다 물을 한 컵 끼얹었을 뿐이었다. 컵에 위스키를 따라 물을 탈 생각으로 먼저 있던 물을 비웠을 뿐이다. 타는 장작에 한 컵의 물은 개미를 삶아 죽였을 따름이었으리라. 그래서 지금 나는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캐서린의 용태가 어떤지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나오지 않기에 나는 한참 후에 문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가만히 열고 들여다 보았다. 복도에서 밝은 불이 켜 있고 방 안은 어두웠으므로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간호사와 베개에 놓인 캐서린의 머리가 보였다. 홑이불 밑에 있는 캐서린은 몸이 홀쭉했다. 간호사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이고 일어서더니 문 앞으로 나왔다. 어떻소? 하고 내가 물었다. 아무 일 없어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가셔서 저녁을 잡숫고 원하신다면 또 오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복도를 걸어 층계를 내려와서 병원 문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으며 어두운 거리를 카페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안은 밝은 불이 켜 있고 식탁에는 손님이 많았다. 내가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웨이터가 다가와서 내 젖은 코트와 모자를 받고 나이 지긋한 신사가 맥주를 마시면서 석간 신문을 읽고 있는 자리 건너편 좌석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웨이터에게 오늘 요리가 뭐냐고 물었다. 송아지 스튜였는데 떨어졌습니다. 먹을 게 뭐가 있소? 햄 에그나 치즈 에그나 자우어 크라우트가 있습니다. 자우어 크라우트는 점심에 먹잖았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점심에 자우어 크라우트를 자셨지요. 그는 정수리가 벗어진 데다가 머리를 매끈히 빗은 중년의 사나이였다. 친절한 표정이 얼굴에 넘쳐 있었다. 뭘로 드실까요? 햄 에그로 할까요, 햄 치즈로 할까요? 햄 에그.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구, 맥주. 약한 맥주로 합니까? 그렇소. 하고 내가 대답했다. 이제 생각납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낮에도 그 맥주를 드셨지요. 나는 햄 에그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햄 에그는 동그란 쟁반에 - 햄을 밑에 깔고 에그를 위에 놓은 것이었다. 무척 뜨거워서 처음 한 입은 얼른 맥주를 한 모금 마셔서 입을 식혀야 했다. 시장해서 웨이터에게 한 접시 더 주문했다. 맥주도 대여섯 글라스 마셨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신문을 읽었다. 그건 영국군 전선이 돌파되었다는 기사였다. 내가 자기 신문의 뒷면을 읽고 있는 것을 눈치채자 그는 신문을 접어 버렸다. 웨이터에게 신문을 청할까 싶었으나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카페안은 덥고 공기가 탁했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카드놀이를 하는 패도 몇몇 있었다. 웨이터는 카운터에서 테이블로 술을 나르느라고 분주했다. 두 사람이 들어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와서 섰다. 나는 맥주를 더 주문했다. 아직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직 병원으로 돌아가기는 이르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완전히 조용한 마음이 되어 보려고 했다. 두 사나이는 여기저기 가서 서 봤으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나가 버렸다. 나는 맥주를 또 한 글라스 마셨다. 이제 내 앞에는 글라스 받침 접시가 수북하게 쌓였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 넣고 신문을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술잔을 들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나는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웨이터를 불러서 대금을 치르고 코트에 팔을 끼고 모자를 얹고 문 밖으로 나왔다. 비를 맞으면서 걸어서 병원으로 갔다. 위층에서 복도를 내려오는 간호사를 만났다. 지금 막 호텔로 전화를 했었는데요. 하고 간호사가 말했다. 가슴에 무엇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가 잘못됐나요? 미세스 헨리께서 출혈을 하셨어요. 들어가도 됩니까? 아니, 아직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이 계십니다. 위험한가요? 아주 위험합니다. 간호사는 방 안으로 들어가고 문을 닫았다. 나는 바깥 복도에 앉았다. 내 몸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캐서린이 죽어 간다는 것을 알았고,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 죽지 않게 해 주소서. 오오, 하나니, 제발 죽지 않게 해 주소서. 만약 죽지 않게만 해 주신다면 당신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하나님, 죽지 않게 해 주소서. 하나님, 제발 안 죽게 만들어 주소서. 안 죽게만 해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시키시는 대로 하겠나이다. 어린아이는 데려가셨지만 캐서린만은 죽지 않게 - 그건 괜찮으니 캐서린만은 죽지 않게 해 주소서, 제발, 제발, 제발, 하나님, 죽지 않게 해 주소서. 간호사는 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도 캐서린은 눈을 들어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의사는 침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캐서린은 나를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구부리고 울었다. 가엾은 분. 하고 캐서린이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얼굴이 무척 거무스레했다. 괜찮아, 캣. 하고 내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질 거야. 난 죽어요. 하고 캐서린은 말하고 한참 기다렸다가 죽기 싫어. 했다. 나는 캐서린의 손을 쥐었다. 손 대지 마세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나는 손을 놓았다. 캐서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엾은 분. 마음대로 만지세요. 괜찮아질거야, 캣. 내가 알아, 이제 괜찮아질 거야. 당신에게 편지를 써 두려고 했지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그러나 그만뒀어요. 목사나 누구를 불러다 줄까? 당신이면 돼요. 하고 캐서린은 말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난 무섭지는 않아요. 죽기가 싫은 거죠. 너무 많이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알겠어요. 캐서린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있나, 캣? 뭘 갖다 줄까? 캐서린은 미소지었다. 아니.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른 여자하고 우리가 하던 짓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하진 않겠지요? 절대로. 그래도 당신이 다른 애인을 갖게 되길 바래요.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너무 말을 많이 하십니다. 하고 의사가 말했다.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미스터 헨리는 나가세요. 나중에 다시 들어오도록 하세요. 죽는 게 아니에요. 바보처럼 굴어서는 안 돼요. 알겠어요.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나, 당신한테 가서 저녁마다 잘게요. 이제는 말하는 것도 무척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제발 밖으로 나가시오. 하고 의사가 말했다. 캐서린이 윙크를 해 보였다. 잿빛의 얼굴을 하고서. 바로 문 밖에 있을게. 하고 내가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여보. 하고 캐서린이 말했다.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그저 너절한 속임수에요. 용감하고 착한 사람. 나는 문 밖 복도에서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내 곁으로 왔다. 미세스 헨리가 대단히 중태인 것 같아요. 염려스러운데요. 그 간호사가 말했다. 죽었소? 아니요, 하지만 의식이 없어요. 캐서린의 출혈은 계속되었지만, 의사는 그것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캐서린이 죽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캐서린은 줄곧 의식이 없었는데, 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 밖 복도에서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내가 오늘 밤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아니, 아무 것도 없어요. 호텔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 고맙습니다. 여기 조금 더 있겠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은 - 아닙니다, 아무 말도 소용 없습니다. 안녕히. 하고 그는 말했다. 호텔까지 모시고 갈 수 없을까요? 아니,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게 유일한 방도였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수술 결과는 - 그 이야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호텔까지 모셔다 드렸으면 합니다만. 아니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는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나는 그 방문 앞으로 갔다. 지금 들어오셔서는 안 됩니다. 하고 한 간호사가 말했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하고 내가 말했다. 아직 못 들어오십니다. 당신은 나가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또 한 분도. 그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건 마치 조상(彫像)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 병원을 나온 나는 비를 맞으며 호텔로 걸어 돌아갔다.